프롤로그(prologue) 그것은 그립고도 아련한 한 때의 기억. 다시는 돌이킬 수도 돌이켜서도 안 되는 금지된 기억. 내게만은 금지된 기억. 사랑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 받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또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 시간, 그 이전의 기억. 부드럽게 스치던 바람이 흩어지고 따뜻하게 감싸주던 햇살은 부서지고 차갑게 흔들리던 물결도 말라버린 그 때. 나의 노래는 두 번 다시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렸다. 누구도 들을 수 없게된 아름다운 당신을 향한 나의 허무한 레플리카... 그리고 시간의 중독자처럼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때로 잠시 기억을 되돌려 본다. 그립고 가슴 아픈 그 때로... 당신에게로의 선율은 단 하나의 간절한 소망을 실어 그립고도 안타까운 그 때로 나를 데려간다. 비록 당신이 들을 수 없는 나의 노래일지라도 부디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당신에게만은 전해지기를... 제1음(第1音) Genevieve(1) 쥬느비에브가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 도착한 것은 점심 시간을 조금 지나서인 3도르[주. 아르헨의 시간 단위. 1도르는 약 1시간.] 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겨우 스콜라의 경계선 안에는 도착했지만 몇 도르째 스콜라 내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정문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녀가 이번에 편입하게 될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는 아르헨 최고의 교육 기관답게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중앙의 학원 부지를 제외하고서라도 스콜라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숲의 규모도 만만치 않아 쥬느비에브는 오면서 몇 번이나 아픈 다리를 주물러야 했다. 보통의 레이디들이라면 아마 멋들어진 마차를 타고 금세 도착했겠지만 쥬느비에브는 아침부터 시내에서 걸어오느라 그녀의 가장 좋은-아마도- 구두는 온통 흙투성이었고 그녀가 신경 써서 고른 파란색 원피스는 여기저기 마른 풀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침부터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문을 찾을 수 없는데다가 스콜라의 사감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초조해졌다. “아... 길을 잘못 들어섰나 봐. 분명 쭉 들어오면 대로가 나오고 바로 정문이라고 아까 그 친절한 과일 가게 아저씨가 일러주셨는데...휴우우...난 정말 바본가 봐...”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스스로를 탓하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멈칫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책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상냥하고 아름답던 어머니가 그토록 허무하게 스스로의 생을 끝냈을 때도,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던 유모가 아무런 말없이 사라졌을 때도, 그리고 처음 만나는 양아버지가 그토록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을 때도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 울며 소리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기운내야지! 조금만 더 가면 분명 정문이 나올거야.” 주먹을 다부지며 나름대로의 결의를 다진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짐이 담긴 커다란 회색 가방을 다시 들어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 곳은 가도가도 숲이니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곳이길래....어휴..” 숲의 방대함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무와 풀 냄새가 아주 차갑고 기분 좋다고 생각하는 쥬느비에브였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게 할 때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피어있을 꽃향기를 들이쉬는 것도 아주 근사한 기분이 된다고 생각했다. 잠시 멈춰 파란색 원피스에 묻은 풀을 털어내며 두리번 거리던 쥬느비에브는 스콜라의 편입을 통보받은 그 순간부터 계속 머리 속을 맴돌던 고민이 불현듯 생각나 이마를 찌푸렸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그 사람이 날 싫어하면 어쩌지...” 한 숨을 포옥 쉬던 쥬느비에브는 그 때 자신의 발 밑으로 지나가던 다람쥐-아마 다람쥐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아야야...” 엉덩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든 그녀는 그대로 주저 앉은 채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 앞에 몇쳐져 있는 광경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와아∼문이다! 문이야! 드디어 정말로 도착했다!!” 자신이 오전내내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던 숲의 규모와 비교해 볼 때, 그리고 상상했던 스콜라의 정문과 비교해볼 때 다소, 아니 사실은 많이 왜소하지만 어쨌든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는 사실에 쥬느비에브는 너무나 기뻐 황홀할 지경이었다. 폭이 약 1레트[주. 아르헨의 길이 단위. 1레트는 약 1m.] 정도 되어보이는 청동으로 된 문은 조금 낡았지만 화려한 무늬로 장식이 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문이었다. 물론 쥬느비에브에게 문의 장식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자, 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쥬느비에브는 문을 열기 위해 문 손잡이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에는 손잡이의 용도로 쓸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아하! 그냥 밀면 열리는 문인가 보네.” 그러나 그녀의 자신만만한 추리에도 불구하고 문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힝∼왜 안 열리지? 안 쓰는 문인가?” 겨우 발견한 문이 조금도 열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과 문을 열기 위해 온 몸으로 부딪혔을 때 생긴 여기저기의 아픔으로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안열리는 거야? 왜 안 열리는 거냐구?” 주먹으로 문을 탕탕 치기를 몇 번, 결국 그녀는 문 앞에 주저 앉고 말았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게다가 어제 저녁부터 잠을 설쳤기 때문에 졸립기도 했다. 이마에 송송 땀이 맺혔다. 간간히 스치는 바람 덕분에 조금 시원해 지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마 사감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시간도 벌써 지나버렸을 것이다. ‘아... 옷이랑 신발은 흙투성이에 온 몸은 땀 범벅. 머리도 아마 엉망으로 헝클어진 것 같은데...첫 만남부터 벌써 아웃이다. 아웃. 아마 그 사람도 날 싫어하게 될 거야. 약속도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우울한 생각만이 계속 떠오르자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털썩 누워 눈을 감았다. 마른 풀들이 쥬느비에브 주위로 들썩이다 다시 가라앉았다. 쥬느비에브는 손을 허우적대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아마 대귀족가의 레이디들은 꿈도 못 꿀 행동이겠지만 쥬느비에브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파란 하늘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손을 위로 뻗어 보았다. 하늘은 너무 높고 푸르러 그녀의 손에는 잡히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 졌다. 자신의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다시 생각난 것이었다. 그녀는 손을 공중으로 뻗어 허우적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왜 안 열리는 거야!” 그 때였다. 작은 문에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쥬느비에브는 난데 없는 굉음에 놀라 눈만 깜빡거리며 한 동안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문이 열렸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가자, 가자!!” 한순간의 멍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쥬느비에브는 널부러져 있던 자신의 가방을 힘차게 움켜쥐고 문으로 돌진했다. 머리에 묻어있는 흙이나 잎사귀는 지금으로서는 문제가 아니었다. 쾅!!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쾅!!’이라니...도대체 무슨 소리지?” 가방은 자신의 한 손에 얌전히 들려있었다. 옷이 찢어진 건가? 그녀의 푸른색 원피스는 다소-사실은 많이- 더러웠지만 괜찮은 상태였다. 구두가 벗겨졌나? 구두도 역시 많이, 아주 많이 더러웠지만 그녀의 발에 얌전히 신겨져 있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려고 움찔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은 표현인 것 같았다. “머리가...머리가 문에 끼였어!?” 쥬느비에브는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녀의 버릇대로 머리부터 돌진을 했더니 문이 닫히면서 머리가 문에 끼인 모양이었다. 어째서 문이 닫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머리가 문에 끼인 채 엉덩이를 밖으로 쑥 내밀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여 보았다. 푸른색 풀들이 소복이 솟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간간히 마른 풀들도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힘들게 걸어서 겨우 도착했더니 정문은 보일 생각도 안 하고, 겨우 찾은 문은 아무리 밀어도 안 열리더니 어쩌다가 열린 문에 머리가 끼이다니...’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빼려고 목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았지만 열쇠 구멍에 열쇠가 들어간 것처럼 문틈과 그녀의 머리크기가 딱 맞아 좀처럼 빠질 것 같지 않았다. 두 손으로 문을 잡고 머리를 잡아당겨 보았지만 역시 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머리 양쪽으로 우리하게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두 다리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쥬느비에브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까 그냥 다른 길을 찾아볼걸.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이 참. 난 정말 바본거 같아...훌쩍. 그나저나 문에 머리 끼인채로 우는 것도 아주 우스꽝스러울 텐데....헤헤. 정말 우습겠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자신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정말로 한심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만 침울해졌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그만 참고 있던 눈물샘을 터뜨려버렸다. ‘맞아... 하루종일 걸었는데도 난 한 사람도 못 만났지... 그렇다면 날 도와줄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는 얘기잖아? 그 말은 곧 여기서 하루종일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아니지..평생을 이러고 있어야 할지도 몰라.... 아직 시집도 못 갔는데... 흐엉....흐엉....흐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쥐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으려니 몸 여기저기가 아주 불편했다. 거기다가 눈물이 얼굴에 말라 아주 끈적끈적했다. 계속 자유를 위한 시도를 해 보았지만 허사로 돌아가자 쥬느비에브는 실망과 짜증과 분함과 노여움이 범벅이 되어 기진맥진해 버렸다. 느리게 시간이 흘렀다. 머리가 끼인지 1도르쯤 지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을 닦아냈다. 그나마 손을 움질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닦아낸 자리에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쥬느비에브는 더욱 서러운 기분이 되었다. 또 다시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쥬느비에브는 부질없이 흐느적거렸다. ******** “...뭐야?” ‘사람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맑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분명 그랬다. 헛것을 들었나 하고 쥬느비에브는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머리가 끼인 상태에서 뒤를 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지?” 다소 의아한 기색을 띈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다시 들린 목소리가 사람의 목소리란 확신이 들자 쥬느비에브는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사람이에요! 도와주세요!! 머리가 문에 끼였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 조용했다. 쥬느비에브는 예상한 반응이 없자 다소 당황했다. ‘혹시 그냥 가버린 건 아닐까? 아님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헛 것을 들었나?“ “저기요... 거기 계세요?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바쁘신가요? 네에?” 쥬느비에브는 주저주저하며 말을 붙여보았다. “……” 역시나 조용했다. 쥬느비에브는 코를 훌쩍였다. ‘잘못 들은 거로구나...난 정말 바보같아....훌쩍, 훌쩍’ 쥬느비에브는 너무나 정신이 없다 보니 환청까지 들린다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를 빼기 위한 시도를 해 보았다. 엉덩이를 뒤로 쭉빼고 두 손을 문과 담을 짚어 지탱한 다음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으응차 하고 소리까지 지르며 힘을 주었지만 역시 이번의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는 숨을 헐떡이며 몸에서 힘을 뺐다. 머리가 문에 끼인 채 몸만 대롱대롱 거리고 있었다. “무슨...이런 기 막힌 일이...”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흠칫 놀라 버둥거렸다. 눈을 뚱그렇게 뜨고 눈물이 덕지덕지 마른 눈을 두 손으로 비벼댔다. “그, 그게 말이죠...어쩌다 보니 문이 닫혀서...그게...어? 진짜 사람이네? 거기 사람이죠? 그죠? 이것 보세요! 도와달라니까요!” “...소속은?” “에? 그게 저....그게 음....” 쥬느비에브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도와달라니까 뜬금 없이 소속을 묻다니 그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머리가 끼여서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바닥의 잔디를 째려 보며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소속이라니? 무슨 소속? 난 그런 거 없는데.... 아, 맞아. 디올레 마을에서 그거....’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박수를 딱 치고 크게 소리쳤다. “음, 전 디올레 마을의 마을 부녀회 소속이에요. 거의 대부분이 아주머니지만 간간이 할머니도 몇 분 계시죠. 전 유일한 미혼이라 레나 아주머니께서 절 아주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리팡세[주. 아르헨에서 경작되는 곡식의 한 종류.]를 추수할 때는 다들 협력해서 일하니까 아주 좋아요.” 쥬느비에브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디올레 마을이 떠오르자 그녀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 다시 조용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만족스러운 대답이 뭐가 잘못되었나 하고 생각하다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한 사람이네? 내가 뭐 잘 못 말했나? 그나저나 머리가 너무 아픈데....’ “저기..안 도와주실건가요?”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거기라뇨?” “네가 들어가려는 곳.” “아 네∼ 당연히 알죠.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잖아요. 제가 바본줄 아세요?” “……” 쥬느비에브는 참 이상한 것을 묻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움직이기 힘든 두 손으로 허벅지를 탁 쳤다. 덕분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팔락 거렸다. ‘아∼ 저 사람도 나처럼 여기가 처음이로구나...’ “문을 열면 머리가 빠질텐데...왜 그러고 있는거야?” “문이 안 열리니까 그러는 거죳!!” 쥬느비에브는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뭐야? 도와주려면 빨리 도와주지. 아야..아파라....’ “문을 못 연다고? 그럼 지금 그 만큼 열린 건 누가 연거지?” “그거야 문이 저절로 열렸으니까...뭐...” “저절로? 그 문은 레플리카에 반응하는 문인데?” “레플리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갸우뚱거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머리가 끼여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뒤에서 조용히 한숨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시간이 없군...” 아마 시계를 보고 있나보다고 쥬느비에브는 생각했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쥬느비에브의 상태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술궂은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테니까 알아서 빠져 나와.” “네?” 멀찍이 서 있는 수수께끼의 사람이 드디어 그녀를 구해주려 하고 있었다. 어쨌든 자신을 이 곤경에서 구해준다면 조금 더 점수를 후하게 줘야겠다고 쥬느비에브는 생각했다. ‘그런데...아주 힘이 센가 보지? 내가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안 한 문인데...’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 사람은 문을 밀지도 않았고 심지어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문 열어준다면서요...문 안 열어줄거에요?” “내가 문을 열어 주면... 나한테 뭘 줄건데? 원래 사례 없는 선행은 없는 법이야.” “…뭐라구요?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그냥 문 열어준다고 했잖아요!!” “생각해 보니 내가 손해보는 거 같아서.” 쥬느비에브는 이 사람이 사실은 아주 성질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문 열어 주세요!! 머리 아프다구요, 네? …뭐든 나한테 있는 거면 줄테니까 제발 열어주세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서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힘들어진 쥬느비에브는 소리를 질렀다. “좋아. 손해보는 거래인 거 같지만...” 선뜻 승낙하는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며 머리를 붙잡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구해준다고 하고는 왜 빨리 다가오지 않는 건지 궁금해 하는 찰나, 이상한 음색이 퍼졌다. [아아아아아아---------] 수수께끼의 사람은 문 근처에는 오지도 않고 묘한 가성을 내고 있었다. 무언가 가사가 있는 노래 같기도 하고 그냥 허밍 같기도 한 아주 이상한 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빼는데 온 신경을 집중한 터라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아주 고음의, 그렇지만 듣기 싫지 않은, 오히려 감미롭기까지한 신비로운 소리였다. 뒤 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문에서도 밝은 색의 빛이 어렸다. 그리고 스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그 사람은 문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쥬느비에브가 힘 쓸 필요도 없이 문이 열리자 머리가 빠졌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홀가분한 기분에 쥬느비에브는 날아갈 듯 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쥬느비에브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와아! 시원해!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뭐...별로.” 이제서야 자신을 도와준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도와준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준 것은 요정이었다! 분명했다. 요정이 틀림없었다. 다소 웨이브진 금발의 블론드가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끼는 그 모습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요정 이야기를 해 주었던 유모의 말 그대로였다. 게다가 방금전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말 근사했다. 다소 높은 톤의 아주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와 우아한 얼굴선, 그리고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반질반질 윤이 나는 옷감으로 만들어진 그의 짙은 녹색빛이 나는 외투가 그녀에게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가 신고 있는 구두도 그녀의 그것보다 121배는 좋은 것이었다! “…음....요정이었군요, 당신은!! 음...유모가 그랬어요. 착한 일을 100번 하는 날! 요정이 나타나서 사탕을 준다고요. 물론 난 안 믿었지만....음...정말 사탕을 주나요? 나도 사실 아-주 착한 아이였는데 말이죠. 혹시 모르셨다면 가르쳐 드릴게요. 나도 착한 일 100번 정도 한 거 같거든요. 근데 아직 사탕을 못 받았지 뭐에요.” 쥬느비에브는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물었다. 그녀는 사실 정말 요정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사탕을 주는지가 늘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를 도와준 이상한 성격의 요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몇 시르[주. 아르헨의 시간 단위. 1시르는 약 1분.]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다 문을 지나 사라져버렸다. 쥬느비에브는 요정이 사라진 곳을 멍하게 바라 보았다. 이왕이면 대답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알고 보니 별로 친절한 요정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요정이 왠지 그녀를 보고 아주 놀란 표정을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나?’ 쥬느비에브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손뼉을 딱 하고 쳤다. 저 요정은 분명히 요정들하고만 살아서 인간의 모습이 어색한 것이 분명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해답에 스스로 흐뭇해져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는 요정이 자신을 도와줘서 착한 성격인 거 같지만 빨리 도와주지 않고 늦장을 부렸으니 아주 짖궂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멋대로 그의 성격을 ‘이상한 성격’으로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스콜라 안으로 당당하게 발을 들이밀었다! 제2음(第2音) Genevieve(2) 차기 아르헨 귀족 연합 평의회의 의장 후보이자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학생회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장인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은 그의 사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풀이 그의 반질반질하게 닦인 구두에 밟히며 부스럭거렸다. 기분 좋은 봄바람에 몸을 맡기며 그는 편안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 그의 목까지 오는 부드러운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다시 불어온 바람에 머리가 흩어지자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의 짙은 녹색 외투가 바람에 살짝 나부꼈다.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방금 만난 여자-그는 그 이상한 ‘것’이 치마를 입고 있었으니 분명 여자일거라고 짐작했다- 때문에 그의 고상한 정신 세계는 적잖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정말 이상한 여자가 다 있다고 생각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이드리안은 오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차 중 하나인 향이 풍부한 말리차와 부드러운 비스켓으로 점심을 먹고 숲의 공기를 마실겸 산책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사택 후문 앞에서, 바로 그 사택 후문에 머리가 끼인 그 여자를 본 것이다. 솔직히 에이드리안은 그 여자의 모습에 매우매우 놀랐다. 엉덩이를 쑥 내밀고 있는 그 이상한 자세라니! 유행이 한참 지난-얼마나 한참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그런 이상한 스타일의 옷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빛바랜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 여자는 이상하다 못해 괴상하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았다. 여기저기 흙투성이에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몇 시르 전의 기억으로는 얼굴도 울긋불긋한 것이 아주 이상하게 생겼던 것 같았다. 까만 머리카락은 거친 덤불 숲을 막 헤쳐 나온 어린 아이의 그 것 같았다. 거기다가 그가 17년을 살아오면서 문에 머리가 끼인 웃지도 못할 상황은 한 번도 목격해 보지 못한 것이라 우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 밖에도 의아한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사택 쪽에는 사촌형인 유벨의 사택과 조금 더 떨어진 곳에 미라벨의 사택이 있을 뿐이다. 스콜라 본관과는 아주 동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 곳에 그 여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것 일까? 그 밖에 ‘레플리카’의 존재를 모르는 점이나-그는 이것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콜라에서 레플리카를 사용할 줄 모르다니!- 무엇보다 무슨 마을의 부녀회 소속이라는 대답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부녀회가 도대체 뭔가? 학생회의 부서에 그런 부서는 없었다. 적어도 <엘크로이츠>에는. <엘크로이츠>는 분명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 여자가 엘크로이츠라면 자신의 얼굴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콜라의 여성 중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가만한다면 정말이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만약 그녀가 <엘크로이츠> 소속이라면 그녀를 받아들인 미라벨을 징계처분해버릴 심산이었다. 당연히 그렇고말고! 그런 이상한 여자가 엘크로이츠라니! 전력 증강은 고상하고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주변에 폐를 끼칠 여자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라데팡스>라고 보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에스프라드가 보낸 스파인가? 그렇지만 스파이가 저렇게 멍청할 리가 없으니 그 여자의 정체는 정말이지 오리무중이었다. 사실 그 여자가 스콜라 학생인지도 미심쩍었다. 게다가 자신을 보고 요정이라니… 요정이 뭐지? 사탕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이런저런 괴상한 여자에 대한 추리를 하던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자신이 사택 내의 서재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콜라 내에 위치하고 있는 자신의 사택은 스콜라의 130여개의 사택 중 2번째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40여개의 방과 커다란 식당, 그리고 작은 정원과 호수가 갖추어진 저택이었다. 비인 가의 이름에 걸맞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일로나 할머님은 늘 본가에 들어오길 종용하셨지만 에이드리안은 이 저택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근처에 잔소리 심한 사촌형 유벨과 자칭 타칭 자신의 추종자라는 미라벨의 사택이 있어 가끔씩 귀찮은 일이 생겼지만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사택의 방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바로 서재였다. 햇빛이 늘 따뜻하게 들어오고 창 밖으로 숲과 호수가 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인 서재 중앙에 놓인 긴 쇼파에서 그는 종종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은 방금 전의 이상한 여자는 잊어버리고 오늘도 느긋하게 서재에서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런 이상한 여자 때문에 정신 사나울 이유는 없다고 판단되었다. “어이, 에드!” 서재 구석의 책상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촌형을 발견하자 에이드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낮잠을 즐기려고 했더니 예기치 못한 방해꾼이 나타난 것이다.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시원한 외모의 사촌형은 에이드리안이 문을 잠그고 다녀도 늘 그의 집에 신출귀몰하게 출현하곤 했다. “무슨 일이야? 유벨. 여긴 또 어떻게 들어온 거야?” “지금 그런 얘기 할 때냐? 비인 본가에서의 소식 들었어?” 에이드리안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되물었다. 사촌형의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 또 무언가 귀찮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무슨 소식?” “네 약혼녀가 오늘 온댄다. 오늘부로 스콜라에 편입한다던데?” 유벨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흠칫 놀라며 방금 책장에서 꺼내들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툭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약혼녀라니? 무슨. 누구의 약혼녀라고?” “너.의. 약.혼.녀.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바로 너의 약혼녀말이다.” “무슨 소리야? 난 약혼 같은 거 한 기억 없어!!” “그거야 나도 당연히 알지. 프란체스 형의 소식통에 의하면 그저께 친족회의에서 결정난 거란다. 게다가 상대를 들으면 더 기절초풍할 일일걸?” 에이드리안은 꿀꺽하고 목으로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귀족 사회에서 결혼은 세력을 결정하는 중대사였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상대를 결정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터였다. 특히 비인 가문에서 자신과 같은 대(大)속성 레플리카를 보유하고 있는 자의 배우자 선택에는 상당한 조건이 필요했다. 배우자의 신분이 낮을 경우 배우자의 가문을 통한 세력 확장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관례상 평의회장이 되는데도 큰 어려움이 따랐다. 게다가 그는 당분간은 결혼에 대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아킬레스건과 같았다. 친족회의에서 정해졌다는 소리에 에이드리안은 이번 음모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헤르만 숙부로군? 내 약.혼.녀를 정한게. 거기다 에스프라드 형도 동참을 했을 테고.” 에이드리안은 옆에 있던 의자에 풀썩 주저 앉으며 체념조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있던 유벨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에스프라드 형이 지금쯤 배를 잡고 웃고 있을 거다. 뭐 그 냉혈한이 진짜 웃지는 않겠지만. 일로나 할머님이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은 헤르만 숙부 뜻을 꺾질 못하셨다더군.” “그렇겠지. 어쨌든 지금의 최고 실권자인 평의회장이 헤르만 숙부니까.” 에이드리안은 지긋이 눈을 감으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현재로서는 헤르만 숙부의 뜻을 거스를 수 가 없었다. “…상대는 누구야?” 유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에슈비츠 공작의 영애.” “…뭐? 에슈비츠 경에게는 딸이 없잖아?” 놀란 에이드리안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유벨을 추궁했다. 갑자기 손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양녀란다. 아버지의 출신은 알 수 없고 어머니는 그야말로 평범한 평민.”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추궁을 피하려는 듯 창 밖의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용히 침묵이 흘렀다. 유벨은 살짝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에이드리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지금 나더러 평민과 결혼하라고? 나에게? 광속성 레플리카의 소유자인 이 나에게?” 에이드리안은 당장이라도 헤르만 숙부에게 따지러 가고 싶었다. 평민과의 결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일로나 할머님이 이런 약혼을 허락하셨다니 믿을 수 없었다. “헤르만 숙부에게 가 봐야겠어. 난 이런 약혼 절대로 못해! 너도 알잖아!!” “에드!! 일로나 할머님도 결국 묵인하신 일이야. 더 이상 번복은 없어. 너도 알잖아. 친족회의에서, 그것도 헤르만 숙부 주재로 결정된 일은 항상 절대적이란 걸!! 아니면 에스프라드 형에게라도 따질 생각이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일로나 할머님이 묵인하신 이상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야. 우선은 두고 보는 수 밖에 없어.” 당장이라도 방을 뛰쳐 나갈 것 같은 에이드리안을 몸으로 막은 유벨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에 절로 신음소리가 났다. “어쨌든 오늘 오후 4도르쯤에 사감과 만나기로 했다니까 우리도 가 봐야지. 비인 가에서 그녀의 환영식을 엘크로이츠에 일임했어.” “너나 가. 난 절대로 안 가. 이런 약혼 절대 무효야. 절대!” 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사촌 동생을 바라보며 유벨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로 꼬투리 잡히는 건 내가 못 봐. 어서 가자구.”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에이드리안은 완강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벨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찌푸린 표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안 갈거야?” 유벨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 당겼다. 에이드리안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쳐다 보자 유벨은 순간 움찔거렸다. 협박과 회유의 이러쿵 저러쿵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겨우 그의 항복을 받아낸 유벨이 에이드리안을 데리고 스콜라 본관으로 향한 것은 그로부터 약 2도르 후였다. ******** 쥬느비에브는 한 숨을 포옥 쉬었다. 어째서 이 스콜라는 이렇게 쓸데없이 넓은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디올레 마을-불과 3개월 전만해도 그녀가 살고 있었던 곳이다-을 5개 가져다 놓아도 이 곳보다는 작을 것 같았다. 아니 그녀가 가 보지 못한 곳이 더 많으니 그 이상 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본의 아니게 스콜라 관광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콜라 안에서 이미 3도르 이상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요정님에게 물어볼걸. 요정님은 뭐든 알고 계실텐데... 좀 성격이 이상한 요정이었지만...무슨 건물이 이렇게 많담. 이상하게 사람도 없고...” 다시 우울해지는 쥬느비에브였다. 자신의 커다란 가방을 고쳐 들고 그녀는 잘 닦여진 길 위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 때였다.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자 쥬느비에브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었다. 아마 스콜라에 재학 중인 레이디일 거라고 쥬느비에브는 생각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찾아온 기회에 눈을 반짝였다. 이제 길을 물을 수 있다! “에이드리안 님이 약혼이라니!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비천한 신분의 여성과의 약혼이라니! 이것은 분명 <라데팡스>가 우리를 우습게 볼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힘을 합해 에이드리안 님을 이 수렁 속에서 구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것을 위해서는 우선 그 약혼녀로 지목된 여성과 에이드리안의 접촉을 막아야합니다!! 일단 에이드리안 님을 만나고 나면 그 여성도 에이드리안 님의 매력에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가 목소리도 우렁하게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 이어 지지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미라벨 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에이드리안 님을 우리가 반드시 구해드려야 합니다. 이건 우리 <엘크로이츠>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자칫 하다가는 고작 평민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엘크로이츠의 존속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반드시 그 여성이 에이드리안 님과 만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쥬느비에브는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들을 수는 없지만 뭔가 결의를 다지는 듯한 여성들의 비장한 목소리와 얼굴 표정으로 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레이디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쥬느비에브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스콜라의 본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화려한 다홍색 머리를 한 레이디를 향해 뛰어갔다. 뛰어가다가 그녀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잠시 휘청했지만 다시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쥬느비에브가 다가온 것을 알아챈 다홍색 머리의 소녀가 고개를 치켜 들고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 스콜라 본관이 어딘지 아세요?” 다홍색 머리를 한 레이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쥬느비에브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구시죠? 스콜라 학생은 아닌 듯 한데?”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의 우아하지만 거만한 말투에 다소 움츠러든 자신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대답했다. “아, 네. 저기... 가족을 찾으러 왔어요.” “가족? 스콜라에 재학 중인 사람인가요?” 한 쪽 눈썹을 움찔하며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가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녀의 가방 손잡이를 꼭 쥐고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기, 진짜 가족은 아니었는데… 오늘부터 저의 진짜 가족이 될 사람이거든요. 스콜라 본관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4도르에 만나기로 했는데 길을 좀 헤매서 늦어버렸네요.” 마음 속으로 사실은 ‘좀’이 아니라 ‘많이’ 길을 헤맸다는 변명을 하며 쥬느비에브는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는 머리를 양 갈래로 나누어 붉은색 리본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레이스와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붉은색 원피스는 아주 고급스러워 보였다. 살짝 다물고 있는 입술이 잠시 실룩거렸다. 뭔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레이디를 자세히 살펴본 쥬느비에브는 이 레이디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좋아요. 우리도 마침 본관으로 가는 길이니 같이 동행하죠.” 레이디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뛸 듯이 기뻤다. ‘더 이상 헤매지 않아도 된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가방을 고쳐들고는 레이디 일행의 뒤를 따랐다. 스콜라 본관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 얼마 안 가 도착할 수 있었다. 본관 건물은 쥬느비에브가 지나가면서 본 다른 건물들처럼 규모는 엄청 났지만 둥근 지붕과 회색 대리석으로 겉을 치장하여 화려하다기 보다는 단순하고 깨끗한 미가 살아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했다. 쥬느비에브는 썩 괜찮은 건물이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주변에는 나무도 많지 않은가. “그럼, 여러분. 우선은 제가 들어가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기다리면서 혹시 그 여성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지나가려면 몸을 바쳐 막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라벨 님!!”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는 근엄하게 나머지 레이디들에게 말을 하고는 쥬느비에브 쪽으로 돌아봤다. “여기가 본관이에요. 가족을 찾아보도록 하세요.” “네, 저기 고맙습니다.” 쥬느비에브는 인사를 하고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친절한 레이디야.” 쥬느비에브는 하늘을 보며 싱긋 웃었다. 하늘은 여전히 높고 맑고 푸르렀다. 마치 그녀의 고난이 끝났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제 다 왔다! 그 사람만 만나면 돼!” ********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실에서 에이드리안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침울했다. 너무나 침울했다. 자신의 난데없는 약혼에, 게다가 소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의 여자를 약혼녀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유벨의 강요로 이곳,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실에 끌려온 그였지만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불쾌했다. 이미 약속 시간에서 3도르간이나 지나고 있었다. 중앙의 쇼파에 앉아 그가 좋아하는 차를 몇 모금 마셔봤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아까부터 옆에서 왔다갔다하는 유벨이 더욱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유벨! 앉아.” “지금 한가하게 앉아 있을 때냐? 네 약혼녀가 소식이 없다고! 분명 4도르에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에이드리안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앉으며 한 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 님!” 부드럽게 스치는 문 소리와 함께 붉은 색 치마를 휘날리며 미라벨이 나타났다. 에이드리안은 아까보다 더 깊게 한 숨을 쉬었다. 미라벨이 온 이상 또 한 차례의 폭풍과 싸워야 했다. “에이드리안 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약혼이라니요! 게다가 천한 평민과!!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요? 우리 엘크로이츠의 레이디들, 아니 우리 스콜라의 레이디들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미라벨. 천한 평민이라기보다는 귀한 평민이라고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평민 출신이라도 에슈비츠 공작의 양녀이니...“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유벨은 자신의 변명이 구차하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유벨 님도 그래요!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약혼을 그냥 두고만 보고 계시는 겁니까? 이대로 약혼이 성사되면 <엘크로이츠>의 위신이 얼마나 떨어질지, 유벨 님도 아시잖아요! 게다가 우리 스콜라의 레이디들이 입을 상처는 어떻게 하구요!! 도대체 그 여자는 어디 있는 거지요?” “아직 안 왔어, 미라벨.” 유벨의 말에 미라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직 안 왔다니? 그럼 지금 에이드리안 님을 바람 맞추고 있다는 말씀!? 뭐 그런 여자가… 아아∼어지러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미라벨을 부축하며 유벨은 얼굴을 찌푸렸다. 미라벨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물어보는 유벨의 말 없는 시선에 에이드리안은 알아서 하라는 듯 창 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와?” 미라벨을 에이드리안이 앉아 있는 곳의 맞은 편 쇼파에 눕힌 유벨은 창 밖을 힐끔 거리며 에이드리안에게로 눈을 돌렸다. 창 밖의 바라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관심 없다는 듯 여기저기를 둘러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에드, 왜 그래?” “그 여자야. 그 괴상한 여자.” “뭐?” 에이드리안은 귀신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 가로 걸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괴상한 여자가 이 건물로 들어왔어, 유벨.” “그 괴상한 여자가 누군데?” 유벨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분명 갑작스런 약혼의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무척 심상치 않아 보였다. 유벨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여자, 정말로 스콜라 학생이었나?” “에이드리안, 쓸데 없는 얘기 하지 말고 사람을 풀어서 네 약혼녀의 행방이나 찾아 보자.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유벨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끌어 당겼다. 미라벨에 이어 두 번째 문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안녕하세요! 사감 선생님 계신가요?” 씩씩한 소녀의 음성에 에이드리안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뒤로 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쥬느비에브가 돌아선 소년이 매우 낯익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금 창 밖에서 본 괴상한 여자가 왜 이 방에 들어온 것인지에 대해 의아함을 감출 수 없는 에이드리안 군과 숲에서 만난 요정이 왜 이 방에 있는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쥬느비에브 양은 한 동안 서로 눈만 끔뻑거리며 그렇게 서 있었다. 제3음(第3音) Genevieve(3) 에이드리안 님을 사랑하는 모든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레이디들, 특히 엘크로이츠의 모든 레이디들에게 나,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는 사죄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현 엘크로이츠의 회장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약혼 소식을 전해 들은 본인과 수 많은 레이디들이 이에 항의하기 위해 굳건한 결의를 한 것을 온 스콜라의 학생들은 알 것이다. 우리들은 에이드리안 님과 그의 약혼녀로 내정된 여성의 접촉을 저지하기 위해 에이드리안 님 본인과 그의 측근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님을 면대했으나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로 내정된 쥬느비에브 양의 간교한 측면전술로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여 오히려 쥬느비에브 양을 에이드리안 님에게 인도한 격이 되고 말았다.(쥬느비에브 양의 자세한 인상 착의와 본인의 느낌은 다음 호에 실을 예정이다.) 게다가 그녀는 소리없이 유벨 님을 포섭하여 에이드리안 님과의 싸움을 부추기는 등의 치밀한 전술을 선보이고 있어 본인은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그러나 레이디들이여!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측근에서 관찰한 결과, 에이드리안 님은 쥬느비에브 양에게 심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필시 본인이 알지 못하는 모종의 사건을 겪은 듯하나 그것은 최측근인 유벨 님도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본인의 정보 파일에 의하면 에이드리안 님과 쥬느비에브 양이 미리 면대를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기에 더욱 사건의 내막이 궁금하기만 하다. 나,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는 어떤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고서라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이 칼럼의 많은 독자들에게 보답할 생각이다. 칼럼의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안 님의 파혼을 위한 우리의 결의는 아직도 굳건하다는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어느 한가로운 봄, ‘오늘의 에스플리크’ 중 미라벨 양의 칼럼에서 ******** “어머! 요정님이 여긴 왠일이세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숲에서 만난 이 요정은 외출이 잦은 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는 넌 여기 무슨 일이지? 여긴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실인데?”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괴상한 여자는 정말이지 신출기몰한 것 같았다. “음. 전 가족을 만나러 왔는데요.” “가족?”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저 괴상한 여자의 가족이라니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저 여자만큼 괴상한 인물일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가족이라...흠, 열심히 찾아 보도록.” 에이드리안은 상관말자고 생각하며 쇼파에 거의 실신 지경으로 누워 있는 미라벨을 지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벨. 난 가겠어. 그 여자를 찾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난 이제 상관 안 하겠어.” 에이드리안은 문 손잡이를 지긋이 잡으면서 방금 들어온 괴상한 여자를 다시 살폈다. 그 여자의 상태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분명히 더 심각했다. 머리는 빗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고 자신이 빛바랜 파란색이라고 생각한 원피스는 옷감의 마모정도가 훨씬 심했으며 군데군데 묻은 흙이 보기 싫게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신발은 이미 묻어 있는 흙 때문에 색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룩덜룩한 얼굴은 왠지 시뻘겋게 보였고 까만 눈동자만 뎅그렇게 큰게 뭔가 휑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괴상한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의 건전하고 고상한 정신 세계가 또 다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얼굴이 분명히 발그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언듯 본 요정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였다. 디올레 마을의 레나 아주머니가 말한 풍덩 빠지고 싶은 눈동자란 아마 요정님의 눈동자를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 쥬느비에브는 짐작했다. 시내의 보석상에서 본 파란 보석처럼 예쁜 눈동자였다. 아까 보았던 짙은 녹색의 외투와 연한 베이지색 바지는 다소 마른 듯한 몸에 딱 맞았다. 물론 처음 보았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아주 비싸 보였다. 아까 봤을 때보다 더 반짝거리는 금발을 보니 쥬느비에브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근데 왜 요정님이 자신을 계속 빤히 쳐다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까도 날 빤히 쳐다봤었지...’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른 물음에 얼굴을 찌푸리던 쥬느비에브의 귀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요정님 옆에 누가 서 있었던 것도 같았다. “에드, 기다려! 쥬느비에브 양이 혹시 길이라도 잃었으면 어떻게 해?” 음? 쥬느비에브는 움찔거렸다. 내 이야기다! 쥬느비에브는 반가운 마음에 돌아서서 방실방실 웃었다. 회색 머리의 소년이 창 가에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회색 머리의 소년이 참으로 신통방통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길을 잃은 거. 와아! 대단하네요. 저, 아침부터 지금까지 헤맸어요. 요정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음? 요정님은 제가 헤맨거 모르는데...”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서로를 말 없이 쳐다 보았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유벨은 쭈뼛거리며 갑자기 나타난 몹시 이상한 차림새의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에, 저 레이디. 무슨 말씀이신지...” “음...그러니까. 쥬느비에브는 지금까지 길을 헤매다가 이렇게 늦었다는 말씀이에요.” 쥬느비에브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벨은 하얗게 질린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곁눈질하며 설마설마를 마음 속으로 외쳤다. “혹시...혹시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어머, 제 풀네임까지 아시네요? 이름 바뀐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와아-신기해라.” 쥬느비에브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탁 하며 손뼉을 쳤다. 그 때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당신은? 왜 여기 있는거죠? 가족을 찾는다면서요? 에이드리안님? 왜 그렇게 안색이 창백하신거죠?” 언제 일어났는지 미라벨이 환하게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와 창백한 에이드리안을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미라벨, 이 쪽의 레이디가 에이드리안의 약혼녀인 쥬느비에브 양이라는군.” 유벨은 눈을 내리깔며 미라벨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 뭐라고요? 이, 이 사람이? 그럼 내가...내가....아...” “미라벨! 미라벨!!” 이번에야 말로 기절해 버린 미라벨을 붙잡고 유벨은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을 찾았으나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자신을 보자 기절해 버린 다홍색 머리의 레이디를 보며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던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진짜 목적을 기억해 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처음 듣던 순간부터 수천번을 되뇌었던 그 이름을 지금 물어볼 때였다. “저, 요정님, 혹시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란 분을 아세요?” 요정의 안색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해서 쥬느비에브는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갑자기 안색이 왜 저렇게 나빠진걸까? 아침에 뭘 잘못 드셨나?’ “에이드리안이...누군데?” 요정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아픈가? 목소리도 이상하네. 아깐 참 목소리가 예뻤는데. 이상하네.’ 쥬느비에브는 양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요정의 안색을 살피며 얼른 대답했다. “제 가족이요! 약혼자에요.” 대답을 듣자 에이드리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라면 내 이름이 분명한데. 이 괴상한 여자의 약혼자가 나? 내 약혼녀가 이 괴상한 여자? 그럼 이 괴상한 여자의 가족이...나란 말인가?’ 에이드리안은 멀리서 들리는 사촌형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새기며 자리에 쓰러졌다. 그 이상한 여자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싶은 에이드리안이었다. ******** “……” “에드, 괜찮아? 에드!” “…유벨?” 에이드리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려고 애를 썼다. 어슴프레 침실의 천장이 보이는 듯 했다. 온 몸이 바닥에 붙어 버린 불쾌한 느낌으로 에이드리안은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바싹 마른 목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에이드리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이마를 찡그렸다. “너, 에슈비츠 양을 보고 기절했잖아.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났다구. 기억나?” “에슈비츠… 에슈비츠?” “쥬느비에브 양 말이야. 네 약혼녀.” “약혼녀? 아!” 에이드리안은 간신히 들어올린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그랬다. 자신의 약혼녀를 보고 기절한 것이다. 평생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여자를 보고 기절하다니 실로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아니다. 그렇게 기괴한 여자와 약혼을 해야한다는데 기절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만 숙부를 만나 봐야겠어. 아니, 에스프라드 형이라도 만나야겠어. 저런 여자랑 결혼이라니… 끔찍해.” 에이드리안은 모로 돌아누우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래도 너 기절해 있는 동안 걱정 많이 하는 거 같던데, 나쁜 여자는 아닌 거 같아. 다만 모습이 조금… 조금 이상할 뿐이지.” 유벨은 멋쩍은 듯한 말에 에이드리안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건 네가 못 봐서 그래! 저 여자가 무슨 꼴로 있었는지…!” 속이 메스꺼웠다. 에이드리안은 울컥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이불을 움켜 쥐었다. 머리 속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하여튼 난 저 여자와는 절대 약혼이든 결혼이든 할 생각 없어.” 에이드리안은 다시 침대에 들어 누웠다. 유벨은 팔짱을 낀채 이불을 끌어 당기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한 숨을 쉬었다. “나도 답답하단 말이다. 임마.”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침대에 남겨둔 채 방을 나섰다. 어찌되었든 그의 약혼녀에게 경과를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유벨은 빠른 걸음으로 1층의 응접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다다른 유벨은 유쾌한 목소리로 소녀를 불렀다. 어찌되었던 소녀에게 잘못을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봐, 아가씨.” 쥬느비에브는 커다란 응접실의 쇼파에 앉아 있었다. 화려한 가구들과 커텐, 카페트로 장식되어 있는 응접실에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는 너무 왜소해 보였다. 그녀는 어디서 얻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독하게 낡은 가방을 두 손으로 꼬옥 들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괜찮아. 지금은 자고 있어.” 유벨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쥬느비에브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에드는 몸이 약해서 가끔씩 기절하곤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쥬느비에브에게는 상당한 효과가 있는 듯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읊조리듯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유벨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괜찮다니까.” 그제서야 환하게 미소 짓는 쥬느비에브를 보면서 유벨은 이 이상한 여자가 생각만큼 이상한 얼굴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잘 씻기만 하면 예쁜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저나 어제부터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텐데, 배는 고프지 않아?” “저기 그것보다 에이드리안 님을 만나고 싶어요. 만날 수 있을까요?” 유벨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에이드리안에게 그녀를 데려갔다가는 당장 <엘크로이츠>에서 제명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미라벨에게서 엄청 잔소리를 들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것보다는 단단히 충격받은 에이드리안이 다시 쓰러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우선은 휴식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음... 지금은 조금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쥬느비에브 양도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게 좋을 것 같아.” “그럴까요? 음, 맞아. 저도 지금 흙투성이니까 좀 씻기는 해야겠어요. 에이드리안 님이 절 보고 싫어 하시면 안 되니까요...헤헤.” 유벨은 아무 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 아가씨야, 안 됐지만 벌써 에이드리안은 널 아주아주 싫어한다구. 에드, 너도 큰일이구나. 이 아가씨는 쉽게 떨어질 타입으로는 안 보이는데.’ 당장이라도 타일러서 집에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유벨은 그 마음을 접고 하녀장을 찾았다. “이 봐! 루이즈! 아가씨에게 목욕물이랑 먹을 걸 좀 준비해주라구!” 에이드리안이 이 아가씨가 자기 집에서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거기다 맛있는 음식까지 배부르게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심히 궁금한 유벨이었다. ‘쿡, 그 녀석 표정 볼만하겠는걸.’ 에이드리안과 이 기묘한 아가씨가 어떻게 보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유벨은 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들어 콧노래를 부르며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제4음(第4音) Genevieve(4) 쥬느비에브는 가슴팍에 달려있는 리본의 매무새를 정리하다가 목욕을 마친 뒤 갈아입은 자신의 낡은 초록색 원피스를 바라보고는 몹시 우울해졌다. 어제 본 레이디들의 아름다운 옷과 비교해 볼 때, 그녀의 초록색 원피스는 너무 낡아서 색도 흐릿한데다가 세탁을 잘 못한 탓에 여기저기 쭈글쭈글한 곳이 많았다. 하여튼 그녀는 그녀의 원피스가 어제 본 레이디들의 그것에 비해 153배는 좋지 않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구두는 흙을 잘 털어서 신었지만 왠지 축축한 느낌이었다. 머리는 그저께 5시엘[주. 아르헨의 화폐 단위. 5시엘은 약 500원.]을 주고 산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묶어놓았지만 리본이 헐거워서 그런지 자꾸만 흘러내렸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리본을 꽉 짜 매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지금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에이드리안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처음에 잠깐 길을 헤맸지만-저택에는 방이 상당히 많았다- 유벨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회색머리의 남자를 만난 탓에 더 이상 헤매는 수고를 덜었다. 유벨은 참 친절했다. 에이드리안의 사촌형이라는 유벨은 그녀에게 따뜻한 음식과 목욕물을 제공해주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옷감의 회색 바지와 같은색의 조끼를 걸친 준수한 유벨의 용모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비인 가문의 사람들은 다들 예쁜 사람들만 모여있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유벨의 뒤를 놓칠세라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음, 에슈비츠 양. 사촌형으로써 이런 말하기는 좀 뭐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곱상하게 생긴 거랑 달리 괴팍한 구석이 다소 있는 터라 너무 그를 자극하지 않는게 좋아.” 유벨의 걱정스런 말투에 쥬느비에브는 걱정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활짝 웃었다. “자극이요? 그럴 리 없잖아요. 전 그를 만나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새로 가족이 된다니 정말 근사한 일이에요. 저는 정말로 그 사람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걸요. 그러고보니 에이드리안 님의 사촌이라니 유벨 님과도 가족이 되는 거네요?” 꿀꺽하고 유벨의 침 삼키는 소리에 놀란 쥬느비에브는 유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뭐... 그렇군. 하여튼 잘 해보라고. 나도 응원할 테니.” 자신의 이 말을 에이드리안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해 보던 유벨은 그만 싱긋 웃고 말했다. 필시 그 잘생긴 얼굴이 심하게 구겨지리라. 그러나 왠지 유벨은 이 아가씨를 자꾸만 응원하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요정님이 제 약혼자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음...그렇게 예쁜 사람이...” 쥬느비에브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달아오른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평소에도 그렇게 자주 기절하시나요? 몸이 그렇게 약하다니 걱정이에요.” 유벨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쥬느비에브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기대를 잔뜩하고 있는 그녀가 몹시 가여웠다. 에이드리안이 자신 때문에 기절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정녕 모르는듯 했다. “에슈비츠 양.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에이드리안이 무슨 말을 해도 절대 울지 마. 에이드리안은 여자가 우는 거 정말 싫어해. 알았지?” “네!” 쥬느비에브는 유벨의 말이 어떤 듯인지도 모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졌다. “절대 안 울어요!” “훗. 왠지 일로나 할머님이 이 약혼을 묵인하신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자, 그럼 들어갈까?” 어느 새 에이드리안의 서재에 도착한 그들이었다. 유벨은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문을 밀어냈다. 방 안에는 에이드리안이 커다란 책상의자에 앉아 바쁘게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곁에서 미라벨이 무어라고 말을 하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기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남녀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리던 에이드리안은 의자에서 일어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유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한 미라벨이 쥬느비에브를 향해 눈을 흘기며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랐다. 에이드리안은 검은 색 바지에 흰 셔츠를 걸치고 그 위에 느슨하게 스카프를 맨 간편한 차림이었지만 왠지 귀족의 우아함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고 쥬느비에브는 생각했다. 그에 비해 미라벨이라는 이름의 레이디는 어제 본 것처럼 화려한 프릴이 달린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라벨의 옷을 보자 쥬느비에브는 다시 자신의 낡은 초록색 원피스가 얄미워 보였다. “예법을 따지자면 환영의 인사라도 거창하게 해야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심정이라 이해바랍니다. 에슈비츠 양.” 파란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 보는 에이드리안에게 쥬느비에브는 그가 자신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아, 아니에요. 에이드리안 님.” 살짝 무릎을 굽히며-그녀가 에슈비츠 저택에서 본 레이디들은 모두 이런식으로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한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조소를 흘리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어제 숲에서 본 인상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쥬느비에브는 말 없이 긴장했다. “실례지만, 에슈비츠 양. 난, 내가 싫어하는 상대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만...” “에드! 무례하게 그게 무슨 말이야! ” 냉랭한 에이드리안의 태도에 잔뜩 기가 죽은 쥬느비에브를 보면서 유벨이 에이드리안을 향해 소리쳤다. “무례하다니, 누구에게 하는 소리야? 평민에게 이정도의 요구야 당연한 것 아닌가?” 에이드리안은 오히려 유벨에게 화를 냈다. “그녀는 평민이 아니잖아. 엄연히 에슈비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구.” “...가문에서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이름? 하! 그래, 그렇게 고귀하신 분이라서 그 알량한 마차도 없이 이곳까지 걸어서 왕림하셨다!? 옷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다 줘 버렸나 보지? 저런 시골쥐도 안 입을 옷을 걸치고 나타난 걸 보니.”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말에 입을 다물고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옆에서는 미라벨이 고소하다는 듯 입술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아가씨 앞에서 너무 심한 것 같다.” 유벨은 쥬느비에브를 막 대하는 에이드리안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쥬느비에브가 평민출신이라지만 에이드리안의 태도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그 여자를 두둔하는 건가? 유벨 형.” 항상 그의 편에 서 있던 사촌형이 자신에게 반발을 하자 에이드리안은 목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저 가라앉은 목소리라니. 사촌형은 그에게 저런 식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저,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준비를 못했어요. 마차도, 옷도...”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쥬느비에브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유벨과 에이드리안의 감정 싸움으로 치달을 태세였다. “하! 준...비?” 에이드리안은 머뭇거리는 쥬느비에브의 대답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에슈비츠 양. 난 아가씨의 출신 성분을 감당한 자신도 없는데다 아가씨의 멍청함은 더더욱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아니 절대 당신과 결혼할 수 없으니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당장 에슈비츠 영지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될 수 있으면 당장.” “에이드리안, 너!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어!” “유벨은 못 봤잖아! 저 여자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글쎄, 문에 머리가끼...” 에이드리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민망한 사건에 대해 주절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라벨이 눈을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미라벨이 이 괴상망칙한 일을 알게 되는 것은 곧 스콜라 내의 모든 학생이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의 약혼녀가 될 뻔한 여자가 그런 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야! 문에 머리가 어쨌다는 거야?” “...몰라. 하여튼 관둬! 관두자고!” 쥬느비에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랬다. 그는 그 일로 화가 난 것이다.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문에 머리가 끼여서 버둥거렸으니. 자기자신도 스스로가 우스웠으니 그 사람이야 오죽했을까.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로 가져보는 ‘진짜’ 가족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녀의 소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산산히 부서진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약혼자는 그녀의 가족이 되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저... 죄송해요. 저 때문에 두 분이 싸우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돌아갈게요. 아직 날도 밝으니까.”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시길. 에슈비츠 양.”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했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더욱 풀이 죽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을 흘겨보았다. “너는...!” “아, 안녕히 계세요. 그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유벨은 쥬느비에브의 측은한 뒷모습을 바라 보다 에이드리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 도대체 왜 그래?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해 줄 수도 있었잖아?”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다그쳤다. “내 사생활 문제야, 이건.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나서지마! 유벨 형!”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밀쳐내고는 방을 나갔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자신에게 화가 났을 때는 꼭 형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유벨 님. 오늘도 애너벨 정원이 엉망이 되겠네요. 에이드리안 님이 화가 단단히 나셨으니.” 계속 지켜보고만 있던 미라벨이 입을 열었다. 분을 삭이고 있던 유벨은 미라벨을 향해 홱 하고 돌아섰다. “미라벨 너! 오늘 일 그 칼럼에 싣기만 해봐! 가만 안 둘거야!” 유벨이 씩씩거리며 나가자 미라벨은 한쪽 눈썹을 치켜 뜨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럴수야 없죠. 스콜라의 많은 레이디들이 저의 칼럼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답니다∼”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서도 매우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애너벨 정원은 에이드리안이 화가 났을 때는 늘 그렇듯 붉은 색 빛으로 휩싸여 있었다. 붉은 색 빛이 스칠 때마다 꽃과 풀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분수의 물도 푸석푸석 소리를 내며 증발해 갔다. 에이드리안은 분수의 대리석에 걸터 앉아 3도르째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유벨 형! 멍청한 계집애!” 에이드리안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다시 외쳤다. “빌어먹을 헤르만! 빌어먹을 에스프라드!! 젠장!” 기분이 너무 나빴다. 그런 멍청한 여자를 자신의 약혼녀로 정한 헤르만 숙부와 에스프라드가 몸서리치게 싫었고 유벨이 자신에게 대든 것도 기분이 나빴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약혼자라고 눈을 반짝이며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그 멍청한 여자가 너무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놀라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까만색 눈동자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서 더욱 기분 나빴다. 어울리지도 않는 벙벙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물에 퉁퉁 불었음이 틀림없는 구두를 신고 있던 그 여자의 모습은 무척 초라해 보였다.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자리잡은 얼굴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양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제는 왜 그렇게 얼굴이 얼룩덜룩 했지? 울었나? 아, 울었었지. 분명 머리가 문에 끼여있었을 때 그 여자는 울고 있었다. 왠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계속 레플리카를 방출했더니 왠지 모르게 피곤했다. 아니다. 그 여자 때문에 씨름해서 피곤한 것이 틀림없었다. 서서히 노을이 사라지고 밤이 되려 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벌써 어슴프레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얗군.”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달을 쳐다 보았다. 어쨌든 그 여자는 떠났다. 이제 비인 본가에 잘만 둘러대면 사건은 마무리다. 절대로 헤르만 숙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에스프라드 형이 뭐라고 하든 그 여자 탓으로 둘러대면 될 것이다. 유벨은 좀 더 두고 보며 괴롭혀야겠지. 아마 지금쯤 스스로를 몹시 자책하고 있을 테니. 유벨은 그런 사람이다. 이제 난 몹시 상처 받은 어린 양을 연기하면 되는 거다. 에이드리안은 대리석 위에서 일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주변은 큰 화재라도 난 듯 온통 그을음투성이였다. 에이드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조소를 만면에 띄웠다. “흥, 뒷정리를 하려면 유벨이 또 고생하겠군. 고생 좀 하라지.” 그렇게 말 하고 자리를 뜨려던 에이드리안에게 또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지. 상처 받은 어린 양을 연기하려면 한 번쯤은 내가 마무리를 하는게 좋을 지도.’ 에이드리안은 잠시 달을 쳐다 보다 노래하기 시작했다. ‘미히르 레세 오르비네 파르 [그대의 숨결로 나를 지켜 주소서] 미히르 레네 오르비아 소네 [그대의 숨결은 나의 숨소리로] 오르비아 소네르 에이라니 로드 [나의 숨소리는 대기로 퍼져] 라이네 미히르 미네데 [다시 그대의 품 속으로] 라이네 오르비스 비스메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리니] 오르비아 레네드 미히르 파르스 [나의 숨결로 당신을 지키리] 레테 라이네 오르비아스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레테 라이네 미히르세 [그리고 다시 그대에게로] 레테 유이르스...유이르스... [그리고 영원으로... 영원으로....]‘ 에이드리안의 노래는 빛의 파동이 되어 정원을 노란빛으로 감싸안았다. 빛이 스며들자 꽃과 풀이 스르르 본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시 피어 난 꽃과 풀 사이로 새들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분수에서는 다시 물이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흐뭇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이것으로 완벽한 마무리다. 지금쯤 그 멍청한 여자도 스콜라를 빠져 나갔을 것이다. 멍청하게 길을 헤매지만 않으면 스콜라가 아니라 수도를 빠져나갔을 시간이었다. 길을 헤매지만 않으면... ‘길을 헤맨다? 설마... 설마...!!’ 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자신의 볼을 건드리는 차가운 것을 손으로 훔쳤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미안하다. 에드. 아깐 내가 좀 흥분했었어.” “흐응...” 이미 예상하고 있던 유벨의 사과에 발코니에서 창 밖을 바라보던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창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은 뿌연 구름으로 달을 감춘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무슨 이유에선지 계속 초조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유벨. 그 여자, 지금쯤 돌아갔겠지?”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의자에 몸을 던진 유벨은 뜬금 없는 물음에 놀라며 대답했다. “그야, 내가 사택 후문까지 바래다 줬으니까. 걸어가더라도 지금쯤은 스콜라를 빠져 나가 근처 마을 여관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겠지.” 유벨은 커다란 가방을 쥐고 문을 나서던 갸냘픈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떠오르자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내 사택에서라도 재워서 보내고 싶었지만 네가 화낼 모습이 선해서 그냥 보냈다. 난 솔직히 에슈비츠 양이 마음에 들었거든. 좀 바보스럽긴 하지만 아주 착해. 에슈비츠 양은.” “유벨 형.” “응?” “그 여자를 사택 후문까지 바래다 줬다고? 혼자서 갔다는 얘기야? 그것도 걸어서?” “응.” 유벨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책을 뒤적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에게 떨어진 호통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뻐끔한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노기 띤 목소리로 유벨을 추궁했다. “지금…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걸어서 반나절을 헤매서 온 여자를 그냥 보냈다고? 마차를 태워 보내든지 적어도 사람을 딸려 보냈어야 될 거 아냐!!” “뭐, 에, 에슈비츠 양이 굳이 혼자 걸어서 간다고 해서...그게...” 유벨은 버럭 화를 내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에게 눈을 흘기며 방수용으로 제작된 외투를 찾아 문을 나섰다. 제5음(第5音) Genevieve(5) 쥬느비에브는 뺨으로 흐르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는 것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비가 흥건히 고인 땅을 피해 축축한 바닥에 가방을 내려다 놓았다. “이 가방은 방수처리가 잘 되어 있다고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으니까 괜찮겠지.” 에이드리안의 사택을 나온지 4도르가 지났지만 쥬느비에브는 숲을 벗어나질 못했다. 1도르 전에 표시를 해둔 나무를 다시 본 순간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또 다시 길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할퀸 상처가 따끔거렸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에 체온을 빼앗겨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도 포옥 젖어 얼굴에 딱 붙어버렸고 그녀의 초록색 원피스도 물을 흡수해 묵직해졌다. 구두는 이미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질퍽질퍽하고 소리가 났다. 가방 속의 외투를 꺼내 입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젖을 것이 뻔한 상황이라 관두기로 했다. 눈이 감겨 왔다.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다리도 무거웠다. 어딘가에 앉아 쉬고 싶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나가지 못하는 바보같은 자신에 쥬느비에브는 막무가내로 화가 났다. 그러다가 자신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던 에이드리안이 생각나자 쥬느비에브는 얼른 다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든 숲을 벗어나야 했다. 어두워 발 밑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서 이 곳을 벗어나야 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가방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몸서리를 쳤다. 무서웠다. 어두운 숲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쥬느비에브는 다리가 꺾여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시야가 흐릿했다. 머리 속에 무언가가 맴도는 것 같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 에이드리안은 숲을 여기저기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몰았다. 쏟아 붓는 비에 말이 움찔거리자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말을 쓰다듬었다. “쉿. 괜찮아... 괜찮아.” 비가 점점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이 여자...제대로 나간 건가?” 에이드리안은 다시 말을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 속에 내려 앉은 어둠은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어 에이드리안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쨌든 이 부근에도 없으면 무사히 나간 거겠지.” 에이드리안은 비가 스며들지 않게 특별히 만들어진 검정색 망토 끝을 여미며 말을 몰았다. 덜컥! “뭐, 뭐야?” 발에 걸린 물체에 말이 뛰어 올랐다.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당황하여 고삐를 다잡았다. “그만. 진정해, 진정.” 에이드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장애물을 치우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그가 발견한 것은 진흙이 범벅이 된 낡은 회색 가방이었다. 그 가방을 본 기억이 있는 그는 기억을 더듬다 그것이 쥬느비에브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내었다. “이 여자가 가방은 버려두고 어디 간거야?”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예상대로 검은 생머리를 풀어헤친 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는 분명히 그가 아는 한, 그의 약혼녀-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약혼녀가 될 뻔한’- 에슈비츠 양이었다. “이 봐! 괜찮아? 정신 차려!!” 에이드리안은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 여자는 왜 여기 이렇게 쓰러져있는 거야. 진흙범벅이 되어서는.’ “으응...” 쥬느비에브가 가늘게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피부가 몹시 차가웠다. 안색도 창백한 것이 에이드리안은 덜컥 겁이 났다. “이 봐! 정신들어? 응? 뭐라고?” “……” 에이드리안은 흠칫 놀라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쥬느비에브가 다시 눈을 감자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를 감쌌다. 쥬느비에브를 말 안장 위로 들어올리고 말에 오른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사택으로 힘껏 말을 몰았다. 작은 소리였지만 에이드리안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전 이제 갈 곳이 없어요...’ ******** 유벨은 초조하게 에이드리안의 응접실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뛰쳐 나간지 1도르가 넘었다. 그는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자신이 경솔했다는 결론을 내었고 쥬느비에브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유벨은 자신도 에이드리안의 뒤를 쫓아 갔어야 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 때 창 밖으로,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유벨은 한달음에 응접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유벨의 눈에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들어 왔다. 그 다음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에이드리안의 외투로 감싸인채 말 없이 안겨 있는 쥬느비에브였다. “유벨...” 에이드리안은 달려온 하녀장에게 쥬느비에브를 맡겼다. 또 다른 하녀가 달려와 마른 수건으로 에이드리안의 흠뻑 젖은 머리를 닦아 주었다.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온 에이드리안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루이즈. 하우먼 선생을 불러서 에슈비츠 양을 진찰하게 해.” 에이드리안은 하녀장을 불러 이것저것 지시사항을 일러주었다. “에드, 너부터 진찰을 받아 봐야겠어. 이렇게 다 젖어서... 에슈비츠 양은 어디서 발견한 거야?”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말했다. “동쪽 숲 속에서. 거기 에슈비츠 양의 가방이 떨어져 있을 거야. 사람을 시켜서 좀 찾아오라고 해. 난 좀 쉬어야겠어.” “알았어. 어서 올라가 봐. 여긴 나한테 맡기고.” 힘없이 2층의 침실로 올라가는 사촌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유벨은 걱정스러운 마음과 왠지 모르게 흐뭇한 마음에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마음을 살짝 엿본 것 같아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상태를 보러온 것은 새벽 2도르를 조금 넘어서였다. 조그만 등이 켜져 있는 방에는 쥬느비에브가 침대에 푹 파무쳐 자고 있었고 옆에는 비인 가의 주치의 중 한 사람인 하우먼 박사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지시가 무사히 전해졌다면 아마 쥬느비에브는 하녀들에 의해 목욕을 마쳤을 것이고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 입혀졌을 것이다. 쥬느비에브가 자고 있는 방은 손님용으로 꾸며진 방 중 하나로 본가의 일로나 할머님이 사택을 꾸미실 때 특히 신경쓰신 방 중 하나였다. 푹신푹신한 침대와 옷장, 가죽으로 된 쇼파와 튼튼하게 생긴 탁자가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은은한 무늬의 카페트가 반듯하게 깔려있었다.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에는 차를 마시기엔 그만인 조그만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일로나 할머님이 고르신 물건이니 아르헨 최고의 가구상에서 준비된 것들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항상 손님은 최상의 상태로 대접해야 한다! 그 것이 인간 관계의 첫걸음이야!’ 에이드리안은 일로나 할머님의 말씀이 생각 나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방이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그도 정말 몰랐다. “도련님. 제가 일러드린 대로 로냐[주. 아르헨의 희귀 식물. 피로 회복에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가루를 탄 뜨거운 물에 목욕은 하셨습니까?” 옆에서 하우먼은 안경을 치켜세우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하우먼 박사는 인자하지만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다분한 노인이었다. “목욕뿐만 아니라 잠도 좀 잤지요. 하우먼 선생. 그 여자는 좀 어떤가요?” 에이드리안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빼어 쥬느비에브를 살폈다.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체온을 많이 빼았겼더군요. 체온은 그럭저럭 회복 된 거 같지만...기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다른 합병증이 오기 전에 회복시켜야 할텐데...” “...기력이라고요? 그건 유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보니 유벨은 어디갔죠? 자기가 알아서 한다더니.” 에이드리안은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니 유벨의 모습은 찾을 수 가 없었다. “유벨 도련님이야 몇 시간전까지는 도련님 곁에 계셨고, 방금 전까지는 저와 같이 계셨습니다만. 아마 숲에 무언가를 찾으러 간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우먼 박사는 다시 안경을 고쳐 쓰며 이상하게 생긴 마른 풀을 사발에 담아 갈기 시작했다. “유벨 도련님은 에이드리안 도련님을 정말로 각별히 아끼시더군요. 이런 말씀 드리기도 뭐하지만 방금전에도 얼마나 호들갑을 떠시던지... 혹시 도련님이 감기라도 걸리면 절 해고해 버리시겠다고 엄포를 놓으시더군요.. 허허.” 에이드리안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사촌형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주었던 사촌형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언제나 사촌형에게 어리광을 부린다는 것을 에이드리안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유벨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자 에이드리안은 웃음이 나왔다. 그 때 방문 쪽에서 유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 여기 있었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어서 방에 들어가. 여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유벨은 땀을 닦아내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끌어당겼다. “방으로 가서 좀 더 자라구.” 에이드리안은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가장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유벨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유벨.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용서해 줄게.” 이제서야 완전히 에이드리안의 화가 풀렸다는 것을 알아챈 유벨은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가방은 찾아 놨어. 사람을 몇 사람 풀었더니 금방 찾아오더라.” “응. 그나저나 이 여자 기력이 많이 약해졌대.” “음, 그래?” “네가 나설 차례 아냐? 이 여자가 이렇게 된 데는 유벨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 보는 파란 눈동자를 보며 유벨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그에게 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었지만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냥 네가 하지 그러냐?” 유벨은 예상대로 자신을 무섭게 쳐다보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알았습니다요. 레플리카를 쓰란 말이시지요? 에.이.드.리.안.도.련.님.” 유벨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우먼 선생님. 제가 좀 보죠.” 유벨은 하우먼 박사를 제치고 쥬느비에브의 곁에 앉아 조그맣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엄마 품에 안긴 우리 아기야. 잘도 자라. 오늘도 별은 반짝이는구나....” 유벨의 부드러운 노랫소리에 약간 움찔거리던 쥬느비에브는 다시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잠에 빠졌다. “왜 치료할 때마다 항상 자장가를 부르는 거야, 너는? 왠지 징그러워.” 에이드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벨에게 물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레플리카가 부드러워지거든. 너도 해 보라구.” “별로. 자장가같은 건 부르고 싶지 않아.” 에이드리안은 눈을 내리깔고 다시 쥬느비에브를 보았다. 숨소리도 고르고 혈색도 돌아와 이제 괜찮은 것 같았다. “유벨 도련님 덕분에 이 늙은이가 할 일이 줄었습니다. 허허. 이제 나머지는 이 늙은이에게 맡기고 두 분은 가서 쉬시지요.” “부탁드립니다. 하우먼 선생님.” 유벨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에이드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그래도 너, 사실은 에슈비츠 양이 싫지 않았던 모양이지? 이렇게 비가 오는데 데리러 가다니.” 유벨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저 여자를 그대로 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얼굴을 찌푸리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유벨은 속으로 흠칫했다. 화해한지 불과 몇 시르되지도 않았는데 또 싸울 수는 없었다.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그나저나 에슈비츠 양은 어쩔 거야? 돌려보낼 거야?” 유벨은 다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픈 사람을 저대로 돌려 보낼 수는 없잖아. 우선은 놔 두고 몸이 괜찮아지면 돌려 보낼거야. 그 전에 에스프라드 형을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겠지. 헤르만 숙부는 지금 의회 기간이라 만나기 어려울 테니.” “...에스프라드...형을?” 유벨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는 에이드리안이 얼마나 에스프라드 형과의 면대를 부담스러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내리깔며 금발을 쓸어 올렸다. “...응.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유벨은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다시 밝게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힘내라! 아우야. 이 형이 뒤에 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었다. “흥, 큰 소리는.” 에이드리안은 복도의 창을 통해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이미 비는 그쳐 달이 떠 있었다. “정말 하얗군.” ********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부드러운 느낌의 그림으로 장식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쥬느비에브가 살아오면서 이런 모양의 천장을 눈에 담아 보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아담하지만 뭔가 다들 비싸보이는 가구로 들어차 있는 방은 정말로 처음 보는 장소였다. 거기다 불현듯 몸에서 목욕을 한 듯한 상쾌한 느낌이 들자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들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옷도 매끄러운 촉감의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흠. 흠. 좋은 냄새가 나네.” 쥬느비에브는 옷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을 더 맡기 위해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런데 옷이 왜 이렇게 크담?” 쥬느비에브는 커서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의 허리춤을 두 손으로 잡고 침대가로 내려왔다. 어쨌든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쥬느비에브가 엉거주춤하며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 끼익하고 문 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문소리가 난 쪽을 쳐다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에이드리안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참 신출기몰하다고 생각했다. 그 것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며 그는 왜 이곳에 온 것이며 이 곳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쥬느비에브는 왠지 그가 화가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이드리안이 문 바깥 쪽을 향해 소리쳤다. “루이즈! 루이즈!!”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허리춤을 쥐고 제대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바지 길이가 길어서 비틀비틀거렸다. 곧이어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무슨 일이신지요?” “루이즈! 저 여자가 왜 내 잠옷을 입고 있는거야?” 에이드리안이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그럼 입고 있는 이 커다란 옷이 에이드리안의 옷이란 말인가? “어제 저녁에 도련님이 아가씨의 옷을 갈아입히라고 하셔서 갈아입혀드린 것입니다만...” 루이즈라 불린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변명을 하고 있었다. 저 여자분이 옷을 갈아입힌 거라면 안심이라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왠지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왜 하필이면 내 옷을 입힌 거냐고!” 에이드리안은 불쌍한 루이즈를 계속 추궁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계속 상황을 살폈다. 루이즈라는 아주머니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처지에서 그 것은 무리였다. “집에는 도련님의 옷밖에 없는데다가 귀족 아가씨에게 하녀들의 옷을 입힐 수는 없어서...그것이... 게다가 도련님의 약혼녀이시니...” 루이즈는 말을 더듬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듯했으나 오히려 에이드리안의 화를 돋운 것 같았다. “누가 약혼녀야!”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넘기며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했다. 어제 저녁에 길을 헤매다 넘어진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내저으며 루이즈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보였다. 이제 그녀 차례였다. 에이드리안이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인채 바지 허리춤을 꽉 잡았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그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회색 머리가 문 안으로 삐죽이 보였다. “어이! 이봐! 에드! 잘 잤어?” “유벨!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장난스런 표정을 한 유벨의 등장으로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았다. 어제 그런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오늘 다들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슈비츠 양, 잠자리는 편했는지 모르겠네.” 유벨은 장난스런 웃음을 만면에 흘리며 쥬느비에브 쪽으로 걸어왔다. 쥬느비에브는 흠칫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했다. “아, 네..편하게 잘 잤어요.” “그렇겠지. 이 내가 친히 레플리카도 써줬는데 말야...” “...?” “게다가 어젯밤은 에이드리안과 단 둘이었으니...흠∼” 능글능글한 유벨의 표정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단 둘이라니? “유벨! 허튼 소리하지 마.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야?”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눈을 피하며 유벨을 다그쳤다. “네 얼굴 보러 온거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구. 에슈비츠 양이 괜찮은지 보러 온거야. 네 말대로 어제 일은 나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 너야말로 아침부터 약혼녀 얼굴을 보러 온거냐?” 평소보다 두 세배는 능글맞은 얼굴을 한 사촌형의 시치미를 뚝 뗀 말투에 에이드리안은 울컥 화가 치솟았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저 여자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뿐이야. 너야말로 아주 바쁜 몸일텐데? 오늘 아침부터 9학년생의 실습을 봐주기로 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유벨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는 급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맞다! 맞아! 고맙다. 에드! 하마터면 미라벨한테 잔소리 들을 뻔 했어. 그럼, 에슈비츠 양, 잘 있어. 에드! 너, 에슈비츠 양에게 상냥하게 대하라구.” “네 일이나 신경 써.” 한 숨을 쉬며 유벨의 뒷모습을 보던 에이드리안은 몸을 돌려 다시 쥬느비에브 쪽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왁자지껄한 소동에 정신이 없던 쥬느비에브는 다시 긴장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불쑥 나타났다 금방 사라져 버린 유벨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에이드리안이 점점 쥬느비에브 쪽으로 다가왔다. 쥬느비에브는 손바닥에서 미끈거리는 땀이 솟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 그는 또 몹시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그 때 이마 위로 시원한 것이 느껴졌다. “열은 없군.” 에이드리안은 손등으로 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손을 거뒀다. 쥬느비에브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 좋아. 하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된 다음에는 떠나줘. 그 때쯤이면 우리 약혼 문제도 해결될 거야.” 어제와는 사뭇 다른 말투에 쥬느비에브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투는 다정했다. 분명히 그랬다. “해결이라니...” “에스프라드 형을 만나서 우리 약혼의 무효 승인을 받아내겠단 말이야.” “아, 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약혼 무효라는 말이 왠지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에이드리안은 뒤늦게 그녀를 찬찬히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자신의 잠옷을 입고 있는 쥬느비에브는 왠지 바보같았지만 밝은 햇빛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사실 예뻤다. 통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귀엽게 생겼다’의 경우가 그녀의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릴 그는 아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녀가 안스럽기도 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이 이야기하는 바를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그는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저, 어제 제가 숲에서 넘어진 것 같은데 그 뒤로 기억이 안나요. 혹시 음... 비인 님이 구해주신 건가요?” 하루 사이에 바뀐 명칭을 들으며 에이드리안은 이상하게 씁쓸함을 느꼈다. “신경쓰지마. 별 거 아니니까. 지금 상황에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쪽에서 책임을 덮어써야 하니까.” 에이드리안은 멋쩍은 듯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 고맙습니다! 그저께 구해주셨을 때도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음, 사실은 저 알고 있었어요. 좀 심술궂기는 하지만 아주 친절하신 분이란 걸요.” 방실방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당황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택 후문에서의 사건‘이 기억나려고 했다. 게다가 원치 않은 칭찬에 조금 겸연쩍기도 했다. “저기, 음, 제가 계속 이 방을 써도 되나요?” “물론이야. 여긴 손님방이니까.” “이렇게 좋은 방이 손님방이라구요?” 쥬느비에브는 정말 놀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있을게요. 될 수 있으면 방 밖으로는 나가지 않도록 하구요, 또...음...” “나가고 싶을 때는 나가도 돼. 단 루이즈나 다른 하녀들을 데리고 다녀. 또 길을 헤매지 말고.” “네에-! 역시 당신은 정말 친절하세요!” 쥬느비에브는 왠지 기뻐서 자신이 바지 허리를 잡고 있다는 것도 잊어 버리고 손뼉을 쳤다. 에이드리안은 미처 그녀를 보고 웃어주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흘러내리는 바지를 보고 말았다. “뭐, 뭐야. 너!” 에이드리안이 재빨리 손을 뻣어 바지를 잡아 아슬아슬한 순간은 모면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포옹을 하는 듯한 아주 묘한 포즈가 되고 말았다. “음.. 저기 허리가 커서 그게...” 쥬느비에브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다시 바지 허리를 다잡았다. “저기, 놔주세요. 바지.” “흠.” 헛기침을 하며 쥬느비에브에게서 떨어진 에이드리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쉬어. 난 나가봐야 해. 저녁쯤에야 들어올 거야.” 계속 옷을 추스르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번쩍들고는 방긋 웃으며 한쪽 손까지 흔들며 말했다. “네! 다녀오세요!! 아참, 지나가는 마차 조심하시구요!” 뭔가 이상한 느낌의 인사를 받자 에이드리안은 기분이 묘해졌다. 어찌되었든 다시 씩씩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안도하며 에이드리안은 방문을 나섰다. 제6음(第6音) Genevieve(6) “미라벨, 부탁이야.” 한가로운 봄기운을 받으며 미라벨은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아침 일찍 학생회실에 들린 미라벨은 왠일인지 그녀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서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역시 에이드리안은 가차없이 그녀에게 빛의 공격을 날렸다. 미라벨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미라벨은 수비를 하기 위해 에이드리안에게서 힘겹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 자석과 철이 끌리듯 다시 에이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마는 그녀였다.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보고 그런 일을 하라니...” “미라벨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알잖아, 미라벨.” 시원한 푸른 눈동자를 밝히며 빛의 미소를 뿌려대는 그에게 미라벨은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래, 이 분이야말로 빛의 레플리카의 계승자! 이 분을 거역할 순 없어. 그래도!‘ “그래도!! 에이드리안 님. 저보고 그 여자의 옷을 사 오라니. 제가 에이드리안 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면서! 흑!” 미라벨은 꽃무늬 손수건을 꺼내 촉촉해진 눈가를 닦았다. “미라벨, 네 마음 다 알아.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 여자는 계속 내 옷을 입어야 하는 걸. 그건 미라벨도 싫지? 게다가 미라벨도 봤잖아. 그 여자 옷을. 난 그런 옷을 입은 여자가 내 집을 돌아 다니는 걸 상상만 해도....” 힘없는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의 에이드리안을 보고 미라벨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거, 걱정마세요! 에이드리안 님! 제가 일을 처리하겠어요. 에이드리안 님의 이런 창백한 표정을 보면 전 정말 마음이 찢어진답니다. 흑.” 다시 손수건을 눈 가에 가져다 대며 미라벨이 말했다. “그럼 오전 중으로 부탁해. 응? 역시 미라벨이 곁에 있어서 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미소에 미라벨은 그만 기절할 듯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붉은 색 치마와 다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미라벨이 회의실을 나가자 에이드리안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휴-, 한 건 해결.” 곁에서 미라벨과 에이드리안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지켜 보고 있던 유벨이 입을 열었다. “정말 존경스럽다니까. 미라벨을 그렇게 쉽게 구워 삶는 걸 보면 네 그 가증스런 연기가 정말로 생활의 지혜인 듯한 착각이 든다.” “흥,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여자 옷을 사러 갔다가는 미라벨부터 시작해서 스콜라 전체가 들썩 거릴 텐데.” 에이드리안은 하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아는구나. 너의 아름다운 추종자들이 그런 대형 사건에 가만 있을리가 없지. 전에도 할머님 스카프를 고르러 갔다가 난리가 났었잖아. 그나저나 미라벨도 참 어지간하다. 네 원래 성격을 알면서도 네 미소 한 방에 넉다운이 되니.” 유벨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미라벨이... 에슈비츠 양이 네 사택에 있다는 사실에 아무말 안해?”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 책장으로 가 책을 꺼내 뒤적거리며 유벨의 물음에 답했다. “당장 내쫓았다가는 정의로운 엘크로이츠의 모토가 흐려질 거라고 했지. 미라벨, 좋아하잖아. ‘정의의 엘크로이츠’! 아, 그리고 유벨 네가 당분간 내 사택에 지내는 조건부를 붙이더군.” 에이드리안의 말에 유벨이 주먹을 불끈 쥐며 미라벨의 흉내를 내자 에이드리안은 쿡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가여운 사촌을 위해서 그 정도야 못하겠냐만. 미라벨이 들어오겠다고는 안 해?” “쿡, 미라벨이 다른 레이디들의 보복이 두려워 그것만은 못 하겠대.” “과연.” 유벨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들고 있던 서류철 사이의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와의 약속에 대한 메모였다. 유벨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에스프라드 형과...저녁에 약속잡아 놨어. 갈꺼지?” “아…물론.” 책장을 덮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다시 유벨은 약속 장소와 시간이 적힌 종이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도 에스프라드를 진심으로 혐오했다. 그를 만나는 것이 에이드리안에게 그 무엇보다 고역이라는 것을 유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이 아직도 에이드리안을 좀 먹고 있다는 것이 유벨은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 학생회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사택에 들어서면서 무언가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녀들과 걱정스러운 표정의 집사를 보니 그의 짐작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톨레, 무슨 일이야?” 에이드리안은 집사에게 겉옷을 벗어 주며 상황을 물었다. “저어, 그것이...아가씨께서...” 그의 우직한 집사를 낯을 바꾸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여자가? 왜, 무슨 일이야?” 에이드리안은 집사의 난처한 표정을 보며 2층으로 달려갔다. 뭔가 일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묵고 있는 2층의 침실에는 하녀들이 왔다갔다하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방으로 들어오자 하녀들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길을 터 주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들을 지나쳐 쥬느비에브의 침대에 쳐져 있는 휘장을 걷어냈다. 쥬느비에브의 상태는 심각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고 끙끙거리며 신음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아침에는 괜찮은 거 같았는데...상태가 나빠진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에이드리안은 역정을 내며 하녀장을 찾았다. “루이즈! 이게 어떻게 된거야?” 에이드리안의 부름에 달려온 하녀장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이... 점심 무렵에 아가씨가 없어지셔서...그것이... 서재에 쓰러져 계셨는데.... 이 상태로...” 하녀장의 머뭇거리는 대답에 답답해진 에이드리안은 소리를 질렀다. “정확하게 말해봐!” “정확하게 말하면 이 아가씨는 지금 몹시 술에 취한 상태지요. 허허.” 어느 새 들어온 하우먼 박사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 제가 처방한 특제 드링크를 마시면 이 정도의 숙취야 금방 날라가 버릴테지만요, 허허.” “뭐? 술이라고? 숙취?” 에이드리안은 어리둥절하여 다시 쥬느비에브의 안색을 살폈다. 그랬다. 술을 너무 마셔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쥬느비에브의 숨결에서 간간히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술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서재에 있던 150년을 숙성시켰다는 체리주를 혼자서 한 병 다 마신 모양이더군요. 그러니 이렇게 취할 수 밖에 없지요. 허허.” 계속해서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대는 하우먼 박사가 신경에 거슬린 에이드리안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 특제 드링큰지 뭔지나 빨리 만들어요. 하우먼 선생.” “허허, 그러지요.” 하우먼 선생은 유쾌하게 웃더니 가방에서 낑낑거리며 사발을 꺼냈다. “루이즈, 저 여자가 일어나면 나한테로 보내.” 에이드리안은 일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듯 하녀장에게 매서운 눈길을 보내며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 “다 마셨군.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서재에 들어 와 사실 확인을 한 에이드리안은 텅빈 유리병을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여자가... 아프다면서 술은 또 왜 마신거야?’ 한 때 잠시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프란체스 형이 아-주 기뻐하겠군. 3년만에 다 마신 셈이니...’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형인 프란체스에게서 받은 그 체리주를 서재에 있는 장식장에 보관하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어쩌다 그의 사택을 방문하면 늘 그 체리주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는 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 그가 자주 애용하는 긴 쇼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하여튼 다들 잔소리꾼이라니까.” 쇼파에 누워있자 잠이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에이드리안은 저녁에 에스프라드와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생각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벌컥! 거의 깊은 잠에 빠지는 순간, 갑자기 들려온 거친 문소리에 에이드리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발그레한 얼굴의 쥬느비에브가 잠옷을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서 있었다. “저 부르셨어요?” 갑작스레 잠에서 깬 에이드리안은 매우 기분이 나빴다. 그러다 쥬느비에브가 입고 있는 잠옷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와 에이드리안은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레이스와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핑크빛 잠옷은 미라벨의 취향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썩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미라벨식’ 잠옷을 입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왠지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는 까만 생머리를 땋아서 어깨로 내리고 있는 모습이 어릴 때 유모가 보여 주었던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역시 프릴의 여왕이로군. 미라벨.’ 다시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신히 참은 채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술을 마셨다지?” 에이드리안의 조용한 추궁에 쥬느비에브는 움찔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말이죠.... 너무 심심해서 책을 보려고 여기에 왔었는데... 음... 맛있게 보이는 색깔의 주스가 있지 뭐예요? 빨간 색깔이 뭐랄까...음... 체리 사탕 색깔! 맞아요. 체리 사탕 색깔의 주스였어요. 하여튼 너무 맛있게 보여서... 그래서 조금만 마시려고 했는데... 음... 너무 맛있어서 그만 다 마셔 버렸던 것 같아요... 음... 저는 정.말.로. 술인지는 몰랐답니다.” ‘정말로’를 강조하며 쥬느비에브는 어설픈 변명을 둘러댔다. ‘아앗. 또 화 났나 봐.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계속 사고만 치니.’ 쥬느비에브는 다시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잠옷을 베베 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화가 나기 보다는 우습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너 그거 얼마짜린 줄이나 알아? 네가 마신 그 술이 얼마짜린지 아냐고.” “어, 얼마짜린대요?” 잔뜩 심각한 표정의 에이드리안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침을 삼키면서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피해 안 끼치고 있겠노라고 바로 아침에 약속했는데 자기가 마신 술이 엄청 비싼 거라면 그녀는 벌써 엄청난 피해를 끼친 셈이었다. “아-주 비싸.” 쥬느비에브는 그녀가 기대했던 정확한 대답이 아니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얼마짜리냐고요.” “모르지. 선물 받은 거니까.” 장난스레 에이드리안은 딴청을 피우며 대답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에요? 자기도 모르면서.” 쥬느비에브는 잔뜩 눈을 치켜 세우고 화가 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양 손을 주먹 져 허리에 갖다 댔다. “아, 글쎄. 왜 물어봤을까.”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자못 궁금하다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저 갈래요. 아직도 머리가 울렁거리는데.” 쥬느비에브는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뒤돌아 섰다. “아, 그래. 참, 나 지금 화 많이 났다는 것만 알아둬.” 에이드리안이 아까까지의 목소리와는 확연하게 냉랭한 목소리를 내자 쥬느비에브는 다시 뒤를 홱 하고 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골똘히 책상 위의 책을 들어 보고 있었다. ‘아-앗.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쥬느비에브는 멍한 머리를 양 손으로 잡고 2층으로 뛰어 올라 갔다. 제7음(第7音) Genevieve(7) 스산한 밤이었다. 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걸려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말 없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막상 만남을 주선하기는 했지만 유벨은 뒤늦게 너무나 후회하고 있는 자신을 알았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육중한 오페라 하우스의 문 앞에 서자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 멈춰 서게 했다. “에드, 정말 너 혼자서 괜찮겠어? 에스프라드 형이 무슨 짓이라도 하면...” “걱정하지마, 유벨. 네가 따라온 걸 알 텐데 설마...” 에이드리안은 웃으면서 군청색 외투의 옷길을 여몄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웃고 있지만 초조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괜찮다니까.” 에이드리안의 유벨의 걱정어린 표정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옷깃을 여몄다. 왠지 추웠다. 그는 봄바람이 이렇게 싸늘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유벨은 바람도 불지 않는 맑은 밤하늘을 보라보다 계속 옷깃을 여미는 에이드리안을 안스럽게 바라보았다. 분명히 마음 속으로는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 틀림없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오페라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서는 1년에 몇 번씩 학생들의 주도하에 오페라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것을 위해 세워진 이 건물은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과 육중한 중압감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은 조그맣게 한 숨을 쉬고 오페라 하우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다녀 올게. 유벨.” “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소리라도 지르라구.” 에이드리안은 자신보다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촌형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하고 소리가 났다. 어두운 복도는 커다란 유리창 너머에서 비쳐오는 달빛으로 겨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에이드리안은 목이 탔다. 주먹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알아챈 그는 손을 펴서 잠시 바라 보았다. ‘역시... 긴장하고 있는건가?’ 자조적인 웃음을 띈채 에이드리안은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오페라하우스 전체에 18좌석밖에 없는 특별석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주저하다 문을 열었다. 끼익 하고 듣기 싫은 금속음이 들렸다. 문을 지나 검은 휘장을 걷어낸 에이드리안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결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에스프라드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조금 늦었구나. 에이드리안.”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죄송합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에스프라드의 좌석 바로 옆의 좌석에 자리잡았다. “나의 사랑스런 사촌 동생이 날 보자고 하다니, 이거 대단한 영광인데?”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제 약혼 문제,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이런.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런 건가? 쿡쿡.” 듣기 싫은 웃음 소리에 에이드리안은 귀를 막고 싶었다. “쿡, 천한 평민 계집애로 정혼 상대가 정해졌다지? 아버님이 어지간히 네가 싫으셨나 봐.” 에스프라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또 다시 불필요한 희생자를 만들 생각이십니까?” “불필요한 희생자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설마 미레이유를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런거야?” “미레이유...그녀에 이어 이번엔 그 여자인가요? 그런 건가요!!”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프라드를 노려 보았다. “……”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름끼치는 순간이었다. “에이드리안...네가 천한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여자를 내쫓았다고 하더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구나? 그렇지? 사실은 두려웠던 거지? 또 미레이유처럼 될까봐. 그 애처럼 말이야. 크큭. 아하하하하-” 오페라 하우스에 울려퍼지는 웃음소리에 에이드리안은 소름이 돋았다. “아버님은 널 결혼시켜 본가에서 내쫓을 생각이신 거 같더군. 뭐, 3년 전에 널 쫓아낼 절호의 기회를, 그 인정 많으신 일로나 할머님 덕분에 놓치셨으니 오죽 안타까우셨을까. 크큭. 설마 할머님이 널 양자로 들이실 거라고는 나도 생각 못했지만. 흠- 아버님께는 좀 미안하지만 난 널 계속 본가에 놔 두고 싶어. 약혼 건은 아버님께 부탁을 해 보지.” 에스프라드는 자리에 일어서면서 옆에 벗어 두었던 외투를 손에 들었다. “아 참, 미레이유가 널 보고 싶어 하더군. 우린 서로 통하는 데가 있거든. 뭐니뭐니 해도 ‘남매’니까 말이야. 후후후.”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얼굴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에이드리안. 내 사랑스런 사촌동생. 넌 결코 행복해져서는 안 돼. 미레이유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안 그래? 아하하하하-” 에스프라드는 새하얗게 질린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문을 나섰다. 에이드리안은 계속해서 떨리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속에서 역겨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 유벨은 초조하게 에이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오페라 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유벨은 한 달음에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문을 통해 나온 것은 그가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 아니라 혐오해 마지 않는 검은 머리의 사촌 형이었다. “이런, 여전히 정성이군.” 감정 없는 에스프라드의 얼굴을 보자 유벨은 욕지기가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어떻게 했어?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지?” “이런, 이런. 유벨. 나도 너만큼 그 애를 좋아해. 이상한 짓 같은 거... 할리가 없잖아. 게다가 바람의 레플리카를 소유한 네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겠어?” “잘도 그런 소리를!” 에스프라드의 비웃는 듯한 웃음에 유벨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우선 급한 것은 그의 사촌 동생이었기에 에스프라드를 제치고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 유벨은 어두운 복도 끝에서 구역질을 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발견했다. “에드! 괜찮아?” “유벨...” 에이드리안은 힘 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창 밖으로 비치는 달빛 때문에 그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보였다. “너 그 자식이 뭐라고 한거지! 그렇지?” “아니야, 아니야... 그가 약혼 문제는 해결해 주기로 했어.”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일어선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냥 조금.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유벨은 비틀거리는 에이드리안을 부축하면서 에스프라드에게 치미는 분을 삭였다. 에이드리안은 창 밖으로 비치는 달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하얗게 빛나고 있어서 정말 추워 보여...정말...” ******** 쥬느비에브는 달빛을 받으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어디론가 나가버렸는지 통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늦은 오후에 어이없는 에이드리안과의 면대를 끝내고 풍성하게 준비된 저녁을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목욕도 했다. 하늘하늘한 핑크색 원피스도 입었다. 여기서는 다들 상냥하게 대해주어서 그녀는 참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알록달록한 원피스들과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잠옷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그렇게 보드라운 촉감의 옷은 처음 입어보았다. 침대는 너무 푹신푹신해서 자다가 꺼지지 않을까하고 염려가 되었지만 의외로 무척 튼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물론 에이드리안의 이상한 태도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는 화를 내다가 상냥하게 대해주다가 장난스레 그녀를 놀리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도 그녀는 그가 좋았다. 섬세하게 조각한 듯한 그의 아름다운 얼굴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가 좋았다. 그것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던 서늘한 손등의 감촉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몸도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맛있는 식사와 상쾌한 목욕 덕에 오히려 더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풀이 듬성하게 솟아있는 땅바닥을 보며 걷고 있던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잎새를 하나 발견했다. “어머! 이건 레네 잎이잖아!! 우-와! 소원 빌어야지.” 그녀는 디올레 마을의 레나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두 손으로 잎새를 잡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가족을 한 명만 만들어 주세요! 바쁘시지 않으면 두 명도 괜찮아요. 이왕이면... 에이드리안님같은 분이 좋겠어요! 집은 당연히 부록으로 주시겠죠? 그리고 좀 한가하시면 잃어버린 제 가방도 찾아 주시면 아-주 고맙겠어요.” 쥬느비에브는 겨우 소원을 다 빌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 이루어져라- 다- 이루어져버려라- 내 소원들아-” 쥬느비에브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쿡.“ 별안간 들린 웃음 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멍하게 시선을 멈추었다. “에이드리안 님!” 쥬느비에브는 나무에 기대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발견했다. “쿡쿡쿡. 넌 정말 소박하구나. 겨우 소원이 그 정도야?” “그 정도라뇨! 저한테는 대단한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발끈해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면서도 왠지 창백해 보이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걱정된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아냐, 아냐. 그래, 대단한 소원이군.” 에이드리안은 계속해서 웃으며 정원에 마련되어 있던 하얀색의 긴 의자에 걸터 앉았다. “가족이라면 에슈비츠 일가가 있을 텐데, 새삼스레 무슨?” 에이드리안의 자신의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음...진짜 가족이 아니니까요.”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까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에이드리안이 가리킨 쪽에 앉았다. “진짜 가족?” “네. 매일매일 같이 식사하는 ‘진짜 가족’이요. 혼자 식사하는 거 너무 싫거든요. 진짜 가족이라면 매일매일 같이 앉아서 식사할텐데...에슈비츠의 사람들과는 같이 식사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양부는 절 싫어하시거든요.” 그렇게 대답하는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너무 쓸쓸해 보여 에이드리안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음, 저기... 저 처음 봤을 때 놀라셨죠? 아주 흉칙한 모습을 보여드렸는데...” “아? 아아...사실 좀....음...” “그게 그렇게 됐네요...헤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흘렸다. 꼭 사과하고 싶었던 일을 언급하고 나자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아참, 소원 비실래요? 레네 잎사귀를 두 손으로 이렇게 들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요.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어요.“ 열심히 손 동작을 하며 설명하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는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띄웠다. “소원이라? 무슨 소원을 빌지?” “소원 없어요? 부자가 되게 해달라든가. 예뻐지게 해달라고 하든지...아니면 저처럼 가족을 달라고 하던가.” 소원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 미안하지만 난 지금도 충분히 부자인데다가 얼굴에 대해서는 별 다른 생각이 없고 가족이라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 할 정도니 어떻게 하지?” “...진짜 가족이 그렇게 많아요?” 쥬느비에브는 부럽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미소를 흘리며 밤하늘을 쳐다 보았다. “네가 말하는 ‘진짜 가족’은 몇 안 된지만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아주 많지. 지겨울 정도로.” “흐음-그럼 행복하게 해달라고 비세요.” “행복?” 쥬느비에브에게로 시선을 돌린 에이드리안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스프라드의 독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넌 결코 행복해져서는 안 돼. 미레이유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안 그래?']] “그건...” “음, 하긴 행복이란 건 스스로가 꽉 잡아야지 의미가 있대요. 다른 사람이 줄 수 있는 행복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고 어렸을 때 유모가 그랬어요. 뭐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잡는 것?” “네. 그러고 보니 이 레나 잎사귀는 제가 한 번 써 먹었기 때문에 별로 신통치 않을 거에요. 다른 잎사귀는 없나?” 에이드리안은 손 안에 놓인 잎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스스로가 잡는 행복...그럴 자격따위 내게 있을 리가 없잖아.’ 쥬느비에브는 두리번 거리며 바닥을 훑어보고 있었다. “우와- 이건 레나 나무잖아-!” 쥬느비에브는 정원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것 보세요! 레나 나무에요! 잎사귀가 이렇게 많아요!” 쥬느비에브는 쪼르르 달려와 에이드리안의 손 안으로 한움큼의 잎사귀를 내려 놓았다. “이 걸로 소원을 215개는 빌 수 있겠어요! 그러고도 나뭇잎이 저렇게 많이 달려 있으니 에이드리-음...비인 님은 아마 평생 소원을 다 빌어도 되겠는걸요. 와아-에이드리-으음, 비인 님은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레나 잎을 손으로 퍼올리며 함박 웃음을 짓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어느새 말없이 미소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음- 톨레 아저씨랑 루이즈 아주머니에게도 하나씩 드려야 겠어요. 음... 어디 보자....” 방긋방긋 웃으며 잎사귀를 모으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멈칫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잊고 싶었던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조용히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저...이제 돌아가야 겠죠?” “아아-. 아마. 돌아갈 곳은...있어?” 에이드리안은 그 때까지 미처 생각지 못한 질문에 답을 망설였다. “무, 물론이에요. 물론...이죠... 훗. 뭐 괜찮아요. 여기 있는 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따뜻한 물에 헤엄도 쳐 봤고 예쁜 옷도 많이 입어 봤으니까...” 말 끝을 흐리며 쥬느비에브는 뒤돌아 서서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냥 여기 있게 해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밤하늘을 쳐다 보며 말을 삼켰다. 에이드리안은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뒷모습에 가슴을 탁 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밤 하늘을 쳐다 보았다. 까만 밤하늘을 별과 달이 경쟁하며 빛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소원, 내가 다 이루어줄 수 있는데... 그럼 나한테 뭘 줄거야?” 난데 없는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쥬느비에브는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며 뒤돌아섰다. “에?” “가방은 찾아 놨고, 가족과 집은...”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금발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결혼할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결국 손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떠뜨려냈다. 그녀는 눈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쏟아질 수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흐, 흐엉, 흐어어어어엉...” 울음을 터뜨리는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가 가만히 안으며 에이드리안은 다시 물었다. “뭘 줄건데?” “흐엉...흐엉....해, 행복하게 해 줄게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품에 안긴 쥬느비에브를 더욱 감싸 안으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은은하게 하늘을 비추고 있는 달을 바라 보며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주...아주 따뜻해...” ******** “뭐라고?” 다음날 아침, 유벨은 뜬금없는 에이드리안의 선언에 그의 진의를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물론 당분간은 약혼 상태로 있게 되겠지만.” 에이드리안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그의 물음을 되받았다. 유벨은 그의 말에 결국 폭발해 버렸다. “야 이 자식아! 그럴거면 어제 그 자식은 왜 찾아간거야? 이미 약혼도 파기되었을 텐데! 괜실히 고생만 한 거잖아!” “뭐, 그렇게 됐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며 유벨은 한숨을 쉬었다. “사랑의 힘이냐,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거냐.”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손으로 행복을 잡아 보려고.” “해앵복?” 에이드리안은 다시 찻잔을 기울이며 유벨을 흘끗 쳐다보았다. 유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미라벨은 어쩌려고. 수습은 해 놓았겠지?” “쿨럭.” 에이드리안은 기침을 해대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유벨, 알아서 처리해 줄거지? 난 형밖에 없어. 그거 알지?” 에이드리안의 예의 불쌍한 어린 양의 연기에 유벨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그 표정 좀 집어 치워! 그런 건 미라벨 한테나 써 먹으라고!” 유벨은 괜히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뭐, 네가 좋다면 나도 좋지만...정말 괜찮은 거지?” “아아... 그래..”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며 유벨은 마음 속으로 쥬느비에브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약혼을 축하해, 에이드리안.” ******** 저녁 무렵 유벨과 함께 집에 들어선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혀 코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게 뭐야?” “헤헤헤. 왔어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향해 달려왔다. 집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시커먼 구정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고 구정물에 푹 잠긴 걸레-에이드리안은 아마도 걸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물을 듬뿍 먹어 질퍽질퍽해 보였다. 게다가 쥬느비에브의 모습은 에이드리안의 이성을 단번에 날려 버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얼굴에는 여기 저기 시커먼 것이 묻어 있었고, 풀어 헤친 머리 카락도 반쯤 젖어서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서 찾아 입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빨간 색 물이 든 빛바랜 회색 원피스도 시커먼 물이 배여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너 그 꼴이 도대체 뭐야? 이 건 또 뭐냐구!” “에헤헤...그게 저 가방이....” 쥬느비에브는 구정물에 반쯤 젖은 회색 원피스를 꾹 짜며 웃음을 흘렸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다 기가 막혀 고개를 돌려 버린 에이드리안은 한 숨을 쉬며 손수건을 꺼내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야- 이 거 다 치우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옆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하게 서 있던 유벨이 입을 열었다. “유벨, 그 거 밟지 말고 조심해서 들어와. 루이즈! 루이즈, 어디 있어? 톨레!” 에이드리안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하녀장과 집사를 불렀다. 그 사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걸레더미’에 다가갔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걸레’를 손으로 들어올리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고함에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덕분에 회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은 부지런히 주변의 구정물을 흡수해 갔다. “음... 그게 저... 옷을 건지려고...헤에-” “옷!? 무슨 옷? 거기서 빨리 일어서기나 해!”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의 유벨을 곁눈질 하며 에이드리안은 다시 소리질렀다. “내 옷이요....여기 젖어서....” 에이드리안은 말을 흐리며 이상하게 자신의 눈치를 보는 쥬느비에브를 뒤로 하고 달려 온 집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톨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집사는 곁에 서 있는 하녀장과 난처한 눈짓을 주고 받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1도르전쯤 아가씨께서 가방을 찾으셔서 저는 그것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뒤를 이어 하녀장이 말했다. “그런데 가방에서 옷가지를 꺼내 들고 힘차게 달려 내려 오던 아가씨가... 제가 청소를 하느라 계단 위에 놓아둔 걸레 빤 구정물 통을 그만 정면으로 들이 받으셨지요.” 집사와 하녀장은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다시 그의 품위있는 정신 세계는 위협받고 있었다. 구정물...통이라고?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이 공허해지는 기분이었다. “...구정물 통을 들이 받았다고? 그럼 저기 널려 있는 걸레, 아니... 하여튼 저게 옷이라고?”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닦아 준 손수건을 살펴 보았다. 시커먼 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구정물을 뒤집어 쓴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며 자신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열은 없었다. 확실히 제정신이었다. “유벨, 나 그냥 약혼 관둘래. 저런 여자랑 평생을 살라니...도저히 못해. 그냥... 없었던 일로 하는게 좋겠어.” 목에 걸려 넘어 가지 않는 말을 겨우 다 내뱉고 에이드리안은 비틀거리며 침실로 통하는 계단을 디뎠다. 뒤에서 쑥쓰럽다며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와 뭘 이정도에 부끄러워 하냐고 격려 아닌 격려를 하고 있는 유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그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할 뿐이었다. 제8음(第8音) 스콜라에서의 첫 날 아득히 먼날, 동방과 서방에 이미 제국이 세워졌을 때 대륙의 중앙에 아르헨이라는 넓디 넓은 거칠고 척박한 땅이 있었다. ‘거칠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의 아르헨은 이름 그대로 강한 바람과 뜨거운 햇살, 흙이 섞인 더러운 물, 초목이 살지 못하는 불모의 땅으로 어떤 사람도 그 곳에서 살기를 꺼려했다. 그런 이유로 그 곳은 동방 제국에도, 서방 제국에도 속하지 않는 버려진 땅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헨에 아이슬로데 라데나 로르 비인이라는 아름다운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하자 척박한 땅 위로 풀과 나무가 솟아올랐고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르헨은 아름다운 초목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동방과 서방 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아르헨으로 찾아 왔다. 그 중에는 권력 다툼에 밀려 도망나온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의 황녀와 황자도 있었다. 아이슬로데의 아름다운 능력에 반한 다섯 명의 황녀와 황자는 아이슬로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충성의 대가로 그들도 그 힘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 힘을 ‘레플리카’라 불렀다. 노래는 그들의 힘이 되었다. 아르헨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풍요로운 대지와 상냥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모여 아르헨은 낙원과 같은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낙원을 탐낸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이 아르헨으로 쳐들어 왔다. 대량의 살상 무기와 많은 병사들이 아르헨으로 몰려 왔다. 아이슬로데와 다섯 명의 황자와 황녀들은 자신들의 아르헨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무기도 병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노래는 대기로 퍼져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병기들도 노랫소리에 산산조각나 버렸다. 결국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은 아르헨을 차지 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만을 입은 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이 후 몇 번의 침략을 막아낸 아르헨은 대륙에서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강대국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몇 세대를 거치면서 아르헨은 가문 중심의 귀족 사회가 되었다. 아이슬로데의 비인 가가 특수 귀족 가문이 되었고 다섯명의 황자와 황녀가 이룬 가문이 5대 대귀족 가문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 두각을 드러낸 많은 가문들이 대귀족과 소귀족을 이루게 되었다. 귀족들은 연합을 이루어 <아르헨 귀족 연합 평의회>를 열었고 그 최고 정점인 평의회장을 비인 가에서 선출했다. 아르헨을 지탱해 온 신비한 능력인 레플리카는 이후 아르헨에만 전승이 되었는데 대부분 귀족 가문의 일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승 자체는 무작위적이어서 귀족이지만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고 평민 중에서도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비인 가는 건국자인 아이슬로데의 가문답게 특이한 레플리카가 전승되었는데 대(大)속성 레플리카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인 가에서도 무작위적으로 전승되는 광(光), 암(暗), 수(水), 풍(風), 지(地), 화(火)의 6가지의 레플리카는 일반적인 무속성 레플리카보다 월등한 능력을 나타내었고 때문에 비인 가는 모든 귀족 가문 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평의회장을 비인가에서 선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레플리카의 학습과 원활한 사용을 위해 평의회 주제로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가 세워졌다. 이후 스콜라는 아르헨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일종의 정치 집단으로서 스콜라 내의 학생회가 운영되었는데 학생회는 대속성 레플리카의 계승자를 필두로 한 집단으로서 차기 평의회장 후보들이 미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건국 이후 400여년이 지난 지금,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는 광(光)속성 레플리카의 소유자인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 이끄는 학생회 <엘크로이츠>와 수(水)속성 레플리카의 소유자인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이 이끄는 <라데팡스>간의 차기 정권을 둘러싼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에이드리안은 다리 사이로 이불을 돌돌 말며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시원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촤악! 눈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느껴지자 에이드리안은 눈을 찡그리며 이불을 둘둘 감은 채 돌아 누웠다.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으음..” 에이드리안은 누가 커텐을 걷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베개를 끌어 당겨 볼을 부벼댔다. 나른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때,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던 에이드리안의 귀에 뭔가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요... 으러 가요...” 에이드리안은 몸을 뒤척이며 이불 가장자리를 당겨 귀를 막았다. “에이드리안! 밥 먹으러 가요!!” 가늘게 뜬 눈으로 쥬느비에브의 화 난 얼굴이 보였다. “으음...나...원래...아침은...안...먹으니까...혼자서...혼자서 먹어.” 에이드리안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 자신이 정확하게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채 웅얼거렸다. “아직 화난 거에요? 우리 어제 저녁에 화해했잖아요∼ 에이드리안, 밥 먹으러 가요∼네에?” 쥬느비에브가 계속 칭얼댔다. “밥 먹으러 가자니까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아 낑낑거리며 끌어 당겼다. “정말! 안 먹는다니까!!” 짜증스런 얼굴로 벌떡 일어선 에이드리안은 다시 휘청거리며 침대에 고꾸라졌다. 저절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지금 깨어났다가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자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것만이 유일한 생의 욕구였다. 에이드리안은 눈꺼풀을 무겁게 닫으며 중얼거렸다. “안 먹어...안 먹는다니까...자게..내버려 둬...” 쥬느비에브는 발끈 화가 나서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진짜 가족이 되어 준다면서요!! 어서 밥 먹으러 가요!!” 결국 쥬느비에브의 반강제적인 연행으로 에이드리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차마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은 채 쥬느비에브의 손에 끌려가는 잠옷 차림의 에이드리안을 보고, 지나가던 하녀들이 쿡쿡하고 웃어댔다. 50여명이 앉아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대형 식당에는 이미 두 사람 몫의 음식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붉은 색의 마알간 파밀주[주. 식사 하기전에 미리 마시는 음료수의 일종]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양고기, 초록색과 붉은 색, 노란 빛깔의 채소로 버무려진 새콤한 샐러드, 위에 살짝 캬라멜 가루가 뿌려져 있는 달걀 푸딩 그리고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빵과 달콤한 과일쨈 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음식이 식욕을 붇돋았다. “와아-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자리에 앉히고 서둘러 자신도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아아- 행복해-” 과일 푸딩을 한 입 입에 넣고 쥬느비에브는 환희의 탄성을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앉은 채 계속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포크가 자꾸 미끄러졌다. 쥬느비에브는 그 모습에 발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이드리안! 밥 먹어요!” 포크를 다시 손에 쥐어 주며 쥬느비에브는 소리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손에 포크를 쥔 채 여전히 졸고 있었다. “아가씨, 도련님은 아침에 잘 못 일어 나세요. 저혈압이시랍니다. 덕분에 아침은 거의 거르시는 편이에요.” 미소를 띄며 다가온 하녀장 루이즈가 쥬느비에브의 넵킨을 정리 해주며 말했다. “그치만...그치만... 같이 밥 먹어준다고 하구선...” 울먹이던 쥬느비에브는 눈을 부릅뜨더니 스푼으로 푸딩을 듬뿍 담아 졸고있는 에이드리안의 입 속으로 들이밀었다. 옆에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녀장의 모습이 보였다. “뭐, 뭐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에이드리안이 소리를 질렀다. “밥 먹으라구요. 그렇게 아침을 굶으니까 그 때처럼 기절하는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눈을 내리깔며 다시 조신하게 스푼으로 푸딩을 떴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이야!!” 새침떼며 식사를 하는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속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때 기절한 건 널 보고 놀라서야!’ 라고 쏘아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 참았다. 에이드리안은 웃음을 감추며 식당을 나가는 하녀장을 매서운 눈으로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 가서 잘 거야.” 쥬느비에브는 넵킨으로 입을 닦으며 의자에서 일어서는 에이드리안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잡아 세웠다.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요! 진짜 가족이 되어 준다고 했으면서!” 쥬느비에브의 책망하는 눈빛을 본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거만하게 눈을 내려깔고 말했다. “너, 너무 무례해. 난 누구에게도 나에 대한 무례한 언행은 용납하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는 격식을 차려줘. 그리고 어제도 말했지만 난 네가 좋아서 약혼한 게 아니야. 어쩌다 보니, 상황에 따르다 보니 이렇게 된 것 뿐이야. 주변에 널린 게 아름답고 기품있는 레이딘데 너같이 이상한 여자랑 약혼하다니 그 때 내가 뭐에 씌인게 틀림없어. 생각 같아서는 당장 파혼이라도 하고 싶다 이 말씀이야. 다시 말해 난 네가 아주아주 싫. 어. 싫다구. 알겠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빈정거리는 말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포크로 동글동글한 고기말이를 쿡 하고 찍었다. 입 안으로 고기말이를 던져넣고 쥬느비에브는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고기말이를 꿀꺽 넘긴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눈웃음을 흘렸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찌푸리며 쥬느비에브의 반응을 기다렸다.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이 세상에서 약속을 안 지키는 인간이 제일 몹쓸 사람이래요. 몹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생긴 나쁜 괴물이 잡아간대요. 무섭죠? 가족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죠? 나는 절대 안 물릴테니까 약속 꼭 지켜주세요. 아니면 괴물한테 잡혀갈지 몰라요.”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힌 듯 멍하니 천장을 쳐다 보았다. 이미 괴물에게 잡힌 기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였다. 포크로 하얀 소스로 양념이 된 면발을 뱅글뱅글 돌리던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그런데 나 정말 싫어요? 많이 싫어요?” 에이드리안은 침을 삼키면서 자신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뭔가 멋쩍은 기분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바싹 익힌 콩요리에 포크를 가져가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몰라! 그런 거 묻지마!” “에이드리안, 우리 약혼 했으니까 서로 좋아하도록 열심히 노력해 봐요. 난 벌써 에이드리안이 아주 좋아졌으니까 에이드리안만 날 좋아해 주면 되요. 가족은 원래 서로 아껴주고 소중하게 여겨주는 거에요.” 해맑게 웃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포크를 내려 놓았다. 갑자기 시비 걸 의욕이 사라졌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한숨을 쉬고 이번에는 다른 일을 꼬투리 잡아 아침 잠에서 깬 화풀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쥬느비에브에게 시비 거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는 것을 깨달은 에이드리안이었다. “하여튼 앞으로 좀 조심하면서 다녀! 그런 더러운 구정물이나 뒤집어 쓰고 다니지 말고. 레이디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 쥬느비에브는 샐러드를 뜨려고 들었던 포크를 내려 놓고 이마를 찡그리며 변명했다. “그건 어제 다 끝난 일인데 새삼스레 또 이야기 하는거에요? 말했잖아요. 가방 안에 옷들이 다 젖어서... 루이즈 아주머니께 세탁을 부탁하려고 내려가다가 그만 그렇게 됐다고. 어제 일은 단순한 사고였다고요. 사고.” “아, 그러셔?” 에이드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음식을 집기 좋게 잠옷 소매 자락을 걷었다. “그런데 넌 왜 다 큰 여자애가 함부로 남자 침실을 드나드는 거야? 보통 레이디라면 꿈도 못 꿀 일이라고!” “그거야 약속도 안 지키는 누구누구때문이죠.” 쥬느비에브는 계속 음식을 입에 가져 가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실룩이며 비아냥거렸다. “아∼그러셔?” 에이드리안은 물이 담긴 잔을 입 가로 가져가며 쥬느비에브를 살폈다. 하얀 블라우스와 까만색 치마를 받쳐 입은 그녀는 하얀색 머리띠로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었다. 물론 블라우스와 치마에는 프릴과 레이스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많이 달려 있었다. ‘후- 옷이나 새로 사 줘야 겠군.’ 에이드리안은 아침부터 일어나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못내 한심했다. 그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체념한 듯 샐러드 쪽으로 포크를 가져갔다. ******** “나, 오늘 스콜라에 가는 첫 날이에요.” 방실방실 웃으며 쥬느비에브는 거울을 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옆을 맴돌며 기대에 부푼 듯이 말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여느 때보다 여유롭게 셔츠 소매의 단추를 잠그며 에이드리안은 말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체 했다. “나, 길 몰라요. 데려다 주세요. 오늘 수업 첫 날이라구요.” “수업?” 하얀색 실크 스카프를 두르며 에이드리안은 계속 모른 체 반문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환심을 사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이리 줘 보세요. 제가 매 드릴게요. ....그러니까....첫 날이니까 지각같은거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단 말씀이에요.” 에이드리안의 스카프를 매 주며 쥬느비에브는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바빠서 안 돼. 유벨에게 얘기 해 놓을테니까 늦지 말고 알아서가.” “흐응...”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쥬느비에브를 뒤로 한 채 에이드리안은 집을 나섰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쥬느비에브를 생각하니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스콜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생길 귀찮은 일들-레이디들의 아우성을 비롯하여-을 생각하면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귀찮은 일은 항상 유벨에게 맡기는 그였기에 이번에도 쥬느비에브를 유벨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침실에 걸려 있는 커다란 거울을 보며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었다. 자신도 다른 레이디처럼 화사한 금발의 블론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까만 직모는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화려하기는커녕 너무 수수하다 못해 칙칙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비쳐졌다. 그녀가 보아온 다른 아름다운 레이디들은 왠지 모르게 화사하고 화려해 보였다. 당당함이 넘치는 그녀들이 부러웠다. 평민 출신의 굴레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당당함은 갖추고 싶었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생긋 웃었다. ‘뭐 이정도면 준수한 편이지.’ 가슴을 탕탕 치며 기분 좋게 자기 합리화를 한 쥬느비에브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톨레 아저씨! 저 가요!!” 희끗희끗한 머리의 집사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하면서 쥬느비에브는 계속 달렸다. “루이즈 아주머니! 다녀올게요!!” 그녀에게 부드럽게 웃어주는 집사와 하녀장이 그녀는 참 좋았다. 자신에게 더 없이 친절했던 디올레 마을의 레나 아주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쥬느비에브는 현관문을 기세좋게 열어 젖혔다. 문 앞에는 유벨이 기다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검은 색 스커트를 휘날리며 유벨에게로 달려갔다. 유벨은 짙은 녹색 빛이 나는 바지와 조끼를 입고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은 오늘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자신을 생글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쥬느비에브에게 허리를 약간 굽혀 인사를 한 유벨은 싱글거리며 말을 건넸다. “이런, 나의 외모에 반하셨나? 에슈비츠 양.” “그렇게 안 봤는데 병이 있군요, 왕자병이라고...한 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불운의 질병이라고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유벨의 능청스런 말에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봄볕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사택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숲으로부터 새 지저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푸른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려 바스락바스락 하는 소리를 냈다. 향기로운 나무 향을 들이쉬며 유벨이 말했다. “오늘이 첫 날이라지?” “네. 열심히 하고 싶어요. 실수하지 않아야 할텐데. 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사실 많이 걱정되요. 수업은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유벨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수업이라고? 흐음... 우리 스콜라에서는 일반 교육기관에서 행하는 수업은 찾아 보기 힘들어. 하지만 너처럼 기초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이론 공부가 선행되어야 할텐데...곤란하군.” 유벨의 난처한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호기심이 일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에요?” 유벨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 당분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건 힘들거든. 특히나 여자들하고.” 쥬느비에브는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왜요? 여자들...그러니까 레이디들하고 있으면 왜 안 되는건데요?” "에이드리안은 있지, 저렇게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레이디들에게 아주...아-주 인기가 많거든. 그 녀석, 겉에서 보기에는 우아함, 그 자체 아니겠어? 그 중에는 열혈 레이디들도 많아서 사실 에드와 약혼한 네가 떡 하니 스콜라에 나타나면...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 거다.“ 유벨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음...에이드리안의 성격이 이상한 건 맞아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비췄다. “음? 그러면...전 어디서 공부하는 거에요? 선생님은요? 아, 그리고 저 몇 학년이에요? 반도 있어요?” “아-, 아직 학년 배정은 어려워. 네 실력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본 다음 학년 배정 테스트가 이루어 질거야. 편입은 좀 까다롭거든.” “그럼 선생님은요?” “흠흠흠. 내가 누구냐! <엘크로이츠>의 부회장 아니겠어? 내 사촌 동생의 약혼녀를 위한 최고의 선생을 수배해 놨지. 넌 그 선생에게서 개인교습을 받는 거야. 개인 교습.”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랑스레 말하는 유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쥬느비에브는 계속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부회장? 유벨 님이 부회장이라고요? 더 높은 회장도 있다는 거잖아요. 별 거 아니네. 부회장같은 걸로 으시대다니, 회장이 알면 웃겠어요.” “별 거 아니라니. 엘크로이츠는 스콜라 학생의 반을 멤버로 하는 거대 조직이라구. 그 안에서 부회장이라면 엄청난 직책이라구!” 유벨은 이마를 찡그리며 반론을 펼쳤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궁금한 듯 물었다. “흠...그럼 회장이 누군데요?”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 네 약혼자야. 네 약혼자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하. 그 거대 조직이 뭐하는 곳인지 알겠어요. 다도회같은 거죠? 에이드리안은 시간만 있으면 차를 마시거든요. 역시 회장은 다르다니까요.” 쥬느비에브의 심각한 대답에 유벨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이보시게, 아가씨. 엘크로이츠는 다도회가 아니라 스콜라의 학생회라네. 뭐 학생회가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그딴 건 알 거 없고...” 다시 어깨를 으쓱하던 유벨은 눈 앞에 보이는 뾰족한 첨탑이 특징적인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야! 저 건물 4층에서 네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음?” 까치발을 하며 건물을 보던 쥬느비에브는 유벨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냥 4층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어디에 붙어 있는 방인지 얘길 해 줘야죠.” 유벨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4층 전체가 하나의 방이니까 헤맬 염려는 안 해도 돼. 어서 가봐.” “에헤...” 쥬느비에브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더니 걸음을 옮겼다. “아참, 유벨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우리 이제 한 가족이잖아요.” 생긋 웃는 쥬느비에브에게 유벨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나도 여동생이 생긴 거 같아 기뻐. 쥬느비에브라고 불러도 되지?” 유벨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뛰어가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쥬느비에브, 에드를 행복하게 해줘. 부디...” ******** 타앙!! 총소리가 숲 전체로 흩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총에 탄약을 끼워 넣으며 나무에 새겨져 있는 목표물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 보았다. 은빛의 총은 약 20오토[주. 아르헨의 길이 단위. 1오토는 약 1cm.]정도되는 비교적 긴 총신에 음각으로 비인가의 문장과 함께 화려한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타앙!! 바람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휘날렸다. 에이드리안은 정확하게 중앙을 꿰뚫린 목표물을 확인하고 긴장을 풀며 숨을 내쉬었다. “후우-” 에이드리안은 총을 허리춤에 걸려 있는 끈으로 매듭을 지어 고정시키면서 아침에 만난 유벨과의 일을 생각했다. [[“...그래서 부탁할게. 알아서 잘 좀 처리해 줘.” “아하... 약혼녀의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나를 찾아오다니... 평상시대로라면 우리의 비인 군은 아직 숙면 중일텐데...” 유벨은 손으로 입 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훔쳐내며 비아냥거렸다. “아침부터 깨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거야!” 에이드리안은 괜히 화를 내며 멋쩍은 심정을 감췄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에슈비츠 양, 레플리카에 대한 기본적인 것도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금발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러니 문제지. 지금 상황으로 바로 스콜라에 내놓을 수도 없고. 뭐 괜찮은 선생 없을까?” 유벨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었다. “걱정마시라, 아우여!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선생이 있지. 오늘 아침에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서신이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이 건내 준 하얀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케이로프가!?” 에이드리안은 놀란 눈으로 유벨을 쳐다 보았다. “흠...그래. 에르슈바이크 본가에 간다고 나간지 어언 4개월. 그 동안 연락두절 되었던 우리의 케이로프 군이 돌아온다는군. 그것도 오늘.” 에이드리안은 이마에 손을 짚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하...케이로프가 선생이라?”]] 회상을 끝낸 에이드리안은 간간히 바람이 부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고생하겠군. 그 여자.” ******** 쥬느비에브는 놀랐다. 4층 복도에는 정말로 문이 하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엄청난 크기의 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다듬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잘 해야해! 실수하면 안 돼!” 열심히 해서 에이드리안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이 칭찬해주는 상상을 하자 쥬느비에브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껏 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거, 이거 왜 안 열리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며칠 전의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라 인상이 구겨졌다. “서, 설마... 이 문도 그 문 같지는 않겠지?” 쥬느비에브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그러나 역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음...그 때 에이드리안이 한 거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야하나?” 쥬느비에브는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내며 침을 삼켰다. “해, 해보는 수 밖에 없어!” 쥬느비에브는 숨을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끅. 콜록, 콜록.” 결국 목에 숨이 걸려 실패로 끝나자 쥬느비에브는 화가 났다. “야! 열리란 말이야, 열려!” 발로 문을 차대며 소리를 쳤지만 여전히 문은 열릴 생각을 안 했다. 결국 쥬느비에브는 다시 숨을 가다듬고 방금 전 실패로 끝난 시도를 다시 해 보기로 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런 소음으로 백날 노래를 해 봤자 열릴 리가 없습니다. 그 문에 스며있는 레플리카도 그 정도의 소음이라면 견디지 못합니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결을 한 딱딱한 표정의 소년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소년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색 조끼와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년을 발견한 순간, 쥬느비에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저기, 이 문 열 줄 아세요? 부탁인데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벌써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첫 수업부터 지각이라니....흑.”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닦아내며 붉은 색 머리의 소년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 보던 소년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열려라.” 무미건조한 톤의 목소리에 신기하게도 문이 열렸다. “음... 이거 암호인가요? 열려라고 하면 열리는 문이에요?” 쥬느비에브는 너무 쉽게 열린 문을 허망하게 바라 보며 소년에게 물었다. “바보같군요. 이 문은 레플리카에 반응하는 문입니다. 그냥 열려라고 백날 소리쳐 보십시오. 열리는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붉은 머리 소년은 그 말을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또 문이 닫혀 머리가 끼일세라 잽싸게 그 뒤를 따랐다. “음, 당신도 학생인가 보죠? 음... 유벨 오빠가 개인 교습이라고 해서 혼자 공부하는 건 줄 알았더니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혼자 공부하는 건 좀 쑥쓰럽거든요.”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한 채 소년이 입을 열었다.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라고 합니다. 에르슈바이크 공작의 셋째 아들로써 현재 후계자 수업 중이며 스콜라 12학년생이고, 엘크로이츠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긴급하게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군으로부터 당신을 가르치도록 지명되었습니다. 오늘부터 교육이 시작되며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은 오늘부터 저의 학생이 됩니다.” 쥬느비에브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목소리 톤조차 일정하게 유지하며 말을 하는 붉은 머리 소년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이 무표정한 소년이 선생님이라니! 그녀는 좀 더 나이 많은, 머리가 히끗히끗한 그런 선생님을 상상했었다! “그럼, 오늘의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충격어린 정신이 깨어나기도 전에 수업은 시작되었다. 무표정하게 서서 이야기하는 케이로프에게 쥬느비에브가 얼른 손을 번쩍 들어 물었다. “저, 저기 이 넓은 데서 계속 우리 두 사람만 있는 건가요? 빈 공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케이로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 곳은 레플리카를 흡수하도록 특수하게 제작된 제 전용 연습실입니다. 5대귀족의 후계자와 비인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이런 연습실이 주어집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에게도 곧 따로 연습실이 주어질 것입니다. 공간이 좁으면 대량의 레플리카를 방출했을 때 벽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일정 수치 이상의 레플리카를 방출하면 이 방의 벽도 견디지 못 합니다만, 대(大)속성 레플리카의 소유자인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경우, 이 곳보다 세 배 이상 더 큰 연습실이 있습니다. 이 장소는 비교적 좁은 곳이지요.” 쥬느비에브는 뭔가 당연한 것을 물어 본 것 같아 겸연쩍었다. “그, 그렇군요.” “그럼,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항상 풀네임으로 부르는 케이로프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쥬느비에브는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열심히 할게요!” 케이로프는 창 가로 가 하늘을 쳐다 보며 물었다. “레플리카가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음... 노래를 하면 문이 열리기도 하고, 시들었던 꽃이 다시 피기도 하고... 음... 물건을 들어올릴 수도 있고... 또... 음... 잘 모르겠는데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거리며 케이로프가 말해줄 정답을 기다렸다. “바보같은 대답입니다. 레플리카란 영혼의 선율을 뜻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입니까! 아-영혼의 선율! 아주 옛날, 이 대륙에 평화가 사라진 그 날! 하늘에서 음악의 뮤즈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일로세나기에 다로미나세트!! 그 거룩한 이름을 가진 음악의 신이 우리 아르헨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양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웠고 축복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대지와 바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리의 축복받은 존재,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 ******** 몇 도르(주. 참조)째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에 쥬느비에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고저차가 전혀 없는 목소리 때문에 제대로 내용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로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알아들으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케이로프의 질문에 쥬느비에브는 움찔거렸다. “죄, 죄송해요...좀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레플리카란 영혼의 선율을 뜻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입니까! 아-영혼의 선율! 아주 옛날, 이 대륙에 평화가 사라진 그 날! 하늘에서 음악의 뮤즈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그 거룩한 이름을 가진 음악의 신이 우리 아르헨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웠고 축복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대지와 바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리의 축복받은 존재,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또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에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았다. 달이 뜨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험난한 고난과 끈기 있는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로서는 그러한 배움의 길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멍하게 머리 속을 비우며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를 끔뻑거리며 쳐다 보았다. 이제 이야기의 2막이 오르고 있었다. ******** “그쯤 해 두는게 어때? 케이로프.”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무미건조한 설교 아닌 설교에 반쯤 졸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귀에 시원스러운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밤 하늘에 달에 뜬지 3도르가 지난 후였다. 쥬느비에브는 반가운 마음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케이로프가 웃고 있었다. 자신과 만난 뒤로 한 번도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은 ‘무표정’ 케이로프가 활짝 웃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케이로프는 반가운 듯 달려가 에이드리안의 손을 두 손으로 덥썩 잡았다.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 오늘 아침 돌아왔습니다.” 에이드리안은 케이로프에게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왔어. 케이로프.” “어-이, 이 봐. 에이드리안만 눈에 들어오고 난 안 보이나 보지?” 유벨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케이로프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인사를 했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오랜 만이야.”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고 쥬느비에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 고생이 많았어.” 쥬느비에브는 실제로 고생이 많았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고생했죠.” “케이로프! 제발 그 엉뚱한 소리 하는 버릇 좀 못 고치겠냐? 서방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건지는 몰라도 듣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그래. 쥬느비에브, 오늘 뭘 배웠어?” 팔짱을 끼며 묻는 유벨에게 쥬느비에브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오늘...그러니까 이 방의 벽이 특별하게 제작되었다는 거랑....레플리카의 정의 정도?” “레플리카의 정의?” 유벨의 되물음에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눈치를 살폈다. “음...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그게....일로세..뭐 어쩌구하는 사람이..그게.... 헤헤.” 결국 머리를 긁으며 말을 흐린 쥬느비에브를 케이로프는 무서운 눈으로 바라 봤다. “일로세 뭐 어쩌구가 아닙니다.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그 거룩한 이름을...” “그만해, 케이로프.” 곤란하다는 듯한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케이로프는 얼른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 사이에 잽싸게 유벨이 말했다. “에슈비츠 양, 일로세 뭐 어쩌구하는 그거, 다 거짓말이야.” “에에?” 쥬느비에브는 놀라 눈을 멀뚱거렸다. “이 녀석 버릇이야. 헛소리하는 거. 그러니까 이 녀석 말은 잘 가려서 들어야 하지. 뭐 레플리카 실력은 발군이다만.” 유벨은 케이로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그게 무슨 실례의 말인가.” 케이로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유벨을 나무랐다. “그만, 그만. 케이로프, 늦었으니까 이만 나갈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뒤 따라 나가는 케이로프를 보고 쥬느비에브는 유벨에게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저 사람은 왜 에이드리안 말은 저렇게 잘 듣는거죠? 에이드리안 앞에서만 웃어요, 저 사람.”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케이로프는 미라벨의 강력한 라이벌이야. 에이드리안을 사이에 둔.” ******** 유벨과 케이로프를 각각의 사택으로 보낸 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관목숲 사이에 나 있는 자갈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가운데 달이 은은하게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공기 속에 촉촉한 나뭇잎의 향기와 꽃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흙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바람도 시원하게 부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음... 저... 그 케이로프란 분 밑에서 정말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요?” 망설이며 묻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야. 그 녀석, 이상한 버릇이 있긴 하지만...뭐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고 할까? 하여튼 그런 거만 빼면 좋은 선생이야. 레플리카도 뛰어 나고.” “그치만 그 사람은 목소리에 톤이 없다니까요. 그래서야 어디 제대로 노래나 하겠어요?” 뚱한 표정의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아냐. 그 녀석이 좋아하는 음이 그런 것 뿐이야. 마음이 안정된다는군. 저음을 사용하면.” 쥬느비에브는 발 밑에 걸려든 돌멩이를 차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흠... 근데 왜 에이드리안에게는 존대를 하면서 유벨 오빠한테는 막 대하는 거죠? 에이드리안이 더 나이가 적잖아요.” “그거야 케이로프와 유벨은 같은 나이인걸.”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에이드리안에게 눈을 흘기며 쥬느비에브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왜 나이가 적은 에이드리안에게는 존대를 하냐구요. 에이드리안은 유벨 오빠에게도 막 대하잖아요.” 에이드리안은 멈추어 서서 자신을 추궁하는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도 멈춰 서서 질세라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다소 화가 난 것 같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나 모른 척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에이드리안의 시선에 받아쳤다. 팔짱을 낀채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윗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너에게도 얘기한 것 같은데? 나한테 무례하게 구는 건 용서 못한다고. 나에게 그런 말투, 쓰지마. 듣기 싫어.”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쥬느비에브의 행동에 에이드리안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쥬느비에브를 바라 보았다. 자신의 말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자신에 대한 순종만을 보아온 그였다. 에이드리안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무슨 뜻이야?” 쥬느비에브는 흘끗 에이드리안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슬그머니 에이드리안처럼 팔짱을 꼈다. “내가 에이드리안에게 어떤 말투를 쓰던 내 마음이에요. 난 앞으로도 에이드리안에게 묻고 싶은 거 묻고 하고 싶은 말 다 할거에요. 난 에이드리안의 가족이라고요. 가족은 조금 무례해도 상관없는 거에요.” 에이드리안은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말 없이 뒤돌아 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쥬느비에브는 얼른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에이드리안이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지 마! 나, 너 싫어!!” 쥬느비에브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에이드리안의 옆에 딱 붙어 섰다. 그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따라가고 싶어서 가는게 아니에요. 이 쪽으로 가야지 집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나는 에이드리안이 좋으니까 괜찮아요. 에이드리안도 앞으로 날 좋아하도록 노력하면 되잖아요. 아직까지는 싫어해도 괜찮아요. 레나 아주머니도 결혼이라는 건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는 거기 때문에 처음에는 싫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하셨어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커다란 검은 눈망울을 바라보다 체념한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가 발랄한 걸음으로 따라오며 에이드리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흐음...하여튼... 그나저나 레플리카가 뭔지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노래를 하면 문이 열리기도 하고, 시들었던 꽃이 다시 피기도 하고 물건을 들어올릴 수도 있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바보같은 대답이라고 하던 걸요.” 쥬느비에브의 단순한 생각에 에이드리안은 웃음을 흘렸다. “쿡. 너답게 단순한 대답이다만 틀리지는 않아. 그 녀석 말대로 레플리카는 영혼의 선율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레플리카란 건 말야. 자신의 ‘바람’을 공기 속에 녹여보내는 거야. 그리고 그 것을 ‘선율’이 중재해 준다고 할까? 간절한 ‘바람’을 선율에 실어 보내는 거야. 선율은 자연으로 흩어지지.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이 레플리카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멈춰 서서 나무 둥치 밑에 봉오리를 맺은 노란 꽃을 가리켰다. “이를 테면, 이 꽃봉오리를 피어나게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노래 속에 녹이는 거지.” 에이드리안은 무릎을 굽혀 꽃봉오리를 향해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꽃봉오리는 마법에 걸린 듯 봉오리를 터뜨려 내며 꽃잎을 활짝 펼쳐냈다. “와! 와아! 대단해요. 대단해! 아름다워!”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쳐대며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이 활짝 피어난 꽃을 바라봤다. “레플리카란 거 대단한 거 같아요! 이렇게 신기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니! 와아-! 레플리카란 거, 정말로 축복받은 능력이에요.” 즐거워 보이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일순 슬픈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레플리카는... 자신을 죽이는 저주스러운 힘...이기도 하지.” ******** 다음날. 여전히 케이로프의 연습실에서 쥬느비에브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레플리카의 정의를 이제는 확실히 숙지하셨습니까? 저는 쥬느비에브 엘모르 에슈비츠 양이 어제,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앞에서 보이신 멍청함은 사양합니다.” 딱딱한 표정, 여전히 고저차가 없는 목소리로 케이로프가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레플리카란 것은 자신의 ‘바람‘을 선율에 실어 보내는 것이에요, 선율은 자연으로 흩어져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줍니다.” “정답입니다.” 쥬느비에브의 대답에 케이로프는 무표정한 얼굴을 지우고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자신에게 보내는 케이로프의 시원한 웃음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같이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이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선생님이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레플리카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귀족이 구사하는 레플리카는 무(無)속성으로서 현재 비인 가문에 6가지의 대(大)속성 레플리카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대속성 레플리카는 무속성 레플리카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가지며 광, 암, 수, 풍, 지, 화 중 광속성과 암속성은 보다 상위 랭크를 지니게 됩니다. ……대속성 레플리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그 분의 축복 어린 능력인 것입니다! ………” ‘잘 나가다가 왜 또 저 일로세...뭔지 하는 이야기를....’ 또 다시 난데 없이 등장한 ‘하늘의 뮤즈’에 대한 이야기로 쥬느비에브는 방금전의 친숙했던 감정은 단발에 날라가 버리고 머리만 아파왔다. 가슴은 불안감으로 콩닥콩닥 했다. ‘오늘도...일찍 들어가기는 틀렸네.’ 오늘도 역시 하늘에는 달이 뜨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폭 쉬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제9음(第9音) 미라벨 양의 어느 하루 싱그러운 공기가 매우 차갑게 느껴지는 어느 날, 미라벨은 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자신의 사택을 나섰다. 컬이 풀리지 않게 고정하여 묶은 자신의 다홍색 머리를 다시 손으로 정리하고 밝은 연두색의 치마 주름을 손으로 탁탁 털어내며 미라벨은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 님, 보고 싶습니다.” 미라벨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손에 든 가방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들었다. 빨간 색 천으로 표지를 감싼 수첩에는 부드러운 필기체로 <미라벨 양의 관찰 수첩>이라고 쓰여있었고 밑부분에 조그맣게 <엘크로이츠>의 금장 무늬가 새겨져있었다. 미라벨은 노란색 종이로 표시가 되어있는 페이지를 재빨리 넘겼다. 페이지 맨 윗부분에는 <에이드리안 님의 today 스케줄> 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어디 보자. 오전 11도르. 미에라 호수 산책. 오호, 그렇군요! 오늘은 미에라 호수로군요!” 미라벨은 수첩을 탁 하고 덮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그 분을 만나는 거야. 기다리세요. 에이드리안 님.” 연두색의 치마자락의 가장자리를 한 손으로 잡고 미라벨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 미라벨이 미에라 호수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도르 50시르 경이었다. 미라벨은 호숫가의 우거진 숲 속에, 정확히 말하자면 두 뼘 정도되는 폭을 가진 길쭉한 나무 뒤에 숨어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하얀 블라우스의 주름을 펴고 겉에 걸친 짙은 녹색 재킷의 모양새를 가다듬었다. 끝으로 연두색 치마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내고 미라벨은 만족한 웃음을 띄었다. 미라벨의 옷은 모두 아르헨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 중 한 곳인 <헤스티스>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헤스티스>는 주 고객인 미라벨의 취향을 항상 만족시켜 왔다. 물론 지금 입고 있는 프릴과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밝은 연두빛의 스커트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햇볕도 별로 강하지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피크닉 가기에는 그만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정말 시원했다. 나무 사이로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수의 물에 햇볕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한, 그리고 고풍스러운 나의 모습을 보여야 해. 에이드리안 님도 나의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 언젠가는 마음을 돌리실거야. 아니지. 지금도 에이드리안 님은 나를 좋아하시는 걸? 언제나 그렇게 나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시니. 그나저나 햇볕에 그을면 안 되는데, 조금 걱정이 되네, 조금이라도 더 그늘로 숨어들어가야겠어.“ 기분이 좋아진 미라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늘을 탐색하느라 에이드리안이 호숫가로 걸어오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순간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발견하자 당황하여 더욱 몸을 움츠리며 나무 뒤에 숨었다. ‘어, 어서 나가야 되는데. 그래. 우, 우연히 나도 산책을 하러 나왔다고 말하는 거야. 우연히.’ 에이드리안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채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자신의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매우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단순함 속에서 귀족적 우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연한 베이지색 바지와 하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금발로 인해 무난한 느낌이라고는 사실 말하기 어려웠다. 살짝살짝 날리는 부드러운 금발에 미라벨은 감격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잽싸게 수첩을 꺼내어 분홍색 종이로 표시된 부분을 펼쳐내어 메모를 남겼다. 소제목은 ‘에이드리안 님의 모든 것’ 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며 반짝이는 금발.’] 미라벨은 수첩을 넣고 다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 지금이야.’ 미라벨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발을 내밀었다. 그 때였다. 그 보기싫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에-이-드-리-안-!” 목소리도 우렁차게 달려온 그녀는 자칭-‘타칭’이라고는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미라벨이었다- 에이드리안의 약혼녀, 쥬느비에브 양이었다. 나갈 기회를 놓친 미라벨은 아랫 입술을 깨물고 쥬느비에브를 관찰하며 다시 수첩을 꺼내어 검은색 종이로 표시된 페이지에 메모를 휘갈겼다. 부제는 ‘그 여자, 쥬느비에브’였다. [‘중요한 때면 꼭 어디선가 나타나, 나와 에이드리안 님의 사이를 방해하는 그녀. 아∼ 정말 싫다.’] 에이드리안이 귀찮은 표정-아마도 그런 표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으로 쥬느비에브를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깡총깡총 거리는 걸음걸이로 에이드리안 곁에 섰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미라벨은 몸을 낮춘 채 좀 더 대화를 잘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빠르게 이동했다. “...정말 나빠요.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그 여자가 따지는 투로 소리쳤다. 어딜 감히! 나의 에이드리안 님에게 저런 말투를! 미라벨은 손수건을 꺼내 물어뜯으며 분을 삭였다. 에이드리안이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역시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 않았다.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무어라고 말하면서 호숫가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가 어디까지 걸어가는 거야?’ 미라벨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가 호수에 빠지고 만 것이다! 에이드리안이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아, 아니! 에이드리안 님!!” 미라벨은 당혹스러워 숲을 헤치고 호숫가로 달려갔다. 미라벨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에이드리안이 그 여자를 호숫가로 끌어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쥬느비에브는 홀딱 젖은 채로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에이드리안 님께 큰 폐를 끼쳤잖아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에요, 당신은!!” “어? 미라벨,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신을 보고 놀란 듯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미라벨은 갑자기 밀려오는 열로 얼굴이 새빨게졌다. ‘미행을 하고 있었다고는 절-대 말 못해.’ “오호호.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답니다. 오호호호호.” 바닥에 주저 앉아 머리카락의 물을 짜내며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미라벨은 다시 얼굴이 후끈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 배고파요.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어요.” “방금 아침 먹었잖아! 또 뭘 먹는다는 거야!” 자신을 무시한 채 에이드리안에게 말을 건네는 쥬느비에브에게 그가 화를 내자 미라벨은 왠지 멍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소외된 미라벨은 티격태격 말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에이드리안이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왠지 마음이 아파오는 까닭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가슴을 스치는 한 조각의 감정을 묻어버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찰싹 때린 미라벨은 다시 두 사람을 관찰했다. 물에 젖은 생쥐 같은 모습의 쥬느비에브와는 달리 에이드리안은 너무나 아름다워 황홀한 지경이었다. 촉촉한 금발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과 투명하게 비치는 하얀 셔츠는 왠지 모르게 뇌살적이었다. 미라벨은 뒤돌아서 얼른 수첩을 꺼냈다. [‘물에 젖어 촉촉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아∼ 아름다운 그 자태여.’] 메모를 마친 미라벨은 다시 뒤돌아서 살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에이드리안 님. 오늘 학생회 업무 보셔야죠? 같이 가실까요?” 에이드리안은 잠시 뚱한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쳐다 보다 미안한 얼굴로 미라벨에게 말했다. “미안해. 미라벨. 먼저 가. 난 집에 들렀다 갈테니까. 야! 너 빨리 일어서!...그럼, 학생회실에서 봐.” 에이드리안은 미라벨에게 살짝 웃어주고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 끌었다. 쥬느비에브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뭐, 뭐 저런 여자가!!” 미라벨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한 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아침부터 열을 올린 탓인지 점심 식사를 하고 난 이후에도 미라벨은 안정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을 따르는 여러 레이디들과 본관에 위치한 학생회실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미라벨은 다시 수첩을 꺼냈다. “오후 2도르. 유벨 님과의 단독 면대. 장소는 유벨 님의 연습실.” 미라벨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자신의 뒤를 쫓아오던 레이디들에게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 저는 이만 선약이 있어 가 보겠습니다. 오늘 오후의 실습은 아무래도 참관할 수가 없을 듯하니 다음 시간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미라벨 님.” 멀어져 가는 레이디들의 뒷모습을 보고 미라벨은 유벨의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유벨의 연습실은 본관에서 약 500레트(주. 참조) 정도 떨어져 있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물에 있었다. 미라벨은 레플리카를 사용하여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벨의 연습실은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의 연습실 다음으로 큰 규모의 연습실이었다. 방음처리가 잘 되어 있고 레플리카를 흡수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사방의 벽에 장치되어 있었다. 유벨은 파장 연습을 하고 있었다. 보다 많은 음(音)을 마스터해야 여러 가지 파장을 낼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보다 다양한 용도로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미라벨은 유벨의 고음(高音)에 언제나 그렇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벌써 저런 고음을 마스터하다니. 역시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야.’ 미라벨은 얼굴에 드러난 놀라움을 감추고 유벨을 불렀다. “유벨 님.” 미라벨의 부름에 유벨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역시 칼 같군. 딱 2도르야. 미라벨.” 유벨은 웃으며 미라벨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연습실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쇼파를 가리켰다. 미라벨은 천천히 걸어가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제게 면대를 요청하시다니. 에이드리안 님께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요?” 유벨은 미라벨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으며 테이블 위의 날씬하게 생긴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라주었다. 그리고 찻잔을 미라벨에게 내밀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아니고 네게 문제가 있지.” 찻잔을 들던 미라벨은 당황한 기색으로 찻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말했다. “제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전 언제나 에이드리안 님과 우리 엘크로이츠의 번영을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유벨은 다시 싱긋 웃으며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미라벨을 보았다. “에이드리안의 약혼 이후, 아-주 침울하다는 거 알고 있어. 에이드리안이 걱정하고 있다고.” 의자에 앉은 미라벨은 고개를 홱 돌린채 거만하고 퉁명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흥. 그건 지금 스콜라의 모든 레이디들이 마찬가지일걸요? 에이드리안님이 그런 여자와 약혼을 한 순간 스콜라의 레이디들은 하나같이 낙심한 상태입니다. 하필이면 그런 멍-청하고도 우아함이라고는 털끗만큼도 없는 여자와 약혼을 하시다니. 도대체 에이드리안 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벨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하는 미라벨을 보고 잠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쥬느비에브가 다소 그런 점이 없진 않지만... 내가 보기엔 에이드리안에게는 좋은 치료약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너, 나 그리고 케이로프까지. 우리 서로 약속했잖아? 에이드리안을 지켜주기로. 이 것도 그 방법 중의 하나라고 난 생각해. 그러니까 미라벨, 그렇게 침울해 있지 말라구. 에드는 널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어.” 유벨의 말을 듣고 있던 미라벨은 눈을 내리깔고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유벨 님이나 케이로프 님, 그리고 저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감정이지요. 전 그 분이 절 ‘특별’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그 때 ‘그녀’가 나타난 이후, 사실상 이미 포기해 버린 꿈이었어요. 하지만... 적어도 열심히 노력해서 제가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했어요. 3년 전 그날 이후, 그 분은 단 한번도 예전의 미소를 보여주신 적이 없으시니까. 지금의 그 분은 사실상 껍데기와 다를 바 없으니까... 차라리 예전의 모습을 몰랐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텐데...” 미라벨의 울 듯 한 표정에 유벨은 안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마음 알아. 하지만...” “아니요, 그게 아니에요. 사실은... 오늘 호숫가에서 에이드리안 님을 만났어요. 예전의 아름답던 그 미소를 쥬느비에브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 상대가 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팠어요. 제가 좀 더 그 분께 힘이 되어 드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만 미라벨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으로 가져갔다. 유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라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 동안 그렇게 있었다. ******** 유벨의 연습실을 나선 미라벨은 몹시 지친듯한 기분에 평상시보다 훨씬 피곤함을 느꼈다. 그녀는 오후의 모든 일정을 미루고 사택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중앙의 학원 부지를 지나서 숲 속을 지날 무렵 미라벨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좋은 날씨였다. “하늘이 파랗다.” 미라벨은 고개를 들어 잠시 더 하늘을 바라본 다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피곤해서 졸음이 쏟아져 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머리가 멍했다. “거-기- 친절하셨던 레이디 부-운!” 미라벨은 멍한 정신을 추스리고 걸음을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미라벨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때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뭐, 뭐에요? 이것은?” 미라벨은 신경질적으로 옷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내며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 보았다. “여기에요, 여기!” 쥬느비에브가 대략 5레트(주. 참조) 정도되는 둥치가 굵은 나무의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뒤짚어진 분홍색 치마 속으로 하얀 속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뭐, 뭐에요? 지금! 거긴 또 어떻게 올라간거에요? 당장 내려오지 못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미라벨은 너무 놀라 잠이 싹 달아났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전에 절 본관으로 데려다 주신 그 예쁜 레이디가 맞죠? 그렇죠? 저 눈썰미는 뛰어나거든요.” 미라벨은 혹여나 쥬느비에브가 나무에서 떨어질까봐 조바심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장 내려오세요! 다 큰 숙녀가 속바지를 내보이다니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당-장 내려오세요!!” 쥬느비에브는 몸을 대롱대롱 흔들어대며 웃어댔다. “아하하- 괜찮다니까요? 이거나 받으세요!” 미라벨은 얼떨결에 쥬느비에브가 던진 것을 덥썩 받았다. 조그만 나무 열매였다. 쥬느비에브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미라벨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아하하- 그거 맛있어요! 요렇게 껍데기를 까서 먹는 거에요. 이렇게 맛있는 걸 여기 사람들은 왜 그냥 두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아하하-” 나무에 걸린채 손짓을 하고 있는 그녀가 너무 불안해서 미라벨은 숨을 삼켰다. “어서 내려오기나 해요!” “알-았어요. 내려갈게요.” 쥬느비에브는 좌우로 손을 흔들며 방실방실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이 딱딱해졌다. “왜, 왜 그러는 거죠?” 미라벨은 당황하여 쥬느비에브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내려가죠?” “그,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미라벨은 열이 나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부쳤다. 쥬느비에브가 울상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나... 어떻게 해요! 못 내려가겠어요! 훌쩍 훌쩍...” 울먹이는 쥬느비에브를 보자 미라벨은 어쩔 줄을 몰랐다. “울지 말아욧! 어떻게든 내려 와 보라구요.” “몰라요...어떻게 해요... 밤새 이러고 있어야 하면 어떻게 해요....흐어엉...”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미라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내가 레플리카를 쓸테니까 뛰어내려요!!” 울먹이던 쥬느비에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뛰어내리라구요? 싫어요. 그러다 바닥에 떨어지면 많이 아플텐데...” “딴 소리하지 말고 빨리 뛰어내려요!! 내 말 알아들었죠? 뛰어내려요! 반드시 내가 받아줄테니까!” 쥬느비에브는 다시 훌쩍거리더니 소리쳤다. “그, 그럼 나 뛰어내려요!” 분홍색 치마가 활짝 벌어지며 쥬느비에브가 떨어졌다. 미라벨은 호흡을 가다듬고 가성(假聲)을 내기 시작했다. 공기의 움직임이 부드럽고 유연해졌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쥬느비에브는 깃털처럼 가볍게 떠오르더니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휴우-” 미라벨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괴, 굉장해요!” 쥬느비에브가 두 손을 깍지낀 채 가슴으로 모아 쥐고 그대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눈을 반짝였다. 미라벨은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당황하여 뒷걸음질쳤다. “뭐, 뭐에요? 그 눈빛은!” “역시 친절하신 분이셨군요! 얼굴도 예쁜데다 친절하시기까지! 음... 사실 이건 케이로프 님한테 드리려고 했지만 그냥 드릴게요.” 쥬느비에브는 주머니에서 나무 열매를 2개 꺼내 미라벨에게 건냈다. 또 다시 얼떨결에 나무 열매를 받아든 미라벨은 낯이 뜨거워 고개를 돌렸다. “사례를 받으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당신이 다치면 혹시 에이드리안 님이 상심하실까봐... 그나저나 저런 나무에는 도대체 왜 올라간거죠? 레이디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어쩌면 그렇게 철이 없나요! 귀족 가문의 레이디라면 정숙함과 우아함, 교양있는 언행! 이러한 덕목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라벨의 쏟아지는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뜬 채 박수를 쳤다. “와아- 왠지 멋져요!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레이디 같아요!" “진짜 레이디 ‘같은게’ 아니고 진짜 레이디에요, 난!” 미라벨은 발끈하여 소리질렀다. 왠지 바보가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뒤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미라벨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쥬느비에브가 눈을 멀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5도르에 분명 제 연습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짧은 붉은색 머리결의 케이로프가 나타나자 미라벨은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사랑의 라이벌인 케이로프가 그녀의 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다, 당신은 케이로프! 언제 돌아온 거죠?” 케이로프는 무표정한 얼굴을 미라벨에게 고정시키며 인사를 건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오랜만이군. 흠. 오늘도 에이드리안 님의 사택으로 가는 길목에 잠복해 있는거로군. 역시 오늘도 에이드리안 님의 미행인가? 그토록 그만두라고 했건만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는군. 그런 짓을 계속 하다간 우리의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의 축복을 결코 받지 못하지. 우리의 일로세나...” “관둬요! 그런 얘긴! 여, 여긴 내 사택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구요! 다, 당신이야말로 왜 여기 있는거에요? 품위 없이 불쑥 나타나다니! 당신도 에이드리안 님의 미행이 목적인거죠? 그렇죠? 그 표정을 보니 그런가 보군요. 오호호호호호-”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미라벨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케이로프의 무표정 속에서 속마음을 알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쥬느비에브가 쭈그리고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동안 두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다. 한창 재미있어질 순간, 쥬느비에브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두 사람.”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 에이드리안이었다. 어느 새 다가온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 옆에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여 주었다. “에이드리안을 두고 싸우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제가 나무에서 딴 열매 때문에 싸우고 있어요. 케이로프 님을 주려고 딴 열매를 제가 저 레이디에게 줘버렸거든요.” 에이드리안은 나직히 웃음을 흘리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바라 보았다. “하여튼 저 두 사람은... 우린 이만 갈까?”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자신의 사택 쪽을 가리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이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자 쥬느비에브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랐다. ******** “웃고 계셨어요.” “아아- 그렇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멀어져 가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몇 년만에 최고의 광경을 봤으니 이만 휴전하죠.” “아아- 동감이야.” 흐뭇하게 웃고 있는 케이로프의 표정을 보며 미라벨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열매 2개로 눈을 돌렸다. “내가 졌어.” 미라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나무 열매를 손에 꼬옥 쥐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기분 좋았다. 제10음(第10音) 라데팡스의 검은 천사 그녀는 고귀한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품위 있는 여느 레이디들과는 달리 알 수 없는 색깔의 빛바랜 옷을 걸치고 사악한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악마의 머리색인 검은 머리결로 사람을 유혹한다. 그녀를 보면 주의하라.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사람들을 유린한다. 그녀의 마수에 걸리는 한 당신은 자신의 이성을 믿지 못하리라. ‘오늘의 에스플리크’ 중 미라벨 양의 칼럼에서 ******** 따갑게 봄볕이 내리째는 어느 날,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9학년에 재학 중인 유리히 군은 화를 삭이며 제2 대(大)연습실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젠장, 엘크로이츠 녀석들! 유벨 님에게 특별 지도를 받다니!!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생각은 안 하고!” 유리히는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생회 <라데팡스>의 9학년생 대표인 그는 오전에 있었던 실습에서 엘크로이츠 소속의 9학년생들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실습은 레플리카를 사용하여 무게 10엘로[주. 아르헨의 무게 단위. 1엘로는 약 1kg.]의 수족관을 물고기와 물을 쏟지 않고, 보다 많이 들어 옮기는 쪽에 점수를 주는 것이었다. 유리히가 속해 있는 9학년 클래스 A의 라데팡스는 1 : 10 의 기록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클래스 B 녀석들은 이겨야 할텐데...” 유리히는 투덜거리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악보책을 다시 고쳐 들었다. 그때 멀리서 시끄러운 레플리카의 방출이 귀에 들어왔다. “이올리제[주. 일종의 결투를 칭하는 말. 주로 레플리카로 승부를 겨눈다.]인가? 어느 학년이 또 싸우나 보지?” 스콜라에서는 워낙 자주 라데팡스와 엘크로이츠간의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유리히는 태연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리히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라는 싸움 구경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재빨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 가지 않아 학생들이 몰려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은 두 편으로 갈려 서로를 향해 레플리카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가 맞은 편에 서 있는 상대방을 향해 거친 레플리카를 방출하고 있는 짙은 녹색 머리의 친구를 본 순간, 유리히는 머리 속으로 뭔가가 쾅 하고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다. “엘크로이츠 자식들!! 지금 뭐하는 거야? 야, 홀스! 어떻게 된거야!” 클래스 B의 라데팡스 대표인 그의 친구 홀스는 몹시 흥분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유리히... 오전의 실습... 이 자식들이 2 : 9로 이긴 걸로... 자꾸 우릴 우습게 보잖아!” 유리히는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느낌을 받았다. “...졌다고? 엘크로이츠 이 자식들!! 비겁한 자식들!! 분명히 뭔가 다른 수를 쓴게 틀림없어! 으아아아아아아아-” 유리히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른 라데팡스와 합세하여 레플리카를 쓰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몸에서 희미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올리제에서는 레플리카에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신체적인 보호를 모두 함축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레플리카의 사용보다 보다 많은 정신력을 요구했다. 보통의 무(無)속성 레플리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심각하지 않을 정도의 신체적인 상해를 입힘으로써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방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주면 재기 불능의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흥분한 상태에서 레플리카를 쓰더라도 어느 정도 지켜지는 규칙이었다. 때문에 소수로써 다수를 쓰러뜨려야 하는 전시(戰時)에 대비한 정신 공격형 레플리카를 따로 실습하기는 하지만 보통의 이올리제에서는 암묵적으로 금지된 사항이었다. 유리히는 적절하게 레플리카를 조절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이미 주변에 가지런히 심어져 있던 나무는 밑동이 거의 대부분 부러져 있는 상태였고 바닥에 깔린 벽돌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섞인 공기가 사방을 뒤 덮었다. ******** 유리히가 싸움에 끼어든지 약 30시르(주. 참조)쯤 지났을 때였다. 클래스B의 엘크로이츠 대표가 갑자기 레플리카를 거두고 힘 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소년의 뒤로 흙먼지가 사라지며 무시무시한 표정의 소녀가 보였다. “뭐, 뭐야.” 유리히는 갑작스러운 전개로 놀라며 새로운 등장인물인 소녀를 주시했다. 싸움은 순식간에 소강 상태를 맞이 했다. “지옥에서 벌을 받을거야.”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무시무시한 검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엘크로이츠 학생들을 집어 삼킬 듯 위험한 빛을 발했다. 하얀 얼굴은 흡사 죽은 자를 생각나게 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엘크로이츠 학생들을 훑어 보더니 매서운 눈초리로 겁에 질려 서 있는 한 학생을 쏘아보았다. “조심해.” 그리고 소녀는 검은 색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흙먼지를 헤치고 사라졌다. 유리히는 왠지 모르게 그녀의 검은 옷에서 사악한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쫓으며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죽음의 천사야. 그녀는 라데팡스의 수호자...” 유리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켜준 검은 천사는 너무나 강하고 잔인했다. 아직도 쓰러져 있는 클래스 B의 엘크로이츠 대표는 쓰러지면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엘크로이츠 녀석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 그러면 그렇지. 저 자식들이 아무리 잘난 체 해 봤자. 우리에게는 늘 숨어서 우리를 지켜주는 자가 있다구. 완벽한 우리의 승리다!’ 서로를 부축하며 자리를 떠나는 엘크로이츠 소속의 학생들에게 유리히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옷을 털어내며 거만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다음날, 실습실에 들어서던 유리히는 어제의 검은 천사를 칭송하는 라데팡스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제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엘크로이츠 녀석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유리히는 정말 흐뭇한 마음이 되었다. “유리히, 어제 대단했다며? 그 검은 천사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한 방에 재수 없는 엘크로이츠 녀석을 날려버렸다지?” 어제의 상황을 묻는 친구의 말에 유리히는 눈을 감은 채 미소를 흘렸다. 다시 어제의 흐뭇한 광경이 생각나는 듯 했다. “그녀는 정말 강하고 훌륭했지. 저번 테스트에서 10점 만점에 8점이나 받은 엘크로이츠 녀석을 단 번에 쓰러 뜨려버렸으니. 에스프라드 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자 일부러 파견한 특수 소속임에 틀림없어. 그 잔인함, 사악함이 흐르던 눈동자... 흙먼지가 가득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그 모습. 네가 봤으면 분명 이런 뿌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왠지 그녀는 우리 라데팡스 학생들에게는 다정한 눈빛이었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 확신해. 그녀는... 우리 라데팡스의 검은 천사야.” 유리히는 스스로 도취해 그녀의 모습을 그리는데 온 정신을 쏟아 부었다. 그의 친구도 자신의 말에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라데팡스! 결국 아르헨의 다음 실권은 우리 라데팡스에게 돌아올 것이 틀림 없어!!” “그래, 검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있는 한 우리 라데팡스는 실패하더라도 몇 번이나 다시 승리할 수 있는 거야!!” 유리히와 그의 친구는 진하게 포옹을 나누며 감격의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 날의 실습에서 겁에 질린 엘크로이츠에게 라데팡스는 10 : 0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 그 다음 날, 유리히는 클래스 A의 라데팡스 학생들과 스콜라의 교내 식당 <르 뤼센부르>에서 배부르게 점심을 먹었다. 스콜라의 대부분 학생들이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르 뤼센부르> 또한 아주 고급스럽고 훌륭한 서비스를 자랑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지붕에 <르 뤼센부르>의 간판이 걸려 있고 청동으로 장식을 한 문에서는 세련미가 듬뿍 느껴졌다. 실내에는 2사람부터 시작해서 40여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늘하늘한 천으로 드리워진 커텐과 짙은 색 꽃 문양의 천으로 만들어진 테이블보는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는데 일조를 했다. 음식은 몇 십년간 이 곳에서 요리만 해온 실력있는 요리사가 맛을 책임지고 있었다. 유리히는 부드러운 모카차 그리고, 치즈와 각종 야채들을 섞어 만든 스프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이어서 나온 풀코스의 음식을, 유리히는 거의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배부르게 먹었다. 부른 배를 탕탕 치며 식당을 나선 유리히는 클래스 A의 엘크로이츠 학생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리히는 거만하게 눈썹을 중앙으로 모으며 엘크로이츠 녀석들을 내려다 보았다. 식당에서 나온 유리히를 알아본 엘크로이츠의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A반의 엘크로이츠 대표는 여자였는데 유리히는 그녀가 마귀할멈같이 꼬장꼬장한 성격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유리히 군. 그런 치졸한 방법으로 우리 엘크로이츠를 이기니 기쁜가? 클래스 B는 그렇게 당했을지 몰라도 우리 클래스 A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유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너희 엘크로이츠 조무래기들이야 말로 비겁한 녀석들이 아니냐!! 유벨비앙카 로르 비인 님이 너희들을 특별 지도 해준 사실! 다 알고 있단 말이다!” 엘크로이츠의 대표가 눈썹을 실룩거렸다. "실력 없는 자들이 원래 변명이 긴 법. 그런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조금이라도 레플리카 실력을 쌓는게 어때? 그런 사악한 여자에게 의존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유리히는 순간 머리 속이 폭발해 버렸다. "이 녀석이-! 감히 우리 라데팡스의 검은 천사를 모욕하다니!! 검은 천사를 모욕하는 것은 우리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리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 쪽의 학생들은 목소리를 높여 레플리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싸움은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A 클래스의 엘크로이츠는 실력이 상당했다. 9학년생 중에서 레플리카의 사용에 특히 뛰어난 자들이 속한 반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유리히는 바짝 조바심이 났다. ‘오늘은 검은 천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강한 천사가 모습을 나타내어 라데팡스를 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유리히는 계속해서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엘크로이츠의 누군가가 자신의 레플리카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좋았어. 이대로라면 승산이 있다!’ 유리히는 씨익 웃으며 좀 더 거세게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자신을 보호하면서 레플리카를 내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유리히는 정신을 집중해 상대방을 노렸다. 툭.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유리히는 자신의 뒤 쪽에서 옆으로 무언가가 스치는 것을 깨달았다. “으, 으아아아아악.” 유리히는 고통 속에서 팔을 움켜 잡은채 바닥으로 뒹굴었다. 먼지가 코로 들어와 유리히는 기침을 해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유리히는 어리둥절했다. 팔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람에 검은 머리결을 날리며 서 있는 ‘라데팡스의 검은 천사‘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처음 본 그 때보다 더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 보고 있었다. “감히...이런 일을...” 소녀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거, 검은 천사... 어째서... 날 공격한 거지?” 유리히는 예상 밖의 전개에 너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지옥이 아니라, 지옥 그 너머에서 벌을 받을 게 틀림없어. 당신들은.” 지독하게 음습한 목소리로 소녀가 말을 이었다. 차가운 검은 색 눈동자에서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라데팡스 학생들을 하나하나 쏘아 보았다. 마치 눈에 새겨 두고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와 징계하려는 듯이. 유리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강인함과 잔인함으로 자신들을 지켜주었던 검은 천사가 왜 자신을 공격했는지, 왜 라데팡스 학생들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 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에서 눈물이 솟아 올랐다. 유리히는 바닥을 기어가며 검은 천사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어째서..당신이... 우리를...” 검은 천사는 자신의 검은 머리결을 뒤로 넘기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같은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해.” 유리히는 자신들을 저버린 검은 천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뭔가가 잘못 되었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검은 천사의 마음을 상하게 한 어떤 일을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고소하다는 표정의 엘크로이츠 녀석들의 표정이 보였다. 유리히는 못내 비참한 기분이었다. 유리히의 귓가에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쥬-느-비-에-브!” 당황한 듯한 목소리의 엘크로이츠 대표가 외쳤다. “유벨 님! 여긴 어쩐 일로!!” 엘크로이츠의 수뇌부인 회색머리결의 유벨이 유리히의 눈에 비쳤다. 그는 한참을 찾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런, 이런. 허가 받지 않은 이올리제는 처벌받는다는 걸 모르나? 거기 라데팡스! 오후에 엘크로이츠 학생회실로 오도록. 여긴 엘크로이츠 구역이야. 자중을 했어야지. 너! 너도 마찬가지야, 학생회실로 와.” 유벨의 호통으로 잔뜩 기가 죽은 엘크로이츠 녀석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소하군. 아- 나도 결국 학생회실로 소환인가?“ 유리히는 곧 있을 징계 처리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가자! 쥬느비에브! 에드가 기다리고 있어.” 무심히 유벨의 말을 들은 유리히는 아픈 팔에도 불구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머리 천사는 뽀얀 먼지만을 남긴 채 유벨과 함께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유리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 ‘에드’라면... 설마...설마...” 유리히의 머리 속에 얼마전에 읽은 스콜라 신문의 칼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 주의하라.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사람들을 유린한다. 그녀의 마수에 걸리는 한 당신은 자신의 이성을 믿지 못하리라.’]] 유리히는 팔의 고통도 잠시 잊은 채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에이드리안 회장의 약혼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우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방심하게 만들다니... 무서운 여자! 역시 엘크로이츠의 여왕!! 측면전술의 귀재다!!” ******** “너, 도대체 이게 뭐야?” 쥬느비에브는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실에 놓여있는 커다란 책상 바로 옆에 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의 매서운 눈을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빠꼼히 들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호통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하, 하지만...그게..저...” 기가 막혀 말도 하기 싫다는 듯한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더욱 목을 움츠렸다. “라데팡스의 검은 천사? 정말 기가 막히는 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잠시 쳐다 보다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지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너, 지금 자신의 위치를 알긴 아는거야?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에이드리안의 화난 음성에 쥬느비에브는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저, 식당에 갔는데...꼬치구이를 팔지 뭐에요? 에이드리안이 그저께 용돈 줬잖아요. 그래서... 꼬치구이가...음... 꼬치구이가 어떤거냐면요, 부드러운 고기를 조그맣게 썰어서 맛있는 양념에 재운 다음 길쭉한 꼬챙이에 꿰는 건데...” “꼬치구이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 다음부터 얘기해!” 에이드리안의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고, 손으로 꼬치구이 모양을 만들며 신나게 설명하던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러니까...고기를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꿴 건데... 하여튼 꼬치구이를 손에 들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날 밀쳐내서... 그만 꼬치구이를 떨어뜨렸지 뭐에요! 고기를 두 개밖에 안 먹었는데! 전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먹는 음식을 버리면 지옥에 가서 벌 받는다고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어요.” “그래서?” 에이드리안이 보고서를 손으로 탁탁 치며 추궁했다. “그래서 깨물어줬어요. 저 이빨 튼튼하거든요.” 생글생글 웃으며 이야기하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 히죽거리며 대화를 듣고 있던 유벨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 거 걸작인데? 그래서 쥬느비에브가 힘껏 깨물어서 기절시킨 사람이 하필이면 9학년 클래스 B의 대표란 말이지?” 싱글거리는 유벨이 성가셔서 에이드리안은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유벨!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너!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된거야?” 쥬느비에브는 웃음을 멈추며 다시 쭈뼛댔다. “그게 그러니까... 그저께 다 못 먹은 꼬치구이가 오늘 너무너무 먹고 싶은거에요... 그래서 오늘도 식당에서 꼬치구이를 사서 들고 가는데... 식당문을 나서는데 어떤 사람이 또 날 밀쳐내는 거에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서서...그래서 또 꼬치구이를 바닥에 떨어뜨려버린거 있죠? 오늘은... 오늘은 고기를 3개밖에 못 먹었는데... 그 나쁜 사람이....훌쩍. 훌쩍.” “그래서... 또 깨물었다?” 에이드리안은 뜨거워진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훌쩍대는 쥬느비에브를 쏘아봤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가. 어서 가. 어서. 내가 제정신일 때 어서 가.”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학생회실을 뛰어 나가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지긋이 눈을 감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 때 진작 관뒀어야 했어. 이런 약혼...정말 싫어, 저런 여자...” 뒤에서 배를 잡고 웃는 유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실습실은 한 가지 주제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야! 너 봤어? 라데팡스의 검은 천사가 사실은 엘크로이츠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위장술을 썼다지 뭐야? 그녀가 건방진 라데팡스 녀석의 팔을 한 번에 못쓰게 만들어 놨다는 소문이야! <엘크로이츠의 검은 수호천사>가 있는 한 우리 엘크로이츠에 패배란 없어!!” 제11음(第11音) Kiss me, please!! (1) 어느 이른 저녁. 하얀 달이 테라스를 통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살며시 미풍이 지나가며 쥬느비에브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어놓았다. 테라스로 통하는 거대한 창문앞에 놓인 흔들의자는 요람 위의 아이를 재우려는 듯 기분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자가 흔들릴 때마다 하얀 원피스 자락이 팔랑거렸다. 손에 들고 있는 그림책은 얌전히 다리 위에 놓여 있었다. 잠들어 있는 쥬느비에브의 곁에 서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귓가로 다가갔다. “……” 쥬느비에브의 귀에 조그맣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 [[“마망!! 마망!! 노랫소리에요!! 너무 좋아요!” “사랑하는 나의 쥬르, 듣지 마라. 제발 들어서는 안 돼.” “마망... 마망!! 그러면 내가 노래 부를께요. 나 잘해요.” ”사랑하는 나의 쥬르, 노래를 해서는 안 돼. 제발... 노래를 불러서는 안 돼.“ “마망...” “쥬르, 듣지 마라. 불러서도 안 돼. 나의 쥬르, 그 것만은 안 돼...”]] 쥬느비에브는 흐릿하게 눈을 떴다. 꿈을 꾼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는 그림책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그림책을 펼쳤다.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키스했습니다. 그리하여 공주님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멍한 목소리로 그림책의 구절을 읽으며 쥬느비에브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얀 달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 쥬느비에브의 성화에 졸린 눈을 겨우 뜬 채 포크로 샐러드를 집던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펼쳐진 하얀 종이를 보고 눈을 껌뻑거렸다. “뭐야, 이건?” “일로나 할머님의 급한 전갈이지. 여기다 어서 서명하라구.” 간신히 뜨고 있는 눈을 조금 더 뜨고 멍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나타난 유벨을 보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촌 형이야 언제나 불쑥불쑥 나타나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이게 뭔데?” 자신의 왼쪽에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가 눈을 깜빡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벨은 비어 있는 오른쪽 자리에 앉아 접시에 담겨 있는 빵을 집어 우물거리며 말했다. “약혼 증명서.”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무슨 증명서?” “약. 혼. 증. 명. 서...라고 했다.” 에이드리안은 발끈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테이블 위의 비스킷 접시가 굴러 떨어졌다. 접시는 다행히 깨지지 않았지만 비스켓은 산산조각나 바닥에 흩어졌다. 바닥을 치우려고 달려온 하녀를 곁눈질하며 에이드리안은 물었다. “내가 왜 이런 거에 서명을 해야 하는데?” 유벨은 오른쪽 눈썹을 찌푸리며 접시의 빵을 하나 더 집어 입 안으로 넣었다. “일로나 할머님이 보내신 거야. 네가 ‘약혼 취소’를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할머님께 전해드렸더니 이걸 보내 오셨더라구. 네가 발뺌할 때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도록 크-게 서명을 받아오라시더라. 사실 너희들 정식으로 약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에드, 서 있지 말고 앉으라구.” 유벨은 계속 빵을 씹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가 놀란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약혼 취소 할거에요, 에이드리안?” 까만 눈망울을 떨며 불안한 얼굴로 묻는 쥬느비에브를 보자 에이드리안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서명, 하면 될 거 아냐. 하면. 약혼 증명서라니. 대귀족 중에서 약혼 증명서같은 거에 서명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일거야, 아마. 펜 이리 줘, 유벨.” 에이드리안은 자리에 앉아 투덜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우아한 필체로 휘갈겨 썼다. “자, 너도 하던지, 말던지.” 에이드리안은 약혼 증명서를 쥬느비에브 쪽으로 밀어내며 포크를 집었다. “‘너’가 아니에요.” 갑자기 뚱한 목소리를 내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뭐가?” “내 이름은 ‘너’가 아니라구요. 내 이름은 ‘쥬느비에브’에요. 쥬느비에브라고 불러주세요.” 심각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기색을 얼굴에 비치며 화를 냈다.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잖아!” “그치만 에이드리안이 내 이름 부르는 거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에슈비츠 양, 아니면 너, 야, 그 여자... 쥬느비에브라고 불러준 적 한 번도 없잖아요.” 평상시와는 달리 놀라운 관찰력을 과시하는 쥬느비에브였다. 에이드리안은 왠지 겸연쩍어 말을 더듬었다. “그거야...뭐...음... 그거야 네 이름이 너랑 전혀 안 어울리니까 그렇잖아! 그런 이름은 너같은 여자보다 좀 더 뭐랄까... 우아하고 품위있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구!”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다시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쥬느비에브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래도 내 이름은 쥬느비에브에요. 쥬느비에브. 불러보세요. 아니면 저, 여기에다 서명 못해요.” 예상치 못한 ‘서명 거부’에 놀란 에이드리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았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고 있는 굳은 표정의 쥬느비에브는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어서 서명이나 해.” 에이드리안은 히죽대는 사촌 형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왠지 쑥스러운 생각이 드는 그였다. “싫어요. 불러 보세요. 쥬느비에브-하고요. 아니면 서명 절.대.로. 안해요.” ‘절대로’를 강조하며 쥬느비에브가 눈을 부라렸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금발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양보 못해. 네 이름 너무 안 어울려. 차라리 ‘쥬르’라고 부르면 모를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느비에브가 눈을 깜빡거렸다. 왠지 좀 놀란 표정이었다. 게다가 얼마 안 있어 얼굴까지 발그레해졌다. “좋아요. 그럼 ‘쥬르’라고 불러보세요. 아니면 서명 안 해요.” 유벨이 옆에서 계속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멋쩍은 기분에 의자를 돌려 앉은 다음 조그맣게 말했다. “쥬르.”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름 불렀잖아! 서명 안 할거야?” 에이드리안이 다시 의자를 돌려 앉으며 버럭 소리치자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방긋 웃더니 하얀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나갔다. 서명이 끝난 것을 본 에이드리안은 잔뜩 눈썹을 찌푸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 “어-이, 에드!” 식당을 나서던 에이드리안의 귀에 익숙한 사촌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약혼 증명서나 가져가지 그래?” 퉁명스러운 사촌동생의 말에 유벨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지? 약혼 증명서도 겉으로는 쓰기 싫어하는 척 하면서... 결국 쥬느비에브에게 억지로 강요하다니... 쥬느비에브도 대단한 걸? 결혼도 안했는데 하나도 안 지는걸 보니. 사실 그녀, 겉보기에는 그래도 굉장히 똑똑한 거 아닐까? 에스플리크의 귀공자, 에이드리안을 이렇게 꼼짝 못하게 만들다니... 쿡쿡. 어쨌든 여자에게는 자고로 상냥해야 하는거다. 아우야.” 듣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눈썹을 실룩이며 대답했다. “너까지 왜 그래? 유벨. 가뜩이나 그 여자때문에 신경질이 나는데. 그리고 난 강요한 적 없어! 그냥... 그냥... 난 서명했는데 그 여자가 엉뚱한 걸로 시비를 거니까...” “‘그 여자’가 아니고 쥬느비에브지.” 평상시의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온 사촌형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거추장스럽게 내려온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하여튼 난 학생회실에 갈꺼니까 넌 오던지 말던지 맘대로 해.” “미안하지만, 전 일로나 할머님께 약혼 증명서를 보내드려야 되기 때문에 잠시 학생회실을 비울 것 같습니다. 에이드리안 회장님.” 싱글거리며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는 유벨을 바라보고 다시 한숨을 쉰 에이드리안은 괜히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침실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 나른한 봄날. 아침의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엘크로이츠> 학생회실에는 오랜만에 모든 멤버가 모여 있었다. 회장인 에이드리안은 책상 앞에 앉아 정신없이 서류를 결제하고 있었다. 너무나 바빠보이는 회장과는 달리 나머지 멤버들은 느긋하게 봄날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옆에서는 미라벨이 느긋하게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고 유벨은 중앙에 놓인 쇼파에 누워 소설책을 보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책장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파란색 원피스 치마 자락을 활짝 펼친 채 바닥에 주저 앉아 쥬느비에브는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그림책은 어디서 얻은 거야? 쥬느비에브.” 책을 보다 눈을 돌린 유벨이 물었다. “헤- 이 거 에이드리안의 서재에서 찾은 거에요. 그림 예쁘죠?” 생글생글 웃으며 쥬느비에브가 그림책을 들어 보였다. “어머? 저 책은! 에이드리안 님, 아직도 저 책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 책을 가지려고 케이로프 님과 제가 하루 종일 싸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결국 에이드리안 님의 서재에 남게 되었지만요.” 문득 고개를 들어 그림책을 본 미라벨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그 것은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질투였었어. 에이드리안 님이 내게 주신 것을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이 억지로 뺏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예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케이로프가 말했다. 미라벨이 발끈하여 입을 여는 순간 유벨이 말을 이었다. “또 두 사람 싸우려는 거지? 사랑하는 에이드리안 님 앞에서 싸우면 에이드리안 님이 아-주 싫어하실 텐데...” 유벨의 말에 두 사람은 여전히 서류를 결제하느라 여념이 없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흘끗 보고는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미라벨은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고 케이로프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유벨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두 사람의 차이라니까.” “유우벨- 그렇게 놀지만 말고 좀 도와주는게 어때?”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유벨은 빙긋 웃으며 다시 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나 자료실에 잠시 다녀올테니까...” 에이드리안은 조용해진 사람들을 잠시 훑어 보고 한숨을 쉬더니 방을 나섰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다 그림책으로 눈을 돌린 쥬느비에브는 다시 그림책을 읽는데 몰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발그레해져 말했다. “음...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키, 키스를 했대요.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네요... 음...음... 키, 키스라니....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하다니.” 듣고 있던 미라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일이라뇨? 키스! 그것은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행위 아니겠습니까? 키스야말로 여자의 행복! 도대체 키스도 한 번 못해봤다는 말씀인가요? 정말이지 이만저만 경험 부족이 아니군요.” 말을 마치고 미라벨은 잽싸게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와 속삭였다. “에이드리안 님과도 못 해봤나요?” 순식간에 홍당무가 된 쥬느비에브를 보고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소리쳤다.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나요? 약혼한 사람과 그 흔하디 흔한 키스 한 번 못해보다니!!” 듣고 있던 케이로프가 한 마디 거들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그 것이 정말입니까? 내 제자가 그렇게 경험 부족이라니 전 스승으로써 이만저만 실망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경험이 쌓여야 레플리카의 사용도 보다 광범위해 지는 법! 쥬느비에브 엘모르 에슈비츠 양처럼 그런 대수롭지 않은 경험조차 없다면 장차 어떻게 레플리카를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말씀입니까! 키스!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 “관둬요. 케이로프 님.”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는 미라벨의 말에 케이로프는 입을 닫았다. “아아- 에이드리안 님은 뭐 하신다고 약혼녀에게 키스 한 번 안 해주셨담? 하긴 쥬느비에브처럼 어린 애에게 키스는 무슨 키스람. 자고로 연인과의 은밀한 교류는 나처럼 우아하고 교양있는 여성과... 흠... 역시 에이드리안 님은 날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뜻? 오호호호호-”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상상도 지나치면 병입니다.” 케이로프의 말에 입을 다문 미라벨은 눈을 치켜뜨고 케이로프를 쏘아 보았다. 케이로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자신의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아아- 또 시작이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유벨은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 그런데 정말 한 번도 못해본거야?” “몰라욧!” 싱글거리는 유벨의 말에 그림책을 가슴에 꼬옥 쥐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때 학생회실로 들어오던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쳐다 보더니 본 척도 안 하고 고개를 돌리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또 왜 그래?” “‘너’가 아니라 쥬느비에브지. 큭큭.”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는 사촌형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발끈 했다. “유벨 형.” 에이드리안의 눈빛을 보고 잠시 웃음을 멈춘 유벨은 다시 씨익 웃으며 책으로 눈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사촌형을 노려 보고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쥬느비에브는 한참 에이드리안을 원망섞인 눈동자로 쳐다 보다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키스 해주세요.” 난데없는 쥬느비에브의 요구에 에이드리안은 눈이 휘둥그레 졌다.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갑자기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와 학생회실을 스쳐 지나갔다. 학생회실은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뭐...라고?” “키스해 달라고요!!” 자신과 쥬느비에브를 놀란 눈으로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의 시선을 느끼며 에이드리안은 역정을 냈다. “너 또 무슨 소리야? 쓸데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에이드리안은 책상 의자에 앉으며 위에 놓여져 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펼쳤다. “훌쩍. 바보같은 에이드리안. 키, 키스도 안 해주고... 우린 약혼한 사인데... 분명 내가 싫어진게 틀림없어. 아니야,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아서 그런건가? 훌쩍. 키, 키스는 여자의 행복이랬는데. 난 안 행복해... 훌쩍.”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혼잣말인지 아니면 학생회실에 있는 사람들더러 다 들으라고 하는 건지 모를 넋두리를 중얼거렸다. 쥬느비에브의 중얼거림에 계속 거칠게 서류를 뒤적이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유벨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쥬느비에브에게 한 번도 안 해준거야?” “뭘?” “키스.”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 죽이고 있는 세 사람-물론 쥬느비에브를 뺀 세 사람이다-을 돌아가며 쳐다보았다. “그, 그 딴 거 왜 묻는거야? 그럴 정신 있으면 일이나 해!!”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에이드리안은 벌떡 일어나 서류를 집어 던지고는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훌쩍이던 쥬느비에브가 웅얼거리더니 그림책을 가슴에 안고 뒤를 따랐다. ******** “아아- 안 해본게 틀림없군요.” “아아- 그래. 그래.”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리크 양,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야.” 학생회실에 남은 세 사람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다 한숨을 포옥하고 쉬었다. 그리고나서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뭉치를 보았다. 다시 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골치 아프군.” ********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연습실에 있었다. 학생회실에서 나와 도망치듯 연습실로 온 에이드리안은 1 도르째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얀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며 울려 퍼지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흥, 어디 고생 좀 해 보라지. 오늘 중으로 결제 하나 봐라." 심통스러운 얼굴로 에이드리안은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건내진 서류가 오늘 중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며 에이드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양손을 건반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맑은 피아노 음색이 넓은 연습실에 퍼졌다. 스콜라의 학생들은 보통 악기를 하나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음감 연습을 위해 악기의 사용은 필수였다. 보통 레플리카 실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작고 다루기 쉬운 악기를 선택했다. 목소리의 음색이 다양하지 못한 사람들은 악기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레플리카의 사용이 필요할 때, 악기를 연주하면서 레플리카를 방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좀 더 실력이 있는 사람은 악기를 연습용으로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레플리카를 사용할 때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했다. 에이드리안도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왔지만 음감 연습을 할 때에만 간간이 사용해 왔다. “휴우-” 짧게 숨을 내뱉은 에이드리안은 손을 멈추고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유벨 그 녀석.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투덜대며 말했다. 잠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피아노 건반 덮개를 씌우고 뚜껑을 닫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에이드리안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는 생각을 했다. ‘키스라니... 그런 어린애한테 무슨 키스를...’ 자신이 쥬느비에브보다 불과 1살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망각한 그였다. 그러다가 어제 저녁에 자신이 저지른 짓이 생각난 그는 더욱 당혹스러워져 괜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조금 화가 나 보이던데, 그것 때문에 그런건가? 하긴. 약혼한지도 이제 꽤 되었는데... 게다가 그 여자도 여자니까. 화가 날 만도 하지만... 아냐, 화가 날만도 하다니...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키스해 달라니...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에이드리안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쑥스러움 때문에 다소 얼굴이 상기되었다. “하여튼 그 여자는 곤란한 일만 몰고 다닌다니까!” 에이드리안은 창문의 커텐을 촤악 하고 닫으며 뒤돌아섰다. 그 때 문 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동안 소리에 귀를 귀울이던 에이드리안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연습실의 문은 들어갈 때는 레플리카를 사용해야 하지만 나갈 때는 자동으로 열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문 앞에 서자 문이 스르르 여렸다. “아야!” 난데없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놀라 주위를 살폈다. 곧 문에 이마를 부딪혀 땅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가 찬 에이드리안은 한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안 들어오고.” “문이 안 열리니까 그러죠. 그렇게 보고 있지 말고 일으켜 주세요.” “싫다면?” 자신을 뚫어져라 쏘아보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느비에브를 피아노 의자에 앉힌 에이드리안은 다시 창문의 커텐을 열어 방을 밝게 만들었다. “뭐라도 마실래?” 쥬느비에브는 옆으로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런 거 말고. 키스 해 주세요.” 다시 시작된 쥬느비에브의 칭얼거림에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화낼 기운도 없었다. “우리, 그,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요! 키, 키스정도는 해 줘야 하는거 아니에요? 왕자님도 공주님한테 키스해 줬는데... 에이드리안은 왜 안 해주는 거에요? 나도 공주님처럼 키스 받고 싶어요.”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가 말했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는 파란 원피스 차림의 쥬느비에브는 마치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심술부리는 어린아이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졌다는 표정으로 깊게 숨을 쉬더니 쥬느비에브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공주님처럼 되고 싶은 거야?” 쥬느비에브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에이드리안의 시선에 쥬느비에브는 괜히 얼굴이 붉어져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리고,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얼굴을 내렸다. 쥬느비에브는 기대했지만 미처 예상하지는 못한 전개에 놀라 눈을 멀뚱멀뚱 뜬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가 키스를 해주려 한다! 너무 긴장되어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숨 쉬기가 어려웠다. 숨을 못 쉬어서 죽는 건 아닐까? 키스하다 숨 못 쉬어 죽은 사람이 있었던가? 아앗,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고... 드디어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에이드리안 님!!” 갑자기 들린 미라벨의 목소리에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물론 쥬느비에브는 이미 굳어 있는 상태였다- 버렸다. “뭐, 뭐야, 미라벨.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머쓱해진 미라벨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저 서류 마저 결제하셔야 한다고... 유, 유벨 님이 말씀하셔서...” “아아-”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수려한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눈을 내리깔면서 쥬느비에브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식사나 하러 가자.” 기대했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잔뜩 심통이 난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끌려가면서 미라벨을 향해 눈을 찌푸렸다. “미라벨 언니, 미워요.” 연습실을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미라벨은 자신의 다홍색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거지요? 난 그냥 유벨 님의 말을 전한 것 뿐인데!! 그리고 에이드리안 님! 지금 식사하러 가시면 서류 결제는 언제 해주시겠단 말씀이세요!!” 자신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퍼지는 것을 들으면서 미라벨은 무척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쥬느비에브에게 미안한 마음이 마구마구 들고 있는 미라벨이었다. 제12음(第12音) Kiss me, please!! (2) 점심 식사 시간이라 학생 식당 <르 뤼센부르>는 부산하게 사람들이 오갔다. <르 르센부르> 안에서도 최고급 VIP 손님만을 접대하는 특별실 안에서는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한 대화가 한참 오고가고 있었다. 6인용 테이블 앞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에이드리안은 오늘의 특선 메뉴를 꼼꼼히 살펴 보았다. 옆에서 <르 뤼센부르>의 총지배인인 하옌도르 씨가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메뉴판에 눈을 박았다. “그럼, 이걸로 부탁해. 너무 짜지 않게.” 에이드리안은 메뉴판을 하옌도르에게 건네며 쥬느비에브에게로 눈을 돌렸다. “넌?” “음... 난 그냥... 아로[주. 아르헨의 과일. 푸른 색의 과실] 주스랑 모롤라 [주. 아르헨의 과일의 한 종류. 노란색 껍질에 쌓인 과즙이 많은 과실]!!” “저 쪽의 레이디에게도 그냥 같은 걸로 가져다 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을 무시하고 쥬느비에브의 메뉴판을 하옌도르에게 건네주었다. “나, 모롤라 먹고 싶어요!” 발끈 하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물이 반쯤 담긴 잔을 입으로 기울였다. “제대로 안 먹으면 안 돼. 너, 너무 말랐어.” 항의가 묵살되자 쥬느비에브는 잠시 에이드리안을 쏘아보더니 이내 포기 한 듯 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에이드리안은 방금 전 연습실에서 있었던 일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무표정했다. 그렇게 긴장되었었는데! “에이드리안. 아까 우리있잖아요... 우리... 키, 키....” “...뭐?” 에이드리안의 파란 눈동자를 보고 순간 당황한 쥬느비에브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참 키, 키가 크다구요, 에이드리안은.” “무슨 소리야,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풍성하게 차려지고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어서 먹어.” 갈색 소스가 맛갈스럽게 뿌려져 있는 고기를 한 점 입으로 가져가면서 쥬느비에브는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에이드리안. 우리...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그 키... 키..” “응?” 맛좋아 보이는 선명한 붉은 색의 조그만 과일을 입으로 가져가며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키... 키, 킷값 좀 하라구요.” “무슨 소리야, 도대체. 킷값이라니 무슨.” 잔뜩 찌푸린 얼굴의 에이드리안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무감각하게 접시와 입 사이로 포크를 왕복운동 시켰다. ‘키다리에 킷값이라니...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거람. 나 정말 바본가 봐. 키, 키스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졸라대면 에이드리안이 싫어하겠지? 그렇겠지? 하, 하지만 나도 키스 받고 싶은데... 키, 키스야말로 여자의 행복이라고 미라벨 언니가 그랬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지으며 음식만 먹을 뿐이었다. 그런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이드리안은 살짝 웃음을 흘렸다. “쥬르, 천천히 먹어.” 갑자기 불린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든 쥬느비에브는 잠시 에이드리안을 뚫어져라 쳐다 봤다. 그리고 살풋이 웃음을 띄웠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내 이름 불러주니까 너무너무 기분 좋아요.” “아아. 응.” 무척 기쁜듯한 표정의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은 기분좋게 웃으며 다시 음식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쥬느비에브도 맛있게 식사를 계속했다. “에이드리안, 이 거 먹을래요? 루이즈 아주머니가 싸주신거에요. 쿠키.” 기분이 좋아진 쥬느비에브는 소복이 담긴 쿠키 주머니를 내밀며 방긋 웃었다. 마침 디저트로 차가 나왔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였다. 쥬느비에브는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바라 봤다. “그래. 맛있게 보이는군. 너도 어서 먹어.”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까만색 초콜렛 쿠키를 먹었다. 오늘은 왠지 식사 시간이 아주 즐겁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은 느긋한 티 타임을 가졌다. 그 때 그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 “우리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심히 궁금한데?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뤼베이크 양.” 케이로프는 <르 뤼센부르> 특별실의 문 틈으로 실내를 살피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거야 저 멍청하고 남녀 관계에는 전혀 무지한 쥬느비에브의 첫키스를 위해서잖아요. 알면서 묻지 말아요.” 미라벨은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실내를 살피는데 몰두했다. “그러니까 왜 나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느냐 말이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당신 제자잖아요. 저렇게 멍청한데 일말의 책임감도 없나요?”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은 원래 저랬기 때문에 책임감같은 건 없는데...” “에이드리안 님을 사모해 마지 않는 나도 이렇게 희생하고 있는데 당신, 그 정도의 책임은 좀 지라구요. 쥬느비에브처럼 저렇게 멍청해서야 어디 키스는커녕 포옹이라도 한 번 받아보겠어요? 우리가 나설 때에요. 합심하자고요.” 미라벨은 옆에서 자신들을 쳐다보는 웨이터들을 손으로 물리고 다시 문틈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군. 책임감이라.” 케이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문 틈으로 파고 들었다. ******** 식사를 마친 뒤 쥬느비에브를 케이로프에게로 보낸 에이드리안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스콜라 교정을 거닐었다. 여기저기서 인사를 보내는 하급생들이 보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 에이드리안은 애너벨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 식사가 끝날 무렵 미라벨로부터 급한 일로 애너벨 정원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 온 것이었다. 무시할까 생각하던 에이드리안은 결국 가기로 마음 먹었다. 미라벨의 평소 언행 상 그리 급하지도 않은 일로 자신을 찾지는 않았기에 몹시 다급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자신의 화풀이 장소이기도 한 애너벨 정원은 평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장소였다. 소규모인데다가 스콜라 내에서도 비교적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숲을 지나 애너벨 정원으로 향했다. 눈을 감고 신선한 공기를 깊이 마시며 에이드리안은 흙을 밟았다. 흙의 감촉이 아주 기분좋게 느껴졌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도 듣기 좋았다. “꺄아아아아아-” 문득 들린 비명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뜨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더욱 불안감이 가슴을 스쳤다. 나무와 풀을 헤쳐 애너벨 정원으로 통하는 육중한 철제 문을 열어젖히고 달려간 에이드리안은 순간 허탈감에 빠졌다. 쥬느비에브가 분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거야, 여기서? 아까 수업 받으러 갔잖아.” 케이로프에게 가 있을 쥬느비에브의 등장으로 당황한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케, 케이로프 님이... 여기서 오늘 수업을 하자고 하셨는데... 그게... 난데없이 절 여기로 밀지 뭐에요? 에취. 그러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로 가신 건지... 에에취-” 얼마 전 호수에 빠졌을 때도 멀쩡했던 쥬느비에브가 재채기를 해댔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를 분수에서 건져냈다. 머리부터 발끝가지 보기좋게 젖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쥬느비에브는 연신 머리카락을 떼내느라 애를 먹었다. “음? 물이 왜 이렇게 차가워?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에이드리안은 잠시 접어두고 쥬느비에브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가에 앉혔다. 쥬느비에브는 오한이 드는지 몸을 떨었다. “왜, 왜 이렇게 춥죠? 이, 이것도 수업의 일종인가요? 체, 체력훈련인가?” 덜덜 떨면서도 쥬느비에브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여, 여기 무, 무슨 일이에요? 엣취-” “아, 난 미라벨을 만나러 왔는데 곧 오겠지.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 겠다.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에이드리안은 우선 자신의 윗도리를 쥬느비에브에게 걸쳐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을 따라 나섰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애너벨 정원의 철제문 앞에 다다랐다. “이게 뭐야.”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자신이 열고 들어온 철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문을 잡고 힘을 주었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너무 이상한 상황에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철제 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한 벌의 옷을 발견했다. “뭐야. 이건.” 옷을 집어 들어 펼쳐 보았다. 빨간색의 원피스였다. 그것도 쥬느비에브에게 딱 맞을 사이즈. “쥬르. 케이로프가 널 분수로 밀었다고?” “에취. 음. 그래요. 그,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죠. 참. 신통하다니까요. 그사이에 사라지다니. 에-에취.” 에이드리안은 얼마전에 쥬느비에브의 옷을 부탁하며 미라벨에게 사이즈를 가르쳐 주었던 기억을 되살려 냈다. “아하...” 한 동안 팔짱을 낀 채 문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쥬느비에브가 물었다. “왜요, 문 안 열려요? 그, 그럼 우리 못 나가는 거에요? 에엣취.” “아냐. 그냥 기가 막혀서 잠시... ” 에이드리안은 다시 문을 살펴 보았다. “레플리카가 걸려 있군. 이런 게 나한테 통할 거라 생각했나?” 에이드리안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뒤돌아서 쥬느비에브를 바라 봤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덜덜 떨며 양 팔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쥬르, 이리 와. 여기서 그냥 말리자. 더 있다가는 감기 들겠어.” “에이드리안. 여긴 머리를 말릴 수건도 없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누군가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에이드리안은 문 옆에 떨어져 있는 빨간 원피스를 손에 쥐고는 쥬느비에브에게 내밀었다. “받아. 누구누구의 선물이니까.” “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쥬느비에브에게 옷을 건낸 에이드리안은 다시 분수대로 돌아가 분수의 대리석에 앉았다. 조금씩 옷으로 물이 튀어올랐다. “이 것도 그 녀석들 짓이군.” 에이드리안은 평소 때보다 훨씬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며 중얼거렸다. “에, 에이드리안. 휴지 없어요? 나 콧물 나요.” 쿨쩍거리며 다가오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은 손수건을 건냈다. “킁-” 손수건을 받자마자 코를 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민망한 심정에 방긋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음. 미, 미안해요. 귀족의 레이디들은 이러지 않죠? 하, 하지만 너무 콧물이 흘러서...그게...에-엣취!” “이리와. 옷이랑 몸부터 말리자.”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손짓했다.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안의 옆에 앉은 쥬느비에브는 곧 이어 작은 허밍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앉아서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쥬느비에브는 추워서 몸은 떨려왔지만, 에이드리안의 부드러운 음성에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모르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라라 라 라라라라라 라라라라-” 곧 쥬느비에브는 몸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의 물기가 마르기 시작했다. 옷도 조금씩 마르더니 금세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얼굴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도 말라서 저절로 떨어졌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심하게 떨리던 몸이 이제는 안정감을 되찾았다. “음...어? 와아- 얼굴이 뽀송뽀송해졌어요, 에이드리안. 아, 신기해. 레플리카로 이런 것도 할 수가 있네요. 게다가 이렇게 빨리 마르다니. 야- 뽀송뽀송.”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쥬느비에브가 말했다. “뭐. 아무래도 광속성이니까.”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대리석에서 일어서 철제 문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에이드리안의 주위로 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약한 바람이 불어왔다. 에이드리안의 긴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에이드리안을 살펴 봤다. 놀랍게도 에이드리안은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삐걱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에이드리안의 말에 붉은색의 원피스를 손에 들고 허둥지둥 달려온 쥬느비에브는 놀란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보았다. “입도 안 움직이고 노래를 해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케이로프 님보다 더 신통한 기술이네요.” “이 정도야 고급 기술을 마스터 한 사람은 다 한다구. 너도 꾀 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 그러면 이 ‘신통한’ 기술을 배울 수 있을테니.”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정원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실망이 크겠군.” ******** 실망이 컸다. 매우 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싸웠다. “역시 문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내가 다른 방법으로 문을 잠그자고 했잖아요. 우리가 문에 걸어 놓은 레플리카를 에이드리안 님이 못 깰거라 생각하다니. 정말 멍청하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에요.” 미라벨이 다그쳤다. “다른 방법을 써봤자 에이드리안 님이 그깟 문 하나 못 여셨을 거라 생각하나,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이 상황은 문이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 문제였어.”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응수했다. “분위기 문제라뇨? 제 계획엔 아무 문제 없었어요. 차가운 물에 폭삭 젖은 여자를 보고 남자는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체온을 남자가 품에 안아 데워준다. 그렇게 여자를 위로하며 남녀 간에는 애정이 싹튼다. 게다가 정원에는 아무도 없다. 나갈 수도 없다. 갖혀버린 두 남녀 간에 새로운 애정이 싹 터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제가 읽은 연애 소설의 각본대로라면 지금쯤 에이드리안 님과 쥬느비에브는 ‘연인 간의 은밀한 교류’를 나누었어야 했다고요. 다시 말해... 제 계획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게다가 보다 깊은 관계를 대비한 옷도 준비해 두었는데. 빨간색은 남자의 본능을 이끈다고 연애 소설에 나와 있었단 말이에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구요.” 미라벨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역시 그 두 사람이 문제야. 그렇게 분위기가 안 잡혀서야.” 미라벨은 강한 결의로 찬 눈으로 케이로프를 바라 보았다.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죠.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아아.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두 사람은 각자의 결의를 다지며 정원을 떠났다. ******** 에이드리안은 오늘 하루 쥬느비에브를 16번 만났다. 애너벨 정원을 떠나 쥬느비에브를 집으로 데려다 준 이후, 자신의 연습실에서 4번. 엘크로이츠 학생회실에서 3번. 잠시 요기를 하려고 간 <르 뤼센부르>에서 1번, 그리고 유벨의 연습실에서 1번... 그 밖의 장소는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지만 에이드리안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우습지도 않은 여러 장치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의 연습실에서 쥬느비에브가 파우더 통-자신의 연습실에 왜 파우더 통이 있었는지 에이드리안은 알 수가 없었다-을 뒤집어 쓰질 않나, 학생회실에서 책장-너무나 튼튼하게 벽에 붙어 있는 책장이다-이 쓰러지질 않나, 그리고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유벨의 연습실 창문에 쥬느비에브의 머리카락이 걸린 것이었다. 머리카락 한 움큼이 창틈에 끼어 빠지질 않아 쥬느비에브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창틀에 뭔가 접착제가 붙어 있는 것 같았지만 쥬느비에브에게는 놀랄까봐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상한 약을 가지고 있는 하급생 덕분에 머리카락은 무사히 떨어졌지만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음모를 꾸민 자들은 기어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에이드리안은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했다. 하늘은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어스름한 길을 한참 걸은 뒤 에이드리안은 집 앞에 다다랐다. 왠지 모르게 피곤해 다리로 현관문을 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에드. 이제 오냐?” 또 다시 불쑥 나타난 사촌형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유벨, 나 쉬고 싶어. 귀찮게 하지마.” 에이드리안은 목에 맨 스카프를 풀어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이어 우당탕거리며 누군가가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 왔어요?” 어느새 계단을 내려온 쥬느비에브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하루종일 고생이 심했던 그녀였다. “응. 넌 괜찮은 거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쥬느비에브를 향해 에이드리안은 살짝 미소지어 주었다. 곧 이어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현관에는 몹시, 몹시도 피곤해 보이는 초췌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하, 이게 누구시더라.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아닌가?” 비꼬는 투로 말하는 에이드리안의 심술궂은 표정을 보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오호...호. 에이드리안 님. 저희는 에이드리안 님이 화가 많이 나셨는지 알아 보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내일 뵙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잠시 들렸습니다. 그렇죠? 케이로프 님.” “아아.” 에이드리안은 다소 굳은 표정의 미라벨과 이리저리 눈을 피하고 있는 케이로프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유벨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너희들, 그런데 몰골이 왜 그래? 어디서 하루종일 일하다 온 사람 같네.”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고 있던 미라벨이 잽싸게 유벨에게 뛰어 가 귓속말을 했다. “아하하-. 그래서 결국 실패?” 유벨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이 얼굴이 찌푸리고 유벨을 노려 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쥬느비에브는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에이드리안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유벨은 계속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참.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뭐냐. 그냥 남녀 관계는 부딪히면 되는 거라고. 이렇게!” 말을 마치고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쥬느비에브 쪽으로 힘차게 밀었다.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에이드리안은 그대로 쥬느비에브에게 안겨 버렸다. 그리고... 입술이 마주쳤다. 쥬느비에브는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깜빡였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도대체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왜 이렇게 가까이 있는거지? 나 지금 숨은 쉬고 있는 건가? 지금 숨을 내쉬어도 괜찮은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뭘까? 뭔가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 같기도 하고... 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속에서 울컥하는... 에이드리안은 가까이 있는 쥬느비에브의 뽀얀 피부에 눈을 깜빡였다. 유벨이 뭔가 저질렀는데 무슨 일이지? 쥬느비에브가 왜 이렇게 가까이 보이는 걸까. 그런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유벨은 왜 저렇게 계속 웃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진다. 촉촉하면서 부드러운... 음? 갑자기 이상하군. 속이 메슥거리는 듯한... “욱, 우웩...”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돌아서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계속 구역질을 해댔다. 두 사람의 ‘은밀한 교류’ 가 이루어지는 동안 계속 배를 잡고 웃고 있던 유벨과 자신들이 하루종일 설쳐댔지만 이루지 못한, 그러나 결국 너무나 쉽게 그것도 순식간에 이루어진 장면을 그저 멍하게 지켜보던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 괜찮아? 응? 괜찮은 거냐구.” “에이드리안 님, 쥬느비에브!!” 세 사람은 두 사람의 등을 토닥거리며 하녀장과 집사, 주치의를 불렀다. 이런저런 부산함을 떨며 유벨이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을 각자의 방으로 데려가자 남겨진 두 남녀,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관두는 게 좋겠어요. 키스 뒤에 구역질이라니...너무 기가 막힌 반응이네요.” “아아. 두 사람에게는 선천적으로 안 맞는 건지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인 우리들의 노력은? 게다가 에이드리안 님은 이미 눈치를 채고 계시는 듯한데 그 보복은 어떻게 막는담?‘ 하루종일 동분서주하게 움직인 것을 생각하며, 그리고 곧 있을 에이드리안의 보복에 더욱 침울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 “하우먼 선생님!! 어떻게 된 거죠? 두 사람 다 괜찮은 겁니까?” 유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치의를 다그쳤다. 하우먼 박사는 예의 사발에 시커먼 가루를 갈면서 쥬느비에브를 살폈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끙끙거리고 있었다. “상한 음식을 먹은 모양이군요. 다른 점은 이상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벨 도련님. 어허허.” “상한... 음식이라구요? 쥬느비에브, 오늘 하루종일 먹은 거 생각해 봐.” 끙끙거리며 쥬느비에브가 입을 열었다. “식당에서 에이드리안이 점심 사준거 먹고... 또 저녁쯤 야참 먹으러 간거 하고... 학생회실에서 미라벨 언니가 차를 한 잔 줘서 마셨고... 또... 음... 점심 시간에 식사 마치고 루이즈 아주머니가 싸 주신 쿠키랑 차를 마셨어요. 다른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피곤한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하녀장 루이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쿠키라뇨? 혹시 주방에 있던 주황색 봉지의 쿠키 말씀이신가요? 그거 너무 오래되어서 버리려고 놔둔건데 없어져서 계속 찾고 있었더니...저는 도둑 고양이가 가져간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에이드리안은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테라스로 나왔다.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뭘 잘 못 먹었길래 이런 걸까?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는 그였다. 밤은 한 참 깊어져 하늘에는 여기저기 밝게 빛나는 별이 박혀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팔을 기대어 별 구경을 했다. 시원한 밤 바람에 기분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머리를 눕히며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조용했다.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문득 조그만 문 소리가 귀에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테라스 창 쪽을 살펴 보았다. 쥬느비에브가 여느 때처럼 잠옷을 두 손으로 잡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 에이드리안. 괜찮아요?” 쭈뼛거리며 서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자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응. 넌 좀 괜찮은 거야? “네...”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쪼르르 달려와 테라스의 담에 매달렸다. “와아- 별이 많아요. 기분 좋다.” 밤공기를 마시려는 듯 눈을 감으며 쥬느비에브는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다시는 그...키, 키스해 달라고 안 조를게요. ” 왠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쥬느비에브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웅크리고 있던 팔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미안한데?” “아까 구, 구역질한 거요... 키, 키스하고나서 그런 반응이라니... 나도 내가 한심한 거 알아요. 공주님은 구역질같은 거 안 한단 말이에요.” “뭐 피장파장이니까 미안해 할 거 없어, 쥬르.” 쥬느비에브가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그 거 알아요? 옛날에 마망이 날 쥬르라고 불러줬어요. 사랑스런 나의 쥬르-이렇게요.” “돌아가셨다던 어머니?” “네. 아주 예쁜 분이셨는데.” 쥬느비에브는 슬픈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 봤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또 울어버릴 것 같았다. “쥬르.” “네?” 쥬느비에브는 다시 생긋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파란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쥬느비에브는 그에게 다시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얼굴이 붉어져 신고 있는 분홍색 슬리퍼만 가만히 쳐다 보고 있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쥬느비에브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두 손으로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감싼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쥬느비에브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눈 좀 뜨고 있지 마. 그렇게 분위기를 못 타서야.” 무안한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한 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있던 쥬느비에브가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붉게 물든 볼을 토닥였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은 참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해 줘요. 나말이에요, 공주님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 공주님보다 훠-얼씬 더 행복해요. 에이드리안이 날 많이 행복하게 해 줘요.”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 안기면서 쥬느비에브는 속삭였다. “그, 그런데... 오, 오늘 우리 처, 첫키스니까 기념일로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첫키스 아냐.” “에?” “네 번째.” “에? 언제? 난 기억 없어요.” “비밀.” 소리없이 웃음을 흘리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더욱 꼭 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가 왠지 기분좋게 느껴졌다. 밤공기가 시원하게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키스했습니다. 그리하여 공주님은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조그맣게 읊조리듯 그림책의 구절을 읽으면서 소녀는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하여 공주님은 구원받았습니다...” 제13음(第13音) 흑백소녀(黑白少女), 안느마리 “아센도르(주. ‘약하게’라는 뜻.), 아센도르, 아센도르!! 아센도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박력이 나옵니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무표정한 케이로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목소리가 제멋대로 크게 나오는 걸 어쩌라구요. 저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겨우 기본적인 이론 수업을 마친 쥬느비에브는 드디어 실기 수업에 들어갔다. 물론 이론 수업을 마치기 위해 얼마나 두 사람-물론 쥬느비에브와 케이로프-이 노력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노릇이다. 거의 매일매일 수업을 빼먹고 도망가는 쥬느비에브를 찾으러 케이로프는 하루도 빠짐없이 스콜라 안을 샅샅이 뒤져야 했고, 쉴새 없이 계속되는 케이로프의 강의 아닌 설교를 쥬느비에브는 무시무시한 인내심으로 참아 내야 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두 사람은 드디어 실제적인 레플리카 연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지금 막 깨닫고 있었다. “이렇게 연습을 하고도 진도가 안 나가는 사람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처음입니다! 도대체 집에 가서 연습은 하고 있는 겁니까?” 케이로프가 다시 목소리를 높여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케이로프가 이런 높은 톤으로 이야기 하다니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음, 에이드리안이 하루 연습을 봐줬었는데 그 후로는 나만 보면 눈을 피하더라고요, 왜 그런지 몰라요. 난 에이드리안이 가르쳐 주면 정말 열심히 할 생각이 있는데... 케이로프 님이 부탁 좀 해주실래요? 제 연습 좀 도와주라고요.” 케이로프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을 피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처럼 아름다운 레플리카의 소유자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의 그 음정 박자 전혀 맞지 않는 노랫소리를 들으면 분명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게 뻔하고도 뻔한 일이 아닙니까.” 쥬느비에브는 난처한 얼굴로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그럼, 유벨 오빠나 미라벨 언니에게 부탁할까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변에 엄청난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그들의 원망을 감당할 자신감 따위, 저에게는 없습니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이 계속 스콜라에 나오길 바란다면 그냥 혼자서 연습하십시오. 1 도르 정도 연습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방금 배운 것을 확실하게 연습하도록 하세요. 1도르 후에 오겠습니다. 그럼.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더니 연습실을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지쳐보인다고 생각했다. 왠지 삶에 지치고 세월에 지친 모습이라고 쥬느비에브는 다시 생각했다. “아아- 그럼 식당에나 가 볼까?” 케이로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쥬느비에브는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식당에 가득한 음식들을 생각하니 정말로 행복해지는 그녀였다. ******** <르 뤼센부르>의 테이크아웃 코너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자신들을 먹어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좋아해 마지 않는 꼬치구이를 비롯해, 다양한 색깔의 온갖 과일들, 야채와 고기가 섞인 맛있는 샌드위치, 먹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장식된 여러 가지 케이크, 갓 구운 쿠키와 비스켓, 그리고 말랑말랑한 캬라멜과 달콤한 사탕, 초콜렛 등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와 다양한 차 종류, 주스 종류가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높이가 1.3 레트[주. 참조]정도되는 유리 장식장 안을 황홀한 표정으로 들여다 보고 있었다. 유리 장식장 안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먹거리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불끈졌다. 그리고 유리 진열장에 매달려서 손을 흔들어 인심 좋아 보이는 요리사 아주머니를 불렀다. “이런. 쥬느비에브 아가씨. 우리 단골 손님이 또 오셨네요? 오늘은 그래 어떤 걸 줄까요?” “롤 아주머니!! 롤 아주머니!! 나 모롤라[주. 아르헨의 과일의 한 종류. 노란색 껍질에 쌓인 과즙이 많은 과실] 주세요!! 모롤라 3개!! 음... 에이드리안 하나 주고 나도 하나 먹고 하나는... 하나는 그냥 또 내가 먹을 거에요. 그리고 꼬치구이 2개랑 요기 분홍색 케이크 1조각, 딸기시럽 발린 케이크 2조각하고 샌드위치 2개랑 음... 크림쿠키 한 봉지하고.... 또... 과일사탕 한봉지!!” 롤 아주머니가 크게 웃으며 물었다. “이걸 혼자 다 먹으려고?” “네! 아, 아니 모롤라 하나는 에이드리안 줄 거에요.” 방실방실 웃는 쥬느비에브에게 기분좋게 웃어주며 롤 아주머니는 음식을 담을 종이 봉투를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 계속 헤실헤실 웃으며 곧 나올 간식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곧 롤 아주머니가 종이 봉투를 가지고 나와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 초콜렛 케이크 한 조각 주세요.” 쥬느비에브는 옆으로 다가와 주문을 하고 있는 소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한 소녀가 유리 진열장 안을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 처음 보는 사람의 인사가 서먹한지 갈색 머리의 소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웃음을 띄며 롤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종이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건 내가 그냥 주는 거니까 먹어요.” 인심좋게 웃으며 롤 아주머니는 쥬느비에브의 손에 막대사탕 하나를 쥐어 주었다. “헤에- 난 롤 아주머니가 너무 좋더라.” 쥬느비에브는 웃음을 흘리며 베이지색 치마 자락을 펄럭이며 기분좋게 뜀박질을 했다. “랄라라 랄라라-” 콧노래를 부르며 식당을 나선 쥬느비에브는 아까 본 갈색 머리 소녀가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음? 아까 봤던 갈색 머리 소녀잖아. 나랑 같은 쪽으로 가네.’ 그렇게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갈색 머리 소녀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쥬느비에브의 미소를 본 갈색 머리 소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막대사탕을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함이 입 안으로 퍼졌다. 행복함에 웃음을 짓던 쥬느비에브는 갈색 머리 소녀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소녀는 쥬느비에브의 미소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미소와 외면을 주고 받았다. ******** 약 100레트(주. 참조)정도를 걸었을 때, 일은 벌어졌다. 한 무리의 소년, 소녀들이 무슨 일인지 쥬느비에브가 있는 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쥬느비에브를 지나쳐 저 편으로 뛰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날리는 흙먼지에 기침을 하면서 옆에서 걷고 있었던 갈색 머리 소녀를 쳐다 보았다. 갈색 머리의 소녀는 흡사 무서운 유령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음, 왜 그래요?” 쥬느비에브는 간식거리가 든 종이 봉투를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갈색 머리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별안간 갈색 머리 소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멀뚱멀둥 갈색 머리 소녀를 쳐다 보았다. 갈색 머리 소녀의 발치에 뭉개진 케이크 상자가 보였다. 갈색 머리 소녀는 계속 굵은 눈물 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동변상련의 심정을 느꼈다. “저, 저기요. 상심하지 마세요. 이 스콜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에요. 저도 당해 봐서 알아요. 저는 글쎄 어떤 사람이 날 치고 가는 바람에 그 맛있는 꼬치구이를 고기도 몇 개 먹지 못하고 떨어뜨렸다니까요? 이 스콜라에서 생활하려면 다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저처럼 이렇게 종이 봉투에 담아서 품에 안고 가세요. 그래야 안떨어뜨려요. 아셨죠?” 쥬느비에브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는 갈색 머리 소녀를 보자 쥬느비에브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저, 저기요. 이, 이거라도 드세요. 모롤라에요. 드셔보셨어요? 아주 맛나요. 음... 이것도 드실래요? 과일 사탕인데 말랑말랑해요. 이것도 아주 맛나요. 나 이거 자주 먹어요.” 쥬느비에브가 내미는 모롤라와 과일 사탕을 손에 받으며 갈색 머리 소녀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다, 당신은 ‘화이트’로군요. 그것도 순수한 100% 화이트. 나에게 모롤라와 과일사탕을 주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어요.” 어느 새 눈물을 그친 갈색 머리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쥬느비에브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당신같은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내 친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군요. 내 친구가 되어 주겠어요? 사실 난 낯을 가리는 편인데다 평민 출신이라서...친구가 없어요. 귀족 출신들 사이에 평민인 내가 끼어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에? 사실은 나도 평민 출신이에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갈색 머리의 소녀는 기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역시 우린 친구가 될 운명인가 봐요. 서로의 처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잖아요. 난 16살이에요. 당신은요?” “나도 16살이에요. 우리 동갑이네요?” “그럼 우리 지금부터 친구가 되기로 해요! 그리고... 지금부터는 말 놓자구!” 갈색 머리의 소녀가 기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친...구...? 으, 으응... 나, 나도 친구는 없었어! 주위에는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뿐이거든. 음... 그래. 그럼 우리 친구가 되기로 해! 나... 음... 아주아주 기뻐. 처음으로 친구가 생겨서.”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발그레해 졌다.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친구라니...나에게도 드디어 친구가 생겼다! “내 이름은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너는?” “내 이름은 쥬느비에브야. 쥬느비에브라고 불러 줘.” “에? 쥬느비에브라고? 에이드리안 회장의 약혼녀와 이름이 같잖아?” “아! 그 거 나야, 나. 얼마 전까지는 평민 계급이었는데 에슈비츠 공작 님의 양녀가 되었거든.”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순간 안느마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곤란한데...”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사실 난 <라데팡스> 소속이거든. 네가 에이드리안 회장의 약혼녀라면 <엘크로이츠> 소속일 테고... 곤란하구나.”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지었다. 스콜라에 들어와서 처음 사귄 친구가 ‘친구’가 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너무 슬펐다. “그럼 우리 친구 못하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느마리에게 물었다. “그럴 수야 없지! 나 지금부터 엘크로이츠에 가입하겠어! 내 친구를 위해서 그쯤 못하겠니?” 안느마리가 가슴을 주먹으로 탁 치며 말했다. “아, 안느마리...” 쥬느비에브는 왠지 모르게 감격하여 안느마리를 얼싸 안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얼떨결에 친구가 생긴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 “누구야?” 에이드리안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다 말고 쥬느비에브가 데리고 온 인물을 뚫어져라 쳐다 봤다. “에이드리안. 오늘 길거리에서 사귄 내 친구에요. 이름은 안느마리라고 해요. 원래 <라데팡스> 소속인데 오늘부터 <엘크로이츠>에서 활동하겠대요. 내 친구가 되어 주려고요. 허락해 줄거죠?”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길거리에서 사귄 친구?”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옆에서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자기 소개를 했다.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라고 합니다. 쥬느비에브의 친구에요.” 쇼파에 앉아 있던 유벨이 벌떡 일어서 물었다. “올? 평민 출신인가?” 쥬느비에브가 발끈해서 대답했다. “유벨 오빠! 안느마리가 평민 출신이긴 하지만 아주 좋은 내 친구에요! 이상한 선입견은 가지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나도 원래는 평민 출신이라구요.” 쥬느비에브의 반발에 머쓱해진 유벨은 에이드리안에게 알아서 하라는 눈짓을 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쥬느비에브의 말에 안느마리는 무척 감동 받은 표정이었다. “에이드리안 님! 제가 비록 평민 출신이긴 하지만 쥬느비에브의 정말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쥬느비에브의 옆에서 언제나 그녀를 지키겠어요! 부디 엘크로이츠의 가입을 허가해 주세요.” 간절한 안느마리의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좋아. 안느마리 양. 엘크로이츠의 가입을 허가하지. 많이 모자란 쥬느비에브지만 잘 부탁해. 그리고 쥬느비에브, 좋은 친구를 사귀었구나. 잘 대해줘.”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서로 얼싸 안으며 기뻐했다. “고마워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나, 너무 좋아요!!” “에이드리안 님! 역시 당신도 화이트군요. 당신도 쥬느비에브와 같이 100% 화이트에요. 엘크로이츠의 가입을 허가해 주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쥬느비에브의 약혼자로서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임에 틀림없어요.” 안느마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 에이드리안과 유벨을 뒤로 하고 새로이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웃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 “뭔가 수상하지 않아? 평민 출신의 라데팡스라... 스콜라에서 쥬느비에브의 실물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별로 없어. 다른 뜻이 있어서 접근한 것은 아닐까?” 유벨이 창 밖으로 안느마리의 모습을 살펴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솔직하고 좋은 아이인 것 같던데? 뭐, 그래도 한 번 조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별 관심 없다는 듯 책장을 넘기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뜻을 알아들은 유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서다 고개를 돌려 물었다. “참, 케이로프랑 미라벨이 안 보이던데?” 에이드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한 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 “왜? 저번 키스 소동때문에?” 유벨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알면서 묻지 마.” “최고의 형벌이로군. 그 녀석들 모습이 선한걸? 사랑하는 에이드리안 님의 모습을 못 보게 되다니... 눈물이라도 흘렸겠군. 쿡쿡.” “잘 아네. ...그리고 유벨, 너도 내가 벼르고 있다는 거 알지?” 폭소를 터뜨리던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섬뜩한 말에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섰다. ******** 화창한 날씨였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잔디밭에 앉아 꼬치구이를 손에 들고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솔직하고 사심없는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는 참 좋았다. 여태까지 친구다운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쥬느비에브에게 안느마리는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친구와의 수다라니... 너무 기분 좋았다. “저기, 쥬느비에브. 나 사실은 아까 에이드리안 님을 보고 너무 가슴이 떨린 것 있지?” 안느마리가 하늘을 쳐다 보며 말했다. “응? 왜?” 쥬느비에브는 꼬치구이의 고기를 하나 쏙 빼먹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은 사실 우리 스콜라의 여학생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라구. 난 오늘처럼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야. 정말이지 그 섬세한 이목구비라니... 나, 남자를 보고 그렇게 가슴이 떨린 건 처음이야.”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가 눈을 껌뻑거렸다. 안느마리는 그런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하하. 그런 표정 하지마. 솔직히 남자로서 너무 멋진 분이지만 난 내 친구의 약혼자를 넘보는 그런 몰상식한 애는 아니라구. 거기다 에이드리안 님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쥬느비에브의 약혼자로서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난 언제나 에이드리안 님과 쥬느비에브의 편이야. 친구의 행복을 빈다고나 할까. 100% 화이트인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 님의 영원한 행복을 빌며!” “아, 안느마리... 나 안느마리가 너무 좋아. 이것도 먹어.” 쥬느비에브는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며 안느마리의 말에 진심으로 감격했다는 뜻으로 크림 쿠키 봉지를 내밀었다. ‘안느마리는 정말 좋은 애야. 근데 아까부터 화이트가 어쩌구하던데 무슨 뜻이람?’ 그렇게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를 향해 베시시 웃었다. 정말이지 좋은 날씨였다. ******** 엘크로이츠 학생회실은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이 가지고 온 보고서를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유벨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참. 쥬느비에브는 어떻게 이런 애를 알게 된 거지?" “길거리에서 사귀었다잖아. 어디보자...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현재 16세. 스콜라 10학년 재학 중. 평민 출신. 그리고... <라데팡스>의 풍기(風紀)위원. 그것도 지하에서 활동하는 시크릿 멤버(secret member)로군. 꽤 조직원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나서지는 않지만 이미 악명이 자자하다더군. <라데팡스>에서는 일명 '징계의 여왕'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흑백소녀’라고도 한다던데 이건 왜 이런지 잘 모르겠군. 하여튼 20델라[주. 아르헨의 시간 단위. 1델라는 약 1일.] 전에도 라데팡스 녀석 하나가 거의 죽을 정도로 다쳤다고 해. 성격에 결함이 있어서 가까운 친구도 없다는군. 혹시 에스프라드 형이 보낸 건... 아니겠지?" 에이드리안은 보고서를 덮고 눈을 감았다. "쥬르는 지금 어디있어?“ 에이드리안의 긴장된 목소리에 유벨은 보고서를 집어들며 입을 열었다. “지금 애들을 풀어서 찾게 하고 있어.” 에이드리안은 차갑게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자. 찾아봐야 겠어.”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든 에이드리안은 웃옷을 챙겨들고 걸음을 옮겼다. 굳은 표정의 유벨이 그의 뒤를 따랐다. ******** 해가 지고 있었다. 안느마리와 실컷 수다를 떤 쥬느비에브는 베이지색 원피스에 묻은 마른 풀을 떼어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느마리, 집에 가 봐야지? 난 에이드리안 사택에서 같이 살아. 안느마리 집은 어디야?” 안느마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택에서 살아. 집이 좀 멀거든. 게다가 내가 운영하는 가게도 이 근처에 있어서 집에서 다닐 형편이 못 돼. 평민이라서 그냥 조그만 사택이 주어졌지만 꽤 살만 해. 아담하거든. 나중에 초대할게. 에이드리안 님의 사택과는 방향이 좀 먼데... 아, 집까지 내가 바래다 줄게. 오늘 친구가 된 기념으로.” “그, 그럴 필요 없어. 난 혼자 가도 돼.”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호의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바래다 준대두.” 안느마리는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끌었다. 쥬느비에브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안느마리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 쥬느비에브를 보며 안느마리는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조금 차가워진 공기가 너무 시원하게 느껴졌다. 하늘을 쳐다 보며 친구와 함께 걷는 것이 아주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쥬느비에브는 오늘 깨닫게 되었다. 안느마리와 쥬느비에브가 10시르(주. 참조) 정도를 걸었을 때, 그들을 만났다. 한 무리의 소년, 소녀들이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그들이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멈추어 서서 안느마리를 쳐다 보았다. 안느마리도 멈추어 서서 뚫어져라 그들을 쳐다 보고 있었다. 소년, 소녀들 중 특히 거만하게 생긴 한 소년이 멈추어 서더니 소리쳤다. “너희들! 지금 길 한 가운데 막고 서서 뭐하는 거야! 우리가 누군줄이나 알아? 감히 우리 앞길을 막다니 건방진 계집애들이로군.” 쥬느비에브는 소리를 지르는 소년이 너무 얄미워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흥! 이게 어디 길 가운데에요? 옆에 이렇게 공간이 많은데. 당신들이 알아서 지나가면 되잖아요! 왜 괜히 시비거는 거에요?” 소년의 옆에 서 있던 허영기가 다분해 보이는 소녀가 앞으로 나와 말을 받았다. “이 거. 웃기는군. 촌스러운 계집애가 지금 어디서 건방지게!” “뭐라고요?” 쥬느비에브는 발끈해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그만해. 쥬느비에브. 저 사람, <라데팡스> 11학년 클래스 C의 대표야. 거기다 백작가의 자제라고. 함부로 굴면 안 돼.” 겁에 질린 표정의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고 말렸다. “하지만. 안느마리... 하지만... 하지만 먼저 시비를 건건 저 사람들이잖아...” 쥬느비에브는 왠지 분해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이 금새라도 볼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았다. “...!” 쥬느비에브의 눈물을 본 안느마리의 눈동자가 갑자기 흐릿해 졌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지자 너무 놀라 눈물을 글썽인 채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안느마리, 괜찮아? 얼굴이 하얘. 안느마리!!”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너희들은 처음부터 순수한 블랙이었지. 100% 블랙. 그래. 아까 내 사랑스런 케이크를 뭉갠 것도 너희들이었지. 게다가 나의 친구,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쥬느비에브의 눈에 눈물을 보이게 하다니. 그래. 내 케이크를 뭉갠 것으로 미루어 보아 너희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인간들임에 틀림없어. 게다가 그딴식의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너희들은 머저리에다 천치, 바보임에 틀림없지. 순수한 100% 화이트를 감히 블랙으로 물들이려고 하다니... 그래. 블랙을 만난 건 거의 20델라[주. 아르헨의 시간 단위. 1델라는 약 1일.]만이군. 난 이미 <라데팡스>를 떠났지만 이런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이 나의 임무. 라데팡스 탈퇴 기념으로 모두 죽여 주지! 훗후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 “아, 안느마리가 이상해. 안느마리가 이상해. 흐엉. 흐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무엇엔가 홀린듯한 안느마리의 상태에 놀라 결국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느마리는 무리지어 있는 소년, 소녀들 쪽으로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안느마리의 차갑고도 소름끼치는 눈빛에 순간 움찔한 소년이 소리쳤다. “뭐, 뭐하는 것들이야, 이 것들은? 둘이서 완전 연극을 하는군.” “죽어서나 그렇게 지껄여 보렴. 아하하하하하-” [크어어어어어어어 끼에에에에에에엑-----] 무시무시하고도 기괴한 레플리카가 방출되었다. 들을수록 소름이 끼치는 소리였다. 안느마리는 크게 입을 벌리고 레플리카를 방출하고 있었다. 음침하고 기괴하며 소름끼치는, 어디선가 피가 튀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끔찍한 소리에 소년은 눈을 뻐끔하게 뜬 채로 쓰러졌다. 옆에 서 있던 소녀는 눈을 시뻘겋게 뜨고, 두 손으로 목을 잡은 채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풀썩하며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하- 블랙은 모두 사라져야 해. 훗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하-” 안느마리는 목표했던 것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주위의 나무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를 찾아 다니던 유벨과 에이드리안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안느마리를 본 것은 그 때였다. “하아아아아아아-” 사태를 파악한 유벨이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짙은 녹색의 빛이 어리면서 안느마리를 감쌌다. 갑작스런 레플리카의 충돌로 안느마리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쓰러지는 안느마리를 재빨리 유벨이 받아 안았다. 에이드리안은 주저 앉아 울다가 결국 지쳐서 꺼억 꺼억 소리만 내는 쥬느비에브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에이드리안. 안느마리가 이상해요. 안느마리가 이상해요. 엉엉.”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쥬느비에브를 안으며 다독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우선 집에 가자.” 지쳐 쓰러진 쥬느비에브를 안고 에이드리안은 발걸음을 떼었다. 안느마리를 업고 있는 유벨의 표정이 매우 일그러져 있었다는 것을 이 때의 에이드리안은 알지 못했다. ******** 겨우겨우 쥬느비에브를 진정시킨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서재에서 유벨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호러야. 호러. 그 기괴한 소리라니.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무시무시한 레플리카는 본 적이 없어. 일명 ‘징계의 소리’라... 공포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게 아닐까? 저러니 성격에 결함에 생길 수 밖에... 게다가... 감추어져 있는 그 진정한 공포는...” 유벨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쿡. 난 웃기던걸? 쥬느비에브의 우는 얼굴을 보고 그랬다잖아. 평상시에는 얌전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까? 시크릿 멤버라... 그럴 수밖에 없겠군. 저런 성격을 드러내놓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 뭐, 쥬느비에브의 보디가드 노릇은 톡톡히 하겠군.” 에이드리안은 슬쩍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에드...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야. 넌 진실을 몰라. 사실...” 유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컥하고 문소리가 들렸다. 하얀 치마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 헤실헤실 웃으며 쥬느비에브가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 안느마리가 깨어났어요. 어서 들어와, 안느마리!” 문 뒤쪽에서 힐끔 눈치를 보며 안느마리가 들어왔다. “죄, 죄송해요... 저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정말 꾹꾹 참았는데... 쥬느비에브가 우는 걸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구요.”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웃어주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엘크로이츠에 들어온 걸 환영해. 안느마리 양. 앞으로도 쥬느비에브를 계속 잘 부탁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손을 마주 잡고 깡총깡총 뛰며 기뻐했다. “잠깐 기다려, 에이드리안! 난 반대야!!” 잔뜩 지푸린 얼굴로 유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이드리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 뭐 다른 문제라도 있어? 그녀의 조직원도 대부분 엘크로이츠 소속을 희망했다고 하던데.” “그녀가 아니야...” “음?” “여자가 아니라고. 남자라고!!! 저 녀석!!!” “네가 어떻게 알아?” “아까 업고 가는데 느낌이 없잖아!” “아...” 에이드리안은 뭐 별 거 아니라는 듯 찻잔을 기울이다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뭐...라고? 남...자?” 에이드리안이 안느마리를 놀란 눈으로 쳐다 보자 쥬느비에브도 눈을 멀뚱 멀뚱거리다가 안느마리의 얼굴 앞에 다가가 물었다. “안느마리, 남자야?” 안느마리는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저... 속은 남자긴 한데...그게... 저기 쥬느비에브, 내가 남자라면 내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거니?” “아냐, 아냐. 난 안느마리가 남자라도 좋아! 내 하나뿐인 친구인걸,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 우정을 확인한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서로 부둥켜 안았다. 안느마리는 눈물을 글썽였고 쥬느비에브는 뭐가 좋은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당장 안 떨어져?” 에이드리안의 화난 목소리에 부둥켜 안고 있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안느마리는 내 친구에요!” 쥬느비에브가 뿌루퉁하게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소리쳤다. “너 지금 내 앞에서 공개적으로 외도를 해보겠다는 거야? 약혼자 앞에서 남자 친구를 사귀겠다고?” 팽팽하게 맞서는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을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짓던 안느마리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싸우지 마세요. 그리고 에이드리안 님. 저 때문에 싸우실 필요 없어요. 에이드리안 님이 염려하실 그런 일은 없어요. 전... 유벨 님이 좋거든요.” 안느마리의 말에 마주 서서 서로를 노려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그녀(...)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갑자기 대화의 주제에 오른 유벨도 또한 안느마리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 보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좋다니?” 퍼렇게 질린 얼굴로 유벨이 물었다. “사실 저... 유벨 님이 절 엎고 오실 때 조금은 정신이 남아 있었거든요. 그 때 느껴지던 넓은 어깨와 듬직한 등...바람에 날리는 부드러운 회색 머리...유벨 님에게 전 한 눈에 반해버렸어요. 물론 에이드리안 님이 조금 더 멋진 건 사실이지만 사랑에 빠지면 외모가 문젠가요?”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유벨은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사촌 형을 그저 쳐다 볼 뿐이었다. “안느마리, 유벨 오빠가 좋은 거야? 유벨 오빠랑 결혼할 거야? 그럼 우리도 한 가족이구나! 꺄아아아아아. 너무 좋다!” “쥬느비에브도 찬성이구나! 역시 내 친구라니까!!! 꺄아아아아아-”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다시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그러다가 안느마리는 에이드리안 쪽으로 얼굴을 돌려 흐뭇한 미소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전 남자가 좋다는 말씀이에요. 여자는 싫어요. 그리고 비록 몸은 이 모양이지만 전 어디까지나 여자니까 여자로 취급해 주세요. 아셨죠? 호적에도 여자로 올라와 있답니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가 깔깔 웃으며 서재를 나가자 에이드리안은 하얗게 질린 채 굳어버린 사촌 형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큰 일이다. 유벨. 비앙카 아주머니가 실망이 크시겠어. 저런 신부감이라면.” 에이드리안은 안 됐다는 듯 한숨을 쉬고 서재를 나갔다. 그 이후로 유벨이 얼마나 오랫동안 서재에 남아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과 몇 도르 전까지만 해도 밝고 희망찬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한 순간에 침울해 질 수 있다는 인생의 교훈을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유벨이었다. ******** 갑자기 나타난 케이로프와 미라벨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열심히 하던 행동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또 잔소리 시작이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분명히 1도르간 연습을 하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어째서 여기서 이렇게 놀고 있는 겁니까?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십니까!" 무표정하게 케이로프가 물었다. 집 앞 공터에서 안느마리와 방금 딴 나무 열매를 열심히 먹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는 거겠죠. 너무 열심히 공부만 하면 대머리 된다구요. 내가 대머리가 되면 에이드리안이 너무 싫어 할 것 같아서요...” 생긋 웃는 쥬느비에브에게 케이로프는 눈을 번득였다. “지금...뭐라고 하셨습니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지금 그런 말이나 할 때입니까! 공부 못해서 무시당하고 사는 불쌍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도대체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은 왜 그렇게 멍청한 겁니까! 그러니 스승인 나까지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스콜라 생활 어언 12년!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때문에 내려간 나의 랭크가 지금 얼마인지 아십니까!” “에헤헤헤. 죄송해요. 근데 미라벨 언니는 여기 어쩐 일이세요?” 옆에서 케이로프의 울분 섞인 말을 듣던 미라벨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야 뭐, 당연히 에이드리안 님의 모습을 몰래 훔쳐 보려고...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그게....저... 아-니, 지금 쥬느비에브는 수업은 제대로 받지 않고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자고로 우아한 레이디는 보다 확실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걸 모르시는 건가요? 도대체 그렇게 멍청해서야 커서 뭐가 되겠냐고요? 에이드리안 님의 쥬느비에브의 무식함에 파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어쩔 건가요!” 미라벨은 갑자기 흥분해 쥬느비에브를 향해 소리쳤다. 쥬느비에브는 늘 듣던 잔소리라 헤실헤실 웃으며 두 사람이 흥분을 가라 앉힐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서 조용히 분노하고 있는 흑백소녀, 안느마리가 있다는 것을 쥬느비에브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블랙이군. 블랙이야. 오늘은 블랙을 아-주 자주 만나는 군.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나의 친구 쥬느비에브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악한 블랙. 그래. 이번에는 남녀 한쌍이로군.... 남자! 쥬느비에브가 멍청하다는 둥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은 쥬느비에브의 천재적인 재능을 시기해 미리 그녀의 앞길을 막으려는 비열한 악당이 틀림없어. 여자! 에이드리안 님이 파혼을 하자는 둥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은 쥬느비에브의 행복을 짓밟고 에이드리안 님을 빼앗으려는 못된 악녀임에 틀림없군. 블랙이 화이트의 행복을 짓밟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내가 가만 있지 않겠어. 모두 죽어 봐라. 100% 화이트는 내가 지킨다. 훗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하하-” [끄어어어어어억- 이히히히히히히-] 또 다시 쏟아지는 기괴하고 참혹한 소리에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눈이 휘둥그레 져서 소리쳤다. “이, 이게 뭔가요! 설마 이런 소름끼치는 소리가 레플리카는 아니겠지요?” “나도 알고 싶군.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아하하하하하하하- 다아- 죽어 버려라-” 또 다시 미친 듯이 포효하는 친구를 보고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지었다. “흐, 흐엉, 흐어어어어엉. 안느마리가 또 이상해. 안느마리가 이상해애∼” 또 다시 주저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쥬느비에브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안느마리, 놀란 눈으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이리저리 몸을 숨기는 미라벨과 케이로프... 벌써 휘황찬란하게 달이 떠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14음(第14音) going Out(1)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는 아침 햇살을 무시하고 에이드리안은 더 깊숙하게 침대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베개의 시원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볼을 부볐다. 오늘따라 이불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좀 더 이불 쪽으로 다가가 꼬옥 끌어안았다. 팔 안으로 감겨온 몽실몽실한 이불을 품 안으로 안으며 에이드리안은 눈을 꼭 감았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불에 얼굴을 묻은 에이드리안은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시간을 기분 좋게 즐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이드리안은 코 끝을 간지르는 무언가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몸을 뒤척이자 이번에는 목이 간지러웠다. 에이드리안은 귀찮아져서 손으로 목을 쓸어내고 다시 돌아 누웠다. 다시 잠이 들려는 순간, 에이드리안은 목 왼쪽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은 어릴 때 일로나 할머님이 키웠던 강아지한테 물렸던 꿈을 꿨나 보다 하고 다시 뒤척이다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침대 위에 까만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손을 가져가 눈을 비볐다. 다시 침대 위를 보았다. 자신이 본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음... 모롤라...” 쥬느비에브가 입맛을 다시며 잠들어 있었다. 하얀 면 잠옷을 입고 웅크리고 자고 있는 그녀를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쳐다 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쥬느비에브를 옆으로 밀치고 침대 가로 기어 나왔다. 그로서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왜 그녀가 여기서 자고 있는 걸까?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꿈이라면 정말 이상한 꿈이로군. 이 여자는 이제 꿈에서까지 날 귀찮게 하는군. 쥬느비에브가 끙 하며 몸을 뒤척였다. 순간 이불이 돌돌 말아 올라가며 쥬느비에브의 하얀 잠옷 치마가 팔럭거리며 뒤짚어 졌다. 그리고 하얀 다리가 쏘옥 모습을 드러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웅얼거리며 이불 위로 다리를 올리고는 다리 사이로 이불을 질질 끌어당겼다. 멍하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하얀 다리를 본 순간 질겁을 해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른 치맛자락을 내려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고는 옆으로 돌아 누웠다. 쥬느비에브가 돌아 누운 순간 에이드리안은 그만 굳어 버렸다. 넓게 파진 잠옷 목선이 어깨로 흐르면서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만 것이었다. 아무리 약혼자라지만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 법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창백한 표정으로 다시 쥬느비에브를 돌려 눕혔다. 확실히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엄연히 눈 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이 상황을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녀들을 부를까? 아니지. 그럴 수는 없었다. 다 큰 남녀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스캔들도 보통 스캔들이 아니었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삼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여자는 왜 여기서 저렇게 자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걸까? 침대의 휘장을 걷어내 날이 밝았다는 것을 확인한 에이드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가 손등으로 살짝 뺨을 두드렸다. “이 봐. 일어나. 일어나 보라니까.” 쥬느비에브를 깨우기 위해 뺨을 두드리던 에이드리안은 순간 행동을 멈추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앞이 아득해지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결국 결심했다. 쥬느비에브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방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 같았다. 하녀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쥬느비에브를 살짝 품에 안았다. 그리고 들어올리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 때 갑자기 잘 자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갑작스러운 몸부림으로 에이드리안은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쥬느비에브 위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쥬느비에브의 팔꿈치에 턱이 부딪힌 에이드리안은 신경질을 내며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여튼 도움을 안 준다니까...” 에이드리안은 투덜거리며 침대 위로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해서 일으켰다. 그러나 몸을 일으켜 균형을 잡으려는 순간 쥬느비에브가 두 팔을 들어 목을 끌어당겼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던 에이드리안은 다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가지마, 모롤라...” 쥬느비에브는 힘 없이 중얼거리며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가슴 쪽으로 꽉 끌어당겼다. 에이드리안은 뺨에 느껴지는 몽실몽실한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쥬느비에브를 밀쳐 냈다. “야! 안 일어나? 안 일어날 거야?” 계속되는 민망스런 일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된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계속되는 소음에 살며시 눈꺼풀을 들었다.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쥬느비에브는 한 쪽 손으로는 이불을 잡고 한 쪽 손으로는 천천히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천연덕스러운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단단히 화가 난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쳤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이드리안은 순간 휘청하며 다시 쥬느비에브의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쥬느비에브가 무심코 당긴 이불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마가 뜨끈뜨끈한 것 같았다. 그 때 비로소 잠에서 깬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빠알갛게 물들이며 침대 위에 굳어 있었다. 깊게 파진 잠옷 목선 위로 에이드리안의 숨결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안느마리와 미라벨 언니가 빌려 준 연애 입문서에 분명히 쓰여 있었다. 남자는 여자와의 스킨쉽을 원한다고. 그리고 책에 써 있던 그 밖의 낯 뜨거운 일들이 머리 속으로 하나씩 스쳐갔다. 결혼을 하면 더 부끄러운 일이 많다고 미라벨 언니가 말했다. 그러나 그런 낯뜨거운 일들은 결혼 후에 하는 일이라고 미라벨 언니가 분명 말했었다. 에이드리안이 일어서는 것을 보며 쥬느비에브도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쏘아 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 보는 쥬느비에브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쥬느비에브가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슴을 들썩이며 입을 열었다. “이 나쁜...어떻게 자는 사람을...게다가 우리는 결혼도 안 했는데...”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힌 얼굴로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았다. “너야 말로 너무 앞서 가는 거 아냐? 간도 크게 남자가 자는 방에 기어들어 오다니...” 쥬느비에브는 아랫입술을 꾹 다물며 옆에 있던 베개를 힘차게 에이드리안에게 던졌다. 에이드리안은 놀란 얼굴로 멍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았다. 자신에게 베개를 던지다니? 베게를 던져?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에이드리안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쥬느비에브를 쏘아 보다 그녀가 옆에 놓여 있는 다른 베개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가 베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쥬느비에브도 질세라 베개 끝을 꾸욱 잡고 놓지 않았다. “너, 안 놔?” “에이드리안이나 놔요. 이 나쁜 사람. 저-질, 말미잘 같은 사람!” “뭐라고?” 에이드리안은 힘을 줘 베개를 당겼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힘에 대항하지 못하고 베개와 같이 에이드리안에게로 돌돌 딸려 와 에이드리안 위로 발랑 넘어졌다. 쥬느비에브는 엉겹결에 에이드리안의 잠옷 상의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투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떨어져 침대 위로 데굴데굴 굴렀 다녔다. 미쳐 충격을 예상치 못한 에이드리안도 쥬느비에브와 함께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으응...정말이지...너란 여자는...”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고는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를 밀쳐 내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지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황한 에이드리안과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쥬느비에브가 문 쪽으로 홱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이, 에드! 잘 잤...냐?”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방으로 들어온 유벨은 자신의 눈에 펼쳐진 광경을 발견하고 천천히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뒤엉켜 있는 두 남녀를 본 순간 유벨은 자신이 대단한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잠옷 상의의 단추가 반이상 떨어져 고스란히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에이드리안과 치마가 말려 올라가 뽀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쥬느비에브, 이 두 사람의 뒤엉켜 있는 자세가 너무 민망해 유벨은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유벨의 시선이 쥬느비에브를 향하는 것을 보고 눈을 돌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드러난 다리를 보고 인상을 쓰며 옆에 있던 하얀 이불을 당겨 재빨리 그녀 위로 덮었다. 그리고 유벨에게 소리쳤다. “뭘 봐?” 에이드리안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유벨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바쁜 거 같은데 난 이만 가마.”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방을 나가는 유벨을 확인한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거세게 밀쳐냈다. “정말! 너 때문에 오해 샀잖아! 어떻게 할꺼야?” 잔뜩 화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내 탓이에요? 에이드리안이 먼저 나한테 그렇고 그런 일을 하려고 했잖아요! 말해 두지만 난 절대 결혼 전에는 키스만 허용이에요!” “아∼ 그러셔? 이봐요, 레이디. 난 어린애한테는 취미도 흥미도 없으니 염려 끄시지 그러십니까? 그러는 이쪽도 결혼 전에는 키스만 허용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함부로 남의 침실에 난입하는 건 용서치 않겠습니다. 레이디. 그러니 어서 제 방에서 나가주시죠?” 에이드리안의 비꼬는 말투에 단단히 심통이 난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홱 돌리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뿌루퉁한 얼굴로 에이드리안에게 혀를 쏙 내밀고는 침대 밑으로 내려가 방 문쪽으로 달려 갔다. 방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선 쥬느비에브는 다시 에이드리안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말했다. “에이드리안, 바아아아-보. 알고보니 정말 저질이에요.” 그리고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밖으로 나갔다.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치며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뭐야.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람...머리 아파...” ******** 에이드리안은 아침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신의 방에 올라와 있었다. 아침부터 너무 피곤했다. 아침의 소동을 생각할 수록 더 피곤해 졌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드레스룸 쪽으로 갔다. 연한 회색의 바지를 입고 하얀 셔츠를 걸친 에이드리안은 거울 앞으로 가 힘없이 셔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단추를 다 잠그고 검은 색 타이를 목에 두르던 에이드리안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목을 거울에 비췄다. “뭐야, 이거.” 목에 빨간 생채기가 나 있었다. 순간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아침의 소동을 다시 생각하며 씩씩거리며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몇 개의 문을 지나 쥬느비에브의 방문을 벌컥 열어 제꼈다. “쥬르!!” 쥬느비에브는 하얀 색과 검은 색이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있는 원피스를 입고 까만 양말에 하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쇼파에 앉아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책을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한 듯 얼른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뒤로 숨겼다. 그러나 <연애대백과>라는 책 제목을 이미 에이드리안이 본 뒤였다. 모른 척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도 아직 아침의 일로 화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숙녀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시다니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에요. 예의를 지켜주세요.”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꾹 물고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목의 생채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거 어떻게 할거야?”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 에이드리안의 목을 바라보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그, 그건 키스마크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바람 핀 거에요? 난 그런 거 정말 못참아요! 어떻게 할 거에요? 훌쩍. 결혼도 하기 전에 바람을 피우다니...바람둥이...훌쩍...훌쩍...흐어어어어어어엉-” 갑자기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쏟아내자 에이드리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순간 기가 막혀 쥬느비에브에게 소리 질렀다. “울지 마. 네가 그런거잖아!!” 쥬느비에브의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끔뻑거리며 그를 쳐다 보았다. “내가요? 언제요?” “아침에 그랬잖아!“ 쥬느비에브는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그런 적 없어요. 그런 낯뜨거운 일을 내가 어떻게 해요. 음...자다가... 그랬나? 아침에 산만큼 쌓인 모롤라 먹는 꿈 꿨는데...그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 쥬느비에브는 빨간 사과만큼 얼굴을 붉히며 뒤돌아섰다. “음...그게....저기 에이드리안. 그 거 길 가다가 넘어졌다고 하면 안될까요?” 살짝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살핀 쥬느비에브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에이드리안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몰라. 네가 알아서 해. 네가 한 거니까 네가 책임져. 그러길래 왜 남의 침대에 몰래 숨어 들어온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순간 발끈하여 쥬느비에브는 소리쳤다. “몰래 숨어 들어간 거 아니에요! 어제 밤에 천둥, 번개 치니까 에이드리안이 무서워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옆에 있어준 거잖아요!” “무서워하긴 누가 무서워 했다는 거야? 네가 무섭다고 해서 내가 같이 있어 준거잖아! 사실은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라고.” “아니에요! 에이드리안이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거잖아요. 비 그치길 기다리다 그냥 잠든거라고요. 그러는 에이드리안은 자기가 나중에 자고서는 왜 나 안 깨워 준거에요?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한거죠? 다 알아요!” “누가 먼저 잤다고 그래? 네가 먼저 잤잖아! 너야말로 자려거든 네 방에 가서 자지 왜 남에 방에서 잔 건데? 너야말로 그렇고 그런 꿍꿍이가 있었던 거 아냐?”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격화되었다. 결국 두 사람의 실랑이는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사택에 방문한 점심 시간 무렵에서야 겨우 끝을 맺었다. 이미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임시 휴전을 하기로 잠정 합의하고 각자의 길을 나섰다. 정말이지 두 사람에게는 피곤한 아침이었다. 제15음(第15音) going Out(2) 쥬느비에브는 점심을 먹고 미라벨의 연습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연습실을 구경했다. 우아하지만 다소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쇼파와 테이블은 역시 미라벨의 취향대로 선택되어진 것 같았다. 바닥에 깔린 빨간 카페트와 창문의 보라빛 커텐도 미라벨이 고심해서 고른 흔적이 역력했다. 쥬느비에브는 연습실을 둘러 보는 것을 그만 두고 맥없이 손에 찻잔을 들었다. 아침부터 에이드리안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더니 너무 피곤했다.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활짝 열린 창문을 응시했다. 어제 비가 온터라 시야도 넓어졌고 무엇보다 공기가 아주 맑고 깨끗했다. 차가운 공기가 다소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렸다. 그러다가 잔뜩 기대섞인 갈색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 보고 있는 안느마리를 보고 뚱하게 물었다. “안느마리.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안느마리는 미라벨이 건네준 찻잔을 받아들고 티스푼으로 살짝 저은 뒤 차를 홀짝 마셨다. 그리고 빙그르르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정말 순진한 줄 알았는데, 대단하다? 어떻게 먼저 선수칠 생각을 다 한거야? 하긴 에이드리안 님처럼 초절정 호화판 혼처는 흔한게 아니니 미리 말뚝을 박아 두는 게 좋을 지도...” “안느마리 양. 그게 무슨 무례한 말이에요? 레이디의 언행은 언제나 교양 있게-.” 미라벨이 눈살을 찌푸리자 안느마리를 어깨를 으쓱하고는 씨익 웃으며 다시 차를 마셨다. 미라벨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미 <미라벨 양의 관찰 수첩>이 금장으로 된 필기구와 함께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쥬느비에브, 정말 그 사건은 어떻게 된거지요? 유벨 님이 아주 굉장했다고 그러시던데...” 쥬느비에브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을 보다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먼저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드리안이 먼저 나한테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한거라니까요. 어제도 밤에 번개 치니까 무서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같이 있어줬더니 아니라고 억지나 쓰고. 난 번개같은 거 하, 하나도 안 무, 무섭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멍청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응시했다. 안느마리가 먼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번개 엄청 싫어하잖아." "에이드리안 님도 어릴 때부터 천둥, 번개같은 걸 아주 싫어하셨죠.“ 미라벨이 한심하다는 듯 손수건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곁눈질로 안느마리를 쳐다 보았다. 안느마리는 기대가 무너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두 사람 다 번개가 무서워서 같이 있다가 그냥 잠들었다는 얘기잖아?” “아니야! 난 번개 아, 안 무, 무섭단 말이야.” 말을 더듬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미라벨이 옆에 놓여 있는 수첩을 들어 열심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당장 가서 에이드리안 님께 사과하세요. 어쨌든 사랑 싸움이든 뭐든 감정 싸움은 빨리 풀수록 좋은 거에요.” “싫어요. 에이드리안이 먼저 사과할 때까지 안 할거에요. 사실은 아주 음흉한 사람이라구요, 에이드리안은.” 잔뜩 인상을 쓰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동시에 한숨을 포옥 쉬었다. 다시 미라벨이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 님이 얼마나 쥬느비에브를 위하고 계신지 몰라서 그래요. 보름 뒤에 있을 비인 대무도회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비인...대무도회?” 쥬느비에브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안느마리는 치마의 주름을 펴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어, 몰랐어? 반년에 한 번 있는 비인 가의 대무도회가 이번에 열리잖아. 비인 가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귀족과 소귀족들까지 전부 초대된다구. 아무나 초대받는 무도회가 아니지. 아마 아르헨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무도회일걸?” “그래요. 원래 이번 모네[약 1달]에는 예정이 없었지만 비인가의 최고령이신 일로나 님이 임의로 결정을 내리셔서 열리는 무도회에요. 일로나 님이 주최하시는 무도회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무도회를 열자고 말씀드린 건 에이드리안 님이시죠. 쥬느비에브와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시려고 그러시는 거에요. 일부러 대무도회를 열어 약혼을 공표하다니, 이런 영광이 어디있겠어요? 다 쥬느비에브가 제대로 약혼식도 못해서 마음 상할까봐 에이드리안 님이 준비하신 거에요.” 미라벨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시며 향을 음미했다. 쥬느비에브는 미라벨의 말에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에이드리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음...미라벨 언니. 에이드리안에게 어떻게 사과하면 될까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그제서야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 학생회실에서 열심히 두 남자가 한 남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케이로프와 유벨은 쇼파에 마주앉아 책을 넘기는 척 하면서 에이드리안을 살펴 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짜증스럽게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서류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벨이 앉아 있는 쇼파로 와 풀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유벨은 흠칙 놀라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로프도 묵묵히 책장을 넘기며 사태 파악을 하고 있었다. 유벨은 슬그머니 책을 내리고 에이드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쳐다 보고 있는 파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음같이 새파란 눈동자에 놀라 유벨은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상황, 말이나 붙여보자는 생각에 유벨은 한 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아깐...” “말 하지 말랬지. 아니라고 몇 번 얘기해야 겠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에이드리안의 말에 움츠러든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케이로프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에게 미움 받을 짓은 절대 안 한다는 신조의 케이로프는 다시 묵묵히 책으로 눈을 돌릴 뿐이었다. 1도르 전에 이미 에이드리안의 호통소리에 의욕을 상실한 유벨과 케이로프였다. 두 사람은 궁금한 마음에 아침의 소동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에이드리안의 소름끼치는 독설을 장장 30시르동안 들어야 했다. 유벨은 무거운 공기가 어색해져 두 손을 만지작 거리며 다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쇼파에 기대어 있었다. 푸른 색의 얇은 상의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유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로프의 말없는 격려가 느껴졌다. 유벨은 케이로프에게 눈을 찡긋 해 주었다. “에이드리안, 사정이야 그렇다치고, 쥬느비에브 화 많이 났을 텐데, 어떻게든 풀어줘야 되지 않겠어?” “내가 왜 그 여자의 화를 풀어 줘야 하는데?”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시큰둥하게 말했다. “여자는 아주 예민하다고. 혹시 화가 나서 가출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해. 쥬느비에브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쥬느비에브가 모롤라를 3개 사면 다른 사람은 안 주고 너한테만 주는 거 알지? 그만큼 널 좋아한다는 뜻이야.” “그렇습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의 말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고 합니다. 아량을 베푸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특히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처럼 단순한 여성에게는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화가 나면 바람을 피울지도 모르지요.” 케이로프가 옆에서 슬쩍 거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케이로프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람이라니? 바람을 피운다고? 그런 거 용납 못 해!” 에이드리안은 목에 맨 타이를 바로 잡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흥분한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과 케이로프가 불안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입고 있던 옷을 손으로 탁탁 털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유벨과 케이로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또 다실 독설이 퍼부어질지 아니면...두 사람은 긴장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흐음...뭐 어차피 보름 뒤의 대무도회 때 입을 의상을 가봉해야 하니까 쥬르를 데리고 시내에나 나가볼까?” “자-알 생각했다. 아우야.” “날씨도 좋은데 정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로 흐뭇한 눈짓을 교환했다. 에이드리안의 심통맞은 언행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진녹색의 둥글게 각진 모자를 눌러쓰고 검정색의 몸에 딱 맞는 얇은 외투를 입고 나온 에이드리안은 초조하게 길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벨과 케이로프가 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무료함과 초조함에 에이드리안은 잘 닦여 반짝이는 구두 끝으로 길 바닥의 작은 돌멩이를 살짝 찼다. 돌멩이가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튕겨져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돌멩이를 쳐다 보다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들었다. “뭐야...늦잖아.” 에이드리안은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유벨에게 또 잔소리를 퍼부으려다 멀리서 달려오는 쥬느비에브를 발견한 에이드리안은 미간에 주름을 넣으며 소리쳤다. “너 지금 몇 도른지나 알아? 왜 이렇게 늦어?” 쥬느비에브는 파란색 가방을 이리저리 흔들며 폴짝폴짝 뛰어 에이드리안에게로 달려 왔다. 쥬느비에브는 쓰고 있는 하얀색 모자를 꾹 눌러 쓰고 하늘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듯 새침하게 까만색 눈동자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원래 숙녀란 좀 늦는 법이랍니다.” “뭐? 네가 무슨 숙녀라고...” 또 다시 실랑이를 벌이려는 두 사람 사이에 유벨이 한숨을 쉬며 끼어 들었다. “아- 참. 에드. 빨리 안 가면 늦어. 쥬느비에브, 미라벨이랑 안느마리는?” “곧 올거라고 했는데.”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달려온 길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곧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까만색으로 치장한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뤼베이크 가의 문장이 찍힌 마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설마...” 케이로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스와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거창한 빨간 드레스 차림의 미라벨이 조그만 창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활기차게 마차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 어서 타시죠?”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그 옷차림은 도대체 뭐지? 우린 지금 무도회에 가는게 아니라고.” “훗. 저의 아름다운 모습에 에이드리안 님이 반하실까 봐 걱정이 되시는 가 보군요. 케이로프 님의 그런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옷이랑 비교가 되나보죠? 오호호호호홋.” 잔뜩 얼굴을 찌푸린 케이로프와 부채를 부치고 있는 미라벨을 제치며 마차에서 내린 안느마리가 앞으로 나왔다. “거기 두 블랙은 비켜 서 봐요.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 어서 타시죠? 즐거운 나들이인데.” 활짝 웃으며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 끌었다. 쥬느비에브는 쭈뼛거리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은 생각보다 넓어서 열 사람은 족히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마차를 끄는 말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밖을 흘끗 쳐다 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모자를 벗고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은근히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옆에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맞은 편 중앙에 자리 잡았다. 쥬느비에브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창 밖을 내다 보았다. 그러다 슬쩍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던 쥬느비에브는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당황하고 어색해 쥬느비에브는 다시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계속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 보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쥬느비에브는 꾹 참고 계속 창 밖에 시선을 두었다. 빨리 화해하고 싶은데 자꾸 어색하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쥬느비에브는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옆에 안느마리가 앉는 것을 곁눈질해 보았다. 유벨과 케이로프가 마차에 오르자 천천히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유벨이 유쾌하게 소리쳤다. “자, 가자구! 즐거운 봄 나들이야!” “그럼요, 그럼요. 아주 날씨도 좋군요.” 미라벨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기분을 돋아주기 위한 유벨과 케이로프, 미라벨, 안느마리의 재롱아닌 재롱을 보면서 쥬느비에브는 봄 나들이길에 나섰다. ******** 약 20시르쯤 힘차게 마차가 구르더니 어느 순간 멈추어 섰다. 그리고 안느마리와 케이로프가 먼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에이드리안과 유벨이 내렸다. 유벨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쥬느비에브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녀가 처음 스콜라에 오기 위해 거쳐왔던 곳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핑크색과 빨간색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예쁜 색깔의 벽돌이 깨끗하게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바닥에는 휴지 한 조각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가로등은 짙은 고동색과 금색이 섞인 금속재질로 고급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마차가 다니는 커다란 대로변도 하얀색 돌로 말끔하게 길이 닦여 있었다. 인도 가 쪽에는 스콜라에서 자주 보았던 약 2 레트쯤 되어 보이는 파란 나뭇잎이 잔뜩 붙어 있는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나무들은 얼마전에 다듬었는지 다들 똑같이 나뭇잎이 둥근원을 그리며 나 있었다. 무엇보다 쥬느비에브의 눈길을 끄는 것은 형형색색으로 만들어져 있는 상점들의 간판이었다. 길 가 쪽으로 전부 상점이 들어서 있었는데 상점의 나열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였다. 의상실, 앤티크 인형 가게, 음식점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입 다물어. 침 흐르겠어.” 또 다시 에이드리안이 핀잔을 주자 쥬느비에브는 발끈해 에이드리안을 쏘아 보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안느마리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 여기까지 왔으니까 제 가게에 한 번 가보실래요? 막내 오빠가 있으니까 아마 지금쯤 오픈해 있을 거에요. 여기서 멀지 않거든요. 쥬느비에브, 너 궁금하다고 했잖아.” 마차에서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을 잡고 낑낑거리며 내리던 미라벨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가게라뇨? 안느마리 양. 여기서 숍(shop)을 운영하고 있는 건가요?” 안느마리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가 되자 안느마리는 기분좋게 웃으며 씩씩하게 앞장 섰다. “그럼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로 Go!하죠!” 제16음(第16音) going Out(3) 안느마리르 제외한 다섯 사람은 한 상점 앞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라고 씌여있는 간판은 ‘정의’와는 무관한 핑크색으로 온통 치장되어 있었다. 리본이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는 간판을 보며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케이로프, 유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라벨을 쳐다 보았다. 역시 그들의 예상에 한치도 어긋남 없이 미라벨은 황홀한 표정으로 간판을 쳐다 보고 있었다. “정말 훌륭한 간판이에요. 내가 본 상점의 간판 중 가장 멋져요. 특히 저 리본들...” “역시 이 간판의 진가를 알아 보는 사람이 있었군요!” 안느마리가 기쁘다는 듯이 미라벨의 손을 꼬옥 쥐며 자랑스럽게 간판을 쳐다 보았다. 지켜보던 케이로프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벨도 한숨을 쉬며 상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케이로프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유벨이 놀라 상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점 안은 빛 줄기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유벨은 이리저리 더듬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는 케이로프를 발견했다. “케이로프!” 유벨이 케이로프를 안아 일으키는 순간 가게 안이 밝아졌다. 유벨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보았다. 안느마리가 전등을 키는 손잡이를 잡은 채 멍청하게 웃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르헨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를 침략하려는 못된 악당 퇴치용으로 미끄럼 발판을 깔아놨는데 미처 말씀 못 드렸네요. 케이로프 님 괜찮으세요?” ‘악당 퇴치용? 무슨 악당?’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케이로프와 멍청하게 웃고 있는 안느마리를 제외한 네 사람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였다. 유벨은 근처의 쇼파에 케이로프를 데려가 눕히고 가게 안을 둘러 보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네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느마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게 안이 좀 괜찮죠? 이번에 인테리어에 좀 신경 썼거든요.” 유벨은 하얗게 질린 에이드리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는 꽤 넓은 편이었는데 온통 검정색 톤의 페인트로 벽이 칠해져 있었다. 오른쪽 벽에만 조그만 창이 하나 나 있었는데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커먼 안막지로 막아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불을 켜지 않으면 가게 안은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창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시커멓게 색칠된 나무 선반들이 일렬로 벽에 붙어 있었다. 선반 위에는 무언가가 가득 든 유리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유리병을 꺼내 본 미라벨은 유리병에 붙어 있는 ‘쥐의 말린 내장’ 이라는 레벨에 뒤로 휘청거렸다. 쥬느비에브가 간신히 뒤를 받쳐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미라벨은 정신적인 충격에 쥬느비에브의 팔을 꼬옥 잡아 끌었다. 왼쪽 벽에는 세 점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유령이 사람의 목을 잡고 을씨년스럽게 웃고 있는 그림과 도끼로 금방이라도 바닥에 엎드린 짐승을 내려칠 것 같은 사람의 그림, 그리고 머리가 여덝개 달린 괴물의 그림이 그것이었다. 그림 사이에는 기괴하게 생긴 괴물의 가면이 하나씩 벽에 걸려 있었다. 왠지 속이 울렁거린 에이드리안은 케이로프가 누워 있는 쇼파에 걸터 앉았다. 순간 쇼파를 살펴 본 에이드리안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쇼파 위에 씌워져 있는 커버 위로 손바닥 크기 정도의 피가 스며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멍하게 안느마리를 쳐다 보자 안느마리는 씨익 웃었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도끼로 내리칠 때 피가 좀 튄 거 뿐이에요.”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이 공허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유벨. 나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다만.” 유벨은 기분 나쁜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눈동자를 돌렸다. 자신에게 은근한 눈짓을 주고 있는 안느마리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유벨은 황급히 눈을 돌렸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안느마리를 요주의 인물로 체크하고 있었다. 그 때 안느마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더니 가게 안쪽으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오빠들! 안에 있지? 손님 오셨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안느마리의 귀청 찢어질 정도의 고함 소리에 벽이 스르르 움직이며 비슷비슷하게 생긴 갈색머리 남자 네명이 우르르 나타났다. 안느마리는 유벨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악당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비밀 통로에요. 오빠들도 각 대도시에서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 분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은 물품 목록을 교환하러 모인거에요. 우리 가게, 수입이 꽤 좋거든요. 오빠들, 뭐해? 어서 인사해. 이 쪽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 그리고 저 분은 쥬느비에브의 약혼자이자 스콜라의 학생회장이신 에이드리안 님. 그리고 여기 이 분은 뤼베이크 가문의 미라벨 님. 저기 쓰러져 계신 분은 에르슈바이크 가문의 케이로프 님.” 안느마리가 소개할 때마다 네명의 남자들이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쥬느비에브는 신기하다는 듯이 남자들이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안느마리의 마지막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 쪽은...음...음...그러니까 장차 내 그이가 되실 유벨 님....”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흐리는 안느마리를 보며 유벨은 시퍼렇게 안색이 질려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서 나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안느마리의 첫째 오빠인 듯 한 남자가 다가와 손을 덥썩 잡았다. “부족한 동생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제 여동생이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해서 어리기만 합니다. 좀 더 여자다워져야 할 텐데 늘 저렇게 천방지축이군요. 하지만 데리고 살다 보면 다 여자다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가 소녀 티고, 뭐가 여자다운 거냐! 도대체 남동생을 여동생으로 만들어서 어쩌자는 거지, 이 사람들은?’ 유벨은 마음 속으로 외치며 에이드리안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매정한 사촌 동생은 측은한 눈빛으로 지켜볼 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다시 애원 섞인 눈짓을 보내자 에이드리안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서 안느마리의 오빠들에게 말했다. “쥬르가 안느마리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드리안이 주의를 모으자 유벨은 그제서야 홀가분한 기분으로 뒤로 숨어 들었다. 안느마리의 오빠들은 감격어린 눈동자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오- 보았느냐, 얘들아! 이 분은 화이트다! 화이트야! 이 천사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겸손하고 상냥하신 목소리라니...” 큰 오빠의 감격 어린 말투에 안느마리는 오빠들을 안 쪽으로 밀쳐 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들은 레플리카를 못쓰니까 저처럼 위험하지는 않아요. 오빠들! 인사 다 했으면 어서 들어가!!” 안느마리의 오빠들이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가자 쥬느비에브는 흥미거리를 잃었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비교적 다른 사람에 비해 덜 놀라고 있는 쥬느비에브는 말린 곤충들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안느마리, 안느마리네 가게는 뭘 파는 거야?” “훗. 바깥에 있는 것은 그냥 취미 삼아, 장식 삼아 놔둔거고 우리 가게의 주요 품목은 여기 있단다!” 안느마리는 자랑스레 웃으며 한 쪽 벽의 시커먼 커텐을 걷어냈다. 안느마리가 커텐을 걷어내기 전에는 그 곳에 커텐이 있다는 것도 몰랐던 네 사람은 눈을 깜빡이며 커텐 안 쪽의 선반 위에 놓인 물건들을 응시했다.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물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그 중 한 가지 용품을 알아챈 에이드리안과 유벨, 미라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끼가 왜 여기 있는거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실룩이던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에게 다가가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뭘 하는건데?” “응, 내 가게는 아르헨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는 가게라고 할까? 비열하고 사악한 악당을 제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파는 거지. 예를 들어 그 악당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는 저주를 담은 부적이라던지, 각종 독약과 독약을 담을 수 있는 반지, 목걸이, 팔찌, 그리고 각종 나이프와 표창, 도끼 같은 것도 있고... 뭐, 그 외에도 아주 많아. 부적이나 표창 같은 건 동방에서 내가 직수입하는 것이라 특히 품질이 우수하지.” 신나게 설명하는 안느마리를 보며 에이드리안과 유벨, 미라벨은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세 사람은 생각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야.’ “아참, 그리고 부업으로, 한 번의 시음으로 자신이 찍은 그이를 나에게 반하게 만드는 사랑의 묘약이라던지 각종 연인들을 위한 연애 지침서라던지 그런 것도 팔지... 그리고 가끔 동방에서 나오는 한방 재료로 만들어진 약 같은 것도 팔아. 수입품이라 좀 비싸긴 하지만 영양제로서는 최고거든. 몸에 좋은 거면 뭐든 잘 팔리니까 가게 실적에 도움이 돼. 뭐 부적 같은 거 수입할 때 같이 들여 오는거니까 별다른 노력도 필요없거든. 그 밖에 필요하다 싶은 수입품은 전부 취급하니까 쥬느비에브도 자주 이용해줘.“ 그 때까지 혼미한 정신을 겨우 가누고 있던 미라벨이 ‘사랑의 묘약’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안느마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연애지침서’ 라는 말에 쥬느비에브도 기대에 찬듯한 눈빛으로 안느마리에게 다가갔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거 좀 보여 주세요. 값이라면 얼마든지 치를 테니.” “안느마리. 나 연애지침서...그 거 보여줘. 음...이 거 2편도 있어?” 여자들의 화기애애한 수다를 지켜 보며 유벨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케이로프를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 보다 시선을 돌려 에이드리안을 바라 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물끄러미 문 쪽을 쳐다 보고 있었다. 유벨은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사촌 동생이 너무나 빛을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여자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수다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를 화해시키고자 단행된 봄나들이는 그렇게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 연두색의 이상하게 생긴 약병과 화려한 분홍색 겉표지의 책을 각각 들고 미라벨과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불렀다. 겨우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에서 나온 여섯 사람은 의상실로 향하고 있었다. 왠지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세 명의 남자와는 달리 세 명의 여자들은 연신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때, 마담 일레시아의 의상실 <프랑소와즈>는 뜻밖의 손님을 맞기 위해 부산함을 떨고 있었다. 스콜라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상업 지구는 스콜라의 학생회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상업 지구를 둘로 구분 지어 한 쪽은 <라데팡스>가, 한 쪽은 <엘크로이츠>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프랑소와즈>가 있는 구역은 엘크로이츠의 관할 구역이었다. 학생회에 자치권이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상점은 학생회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커다란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그들로서도 학생회 자체가 스콜라의 학생이자 대부분 귀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귀족가의 자제가 고객이라는 프라이드도 대단했기 때문에 스콜라의 학생회와 상점 간에는 나름대로의 신용 관계가 암묵적으로 채결되어 있었다. <프랑소와즈>가 이렇게 부산함을 떠는 이유는 바로 스콜라 학생회의 회장이 친히 상점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대귀족의 경우, <프랑소와즈>에서 일하는 사람이 출장 형식으로 스콜라에 가서 옷을 만들 옷감을 정하고 신체 치수를 재오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대귀족 출신의 손님에게는 특별히 마담 일레시아가 그 일을 맡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경우도 수년간 마담 일레시아가 직접 그의 사택을 방문해 옷을 맞추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에이드리안이 직접, 그것도 자신의 약혼녀와 학생회의 최고 고위 멤버들을 모두 데리고 자신의 의상실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마담 일레시아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장차 아르헨의 실권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상실에서 옷을 맞춘다는 것은 미래에 그녀가 만든 의상이 아르헨의 최고 패션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베일에 쌓인 에이드리안의 약혼녀 옷을 그녀가 맡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기회였다. 장차 사교계의 여왕이될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옷을 만든다는 것은 마담 일레시아로서는 엄청난 영광이자 대단한 자부심이 생기는 일이었다. 그녀의 옷을 만듦으로서 따라올 부차적인 수입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의상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이 올라갈 뿐만이 아니라 고위층의 고객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 가에서 마담 일레시아는 초조하게 에이드리안을 기다렸다. 에이드리안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화사한 금발을 날리며 에이드리안이 들어왔다. 뒤 이어 까만 머리카락의 앳된 얼굴의 소녀와 갈색 머리의 소녀, 그리고 마담 일레시아에게도 익숙한 유벨, 미라벨, 케이로프가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이 기품있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요, 마담. 이 쪽은 내 약혼녀 쥬느비에브 양.”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인사를 하자 하얀색의 드레스 차림인 마담 일레시아가 허리를 굽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비인 님. 그리고 쥬느비에브 님.” 에이드리안은 다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뒤에서 쥬느비에브가 의상실 곳곳에 걸려 있는 화려한 의상들을 보고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다. 안느마리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의상실 내부를 찬찬히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보름 뒤에 비인 가에 무도회가 있어서...”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리 오시죠.” 일레시아는 의상실 안으로 재빠르게 걸어가 안 쪽의 안락한 방으로 세 사람을 데려갔다. 꽤 널찍한 방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쇼파와 섬세하게 조각된 하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일레시아는 쇼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자리잡았다. 미라벨과 케이로프, 유벨과 안느마리도 각자 자리를 잡았다. 일레시아가 옆에 놓여 있던 천 꾸러미를 가져와 테이블 위로 펼쳐 놓았다. “이번 시즌에 유행할 옷감들입니다. 살펴 보시죠. 이 황금색 원단은 이번에 수입된 것으로서 부드러운 촉감과 광택으로...” 일레시아의 설명이 시작되자 에이드리안은 편한 자세로 앉아 일레시아가 보여 주는 옷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쥬느비에브는 옷감에 바짝 다가 앉아 눈을 크게 껌뻑거리며 열심히 일레시아의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듣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마담. 내 약혼녀의 평상복이 몇 벌 필요한데... 편한 면 잠옷도 한 벌하고. 특히 잠옷은 목선을 높게. 그리고 레이스와 프릴과 리본을 될 수 있으면 적게 달도록.” “물론입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일레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며 자리를 뜨자 미라벨이 냉큼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어째서죠? 에이드리안 님. 레이스와 리본, 프릴은 옷의 기본입니다. 여성의 우아함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거에요.” 쥬느비에브도 이마를 찡그리며 거들었다. “그래요, 나 프릴이랑 리본 좋단 말이에요. 많이 달아 주세요. 많이!!” “너랑 안 어울려.”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표정을 구기며 에이드리안을 쏘아 봤다. “하지만 미라벨 언니는 그런 거 입고 다니잖아요!" “그건 미라벨이니까. 설마 너 레이디의 옷에는 모두 레이스랑 프릴이 잔뜩 달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무표정한 에이드리안을 응시하면서 쥬느비에브는 뜨끔한 가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미라벨이 옆에서 어깨를 으쓱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통과라는 표정이었다. “그, 그치만...” “일레시아가 알아서 해 줄테니 걱정하지마.” 쥬느비에브는 뿌루퉁한 얼굴로 혀를 쏙 내밀며 방을 나가며 소리쳤다. “나, 다른 옷 구경할 거에요! 다른 옷에도 레이스랑 프릴 많이 달려 있으면 내 옷에도 달아 줘요. 알았죠? 안느마리, 나 금방 올테니까 예쁜 옷감 좀 골라줘.”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다시 옷감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라벨이 천을 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어리군요. 옷 타령이라니.” “에드, 우린 얼마전에 가봉을 다 끝냈으니까 너랑 쥬느비에브 것만 고르면 될거야.” 유벨은 옷 모양이 잔뜩 그려진 책을 뒤적이며 말했다. 케이로프는 부지런히 천을 뒤지며 에이드리안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옆에서 드레스의 디자인을 고르던 미라벨이 옷본에서 핑크색의 프릴이 잔뜩 달린 디자인을 가리키자 케이로프가 바로 면박을 주었다. 발끈하는 미라벨에게 안느마리가 조용히 분노를 일으키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옷감을 고르는데만 집중하였다. 그렇게 한 참을 옷감을 고르다가 드디어 모든 것을 결정한 다섯 사람은 그제서야 쥬느비에브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어디에선가 사고를 치고 있을 쥬느비에브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는 다섯 사람이었다. ******** 쥬느비에브는 오랜만에 또다시 길을 헤매고 있었다. 쇼윈도의 옷을 구경하러 바깥으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어느 새 처음보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배고파... 에이드리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에요?” 처음 거리 구경을 할 때는 신기하기도 하고 못 보던 것들도 많아 마냥 즐거웠던 그녀였지만 배가 고파옴에 따라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쥬느비에브였다. 게다가 지갑이 든 가방을 의상실 안에 놔 두고 와서 음식점을 발견 해도 뭔가를 사먹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낯선 거리에는 낯선 사람들만이 주위를 지나쳐 갔다. 아까의 깨끗하고 보기 좋던 거리가 지나가고 점점 으슥한 길이 나오자 쥬느비에브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에이드리안, 나 배고파요. 나 배고파. 훌쩍.” 눈물이 묻은 손을 치맛자락에 닦아 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그녀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 “귀족 여자다. 잘만 하면 용돈 좀 타 쓰겠는데?”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생긴 남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 형. 거기다 아무래도 혼자인 거 같은데? 생긴 것도 왠지 어설퍼 보이고. 그래. 저런 여자는 팔아 넘겨도 꽤 비싼 돈을 받지. 오늘 크게 한 건 하겠는데?” “그래, 오늘 한 번 잘 해보자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그래.” 세 명의 남자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목표물을 바라 보았다. 먼 곳에서 ‘원정’을 온 보람을 느끼며 세 사람은 목표물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제17음(第17音) going Out(4)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었다. 무섭게 생긴 아저씨 한 사람이 걸어오더니 자신의 앞에 선 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이 봐, 아가씨. 길을 잃었나? 내가 여기 지리는 좀 잘 아는데 가르쳐 줄까?” 남자의 컬컬한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밥이나 사주세요. 나 배고파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남자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참 당돌한 소녀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는 자신이 조금만 인상을 써도 엄청 험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얼른 얼굴 근육을 풀었다. ‘뭐, 상관 없겠지. 밥을 먹여 놓고 끌고 가는게 손 쉽겠어.’ 남자는 손을 뒷짐 지고 나머지 두 명의 남자에게 사인을 전달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아는 식당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지. 내가 길 잃은 아가씨를 위해서 특별히 밥 한 끼 살게.”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남자의 뒤를 쫄레쫄레 뒤 따라 갔다. 한참을 걷더니 남자가 도착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자가 도착한 식당은 꽤 좋아보이는 음식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하게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이런 데 와도 괜찮아요? 여기 비싼 데 같은데. 음... 아저씨 많이 많이 가난해 보여요. 음... 입고 있는 옷도 굉장히 낡은 거 같은데. 곧 걸레로 써도 아무 불평 없겠는걸요? 나중에 돈 없어서 나더러 내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세상은 보기보다 험악하다고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어요.” 쥬느비에브의 의심이 가득한 말투에 남자는 발끈했지만 겨우 참아 내고 말을 이었다. “아니,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 뭐, 귀족 아가씨인 것 같은데 이정도는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 남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고 깨끗하게 정돈된 녹색 테이블로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갔다.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부르며 재빨리 테이블 의자로 달려가 폴싹거리며 앉았다. “헤에- 아저씨 보기에는 아주 무섭게 생겼는데 사실은 아주 친절하네요. 나 먹고 싶은 거 시켜도 되요?” 쥬느비에브는 글방글 웃으며 메뉴판을 펼쳐서 얼굴을 파 묻었다. “그래, 아가씨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남자는 귀족 출신의 고상한 레이디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냐고 생각하며 인심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들은 바로는 소위 레이디라는 품위있는 여자들은 체면과 위신 때문에 많이 먹어봤자 스케이크 반밖에 못 먹는다고 했다. “음... 그럼 우선 생크림 케이크 3조각으로 요기를 하고... 아로 쥬스 한 잔 우선 마시고 크림 소스 얹은 스프 한 접시에 올리브 오일 듬뿍 뿌린 치킨 요리, 그리고 허브를 갈아 넣은 마늘 소스가 들어있는 스테이크 큰 걸로 하나, 그리고 야채랑 해산물이랑 같이 넣어서 버무린 샐러드 한 접시, 그리고... 또 부드러운 치즈랑 연어를 허브 오일에 볶은 연어 볶음 요리 한 접시 그리고 보자...음...” 계속해서 이어지는 쥬느비에브의 주문에 웨이터는 빠르게 손을 놀려 주문서에 목록을 받아 적고 있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는 예상치 못한 쥬느비에브의 끝이 없는 주문에 원래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우락부락하게 만들며 속으로 쉴새없이 ‘그만해’를 외치고 있었다. “주문은 이걸로 끝입니까?” “음- 음- 아! 아저씨, 쵸콜렛 케이크 한 조각 드실래요?” 남자는 고개를 둘레둘레 내저으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쥬느비에브가 먹은 음식 값만 해도 그의 주머니를 톨톨 털어야 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굳어진 얼굴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과 투자 정도를 타진해 보았다. ‘흥, 이 여자가 먹은 것, 이 여자한테서 다시 받을 거니 이 정도 투자야 참고 하는 수 밖에... 귀족 여자니 이정도의 돈이야 뭐 아무것도 아니겠지?’ “으음- 배가 안 고프신가 보네요. 그럼 쵸콜렛 케이크 내가 먹어야 겠다. 여기 쵸콜렛 케이크도 한 조각 부탁해요.” 쥬느비에브는 남자의 표정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웨이터에게 추가주문을 했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빙그레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아주아주 가난해 보이는데 사실 아주 부자인가 보죠? 난 아저씨 같이 친절한 사람이 좋아요.”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곧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탄성을 지었다. 입맛을 당기는 선명한 색깔의 각종 음식이 하나씩 테이블 위에 놓였다. “야아- 맛있겠다!!”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남자는 주머니에 든 지갑을 꺼내 돈을 세어 보았다. 마침 엊그저께 ‘일’을 성사시켜 생긴 돈이 꽤 들어 있었다. ‘쯧, 어제 쓰고 100만 시엘(주. 참조)이 남았구만.’ 남자는 혀를 차며 다시 쥬느비에브를 보았다. 테이블을 꽉 채운 그 많던 접시가 조금씩 빈 자리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쥬느비에브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하얗게 빈 접시만 널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옷을 탁탁 털며 남자를 보고 방긋 웃었다. “아아- 잘 먹었다. 친절하신 아저씨- 그럼 안녕!”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쌩하고 사라진 소녀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고 남자는 눈을 깜박였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남자는 그저 멍할 뿐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옆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계산 하셔야죠? 99만 8천 5백 시엘입니다.” 남자는 눈을 찌푸리고 서 있던 웨이터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멍하게 문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 “아아- 잘 먹었다. 정말 친절하신 아저씨라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근데 이제 어떻게 길을 찾는담?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아저씨한테 물어 볼 걸. 배가 너무 불러서 정신이 없었으니 하는 수 없지. 에이드리안 보고싶은데...역시 아까 사과할걸... 휴우-.” 쥬느비에브는 이리저리 투덜대며 길을 걸었다. 배가 불러서 힘은 났지만 왠지 졸음이 몰려 왔다. 한 블록 정도 걸었을 때 쥬느비에브의 앞에 아까 아저씨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다시 앞을 가로 막았다. “이 봐, 아가씨. 길을 잃었나? 내가 여기 지리는 좀 잘 아는데 가르쳐 줄까?”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 남자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 재미없어요. 아까 그 아저씨랑 똑같은 말이잖아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남자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아, 아 그래? 뭐. 그,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아가씨. 그렇게 길을 헤매다가 날이 저문다고. 어서 길을 찾아야지.” 쥬느비에브는 하얀색 모자를 다시 꾹 눌러 쓰고 말했다. “네. 그게 문제죠. 도대체 <프랑소와즈> 의상실은 어디 있는 거죠? 아저씨 아세요?” “물론 알지. 날 따라오라구.”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까의 아저씨처럼 역시나 친절한 아저씨라고 생각하며 남자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 의상실에서 나와 에이드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간거야? 쥬르.”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달려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쪽에는 없습니다.” “이 쪽도 마찬가지에요.”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 편에서 안느마리와 유벨이 모습을 나타냈다. 안느마리는 숨을 고르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이 쪽 지리는 제가 잘 아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에이드리안 님.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찾아올테니까요.” 안느마리가 자신있게 주먹을 져 보였다. “거기 블랙 둘! 어서 따라 오세요! 유벨 님도 어서 오시라구요!” “아-니 누구보고 블랙이라는 거에요?” “아아- 블랙이라. 듣기 싫은 말이군.” 안느마리와 미라벨, 케이로프는 실랑이를 벌이며 거리 저 편을 향해 달려갔다. 유벨도 씁쓸한 표정으로 어기적거리며 안느마리의 뒤를 따랐다. “어디 간거야...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하여튼 사고만 친다니까.”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잠시 주변을 둘러 보고 서둘러 반대편으로 달려 갔다. ******** “아저씨, 진짜 길 아는 거 맞아요? 여기 아까도 왔던 곳이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시무룩하게 다리를 주무르며 물었다. 죽 늘어선 상점가를 걸어가며 쥬느비에브는 연신 불평이었다. 길을 찾기는커녕 점점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쥬느비에브는 남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었다. <프랑소와즈>가 있던 길은 깨끗하고 꽃이나 나무들도 깔끔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이 곳은 왠지 상점들만 칙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생각에도 이 길을 계속 가봤자 <프랑소와즈>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안다니까 그러네?” 남자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힐끗 쥬느비에브의 눈치를 살폈다. 쥬느비에브는 손을 허리에 가져다 대고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에-이, 아저씨 모르죠? 여기 아저씨도 처음이죠? 그쵸?” 뱅글뱅글 주위를 돌며 투덜거리는 쥬느비에브의 추궁에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여기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디 간 거야?” 쥬느비에브는 찌푸린 얼굴로 남자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리고 모자를 쓰다 엉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그냥 혼자 갈래요. 안녕, 아저씨!” 남자는 쥬느비에브의 태도의 변화에 화들짝 놀라 그녀를 쳐다 보았다. “어, 어딜 간다는 거야? 넌 아무데도 못가!” “에이, 아저씨 혼자서 길 잃을까 봐 그러는구나? 각자의 길은 각자 찾기로 해요, 아저씨. 그럼 길 잘 찾아 보세요. 바이바이-” 발걸음을 옮기는 쥬느비에브를 보자 마음이 급해진 남자는 품에 감추고 있던 칼을 꺼내 쥬느비에브 쪽으로 내밀었다. “이 봐! 돈 내놔! 가진 거 전부 내 놔!!”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다시 하얀색 모자를 눌러 썼다. “아저씨. 미안하지만 나 돈 없어요. 가방 놔두고 나왔거든요. 헤헤- 그럼 전 이만 가요. 안녕, 아저씨!” 콧노래를 부르며 깡총깡총 뛰어가는 소녀는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졌다. 남자는 조용히 용도가 무의미해진 자신의 칼을 바라보며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제18음(第18音) going Out(5) 쥬느비에브는 원피스의 리본을 다시 매면서 길을 훑어 보았다. 역시 처음 보는 길이었다. 왠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으슥한 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옷 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아참, 아까 그 아저씨. 마차삯이 없었나 보지? 하긴 집까지 걸어가려면 좀 고생이긴 하겠다. 뭐, 도와주고 싶긴 하지만 나도 가방을 두고 온걸... 헤헤. 근데 아까 그 아저씨도 안느마리네 가게 손님인가 보네. 그 칼도 아마 안느마리네 가게에서 산 게 틀림없을 거야. 뭐, 난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의 취미 생활을 비웃는 건 분명 나쁜 일일 거야. 음- 그렇구 말구. 서로서로 이해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자신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한 아저씨와 아까 헤어졌던 아저씨, 그리고 처음 보는 아저씨가 하얀 자루를 손에 들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 아저씨들!! 또 만났네요? 옆에 있는 분은 친구 분이세요?”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 봐, 아가씨. 두 번이나 우리의 시도를 무마시키다니. 이번에는 안 돼. 순순히 잡혀 가 주셔야 겠어.” 처음 보는 남자가 음흉하게 말했다. 난데없는 협박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옷을 탁탁 털고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잡혀 가는 건데요?” “뭐, 그렇고 그런 가게에 팔아 넘기는 거지. 아가씨 같은 여자는 꽤 비싼 값을 받거든.” 남자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제가 잡혀 가면 에이드리안이 구하러 와줄까요? 원래 공주님이 나쁜 악당에게 잡혀 가면 잘생긴 왕자님이 구하러 오잖아요." "......" 쥬느비에브의 물음에 남자들은 멍하게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귀족 레이디들은 남들과는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납득한 듯 천천히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잡혀 가면 돈 얼마나 줘요?” “그런 건 알아서 뭐하려고? 대충 2천만 시엘 정도 받을까?” 쥬느비에브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하고 넘어갔다. “이, 이천만 시엘? 정말요? 그럼 나한테도 주는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손가락으로 셈을 하며 다시 침을 삼켰다. 얼굴에 발그레하게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이상한 아저씨들에게 지금 잡혀 가면 에이드리안이 구하러 올거고 감동의 재회 속에서 사과할 기회가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아침부터 계속 티격태격 싸우기만 하고 정작 사과할 기회가 없었던 그녀에게는 무척 좋은 기회로 느껴졌다. 게다가 엄청난 돈도 받을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쥬느비에브는 곧장 주먹을 쥐며 결단을 내렸다. “아저씨! 나 잡혀 갈래요! 중개료 같은 것도 있으니까 아저씨들한테 100만 시엘 줄게요. 그럼 됐죠? 그럼 저기 흰 자루 속에 들어 가면 되는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쪼르르 달려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자루 속으로 다리를 넣었다. “아저씨, 나 자루에 들어가 있는 동안 살살 다뤄야 해요. 던지거나 하면 안 돼요, 알았죠?”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자루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불건전한 생활에 발을 들여 놓은지 어언 십여년째, 이런 자발적인 반응을 처음 보는 세 남자는 멍하게 상황을 지켜 보았다. “아저씨들, 뭐해요? 어서 묶어요!” 소녀의 다그침에 정신을 차린 세 남자는 재빨리 자루 곁으로 다가와 끈을 꺼내 동여매기 시작했다. “흐흐, 이거 완전 돈이 굴러온 격이잖아?” “그래, 그래. 이렇게 웃긴 여자는 난생 처음 봐. 흐흐.” “이 걸로 또 얼마간 잘 먹고 잘 자겠어.” 남자는 열심히 끈을 동여맨 다음 매듭을 확인했다. “이 걸로 문제 없...” 머리에 시원한 감촉이 들자 남자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파란 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 피스톨?” 그 시원한 감촉이 은백색의 권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기 시작했다. 파란색의 눈동자의 지독하게 아름다운 소년은 자신을 금방이라도 죽일 듯 차갑게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풀어.” 가슴 속까지 후벼 파는 듯한 냉랭한 목소리에 남자들은 잔뜩 움츠렸다. 그러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너, 넌 뭐야? 설마 그걸 정말 쏠 생각은 아니겠지?” “못 할 것 같아?”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끼이익 하고 쇳소리가 들렸다. “으으악! 야! 어서 풀어!!” 머리에 총이 겨누워져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옆에 서 있던 두 남자가 놀라 허둥지둥 자루의 끈을 풀었다. 긴장해서인지 끈이 잘 풀리지 않았다. 끈은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풀렸다. 끈이 풀리자 자루 속에서 쥬느비에브가 쏙하고 나왔다. “어? 에이드리안? 벌써 구하러 왔어요? 아직 안 잡혀 갔는데...” “너, 당장 따라와.” 무서운 눈빛의 에이드리안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잔뜩 겁을 먹어 자루 속에서 나와 그의 뒤를 따랐다. 화난 표정을 보니 이번에도 에이드리안과 화해하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너무 빨리 구하러 와서 감동의 재회를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세 남자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정신을 차려 소리쳤다. 어쨌든 이 쪽은 건장한 남자 세 명이었고 저 쪽은 어린 소년이었다. 완벽한 승리를 타진하며 남자들은 웃음을 흘렸다. “야! 넌 뭔데 남의 물건을 거져 먹으려는 거야? 엉?” 순간 파란색 눈동자의 소년이 뒤돌아 서더니 권총을 꺼내들어 남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자신의 귓가를 스치고 간 총알에 놀라 털썩 쓰러져 버린 남자는 벌벌 떨며 손으로 귀를 확인했다. 귀가 온전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남의 물건이라... 웃기는군.” “이, 이런 자치구역에서 초, 총을 쏘다니 무, 무사할 줄 알아?” 소년은 차갑게 미소짓더니 총을 다시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죽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뭐 이 멍청한 여자를 타겟으로 잡은 너희들도 안 되었다만 난 그리 인자한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내 구역에서 그 딴 짓 하려거든 목숨을 내놓는게 좋아. 흥, 너희들을 처리할 나머지가 있어서 오늘은 이쯤해 두는 거니까 운 좋은 줄 알아.” 파란색 눈동자의 소년은 지독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던지고 검은색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구역이라고? 그럼 저 사람이...스, 스콜라의 학생회장?!” 세 남자는 주저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게 보낸다음 반대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 쥬느비에브는 쭈뼛거리며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에이드리안은 아침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말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어색한 기분에 몹시 침울해 졌다. 그와 화해하기 위한 기회는 저만치 더 멀어진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정말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아까 일로 에이드리안이 엄청 화가 난게 분명했다. 계속 되는 자책감으로 쥬느비에브는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울퉁불퉁한 회색 바닥이 왠지 보기 싫게 느껴졌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벗겨지기 직전의 모자를 간신히 잡은 쥬느비에브는 모자를 다시 눌러 쓰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드리안이 사라지고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멈춰 서서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사람들이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밀쳐 내며 지나갔다. 에이드리안은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서러워진 기분에 눈물이 솟았다. 계속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여 보았지만 에이드리안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손으로 눈물을 닦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뿌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화사한 금발을 발견했다. 에이드리안이 달려 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에이드리안은 곧장 달려와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잠시 쥬느비에브의 눈물어린 눈동자를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리다 다른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손을 펴 보았다. 예쁜 노란색의 머리 리본이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쳐다 보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미소지으며 에이드리안의 옆으로 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손을 꼬옥 잡고 노란색 리본을 이리저리 보며 다시 함박 웃음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그녀와 보폭을 맞춰주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손은 참 따뜻했다.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아침에는 미안했어요. 그렇고 그런 짓 하려고 했던 거 용서해 줄게요.” “누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는 거야?” 시큰둥하게 말하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웃었다. 그가 쑥쓰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유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에이드리안의 손을 꼬옥 잡았다. 기분 좋은 따뜻함이었다. 멀리서 분홍색 벽돌 바닥의 깨끗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 “에이, 재수 없군. 오늘은 실패다, 실패. 스콜라의 학생 회장이라니...제대로 걸렸잖아? 이대로 우리 스콜라 학생회 위원한테 걸리면 반 죽음이야. 바로 수도로 압송될걸?” “그러게 말이야. 어휴. 아까 그 남자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쳐다 보는데 솔직히 말해서 진짜 무서웠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우린 그냥 고향가서 일 하는게 좋겠어. 근데 아까 우리를 처리할 나머지가 어쩌구 하던데 무슨 소리냐?” “내가 아냐? 하여튼 나도 오늘 돈만 날렸어. 천 5백 시엘밖에 안 남았다구. 무슨 여자가 그렇게 많이 먹냐? 이 짓도 그냥 고향 가서 하는게 좋겠어. 여긴 우리랑 안 맞아. ” 세 남자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세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소년과 소녀를 발견했다. “거기, 비켜! 우리 지금 급하다구.” 남자는 신경질이 나 소리쳤다. “감히 에이드리안 님께 폐를 끼치다니 절얼-대 용서 할 수가 없군요.” “음.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양.” 다홍색 머리를 한 소녀가 까탈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붉은색 머리결의 소년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 듯 했다. 그리고 곧이어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 으악! 레, 레플리카다. 학생회 위원인가? 어서 도망가자구!” 세 남자는 쏟아지는 레플리카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쳤다. 정신 없이 도망치는 가운데 무언가 시커먼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블랙, 블랙이다. 블랙이야. 나의 친구,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쥬느비에브를 감히 납치하려 했단 말이지. 이런 너희들의 소행으로 미루어 보아 너희들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인간 쓰레기임에 틀림없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감히 화이트를 넘보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오늘 생의 마지막을 맛 봐라. 모두 죽어버리렴. 아하하하하하하하-” [끼에에에에에엑 크카카카카카칵----] 끔찍하게 무서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세 남자는 그로부터 인생에서 가장 참혹한 순간을 경험하였다.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며 세 남자는 그렇게 무너졌다. 뒤 쪽에서 조용히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는 회색 머리의 남자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안느마리, 대충 해, 대충. 휴- 어차피 뒷처리는 항상 내 몫이라니까.” ******** 다음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쥬느비에브는 기분좋게 이불을 끌어당겼다. 오늘따라 이불이 촉감도 부드럽고 좋은 향기도 나는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이불 안으로 파고 들었다. 그 때 뺨으로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쥬느비에브의 비명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레이스와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잠옷을 입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침대 위에 주저 앉아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곧 이어 베개가 날라왔다. “이 저질! 이 저질!” 난데없는 베개 세례에 에이드리안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날라온 베개를 옆으로 던지며 쥬느비에브에게 쏘아주었다. “도대체 아침부터 왜 그래?” 그렇게 소리치고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왜 또 이 여자가 여기 있는 거지? “너 또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긴 내 방이에요!!”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에이드리안은 어젯밤에 쥬느비에브가 책을 읽어달라고 칭얼거렸던 일을 생각해 냈다. 밤 늦게까지 잠이 안 온다고 투정부리길래 옆에서 책을 읽어 줬는데 그 다음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이 좀 더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방 바깥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의 비명에 하녀들이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았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결혼도 안 한 남녀가 잠옷차림으로 같이 침대 위에 있는 모습을 하녀들에게 보인다면 충분히 불쾌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힘 없이 침대 가로 기어 갔다. 그 때 쥬느비에브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도망가려구요? 난 사과 받아야겠어요.” 그리고 동시에 쥬느비에브는 힘껏 에이드리안을 끌어당겼다. 멍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맥없이 그녀 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방문이 활짝 열리며 일대 합창이 쏟아졌다. “무슨 일이세요, 아가씨?” 하녀들의 놀란 눈동자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결단코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미라벨 양의 칼럼>에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열애 상황이 대서특필되었다. 제19음(第19音) 방역 활동!! 학생회 <엘크로이츠>가 출범한 가운데 처음으로 학생회 멤버 전원이 자리를 비우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현재 학생 회장 에이드리안 블랑쉬로르 비인 님을 비롯해 부회장인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님, 그리고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 군 전원이 학생회실을 비우고 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과 그녀의 지인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 또한 학생회실의 출입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라 더욱 의문이 고조되고 있다. 본지는 사건의 진위를 조사하는데로 속보로 알려드릴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오늘의 에스플리크> 중 1면 특종기사에서 ******** 기분 좋은 오전. 쥬느비에브는 또 다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번의 잔소리 타자는 미라벨이었다. "아아니- 쥬느비에브, 이게 도대체 뭐에요? 레이디라면 우아하고 절도있는 언행이 필수라고 제가 얼마나 말씀드렸나요? 이렇게 품위 없이 구는게 얼-마나 에이드리안 님께 폐가 되는지 아십니까! 차를 마실 때는 조심해서 눈을 지긋-이 감고 향을 음미하며 드시라고 얼마나 강조했나요! 이렇게 차를 쏟다니 교양있는 레이디로서 실격이에요!"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치만, 미라벨 언니. 눈을 감고 마시면 차가 안 보이는 걸 어떻게 해요. 난 내 입인 줄 알고 차를 부었던 건데 그게 바닥이잖아요." 미라벨은 양 쪽으로 묶은 다홍색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분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나가세요. 오늘 예법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연습 좀 해오라구요! 쥬느비에브 때문에 내 얼굴에 하루에 얼-마나 주름이 생기는지 알고 있는거에요? 어찌되었든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로서 <엘크로이츠>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요!”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식당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였다. ******** 식당으로 향하던 쥬느비에브는 스콜라 안에 들어서 있는 이상한 아저씨들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생긴 네모난 철제 통을 잔뜩 마차에 싣고 온 아저씨들은 긴 호스(hose)를 꺼내어 통에 연결시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호기심이 동해 아저씨들에게 뛰어갔다. "아저씨들! 여기서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이 통은 다 뭐에요?" 달려간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손가락으로 톡톡 통을 건드렸다. “이 봐요, 아가씨.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 이건 나무에 생기는 해충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뿌리는 약품이라고요.”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아저씨가 통에 호스를 연결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해충요?” “그래요. 여름이 되기전에 뿌려서 미리 예방하는 거지요. 아가씨 같은 레이디는 이런 걸 만지면 안 되는 거에요. 이런 방역 활동은 우리에게 맡기고 아가씨는 차나 마시러 가라구요.” 옆에서 걸리적 거리는 소녀를 빨리 보내려고 아저씨들은 손짓을 했다. “방...뇨 활동?” “방역 활동이요. 지금부터 약품을 뿌려야 하니까 저-기로 멀찍이 떨어지라구요.” 아저씨들은 계속 옆에서 얼쩡거리며 떠날 생각을 안 하는 소녀에게 다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일을 해야 하는데 옆에서 계속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소녀가 귀찮았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한참 뚫어지게 통을 보다가 손뼉을 탁 하고 쳤다. “아저씨. 에이드리안 알아요?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요.” 쥬느비에브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아저씨는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스콜라의 학생 회장님이 아니십니까. 그건 왜 묻습니까?” “나 약혼녀에요. 에이드리안 약혼녀. 저 알죠?” 계속해서 웃음을 잃지 않고 묻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아저씨들은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 보다 순간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아, 그 이번에 약혼이 결정되었다는... 이, 이런 죄송합니다.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아까의 무례는 부디 용서하십시오.” 순식간에 달라진 태도의 아저씨들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었다. 두 손을 허리에 가져다 대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쥬느비에브는 말했다. “그럼 아저씨들. 오늘은 쉬세요. 제가 특별히 보너스 휴가 드리는 거에요. 아저씨들이 이렇게 수고 하시는 거 보니까 제가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시고 내일 오세요. 아셨죠?” 쥬느비에브의 말에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아저씨들은 쥬느비에브가 빨리 가보라며 손을 흔들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저만치로 걸어갔다. 그들로서는 대귀족, 그것도 스콜라 최고 실권자의 약혼녀에게 대들만한 베짱이 없었던 것이다. ********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흐뭇하게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철제 통을 바라 보았다. “하여튼 참 신기하다니까. 에이드리안 이름만 대면 저렇게 다 친절하게 변하니 에이드리안은 정말 인기가 많은 거 같아. 우웅∼ 그럼 이제 <엘크로이츠>를 위한 나, 쥬느비에브의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어 볼까?” 쥬느비에브는 이번에 의상실에서 새로 맞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옅은 회색의 깔끔한 디자인의 원피스는 비록 프릴과 레이스가 별로 달려 있지 않았지만 비교적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새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불끈졌다. “그래. 옷 좀 버리면 어때?” 쥬느비에브는 소매를 둥둥 걷어 팔꿈치 위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철제 통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철제 통은 겉에 종이가 붙여져 있었는데 빨간 글씨로 <취급 주의 : 독함. 물 타서 쓰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헤헤. 취급 주의? 이 통 살살 옮겨야 되나 보다. 분명 던지거나 흔들면 꽝하고 터질 거야. 그런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헤헤. 난 정말 머리가 좋다니까.” 쥬느비에브는 다시 방긋 웃고는 아저씨가 했던 것처럼 긴 호스를 통에 붙어 있는 동그란 구멍에 연결했다. 호스를 연결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철제통을 살폈다. 약 30오토(주. 참조)정도 되는 높이의 철제 통은 이상한 장치가 잔뜩 붙어 있었다. “우웅. 약품이 나온다고 아저씨들이 그랬는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철제 통에 붙은 시커먼 손잡이에 시선이 가자 쥬느비에브는 아무 생각 없이 철제 손잡이를 눌렀다. 동시에 호스에서 푸욱하고 하얀 약품이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진 약품에 놀란 쥬느비에브는 철제 손잡이를 다시 당겼다. “노, 놀랬잖아. 어휴- 이, 이제 다 알았으니까 어서 나무에 가져 가서 뿌 려야지.” 쥬느비에브는 팔에 묻은 약품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낑낑 거리며 주변의 나무 근처로 통을 옮겼다. 그 때 멀리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귓가에 퍼졌다. “쥬느비에브!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안느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쥬느비에브는 방글방글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안느마리!!” 안느마리는 숨이 찬지 헐떡거리며 물었다. “쥬느비에브, 식당에서 한참 찾았잖아. 근데 이게 뭐 하는 거야?” 이상하게 생긴 철제통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안느마리가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심각하게 결의에 찬 눈빛을 빛내며 대답했다. “나, <엘크로이츠>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마음 먹었어. 안느마리. 사실 나 에이드리안의 약혼녀로서 별로 해준게 없잖아. 미라벨 언니도 나더러 <엘크로이츠>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보라고 했거든. 이 기회에 열심히 해서 에이드리안의 칭찬을 많이많이 받을 생각이야.” 계속해서 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안느마리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 통으로 <엘크로이츠>를 위해 뭘 할 수 있는 건데?” “방뇨 활동이래. 나무에 이 통안에 들어 있는 약품을 뿌리는 거야. 그러면 벌레가 안 나온대. 그럼 스콜라의 나무는 아프지 않고 쑥쑥 크는거야. 멋지지?” 흐뭇하게 웃으며 이야기 하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안느마리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뇨 활동이라... 야아- 정말 멋진데?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쥬느비에브는 역시 머리도 좋다니까! 자연을 사랑하는 네 모습을 보면 에이드리안 님도 다시 한 번 너한테 홀딱 빠져버릴 거야.” “그치? 그치? 꺄아아아아- 역시 안느마리는 날 잘 이해해 준다니까.”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기쁨의 발구르기를 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안느마리. 나 혼자서만 이렇게 멋진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조금 싫어하겠지? 좋은 일일수록 나눠서 해야한다고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음...안느마리, 나 방뇨 활동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안느마리가 유벨 오빠랑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 좀 불러 줄래? 에이드리안은 빼고. 나중에 놀래켜 줄거야.” 안느마리는 유벨이라는 이름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문제 없어. 쥬느비에브! 내가 가서 다들 데리고 올게. 사랑스러운 유벨님과 그 ‘블랙’ 둘만 데려오면 되지?”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마리는 브이자를 그려 보이고 저편으로 달려갔다. ******** 유벨은 자신의 연습실에서 바이올린 손질을 하고 있었다. 최근 등장한 한 인물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 그였다. 창 밖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음침한 소리와 함께 연습실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연습실 문 소리가 이랬던가?“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그렇게나 피하고자 노력했던 소녀, 아니 소년이 들어왔다. 갈색 머리를 흔들며 다가온 안느마리를 보며 유벨은 말없이 긴장했다. “안느마리 군. 여긴 무슨 일이지?” 안느마리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이. 참. 유벨 님도. 안느마리 양이에요. 안느마리 양. 저 여자란 말이에요.” 유벨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안느마리 군. 무슨 일이야?” “아이. 안느마리 양이라니까 그러시네. 쥬느비에브가 유벨 님을 모셔 오래요. 지금 스콜라 중앙 정원에서 방뇨 활동 중이거든요.” “바....방뇨?”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안느마리를 뒤로 하고 유벨은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 나갔다. “어-이, 유벨 님! 같이 가요! 부끄러워 하지 마시라니까요!” 안느마리가 쏜살같이 유벨의 뒤를 쫓아갔다. ******** 미라벨은 벌겋게 부은 얼굴로 열심히 뛰어가고 있었다. 품위있고 고상한 레이디로서 뛰는 일따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으로 인해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하급생들이 미라벨의 뜻밖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멀리서 붉은 머리의 케이로프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레이디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태의 급박함으로 미라벨은 크게 소리쳤다. “케이로프 님!! 얘기 들으셨나요? 쥬느비에브가 글쎄...바, 바..” 케이로프가 미라벨의 곁으로 뛰어왔다. 두 사람은 계속 달려가며 대화를 주고 받았다. “아아- 들었지. 그래서 이렇게 달려 가는게 아닌가.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뤼베이크 양.” 미라벨은 눈물을 머금은채 하소연을 했다. “전 정말 열심히 예법을 가르쳤어요. 뭣 하나 잘 하는게 없는 쥬느비에브에게 예법을 가르치느라 매일매일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지만 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 쥬느비에브에게 예법을 가르쳤다고요. 그렇지만 걸핏하면 수업 빼먹고 도망가는데다 요즘은 수업시간에 공공연하게 잠을 자질 않나...급기야....바, 바...방뇨라뇨!! 그 것도 스콜라 학생이 눈 벌겋게 뜨고 있는 이 대낮에!! 레이디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실격이라고요.” 케이로프는 진심으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의 마음, 내가 잘 알지. 내 제자지만 정말 나도 어쩔 수가 없군. 이번에 이 사건이 알려지면 또 내 랭크가 내려갈 텐데... 정말이지...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이번에야 말로 쥬느비에브 양을 뜯어 고치자고.” 케이로프의 장엄한 눈빛에 미라벨은 눈물을 닦아내고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요. 에이드리안 님이 뭐라고 하시던 이제는 더 못참아요!”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오늘도 결의를 다지며 목적지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마음 속으로 승리의 가능성을 점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에게 있어서 쥬느비에브를 상대로 승리를 넘본다는 것은 쥬느비에브에게 간식거리로 모롤라(주, 참조)를 먹겠느냐 꼬치구이를 먹겠느냐고 묻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둘 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는 스콜라 중앙 정원에 서서 말 없이 쥬느비에브를 쏘아 보았다. 옆에서 안느마리가 웃으며 서성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울상이 되어 유벨, 미라벨, 케이로프를 쳐다 보았다. “역시 화가 나셨군요. 혼자만 좋은 일 한다고 화가 나신 거 맞죠? 그래도 일찍 부른 건데...화 푸세요, 네? 네에? 미라벨 언니, 유벨 오빠. 케이로프님. 그렇게 자꾸 보시면 무서워요. 나.” 미라벨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조...좋은 일이라고 했나요? 쥬느비에브 양은 여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노상 방뇨가 얼마나 벌금이 센지 알기는 아는 겁니까? 도대체 이 벌건 대낮에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에이드리안 님이 아시면 어쩔려고....아- 나 같은 품위있는 레이디 입에서 이런 저질스런 단어를 내뱉어야 하다니...아∼어지러워...” 풀썩 쓰러지는 미라벨을 받쳐들고 케이로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방출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그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어떤 심정인지는 저도 이해하고 싶지만 스콜라 안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몹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일인겁니다. 일로세...” 유벨이 눈썹을 찌푸리며 케이로프의 말을 잘랐다. “거기 까지. 케이로프. 음...쥬느비에브, 이 건 아니야. 에이드리안이 이 일을 알면 가만히 안 있을거야. 이번에야 말로 약혼 취소하자고 난리 부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이 일은 우리만 아는 걸로 덮어 둘테니까 다음부터는 절대 안 돼. 알았지?” 쥬느비에브는 세 사람의 말을 들으며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다 안느마리에게 손짓해 귓속말을 했다. “안느마리, 이 약품, 노상(路上)에 뿌리면 벌금 있나봐. 어쩌지? 그래도 나무 위에 뿌릴 거니까 괜찮겠지?” 안느마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다시 헤실헤실 웃으며 철제 통 쪽으로 갔다. “뭐, 그러셔도 소용없어요. 저 혼자만 좋은 일하니까 다들 질투가 나서 그러시는 거죠? 여기 통 많으니까 다 같이 해요.” 방글방글 웃는 쥬느비에브의 ‘다 같이 하자’는 말에 미라벨, 케이로프, 유벨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쥬느비에브가 통쪽으로 가 치마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지자 세 사람은 너무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그만 둬(요)!!!”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치맛자락에 손을 닦고 통에 붙어 있는 까만 손잡이를 눌렀다. 호스 끝에서 하얀 액체가 뿜어져 나와 쥬느비에브의 머리 위로 순식간에 쏟아졌다. 머리 카락에서 뚝뚝 흐르는 약품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이런...뒤집어 썼네...” 하얀 약품이 범벅이 된 채로 쥬느비에브는 다시 헤실헤실 웃었다. 그런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유벨, 미라벨, 케이로프는 멍하게 쳐다 볼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안느마리가 달려가 손수건으로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쥬느비에브, 나도 해보자. 방뇨 활동. 이 거 정말 재미있겠다. 야.” “으응. 안느마리. 이 거 호스 끝을 잘 잡고 있어야지 나처럼 안 뒤집어써. 나무에 잘 조준해서 뿌려.” 싱글거리는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를 보며 유벨이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설마 그게... 방...뇨 활동?”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유벨 오빠, 방뇨 활동도 몰랐구나? 난 오늘 아저씨들이 가르쳐 줘서 알았는데. 유벨 오빠 공부 좀 열심히 해야겠다.” 쥬느비에브는 열심히 하얀색 약품을 나무에 뿌리고 있는 안느마리 곁에 가서 같이 호스를 붙잡고 약품을 뿌렸다. “아하하하- 아이 재밌어. 미라벨 언니, 안 할거에요? 이 거 무지 재미있어요! 물장난 하는 거 같아. 아하하하-” 미라벨은 아까까지 흥분한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져 멍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 볼 뿐이었다. 호스를 들고 이리뛰고 저리뛰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이긴 했다. 그러나 레이디인 자신이 그런 경박한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미라벨은 두 손을 꼬옥 쥐었다. “아이, 정말. 빨리 해 보라니까요.” “뭐, 뭐에요?” 갑자기 달려온 쥬느비에브가 호스를 손에 쥐어 주고 나무 쪽으로 끌고 가자 미라벨은 얼굴을 붉히며 호스 끝을 나무 쪽으로 향하게 했다. 호스 끝에서 하얀 약품이 쏟아져 마치 나무 위에 하얀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미라벨은 처음 해 보는 일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 다시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재미나죠? 그쵸? 요렇게 뿌리면 하트 모양이 되요. 요렇게 하면 꼬치구이 모-양-” “으응...” 옆에서 방글방글 웃는 쥬느비에브에게 미라벨은 웃어 주며 호스 끝을 조준했다. “아이 참, 케이로프 오빠! 유벨 오빠!! 다른 사람 볼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해 보세요. 내가 <접근 금지> 표지판도 만들어서 붙여 놨다니까요.” 쥬느비에브는 쪼르르 달려가 케이로프의 손에 호스를 쥐어 주었다. 호스를 이리저리 살펴 보던 케이로프는 한 팔을 번쩍 들어 나무 위로 약품을 뿌렸다. 그리고 신기한 듯 잠시 쳐다 보다 다시 약품을 뿌려댔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안느마리가 어느새 유벨에게 쫓아와 호스를 손에 쥐어 주며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하실 거죠? 유벨 님?” 유벨은 껄꺼름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 나무 위로 호스 끝을 댔다. 하얀색 액체가 하늘 위로 쏟아졌다. “와아- 재미난다. 역시 좋은 일은 다 같이 해야 한다니까!!” 까르르 웃어대며 쥬느비에브는 중앙 정원을 뱅글뱅글 돌았다. 안느마리가 그 뒤를 쫓아가며 약품을 뿌려댔다. 어느새 재미를 들인 미라벨과 케이로프, 유벨도 신나게 하얀색 액체를 쏟아부었다. 왠지 모르게 유쾌한 기분이 드는 하루였다. 스콜라의 중앙 정원은 마치 눈이 온 듯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신나게 ‘방뇨 활동‘을 끝낸 다섯 사람은 지쳐서 정원 위로 풀석 쓰러졌다. 여기저기 얼굴에 약품이 묻어 아주 우스웠다. 서로 킥킥 대며 다섯 사람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쥬느비에브는 정말 즐거웠다. 좋은 일도 하고 재미도 있고. 나중에 에이드리안에게 칭찬 받을 생각을 하니 너무 기분 좋았다. 그러다 쥬느비에브는 문득 고개를 돌려 철제 통에 붙여져 있는 종이를 보았다. ‘아참. 물 타서 쓰라고 했는데 깜빡했네. 뭐 괜찮겠지.“ 만사 귀찮아진 쥬느비에브는 큰 대자로 드러누워 기지개를 켰다. 잔디에 피부가 긁혀서 그런지 몸이 조금 가려웠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기분 좋게 오늘도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에이드리안은 학생회실의 책상 의자에 앉아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서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리고 보고서를 가지고 온 환경위원에게 말했다. “이상하군. 오늘은 학생회실에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거지?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에게서 소식은?” 환경위원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피부병 때문에 당분간 못 나오신답니다. 아침에 제게로 전갈을 주셨습니다.”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피부병?” “이유는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참 이상하군. 쥬르도 오늘 아침 식사시간에 안 나오더니...”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보고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스콜라 중앙 정원 피해 실태입니다. 어제 누군가가 몰래 방역 약품을 뿌린 모양인데 제대로 희석도 안 하고 원액을 쏟아 부은 것 같습니다. 치밀하게 ”접근 금지“ 간판까지 걸어 다른 학생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해 오늘 아침까지도 피해 상황이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거기다 스콜라 전체에 사용될 양을 중앙 정원에 집중적으로 뿌려 피해가 매우 극심한 편입니다. 토양 오염도 엄청난 상황이고 현재 중앙 정원의 나무 95%이상이 괴사한 상태입니다.” 에이드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훑어 보았다. “흐음...이거 아주 심각하군. 그래. 대책은?” “이상하게도 뤼베이크 가와 에르슈바이크 가. 그리고 모스테츠 무역 회사에서 예산을 충당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유벨 님이 얼마간의 비용을 부담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호오, 그래? 참 별일이군.” “그리고 방역을 담담하고 있는 용역 업체에서 에이드리안 님께 약품 비용 일체를 청구했습니다.” “뭐, 나한테? 학생회가 아니라?” 에이드리안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턱을 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군... 이해할 수 없어...” 에이드리안의 고민은 오래도록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사택으로 돌아간 에이드리안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집 안이 들썩일 정도로 소리를 지른 것은 해가 지고 달이 뜰 무렵이었다.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피부병이 옮아 자리에 드러누운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학생회실은 역사상 처음, 모든 멤버가 자리를 비우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일은 <오늘의 에스플리크>에 특종 기사로 실리게 되어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미스테리로 회자되었다. 제20음(第20音) Return to my Heart(1) 뽀송뽀송한 하얀 베갯잇에 얼굴을 비비며 쥬느비에브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팔을 움직여 베개를 얼굴로 꼬옥 당기며 그녀는 몸을 반대쪽으로 굴렸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불의 푸석푸석한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스쳤다. 까만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불 안쪽으로 몸을 파묻으며 다시 몸을 굴렸다. 멀리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눈에 들어오는 전경이 자신의 방임을 확인하고 쥬느비에브는 빙긋 미소지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다시 눈꺼풀을 닫고 베개를 끌어당기며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단잠에 빠져들었다. ******** 쥬느비에브는 오랜만에 아침식사 시간에 늦었다. 늦잠을 잔 탓이었다. 난처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랬든 그녀는 씨익 웃어 보이며 테이블로 달려가 맛있게 준비된 요리를 먹었다. 그녀의 약혼자인 에이드리안이 그녀에게 오늘은 왜 깨우러 오지 않았냐고 다소 비꼬는 말투로 이야기 했지만 그 속에 다소 섭섭함이 묻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다시 그에게 웃어주며 쥬느비에브는 그와 얼마 후에 있을 비인 가의 대무도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부드러운 롤빵에 과일 쨈을 듬뿍 바르며 비인 가의 대무도회가 아주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얼마 전부터 식당 옆에 있는 작은 방을 간이 식당으로 만들어 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것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싶다는 쥬느비에브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던 곳은 몇 십명이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당이어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기에는 어색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6인용의 비교적 작은 테이블을 구입해 간이 식당을 만든 것이었다. 에이드리안도 비교적 간이 식당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쥬느비에브는 아담하게 꾸며진 식당을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에이드리안은 장서 정리를 한다며 서재로 갔다. 쥬느비에브는 웃으며 도와주겠노라고 했지만 고개를 내젓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며칠 전 도착한 대무도회를 위한 의상을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반짝거리는 계단에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불렀다. 아래층에서 하녀장인 루이즈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녀도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방으로 향하며 집사인 톨레를 만난 그녀는 에이드리안이 서재에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늘 따뜻하게 웃어주는 하녀장과 집사가 아주 좋았다.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뛰듯이 걸어가 자신의 작은 드레스룸의 문을 열어 젖혔다. 드레스룸에는 그녀의 평상복이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그리고 따로 옷걸이에 하얀색의 무도회용 드레스가 걸려있었다. 드레스는 하얀색의 부드러운 옷감에 금색 실로 세련되게 장식되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정장과 매치되어 디자인된 드레스는 목선이 브이자 형태로 되어 있었고 치맛자락은 두 단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왼쪽 허리춤에 커다란 꽃 장식이 달려 있어 우아함과 산뜻함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드레스의 부드러운 치맛자락을 뺨에 가져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비인가의 무도회가 너무나 기대되었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하지 못한 그녀로서는 에이드리안의 약혼녀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자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혹시나 에이드리안이 약혼을 파기하지 않을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설픈 자신 때문에 그가 화를 낼 때마다 혹시나 약혼을 취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많이 불안하고 초조했었다. 물론 에이드리안이 좋은 사람이란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이야기한 이상 그가 책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가 섞인 가족이라고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그녀에게는 사람의 온기가 너무나 절실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다른 사람이 아닌 에이드리안이 있어주길 원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랬다. 너무나 간절히 원했다. 자신에게 과분한 소원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 에이드리안은 며칠 전부터 마음 먹은 장서정리를 하기 위해 서재에 들어와 있었다. 청소같은 것은 하녀들을 부리면 되지만 장서 정리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주 보는 책과 자주 보지 않는 책, 그리고 책의 종류와 출판 일시, 크기 등을 모두 고려해 서적을 배열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에이드리안은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을 한바퀴 둘러보고 책장 제일 위쪽에 꼽혀 있는 빨간색으로 장정된 책을 꺼내 내용을 훑어보았다. 몇 년 전에 읽은 기억이 났다. 그 때의 기억이 생각나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었다. 그 때만 해도 책에 푹 빠져 닥치는 대로 읽곤 했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질적으로 형편없는 책들도 많아서 에이드리안은 종종 창 밖으로 책을 집어 던지곤 했었다. 그 때마다 깨진 창유리를 하녀들이 치우느라 창 밖에서 왔다갔다한 기억이 났다. 한 번은 유벨이 그가 던진 책에 맞아서 세 시간동안 잔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빨간색 표지의 책을 다시 제자리에 끼우려고 팔을 뻗었다. 그 때 부드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빠꼼히 안을 들여다보는 하얀색 원피스 차림의 쥬느비에브가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책을 책장 안에 끼워 넣고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들어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쥬느비에브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잖아." "음... 아까 에이드리안의 타이가 삐뚤게 매어져 있던 게 생각나서요. 에이드리안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요." 쥬느비에브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하얀 셔츠 위에 매어져 있는 군청색의 타이를 풀어 다시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손끝이 에이드리안의 목을 스쳤다. "너나 잘 매고 다녀."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거의 풀릴 지경인 쥬느비에브의 머리 리본을 다시 매주었다. 타이 매듭을 다 지은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들어 머리 리본을 매만졌다. "어, 언제 풀어졌지?" 에이드리안은 계속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와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쥬느비에브는 왠지 부끄러워 머리에서 손을 내리고 두 손을 움켜쥐었다. "왜, 왜 그래요? 머리 리본 또 삐뚤어 졌어요?" "가까이 와 봐." 에이드리안은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쥬느비에브는 주춤대며 작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더. 더 가까이." 쥬느비에브는 잡고 있던 두 손을 더욱 꽉 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까만 머리를 살풋이 그의 뺨에 가져가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을 계속 뜨고 있었더니 눈이 아팠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드리안이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다시 피식 웃으며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귓가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는 잘 매고 다녀." 귓가에 들리는 따뜻한 숨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번쩍 뜨고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양 볼을 감쌌다. 왠지 가슴이 콩닥콩닥 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장난스럽게 일렁이는 파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의 눈동자가 전에 보석 상점에서 본 파란 보석처럼 참 예쁜 색이라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발갛게 상기된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책장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럼 나 나가볼게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그만 옆에 쌓여 있었던 책에 발이 걸려 휘청대고 말았다. 쥬느비에브의 외마디 비명에 에이드리안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넘어지기 일보직전인 쥬느비에브를 보고 그는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에이드리안의 품에 안긴 쥬느비에브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연신 숨을 몰아 쉬었다. "조심 좀 해. 다치잖아."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의 파란 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머리 속이 잠시 하얗게 변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쥬느비에브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발꿈치를 들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앉아 자신에게로 내렸다. 놀란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보였다. 살짝 입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에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의 질 좋은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손을 내려 에이드리안을 놓아주며 쥬느비에브는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양 볼에 가져갔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얼굴에서 심하게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잠시 쳐다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멍하게 쥬느비에브가 사라진 서재의 문을 바라보았다. ******** 쥬느비에브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문을 뒤로하고 서서 쥬느비에브는 두 손을 가슴에 대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나서 머리 속에 그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고 다시 양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왠지 너무 부끄러운 기분에 죽을 것만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기계적으로 자신의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흰색과 까만 색이 섞인 모자와 까만 색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서랍 쪽으로 다가가 서랍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모두 가방에 쓸어 넣었다. 그러다 가방 속에 들어간 책자 하나를 보고 다시 꺼내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안느마리에게서 선물로 받은 <연인으로 가기 위한 3단계>란 책이었다. 어제 밤에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나자 쥬느비에브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며 무의식적으로 책을 서랍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발걸음을 떼고 있는지 아니면 그대로 서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발을 놀리면서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 쥬느비에브는 아까의 충격으로 아무 생각 없이 스콜라 교정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간간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금 전의 바람으로 머리에서 조금 들어올려진 모자를 다시 손으로 꾹 누르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앞을 보며 걷다 그녀의 친구, 안느마리를 발견한 것은 오솔길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쥬느비에브!"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친구를 보자 쥬느비에브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친구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침 너 보러 가려고 했는데. 어디 가는 길이야?" 쥬느비에브는 그냥 목적지 없이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빨갛잖아."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왠지 더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안느마리가 발을 까딱까딱하며 싱긋 웃었다. "너, 에이드리안 님과 무슨 일이 있었구나? 참, 부끄러워 하긴. 내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식당에나 가자."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안느마리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 친구 안느마리...' '친구'라는 어감이 아주 기분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마음 속 깊이 행복감을 느꼈다. ********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아담한 2인용 테이블에 자리 잡아 딸기 시럽이 듬뿍 뿌려진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오늘따라 왠지 입맛이 없어 보이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안느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쥬느비에브, 맛없어? 다른 거 사 줄까?"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가 열심히 고개를 내젓자 안느마리는 손을 내밀어 쥬느비에브의 볼을 잡아당겼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쥬느비에브는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서는 포크로 케이크를 떠 입으로 가져갔다. "안느마리... 나 있잖아. 에이드리안 좋아해도 되는 걸까?" 케이크를 떠먹던 안느마리가 고개를 들고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약혼한 사람끼리 러브러브한 건 당연하지." "그렇지만 나한테 너무 과분한 거 같아서..." 안느마리는 움츠러든 쥬느비에브를 잠시 쳐다 보다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로(주. 참조) 주스에 꽂힌 빨대를 한 번 쭉 빨아 당기고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도 알아야 해. 사람만큼 이기적인 동물이 없다구. 그리고 내가 보기엔 전혀 과분한 게 아니라고. 너 에이드리안 님 아주 좋아하잖아. 그 것만으로도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 아니니? 그리고 사랑을 할 때 가장 멋진 모습이 어떤 건지 아니?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모습이야. 난 쥬느비에브가 자신에게 당당했으면 좋겠어. 평민 출신이라는 게 대수로운 일이니? 게다가 쥬느비에브는 이미 에슈비츠라는 엄청난 대귀족가의 일원이 되었잖아. 두려울 게 뭐 있니? 안 그래?" 자신에게 씨익 웃어주는 안느마리를 보고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웃었다. "으응...나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아. 안느마리. 안느마리가 내 친구여서...나 아주 행복하다고 얘기한 적 있었어?" "바아-보. 그걸 말로 해야 꼭 알아듣니? 다아- 압니다요." 안느마리는 다시 웃으며 빨대로 입을 가져갔다. 쥬느비에브는 웃으며 안느마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행복했다. ******** 쥬느비에브는 스콜라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수업을 받으러 실습실에 간 뒤였다. 수업을 빼먹고 쥬느비에브와 놀아주겠다는 안느마리를 억지로 보내느라 쥬느비에브는 진땀을 뺐다. 날씨는 오늘도 화창했다. 햇볕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아주 따뜻했다. 쥬느비에브는 한 걸음씩 발을 내딛으며 눈을 감았다. 피부로 따뜻한 햇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꽃이 절정을 이룬 스콜라의 교정은 아주 아름다웠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꽃잎 들이 날리곤 했다. 꽃잎이 날리며 향긋한 꽃향기가 퍼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문득 자신도 수업이 있었다는 생각에 쥬느비에브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가방을 휘두르며 케이로프의 연습실로 달려갔다. 무슨 건물을 어디서 어떻게 지나쳤는지도 모르게 정신 없이 달려가 연습실의 문 앞에 섰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쥬느비에브는 심호흡을 했다. 또 잔소리를 듣게 될 게 뻔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고 모자를 고쳐 썼다. 옷자락을 탁탁 털어 낸 다음 쥬느비에브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아직 레플리카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면 케이로프가 문을 열어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다시 문을 두드렸다. 쥬느비에브는 안에 아무도 없는지 궁금해 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무표정한 케이로프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몇 도르(주. 참조) 인지 아십니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죄송하다고 말 했다. 케이로프는 잔소리를 시작하려 입을 열더니 다시 꾹 다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케이로프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수업이나 합시다. 오늘도 기본적인 레플리카 연습을 해 보겠습니다." 케이로프는 엄지 손가락 만한 작은 돌멩이를 탁자 위에 놔두고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이 돌멩이를 들어 올리는 겁니다. 거의 1학년 수준이지요. 아시겠습니까? 강한 바램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우선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케이로프는 입을 벌여 어린 아이들이 부를법한 동요를 불렀다. 쥬느비에브는 동요를 부르고 있는 케이로프가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삼키느라 애를 먹었다. 케이로프의 매서운 눈초리에 웃음을 겨우 멈춘 쥬느비에브는 다시 탁자 위에 있는 돌멩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신기하게도 돌멩이가 혼자서 붕붕 떠 있었다. 케이로프가 노래를 멈추자 돌멩이는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쥬느비에브는 놀랍다는 듯 손뼉을 쳐대며 케이로프에게 정말로 신기하다며 칭찬을 했다. "그렇게 박수만 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차례입니다. 해 보십시오." 쥬느비에브는 움찔거리다 돌멩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까 케이로프가 부른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가 다 끝날 때가 되어도 돌멩이는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케이로프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연습을 게을리한 결과입니다. 이 정도의 레플리카도 사용하지 못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래서야 장차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안사람으로서 어떻게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설 수 있겠습니까."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화가 나고 서러워졌다. 까만 색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움켜쥐며 눈물을 떨구었다. "케이로프 님.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요. 이 정도도 못하고. 나 정말 바보 같죠? 나도 잘 하고 싶은데. 사실 어제도 많이 연습했는데. 왜 이런 걸까요, 난. 에이드리안이 아주 싫어할 거에요. 이렇게 멍청하니까."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케이로프는 당황하여 헛기침을 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사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자신의 능력이 아주 강하고 월등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지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충실해지고 자신의 가치를 존중해 줄 때 비로소 자신의 본래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은 지금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당신은 분명 할 수 있습니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두 눈을 깜빡이며 케이로프를 쳐다 보았다. "잘 할 수 있을까요?" 케이로프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다시 노래를 불렀다. 넓은 연습실로 쥬느비에브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떠라, 떠라, 떠라...'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마치고 살며시 눈을 떴다. 돌멩이가 탁자 위 약 5오토(주. 참조) 정도 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제자리에서 폴짝 폴짝 뛰었다. "케이로프 님! 보세요! 돌멩이가 떴어요. 떴다구요. 와아- 해냈다!" 케이로프가 웃어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기뻐 손뼉을 쳤다. "보십시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케이로프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케이로프 님 덕분이에요. 나, 다른 사람이 아니고 케이로프 님이 제 선생님이 되어주셔서 아주 기뻐요. 아~주 기뻐요."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으며 다시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해낸 작은 기적에 쥬느비에브는 너무나 행복했다. ******** 수업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학생회실로 향했다. 에이드리안이 오늘 장서 정리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왠지 만나면 서먹서먹할 것 같아서 쥬느비에브는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집에 가지 않고 학생회실에 들리려는 것이었다. 학생회실 문을 열자 유벨과 미라벨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다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방문을 닫고 방 안쪽으로 살짝 발을 내밀었다. 미라벨이 먼저 쥬느비에브를 발견했다. "어머, 쥬느비에브. 무슨 일이에요? 에이드리안 님도 안 계신데..." "어? 쥬느비에브, 무슨 일이야? 에이드리안이라면 지금 집에 있을 텐데..."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아, 알아요." 미라벨과 유벨이 쥬느비에브를 수상쩍은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미라벨과 유벨의 시선을 피해 괜히 탁자에 놓여 있던 책자를 뒤적거렸다. "흠...남녀 문제로군. 그렇지? 에이드리안이 또 뭐라고 그랬어?" 유벨이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러니까..." 쥬느비에브는 손에 들고 있는 책자의 표지에 시선을 박았다. "원래 남자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쥬느비에브." 미라벨이 딱 부러지게 말했다. "하,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된단 말이에요." "너무 가까이 가면 안된다니?" 쓰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으며 미라벨이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책자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에이드리안하고 나하고는 한 뼘만큼 틈이 있어요. 거긴 넘어서는 안 되는 곳이에요. 그 틈을 넘어서면 에이드리안이 날 싫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근데... 자꾸 더 가까이 가고 싶어요. 그래서 오늘... 하,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에이드리안이 날 싫어하게 되면 정말...정말 싫어요."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보던 미라벨이 혀를 찼다.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이 것 보세요. 쥬느비에브 양. 난 나의 사랑을 희생해서 쥬느비에브 양에게 에이드리안 님을 맡겼다고요. 그런데 그런 자신감 없는 태도는 도대체 뭐지요? 제 몫까지 열심히 그 분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틈이든 뭐든 쥬느비에브의 사랑으로 메워 버리면 되잖아요. 원래 사랑이란 그런 거에요. 상대방의 생각까지 일일이 꿰뚫어 보려 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에요. 자신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 그 뿐이에요. 진짜 그 분의 속마음은 모르는 거잖아요?" 듣고 있던 유벨이 슬쩍 웃으며 정리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쥬느비에브의 맞은 편의 소파로 걸어가 풀썩 주저앉았다. "맞아. 쥬느비에브. 미라벨의 말이 맞아. 쥬느비에브는 늘 하던 방식으로 나가라구. 단순하게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보기엔 에이드리안은 아마...네가 더 가까이 다가와 주길 바랄걸? 그 녀석 겉으로 표현은 잘 안 하지만 널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뭐 내가 그 녀석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쥬느비에브는 자신을 가지고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자, 이제 에이드리안에게 가야지?" 쥬느비에브는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붉어진 얼굴을 책자로 가렸다. 뭔가 굉장한 응원을 받은 거 같았다. "유벨 오빠, 미라벨 언니. 고마워요." 쥬느비에브는 작게 속삭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미라벨과 유벨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 행복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너무나 행복했다. 스콜라에 오기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에 쥬느비에브는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으로 눈을 한참 비벼댔다. 그리고 하늘을 보고 씨익 웃어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을 비추고 있는 따뜻한 햇볕을 온 몸으로 느끼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면 에이드리안과 같이 식사를 해야겠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에이드리안과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역시 며칠 뒤의 무도회 이야기가 좋겠지? 무도회가 끝나면 난 에이드리안의 가족으로 인정 받게 되니까 기념으로 선물이라도 하나 사달라고 졸라볼까? 아아~ 기분 좋아라.' 바람이 불어왔다. 떨어지는 나뭇잎과 꽃잎을 손에 받아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손을 들어 바닥에 떨어뜨리며 쥬느비에브는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름다웠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검은머리의 남자가 두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낯이 익은 그의 얼굴에 쥬느비에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서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조금만 더 가면 에이드리안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루네르...오라버니." 교활하게 생긴 검은머리의 남자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누가 네 오라버니라는 거냐? 난 너같이 비천한 신분의 사촌 동생을 둔 기억이 없다. 에슈비츠 공작 예하...숙부님으로부터의 전언이다. 비인 님과의 약혼을 파기하고 당장 본가로 들어오라는 구나." 검은머리의 남자는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말을 뱉어냈다. 쥬느비에브는 떨려오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뒷걸음질을 쳤다. 그 때 루네르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와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21음(第21音) Return to my Heart(2) 이른 아침. 학생회실은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움직임이 있는 사람은 에이드리안 뿐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초점 없는 시선으로 무의미하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손을 뻗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 담긴 차가 식었다는 것을 깨닫자 그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본 미라벨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즉시 차 주전자에서 다시 차를 따라 가져왔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벽에 붙어 묵묵히 에이드리안의 뒷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라벨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섰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미라벨이었다. 미라벨은 유벨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오늘은 루드레스 차에요. 에이드리안 님은 기분이 나쁘실 때면 항상 이 차를 드시죠. 이거 상당히 위험한데요." 유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로프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어. 다들 준비하지." 케이로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 이어 찻잔이 벽으로 날아갔다. 그릇이 깨지는 특유의 시끄러운 소리가 학생회실을 울렸다. 그 광경을 본 미라벨과 유벨, 케이로프는 굳은 표정으로 일제히 눈을 내리깔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곧 이어 시끄러운 불협화음의 진동이 온 몸으로 전해져왔다. 세 사람은 그저 끈질긴 인내심으로 귀를 막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주변이 조용해지자 세 사람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책상과 책장은 뒤집어 진 상태였고 주위에 종이가 날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으며 바닥의 양탄자도 색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무로 된 방문은 흡사 짐승의 발톱으로 긁은 것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앉아 있는 소파만이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살피던 유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다가 벽에 난 금을 보고 침을 삼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에이드리안을 응시하면서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케이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오늘, 천장은 안 무너졌네요." 케이로프가 허무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유벨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오늘은 벽에 금이 갔잖아. 또 예산 엄청 들겠어. 쥬느비에브는 도대체 어딜 가서 안 오는 거람..." 다시 주위를 둘러보던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연락없어?" 갑자기 귓가에 들린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세 사람은 화들짝 놀라 각자 딴 짓을 하며 창 밖을 쳐다봤다. 에이드리안이 매서운 눈초리로 뒤돌아 보자 세 사람은 서로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유벨이 입을 열었다. "아직...없는데." 에이드리안은 조용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외박이라니!!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외박이라니!! 도대체 뭐 이런 여자가...!"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는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에이드리안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 학생회실에서 한 차례의 소동이 있은 뒤 에이드리안은 접견실로 자리를 옮겼다. 접견실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가라앉히고 에이드리안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 밤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애물덩어리 약혼녀 때문에 밤 새 잠을 못 잤더니 눈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머리도 멍한 게 잠이 모자란 탓인 듯 했다. 답답함에 몸을 일으켜 세워 걸치고 있던 얇은 외투를 벗어 손에 쥐었다. 외투를 옆에 있는 의자에 던지자 무언가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에이드리안은 귀찮은 듯 얼굴을 찡그리다가 무언가가 생각나듯 급히 바닥의 물건을 주웠다. 조그만 은색 상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이드리안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상자를 외투 주머니 안에 넣었다. 얼마 전에 보석상에서 산 '그것'을 쥬느비에브에게 주려고 여러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어제 밤부터 사람을 풀어 찾아보았지만 쥬느비에브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제 쥬느비에브는 아주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리 뭔가 들뜬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초조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재를 뛰쳐나갔을 때 따라나갔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며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가슴 한 쪽을 스쳤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참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열리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의 미라벨이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무슨 일이냐고 눈짓을 하자 미라벨이 말했다. "에슈비츠 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쥬느비에브 문제로 에이드리안 님께 드릴 말이 있다고..." 미라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뒤에서 검은머리의 간사하게 생긴 2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인 님. 루네르 미샤 모르 에슈비츠라고 합니다." ******** 에이드리안은 따뜻한 차를 목으로 넘기며 맞은 편에 앉은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맘에 들지 않는 남자의 인상에 얼굴을 찌푸렸다. 에이드리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용건은?" 어느 샌가 들어온 미라벨과 유벨,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문에 딱 붙어 이쪽 상황을 훔쳐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실종된 마당에 갑자기 찾아온 에슈비츠 가의 사람에게 모두 호기심이 인 것 같았다.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제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 지금 에슈비츠 본가로 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에이드리안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자못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뒤에 서 있던 네 사람도 놀란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눈치였다. "에슈비츠...본가라니?" 남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가 본가로 편지를 보내왔더군요. 이 곳 생활이 적응이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원래 평민 출신으로서의 생활이 있었을 텐데 갑자기 귀족으로서 생활을 하려니 힘이 들었던 게지요. 여러 가지 문제로 아주 힘이 드는 것 같아서 숙부님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쥬느비에브를 본가로 데려오기로 말입니다." 에이드리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며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에이드리안이 찻잔을 내려놓기 전에 안느마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쥬느비에브는 이곳 생활을 아주 즐거워했다고요!! 무슨 그런 말을!!" 금새라도 달려들 기세의 안느마리를 미라벨이 붙잡고 잡아끌었다. 제발 가만있으라고 미라벨이 토닥이자 안느마리는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루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다시 루네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약혼자인 내 허락도 없이 데려갔다는 말인가?" 냉랭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루네르는 다소 놀란 듯 했지만 곧 자세를 고쳐 앉고 말했다. "숙부님께서는 쥬느비에브와 비인 님의 약혼 파기를 원하십니다." 루네르의 말에 접견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루네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이 약혼은 두 가문의 결합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에슈비츠 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쥬느비에브로서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렵지요. 숙부님께서도 평의회 의장이신 헤르만 님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추진하신 것이기에 매우 후회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쥬느비에브와의 약혼은 없던 것으로 하고 정당하게 에슈비츠의 피를 이어 받은 제 동생, 베로니카와의 약혼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베로니카는 에슈비츠 가의 먼 방계 혈족으로 이번에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가 되기 위해 숙부님의 양녀로 입적되었지요." 안느마리를 진정시키던 미라벨이 그 말을 듣고 뛰어 나왔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뒤에서 미라벨을 응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별 말 같지 않은 소리 다 듣겠군요. 에이드리안 님은 쥬느비에브 외의 사람과는 약혼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요!! 다른 사람과 약혼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하겠어요! 적어도 베로니칸가 뭔가 하는 여자보다는 내가 더 신분상 유리하지 않나요?"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하는 미라벨의 모습을 보며 루네르는 잠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에슈비츠 가의 방계 출신인 그의 신분상 뤼베이크 가의 후계자인 미라벨은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뤼베이크 님. 저는 비인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라벨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루네르를 쏘아보고 다시 뒤쪽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차를 마시며 루네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슈비츠 경으로부터 받은 증표라도 있나? 자네같이 이름 없는 자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서." "예. 숙부님의 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녁에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루네르는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알아들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다시 연락하지. 가보게." 냉랭하게 말하며 에이드리안은 기품 있게 찻잔을 기울였다. 루네르는 왠지 살벌한 느낌의 에이드리안을 잠시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 "뭐 저런 해산물 같은 남자가 다 있는 거지요?" "옳소!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에요, 미라벨 님."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씩씩거리며 에이드리안 쪽으로 다가왔다. "저런 남자 말은 믿을 게 못됩니다. 교활하게 생긴 얼굴을 봐도 그렇습니다. 베로니칸지 뭔지 그런 건 접어 두고 어서 쥬느비에브를 데려오는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에이드리안 님." "그래요, 어서 내 친구를 구하러 가요. 분명 저 사람이 납치 한 게 틀림없어요. 쥬느비에브가 그런 이상한 곳으로 돌아가길 바랬을 리가 없어요." 미라벨과 안느마리가 옆에서 계속 시끄럽게 굴자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벨이 다가와 물었다. "에드, 지금 준비할까? 쥬느비에브, 빠르면 내일 중으로 따라 잡을 수 있을거야." "안 가." 냉랭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접견실에 울려 퍼졌다. 계속 종알거리던 미라벨과 안느마리가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유벨과 케이로프도 의외의 대답에 그저 에이드리안을 쳐다 볼 뿐이었다. "스스로 뛰쳐나간 거야. 내가 굳이 그 여자를 데려와야 할 이유 따위 없잖아?" 차갑게 말을 내뱉고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벨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에이드리안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남겨진 세 사람은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세 사람 모두 고민에 빠진 듯 했다. 안느마리가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님이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쥬느비에브를 빨리 구해 와야해요. 우리끼리라도 가자고요."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이 나간 방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린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에이드리안 님이 저렇게 말씀하신 이상 그 뜻에 따르는 게 우리의 소임이에요." "뭐라고요? 당신들 모두 쥬느비에브 좋아했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지금 위기에 빠진 거라고요!! 그런 말 할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안느마리가 울분을 토하자 미라벨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우리는 당신과는 입장이 달라요. 우리는 에이드리안 님을 따를 뿐이에요." "아, 그래요? 그럼 잘~들 해보세요. 난 당신들 입장과는 달리 에이드리안 님보다 내 친구, 쥬느비에브가 훨씬 소중하니까. 난 내 하나뿐인 친구를 구하러 갈 테니까 댁들 어디 잘 해보세요!!" 거세게 소리치며 안느마리는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갔다. 슬픈 표정으로 미라벨은 묵묵히 서 있는 케이로프 쪽으로 돌아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우리, 이래야 하는 거 맞죠? 그렇죠?" 케이로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아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미라벨, 잘 생각해야 해. 에이드리안 님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3년 전처럼 방관자가 될 수는 없어. 그 때처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 자신의 방에 들어온 에이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닫고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목에 맨 타이를 잡아 당겼다. 매끄러운 감촉의 타이가 목을 타고 미끄러졌다. 타이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이드리안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타이를 집어 던졌다. 그 타이는 아침에 쥬느비에브가 손수 매어준 타이였다. 에이드리안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테라스 밖 정경은 매우 평화로웠다. 울창하게 솟아 있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아 연두색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 호수가 보이는 듯 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화창한 날씨에 괜히 신경질이 난 듯 에이드리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테라스의 문을 발로 걷어 찼다. 테라스의 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오자 막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벨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침대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잘 거니까 방해하지마. 안 그래도 어젯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벨이 다가와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잡았다. "너, 진심이야? 쥬느비에브 데리러 안 갈거야? 이대로 약혼 파기할 생각인거야?" 유벨이 목소리를 높이자 에이드리안은 짜증스러운 듯 유벨을 밀쳐냈다. "상관 마! 내 일이야! 어차피 잘 된 거잖아? 스스로가 나간 거야! 내 옆에 있어봤자 그녀는 행복해 질 수 없어!!" "아, 그래? 그래, 네 일이지. 네 일이고 말고. 그럼 좀 더 잘 처리를 해야 할 거 아냐!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항상 일을 그르치는 건데? 나도 네 뒷감당하는 거 피곤해. 힘들어 죽겠다구!! 그러니까 네가 좀 제대로 하란 말이야!" 유벨은 말을 마치고 숨을 헐떡이며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됐어. 그만 가." "후회하는 건 너야. 지금 쥬느비에브 보내면 네가 후회한다고. 난 그런 꼴 볼 생각 절대 없으니까 알아서 해. 네 일이니까 네가 좀 알아서 하라고! 에드, 욕심 부려도 되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알았어?" 에이드리안은 순간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하고 나가랬잖아!!!" 유벨은 잠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뒤로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테라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마음이 무거웠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기분과 흡사했다. 안도감과 초조함, 그리고 불안함, 죄책감...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시선을 둔 채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테라스의 문이 열리고 하얀 새들이 테라스와 방으로 살며시 내려앉았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새를 손바닥에 앉혔다. 새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내겐 너무 과분한 존재야. 욕심 따위 부릴 수 없을 정도로. 그녀 스스로가 떠난 거라면 놓아주어야겠지. 세상엔...가질 수 없는 것도 있어. 그렇지?" 손안의 하얀 새를 날려보내고 에이드리안은 테라스의 문 가에 기대어 섰다. 여전히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하얀 새들이 날개짓을 하며 높게, 높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 컴컴했다. 쥬느비에브가 제일 처음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깜깜하다 못해 컴컴했고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두웠다. 어둠, 어둠뿐이었다. 자신이 딱딱한 바닥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은 쥬느비에브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팔과 다리를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로 인해 원치 않는 속박감을 맛보아야 했다. 몸을 꿈틀거린 탓인지 입안으로 머리카락 한 올이 들어왔다. 찝찝한 기분에 머리카락을 떼어내려고 이리저리 목을 움직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바닥에 쿡 하고 박았다. 뒤통수 쪽으로 아리한 아픔이 느껴지자 눈물이 찍 하고 났다. 어둠에 적응이 되었는지 서서히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낡은 마차에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차가 몹시 흔들려 몸 여기저기가 쑤신다는 것도 알았다. 그제서야 쥬느비에브는 불현듯 자신이 루네르 오라버니에게 잡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 주름을 잡고 다시 몸을 꿈틀거려 마차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무릎과 발을 사용해 문을 찼다. 구두 굽과 나무가 부딪히며 시끄러운 합창이 쏟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발차기를 시도했다. 한참동안 동작을 반복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때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며 쥬느비에브는 반대쪽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귀 위쪽의 머리 부분으로부터 찌릿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움직일 수 없는 손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몸을 꿈틀거렸다. 아까보다 더 한 고통이 머리를 울렸다. 비로소 고통의 실체를 알게된 쥬느비에브는 또 다시 직면한 바보 같은 상황에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목청을 높여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것 보세요!! 나 머리카락 끼였어요!! 도와주세요!! 도와 달라니까요!!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아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있는 것 다 알아요. 어서 도와달라니까요!! 흐아아아아아아앙~" 제22음(第22音) Return to my Heart(3) 쥬느비에브는 버석한 흙먼지가 날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이 삐죽삐죽하게 솟은 아저씨가 건네주는 검은 손수건에 팽하고 코를 풀었다. 다시 콧물이 줄줄 흐르자 손수건을 반대쪽으로 뒤집어 다시 코를 풀었다. 너무 세게 푼 탓에 머리 왼쪽이 웅 하고 울렸다. 쥬느비에브는 손수건을 다시 아저씨에게 건네주었다. 아저씨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코 묻은 손수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아 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훌쩍거렸다.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 옆에 세워져 있는 마차의 문 모서리에 까만 색 머리카락 몇 올이 걸려 있는 것을 보자 더욱 서러운 기분에 아저씨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다시 빼앗아 코를 풀었다. 그리고 삐죽머리 아저씨와 반대로 머리카락이 머리에 딱 붙어 있는 아저씨를 두 눈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아저씨들, 나 대머리 되면 책임 질 거에요? 나 대머리 되어서 에이드리안 한테 구박받으면 아저씨들이 책임 질 거냐구요! 말해두지만 안느마리네 가게의 강력 발모제는 아주아주 비싸다구요." 두 남자가 멍청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참 이상한 아저씨들이라고 생각하며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납치되어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자 뻣뻣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든 여기서 도망가서 스콜라로 돌아가야 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차가 세워져 있는 좁은 흙길의 주위에는 무언가를 심어 놓았는지 파란색이 듬성듬성 보이는 논밭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이런 장소는 태어나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곳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첫 번째 과제를 결정했다. 우선은 이 이상한 두 아저씨들을 따돌려야 했다!! "아저씨들. 루네르 오라버니가 절 데리고 가라고 했죠?"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눈을 뜨고 아저씨들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들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역시... 그랬었군요. 아저씨들, 참 안 되었군요. 나와 같이 죽음의 길에 오르다니...아니에요. 이 것은 가문을 위한 성스러운 희생이니 아저씨들도 이해하는 거겠죠?"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리고 슬픈 표정으로 아저씨들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들은 난데없는 소녀의 눈물에 영문을 몰라 서로 마주보며 눈짓으로 의견을 묻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저와 함께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님의 부르심을 받고 함께 죽음의 길을 걷는 거에요. 사실 제가 에슈비츠 가의 양녀가 된 건 다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의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랍니다.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가 누구냐고요? 우리 에슈비츠 가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신 우리 가문의 수호신이시지요. 모르셨나보군요. 이 사실은 진짜 에슈비츠 가의 일원에게만 전해지는 전설이랍니다. 그러나 이 하늘의 뮤즈는 우리 가문을 지켜주는 대가로 매년 산 제물을 바치라고 하셨죠. 그리고 제물은 꼭 세 사람이어야 한답니다. 산 제물은 우선 3 도르 후에는 전신으로 퍼져 몸 구석구석을 썩게 만드는 독약으로 몸을 마비시킨 다음 도끼로 가볍게 내리쳐..." 쥬느비에브는 오랜 기간 케이로프와 안느마리에게 전수 받은 궁극의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하늘의 뮤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써먹어서 미안하다고 마음 속으로 케이로프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안느마리가 가르쳐 준 <정의를 수호하는 101가지 방법>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산 제물은 영혼조차 갈가리 찢겨져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랍니다. 아시겠어요, 아저씨들? 루네르 오라버니는 아저씨들이 겁을 먹을까 봐 이야기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아저씨들은 얼굴이 퍼렇게 질려 서로 마주보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가씨. 그게 정말이야? 우리가 그...일로세...뭔가하는 수호신에게 잡아 먹힌다는 것?" "아저씨들, 에슈비츠 본가의 대식당에 신전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거 모르셨나 보군요..."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 한 방울을 떨구어 내며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 것은 미라벨의 흉내를 낸 것이었다. 소맷자락 너머로 흘끗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아저씨들은 순진하게 쥬느비에브의 말을 믿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저씨들...전 사실 아무 죄 없는 아저씨들을 길동무로 선택하고 싶지 않아요. 영혼마저 찢겨질 아픔을 아저씨들이 견딜 수 있겠어요? 어서 도망 치세요. 전...차라리 숲 속에 들어가 목을 맬지언정 영혼이 사라지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저씨들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케이로프처럼 무표정하게 보이려고 최대한 애를 쓰며 목소리를 저음으로 쫙 깔았다. "아니면 저의 저승길 동무가 되고 싶으신 모양이죠?" 아저씨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뒤로 돌아 허둥지둥 마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말을 채찍질해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흙바닥에서 일어나 치마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어 냈다. 그리고 마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는 확 트인 길 쪽으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며 열심히 달렸다. 머리카락이 날리며 얼굴을 쓸어 갔다. 쥬느비에브는 손을 들어 얼굴에 걸쳐진 머리카락을 잡아떼고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리에 힘이 빠질 무렵 마을이 보였다. 집이 몇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가 서 있던 언덕 위에 잠시 주저앉았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머리가 멍하니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쥬느비에브는 웃었다. 곧 스콜라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운이 솟았다. 돌아가면 에이드리안에게 말하리라. 자신은 계속 에이드리안 곁에 있고 싶다고.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에슈비츠 가에는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차갑고 냉랭한 그 곳에는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끄응차 소리를 내며 무릎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슬슬 마을 안 쪽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다리를 끌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쥬느비에브는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자신처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쫓아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잡히는 것이 시간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쥬느비에브는 힘껏 달렸다. 어서 스콜라에 돌아가야 했다. 에이드리안이 몹시 화를 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자 더욱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에슈비츠 가에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이 강제로 끌려간 것을 알게 되면 모두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안간힘을 다했다. 다시 스콜라에 돌아가야 했다. 그 곳에 에이드리안이 있고 모두가 있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모든 것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달리고 달렸다. 뒤쪽에서 말울음 소리가 났다. 조바심에 뒤를 돌아 보았다. 루네르가 갈색 말을 몰아대며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다리가 꺾이며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루네르가 말을 세우더니 안장에서 내려왔다. 뒤쪽에 아까의 아저씨들이 루네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눌한 표정으로 보아 분명 도중에 루네르에게 잡힌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손을 떨며 얼굴로 가져왔다. 순간 에이드리안이 너무 보고싶었다. 너무 보고싶었다. 에슈비츠 본가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네르가 의기양양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작은 곤충의 다리를 분지르는 것처럼 루네르는 쥬느비에브의 신경을 하나하나 망가뜨려 놓았다. "이렇게 도망쳐봐야 갈 곳도 없단다. 쥬느비에브. 비인 님께서...에이드리안 님께서 너와의 약혼을 파기하겠다고 오늘 아침에 내게 말씀하셨단다. 이제 갈 곳이 없어졌단 말이다. 네가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니면 에슈비츠가가 곤란해지니 그만 돌아가자꾸나. 내 사랑하는 사촌 동생." 쥬느비에브는 멍한 표정으로 루네르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자신과의 약혼을 깨뜨리다니. 분명 자신에게 집과 가족을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다소 초조함과 불안감은 있었지만 믿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늘 곁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그녀는 꿈이 아닌 현실 속에 있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 에이드리안은 까만 색의 커다란 우산을 쓰고 상점가를 걷고 있었다. 오후 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바닥의 물이 튀어 구두를 적시고 있는 광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아침에 루네르에게 약식으로 쥬느비에브와의 약혼 파기를 통보한 뒤 그는 내내 불편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학생회실에서도 집에서도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 3쌍의 눈빛 때문에 에이드리안은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시종일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눈빛에 에이드리안은 그들을 피하려고 온갖 장소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유벨도 말없이 그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왠지 껄끄러운 감정 때문에 그 역시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외출을 한 것이었다. 물론 외출을 한 지금도 이상하게 마음 한 쪽이 무거웠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상점가는 한산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인적이 뜸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쇼윈도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을 건성으로 훑어 보았다. 약 500 레트(주, 참조)정도를 걸었을 때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눈을 잡아끄는 물건을 발견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멈춰 서서 그 물건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우산을 접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제법 커다란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상점을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외출은 이쯤해서 마치기로 하고 집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 현관에 들어서자 반갑게 집사와 하녀장이 그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하며 에이드리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허전함의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문득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본 순간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쥬느비에브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짝 인상을 쓰며 에이드리안은 물이 떨어지는 우산과 외투를 집사에게 건네주고 상자를 두 팔에 안아든 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비가 와서 하늘은 어두웠고 덕분에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도도 매우 어두침침했다. 곧 불을 밝혀야 할 정도였다. 에이드리안은 복도를 지나다 문득 멈추어 섰다. 벽면의 방문이 굳게 닫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경첩에 기름칠이 잘되어 있는지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커튼까지 드리워져 방안은 깜깜했다. 에이드리안은 방안으로 살며시 발걸음을 옮겼다. 불을 밝히고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핑크색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은 사람의 온기가 없어 왠지 썰렁하게 느껴졌다. 들고 있던 상자를 근처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에이드리안은 침대가로 걸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주름 하나 없이 말끔하게 씌워져 있는 시트를 훑었다. 하얀 시트가 차갑게 느껴졌다. 침대 위에 가만히 몸을 뉘였다. 시트의 냉기가 에이드리안의 피부를 차갑게 만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구석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들고 온 상자가 위에 놓여 있었다. 무심히 눈을 내리깔던 에이드리안은 침대 옆의 서랍으로 눈을 고정시켰다. 서랍으로 다가가 제일 윗 서랍을 열어보았다. 서랍 안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물건들을 이리저리 뒤지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러다 문득 소중하게 감춰둔 듯한 파란색 상자를 발견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상자를 바라보다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노란색 리본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는 것을 에이드리안은 알고 있었다. 상자를 닫고 에이드리안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다시 들고 방을 나섰다. 그는 다시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방안을 둘러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 곳은 쥬느비에브의 방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진 에이드리안은 서둘러 자신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없이 침실의 문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연 에이드리안은 우선 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 침대 위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가지고 온 상자의 끈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곧 이어 상자에서 까만 생머리의 앤티크 인형이 살풋이 웃는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형은 짙은 초록색의 귀여운 원피스 차림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인형을 침대 머리맡에 앉혀 놓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찌르며 뿌루퉁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쥬느비에브...아니, '가짜 쥬르'야. 알겠어?" 인형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까만 눈동자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까만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인형이 옆으로 발라당 쓰러졌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인형을 세워주고 이번에는 더욱 인상을 쓰며 인형을 쳐다보았다. "바보, 말도 못해? 깨물어도 가만있을 거야?" 여전히 말도 없고 표정도 변하지 않는 인형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폭 쉬었다. "키스...해도 가만있을 거야?" 힘없이 말하며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에 들어 누웠다. 그리고 다시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인형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바보, 바보, 바보."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누워있기로 했다. 그 편이 그를 괴롭히는 세 사람한테서 탈출할 적당한 구실인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돌아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불쑥 떠나버린 쥬느비에브가 못내 원망스러운 그였다. 그렇다고 그가 먼저 편지를 쓰기에는 왠지 기분이 불편했다. 사람을 시켜 그녀의 소식을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럴 수는 없었다. 무언가와의 싸움에서 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그녀가 에슈비츠 가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물론 잘 지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장소였으니 말이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한 번 쥬느비에브를 원망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는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까만 생머리의 인형을 품에 꼬옥 안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에이드리안을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미라벨이 작게 속삭였다.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군요. 이 정도면 관찰은 충분한 것 같으니." 케이로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은 이미 작업에 들어간 모양이더군. 우리도 곧 출발해야 할거야."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잠시 더 들여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두 사람은 모두 진심으로 빌고 있었다.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가 에이드리안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 쥬느비에브는 멍한 표정으로 낡은 마차에서 내렸다. 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쥬느비에브는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들었다. 웅장하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는 엄청난 대저택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해가 지면서 저택의 유리창문에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뒤를 돌아보면 분명 아름답게 조경된 정원이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곳에서 약 3개월 가량 살았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3개월.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옆에서 사치스럽게 치장된 검은 마차에서 내리는 루네르가 보였다. 루네르는 쥬느비에브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저택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 루네르의 뒤를 따랐다. 루네르는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걸음걸이로 에슈비츠 저택에 들어섰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루네르의 뒤통수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널찍한 현관에 들어서자 집사와 하녀들이 뛰어 나왔다. 그리고 저마다 한 마디씩 루네르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쥬느비에브를 흘끗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 했지만 하녀들과 집사는 그녀의 눈을 피해버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쥬느비에브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본 것처럼 그들은 시선을 거두었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보통 자신들이 평민들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과신하고 있었다. 에슈비츠 저택의 하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3개월 전에도 그들은 같은 태도로 쥬느비에브를 대했었다. 평민 출신 주제에 운 좋게 귀족이 된 계집애라고 다들 말없이 그녀를 비판했다. 쥬느비에브는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루네르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하녀 한 명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하녀는 쥬느비에브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쥬느비에브가 입고 있는 질 좋은 원피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필시 천한 평민 출신이 옷만 좋은 것을 입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듯 했다. 하녀의 시선에 쥬느비에브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녀가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앞서 갔다. 쥬느비에브는 주변을 살피며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과 복도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음침하고 축축한 느낌이었다. 곧 계단 끝에서 쥬느비에브는 거친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녀가 문을 열더니 들어가라며 방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울퉁불퉁한 돌이 벽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바닥도 고르지 못해 자칫하다가는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았다. 하녀는 쥬느비에브가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곧 발소리가 희미해져가며 결국 사라졌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방을 둘러 보았다. 방에는 낡은 침대와 작은 서랍 하나가 전부였다. 침대에는 듬성듬성 곰팡이가 슬어 있는 것 같았다. 작은 창문에서 조그맣게 빛이 들어 왔다. 이 방은 원래 잡다한 물건들을 쌓아 놓는 창고 겸 다락이었던 것 같았다. 3모네 전에 머물던 골방보다도 상태가 더 심각한 방이었다. 그녀가 에이드리안의 사택에서 머물던 방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었다. 쥬느비에브는 체념한 듯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축축한 기분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참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줄기를 넋이 빠진 듯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 순간 뺨으로 눈물이 타고 내렸다. 쥬느비에브는 흠칫 놀라 재빨리 소매 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에이드리안이 자신과의 인연을 잘라내고자 한다면 그녀로서는 더 이상 매달릴 수가 없었다. 그녀와 그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 반면,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떠나보낸 것이다. 다시 눈물이 샘솟았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왠지 기운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내내 굶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쥬느비에브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다시 계단으로 내려갔다. 어두침침한 복도가 끝나고 대낮같이 환한 복도가 나타났다. 비싸게 보이는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고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듬성듬성 나열되어 있는 복도에서는 많은 하인과 하녀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누군가가 자신과 눈이 마주쳐 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몇 몇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쥬느비에브는 반갑게 인사를 하려고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돌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쥬느비에브는 무안함에 다시 뒤로 물러섰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하다 쥬느비에브가 거의 포기할 무렵 하녀 한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우?" 하녀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먹을 것이 좀 없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하녀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걸어갔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 뒤에 아까의 하녀가 쟁반 하나를 들고 왔다. 쟁반에는 허옇고 묽은 밀가루 죽과 색 바랜 스푼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하녀는 쥬느비에브에게 던지듯이 쟁반을 쥐어주고는 다시 멀어져 갔다. 쥬느비에브는 말 없이 쟁반을 받아 들고 다시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문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방으로 들어섰다. 힘없이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침대에 앉아 쟁반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스푼으로 밀가루 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순간 스프 속으로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돌아가고 싶었다. 행복한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 봐 주고 아껴 주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는 꿈같은 장소인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하얀 달빛을 받으며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러나 꽉 막힌 다락에 갇혀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한 그녀의 울음소리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 에이드리안은 순간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치 쥬느비에브의 흐느낌 같았다. 곧 자신의 환청이라는 생각이 들자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책상 위에 있는 종이 뭉치를 넘겼다. 한참 종이를 뒤지다가 에이드리안은 종이 사이에 끼워져 있는 하얀 봉투에 에슈비츠 가의 인장이 찍혀져 있는 서한을 발견했다. 잠시 주저하다 책상 서랍 안의 페이퍼나이프를 꺼내 봉투를 찢었다. 안에는 손바닥 크기의 다소 두꺼운 하얀 종이가 들어 있었다. "베로니카 양과의 접견...이라." 에이드리안은 살짝 이마를 찌푸리고 책상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했다. 차를 시키려고 일어서던 차에 서재의 문이 열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 왔다. 에이드리안은 별로 반갑지 않은 잔소리가 이어지리라 예상하고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미라벨이 생긋 웃으며 기품 있게 말했다. "얼마간의 휴가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에이드리안 님." 에이드리안은 예상치 못한 주제에 놀란 눈으로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다홍색 레이스 치마를 한 손으로 우아하게 들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라니? 갑자기 왜?" "네, 언니가 다홍색 머리를 까맣게 물들일 수 있는 기발한 약이 있다 길래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해서...비싼 약이라서 빌려 줄 수가 없다는 군요. 학생회 업무에 지장이 있을 줄은 알지만 꼭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휴가 중이라도 비인가의 대무도회에는 참석할 생각입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로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너도 휴가? "예. 이번에 아버님께서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에 대한 새로운 다큐멘터리북을 구해오셨다고 합니다. 책이 워낙 귀하고 귀한 것이라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가져오라고 하기가 그래서 제가 직접 가서 가져오려고 합니다." 에이드리안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두 사람은 왠지 시침뚝뗀 표정으로 맨숭맨숭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좋아. 허락하지."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지독한 잔소리꾼이자 염탐꾼인 두 사람이 잠시나마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접대용 미소를 내보이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 학생회일은 걱정하지 말고. 푸욱- 쉬다와."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걸음을 떼었다. 방 문앞에 다다랐을 때 미라벨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왜 그러냐고 눈짓을 보냈다. 미라벨은 다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응시했다. "저, 에이드리안 님. 쥬느비에브가 정말로...정말로 스스로 이 곳을 떠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가 다시 다루어지자 에이드리안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책상 위의 종이를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미라벨." 미라벨은 케이로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는 진심으로 에이드리안 님을 믿고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지켜 본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떠났을 리가 없어요. 에이드리안 님. 혹시 그녀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녀에게 에슈비츠 가가 정말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장소일까요? 그녀가 에이드리안 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시나요?" 에이드리안은 말 없이 책상 위의 종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로프가 미라벨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라벨은 조용히 문을 열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케이로프도 잠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당황하고 있었다. 뭔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당연히 쥬느비에브가 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스스로 간 것이니 그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것보다 사실 그는 심술이 났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탓하고 원망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떠나게 된 거라는 가설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녀가 지금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무렵 그녀가 그에게 속삭였던 말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전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에이드리안은 심장 저 안쪽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에슈비츠 가의 작은 응접실에서 집사가 바쁘게 면접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 하녀 한 명이 심하게 배앓이를 하는 바람에 당분간 임시직으로 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추천서를 들고 자신의 앞에 차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은 아직은 어린 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예쁘장한 소녀였다. 갈색 머리를 양옆으로 쫑쫑 땋아 내린 소녀는 꽤 일을 잘 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천서를 바라보았다. "음...'모롤라 꼬치구이 올 쵸코시럽' 이라...허 참, 이름 한 번 괴상하구만." 집사가 웅얼거리자 갈색 머리 소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어머님의 성함이 꼬치구이셨지요. 아버님은 어머님의 기품이 넘치는 이름에 그만 첫 눈에 반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님은 대대로 도끼 장사를 하고 있는 쵸코시럽 가문의 장손이시지요. 저희 쵸코시럽 가의 도끼는 어느 곳보다 강하고 튼튼한 품질로 아르헨 전역에 납품을 하고 있답니다. 나무를 베는데 무엇보다 쓰기가 편리하며 그 외에도 다양한,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지요. 특히나 정의를 모독하는 악당 같은 사람에게요. 후후후." 집사는 안경을 고쳐 쓰고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얌전하게 앉아 집사에게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집사는 방금 등줄기에 흐른 땀이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추천장을 쳐다보았다. "흠...모스테츠 무역 회사라...좋은 곳에서 추천장을 써 주었구먼...큰 회사지. 이 회사는. 그래, 여기서 무슨 일을 하였나?" "밥짓기, 빨래하기, 다 큰 남자 넷 뒷바라지하기. 뭐 가사에 필요한 일은 거의 다 경험하였지요." 집사는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결과는 '만족스럽다' 였다. "좋네. 모롤라 양. 오늘부터 당장 일하게. 자네의 방은 하녀장이 일러줄게야." 집사는 추천장을 옆에 서 있던 하녀장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 때 하녀장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런. 이 추천장은 가짜에요! 여기 자신의 이름을 쓴 필체와 모스테츠 주식회사에서 써준 부분의 필체가 같잖아요." 집사는 놀라 하녀장에게로 다가왔다. 사실을 확인한 집사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이런...당장 나가게! 이따위 가짜 추천서를 가지고 오다니, 여기서 당장 나가게! 이 사기꾼 같으니라구." "그래요, 이 곳처럼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당신같이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받을 수가 없어요!" 하녀장과 집사는 점점 목소리를 높여 소녀를 다그쳤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흥분한 바람에 소녀가 조용히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이 그들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였다. "하! 이 것들 봐라.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구하러 온 나, 정의의 안느마리가 가는 길을 막다니...필체가 같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모스테츠 무역회사의 이사인데 누구한테 서명을 받으란 말이야? 아버지는 귀찮아서 그런 것따위 안해주신단 말이야!! 그래. 이번에는 멍청한 블랙이로군. 블랙이야. 블랙, 블랙!!! 나, 정의의 안느마리의 앞길을 막은 것으로 보아 당신들은 정의를 파괴하고자 세상에 강림한 악마들이 틀림없군. 가뜩이나 열 받는 마당에 잘 되었어. 어디 한 번 죽어보라지. 쿡쿡쿡. 아하하하하하하-" [끼끼끼끼에에에에에에엑- 크르르릉캉캉-] 집사와 하녀장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상황 파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그들 자신의 상황이 이미 끝나있는 상태였다. 모롤라 양이 쓰러져 있는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진작 이럴 것을 그랬어. 쳇. 블랙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존재. 우후후후후후-" 집사와 하녀장은 자신들이 지옥에서 마녀를 만났다고 짐작하며 정신을 잃었다. 멀리서 모롤라 양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저기, 이 것 보세요!! 하녀장과 집사님이 쓰러지셨어요!! 지병이 악화된 것 같으니 당분간은 집안 일을 못하시겠는데요- 어떻게 하죠? 네? 저요? 전 이번에 새로온 하녀, 모롤라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호-" 제23음(第23音) Return to my Heart(4) 이른 아침이었다. 유벨은 자신의 사택 안에 마련되어 있는 음악실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편안한 베이지색 바지와 연한 갈색 셔츠 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그의 모습은 퍽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바이올린을 통해 내뿜고 있는 선율은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거칠게 활을 잡아 빼며 유벨은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거두어들였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유벨은 근처의 조그만 테이블로 걸어가 그 위에 놓여 있는 노란색 수건을 집어 들었다. 수건으로 이마를 닦다가 유벨은 귀를 움찔거렸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바이올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곧 문이 열리며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들어왔다. "이런. 우리가 방해를 했나보군.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케이로프가 오랜만에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벨은 씨익 웃으며 구석의 의자를 가리켰다. 미라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케이로프도 옆에 앉으며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다들?" 유벨은 수건으로 이마를 마저 닦고 자리에 앉았다. "저희 두 사람. 얼마동안의 휴가를 받았답니다. 앞으로 당분간의 학생회 업무는 유벨님이 맡아주셔야겠다는 말씀을 드리러 들린 거에요." "휴가? 갑자기 무슨 휴가야?"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서로의 눈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유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쥬느비에브를 데리러 갈 생각이에요. 안느마리가 이미 에슈비츠 가에 잠입을 했다니 쉽게 데려올 수 있을 거에요." 유벨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 "물론 에이드리안 님께는 비밀로 부쳤지요. 들키면 아마 다시는 저희를 보지 않으시려고 하겠지만...이번에는 저희들 스스로가 판단을 내리기로 결정했어요. 3년 전처럼 아무 것도 못한 채 그렇게 있을 수는 없어요." 미라벨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벨은 미라벨의 슬픈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 보다 케이로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케이로프가 입을 열었다. "설사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이 일로 우리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셔도 후회는 없을 거야. 그 분이 우리의 이런 부당한 간섭으로 조금이나마 행복해지신다면.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야." 유벨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그래, 그래. 에이드리안 그 녀석. 자기 입으로는 절대 그런 말못할 테니. 욕심 좀 부리면 어때서... 원하는 것을 뻔히 눈앞에서 놓쳐버리다니,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라니까." "두려우신 거겠죠. 이미 한 번 잃으셨으니." 미라벨은 조용히 중얼거리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올 동안 유벨 님이 여길 맡아 주세요. 에이드리안 님이 쉽게 마음을 바꾸시진 않겠지만... 유벨 님이 곁을 지켜 주세요. 우리가 없는 동안 에이드리안 님을 지켜 주세요." "그래,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자네에게 에이드리안 님을 부탁하네. 다른 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유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다들. 에이드리안을 이렇게 아껴주어서."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싱긋 웃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유벨 님. 당연한 일인걸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그럼 뒷일을 부탁하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음악실에서 사라졌다. 유벨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멀리 창 밖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드, 이 바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널 지켜주려고 하는데...너 그거 알아?" ******** 비인 본가의 거대한 저택은 화사한 햇살을 받아 더욱 장엄하게 보였다. 비인 가의 거대한 장원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그 규모에서는 다른 모든 귀족 저택을 압도하는 비인 본가의 저택은 다수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가장 안쪽의 건물은 차기 평의회장의 강력한 후보인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이 사용하고 있었다. 원래 본가의 직계와 가까운 혈통인데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이 현 평의회장이라 그는 어릴 때부터 본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스콜라의 졸업이 다가오면서 외출을 자제하고 있었다. 스콜라의 졸업과 동시에 평의회로의 진출이 확정된 그로서는 신변의 안전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두문분출하고 있는 것은 신변의 안전 때문이라는 명목보다는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었다. 그가 비인 본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라데팡스>의 중요한 안건은 학생회실보다는 에스프라드의 방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저택의 구석진 방의 테라스에서 에스프라드는 하얀 새를 손에 들고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질 좋은 검은머리가 선선한 바람에 부드럽게 날렸다. 몸에 걸치고 있는 동방 제국식으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촉감의 하얀 의복은 소맷자락이 넓고 길이가 길어 그가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그다지 부드러운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테라스에서 한 걸음 옮겨 둥근 모양으로 손질되고 있는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라...에슈비츠 가에서 손을 썼나?" 밝은 햇살이 눈부셔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인 테라스와 비교해 어두침침한 방 안 쪽에서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에슈비츠 가의 조무래기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큭. 에이드리안이 당황했겠군. 꽤 그 여자가 마음에 든 것 같던데." 에스프라드는 지긋이 눈을 감고 새를 뺨으로 가져와 부드러운 날개에 비벼댔다. "처리할까요?" 에스프라드는 우울하게 미소지으며 잠시 하늘을 쳐다 보다 천천히 뒤돌아 섰다. "아니. 조금 더 지켜 본 뒤에. 결국 에이드리안이 나서겠지만 내 입장은 또 그게 아니니까. 그보다...조금 장난을 쳐보는 게 좋겠어. 오늘 저녁에 오페라 공연이 있다지? 올슈틴." 짙은 밤색 머리의 준수한 용모의 소년이 방안에서 나와 테라스로 다가왔다. "예. 참관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대신 에이드리안에게 노래 선물을 하도록 하지. 아주 그리운 노래를." 에스프라드는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새는 열심히 날개짓을 하며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갑자기 노래를 그쳤다. 동시에 새가 주춤하더니 곧 바로 땅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처참하게 죽어버린 새를 내려다보며 에스프라드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이드리안에게는 아마도 죽음과도 같은 노래겠지만." ********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자신의 하얀 말을 몰았다. 숲의 나무들을 지나쳐가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켰다. 숲이 끝나고 대로변이 나오는 것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고삐를 다잡았다. 검은 색 망토를 여미고 멍한 표정으로 고삐를 잡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에드, 안색이 안 좋은데. 오페라 참관 그냥 취소할까?" 유벨은 고삐를 당겨 자신의 말을 다독거리며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아냐. 괜찮아.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힘없이 말하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에 대한 일을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어느새 육중한 오페라 하우스의 문이 보였다. 유벨은 이곳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을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에이드리안과 유벨을 발견한 학생회 위원들이 달려 왔다.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학생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은 승마용 장갑을 벗고 일상용 장갑으로 바꿔 끼며 무표정하게 오페라 하우스를 쳐다 보았다. 오페라 하우스 안이 평상시와는 달리 웅성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오페라 무대가 한 눈에 보이는 2층의 특별석에 자리 잡았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에이드리안은 오페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시커먼 천장만 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그의 예상처럼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가 지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정말이지 난감했다. 만약에 데리러 갔는데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저런 고민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에이드리안은 지긋이 눈을 감고 의자 등에 머리를 기대었다. 곧 이어 장엄한 음악과 함께 화려하게 치장한 오페라 가수들이 무대 위에 등장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뜨고 무표정하게 오페라를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공연과 비교해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무대였다. 유벨은 옆에서 종이에 열심히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무대에 오른 오페라 가수들은 전부 스콜라의 학생으로서 유벨은 그들의 무대를 보며 랭크를 매기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는 점수를 매기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히 유벨을 쳐다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이 복잡해 노래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오페라의 내용은 서로 무관심한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해프닝을 그린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한 손을 턱에 괴고 눈을 무대 위로 고정시켰다. 딴 생각을 하던 하지 않던 그가 무대 위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이 본다면 또 다시 <오늘의 에스플리크>의 불쾌한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한 번 7학년생들의 개인 리사이틀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전날 잠을 못 자 잠시 졸았더니 그 다음 날 자신에게 숨겨진 애인이 있다는 둥 별 해괴한 소문이 스콜라 안에 퍼졌었다. 그런 일은 이제 그만 사양하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무대 위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상대 소년에게 핀잔을 주는 내용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웃었다. 쥬느비에브가 자신에게 칭얼거리는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쥬느비에브가 예전에 한 말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이 세상에서 약속을 안 지키는 인간이 제일 몹쓸 사람이래요. 몹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생긴 나쁜 괴물이 잡아간대요. 무섭죠? 가족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죠? 나는 절대 안 물릴 테니까 약속 꼭 지켜주세요. 아니면 괴물한테 잡혀갈지 몰라요.]] "흥. 괴물한테 잡혀간다고?" 곰곰이 생각하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쥬느비에브가 입에 달고 사는 레나 아주머니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분명 쥬느비에브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틀림없었다. 언젠가 꼭 한 번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와 만날 수 없기에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몹시 침울해 졌다. 그러다 유벨과 눈이 마주친 에이드리안은 무안해져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무대 위로 눈을 돌렸다. 옆에서 혼자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은 이상하다는 듯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무시하고 짐짓 무대위로 시선을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다가 일순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에 에이드리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하게 벌렸다. 입술이 바짝 마른 것 같았다. [[나는 절대 안 물릴 테니까 약속 꼭 지켜주세요.]] 그랬다. 분명 쥬느비에브는 그렇게 말했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래, 그녀는 그와의 약속을 절대 물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했었다. 약속을 먼저 깬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자신이 먼저 그녀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가족이 되어주길 원하고 있어. 분명 지금도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데리러 가야해. 하지만 만약 그녀가 날 원하지 않는다면...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때는 그 때다.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벨이 다시 무슨 일이냐는 눈짓을 보내왔다. 에이드리안은 사촌 형에게 웃어주며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유벨을 뒤로하고 특별석을 나서던 에이드리안은 순간 머리 속을 울리는 장엄한 선율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불안감이 가슴을 울렸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음색에 에이드리안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두다 무대 아래쪽으로 눈동자를 내렸다. 금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익숙한 멜로디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 노래를? 그는 뻐끔하게 눈을 뜬 채 입술을 달싹였다. "어째서... 안...돼....안 돼..." 에이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만 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두 손을 목에 가져갔다. 눈앞에 금발의 여자가 아른거렸다. 언제나 아름답게 노래하던 그녀. 자신에게만 들려주던 아름다운 노랫소리. 그러나 지켜주지 못한 노래.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선율... 에이드리안은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통증에 입을 앙다물었다. 두 팔을 잡고 허리를 숙여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노랫소리는 계속 그의 심장을 두드려댔다.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청각이 마비되는 듯 했다. 유벨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시선을 모아 유벨을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걱정스러운 표정의 유벨이 보였다. 신경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에이드리안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 [소중한 건...아껴줘야지. 그래야 후회 같은 게 남지 않으니까.]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하지만 미레이유는 소중하니까 아껴줄게요.] [후후. 진심으로 소중하다면 상처받지 않게 해줘. 마음이란 건 의외로 아주 약하기 때문에 한 번 다쳐버리면 그 상처가 오래간단다. 평생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난 강해요. 그러니까 괜찮아. 하지만 미레이유는 여리니까 내가 지켜줄게요. 지켜줄게요...]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을 지우려는 듯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에이드리안은 몸을 돌려 눕고 멍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익숙한 장소가 보였다. '내 방이로구나. 난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있어. 왜?' 몸이 왠지 무거워진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에이드리안은 머뭇거리며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긴 금발이 손에 쥐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겁지겁 방 안쪽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에는 하얀 잠옷을 입고 있는 자신이 비춰지고 있었다. 평상시보다 더 파랗게 보이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에이드리안은 손을 들어 거울 안의 자신에게로 가져갔다. 거울 위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섰다. 다시 뒤돌아 거울을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금발은 어깨 위를 지나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자라있었다. 침을 삼키며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손등 위로 하얗게 빛이 어렸다. 그러나 평상시와 같은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창백한 안색을 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無)...속성?" 에이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쳐 빛을 흩어냈다. 머리 속이 차갑게 식었다. 떨리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다부쥐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에이드리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쏘아 보며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얀 빛이 뿌려지며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에이드리안은 숨을 몰아 쉬며 바닥에 널려 있는 깨진 거울 조각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 때 방문 소리가 들렸다. 살기 어린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24음(第24音) Return to my Heart(5) 에이드리안은 긴장한 얼굴로 문 쪽을 쏘아보았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에이드리안은 애써 표정을 풀며 미소지었다. "아아, 유벨." 회색 머리의 사촌 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촌 형이라면 안심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빙긋이 웃으며 표정을 지웠다. 유벨이 다가왔다. "에드, 괜찮아? 벌써 일어나도?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잖아." 에이드리안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들어올린 다음 구석의 쇼파 쪽으로 걸어갔다. "걱정할 것 없어. 가끔씩 찾아오는 '지병'이란 거 너도 알잖아. 내가 아프다는 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 괜히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귀찮아져." 에이드리안은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유벨은 껄꺼름한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살피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의심스러워하는 유벨에게 다시 웃어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당분간 레플리카는 못 쓸 거 같으니까 네가 주변 경계를 좀 해 줘." "그래. 몸이 안 좋을 때 레플리카를 쓰면 몸에 무리가 오니까.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또 자랐구나. 사람 불러서 좀 자를까?" 에이드리안의 맞은 편에 앉으며 유벨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머리카락을 꼬며 말했다. "아니. 어차피 '병'이 나을 때까지는 잘라도 금방 다시 길어질 텐데. 그나저나 좀 피곤한 거 같아. 쉬고 싶어." 에이드리안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사촌형을 쳐다보았다. 유벨은 잠시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쥬느비에브는...어떻게 할 생각이야?" "내일 에슈비츠 가에 갈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유벨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쥬느비에브를 데리러 갈 거야?" 에이드리안은 사촌 형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이드리안이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아니. 베로니카 양을 만나러 갈거야. 쉬고 싶어. 나가줘." 차갑게 말을 내뱉고 냉랭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은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무언가를 자신에게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유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에이드리안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놔두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그것을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래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난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를 테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를 너도 아니고 항복이다, 항복! 그나저나 주변 경비를 좀 더 늘려야 겠군.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내일 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드리안을 잠시 쳐다 본 뒤 유벨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유벨은 문득 깨어져 있는 거울을 보고 에이드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방을 나섰다. 에이드리안이 '이 시기'가 되면 유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병'이 3년 전 그 사건 이후부터 나타났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사촌 형이 나간 방문을 뚫어지게 쳐다 보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이제부터 조심해야 했다. 빛의 속성이 사라지고 무속성이 된 지금은 극도로 레플리카의 사용을 자제해야 했다. 능력치가 평소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졌다는 것은 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신변의 안전도 문제였지만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런 불완전한 능력을 알게 되면 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데미지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이런 사실은 유벨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다만 유벨은 그가 '그 사건'의 충격으로 비주기적으로, 머리카락이 급속도로 자라고 정신적으로 매우 약해진다고만 알고 있었다. 유벨이 의심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에이드리안은 단호히 그의 접근을 거부했다. 그래서 유벨은 그가 '아플 때'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능력의 부재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의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인 본가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헤르만 숙부와 에스프라드 형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에스프라드 형의 졸업이 눈 앞에 다가온 이상 허점을 드러내서는 곤란했다. 에스프라드가 먼저 평의회에 진출한다는 것만 해도 자신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가 사회에서 세력을 쌓을 동안 자신은 단지 스콜라를 지키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평의회에 나가기도 전에 세력이 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대속성 레플리카가 완전한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칫 평의회 의장의 후보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곤란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젠장..."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 그 노래 때문이었다. 그 노래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서 멘탈 밸런스(mental balance)가 무너진 것이었다. 그래서 힘이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어째서 그 노래가 알려진 것일까? 그 노래는 '그녀'의 노래인데. 아아, 그래. 에스프라드의 장난이로군. 그 녀석이..."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에스프라드를 원망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마음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면 그런 노래 하나에 이렇게 무너질 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의 이런 상태는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휘둘려야 하나.' 원망스러운 감정이 몸을 타고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언제 힘이 돌아올지 막막하기만 했다. 3년 전 그 날 이후 몇 번이나 겪어온 일이었지만 그 주기가 불확실했다. 그는 항상 마음을 굳게 먹고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조금이라도 무너져 버린다면 힘도 사라질 것이다. '그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녀를 생각해서는 안 돼. 동정심은 금물이야.' 에이드리안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창 밖의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에이드리안은 두려웠다. 자신의 레플리카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서 푸드덕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힘이 돌아올 때까지 숨죽이고 있어야 해. 레플리카를 사용해서는 안 돼. 내 노랫소리에 잠자던 공주님이 깨어나면 곤란하니까. 절대.' 에이드리안은 차갑고 공허하게 웃으며 소파에 위에 쓰러졌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이리저리 날렸다. 에이드리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쥬르... 데리러 갈 테니까. 조금만 더..." ********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하녀를 바라보며 안느마리는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감히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의 험담을 하다니. 게다가 나, 정의의 안느마리의 앞을 가로막아? 훗, 벌써 30명째. 이 곳은 블랙 소굴이로군. 깨끗하게 블랙을 청소한 다음의 이 상쾌한 기분이라니...우후후후후후훗."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안느마리는 뒤쪽의 인기척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상냥한 미소를 만면에 빛내며 빙그르 돌아섰다. 빨간 머리의 20대쯤되어 보이는 하녀가 보였다. 안느마리는 그녀가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에서 즐겨 사용하는 접대용 미소를 흘리며 하녀에게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머, 여기 좀 보세요. 이 여자 분이 이렇게 쓰러져 있지 뭐에요? 계단에서 떨어지셨나 봐요. 아유, 불쌍하게도..." 안느마리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하녀를 쳐다보았다. 빨간 머리의 하녀는 놀란 표정으로 달려와 쓰러져 있는 하녀를 살펴 보았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하녀에게 다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런데.... 혹시 쥬느비에브 아가씨가 어디 계신지 아세요?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쓰러져 있는 하녀를 일으키던 빨간 머리 하녀는 안느마리의 말에 입을 샐쭉거렸다. "아가씨? 그 평민 출신의 여자더러 아가씨? 너도 참 착한 애로구나. 그 여자, 저기 옥상 창고 방에 있을 걸? 말이 나와서 그러지 정말이지 억세게 운이 좋은 여자라니까. 우리와 다른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야 바른 말이지. 차라리 내가 에슈비츠 가의 양녀가 되었다면 훨씬 더...." 기분 나쁘다는 듯 말을 이어가던 빨간 머리 하녀는 고개를 돌려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마녀의 얼굴을 보았다. 마녀는 음침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옥상 창고 방이라?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그런 곳에 가뒀다고? 이런, 싹 쓸어버릴 블랙을 보았나. 쥬느비에브를 그런 창고 방에 가둔 걸로 미루어 보아 너야말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당 중의 악당이 틀림없어. 화이트를 수호하는 나, 안느마리의 징계를 맛봐라. 아하하하하하핫-" 하녀는 자기가 쥬느비에브를 가둔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머리 속에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하녀는 조용히 쓰러졌다. ********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축축한 침대 위에 앉아 있기가 좀 꺼려졌지만 바닥의 돌이 너무 차가워 바닥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침대 위에 조심스레 걸터 앉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침대 위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배가 고프면 나가서 밀가루 죽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저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만 죽을 먹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기분이 찝찝했지만 식사도 겨우 얻어 먹는 상황에서 목욕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끔 에이드리안의 사택에서 따뜻한 물에 목욕하던 기억이 났지만 쥬느비에브는 곧 그 기억을 묻어 버렸다. 기억하면 할수록 눈물만 날 뿐이었다. 눈물마저도 이제는 흐르지 않았지만 쥬느비에브는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며 쥬느비에브는 달을 쳐다보았다. 침대 위에 몸을 누이며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박였다. 어두컴컴한 방안은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해 볼 생각이었다. 그 때 바깥에서 또박또박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떴다. 이 곳에 발소리가 들리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녀들도, 하인들도 이 곳에 오기를 꺼려했다. 쥬느비에브는 호기심이 일어 몸을 일으켰다. 발소리가 멈췄다. 쥬느비에브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손으로 심장 쪽을 눌렀다. 삐걱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쥬느비에브는 눈에 핑하고 도는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갈색 머리 소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팔을 뻗어 소녀에게 안겼다. "아, 안느마리!! 안느마리!!" 쥬느비에브는 펑펑 울었다. 안느마리가 따뜻하게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 안느마리도 눈물을 글썽였다. "나쁜 블랙들. 이런 곳에 쥬느비에브를 감금하다니...쥬느비에브를...이런 곳에... 엉엉엉-"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한참동안 부둥켜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지칠 때까지 울고 난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품에서 나와 눈물을 닦아 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안느마리. 여긴 어떻게 왔어?" 안느마리도 눈물을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그거야 당연히! 널 데리러 왔지. 네가 그 해산물같이 생긴 놈한테 끌려온거 다 안다구. 그 해산물 같은 놈한테 억지로 끌려온 거 맞지? 정의의 안느마리가 데리러 왔으니까 이제 걱정하지마. 미라벨 님이랑 케이로프 님도 곧 오실 거라고 연락 주셨어. 뭐 나의 그이, 유벨 님은 스콜라를 지키느라 못오시지만." "정...말? 나 스콜라에 돌아가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며 기쁨으로 들떴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표정을 풀며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응? 그게 저....그게 에이드리안 님은 바쁘셔서 말이지...그러니까..." 안느마리는 말을 더듬으며 쥬느비에브의 시선을 피했다. 쥬느비에브는 말 없이 까만 눈동자에 눈물을 드리웠다. 실망 어린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안쓰러워진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에이드리안 님은 스콜라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빨리 돌아가서..." "난 안 가. 안느마리. 난 안 가. 난 못 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안느마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울리는 에이드리안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안느마리는 말 없이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토닥였다. 쥬느비에브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안느마리. 에이드리안이 우리 약혼 파기했대. 에이드리안은 내가 필요없나 봐. 나 같은 건 정말 싫어졌나 봐. 그러니까 난 못 가. 난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가고 싶지만...돌아갈 수가 없어." 듣고 있던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등을 철썩 치며 버럭 화를 냈다. "너, 알고 보니 아주 겁쟁이구나! 내 친구, 쥬느비에브는 언제나 밝고 명랑했다구.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너 에이드리안 님이 널 싫어한다고 말씀하신 걸 직접 들었어? 네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걸 직접 네 귀로 들었냐구!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거였니? 에이드리안 님이 네겐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있는 상대였나구!"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멈추고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안느마리는 엄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하지만 에이드리안이 내가 싫다고 하면...그런 말을 직접 듣게 되면, 그런 건 너무 무서워..." "쥬느비에브. 그런 건 그 때가서 생각하라구. 용기를 가져, 쥬느비에브. 그리고 에이드리안 님이 네가 싫다고 하면... 그 땐 나한테 시집오면 되잖아."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끔뻑거렸다. 안느마리는 아주 진지하게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난 에이드리안이랑 결혼할 거야." 안느마리는 그제서야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봐. 그게 네 마음이라구. 뭐 어차피 나도 유벨 님이 있어서 널 거둬들일 수는 없으니까 필사의 각오로 에이드리안 님을 잡는 거야. 알았지?" 쥬느비에브는 결의에 찬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이 싫어진 거냐고. 곁에 있으면 안되겠냐고.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안느마리의 격려로 마음이 홀가분해진 쥬느비에브는 그녀에게 기분 좋게 방긋 웃어주었다. 안느마리가 칭찬의 뜻으로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안느마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침대 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 해산물 같은 놈 아냐? 나 그 녀석한테 면식이 있으니까 들키면 곤란해." 안느마리는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까 울어서 얼굴이 찐득찐득했다. 곧 문이 열리며 빛줄기가 쏟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빛을 가리며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루네르가 들어왔다. 루네르는 쥬느비에브를 주욱 훑어보더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이런 쥬느비에브. 울었나 보네? 훗. 휘황찬란하던 생활에서 갑자기 이런 골방 생활이라니... 울만도 하군. 하지만 너 같은 평민 출신에게는 이런 생활이 딱 맞지. 비인 님과 같은 고귀한 분께는 내 동생, 베로니카가 어울려. 네 자신도 주제 파악 좀 하는 게 좋을 거야." 쥬느비에브는 발끈 화를 내려다 꾹꾹 눌러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딱딱하게 말했다. "에슈비츠 공작 예하를 뵙게 해 주세요. 여기 와서 공작 예하를 한 번도 뵙지 못했어요. 왜 저와 에이드리안의 약혼을 파기하려고 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루네르는 비열하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안 됐지만 숙부 님께서는 이 곳에 계시지 않는단다. 나에게 이 일은 일임하고 떠나셨지. 서방 시찰단으로 말이야." 쥬느비에브는 입을 앙다물며 루네르를 쏘아 봤다. 루네르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려고 왔단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이 이 곳, 에슈비츠 영지로 오신단다."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는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루네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활짝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이 온다! 에이드리안이! 날 데리러 오는 게 틀림없어!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루네르가 입술을 실룩였다. "그렇게 기쁘니? 에이드리안 님이 내 동생, 베로니카를 만나러 오시는 게. 하긴 한 때 약혼녀였으니 반갑기도 하겠구나.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마라. 어차피 너는 얼굴도 못 뵐 텐데." 루네르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문을 쳐다보았다. 안느마리가 잽싸게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소리쳤다. "뭐 저런 뼈다귀 같은 녀석이!! 쥬느비에브, 신경 쓰지마. 에이드리안 님은 분명 널 데리러 오시는 거라구. 베로니칸지 그런 여자 따위 신경 쓰실 리가 없어."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마음 한 쪽이 아련하게 아파 왔다. ********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뤼베이크 가의 응접실에 앉아 살벌하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로프를 쳐다보고 있던 미라벨은 고개를 홱 돌리며 빽빽 소리쳤다. "그러길래 내가 그냥 쳐들어가자고 했잖아요!! 에슈비츠 가로부터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지금, 마냥 이렇게 시간만 죽이고 있어야 하나요? 말씀 좀 해 보세요, 케이로프 님." 미라벨의 거센 추궁에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언제나 다른 가문의 방문은 미리 허락을 받고 이루어져야 되는 거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우리가 허락도 없이 무례하게 에슈비츠 가를 방문해서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을 데려온다면 에슈비츠 공작 예하의 체면과 위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에슈비츠 가는 단순한 대귀족 가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서열의 5대 대귀족이라고. 나중에 감정 문제로 치닫게 되면 에이드리안 님의 입장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그거야...그렇지만... 하지만 마냥 이렇게 있으면 어떻게 해요? 에슈비츠 공작 예하께선 지금 서방 제국 시찰단으로 서방을 방문 중이시잖아요!!" 케이로프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침묵했다. "으아아아∼ 하여튼 당신이랑 같이 일하면 되는 게 없다니까요!!!!" 자신의 다홍색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미라벨은 절규했다. 그런 미라벨의 모습을 케이로프는 다만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제25음(第25音) Return to my Heart(6) 유벨은 자신의 여관방을 나와 복도의 창가로 다가갔다. 많은 수행원들이 밖을 지키고 있었다. 유벨은 수행원들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에슈비츠 가를 방문하기 위해 그저께 스콜라를 떠나왔다. 그리고 스콜라에서 에슈비츠 가는 이틀 이상이 걸리는 거리라서 어젯밤은 에슈비츠 저택에서 멀지 않은 이 곳에서 보냈다. 여관치고는 고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은 아르헨의 유력자인 에이드리안과 유벨의 방문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오후에 에슈비츠 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정성껏 차려진 아침을 먹고 에이드리안은 옷을 입으러 방으로 돌아갔고 유벨은 지금까지 자신의 방에서 수행원들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상황을 체크했다. 에이드리안이 머물고 있는 방에 다다른 유벨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유벨은 문 가에 기대어 서서 에이드리안을 지켜봤다. 에이드리안은 매끄러운 붉은 색 천에 화려하게 금장한 동방식 의복을 입고 있었다. 수행원으로 따라온 하녀들이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올려 주고 있었다. 하녀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를 올려 용잠(주. 참조)으로 고정했다. 머리카락이 길어 용잠으로 고정을 해도 허리까지 흘러내리자 하녀들은 흘러내린 금발을 부드럽게 빗어 다시 머리를 올리려고 손을 놀렸다. 하녀들에게 머리를 맡긴 채 멍하게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벨을 발견한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웃으며 곁에 있는 하녀들에게 그만 하라고 손짓했다. 에이드리안의 손짓에 하녀 한 명이 장갑과 접부채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하녀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유벨은 미소 띈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올려 머리를 매만진 다음 유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부채를 펴 가볍게 부치며 기분 좋게 말했다. "준비 다 됐어. 슬슬 가볼까?" 유벨은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 그의 긴 금발을 쓸어 내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 거 손질하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겠는걸."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붉은 옷자락을 손으로 잡고 일어섰다. "하여튼 넌 늘 걱정만 안고 산다니까." 유벨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기는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랐다. "에드, 괜찮은 거지?" "뭐가?" 에이드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되물었다. 유벨은 그가 웃고 있다고 느끼며 대답했다. "이것저것 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유벨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큰 걸음으로 에이드리안의 옆에 다가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치며 말했다. "모든 것이 원래 대로라... 듣기 좋은 소리군." ******** 루네르는 초조하게 응접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에슈비츠 가로 출발 했다는 <엘크로이츠>의 전갈로 미루어 보아 에이드리안이 30시르(주. 참조) 후에는 저택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베로니카에게 다짐을 시켜야 했다. 그의 마음을 안 것인지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짙은 금발의 소녀가 들어왔다. 루네르는 반가운 마음에 흠뻑 미소를 지었다. "어서 이리로 와. 베로니카." 동생을 응접실의 쇼파에 앉게 하고 맞은 편에 자리 잡은 루네르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전에 이야기한 것 다 기억하지? 이번 혼담은 우리 남매에게 하늘이 내려 주신 기회야. 결코 실수해서는 안 돼. 알았지?"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이번 혼담이 단번에 상류 계층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귀한 기회라는 것도. 그리고 그 천한 쥬느비에브보다 내가 그 분께 더 어울린다는 것도." 베로니카는 거만하게 눈을 빛내며 루네르를 쳐다보았다. 베로니카의 당돌한 표정에 루네르는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를 보였다. "에이드리안 님과의 약혼만 성사되면 우리도 이제 완벽한 대귀족, 그것도 최상의 상류계급이 되는 거야. 아니, 어쩌면 아르헨 최고의 실권자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니 네가 곧 아르헨 최고의 레이디가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너와 나, 둘 다 이 아르헨을 움직이는 최고 권력층이 되는거야." 베로니카는 나른하게 다리를 꼬며 입술을 실룩였다. "걱정마세요. 오라버니. 확실히 그 분의 마음을 잡을 테니까. 소문에 듣자하니 에이드리안 님이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라고 하던데... 여자로서 막강한 권력과 배경, 그리고 탁월한 능력, 거기다 외모까지...탐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방계 출신이라고 제대로 처우도 받지 못한 지난 세월을 반드시 보상받겠어요." "숙부 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일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알았지?" "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이번에 새로 맞춘 옷을 입고 그 분을 맞이하면 분명 절 좋아하게 되실거에요."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입술을 핥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네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에슈비츠 가의 응접실에서는 계속해서 웃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옆에 앉아 있던 유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에슈비츠 가의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거머리 같은 루네르의 쓸데없는 농담에도 아주 즐거운 듯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새빨갛게 칠한 천하디 천해 보이는 베로니칸지 뭔지 하는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레이디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예의를 갖춰 대하고 있었다. 유벨은 베로니카의 머리를 보고 다시 인상을 썼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에이드리안의 금발과 비교해 베로니카의 금발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아프더니 머리까지 이상해 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며 계속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기품 있는 손놀림으로 접시에 담겨져 있는 종이에 쌓인 비스킷을 들며 말했다. "...그래서 베로니카 양은 그 남자 분의 청혼을 거절한 거로군요. 아주 잘한 선택이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와 베로니카 양과의 만남은 없었을 테니까요." "오호호호.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로군요." 경박하게 호들갑을 떨며 웃고 있는 베로니카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비스켓을 찻잔에 살짝 담가 입으로 가져갔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전(前) 약혼녀인 쥬느비에브 양이 여기 있다고 하던데..." 에이드리안의 말에 루네르와 베로니카가 순간적으로 표정을 일그러 뜨렸다. 갑작스레 쥬느비에브를 화제에 올린 에이드리안을 어리둥절하게 바라 보던 유벨은 루네르와 베로니카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코웃음에 루네르와 베로니카가 사나운 표정을 하자 유벨은 짐짓 모른 척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루네르가 잠시 더 유벨을 쏘아보더니 에이드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쥬느비에브가 여기 있긴 하지요. 역시 이 곳 생활이 마음에 드는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시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일순 싸늘해졌다고 생각하던 루네르는 고개를 든 에이드리안의 파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루네르에게 말했다. "잘 되었군. 사실 그녀의 혼처가 나타나서... 미라벨이 여자는 한 때의 스캔들로 평생을 망칠 수도 있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고 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다행히 우리 비인 가에서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나로서는 한시름 덜게 되었지. 그는 나와는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녀에게 혼처가 정해지는 것이 내가 약혼을 했을 때 보기도 좋을 테지. 안 그런가, 루네르 군? 안 그렇습니까, 베로니카 양?" 에이드리안의 말에 루네르와 베로니카는 그제서야 표정을 밝게 하며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동생과 걱정할 것 없겠다는 눈짓을 교환한 루네르는 다시 아부 섞인 말투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아, 그렇군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리면 에이드리안 님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 베로니카와의 약혼을 추진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쥬느비에브처럼 천한 출신이 비인 가에 들어간다는 건..." 에이드리안은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어깨 위에 걸쳐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걱정할 것 없어. 그녀의 상대는 비인 본가의 직계에서도 아주 머언, 머-언 방계 출신이니까." 루네르와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이 잘 풀린다는 듯이 기쁘게 미소지었다. 유벨은 아까부터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그저 멍하니 지켜만 볼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이 흘끗 유벨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다시 루네르에게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에슈비츠 경이 아르헨에 안 계신 지금 자네가 이 곳을 맡고 있다니... 방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에슈비츠 경의 신임을 받은 모양이야. 아, 그러고 보니 스콜라에서도 루네르 군, 자네의 이름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루네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에이드리안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부채를 집어 들어 천천히 부치기 시작했다. 금발이 나풀나풀 날리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평민 출신의, 그것도 이제는 내 약혼녀도 아닌 쥬느비에브 양에게 저택의 프리미어 룸을 내주었다지? 에슈비츠 경이 직접 신경 써서 고르신 가구들이 일품이라는 그 방을 어떻게 그렇게 선뜻 내주었는지, 자네의 인심에 탄복할 따름이야. 안 그래, 유벨? 우리 어제도 그 얘기 했었잖아."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의 루네르와 베로니카를 슬쩍 흘려 보며 에이드리안은 유벨에게 시선을 보냈다. 유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이었다. 유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루네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음...그러고 보니 난 에슈비츠 가의 저택을 제대로 구경해 본적이 없군. 일로나 할머님께서 언제나 에슈비츠 경의 가구 고르는 안목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루네르 군. 그 프리미어 룸을 좀 볼 수는 없겠나?" 더 없이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었던 루네르는 벌레 씹은 표정에 애써 미소를 띈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쥬느비에브는 2층의 프리미어 룸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지요. 사랑하는 사촌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살피는 일은 당연한 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프리미어 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에이드리안 님의 말씀대로 숙부님의 가구 고르시는 안목은 정말로 소문이 자자하지요." 억지 웃음을 띈 루네르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부채를 부쳤다. 도대체 에이드리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유벨은 계속해서 멍하니 웃고 있는 사촌 동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루네르의 뒤를 따라가며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하면서 조그맣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고는 복도에 걸린 그림을 보는 척하며 부채를 부쳤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던 유벨은 갑자기 멈추어선 루네르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루네르가 돌아서며 말했다. "이 곳입니다. 마침 쥬느비에브는 외출 중이지요." 머리의 용잠을 다시 고정한 다음 에이드리안은 루네르가 열어 주는 방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세련된 가구들과 카페트, 그리고 우아한 커텐으로 꾸며진 커다란 방안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역시 에슈비츠 경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군..." 부채를 접어 손바닥에 두드리던 에이드리안은 방 중앙에 놓여있는 짙은 주황색빛 소파 쪽으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붉은 색 옷자락이 끌리지 않게 들어 올리며 흡족한 미소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루네르는 쭈뼛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베로니카가 인상을 쓰며 방 밖에서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유벨은 그저 별 감정 없이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방안을 둘러보던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 드레스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문을 활짝 열었다. 드레스룸은 텅텅 비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표현하며 뒤로 돌아섰다. "흠...정말 알 수 없군. 옷이 한 벌도 없다니. 설마 자네, 쥬느비에브 양에게 옷 한 벌 해주지 않은 건 아니겠지? 베로니카 양, 혹시 쥬느비에브 양이 여기서 옷 한 벌 없이 지내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 사실이 알려지면 쥬느비에브를 신부로 점찍은 '그'가 몹시 화를 낼텐데. 나로서는 조금 걱정이로군요. 남에게 핀잔 받는 건 질색이라서..." "아, 아닙니다. 쥬느비에브가 이번에 새로 옷을 맞추었는데 치, 치수가 좀 잘못되어서 다시 가봉에 들어갔답니다. 오라버니가 쥬느비에브에게 예쁜 옷들을 많이 선물하셨답니다. 에이드리안의 말에 베로니카는 놀라 말을 더듬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괜히 치마를 쥐어뜯고 있는 그녀에게 미소를 보여준 다음 에이드리안은 루네르에게 시선을 돌리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네같이 좋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세세한 일에도 신경쓸 줄 알았네. 정말이지 루네르 군은 좋은 사람이야. 쥬느비에브 양의 혼처로 나선 그가 알면 나중에 섭섭지 않게 사례할거야. 아무렴." 에이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뒤돌아 섰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여기선 목욕을 어디서 하지? 루네르 군의 인상으로 봐서 아주 깔끔한 성격일 거 같은데, 욕조를 따로 준비해 둔건가?" "예? 아, 예. 저 쪽에 욕탕이 있습니다." 루네르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금발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아! 이 방 구조로 보아 식사는 저기 테이블에서 하나 보지? 흠- 정말이지 이 방은 쓸모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군. 쥬느비에브 양은 아침 일찍 식사를 하는데 하녀들이 좀 부지런해야 할거야. 혹시 못 먹어서 마르기라도 한다면 내가 그를 볼 면목이 없지. 그렇지 않은가, 루네르 군?" "아, 예. 당연히 쥬느비에브는 충분히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쥬느비에브를 데려가실 그 분께서 실망하실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루네르는 에이드리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최대한 굽실거리지 않으면서 그의 기분을 맞추어야 했다. 너무 굽신거리면 오히려 역효과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선은 에이드리안의 기분을 맞춰줘야 베로니카와의 약혼도 무사히 성사될 것이었다. "흠- 좋군. 이 정도라면 만족스러워. 그럼 쥬느비에브를 내게 안내해 주겠나?" 에이드리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띈 채 창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루네르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흠칫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쥬느비에브는 지금 외출 중이라고 아까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루네르의 말을 듣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뒤돌아 섰다. 그는 파란색 눈동자를 천천히 내리깔더니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방금 전 까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려.오.라.고 말했어." 루네르는 에이드리안의 파란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서 불복은 용납치 않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당황한 표정의 베로니카가 뒤를 따랐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방 문쪽을 바라보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서야 에이드리안의 뜻을 알게된 유벨은 혼자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에이드리안은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쥬느비에브에게 좋은 옷과 음식, 그리고 목욕과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루네르와 베로니카에게 그렇게 살갑게 대했던 것이었다. 그는 에슈비츠 경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 그의 대리인인 루네르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에슈비츠 경의 진의를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었기에 우선은 이런 식으로 행동한 모양이었다. 그는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우같은 사촌 동생의 행동에 유벨은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그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채 기분이 좋아진 유벨은 복도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오래지 않아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루네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의 루네르가 자신의 골방으로 와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찾는다고.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박았다. 쥬느비에브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천천히 적응해 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나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 보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발소리에 맞춰 들리는 또 다른 발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가 계단 사이로 삐죽하게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웃으며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왠지 용기가 솟았다. 기운을 내어 에이드리안을 만날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풀 죽은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건넬 많은 말들을 되뇌이며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환하게 촛불이 켜져 있는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복도 가득히 서 있는 수행원들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은 수행원들을 항상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었다. 쥬느비에브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짙은 고동색의 튼튼해 보이는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쥬느비에브는 우뚝 서서 손으로 치맛자락을 탁탁 털어냈다. 그리고 치마의 주름을 핀 다음 여기저기 옷매무새를 고쳤다. 에이드리안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루네르가 다시 다짐을 받으려는 듯 험악하게 눈짓했다. 쥬느비에브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똑바로 앞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밝은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26음(第26音) Return to my Heart(7) 에이드리안이 그 곳에 있었다. 붉은 색 옷을 차려 입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본 순간 쥬느비에브는 그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길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그 머리카락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했겠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이 곳에 오면서 되뇌었던 수많은 단어들을 한 번에 머리 속에서 몰아내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에이드리안의 존재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이 머리 속에 또렷이 각인 되었다.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에,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다짜고짜 달려가 에이드리안에게 안겼다. 그리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에이드리안. 흐어어어어어어엉-"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런 쥬느비에브의 포옹에 순간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 보았다. 유벨의 능글맞은 얼굴이 보였고 험악한 표정의 루네르가 보였다. 그 옆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베로니카의 모습도 보였다. 주변 사람을 무시하기로한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이다 문득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그녀가 사라진 날에 입고 있던 옷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 이 옷을 입고 있다니...' 흙먼지로 온통 뿌연 옷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잠시 루네르를 쏘아보았다. 루네르가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몹시 속상했다. 자신이 일찍 그녀를 데리러 왔다면 그녀가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축축하게 젖어 가는 옷의 감촉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울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 때문에. 유벨은 아주 흐뭇하게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바라던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 가에 서 있는 하녀 복장을 하고 시커먼 뿔테 안경을 쓴 갈색 머리 소녀를 발견한 그는 싸늘하게 안색을 굳혔다. 갈색머리 소녀가 쓴 이상하게 생긴 뿔테 안경은 루네르의 눈을 피하기 위해 쓴 것 같았다. 유벨은 침을 삼키며 갈색 머리 소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갈색 머리 소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쥬느비에브! 그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당장 이리 오지 못해?" 루네르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잠시 루네르를 뒤돌아보더니 다시 에이드리안 쪽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더욱 꼬옥 안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요."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계속해서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였다. 쥬느비에브를 물리치지 않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보며 베로니카가 발끈하여 소리를 높였다. "쥬느비에브, 이제 그 분은 네 약혼자가 아니야. 넌 다른 분과 결혼하게 된다구!! 에이드리안 님께서 네 혼처를 정해주셨단 말이야. 비인 가의 방계 혈족 출신의 멋진 분이시란다." 앙칼진 베로니카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빠꼼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멍하게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사람과 결혼? 내 혼처가...정해졌다고요?" 쥬느비에브는 뻐끔하게 입을 벌린 채 천천히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또 다시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쥬느비에브는 숨을 삼키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어 에이드리안을 밀어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쥬르, 그건..." 쥬느비에브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안느마리가 북돋아 주었던 용기가 어디론가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무서웠다. 상황을 지켜보던 유벨은 다급한 심정으로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며 비열한 웃음을 보이고 있는 루네르와 베로니카를 쏘아보다가 함숨을 쉬었다. 그리고 안느마리에게 말없이 눈짓을 주었다. 역시 루네르와 베로니카에게 이빨을 갈고 있던 안느마리는 유벨의 사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느마리의 눈짓을 본 유벨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 유벨은 배를 잡고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방안의 사람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벨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을 쳐다보며 문 가에 서 있던 안느마리가 재빨리 달려와 유벨을 부축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어머, 이 증상은? 어머, 어머, 어머-. 큰 일이군요. 이런 증상으로 투병하시다 우리 할머님이 결국 급사 하셨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비인 가의 높으신 분이 에슈비츠 가에서 쓰러지시다니...어머머머머머머머....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호들갑스럽게 유벨을 살펴보며 안느마리는 루네르와 베로니카 쪽으로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뿔테 안경을 뱅그르르 빛내며 말했다. "혹시 음식에 잘 못된 거라도?" "그, 그럴 리가 있나." 루네르와 베로니카가 놀라 시퍼렇게 질린 눈으로 유벨 쪽으로 달려 왔다. 그리고 유벨을 이리저리 살폈다. "흐으윽!" 유벨은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들썩거렸다. 안느마리는 유벨의 몸을 흔들어 대며 빽 고함을 질렀다. "이런! 증상이 악화되고 있어요. 어서 옮겨야...루네르 님, 베로니카 님? 어서 좀 도와주시죠. 만일 대속성 레플리카의 계승자이신 분이 여기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에슈비츠 가에 내려질 비인 가의 분노가 두렵기만 하군요. 어서요! 뭐 하시는 거에요?" 루네르와 베로니카는 얼떨결에 안느마리를 도와 유벨을 바깥으로 데려나갔다. 유벨은 세 사람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에이드리안에게 찡긋 눈짓을 해주었다. 멍하니 유벨을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꾀병이라니...유벨답지 않아...' 유벨의, 몸을 던진 필살의 꾀병으로 방에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만이 남겨졌다. ********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잡고 묵묵히 바닥의 카페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도 왠지 어색한 것인지 창 밖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힌 것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엉, 흐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의 울음에 당황한 에이드리안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쥬르, 사실은..." "에이드리안 미워요! 정말 미워요! 이젠 말도 안 할거야!!" 쥬느비에브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씩 닦아내며 외쳤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콧물을 막으려고 손으로 코를 잡았다. 그녀는 잠시 에이드리안을 흘겨 보더니 그의 장갑을 빼앗아 콧물을 팽 하고 풀었다. "바아보- 해삼, 말미잘, 꽁치, 멍게...바보 바보!!"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다시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르, 미안해. 난 그저..." "난 루네르 오라버니한테 잡혀 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었는데 에이드리안은 정말 바보야. 바보!!" "쥬르!!" 다소 큰 목소리로 쥬느비에브의 이름을 부르며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의 눈을 가렸다. "뭐, 뭐에요?" 갑자기 눈 앞이 어두워진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차가운 에이드리안의 손이 느껴졌다. 얼굴이 눈물투성이라 약간 부끄러워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손을 내리려고 손을 뻗었다. "가만히 내 말 들어, 쥬르. 늦게 온건 미안해. 난 그저 조금 오해를 해서... 어쨌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쥬느비에브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화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에이드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아까 네 혼처가 정해졌다는 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다시 머리 속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쥬느비에브는 힘껏 에이드리안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섰다. 화가 났다. 아무리 자신이 싫어도 다른 사람과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하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화가 나고 슬프고 억울하고 서러웠다. "바보, 에이드리안!! 난 계속 에이드리안을 기다렸는데!! 에이드리안 정말 싫어요!! 이젠 정말 싫어요!!" "쥬르, 그게 아니라..." 에이드리안이 난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이제 에이드리안 포기할거에요. 이제 됐어요.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내 행복을 맡기는 일 따위 이제 그만 할 거에요." "쥬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난감해졌다. 그리고 자신을 포기하겠다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묘하게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쥬르, 그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싫어요! 에이드리안은 항상 제멋대로야! 내 마음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 멋대로 자기 기분만 좋으면 그만이야! 정말 나빠. 정말 못된 사람이야. 흐어어어엉-"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쥬느비에브의 막무가내 식의 칭얼거림에 결국 화가 난 에이드리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던 쥬느비에브는 곧 이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소, 소리지르지 말아요. 귀 아프단 말이에요, 딸꾹."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연신 딸꾹질을 하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쥬르, 난..." "나, 평생 혼자 살기로 마음먹었어요. 지금 마음먹었어요. 딸꾹. 내 혼처로 정해졌다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 결혼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딸꾹. 에이드리안이나 베로니카랑 잘 해 봐요. 딸꾹." "정말!!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에이드리안이 또 다시 발끈하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눈을 끔뻑거리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딸꾹질이 나자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서러운 마음에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약속한 거 취소에요. 어차피 에이드리안이 내 가족이 되어 주지 않을 테니까 나도 이제 에이드리안 필요 없어요. 그리고 내가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줄 의무도 이젠 없어요." 새침하게 말하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표정을 굳혔다.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 것은 그에게 있어서 금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에겐 무엇보다 의미 있는 약속이기에. "진...심이야? 그 말, 진심인 거야?" 갑자기 무서운 표정으로 심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한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화가 단단히 났기 때문에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면서 에이드리안에게 소리쳤다. "무, 물론이에요! 우리 이제 남남이라구요!" 쥬느비에브는 으름장을 놓듯 크게 소리치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계속 딸꾹질이 나자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슬쩍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아까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한편으로는 고소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묻겠어. 그 말 진심이야?" 쥬느비에브는 오기가 생겨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진심이라니까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무표정하게 표정을 지우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뒤에 다시 냉랭하게 쥬느비에브를 내려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이렇게 화를 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에이드리안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곁에 있게 해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에,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에이드리안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답해 주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에이드리안은 방구석에 놓여 있는 서랍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작은 단도를 꺼내었다. 쥬느비에브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단번에 잘라냈다. 그리고 붉은 색 끈에 묶여 있는 금발을 쥬느비에브에게 내밀었다. "이별 선물이야.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에이드리안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 단도를 던졌다. 단도가 벽에 맞고 튕겨져 나와 바닥으로 굴렀다. 에이드리안은 한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무의식적으로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받아든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살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잘려진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마치 쥬느비에브와의 인연을 끊어내고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에이드리안의 뜻인 것 같았다. 다시 자란 머리카락은 쥬느비에브에게 잘라준 머리카락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처럼 쥬느비에브와의 인연과는 '다른' 인연을 찾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쥬느비에브는 손에 들려진 금발을 쳐다 보았다. 갑자기 밀려드는 현실감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손에 들린 금발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아 마음이 아파 왔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외쳤다. "에이드리안! 내가 잘못했어요.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그게 아닌데...에이드리안....훌쩍..훌쩍...흐어어어엉..." 침묵 어린 방에서 쥬느비에브는 순식간에 벌어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너무 마음이 아파 눈물을 쏟아내었다. 에이드리안을 만나서 너무나 기뻤는데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쥬느비에브는 알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정말로 자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해버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가 아닌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진심 어린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적시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단지 에이드리안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니 심술이 났었다. 자신에게 다른 혼처를 정했다는 말에 너무 화가 났었다. 그래서 그렇게 몰아붙인 거였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바보같이 그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용기를 내어 곁에 있어달라고 말했어야 했다. 다시 그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유벨과 안느마리는 프리미어 룸 앞의 복도에서 험악한 눈빛으로 베로니카와 루네르를 압박하고 있었다. 에슈비츠 가의 주치의가 진찰한 덕분에 고스란히 꾀병이 탄로난 유벨은 결국 막무가내 식으로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물론 옆에서 안느마리가 든든하게 뒤를 받치고 있었다. 유벨은 루네르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것이 오늘의 맡은 바 소임이었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이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으니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이드리안 님은 곧 베로니카와 약혼할..." "에슈비츠 군,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내 말에 거부의사를 표할 생각인가? 난 자네에게 우호적인 에이드리안과는 달라." 유벨이 눈썹을 실룩이며 노기띈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서 안느마리가 맞장구를 쳤다. "네. 정말 겁도 없군요. 감히 유벨 님께 대들다니...쯧." 루네르는 잠시 발끈했지만 유벨에게 대들 수는 없는 터라 분을 삭히며 프리미어 룸안의 상황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방은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연신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안느마리가 입을 삐죽 내고 그녀의 모습을 기분 나쁜 듯 쳐다보았다. 유벨은 초조하게 에이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잘 풀려서 어떤 식으로든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가야 할텐데...' 유벨은 짐짓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걱정스런 한숨을 쉬었다. 한참 기다린 끝에 프리미어 룸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유벨은 반가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에이..."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이름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소름끼치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았던 것이다. 유벨은 입을 달싹이며 에이드리안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팔을 움켜쥐었다. "에드! 쥬느비에브는 어떻게 됐어? 일은 잘 된 거지?"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유벨을 후려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날카로운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 목소리에 유벨과 안느마리가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 때 잽싸게 루네르가 간사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역시 쥬느비에브가 무례한 언행을 한 것이로군요. 제가 당장 가서..."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루네르에게 눈을 돌렸다. 루네르는 에이드리안의 차가운 눈빛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에이드리안이 루네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루네르의 뺨으로 힘껏 손을 날렸다. "건방진!!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냐!" 루네르는 얼빠진 얼굴로 얼얼하게 부어오르고 있는 뺨을 한 손으로 대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루네르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옆에 서있던 베로니카가 앞으로 나섰다. "에이드리안 님. 도대체 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라고 허락했지? 그 썩어 빠진 머리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나? 예법도 재대로 배우지 못한 모양이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는 걸 모르나? 쓸데없이 허영심만 가득한 너 같은 천박한 여자는 질색이야." 에이드리안은 매섭게 베로니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역겹다는 듯 눈을 돌렸다. 베로니카는 갑자기 바뀐 에이드리안의 태도에 놀라 몸을 벌벌 떨며 루네르의 팔을 잡았다. 에이드리안은 단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붉은 옷자락을 날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수행원들이 유벨을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랐다. 아연 질색한 표정으로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곧 이어 프리미어 룸안에서 울리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일이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느마리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하아- 하아-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여관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몸을 두 손으로 부여 안고 힘겹게 무릎을 굽힌 그는 천천히 문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하아- 하아- 안 돼...더 이상 무너지면 안 돼...그녀가...깨어날 텐데..." 에이드리안은 허리를 굽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났다. 에이드리안은 울고만 싶었다. '그런 여자 이제 나도 필요 없어!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란 말이야... 어째서 쥬르는 그렇게 말한 걸까. 내가 필요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 네가 날 밀어내면 난 가까이 갈 수 없어. 가까이 갈 수 없는데...어째서 쥬르...내가...싫어진 거야?' 갑자기 숨이 막혀 와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파란색 눈동자의 동공이 뻐끔하게 열렸다.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 미레이유가...숨을 쉬고 있다! "안 돼, 오지 마! 허락 안 할거야, 네가 깨어난 것 따위... 절대 허락 안 할거야!!" 에이드리안은 터지는 가슴을 손으로 누른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한순간 눈앞의 하얀빛을 보았다. 따뜻하지만 너무나 차가운 그녀의 빛...에이드리안은 눈을 뜬 채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미...레이유..." 제27음(第27音) Return to my Heart(8) "이건 다 쥬느비에브, 그 계집애때문이에요!!" 베로니카는 자신의 방에서 씩씩거리며 루네르에게 소리쳤다. 이미 방 안은 베로니카가 던진 값비싼 도자기의 파편으로 어지러워져 있었다. "그래, 쥬느비에브 다 그 애때문이야. 그 여자가 화근이야." 루네르도 동생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는 잘 다듬어진 손톱을 물어뜯으며 앙칼지게 말했다. "고 계집애가 나타났을 때부터 되는 일이 없어. 원래 그 계집애만 아니면 내가 숙부님의 양녀가 되고 또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가 되었을 텐데. 어디서 그런 천한 계집이 나타나서! 오라버니! 에이드리안 님은 분명히 쥬느비에브에게 마음이 있으신 게 틀림없어요. 그 여자를 가만 놔두실 거에요?" 루네르는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그럴 수야 없지. 베로니카, 쥬느비에브를 그냥 놔 둘 수는 없어." 루네르는 비열한 웃음을 만면에 띄고 베로니카의 방에서 나왔다. 그럼! 절대 그녀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 해질 녘 에슈비츠 영지 근처의 한 여관에서는 고요히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겹겹이 여관을 둘러싼 많은 수행원들의 모습에서 엄숙한 기운이 돌았다. 여관 안에서는 바쁘게 하녀들이 뛰어 다니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침실은 더욱 조용했다. 4명의 의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마다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핏기 하나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 같아 유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드가 왜 이런지 모르겠단 말씀이신가요?" 의사들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여 의사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유벨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쳤다. "에드, 왜 이러는 거야..." 유벨은 거의 이틀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에이드리안 때문에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더구나 의사들이 에이드리안의 상태에 대해서 아무런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 더욱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유벨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에이드리안에게 눈을 돌렸다. 순간 유벨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았다. "에드!!" 에이드리안이 파란 눈동자를 들어 유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달싹였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입 쪽으로 가져갔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벨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목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에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야?" 유벨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다그쳤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유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져 유벨은 침을 삼켰다. 평상시의 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유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 쥬느비에브는 또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 방에 갇혔다. 루네르와 베로니카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문까지 걸어 잠근 것 같았다. 그래서 배가 고팠지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를 다독여 주던 안느마리는 다행히 루네르와 베로니카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숨은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울어서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멍하게 창 밖을 내다보았다. 조그만 창에서 겨우겨우 달이 보였다. '에이드리안, 정말 미안해요.'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되뇌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이 스콜라로 돌아간 것인지 궁금했다. 쥬느비에브는 이제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지만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에게 진심을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 에이드리안은 화를 낼 게 틀림없었다. 그녀를 만나주지도 않을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했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훌쩍이는 코를 손가락으로 꾸욱 잡았다. 경솔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쥬느비에브는 의기소침해 졌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백 번을 되돌린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 가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손바닥으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용기를 내자!" 쥬느비에브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꾸욱 쥐었다. "에이드리안을 찾아가자. 가서 사과하는 거야.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사과해야해. 그래, 용기를 가져, 쥬느비에브!" 쥬느비에브는 다시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고는 두 손을 쭈욱 뻗었다. "할 수 있어! 에이드리안! 꼼짝 말고 기다려요! 알았죠?" 쥬느비에브는 의기소침했던 시간을 날려버리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치맛자락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콩콩 두 번 뛴 다음 자리에 우뚝 섰다. "우웅... 근데 어떻게 여기서 나가지? 안느마리도 없는데..." 쥬느비에브의 결심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울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고 문을 열만한 도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달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작은 창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로 나가볼까? 그래! 그 수밖에 없어!!" 쥬느비에브는 결심을 한 듯 손뼉을 탁 치고 침대 위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창 밖으로 쭈욱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앞으로 힘껏 힘을 주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가 빠져나가기엔 창이 너무 작았다. "히잉... 여긴 안 되겠네. 그냥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으응? 왜 이래, 이거?" 쥬느비에브는 몸을 빼려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것보다는 창에 몸이 끼인 것 같았다. 게다가 거친 창틀에 옷자락이 끼인 것도 같았다. 익숙한 상황에 쥬느비에브는 이번에도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소리 높여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창문에 몸이 끼였어요!! 안느마리! 나 좀 빼줘, 흐어어엉, 흐어어어엉-" 쥬느비에브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방을 흔들어 놓았다. 안느마리가 달려와 쥬느비에브를 극적으로 창문에서 '뽑아준' 것은 그로부터 약 3도르(주. 참조)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 다음에는 나쁜 일이 생긴다고 했던가. 쥬느비에브의 구출 작전 때문에 불쌍한 안느마리도 뼈다귀 같은 루네르에게 잡혀 버렸던 것이다. ******** "안느마리, 미안." 눈물을 글썽이며 쥬느비에브가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어두컴컴한 창고방의 침대 위에 주저앉아 있는 두 사람은 서로가 참으로 딱해 보였다. 안느마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도망가지 못한 내 잘못이지. 들켰으니 모롤라 양도 이젠 관둬야 겠어." 쥬느비에브가 다시 훌쩍거리자 안느마리는 치마에 달려 있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안에서 체리맛 사탕 하나를 꺼내 쥬느비에브에게 건네 주었다. 사탕을 받아든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생긋 웃으며 사탕을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오물오물 맛있게 사탕을 빨기 시작했다. "체리맛 사탕 먹으면 에이드리안 생각나. 전에 에이드리안이 체리맛 사탕을 세 봉지나 사줬었거든." "근데 에이드리안 님이랑 왜 또 싸운 거야? 유벨 님과 내가 일부러 두 사람만의 시간도 만들어 주었는데. 에이드리안 님과 싸우지 않았으면 지금 쯤 넌 프리미어 룸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을 거야...네가 에이드리안 님과 싸우는 바람에 그 해산물 같은 남자가 신경질 나서 우릴 가둔 거 아냐. 하여튼 에이드리안 님 정말 화나셨어. 나 정말 무서웠단 말이야." 쥬느비에브는 다시 생각난 부끄러운 일이 생각나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 에이드리안이 내 혼처를 정했다고 하니까 화가 나잖아." "어휴-. 유벨 님한테 들었는데 그 혼처가 비인 가의 머언 방계 출신의 사람이라며?"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마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 했다. "이번엔 너도 잘못했어. 에이드리안 님의 말씀을 잘 들어보지 그랬니. 그 비인 가의 방계 혈족 출신이라는 사람이 에이드리안 님 자신을 이야기하는 거란 걸 모르겠니?"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뚱하게 말했다. "하,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비인 가의 직계 혈통이란 말이야." "바아보-. 약혼녀라면서 그것도 몰랐어? 에이드리안 님은 원래 방계 혈통 출신이란 말이야. 3년 전에 직계의 일로나 님의 양자로 입적되신 거라구."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주먹으로 꽁 쥐어박고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다시 눈물을 톡톡 떨구었다. "안느마리. 그럼 어떻게 해. 에이드리안은 벌써 화가 나버렸는데. 이젠 여기서 나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해...훌쩍. 훌쩍. 흐어어어어엉-" "아유, 쥬느비에브. 울지 마. 다 나가는 수가 있으니까. 미라벨 님과 케이로프 님이 계신다고. 걱정하지마."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토닥이며 안느마리는 다시 깊이 한숨을 들이쉬었다.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이 아프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또다시 대성통곡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안느마리는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보낸 서신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며 창 밖의 달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미라벨 님과 케이로프 님이 반드시 와 주실 거야. 믿고 있어." ******** 뤼베이크 가의 응접실에서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심각한 표정으로 두 장의 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는 유벨에게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느마리로부터의 서신이었다. 미라벨은 안느마리의 서신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씩씩거렸다. "이런... 루네르라는 사람 역시 해산물 같은 사람이라니까요!! 쥬느비에브로 모자라 안느마리까지 감금이라? 무서운 줄을 모르고 덤비는 군요." 케이로프는 묵묵히 유벨의 서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미라벨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쓰러지셨다는 군. 지금 의식은 돌아왔지만 왠지 이상하다고..." "뭐, 뭐라고요? 에이드리안 님이 아프시다고요? 정말!! 그 해산물 같은 사람이 쥬느비에브를 감금해서 에이드리안 님이 화가 나신 게 틀림없어요! 우리 빨리 에이드리안 님께 가 봐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어서요!" 미라벨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허둥지둥 거렸다. 그런 미라벨의 모습에 케이로프가 한숨을 쉬며 미라벨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웠다. "우선은 쥬느비에브에게로 간다. 그게 우선이야.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곁엔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이 지키고 있다. 그 분을 그에게 맡기고 온 우리들이야. 우린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을 데려오는데 집중해야 해." 미라벨은 안타까운 마음에 주먹을 꽉 쥐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결국 막무가내로 에슈비츠 가에 쳐들어가는 건가요?"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예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며 주머니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들었다. "에슈비츠 공작 예하로부터의 서신. 공작 예하께서는 쥬느비에브와 그 분의 약혼 파기에 대한 사실만을 인정하셨을 뿐 다른 사항은 모른다고 말씀 하셨어. 다시 말해. 루네르와 베로니카란 여성이 지금 에슈비츠 저택에서 저지르고 있는 짓은 에슈비츠 공작 예하의 뜻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미라벨은 기쁜 표정으로 케이로프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정말!! 언제 그런 서신은 받은 거에요? 정말 당신이랑 같이 일하면 편하다니까요. 오호호홋" 며칠 전만 해도 케이로프의 무능함을 구박하던 미라벨은 전폭적인 찬사의 말을 그에게 퍼부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당장 마차를 불렀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를 구출하기 위해 힘차게 말을 몰았다. ******** 침대에 앉아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보며 유벨은 문 가에 기대어 서서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의사들은 에이드리안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진단을 내리지 못했고 에이드리안은 깨어난 이후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의 그답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흐릿한 파란색 눈을 들어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가끔씩 이상하게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벨은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이번 경우는 다른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 전에는 이렇게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벨은 고개를 내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의 상태 때문에 스콜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예상외로 오랫동안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다른 귀족들이 거처를 제공하겠다고 말했지만 유벨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에이드리안의 상태가 알려지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복도에서 유벨은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눈을 찌푸렸다. 비인 가의 문장이 새겨진 새카만 마차가 여관 앞에 섰던 것이다. "누구지?" 유벨은 다시 인상을 쓰며 복도 끝에서 달려오고 있는 수행원에게 손짓을 했다. "비인 가의 마차가 보이는데 누가 온거지?" "에스프라드 님이십니다!" 수행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유벨은 순간 놀라 계단 쪽을 바라 보았다. 까만 망토 차림의 에스프라드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의 뒤로 짙은 밤색 머리카락의 올슈틴이 보였다. "여긴 무슨 일이야, 에스프라드 형? 방문 허가를 내준 적이 없는데. <엘크로이츠>는 에스프라드 형의 방문 요청을 받은 적이 없어." 에스프라드는 퉁명스러운 유벨의 말투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을 만나러 왔어. 사촌끼리 꼭 그런 걸 따져야 하나?" 유벨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에스프라드를 쏘아 봤다. "방문을 거절하겠어. 난 에스프라드 형과 에이드리안을 만나게 해 줄 생각 전혀 없어. 에이드리안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알고 있어. 에이드리안은 지금 '먹혀' 버린 상태니까." "뭐? 무슨 소리야?" 에스프라드는 다시 차갑게 웃음을 흘리며 유벨을 밀쳐내었다. 그리고 곧장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프라드의 말에 잠시 얼이 빠졌던 유벨은 곧 정신을 차려 에스프라드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올슈틴이 유벨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벨 님. 그만 두십시오. 유벨 님이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묻어 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에 유벨은 말없이 올슈틴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올슈틴과 싸울 수는 없었다. 유벨은 우선 참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 "당신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걱정했는데 여기 있었군요. 미.레.이.유. 누.님." 에스프라드의 냉랭한 목소리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에스프라드의 얼굴을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랜만의 외출인데 이거 영 갑갑하군요. 왜, 말도 못하는 거에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에스프라드는 냉소를 흘렸다. "목소리만은 내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에이드리안은. 그의 레플리카는 그만의 것이니까." 순간 슬픈 표정을 띈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다시 창 밖을 바라 보았다. 창 밖의 나무 위로 새들이 내려앉았다. 새를 본 에이드리안의 표정에서 살짝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표정을 본 에스프라드는 입술을 깨물고는 작은 단도를 꺼내어 에이드리안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 가까이로 가 눈을 마주쳤다. 긴 금발을 늘어뜨린 채 에이드리안은 파란 눈동자를 그에게 향하며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서 나가. 이 마녀야. 에이드리안은 에이드리안으로서 존재해야 해. 네까짓게 또다시 에이드리안을 차지하려는 건 내가 용납 못 해. 내가 널 죽여 버리기 전에 어서 이 몸에서 나가." 고개를 들고 단도를 거두어들인 에스프라드는 방금 전의 험악한 표정을 풀고 한껏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은 작은 소녀를 만났어요. 아주 사랑스런 소녀에요. 이제 당신이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어." 에스프라드의 말에 순간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눈물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당신의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서 그 몸에서 나가는게 좋을 거에요. 뭐,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그 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테니. 큭큭. 아하하하하-" 에스프라드는 크게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에이드리안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침대 시트 위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 제28음(第28音) Return to my Heart(9) 쥬느비에브는 신기한 안느마리의 치마 주머니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무척 작게 생긴 주머니인데 별 신기한 물건이 다 쏟아져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가 주머니에서 꺼내 준 초콜렛맛 막대 사탕을 쪽쪽 빨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그 치마 정말 신기해. 그런 건 어디서 팔아?"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에서 수입해서 파는 거야. 치마 전체가 주머니라고 할까? 동방에서 건너온 건데 꽤 유용하더라구. 여기서 나가면 너한테도 선물할게. 쥬느비에브, 이 것도 먹을래?" "응!! 응!!"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가 다시 주머니에서 꺼내 준 비스킷 봉지를 받아 들고 함박 웃음을 띄었다. "아아- 정말 행복해..." 쥬느비에브는 먹을 것에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안느마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어휴, 넌 정말 단순하다니까." 쥬느비에브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싱긋 웃었다. 그 때 끼익 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눈을 찌푸렸다. 곧 이어 재수 없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쓰며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 곳 생활이 몸에 맞나 보지? 미안하지만 이 곳 생활도 끝이야. 어서 나와!" 루네르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갑작스러운 말에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루네르는 안됐다는 듯 비아냥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집 안의 화만 불러일으키는 쥬느비에브, 너같은 애를 쫓아 버리기로 결정했단다. 마침 너를 데려갈 마음씨 좋은 분이 계셔서 널 그리로 보낼 생각이야." 루네르의 말에 안느마리가 발끈해서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루네르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뭐라고? 너 이 자식, 지금 쥬느비에브를 노예상으로 팔려고 하는 거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어디서 수작이야? 쥬느비에브는 절대 안 가. 여기 있을 거야. 알겠어?" 루네르는 생각보다 완강한 안느마리의 힘에 당황했다. "이 계집애가! 어디서 힘만 세가지고!" 루네르는 있는 힘껏 안느마리를 밀어냈다. 안느마리는 루네르에게서 퉁겨져 나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쥬느비에브가 놀란 눈으로 안느마리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안느마리! 어? 피, 피가 나잖아! 안느마리, 안느마리! 흐어어어어엉-" 루네르는 코웃음을 치며 헝클어진 옷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계집은 그 정도로는 모자라지. 그렇고 말고!" "오호, 그래요? <엘크로이츠>를 다치게 하다니... 우리 <엘크로이츠>는 우리를 우습게 보는 자들은 결코 용서치 않아요!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갑자기 들려온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루네르는 고개를 돌렸다. 안느마리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나이스 타이밍! 미라벨 님."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미라벨을 발견하고 방긋 미소지었다. "미라벨 언니!! 어, 케이로프 님도?" 루네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갑자기 등장한 미라벨에게 말했다. "방문 요청도 없이 무단으로 침입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군요. 뤼베이크 님." "그거야 자네 얘기 아닌가? 에슈비츠 공작 예하께서 자네에게 이 곳의 체류 허가를 내 주신 적이 없는데 자네야말로 여긴 무슨 일인가?" 케이로프의 험악한 목소리에 루네르는 매우 놀란 듯 움찔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숙부님께서는..." "에슈비츠 공작 예하의 친서를 받아 왔지요. 당신은 에슈비츠 공작 예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함부로 그 분의 이름을 빙자했고 또한 우리 <엘크로이츠>에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에이드리안 님을 대신해 우리가 당신을 징계하겠습니다." 미라벨의 똑똑 부러지는 말에 루네르는 안색을 바꿨다. "미라벨 님.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안느마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케이로프 님! 아르헨 법률 제65조, 스콜라의 학생회 소속 임원에게 임의로 상해를 입힐 경우 그 학생회에서 처리한다! 맞죠?" 루네르의 파리한 안색을 보며 미라벨이 씨익 웃으며 케이로프에게 눈짓했다. "그렇지. <엘크로이츠>의 중요 임원인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을 저렇게 다치게 했으니 순순히 우리와 같이 가 줘야겠어." 말을 끝내고 케이로프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에게 눈짓했다. 수행원들이 우르르 달려 와 루네르를 포박했다. "아니, 저! 그게 아니라..그건 단지 사고..."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지르는 루네르를 수행원들이 끌고 가자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당분간 햇볕을 보기는 어려울 테니 동생에게 면회나 부탁해 보지, 그러나?" ******** 쥬느비에브는 상기 어린 얼굴로 에슈비츠 가의 응접실에 앉아 차를 입 안으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목욕도 했더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분홍색 치마 자락을 주름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펼친 다음 고개를 들었다. 미라벨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근데 미라벨 언니.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요? 에슈비츠 공작 예하께서도 안 계신데..." 미라벨은 걱정스런 쥬느비에브의 말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에슈비츠 공작 예하로부터 방문 허가를 받았답니다. 우린 지금 뤼베이크 가와 에르슈바이크 가를 대표해서 에슈비츠 가를 방문하고 있는 거에요. 그나저나 쥬느비에브는 정말 에이드리안 님께 가보지 않을 거에요?" "조, 조금만 더 있다가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에이드리안 많이 화났거든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내저으며 침울하게 말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 편에서 안느마리와 케이로프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안느마리, 무슨 얘기해?" "어, 어?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렇지요, 케이로프 님?" "아아-. 그렇지. 그렇고 말고." 갑자기 말을 얼버무리는 두 사람을 쥬느비에브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 보다가 다시 찻잔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 때 미라벨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큰 일이로군요. 에이드리안 님이 아프시다니..." "미, 미라벨 님!!" 안느마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미라벨은 아차 하는 마음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쥬느비에브의 커다란 눈망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미라벨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이...아파요? 그런 거에요? 어디가 아픈 거에요? 얼마나 아파요?" "그, 그게... 그러니까...." 안느마리와 케이로프의 눈총을 받으며 미라벨은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다듬었다. "잘 들어요.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은 쥬느비에브 때문에 지금 몹시 아프세요. 사실 유벨 님이 우리조차 방문 허가를 내주시지 않으셨어요. 상태가 심각하다기 보다는 이상하다고 하던데... 우리로서는 잘 알 수가 없어요." "에이드리안 지금 어디 있어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로프가 천천히 대답했다. "마을 입구 쪽의 여관에 계신데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도 우선은 여기서..." "쥬느비에브! 지금 어딜 가겠다는 거에요?" 케이로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쥬느비에브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재빠르게 저택을 나섰다. 그런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며 미라벨은 한숨을 쉬었다. "뭐, 잘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에이드리안 님이...쥬느비에브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니까요." 안느마리와 케이로프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무심하게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 유벨은 여전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에이드리안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보면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호들갑을 떨게 분명했으므로 잠시 방문을 미루라고 했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될지 몰라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하얀 색 옷을 입고 여관방에서 서성이고 있는 에이드리안은 마치 유령같이 아무런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에 유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벨은 방으로 들어가 에이드리안 앞에 섰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로 유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쥬느비에브를 구해냈어. 하마터면 노예상에 팔려갈 뻔했대. 그리고...쥬느비에브가 지금 이 쪽으로 오고 있대. 만나볼 거지?" 유벨의 말에 순간적으로 에이드리안의 무표정한 얼굴이 흔들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입을 달싹였다. 유벨이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자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팔을 두 손으로 잡고 다시 무어라고 말했다. "에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유벨이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챈 에이드리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벨은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사라졌다. 유벨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드! 그런 몸으로 공간 이동을 해서 어쩌자는 거야!" 아무리 레플리카 실력이 상위라도 공간 이동은 몸에 엄청난 무리를 주었다. 때문에 거의 대부분 레플리카 사용자들이 공간 이동만은 꺼렸다. 유벨은 걱정스런 마음에 주먹을 꾹 쥐고 방에서 나갔다. ******** 쥬느비에브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너무 아파 욱신거렸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이 아프다는데 이렇게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온통 주위에 나무와 풀뿐이었다. 가끔씩 숲 안 쪽에서 이상한 동물 소리가 들려 왔다. 해가 져 어두컴컴해서 조금 무서웠다. 그러나 그런 무서움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에이드리안이 아팠다. 그것도 자기 때문에. 자신이 에이드리안을 화나게 해서 그가 아픈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솟아 잠시 멈추어 섰다.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내가 미안하니까 아프지 말아요. 훌쩍."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다리가 너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에이드리안에게 빨리 가고 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과 여러 가지 걱정 때문에 결국 쥬느비에브는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 "흐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어엉--" 새로 갈아입은 분홍색 치마가 흙으로 더러워졌지만 쥬느비에브는 그런 일에 정신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에이드리안...." 어느새 목이 잠겨와 끄억끄억 거렸다. 쥬느비에브는 눈물 때문에 얼룩이 진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손등으로 닦아 내렸다. 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무심결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에이드리안? 여긴 어떻게?" 쥬느비에브는 놀라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창백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갑작스런 만남에 어색해져 고개를 숙여 먼지투성이인 치맛자락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많이 아프냐고 먼저 물어 봐야 하나.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어라도 이야기해야 했다. 그 때 머리 속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였다. [겨우...만났어. 하지만. 당신은...비참한 검은 선율...결국 나와 같아...] 쥬느비에브는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숲에는 에이드리안과 자신밖에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에이드리안의 눈동자가 자신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목소리는 에이드리안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입술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 무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드리안의 눈에서 말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슬픈 표정으로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본 쥬느비에브는 그에게 달려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울지 말아요."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 쥬느비에브도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쥬느비에브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흐릿한 파란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다, 당신 누구야? 에이드리안이 아냐! 에이드리안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진 않아! 당신 누구야? 에이드리안은 어디 간거야?"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에이드리안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쥐고 그를 노려봤다. "에이드리안을 돌려 줘요! 에이드리..."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목을 압박해 오는 에이드리안의 손에 눈을 깜빡였다. "무, 무슨 짓을...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숨이 막혀와 목을 조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손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흐릿해지는 눈동자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힘겨운 표정을 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은 분명 자신의 '그'가 아니었다. 숨이 막혀 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뺨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살며시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아. 에이드리안을 더 이상 상처주지 마. 나 하나로 충분해!!] 머리 속에서 고통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으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아니야! 아니야!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난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줄거야! 함부로 말하지 마! 당신이야말로 에이드리안을 괴롭히지 마!"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손에서 힘을 뺐다.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축 늘어진 몸이 떨려왔다. [하아- 하아-]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힘이 빠진 눈꺼풀을 겨우 올리고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귀를 막고 괴로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다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랫소리는 맑고 아름답게 머리 속을 채워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들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익숙한 노랫소리였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기분 좋은 노랫소리에 쥬느비에브는 잠이 쏟아졌다. 몸이 따뜻해져갔다. '에이드리안이...예전에 불러줬던 자장가야...맞아...잠이 안 온다고 투정부렸을 때 이 노래를 불러줬었어. 응...그 때 그 자장가야...' 쥬느비에브는 나른해지는 기분에 미소지으며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에이드리안이 시선을 돌려 원망 섞인 눈동자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소중해? 이 여자가..소중해? 지켜 주고 싶어? 하지만 결국 상처받을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무언가에 충격을 받았는지 에이드리안도 힘없이 쓰러졌다.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달싹이며 에이드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빠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이 감겨 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세심하게 장식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라벨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쥬느비에브는 목이 간지러워 손톱을 세워 벅벅 긁어댔다. 옆에서 보고 있던 미라벨이 쥬느비에브의 손을 찰싹 때렸다. "정말! 상처난다고요! 목의 흉터가 얼마나 보기 싫은지 아는거에요, 모르는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미라벨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어때요?"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여전히 잠만 자고 계세요. 벌써 3일짼데... 어휴- 정말이지. 그 강도들을 잡기만 해봐라! 내가 그냥 안 놔둘거에요!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 님이 감동의 상봉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다니! 게다가 쥬느비에브의 목에 이렇게 흉칙한 손자국까지 만들어 놓고...아픈 에이드리안 님마저 충격에 저렇게 쓰러지시고... 에이드리안 님이 정신을 차리시면 그 강도들은 그 자리에서 죽음이에요!" 씩씩거리는 미라벨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미소지었다. 뒤늦게 달려온 유벨 덕분에 무사히 에슈비츠 가에 돌아온 쥬느비에브는 걱정어린 표정을 하고 있던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에게 갑자기 나타난 강도들 때문에 자신과 에이드리안이 그만 정신을 잃었다고 말해 두었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목을 졸랐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다들 걱정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분명 그 때의 에이드리안은 '에이드리안'이 아니었다. 그때의 에이드리안은 뭔가 유령에게 홀린 것도 같았다.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생긴 유령이 생각나자 쥬느비에브는 오싹해졌다. '에, 에이드리안이 나한테 너무 화가 나서 유령한테 홀렸으면 어쩌지?'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뭐, 뭐에요? 왜 그래요? 또 아픈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 이불을 걷어찼다. 그리고 쏜살같이 에이드리안이 누워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미라벨이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쥬느비에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돌진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씌인 유령을 퇴치해 줄 생각이었다. 어느 새 방 앞에 다다른 쥬느비에브는 우뚝 서서 침을 삼켰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제29음(第29音) Return to my Heart(10) 마침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하얀색 잠옷 자락을 펄럭이며 에이드리안이 누워 있는 침대 가로 쪼르르 달려 갔다. 에이드리안은 하얀 이불을 덮고 잠이 들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며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말고는 다른 이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휴우- 이제 그 유령만 몰아 내면 되는 거겠지?" 쥬느비에브는 다시 심호흡을 가다듬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주먹을 쥐어서 양 볼로 가져가 마구 비벼댔다. "우웅- 근데 유령을 퇴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난 그런 거 한 번도 해 본적 없는데..." 갑자기 앞이 막막해진 쥬느비에브는 침대 가에 놓여 있는 의자에 풀썩 앉아서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쥐어뜯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갑자기 호기심이 동한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금발에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안에 퍼졌다. "에이드리안은 나중에 가난해져도 머리 팔아서 살면 되겠다...예쁜 금발... 아이, 부드러워."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볼에 비비던 쥬느비에브는 그의 이불을 걷어 내고 조심조심 금발을 자신 쪽으로 걷어냈다. 긴 금발이 쥬느비에브에게 쏟아졌다. "에이드리안, 거추장스러우니까 내가 땋아 줄게요. 움직이지 말아요." 콧노래를 부르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한 가닥으로 땋기 시작했다. "헤헤- 재밌다. 옛날에 공주님 중에 이렇게 머리카락이 긴 공주님이 있었다고 하던데... 에이드리안, 공주님 같아." 계속 머리를 땋아 내리던 쥬느비에브는 다시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빨리 일어나 봐요. 내 사과도 아직 안 받았잖아요. 일어나기만 하면 내가 많이 많이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빨리 일어나 봐요. 유, 유령한테 홀렸으면....음...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무, 물리쳐 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요." 쥬느비에브의 말에도 에이드리안은 꼼짝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벌떡 일어나 에이드리안 옆의 침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볼을 쭉 당겼다. "일어나요! 일어나란 말이에요! 지금 몇 도른지 알아요? 해가 높이높이 떴다구요! 지금 일어나면 봐줄 테니까 일어나 봐요! 으, 음...지금 일어나면 내가 아끼는 모, 모롤라 사탕 한 봉지 줄게요, 네? 아니면 내가 제일 아끼는 레이스 속옷 줄까요? 뭐 더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다 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 봐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 쥬느비에브는 슬슬 오기가 생겼다. "정말! 일어나 보라니까요! 나 앞으로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아침에 일찍 깨우지도 않고 사고도 안 칠게요!" 쥬느비에브는 그러면서 자신이 땋고 있던 머리카락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머리카락만 공주님이고 순 고집불통이야. 말도 안 듣고. 바보. 공주님은 고집 같은 거 안 부리는 데..." 퉁하게 말하던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맞아! 동화책에 잠자고 있는 공주님에게 왕자님이 키스를 하니까 공주님이 벌떡 일어났었지! 맞아! 그 방법을 왜 생각 못 했지? 으응? 하,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남자고 난 여잔데...왕자님에게 키스하는 공주님은 없었는데..." 쥬느비에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심각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포옥 쉬었다. "하는 수 없지. 에이드리안이 공주님하고 내가 왕자님 하는 수밖에... 에이드리안 바보. 나 공주님 하고 싶은데..."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쥬느비에브는 눈을 꼬옥 감고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에이드리안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 꼭 일어나야 해요. 나 에이드리안 많이 좋아해요. 많이 소중해요. 많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마음 속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직 나 에이드리안 많이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빨리 일어나요. 그래야 내가 이전 몫까지 많이많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알았죠? 안 일어나면 에이드리안 바아보-.' 쥬느비에브는 살짝 입을 맞추었다. 창백한 안색과는 달리 에이드리안의 입술은 따뜻했다. '눈 떠라, 눈 떠라. 수리수리 마수리! 에이드리안! 일어나야 돼요! 힘내요!'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떼고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여전히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눈물을 쏟아냈다. "에이드리안 바아보-! 키스하면 원래 일어나야 하는 거란 말이에요! 흐어어어어엉- 에이드리안 바보 바보!!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시끄러워."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워요! 지금 그게 문제에요? 왜 안 일어나는 거야. 흐어어어엉어어어어어엉-.....어, 어라?"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고개를 내렸다. 에이드리안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파란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 유...령? 으아아아-." 쭈뼛거리던 쥬느비에브는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내둘렀다. 아직 유령을 퇴치할 준비는 안 되었는데! "누구보고 유령이라는 거야? 넌 또 왜 여기 있는 거야? 도대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에이드리안은 머리가 울리는지 다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쥬느비에브는 놀란 눈으로 멀뚱멀뚱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다시 만나지 말자고 했던 것 같은데...너 왜 여기에..." "에이드리안!! 진짜 에이드리안이다! 흐, 흐어어어어어어어엉-" 갑자기 자신에게 안기는 쥬느비에브를 얼떨결에 안으며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듯 말했다. "뭐, 뭐야. 너." "내가 미안해요! 내가 많이많이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흐어어어어어엉-. 어, 어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 앞으로 쿡 고꾸라졌다. 너무 많이 울어서 탈진해 버린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으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쌕쌕거리며 품에 안겨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 정말...일어나자마자..." 그러면서도 쥬느비에브의 사과 한 마디에 한꺼번에 마음이 풀어진 에이드리안은 조심스럽게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이며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깨워줘서...고마워. 나의 쥬르." ******** 에이드리안은 하늘색 정장 차림으로 에슈비츠 가의 호숫가에 서 있었다. 따뜻한 햇살에 호숫가의 물이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조금은 더운 바람에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갔다. 아직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아침에 쥬느비에브가 떼를 써서 기어이 땋아 놓고 말았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쥬느비에브가 아주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어 에이드리안은 그저 가만히 그녀를 지켜 봤을 뿐이었다. 어깨 위로 금발을 내려 손장난을 치던 에이드리안은 뒤쪽의 인기척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유쾌하게 말했다. "좀 늦으셨습니다. 에슈비츠 공작 예하." 에이드리안은 우아하게 팔을 들어 가슴으로 가져가 인사를 건넸다. "미안하군. 비인 군." 에이드리안은 다시 몸을 돌려 호수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제법 보이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에이드리안 곁으로 왔다. 에슈비츠 공작은 제법 듬직한 체구의 남자였으나 귀족 가문 특유의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시찰단 일은 잘 되셨습니까?" "뭐, 그저 그렇네. 그나저나 이번에 루네르 일로 폐를 끼쳐 할 말이 없군." "그는 이미 스콜라에 넘어갔으니 곧 처벌이 있겠지요. 그리고...쥬느비에브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공작 예하의 거부는 용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딱 부러지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에슈비츠 공작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허-, 자네,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쥬르를...쥬느비에브를 공작 예하께서는 싫어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평민 출신의 평범한 그녀를 양녀로 들이신 거지요?" 에이드리안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에슈비츠 공작은 그리운 무언가가 생각난다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어미를 알고 있네. 엘은 아름다운 여자였어. '그'가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난 그녀에게 청혼했을 거야. 나에게 출신 성분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었어. 그녀만 곁에 있어준다면....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 아이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이를 낳고 얼마 뒤에 소식이 끊어졌다고 하더군. 죽었는지 살았는지.... 난 엘을 만나러 갔네. 그리고 어린 쥬느비에브를 그 때 처음 보았네.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난 그 아이를 그저 사랑할 수만은 없었네. 그 애 애비가 자꾸 생각나서...그리고 엘이 죽고...난 그 애를 양녀로 맞아 들이기로 했네. 그 와중에 헤르만의 입김에 어쩔 수 없이 자네에게 보냈지만." "쥬느비에브는 당신께서 그녀를 싫어하고 계신 줄 압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내리깔고 살짝 눈을 찌푸린 채 말했다. "싫어하다니...비록 처음에는 그 아이가 미웠지만...사실 난 내 아이로써 그 애를 사랑하네. 하지만 표현이 어려워. 쥬느비에브가 스콜라에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에 간 적이 있네. 그 때 그 아이는 아주 행복해 보였어. 그래서 자네에게 계속 그 아이를 맡기기로 했지. 자네가 그 아이를 잘 대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소중하게...아끼겠습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숙이자 에슈비츠 공작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우선은 루네르 녀석의 일을 사과하지. 내가 잠시 그 녀석에게 속았다네. 쥬느비에브가 스콜라에서 너무 힘들어 한다고...그래서 난 자네와의 약혼 파기를 이야기한 거야. 물론 그 것은 내가 시찰을 다녀온 다음에 이야기할 생각이었네만. 루네르 그 녀석이 멋대로 내 편지를 가지고 날뛰었더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발 밑의 돌을 주워 호숫가로 던지며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 것 때문에 꽤 곤란했었습니다. 그런 녀석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공작 예하의 친서를 무시한다는 건 곤란했으니까요." 에슈비츠 공작은 천천히 호숫가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네. 이해해 줘서. 그나저나...지금 내게는 후계자가 없어. 난 그 아이를 에슈비츠 가의 후계자로 정할 생각이네. 비록 나의 피가 흐르지는 않지만." "친족들의 불만이 심할 텐데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르던 에이드리안의 말에 에슈비츠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자네가 있지 않나. 비인 가의 대속성 레플리카 전승자의 약혼녀로서 오히려 가문에서는 그 아이를 반길 게야. 지금까지는 내가 그 아이를 버려 두었지만 이젠 든든한 방패막이가 될테고. 그리고 이건 비밀이네만 사실 엘의 머언 선조 중에 우리 에슈비츠 가의 사람이 있다네. 가문에서 도망쳐 나가 한 결혼이라 인정되지 않았지만."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저와 에슈비츠 가문과의 협력관계가 이루어지겠군요. 앞으로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엘크로이츠>가 다음 평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에이드리안이 손을 내밀자 에슈비츠 공작이 그의 손을 잡았다. "쥬느비에브와 우리 가문을 부탁하네. 에슈비츠 가문은 엘크로이츠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야." 에이드리안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바람이 날려와 금발을 흩뜨렸다. 천천히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기뻐하는 얼굴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 쥬느비에브는 그 날 저녁 계속해서 눈물을 터뜨렸다. 에슈비츠 공작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러보라고 했을 때도, 그가 저녁 식사때 자신에게 먹을 것을 손수 가져다 줄 때도,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쥬느비에브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에이드리안의 기분 좋은 미소에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렸다.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이리저리 호들갑을 떨었다. 유벨과 케이로프가 조용히 그녀에게 후계자로 지목 된 것에 대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에게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찾아 온 행복에 방긋 미소지었다. 그러나 안느마리가 울다가 웃으면 바보가 된다고 말해서 다시 한 번 울고 말았다. 유벨에게 눈총을 받은 안느마리는 미안해하며 치마 주머니에서 사탕 한봉지를 꺼내 쥬느비에브에게 건네주었다. 쥬느비에브는 훌쩍거리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 뒤에 돌아온 스콜라는 너무나 그립고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쥬느비에브는 스콜라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이야기를 에이드리안은 묵묵히 들어 주었다. 에이드리안의 사택에 도착한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꾸욱 참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집사 톨레와 하녀장 루이즈가 반갑게 그녀를 맞아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다 또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겨우 눈물을 그치고 응접실에 들어선 그녀를 오랜만의 티타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응접실에 앉은 여섯 사람은 그 동안의 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니까. 안느마리가 보낸 그 편지지가 얼마나 웃겼는지...케이로프 님 보셨죠? 오호호호호. 생각만 해도 웃겨요." 미라벨이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케이로프가 미라벨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을 실룩였다. "아아. 보았지.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그려져 있는 편지지 였지. 옆에 '안느마리, 사랑해.'라고 씌여 있었어. 맞아. 그렇게 씌여 있었지. 아주아주 재미있었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케이로프가 대답하자 차를 마시고 있던 유벨이 돌연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안느마리를 쏘아보았다. "안느마리 군, 이게 무슨 말이야?" "안느마리 양이에요. 그건 저희 가게에서 팔고 있는 편지지에요. 꽤 인기가 좋은 상품이죠. 유벨 님도 하나 사실래요? 그거말고 제 얼굴이 그려진 편지지도 있어요. '유벨 님은 내 꺼!'라고 씌여 있는데 사실 이 게 더 인기가 좋아요." 새침떼며 차를 마시는 안느마리를 유벨이 노려보자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쿡쿡거리켜 웃음을 삼켰다. 그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던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루네르 오라버니는...어떻게 되었어요?" 순간 웃음을 멈춘 사람들은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라벨이 괘씸하다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허, 참! 그 녀석 얘기는 말도 꺼내지 말아요! 세상에, 5년 유배형을 받은 걸로 앙갚음을 하려는지 에이드리안 님께 이올리제(주. 참조)를 신청했다니까요! 해산물이 태양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다더니. "에? 뭐라고요? 그, 그래서요?" 안느마리가 접시에 담긴 비스킷 하나를 손에 들고 입에 넣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는. 그래서 당연히 뼈다귀 같은 그 남자는 에이드리안 님께 묵사발이 났지. 그 때 그 베로니칸지 뭔지 하는 여자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얼마나 고소하던지..." 케이로프와 미라벨이 그 장면이 새삼스레 생각난다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뺨에 홍조까지 띄며 반짝이는 눈으로 허공을 쳐다 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감격스러운 표정을 보며 꾹꾹 웃음을 참았다. 케이로프가 미라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그 때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모습은 정말 멋졌지. 안 그런가? 그 분이 하얀 손을 뻗으니 밝은 하얀빛이 사방을 휘어 싸면서..." 미라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이었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노랫소리가 울려퍼졌죠. 광속성 레플리카답게 그 은은한 따스함이 퍼지고...그리고 그 해산물 같은 남자는 한 방에 퍼억..."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감동의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유벨이 실실 웃으며 가만히 듣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 눈을 돌렸다. "얼마동안 비실비실 거리더니 이제 완전히 회복된 거구나? 역시 넌 레플리카에 있어서는 완벽하다니까."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방 문 앞에 멈춰선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유벨, 내가 언제 비실댔다는 거야?" 거만하게 말하며 방문을 닫고 나가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유벨은 킥킥대며 웃었다. "곧 죽어도 지기는 싫어서...녀석."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품에 안고 있던 소파의 쿠션을 내동댕이치고 방에서 달려나갔다. ******** 달이 은은하게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사택에 포함되어 있는 작은 정원을 천천히 걸어갔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멈추어 서서 눈을 감고 나무와 풀의 향기를 들이 마셨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에 나무의 은근한 향이 실려왔다.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노랗게 빛나고 있는 달빛에 눈이 부셔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문득 에이드리안은 인기척에 손을 내리고 뒤로 돌아보았다. 하얀색 원피스 차림의 쥬느비에브가 까만색 눈망울을 빛내며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움켜쥐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눈이 부셔와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 나 그 쪽으로 가도 돼요?" "으응..."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향해 폴짝폴짝 잘도 뛰어오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넘어져. 쥬르. 천천히 와." 에이드리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온 쥬느비에브는 힘든지 숨을 훅훅 내쉬었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쥬느비에브의 땀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정원의 벤치로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가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자리 잡았다. 에이드리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왜 나온거야?" "에이드리안이 나와서....헤헤." 머리를 긁적이며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음을 보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다시 손수건으로 쥬느비에브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 문득 목에 나 있는 붉은 자국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이건...그녀가...아니, 내가 그런 거야? 요며칠 계속 스카프를 하고 있더니." "벼, 별거 아니에요. 에이드리안. 난..." 멋쩍은 듯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이드리안은 손수건을 내려놓고 가만히 두 손으로 쥬느비에브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 그녀의 손자국이 남아있는 목 부분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입술을 벌려 목을 살짝 깨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행동에 당황하여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목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쥬느비에브를 꼬옥 껴안았다. "상처를...지웠어.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쥬르, 미안해. 내가 좀 더 날 단단히 억압했어야 했어. 그녀가 내게 침범하지 못하게...좀 더 강하게 마음을 먹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 "에이드리안..." 떨리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들고 그를 꼭 껴안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드리안은 잠깐 유령에 씌였던 거라구요. 무시무시한 여자 유령이었거든요. 에이드리안은 기억도 잘 안나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생긋 웃어주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책망하는 듯 눈동자를 내렸다.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참.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라니까요. 내가 에이드리안을 화나게 해서 이상한 유령한테 씌인 거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의 등을 톡톡 두드려 주다 고개를 포옥 숙였다. 그리고 조그맣게 속삭이듯 물었다. "있잖아요. 에이드리안. 그런데...나 그 때 말한 약속 취소...말인데요. 그 거 물릴 수 있어요?" 동그랗게 눈을 말똥거리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까 전의 침울하던 표정을 지우고 천연덕스럽게 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이미 취소된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린 이제 한 가족도 아니고 뭐도 아니군." "하, 하지만... 그 때 그렇게 말한 건 실수였어요!" 쥬느비에브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칭얼거렸다. 에이드리안은 괜히 시선을 돌리며 약올리듯 말했다. "아- 그러셔? 하지만 이미 그 때 우리 약속은 취소된걸." 태연한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꾸욱 참으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재미있다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약속이란 건 원래 일종의 계약이고, 계약이란 건 다시 맺을 수 있는 거지. 재계약이라고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 "에에-?"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눈을 빠꼼하게 들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네 가족이 되어 주면 무얼 줄건데?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에슈비츠 공작 예하께서 네 가족이 되어 주셨으니 난 이제 필요 없겠군." "아, 아니에요! 난 에이드리안이 꼬옥 필요해요! 필요하단 말이에욧!!" 꽥 소리를 지르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에 에이드리안은 순간 놀라 귀를 막았다. "아, 정말! 귀 아프잖아!" 쥬느비에브는 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에이드리안에게 고정시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에이드리안이랑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할 거에요! 내가 에이드리안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약속 깨면 안 돼요. 알았죠? 이제 재계약이 맺어진 거죠? 우리 다시 가족 되는 거 맞죠?" "으, 으응..." 에이드리안은 고집스럽게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다소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러자 쥬느비에브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쥬느비에브의 행동에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뭐, 뭐야? 이건." "아이참. 원래 뭐든 새롭게 시작하면 선물을 줘야 하는 거에요. 선물." 손바닥을 까딱거리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젖혔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쥬느비에브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손바닥을 다른 쪽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에이드리안은 못 말리겠다는 듯 깊이 한숨을 쉬고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호기심이 일어 에이드리안의 주머니 쪽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곧 주머니에서 작은 은색 케이스가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은색 케이스를 쥬느비에브에게 건넸다.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은색 케이스에 달려 있는 작은 버튼을 눌렀다. 딸깍하고 케이스가 열렸다. 케이스 안에는 맑은 은색의 주사위 네 개가 세밀하게 세공 되어 얌전히 놓여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주사위를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며 환성을 질렀다. "와아- 예쁘다!" "2개만 가져."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홱 몸을 돌리고 말했다. "에이. 그냥 나 다 줘요. 에이드리안 쪼잔해. 구두쇠 영감님 같아." 에이드리안은 발끈하며 쥬느비에브의 손에서 케이스를 빼앗았다. 그리고 주사위 두 개를 꺼내어 쥬느비에브의 손에 들려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잠시 인상을 쓰다가 다시 주사위에 눈을 돌리고는 살풋이 미소지었다. 두 개라도 좋은 모양이었다. "너무 예쁘다. 반짝반짝 거려. 별 같아." "원래 이건 4개가 한 쌍이야. 4개가 다 모이지 않으면 주사위 놀이를 할 수 없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손뼉을 딱 쳤다. "알겠어요! 4개가 있어야 주사위 놀이를 할 수 있으니까 2개씩 가지고 있는 나랑 에이드리안이랑 매일 같이 있어야겠네요? 그쵸?" 기분 좋다는 듯 연신 미소를 흘리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다시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잘 맞췄으니까 이 것도 줄게."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상자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한 번 쳐다보고 상자를 열었다. "어어-? 반지잖아! 예쁘다! 주사위보다 더 예뻐!" 에이드리안은 반지를 꺼내 쥬느비에브의 손에 끼워 주었다. "이번에 비인 가의 대무도회에는 참석치 못했지만...이제 넌 진짜 내 약혼녀야. 아무도 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안겼다. "나, 에이드리안의 가족이 되어서 에이드리안을 매일 행복하게 해 줄거에요. 나, 에이드리안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에이드리안은 기쁜 듯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하늘로 눈을 돌렸다.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운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쥬느비에브가 전해주었던 레플리카가 따뜻하게 마음을 적셨다. [나 에이드리안 많이 좋아해요. 많이 소중해요. 많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건 분명 쥬르의 사랑스런 레플리카... 하지만 난 지금도 이렇게 행복한걸.' 에이드리안은 좀 더 쥬느비에브를 꼬옥 껴안았다. 따뜻한 쥬느비에브의 체온이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귀에 속삭였다. "내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줘서 기뻐. 고마워, 쥬르." 제30음(第30音) 학년 배정 테스트(1) 잠깐 동안의 소동이 지나가고 변함 없는 스콜라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난 쥬느비에브는 군청색 반바지와 하얀 셔츠를 입고 바지와 같은 색의 타이를 꾹 매었다. 그녀는 세심하게 거울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어 주었다. 거울 속에서 까만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신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들어 침대 옆의 서랍으로 쪼르르 달려가 서랍 속의 반짝거리는 하얀 색 핀을 꺼내 머리에 쿡 찔렀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쥬느비에브는 두 발을 쩍 벌리고 씩씩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다. "이 걸로 완벽하군. 그럼. 이제 에이드리안을 깨우러 가볼까?"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워진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랄하게 뜀박질을 하였다. 그리고 방문을 힘차게 열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그녀는 앞으로 스쳐 가는 시커먼 그림자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야야...어,어? 유벨 오빠?"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유벨을 쳐다 보았다. 유벨은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벨을 바라보던 쥬느비에브는 눈을 돌리다 옆에 서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 그리고 안느마리를 발견했다. 쥬느비에브는 이른 아침부터 등장한 네 명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아침부터 웬 일이에요? 에이드리안은 아직 안 일어났는데." 쥬느비에브의 말에 유벨이 험상궂게 표정을 구겼다. 그 때서야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네 명이 왠지 통일감 있어 보이는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로프와 유벨, 그리고 미라벨과 안느마리가 각각 같은 모양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다들 색상만 틀릴 뿐이었다. 남자들의 제복은 무릎까지 오는 긴 상의와 빳빳한 조끼, 바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기 다른 화려한 장식들과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여자들의 제복은 허리까지 오는 짧은 상의와 발목까지 덮이는 일자 모양의 긴 치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자들의 상의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색색의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유벨은 회색, 케이로프는 붉은 색, 미라벨은 다홍색, 안느마리는 갈색 톤의 제복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다들 머리색에 맞춰서 단체복을 만들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왠지 제복이 멋져 보여 부러운 생각도 잠깐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쥬느비에브는 의아해 하며 말을 건넸다. "어라, 다들 같은 옷 입고 뭐 하는 거에요?" "쥬느비에브. 이 거 교복이야. 교복." 안느마리가 싱긋 웃으며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교오복-?" 미라벨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도 엄연한 학교에요. 학교. 교복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요. 물론 평상시에는 입지 않지만 오늘같이 <엘크로이츠>의 총회가 열리는 날에는 당연히 예법에 맞게 착용하는게....음? 앗!!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미라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던 유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안색을 바꿨다. 유벨이 허둥지둥 거리며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달려갔다. "에드, 이 녀석! 내가 오늘 총회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늦잠을 자?" 유벨의 뒤를 따라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도 헐레벌떡 뛰어갔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달려 갔다. 꼭 마을에 방물장수가 왔을 때 무작정 뒤따라 다니던 그런 기분이 들었다. ******** "에드, 일어나!!" 에이드리안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척였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제발 일어나 주시지요." 아까보다는 좀 더 가까이 들리는 윙윙거리는 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반대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에이드리안 님. 이 미라벨을 봐서라도 일어나 주세요!!" 에이드리안은 더욱 가까워진 소리에 짜증스럽게 신음소리를 내며 이불을 확 끌어 당겼다. 그 때 몸 위로 뭔가가 덮쳐 왔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뜨고 한숨을 쉬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에이드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으악!!!"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얼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얼굴 때문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놀란 가슴을 힘겹게 쓸어 내리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쥬느비에브의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에 올라온 쥬느비에브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 내 얼굴이 그렇게 무서워요?" "너, 정말! 자는데 자꾸...어, 유벨? 다들 여기서 뭐해?" 천연덕스럽게 베개를 껴안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너 이 자식! 이 형님이 오늘 총회라고 말했냐, 안 했냐!! 분명히 내가 어제 저녁에도 말했었지!!" 막무가내로 에이드리안에게 달려드는 유벨을 가까스로 저지한 케이로프는 힘겹게 숨을 몰아 쉬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어서 준비하시지요.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서두른다면 그리 늦지는 않을 테니..."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유벨과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멍하게 말했다. "총회..무슨 총회....총회?!"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잠에서 깬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들어 머리를 부시시 흩트렸다. 그리고 우왕좌왕 하며 소란을 피웠다. "어, 어떻게 하지? 아직 얼굴도 안 씻고 옷도 안 입고...어, 어떻게 하지? 뭐, 뭐부터 해야...옷부터 입고...아니지 먼저 씻은 다음...아니야. 식사부터 하고...아니지, 아니야..." "야! 에이드리안 파이팅! 에이드리안 만세! 더 빨리 걸어 봐요! 더 빨리! 아하- 재밌다." 정신 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에이드리안과 그런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재미있다면서 손뼉을 치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안느마리가 딱하다는 듯 미라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엘크로이츠> 총회 때마다 에이드리안 님이 지각 한 번 하신 적이 없다고 하던데 미라벨 님, 힘드셨겠어요. 총회 때마다 이런 소동을 겪어가며 이룬 쾌거들일 테니..." 안느마리의 동정어린 눈동자와 쥬느비에브의 장난끼어린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길고 고된 시간이었죠...그나마 오늘은 쥬느비에브 때문에 일찍 일어나신 거니 다행인지도..." 그렇게 말하는 미라벨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 안느마리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눈 앞에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에이드리안과 옆에서 잔소리를 퍼부어 대는 유벨, 신나게 박수를 치고 있는 쥬느비에브, 묵묵히 세숫물을 가져온 케이로프가 한 편의 쇼를 펼쳐내고 있었다. ******** 에이드리안은 급하게 대강당으로 들어섰다. 아침부터 너무 정신이 없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하얀색과 금색이 매치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비인 가의 문장과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문장, 그리고 엘크로이츠의 문장과 학생회장임을 표시하는 문장이 왼쪽 가슴에 가득 수놓아진 교복은 일년에 몇 번 입지 않는 옷이었지만 대단히 정갈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목의 타이를 바로잡고 커프스를 고정하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대강당은 하얀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건물로서 한 번에 스콜라의 모든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때문에 학생회의 총회는 항상 이 곳에서 열리곤 했다. 중앙 앞쪽에 커다란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래편에는 푹신한 붉은 색 양탄자가 깔려 있고 그 위에 편하게 보이는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대강당은 항상 밝은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고 긴 창이 여기 저기 배치되어 언제나 밝았다. 까만 색 끈으로 머리를 묶고 나온 에이드리안은 무심코 머리에 손을 대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스콜라에 돌아온 이후 에이드리안은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부터 자르려고 했다. 그런데 쥬느비에브가 울며불며 말리는 바람에 결국 중간에서 합의를 보고 말았다. [엉덩이까지! 거기까지만 봐줄거에요. 더 이상 짧게 자르면 나...나...가출 해 버릴 거에요!] 가출을 한다는데 별 수가 없었다. 결국 에이드리안은 긴 머리의 반 정도를 잘라내고 그 것을 쥬느비에브의 장난감으로 줘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쥬느비에브는 틈만 나면 머리를 만지러 왔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으로서는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머리를 만져주는 감촉이 좋아 가끔씩은 그냥 맡겨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머리를 자르고 난 다음 결국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약 5오토(주. 참조) 정도 더 짧게 잘랐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에이드리안은 모롤라와 꼬치구이를 비롯한 간식거리로 겨우 울음을 달래 줄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간식거리를 보고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씨익 웃어 주었다. 에이드리안은 그 때의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생각나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에이드리안의 회상을 방해하려는 듯 유벨이 에이드리안의 팔꿈치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싱글거리냐? 다 외웠어? 오늘 얘기할 거. 내가 어제 준 서류 읽어 봤지?" 유벨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제 유벨이 준 서류를 그냥 서랍 안에 넣어 놓고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다. 에이드리안은 예의 불쌍한 어린 양의 미소를 내보이며 측은하게 말했다. "유벨. 미처 보지 못했는데....알아서 해줄 거지?"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말에 순간 발끈하다가 에이드리안의 사랑스런 미소에 그만 분을 삭이고 말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연설문이 적힌 하얀 종이를 꺼내 퉁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읽어줄테니까 빨리 외워! 친애하는 엘크로이츠의 여러분, 새로운 총회가 열렸습니다. 우리 엘크로이츠는 저번 총회에서 통과된 여러 사안들을 훌륭하게 집행했으며 이 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마음을 담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엘크로이츠로서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걸어가며 유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뒤에서 미라벨이 바짝바짝 속이 타는지 손수건을 물어 뜯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지긋이 눈을 감고 위로하듯 미라벨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멀뚱멀뚱 거리며 따라온 쥬느비에브가 안느마리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 근데, 안느마리. 왜 에이드리안은 교복이 하얀색이야? 에이드리안은 금발인데. 금색이 쪼끔 들어 있긴 하지만 주로 장식 부분이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케이로프가 예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신 대답해 주었다. "스콜라의 교복은 원래 짙은 자줏빛이 주요색으로 흰색이 부분적으로 매치된 것입니다만 특별히 학생회의 중앙 집행부에게만은 다른 색상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어쩌다 보니 머리색과 같은 교복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만,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은 특별하니까요." "에에?"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쥬느비에브를 보며 안느마리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투표를 했었다는 거 아니니. 스콜라의 레이디들이 에이드리안 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에 대해 투표를 했는데 흰색이랑 금색이 나왔지. 흰색의 표가 더 많아서 에이드리안 님은 저런 색을 선택하신 거야." "호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의문점이 생겼는지 안느마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느마리. 안느마리. 그럼 내 교복은?" 미라벨이 자신의 다홍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신 대답했다. "이번에 학년 배정을 받게 되면 맞추게 될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무슨 색깔이 좋아요? 역시 검은색?" "에에- 그런 거 정말 싫어요." "하긴 그렇게 되면 그 재수 없는 에스프라드 님과 한 쌍이 되겠군요. 다른 색상을 골라 봐야겠어요." 미라벨은 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이미 강당 안쪽으로 들어 서고 있었다. 미라벨은 그 모습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케이로프 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케이로프 님이 오늘 사횐데!" 미라벨의 말에 케이로프는 잠시 잊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 곧장 단상으로 뛰어 갔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유- 정말. 다들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거야." 교복 색깔을 뭘로 할까 계속 고민 중인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손에 질질 끌려 가 단상 밑에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강당에는 흰색과 자주색으로 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이렇게 많은 학생들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처음이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진짜 정신은 여전히 자신이 맞출 교복 색깔에 팔려 있었다. '분홍색...분홍색이 좋을까? 아님 빨간색? 아니야. 연두색으로?' 끝이 없는 고민에 빠져 쥬느비에브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푸욱 숙였다. 곧 케이로프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말투가 평상시보다 이런 행사 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삼켰다. ********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열심히 단상을 쳐다보았다. 케이로프가 사회를 보고 있었고 꽤 많은 학생들이 올라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발표를 했다. 쥬느비에브는 슬슬 잠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케이로프가 외쳤다. "그럼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갑자기 학생들이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덩달아 박수를 치며 멀뚱멀뚱 단상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주고 단상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계단을 오르자 이미 준비해 있던 집행 위원들이 에이드리안의 팔에 완장을 채워 주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미라벨의 귀에 속삭였다. "아까 에이드리안 그 거 다 못 외우는 거 같던데..."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체념 조로 말했다. "물론 다 못 외우셨겠죠. 뭐 하지만 걱정은 없어요. 그나저나 완장을 빠뜨렸다니...나의 실수로군요. 이 일을 어쩐다..." 미라벨은 잔뜩 얼굴을 구기며 수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에이드리안의 연설보다 자신이 챙기지 못한 완장에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빠꼼히 고개를 돌리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왠지 멋들어진 교복을 입고 있어선지 오늘따라 에이드리안이 무척 근사해보였다. 그 때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어머, 오늘따라 에이드리안 님이 더 멋있게 느껴지지 않아? 게다가 저 부드러운 금발이 저렇게 길어지다니...상위 레플리카 능력자 중 가끔씩 한꺼번에 머리가 자라는 경우가 있지만...역시 멋져. 레이디들의 선망의 대상!" "응. 정말이지 아름다우시다니까. 어휴,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는 정말 좋겠어. 도대체 누구야. 아직까지 얼굴도 안 비치고." 미라벨이 고개를 돌려 눈짓을 주자 수군거리는 소리를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왠지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썼다. 다른 여자들이 에이드리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싫었다. '에이드리안 약혼녀는 나야, 나!' 쥬느비에브는 마음 속으로 외치며 주먹을 쥐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한 손을 들었다. 강당이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곧 이어 에이드리안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상하게도 강당이 이렇게 큰데도 에이드리안의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쥬느비에브의 의아한 표정에 안느마리가 소근거렸다. "레플리카야. 직접 머리 속에 들려주시는 거지." 쥬느비에브는 레플리카란 것이 정말 편리한 능력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친애하는 엘크로이츠의 여러분, 새로운 총회가 열렸습니다. 우리 엘크로이츠는 저번 총회에서 통과된 여러 사안들을 훌륭하게 집행했으며 이 것은 모두 여러분들의 마음을 담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엘크로이츠로서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말을 멈췄다. 유벨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미라벨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허탈하게 말했다. "오늘도 역시군요. 오늘도 다 못 외우셨군요. 아아- 어지러워~" 비틀거리는 미라벨을 안느마리가 받치며 초조하게 입맛을 다셨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어떻게 할 것인지 너무 조마조마해 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에이드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살며시 미소지어 주고는 다시 눈을 들고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우리 엘크로이츠가 차기 평의회를 장악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러분들이라면 나의 소망과 여러분의 소망을 현실로 실현시켜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나를 믿고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나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곧 이어 엘크로이츠와 에이드리안을 외치는 목소리가 하나되어 울려 퍼졌다. 큰 함성에 쥬느비에브는 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아, 정말. 종교 집회같아." "이게 바로 에이드리안 님의 힘이시죠. 나중에 신흥 종교의 교주를 하셔도 아마 잘 하실 것 같아요. 저 즉흥 연설만 봐도 충분하죠. 아...근데 정말 멋지지 않아요?" 미라벨은 우수에 찬 눈길을 에이드리안에게 말없이 보내며 두 손을 턱 밑에서 꼬옥 쥐었다. 에이드리안은 무사히 연설을 마치고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주었다. 에이드리안이 단상에서 내려가자 함성은 더욱 거세졌다.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멍하게 서 있던 케이로프가 정신을 차려 에이드리안의 연설이 끝났음을 알리고 공지 사항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유벨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유벨이 단상에 올라가자 역시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벨의 인기도 제법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옆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 빛의 정체는 안느마리의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안느마리는 입을 헤 벌린 채 야릇한 눈빛으로 유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킥킥거리며 유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학생들을 둘러보던 유벨은 문득 안느마리를 보고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유벨은 애써 시선을 먼 곳으로 고정하며 딱딱하게 이야기했다. "여러분. 10델라 후에 편입생들과 기타 학년 배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학년 배정 테스트가 있습니다. 이번에 좋은 랭크를 받아 엘크로이츠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그리고..." 유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년 배정 테스트?" 쥬느비에브는 반바지를 두 손으로 꾸욱 움켜쥐고 결의의 눈빛을 빛냈다. '학년 배정을 받으면....배정을 받으면...나도 분홍색 교복을 받을 수 있다!!' 어느새 교복 색깔을 분홍색으로 결정해 버린 그녀였다. 그리고 학년 배정 테스트를 위한 '완벽 레슨'이라는 그녀만의 굳은 결심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만저만한 민폐라는 것을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뒤로 한 채 총회의 끝을 알리는 학생 전원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제31음(第31音) 학년 배정 테스트(2) 꽤 긴 시간동안의 여행으로 학생회 업무가 산더미 같이 밀린 에이드리안은 연일 업무를 처리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쥬느비에브는 매일 학생회실에 찾아와서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훼방만 놓고 갔다. 오늘도 갑자기 와서는 카드 게임을 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일을 제쳐두고 카드 게임을 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까지 잔뜩 들떠서 일은 모두 팽개치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상하게 쥬느비에브만 나타나면 분위기가 들떴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그것이 그리 나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귀족 가문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온 미라벨과 케이로프로서는 쥬느비에브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쩌면 지극히 신기한 장난감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회 업무를 잠시 미루고 사택으로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 너무 피곤해서 머리 속이 멍했다. 오로지 침대 위에 들어 눕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학생회실에 가서 업무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머리 끈을 풀어 테이블 위에 놓고 어기적거리며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이 쏟아져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단추를 채웠는지도 모르게 에이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침대가 흔들리며 곧 진동이 잦아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낮잠이라는 것은 늘 그렇지만 너무 달콤하고 기분 좋았다. 에이드리안은 베개를 꼬옥 끌어 안으며 단잠을 맛봤다. [에헤헤헤헤헤헤-----크에에에에에에엑-----]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신경을 긁는 소리에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악----므헤헤헤헤헤헤헤헤----] 다시 기괴한 소리가 들리자 에이드리안은 신경질을 내며 베개로 귀를 막았다. [이히히히히히히히--- 꾜오꾜꾜꾜꾜꾜꾜------] 에이드리안은 핏발이 선 눈을 뜨고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로 달려갔다. 창문에 힘을 주었다. 창문이 드르륵 하며 열렸다. 에이드리안은 창 문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나의 단잠을 깨워! 누구야!! 당장 안 나와?" 조용했다. 에이드리안은 창 문밖을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부라렸다. 그 때 창 가 바로 밑의 나무 아래에서 쥬느비에브가 쏘옥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안느마리도 얼굴을 보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물었다. "에이드리안, 잤어요?" 에이드리안은 잔뜩 인상을 쓰고 하품을 하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거기서 뭐해? 뭐 하는데 그렇게 시끄럽게 굴어? 나 잘 거니까 다른 곳에 가서 해." "나 지금 노래 연습해요. 학년 배정 테스트가 있잖아요. 그래서 곡목을 정하려고 하는데... 안느마리가 노래 가르쳐 주고 있어요. 제목은 <지옥의 묵시록>인데 그게...." "쥬르, 당장 들어와."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얼굴을 굳히며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창문을 거칠게 닫았다. 안느마리가 노래를 가르쳐 줘?! 절대 안 될 말이다. 그런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레플리카를 쓰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렴! 안느마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지옥의 묵시록>같은 걸 부르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침실에서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며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오라고 해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벅벅 긁고 손가락으로 양 볼을 쭈욱 늘리며 이상한 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혀를 쏘옥 내밀었다. 에이드리안은 뒤돌아 서 있었기 때문에 쥬느비에브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재미있다는 듯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대며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입에 걸어 쭈욱 당겼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놀란 눈을 깜빡 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눈 앞에 앉아 있는 저 괴상한 얼굴의 생명체가 자신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에이드리안은 시선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에게 장난을 들킨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놀라 입에서 손가락을 빼고 새초롬하게 고개를 숙이고 방긋 웃었다. 에이드리안이 한 숨을 쉬더니 쥬느비에브가 있는 쪽으로 왔다. "쥬르, 음...이런 얘기 뭐하지만 난 안느마리에게서 노래 배우는 건 그만 뒀으면 좋겠어." "에에? 하지만 안느마리 노래 엄청 잘 해요. 스콜라에서 저번 랭킹 14위 래요! 정말 대단하죠?" 에이드리안은 잠시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고 쥬느비에브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쥬르. 그 것때문이 아니라 안느마리의 노래가 너무 독창적이어서 그래. 안느마리만의 특징적인 노래를 네가 부르면 안느마리의 독창성이 그만큼 줄어 드는 거잖아. 안 그래? 친구를 위해서 그러면 안 돼지. 그럼. 그럼."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손으로 턱을 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드리안을 보았다. "으, 응|! 맞아요. 난 안느마리 친구니까 안느마리의 독창성을 존중해 줄거에요. <지옥의 묵시록>은 관두고 다른 노래해야 겠다. 우웅- 그럼 누구 한테 배우죠? 빨리 선곡해서 연습해야 하는데..." "케이로프가 있잖아. 아니면 미라벨에게 가보던지...유벨도 있고. 나중에 선곡한 다음은 안느마리에게 레슨 받아도 좋고. 선곡만 하면." 에이드리안이 말을 마치자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거리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시선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쥬, 쥬르. 나, 난 말이야. 시, 시간이 없어서...그러니까...음...그래. 나중에. 맨 나중에 내가 봐줄게. 됐지?"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 나 열심히 연습해 올 테니까 꼭 봐줘야 해요, 알았죠? 아주 멋진 노래를 선곡할 테니까!" 쥬느비에브는 까르르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이마의 식은 땀을 닦으며 침을 삼켰다. 쥬느비에브의 노래가 얼마나 들어주기 힘든 것 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음정, 박자는 물론이고 도대체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그녀는 노래다운 노래를 부르지를 못했다. 미라벨은 그녀의 노래에 한 번은 기절하기까지 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걱정이 되어서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왠지 모르게 쥬느비에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에이드리안이었다. "당분간 다들 힘들겠군. 쥬르 때문에...미안해, 다들." ********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케이로프는 품이 넉넉한 셔츠를 흔들어 안으로 바람을 보냈다. 너무 열을 올려서 그런 건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습실은 그의 열기로 무척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열기만으로! 쥬느비에브는 싱글싱글 웃으며 케이로프를 보고 있었다. 케이로프와는 대조적으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는 다시 이마에 열이 올랐다. "도대체 여기서는 한 템포 늦추라고 제가 얼마나 말씀드렸습니까!!" "그, 그게 말이죠. 자꾸 마음이 급해져서 말이죠. 마차 타고 식당에 가는 기분이라니까요. 식당에 가면 모롤라도 있고 꼬치구이도 있고 예쁜 케이크도 있고..." "그만, 그만!! 그만 하고 연습이나 하세요." 케이로프는 가쁘게 숨을 쉬고 악보를 뒤적거렸다.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고는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근데 케이로프 님. 나 학년 배정 테스트에서 어떤 노래를 하면 좋을까요?" "아직도 선곡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악보를 뒤적이다가 하나를 골라냈다. "제가 아끼는 곡입니다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에게 드리겠습니다. 아주 당당하고 아름다운 곡이지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악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노래의 제목을 보고 눈썹을 실룩였다. "아, 위대하여라.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케이로프는 자랑스럽다는 듯 앞머리를 넘기며 쥬느비에브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제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지요. 하늘의 뮤즈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한 곡입니다. 제가 한 번 불러보지요. 오오~ 찬----양하라 하늘의 뮤즈-----여 그대의 찬----란한 이름은 길이 길이 빛나리~" 케이로프는 말을 마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케이로프의 노래를 들었다. 음의 높낮이가 전혀 없는 노래는 끝없이 이어져 갔다. 쥬느비에브는 입맛을 다시며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오늘은 늦어지기 전에 이 곳을 떠나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용기를 내어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케이로프는 눈을 지긋이 감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노래에 도취되었는지 가끔씩 몸을 부르르 떨었다. 쥬느비에브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뒷걸음질을 했다. 그리고 문 가에 도착하자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케이로프는 여전히 <아, 위대하여라.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을 부르고 있었다. ********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고 뒤돌아보았다. 다행히 케이로프가 쫓아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오늘 오렌지색 호박모양 반바지와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빨간색 크로스가방을 매고 있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들고 나온 제목도 거창한 <아, 위대하여라.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악보를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케이로프가 상당히 아끼는 악보인 것 같아 나중에 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쥬느비에브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미라벨의 연습실로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아유, 더워. 슬슬 더워지네. 미라벨 언니한테 아이스티 만들어 달래야지." 쥬느비에브는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토닥토닥 발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그늘이 있는 곳만을 걸어가며 쥬느비에브는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케이로프 님의 곡은 무리야. 그런 노래 부르다가는 내가 먼저 잠들어 버릴걸? 다른 노래를 골라야 겠는데...역시 미라벨 언니한테 물어 봐야겠다.' 쥬느비에브는 미라벨의 연습실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 정열적인 붉은 색의, 역시나 프릴과 레이스와 리본 때문에 디자인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미라벨은 열심히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문 쪽으로 빠꼼히 모습을 드러낸 쥬느비에브를 보며 미라벨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쥬느비에브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쥬느비에브는 빨간 꽃무늬 커튼을 곁눈질하며 연습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미라벨에게 물었다. "미라벨 언니도 바이올린 켤 줄 알아요?" "뭐 다들 기본적인 거야 할 수 있지요. 나도 그저 쉬운 곡을 연주하는 수준밖에 안 돼요. 유벨 님에 비한다면." 미라벨은 테이블 쪽으로 쥬느비에브를 안내했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테이블로 쪼르르 달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 손을 번쩍 들고 마구 흔들었다. "미라벨 언니! 나 아이스티! 레몬맛 나는 걸로!" 쥬느비에브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미라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쪽에서 차를 타며 미라벨이 물었다. "아이스티를 마시러 여기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다른 일이 있나요? 쥬느비에브." "으응- 사실 나 학년 배정 테스트 때 부를 노래 아직 못 정했어요. 미라벨 언니가 아는 좋은 노래 있어요?" "흐음...글쎄요..." 미라벨은 빙긋이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말간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티를 건넸다. 쥬느비에브는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아이스티를 받아 들고 함박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고 몸을 부르르 떨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아, 너무 맛나요! 우웅~ 너무 행복해..." "뭐, 에이드리안 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나, 미라벨의 아이스티니 당연하지요. 오호호호호호-" 입에 손을 가져가 거창하게 웃고 있는 미라벨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아이스티를 꿀꺽꿀꺽 삼켰다. 미라벨은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손을 내리고 쥬느비에브의 맞은 편에 우아하게 사뿐 거리며 앉았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얼굴을 내밀어 작게 속삭였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노래가 한 곡 있긴 하지요." "에? 뭔데요, 뭔데요?" 쥬느비에브도 얼굴을 쑥 내밀고 물었다. 미라벨은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여왕의 프로포즈>이란 곡이에요. 제목 그대로 여왕 같은 노래에요. 당당하고 근엄하고 장엄하기까지한 곡이지요. 한 번 들어 볼래요?" 미라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허공으로 쭈욱 뻗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나는야 아름다운 여왕이라네--- 아----름다운 남자여 나에게 굴복하시라--- 나는 레이스를 사랑하는 여왕이라네--- 나는 프릴을 사랑하는 여와이라네--- 아아아아아아- 그---대여 나에게 굴복하시라------]]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리를 긁적였다. 노래를 마친 미라벨은 감동을 지속시키고 싶다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손으로 허공을 쓰다듬었다. "아아, 쥬느비에브. 정말이지 멋진 노래죠? 이제 노래도 선율뿐만이 아니라 가사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곡은 이올린스 가문의 막내 자제분이 나를 그리면서 작사한 곡이에요. 정말이지 나의 이 아름답고 기품 있으며 당당한 모습을 그린 곡 같지 않나요?" 쥬느비에브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코를 훌쩍였다. 목구멍 안으로 홀짝홀짝 넘어가고 있는 아이스티의 맛이 갑자기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미라벨을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미, 미라벨 언니. 그 곡은 너무 거창하고...뭐랄까. 너무 장대한 곡이라 저 같이 평범한 소녀에겐 너무 무리인 것 같아요." "오호호호호호호호- 역시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역시 쥬느비에브에게는 어울리지 않죠? 오호호호호호호- 좋아요, 그럼 평범하지만 좋은 곡을 제가 선별해 드리죠. 이 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미라벨의 뒤를 폴짝폴짝 뛰어 갔다. 미라벨은 연습실 안 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방으로 쥬느비에브를 안내했다. ******** 미라벨이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간 곳은 악보를 보관해 놓는 곳이었다. 벽을 둘러싸며 책장이 놓여 있었고 책장마다 악보들이 가득가득 꽂혀 있었다. 그리고 책장에 붙은 작은 종이들이 분류기호를 나타내고 있었다. 중앙의 나무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 위에도 악보가 쌓여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끔뻑거리며 악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악보 한 장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때 미라벨이 다가와 악보 책 하나를 건네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 악보 책을 보며 미라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라벨은 컬이 진 다홍색 머리를 찰랑거리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아주 쉬운 노래들만 모아 놓은 책이에요. '숲 속의 작은 집'이라던가 '아름다운 포린스 숲'이라던가...뭐, 다 무던히 소화할 수 있는 곡이에요. 쥬느비에브도 충분히 마스터할 수 있을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심상치 않은 눈동자로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쥬느비에브의 눈빛에 미라벨은 멈칫 거렸다. "왜, 왜 그러는 거죠? 무슨 문제라도?" 쥬느비에브는 퀭한 눈으로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퉁하게 대답했다. "나, 악보 볼 줄 모른단 말이에요." ******** 헉- 헉- 헉- 미라벨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쥬느비에브를 바라 보았다. 미라벨과 쥬느비에브는 2도르(주. 참조)째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미라벨이 대충 곡을 선정해 쥬느비에브에게 곡을 가르쳐 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미라벨은 잊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들어주기 민망한 노래 솜씨를. 몇 번의 호통소리와 몇 번의 달래는 소리가 흘러가며 미라벨은 천천히 지쳐 가고 있었다.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미라벨은 힘겹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다시 한 번 해보죠. 나--의 작---은 집에는---" "나의-----작은-----집-----에는." 쥬느비에브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노래 아닌 노래를 불렀다. 미라벨은 머리 속에서 폭발하는 화산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그게 아니라니까요! 음정, 박자를 생각해서 다시 한 번!! 나--의 작---은 집에는---" "나의-------작은 집-------에------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고...내가 몇 번이나..아아~ 어지러워.... 으, 음..." "미라벨 언니!!" 쥬느비에브는 풀썩 쓰러져 버린 미라벨을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미라벨을 살펴보다 순간 눈물을 터뜨렸다. "흐, 흐어어어어엉---, 미라벨 언니, 지금 자면 어떻게 해요! 나 노래 아직 덜 배웠는데--- 미라벨 언니, 미워... 흐어어엉, 흐어어어어어엉---" ******** 해가 막 질 무렵, 쥬느비에브는 초췌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미라벨은 그 후 일어날 생각을 안 했고 다행히 미라벨에게 학생회 서류를 건네주려고 온 학생회 임원이 그녀를 사택으로 옮겨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울하게 레슨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노래의 첫 소절도 다 배우지 못한 그녀로서는 아주 억울할 따름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잔뜩 얼굴을 구기며 집으로 들어섰다. 마침 미리 돌아와 있던 에이드리안이 현관에서 그녀를 맞았다. 톨레와 루이즈는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이드리안의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르, 얼굴이 왜 그래? 배고파서 그런 거야? 점심 안 먹었어?" 에이드리안이 걱정스레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슬쩍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미라벨의 연습실에서 아이스티 5잔과 초콜렛이 박힌 쿠키 두 접시, 하얀 설탕 가루가 잔뜩 뿌려진 빵 4개밖에 못 먹었다. 점심도 안 먹고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통치 않은 결과에 쥬느비에브는 다시 우울해졌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더니 쥬느비에브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꾸민 간이 식당에는 눈치 빠른 루이즈가 벌써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준비해 놓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의자에 앉히고 맞은 편으로 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노래 아직 못 정했어요.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나 아주 우울해요. 위로 해 주세요." 에이드리안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위로 해 줄까?" 쥬느비에브는 벌떡 일어나서 에이드리안 쪽으로 달려 왔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1 도르만 내 노래 들어 줘요." "으, 응? 콜록, 콜록-" 에이드리안은 먹고 있던 샐러드가 목에 걸린 것인지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기세에 에이드리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날 새벽, 에이드리안은 자리에 드러누웠다. 병명은 '소음에 의한 스트레스' 였다. 제32음(第32音) 학년 배정 테스트(3) 아침 일찍 일어나 사택의 응접실에서 바이올린을 손질하던 유벨은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그는 애써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날따라 창 밖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평소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던 창 밖의 풍경이 오늘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래서 1도르(주. 참조)든, 2도르든 계속 지켜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것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도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2쌍의 눈빛을 느끼며 천천히 돌아섰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그들 선에서 끝내주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벨은 마음 속으로 두 사람을 원망했다. '케이로프, 네 제자면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냐. 미라벨, 같은 여자로서 네가 좀 잘 가르쳐 주지 왜 나한테까지 떠넘기는 거냐.' 유벨은 다시 침을 삼키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두 사람에게 웃어 주었다. 쥬느비에브가 잔뜩 기대가 담긴 눈동자로 연두색 치마를 두 손으로 꾸욱 잡은 채 유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소녀, 아니 소년이 서 있었다. 안느마리가 양 갈래로 땋은 갈색 머리를 뱅뱅 돌리며 애교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벨 님. 쥬느비에브에게 노래 좀 가르쳐 주세요. 선곡도 안 했는데 테스트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제 얼굴을 봐서라도 부탁드려요. 아잉~~"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안느마리때문에 더욱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벨이었다. 유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주먹을 풀며 빙그레 웃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안느마리 군. 제발 그 코맹맹이 소리는 좀 안 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쥬느비에브. 어차피 오늘은 좀 한가하니까 레슨을 해줄게. 30시르 후에 내 연습실로 와. 안느마리 군! 그런 이상한 눈빛 하지마!" "아잉~~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유벨 님! 남자는 원래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심술궂은 법! 후훗." 유벨은 안느마리의 말에 벌써부터 달아오르는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으며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씨익 웃고 있었고 안느마리는 끊임없이 유벨에게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그저 달력에서 오늘 날짜가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는 유벨이었다. ******** 유벨은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듣고 있는 귀가 불쌍할 정도로 엉망인 노래와 자신을 향한 야릇한 시선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연습실은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벨의 정신은 하나도 정돈되어 있지 못했다. 그가 듣던 데로 쥬느비에브의 노래는 가공할 만했고 그에 덧붙여 플러스 알파로 붙은 안느마리의 유혹 어린 눈빛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유벨은 애써 쥬느비에브에게 정신을 집중하며 안느마리의 눈빛을 떨쳐 버리기 위해 노력을 들이고 있었다. "음...쥬느비에브, 그 처음 부분은 다소 약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짧게 해야 하는 거야. 나-의. 이렇게. 다시 한 번 해볼까?" "나---의-----! 이렇게요?"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유벨에게 말했다. 유벨은 살짝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다시 음을 바로 잡아 주었다. "나-의. 이렇게." "나-의-----. 어때요?" 유벨은 순간 숨이 막혀 와 쥬느비에브에게 억지로 미소지어 주며 말했다. "저기, 쥬느비에브. 나 잠깐 물 마시고 올 테니까 쥬느비에브는 여기서 연습하고 있어. 알았지?" 유벨은 쥬느비에브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돌아서 뻣뻣한 걸음으로 연습실 안에 칸막이를 쳐서 만든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멍한 머리를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유벨은 쥬느비에브가 뒤쫓아올세라 긴장하며 잽싸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고 깊게 한 숨을 쉬었다. 미라벨과 케에로프에 이어 머리 속에는 온통 에이드리안에 대한 원망이 솟아올랐다. '에드, 이 녀석아. 어째서 나한테 이렇게 큰 고난과 역경을 주는 거냐. 네 약혼녀면 네가 책임져야 할 것 아냐. 아아- 정말 나의 레플리카 능력에 회의가 온다...어째서 쥬느비에브는 저런 엄청난 음정, 박자로 노래를 할 수 있는 거지? 게다가 레플리카로 치면 아르헨에서도 내노라 하는 미라벨과 케이로프 그리고 나한테서까지 레슨을 받으면서...이해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어. 앞으로도 계속 그녀를 가르쳐야 할 케이로프가...불쌍할 따름이군....존경한다, 케이로프!' 유벨은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며 방안의 유리문이 달려 있는 장식장에 다가가 물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컵에 가득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게다가...저 안느마리까지 옆에 붙어서는 날 괴롭히니...' 유벨이 침울하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고 있었다. 왠지 더욱 억울한 기분의 그였다. 다른 사람들은 쥬느비에브 하나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자신은 그 소년, 안느마리까지 상대해야 했다.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유벨은 쥬느비에브인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유벨은 거칠게 숨을 쉬며 가슴을 들썩거렸다. 침묵이 흘렀다. 유벨은 이마에서 땀이 송송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벨은 천천히 뒤돌아 섰다. 순간 유벨은 아까 보다 훨씬 놀라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 안느마리 군. 여긴 어쩐 일이야. 밖에 쥬느비에브 혼자 놔두고..." "저와 유벨 님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고 왔죠. 후훗."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는 안느마리의 모습을 보며 유벨은 식은 땀을 흘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안느마리 군." "아이~ 안느마리 양이라니까요. 사실 쥬느비에브를 구하러 간다고 그 동안 유벨 님을 못 봐서 저, 아주 슬펐다고요. 유벨 님도 그렇죠? 다 알고 있으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되요." 베이지색 스커트 자락을 펄럭이던 안느마리는 싱긋 웃으며 유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곧장 유벨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순간 유벨은 머리 속이 하얗게 물들어 가며 온 몸에 급속도로 두드러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쥬느비에브의 노래를 듣고 있는 편이 낫겠어. 아아- 그래. 그 편이 백 배는 낫겠어.' 유벨은 눈을 감으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계속 노래를 하다 지친 쥬느비에브는 연습실의 테이블로 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유벨은 물 마시러 간다고 하고선 아직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안느마리도 어느 새 사라져 버려서 쥬느비에브는 너무 심심했다. 짙은 녹색 스커트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장난을 치던 쥬느비에브는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을 바라보는데도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쥬느비에브는 유벨이 사라진 문 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가볼 것인가 말 것인가. 쥬느비에브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우웅~ 가볼까 말까. 미라벨 언니가 레이디는 남자 혼자 있는 곳에 출입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유벨 오빤데. 그래. 유벨 오빠가 물 마시다가 체해서 쓰러져 있는지도 모르지. 그럼 내가 구해주러 가야 되는데. 맞아. 안느마리가 좋아하는 유벨 오빠를 내가 구해줘야 해!"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녹색 스커트와 연두색 블라우스를 손으로 털어내고 두 손을 쭈욱 펴서 어깨를 풀었다. 그리고 힘찬 걸음으로 유벨이 들어간 방 쪽으로 걸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방 문 앞에 서서 문에 귀를 바짝 가져갔다. 방 안쪽의 사정을 염탐 할 생각이었다. 안 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안느마리....하지마..." "아이~ 유벨 님. 천천히...천천히...."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안에 안느마리가 있었다. 유벨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씨익 웃으며 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헤헤. 유벨 오빠랑 안느마리가 둘 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안느마리의 친구로서 방해하지 말고 빨리 사라져야겠다. 안느마리, 미리 말해줬으면 내가 진작 먼저 갔을 텐데....아이, 부끄러워 하긴. 킥킥."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입가로 가져가 킥킥댔다. 그리고 발랄한 걸음걸이로 콧노래를 부르며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우정을 위해! ******** 쥬느비에브의 예상과는 달리 안느마리와 유벨은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유벨은 끙하며 신음소리를 흘리며 어정쩡한 자세를 좀 더 편하게 만들려고 몸을 비틀었다. 안느마리도 갈색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가며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안느마리 군. 그러니까 내가 빨리 비키라고...아야-" "유벨 님이야 말로 절 밀쳐 내지 않으셨으면...아, 아파라-" 두 사람은 서로의 상의 단추에 머리카락이 엉키는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다. 자신에게 달려든 안느마리를 밀어내다가 안느마리의 머리카락이 유벨의 셔츠 단추에 걸렸고 곧 이어 안느마리가 유벨에게 넘어지면서 유벨의 머리카락이 안느마리의 블라우스 단추에 엉켜버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심히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참 머리카락을 풀어보려고 시도하던 두 사람은 결국 한숨을 쉬며 포기하고 말았다. 유벨은 땀을 닦아 내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어이, 안느마리 군. 좀 앉자." "네에..." 안느마리는 원하던 바라며 힘없이 말했다. 원하지 않는 일심동체가 된 두 사람은 바닥에 앉은 채 허리를 굽히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허리를 펼 수도 없는 상황인 두 사람은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대화를 나눴다. "이 거 그냥 잘라내자. 안느마리 군." "안 돼욧! 머리카락은 여자의 생명이에욧!" 발끈하는 안느마리의 말에 유벨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다시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누가 여자야? 이거 그냥 잘라내자. 응? 이게 무슨 꼴이야. 밖에 나가서 이 거 풀어달라고는 절대 말 못해. 이런 우스운 꼴을 다른 학생들이 보면...어휴-" "아, 맞아. 유벨 님. 쥬느비에브를 불러서 이 것 좀 풀어 달라고 하죠." "아, 그렇군. 맞아. 쥬느비에브- 거기 있지? 이리로 좀 와 봐!!" "쥬느비에브! 여기 좀 와 봐! 큰 일났어! 좀 도와줘, 빨리!" 있는 힘껏 두 사람은 쥬느비에브를 불렀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이 시뻘겋게 눈이 충혈될 때까지 쥬느비에브를 불렀지만 그녀는 그들의 부름에 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미라벨에게 구출 될 때까지 그렇게 한심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미라벨에게 구출된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이후 오랫동안 미라벨의 비웃음 아닌 비웃음을 받아야 했고, 무엇보다 그 다음 날, <오늘의 에스플리크>의 <미라벨 양의 칼럼>에 유벨과 안느마리의 모종의 관계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었다. 물론 실질적인 피해자는 유벨이었다. 안느마리는 그야말로 기세 등등해졌으며 유벨에게 더욱 노골적으로 유혹의 몸짓을 했고, 유벨은 그런 안느마리와 사람들의 의혹의 눈초리 때문에 내내 스콜라 학생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 유벨의 연습실에서 나온 쥬느비에브는 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색 손가방을 흔들어 대며 쥬느비에브는 토닥토닥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숲의 나무들은 벌써 잎이 손바닥만하게 자라 아주 보기 좋게 우거져 있었다. 제법 뜨거워진 햇볕을 받으면서도 나무들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몸을 흔들어댔다. 바람이 솔솔 불어 와 앞머리를 날리자 쥬느비에브는 빙긋 미소지었다. 그리고 콩콩 뜀박질을 하며 두 손을 휘저었다. "우웅~ 기분 좋아! 그냥 기분 좋아~" 쥬느비에브는 멈춰서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오솔길의 끝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주먹을 불끈 쥐며 쥬느비에브는 힘차게 외쳤다. "좋았어! 오늘은 1시르(주. 참조) 안에 돌파다! 이얍!" 말을 마치자마자 쥬느비에브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달렸다. ******** 힘차게 저택의 안뜰에 골인한 쥬느비에브는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 번 씨익 웃어주고 옷의 먼지를 털어냈다. 에이드리안이 먼지투성이 옷을 보면 또 잔소리를 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옷의 매무새를 고치고 현관으로 들어가려던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저택 뒤뜰로 걸어갔다. 쥬느비에브는 그 노랫소리를 알고 있었다. 소름이 오싹오싹끼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뒤뜰로 가 구석에 몸을 숨기고 빠꼼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에이드리안이 그 곳에 있었다. 검은색 바지와 엉덩이부근까지 오는 하얀색 조끼를 입고 있는 에이드리안은 나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금발을 늘어뜨린 채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을 감고 노래하고 있었다. [[레 레스미나 토오레(나비들아 이리 오렴) 기 세테레나 호와르(늦은 봄에 해매고 있구나) 루즈 미레나 오르와르(나의 위로를 들어주렴) ......]] 에이드리안의 신비로운 목소리에 나비들이 기쁜 듯 날개짓을 했다. 에이드리안이 손을 들어 올리자 나비들이 그의 손 주변을 기분 좋게 날아다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몹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자신도 에이드리안처럼 노래하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몹시 아름답고 가슴 설레도록 노래했다. 그녀도 에이드리안처럼 '진짜 노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가 노래를 하면 늘 화를 내셨다. 그리고 아주 슬픈 표정을 지으셨다.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하려고 하면 자꾸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과 어머니의 슬픈 표정이 떠올라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침울해 졌다. 자신도 에이드리안처럼 멋지게 노래를 해서 이번 학년 배정 테스트에서 좋은 성과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에이드리안의 칭찬을 많이 받고 싶었다. 미라벨, 케이로프, 유벨, 안느마리가 그녀를 위해 많이 애를 썼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노래하는 것이 무서웠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기분 좋고 잔인하게 무서운 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무릎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눈물이 솟아 흘렀다. 학생회 업무를 보다가 점심 시간을 놓친 에이드리안은 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던 그는 문득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벌써 날씨가 제법 더워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나비는 아주 힘겹게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나비가 안쓰러워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나마 그늘이 져서 서늘한 뒤뜰로 가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곧 이어 나비들이 에이드리안의 위로를 들으려는 듯 다가왔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비들에게 노래를 들려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에이드리안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노래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쪽 벽에 삐죽이 나와 있는 짙은 녹색의 치맛자락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곧 그 치마 색깔이 아침에 쥬느비에브가 입고 있던 것과 같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에이드리안은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쥬르! 쥬르! 여기서 뭐해? 쥬르..." 커다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몹시 놀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 쥬르. 왜 그렇게 눈물이 많아? 울지 마..." 쥬느비에브는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에이드리안에게 안겼다.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알지는 못했지만 쥬느비에브의 눈물에 가슴이 아려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쥬르, 무슨 일 있어? 나한테 말해봐. 응?" "나, 나도 에이드리안처럼 노래하고 싶어요! 나도 노래 잘 하고 싶어요! 훌쩍. 훌쩍."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연습 열심히 하고 있잖아. 잘 할 수 있을 거야." "아니에요. 난 노래 못 해요. 못 해요." 에이드리안은 울먹이며 눈을 비비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안타까워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가 다시 말했다. "난 에이드리안처럼 못 해요. 에이드리안처럼 예쁘게 노래 할 수 없어. 잘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너무 무서워. 무서워서 노래할 수가 없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여 주며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맞췄다. 쥬느비에브는 파란 에이드리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계속 훌쩍였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쥬르, 레플리카란 건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우선은 마음의 문제야. 마음을 아름답게 가지고 있으면 아름다운 레플리카가 나타나는 거고, 마음을 훙칙하게 먹고 있으면 듣기 싫은 레플리카가 나오는 거지. 쥬르는 아주 따뜻하니까 아름다운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서워할 것 없어. 노래라는 것은 들어주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네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네 노래를 듣고 싶어할 거야. 넌 그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면 돼." 빙긋이 웃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가슴 한 쪽에서 무언가 찡한 것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말투로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내 노래 듣고 싶어요?"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품에 쏘옥 안겼다. 그리고 기쁜 듯 말했다. "나, 나 에이드리안을 위해 노래할 거에요. 그럼 무섭지 않아. 하나도 안 무서워. '진짜' 노래를 할거야. '진짜' 노래를...." 제33음(第33音) 학년 배정 테스트(4) 학년 배정 테스트가 열리는 날이 드디어 밝아왔다. 쥬느비에브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서둘러 옷을 입었다.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를 세심하게 잠그고 노란색 스커트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같은 노란색의 짧은 자켓을 입은 다음 거울을 보았다.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치며 침대 옆의 서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파란색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노란색 머리 리본이 얌전히 들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노란색 리본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쪽 머리를 쫑쫑 땋아 내리고 노란색 리본으로 돌돌 말아 매듭을 지었다. 쥬느비에브는 폴짝폴짝 뛰어 거울 앞에 섰다. 노란색 옷을 앙증맞게 입고 있는 귀여운 소녀가 거울 안에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브이 자를 그려 주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씩씩하게 말했다. "잘 해 보는 거야, 쥬느비에브!" 잠시 눈썹을 실룩이던 쥬느비에브는 살짝 눈을 내려 손가락을 살폈다. 왼손 약지에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두 손을 주먹져 허리에 가져갔다. "흐음...약혼 반지 끼고 있으면 나도 임자 있는 몸이라고 다들 봐 줄까? 하지만...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데~~~아웅~~" 부끄럽다는 듯 양 주먹으로 두 뺨을 비비며 돌리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에이드리안이 뭐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문 가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 에이드리안! 나, 난 그저... 뭐 내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게 아니라... 그게..." 몰래 엄마 옷 입어 보다 들킨 아이처럼 쥬느비에브는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에이드리안은 다른 날처럼 머리를 묶고 있지 않았다. 부드러운 금발이 찰랑거리는 모습을 보자 쥬느비에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의 아름다운 약혼자는 오늘 귀족의 우아함이 물씬 풍겨나는 세련된 군청색의 상의에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상의의 왼쪽 팔 부분에 이상한 문양들이 아랫쪽으로 길게 잔뜩 수놓아져 있었다. 유심히 살펴 본 끝에 쥬느비에브는 그것이 전에 에이드리안의 교복에 수놓아져 있었던 문양 세 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인 가의 문장과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그리고 엘크로이츠의 문장이었다. 그리고 오른 쪽 소매에 다른 문장이 하나 더 있었는데 쥬느비에브는 나중에서야 그 문장이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를 나타내는 표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옷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멋쩍어진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에, 에이드리안, 어디 가요? 이렇게 일찍?" "평의회 분회에 다녀 올 거야.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가기 전에 인사하러 온 거야. 오늘이지? 테스트." 부드럽게 미소지어 주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예전에 준 노란색 리본을 묶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너무 귀여워 보여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잘 해. 그렇다고 부담 갖지는 말고." "그, 근데 에이드리안. 저기요....저기요....내가 머리 묶어 줄까요?" "응? 아아, 그래." 웬일로 기꺼이 수락을 해 준 에이드리안이 너무 좋아서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방 가운데의 소파로 데려갔다. 에이드리안은 평상시와는 달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달아날 세라 쪼르르 화장대로 달려가 빗을 가져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빗어 내렸다. 보드라운 촉감이 손안으로 퍼졌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기분 좋은 느낌에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빗질에만 투자한 쥬느비에브는 하얀색 끈을 가져와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한 묶음으로 보기 좋게 묶어 주었다. 살짝 웨이브가 져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너무 보기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이리저리 살펴보다 결국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아이, 기분 좋아. 다 됐어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 유쾌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방을 나서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서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너 테스트 받을 때쯤 맞춰서 대연습실에 가볼게." "에엣! 정말? 바쁘잖아요, 오늘. 그런데 정말 올 거에요?" "응. 쥬르, 이 쪽으로 와 봐."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굴리며 기분 좋게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웃음에 미소로 답해 주며 쥬느비에브의 왼손을 잡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왜 손을 잡는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드..." 순간 쥬느비에브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바닥에 살며시 입을 맞췄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하라는 증표야. 떨지 말고 잘하라고."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방을 나섰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끝까지 빨갛게 물들어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겨우 충격에서 벗어난 쥬느비에브는 계단으로 달려가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며 씩씩하게 소리쳤다. "에이드리안! 나 잘 할거에요! 나 에이드리안을 위해 노래할 거에요!" 계단으로 내려가는 에이드리안의 희미한 미소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왼손 손바닥에 시선이 쏠리는 그녀였다. ******** 쥬느비에브는 점심 시간이 지나서 10학년생들의 대(大)연습실에 들어섰다. 연습실에는 아직 한 사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와 보는 연습실은 무척 커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도 잔뜩 놓여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긴장을 풀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몇 시르(주. 참조) 후에 여기서 학년 배정 테스트가 이루어질 것이다. 어차피 스콜라에서는 학년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기에 학년 배정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테스트에서 받을 랭크였다. 스콜라의 실제적인 상급생과 하급생은 랭크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처음 받은 랭크가 자신의 출발점이 되기에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또한 반 배정을 랭크 순으로 받기 때문에 그것도 무시 못할 부분이었다. 어차피 학년이야 1년이 지나면 자동 진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쥬느비에브가 아무리 랭크를 못 받아도 10학년에 배정 받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학년은 나이로 매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7살에 보통 입학이 결정되는 스콜라에서 16살인 쥬느비에브는 10학년에 배정 받는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창가에 다가가 옆에 있는 의자에 무릎을 대고 올라갔다. 창 밖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밖의 웅성거리는 소란과는 반대로 연습실은 너무 조용해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창가에 팔을 올리고 그 팔을 베고 누웠다. 막 점심을 먹고 와서 그런지 배도 부르고 잠도 왔다.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슬슬 잠이 들려는 순간, 쥬느비에브는 연습실의 침묵을 깨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여학생 두 사람이 연습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한 여학생이 쥬느비에브를 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너도 여기서 10학년 배정 테스트 받는 거니?" 쥬느비에브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졸린 눈을 돌려 다시 팔을 베고 누웠다. 너무 졸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신이 멍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머, 뭐니. 쟤는. 어지간히 자신 있나 보지? 연습도 안 하고." "그러게. 그나저나 오늘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도 테스트를 받는다며? 소문의 그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엄청 두근거려. 분명 화려한 미모에다 똑똑하고...게다가 레플리카도 굉장히 강하겠지?" "그래. 소문에 그녀가 벌써 라데팡스의 기선을 잡고 엘크로이츠를 보호하고 있다며? 그 엘크로이츠의 수호천사라던가...하여튼 무척 대단한 레이디임에 틀림없어." 두 여학생의 쑥덕거림에도 상관없이 쥬느비에브는 정신 없이 곯아 떨어졌다. 30시르 정도 잤을 때 누군가가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테스트가 시작됩니다. 일어나세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멍하게 자신을 흔들어 깨운 사람을 쳐다 보았다. 무뚝뚝하게 보이는 상급생이 쥬느비에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비비고 앞자리로 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졸기 시작했다. 이미 연습실 안에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습실 앞에서는 하얀색 테이블 보가 덮여 있는 긴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네 명의 상급생들이 심사위원으로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저마다 무게가 다른 커다란 추들이 놓여 있었다. 물리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정신 능력이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쥬느비에브를 깨운 상급생이 중간의 빈자리로 가 앉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자신의 랭크를 위해 열심히 해 주십시오." 상급생이 한 사람씩 호명하자 학생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저마다 열심히 연습한 노래들이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앞에 놓여 있는 무거운 추가 들썩이며 각자의 기량을 과시했다. 5명의 학생들이 테스트를 마쳤을 때 연습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엘크로이츠의 중앙 집행부가 모습을 나타냈다. 심사를 맞고 있던 상급생들이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에이드리안은 됐다는 표시로 손을 올리고 심사 위원들이 있는 테이블 옆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집행위원들이 얼른 의자를 옮겨와 학생들이 잘 보이는 쪽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에이드리안이 의자에 앉자 뒤이어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엘크로이츠>야. 오늘 13학년이랑 12학년 배정 테스트도 있는데 10학년 배정 테스트를 참관하러 오다니. 역시 오늘 학생회장의 약혼녀가 테스트를 본다던데 진짠가 봐!" "도대체, 그 약혼녀가 누구야? 저기 금발의 저 여잔가? 아니면 저기 다소곳이 앉아 있는 저 다갈색 머리의 저 여잔가?" 에이드리안은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모른 채 하고 테스트를 속행하라고 전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휘청하며 끄떡끄떡 자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발견한 에이드리안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쥬르,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설마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드리안의 생각을 끊어내며 옆에 있던 유벨이 턱으로 쥬느비에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쥬느비에브, 자고 있는 거 아냐?" "네. 분명히 자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금방이라도 앞으로 뒹굴 것 같은 자세로..." 미라벨이 눈을 내리깔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미라벨의 말에 케이로프는 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별 기대는 안 하지만...기대보다는 심사위원들이 화를 안 내야 할텐데... 내 제자지만 노래 실력만큼은...."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안느마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속삭였다. "쥬느비에브, 파이팅! 쥬느비에브, 잘해라!" 그러나 안느마리의 응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쥬느비에브는 계속 고개를 휘청거리며 졸고 있었다. ******** "어, 어떻게 된 거야? 이제 저 이상한 까만 머리 여자 애밖에 없는데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는 도대체 누구야? 벌써 지나갔나?" "글쎄, 그렇게 특출한 레플리카는 아직 안 나온 것 같은데...거기다 그 약혼녀의 이름도 아직 호명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저마다 의문점을 내세우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을 비롯한 학생회 임원들은 왠지 모르게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 억측을 하며 숨죽이고 있었다. 중앙에 앉아 있던 상급생이 일어나 마지막 학생의 이름을 호명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상급생의 호명이 끝나자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마다 시선을 돌려 여태 졸고 있던 까만 머리 소녀에게로 고정시켰다. 여전히 그 소녀는 까만 머리카락을 정신 없이 흔들어 대며 졸고 있었다. 학생들은 고개를 들어 학생회 임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유벨은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으며 미라벨은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를 오래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갈색 머리 소녀는 쥬느비에브에게 신나게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학생들은 다들 속으로 침을 삼켜가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 맙소사!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라면 에이드리안 회장의 약혼녀! 설마 저 이상한 여자애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다시 상급생이 호명하자 그 때까지 신나게 꿈나라를 여행하던 쥬느비에브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혹시나 흘렀을지 모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상급생을 쳐다보았다. 상급생이 소리쳤다. "에슈비츠 양, 에슈비츠 양의 차례입니다." 상급생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했는지 어기적거리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대충 가운데를 골라 우뚝 섰다. 노란색 스커트가 옆으로 돌아간 것을 보고 대강 앞으로 돌린 다음, 쥬느비에브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렸다. "나---의 작--은 집에---는 오---늘도....오----늘도....으음...모, 모롤라... 하지만....오, 오늘은 체리 사탕이 더...맛있어...으음..." 엄청난 소음으로 노래를 하던 쥬느비에브는 결국 다시 꿈나라로 돌아간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읊어대며 싱긋 웃더니 휘청휘청거렸다. 학생들은 눈을 끔뻑거리며 불안하게 서 있는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심사위원들은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미라벨은 끝내 이마를 짚으며 안느마리 쪽으로 쓰러졌다. 안느마리는 초조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보며 쓰러진 미라벨을 부축했다. 미라벨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아아... 엘크로이츠의 위신이...아아... 어지러워~" 유벨과 케이로프는 묵묵히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불안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묵묵히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서 쥬느비에브를 깨워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불안해져서 결국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맑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로스페르 데 미오르디르..." 에이드리안은 그 목소리가 쥬느비에브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하며 무심결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쥬느비에브의 표정은 평소의 그녀 같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의 소녀는 꼬옥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까만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잠시 빛났다. 소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한 손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소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엄청난 음감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로스페르 데 미오르디르 로페스냐흐 데스데르나 게흐 우르에르 레나비오 레모르체 메르사 호레스니 미레스니 다아메르테 투메네데모 기르오 다아테르 라아두르체 마나테엔데 오호르나 키레스나 로데미세르 오호르나 키레스나 미스케레나 오르비노 다레이스 레나레스 오호르나 케레스나 로데미르 저 멀리 그 먼 곳까지 나는 날아가고 있어요 당신에게 받은 자유와 사랑으로 나는 다시 태어났어요 아름다운 선율은 내게로 전해져 나에게 희고 흰 날개를 달아주었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행복합니다 나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연습실의 공기가 바뀌고 있었다. 매끄러운 선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머리 속에 가득 채워진 소녀의 목소리는 어떤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중독시켰다.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맑은 목소리. 연습실 안의 학생들은 황홀하게 까만 머리의 소녀가 부르고 있는 선율에 빠져 들었다. 마치 성스러운 여신이 사랑하는 인간에게 축복을 내려주듯, 아름다운 카나리아가 하늘을 그리며 지저귀듯 소녀는 아름답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었다. 눈을 꼬옥 감은 채 깨끗하고 부드러운 선율을 쏟아내는 소녀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옆에 있던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 믿을 수 없군요. 진짜 쥬느비에브? 이런 비브라토(주. 참조)라니...도대체 몇 옥타브를..." "아아- 그래. 믿을 수가 없군. 엄청난 비브라토야. 게다가 이 곡은 레플리카 상급자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비인 가의 곡인데..." 유벨과 안느마리도 입을 벌린 채 노래에 심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사를 하던 상급생들도 어느새 손에서 펜을 놓고 소녀에게 시선을 꽂고 있었다. 에이드리안도 자신의 사랑스러운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녀의 노래는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두드려 놓았다. 갑자기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곧 이어 환한 빛이 어리면서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꽃밭이 펼쳐졌다. "환...영?" 에이드리안은 다시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상황을 확인했다. '레플리카의...환영? 정신력 소모가 극심한 이런 능력을, 누가...?' 에이드리안은 놀라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환영을 보여줄 정도의 능력은 매우 정신력을 요하는 것으로 레플리카의 사용에 있어서도 상위 클래스에 속했다. 그것도 에이드리안과 같은 상위 클래스의 능력자에게 환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그 레플리카 사용자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색깔의 꽃을 보며 미소지었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어디선가 들려 오는 노랫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쥬느비에브의 노랫소리였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쥬느비에브의 레플리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드러운 꽃향기가 바람에 날려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꽃밭을 거닐었다. 파란 하늘 바로 밑에 펼쳐져 있는 꽃밭은 마치 지상의 낙원을 보는 듯 따뜻하고 감미로왔다. 에이드리안은 빨간 잎의 꽃을 하나 꺾어 향기를 맡았다. 꽃잎들이 어지럽게 날렸다. 에이드리안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문득 뒤돌아 봤다. 까만 머리카락의 작은 아이가 꽃밭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만드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궁금해져서 까만 머리카락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아이가 너무 귀여워 미소지었다. 아이가 살짝 뒤돌아보더니 화관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와아! 정말 대단해!! 정말 대단해!!!" 박수 소리와 함께 유벨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에이드리안은 눈앞의 광경이 흩어지며 천천히 시야가 확보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여전히 연습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에서 유벨이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미라벨은 감격했는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고 케이로프도 왠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연신 팔을 휘둘러대며 기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현실감을 느낀 에이드리안은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노래는 끝났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환상도 끝났다.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그 환영은 쥬느비에브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스며든 부드러운 꽃향기에 눈을 감았다. 눈을 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눈을 감고 서 있는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쥬느비에브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까만 눈동자를 들어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다. "나 노래 잘 하죠? 칭찬해 줘요...에이드..." "쥬르!!" 갑자기 자신에게 안기며 쓰러지는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으며 에이드리안은 놀라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소리쳤다. "유벨! 의료진을 불러 와! 어서!!" 엄청나게 열이 나는 쥬느비에브를 안고 에이드리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발갛게 뺨이 달아오른 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 "라라라- 라라라라라- 라----"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부드럽게 쥬느비에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살짝 코끝에 주름을 잡았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여 쥬느비에브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만 하루동안 꼬박 레플리카를 쓴 탓인지 쥬느비에브의 식을 줄 모르던 열이 이제는 거의 잦아들었다. "으응...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가 눈을 떴다. 방을 나서려던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에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땀으로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해서 떼어 주며 말했다. "몸살이 난 것 같아, 쥬르.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당분간 푹 쉬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똘망똘망 눈을 빛내며 힘겹게 미소지었다. "헤에- 에이드리안. 나 노래 잘 했죠? 그쵸? 칭찬해 주세요." "그래. 아주...아주 감동적이었어." "내...선물도 받았어요?" "으응, 화관은 못 받았지만. 다들 그 꽃밭에 감동했을 거야." 자상하게 웃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노래가 거기서 끝나버려서...으, 음...나, 나중에 다시 줄게요...." "쿡, 그래. 우선은 푹 쉬어." "근데, 나 교복 맞추러 언제 가요?"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교복 타령을 하는 쥬느비에브가 너무 우스워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 나으면 가자. 그러니까 좀 더 자." "에, 에이드리안. 나 분홍색 교복. 분홍색 교복으로 맞춰줘요." "안 돼. 넌 흰색에다 금색 섞인 걸로 할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에에? 싫어요. 그 거 에이드리안이 벌써 정했잖아요. 미라벨 언니가 같은색은 안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알록달록한 분홍색이 좋아요." "안 돼. 넌 내 약혼녀니까 나와 같은 색상으로 해야 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당연히 분홍색 보다 에이드리안과 같은 흰색이 훨씬 좋았다. 같이 입고 있으면 당연히 약혼했다는 표시가 나겠지. 그러면 다른 레이디들도 에이드리안을 넘보지 않을 거고 나는 손쉽게 에이드리안을 지킬 수 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침대 가로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조그맣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있잖아요. 내가 부른 그 노래. 파파가 불러주신 거에요. 나, 아직 그 노래 기억해요. 파파는...아주 아름답게 노래 부르셨어." "아...버지가?" 생긋 웃으면서 쥬느비에브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웃어 주며 방을 나섰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문을 닫고 나온 에이드리안은 굳게 닫힌 쥬느비에브의 방문을 바라보며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아버지라....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 레플리카는...아닐거야. 아니겠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뒤돌아선 에이드리안은 유벨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 유벨과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는 우울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느낀 침울한 분위기에 의아한 표정을 하며 유벨의 옆에 자리 잡았다. "왜들 그래?" "쥬느비에브의 랭크가 나왔습니다." 케이로프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한쪽 눈썹을 실룩이며 미라벨이 건네준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유벨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클래스 배정도 되었지." "클래스도? 결과가 빨리 나왔군 그래, 당연히 클래스 A겠지? 그 정도의 레플리카라면." 에이드리안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접시에 담긴 쿠키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케이로프가 묵묵히 대답했다. "클래스 O입니다. 클래스 O의 학생은 쥬느비에브를 포함해 두 사람입니다." "클래스...O? 무슨 소리야. 10학년은 클래스 D까지밖에 없잖아. 도대체 랭크가 얼만데 그래?" 잔뜩 인상을 구기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미라벨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학년 평균과 너무 동떨어진 랭크 때문에 차마 클래스 D에 소속되지는 못했고 따라서 새로운 클래스를 신설했다는 군요. 쥬느비에브는 랭킹 1053위를 기록했습니다." 에이드리안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멍하게 미라벨에게 물었다. "...1053위? 현재 스콜라 학생 수가 1054명이니까..."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된다! 그렇게 깨끗하고 맑은 노래에다 충분히 점수를 받을 만한 훌륭한 레플리카였다! 심사위원들이 나한테 대들려고 결심을 한 건가? 감히!! "말도 안 돼. 그 때 너희들도 다 같이 있었잖아. 훌륭한 노래였어. 심사를 다시 해야 해." "노래는 훌륭했었지요.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하지만 노래만 있고 레플리카의 사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테스트의 목적이 레플리카의 랭크를 매기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케이로프가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울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이마에 주름을 넣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 환영은 레플리카로 만들어진 거였어. 너희들도 그 꽃밭을 봤잖아." "꽃밭이라뇨?" 무슨 소리를 하냐는 미라벨의 표정과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는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에이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에이드리안만이 그 환영을 본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 나 잘 할거에요! 나 에이드리안을 위해 노래할 거에요!] 정말 쥬느비에브는 그를 위해서 노래했다. 그래서 그에게만 레플리카를 쓴 모양이었다. 덕분에 정작 그녀의 레플리카를 심사해야 하는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레플리카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한심한 기분이 들어 에이드리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겨우 숨을 고르면서 에이드리안은 입을 열었다. 원래 클래스가 배정되면 학년이 바뀌기 전까지는 변동이 불가해 쥬느비에브의 재시험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에이드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나마 꼴찌를 면한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그런데...클래스 O의 다른 한 학생은 누구야?" "넷! 저에요, 저!" 안느마리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손을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느마리. 너 저번 랭크 14위였잖아. 어째서..." "네. 이번에 학년 배정 테스트를 저도 봤거든요. 쥬느비에브 혼자 쓸쓸하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저도 레플리카를 안 썼었는데 쥬느비에브보다 노래 점수가 많이 모자라서 한 등수 아래 랭크를 받았어요. 그래서 제 랭크는 1054위." 안느마리는 자랑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럼...네가....꼴찌? 끝에서 1등과 2등의 반이로군. 클래스 O는." "네. 아까 쥬느비에브한테 물어 봤는데 쥬느비에브는 클래스 O가 아주 좋대요. O가 마치 모롤라 같이 생겼다나? 제가 그럴 줄 알고 클래스 E말고 O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니까요." 에이드리안은 침을 삼켰다. 왠지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우울한 얼굴을 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왠지 허탈한 그였다. ******** 학년 배정 테스트에서 우연하게 쥬느비에브에게 인사를 건네 그 곳 학생들 중 유일하게 쥬느비에브에게 말을 붙여본 사람이 된 여학생은 식당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클래스 O 얘기 들었니? 특수 클래스라며?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와 저번 랭킹 14위인 모스테츠 양이 그 클래스에 소속되었다잖아. 모스테츠 양은 얼마 전에 갑자기 <엘크로이츠>로 이적하더니...<라데팡스>에서도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던데. 뭔가 수상해." "맞아. 에슈비츠 양도 그렇게 엄청나게 노래했으면서 레플리카는 하나도 안 쓰고. 우리같이 조무래기들에게는 자신의 엄청난 레플리카를 보여줄 가치도 없었겠지. 전에 칼럼에도 나왔었잖아. 측면 전술의 귀재라고.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중요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그 에슈비츠 양." "그래. 원래의 4개 클래스 외에 새로 신설된 클래스는 O밖에 없는 걸. D다음의 E도 아니고. 왠지 수상해. <엘크로이츠>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게 진실을 모르는 소녀들은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며 추측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렇게 스콜라에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을 때, 사건의 주인공,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걷어차면서 기분 좋게 옹알이를 하며 꿈나라로 직행하고 있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드디어 쥬느비에브는 당당한 스콜라의 학생으로서 인정 받게 되었다! 제34음(第34音) 엘크로이츠...그 들의 만남(1) 아침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학생회실 안은 고요한 침묵과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6쌍의 눈동자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테이블 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테이블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는 눈을 치켜 뜨며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쥬느비에브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있는 힘껏 손가락에 힘을 주어 테이블 위로 내렸다. "<암살자> 카드로 엠퍼러(emperor)를 공격! 그리고 곧 이어 <반란> 카드와 <혁명> 카드로 윈 제국을 교란시킨다!! 어때요? 졌죠? 그쵸?"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곁눈질하며 에이드리안은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손에서 카드를 뽑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근위대> 카드로 암살자를 체포. 곧 이어 <엠퍼러의 분노>로 반란자를 색출. 그리고 <금단의 사랑>으로 엘 왕국의 여왕을 생포. 혁명의 자연 중지. 엘 왕국의 합병." "오호호호호-. 그 것 보세요! 이번에도 에이드리안 님이 이기셨어요!" 미라벨이 환호성을 지르며 케이로프의 손바닥을 잡고 철썩 때렸다. 케이로프는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아프다는 듯 손을 문지르고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길래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내가 얘기했잖나.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은 <엘윈 게임>(주. 참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으시다고. 어쨌든 우리가 이겼군." 케이로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유벨은 한숨을 쉬고 안느마리를 책망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 봐. 안느마리. 그러니까 내가 에드 편 되자고 말했잖아." 안느마리는 유벨에게 미안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원망스레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 좀 잘 하지 그랬어." 너무나도 신이 난 미라벨과 케이로프, 그와 반대로 너무나 침울한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 유벨은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섯 사람은 날씨도 덥고 해서 기분을 풀 겸 카드 게임을 한 것이다. <엘윈 게임>이라고 불리는 이 카드 게임은 서로 다른 엘 왕국 카드와 윈 제국 카드를 가지고 상대방의 나라를 먼저 통합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세 사람씩 편을 갈랐는데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막무가내로 에이드리안에게 붙는 바람에 편은 자연적으로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편으로 갈렸다. 주사위로 카드 게임의 주자를 정한 결과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나란히 뽑혔다. 그러나 <엘윈 게임>에 있어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에이드리안에게 쥬느비에브는 결국 지고 말았던 것이다. 쥬느비에브의 팀은 침울했다. 게임에서 진건 그만이었지만 한달동안 점심 내기를 했던 것이다. 미라벨이 기분 좋다는 듯 몸을 으쓱이며 다홍색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크게 말했다. "그럼 이제 한 달동안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 유벨 님이 점심 식사 값을 내는 거죠? 오호호호호.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공짜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실감하겠군요." "미라벨 언니. 미워." 쥬느비에브는 안간힘을 다해 인상을 쓰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벨은 모른 척하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뿌루퉁한 표정의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이 다가와 쥬느비에브에게 무어라고 속삭이자 그제서야 쥬느비에브는 표정을 풀고 생긋 미소를 지었다. '쥬르, 인상 펴. 내가 점심값 내면 되잖아.' 에이드리안의 말을 엿들은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곧 이어 항의를 토해냈다. 에이드리안은 모른 척하며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학생회실에서 나갔다. 씩씩거리는 미라벨을 케이로프가 다독거리며 유벨에게 눈짓을 주었다.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느마리도 유벨과 같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겨진 미라벨은 괜히 케이로프에게 화풀이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렇게 오늘도 스콜라의 즐거운 생활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 미라벨의 항의로 결국 식당에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유벨과 쥬느비에브, 안느마리는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전의 카드 게임에서 진 탓에 식사 값을 지불해야하는데 그 것 때문에 왠지 기분이 침울했다. 물론 돈이 문제는 아니었다. 유수의 대귀족 가문의 자제와 유명한 모스테츠 무역회사의 간부인 소년, 소녀였다. 그러나 내기에서 져서 식사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알게 모르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테이블 위에 음식이 차려지자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음식 앞에서는 만가지 시름이 사라지는 그들이었다. 6인용의 테이블에는 부지런히 음식이 올려지고 있었다. <르 뤼센부르>에서 최고급 메뉴를 시킨 그들은 천천히 식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우아하게 스프를 떠먹고 있던 미라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케이로프에게 물었다. "요즘 쥬느비에브의 레슨은 어때요? 저번 테스트에서 보여줬던 그 놀라운 실력이라면 이제 케이로프 님도 가르치는 보람이 있겠어요. 그땐 정말 쥬느비에브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는데...사실 저 그 때 너무 감동 받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요. 노래만을 본다면 거의 최상급 랭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나요." "아아- 글쎄. 그 때 일은 그저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의 노래는 여전히...상상불허라고 할까. 듣고 있으면 머리에서 김이 팍팍 나는....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케이로프가 생선요리에 포크를 가져가며 말하자 듣고 있던 유벨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음? 말도 안 돼. 그 때 그렇게 멋지게 노래했으면서." "그러게 말이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그 때 노래는 분명 어쩌다 잠결에 부른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습니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케이로프의 물음에 열심히 포크로 음식을 집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눈을 말똥말똥 뜨며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음...그건 말이죠. 음...음...이상하게 에이드리안 앞에서가 아니면 노래가 잘 안되지 뭐에요. 그러니까 에이드리안이 매일 옆에 있어주면..." "쥬르, 너 내 앞에서도 여전히 그렇잖아." 에이드리안이 눈을 내리깔며 무표정하게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멋쩍은지 다시 머리를 긁어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안느마리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쥬느비에브, 우리 같은 클래스로서 앞으로 열심히 같이 연습해 보자."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이 한숨을 쉬며 포크로 샐러드를 쿡 찍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보며 말했다. "쥬르. 나도 이젠 정말 안 믿어져. 그 때 이후로 레플리카도 거의 못쓰고. 그 때 노래부른 거 너 맞아? 어떻게 며칠 사이에 노래 실력이 그렇게 바뀔 수 있는지 의심이 갈 뿐이야." "아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노래가 잘 불러질 때가 있고, 잘 안 불러질 때가 있을 뿐이에요. 나도 아쉽지만 잘 안 불러지는 날이 아주 쬐---끔 더 많을 뿐이에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허망한 표정을 하며 케이로프가 말했다. "그 잘 불러지는 날과 잘 안 불러지는 날의 실력 차가 너무나 심각하게 차이가 나니 그것이 문제겠지요." 유벨은 케이로프의 어깨를 쳐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라벨이 주제를 돌리려는 듯 나섰다. "그나저나 요즘은 꽤 덥네요. 봄이 어느새 다 지나가 버렸네요. 그러고 보니 에이드리안 님과 제일 처음 만났을 때가 늦은 봄이었는데...에이드리안 님, 어릴 때 정말 예뻤죠, 그렇죠, 케이로프 님?" "아아- 그랬지. 아주 귀엽고 착한 소년이었어."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별안간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자 스테이크를 집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까만 눈동자를 빛냈다. "에이드리안 어릴 때요? 와아! 보고 싶어라!" 미라벨이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쥬느비에브에게 속삭였다. "정말 보고 싶어요?" 쥬느비에브가 두 주먹 불끈 쥐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라벨은 얼른 가방 안에서 작은 초상화 하나를 꺼냈다. "내 보물 1호에요. 조심해서 다뤄요." "미라벨, 그거 아직까지 가지고 다녀?" 에이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리자 미라벨은 화들짝 놀라 음식에 집중했다. 케이로프와 안느마리가 궁금하다는 듯 쥬느비에브의 옆에 다가왔다. 작은 초상화는 옅게 채색까지 되어 있었는데 금발의 귀여운 소년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의 소년은 왠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더욱 귀엽고 예쁘게만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초상화를 꼬옥 껴안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와아- 에이드리안, 너무 귀여워...우웅~~ 동생 삼고 싶어!" "정말, 귀엽다, 쥬느비에브!"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쥬느비에브의 말에 발끈한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생이 어쨌다고?" 쥬느비에브는 혀를 쏙 내밀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초상화에 쪼옥 하고 입을 맞췄다. 자신의 보물 1호에 쥬느비에브가 당당하게 입을 맞추자 미라벨은 기겁을 하며 포크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유벨이 씩씩거리는 에이드리안을 다시 자리로 끌어내렸다. 묵묵히 초상화를 보고 있던 케이로프가 감동 받은 듯 말했다. "옛 생각이 나는군요. 엘크로이츠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말입니다." 쥬느비에브가 눈동자를 똘망똘망거렸다. 안느마리도 궁금하다는 듯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케이블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케이로프 님! 얘기해 주세요! 에이드리안 어렸을 때 얘기도 나오는 거죠? 빨리 얘기 해주세요!" "나부터 얘기할까요? 전 처음에 에이드리안 님을 만났을 때 그분을 정말 싫어했답니다." 미라벨이 다홍색 머리를 넘기며 우수에 찬 눈동자로 말했다. 유벨이 힐끔 거리고는 씨익 웃었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에 에이드리안은 상관 않겠다는 듯 퉁한 얼굴로 식사에만 열중했다. 쥬느비에브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물었다. "에에-? 미라벨 언니가 에이드리안을 싫어했다고요?" "말도 안 돼. 에이드리안 님의 광적인 추종자인 미라벨 님이 어째서..." 안느마리의 '광적인'이라는 말에 눈썹을 실룩이던 미라벨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전 그 분을 제 라이벌로 생각했거든요. 처음에는 말이죠." 듣고 있던 케이로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을 가장 먼저 만난 건 물론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이고, 그 다음이 미라벨 브리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그 다음이 나지.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은 우리 중에 가장 늦게 스콜라에 입학하셨지. 늦은 봄이었어." 케이로프가 말을 마치자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을 한 번 쳐다 보고 지긋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때는 늦은 봄이었죠...." 그리고 미라벨의 회상이 시작되었다...... 제35음(第35音) 엘크로이츠...그 들의 만남(2) ********미라벨의 이야기 : 소녀의 눈동자에 사로잡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는 어릴 때부터 그녀의 탁월한 레플리카 실력으로 일찍부터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르헨의 대귀족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5대 대귀족 가문의 하나인 뤼베이크 가문의 차기 권력을 계승할 자로서 많은 교육을 받게 되었다. 레플리카의 효과적인 사용법을 비롯하여 승마, 예법, 사회, 경제, 역사 등 많은 가정 교사들이 그녀를 가르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당당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뤼베이크 가문의 계승자로서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연마했다. 그리고 귀족으로서 항상 우아함과 기품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했다. 그녀의 어머니, 브레시아는 때때로 그녀의 그런 성격을 염려했다. 미라벨은 지나치게 자신을 통제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겉으로는 온화하게 웃고 있지만 미라벨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친언니조차 그녀를 어려워할 때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주위에 담을 쌓은 미라벨은 자신의 그런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결과를 낳은 자신의 행동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7살이 되던 해, 평의회에서 그녀의 스콜라 입학 허가장이 나왔다. 스콜라에 입학하면 13년 간을 그 곳에서 보내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는 출입이 자유롭고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되었든 이틀이 되었든 딸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브레시아는 눈물을 흘렸다. 미라벨은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른스럽게 잠시동안의 이별 인사를 건넸다. 스콜라의 입학은 차기 권력 승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 것을 미라벨로서는 거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가 뤼베이크 가의 후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라벨은 정든 집을 떠나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로 향했던 것이다. ******** 어떤 일이든지 항상 그랬듯 스콜라에서도 미라벨은 잘 적응했다. 식사와 그녀가 머물고 있는 사택도 그녀의 수준에 모자람이 없었고 레플리카를 습득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습들도 만족스러웠다. 미라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콜라의 유명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정치적 위치와 어리지만 당당하고 기품 있는 태도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많은 레이디들이 그녀와 차를 마시고 승마를 즐기길 원했다. 그러나 미라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렇게 스콜라에 입한 한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미라벨은 유벨이라는 소년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유벨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회색 머리의 성격 좋아 보이는 소년으로서 꽤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아르헨에 단 5명밖에 없는 대속성 레플리카의 계승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속성은 풍속성이라고 했다. 스콜라에서는 대속성 레플리카의 보유자에게 학생회를 만들 권리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친형인 프란체스가 이미 <슈르트홀츠>라는 학생회를 만든 것과는 대조적인 행동이었다. 스콜라에는 현재 두 개의 학생회가 난립해 있었다. 먼저 만들어진 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프란체스의 <슈르트홀츠>와 저작년에 입학해 불과 2년 만에 엄청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수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에스프라드의 <라데팡스>였다. 미라벨은 자신도 언젠가는 학생회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다음 권력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후일 권력의 정점인 평의회의 의장으로 등장할 인물이 누구인지를 보다 정확하게 점찍음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평의회 의장은 스콜라의 학생회장을 후보로 하여 선출되었다. 따라서 어느 학생회에 가입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지가 결정되었다. 미라벨의 경우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녀가 지지하는 것은 곧 가문 전체가 그 후보를 원조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미라벨은 고민하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자신의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리더의 조건이 갖추어 지는 것은 아니었다. 성실 외에도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왠지 미덥지 않았다. 그리고 에스프라드는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뭔가 속을 알 수 없는 소년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드러내지 않을 사람이었다. 속내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끌려 다니긴 싫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라벨은 학생회의 가입을 결정하지 못했다. ******** 미라벨은 천만 뜻밖의 우연으로 유벨을 만나게 되었다. 본관 자료실에 악보를 가지러 가다가 <슈르트홀츠> 학생회실 앞에서 부딪힌 것이다. 본관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뜻밖의 우연일 수밖에 없었다. 미라벨과 시선이 마주치자 유벨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 왔다. "이야. 뤼베이크 가문의 미라벨 양 아닌가?" "안녕하세요, 유벨 님." 미라벨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유벨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서글서글하다였다. 유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멀리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 앞으로 잘 부탁하자구." "저야말로 앞으로의 스콜라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고 싶네요." 미라벨은 구태의연한 인사말을 건네고 뒤돌아 섰다. 거기서 그만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유벨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같은 귀족 출신으로서 서로간의 예의를 표하면 그만이었다. 불필요하게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미라벨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그에게 호기심을 표현했다. 그녀가 유벨에게 질문을 건넸다. "왜 학생회를 만들지 않으시는 거죠?" 다소 직설적이기도 한 미라벨의 질문에 유벨은 대수롭지 않은 듯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기다리는 녀석이 있거든. 그 녀석이 학생회를 열면 난 거기서 부회장을 할 생각이야. 일인자보다는 이인자가 되는 편이 내 적성에 맞아." 미라벨은 살짝 눈썹을 실룩였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자존심이랄까 그런 것때문에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유벨이 말했다. "광속성 레플리카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지. 영혼을 감동시킬 정도로 아주 아름답게 노래하는 녀석이야. 그 녀석의 노래에 반해버렸어, 난."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말을 마친 유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다음 계단 저편으로 달려갔다. 주저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유벨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유벨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기다리고 있는 그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 하는 미라벨이었다. ********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그녀'를 만난 것은 미라벨이 유벨과의 만남을 가진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해가 질 무렵 미라벨은 자신의 사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택은 스콜라 가장자리의 숲을 지나 있었다. 사택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어가며 미라벨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직은 봄이라 날씨가 매우 나른했다. 미라벨은 숲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가리고 있는 키큰 나무들의 파란 잎사귀가 시야를 메웠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마른 날에 비가 내릴 것 같이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미라벨은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굽 높은 구두에 돌돌 채이는 돌멩이가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미라벨은 인기척이 느껴져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에 어른거리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평상시라면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그녀였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 뛰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앞에 있던 두 개의 그림자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림자 하나가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뤼베이크 양이잖나." 유쾌한 목소리의 유벨이었다. 미라벨은 땀에 젖은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고 격식을 차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유벨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인사를 건네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미라벨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기품 있게 미소짓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을 보기 좋게 길러 나풀나풀 바람에 날리고 있는 작은 소녀는 예쁘다기 보다는 아름다웠다. 파란색 눈동자가 마치 보석같이 매끄럽게 반짝였다. 입고 있는 장식 없는 하얀색 원피스가 너무 잘 어울렸다. 순간 미라벨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감정은 질투심과도 흡사했다. 미라벨의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가 유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벨이 소녀의 눈짓에 급히 미라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사촌 동생이야. 이번에 스콜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름은..." "잘 부탁해. 미라벨 양." 소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미라벨은 넋이 나간 듯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 속이 하얗게 채색되어 갔다. 소녀의 목소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벨의 사촌이라면 비인 가의 일원이리라. 아름다운 용모와 목소리, 대단한 출신 성분. 소녀는 그녀 자신과 아주 흡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녀가 자신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미라벨은 얼마가지 않아 알게 되었다. ******** 소녀는 금방 스콜라의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아름다운 용모와 들어본 적 없는 신비한 목소리, 그리고 기품 있는 태도. 소녀는 동경할 만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대귀족 가문 중에서도 으뜸인 비인 가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왠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녀의 신상정보가 사람들에게는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단지 비인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 하고는 소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소녀는 선천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녀의 눈빛에 아직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소년들이 얼굴을 붉혔고 어린 소녀들은 소녀의 사근사근한 태도에 매료되어 갔다. 소녀가 새로운 레이디들의 우상으로 받들어짐에 따라 미라벨의 추종자들은 하나 둘씩 소녀에게로 떠나갔다. 미라벨은 소녀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의 추종자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소녀 그 자체에 질투심이 생겼다. 소녀는 미라벨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자유로웠다. 뭇 귀족들 처럼 예의바르고 기품 있게 행동했지만 그녀에게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미라벨 자신처럼 꽉 막혀 자신을 통제하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언제나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하게 표현했다. 소녀의 솔직함에 많은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곁에 있고 싶어했다. 미라벨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와 자신이 비교되어 못내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 소녀가 너무 싫었다. ********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봄을 맞아 스콜라에서는 학생들의 친선 승마 시합이 벌어졌다. 물론 대다수의 레이디들이 승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학년생은 클래스 A와 D가 한 편이 되고 B와 C가 한 편이 되어 경기가 벌어졌다. 미라벨은 자신과 같은 클래스인 소녀를 몹시 의식하고 있었다. 이번 경기에서 반드시 그녀를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심판을 보고 있는 상급생에게 클래스 A가 모두 한 편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기어이 소녀와 편을 갈랐다. 결국 미라벨과 소녀는 각기 다른편이 되어 승마 실력을 겨누게 되었다. 긴 금발을 하나로 땋아 내린 소녀는 하얀색 승마복 차림으로 승마 경기장에 나왔다. 많은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소녀가 미라벨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미라벨은 소녀를 무시하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돌보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소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라벨 자신 혼자서 열등감에 불타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미라벨은 자신과는 달리 소녀가 너무 당당하게 느껴져 또 다시 질투심이 생겼다. 소녀와 미라벨은 나란히 스타트 지점에 섰다. 미라벨은 평소의 그녀 답지 않게 소녀에게 시합 제의를 했다. "승마장만으로는 코스가 너무 짧으니 숲 안 쪽까지 코스를 잡는 게 어때요?" "하지만 규정 상..." "두려운 거라면 그만 둬도 좋아요." 미라벨은 앞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소녀가 미라벨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좋아. 하지만 승부에는 대가가 따라야 하지. 안 그래, 미라벨 양?" 소녀의 당돌한 목소리에 미라벨은 발끈했다. "좋아요! 내가 지면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 주겠어요." "내가 지면...스콜라를 떠나겠어. 미라벨 양이 바라는 게 그거 아닌가?" 미라벨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소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꿰고 있었다. 미라벨은 왠지 부끄럽고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곧 이어 시합을 알리는 깃발이 날렸다. 미라벨은 힘차게 고삐를 다잡고 출발했다. 갈색 말이 히이힝 하고 길게 울더니 강한 다리로 땅을 박차고 나섰다. 순조로운 출발에 미라벨은 흡족했다. 소녀를 반드시 이기리라. 미라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을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미라벨의 투지때문인지 소녀는 좀처럼 미라벨을 앞지르지 못했다. 미라벨은 속으로 웃으며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학생들의 환호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저 소녀를 당당하게 이겨서 웃음거리로 만들어 줄 것이다, 반드시! 미라벨은 바람을 가르며 열심히 말을 충동질했다. 승마장의 마른 흙바닥이 끝나고 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나타났다. 미라벨은 소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 했다. 필시 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안달이나 거칠게 말을 몰고 있겠지. 이 시합에서 지면 스콜라를 떠나야 할 테니. 미라벨은 항상 온화하게 웃고 있던 소녀의 찡그린 얼굴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미라벨은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미라벨은 심장 한 쪽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미라벨은 미친 듯이 말을 재촉했다. 소녀는 웃고 있었다. 여유 있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어떻게! 미라벨은 숲의 풀숲을 헤쳐내고 말을 몰았다. 결승점이 눈앞에 다가왔다. 어떻게든 이겨야 했다. 순간 소녀의 하얀색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추월이 시작된 것이었다. 소녀는 미라벨을 보고 싱긋 웃어 주었다. 미라벨은 순간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과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손을 뻗어 소녀를 힘차게 밀고 만 것이다. 콰당! 쿠당탕!! 소녀가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렀다. 말은 소녀를 떨어뜨리고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미라벨은 말을 멈추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여전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동공이 뻐끔하게 열리고 있었다. 뒤늦게 미라벨은 자신이 심하게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라벨은 갑자기 정신이 들어 말에서 내려왔다. 대귀족 가문의 자신이 이런 비열한 짓을 저지르다니. 언제나 옳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자신을 채찍질했던 그녀였다. 미라벨은 자신이 한 짓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행동과 믿고 있었던 신념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미라벨은 가슴 한 쪽을 꾸욱 움켜쥐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머리에서 새빨간 피가 샘솟고 있었다. 미라벨은 미친 듯이 울며 소녀를 일으켰다. "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아,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미라벨은 소리쳐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숲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미라벨은 물끄러미 소녀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미라벨은 주먹을 꽈악 쥐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치료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던 그녀인지라 목소리가 떨려 왔다. [[ 아름다운 숲에는 오늘도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마저 나를 반기는 듯해 마음은 그저 기분 좋게 하늘을 맴돌아... ]] "흐, 흐흑...흑흑흑..." 미라벨은 결굴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노래에도 소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라벨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눈물의 홍수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소녀의 몸은 축 늘어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피가 흘러 소녀의 하얀 승마복이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라벨은 자신의 승마복에 피가 묻는다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옷자락으로 열심히 피를 닦아 내었다. 그러나 닦으면 닦을수록 피가 샘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어떻게 해...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흑흑..."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지? 내 말은 이미 결승 지점을 통과했는 걸." 미라벨은 눈을 깜빡였다. 소녀가 눈을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소녀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미라벨은 갑작스러운 사건의 반전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머, 머리에 그렇게 피가 나는데..." "아? 아아- 피가 나네." 소녀가 머리에 손을 대보더니 손에 묻은 피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 당신의 마음은 호수와 같아 작은 파문에도 쉽사리 흔들리고 그런 당신은 작은 흔들림에도 괴로워하고 슬퍼하네 하지만 그런 여린 마음은 당신의 따뜻한 마음씨가 발현된 것. 결코 슬퍼하지 말기를... 괴로워하지 말기를... 당신은 당신. 여전히 아름다워... ]] 소녀의 붉은 피가 가시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소녀는 빙긋 웃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의 피를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라벨은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레플리카는 소문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굉장했다. 아름다운 선율은 귀가 아니라 마음을 울렸다. 미라벨은 소녀의 노래에 매혹되었다. 소녀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품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찾았다는 듯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미라벨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미라벨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둥그렇게 눈을 떴다. 그 것은 은제 페이퍼 나이프였다. 나뭇잎 모양으로 장식된 아주 고급품이었다. 미라벨은 난데없이 웬 페이퍼 나이프 인가하고 눈을 깜빡이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페, 페이퍼 나이프?" "미라벨 양. 미라벨 양의 레플리카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이야기겠지.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알고 있어. 마음은 자신이 드러내고자 해서 나타나는 것도, 숨기고자 해서 감춰지는 것도 아니야. 자신에게 솔직해지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데로 내버려 둬. 그것이 곧 가장 진솔한 자신이야. 마음은 언제나 자유로운 것. 미라벨 양의 마음은 자유롭지 않은가?" 소녀는 고개를 돌려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저 편에서 소녀의 하얀색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을 향해 열심히 달려오는 말에게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주저앉아 있는 미라벨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페이퍼 나이프는 편지 봉투를 아주 깨끗하게 잘라 줘. 난 그게 아주 기분 좋아. 손으로 찢으면 아주 보기 싫게 찢어지지만 페이퍼 나이프로 잘라내면 아주 깔끔하고 보기 좋아. 미라벨 양은 그것과 같아. 깔끔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지. 나쁘지 않아. 좋은 느낌이야." 미라벨은 눈을 깜빡였다. 뭔가 칭찬을 들은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멋지니 나는 나답게 있으라는 말인가? 그렇게 자신에게 솔직해지면 된다고 말하는 건가?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일부러 담을 쌓지 않아도 된다? 미라벨은 고개를 숙였다. 소녀를 미워했던 이유들이 단박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미라벨은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말에 올라 미라벨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이리저리 흩어냈다. 금발이 바람에 기분 좋게 날렸다. 소녀는 웃으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혼자 일어날 수 있지? 미라벨 양이라면." 소녀는 믿고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도 완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스스로의 자유를 찾으라고 말해 주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미라벨은 페이퍼 나이프를 손에 꼬옥 쥐고 말했다. "물론이에요. 난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니까요." 미라벨은 일어나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고 말에 올랐다. 올 때와는 다른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라벨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자신에게 '자신'을 준 소녀를 따르겠노라고. ******** 승마장에 돌아온 소녀와 미라벨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던 1학년생들과 상급생은 법석을 떨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뤼베이크 가문의 후계자와 비인 가문의 두 소녀가 피범벅이 되어 들어왔던 것이다. 심판을 보고 있던 상급생이 놀라 두 사람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미라벨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을 상급생에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순간 소녀가 먼저 말했다. "제가 승마에 아직 익숙하지 못해 낙마를 했습니다. 미라벨 양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나를 치료해 줬습니다. 별 일 없으니 그만 가보세요." 소녀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상급생을 돌려보냈다. 소녀의 말에 상급생은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저만치로 사라졌다. 미라벨은 발끈하며 소녀에게 말했다. "왜 내 잘못을 뒤집어쓰는 거죠? 그런 동정 따윈 필요 없어요. 내 잘못은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에요." "미라벨 양. 사과는 나한테 하면 돼. 다른 사람에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잖아? 그나저나 약속은 지켜줄거지? 내가 원하는 건 다 주기로 했잖아." 소녀가 장난끼 가득한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미라벨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뭘 원하는데요?" 소녀는 햇빛을 등지고 섰다. 소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녀는 웃었다. 미라벨은 숨을 죽였다. 소녀의 얼굴은 섬세했다. 그러나 미라벨은 당황했다. 소녀의 모습에서 당당한 남자다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소녀는 미소를 띄며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너. 널 원해. 내가 필요할 때 내 곁에 있어 줘. 대신 뤼베이크 가문의 안전과 권위는 내가 보장하겠어." 미라벨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은 지도자의 눈이었다. 당당하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눈.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동자다. 미라벨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가문의 안위을 맡아줄 자를. "언제나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곁에." ******** "에엣~~~!! 그럼 그 소녀가 에이드리안 님이란 말씀이세요?" 안느마리가 눈을 시뻘겋게 만들며 미라벨에게 물었다. 미라벨은 우아하게 포크로 생선살을 집으며 말했다. "네. 그 아름답고 귀엽고 깜찍한 소녀가 바로 에이드리안 님이셨죠. 후훗. 그 때 생각하면 정말 아쉽다니까요. 초상화도 하나 남겨두지 않고..." 미라벨은 아쉽다는 듯 포크로 접시를 톡톡 두드렸다. 쥬느비에브가 눈동자를 뱅그르르르 돌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테이블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 나도 본 적 있어. 에이드리안 봤어. 어릴 때." 쥬느비에브의 말을 무시하고 안느마리가 다시 물었다. "근데 어째서 여자 행세를 하신거에요?" 유벨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집 안에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랬지. 하지만 입학하고 나서 3모네(주. 참조) 뒤에 여장은 관뒀어. 그 때 스콜라가 난리가 났었지. 여성 팬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도 그 때가 아닐까?" 듣고 있던 케이로프가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고 미라벨에게 물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은 언제 에이드리안 님이 남자인 걸 알았나?" 미라벨이 포크를 내려놓고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한 번은 제가 같이 목욕하자고 에이드리안 님을 욕탕에 데리고 갔는데 유벨 님이 시뻘건 얼굴로 달려와서는 에이드리안 님을 탈취해 가신 거 있죠? 후훗. 당연히 제가 화를 내며 유벨 님께 항의를 했는데 그 때 마음 약하신 유벨 님이 결국 털어놓으시더라고요. 그 때부터 전 에이드리안 님을 남자로 보기 시작했죠. 오호호호호- 하지만 사실 전 여장을 하고 있을 때부터 에이드리안 님을 좋아했거든요. 오호호호호호-" 미라벨은 한 손을 입가에 가져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옆에서 케이로프가 물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뭐, 어쨌든 그 당시에도 에이드리안 님은 학생회를 만들지 않고 계셨지. 대내외적인 사정이 있었으니까. 내가 에이드리안 님을 처음 만난 건 이미 찰거머리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이 그 분께 붙어 버린 직후였는데..."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다시 숨을 죽였다. 케이로프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36음(第36音) 엘크로이츠...그 들의 만남(3) ********케이로프의 이야기 : 소년이 일깨워준 강인함과 당당함.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는 어릴 때부터 말수도 적고 소심한 아이였다. 많은 사촌들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뜨이지 않는 아이였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였다. 케이로프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남들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유창하게 말하는 다른 사촌들과는 달리 항상 쓸데없는 주제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때문에 케이로프는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심판하는 것 같아 두렵고 무서웠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케이로프는 무표정해지고 말투도 딱딱하게 변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될 수 있으면 말을 아꼈고 지나치게 깍듯이 예의를 지켜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풀 네임을 부르는 것도 이 때부터 시작된 버릇이었다. 그러나 케이로프가 자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레플리카 실력만은 사촌들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 있었다. 자신의 노래로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노래를 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노래로 자신을 표현했다. 노래를 하면 그가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케이로프는 언제나 레플리카 연습을 자신의 방에 꼭꼭 숨어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대부분 귀족 자제에게 그렇듯 케이로프에게도 7살에 입학 허가장이 나왔다. 그의 아버지인 에르슈바이크 공작은 묵묵하게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케이로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데다가 별다른 능력도 보이고 있지 않으니 장차 있을 승계 시험에서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후계자를 선발하기 위한 승계시험은 레플리카와 그 밖의 중요한 여러가지 능력들을 테스트했다. 케이로프는 자신이 그 승계시험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분명 사촌 중 한 명이 에르슈바이크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자신같이 매사에 자신 없는 사람이 에르슈바이크 가와 같은 대귀족 가의 후계자가 될 리가 없었다. 케이로프는 스콜라에 가는 것이 좋았다. 쓸데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고 레플리카 연습에만 전념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케이로프는 모든 생각을 떨치고 스콜라로 향했다. ******** 케이로프는 스콜라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그의 예측과는 달리 스콜라는 또 다른 사교의 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어울려 다녔고 서슴없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케이로프는 그런 것들이 싫었다. 자신이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살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레플리카 연습을 하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여러 방면의 지식과 레플리카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지만 그에게는 친구 한 명 생기지 않았다. 조용조용 숨을 죽이며 생활하는 케이로프는 스콜라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그저 그 곳에 존재하는 학생 중 한 명 이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의 동경의 대상이 생겼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라는 자신보다 한 학년 어린 학생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비인 가문의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대속성 레플리카 중에서도 가장 상위 레벨로 취급받는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케이로프에게 무엇보다 돋보였던 것은 그의 섬세한 외모도, 대단한 배경도 아닌 그의 성격이었다. 그는 항상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자신의 동급생을 비롯해 많은 상급생들이 그의 한 마디를 듣고자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에이드리안의 아주 맑은 목소리는 언제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당당했고 항상 상대를 존중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런 그의 태도에 상대도 자신을 솔직하게 내비치며 그에게 빠져갔다. 에이드리안은 마치 노련한 외교관처럼 대인 관계에서는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람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에 비해 케이로프 자신은 소심하며 항상 타인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에이드리안의 모습은 케이로프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마치 빛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고 자신은 어둠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에이드리안처럼 되고 싶었다. ******** 그와의 만남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 왔다. 대연습실에서 오랜만에 레플리카 실습을 하려고 들린 케이로프는 그 곳에 이미 자리잡은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는 에이드리안이라는 것을 안 케이로프는 문 가에 얼굴을 내밀고 숨을 죽이며 연습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회색 머리의 소년이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케이로프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름이 생각났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분명히 풀 네임이 그랬던 걸로 기억났다.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 에이드리안과는 사촌 지간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과 같은 학년이라는 것도 생각났다. 아마 클래스 A였던 것 같다. 케이로프는 다시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주의를 집중했다. 곧 이어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리더니 세련된 바이올린의 음감이 겹쳐졌다. 두 사람의 연주는 훌륭했다. 케이로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에이드리안과 같이 연주하고 있는 회색 머리의 유벨이 몹시 부러웠다. 자신도 에이드리안과 한 번만 연주를 해 보았으면... 그 때 갑자기 피아노를 연주하던 에이드리안이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순간 케이로프는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놀란 표정의 에이드리안이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갑자기 연주를 멈춘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던 유벨이 자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벨은 살짝 코를 찡그리더니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자신에게 다가왔다. "케이로프, 맞지? 클래스 B의." 케이로프는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유벨의 태도가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신의 클래스까지 알고 있는 것은 천만 뜻밖이었다. 케이로프는 언제나 실습 시간에는 가만히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랭크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 셈치고 클래스 B에 소속된 것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케이로프는 언제나 그렇듯 더듬거리며 유벨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아..으,응." "연습하러 왔나 보네? 어서 들어 와. 거기 그러고 있지 말고." 사람 좋게 보이는 웃음을 만면에 드리운 유벨의 말에 케이로프는 무의식적으로 연습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연습실 안은 환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은 지극히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관찰이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유벨을 불렀다. "유벨, 소개시켜 줘야지?" "아아, 이 쪽은 케이로프 군. 에르슈바이크 공작 예하의 자제분이시고. 케이로프, 내 사촌 동생, 에이드리안이야. 소문은 들어봤겠지? 요즘 이 녀석 인기가 많아서 말이야. 하하-" "잘 부탁해, 케이로프 군."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인사했다. 케이로프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에이드리안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근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소 차분하고...따뜻한 느낌이었다. 사실 뭔가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인사는 거기서 끝났다.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케이로프였다. 에이드리안이 빙긋이 케이로프에게 미소를 보냈다. "연습하러 온 거면 같이 하겠어?" 케이로프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소원이 이루어지다니...에이드리안과 같이 연습을... 에이드리안과 유벨이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고 유벨도 다시 바이올린을 조율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려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노래 불러줘. 케이로프 군. 나, 듣고 싶어." 케이로프는 입을 뻐끔 벌렸다. 에이드리안 앞에서 노래를 하다니. 쑥스럽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다니... 케이로프는 마음 한 구석에 퍼져나가는 기쁨에 살짝 미소지었다. 쑥스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노래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케이로프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하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은 노래를 통해 표현되었다.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케이로프는 지긋이 눈을 감고 울려 퍼지는 선율에 몸을 맡겼다. 노래가 끝나고 케이로프는 눈을 떴다. 한바탕 꿈을 꾸고 난 것 같았다.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시선을 던질 것인가.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래에 비웃음을 보낼지도 몰랐다. "기분이 아주 좋구나. 케이로프 군. 아주아주 기뻐, 지금. 그렇지?" 에이드리안은 그의 섬세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케이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자상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가 자신보다 1살 어린데도 케이로프는 왠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유벨에게 말했다. "나, 결정했어. 이 사람으로 할래. 지금, 결정했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에이드리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연습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에이드리안 님! 아아니- 이 이상한 빨강머리 남자는 누구죠?" 난데없이 침입한 다홍색 머리의 소녀가 자신을 보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뒤로 한 걸음 주춤하고 물러섰다. 소녀는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흐음...이 자신감 없이 멍청하게 보이는 남자는 도대체 누구죠?" 케이로프는 당돌한 소녀의 말에 움찔했다. 마음 한 구석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다시 자신을 훑어보더니 에이드리안에게로 우아한 몸짓으로 걸어갔다. 케이로프는 그제서야 그 소녀가 뤼베이크 가문의 후계자인 미라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뤼베이크 가문의 후계자답게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다소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소녀의 태도가 케이로프는 약간 부러웠다.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즐거운 듯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라벨의 말에 간간이 에이드리안이 미소지었다. 유벨도 옆에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자신과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이 쳐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 때 미라벨이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거기, 뭐하는 거에요? 그렇게 바보같이. 어서 이리로 오라구요." 케이로프는 놀란 눈을 깜빡이며 머뭇머뭇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과 자신 사이의 막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미라벨의 삐죽거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미라벨, 좀 상냥하게 굴어. 너 그러고 있으면 무섭다구." 에이드리안의 말에 미라벨이 어깨를 으쓱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옆에서 계속 능글맞게 웃고 있던 유벨이 케이로프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어이, 케이로프. 우리 모임에 들어오는 거, 어때? 다도회같은 건데...차를 마시면서 뭐 이런저런 잡담하는 모임이야. 여기 있는 에이드리안과 나, 미라벨이 전분데 뭐 이왕이면 짝수로 맞추는 게 분위기도 좋잖아?" 케이로프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이런 쟁쟁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케이로프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할 수만 있으면 그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재미없어 하고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자신처럼 소심하고 대인관계에 소질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큰 기회인 것 같았다. 케이로프는 결국 그 제의를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그냥 혼자인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웠다. 케이로프는 거절 의사를 밝히려고 입을 열었다. 그 때 미라벨이 불쑥 말했다. "흐음...그럼 이제 네 사람이니까 찻잔이 모자라겠어요. 어쩐다. 새로 장만 해야겠네. 이번에 상가에 쇼핑 가서 한 세트 마련해야 겠어요. 이왕이면 준비하는 거 여섯 조를 준비하면 여분도 있고 괜찮을 거 같아요." 케이로프는 입을 열고 미라벨의 표정을 살폈다.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미라벨 때문에 케이로프는 거절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바이올린을 닦던 유벨이 미라벨에게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호숫가에서 차를 마셔볼까? 바람도 적당하고 이럴 때는 야외가 좋지. 케이로프, 저 뒤편 호숫가 알지?" 케이로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한다. 나는 그 모임에 참가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케이로프는 주먹을 꾸욱 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나는..." "케이로프 군. 잊지 말고 꼭 와. 내일 2도르야. 호숫가에서. 아주 즐거울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케이로프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보내는 에이드리안의 미소에 거부를 표시할 수는 없었다. 케이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정말이지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그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한 자신의 마음을... ******** 에이드리안의 말대로 모임은 즐거웠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에이드리안과 미라벨, 유벨은 자신의 말을 놓치지 않고 귀기울여 주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아주 재미있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의 많은 독서량으로 쌓인 지식들이 매우 존경스럽다고 했다. 결코 비웃거나 무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적절하게 웃고 적절하게 장난끼 어린 핀잔을 주었다. 그들과 같이 차를 마시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에이드리안은 언제나 잔잔하게 대화에 참여했고 유벨은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미라벨은 중간중간에 끼여들어 톡 쏘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했다. 케이로프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에이드리안의 노련한 대화술과 유벨의 유머 감각, 미라벨의 톡톡 튀는 자신감. 그들은 언제나 당당해 보였다. 케이로프는 자신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케이로프는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꾸준히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모임이 계속될수록 그는 점점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수가 많아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콜라의 여러 면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레플리카 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상위의 랭크를 받았고 그 때 마다 에이드리안의 자상한 칭찬과 유벨의 유쾌한 격려, 미라벨의 빼족거리는, 그러나 결코 듣기 싫지 않은 응원을 들었다. 케이로프는 처음으로 스콜라의 생활이 아주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승계 시험이 다가왔다. 제37음(第37音) 엘크로이츠...그 들의 만남(4) 케이로프는 초조하게 연습실 안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승계 시험이 코 앞에 다가온 지금 그는 참으로 난감했다.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에이드리안이 언젠가는 학생회를 만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참여하고 있는 그들의 모임도 사실은 그 학생회를 위한 전초적인 모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벨과 미라벨의 말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에드, 저 녀석, 지금은 저렇게 행동을 자제하고 있지만 일단 학생회를 열면 아마 엄청나게 세력을 확장할거야. 우리 형의 <슈르트홀츠>는 이미 <라데팡스>에게 대부분의 세력을 빼앗겼어. 스콜라가 현재 <라데팡스>에 장악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에스프라드 형은 대단한 사람이야. 하지만 저 녀석이 학생회를 열면 적어도 스콜라의 반은 넘어 온다. 확실히 그래. 난 저 녀석에게 내 모든 것을 걸었어.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녀석이야.] [에이드리안 님은 지금 숨을 죽이고 계시지요. 아직은 자신의 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으니 학생회를 열어도 <라데팡스>에 눌릴 뿐이니까요. 저는 에이드리안 님으로 결정했어요. 뤼베이크의 이름을 맡길 분으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이름을 걸고서 그 분께 힘을 실어 드리는 것. 케이로프 님도 분발하세요. 그 분께 힘이 되어드려야 해요.] 케이로프는 이마를 찡그렸다. 자신도 에이드리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당당하게 에르슈바이크 가의 후계자가 되어 에이드리안 곁에 서고 싶었다. 유벨과 미라벨처럼 자신 있게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승계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그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내세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게 미소짓던 자신의 사촌들이 생각났다. 더욱 몸이 움츠러들었다. 케이로프는 연습실의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케이로프는 무의식적으로 문 쪽을 쳐다 보았다. 하얀색 반바지와 군청색 띠가 장식된 세일러 칼라의 상의를 입은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목 중간까지 오는 금발을 나풀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케이로프를 발견한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케이로프.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아, 아, 예." 케이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안을 기다렸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케이로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케이로프를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가 참 좋군. 내일이지, 승계시험?" "아, 네." 에이드리안이 뒤돌아 케이로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에이드리안 자신보다 다소 키가 큰 케이로프를 단호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반드시 후계자가 되어 돌아오도록."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전....전...자신이 없습니다." "케이로프, 넌 네가 약하다고 생각하나? 다른 사람들이 너의 약함을 비웃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멍청한 녀석이었나, 너는?" 케이로프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방안의 공기가 냉랭해 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미소짓던 에이드리안이 차갑게 표정을 바꿨다. 그는 매서운 표정으로 케이로프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그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라 케이로프는 몸둘 바를 몰랐다. "에, 에이드리..." "자신을 기만하지 마라. 넌 충분히 강한데 어째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그건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야, 케이로프. 그건 몹시 너 자신에게 실례되는 일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너를 보여주기 전에 너 자신에게 너를 보여 줘. 네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지. 에르슈바이츠 가의 그런 조무래기들에게 지지 마라. 넌 앞으로 내 옆에 서게 될 사람이야. 그 따위 녀석들에게 지는 건 용서 못 해." 냉랭하게 말을 마치고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벽장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케이로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바이올린을 꺼내 이리저리 둘러 보다 바이올린의 현에 거세게 손목을 그었다. 날카롭게 현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에이드리안의 손목에 흥건하게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현 하나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케이로프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저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정신이 든 케이로프가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소, 손목에서 피, 피가...어서 지혈해야...." 에이드리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지 마!! 네가 약하면 내가 다친다. 이렇게 내가 다치는 거야. 지금은 이 정도에서 그친 거지만, 후일 사회에 나가면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노리고 다가올 거야. 네가 약하게 마음먹으면... 난 죽을 수도 있어. 넌 분명히 강해. 강하게 마음먹어라. 케이로프, 넌 내가 유벨과 미라벨에 이어 택한 세 번째 사람이야. 이 내가 에르슈바이크 가의 많은 사람들을 재치고 널 택한 거야. 그건 충분히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이야기야. 자부심을 가져라. 그리고 날 위해서 반드시 후계자 자리를 얻어라."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케이로프는 순간 뺨으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말없이 그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따끔한 말에 가슴 한 쪽이 아련하게 떨려왔다. 그 것은 기쁨의 떨림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 자신의 강함을 일깨워주고 자신에게 당당함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할 당위성도 부여해 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는 에이드리안에게 선택되었다는 사실과 태어나 처음 맛보는 묘한 성취감에 케이로프는 기쁘다 못해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케이로프의 표정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손목의 피를 닦아 냈다. 그리고 아까까지의 냉랭한 얼굴을 풀고 빙긋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좀 있다 유벨과 미라벨에게 가 봐. 각자 할 말이 있을 테니."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연습실 문을 나섰다. 갑자기 생각난 질문에 케이로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저를 선택하셨지요? 제가 에르슈바이크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학생회의 입지를 위해 절 택하신 건가요?" 케이로프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케이로프, 난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 나를 만난 기쁨에 들떠 있던 네 노래에 답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다시 발걸음을 돌려 연습실에서 나가는 에이드리안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케이로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날, 케이로프는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 케이로프는 미라벨이 준 붉은 색 머플러와 유벨이 준 같은 색의 장갑을 손에 끼고 승계시험을 봤다. [이것 보세요, 케이로프 님. 반드시 이 거 목에 두르고 손에 끼고 시험 보라구요. 그럼 100% 합격일테니.] 미라벨은 땍땍거리면서도 이것저것 세심하게 신경써주었다. 미라벨과 유벨의 응원덕분인지 케이로프는 당당하게 승계 시험에서 합격했다. 그리고 에르슈바이크 가의 후계자로 낙점 되었다. 그의 탁월한 레플리카 실력과 다양하고 폭 넓은 지식, 그리고 유창한 말솜씨에 모든 친족들이 그를 후계자로서 인정했다. 케이로프는 에르슈바이크 가에서 돌아와 곧장 에이드리안의 사택으로 향했다. 그는 다짜고짜 에이드리안의 서재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활짝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에게 외쳤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제가 해냈습니다!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케이로프, 당연히 해낼 줄 알고 있었어. 믿고 있었어." 에이드리안이 책상 위에 걸터앉아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미소가 너무 기분 좋아 주위에 유벨과 미라벨이 우두커니 서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미라벨이 멍하게 말했다. "어머, 어머. 케이로프 님이 웃으시는 거 저, 처음 봐요." "나도 그래. 미라벨." 유벨도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케이로프는 여전히 두 사람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제가 에이드리안 님의 든든한 방패가 되겠습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존경하고 사모합니다! 당신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던 미라벨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달려 와 주먹을 내저었다. "아아니-! 지금 사모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에이드리안 님은 내가 먼저 점찍었다고요! 늦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사랑에 시간은 무의미한거야." "뭐, 뭐라고욧?" 케이로프와 미라벨이 험악한 시선으로 아웅다웅거리고 있는 동안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에게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말했다. "슬슬...학생회를 만들어 볼까?" "이름은 뭐라고 할 건데?" 유벨의 질문에 에이드리안은 빙긋이 웃더니 대답했다. "<엘크로이츠>." ******** 쥬느비에브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올리고 말똥말똥 케이로프를 쳐다 보았다. "그래서, 에이드리안이 손목을 그어서 놀란 바람에 후계자 시험에서 합격 한 건가요? 웅~ 아팠겠다. 에이드리안, 손목에 흉터 남았나?" 케이로프는 여전히 식사에 몰두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흉터는 지워졌지. 그 흉터가 남아있으면 내가 불편해 하리란 걸 아셨으니까. 그 상처는 나약한 내 마음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내리신 결단이었지." 듣고 있던 유벨이 껄껄 웃으며 손을 이리저리 내저었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말이야. 에이드리안의 그 권모술수라고 할까? 에이드리안은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 하면 곁에 둘까 한참 고민했단 말씀이야. 결국 에이드리안의 미소와 말솜씨에 녀석들이 한번에 넘어가긴 했지만. 그 때 그 페이퍼 나이프 말야. 미라벨의 페이퍼 나이프. 그 것도 그 날, 승마 경기가 있는 날, 아침에 '음, 이게 좋겠어.' 라고 가지고 나가더니 그렇게 얼렁뚱땅 미라벨을 유혹해버리고." "에에.... 역시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에이드리안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유벨도 에이드리안을 한 번 쓱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녀석의 능력이니까. 그 녀석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행동이었다면 두 사람도 에드를 따라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안 그래?"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말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로프가 말했다. "하지만 난 그 사실이 더 기분이 좋았어.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나를 곁에 두기 위해 어떤 생각을 하셨든 그 분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그 분이 다른 조건이 아닌 나 자체만을 보고 선택해 주신 거니까." "그래요. 저도 그래요. 에이드리안 님이 저를 곁에 두고자 생각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이죠. 제게 더 없는 자유를 주셨어요. 에이드리안 님이 주신 페이퍼 나이프는 그 후로도 제게 많은 용기를 주었지요." 미라벨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안느마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그런데 케이로프 님, 그러면 그 당시에는 아주 멀쩡해 보였는...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하늘의 뮤즈, 일로세...뭐라는 것에 심취하기 전이었나요?"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도 못 외우는가? <엘크로이츠>가 결성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으로 유학을 갔었지. 거기서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에 대해 알게 되었어. 그것은 내 일생에서 두 번째 기회였...." "그만 하세요. 그만." 미라벨이 눈치를 주자 케이로프는 눈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재미있다는 듯이 입을 막고 킥킥 거렸다. 안느마리가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얘기 들어보니 에이드리안 님은 정말 완벽하신 것 같네요.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박력 만점에다...말씀도 잘 하시고. 결국 두 분은 에이드리안 님의 멋진 말에 뻑 하고 넘어갔다는 말이잖아요." "엥, 그리고 이상해. 에이드리안은 매일 이렇-게 자상하게 웃는 건 아니란 말이야. 미라벨 언니나 케이로프 님 이야기대로라면 항상 다정하게 웃는데. 사실 에이드리안은 심술도 많이 부린다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자상한 표정으로 흉내내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 때 무슨 말을 하던 상관 안 하겠다는 듯 계속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평의회 보고 서류를 검토해 봐야 하니까 여기서 잡담을 나누든 식사를 하든 맘대로 해." 말을 마치고 에이드리안은 벗어둔 겉옷을 손에 들고 식당을 나섰다.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유벨이 말했다. "사실 그게 저 녀석의 또 다른 무서운 점이라고 할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쓰지 않아. 이미지 관리가 되어서 우리야 좋지만. 하지만 우리와 같이 있을 때는 화도 내고 어리광도 부리고 또 심술도 부리지."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래서 기뻐요. 우리에게 마음을 보여주신다는 거니까." "그렇지. 우리를 믿고 의지하고 계신다는 거니까."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가 멍하니 옛 기억에 빠져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손뼉을 탁 쳤다. "아앗. 오늘 점심 값 에이드리안이 낸다고 했는데 먼저 가버렸잖아? 우웃, 어, 어떻게 해. 우웅~~" 옆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밀쳐 내고 안느마리가 유벨에게 물었다. "유벨 님 이야기는 언제 해주실 거에요?" 유벨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야기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해 줄게. 너무 한꺼번에 다 알아버리면 재미없잖아?" ******** 창의 하얀 커튼이 부드럽게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던 작은 금발의 소년이 고개를 숙여 손목에 묶여져 있는 하얀색 끈을 바라보았다. 끈에는 붉게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살며시 미소를 띄며 뒤돌아보았다. 회색머리의 사촌형이 자신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자 소년은 싱긋 웃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이드리안, 도대체 네 사람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번번이 이렇게 피를 흘려서 어쩌자는 거야?" "유벨, 사람은 보석 같은 거야. 아주 아름답고 소중한 보석이지. 이 정도의 피로 그 두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든다면... 나만의 보석으로 만든다면, 내겐 아주 과분한 거지. 훗." 소년은 자신의 옆에 놓여져 있는 원래 두 개가 한 쌍인 자신의 은색 페이퍼 나이프를 보며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따뜻한 햇살이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제38음(第38音) 쥬르, 스콜라를 지켜줘!(1) "으아아앙, 아으으으으--" 쥬느비에브는 거울을 보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까만색 호박 모양 바지-쥬느비에브가 애용하는 디자인의 반바지로 의상실 <프랑소와즈>가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것이다-와 귀여운 작은 프릴이 나폴나폴 달려 있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지금 아주 집중하고 있었다. 거울 속에 까만 생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벌린 채로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웅~ 잘 안 보이네." 쥬느비에브는 다시 뒤꿈치를 바짝 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 방문 소리가 났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쩍 벌린 상태로 빠꼼하게 고개를 돌렸다. 잔뜩 놀란 표정의 에이드리안이 문 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표정에 움찔해 뒤로 돌아 입을 꾹 닫았다. 오래 입을 벌리고 있었더니 아래턱이 우리하게 아팠다. 쥬느비에브는 턱을 살살 문지르고 폴짝 뛰어 뒤돌아 섰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헤헤. 에이드리안, 웬 일이에요?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에요?" 편하게 보이는 하얀 바지와 셔츠 차림의 에이드리안은 아까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다소 놀랐는지 쥬느비에브의 시선을 피했다. 레이디라면...레이디라면 결코 약혼자에게 그런 민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을 텐데! "쥬르, 할 말이 있어...그게..." "에이드리안, 이 쪽으로 잠깐만 와봐요." 쥬느비에브의 웃는 얼굴에 에이드리안은 의아해 하며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다가갔다. "뭔데? 무슨 일..." "아앙~~ 보여요? 보여요? 잘 좀 봐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입을 쩍 벌리고 손가락으로 입안을 가리켰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살짝 이마에 주름을 넣었다. 세상에, 약혼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약혼녀라니! 기가 막힐 따름인 에이드리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뭘 보라는 거야?" "충치. 충치 있어요? 아앙~ 보여요?" "충치?"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입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얗고 고른 이빨이 쪼옥 보였다. 곰곰이 이빨을 살피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턱을 들고 이리저리 돌리며 꼼꼼하게 관찰했다. 의외로 진지하게 그녀의 충치를 찾고 있는 그였다. "흐음...없는 거 같은데..." "아유. 다행이다. 요즘 쵸콜렛을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었거든요."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헤죽 웃었다. 에이드리안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어깨너머로 보고 씨익 웃었다. 비녀로 돌돌 감아 고정시킨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뒤로 가서 등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만지며 그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근데 할 말이 뭐에요?" "응. 며칠 스콜라를 비울 것 같아서..." "에엣?" 쥬느비에브는 금발을 다듬던 손을 멈추고 에이드리안의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에이드리안에게 다시 물었다. "왜요? 어디 가요? 나도 가는 거에요?" "평의회에 이번 회기 보고하러 가는 거야. 나와 유벨, 그리고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가는데 아마 3델라(주. 참조)나 4델라정도 걸릴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곧이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흐, 흐어어어엉- 나도 갈래요. 나도 갈래요. 에이드리안이랑 떨어지는 거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흐어어어엉-"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꺼이꺼이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당황했다. "쥬르, 또 왜 울고 그래. 3델라 정도 밖에 안 걸린다니까?" "그래도 싫어요. 나도 갈래요. 나도 갈거야. 에이드리안 따라 갈거야. 나도 갈거란 말이야. 흐어어어어어어엉-" 에이드리안은 미처 챙겨오지 못한 손수건을 원망하며 셔츠의 소매로 쥬느비에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나도 갈거에요. 에이드리안." "안 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단 말이야. 넌 여기 남아. 안느마리가 같이 있어줄 테니까." 단호하게 거절하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를 꼬옥 안아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 올 때 선물 사 가지고 올게." "선물 싫어요. 나도 갈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셔츠를 촉촉하게 적시며 떼를 썼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쥬느비에브를 달랠 방법을 골똘이 생각했다. 쥬느비에브가 떼를 쓰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헤르만 숙부와 에스프라드 형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녀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자신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두 부자가 쥬느비에브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에이드리안의 품에서 칭얼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고 쥬느비에브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쥬느비에브의 입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계속 표정을 구기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얌전히 잘 있으면 다녀와서 키스 열 번 해줄게. 어때?" "여, 열 번요?" 더욱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쥬느비에브는 손가락으로 셈을 해 보며 머리 속으로 열심히 수지타산을 계산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삼십 다섯 번." "응?" "키스 삼십 다섯 번 해주면 나 기다릴게요. 하루에 열 번씩. 다섯 번은 보너스." 말똥말똥 자신을 바라보는 쥬느비에브를 바라 보며 에이드리안은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가 이렇게 결정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다. 에이드리안은 괜히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조, 좋아. 그럼 삼십 다섯 번. 됐지?" "응!! 좋아요. 나 얌전히 여기서 기다릴게요. 나 착하죠?"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어리벙벙 해 보여도 자신의 밥그릇은 자신이 찾는 쥬느비에브가 아닌가. 울면서 매달린 결과 가뿐하게 키스 삼십 다섯 번을 챙긴 그녀였다. 뭐 그로서도 싫지 않은 조건이기에 수락한 것이지만.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자신이 아주 그 뭐랄까. 미라벨이 말한 여자의 적, 늑대같은 남자처럼 느껴져 살짝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남자는 여자의 적이에요. 정말 늑대가 따로 없다니 까요!] 미라벨의 말이 생각나 괜히 쑥스러워진 에이드리안은 발걸음을 돌려 뒤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오후에 학생회실에 와. 가기 전에 말해 줄게 있으니까." "에이드리안! 잠깐만 멈춰봐요." "응?"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발꿈치를 들고 그에게 살짝 입맞췄다. 에이드리안은 얼떨결에 쥬느비에브의 허리를 받치며 키스를 받아들였다. "헤헤. 원래 덤이란 게 있는 거잖아요. 나 덤으로 주는 게 참 좋아요. 덤으로 주는 모롤라도 좋고, 덤으로 주는 체리 사탕도 좋고. 그리고..." 쥬느비에브는 다시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셔츠를 손으로 톡톡 털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지금 나갈 거죠? 그럼 오후에 학생회실에서 봐요."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분 좋게 방을 나섰다. 잠시의 이별이지만 키스 삼십 다섯 번이라면 괜찮은 대가 아닌가. 사실은 에이드리안도 쥬느비에브에게 떼를 쓰고 싶었다.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도 같았던 것이다. ******** 햇볕이 뜨거운 오후. 쥬느비에브는 학생회실에서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키스 삼십 다섯 번은 너무 적었다. 적어도 3 델라씩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에이드리안 없이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심심하고 무섭고 외롭고 쓸쓸하고...하여튼 에이드리안 없이 혼자 있는 건 너무 싫었다. 거기다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까지 에이드리안과 같이 떠난다고 하니 스콜라가 너무 텅 비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안느마리가 곁에 있어준다고는 했지만 쥬느비에브는 정말 속은 기분이었다. '바보 에이드리안. 키스 삼 십 다섯 번에 날 설득하다니. 정말 나빠.'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에이드리안을 원망하며 울음을 삼켰다. 결국 그녀는 까만 호박 바지를 두 손으로 꾸욱 잡고 커다란 눈물 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나 그냥 따라갈래요. 따라 갈래. 흐어어어엉-"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우는 모습을 보기가 그런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던 미라벨이 다가와 등을 토닥거렸다. "쥬느비에브, 우린 놀러가는게 아니고 일 하러 가는거에요. 에이드리안 님께 방해가 되고 싶진 않죠? 고작 3 델라정돈데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올 때 모롤라 사탕 다섯 봉지 사올게요." "그래. 쥬느비에브. 내가 재미있게 놀아 줄게." 안느마리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달래려고 말을 건넸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쥬느비에브를 측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싫어. 나도 갈래. 나도 갈거야.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갈거야. 흐, 흐어어어엉- 에이드리안, 나도 데려 가요. 흐, 흐어어어어어어엉---" 미라벨이 레이스 달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자 쥬느비에브는 더욱 서러운 듯 눈물을 쏟아내며 코를 풀었다. 달래는 게 무리라고 생각된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창 밖을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한 숨을 쉬며 뒤돌아 섰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쥬르. 널 여기 남기고 가는 건 사실 엄청난 이유가 있어서야." "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물을 그치고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심호흡을 하더니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널 여기 두고 가는 건 사악한 악당으로부터 스콜라를 지키기 위해서야. 스콜라에는 나도 없고 유벨이나 미라벨, 케이로프도 없어. 그럼 스콜라는 누가 지키지?" "으, 음...그건..." 쥬느비에브는 손가락으로 블라우스 자락을 돌돌 말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손뼉을 탁 치고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내, 내가? 내가 스콜라를 지켜요?" "그래. 너와 안느마리가 힘을 합쳐 스콜라를 지키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스콜라를 지킨다! 머리 속에 스물스물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당당하게 스콜라를 지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멋진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나쁜 악당들을 다 물리쳐 줄 테니까. 스콜라는 나, 쥬느비에브가 지킬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에게 눈짓을 주었다. 쥬느비에브를 다루는 에이드리안의 솜씨에 다들 감탄을 하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안느마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쥬르를 잘 부탁해. 혹시라도 잘못되면...알지?"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이 정의의 안느마리 님께서 지킬 테니까." 안느마리는 자신 있게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그럼, 쥬르, 안느마리. 좀 있다가 집행 위원들이 주의할 사항을 알려주러 올거야. 케이로프, 미라벨, 우린 이만 갈까? 보고서 준비도 해야 하니." 에이드리안은 웃으면서 학생회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뒤따라갔다. 역시 방을 나서던 유벨은 안느마리의,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어린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쥬느비에브는 모두가 떠난 스콜라를 외롭게 지키게된 것이다. 물론 안느마리와 함께. ******** 다음 날, 에이드리안 일행은 스콜라를 떠났다. 쥬느비에브의 또 한번의 눈물 세례를 받아야 했지만 에이드리안이 겨우 어르고 달래어 눈물을 그치게 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 일행의 마차를 우두커니 서서 보며 울먹이다 결국 안느마리가 식당에서 들고 온 간식거리 덕분에 울음을 그치고 평상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생회실에 돌아온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다 에이드리안의 책상에 쪼르르 달려가 의자에 폴싹 앉았다. 에이드리안의 책상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푹신한 의자가 맘에 들어 엉덩이를 괜실히 들썩였다. "의자 폭신폭신해. 기분 좋아. 에-에. 학생회장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입니다. 여러분은 엘크로이츠로서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고....어때, 안느마리? 나 에이드리안이랑 똑같지?" 소파에 앉아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안느마리가 쿡쿡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하나도 안 똑같아.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은 좀 더 온화하면서 힘있게 말씀하신다고. 넌 마치 어린 아이가 떼쓰는 말투잖아." "치이-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뭐,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스콜라를 지키지?"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안느마리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잡지에 눈을 돌렸다. <올 여름의 패션 경향>이라는 부분을 열심히 탐독하며 안느마리는 유벨을 사로잡을만한 섹시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유벨이 감격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안느마리는 열심히 잡지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며 스콜라를 지킬 방법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 학생회실의 방문이 열리고 낯익은 학생회 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쥬느비에브 님, 안느마리 님. 광장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마주 보았다. 드디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스콜라를 지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광장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제39음(第39音) 쥬르, 스콜라를 지켜줘!(2)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헐레벌떡 광장으로 달려갔다. 광장에는 한 무리의 소년, 소녀들과 덩치 큰 한 학생이 대치하고 있었다. 다들 힘들어 보이는 표정과 이리저리 먼지가 날리는 엉망인 주변의 모습으로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과 약 50레트(주. 참조)정도 떨어져 상황을 살펴본 쥬느비에브는 뒤따라 온 학생회 위원에게 물었다. "누구죠? 저기 저 사람들은?" "저 쪽 무리는 우리 스콜라 학생이고, 저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저 사람은 슐뢰르겐 레플리카 스콜라의 학생회 부회장, 카를로스입니다. 지금 학생회 주요 임원이 부재중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 에스플리크를 아주 못마땅해 했으니까요." "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그 덩치 큰 학생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안느마리에게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물었다. "안느마리. 레플리카 스콜라가 또 있어?" "응. 슐뢰르겐은 2군이야. 하급 솔리스트(주. 참조)들을 양성하는 곳이지. 상급 솔리스트들을 양성하는 에스플리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곳이야. 군대로 따지자면 에스플리크의 학생들은 사령관, 슐뢰르겐은 쫄병 정도? 뭐 슐뢰르겐 쪽에서는 당연히 우리 스콜라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다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학생회 위원에게 물었다. "이상해요. 저 정도 사태면 벌써 라데팡스의 그 무서워 보이는 상급생 언니들이 벌써 처리했을 텐데." "에스프라드 님은 원래 스콜라에 잘 계시지 않는 데다 이번에 평의회 보고 건으로 올슈틴 님과 오르탕스 님도 함께 가셔서...지금 스콜라는 지휘관 부재 상태입니다." 쥬느비에브는 학생회 위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에에? 그럼 스, 스콜라에서 안느마리랑 내가....지금 최, 최고 책임자란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십시오. 우리 스콜라의 학생이라면 모르지만 슐뢰르겐의 그 것도, 학생회 부회장이 끼여든 일이라 저희로서는 처리하기가 힘듭니다." 학생회 위원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짓고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안느마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쥬느비에브는 검정색의 호박바지를 두 손으로 꾸욱 쥐고 안느마리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하지? 안느마리. 우리, 정말로 스콜라를 지켜야 할까봐." "쥬느비에브, 걱정하지 말고 우리 힘을 합쳐서 나쁜 악당으로부터 스콜라를 지키자. 나, 정의의 안느마리가 뒤를 받쳐 줄 테니." "으, 응!" 안느마리의 결의에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쥬느비에브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곧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치만 안느마리. 저 사람, 에이드리안보다 덩치가 3배는 더 크고 30배는 험상궂게 생긴데다 300배는 더 무서운데. 나 사실 좀 무서운데. 그냥 안느마리 혼자 싸우면 안 될까?" 안느마리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쥬느비에브, 원래 악당은 다 저렇게 생긴 거야. 감히 에스플리크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용서 할 수 없어. 걱정 마. 쥬느비에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이번 일을 잘 해결하면 에이드리안 님께 칭찬 받을지도 모르잖아." "치잉-찬? 으, 응! 안느마리. 나 열심히 할래. 스콜라를 지킬 거야." 주먹을 꾸욱 쥐며 쥬느비에브는 마음을 굳건하게 먹었다.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스콜라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의 무리 쪽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덩치 큰 남자와 약 1레트 정도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란색 블라우스와 검정색 호박바지 차림의 쥬느비에브는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을 하고 덩치 큰 남학생에게 손을 쭈욱 뻗었다. "거, 거기서 그, 그만...하세요. 그, 그러니까 더, 더 이상 스콜라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 돼...요. 알았지...요?" 반말을 하려다 번번이 험상궂은 학생의 표정에 움찔거려 결국 '요'를 붙이고만 쥬느비에브였다. 확실히 가까이서 보니까 카를로스는 더 무서웠다. 험악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기운이 쭉 빠졌다. 쥬느비에브는 카를로스의 반응을 부들부들거리며 기다렸다. 왠지 어색하고 참기 힘든 시간이 똑딱거리며 지나갔다. 카를로스가 씨익 웃더니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이거. 이거. 이건 또 누구야? 야, 저리가. 쪼끄만게. 옆에서 있으면 다치니까 저어기 멀리서 구경이나 해라. 알았지?" 카를로스의 말에 순간 쥬느비에브는 발끈했다. "누가 쪼끄마다는 거야? 이 덩치야. 바보. 해산물. 뼈다귀. 조, 좀탱이!!" 쥬느비에브는 허리에 두 손을 가져가 꽥 소리를 질렀다.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쥬느비에브만 모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갑자기 나타난 쥬느비에브가 자신들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카를로스에게 대드는 것을 보고 눈만 끔뻑거렸다. 카를로스의 옆에 선 쥬느비에브는 너무나 자그마하고 약하게 보여 소년, 소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묵념을 하고 있었다. 저 조그만 여자아이는 왜 상황 파악도 못하고 여기 나선걸까. 저 카를로스란 놈, 슐뢰르겐의 학생이지만 꽤 강한 레플리카를 가지고 있는데 저 여자아이는 무슨 배짱으로 나선 걸까. 학생들은 저마다 깊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저 덩치 큰 카를로스가 시비를 걸어 싸우긴 했지만 카를로스의 레플리카는 상상외로 강했다. 여자 아이가 나름대로 도와주려고 온 것 같기는 한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고맙지 않았다. 아마 카를로스의 한 방에 나가떨어지겠지.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순간 우울해 지는 학생들이었다. 갑자기 카를로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와 학생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요 쪼끄만게 뭐라고 한 거야? 조, 좀탱이?" 쥬느비에브는 카를로스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안느마리에게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안느마리가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그러나 안느마리는 딴청을 부리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 쥬느비에브. 난 저렇게 험악한 인상을 보면 두드러기가 나서...그게 좀...나, 사실 연약한 여자로서 저런 사람은 좀 부담스러워." 안느마리는 싱겁게 웃으며 쭈뼛거렸다. "에엣? 안느마리. 안느마리가 책임진다며. 웅..." 믿고 있던 안느마리의 배신에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카를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를로스는 '좀탱이'라는 말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씩씩거리던 카를로스가 손을 번쩍 들어 쥬느비에브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음침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꼬마. 이올리제를 신청한다. 지금 당장. 여기서." "에에에에엣?" 쥬느비에브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옆에 있던 학생회 위원도 안느마리도 그리고 주변의 학생들도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가 무슨 힘이 있어 이 무식하게 생긴 남자를 막는단 말인가?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카를로스에게 말했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저, 저기요. 그게 말이죠. 음...그러니까 이올리제란 건 말이죠. 음...유벨 오빠가 그랬는데 허, 허가받지 않은 건 징계 처분 감이라고..." "잔 말 말고, 자, 간다. 으아아아아아아---" 쥬느비에브는 귀에 울려 퍼지는 굵직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휘청거렸다. 쥬느비에브의 옆으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자욱한 먼지가 날렸다. 쥬느비에브는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귀를 막았다. 참기 힘든 기분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 것 보세요. 나 레플리카 잘 못 쓰는데. 무, 무서워. 무서워. 우, 우에에에에에에엥- 안느마리. 살려줘. 안느마리!" 흙먼지가 날리는 가운데 쥬느비에브는 주저앉아 눈물샘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먼지 때문에 안느마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를로스의 레플리카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린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반팔 소매의 왼팔로 무언가가 홱 하고 지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팔을 쳐다 보았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안느마리였다. "쥬느비에브, 먼지 때문에, 콜록콜록. 어? 어? 이 거 피잖아. 팔에서 피가..." "어어? 안느마리. 피? 어? 진짜 피나잖아. 흐, 흐어어어어어엉- 흐어어어엉- 에이드리안. 나 피나요. 피난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 흐어어엉-" 팔에서 찔끔 솟아오른 피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기겁을 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 때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목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안느마리가...울부짖고 있었다. "감히...감히...용서 못 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에게 피를 흘리게 하다니. 블랙이야. 세상은 블랙 천지야. 이 정의의 안느마리가 처리해야겠어. 쥬느비에브를 다치게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저 블랙은 아주 최악질임에 틀림없지. 하늘을 대신해서 나 안느마리가...우훗, 우후후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하하-" 순간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나의 정의로운 힘에 하늘도 감동하셨다! 쥬느비에브가 흘린 태산만큼의 피만큼 되값아 주마! 아하하하하하-"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멈추고 물끄러미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자주 봐서 놀라지는 않지만 안느마리의 '변신'은 언제 봐도 무서웠다.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그치만 안느마리. 팔에 난 피는 세 방울밖에 안 되는데... 태산만큼은 아닌데..." 중얼거리며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다시 벼락이 치며 기괴하고 음침한 소리가 광장을 진동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이히히히히히히히- 쿠에에에에엑-----] 그리고 카를로스는 허무하게 쓰러졌다. 눈을 번뜩 뜬 채 일말의 비명소리도 없이 그렇게 무너졌다. 바닥에는 그가 쓰러지면서 일으킨 흙먼지가 자욱했다. 안느마리는 거만하게 눈을 빛내며 뒤돌아 섰다. 하얀색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그녀는 갈색머리를 뒤로 넘기며 앙칼지게 외쳤다. "아하하하-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법! 아아하하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안느마리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문제는 저 안느마리를 어떻게 원래대로 돌리느냐였다. 쥬느비에브는 몸을 일으키고 터덜터덜 걸어가 학생회 위원에게 말했다. "뭐, 어쨌든 일은 잘 된 거 같으니까요. 안느마리 쓰러지면 학생회실로 좀 데려와 주실래요? 정신차리는데 평균 3도르(주. 참조)정도 걸리니까 참고하시고요."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손으로 탁탁 털고 살짝 안느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하하하하하- 블랙이여. 모두 사라져 버려라!! 우후후후, 아하하하하핫."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학생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겨진 학생들은 물끄러미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학생이 말했다. "그래. 생각났어. 저 두 사람. 클래스 O잖아. 10학년에 있다는 미스테리 클래스. 그래. 우리가 몰라봤어. 분명 우리 스콜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온 저런 나쁜 놈들을 물리치려고 비밀리에 파견된 거야. 모스테츠 양의 레플리카도 엄청나지만 특히 저 <엘크로이츠> 학생회장의 약혼녀, 에슈비츠 양.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옆에 있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자신은 싸우지 않는 척 하면서 상대방을 도발하고 결국 자신의 상처때문이라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저 모스테츠 양으로 일격을 가한다. 정말 멋진 전술이라고 밖에 할 수 없군요. 거기다 허가 없는 이올리제였기 때문에 스콜라 자치 법규에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정말 지능적이에요." 학생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 걸음을 돌렸다. 흙먼지가 가득한 광장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를로스와 그 옆에서 정신 없이 웃고 있는 안느마리, 안느마리를 데려가려고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는 학생회 위원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어느새 학생회실에 도착한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책상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하얀 종이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랄랄- 재미있는 낙서. 에이드리안 그려야지. 랄라라-" ******** 사륜마차 안에서 에이드리안은 아까부터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유벨이 물었다. "다 와가는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책상 위에 다음 회기 서류를 그냥 두고 왔는데. 이상하게 걱정이 돼. 서랍 안에 두고 온다는 게 깜빡하고... 흠, 그거 작성하느라 거의 한 달 넘게 걸렸는데.... 이상하네. 자꾸 기분이 찝찝한게..." 미라벨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별 일이야 있겠어요? 쥬느비에브만 안 건드리면 되는 건데요. 뭐." "아아-. 그래.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의 손에만 안 들어가면 무사할 테지."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인상을 쓰며 마차 밖의 풍경으로 애써 정신을 분산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서류에 신경이 쓰이는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 "와아- 다 됐다!! 귀여운 에이드리안 어릴 때 모습이 완성되고 말았어! 우웅! 기분 좋아." 쥬느비에브는 하얀 종이에 까만 색 펜으로 쓱쓱 그린 그림을 보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너무 기분 좋고 행복했다. 하얀 종이에 얼굴을 비비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종이를 돌려보았다. "어라? 글씨가 있네? 엘크로이츠 제2기 계획서? 이게 뭐람. 에이, 모르겠다. 이번에는 에이드리안 밥 먹고 있을 때 그림 그려야지. 맛있는 모롤라 그림도 그리고. 에헷. 재밌다." 초췌한 안느마리가 돌아온 시간까지 신나게 그림을 그린 쥬느비에브였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이 후 에이드리안의 잔소리를 7델라 동안이나 듣게 된다는 것을. 제40음(第40音) 쥬르, 스콜라를 지켜줘!(3) 쥬느비에브는 밤늦게까지 안느마리와 학생회실에서 카드 게임을 하다가 12도르(주. 참조)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기가 싫었다. 에이드리안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어서 집에 돌아오는 것을 자꾸 늦추고 싶었다. 안느마리가 자신의 사택에서 밤 새워서 놀자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이 없는 동안 외박이나 기타 등등의 것들은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안도 알고 보면 고지식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현관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오늘은 늦으셨네요." 하녀장 루이즈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집사 톨레는 진지한 표정으로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거리며 톨레에게 물었다. "아저씨, 뭐 적는 거에요?" "아, 쥬느비에브 아가씨의 귀가 시간을 적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명령이라서..." "에엣?" 쥬느비에브는 놀란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가 톨레의 수첩에 적힌 시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안스럽게 표정을 만들며 톨레에게 매달렸다. "아저씨, 2도르만 당겨주세요. 나 에이드리안한테 혼난단 말이에요. 이렇게 늦게 들어온 거 알면. 고쳐주실거죠?" 쥬느비에브의 헤실헤실 웃는 모습에 집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숫자를 고쳤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집사에게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아저씨 최고! 루이즈 아주머니! 저 들어가서 잘게요." 쥬느비에브는 하녀장과 집사에게 신나게 손을 흔들고 이층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겨진 하녀장과 집사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 아가씨가 오시고 나서 집이 아주 밝아진 것 같아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두 사람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보듯 너그럽게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쥬느비에브는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잽싸게 에이드리안의 방 앞으로 달려갔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예상했던 것처럼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방문을 열고 쪼르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컴컴했다. 쥬느비에브는 잠옷을 두 손으로 꾸욱 잡고 침대 가로 걸어갔다. 가다가 몇 번이나 바닥의 카페트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운 좋게 넘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 이불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베개의 시원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로 뒹굴어서 베개를 두 팔로 꼬옥 감싸고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에이드리안 냄새다. 너무 좋아. 이제 안 무서워."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침대에 자려다가 문득 무섭고 쓸쓸한 생각이 들어 결국 에이드리안의 방에서 자기로 한 것이다. 에이드리안의 침대에 누워 있으니까 에이드리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모롤라를 세기 시작했다. "모롤라 하나, 모롤라 둘, 모롤라 셋......모롤라 오백 사십 여섯 개, 모롤라 오백 사십 일곱 개...."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잠이 안 왔다. 모롤라를 654개까지 셀 때 까지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벽으로 달려가 불을 켰다. 어둡던 방이 환해지자 잠시 눈이 적응이 되지 않아 따끔거렸다. 이내 시야가 적응되자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방을 뱅그르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심풀이로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먼저 탐사하기로 결정한 것은 드레스 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드레스 룸의 문을 활짝 열고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많은 타이와 스카프, 신발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목에 타이 하나를 걸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흠...매끄러운 감촉. 95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상의 하나를 꺼내어 몸에 대어 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마른 체구이긴 하지만 쥬느비에브보다는 확실히 컸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더니 잠옷을 벗고 에이드리안의 군청색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긴 소매와 바지단 때문에 아주 우스꽝스럽자 쥬느비에브는 입을 막고 쿡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 소맷자락을 코로 가져가 킁킁 거렸다. "여기도 좋은 냄새. 에이드리안은 무슨 향수 쓰지?" 쥬느비에브는 군청색 정장을 입은 채로 방을 비실비실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방구석에 있는 서랍으로 눈이 가자 발걸음을 돌렸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바지 자락이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마가 바닥에 정면에 부딪히자 쥬느비에브는 얼른 몸을 일으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코. 아파라. 이거 그냥 벗어야겠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바람에 미처 탐사하지 못한 서랍으로 향했다. 첫 번째 서랍은 각종 타이 고정핀과 커프스 단추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보석으로 가득했다. 쥬느비에브는 이것저것 만져보며 눈을 찡긋했다. "음...도둑 아저씨가 오면 이 서랍만 가져가도 평생 잘 살겠는데?" 타이핀에 붙어 있는 초록색 보석을 불에 비춰 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찡긋했다. 타이핀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쥬느비에브는 첫 번째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서랍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네모나게 접힌 하얀색 종이만이 서랍 중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종이를 쳐다보았다. "보, 볼까? 음, 음. 봐야지." 쥬느비에브는 잽싸게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세련된 필기체로 무언가가 씌여 있었다. [왜 남의 서랍을 뒤지고 난리야? 말해두건대 밑에 서랍도 뒤지면 가만 안둬.] 쥬느비에브는 종이를 보고 숨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길게 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종이의 글씨체는 에이드리안의 그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에이드리안 정말 신통하네. 어디서 숨어서 날 보고 있는게 아닐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레둘레 살펴보았다. 그러나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 다시 서랍에 시선을 고정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 서랍을 열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쥬느비에브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고 서랍을 노려보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리고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흠, 뭐 에이드리안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좀 보면 어때?" 쥬느비에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는 것 같아 왼쪽 가슴을 두 세차례 토닥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쥬느비에브는 혹시 이상한 물건이라도 있나 싶어 눈을 내리깔고 빠꼼히 쳐다보았다. "에에? 이 게 뭐야?" 서랍에는 까만 생머리의 귀여운 인형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인형은 양 손에 두 번째 서랍과 같은 하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인형의 손에 들린 종이를 쏙 빼어 읽어보았다. [또 뒤졌지? 심심하면 인형이랑 놀아. 자꾸 남의 물건 뒤질 생각하지 말고. 인형 이름은 '가짜 쥬르' 야. 난 필요 없으니까 네가 가져.] 쥬느비에브는 다시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고 인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왜 이런 인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밑에 서랍도 열어본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쥬느비에브는 인형을 들어 다시 물끄러미 살폈다. 인형은 짙은 초록색의 깜찍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인형은 생긋 웃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도 인형처럼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가아짜 쥬르-? 어, 그러고 보니 우리 닮았잖아. 음, 음, 음. 잘 부탁해, 가짜 쥬르. 그나저나 에이드리안은 어떻게 알았지? 내가 서랍 뒤질 거란 거. 정말 신통하다니까." 인형의 한 팔을 인사하듯 흔들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씨익 웃었다. 쥬느비에브는 인형을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침대로 쫓아갔다. 그리고 침대 위로 붕 날아서 털썩 누웠다. 쥬느비에브는 인형을 품에 꼬옥 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에이드리안, 보고싶어요. 빨리 와요. 선물 사 가지고. 음, 음냐." ******** 다음날. 쥬느비에브는 어젯밤에 늦게 잔 탓인지 늦잠을 자버렸다. 그래서 옷을 다 입고 대충 식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점심 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짙은 파란색 호박 모양 바지 위에 하늘색 세일러 칼라 셔츠를 입은 쥬느비에브는 하얀색 가방을 휘두르며 열심히 스콜라로 통하는 오솔길로 뜀박질 했다. 하얀색 가방에는 까만 머리의 '가짜 쥬르'가 반쯤 잠겨서 대롱대롱 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오늘 하루 종일 가짜 쥬르와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가짜 쥬르'와 함께 있으면 왠지 에이드리안이 생각나서 아주 기분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하얀색 머리띠를 다시 고정하고 신나게 달렸다. "오늘 점심 특별 메뉴가 내가 좋아하는 샴페인 소스의 새우, 치킨 구인데...음, 게다가 디저트로 모롤라 아이스크림, 아웅~ 맛나겠다. 빨리 가서 먹어야지." 쥬느비에브는 멈춰 서서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다음 다시 발걸음을 재촉 했다. 방금 식사를 마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그녀였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저 쪽에서 들려 왔다. 갈색 머리를 두 갈래로 쫑쫑 땋아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소녀는 쥬느비에브의 절친한 친구, 안느마리였다. 안느마리를 알아 본 쥬느비에브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안느마리! 여기야!!" 안느마리는 금세 쥬느비에브의 앞에 섰다. 레몬색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안느마리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 큰일났어, 쥬느비에브. 어제 그 덩치 말이야, 그 덩치 복수를 한다고 슐뢰르겐에서 또 이상한 녀석이 와서...지금 식당이 아수라장이야."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쭈뼛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에엣? 식당이라고? 음, 음. 안느마리. 나, 난 안 갈래. 어제처럼 이올리젠지 뭔지 그런 거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 가뜩이나 어제 안느마리가 중간에 끼여드는 바람에 안느마리 잘 하면 징계 처분인데. 이올리제 중간에 끼여드는 행위는 징계 처분 감이래. 에이드리안이 와서 혼낼 거야. 분명." 안느마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쥬느비에브에게 싱긋 웃어 주며 집게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걱정마셔. 어제 이올리제는 허가받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징계 처분 받을 일도 없어. 내가 이런 거 한 두 번 해보겠니? 훗. 어서 악당을 물리치러 가자고, 우리." 쥬느비에브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하며 안느마리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가방 속에 얼굴을 삐죽 내밀고 있는 '가짜 쥬르'에게 소근거렸다. "가짜 쥬르, 날 보호해 줘. 알았지? 그럼 새 옷 해줄게." 쥬느비에브는 입을 앙 다물고 다부지게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식당 건물이 보였다. ******** 안느마리의 말대로 식당은 아수라장이었다. 과연 이 곳이 식당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테이블은 저마다 뒤집어져 있고 여기 저기 음식들이 쏟아져 있어 몹시 지저분했다. 가뜩이나 점심 시간이라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식당은 더욱 어수선했다. 그 가운데 엄청나게 덩치 큰 여자가 또 하나의 테이블을 뒤집으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행도 있는지 야비하게 생긴 남자 네 다섯 명이 뒤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식당 <르 뤼센부르>의 지배인 하옌도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문 가에 서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아, 안느마리. 어째 어제 그 사람보다 덩치가 더 큰 것 같은데. 안느마리 4명 합치면 되겠다. 게다가 여잔데. 흠... 저 스콜라는 덩치 순으로 학생회를 뽑나?" "으, 응. 그러게. 나 저런 여자들만 보면 닭살이...나의 미적 감각과는 전혀 맞지 않아. 저 근육이라니....으, 음...." 팔을 문지르며 신음을 내뱉고 있는 안느마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말똥거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때 어느새 다가왔는지 엘크로이츠의 학생회 위원이 말했다. "벌써 오셨군요. 이번에도 스콜라를 지켜 주십시오. 에이드리안 님이나 다른 분들이 계시기만 했어도 절대 이런 일은 없을 텐데...저 여자 분도 슐뢰르겐의 학생회 소속인데 어제 카를로스의 복수를 한다면서 저렇게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쥬느비에브는 학생회 위원의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학생회 위원은 쥬느비에브에게 고개를 돌려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는 학생들이 식사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에에, 식사? 음..."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식사를 못하게 되다니 그런 엄청난 불행이 있다니! 역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어! 쥬느비에브는 식당 중간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옆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던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회장의 약혼녀야. 역시 소문은 사실이었어. 클래스 O가 우리 스콜라를 지키기 위해 비밀리에 창단된 조직이라고 하더니. 저기 봐, 모스테츠 양이다. 아주 험악하게 저 덩치 큰 여자를 노려보고 있어." "그래. 이번에도 반드시 저 무식하게 생긴 여자를 물리쳐 주겠지. 에슈비츠 양이 비록 저렇게 작고 갸냘퍼 보여도 측면 전술의 귀재니까. 믿고 있어, 에슈비츠 양!" 긴장 때문에 학생들의 수근거림을 듣지 못한 쥬느비에브는 뻣뻣하게 걸어가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손을 번쩍 들어 덩치 큰 여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름대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거, 거기, 당신! 당장 그만둬요. 식당을 이렇게 어지럽히면 식사를 할 수가 없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오물오물 입을 놀려 겨우 말을 끝냈다. 막상 앞에서 보니 여자의 덩치는 더 대단했다. 그리고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험악하게 생겼다. 어제 카를로스와 오누이 사이 같다고 쥬느비에브는 생각했다. 정말 두 사람은 분위기도 생김새도 아주 비슷했다. 덩치 큰 여자가 눈썹을 실룩이며 말했다. "오라, 네가 어제 오라버니를 그 지경으로 만든 꼬마로구나? 내 이름은 로잘리다! 어디 한 번 겨뤄 보자!"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로잘리라니? 우웅~ 정말 안 어울리는 이름이잖아. 역시 어제 그 남자와 오누이였구나. 그런데 어제 그 덩치 큰 남자를 쓰러뜨린 건 안느마린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걸까?' 왠지 억울해 지는 쥬느비에브였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 우리 평화롭게 해결하자고요. 여기 식당만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다용서..." 순간 쥬느비에브는 갑작스러운 바람을 맞으며 놀란 눈을 휑뎅그레 떴다. 머리 바로 옆으로 의자가 날아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숨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의자가 바닥에 굴러 박살이 나 있었다. 로잘리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튼 소리하지 말고. 우리 겨뤄 보자고." 순간 다급한 걸음으로 안느마리가 멍한 표정의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 속삭였다. '쥬느비에브, 난 저렇게 우락부락한 여자한테는 비위가 약해서 말이지...레플리카를 쓸 기분은 안 나지만. 대신 내 비장의 무기를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 친구만 이렇게 고생시킬 수는 없지.' 안느마리의 속삭임에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느마리가 나서준 이상 걱정은 없었다. 안느마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그렇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만약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이 수밖에 없다! <안느마리의 정의로운 가게>의 신제품! 최면술 동전!!" 안느마리는 주머니에서 긴 실에 묶인 동전을 꺼내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자라- 자라- 까불지 말고 자라- 어서 자라- 안 자면 블랙으로 간주한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난데없는 괴상한 행동에 표정을 굳히고 멀뚱멀뚱 동전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주변의 학생들이 안느마리의 행동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도,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새로운 전술인가?" "그, 글쎄, 모스테츠 양도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 거겠지." 안느마리는 여전히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동전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로잘리는 시큰둥한 표정을 하며 좀처럼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느마리는 자신의 최면술이 통하지 않자 속으로 움찔했다. 지금쯤 잠에 빠져야 하는데 저렇게 무디다니! 그 때 안느마리는 옆에서 무언가가 휙 하고 자신 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느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든 안느마리는 놀라 소리쳤다. "쥬, 쥬느비에브! 네가 자면 어떻게 해!!" "어? 음냐, 아, 안느마리?" 쥬느비에브는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들어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에 막이 끼인 것처럼 이상하게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 안느마리. 있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쥬느비에브, 지금 저 덩치 큰 여자가 식당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식사도 못하게 됐잖아. 그래서 우리가 악당을 물리치러 여기 온 거잖아. 어서 잠 좀 깨 봐." 안느마리의 닦달에도 쥬느비에브는 졸린 지 고개를 끄덕이며 휘청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음냐, 식사를 못한다고? 아악-당? 음, 음..." 순간 쥬느비에브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몸을 완전히 일으켜 로잘리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느마리는 갑작스러운 쥬느비에브의 행동에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로잘리도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힘차게 달려가다 순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비장하게 외쳤다. "오, 오늘 식사를 못하게 하다니!! 오늘 점심은 내가 좋아하는 새우, 치킨 구이란 말이야! 바보, 꽁치!! 받아랏, 악당! 쥬느비에브 공중 이단 발차기!" 쥬느비에브는 공중에서 붕 하고 한 바퀴 돌더니 정확하게 로잘리의 정수리를 발로 두 번 걷어찼다. 그리고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고는 씨익 웃었다. 쥬느비에브는 뒤돌아서 로잘리에게 다가갔다. 로잘리는 눈을 번쩍 뜬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방 안의 '가짜 쥬르'를 꺼내 로잘리의 이마에 푹 하고 발을 찔렀다. "덤으로 가짜 쥬르 발차기!" 로잘리는 '가짜 쥬르'의 발차기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녀는 이미 쥬느비에브의 새우, 치킨 구이를 사수하고자 뿜어져 나온 가공할 힘의 발차기로 이미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가짜 쥬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고 가방에 쏘옥 집어넣었다. 그리고 두 손을 탁탁 털고는 방긋 웃으며 하옌도르에게 외쳤다. "아저씨!! 여기 오늘 점심 특별 메뉴 2개요!! 모롤라 아이스크림 많이많이 주세요."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더니 살랑살랑 가방을 흔들며 쥬느비에브의 발차기에 놀라 멍해진 표정의 안느마리와 함께 식당의 특별실로 들어갔다. 뒤에 남겨진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놀란 눈으로 서로서로 마주 보았다. "오늘은... 더 대단했지? 평화를 주장하는 척 하면서 결국 자신의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다니...역시 지능적이야....거기다 중간에 자신의 몸을 던져 쓰러지면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래, 모스테츠 양으로 저 덩치 큰 여자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그 사이 멋진 킥으로 적을 쓰러뜨린다! 에슈비츠 양은 발차기도 정말이지 시원하게 잘하더군. 햐-, 나 갑자기 <엘크로이츠>에 가입하고 싶어졌어." 오늘도 학생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에슈비츠 양과 클래스 O에 대해 찬사의 말을 퍼부었다. 그렇게 급격하게 <엘크로이츠>의 가입 희망자가 늘어나고 있을 때, 쥬느비에브는 기대하고 또 기대했던 새우, 치킨구이를 행복한 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아유, 맛나. 역시 맛있다니까. 헤헤." 입에 묻은 소스를 씨익 닦으며 쥬느비에브는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그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정말이지 행복한 하루였다. 그렇게 쥬느비에브가 지켜낸 스콜라에서 또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제41음(第41音) 쥬르, 스콜라를 지켜줘!(4) 에이드리안은 반들반들 닦인 평의회 건물에 들어서고 있었다. 뒤에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가 보고할 내용을 부지런히 읽어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저 깨끗하게 닦여 있는 대리석 바닥에 묵묵히 시선을 고정하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평의회 의장실은 건물 가장 안쪽에 있었다. 복도마다 청소와 기타 잡일을 담당하고 있는 하녀와 하인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꽤 무더웠다. 건물 안은 제법 시원한데도 이상하게 더운 느낌이 들었다. "유벨, 노래 좀 불러 봐. 나 더워." 유벨이 열심히 보고서를 보고 있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에드, 나 지금 바빠."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움찔한 유벨은 한숨을 길게 내뿜고 눈은 여전히 보고서에 고정한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유벨의 노래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냥 풍속성이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더운 날, 힘도 거의 안 들이고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맛볼 수 있으니, 하긴 추운 날도 마찬가지군. 따뜻한 바람을 불게 하면 되니까. 부러운 능력이야..."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평의회 의장실의 문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뒤돌아 서서 말했다. "이제 준비는 다 된거지?" "걱정마세요, 에이드리안 님.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답니다." 미라벨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케이로프도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가 다 되었다는 표시를 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에게 눈짓을 주었다. 유벨이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서 있다가 이내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약 1도르째 보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라벨이 우선 그녀의 딱 부러지는 말투로 꼼꼼하게 이번 회기의 보고를 끝마쳤고 뒤 이어 케이로프가 그의 단정한 목소리로 다음 보고서를 읽어 나갔다. 유벨은 의자에 기댄 채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숙부를 날카롭게 응시하며 자신의 몫을 무사히 끝마쳤다. 에이드리안은 세 명의 보고에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평의회장 각하." 붉은 기가 도는 다갈색 머리카락의 헤르만은 피식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그는 다소 날카롭고 간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뭔가 꼬투리를 잡아주었으면 하는 표정이구나. 건방지게. 네 녀석은 정말이지 맘에 안 들어. 모든 것이." 헤르만은 순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냉각되어 갔다. 에이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글쎄, 아무리 평의회장 각하라도 아무렇게나 꼬투리를 잡으실 수는 없을 테니 그저 말씀드려본 것뿐입니다. 흥분하지 마세요. 몸에 좋지 않으니. 평의회장 각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저로서는 아주 곤란하거든요. 차기 평의회장 선거에 바로 뛰어들어야 하니까요. 아직은 학생 신분이 좋습니다." "거, 건방진! 네 놈의 그 낯짝은 네 애비와 똑같구나. 하는 짓도..." "숙부님!" 유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씩씩거리는 유벨을 보며 헤르만은 무섭게 에이리안과 유벨을 쳐다보았다. "유벨, 너도 한심하구나. 하필이면 이 녀석에게 붙다니. 풍속성으로서 에스프라드의 힘이 되어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평의회장 각하. 더 이상 자극적인 말씀을 하시면 저희들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자중해 주십시오."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헤르만은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험악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돌린 채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도록. 너무 불쾌해 더 이상 마주할 수가 없군. 아참, 에이드리안, 네 약혼녀는 같이 오지 않았나? 이래봬도 내가 주선을 해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뭔가 꿍꿍이가 담겨 있는 헤르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순간 어둡게 눈을 빛내며 지긋이 말했다. "헤르만 숙부. 숙부가 제게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쥬느비에브에게 손을 대시려면 미리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소중하게 아껴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 때처럼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싶지 않으면요. 체면은 세워야 할게 아닙니까? 훗, 후후후."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의 말에 순간 얼굴이 창백해 졌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건성으로 고개를 숙이며 문을 나섰다. 유벨이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고개를 돌려 퍼렇게 질려 있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숙부, 한 번만 더 에이드리안을 괴롭히시면 저와 프란체스 형도 가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자중하세요. 아무리 최고 실권자인 숙부님이라도 대속성 레플리카 두 사람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승산이 없다는 거 아시죠?" 유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헤르만에게 잠시 눈짓을 주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순간 방 안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만이 물건을 던진 모양이었다. 성질이 불같은 숙부였다. 그래서 화속성인가. 유벨은 씨익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 "에이드리안 님, 제발 좀 참으세요. 평의회장이 맘에 안 드셔도 좀 참으시란 말씀이에요. 저희가 뒷감당하기 어렵단 말이에요." 미라벨이 투덜투덜하며 걸어갔다. 케이로프가 옆에서 그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헤르만 마리에 로르 비인 평의회장이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 먼저 시비를 거신 거였어. 그리고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말에 결국 혼자 흥분한 거라고."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또 다시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하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헤르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기분 나쁘고 짜증나는 만남이었다. 유벨이 그런 에이드리안의 기분을 안다는 듯이 어깨를 툭툭 쳤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유벨에게 살짝 미소지어 주었다. 그 때 앞쪽에서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의 하얀색 옷차림과는 대조적인 까만 옷차림의 에스프라드와 짙은 밤색 머리의 올슈틴, 보라색 머리의 오르탕스였다. 살며시 미소를 띄우는 에스프라드와는 달리 올슈틴과 오르탕스는 그저 무표정하게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라벨이 세 사람을 보더니 혀를 쑥 내밀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윽, 보기 싫은 냉혈 3인방이에요." "아아-, 그렇군. 재수 없는 냉혈 3인방."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서로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이 뒤를 돌아보며 눈짓을 주자 두 사람은 일제히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에스프라드가 먼저 말을 건넸다. "빠르군. 보고를 벌써 끝냈나? 훗, 표정을 보니 또 아버님과 한바탕 했나보군. 아버님은 다혈질이라서 말이야. 내가 대신 사과하지." 에이드리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섰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줘. 에스프라드 형과 할 얘기가 있어." 유벨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이드리안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벨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았어.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나와. 알았지? 어이, 미라벨, 케이로프. 우리 먼저 나가 있자."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고 있던 미라벨과 케이로프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유벨과 함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에스프라드도 고개를 끄덕여 올슈틴과 오르탕스를 물렸다.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에스프라드가 에이드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할 말이란?" "미레이유를 돌려주세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에이드리안의 말에 에스프라드는 다소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큭큭. 미레이유를 돌려달라고? 큭큭." 복도를 울리도록 크게 웃던 에스프라드가 얼굴에 싸늘한 빛이 어렸다. 차갑고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 미레이유는 나의 중요한 카드 패니까. 설마 저번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니겠지? 그건 네 약함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다른 사람을 탓해서는 안 되지. 안 그래?" 에스프라드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괴로운 듯 말했다. "부디...그녀를 돌려주세요." "안 돼. 내 사랑하는 누이가 네게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야 없지. 사람의 인정상 그럴 수는 없단다. 그것보다 너 스스로를 단속하는데 더 신경을 쓰는 게 어때? 쿡쿡쿡. 할 수만 있다면."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을 제치고 평의회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는 뒤돌아 서서 에스프라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좋은 패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겐...." ******** 쥬느비에브는 오늘도 학생회실의 책상에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잠자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었다. 비뚤비뚤 굵은 검은 색 펜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쥬느비에브에게 소파에 앉아 쇼핑 물품을 체크하고 있던 안느마리가 물었다. "쥬느비에브, 나도 어제 네가 쓴 그 멋진 발차기 가르쳐 줘. 정말 얼마나 멋졌던지..."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안느마리, 그 건 그냥 화가 나니까 몸에서 힘이 불끈 솟아서...그, 뭐랄까. 맞아. 안느마리가 준 소설책 있잖아. 음, 음, <지구의 평화를 위해, 오색레인져>였던가? 하여튼 거기 말처럼 분노에 몸을 맡겼더니 그런 발차기가 성공하더라구. 나 사실 운동 잘 못하거든." 안느마리는 '분노에 몸을 맡긴다'라고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씹어 보니 정말 멋진 말인 것 같았다. 다시 그림을 그리던 쥬느비에브가 생긋 웃으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나 아주 기분 좋아. 내일이면 에이드리안이 올텐데. 이 그림 열심히 그려서 에이드리안 줄거야. 나, 정말 괜찮은 약혼녀지?" 헤실헤실 웃으며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그림을 한 번 훑어보았다.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비뚤비뚤한 그림이 눈에 들어오자 쥬느비에브는 만족한 듯이 씨익 웃었다. "정말 에이드리안이랑 똑같네. 100점. 그런데 안느마리. 나 지금 스콜라 잘 지키고 있으니까 에이드리안이 와서 칭찬해 줄까?" "물론이지! 에이드리안 님이 너무 감격해서 엄청난 선물을 사오실지도 모르지." "헤에- 정말? 이야- 나 앞으로도 더 힘내서 스콜라를 지킬래!!"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 무언가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안느마리도 쥬느비에브를 바라 보며 말했다. "쥬, 쥬느비에브. 저 발소리는 분명 그 학생회 위원의 발소리. 또 다시 사건이?" "그, 그럴지도. 아, 안느마리, 왜 이렇게 자주 사건이 발생하는 거지? 난 평화주의잔데." 그리고 학생회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낯이 익은 학생회 위원이 달려와 소리쳤다. "크, 큰일입니다. 이, 이번에는 슐뢰르겐의 학생회장입니다! 지금 중앙 공원에서 쥬느비에브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를로스와 로잘리때문인 것 같습니다." 놀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학생회 위원을 보며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둘 다 중얼거렸다. "아아- 역시 이젠 귀찮아." ******** 중앙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어기적어기적거리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느마리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쥬느비에브의 뒤를 따랐다. 공원에서 오늘의 악당 얼굴을 확인한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카를로스와 로잘리와는 달리 아주 정상적인 생김새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학생들의 무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열심히 뒤쫓아온 학생회 위원이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학생회장 크리스티안입니다. 학생회장이라 레플리카 실력도 만만치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쥬느비에브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옅은 붉은 머리결의 크리스티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스콜라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사실 너무 귀찮았다. 더이상의 사건은 그만 사절하고 싶었다. 이 정도로 스콜라를 지켰으면 충분한 것 같은데 왜 자꾸 사건을 일으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옆에서 안느마리가 먼저 나섰다. "보세요. 자꾸 이렇게 우리 스콜라에 침입하면 곤란해요. 그것도 평범한 학생도 아니고 학생회장이 이렇게 경우 없는 짓을 하면 어떻게 해요." 크리스티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플리크는 언제나 우리 슐뢰르겐을 무시했어. 2군이라고 깔보고 업신여겼지. 게다가 이번에 우리 학생회의 중요한 간부를 두 사람씩이나 부상을 입히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우리 슐뢰르겐의 힘을 보여 주겠어. 더 이상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게!" "당신네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요. 우리한테 그래봤자...악!"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안느마리가 쓰러졌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쓰러져 있는 안느마리에게 달려갔다. 안느마리의 왼쪽 이마가 붉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안느마리, 안느마리! 어떻게 해. 혹 났잖아. 어, 어떻게 해." "아야야, 쥬느비에브, 만지지 마. 아파." 안느마리는 이마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혹을 살살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부르르 쥐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내 친구를 상처 입히다니 더 이상은 못 참아. 만약에, 만약에 내가 성공하면 나중에 칭찬해 줘." "...뭐? 뭐가 성공해?" 안느마리가 물어보기도 전에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리스티안에게 다가갔다. 안느마리는 단호한 표정의 쥬느비에브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진지한 모습이라니! 왠지 숙연함마저 느껴지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며 안느마리는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쥬느비에브는 크리스티안의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주변의 학생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번에 이 에슈비츠 양이 어떻게 사태를 해결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안느마리는 걱정스럽게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살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필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크리스티안은 입술을 실룩이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공원에 울려 퍼졌다. "나는 나의 약혼자,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으로부터 엘크로이츠의 전권을 위임받은 에슈비츠입니다. 이 곳은 엄연한 엘크로이츠의 구역으로서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치 않겠으니 당장 물러나세요." 쥬느비에브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리자 크리스티안은 입술을 실룩였다.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쟤가 갑자기 왜 저래? 전혀 쥬느비에브 같지 않잖아!' 곧 이어 크리스티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 슐뢰르겐에 용서를 빌고 다시는 우리 스콜라를 업신여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물러나지."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크리스티안의 약 1레트(주. 참조) 정도 앞에 멈춰선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크리스티안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쥬느비에브의 입에서 날카로운 호통소리가 나왔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열등감에 지나지 않아. 무엇에 대한 열등감이지? 에스플리크에 대한 열등감인가, 아니면 자기자신에 대한 열등감인가! 자신에게 당당해질 수 없다면 타인에 대한 비난은 그 정도로 해둬. 지금 당신들의 모습은 추하고 냄새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것에 분풀이하고 있어. 2군이면 어떻고 1군이면 어떻지? 자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한다면 당신들은 스스로에게 있어 1군이다. 어째서 스스로를 2군으로 몰아세우는 거지?" 바람이 쥬느비에브의 검정색 치마를 펄렀였다. 안느마리는 어안이 벙벙해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쥬느비에브 같지 않았다. 당당한 시선과 냉철한 태도, 그리고 시원스러운 말솜씨. 꼭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느마리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던데. 안느마리는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주변의 학생들은 저마다 쥬느비에브의 말에 감동한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도 당황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뒤돌아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에스플리크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건가. 이 에스플리크란 이름인가. 아니면 그대들 자신인가.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면 슐뢰르겐을 무시하는 것도 그만둬라. 너희들은 자격이 없어. 만약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으로 다른 스콜라를 대해라. 에스플리크가 해야할 일은 그것이다. 모든 스콜라를 한 곳에 모으는 것. 결코 다른 스콜라 위에 군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콜라가 소임을 다했을 때 비로소 에스플리크란 이름을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쥬느비에브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저마다 주의를 뺏기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그저 홀린 듯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릴 생각도 없었다.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너무 멋졌던 것이다. 멍한 학생들의 표정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크리스티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쥬느비에브가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아낀다면 슐뢰르겐이 1군이 될 수도 있음이다. 타인의 눈에 1군으로 보이려고 하지말고 자기 자신에게 1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라. 쓸데없는 경쟁의식보다는 자신을 연마하는데 더 힘을 기울여라. 그렇게 되면 에스플리크는 슐뢰르겐을 진정한 동반자로서 인식할 거다." 크리스티안이 뻐끔하게 입을 벌렸다. 왠지 무언가를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가슴 가득 무언가 벅찬 기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죠?" "내 이름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엘크로이츠>의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의 약혼녀다." 크리스티안은 눈을 깜빡이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크리스티안은 결심했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쥬느비에브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뒤따라온 일행도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공원을 에워싸고 있던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우리를 2군이라 하여 깔보고 업신여길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들 그렇게 볼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이해해 준 첫 번째 사람입니다. 우리 슐뢰르겐은 에스플리크의 <엘크로이츠>를 위해 스스로를 연마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동반자로서 나란히 서겠습니다. <엘크로이츠>와 우리 슐뢰르겐은 이제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라...좋은 어감이군."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크리스티안을 일으켜 주었다. 두 사람은 모든 학생들의 박수 속에 악수를 나누었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있었다. ******** "헥- 헥- 헥-. 아유, 힘들어. 헥- 헥-" 학생회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쥬느비에브는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느마리가 부지런히 쥬느비에브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안쓰럽게 말했다. "쥬르, 웬 땀을 이렇게 흘리는 거야. 그나저나... 아까는 굉장하던데?"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가 씨익 웃었다. "나 에이드리안 흉내 잘 내지? 평소에 내가 얼마나 연습 많이 했는데. 역시 난 실전에서 강하다니까. 그런데 나 긴장되어서 죽을 뻔했다? 사실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억지로 참았단 말이야. 어휴, 폼 잡고 서 있는 것도 너무 힘들어. 안느마리, 나 칭찬해 줘. 오늘도 스콜라를 지켰으니까." "그래, 오늘 최고였어." 안느마리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땀이 찬 이마를 쓱 닦으며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나, 이제 집에 갈래. 에이드리안이 귀가 시간 체크하라고 톨레 아저씨한테 얘기했거든. 안느마리, 그럼 안녕!" 쥬느비에브는 싱글거리며 학생회실을 나섰다. 안느마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다니까. 쥬느비에브. 오늘은 정말 에이드리안 님 같았어." ******** 달 밝은 밤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 집에 가서 하룻밤만 자면 내일은 에이드리안이 올 것이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외로워 할 필요도 없고 에이드리안이 보고 싶어 울 필요도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너무 보고 싶었다. 돌아오면 같이 즐겁게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리라고 생각했다. 가방을 흔들며 신나게 오솔길을 걸어가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멈춰 섰다. 익숙한 뒷모습을 본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약간 호리호리한 몸매에 우아된 몸짓. 긴 금발의....에이드리안이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폴짝폴짝 뛰어가서 에이드리안에게 안겼다. 하얀색 셔츠와 바지 차림의 에이드리안이 뒤돌아보며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너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가고 뭐한 거야?" "에이드리안이야말로 내일 온다고 했잖아요. 훌쩍, 나 많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훌쩍. 에이드리안 말대로 나, 스콜라를 지키느라고 많이 바빴단 말이에요." 어느새 훌쩍이는 쥬느비에브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그래그래. 조금 일정을 앞당겨서 일찍 온 거야. 선물 잔뜩 사왔으니까 어서 들어가자. 너 마중 나온 거였어." 쥬느비에브가 보고 싶어서 지친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를 닦달해 일찍 왔다는 이야기는 쑥스러워서 하지 못한 에이드리안이었다.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을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에에, 그 거 말고. 우리 약속한 거." 에이드리안이 파란색 눈동자를 빛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말이야?" "키스 삼십 다섯 번." "아아, 그 거.... 음...쥬느비에브, 그 거 내일 하면...." "아이, 해줘요. 빨리...."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즐겁게 실랑이를 즐기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아주 오래 떨어져 있었던 느낌에 두 사람은 서로가 아주 반가웠다.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잡고 시원한 밤 공기를 마시며 시선을 마주 했다. 따뜻한 달 그림자와 부드러운 바람이 너무 기분 좋았다. ******** 다음 날.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쇄도한 학생회 가입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렇게 가입 허가를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옆에 놓여져 있는 다른 서류에 눈을 돌렸다. 슐뢰르겐 레플리카 스콜라의 학생회가 <엘크로이츠>에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원조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서류에 눈을 돌린 에이드리안은 잠시 눈을 찌푸리더니 황급히 서류를 넘겨보았다. 서류에 가득가득 그려진 그림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다음 회기 서류였다. "쥬르, 너 이리 안 와? 다음 회기 서류에 낙서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응? 도망갈 거야? 이리 안 와?" "에-이, 그거 에이드리안이란 말이에요. 잘 그렸는데 맘에 안 들어요?"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이 돌아와서 마냥 즐거운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은 이리저리 도망치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림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나도 안 닮았잖아.' Creation Note-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Creation Note No.1 - 정체를 밝혀라!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레플리카∼>의 무대가 되고 있는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오늘은 이 곳의 정체를 샅샅이 밝혀 보겠습니다. Q.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그 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A. 귀족 출신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음악 학교이자 특수 교육 기관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레플리카가 중요한 척도가 되는 아르헨의 사회에서 레플리카를 발굴하고 양성하기 위한 기관의 필요성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귀족 연합인 평의회에서 주축이 되어 이 에 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가 건립된 것입니다. Q. 무엇을 배우는가? A. 기본적인 레플리카의 운용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레플리카의 사용법을 마스터하게 됩니다. 또한 전쟁 중에 사용하기 위한 기술들이 다수 포함되 어 있습니다. 레플리카를 사용하기 위한 음감을 키우기 위해 따로 성악, 기악, 작곡 등을 배우기도 합니다. Q. 언제 입학해서 언제 졸업하는가? A. 보통 7살이 되면 입학이 허용됩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은 7살이 되면 스콜라에 입학하게 됩니다. 졸업은 13학년이 되는 19세에 하 게 됩니다. 중간에 월반 같은 과정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 라도 13년을 다 채워야 졸업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학생은 1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진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졸업할 때의 랭크가 아르헨의 최고 실권을 가진 평의회로 소속되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대부 분의 학생들은 스스로가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참고로 에이드리안은 7살 에 입학하여 현재 11학년이고 에스프라드는 13학년으로 졸업반입니다. 쥬 느비에브는 이번에 10학년으로 편입해야 하지만 실력이 검증되지 않아 학 년 편입이 보류 중인 상태입니다. Q. 졸업하고 나서 무얼 하는가? A. 레플리카 실력이 뛰어난 소수의 사람들은 바로 평의회에 소속됩니다. 그 때부터는 아르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실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보다 약간 못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각각의 집행 부처에 소속됩니다. 귀족 가문의 레이디들은 신부 수업을 받고 바로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Q. 귀족만 다닐 수 있는 곳인가? A. 그렇지는 않습니다. 90%이상이 귀족 출신의 학생들이고 그 중 30%이 상이 대귀족 출신이지만 뛰어난 레플리카의 소유자라면 평민이라도 예외 적으로 입학을 허용합니다. 실제로 평민 출신이 학생도 다수 재학 중입니 다. Q. 시설은 어떠한가? A. 아르헨의 최고 기관인 평의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된 기관이라 시설은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귀 족 가문에서의 후원도 엄청난 편입니다. 본관을 비롯하여 다수의 건물군 이 중앙의 학원부지에 위치하고 외곽으로 학생들의 사택이 약 130여개 있 습니다. 그리고 바깥 쪽으로는 거대한 숲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학 원 주변에는 귀족 출신의 학생을 주 고객으로 하는 많은 상가 건물이 들 어서 있어 일종의 번화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150여년 전의 대전쟁으로 학원 시설이 한 번 소실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모두 복원된 상태입니다. Q. 교장 선생님은 누구인가? A. 없습니다.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는 한 사람의 책임자가 전담하 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평의회장이 이사장이 되고 5대 대귀족 가문의 수 장이 이사회의 멤버가 되어 스콜라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 나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 대소사의 결정은 자율적으로 학생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Q. 선생님이 안 보인다. 어디로 간건가? A. 특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선 스콜라에서 학생을 가르치려면 뛰어난 레플리카 실력을 가져야 하는데 학생들을 가르칠만한 실력의 사람 들은 거의 졸업 후 평의회 소속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 상급생이 하급생을 가르치는 형식을 띄게 됩니다. 고학년생들 중 졸업 후 평의회에 소속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1 년에 한 번 스콜라의 모든 학생들은 <체리욜파쳰>이라는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이 때는 상급생도 테스트를 받기 때문에 참관인이자 랭크를 매기 는 심사 위원으로서 비인 가문의 사람들과 5대 귀족가문의 수장, 평의회 의원들이 참석합니다. Q. 전교생은 대략 몇 명인가? A. 정확한 숫자를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보통 한 학년이 4개의 클래스로 이루어져 있고 클래스의 인원이 20명 남짓이기 때문에 스콜라 전체의 학 생 인원은 (4×20)×13 = 1040, 대충 1000명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Q. 학생회는 어떻게 조직되는가? A. 대속성 레플리카의 소유자를 중심으로 학생회가 조직됩니다. 대속성 레플리카를 보유한 사람이 미래의 평의회장 후보가 되기 때문에 이 조직 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학생회의 세력이 커 지면 후일 스콜라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세력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학생회에 대해서는 다음 Creation Note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 Q. 반은 어떻게 나뉘는지? A. 레플리카의 랭크에 따라 반이 갈립니다. 가장 뛰어난 레플리카의 소유 자를 우선 클래스 A로 분류하고 그 다음 사람들을 클래스 B로 분류하는 식입니다. Creation Note- 학생회 편 Creation Note No.2 - 단순한 학생회인가! 정치 조직인가! <엘크로이츠 Vs 라데팡스> 이번 Creation Note에서는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학생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Q. 현재 스콜라에는 어떤 학생회가 존재하나? A. 현재 스콜라에는 <엘크로이츠>와 <라데팡스>, 두 개의 학생회가 존 재합니다. 에이드리안이 입학하기 직전에는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 군의 <라데팡스>와 프란체스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의 <슈르트홀츠> 두 개의 학생회가 있었습니다. 에이드리안 군이 입학 한 이후 <슈르트홀츠> 의 회장 프란체스 군이 자진하여 에이드리안 군의 <엘크로이츠>에 소속 됨으로써 슈르트홀츠의 세력은 완벽하게 <엘크로이츠>에 흡수되었습니 다. 현재는 <엘크로이츠>와 <라데팡스>가 거의 비슷한 세력권을 형성하 고 있는 실정입니다. Q. 각각 학생회의 주요 멤버는 누구인가? A. 우선 <엘크로이츠>는 광(光)속성 레플리카를 보유하고 있는 에이드리 안 블랑쉬 로르 비인 군이 학생회장을, 풍(風)속성 레플리카의 보유자인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이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5 대 대귀족 가문의 자제로서 각각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미라벨 브레시 아 모르 뤼베이크 양과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 군이 보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에이드리안 군과 약혼한 에슈비츠 공작의 양녀, 쥬느비에브 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이 곧 합세하게 됩니다. <라데팡스>의 학생회장은 수(水)속성 레플리카의 소유자인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 군으로, 5대 대귀족 가문 중 하나인 드레이노 가문의 후계자, 올슈틴 파라 모르 드레이노 군이 부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 고 역시 5대 대귀족 가문인 메젠 가의 후계자, 오르탕스 아스타나 모르 메젠 양이 뒤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이 외의 멤버외에 각 학년 대표와 각 클래스 대표가 선출되어 학생회의 주요 임원을 맡게 됩니다. 이 경우 클래스 A의 대표가 학년 대표를 겸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Q. 졸업한 학생회 멤버는 어떻게 되는가? A. 졸업한 학생회 멤버는 미리 사회에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기반을 닦습니다. 프란체스 군의 경우, 이미 4년 전에 스콜라를 졸업하여 현재 평의회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에스프라드 군의 누나인 엘로이 즈 르미엔 로르 비인 양도 현재 졸업하여 평의회에 속해 있는 상태입니 다. 이렇게 사회에 진출한 멤버들은 스콜라의 학생회장에게 정보를 제공 하고 필요에 따라 특정 인물이나 기관에 압력을 가하는 등 학생회장이 사 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임무를 맡게 됩니다. Q. 학생회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가? A. 현재 <라데팡스>와 <엘크로이츠>는 각각 스콜라 학생의 절반 정도를 멤버로 두고 있습니다. 학생회 소속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학생이 학생회에 소속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Q. 학생회장 자격은 어떻게 되는가? A. 학생회장은 대(大)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傳承者)나 그 대(代)에 대속 성 레플리카의 전승자가 없으면 전승 후보자들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 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 대에 많으면 6개의 학생회가 난립할 수도 있으나 스콜라의 기록에 따르면 그런 전례는 없다고 합니다. 대속성 레플리카가 비인 가문에만 전승되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학생회장은 비인 가문의 사람 으로 선출됩니다. 현재 아르헨에는 1개의 대속성 레플리카가 소실되어 5 개의 대속성 레플리카가 전해지고 있는데 풍속성과 지(地)속성 레플리카 의 전승자인 유벨 군과 프란체스 군이 에이드리안 군의 세력권으로 흡수 됨으로써 사실상 학생회장 자격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화(火)속성 레플 리카의 전승 후보자인 엘로이즈 양도 역시 동생인 에스프라드 군의 세력 권에 있기 때문에 스콜라 재학 시절에 학생회장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 습니다.(현재 화(火)속성 레플리카는 평의회 의장인 헤르만 마리에 로르 비인 씨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부회장 자격은 특별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Q. 왜 학생회장 자리에 다들 연연하는 것인지? A. 아르헨의 최고 권력 기관인 <아르헨 귀족 연합 평의회>의 최고 실세 (實勢)라고 할 수 있는 평의회장을 스콜라의 학생회장 출신들 중에서 선 출하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 다음 대(代)의 평의회장 후보는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들이 각각의 후보에게 흡수된 상태이기 때문에, 에이드 리안 군과 에스프라드 군으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평의회장에 선출된 학 생회장은 대부분 자신이 스콜라 재학시절 함께 했던 멤버들을 그대로 기 용하기 때문에 스콜라의 학생회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콜라의 학생회는 단순한 학생회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차기 아르헨의 실권을 얻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Creation Note- 레플리카 편 Creation Note No.3 - <레플리카>란 무엇인가! [레플리카]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Q. replica의 정의는? 사전적 의미로는 1. 원작자에 인한 원작의 모사(模寫) 2. 복사, 복제 3. 樂 빈복 입니다.(한컴 사전 참조입니다. 혹시 사전을 찾아 보았는데 뜻이 다르다는 분... 그냥 넘어갑시다! ^-^) 여기서 복사, 복제의 뜻인 1, 2번은 제쳐두기로 합니다. 나중에 에이드리 안이 어떻게 하다 죽어서 열 받은 쥬느비에브가 그를 복제인간으로 만드 는... 그런 일은 아마 거의 99.9%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 <레플리카 replica...당신에게로의 선율>에서 사용되는 replica의 뜻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전적 의미의 세 번째. 음악에서 쓰이는 <반복>이라 는 뜻입니다. 이 것은 결말과 상관이 있는 터라 더 이상 자세하게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무사히 글을 끝까지 쓰게 된다면, 그리고 제가 제 대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아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레플리카를 이르는 다른 하나의 뜻은 극 중에서 사용되는 레플리 카의 정의 즉, '정신 에너지를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번 Creation Note에서는 이 두 번째 뜻의 레플리카에 대해서 집중적으 로 알아 보겠습니다. Q. 레플리카는 무엇인가? 아르헨의 사회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능력으로서 노래를 하거나 악기 연주 를 하는 등의 행위로서 정신 에너지를 표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딱히 집 어서 이것이 레플리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레플리카를 사 용하다'라고 하면 노래 등으로 정신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 그냥 초능력을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그러나 일반 만화나 소설에서의 초능력은 등장 인물이 눈빛만 주면 물건도 들어 올리고 뿅-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레플리카의 경우, 그 사이에 '음악'이 라는 매개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대충 이해되셨죠? Q. 다른 나라 사람들은 레플리카를 못 쓰나? 이상하게도 아르헨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레플리카를 사용하는 사람 이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사용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이웃 나라에서도 레플리카에 대한 연구가 있었지만 모두 실 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레플리카는 아직 미 지의 능력이기 때문에 현재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가 많습니다. Q. 아르헨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선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레플리카 의 보유자'라고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Q.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아르헨은 레플리카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이기 때문에 초창기 건국 시기 부터 레플리카 사용자가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이후 비인 가문과 5대 대귀족 등 일련의 귀족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대부분의 레플리카의 사용자는 귀족 출신입니다. 특히 비인 가문과 5대 대귀족 가문의 사람들이 강력한 레플리카를 사용합니다. Q. 그렇다면 레플리카는 유전인가? 유전은 아닙니다. 실제로 귀족 가문에서도 레플리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민 출신 중에서도 뛰어난 레플리카 실력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전이 아님에도 불 구하고 대부분의 레플리카 사용자는 귀족으로서 그 이유는 역시 미스테리 입니다. 대속성 레플리카도 한 직계에 쭉 이어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비 인 가문 안에서 무작위적으로 전승되는 편입니다. 아버지가 레플리카의 사용자라고 해서 그 아들이 레플리카를 이어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요. Q. 대(大)속성 레플리카란 무엇인가? 레플리카를 사용함에 있어서 특정한 속성을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러한 사람들의 레플리카를 따로 통칭하여 대속성 레플리카라고 합니다. 광(光), 암(暗), 수(水), 풍(風), 지(地), 화(火)의 6가지 속성이 있으며 대속 성 레플리카는 속성을 띄지 않는 무속성 레플리카에 비해 월등한 힘을 가 집니다. 때문에 대속성 레플리카의 보유자들은 일반 무속성 레플리카의 보유자들에 비해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다른 레플리카와 대속성 레 플리카를 비교해 볼 때, 사용에 있어서는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만 예 를 들어 화(火)속성의 레플리카를 사용하면 물을 마르게 한다던지 이런 일에는 확실히 더 효율이 높겠지요. 현재 대속성 레플리카는 비인 가문에 만 전승되고 있습니다. 한 대(代)에 한 속성 당 한 명씩 6명에게 각각의 속성이 전승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를 위한 전승 후보자가 선택되어 집니다. 전승 후보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집니다. 처음부터, 무속성의 다 른 사람들에 비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속성으로서의 색채를 띄고 있는 것 이지요. 그리고 전승자가 죽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다음 전승 후보자에게 속성이 전이됩니다. 그리고 다시 전승 후보자가 선택되 는 것이지요. Q. 대속성 레플리카는 왜 비인 가문에만 전승되는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속성 레플리카가 전승되기 때문 에 비인 가문은 비록 작위는 없지만 다른 5대 대귀족 가문보다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아르헨 귀족 연합 평의회>의 의장이 비인 가 문에서 뽑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Q. 주로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 처음 레플리카의 주 사용처는 전쟁터였습니다. 다른 나라가 아르헨을 쉽 게 침략하지 못했던 이유도 이 것이었습니다. 군인을 몇 백명을 보내도 레플리카 보유자 한 명에게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대속성 레플리카의 사용자는 많을 경우 몇 천명의 사람들을 상대하기도 했기 때 문에(...괴물 같군요...-.-;) 아르헨의 침략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50여 년 전의 대전쟁에서도 레플리카를 사용하여 결국 아르헨의 승리로 끝이 났지요. 레플리카의 실력이 낮은 사람들은 그룹을 지어 '합창'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레플리카의 능력이 증폭되어 보다 효과를 낼 수 있 습니다.(무슨 효과? 사람 많이 죽이는? ㅠ.ㅠ 써 놓고도 한기가 드는군 요..) 그러나 전쟁이 150여년 간 없었던 현재의 아르헨에서는 권력의 유지 수단 으로서 레플리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웃 나라의 침 입에 대한 레플리카 교육이 실시되고는 있지만요. 그 외에 에이드리안처럼 화가 났을 때, 기분이 나쁠 때, 화풀이 용으로 레 플리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치료 용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람마 다 사용 방법은 가지 각색이지요. Q. 레플리카 능력을 향상 시키려면? 음악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능력의 80%는 선천적인 것이지 만 20%정도는 노력입니다. 우선 여러 가지 음을 체화시켜야 합니다. 보다 많은 음을 알고 다양한 파장의 소리를 알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을 발산 할 수 있을 때 보다 폭 넓은 레플리카의 사용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이러 한 교육을 위해 설립된 기관이 바로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입니 다. Q. 레플리카를 사용할 때, 어떤 음악이 좋을지? 사람마다 그 때 그 때 사용하는 음악이 다릅니다. 가사가 없는 음악을 좋 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사가 있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클래식이 있다면 일반 가요도 있겠지요. 상황에 따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곡목은 선택되어 집니다. Q. 약점은 없나? 딱히 약점이랄 것은 없으나 레플리카를 사용할 때 정신이 집중되기 때문 에 근거리 물리 공격에 노출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이를 위해 따로 무술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고 에이드리안처럼 사격을 연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이드리안의 경우는 거의 취미 삼아 하는 것이지만요. Creation Note- 인물 소개 편 Creation Note No.4 - Character Profile, 그 녀석이 알고 싶다!!(1) 알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등장한 사람들과 이름이 거론된 캐릭터의 정보만 있지요. ^-^) 밑으로 start! #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 17세. 男. 현재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11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금 발에 푸른 눈을 한 귀공자 스타일의 소년이지요.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 자로서 현재 스콜라의 학생회 중 하나인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장을 맡 고 있습니다. 수려한 용모와 우아한 언행으로 스콜라 내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이 중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 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실제로 남학생들의 지지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 습니다.) 아르헨의 대귀족가인 비인 가의 방계 혈족 출생으로 어릴 때부터 화려한 외모와 완벽한 광속성 레플리카의 구사로 '비인 가문의 천재'라 불 리며 가문의 기대주로 자라 왔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 으며 쭉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의 집에 신세를 지다가 3년 전, 가문의 가장 어른이신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화려한 외모로 일견 차갑고 다소 거만한 인상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 보면 순진한 구석이 있는데다 다정다감하고 여린 심성의 소유자입니다. 취미는 당연히 <차 마시기>입니다. 그 밖에 피아노 연주하기, 사격 연습, 승마 등 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있지요. ⇒처음에는 거만하고 말수도 적은 설정이었지만, 쥬느비에브를 붙여 놨더 니 이런 성격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은 거의 극과 극을 오가는 성격이 되었지요. 소리 지르다가 다정하게 속삭이다 소리지르다가 다정하게 속삭 이다....(에드 군! 힘들어도 파이팅! @.@!) #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 16세. 女.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 어느 날 불쑥 편입해 버린 소녀 입니다. 에이드리안의 약혼녀 자리를 거머진 행운아라면 행운아인 그녀는 검은 생머리와 커다란 검은 눈망울, 다소 마른 듯한 몸매로 가끔씩 인형 같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스콜라에 편입하기는 했지만 레플리카 능 력은 전무한 소녀입니다. 덕분에 학년 배정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생활에는 잘(...) 적응하고 있는 듯 합니다. 현재는 약혼자인 에이드리안이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장이라 자동적으로 <엘크로이츠>에 소속된 상태입니다. 에슈비츠 공작의 양녀로서 그다지 가문에서 환영받고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평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쥬느비에브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어 보이지 만 그것은 지극히 먼날 밝혀질 일입니다. 일견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고 바보같은 그녀이지만 사실은 아주 귀엽고 착한 소녀입니다. 취미는 <간식 먹기>입니다. ⇒초기 설정에는 엄청 얌전하고 수줍은 성격이었답니다. 지금은 사고란 사고는 죄다 몰고 다니는 문제아가 되어버렸지만. ^-^;(미안해, 쥬르∼ >.<) #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 # 19세. 男.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13학년에 재학 중인 에스프라드 군 은 올해 졸업입니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를 가진 수려한 용모의 그는 <엘크로이츠>와 대립하고 있는 <라데팡스>의 학생회장입니 다. 이 이야기의 악역이라면 악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라데팡스>의 회 장이면서 스콜라에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는 비인 본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수(水)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 그의 레플리카는 지금까지의 수속성 레플리카 중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일컫어지고 있습니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차기 평의회장으로서 기대되는 유망주였고 특히나 그의 아버 지인 헤르만 마리에 로르 비인 씨가 현재 평의회의 의장이기에 지금도 막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도 그의 말에는 함부로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차가운 표정과 감정없는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 로 하여금 그를 충분히 두렵도록 만듭니다. 에이드리안과는 일방적인 사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프라드 군이 다시 등장하면 나머지 이야기는 하도록 하지요. 취미는 승마와 사냥입니다. ⇒에이드리안의 설정이 정해졌을 때 같이 정해진 에스프라드 군입니다. 차갑고, 감정 없는, 그리고 치밀한 성격... 이것이 에스프라드 군의 중심되 는 성격입니다. 캐릭터의 특징 상 많이 등장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나올 때마다 즐겁답니다.(에스프라드 군∼ 좋아요! 냉혈꽃미남!) # 미레이유 리리아 로르 비인 # no comment #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 18세. 男.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12학년에 재학 중인 유벨 군은 풍 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지금은 <엘크로이츠>의 부회장입니다. 에이 드리안의 사촌형으로서 언제나 그를 곁에서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에이 드리안과는 어릴 때부터 알아 왔으며 동생이 없는 그로서는 에이드리안에 게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어릴 때의 에피 소드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요.(언젠가는 외전에서 다루게 될지도 모르겠 습니다.) 대속성 레플리카의 보유자로서 학생회를 만들 수도 있는 위치이 지만 <엘크로이츠>에 소속됨으로서 그 자격을 버렸습니다. 그의 형, 프란 체스의 <슈르트홀츠>가 있었을 당시, 부회장직을 부탁받았지만 "에이드리 안이 입학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습 니다. 회색 머리결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유벨 군은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스콜라의 모든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쥬느비에브의 은근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레플리카 실력은 역시 발군입니다. 게다가 바이올린 도 썩 잘 연주한다고 합니다. 취미는 글쎄요...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 다. 역시 에이드리안 놀려먹기? ⇒유벨 군은 초기 설정과 가장 비슷하긴 하지만... 역시 그도 처음에는 웃 음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에이드리안 놀려먹기가 거의 취미생활이 된...ㅠ.ㅠ 안느마리 양의 등장으로 인생이 고달파진 유벨 군입니다. #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 17세. 女.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11학년에 재학 중인 미라벨 양은 대귀족 중에서도 특히 세력이 큰 5대 대귀족의 뤼베이크 가문의 후계자입 니다. 뤼베이크 공작의 둘째 딸로서 어릴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다른 형제, 자매들을 제치고 후계자 자리를 거머쥐었습니다. 현재 <엘크로이츠 >에 소속되어 있고 에이드리안을 보좌하고 있습니다.(알고보니 에이드리 안과 같은 나이군요.) 다홍색 머리에 다소 붉은 기가 도는 파란 색 눈의 미라벨 양은 스콜라의 레이디들을 이끄는 '스콜라의 여왕' 같은 존재입니 다. 에이드리안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굴러온 돌, 쥬느비에 브에게 자리를 빼앗겨 버린 비운의 여인이지요. '오늘의 에스플리크'에 연 재 중인 '미라벨 양의 칼럼'은 레이디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 다. 독자 중 남학생들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한편 미라벨 양은 옳고 그름 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하는 '정의'를 사랑하는 소녀이기도 합니다. 하는 일도 야무지고 딱 부러지지요. 귀족 가의 특성답게 다소 거만하고 딱딱하 게 느껴지긴 하지만 본디 마음씨는 착하고 여린 아가씨입니다. 에이드리 안의 뒤를 미행하는 등 다소 철이 덜 든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케이로 프와는 에이드리안을 사이에 둔 앙숙입니다. 처음에는 쥬느비에브를 아주 싫어했지만 어느새 그녀를 응원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지요. ⇒미라벨 양은 처음 설정과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미라벨 양!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구!) <안젤리크>의 로잘리아가 모델이라면 모델입니다. 한 글판 안젤리크 스페셜의 로잘리아 목소리...딱 미라벨이에요. #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 # 18세. 男.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1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유벨과는 동급생이군요. 역시 <엘크로이츠> 소속인 케이로프 군은 붉은 머리 카락 에 다소 엹은 붉은 색 눈동자의 소년입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무미건조 한 톤으로 말하지요. 그러나 에이드리안에게만큼은 미소를 보여줍니다. 그 보다 에이드리안에게만 어리광을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방 국가에 잠시 유학을 다녀 온 일이 있는데 그 때부터 이상한 말버릇이 생겨버렸습 니다. 하늘의 뮤즈에 대한 흥분이라고 할 까요... 5대 대귀족 가의 하나인 에르슈바이크 가의 후계자입니다. 에르슈바이크 공작의 셋째 아들이지요. 현재는 쥬느비에브의 스승으로서 그녀에게 레플리카 수업을 하고 있습니 다. 스스로는 꾀 많은 쥬느비에브 때문에 애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무엇보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 낼 수가 없지요.) 역시 레플리카 실력은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의 높낮이 없 는 목소리를 들으면 과연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의심이 들 뿐입니다. 미 라벨과는 늘 싸우는 편이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가끔씩 서로의 공동 목표를 위해 합심할 때는 최고의 콤비를 보여줍니다. ⇒사실 언제 설정한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 새 정신차려보니 쥬느비 에브의 선생이 되어 있는 케이로프 군. ㅡ.ㅡ; #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 16세. 男.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 10학년에 재학 중인 일명 흑백소 녀, 안느마리 양은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의 '소녀'입니다. 쥬느비에브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언제나 쥬느비에브와 함께 움직이며, 레플리카 실력 이 전무한 쥬느비에브를 지켜주는 의리의 친구죠. 또한 에드-쥬르 커플의 전폭적인 지지자이기도 합니다. 쥬느비에브를 만나기 전에는 <라데팡스> 의 시크릿 멤버로서 풍기위원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콜라 학원 의 평화를 위협하는 자들을 일소하기 위한 직책이지요. 그녀는 일명 '징계 의 여왕' 혹은 '흑백소녀'라 불리며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왜 '흑백소녀'라 불리는가 하면 우선 사람을 만나면 흑백 논리에 의해 '흑'과 '백'으로 나눈 다음 '흑'은 가차없이 그녀의 기괴한 레플리카 로 처단하기 때문이죠. 평민 출신이지만 레플리카 실력이 뛰어나 스콜라 의 입학이 허가되었습니다. 안느마리는 5형제 중 막내인데 딸이 너무 가 지고 싶었던 부모님과 귀여운 여동생이 너무 가지고 싶었던 4명의 형들 때문에 지금껏 여자로서 자라왔습니다. 물론 본인도 이런 생활이 아주 마 음에 드는가 봅니다. 안느마리 집은 꽤 유명한 무역 회사입니다. 여러 가 지 수입품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요. 안느마리와 그의 형들도 각각의 가게 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벨과는 러브러브 관계, 미라벨-케이로프 콤비와는 서로 아웅다웅 하는 관계입니다. ⇒분명 초기 설정 때는 진짜 여자였던 안느마리 양. 쥬느비에브의 귀엽고 발랄한 친구 겸 미라벨-케이로프 연합 콤비의 라이벌 겸 유벨 군의 러브 러브 겸... 여러 가지 역할을 가지고 태어난 캐릭터입니다만...글 쓰면서 그 만 성별이 뒤바뀌어 버린 비운의 인물이죠. (안느마리 양∼ 그래도 남자여도 좋지? ㅠ.ㅠ) # 프란체스 비앙카 로르 비인 # 23세. 男. 아르헨 평의회에 소속되어 있는 프란체스 군. 아니 프란체스 씨 라고 불러야 할까요. 어쨌든 프란체스는 유벨 군의 하나뿐인 형입니다. 지 (地)속성 레플리카를 보유하고 있지요. 프란체스 역시 에스플리크 레플리 크 스콜라 출신으로 이미 졸업한 상태입니다. 한 때 스콜라 학생회 <슈르 트홀츠>의 학생회장이었지만 에이드리안이 입학하고 나서 <엘크로이츠> 에 소속되었습니다. 때문에 현재는 <엘크로이츠> 세력에 합세한 상태입 니다. 유벨 군의 형 답게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에이드리안에 게도 친형같은 존재입니다. ⇒아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여러 번 이름이 거론된 프란체스. 그 가 등장할 날은 과연 언제 일까요? # 헤르만 마리에 로르 비인 # 나이 불명. 그냥 아마 꽤 되었다고 생각해 주세요.(당연히 중년이겠지요.) 에스프라드의 아버지입니다. 현재 평의회 의장이지요. 아르헨의 최고 실권 자로서 화(火)속성 레플리카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에이드리안을 몹시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역시 아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헤르만 씨. 등장할 날을 기다리고 있 습니다. #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 # 나이 불명. 할머니입니다.(나이는 대충 감 잡으셨나요? ^-^) 비인 가의 최 고령이지요. 에이드리안과 유벨 등의 할머니입니다. 에이드리안은 현재 일 로나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일로나 할머니는 언제나 에이 드리안의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그녀의 정체가 또 하나 있지만 아직까지 는 비밀입니다. # 그 외 기타 등등 닥터 하우먼 : 비인 가의 주치의 중 한명. 루이즈 : 에이드리안의 하녀장. 톨레 : 에이드리안의 집사. 하옌도르 : 스콜라 학생 식당 <르 뤼센부르>의 총지배인.(지금까지 대사 한 마디 없었지요..-.-;) 이상입니다. 다른 인물들은 등장한 다음 다시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Creation Note- 계급 제도 편 Creation Note No.5 - 계급 제도를 밝혀라! 특히 <비인 가문>과 5대 대귀족 가문!! 아르헨의 계급제도와 귀족 가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Q. 아르헨의 계급제도는 어떻게 되어 있나요? A. 그렇습니다. 아르헨은 계급 사회입니다. 아르헨의 계급은 크게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고 귀족은 다시 대귀족과 소귀족으로 나뉩니다. 대귀족 중 에서 다섯 가문은 특별히 5대 대귀족이라고 불리며 대귀족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특수 귀족 가문인 비 인 가가 있습니다. 1계급 : 비인 가. (로르) 2계급 : 5대 대귀족. (모르) 3계급 : 5대 대귀족을 제외한 대귀족. (모르) 4계급 : 소귀족. (베르) 5계급 : 평민. (올) Q. 그렇다면 아르헨은 엄격한 계급사회인가? A.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인 가와 5대 대귀족 가문이 부동의 위치를 점하 고 있고 또한 귀족 가문의 세력이 거대하긴 하지만 개인의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고 자신의 가문을 번창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계급이 높아도 자신의 능력이 보잘 것 없다면 인정받지 못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신분이 비록 평민이라도 레플리카 실력 이 좋다면 상류 교육기관인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 입학 할 수 있 는 것입니다. 고로 계급도 계급이지만 개인의 능력도 중요한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Q. 대귀족과 소귀족은 어떻게 구분되나? A. 대귀족은 공작, 후작, 백작 가를 지칭하고 나머지 자작, 남작 가는 소 귀족이 됩니다. Q. 5대 대귀족 가문은 어떤 가문이 있나? A. 5대 대귀족 가문은 건국 초기, 시조 아이슬로데를 곁에서 도왔던 제국 출신의 황자, 황녀가 세운 가문입니다. 미라벨 양의 뤼베이크 가, 케이로 프 군의 에르슈바이크 가, 쥬느비에브의 에슈비츠 가, 올슈틴의 드레이노 가, 오르탕스의 메젠 가가 있습니다. Q. 비인 가문은 왜 특수 귀족 가문인가? 건국 시조 아이슬로데의 가문이어서기도 하지만 비인 가에만 대속성 레플 리카가 전승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5대 대귀족 가문과 결정적인 차이 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슬로데와 결혼한 로스페니르가 그와는 다른 의미 의 능력자였기 때문입니다. 항간에는 그녀가 자연을 움직일 수 있다하여 로스페니르를 마녀라고도 불렀습니다. 하여튼 비인 가에는 다른 가문에는 전승되지 않는 대속성 레플리카가 전승되고 그 대속성 레플리카를 전승한 자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에 대귀족 가운데서도 으뜸 으로 치는 것입니다. Q. 비인 가문이라 해도 같은 가문에서 여러 명의 평의회 의장 후보가 나 오기 때문에 결속력이 약할 것 같다. 사실인가? A. 각각의 후보를 지지하다보면 가문 안에서도 파가 갈리는 것이 사실입 니다. 그러나 대속성 레플리카가 나오는 계열이 대대로 다르기 때문에 결 속력이 약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후보를 지지 했는데 A가 아니라 B가 평의회 의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평 의회장에 A의 아들이 당선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속성 레플리카가 대 를 이어 전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전승되기 때문에 이쪽저 쪽 붙다보면 결국 가문 안에서 맴도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Q. 비인 가문은 다른 가문보다 소속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A. 다른 대귀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다 보니 비인 가문이 다른 가문에 비해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직계와 방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 문의 규모가 어마어마한 편이지요. 직계 출신과 방계 출신의 사람들의 결 혼이 가능할 정도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머언 방계 출신인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의 누이, 엘로이즈와도 결혼은 가능한 것입니다. 왜냐면 헤르만 씨네 가족은 직계에 가깝거든요. 실제로 비인 가문 사람들끼리 결혼한 사 례도 꽤 많은 편입니다. 다른 대귀족들도 혈통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결 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외전 01. 히스페르와 유디스레느 [ 약 속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1. ----히스페르와 유디스레느 [ 약 속 ] ******** 히스페르...생의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 비인 가의 대장원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유리 온실 안에 긴 금발의 한 소년이 눈을 감고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유리 온실 안에는 소년뿐이었다. 소년은 대략 15, 16세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로 하얀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보였다. 온통 하얀색으로 채워진 옷이 소년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소년은 중앙의 작은 분수대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따금씩 분수대의 물이 소년의 금발에 튀기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손으로 바닥의 흙을 긁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기분 좋았다. 소년은 평온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때 먹었던 빨간 사탕만큼 달콤하리 만치 부드럽고, 그가 자주 찾아가곤 하는 서쪽 숲의 호수만큼 맑으며 또한 그가 오후에 즐겨 마시는 홍차만큼 감미로운 선율이 그를 감싸듯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라라라 라 라라라라 라 라-] 소년은 조그맣게 음율을 따라 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매끈한 은색 철근이 여기저기 하늘의 덮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를 넘어서 햇빛이 은은하게 온실 속을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아주 기분 좋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율을 흥얼거리며 천천히 주위를 돌아 보았다. 유리 온실에는 갖가지 꽃들이 훌륭하게 피어 있었다. 소년은 대견하다는 듯 꽃을 향해 웃어 주었다. 그리고 순간 멈칫 하여 유리 온실로 통하는 투명한 무색 유리 문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리고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서 끝인가." 소년은 안타까운 느낌에 한참 문 쪽을 바라보다 '그녀'의 노랫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문득 손을 들어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아까 흙을 긁었을 때 생긴 생채기인지 조그맣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약하디 약한 자신의 육체을 소년은 아무 감정없이 쳐다 볼 뿐이었다. 어차피 오 래 견디지 못할 육체였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었다. 태어날 때 이미 죽 음을 예정 받은 그였다. 죽는 그 순간이 두렵긴 하지만. 그랬다. 죽음 자 체보다는 죽는다는 행위 자체가 무서웠다. 혼자 외로이 사라져야 하는 처 절한 악몽.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소년은 유리 온실 안을 잠시 서성이다 천천히 입을 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매 끄럽고 따뜻한 선율이 유리 온실 안으로 넘쳐 갔다. 소리의 파동으로 꽃 들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얀 빛이 온실 속을 가득메우자 그제서 야 소년은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온실 문쪽으로 걸어갔 다. "안녕. 내일 보자." 소년은 마치 사람에게 인사를 하듯 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온실 문을 나섰다. ******** 유디스레느...생의 무감각함. 비인 본가의 어느 작은 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방은 손님용 의 방으로서 작은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할 수 있게 꾸며진 작은 거실, 그 리고 침실로 연결되는 작은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한 남 자가 거실의 의자에 앉아 그 앞에 서 있는 20대 초반의 여자를 노려 보고 있었다. 여자는 붉은 색의 장식 없는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붉은 색의 드레스에는 그보다 더 짙은 붉은 색의 얼룩이 군데 군데 묻어 있었다. 자 세히 보면 그 얼룩이 피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판별할 수 있었다. 긴 금 발을 드레스와 같은 붉은 색 끈으로 묶은 여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인 형처럼 눈깜빡임도 없이 서 있었다.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런 일을!" 남자가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여자는 무표정하게 남자의 눈을 쳐다 볼 뿐이었다. 남자가 다시 소리를 높여 고함을 질렀다. "너 어떻게 할 거야! 비인 가의 사람을 거의 죽도록 만들어 놨으니 도대 체 어떻게 할 거냐고! 너 같은 걸 우리 집의 양녀로 들인 건 아버님의 일 생 최대의 실수라고. 가뜩이나 미약한 우리 가문이 너 때문에 아르헨에 발도 못 붙이게 생겼어. 너, 뭐라고 말 좀 해봐!" 여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시선을 거두더니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 행동에 후회는 없어요." 말이 끝나자 마자 여자의 뺨으로 남자의 손이 날아왔다. 발갛게 부은 뺨 을 어루만지며 여자는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천한 계집 주제에. 레플리카를 좀 쓸 줄 안다고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나 한테 두 번 다시 오래비 소리 하지 말아라. 치가 떨리니까. 저런 잔인한 계집같으니라구." 남자는 거칠게 눈을 흘기며 여자를 어깨로 떠밀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여자는 비틀거리며 여전히 무감각한 눈으로 남자가 사라진 방 문을 쳐다 보았다. 테라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은 뺨이 아파왔다. 테라스 밖 의 아름다운 경치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며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삶이라는 것이 지겹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느껴졌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항상 느리게 흘렀다. 삶의 끝이 언제가 될지 궁금했다.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무미건조한 세계.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갔다. ******** 만남...함께 할 수 있는 작은 용기. 그녀다. 소년은 직감할 수 있었다. 복도 끝에서 다가오고 있는 여자는 분 명 그의 '그녀'였다. 노래하고 있지 않아도 그는 그녀가 조용히 소리 없이 내뿜고 있는 레플리카가 예의 그 노랫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 는 아주 아름다웠다. 밝고 연한 금발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소년은 멈춰 서 서 계속 그녀를 쳐다 보았다. 여자도 그를 쳐다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 굴이 마치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소년은 알 수 있었다. 그녀로부터 느낄 수 있는 레플리카가 아주 부드러웠기 때 문이었다. 소년은 여자를 보고 기분 좋게 웃어 주었다. 소년을 보고 있던 여자는 눈썹을 실룩이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히스페르 이스타냐 로르 비인 님."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며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 의 입모양을 살폈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레플리카로 말해 주겠어요? 난 귀가 들리지 않아요." ********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긴 금발의 소년이 정원의 분수대로 달려 가는 모습 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소년을 따라 나온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 녀는 소년, 히스페르와는 별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거의 모르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인 가의 대무도회가 있었을 때 멀리서 한 번 본 것뿐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너무 하얘서 기억에 남았었다. 소년 이 그녀를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수의 물을 손에 담으며 해 맑게 웃고 있는 소년을 보자 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방계 혈족 이라지만 아르헨의 최고 대귀족인 비인 가의 사람이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레플리카의 습득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없 다면 아무리 비인 가의 사람이라도 평생 권력과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할 판이었다. 아르헨의 사회에서 레플리카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그녀 또한 평민의 신분에서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귀족가의 일원이 된 경우였다. 물론 그녀에게 신분이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했지 만 객관적으로 볼 때 레플리카 때문에 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 여자 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심란하게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때, 히스페르가 분수대에서 이 쪽으로 오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귀족 자제들의 뒷치 닥거리는 질색이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히스페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분수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분수대에 가까이 다가서자 소년은 풀어 헤친 긴 금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따뜻하게 웃었 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웃어 봐요." 여자는 소년의 말에 당황하여 물끄러미 소년을 쳐다 보았다. "웃는 게 예쁠 거 같아. 이름이... 뭐에요?" 소년은 여전히 웃으며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못한 척 대답했다. "유디스레느 레아 베르 슈카테...입니다." 소년이 다시 알아 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하자 유디스레느는 잠시 멈칫하 고는 레플리카를 방출하며 천천히 말했다. "유디스레느...레아...베르...슈카테..에요." "유디스..레느...예쁜 이름이네요." 그제서야 히스페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쁜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 그의 투명하리만치 연한 초록색 눈동자를 그녀에게 고정했다. "당신이... 올테스 형을 많이 다치게 했다죠?" 소년은 다시 분수에 손을 집어 넣어 시원한 감촉을 느끼며 말했다. 유디 스레느는 살짝 인상을 쓰며 가만히 분수대를 쳐다 볼 뿐이었다. 그녀로서 는 그에게 그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히스페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알아요. 당신이 왜 그랬는지. 올테스 형이 마음대로 온실 속의 화초 를 망쳐버려서 그런 거죠? 당신이 유리 온실의 착한 아이들에게 매일 노 래를 들려주고 있다는 거 알아요.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아주, 아주 아름 다운 노랫소리였죠. 영혼을 빼앗겨 버릴 만큼." 여전히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바라보는 히스페르를 보며 유디스레느는 왠 지 어색해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때 자신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 껴졌다. 유디스레느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쳐다 보았다. 히스페 르가 자신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유디스레느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하 게 히스페르를 쳐다보았다. 히스페르가 다가와 조그맣게 귓가에 속삭였다. "나와...같이 죽어줘요." 유디스레느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히스페르를 쳐다 보았다. 히스페르는 따뜻하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흰 옷자락이 금발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있어줘요." 유디스레느는 무감각한 파란 눈동자를 히스페르에게 고정시키며 자신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바람소리인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내가 얻게 되는 건?" 히스페르가 유디스레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당신의... 생의 의미가 되어 줄게요." 유디스레느는 한참 침묵을 지키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히스페르의 손을 잡으며 살며시 미소를 띄었다. 따뜻한 온기. 시원 한 바람. 뺨에 튀긴 물방울. 이 것은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있지 못할 그 리움이었다. ******* 예정된 행복의 끝...서로 다른 두 마음. 정원의 하얀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아 유디스레느는 조용히 요람을 흔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자극에 기분이 좋은지 아기는 옹알대며 잠이 들어 있었 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히스페르가 요람에 손을 대고 아기에게 흐릿한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흐뭇하게 미소를 띄며 손을 더듬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디스레느. 에드가...당신 눈동자를 닮아서 다행이에요. 파랗고 파란...눈 동자...내가 동경해 마지 않은 파란색 눈동자." 유디스레느는 고개를 돌리고 멀리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표 정도 짓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머리카락은 당신을 닮은 걸요. 나보다 훨씬 짙은 색의 금발이에 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죠?" 히스페르는 다시 아기의 머리카락을 보듬으며 미소지었다. 청력에 이어 시력도 천천히 그에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히스페르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부드럽게 풀이 밟혔다. 향긋한 나무냄 새가 퍼지고 있었다. 히스페르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유디스레느. 내가...당신의 생의 의미가 되어 주었나요?" "네. 짧은 순간이었지만 행복했어요." 유디스레느는 계속 요람을 흔들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히스페르도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나, 오늘 밤에 죽을 거에요. 19년이나 살았으니 오래 산 거라고 할 수 있 죠. 당신과의 행복했던 날들을 포함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해 달라고는 말 못해. 밤이 되기 전에 어서 도망가요. 그들이...올 거에요. 일로나 할머님께 가세요. 그 분이라면 에이드리안을 지켜 주실거에요." "네..." 유디스레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요람에서 아기를 안아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내 사랑하는 아가. 미안하구나..." ******** 아련한 노랫소리...그립게 마음을 스치는 아름다운 당신. 방 안은 조용했다. 히스페르는 자신의 금발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마지 막으로 창 밖의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 보았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박아두려는 듯 열심히 밤하늘을 올려다 보 았다. 잠시 후 작은 문소리가 들렸다. 히스페르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왔군." "이런 곳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어." 시커먼 그림자가 히스페르의 앞에 버티고 있었다. 히스페르는 살며시 미 소지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피가 사방으로 튈 때까지 노래 는 끝나지 않았다. 그림자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것을 보며 히스페르 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자신도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 앉았다. 벽에 몸 을 기대며 손으로 입 가의 질퍽한 피를 닦아냈다. 피곤했다. 자꾸 눈이 감 겨왔다.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랫소리는 점점 뚜렷하게 들려왔다. 히스페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노랫소리였다. 오늘 그녀 의 노랫소리는 다소 구슬펐다. 그는 안도감과 죄책감에 작게 한숨을 쉬었 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웠던,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해 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히스페르는 미소지었 다. 그 것은 어느 화창한 날의 그리움이 듬뿍 묻은 그만의 기억이었다. 오 로지 그만이 지니고 있는 그립고도 그리운 기억이었다. ******** 끝, 그리고 다시 시작. "이이잉-" 아이가 칭얼거리는 통에 일로나는 책을 보던 것을 멈추고 아이를 물끄러 미 쳐다 보았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금발의 귀여운 아이는 파 란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일로나의 팔을 잡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가?" 일로나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아이는 예쁘게 미소지으며 다시 일로 나의 팔에 매달렸다. "하머니- 야꾸속이 뭐야?" 일로나는 빙그레 웃더니 아이를 두 팔로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 듯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일로나는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들 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약속'이 뭔지 궁금한 게냐?"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물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약속이란...믿음을 걸고 서로 약속한 그것을 지키겠다고 미리 정해 두는 거란다. 약속 중에서도 소중한 사람과 한 약속은 반드시...생명을 걸고서라 도 지켜야 하는 거다. 알아 듣겠니?" 아이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통통한 볼을 손가락으로 토닥였다. "소주한 사람이 누구야?" 아직까지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에 일로나는 미소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다시 쓸어 주었다. "언젠가는 나타날 거란다. 그녀를 소중히, 소중히 대해 주어라. 네 마음의 욕심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보드라운 뺨을 일로나에게 비벼댔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소중한 금발의 아가씨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새로운 시작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진다...다시 검은 머 리의 소녀를 만나 새로운 시작을 만들기 전까지는... *히스페르 이스타냐 로르 비인 비인 본가에서는 좀 머언 방계 혈족 출생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결국 청력을 잃고 말았지요. 금발의 연한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 고 권력에도 흥미가 없었습니다. 레플리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청력 때문에 그 능력이 대단치는 않다고 알 려져 있습니다. 15세 때 유디스레느를 만나 그 해, 결혼.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과의 인연으로 쭉 본가에 머물렀으나 결혼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 숨어 살았다. 그가 왜 숨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와 유디스레느는 사고로 죽었다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유디스레느 레아 베르 슈카테 원래 평민 출신이었으나 레플리카 실력을 인정받아 슈카테 가문의 양녀로 입적되었습니다. 슈카테 가문은 소귀족으로서 다소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다분했으나 그녀 로서는 별로 관심없는 사안이었지요. 짙지 않은 금발과 파란색 눈동자의 소유자인 그녀는 어느 때인가부터 삶 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려 언제나 무표정하고 무감각했습니다. 다소 냉소 적이기까지 했지요. 그녀에게 있어 '살고 싶을 정도로 소유하고 싶은 것' 은 히스페르뿐입니다. 히스페르와 함께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외전 02. [ 거짓말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2-01. ---- [ 거 짓 말 ] ********달콤한 첫만남. "이이잉- 이이잉-" 꼬마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겁이 덜컹 났다. 까만 생머리 의 귀여운 꼬마는 몇 도르째 넓디넓은 장원 안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모처럼만의 외출로 꼬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 곳에 왔다. 이 곳은 꼬 마가 살던 곳과는 너무나 달랐다. 어마어마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커 다란 저택과 그 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잔디밭,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대리석 장식의 분수대,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 꼬마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창한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얀 피부의 할머 니와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밖으로 나와버렸던 것이다. 솔직히 저택 안에 서는 너무 재미없었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꼬마는 쫄레쫄레 자신의 회색 원피 스 자락을 흔들어 가며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한 손에 빛 바랜 치마를 입고 있는 인형을 손에 들고 꼬마는 답답한 저택에서 나와 밝은 햇살에 찡긋 눈을 찌푸렸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눈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 두 번 눈을 깜빡거린 꼬마는 생긋 웃으면서 잔디밭을 뛰어 다녔다. 꼬마는 새로 운 장소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 꼬마는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검은 색 말과 하얀 색 말, 그리고 갈색 말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는 마구간도 보았 고 예쁜 꽃들이 잔뜩 피어 있는 유리 온실도 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 수도 너무 예뻤다. 꼬마보다 열 배는 키가 큰 나무들도 잔뜩 보았다. 꼬마 는 뒤뚱뒤뚱 열심히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는 정원에 와서야 꼬마는 문득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꼬마는 집에 돌아가려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어느새 자신이 못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아 꼬마 는 무작정 걸어다녔다. 결국 집을 찾지 못하자 꼬마는 눈물을 터뜨렸다. "이이잉- 파파, 마망. 이잉, 이이잉-" 문득 꼬마는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예쁜 금발을 허리까지 드 리운 여자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소녀는 나무로 만 든 울타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고 있었다. "훌쩍. 훌쩍. 누구야?" 꼬마는 계속 훌쩍이며 소녀에게 물었다. 꼬마는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아주 예뻤다. 반짝이는 금발과 파란 하늘같은 눈동자, 섬세한 이목구비가 너무나 예뻤다. 게다가 소녀가 입고 있는 하늘색 원피스는 꼬마가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너무나 멋진 옷이었다. 꼬마는 물끄러미 자신이 입고 있는 회색 원피스를 쳐다보았다. 칙칙한 회색의 원피스가 너무 밉게 보였다. 꼬마는 다시 고개를 들어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울었나 보네?" 꼬마는 눈을 깜빡였다. 소녀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어제 아버지가 준 과일 사탕 맛 같았다. 꼬마는 울음을 그치고 물끄러미 소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맛있어, 목소리. 아주 달콤해. 사탕같이." 소녀는 꼬마의 말에 못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쿡, 쿡쿡. 너 아주 재밌구나? 내 목소리에 대해 그런 평은 처음인데..." 소녀는 울타리에서 폴짝 뛰어 내렸다. 그리고 꼬마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어디선가 손수건을 꺼내 꼬마에게 건네주었다. 꼬마는 깨끗하게 접힌 손수건을 얼떨결에 받아들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생긋 웃으며 꼬마에게 말했다. "울지만 않으면 훨씬 예쁠 텐데, 꼬마 아가씨. 눈물 닦아." "난 안 예뻐." 꼬마는 눈물 때문에 꾀죄죄한 자신의 얼굴과 화사하기 그지없는 소녀가 너무 비교되어 뾰로통하게 말했다. 소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꼬마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아냐. 이렇게 예쁜데. 아주아주 사랑스러워." 소녀의 입맞춤에 꼬마는 이마를 문지르며 발갛게 볼을 달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빠꼼하게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옷은 이렇게 보기 싫은 색깔인걸." 꼬마의 말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마는 자신의 회색 원피스가 아주 싫었다. 어머니는 항상 이런 우중충한 색깔의 옷만 만들어 주었다. 꼬마는 언젠가 마을에서 본 노란색 원피스나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싶었다. 여러 번 꼬마가 어머니에게 졸라 봤지만 어머니는 그 때마다 슬픈 얼굴을 하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그 표정이 왠지 마음에 남아 그 후로 꼬마도 어머니에게 떼를 쓰지는 않았지만 어른이 되면 꼭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입어보리라 결심한 터였다. 소녀가 꼬마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까만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꼬마에게 속삭였다. "그럼, 우리 옷 바꿔 입을까? 내가 좀 더 크긴 하지만 네 옷도 아주 커 보이니까 바꿔 입으면 되잖아." "저, 정말? 하지만...하지만 이건 마망이 만들어 준건데..." 꼬마는 자신의 회색 원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안 할래. 이건 마망이 만들어 주신 거니까." 꼬마의 단호한 말에 소녀가 보기 좋은 미소를 만들며 자신의 머리에 꼽혀 있던 색색깔의 보석이 박혀 있는 핀을 뽑아 냈다. 그리고 핀을 소녀의 까만 생머리에 꼽아 주었다. 그리고 꼬마를 향해 빙그레 웃어 주었다. "아주 예뻐. 그거 진짜 보석이니까 나중에 배고프면 과자점에 가서 과자랑 바꿔 달라고 해." "헤에-" 꼬마는 두 손을 들어 머리에 꼽혀 있는 핀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말똥말똥 눈동자를 굴리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가 천사같이 보이는 꼬마였다. 꼬마는 소녀에게 고개를 내리라고 손짓했다. 소녀가 눈을 깜빡이며 허리를 숙였다. 꼬마는 소녀의 뺨에 뽀뽀를 해주고 헤실헤실 웃었다. "예쁜 사람이야, 아주. 나 대신 이거 줄게." 꼬마는 손에 들고 있던 누렇게 빛 바랜 인형을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빙긋 웃더니 인형을 받아들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 큰일이다. 해가 지잖아. 할머니한테 혼나겠어." 소녀는 꼬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작별해야 겠다. 나 집에 가야 되거든. 꼬마야, 너도 어서 돌아가. 그럼 안녕." 소녀는 서둘러 몸을 돌려 뛰어 가기 시작했다. 문득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생각난 꼬마는 화들짝 놀라 소녀의 뒷모습을 쫓아갔다. 꼬마는 열심히 달렸다. 그러나 소녀의 걸음에는 미치지 못하고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꼬마가 넘어지는 소리에 소녀가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꼬마에게 달려 온 소녀는 바닥에 큰 대자로 넘어진 꼬마의 모습이 너무 우스워 웃음을 꾹꾹 참으며 꼬마를 일으켰다. 그러다 꼬마의 뺨에 빨간 생채기가 난 것을 확인한 소녀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났잖아." 소녀는 다시 어디론가로 시선을 돌리다 작게 한숨을 쉬고 꼬마의 옷에 묻은 흙을 손으로 탁탁 털어 주었다. 그리고 살며시 웃으며 꼬마에게 말했다. "안 우네? 용감하구나, 너."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꼬마의 모습에 소녀는 다시 한 번 웃으며 헝클어진 까만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보드라운 꼬마의 뺨에 살며시 가져갔다. 꼬마는 소녀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꼬마야. 지금 있는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이다. 알았지? 기원제(주. 참조) 기간에 다른 사람한테 레플리카를 쓴 걸 들키면 나 혼나거든." 소녀는 생긋 웃더니 촉촉한 입술을 열었다. [[ 모두 행복하기를... 당신의 아픔은 내가 가져갈 테니. 당신은 행복하기를... 당신의 슬픔은 내가 지워줄테니 당신은 행복하기를... 당신의 괴로움은 내가 감싸줄테니 당신은 행복하기를... 당신은 행복하세요.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답니다 모두 행복하기를... ]] 소녀의 마법 같은 노래가 끝났다. 꼬마는 놀라 입을 살짝 벌린 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노래는 마법 같은 게 아니라 마법이었다. 소녀의 노래 소리가 꼬마에게로 옮겨와 은은하게 빛이 돌더니 뺨의 생채기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소녀의 노래는 아주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꼬마의 적은 어휘력으로는 별다른 표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꼬마는 놀란 눈을 깜빡이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꼬마는 소녀의 소매자락을 움켜잡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예쁜 노래...목소리만큼 달아. 아주 새콤달콤해." 소녀는 칭찬을 받아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꼬마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왜 날 따라온 거야?" "나, 길 잃었어. 집에 갈 줄 몰라. 아주 커다란 집이야. 앞에 하얀 의자랑 테이블도 있고 예쁜 아줌마 동상도 있어."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알았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너 지금 대저택에 머물고 있는 거니? 할머니의 손님이었구나." 소녀는 기분 좋게 웃더니 소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그 쪽으로 가니까 같이 가자." 꼬마는 방긋 웃으며 소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소녀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소녀와 함께 가는 길을 시원한 바람과 향기로운 꽃 향기가 동행해 주었다. 꼬마는 기분이 좋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토닥토닥 발걸음을 재촉했다. ********첫 번째 거짓말. "여기야. 여기 맞지?" 소녀는 커다란 저택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별의 시간이었다. 꼬마는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꼬마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쥐고 소녀에게 말했다. "다시 만날 수 있어?" 소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내일 여기서 만나자." "응!!" 꼬마는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방실방실 웃었다. 소녀는 어서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꼬마가 저택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워서....눈을 뗄 수가 없었어." ******** 집에 돌아온 소녀는 조용히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의 인기척을 알아 챈 소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여기서 뭐하시는 거에요?" "네가 늦어서 와 봤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의 노파가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인자하고 상냥한 할머니였다. 하얀 백발만 보면 노파가 아주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에 비해 매우 정정했다. 목소리도 누구못지 않게 우렁찼다. 할머니가 말했다. "어디 갔었더냐?" "잠시 정원에 갔었어요. 꽃향기가 좋아서...기분이 아주 좋아졌어요." "내가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구나.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냐?"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인형을 뒤로 숨기고 소녀는 방긋 웃음 지어 보이면서 할머니의 맞은 편에 자리했다. 할머니는 소녀를 꼼꼼히 살피시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레플리카를 쓴게냐?" 소녀는 머뭇거리더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는 다시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기원제 기간에는 레플리카를 써서는 안 된다. 관습이야. 그리고 내일 기원제가 열릴 사당에 가보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라. 올해 비인 가의 모두 앞에서 처음으로 노래하는 거니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지. 네가 싫어하는 건 알지만 조금만 참아라. 자유의 날도 멀지 않았다." "내일...이요? 나 내일 약속이..."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고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네. 내일 준비할게요." 소녀는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또 만나고 싶었는데...그 꼬마, 실망하겠지? 아니야, 나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을 지도...' 소녀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기다리는 아픈 마음. 다음 날. 꼬마는 아침부터 집 앞에 나와 소녀를 기다렸다. 제자리에서 발구르기도 해보고 주변의 꽃도 꺾어 보았다. 소녀가 나타나지 않자 꼬마는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안 오지? 약속 잊어 버렸나? 우웅~' 이것저것 고민하던 꼬마는 문득 저택 벽 쪽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 나뭇잎을 발견했다. 꼬마는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가 나뭇잎을 주워 왔다. "반찬 만들어야지." 꼬마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후 꼬마는 땅바닥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를 가져와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제법 끌어 모아온 나뭇잎들과 꽃잎을 옆에 잔뜩 쌓아 놓고 돌멩이로 콩콩 찧기 시작했다. 꼬마는 나뭇잎과 꽃잎으로 만든 반찬을 만들어 소녀에게 줄 생각이었다. 이마에 송송 맺힌 땀도 아랑곳 하지 않고 꼬마는 열심히 돌멩이로 나뭇잎을 찧었다. 곧 나뭇잎이 짓이겨서 파란 즙이 나오기 시작했다. 꼬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꼼꼼하게 짓이겨진 나뭇잎과 꽃잎을 커다란 나뭇잎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워온 빨간 열매도 예쁘게 올려 놓았다. 꼬마는 생긋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배고프면 먹으라고 해야지. 맛난 반찬." 꼬마는 반찬을 보기 좋게 집 앞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질 때까지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꼬마는 다 말라버린 반찬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거짓말쟁이..." 외전 02. [ 거짓말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2-02. ---- [ 거 짓 말 ] ******** 꼬마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소녀가 끝내 나타나지 않아 꼬마는 몹시 속이 상했다. 하루종일 밖에서 서성였더니 몸이 무겁고 졸음이 쏟아졌다. 소녀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꼬마는 창가로 쪼르르 달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소녀가 왔을까 하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나 역시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꼬마는 훌쩍이며 침대로 가 풀썩 주저 앉았다. 그러다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이 보였다. 꼬마가 머물고 있는 방은 너무 멋졌다. 전에 유모가 우유로 만든 크림을 잔뜩 끼얹은 케이크를 만들었을 때 '멋지다'라고 말했었다. 그 때의 예쁜 케이크처럼 방은 너무 멋졌다. 예쁜 커튼, 왠지 비싸 보이는 가구와 양탄자가 꼬마의 눈에도 아주 근사해 보였다. 원래 꼬마가 살던 집보다 138배는 더 좋아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꼬마는 이렇게 멋진 방보다 어머니가 있는 '진짜 집'이 더 좋았다. 소녀는 다시 창가로 가 창틀에 팔을 올리고 창 밖 풍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갑자기 소녀가 불러 줬던 노래가 생각났다.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너무 좋은 노래였다. 꼬마는 소녀의 노래를 가만히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산뜻해졌다. 꼬마는 소리내어 노래불렀다. "모두 행복하기를...당신의 아픔은 내가 가져갈 테니. 당신은 행복하기를..."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노래를 부르면 항상 그랬다. 특히나 이 노래는 부르고 있으면 소녀가 생각나 너무 기분이 좋았다. 노래에 너무 집중하느라 꼬마는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꼬마는 물끄러미 뒤를 돌아보았다. "파파!" 꼬마는 활짝 웃으며 검은머리의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파파, 나 노래 배웠어요. 나, 노래 잘 하..." 철-썩-. 순간 꼬마는 욱신거리는 뺨에 손을 가져가며 우두커니 아버지를 쳐다 보았다.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노래 같은 거 하지 말랬지! 내가...노래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버지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더니 울먹이는 꼬마를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파파! 나 노래 안 할게요! 파파! 파파..." 꼬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아버지는 꼬마가 노래만 하면 아주 화를 내셨다. 그리고 아주 슬픈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나 꼬마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주아주 아름답게 노래한다는 것을...그 모습은 마치 어제 만난 그 소녀와도 같았다. ********새콤한 두 번째 만남. 다음 날, 꼬마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돌멩이로 나뭇잎을 콩콩 찧고 있었다. 오늘은 식사할 때 슬쩍한 노란색 과일도 있어서 더 맛있는 반찬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꼬마는 오로지 나뭇잎을 찧는 데만 정신을 집중 했다. "흐음. 뭐 하는 거야?" 꼬마는 갑자기 들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소녀다! 그 소녀다! 그러나 꼬마는 못 들었다는 듯이 샐쭉거리며 계속 돌멩이로 나뭇잎을 쳤다. 벌써 나뭇잎은 질퍽하게 되었지만 꼬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돌멩이를 놀렸다. "삐친 거야? 많이 화났어?" 소녀가 꼬마의 얼굴 쪽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순간 꼬마는 갑작스러운 소녀의 행동에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 아야야- 아프잖아!" 꼬마는 새침하게 소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빙그레 웃으며 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훗. 미안. 어제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가 없었어. 대신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줄게." 소녀의 말에 꼬마는 눈을 끔뻑이며 살풋이 미소지었다. 꼬마는 다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쏙 내밀고 속삭였다. "정말? 하루종일 같이 있어줄거야?" 소녀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는 생긋 웃더니 소녀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까만 색 원피스를 손으로 토닥여서 먼지를 털어 냈다. 꼬마는 손바닥만한 나뭇잎에 열심히 돌로 두들긴 나뭇잎과 꽃잎을 정성스레 올려 소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아침에 식사시간에 안 먹고 가져온 노란 색 열매도 건네 주었다. "반찬 줄게. 배고프면 이것도 먹어. 예쁜 노란 열매." 소녀는 나뭇잎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쿡 하고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노란색 열매를 쳐다보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꼬마가 소녀의 웃음에 뿌루퉁한 표정을 짓자 소녀는 그때서야 빙긋 웃으며 꼬마에게 말했다. "모롤라잖아? 쿡, 너 정말 귀엽구나. 잘 먹을게요, 레이디." 소녀는 꼬마의 손에 살짝 입을 맞추고 씨익 미소지었다. "모...롤라?" 꼬마는 노란색 열매의 이름을 잘 기억하려고 몇 번이나 입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소녀는 꼬마의 표정을 보며 웃더니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뒤돌아섰다. 꼬마는 소녀의 휘날리는 금발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햇살을 등진 소녀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럼 내 보물 창고에 가볼래?" "보오-물창고?" 꼬마는 눈을 말똥거리며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소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는 힘차게 소리쳤다. "그럼, 가자!" 꼬마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소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머리 꼽힌 보석 핀을 토닥거렸다. 소녀는 즐거운 듯 미소짓고 꼬마의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거짓말. 소녀가 꼬마를 데리고 간 곳은 꼬마가 묵고 있는 대저택에서 약간 떨어진 건물의 다락방이었다. 소녀는 어두운 다락방을 조심조심 걸어가며 둘레둘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듯이 멈춰 섰다. 아- 소녀가 짧은 소리를 내자 순간 다락방 구석구석에 놓여져 있는 초에 불이 붙으면서 주위가 밝아졌다. 뒤에 서 있던 꼬마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괴, 굉장해. 한꺼번에 불이 붙었잖아." 소녀는 생긋 웃더니 꼬마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낡은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는 구석으로 꼬마를 데리고 갔다. 꼬마와 소녀는 바닥에 깔려 있는 작은 양탄자 위에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꼬마는 왠지 짜릿한 흥분감에 킥킥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옆에서 생긋 웃던 소녀가 옆에 있는 상자를 끌어내려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이 가득 들어 있었다. 꼬마는 탄성을 질렀다. "예, 예쁜 옷이 이렇게 많이...!!" "내가 입던 거긴 한데...입어 볼래?" 꼬마는 주먹으로 두 볼을 감싸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꺼내 꼬마에게 건네주었다. 꼬마는 잠시 소녀를 보더니 입고 있던 검은색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하얀색 봉실봉실한 속바지만 입은 채 꼬마는 이리저리 옷을 살펴보았다. 소녀는 왠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상자만 열심히 뒤졌다. 드디어 앞 뒤 구분을 한 꼬마는 원피스를 낑낑 올려 입고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소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상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소녀가 물끄러미 얼굴을 들었다. 꼬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소녀는 상자에서 꺼낸 분홍색 리본을 꼬마의 머리에 묶어 주고 즐거운 듯 꼬마를 바라보았다. "예뻐. 아주 예뻐. 공주님 같아." 꼬마는 소녀의 말에 더욱 기가 살아서 원피스 자락을 잡은 채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하지만 왕자님이 없는 걸. 왕자님이 없는 공주님은 싫어." 꼬마의 말에 소녀는 멍하게 꼬마를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내가 왕자님이 되어 줄까?" "에에? 하지만 왕자님은 남잔걸.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소녀는 말없이 웃으며 일어나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꼬마에게 손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레이디. 오늘의 왕자는 저니까 부디 손을." 꼬마는 멍하게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표정은 정말 왕자 같았다! 꼬마는 얼떨결에 소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소녀는 다시 허리를 숙이고 꼬마의 손을 잡아 이끌기 시작했다. 작은 왈츠가 시작되었다. 소녀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꼬마는 즐겁게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소녀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추는 것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 소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추어 서서 꼬마의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넌 웃는 게 참 예뻐. 나의 그녀도 너처럼 잘 웃으면 좋을 텐데..." 꼬마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소녀에게 물었다. "나의 그녀가 누군데?" 소녀는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아주...쓸쓸한 사람." 소녀의 말과 표정에 꼬마는 가슴 한쪽이 뭉클하게 아파 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마는 슬퍼졌다. 소녀가 갑자기 미워져 꼬마는 뒤돌아 서서 분홍색 원피스를 휙 벗어 던졌다. 그리고 달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은색 원피스를 다시 챙겨 입었다. 갑작스러운 꼬마의 행동에 소녀가 당황했는지 꼬마에게 물었다. "왜 그래? 옷 맘에 안 들어?" 꼬마는 소녀의 말에 울먹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꼬마도 알 수 없었다. 소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꼬마의 등을 토닥였다. 꼬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나도, 나도 좋아한단 말이야! 나도 아주 좋아하는데...훌쩍, 훌쩍...이이잉- 이이잉-" 소녀는 꼬마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꼬마가 좋은 걸. 울지 마. 나도 꼬마가 아주 좋아." 꼬마는 소녀의 말에 눈물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볼을 빵빵하게 만들더니 잔뜩 인상을 쓴 채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신부가 될래. 결혼할래." "으, 응? 하, 하지만 결혼은 남자랑 여자랑 해야 하는 거야. 난..." 소녀의 말에 꼬마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꼬마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자 다급하게 꼬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 알았어. 결혼 할 테니까 울지 마. 응? 울지 마." 꼬마는 소녀의 말에 그제서야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소녀에게 뺨을 비벼댔다. 소녀는 한숨을 쉬더니 빙긋 웃고는 말했다. "우리가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고, 또 네가 멋진 레이디가 된다면 그 때는 정말 프로포즈 할지도..." 꼬마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나 멋진 레이디가 되어서 꼬옥 결혼할거야. 마망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 이랬어. 무슨 말인지 난 잘 모르겠지만 나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소녀는 살며시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네가 행복한 사람이 될 때까지 힘들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내가 네 곁을 지켜 줄게. 많이 슬프고 괴로울 때는 날 불러." 소녀의 말에 꼬마는 기쁜 듯 방방 뛰며 말했다. "정말? 우웅~ 하지만 힘들 때 부르려면 이름을 알아야지." 소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내 이름은..." 꼬마는 소녀의 말에 빙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어두운 다락방은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소녀가 있어주어 꼬마에게는 정말 '보물창고' 같았다. ********마음을 맴도는 소망.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마망, 파파는? 파파는? 파파 어디 갔어요?" 꼬마는 울먹이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어머니는 힘없이 휘청거리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가 눈물을 보일 때마다 꼬마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어머니가 꼬마에게 말했다. "파파는...파파는 멀리 떠나셨어. 아주...아주 멀리..." 꼬마는 눈물을 터뜨리며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그럼 나도 갈래. 나도 갈래! 파파랑 같이 갈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 숙여 울면서 꼬마에게 말했다. "네가...네가 따라갈 수 없는 곳이야. 나도..갈 수 없는 곳이야..." 꼬마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질을 쳤다. 아침부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슬픈 얼굴로 자신을 꼬옥 품에 안아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리라는 둥 평소와는 달리 이상한 말만 하셨다. 유모와 마을에 다녀온 꼬마는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떠나셨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리고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는 것을 꼬마는 알고 있었다. 꼬마는 울먹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곧장 침대위로 쓰러졌다. 자꾸 솟아오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침대 시트가 눈물로 젖어갔다. 꼬마는 소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 너무 아파. 너무 괴롭고 슬퍼. 빨리 내 곁에 와줘. 빨리 와줘. 나 많이 아프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꼬마가 소녀의 이름을 불러도 소녀는 오지 않았다. 꼬마가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도 소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꼬마는 숨죽여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전부 다 거짓말이야...." ********세번째 거짓말. 거짓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 부드럽게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에이드리안은 옷을 갖춰 입고 사택에서 나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봄바람이 살며시 그의 금발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뒤쪽의 인기척을 느끼고 홱 뒤돌아 보았다. "너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나, 오늘 바빠. 귀찮으니까 따라오지 마."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더니 에이드리안의 옆으로 달려 왔다. 그리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의 팔에 팔짱을 꼈다. 발끈하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었다. "싫어요. 나 오늘 하루종일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있을 거에요. 약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자고로 연애는 그저 같이 있어야 하는 거에요. 그나저나 나 배고픈데 맛난 거 사줘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잡고 또박또박 따라오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소리쳤다. "나, 너 정말 싫어. 싫다구!" "나 그거 거짓말인 거 알아요. 이제 다 안다구요." 쥬느비에브는 머리에 꽂은 보석 핀을 매만지며 새침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시선을 돌려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가자. 가자구. 식당에."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더욱 꽉 잡으며 매달렸다. 에이드리안은 문득 쥬느비에브의 머리에 꽂힌 핀을 보고 살짝 매만졌다. "어, 이거. 이 건 분명히...할머니가 주신..." 에이드리안은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자, 식당에. 배고프다며."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은 투덜대면서도 그녀가 가다가 넘어질까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그녀의 발걸음을 주의깊게 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따뜻한 봄바람과 꽃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어." 외전 03. 아이슬로데와 아르헨 [ 새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3. ----아이슬로데와 아르헨 [ 새 ] ********날아갈 수 없는 작은 새. "아이! 노래해 줘! 어서! 어서!" 커다란 소매 자락을 날리며 소녀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허 공을 맴도는 가냘픈 새 같아 소년은 눈물이 났다. 소년은 안타까운 마음 을 누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도 나를 지켜 주소서 당신의 아름다운 그늘로 나를 지켜주소서 당신에 대한 경배는 오늘도 나의 노래로 이어지리니 나를 지켜주소서]] 소년의 구슬픈 노래가 작은 정원을 가득 메웠다. 소녀는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듯 발을 놀리며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파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아르헨. 그만 하세요. 제발. 그만 하세요." 소녀가 멈춰 서서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감정 없는 초록색 눈을 허무하게 하늘로 돌렸다. 한 무리의 새가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아이. 난 왜 이렇게 무거운 몸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저 먼 하늘로 날아 가고 싶어. 이런 좁고 답답한 곳이 아니라. 자유롭고 아름답기만 저 먼 곳 으로 날아가고 싶어. 마치 새처럼. 저 새들처럼." 소녀는 손을 벌려 가슴으로 모았다.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조용히 품에 안았다. "아르헨. 난..." "아이. 내 노래에는 너처럼 그런 아름다운 능력은 없어. 자유롭게 공기를 가르고 마치 새처럼 날아가는 너의 노래처럼 부를 수는 없어. 그래서 널 동경해. 언제까지나. 나의 아이슬로데." 소녀는 소년을 밀어내고 정원 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물을 머 금은 눈으로 미소지으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아이. 아르헨이란 곳에 가봤어?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의 그 곳. 그 곳은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래. 그렇지만 그 곳은 자유롭지.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곳이야. 그 곳에 가보고 싶어.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아주 그립 고 그리운 곳이야. 이상하지? 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 곳이 이렇게 그리울 수가..." 소년은 소녀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소녀,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않은 소녀. 소년은 소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행복하게 만들 어 주고 싶었다. ...새가 되게 해주고 싶었다. ******** 보랏빛 머리카락이 신비로운 소년은 아이슬로데 라데나 로르 비인이라고 불렸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족의 마지막 자손이었던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소년은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를 통해 사람들의 바램을 이루어 줄 수 있는 힘이었다. 그가 노래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느꼈다. 아름답고 그리운 노래는 사람들을 매 혹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의 힘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그를 사람들 은 억압하려고 했다. 소년은 동방 제국과 서방 제국을 오가며 도망 생활 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길을 가다 화려한 장식이 된 거대한 마차를 보았 다. 그리고 그 마차에 탄 아름다운 소녀를 보았다.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 녀는 아름다웠지만 허무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소년을 용케 알아보았던지 소녀는 살풋이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때부터 소년은 소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아름다운 미소를 사랑하게 되었다. 소년은 소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소녀 는 아름다운 저택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늘 우울하고 허 무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늘 하늘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소녀의 그런 모습이 못 견디게 마음 아팠다. 소년은 소녀에게 노 래를 불러 주기로 했다. 어느 조용한 밤 소년은 소녀의 방 창가에서 노 래를 불렀다. 작지만 분명하게 소녀가 들을 수 있도록. 소녀는 밤새 소년 의 노래를 들었다. 왠지 모를 슬픈 마음에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그 렇게 15번의 밤이 지날 때까지 소년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16번째 밤이 되던 날, 소년은 소녀에게 붙잡혔다. 소녀는 동방 제국의 황녀였다. 감정 없고 냉랭한 눈으로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를 억압하고 구속 하려고 했던 많은 사람과 같은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갖고 싶다'고 소녀의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 소년은 순순히 붙잡혔고 소녀의 노예가 되었다. 소녀는 그를 '아이'라고 불렀다. 소년은 행복했다. 보다 가까이서 소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현재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 는 황자의 이복누이로 그녀가 황위를 노릴까 저어되어 유폐되어 있었다. 소녀는 늘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했다. 소년이 곁에 있어도 소녀는 늘 슬 퍼했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의 노래를 아주 사랑했다. 늘 소년에게 노래를 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소녀는 갑갑함을 벗어버리려는 듯 춤을 추었다. 소년은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약속. "아이. 아버님은 내가 정말 미우신 거야. 많은 이름 중에서 하필이면 아르 헨이라니. 그 불모의 땅처럼 내가 싫으신 거겠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 루 없는 곳의 이름을 내게 주시다니. 아르헨이란 건 '거칠 수 없는 곳'이 란 뜻이래. 후훗. 멋지지?" 어느 날, 소녀는 정원을 꽃을 꺾으며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년은 부 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르헨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워요. 무척...사랑스러운 이름이에요." 소년의 말에 소녀는 꽃을 꺾던 손을 멈추고 크게 눈을 뜨고는 소년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소년에게 다가와 살며시 웃으며 꺾은 꽃을 건넸다. "내 이름에 대해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너뿐이야. 아이, 너도 이 꽃처럼 아름다워." 소년은 기쁘게 웃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향기로운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소녀가 다시 말했다. "아이, 언제나 곁에 있겠다고 말해 줘. 여긴 정말 외롭고 슬픈 곳이야. 아 이가 없다면...이젠 이 곳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잖아요. 앞으로도 쭈욱 당신 곁에서 머물 거에요. 당신이 행복해질 때까지." 소녀는 눈물을 머금고 소년의 품에 안겼다. 소년은 알 수가 없었다. 어떻 게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불행할 수 있는지. 하늘이 정말 무심했다. ********끝이 예정된 이별. 소녀에게 결혼 상대가 정해졌다는 전갈이 왔다. 정혼자는 서방 귀족 출신 의 남자라고 했다. 황위 계승자로서 높은 서열에 올라 있는 소녀를 서방 에 보내 사실상 소녀를 축출하려는 속셈이었다. 정략 결혼으로 소녀를 몰 아내고 서방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일거양득의 계략이었다. 소녀 는 오열했다. "죽어 버릴 거야! 이런 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난, 난 이런 거 싫어!" 소년이 잠시 동안 외출을 하고 왔을 때 이미 소녀는 손목을 그어 버린 후 였다. 소년은 아연 질색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의 얼굴은 너무 창백 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소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소녀의 심장에 가져 갔다. 다행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눈물을 흘렸다. "내게 곁에 있어달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목숨을 끊으려하다니 그럼 난 뭐 죠?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소녀가 가만히 눈을 떴다. 소녀는 붕대가 감겨져 있는 손을 들어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소년에게 말했다. "아이, 우리 도망가자. 날 데려가 줘. 어디론가 날 데리고 가줘. 그래서 우 리 두 사람 같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우리 두 사람이 자유롭게 서로 만 보고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소년은 소녀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소녀는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빠졌다. 소 년은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여장을 꾸렸다. 떠나는 사람은 소년 혼자였다. 소녀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긴 여정을 소녀가 참아낼 수 있 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소년은 그렇게 소녀의 곁을 떠났다. 소년이 떠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소년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 마 후, 소녀의 정혼자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동방 제국 이곳저곳에 떠돌 았다. ********아름다운 아르헨...새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소년이 척박한 땅, 아르헨에 도착한 건 12모네(주. 참조)가 2번이나 지나 고 나서 였다. 많은 여정을 겪고 그동안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아이슬로 데는 아르헨에서 3모네동안 노래만 불렀다. 그의 노래에 나무가 자라고 풀이 솟았다. 그리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슬로데는 아르헨을 사랑 했다. 아르헨은 아름다운 땅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아르헨에 사람들이 찾 아 오기 시작했다. 아이슬로데는 그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 들였다. 대부분 의 사람들이 동방과 서방,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동, 서방 제국의 황녀와 황자들도 있었다. 아이슬로데는 그들에 게 향수를 느꼈다. 아이슬로데는 소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소녀를 데리고 와 이 아름다운 낙원에서 같이 살게 될 그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르헨 이 완벽한 하나의 나라가 될 때까지 아이슬로데는 참기로 했다. 소녀의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아이슬로데는 아르헨을 아름답게 가꾸는데 마 음을 기울였다. 아르헨에 도망 온 황녀와 황자들은 아이슬로데를 존경했 다. 그리고 언제나 그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아이슬로데는 그들에게 힘 을 나누어주었다. 노래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 들은 곧 이어 아이슬로데와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기한 힘을 '레플리카'라 부르며 칭송했다. 아르헨의 사람들은 선 량했다. 아이슬로데는 초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땅과 착한 사람들을 사랑 했다. 더 없이 자유롭고 따스한 나라였다. 세간의 사람들은 아르헨을 '낙 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아르헨은 그와 소녀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소녀를 데리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슬로데는 기 쁘게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슬로데는 소녀를 데리고 오지 못했다. 동, 서방 제국이 아르헨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인지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 이었다. 아이슬로데는 분노했다. 자신과 소녀의 낙원을 망치려드는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다. 동방과 서방은 엄청난 병사와 무기로 무장하고 아르헨 으로 쳐들어왔다. 아이슬로데는 그 무시무시한 정경에 이를 악물었다. 용 서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행복을 빼앗고 자신의 행복을 빼앗은 제국이었 다. 아이슬로데는 7델라(주. 참조)동안 장송곡을 불렀다. 그리고 5델라동안 진혼곡을 불렀다. 진심으로 그들이 쓰러져 주기를 바라며 노래했다. 동방 과 서방 제국은 그의 노래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아이슬로데는 그들이 포기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아르헨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날아가 버린 나의 작은 새. 전쟁은 오랫동안 아이슬로데의 발을 묶어 놓았다. 아이슬로데가 동방 제 국을 찾은 것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이슬로데는 기억을 더듬어 소녀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 곳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 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 마음이 들어 아이슬로데는 미소지었다. 아이슬로 데는 소녀가 곧잘 거닐곤 했던 작은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은 세심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는 정원에서 꽃을 하나 꺾어 향기를 맡았다. 그가 소녀에게서 건네 받았던 그 꽃의 향기가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때 갑자기 아이슬로데는 인기척을 느껴 뒤로 돌아섰다. 소녀의 유모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 그는 머뭇거렸다.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소녀의 유모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가씨는 여기서 매일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매일." 아이슬로데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유모는 정원의 잡초를 하나 뽑아 내고 말을 이었다. "매일 노래를 흥얼거리셨죠. 당신이 부르던 그 노래 말이에요." "아르헨은...아르헨은 지금 어디에?" 유모는 아이슬로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저 원을 풀을 뽑아 냈다. "아가씨를 만날 수는 없을 겝니다. 아가씨는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리셨으 니까요. 아주 먼 곳에." 그렇게 말하는 유모의 말이 아주 슬퍼 보여 아이슬로데는 멍하니 집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유모가 울음을 삼키려는 듯 울먹이며 말했다. "돌아가셨습니다. 짝을 잃은 새처럼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결국 독살당하 셨습니다. 아가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황자께서 결국... 그 날도 아가 씨는 이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셨지요.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 면...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아이슬로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소녀는 그 렇게 그에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온통 가져가 버리고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새가 되어 날아가 버 렸다. ********당신의 노래로 새가 되어...누구보다 자유롭게... "아이슬로데 님! 아이슬로데 님!"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아이슬로데에게 다가왔다. 그는 빙그레 웃어 주며 아 이들을 바라보았다. 한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있잖아요! 아르헨 사람들 중에서 아르헨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슬 로데 님이래요! 맞죠? 그렇죠?" "당연하지! 너 그런 것도 모르냐? 아이슬로데 님이 우리 아르헨을 만들어 주신걸." 아이들은 티격태격 거리며 소리쳤다. 아이슬로데는 기분 좋게 웃어 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난 정말 아르헨을 사랑한단다. 아르헨을...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아이슬로데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얀 새가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슬로데는 눈을 감고 노래했다. 따뜻한 노랫소리가 멀리 퍼져나갔다. 그는 주머니 속의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중한 듯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 이 글을 볼 때쯤 난 이미 없겠지만... 오라버니가 날 죽이겠다고 마음 먹으셨나 봐. 슬프지는 않아. 그래도 당신이 마음 아 파할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거야. 당신이 약속을 지켜주지 않아서 원망했어.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저버렸 어, 아이. 내 곁에 있어 주겠다는 약속도. 날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도. 당 신이 사라져서 난 새가 될 수 없었어. 자유롭게 이 곳에서 날아갈 수 없 었어. 그래도 당신의 노래는 나를 사랑하게 해 주었어. 마음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와질 수 있었어. 당신이 아르헨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때서야 당신이 날 위해 떠났 다는 것을 깨달았지. 당신은 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들어주려는 거였어. .......당신은 그립고 그리운 그 곳에서 날 자유롭게 해주겠지. 당신의 노래 는 내게 날개를 달아줄거야. 난 그 곳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워지겠지. 언제 나 당신과 함께 지켜본 그 새들처럼 난 자유로와 질거야. 그리고 누구보 다도 당신을 사랑할 거야. 당신의 노래를 사랑해. 그리고 당신을 사랑해. 아르헨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자유로운 나의 마음만으로......]] 외전 04. 로스페니르 [ 눈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4. ----로스페니르 [ 눈 ] ******** 마지막까지 함께... "눈이... 오고 있어." 나는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눈을 받아 보았다. 새하얗고 차가운 눈. 살며 시 뺨에 대어 본다. 차갑지만 어느새 따스한 물로 바뀌는 눈. 그것은 어느 새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에도 넌 함께 해 주는구나." 눈이 감겨왔다. 마음 아플 정도로 시리고 차가운 눈. 마치 그의 눈동자와 같아 언제나 마음 한 쪽이 아파 왔었던 새하얀 눈. 나의 마지막은 눈과 함께였다.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그가 아니라 눈과 함께였다. 그는 마 지막까지도 나와 함께 하지 않았다. 당신을 영원히 저주하리라. 죽어서도 나를 잊지 못하도록. ******** 아름다운 이방인. 나는 눈의 아가씨라고 불렸다. 내가 태어날 때 어느 해보다 많은 눈이 내 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눈이 너무 좋았다. 새하얗고 차가운 눈. 눈 이 내리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 얗게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풍경이다. 온통 새하얀 세상. 내가 사는 곳은 아르헨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르헨의 주변에 사는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고 들었다. 척박한 땅, 아르 헨.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아르헨에 우리 일족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우리 일족은 아르헨에 살고 있 었다. 우리 일족은 숨어사는 일족이었다. 우리는 그저 빛과 어둠, 바람과 물, 불과 대지를 벗삼아 살고 있었다. 대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 일족에게 대자연은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다. 빛과 어둠, 바람과 물, 불과 대지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바램을 들어 주었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워진 환경에 만족해서 살 아가고 그 마음이 자연에 전해졌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척박하고 메마 른 아르헨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다른 무엇도 우리에겐 필요치 않았다. 아르헨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그가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던 날, 아르헨의 마른 대지가 흥분에 휩싸여 울려댔다. 나는 그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날따라 빛은 더욱 다정하게 우리를 감싸 주웠다. 그는 대자연에게 환영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웠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신비로운 사람. 그 는 우리를 발견해 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찾아 내지 못했던 우리 일족 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마치 공기의 움직임 과도 같은 노랫소리에 우리는 말을 잃었다. 아름다운 노래의 힘은 비단 우리의 정신을 따스하게 만드는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노래는 아르헨으 로 퍼져갔다. 그리고 그 노랫소리에 아르헨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칠고 마른 대지에 물이 흐르고 초목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난 그 낯선 이방인 의 기적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는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낙원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자 했다. 이미 우리 일족은 그의 매력 에 푹 빠져 버렸다. 아름다운 이방인은 그렇게 아르헨의 사람이 되었다. ******** 나를 바라보는 그의 차가운 눈동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가 아르헨에 온 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러나 나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누어 보지 못했다. 언제나 발을 내리고 희미 하게 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일족의 장과 이방인과의 만남 을 금기시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아르헨의 사람이 되 었음에도 나는 좀처럼 그와 마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노 래를 흥얼거리며 나무를 키워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겨울이 왔다. 그리고 겨울 가운데쯤의 어느 날 눈이 내렸다. 나는 얇은 옷 차림으로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눈이 온다는 기쁨에 춥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하늘도 온통 새하얗게 물들이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름끼칠 정 도의 아름다움에 나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차갑고 깨 끗한 눈이었다. 나는 바람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로 와주세요! 그래서 이 아름다운 눈을 멀리까지 흩어주세요!" 두 손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바람이 오 늘도 나의 부탁을 잊지 않고 들어 주었다. 따스한 바람, 차가운 바람...그 들은 언제나 나의 벗이었고 언제나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바람에 이 리저리 흩어지는 눈발을 보며 나는 미소를 띈 채 눈밭을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기분이 좋았다. 언제나 이렇게 눈이 왔으면! 그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의 아가씨로군요." 나는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길게 흩날리는 은발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아이슬로데 님." 그는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바람이 불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대단한 능력을 지니셨군요. 로스페니르 님. 자연을 움직이다니. 나의 노래가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당신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의 노래는 단순한 나의 바램을 이루어주는 것뿐이니까요. 이렇게 거대한 자연의 힘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없답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속삭이듯 대꾸했다. "자연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연의 힘에 거역하지 않고 그저 순응 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하얗게 덮인 눈밭을 둘러보았다. "난 겨울이 싫습니다. 춥고 메마른 계절이에요.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하고 새들도 모두 웅크리고 있으니..." "하지만 겨울은 다음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에요. 아름다운 눈과 같이." 그는 나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새가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계절이 좋아요. 겨울은 너무 차가워서 새들도 추워 보여..."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차가운 눈과 같다는 것을. 묘하게 욱신거리는 심장 안쪽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차갑고 차가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말라버린 마음, 내게만은 잔인한 당신. 아르헨에 비릿한 전쟁이 찾아왔다. 그러나 아르헨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아이슬로데와 그를 따르는 제국 출신의 다섯 명의 황자, 황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리 일족이 있었다.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우리 일족의 힘이 숨어서 그들을 뒷받침을 해주었다. 아르헨은 우리 일족의 땅이었다. 쉽사리 내줄 수는 없었다. 그런 나의 바램과 같이 전쟁은 끝이 났고 아르헨에는 평화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가 여행을 떠났다. 그가 한 때 살았던 동방 제국으로 간다고 했다. 얼마 후 나는 우연하게 그 여행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 여행의 목적은 그가 그토록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아르헨이라는 여자를 데리러 가는 것이었다. 그가 이 곳에 온 이유도 그 여자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게된 순간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 대한 질투로 내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기분으로 동방의 황태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아이슬로데의 그녀, 아르헨을 죽이면 나의 땅, 아르헨을 넘겨주겠노라고. 얼마 후,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위로해주었다. 나 자신의 태연자약한 모습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내 곁을 떠나는 것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얼마 후 동방의 황태자가 아르헨을 죽인 대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했다. 굳이 그런 일에 나설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아르헨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이상 그들은 내게 어떤 대가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일족과 아르헨에 정착한 사람들 사이에 그와 나의 정혼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안타깝고 슬픈 마음은 흘러. 그와 나의 혼인에 대한 문제는 거의 결정된 사항과 같았다. 그가 아무리 나를 싫어해도 우리는 혼인하게 되어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수록 하기 싫은 일을 많이 하게 되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를 따르는 황자와 황녀의 청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고 나 또한 내 일족의 바램을 저버릴 수 없었다. 아르헨이라는 나라를 만든 그를 그렇게 혼자 내버려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아르헨에서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가 후손을 남겨 아르헨을 지켜주길 다들 바라고 있었다. 혼례의 날짜가 정해진 어느 날, 그가 내게로 왔다. 나는 나의 혼례복을 보고 있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혼례복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나 그가 이미 그 혼례복을 본 뒤였다. 그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과 혼인할 수 없습니다. 내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은 만나지 못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당신과 혼인할 수는 없습니다." "아르헨이라는 여자 분 말씀이신 가요? 늘 새가 되고 싶어했다는 그 여자분." 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내 앞에서 저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것인가. 그는 이기주의자였다. 내 기분 따위는 생각해주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새가 되어 날아가 버린 그녀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일족의 의견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당신도 아르헨에 온 이상 책임을 져야할 겁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후손을 남겨 아르헨을 지켜주세요." 하얗고 차가운 눈동자로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뒤돌아서 나가버렸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렸다. 눈 오는 날에 태어난 아이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 사실이 이렇게 마음에 파고들다니 정말이지 마음이 아파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말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나는 그를 원망했다. 그 누구에게도 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 내게 이렇게 추하고 흉측한 감정을 지니게 만든 그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잔인한 당신, 잔인한 나. 당신이 나를 잊지 않도록... 아이가 태어났다. 나와 그의 아이다.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모성애라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마지못해 한 결혼이지만 그는 남편으로서 나에게 자상하게 대해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시간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데 보냈다. 그가 여전히 아르헨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의 남편이라는 사실로 만족해야 했다. 나는 그것으로서 만족해야 했다. 그 마음 속에 내가 있을 자리가 한 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거기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아이만은 사랑했다. 나와는 달리 아이에게는 정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와 나는 아이를 통해서만 대화를 했다. 두 사람만 있을 때는 몹시 어색해져 항상 그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그가 내 곁에 있었다. 아르헨이 아니라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만족해야 했다. 그 작은 행복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욕심이 났다. 가질 수 없었지만 너무나 욕심이 났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이 찾아왔다. 그가 결국 알아냈던 것이다. 내가 아르헨을 죽였다는 것을.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찾아 왔다. 그 날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이 오는 여느 때처럼 지긋이 눈을 감고 하얀 눈을 맞고 있었다. 그 날의 눈은 몹시 차가웠다. 그가 말했다. "난 이 곳을 떠나겠어. 더 이상 당신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떴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머리 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를 사랑하지 않은 당신이 나빠. 내게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어. 오직 그녀를 그릴 뿐." "난 떠나겠어. 내 아이를 데리고." 나는 피식 웃음이 새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소중한 건 아이뿐이다. 어차피 내게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그였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곁에 있지 않겠다면 당신도 죽이겠어. 내 곁에 있는 것, 그리고 죽음, 어느 것을 택하겠어요?" 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던 날이 드디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가 2개의 유리잔에 술을 따라왔다. "이별주(酒)에요. 당신이 내 곁에서 떠나든, 아니면 죽음을 택하든 둘 다 우리에겐 이별이니까. 다시 한 번 묻겠어요. 내 곁에 있겠어요,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어요?" 아이슬로데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차라리 죽겠어." 그의 말에 나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내 곁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말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독이 든 술이에요. 당신 스스로가 죽음을 택한 것이니." 나는 미소 띈 얼굴로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술잔을 바라보다 내게로 시선을 올렸다. "미안해. 난..." 사과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내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을 입으로 기울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 술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훗, 독이 든 술잔은 내 잔뿐이야. 당신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죽어서 그녀를 만날텐데.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난 죽어서 다시 그녀를 죽일 거야. 영원히 당신과 그녀가 만나지 못하도록. 내가 그녀를 죽여 놓을 거야." 아이슬로데의 놀란 눈동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일말의 쾌감을 느끼며 크게 웃었다. 내 마음과는 달리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흐려져 가는 시야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 "정말로 내겐 일말의 감정도 없었나?" 아이슬로데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힘없이 말했다. "로스페니르, 난... 미안해. 그것보다 어서 해독을..." 그는 끝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뺨을 스치는 눈발을 느끼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허무했다. 그녀는 죽어서도 사랑 받았고, 나는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 받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을 저주할 거야. 내 아이를 저주할 거야. 그 아이들은 자라서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들이 자라서 아이를 낳겠지. 당신과 나의 피는 영원히 비인 가에 전해질 거야. 그리고 나의 저주는 그들의 피를 타고 흐르겠지. 내 피가 흐르는 아이들은 절대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그들은 당신을 저주할테지. 내 저주는 모두 당신 탓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의 원망을 들으며, 죽어서도 나를 잊지 못하겠지. 당신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군 나를 원망하고 원망할거야. 그렇게 난 당신 마음 속에 깊이깊이 자리하게 될 거야."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갑고 시린 새하얀 눈 같은 눈동자.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나와 함께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름답고 깨끗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미소지었다. 죽는 순간까지 눈은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피가 울컥 하고 입 안에서 쏟아졌다. 나는 천천히 눈밭으로 쓰러졌다. 차가웠다. 하지만 눈동자에 비치는 아름다운 눈송이는 너무나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식어가는 몸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빛이여, 어둠이여, 바람이여, 물이여, 불이여, 대지여. 사랑 받지 못한 나를 불쌍하게 여겨 주길. 그리고 나의 바램을 들어주길. 내 아이들에게 저주를. 절대 행복해 질 수 없도록.... 그 저주가 전해져 그가 날 기억하도록. 그가 날 기억하도록...." 천천히 눈이 감겨왔다. 하얀 눈이 내 몸을 덮고 있었다. 얼어버린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이 바람이 불어왔다 죽어 가는 순간에 나는 빛을, 어둠을, 바람을, 물을, 불을, 대지를 느꼈다. 이렇게 추한 나를 감싸주려는 듯 그들은 우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런 나도 자연에게만은 사랑 받고 있는 것인가?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감사한 마음에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울 수도 없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나의 바램을 들어주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러나 내 아이들에게 축복을. 그 아이들이 행복해 지기를.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오래도록 행복하도록. 어리석은 나의 바램을 뿌리치고 행복해지기를...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사랑 받는 아이가 되기를...' 제42음(第42音) 드디어 비인 본가에!(1) 에이드리안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쥬느비에브는 빨갛게 잘 익은 조그만 과일를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에이드리안의 입 앞에 내밀었다. "아아- 하세요. 어서 아아-" 쥬느비에브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굴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베개를 등뒤로 받치고 누워 있던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내가 먹을 테니 내려놔." "아이 참, 아플 때는 많이많이 먹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특히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루이즈 아주머니가 그러셨어요." 쥬느비에브는 아랫입술을 뿌루퉁하게 내밀며 에이드리안의 입으로 다시 과일을 내밀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저 약간 몸살이 난 것 뿐이야.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 없다고." 그랬다. 쥬느비에브는 이틀동안 스콜라에도 나가지 않고 이리저리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요즘 연일 계속된 학생회 업무와 자신의 영지와 장원(莊園)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결정하느라 결국 몸살이 났다. 에이드리안이 아프다는 것을 안 쥬느비에브는 그 때부터 자신이 손수 에이드리안을 간호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을 데워와 수건을 적셔 에이드리안의 머리에 올려놓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곧이어 쥬느비에브는 몸에 나는 열을 식혀야 한다는 루이즈의 말을 듣고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곧장 에이드리안의 잠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행동에 기겁을 하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느라 몸살이 더 심해졌다. 겨우겨우 쥬느비에브를 말린 에이드리안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살이 난 사람의 체온이 가끔씩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톨레의 말을 듣고 쥬느비에브가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주겠다는 둥 같이 자겠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에이드리안은 또 다시 그녀를 피해 집 안 구석구석으로 도망쳐야 했다. 루이즈와 톨레의 만류로 다시 잠잠해진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이제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마를 만져본 쥬느비에브가 체온이 오른 것 같다며 난리를 떠는 바람에 다시 그의 평화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체온을 재야 한다며 자신의 입술에 막무가내로 입술을 들이미는 쥬느비에브를 진정시키느라 기력을 소진해버린 에이드리안은 결국 정말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나 쥬느비에브의 '간호'는 계속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체력 보충을 위해서라며 과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정말 안 먹을 거에요? 그럼 내가 먹여 줘요?" 에이드리안은 계속 감겨오는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뭐라고?" 쥬느비에브는 조그만 빨간 과일을 입안으로 쏘옥 넣더니 침대 위로 뛰어 올라 에이드리안에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아- 해요. 내가 넣어줄게요. 안느마리가 준 <연인의 지침서>에 남자 친구에게 이렇게 해주면 반드시 먹는 댔는데." 에이드리안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끙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그냥, 그냥 줘. 먹을게."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생글생글 웃으며 침대 밑으로 내려가 다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 들어 있는 과일을 오물오물 맛있게 씹으며 접시 위의 과일 하나를 집어 들어 에이드리안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에이드리안은 마지못해 입을 벌려 과일을 받아먹었다. "맛나죠? 너무너무 맛나죠? 내가 주니까 더 맛나죠? 힘이 빡빡 솟는 거 같지 않아요?" 에이드리안은 입안에 든 과일을 씹으며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려오는 잠 때문에 쥬느비에브의 말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다시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요? 자지 마요. 이 거 다 먹어야 하는데. 음, 음, 에이드리안~ 자지말고 이거 더 먹어요." 에이드리안은 어느새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심신이 피곤했다. 어서 잠들고 싶었다. 이마에서 열이 나는 것 같고 머리도 멍했다. 그저 자고 싶었다. 순간 뭔가 따끔한 느낌이 손등에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신경쓰지 않고 다시 졸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 에이드리안은 입술에 닿은 매끈하고 다소 시원한 어떤 느낌을 받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또 입술로 과일을 들이밀었거니 생각하고 살짝 깨물고는 혀로 핥아 입안으로 빨아 당겼다. "아야, 아파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웅얼거리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살짝 눈을 떴다. '응? 쥬르 얼굴이 왜 이렇게 가까이 보이지? 머리가 어지러우니 눈까지 이상해 졌나? 근데 과일 맛이 왜 이래?' 에이드리안은 순간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를 확 밀쳐 냈다. 그리고 멍하니 입술을 문질렀다. 정신이 번쩍 든 에이드리안은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제 밤부터 쌓인 모든 것이 풀어져 나와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도저히 못 참아! "야! 너는 왜 아무데서나 입술을 내밀고 그래? 여자애가 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아무리 약혼을 했다지만 그렇게 함부로 키스를 하는 여자애가 어디 있어? 제대로 된 레이디는 절대 여자 쪽에서 먼저 입술을 내미는 경우가 없어!" "하, 하지만 에이드리안이 자니까...깨우려고 그랬던 거라고요. 꼬집어도 안 일어났으면서. 이 과일 다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야 건강해지는데..." 쥬느비에브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에이드리안은 무거운 머리를 겨우 가누며 다시 소리쳤다. "어젯밤도 그래. 그렇게 남자 몸에 함부로 손대면 어떻게 해? 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전에도 말했지만 난 절-대 결혼 전에는 그렇고 그런 짓은 할 생각 없어!" "아이, 정말! 다 에이드리안을 빨리 낫게 하려고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나도 결혼 전에는 절대 그렇고 그런 이상한 짓 할 생각 없으니까 안심, 또 안심하세요! 에이드리안 바보!"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말을 마치고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리고 접시에 담긴 과일을 우루루 입안에 털어놓고 우물거렸다. "흥!! 내가 다 머거 보리꺼야. 에드리아하테느 아 주꺼야. (내가 다 먹어 버릴 거야. 에이드리안한테는 안 줄 거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쥬느비에브는 홱 토라져 밖으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을 받으며 침대 위로 휙 쓰러졌다. 그리고 궁시렁거리며 이불을 잡아 당겨 덮었다. "아, 정말. 도대체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쥬르 바보. 바보, 바보, 바보." ******** 쥬느비에브는 저녁 늦게까지 집 근처의 연못가에서 투덜대고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 에이드리안을 위해 그런 건데 그는 칭찬은 못해줄 망정 소리나 지르고 정말이지 화가 났다. 쥬느비에브는 연못가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 돌멩이를 던지며 불만을 뿜어냈다. "에이드리안 바보, ....조, 좀탱이." '좀탱이'라고 말하고 나니 좀 심한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야. 에이드리안은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아까워. 흥! 에이드리안 바아-보." 돌멩이 하나를 연못 속으로 퐁당 던지고 쥬느비에브는 시무룩한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에이드리안을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때처럼 모롤라나 꼬치 구이정도로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에이드리안이 사과할 때까지 절대 화 안 풀 테다! 그 때 쥬느비에브는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분명 자신을 찾으러 온 에이드리안이라고 생각하고 쥬느비에브는 잔뜩 얼굴을 구겼다. 화난 표정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에이드리안을 겁먹게 해야 했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흥! 무, 무슨 상관이에요? 나 화났다구요. 계속 화나 있을 거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홱 돌려 에이드리안에게 외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화를 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전처럼 에이드리안이 진짜 화내버리면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 좀 무섭긴 하지만. 절대, 절대! 화 안 풀어야지. 절대 사과 안 하면 화 안풀...' "정말 계속 화낼 거야? 비인 본가에 데려가도?" "에에-?" 쥬느비에브는 절대 화를 안 풀겠다는 방금 전의 결심은 한순간에 잊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이드리안은 방금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어, 언제요? 우리 정말 비인 본가에 가는 거에요? 그래서 에이드리안 가족도 만나는 거에요? 정말요? 진짜요?" "응...저번 대무도회도 그렇게 되었으니. 당분간 친족들이 다 모이기는 어려울 테니 우선 일로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쥬느비에브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다니면서 팔을 으쓱으쓱하며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이,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드디어 비인 본가에 가보게 되다니...기분 좋아." 쥬느비에브는 춤을 끝내고 에이드리안에게 쪼르르 달려가 폴싹 안겼다.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이 최고로 좋아요." "으응..."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계속 화나 있겠다더니? 왜 이렇게 단순한 거야, 넌...' ******** 에이드리안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 쥬느비에브를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에서 비인 본가에 가자고는 했지만 사실 언젠가는 한 번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휴가를 내겠다는 간단한 서신을 작성한 다음 잘 접어 하얀 색의 고급스런 봉투에 넣고 그 위에 붉은 색 인장을 찍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휴가를 낸 것을 유벨 일당이 알면 돌아와서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학생회 업무도 상당히 밀려 있는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그 녀석들이 애 먹을 걸 생각하니 왜 이렇게 즐거울까.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듯한...' 장난스러운 눈으로 유벨 일행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에이드리안은 다시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학생회 위원에게 전하기 위해 책상 위에 봉투를 올려놓은 에이드리안은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무척 더워 보였다. 내리쬐는 햇살에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진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털어 내고 뒤돌아 섰다. 낮에 유벨이 와서 레플리카를 써준 덕에 몸 상태는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몸살 같은 것은 레플리카를 써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휴가동안 회복시킬 수밖에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작게 한 숨을 쉬고 베이지색 바지를 손으로 탁탁 털어 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쥬느비에브가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가자고 하는 건데 자신이 좀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로나 할머니를 뵌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천천히 서재를 벗어났다. 멀리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쥬느비에브가 짐을 챙겨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에이드리안은 밖에 대기되어 있는 커다란 흰색 마차를 창으로 흘끗 보며 미소지었다. ******** "얼마나 머물 건데요?" 쥬느비에브는 마차 안이 답답한지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칭얼거림에 생각보다 일찍 출발한 그들이었다. 등을 기대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그녀에게 살짝 웃어주며 말했다. "글쎄. 가보고, 있고 싶은 만큼." "에이, 무계획적이잖아요. 우웅~ 그런데 할머니가 날 좋아해 주실까요? 사람에게는 첫인상이 아주아주 중요하다고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나 오늘 옷 어때요?"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파란 색 체크 치마를 가리키며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잔뜩 기대하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까만 눈동자를 말똥말똥 뜨고 있는 그녀가 너무 귀엽고 우스워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할머니가 널 좋아하실 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레나 아주머니가 누구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살짝 눈을 찌푸리다 곧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나 여기 오기 전에 디올레 마을에 살았었거든요. 거기서 만난 아주머닌데 아주 박식하고 친절하세요. 나한테 과자도 많이 주시고. 게다가 디올레 마을 부녀회 중에 나만 결혼 안 한 사람이어서 아주 귀여움 받았거든요." "마을...부녀회? 너 그런데는 왜 들어간 거야?" 에이드리안은 저번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정체 불명의 집단에 대해 생각하고는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쥬느비에브는 치마 주름을 쭉쭉 펴면서 말했다. "거기 들어가면 아주머니들이 맛난 거 많이 주시거든요. 나 꽤 인기 있었어요, 거기서. 레나 아주머니는 매일 나더러 며느리가 되라고 하셨는걸요? 타지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있다며 늘 나더러 '고생하지 말고 우리 집에 오렴-' 이러셨어요." "뭐, 뭐야? 그 여잔. 며느리는 무슨. 너한테 그런 이상한 유혹을 하다니... 그런데 너...거기서 고생했어?" 에이드리안은 그 레나 아주머니가 아주 쓸데없는 소리만 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인상을 쓰다가 '고생'이라는 말에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씨익 웃어주고 말했다. "그냥 좀 가난했을 뿐이에요. 그냥...마망도 유모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부자면 행복한 거래요."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레나 아주머니란 사람이 쥬느비에브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가난해도 마음이 부자면 행복하다라...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잔뜩 인상을 쓴 채 마차 밖의 풍경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왜 자신이 쥬느비에브를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쥬느비에브가 자신과 만나기 전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마 자신의 사택 후문 앞에서 그와 처음 만난 그 때 입고 있던 낡은 옷차림처럼 아주 힘든 생활을 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고 있을 때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엉? 에이드리안! 우리 커다란 철문을 지나왔어요! 어, 어디로 가는 거에요?" "여기서부터 본가야. 아마 30시르(주. 참조)나 40시르정도 가면 대저택이 나올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기겁을 했다. "에엣! 3, 30시르요?" 쥬느비에브는 창 밖으로 빠꼼하게 머리를 내밀었다. 바람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많은 건물과 나무를 헤치고 커다란 저택이 보이기 시작하자 쥬느비에브는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와 침을 꿀꺽 삼켰다. "에, 에이드리안, 나 길 잃어버릴 것 같아요. 왜, 왜 이렇게 넓은 거에요? 스콜라보다 훨씬 클 거 같은데..." "비인 가는 다른 가문보다 사람이 많아. 여긴 직계 가족과 그 밖에 중요 인사들이 머물고 있어. 내 할머니이신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 님을 위시해서."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움켜쥐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현실감이 확 느껴졌다. 그랬다. 에이드리안은 아르헨에서도 손꼽히는 비인 가문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보통 대귀족도 아닌 비인 가문! 쥬느비에브는 다시 침을 꿀꺽 삼키며 왼쪽 가슴을 투닥거렸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 그래. 좋았어! 할머니한테 좋은 인상을 보여서 귀여움 받아야지!"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비인 가의 대저택이 눈앞에 다가왔다.! 제43음(第43音) 드디어 비인 본가에!(2) 쥬느비에브는 마차에서 내려 멍하게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대저택을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뱅글뱅글 눈동자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저택의 크기는 그녀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거대하다'하는 단어와는 차원이 틀렸다. 그렇다고 대저택의 크기를 설명할 다른 뾰족한 단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색과 붉은 기가 도는 벽돌로 만들어진 대저택은 중후한 멋이 있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대단해 보이는 곳이 더 대단해 보였다. 주변의 녹지도 한 몫을 했다. 자신의 파란색 체크 치맛자락을 무의식적으로 두 손으로 꾸욱 쥐고 쥬느비에브는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 엄청...엄청 크다. 와아..." "뭘 그렇게 넋을 빼놓고 있어? 쥬르." 마차에서 내린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곁에 와서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멍해진 눈동자를 돌려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안 놀래요? 여기 너무너무 크잖아요." "뭐 어릴 때부터 봐 와서 잘 모르겠는데."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꽉 쥐어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주먹을 떼고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섭도록 큰 저택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왠지 의기소침해진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에이드리안의 옆으로 가서 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꾸욱 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불안해하는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어 주었다. "스콜라 졸업하면 여기서 살게 될 건데 그렇게 무서워하면 어떻게 해?" "하, 하지만 너무 크니까..." 쥬느비에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에이드리안, 좀 무섭긴 하지만 나 안 떨래요. 있잖아요, 가족이 한 명 더 생기는 거잖아요. 에이드리안의 가족은 내 가족이기도 하니까. 나 아주아주 기분 좋아요.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할머니한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손길에 기분이 좋다는 듯 고양이처럼 살풋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들어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시 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조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중얼거렸다. "왠지...그리운 냄새가 나. 아주 그리운..." ******** 현관 앞에 서서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파란색 체크무늬 스커트의 주름을 쭉쭉 펴고 입고 있는 하늘색 자켓도 바로 했다. 그리고 한 쪽 머리에 묶은 리본도 보기 좋게 리본 매듭을 앞으로 돌려놓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작업이 완료되자 기분 좋게 웃으며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얇은 베이지색 코트와 하얀 바지를 쭉 훑어보고 눈에 띈 주름을 펴 주었다. "다 된 거야? 이제 들어가도 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신나게 브이 자를 그려주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 때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휙 하고 날렸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끔뻑거렸다. 곧 이어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쥬느비에브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깨진 도자기가 눈에 보였다. 집 안에서 도자기가 날아왔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랄 정신도 없었다. 뒤늦게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누르며 쥬느비에브는 앞 서 있던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에이드리안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바로 머리 옆으로 도자기가 날아갔는데도! 쥬느비에브는 역시 대속성 레플리카의 계승자는 남들과는 다른 대범함이 있나 보다하고 생각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도자기에 맞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은 퉁한 표정으로 현관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또 다시 도자기가 날아올까 에이드리안의 등뒤에 숨어 빠꼼히 안 쪽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아까보다 더 큰 도자기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것도 자신들의 앞에 직격으로! "으으악. 어떻게 해~" 쥬느비에브는 놀라 손으로 양쪽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무언가 짧은 소리가 귀를 찔렀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한 쪽 눈을 떴다. 도자기가 에이드리안의 앞에 멈춰 공중에 떠 있었다. 도자기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살며시 그의 두 팔에 안겼다. 에이드리안이 성큼성큼 발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덜덜 떨리는 심장을 두드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에이드리안은 현관에 들어서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할머니! 함부로 현관에 이런 거 던지지 말라고 했죠?" "네가 예술에 대해 뭘 안다는 게냐. 예술가란 자고로 자신의 실패한 작품에 대해서는 바로바로 처분을 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실패작을 현관에 던져야 다음 작품이 잘 된단 말이다." 굵직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에이드리안이 눈썹을 실룩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말똥말똥 눈동자를 굴리며 안 쪽을 바라보았다. 각양각색으로 채색된 하얀 도자기가 한 쪽에 잔뜩 쌓여 있고 그 옆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위풍당당하게 짙은 녹색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노인은 비록 얼굴에 주름이 많았지만 하얀 피부에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당당한 자세로 정확한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노인을 본 순간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바우츠! 이 거 받아. 할머니, 밑에 사람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깨진 도자기 다 치우려면 다들 고생하잖아요."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상냥해진 게냐. 그리고 바우츠와 우리 집 하녀들은 너처럼 그렇게 속이 좁지 않다. 내 예술을 이해해 준단 말이다." 에이드리안이 건네준 도자기를 받아들고 집사가 살짝 허리를 굽혔다. 그는 이제는 이런 일은 몸에 익었다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도자기에 색을 입히는 것은 일로나의 취미였다. 그러나 항상 마음에 안 든다며 도자기를 집어던지곤 하는 것이다. 실패한 작품을 현관에 던져야 스트레스가 풀리고 다음 작품이 제대로 완성된다는 일로나의 지론덕분에 그녀의 집사와 하인, 하녀들은 늘 뒤처리를 하느라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우직한 집사의 말에 살며시 웃어주며 말했다. "훗, 오랜만이군, 바우츠. 늘 고생이 많아." 에이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할머니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할머니는 손자의 말에 눈을 실룩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두 사람 사이가 엄청 나쁜가 보다고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첫 만남부터 싸움이라니. 평소에 이야기할 때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참 이상했다. 그 때 할머니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와서 안아주지도 않을 테냐?" 에이드리안은 할머니의 말에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가 곧장 안겼다. "할머니! 진짜 오랜만이잖아요!" "그래, 이 녀석아, 자주 좀 오라고 했는데 이제야 오다니..." 얼싸안고 포옹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주 사이가 나쁜 것 같더니 지금 보니 엄청 사이 좋은 할머니와 손자 사이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혼자 멍하니 서서 두 사람의 감동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다가왔다. "인사해, 쥬르, 내 할머니이신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 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이상한 표정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쥬르." 쥬느비에브는 다시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참 그를 쳐다 보다 뒤에 서 있는 일로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흔들며 말했다. "레나 아주머니, 안녕?" ******** "속았어. 난 속았던 거야. 이렇게 두 여자의 간계에 쉽게 속아넘어가다니..." 에이드리안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하녀가 트롤리(주. 참조)에 차와 쿠키, 과일을 실어 가져왔다. 하녀가 차분한 몸짓으로 테이블 위에 다과를 차려놓고 나가자 일로나가 부드러운 향의 차가 담긴 잔을 입에 기울이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냐. 차 식겠다." "정말!! 할머니가 왜 그 레나 아주머닌지 뭔지 그 사람인거에요! 빨리 말 안 해주시면 저 오늘 그냥 집에 갈거에요." 심퉁한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새침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에이드리안, 자꾸 심술부리지 말아요. 레나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자꾸 심술부리면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잡아간대요." 에이드리안은 순간 발끈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는 무슨 아주머니야? 이런 할머니를 보고 무슨 아주머니냐고." "하, 하지만 레나 아주머니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힝~" 쥬느비에브는 놀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을 찍 달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은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리고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다. 일로나가 차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작년 겨울 별장에 갔었잖니. 그런데 근처의 마을에 좋은 염료가 있다길래 나의 예술적 취미를 살리고자 그 곳에 갔었다. 물론 본명을 숨기고 갔지. 귀찮은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만났지 뭐냐.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쥬느비에브를 내 손주며느리로 삼기로. 다행히 내가 손을 쓰기 전에 에슈비츠 가의 양녀로 가 이렇게 너의 짝이 되었으니 나로선 기쁠 수밖에." "그래서 제 약혼을 끝까지 반대하지 않으신 거에요?" 에이드리안은 다시 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럼 그 타지에서 힘들게 공부한다던 아들이 에이드리안이었어요?" "그래. 호적상으로는 저 녀석이 내 아들이니까." "음, 음, 음....그러면요, 이제 레나 아주머니가 제 할머니가 되는 거에요?" 기대가 가득 담긴 쥬느비에브가 두근두근 하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물었다. 일로나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강경하고 엄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웃을 때는 누구보다 인자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일로나의 긍정에 쥬느비에브는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레나 아주머니가 내 할머니라니...너무 좋아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아까까지 뿌루퉁하게 부어 있던 표정을 풀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자신의 기분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따끈한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일로나 할머니는 내가 비인 가에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야. 내가 어리광부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도 하고.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쭉 날 돌봐주셨지." "네가 언제 어리광을 부렸단 말이냐. 나이도 어린 게 늘 어른들이 짓는 표정이나 하고 있었으면서." 에이드리안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진심으로 가족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일로나 뿐이었다. 유벨의 가족도 그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친척이었다. 호적때문이 아니더라도 일로나는 그의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에이드리안, 나 옆에 앉아도 돼요?" 쥬느비에브가 갑자기 쪼르르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일로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할머니. 있잖아요. 에이드리안, 어릴 때도 지금처럼 이랬어요? 매일 멋진 말만하고 어른스럽고." "애늙은이였다.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어른스럽게 이야기를 하는지. 다들 그 녀석 말 한마디에 혀를 내둘렀지." 일로나는 옛날이 생각난다는 듯 지긋이 눈을 감았다가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에이드리안의 옷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일로나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결혼은 언제쯤 생각하고 있느냐." 장난치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스콜라를 졸업하고 나서 할 생각이에요. 제가 졸업하더라도 쥬느비에브는 아직 학생이겠지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결혼이라니? 내가 정말 에이드리안과 결혼하는 건가? 일로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기대어린 눈동자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일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혼을 늦게 해도...기대할 수는 있겠지." "무슨 기대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잡아당긴 쭉 풀어져 나온 셔츠자락의 실을 손가락에 돌돌 말면서 물었다. 그리고 실을 잡아당기며 다른 손으로 찻잔을 들고 입에 가져갔다. 쥬느비에브는 이번에는 에이드리안의 셔츠 소매를 손가락에 돌돌 말며 일로나를 끔뻑거리며 보고 있었다. 일로나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손주." "뭐, 콜록...콜록, 콜록." 에이드리안은 차를 마시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으며 일로나를 쏘아보았다. "무슨 소리에요.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아기라면, 그 포동포동하고 토실토실하고 뽀얗고 부드럽고 몽글몽글하고 귀여운 그 아기 말이에요? 에에-. 에이드리안, 우리 아기 입양하는 거에요? 음, 그럼 스콜라에 갈 때 아기를 업고 가야겠네. 그쵸? 할머니." 쥬느비에브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순간 발끈해 소리쳤다. "입양은 무슨, 누가 입양을 한 대? 우리 아이말이야, 우리 아이!" 에이드리안은 문득 자신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상기되는 것 같았다. 일로나가 능구렁이같이 음흉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어라, 우리 아기요? 우리 아기가 어디 있는데요? 어디? 어디?" 손을 이마에 붙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기가 막힌 듯 보던 에이드리안은 발끈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는 말이야, 그건 그러니까...너와 내가....그게..." 에이드리안은 결국 길게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결국 일로나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며 일로나를 쏘아보았다. 일로나는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찻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옆에서 계속 아기를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뭔가 한심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잘래요, 할머니. 너무 피곤해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아기가 어디 있다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일로나가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행복하니? 지금." 일로나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었다. "응!! 나 행복해요. 에이드리안이 날 아주 행복하게 해주거든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드리안의 뒤를 신나게 쫓아갔다. 일로나는 쥬느비에브의 기분 좋은 모습을 보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히스페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리고..." 일로나는 왠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찻잔 속에 담긴 붉은 빛의 차를 바라보았다. 그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 마냥 웃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44음(第44音) 드디어 비인 본가에!(3) 에이드리안은 꿈을 꿨다. 아주 견디기 힘든 꿈이었다. 일로나가 다가와 곧장 그의 멱살을 잡더니 당장 아이를 낳지 않으면 가마솥에 집어넣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쥬느비에브가 나타나 아이를 입양했다며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숨을 멈추며 눈을 떴다. 침을 삼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이지 어제 일로 분명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은 게 틀림없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꿈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떠 천천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익숙한 방이다. 그가 스콜라에 입학하기 전에 지냈던 곳이었다. 이 곳은 일로나의 대저택과는 약 5시르(주. 참조)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슬슬 일어나서 아침을 먹을까 하는 마음에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잠들어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에 터져 나오는 스팀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를 흔들었다. "쥬르, 쥬르! 왜 또 여기서 자는 거야? 응?" 쥬느비에브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을 떴다. 게슴츠레 눈을 뜬 쥬느비에브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드리안, 왜 그래...요?" "몰라서 물어? 네 방 놔두고 왜 여기서 자냐고." 쥬느비에브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그리고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어라, 아기, 아기는 어디 있어요?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자면 아기가 뿅하고 나온다고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음...음...에이드리안, 나 그냥 더 잘래요. 졸려. 아기는 나중에 찾아봐요."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에이드리안은 조용히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이내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할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야!" ******** 여느 때와는 정반대 입장으로 에이드리안은 잠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는 쥬느비에브를 겨우겨우 깨워 옷을 입혀 주고 아침도 먹여주었다. 그녀 나름대로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다녀왔다. 약 2도르 정도 쥬느비에브와 일로나의 재잘대는 수다를 듣고 나온 에이드리안은 마음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쥬느비에브와 일로나의 사상은 무척 심오하게 그 합일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너무나 잘 통해 옆에 있으면 소외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단순한 쥬느비에브와 불같은 성격의 할머니가 잘 어울린다고 내심 생각하는 에이드리안이었다. 두 사람은 내친 김에 본가의 여러 어른들께도 인사를 다녔는데 인사를 마치고 보니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비인 가의 어른들을 보고 기쁜 듯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 졌다. 자신의 저택에 돌아오는 길에 쥬느비에브가 말했다. "다들 아주 상냥하게 대해 주셔서 너무 기분 좋아요. 나, 진짜 에이드리안의 약혼녀로 인정받은 기분이 드는 걸요. 아주아주 기분 좋아요."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미소지었다. 오늘 만난 어른들은 모두 그를 지지하는 비인 가의 큰 어르신들이었다. 쥬느비에브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쥬느비에브가 바람에 날리는 하얀색 원피스자락을 잡고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음, 음...그런데 에이드리안, 나, 오다가 아주 예쁜 유리 온실 봤어요. 아주 멋진 온실이었는데...음..." 쥬느비에브는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고 치마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가 보고 싶은 거야?"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쥬느비에브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 봐요. 거기. 네?" 에이드리안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있었다. ******** "와아- 예뻐라, 너무 예뻐요!" 쥬느비에브는 투명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유리 천장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쥬느비에브는 안으로 뛰어들어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숨막힐 듯한 꽃향기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머리 속이 온통 꽃향기로 채워지는 듯 했다. 꽃은 저마다의 색을 공기 중에 뿌리려는 듯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꽃뿐만이 아니었다. 높이 치솟은 초록색 잎사귀의 나무들도 진귀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서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생긋 웃어주었다. "에이드리안, 이리 와 봐요! 어서요!" 행복하게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천장의 빛을 느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매달리며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떻게 이렇게 꽃이랑 나무랑 잘 자라고 있는 거죠? 다들 난 잘 있어- 행복해- 이러는 거 같아요.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어요, 다들." "레플리카를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 쥬느비에브는 웃음을 멈췄다. 에이드리안은 높이 솟아 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여길 가꾸셨대. 늘 여기에 와서 노래를 부르셨다는 군."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의 부모님에 대해 그녀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사실 그도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그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 비해 그나마 온전하게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자신이 아주 행복한 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너무 불쌍해졌다. 그녀는 에이드리안을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에이드리안, 그 분이 여길 아주 소중하게 여기셔서 그래서 다들 이렇게 아름답게 자라고 있나봐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쥬느비에브는 크게 미소지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이드리안, 노래해줘요. 이 아이들도 좋아할 텐데. 응? 나 듣고 싶어요. 에이드리안 노래." 에이드리안은 계속 보채는 쥬느비에브에게 싱긋 웃어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선율이 유리 온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온화하고 따스한 빛이 당신을 감싸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답니다...] 쥬느비에브는 행복한 미소를 띄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따라 노래했다. [시원하고 투명한 바람이 당신을 스치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된답니다...] 쥬느비에브의 맑은 노랫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놀란 듯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미소지으며 노래했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와 합쳐져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었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축복 속에 당신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존재가 된답니다. 누구보다 행복한 존재가...] 노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따뜻하고 청량감 넘치는 합창은 유리 온실을 가득 매우며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온실 속의 꽃과 나무들은 기분 좋게 몸을 흔들며 그들의 노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오랫동안 노래를 즐기며 유리 온실로 쏟아지는 빛과 그림자를 만끽했다. ******** 노래가 끝나고 에이드리안은 벅찬 기분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저 싱긋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이중창에서 이런 희열을 맛본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마른 입술을 살짝 핥아내고 쥬느비에브에 말했다. "쥬르, 노래...할 수 있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드리안이 옆에 있으면 노래가 잘 된다니까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웃어주다 무심코 돌린 시선에 뜻밖의 광경을 보고 말았다. 갑자기 창백해진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창백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어, 어쩌죠? 왜, 왜 이렇게 된 거죠?" "아, 아마 레플리카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 에이드리안은 금새라도 유리 온실의 천장을 뚫어버릴 만큼 길게 뻗어 오른 나무를 쳐다보며 아연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온실에는 레플리카에 대한 아무런 방지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너무 기분 좋아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급격하게 성장한 나무와 꽃들이 온실 안의 길을 가로막을 정도로 휘영청 가지를 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잘 보였던 천장의 하늘이 나무의 잎사귀 때문에 반쯤 가려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길이 막혔는데...어쩌죠? 그렇다고 꽃이랑 나무를 뽑을 수도 없고." "응. 기분이 좋아서 그냥 레플리카를 써버렸더니..."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탓하며 애써 쥬느비에브에게 미소를 지었다. "뒷문으로 가면 될 거야. 걱정마." 말을 마치고 에이드리안은 그나마 나무들이 덜 자란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 나무들과 씨름을 한 끝에 그들은 뒷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뒷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변의 나무와 풀이 놀라울 정도로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던 것이다. 온실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세련되게 조경되어 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할머니한테 또 잔소리 듣겠군. 조경하는데 1모네(주 참조)나 걸렸다고 하셨는데.' 에이드리안은 옆에서 걱정 없이 말똥말똥 눈을 굴리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곁눈질하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잔소리는 자신만의 몫이 될 게 분명했다. 몇 도르나 계속될 잔소리를 예상하고 에이드리안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너무나 우울해졌다. ******** "......너는 도대체 그 정원과 가로수들을 조경하느라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기나 아는 거냐! 도대체 레플리카 하나 제대로 조절을 못해서 어떻게 평의회 의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으려는 거냐!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걸려 완성한 예술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쳐 놓다니. 어떻게 할 게냐. 네가 대신 조경해줄 게냐?......" 그의 예상대로 일로나의 잔소리는 몇 도르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비하면 미라벨의 잔소리는 거의 귀여운 수준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응접실의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조경사 쓰실 거잖아요. 돈은 제가 낼게요. 됐죠?" "그 정도로 내가 화를 풀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산! 돈은 나도 썩어 넘칠 만큼 많아, 녀석. 저 정원과 가로수의 조경은 내가 다 감독한 거란 말이다. 조경사들은 나의 예술적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지 못해. 내가 일일이 말해야 알아듣는 놈들이야."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낄 만도 한데 쥬느비에브는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만 잔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에 갑자기 억울해져 쥬느비에브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너도 말 좀 해 봐. 노래는 같이 불렀잖아."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었다. 그리고 일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나 아주...아니 할머니." 아직도 적응이 잘 되지 않는 건지 쥬느비에브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일로나가 화를 가라앉히며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미소를 띄고 입을 열었다. "그 나무하고 꽃말인데요. 저도 아주 책임을 느끼고 있거든요."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외치며 씨익 웃었다. 이로서 책임 분담이 되는 것이다. 쥬느비에브가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음...그래서 말인데요. 그 조경, 제가 할까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음, 음. 저 엄청 잘할 자신 있어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 헤실헤실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일로나는 안색을 굳혔다. 창백해지는 일로나의 표정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를 겪어본 일로나라면 쥬느비에브의 호언장담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으리라. 쥬느비에브가 정원에 손을 대면 최소한 돌멩이 밭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심 짐작하며 에이드리안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을 일순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일로나는 힘없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의 귀여운 손주며느리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야 있나. 내가 알아서 하마. 너희들은 이만 밤이 깊었으니 가보려무나." 일로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일로나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었다. 생각보다 잔소리가 일찍 끝났다는 사실에 그는 너무나 기뻤다.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오늘의 일등공신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영문도 모른 채 마냥 헤실헤실 웃을 따름이었다. ======================================================== [ 미 라 벨 ] : 유벨 님, 쥬느비에브의 딸은 어떤 아이인가요? [ 유 벨 ] :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내가 어떻게 아나? [ 케이로프 ] : 엘제스미네 양은 아주 책을 좋아하는 귀여운 아가씨지. 책 을 너무 좋아해서 어리광쟁이 어머니에게 매일 혼나기는 하지만. [ 안느마리 ] : 케이로프 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거죠? [ 케이로프 ] :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께서 알려 주셨지. 엘제스미네 양의 약혼자 이름은 슐레이만. 미래의 스콜라 학생회 장이지. [ 미 라 벨 ] : 당신, 드디어 경지에 다다랐군요. 거의 점쟁이 수준이에요! [ 유 벨 ] : 그래, 그럼 엘제스미네 양은 도대체 누가 키우지? 에드야, 아니면 쥬느비에브야? [ 케이로프 ] : 18%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그리고 2%는 어머니의 손에, 나머지 80%는 혼자 힘에 의해 자라나지. 가여운 아이야. 어릴 때부터 환 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 다행이지. [ 안느마리 ] : 과, 과연...그럼...그럼... 누, 누가 먼저 덮친 거에요? [ 케이로프 ] : 그건....웃! 빛의 방해 전파가... [에이드리안] : 케이로프. 지금 뭐 하는 거야? [ 케이로프 ] : ........그, 그게. 저.... ======================================================== 제45음(第45音) 드디어 비인 본가에!(4) 다음 날.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저택 근처의 호수를 보여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에 긴급한 서신이 도착해 있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에 호수를 그리 오래 구경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쥬느비에브는 연신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못들은 척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칭얼거림이 통하지 않자 쥬느비에브는 볼멘 소리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호수에서 물고기도 잡아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집에서 점심 먹고 다시 데려가 줄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아쉬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쥬느비에브는 생각났다는 듯 딱 하고 손뼉을 쳤다. "음, 음, 그럼 에이드리안, 나 여기서 조금만 놀다 가도 돼요? 구경하고 싶은데... 에이드리안 먼저 집에 가 있으면 내가...음...그러니까 나는 조금만 놀다가 들어갈게요." 쥬느비에브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약혼자를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와본 곳이라 여러 곳을 탐색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말고. 그리고 혹시 길 잃으면 구석구석에 하인들이 있으니까 도움 청하고." 에이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쥬느비에브에게 다시 말했다. "그리고...내 저택 저쪽으로는 가면 안 돼. 알았지?" 에이드리안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요?" "저기엔...음...나쁜 사람이 살거든. 그러니까 저쪽으로는 절대 가지 마. 내말 어기면. 나 몹시 화낼 거야." 에이드리안의 단호한 말투에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드리안은 화나면 무서웠다. 쥬느비에브는 걱정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쁜 듯 두 손을 주먹 쥐어 흔들어댔다. "헤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나 조금만 놀다 갈게요." 폴짝폴짝 기분 좋게 뜀박질하며 가는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흘렸다. 그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뒤돌아서 저택으로 향했다. ******** 자신의 방에 들어선 에이드리안은 한 통의 서신을 발견했다. '긴급한 서신'이란 이것을 보고 말한 듯 했다. 그의 예측대로 서신은 그다지 신경 쓸만한 것이 아니었다. <엘크로이츠>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편지 보낸 사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편지를 쓴 사람은 미라벨이었다. 물론 유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를 대표해 쓴 것이다. [ ....우리에게 한 마디도 없이 스콜라를 떠나시다니 이 미라벨의 마음이 찢어지는군요, 하루 속히 돌아오시지 않으면 저의 칼럼에 쥬느비에브와의 밀월에 대한 글을 퍼뜨릴 테니 어서! 돌아와 주세요. 결혼 전에 단 둘만의 여행이라니요. 아주 건전하지 못해요.... ] 에이드리안은 편지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다른 것은 괜찮은데 미라벨의 칼럼에 실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서신이었다. 내가 휴가를 즐기겠다는데 누가 말릴 거야? 에이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타이를 풀어 던졌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서랍 위에 놓여 있는 액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무심히 액자를 들어 시선을 내렸다. 긴 금발의 남자가 그려져 있는 작은 초상화였다. "아버지..." 이질적인 단어를 입에 담아보며 에이드리안은 차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애써 액자를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자 바람이 불어들어 왔다. 창 밖에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나, 이 곳에서....행복했던가...." ********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 것도 없는 잔디밭에서 홀랑 넘어지고 말았다. 발 걸릴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잔디밭에서 보기 좋게 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결코 울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빨개진 이마와 코를 씨익 문지르고 다시 기분 좋은 뜀박질을 했다. 주름과 빳빳한 천으로 동그랗게 만들어진 붉은 색 치마를 봉실봉실 흔들며 쥬느비에브는 초록색 재킷을 손으로 쭉쭉 잡아당겼다. 오늘 옷은 과일에서 컨셉을 따온 옷이었다. 쥬느비에브가 과일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마담 일레시아가 둥그런 과일 모양으로 치마를 디자인하고 거기 붙은 잎사귀 모양으로 상의를 만들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커다란 붉은 과일이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귀엽지만 우스꽝스럽지 않게 보이는 것은 일레시아의 뛰어난 디자인 실력 때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오늘 입은 옷이 참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는 모롤라 모양으로 만들어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우뚝 섰다. 어느새 자신이 에이드리안이 가지 말라고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인상을 쓰고 멈춰 서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 우우우. 어쩌지? 에이드리안이 여기로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에이드리안 화나면 무서운데... 거기다가 나쁜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는데. 음... 하지만 내가 여기 갔는지 안 갔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가 봐야지. 왠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양 볼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은근하게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콩콩 뛴 다음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바람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잔디밭을 힘차게 박차고 열심히 달렸다. 크고 작은 나무와 꽃들을 지나치고 쥬느비에브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에이드리안의 저택과 비슷한 크기의 집이 있었다. 물론 아주 큰집이었지만 에이드리안의 저택과 일로나의 대저택을 계속 봐서 그런지 이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적응력이 대단하다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녀의 눈을 끄는 것이 있었다. 집 앞의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하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반들반들 맛있게 생긴 파이가 접시에 담겨져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파이를 쳐다보았다. 파이가 너무 맛있게 생겨서 금방이라도 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시선을 돌렸다. 검은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사람이 떡 하니 앉아 있었는데 먹을 것부터 눈에 들어오다니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날 먹보 뚱순이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어. 뚜, 뚱순이는 좀 심한걸. 난 이렇게 말랐는데. 하여튼 에이드리안이 먹을 거 보고 제발 티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쥬느비에브, 바보바보.' 쥬느비에브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시원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보다 여기 와서 이 걸 먹어보는 게 어떨까요?"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눈을 떴다. 남자가 웃으며 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보니 테이블 위에는 향긋한 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남자는 지금 막 티타임을 가지려고 한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쭈뼛거리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정말 먹어도 돼요? 나 파이도 좋아하는데 이건 무슨 파이에요? 달콤한 냄새가 나네." 검은머리의 남자는 쥬느비에브에게 맞은 편 자리를 가리켰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검은머리의 남자는 에이드리안과는 다른 면에서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고 귀공자 같은 이미지라면 이 남자는 좀 더 날카롭고 절제된 이미지였다. 검은색 바지와 조끼, 그리고 하얀 셔츠가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게 디자인된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이 남자에게서 조금 뾰족한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자신에게 파이를 건네는 것을 보니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더니 에이드리안 거짓말쟁이.'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불만을 던지고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는 손수 차를 따라 쥬느비에브에게 주었다. 그리고 파이 한 조각을 떠서 접시에 담아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앞에 놓인 파이를 쳐다 보았다. 달콤한 냄새와 파이 위에 뿌려진 하얀 가루 때문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문득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비인 가에 사는 사람이라면...대단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여기는 본가의 영지였다. 쥬느비에브는 금색 장식이 붙어 있는 포크로 파이를 쿡 찍어 한 입 베어 물고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티타임을 갖고 있는 걸까. 우웅. 안느마리가 모르는 사람 따라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음. 음.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같이 차를 마시는 거니까 괜찮겠지. 그리고...이 파이는 너무 맛난걸.' 쥬느비에브는 파이가 너무 맛있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너무 행복했다. 그 때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쥬느비에브는 억지로 파이를 내려놓고 남자에게 물었다. 맛있는 파이를 입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픈 그녀였다. "있잖아요. 내 이름은 쥬느비에브에요. 당신은 누구세요?" 남자는 쥬느비에브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난 에이드리안의 사촌 형이에요." "에에? 에이드리안의 사촌 형이라고요? 그, 그럼 말 놓으세요. 전 에이드리안의 약혼녀거든요." 에이드리안의 사촌 형이라는 말에 쥬느비에브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훗, 그럴까? 쥬느비에브라...맞아. 에이드리안의 약혼녀가 바로 너로군. 만나고 싶었는데..." "이름이 뭐에요?" 쥬느비에브는 아까 아깝게 내려놓은 파이를 다시 들어 한 입 베어 물고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남자는 시선을 돌려 저택 앞의 작은 정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에스프라드." "에에-? 에, 에스프라드라면 '라데팡스'의?" 에스프라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에스프라드를 만나게 되다니! 유벨과 케이로프, 미라벨이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 이름이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빠꼼하게 들어 다시 그를 살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맛있는 파이와 차를 대접해 주지 않았는가! "에이드리안 얘기 좀 해주겠어? 그 애는 날 몹시 싫어해서 좀처럼 가까이 할 수가 없거든. 물론 난 그 애를 아주 좋아해."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에이드리안은요, 어제 저랑 일로나 할머니를 뵈러 왔거든요. 지금쯤은 아마 낮잠을 즐기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 둘 중 하나일거에요." "그래. 그 애, 잠이 많은 편이지." 에스프라드가 아주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차를 한 모금 삼키고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스프라드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에스프라드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며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에이드리안을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며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가끔씩 에스프라드가 이야기해주는 에이드리안의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어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치며 깔깔깔 웃었다. ******** "그래서요, 안느마리는 제 친구가 되어서 <엘크로이츠>에 들어 왔거든요? 아 참. 안느마리 아세요? 원래 <라데팡스>였거든요. 지금은 저 때문에 <엘크로이츠>에 있지만요." "알아. 그 갈색 머리 소녀 말이지?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책임감 있는 소녀였지." 에스프라드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대화는 계속 이어져 어느새 해가 저물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벌써 4잔 째 마시는 차를 한 모금 홀짝 들이키고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런데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 님이 <라데팡스>의 학생회장이라서 싫어하는 거에요? 음, 사촌이면서 싸워야 한다니 슬퍼요. 평의회장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애와 난... 흠, 이런 이야기는 관두지. 해가 저무는군. 에이드리안이 걱정하지 않을까?" 쥬느비에브는 돌아서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 큰일이다. 에이드리안이 화낼 텐데...." 쥬느비에브는 허둥지둥 갈팡질팡 하다가 돌아서서 에스프라드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오늘 차랑 파이 잘 먹었어요. 나중에는 제가 대접할게요. 그럼 안녕!" "쥬느비에브. 오늘 우리 만난 것, 에이드리안에게는 비밀로 해주겠어? 그 애가 너와 내가 만났다는 것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내 입장도 있으니까. 부탁해."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에스프라드를 쳐다보았다 조금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얘기해 본 바로는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을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에이드리안은 왜 그를 싫어하는 것일까?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마세요. 에이드리안에게 말 안 할게요. 그럼 나중에 또 만나요!"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에스프라드와의 만남은 아주 즐거웠다. 또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것보다는 우선 빨리 집에 가서 잔뜩 화가 났을 에이드리안을 달래는 게 더 급했다. 화난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생각나자 쥬느비에브는 등뒤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녀는 겁에 질려 좀 더 빠르게 다리를 놀렸다.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보며 에스프라드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너의 사랑스러운 소녀라... 훗, 이로서 미레이유에 이은 두 번째 패로군. 쿡쿡. 잘 간수하는 게 좋아, 에이드리안." ******** 무사히 현관으로 들어온 쥬느비에브는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2층 계단을 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밀 때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상하게 집 안은 고요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자기 방문에 살짝 손을 얹고 지긋이 힘을 주었다. 문이 살며시 열리는 순간...! "야! 너 어디 갔다 지금 오는 거야? 지금이 몇 도른지나 알기는 아는 거야? 응? 도대체 연락도 안 하고 왜 이렇게 늦은 거냐구!" 반사적으로 뒤돌아본 쥬느비에브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하잖아? 엄청 화났는데... 어, 어떻게 하지?' 쥬느비에브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즐겁게 차를 마시고 파이를 먹는 동안 에이드리안은 낮에 찾아온 일로나로부터 잔뜩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또다시 손주를 종용하는 가공할만한 일로나의 닦달에 에이드리안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쥬느비에브에게로 옮겨왔다는 것을 그녀는 결코 모르고 있었다. 하얀 새벽이 될 때까지 에이드리안의 잔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가 꾸벅꾸벅 졸때까지도. 제46음(第46音) 드디어 비인 본가에!(5) 스콜라로 돌아가겠다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잠시 울상을 지었지만 곧 인상을 펴고 짐을 꾸렸다. 며칠 있지는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다시 올 수 있다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안심했던 것이다. 비인 가에서의 날들은 즐거웠다. 일로나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거나 에이드리안과 단 둘이서 비인 가의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그 것도 여의치 않으면 에이드리안 몰래 에스프라드에게 찾아가 차를 얻어 마셨다. 전부 신나고 즐거운 일뿐이었다. 그러나 비인 가를 떠난다는 것이 비록 아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콜라에서 기다리고 있을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몹시 보고팠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잠옷을 여행용 가방에 쑤셔 넣고 머리 끈을 집어 가방으로 가져갔다. 잊어버린 것이 없는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콘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액자에 눈이 갔다. 금색 테로 된 액자에는 금발의 무표정한 여자의 초상화가 담겨져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 무표정하기는 하지만 몹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나이는 20대쯤 될까. 순간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손에 액자를 든 채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힘차게 방문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에이드리안! 바른대로 말해봐요! 바람 폈죠? 여기 이 아줌마랑 바람 핀거 맞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다가와 두 손에 액자를 들고 에이드리안의 눈앞에 내밀었다. "벌써부터 바람이라니. 여, 역시 나처럼 어린애보다 이렇게 나이 든 아줌마 취향이었던 거에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바람 피는 거 절대 못 참아욧!" 눈을 질끈 감고 꽥 소리를 지른 쥬느비에브는 제 풀에 꺾여 혼자 헉헉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그런 표정에 더 화가 났다. "이, 이렇게 뻔뻔하다니. 약혼녀의 방에 여자 친구의 초상화를 버젓이 놔두질 않나....에이드리안, 지금 보니까 완전히 뻔뻔돌이에요!" 쥬느비에브는 보라색과 핑크색 체크 무늬의 호박바지를 한 손으로 꾸욱 움켜쥐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눈만 깜빡이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누가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내 어머니잖아, 어머니." "...에에-? 에이드리안의 마망?"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멍하게 액자 안의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니 눈동자 색깔이 에이드리안과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으며 액자를 곰곰이 뜯어보기 시작했다. "헤, 헤헤. 그, 그럴 줄 알았어요. 사실 나, 다 알고 있었다니까요. 그냥 재미로 한번 말해 본 것뿐이에요. 그럼요, 말도 안 돼죠. 에이드리안이 바람을 피우다니... 헤헤, 마망이 참 예뻐요. 에이드리안처럼 예뻐요."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방 가운데의 소파에 앉았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액자를 이리저리 보다가 문득 다른 액자 하나를 발견했다. 액자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번뜩 들어 올린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면서 돌아섰다. "그럼 여기 이 남자 분이 에이드리횬?파파? 그렇죠?"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거두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옆으로 달려가 앉았다. 그리고 손에 액자를 하나씩 들고 보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파파도, 마망도 너무 예뻐요. 에이드리안이 예쁜 게 당연한 것 같아. 나도 파파랑 마망, 초상화라도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은 슬퍼 보이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고 에이드리안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두 분 좋아하지 않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액자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예쁜 두 분인데?" "나약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에이드리안의 퉁명스러운 표정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저번에 유리 온실에서 봤을 때는 아버지를 아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고 다시 물었다. "왜, 왜 싫어하는데요?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다면서요? 에이드리안을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살 수 있었음에도 죽음을 택하신 분들이지. 서로밖에 보지 않으셨어. 나 같은 건...그 분들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지. 그래서..." 에이드리안은 더 이야기를 하려다 고개를 흔들며 말을 끊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하지만....마망과 파파가 에이드리안을 많이 사랑하셨을 텐데. 에이드리안은 마망과 파파를 싫어하면 안 돼요. 안 되는데..." 훌쩍이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쥬르의 부모님은 쥬르를 많이 사랑해 주셨어?" "으, 으응. 나 파파,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파파는 아주 멋지고 자상해. 그리고 노래도 잘 하고. 마마도 예뻐. 마마도 노래 잘 해요. 마마는 파파를 아주 사랑한댔어요." 에이드리안은 어느새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쥬느비에브에게 미소를 띄워 주고 기분 좋게 뺨을 토닥여 주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던 쥬느비에브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에이드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침묵에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르, 무슨..."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에이드리안을 꼬옥 껴안고 작게 속삭였다. "내가 에이드리안 가족이니까, 에이드리안의 마망이나 파파가 못해준 만큼 에이드리안 많이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줄게요. 그러니까 에이드리안도 마망, 파파 미워하면 안 돼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빙긋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았다. 쥬느비에브의 어깨 너머로 두 개의 액자가 눈에 들어 왔다. 에이드리안은 액자를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싫어하지만....사랑하고 있었어. 아버지, 어머니..." ********* 짐을 다 꾸린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일로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대저택을 찾았다. 현관에 들어선 순간 또 한 번 도자기 세례를 받았지만 두 사람은 꿋꿋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일로나는 실패한 도자기 처분을 위해 분주하게 도자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 짙은 초록색의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채 일로나는 풍채 좋은 몸을 이끌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자, 이건 나의 선물이다. 갈 때 잘 챙겨서 가져가려무나." 일로나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팔을 들어 계단으로 통하는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도자기를 가리켰다. 에이드리안은 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걸 가져가서 어디다가 쓰게요?" "나의 예술 작품을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이 녀석." 쥬느비에브는 말똥말똥 눈동자를 굴리며 도자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통통 도자기를 건드렸다. 쨍쨍 하며 도자기가 울렸다. 쥬느비에브는 한 쪽 눈썹을 실룩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고 에이드리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음, 음. 이거 우리 쓰레기통 할까요? 내 방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너무 불편한데." 에이드리안과 일로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쓰레 기통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통이라니! 에이드리안이 일로나의 도자 기를 보고 별별 소리를 다했지만 쓰레기통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일로나 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에이드리안은 일로나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 냈다. 그리고 다시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쓰레기통으로서 도자기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지 꼼꼼하게 따지고 있었다. 이내 판단이 서자 쥬느비에브는 낑낑거리며 그 중 크기가 큰 도자기 하나를 품에 앉고 에이드리안과 일로나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흠.... 그런데 확실히 쓰레기통으로 쓰려니까 좀 미안하네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일로나가 얼굴에 홍조를 띄며 말했다. "이제서야 내 예술품의 진가를 아는구나. 아무도 내 도자기보고 쓰레기통 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단다." "맞아요. 있잖아요, 전에 상점에 가니까 예쁜 쓰레기통 너무 많던데, 역시 그 쓰레기통한테 좀 미안하죠, 할머니? 나, 그냥 그 쓰레기통 사야겠네." 쥬느비에브는 말을 마치고 엉금엉금 걸어가 도자기를 원래 있던 곳으로 내려놓았다. 에이드리안은 하얗게 변한 일로나의 안색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저런 도자기 내놓지 마세요. 그나마 제가 할머니의 도자기에 가장 좋은 점수를 쳐준 사람이라고요." 일로나는 자신의 예술작품에 대한 가장 지독한 혹평을 받고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결국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였다. 그녀는 손자 앞에서는 엄살이 심한 사람이었 다. ******** "어, 어쩌죠? 할머니가 아프신 것 같던데." "걱정하지 마, 원래 저러셔. 엄살이 심하신 분이야. 다음에 만나면 아무렇 지도 않으실 거야." "흐음. 그건 그래요. 레나 아주머니는 원래 엄살이 심하셨어요." 일로나가 자신 때문에 드러누웠다는 사실은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자 쥬느비에브는 창을 열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비인 가의 영지를 기분 좋게 달리고 있었다.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게 조경된 나무들이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흩어놓자 쥬느비에브는 살짝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쥬느비에브는 창에 팔을 기대고 기분 좋게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머물고 있었던 곳에서 떠난다는 것은 항상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발견한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말았다. "에스프라드 오빠. 안녕!" 쥬느비에브의 말에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벌떡 몸을 일으켜 쥬느비에브와 창 밖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스프라드가 나무 그늘 밑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잔뜩 인상을 쓰며 마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멈춰!" 마차가 멈추어 섰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로 고개를 돌려 날카롭게 말했다. "넌 여기 있어. 절대 나오지 마. 알았어?" 쥬느비에브는 화가 잔뜩 난, 아니 소름끼치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문과 창을 닫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어, 어쩌지? 에이드리안 정말 화났나 본데....음...음...어쩌지?' 쥬느비에브는 침울한 표정으로 치맛자락만 쥐어뜯었다. 쥬느비에브는 상황이 궁금해 창문을 살짝 열어 에이드리안을 지켜보았다. 그는 에스프라드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드리안이 에스프라드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에스프라드는 그의 말에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이 좀 더 과격하게 이야기를 하자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을 밀어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이 뒤쫓아가 에스프라드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또 다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스프라드는 물끄러미 그를 보더니 다시 발걸음을 돌려 저 쪽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켜보고자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이 마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곧 이어 퍼부어질 잔소리를 예감하고 창을 닫았다. 그리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곧 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 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쥬느비에브는 언제 잔소리가 시작될까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마차 안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 생각을 안 했다. 잔소리도 없었다. 그저 조용한 침묵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속상했다. 차라리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할 텐데 에이드리안은 그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잡고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얘기 안 한건....에이드리안...." 순간 쥬느비에브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에이드리안이 이상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옆자리로 옮겨가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는 멍하게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아니 그저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그의 동공은 뻐끔하게 열려 있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어디 아파요? 어디 아파?"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멍하게 바닥에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의 힘없는 몸짓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에이드리안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순간 에이드리안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쥬...르....쥬르?"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드리안의 눈동자가 천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긴 것을 확인한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에이드리안, 아까는 내가 미안했어요. 에스프라드 오빠랑 만난 거....얘기 안 한거 미안해요. 아프지 말아요." "에스프라드...미레이유..."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귀에 울린 '미레이유'라는 단어에 몸을 움찔했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은 단어였다. 순간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더욱 꼭 껴안았다. 그리고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쥬르, 그에게 다가가지 마. 다가가면 안 돼. 난 또 잃을 수는 없어. 이번엔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난.... 쥬르, 부탁이야. 쭉 내 곁에 있어 줘. 그에게 가면 안 돼. 안....돼...." 에이드리안은 말끝을 흐리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안의 투정부리는 듯한 말투에 쥬느비에브는 왠지 안심한 기분이 되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에이드리안, 난 에이드리안 약혼녀잖아요. 평생 함께 할 수 있어요...믿어도 좋아요." ******** 스콜라에 도착한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우선 학생회실에 먼저 발걸음을 하기로 했다. 몸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유벨 일행의 잔소리도 일찍 듣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스콜라 본관의 계단을 깡총깡총 뛰어 오르던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단을 오르던 에이드리안이 물끄러미 쥬느비에브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에이드리안, 있잖아요, 우리 갈 때 모롤라 많이 사가요. 집에서 에이드리 안이랑 같이 먹을래."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으 쓱하며 잡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손을 흔들었다. 그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니! 지금 이렇게 놀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학생회 업무가 얼마나 밀렸는지 아세요? 결제할 서류가 산더미만큼 쌓였다고요~" 미라벨이었다. 다홍색 머리를 굵게 컬을 말아 양쪽으로 내린 미라벨은 못 마땅한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미라벨에게 웃어 주며 말했다. "미라벨, 오랜만이야. 모두들, 잘 있었나 보군." 뒤 따라 나온 케이로프와 유벨, 안느마리가 빙긋이 웃으며 서로 마주보았 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기분 좋은 미소에 생긋 웃어주었다. 돌아온 스콜라가 너무 정겨워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가슴 가득 행복 을 느끼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긴 금발이 날리자 에이드리안은 부드 럽게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는 천천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 다. 에이드리안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소유한 것....결코 잃지 않을 거야..." 제47음(第47音) Misunderstanding(1) -그 남자의 생각 "더워." 에이드리안은 온 몸을 휘감는 찝찝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몹시 더운 날씨였다. 침대 시트도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마치 새벽에 널 어놓아 이슬을 맞은 이불처럼 몹시 눅눅했다. 에이드리안은 몸을 뒹굴뒹 굴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얇은 이불이 다리 에 감겨와 좀처럼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끙하는 신음소리 와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둘둘 감긴 이불 때문에 짜증이 치밀 어 올랐다. 거기다 긴 머리가 이리저리 날려서 여간 신경에 거슬리는 것 이 아니었다. "아욱. 정말!!" 에이드리안은 이불을 겨우 헤쳐 내고 침대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정말 기 분 나쁜 날이었다. ******** 웬일로 일찍 일어났냐며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포크로 둥글게 말려 있는 빵을 푹 찍었다. 기운이 없었다. 대꾸해줄 기분도 안 났다. 힘없이 포크를 놀리자 쥬느비에브가 언제나처 럼 도끼눈을 했다.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창 밖을 보며 쥬느비에브를 무시 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푸른색 채 소를 쏙쏙 골라내는 것을 보았다. "먹어. 골라내지 말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싫다는 뜻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드리안은 발끈해서 다시 말했다. "어서 먹어. 나쁜 식습관은 빨리 고쳐야 되는 거야. 안 먹을 거야?" 포크로 식탁을 탁탁 치며 에이드리안이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혀를 낼름 내밀고 보란 듯이 파란색 채소만 빼고 포크로 음식을 쿡쿡 집었다. 에이 드리안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저렇게 늘상 골 라먹으니 비쩍 마를 수밖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제대로 골고루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 만 심각할 정도로 폭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런 식습관은 금물이었다. "너 정말 안 먹을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스테 이크 조각을 입안으로 쏙 던져 넣었다. 다시 발끈한 에이드리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쥬느비에브가 골라놓은 파란색 채소를 포크로 쿡 집어 쥬느비에브의 입을 벌리고 쑥 집어넣었다. 잔뜩 인상을 쓴 채 쥬 느비에브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입안의 채소를 씹지 않고 에이드리안 을 뿌루퉁하게 쳐다보았다. "안 씹을 거야?" 다시 자리에 앉아 에이드리안은 험악하게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 안의 화난 말투에 울먹이며 입안의 채소를 씹기 시작했다. 마치 마른 나 무뿌리를 씹는 듯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쥬느비에브는 가까스로 채소를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고 에이드리안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안, 미워!'를 외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에 씩씩거리며 괜히 포크로 접시를 두드리면서 화풀이를 했다. 다 쥬느비에 브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 건데 남의 속도 모르고! 정말 화가 나고 속상 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되 는 일이 하나도 없는 아침이었다. ******** 쥬느비에브는 집에서 나갈 때까지 에이드리안을 계속 무시했다. 샐쭉한 표정으로 말없이 쏘아보기만 했다. 아마 단단히 삐친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상관 안 하기로 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다 저를 위해서 그런 건데 왜 화를 내는 거야? 나라고 화 못 낼 줄 알아?' 에이드리안도 쥬느비에브의 시선에 맞장구 조로 고개를 홱 돌리며 무시했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냉랭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식사시간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가 났다는 것을 표시라도 하겠다는 듯이 쥬느비에브는 말도 없이 먼저 스콜라에 가버렸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나간 뒤 약 10 시르 정도 기다린 다음 집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가 왠지 어색한 탓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투덜거리며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무가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긴 했지만 후텁지근한 공기가 짜증스럽기만 했다. "바보, 쥬르. 그렇게 음식을 가려먹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다 네 책임이야.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편식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쩔 거야? 흥, 뭐 난 이제 책임 없다고. 정말 이제 어린애 뒤치다꺼리하기도 지쳤어. 흥, 나한테 말 걸기만 해 봐. 대답도 안 해줄 테다." 유치한 변명과 심술을 부리며 에이드리안은 학생회실로 향했다. 그는 쥬느비에브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든 절대 상관 안 할 생각이었다! ******** "허- 정말 시원한 걸." 유벨은 소파에 앉아 기분 좋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바깥의 더운 날씨에도 스콜라의 건물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레플리카 장치가 되어 있었다. 유벨은 바깥의 따가운 햇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학생회실은 시원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거기다 미라벨의 특제 아이스 티 덕분에 거의 사막의 오아시스에 온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아이스 티를 홀짝이던 에이드리안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자신의 방이 오늘 아침 그렇게 더웠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던 것이다. 자기 방의 레플리카 장치가 고장난 걸 왜 아무도 몰랐지? 레플리카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이상 방이 그렇게 더울 리가 없었다. 그때 미라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에이드리안 님, 쥬느비에브는 오늘 같이 오지 않았나요? 매일 같이 스콜라에 나왔잖아요." "몰라. 케이로프와 레슨이라도 하고 있겠지." 에이드리안의 심드렁한 말에 미라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상하네. 참, 쥬느비에브가 오선지랑 필기구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언제 한 번 쇼핑 나가야겠어요. 악보 볼 줄 모른다고 하더군요." 에이드리안은 미라벨의 말을 들으며 아이스 티를 홀짝였다. '오선지? 흠....내가 쓰던 게 있긴 한데.... 초급 악보 책도 찾아보면.... 아니야, 내가 왜 이런 거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아침에 다툰 것을 생각하며 왜 굳이 자신이 그녀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마음 속의 생각과는 달리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라벨, 나 오늘은 집에서 점심 먹을 테니까 알아서들 식사 해. 그럼." 에이드리안은 뒤에서 그를 부르는 미라벨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 그의 예상대로 서재에서 오선지와 초급 악보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쓰던 것이라 모두 최고급품이었다. 오선지는 비싼 미백지로 만들어져 있어 펜의 번짐이 전혀 없는 고급품이었고 악보 책도 시중에서 아무나 사 볼 수 없는 고가의 책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그가 즐겨 쓰는 펜이 가득 들어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그가 한 번도 쓰지 않은 붉은 색의 장식이 붙여져 있는 펜을 하나 꺼냈다. 작은 상자에 들어 있는 펜을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좋은 게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다시 서랍을 뒤져 은백색의 펜을 꺼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생일 선물로 받은 펜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오선지가 담겨 있는 주황색 상자에 펜과 악보 책을 담아 조심스레 뚜껑을 덮었다. 그 때 밑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씩씩한 발소리는 분명 쥬느비에브였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밖으로 나가려다 아침에 싸운 일을 생각하고 뺨을 두드렸다. 표정을 풀고 무표정하게 만든 다음 에이드리안은 서재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올라오던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헛기침을 하며 인사를 했다. "오늘 레슨은 다 한 거야?"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화가 난 것인지 말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오선지를 어떻게 전해줄까 고심하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쥬느비에브의 손에 들린 종이 봉투를 보았다. "그건 뭐야?" 쥬느비에브는 뿌루퉁한 얼굴로 한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더니 오선지와 악보 책이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방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다시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 에이드리안은 정성껏 준비한 오선지 상자를 구석에 던져 버리고 중얼거렸다. "맞아, 내가 전혀 신경 써 줄 필요가 없었잖아? 바보 같이. 그러길래 괜히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하여튼 어린애 뒤치다꺼리는 질린다니까! 바보, 바보, 쥬르." 에이드리안은 심술궂게 투덜대면서 자신이 던져버린 상자를 쳐다보았다. 왠지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 소외된 듯한 기분. 이런 기분은 정말이지 싫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홱 돌리다가 다시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아, 쥬느비에브로군, 또 어디를 가나 보지?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발걸음을 돌리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테라스 쪽으로 갔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뭔가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스콜라의 학생으로 짐작되는 웬 남자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때 현관에서 쥬느비에브가 달려나와 남자에게 즐거운 듯 말을 건넸다. 분명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지? 누군데 쥬르와 함께 있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쥬르! 당장 들어와! 어서!"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의 고함에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내렸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쥬느비에브의 태도에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굴리더니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을 하며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스콜라 쪽으로 뛰어 갔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도, 도망을 가? 도망을!" 에이드리안은 뒤쫓아가려다 자신이 몹시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남자와 자신의 약혼녀가 도망을 갔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야? 스콜라에 재학하면서 감히 내 약혼녀를 넘봐? 간이 부었군. 단단히 부었어.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꾸욱 쥐고 결심했다. 쥬느비에브와 그 알 수 없는 남자를 찾아야 했다. 약혼한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스콜라에 불어올 스캔들의 바람에 에이드리안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바람 피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 학생회실에 들어온 에이드리안은 사람을 풀어 쥬느비에브를 찾게 했다. 그러나 스콜라에서 쥬느비에브를 봤다고 하는 사람은 있지만 결코 그녀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몇 도르째 스콜라를 뒤졌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긴 금발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초조하게 학생회실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돌아오면 용서치 않으리라!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감히 약혼자의 눈앞에서 바람을 피다니... 미라벨과 유벨, 케이로프, 안느마리는 학생회실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각자의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랑싸움에 끼여드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끼여들지 않기로 결정한 그들이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이 저녁 늦게까지 기다렸지만 쥬느비에브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결국 분을 삭이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집에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이것저것 기분이 좋지않아 자꾸 화가 났다. 그는 다짜고짜 장식장으로 걸어가 술 한 병을 꺼냈다. 장식용으로 넣어둔 것이지만 지금 마셔볼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술병에 붙여져 있는 라벨을 쳐다보았다. 알코올이 많이 함유된 독한 술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마실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기분으로는 당연히 마시고 싶었지만 주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그로서는 왠지 꺼림칙했다. 몇 시르동안 고민하던 에이드리안은 결국 술을 마시기로 했다. 술을 마시면 온갖 시름이 잊혀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에이드리안은 유리잔과 술병을 들고 중앙의 소파로 갔다. 풀썩 주저앉은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술병을 따고 유리잔에 술을 따랐다. 짙은 호박색 액체가 병 입구에서 흘러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마음 속으로 기분이 좋아질 만큼만 마시자고 굳게 결심하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프란체스 형, 드디어 이 술도 마시게 되는 군요." 에이드리안은 술을 한 모금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 술도 장식장의 다른 술과 마찬가지로 프란체스가 가져다 준 것이다. 세상의 온갖 경험을 다하려면 술도 잘 마셔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져다 준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울적해지기만 했다. 쥬느비에브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전처럼 어디론가 끌려간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닐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눈앞에서 외간 남자와 함께 도망가버린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우울한 마음에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뭔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머리끈을 풀어내고 목의 타이도 잡아당겨 풀어냈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신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눈을 뜨고 생각했다. '왜 기분이 좋아지지 않지? 그래. 조금밖에 안 마셔서 그런가 보지.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만 마시는 거야. 아직은 취하지 않았으니까. 프란체스 형, 순 거짓말쟁이잖아? 한 모금만 마셔도 천국에 온 기분이 된다더니...' 에이드리안은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천장의 네모난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네....천장이 이렇게 높았던가?' 에이드리안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그 때 서재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제48음(第48音) Misunderstanding(2) -그 여자의 생각 그 날도 쥬느비에브는 일찍 일어났었다. 언제나 그렇듯 상쾌한 아침이었 다. 그러나 그녀의 방 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를 본 순간 몹시 기분이 나 빠졌던 것이다. 그 서류는 그녀가 에슈비츠 가의 후계자로서 치러 내야할 혹독한 시련이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와 같이 어릴 때부터 후계자 수업 을 받지 않은 쥬느비에브는 이제부터 그들처럼 완벽하게 가문의 일을 처 리할 수 있도록 연습에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예법 수련에 서도 쩔쩔 맺던 그녀인지라 이번에는 거의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류는 에슈비츠 가의 영지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지출 내용과 수 입을 결산하는 예산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각종 계획서 짜기 와 사람을 고용하는 일, 집 안 사람들에 대한 수입 배당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등등 쥬느비에브가 태어나서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일들만 가득 했다. 가끔씩 에이드리안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 서류들을 보기 만 해도 잠이 왔다. 쥬느비에브는 테이블 앞에 앉아 서류를 넘겨 뚫어져 라 쳐다보았다. 당장 내일 모레까지 작성을 해서 에이드리안에게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에슈비츠 공작 예하-아직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어색했다- 께서 특별히 쥬느비에브가 어려워할까 봐 에이드리안이 대신 제대로 했는 지에 대해 검사를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생각보다 훨씬 깐 깐한 검사관이었다.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고 꼬집어 주었다. 그래서 번번 이 그녀는 망신을 당했다. 쥬느비에브는 짧게 한숨을 쉬고 서류를 덮었다. 아침부터 머리가 복잡해서 신경질이 났다.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밥이나 먹자. 밥이나 먹어." ******** 식당에 내려온 쥬느비에브는 놀란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가 혼자 힘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쥬느비에브 는 의자에 앉아 한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 언가 심통난 일이 있는지 뿌루퉁한 얼굴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괜히 건드 려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앞에 차려진 음식에 주의를 기울였 다. 오늘도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부드러운 맛의 음료로 우선 입맛을 돋우고 샐러드를 한 조각 집어먹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인 연한 스테이크를 살살 썰 어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 녹아 내리는 맛에 아침의 신경질과 짜증이 단 번에 날아가는 듯 했다. 다시 스테이크에 포크를 가져가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그녀가 싫어하는 파란색 채소가 눈에 보였다. '난 스테이크가 좋아. 채소는 싫어. 골라내야지. 랄라라.' 쥬느비에브는 포크를 들어 채소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파란색 채소는 정 말 맛없었다. 달콤하지도 않았다. 그 서걱거리는 맛이라니 정말 싫었다. 쥬느비에브가 열심히 채소를 골라내고 있을 때,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골라내지 말고 먹으라며 인상을 썼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 았다. 괜히 심통이 나니까 자기한테 화풀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드 리안이 뭐라던 정말 파란색 채소는 너무 싫었다. 쥬느비에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은 포크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목소리 를 높여 나쁜 식습관이 어쨌다는 둥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쥬 느비에브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채소를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쥬느비에브는 샐쭉해져서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으로 던져 넣었다. '파란 채소는 안 먹을 거야!' 그 때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 쪽으로 걸어왔다. 쥬느 비에브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다짜고짜 파란색 채소를 포크로 집어 쥬느비에브의 입 속으로 억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자 리로 돌아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상했다. 정말 먹 기 싫었다! 쥬느비에브가 채소를 씹지 않고 입안에 그대로 두는 것을 보 고 에이드리안이 안 씹을 거냐고 소리쳤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놀라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말 맛없었다. 도대체 목구멍에 넘어가지가 않았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쥬느비에브는 채소 를 목구멍에 억지로 꿀꺽 넘겼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에이드리안이 왜 나한테 괜히 화풀이를 하는 걸까? 내가 먹기 싫다는데 왜 그러는 걸 까? 정말 미웠다.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식당에서 나왔다. 정말 신경질 나는 하루였다. ******** 쥬느비에브는 자기가 화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침 식사시간 이후로 그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그를 바라보면 도리어 기분 나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쥬느비에브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내가 먹기 싫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으면 체하는데. 게다가 입맛도 뚝 떨어지고. 에이드리안 바보, 바보, 바보." 쥬느비에브는 한 20시르 정도 에이드리안에 대한 원망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에이드리안이 스콜라에 갈 조짐이 보이지 않자 더욱 화가 났다. "정말 나쁜 사람이야. 조금 화가 났다고 날 데려다주지도 않으려 하고. 누가 혼자 못 갈 줄 알아? 에이드리안 바보. 나 혼자서도 잘 찾아갈 수 있다고. 흥!" 쥬느비에브는 코방귀를 뀌고 연두색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정말이지 화가 났다. 에이드리안이 미안하다고 해도 절대, 절대 용서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일부터 나도 절대 에이드리안이 같이 가자고 해도 안 갈 거야. 두고 보라지. 흥!" ********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연습실로 향했다. 케이로프가 오늘의 레플리카 실습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아침의 일 때문에 케이로프의 목소리가 좀처럼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드디어 케이로프가 한 마디 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수업에 집중해 주십시오." 쥬느비에브는 눈을 들어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케이로프에게 물었다. "케이로프 님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면 에이드리안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어요? 케이로프 님은 에이드리안과 안지 오래되었잖아요." 오늘은 붉은 색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케이로프가 눈썹을 실룩이며 말했다. "그 분과 무슨 문제라도?" "그냥 오늘 아침에 에이드리안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케이로프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님은 더위에 무척 약하십니다. 오늘 아침은 몹시 더웠으니 그 것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군요. 흠- 그렇지만 사택에는 온도유지 장치가 되어 있을 텐데. 어쨌든 오늘 날씨로 미루어 보아 그 편이 가장 유력 하군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했다. 더워서 화가 났다고? 하지만 오늘 자신의 방은 너무 시원했는데 이상했다. 쥬느비에브는 곧 이어 에이드리안이 더위에 약하다는 케이로프의 말을 생각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더위에 약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더우면 신경질 나니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표시를 했다. 곧 이어 케이로프의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레플리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케이로프의 목소리는 전혀 쥬느비에브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머리의 뇌 세포가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느라 분주했던 것이다. 케이로프의 수업에 집중할 여유는 없었다. '더위를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 부채를 만들어 줄까? 음...음...괜찮은 생각이네. 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우리 오늘 아침에 싸웠는데...음...하지만 에이드리안이 더워서 심술이 난 거라면...음... 그나저나 부채만으로는 좀 부족한데...." 싸웠다는 사실을 어느 새 망각해 버린 그녀였다. 순간 쥬느비에브의 머릿 속에 얼마 전에 식당에서 먹은 맛있는 소다수가 생각났다. 쥬느비에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케이로프에게 씩씩하게 외쳤다. "케이로프 님! 저 현기증이 나서 오늘은 그만 쉴게요. 그럼 안녕!" 날쎄게 방에서 나가버린 쥬느비에브를 보며 케이로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를 잡을 시간도 없었다. 혈색 좋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생각하며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도망이로군." ******** 쥬느비에브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테이크아웃 코너의 롤 아주머니를 불렀다. 단골 손님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롤 아주머니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롤 아주머니는 오늘도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쥬느비에브를 맞았다. "쥬느비에브 아가씨, 오늘은 무얼 드릴까요?" 롤 아주머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유리 장식장에 기대어 손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롤 아주머니. 나 오늘 에이드리안한테 얼마 전에 내가 마신 소다수, 그거 만들어 줄거에요. 그거 만드는 방법이랑 재료 좀 가르쳐 주세요. 예쁜 부채도 만들어서 같이 줄거에요." "그래요? 에이드리안 님이 좋아하시겠네. 잠깐만. 부채라면..." 롤 아주머니는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더니 종이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뭐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내가 가끔씩 취미로 공예품을 만드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나지 않아서 계속 못 만들고 있었거든요. 좀 있으면 스콜라 행사도 많고. 이리저리 식당이 바빠서 말이죠. 비싼 수입 재료라 아깝기도 하고. 아가씨가 가져가서 쓰세요." 쥬느비에브는 종이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에 부챗살, 접착제까지 들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난 롤 아주머니가 너무 좋더라." 롤 아주머니는 기쁘게 웃으며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쥬느비에브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소다수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재료는 여기 보는 것처럼 거의 집에 있는 걸 테니까 이걸 사용 하도록 하고. 아참, 시내 상점에 가면 소다수를 장식할 예쁜 장식품도 파니까 그걸 이용하는 것도 좋을 거에요. 여기 식당의 장식품들은 모두 식당 이름이 쓰여 있어서 좀 부적당할 거고." "그 가게가 어딘 데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롤 아주머니는 약도를 그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내 아들 녀석이 오늘 시내에 나간다고 했는데...지금쯤 올 시간이 지났는데...아! 저기 오는 군요. 스콜라 9학년생이에요. 아가씨의 동생벌이죠. 레플리카 실력은 변변치 않은데 어쩌다가 스콜라에 입학하게 되어서 운이 좋았죠."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하게 생긴 소년 한 명이 다가와 롤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롤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 아가씨는 쥬느비에브 아가씨란다. 에이드리안 님의 약혼녀이신." "알아요. 어머니." "그 가게 알지? 전에 나랑 식기 세트 사러 간 그 가게. 이 아가씨를 좀 안내해 드리렴. 혼자서는 찾기 어려우니까." 소년은 친절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신이 나서 만세를 불렀다. 이제 환상적인 소다수를 만들어서 에이드리안에게 가져다 주고 칭찬 받는 일만 남았다. 부채도 예쁘게 만들어서 에이드리안에게 주면 아주 기뻐하겠지.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여전히 아침에 싸운 일은 벌써 까맣게 잊고 있는 그녀였다. ******** 쥬느비에브는 종이 가방을 집에 두고 상점가에 가기로 결정했다. 종이 가방이 생각보다 제법 무거웠기 때문이다. 쥬느비에브는 소년에게 집 앞에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 하녀장과 집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쥬느비에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가 2층에 막 닿은 순간 에이드리안을 만나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아침에 그들이 싸웠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었다. 쥬느비에브는 표정을 지우고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 난 화가 다 풀린 게 아니야. 그러니까....음....' 겨우 표정을 유지한 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도 여전히 화가 난 듯 무표정했다. 에이드리안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저 인사 치레를 하겠다는 듯 레슨을 다 마쳤냐고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무슨 말이라도 하면 표정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 때 에이드리안의 시선이 종이 가방으로 내려갔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원래 선물은 주기 전에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드디어 에이드리안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엉겁결에 말했다. "오선지랑 악보 책이요." 얼마 전부터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두 가지가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더 이상 에이드리안과의 대화를 계속하다가는 그녀의 계획이 들킬 것 같아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갔다. ******** 방에 도착한 쥬느비에브는 은근히 화가 났다. 자신은 이렇게 에이드리안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화만 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뿌루퉁하게 입을 내밀며 드레스 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괜히 신경질적으로 문을 한번 콩 걷어찼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힘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고 문을 열어 종이 가방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현관을 열고 나가자 소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기다려 준 소년에게 음료 한잔 대접 못해서 아쉬웠다. 에이드리안이 화만 안 났으면 차가 아니라 쿠키와 케이크까지 대접했을 텐데 정말 안타까웠다. 그 때 위쪽에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들어오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뜨끔한 마음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종이 가방이 들켰나?' 쥬느비에브는 옆을 돌아보았다. 소년이 겁에 질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소년에게 가자고 손짓하며 스콜라 쪽으로 뛰어갔다. 부채는 실패로 돌아 갔어도 소다수까지 들킬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 소년이 안내해준 상점에는 정말 신기하고 예쁜 것들이 많았다. 은으로 만든 식기도 정말 예뻤고 컵이랑 찻잔도 너무 멋졌다. 쥬느비에브는 투명한 유리에 파란색 장식이 시원하게 붙어 있는 유리잔 두 개와 컵을 장식하는 과일 모양의 장식이 달린 리본을 2개 샀다. 싱글거리며 들어온 집은 왠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하녀장 루이즈가 그녀에게 달려오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이 하루 종일 찾으셨어요. 어서 서재로 가보세요." 쥬느비에브는 루이즈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쭈뼛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분명 부채 재료를 들킨 게 틀림없었다. 상점에서 사온 유리잔과 장식품을 방에 가져다 놓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며 서재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소파에 누워있는 에이드리안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살금살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제49음(第49音) Misunderstanding(3) -Dispel!!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방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이내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술병과 유리잔을 발견한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썼다. 냄새로 보아 왠지 엄청 독할 것 같은 술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술병의 뚜껑을 잘 닫은 다음 유리잔을 테이블 멀찍이 치웠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웠다. "에이드리안,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에이드리안,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렇게 자면 감기든다고요." 쥬느비에브가 연달아 계속 몸을 흔들어 대자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드디어 눈을 뜨자 성취감이 느껴져 함박 미소를 지었다. '아차, 우리 싸웠었지.'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다시 표정을 굳히며 에이드리안을 곁 눈질했다. 그 때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품안으로 확 잡아당겼다.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에이드리안 때문에 몹시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곧 이어 그가 너무 세게 안아 숨쉬기가 곤란하자 손으로 에이드리안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나 숨막혀요. 숨막혀." "....거야. ....정말 맞아....프란체스 바보. 쥬르도 바보." 에이드리안은 뜻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며 더욱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런데 나더러 바보라고?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버둥버둥 거리며 에이드리안을 밀어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때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이 숨을 쉴 때마다 귓가가 얼얼해졌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굳어버렸다. 온 몸으로 짜릿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코에 은근한 술 냄새가 느껴졌다. 그랬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인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겨우 깨닫게 된 사실을 되뇌며 인상을 썼다. '에이드리안은 열 일곱 살 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음주라니...안 돼. 절대 안 되는 일이야. 앞으로 내가 막아야....' 쥬느비에브가 심각하게 에이드리안의 건전한 생활을 걱정하고 있을 때 일이 벌어졌다. 에이드리안이 귓불을 핥기 시작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왜 이러는 거지? 맞아. 술에 취했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여긴 에이드리안의 서재지. 그런데 내가 왜 이러고 있담?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에, 에이드리안, 이러지 말아요. 나 간지러운데... 응...."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쥬느비에브를 꼭 껴안은 채 그녀의 목으로 입술을 내렸다. 쥬느비에브는 아찔한 느낌에 에이드리안을 밀어내려고 팔을 들었다. 에이드리안의 입술이 목에 느껴졌다. "에이드..." 순간 에이드리안이 그녀의 말을 막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목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거세게 밀어냈다. 그는 아직 덜 열린 파란 눈동자로 쥬느비에브를 보며 중얼거렸다. "바보." 쥬느비에브는 소파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목이 얼얼했다. 쥬느비에브는 아무래도 이빨 자국이 났을 것 같은 목을 한 손으로 감싸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머, 멀쩡하잖아? 술 취한 게 아니란 말이야?'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서재 문 쪽으로 걸어갔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멍하게 지켜보다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의 걷는 폼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쥬느비에브의 예상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에이드리안은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주저앉듯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쓰러진 이후로 좀처럼 잠에서 깨질 못했다.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다녀갈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주치의인 하우먼 박사는 독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거라며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이 일어났을 때 마시게 할 하우먼 박사의 걸쭉한 특제 드링크를 스푼으로 힘없이 휘저으며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의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쥬느비에브는 그 때 에이드리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술은 또 왜 마신거람? 그것도 이렇게 독한 술을..." 에이드리안은 편안한 표정으로 잘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관찰했다. 깨어있을 때는 항상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품위 있고 우아한 귀족 도련님 같은 분위기였는데 자고 있는 모습은 그저 예쁘장하고 귀여운 소년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넘겨주며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지금 아주 귀여우니까 아까 깨물었던 거 용서해 줄게요." 쥬느비에브의 짧은 입맞춤에 에이드리안은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걷어내었다. 그러더니 살며시 눈을 떴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행동이 들켰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에이드리안은 한동안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때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그 남자." 쥬느비에브는 눈을 뱅그르르 돌리며 눈을 깜빡였다. 남자라니, 무슨 남자? 일어나자마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기분이 나쁜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배게를 등뒤에 받치고 쥬느비에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에 움찔했다. "아까 낮의 그 남자 말이야. 스콜라 학생이야?" 쥬느비에브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롤 아주머니의 아들을 아까 에이드리안이 봤었다는 생각이 났다. 서, 설마 질투를? 왠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이 질투를 한단 말이지. 흐음...나에 대한 독점욕이 있긴 한가 보지? 아이, 기분 좋아. 그렇지만 에이드리안의 태도가 은근하게 화가 났다. "그 남자애가 궁금한 거에요? 나 오늘 그 애랑 상점에 갔었어요."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리고 머리가 울리는 것인지 한 쪽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아깐 왜 도망갔어?" "그 애랑 상점에 가려구요."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말이 에이드리안의 속을 긁어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엄청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흥! 한 번 열 받아 보라지. 에이드리안 바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면서 손에 쥐고 있는 숙취 해소 드링크를 언제 줄까 고민하는 그녀였다. 그 때 에이드리안의 손이 뻗어와 쥬느비에브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입술을 들이밀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갑작스러운 키스로 들고 있던 드링크를 놓쳐 버렸다. 거친 키스에 쥬느비에브는 얼떨결에 에이드리안을 거세게 밀어버렸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왜 이러는 거에요! 아까는 깨물더니, 이번엔! 전에 나보고 함부로 키스하지 말라면서요? 왜 에이드리안은 함부로 키스하는 거에요! 정말 나쁜 사람이야, 에이드리안은!" 에이드리안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손등을 뺨으로 가져갔다. 내가 왜 이러지? 쥬르한테 괜히 화만 내고 거칠게 굴고. 다 프란체스 형이 준 술 때문이야! 에이드리안은 이내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뭐라고요?" 작은 목소리에 잘 듣지 못한 쥬느비에브는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미안하다고."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사과를 하는 에이드리안 때문에 머쓱해졌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고 그러는 걸까? 자존심 하나는 절대 남한테 뒤지지 않을 에이드리안이었다. 술김에 사과한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에이드리안의 사과로 한 풀 꺾인 쥬느비에브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싸운다는 것이 시시해 졌다.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시선을 피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미안. 그냥 화가 나서. 난...난 네가 화내는 거 싫어."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돌렸다. 왠지 에이드리안을 마주 보기가 어색했다. 나도 사과해야 하나? "있잖아요. 아까 그 남자애. 롤 아주머니 아들인데요, 내가 지리를 잘 몰라서 상점까지 데려다 준 거에요. 상점에 왜 갔냐면요... 그게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음..음...사실은 에이드리안이 오늘 아침 식사시간에 기분이 나빴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막 그러고. 케이로프 님이 에이드리안은 더위에 약하다고....그래서 아마 기분이 나빴을 거라고 해서 나... 소다수를 만들어 주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상점에 가서 유리잔하고 장식용품들을 사왔는데...음...음..."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올렸다. 순간 에이드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오해가 풀린 것인지 에이드리안도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갑자기 쿡쿡 하며 웃기 시작했다. "아침에 짜증이 나긴 했지만 그런 거 아냐. 난 그냥 네가 골고루 먹지 않으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 "헤에-. 그랬구나. 음, 음...저기요, 나 앞으로 파란 채소도 먹어보도록 할게요. 맛은 없지만."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눈을 뱅그르르 돌렸다. 뭔가 상황이 기분 좋게 풀리고 있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쥬느비에브가 손뼉을 탁 치며 물었다. "그런데 아침에 왜 나 스콜라에 데려다 주지 않은 거에요?" "네가 화나서 먼저 간 거잖아. 아니었어?" 명백한 오해였다는 것을 알아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킥킥대기 시작 했다. 곧 이어 크게 소리내어 웃어댔다. 너무 웃는 바람에 눈물까지 나자 두 사람은 가까스로 진정을 하고 씨익 웃었다. 에이드리안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나, 먹고 싶은데, 네가 만든 그 소다수." "저, 정말요? 그, 그럼 만들어 올 테니까 기다려 봐요. 알았죠?" 쥬느비에브는 까만 머리카락을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쪽으로 달려가던 쥬느비에브는 중간에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살포시 웃어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먼저 사과해 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싸우게 되면.... 음...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하여튼 그 때는, 내가 먼저 사과할게요." 에이드리안이 웃어주자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 밖으로 나갔다. 쥬느비에브가 나간 것을 확인한 에이드리안은 깊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놀랬잖아. 진짜 바람 핀 건 줄 알았어. 휴-" 그러면서도 왠지 기분 좋은 그였다. ******** 우여곡절 끝에 요리사 아저씨의 도움덕분에 겨우 소다수를 만든 쥬느비에브는 커다란 금색 쟁반에 소다수와 얼음이 가득 담긴 은제 주전자와 그녀가 상점에서 사온 유리잔과 장식품을 얹어 서재로 갔다. 어느 새 방에서 나온 에이드리안이 서재에 간 모양이었다. 루이즈가 그녀에게 에이드리안이 서재에 있다고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며 그녀 특유의 음정, 박자가 전혀 맞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 "우웅~ 우웅~ 기분 좋은 하루~ 랄랄라- 내 이름은 쥬느비에브~ 랄라라-" 그러나 서재의 문 앞에 우뚝 선 쥬느비에브는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있어 방문을 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좀 미안하지만 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쥬느비에브는 문을 발로 콩콩 찼다. 몇 번의 시도 뒤에 문이 열렸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그녀를 맞아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분명 레이디처럼 보였으리라. 쥬느비에브는 소다수를 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이 그녀를 테라스로 안내했다. 쥬느비에브는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다음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마의 땀방울을 닦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쥬느비에브는 서재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주황색 상자를 발견하고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저 상자는 뭔데 저렇게 구석에 던져놓은 거에요?" "아, 음....그게...오선지와 악보 책인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서재 안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상자를 조심해서 들어 올렸다. 그의 말대로 상자 안에는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오선지와 견고한 양장의 악보 책, 은백색 펜이 들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음, 음...에이드리안, 이 거 안 쓰면 나 줘요. 나 이 거 필요하거든요." "너 낮에 들고 있던 거 오선지와 악보 책이라고 얘기했잖아."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거 사실 에이드리안한테 부채 만들어 주려고...그 재료인데...헤헤." 쥬느비에브의 멋쩍은 표정을 보자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너 가져. 그거."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상자를 테라스 쪽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의자 위에 놓은 다음 그 옆의 의자에 자리했다. 에이드리안이 맞은 편에 앉자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씨익 웃은 다음 소다수를 유리잔에 따랐다. 맑은 레몬색의 액체가 유리잔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에이드리안은 아주 기대가 된다는 듯 유리잔을 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잔에도 소다수를 따르고 그녀가 사온 장식품으로 유리잔을 보기 좋게 치장했다. 문득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야아- 별이 많아요. 하늘이 아주 까맣고....반짝여." "아- 그래. 음....그런데 쥬르." 에이드리안의 부름에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에이드리안과 오해도 풀었고 밤하늘도 아름답고 소다수도 무사히 완성되었다. 정말 즐거운 밤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내려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네에? 왜 그래요?" "유리잔 세는데....불량품인가 봐." "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유리잔을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곧 이어 테라스에는 작은 에이드리안의 웃음소리와 쥬느비에브가 유리잔을 보고 투덜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쥬느비에브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연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드리안과 화해하게 되어서 정말 기분 좋았다. 역시 싸우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 웃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미소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그 마음은 에이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속 좁게 행동한 자신이 못내 아쉬웠다. 진작 대화로 해결했다면 싸울 일도 없을 텐데. 에이드리안은 싱긋 미소지으며 눈을 하늘로 돌렸다. 그렇게 밤은 소리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제50음(第50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1) 대연습실의 의자에 앉아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합동 레 슨 중이었다. 클래스 O가 두 사람밖에 없는 관계로 그나마 인원이 가장 적은 클래스 B와 함께 레슨을 받기로 했다. 옆자리에 안느마리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제 밤에 가게에 새로 들어온 물품을 체크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심장이 콩닥콩닥 거리는 느낌 을 받았다. 쥬느비에브가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오늘 레슨 을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약혼자, 에이드리안이 었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상급생의 경우, 하급생의 레슨을 직접 하는데 에이드리안의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일년에 손꼽을 정도라고 했다. 바쁘기도 했지만 그가 레슨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의 경우 레슨을 하는 경우가 상대적으 로 많아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거리며 에이드리안이 자신에게 시선을 주기 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좀처럼 그녀를 보지 않았다. 간단히 이 론 수업을 끝낸 에이드리안이 잠시 쉬고 개인 레슨을 하겠다고 하자 대연 습실의 숨막히던 분위기는 그제야 풀어졌다. 쥬느비에브는 연습실을 나가 려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쪼르르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잡고 베시시 웃었다. "에이드리안! 왜 얘기 안 했어요? 아침에 같이 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 10 학년 레슨 한다는 말 없었잖아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거리낌없는 행동에 다소 당황한 것인지 주위 를 둘러보았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쥬르, 합동 레슨은 다른 학생들도 함께 하는 거니까 사적인 감정은 배제 해야 하는 거야. 너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에이드리안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아쉽다는 듯 입 맛을 다셨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다소 뿌루퉁한 표정을 보며 슬 며시 미소를 띄었다. "그나저나 오늘 노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뭣하면 네 차례에서 그냥 넘 어갈게." "으으응, 나 잘 할 수 있어요. 잘 할 수 있다니까."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의 저 타당성 없는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 는 것인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쥬느 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더니 뒤돌아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열심 히 손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저 막막한 기분에 연습실을 나섰다. ******** "더! 더! 소리를 좀 더 크게 높여! 더! 좋아. 좀 더 연습하도록." 에이드리안의 레슨은 확실히 박력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곱상한 얼굴에서 저런 박력이 나오다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에이드리안을 보는 데만 집중했다. 옆에서 안느마리가 연습하라고 툭툭 쳤지만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의 약혼자이긴 했지만 정말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또 다시 베시시 웃었다. 개인 레슨은 짧게 끝났다. 에이드리안이 학생의 노래를 잠깐 들어보고 고칠 점을 가르쳐 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을 거치고 드디어 쥬느비에브 쪽으로 에이드리안이 다가왔다. 에이드리안은 안느마리에게 노래를 해보라고 손짓했다. 안느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짧게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우리는, 우리는 정의를 지키는 오색 레인져- 악당들은 꼼짝 마라, 오색 레인져가 간다아아아---" 연습실 안이 조용해 졌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우렁찬 노래에 학생들은 저마다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쥬느비에브만 빼고.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박수까지 쳤다.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오색 레인져'의 주제가였던 것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멋진 용사들의 모습이 떠올라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소리가 너무 탁해. 좀 더 맑게 내도록 해봐. 흠...나머지는 괜찮군. 그럼 다음." 에이드리안이 차트에 간단하게 몇몇 사항에 체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짓으로 순서를 물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시작." 쥬느비에브는 우물쭈물 거리다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노래할 생각을 하지 않자 조금 더 다가가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 못 하겠어?" "아뇨. 그게 아니라. 있잖아요. 나 노래 잘 하면 뭐 해줄거에요?"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게 문제란 말인가!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조그맣게 말했다. "모롤라 3일분. 됐지?"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래했다. "그대는 나의 아름다운 소망이니 나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곱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자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저번 학년 배정 테스트 때의 그 목소리였다. 요즘은 노래가 잘 되는 날이 많은 건지 곧잘 노래하곤 했다. 자기 전에 가끔씩 그의 귓가에 다가와 노래를 속삭이기도 했다. 문제는 노래가 안 되는 날이 아직까지는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지만.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주위의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역시 학생회장의 약혼녀라는 둥 별별 소리가 다 들리는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더니 에이드리안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이 무언가 칭찬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만 의자에 발이 걸려 홀랑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쿵 하고 의자에 머리를 박았다. "쥬, 쥬르?"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고 당황하여 쥬느비에브를 일으켰다. 쥬느비에브는 부풀어 오른 이마를 만지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꼭 껴안더니 잠들어 버렸다. ******** 학생회실의 소파에 누워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옆에 앉아 짓궂게 뺨을 쭉쭉 잡아당겼다. 쥬느비에브는 자면서도 아픈지 자꾸 고개를 돌렸다. 은근히 재미있어진 에이드리안은 계속 볼을 잡아당겼다. 슬며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보드라운 뺨의 몽실몽실한 느낌이 아주 기분 좋았다. 또 다시 볼 살을 쭉 잡아 당기던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쥬느비에브가 눈을 뜨는 바람에 더 이상 잡아당기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쥬느비에브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자꾸 잡아당기면 볼 살 늘어나요. 불독처럼 볼 살 축 처지면 에이드리안이 책임질 거에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쥬느비에브는 오물조물 입을 놀려 말했다. 그녀의 볼을 잡고 있던 손을 어색하게 거두고 에이드리안은 멋쩍어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홱 돌리고 말했다. "너는 거기서 그렇게 자면 어떻게 해. 덕분에 레슨도 못 끝내고." "이마가 너무 아파서 갑자기 잠이 막 오더라구요. 으음..." 말을 끝내고 이마를 만지던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렸다. 이마에 작은 혹이 느껴졌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글썽였다. "에이드리안, 나 어쩌죠? 혹 났는데. 안느마리 혹 없어질 때까지 시간 많이 걸렸는데. 우웅~ 어쩌죠?" 에이드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고 체념 조로 말했다. "집에 가서 레플리카 써 줄 테니까 걱정말고..." 그 때 문이 열리고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뒤돌아보았다. 미라벨은 학생회실에 들어서자 말자 소파에 누워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머, 어머. 웬 혹이에요?" "레슨 받다가 넘어져서 생긴 혹이야." 에이드리안의 시큰둥한 말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책상 앞으로 가 앉더니 생각났다는 듯이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먼저 미라벨이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님. 이번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 말인데요. 공연 작품이 결정 났답니다. 집행부가 거의 3모네동안 끙끙거리더니 결국 <에스멜로네>로 결정 났다고 해요." 쥬느비에브는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이란 말에 눈을 끔뻑거렸다.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케이로프가 그녀의 호기심에 답해 주었다. "12모네에 한 번, 오페라 대공연이 열립니다. 이 행사는 학생회별로 열리며 그 규모가 엄청나지요. 거의 1모네동안 계속되며 학년별로 13개의 공연이, 그리고 학생회 소속의 임원으로 구성된 공연이 학생회별로 하나씩 열리게 됩니다. 이 공연은 여름 학기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여름 휴가지요. 아시겠습니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케이로프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오페라 공연이라니 왠지 멋질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그럼 나도 참가하는 거에요?" "글쎄, 모든 학생들이 공연을 하는 건 아니야. 대외적으로도 많은 손님들이 오기 때문에 실력을 검증 받은 학생 위주로 하는 거지. 너라면 학년 공연에서 제외된다고 해도 학생회 공연의 기회가 또 있으니까. 하지만..." 미라벨이 에이드리안의 말허리를 잘랐다. "하지만 쥬느비에브. 배역을 맡는 건 어려울 거에요. 학생회 공연의 배역은 학생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니까요. 이번의 <에스멜로네>에는 쥬느비에브처럼 낙천적이고 다소...음....뭐랄까 희, 희극적인 인물은 없으니까...." 미라벨은 쥬느비에브의 듣기 민망한 노래 실력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이 쿡쿡 웃음을 삼켰다. 미라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라벨은 말을 돌려서 하느라 몹시 고생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에이드리안은 아쉬운 듯 눈을 멀뚱거리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배역 투표는 다 끝났지? 결과는 언제쯤 나올 예정이야?" "확실한 일정은 잡히지 않았지만 오늘, 내일 정도에는 배역이 결정될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배역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이니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서는 '프란'을 맡으실 게 분명합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를 일으켜 세웠다. 쥬느비에브는 '프란'이 누구냐고 눈짓으로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난 이만 집에 갈 테니까... 내일 아침에 학생회실에 올 테니 그 때 배역에 대한 이야기는 하자고."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 "에이드리안, '프란'이 누군데요?" "아까 얘기했잖아. 남자 주인공이라고."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서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오페라 공연에 대해 궁금한지 아까부터 옆에 누워서 칭얼대고 있었다. 귀찮아진 에이드리안이 책 읽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자 그녀도 그림책 하나를 가져와 자신의 옆에 발랑 드러누워 버렸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돌아누웠다. 베개를 가슴께에 놓고 엎드린 채 책을 펼쳤다. 쥬느비에브는 옆에서 뒹굴뒹굴 거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오페라가 뭐에요?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거에요? 나 한번도 본 적 없는데." "오페라란 건...음....말 대신 노래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고 할까? 그런거지." "헤에- 나도 하고 싶어. 음, 에이드리안이 하는 그 오페라에 귀여운 토끼나 곰돌이 같은 건 안 나오나요? 나, 그런 거 잘 할 자신 있는데." 쥬느비에브도 말을 마치고 에이드리안의 베개 하나를 가져와 목 아래에 받치고 엎드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보고 있는 책에 시선을 가져가며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에스멜로네>에는 토끼는커녕 곰돌이도 안 나와. 그나저나 옆으로 좀 갈래? 책 안 보여." 에이드리안의 귀찮다는 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에에, 그럼 여자 주인공은 누구에요? 다른 여자애랑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있는 거 싫은데. 흠...오페라 연습 때문에 자주 같이 있지도 못할 텐데. 음...음..." "쿡. 걱정하지마. 프리마 돈나는 아마 미라벨이 하게 될 테니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더니 에이드리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래도 싫단 말이에요. 내가 하면 안 돼나?" 옆에서 불평을 털어놓는 쥬느비에브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다시 돌아누웠다. 침대 천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도 쥬르, 너와 함께 노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무반응에 지쳤는지 그의 곁에 다가와 팔을 잡아끌어 배게 대신 베고 금새 잠들어 버렸다. 새근새근 잠들어 버린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웃으면서 그녀의 뽀얀 뺨에 입맞춤을 했다.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에 저절로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제51음(第51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2) 더운 여름이었지만 아침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학생회실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짙은 붉은 색의 커튼을 살랑거리 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쭉 잡아당기며 쥬느비에 브는 말똥말똥 눈을 굴리면서 옆에 서 있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 이드리안은 살짝 인상을 쓰며 미라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라벨은 하얗 게 질린 얼굴로 하얀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녀의 옆에 있던 케이로프는 무표정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벨과 안느마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떨고 있는 미라벨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긴장된 분위기로 학생회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 았다. 미라벨은 드디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머리를 흔들고 입을 열 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에이드리안이 살짝 이마에 주름을 넣으며 물었다. 미라벨은 다시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오페라 배역이 발표가 되었습니다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답하군.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듣다 지친 케이로프가 다가와 미라벨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종이에 적힌 글을 훑어보던 케이로프는 이내 한쪽 눈썹을 실룩이더니 창백한 안색으로 다시 종이를 미라벨에게 건넸다. 그리고 쓴 입맛을 다시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 도대체 배역이 어떻게 결정되었다고요." "그래, 미라벨, 어서 말해봐." 미라벨은 유벨과 안느마리의 닦달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남자 주인공 '프란' 역에는 에이드리안 님이, 그리고 부족장 역에는 유벨 님이, 노이스첼르 역에는 케이로프 님, 레티스엘라 역에는 안느마리, 그리고 아마빌레 역에는 저, 미라벨...." 학생회실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듣고 있던 유벨이 잔뜩 인상을 쓰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아마빌레가 미라벨이라고? 그럼 여자 주인공인 에스멜로네는? 여기 다른 사람이 누가 있어서..." 순간 유벨은 말끝을 흐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쥬느비에브에게로 모아졌다.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고 흔들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며 뒤돌아 섰다. 이미 먼저 결과를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던 그였다. "엘크로이츠에 소속된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입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에스멜로네로 결정되었다고 하는군요." 유벨과 안느마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가끔씩은 이런 위로가 필요한 법이었다. 미라벨은 고개를 숙이며 들고 있던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쳐다보아도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옆에서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실감이 나는지 쥬느비에브가 말했다. "내, 내가 여자 주인공이라고요? 내가?" 미라벨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 다들 쥬느비에브의 노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미라벨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내어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쥬르가 이렇게 학생들에게 어필했던가?" 안느마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전에 엘크로이츠의 수호천사인가 뭔가 하는 사건과 저번 학년 배정 테스트의 사태, 그리고 얼마 전에 슐뢰르겐 레플리카 스콜라의 일 때문에 쥬느비에브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었죠.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는데..." 사실 그랬다. 스콜라의 학생들에게 쥬느비에브는 하나의 우상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학생회장 에이드리안의 약혼녀라는 조건과 함께 미스테리한 조직인 클래스 O의 소속원으로서 언제나 엘크로이츠를 지켜주고 있다는 신비스러운 이미지, 그리고 학년 배정 테스트에서 보여준 아름다운 가창 실력, 슐뢰르겐 레플리카 스콜라의 학생회장을 감동시킨 언변 등 학생들의 눈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약혼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소녀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였던 것이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소녀, 그것이 쥬느비에브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쥬느비에브 본인을 포함한 학생회 중앙 집행부 임원 6명만이 모르고 있었다. 방안에 조용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쥬느비에브가 눈을 반짝이며 에이드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에이드리안은 기대감에 반짝이는 쥬느비에브의 눈동자를 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 때 미라벨이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가 진짜 이 역할을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요? 에스멜로네는 어려운 역할이에요. 게다가 쥬느비에브와는 전혀 연결할 수 없는 성격이잖아요. 쥬느비에브와 '신비로운 여인'이라는 이미지는 전혀...." "저도 동감입니다만...그 보다는 노래가 더 문제입니다. 과연 그 큰 무대에서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게다가 혹여나 잘못해서 그 음정, 박자 맞지 않은 노랫소리라고 나온다면..." 케이로프는 상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근심 어린 말과 유벨과 안느마리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며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의 표정에서 그녀의 생각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오페라 공연을 하고 싶긴 하지만 다들 걱정하는 터라 쉽게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입을 열었다. "안 될 것 없잖아? 내일부터 기초 발성 연습부터 시작하도록 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나 반대로 미라벨과 케이로프, 유벨의 표정은 몹시 침울하게 변하고 있었다. 오페라 공연의 실패가 그들의 눈앞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미소를 보냈다.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케이로프가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의 발성 연습은 물론 제가 해야..." "아니야. 내가 할 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자기 역할을 연습해 두도록 해." "네에? 에이드리안 님이 직접 하시겠다고요?"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쥬느비에브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끌어당겼다. "그럼 오늘은 가서 오페라 분석부터 해봐야 하니까 내일 연습실에서 보도록 하지." 헤실헤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에이드리안이 방을 나가자 미라벨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프리마 돈나의 자리를 빼앗긴 건 별로 억울하지 않지만 이번 공연은 엘크로이츠의 위상을 널리 알릴 몇 안 되는 기회인데....아아~ 어지러워~" 머리에 손을 가져가며 휘청거리는 미라벨을 받치며 케이로프도 묵묵히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의 엄청난 노래 실력이 스콜라에 알려지면 아마...상상하기도 싫은 사태가 일어날 테지." "그래도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맡겠다고 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니냐. 휴- 쥬느비에브와의 레슨은 정말 힘들다니까." 유벨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긍정의 뜻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창 밖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래도 쥬느비에브, 기분 좋은 가봐. 하긴 에이드리안 님과 함께 공연할 수 있으니." ******** 집으로 돌아온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서재로 갔다. 에이드리안은 책장을 두리번거리더니 회색 표지의 얇은 책자 하나를 건넸다. 쥬느비에브는 책자를 받아들고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에요, 에이드리안?" "<에스멜로네> 대본이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빛내며 책자를 넘겼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그런데 에이드리안, 다른 사람들은 다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는데 에이드리안은 왜 내 편 들어준거에요? 나도 알아요. 내가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을 만큼 미덥지 못하다는 거." "네가 하고 싶어했잖아. 그리고 너 노래 잘 하잖아. 아니야?"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주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기분을 정말이지 잘 알아 맞춘다. 그리고 자신을 믿어 준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오페라 대본을 꼬옥 끌어안았다. ******** 서재에서 쥬느비에브와 헤어진 에이드리안은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지금 부터는 느긋하게 대본을 볼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에 들고 있던 대본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드레스룸 쪽으로 갔다. 그는 편한 셔츠와 바지 하나를 꺼내 갈아입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드득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테라스 쪽으로 가 밖을 쳐다보았다. 뿌연 하늘 아래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비가 투명한 유리창을 말없이 때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침대로 걸어갔다. 대본 책을 가지고 침대 위에 드러누운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천장을 쳐다보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곧 몸을 돌려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대본 책을 펼쳤다. 익숙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번 보았던 것이라 지루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공연할 <에스멜로네>의 분위기를 그는 매우 좋아했다. 에이드리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 때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까만 눈동자를 굴리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본 읽는다며? 벌써 다 읽었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방안으로 쫓아 들어 왔다. 한 손에 대본 책을, 한 손에는 모롤라가 가득 들어 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누워 있는 침대로 한달음에 달려 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옆에 풀썩 드러누우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녀는 종이 가방에서 모롤라 하나를 꺼내 에이드리안에게 건네주며 빙긋 웃고는 대본 책을 펼쳤다. 모롤라를 건네 받은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행동에 눈을 깜빡이다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러운 눈동자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남녀가 한 방에, 그것도 한 침대에 누워있으면 엄청난 스캔들감이래요." "알면 왜 이러고 있는 건데?"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혀를 쏙 내밀며 에이드리안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난 에이드리안이랑 스캔들 나는 거 너무 좋거든요. 게다가....음...음... 비오니까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우리 같이 대본이나 읽어요. 비도 오니까." "쿡." 피식 웃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모롤라의 껍질을 쏙쏙 까며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에이드리안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모롤라의 껍질을 벗겼다. 두껍고 오돌도돌한 껍질을 까자 노란색 과즙이 듬뿍 흘러내리는, 젤리 같은 과육이 드러났다. 에이드리안은 모롤라를 한 입 베어 물고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흘리지 말고 먹어. 알았지?"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는 대본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모롤라를 까먹으며 대본을 읽었다. 몇 시르가 흘렀을까,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에 왜 그러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고는 쥬느비에브의 손에 들려 있는 방금 껍질을 깐 모롤라를 한 입 덥석 물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으며 다시 대본에 시선을 가져갔다. 장난스레 눈을 빛내며 대본에만 집중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본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손에 들린 움푹 파인 모롤라를 보며 인상을 썼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모롤라 있으면서 왜 내 모롤라 먹은 거에요?...아이, 정말. 에이드리안 때문에 바보 모롤라가 됐잖아요." "남의 모롤라가 맛있어 보이는 법." 시침 뚝 뗀 에이드리안은 계속 모른 척 대본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표정과 말에 발끈한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에이드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다시 발끈한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에이드리안에게로 돌격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모롤라를 크게 한 입 베어먹고 씨익 입을 닦았다. 흡족한 기분으로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반도 남지 않은 모롤라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더니 이내 쥬느비에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원래 남의 모롤라가 맛있어 보이는 법."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의 화난 표정에 고소해하며 그녀는 그가 한 입 베어먹은 모롤라를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미 입을 댄 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문제였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이내 눈을 천장으로 돌리며 애써 태연한 척 모롤라를 베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콩닥콩닥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도 한동안 자신의 손에 얌전히 들려 있는 모롤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딴청을 부리듯 눈을 돌리고 결국 모롤라를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적막감 속에서 모롤라를 베어 물며 서로에 대한 달콤한 간접키스를 맛보고 있었다. 창 밖에는 여전히 시원하게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52음(第52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3) 근사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서재로 갔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된다는 에이드리안의 엄포에 쥬느비에브는 다소 긴장했지만 곧 평소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늘 에이드리안은 예정과는 달리 스콜라에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오늘 하루 종일 에이드리안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무척 기뻤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대본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늘 같이 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에이드리안은 서재의 문을 밀며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쥬느비에브는 기쁘게 어깨를 으쓱하고 에이드리안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은 베이지색 셔츠와 검정색 바지 차림으로 비교적 편안한 차림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주름하나 없는 에이드리안의 옷을 보고 자신의 옷을 살폈다. 연두색 스커트에 노란색 블라우스의 주름을 본 쥬느비에브는 얼른 손으로 주름을 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쥬르, 그러고 있지 말고 이 쪽으로 와." 어느 새 소파에 가서 앉은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불렀다. 쥬느비에브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고 그의 옆에 가 앉았다. 에이드리안은 대본을 뒤적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내용은 대충 알겠지?" "음....주인공인 에스멜로네는 어떤 일족의 부족장 후계자 후보인데, 남자 주인공인 프란이 그녀를 시기하죠. 하지만 에스멜로네는 프란을 사랑해서 문제가 생기는데...음...그 둘 사이를 이간질해 자신이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노이스첼르란 사람이 있고 에스멜로네와 프란의 사랑을 결국 연결시켜 주는 에스멜로네의 친구, 레티스엘라...그리고 프란의 약혼녀, 아마빌레.... 이렇게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일을 꾸미는 거 아닌가요?"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단편적인 이해에 싱긋 웃으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스멜로네는 바람을 움직일 수 있는 신비한 힘의 소유자야,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족의 후계자로서 지목되고 있었는데, 그녀 외에 프란이라는 남자가 또 다른 유력한 후보자였지. 프란은 에스멜로네를 몹시 싫어했어. 그녀가 없으면 자신이 일족의 장이 되는 것은 뻔한 일 이었으니까. 그런데 에스멜로네는 그토록 자신을 싫어하는 프란을 사랑하고 만거야." "에에....그런데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왜 좋아하는 건데요?" 쥬느비에브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쥬르는...내가 널 싫어하면 날 안 좋아할 거야?"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쥬느비에브는 곤란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래. 에스멜로네도 어쩔 수 없이 프란에게 끌린 거겠지. 하지만 프란은 그녀를 싫어하는데다가 그에게는 아마빌레라는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있었거든. 에스멜로네는 몇 번이나 프란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려고 했지만 서로가 적대시해야 하는 관계 때문에 그는 곁을 내주지 않았어." "잉, 에이드리안, 남자는 자고로 약혼녀에게 충실해야 하는 거에요. 알죠?"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갑자기 '약혼녀' 아마빌레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동시에 없애고 자신이 일족의 장이 되려고 하는 노이스첼르란 남자가 있었어. 그는 아주 간교한 남자였어.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두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그런 와중에 에스멜로네의 친구, 레티스엘라가 부지런히 나서준 끝에 에스멜로네와 프란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사랑을 확인하게 돼. 하지만 그것에 화가 난 아마빌레에게 에스멜로네는 크게 다치게 되는데... 결국은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해피 엔딩." 에이드리안의 말을 들으며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하지만..분위기 잘 모르겠는데..." "흐음....그럼 연습실에 한 번 가볼까? 다들 거기 있을 텐데.... 가서 보면 어떤 분위기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를 나서는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르며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막상 대본을 보고 나니 너무 어려워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며 뭉기적 걸음을 재촉했다. ********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요." "정말, 다들 있는데서 저러고 싶을까?" 연습을 하다말고 미라벨과 유벨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1도르 전에 연습실에 와서 민망한 광경으로 방해만 놓고 있는 두 사람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케이로프도 작게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눈에 거슬리는군." "하지만 어쩌겠어요. 좋다고 저러는데... 나도 유벨 님과...." 안느마리의 부러운 눈빛을 받으며 두 사람,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테이블 앞에 앉아 열심히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러운 롤빵에 하얀 크림을 듬뿍 묻혀 쥬느비에브에게 먹여 주었다. "쥬르, 아- 해봐." "아아- 웅, 냠냠. 아, 정말 맛난다니까."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기분 좋은 미소를 띄우며 노란 벌꿀에 절인 버터스틱을 에이드리안에게 내밀었다. "에이드리안, 이거 맛나요. 먹어봐요. 아아-" "응..." 쥬느비에브가 건네준 버터스틱을 받아들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돌렸다.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불쾌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겸연쩍은 기분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뭘 봐? 식사하는 거 처음 봐?" "에이드리안, 소리치지 말아요. 다들 우리 먹는 거 보고 배고파져서 그러나 봐요. 다들, 이리 와서 같이 먹어요!"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쥬느비에브와 잔뜩 심통난 얼굴의 에이드리안을 보며 유벨 일당은 입맛을 다셨다. 미라벨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 왜 하필이면 여기서 식사를 하시는 건지 알고 싶네요." "미라벨 언니. 우리 점심 아직 못 먹어서 언니들 연습하는 거 구경하면서 식사하려고 이렇게 싸온 거예요." 쥬느비에브의 발랄한 대답에 미라벨은 허탈하게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미 라벨을 쏘아보며 쥬느비에브의 입에 묻은 크림을 냅킨으로 닦아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이 닦아주기 쉽게 턱을 올렸다. 두 사람의 심각할 정도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던 유벨과 안느마리는 서 로 속닥거렸다. "에드는 날이 갈수록 쥬느비에브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 같아. 안 그래?" "그런 거 같네요. 그렇지만 그건 쥬느비에브도 마찬가지인걸요? 하지만 저렇게 민망할 정도의 커플이 되다니... 부럽네요." "하지만 본인들은 자각을 못 하고 있으니 무서운 거지. 남에게 이렇게 피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유벨과 안느마리는 한숨 섞인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미라벨 과 케이로프도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이런 분위기에서는 연습할 맛이 안 나는군요... 그렇지만...에이드 리안 님이 저 롤빵을 나에게도 먹여 주신다면...아~ 황홀~" "꿈 깨는 게 좋아.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그나저나 신경 쓰 여서 연습을 할 수가 없으니..." 결국 포옥 한숨을 쉬고 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였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주거니 받거니 즐겁 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 "쥬르, 오늘 맛있었지? 요리사가 신경 쓴다고 하더니 꽤 괜찮았어." "응, 너무너무 맛났어요." 드디어 길고 긴 식사시간을 끝마친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흡족한 표 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탈하고 지친 표정의 유벨 일당에게로 다가왔 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인상을 쓰며 유벨에게 말했다. "왜 그래? 다들 오늘은 연습도 제대로 안 하고." "아아- 글쎄, 눈에 거슬리는 앙증맞은 두 마리 토끼들 때문에 말이지..." 유벨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미라벨에 게 말했다. "미라벨, 오늘 에스멜로네는 네가 맡아. 쥬느비에브가 분위기를 잘 모르겠 다고 하니까." "네에..그러죠..." 역시나 지친 표정의 미라벨이 힘없이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1막 약간만 해볼 테니까 잘 봐. 알았지?" "으응!!" 쥬느비에브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서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드리 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작을 알렸다. 곧 이어 작은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없는데 굉 장한 연주가 머리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이내 그것이 에이드리안의 레플리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스멜로네의 역을 맡은 미라 벨이 먼저 우아한 몸짓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미 방금 전의 힘없는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름다운 밤이면 생각나는 그대여..." 미라벨의 표정을 본 쥬느비에브는 순간 깜짝 놀랐다. 평상시의 다소 거만 하던 미라벨의 표정이 여리고 부드럽게 변하고 있었다. 미라벨이 뿜어내 는 신비한 분위기에 쥬느비에브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멍하게 그 녀를 바라보았다. 미라벨의 풍부한 성량은 몹시 아름다웠다. 그리고 곧 이 어 에이드리안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절제된 몸짓, 그리고 거만한 표정. 에이드리안의 노래에서는 에스멜로네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고 있었다. 노래가 아니라 마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 의 감정이 전해지는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미라벨과 에이 드리안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저기 저렇게 노래하 는 사람이 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는 미라벨만큼 잘할 자신 이 없었다. 미라벨에 비하면 아직은 햇병아리인 자신이었다. 에이드리안 도, 미라벨도 너무나 멋지게 노래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만큼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약간은 우울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순간 에이드리안이 눈을 돌리다 쥬느비에브의 시선과 마주쳤다. "나는 당신이..." 노래의 끝을 흐리며 에이드리안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만. 미라벨." 에이드리안은 도중에 노래를 그만두고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왔다. 쥬느 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노래를 그만 두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쥬르, 집에 가자." "에에? 나 더 볼래요. 나..." 다짜고짜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에이드리안을 놀란 눈으로 보며 쥬느비에 브는 멍하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가 면서 유벨에게 말했다. "유벨, 나 내일은 정말 안 나올 테니까 알아서들 연습해. 미라벨, 오늘 아 주 좋았어. 그럼." 의아한 눈빛으로 보는 유벨 일당을 내버려두고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는 사라졌다. 보고 있던 미라벨이 심퉁하게 말했다.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셨나 보네요." "아아- 의기소침한 얼굴이었어."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안느마리가 싱긋 웃으며 유벨에 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이 잘 달래주시겠죠?" "그렇겠지. 뭐 다 잘 될 거야. 두 사람이라면. 어이! 우리도 연습하자고!" 유벨은 씨익 웃고 뒤돌아서 나머지 사람들을 독려했다. 미라벨과 케이로 프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더니 각자의 연습에 몰입했다. 안느마리는 문 쪽 을 보며 한 손을 들어 주먹을 꾹 쥐고 흔들었다. "쥬느비에브, 파이팅!" 제53음(第53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4) 차가운 공기가 새벽을 가르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잔디밭의 하얀 벤치에 앉아 있는 에스프라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귀에 울리는 작은 소리 에 집중하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흔 들리는 소리, 분수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 에스프라드는 다양한 소리 를 선별하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기분 좋은 공기 속에 그의 검은 머리결 이 흔들렸다. 그 때 문득 인기척을 느낀 에스프라드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같은 검은 머리결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일어나 하얀 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이즈 누님." 검은 머리결의 소박한 모습의 여자가 그의 곁에 다가와 미소지었다. 대략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는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아니었지만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 오랜만이지? 어젯밤에 돌아왔단다." "평의회 일은 잘 되고 있나보죠?" 에스프라드의 말에 엘로이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였다. 평상시 그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따스한 표정으로 에스프라드는 자신의 누이를 꼬옥 껴안았다. "누님, 게속 집에 계셔 주면 좋을 텐데요. 같은 피가 흐르는 내 하나뿐인 누이가 집에 없으니 아주 쓸쓸해요." 엘로이즈는 동생을 포옹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포옹을 푼 엘로이즈 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고 동생에 게 물었다. "이번에 오페라 대공연, 나도 가서 볼 수 있을 것 같아. 의회 기간이라 바 쁘긴 하지만." "그래요? 더 열심히 연습해야 겠네요." 싱긋 웃는 동생의 표정을 보며 엘로이즈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도...만나보려고 해." "...나쁠 거 없죠. 하지만 그 애가 싫어할텐데요. 우리 남매를 아주 혐오하 는 녀석이니까." 에스프라드가 뒤돌아 서며 말했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 지자 에스프라드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무심한 눈초리로 떨어진 나뭇잎을 쳐다보았다.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앤 좋은 애야. 어릴 땐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우리들인데... 어쩌다 이 렇게 되어 버렸는지... 에스프라드, 에이드리안을 괴롭히는 짓은 그만 둬. 우리 모두 그 애에게 죄를 진 거야." "그래요. 에이드리안은 좋은 아이예요. 부족한 것 없이 늘 빛처럼 밝고 아 름다운 아이였죠. 나와는 달리 욕심이...없는 아이였죠." 에스프라드가 미소를 띄며 엘로이즈 쪽으로 뒤돌아 섰다. "후- 그만 두죠, 이런 이야기는.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평소에는 일 때문 에 집에도 안 들어오니까. 아니, 아버지 때문인가? 훗, 우리 오랜만에 실 컷 이야기나 나눠요, 누님." "그래. 에스프라드." 에스프라드는 체념하듯 웃고 있는 엘로이즈의 어깨를 잡고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가슴 한 쪽이 싸늘하게 얼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애는...정말 욕심이 없어. 그래서 싫어. 싫지만...' ******** 쥬느비에브는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 앞에 앉아 칭얼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묵묵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드디어 쥬느비에브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황색 호박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노란 색 바지 자락을 잡고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미라벨 언니네 연습하는 것도 못 보게 하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나 그거 보고 싶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그녀 쪽으로 홱 돌아보았다. "쥬르,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너 에스멜로네 하고 싶어?" "무, 물론 하고 싶어요." 우물쭈물 대답하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이 다가와 머리를 쿡 쥐어 박았다. "그럼 연습을 해야지. 연습을 많이 해야 자신감도 붙고 잘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욱신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도, 연습도 좋지만....에이드리안이 알밤을 준 자리가 너무 아팠다. 쥬느비에브는 뺨을 실룩거리며 에이드리안이 넘겨 준 악보를 쳐다보았다. "악보, 이제 읽을 수 있지?"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에요. 전에 에이드리안이 가르쳐 줬잖아요. 나 기억력은 좋은 편이에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악보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리듬을 느끼려는 듯 손가락으로 악보를 토닥거렸다. 그동안 에이드리안은 연습실을 주욱 둘러보고 있었다. 이번에 에슈비츠 가의 후계자로서 쥬느비에브가 스콜라에서 지급 받은 연습실이었다. 넓이나 규모 면에서 에이드리안이나 유벨의 연습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안락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연습실이었다. 짜임새 있는 공간 배치와 햇볕이 잘 들어오는 긴 창은 꽤 매력적이었다. 연습실도 지정되고 쥬느비에브도 점점 에슈비츠 가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찾아가고 있었다. 에슈비츠 가의 내부에서도 이제는 쥬느비에브를 반기는 눈치였고 쥬느비에브 스스로도 에슈비츠 공작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어릴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쥬느비에브는 꽤 똘똘한 학생이었다. 지금은 회계 장부를 작성하는 일도 썩 잘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결과를 낳기까지 그녀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했고 또한 에이드리안과 함께한 매일매일의 공부가 무척 도움이 되었다.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때, 노래 해 볼 수 있겠어?" "으, 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쥬느비에브는 앞쪽으로 걸어나와 한 손에 악보를 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 아, 아으- 나는야 쥬느비에브---" 대충 목이 풀린 것 같자 쥬느비에브는 흘깃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입을 열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당---신의 발---걸음에 나-의 마--음 은 다급하---게 뛰어---오르고..." 노래 한 소절을 부른 쥬느비에브는 악보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말똥말똥 굴리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또 다시 예의 그 듣기 민망한 노래실력이 나왔던 것이다. 쥬느비에브 자신의 귀에도 어지간히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화 낼 것을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 마음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에이드리안은 엄청 화를 내고 레슨도 관두겠지. 그리고 오페라 공연에도 물론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노래 실력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페라 공연은 꼭 하고 싶었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혀 쥬느비에브는 사실 몹시 괴로웠다. 순간 꽁 하고 이마에 욱신거리는 아픔이 전해져 왔다. 쥬느비에브는 당황하여 눈을 뜨고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이마를 주먹으로 통통 치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프잖아요. 내 머리는 장난감이 아니라고요. 자꾸 알밤 주기예요?" 퉁한 목소리로 쥬느비에브가 말하자 에이드리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길래 왜 혼자 이상한 상상하고 있는 거야? 또 머리 속으로 온갖 상상 다 했지?" "그, 그건..." "하여튼 걱정은 혼자 한다니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말을 머뭇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정말 신통방통했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건지 그녀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이내 체념 조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사실 자신 없어요. 하고는 싶지만 공연은 아주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할 건데 노래 한 곡도 아니고 몇 곡을 부를 자신, 정말 없어요." "쥬르,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본능과도 같아.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든지 간에 자꾸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거지. 그건 어떤 지독한 본능보다도 더 강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 노래를 하고 싶은 거야. 쥬르는 노래 싫어해?" 에이드리안은 자상한 말로 그녀의 기분을 북돋아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노래를 싫어한다니 말도 안 되었다. 그녀는 노래를 정말 좋아했다. 노래를 하고 있으면 새가 된 기분이었다. 새가 지저귀는 기분 말이다.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나는 말이에요. 노래하는 게 조금 무섭긴 하지만 아주 좋아해요. 내가 에이드리안을 좋아하는 것만큼 좋아해요. 그러니까 그 기분만을 가지고 노래할래. 다른 사람들이 듣고 기뻐해 줄 노래를 부를래."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여 뺨에 입 맞춰 주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착한 아이다, 쥬르." "헤헤- 하지만...나..."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다는 듯 머리를 만지며 말을 흐렸다.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마냥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따뜻한 시선을 만끽했다. '하지만 사실 나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노래할 수 있어서, 그래서 용기를 내는 거예요.' ******** 쥬느비에브는 혼자 오페라 하우스로 향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을 힘들게 먼저 집에 보낸 그녀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를 보면 왠지 기운이 날 것 같았다. 심적으로 자극을 주려는 의도였다. 운 좋게 역을 맡게 되었지만 쥬느비에브는 사실 겁이 났다. 아무리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다잡아도 겁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멋지게 공연하고 싶은 욕심과 자신의 어설픈 실력으로 공연을 망칠 것 같은 두려움에 쥬느비에브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에이드리안은 상냥하게 발성 연습을 해주었지만 그럴수록 쥬느비에브는 미안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와 안느마리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결코 그녀에게 관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말없이 독려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저녁의 약간 스산한 바람을 느끼며 입고 있는 재킷을 여몄다. 육중한 오페라 하우스 앞에 선 쥬느비에브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거리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하고 무거운 울림이 퍼지며 문이 열렸다. 쥬느비에브는 소리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따라갔다. 순간 그녀는 휙 하고 앞을 가로 막는 그림자에 깜짝 놀라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야-" 벽에 그대로 부딪힌 팔꿈치를 문지르며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케이로프가 항상 무표정하게 있어도 그 안에서 그의 기분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코 그 무표정한 얼굴이 차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소녀의 표정은 차가웠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에슈비츠 양이로군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죠?" "에, 저기 오페라 하우스 구경하러... 그, 그런데 절 아세요?" "따라오세요." 차갑고 무기질한 소녀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무턱대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쥬느비에브는 다른 생각 할 틈도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직선의 복도를 지나 소녀가 붉은 색의 무척 무거워 보이는 문을 밀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빛을 받으며 눈을 찌푸렸다. 차차 빛에 눈이 적응되자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눈을 떴다. "와아- 무대잖아?" 눈 앞에 펼쳐진 무대를 보고 쥬느비에브는 탄성을 질렀다.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는 무척 커다랗고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제법 많은 학생들이 올라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라데팡스의 작품이에요. 한창 연습 중이죠." "라, 라데팡스요? 그, 그럼 당신은..." 쥬느비에브는 <라데팡스>의 공연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더니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오르탕스 아스타나 모르 메젠입니다. 에스프라드 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으, 음...에스프라드 님을... 음... 에스프라드 님은 아주 친절하세요." 쥬느비에브는 오르탕스를 보고 씨익 웃어 주었다. 오르탕스는 그제서야 살짝 미소를 짓더니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쪽의 의자를 가리키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저기 앉아서 구경해도 좋아요. 당신은 특별한 손님이니까." 오르탕스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을 지켜보았다. 다들 너무나 멋지게 노래를 불렀다.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노래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마치 무대 속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 "쥬느비에브가?" 오페라 하우스의 어두운 방 가운데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네. 오페라 하우스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에스프라드 님." 오르탕스의 말에 에스프라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버려둬. 그보다...네가 보기엔 어때?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서로 아끼는 것 같더군요." 오르탕스는 별로 어렵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에스프라드는 이미 어두워진 스콜라를 무심히 바라보며 냉소를 띄었다. "서로 아낀다라....흠... 그걸로는 부족해. 조금 더...서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돼. 그래야...더 마음이 아플 테니까. 쿡, 쿡쿡. 아하하하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울리며 조용한 밤을 깨뜨리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 조금 더 소중함을 느껴주지 않으면 곤란해. 에이드리안." 제54음(第54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5) 오늘도 어김없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깨우러 그의 침실로 달려왔다. 그러나 여느 때 같으면 벌써 소리를 질러 그를 깨웠을 텐데 오늘 그녀는 쉽사리 그러지를 못했다. 에이드리안의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는 어제 밤늦게까지 그녀의 발성 연습을 지켜 봐주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쥬느비에브는 그가 자신에게 신경 써 주는 모습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팔꿈치를 침대 위에 놓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긴 금발은 오늘도 반짝거리며 침대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는 꼬옥 닫혀 있는 눈꺼풀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남자치고는 흰 피부에 시원한 콧날과 눈썹. 그리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 그녀의 약혼자는 남자치고는 너무 예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흐뭇하게 웃으며 일어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에이드리안은 피곤했던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방해하지 않고 혼자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방을 나섰다. 방 문을 살며시 닫으며 그녀는 속삭였다. "잘 자요. 에이드리안." ******** 쥬느비에브는 아침을 날쌔게 챙겨 먹고 자신의 연습실로 왔다. 자신의 연습실에 들어선 쥬느비에브는 뿌듯한 마음으로 방을 훑어보았다. 노란색 커튼과 밝은 핑크색의 카페트가 방 분위기를 귀엽고 깜찍하게 만들고 있었다. 왠지 소꿉놀이라도 하고 싶은 분위기의 연습실이 그녀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우선 가져 온 간식 바구니를 방 가장자리 쪽의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창가로 갔다. 긴 창문에서 따가운 햇빛이 방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방이 좀 어두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러 불을 밝혔다. 대충 준비가 되자 쥬느비에브는 테이블로 걸어가 간식 바구니에서 시원한 모롤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잽싸게 껍질을 까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우적우적 모롤라를 씹으며 악보 보면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악보를 뒤적거리며 웅얼거렸다. "흐음...이 노래부터 해 볼까?" 쥬느비에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문을 보고 문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쥬느비에브의 연습실은 자물쇠로 잠그게 되어 있었다. 그녀가 레플리카 사용에 능숙치 못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문을 걸어 잠그고 씨익 웃었다. "이제 아무도 못 보겠지?"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악보 보면대 앞으로 걸어갔다. 어제 본 라데팡스의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여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그녀도 그 사람들처럼 열심히 연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한 번 꾸욱 쥐고 결심을 굳혔다. 천천히 악보를 훑어 음을 파악한 쥬느비에브는 목을 가다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매끄럽고 단아한 선율이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 시간은 당신을 내게 이끌어 나의 눈앞에 당신을 데려다 놓았어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나는 마음만 아파 눈물을 흘리고 마네요 그러나 당신이 행복하다면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나의 사랑쯤은 기꺼이 눈물이 되어 사라져 줄 거에요 당신만 행복하다면... ]] 노래를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노래는 언제나 아름답고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허탈한 마음에 쥬느비에브는 테이블 앞의 의자로 힘없이 걸어가 주저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엎드려 중얼거렸다. "파파- 아무도 안 보니까. 그러니까 노래해도 되죠? 그렇죠?"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았다.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 잠이 쏟아졌다. ******** 쥬느비에브는 연두색 스커트를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연습실에서 실수로 자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꽤 흘렀다. 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발랄한 걸음으로 뛰면서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 노래 잘 할 거에요! 그래야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노래할 수 있으니까!" 크게 소리치고 한 번 씨익 웃은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있는 집으로 열심히 달려갔다. 익숙한 현관을 지나쳐 집사와 하녀장에게 인사를 한 쥬느비에브는 곧장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힘차게 외쳤다. "에이드리안! 나..." "어..."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인지 가운 차림에 머리카락도 촉촉하게 젖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들어온 쥬느비에브를 잠시 당황한 눈으로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들어오라는 표시를 했다. "거기 앉아 있어.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으응..." 쥬느비에브는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소파에 가서 살며시 앉았다. 드레스룸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전하지 못한 생각을 한 건지 이내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곧 드레스 룸이 열리고 에이드리안이 나왔다. 그는 편하게 보이는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토닥이며 쥬느비에브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왔다. "아침부터 어딜 갔었던 거야?" "여, 연습실에서 연습했어요." 그와 시선을 맞추기가 어색해진 쥬느비에브는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들리는 허밍에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하얀빛이 어리면서 머리카락이 말라가고 있었다. 금세 뽀송뽀송하게 마른 머리카락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정말 편하겠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면 바짝 말리는데 몇 도르 정도 걸리는데 말이다. 그 때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쏟아 붓는 빗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당신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볼 수 있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따라 해보라는 듯이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입을 벌렸다. "따스한 햇볕에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나는 이상하게 당신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볼 수 있네..." 작은 속삭임 같은 노랫소리가 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노래와 자신의 노래가 일체가 되어 가는 짜릿함에 기분이 붕붕 떠오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같이 노래를 하면 정말 기분 좋았다. 어떤 기분 좋은 일도 이보다 좋지는 못했다. 따뜻한 물에 하는 목욕도, 더운 날 먹는 아이스크림도 이보다 좋지는 않았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소절에 다다랐다. "내 삶에 빛은 오직 당신 뿐..." "오직 당신 뿐..." 노래가 끝났다. 쥬느비에브는 상기된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매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 에이드리안과 함께라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었다.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좋은 목소리가 나온다. 쥬느비에브는 칭찬해 달라는 듯이 방긋 웃으며 눈을 감고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숙여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기분 좋은 느낌에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에이드리안의 손이 부드럽게 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꾸 웃음이 나서 키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 간지러워요." "응..." 웅얼거리듯 키스가 깊어지자 쥬느비에브는 몸에 힘이 빠져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그 때 벌컥 방문이 열렸다. "에이드리안 님!!" 씩씩하기 그지없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입을 맞춘 채로 그대로 눈동자만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이 벌건 얼굴을 하고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뒤에 시선을 돌리며 멋쩍은 듯 유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떼어내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노크! 노크도 몰라? 어서 나가!" "아, 예..." 미라벨이 굳어 버린 몸을 이끌고 방문을 닫고 나가자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가 발간 얼굴로 마치 프라이팬의 버터처럼 추욱 늘어져 있었다. "쥬르, 왜 그래?" "에, 에이드리안, 몸에 힘이 빠져서...아, 안아줘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일으켜 세워 품에 안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눈치 없는 친구들과 어리광쟁이 연인 때문에 삶이 고달픈 그였다. "하여튼, 이쪽 저쪽 똑같다니까." ******** "두 사람의 러브러브가 갈 때까지 간 게 틀림없어요. 이런 허연 대낮에 그런..." 미라벨이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얼빠진 얼굴로 옆에 앉아 있던 케이로프가 입을 열었다. "눈치 없이 들이닥친 우리 잘못이 아닌가.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두 사람은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의 축복으로..." "그만 둬(요), 케이로프(님)!" 유벨과 안느마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그렇고 그런 장면을 목격하는 바람에 유벨과 안느마리는 서로에 대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연인과의 은밀한 키스 장면을 본 안느마리가 부러운 마음이 들어 유벨에게 계속 은근한 눈빛을 보내자 유벨은 짜증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결국 두 사람은 옥신각신 하다가 길고 긴 장기전으로 돌입한 것이다. 그들은 에이드리안의 서재에서 각자의 마음 속에 다른 생각들을 품고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싶을 때 방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신경질적으로 묻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숙이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벨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라데팡스는 벌써 연습을 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제부터 합동 연습을..." 순간 찌릿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미라벨은 말을 얼버무렸다.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응, 에이드리안. 이제 다 같이 연습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나 자신감이 생겼어. 잘 할 수 있어요." "그래?" 쥬느비에브의 씩씩한 말에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쥬느비에브도 기분이 좋은지 그의 셔츠 자락을 매만지며 생긋 웃었다. 두 사람의 이 친근한 행동에 유벨 일당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험한 얼굴을 하시더니 저 미소는 또 뭐람? 에이드리안 님! 정신 차리세요!' '끝난 거야, 끝났어, 에드 네 인생은 끝난 거라고. 넌 쥬느비에브한테 잡힌거야, 녀석아.' '내 제자지만 어떻게 보면 기특하구만.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는 좀 자제해 주시면 좋을 텐데... 사람들 앞에서의 저런 민망한 행동을 위대한 하늘의 뮤즈께서 과연 용서하실 지...' '쥬느비에브, 야, 부럽다, 부러워. 난 언제나 유벨 님과....흑.' 각자의 생각에 빠져 네 사람이 중얼중얼거리자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배 고프다. 뭐 좀 먹을까?" "응!" 두 사람이 식당으로 사라질 때까지 네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두 사람이 연습실에 갈 때까지도 네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어떻게 보면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커플의 생각 없는 행동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불쌍한 피해자인 네 사람이었다. 제55음(第55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6) 에이드리안의 연습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하얀색 원피스 자락을 흔들어 대며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미라벨은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놀란 눈을 깜빡였다. "케이로프 님, 쥬느비에브, 오늘은 노래가 잘 되는 날인가 봐요." "아아-. 그런가 보군. 보기 드문 일이야."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고 있던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유벨이 어깨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 봐, 연습해야지. 연습. 쥬느비에브가 오랜만에 노래다운 노래를 하는거니까 이럴 때 열심히 해야 한다고."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동감이라는 뜻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본 에이드리안은 손뼉을 한 번 치고는 손을 흔들었다. "미라벨, 다음 너부터 시작해. 레플리카 조절하고. 케이로프, 준비해. 안느마리, 쥬느비에브 자기 차례 챙겨." 에이드리안의 지시에 따라 각자 자신의 맡은 장면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라벨이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연인을 빼앗아 가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노래였다. 미라벨은 그녀답지 않은 청승맞은 얼굴을 하고 가련한 연기를 해냈다. 그러나 그녀 안에 담겨 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가 은연 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 것이 미라벨의 노래였다. 언제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노래다. 다음은 안느마리의 차례였다. 안느마리는 그녀 특유의 기괴한 레플리카를 잠재우고 다소곳이 노래하고 있었다. 그녀의 역은 쥬느비에브가 맡은 에스멜로네의 친구 역이었다. 안느마리는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에게 구차하게 매달리지 말고 두 사람을 축복해 주자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쥬느비에브를 생각하듯 부드럽고 따스한 노래였다. 미라벨이 맡은 아마빌레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안느마리의 목소리는 사실 약간 중성적이라 묘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안느마리가 조용히 노래를 끝마치자 쥬느비에브가 앞으로 나섰다. 쥬느비에브는 오늘 기분이 좋은 건지 아주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다. "난 내 마음을 막을 수 없답니다. 흐르는 강물이 내 마음을 쓸어가듯..." 쥬느비에브의 맑은 노랫소리에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무랄데 없는 노래였다. 자신의 마음을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 아마빌레에게 정말이지 미안하다는 마음을 나타내는 노래였다. 쥬느비에브가 노래를 마치자 케이로프의 노래가 이어졌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 두 사람을 훼방놓는 역할이었다. 케이로프가 부르는 노래는 아무리 주인공들의 사랑이 깊어도 언젠가는 그 마음이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다. 케이로프는 음흉한 목소리를 그 특유의 저음으로 풀어냈다.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미소짓다 문득 유벨을 바라보았다. 부족장 역할을 맡는 바람에 가장 비중이 작은 역이었다. 그러나 부족장 특유의 중후한 노래는 아무나 맡을 수 없는 난이도의 노래이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었던 까닭이었다. 케이로프가 웅장하게 노래를 끝냈다. 에이드리안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많은 시련이 닥쳐도 나의 사랑은 막을 수 없지. 나는 그저 당신을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슬플 뿐이오..." 에이드리안은 한껏 기교를 부려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겠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시간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시간을 멈추고..."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노래를 멈추고 확 뒤돌아 섰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연습실 안이 조용해 졌다. 차갑게 침묵의 순간들이 흘렀다. 지켜보고 있던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무슨 일이냐며 한 걸음 나왔다. 유벨과 안느마리도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그대로 연습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쥬느비에브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에,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왜 저러지?" "글쎄요, 속이 안 좋으신가?" 미라벨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유벨은 쥬느비에브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씨익 웃었다. "곧 돌아오겠지. 그나저나 쥬느비에브, 오늘 노래 아주 잘 하는데? 감격이야, 감격." "아아- 동감이야. 평상시에도 이렇게 노래해 주면 좋을 텐데. 선생으로서 안타깝군." 케이로프가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을 받았다! 기분이 너무 좋은 그녀였다.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러고 있지 말고 더 연습하자구. 쥬느비에브, 노래 정말 잘 했어." 쥬느비에브는 칭찬에 힘이 솟은 건지 주먹을 꾹 쥐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연습이 시작되었다. ******** 에이드리안은 살짝 붉어진 뺨을 두드리며 숨을 고랐다. 어느 새 자신의 방에 들어선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던졌다. "안 되겠어. 프란은 무리야. 도저히 무리야. 쥬느비에브랑 같이 노래 못 하겠어." 에이드리안은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얼굴만 보일 뿐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노래도 부를 수가 없었다. "정말 단단히 빠진 건지도...바보 같아."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지금의 감정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뜨고 살며시 미소지었다. "행복...한 건지도." ******** "싫어욧!! 나 안 해! 안 할거야!" 예상했던 데로 쥬느비에브는 완강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에이드리안이 케이로프와 배역을 바꾼다고 말하자마자 쥬느비에브는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이며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그냥 프란 해요? 응? 네에?" "쥬르, 난 결심했어. 계속 주인공 역만 맡는 것도 질렸고, 다른 역을 맡아 보고 싶어." 서재의 소파에 앉아 대본 책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하고 에이드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씩씩거리면서 두 손을 주먹 쥐어 허리에 가져갔다. "에이드리안, 케이로프 님 얼굴을 보면 도저히 노래가 안 된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이 프란 안 하면 나도 에스멜로네 안 해!" "그럼 하지 마."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에이드리안은 대본을 넘겼다. 그는 벌써 케이로프가 맡은 '노이스첼르'의 역할을 분석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그만 두지 않을 거란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오페라 공연에 기대를 걸고 있는 그녀였다. 쥬느비에브는 발끈해서 에이드리안의 옆에 앉아 팔을 잡고 흔들어 댔다.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이 아니면 싫어요. 네? 에이드리안이 하자는 대로 다 할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 모롤라 다 줄게요. 방에 2 상자스 있어요. 그 거 다 줄게요. 네에?" 에이드리안이 아무 말하지 않자 쥬느비에브는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내가 숨겨 놨던 모롤라 한 상자 더 줄게요. 사실 에이드리안 몰래 사 놓은 건데... 그 거 줄게요."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드디어 마음을 돌리려 한다고 생각하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정하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나 돈 많아. 아르헨의 모롤라 다 사고도 남을 만큼 많아." "에에...에이드리안. 정말 프란 안 할 거에요? 그 노이스첼르인가 그 못된 사람 할 거에요?" 에이드리안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쥬느비에브는 팩 토라져 에이드리안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 바보! 에이드리안 미워요!" 방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가는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쥬르, 나도 어쩔 수 없어. 너 때문에 도저히 그 역은 불가능해."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쥬느비에브의 거센 울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 다음날. 연습실은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긴장감이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뭔가 사건의 급전개네요. 유벨 님."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를 살피며 유벨에게 곁눈질을 했다. 유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안느마리 군. 어제는 그렇게 살갑게 굴더니. 남녀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니까. 에이드리안은 왜 또 역을 바꾸고 난리야?" 심드렁하게 유벨이 말하자 안느마리는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곧이어 쥬느비에브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뭐에요? 나 건드리지 말아요. 에이드리안 바보!" "누가 건드렸다는 거야? 네가 와서 밀었잖아!" 티격태격 싸움을 그치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고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케이로프를 떠밀었다. 해결사로 등장한 케이로프는 머뭇거리며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를 떼어놓고 연습을 속행하자고 외쳤다. 새롭게 프란의 역을 맡게 된 케이로프는 잠시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입을 열어 프란의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노래 한 소절을 끝내고 쥬느비에브를 보자 쥬느비에브는 샐쭉한 표정으로 자신의 부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시--간이--- 흘러도---- 난-- 당---신을----사--랑--하 겠어-요---" 순간 사람들은 묵묵히 귀를 막고 말았다. 오늘은 노래가 잘 안 불러지는 날인 것 같았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의 노래였다.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며 옆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노래가 끝나자 곧 이어 에이드리안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너 제대로 안 할거야? 지금 장난하는 줄 알아?" "노래가 잘 안 불러지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에요? 다 에이드리안 때문이에욧!!" 쥬느비에브는 팩 고개를 돌리고 연습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에이드리안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화가 난 듯 씩씩거렸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도 연습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언제까지 저런 사랑놀음에 휘말려야 하는 건가요." "글쎄, 알 수 없지. 우린 우리끼리 연습이나 하지." 케이로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악보를 집어 들었다. 한숨밖에 안 나오는 그들이었다. ******** "에이드리안, 정말 바보얏! 바보! 꽁치!" 쥬느비에브는 투덜대며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그 곳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이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어있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오페라 하우스의 문을 단번에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언제나처럼 어두운 복도는 작은 불빛으로 근근히 앞을 구분할 수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늘은 이곳에서 아무도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덕분에 좀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주먹을 꾸욱 쥐고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는 언듯 눈에 띈 문을 거칠게 열고 안으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열자 멀리 무대가 보였다. 수백 개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한 쥬느비에브는 그 중 구석에 있는 한 의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자신의 느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머리의 남자가 무대 앞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방긋 미소지었다. "에스프라드 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런. 생각보다 꽤 빨리 기회가 왔군. 쿡쿡쿡." 검은머리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돌아 서서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한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56음(第56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7) 저녁 시간 무렵, 자신의 방에서 서재의 책을 가지러 나오던 에이드리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녀에게 업혀 들어오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밖이 소란하다 싶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하녀들이 우왕좌왕하며 뜨거운 물을 담은 대야와 수건을 들고 쥬느비에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주치의 하우먼 박사가 정신 없는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야? 다들 왜 저러는 거지? 그런데 쥬르가 왜 저렇게 피를...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 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그저 쥬느비에브의 머리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붉은 피만이 맴돌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하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붙잡아 정신을 차렸다. 그의 집사가 평소의 우직한 표정과는 달리 몹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톨레, 무슨...일이야?" "아가씨가 많이 다치셨습니다. 오페라 하우스 안에서 쓰러져 계셨다고 하는데 다행히 일하는 사람들이 아가씨를 발견해서..." 에이드리안은 뻐끔하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톨레의 팔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다치다니, 다쳐? 쥬르가? 그럼 저 피가..." 에이드리안은 순간 정신이 확 들어 얼굴을 한 번 흔들고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 에이드리안은 방 가득히 서 있는 하녀들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의 침대 옆에는 세 명의 하녀와 하우먼 박사가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짜고짜 하우먼 박사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쥬르가, 쥬르가 어딜 어떻게..."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자 에이드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하우먼 박사를 쳐다보았다. 하우먼 박사는 고개를 흔들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생각보다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저 머리를 좀 다친 것 같은데 작은 수술을 해야겠지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상처로 미루어 보아 그게..." "답답하게 하지말고 어서 말해 봐요!" 에이드리안이 닦달을 하자 하우먼 박사가 고개를 흔들더니 에이드리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레플리카에 의한 상처인 것 같습니다. 그것도 고의적인." "레...플리카? 레플리카라고?" 에이드리안은 순간 뒷걸음질을 하며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에게 레플리카를 써서 부상을 입힐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에이드리안은 눈앞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꾸욱 쥐고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쥬느비에브의 이마에는 임시로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미 피는 닦아놓은 상태라 얼굴은 깨끗했다. 파리한 얼굴로 누워있는 쥬느비에브를 보자 에이드리안은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에이드리안은 하우먼 박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겨우 나오는 목소리를 짜내어 그에게 말했다. "하우먼 선생, 쥬르를...부탁드립니다." "맡겨 주십시오. 상처 부분을 약간만 꿰매면 되니까 어렵지 않은 수술입니다. 걱정 마시고 따뜻한 차나 한 잔 마시고 계세요." 하우먼 선생의 말에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서 방을 나섰다. ********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움켜쥔 채 아래층으로 뛰듯이 내려갔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온 몸에 후끈한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이 있을 뿐이었다. 당장 그에게 달려갈 참이었다. 절대 용서 못해! 절대! 아래층에 당도한 에이드리안은 막 현관에 들어온 유벨을 보았다. 그 사이 쥬느비에브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에게 다가가 그의 셔츠 자락을 잡고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그 녀석 어디 있어? 지금 스콜라에 있지? 그렇지?" "에드, 진정해. 그 녀석이라니 누구보고 말하는 거야?" 유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을 퍼붓는 에이드리안을 살피며 그의 팔을 다잡았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앙다물며 유벨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에스프라드 녀석 말이야! 그 녀석, 지금 사택에 있어? 그래? 아니면... 어디 있냔 말이야!!" 집 안이 울리도록 소리치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당황한 유벨은 그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지금 어쩌자는 거야? 쥬느비에브가 다친 건 알겠는데 에스프라드 형 짓이라는 증거도 없잖아! 진정하고 가서 좀 앉자. 쥬느비에브가 깨어나는 것부터 봐야 할 것 아냐." 유벨의 호통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쥬르가...깨어나야...아..." 에이드리안은 눈동자를 돌리며 유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유벨, 나, 방에 좀 데려가 줘." 힘없이 중얼거리는 에이드리안을 안으며 유벨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쥬느비에브를 다치게 한 사람이 에스프라드라면 에이드리안이 나서기 전에 그가 에스프라드를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3년 전의 사건으로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 에이드리안이 멍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유벨이었다. ******** 시간은 느리고도 지겹게 흘러갔다. 에이드리안은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유벨이 마시라고 권해준 차는 한 모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미지근하게 식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바짝 타들어가는 가슴을 억누르고 불안한 눈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의 바늘이 너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등에 뾰족한 바늘을 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를 혼자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화가 났으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에이드리안은 그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전의 모든 상황이 되살아나며 왜 자신이 좀 더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는 너무 괴로웠다. 보고 있던 유벨이 안쓰러운 듯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쉬운 수술이라며? 수술만 잘 되면 당장 생활하는데도 아무 불편 없대. 그냥 이마가 약간 째진 거라니까..." "유벨, 나...만약에, 만약에 에스프라드가 그런 거라면, 이번엔 가만 안 둬. 절대."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말했다. 그의 빛바랜 파란 눈동자를 보며 유벨은 한숨과 함께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루이즈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아가씨의 수술이 끝났답니다!" 루이즈의 말에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한달음에 달려간 쥬느비에브의 방은 긴장 때문인지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방안은 어둡게 촛불만이 밝혀져 있었고 하녀 한 명이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우먼 박사가 쥬느비에브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의 곁에 가까이 가 쥬느비에브의 상태를 눈짓으로 물었다. "허허. 쉬운 수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처만 잘 아물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될 겁니다. 피를 좀 많이 흘렸지만 영양가 있는 식사와 제가 조제한 약을 꾸준히 드시면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하우먼 박사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안도의 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살폈다. 듣고 있던 유벨도 다행이라고 말하며 하우먼 박사에게 나가자고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방에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만 남게 되었다. 에이드리안은 붕대를 칭칭 동여 맨 쥬느비에브의 이마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정말 다행이야...정말 다행... 많이 다쳤으면 어쩌나 했는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고 쥬느비에브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 뒤돌아 섰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속삭이며 방을 나섰다.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거야. 결코." ********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상하게 머리가 무거웠다. 침대에 몸이 쩍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눈을 한 번 뱅글 돌려보았다. 익숙한 냄새와 풍경.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 챈 쥬느비에브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목이 깔깔했다. 입술도 바짝 마른 듯 했다. 고개를 돌린 쥬느비에브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그제야 귀를 울리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쥬느비에브, 좀 괜찮아?" 유벨이었다. 유벨 오빠가 왜 여기 있는 거람?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어디 가고 왜 유벨 오빠가 있는 거지? 아참, 우리 싸웠었지. 쥬느비에브는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은 어디에?" "약 가지러 갔어. 너 지금 머리 다친 상태니까 너무 말하려고 애쓰지 마. 머리 울릴 거야."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다쳐? 내가, 머리를 다쳤다고? 쥬느비에브는 손을 올려 이마를 만져 보았다. 두꺼운 붕대가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그 때 다소 긴장한 듯한 유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쥬느비에브, 그 상처...누가 그런 거야?" "잘 기억이 안 나는데...음...오페라 하우스에 갔는데... 음... 맞아. 에스프라드 님을 만났거든요." 쨍그랑! 쥬느비에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 쪽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벨은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에이드리안이 넋 나간 표정으로 문 가에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입술을 앙다물더니 모래기둥이 부서지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몸을 덜덜 떨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유벨이 일어서 그에게 다가오려 하는 순간 에이드리안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흡사 죽은 사람의 눈동자 같은 에이드리안의 눈동자를 본 유벨은 속으로 에스프라드를 욕하며 그에게 뛰어갔다. "에드! 우선 좀..." "치워!"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유벨은 뒤쫓아가려다 침대 위에서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생각하고 다시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의 하얗게 질린 표정을 본 쥬느비에브는 바짝 마른 입을 벌렸다. "에이드리안이 왜 저러는 거죠? 아직 나한테 화났나?" 유벨은 납빛 같은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그 상처 에스프라드 형이 한 거 맞아?"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에스프라드 님을 만나고 나서 기억이 없어요. 그렇지만 에스프라드 님이 그랬을 리는 없어요. 아주 친절한 분이었는데..." 쥬느비에브의 말에 유벨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유벨은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고 굳은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 쥬느비에브. 에스프라드 형한테 다가가면 안 돼. 그 사람은 겉은 항상 웃고 있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유벨 오빠..." 쥬느비에브는 알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유벨은 계속 말을 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그 사람한테 아주 소중한 것을 빼긴 적이 있어. 그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다고. 네가 그 사람한테 다가가면 에이드리안은 견디지 못할 거야." 유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소중한 것? 에이드리안의 소중한 것이라고?' 갑자기 가슴 한 쪽이 아련하게 아파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애써 밝게 만든 유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쉬어. 쥬느비에브. 눈떴을 때는 에드를 볼 수 있을 거야." 곧 이어 유벨의 발소리가 방 바깥쪽으로 멀어졌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뜨고 속삭였다. "미레이유." ******** 한달음에 스콜라 본관으로 온 에이드리안은 라데팡스 학생회실의 문을 거세게 열어 젖혔다. 이곳은 일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장소였다. 그로서는 결코 발걸음하고 싶지 않은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학생회를 방문하기 적당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정장을 차려 입을 정신이 없었다. 지금은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가슴 한 쪽이 싸늘하게 굳어오고 있었다. 설마 했었는데... 설마 했었는데! 에이드리안은 눈을 낮게 깔고 숨을 죽였다. 그는 싸늘하게 눈동자를 얼린 채 학생회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올슈틴이 그를 맞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이드..." "비켜!" 냉랭한 에이드리안의 말과 함께 올슈틴이 나가떨어졌다. 그와 책상이 부딪히며 우당탕하고 거친 소리가 학생회실을 울렸다. 한순간 뿜어져 나온 강력한 레플리카에 쓰러진 올슈틴은 괴로운 표정으로 피가 샘솟고 있는 옆구리를 잡고 에스프라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오르탕스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올슈틴에게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창가에 기대있던 에스프라드가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릿결이 부드럽게 날렸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에이드리안? 여기까지 와서 난동이라니 징계처분 감이야." 에스프라드와 에이드리안의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에스프라드는 시선을 에이드리안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여 올슈틴과 오르탕스에게 나가라고 지시했다. 에스프라드의 눈짓에 올슈틴과 오르탕스가 곧 자리를 비켰다.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음습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에스프라드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순간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에스프라드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한테 왜 이래. 왜 이러는 거냐구!!" "글쎄. 내가 왜 너한테 이러는 걸까. 훗. 이유야 충분히 많지. 넌 나와 같은 평의회 의장 후보이고, 내 아버님에게 수치를 준 데다가...그리고 미레이유 누님도..." 순간 에이드리안의 동공이 넓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멈춰 서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고개를 내저으며 결국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만해...그만해...그만해..." 에스프라드는 미소를 흘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운 거지?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넌 한 번 잃었고, 또 한 번 잃게 될 거야. 쿡, 날 원망해 봤자 소용없지. 결국 지키지 못한 네 잘못이야." 에이드리안은 흐려진 눈동자를 들어 에스프라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에스프라드 형, 나한테 이러지 마. 이러지 마. 내가...내가 뭐든 할게. 쥬르는 제발, 제발 내 곁에 머물게 해 줘. 제발 부탁이야.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어느새 에이드리안은 애걸하듯 에스프라드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프라드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변해갔다. 그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을 내려다보고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우습군. 네가 나한테 빌다니. 그렇게 소중한 거야? 응? 미레이유보다도?"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넋이 빠진 얼굴로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에스프라드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꽤 효과가 좋군. 그녀가 다쳤을 때의 네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소중한 것에 금이 가면 네가 어떤 표정을 할까하고. 훗, 이만하면 꽤 흡족한 수준이야." 에스프라드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표정하게 바닥을 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에이드리안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쥬르, 건드리지 마. 당신이 아무리 움직여도 다음 번에는 소용없을 거야. 그 때처럼 만들지는 않아. 다음엔 당신을 살려두지 않을 지도 몰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이미 충분해. 그러니 더 이상 날 자극하지 마." "글쎄... 네 손에 죽는 것도 꽤 매력적인 걸. 후훗." "에스프라드!!" 에이드리안의 고함에 에스프라드는 웃음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평의회 의장 같은 거 관심 없어. 난 그저..." 에스프라드는 고개를 돌려 작게 한숨을 쉬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랑스러운 쥬느비에브 양을 잘 간수하렴. 다음 번에는 그 정도로 끝내지 않아." 에스프라드는 말을 내뱉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는 다급히 그에게 달려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형, 부탁이야. 우리 이러지 말자. 제발 부탁이야. 쥬르, 건드리지 마. 나, 더 이상 형 미워하기 싫어. 부탁이야."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에스프라드는 피식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거세게 그를 밀어냈다. "웃기는군." 방문을 열고 나가는 에스프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곧 이어 방문이 닫히고 에스프라드의 모습은 사라졌다.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방안과는 달리 창 밖에는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서히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 둬. 그만 둬... 쥬르만은 내 곁에 있게 해줘." 제57음(第57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8) 침대에 누워 있는 쥬느비에브는 행복한 듯 빙긋 미소지었다. 이마의 붕대를 이리저리 만져주는 에이드리안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그는 붕대를 매만져 주고 루이즈가 건네주고 간 죽을 스푼으로 휘젓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팔을 들어 분홍색 잠옷 소매를 이리저리 흔들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 아프니까 너무 좋아요. 에이드리안이 계속 옆에 있어주고."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야." 에이드리안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어제부터 기분이 나쁜 것 같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보며 금새 침울해 졌다. "에이드리안, 나 이 상처 오페라 하우스에서 뒹굴어서 생긴 게 틀림없으니까..." "다시는 에스프라드 형과 만나지 마." 딱 잘라 말하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의기소침해져 이불을 끌어올렸다. 에이드리안이 진짜 화나면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 에이드리안은 진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죽을 한 스푼 뜨더니 이불을 코까지 끌어당겨 눈만 말똥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은 죽이 담긴 둥근 그릇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쥬느비에브를 일으켜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등뒤로 베개를 받쳐주고 다시 옆의 의자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죽 그릇을 다시 들고 말했다. "입 벌려." "아앙-" 에이드리안이 떠준 고소한 죽을 한 스푼 받아먹은 쥬느비에브는 심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죽을 젓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상황은 그녀에게 너무 불리했다. 에이드리안은 그 날 혼자 삐쳐서 도망가 버린 자신을 탓하는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가 오페라의 어떤 역을 맡던지 간에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에이드리안과 함께 노래를 하고 싶어서 억지를 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삐치고 혼자 도망가서 혼자 다친 꼴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며 고개를 숙였다. 기운이 안났다. "안 먹을 거야?" "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내민 스푼을 멍하게 보았다. 맞아, 죽을 먹고 있었지. 쥬느비에브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 우리 전에 싸웠을 때 말이죠. 그 때 에이드리안이 먼저 사과해 줬잖아요." "......" "나 그 때 너무 고마웠거든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사과할래. 어제 나 화낸 거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다친 것도 미안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쥬느비에브는 몸을 일으켜 에이드리안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쥬느비에브의 입술이 뺨에서 떨어지자 그제야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쥬르,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저 내가...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나, 에스프라드 님이랑 이제 다시는 말도 안 할게요. 약속할게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안심시키려는 듯 생긋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띄며 우울한 표정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이 거 마저 먹자. 좀 있다 미라벨하고 안느마리가 올 거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이드리안이 먹여주는 죽을 맛있게 받아 먹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꾸만 어두워지는 마음을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속 머리 속에 맴도는 기분 나쁜 단어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왜 그렇게 에스프라드를 싫어하는지. 그리고 에스프라드는 왜 자신을 상처 입힌 건지. 에이드리안의 소중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알고 싶었다. ******** 오후에 미라벨과 안느마리가 문병 차 찾아왔다. 오전에 케이로프와 유벨이 다녀간 뒤로 혼자서 심심했던 쥬느비에브는 두 사람의 방문에 활짝 미소를 띄웠다. 머리말고 다른 곳은 멀쩡한 대도 에이드리안은 방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음식도 아직까지는 죽만 먹도록 지시를 내린 상태라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모롤라는 커녕, 케이크 한 조각도 입에 대지 못했다. 에이드리안은 정말 까다로운 보호자였다.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천장을 보며 모롤라를 세다가 방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껑충 뛰어 올랐다. 곧 이어 갈색 머리를 두 갈래로 쫑쫑 땋아 내린 안느마리와 다홍색 머리를 한 묶음으로 높이 올려 묶은 미라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쥬느비에브!"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눈물을 쏟아내는 안느마리의 등을 토닥였다. 어째 다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안느마리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 미라벨이 안느마리를 떼어냈다. "아픈 사람이에요. 절대 안정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미라벨 님. 쥬느비에브는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군데, 내 친구가 이렇게 다쳤는데...흑...도대체 내 친구를 이렇게 만든 블랙 놈이 누군지..." 안느마리의 '블랙'이라는 말에 쥬느비에브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 안느마리. 나 그냥 걷다가 혼자 굴러서 이런 거야. 브, 블랙은 없어." "그래? 그럼 거기가 어디야? 분명 부실 시공으로 네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렸음에 틀림없어! 시공한 사람을 당장 잡아서..." "관둬요. 안느마리. 오페라 하우스에 돌부리가 어디 있단 말이에요? 혼자 넘어진 쥬느비에브 잘못이에요." 한심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미라벨은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이 외출 금지령을 내리셨다죠?" 쥬느비에브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페라 공연 기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걱정이군요." "머리 상처 금방 낫는데요. 나 오페라 할 거에요. 에이드리안하고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미라벨은 쥬느비에브를 보며 빙긋 웃었다. "좋아요. 빨리 나아서 연습에 오도록 해요. 게으름 피우면 이 미라벨 님이 용서치 않겠어요." 쥬느비에브는 미라벨의 격려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은 언제나 친언니 처럼 그녀를 격려해주곤 했다. 겉으로는 아주 거만한 레이디 같지만 미라벨은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때 안느마리가 치마 밑으로 손을 쑥 넣더니 책을 하나 꺼냈다. 쥬느비에브는 치마 어디에 저런 큰 책이 붙어 있었을까 하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안느마리는 또다시 부스럭거리더니 이번에는 입고 있던 베이지 색 재킷에서 또 다른 책을 한 권 꺼냈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심심할 테니까 이거 읽어 봐. <그대를 위한 사랑의 볼레로> 1, 2권이야. 2권은 미라벨 님의 책이니까 조심해서 봐야 해." 옆에서 보고 있던 미라벨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꽤 감동적인 소설이에요. 특히 여자 주인공이 납치 당한 장면과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구해주는 장면..."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느마리가 건네준 연애 소설 두 권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에이드리안이 보면 또 잔소리를 할 테니 미리 숨겨놓을 생각이었다. 쥬느비에브가 싱긋 웃으며 별일 있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안느마리와 미라벨이 쿡쿡 하고 웃음을 삼켰다. 오래도록 대화가 계속되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들의 연습도 마다하고 문병을 와준 미라벨과 안느마리가 참으로 고마웠다. ******** 미라벨과 안느마리를 쥬느비에브의 방에 들여보낸 후, 에이드리안은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역시 차를 마시고 있던 유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 올슈틴 많이 다치게 했다며?" "많이 다쳤대?" 에이드리안은 창 밖의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넋 나간 듯 말했다. 유벨은 답답하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 쪽에서 문제삼지는 않을 모양이지만, 너 정신 좀 차려.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가서 어쩔 셈이었어?" "죽여 놓을 생각이었지. 그가 쥬르를 상처 입혔듯 나도 그를 부셔놓을 생각이었어. 그가 쥬르를 저렇게 만들어 놓아도 내가 아무 소리 못하듯 그 쪽도 마찬가지니까. 우린 둘 다 핸디캡을 가지고 있거든." 에이드리안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대답했다. 유벨은 그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모습에 가슴 한 쪽이 시려왔다. 그는 고개를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그 때 먼저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알아. 네가 무슨 말하려는지. 난 에스프라드를 건드릴 수 없어. 더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건 나니까." 유벨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에이드리안이 보고 있는 나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에드, 난 네가 상처받는 일, 이젠 절대 사양이야. 만약...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땐 내가 그 자식 죽여놓는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유벨이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네가 있어서 마음이 놓여. 아버지가 널 보면 아주 흐뭇해하실 거야." "흥, 뭐 히스페르 숙부님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니까..." 에이드리안의 칭찬에 유벨은 쑥스러운지 시선을 돌리며 찻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찻잔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이 도는 노란 액체에 자신의 얼굴이 일렁였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몹시 피곤했다. ******** 저녁 무렵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욕실의 뜨거운 김 때문에 거울이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따뜻한 물이 머리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상처에 물 들어가면 안 된단 말이야. 이거 잡아." "으응."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이마에 받쳐 준 수건을 손으로 받치고 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지금 자신의 머리를 감겨 주는 중이었다. 상처가 이마 쪽에 있어서 물만 들어가지 않으면 머리를 감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계속 머리가 가렵다고 긁어대는 통에 결국 그가 머리를 감겨주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계속 졸라댔던 탓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거울에서 언 듯 보이는 자신의 머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거품이 뽁작뽁작 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머리를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 머리를 가볍게 문질러 주는 그 손길이 너무 기분이 좋아 쥬느비에브의 입이 미소로 저절로 올라갔다. 시원하고 청결한 느낌과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에이드리안, 너무 기분 좋아요. 머리 감겨 주니까." 쥬느비에브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뺨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면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거품에 폭 파묻힌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을 한 곳에 모으면서 말했다. "물 부을 테니까 얼굴 이 쪽으로 돌려... 응, 됐어."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뒤로 젖히자 곧 이어 부어진 따뜻한 물이 거품을 몰고 갔다. 쥬느비에브는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목욕도 하고 싶은데..." "어쩌라고." "......" 순간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동시에 달아올랐다. 쥬느비에브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토닥이면서 눈을 말똥말똥거리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서 닦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느껴지는 쥬느비에브의 시선이 불편한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루이즈 불러 줄 테니까 목욕 해." "에이드리안이랑 하니까 좋은데." "너어!" 아쉽다는 듯 손가락을 물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호통소리에 숨을 죽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단단히 감싸주고 에이드리안은 욕실에서 나갔다. 곧 이어 루이즈가 들어오자 쥬느비에브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기분 좋게 첨벙거리며 수영, 아니 목욕을 했다. 목욕을 한 뒤라 김이 모락모락나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기다리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웃음을 삼켰다. 이마에는 여전히 하얀 붕대를 둥둥 감고 있었는데 뺨을 실룩실룩 문지르는 쥬느비에브가 어린 아이 같이 보여 너무 우스웠다. 쥬느비에브는 몸이 깨끗해져 기분이 좋았는지 에이드리안에게 달려와 폭 안겼다. 덕분에 머리에 매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고 젖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에이드리안! 다음에도 머리 감겨줘요. 너무 너무 너무 기분 좋았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이 머리 만져주니까 너무 좋아요."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힘없어 보이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쥬느비에브는 이내 그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에이드리안의 그런 얼굴은 보기 싫었다. 더 깊이 안겨오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보드라운 몸을 꼬옥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언제나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 사흘 뒤. 쥬느비에브는 오페라 연습실을 찾았다. 에이드리안을 비롯해 유벨, 미라벨,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부지런히 레플리카를 써준 덕에 벌써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상처가 남으면 안 된다고 법석을 떨고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빨간색 반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연습실에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여러분, 안녕!"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등에 매고 있던 모롤라 모양의 가방-마담 일레시아가 쥬느비에브의 요청으로 디자인한 가방이다-을 테이블 위에 벗어놓고 발랄하게 뜀박질을 하며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미라벨이 웃으면서 먼저 그녀를 맞았다. "어서 와요, 쥬느비에브. 오늘부터 온다더니 정말이었군요." "네! 오늘부터 열심히 연습할 거예요." 쥬느비에브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에이드리안, 우리 열심히 해 봐요. 나 에스멜로네 열심히 할 테니까 에이드리안도 노이스첼르 열심히 해요." "으응." 에이드리안이 미소를 띄며 대답하자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미소짓고 연습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여러분! 다들 연습하자고요. 유벨 님, 케이로프 님, 안느마리! 딴짓 하지 말고 어서 연습해요!" 쥬느비에브는 오랜만에 해보는 오페라 연습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의 외출, 오랜만에 부르는 노래, 오랜만에 보는 에이드리안의 웃는 얼굴. 모두 기분 좋았다. ******** 힘겨운 연습이 끝나고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제대로 감정을 살리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노래는 그럭저럭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모롤라 가방을 흔들며 콩콩 뜀박질을 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기분 좋은 것을 느끼고 더불어 미소를 띄웠다. "쥬르, 기분 좋은가 봐?"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뒤돌아 섰다. "응! 에이드리안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나도 기분 좋아요."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은 문득 멈춰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지만 해가 져서 서서히 그림자가 옅어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고개를 내리고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갔다. 쥬느비에브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쥐고 입을 열었다. "쥬르, 있잖아. 만약에 내가...내가 널 지켜주지 못하면...그 때는 어떻게 할거야?"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가 다친 이후로 계속 우울한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에이드리안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빙긋 웃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날 지켜주지 못 하면...마구 울어버릴 거예요. 울고불고 난리칠거니까 꼭 지켜줘요. 알았죠?" 쥬느비에브는 말을 마치고 다시 발랄하게 뜀박질을 하며 앞으로 뛰어갔다. 멀어지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삼켰다. "울고불고 난리 친다고? 후훗, 쥬르다워." 그 때 앞서 가던 쥬느비에브가 멈춰 서서 손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걱정하지 말아요. 에이드리안은 내가 지켜 줄 테니까! 내가 꼭 지켜줄게요!"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은 이제 막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고 따뜻한 밤하늘 아래로 빛이 흩뿌려지는 느낌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하던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 속에 걸리고 있던 것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에 미소를 보냈다. "그래, 내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 제58음(第58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9)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 기간이 시작되었다. 이번의 공연은 라데팡스 학생회 임원의 오페라 공연부터 시작되어 1학년부터 차례대로 13학년까지 공연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에 엘크로이츠 학생회 임원의 공연으로 마무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 해마다 오프닝 공연과 파이널 공연을 번갈아 가며 하는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작년에는 엘크로이츠의 공연이 처음에, 라데팡스의 공연이 마지막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는 엘크로이츠가 파이널 공연을, 라데팡스가 오프닝 공연을 하는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라데팡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로 향하고 있었다. 유벨과 안느마리, 케이로프, 미라벨은 이미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집에서 막 출발한 참이었다. 오늘 쥬느비에브는 그녀의 긴 생머리를 땋아 동그랗게 올린 다음 하얀 끈으로 묶어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든 그녀는 머리를 한 번 매만진 다음 하늘을 쳐다보았다. 5도르가 다되어 가는데도 햇살이 아주 뜨거웠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사준 레이스 양산을 흔들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흙바닥이 뜨겁게 달구어져 신발 아래로 열이 느껴졌다. 햇살이 뜨겁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쥬느비에브는 양산을 흔들며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이리 와요. 얼굴 탄다고요." "괜찮아. 너나 안 타게 잘 써."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처음 보는 오페라가 너무 기대되었다. 아주 즐거울 거야.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한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이마의 상처는 하우먼 박사의 말처럼 금방 아물었다. 이제 약간의 상처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우먼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앞머리를 내려 상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시선에 왜 그러냐고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너무 좋아서요." ******** 엄청난 사람들이 오페라 하우스로 향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거리를 지나면서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피곤한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마차를 타고 오려고 했지만 쥬느비에브가 걷고 싶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걸어오게 된 것이다.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에이드리안이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를 받아주자 옆에서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학생들은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인사를 받고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히야- 에슈비츠 양이 내 인사를 받아 주었어." "에이드리안 님과 에슈비츠 양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잘 생기고 멋진 에이드리안 님과 아름답고 신비한 에슈비츠 양!"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쑥쑥 자란 쥬느비에브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르, 너 인기 많은데?" "에? 에헤헤. 뭐, 뭘요." 쥬느비에브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나 정작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언제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도 알 수 없는 그녀였다. '내가 인기가 많다고? 다들 날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에이드리안 약혼녀라서 그런가? 맞아, 에이드리안은 인기가 많으니까. 흠... 에이드리안의 덕을 본 셈이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쥬느비에브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도출해낸 결론이 꽤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너무 똑똑한 거 같아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의 표정으로 보아 또 혼자만의 상상에 빠진 모양이었다. "쥬르, 양산 접어야지." "어?" 그제야 실내에서 계속 양산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쥬느비에브는 얼른 양산을 접어 옆에 서 있는 하인에게 건넸다. "나올 때 돌려주세요. 부탁드려요." 쥬느비에브는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에게 오늘의 의상에 대해 한마디 듣고 싶은 그녀였다. 그녀의 마음을 안 것인지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더니 말했다. "오늘 의상은 하얀 원피스에 흰 장갑, 흰 구두, 흰 머리 끈. 그리고 까만 꽃 장식이 달려 있는 벨트. 좋아, 합격."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완벽한 하얀 정장. 쥬느비에브가 묶어준 예쁜 금발, 에이드리안도 합격!" 그녀는 씩씩하게 외치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럼, 가시죠, 에이드리안 님-!" ******** 미리 도착한 유벨 일행에게 인사를 건네고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옆방으로 갔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두 사람만이 앉아 관람할 수 있는 특별실이었다. 붉은 색의 푹신해 보이는 천으로 싸인 긴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과일과 쿠키, 차가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슴이 콩닥거려 자꾸 눈이 뱅그르르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자리에 앉히고 그녀의 장갑을 벗겨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에이드리안이 장갑을 벗기는 것을 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여기 이상하게 어두워요. 이렇게 어두워서 무대가 보이려나?" "무대는 밝으니까 걱정하지 마."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장갑을 뒤에 서 있던 하인에게 건네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하인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 쪽으로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쥬르, 그거 알아?" "뭘요?" "여기가 연인들의 사교의 장이라는 거."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움찔해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사, 사교의 장이요? 그, 그게 뭐 하는 건데요? 사탕과 교회?! 교회에 가면 사탕 준다는 말이에요?" "아냐, 아냐. 음...그게 뭐냐면, 여긴 아주 어둡잖아? 그래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짓도, 저런 짓도 하고 뭐...불건전한 짓도 많이 한다 그거야."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에이드리안은 실컷 호기심을 부추겨 놓고 짐짓 모른 체 바구니 안에 담겨 있는 과일을 꺼내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부, 불건전한 짓이 어떤 짓인데요?" "그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귀에 대고 한참 무언가를 속삭였다. 얼마 후 쥬느비에브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인 채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부, 불건전한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오페라 하우스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괴물에게 잡혀가는 거지." 순간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침을 꿀꺽 삼킨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잡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검은 색 손가방을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단호한 목소리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오페라만 열심히 볼 거예요. 부, 불건전한 짓은 안 할거예요." 에이드리안의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침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그녀였다. '오페라 보면서 에이드리안이랑 모롤라 먹으려고 했는데... 오페라에 집중하지 않고 모롤라 먹으면 불건전한 거로구나....맞아, 오페라 안 보고 딴짓하면 안 되는 거지. 오페라 괴물한테 안 잡혀가려면 가방 안에 든 모롤라는 집에 가서 먹어야 겠네. 아휴-'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쥬느비에브는 모롤라만 쏙 빼놓고 준비되어 있는 과일 바구니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삼켰다. 오페라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어두웠던 특별실의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어둠이 드리웠다. 그리고 무대 쪽에 밝은 조명이 들어왔다. 여러 명의 남녀가 무대 위로 나왔다. 전에 봤던 보라색 머리의 오르탕스가 프리마 돈나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짙은 밤색 머리의 남자가 남자 주인공인 것 같았다. 발음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세세한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멋진 무대와 아름다운 의상, 그리고 무대를 가득 채우는 목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멍하니 오페라를 바라보았다. 밝은 조명 속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옆에 있던 에이드리안이 동그란 원통형의 금색 물건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눈에 가져가라고 손짓했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말대로 그 물건을 눈에 가져갔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신기해 생글생글 웃으며 무대에 집중했다. 계속되는 음악과 노래에 쥬느비에브는 너무 즐거웠다. 한가지 아쉬운 건 에스프라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에게 다시는 말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 아주 멋진 음색일 것 같았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을 느껴 옆으로 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물었다. "즐거워?" "네. 아주 재밌어요." 쥬느비에브는 미소로 다소곳이 대답했다. 어두워서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쥬르, 그런데 아까 그 불건전한 짓 말이야." "으음...나 모롤라 안 먹었는데요." 쥬느비에브는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괴물한테 잡혀가기 싫어서 가방에 손도 대지 않은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쥬르. 진짜 불건전한 건...이런 거야."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무대로 통하는 창문에 휘장이 쳐지고 에이드리안이 입술을 겹쳐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거리며 키스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얼굴이 붉게 물들고 있음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눈만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이 살며시 입술을 들어 속삭였다. "너, 또 눈뜨고 있지?" "에에...음....눈감을 게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에이드리안의 팔을 꼬옥 붙들었다. 따뜻한 에이드리안의 손길이 아주 기분 좋았다. '진짜 불건전한 짓이라는 거, 꽤 좋은 거구나. 하지만 오페라 괴물이 오면...음...에이드리안이 물리쳐 주겠지. 맞아, 그럴 거야.' 에이드리안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을 맛보며 쥬느비에브는 오페라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그의 입술에만 매달렸다. 오페라 같은거! 나중에 보지 뭐. ******** 어느 새 제법 시간이 흘렀다. 쥬느비에브는 오페라가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갑자기 특별실 안이 밝아졌다. 쥬느비에브는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 속이 멍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대고 있었다. "벌써 끝났나?"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그저 멍하니 특별실의 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다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쥬르! 나가야지. 머리 바로 하고." 에이드리안이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다시 묶어 주자 쥬느비에브는 그 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느끼며 재빨리 옷을 끌어올리고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풀어진 머리를 다시 묶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뺨을 살짝 토닥이고 일어서서 그의 손을 내린 다음 천천히 그의 금발을 묶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단추를 잠가 주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미소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식을 줄 모르는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를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규칙하게 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자꾸만 눈동자가 뱅글뱅글 돌아갔다. 에이드리안이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이끌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눈이 부셔 잠시 눈을 찡그리다 곧 적응이 되어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쥬느비에브는 뒤돌아 섰다. "정말, 오늘 라데팡스의 공연은 괜찮았어요, 물론 우리 엘크로이츠에게는 못 미치지만. 어머?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 미라벨 일행이었다. 에이드리안이 헛기침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약간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미라벨 언니, 오페라 재밌었죠?" 미라벨 대신 안느마리가 신나게 대답했다. "맞아, 쥬느비에브, 오늘 오페라 아주 재밌었어. 난 유벨 님이랑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재밌게 봤는데....특히 후반에 프리마 돈나가 끌려가는 장면 말이야..."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까만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리며 머뭇거리며 말했다. "마, 맞아.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와서 구해줬지." "......"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뭐 잘못되었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뭔가 대답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페라를 제대로 봤어야 대답을 할텐데! 심장이 아까보다 더 쿵쾅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다시 침을 삼켰다. 유벨과 케이로프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의아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미라벨이 눈썹을 실룩이더니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거기서 프리마 돈나는 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죽는다고요." 미라벨의 말에 이어 안느마리가 꼼꼼히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쥬느비에브, 아까랑 머리 모양 틀리잖아? 옷은 왜 그렇게 구겨졌어? 에이드리안 님도 왠지 이상한데." 의아해하는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순간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올라 에이드리안에게 외쳤다. "빠, 빨리 집에 가요!" "으, 응."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도 유벨 일행의 시선을 피하며 그녀를 뒤따라갔다. 유벨이 멍하니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저 두 사람. 오페라는 안 보고 뭐한 거야?" "글쎄요,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겠죠." 미라벨은 대답을 하며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뒤에 남은 네 사람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부럽고도 낯뜨거운 기분에 방금 전 오페라로 인한 감동은 다 날아가 버린 뒤였다. 네 사람은 부질없이 에이드리안을 원망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디뎠다. ******** 집에 돌아오자 말자 자신의 방으로 다급히 들어온 에이드리안은 문을 닫고 그대로 거친 숨을 들이셨다. 머리 속에 뭔가가 펑 하고 터진 것처럼 멍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열이 나는 것 같은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그는 눈을 돌렸다. 온 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미쳤어. 내가 미쳤어! 쥬르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에이드리안은 주먹으로 허벅지를 치며 중얼거렸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방 한가운데로 나아간 에이드리안은 초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집에 오기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너무 두근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에이드리안은 결국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 쥬르 때문이야. 쥬르가 그렇게 무방비한 모습으로 있으니까...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손으로 뺨을 감쌌다. 오페라를 바라보고 있는 쥬느비에브는 몹시 사랑스러웠다. 까만 눈동자를 무대에 고정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 슬슬 장난 끼가 돌았었다. 처음에는 그저 키스만 하려고 했었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전혀 생각지 못한,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그도 사실 멍한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시 일어나 방안을 배회했다. "그래도 거기서 오페라가 끝나서 다행이었어. 이제부턴 조심해야 겠어. 조심해야 해. 쥬르는 어리니까. 조심..조심...조심..." 에이드리안은 계속 중얼거리며 이마를 두 손으로 받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퍽! "아야. 뭐, 뭐야?"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그대로 넘어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밝은 색의 벽지로 둘러싸인 벽이 보였다. 너무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그대로 벽과 정면충돌을 한 그였다. 갑자기 멍하던 머리가 맑아지며 한숨이 푹푹 나왔다. 너무나 한심했다. "정말. 점점 쥬르를 닮아 가는 것 같잖아. 아윽!!" 괜히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분풀이를 하던 에이드리안은 다시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일이 생각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마음 가득 채워진 고민으로 그는 새벽까지도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쥬느비에브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침대 속에 쏙 몸을 밀어 넣고 토마토만큼 붉어진 얼굴을 이불로 가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쥬느비에브는 훅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김이 이불 밑에서 맴돌았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호흡 곤란으로 이대로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중얼거렸다. "너, 너무 야했잖아. 에, 에이드리안은 정말 불건전한 일을...음...부끄러워라, 내일 어떻게 얼굴 마주한담? 아이, 부끄러워라. 하, 하지만 기분은... 음..." 다시 확 뻗쳐오는 열기에 쥬느비에브는 입을 벌리고 훅훅 숨을 쉬었다. 정말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빠, 빨리 결혼하자고 떼 써봐야겠다. 그렇게 야, 야한 일을 해버렸는걸. 아휴-" 또 다시 열기에 휩싸인 몸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찬물로 씻어야 겠네. 이러다가 열 올라서 쓰러지겠어. 아이, 정말." 투덜거리며 쥬느비에브는 욕탕으로 들어갔다. 입고 있던 원피스의 단추를 풀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머리 속에 떠오른 민망한 생각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충격에 휩싸인 쥬느비에브는 숨이 막혀 쌕쌕거리며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자긴 그른 듯 싶었다. 숨 막혀!! 열이 올라서 숨을 쉴 수가 없잖아!! 이게 다 에이드리안 때문이야! 에이드리안, 어떻게 좀 해줘요!! 쥬느비에브는 꿈틀거리며 밤새 마음 속으로 에이드리안을 외쳤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에게는 잠 못 드는 밤이었다. 더운 여름 속에서 더운 열기로 후끈거리는 뺨을 두드리며 두 사람의 더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제59음(第59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10) 라데팡스의 오페라 공연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한동안 서로가 서먹서먹해서 시선을 피하곤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계로 돌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단순해서 오래 고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느 샌가 예전처럼 웃고 화내고 싸우는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가 한동안 결혼하자고 떼를 쓰는 바람에 에이드리안으로서는 약간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거의 수준급에 오른 '쥬느비에브 달래기'로 그녀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약간은 두근거리고 긴장되지만 몹시 기분 좋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아침 공기는 늘 그렇듯 차갑고 기분이 좋았다. 차가운 공기를 뺨으로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다리를 베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나서 쥬느비에브는 쭈욱 이 자세였다. 아직 완전히 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한숨을 쉬더니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다리 저려. 어리광부리지 말고 어서 연습하러 가. 모레 공연이잖아." "에이드리안도 연습 안 하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심술궂은 말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뺨을 토닥이며 달래듯이 말했다. "난 연습 다 했다고. 연습하러 가, 응?" "싫어요. 다들 이, 이상한 눈으로 본단 말이에요. 다 에이드리안 때문이야. 칫, 결혼도 안 해주고." 발갛게 얼굴을 달구며 말하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고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또 결혼 타령이다. 그는 체념 조로 중얼거렸다. "몰라, 나도 몰라, 나중에 연습 부족으로 망신당해도 난 몰라. 마음대로 해." "나도 몰라요. 잘 거야."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 손으로 에이드리안이 도망가지 못하게 셔츠 자락을 꾸욱 잡은 쥬느비에브는 솔솔 잠에 빠졌다. 에이드리안도 어느 새 꾸벅꾸벅 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온 지도 몰랐다. 먼저 잠에서 깬 사람은 쥬느비에브였다. 막 깊은 잠에 빠지던 참이라 쥬느비에브는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쓰며 방문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도련님을 좀 깨워주세요. 중요한 손님이 오셨는데..." "누군 데요?" 쥬느비에브는 비몽사몽간에 자신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도 몰랐다. 루이즈가 방문 앞에서 될 수 있는 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아직 자고 있어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엘로이즈 님이 오셨어요." "에, 엘로이즈? 음냐...엘로이즈....여자?! 여자라구!" 순간 쥬느비에브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신 없이 머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여자라니, 에이드리안한테 여자 손님이 오다니...바, 바람둥이...역시 결혼 안 하겠다는 이유가 있었던 거얏! 쥬느비에브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졸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에이드리안이 눈을 떴다. "쥬르, 왜 그러고 있어? 연습하러 가려고?" 에이드리안도 역시 잠에서 덜 깬 듯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토닥이며 외쳤다. "정신 좀 차려 봐요. 에이드리안한테 여자 손님이 왔단 말이에요." "아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두 손을 잡아 내리고 멍하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눈을 감고 침대 위로 푹 고꾸라졌다. 다시 잠들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에이드리안의 귀에 대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밝--았어---요---" "아이, 정말! 잠 좀 자자구! 왜 그러는 거야?" 쥬느비에브의 소음이라고 할만한 엄청난 노랫소리에 결국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은 입을 악물고 쥬느비에브를 쏘아봤다. 쥬느비에브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빼족거리며 말했다. "바람둥이. 아침부터 여자 손님이 찾아오다니..." 에이드리안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고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손님이 왔어? 누구야?" "엘로이즈라는 '여자' 손님이에요. 흥! 바람둥이!" 쥬느비에브가 톡 쏘아주자 에이드리안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루이즈를 쳐다보았다. 문 앞에서 민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 루이즈는 에이드리안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침대에서 나와 걸어가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너, 빨리 연습하러 가. 안가면 화낸다." 에이드리안은 다리가 저린지 절뚝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나빠져 심술궂게 말했다. "흥, 쌤통이다. 바람둥이. 여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역시. 흥!" 심통 맞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루이즈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엘로이즈 아가씨는 에스프라드 님의 누님이세요. 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 후보자시죠. 나이가 아마 스물 다섯쯤 되셨나? 호호, 내려가서 모롤라 주스라도 한 잔 드세요." "모롤라 주우-스?" 쥬느비에브는 루이즈의 말에 방실방실 웃으며 침대에서 나왔다. 방금 전의 씩씩거리던 기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만 모롤라 주스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가 된 쥬느비에브였다. 쥬느비에브는 루이즈의 뒤를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다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 님은 사이가 나쁜데, 왜 그 누이가 찾아온 거지? 흠- 모르겠네.' ******** 응접실 문 앞에 선 에이드리안은 무감각한 눈동자를 바닥에 내렸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 방문을 열었다. 소파에 검은 머리카락의 수수한 차림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에이드리안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은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인사를 건넸다. "이 거 별일이로군요. 엘로이즈 누님이 날 찾아 주다니." "오페라 공연을 보러 왔어. 기대하고 왔는데 정작 에스프라드는 나오지 않더구나. 나한테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는데. 언제나 그렇지. 그 애는. 우리, 오랜만이다, 그렇지?" 엘로이즈가 애써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맞은 편의 소파에 가서 앉았다. 에이드리안은 감정을 담지 않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사과하러 왔어. 내 아버지, 그리고 내 동생. 모두 미안하구나." 엘로이즈가 고개를 숙이고 힘들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삼스레 무슨 말이에요? 게다가 누님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누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에이드리안, 네 아버지 일. 나도 알고 있었어." 엘로이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꾹 마주잡고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눈물이 솟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용서해 주렴. 아버지도, 에스프라드도 자신들이 얼마나 널 상처 입힌 건지 모르고 있어. 나도...그 때 에스프라드가 하려는 짓을 막을 수 있었는데..." "하! 그럼 그 속에서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래요. 아주 즐거웠겠군요. 가여운 고아를, 그것도 자신들에게는 데미지가 될 것이 뻔한 아이의 눈과 귀를 막고 당신들의 장난감으로 만들었군요."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히다는 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웃어댔다. 엘로이즈는 순식간에 창백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차피 그 일은 지난 일이에요. 남아있는 감정 찌꺼기는 어떻게 되지 않겠지만. 에스프라드 형이 쥬르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이 따위 평의회 의장 후보자리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죠." "에이드리안. 난 에스프라드를 설득할 수 없어. 난...그저 용서를 빌 뿐이야. 미레이유 일도..." 순간 에이드리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엘로이즈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가주세요! 두 번 다시 누님 얼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에이드리안은 차가운 눈동자로 무심하게 바닥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혐오감마저 느껴지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엘로이즈는 슬픈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엘로이즈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 아마,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 아마 내 생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다, 그리고 부디 행복해지렴."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엘로이즈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뒤돌아 섰다. 그녀는 어린 날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가족이 그에게 저지른 죄를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저 용서를 구할 뿐이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대속성의 저주가 끝날 때까지 그저 용서를 구할 뿐... ******** 쥬느비에브는 손에 모롤라 주스가 든 유리잔에 빨대를 꽂으며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검은머리의 여자가 나와 밖으로 뛰어나갔다. 언 듯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본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에스프라드 님의 누이라고 해도 여잔데!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발을 내딛었다. 에이드리안이 창 밖을 보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에이드리안!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여자를 울리면 어떻게 해요!" 쥬느비에브의 호통소리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움찔했다. 그녀가 본 에이드리안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그의 눈동자를 보면 항상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 그 여자가 에이드리안을 괴롭힌 건가? 흠, 결국 화가 난 에이드리안의 독설 한 마디에 울고 나간 걸까?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모롤라 주스에 담긴 빨대를 한 번 쪼옥 빨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힘내요. 응? 나, 연습하러 갈 테니까 기분 풀어요. 응? 에이드리안~" "너 누구 편이야? 내가 여잘 울렸다고?" 에이드리안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의 기분이 풀리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물론 에이드리안 편이에요,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드리안 편이라고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그제야 슬며시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기분이 풀렸다는 것을 알고 방실방실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조마조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쥬느비에브의 시선에 기분이 좋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우리 같이 미라벨 언니네한테 가 봐요. 궁금하니까." 에이드리안은 대답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유리잔에 대롱거리고 있던 빨대를 쪼옥 빨았다. 노란색 모롤라 주스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것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두드렸다. "에이, 이 거 내 거란 말이에요. 에이드리안, 루이즈 아주머니한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내 거 먹고 그래요? 거기다 그 빨대 내가 한 번 빨았던 건데. 에이, 정말."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빨대를 빨면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싫어?"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오물조물 움직이다 고개를 숙여버렸다. 에이드리안이 마음먹고 예쁘게 보이고자 하면 아무도 그를 당하지 못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파란 눈동자와 하얀 피부의 얼굴을 본 순간 할말을 잃었던 것이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예쁜 거야?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든 쥬느비에브는 3분의 1정도 밖에 남지 않은 모롤라 주스를 보며 눈물을 머금었다. "힝, 에이드리안 바보." ******** 오후에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학생회실을 찾았다. 유벨 일당이 오늘은 연습을 쉰다고 해서 학생회실에 온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연습 때문에 자주 오지 못한 학생회실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전혀 반갑지 않은 시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학생회실에 들어서자 학생회실은 바로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유벨을 비롯하여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가 싸늘한 시선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다들?" 그러자 쥬느비에브가 불만이 가득한 눈을 하고 에이드리안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거 봐요. 내가 다들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그랬죠?"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네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이럴 거야?"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주변은 조용해졌다. 유벨과 미라벨은 여전히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안느마리와 케이로프는 묵묵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네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쥬느비에브에게 손짓을 한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벨, 쓸데없는 걸로 신경 쓰이게 하면....알지? 네 과거를 털어놓을지도 몰라." 순간 유벨의 표정이 시퍼렇게 굳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옆에 앉은 쥬느비에브의 머리 리본을 바로 잡아주며 미라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라벨, 전에 우리 어릴 때 말이야, 그 때 시냇가에 놀러 갔을 때, 그때 일 기억해?" 에이드리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라벨은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쳐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거리며 에이드리안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별 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케이로프, 난 널 믿어. 쓸데없는 소리하고 다니지는 않겠지? 난 널 몹시, 몹---시 믿고 있다고. 설마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지는 않을 테지?" 케이로프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자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며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쥬르, 저 세 사람은 앞으로 이상하게 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말끝을 흐리며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순간 안느마리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저, 전 괜찮아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의 둘도 없는 친구니까요. 아, 하하하." 머쓱한지 안느마리는 계속해서 웃어댔다.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학생회의 회장이라는 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한 번에 다 겁에 질리게 만들다니. 에이드리안은 정말 대단해. 흠... 전에 케이로프 님이 에이드리안더러 대인 관계의 귀재라더니 정말 사실이었어. 그래, 대인 관계란 이런 거로구나. 협박과 회유. 음..잘 배워둬야지.' 새로운 깨달음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쥬느비에브였다. 정말 배울 점이 많은 그녀의 약혼자였다.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그럭저럭 공연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60음(第60音) 에스플리크 오페라 대공연(11) 드디어 대공연의 날이 다가왔다. 무대 뒤의 의상실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따로 정해진 방에서 무대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연습해 두는 건데...' 쥬느비에브는 하얀 드레스를 입으며 단추를 잠그려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손가락이 단추 끝에서 미끄러졌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앙다물고 단추에 집중했다. 무슨 단추가 이렇게 많은 거람? 쥬느비에브는 결국 단추 잠그기를 포기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 때 문 열리는 소리가 열렸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드레스 앞자락을 손으로 여몄다. "쥬르, 옷 다 입었어?" 에이드리안이었다. 그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쥬느비에브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내리고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왜 옷 안 갈아입었어요?" "내 순서는 조금 뒤니까.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드레스 앞자락을 두 손으로 꾹 잡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단추, 못 채우겠어요. 손에 힘이 없어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가 단단히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드레스의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채 그가 단추를 잠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쥬르, 나도 처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때 많이 긴장했었어." "에? 정말?" "응, 내가 처음 많은 사람들 앞에 선 건 기원전의 예식 때였는데, 비인 가의 높은 어른들과 대귀족 가문의 사람들까지 몰려들어서 무척 부담스러웠지."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단추를 채우며 말을 이었다. "자꾸 몸이 떨려와서 노래할 수가 없었는데, 할머니가 말씀하시더군. 노래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난 노래부르고 싶었어. 그래서 노래했지." 에이드리안은 무사히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눈을 들어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쥬르도 노래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어때, 하고 싶어? 아니면 하기 싫어?" "노, 노래하고 싶어." 쥬느비에브는 굳은 각오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좋아. 무대엔 미라벨도 유벨도 안느마리도 케이로프도 있어. 걱정하지 말고 네가 부르고 싶은 만큼 노래 불러."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쥬느비에브의 뺨에 살짝 입맞췄다. "떨지 말고. 나도...네 뒤에 있을 테니까."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에이드리안도 떨지 말고 잘 해요."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뺨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난 에이드리안과 노래하고 싶어."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노래. 언제까지나 노래를 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노래할 수 있다면. ******** 어느 새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 위로 밝은 빛이 쏟아졌다. 케이로프가 노래하고 있었다. 무대를 둘러싼 관중석은 조용한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케이로프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검은 막 뒤에 숨어서 케이로프가 노래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는 다음 차례였다. 옆에 서 있던 안느마리가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쥬느비에브, 첫 무대, 잘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느마리의 응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 졌다. 그녀는 주먹을 꼬옥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케이로프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의상을 살폈다. 하늘하늘거리는 치맛단의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 딱 맞게 입혀져 있었고 웨이브진 긴 검은머리의 가발은 양쪽으로 땋아 위로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두 가닥의 긴 머리카락이 무릎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하얀 드레스를 조심스레 끌며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미라벨과 유벨의 격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뜨거운 조명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잠시 자리에 서서 음악을 느꼈다. 머리 속에 울리는 아름다운 선율에 살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무대 위의 숨막히는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미소지었다. 온몸에 쾌감이 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나의 노래를 듣기 위해!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을 그대는 몰라주오. 내 안의 시간은 그대를 향해 흘러..." 다행이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온다. 자신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기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첫 무대다. 나의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첫 무대다!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안락한 밤하늘과 같은 기분.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리며 노래와 함께 흩날렸다. '나의 노래는 분명 사람들에게 전해질 거야. 모두가 귀기울여 주길!' ******** 자신의 노래를 마치고 무대 뒤로 나온 쥬느비에브는 스텝들에게 엄청난 찬사의 말을 들었다. 안느마리와 미라벨이 다가와 칭찬의 말을 건넸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듣고 싶은 칭찬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스텝이 건네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두리번거렸다. "에이드리안은? 그는 어디 있어요?" "에이드리안 님은 의상을 갈아입으시러 갔어요." 미라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순식간에 실망감에 젖어드는 마음을 느꼈다. 그가 들어주길 원했는데. 에이드리안이 나의 노래를 듣고 칭찬해 주길 원했는데!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나갈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울하게 의상실 쪽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 어느새 시간이 흘러 마지막 막이 올랐다. 쥬느비에브는 그 후로 한번도 에이드리안을 만나지 못했다. 극중에서도 멀찍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몹시 우울해졌다. 무슨 생각으로 노래를 불렀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미라벨이 노래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무대 위에서 우두커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라벨은 매섭도록 그녀를 노려보며 노래하고 있었다. 질투에 빠진 추한 여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관심이 없었다. 갑자기 노래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들어 주길 원하는 사람이 나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쥬느비에브는 노래하기가 싫어졌다. [[ 쥬르도 노래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어때, 하고 싶어? 아니면 하기 싫어? ]] 에이드리안이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의 대답은 '싫다'였다. 미라벨의 노래가 끝나고 있었다. 다음은 자신이 케이로프를 바라보며 사랑의 아리아를 부를 차례였다.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사랑의 아리아 따위 부를 수가 없었다. 전혀 기분이 나지 않았다. "싫어."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쥬느비에브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뒤돌아서 무대 뒤로 걸어나갔다. 더 이상 무대 위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노래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무대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걸어나가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라벨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노래할 수가 없었다. 이미 미라벨의 노래가 끝나고 자신이 부를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기에는 한 템포 늦어버렸다. 결국 계속 연주를 이어 나가던 음악도 멈추어버렸다. 무대 위가 조용해 졌다. 쥬느비에브는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대 뒤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이 보였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걸음을 멈췄다. 무대의 이상한 분위기에 에이드리안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가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돌아갈 수 없었다. 뿌옇게 흐려지고 있는 시야를 애써 진정시키며 쥬느비에브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늘 변함 없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요 눈처럼 순수하게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요 후회되는 말은 그대로 풀어헤치고 나에게로 오세요 당신이 있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어요. 당신이 내 마음에 있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어요 ]] 머리 속을 울리는 단 하나의 말. 언제나 잊을 수 없는 그 단어를 떠올리며 쥬느비에브는 노래했다. 마음을 적시며 아름답게 떨리는 단 하나의 단어. 순간 머리 속이 흐릿하게 변하며 쥬느비에브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단 하나의 단어만이 머리 속을 맴돌며... "나의 노래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에이드리안." ******** 오페라 공연이 끝난 다음 날. 학생회실의 소파에 앉아 쥬느비에브는 미라벨의 우레와 같은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안느마리와 케이로프는 짐짓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미라벨은 기세 등등하게 쥬느비에브에게 호통을 쳤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공연이 망쳐졌잖아요! 마지막 부분이라서 다행이지. 우리가 뒷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이 미라벨이 쥬느비에브 때문에 늙는다구요, 늙어!" "미안해요, 미라벨 언니."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안느마리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요, 미라벨 님, 그만 하세요. 쥬느비에브가 탈진해서 쓰러진 거니까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만큼 공연에 몰입했다는 뜻 아니겠어요?" "아윽!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사랑의 아리아를 에이드리안 님을 보고 부르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결국 에스멜로네가 노이스첼르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뜬 걸로 결말을 맺게 되었잖아요. 어휴. 이런 결말은 또 처음이에요. 처음!" 미라벨의 잔소리에 쥬느비에브는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어제 공연 도중에 쓰러진 다음 아침까지 잠만 잤다. 일어나 보니 에이드리안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학생회실에 에이드리안을 찾으러 왔더니 에이드리안은커녕 엄청난 미라벨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학생회실의 문이 열리고 유벨이 함박 미소를 띈 채 들어왔다. "미라벨, <오늘의 에스플리크> 좀 봐. 어제 우리 공연 대성공이야!" 유벨의 말에 미라벨은 입술을 실룩였다. 그리고 유벨의 손에 들린 신문을 홱 낚아채 시선을 내렸다. "성공은 무슨 성공이에요? 어디.... 음? 음? 이럴 수가...이런 기사가 실리다니...말도 안 돼..." 미라벨의 당황한 목소리에 케이로프가 다가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신문을 빼내어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엘크로이츠> 오페라 대공연, 역대 오페라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흠... 학생회장, 에이드리안 님의 변신과 그의 약혼녀, 쥬느비에브 양의 아름다운 노래가 돋보인 좋은 공연으로.... 특히 마지막에 쥬느비에브 양이 무대뒤의 에이드리안 님을 향해 부른 노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없이 목소리로만 전해졌는데 기교와 창법 모두 빼어났으며 특히 모든 이의 심금을 울려... 연인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감동적인 노래였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치를 살폈다. 다들 신문에 눈이 팔려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 우울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는 현관에 들어섰다. 에이드리안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분명 공연을 망쳐서 화가 난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며 집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루이즈가 쫓아 나와 그녀를 맞아 주었다. "아가씨, 도련님이 오셨어요. 들어가 보세요. 아가씨 방에 계실 거에요." 루이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이 돌아왔다! 쥬느비에브는 쿵쾅거리며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한달음에 자기 방문 앞에서 선 쥬느비에브는 숨을 훅훅 몰아쉬며 가슴을 두드렸다. 머리띠를 바로 고정하고 치마의 주름을 폈다. 옷매무새가 대강 가다듬어졌다고 생각한 쥬느비에브는 심호흡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밝은 빛과 함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와, 쥬르." 에이드리안이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그는 빛을 받으며 창가에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방안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갖가지 색깔의 예쁜 꽃들이 활짝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전에 못 받은 화관, 어제 나한테 줬잖아? 보답이야."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그제야 방안의 꽃들이 예전에, 그리고 어제 그녀가 레플리카로 보여준 그 꽃밭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보낸 자신의 레플리카가 그에게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제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그에게 레플리카를 전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만이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마음으로부터의 레플리카는 무사히 그에게 전해졌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방울져 흐르는 뺨을 닦으며 그에게 물었다. "정말... 받았어요?" "응." 에이드리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꽃을 헤치고 에이드리안에게 달려갔다. 그의 품에 안긴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다른 사람 다 필요 없어요. 에이드리안만. 에이드리안만 내 노래를 들어주면 돼. 다른 사람이 들어주는 건 의미가 없어. 나의 레플리카는 당신을 위해서만 존재할거야." 쥬느비에브는 속삭이듯 말하며 손가락에 걸리는 그의 금발을 매만졌다. 그가 곁에 있어준다면, 그가 나의 노래를 들어준다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 할 자신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살포시 미소를 흘렸다. 쥬느비에브의 마음을 다 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에이드리안은 그녀를 살며시 품으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내게 준 네 노래. 그리고 첫 번째 공연...축하해." 향긋한 꽃향기와 함께 바람이 불어들어 왔다.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에이드리안도 뒤따라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마음 가득 채워지는 행복감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띄웠다. 그녀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오래도록... [[ Replica 殘像 - 레플리카 잔상 ]] 그립고 소중한 당신은 언제나 나의 마음 속에... 비록 두 번 다시 볼 수 없어도, 당신만은 나의 마음 속에. 나의 레플리카가 사라진다 해도. 나의 레플리카가 당신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해도. 당신만은 그립게.... 그리하여 영원히 나의 곁에... 그 무엇보다 아픈 이별. 나로 인한 고통. "에이드리안, 나... 당신이 곁에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우린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어. 그리고 그것은 나의 잘못. 그리고 당신의 잘못.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아픔. 만남은 이별로, 이별은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은 당신에게로... 당신과 나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만이 감도는 생채기 가득한 나의 마음."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 행복이라 믿었던 시간들. "언제나 네가 행복하기를. 하지만 나로서는 줄 수 없는 행복. 그리고 네가 내게 행복을 줄 수 없듯이 나는 네게서 슬픔만을 보고 너도 내게서 행복 을 가져갈 수는 없어. 너와 난 서로에게 그 무엇도 아닌 존재. 그럴 수밖 에 없는 존재. 행복이라 믿었던 것은 모두 신기루.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지켜주지 못한 행복. 아프도록 슬픈 현실." 누구보다 깊이 새겨지고픈 마음. 따뜻했던 그 순간. "널 동경했어. 아름답고 파란 눈동자. 그것은 누구에게도 볼 수 없었던 하 늘과도 같은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는 늘 모든 사람에게 그 빛을 던져 주었지. 그것은 언제나 상상했던 그리운 눈동자. 하지만 난 네게 그 빛을 빼앗기로 마음먹었어. 그것이 내 생의 의미. 되돌릴 수는 없어. 네가 날 미워한다면...부디..." 사랑 받았기에 더욱 시린 마음. 당신을 위한 영원으로의 기원. "아무리 마음에 담아두어도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소중한 나 의 당신. 하지만 사랑했고 미움받았고 또한 사랑 받았으니 내 삶에 후회 는 없어. 난 단지 더 이상 네가 아픔을 겪지 않기를, 그리고 다시 한 번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 그 시간을 두 번 다시 되돌리지 말고 너의 마음으 로, 그리고 너만의 선율로 나아가길. 그리고..." 반복되는 나의 마음. 반복되는 나의 레플리카. 포기할 수 없는 당신에게로의 선율. 그리운 당신에게로... 소중한 당신에게로... 제61음(第61音) Baby Panic!!(1) 안느마리는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침은 비교적 규칙적이었다. 검정색의 침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베개로 둘러싸인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녀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안느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다음 자신의 방구석에 있는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아 정신통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확히 2시르(주. 참조) 후에 번쩍 눈을 떴다. 안느마리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모스테츠 무역회사의 상표가 붙어 있는 검은 붓을 들어 붉은 무늬가 잔뜩 그려져 있는 하얀 미백지 위에 힘있게 휘둘렀다. 그녀는 조용히 붓을 놓고 종이를 들어 올려 눈앞으로 가져왔다. '유벨'과 '안느마리'라는 이름이 보기 좋게 쓰여 있었다. 안느마리는 흡족한 미소를 띄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유벨 님을 위한 러브러브 부적. 1000장을 채우는 그 날, 나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이야. 후후, 우후후후후후후후후-" 안느마리는 거나하게 웃고 나서 종이를 잘 접어 서랍 안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안느마리는 천천히 뒤돌아서 방을 살폈다. 그리고 한 쪽 벽으로 다가서서 검은색 커튼 한 쪽에 붙어 있는 긴 끈을 잡아당겼다. 순간 벽이 180도 회전하면서 5단 짜리 낡은 나무선반이 나왔다. 선반 위에는 커다란 유리병과 각종 도끼, 톱, 단검, 기관총 등이 나열되어 있었다. 안느마리는 선반 위에서 누런 수건 하나를 꺼내 유리병 하나를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훗, 귀여운 것들." 병 안 가득 들어 있는 곤충을 보며 안느마리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컬렉션을 빠짐없이 둘러 본 안느마리는 다시 끈을 잡아당겨 벽을 회전 시켰다. 순간 안느마리는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미소를 흘렸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오늘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지. 쥬느비에브, 세상의 더러운 블랙들로부터 널 지켜 줄 테니 오늘도 마음 푹 놓고 세상을 경영하렴." 안느마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하게 외쳤다. "오늘도 세상의 블랙이여, 긴장하라. 아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오늘도 그녀의 변함 없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있었다. ******** 식당에 나온 안느마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쥬느비에브의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 같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쥬느비에브의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쥬느비에브는 귀엽게 볼을 부풀리며 아로(주. 참조)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안느마리가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자 기분이 이상한 듯 쥬느비에브가 물었다. "안느마리,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야? 얼굴 구멍나겠어. 뽕-하고 구멍나면 에이드리안이 싫어할 텐데." "으응.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가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행복해서."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었다. 쥬느비에브는 한 쪽으로 땋은 머리를 흔들어 대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학생회실에서 자주 만나 이제는 익숙한 학생회 위원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살짝 인상을 쓰며 주스 잔을 내려놓았다. "맞아. 오늘 점심 전까지 처리할 서류가 있다고 했지." 쥬느비에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학생회 위원이 곁으로 와 서류 뭉치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쥬느비에브 님. 쉬고 계신데 죄송하지만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라서..." "응. 미안해요. 어제 다 하려고 했는데 에이드리안이랑 책 보다가 잊어 버렸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으며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서류 안의 내용을 꼼꼼히 훑어본 쥬느비에브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가방 안의 은색 펜을 꺼내 보기 좋게 사인을 그려 넣었다. "좋아요. 하지만 역시 '시셀리스' 악보 책 구매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스콜라에 있는 것도 아직 쓸만하던데. 에이드리안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까 그대로 유벨 오빠한테 제출하면 될 거예요." 학생회 위원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자 쥬느비에브도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보고 있던 안느마리가 감탄의 말을 터뜨렸다. "쥬느비에브. 너 정말 멋져 보이는 거 알아? 이제 서류 결제까지 하는 거로구나."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에이드리안이 이제 처리하기 쉬운 안건은 나더러 하라고 했어. 예를 들어 학생회 간식 비용 결제 같은 거. 게다가 나 공부 엄청 열심히 하거든. 이제 에슈비츠 영지 예산 관리도 내가 하고 있는 걸. 에이드리안이 매일 나 공부하는 거 옆에서 봐주니까 너무 재밌어. 그런데 시험 쳐서 틀리면 모롤라 세 개씩 압수 당하는데 그건 좀 안 좋아. 하지만 잘 하면...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눈동자를 천장으로 돌렸다. 안느마리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잘 하면 다시 모롤라 돌려주시는 거야?" "아니. 잘 하면...뽀뽀해 줘." 안느마리는 여전히 볼을 달구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싱긋 웃음을 지었다. "아항. 네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구나? 좋겠다. 정말 청춘이야, 쥬느비에브. 난 유벨 님과 언제 한 번..." 안느마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미리 주문해 두었던 치즈 소스를 입힌 스테이크와 매콤한 소스에 적신 연한 새우살 요리가 테이블 위에 얹어 졌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너무 맛나겠다. 우리 어서 먹자." "응. 쥬느비에브. 많이 먹어." 안느마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포크를 집었다. 새우살이 너무 연해서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매콤한 소스의 향도 너무 좋았다. 안느마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새우살을 집어먹었다. 쥬느비에브도 웃으며 새우살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 때 갑자기 쥬느비에브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안느마리는 새우살이 쥬느비에브의 입술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놀란 눈을 깜박였다. 쥬느비에브는 곧 이어 손을 입에 가져갔다. "욱, 우욱. 우욱..."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두 손으로 입을 막더니 결국 참지 못하겠던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안느마리는 멍한 얼굴로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쫓다가 포크를 떨어뜨려 순간 정신이 들었다. "쥬느비에브, 속이 안 좋은가?" 안느마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쥬느비에브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지배인이 계산서를 가져오는 바람에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쥬느비에브는 창백한 안색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 쥬느비에브의 표정이 수상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느마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움찔하더니 다소곳이 자리에 앉으며 변명을 둘러댔다. "소,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말이야. 음... 아무래도 이 거 말고 다른 거 먹어야 겠어." 쥬느비에브는 다시 메뉴판을 넘기며 안느마리의 시선을 피했다. 안느마리는 파리한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뜯어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쥬느비에브, 안색이 창백해. 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으, 응? 어어. 그건 그냥 어제 밤에 잠을 좀 못 자서... 그 게..." 쥬느비에브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안느마리는 실눈을 뜨고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왜 밤에 잠을 못 잔 건데?" "응? 그거야 어제 에이드리안이랑..." 갑자기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메뉴판에 얼굴을 박았다. "아, 안느마리. 나 다른 거 시킬래. 그, 그래. 조금 새콤한 게 좋겠다. 에, 레몬 주스나 마실까?" 안느마리는 눈썹을 실룩였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밤에 잠을 못 잤다고? 에이드리안 님 때문에? 게다가 저 창백한 안색... 그리고 헛구역질에 신 음식?! 설마...설마!!' 안느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에게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안느마리는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 너 혹시..." "으아악! 아니야, 아니라구!"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가방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쥬느비에브가 도망가버리자 안느마리는 멍하게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몸 속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저 반응은. 설마...설마... 사실이란 말인가?" ******** 미라벨은 연습실의 문을 여는 순간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안느마리가 갈색 눈동자에 엄청난 양의 눈물을 매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예요? 왜 그러는 거예요, 안느마리 양!" 안느마리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미라벨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미라벨 님. 예전에 제가 미라벨 님더러 블랙이라고 한 거 취소할 게요. 그러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미라벨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뭐, 뭘 도와달라는 거죠?" 안느마리는 미라벨의 말에 울먹울먹 하더니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어어어어 어어어엉- 내 친구, 내 친구 쥬느비에브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가..." "아이, 참.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요." 미라벨이 답답하다는 듯 안느마리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히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안느마리는 울음을 그치고 물끄러미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안느마리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미라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미라벨은 안느마리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아 그녀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안느마리. 나한테 말해 봐요. 이래봬도 난, 스콜라 레이디들의 고민 상담을 꽤 오랫동안 해왔어요. 좋아요. 쥬느비에브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미라벨의 차분한 목소리에 안느마리는 또 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라벨 님....미라벨 님.... 쥬느비에브가..." "쥬느비에브가?" "아기 가졌어요." 콰당! 안느마리의 대답과 동시에 쓰러져 버린 미라벨을 부축하며 안느마리는 더욱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어어어엉, 어어어엉, 어떻게 해. 쥬느비에브. 어어어엉. 미라벨 님. 일어나 보세요. 어어엉-" ******** 3 도르만에 정신을 차린 미라벨은 자신의 연습실을 둘러보며 침을 삼켰다. 분명 현실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미라벨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안느마리에게 물었다. "이, 임신이라뇨, 쥬느비에브가 그러던 가요?" 안느마리가 고개를 흔들자 미라벨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럼 무슨 근거로 그런 민망한 말을 하는 거예요?" 안느마리는 여전히 울먹이는 얼굴로 미라벨에게 말했다. "오늘 이상하게 안색이 나쁘더라고요. 그런데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헛구역질을 하는 거 있죠? 게다가 신 음식을 찾는 거예요. 이거 그 증상 아닌가요? 나, 잘은 몰라도 그 거, 연애 소설에 줄곧 나오는 거잖아요. 게다가 어젯밤에 에이드리안 님 때문에 잠도 못 잤대요. 두 사람사이에 뭔가가 있다고요." 안느마리의 말에 미라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라벨은 굳어 버린 몸을 겨우 안느마리에게 돌리고 말했다. "마, 말도 안 돼.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 님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아무리, 아무리 약혼을 했다지만. 그럼 두 사람이....그렇고 그런 심각한 관계까지 갔다는 얘기? 전혀 건전하지 않잖아요." 미라벨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안느마리도 얼굴을 달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오페라 공연이 있었을 때 두 사람 왠지 수상했어요. 그 날 일이 난게 틀림없어요." "나, 나도 그 때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하지만 2주일만에 생기는 아기가 어디 있어요! 지금 임신이 되려면....적어도 지난 봄에 그렇고 그런... 아아... 있을 수 없어요. 그 때 에이드리안 님과 쥬느비에브는 그렇게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고요."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끙끙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닥친 엄청난 사건에 두 사람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순진하고 단순해 보이는 쥬느비에브가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줄이야. 게다가 어째서 걱정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것인가. 몹시 억울한 기분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제62음(第62音) Baby Panic!!(2)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초췌한 얼굴로 학생회실에 들어섰다. 그들의 복잡한 머리 속을 시원하게 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두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어떠한 결론도 도출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미라벨은 터덜터덜 걸어가 소파 위에 풀썩 앉았다. 안느마리도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학생회 업무를 보고 있던 유벨과 케이로프는 살짝 인상을 쓰며 눈짓을 교환했다.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유벨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미라벨, 무슨 일 있어?" 미라벨이 다홍색 머리를 펄럭이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 유벨을 향해 입술을 달싹이던 미라벨은 붉은 원피스 자락을 매만지며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유벨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에 안느마리에게 눈짓을 주었다. "안느마리 군. 무슨 일이야?" 안느마리가 유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평상시 같으면 안느마리 양이라며 바락바락 대들었을 그녀가 왠지 이상했다. 안느마리가 오늘은 이상하게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유벨은 점점 이상한 느낌에 케이로프에게 눈짓을 했다. 케이로프가 헛기침을 하더니 미라벨에게 말했다. "말을 해야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것 아닌가. 미라벨 브레시아..." "큰 일이 생겼어요. 케이로프 님." 케이로프의 말이 끝나기 전에 미라벨이 힘없이 대답했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서로 바라보며 미라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벨은 답답하다며 가슴을 치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 미라벨이 유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쥬느비에브가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아...기. 아기?" 순간 학생회실에 냉랭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머리 속이 마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 정신을 차린 유벨과 케이로프는 오래도록 미라벨과 자초지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동안 토론이 끝나자 유벨은 천천히 침을 삼키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 쥬느비에브가 그런 증상을 보였단 말이지? 그리고는 당황한 듯 도망을 치더라구?" 안느마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작게 한숨을 쉬며 묵묵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듣고 있던 미라벨이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어요. 저번 봄에 두 사람, 별로 좋은 사이 아니었잖아요? 에이드리안 님, 그 당시만 해도 쥬느비에브를 그렇게 좋아하시진 않았어요." "하지만 남녀간의 일은 모르는 법이지." 케이로프가 응수를 했다. 안느마리와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유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축하해야 할 일 아니야? 내 조카가 생기는 건데." "지금 그 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유벨 님! 에이드리안 님과 쥬느비에브는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사고를 친 거라고요! 이건 엄연한 사고예요, 그것도 대형 사고! 엄청난 스캔들이라고요!" 미라벨이 버럭 화를 내었다. 유벨은 그만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안느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벨에게 다가갔다. 안느마리는 눈을 감고 유벨의 등을 두드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미라벨 님 말씀이 맞아요, 유벨 님. 만약 임신이 사실이라면...쥬느비에브는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서 두고두고 손가락질 받을 게 틀림없어요." 다시 학생회실에 침묵이 흘렀다. 네 사람은 갑자기 그들 앞에 던져진 사건에 대해 도저히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 때 유벨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봄에 본 적이 있었지. 침실에서의 뜨거운 로망스." "하지만 그건 번개 때문에 무서워서 같이 있다가 어쩌다보니 그런 거라고 했잖아요." 안느마리가 유벨의 말에 반론을 제시했다. 다시 학생회실에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케이로프가 무거운 침묵을 들어올리고 입을 열었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에게 들켜서 민망한 마음에 둘러댄 변명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 하지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에게 그만한 배짱이 있었단 말인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에이드리안 님이 쥬느비에브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거겠죠. 어차피 유벨 님께 들켰으니 변명을 둘러대라고 협박을 하셨을 지도 몰라요." 미라벨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미라벨은 안느마리를 보며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되겠어요. 우리가 이제부터 쥬느비에브를 관찰하자고요." "미라벨 님. 그냥 쥬느비에브에게 물어볼까요? 사실대로 말하라고..." 안느마리의 말에 미라벨은 눈을 흘겼다. "아직 온전한 여자의 마음을 갖지 못했군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을 했다면, 어느 여자가 자랑스레 그렇다고 대답하겠어요? 이제부터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요!" 미라벨의 말에 안느마리는 굳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소중한 친구가 곤경에 빠진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쥬느비에브, 내가 지켜 줄게, 걱정하지 마! 안느마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렸다. ******** 다음 날. 학생회실에 나온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하며 꼼꼼히 관찰하고 있었다. 유벨과 케이로프도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는 척하며 틈틈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확실히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아까부터 계속 두 사람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무언가를 작게 속삭이자 쥬느비에브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느마리와 미라벨은 책장 앞에 딱 붙어 책을 보는 척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이 워낙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바람에 대화의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괜찮겠어? 같이 병원에 가 볼까? 확실한 진단을 받아야........" 살짝 들린 말에 안느마리와 미라벨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병원? 병원에 간다고? 진단을 받는다고? 임신 진단을?'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제부터 음식도 잘 생각하고 먹어야......" 이번에는 케이로프와 유벨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홀몸이 아니니 무리하지 않겠다?! 게다가 식단에도 신경을 쓰겠다고?' 네 사람은 그들이 수집한 정보와 각자의 추리 내용을 바탕으로 열심히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 네 사람은 화들짝 놀라 생각을 끝맺었다. "난 점심 먹으러 갈 거니까 다들 식사하러 가." 에이드리안은 오늘따라 학생회실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눈짓을 주며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해 놓고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방안의 긴장된 분위기가 한 순간에 풀렸다. "휴우- 숨 막히는 줄 알았네. 미라벨 님! 점점 사건은 본질을 향해 다가가고 있어요.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어서 두 사람을 따라가죠!" 안느마리가 거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라벨도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곧 진실이 밝혀지겠죠. 케이로프 님! 자, 가시죠!" "왜 나까지 가야하는 거지?" "잔말말고 따라오세요. 우리 엘크로이츠의 운명이 걸린 문제예요." 별로 타당한 이유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케이로프는 미라벨과 안느마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유벨에게 말했다.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자네는?" 유벨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일로나 할머님께 알리러 가야겠어. 이런 중대한 문제를 이대로 둘 수는 없지. 빨리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하시라고 말씀드려야 겠어." 케이로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미라벨과 안느마리, 케이로프는 굳건한 사명 의식을 가슴속에 품고 식당으로 향했다. 진실은 반드시 빛을 보게 되리라! ******** "이상하군요. 확실히. 화장실에 너무 자주 가잖아요? 쥬느비에브." 미라벨이 벽에 몸을 숨긴 채 열려 있는 방문을 통해 방 안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입가를 닦아주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지만 미라벨은 꿋꿋하게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사모해마지 않는 에이드리안에게 위험이 닥치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추측이 사실로 밝혀지면 에이드리안은 얼마나 세간의 입방아에 고생하게 될 것인가! 미라벨은 활활 타오르는 사명감에 입을 꾹 다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쥬느비에브는 엄청난 양의 요리를 주문해서 헤실헤실 웃으며 열심히 먹고 있었다. 임신한 여자들의 음식 섭취량이 많아진다는 말을 언 듯 들은 적이 있는 미라벨은 이마를 찡그렸다. 게다가 오늘 쥬느비에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화장실에 자주 가고 있었다. 이것도 아기를 가졌을 때의 증상이라는 것을 미라벨은 분명히 책에서 읽었었다. 점점 확실한 결론이 드러나고 있었다. 케이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화장실에 자주 가는 건 주스를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은데. 벌써 6잔 째야." 미라벨은 인상을 썼다. 그럴듯한 반론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안느마리가 눈을 찡그리며 소곤댔다. "하지만, 왠지 에이드리안 님이 쥬느비에브에게 지나치게 신경 쓰고 계신 것 같지 않아요? 마치...음..." 안느마리의 말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에이드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평소 때보다 쥬느비에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나왔다. 식사를 마친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다행히 눈치를 채지 못한 듯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은 가쁜 숨을 쉬며 눈동자를 돌렸다. ******** 식당에서 나온 미라벨을 위시한 세 사람은 우거진 나무 뒤에 숨어 쥬느비에브를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나무 그늘 아래의 긴 벤치에 앉아 다리를 쭉 뻗어 신발 발꿈치로 흙을 긁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 사이 어디론가 가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나른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기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살며시 손을 내리더니 살살 배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미라벨과 안느마리, 그리고 케이로프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 친밀한 행동은 무엇인가. 세 사람은 단 한가지 생각나는 단어를 머리 속으로 굴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나타났다. 손에 물컵을 들고 나타난 그는 컵을 쥬느비에브에게 건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서 건네 받은 물컵을 입으로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의 배에 손을 가져가 무언가를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우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미라벨 일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그들이 예상하고 있던 결론이 거의 확실하다는데 생각이 이르렀다. 그러나 결론을 내린 순간 고개를 돌린 에이드리안과 눈이 맞고 만 것이다. 에이드리안이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안 나와? 또 미행하고 있었지?" 에이드리안의 호통소리에 세 사람은 기겁을 하고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다. 세 사람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앞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의 앞에 선 미라벨은 애써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말했다. "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책을...아...하...하..." 여전히 매섭게 자신을 쳐다보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에 미라벨은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보고 말았다. 쥬느비에브의 가방 안에 담긴 아기 양말을. "아, 아니. 아니. 아니! 저것은 아, 아기 양말이 아니에요? 역시!" 미라벨은 놀라 소리쳤다. 미라벨의 말에 안느마리가 달려와 쥬느비에브의 가방 안에 담기 작은 양말을 꺼냈다. "지, 진짜네. 진짜 아기 양말이잖아?" 안느마리와 미라벨은 서로 마주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라벨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에이드리안에게 소리쳤다. "에이드리안 님!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어서 쥬느비에브와의 결혼식 준비를 하세요! 책임을 지셔야죠!" 미라벨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눈썹을 실룩였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결혼식?" "그래요.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저런 침울한 상황 속에 놔둘 수는 없어요.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어서 결혼식을 해야 한다구요!" 안느마리도 두 주먹을 아래위로 흔들며 외쳤다. 에이드리안은 왜 저러냐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보고 있던 케이로프가 나섰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지금 그 반응은 뭡니까!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임신한 것이 얼마나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인지 모르는 겁니까!" "이, 임...신?!" 케이로프의 말에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놀란 눈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고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누가 임신을 했다고 그래?" "여기 증거가 있잖아요! 쥬느비에브는 불쌍하게 이런 사실을 숨기고 넘쳐 나는 모정으로 아기 양말을 만들고 있었던 거예요. 불쌍한 쥬느비에브. 혼자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헛구역질하느라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흑흑." 미라벨이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에이드리안에게 아기 양말을 건넸다.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양말을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당황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미라벨. 이거 아기 양말 아닌데." 에이드리안의 말에 미라벨과 안느마리, 케이로프는 눈을 끔뻑였다. 아기 양말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저렇게 작은 양말이. 쥬느비에브가 눈을 말똥거리며 말했다. "그거 '가짜 쥬르' 양말인데. 어어-. 나 요즘 가짜 쥬르 옷하고 모자하고 만들고 있거든요. 양말도 내가 만든 거예요. 잘 만들었죠? 나, 바느질 잘 해요. 헤헷. 오늘 에이드리안 셔츠 단추도 내가 달아줬는걸요?" "그, 그런. 하, 하지만 분명 헛구역질 했잖아!" 안느마리가 변명하지 말라는 뜻으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외쳤다. 쥬느비에브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내 쥬느비에브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몰라, 몰라! 네가 알아서 해. 너 때문이잖아!" 에이드리안의 호통소리에 쥬느비에브는 찍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침울한 목소리로 뚱하게 말했다. "너무해. 나만 몰아 세우고. 나도 창피하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말했다. "미라벨, 쥬르가 헛구역질한 건... 혼자 숨어서 딸기 케이크 먹다가 나한테 들켜서 놀란 바람에 체한 데다가....거기다 그전에 먹었던 과일빙수 때문에 배탈까지 나서 그런 거야. 그리고..." "그 정도로 헛구역질을 한다고요?" 미라벨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반문했다. 에이드리안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 어제 소화젠줄 알고 약 먹었는데...그게 루이즈 아주머니의 비, 비듬 방지 샴푸였지 뭐야. 이상하게 약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음...음...좀 많이 마셨더니 어제도 하루종일 화장실만 가고... 이상하게 향이 강한 음식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아이, 창피해."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에이드리안의 옷자락을 꾸욱 잡았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많이 마신 정도가 아니라 샴푸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다니까. 하여튼 정말 바보 같아. 샴푼지 약인지도 구분 못하고. 큰 부작용이 없으니까 다행이지, 정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며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사정을 듣고 기가 막힌 세 사람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시 반문을 던졌다. 첫 타자는 안느마리였다. "마, 말도 안 돼. 쥬느비에브, 너 레몬 주스 시켰잖아. 신 거 먹고 싶다며? 그리고 아까 왜 도망간 거야?" "응, 속이 더부룩해서 새콤한 게 먹고 싶었어. 그리고 아까 도망간 건...샤, 샴푸 먹은 게 들켰나 싶어서...부끄럽잖아. 헤헤." 쥬느비에브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케이로프가 손바닥의 땀을 닦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그럼 아까 병원에 가자고 하신 건..." "쥬르가 창피하다고 하우먼 선생을 안 보겠다고 해서 병원에 가자고 한거야. 자주 보는 하우먼 선생보다는 그 편이 덜 창피할 것 같아서. 그런데 케. 이. 로. 프." 에이드리안이 다리를 꼬며 케이로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케이로프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에이드리안의 냉랭한 눈빛에 케이로프는 그만 굳어 버렸다.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케이로프를 보며 미라벨은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하. 저, 정말 날씨가 좋군요. 오호호. 호호호." 머쓱해진 안느마리도 눈을 돌리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각나서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쥬느비에브. 그 날 말이야. 라데팡스 오페라 공연 있던 날. 에이드리안 님과 무슨 일 있었지?" 순간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쥬르, 뭐 하는 거야? 어서 병원 가자구!" "으, 응! 어, 어서 병원 가요!" 뻣뻣한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쥬느비에브는 그 사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비틀비틀 발걸음을 내딛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는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휩싸이고 있는 그들이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에이드리안은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어 뒤돌아보았다. "유벨은? 그 녀석은 어디 간거야?" 순간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의 표정이 썩은 생크림처럼 지독하게 변했다. 이리저리 눈빛을 주고받던 세 사람은 결국 만만한 안느마리에게 총대를 짊어지게 했다. 안느마리는 숨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우울하게 말했다. "유벨 님은 쥬느비에브가 아기 가졌다는 걸 비인 본가의 일로나 님께 알려 드리러..." "뭐...라고? 뭐라고!!"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는 에이드리안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고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안의 불같은 화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살아서 돌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는 2주일간 에이드리안을 만나지 못하는 혹독한 처벌이 내려졌고 유벨에게는 안느마리와 함께 2주일간을 보내야 하는 끔찍한 형벌이 주어졌다. 결국 이 일로 가장 득을 본 사람은 엉뚱하게도 안느마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느마리에게도 어마어마한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아끼는 컬렉션들을 2주일동안 학생회 관리하에 모두 압수 당한 것이다. 그녀는 2주일동안 쓸쓸함에 몸부림쳐야 했다. 특히 그녀가 지금까지 하루에 한 장씩 정성스레 만들어오고 있던 '1000장 목표' 부적꾸러미를 압수 당하고 만 것이 치명적이었다. 하루에 한 장씩 만들어 천장이 이루어지는 그 날, 유벨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왔던 안느마리는 천 장 완성을 눈앞에 남겨두고 무시무시한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제63음(第63音) 해변에서 그대와 왈츠를!(1) [넌 괜찮을 거야. 저주받은 자는 나니까.] [......나, 노래할 수 있어요? 파파.] [미안하다, 쥬느비에브. 널 낳은 걸 후회해. 후회하고 있어. 미안하다. 내가..내가...미안해. 나의 사랑하는 쥬르.] [......왜 나는 노래하면 안 되는 거에요? 그녀는..그녀는...저렇게 즐겁게 노래하는데. 나도 노래하고 싶어. 부러워. 시샘이 나. 어째서 그녀는, 그녀는 노래를 할 수 있는 거지? 미워. 난 노래할 수 없는데!] [미안하다, 쥬느비에브. 하지만 난 널 사랑하고 있단다. 믿어주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도 난...널 사랑하고 있단다.] ********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눈을 떴다. 희뿌연 기억을 헤치며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립고 가슴 아픈...그리고 몹시 우울한 꿈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하얀 이불을 입 가로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파파. 나 이제 노래할 수 있어요. 에이드리안이 노래할 수 있게 해줬어." 에이드리안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으며 이불 위로 다리를 들어올렸다. 하늘색 면 잠옷이 둘둘 말려 올라가며 뽀얀 다리가 이불 위로 올라왔다. 시원했다.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으며 꼼지락거렸다. 뭐 좀 민망한 모습이긴 하지만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지금은 더운 여름이란 말이야. 쥬느비에브는 마음 속으로 변명을 둘러대며 나머지 한 쪽 다리도 잠옷을 걷어내고 쭉 뻗었다. 거추장스러운 잠옷을 걷어내고 나니 정말 시원했다. 맨 다리에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 "쥬르, 너 자꾸 이럴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가만히 생각해 보니 에이드리안 목소리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썹을 실룩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뭔가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에이드리안이 이제는 꿈에도 출연하는가 보다. 학생회 업무랑 집안 일로도 엄청나게 바쁜 사람인데 내 꿈에 까지 나오다니 에이드리안은 정말 부지런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안 비켜?" 또 들렸다. 이 꿈은 정말 이상했다. 목소리만 들리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몸을 꿈틀거렸다.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꿈이 끝난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반쯤 뜨고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엎드렸다. "아침 운동해야지." 쥬느비에브는 엉덩이를 쑥 내밀고 애벌레처럼 상체를 앞으로 쭈욱 당기고 그 다음 다리를 당기는 식으로 앞 뒤 운동을 했다. "헤헤. 재밌다. 내 이름은 쥬르 애벌레." 쥬느비에브는 실실 웃으며 다시 꿈틀거렸다. "쥬르, 뭐 하는 거야...잠 좀 자자. 응?"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꿈을 꾸고 있었다. 정말 현실감이 느껴지는 꿈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베개, 하얀 시트. 뿌연 침대 휘장. "어, 여기 에이드리안 침댄데?" 쥬느비에브는 몸을 반대쪽으로 뎅구르르 굴렸다. 한 바퀴 구르고 다시 한 바퀴 구르려는 순간 쥬느비에브는 장애물을 만났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한 쪽 눈을 살며시 떴다. 애써 눈을 감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에이드리안? 꿈이 아냐?" "당연히 꿈이 아니지. 너 자꾸 내 침대에서 잘 거야? 이젠 완전히 버릇이 됐군, 버릇이 됐어. 이젠 나도 몰라." 졸린 목소리로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인상을 쓰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나 언제 여기 온 거예요?" "내가 어떻게 알아? 말 시키지마. 나 잘 거야." 에이드리안은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무릎 위까지 말려 올라간 잠옷을 생각해내고 옷자락을 황급히 내렸다. 빨개진 얼굴을 토닥이며 그녀는 다시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다행히 그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사이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가벼운 숨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쥬느비에브는 조심조심 에이드리안이 안고 있는 베개를 치우고 그의 품안으로 쏙 들어갔다.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었다. "여름이라도 따뜻한 게 좋아." 에이드리안의 등으로 팔을 두르며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아침잠을 더 즐길 생각이었다. 그녀는 포근한 에이드리안의 품안에서 달콤한 꿈나라로 향했다. ******** 에이드리안은 혼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무슨 일이 있는지 나중에 먹겠다고 했다. 그는 아침부터 쥬느비에브 때문에 잠을 설쳤더니 아직까지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가 자신의 침대에 불쑥불쑥 출몰하는 일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 웅크리고 자고 있고, 낮잠 자고 일어나면 옆에서 혼자 뎅굴뎅굴 구르면서 자고 있고, 스콜라에 갔다오면 자신의 침대 마냥 큰 대자로 그의 침대 위에서 자고 있고... 에이드리안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여자로서 자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처음에는 일일이 화를 내고 다그쳤지만 계속되는 상황에 그도 포기해 버린 지 오래였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뭔가 투닥거리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그녀의 하얀 다리가 휙 하고 넘어오는 것이 아닌가. 곧 이어 그녀의 잠옷이 펄럭이더니 나머지 다리도 쭉 하고 뻗어 나오는데 그는 보기가 민망해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쥬느비에브는 민망한 자세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건지 계속 눈을 감고 있더니 요즘 들어 그녀의 주특기가 된 애벌레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어떻게든 말려보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는데 쥬느비에브가 베개를 치우고 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거기서 지고 말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좋아서 그만 계속 자는 척 해버렸던 것이다. 짐짓 자는 척 하며 그녀를 더욱 꼭 안고 있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문제는 요즘 들어 이런 상황이 몹시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뭔가 큰 일이라도 날까봐 몹시 걱정스러운 그였다. 방 안에 들어선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어, 방을 잘못 찾은 건가? 그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분명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비비며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 때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에이드리안! 뭐해요, 어서 들어와요." 쥬느비에브였다. 그녀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핑크색 스커트에 목 부분에 앙증맞은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 아주 귀여워 보이는 그녀였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며 방긋 웃었다. "어때요? 이러니까 방이 더 좋아 보이지 않아요?"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인상을 쓰며 쥬느비에브를 내려다보았다.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네 가구를 왜 내 방에 가져 온 거야!" 그랬다. 쥬느비에브의 가구들이 속속 그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만 빼고. 누가 옮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구들은 짧은 시간 안에 알차게 배치되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을 흔들며 방실방실 웃었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에이드리안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나도 이제부터 여기서 지내려고요. 이 방에서 자면 왠지 잠이 더 잘 오거든요. 여기, 내 방보다 더 크고 더 시원해요." "뭐, 뭐라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에이드리안은 기가 찼다. 결혼도 안 한 남녀가 한 집에서 지내는 것만 해도 굉장한 일인데 같은 방에서 지내자고?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고 소파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소파에 앉게 한 다음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쥬르, 잘 들어. 우린 물론 약혼한 사이이긴 하지만 아직 결혼은 안 했다고. 그러니까 서로간의 최소한 지켜줄 건 지켜줘야..."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자면 기분 좋아요. 따뜻해서 마망이랑 같이 자는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진지한 충고를 한 쪽 귀로 흘려버리며 방실방실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쥬르, 그러니까 기분 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자면 이런 저런 문제가 많단 말이야. 사람들이 알면 뭐라 그럴 거고..." "괜찮아요. 우리 어차피 결혼할 사인데." 쥬느비에브는 이번에도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은 점점 함정에 빠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그저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덕분에 에이드리안이 말하는 것은 모두 그녀의 머리 속에는 접수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시도를 했다. "쥬르, 그러니까 너 아직 스콜라 졸업하려면 3년이나 있어야 하는데 혹시 음...뭔가 잘못되어서...그러니까 그래, 아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아기요? 아기가 왜 생겨요? 여긴 양배추 밭도 없는데. 아기는 양배추 밭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나 생각났어요. 전에 얘기들은 적 있어요. 남자랑 여자가 같이 자면 양배추 밭에서 아기가 뿅 하고 나온다고. 하지만 여긴 양배추 밭이 없으니까 에이드리안이랑 나랑 같이 자도 괜찮아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굴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난감해 졌다. 양배추 밭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꾹 쥐고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머리를 굴렸다. 그녀를 납득 시킬만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넌 순진해서 잘 모르겠지만 아기는 양배추 밭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하여튼 난 남자고 남자는 그렇게 믿을 만한 동물이 아니란 말이야. 그...그 때 오페라 공연 때 말이야. 그 때 그..불건전한 일을... 음..."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여기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쥬느비에브에게 소리쳤다. "몰라! 하여튼 내 방에 있는 네 가구 저녁때까지 다 치워! 알았어?"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쭉 내밀고 볼멘소리를 냈다. "뭐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정말 요즘은 왜 전부 아기 타령인 거야? 어휴, 얼마 전에는 미라벨 언니랑 안느마리가 나더러 임신했다고 난리더니...양배추 밭이 옆에 있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정말 다들 공부 좀 해야겠다니까. 아기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게 틀림없어. 내가 나중에 에이드리안한테 잘 가르쳐 줘야겠다. 에이, 정말." 투덜투덜 불만을 풀어놓던 쥬느비에브는 한순간 얼굴이 발그스름해 졌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의 핑크색 치마에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왜 다들 그 때 부, 불건전한 일을 자꾸 말하는 걸까. 부, 부끄러운데. 하지만 기분은 좋았는데....좀 부끄럽긴 하지만...음...많이 부, 부끄럽긴 하지만..." 또 다시 불건전한 생각을 해 버린 쥬느비에브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뺨을 토닥이며 방을 한 번 쭈욱 둘러보았다. 방을 한바퀴 둘러본 그녀는 순간 생각났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맞아. 베개 안 가져 왔네. 뭐 에이드리안 팔 베개 베면 되지만 좀 싫어하겠지? 음...가짜 쥬르도 데려 와야지."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신나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에이드리안의 말은 그새 까맣게 잊어버린 그녀였다. ******** 투명한 푸른색의 아로 주스와 싱싱한 모롤라 5개, 그리고 얇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은 쥬느비에브는 부산하게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낑낑거리며 옮겨 온 그녀의 옷을 에이드리안의 드레스룸에 걸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 됐다! 난 정말 일도 잘 한다니까."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까만 생머리의 인형을 안아들고는 인형 팔을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빨리 와요! 쥬르랑 가짜 쥬르가 기다리고 있어요!" 쥬느비에브는 가짜 쥬르를 안고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았다. 에이드리안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춤을 추고나니 무료해졌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톨레 아저씨와 하인들의 손을 빌려 옮겨 놓은 자신의 서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서랍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가짜 쥬르를 안고 그녀는 침대로 달려 곧 바로 다이빙을 했다. 침대가 출렁이며 쥬느비에브의 몸을 흔들어 놓았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가짜 쥬르를 옆에 앉혀 놓고 책을 폈다. "헤헤. 에이드리안이 올 때까지 책이나 읽어볼까?" 쥬느비에브는 '한 여름에 타오르는 정열'이라는 제목을 스윽 훑어보고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미라벨의 책이라 구겨지거나 흠이 생기면 감당 못할 잔소리를 들어야했기 때문이다. "흐음...남자 주인공이 나왔네." 쥬느비에브는 빠르게 눈동자를 돌리며 책을 읽어나갔다. 미라벨이 좋아하는 연애 소설은 모두 남자 주인공이 금발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책을 반정도 읽어나가던 쥬느비에브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이, 에이드리안이 더 좋은 걸. 난 이런 근육질 남자는 싫어. 미라벨 언니, 은근히 이상한 취향이잖아?" 입맛을 다시며 쥬느비에브는 책장을 슬슬 넘겼다. 어느새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해변 가에 가서 두 사람만의 사랑을 확인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에 도달했다. 쥬느비에브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에이드리안이랑 바다 가보고 싶은데. 단 둘이서." 갑자기 건전하지 못한 상상을 해버린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옹알거렸다. 이내 마음이 들뜬 쥬느비에브는 책을 덮고 자리에 엎드렸다. 잠이 솔솔 몰려왔다. "에이드리안한테 말해 봐야지. 우리 바다 가자고. 바다 가고 싶어. 곧 여름 휴가도 있는데...음...음냐..." 어느 새 잠에 빠져 버린 쥬느비에브였다. 온도를 조절하는 레플리카 장치가 원활히 움직여 준 덕분에 쥬느비에브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Replica 殘像 - 레플리카 잔상 ]] 와아- 에이드리안! 반짝거려요, 유리컵. 우웅~ 너무 반짝거리고 투명해. 유리는 왜 이렇게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거예요?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걸. 유리컵에 눈을 대면 다 보여요. 예쁜 나무랑 햇빛도 다 보여. 글쎄, 원래 그렇게 생긴 거니까. 하지만 유리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요. 너무 투명하고 맑으니까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몰라. 그럼 그 속에 아무거나 담을 수 있을까요? 흐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쥬르. 만약에 유리 속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으면... 나, 내 노래를 담을래. 그럼 에이드리안은 내가 없어도 언제나 노래를 꺼내어서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럼 에이드리안은 내가 없어도 날 잊지는 않을 거야. 내 노래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나의 레플리카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그럼 난 그 유리, 깨버릴 거야. 에에? 어째서? 유리 속에 담긴 네 노래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네가 내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면 그 노래를 들을 거야. 다른 건 듣지 않아. 내겐 네가 곁에 있어야 네 레플리카가 내게 의미가 있는 거야. 곁에 없다면 노래도 듣고 싶지 않아. 네 노래만 곁에서 맴도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응... 응, 에이드리안. 나 유리 같은 거에 노래 담지 않을래. 에이드리안 곁에서 노래하고 싶어. 그건 내 가장 큰 소원이기도 해.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소원이야... 포기할 수 없는 소원이야.... 제64음(第64音) 해변에서 그대와 왈츠를!(2) 스콜라에서 저녁 늦게 서야 집에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 에이드리안이었다. 분명히 쥬느비에브에게 저녁까지 가구들을 다 치우라고 했는데 치우기는커녕 그 수가 더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목에 매고 있던 타이를 풀어 드레스룸으로 갔다. 드레스룸의 문을 연 그는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강한 압박감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드레스 룸 가득 쥬느비에브의 옷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기가 찬 에이드리안은 타이를 던져 넣고 얇은 질감의 하늘색 셔츠 하나를 꺼내어 손에 들고 자신의 침대로 걸어갔다. 그의 예상대로 쥬느비에브가 태연자약하게 엎드려 자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살폈다. 숨소리도 약하게 잘도 자고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쥬느비에브의 옆에 있는 책에 눈길이 갔다. 책을 들어 제목을 살핀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한 여름에 타오르는 정열?! 이게 뭐야?" 제목에서 오는 야릇한 느낌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찌푸리고 책장을 주루룩 넘겼다. 그리고 이내 한숨 섞인 탄식을 뱉어내며 책을 던져 버렸다. "이런 건 잘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순진한 거야. 이해할 수 없어, 정말." 에이드리안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셔츠를 벗고 가져온 하늘색 셔츠를 몸에 걸치던 에이드리안은 뭔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쥬느비에브가 침대 위에 주저앉아 눈을 말똥말똥 굴리고 있었다. 얼굴까지 발그스름해진 쥬느비에브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리고는 애꿎은 치마를 쭉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에, 에이드리안도 생각보다 몸이..." 문득 잠에서 깬 순간, 에이드리안의 벗은 상체를 보고만 쥬느비에브는 그의 몸이 호리호리한 것 같은데도 의외로 튼튼해 보이는 몸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왠지 부끄럽고 창피한 기분이 들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셔츠 단추를 잠그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독하게 새파란 눈동자에 겁에 질린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힘겹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 에이드리안, 왜 그러는 데요?" 순간 에이드리안이 손을 뻗어 왔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움찔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야!" 쥬느비에브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이 귓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는 양쪽 귀를 잡아당기며 심술궂게 말했다. "너, 네 가구 다 치우라고 했지. 말 안들을 거야, 응?" "하, 하지만 난 여기서 지낼 건데...우웅~ 아파요~" 쥬느비에브는 겨우 눈을 뜨고는 그에게 잡힌 귀를 사수하려고 이리저리 손을 휘둘렀다. 에이드리안이 다시 말했다. "말 안 들으면 벌 줄 거야. 안 치울 거야?" 에이드리안의 협박조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물 한 방울을 찍 눈에 달고 그를 노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노려보자 흠칫 놀라 귀를 잡고 있던 손에 한순간 힘을 뺐다. 그 순간, 쥬느비에브는 그의 손을 확 밀쳐내고 그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곧장 그에게 돌진했다. "쥬르, 무슨...읍!"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덮쳐온 쥬느비에브의 입술에 아연질색하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인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에도 쥬느비에브가 포기하지 않자 에이드리안은 결국 체념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에이드리안의 항복을 알아들은 건지 쥬느비에브는 웃으면서 보드라운 그의 입술을 살며시 핥았다. '정말, 이젠 키스도 버릇이 됐다니까!'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 자신이 몹시 겸연쩍었다. "쥬르, 그만 해. 그만..." "싫어요. 이 방에서 지내는 거 허락 안 해주면 계속 키스 할거야."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웅얼거리며 대화를 나누면서도 키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싫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등을 쓰다듬으며 힘없이 말했다. "쥬르, 자꾸 이러면..." 에이드리안은 말끝을 흐리며 쥬느비에브를 돌려 눕혔다. 그리고 입술을 내려 그녀의 목을 핥았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붉히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몸 속의 피가 한순간에 쭉쭉 퍼지는 것 같이 열이 났다. 그렇지만 너무 짜릿하고 기분 좋은 느낌에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었다. "에, 에이드리안. 나, 기분 좋아요. 음..." "가만있어. 가만..." 그렇게 말하고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블라우스 속에 손을 넣다 순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점점 크게 뜨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내, 내가 무슨...무슨..." 확 달아오른 뺨에 손을 가져가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쥬느비에브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는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허벅지까지 올라간 구겨진 스커트. 풀어져서 이리저리 날리고 있는 블라우스의 리본. 에이드리안은 순간 목구멍에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머리 속이 마비되고 있었다. 분명 정신을 잃었던 게 틀림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뻣뻣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 쥬르. 내, 내가 정신이 나가서..." 힘들게 짜낸 사과의 말을 꺼내며 에이드리안은 침대를 벗어났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한참 기분이 좋았는데 에이드리안은 왜 저러는 걸까? 좀 야, 야하긴 했지만...음....좀 부끄럽기 했지만. 사실 많이 부끄러웠지만. 아욱, 부, 부끄러워라. 머리도 좀 어지러운 것 같지만... 어쩌지? 어쩐다? 어쩌긴 뭘 어쩐다는 거지? 음...음...하아아아아아---'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늦게 서야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멀뚱멀뚱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머리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어지럽고 더운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저절로 침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그러다 그녀는 에이드리안이 방에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은 뻣뻣한 몸놀림으로 방을 벗어나고 있었다. 놀란 쥬느비에브는 침대에서 나와 그에게 달려갔다. 아직 할 말이 있는데! 쥬느비에브는 곧장 돌진해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하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쓰러졌고 에이드리안도 예상치 못한 충격에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왜, 왜 그래?" 넘어지면서 부딪힌 팔꿈치를 문지르며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계속되는 육탄전에 정신이 없는 그였다. 쥬느비에브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안의 팔을 꾹 잡았다. "하, 할말이 있단 말이에요." "으, 응. 말 해봐." 쥬느비에브의 단호한 목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다소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사실 방금 전의 상황으로 정신이 없었던 그였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한 번 꿀꺽 넘기더니 그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바다 가 보고 싶어요. 바다. 이번 여름 휴가에 바다 가요. 바다." "바다?" "응! 나 꼭 바다 가보고 싶어." 쥬느비에브의 기대에 찬 눈빛에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았어. 근처에 내 별장이 있으니까 여름 휴가, 그 쪽으로 가자. 바다도 가까워." "응! 헤헤." 기분 좋게 웃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쥬르는 순진해서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래, 조심해야 돼. 결혼 전에는 곤란해. 절대 조심해야 해. 얜 아기가 양배추 밭에서 나오는 줄 아니까. 후- 정말 피곤하다니까.' 젊은 날, 순진하기 그지없는 약혼녀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에이드리안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확 결혼해 버려? 아니, 아니야. 결혼을 해서 어쩌자는 거야. 결혼해서 아이라도 생기면 쥬르는 어쩌고? 아직 졸업까지 3년이나 남았는데. 분명 아이를 낳으면 스콜라에 데리고 다닐 게 뻔하니까 그건 막아야 해. 더 이상 가십거리가 될 수는 없어! 그래, 그래야 내 아이에게도 면목이 서지.'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드리안에게 뭔가 고민이 많은 듯 했다. 안색이 수시로 변하고 계속해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고민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었다. 어쨌든 이제 에이드리안과 바다로 여름 휴가를 가는 것이다. 그 것도 단 둘이!! ******** 그로부터 몇 주일 후, 드디어 쥬느비에브가 그토록 기대하던 여름 휴가의 첫날이 밝아왔다. 여름 휴가는 대부분 한 모네 정도 주어지는데 에이드리안은 매년 본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자신의 별장에 가는 것도 무척 오랜만의 일이라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날아갈 듯 기분이 붕붕 뜨고 있었다. 여름 휴가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그녀는 요 몇 주일동안 거의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물론 그 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에이드리안의 외박이 잦아졌던 것이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계속 외박을 하는 바람에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나서 가출까지 결심했지만 꾹꾹 참았다. 여름 휴가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안을 화나게 해서 여름 휴가를 못 가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가 유벨과 케이로프의 사택에서 머물렀다고 해서 그나마 화가 풀렸던 것이다. 사실 에이드리안이 이렇게 외박을 자주한 것은 자기 멋대로 가구를 옮겨온 쥬느비에브가 그대로 그의 방에 눌러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새 원래 그녀의 방에 있던 가구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방으로 옮겨졌고 그녀의 물건도 남김 없이 그의 보금자리로 속속 침투했다. 어느새 '그의 방'은 '우리 방'이 되었고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이상 그의 방에서 편하게 잠잘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벨과 케이로프의 사택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집에 있으면 기어코 쥬느비에브에게 끌려가 이렇게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난로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꼼지락거리며 잘도 자는 그의 약혼녀를 품에 안고 온갖 잡생각에 어김없이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워야 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우여곡절의 시간들을 넘어 드디어 쥬느비에브가 그렇게도 고대하고 기다려왔던 날이 드디어 찾아왔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짐을 꾸렸다. 며칠을 고민하여 골라놓은 여름 옷가지를 잘 정리해서 여행 가방에 넣고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여행용 화장품 세트를 작은 가방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모롤라 한 박스를 가방 앞에 낑낑거리며 옮겨 놓았다. 이 모롤라는 그녀가 숨겨 놓고 자기전에 하나씩 먹던 것이었는데 이번 휴가가 꽤 길어질 것 같아 들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고는 자리에서 폴짝폴짝 뜀박질을 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으로 돌진했다. 그녀는 나풀나풀거리는 시원한 소재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에이드리안이 예전에 선물로 준 은빛 방울이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걸을 때마다 딸랑딸랑 귀여운 소리가 났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져 몸을 베베 꼬다 다시 그녀의 서랍으로 달려갔다. "어휴- 정신 없네." 쥬느비에브는 숨을 몰아쉬며 서랍을 열어 리본을 찾기 시작했다. 서랍 안에는 고급스러운 리본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녀가 안느마리나 미라벨과 함께 상점가로 갈 때마다 사온 리본도 많았지만 통 큰 에이드리안이 한 번에 스무 개씩 사줄 때가 많아서 리본은 거의 포화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예전에 자신이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것이 안쓰러웠던 것인지 옷이나 장신구, 신발 같은 것을 넘칠 정도로 사주었다. 덕분에 의상실 프랑소와즈의 마담 일레시아는 그녀가 갈 때마다 입이 귓가에 걸릴 정도로 웃곤 했다. 쥬느비에브는 매끈한 흰 색 리본 두 개를 꺼내 거울로 달려가 양 쪽으로 머리를 쫑쫑 땋기 시작했다. "나는야 쥬르, 쥬르, 귀여운 쥬르, 나는야 쥬르, 울라라, 울라라-" 자신이 즉석에서 작사, 작곡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움찔움찔 거리면서 춤을 추던 쥬느비에브는 다 땋아져 내려온 머리를 보고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음- 준수하군. 아. 하. 하."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멋진 장군님처럼 거나하게 웃은 쥬느비에브는 순간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탁 치고 다시 서랍 쪽으로 달려갔다. 서랍에서 작은 다이아몬드가 총총 박힌 핀 한 개를 꺼낸 쥬느비에브는 핀을 한쪽 머리에 쿡 찌르고 새침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반해 버리면 어쩌지? 아이, 부끄러워." 괜히 얼굴을 붉히며 몸을 꼰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드레스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편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타이를 꺼내어 차곡차곡 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서랍 쪽으로 걸어가 미리 어제 챙겨둔 그의 향수와 화장품 세트를 가져왔다. 몇 종류 되지 않는 화장품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를 킁킁 거렸다. "흠- 에이드리안은 얼굴에 별로 바르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거지? 향수 냄새는...음...나도 이거 써 볼까?" 예쁜 유리병을 흔들어 보며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었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루이즈가 들어왔다. "아가씨, 도련님이 기다리세요. 어서 나가셔야죠." "응! 루이즈 아주머니. 여기 짐들 다 부탁드려요!" 루이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대답하고 챙이 넓은 모자를 가져와 머리에 쿡 눌러썼다. 루이즈 아주머니에게 손을 흔든 쥬느비에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쿠당탕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사택 밖으로 달려온 쥬느비에브는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분명!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비비고 그녀의 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유벨과 안느마리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폭소를 터뜨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짐을 체크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에이드리안이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았다. 이내 쥬느비에브를 발견한 그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쥬르, 짐 다 챙겼어?" "이게 뭐예요?" 쥬느비에브는 볼멘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하얀 모자의 챙을 손으로 죽 잡아당겨 머리에 눌러쓴 그녀는 잔뜩 입술을 내밀고 원망스레 그를 쳐다 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뭐냐니. 우리 여름 휴가 갈 거잖아." "우리 둘이서 가기로 했잖아요!" 쥬느비에브는 빽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고함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았다. 유벨 일당들은 쥬느비에브가 나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쥬르, 우리 휴가 가는 걸 알고 다 같이 가겠다고 해서..." "난 몰라. 난 몰라. 에이드리안 미워! 흐, 흐어어어엉, 흐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무너진 기대감과 가슴 가득 채워진 실망감으로 결국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달래려고 에이드리안이 애를 썼지만 그녀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 온 유벨 일당이 아무리 구슬려도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에이드리안은 그녀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오래도록 그녀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결국 다시는 외박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마차에 올라탄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에이드리안이 어떤 심정으로 유벨들을 불렀는지. 그야말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약혼녀와 단 둘이서만 지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던 에이드리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제65음(第65音) 해변에서 그대와 왈츠를!(3)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쑥 내밀고 마차에 타고 있었다. 비록 에이드리안의 달래는 말에 넘어가긴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둘만의 여행인데 기대감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허탈감마저 들고 있었다. 전에 비인 가에 갈 때도 둘이 같이 여행을 하기는 했지만 그 때와 지금은 엄연히 달랐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별장에서 오붓하게 보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에이드리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오직 그녀만을 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원했다. 스콜라에서 에이드리안은 늘 바빴다. 그 와중에 같이 있는 시간도 물론 많았지만 거의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녀는 잠시동안이라도 에이드리안을 독점하고 싶었다. "쥬느비에브, 어디 아파?" 조용히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하던 안느마리가 슬쩍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쥬느비에브는 눈치 없이 따라 온 안느마리가 얄미워 고개를 홱 돌렸다. "안느마리, 미워. 미라벨 언니도, 케이로프 님도, 유벨 오빠도 다 미워." 쥬느비에브는 심술궂게 입을 뾰족 내밀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쥬느비에브의 톡 쏘는 말에 머쓱해진 안느마리는 유벨에게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유벨 님, 오늘 우리 잘못 따라온 거 같은데요?' '글쎄, 에이드리안이 같이 가자고 먼저 그랬잖아. 우리 잘못은 아니지.' 짐짓 모른 체 고개를 돌리던 유벨은 에이드리안에게 책망의 시선을 주었다. 쥬느비에브의 반대쪽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곱지 않은 시선에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쥬르, 어차피 다 같이 가게 된 거잖아. 기분 좋게 가자. 응?" "몰라. 에이드리안 바보." 쥬느비에브는 화가 풀리지 않는 것인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쥬느비에브가 그와의 여행을 몹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식사시간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없었다. 요즘 들어 자꾸 쥬느비에브가 귀엽게 보이고 예쁘게만 보여서 자신의 행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무리한 상황이 여러 번 있었는 데다가 자신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자꾸 만져보고 싶고 안아 보고 싶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자꾸 한숨이 나와 그대로 땅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쥬느비에브는 쥬느비에브대로, 에이드리안은 에이드리안대로 별로 좋지 못한 기분으로 여름 휴가를 떠난 그들이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샌드위치의 치즈같이 꼭 끼인 유벨 일당들도 기분 좋을 리 없는 시작이었다. ******** 에이드리안의 별장은 아담하고 보기 좋은 곳이었다. 작진 않지만 소담한 집에 주위에는 작은 정원이 만들어져 있었고 해안가로 돌길이 주욱 이어져 있었다. 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가려줄 나무들도 많았고 휴양지로서는 그저 그만인 곳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였으면 좋다고 방방 뛰어 다닐 쥬느비에브가 너무나 조용해서 일행들은 덩달아 무거운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쥬느비에브의 기분이 너무 침체되어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집 안은 깨끗했다. 별장에 상주하는 하인들이 항상 청소를 하기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계속되는 침묵을 못 견디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도 에이드리안을 노려보며 옆방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제야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어휴, 정말 숨 막혀서 못 살겠어요. 도대체 어쩌자고 우리가 여기 온 거죠?" 미라벨이 질린 얼굴을 손으로 부치며 말했다. 케이로프가 묵묵히 집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서 같이 가자고 하셔서 따라오게 된 거잖나." "하지만 그 녀석, 꼭 따라와 줬으면 하는 눈치라서 따라왔더니, 분위기 영 아닌 걸?" 유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느마리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이랑 둘이 있고 싶었는데 우리가 따라와서 화난 거 같아요. 솔직히 우리가 눈치가 없긴 했죠. 둘만의 여행에 끼여들었으니." 네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의 도끼눈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네 사람은 진지하게 상의한 끝에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들로서는 에이드리안보다 쥬느비에브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관계는 언 듯 보기에 에이드리안이 더 높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결국 쥬느비에브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모롤라를 사러 갔다고 할 때, 쥬느비에브가 세 상자를 주문하면 옆에서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핀잔을 준다. 무슨 모롤라를 세 상자씩이나 사느냐부터 해서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일순 쥬느비에브의 계획이 어긋나나 싶지만 곧이어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며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 결국 에이드리안은 머쓱한 얼굴로 다섯 상자를 주문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런 관계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어 에이드리안이 버럭 화를 낸다던가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그가 이길 확률이 많지만 이번처럼 쥬느비에브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경우 그녀의 승리가 보다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유벨을 비롯한 네 사람은 이런 관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안 돼.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절대 안 될 말이야." 의외로 에이드리안의 반응은 단호했다. 유벨과 미라벨, 안느마리, 케이로프는 그의 반응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들이 떠난다고 하면 당연히 그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에이드리안은 계속 머물러달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네 사람은 인상을 썼지만 에이드리안의 고집을 말릴 만한 배짱은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는 쥬느비에브의 매서운 눈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앞에는 에이드리안, 뒤에는 쥬느비에브라는 엄청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휴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피곤한 시간을 보내게된 그들이었다. ********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의 관계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단단히 삐친 것 같았고, 그녀에 대한 에이드리안의 반응도 의외로 심드렁했다. 두 사람사이에는 여전히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고 잘 놀다가도 두 사람만 나타나면 침묵이 전염되는 바람에 유벨을 비롯한 네 사람도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네 사람은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을 데리고 해변 가에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쥬느비에브는 바다가 신기한 것인지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노란색 원피스 수영복까지 입고 나온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바닷가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손에 들고 나온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 헥, 헥. 힘드네. 다시 부우우우우우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열심히 공기를 불어넣던 쥬느비에브는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탱탱하게 부풀어오른 튜브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튜브를 물에 띄우고 방실방실 웃으며 튜브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야아- 기분 좋아. 행복해애--" 물장구를 치며 첨벙거리던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에게 열심히 손짓을 했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쥬느비에브의 튜브를 잡고 물을 튀겼다. 이내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의 물장난이 시작되었다. 안느마리와 물장난도 치고, 모래성도 쌓고 분주하게 시간을 보낸 쥬느비에브는 즐거운 것인지 연신 함박 미소를 띄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그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바닷가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의 화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유벨 일당은 점점 고민스러워지고 있었다. ******** "콜록, 콜록." 에이드리안은 연신 기침을 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어젯밤에 창문을 열고 잤더니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았다. 해변 가라 아침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게다가 쥬느비에브가 바닷가에서 노는 것이 즐거워 보여 계속 바깥에 있었더니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목이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고 머리도 멍했다.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침대로 걸어가 풀썩 드러누웠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몽롱한 머릿속에 잠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추워? 이불 덮어야지...이불...' 에이드리안은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이불을 찾으려고 손을 뻗어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겼다. "...파요?" 뭔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뭘까. 그냥 자야겠다. "아파요?" 조금 더 큰 소리였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에이드리안, 아파요? 열도 나네." 언제 왔는지 쥬느비에브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내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를 보는 게 힘들었다. 왠지 모르게 너무 피곤했다. "안 아프니까 가." "에이, 열 나는데?" 쥬느비에브는 손을 내려 다시 그의 이마를 만져보며 인상을 썼다. 차가운 쥬느비에브의 손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행동에 심술이 났는지 침대 위에 올라와 그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왜 그래요? 내가 화내서 신경질 난 거예요? 응?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에이드리안의 반응이 없자 쥬느비에브는 시무룩하게 몸을 일으키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싸웠다지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줘야 할 게 아니야!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에이드리안이 얼굴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지고 싶어." "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고 싶어." 쥬느비에브는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하지만 자꾸 얼굴이 달아오르는 이유를 그녀도 알지 못했다. 순간 에이드리안의 팔이 뻗어오더니 쥬느비에브를 확 끌어당겼다. 쥬느비에브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만 깜빡거렸다. 귓가에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참을래. 나중에... 좀 더 크면. 응... 쥬르가 좀 더 크고, 나도 좀 더 크면... 쥬르는 누구보다 아껴줘야 할 사람이니까."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 준 것 같았다. 왠지 가슴 한 쪽이 뭉클한 것 같았다. 괜히 트집잡고 화낸 게 미안해졌다. 맞아, 에이드리안 한테 화낸 건 사과해야 겠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 우리 화해해요. 네? ...으응?" 에이드리안이 자고 있었다. 그 사이 잠을 자다니. 쥬느비에브는 약간은 허탈감에 빠졌지만 이내 마음을 풀고 에이드리안의 등으로 주섬주섬 팔을 미끄러뜨렸다. 두 팔로 꼬옥 그를 품에 안은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자면 따뜻하다니까." 곧 이어 행복한 꿈나라로 가버린 쥬느비에브였다. ******** "뭐죠? 저 모습은." 미라벨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에이드리안의 방에 엄청난 기세로 달려간 쥬느비에브가 좀처럼 나오지 않아 혹시 두 사람이 심하게 싸우는 것이 아닌가 싶어 들어와 봤더니 두 사람은 다정하게 꼭 껴안은 채 기분 좋게 낮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까는 완전 싸울 태세로 들어가더니.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에이드리안 님께 항의를 하겠다고 들어가더니." 안느마리는 쓴 입맛을 다시며 발로 바닥을 쿵쿵 찼다. 유벨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어이, 우린 이만 돌아가야지?" "아아- 근처에 내 별장이 있으니 그리로 가지. 아직 휴가는 많이 남았으니." 케이로프는 밖으로 걸어나가며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즐거운 여름 휴가를 보내도록 도와주소서.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여-"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케이로프를 보며 미라벨과 안느마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케이로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되었든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화해를 해서 무거운 짐을 덜어버린 그들이었다. 이젠 가볍게 여름 휴가를 즐기는 일만 남았다! ******** "에이드리안! 코 단단히 막아요. 바닷바람 맞으면 안 좋아! 쥬느비에브는 깔깔깔 웃으며 바닷가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해서 기쁜 것인지 유벨 일당들이 사라져서 기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에이드리안은 얇은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낮에는 그렇게 파랗던 바다가 밤이 되니 마치 일부러 까맣게 칠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모래사장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쥬르,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옷 젖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말하며 좀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쥬느비에브는 그녀의 하늘색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바다 너무 좋아요!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 쥬느비에브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모래를 토닥거리며 열심히 성을 쌓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귀를 쫑긋거렸다. 무언가 음악이 들리고 있었다. 감미롭고 좋은 곡이었다. 에이드리안도 음악을 들었던 것인지 고개를 돌리고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순간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고 쥬느비에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친애하는 에슈비츠 양, 밤이 깊었지만 부디 저와 함께 왈츠를." 에이드리안이 약간 허리를 굽힌 채 손을 내밀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의 몸짓이 너무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여 왠지 멋져 보였던 탓이다. 쥬느비에브는 모래를 만지고 있던 손을 탁탁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었지만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비인 님." 쥬느비에브도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음악과 함께 두 사람은 사뿐사뿐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얀 모래밭 위에 발자국이 찍혔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와 가느다란 음악 소리만 맴도는 바닷가에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춤을 췄다. 그것은 놀랍도록 신비하고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주어 어느 새 온갖 생각들을 말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즐겁게 춤을 즐겼다. ******** "우리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죠?" 미라벨은 레플리카를 뿜어내며 거칠게 물었다. 풀숲을 헤치며 얼굴을 내밀고 있던 유벨이 힐끗 미라벨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자고. 두 사람 화해시켜야 한다고 다시 돌아오자고 한 사람은 미라벨이잖아." 미라벨은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케이로프가 말했다. "힘들면 좀 쉬지. 내가 이어서 할 테니까."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케이로프가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이 있는 곳으로 레플리카를 사용했다. 아름다운 왈츠 음악이 퍼졌다. 케이로프가 보내고 있는 음악덕분에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아주 즐거운 듯 왈츠를 추고 있었다. 특유의 기괴한 레플리카 때문에 오늘 '음악 생중계' 멤버에서 제외되어 너무나 심심했던 안느마리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코를 훌쩍이며 모래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 언제까지 춤 출거야. 배도 고프고 추운데. 훌쩍." 하지만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 두 사람의 춤은 새벽이 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덕분에 화해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이었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그 다음날 휴가도 즐기지 못하고 감기로 드러누워 버렸다. 희비가 교차하는 여름 휴가였다. 제66음(第66音) 갑작스런 방문자(1)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긴 여름 휴가를 다녀 온 뒤로 약간 탔던 얼굴이 서서히 원래의 뽀얀 피부로 돌아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가 동방에서 직수입해 왔다는 미백 크림을 튜브에서 쭉 짜내 얼굴에 토닥거렸다. 걸쭉한 크림은 각종 한방 재료로 만들어진 고급 화장품이었다. 왠지 좀 이상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여름의 뜨거운 햇빛에 익은 피부를 진정시키는데는 더없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말랑말랑한 고무 튜브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것를 코로 가져갔다. "아이, 냄새...쓰고 맛없는 냄새야."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한 번 쓰고 크림이 담긴 튜브를 손에 들고 꼼꼼하게 사용방법을 읽어보았다. 그러다가 튜브에 찍혀 있는 광고 문구를 보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 남자가 키스하고 싶은 피부?! 아이, 참, 부끄럽게. 헤헤. 내 피부 보면 에, 에이드리안이 키스하고 싶어질까?" 쥬느비에브는 부끄러움에 벅벅 머리를 긁으며 크림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커다란 빗을 꺼내 죽죽 머리를 빗은 그녀는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한 바퀴 휭 하고 돌았다. 오늘의 의상은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안느마리가 예쁘다고 말해준 옷이었다. 반질반질한 붉은 색 치마는 마치 드레스 같이 풍성하게 발목까지 퍼졌고 그 위에 입은 상체에 딱 맞는 하얀색의 재킷은 프릴이 어깨에서 허리 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나풀나풀 달려 있었다. 얼마 전에 에이드리안과 시내에 나가서 사온 분홍색 꽃 장식이 달린 구두를 꺼내 신은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붉은 색 손가방과 하얀 모자, 그리고 한 묶음의 서류가 놓여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손가방 안의 물건을 꼼꼼하게 챙기고는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들어 머리 위에 꾹 눌러썼다. 모자는 상의와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붉은 색 레이스로 만들어진 커다란 꽃 장식이 붙여져 있었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워진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서류를 손에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 쥬느비에브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학생회실로 향했다. 오솔길을 지나 스콜라로 들어서자 많은 학생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인사를 할 때 유심히 보아둔 모습을 생각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돌려주었다. 물론 기품 있게 미소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내 모습도 레이디 같지 않을까? 쥬느비에브는 왠지 뿌듯한 마음에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라벨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라벨은 요즘 들어 기품 있게 인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몹시 놀라워했다. 그녀가 그렇게 연습을 시켰어도 귀족다운 인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쥬느비에브가 그저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따라한 것만으로 성공을 했으니 미라벨로서는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생각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이 인사하는 건 정말 멋져 보이는 걸. 저절로 따라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게다가 미라벨 언니 예법 수업은 지루해서 잠만 오니까 아무리 수업을 들어도 인사법을 깨우칠 리가 없잖아.' 대강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은 쥬느비에브는 가방을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오늘 오전에 결제한 서류를 에이드리안에게 건네주기 위해 학생회실에 가는 길이었다. 요즘은 꽤 일을 잘 한다고 에이드리안에게 칭찬 받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쥬느비에브는 더욱 열심히 학생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칭찬 받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 그녀가 학생회실에 다 와갈 즈음, 그가 나타났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는 쥬느비에브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헤이! 아가씨!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 깜빡였다. 이상한 남자가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건들건들 거리는 폼이 꼭 동네 불량배 같았다. 화려한 무늬가 단연 압권인, 남자가 입고 있는 가죽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는데 떨어지거나 해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찢어놓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머리 색이 기가 막힐 정도로 괴상했다. 알록달록 무지개 색깔, 아니 예전에 딱 한번 동물원에서 본 공작새 깃털 같은 색깔이었다. 학생이라기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서류를 가슴에 꼭 안고 대답했다. "누, 누구세요? 스콜라 학생은 아니신 것 같은데..." "오우~ You!! 잘 아는군 그래~ 난 말이지. 이 아르헨에서 가장 자유롭고 멋진 사나이지. 아하하- 음하하하하-"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으스대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뭔가 자신의 정신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볼을 부풀리며 남자에게 말했다. "저기, 전 바빠서 말이죠. 에이드리안한테 가야되거든요." "오우~ No~!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라고 했나? 아하~ 까만 머리에다 귀엽고 깜찍한 그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말았어. 어때, 내가 어떻게 그대의 정체를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나?" 쥬느비에브는 웃지도 못할 상황에 엉거주춤하게 표정관리를 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왜 자꾸 말을 잡아채는 걸까. 쥬느비에브는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제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구요, 제가 지금 바쁘다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저 지금 에이드리안한테 가야하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쥬느비에브는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쳐서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이상한 남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따라오는 거예요? 전 지금 바빠서 아저씨 상대해 줄 시간 없어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남자가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오우~ No~! 아저씨라니, 아저씨라니? 난 이래봬도 창창한 이십대라고. 큐티하고 뷰~티풀한 아가씨, 오. 빠. 라고 불러줘요~" 남자의 느끼한 말에 기가 막힌 쥬느비에브는 눈을 질끈 감고 꽥 소리를 질렀다. "오빠는 누가 오빠에욧! 자꾸 따라오면 에이드리안한테 이를 거에욧!"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오우, 오우, 안 될 말이지. 그것만은 오우~ No~에요~ 사실 난 아가씨한테 한 눈에 반했다고~ 아가씨처럼 큐우~티하고 뷰~티풀한 아가씨는 정말 드물다고." "에에? 뭐라고요?" 쥬느비에브는 기겁을 하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어찌되었든 쥬느비에브는 이런 느끼하고 유들유들한 남자는 정말 싫었다! "나, 난 약혼자가 있어요! 그, 그리고 난 세상에서 에이드리안이 제일 좋으니까 자꾸 따라오지 마세요! 다, 당신 같은 아저씨랑 바람 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따라오지 말아요. 아셨죠?" 쥬느비에브는 말을 내뱉고 뒤돌아서 쌩 하고 달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이상한 남자가 힘차게 뛰며 뒤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가방을 뱅글뱅글 흔들며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학생회실로 내달렸다. ******** 헉- 헉- 헉- 쥬느비에브는 숨을 헐떡이며 학생회실 문을 쾅 하고 열어 젖혔다. 그리고 다짜고짜 에이드리안에게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쥬느비에브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자 놀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결국 눈물을 방울방울 달고 훌쩍이며 말했다. "에,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이, 이상한 아저씨가 따라와서...나한테 반했대요, 훌쩍, 훌쩍." "이...상한 아저씨? 너한테 반했다고?" 에이드리안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쥬느비에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고 있던 유벨이 말을 건넸다. "스콜라에 웬 잡상인? 여기 잡상인 출입 금지 구역인데. 혹시 변...태 아냐? 처음 보는 여자 애한테 반했다구?" "그 이상한 아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 봐. 사람 풀어서 찾으라고 할테니까." 에이드리안이 조심스레 그녀를 달래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울먹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꾸욱 가슴에 품고 말했다. "다 찢어진 가죽옷에다가 머리는 공작새처럼 알록달록한데다가...하여튼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이상한 아저씨였어요! 훌쩍, 훌쩍." 순간 유벨과 에이드리안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특히 유벨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묵묵히 창 쪽으로 돌리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분명 그런 인상착의였어? 그래? 걱정하지 마. 나, 아는 사람이야. 울지 말고." "하, 하지만 무서웠단 말이에요! 흐, 흐어엉, 흐어어어어엉-"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만 쥬느비에브였다. 에이드리안은 난처한 얼굴로 유벨을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유벨은 민망하다는 듯 애써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그 사람, 유벨 오빠 말처럼 변태가 틀림없어요! 안 그러면 얼굴도 모르는 나한테 그렇게 이상하게 굴 리가 없잖아요. 우리 어서 그 변태 아저씨 잡으러 가요. 흐엉, 흐어어어어엉-" 그 때 문이 열리며 화려한 섬광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알록달록 공작새 머리의 청년이 들이 닥쳤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옆에서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던 에이드리안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의문의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외쳤다. "오우~ 싸랑하는 동생들! 잘 있었나? 으하하하하-"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유벨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실룩이며 한숨을 쉬고는 힘없이 말했다. "오랜만이야, 프란체스 형." ******** 쥬느비에브는 프란체스의 시선에 움찔거리며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꾸욱 잡으며 몸을 사렸다. 너무 긴장해서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저 이상한 아저씨가 유벨의 형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변태 아저씨는 아닌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아 그가 좋아하는 차를 마시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심드렁하게 프란체스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웬 일이야, 프란체스 형? 형 덕분에 내 약혼녀가 이렇게 놀랐다고. 도대체 그 머리하고 옷, 어떻게 좀 안 되겠어?" "오우~ 나의 사랑하는 사촌 동생, 에이드리안! 너까지 나의 자유로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마음이 아플 뿐이지." 딸기 주스의 빨대를 쭉쭉 빨며 프란체스가 말했다. 듣고 있던 유벨은 기가 막히다는 듯 프란체스의 이마를 주먹으로 쿡 쥐어박고 말했다. "이건 형이 아니라 웬수라니까! 어쩌자고 그런 꼴로 온거야? 이러니까 어머니가 걱정하시지! 형 도대체 결혼은 언제할 생각이우? 그런 꼴로 다니다가는 80살이 되어도 호호 노총각으로 있어야 할거야." 유벨의 호통에 프란체스는 싱글싱글 웃더니 유벨의 어깨에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동생~ 동생은 너무 무섭다니까아~" "으아! 징그러워!" 유벨은 닭살이 돋는다는 듯 팔을 휘저으며 프란체스를 겨우 떼어냈다. 쥬 느비에브는 갑자기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다. 프란체스를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예전에 몇 번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에는 항상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처럼 느껴져 이런 이미지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가만히 보니까 꽤 재미있는 사람인 거 같았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게다가 꼼꼼히 살펴보니 유벨과도 꽤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사실을 들으면 유벨은 기겁을 하고 싫어할 것 같지만. 프란체스를 살펴보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오우~ 큐티 레이디이~ 나한테 반해버리셨나?" "프란체스 형. 쓸데없는 소리하면 쫓아내 버릴 거야." 에이드리안이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프란체스는 손을 흔들며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너와 에슈비츠 양의 사이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사이라고 하던데. 으음~ 알만 하군. 다음에 본가에 가면 일로나 할머님과 내 어머님이신 비앙카 님에게도 소문을 쫘악..." "형!" 프란체스는 에이드리안의 날카로운 눈빛에 머쓱해졌는지 머리를 긁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나저나 에이드리안, 이번에도 엄청나게 좋은 술을 가져왔단다. 이번에는 동방 제국산의 150년 숙성시킨 천연 과일주! 흠...제국에서도 몇 병 되지 않는 귀한 거야." "형, 얼마 전에 에드, 형이 준 술 마셨다가 숙취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독한 술은 좀 가져오지마." 유벨이 핀잔을 주자 프란체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왜 술을 마셨을까, 에이드리안? 평상시에는 손도 안 대는 녀석이...흠..의심스러워, 의심스러워... 혹시 에슈비츠 양과의 그윽한 밤을..." "형!!" 에이드리안이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프란체스는 깜짝 놀라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였다. 쥬느비에브는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프란체스의 행동이 재미있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이상해서 무섭기까지 했지만 가만히 보니 재미있는 성격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프란체스와 에이드리안의 실랑이를 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그 때 방문이 활짝 열리고 안느마리가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순간 안느마리는 눈썹을 실룩이더니 놀랄만한 육감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공작새 머리의 남자가 유벨의 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느마리는 곧장 달려가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아주버님!!" 안느마리의 말에 프란체스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손뼉을 치며 팔을 벌려 안느마리를 안았다. "오오~ 네가 소문에 듣던 안느마리 양이로군. 우리 유벨을 잘 부탁하마. 저 녀석, 숫기가 없어서 말이야. 이왕이면 결혼도 빨리해서 조카가 보고 싶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버님.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안느마리와 프란체스의 감동적인 포옹을 보며 유벨은 기겁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유벨은 힘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쥬느비에브는 자꾸만 재미있어지는 상황에 씨익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저 공작새 머리 아저씨, 폭탄 같아요, 폭탄. 너무 재미있어." 생글생글 웃는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에이드리안도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안느마리와 프란체스의 포옹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제67음(第67音) 갑작스런 방문자(2) 에이드리안은 집에 빠뜨리고 온 서류를 가지러 왁자지껄한 학생회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곧 이어 들어온 미라벨과 케이로프까지 합세해 학생회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프란체스가 머무는 곳은 항상 분위기가 들떠서 마치 활기찬 시장 같았다. 스콜라 시절, 학생회를 가지고 있을 때만 해도 프란체스는 지극히 모범적이고 성실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학생회가 <엘크로이츠>에 통합되고 나서 그는 180도 달라졌다. 자유방임을 외치며 온갖 망나니짓을 저지르고 다닌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항상 적절한 수준에서 멈춰있었고 이전의 다소 억압된 모습과는 달리 오히려 자유로와 보여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좋게 받아들였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사택으로 통하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프란체스 형은 유벨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마치 친형제처럼 지내오던 사이였다. <엘크로이츠>를 위해 자신의 학생회를 해체하기까지 한 프란체스가 그는 항상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지금은 평의회에서 활동하며 누구보다 정확하고 광범위한 소식통을 가지고 그에게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그나 유벨에게 있어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었다. 오솔길의 돌을 굴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에이드리안은 순간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 보았다. "프란체스 형." 프란체스였다. 그는 싱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뒤에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다들 놔주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서 온 거야." 프란체스는 손을 들어 머리를 낚아챘다. 가발이 벗겨지고 단정한 회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자못 진지해진 그의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은 심각한 이야기가 있음을 눈치챘다. 프란체스는 그의 회색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진지하고 엄숙하게 변했다. 학생회 <슈르트홀츠>를 해체하고 나서 거의 볼 수 없었던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조용히 말했다. "호숫가로 가지. 프란체스 형." ******** "너 어릴 때, 그렇게 조그맣고 귀여웠는데 세월 한 번 빠르군. 약혼녀라... 후, 쥬느비에브 양, 꽤 귀엽고 착하던데?" 프란체스는 싱긋 웃으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아 호숫가에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무 그늘 밑에서 본 호숫가는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은색 끈으로 묶인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착하고...좋은 아이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그래, 넌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지. 나 또한 네게 빚이 있고. 솔직히 네가 학생회를 만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나야. 난 평의회 의장이니 그런 거창한 것과는 맞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이 있다면 거기에 만족할 놈이지, 난." 프란체스는 나무둥치에 기대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프란체스 형의 실력은 모두 알고 있어." 에이드리안의 말에 프란체스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 그의 회색 눈동자를 파란 하늘로 올렸다. "네가 나의 짐을 덜어주어서 난 그제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 하루하루 내게 거는 기대에 보답하도록 안간힘을 써야했어. 난 그럴만한 그릇이 아닌데. 사람들의 기대가 날 짓눌렀어. 단지 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는 이유로. 난...내게 자유를 준 네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프란체스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프란체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쉽게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보챌 생각은 없었다. 그가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은 그가 하려는 말이 그만큼 힘겨운 주제라는 이야기였다. 프란체스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프란체스는 지긋이 눈을 감고 힘겹게 말했다. "엘로이즈가 찾아 왔었다며? 네게 용서를 구했겠지?" "응." 에이드리안은 바닥에 눈동자를 내리고 짧게 대답했다. 프란체스는 멍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녀 나름대로 몹시 고민하고 용기를 내어 말한 걸거야. 넌 물론 그녀에게 용서한다고 말하지는 않았겠지." "프란체스 형이 엘로이즈 누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도 알아. 하지만 내게는 나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어.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느꼈던 그 때 그 시간이 다시 되돌아 온다해도. 하지만 안심해. 엘로이즈 누님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으니까." 에이드리안은 다소 굳은 얼굴로 프란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란체스는 슬픈 표정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훗, 그래. 엘로이즈는 세상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여자야. 알아, 네가 무얼 생각하는지. 하지만...하지만...에이드리안. 너 그거 생각해봤어? 우리 대(代)에서는 아직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다음 대에는 벌써 '그것'이 나타났지. 아직까지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프란체스의 조용한 말에 에이드리안은 순간 안색을 바꾸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불안감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설마...아니겠지? 엘로이즈 누님이...그럴 리가." 프란체스는 공허한 눈동자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난 이 비인 가문이 지긋지긋해. 서로 상처받고, 상처 입히고. 소중한 사람조차 내 손으로 지켜주지 못한 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비인 가문의 사람이어서 받아야할 고통이니까. 하지만 너무 잔인해. 대속성 레플리카는...저주받은 힘이야. 아무리 원해도 바뀌지 않는 진실. 그녀를 위해서 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아무 것도." "프란체스 형... 내가 엘로이즈 누님을 만나겠어." 에이드리안은 프란체스에게 다가가 초조하게 말했다. 프란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미 늦었어. 내가 너에게 말했다는 걸 알면 아마 그녀는 몹시 날 원망할 걸? 그런 건 사양이야. 난...그녀에게 좋은 모습만 남겨주고 싶어." "프란체스 형." 프란체스는 표정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는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나도, 그녀도 네가 행복해지길 원하고 있어. 진심으로...이 말을 하고 싶었어."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프란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며 흩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가슴 한쪽이 욱신욱신 아파 왔다.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왜 모두 행복해질 수 없는 거지? 난...난...행복해 질 자격 따위 없는데. 없는데... 더 이상 아파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데." ******** 프란체스와 헤어지고 난 뒤 에이드리안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는 프란 체스가 바로 평의회에 돌아간 사실을 알면 다들 무척 아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띄웠다. 오랜만에 만난 프란체스였다. 모두 좀 더 함께 하고 싶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견 웃고만 있는 프란체스 형이 지금 몹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오늘 힘들게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그에게 하소연을 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지 못했다. 그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자꾸만 무거워지는 마음을 느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그는 쥬느비에브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쥬느비에브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짓으로 거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무거운 마음을 달래며 애써 미소지었다. "쥬르, 언제 온 거야?"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부르며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레 눈물을 보이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당황해 재빨리 그녀 곁으로 갔다. "쥬르, 무슨 일이야?" "나, 나, 벌레 밟았어요. 어떻게 해요--- 흐어어어엉----" '벌레'란 말에 에이드리안은 깜짝 놀라 쥬느비에브의 발을 쳐다보았다. 왠지 뻣뻣한 몸짓으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벌레를 밟아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에게 말했다. 버, 벌레라고? 이런. "그, 그럼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어서 벌레를 치워야지. 발 치워봐."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그치고 훌쩍이며 한쪽 다리를 살짝 들었다. 신고 있던 슬리퍼가 들어올려지며 납작하게 죽어있는 정체불명의 벌레가 나타났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훌쩍이며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에이드리안은 파리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계속 다리를 들고 있으려니 힘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발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 순간. "너, 벌레 묻은 슬리퍼로 다시 바닥을 밟아서 어쩌자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발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힘이 딸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끌어당겼다. "하, 하지만 에이드리안, 나 다리 아픈데. 훌쩍." 쥬느비에브는 계속 눈물을 글썽거리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바닥에 붙어있는 죽은 벌레를 찡그리며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바보. 슬리퍼 벗으면 되잖아." "아, 맞다. 슬리퍼 벗으면 되는구나. 헤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리퍼를 벗어 바닥이 보이도록 돌려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있게 다리를 바닥에 착지시켰다. 왠지 뿌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쥬느비에브였다. "에이드리안, 그럼 이 벌레, 치워야되는 거예요?" "당연하지." "그럼 누가 치워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등 뒤로 땀 한 방울이 찍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나, 난 벌레 너무 무서운데." "나, 난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에이드리안은 애써 시선을 돌리다 다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에이드리안의 시선에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이, 에이드리안도 벌레 무서워하는 구나." "그, 그런 게 아니야. 그, 그런 게 아니라....난 단지 이런 일은 적성에 안맞아서...그러니까...그게..."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것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리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이내 그것을 발견한 쥬느비에브는 쪼르르 달려가 그것을 가져왔다. 그것은 널찍한 종이였다. 쥬느비에브는 종이를 흔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내가 지켜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비록 벌레가 좀 무, 무섭긴 하지만 내가 치워 줄께요. 에이드리안이 벌레를 무서워 하니까 내가 용기를 내서 벌레를 퇴치해 줄게요."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손바닥에 송송 땀방울이 맺혔다. 치마 자락에 손바닥을 스윽스윽 닦고 난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붙어있는 벌레를 한쪽 눈을 감고 살짝 곁눈질하고는 벌레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코를 막고 종이를 부지런히 움직여 벌레를 종이 위로 올렸다.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코는 왜 막는 건데?" "냄새나니까요. 아, 맞아. 냄새는 안 나지." 코에서 손을 뗀 쥬느비에브는 무사히 종이 위에 올려진 벌레를 곁눈질하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벌레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충 힐끗 보고는 현관문을 열어 벌레를 앞마당을 휙 던졌다. "헥-헥- 힘들어. 벌레는 정말 무섭다니까. 아유." 쥬느비에브는 안으로 들어와 에이드리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넘겼다. "정말, 벌레는 싫다니까." "에이드리안, 나 좋죠? 벌레도 치워주고." "네가 밟아서 그런 거잖아. 벌레는 왜 밟아서... 아, 그런데 하인들한테 시키면 되는데 왜 굳이 우리가..." 에이드리안은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망연자실해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드리안, 모두 회식하러 갔는 걸요. 모두의 단결을 위해 톨레 아저씨랑 루이즈 아주머니가 하인 아저씨랑 하녀 아주머니랑 데리고 갔어요. 1도르간 정도 걸린다던데? 그런데 레플리카 쓰면 벌레 치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에 당황해 입을 벌렸다. 그렇다. 왜 그 생각을 못한 것인가. 레플리카를 쓰면 작은 벌레정도 '공간이동'시키는 것이 뭐가 어려우랴. 에이드리안은 울적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물었다. "프란체스 아저씨는 갔어요?" "응." "헤에- 아쉽다. 재미난 아저씨였는데. 하지만 아까 방에서 나갈 때 언 듯 봤는데 왠지 슬퍼 보였어요, 눈동자가."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자조적인 미소를 띄웠다. 가끔씩 쥬느비에브는 놀라운 관찰력을 보여준다. 한쪽 발에만 슬리퍼를 신고 생글생글 웃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양 쪽 발의 높이 차이로 절룩거리며 에이드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하지만 프란체스 아저씨가 슬퍼 보이는 건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나의 동물적인 육감이라고 해야 하나? 으음... 그치만 이해할 수 없어요. 소중한 사람이 있는데 왜 슬퍼하지?"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답답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쥬르, 소중한 사람이 있어도 아주 슬퍼질 수가 있어.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에이드리안은 말끝을 흐리며 쥬느비에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쥬느비에브의 표정이 너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당황해 쥬느비에브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이내 눈물을 글썽하며 대답했다. "아까 벌레 죽은 자리, 또 밟아 버렸어. 바닥 닦지도 않았는데... 양말 밖에 안 신었는데 느낌이 이상해요. 흐어어어어엉---"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쥬느비에브는 옆에서 계속 울음을 터뜨리며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옆에 있으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진다. 왜냐면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그것이 고맙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어떻게 사태를 해결할 것인가. 쥬느비에브는 아까의 뻣뻣한 몸짓으로 서 있었다. 한치의 미동도 없이 울먹이며 서 있는 그녀를 보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유쾌한 마음 뒤에 숨은 걱정 때문에 자꾸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벌레를 정말 싫어했다! 제68음(第68音) 내가 돌봐줄게!(1) 이 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스콜라에 재학 중인 학생 여러분이라면, 요즘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의 인기가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급생들뿐만이 아니라 상급생에게서도 선망과 존경의 눈빛을 받고 있는 에슈비츠 양. 항간에 긴 검은 생머리에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언제나 스콜라를 위해 헌신하는 그녀에게 뭇 남학생들이 사모의 정을 불태운다는 소문도 있고 에슈비츠 양과 한 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일부러 그녀의 뒤를 쫓아다닌다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 <엘크로이츠> 내부에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학생회장 에이드리안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것... <오늘의 에스플리크> 중 ********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고 있어서인지 아침바람이 꽤 쌀쌀했다. 에이드리안은 얇은 이불을 끌어올리며 솜이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매끄러운 소맷자락을 볼에 비비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팔을 뻗었다. 그리고 팔에 걸려든 것을 꽈악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의 '그것'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상대로 너무나 따뜻했다. 난로로서는 그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그것'을 품에 꼬옥 안았다. 에이드리안은 '그것'이 쥬느비에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름 휴가 전에 쥬느비에브가 멋대로 옮긴 가구들은 그가 계속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그 후로도 불쑥불쑥 그의 침대에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잘 때는 서로 밤인사를 하고 각자의 침실로 간다. 그러나 눈 떠보면 그녀가 꼼지락거리며 자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잔소리하기도 지쳐버린 그였다. 사실 그녀를 안고 있으면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도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었다. "따뜻해, 따뜻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끌어안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떴다. 그의 예상대로 쥬느비에브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발그스름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상한 생각에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 나잖아?" 에이드리안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와 뺨을 만져보았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이러니 따뜻할 수밖에! 에이드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끈을 잡아당겼다. 하인을 호출하기 위한 끈이었다. 그는 쥬느비에브를 침대 가운데에 눕히고 얇은 이불이나마 정성껏 덮어 주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의 손길에 잠이 깬 건지 쥬느비에브가 힘겹게 눈을 뜨며 그를 불렀다. 에이드리안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쥬르, 깼어?"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까만 눈동자를 에이드리안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에이드리안, 나 열나요. 머리 아파. 몸도 아파." "어제 밤늦게까지 밖에서 노래부르더니...몸살났나 봐." 에이드리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열에 들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그에게 대답했다. "잘 때 좀 추웠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에이드리안 꼭 안고 잤는데..." "쥬르, 말하지 말고 그냥 눈감고 누워 있어. 곧 루이즈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루이즈가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이것저것 지시사항을 전해주고 쥬느비에브를 돌아봤다. 힘겹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소맷자락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이마에 맺힌 땀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막 하우먼 박사가 조제해주고 간 해열제를 먹은 참이었다. "쥬르, 괜찮아? 많이 아파?" "으응, 그냥 머리가 좀 멍하고 몸이 무거운 것뿐이에요." 쥬느비에브는 힘겹게 미소지으며 이내 쌕쌕거리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에이드리안은 도톰한 솜이불을 그녀의 목까지 끌어 올려주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불 덮고 땀 푹 내면 금방 나을 거래. 그런데...쥬르." "네에?"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은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 오늘 의회에 가봐야 하는데...혼자서 괜찮겠어?" "으응.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루이즈 아주머니도 있고 톨레 아저씨도 있으니까." 쥬느비에브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올 때 시내 상점가 떡집에 들러서 떡 바구니 제일 큰 걸로 사다주세요."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도 먹는 걸 생각하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은 우스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쿡. 알았어. 올 때 사올 테니까. 약 잘 먹고 식사도 잘 하고 있어. 알았지?"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 속으로 쏘옥 얼굴을 파묻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쥬느비에브가 안쓰러워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에이드리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 아래층에 유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며 연한 청록색의 얇은 코트를 걸쳤다. 그는 의회에 가져가야 할 서류를 생각하며 부산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 회기 계획을 발표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갈색 바지와 베이지색 셔츠 차림의 유벨이 손을 들었다. "어이! 에드!" "유벨." 에이드리안은 유벨에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유벨은 다소 표정이 어두운 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어깨를 탁탁 쳤다. "쥬느비에브, 아프다며?" "응, 그래서 걱정이야. 하필이면 나 의회 가는 날에 아프다니..." 유벨은 얼굴을 찡그렸다. 에이드리안이 여간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심하고 의회에 가지도 못할 것 같았다. 유벨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쥬느비에브, 주위에 사람 많잖아? 의회에는 너와 나, 두 사람만이 가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 거야." 유벨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유벨, 나 학생회실에 가서 서류 좀 챙겨 올 테니까 스콜라 광장에서 만나자." "그래, 나도 그동안 할 일이 있으니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걱정되어서인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유벨은 팔짱을 끼며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흠..쥬느비에브를 어쩐다? 저대로 두면 에드 녀석, 걱정하느라 제대로 회기 계획 발표도 못할 것 같은데...결국 그 녀석밖에 없나?" 갑자기 한숨이 나오는 유벨이었다. ******** 안느마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유벨이 식당에서 만나자고 하다니! 그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두근거리고 뺨이 달아오르고...하여튼 몸이 평상시와는 다른 리듬으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식당의 테이블 앞에 앉아 초조하게 유벨을 기다리다 물잔을 들어 입으로 기울였다. 꼴깍꼴깍하고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며 긴장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한숨을 후 하고 쉰 안느마리는 재빨리 손거울을 꺼내 뺨에 파우더를 토닥거렸다. "흐음..이만하면 절세의 미인인데...훗, 정의를 지키는 미녀라...듣기 좋은데?" "누가 정의를 지키는 미녀야?" 안느마리는 얼른 손거울에서 눈을 들었다. 유벨이 호탕하게 웃으며 맞은 편 의자에 앉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최대한 조신하게 굴며 눈을 내리깔았다. "저번에 아주버님을 뵙고 전 깨달았어요. 확실히 저의 배필은 유벨 님밖에 없다는 걸. 유벨 님도 이제 깨달으셨나봐요. 아주버님께서 허락하신 마당에 우리 두 사람,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유벨은 안느마리의 말에 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저 찰거머리 같은 남자는 언제쯤 떨어줄 것인가! 우울해진 유벨이었다. "안느마리 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라..." "아주버님이 그 날 급하게 가버리셔서 정말 가슴이 아팠지요. 뭔가 잘 통하는 분 같았는데..." 유벨은 혀를 차며 눈썹을 실룩였다. 안느마리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 눈을 감고 그윽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느마리.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쥬느비에브 때문이야." "네에? 쥬느비에브요?" 쥬느비에브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야 안느마리는 유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벨은 기침을 한 번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가 아프니까 옆에서 좀 봐주라고." "뭐라고요? 쥬느비에브가 아파요? ...그런데, 왜 그 일을 유벨 님이 부탁하시는 거죠?" 안느마리가 의심스럽게 눈썹을 실룩이며 말했다. 왠지 기분이 나빠진 듯 했다. 유벨은 안느마리의 시선에 움찔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에, 에드는 오늘 나와 의회에 들어가야 해. 쥬느비에브를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그 녀석, 걱정하고 있다고." "물론 쥬느비에브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에요, 그 애가 아프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유벨은 안느마리의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한 표정에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뭔가 수상한 눈빛이었다. "제가 쥬느비에브 잘 돌봐주면 사례가 있어야겠죠? 유벨 님이 부탁하신 거니까. 좋아요. 제가 쥬느비에브 잘 돌봐주면 저와 데이트해주세요." "뭐라고?" 유벨은 안느마리의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느마리는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를 곁눈질했다. "싫으면 말구요. 그럼 불쌍한 쥬느비에브는 혼자 외롭게 끙끙 앓으며...에이드리안 님이 엄청 슬퍼하시겠군요." 유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요즘 한참 학생회 일 때문에 바빴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안느마리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유벨은 힘없이 자리에 앉으며 침울하게 말했다. "알았어. 고려해 볼게." "약속하셨어요! 그럼 전 쥬느비에브를 돌보러 가겠어요!" 안느마리는 하하하 하고 웃으며 식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유벨은 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쓸쓸하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삶에 대한 회한과 고독을 한꺼번에 맛보고 있는 그였다. "에이드리안, 왜 너 때문에 내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거냐. 네 뒤치다꺼리는 정말이지 지겹단 말이다. 후유-" ******** "휴우-" 서류함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던 에이드리안은 자꾸 쏟아지는 한숨에 목이 막혀 왔다. 타이를 느슨하게 당긴 에이드리안은 다시 서류 묶음에 손을 뻗다가 한숨을 몰아 쉬고 말았다. 쥬느비에브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는데, 땀도 계속 닦아줘야 하고 열이 더 오르는지도 봐야 하고 밥도 먹여줘야 하고...내가 있어야 하는데... 에이드리안은 계속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 휙 하고 뒤돌아보았다. 자꾸 한숨을 쉬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눈에 들어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어두운 얼굴에 차마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여태까지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얼굴 표정을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고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접대용 미소를 드리웠다. "음...미라벨, 케이로프.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지?" "무, 물론입니다!!" "무, 물론이에요!!" 갑작스러운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얼른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이 우리를 믿고 있다? 이렇게 황홀할 데가... 에이드리안이 저런 미소를 띄고 있을 때는 항상 어떤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알면서도 그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미라벨은 곁눈질로 케이로프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님에게서 빛의 광선의 뿌려지고 있어요. 저 뒤의 후광은 우리에게만 보이는 거겠죠?' '아아-.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우리들에게만 보이는 후광일 게야.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군.' 에이드리안은 두 사람이 이런저런 눈짓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미소를 띄웠다. "부탁이 있어. 미라벨, 케이로프." "말씀하세요! 에이드리안 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미라벨이 들어드리겠어요." "동감입니다."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씨익 웃고는 미소를 지우고 우울한 표정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의 긴 금발을 손가락에 뱅글뱅글 돌리며 고개를 떨궜다. "쥬르가 아프지 뭐야. 빨리 낫지 않으면 또 내가 얼마나 피곤할지...게다가 오늘 난 의회에 가니까 돌봐줄 사람도 없고..." "아아~ 쥬느비에브 말씀이세요? 하녀들이 있잖아요." 미라벨은 맥이 풀린다는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케이로프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부탁인가 했더니 쥬느비에브인가. 하여튼 갈수록 그녀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에이드리안의 침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그들을 너희들만큼 믿을 수는 없는걸. 게다가...어제 서랍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내 어릴 때 초상화 한 장을 발견했지 않아? 너희들은 아마 구경도 못 한..." "에이드리안 님! 저한테 맡겨 주세요! 걱정 마시고 의회 일이나 잘 하시고 돌아오세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은 저희가 성심껏 보살피겠습니다." 갑자기 180도 달라진 두 사람의 태도에 에이드리안은 마음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서류 뭉치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문 앞까지 걸어간 그는 문득 멈춰 서서 뒤돌아보며 말했다. "초상화는 한 장밖에 없으니까 다녀와서 쥬르한테 물어보고 더 열심히 보살펴 준 사람한테 줄 거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흠칫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에이드리안 님의 초상화! 절대 놓칠 수 없어요!! 당신은 지금부터 나의 라이벌!!' '마찬가지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에게 뺏길 수는 없지!!' 살벌하게 눈을 흘기며 방을 나서는 두 사람이었다. 미공개 에이드리안의 초상화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절대!! [[ Replica 殘像 - 레플리카 잔상 ]] 에스프라드 형, 형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글쎄. 그러는 넌 뭐가 되고 싶은데? 음, 난 말이야. 노래가 되고 싶어. 노래? 바보. 사람이 어떻게 노래가 된단 말이야? 하지만 노래는 너무 아름답고 멋진걸. 나, 꼭 노래가 되고 싶다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노래가 되고 싶어. 분명 광속성 레플리카를 전승 받으면 노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대속성 레플리카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잖아. 핏, 그럼 대속성을 전승 받은 나는 벌써 노래가 되었어야 하게? 아, 그런가? 그래도 광속성은 형의 수속성보다 레벨이 높잖아. 꼭 노래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형이 레플리카를 사용하면 내가 그 노래가 되어서 사람들을 감동 시키는 거지. 멋지잖아? 안 멋져. 그럼 난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없잖아. 하여튼 넌 어린 게 별 이상한 생각만 한단 말이야. 하지만 노래로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그럼 형은 뭐가 되고 싶은데? 나?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흐음. 멋진걸?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형이랑 나랑 같이 행복해 지면 되겠다. 하지만 아주 힘든 일인걸. 행복이란 건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거래. 그래도 내 소원보다야 나을 것 같은데? 노래가 되는 건 사실, 정말 어려워 보여. 난 광속성도 아직 전승 받지 못하고 있고...하긴 아직 어리니까.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네 소원, 내가 들어줄 테니까 내 소원, 네가 들어줘. 응? 나, 노래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네가 날 행복하게 해 준다면. 그래. 그럼 내가 형을 행복하게 해 줄게. 좋아. 그럼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줄게. 노래가 되게 해 줄게. 반드시. 반드시 내가 네 소원을 이뤄줄게. 그러니 넌 반드시 날 행복하게 해줘야 해, 에이드리안. 제69음(第69音) 내가 돌봐줄게!!(2) 어느덧 가을이었다. 여름의 파랗던 나뭇잎이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너무도 푸르고 맑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약간은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은 한가로운 한숨을 쉬었다. 무엇보다 가을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햇살이었다. 가을의 햇살은 눈부시고 뜨겁고...그리고 피부가 잘 타는 햇살이었다. 안느마리는 튜브에 들어있는 하얀색 크림을 쭉 짜내서 쥬느비에브의 뺨에 뭉실뭉실 발라주었다. 안느마리의 손은 부지런히 아기살 같은 뽀얀 뺨을 토닥였다. 침대에 누워 베개를 등에 받치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약간은 달아오른 얼굴로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아, 안느마리. 따꼼따꼼한 걸." "자외선 크림을 듬뿍 발라야 얼굴이 안 타는 거야. 이건 산책을 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가을 햇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기미 주근깨가 둑둑 생기면 난 에이드리안 님을 볼 면목이 없어." 안느마리는 계속해서 크림을 발라주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외선 크림이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머리가 멍해져서 관두었다. 아직 완전히 열이 내리지 않아 겨우 몸을 가누고 있는 중이었다. 안느마리는 다시 크림을 쭉 짜내서 쥬느비에브의 팔에 발라주면서 은근슬쩍 말했다. "저기, 쥬느비에브. 나중에 혹시 유벨 님이 내가 너 잘 돌봐줬나 물어볼지도 모르거든? 그 때 잘 좀 부탁해." "유벨 오빠가 왜 그런 걸 묻는데?" "그, 그런 게 있어." 안느마리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쥬느비에브를 일으켜 세웠다. 쥬느비에브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지 휘청휘청 거리며 안느마리에게 안겼다. "쥬느비에브, 좀 있다가 루이즈 아줌마가 옷 갈아 입혀 줄거야. 예쁜 옷 입고 우리 산책하는 거야, 알았지?"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를 침대 끝에 앉혀주고 밖으로 쌩하고 달려나갔다. 병자는 자고로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는 산책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안느마리였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지만 안느마리는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느마리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우울한 표정으로 하얀 잠옷을 손가락으로 비틀었다. "하, 하지만 안느마리. 나 아직 어지러운데..." ******** 안느마리는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휠체어까지 준비해 왔다. 쥬느비에브는 노란색 체크 무늬 원피스를 입고 하얀색 동그란 모자를 눌러쓰고 하녀장 루이즈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눈도 제대로 못 떠 비틀거리며 안느마리에게로 다가갔다. 루이즈가 여간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지만 쥬느비에브의 눈에는 그것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안느마리는 준비해온 휠체어를 가리키며 씩씩하게 말했다. "자, 보시라! 서방 제국에서도 고가로 취급되는 고급 스테인레스 휠체어!! 비를 맞아도 녹이 슬지 않는다구! 쥬느비에브, 어서 앉아 봐. 우리 산책을 가자!" "으응..." 쥬느비에브는 휘청거리며 가까스로 휠체어에 앉았다. 안느마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루이즈에게 신나게 손짓을 하고는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자! 이제 가는 거야, 안전 벨트도 착용하고, 그럼 간다!!" "으응..." 쥬느비에브는 가뜩이나 열이 오르는 이마가 더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말을 꺼내지 못 했다. 그저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원치 않는 산책을 즐겨야했다. ******** "거기! 당장 멈춰 서세요!" 스콜라 광장에 들어서던 안느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저 목소리는 미라벨이 아닌가! 안느마리는 왜 그러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상시와는 다른 분위기에 안느마리는 잠시 움찔거렸다. 미라벨이 그녀의 하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감히 쥬느비에브를 혼자 독차지하려고 수를 쓰다니! 용서할 수 없군요! 당신도 그 분이 그것을 주겠다고 제안했나보죠? 하지만 비겁하게 먼저 쥬느비에브를 데려가다니." "아아- 동감이야. 저렇게 페어플레이가 되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어서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을 내놓게.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 안느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쥬느비에브는 어느 새 휠체어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눈을 부라렸다. 설마 유벨 님이 저 두 사람에게도 데이트 제안을 한 건가? 평상시에 유벨에게 관심 없는 척 하다니 사실 꿍꿍이가 있었군! 유벨과의 데이트를 놓칠 수는 없었다. 기필코!! "우후후훗, 쥬느비에브를 내놓을 수는 없지요. 죄송하지만 저도 꼭 얻어내야 한다고요." "역시! 그 분이 안느마리에게도 말한 게 틀림없어요. 절대 빼앗길 수 없지!" "동감이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 안느마리는 손바닥 가득 땀이 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분명 유벨이 그들에게도 데이트 약속을 했음이 분명했다. 안느마리는 획 몸을 돌려 황급히 휠체어를 몰기 시작했다. '잡히면 유벨 님과의 데이트는 꽝이야! 힘내자, 안느마리!!' "아, 아니! 도망을 가다니! 잡아요, 케이로프 님!!" "좋아, 놓칠 수 없지!" 휠체어를 끌고 앞서 달려간 안느마리와 그녀의 뒤를 쫓는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런 상황도 모른 채 쥬느비에브는 그저 꾸벅꾸벅 잘도 자고 있었다. ******** 헉- 헉- 안느마리는 숨이 차 잠시 휠체어를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잘 자고 있었다. 모자는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건지 까만 생머리를 커튼처럼 내리고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갑자기 허탈해져서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어떻게든 따돌리기는 했는데 두 사람의 끈질긴 집념을 잘 아는지라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오늘 하루는 내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있어야 유벨 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 텐데..." 안느마리는 잠시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식당 근처였다. 안느마리는 휠체어를 살살 밀어 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그리고 자고 있는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나 음료수 하나 사올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고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이미 쫓아와 그들의 주특기 '몰래 관찰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라벨은 씨익 웃으며 나무 둥치에서 나왔다. "드디어 쥬느비에브가 우리 손에 들어왔군요, 어서 데려가자고요!" "아아-. 힘들었어. 이런 운동은 체질에 맞지 않아." 케이로프는 머리를 흔들고는 휠체어를 끌고 앞으로 나갔다. 순간 뒤쪽에서 거센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그 사이 쥬느비에브를 강탈하다니 거기 서지 못해욧!!" 안느마리가 한 손에 음료수 컵을 들고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허둥지둥 쥬느비에브의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안느마리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컵을 날려 버리고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어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앞장서서 달려가고 안느마리가 뒤따라 달려가는 제2라운드 추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 뭔가 덜컹거리는 느낌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떴다. 머리 속이 몽롱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순간 자신이 몹시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쥬느비에브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주변의 나무와 벤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지나갔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여전히 휠체어에 타고 있고 그 휠체어가 누군가에 의해 대단히 빠른 속도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상시에는 다소곳이 우아하게 걸어다녔던 미라벨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로프가 자신의 휠체어를 몹시 힘든 표정으로 밀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어디 간거람?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거리며 턱을 괴다가 이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야아- 재밌다! 더 빨리! 더 빨리 가요!! 와아아- 재밌다!!" 재미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휠체어가 달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마치 어릴 때 타봤던 썰매 탄 기분이 들어 너무 재미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더 빨리 가요, 더 빨리!!" 쥬느비에브는 깔깔깔 웃으며 운전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 정말 얄밉네요. 우리는 힘들어 죽겠는데..." "다아- 그 분의 초상화를 위해서가 아닌가. 미공개 초상화라고!!" 그 때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요, 미라벨 님!! 케이로프 님!!" "어라, 안느마리?" 쥬느비에브는 뒤에서 열심히 쫓아오고 있는 안느마리를 보고 눈을 멀뚱멀뚱 굴렸다. 미라벨의 굳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서 가죠, 케이로프 님!!" "좋았어!!" 쥬느비에브는 다시 가속하고 있는 휠체어에 앉아 함박 미소를 띄웠다. "아하하- 너무 재밌다!! 더 빨리 가요, 더 빨리! 안느마리, 빨리 쫓아와!" 상황이야 어쨌든 너무나 즐거운 쥬느비에브였다. 계속 웃었더니 어느새 열도 내린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연신 박수를 쳐대며 케이로프를 재촉했다. 휠체어는 덜그럭거리며 열심히 구르고 있었다. 아유, 정말 재미있다니까! ******** 오랜 경주 끝에 드디어 휠체어가 멈추어 섰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주변 파악에 나섰다. 휠체어의 종착역은 중앙 공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답답한 안전 벨트를 풀고 물끄러미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휠체어가 멈추어 서자 마자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훅훅 하고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어 몹시 힘들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턱을 괴고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고요함에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렸다. 한 순간 두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라벨이 슬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훗, 쥬느비에브를 데려온 데는 내 공이 더 크지요, 그러니까 그 분의 초상화는 이 미라벨의.." "휠체어를 끌고 온 건 나야,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케이로프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두 사람의 뜨거운 눈빛이 마주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심상치 않은 모습에 호기심이 동해 방실방실 웃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케이로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반드시 그분의 미공개 초상화를 손에 넣어 나의 컬렉션에 넣고 말겠어." "흥! 누가 할 소리! 나야말로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 에이드리안 님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위해서도 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어요!" 미라벨도 지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두 사람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중요한 것을 두고 싸우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때였다. 안느마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드디어 찾았어!!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았나요? 이 안느마리는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여자예요. 아하하하-"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느마리를 쏘아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3파전으로 변한 싸움의 양상에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세 사람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며 뭔가 비장한 느낌을 주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미라벨이 손을 번쩍 들었다. "훗, 스콜라의 여왕인 이 미라벨이 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난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고 말거에요! 오호호호호호호호-" "흥, 헛소리. 나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에게는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의 축복이 내려지고 있지. 결국 내가 하늘의 선택을 받게 될 거야." "역시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어. 두 블랙들, 맞아. 나의 행복을 방해하려는 블랙들. 쥬느비에브를 강탈해가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신들은 심각한 블랙들임에 틀림없어. 블랙이야, 우훗, 우후후후후후후- 블랙에게 질 수야 없지, 아하하하하하하-" 케이로프와 안느마리가 각자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당찬 말을 내뱉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거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아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오페라 연습을 하는 거로구나. 그래서 나까지 데리고 나와 구경시켜주려고 한 거구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의 정성에 감사를 표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니까. 집에만 있으면 내가 심심할 줄 알고 데리고 나와 준거로구나. 그 때 거창한 선율이 공기 중으로 퍼지며 바람이 슉 하고 스쳐지나 갔다. 쥬느비에브는 바람과 함께 날려온 먼지에 기침을 해댔다. "코, 콜록, 콜록, 뭐, 뭐지?"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살폈다. 레플리카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호호호- 스콜라의 랭킹 5위! 이 미라벨을 당해 보라지요, 오호호호호- 나의 우아한 선율이여- 나를 승리로 데려가라! 오호호호호-"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여, 나에게 힘을! 부디 이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나에게 힘을!!" "아하하하하- 블랙들, 다 쓸어버려라- 아하하하하하---" 미라벨의 웅장한 소리와 케이로프의 육중한 소리, 안느마리의 기괴한 레플리카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덕분에 중앙 공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쑥대밭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이리저리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라? 오페라 연습이 아니라 레플리카 실습이었나 보네?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에이, 저녁이 되어 가잖아. 나 집에 가야겠다. 에이드리안 올 시간 되었는데."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토닥토닥 걸음을 옮기다 물끄러미 뒤를 쳐다보았다. 먼지 자욱한 공간 속에서 세 사람이 숨을 몰아쉬어 가며 레플리카를 방출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벅벅 긁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집에 들어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돌아왔다는 말에 부리나케 서재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서랍에 서류철을 넣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함박 미소를 띄우며 에이드리안에게 달려가 안겼다. "에이드리안!!" "쥬르, 외출했었다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볼을 비볐다. 너무 기분 좋았다. 역시 에이드리안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에이드리안은 손등으로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며 빙그레 웃음을 흘렸다. "열 내렸네?" "응!! 재미있게 놀았거든요."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그녀를 소파로 데려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동그랗고 커다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의 정체를 알아챈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아- 떡바구니다! 떡이다, 떡!!" 쥬느비에브는 바구니 안의 하얀 찹쌀떡을 꺼내 한 입 베어 물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 행복해. 정말 맛난다니까. 냠..." 우적우적 떡을 씹어먹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흘렸다. 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잘 돌봐줬어?" "에?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 밖에서 레플리카 연습하고 있던데." "그래? 그 녀석들..." 에이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리자 쥬느비에브는 그의 소맷자락을 흔들며 웃으면서 말했다. "헤에, 에이드리안도 이거 먹어요. 맛나요, 떡. 이거 말랑말랑해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건네준 떡을 집어들고는 이내 미소를 띄었다. 쥬느비에브의 열이 내려 걱정이 가신 그였다. ******** 다음 날, 안느마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학생회실의 소파에 앉아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 없이 울먹이고 있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유벨의 호통소리가 다시 공기를 찢었다. "너,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중앙 공원이 지금 어떻게 된 건지나 알아? 완전 쑥대밭이라고! 이 거 예산이 얼마나 들 건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안그래도 이번 회기에는 돈 들 일이 많아서 머리가 아픈데. 너 나 좋아한다는 말 순 거짓말이지? 아니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하, 하지만 유벨 님..." 안느마리는 울먹이며 유벨에게 처량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유벨은 고개를 돌리며 잔인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데이트고 뭐고 취소야, 취소." "흑, 유벨 님은 정말 너무해. 흑흑흑.... 유벨 님, 미워요!!" 끝내 안느마리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치마자락을 날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방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유벨은 콧방귀를 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투덜거리며 문 쪽으로 걸어가던 유벨은 마침 들어오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발견했다. 유벨은 다소 창백한 듯한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케이로프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로프, 잘 해 봐. 잘 해 보라구. 에드, 화가 많이 났던데." 유벨의 동정어린 말에 케이로프와 미라벨의 표정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유벨은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삼키며 밖으로 나갔다. 미라벨은 소름이 끼치는 것인지 연신 팔을 문지르며 케이로프에게 물었다. "어, 어쩌죠?" "어쩌긴 뭘 어쩌나.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 사정을 말하고..." 그 때 학생회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하얀 코트 차림의 에이드리안이 들어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발견한 에이드리안은 차갑게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중앙의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온 것인지 쥬느비에브도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온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이 눈을 살짝 치켜 뜨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뻣뻣한 몸짓으로 가 에이드리안의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미라벨은 어떻게든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 해 보고자 애써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에, 에이드리안 님. 어제 그 일은..." "너희들, 이제 내가 우습게 보인다 이거지?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아픈 사람을 그런 소동에 끌고 갔다는 건 분명 나의 말을 우습게 생각했다는 건데." 에이드리안이 살며시 턱을 괴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케이로프가 화들짝 놀라 다급히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다 알았어. 너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초상화도 필요 없겠군?" 에이드리안이 품에서 작은 초상화 한 장을 꺼내자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저것이 바로 그 초상화! 두 사람은 동시에 침을 꿀꺽 삼키며 초상화에 눈을 박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에이드리안은 초상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옆에서 눈을 말똥거리며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더니 에이드리안의 손에서 초상화를 낚아챘다. "야아- 에이드리안, 너무 귀엽다! 반바지 차림에 이렇게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다니. 예쁜 금발도 나풀나풀. 와아- 귀여워." 쥬느비에브가 초상화에 연신 뺨을 비비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침을 넘겼다. 어떻게든 저 초상화를 손에 넣어야 할텐데! 하지만 그들의 소망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쥬느비에브가 눈동자를 빛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이 초상화 내가 가져도 되요? 나, 에이드리안 초상화 갖고 싶은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에이드리안의 입을 노려보았다. 제발 안 된다고 말씀해 주세요!! 저건 내 거라고요!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 콰콰쾅-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 속에서 번개가 친 것 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결국 쥬느비에브의 손에 초상화가 들어가다니. 어떻게! "에이드리안 님, 너무 하세요! 으흐흐흐흐흑----"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너무하십니다. 크흑."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울먹이며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길래 왜 내 말을 안 들어? 한편 쥬느비에브는 어쩌다보니 손에 들어온, 에이드리안의 귀여운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헤에- 아프니까 좋구나. 재미있는 휠체어도 타고, 떡 바구니도 받고, 에이드리안 초상화도 받고...헤헤. 또 아팠으면...아코, 왜 때려요?" 결국 에이드리안의 알밤을 맞고 마는 쥬느비에브였다. 각각 데이트와 에이드리안의 초상화를 놓친 안느마리와 미라벨, 케이로프,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정통으로 알밤을 맞고 만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각각의 아픔을 간직한 채 오늘도 스콜라의 하루는 저물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70음(第70音) 에이드리안 vs 에이드리안(1) 가을의 스산하고 음침한 아침이었다. 현 아르헨에서 불과 다섯 명밖에 안 되는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 중 한 사람이자 평의회 의장 후보로서 남부럽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이제 17살의 소년,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은 그 날 아침 너무나 기분이 언짢았다. 꽤 쌀쌀했던 어제 저녁, 깜빡 잊고 창을 닫지 않아 덜덜 추위에 떨어야 했던 탓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늘따라 유난히 잘 매어지지 않는 타이 탓도 아니었다. 그가 오늘 아침 이렇게 기분이 언짢았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그녀 탓이었다. 그의 약혼녀,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어느 날 불쑥 나타나 그의 약혼녀가 되어 버린 까만 생머리의 소녀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지그시 감고 불평불만을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간 눈을 번쩍 뜨고 홱 뒤돌아 창문 쪽으로 매섭게 시선을 던졌다. 아직까지 열려 삐걱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창문이 왠지 미워죽을 지경이었다. "닫혀 버려!" 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미묘한 음률을 발산하며 공기 중으로 퍼졌고 그와 동시에 창문이 쾅 하고 닫혔다. 에이드리안은 씨익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뒤돌아 섰다. 그리고 쿵쿵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약혼녀, 쥬느비에브 양을 친히 깨우러 갈 작정이었다. "감히 늦잠을 자?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그렇게 날 들볶아 놓고 감히 늦잠을 자? 어디 한 번 두고 보라지. 감히!" 에이드리안은 씩씩거리며 방밖으로 나갔다. 그랬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를 귀찮게 했던 쥬느비에브의 칭얼거림이 오늘은 없었다. 벌써 10도르인데! 아직도 자고 있다는 말이지?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실룩이며 그녀를 어떻게 혼내줄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은근히 쥬느비에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가 매일 아침 그를 깨워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그런데 오늘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심통이 났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리광과 투정을 못내 무시하며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 가을 분위기가 익어가면서 쥬느비에브의 방도 분위기를 바꿨다. 침대보와 커튼, 그리고 소파가 베이지 색과 갈색 톤으로 새단장을 했다. 물론 어느날 사택에 등장한 일로나의 손으로 모두 바뀐 것이다. 어찌되었든 방은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단정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방문을 연 순간, 쥬느비에브의 방을 한 번 둘러보다 이내 눈을 깜빡이고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는 눈을 깜빡이며 귀를 울리는 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훌쩍...흑흑...훌쩍. 훌쩍. 흑흑...흐흐흑..."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울음소리가 아닌가? 그는 그의 파란 눈동자를 방안으로 돌렸다. 아직 커튼을 제대로 걷지 않은 것인지 방은 꽤 컴컴했다. 에이드리안은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을 힘겹게 삼키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흑...흑...훌쩍...흑흑흑..." 또 다시 울음소리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에이드리안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에이드리안은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목소리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 아니 울음소리!! 또 무슨 일이람? 왜 또 우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라도? 그는 황급히 눈동자를 돌리며 방안을 살폈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마음을 메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어두운 방안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이내 침대 기둥너머로 까만 생머리가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흐흐흑....훌쩍...훌쩍...흑흑..." 다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그는 정신이 멍해져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잠옷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의 약혼녀를 발견했다. 순간, 그는 웃고 말았다. "하아...하하....하하..." 에이드리안은 그의 약혼녀를 보고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허탈하고 무력한 기분에 자꾸만 실소가 나왔다. 그녀의 약혼녀, 쥬느비에브 양은 쪼그리고 앉아 두 눈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양손에 모롤라 하나씩을 들고 번갈아 덥석덥석 베어 물며. 그리고 옆에는 커다란 모롤라 상자를 옆에 둔 채...그녀는 울고 있었다. "흑흑....흑흑...훌쩍. 너무 맛나. 너무 맛나잖아. 훌쩍. 모롤라야, 넌 왜 이렇게 맛난 거니. 훌쩍..."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모롤라를 먹고 있는 자신의 약혼녀를 보고 그만 기가 막힌 에이드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담? 먹는 거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다니! 기가 막혀서. 내가 왜 이런 여자가 약혼을 했담? 내가 정신이 나갔던 거야, 내가!' 에이드리안은 정확하게 112번째, 약혼에 대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 그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녀의 이런 엉뚱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절대 파혼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연하지 않은가. 쥬느비에브를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 내가 희생해야지. 아르헨의 남성들을 위해 내가 쥬르와 약혼을 해야 하는 거야. 그건 운명이야, 운명. 그래. 내가 희생해야지. 저런 사고뭉치를 감당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비록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쥬느비에브가 다른 남자와 함께 하는 상상에 그만 기분이 나빠진 에이드리안이었다. 그 때 쥬느비에브가 가만히 고개를 올렸다. 옆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이 그득한 눈동자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실룩이며 팔짱을 끼고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건데?" "......핫. 들켰다."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눈동자에 담기자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모롤라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먹다 남은 모롤라가 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굳어버린 것인지 눈물을 퐁퐁 뿜어내며 계속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와 그녀의 말없는 눈싸움이 계속되었다. 침묵이 흘렀다. 마음 속의 시계가 똑딱거리며 울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두 사람은 폭발하고 말았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안 돼욧! 안 돼욧! 이건 안 된단 말이에요오-!!" "뭐야, 너! 도대체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거야, 뭐야? 내가 하루에 모롤라 세 개만 먹으라고 했지! 말했잖아!! 그건 또 언제 숨겨놓은 거야? 안 내놔? 안 내놓냐구!!" 쥬느비에브는 옆에 놓아둔 모롤라 상자에 몸을 날려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모롤라 상자에 팔을 뻗어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무섭도록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얼마 전,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모롤라 금지령을 내렸다. 쥬느비에브가 모롤라를 워낙 좋아해 모롤라만 과식하다보니 다른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덕분에 이번에 하우먼 박사의 진료에서 영양 섭취가 몹시 불균형적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에이드리안은 하루에 모롤라 세 개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고 쥬느비에브는 그의 단호한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모롤라 금단 현상에 끝내 참지 못한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 몰래 숨겨놓은 모롤라를 먹다가 끝내 들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물러설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맛본 모롤라의 맛은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눈물이 날만큼 맛있었다. 그녀는 모롤라의 맛의 그만 감동해 버렸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모롤라 상자를 몸으로 사수하면서 속으로 외쳤다. '모롤라야!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줘! 그래서 매일 나한테 먹혀 줘! 소원이야!! 에이드리안, 제발 모롤라를 내 곁에서 떼어놓지 말아줘요! 소원이에요!' ******** 승리의 주역은 언제나 느긋하고 우아한 법.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서재에서 느긋하고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란빛의 차가 그윽한 향을 뿌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기품 있게 몸을 움직여 다리를 꼰 다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향긋한 차 향이 코를 자극했다. 살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아- 차, 향이 좋군." 에이드리안은 차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기고 다시 흐뭇한 미소를 피웠다. 오늘 아침 쥬느비에브와의 모롤라 쟁탈전은 결국의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감히 나한테 덤벼? 흥! 쥬느비에브의 뿌루퉁한 표정이 떠올랐다.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맛보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살짝 열어놓은 창으로 살랑살랑 가을 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시원한 바람에 살며시 눈을 감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그에게도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 쥬느비에브는 아침의 일로 화가 난 것인지 에이드리안과의 다툼 뒤에 바로 외출을 했다. 덕분에 에이드리안은 실로 오랜만에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집에 있는 날이면 조용히 독서하기란 꿈에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옆에서 달라붙어 칭얼거리기 일쑤였고 좀 조용하다 싶으면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중요한 서류에 낙서를 한다든지 혹은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든지... 하여튼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홀테스 페르니스의 경제 이원 구조론이라....흠.... 아참!" 소파에 누워 책을 뒤적이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흠... 여기 있군. 내 비밀 장부." 에이드리안은 검은 색 표지의 제법 두꺼운 책을 꺼내 손에 들고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진지하게 장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흠... 동방의 내 농장에서 이번 모네에 벌어들인 게...어디...음...이런. 역시 저번에 써본 원심론이 더 유용했던 것 같군. 흠... 뭐 그럭저럭 괜찮군. 용돈 정도는 되겠어." 에이드리안은 장부를 덮고 서랍에서 편지지 하나를 꺼내 빠르게 지시사항을 써내려 갔다. 그것은 동방 제국에 있는 그의 대농장 관리인에게 보내는 지시사항이었다. 어릴 때 동방 제국의 재상 출신의 한 노인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그 노인이 죽고 난 뒤 우정의 선물이라며 건네준 것이 바로 이 대농장이었다. 말이 선물이지 그 넓이가 어마어마한 데다가 땅이 매우 비옥해 고품질의 농산물들이 재배되었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수익을 남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이 농장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부쳐두었다. 그는 그가 나름대로 깨달은 경제 이론을 토대로 농장을 꾸려나가길 원했다. 농장에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작정이었다. 어떤 이론을 사용하여 농장에서의 결과가 좋으면 그 이론은 자신의 영지나 다른 사업에도 이용하고 결과가 나쁘면 바로 버린다. 지금까지 대농장은 계속 꾸준한 성장률을 보였다. 자신이 사용한 방법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편지를 잘 접어 봉투 안에 넣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기지개를 켰다. "케이로프에게 우선 이걸 건네고...음... 이번에 모롤라 과수원을 좀 만들라고 해 볼까? 쥬르가 좋아할 텐데. 쿡." 케이로프는 그의 비밀 농장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들켰지만 그가 비밀을 지켜준 덕에 계속 비밀 농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케이로프는 그의 일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눈치가 빨랐다. 시원한 가을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자꾸 미소가 피어올랐다. 에이드리안은 남몰래 하고 있는 이 취미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쌓여 가는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농장을 경영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 모롤라 과수원을 만들라고 해야...." 에이드리안은 봉투를 서랍 깊숙이 넣고 레플리카 잠금 장치를 작동시키려다 문득 아래층에서부터 들려오는 쿵쾅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쳐다보았다. 저 씩씩한 걸음 소리는 쥬느비에브의 그것이 아닌가? 그녀가 외출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서둘러 서랍의 레플리카 잠금 장치를 작동시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책상 서랍은 그의 레플리카에만 반응해 열리게 될 것이다. 이제 안심이다. 에이드리안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문을 홱 하고 열었다. ******** 그리고 몇 시르 후.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그 누구도 두려워할 자 없는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 긴장하고 있었다. 침이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손바닥에서 땀이 솟았다. 주먹을 불끈 쥐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머리 속에 하얀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눈동자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자신의 앞에 서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의 약혼녀, 쥬느비에브가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고 힘겹게 말했다. "그, 그게 뭐야?" 쥬느비에브가 눈을 깜빡였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그녀는 생긋 미소짓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예요. 멍멍이잖아요, 멍멍이. 강아지 몰라요?" "그러니까! 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건데?" 초조함과 조바심으로 끝내 에이드리안은 소리를 질러버렸다. 쥬느비에브는 처음에는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이내 방실방실 웃으며 몸을 실룩실룩였다. "멍멍이, 내가 샀어요. 귀엽죠? 불쌍하게 누가 버렸다잖아요! 이렇게 말라서 너무 불쌍한 거 있죠? 그래도 원래 엄청 귀하고 비싼 강아지래요.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를 버리다니 정말 나쁜 사람이야." 쥬느비에브는 품에 안고 있는 하얀 털의 강아지에게 볼을 비비며 에이드리안에게 눈짓했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그 강아지를 어쩌려고?" "어쩌긴요. 이제 우리 집에서 살 거예요, 멍멍이." "뭐...뭐라고? 뭐라고? 누구 마음대로!! 절대 안 돼! 당장 다른 데로 보내 버려!" "싫어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도 고집스레 강아지를 꼬옥 품에 안았다. 에이드리안은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릴 때 강아지에게 심하게 물린 적이 있었다. 얼마나 울었던가. 그 날 저녁에는 끝내 탈진해서 자리에 눕고 말았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다. 그 후로 그는 개라면 질색을 했다. 물론 멀리서 본다거나 그림을 본다거나 이런 것은 괜찮았다. 가까이만 오면 소름이 돋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기쁜 듯이 통통 튀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멍이, 나 이름도 지었어요. 멍멍이 이름, <에이드리안>이에요. 정말 어울리죠? 그쵸?" 에이드리안은 멍한 눈으로 쥬느비에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고작 개 이름에 내 이름을 붙여? 감히! 감히!! "너 당장 나가!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 개 데리고 당장 나가!!" 에이드리안은 거의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혈압에 그만 비틀거리며 벽을 등지고 흐물흐물 쓰러지고 말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 쥬느비에브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치만, 이 멍멍이 이름은 에이드리안인데... 너도 좋지? 멍멍아, 아니 에이드리안." 개가 기쁜 듯 짖어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아르헨에서 그 누구보다 근엄하고 고귀한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감히 개 이름에 내 이름을!! 어쨌든 지금은 충격을 완화시켜야 했다. 머리 속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저 개를 어떻게 해서든 집에서 몰아내야 할텐데!! 제71음(第71音) 에이드리안 vs 에이드리안(2) 쥬느비에브가 난데없이 개를 데리고 온 다음 날. 에이드리안은 아침부터 무척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군청색 셔츠와 검은 색 바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에이드리안은 방 안을 서성이며 자신의 금발을 부드럽게 뒤로 넘겼다. 여느 때와 같이 여유로움이 듬뿍 묻어나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지금 그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여유롭고 우아하게 처신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여유라고 할만한 작은 틈도 없었다. 무엄하게 자신의 이름을 받은 그 하얀색 조그만 강아지를 생각할 때마다 이마가 뜨끈뜨끈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쥬느비에브가 데려온 개를 집에서 내쫓아야 했다! 그는 개를 정말 싫어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의 고집이 여간이 아니었다. 어제 모롤라 상자를 압수당한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강아지를 품에 꼭 껴안고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눈을 부라렸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 허공에 팔을 휘둘렀다. "쥬르, 고단수라니까. 조심해야..." 그랬다. 쥬느비에브는 사실 엄청난 여자였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 당연히 전자는 쥬느비에브였고, 후자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왠지 한심하고 불쌍한 기분에 그는 다시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쨌든 개의 동태를 살펴 기회만 된다면 멀리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기다려라! 강아지! ********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방문 앞에서 살짝 헛기침을 하고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면서 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앉아 있으면 입고 있는 하얀 원피스가 더러워질 텐데. 정말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여자다. 에이드리안은 머리를 두 손으로 살며시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쥬르, 뭐 해?" "어? 에이드리안!" 그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돌리며 방긋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순간 움찔했다. 저 해맑은 미소라니! 난 개를 쫓아내려고 온 건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무척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쥬느비에브가 자리에서 일어나 원피스 자락을 두 손으로 탁탁 털어 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꼬마 에드, 에이드리안이 왔어. 인사해야지. 아참, 에이드리안, 이름 헷갈리니까 멍멍이, '꼬마 에드'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좋죠?"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의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말도 못하고 그저 바닥만 매섭게 노려보며 화를 삭일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자신을 보고 있는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털의 강아지는 쥬느비에브가 씻겨준 것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깨끗해 보였다. 우유가 담긴 하얀 그릇이 강아지 앞에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우유를 먹었던 모양이었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 것인지 강아지는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보이긴 했지만 개는 개! 에이드리안은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쥬느비에브가 눈치채지 못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때였다. 방심한 사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강아지가 와락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에이드리안은 달려오는 강아지를 보며 확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에이드리안은 심장에서 피가 한 번에 뽑히는 느낌을 받았다. 끔찍하고 지독했다. 그리고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귀를 울렸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팔을 내리고 눈동자를 조심스레 돌렸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의 쥬느비에브가 말똥말똥 까만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머쓱한 기분에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한기가 드는 것 같아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순간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으아아악!" 강아지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의 다리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느낌이 다리로 전해져 왔다. 에이드리안은 그만 그 자세로 굳어버렸다. 강아지한테 언제 물릴지 모른다! 언제 물릴지 몰라! 옆에서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왔다. "꼬마 에드, 에이드리안이 무척 좋은 가봐요. 헤헤. 역시 잘생긴 사람에게 약한 가봐요. 어? 에이드리안, 얼굴빛이 왜 그래요?" 쥬느비에브는 창백한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바짝 마른 입술을 놀려 말을 뱉어냈다. "......복수하는 거지?" "에에?" "너어! 지금 어제 일로 복수하는 거지? 내가 모롤라 상자 가져가서 복수 하는 거 맞지? 어떻게 내 앞에 개를 데려올 수가 있는 거야! 개를!"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굳은 자세로 그나마 자유로운 입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다 이내 방실방실 웃으며 강아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강아지의 발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그럼, 꼬마 에드. 우리 산책이나 가볼까? 우웅~ 너무 귀여워. 인사해야지. 에이드리안 아저씨, 안녀엉-" 말을 마치고 천연덕스럽게 밖으로 나가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혀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 개, 당장 쫓아내고 말겠어! 당장!! 그러나 개는 쥬느비에브의 품에 안겨있었고 그에게는 당장 개를 쫓아낼 묘책이 없었다. 결국 불만 어린 말만 내뱉고 있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어떻게든! 쫓아내고 말 테다!' ******** 학생회실에서도 에이드리안은 개를 쫓아낼 방법을 생각하느라 거의 일에는 손을 뗀 상태였다. 물론 개 한 마리 쫓아내는 일이 그리 어렵겠느냐만 문제는 쥬느비에브였다. 쥬느비에브가 개를 감싸고도는 이상 섣불리 그냥 개를 없애버렸다가는 나중에 쥬느비에브의 눈물 바다를 감당해야 할게 틀림없었다. 그는 그 상황만은 절대 사양이었다. 그러니 개를 없애는 것은 지극히 조심스럽게, 그녀가 모르게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쥬느비에브가 계속 개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자꾸만 나오는 한숨에 고개를 떨구고 책상 위에 엎드려 버렸다. 우습지도 않은 문제로 이렇게 신경을 쓰다니 정말 한심한 기분이었다. "에이드리안 님, 어디 아프세요?" "아니." 미라벨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대충 대답을 하고 눈을 감았다. 미라벨과 유벨의 대화가 귓가에서 웅웅하고 울렸다. 두 사람은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님, 아프신 것 같진 않은데..." "놔 둬. 뭐 골치 아픈 일이 있겠지. 그런데 케이로프는 어디 갔어?" "쥬느비에브하고 레슨 중이겠죠. 케이로프 님도 대단하시다니까요. 쥬느비에브의 레슨 봐 주시는 것도 꽤 되었잖아요. 매일 도망가고 쫓아다니고. 나름대로 재미있으신 건지..." 미라벨의 말을 귓가로 흘리던 에이드리안은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냈다. 점심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건지 배가 고팠다. 에이드리안은 유벨과 미라벨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려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요 근래 쥬느비에브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럼 오랜만에 함께 식사나 할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기뻐서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어쨌든 개를 데리고 왔든 말든 그녀는 그의 약혼녀였고 잘 먹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의무가 있었다. 개는 개고 쥬느비에브는 쥬느비에브니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말랐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다. 사실 좀 마르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오랜만에 배가 부르도록 듬뿍 맛있는 음식을 사 줄 생각이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에이드리안은 유벨과 미라벨에게 미소로 인사를 해주고 유쾌한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 "안돼요."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쥬느비에브가 분명 싫다고 대답한 것 같았다. 싫다고? 내가 오랜만에 밥을 사주겠다는데? 에이드리안은 머리를 흔들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케이로프의 연습실은 오늘따라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속이 답답하다니. 에이드리안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녀에게 눈짓했다. "다시 말해봐. 내가 오랜만에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데 거절이라고?"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에 안고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케이로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나, 오늘 케이로프 님이랑 점심 먹을 거예요. 오늘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어어어어어어엄--청 중요한 일이에요." "그게 뭔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방실방실 웃는 얼굴에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레플리카 레슨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나하고 해도 되잖아! 괜히 신경질이 나고 있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생긋생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멍멍이, 아니 꼬마 에드가 성이 없잖아요? 이름만 있고 성이 없으니까 너무 불쌍하잖아요. 우리 꼬마 에드, 꽤 혈통 있는 집 멍멍이라는데... 그래서 케이로프 님이 꼬마 에드 성 만들어 주시기로 했어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다른 이유도 아니고 개 이름 때문에 내 제안을 거절한단 말인가? 다른 이유도 아니고... 고작 개 때문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부라리며 쥬느비에브를 쏘아보았다. "너어-! 도대체...." 순간 에이드리안은 또다시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말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그 하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쪼르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에이드리안은 금새 창백한 안색으로 강아지를 쏘아보았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다가오지 마! 그러나 강아지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굴리며 촐랑촐랑 뛰어왔다. 그러나 다행이 그 때 케이로프가 앞으로 나와 강아지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꼬마 에드 군.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 다가가면 안 됩니다." 케이로프는 가만히 강아지를 안아 들고는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눈치 빠른 케이로프. 그가 개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강아지를 제압한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살며시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럼, 에이드리안! 집에서 만나요. 안녀엉! 꼬마 에드, 가자!"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케이로프의 소매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케이로프는 난처한 듯 눈을 깜빡이다 이내 쥬느비에브의 손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하고자 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에이드리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쥬느비에브의 흔적을 찾으며 눈을 깜빡였다. 멍하고 허탈했다. "뭐...지? 내가...내가...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이자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장인 내가...고작 개 때문에..." 인생의 온갖 회의가 들고 있었다. 고작 개한테 약혼녀를 빼앗기다니!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개한테 약혼녀를 빼앗겼으니 찾아달라고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하란 말인가. 착잡한 마음에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기분도 나쁘고 그냥 집에서 식사해야 할 것 같았다. ******** 집에서 홀로 쓸쓸하게 식사를 한 에이드리안은 계속 심통한 얼굴로 방을 서성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 기분 나쁜 개를 집에서 몰아낼 것인가!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키고 힘차게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쥬느비에브의 방에 들어선 에이드리안은 꼼꼼하게 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화풀이할 물건을 발견했다. 그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바구니 쪽으로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갔다. 바구니 안에는 바닥을 폭신하게 만들려고 한 것인지 두꺼운 수건이 여러 겹 깔려있었다. 분명 강아지가 잠자는 곳이 분명했다. 에이드리안은 발끝으로 바구니를 툭툭 치고는 씨익 웃었다. "흥. 그래. 감히 내 집 안에 이런 물건을 놔두다니. 참을 수 없어. 흥." 에이드리안은 바구니의 손잡이를 잡고 뒤돌아 섰다. 어딘가에 버릴 참이었다. 휙 던져 버릴 테다! 에이드리안은 흐뭇하고 미소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상상만으로도 화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방문이 열리고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강아지를 품에 안고. 들어오자 마자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아지 바구니는 들고." "아...그게..." 에이드리안은 예상치 못한 쥬느비에브의 등장으로 굉장히 당황했다. 뭐, 뭐라고 하지? 사실대로 말했다가는....분명 쥬느비에브가 엄청 화를 낼 텐데. 너무하다는 둥 실망했다는 둥 별 소리를 다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 그러니까 강아지한테 이건 너무 답답하지 않겠어? 이건 버리고 차라리 커다란 쿠션이라던가...그런 게 나을 거 같아서..." 에이드리안은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쿠션은 무슨!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구나! 역시 에이드리안은 친절하다니까! 바구니가 답답하니까 역시 쿠션을 만드는 게 좋겠어요. 그치? 꼬마 에드, 기분 좋지?" 쥬느비에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강아지가 그녀의 팔에 뺨을 비벼댔다. 쥬느비에브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깔깔대며 강아지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어깨를 실룩였다. 강아지는 눈을 말똥거리며 발을 흔들어 댔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외쳤다. "에이드리안 좀 봐요. 쥬르와 꼬마 에드 <합체>!" 에이드리안은 버둥거리는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보고도 맥이 풀려 대답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는 단번에 기운을 차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럼, 에이드리안. 나 루이즈 아주머니한테 쿠션 구해 달라고 할 테니까 꼬마 에드랑 잠시만 같이 있어요." "그, 그래. 갔다 와. 내가 강아지는 잘 보고 있을 테니까." 에이드리안은 일부러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손까지 흔들어 배웅 했다. 강아지와 단 둘이! 이런 기회가 오다니!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내 쥬느비에브의 하얀 원피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강아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아- 그래. 그래. 이제 끝이다. 이봐. 강아지 군. 내 집에서 당장 사라지라고. 흐음...그래. 밖으로 걸어서 가기엔 너무 힘들 테니 내가 밖으로 보내 줄게. 알았지? 이 정도면 꽤 인정 많은 편이지, 난. 쿡쿡쿡."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강아지는 눈을 말똥거리다가 이내 몸을 흔들며 춤추듯이 뒤뚱뒤뚱 걸어다니는 것이 아닌가.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허탈해 져서 코웃음만 나왔다. 지금 자기 입장을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저렇게 무사태평한 모습이라니! 그 순간, 에이드리안은 깨닫고 말았다. "저 강아지. 이렇게 보니까 쥬르랑 똑같잖아? 상황 파악 못하고 둔한 거랑 저렇게 움찔움찔 움직이는 걸 보니... 아아- 이름을 잘 못 지었어. 꼬마 에드가 아니라 꼬마 쥬르라고 해야..." 에이드리안은 숨을 가다듬고 눈에 보이는 의자에 풀썩 몸을 앉혔다.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다니! 에이드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까딱거리며 강아지를 불렀다. "야! 강아지! 이리 와봐. 어서!" 에이드리안의 외침에 강아지가 하얀 털을 흔들며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실룩이며 강아지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강아지는 간 크게 다시 홱 몸을 돌려 아까와 같은 움찔거리는 몸짓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경험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에이드리안은 커다란 걸음으로 성큼성큼 단번에 강아지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손가락을 바닥을 톡톡 치며 강아지를 쏘아보았다. "야! 너 지금 네 처지를 모르는 모양인데 너, 지금 쫓겨 날거야. 내가 레플리카를 쓰면 넌 알 수 없는 세계로 날아가게 된다고. 응? 야! 강아지! 내 말 듣고 있어?" 에이드리안의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강아지는 몸을 베베 꼬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하는 짓이 정말 쥬느비에브와 판박이였다! 에이드리안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은 산 속에는 오늘도 노래 소리가 울리니.... 맑고 밝은 아침에 산새들의 지저귐...." 에이드리안은 노래에 집중했다. 이제 슬슬 레플리카를 써 볼까? 저 녀석을 어디로 날려보내는 것이 좋을까. 이왕이면 멀리, 아주 멀리 보낼 생각이었다. 그래! 상점가로 날려보내면 다른 사람이 주워가겠지. 그래!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눈을 떴다. 그러나 순간, 그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강아지가 몸을 사리고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 강아지! 자면 어떻게 해! 내가 너 자라고 노래부른 줄 알아? 어서 일어나, 이 강아지야!"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강아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둔한 것이 이렇게나 쥬느비에브와 같을 수가! 강아지는 에이드리안의 노래가 자장가로 들렸던 것인지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만 맥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피곤했다. 만사가 귀찮고 싫었다. 나쁜 강아지 같으니라구! 에이드리안은 마음 속으로 온갖 불평, 불만을 퍼부으며 서서히 잠에 빠졌다. 그리하여 오늘 에이드리안과 꼬마 에드의 싸움은 꼬마 에드의 한판 승으로 끝난 것이다. 제72음(第72音) 에이드리안 vs 에이드리안(3) 어느 날, 쥬느비에브와 함께 불쑥 나타난 하얀 강아지. 그 강아지가 이제 한 가족으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와 산책을 나갈 때면 쫄레쫄레 달려가는 그 모습에 집사와 하녀장이 귀엽다고 칭찬을 했고 스콜라의 학생들도 쥬느비에브와 강아지가 너무 잘 어울린다며 소근거렸다. 케이로프가 지어준 <에이드리안 헤르디스테르네스 리코도메스 페르난테스 돌로레스 미오르바스티스>-물론 쥬느비에브도 이 이름을 다 못 외운다. 정확하게 이름을 외우는 사람은 케이로프뿐이다-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게 된 이 조그만 강아지는 이제 학생회의 새로운 마스코트로서 등극하고 있었다. 한편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쫓아내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하루하루 울적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강아지는 그야말로 작은 쥬느비에브라고 할 만했다. 하는 짓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화낼 때 모른 척 눈을 멀뚱멀뚱거리는 모습이나, 귀찮다는데 달려와 볼을 비빌 때나 밥 먹을 때 정신 없이 집중하는 모습이나... 정말 쥬느비에브와 똑같았다! 강아지의 덕분에 에이드리안은 번번이 실패의 뼈아픈 고통을 맛보아야 했고 이제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그저 강아지가 나타나면 조용히 한숨을 쉬며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이드리안과 꼬마 에드의 싸움은 꼬마 에드의 승리로 가볍게 끝나가고 있었다. ******** 학생회실에 집에 막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걷어찼다. 정말 요즘 들어서는 자꾸 신경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쥬느비에브에게 보기 좋게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하고 오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살 것도 있고 해서 나가자고 했더니 단 번에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아지 밥을 사러 가야하기 때문에 바쁘다는 것이 아닌가! 강아지! 또 강아지다! 정말 기분 나쁘고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당장 그 강아지를 쫓아버리지 않으면 펑 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씩씩거리며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고 방안을 살폈다. 강아지는 단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꾸물떡거리고 있겠지! 에이드리안은 방 가운데로 들어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 때 쥬느비에브의 침대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하얀색 솜이불 아래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 강아지 녀석이 틀림없었다! "쿡. 잘 됐군. 마침 쥬르도 집에 없으니까 이 틈에 빨리 쫓아보내야..."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잡으려고 침대 위에 올라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 강아지가 이리저리 잘도 피하는 것이 아닌가. "강아지 녀석! 가만있어 봐!" 에이드리안은 이불 밑에서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강아지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 몸을 날렸다. 그러나 먼지만 날 뿐 강아지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덥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침대 밑으로 내려온 그는 손을 들고 소리쳤다. "하! 더 이상은 못 참아! 이대로 날려 버릴 거니까... 음?" 에이드리안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깜빡였다. 이불 안이 조용했다. 강아지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지금쯤 쫄레쫄레 움직이면서 화를 돋우어야 할 강아지가 왜 이렇게 잠잠하지? 딱히 집어서 말하기는 그랬지만 분명 무언가가 이상했다.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의 이불을 확 걷어내며 소리쳤다. "너어! 이번엔 진짜로 쫓아보낼..." 에이드리안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강아지가 힘없이 누워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에이드리안은 가까이 다가갔다가 물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저주저하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슬쩍 다가갔다. 그리고 멀찍이 서서 손가락으로 강아지를 쿡쿡 찔렀다. "야. 왜 그래? 쫓겨난다고 생각하니까 슬픈 거야?" 에이드리안이 쿡쿡 찔러대는 동안에도 강아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아까 까지만 해도 잘 움직이던 강아지가 갑자기 누워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강아지의 움직임이 꽤 힘겨웠던 것 같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침대 가에 앉아 강아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있잖아?" 에이드리안은 놀라서 손을 강아지의 몸으로 내렸다. 온 몸이 뜨끈뜨끈했다. 갑자기 화가 났다. 도대체 아플 때도 쥬느비에브와 이렇게 똑같다니! "야!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에이드리안은 정신 없이 강아지를 안아들고 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고 보니 강아지는 말을 못 하지.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의 생각을 힘겹게 몰아내며 한쪽 팔로 강아지를 안고 자유로운 한 쪽 팔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가 손잡이에 힘을 주려는 순간, 아래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방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두 손 가득 개밥으로 추정되는 빨간색 종이 봉투를 들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에 힘없이 안겨 있는 강아지를 보고 눈을 멀뚱거렸다. "어, 꼬마 에드, 왜 그러고 있어요? 아직 낮잠 시간 아닌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들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어? 뜨거운데. 꼬마 에드가 뜨거운데..." "쥬르, 강아지 아픈가 봐."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감싸 안으며 걱정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쥬느비에브는 손에 들고 있던 개밥 봉투를 툭 하고 떨어뜨리고 말았다. 곧 이어 까만 눈망울에 눈물이 퐁퐁 흐르기 시작했다. "아, 아프다고? 꼬마 에드가 아픈 거예요? 그럼...아프면 주,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럼 싫은데. 정말 싫은데.... 흐, 흐어어어어어어어엉-- 흐어어엉--- 어떻게 해요. 흐어어어어엉----" "쥬르, 울지 마. 수의사한테 보이면 괜찮을 거니까 빨리 톨레한테 수의사 좀 부르라고 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울먹이며 뒤돌아 섰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 아래층으로 쿵쾅쿵쾅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다시 쥬느비에브의 침대로 갔다. 강아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준 에이드리안은 강아지의 보드라운 털을 한 번 쓸어 주었다. 강아지는 숨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강아지의 모습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힘없이 누워있는 강아지가 물리는 없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에이드리안은 다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라라라 라-- 라라라라 라라 라---" 하얀빛이 강아지의 몸 위로 맴돌았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계속 강아지에게 레플리카를 뿜어내었다. 그러고 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를 쫓아 보내려고 왔는데 이렇게 강아지를 위해 레플리카까지 쓰게 될 줄이야. 정말 사람 사는 일은 모른다고 하더니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힘없이 골골거리고 있는 강아지는 정말 불쌍해 보였다. ******** 잠시 후. 쥬느비에브는 콧물까지 흘려가며 계속 훌쩍이고 있었다. 자신의 침대 위에 맥없이 누워있는 하얀 강아지를 보면서 손수건에 팽하고 코를 풀던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수의사가 강아지를 진찰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수건은 에이드리안의 것이었다. 잘 빨아서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한 번 손수건에 코를 풀었다. 톨레가 급하게 연락을 취해 달려온 수의사는 꽤 젊은 아저씨였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수의사에게 물었다. "꼬마 에드, 괜찮을 거죠? 주, 죽는 거 아니죠?" 쥬느비에브의 물음에 수의사가 빙긋이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강아지를 지켜보고 있던 에이드리안도 수의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집에 온 이상, 수의사로서 책임을 져야 할거야. 만약 강아지가 이대로 죽거나 하면...나로서는 좋지 않은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 에이드리안이 냉랭하게 수의사를 쳐다보자 수의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주, 죽다니요. 이 정도에 죽으면 아르헨의 개들 중 살아 있는 개가 없을 겁니다. 오늘 아침에 뭔가 심하게 과식을 한 모양인데...그 것 때문에 이렇게 열이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씩 이런 경우도 있지요. 약을 먹이면 금새 괜찮아질 것입니다." 수의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씨익 웃으며 침대 위에 풀쩍 뛰어올라가 강아지 옆에 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누웠다. "꼬마 에드, 이제 괜찮을 거래. 헤헤. 다행이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내가 모롤라 많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다행이다. 우웅-" 기뻐하는 쥬르와 달리 에이드리안은 정신적 공황 상태를 맛보고 있었다. 수의사가 집사에게 약을 건네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그대로 굳어 말을 하지 못했다. 과식. 과식이라고 했나? 고작 과식 때문에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단 말인가! 내가 친히 레플리카까지 써줬는데. 어떻게 저런 면도 쥬느비에브와 똑같단 말인가! 에이드리안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어어? 에이드리안! 어디가요? 꼬마 에드, 간병 해 줘야죠! 싫으면...그럼 나중에 병 문안 와요. 알았죠? 올 때 모롤라 선물세트 사 가지고 와요!" 멀리서 웅웅거리며 들리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저 눕고만 싶었다. 자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힘없는 강아지의 모습에 당황해하고 걱정스레 다독거리던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 정말이지 한심한 기분이었다. 죽는다고? 고작 과식으로 죽는 강아지 보았나! 이것저것 모두 정말 한심했다! ********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강아지 때문에 피곤했던 것인지 꽤 오랜 시간 잔 것 같았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몸을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아직 머리가 멍한 걸로 보아 잠이 덜깬 것 같았다. 하얀 잠옷 소매로 눈을 비비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문이 열리고 방안으로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곧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에이드리안, 아직도 자요?" "안 자. 방금 일어났어."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가 살며시 웃더니 불을 켜고 쪼르르 방안으로 달려왔다. 방안이 환해지면서 쥬느비에브가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잠옷 차림이라는 것이 생각나 고개를 숙여 입고 있는 잠옷을 쳐다보았다. 옷 갈아입기 귀찮았다. 그냥 가만히 있기로 결정했다. 어느 새 쥬느비에브가 침대 옆에 다가와 쿵 하고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에이드리안. 오늘 고마워요." "뭐가?"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멍하게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요. 꼬마 에드 보살펴 준 거. 정말 고마워요. 내가 잘 돌봤어야 하는데... 있잖아요, 꼬마 에드, 지금은 막 뛰어다니고 그래요." "으응..."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그 강아지 말인데요. 나 닮았지 않아요?" "응?" 쥬느비에브의 난데없는 물음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 자신도 강아지와 자신이 닮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가? 둔한 것과 하는 행동이 정말 닮았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짓고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말했다. "꼬마 에드, 나 많이 닮았어요. 나처럼 마망도 파파도 없고. 처음에 봤을 때 때가 꼬질꼬질했는데 그 모습이 나랑 너무 닮은 거 같아서 많이 마음이 아팠거든요. 밥도 못 먹었었나 봐요. 배고파서 짖지도 않더라구요. 나도 그랬는데...나도 예전에는 그랬는데... 많이 외롭고 쓸쓸하고 배가 고팠었는데." "쥬르..." 에이드리안은 예상치 못한 쥬느비에브의 말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 에이드리안을 만나고 나서 아주 아주 행복하게 됐잖아요. 그래서 나도 멍멍이, 꼬마 에드를 많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에이드리안이 나 행복하게 해 준 것처럼. 그런데 역시 난 잘 안 되나봐요. 꼬마 에드가 아픈 것도 모르고..." "쥬르, 강아지 많이 아팠던 것도 아니잖아." 에이드리안은 머뭇거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불쌍한 개 한 마리 사온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쥬느비에브가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기분이 나아진 건지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 멍멍이 이름, 에이드리안이라고 붙인 거 말이에요. 사실은 내가 멍멍이를 많이 행복하게 해 주면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랑 같은 거잖아요. 멍멍이 이름도 에이드리안이니까. 내가 멍멍이를 행복하게 해주면 내가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니까...그래서 에이드리안이라고 이름 붙인 거예요." 쥬느비에브는 미소를 띈 채 에이드리안을 응시했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장난스레 눈동자를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쥬르. 나 개, 싫어하는데..." "에에? 멍멍이를 싫어한다고요?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꼬마 에드, 잘 돌봐 줬잖아요." 쥬느비에브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전에 모롤라 사건으로 복수하려고 강아지를 데려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싱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너 몰랐어? 나 어릴 때, 개한테 물린 적 있단 말이야. 넌 도대체 약혼자에 대해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음...음...그랬구나. 그, 그럼 꼬마 에드도 싫어요?" 쥬느비에브는 의기소침해진 건지 작은 목소리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저 모습도 그 하얀 강아지와 닮았다. 가끔씩 눈을 깜빡이며 저런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던 하얀 강아지.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싫지 않아. 우리 집에 사니까 이제 한 가족이잖아? 너와 내가 가족인 것 처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쥬느비에브는 다짜고짜 에이드리안에게 안겨 볼을 비볐다. "헤에- 난 에이드리안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에이드리안이 제일 좋아!"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렇게 앞 뒤 안 가리고 자신에게 안겨서 뺨을 비벼대는 것도 강아지와 똑같았다. 그리고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것도 너무나 똑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등을 다독거리며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그 때 배 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뭉실뭉실한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내려 이불을 쳐다보았다. 이불 밑으로 무언가가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외쳤다. "꼬마 에드!" 하얀 강아지가 눈을 말똥거리며 이불 밑에서 쏘옥 고개를 내밀었다. 강아지는 엉덩이를 한 번 움찔거리더니 쫄레쫄레 쥬느비에브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홱 방향을 돌려 에이드리안의 품에 폭 안겼다. "이 녀석, 어리광부리는 것도 똑같잖아. 너 언제 온 거야?"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부드러운 털이 너무 기분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까르르 웃어댔다. "너무 몽실몽실해요. 꼬마 에드, 너도 이제 우리 가족인 거야. 알았지?" 쥬느비에브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강아지는 연신 에이드리안에게 몸을 비벼댔다. 에이드리안은 유쾌하게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르, 내일은 같이 산책이나 가 볼까? 강아지 데리고 숲이나...음?"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따끔한 느낌이 들어 무심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입을 뻐끔하게 벌리고 말았다. 하얀 강아지가 자신의 손목을 덥석 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꼬, 꼬마 에드! 에이드리안을 물면 어떻게 해. 아, 안 아파요? 에이드리안. 꼬, 꼬마 에드, 바보. 훌쩍. 훌쩍. 어떻게 해, 꼬마 에드가 에이드리안을 물었어. 흐어어어어엉---" "쥬르, 안 아프니까 울지 마. 야! 강아지, 빨리 떨어져!"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흔들며 소리쳤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놀랄 겨를도 없었다. 강아지는 실룩실룩거리며 몸을 흔들어 댔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몸을 비비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애정의 표현인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왜 또 깨물고 난리야! 이 강아지야! 그 날 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손목을 물고 대롱거리는 강아지와 옆에서 계속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쥬느비에브덕분에 밤새도록 정신 없이 소리를 질러야 했다. ******** 다음 날. 에이드리안은 스콜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하얀 붕대로 감겨있는 자신의 손목이 못내 불쌍해 보였다. 어제 강아지에게 물린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사실 레플리카를 쓰면 그 정도 상처야 금새 낫게 할 수도 있지만 강아지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붕대를 감아놓은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걸음을 옮기다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강아지가 자신의 뒤를 쫄레쫄레 따라오고 있었다. 왠지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강아지는 몽실몽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쫄랑쫄랑 따라오다 그만 발라당 넘어졌다. 그러나 강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다시 실룩실룩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모롤라를 덥석 베어 물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쥬느비에브가 따라오고 있었다. 입 안 가득 모롤라의 달콤한 맛을 즐기고 있는 그녀는 그야말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 모습이 도대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자신을 쫄레쫄레 따라오는 강아지와 그 강아지를 따라오며 콧노래를 부르는 쥬느비에브. 왠지 피곤해지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제73음(第73音) Male? Female?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팔랑팔랑 낙엽이 지고 있었다. 어느새 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사라지고 그저 따뜻하게 지면을 달구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푸르던 숲이 이제는 갈색 붓을 스친 듯 연한 갈색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베이지 색 모자를 꾹 눌러쓰고 총총 걸음을 옮겼다. 안느마리가 급히 식당으로 나오라고 전갈을 보내와서 식당 <르 뤼센부르>에 가는 길이었다. 갈색 천으로 만들어진 원피스를 손으로 탁탁 털어 낸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시내에 나가서 맞춘 이 갈색 원피스가 퍽 마음에 들었다. 치마 자락 끝에 커다란 낙엽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 장식이 너무 귀여워 보여 쥬느비에브는 쿡쿡 웃음을 삼켰다. 짙은 고동색 손가방을 대롱대롱 흔들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힘차게 걸어갔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에 나른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달려갔다. "야아- 가을이다! 가을이야-" ********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를 찾기 위해 시선을 이리지리 옮겼다. 곧 지배인 하옌도르가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쥬느비에브 아가씨."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느마리 왔어요?" 쥬느비에브는 귀엽게 생긋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하옌도르는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쥬느비에브에게 웃어 주며 그녀를 안내했다. 그리고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모스테츠 님이 오시긴 했는데...지금 몹시 곤란한 상황이..."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거렸다. 안느마리가 무슨 일이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빨리 식당으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뭔가 급한 일인 거 같아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달려온 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에게 뭔가 중대한 일이 생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에게 어떤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그녀는 안느마리의 힘이 되고 싶었다. 하옌도르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간 쥬느비에브는 순간 귀를 때리는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주워든 쥬느비에브는 울고 있는 안느마리에게 다가갔다. "아, 안느마리, 왜 울어. 왜 우냐구. 울지 마." 쥬느비에브는 엎드려 오열을 하고 있는 안느마리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언제나 웃고 있었던 친구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그녀와 꼬치구이를 사먹으며 즐겁게 웃던 그녀가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며 안느마리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아 그녀의 팔을 두드렸다. "안느마리, 울지 말래두. 나 오늘 에이드리안한테서 용돈 받았으니까 맛난 거 사줄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달랠 때 자주 써먹는 '간식으로 달래기' 전법을 펼쳤다. 이윽고 안느마리가 얼굴을 들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된 안느마리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었다. 얼른 가방에서 모롤라 그림이 앙증맞게 그려진 손수건을 꺼낸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한테 말해 봐. 이래봬도 스콜라 레이디들의 상담을 오랜 시간..." 쥬느비에브는 말을 하다가 겸연쩍어져 말끝을 흐렸다. 안느마리를 달래려고 미라벨이 했던 말을 생각하다가 자신과는 거리가 먼 대사를 읊고 말았다. '아유, 나도 참. 난 스콜라 레이디들 상담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쥬느비에브는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안느마리의 머리를 토닥였다. "안느마리. 뭐든 나한테 말해 봐. 이 쥬느비에브 님이 다 들어줄 테니까." 자신이 말해 놓고도 왠지 미덥지 않은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리고 혀를 쏙 내밀었다. 그 때 안느마리의 목소리가 들려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 나....나...남자가 되어야 할지도 몰라. 난....난....여잔데..." "에에? 안느마리가 남자가 된다고?"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눈을 말똥말똥 거렸다. 안느마리가 남자가 된다고? 하지만 안느마리는 원래 남자잖아. 쥬느비에브는 지배인이 손수가져다 준 오렌지소다를 받고는 빨대를 쪽쪽 빨며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안느마리는 눈물로 얼룩덜룩한 얼굴을 손으로 한번 씨익 닦고는 소다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통한 얼굴로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나한테 여동생이 생겼지 뭐야. 난 당연히 이번에도 남자가 태어나겠거니 하고 신경도 안 썼는데 이런 일이...흑... 이제 여동생이 생겼으니 오빠들도 더 이상 날 여자 취급해 주지 않을 거야. 흑...흑..." "에에? 동생? 동생이 태어났다고? 언제? 와아- 뽀송뽀송 귀엽겠다. 안느마리, 우리 아기 보러 가....자...."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말하다가 매섭게 노려보는 안느마리의 눈빛에 말을 흐렸다. 갑자기 쑥스러워진 쥬느비에브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갑자기 이상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쥬느비에브는 애써 아쉬운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도, 동생이라니 큰 일이네. 아, 안느마리 그럼 이제부터 남자하는 거야?" "몰랏!! 와앙-" 안느마리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다시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우는 안느마리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안느마리가 남자가 된다고? 음...앗! 그건 곤란해!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안느마리가 남자가 되었을 경우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안느마리가 남자가 되면 분명 에이드리안이 안느마리를 내 곁에 두지 않을 거야. 남자 친구라고 하면 펄쩍 뛸 게 틀림없으니까. 그럼 난 단 한명 밖에 없는 친구를 잃게 될 거고, 혼자 쓸쓸하게 스콜라에 다녀야 하고, 같이 꼬치구이 먹어줄 사람도 없고...그럼 난 결국 외로움에 지쳐 우울증에 걸리고 말겠지. 그리고 결국 우울증이 악화되어서 나는 몸져눕고...음...이 세상과 바이바이 할지도...그건 안 돼! 나, 아직 에이드리안이랑 결혼도 못 했는데!!' 갑자기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사명감에 휩싸인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손을 잡아채서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안느마리. 내가 안느마리, 여자로 있도록 도와줄게." "쥬느비에브... 역시 넌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야. 흑..."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싸안고 우정의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렇게 눈물 속에 빛나고 있었다. ******** 안느마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쥬느비에브는 곧 바로 서재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스콜라에 나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모자와 손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에이드리안의 책상으로 달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에헤헤. 안느마리. 쥬느비에브가 안느마리를 구해줄게." 쥬느비에브는 왠지 자신이 멋있게 느껴져 어깨를 으쓱으쓱하다가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려 정신을 가다듬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책상 서랍은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에이드리안다웠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 빙그레 웃으며 이것저것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참, 내 필통."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치고는 테이블로 달려가 손가방 안에서 앙증맞은 곰돌이 모양의 필통을 꺼냈다. 필통을 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쥬느비에브는 다시 꼼꼼히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찾던 물건을 찾자 함박 미소를 흘렸다. "헤에- 찾았다. 편지지! 엘크로이츠 편지지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편지지첩에서 한 장을 쭉 떼어 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의 땀을 옷에 삭삭 닦아낸 쥬느비에브는 필통에서 은색 펜을 꺼내 또박또박 편지지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모스테츠 씨에게...음...멋지다." 쥬느비에브는 스스로 흐뭇해져 빙긋 미소를 흘리며 다시 편지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하얗고 몽실몽실한 것이 촐랑촐랑 뛰어왔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에게 빙긋 미소지어주며 말했다. "꼬마 에드, 나 지금 바쁘니까 좀 있다 놀아줄게. 아니면 에이드리안이랑 놀아." 강아지는 쥬느비에브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그녀의 발 밑으로 와 혼자 데굴데굴 구르면서 놀았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다시 펜을 놀렸다. "...댁의 따님을 제 신부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엘크로이츠의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드림... 음!! 다 됐다!" 쥬느비에브는 짤막한 편지글을 완성하고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편지지를 잘 접어 하얀 봉투에 넣은 쥬느비에브는 다시 서랍을 뒤져 엘크로이츠의 인장을 찾아내었다. 봉투의 덮개 부분에 인장을 쿵 찍어 봉한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웃으며 편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랄랄라- 설마 유벨 오빠가 안느마리를 신부로 맞겠다는데 여장 관두라고 하지는 않겠지? 남자랑 남자는 결혼 못 한다구. 훗, 이제 이 편지를 보내면 안느마리 오빠랑 부모님이랑 그냥 여자로 지내라고 하실 거야. 헤헤- 난 정말 너무 똑똑해." 쥬느비에브는 자기 자신이 너무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한껏 자신에 대한 칭찬을 한 쥬느비에브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혼자 남겨진 강아지는 여전히 데구르르르 구르면서 놀고 있었다. ******** 며칠 뒤. 안느마리는 침울하게 유벨의 조소를 받고 있었다. 유벨은 배를 잡고 웃으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아하하- 그래서 결국 부모님이 너 여장 관두라고 했다고? 허- 거참, 현명한 판단이시군. 아하하-" "유벨, 시끄러워. 그만 웃어." 보다 못한 에이드리안이 이마를 찌푸리며 유벨을 말렸다. 에이드리안은 품에 안고 있는 하얀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며 쥬느비에브에게 눈길을 주었다. 옆에서 있던 쥬느비에브도 발끈해서 유벨에게 따졌다. "유벨 오빠, 정말 나쁜 사람이야. 안느마리는 지금 자아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고요!" 쥬느비에브는 말해놓고 보니 자신이 너무 어려운 말을 쓴 것 같아 뿌듯해졌다. 자아정체성이라니...정말 멋진 말이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순간 안느마리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자신도 우울해져 버렸다. 시무룩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안느마리가 말했다. "쥬느비에브, 그만 둬. 어떤 위로라도 이제는 소용없어. 난...난...여자지만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야하는 거야. 흑-"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 아니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군. 남자로서의 삶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 상심하지 말도록."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안느마리는 서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훌쩍였다. 미라벨이 한숨을 쉬며 안느마리의 등을 두드렸다. "안느마리, 힘내요. 남자, 여자가 그런 게 뭐 중요하나요?" "미라벨 님은 몰라요. 난...진심으로 유벨 님을 좋아했는데 이제 나의 소중한 꿈을 깨어져 버렸어요. 흑-" 그 때 학생회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학생회 위원이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학생회 앞으로 서신입니다. 모스테츠 무역회사의 소인이 찍혀 있습니다." 에이드리안은 '모스테츠'라는 말에 눈썹을 실룩이며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한 팔로 강아지를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봉투를 펼쳤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옆에서 궁금해 못 견디겠는지 쥬느비에브가 쪼르르 달려와 에이드리안의 옆에 붙어 편지를 곁눈질했다. 에이드리안은 편지지를 손에 들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엘크로이츠 학생회장, 비인 님께. 흠...나한테 온 거잖아? 부족한 제 '아들'이 신세를 지고 있어 언제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야, 강아지. 가만 좀 있어봐." 에이드리안은 자꾸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보듬어 주었다. 강아지는 그제야 몸을 비비며 에이드리안의 품에 쏘옥 안겼다. 한편, '아들'이란 말에 안느마리의 안색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평상시에는 언제나 '귀여운 딸'이라고 칭했던 부모님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갔다. "...일전에 받은 서신으로 저희들은 결심했답니다. 안느마리를 계속 여자아이로 두기로 말입니다. 새로 태어난 딸아이에게도 언니가 있는 편이 좋을거라 결론 내렸습니다." 순간 안느마리의 표정이 확 살아나며 방긋 미소가 피어올랐다. 반면 유벨의 얼굴에는 근심 어린 빛이 떠올랐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다음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일전의 서신에서 부탁하신 내용을 받아들여 저희 딸아이를 유벨 님께 시집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나하고 유벨 님이 결혼을?" 안느마리가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유벨은 화사한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흡사 사신을 만난 듯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질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웃음을 참지 못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유벨은 이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누가 누구에게 시집 와?" 유벨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에이드리안에게 달려왔다. 안느마리는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온 것 같은 황홀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밀어내고 나머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 태어난 우리 귀여운 딸, 리즈벨리를 유벨 님의 신부로..." "말도 안됏!!" "그게 무슨 말이얏!!" 유벨과 안느마리가 동시에 일어나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머지 내용을 읽었다. "그러므로 비인 님께서 부디 유벨 님과 우리 리즈벨리의 혼인 주례를 맡아 주시길." 유벨과 안느마리는 한 순간 혼이 빠진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편지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쥬르, 미라벨, 케이로프. 식사하러 가지." 에이드리안이 책상에서 내려 와 코트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쿡쿡 웃음을 삼키며 멍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유벨과 안느마리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원피스의 주름을 피며 살며시 웃었다. "어머, 세상에. 두 사람의 수난 시대로군요." "아아- 사랑의 행방은 어디로... 그나저나 일전의 서신이란 게 뭐지? 누가 쓴 거지?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은 아닐 테고." 케이로프의 말에 미라벨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하다 뒤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쥬느비에브로군요." "아아- 그렇군." 고개를 돌려 뿌듯한 표정의 쥬느비에브를 본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불쌍하디 불쌍한 유벨과 안느마리를 생각하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필이면 쥬느비에브가 나서다니...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의 편지 때문에 안느마리가 계속 여자로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쁜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랄하게 뜀박질을 했다. 뭔가 뜻이 잘못 전달 된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안느마리가 계속 여자로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제 안느마리는 계속 여자로 있을 거고 자신이 우울증에 걸릴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 세상은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 제74음(第74音) 데이트, 데이트!!(1)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학생회실에 발걸음한 쥬느비에브는 달라진 학생회실의 가구 배치에 눈을 깜빡였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가구 배치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영문을 몰라 둘레둘레 고개를 흔들었다. 학생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어 쥬느비에브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쳤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방을 꼼꼼하게 살폈다. 전에 있던 에이드리안의 책상과 책장들은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이내 쥬느비에브는 학생회실에 커다란 책상 2개가 더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회실 자체가 워낙 넓어 책상 2개쯤 더 놓여 있다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멀뚱멀뚱 끔뻑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흠... 에이드리안이 책상 하나로는 부족했나 보지? 하지만 혼자서 어떻게 두 개를 쓴담. 모르겠네. 우웅~"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안느마리를 발견했다. 안느마리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느마리, 안녕?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그 상자는 뭐야?" "쥬느비에브! 우리 책상 생겼잖아! 에이드리안 님이 말씀 안 해 주셨어?"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거렸다. 내 책상?! 안느마리는 상자를 방 안으로 들고 와 새로 배치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힘이 드는지 땀을 닦으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에게 달려갔다. "여기가 안느마리 책상이야? 그럼 저거, 저기 저 책상은 내 책상이야?" "그럼! 내가 일부러 에이드리안 님 옆 책상을 양보해 준거라고. 이제 학생회실에서도 책상 앞에 앉아 편하게 에이드리안 님을 관찰할 수 있다구. 좋지?" "으응!!" 쥬느비에브는 너무 신났다. 내 책상이라니!! 그녀는 신이 나서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짙은 고동색의 묵직해 보이는 책상으로 달려갔다. 안느마리는 상자에서 자신의 물건을 꺼내 서랍 안에 정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책상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새롭게 그녀의 '소유'가 된 책상을 관찰했다. 책상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쓰임새 있는 서랍들이 줄지어 달려 있었고 고급스러운 금속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책상 밑까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일어나 의자에 폭 주저앉았다. 푹신푹신한 의자가 너무 기분 좋았다. "헤헤. 멋지다, 멋져." 쥬느비에브는 그녀의 까만 생머리를 뒤로 넘기고 베시시 웃었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안느마리, 서랍 속에 넣는 게 뭐야?" "응. 혹시 나쁜 악당이 쳐들어오면 안 되니까 악당 퇴치용 부적 하나 붙여 놓고. 내 컬렉션 몇 개 넣어두려고. 너도 하나 줄까? 풍뎅이 말린 거 있는데." 안느마리는 말린 풍뎅이가 잔뜩 들어있는 유리병 하나를 쥬느비에브에게 건넸다. 쥬느비에브는 자꾸만 질려 가는 얼굴빛을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들었다. "괘, 괜찮아. 나도 짐 가지러 가야겠다. 음...서랍 안에 뭘 넣어놓을까?" 쥬느비에브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쿡쿡 찌르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결국 집에서 생각하기로 한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느마리에게 인사를 했다. "안느마리, 나 집에 가서 내 물건 챙겨올래. 안느마리, 안녕!" "그래, 쥬느비에브, 나중에 보자!" 안느마리가 정겹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빨간색 반바지를 토닥토닥 털어 내고 노란색 크로스백을 고쳐 멘 다음 즐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달음질했다. 어서 방에 가서 물건을 챙겨갈 생각이었다. 2층의 복도를 걸어가던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생각나는 바가 있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쳤다. "에이드리안한테 가 봐야지." 쥬느비에브는 곧장 진로를 바꿔 에이드리안의 방 쪽으로 달려갔다. 방 문 앞에 선 쥬느비에브는 잠시 숨을 고르며 옷매무새를 살폈다. 생머리도 손가락으로 빗어 가지런하게 보이도록 다듬고 반바지와 티셔츠도 주름 없이 반듯하게 폈다. 쥬느비에브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힘차게 문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문이 열리고 환하게 빛이 쏟아졌다. 그녀는 눈이 부셔 잠시 손으로 눈을 가리다가 이내 적응이 되자 생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쥬느비에브는 바깥쪽에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에이드리안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노래다! 토끼 귀, 토끼 귀!" 쥬느비에브는 두 손을 토끼 귀처럼 머리 위에 딱 붙여서 테라스 쪽으로 깡총깡총 뛰어갔다. 테라스 앞의 하얀 휘장이 바람에 날렸다. 쥬느비에브는 그 나른한 분위기에 빙긋 웃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생명의 찬란함을 그대의 두 손에. 당신과의 만남에 그 보다 더 찬란함이....]] 쥬느비에브는 더욱 잘 들리는 에이드리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테라스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노래에 집중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예뻤다.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다시 휘장이 바람에 날렸다. 순간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언 듯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이상해! 노래가 그쳤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이 밝은 빛 속에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쥬르." 순간 쥬느비에브는 그 자리에 쿵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져서 꿈틀거리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이 놀란 얼굴로 달려와 몸을 흔들었다. "쥬, 쥬르! 왜 그래. 응?" "에, 에이드리안, 미워요. 훌쩍, 훌쩍. 흐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머리를 만졌다. 아차! 잊었었다! ******** 자신의 침대에 베개를 등진 채 누워 있는 쥬느비에브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머쓱해진 에이드리안은 눈동자를 돌리며 슬쩍 그녀를 곁눈질했다. 오랜 눈싸움에 결국 맥이 풀린 에이드리안은 결국 한숨을 쉬며 먼저 항복 의사를 보였다. "쥬르, 너한테 말 안 한건 미안해. 하지만 너무 귀찮고...음...그리고 생각난 김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 몰래 머리를 잘라 버리다니... 정말 미워욧! 나 긴 머리가 좋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요? 어서 물어내요! 전에는 머리카락 쑥쑥 자라더니 이제는 왜 안 자라는 거예요! 난 몰라."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린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빼족거리며 뚱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목까지 오는 자신의 금발을 매만지며 당혹스레 쥬느비에브를 보았다.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워서 결국 오늘 사람을 불러 머리카락을 자른 참이었다. 쥬느비에브에게 말하려다 잔소리를 할 것 같아 참았는데 결국 이런 상황이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쥬르, 내 머리 자르고 남은 거 너 줄게. 그 거 가지고 놀면 되잖아." "칫, 그런 거라면 전에 준 것도 있단 말이에요. 자른 거 가지고는 머리도 못 땋고 묶어줄 수도 없고. 흥! 에이드리안 바보." "너 자꾸 그럴래?" 듣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결국 화를 내버렸다. 갑자기 그가 화를 내자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초조한 마음으로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화...났어요? 아니죠? 그쵸? "화났어! 내 머리 내가 자르겠다는데 왜 그래?" 에이드리안은 정말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당황했다. 정말로 에이드리안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어기적 나와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만지며 베시시 웃었다. "지, 지금 보니까 이번에 머리 너무 예쁘게 자른 거 같아요. 전에 머리보다 더 예뻐요. 앞머리도 예쁘고. 헤, 헤헤헤헤-"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고 있는 에이드리안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겸연쩍어 계속 웃기만 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손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시내 갈 거야. 너, 갈 거야, 말 거야?" "에엣? 시내요? 상점가에?"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묻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 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 것도 좀 있고. 너는?" "다, 당연히 갈래. 갈래요. 헤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화가 풀렸음을 직감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아이, 기분 좋아! 데이트다! 하여튼 울고 나면 꼭 좋은 일이 생긴다니까. 헤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실룩실룩 기쁨의 춤을 췄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에이드리안은 밝아진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음...이열치열 이랬나. 화를 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 에이드리안은 새로 터득한 '쥬느비에브 달래기' 방법을 마음 속에 새기며 밖으로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엉거주춤한 춤을 추고 있었다. ******** 쥬느비에브는 계속 기쁨의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드레스 룸 쪽으로 달려갔다. 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다. 드레스 룸의 문을 벌컥 연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가지각색의 옷을 살폈다. 결국 노란색 셔츠와 핑크색의 동그란 스커트를 결정한 쥬느비에브는 옷을 침대에 던져놓고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반바지를 벗고 하얀 속옷 차림으로 우당탕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내 머리 끈 어디 갔담? 내 가방은? 내 모자는?" 옆에서 꼬마 에드도 덩달아 둥실둥실 뛰어다녔다. 쥬느비에브는 꼬마 에드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다시 우당탕거리며 방안을 뛰어다녔다. 한동안 뛰어다닌 결과 주르륵 땀이 흐르자 쥬느비에브는 둘레둘레 고개를 흔들고는 손에 들고 있던 모자와 가방을 던져버리고 욕실로 뛰어갔다. 속옷을 홱홱 벗어 던진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욕탕에 다이빙했다. 물이 퐁퐁 솟아 오르고 있었다. 커다란 욕조에서 첨벙거리며 쥬느비에브는 까르르 웃었다. "헤헤- 시원해! 빨리 씻고 옷 입어야지! 꼬마 에드, 너도 들어와." 부러워하는 눈으로 쥬느비에브를 보던 꼬마 에드가 뒤뚱뒤뚱거리며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놀라운 점프력으로 욕탕 안으로 풍덩하고 빠져들었다. 쥬느비에브는 꼬마 에드를 건져내어 하얀 털을 넘겨주고 얼마 전에 강아지용으로 산 작은 튜브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꼬마 에드는 기분이 좋은지 발을 버둥거리며 수영을 즐겼다. "꼬마 에드, 수영 잘 하는구나. 난 꼬마 에드가 너무 자랑스러워. 헤에-" 쥬느비에브는 꼬마 에드에게 웃어주고 물 속으로 쑤욱 들어가 잠수를 즐겼다. 그녀는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공기 방울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 때 갑자기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에이드리안이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쥬르, 내 타이핀 못 봤어? 어제 네가 가지고 놀았...잖...아..." 에이드리안은 튜브를 타고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쳐다보다 물에 잠겨 있는 쥬느비에브를 발견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갑자기 확 하고 뻗쳐오는 열에 당황해 얼굴을 돌렸다. 세, 세상에!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도 여전히 물에 잠긴 채 놀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에이드리안이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말았다!! 갑자기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몸을 가려야 한다는 정신도 없이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발걸음 돌려 욕실에서 벗어나려다 뒤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쥬느비에브가 눈을 뜬 채 꼬르륵거리며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깜짝 놀라 욕탕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그녀를 건져 올렸다. 쥬느비에브가 안기면서 셔츠 자락이 젖어왔다. "쥬, 쥬르! 정신 차려! 쥬르!" 욕탕에서 익사할 뻔한 쥬느비에브는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이다 손을 들어 에이드리안을 쿡쿡 찔렀다. "에, 에이드리안, 나 부, 부끄럽단 말이에요. 놔, 놔줘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현실 파악을 하고 말았다. 맞아, 쥬느비에브는 아주 미, 민망한 모습이었지. 갑자기 그녀가 물에 빠지는 통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쿵쾅거리는 심장에 쥬느비에브를 놓치고 말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은 쥬느비에브는 어푸어푸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놓으라고 해서 정말 놓으면 어떻게 해욧! 나, 물에 빠져 죽을 뻔 했잖아욧!!" "쥬, 쥬르. 차라리 그냥 물에 가라앉는 게..." 다시 쥬느비에브의 곤혹스럽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모습을 보고만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몸을 돌리고 욕실 바깥쪽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그녀에게 던졌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갑자기 계속 충격을 받았더니 머리 속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어서 가려. 어서." 그제야 자신이 민망할 정도로 몸을 보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쥬느비에브는 잘 익은 토마토보다 더 얼굴을 붉히며 수건을 엉거주춤 몸에 둘렀다. 그 때 욕실 밖으로 나가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문을 탕 하고 닫으며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아, 하아-"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숨을 토하며 고개를 숙였다. 수건을 돌려 매듭을 짓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눈을 끔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수건으로 가려서 부끄러울 일은 없지만 여전히 온 몸에 열이 오르고 있는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은 두 손으로 문을 꽈악 잡고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미라벨이...온 거 같은데..." "에에?"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의 이 모습이 미라벨에게 들키면 다음 날 스콜라에 이상한 소문이 퍼질 것이라는 사실은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욕탕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다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회해 볼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 내 머리 미역 같아요. 젖어서 축 늘어진 게 미역 같아요." "......" 에이드리안은 이상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문가에 주저앉았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더 가라앉아 버렸다! 첨벙첨벙하고 꼬마 에드의 헤엄치는 소리 만이 욕실을 울리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가뜩이나 서로 창피하고 부끄러운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미라벨 때문에 욕실에서 3도르(시간)간이나 같이 있어야 했다. 무슨 일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라벨은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으로 방에서 쥬느비에브를 3도르 간이나 기다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리고 가끔씩 상대방을 곁눈질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3도르 간을 보냈다. 정말 부끄럽고...정말 짜릿하면서...역시나 부끄러운 3도르 간이였다. 그러나 덕분에 오늘 그들의 목적, 상점 가 나들이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열이 올라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기 때문이다. 제75음(第75音) 데이트, 데이트!!(2) 다음 날.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에이드리안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쥬느비에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쥬느비에브는 아침에 어제 일로 아직도 발간 얼굴을 하고 시내에는 언제 갈 거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가끔씩 감탄하는 일이지만 그녀의 '자기 밥그릇 찾기'는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어제 그런 민망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데이트를 하자는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바라보았다. 맑은 차 속에 얼굴이 비쳐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찻잔을 입으로 기울였다. 찻잔에 담긴 차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차 중 하나였으나 어제의 민망스러운 일을 생각하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 맛이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당황하다니. 에이드리안은 짧게 한숨을 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제 손질해서 시원해진 금발을 살짝 매만진 다음 자꾸 앞으로 내려오는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이 어느새 바짝 말라 보기 좋은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가을이다. 따뜻한 색깔이야."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창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이내 노래를 흥얼거리던 에이드리안은 잠시 후 귀를 울린 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하얀 색의 둥근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방안에 들어와 생긋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줍은 모습으로 손을 흔들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정성껏 차려 입은 것이 분명한 하얀색 원피스를 손으로 털어 주름을 없앴다. 그리고 헤실헤실 웃으며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뻐끔하게 입을 벌렸다. 이내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너, 너어- 그, 그 머리 뭐야?" 에이드리안이 화낼 것을 짐작했던 것인지 쥬느비에브는 모자를 두 손으로 꾹 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잦아지자 쥬느비에브는 눈을 뜨고 방글방글 웃으며 엉덩이까지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쁘죠? 에이드리안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에요. 사실 며칠 전에 헤어 샵에서 완성되어서 온 건데, 정말 예쁘죠? 그쵸?" 반짝이는 금발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리며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혀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기가 막힌 듯 쳐다보았지만 쥬느비에브의 새침 뗀 표정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상점가로 향했다. 결국 머리카락을 준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녀가 그 머리카락으로 무얼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도 자신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저 기분 좋게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상점가의 입구에 다다른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풀보풀 날리는 천으로 만들어진 소매를 쭉 잡아당기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팔짱을 꼈다. 에이드리안은 움찔하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다, 데이트! 너무 기분 좋아요. 오랜만이잖아요, 데이트. 헤헤- 짠! 가을의 햇볕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선글라스까지! 나, 멋지죠? 그런데 에이드리안, 오늘 뭐 사러 온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어디선가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걸친 다음 베시시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페이퍼 나이프. 전에 쓰던 거 잃어버렸어." "웅~ 그거 하인들한테 시키면 되잖아요. 알았다! 나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일부러 나온 거죠?" "무, 무슨 말 하는 거야? 너는. 그나저나 강아지는?" 에이드리안은 뭔가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는지 얼굴을 돌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꼬마 에드는 지금쯤 맛난 강아지 밥 먹고 있을걸요? 오늘 하루 톨레 아저씨랑 루이즈 아주머니가 봐주신다고 하셨어요. 데이트는 둘이서만 하고 싶었다고요. 나 잘했죠? 쥬느비에브는 그저 기분이 좋아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에 매달렸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쥬느비에브의 기분 좋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둘이서만 나오니까 정말 좋아요. 데이트-" 쥬느비에브는 주변에 경호원을 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에이드리안의 성격이 너무 좋았다. 덕분에 이렇게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둘만의 데이트도 하고! 물론 에이드리안 자신이 스스로를 지킬만한 능력이 충분히 되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누가 감히 광속성 레플리카를 지니고 있는 자에게 덤비겠는가. 쥬느비에브는 뿌듯한 가슴을 안고 상점가를 거닐고 있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마 에이드리안과 자신도 저 사람들처럼 다정한 연인으로 보이겠지? 쥬느비에브는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거려 볼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의 예측은 쥬느비에브와는 달랐다. 자신과 똑같은 금발을 머리에 달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자신의 무엇으로 보이겠는가. 잘 봐주면 사촌 동생, 심하면 여동생. 에이드리안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상점가의 잘 닦여진 대로를 걸으며 에이드리안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안느마리하고 유벨, 어떻게 지낸다고 그래? 요즘 통 안 보이잖아." "매일 싸워요, 두 사람. 안느마리는 이상하게 내 얼굴도 잘 안 보려고 하는 걸요. 내가 편지까지 써서 계속 여자로 있게 되었는데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나 봐요. 유벨 오빠도 나만 보면 피하고." 쥬느비에브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드리안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띄우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태어난 안느마리의 여동생 리즈벨리가 난데없는 신부 후보감이 되는 바람에 유벨은 요즘 들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느마리 또한 좋아하는 사람을 여동생에게 빼앗기게 생겨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흥, 유벨, 나한테 잔소리 많이 했지? 실컷 고생해라!! 에이드리안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을 때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참! 음. 음. 나도 살 거 있는데. 에이드리안, 나, 전에 봐 둔 물건 있는데 오늘 살래요. 거기부터 가요!"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또 연애 소설 같은 거겠지. 아니면 과일 가게에서 모롤라를 사거나...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계속 걸어갔다. ******** 에이드리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상점 안에 들어섰다. 막무가내로 잡아 끄는 쥬느비에브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그를 끌고 간 곳은 <엘레강스 & 뷰티>라고 하는 상점이었다. 상점 이름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는데 들어간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뒤돌아 서고 말았다. 물론 쥬느비에브에게 끌려 결국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지만. 그곳은 여성 물품만 취급하는 잡화점이었다. 잡화점치고는 고급 샵이어서 가게는 겉에서 봐도 훌륭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가게 점원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전에 제가 봐 둔 거요. 오늘 사려고 왔답니다." 점원이 눈을 깜빡이자 샵의 주인인 듯한 젊은 여자가 달려왔다. 그러나 가발에다 모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못 알아본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쥬느비에브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뭐 몰라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전에도 한 번밖에 온 적이 없는데다가 미라벨, 안느마리와 같이 온 것이라 그녀를 기억하지 못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안을 둘러보았다. 화장품과 손수건, 부채 같은 여성 용품이 진열대와 장식장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던 여주인은 이내 에이드리안을 알아보고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학생회의 회장이 상점을 방문하다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가 상점을 방문 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는 굉장한 영광이었다. "비, 비인 님. 왕림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아아." 에이드리안은 대충 대답을 하고 쥬느비에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쥬느비에브는 동그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이런 곳은 미라벨하고 와도 되잖아. 왜 날 끌고 온 거야.' '에이, 미라벨 언니랑 오면 레이스랑 프릴 달린 것만 골라 준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며 진열대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에이드리안의 옷자락을 잡고 끌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쥬느비에브가 진열대 앞에서자 여주인이 진열장으로 달려가 안에서 무언가를 잽싸게 꺼냈다.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요즘은 이런 것들이 인기랍니다." "응! 이거예요. 이거. 에이드리안, 이 거 예쁘죠?" 쥬느비에브는 매끄러운 촉감의 속치마를 몸에 대보며 에이드리안에게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속옷이라니! 도대체 이런 민망한 물건을 왜 나한테 고르라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어떤 것을 겨우 진정시키고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끌었다. "쥬르, 여긴 나중에 미라벨 하고 오고 우선 나가자." "에이, 미라벨 언니는 레이스 속옷만 골라 준다니까요. 나 과일 모양이나 귀여운 모양 고르고 싶단 말이에요. 아참, 모롤라 모양으로 수놓아진 건 없나요?" 쥬느비에브는 여주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진열장을 안을 살폈다.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혀 쥬느비에브를 홱 밀어내고 주인에게 말했다. "여기 진열장 안에 든 거 전부 사이즈 별로 내 사택으로 보내. 청구서도 그 쪽으로."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홱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됐지? 고르고 말 것도 없지? 어서 가자!" 쥬느비에브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에이드리안의 손에 질질 끌려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끌려가면서도 여주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여주인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어휴- 갑자기 방문하시다니. 십년 감수했네. 음? 맞아.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지? 분명 비인 님의 약혼녀는 검은 머리였는데. 맞아. 전에 한 번 샵을 방문해주신 적이 있는데 분명 검은 머리였어. 그럼 저 여자는? 아하. 숨겨둔 애인인가 보군. 하긴 높으신 분들은 다 그런 거지." 여주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진열대 안의 속옷을 하나씩 꺼냈다. 어쨌든 매상이 올라서 기분 좋은 그녀였다. ******** "너는! 그런 데 날 데려가서 어쩌자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상점에서 한 블록 정도 벗어나자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리며 주먹으로 뺨을 실룩실룩 돌렸다. "하지만! 나 소설책에서 봤단 말이에요. 남자친구가 속옷도 골라주고 그랬는데... 미라벨 언니도 왠지 멋져 보인다고 말했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는 뿌루퉁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이마에 핏발이 서는 것을 느끼며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가 눈치를 보며 움찔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쥬르, 잘 들어. 그런 건 남자친구에게만 해당되는 거고, 나는 네 약.혼.자. 이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되는 거지. 앞으로 또 저런데 가자고 하면 나 무척 화.낼.거.야." 에이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우아한 몸짓을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오랜만의 데이트인데 싸우고 싶은 마음 전혀 없었다. 어쨌든 속옷도 샀으니까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쥬느비에브는 모자를 두 손으로 잡아당겨 꾸욱 눌러쓴 다음 에이드리안을 쫓아 쫄레쫄레 뛰어 갔다. "에이드리안, 나 또 살 거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곳 아니에요. 같이 가요, 네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잡고 흔들며 기분 좋은 미소로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가자, 가." 에이드리안의 맥빠진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면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자고요!" ******** "에이드리안, 여기 있어요. 내가 사 가지고 올 테니까." 쥬느비에브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넋 나간 듯 눈짓을 했다. 나더러 이 앞에 서 있으라고? 에이드리안은 말도 안 된다며 손을 흔들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방긋 웃더니 상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에이드리안은 보석상으로 보이는 상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에 목걸이 보석 떨어졌다고 하더니. 흠..." 에이드리안은 이내 방실방실 웃으며 상점에서 나온 쥬느비에브를 맞으며 슬쩍 곁눈질했다. 손에 든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 가방 안에 넣은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매달렸다. "나, 배고파요. 자고로 데이트는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는 거라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쥬느비에브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 쥬느비에브의 뒤만 따라 다니게 된 에이드리안은 짧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뒤따랐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즐거워 보이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미소를 띄웠다. 입으로는 계속 불평 어린 말을 쏟아내어도 사실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그였다. 제76음(第76音) 데이트, 데이트!!(3)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쥬느비에브는 발랄한 걸음으로 대로를 걷고 있었다. 너무 기분 좋았다. 에이드리안과 매일매일 데이트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늘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에이드리안은 옆에서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다. 문득 쥬느비에브는 커다란 쇼윈도에 장식되어 있는 투명한 피아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투명한 피아노가 너무 예뻤다. 쥬느비에브는 유리창으로 달려가 딱 붙어 피아노를 관찰했다. 피아노 안의 이상한 장치들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는데 투명한 유리 같은 재질의 그것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다가왔다. "흠. 크리스탈 피아노네?" "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말똥말똥거렸다. 크리스탈 피아노라고? 저렇게 예쁜 피아노가 있다니. 에이드리안의 음악실에 있는 피아노도 이것만큼 예쁘진 않은데! 쥬느비에브는 피아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도 저런 피아노가 있었으면!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마음을 꿰뚫어본 건지 눈썹을 실룩였다. "갖고 싶어?" "으응..." 쥬느비에브는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피아노를 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너, 피아노 못 치잖아." "에이드리안이 가르쳐 줘요. 그러면 되잖아." 쥬느비에브는 기대감으로 한껏 잠긴 눈동자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상점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작은 오르간부터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까지 가지가지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장난삼아 건반을 눌렀다가 띵 하고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굳은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놀고 있어. 나 주문하고 올 테니까." 쥬느비에브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어 에이드리안이 안 쪽으로 들어가고 전시장에는 그녀만이 남게 되었다. 쥬느비에브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피아노 앞에 서서 집게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렀다. "띵- 딩- 띵- 나는야, 쥬르, 귀여운 쥬르, 예쁜 쥬르, 착한 쥬르..." 쥬느비에브 작사, 작곡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는 몸을 실룩실룩 움직였다. 그녀가 노래 2절을 부르려고 할 때 에이드리안과 주인으로 보이는 이저씨가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영수증으로 보이는 종이를 손에 들고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주인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주인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와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주인에게 말했다. "그럼 완성되는 데로 내 사택하고 에슈비츠 양의 연습실로 보내주기로 하고. 나머지 대금은 물건 오는 날 치루지." "예. 살펴 가십시오. 비인 님."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피아노 두 개나 산 거예요?" "응." "에에? 하지만 집에만 있으면 되는데." 쥬느비에브는 말을 마치고 에이드리안이 들고 있던 영수증을 빼앗아 눈동자를 굴렸다. "음...일십백천만...도대체 0이 몇 개나 붙은 거야... 에엣? 이렇게 비싸요?" 쥬느비에브는 피아노의 가격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에이드리안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걸음을 옮겼다. "특수 제작 주문으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약간 비싸긴 하지. 하지만 악기는 만지는 사람의 손을 타기 때문에 자신의 악기가 있어야 해. 집에서만 연주 할 거 아니잖아? 유벨이나 미라벨도 집에서 쓰는 악기와 연습실에서 쓰는 악기가 따로 있어. 너도 이젠 음감 연습을 하려면 제대로 된 악기가 있어야 하고." "응...그치만 너무 비싸다. 웅~ 모롤라 200 모네치는 되겠다." 계속 아쉬워하는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손뼉을 딱 치고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그럼 이 피아노, 에이드리안이 사 주는 거예요? 내 용돈으로는 이런 피아노 사는 거 어림도 없는데." "에슈비츠 가에서 오는 돈, 생각보다 많아, 쥬르. 내가 안 준 것뿐이지. 너 돈주면 모롤라만 잔뜩 사오잖아. 뭐, 피아노는 내가 사줄게. 선물이야, 선물."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에이드리안에게 매달렸다. "헤헤- 나 선물 좋아해요. 그럼 피아노 언제 오는 건데요?" "글쎄, 일주일쯤 걸릴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피아노 선물이라니! 정말 멋졌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웃으며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데이트에다가, 선물까지 받고 그녀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곁눈질하다가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대롱대롱 흔들리는 그녀의 손을 보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손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대로에서 손잡고 다니는 것이 좀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에이드리안은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하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을 통해 느껴졌다. 깜짝 놀란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보였다. 따뜻한 느낌에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에이드리안은 따뜻하게 파란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에이드리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네에- 가시지요, 비인 님." 시원한 가을 바람과 함께 두 사람의 데이트는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오랜만의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미행 없는 데이트다운 데이트였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미행이 없었던 이유는 미라벨이 의회에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을 혼자서만 독점하지 못하도록 서로간의 암묵적인 약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만 미행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미행을 하더라도 항상 두 사람이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참으로 페어플레이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 일주일 뒤. 드디어 피아노가 배달되었다. 쥬느비에브는 피아노가 온다는 소식에 아침 부터 우당탕탕 법석을 떨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그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피아노가 에이드리안의 음악실 옆방으로 옮겨졌다. 그 곳이 지금부터 쥬느비에브의 음악실이 될 예정이었다. 전에 전시장에서 본 것보다 더 크고 더 반짝거리고 멋져 보이는 피아노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쥬느비에브는 입을 쩍 벌리고 허둥지둥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피아노를 실어다 준 아저씨들이 떠나자 쥬느비에브는 폭신폭신한 피아노 의자에 앉아 딩딩딩 하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방안으로 퍼졌다. "이야- 정말 멋져요! 예쁜 소리다!" "맘에 들어?" 피아노 곁으로 다가온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반 위에 털썩 엎드렸다. 건반이 한꺼번에 눌리면서 쿵당탕 하고 소리가 났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나, 기분 최고예요. 음...음...정말 좋아요. 행복해." 피아노 옆에 기대어 있던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짓고는 쥬느비에브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에이드리안, 나, 피아노 선물 받은 기념으로 좋은 곡 하나만 쳐줘요. 네?" "싫어. 난 비싼 몸이야." 에이드리안이 장난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피아노에서 발딱 몸을 일으켜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피아노 연주해 주면 선물 줄게요. 선물!"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자세를 고쳐 피아노에 기대며 물었다. "선물? 뭔데?" "연주해 주면 가르쳐 줄 거야." 방긋방긋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졌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는 쥬느비에브를 살짝 밀어내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옆에 앉아 조마조마한 눈으로 건반을 쳐다보았다. "한 곡만 칠 거야." 에이드리안은 말을 끝내고 건반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쥬느비에브는 붕붕 고개를 끄덕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곧 이어 에이드리안의 손이 움직이고 동시에 맑은 피아노의 음이 방 안 구석구석 퍼졌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선율에 발갛게 볼이 달구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듯 건반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으로 보아 무척 좋은 느낌임에는 틀림없었다. 자꾸만 열이 오르는 볼을 토닥이며 쥬느비에브는 그만 에이드리안의 뺨에 쪽 하고 키스를 하고 말았다. "응?" 에이드리안이 연주를 멈추고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에 스스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버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째깍째깍 하고 시계 초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그나마 자유로운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리며 이 침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때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쥬르." "에에? 으, 으아악!" 갑작스러운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놀란 쥬느비에브는 그만 의자 뒤로 뒤집어 지고 말았다. 보기 좋게 데굴데굴 굴러버린 쥬느비에브는 핑핑 도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치며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도 의자 위에 앉아 있지는 않았다. 쥬느비에브가 넘어지면서 그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도 옆으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의자에 이마를 부딪혀 연신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쥬르, 너... 도대체 왜 그래?" "에..헤. 에헤헤헤헤헤-" 쥬느비에브는 멋쩍은 탓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음을 흘렸다. 에이드리안은 한심한 기분에 고개를 숙이다 쥬느비에브가 내미는 작은 상자에 고개를 들었다. "뭐야?" "선물이요." 쥬느비에브는 넘어진 채로 주머니에서 꺼낸 상자를 에이드리안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에이드리안은 궁금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반지가 들어있었다. "반지? 웬 반지야?"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며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와 반지를 손에 끼워주었다. "전에 나, 약혼 반지 받았잖아요. 에이드리안한테는 반지가 없으니까 내가 선물하는 거예요. 이 거 전에 우리 데이트 갔을 때, 용돈 다 털어서 산 거예요. 어때요? 맘에 들어요?" 에이드리안은 손에 딱 맞는 반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이내 미소지었다. "피아노 연주의 대가치고는 대단한 걸? 과분한 선물이야, 쥬르." "안에 글씨도 있단 말이에요. '쥬르가 에이드리안에게'. 어때요? 우리 진짜 연인 같죠?" 쥬느비에브는 자랑스러운 듯 반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의 목을 끌어와 입을 맞추었다. "연인 같은 게 아니라, 우린 이미 약혼한 사이잖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쿡쿡 웃음을 삼키며 다시 한 번 키스했다. 에이드리안은 연신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키스를 받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맞아. 우린 이미 약혼한 사이지." 그리고 얼마 뒤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연주해 준 곡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 그 곡은 'My treasure' 이라는 노래였다. ******** 한편. 출장을 다녀온 미라벨은 연신 케이로프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없을 동안 에이드리안 님을 잘 지켰어야지요! 도대체 케이로프 님은 뭐하고 있었기에 이런 기사가 난 거예요!" 미라벨은 말을 마치고 <오늘의 에스플리크>를 케이로프의 손에 쥐어주었다. 묵묵히 미라벨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케이로프는 한숨을 쉬며 신문을 펼쳐들었다. "...<엘크로이츠> 학생회장,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숨겨진 애인 나타나다?! 흠, 흠. 얼마 전, 금발의 늘씬한 미녀와 함께 다정하게 손을 잡고 상점가를 다니는 모습이 스콜라 학생에게 목격되었다. 그 날, 약혼녀 에슈비츠 양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에이드리안 님이 약혼녀가 아닌 다른 소녀를 데리고 데이트를 즐겼던 것. 잡화점에 들러 애인의 속옷을 사주는 등의 배려와... 소, 속옷이라고?" 케이로프는 신문을 읽다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그만 신문을 놓치고 말았다. 미라벨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신문을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갔다. "...게다가 레스토랑에서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한편 금발의 여자는 혼자 보석상에 들러 남성용 반지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이 반지가 에이드리안 님의 손에 끼워져 있는 것을 본 필자의 눈으로 확인한 바이다...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이 금발의 늘씬한 미녀는 도대체 누구냐고요! 우리 주위에 금발은 아무도 없잖아요. 이 사실을 쥬느비에브가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흑흑...불쌍한 쥬느비에브..."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서로 손을 꼬옥 잡고 결의에 찬 눈을 빛냈다. 미라벨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밖에 없어요. 에이드리안 님과 쥬느비에브를 이 수렁에서 구해낼 사람은!" "그래.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지금 당장 미행을 시작하지."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졌다.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씩씩한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라벨 언니! 왔어...요?" 쥬느비에브는 말끝을 흐리며 방안에서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번갈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인상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에,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 사귀나 봐요! 두 사람 손잡고 있어요!" 한 차례의 폭풍과도 같은 쥬느비에브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본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여전히 두 손을 잡은 채 멍하게 말했다. "저 가발은 뭐죠? 금발이잖아요." "아아-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금발인데... 그럼 그 금발의 늘씬한 미녀가..."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포옥 한숨을 쉬며 한심한 기분을 맛보았다. 괜히 흥분했던 자신들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서 쥬느비에브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 사귄다며? 축하해." "예-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케이로프 님과 사귄다고? 누가, 내가? 난 에이드리안 님뿐인데. 이런 무표정한 남자랑? 말도 안 돼. 그렇고 말고.' '내가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과 사귄다고? 누가, 내가? 난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만을 사모할 뿐인데. 그리고 저런 거만한 여자와? 말도 안 돼.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 님이 용서하실 리 없지..." 두 사람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그렇게 꿈틀거렸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제77음(第77音) Uneasiness 조금은 시원하지만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몸을 훑고 간다. 머리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온 몸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에 비명을 지른다.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현실. 도대체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넌 노래할 수 없어. 노래해서는 안 돼.] [널 낳은 걸 후회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 아이가... 광속성을 계승했어. 넌 불행해 질거야. 넌...넌...어째서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건 너인데, 진심으로 행복해지길 원하는 건 너인데! ] [미안하구나, 쥬르. 파파가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가 널 지켜줄테니...내 저주받은 레플리카로 널 지켜줄테니...] 쥬느비에브는 순간 눈을 떴다. 뺨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틀림없는 현실이다. 목에서 알 수 없는 비명이 터진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쥬르! 쥬르! 나야, 에이드리안. 쥬르!" 에이드리안은 옷을 갈아입다 쥬느비에브의 방에서 터져 나온 비명 소리에 셔츠 단추를 마저 채우지도 못하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쥬느비에브는 침대에 엎드려 귀가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정신이 나간 듯 흐느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에이드리안은 너무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쥬르, 정신 차려. 나야. 쥬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일으켜 안고는 등을 두드렸다. 쥬느비에브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헉헉거리며 그의 등을 힘겹게 안았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잦아드는 쥬느비에브의 숨소리를 들으며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쥬르, 꿈 꾼거야?"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자락을 꾸욱 잡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이내 가느다란 몸의 떨림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흐느끼고 있는 것이 느껴지자 에이드리안은 마음이 안 좋아져 얼굴을 굳혔다. "쥬르, 울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무서워할 것, 아무 것도 없어." 에이드리안이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품에 안자 쥬느비에브는 이내 흐느낌을 멈추었다. "에이드리안, 약속해 줘요. 곁에 있어준다고. 만약에...만약에...내가...내가..." 쥬느비에브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가 무언가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부드럽게 등을 쓸었다. "쥬르, 걱정하지 마. 곁에 있을게. 곁에 있을 테니까..."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눈물 맺힌 눈으로 조용히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나...그냥 무서운 꿈을 꿨나봐요. 좀 놀라서...그냥 그런 거예요. 미안해요. 아침 식사하러 갈 거죠?" "응..." 에이드리안은 그렇게 말하는 쥬느비에브가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여 다소 당황했다.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울며 매달렸을 그녀였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뜻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 기분이 좋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스콜라에는 가지 못하겠다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얼굴을 곰곰이 살피며 그러라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그녀가 평상시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평상시의 자신이 아니었다. 너무나 불안하고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우울했다. 갑자기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아 너무나 불안했다. 기분 전환을 할 겸 사택 뒤쪽의 숲으로 나온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시원한 공기를 맛보며 산책을 즐겼다. 강아지를 함께 데리고 나온 쥬느비에브는 애써 밝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해지면 안 돼,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이 걱정한단 말이야. 꼬마 에드도 그렇게 생각하지?" 강아지가 뒤뚱뒤뚱 따라오는 모습을 보니 약간은 기분이 풀렸다. 발에 채는 돌을 걷어차며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여전히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커다랗게 솟아 있는 나무들 때문에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하늘이 꼭 자신의 기분 같아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났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당신에게만 존재한다면 당신은 시간을 멈추고 나를 찾아주세요...나를 찾아 주세요..."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뺨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얼른 손등으로 닦아내고 시선을 돌렸다. "나 왜 이러는 거지. 오늘? 정말..." 이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난...에이드리안과 함께 하지 못할 거야. 그건 싫어. 무섭고...슬퍼."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강아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손등으로 눈물을 쓰윽 닦아냈다. 강아지에게까지 걱정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자꾸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 사람을...만나봐야 겠어." ******** 한편 에이드리안은 학생회실의 창가에 서서 멍하게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꽤 쌀쌀해진 날씨덕분에 창문은 꼭꼭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잘 닦여진 창밖으로 바깥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계속 그를 보고 있던 유벨이 다가와 어깨를 쳤다. "뭘 그렇게 넋이 빠져있는 거야?" "아, 유벨."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그의 표정을 유벨이 놓칠 리가 없었다. "에이드리안, 무슨 고민 있어?"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고민은 무슨..."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조끼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벨은 아무리 보아도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유벨, 이상하지? 원래 대속성 레플리카는 무작위적으로 전승이 되는데 이상하게 한 가문에서 무더기로 나오고 있잖아. 너와 프란체스 형도 그렇고. 헤르만 숙부의 가계에는 3명이나 되니까. 게다가 우리 대에 아직 '그것'이 나오지 않았잖아. 대속성 레플리카는 6명. 암속성을 빼고는 5명이지. 헤르만 숙부를 빼면 너와 나, 프란체스 형, 에스프라드 형 밖에 남지 않았어. 이번 대는 정말 이상해." 유벨은 자기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을 느끼며 대답했다. "어쩌면...이번에는 무사히 지나갈지도 모르잖아. 지금까지 별 일 없었으니." "훗, 로스페니르의 저주는 한 번도 그냥 지나간 적이 없어. 어쩌면...나 일지도 모르지." "그런 소리하지마!!" 유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띄며 유벨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안. 그런 게 아니라...나 갑자기 궁금해 졌어. 내가 과연 쥬르를 지켜줄 수 있을까. 내 곁의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하는." "무슨 소리야. 쥬느비에브도, 그리고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행복하다고." 유벨은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은 슬프게 미소지으며 우울하게 말했다. "하지만...난 내 손으로 지켜주려고 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못 했어. 그것만은 진실이지." 유벨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에이드리안의 시선을 외면했다. 에이드리안은 한 손을 허공으로 뻗으며 가만히 미소지었다.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이지. 그렇지만 쥬르는...내 손으로 지켜주고 싶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 딱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예전에 숲에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둘러본 장소였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과 그녀가 머물고 있는 사택보다 약간 더 큰 저택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저택 안의 정원에 들어섰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훑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가 정원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레플리카가 전해져 오더니...역시 너로구나." 검은색 동방 제국식 의복의 에스프라드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쥬느비에브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그 날 처음 만난 게 아니에요. 그렇죠? 나, 기억났어요." "기억이 약간은 돌아왔나 보군. 흐음...그래. 넌 아직 어려서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너보다 3살이나 많으니까 그 때 일도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지. 너도 슬슬 기억이 날 때가 되었을 텐데?" 에스프라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앙다물었다. 이내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절대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기억하게 되면 에이드리안이랑 헤어져야 하는 것도 알아. 난 절대 기억해 내지 않을 거예요. 난...에이드리안이랑 행복해질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방해하지 마세요!" 쥬느비에브는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깜빡이며 뒤돌아서 뛰어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 전했으니 그것으로 그녀는 만족했다. 에스프라드는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를 띄웠다. "방해하지 말라고...큭,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 해."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피처럼 새빨간 하늘을 쳐다보며 에스프라드는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그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다. "쿵, 쿵, 쿵...에이드리안, 네 심장도 뛰고 있겠지?" ******** 쥬느비에브는 방긋방긋 웃으며 사택으로 뛰어들어왔다. 낯익은 노랫소리가 가만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분이 날 듯이 좋아졌다. 사택의 후원에 에이드리안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 가만히 옷자락을 잡아 그를 세웠다. "쥬르!" 에이드리안은 미처 쥬느비에브가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당황스럽게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나와있는 거예요? 에이드리안." "너 기다렸어." 쥬느비에브는 왜 기다렸냐는 뜻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시원하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냥. 그냥 너 기다리고 있었어. 안 돼?" "으으응-" 쥬느비에브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에이드리안을 꼬옥 껴안았다. 따뜻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을 거예요." "응, 나도 쥬르랑 오래오래 같이 있을 거야." 쥬느비에브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일순간에 평온해 졌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곁에만 있어준다면.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행복감을 만끽했다. '당신과 함께라면...누구보다 행복하게...' 제78음(第78音) Love is Pain.(1) 미라벨은 자신의 레이스 스커트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며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관찰 대상이 나뭇잎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너벨 정원은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봄처럼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가을 바람에 실려오는 아찔한 꽃향기에 현기증을 느끼며 미라벨은 손가방에서 <미라벨 양의 관찰 수첩>을 꺼내 들고 부드럽게 메모를 휘갈겼다. [아름다운 금발을 자르신 후, 훨씬 남자답고 우아한 모습. 마치 영롱한 새벽 이슬처럼...] 메모를 마친 미라벨은 자신이 숨어 있는 수풀을 헤치고 다시 정원을 살폈다. 이 정원은 에이드리안이 즐겨 찾는 정원이었다. 그렇게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담한 맛이 있는 곳이었다. 미라벨은 가늘게 눈을 뜨고 관찰 대상을 꼼꼼히 살폈다. 에이드리안이 분수대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노래에 이끌렸는지 작은 새 한 마리가 그의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바람에 날리는 부드러운 금발과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는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림 같아 미라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벨은 다시 메모를 하려고 수첩을 펼쳤다. 그 때 갑자기 귓가에 소름끼치는 저음이 들렸다. "이건 엄연한 약속 위반이야. 혼자 미행하다니." "케, 케이로프 님? 여, 여긴 어쩐 일로! 놀랐잖아욧!" 갑작스러운 케이로프의 등장에 미라벨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미라벨은 투덜거리며 케이로프에게 속삭였다. "에이드리안 님께서 우리 사이를 의심하고 계신 마당에 당신과 함께 행동 할 이유는 없어요. 어서 돌아..." 그러나 미라벨은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이미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을 관찰하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고 다시 에이드리안에게 눈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이제 막 분수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정원 주위를 걷고 있었다. 순간 동시에 두 사람의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은 언제나 당당하고 아름다우시군." "물론이에요. 천하의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니까요. 빛의 왕자시죠."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해요?" "뭐 하긴요, 에이드리안 님을 미행... 음? 케이로프 님? 무슨 말씀이세요?" 미라벨은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케이 로프에게 물었다. 케이로프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 했다. "아무 말 안 했는데." "뭐하냐구요." "그거야 에이드리안 님을 관찰 중이라고 할 수 있지. 음? 미라벨 브레시 아 모르 뤼베이크 양, 무슨 말인가." 케이로프는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뭔가가 이상해 반문했다. 미라벨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눈짓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끄러미 뒤를 돌아보았다. "으, 으아악!" 두 사람은 놀라 동시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쥬느비에브가 쪼그리고 앉 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쥬느 비에브는 까르르 웃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안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애써 몸을 추스르다가 쥬느비에브의 말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이드리안!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랑 데이트하고 있어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미라벨과 케이로프에 게 손짓했다. "뭐야, 이런데 숨어서 데이트하고 있었던 거야? 데이트하고 있었으면 진 작 말해주지 그랬어? 자리 피해 줬을 텐데. 이왕 만났으니 차나 한 잔 마 시고 가." 에이드리안의 다정한 말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상대방을 매섭게 노려보 았다. "당신 때문이에요! 또 오해받았잖아요. 어떻게 할 거에욧!!"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에이드리안 님이 저런 오해를 하시다니..." 두 사람은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다가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의 손에 끌 려 그들의 사택으로 발걸음 했다. ******** 네 사람은 응접실에서 티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우아한 몸 짓으로 찻잔을 기울이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의 눈빛을 받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썩은 모롤라 씹은 표정으로 이리 저리 그의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에이드리안은 유쾌하 게 말했다. "두 사람 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연애하겠다는데 내가 왜 말리겠어? 난 오히려 두 사람의 사이, 아주 기분 좋아." 미라벨은 자신의 목에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황급히 입을 열 었다. 에이드리안 님, 그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이드리안의 옆에서 모롤라 주스를 홀짝이던 쥬느비에브가 말했다. "맞아요. 에이드리안이랑 나,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 연애하는 거 찬 성이에요. 우리가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줄 테니까 두 분은 걱정 마세요. 그쵸? 에이드리안." "응. 맞아, 쥬르. 우리 어제 시내 가서 사온 거 있잖아. 가져와."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손뼉을 탁 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밖으 로 달려나갔다. 듣고 있던 케이로프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저희들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 그 저..." "케이로프. 두 사람, 나 때문에 서로 사귄다고 말도 못하고 맘 고생이 심 했을 거라고 생각해. 내게도 잘못이 있지. 눈치 없이 너희들이 그런 사이 인 것도 모르고. 이제는 걱정하지 마. 난 두 사람 사이, 절대 찬성이야." 에이드리안은 다시 찻잔을 입으로 기울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미라벨은 굳어버린 머리를 흔들고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에이드리안 님. 저희는 진짜 아무 사이도..." "에이드리안! 가지고 왔어요!!" 미라벨은 이번에도 쥬느비에브 때문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쥬느비에브는 발랄한 걸음으로 다가와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에이드리안에게 손바닥만 한 상자를 건넨 쥬느비에브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보며 씨익 미소지었 다. "미라벨 언니. 매일 금발에 근육질 아저씨 나오는 소설만 읽더니 사실은 다른 데 더 관심이 있었네요? 케이로프 님은 금발도 아니고 근육질도 아 니고. 흠...에이드리안이 더 멋지긴 하지만 케이로프 님도 괜찮으니까. 미 라벨 언니. 잘 해 봐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에 매달리며 싱긋 웃었다. 미라벨은 울화통 이 터지는 것을 느끼며 더운 김을 훅훅 뿜어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 브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들고 있던 상자를 케이로프에게 내밀었다. "우리 어제 시내 나간 김에 산 거야. 두 사람, 축하하는 의미로." "케이로프 님, 미라벨 언니. 두 사람 정말 축하해요. 나중에 우리 더블 데 이트 즐겨봐요."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케이로프는 에이 드리안이 건넨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휘둥그레진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화사한 표정으로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었다. "뭐 사귀는 사이니까 커플링 정도야 있겠지만 쥬르가 자꾸 그걸 사주자고 해서. 맘에 안 들어?" "마,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요... 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케이로프는 차마 기대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실망감을 주기 싫어 그렇게 대답했지만 눈 앞이 캄캄해져 오고 있었다. 미라벨은 그저 멍하니 상자 안에 담긴 두 개의 반지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방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에이드리안, 우리 이제 연습실에 가요. 나 오늘 피아노 가르쳐주기로 했 잖아요." "그럴까? 맞아. 두 사람한테도 둘 만의 시간이 있어야 하겠지."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차 다 마시고 가. 우린 먼저 갈 테니까. 케이로프, 레이디를 잘 모시도록. 그럼." "미라벨 언니. 케이로프 님한테 맛난 거 사달라고 졸라 보세요. 그럼 우리 는 이만 가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멍 하게 바라보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묵묵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 은 차를 한 번에 꿀꺽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라벨은 케이로프를 쏘아보며 소리질렀다. "어떻게 할 거예요? 반지까지 받아서는."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실망하시는 얼굴을 볼 수는 없었어.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이 좀 더 확고하게 사실을 밝혔더라면 이런 오해는 풀렸을 거 아닌가!" 케이로프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동안 그 렇게 서 있었다. 정말이지, 어쩌다 이런 오해를!! 몹시 우울해지는 그들이 었다. ********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에이드리안의 전폭적인 지지로 연인 사이임을 공인 받은 그 순간, 또 다른 커플, 유벨과 안느마리도 한창 신경전을 벌이고 있 었다. 유벨의 연습실에서 안느마리는 묵묵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벨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리즈벨리 일이 내 잘못이야? 너희 부모님이 멋대로..." "그럼 유벨 님이 우리 부모님한테 가서 무릎 꿇고 빌어야지요! 제가 사랑 하는 것은 안느마리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말 유벨 님한테 실망이에요." 안느마리는 유벨을 톡 쏘아붙이고 고개를 돌렸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대 답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거야? 차라리 리즈벨리랑 결혼하겠다! 난 정상 적인 여자가 좋다고." "뭐, 뭐라고요? 유벨 님, 정말!!" 두 사람의 실랑이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쥬느비에브의 편지가 안느마리 의 부모님에게 전해진 직후, 두 사람은 생애 가장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 었다. 유벨은 여장남자로부터의 구애에서 자유로워진다고 좋아했더니 이 번에는 그와는 무려 17살 차이가 나는 연하의 여성에게서 구혼을 받게 된 것이다. 안느마리 또한 남자로 되돌아갈 위기를 넘겼다고 안심했더니 이 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여동생에게 빼앗길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두 사 람은 티격태격 거리며 결국 지쳐 자리에 푹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부드 러운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레플리카에 반응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을 보며 유벨과 안느마리는 인상을 썼다. 자신들이 이렇게 고민을 하게 만든 원흉!! "안느마리! 유벨 오빠! 안녕?"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고 헤실헤실 웃으며 서 있었다. 에이 드리안은 몹시 초췌해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 다. "두 사람, 표정이 왜 그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잡고 유벨과 안느마리가 앉아 있는 테 이블로 걸어갔다. 쥬느비에브를 자리에 앉힌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그 옆 에 앉고 턱을 괴고는 곰곰이 유벨을 살폈다. "유벨, 네 주례는 내가 봐 줄게. 신부가 누가 되든." "에드!!" 유벨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에이드리안은 귀가 가렵다는 듯 손바닥으로 톡톡 치고는 안느마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면 서 안느마리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안느마리. 난 안느마리 편이야. 잘 해봐. 유벨 오빠의 사랑을 쟁취하는 거야! 나도 처음에는 에이드리안한테서 구박만 받았다구. 안느마리도 힘 내." "쥬, 쥬느비에브. 역시 쥬느비에브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 름다운 내 친구야. 흑..." 안느마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쥬느비에브를 얼싸안았다. 쥬느비에브 는 씨익 웃으며 파랗게 질린 표정의 유벨에게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유벨 오빠, 안느마리 잘 부탁해요." 유벨은 파랗게 질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멍하게 쥬느비에브를 쳐 다보았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눈을 깜빡이며 유벨에게 말했다. "뭐 해? 내 약혼녀가 손수 부탁하잖아. 대답해야지." "야! 에드 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만은 내 편이 되어줘야 할게 아냐!" 유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이드리안에게 고함을 질렀다. 왠지 억울 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실룩이더니 쥬느비에브 에게 말했다. "쥬르, 우리 식당에나 가볼까? 나 오늘 일 없거든. 맛있는 거 사줄게." "응!! 나 갈래!" 유벨의 말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긋방 긋 웃는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에이드리안은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갔다. 문 밖으로 나가던 에이드리안은 순간 멈칫 해 자리에서 멈추고 뒤돌아봤다. "유벨, 비앙카 아주머니한테는 말씀드렸어? 신부 후보가 두 명이나 된다 고." "에드!!" 유벨은 씩씩거리며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문이 쾅하고 닫히며 에이드리안 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벨은 훅훅 숨을 쉬며 안느마리에게 외쳤 다. "다 너 때문이야! 왜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응?" 안느마리는 유벨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가련한 표정을 지으 며 창가로 걸어갔다. "사랑은 고통... 그래, 사랑은 고통인 거야..." 우수에 젖은 안느마리를 보며 유벨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 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벨과 안느마리, 그리고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고통스러운 '러브러브' 고 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스콜라의 하루는 또 다시 지나가고 있었다. 제79음(第79音) Love is Pain.(2) 촉촉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미라벨은 자신의 사택 내에 마련되어 있는 작 은 서재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요즘 연일 케이로프와의 스캔들에 몸살 을 앓고 있던 미라벨은 오늘 아침에 발간된 <오늘의 에스플리크>에 실린 기사에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오늘의 에스플리크>에는 두 가지 중 요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하나는 유벨과 안느마리에 대한 기사였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케이로프에 관한 가십 기사였다. "학생회 소속의 뤼베이크 양과 에르슈바이크 군이 현재 열렬한 열애 중?! 게다가 학생회장 비인 님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 다...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 미라벨은 신문을 구기며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애써 말아놓은 자신의 다 홍색 머리카락을 들쑤셨다. 그러나 미라벨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라벨 님." 미라벨은 언제부터인가 들어와 있던 얌전해 보이는 하녀에게 눈길을 주었 다. 그리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요? 나 지금 피곤하니까 혼자 있게 해주세요." "그게...뤼베이크 본가에서 서신이..." 하녀는 다소곳이 말하고 잽싸게 다가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미라벨은 이마를 찡그리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에는 뤼베이크 가의 인장이 찍 혀 있었다. 미라벨은 하녀가 나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뜯었다. "'잘 있었느냐, 미라벨.'. 그럼요, 잘 지내고 있지요, 아버님. 뭐 최근에 문 제가 좀 있지만. '다름이 아니라 이번 네 약혼 문제로...' 음?" 미라벨은 수상쩍은 편지의 내용에 눈을 깜빡이며 소리내어 읽던 것을 멈 추고 빠른 눈 놀림으로 읽어 내려갔다. 미라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 다. 미라벨은 멍한 눈동자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자꾸 이런 일이...이런 비실비실한 남자와...아아~ 어지러워~" 말을 마침과 동시에 미라벨은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손에서 떨 어져 나와 바람에 나뒹굴고 있는 편지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이런 글이 쓰 여 있었다. [...같은 5대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와 혼인의 연을 맺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많다. 아비는 절대로 반대이니 속히 본가로 돌아와 대귀족 가문인 슈리체스토 가문의 후계자와 약혼을 하도록 하거라. 슈리체스토 가문의 후계자인 세바스찬은 현재 유학 중인데 출중한 용모와....]] 그랬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열애설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새로운 약 혼 상대를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5대 대귀족 가문과의 혼인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특히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각 가문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우선 각 가문의 후계자 문제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 데다 각 가문이 워낙 거대한 귀족 가문인지라 재정 문제를 비롯해 갖가지 문제가 불어져 나올 확률이 매우 컸다. 어찌되었든 미라벨로서는 사실도 아닌 일 로 난데없는 약혼식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 이틀 후. 학생회실에 들어선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추궁하는 듯한 눈빛을 받아야 했다. 영문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걸음을 옮겨 자신의 책상으 로 다가갔다. 쥬느비에브는 얼마 전에 생긴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노골적으로 케이로프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긴장감을 느끼 며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그렇게 사람을 쳐다보는 것은 상당히 예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만."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원망 섞인 그 눈빛에 케이로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시 돋친 말을 뱉어냈다. "난 네가 그렇게 무책임하고 경솔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케이로프. 대단 히 실망이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케이로프는 사색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에,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옆에서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책상 위에 놓인 모롤라 모양의 연필꽂이 에서 펜을 꺼내 서류에 사인을 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케이로프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너무 잔인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케이로프는 늘 무표정하던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약혼하게 생겼는데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야? 이런 네 모습을 보면 미라벨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케이로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이 약혼을? 그 거 정말 축하할 일이로 군요. 이제 더 이상 오해를 사지...않..아...도..." 케이로프는 신나게 말을 하다가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따가운 눈총 에 말끝을 흐렸다.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케이로프 님, 정말 나쁜 사람이야. 미라벨 언니는 갑자기 본가에서 사람 이 나오는 바람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갔다고요. 좋아하는 사람이 강제로 약혼을 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아니,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케이로프는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열다 뒤이어지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케이로프. 내 눈치를 봐서 그런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빨리 미라벨을 구하러 가. 약혼을 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행복은 자기 손으로 잡아야 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이 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면서 말을 끝내자 그와 동시에 방문 이 벌컥 열렸다. 유벨과 안느마리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뛰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다짜고짜 케이로프에게로 달려가 소리쳤다. "케이로프, 이 자식.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미라벨이 그런 곤경에 처했 다는데! 너희들,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지금 한가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어서 미라벨을 구하러 가라고!" "그래요. 지금 미라벨 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울고 계실 게 틀림없 어요. 전에 에이드리안 님이 늦게 가시는 바람에 쥬느비에브가 실컷 고생 만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미라벨 님도 그렇게 만들 거예요?" 안느마리의 말에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한순간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원래 얼굴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쥬느비에브 가 케이로프 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마음 한 구석에 찔리는 부분이 있는 그였다. 에이드리안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케이로프에게 다가갔다. "케이로프, 뭣하면 우리가 뒤따라 갈 테니까 어서 뤼베이크 가로 출발해."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우린 정말로 아무 사이도..." 케이로프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 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로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케이로프. 네 맘 다 알아. 물론 울고 싶겠지. 겨우 연인 사이로 인정받았 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다 아니까 어서 미라벨을 데리러 가." 케이로프는 정말 울고 싶었다. 어째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인가. 미라 벨과 그는 정말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곧 이어 유벨과 안느마리의 격 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로프. 힘든 거 알아. 우리도 지금 머리 속이 복잡한 상태지만 너희 커플을 위해 힘쓸 테니까 힘내." "맞아요. 케이로프 님. 사실 내 문제도 벅찬 상태지만 저희가 뒤를 받칠게 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느마리와 유벨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케이로프는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한숨에 사람들은 그가 미라벨에 대 한 근심걱정으로 표정이 어둡다고 생각하며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케이 로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살며 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과 그가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뤼베이크 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휴가를 준비하고 여장을 꾸려준 에이드리안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그는 에이드리안에게는 정말 약했다. ******** 그리고 그 무렵, 무사히 뤼베이크 가에 당도하여 그녀의 약혼자 후보인 세바스찬을 만난 미라벨은 긴장감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를 보고 거창 하게 웃고 있었다. "오호호호호호호- 그래서 레플리카를 사용하실 수 없다는 말씀이신 가요? 오호호호호- 스콜라 랭킹 5위인 저와 너어-무 비교되는 군요. 에이드리안 님은 통산 랭킹 2위시라고요, 그것도 저작년 체리욜파쳰(주. 참조) 때 불 참하셔서 2위에 그친 거지만. 케이로프 님도 랭킹 6위는 된다고요. 오호호 호호-" 미라벨은 그녀가 앉아있는 대응접실이 떠나갈 듯 웃어대다가 문득 생각나 는 것이 있어 웃음을 그쳤다. "그럼 슈리체스토 님은 서방에서 무얼 배우셨나요?" 기가 죽어 고개도 못 들고 땀만 뻘뻘 흘리고 있던 세바스찬은 미라벨의 질문에 찔끔 놀라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 그것이... 여러 가지 철학과 사회 문제에 대해..." "어머? 그건 케이로프 님 전문인데 말이죠. 케이로프 님은 겉은 그렇게 보여도 그 쪽 방면으로는 엄청난 지식을 자랑하시죠. 맞아. 전에 레오슈타 인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었죠. 그 분을 아시나요? 이번에 철학계에 등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인공이라고 하던데." "자, 잘 모르겠군요." 세바스찬이 말하자 미라벨은 재미없다는 듯 눈썹을 실룩이며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차 향기가 아주 좋죠? 흠... 향이 조금 날아간 듯 하군요. 오렌테스(주. 참 조) 산 찻잎을 쓴 게 아닌 것 같은데... 쯧, 내가 그렇게 차는 오렌테스 산 을 쓰라고 했는데! 세바스찬 님은 어떠세요? 역시 오렌테스 산의 찻잎이 가장 향기롭죠? 오호호호호호호-----" 세바스찬은 목구멍에 넘어가는 차의 향이 어떤지도 느끼지 못한 채 뻣뻣 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여자와 평생을 살라고 한다면 아마 1모네(주. 참 조)가 못 되어 말라버릴 것 같았다. 모든 수준이 그와 비교해서 지나치게 높았다. 같은 대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미라벨과 함께 앉아 있으니 비인 가 문의 사람 앞에 앉아 있는 평민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세바스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에게 이 약혼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할 참이었다. 처 음에 뤼베이크 가문의 후계자와 약혼을 한다고 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5 대 대귀족 가문과 혼인의 연을 맺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세력 확장 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미라벨을 만나본 그로서는 더 이상 이 약혼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사실 미라벨은 평범한 남자가 상대하기에는 좀 벅찬 여자였다. ******** 그 날, 저녁.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서재 바닥에 푹신한 분홍색 매트를 깔아놓고 앞구르기를 하고 있었다. "앞구르기! 데굴데굴-" 쥬느비에브는 치마를 펄럭이며 구르기를 하고 멋지게 착지 포즈까지 한 다음 씨익 웃었다. 원피스를 톡톡 털어 내고 다시 매트 쪽으로 돌아선 쥬 느비에브는 다리를 옆으로 주욱 뻗고 허리를 굽혀 스트레칭 체조를 한 다 음 다시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에 섰다. "다시 한 번 굴러야지. 음..음. 심호흡을 가다듬고!" 쥬느비에브는 매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매트 위에 잘 고정한 다 음 엉덩이를 쑥 들어올렸다. 그러다 문득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치맛자락에 땀이 베긴 손바닥을 삭삭 닦은 쥬느비에브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헤실헤실 웃었다. "이번에는 2단 앞구르기! 이번에는 뎅굴뎅굴 굴러야지. 헤헤. 재밌다." 쥬느비에브는 팔을 살짝 굽혀 힘차게 몸을 굴렸다. 서재가 한 바퀴 눈앞 에서 어지럽게 돌아갔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찻잔을 손에 든 에이드리안 이 들어왔다.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쥬느비에브의 뒤집힌 치마 속의 하얀 레이스 속바지를 본 그는 인상을 쓰며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구 르면서 언 듯 에이드리안의 화난 얼굴을 본 쥬느비에브는 그만 균형을 잡 지 못하고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버렸다. 곧 이어 에이드리안의 당황한 목 소리가 귀를 울렸다. "쥬르, 지금 뭐 하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끙 하고 몸을 일으켜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으로 슬쩍 고개 를 돌렸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큰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쥬느비에브는 또 알밤을 맞을까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에 이드리안은 알밤을 주지 않았다. 대신 허벅지까지 올라간 치맛자락을 확 내려주고 화난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여자애가 자꾸 이럴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이럴 거야? 응?" 쥬느비에브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고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잡고 이내 헤실헤실 웃었다. "아뇨. 에이드리안, 나 운동하고 있었어요. 몸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한 앞 구르기요." "앞구르기고 뭐고, 바지를 입고 해야할 것 아냐?" 에이드리안이 다그치자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생긋 미소지 었다. "에이드리안, 전에 책에 보니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구하려고 담 도 타넘고, 밧줄 타고 벽에도 올라가고 그러던데, 우리도 그래야 되죠? 미 라벨 언니를 구하려면. 그래서 나, 운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 앞구르기 잘해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혔다. "우리가 왜 담을 타고 넘어가? 멀쩡한 문 놔두고. 밧줄 탈 일도 없으니까 앞구르기 그만해. 이 매트는 어디서 가져온 거야, 정말."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매트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치마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케이로프 님은 벌써 출발하셨고. 우리도 빨리 미라벨 언니, 구하러 가요. 유벨 오빠랑 안느마리도 벌써 갔단 말이에요. 전에 케이로프 님이랑 미라벨 언니랑 나 구하러 왔잖아요. 이번에는 쥬느비에브가 도울 차례예요."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씨익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의 표정에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충만했다. 에이드리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째서 이런 단순하고 어린 애 같은 여자를 약혼녀로 맞을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상형은 어디까지나 온화하고 침착한, 그런 여성이었다. 쥬느비에브와 같은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미 쥬느비에브는 그의 약혼녀였고 그는 그녀의 약혼자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그녀의 뒷바라지를 하며 사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 안느마리가 언젠가 한 말처럼 사랑은 고통이었다.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제80음(第80音) Love is Pain.(3) 케이로프는 무사히 뤼베이크 가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파란색 상의의 깃을 빳빳하게 세운 다음 뤼베이크 가의 현관에 들어섰다. 에이드리안의 성화로 떠밀리다시피 이 곳에 온 그였지만 정말이지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그는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미라벨이나 구해가자는 심정으로 체념한 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행원들과 함께 들어선 그는 많은 하인들과 하녀들의 마중을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이미 야심한 시간이라 저택 안은 조용했다. 케이로프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공식 방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될 수 있는 한 깍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의 문이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열렸다. 미라벨의 다홍색 머리카락이 약간 빛 바랜 듯한 머리카락을 지닌 브레시아가 들어왔다. 케이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부인." "오랜만이군요, 케이로프 군." 미라벨의 다소 오만한 인상과는 달리 브레시아는 매우 부드러운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로프는 언제나 무표정했던 얼굴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았다. 브레시아는 인자하게 웃으며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미라벨과의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 애와 그런 사이였다니 나도 깜짝 놀랐어요." 브레시아의 말에 케이로프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빠른 몸놀림으로 차와 과자를 내려놓고 하녀가 나가자 브레시아는 미소를 띄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케이로프는 작게 한숨을 쉬고 차를 마셨다. 어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 이상하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브레시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케이로프 군을 아주 좋아하시지만 두 가문이 보통 귀족 가문이 아니다 보니... 공작님께서는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생길 갖가지 영향 때문에 지금은 저러고 계신 거랍니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 결혼, 찬성이에요. 우리 미라벨을 잘 부탁해요.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주세요." "쿨럭!" 브레시아의 말에 차를 마시던 케이로프는 기침을 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이내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은 그는 겨우 표정을 가다듬고 브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 저는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과는..." "알아요.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들게 사랑을 키웠을 지는 내 눈에도 선하니까. 5대 대귀족 사이에서, 그것도 후계자끼리 결혼한 관례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드니까요. 하지만 두 사람이 잘 이겨낼 거라고 믿어요." 브레시아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섰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공작님을 만나보고 담판을 짓도록 해요. 내가 언제나 뒤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사랑은 성취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랍니다." "공작부인, 저는..." 케이로프의 당혹스러운 표정에 브레시아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케이로프는 깊이 한숨을 쉬며 허벅지를 두드렸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아아- 위대한 하늘의 뮤즈,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께서 내게 주신 시련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케이로프는 하녀가 안내하는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 다음 날 아침. 미라벨은 막 침대에서 일어나 테라스에서 아침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비록 엉뚱한 이유로 집에 오기는 했지만 왠지 따뜻하고 좋은 느낌에 미라벨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스콜라에 있을 때도 외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었다. 그녀의 성격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좀처럼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가족을 몹시 사랑했다. 난간에 기대어 미라벨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조심스레 레플리카를 뿜어내며 노래를 부르며 그녀는 미소지었다. 아마 자신이 가고 나면 레플리카를 먹은 나무들이 부쩍 자라겠지. 아마 한동안은 건강하게 잘 자랄 것이다. 흐뭇한 생각에 잠겨 있던 미라벨은 문득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시중들던 하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라벨은 호기심이 일어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저, 손님이 오셨는데, 에르슈바이크 가의 케이로프 님이시라고..." 하녀의 말에 미라벨은 놀란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돌렸다. 케이로프 님이 오다니, 무슨 말인가. 설마 내 약혼 소식을 듣고 날 데리러? 미라벨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을 저어 하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머리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지금 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안 그래도 이상한 소문 때문에 적지 않게 피해를 보고 있는 지금, 여기까지 오면 소문이 더 부풀려 질텐데. 미라벨은 머리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아아- 어쩌자는 거야. 날 데리러 오면. 소문만 더 무성해 질텐데. 하지만...정말로 날 데리러 오신 걸까?" 미라벨은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두드리며 드레스룸으로 갔다. 하늘색의 풍성한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꺼내어 몸에 대어 보며 미라벨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이상하게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오늘 아침은 근사한 옷을 입고 싶었다. 곧 아침 식사시간이었다. ******** 식사를 하기 위해 2층의 침실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미라벨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오고 있는 케이로프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려던 미라벨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반갑긴 뭐가 반가워? 지금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데.' 미라벨은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미라벨을 발견한 케이로프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좋은 아침이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다니! 미라벨은 고개를 돌리다 슬며시 케이로프를 곁눈질했다. 미라벨은 케이로프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초췌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아버님이 케이로프 님께 호통을 치신 건 아닐까? 미라벨은 불안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며 인사를 받았다. "조, 좋은 아침이네요. 그런데 여긴 웬 일이세요?"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을 데리러 왔지." "네?" 케이로프의 무미건조한 말에 미라벨은 깜짝 놀랐다. 정말 날 데리러 왔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중요한 말을 저렇게 높낮이 없이 아무렇게나 말하다니. 미라벨은 살짝 인상을 쓰며 다시 물었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미라벨의 질문에 케이로프의 안색이 좀 더 창백해졌다.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정정당당히 슈리체스토 군과 겨루어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을 데리고 가라고 하시더군." "뭐, 뭐라고요? 그럼 아버님께서 허, 허락을 하신 거잖아요?" 미라벨은 얼굴을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약혼자 후보, 슈리체스토는 백년을 살아도 케이로프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그가 어떻게 하늘의 뮤즈의 비호를 받고 있는 케이로프를 이기겠는가. 한 마디로 아버지는 케이로프를 간접적으로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라벨은 머리 속이 까마득해져서 비틀거렸다. 늘 그렇듯 케이로프가 다가와 팔을 잡아 부축해 주자 미라벨은 그만두라고 소리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때 서재가 열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오,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구나. 미라벨. 하지만 케이로프 군과의 이런 다정한 모습을 공공연히 보이는 것은 슈리체스토 군에게는 실례야. 어서 식사나 하러 가지. 참, 케이로프 군, 아까 얘기한 그 로쉬토프의 사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보세나." 미라벨은 듬직한 모습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아버지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케이로프의 다양한 지식은 특히나 나이든 사람에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분명 케이로프의 말주변에 빠진 게 틀림없었다. 하긴 아버지는 원래 케이로프를 좋아하셨다! 절망감으로 몸에 힘이 빠진 미라벨은 어쩔 수 없이 케이로프의 부축을 받으며 식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 식사가 끝나고 미라벨은 그녀의 너무나도 평범한 약혼자 후보, 세바스찬과 능청스럽게 만사를 해결하고 있는 케이로프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가 수를 쓴 것인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식사가 끝나자 마자 모두 산책을 가시고 그녀의 언니 또한 어디로 가버린 건지 도통 나타나지 않았다. 미라벨은 두 남자 때문에 식사시간에 제대로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바보 같은 세바스찬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을 피하고 멍하니 음식만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그에 반해 케이로프는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가며 유쾌하게 식사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너무나 비교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녀가 세바스찬의 편인 건 아니지만 이대로는 정말로 케이로프와의 약혼이 성사될 판이었다. 케이로프가 찻잔을 내려놓고 세바스찬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유학을 마치고 스콜라에 편입할 생각인가?" "예. 레플리카 스콜라에는 입학이 허용되지 않겠지만 다른 인문, 사회 쪽의 공부를 하는 스콜라 쪽으로 편입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내게 연락을 주게. 도움이 되고 싶군." 케이로프의 말에 세바스찬이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은 기가 막혔다. 지금 자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두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신경전은커녕 형, 동생처럼 잘 지내보자는 둥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차를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부었다.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케이로프! 잘 하고 있다며?" "이야, 미라벨 님, 케이로프 님. 러브러브 군요!" 미라벨은 두 명의 방해꾼, 유벨과 안느마리를 노려보며 뜨거운 숨을 훅훅 내쉬었다. 케이로프가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미라벨은 그 모습에 더욱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 티타임은 새로운 방문자 두 사람을 맞아 계속 되고 있었다. 미라벨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리고 찻잔만 홀짝이고 있었다. 케이로프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 사이에 연신 유쾌한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과일을 까먹던 안느마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유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벨 님, 그러고 보니 쥬느비에브도 온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네요?" "쿨럭." 미라벨은 찻잔을 기울이다 '쥬느비에브'란 말에 기침을 하며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쥬, 쥬느비에브가 온단 말인가요?" 안느마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미라벨은 온몸에 힘이 좍 하고 빠져 버렸다. 그녀가 오면 또 어떻게 상황이 굴러갈지 알 수가 없었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유벨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야- 이렇게 보니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는 걸? 케이로프, 약혼하지 말고, 그냥 바로 결혼하지 그래?" "하하. 비인 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라벨 님과 케이로프 님은 정말이지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지요." 세바스찬의 대답에 모두 멀뚱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유벨은 세바스찬을 쳐다보며 안느마리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녀석, 미라벨 약혼자 후보라면서 왜 저래?" "글쎄요, 뭔가 머리에 이상이 있던지. 아니면 케이로프 님의 카리스마에 눌려서 일찌감치 포기했다던지... 이것도 아니면 미라벨 님께 질려버렸는 건지도 모르죠. 그래서 케이로프 님께 양보하려고..." 안느마리와 유벨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서로 뜻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미라벨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약혼자 후보를 확 레플리카로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을 꾸욱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가는 주름살만 늘어날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케이로프는 은근한 미소를 띄며 바라보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날 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라는 폭풍을 무사히 뤼베이크가에 상륙시켰다. 현관 앞에 선 에이드리안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쥬느비에브의 가방이 너무 눈에 띄었던 탓이다. 쥬느비에브는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애써 바지가 아닌 원피스를 입었지만 등에는 엄청난 크기의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노란색의 정장 분위기가 나는 원피스와 배낭은 너무나 안 어울렸다. 쥬느비에브는 낑낑거리며 배낭을 매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섰다. 하인들에게 맡기라고 해도 도대체 말을 듣지 않는 그녀였다. "쥬르, 그 안에 뭐가 들었기에 그렇게 짐이 많아?"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검은 색 바지를 손으로 탁탁 치며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그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음... 알고 싶어요?' "알고 싶으니까 물어본 거잖아." 에이드리안은 답답한 마음에 더욱 얼굴을 구기며 퉁하게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리더니 결심했다는 듯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그리고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행동에 놀라 자신도 덩달아 무릎을 굽혀 앉았다. "쥬, 쥬르, 왜 그래? 가방은 왜 또 풀고 그래?" "에이드리안, 배낭에는요, 음... 밤에 심심할 때 하려고 가지고 온 카드랑 공깃돌, 고무줄, 틀린 그림 찾기 그림책, 그리고 배고플 때 먹으려고 가지고 온 모롤라랑 쥐포, 알사탕, 그리고 혹시 길 잃었을 때 사용할 나침반이랑 지도... 또... 세면 도구, 자외선 방지 밀크 크림, 성냥이랑 물 컵, 붕대랑 반창고, 소독약...에- 또, 침낭이랑 담요도 하나씩...폭닥폭닥한 베개, 그리고 손전등....양초도 2개...아참, 꼬마 에드는 집에 두고 와서 배낭에는 없어요. 그리고...이쑤시개 한 통..." 쥬느비에브가 바닥에 늘어놓은 물건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 건 완전 야영 준비잖아. 정말..." 에이드리안의 한숨에도 아랑곳없이 쥬느비에브의 신나는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이건 심심할 때 보려고 가져온 잡지고, 이건 벌레 나왔을 때 뿌리는 해충약....그리고 이건 과일 깎아먹을 때 쓰는 과도. 밥그릇, 국그릇에다가 작은 냄비도 하나....프라이팬도 하나..." 제81음(第81音) Love is Pain.(4) 브레시아가 준비한 담백한 식사를 맛있게 먹고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침실로 갔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미라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는 내일 만날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계속 마차를 타고 왔더니 온 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그는 깨끗하게 씻고 푹 숙면을 취해 피로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하녀가 안내해 준 방은 하나였다. 잠을 자야 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는데 분명 방은 하나였다. 에이드리안은 방안에 들어와 멍하니 안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침대는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로서는 이만저만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까 브레시아에게서 예쁘게 생겼다는 둥, 착하다는 둥 칭찬을 받은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계속 어깨를 으쓱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현관 앞에서 흩어놓은 물건을 다시 꾸욱꾸욱 집어넣어서, 매고 있는 배낭은 들쭉날쭉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배낭을 벗어 방 안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에이드리안, 빨리 들어와요."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으로 들어왔다. "쥬르, 방 하나 더 달라고 말해야 겠어. 손님 접대를 이렇게 하다니... 브레시아 아주머니가 이러실 분이 아닌데." 에이드리안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거리며 말했다. "어어. 방 하나만 달라고 내가 말했는걸요? 같이 있어야 캠핑 온 기분이 난단 말이에요. 헤헤."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노란색 원피스를 휘날리며 침대 쪽으로 뛰어갔다. "다-이빙!!" 침대 위로 풀썩 뛰어내린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에서 버둥버둥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이제 말릴 기운도 안 나 한숨을 쉬며 침대로 걸어가 풀썩 주저앉았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을 오라 가라 하기도 귀찮았다. 될 데로 되라는 심정으로 에이드리안은 그냥 이 방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지금은 너무 피곤해 모든 것이 귀찮았다. 입고 있던 하늘색의 상의를 벗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쥬느비에브는 침대에서 일어나 배낭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가져 왔다. "에이드리안, 이거 먹을래요? 짭쪼롬하고 맛나요. 쥐포." 에이드리안은 태어나서 난생 처음 보는 넓적하고 누르스름한 것을 보며 인상을 썼다. "쥐...포?" "응! 이거 맛나요. 안느마리가 줬어요. 음...이거 싫으면 이 거 먹을래요? 양파맛 감자칩. 찐빵도 있어요." 쥬느비에브가 노란색 반들거리는 봉지에 담긴 하얀 과자와 찐빵을 내밀자 에이드리안은 과자를 집어 한 입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의 옆에 앉아 셔츠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나랑 밤새도록 같이 놀아줄 거죠? 그쵸? 원래 놀러와서는 그래야 하는 거래요. 뭐 할래요? 카드놀이? 아니면? 공기? 아니면 고무줄놀이 할까요? 딱지도 있어요. 원래 야영 와서는 이런 거 하고 노는 거래요." "쥬르. 나 피곤해. 그리고 우리 야영 온 거 아니잖아. 나 먼저 씻을 테니까 너 혼자 놀아." 에이드리안은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두 손 가득 카드와 공깃돌, 고무줄, 딱지를 들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하고 에이드리안이 들어간 욕실을 쳐다보았다. "힝, 원래 이런 거 하고 놀아야 하는데... 에이드리안 바보, 꽁치, 쭈꾸미...메추리알...같이 놀아야 되는데..." ********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상쾌한 기분과 함께 다소 피로가 가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쥬르, 난 잘 테니까 너도 불끄고 빨리 자." 쥬느비에브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 씻고 나오면서 보니 쥬느비에브는 침대에 앉아 뿌루퉁한 얼굴로 바닥을 쏘아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돌아누웠다. 쥬느비에브가 혼자서 놀든 말든 잘 생각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슬슬 잠이 왔다. 침대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 아주 기분 좋았다. 또록, 또록, 훌쩍. 또록, 또록, 또각, 훌쩍. 에이드리안은 자꾸만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이불을 끌어올리며 잠을 청하고 있는 그였다. 또록, 또록, 훌쩍. 소리는 계속 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귀를 막다가 훌쩍이는 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침실 등만이 켜져 있어 방은 어두웠다. 은은하게 붉은 빛만이 감돌았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또록, 또록, 또각. 훌쩍. 훌쩍. 확실히 울먹이는 소리였다. 에이드리안은 이불을 확 끌어내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쥬르?" 에이드리안은 순간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에 앉아 두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리며 혼자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잔뜩 울먹이는 얼굴로 쥬느비에브는 공깃돌을 던지거니 받거니 하며 코를 훌쩍였다. 에이드리안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쥬르, 안 자고 뭐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공깃돌을 던지고 받으며 눈물을 퐁퐁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훌쩍, 훌쩍.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흐엉. 흐어엉...." "쥬, 쥬르, 울지 마!" 에이드리안은 당황해 쥬느비에브의 입을 손으로 막고 속삭였다. 늦은 밤에 쥬느비에브의 울음소리 때문에 집 안 사람들을 다 깨어나는 일 따위 정말 사절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끄억끄억 소리도 못 지르고 눈물만 쏟아 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신음 섞인 목소리로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르, 같이 놀아줄게. 됐지? 그럼 된 거지? 이제 된 거지?"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손바닥 가득한 눈물에 얼굴을 찡그리며 에이드리안은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우리 카드놀이 할까요? 아니면 체스 도구도 있어요. 그거 할래요? 아니면 딱지치기?" 에이드리안은 자꾸만 감겨오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카드를 가리켰다. 그리고 곧 이어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의 카드놀이의 승패를 둘러싼 대격돌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어기적거리며 카드를 하던 에이드리안도 어느 새 바짝 집중을 하게 된 것이다. 쥬느비에브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3번 카드 받고, 11번 카드로 패스. 쥬르, 그 쪽 카드 앞으로 내야지. 네 카드 아니잖아." "12번 카드로 패스, 5번 카드 받고. 에이드리안, 거기 다리 밑에 그거 뭐 예요? 속임수 쓰기 없기!" 그렇게 밤새도록 놀이는 계속 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에이드리안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온 미라벨과 케이로프, 안느마리, 유벨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한 쪽 침대에는 카드와 체스판, 체스말, 그리고 딱지, 공깃돌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나마 좀 깨끗해 보이는 다른 쪽 침대에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서로 엉켜 자고 있었다. 미라벨은 그 모습에 눈썹을 실룩이며 케이로프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 님, 나 데리러 오신 거 아닌가요?" "아아- 아마도." 케이로프는 눈을 깜빡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유벨은 기가 막힌 듯 방을 둘러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이 게 뭐야. 냄비에다 해충약에다... 이건 또 뭐야, 침낭?" "쥬느비에브는 야영 왔다고 착각했나 봐요." 안느마리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네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잘 자고 있는 두 사람은 내버려두고 네 사람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그들이었다. ******** 미라벨은 멍한 얼굴로 무심하게 복도를 따라갔다. 케이로프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안느마리와 유벨은 어느 새 눈치껏 자리를 피한 모양이었다. 연일 계속된 결혼 소동에 시달린 미라벨은 너무 피곤했다. 무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미라벨은 커다란 테라스로 걸어가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시원한 느낌에 피곤함이 잦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로 간간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미라벨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케이로프가 난간으로 다가와 무표정하게 테라스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산이 이제는 낙엽으로 덮여 울긋불긋 해지고 있었다. 미라벨은 살짝 눈을 떠 케이로프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케이로프 님. 죄송해요. 이런 일로 폐를 끼쳐서." 케이로프가 고개를 돌려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여전히 눈을 감고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케이로프는 다시 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내 본가에서도 서신이 왔더군. 당장 와서 약혼을 하라고 하던데." "뭐, 뭐라고욧?" 케이로프의 말에 미라벨은 벌떡 일어나 소리질렀다. 케이로프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미라벨은 고개를 돌리며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내가 왜 놀라는 거야? 저 사람이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상관없잖아! 미라벨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뭐 케이로프 님이 약혼을 하던 말던 상관은 없지만 안 됐군요. 또 한번 이런 소동을 겪어야 하니..." "그렇겠지." 케이로프는 계속 테라스 바깥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미라벨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난간에 기대어 산을 바라보았다. 산을 보고 있으니 단풍구경 가고 싶다는 생각이 소록소록 들었다. 바람이 테라스 쪽으로 불어왔다. 시원한 가을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자 미라벨은 손을 들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 때 케이로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만약에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이 길을 가다 올슈틴 파라 모르 드레이노 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면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은 어떤 말을 할 텐가?" 미라벨은 눈을 깜빡이며 케이로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그러나 케이로프는 의외로 진지하게 미라벨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해 봐." 미라벨은 눈썹을 실룩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드레이노따위 하수구에 빠져 버리라지!" "드레이노따위 하수구에 빠져 버리라지!" 미라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이로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가 입을 연 동시에 케이로프가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미라벨의 입에서 갑자기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케이로프와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누구보다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만약에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다면 역시 케이로프도 같은 대답을 했으리라. 미라벨은 고개를 숙여 쿡쿡 웃음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때 케이로프가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우리 약혼을 하는 게 어떤가? 그럼 더 이상 피곤할 일도 없을 테고." 케이로프가 말했다. 미라벨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가 다시 한 번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뭔가 충격적인 말은 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이었는지 제대로 머리 속에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로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라벨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며 초조하게 손등을 긁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난 에이드리안 님을..."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는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있지 않은가." "하, 하지만!" "이미 기회는 놓친 것이니 차라리 그 분의 2세를 공략 해 보는 것이 어때?" 케이로프의 진지한 말에 미라벨은 눈을 깜빡였다. "2, 2세요?" "어떻게든 우리의 자식을 그 분의 자식과 결혼시키는 거지. 그럼 그 분과 우린 사돈이 되는 거야." "사, 사돈? 그거 멋지군요..." 미라벨의 얼굴이 발그레해 졌다. 어차피 에이드리안 님과의 결혼은 꿈에서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렸으니 차라리 이 편이 훨씬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에이드리안의 사돈이라니, 정말 멋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케이로프와 결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미라벨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그에게 말했다. "거절이에요. 그 분의 사돈이 되기 위해 왜 제가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 거죠?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에이드리안 님과 사돈이 될 수 있다고요." "만약 그 분의 자제 분이 한 명이라면 어떻게 할건가. 또 나와 싸울 건가? 게다가 우리가 결혼하면 그만큼 세력이 커지기 때문에 그 분으로서도 우리와의 안정된 관계를 위해서 반드시 우리 아이와 혈연관계를 맺어야 할 당위성이 생기지." 미라벨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너무나 구구절절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만약 에이드리안의 아이가 한 명이라면 케이로프와 또 엄청난 혈전을 벌여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뿐인가. 에이드리안의 사촌 형인 유벨 혹은 쥬느비에브의 절친한 친구, 안느마리가 아이를 낳으면 그 만큼 경쟁자가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케이로프와 결혼하면 그녀로서는 훨씬 경쟁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미라벨은 침을 삼키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케이로프 님은... 나,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케이로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맞받아 쳤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건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은 부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고고한 레이디지.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야. 난 그 점을 존경하고 있어. 그리고..." "그리고?" 미라벨은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케이로프는 가만히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함께 평생 노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미라벨은 그만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케이로프에게 노래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혼자였던 시절, 그를 지탱해준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노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노래를 하고 싶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의미였다. 미라벨은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케이로프가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앞에서가 아니면 좀처럼 웃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그대로 눈에 박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라벨은 활짝 미소지었다. "좋아요. 우리 약혼해요. 까짓 거 에이드리안 님의 사돈이 되어 보자구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이유로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자신이 약혼했다는 것도. 그들은 평생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약혼식이 미라벨의 본가에서 치러졌다. 이미 양가의 부모님들이 서로를 잘 아는 데다 원래 사이가 좋았던 두 가문인지라 약혼식은 별 문제없이 치러졌다. 약혼은 뤼베이크 가에서 결혼은 에르슈바이크 가에서 치른다는 예정이었다. 약혼식은 많은 하객들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무엇보다 5대 대귀족 간의 혼사였기 때문에 비인 가에서도 많은 하객이 왔다. 약혼식이 끝나고 모든 하객들이 떠났지만 엘크로이츠의 임원들은 축하 의미에서 일주일 정도 뤼베이크 가에서 머물 참이었다. 안느마리와 유벨은 식사 후 후식을 실컷 먹고 가볍게 산책을 즐기는 중이었다. 안느마리는 기지개를 주욱 펴며 유벨에게 말했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렸죠? 나 미라벨 님이 레이스랑 프릴 안 달린 옷 입은 거 그 때 처음 봤어요." "미라벨이 처음에 고른 옷을 케이로프가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했다잖아. 미라벨, 은근히 케이로프에게 약하단 말이야. 겉으로 봐서는 백 번 싸우면 백 번 미라벨이 이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또 그렇지 않다니까." 유벨은 유쾌하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쥬느비에브 울었다면서요? 하긴 쥬느비에브는 제대로 된 약혼식을 못 했으니까 부러웠던 거겠죠.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시더라구요." "그건 쥬느비에브가 몰라서 그래. 에이드리안은 비인 가의 사람들 모두 앞에서 약혼식을 하고 싶은 거라고. 다른 가문과 달리 비인 가는 한 번 사람을 모으기가 엄청 힘들어. 아르헨에 큰 일이 생기거나 가문의 연례행사 같은 게 아니면 힘들다고. 저번에 대무도회도 취소되어서 힘든 상황이야." "하여튼 에이드리안 님 고생이시네요." 안느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눈앞에 휙 하고 지나가는 그 무언가를 보았다. 안느마리는 유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미라벨 언닌가 보네? '세린느'라고 승계자 시험 때 떨어지고 계속 유령처럼 지내는 사람이야. 착하긴 한데 너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여자라서 좀 대하기가 어렵지. 이번 약혼식 때도 뒤에서 숨어만 있었다더니. 신경쓰지 마. 나중에 만나면 인사나 해줘." 유벨은 휘파람을 부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느마리는 세린느가 사라진 곳을 멍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린느...예쁜 이름인데." 안느마리는 이내 웃으며 유벨의 뒤를 따라갔다. 기분 좋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사랑이 고통이든 기쁨이든 어쨌든 참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니까! 제82음(第82音) Tell me...(1) [ 사랑하는 나의 쥬르, 사랑한다는 말은 위험한 거야. 난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 [ 마망, 왜요?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가 아주 좋아한다는 뜻이라는데. ] [ 그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말을 주고 내 곁을 떠났단다. 사랑하는 나의 쥬르, 소중한 사람이 그 말을 하면 조심해야 해. 그는 네 곁을 떠날지도 몰라. ] [하지만 마망. 마망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도 떠나지 않았잖아요. ] [ 사랑한다는 말은 무섭지만...세상 어느 단어보다 따뜻하단다. 그래서 난 무섭지만 네게 그 말을 하는 거야. 사랑하는 나의 쥬르, 마망도...곧 떠날 거란다. 아주 먼 곳으로... ] ******** 쥬느비에브는 울면서 깨어났다. 뤼베이크 가에서 집에 돌아온 후부터 쥬느비에브는 매일 울면서 깨어났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둘러싼 축하 손님들을 볼 때도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방 한가득 쌓여 있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선물을 볼 때도 눈물이 났다. 그냥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 울면 에이드리안이 굉장히 화를 내고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요즘 에이드리안은 매일 아침 방으로 찾아왔다. 아침마다 그녀가 우는 것을 알고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찾아왔다. 에이드리안이 올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쥬느비에브는 잠옷 소맷자락으로 쓱쓱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자꾸 퐁퐁 솟아오르는 눈물을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김없이 방문이 열리고 에이드리안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쥬느비에브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눈을 찌푸렸다. 그는 쥬느비에브의 침대로 다가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쥬르, 울지 좀 마. 나 속상해."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미안했다. 자신도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서러운 기분이 들고 눈물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짧은 한숨과 함께 눈물을 닦아주며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 너 우는 거 싫어. 울지 마. 응?" "에,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하지만 자꾸 눈물이 나와."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다시 소맷자락으로 쓱쓱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손수건을 내려놓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흐르는 눈물을 에이드리안의 셔츠에 비벼 닦아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눈물이 덜 나올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계속해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쥬르, 약혼식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입을 꾸욱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약혼식 때문에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까만 생머리를 매만졌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난 약혼식 할 생각 없어. 어차피 너와 나, 약혼한 거 아르헨 사람들은 다 아는걸." 순간 쥬느비에브의 입이 톡 튀어나왔다. 에이드리안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쥬르, 우리 대신 결혼식 하는 건 어때?" "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품에서 나와 말똥말똥 눈을 굴렸다. 어느 새 눈물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계속 웃으며 말했다. "스콜라 졸업하고 나서 하려고 했지만 네가 원하면 좀 더 빨리 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어, 언제요?" 쥬느비에브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손으로 잠옷 자락을 꾸욱 쥐고 말했다. "곧 겨울이니까 좀 곤란하고 내년 봄쯤?" "헤에- 정말? 정말? 야아- 신난다!"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아래위로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품에 덥석 안겨 웃어댔다. "그럼 우리 봄에 결혼하는 거예요? 그럼 그 때 선물도 많이 받고 손님도 많이 오는 거예요?" "너어- 선물 받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 에이드리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결혼식을 하면 알록달록 예쁘게 포장한 선물도 많이 받고 예쁜 옷도 입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겠지. 그럼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가 되는 거야. 그리고 영원히 에이드리안과 함께 있을 수 있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품에 안겨 가만히 눈을 감으며 미소지었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 오후가 되자 에이드리안은 집을 나서 학생회실로 향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오솔길이 정답게 느껴졌다. 노란빛의 낙엽으로 뒤덮인 오솔길은 걸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하고 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안은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깨끗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갔다. "손 안에 공기가 잠겨와..."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화로웠다. 마음을 짓누르는 아무런 불안감도 없이 평화로웠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미소지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지 않아 그는 학생회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학생회실에는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무사히 약혼식을 치룬 두 사람은 약혼을 했다지만 평상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입고 있던 얇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워낙 골똘히 생각에 잠긴 탓에 그가 학생회실에 들어온 것도 몰랐다. "뭐해? 두 사람." 에이드리안의 말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종이를 다급하게 구겨 손에 쥐고는 애써 미소를 띄웠다. "어, 언제 오셨나요. 에이드리안 님?" 두 사람의 침을 삼키는 모습이 극명하게 눈에 보이자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자신의 책상 쪽으로 갔다. 놀라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만의 은밀한 대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금 왔지. 그런데 유벨은?"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은 잠시 외출 중입니다.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케이로프가 에이드리안을 꼼꼼히 살피며 대답했다. "그래? 아, 연습실에 좀 다녀와야 겠어. 좀 있다 올 테니까." 에이드리안은 무언가 잊은 것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코트를 다시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아까 구겨버린 종이를 다시 펼쳐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미라벨은 엄숙한 표정으로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그럼 계속해 보죠. 우리의 가족 계획." "아아-. 그래. 타이밍을 잘 맞춰야 그 분과 사돈이 될 수 있음이야.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이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또래의 딸을 낳아야 하고, 반대 상황이면 아들을 낳아야 하지." "맞아요. 정확한 가족 계획만이 우리가 에이드리안 님의 사돈이 될 수 있는 길이에요."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가족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내후년에 아들을 한명, 그 다음 해에 딸을 한 명...이런 식으로 그들은 꼼꼼하게 가족 계획을 세웠다. 오로지 에이드리안과 사돈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유벨이 들어왔다. "어이! 들었어, 그 얘기?" 유벨은 들어오자 말자 유쾌하게 말을 던졌다. 미라벨은 다시 잽싸게 가족계획서를 구겨 손에 쥐고 유벨을 쳐다보았다. 케이로프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야기 말인가?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에드랑 쥬느비에브, 내년 봄에 결혼한다잖아. 아참! 내 정신 봐라. 서류 놔두고 왔네. 어이, 좀 있다 보자구!" 유벨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멍하게 마주보았다.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그럼 2세도 빠르면 내년에? 미라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가족계획서를 다시 펼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가족 계획을 다시 짜야겠네요." "아아- 내년에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딸이 태어난다면...우리로서는 내년에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케이로프는 힘없이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난감해진 두 사람이었다. 에이드리안의 사돈이 되는 것은 멀고도 험한 일이었다. 문제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이미 미라벨이 졸업하는 해에 결혼식을 하기로 양가 합의를 본 상태였던 것이다. 내년에 아이를 가진다면 그야말로 사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우울하게 다시 가족 계획서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 한편,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와 함께 식당 <르 뤼센부르>에서 간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모롤라 주스에 담긴 빨대를 쪽쪽 빨며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베이컨 밤말이를 먹고 있던 안느마리가 씨익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너 기분 좋구나? 에이드리안 님이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아?" 쥬느비에브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안느마리는 그런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행복해 지는 것 같아 살며시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 그럼 그 때 부케는 나한테 주기다?" "알았어. 안느마리. 하지만 미라벨 언니도 달라고 할텐데. 두 개 던져야 겠다." "부케를 두 개 던지는 신부가 어디 있어?" 쥬느비에브의 말에 안느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쥬느비에브도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어댔다. 안느마리는 계속 웃다가 생각난 것이 있다며 가방을 주섬주섬 뒤적였다. 그리고 이내 주황색으로 양장된 커다란 책을 하나 꺼냈다. "쥬느비에브, 이거 악보 책이야. 좋은 노래 많으니까 한 번 보라구. 비싼 건데 특별히 주는 거야. 동방에서 직수입한 거라고." "헤에- '사랑의 연가'? 안느마리네 가게는 별 걸 다 수입하는 구나."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가 건네준 주황색 표지의 책을 보며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번쩍 들고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주스를 마시고 있던 안느마리는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안느마리, 전에 그 요리법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요즘 동방에서 유행하는 그 요리. 나 에이드리안한테 해 주고 싶은데." "아아. 그거?"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에게 가르쳐 주기로 한 요리법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쥬느비에브느 곰돌이 필통과 모롤라 메모지를 꺼내 열심히 안느마리의 설명을 받아 적었다. "헤에- 이거 쉽구나. 에이드리안은 매운 거 못 먹으니까 이런 건 아주 잘 먹을 거 같아. 나 멋지게 요리에 성공해서 에이드리안한테 칭찬 받을 거야. 아유, 난 정말 좋은 약혼녀라니까."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대견한지 머리를 쓰다듬고 메모지와 필통을 조심스레 가방 안에 넣었다. 연두색 원피스 자락을 매만지던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안느마리. 나 사실은 정말 믿어지지 않아. 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이제는 에이드리안이 있고, 좋은 친구 안느마리도 있고 유벨 오빠랑 미라벨 언니, 케이로프 님까지 전부 나한테 잘 대해주니까." "쥬느비에브. 그건 당연한 거잖아. 너만큼 착하고 멋진 아이한테 잘 대해 주는 건 정말로 당연한 일이라구. 나도 늘 쥬느비에브한테 감사하고 있는 걸? 나, 쥬느비에브가 아니었으면 스콜라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친구 한 명 못 사귀었을 거야. 쥬느비에브 덕분에 유벨 님이나 미라벨 님, 케이로프 님같은 멋진 사람들과도 잘 알게 되고." 안느마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쥬느비에브에게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미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빨대로 주스를 휘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변변하게 입을 옷도 없고, 신발도 없었는데 지금은 드레스룸 문을 열면 너무 옷이 가득해서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해. 하지만 정말 마음을 울리는 건 그런 옷 같은 게 아니야. 정말 마음을 감싸는 건 날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지. 응, 에이드리안이 날 행복하게 해줬어. 에이드리안의 마음이 날 따뜻하게 감싸줘. 이젠 내게도 가족이 있어. 에이드리안이 있고, 꼬마 에드도 있어. 참 행복해." 쥬느비에브는 행복한 미소를 띄며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주스의 질감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만큼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그녀는 몹시 행복하고 행복해서 다른 아무 것도 생각 할 수 없었다. 안느마리는 친구의 이 행복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83음(第83音) Tell me...(2) 늦은 저녁이었다. 에이드리안도 자러 들어가고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 유심히 안느마리가 준 '사랑의 연가'라는 악보 책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홍색 원피스 잠옷을 두 손으로 꾸욱 잡고 쥬느비에브는 침대위에 펼쳐놓은 악보 책에 눈을 박았다. 밤이라 날씨가 쌀쌀해서 창문을 닫아 놓았는데 바람이 불면서 가끔씩 덜컹거렸다. 쥬느비에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악보 책을 넘겼다. 악보 책의 제목처럼 실린 곡들은 전부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였다. 악보를 이리저리 넘기던 쥬느비에브는 눈에 띈 한 곡을 가만히 읽어보았다. "나는 그렇게 그대를 사랑합니다. 따스한 봄날의 은은한 꽃향기처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기분이 이상한 울림이었다. "사랑? 사랑이라고?"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가만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 나는 그렇게 그대를 사랑합니다. 따스한 봄날의 은은한 꽃향기처럼... 나는 그렇게 그대를 사랑합니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나는 그렇게 그대를 사랑합니다 풍요로운 가을 농부들의 땀을 씻어주는 청명한 바람처럼... 나는 그렇게 그대를 사랑합니다 추운 겨울 마법처럼 온 세상을 물들이는 새하얀 눈처럼...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은 그렇습니다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대여... 사랑해요 ]] 입술에서 맴도는 소리가 마음 아프게 느껴져 쥬느비에브는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잦아들어 창 밖은 고요했다. 시커먼 어둠이 드리워진 창 밖에는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둠. 아름다운 노래, 그리고 고통, 아픔....사랑."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뭔가 계속 가슴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뒤돌아 누워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웠다. "하아- 하아- 아파. 아파. 에이드리안..." 이마에 땀방울이 솟는 것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에이드리안이 걱정할 것이다. 자신의 이러한 고통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분명 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겠지.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쥬느비에브는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커다랗고 동그란 그릇에 밀가루와 물을 넣어 열심히 반죽을 하고 있었다. 안느마리가 가르쳐 준 레시피에 따라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물 요만큼에 밀가루, 거기다 우유도 넣고..." 쥬느비에브는 체크 무늬의 앞치마를 바로잡고 밀가루 반죽이 범벅이 된 위생용 장갑을 벗고 새 장갑을 손에 꼈다. "조물딱 조물딱, 열심히 반죽을 합시다아---" 쥬느비에브는 방금 만든 노래를 부르며 있는 힘껏 밀가루 반죽을 했다. 그리고 레시피가 적혀 있는 메모지를 힐끗 보고 다시 밀가루 반죽으로 눈을 돌렸다. "흐음... 반죽은 된 거 같은데. 그럼 이제 설탕이랑 땅콩이랑... 계피 가루도 조금 넣어볼까?" 쥬느비에브는 작은 그릇에 설탕을 살짝 붓고 각종 재료를 쏟아 넣은 다음 스푼으로 섞었다. "좋았어! 이제 굽기만 하면 된다! 야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밀가루 반죽을 쪽쪽 떼어내어 설탕양념을 넣은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들썩들썩 하며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굽기 시작했다. 노릇노릇 반죽이 익어가며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쥬느비에브는 코를 킁킁거리며 즐거운 듯 미소를 띄었다. ******** 침대에 누워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에이드리안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쥬느비에브가 깨우러 올 시간이 벌써 지났는데 아직도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끙 하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좀 더 늦잠을 즐겨도 무방하리라. 아직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편하게 내려놓고 에이드리안은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쥬느비에브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이마에 주름을 넣으며 돌아누웠다. 살며시 뜬 눈 속으로 희미하게 햇빛이 들어왔다. 그는 허공으로 팔을 뻗어 가만히 손을 쳐다보았다. 이내 문이 열리고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들어왔다. 손에 커다랗고 폭신폭신한 주방용 장갑을 끼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단번에 침대로 달려와 껑충 뛰어올랐다. "에이드리안, 이 거 먹어봐요. 이 거. 호떡." "으응?"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베개를 등 뒤로 돌려 기대었다. 쥬느비에브의 손에는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는 호떡을 담은 접시가 들려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아직 깨지 않은 잠을 쫓아보내려는 듯 머리를 한 번 흔들고 호떡을 집어 입에 물었다. "어때요? 맛나죠? 이 거, 안느마리가 가르쳐 준거예요. 내가 직접 만들었단 말이에요. 어때요?" "네가 만들었다고? 그런데 뜨거워." 에이드리안은 졸린 눈을 끔뻑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떡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기대감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호떡을 쭉 물어뜯었다. 천천히 호떡을 씹으며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접시에 담겨 있는 호떡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듯 싶었다. 입안에 달콤한 설탕과 쌉쌀한 계피맛이 스며들었다. 고소한 땅콩도 씹히는 것 같았다. "맛있어." "에에? 정말? 정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함박 미소를 띄며 장갑을 벗고 호떡을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행복한 얼굴로 호떡을 씹었다.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뭐 먹을 때가 제일 좋아요. 진짜 가족인 거 같거든요. 아주아주 행복해서 너무너무 기분 좋아요." 에이드리안은 잠결에 호떡을 씹으며 물끄러미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살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 아주 기분 좋은 듯 했다.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눈을 비비며 멍한 정신을 추슬렀다. 쥬느비에브는 두 개째의 호떡을 먹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나중에 또 만들어 줄게요. 나, 호떡 잘 만들죠?" "응." 난생 처음 먹어보는 이상하게 생긴 '호떡'이라는 것을 먹으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었다. 이상하게 아르헨의 최고 요리사들이 만든 요리보다 맛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들고 있던 호떡을 마저 먹었다. 계속 호떡을 우물거리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협탁 위의 물주전자를 가져와 컵에 물을 따라 마시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왜 그러냐고 눈짓을 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나 좋아해요?" "콜록!" 물을 마시던 에이드리안은 순간 체해 콜록거렸다. 잠도 한 순간에 싹 달아나 버렸다. "무,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머쓱하게 입 언저리를 닦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자못 진지한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아직도 김이 나고 있는 호떡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난 계속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공부도 많이 하고 싶어요. 매일 같이 산책도 하고 가끔씩은 데이트도 하고 싶어. 나, 처음 여기 올 때는 같이 밥 먹어줄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입고 있던 연한 자주색 원피스 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잡으며 말끝을 흐렸다. 에이드리안은 심각한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자못 긴장하고 있었다. 이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 나 점점 욕심이 생기는 거 같아요. 에이드리안이 다른 사람말고 나만 봐줬으면 좋겠어요. 나하고만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진지한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쥬르,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없이 눈을 똑바로 뜨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긴장하고 있던 자신이 갑자기 바보같이 느껴졌다. "쿡."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에 엎드려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쿡쿡쿡. 아하하하하하하하---" "에이드리안, 왜 웃는 거에요? 남은 심각하게 말했는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얼굴을 돌려 쥬느비에브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쥬르...너무 웃기단 말이야...너무 웃겨..." 에이드리안은 너무 웃어서 숨쉬기가 곤란한지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팔짱을 끼고 짐짓 무서운 표정을 만들며 그에게 말했다. "너무 해요. 난 정말 용기를 내서 말한 건데." "하지만 쥬르, 이렇게 잠옷 바람으로 고백을 듣고 싶진 않다고. 게다가 호떡 먹으면서 고백이라니....쿡쿡. 분위기 꽝이잖아." 쥬느비에브는 퉁하게 표정을 구기며 에이드리안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나 진지해요. 듣고 싶은 말이 있다구요." 에이드리안은 계속 잠옷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다가 쥬느비에브의 단호한 표정에 웃음을 그쳤다. "듣고 싶은 말?" "꼭 듣고 싶은 말이 있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쥬느비에브는 절박한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에이드리안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 "그걸 내가 말하면 어떻게 해요! 에이드리안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가르쳐줘야 해줄 거 아니야." 에이드리안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무심한 표정에 살며시 표정을 구기며 홱 토라져 호떡 접시를 들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며 외쳤다. "에이드리안 미워요! 바보, 꽁치! 메추리알!" 접시를 들고 후다닥 뛰어나가는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쥬르, 아침부터 왜 저러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에이드리안은 이미 깨어버린 잠을 다시 자기도 그렇고 해서 일어나 드레스룸 쪽으로 기지개를 켜며 걸어 갔다. ******** 쥬느비에브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등지고 서서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녀는 호떡 접시를 내려놓지도 않고 손에 들고는 훅훅 숨을 내쉬었다. 원망과 분노의 한숨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너무해. 내 마음도 몰라주고."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왠지 남겨진 호떡들이 처량해 보였다. 일부러 에이드리안에게 잘 보이려고 아침부터 호들갑 떨며 구웠던 것인데 그녀가 바랬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 왠지 심통했다. "정말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쥬느비에브는 접시를 내려놓고 팔로 다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 두, 둔탱이. 좀 심했나? 아니야, 하나도 안 심하다 뭐." 쥬느비에브는 우울하게 시선을 돌리며 창 밖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쌀쌀한 모양이었다. 유리창에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쥬느비에브는 심장 저 안쪽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에이드리안이 못내 야속했다. 아침부터 엄청난 실망감을 맛보고 나니 너무 우울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밑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꼬마 에드에게 손짓을 했다. 꼬마 에드는 쥬느비에브의 손짓에 통실통실 뜀박질을 하며 다가왔다. "꼬마 에드, 나 우울해. 우리 같이 놀자." 쥬느비에브는 꼬마 에드의 손을 잡고 실룩실룩 흔들었다. "랄라라라 나는야 귀여운 쥬르, 내 강아지 이름은 꼬마 에드,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자작 곡을 부르며 강아지에게 춤을 추게 하던 쥬느비에브는 이내 숨을 포옥 내쉬었다. 강아지도 나름대로 피곤한 건지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만 하자. 꼬마 에드, 가서 강아지 밥 먹어." 쥬느비에브는 꼬마 에드를 놓아주고 멍하니 고개를 들어 욕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84음(第84音) Tell me...(3)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아침에 보았던 쥬느비에브의 실망감 어린 얼굴이 생각나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쥬느비에브가 아침부터 호떡이라는 것을 굽느라 부산을 떨었을 것을 생각하니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호떡은 자신에게서 어떤 말을 듣고자 유인수단으로 가져온 것이 틀림없었다. 쥬느비에브의 단순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호떡으로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그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생각이었을 거라 짐작되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 타이를 마저 매었다. 큰 어려움 없이 멋스럽게 타이를 맨 에이드리안은 긴 조끼를 걸치고 단추를 채웠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살핀 그는 곧장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했다. 쥬느비에브의 방에서 그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조바심이 났다. 혹시 화가 나서 가출한 건 아니겠지? 토라질 때마다 가출한다는 소리를 밥먹듯이 하는 그녀였기에 에이드리안은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쌀쌀한 바람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갈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돌린 에이드리안은 욕실의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번의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말없이 긴장하고 있는 그였다. 그는 조심스레 욕실로 다가갔다. 첨벙첨벙하고 물소리가 들렸다. 훅 하고 숨을 쉬고 에이드리안은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쥬르, 거기 있어?" 조용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대답을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욕실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로 대답이 들렸다. "들어와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움찔했다. 설마 저번처럼 고약한 상황은 아니겠지. 그는 살짝 심호흡을 하고 욕실 문을 열었다. 순간 그는 눈을 깜빡이며 욕탕 안에 잠겨 있는 쥬느비에브를 향해 물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수영이요." 쥬느비에브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튜브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리를 참방거렸다. 쥬느비에브는 전에 여름 휴가 때 입고 놀던 노란색 원피스 수영복까지 챙겨 입고 튜브를 몸에 끼운 채 넓은 욕탕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병아리 그림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 튜브를 타고 수영을 하던 쥬느비에브는 이내 튜브를 쑥 빼내 휙 하고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첨벙첨벙 개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어때요? 에이드리안. 나 인어 같죠? 헤에-" 싱긋 웃으며 묻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둥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어놓고 이렇게 신나게 놀고 있다니. 쥬느비에브의 개헤엄덕분에 사방이 물투성이가 된 욕실을 둘러보고 에이드리안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몰라. 잘 놀아. 잘 놀라구." 에이드리안이 밖으로 나가자 쥬느비에브는 포옥 한숨을 쉬었다. 욕탕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며 쥬느비에브는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에이드리안은 내 마음도 모르고...정말 둔하다니까." 평상시 자신이 얼마나 둔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쥬느비에브였다. ******** 쥬느비에브는 욕탕에서의 수영을 마치고 침대에서 기분 좋게 낮잠을 즐겼다. 어제 결제 서류를 말끔하게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오늘은 비교적 한가했다. 쥬느비에브는 낮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창 밖을 쳐다보았다. 나뭇잎도 거의 떨어져 가고 왠지 쓸쓸해 보이는 풍경이 창 밖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고 있던 잠옷 자락을 매만졌다. "조금 있으면 곧 겨울이네. 겨울이 끝나면 봄이고 봄이 되면 에이드리안이랑..."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행복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어머니가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었을 때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매일 울면서 보냈다. 아무리 울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혼자였고 누구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다가오지 않았다. 배가 고프고 외로웠다. 혼자 살아가기 위해 정든 집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동정심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슬펐다.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불쌍해서 잘 대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었다. 봄에 결혼식을 하면 이제 세상 누구도 그녀를 그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와 평생 함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장치였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좋아했다. 그가 곁에 있어주면 행복했다. 설사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그러나 자꾸 욕심이 생겼다.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생겼다. 꼭 듣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것은... 쥬느비에브는 침대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가서 초록색의 원피스를 챙겨 입었다. 에이드리안이 보고 싶었다. 비록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진 않았지만 다시 가서 떼를 써볼 참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어리광이었다. 그 때는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에이드리안이 있다.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떼를 쓰리라. 주어진 행복을 마음껏 맛보리라. ******** 에이드리안이 응접실에 있다는 루이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꼬마 에드를 품에 안고 콩콩 뜀박질을 하며 계단을 디뎠다. 손님이 와 계신다고 언듯 들었던 것 같은데?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으며 발랄하게 응접실로 달려갔다. 응접실의 문을 열자 테라스에서 빛이 쏟아졌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고 방실방실 웃으며 외쳤다. "에이드리안! 어어?" 방에는 에이드리안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아저씨가 물감이며 붓을 정돈하고 있었다. 아저씨의 길게 기른 수염이 붓이랑 비슷하게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쥬느비에브를 발견한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가 쥬느비에브 아가씨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이 싱긋 웃었다. "쥬르, 인사 해. 화가, 모리에르 씨야." "아, 네. 안녕하세요. 아저씨." 쥬느비에브는 화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에이드리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귓속말을 속삭였다. "화가 아저씨가 우리 집엔 웬일이신 데요?" "당연히 그림 그리러 왔지. 초상화 그리러 온 거야."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끔뻑거리며 보다가 이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러니까 에이드리안, 갑자기 왜 초상화를 그리냐구요." "대속성 레플리카는 6모네에 한 번 꼴로 초상화를 남기도록 되어 있어. 그래서 모리에르 씨를 부른 거야." 에이드리안은 편하게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편한 셔츠와 검정색 바지 차림의 에이드리안을 보고 생긋 미소지었다. 귀족의 여유랄까 그런 것이 느껴지는 차림새였다. 화가가 준비가 다 되었는지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그릴 테니 편하게 자리잡아 주세요."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그의 셔츠 소매를 잡고 그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쥬느비에브는 태연한 척하며 품에 얌전하게 안겨있던 꼬마 에드를 꼬옥 끌어안았다. 에이드리안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쥬르, 이제 초상화 그려야 하니까 올라가서 책을 읽던지..." "나도 같이 있을래. 나도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모델 할거야. 꼬마 에드도 같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스레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함께 초상화 모델을 한 적은 없었다. 대속성 레플리카로서 관례상 6모네에 한 번 꼴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원칙상 개인 초상화를 남겨야 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드리안과 함께 모델이 되겠다고 박박 우기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이내 한숨을 쉬고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화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에르 씨. 쥬르랑 함께 그리도록 하지. 강아지도. 어차피 내 모습만 남기면 아무 문제없으니까." 화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미소지으며 연필을 놀렸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진 건지 침을 꼴깍 삼키고 나름대로 얌전한 포즈를 취해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우스워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각사각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화폭에 담기고 있었다. ********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꽤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초상화 모델을 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저 가만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몸을 뒤척였다. 지루하고 심심했다. 배도 고픈 거 같고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몸도 여기저기가 쑤신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슬쩍 에이드리안을 곁눈질 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도 몸의 찌뿌둥함은 풀리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포옥 쉬고 화가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고는 강아지를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주특기, '엉거주춤 춤추기'를 했다. 화가 아저씨는 여전히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는 굉장한 집중력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싱글싱글 웃으며 계속 춤을 췄다.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며 팔을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며 쥬느비에브는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여기저기 욱신거리던 것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강아지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몸을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쥬느비에브는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아 춤을 계속 추면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에..에에?" 에이드리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춤동작을 하다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은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듯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는 것을 느끼며 머쓱한 마음으로 팔을 내려 다시 강아지를 안아 들고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침을 꼴깍 넘기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 에이드리안, 그게 말이죠. 사람은 관절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던 걸요? 그래서 말이죠..." "아아- 나 상관말고 열심히 잘 해 봐." 에이드리안은 툭 말을 내뱉고 턱을 괴고 앞을 쳐다보았다. 가끔씩 느끼는 것인데 쥬느비에브의 행동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왜 저런 어기적거리는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 심심해서 그런 걸까. 춤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자신의 약혼녀가 굉장히 특이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쥬느비에브는 왠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화가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작은 의자에 앉아 열심히 붓을 놀리던 화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약간만 손을 보면 완성이지요." 에이드리안은 화가의 말에 그제야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도 약간은 지루하고 뻐근했던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금 에이드리안에게 자신의 민망한 춤을 들켰던 터라 베시시 웃으며 화가에게 달려갔다. "아저씨, 그림 봐도 되요?"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자 화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허리를 숙여 그림으로 고개를 내렸다. "야아- 대단하다-" 쥬느비에브는 그림 앞에 서서 가만히 에이드리안과 자신의 초상화를 들여다 보았다. 밝은 빛 속에 자신과 에이드리안이 담겨 있었다. 열심히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신과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 주고 있는 에이드리안이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하얀 종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강아지도 너무 귀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여 쥬느비에브는 가슴이 따뜻하게 달궈지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화가가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원래 비인 님의 개인 전신 초상화를 계속 그려 왔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포즈의 두 분을 그려봤습니다. 비인 님의 이런 밝으신 모습은 3년 전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주 기분이 좋군요." "에에? 이전에는 어땠는데요?" 쥬느비에브는 화가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때 의자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안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쥬르?" 쥬느비에브는 활짝 미소지으며 뒤돌아 섰다. "응! 너무 그림이 예뻐요. 에이드리안도 어서 와서 봐요!" 에이드리안은 이젤 쪽으로 다가와 유심히 그림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가 그림을 어떻게 봐줄까? 왠지 자신이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순간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흠, 괜찮은데? 쥬르, 너 실물보다 더 잘 그려진 거 같아. 모리에르 씨에게 감사하다고 말해." "그쵸? 나 예쁘게 나왔죠? 에이드리안도 정말 멋진 걸."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다시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림 속의 에이드리안의 얼굴에 살며시 떠오른 미소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보면 볼수록 행복해 지는 기분에 그녀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언제까지나 저렇게 웃는 모습으로 그와 행복하게 있을 수 있다면... 제85음(第85音) Tell me...(4) 차가운 달빛이 서재로 쏟아지고 있었다. 화가가 마무리 작업을 하고 그림은 서재로 옮겨졌다. 불도 켜 놓지 않은 컴컴한 서재에 달빛만이 그림을 비추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림을 쳐다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돌아 섰다. "웃기는 군. 초상화라..." 에이드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띄며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난간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까만 밤하늘이 피부로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공기의 흐름.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눈을 떴다. 기분이 안좋았다. 뭔가 불쾌하고 역겨웠다. 그는 힘없이 테라스의 테이블 앞에 앉아 다시 초상화로 시선을 내렸다.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기분이 불편했다. 그는 다시 밤하늘로 눈을 돌렸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회색 머리의 사촌형이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방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드, 이렇게 어두운데서 뭐 하는 거야?" 유벨이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환하게 불을 켜고 방안으로 들어서다 우뚝 멈춰 섰다. 초상화를 발견했던 것이다. "히야- 쥬느비에브랑 같이 그렸구나? 녀석, 비인 가의 어르신들이 아시면 난리법석을 떨텐데." "흥, 아무렇게나 말하라지. 말만 많은 노인들."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유벨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테라스로 나와 에이드리안의 맞은 편에 앉았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힐끗 보고는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웬 일이야? 초상화는 다 그렸어?" "물론. 비인 가의 관례를 무시할 수야 없지." 유쾌하게 웃고 있는 유벨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런 걸 그리라는 거야? 비인 가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라는 건가? 대외홍보용이겠지. 대(大) 비인가의 구성원으로서 끝까지 이용당해 달라는 말 아니야? 저주받은 자들에게 그런 게 소용이 있단 말인가? 웃겨, 정말." "하는 수 없잖아. 비인 가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적어도 6모네에 한 번씩 초상화를 남기도록 되어 있으니까. 우리 대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너도 나도 귀찮지만 하는 수 없지. 그리고 가장 최근에 그려진 그림은 비인 가의 대회랑에 걸리잖아. 뭐 네 말대로 두고두고 비인 가로서의 긍지를 가지라는 뜻일지도." 유벨은 고개를 돌려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금발을 쓸어 넘기고 냉랭하게 바닥을 쏘아보았다. "저주라.... 선택받은 자, 버림받은 자. 버림받은 자는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하지? 비인 가는 존재치 말아야 했어. 더럽고 추잡스러워. 그딴 허울 좋은 이름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비인 가에는 피 냄새가 진동을 해. 역겨워." "미리 대비를 하는 거겠지. 에드, 너무 심통부리지 마. 숙부님은..." "됐어. 그만 해."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사촌 형을 쳐다보았다. "응접실에서 기다려. 차나 마시게. 난 뒷정리 좀 하고 갈 테니까."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에이드리안, 숙부님을 대신해서 내가 널 지켜주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니까 넌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라고. 비인 가의 사람이라고 행복해지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나까지 불행해질 필요는 없는거야." 유벨은 말을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말에 가만히 미소지었다. 언제나 자신을 생각해 주는 상냥한 사촌형. 어릴 때부터 계속 걱정만 끼쳤다. 변변치 못한 동생을 얻은 바람에 고생이 심한 유벨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띈 채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과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담긴 그림에 눈이 갔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림을 곁눈질했다.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내가 언제부터 저렇게 웃었던 거지? 갑자기 생각하기 싫은 일이 떠올랐다.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허공을 맴돌며 이리저리 날렸다. 그리고 순간 테라스로 통하는 유리창이 와장창 하고 깨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박살이 난 테라스 유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너 때문이야, 미레이유. 너 때문에 내가 망가진 거야. 널 증오해. 난 '너 없이' 행복해 질 거야. 행복해 지고 말 거야. 보란 듯이 행복해 지고 말거야."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꾹 쥐고 가만히 테라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을 들어 깨어진 유리쪽으로 내렸다. 곧 이어 날카로운 선율의 노래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유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한 곳으로 모아졌다. 환한 빛이 쏟아지며 유리는 한 덩어리로 녹아들었다. 그 때 벌컥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어어? 뭐 하는 거예요?" 쥬느비에브는 침대에서 뒹굴다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달려왔다.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드리안." 순간 쥬느비에브는 테라스 문 쪽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유리 조각을 보며 인상을 썼다. 유리창이 깨졌나본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그는 계속 노래를 중얼거리며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이리로 와요. 유리 깨진 거 위험하단 말이야." 쥬느비에브의 말에도 에이드리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방안을 매웠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쥬느비에브가 다시 말을 하려는 순간, 에이드리안이 가만히 뒤돌아 섰다. 그리고 활짝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쿡. 뭐야, 내가 어린 앤줄 알아? 그 정도 조심성은 있어. 자아- 이건 선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왠지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이 건네준 것을 받아든 순간 쥬느비에브는 휘청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빛을 내며 건네준 것은 커다란 유리 공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유리 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걸 어디다 쓰라구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썼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심심해서 만들어 본 건데...마음에 안 들어? 그럼 이건 어때?" 순간 가느다란 노래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은 에이드리안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짜르르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밑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유리공이 반짝거리더니 한순간에 무너지듯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그리고 작은 유리 구슬로 변해 바닥에 돌돌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야아- 유리 구슬이다! 예쁘다! 꼬마 에드도 좋아하겠다." 쥬느비에브는 구슬 하나를 손에 들어 불빛에 비춰보며 방긋 미소지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투명한 구슬이 너무 예뻤다.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굴러 다니는 구슬을 열심히 한 쪽으로 모으다 문득 서재 한 구석에 있는 그와 자신의 그림을 발견하고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 저기 저 그림 말이에요." "응." 에이드리안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자리에 앉아 구슬을 모으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도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기 저 그림 속의 에이드리안, 정말 행복해 보여요." "........."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구슬을 모아 치마폭에 담으며 계속 말했다. "나,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거 맞죠? 나, 우리가 했던 약속 분명히 지키고 있는 거 맞죠?" 쥬느비에브는 말을 마치고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어두워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구슬을 모으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미소와 함께 눈을 떴다. "응. 네가 있어서 많이 행복해." 쥬느비에브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구슬을 모아 치마폭으로 가져갔다. "난 에이드리안이랑 저 그림에서처럼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어.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을 거야. 에이드리안 곁에 꼭 붙어서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나, 그래도 되요?"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차갑도록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래, 그래도 돼. 그건...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해. 그런데..." "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헤실헤실 웃으며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실룩이더니 싱긋 웃으며 장난스레 쥬느비에브의 머리에 콩 하고 알밤을 주었다. "너어- 지금 벌써 나 바람 필 거 걱정하고 있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인기가 많아서 레이디들이 날 안 놔줄지도 몰라." "에에? 뭐라고요? 안 돼욧! 난 바람 피는 건 절대 못 참아욧!" 에이드리안은 투다닥 달려드는 쥬느비에브를 이리저리 피하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달 가장자리에 머물고 있던 구름이 움직여 가 훨씬 환해진 방 안에서 오래도록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의 티격태격 싸움이 계속되었다.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달을 쳐다보았다. "달은...그 때도, 지금도 빛나고 있지만 여기 있는 나와 거기 있는 나는 달라. 난 지금 행복하고, 그 행복을 놓칠 생각은 전혀 없어. 쥬르, 네가 달아나려고 하면 내가 놓지 않을 거야. 왜냐면..." ******** 유벨과 차를 마시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러운 기분이 들어 옆에 걸어가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았다. "쥬르, 나 네가 듣고 싶어했던 말, 뭔지 알겠어." "에에? 정말? 그럼 말해 줄 거예요?" 쥬느비에브는 그의 말에 화사하게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계단 중간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조마조마한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말은 하지 않고 그저 파란색 눈동자를 장난스레 빛내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결국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쓰고 말았다. "에이, 빨리 해 줘요. 에?" 쥬느비에브는 갑작스러운 에이드리안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다가와 입술에 쪽 하고 키스를 하고 도망갔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당황스럽고 놀라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빨갛게 물들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내 쥬느비에브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에이, 비겁해! 에이드리안, 같이 가요!"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계단을 내려가자 쥬느비에브는 빨갛게 달궈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쿵쿵거리며 뒤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에이드리안이 응접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현관을 거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썼다. "유벨 오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에이드리안, 또 유벨 오빠를 괴롭히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불끈 쥐고 에이드리안을 따라 밖으로 달려갔다. 불쌍한 유벨을 위해 에이드리안을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었다. ******** 예상외로 에이드리안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숨을 쌕쌕거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서서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늦은 가을 바람에 그의 금발이 부드럽게 날리고 있었다. "난 달빛이 좋아. 몹시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따뜻하거든. 따뜻하고 포근해서 마음이 감동해 버려. 그건 마법과도 같은 감정.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마음의 편린. 아름다워.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끔씩은 내 손안에 담아두고 싶다고 느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겨우 전해질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을 들으며 까만 생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뒤돌아 섰다. "쥬르, 난 네가 원하는 말을 알고 있지만 해줄 수 없어. 해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 안 할거야." "에에? 왜요? 난 듣고 싶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심통난 얼굴로 대답했다. 알고 있다면서 안 해주겠다니 너무하잖아!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볼을 부풀렸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쿡 하고 웃기만 할 뿐 끝까지 그녀가 원하는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폭 쉬고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에이드리안, 나 그 말 꼭, 꼬옥 듣고 싶은데. 듣고 싶어요." "싫-어." 쥬느비에브의 칭얼거림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레 미소지으며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어갔다. 잠시 후, 까만 밤하늘 아래 작은 노래 소리가 퍼졌다. 에이드리안의 허밍소리에 쥬느비에브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쥔 채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이 지났다. 쥬느비에브는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뒤섞인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에이드리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계속 노래만 흥얼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그를 보채려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에이드리안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쥬르, 난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마디로 말하고 싶지는 않아."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서 다정하게 미소를 보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슴 한 구석이 콩콩 뛰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보고 있으면 아주 즐겁고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 가끔씩은 키스도 하고 싶고 어떨 때는 안아 주고 싶기도 해. 그리고 어떤 날은 아주 심통이 날 때도 있고 네가 아주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 달콤할 때도 있고 씁쓸할 때도 있어. 가끔씩은...정말 그리워지기도 해.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말끝을 흐리며 쥬느비에브의 곁으로 다가왔다. 쥬느비에브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그림자에 가려져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왜 자꾸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까. 쥬느비에브는 알 수 없는 의문점을 떠올리며 에이드리안의 눈동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에이드리안은 묘한 미소를 띄우며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쥬르는 달 같아. 내 손안에 담아 두고 싶어." 에이드리안은 속삭이듯 말을 건네고 가만히 쥬느비에브의 손을 놔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뺨을 토마토처럼 빨갛게 붉히며 에이드리안의 파란 눈동자를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등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 왠지 불공평한 기분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비겁해. 너무 비겁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해 주지 않고 에이드리안이 하고 싶은 말만 하잖아요. 정말 불공평해. 거기다 언제나 나만 당황하고, 나만 얼굴 빨개지고... 정말 불공평해."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심통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까만 생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미소를 띄웠다. "그래서...내 대답이 부족해?" 쥬느비에브는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을 확 붉혔다. 부족하냐고? 저런 대답을 듣고 어떻게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는 슬쩍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녀는 몹시 감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듣고 싶어했던 그 말을 들려주진 않았지만 에이드리안은 훨씬 감동적인 말을 주었다. 그는 언제나 곁에 있고 싶다고, 그래서 언제나 느껴보고 싶다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둔하고 바보 같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슬쩍 눈동자를 돌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아, 안 부족하니까 우리, 빨리 집에 가요. 우리 집에. 꼬마 에드도 있는 우리 집에 빨리 가요."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팔에 찰싹 감겨 오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낮에 쥬느비에브의 방에서 본 악보 책이 생각나 빙그레 미소가 흘렀다. '제목이 <사랑의 연가>였지. 사랑이라... 그런 단순한 말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어. 그건 내 마음을 아주 협소하게 나타낼 뿐이니까. 사랑하는 감정을 제외한 그 나머지 마음은 나타낼 수 없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쥬르,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해 줄 수 없어.' 에이드리안은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옆에 쥬느비에브가 있고 쥬느비에브의 곁에 자신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따뜻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미소를 건넸다. 쥬느비에브도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씨익 웃어 보였다. "에이드리안, 우리 빨리 집에 가서 모롤라 주스 마셔요. 맛난 모롤라 주스. 꼬마 에드도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럴까?"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달빛도 따뜻하고 공기도 맑았다. 그 때 문득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져 에이드리안은 눈을 돌렸다. 저 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이내 그가 자신의 사촌 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손을 들어 사촌 형을 불렀다. "유벨!" 옆에서 눈을 깜빡이며 보고 있던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유벨 오빠, 화났나 봐요. 우리가 유벨 오빠 많이 기다리게 했잖아요. 분명히 심심해서 화가 난 게 틀림없어요. 헤에-"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유벨에게 다가갔다. 유벨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굽혔다.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으며 유벨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유벨, 미안.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에이드리안." 유벨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창백한 얼굴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쥬느비에브도 뭔가 이상했던 것인지 가만히 다가와 그의 셔츠 소맷자락을 잡고 유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감싸며 유벨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일이야?" 유벨의 회색 눈동자에 초조함과 불안감이 서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내젓고 입을 열었다. "엘로이즈 누님이...죽었어." 작은 이야기 01. 어느 따뜻한 봄날... 금발의 작은 소녀가 잔뜩 인상을 쓰며 분수대 안에 있는 물고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수대에 살짝 손을 넣어 물에 파문을 일으키던 소녀는 입술을 꾸욱 다물고는 말없이 물고기를 쏘아보았다. "왜 힘이 없는 거야, 바보 물고기." "바보는 너잖아, 에이드리안." 소녀는 어느 새 다가와 힐끗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검은머리의 사촌에게 방긋 미소지었다. "에스프라드 형, 물고기가 이상해. 호수에서 잡아서 바로 물에 넣어줬는데도 힘이 없어. 이렇게 알록달록 예쁜데. 내가 싫은 걸까?" 검은머리의 사촌은 싱긋 웃으며 분수대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금발의 소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분수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사촌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분수대 안의 물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파란빛이 곳곳에 어리면서 물이 이리저리 튀겼다. 금발의 소녀는 옷에 튀긴 물을 재빨리 털어 내며 사촌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사촌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바보. 친구 물고기랑 즐겁게 잘 살고 있는 애를 데려 오면 어떻게 해? 혼자 외로워서 그러는 거잖아. 내 노래로 기분이 좀 나아졌겠지만 오래 놔두면 죽을 지도 몰라. 혼자라는 건 외로운 거라구." 금발의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분수대 안의 물고기를 쳐다보았다. 힘없이 물 속을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걸까? 혼자면 외로운 걸까? 함께 하면 괜찮은 건야? 둘이라면...행복해 질 수 있는 거야?" "둘이라면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어. 책에도 그렇게 나와있잖아. 왕자님과 공주님이 둘이서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그럼 에스프라드 형이랑 나랑 같이 있으면 행복하겠네? 훗, 그렇겠다." 소녀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분수대를 쳐다보던 소녀는 물고기를 다시 호숫가에 데려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혼자는 너무 외로우니까... 제86음(第86音) 대속성(大屬性) 레플리카(1)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창 밖을 쳐다보았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날씨 였다. 스산하게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바닥으로 흩어 놓았다. 회색 구름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방안에는 불을 켜놓아 비교적 밝았지만 밖은 한낮인데도 무척 어두웠다. 안 그래도 우울한 마음이 더욱 흐려지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커튼을 치고 방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소파 에 앉아 멍하게 벽을 응시하던 그녀는 자신의 검정색 원피스를 가만히 쳐 다보았다. 검은 색은 싫었다. 우울한 색이다. 수수한 디자인의 검정색 원 피스는 그녀가 급하게 의상실에서 맞춘 것이었다. 평소 밝은 색을 좋아하 던 그녀라 장례식에 입고 갈 어두운 색 계열의 원피스가 없었다. "싫어. 사람이 죽는 건..."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녀는 곧 비인 가의 장례식장에 참석할 참이었다. 유벨이 전해준 부고는 충격적이 었다. 얼마 전에 방문했던 온화한 검은 색 머리의 여자, 에스프라드의 누 이라고 하던 엘로이즈가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녀의 얼굴 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쉬 고 말을 하던 사람이 죽었다니. 죽어서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울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 다. 그 사람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고통은 더욱 크다. 그 것은 남겨진 자들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그녀는 너무나 사무치 게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소리 없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혼 자 죽음을 택했을 때. 곁에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그 때 그 녀는 자신의 영혼이 날아가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존재에 회의가 드는 모진 경험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에이드리안이었다. 사실 그녀는 엘로이즈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녀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달랐다. 그녀의 부고를 받은 순간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놀라움, 불안감, 공허... 그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싫어하는 에스프라드의 누이였지만 그녀의 죽음에 에이드리안은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쥬느비에브는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에게 가볼 생각이었다. 그를 혼자서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쥬느비에브는 창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희뿌연 하늘. 차가운 바람. 메마른 공기... "겨울이 시작되나 봐. 춥고 긴..." ******** "에이드리안, 준비 다 됐어요?" 쥬느비에브는 문을 열고 살짝 물음을 던졌다. 에이드리안은 아직 옷을 입고 있었다. 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타이를 매고 있는 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애써 미소를 띄우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밖에 마차가 와 있어요."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타이를 매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자꾸 매듭이 엉켰다. 쥬느비에브는 다가가 에이드리안의 손을 내리고 능숙하게 타이를 매어주었다. 에이드리안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기까지 한 그의 얼굴빛이 너무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등을 가져갔다. "에이드리안, 괜찮은 거예요?" "응... 괜찮아. 나쁠 거...없잖아." 에이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테이블로 가 은색 물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금발을 살짝 넘겨주고 손을 잡았다. "가요. 기다리겠어요." "으응."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속삭이듯 대답하고 쥬느비에브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는 무언가에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죄여왔다.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너무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안이 슬퍼하는 것은 싫었다. 자신이 겪었던 마음 아픈 일을 에이드리안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죽어 버려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아픔을 그가 마음에 새기지 말았으면 하고 그녀는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 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말없이 창 밖만을 바라보던 에이드리안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어둡고 칙칙한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이 으레 불길하다고 말하는 것이 이런 하늘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손을 뻗어 머리에 매고 있던 까만 리본을 단정하게 다듬고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그는 무표정하게 하인에게 장갑을 받아 손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그에게 뒤쳐질 세라 그의 눈치를 보며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지금까지 저렇게 어두운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계속 발을 놀렸다. 사람들이 엘로이즈의 묘지 앞에 모여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각보다 적은 사람들이 있어 적지 않게 놀랐다.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 후보자로서 엘로이즈의 입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평의회 의장인데다가 동생은 수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여있는 사람은 비인 가의 중요 인사들과 대귀족 가문의 몇몇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검은 옷차림이 어색하고 싫게 느껴졌다. 검은 색은 우울하고 슬픈 색이다. 쥬느비에브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발견하고 눈인사를 건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쥬느비에브의 인사에 살짝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꽤 덤덤한 모습이었다. 평소에 유달리 에스프라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인지라 엘로이즈의 죽음에도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유벨의 모습도 보였다. 유벨은 정말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에스프라드의 누이지만 같은 대속성 레플리카의 일원으로서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프란체스의 모습도 보였다. 전에 봤던 공작새 머리가 아니라 단정한 회색 머리의 그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엄숙해 보여 쥬느비에브는 감히 인사를 건넬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을 대충 확인한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순간 눈을 찌푸렸다. 에이드리안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인지 쥬느비에브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걱정스러운 자신의 표정을 본 것인지 애써 미소를 보여주었다. "괜찮아, 쥬르. 걱정하지 마." 그러나 여전히 에이드리안의 얼굴에서는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무언가 더 위로의 말을 건네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는 비인 가의 어른 한 분이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엘로이즈 르미엔 로르 비인이 우리 곁을 떠나가니 부디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 축복 받은 삶으로 돌아오기를...빛과 어둠, 물과 바람, 대지와 불의 축복을..." 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무서울 정도의 침묵만이 감돌았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무서웠다. 손을 뻗어 에이드리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슨 생각에 사로잡혔는지 그녀가 그의 옷깃을 잡은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늘이 져서 파랗다 못해 숨막히도록 어두웠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말았다. 공기가 차갑고 음습했다. 숨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왜 나오시지 않은 걸까. 알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눈을 뜨다 문득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다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남자였다. 인상 착의로 보아 언뜻 들었던 평의회장, 헤르만 마리에 로르 비인 씨인 것 같았다. 아르헨에서는 최고의 실권을 가진 남자이다. 평상시였다면 약간 거만해 보일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엘로이즈의 아버지다. 딸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나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럼 에스프라드 님도 여기에 계실까. 쥬느비에브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에스프라드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까만 정장 차림의 그는 평상시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전해져 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기도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장송곡을 부르는 차례가 왔다. 쥬느비에브는 숨을 죽였다. 공기가 너무 무거웠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 에스프라드가 입을 열었다. [ 당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당신을 기억한다는 것. 당신이 내게 준 그 한 마디는 내 마음에 살아서 당신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에 살아서... ] 멍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던 에스프라드는 노래를 끝마치지 못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프란체스를 쳐다보았다. 프란체스는 에스프라드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바람이 부네요 싸늘한 눈의 결정을 뚫고 새로운 생명이 피어오르듯 바람이 부네요 그대가 날 떠나갈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요 그 의미 없는 시간 속에 내 심장은 멈춰버렸죠 따스한 봄의 바람도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없겠죠 내 심장은 이미 그대로 인해 투명한 유리처럼 깨졌으니. 바람이 부네요 뜨거운 햇살을 뚫고 세상에 풍요로운 색채를 더해 가듯 바람이 부네요 그대가 이미 날 떠나버린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죠 그 의미 없는 시간 속에 난 마음을 읽어버렸죠 상쾌한 가을의 바람도 내 마음을 찾을 수 없겠죠 내 마음은 그대로 인해 깨진 유리조각처럼 버려졌으니. 바람이 부네요 바람의 풍경 속에 나 홀로 서있네요…… ] 쥬느비에브는 프란체스의 간절한 목소리의 노래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프란체스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였다. 그는 엘로이즈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사랑하는 자만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레플리카. 엘로이즈에게도 전해질 수 있을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그 때 헤르만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네가 죽다니! 어흐흑. 어어흐흐흐흑..." 헤르만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북받쳐 오던 슬픔이 기어코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모두 동정심에 찬 눈빛이었다. 평상시 거만하고 의젓한 평의회장의 모습은 간데 없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모습만이 남은 그의 모습은 충분히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 만 했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주먹을 쥐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이드..." "하! 보기 좋군! 아주 가관입니다, 헤르만 숙부! 보기 싫으니 당장 그따위 모습은 떼려 치워요. 당신에게는 울 자격 따위 없으니까! 어때요, 당해 보니까 알겠죠. 그런 멍청한 얼굴 하지 말란 말입니다! 당신은..." 에이드리안이 달려들 듯 헤르만에게 폭언을 퍼붓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입을 벌리고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선은 그를 말려야 했다. "에이드리안, 그러면 안 돼요. 에이드..." "에드! 그만 해!" 어느 새 유벨도 다가와 에이드리안을 다잡고 있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옮겨 다가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드리안이 이러는 것은 옳지 않았다. 헤르만은 분명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이러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되었건 너무 잔인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의 울부짖는 듯한 폭언은 계속 되었다. "당신이 엘로이즈 누님을 죽인 거야. 당신이 모든 걸 부셔버렸어. 당신이! 꼴 좋군! 꼴 좋아! 그렇게 울지 말고 당신도 같이 죽어버리지. 당신도 죽어버렸어야 했어! 당신의 죗값을 엘로이즈 누님이 받은 거야. 나도, 그녀도 당신이 죽였어. 이젠 엘로이즈 누님마저 죽였군 그래. 하! 다음엔 누구지? 다음 번엔 누구야!" 핏발 서린 에이드리안의 눈동자가 너무 무서웠다. 이런 그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분노 어린 모습이 너무 싫었다. 너무 무섭고 아프고 슬펐다.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들렸다. 모두 놀란 얼굴로 에이드리안과 헤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프란체스와 에스프라드만이 비교적 평상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벨은 몸부림치는 에이드리안을 막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케이로프도 어느 새 달려와 에이드리안을 말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는 미라벨을 흘깃 쳐다보고 다시 에이드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가쁜 숨을 고르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 때 멍하니 에이드리안의 폭언을 듣고 있던 헤르만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거센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놈이... 네 놈이!! 네 놈이 내 집에 왔을 때부터 불길했었다. 모두 네 놈 탓이야, 누구에게 감히..." "아버지!!" 헤르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에스프라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 서운 표정의 에스프라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험한 소리 듣기 전에 들어가세요. 아버지." "에스프라드... 난..."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에스프라드의 냉랭한 말에 헤르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힘없이 걸음을 옮겼 다. 수행원들이 그를 부축했으나 그는 한 순간에 10년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자꾸만 무서워지는 분위기에 울먹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풀려버린 파란 눈동자로 앞을 응 시하다 그대로 쓰러졌다. "에이드리안!" "에드!" 유벨과 케이로프가 즉시 에이드리안을 부축했다. 쥬느비에브는 그런 모습 을 보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무서웠다. 마치 죽일 듯이 고 함을 지르는 에이드리안의 모습과 창백한 표정의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그곳만 죽어버린 듯한 묘지와 묘비. 너무 무서워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 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건 정말 싫었다. 제87음(第87音) 대속성(大屬性) 레플리카(2)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침대에 누워 유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날 즈음 쓰러진 그는 만 하루를 침대에서 보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쥬느비에브의 모습이었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보기 싫었다. 그래서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놀라고 마음 아파하는 표정이 너무 싫었을 뿐이었다. 쥬느비에브가 안타까운 얼굴로 방에서 나가자 곧이어 유벨이 들어왔다. 그리고 주욱 설교를 늘어놓고 있었다. "에드, 너 정신 있어?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아무리 그래도 평의회 의장이야. 자식 죽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심한 말을 퍼부어 대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적어도 예의를 지켜야..." "닥쳐. 시끄러워." 에이드리안은 침대에 앉아 몸을 웅크리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유벨은 놀라고 당황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드. 난 히스페르 숙부 앞에서 맹세했어. 널 지켜주기로. 그건 내 풍속성 레플리카를 걸고 맹세한 거야. 그러니까 난 네가 이런 모습 하는 거 절대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난..." "어쩌라는 거야? 내가 가서 사과라도 할까? 그럼 되겠어?" 에이드리안은 눈을 돌려 유벨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에게 틀린 말을 했나? 그가 내게 어떻게 했는데... 아니면 너도 얘기하고 싶은 거야? 엘로이즈 누님을 죽인 건 다름 아닌 나라고!" "에드! 정신 차려! 넌..." 유벨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가 맥없이 흔들리며 금발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어두운 파란색 눈동자로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벨, 넌 몰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넌 몰라. 그러니까 난 계속 연극을 할거야. 옳은 건 나고 그른 건 헤르만 숙부야. 쿡쿡쿡..." "에드..." 유벨은 점점 히스테릭해지는 에이드리안을 허탈하게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쿡쿡 웃음을 삼키며 파란 눈동자를 유벨에게 올렸다. "그래. 옳은 건 나지. 그리고 넌 나를 계속 믿어 줘야 해. 넌 진짜 내 모습을 모르니까. 쿡쿡." 에이드리안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멍하니 파란색 눈동자를 창 밖에 고정시켰다. "알고 있었어. 엘로이즈 누님이 저주받았다는 걸. 그런데 아무 것도 못 했지. 아니, 하지 않았어. 난 누님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내게 준 상처만큼 되돌려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래, 어쩌면 엘로이즈 누님을 죽인 건 나일지도 몰라. 정말 추악해. 더럽고 잔인해. 누구도 몰라. 나의 진짜 모습을...아니, 아는 사람이 있군. 그래, 내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 있어. 아직 살아서 지금도 날 저주하고 있겠지. 쿡쿡. 아하하하하하하하-" 에이드리안은 이불로 얼굴을 감싸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유벨은 창백하게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불안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3년 전 그 사건이 있었던 직후의 그의 모습이 되살아 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벨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유벨은 그 악몽 같았던 날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냉랭한 눈빛에 그의 방을 나와 응접실에 나와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차갑고 시린 눈빛이 자꾸만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와 그녀는 지금 비인 가의 에이드리안 소유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유벨과 케이로프, 미라벨도 이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유벨에게도 저택이 있었지만 에이드리안의 상태가 나빠 계속 이곳에 있었다. 부모님도 만나지 않고 계속 에이드리안의 곁을 지켜준 그가 몹시 고마웠다. 다행히 에이드리안은 깨어났지만 쥬느비에브는 몹시 우울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 곳에 온 뒤로 자꾸 무섭고 슬픈 일만 있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자신을 쳐다보았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느낌의 목소리.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응접실을 서성이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 아버지!" 검은 색 코트 차림의 에슈비츠 공작이 서 있었다. 자주 만나지 못해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쥬느비에브는 놀랄 겨를이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곧장 달려가 공작의 품에 안겼다. "쥬느비에브, 그 동안 잘 있었느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냈다. 계속 우울한 일만 있었는데 아버지를 만나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장례식장에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에슈비츠 가를 대표해 자신이 대신 참석한 것이었기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에슈비츠 공작은 시간을 내어 뒤늦게 비인 가를 방문한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그에게 말했다. "아, 아버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쥬느비에브는 아직까지는 다소 어색한 '아버지'란 단어를 용기를 내어 사용했다. 에슈비츠 공작은 '아버지'란 단어를 아주 감동적인 표정을 지으며 귀담아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그를 소파로 데려갔다. "좀 더 자주 가고 싶은데 이상하게 시간이 모자라서...하루하루가 쑥쑥 지나가 버리거든요." "그건 네가 행복하다는 증거지. 반가운 일이구나." 에슈비츠 공작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인자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웃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참 좋았다. 지금까지의 우울한 기분이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방긋 웃으며 물었다. "바, 바쁘지 않으세요? 언제나 바쁘셨잖아요." "내 딸아이의 얼굴도 못 보고 갈 수야 없지. 엘로이즈 양의 죽음은 안되었다만..." 에슈비츠 공작은 엘로이즈의 죽음이라는 말에 순간 흐려지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애써 밝은 표정을 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장례식장에서의 얘기는 들었다. 에이드리안 군은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헤르만 평의회장과는 원래 사이가 좋지 못해서..." "에이드리안은 괜찮아요. 아까 깨어났거든요. 하지만 아직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봐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밝게 만들고 공작에게 빙긋 미소지어 주었다. "에이드리안은 더위랑 추위에 엄청 약하거든요. 오늘 아침에 좀 추웠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어요. 나, 에이드리안 화났을 때, 잘 달랠 자신 있거든요. 걱정 없어요."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네가 행복해야지 엘을 볼 면목이 있다. 그리고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단다. 그리고 그도..." 에슈비츠 공작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말대로 난 늘 바쁘구나. 이렇게 하는 일도 없이 바쁘니 딸아이에게 미움을 받겠어. 허허." "아, 안 미워해요. 오늘도 일부러 여기까지 와 주셨잖아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씨익 미소지었다. 그리고 공작의 뒤를 따라나갔다. 복도에 대여섯 명의 수행원이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수행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웃어주었다. 수행원들은 쥬느비에브의 인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결국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공작과 함께 현관 밖으로 나갔다.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제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어느 새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를 우울하게 쳐다보다 이내 웃는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짙은 고동색의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마차가 집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공작은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다가와 가만히 포옹했다. "가까이에 없더라도 언제나 널 지켜보고 있단다. 부디 행복 하려무나." "아, 아버지도 많이 행복하셔야 해요. 다음 번엔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본가에 가 뵐게요. 선물도 많이 사 가지고." 쥬느비에브는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빙긋이 미소지었다. 포옹을 풀고 마차에 올라타는 에슈비츠 공작의 모습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에슈비츠 공작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에슈비츠 공작은 마차에 타고는 창을 열어 쥬느비에브를 바라 보았다. "쥬느비에브.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렴.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 쥬느비에브는 공작의 말에 더욱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였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쥬느비에브는 떠나는 마차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쥬느비에브는 밖에 서 있었다. 바람이 무척 쌀쌀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따뜻한 감동에 젖어 있었다. 이미 예전에 잃어버렸던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는 근사한 가족이 생겼다. 그녀는 뒤늦게 사랑 받고 있는 자신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에슈비츠 공작에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가족...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하늘은 흐리고 음침한 날씨를 고수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손바닥으로 뺨을 톡톡 쳤다. 그리고 결심한 듯 불끈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또 다른 가족에게 가볼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에슈비츠 공작의 방문으로 용기가 생긴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를 웃게 만들고 싶었다. 욕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행복해 지고 싶었다. ******** 을씨년스러운 하늘을 뒤로 한 채 에스프라드는 자신의 저택에 있는 서재 앞에 서 있었다. 냉랭한 표정으로 그는 방문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는 결심한 듯 문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육중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코를 자극하는 독한 술 냄새에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르만이 먼저 그를 발견했다. "에스프라드. 엘로이즈가 죽었다. 이젠 너 밖에 없어...너 밖에 없다..." 헤르만은 아직 술에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음 속에 커다란 짐이 있으면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법이다. 그 마음 속의 무거운 짐에 정신이 눌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에스프라드는 그에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헤르만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에스프라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말이 맞아요. 아버지가 누님을 죽였어." 냉랭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헤르만은 퀭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프라드.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너희들을 위해..." "아버지 자신을 위해서였지요. 우린 아버지 때문에 모든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누님은 아버지의 죗값을 대신 받은 거야. 그 때는 행복 했었는데. 그 때는 행복했었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모두 망가뜨려 버렸어." 에스프라드는 조용하게 그러나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헤르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너희들을 사랑했다. 르미엔을 잃고 내겐 너희들밖에..." 에스프라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띄웠다. "난 아버지를 용서 할 수가 없어요. 내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어. 그래서 난 내 손으로 행복을 거머쥐기로 마음먹었어요.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가지 말아요. 그에게 손대면 가만있지 않겠어. 또 한 번 그 때처럼 그에게 손을 댄다면...그 땐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나마 평의회 의장이라는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 신중하게 행동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에스프라드는 말을 내뱉고 바로 뒤돌아 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서재를 벗어나 방문을 닫자 헤르만의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스프라드는 귀를 막았다. 언제나 냉정하고 근엄했던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저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울고 있다. 에스프라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눈을 감았다. 사랑했던 누이는 이제 없다. 슬슬 끝을 낼 때가 다가온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띄고 복도로 걸어갔다. 얼마가지 않아 복도 한 쪽의 구석진 방의 문 앞에 선 에스프라드는 차갑게 미소를 띄우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차갑고 스산한 공기에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희뿌연 달이 걸려있었다. "에이드리안이...지금 본가에 있어요. 미레이유 누님." 어둠 속에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에스프라드는 피식 웃으며 창틀에 몸을 기대어 뒤돌아 섰다. "엘로이즈 누님이 죽었어요. 아시나요?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끼리 좀 통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침대 위에 조용히 침묵이 흘렀다. 휘장으로 어둡게 가려진 침대를 응시하며 에스프라드는 미소를 띄웠다. "곧 에이드리안을 만나게 될 거예요. 3년만의...만남이 되겠군요. 쿡. 그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쿡쿡쿡." 에스프라드는 웃음을 삼키다 갑자기 무표정하게 창 밖을 곁눈질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요. 내가 한 짓과 당신이 한 짓, 그리고 그가 한 짓.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난 내 뜻대로 할거야. 당신이 뭐라 그래도.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단 하나뿐인 소망을 이루게 될 거야.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 그 날, 파란 눈동자를 동경하게 된 그 날. 모든 게 잘못된 거였어. 그리고 당신의 존재도." 여전히 침대 위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에스프라드는 살짝 미소를 띄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문까지 걸어가다 멈춰서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미레이유 누님. 에이드리안을 만나려면 조금...기다려야 할겁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처리할 일이 있거든요. 나머지 카드 패를 쓰고 난 다음에 미레이유란 카드 패를 쓸 거에요. 결정적으로." 그는 속삭이듯 말을 건네고 천천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방안에 가느다란 레플리카가 퍼졌다. [에이드리안... 안 돼! 안 돼! ] 제88음(第88音) 대속성(大屬性) 레플리카(3) 엘로이즈의 장례식이 끝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프란체스는 멍하게 엘로이즈의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었던 그녀가 차갑게 식어 땅 속에 있다. 자신을 땅 속 깊이 묻어달라는 것이 엘로이즈의 유언이었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머리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 프란체스, 나 말이야...나... 내가 죽거든 꼭 땅 속 깊이깊이 묻어 줘. 그러면 죽어서도 당신과 같이 있는 느낌이 들 것 같아. 당신과 함께라면 난 죽어도 죽지 않은 거지. 응? 프란체스. ] 눈이 아파 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이 아팠다. 프란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내렸다. 그 때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 섰다. 자신의 동생, 유벨이었다. "유벨, 에이드리안은 괜찮아?" "형 생각이나 해." 유벨은 심드렁한 얼굴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탁탁 쳤다. 위로의 뜻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유벨은 엘로이즈의 묘지 앞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에드 녀석, 아무래도 단단히 충격을 받았나 봐. 정말 어리광쟁이라니까. 형도 이렇게 멀쩡한데. 형은... 괜찮아?" 유벨은 자신과 많이 닮은 형의 모습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프란체스는 빙긋이 웃으며 회색 눈동자를 하늘로 돌렸다. "괜찮지. 이미 여러 번 연습해 온 일인걸. 엘로이즈가 저주받았다는 건...알고 있었으니까." "형..." "괜찮아. 사랑 받고 사랑했어. 그녀의 마지막 모습도 보았으니 더 이상 마음에 남는 것도 없지. 다만 미안할 따름이야. 에이드리안에게, 그리고 에스프라드에게. 우리가 막았어야 했는데. 우리 두 사람이..." 프란체스는 안타깝고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내리고 동생에게 미소지어 주었다. "유벨, 내가 없더라도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형, 무슨 말이야? 어디 떠나기라도..." 유벨은 프란체스의 말에 당황하여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프란체스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는 회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나, 나무 한 그루 심을 생각이야, 여기다가. 나무가 무럭무럭 자랄 테지. 엘로이즈가 나무가 될 테니까. 그녀의 마지막 소망을 내가 들어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도, 그녀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형..." 유벨은 안타까운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누구보다 허탈하고 슬플 그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미소를 띄고 있었다. 프란체스의 따뜻한 미소가 유벨에게는 너무나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유벨은 마음 속으로 빌었다. 형이 제발 행복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프란체스는 그의 바램을 아는 것인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벨, 나와 엘로이즈가 못한 만큼 에이드리안을 보살펴 줘야 한다. 에이드리안에게 꼭 행복해지라고 말해 줘. 그리고 에스프라드에게도." 프란체스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유벨은 왠지 그 뒷모습이 쓸쓸하고 안타까워 보여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비인 가에 태어난 것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비인 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슬픔을 이토록 가슴 사무치게 느껴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그날 프란체스의 뒷모습을 유벨은 형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해야 했다. ******** "나...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야." 에이드리안은 며칠째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일체 허락하지 않고 그저 누워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와 유벨, 그리고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수시로 방문을 요청했지만 수행원들에게 말해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한 참이었다. 온몸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느낌이었다. 신경이 곤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서워졌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에이드리안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신음소리를 흘렸다. "미안해요, 엘로이즈 누나. 미안해..." 무서웠다.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자신이 저질러 버린 잔인한 짓.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온갖 생각들이 몰려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엘로이즈의 죽음은 그의 정신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 언제나 자신에게 자상했던 누이였다. 상냥하고 다정했던 누이. 그 때는 행복했었다. "그 때는 행복했었는데... 돌아가고 싶어.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에이드리안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을 다시 베개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어디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들이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몸을 돌려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장의 무늬가 어지럽게 느껴졌다. 목이 메어왔다. "엘로이즈 누나. 미안해. 미안..."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엘로이즈의 마지막 말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 에이드리안, 아마,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지. 아마 내 생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다, 그리고 부디 행복해지렴. ] 그 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신의 용기를 내어 그에게 온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매정하게 그녀를 뿌리쳤다. 그것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될 것인지 잘 알면서 그는 그녀를 뿌리쳐 버렸다. 얼마나 잔혹한가.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온 순간까지 자신의 행복을 빌던 누이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그녀를 밀어내 버렸다.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어린 시절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누이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프란체스가 찾아온 날,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알량한 마음 때문에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정말로 나쁜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알면서도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던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더러워. 추잡스러워. 죽어버렸어야 할 사람은 나야. 그래, 내가 죽어버렸어야..." 에이드리안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온몸에 한기가 돌고 있었다.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덜덜 몸이 떨려왔다. "안 돼. 생각하면 안 돼. 그런 생각하면 안 돼. 쥬르가...있는데..."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원치 않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에이드리안은 가까스로 입을 벌려 소리를 질렀다. "유, 유벨! 유베엘!!" 그와 동시에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머리 속이 마비되어 간다.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방안에 레플리카가 쏟아졌다. 음침하고 어두운 노랫소리가 가느다랗게 방안을 메워갔다. 그 때 문 쪽에서 탕탕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가까스로 눈을 뜨고 희미한 시야를 확보하며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내 문이 와지끈 하고 소리를 내더니 벌컥 열리고 놀란 표정의 유벨이 달려왔다. "에드! 에드! 정신차려. 에드!"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자신의 의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레플리카가 계속 입에서 흘러나왔다. "에드! 생각하지 마. 죽는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마. 레플리카 쓰지 말라구! 쥬느비에브가 있잖아!" 유벨은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지르고는 짧고 강한 레플리카를 방출했다. 순간 하얀빛이 터지듯 흩어지면서 그 충격에 에이드리안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한참이 흘렀다. 유벨은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학생회의 밀린 업무와 집안 일 때문에 결국 아쉬워하면서 돌아갔다. 에이드리안의 자고 있는 얼굴을 걱정스레 살피던 그들은 유벨에게 믿는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들의 몫을 하기 위해 떠났다. 안느마리는 평민 출신이기에 엘로이즈의 장례식 참석이 허가되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혼자 스콜라를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유벨은 침대 가로 걸어가 얇은 휘장을 걷어냈다. 에이드리안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은 그렇게 행복했었는데 에이드리안은 어느새 커다란 마음의 짐을 떠 안고 말았다. 그것은 모두 헤르만 부자 때문이다. 유벨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헤르만 숙부가 야속하고 미웠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이제 그만 마음을 편히 놓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원했다. 레플리카는 자신의 소망을 현실로 이루어주는 힘이다. 그래서 혹여라도 약한 마음을 먹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힘으로 반영된다. 특히 마음이 고통스럽고 긴장감에 차 있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에이드리안은 3년 전에도 레플리카로 거의 죽을 뻔했었다. 자신의 진정한 의지가 아니어도 그 마음이 강하면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유벨이 한창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에이드리안이 뒤척이더니 가만히 눈을 떴다. 유벨은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에드, 정신 들었어?" "유벨? 아아- 머리가..." 에이드리안은 아직 머리가 멍한지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눈을 크게 뜨고 유벨을 쳐다보았다. "유벨, 나 또..." "그래, 이 녀석. 극도로 긴장된 생각을 하게 되면 가끔씩 레플리카가 제어 되지 않잖아. 너도 조심해. 난 네가 자살하는 거 따위 절대 못 봐." 유벨은 팔짱을 끼고 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정말이지 마음 약한 사촌 동생 때문에 때때로 그는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맛본다. 에이드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띄며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나야말로 꼴 좋군. 하지만 내가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헤르만 숙부는 좋아 할 텐데..." "에드!" 유벨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에이드리안은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어두운 표정으로 유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유벨, 쥬르에게 이야기 해. 비인 가의 저주를. 그리고 우리도 저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이야기 해줘. 난 못하겠으니까 네가 해줘." "뭐...뭐라고?" 유벨은 한 순간 너무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잔인한 일 인줄 알아. 나도 많이 생각한 거야. 많이 망설여지지만 그렇게 결정했어. 그녀도 알 권리가 있고 선택할 권리가 있어. 그녀가 그것 때문에 날 떠나도 받아들이겠어. 그러니 내 말 들어줘." 유벨은 인상을 쓰며 에이드리안을 살폈다. 그가 이불 아래로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도 참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유벨은 알 수 있었다. 유벨은 가만히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드, 난 언제나 네 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벨은 다시 몸을 일으켜 씨익 웃어주며 밖으로 나갔다.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이불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 "안녕, 쥬느비에브." 유벨은 가까스로 쥬느비에브를 찾아내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방 테라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팔에는 하얀 강아지를 꼬옥 껴안고 있었다. "유, 유벨 오빠. 에이드리안은 아직도 내 얼굴 안 보겠대요?" 유벨은 측은하게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며칠째 에이드리안에게 거부당한 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정말 좋아한다. 옆에서 지켜본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을 옆에서 지켜줄 것 같았다. 유벨은 킁 하고 코를 푸는 쥬느비에브에게 웃어주며 테라스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쥬느비에브, 할 말이 있어. 에이드리안이 부탁한 거야." "에, 에이드리안이요?" 쥬느비에브는 뭉실뭉실거리는 꼬마 에드를 품에 안고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유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방실방실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맞은 편에 자리잡은 유벨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조금...어두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두운 이야기요?" 한순간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아요. 에이드리안이 얘기한 거라면 다 괜찮아요." 유벨은 잠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엘로이즈 누님은...평범하게 죽은 게 아니야. 엘로이즈 누님이 죽은 건...비인 가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지." 유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보였다. "저...주?" "비인 가의 몇몇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지. 비인 가의 선조인 마녀, 로스페니르가 자신의 자손에게 저주를 퍼부었지. 그녀는 대자연에게 소원을 빌었어.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에게 저주를 내렸던 거야. 로스페니르의 힘, 다시 말해 대자연의 여섯 속성을 포함하고 있는 대속성 레플리카는 저주가 깃들인 힘이야. 어떤 힘보다 강력하지만 거기엔 대가가 있지.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힘을 이어받은 대속성 레플리카 중 단 한 사람 만이 저주를 받게 되었어. 그녀의 모성애가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를 지켜 준 것인지도 몰라. 대대로 저주를 받는 자는 단 한 명. 그러나 그 속성이 어떤 속성이 될지는 아무도 몰라." 유벨은 고개를 숙이고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말을 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당혹스러웠다. 유벨이 난데없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주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무서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역겹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유벨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래. 단 한 사람만이 저주를 받게 되지. '비인 가의 저주' 혹은 '로스페니르의 저주'... 비인 가에 대대로 유전되어 오는 유전병이야. 저주를 받은 자는 거의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저주받은 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대. 그냥 문득 깨닫게 된다더군. 그리고 예정된 때에 죽게 되는 거야. 시력을 잃고, 청력을 잃고..서서히 능력을 하나씩 잃어가다 결국은 죽는 거지. 엘로이즈 누님처럼 아무런 징조도 없다가 갑자기 급사하기도 해." "유벨 오빠, 저주라니... 유전병이라고요? 그런 일이... 엘로이즈란 분도 갑자기 죽었다더니..." 쥬느비에브는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벨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인 가에만 내려오는 저주 혹은 유전병. 에이드리안은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유벨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잔인한 유전병이지. 반드시 죽음과 직결되는 유전병. 자신의 생명을 담보 삼아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거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어릴 때 알게 된대. 본능과도 같이 자신이 언제쯤 죽을지 어렴풋이 알게 되는 거지. 저주받은 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고통과 싸워야 하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죽음.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은 얼마 되지 않아." 유벨은 말을 끊고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섯 명의 대속성 레플리카는 괴로워할 수밖에 없어. 저주받은 자는 자신의 운명에 절망스러워 하지.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들이 아르헨의 최고 실권을 위해 다툼을 벌일 때 자신은 제대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어.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신의 얼마 되지 않은 생에 조심스러워 하며 모습을 숨겨야 하지. 그리고 나머지 네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 하지. 자신은 저주를 피했다는 안도감과 저주받은 자의 생을 먹고사는 것에 대한 혐오감...그 사이의 괴리감. 그건 실로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감정이야." 유벨은 눈을 감았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도 얼마나 놀랐던가. 천천히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이 중 누가 가혹한 운명의 대상자가 될는지... 그 당시에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로이즈가 죽은 지금, 유벨은 자신도 저주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혐오스러운 건 비인 가문이야. 가문의 안위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고 있으니까. 비인 가문은 아르헨의 최고 실권을 쥐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고 있어. 평의회 의장 후보는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들 중에서 뽑히지. 때문에 비인 가문은 로스페니르의 저주를 숨겼어. 작은 트집도 허용치 않으려는 것이지.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들에게 결점이 있다면 다른 대귀족 가문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특권 중의 특권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야. 때문에 저주받은 자의 죽음은 언제나 드러내지 않아. 사고사로 위장을 하던지 병사로 처리하던지... 그리고..." 유벨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유벨은 주먹을 다부지고 쥬느비에브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아버지, 히스페르 숙부도 저주받은 자였어. 평생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사셨어." "에, 에이드리안의 파파도?"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몸이 떨려왔다. 어둡고 기분 나쁜 기운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믿을 수 없어 계속 눈을 깜빡였다. 품에 안겨 있는 강아지도 그녀의 기분을 아는 것인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벨은 견디기 힘든 듯 침을 삼켰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워졌다. 죽음이라는 것은 정말 싫은 단어였다. 유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주받은 자는 한 대(代)에 한 명. 다음 대에서는 이미 엘로이즈 누님이 죽었고, 우리 윗대에도 저주받은 자가 나왔어. 그런데...아직 우리 대에서는 그게 나오지 않았어." 쥬느비에브는 입을 뻐끔하게 벌렸다. 유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쥬느비에브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그러면...에이드리안이나 유벨 오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 거예요?" 유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고개를 내렸다. 그 모습이 몹시 참담해 보여 유벨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쥬느비에브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만약 에이드리안이 저주받은 자라면 쥬느비에브로서는 견디기 힘들 것이 자명했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그것은 본인도 본인이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자의 피를 말리는 시간이다. 그것을 그는 자신의 형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 하루 죽어나가는 그 고통... 저주를 받지 않아도 고통은 계속된다. 그 저주받은 피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불안감. 지독하리 만치 잔인한 일이다. 저주를 받아도, 받지 않아도 대속성 레플리카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속박과 억압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다. 유벨은 축 처진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제89음(第89音) 대속성(大屬性) 레플리카(4)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의자에 앉아 테라스 밖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째 계속 날씨가 어두웠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는 강아지를 더욱 꼭 껴안았다. 추웠다. 이상하게 몸에 한기가 돌았다. 바람이 쌀쌀해서 그런지 아니면 마음이 추워서인지는 몰랐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아버지의 초상화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는 그저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로스페니르의 저주를 받은 자였다. 얼마나 아프고 슬펐을까. 자신의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두고 가야하는 마음이 얼마나 참혹할까. 엘로이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급사라니... 잠을 자다가 죽어버린다거나 하면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우울한 일이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의 체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꼬마 에드, 난 꼬마 에드가 아프기만 해도 많이 슬픈데...사람이 죽는다는 건 정말 많이 아프고 힘든 일이야. 그치? 에이드리안이 불쌍해. 많이 불쌍해." 쥬느비에브는 어느 새 뚝뚝 흐르는 눈물을 깨닫고는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쥬느비에브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커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날씨 때문에 어둠침침했는데 밤이 찾아와 더욱 하늘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주, 죽을 리 없어. 저주든 뭐든 내가 다 무찔러 줄 거야."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쓰윽 닦고 쿵쾅거리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 1도르 정도 찾아 헤맨 끝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유령처럼 유리 온실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두워 꽃과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향긋한 냄새로 온실 안 초목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바깥 날씨가 꽤 쌀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실 안은 따뜻했다. 쥬느비에브는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려놓고 에이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에이드리안!" 그녀의 목소리에 말없이 걸어가고 있던 그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물끄러미 뒤돌아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삼키고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며칠동안 부쩍 마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드리안, 한참 찾았..." "거기 서. 다가오지 말고." 에이드리안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이질적인 그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워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언제나 따뜻하게 자신에게 말을 건네던 에이드리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고 어둡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안...난..." "유벨에게 얘기 들었지?" 바람 한 점 없는 온실임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안의 옷자락이 이리저리 날렸다. 쥬느비에브는 그것이 레플리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몹시 초조하고 불안하다는 것도.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난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저주 따위 상관하지 않아요. 그런 거 믿지 않을래.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주, 죽을리는 없으니까. 난 절대 그렇게 믿어요. 그러니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자신을 냉랭한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영 어색했다. 문득 사박사박하고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이 하얀 옷자락을 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쥬르, 넌 내가 어느 순간 죽어버린다면 견딜 수 있어? 한 마디 말도 없이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할거야? 내가 같이 죽자고 하면...같이 죽어 줄 거야? 그럴 수 있어?" 에이드리안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멈춰 서서 두 눈을 내리깐 채 양 손을 마주 잡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에이드리안이 죽는다는 것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이드리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 피를 이어받은 우리 아이가 저주를 받아, 짧은 생을 숨어서만 지내야 한다면... 그리고 네가 보는 앞에서 허무하게 죽는다면... 견딜 수 있어?" "에이드리안, 난..." 쥬느비에브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무서운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주따위...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꾸욱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부진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에이드리안은 내가 그런 것 때문에 에이드리안을 떠난다면 견딜 수 있어요?" 에이드리안이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에서 쥬느비에브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두려운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미래. 자신이, 혹은 자신이 무척 아끼는 형들 중 한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된다면... 그것도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너무나 참담할 것이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 줄 거에요.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지금까지 우리, 많이 행복했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넌 몰라!" 에이드리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쥬느비에브는 그의 외침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은 마치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넌 몰라. 대속성 레플리카는 저주받은 힘이야. 빌어먹을 아이슬로데. 그 마녀 로스페니르는 자신의 아이에게 저주를 내린 지독한 여자야. 저주란 건 단지 그 유전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그 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것이 진짜 저주야. 지독하리 만치 혐오스럽고 무서운 마음. 파렴치하고 추잡스러워." 에이드리안의 자조적인 말에 쥬느비에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옷자락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그리고 끝내는 원하게 되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자신과 함께 죽음을 택해주기를.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바람인지 알면서도 원하게 되고 말아. 레플리카는 영혼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힘. 저주받은 자들 중,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가 얼마나 될 것 같아? 자신의 누구보다 강력한 레플리카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무서운 힘. 무시무시해.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기도 하지. 잔혹하고 치 떨려." 에이드리안의 음습한 목소리를 들으며 순간 쥬느비에브는 보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의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를. 쥬느비에브는 더 이상 그를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저런 무서운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다행스럽게 저주를 피한다고 해도, 남겨진 사람들의 속은 시커멓게 변해 버려. 남겨진 자는 저주받은 자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뒤돌아서면 안도감에 미소짓지. 네가 죽어줘서 내가 살았어! 그래, 살아남은 자들은 저주받은 자의 생을 갉아먹고 사는 거야. 그 씻을 수 없는 죄책감. 평생 짊어져야 할 마음의 고통. 그러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헤르만 숙부를 봐. 자신은 이미 저주를 피했지만 축복 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은 저주를 이어받아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신의 눈 앞에서 차가운 관 속으로 들어갔지. 기분이...어떨 것 같아? 말해 봐, 쥬르. 넌 이런 것들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 그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에이드리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다시금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기분이 나빴다. 지금의 에이드리안은 너무나 답답했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답답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에이드리안은 바보에요! 왜 그렇게 약하게만 생각하는 거에요! 사실 난 저주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거 이겨내면 되잖아요. 에이드리안은 레플리카도 강한데 왜 그렇게 약한 마음을 먹는 거에요? 왜 에이드리안의 운명을 다른 것이 결정하도록 놔두냔 말이에요! 에이드리안이랑 나랑 같이 있으면 행복하잖아요. 그걸로 충분한 건데 왜 자꾸 다른 걸 끼여들게 만드는 거에요! 나, 그런 건 참을 수 없어요! 이런 에이드리안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쥬느비에브는 씩씩거리며 말을 끝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단호한 외침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어떻게 저렇게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엘로이즈 누님이 이미 돌아가셨어. 로스페니르의 저주는 피할 수 없어. 쥬르, 난 지금까지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어린 시절, 그 이야기를 말로 들었을 뿐. 어른들의 말도 무섭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마음에 와 닿진 않았어. 하지만 엘로이즈 누님이 죽었어. 저주는 현실이야."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내가 다 지킬 테니까, 에이드리안도 우리 가족도 다 내가 지킬 거에요. 난 에이드리안, 절대 떠나지 않을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고집스레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메이리 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단호한 얼굴을 보자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비인 가의 저주를 알고서 저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어렸을 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무서워했던가. 그 날 ,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으면 친형과도 같은 유벨과 프란체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당혹스러운 사실... 그리고 에스프라드 또한...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왔었다. 어느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미소짓고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로스페니르의 저주는 존재하고 대속성 레플리카 중 한 사람은 비인 가의 잔혹한 유전병으로 죽게 될 것이다. 암담하고 불안한 현실. 하지만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불안감이 사라진다. 눈 앞의 현실은 사라지고 환상만이 남는다.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버지도 그랬겠지. 어머니와 함께라서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 그래서 미소를 머금고 돌아가신 거겠지.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를 감싸안았다. "쥬르, 난 무서워. 아직도 불안해. 널 잃을까 봐. 네가 날 잃을까 봐 많이 불안하고 무서워. 그리고 네가 불안감에 날 떠날까 봐 너무 무서워." "조, 좋아하는 사람이 슬퍼하는데 어떻게 떠나요? 말도 안 돼. 난 에이드리안한테 딱 달라붙어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절대로."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에이드리안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지켜줄 것이다. 에이드리안이 어떤 상황에 처해도 절대 곁에 있어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우리 가족이잖아요. 가족끼리는 많이 미안해도 괜찮은 거예요.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마음 속의 슬픈 일 같은 거 꼭꼭 숨겨두지 말고 꼭 나한테 말해 줘요. 가족끼리는 슬픈 일도 나누는 거예요." "가족...가족이라...."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띄우며 쥬느비에브를 꼭 껴안았다. 가족...아주 좋은 어감이었다. 쥬느비에브와 자신이 한 가족이라...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말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에게서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 잔인한 어린 아이처럼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모른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쥬느비에브가 슬퍼하더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그 말이 더욱 마음 아팠다.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결코 하지 못할 말이 있었다. 죽을 때까지 그 일로 마음이 아파도 그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아파할 테니까... 에이드리안은 냉랭한 눈동자로 피식 미소지었다. '엘로이즈 누님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덕분에 그녀가...살았으니까.' ******** 다음 날.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비인 가의 정원을 콩당콩당 뛰어다녔다.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너무 맑고 화창했다. 에이드리안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가끔씩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그런 눈빛을 하는 이유를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그는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더욱 애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비인 가에서도 몇몇 사람들밖에 모르는 비밀을 털어놓기 위해 에이드리안이 얼마나 고심했을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게 불길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불안감과 혐오감에 자신의 곁을 떠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때면 쥬느비에브는 먼저 그에게 안겨서 등을 두드려 준다. 걱정할 것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 주면 그 때서야 에이드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쥬느비에브는 그 순간이 너무 기분 좋았다. 그것은 에이드리안이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원한다는 이야기였다. 불안에 떨고 있는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약간 미안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그녀는 즐거웠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원하고 곁에 있길 바란다. 생각만 해도 근사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자신이 모두 행복하길 바랬다. 그리고 꼭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오늘 스콜라로 떠날 참이었다. 유벨과 에이드리안이 짐을 싸고 있는 동안 그녀는 정원으로 나왔다. 며칠째 우중충하던 날씨가 개여 너무 기분이 좋았던 탓이었다.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참 뛰어다니다가 뒤를 흘끗 쳐다보았다. 하얀 강아지가 발랑발랑 뛰어오고 있었다. "꼬마 에드, 기분 좋지? 헤에-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쥬느비에브는 멈춰 서서 한 손을 이마에 붙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도 별로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바람이 쌀쌀했지만 계속 뛰어다닌 탓인지 춥지는 않았다. "이런. 쥬느비에브 양이 아닌가?" 문득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홱 돌렸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어? 프란체스 아저씨!" "오우~ No~ 아저씨가 아니라 오. 빠. 야. 알겠어? 큐티 걸, 쥬느비에브 양?" 프란체스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어느 새 강아지가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매달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프란체스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랬다. 장례식장에서는 워낙 정신이 없어 못 알아보았지만 프란체스의 모습은 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동네 불량배 같던 그의 모습이 너무나 단정했다. 물론 말투는 똑같았지만 모습만은 큰 회사 사장님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품에 안아 들면서 물었다. "아저씨. 이상해요. 평범해 보이잖아요. 전에 공작새 머리는 어떻게 한 거에요?" "훗훗. 이 모습이 나의 진정한 모습이지. 우하하하." "에에?" 쥬느비에브는 잔뜩 인상을 쓰다가 문득 유벨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 표정을 풀었다. 엘로이즈와 프란체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을 언듯 들었던 것이다. 장례식장의 노래도 너무 슬펐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도 마음 아프게 느껴졌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프란체스의 행동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분명 슬플 텐데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그의 행동은 슬픔을 감추기 위한 억지스런 행동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오우~ 난 괜찮다우. 아가씨.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야." "자, 작별 인사요?" 쥬느비에브는 한 쪽 눈썹을 실룩이며 물었다. 강아지가 자꾸 꿈틀거리자 쥬느비에브는 손바닥으로 강아지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프란체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돌려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빙그레 웃었다. "여행을 할 생각이거든. 동방으로 갈지, 서방으로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프란체스는 쥬느비에브를 힐끗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쥬느비에브에게 건넸다. "내 마지막 편지니까 에이드리안한테 잘 전해 주게나, 아가씨. 그럼! 또 보지!" 쥬느비에브는 엉겁결에 하얀 편지 봉투를 받아들고 멀뚱멀뚱 프란체스를 쳐다보았다. 프란체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어느 새 멀어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마음이 아플 때는 시간이 약이래요. 꼭 돌아와서 우리 같이 놀아요! 알았죠?"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린 것인지 프란체스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프란체스라면 어떻게든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꼭 다시 한 번 만나서 오래오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믿고 싶었다. ******** "뭘 그렇게 싱글거리고 있는 거야?" 짙은 파란색 모자를 바로잡으며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마차에 타기 전에 몸풀기 운동을 해야 한다면 몸을 움찔움찔거리며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내가 웃었어요?" "그러니까 물어본 거잖아." "스콜라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요. 호호호." 쥬느비에브는 어색하게 미라벨의 웃음소리를 흉내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 보이며 하늘색 코트를 여몄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 하얀색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타시지요, 레이디." "그러지요, 비인 님." 쥬느비에브는 한 손으로 연두색 원피스 자락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에이드리안의 손에 포갰다.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레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마차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도 뒤 이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푹신한 마차 안의 의자에 앉았다. 곧 이어 강아지가 대단한 점프력을 과시하며 안으로 풀썩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이 강아지를 품에 안자 쥬느비에브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유벨 오빠도 우리랑 같이 가면 될 텐데..." "글쎄. 그 녀석은 일이 생겼다며 먼저 갔으니까..." 에이드리안은 모자를 벗고 자신의 금발을 쓸어 넘겼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 얼굴을 붉히며 콩닥콩닥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에이드리안이 너무 좋아요. 빨리 스콜라에 돌아가서 모롤라 먹을래." "후후- 좋을 데로 하셔. 하지만 이제부터는 체리욜파쳰(주. 참조) 준비를 해야하니까 바쁠 거야."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가 덜컹거리더니 앞으로 움직였다. 쥬느비에브는 창을 열어 바깥을 쳐다보았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갔다. 드디어 스콜라에 간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기뻐 함박 미소를 지었다. 에이드리안도 더 이상 우울해 하지 않고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고, 스콜라의 집에는 모롤라가 잔뜩 있고! 정말 기분 최고였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할머니를 못 뵈어서 너무 아쉽다. 그쵸?" "나는 잠깐 뵈었어. 몸이 불편하셔서 말이야." 에이드리안은 순간 묘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미소를 띄웠다. 쥬느비에브의 서운한 얼굴을 보자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번에 같이 오자." "응. 프란체스 아저씨도 다음엔...어? 맞다." 말을 하다 문득 프란체스의 편지가 생각나 쥬느비에브는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편지를 꺼냈다. "에이드리안, 프란체스 아저씨 편지." "프란...체스 형?" 에이드리안은 의아한 눈빛으로 쥬느비에브가 건네준 편지를 받아들었다. 쥬느비에브의 주머니에서 이미 편지는 꼬깃꼬깃해진 상태였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한숨을 쉬고 편지를 뜯었다. 쥬느비에브는 내용이 궁금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살폈다. 하지만 내용이 보이진 않았다. 포기하고 에이드리안을 살피던 쥬느비에브는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에이드리안을 불렀다. "에이드리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대요?" "쥬르, 프란체스 형...어디로 간데?" 에이드리안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 했다. "동방으로 갈지 서방으로 갈지 모른댔는데..." 그녀의 대답에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쥬느비에브는 심상치 않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이 몹시 창백했다. 뭔가 큰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그것은 확신으로 굳어갔다. 쥬느비에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에이드리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프란체스 형이... 프란체스 형이 이번 대의... 저주받은 자래. 어떻게 이런 일이..." 제90음(第90音) 어딘가에 숨어 있을 Egoism 스콜라에 돌아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다. 에이드리안은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어떻게 저런 뻔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평상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는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어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도 사람이라는 동물은 무서울 정도로 적응을 잘한다. 다른 사람을 제쳐두고 자신만 봐도 그것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무섭고 슬픈 일이 일어났는데도 저렇게 초연한 얼굴이라니. 정말 소름 끼쳤다. 에이드리안은 두꺼운 청색 코트를 여미고 하늘색 모자를 쓰며 한숨을 뱉어냈다. 이미 가을은 온데 간데 없고 벌써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추운 건 질색이었다. 그는 옷을 다시 여미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군. 이따위 생각이라니..." 에이드리안은 거울 속의 자신을 꼼꼼하게 살폈다. 하늘색 모자 아래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인다.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방에서 나갔다. 그는 지금 유벨의 저택으로 갈 예정이었다. ******** 유벨의 사택은 매우 조용했다. 하인들이 유벨의 가라앉은 기분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집사에게 코트와 모자를 건네주고 그가 있다는 서재로 향했다. 그는 계단을 오르면서 곰곰이 그에게 건넬 위로의 말을 생각했다. 프란체스가 편지로 자신이 이번 대의 저주받은 자라는 사실을 밝힌 후, 에이드리안은 한동안 고민했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아니면 말아야 할까. 그는 결국 잔인한 선택을 했다. 유벨과 에스프라드, 헤르만에게 서신을 보내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이로서 살아남은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을 알고 있었다. 프란체스의 편지를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게 된다면 자신만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프란체스의 생명을 담보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신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 그는 혼자서 그것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모두에게 같은 짐을 지우게 하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에이드리안은 서재 앞에 멈춰서 잠시 헛기침을 했다. 유벨을 만나기가 껄끄러웠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벨은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유벨." 에이드리안의 부름에 유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싱긋 미소를 띄웠다. 저런 모습이 더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유벨은 알고 있을까. 에이드리안은 씁쓸한 마음에 희미하게 미소를 띄웠다. 유벨은 자신의 맞은 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와. 에드. 앉아."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날씨가 제법 추웠다. 그러나 겨울을 대비한 유리가 테라스 난간 쪽으로 둘러쳐져 있어 바람이 직접적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어색한 분위기에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유벨, 괜찮아?" "괜찮아. 녀석, 걱정했던 모양이지? 내가 너한테 걱정 끼칠 때도 있고 별 일이네." 유벨은 싱겁게 대답을 하고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차갑고 스산한 바람이 앙상한 나무를 스치고 간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떨구고 입을 열었다. "미안. 혼자 알고 있는 편이 차라리 나았는데...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 "에드, 네 잘못 없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우린 살아있는 만큼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해. 그게 당연한 거지. 그리고 형이... 죽었다는 것도 아니고. 뭐 아냐? 동방에 가서 기가 막힌 약을 먹고 멀쩡하게 살아올지..." 유벨은 씁쓸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회색 머리를 넘겼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촌 동생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에드, 난 우리 형 아주 좋아해. 형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게 사실 믿어지지 않아. 하지만 어차피 현실이 그렇다면 더 이상 그것에 미련 두지 않으려고 해. 형도 그걸 바라고 너에게 알려준 걸 테니까. 형이 희생해서 널 살리고 날 살렸어. 난 형이 행복하리라고 생각해. 꼭 살아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형을 만난 날... 그 때 형이 왜 미소지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형은 엘로이즈 누님을 따라갈 수 있어 행복했던 거였어.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 아파할 필요 없어. 그건 내가 원하지 않아." "유벨...미안. 미안..." 에이드리안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테이블 위에 엎드리고 말았다. 유벨은 사촌 동생의 질 좋은 금발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에드, 내가 우리형만큼 널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형이 흐뭇해할 만큼 우리 행복해지자." ********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인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타이름에 어쩔 수 없이 기분을 풀 수밖에 없었다. 정작 슬퍼해야 할 사람은 유벨이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기분으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좋아하는 차를 특별히 준비해 주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녹였다. 향긋한 차향이 서재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유벨은 차 한 모금을 마시다 문득 찻잔을 내려놓고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드. 할머니께...말씀드렸어? 형 얘기." "아니. 할머니 아시면 쓰러지실 지도 모르니까." 에이드리안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차를 마셨다. 유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이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말했다. "저번에 뵈었을 때도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았어. 할머니 나름대로 마음이 불편하신 가봐. 엘로이즈 누님의 죽음이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할머닌 꽤 많은 사람의 죽음을 봐 오셨으니까. 도대체 비인 가에서 몇 사람이나 죽어나간 건지... 부모님께도 비밀로 할 생각이야.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한숨을 쉬며 찻잔을 기울였다. 에이드리안은 차로 입술을 적시며 가만히 유벨을 바라보았다. 사촌 형이 강하다는 것을 이럴 때 느낀다. 자신의 형에게 무시무시한 일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촌 형은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픈데도 마음 약한 자신을 위해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고마운 마음에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유벨, 고마워." "당연하지.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알면 평생 고마워해야 한다." 유벨은 장난스레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회색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형의 뒷모습이 눈에 남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형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자신의 형인 건지. 걷잡을 수 없는 마음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 유벨의 사택에서 나온 에이드리안은 산책을 겸해서 걸어서 학생회실로 향했다. 낙엽이 떨어진다고 했더니 어느 새 나뭇가지는 앙상한 팔만 드리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이 춥다며 둘러준 머플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흙이 건조해서 그런지 푸석푸석한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먼지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희뿌연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이제 더 이상 아프지 말았으면..." 에이드리안은 또 다시 어두워지는 마음에 머리를 흔들고 학생회실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아무 생각도 없이 스콜라 본관에 들어선 그는 멀리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아무래도 학생회실인 것 같았다. 그는 발을 놀려 학생회실로 갔다. 문 앞에 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학생회실에서 그 정체불명의 떠들썩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문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노란색의 무언가가 자신에게 휙 하고 다가왔다. "뭐....읍!" "에헤헤- 오늘도 한 번! 짜잔!" 쥬느비에브가 헤실헤실 웃으며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쥬느비에브가 갑자기 다가와 키스를 했던 것이다. "야! 너 왜 그래? 도대체..." 에이드리안은 버럭 화를 내며 외치다 따끔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얼굴을 붉히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안느마리가 웃기다는 듯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알밤을 맞을까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두 눈을 찔끔 감고 있다 에이드리안이 잔소리를 멈추자 살며시 눈을 뜨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코트 자락을 흔들며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에이드리안,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 글쎄, 키스 한 번도 못 해봤다지 뭐예요? 우린 매일 한 번씩은 하잖아요. 그쵸? 그래서 내가 막 놀렸어요. 나 잘했죠?" "뭐?"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인상을 쓰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쳐다 보았다. 그 때 자지러지게 웃고 있던 안느마리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쥬느비에브, 진짜 하루에 한 번씩 에이드리안 님이랑 키스하는 거야?" "그렇다니까. 에이드리안은 잘 때 꼭 뽀뽀 해준단 말이야. 그리고 아침에도 가끔...음! 으으음!" 안느마리의 물음에 자랑스레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하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입을 막는 바람에 버둥거리며 눈을 말똥거렸다. 에이드리안은 민망한 마음에 쥬느비에브를 쏘아 보다 또 다시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안느마리에게 소리쳤다. "안느마리!" 안느마리는 에이드리안의 호통에 깜짝 놀라 켁켁 거리다가 다시 입을 막고 킥킥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정신 없는 소동에 이마를 짚으며 쥬느비에브를 놓아주었다. 풀려난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콩콩 쳤다. "에이, 에이드리안.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은 한 번도 못 해봤다잖아요. 정말 두 사람은 너무 순진하다니까요. 우리가 한 수 가르쳐 줘야겠어요." '순진하다고? 누구만큼 순진하진 않을 텐데...' 쥬느비에브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던 에이드리안은 머플러를 풀고 모자를 벗어 쥬느비에브에게 건네주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뚫어져라 케이로프를 쳐다보았다. "케이로프, 진짜야?" 순간 케이로프와 미라벨의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저 반응으로 보아 사실인 모양이었다. 옆에서 안느마리가 또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머플러와 모자를 옷걸이에 걸고 쪼르르 달려와 에이드리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생긋 미소지으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미라벨 언니. 나도 처음엔 너무너무 부끄러웠는데 자꾸 하면 괜찮아요. 사랑은 쟁취하는 거래요. 남자가 부끄러워하면 여자가 먼저 시도를 해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뺨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행동에 잔뜩 인상을 쓰며 그녀를 흘겨봤다. 결국 쥬느비에브는 알밤을 맞고 말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그녀는 알밤 맞은 곳을 문지르면서 헤실헤실 웃으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때로 알밤 맞는 일이 있지만 이 정도 희생 없이 어떻게 사랑을 쟁취하겠어요? 그쵸? 아코, 그런데 오늘 알밤은 너무 아프다... 미라벨 언니도 알밤은 조심해야 돼요. 알밤 피하는 요령은 말이죠...." 쥬느비에브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알밤 피하는 요령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케이로프와 미라벨이 진지하게 경청을 하자 안느마리는 또다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웃음을 삼키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그런데 케이로프. 진짜야? 정말이야?" 에이드리안이 장난스럽게 묻자 케이로프가 얼굴을 굳혔다. 에이드리안은 재미있는 상황에 웃음을 삼켰다. 예전에 자신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벌써 먼 옛날 이야기 같아서 너무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 때 얼마나 당황했던가. 케이로프는 그의 질문에 겸연쩍게 머리를 긁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케이로프가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짐짓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약혼한지 꽤 오래되었잖아. 아직도야? 흠...그러고 보니 약혼이나 결혼을 한 뒤 100일 이내에 키스를 못하면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뭐, 뭐라고욧?" "그게 사실입니까?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듯 되묻는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말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리고 이내 붉으락푸르락 안색을 바꾸며 서로를 쳐다보다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두 사람의 반응이 참으로 괴상해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저렇게 심각하게 반응하다니. 에이드리안은 계속 웃고 있는 안느마리에게 눈짓을 했다. 이쯤해서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았다. "참, 안느마리. 유벨한테 가 봐. 유벨이 전에 맡겨 놓은 서류 좀 달라고 하던데." "유벨 님이요?" 안느마리는 화사하게 안색을 바꾸며 순식간에 학생회실에서 사라졌다. 에이드리안은 '유벨 효과'에 감탄을 하며 쥬느비에브에게 고개를 돌렸다. "쥬르, 나가자.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지." "응!" 쥬느비에브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의 머플러와 모자를 가져와 그에게 건네주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보며 쿡 하고 웃음을 삼켰다. 쥬느비에브가 밖으로 나가자 에이드리안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다 나간 것을 확인한 미라벨이 슬쩍 케이로프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원피스의 주황색 프릴을 쥐어뜯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 어쩌죠? 아이를 못 낳으면 에이드리안 님의 사돈이 될 수 없는데..." "아아- 그렇군. 어쩌지?"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화르르 불이 붙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라벨은 눈동자를 돌리며 눈을 꾹 감았다. 아까 쥬느비에브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뽀뽀를 잘 했는데 자신은 이게 뭔가.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에이드리안의 사돈이 될 수 없건만! 쥬느비에브가 너무 부러웠다. 생각 없이 단순한 사람이 이런 일에는 강한 법. 순간 미라벨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음?" 케이로프 님의 얼굴이 왜 이렇게 가까이 있지? 미라벨은 눈을 깜빡이며 알 수 없는 의문에 싸였다. 곧 이어 케이로프의 얼굴이 멀어져 갔다. "이제 됐군. 키스를 했으니 분명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야." 케이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라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라벨은 눈을 깜빡이며 머리 속을 정리했다. 뭔가 일이 일어나긴 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났담? 그녀는 케이로프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순간 깨달아 버렸다. 그렇다. 케이로프와 키스를 한 것이다! 미라벨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첫 키스인데! 첫 키스인데 기억이 안 난다! 그녀는 다홍색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름대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방금 전 일이 생각나지 않다니! 보고 있던 케이로프가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은 키스 뒤에 머리를 쥐어뜯나? 참 별 이상한 취미군. 나중에 아이에게 전염되면 곤란한데..." ******** "에이드리안, 기분 좋아졌죠?" "응?" 쥬느비에브가 두 팔을 벌리고 퐁당퐁당 뛰어가며 묻자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미소지으며 쪼르르 에이드리안에게 다가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다들 에이드리안 기분 좋게 해주려고 애쓰고 있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이 우울한 거 다들 알고 신경써준 거란 말이에요. 평상시처럼 행동하려고 다들 노력하고 있는 거, 에이드리안은 모르죠?" "......" 에이드리안은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에게 살며시 웃어 주었다. 이럴 때는 정말 쥬느비에브가 어른스러워 보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을 톡톡 치며 물었다. "유벨 오빠는 괜찮은 거죠? 더 이상 슬픈 건 싫으니까 유벨 오빠도 어서 힘냈으면 좋겠어요. 믿기 어렵고,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지만 아직 눈 앞에 닥친 건 아니잖아요. 나, 프란체스 아저씨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의 직감은 무서운 거라고요."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미소로 답해 주었다. 정말 그랬다. 이젠 모두 행복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물었다. "쥬르, 쥬르는 행복해?" 그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우뚝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에요.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구요. 믿어지지 않아요?" 쥬느비에브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유벨 말대로 프란체스 형이 어쩌면 동방에서 귀한 약을 먹고 멀쩡하게 웃으며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쥬르." "네에?"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원피스 자락을 폴폴 날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한 걸음 앞서 나가던 에이드리안은 휙 하고 뒤돌아서 쥬느비에브의 머리에 꽁 하고 알밤을 주었다. "쥬르가 틀렸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화사하게 웃으며 콩콩 뜀박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프란체스의 문제는 잠시 잊어버리고 싶었다.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슬퍼진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그래서 마음만 아플 뿐이라면 어떻게든 눈 앞에 닥치기 전에는 잠시 옆으로 미루어 두고 싶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잃어버렸던 미소를 찾자. 그리고 그 동안 방법을 생각해 보자. 에이드리안이, 그리고 쥬느비에브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면 난 아주 행복해져. 그래서 에이드리안이 행복한 만큼 나도 행복해져 버리는 걸. 꼭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외전 05.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 나 무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5-01.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 나 무 ] // 숨 쉴 수 있는 세계와의 만남 // 오늘도 소년은 몹시 지쳐있었다. 힘없이 옷을 벗고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로 갈아입은 소년은 다리를 질질 끌며 침대로 가 풀썩 주저앉았다. 피곤했다. 오늘도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레플리카 연습과 공부에만 소모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는 빡빡한 일상 생활에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소년은 몸에 힘을 빼고 침대 위에 상체를 내렸다. 누워 있으니 두 눈 가득히 천장의 이상한 벽지 모양이 들어왔다. 계속 보고 있으니 어지럽고 답답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싫어, 이런 건. 더 이상은 싫어. 답답해. 숨 막혀." 소년은 이불을 적시며 눈을 감았다. 하루라도 마음놓고 쉬고 싶었다. 나무와 풀과 꽃이 뿜어내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노래하고 싶었다. 답답한 연습실에서가 아니라 맑고 쾌청한 숲 속에서 노래하고 싶었다. 몇 도르(주. 참조)가 되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폐 깊숙이 공기를 끌어 당겨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바로 다음 수업을 위해 나가야 했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걷어져 있는 커튼 사이로 바깥의 환한 햇살이 느껴졌다. 밖은 저토록 환하고 따뜻한데 소년은 누워있는 이 곳은 너무나 어둡고 음습했다. 순간 소년의 눈동자에 날개짓을 하는 하얀 새가 들어왔다.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옮겨졌다. 소년은 무언가에 홀린 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 소년은 자신의 회색 머리를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밖으로 나온 소년은 자신이 어느 새 숲 가장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미쳤어! 곧 역사 시간인데! 홀츠워드 선생이 화내겠어! 일로나 할머니한테 이르면 끝장인데!" 소년은 자신이 왜 이 곳에 왔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수업 시간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홀츠워드 선생의 역사 시간이었다. 홀츠워드는 종종 일로나 할머니에게 고자질을 해 그를 골탕먹이는 고약한 선생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을 내딛었을까. 소년은 코 속으로 퍼지는 시원한 공기에 문득 멈춰 섰다. 고개를 올려 눈동자를 하늘로 향하게 한 소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청량감 넘치는 공기. 시원해." 그러고 보니 이 얼마나 원했던 순간인가. 숲에서 한번이라도 마음 편하게 노래해보고 싶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숲이었지만 공부와 레플리카 연습 때문에 와본 지가 까마득했다. 소년은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켜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느끼고 있었다. 자유로운 기분. 그러나 소년은 눈을 떠야했다. 홀츠워드 선생과 일로나 할머니의 잔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걸음을 내딛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뒤돌아 섰다.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흑흑... ] 소년은 눈썹을 실룩였다. 울음소리였다. 분명 울음소리였다. 그 것도 여자의 울음소리가 분명했다. 소년은 잠시 멈춰 서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 것인가, 이대로 수업을 받으러 갈 것인가. 소년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흐흑... 흑흑... ] 소년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울음소리는 계속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소년은 신경에 거슬리는 울음소리에 이내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소년은 덜컥 무서워졌다. 비인 가의 오랜 전통에 걸맞게 숲의 나무들은 최소 몇 십 년, 길게는 몇 백 년 되는 나무들도 많았다. 덕분에 커다란 나무들로 햇빛이 가려져 숲은 한 낮인데도 꽤 어두컴컴했다. 소년은 침을 삼키며 주먹을 꾸욱 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읽은 몇 권 안 되는 동화책에 유령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 있었다. 갑자기 왜 그 책이 생각나는 것일까. 하긴 정치니 경제니 하는 공부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읽어야 할 동화책을 몇 권 읽어보지도 못 했으니 그나마 읽었던 책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소년은 한숨을 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뭐 유령 같은 건 믿지 않지만 혹시 그 비슷한 것이 나오면 레플리카로 날려버릴 참이었다. '흥! 바보 같은 레플리카. 이 놈의 대속성 레플리카 때문에 실컷 고생하고 있으니 이럴 때는 도움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쳇.' 소년은 갑자기 나빠진 기분을 추스르며 입술을 실룩였다. 자신이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서 겪고 있는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금새라도 머리가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소년은 귀에 울리는 커다란 울음소리에 인상을 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꺄,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숲 속에 어마어마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넘어져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그 것'을 눈을 끔뻑이며 쳐다보았다. 희끄무레 한 옷을 입은 소녀가 자신을 보고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년은 입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유, 유령...진짜 유, 유령이..." "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나무 유령 님. 제가 나무를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랍니다. 살려주세요, 나무 유령 님. 나무가 멋대로 죽은 거에요. 전 그냥 잘 자라라고 레플리카를 쓴 거밖에 없어요. 물도 줬어요.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나무 유령 님...." 그 유령 소녀가 엎드려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인상을 쓰며 그 정체불명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보니 유령은 아닌 듯 했다. 책에 본 유령은 적어도 신발을 신고 있지는 않았다. 항상 공중에 붕붕 떠다녔으니 신발이 필요 없었겠지.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엎드려 있는 소녀를 슬쩍 찔렀다. 그러자 소녀는 벌떡 몸을 일으켜 외쳤다. "용서해 주시는 거군요! 감사합니다!" 소년은 소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너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뭘 용서한다는 말인가? 소년의 멀뚱한 표정에 소녀도 뭔가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물었다. "나무 유령 님이 아닌가요?" "저기... 누구보고 유령이라고 그러시는 건지..." 소년은 평소에 하던 것처럼 다소곳이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누구보고 유령이라는 거야? 이 이상한 여자야!'라고 외치고 있는 소년이었다. 소녀는 소년의 말에 제법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인지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이 걸 어쩐다. 추, 추한 모습을 보, 보여드렸네요, 아, 아버지가 아시면 기절하실..." 순간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목구멍에서 난 소리였다. 소년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소녀도 놀란 눈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분명 귀족인데 레이디에게서 저런 소리가 나다니.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디론가 도망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역력한 소녀의 표정을 보자 소년은 웃음이 나왔다. "쿡...쿡... 아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소년이 미친 듯이 웃어대자 소녀는 놀라 허둥지둥 거리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괘, 괜찮으세요? 저기요, 나무 유령...아니...그러니까...저기..." 소년을 뭐라 불러야 할지 난감해진 소녀는 까만 머리를 넘기며 울상을 지었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표정에 또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무 유령이라니... 혹시 나무라도 죽인 거야? 유령은 죽은 자의 혼이잖아. 어디서 나무 한 그루라도 죽였...." 프란체스는 웃으며 말하다 소녀의 심각한 얼굴에 말끝을 흐렸다. 자책감이 가득한 저 얼굴. 소년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말했다. "진짠가 보네?" "그, 그게 말이죠. 나무를 심었는데... 그게 잘 자라라고 레플리카를 줬더니 마, 말라 버린 거에요. 전 정말 나무를 잘 심어서 키워보고 싶었는데... 그게 저..." 소녀가 굳어버린 표정으로 말하자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가 레플리카를 쓸 수 있다는 말에 약간 의외였던 소년은 고개를 돌려 소녀가 방금 전까지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보드라운 흙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어린 묘목이 비쩍 말라있었다. 마치 강한 햇볕에 시들어버린 것처럼. 소년은 눈썹을 실룩이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마치 큰 죄를 지은 듯 울상을 짓더니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나, 나무는 다시 살려볼 테니까 용서해 주세요. 아,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치고 소녀는 바람같이 달려가 버렸다. 어느 새 사라져버린 소녀의 뒷모습을 쫓으며 소년은 두 눈을 깜빡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유령 아냐?" ******** 숲에서 유령인지 사람인지 하여튼 무언가를 만나고 돌아온 소년은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역사 시간은 보기 좋게 결석한 셈이 되었다. 자신에게 쏟아질 질타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한 그였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군청색의 마차는 일로나 할머니의 그것이었다. 홀츠워드 선생이 고자질한 게 틀림없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며 힘없는 손짓으로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소년은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눈을 깜빡이며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앞에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소년은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안쓰러운 표정의 어머니였다. 소년은 가슴 한 쪽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일로나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호통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홀츠워드 선생에게 들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놈의 행동인 게냐, 그것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는 게냐! 이거 원,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구나. 어디서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가 게으름만 피우고 다닌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가문에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쯧, 하여튼 네 놈이야 늘 그렇지.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가 어서 나와야 할텐데... 쯧."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할머니의 꾸짖음을 들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를 말리고 계셨다. "할머님. 고정하세요. 프란체스도 생각이 있어서..."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이냐! 저따위 정신으로 잘도 비인 가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나섰구나!" 일로나 할머니는 무서운 눈초리로 소년은 쏘아보더니 뒷짐을 지고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소년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깔린 카페트에만 시선을 줄뿐이었다. 일로나 할머니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에는 언제나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마치 그 자리에 자신이 없다는 느낌이랄까. 자신은 껍데기만 남아 할머니의 질타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안타깝고 슬픈 표정을 볼 때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에게 이런 무겁고 버거운 짐을 준 게 어머니의 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속상하고 안타까웠던 것 같았다. 소년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몹시 마음이 아팠다. ******** 프란체스 비앙카 로르 비인. 거창한 '비인'이라는 성을 받은 소년의 이름이었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비인'이라는 이름. 아르헨의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고 경애하는 이름. 아르헨의 대귀족 중 유일하게 '로르'의 칭호를 받은 대단한 가문을 지칭하는 이름. 하지만 소년은 이 이름이 지긋지긋했다. '비인'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람들의 기대감. 그것은 말로는 하지 못할 엄청난 짐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대속성 레플리카가 소년에게 전승되었던 것이다. 대속성 레플리카가 가지는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대속성 레플리카를 몸에 지니는 순간, 그토록 대단한 비인 가의 기대를 그야말로 한 몸에 받게 되는 것은 물론 운 좋으면 아르헨의 최고 실권자가 될 수도 있었다. 화려한 귀족 가문에 태어나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그러나 프란체스에게는 악몽 같은 힘이었다. 태어나는 순간, 지속성(地屬性)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인재로 주목받았던 그는 단 한번도 마음놓고 쉬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계속되는 공부와 레플리카 연습으로 소년에게 여유라는 말은 기적과도 같은 말이었다. 답답하고 숨막히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고 소년은 마치 기계같이 주어진 지식을 받아들이고 목멘 카나리아 같이 노래를 불렀다.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생활이었다. 가문의 가장 어른이신 일로나 할머니의 호통소리에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났지만 프란체스는 참아야 했다. 그가 힘들어하면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부모님이 슬픈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모범적이고 우수한 사람인양 연극을 했다. 가끔씩 그가 눈에 차지 않는 건지 일로나 할머니는 툭 하면 잔소리를 해대었지만 어느 새 둔감해진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 그 날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비인 가의 대무도회 날이었다. 그래봤자 어린 아이들은 무도회에 참석할 수 없지만 가문의 커다란 행사라는 점에서 프란체스는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이 날만은 그도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스콜라에 입학해 학생회를 연 프란체스는 오늘 무도회에서 소개될 예정이었다.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로나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모범생, 프란체스는 물론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데로 따라줄 생각이었다. 그 편이 가장 마음 편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무도회가 시작되는 음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잠시 바깥에 나와있던 프란체스는 입고 있던 까만 정장을 바로잡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구두 굽과 대리석 바닥이 부딪혀 또각또각하고 소리가 났다. 프란체스는 무심한 얼굴로 발소리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의 얼굴을 아는 많은 집안 사람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이미 예법 시간에 마르고 닳도록 배운 인사법을 십분 이용해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회색머리를 넘기며 연회장 안을 둘러보던 프란체스는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할머니와 아버지도 연이어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는 심호흡을 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지겹도록 집 안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야 하겠지. 정말 싫었다. 이런 구태의연한 의식 따위는 정말 갑갑하고 싫었다. 그는 사실 평의회 의장 따위 티끌만큼도 관심 없었다.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최고의 위치에 서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 아래에 서서 명령을 수행하는 편이 그의 체질에 훨씬 잘 맞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는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팔을 잡아끌었다. "프란체스, 이런 자리 싫어하는 거 잘 알지만 어쩔 수 없구나." "괜찮아요, 어머니." 프란체스는 화사한 붉은 색 머리의 어머니에게 의젓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머니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미인이라는 소리도 제법 듣는 어머니가 그는 정말 좋았다. 프란체스는 몸을 돌려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회색 머리를 물려준 아버지는 현재 평의회에서 활동 중이었다. 프란체스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그동안 잘 계셨지요?" "오랜만이구나, 프란체스." 무표정하던 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며 아들의 손을 잡아 두드렸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숙여 아버지의 체온을 느꼈다. 강건하신 아버지를 그는 무척 존경했다. 그 때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일로나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여기네, 헤르만." 프란체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붉은 기 도는 갈색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 남자가 바로 아르헨에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평의회 의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프란체스는 이질적인 느낌에 눈썹을 모으다 헤르만의 옆에 서서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작은 소녀를 보고 그만 눈을 휘둥그래 뜨고 말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서, 설마..."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5-02.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 나 무 ] 프란체스는 지그시 눈을 감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지로 달래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프란체스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검은머리의 소녀를 살짝 쳐다보았다. 소녀도 그를 발견했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숨을 훅훅 들이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입술이 말라 왔다. 왜 저 여자애가 여기 있는 걸까. 프란체스는 다시 살짝 고개를 돌려 일로나 할머니를 훔쳐봤다. 할머니의 무뚝뚝한 인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일로나 할머니는 정말 무서웠다. '어, 어떻게 저 여자애가 여기 온 거지? 아, 맞아. 비인 가 사람인가? 하긴, 그 숲은 비인 가의 영지니까. 하아... 그 때 수업 안 하고 숲에서 노닥거렸다는 걸 할머니가 아시면 또 잔소리를 퍼부으실 텐데... 다 지난 일로 또 꾸중을 들어야 한다니...' 프란체스는 우울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백 번 생각하면 백번 그렇다고 말할 정도로 일로나 할머니는 무서웠다. 이제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호통소리에 그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다. 물론 어릴 적 이야기지만.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헤르만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네, 프란체스 군." "아, 아아-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숙부." 프란체스는 헤르만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비인 가는 폐쇄적인 가문이라 같은 친척간에도 만남이 드물었다. 가까운 친척간의 개인적인 왕래는 몰라도 가문 전체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하물며 헤르만 같이 평의회 건물에서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몇 번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프란체스는 어린 시절 몇 번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헤르만에게 미소 띈 얼굴을 보여주었다. 현 평의회 의장이 아닌가. 잘 보여둘 필요가 있었다. 헤르만을 쳐다보며 미소짓던 프란체스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내리다 까만 머리의 소녀와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놀란 마음에 시선을 피해 버린 프란체스는 다시 흘깃 소녀를 쳐다보다 소녀도 그를 피해 고개를 돌린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 때 어머니가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프란체스, 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 후보자인 엘로이즈 르미엔 로르 비인 양이란다. 헤르만 각하의 따님이셔. 엘로이즈 양, 내 아들 프란체스에요. 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랍니다." 어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프란체스와 소녀를 인사시켰다. 프란체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 후보자? 그는 손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무심코 말했다. "화속성이니 나무가 말라버릴 수밖에. 레플리카 조절을 잘 못하는...읍!" 프란체스는 갑작스런 소녀의 행동에 놀라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소녀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달려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던 것이다. 소녀의 행동에 놀란 사람은 비단 소년만이 아니었다. 헤르만 숙부를 비롯한 일로나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두 눈을 벙 하고 뜬 채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당황한 것인지 소녀는 프란체스를 놓아주고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쳤다. 일로나 할머니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냐, 엘로이즈. 그런 교양 없는 행동은! 쯧." "하, 할머니, 죄송해요. 저, 전에 이 분을 만났거든요, 숲에서...읍!" 소녀는 아까와는 반대 상황으로, 얼굴을 구기며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은 프란체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소년은 이내 버둥거리는 엘로이즈를 놓아주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로나 할머니에게 말했다. "저, 전에 수업을 받으러 가다가 문득 마주친 적이 있지요. 그래서 그만 반가운 마음에...하핫. 잠시 엘로이즈 양과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지요? 대속성 레플리카의 무한한 힘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해 보고 싶어서요." 애써 웃음을 짓는 프란체스의 얼굴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며 일로나 할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려무나. 가문의 앞날에 대해서 서로 상의해 보는 것도 좋겠지." 프란체스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엘로이즈의 손을 잡아 바깥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그였다. 일로나에게 다른 이유도 아닌 그 날 숲에서 '놀다가' 수업을 빼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몇 도르동안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 몰랐다. 그건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었다! ******** "이 봐! 내가 그 날 숲에 갔었다는 얘기는 왜 하려는 거야? 내가 일로나 할머니 잔소리에 말라죽는 거, 보고 싶었던 거야?" 정원 뒤편으로 엘로이즈를 데려온 프란체스는 엘로이즈 쪽으로 홱 돌아서 그녀를 거세게 추궁했다. 그러나 엘로이즈 또한 잔뜩 인상을 쓰며 그에게 따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왜 내 레플리카가 미숙하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데요? 난 아버지께 실망감을 드리고 싶지 않다구요!"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서로 씩씩거리며 상대를 쳐다보다 제 풀에 지쳐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잔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화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프란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엘로이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대속성 레플리카에는 일반 레플리카와는 달리 자연의 힘이 깃들어 있어. 잘 조절하지 않으면 안 돼. 나무에게 레플리카를 줄 때는 불의 기운을 최대한 눌러야 해. 아니면 말라버리니까." "부, 부럽네요. 지속성이라서. 지속성 레플리카를 주면 나무들이 너무 잘 자랄텐데." 엘로이즈도 화가 풀린 것인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흘끗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숲에 간 거 들키면 할머니한테 혼나나요? 하긴 일로나 할머니는 너무 무서워. 특히 잔소리 할 때는...으으으-" 엘로이즈는 소름이 돋는 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잔소리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면 소름이 오싹오싹! 쿡쿡. 아하하하---" "후후. 맞아요. 후후후후후--" 엘로이즈와 프란체스는 배를 잡고 실컷 웃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보는지... 프란체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검은 색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난 비인 가가 싫어. 답답하고 숨 막혀. 대속성 레플리카 따위, 전승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내 레플리카를 싫어하는 게 아냐. 좀 더 자유롭고 싶어. 내가 원하는 데로 노래부르고 싶어. 평의회 의장 따위가 아니라...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싶어. 하지만 이 곳에서는 내게 아무런 선택권도 주지 않아." 엘로이즈는 프란체스의 쓸쓸한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방긋 웃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 난 전승 후보자라서 자유로운 편이지만...아마 당신처럼 자유를 빼앗겨 버린다면...아주 슬플 것 같아요. 그 나무처럼 말라버릴지도 모르죠. 난.... 나무를 키워보고 싶어요. 나의 레플리카로 나무를 키워보고 싶어.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소망이에요." "쿡. 지금처럼 레플리카를 쓰다간 남아나는 나무가 없을 텐데..." 프란체스가 웃으며 말하자 엘로이즈는 샐쭉한 표정을 짓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참 이상했다. 프란체스는 심장이 고장났나 의심할 지경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웃을 수 있었지? 게다가 이 까만 머리의 순진한 여자 애를 보고 있자니 자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자신에 대해서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프란체스는 순간 허탈감에 빠져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이런 답답한 마음을 말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뿐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다는 것이 진심이었다. 그 때 엘로이즈가 가만히 어깨를 툭 쳤다. "알 것 같아요, 당신의 기분. 그러니까 나한테 얘기해 봐요. 마음 속에만 묻어두는 것보다 밖으로 꺼내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꽁꽁 묻어 놨던 이야기들, 나한테 이야기해 봐요." 프란체스는 놀란 눈으로 엘로이즈를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읽었나? 프란체스는 이내 빙그레 웃음을 띄며 말했다. "그럼, 그 잔소리 마귀 할멈부터 말해 볼까? 일로나 할머니는 말이야..." 까만 밤하늘, 그것과 같은 까만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며 프란체스는 유쾌하게 미소지었다. 그 날 밤. 소녀의 존재는 그에게 단 하나의 숨 쉴 수 있는 맑은 공기가 되었다. 웃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숨 쉴 수 있는 공간. 엘로이즈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소녀가 그에게 준 새로운 세계였다. // 자유를 얻게 된다면... // 엘로이즈는 참 이상한 여자였다. 프란체스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비인 가는 꽤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잘생긴 사람,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많았다. 못 생겼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없으니 참 대단한 가문 아닌가. 비인 가가 칭송 받는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모두 얼굴 생김새가 반듯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엘로이즈도 그런 비인 가의 유전자 덕을 본 것인지 오목조목 빠지는 구석이 없는 얼굴 생김새였다. 화려한 미모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단아한 생김새라고 해야할까. 다소곳하고 다정한 그녀의 성격에 무척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얼굴이 좋았다.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했다. 게다가 수수한 옷차림과 욕심 없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성격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만나면 만날수록 생각지도 못한 면을 보여주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얌전하고 부드러워만 보이는 그녀가 가끔씩 깜짝 놀랄만큼 열정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엘로이즈 자신도 모를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화속성 레플리카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마음 속에 빨간 불길처럼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에 임할 때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그런 점이 이상하게 느껴졌고 아주...사랑스럽게 보였다. 스콜라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수준이었다. 어른들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잔소리와 호통을 들을 일도 없었고 훨씬 여유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빡빡한 공부시간과 레플리카 연습 시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한가하다'라는 느낌을 받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 무엇보다 엘로이즈가 스콜라에 입학한 뒤로는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몹시 기뻤다. 엘로이즈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가 살아있고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그의 삶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 그 날은 프란체스가 스콜라에 재학한지 6년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스콜라의 밤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늦은 시간에 프란체스는 마음먹고 엘로이즈의 사택을 찾아갔다. 그녀의 소박한 성품 그대로 그녀는 조그마한 사택을 빌려 살고 있었다. 다른 대귀족의 사택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아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택이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사택 앞에 우뚝 서서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 그녀의 창문에 던졌다. 물론 유리가 깨지지 않을 만큼 힘을 조절해서 던졌다. 늦은 시간에 하인들을 깨워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몇 번 돌멩이를 던져보아도 엘로이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란체스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벌리고 노래를 중얼거렸다. "넓고 넓은 하늘에 반짝임이 어려..." 프란체스는 싱긋 웃으며 곧 등장할 엘로이즈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엘로이즈에게 레플리카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자고 있더라도 자신의 노랫소리에 깨어날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노래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테라스의 문이 열리더니 까만 머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엘로이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프란체스!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엘로이즈.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엘로이즈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프란체스는 바닥의 돌을 발로 툭툭 차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이어 까만 숄을 걸친 엘로이즈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또 마음이 답답한 거구나?" 프란체스는 말없이 웃으며 그녀를 근처의 벤치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은 엘로이즈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프란체스에게 말했다. "일로나 할머니께서 이제 좀 여유 있게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전히 예전처럼 빡빡하게 생활하고 있다며? 프란체스가 원한 거잖아. 여유로운 시간. 왜 그러는 거야?" "글쎄... 습관이 되어 버렸나 봐. 좀처럼 그게 잘 안 되네. 그래. 내가 그토록 원하던 건데... 나 자신이 길들여졌나 봐. 모범생 프란체스. 언제나 단정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프란체스. 너무 싫다. 이런 거. 하지만 일로나 할머니가 변한 건 너무 좋아." 프란체스는 씨익 웃으며 엘로이즈를 쳐다보았다. 엘로이즈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프란체스는 여전히 짓궂어. 그래도 할머니, 요즘은 정말 다정하신 걸. 예전 같지 않아. 에이드리안이 나타나고부터는 정말 달라지셨어." "응. 에이드리안도 곧 스콜라에 입학할 텐데... 나, 그 애한테 걸어보고 싶어. 이런 날 해방시켜줄 수 있는지. 약속했거든. 날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프란체스는 까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자신의 사촌 동생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생각했지만 에이드리안은 정말 매력적인 아이였다. 그의 화사한 금발과 투명한 파란색 눈동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밝게 미소지으며 사람의 마음을 훤하게 꿰뚫어 보는 듯 했다. 프란체스는 에이드리안이야말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완이 좋은 아이였고 또한 대속성 레플리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였다. [ 프란체스 형, 울지만 말고 내 말 들어 봐. 내가 스콜라에 입학하면 학생회를 열게. 난 평의회 의장 같은 거 관심 없지만 형처럼 싫지는 않으니까 내가 대신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 말고 힘내. ] 에이드리안은 어른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어쩌면 흘려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프란체스는 그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의 말에 믿음이 갔다. 엘로이즈가 숄을 여미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프라드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 에이드리안이 오면 재미있어질 거라고 하던가? 하긴 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고 있는 프란체스보다는 싸우는 재미가 있을 거야. 정말 우습지?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서 둘 다 승부 욕은 대단하다니까." "맞아. 둘 다 지기 싫어하지." 프란체스는 자신의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세 명의 소년을 생각하고는 쿡 하고 웃었다. 어린 나이지만 침착하고 냉정한 에스프라드, 그리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두 남자-물론 에스프라드와 유벨이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에이드리안, 어느 새 에이드리안에게 잡혀버린 성격 좋은 유벨. 세사람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는 아주 재미있어졌다. 특히 에이드리안이 등장하고부터는 일로나 할머니도 인자, 다정, 온화 등등 온갖 덕목을 갖춘 굉장한 사람으로 변했고 하나뿐인 그의 동생,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뒷바라지를 한다며 언제나 허둥거렸으며 에스프라드는 그 특유의 차가운 눈빛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변했다. 에이드리안은 가문에서도 차세대 기대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레플리카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였다. 항간에 '비인 가의 천재'라 불리며 벌써부터 그를 따르는 세력이 생기고 있었다. 본인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지만. 어떨 때 보면 에이드리안의 수완은 깜짝 놀랄 정도여서 어느 새 정신 차려 보면 어려운 일이 벌써 성사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금도 평범한 소녀 행세를 하고 있지만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프란체스는 엘로이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엘로이즈, 에이드리안이 날 해방시켜 주기 전까지는 계속 어리광 부릴거니까 받아줘야 해." "훗. 프란체스. 그건 내가 언제나 하던 일이잖아? 프란체스의 상담 선생 역할." 엘로이즈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프란체스를 바라보았다. 프란체스는 장난스레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엘로이즈, 나 말이야. 만약 지금 이런 답답한 생활에서 해방되면 진짜 자유롭게 살 거야. 음... 머리도 염색하고 옷도 이상한 옷 있잖아. 뭐 예를 들어 다 터진 옷이라던지... 그런 것도 입어보고 싶어. 여행도 많이 가고 싶고." "프란체스. 난 프란체스 회색 머리가 아주 좋은데... 다른 건 다 좋지만 머리카락만은 제발..." 엘로이즈가 입술을 꾸욱 다물어 장난스러운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세상 사람들이 알긴 알까. 언제나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행동하는 엘로이즈가 저런 우스운 표정을 지을 때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 프란체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가발을 쓰면 되잖아. 그래, 가발 좋다! 아, 도박장 같은 데도 가볼까?" "도...박장? 그런 곳은 나쁜 곳인데. 프란체스, 자유는 방종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나도 가보고 싶어."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다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결국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정말 그런 날이 왔으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며 마음껏 노래부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엘로이즈는 웃고있는 프란체스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에스프라드가 나서줘서 가문의 무거운 기대감에서 해방된 그녀였기에 언제나 프란체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만 올가미에서 빠져나온 느낌. 프란체스는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억눌려 있는 모습은 정말 안타까웠다. 그의 자유롭고 청량감 넘치는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엘로이즈는 프란체스가 눈치 채지 못하게 별에게 소원을 빌었다. '부디 프란체스가 넓은 대지와 같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 주세요. 그에게 넓은 자유를...'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5-03.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 나 무 ] // 어색하지만 당신의 따스한 눈빛에 용기가... // 화사한 금발의 소녀가 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스콜라 본관으로 통하는 대로를 걷고 있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수군거림에도 상관없이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의 소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아- 도대체 어디람? 유벨 오라버니를 괜히 떼 놓고 왔나?" 소녀는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득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학생을 쳐다보았다. 남학생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준 소녀는 챙 넓은 하얀 모자를 반듯하게 고쳐 쓰고 그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혹시... 프란체스 비앙카 로르 비인이라는 분을 아시는지..." "아아...예. 슈, 슈르트홀츠의 학생회장이신...그러니까 슈르트홀츠의 하, 학생회장이신데..." 남학생은 소녀의 눈빛에 그만 굳어버린 것인지 말을 더듬으며 답답하게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소녀는 순간 눈썹을 실룩이더니 다시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괜찮아요. 방금 생각이 났답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벌겋게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 남학생을 뒤로하고 소녀는 중얼거렸다. "흥! 프란체스 형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정말!" 그 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나 여기 있어!" 순간 소녀는 빙글 뒤돌아서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는 프란체스를 바라보며 눈금을 머금은 채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프란체스 오라버니!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 데리러 와주시지도 않고. 흑흑흑..." 프란체스는 갑자기 품에 안긴 소녀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한 얼굴을 하다 사람들의 시선에 급히 소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처롭게 울고 있는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는 단단히 품에 안겨 그에게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프란체스는 발끈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야! 에이드리안! 안 떨어져? 야! 다들 본단 말이야!' '훗. 보라고 이러는 거다, 왜?' 소녀는 장난스레 눈을 빛내며 프란체스의 옷깃을 꾸욱 쥐었다. 그렇게 그의 사촌 동생, 에이드리안은 그 날 무사히 스콜라에 입학했고 모범생 프란체스는 난생 처음으로 가십 기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물론 에이드리안의 장난에 골탕 먹고 끝내 그의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한 유벨의 엄청난 화풀이도 감당해야 했다. 뭐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쯤이야 감내해야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날, 프란체스는 하루종일 너무나 우울했다. ******** "맙소사! 프란체스? 진짜 프란체스야?" 검은 색의 스커트와 하얀 블라우스 차림의 엘로이즈는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자신의 방 앞에 서 있는 기묘한 옷차림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색의 가짓수를 샐 수 없을 정도로 알록달록한 머리에 검은 가죽 코트, 망사 재질로 된 이상한 모양의 셔츠, 그리고 가죽바지를 입고 있는 그 남자는 입술을 실룩이며 엘로이즈의 어깨를 툭 쳤다. "오우~ 뷰~~~리풀한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나의 달라진 모습이 아름다운 그대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프란체스... 쿡. 쿡쿡쿡....너, 너무 웃긴다...." 엘로이즈는 허리를 숙이고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반응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안 어울리지? 역시? 에이드리안이 학생회를 열어서 기껏 얻은 자유인데 역시 난 모범생 프란체스가..." "아니야! 너무 어울려. 프란체스다워." 엘로이즈는 방긋 미소지으며 프란체스의 어깨를 툭 쳤다. "자유를 얻으신 걸 축하드려요. 프란체스." 그 날, 모범생 프란체스는 사라지고, 시대의 풍운아 프란체스가 탄생했다. 엘로이즈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나타난 그는 이후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그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자유로운 모습에 끝내 부드럽게 미소를 드리웠다. // 돌이킬 수 없는 행복한 시절. 망가져 버린 소망. // 행복했다. 프란체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느낌. 그것은 실로 대단히 감동적인 기분이었다. 이제 자신을 속박하는 그 무엇도 없고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엘로이즈와 그는 이제 뒤에 서서 동생들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기로 했다. 에스프라드와 에이드리안은 앞에서는 다투고 뒤에서는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참 재미있는 두 사람이었다. 유벨이 옆에서 질투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에스프라드와 에이드리안은 일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학생회를 꾸려나가다 보면 여러 가지 충돌할 일이 생긴다. 그럴 때는 에이드리안이나 에스프라드는 마치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프란체스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그런 두 사람이 프란체스의 눈에는 아주 멋져 보였다. 날이 갈수록 엘로이즈와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사랑이었다. 곁에 없으면 쓸쓸하고 마음이 아픈 사랑이었다. 그녀로 인해 그의 행복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완성되기도 전에 무참히 깨어져버렸다. ******** 그 날은 날씨가 사나웠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장대같은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콜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프란체스는 이미 평의회에 진출해 있었다. 평의회 의원으로서 그는 집을 떠나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살고 있었다. 엘로이즈와는 7델라에 한 번씩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엘로이즈의 졸업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졸업 선물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몹시 고민했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결정했다. 프란체스는 작은 크리스탈 상자에 담겨 있는 반지를 꺼내 불에 비춰 보았다. 불빛에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그 모습이 마치 빨간 불빛 같아 프란체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청혼...받아줄까?" 이처럼 두근거리는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다. 프란체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그 때 쾅쾅하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프란체스는 이 늦은 시간에 누군가하며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지 상자를 서랍 안에 넣고 문 쪽으로 걸어간 그는 문을 향해 외쳤다. "누구십니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프란체스는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을 받으며 살며시 문을 열었다. "엘로이즈!" 비에 흠뻑 젖은 엘로이즈가 몸을 떨며 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프란체스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황급히 그녀를 일으켰다. 엘로이즈는 눈물을 쏟아내며 맥없이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프란체스는 머리를 흔들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녀에게 물었다. "엘로이즈, 무슨 일이야? 이렇게 비에 젖어서..." "프란체스...프란체스...이제 어떻게 해...이제 어떻게 해..." 엘로이즈는 눈을 감고 프란체스의 품에 안겨 울먹였다. 프란체스는 답답한 마음에 엘로이즈를 품에서 떼어내 물었다. "엘로이즈! 말을 해 봐. 무슨 일이야!" 엘로이즈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뺨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에스프라드가...에이드리안을 망가뜨렸어. 이제 어떻게 해...이제 어떻게해..." 엘로이즈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그의 품에 쓰러졌다. 프란체스는 넋 나간 얼굴로 엘로이즈를 끌어안았다. 설마 하고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엘로이즈를 품에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완벽한 행복은 이날 부서지고 말았다. ******** 따스한 햇빛이 비치는 날, 프란체스는 에스프라드를 찾았다. 에스프라드의 표정은 초연했다. 프란체스는 어느 때보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에스프라드를 다그쳤다. "왜 그랬어? 에이드리안이 뭘 잘못 했다고. 그 애, 자살하려고 했었다는거, 들었어?" "형이 상관할 일 아니에요. 그와 내 문제에요. 이건." 에스프라드는 희미하게 미소까지 띄우며 그에게 말했다. 프란체스는 순간 발끈하여 에스프라드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나 에스프라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프란체스는 입을 앙 다문 채 그에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너 도대체 왜 이래. 에이드리안과 그렇게 사이 좋았던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가 흥미가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프란체스의 손길을 거세게 밀쳐냈다. 그리고 타이를 바로잡으며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과 누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에이드리안과 내가 대립하면 형과 누님의 입장이 곤란해질 테니까. 아버님도 물론 허락하지 않으실 테고.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난 형을 좋아하니까. 아무 것도 변한 건 없어요. 형과 누님은 여전히 행복하게 지내면 되는 거에요." "에스프라드... 너 완전히 변했구나." 프란체스는 에스프라드의 차가운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에스프라드는 잔인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떨구고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와 에이드리안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이제 다시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버렸다. 프란체스는 씁쓸한 마음으로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 에스프라드의 저택에서 나온 프란체스는 곧장 스콜라에 있는 에이드리안의 사택으로 향했다. 엘로이즈가 핼쑥한 얼굴로 에이드리안에게 가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녀가 걱정되었다. 여리고 다정한 마음을 가진 그녀가 얼마나 상처받았을 지는 그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의 모습에 늘 흐뭇하게 미소짓던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의 사택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케이로프와 미라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되었다. 프란체스는 그들에게 목례를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에 다다랐을 즈음, 에이드리안의 방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가! 나가!! 나가버렷! 제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나가아!!!"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였다. 프란체스는 황급히 걸음을 재촉해 방으로 달려갔다. 방 안에는 유벨이 엘로이즈를 부축하고 있었고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있는 에이드리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 에이드리안이 살며시 한 손을 치워 프란체스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습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저 여자, 데리고 나가. 어서 데리고 나가. 다시는 내 눈앞에 데리고 오지마." 프란체스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충격과 허탈감이 뒤범벅된 감정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여윈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는지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숨을 쉬더니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팔로 눈을 가리고 말라버린 음성으로 말했다. "제발 나가 줘. 내가 미쳐버리기 전에. 제발..." 프란체스는 고개를 숙이고 넋 나간 듯 멍하게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엘로이즈를 부축했다. 곁에서 엘로이즈를 부축하고 있던 유벨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엘로이즈 누님, 당분간 오지 말라고 해. 에드, 상태가 많이 안 좋아." 프란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엘로이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상처받은 에이드리안과 그 모습에 더 상처받은 엘로이즈의 모습이 기가막힐 따름이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 프란체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했던 그들이었다. 프란체스는 행복했던 나날을 뒤엎어버린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웠다. ******** 노란 달빛이 아늑하게 비치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며 우수수 하고 소리를 내자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엘로이즈는 손으로 흙을 긁으며 속삭였다. "부디...내 눈물이 나의 레플리카를 식혀 주었으면... 너희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엘로이즈는 말을 맺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은 스커트가 바닥의 습기를 머금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미 흙으로 더러워진 블라우스 자락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엘로이즈는 눈물을 떨구어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가 키우는 나무들은 어느 샌가 죽어버린다. 아무리 정성껏 레플리카를 주어도 그녀의 기운에 나무들은 말라 버린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꿈. 엘로이즈는 고동색 흙 사이로 삐죽이 솟아 있는 어린 묘목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널 죽이려고 데려온 건 아닌데..." 그 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는 눈물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프란체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흐른다. "엘로이즈, 뭐 하는 거야? 어서 들어가자." "프란체스. 나무를 키우면...내가 나무를 잘 키우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에이드리안도, 에스프라드도 모두 상처받지 않은 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엘로이즈는 멍하니 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프란체스는 그녀에게 가져온 숄을 둘러주고 손을 어루만졌다. "엘로이즈. 자책하지 마. 너 때문이 아니잖아." "에이드리안은 내 얼굴 보려고도 하지 않아. 우리 가족이 에이드리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어. 아버지도, 에스프라드도, 나조차..." 엘로이즈는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프란체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눈동자로 그에게 말했다. "프란체스. 그 애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나도, 에스프라드도 그 애를 사랑했어. 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죽이려고 그 앨 데려온 게 아니야! 정말이야!!" 프란체스는 정신이 나간 듯 허둥지둥 거리는 엘로이즈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엘로이즈는 프란체스에게 무언가 대답을 들으려는 듯 그를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야. 알고 있었어. 에스프라드도,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모른 척 했어. 정말로 죄를 지었어. 그 애에게 처음부터 용서를 구했어야 했어. 나도...알면서도 모른 척했어. 깨고 싶지 않았어. 행복했는데...행복했었는데...흑...흑흑...." 엘로이즈는 끝내 프란체스의 품에 안겨 오열했다. 프란체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엘로이즈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엘로이즈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직이 말했다. "에이드리안이 오늘 스콜라에 나갔대. 많이 회복된 모양이야. 너무 자책하지 마. 엘로이즈, 네가 울면 마음 아파." 프란체스의 다독임에 엘로이즈는 정신을 차리고 애처롭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속삭였다. "프란체스는 넓은 대지 같아.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다 받아주고 용서해 주잖아. 나도...불이 아니라 대지와 함께 하고 싶어." 엘로이즈의 말에 프란체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어 주며 그녀가 심어 놓은 작은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품안에 당신을 안고 오늘도 밤하늘을 바라보네. 이대로 잠들 수만 있다면..." 진홍색의 빛이 퍼지며 나무에 스며들었다. 프란체스는 부드럽고 풍요로운 표정으로 다정하게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프란체스의 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당신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5-04.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 나 무 ] // 함께 하고 싶어, 엘로이즈. // 프란체스는 오랜만에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손도 안 대던 타이를 매려니 영 어색하고 잘 매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꼭 멋진 모습을 해야 했다. 프란체스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스물 하나. 스물 하나의 옷이 침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사실 그는 지금 약 3 도르동안 옷 갈아입는 놀이 아닌 놀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마음에 딱 드는 옷이 없었다.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프란체스는 싱긋 웃으며 거울 앞으로 갔다. 그가 고르고 고른 끝에 결정한 옷은 짙은 청색의 정장이었다. 이렇게 차려입고 있으니 예전의 '모범생' 시절의 자신이 생각났다. "훗. 이 모습으로 가면 평의회 동료들이 다 자지러지게 웃겠구만." 사실 그는 평의회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 늘 동네 불량배 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데다가 수시로 바꿔 쓰고 다니는 오색의 가발 때문에 종종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를 누가 감히 건드린단 말인가. 사실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귀족들의 꽉 막히고 답답한 생활 속에서 그만이 자유로웠다. 누구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찌되었든 그는 상관치 않았다. 이윽고 타이를 완벽하게 맨 프란체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바라보았다. "오우~ 이렇게 멋진 싸나이가 청혼을 하는데 누가 거절하겠어? 엘로이즈 양, 부디 나처럼 나이~스한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지 말라구." 프란체스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회색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내렸다. 오늘은 엘로이즈의 생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오랫동안 미뤄왔던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나이 들다 다른 남자에게 뺏기는 건 곤란하니까! ******** 프란체스는 오랜만에 와 보는 스콜라의 본관에 이상하리 만치 향수를 느꼈다. 평소에 얼마나 혐오했던 공간인가. 스콜라 재학 시절, 이 곳은 그에게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원치도 않은 학생회를 열어 억지로 하루하루 버텨나갔던 시간들.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나 나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싫어하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가슴이 설레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도 그렇고 새하얀 벽도 그렇고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 '그러고 보니 엘로이즈와 첫 키스, 여기에서 했었지. 나도 참 무드 하나는 꽝이군. 이런 데서 첫 키스라...' 프란체스는 싱긋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는 복도 끝의 커다란 문을 두 손을 쾅 밀어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이! 에이드리안!" 프란체스는 한 눈에 창가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년은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랬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웃으며 그를 맞아 주었다. "프란체스 형? 웬 일이야? 전갈도 없이." "그야 불쑥 나타나는 것이 신비한 남자, 이 프란체스 님에게 어울리기 때문이지. 오우, 오우~ 이제 아셨나?" 프란체스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자 프란체스는 방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은 소파에 그를 안내하며 말했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그런 옷차림이라니... 프란체스 형 아닌 줄 알았잖아." "나, 오늘 청혼하러 간다." 프란체스는 씨익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에이드리안은 약간 놀란 듯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두 손을 깍지끼며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축하해. 성공하길 빌어. 하긴, 엘로이즈 누님이 거절할 리는 없을 테니. 그런데... 헤르만 숙부가 허락하겠대?" "헤르만 숙부? 아아- 뭐 반대하시면...사랑의 도피라도 해버리지 뭐." 프란체스는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너 진짜 엘로이즈, 만나지 않을 거야? 그녀, 많이 마음 아파하고 있어. 에스프라드와는 달리..." "미안해, 형. 엘로이즈 누님을 만나면 또 험한 소리할 것 같아. 그냥... 당분간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나도 알아. 엘로이즈 누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거. 하지만 난 그 집 사람들이라면 지긋지긋해. 만나고 싶지 않아. 미안해."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인상을 쓰다 이내 프란체스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유쾌하게 말했다. "선물 뭐 해 줄까? 약혼 기념이라든지... 말해 봐. 뭐든 해 줄게. 나 이번에 동방에서 꽤 많이 벌어들였거든. 여유 있으니까 말해 봐." 애써 말을 돌리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프란체스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엘로이즈도, 에이드리안도 모두 노력하고 있었다. 속죄하고 용서하기 위해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세상에는 많다. 그들은 그들에게 닥쳐온 상황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프란체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그저 엘로이즈에게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그렇게만 말해 줘. 그럼 내가 그녀에게 전해 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최고의 선물이야." 프란체스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기분이 불편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엘로이즈 누님은 축복 받았군. 형 같은 사람한테서 사랑 받으니까. 따뜻하고...인정 많은.... 훗." 에이드리안은 포기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뒤돌아 섰다. 등뒤로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에이드리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띄웠다. "엘로이즈 누님에게 전해 줘. 행복 하라고." ******** "휴우- 이번에는 잘 되어야 할텐데..." 엘로이즈는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작은 삽으로 흙을 파내고 있었다. 집 앞의 작은 정원 한 모퉁이에 돌을 쌓아 만든 '엘로이즈의 나무밭'에는 아직까지 나무가 한 그루도 세워져 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5그루의 어린 묘목을 심었지만 또 다시 그녀의 화속성 레플리카의 기운에 말라버렸던 것이다. 엘로이즈는 이번에야말로 멋지게 나무를 키워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하고서도 내심 불안했다. 그녀의 레플리카는 전승 후보자치고 속성의 성격이 뚜렷해 좀처럼 제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엘로이즈는 의지를 굳건히 하려는 듯 소매를 걷으며 삽을 놀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엘로이즈는 갑자기 자신의 앞쪽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발견했다. "엘로이즈. 또 나무 심어?" "프란체스!" 엘로이즈는 따뜻하고 정겨운 목소리에 활짝 미소지으며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기저기 흙으로 더러운 옷을 손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프란체스, 우리 내일 데이트하기로 했잖아. 오늘은 무슨 일이야? 옷까지 갖춰 입고. 프란체스 같지 않아." 엘로이즈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하자 프란체스는 엘로이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그녀를 앉히고 자신도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가 끌어내리는 데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엘로이즈는 웃음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프란체스. 그렇게 앉으면 바지에 주름 생겨. 기껏 멋지게 차려입었는데." 프란체스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웃으며 삽을 들고 흙을 파냈다. 엘로이즈는 그의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그가 흙을 파는 광경을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나무가 흙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프란체스는 씨익 웃으며 엘로이즈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더 능숙하지? 네가 말라 죽이는 나무도 내가 다 살려놓잖아." "후후- 맞아. 프란체스. 이제 프란체스가 나보다 훨씬 능숙해. 난 언제쯤 제대로 나무를 키워볼까... 나무를 잘 키워서... 에이드리안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에스프라드에게도." 엘로이즈는 쓸쓸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보드라운 흙을 매만졌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표정에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묘목이 둘이나 남았잖아. 자기의 일은 자기 힘으로." "훗. 프란체스만큼 나도 나무 잘 심어. 사실 내가 사부님이잖아." 엘로이즈는 웃으며 삽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얼마를 팠을까. 엘로이즈는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프란체스를 올려다보았다. "프란체스. 흙 속에 뭔가가 있어. 딱딱한 게... 서, 설마 보물? 프란체스! 나 보물 찾았나 봐." 엘로이즈는 생각지도 못한 발견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삽으로 열심히 흙을 파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엘로이즈는 작고 투명한 크리스탈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바닥에 상자를 올린 엘로이즈는 상기된 얼굴로 프란체스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내가 진짜 보물을 캐다니..." 프란체스가 웃어 주자 엘로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살며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가 열리며 빨간 보석이 자리잡고 있는 은색의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엘로이즈는 당황한 표정으로 반지를 쳐다보았다. "반...지?" 놀란 표정으로 프란체스를 올려다 본 엘로이즈는 그의 장난스런 표정에 입을 벌렸다. "프란...체스?" "우리 결혼하자." 프란체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짤막하게 청혼을 했다. 엘로이즈는 충격을 받은 것인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엘로이즈의 어깨를 쳤다. "엘로이즈? 내 말, 들은 거야?" "응? 아아- 응, 들었지. 들었어. 그런데 저기...그게..." 엘로이즈는 어느 새 달아오른 얼굴을 돌리며 침을 삼켰다. 긴장한 것이 틀림없는 엘로이즈를 바라보며 프란체스는 즐거운 듯 미소를 흘렸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숙여 반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기...나한테...청혼한 거야?" "응." 프란체스는 이번에도 딱 잘라서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엘로이즈는 그만 휘청거리고 말았다. 프란체스가 그녀를 부축하기도 전에 자력으로 제자리에 선 엘로이즈는 굳은 얼굴로 허리를 숙여 옷을 털기 시작했다. 프란체스는 그녀의 행동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엘로이즈, 뭐 하는 거야? 어서 대답해 줘야지." "응? 아, 저기... 그게 청혼 받는데 옷차림이 이래서... 시, 실례잖아. 흙 때문에 지금 나, 아주 보기 싫을 텐데..." 엘로이즈는 잔뜩 굳은 얼굴로 꼼꼼하게 스커트와 블라우스에 묻은 흙을 털고 머리를 정리했다. 한참 옷매무새를 다듬은 엘로이즈는 꼿꼿하게 몸을 바로 세우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프란체스를 쳐다보았다. "뭐 해? 어서 청혼해 줘야지." "응? 아까 했잖아." "다시 해 줘. 나, 이제 준비 됐어." 엘로이즈의 부드러운 미소에 프란체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항복이라는 뜻으로 두 손을 든 채 어깨를 으쓱했다. 엘로이즈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와 같이 어깨를 으쓱해주자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지요, 레이디." 엘로이즈는 행복한 듯 미소지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지요. 대신 행복하게 해주세요. 계속 곁에 있어 주세요." // 함께 하고 싶었는데... 프란체스. //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약혼식 없이 바로 결혼하기로 서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의 미묘한 관계와 헤르만의 반대로 쉽게 결혼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많은 것을 결심한 상태였다. 다만 두 어린 동생이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못했던 두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좋아졌을 때 축복 받는 결혼식을 하자고 했다. '엘로이즈의 나무밭' 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우울한 표정으로 두 그루의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연한 베이지색 스커트와 갈색 스웨터 차림의 엘로이즈는 단정하게 빗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러워. 프란체스." 두 그루의 나무는 모두 프란체스가 심어 레플리카를 준 나무였다. 엘로이즈가 정성 들여 심은 나무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녀의 레플리카에 말라 버렸다. 엘로이즈는 스웨터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우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힐끔 물을 먹어 반짝이는 잎사귀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난 왜 이렇게 레플리카 제어가 안 되는 걸까. 휴우-" 순간 엘로이즈는 프란체스의 나무에 욕심이 생겼다. "다시 한 번... 레플리카를 써 볼까? 하지만 또 말라죽으면... 후우- 하지만 프란체스가 다시 살려주겠지. 프란체스라면...어떤 마음으로 노래할까." 엘로이즈는 미소를 지으며 하얀 물조리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 허공을 향해 천천히 들어올렸다. [ 사방에서 비치는 밝은 빛에 눈이 멀고 마음이 멀어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 커다란 세계는 작은 세상으로 좁혀지고 모든 것은 당신으로 다시 태어나네. 빛은 내게로 다가와 당신을 주었고 당신은 내게 세계를 주네. ... ] 오색의 빛이 나무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빛은 나무의 가지와 잎으로 스며들었고 흙 위로 마치 물결이 치듯 넘실댔다. 엘로이즈는 그 모습에 활짝 미소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세, 세상에! 레플리카가...레플리카가 제대로 스며들고 있어! 와아-" 엘로이즈는 환희에 찬 눈빛으로 빛을 머금고 있는 작은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일생동안 처음으로 불의 기운을 누르고 나무에게 제대로 된 레플리카를 주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무를 키워 보고 싶었다. 그러나 미숙한 자신의 레플리카 실력 때문에 지금까지 말라죽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마다 밤새 울었고 마음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나무에게 듬뿍 힘이 되어줄 레플리카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기쁘고 벅찬 마음에 엘로이즈는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떻게든 이 기쁜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프란체스... 프란체스!" 엘로이즈는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 섰다. 그러나 뒤돌아 서는 순간, 갑자기 심장 주변에 아찔한 아픔이 찾아왔다. 갑작스런 아픔에 엘로이즈는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왜, 왜 이러지?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엘로이즈는 눈을 깜빡였다. 눈 앞이 희미해졌다. 왜 이러는 걸까. 엘로이즈는 힘겹게 눈을 감았다. 순간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레플리카에서 언제나 느껴지던 불의 기운이었다. 무언가 계시가 내려지듯 머리 속을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사실에 엘로이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불... 불이...소원을 이루어주려고 해. 대자연에 사랑 받은 이, 로스페니르.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려 해. 이번에는 불이 로스페니르의 소원을 이루어 주려해." 서서히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멍하니 흙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저주가... 저주가 내게... 프란체스..."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5-05.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 나 무 ]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햇빛은 그녀의 붉은 반지도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붉은 보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엘로이즈는 눈을 감았다. "상냥해, 빛은. 대자연은 마음이 여려.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뤄 주려고 마음이 아파도 눈물 흘리며 슬픈 짓을 해버려." 엘로이즈는 눈을 뜨고 눈앞에 펼쳐진 넓은 초원에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아이들은 따뜻하고 고귀해. 나도...나무가 되었으면.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대지와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엘로이즈는 넋 나간 듯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사륵사륵 하고 풀이 밟히며 특유의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신발 밑으로 느껴지는 풀과 흙의 기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 천천히 눈을 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감격한 듯 미소를 띄었다.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도,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무도,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풀과 보드라운 흙. 모두가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람에 까만 머리카락이 날리자 엘로이즈는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그때 익숙한 발소리가 귀를 울렸다. 엘로이즈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뒤돌아 섰다. "프란체스. 나, 그림 같지? 오늘은 하늘도 나무도 바람도 너무 아름다워." 웃으며 다가온 프란체스는 웃고 있는 엘로이즈의 모습에 그만 얼굴을 굳혔다. 엘로이즈의 말대로 하늘 아래 초록색의 벌판에 서 있는 그녀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프란체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했다.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었다. ******** "또 죽어버렸네." 엘로이즈는 눈물을 머금은 채 슬픈 표정으로 말라죽은 나무를 흙에서 파냈다. 엘로이즈는 말라버린 나무를 뽑아 바닥에 놓고 나무로 인해 생긴 구멍에 손으로 흙을 메워 넣었다. 구멍이 어느 정도 평평해질 즈음 엘로이즈는 문득 자신의 손을 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프란체스였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그가 웃으며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엘로이즈, 손 다쳐. 장갑을 끼거나 삽을 쓰거나... 엘로이즈?" 프란체스는 엘로이즈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엘로이즈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팔로 다리를 두른 채 우울한 눈빛으로 말라버린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체스. 나 정말 바본가 봐. 왜 나무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걸까. 다른 이에게 사랑을 주어도 그는 받아주지 않아." 프란체스는 엘로이즈의 말에 이마를 찌푸렸다. 에이드리안의 이야기다. 그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엘로이즈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흔들고는 쾌활하게 웃으며 엘로이즈의 등을 두드렸다. "엘로이즈. 나무들이 바보라서 그래. 네가 너무 사랑해 주니까... 네 사랑이 너무 크니까 견디지 못하고 말라버린 거야. 뭐, 오늘은 내가 한가하니까 손수 나무를 심어주지. 아하하하하---" 프란체스는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흙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작은 삽을 들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엘로이즈는 그의 모습에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무릎에 얼굴을 기대었다. 삭삭... 철제 삽과 흙이 부딪히며 특유의 소리를 냈다. 엘로이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프란체스의 대지가 울리는 소리다. "프란체스, 난 프란체스를 만나서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해. 프란체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 따뜻하고 너른 대지와 같이 언제나 날 조건 없이 감싸줘. 에이드리안이나 에스프라드에게도 언제나 든든한 형으로서 울타리가 되어 줬지. 그래서 내가 행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프란체스는 엘로이즈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왜 그래. 늘 힘들다고 징징대던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어?" "응. 프란체스는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늘 근사하게 완성시켜주니까. 나는...프란체스한테 어떤 존재였어?" "오늘따라 짓궂은데, 엘로이즈? 다 알면서 왜 물어. 엘로이즈가 없었다면 난 벌써 숨막혀서 죽어버렸을걸? 내겐 공기보다 소중한 존재야, 엘로이즈는." 프란체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엘로이즈의 검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체스는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흙을 파고 작은 묘목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삽으로 흙을 떠서 아직은 여린 줄기에 덮어주었다. "엘로이즈. 좀 있으면 비가 온대. 네 레플리카를 식혀줄 정도로 많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니까 이번에야말로 잘 키워봐. 물도 주고...거름도 주고." "그럴 수는 없어. 시간이 없거든. 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 엘로이즈의 말에 프란체스는 나직하게 웃으면서 묘목 주위의 흙을 단단히 누르며 말했다. "나야 의회에서도 늘 보고 데이트도 하고... 자주 만나는데 뭘 그래. 내가 보기엔 이번 나무들은 아주 강한 놈들인 거 같아. 여간해서는 잘 안 죽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잘 자랄 것 같아." "그래도 안 돼. 나, 저주받았거든."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귓 가를 맴도는 순간, 프란체스는 흙을 떠올리던 손길을 멈추고 멍하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로이즈는 눈을 내리깐 채 쓸쓸하게 미소를 띄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프란체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삽을 움직여 흙을 옮겼다. 그리고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쿡, 엘로이즈. 내가 아무리 가벼운 놈이고, 농담을 좋아한다지만 그런 건 재미없어. 다음 번에는 좀 더 재미있는 걸로 해 봐. 그럼 웃어줄 테니까." "...정말이야." 엘로이즈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프란체스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랫입술을 꾸욱 다물고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놀렸다. 보드라운 흙이 작은 삽에 실려 나무 줄기 위에 뿌려졌다. 다시 삽에 흙이 담겨 나무 위로 뿌려지고...다시 뿌려지고... 어느 새 떨어진 눈물 방울이 흙을 적시며 녹아 들어갔다. 프란체스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라도 내려줬으면....그랬다면 내 사치스러운 눈물이 그녀에게 보이지 않을 텐데... 마음 아파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내 눈물이 보이지 않아야 할텐데... // 나무가 되고 싶어... // "엘로이즈! 너 에이드리안한테 갔었다며?" 프란체스는 잔뜩 화난 얼굴로 그녀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엘로이즈는 약간 피곤한 얼굴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그녀는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 프란체스." "괜찮아? 에이드리안이 험한 소리는 안 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프란체스의 표정에 엘로이즈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대었다. "후후- 따뜻하다. 프란체스는 언제나 따뜻하구나." "엘로이즈..." 프란체스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엘로이즈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애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어. 더 이상 기회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아직도 많이 아파하고 있어. 마음이 아파. 에스프라드도, 에이드리안도 왜 서로에게 멍을 주는 걸까. 에이드리안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와 내 가족은 그 애에게 빚을 진 거야. 행복해졌으면...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엘로이즈는 프란체스에게서 떨어져 천천히 테라스로 걸어갔다. 프란체스는 무거운 마음에 그녀에게 작은 위로의 말도 해주기가 벅찼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그녀가 상처받지 않을까. 엘로이즈는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프란체스! 나 아주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 "무슨 생각인데?" 프란체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로이즈는 손을 뻗어 집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파란 잎을 가지마다 드리우고 있었다. "프란체스. 나, 아무래도 나무를 키우는데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냥 내가 나무가 되는 거야. 그리고 노래를 하는 거지. 그럼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노래하는 나무가 되는 거야. 근사하지? 아니면 이 나무, 저 나무를 떠돌아다니면서 노래를 하는 것도 멋질 것 같아." 엘로이즈는 마치 꿈을 꾸는 듯 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몹시 아름답고 마음이 아파 프란체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엘로이즈. 내가 이뤄줄게. 네가 원하는 건 모두. 내가 이뤄줄게." "으응..." 엘로이즈는 눈물 가득한 눈을 들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행복해 보이는 것인지 불행해 보이는 것인지 프란체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만으로도 프란체스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 가장 아름다웠으니까. // 다시 만나자... 프란체스. // 그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햇살이 집 앞 정원 구석구석을 비춰주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잔잔한 바람도 무척 기분 좋았다. 프란체스는 그 날 새로 들여온 꽃씨를 정원에 심을 생각이었다. 프란체스는 엘로이즈에게 따뜻한 다갈색 숄을 둘러주고 그녀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커다랗고 평평한 돌 위에 그녀를 앉혔다. 엘로이즈는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프란체스. 돌이 따뜻해. 오늘 날씨, 정말 좋다. 하아- 공기도 시원하고..." 엘로이즈의 즐거운 표정에 프란체스는 꽃씨가 담긴 봉투를 흔들며 웃었다. "오늘 이 꽃씨를 다 심으면 다음 봄에는 이곳에 꽃이 흐드러지게 필 거야. 아주 예쁜 꽃이래, 엘로이즈. 평의회 동료 녀석이 준 건데, 아주 보기 좋은 꽃이래." 프란체스는 유쾌한 몸짓으로 꽃씨를 봉투에서 꺼내 흙 위에 조심스레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몸짓만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스프라드한테...말했다며? 뭐라고 그래, 그 녀석? 널 얼마나 아꼈는데..." "에스프라드, 웃기만 했어. 아니 울었을지도... 나, 참 못난 누나야. 그렇지?" 프란체스는 엘로이즈의 말에 숨을 들이마시며 꽃씨에 집중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바보같이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았다. 눈이 따끔따끔한 게 자꾸 아파 왔다. 프란체스는 애써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행복하게 살자. 얼마가 되었든 누구보다 행복하게." "훗. 나, 지금도 아주 행복한 걸. 프란체스는 가만히 보면 욕심쟁이야. 더 행복해지면 벌받을 걸? 후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하늘보다 더 보고 싶은 게 있다. 그녀는 프란체스의 뒷모습을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았다. 힘들다며 늘 투정부리며 다가와 늘 그녀를 더 챙겨주고 떠나는 프란체스. 그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생이지만 그를 만나서 자신의 생은 의미를 찾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프란체스, 나 말이야...나... 내가 죽거든 꼭 땅 속 깊이깊이 묻어 줘. 그러면 죽어서도 당신과 같이 있는 느낌이 들 것 같아. 당신과 함께라면 난 죽어도 죽지 않은 거지. 응? 프란체스." "바보. 아직 멀었어.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해. 나중에..." 프란체스의 심술난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날씨도 정말 좋고 프란체스의 모습도 잘 보이고 아주 기분이 좋았다. "날씨 좋다. 여행가고 싶어. 동방이나 서방으로... 어릴 때 가보고 한 번도 못 가본 걸." "봄이 되면 같이 가자. 맛있는 거 잔뜩 싸가지고." 엘로이즈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먹을 거라니? 내가 말한 건 여행인데... 피크닉이 아닌데. 프란체스는 지금 소풍을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가끔씩 어린애 같은 모습이 보일 때마다 너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하다. 그가 들으면 화내겠지? 남자들은 귀엽다는 말 싫어한다던데... 아니야, 그냥 웃으며 넘어갈지도 몰라. 프란체스 말대로 혹시 생각보다 나, 오래 살지도 모르겠는걸? 그럼 프란체스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겠네? 후후- 나중에 에스프라드와 에이드리안이 우리 아이를 위해 잔뜩 장난감을 사올지도 몰라. 그럼 육아실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둘 다 물건 사면 잔뜩 사버리니까 육아실이 장난감으로 넘쳐날지도 몰라. 유벨은 성격이 좋으니까 아기랑 좋은 친구가 되어줄 거야. 삼촌이 세 명이나 되다니 정말 멋질 것 같아. 그리고...프란체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이 되는 거고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내가 되는 거지. 봐, 프란체스! 정말 멋진 이야기지? 그렇지?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다. 당신이랑 나랑 작고 아담한 집을 하나 사서... 프란체스, 듣고 있어? 프란체스, 여기 좀 봐. 고개 좀 돌려 봐. 응? 아! 뒤돌아본다. 훗, 왜 그렇게 놀란 얼굴하고 있는 거야? 응? 안 들려. 크게 좀 말해 봐. 아아- 또 우네. 정말 어린애 같아. 그래서 프란체스는 내가 곁에서 챙겨 줘야... 아, 맞아. 내가 그 말, 했던가? .....사랑해....프란체스.... 우리...다시 만나자... 어느 때든...프란...체....스.... 프란체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있는 엘로이즈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느 새 떠나버린 그녀는 아직도 따뜻했다. 따뜻해서 마치...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엘로이즈!!!" // 사랑 받고 있었어, 넌... // "고마워요. 형. 끝까지 누님을 지켜 줘서..." 창백한 표정의 에스프라드가 검은 상복 차림으로 그에게 말했다. 창 밖의 어두운 기운에 방안도 무척 어두워 그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프란체스는 에스프라드의 어깨를 툭 하고 치며 말했다. "엘로이즈가 행복하라고...그렇게 전해 달랬어." "누님이야 언제나 걱정만 안고 살았으니까..." 순간 작은 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프란체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눈물 같은 거 체질에 안 맞다며?" "그랬죠. 여행, 잘 가세요.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고."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어? 나야 여행이 체질인 사람이라고." 프란체스는 웃으며 말했다. 발걸음을 돌리는 그의 뒤에서 에스프라드가 말했다. "형. 누님을 만나면...안부 전해 줘요." 프란체스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쌀쌀한 밤바람에 마음마저 차가워지는 듯 했다. 프란체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엘로이즈의 묘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묘지가 보일 즈음 그는 그녀의 묘비를 바라보고 있는 하얀 옷차림의 소년을 발견했다. 금발의 소년은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끼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소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엘로이즈. 용서가 문제가 아니었어. 넌 여전히 네 동생들에게 사랑 받고 있으니까...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해도 넌 여전히 사랑 받고 있어. 네가 사랑해 준 만큼." // 먼 어느 곳에서... // "아저씨, 노래 너무 멋졌다고 우리 엄마가 가져다 주래요." 바쁜 시장통의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아있던 청년은 꼬마가 내미는 것을 보고 기분 좋게 눈썹을 실룩였다. 작은 꼬마가 내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파이를 받아든 빛 바랜 회색 머리의 청년은 거나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 으하하하하하--- 나의 노래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모양이지? 귀엽고 앙증맞은 꼬마야." "응! 나 아저씨, 바본 줄 알았는데 노래 엄청 잘 하잖아요. 나, 아저씨 엄청 좋아졌어요." "오우~ 오우~ 안 돼!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결혼은 곤란하단다. 꼬마야. 다른 신랑감 찾아보렴. 으하하하하!!" 거칠 것 없이 편안해 보이는 연한 갈색 바지와 셔츠 차림의 청년은 벤치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며 꼬마에게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올 일 있으면 또 노래 불러주마. 예쁘게 커라!" "응! 나중에 또 와요! 장돌뱅이 아저씨!" 회색머리의 청년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걸음을 옮겼다. 동방의 시장은 언제나 활기찼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그 같은 뜨내기가 찾아들어도 웃으며 반겨준다. 바닥에 천을 깔아놓으면 근사한 상점하나가 세워진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온갖 물건들이 사거니 팔거니 하며 사람들의 손에서 오간다. 그리고... 정말 감동적인 것은 사람들의 소리다. 시장의 역동적인 소리가 귀를 울린다. 생선 가게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 야채 가게 아주머니의 가늘지만 분명한 목소리, 과일 가게 아저씨의 묵직한 목소리.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주 다양한 음색을 지니고 있다. 그 아름다운 울림에 프란체스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곳에는 레플리카란 존재는 없지만 다른 어떤 감동이 존재한다. "과일이나 하나 사 먹어볼까? 오늘은 수입도 좋았으니. 흠. 아르헨 사람들, 여기 와서 노래만 불러도 돈 벌 텐데... 후훗." 청년은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채 과일 가게로 향했다. "아저씨! 과일 하나 주슈. 어디 보자... 어, 모롤라가 있잖아? 하하. 이거 귀엽고 깜찍한 쥬느비에브가 좋아한다던 건데... 아저씨! 이 거 주슈." 턱수염이 아주 인상적인 과일 가게의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으며 싱싱한 모롤라를 골라 청년에게 내밀었다. "허. 오늘따라 이 비싼 게 잘 팔리네. 아까 그 예쁘장한 남자애도 이 비싼 걸 10개나 사갔다니까. 어? 저기 가네. 저 소년. 생기기는 참 예쁘게도 생겼두만." "그래요?" 청년은 껍질을 대충 까서 모롤라를 덥설 베어 물며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 시장을 가로지르는 금발의 소년이 보였다. 청년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모롤라를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옆에서 과일 가게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고! 이 아까운 걸 떨어뜨리다니..." 그러나 청년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몹시 놀란 표정으로 소년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어째서 여기에...설마 잘못 본 거겠지." // 함께.... 함께.... // "어휴- 배도 부르고...오늘은 어디서 잘까나." 프란체스는 시장에서 벗어나 마을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커다란 평상 위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해가 지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빙긋이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다 평상 바로 옆에 솟아 있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둘레가 적어도 1 레트(주. 참조)정도는 될 것 같은 엄청나게 큰 나무였다. 가지마다 붙어 있는 초록색 나뭇잎이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히야- 엘로이즈가 이 정도 나무를 키우려면 몇 백년은 있어야 겠다." 프란체스는 빙긋 웃으며 나무를 매만졌다. 그 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부드럽게 나무를 쓰다듬자 그에 대답하려는 듯 나무는 가지를 살며시 흔들었다. 사라락 사라락- 순간 프란체스는 나무가 흔들리며 내는 기묘한 음률에 입을 벌렸다. 나무가 노래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선율. 사라락 사라락- 다시 한 번 나무가 흔들리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장엄하고 섬세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생애 최고의 감동. 가슴 뭉클한 환희. 프란체스는 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엘로이즈. 너... 여기 있었니? 프란체스는 눈물 머금은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던 자신만의 그녀. 먼 곳을 떠돌아 겨우 자신을 찾은 모양이었다. 프란체스는 어느 새 흘러내린 눈물을 흩어내고 미소지어 주었다. "응. 근사해. 엘로이즈. 네 말대로 아주 근사해. 내가 심은 나무에도 와 줄거지? 먼 곳에 가지는 않을 테니까..." 프란체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아름드리 나무를 바라보았다. "데리러...와 줄 거지?" 따뜻한 엘로이즈의 숨결이 느껴졌다. 프란체스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 [ 파란 초원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 파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너른 대지를 발 아래 뉘인 행복한 나무가 있어. 나무는 사랑스럽게 노래했지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노래. 그 노래가 지금 전해져 날 데리러 왔다고 하네. 사랑하는 당신을 지금 바라보고 있어 날 찾아 먼 곳까지 온 당신은 오늘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네 이제 당신 곁에...언제나 당신 곁에... ] 날 데리러 와 줘...엘로이즈... 그래 줄 거지? 영원히 함께 하자... 함께...언제까지나... 제91음(第91音) ....and the Past(1) 비인 가에서의 무거운 분위기가 서서히 벗겨져 가고 있었다. 사람의 적응 력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쥬느비에브는 이런 상황 이 반가웠다.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는 정말 싫었다. 에이드리안의 평소의 모습을 바라보면 다행스러운 기분이 든다. 사실 비인 가에서 에이드리안 은 너무 무서웠다. 차가운 눈빛과 어두운 목소리. 쥬느비에브는 그런 에이 드리안이 너무 무서웠다. 그가 곁에 있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 좋 았다. 자신의 틀에 그를 맞추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쥬느비에 브는 에이드리안이 웃어주길 원했다. 이른 아침부터 쥬느비에브는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있을 체리욜 파쳰의 준비로 요즘은 거의 정신이 없었다. 체리욜파쳰이란 스콜라 전 학 생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1년에 한 번 치러지는 체리욜파 쳰은 스콜라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다.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게 하는 랭크를 매기는데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테스트였던 것이다. 심사위 원도 대귀족과 평의회 출신의 쟁쟁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쥬느비에브는 이번에 각오가 대단했다. 자신의 약혼자, 에이드리안은 통산 랭킹이 스콜 라 2위라고 했다. 정말 엄청난 성적이 아닌가! 미라벨과 케이로프도 각각 5위와 6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안느마리 또한 저번 랭크를 받기 전에는 14 위라는 대단한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끝에서 2등이라는 그야말로 불명예스러운 랭크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성적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창피했던 것이다. 하여튼 이번에는 열심히 해서 꼭 좋은 성적을 받 고 싶었다. 그래서 에이드리안에게 듬뿍 칭찬을 받을 생각이었다. 벌써부 터 기대에 부풀어 있는 쥬느비에브였다. "랄랄라-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나. 우웅~ 이번에 바꾼 연습실 커튼 색 이랑 같은 옷 입어야지. 핑크색이 좋아. 귀여운 핑크." 쥬느비에브는 드레스룸으로 달려가 핑크색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하얀 색 코트를 꺼내 몸에 대 보았다. 의상실에서 딱 맞게 만들어진 하얀색 코 트는 하얀 눈이 연상되는 질감이었다. "눈사람 같지 않을까. 헤헤." 쥬느비에브는 웃음을 삼키고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드레스룸에는 옷이 넘쳐날 만큼 많고 방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매 식사시간마다 난생 처음 맛보는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고 자기 전에는 따뜻하고 매끄러운 물에 목 욕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약혼자도 있다. 에이드리안 은 그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었다. 그 때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분명 에이드리안이었다. "에이드리안, 들어와요!" 언제부터인가 에이드리안은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고 있었다. 조심성 없는 자신 때문에 여러 번 곤란한 일을 겪었던 에이드리안이었기에 충분 히 이해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짙은 녹색 코트의 에이드 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쥬느비에브에게 다가왔다. "아직 준비 덜 했어?" 에이드리안은 아직 평상복 차림의 쥬느비에브를 보고 말했다. 쥬느비에브 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부드러워 보이 는 금발에 예쁘장한 생김새. 자신의 약혼자는 늘 그렇듯 참으로 감탄스러 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에이드리안이라는 존재가 신 비하게 느껴졌다. 그가 살아서 움직이고 말을 건넨다. 그가 자신의 약혼자 다. 그가 곁에 있다. 쥬느비에브는 그만 감동해 버렸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에이드리안의 뺨에 가져갔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슴 한가득 벅찬 감동으로 물들여진다. 에이드리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 박였다. "쥬르?" 쥬느비에브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이렇게 있으니까 현실감이 느껴져요. 에이드리안이 내 곁에 있다는 게. 내 가족이라는 게. 그래서 나, 많이 행복하고 기뻐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복이니까. 그래서 가끔씩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이러고 있으니까 현실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내가 행복하 다는 것도." 쥬느비에브는 미소를 띄며 눈을 감았다. 그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에게 가족이 생기리라는 것도, 이렇게 행복해지리라는 것도. 눈앞에 까만 생머리의 꼬마 아이가 어른거렸다. 그 꼬마는 행복하지 못했 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기에는 하루하루 숨쉬는 것조차 너무 힘 들었다. 그 때는 그랬다. ******** ******** "마망? 마망!!" 까만 생머리의 꼬마 아이는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집 안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분명 사과파 이를 구워주겠다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했는데 어머니는 어디로 가버 린 건지 보이지 않았다. 꼬마가 쿵닥쿵닥 뛰어다닐 때마다 마루바닥이 비 걱삐걱거렸다. 꼬마의 집은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이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꼬마의 가족은 이곳에서 무척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아버지가 사라졌다. 그 날 밤, 꼬마는 밤새 문을 걸 어 잠그고 울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다. 꼬마는 아 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꼬마는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일체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 슬픈 얼굴을 하셨 기 때문이다. 꼬마는 집에서 나와 집 근처의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꼬마의 집은 마을 에서도 비교적 떨어진 곳에 있었다. 꼬마가 매일 사탕가게 옆으로 이사가 자고 졸라도 아버지는 조용한 곳이 좋다며 빙그레 미소지으셨다. 한참을 달렸을까 꼬마는 결국 포기하고 풀밭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힝- 마망. 마망, 나 배고픈데... 혹시 사탕 가게 가셨나? 하지만 마망은 절대 나 혼자 두지 않는데... 힝-" 꼬마는 토실토실한 뺨을 실룩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때 언덕 아래 로 익숙한 동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 거기 있니?" "어어?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쥬느비에브는 평소에 어머니가 시키던 데로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빤히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전에 시장에서 알게 된 아주머니다. 그리 자주 왕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격 좋은 아주 머니였다. 그런데 늘 혈색 좋던 아주머니가 오늘따라 안색이 파리했다. 꼬 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머니는 침울한 얼굴로 꼬마를 보더니 이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물에 빠져서 자살하셨어." 꼬마는 멍하니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꼬마가 생애 두 번째 겪는 죽음이었다. ********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났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몇몇 동네 아주머니, 아저 씨들이 치러주었다. 꼬마는 며칠째 어머니가 쓰던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배고프면 장례식이 끝나고 동네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준 과 일과 빵을 먹었다. 잠이 오면 그대로 쓰러져서 잤다. 꼬마는 많이 울었다. 너무 울어서 기운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눈물 이 솟았다. 꼬마는 초가 다 떨어져 어두컴컴한 방을 둘러보다 힐끗 과일 바구니를 쳐다보았다. 이제 먹을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아 주머니, 아저씨들이 나누던 말이 생각났다. [ 이런 여자 애를 데려가서 뭐에 쓰게요? 내 딸애 뒤치다꺼리하기도 벅차 다고요. ] [ 데려가서 집안 일 시키기에도 나이가 너무 어리고... 그냥 마을 보호기관 에 맡기면 어때? ] [ 마을 보호기관에서 맡기엔 나이가 많다고요. 거기서는 아주 어린애만 맡 아준단 말이에요. 뭐 우리가 신경 쓸 필요 있나요? 누군가가 알아서 챙겨 주겠죠. 신경 쓰지 말아요. ] [하긴 장례를 치러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칫, 돈 좀 많은 집이 었으면 내가 맡았을 텐데. ] 꼬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졌다. 꼬마는 아직 어렸지만 어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꼬마는 이제 갈 곳도 있을 곳도 없다는 말이었다. 어머 니가 보고싶었다. 분명히 꼬마와 약속했었다. 시장에 가서 맛있는 사과를 잔뜩 사서 달콤한 사과파이를 만들어 주기로. 설탕시럽도 듬뿍 뿌려서 구 워주기로 약속했었다. 어쩌면 시장 갔다가 기분이 좋으면 예쁜 리본도 하 나 사올지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짓말쟁이였 다. 꼬마는 울먹이며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 "마망- 마아망- 흐어어엉- 파파- 파파아-- 엉엉엉- 흐어어엉-" 밤하늘이 까맣게 채색될 때까지 꼬마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울다 가 지치면 자고 또 다시 깨어나면 울었다. 새벽 무렵이 되었을 때는 너무 울어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꼬마는 침대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바 구니 안의 빵을 우걱우걱 씹었다. 입안에서 씹히고 있는 빵이 무슨 맛인 지도 모르고 꼬마는 빵을 씹어 삼켰다.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따라 꿀꺽 꿀꺽 마셨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꼬마는 물을 마셨다. 얼굴이 끈적끈적했 다. 꼬마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어디서 놀다와서 얼굴이 더러워져 도 다정하게 웃으며 얼굴을 씻어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 옷이 더러워져도 빨아줄 사람이 없다. 옷이 찢어져도 기워줄 사람이 없다. 맛있는 음식도 따뜻한 집도 이제는 모두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꼬마는 다시 울음을 터 뜨리며 침대 위에 엎드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작은 집에 아이의 울 음소리만 거칠게 메아리쳤다. ******** 5 델라째 되던 날. 꼬마는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음식은 벌써 떨어진 지 오래였다. 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개울로 달려갔다. 개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었 다. 머리도 오랫동안 안 감아서 들쭉날쭉했고 얼굴도 얼룩덜룩한 것이 너 무 보기 싫었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와 있던 뺨이 홀쭉해 보였다. 꼬마는 몸을 기울여 어푸어푸하고 세수를 했다. 물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까만 머 리카락도 개울물에 담가 몇 번 헹궜다. 어머니가 감겨주실 때처럼 손으로 막 문지르기도 했다. 꼬마는 세수와 머리 감기를 마치고 물을 뚝뚝 흘리 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간 꼬마는 정신 없이 서랍을 뒤져 수건을 찾아냈다. 수건으로 머리를 둘둘 말고 꼬마는 옷도 찾아서 갈아입었다. 보기 싫은 갈색의 원 피스였다. 꼬마는 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옷에 꼬마는 늘 불만이 많았다. 어머니는 늘 보기 싫은 우중충한 색으로 만 옷을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꼬마는 늘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어머니가 다시는 새로 옷을 만들어 주시는 일은 없을 거 라고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났다. 꼬마는 머리에 감고 있던 수건 한 자락 으로 눈물을 슥슥 닦고 다시 서랍을 뒤졌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기 전 에 언제나 서랍을 뒤졌던 기억이 났다. 얼마 안 가 꼬마는 커다란 돈주머 니를 찾을 수 있었다. 꼬마는 돈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꼬마의 관념으로는 얼마나 많은 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색 동전이 잔뜩 들어있어 왠지 모르게 돈의 액수가 많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금색 동전을 몇 개 쥐고 꼬마는 주머니를 다시 잘 오므려 서랍 깊숙이 넣어두 었다. 꼬마는 머리의 수건을 떼어내고 어머니의 화장대로 가 빗을 꺼내 슥슥 빗어 내렸다. 빗질이 잘 안되었지만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꽤 성공적 으로 마칠 수 있었다. 꼬마는 바로 집을 나와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시장 가는 길을 꼬마는 훤히 알고 있었다. 언제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 을 잡고 갔던 길이다. 그 때는 정말 행복했었다. 자상하게 웃는 멋진 아버 지와 예쁜 어머니. 그 때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분명 자신이 세상 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꼬마 는 혼자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토닥토닥 걸어갔 다. 이제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꼬마는 잘 알고 있었다. 시장은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참 많았다.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어버 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없으니까. 자신 혼자 뿐이다. 꼬마는 얼른 눈가를 소매로 닦았다.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지난 5델라 동안 꼬마는 깨달았다.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꼬마는 동 전을 손에 꼭 쥐고 두리번 두리번 상점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과일 가게 를 발견했다. 꼬마는 과일 가게로 걸어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과일을 둘 러보았다. 맛있어 보이는 과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중 꼬마는 자신의 눈을 끄는 노란 열매를 발견했다.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가 커다란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먹어봤던 열매였다. 무척 달고 맛있었다. 침이 꼴 깍 넘어갔다. 문득 꼬마는 과일 가게 아저씨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꼬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저씨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서웠다. 언제나 어머니가 물건을 샀었다. 꼬마는 물건 사는 것이 처음이었다. 이내 꼬마는 용기를 내어 주먹을 꼬옥 쥐고 아저씨에게 물었 다. "아, 아저씨. 이 거, 이 노란 거 주세요." 아저씨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꼬마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가 호통을 치듯 말했다. "꼬마야. 이 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아니? 너 돈은 있어?" 꼬마는 움찔 눈물이 솟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펴 금색 동전을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순간 아저씨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허 참. 꼬마야, 이렇게 큰돈을 어디서 얻은 거야? 설마 훔친 건 아니겠 지?" 아저씨의 말에 꼬마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 수상쩍은 표정 으로 동전을 누런 상자 속에 집어넣고 노란 열매 하나를 종이 봉지에 넣 어주었다. "옛다. 모롤라 한 개." 꼬마는 종이 봉지를 받아들고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난생 처음으로 물건 을 사보는 꼬마였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묘한 성취감을 느끼며 꼬마는 과일 가게에서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꼬마는 향긋한 과일 냄새에 다시 뒤돌아보았다. 사과가 보였다. 어머니가 사과파이를 만들어 주신다고 했었 는데... 꼬마는 용기를 내어 다시 과일 가게의 진열대로 다가갔다. "아저씨. 사과...주세요." 꼬마는 다시 동전 하나를 과일 가게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금색 동전을 보고 아저씨는 험악하게 얼굴을 굳혔다. "꼬마야, 네 어머니 어디 계시니? 이 동전 어디서 났어?" 꼬마는 아저씨의 험상궂은 얼굴에 움찔해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이내 꽥 소리를 질렀다. "마망이 준 거에욧! 마망이 준 거란 말이에욧!!" 꼬마가 씩씩거리자 과일 아저씨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동전을 받아들고 은색 동전 하나와 갈색 동전 몇 개를 건네주었다. "사과 10개정도면 되겠지?" 꼬마는 아저씨가 건네준 동전을 휘둥그래 쳐다보았다. 금색 동전으로 노 란 열매는 하나밖에 못 샀는데 사과는 저렇게 많이 주고 동전까지 주다 니. 꼬마는 아저씨가 종이봉투에 넣어준 사과를 받아들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사과가 너무 무거웠다. 꼬마는 손마디가 빨개지는 것도 모르고 사과와 노란 열매를 들고 빵 가게로 갔다. 빵 가게는 아주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꼬마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길쭉한 빵을 가리키며 동전을 내밀 었다. 아주머니는 과일 가게 아저씨처럼 미심쩍은 눈으로 꼬마를 쳐다보 며 빵과 거스름돈을 건네주었다. 꼬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 갔다. ******** 집으로 돌아온 꼬마는 침대 위에 과일을 와르르 쏟아 놓았다. 사과가 데 굴데굴 굴러다녔다. 꼬마는 침대 위에 뛰어올라가 주머니의 동전을 쏟아 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노란 열매를 손안에 움켜쥔 꼬마는 그제야 손 바닥이 빨갛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바닥에 붉게 피가 스며있었 다. 꼬마는 침을 꼴깍 삼키고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문질렀다. 그러나 붉은 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따끔따끔한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꼬마는 이내 포기의 한숨을 쉬고 노란색 열매의 껍질을 벗겨냈다. 작은 손으로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오돌도돌한 껍질을 벗기자 즙 많은 과육이 드러났다. 꼬마는 먹음직스러운 노란색 과육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덥석 깨물었다. 달콤함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꼬마는 갑자기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서럽고 외로웠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혼자라는 생 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꼬마는 노란 열매를 금세 먹어치우고 사과를 깨물 었다. 사과가 너무 달았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었을 사과파이도 너무 달콤 했을 것이다. 너무 달콤해서 또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을 지도 몰랐다. 그 럼 어머니는 웃으며 다음에 또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을 것이다. 꼬마는 눈물을 삼키며 열심히 과일을 먹었다. 펑펑 눈물을 흘리며 꼬마가 잠들었을 때는 노란 열매와 사과 6개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제92음(第92音) ....and the Past(2)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핑크색 원피스를 입으니 썩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때는 생각해보지도 못 한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핑크색 원피스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뜨는 옷이었다. 그녀는 밝은 색을 좋아했다. 어둡고 칙칙한 색보 다 밝고 경쾌한 색이 좋았다. 어렸을 때 늘 칙칙한 색의 옷만 입어서 일 까. 아니면 어두운 색의 옷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서 일까. 그녀는 밝은 색이 훨씬 기분이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거울을 보고 재빨리 리본을 가져 와 한쪽 머리를 쫑쫑 땋아 하얀 리본으로 동동 동여맸다. 나머지 생머리 를 잘 빗어 어깨 위로 드리운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거울 속의 자신 에게 브이 자를 그려주었다. 하얀 코트를 챙겨 입은 쥬느비에브는 다시 거울 속의 자신을 흘끗 쳐다보았다.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높은 귀족 가문의 레이디처럼 보인다. 쥬느비에브는 새침 뗀 표정으로 거 울 속의 자신에게 무릎을 까딱 굽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쥬느비에브랍니다." 만족스럽게 인사를 마친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에이드리안이 기 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곳은 분명 연습실이 아니라 상점가였다. 쥬느비에브는 말에서 내리는 에이드리안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분명 연습실에 데려다 준다고 했었다. 요즘 그녀는 체리욜파 쳰 연습으로 몹시 바빴다. 이렇게 놀고 있을 틈이 없는데!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말고삐를 상점가 관리인에게 건 네주고 있었다.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둥 지시 사항을 전하고 돈을 건네 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성큼성큼 걸어가 에이드리안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에이, 나 속았어. 말 태워준다고 해서 따라왔더니 엉뚱한 데 데려 오고. 나 바쁘단 말이에요. 연습해야 하는데..." 쥬느비에브가 뚱하게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씨익 웃으며 손으로 상점가를 가리켰다.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잘 따라다니면 오늘 레슨은 내가 해줄게." 그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끄덕 였다. 케이로프와의 레슨 성취도를 대략 98로 보았을 때, 에이드리안과의 레슨은 거의 736에 해당된다. 쥬느비에브는 이상하게 에이드리안이 무언 가를 가르쳐주면 어마어마한 집중력으로 깨우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미라벨이 공인 검증한 사실이었다. 미라벨이 1 모네동안 가르쳤던 예법을 에이드리안은 한 순간에 가르쳐 버린다. 미라벨의 주름살 원인인 쥬느비 에브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원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미소를 띄우며 뻣뻣한 걸음으로 걸어가 에이드리안에게 팔짱을 꼈다. 태연한 척 하지만 언제나 쑥스러운 행동이다. 쥬느비에브는 부끄러움을 만회하려는 듯 생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가시죠~ 약혼자 씨." "그럼 갈까요, 약혼녀 양."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은 서로 미소를 교환하며 걸음을 옮겼다. 맑고 화창한 날의 기분 좋은 데이트다! 얼마나 걸었을까. 순간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까만 머리카락의 소녀가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을 걸어오던 그녀도 문득 자신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다가오던 소녀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쥬, 쥬느비에브?" "...세...실리아?" 쥬느비에브도 낮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눈짓을 했다. 나름대로 한껏 멋을 낸다고 낸 소녀는 입고 있는 옷과 하는 행동으로 보아 아무리 봐도 평민이었다. 얼굴은 미인이라고 하기엔 좀 뭐 하지만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해줄만했다. 물론 그의 기준에서는 너무나 미달이었지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 "으응... 어릴 때 아는 사람인데..."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세실리아를 만나게 되다니. 에이드리안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자신의 불행했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말았다. 도, 도망가면 안 될까? 우웅~ ******** ******** 꼬마는 놀라운 정도의 적응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돈은 상상외로 엄청난 액수였다. 서랍 깊숙이 많은 돈주머니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꽤 셈을 잘 하는 꼬마였지만 끝까지 돈을 세어보지 못할 정도였다. 꼬마는 그 돈으로 과일과 빵을 사 먹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돈을 들고 시장에 나가 사왔다. 어린 꼬마가 큰 액수의 돈을 내밀어도 시장 사람들은 처음에만 약간 이상한 눈으로 보지 그 이후에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어서 꼬마로서는 차라리 속이 편했다. 꼬마의 하루는 이랬다. 일찍 일어나 개울가로 가 세수를 하고 시장에서 사온 칫솔로 이빨을 닦는다. 너무 비싼 칫솔을 샀더니 나무로 만들어진 칫솔 몸통이 손안에 착 달라붙어 기분이 좋았다. 전에 쓰던 칫솔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전에 쓰던 칫솔은 개울가에서 실수로 떨어뜨려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하여튼 비싼 칫솔인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시장에서 파는 칫솔 중에서 제일 좋은 물건이었다. 아직 돈 관념이 분명치 않은 꼬마라 싼 것인지 비싼 것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칫솔로 이빨을 닦고 난 다음에는 머리를 감는다. 거품이 잘 나는 머리용 비누도 시장에서 사왔다. 거품 낼 때 눈이 조금 따갑기는 하지만 감고 나면 좋은 냄새가 났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나서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는다. 전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집으로 들어가 온 방에 물을 떨어뜨리고 다녔지만 똑똑한 꼬마는 금새 깨달았다. 수건을 개울가로 가지고 가면 방에 물을 떨어뜨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머리에 수건을 동동 매고 집으로 들어간 꼬마는 물이 흐르지 않게 머리를 잘 닦은 다음 아침을 먹는다. 물론 시장에서 사온 과일과 빵이 전부다. 우유도 있다. 배부르게 아침을 먹고 난 다음은 꼬마의 자유시간이었다. 밖에 나가 풀밭에 앉아 하루종일 하늘을 쳐다 볼 때도 있고 꽃을 따러 돌아다닐 때도 있다. 가끔씩은 벌레와 장난을 칠 때도 있었다. 그 것들이 모두 재미없어지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방에 있는 이상한 책들을 꺼내 읽는다.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꼬마는 글을 아주 잘 읽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는 책은 너무 재미 없었다. 알 수 없는 내용만 잔뜩 있었다. 가끔씩은 청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꼬마는 지루함에 못 이겨 낮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날 무렵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또 다시 심심함에 밖으로 나가보지만 이미 해가 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씩 시장에 가기도 하지만 꼬마는 거의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해가 지는 모습은 언제나 두근거렸다. 해가 사라지면 세상이 금새 캄캄해진다. 꼬마는 바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지루하고 쓸쓸한 생활이었다. 그래서 꼬마는 될 수 있으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다. 하루가 짧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우는 시간도 적을 테니까. ******** 시간이 한참 지났다. 사실 얼마나 오랫동안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꼬마의 하루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무서운 날이 찾아왔다. 그 날도 꼬마는 시장에 가는 중이었다. 빵이 다 떨어졌던 것이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꼬마는 빨리 다녀오려고 종종걸음을 걸었다. 시장은 그날따라 몹시 한산했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보다 하고 꼬마는 동전을 놓칠세라 꼬옥 쥐고 토닥토닥 빵 가게로 갔다. 언제나 그랬듯 꼬마가 빵을 가리키고 동전을 건네자 주인 아주머니가 빵을 종이 봉지에 싸서 건네주었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위에서 소리가 났다. "어머, 넌 그 때 그 꼬마 아니니? 자살한 여자의..." 꼬마는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여자를 쳐다보았다. 전에 어머니의 장례식에 있었던 몇 안 되는 동네 아주머니 중 한 사람이다. 꼬마는 빵 봉지를 품에 끌어안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주머니는 빵 봉지를 보며 인상을 썼다. "빵 샀구나? 그런데 무슨 돈으로 산 거니?" 아주머니는 이상한 눈으로 꼬마를 쳐다보다 빵 가게 아주머니에게 눈을 돌렸다. "얘, 무슨 돈으로 빵 산 거예요?" "글쎄, 집이 잘 사나 보지? 매일 금화를 들고 와서 빵을 사가니까. 저 꼬마만 오면 거스름돈이 죄 없어진다니까." 빵 가게 아주머니의 무심한 대답에 아주머니가 더욱 인상을 썼다. "금화?" 꼬마는 아주머니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빵 봉지를 꾹 잡고 다짜고짜 돌아서 뛰어갔다.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생각나 꼬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뛰어갔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꼬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을 마셨다. 그 아주머니는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았을까. 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빵 봉지를 뜯었다.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꼬마는 창 밖의 달을 쳐다보았다. 달이 참 예뻤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의 곁을 떠나고 이 집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지만 이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고 싫었다. 눈물이 마를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건지 걸핏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꼬마는 물을 조금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꼬마는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입에 물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창 밖으로 달려가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창 밖을 본 순간 꼬마는 깜짝 놀라 몸을 숙이고 말았다. 전에 장례식장에서 본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아까 시장에서 본 그 아주머니도 있었다. 꼬마는 놀라 두리번거리다가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나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꼬마가 잠금 장치에 손을 대는 순간, 문은 벌컥 하고 열리고 말았다. 꼬마는 무서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집 안으로 들어온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주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꼬마를 홱밀쳐 냈다. "아주 웃긴 녀석이로군. 집에 돈이 있다는 얘길 왜 안 해?" 한 아저씨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꼬마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른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이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집 안이 엉망이 되는 것을 보며 꼬마는 서랍을 뒤지는 한 아저씨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만지지 마! 우리 집이야! 만지지 마!" "이게 귀찮게!" 아저씨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꼬마를 거칠게 밀어냈다. 어른의 강한 힘에 꼬마는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꼬마는 넘어지면서 부딪힌 곳에 스며드는 아픔과 알 수 없는 분노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만지지 마! 만지지 마! 만지지 마! 만지지 마! 만지지 맛--!!" 꼬마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꾸라졌다. 쓰러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머리 속에 맴돌았다. [ 쳇, 이렇게 돈을 숨겨 놓고 우리한테 감쪽같이 속여? ] [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가 제 어미 장례까지 치러줬는데 웃긴 꼬마라니까요. ] [ 그럼 이 꼬마는 우리가 번갈아 가며 맡기로 하고 돈은 나눠 갖도록 하지. 나중에 좀 나이가 들면 어딘가에 보내버리면 되니까. 돈 얘기는 우리 끼리만 아는 거야. 다들, 알았지? ]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꼬마는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집이었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곳이었다. 꼬마 혼자서 주욱 지켜왔던 집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꼬마 혼자서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꼬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은 불태워졌고 꼬마는 이 집 저 집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 12모네가 세 번 지나고, 꼬마는 이제 소녀가 되었다. 벌써 일곱 번째 집을 옮긴 소녀는 여덟 번째로 머물 집으로 짐을 가지고 가고 있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낡은 회색 가방에 옷 두세 벌이 전부였다. 까만 생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내린 소녀는 전에 살던 집의 아주머니가 어디선가 구해준 빛 바랜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그녀의 발에는 너무 큰 구두를 신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좋은 인상을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차피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헛기침을 하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쥬느비에브에요." 문을 두드리고 한참이 지나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초조하게 문 앞에서 서성이다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낡은 나무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을 조심스레 보던 소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 안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렇게 문을 세게 두드렸는데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소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순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소파에 앉아 있던 주인 아저씨가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냐. 남의 집 문은 왜 그렇게 세게 쳐? 쯧, 하여튼 못 배워먹은 것이..." "흥, 내버려둬요. 그래도 저 애 덕분에 돈 좀 벌었잖아. 얘, 2층에 다락으로 가. 거기가 네 방이야." 아주머니가 천으로 손톱을 닦으며 말했다. 경박스러운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소녀는 12 모네를 세 번 보내면서 인내심만을 키워왔다. 이 정도 참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소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에 발을 디디던 소녀는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발견하고 침을 삼켰다. "세, 세실리아. 아, 안녕?" "어머, 쥬느비에브잖아. 오늘부터 오는 거야?" 어린 나이에 벌써 옅게 화장까지 한 세실리아는 입을 빼쭉거리며 내려왔다. 그리고 소녀의 어깨를 툭 밀쳐내며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입술에 걸었다. "휴- 부모님이 없어도 돈이 있으니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여튼 복도 많으셔. 넌 빨리 결혼이나 하는 게 좋겠다. 언제까지 우리가 널 돌봐 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세실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흥! 자기 걱정이나 하시지!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소녀의 예상대로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대놓고 자신에게 고아라느니 못 배워먹은 애라느니 손가락질을 하는 건 여사였고 집안 일조차 고스란히 소녀의 몫이 되고 있었다. 이 집 부부의 유일한 자식인 세실리아도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 외모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소녀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복하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해 야단맞게 하든지 시장에 가서 예쁜 옷을 사와 입고 자랑하듯 걸어 다닌다든지 보고 있으면 유치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부모님이 계시기에 당연히 누리는 권리였다. 자신도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분명 사랑 받는 아이가 되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날이면 소녀는 으레 자신의 다락으로 와 밤새 눈물을 흘렸다. 행복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제93음(第93音) ....and the Past(3) 그 날 소녀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이제는 돈 관념이 철저해져서 물건 흥정하는 것도 제법 잘하는 소녀였다. 소녀는 아주머니가 일러준 물건을 다 샀나 하고 메모지를 꼼꼼하게 살피며 길을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던 소녀는 뭔가 달콤한 냄새에 멈춰 섰다. 하얀 색으로 채색된 집에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소녀는 달콤한 냄새에 더욱 배가 고파졌다. 소녀는 집으로 걸어가 창가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녀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세 명의 가족이 다정하게 테이블에 둘러앉아 사과파이를 먹고 있었다. 소녀는 돌아서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소리 죽여 울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그녀가 예상한데로 아주머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넌 도대체 뭐 하는 애니?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 고작 시장 보기 하나도 제대로 못해? 뭐 하는데 시간이 이렇게 걸린 거야? 배고파 죽겠는데. 혹시 남자애랑 시시덕거린 건 아니겠지?" 소녀는 아주머니의 속사포 같은 잔소리에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연거푸 뱉어냈다. 괜히 대들었다가는 그 날 저녁도 못 먹게 된다. 오랜 경험의 노하우랄까. 소녀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 방에서 나와 장바구니를 뒤지던 세실리아가 인상을 썼다. "뭐야? 돈이 모자라잖아? 너, 잔돈은 어떻게 했어?" "거기 바구니 안에 있잖아. 오늘 야채 가격이 좀 비싸서 잔돈이 좀 적을거야." 소녀는 얼버무리듯 말을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와 세실리아가 투덜대며 장바구니에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올라가도 될 때다. 소녀는 가만히 소리나지 않게 발꿈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 소녀의 저녁 식사는 주인집 가족의 식사가 끝난 다음 이루어진다. 소녀는 주인집 가족들과 한 번도 같이 식사해 본 적이 없었다. 8번 집을 옮기면서 그녀는 항상 혼자 식사를 했다. 오늘도 방금 장을 봐 왔으니 식사시간 까지는 한참 시간이 남았다. 방에 돌아온 소녀는 원피스 치마 자락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종이 봉투에 담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과 파이였다. 혹시 생길 일에 대비해 소녀는 치마 안쪽에 커다란 주머니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가끔 시장에서 사탕 같은 것을 사와 숨겨오곤 했다. 용돈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끔 편법을 써야했다. 오늘 동네의 한 집에서 본 사과파이가 너무나 맛있게 보여서 소녀는 바로 시장에 가서 파이를 샀다. 하지만 마침 파이가 다 나가서 새로 굽는 바람에 소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귀가 시간도 늦어지고 거스름돈도 많이 줄어버렸다. 소녀는 봉지를 뜯어 사과 파이를 꺼냈다. 그리고 한 입 물었다. 소녀는 사과 파이 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망이 해주던 맛이 아니야." 소녀는 슬픈 눈으로 사과 파이를 쳐다보다 이내 눈물을 톡 하고 떨궜다. 정말로 원하는 건 사과 파이가 아니었다. 함께 먹어줄 누군가였다. 아까 그 집에서 본 것처럼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먹는 사과 파이를 원했다. 함께 식사해 줄 '진짜 가족'을 원했다. '진짜 가족'이 생기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있었을 때처럼 아주 행복하고 따뜻하리라. 소녀는 멍하니 사과파이를 보다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혼자 먹는 건 너무 쓸쓸하고 우울했다. 눈물이 파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나중에, 나중에 가족이 생기면 꼭 같이 사과 파이 먹을 거야. 꼬옥 같이 사과 파이 먹고 말거야." 파이 맛이 왠지 짜졌다고 생각하며 소녀는 우적우적 파이를 씹어 삼켰다. ******** 한편 세실리아의 질투 아닌 질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이상하게 소녀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같은 검은 머리여서 그런 건가? 소녀는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가끔씩은 너무 피곤하기도 했다. 소녀는 동네 소년들에게 알게 모르게 인기가 있었다. 소녀가 고아라서 동정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소녀의 예쁘장한 생김새 때문에 그럴 지도 몰랐다. 하여튼 그 또래의 소년소녀들이 그렇듯 아직은 마음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기라 서로서로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쉽게 단정짓고는 했다. 문제는 세실리아가 마음에 두고 있는 한 동네 소년이 소녀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소녀로서는 반갑지 않은 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소녀는 그 소년이 좋지 않았다. 한 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이 들만큼 그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녀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난 내 진짜 가족이 되어 줄 사람을 좋아할 거야. 응. 그래서 그 사람만 좋아해야지." 소녀는 벌써 나름대로 연애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가 원치 않는 삼각 관계는 꽤 심각한 사태로 진전되고 있었다. ******** 사건의 발단은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소녀의 유일한 외출 핑계인 시장보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소녀는 마을 광장에 있는 한 무리의 소년을 만났다. 그 중에는 소녀를 좋아한다고 소문난 바로 그 소년도 있었다. 소녀는 늦게 들어가면 또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소년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쥬느비에브." "으응?" 소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한 달음에 달려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소년들의 무리 쪽으로 끌고 갔다. 소녀는 당연히 화가 났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우린 친한 사이도 아닌데. "이 거 놔. 아프단 말이야." 소년은 광장에 소녀를 데려다 놓고 나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소녀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소년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씨익 웃으며 다른 소년이 들고 있던 붉은 색 표지의 책을 가져와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오오- 다정한 나의 당신이여- 당신은 새벽녘에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꽃과 같소- 오오- 아름다운 나의 당신이여-"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소년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소녀는 멀뚱멀뚱 소년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뭐하는 거람. 책을 읽어주는 건가? 참 착한 소년이다. 하긴 요즘 독서를 너무 하지 못했다. 집에서 일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 가끔 아저씨의 책꽂이에서 몰래 책을 빼와 읽곤 하지만 들켰을 때 아주머니의 잔소리가 문제였다. 소녀는 아주머니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지끈지끈한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 동안에도 소년의 낭독은 계속 되었다. 그 때 멀리서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번뜩 정신을 차려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머니가 나 여기서 놀고 있는 걸 알고 세실리아를 보냈나? 오늘 저녁도 없구나. 배고픈데. 한 순간에 몹시 우울해진 소녀였다. 세실리아는 한 달음에 뛰어와 곧장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힘껏 팔을 후려쳤다. 짝! 소녀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곧 이어 뺨이 욱신거렸다.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세실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자신의 뺨을 때렸다. 분명했다. 소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따지려고 드는 순간, 책을 읽던 소년이 앞으로 나서 세실리아에게 외쳤다. "세실리아, 이게 무슨 짓이야? 정말 형편없구나, 너." "너야말로 생각이 없는 애구나. 쥬느비에브가 어떤 앤 줄 알지? 고아라고. 부모가 없어서 우리 집에 들러붙어 사는 애라고! 저런 애를 좋아하다니 정신 좀 차려!" "뭐라고? 쥬느비에브가 어때서 그러니? 너보다 훨씬 나아. 쥬느비에브는 착하고 예쁘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 세실리아가 바락바락 소년에게 대들고 있었다. 소년 또한 못지 않게 그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소녀는 눈을 끔뻑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 소녀였다. 소녀는 한숨을 쉬며 장바구니를 손에 쥐다가 소년이 던져버린 책에 눈길이 갔다. 소녀는 신나게 말다툼을 하는 소년소녀를 내버려두고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시집이었다. 주루룩 훑어보던 소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에서 본 글씨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소녀는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미스페르 디테 로스페르로냐 스로냐테..." 한 쪽을 거의 다 읽어내려 갈 때 즈음 소녀는 문득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년과 세실리아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이 환성을 질렀다. "히야- 그 문자는 레플리카 사용자들만이 읽을 수 있다는 고대 문자잖아! 쥬느비에브, 굉장하다-" 소년의 칭찬에 소녀는 멋쩍어 머리를 긁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칭찬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세실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말도 안 돼. 쥬느비에브 따위가 레플리카를 쓸 수 있을 리 없잖아. 레플리카는 귀족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거라구. 쥬느비에브가 꾸며서 그냥 제멋대로 읽은 거 뿐이야!" 세실리아의 말에 소녀는 발끈했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세실리아에게 외쳤다. "아니야! 나 이 글씨 읽을 수 있어. 파파가 가르쳐줬단 말이야." "흥! 그럼 네 아버지가 레플리카 사용자였단 말이니? 네 아버진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남자라고! 얼굴만 멀쩡하지 대인기피증에다 직업도 없었잖아! 멍청이! 평민 주제에 너도 참 웃기구나." 세실리아의 말에 소녀는 그만 폭발해 버렸다. 소녀는 다짜고짜 달려가 세실리아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파파를 욕하는 건 용서 못 해! 이 바보탱이!" "뭐, 뭐 하는 거야? 이 주제도 모르는 애가!" 소녀와 세실리아는 뒤엉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둘러싸고 있던 소년들은 놀라 어른들을 부르러 갔고 곁에서 지켜보던 소년은 말리지도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 소녀는 그 날 밤, 또 한 번 부모 없는 서러움을 느껴야 했다. 뒤늦게 몰려온 어른들은 모두 소녀만을 몰아붙였다. 부모 없는 애가 역시 행동도 괴팍하다며 쏘아붙였고 그 소리에 눈을 흘기던 소녀는 결국 어른들에게 한 대씩 머리를 맞아야 했다.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던 소녀는 다시 자신이 묵고 있는 다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억지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주인 아주머니의 옆에서 빙긋이 웃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소녀는 밤새도록 울었다. 온몸이 아프고 열이 났다. 서럽고 분해서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패자였다. 그리고 다음 날, 소녀는 집에 들어선 마을 관리인을 보았다. 소녀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마을 관리인은 마을에 숨어 있는 도둑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그리고 하얀 주머니에 가득 들어 있는 동전을 보였다. 소녀는 그 주머니가 자신의 집에 있었던 그 돈주머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소녀는 말없이 주인 부부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집에 있던 돈을 강제로 가져간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소녀가 그 돈을 훔쳤다고 거짓 고발을 했던 것이다. 소녀는 억울했다. 하지만 그녀를 변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을 나눠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도둑으로 지목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간사하게 미소짓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밤, 소녀는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다. 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치른 어머니의 장례는 거짓 장례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저 물에서 건져 올린 옷을 땅에 파묻음으로서 장례식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시신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귀찮고 성가신 일일 뿐이라며... 소녀는 잔인하고 지긋지긋한 마을에서 벗어나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동전 몇 개를 달랑 들고. ******** ******** "쥬르?" 에이드리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퍼뜩 눈을 떴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보고 도리도리 얼굴을 흔들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는 그 때와 참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화장이 더 진해졌다는 것과 옷이 아주 뭐랄까 가볍다고 해야 할까, 퇴폐적으로 변했다고 할까. 오늘 그녀는 자극적인 빨간색의 코트 차림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세실리아 쪽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실리아는 눈웃음을 치며 다가와 쥬느비에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런, 쥬느비에브. 반갑다. 너도 스콜라 구역에 놀러왔나 보지? 하긴 평민이 이런 번화가에 올 일은 잘 없으니까. 그 때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보아하니...요즘은 잘 있나 보네?" 세실리아가 비웃는 듯 한 미소로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는 한 쪽 입술을 실룩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은 요즘 꽤 돈이 많이 들어와서 2 모네에 한 번쯤은 여기에 쇼핑 하러 와. 넌 더 자주 오나 보지? 옷이며 신발이며... 하긴 남자에게 꼬리쳐서 얻어낸 거겠지만. 너 같은 게 뾰족한 수가 있니?" 세실리아는 노골적으로 쥬느비에브를 훑어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자신보다 몇 곱절이나 좋은 옷차림의 쥬느비에브가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겁이 났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도둑으로 몰린 일은 정말 에이드리안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흘끗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냥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세실리아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슬슬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자신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사람이나 건방지게 행동하는 사람은 절대 용서 못 하는 그였다. 세실리아의 베베 꼬는 말투는 에이드리안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흘끗 눈짓을 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물었다. "너하고 무슨 사이야?" "에, 에이드리안. 그게..."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친구? 그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집 딸? 뭔가 좀 이상했다. 라이벌? 그녀는 전혀 라이벌 의식을 가지지 않았으니 그것도 합당치 못했다. 쥬느비에브가 한참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제94음(第94音) ....and the Past(4)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쩍 벌리고 세실리아를 쳐다보았다. 제발 에이드리안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때 그만 그쳐주었으면! 그가 화나면 그녀로서는 말릴 도리가 없었다. 지금도 사실 평소 에이드리안을 생각할 때 엄청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 뒤 가리지 못하고 세실리아는 샐쭉거리며 혀를 놀렸다. "그 쪽 남자 분도 보아하니 얼굴 반반한 것이 꽤 돈 많은 사람 같은데 쥬느비에브 너 참 운도 좋다. 설마... 어머, 몸이라도 판 건 아니지? 하긴 가진 거 하나 없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어릴 때도 늘 남자애들 한테 꼬리나 치고 다녔지. 그런데 이 분은 아시니? 너 도둑질했다는 거." 세실리아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에이드리안 앞에서 저런 상스러운 소리를 하다니. 그것보다 에이드리안이 알아버렸다! 자신이 도둑으로 몰렸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버렸다! 그 때 동네의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 주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닦아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얼굴에 놀라 다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 냉랭한 눈동자는 그가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분명 자신에게 다그칠 게 분명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코트 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쥔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상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쥬르, 말해 봐. 저거 뭐야? 저런 천박한 것하고 무슨 관계야?"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친구는 아니고 말고. 저런 친구를 뒀다가는 1시르(주.참조)만에 말라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안느마리 같은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세실리아 같이 나쁜 여자 애가 친구라면 정말 인생이 슬플 것 같았다. 그런데 에이드리안은 도둑질에 대한 것은 왜 묻지 않는 걸까?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어버렸나? 쥬느비에브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자 에이드리안은 다시 슬쩍 물었다. "그럼 뭐야. 너 괴롭히던 애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답은 못 하고 그저 멀뚱하고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볼을 부풀리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으며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너, 죽고 싶니?" 곱상한 얼굴에서 나온 섬뜩한 말에 세실리아는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파란 눈동자에서 나오는 싸늘한 냉기에 한순간 몸에 한기가 돌았다. 세실리아가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에이드리안의 눈빛이 보통 평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었던 자의 무게감 있는 눈빛을 알기에 그녀는 너무 무지했다. 세실리아는 오기를 부리며 이내 화를 냈다. "뭐야! 하여튼 같은 것끼리 논다니까. 이 봐요, 뭘 모르나 본데 나한테 잘 보여야 할걸요? 난 남작 가의 자제 분과 깊은 연분이 있단 말이에요. 내말 한 마디에 당신 같은 평민들은 그야말로 낙엽 신세예요. 옷만 번드르르 입었다고 잘난 체는. 평민한테 아무리 돈이 많아봤자 그게 그거지." 쥬느비에브는 세실리아의 말에 눈을 감았다. 세실리아는 아마 삶을 포기 한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이 저런 소리를 듣고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찔끔 뜨고 그를 곁눈질했다. 그는 탁한 음성으로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그냥 가자. 상대할 가치도 없잖아."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 다행이었다! 사실 비인 가문의, 그것도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대단한 대접을 받고 자란 에이드리안이었기에 세실리아 같이 막 나가는 타입은 한번도 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언제나 사람들의 추종과 복종을 받고 살아온 에이드리안이었다. 세실리아의 상스러운 소리에 그는 딱 기가 막힌 듯 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상대하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알게 된다면 정말 나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창피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쨌든 싫었다. 그에게 당당해지고 싶었다. 만약 에이드리안이 없었다면 세실리아에게 싸움을 걸었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에이드리안 앞에서 머리를 잡아당기며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엄청난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질려 버릴 것이다. 그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꾸욱 참기로 결정했다. 쥬느비에브는 세실리아를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세운 장본인이 그녀라는 것도. 세실리아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고생스럽게 살았던가. 툭 하면 심술부리고 화내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꾸욱 붙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순간 세실리아가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확 잡아당겼던 것이다. "야! 누굴 무시하고 그래?" "아야-" 쥬느비에브는 세실리아의 억센 손에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져 질질 끌려갔다. 단정하게 묶어 놓은 리본이 스르륵 풀려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머리에 전해져 왔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아파!" 쥬느비에브는 거세게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서운 힘으로 머리를 잡아채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눈을 흘겨? 우리 집에서 널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남자한테 빌붙어 사는 주제에....아악!" 짝 하는 소리가 나고 곧 이어 세실리아의 비명소리가 났다. 쥬느비에브는 한 순간에 자유로워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고 멀뚱멀뚱 세실리아를 쳐다보았다. 세실리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세실리아의 벌겋게 손자국이 난 얼굴과 에이드리안의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가 세실리아의 뺨을 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날이라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너, 어디서 그딴 천박한 짓을 하는 거야?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 죽고 싶어? 어딜 감히!!" 에이드리안은 분풀이를 하려는 듯 다시 손을 뻗어 힘껏 세실리아의 뺨을 쳤다. 세실리아는 멍하니 서 있다 다시 뺨을 맞고 그대로 나뒹굴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그래도 여잔데 좀 봐주면 좋았을 텐데. 세실리아의 빨개진 뺨을 보니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정말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은 쥬느비에브였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대충 손가락으로 긁어 빗고 땅에 떨어진 리본을 주운 다음 에이드리안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에이드리안, 빨리 가요. 우리 그냥 가요. 사람들이 본단 말이야." 쥬느비에브의 간곡한 말에 에이드리안은 숨을 고르며 뒤돌아 섰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잊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얼마나 상황파악을 못하던 사람인가를. 세실리아는 분했던 것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내 애인한테 다 이를 거야! 당분간 감옥에서 좀 썩어야 할걸? 쥬느비에브에게 그렇게 잘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빠졌나 본데? 아직 재미를 덜 본 모양이지?" 세실리아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지독한 표정으로 뒤돌아 섰다. "쓰레기 같은 게 어딜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 건방진! 감히!!" 에이드리안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다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내저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세실리아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다른 날이었으면 살려서 안 보내. 오늘이라서 참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서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벼룩 같은 집념은 포기를 몰랐다. 다시 보니 에이드리안에게 꽤 호감이 간 그녀였다. 세실리아는 입을 샐쭉거리며 에이드리안에게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나름대로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그에게 외쳤다. "이봐요! 그런 볼 거 없는 애 말고 나랑 사귀는 건 어때요? 나, 연인으로서는 만점이라고요. 같은 평민 출신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죠. 부모 없이 몸이나 팔고 다니는 그런 더러운 애는 치워버리고 나랑 사귀는 게 더 좋지 않아요? 귀족 자제 분들과도 사귄 적 있어요, 나." "........하아!" 에이드리안이 드디어 폭발해 버렸다. 오늘은 정말 어마어마한 인내심으로 꾹꾹 참고 있던 그였다. 그러나 결국 멍청한 세실리아 때문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뭐라 말도 못하고 멍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메아리치며 허공에 붉은 색 빛이 어리더니 세실리아에게 바로 직격탄으로 날아갔다. 세실리아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잠시 후,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세실리아는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를 보고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차갑게 눈을 내리깔며 쓰러져 있는 세실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갑 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겼다. 세실리아가 질려버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막 장난을 저지르려는 작은 악마처럼 잔인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이 걸려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힘을 주자 세실리아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꺄- 이거 놔! 아파!" "너, 어디서 감히 입을 놀려? 누가 몸을 팔아? 미쳤어? 어디 감히 내 앞에서 그딴 상스러운 소리를 해? 네까짓 게 쥬르 얘기 하는 게 소름끼치고 기분 나빠. 입을 날려버리기 전에 닥쳐." 에이드리안이 다시 손에 힘을 주자 세실리아가 아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고통스러워하는 세실리아의 표정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왔다. 장갑 사이로 세실리아의 검은 머리카락이 몇 올 매달려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혐오스럽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쓰며 장갑을 벗었다. 그는 정확하게 세실리아의 뺨에 장갑을 갈겼다. 그리고 기분 나쁜 듯 잔뜩 인상을 쓰며 세실리아를 내려보았다. "더러워. 저런 쓰레기의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장갑이라니. 기분 나빠. 너, 어지간히 돈 좋아하나 본데, 그 장갑, 네가 평생 벌어도 못 살 만큼 비싼 거니까 잘 쓰도록 해. '대귀족'으로서 불쌍한 평민에게 적선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표정에 남아있던 혐오감을 털어 버리고 싱긋 미소지으며 뒤돌아 섰다. 그는 쥬느비에브에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기분 나빠. 저 딴 거에 내 레플리카를 쓰는 것 자체가 모욕이야."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보며 미소를 지어주다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안과 세실리아의 실랑이, 정확히 에이드리안의 일방적인 폭력을 멀뚱멀뚱 지켜본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눈을 번뜩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쥬느비에브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에이드리안의 팔을 투다닥 때렸다. "흐어엉- 에이드리안! 어떻게 해요. 세실리아가 저러다 죽겠어요. 어떻게 해- 에이드리안 바보! 그렇다고 레플리카를 쓰면 어떻게 해- 흐어어어엉--" "쥬르, 넌 속도 없어? 저런 쓰레기 같은 여자는 더 심한 꼴을 당해야 해. 너 괴롭힌 여자라며? 오늘 많이 참은 거야. 그렇고 말고. 게다가 저런 상처로는 절대 안 죽어." 에이드리안은 심퉁한 얼굴로 다시 세실리아에게 다가가 고개를 내렸다. "이 봐, 여자. 난 여자라고 봐줄 만큼 상냥한 사람이 아니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남작 가의 자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이번에는 곤란하겠어. 비인 가의 에이드리안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겠지? 뭐? 바보라서 모른다고? 이런. 내 이름을 모르는 바보가 여기 있군." 뺨에 빨갛게 장갑 자국이 난 세실리아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다 갑자기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쯧. 오늘은 내가 아주 기분이 좋았는데 참아줄 때 도망가지 그랬어? 하긴 멍청한 자의 멍청한 최후랄까. 당분간은 살려둘 테니 감옥에 가서 반성이나 열심히 해 봐. 아참, 그리고 쥬르는 이제 평민이 아니라 내 약혼녀거든. 에슈비츠 가의 후계자라서 평민은 될 수 없지. 미안해서 어쩌나? 후후-" 에이드리안은 고소한 듯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세실리아의 벌겋게 피가 흐르는 상처 부위를 은근 슬쩍 발로 쳤다. 세실리아가 괴로운 표정을 하자 에이드리안은 더욱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냉랭한 얼굴로 돌아가 혐오감 가득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어디 천한 것이! 감히 누굴 입에 올려? 앞으로 쥬느비에브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입에 달면 그 땐 진짜 죽. 을. 줄. 알아." 어디선가 스콜라 자치구역 담당인 학생회 위원이 달려나왔다. 에이드리안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 쓰레기, 빨리 치워. 내 구역에 저런 쓰레기를 방치해 놓을 수는 없지. 아참, 내가 저 쓰레기한테 내 장갑 줬으니까 장갑 값 받아 와. 장갑 값, 지금 못 갚으면 나중에 이자 쳐서 받아와. 다음 모네 안으로 반드시 받도록 하고. 내 수행원들 동원해도 되니까 신경 써 줘. 그리고 재판에 회부하고 죄목은 꼭 케이로프에게 쓰라고 해. 내가 특별히 부탁했다고 전하고." 에이드리안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발걸음을 옮기며 쥬느비에브 쪽으로 돌아보았다. "쥬르, 뭐해? 배고프니까 잠시 어디 가서 뭐 좀 먹자."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쓱쓱 닦고 에이드리안의 기분 좋은 얼굴을 보며 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세실리아를 위해 울었을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세실리아가 좀 불쌍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소한 기분이었다. 사실 많이 고소했다. 모롤라 먹다 체한 것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과 팔짱을 끼고 걷다가 살짝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부축되고 있는 세실리아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세실리아, 부럽지? 내가 너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베에- 메롱." 세실리아의 분한 얼굴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싱글싱글 웃었다. 에이드리안이 너무 좋았다. 대신 복수도 해 주고.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 했지만 그녀는 정말 세실리아가 싫었다. 에이드리안만 없었으면 내가 발차기를 해버렸을 텐데. 뭔가 좀 아쉬운 쥬느비에브였다. 다음에 만나면 발차기 해줘야지! 하지만 어쨌든 세실리아는 귀족을 모욕한 죄로 당분간은 감옥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귀족도 그냥 귀족이 아니라 에이드리안 같은 거물을 건드렸으니. 쥬느비에브는 세실리아가 불쌍하다는 듯 짐짓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에이드리안, 왜 케이로프 님한테 죄목을 쓰라고 하는 건데요?" "응, 그건 케이로프, 이름 만들어 내는데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거든. 죄명 같은 거 만들어 내는 건 일도 아니지. 적어도 죄명, 스무 개 정도는 붙여 줄 거야, 저 쓰레기한테."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로프는 참 비상한 재주가 많다. 음? 그럼 세실리아는 죄목이 많아지면 오래 감옥에 있어야겠네? 흥! 하나도 안 불쌍하다 뭐. 그러기에 왜 파파를 욕하고 난리야? 쥬느비에브는 씩씩하게 콧방귀를 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과 즐겨오는 레스토랑에 들러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맛보고 있었다. 한참 신나게 케이크를 먹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맞은 편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자신이 예전에 도둑으로 몰렸던 일에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뱅그르르 한 바퀴 돌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에, 에이드리안. 왜 그래요?" 쥬느비에브가 웃는 것인지 인상을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묻자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쪽으로 와 봐." "네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다시 침을 삼켰다. 분명 옆자리에 데려와 알밤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쥬느비에브는 침울한 얼굴로 에이드리안의 옆자리에 가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푸욱 숙였다. 어찌되었든 변명 한 마디 못하고 알밤을 맞는 건 너무 억울했다. "에, 에이드리안! 그 때 내가 도, 도둑으로 몰린 건 누, 누명이었어요. 난 도둑질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난 결백...응?"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은 감촉에 찔끔 눈을 떴다. 에이드리안은 알밤을 주지 않았다. 알밤은커녕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녀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거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에, 에이드리안. 화 안 내요? 나 도둑질했다고 소문났었는데..." "화를 왜 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까만 머리카락을 부지런히 땋아내려 그녀의 주머니 속에 있던 리본을 꺼내 매듭을 지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머리를 만져주는 감촉이 좋아 헤실헤실 웃다가 빙그르르 돌아 에이드리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믿어줘요. 난 이 때까지 도둑질 같은 거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시장에서 동전 몇 개 땡땡이 친 건 있지만. 그것도 다아- 용돈을 못 받아서 그런 거라구요. 칫, 집에 있던 돈을 사람들이 다 가져가 버려서 난 너무 가난했단 말이에요. 그건 다 내 돈인데. 흥." "알아. 네가 그런 일 할 리가 없다는 거. 그런데..."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화사하게 미소를 띄웠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믿어 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고 불신했던 자신의 말을 에이드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믿어준다. 너무 기분 좋고 따뜻한 느낌이다. 쥬느비에브는 싱글싱글 웃다가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에이드리안?" "불공평해." "뭐가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심통난 얼굴에 침을 삼켰다. 혹시 세실리아가 나더러 남자 잘 꼬신다고 해서 화가 났나?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쥬느비에브에게 있어서 에이드리안이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그 일로 오해를 하는 거라면 정말 억울했다. 쥬느비에브는 잔뜩 인상을 쓰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한참 망설이더니 에이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가족은 뭐든 나누는 거라며? 넌 나한테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넌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잖아.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네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난 아무 것도 몰라. 기분 나빠." 에이드리안은 뿌루퉁하게 화가 난 아이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미소지으며 에이드리안에게 폭 안겼다. "헤에- 기분 좋다. 에이드리안이 날 좋아하긴 하는 구나."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에이드리안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띄우며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에이드리안이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믿어주니까 아주 좋아요. 나 정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얘기 해 줄게요. 옛날엔 별로 안 행복했지만 지금은 행복하니까 나, 다 이야기할 수 있어." 쥬느비에브는 화가 풀린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보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할 때 마다 에이드리안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화내고 기뻐하고 슬퍼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가족'같은 기분이 스며들어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에이드리안이 퉁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쓰레기 같은 여자 때문에 도둑 누명을 쓰고 쫓겨나듯 나왔다고? 당연히 복수를 해야지! 아까 괜히 그냥 보냈잖아. 케이로프한테 얘기해서 그 여자 죄목을 좀 더 늘려보라고 해야겠어." "그, 그게 말이죠. 나 좋아한다고 소문났던 남자애를 세실리아가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나한테 시비 걸었던 거 같아요."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은 주스 컵을 입술에 기울이다 쥬느비에브의 말에 눈썹을 실룩였다. 그리고 흘끗 그녀를 쳐다보다 멋쩍은 듯 질문을 던졌다. "그 남자애... 너도 좋아했어? 잘 생겼어? 돈 많아? 집안은 어때? 레플리카 실력은?" "난 에이드리안이 좋아요." 두 주먹을 꾸욱 쥐고 단호하게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쥬느비에브를 괴롭혔던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였다. '마을을 없애 버려? 아니지. 쥬르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일부분이니까. 그럼 그 사람들 재산을 모두 몰수해 버려? 아니야, 너무 가벼워. 모두 채석장이나 이런 데 보내버릴까? 이 것도 별로야. 흐음... 안느마리에게 말하면 기막힌 방법을 일러줄지도. 그래, 안느마리에게 맡겨야 겠군.' 꽤 신통한 결론을 도출한 에이드리안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안느마리의 가게에 있던 각종 도끼와 칼, 쥐덫이 생각났다. 자신의 결정은 정말 훌륭한 판단이었다. 둘도 없는 친구를 괴롭힌 사람들이라고 하면 분명 안느마리의 성격으로 가만있지는 않을 테고. 좀 심한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너무 기분이 좋았다. 흐뭇하고 뿌듯했다. 어디서 고소한 깨를 튀기나? 왜 자꾸 고소한 느낌이 드는 걸까.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버린 에이드리안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눈을 깜빡이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가 땋아준 머리를 기분 좋게 만지며 말했다. "있잖아요, 에이드리안. 나 사실 나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 많이 미웠어요. 나중에 복수해줘야지-하고도 생각했는데 관뒀어요. 마망 일도 많이 화나고 우리 집 없앤 것도 많이 화나지만...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게 그 사람들에게 복수해주는 방법인 거 같아요. 그래서 나 보란 듯이 행복해 지고 싶어요.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날 행복하게 해주니까 내 복수는 이루어진 건지도 몰라요." 쥬느비에브는 어른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래서 마을을 도망쳐 나온 바람에 레나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씀이에요. 돈이 없어서 헤매다가 우연찮게 디올레 마을에 가게 되었지 뭐예요? 그래서..." 제95음(第95音) ....and the Past(5)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소녀는 무작정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예고하려는 듯이 그 때부터 소녀에게는 알게 모르게 운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인심 좋은 아저씨의 마차에 얻어 타기도 하고 높은 귀족 분에게서 과일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렇게 거리를 방황하길 7델라. 소녀는 드디어 디올레 마을이라는 곳에 당도했다. 겉보기에는 전에 살던 마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곳은 그곳과는 달랐다. 넘쳐나는 인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장에서의 인심도 아주 좋았다. 몇개 안 되는 동전으로 소녀는 꽤 푸짐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소녀의 남루한 모습을 보고 과일 가게 아주머니는 과일 몇 개를 더 주었고 빵집 아주머니는 팔고 남은 빵을 돈도 받지 않고 그냥 주었던 것이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약간 슬프긴 했지만 머물 곳도 없었던 그녀에게 작은 친절은 커다란 감동으로 돌아왔다. 소녀의 행운은 또 한 번 입증되었다. 빵 가게 아주머니가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얼굴로 마을 관리인에게 가보라고 했던 것이다. 마을 관리인은 소녀의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마을 구석에 버려져 있는 작은 집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살림살이 도구들을 끌어 모아주었다. 소녀는 마을 사람들의 친절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전에 있던 마을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주머니들도 자신의 딸 같다며 소녀를 예뻐해 주었고 아저씨들도 반갑게 웃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운 좋게 집을 얻게 된 소녀는 더욱 운 좋게 취직까지 하게 되었다. 그녀의 취직 자리는 다름 아닌 빵 가게 옆의 빵집 분점이었다. 정확하게, 그곳은 땅콩빵과 계란빵을 전문으로 파는 즉석 빵집이었다. 그렇게 소녀는 빵집소녀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빵집의 최대 비밀이라며 절대 반죽 레시피를 가르쳐주지 않는 빵집 아주머니. 소녀는 빵집 아주머니를 보며 프로의 진정한 정신에 대해 배웠다. 자신의 비기를 개발해 특화시키는 것.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비장의 무기를 만드는 것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소녀는 그런 의미로 자신의 무기를 개발했다. 바로 물어뜯기. 아무리 질긴 빵이라도 소녀의 튼튼한 이빨을 이기지는 못했다. 덕분에 잘못 구워져서 딱딱해진 빵은 모조리 소녀의 차지가 되었다. 돈도 안 들이고 공짜로 빵을 얻으니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가. 소녀는 빵집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하얀 앞치마를 쓰고 빵 모양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하얀 모자를 눌러쓴다. 그리고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얼음으로 둘러싸인 시원한 냉장실에서 물렁물렁한 반죽을 꺼내 주면 소녀는 재빨리 그것을 가져와 잘 기름칠한 거푸집 같은 것에 조심스레 반죽을 넣는다. 물론 땅콩빵의 거푸집은 땅콩빵 모양이고, 계란빵의 거푸집은 동그란 계란 모양이다. 반죽을 잘 넣은 다음에는 땅콩빵에는 땅콩 조각을, 계란빵에는 계란 반개를 풀어 넣는다. 잠시 후, 빵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나면 넓적한 주걱으로 빵을 뒤집는다. 나머지 한쪽 면이 노릇노릇해질 때면 땅콩 모양과 계란 모양의 빵을 꺼내 보온통에 넣는다. 가끔 배가 고플 때면 일부러 빵을 태우기도 한다. 그러면 힐끗 아주머니를 보고 씨익 웃으며 탄빵을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아주머니는 눈을 흘기면서도 웃어주었다. 그러나 가끔씩 쓸쓸할 때도 있었다. 가족끼리 와서 빵을 사갈 때면 말 할 수 없이 우울해졌다. 소녀는 그래도 좋았다. 예전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넉넉한 생활이었다. 일을 마치고 그녀의 작은 집에 돌아오면 소녀는 집 안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이틀에 한 번 꼴은 울면서 식사를 한다. 식사할 때가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자꾸 생각났던 탓도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마음이 아팠던 소녀였다. 식사를 마치면 마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는다. 이 시간을 소녀는 매우 좋아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음 날 일을 하기 위해 일찍 잠든다. 빵집 일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했고 쉴 새 없이 빵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소녀는 만족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녀는 만족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드디어 소녀의 사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그 분과 만나게 되었다. 그 날 소녀는 빵집 아주머니가 친척집에 가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휴가를 받게 되었다. 소녀는 그 동안 모은 돈을 약간 챙겨 시장으로 갔다. 옷도 신발도 너무 낡아서 새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녀는 참방참방 뜀박질을 하며 옷가게로 갔다. 옷가게에 들어선 소녀는 방긋 미소지으며 옷가게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나 오늘 옷 사러 왔어요. 나, 옷 처음 사는 거라서 너무 두근거려요." "어서 오렴, 쥬느비에브. 옷 사러 왔다고? 그럼 저렴하고 예쁜 옷들을 추천해 줄 테니까 기다려봐." 옷가게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웃으며 안 쪽의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볼을 두 손으로 뭉실뭉실 문지르며 옷가게 안에 걸린 알록달록한 옷들을 구경했다. 돈이 많으면 옷도 두 벌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아껴 살아야 했다. 빵집에서 버는 돈으로 1모네 동안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것이다. 그 때 딸랑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려댔다. 소녀는 무심결에 뒤돌아보았다. 할머니 한 분이 안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인사성 밝은 소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할머니는 소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다가와 진열대 위를 손으로 탁 쳤다. 순간 할머니의 목에 걸린 엄청 커다란 목걸이가 출렁였다. 반들반들 빛나는 옷차림으로 보아 부잣집 할머니인 것 같았다. 소녀는 눈을 말똥거리며 할머니를 살펴보았다. 질 좋은 옷감의 갈색 옷이 퍽 멋져 보였다. 그 때 할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 보시게, 주인! 짙은 초록색 앞치마 없나? 작업용으로 쓸 건데." 소녀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커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태연한 척 하며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렸다. 옷가게 아주머니가 안에서 뛰어나와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초록색 앞치마는 없는데요." "그러면 언제 만들어 줄 수 있나." 할머니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옷가게 아주머니는 급하게 노트를 펼치더니 웃으며 말했다. "며칠 있다가 천을 가지러 도시에 나가니까 5델라 후에는 완성될 것 같은데요." "흐음...그렇군. 그런데..." 할머니는 고개를 돌리다 옆에서 말똥말똥 눈을 굴리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놀라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쥬느비에브라고 해요." "쥬느비에브... 쥬느비에브?" 할머니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소녀는 너무 무서워졌다. 무뚝뚝한 인상에 이마에 주름까지 넣으니 할머니는 참으로 무서운 모습이 되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손으로 옷 모양을 그리며 허둥지둥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오, 옷을 사러 온 거예요. 옷이 다 떨어지고 너무 작아서 그러니까...이왕이면 알록달록한 옷이 좋겠지만 저, 저는 도, 돈이 별로 없어서 이왕이면 싸고 트, 튼튼한 옷을 사러온 거에요. 사실은 이런 모양 방울 달린 원피스도 예쁘지만...그렇지만 역시 난 가난하니까 아껴 살아야 한다고 할까요. 아껴 살아야지 나중에 돈도 모으고 시집 갈 돈도 마련할 수 있거든요. 나중에 결혼하면 아주 행복하게 살 테니까 그러니까 돈을 많이 모아야 해요. 그러니까 결론은... 옷을 사러온 거란 말씀이죠." 소녀는 장황한 설명을 다 끝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의 할머니는 한 무더기의 옷을 들고 나오는 옷가게 아주머니에게 시선을 돌리며 소녀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레나다. 레나 아주머니라고 부르렴." "네? 아, 네에..."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마을 사람은 아니었다. 옷가게에서 나가면 다시 볼 일이 없을 텐데 왜 내가 할머니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그러고 레나 할머니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닐까? 그냥 레나 아주머니라고 불러야겠다. 할머니 좀 무서운 인상이야.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그 때 옷가게 아주머니가 옷을 보여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 이 옷은 다 싼 거니까 한 번 골라봐." "네에." 소녀는 조심스럽게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옷은 유행이 지나서 가격이 싸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이것조차도 과분했다. 소녀는 이것저것 옷 무더기를 들쑤시다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볼일이 다 끝난 거 같은데 왜 자꾸 날 보는 걸까. 그 때 할머니가 옷가게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이 곳은 손님에게 차도 한 잔 주지 않는 건가." 옷가게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묵직한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와 차가운 주스를 따라왔다. 할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주스를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손녀에게 줄 옷을 사려고 하니까 여기서 최고로 좋은 옷을 주게." 할머니의 말에 옷가게 아주머니는 재빨리 원피스 한 벌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소녀는 아주머니가 가져온 원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척 좋아 보이는 옷이었다. 약간 부럽긴 했지만 소녀에게는 무리였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옷을 하나 골라냈다. 약간 빛 바랜 듯한 파란색 원피스였다. 색깔이 좀 바래서 그렇지 옷감이 아주 두껍고 오래 입어도 잘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면 좀 싸지 않을까. 소녀는 나름대로 수지타산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순간 퍽 하고 주스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녀는 파란 원피스를 손에 들고 놀란 눈으로 끔뻑거리며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옷가게 아주머니가 보여준 예쁜 원피스 위에 주스를 쏟았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옷가게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돈은 지불할 테니 이 옷은 저 꼬마에게 주게. 어차피 이렇게 버린 옷을 그 애는 입지 않을 테니." 말을 마치고 할머니는 지갑에서 커다란 액수의 돈을 던져주고 밖으로 나갔다. 어쩌다보니 멋진 옷-물론 주스로 적셔진 옷이지만 이 정도는 빨면 문제없었다-이 생긴 소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함박 미소를 지었다. "회, 횡재했다!" ******** 그리고 다음 날. 소녀는 그 무뚝뚝해 보이는 할머니, 아니 레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레나 아주머니는 어제 디올레 마을로 이사했다고 했다. 마을 구석의 꽤 커다란 집에서 산다고 했다. 소녀는 레나 아주머니가 좋아졌다. 아주머니도 자신에게 너무나 잘 대해 주었다. 비단 전에 옷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치 한 가족처럼 따스하게 대해 주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레나 아주머니에게는 소녀 또래의 손녀가 없었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셨을까? 참 궁금했지만 소녀는 그냥 모른 척 했다. 아주머니가 기분 나빠져서 옷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아주머니는 아주 박식했다.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소녀는 결심했다. 아주머니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소녀의 마음을 안 건지 레나 아주머니도 집에 있는 책을 잔뜩 빌려주곤 했다. 소녀는 일이 없을 때는 으레 아주머니의 집에 가서 놀았다. 레나 아주머니는 무뚝뚝하지만 가끔씩 미소를 보여주실 때는 너무 다정했다. 그리고 어느 날, 레나 아주머니가 소녀의 집으로 찾아왔다. 소녀는 테이블도 하나 없는 집에서 아주머니를 맞으려니 약간 미안했다. 결국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앉아 어제 빵집에서 가져온 쿠키와 주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쥬느비에브, 너 마을 부녀회에 가입하렴." "에에? 레, 레나 아주머니. 마을 부녀회는 결혼한 아주머니들만 들어가는 거잖아요. 나 알아요, 그것쯤은." "들어오면 먹을 거 준다." 소녀는 레나 아주머니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먹을 걸 준다고? "머, 먹을 거요? 그, 그럼 나 할래요. 마을 부녀회." 그렇게 간식에 현혹된 쥬느비에브는 그 날, 디올레 마을 부녀회의 유일한 미혼 가입자가 되었다. 마을 부녀회는 정말 근사한 곳이었다. 아주머니들의 온갖 정보를 들을 수 있고 행사 때마다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쥬느비에브는 경로 잔치를 제일 좋아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마련하는 경로 잔치 때는 먹을 게 아주 많아서 음식 준비를 거들면 주워 먹는 것도 많았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면 기념품도 받았다. 이번 잔치 때는 수세미를 다섯 개나 받았다. 공짜라서 너무 기분 좋았던 쥬느비에브였다. 부녀회의 아주머니들도 모두 친절했다. 집에서 쓰다 남은 유용한 물품이 생기면 신경 써서 모아두었다 소녀에게 주었다. 덕분에 돈들이지 않고 빨래판이며 이불솜 같은 것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부녀회 일을 열심히 하는 소녀가 보기 좋았던 것인지 소녀는 부녀회의 마스코트로서 최고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소녀는 부녀회 가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스 부녀회에도 당선되었다. 미혼 여성이 소녀 한 사람뿐이어서 후보자도, 당선자도 소녀였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경품으로 화장품 세트를 받아 하루종일 기분 좋았던 그녀였다. 소녀는 정말 마음 부녀회에 가입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 좀 심하게 가난한 게 문제였지만 소녀의 하루는 비교적 평안했다. 그래도 레나 아주머니가 수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잔뜩 싸주셔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소녀는 레나 아주머니에게 빵집에서 가져온 땅콩빵으로 감사의 표시를 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난생 처음으로 레나 아주머니가 허둥지둥 거리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레나 아주머니의 응접실 테이블 위에 땅콩빵을 내려 놓고 눈을 말똥거렸다. "레나 아주머니, 무슨 일 있어요? 흐음...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관절염 올텐데. 우웅~"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하자 레나 아주머니가 제자리에 서서 소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아들 녀석이 온다지 뭐냐. 아들 녀석 모르게 나온 거라 이것저것 곤란한 게 아니야. 쥬느비에브, 그렇게 맹한 표정으로 계속 서 있으면 유령이 잡아간다. 어서 앉아라." "유, 유령이 잡아가요?" 소녀는 창백한 얼굴로 얼은 소파에 앉았다. 그렇구나. 맹한 얼굴로 오래 서 있으면 유령이 잡아가는 구나. 소녀는 마음 깊이 레나 아주머니의 말을 새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생긋 웃으며 레나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그 공부한다던 아들 말씀이세요? 나한테 그러셨잖아요. 레나 아주머니 아들한테 시집오라고." 레나 아주머니는 정신 없이 뛰어다니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아무래도 정신 없는 레나 아주머니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허둥지둥 움직이고 있었다. 현관 밖으로 나와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소녀는 옆으로 홱 하고 지나가는 마차를 보고 가만히 뒤돌아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크고 좋아 보이는 마차였다. 소녀는 호기심에 마차가 간 쪽을 쳐다보았다. 순간 소녀는 저 마차 안에 레나 아주머니의 아들이 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씨익 웃으며 발걸음을 돌려 부리나케 아주머니의 집으로 갔다. ******** 소녀의 예상대로 까만 색의 반질반질한 마차는 레나 아주머니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소녀는 근처의 나무에 몸을 숨기고 마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더니 온통 하얀색의 옷을 입은 금발의 소년이 내렸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얼굴이 너무 궁금했지만 그녀의 위치에서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운 한숨을 쉬던 소녀는 소년이 안으로 들어가자 발뒤꿈치를 들고 레나 아주머니 집의 후문으로 향했다. 현관으로 가려니 이상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 좀 무서웠다. 소녀는 후문을 통해 집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쪼르르 응접실로 달려간 소녀는 문 앞에 서서 문에 귀를 딱 들이밀었다. 안에서 아까 들어간 금발의 남자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도대체 할머니 나이에 가출이 웬 말이에요? 제가 여기까지 꼭 모시러 와야 겠어요? ] [ 내가 겨울 별장으로 휴가를 나온 거라고 얼마나 얘기를 했었냐. 도대체 내 말을 안 듣는 건 누구냐. 쯧. ] [ 할머니! ] 소녀는 '가출'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레나 아주머니가 가출한 거라고? 그럼 가출할머니? 아님 가출아주머니? 레나 아주머니 아들이 가출한 아주머니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어라? 할머니는 아들이라고 그랬는데 왜 저 남자애는 할머니라고 부른담. 참 이상한 가족이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 어? 이건 뭐야. 빵인가? 쿠키? ] [ 땅콩빵이다. ] 소녀는 순간 움찔했다. 아참, 땅콩 빵을 놔두고 왔었지. 왠지 부끄러운 기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눈을 뱅그르르 돌리며 귀를 문에 딱 붙이는 소녀였다. [ 할머니, 언제 이런 거 드셨어요? 이상하게 생겼네. 음, 음. 보기보다 맛은 괜찮지만. ] [ 네 신부 될 아가씨가 만든 거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라. ] 순간 소녀는 목이 콱 막혔다. 시, 신부라니...레나 아주머니! 난 아직 그 쪽 남자 분이랑 결혼할 마음이 없다구요. 방안에서 다시 소년의 말소리가 들렸다. [ 또 무슨 소리예요. 나, 결혼 생각은 아직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나, 이 땅콩 빵인지 뭔지 이거나 좀 싸줘요. 참, 별 먹거리가 다 있네. ] [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고통과 인내심으로부터 그 작은 땅콩빵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야. 그리고 땅콩빵은 이제 없다. 그게 다야. ] [ 어디서 사신 거에요? 바르겐하우츠? 아니면 올레스티네스? 비싼 건가요?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 [ 안 가르쳐 준다. 비밀이다. ] 소녀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땅콩 빵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하며 다리 아픈 것을 꾹꾹 참아야 하는가. 땅콩 빵이라는 거 정말 대단한 빵인 것 같았다. 소녀는 흐뭇한 웃음을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방안에서 발소리가 들려 얼른 문 옆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후,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아까 보았던 하얀 옷의 소년이 걸어나왔다.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이번에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소년은 무척 근사했다. 우아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부드러운 금발이 너무 예뻐 보였다. 소녀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자 가만히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 날 밤, 소녀는 자꾸 소년의 뒷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콩닥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소녀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 ******** "뭐? 그 이상하게 생긴 쿠키 같은 게 네가 구운 거라고?" 에이드리안이 놀란 눈으로 묻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럼요. 땅콩빵이란 건 엄청난 인내심과 고통으로 만들어지는 빵이라구요." 에이드리안은 허탈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다 다시 발끈 화를 내며 말했다. "그 거 사려고 유벨을 얼마나 볶았는데... 그런데 할머니는 왜 너한테 그렇게 구두쇠같이 구신 거야? 좋은 옷이랑 먹거리랑 사주실 수 있었을 텐데..."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 레나 아주머니가 좋은 옷 같은거 사 주셨다면 그렇게 편하게 대하지는 못 했을 거 같아요. 부담스러웠을 거 같아. 아마 레나 아주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하지만 나, 레나 아주머니한테 신세 많이 졌다구요."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때는 나름대로 평온하고 좋은 생활이었다.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제96음(第96音) ....and the Past(6) "으랏차! 아유, 힘들어." 소녀는 자신의 회색 가방을 에슈비츠 가의 현관문 앞에 놓고 땀을 닦고 있었다. 현관문은 보기만 해도 으리으리해서 소녀는 자꾸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이 멋진 집에서 주욱 행복하게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그랬다. 소녀는 에슈비츠 가의 양녀로 입양되어 이 곳에서 살기 위해 온 것이었다. 디올레 마을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던 소녀에게 변화가 닥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낯선 아저씨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 아저씨는 대귀족인 에슈비츠 공작이 소녀를 양녀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소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제안을 수락했다. 자신이 갑자기 왜 그런 제안을 받게 되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저씨의 말로는 그저 에슈비츠 공작이 우연히 소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이다. 자식이 없는 에슈비츠 공작이었다. 혹시 가족이 필요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소녀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양녀라니. 그저 다른 집에 가서 얹혀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의 딸이 되는 것이다.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녀는 다른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레나 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레나 아주머니는 의외로 그녀와의 이별에 그리 아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소녀는 그것이 약간 섭섭했지만 이내 새로운 집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에헴, 에헴. 아, 안녕하세요, 공작님. 저는 쥬느비에브라고 한답니다. 쥬느비에브라고 해요. 쥬느비에브에요. 쥬느비에브일걸요? 이, 이상하네. 다시연습.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쥬느비에브에요. 저는 디올레 마을의 마을 부녀회 회원인데...아얏!"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신나게 인사 연습을 하던 소녀는 갑자기 벌컥 하고 열린 현관문에 이마를 맞고 넘어져서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소녀는 자신의 원피스에 묻은 흙먼지를 파다닥 두 손으로 털어 냈다. 자신의 몇 벌 안 되는 옷 중에서 그나마 색이 덜 바랜 촌스러운 자주색 원피스를 골라 입고 온 소녀는 옷의 먼지가 대충 털리자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틈으로 나이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소녀는 달려가서 소중하게 간직해온 에슈비츠 공작의 편지를 내밀었다. "아, 안녕하세요. 쥬느비에브라고 해요. 에슈비츠 공작님."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아래에서 위로 주욱 훑어보더니 탐탁지 않은 눈으로 편지를 보았다. 소녀는 두근거리고 어색한 기분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녀는 금새 침울해 지고 말았다. 편지를 다 읽은 할아버지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난 에슈비츠 공작님이 아니라 그 분의 집사입니다. 들어오시죠, 아가씨." 소녀는 할아버지가 에슈비츠 공작이 아니라는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곧 뭐라고 물어볼 새도 없이 집사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소녀는 자신의 회색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에슈비츠 공작과의 만남은 짧게 끝났다. 소녀는 멍한 눈동자로 하녀가 데려다 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앞으로 자신이 머물게 될 방이었다. 작은 골방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은 침대와 낡은 탁자, 빛 바랜 커튼... 소녀는 방에 들어와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소녀는 침대 위에 누워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방이 작고 누추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처럼 부모님이 보고싶어서도 아니었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눈물이 났다. 가족이 생기는 것이라고 얼마나 기대했던가. 바보같이 에슈비츠 공작의 양녀가 되면 그가 진짜 가족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소녀가 만나본 공작의 눈빛은 너무나 싸늘했다. 차갑고 무서워서 소녀는 공작과의 짧은 면대 시간동안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녀는 느꼈다. 공작은 자신에게 가족 같은 다정함은커녕 증오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훌쩍이듯 중얼거렸다. "사, 사과 파이 못 먹게 됐어. 가, 가족이 생기면 꼭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흑흑, 흐어어엉-- 흐어어어어엉--" ******** 에슈비츠 공작과의 짧은 면대 후, 소녀는 더 이상 공작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 공작은 소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소녀는 작은 골방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생활을 꾸려나갔다. 밖에 나가는 것은 무서웠다. 공작과 다시 만나는 것이 꺼려졌다. 게다가 에슈비츠 가의 하인들이나 하녀들은 하나같이 소녀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녀는 뒤에서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모두들 소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그리고 사흘에 한 번 찾아오는 루네르와 베로니카 남매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녀를 적대시하고 비아냥거렸다. 두 남매의 구박에 소녀는 많이 슬펐다. 루네르와 베로니카가 서로 피가 통하는 남매고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자 많이 부러웠던 것이다. 가족이 있으니까 가족이 없는 자신을 당당하게 깔보는 것 같았다. 소녀는 디올레 마을이 그리웠다. 그 곳에서 지냈던 날들이 몹시 그리웠다. 에슈비츠 가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하녀가 날라 오는 푸석한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창 밖을 쳐다보거나 잠을 자는데 썼다. 힘들고 쓸쓸한 생활이었지만 소녀는 에슈비츠 공작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아도 소녀를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미워할 만큼 염치없진 않았다.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이제 호적상 자신의 아버지였다. 소녀가 에슈비츠 가를 떠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3모네 후였다. 작은 골방에 갇혀 살다시피 산 소녀는 예전에 자신에게 입양 소식을 전해준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 남자는 공작의 비서라고 했다. 공작의 비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그는 소녀가 에슈비츠 가의 영애로서 비인 가의 에이드리안이라는 소년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고 소녀에게 전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이미 공작과의 만남에서 더 이상 가족에의 희망을 갖지 않았던 소녀였다. 하지만 소녀의 약혼자가 될 거라는 소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소녀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의 삶이 움직이는 건 싫었지만 소녀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기대를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절실하게 원했다. 자신의 가족이 되어줄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었다. ...함께 사과 파이를 먹고 싶었다. ******** 며칠 후. 소녀는 소년을 만나기 위해 스콜라 자치구역이라는 곳에 당도했다. 언듯 듣기로 소년은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소녀는 스콜라라는 장소가 참 신기했다. 교육기관에 한 번도 몸담아 본 적이 없는 소녀로서는 특정한 장소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소녀는 며칠 전부터 자기 전에 수백, 수천 번을 되뇐 소년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며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좋은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마음이 뿌듯했다. 오늘 아침에 오랫동안 손질해서 빗은 머리도, 입고 있는 옷도 소녀의 짧은 인생동안 가장 상태가 좋은 경우였던 것이다. 소녀는 소년에게 좋은 첫인상을 전해 주고 싶었다. 소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바쁘게 발을 놀렸다. 걸어서 스콜라 안까지 가야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소녀는 자신의 짐이 든 회색 가방을 손에 꾸욱 쥐고 난생 처음 보는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며 눈을 말똥거렸다. 계속 걸음을 걸으면서도 소녀의 놀란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공작님께 제대로 인사를 드렸다면 좋았을 걸." 소녀는 문득 에슈비츠 공작이 생각나 한숨을 쉬었다. 소녀는 끝내 양아버지의 배웅을 받지 못했다. 멀리서 그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웃고 있는지 아니면 슬퍼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소녀는 한숨을 쉬다 다시 더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소녀는 작고 초라한 마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오면서 소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될 사람이 아르헨에서 최고의 명문가 자제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소녀는 걱정스러웠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을 약혼자가 될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날 싫어하면 어쩌지?" 소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다 문득 과일이 잔뜩 싸여 있는 과일 가게를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과일이 너무 맛있어 보였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보았다. 동전 세 개가 손에 쥐어져 나왔다. 소녀는 짧게 한숨을 쉬고 진열대 앞으로 갔다. 과일 향이 솔솔 코를 자극했다.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달콤한 향이 나는 노오란 모롤라를 사고 싶었다. 모롤라를 먹어본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어릴 때 몇 번 먹어보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으니. 하지만 소녀의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소녀는 옆에 있는 바알간 복숭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토실토실 둥그스름한 것이 몹시 맛있어 보였다. 소녀는 수줍은 얼굴로 주인에게 동전 세 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복숭아 주세요. 예쁜 걸로 주세요." "이 걸로는 복숭아 한 개 값이 안 되는데... 뭐, 하는 수 없지. 작은 걸로 골라 줄 테니 가져가라." 주인은 소녀가 쥐어준 동전 세 개를 흘끗 보더니 웃으며 복숭아 중에서 다소 작아 보이는 것을 골라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스콜라 위치를 묻고는 베시시 웃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한 쪽 손에는 커다란 회색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소녀는 빙그레 웃으며 걸어갔다. "맛나겠다." 배가 고팠던 소녀는 복숭아를 옷에 슥슥 닦고 껍질을 벗기려고 손을 가져갔다. 손이 복숭아의 얇은 껍질에 닿는 순간 소녀는 갑자기 머뭇머뭇 복숭아를 다시 앞으로 가져왔다. 깨물면 달콤한 맛이 가득 퍼질 것 같이 아주 맛있어 보였지만 소녀는 빙긋 웃으며 다시 옷에 복숭아를 문질렀다. "그 사람 줘야지. 맛난 복숭아. 날 아주 좋아하게 될 거야." 소녀는 사과를 가방 안에 잘 넣은 다음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소녀는 복숭아를 전해 주지 못 했다. 그 날 밤, 소녀는 냉랭한 약혼자의 눈에 도망치다시피 나와 빗속을 걸었고 결국 쓰러진 소녀는 복숭아가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가방 안에는 다 물러버린 복숭아만이 남겨져 있었다. 소녀는 울며 복숭아를 집 앞 땅 속에 묻었다. '나중에 복숭아나무가 자라서 복숭아가 많이 열리면 그 사람한테 줘야지. 훌쩍. 꼭 줘야지. 훌쩍.' ******** ******** 상점가에서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쥬느비에브는 테이크아웃 코너에서 사온 모롤라 주스를 쪽 빨며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쳐다보았다. 오늘 의상실에서 산 가방이다. 두꺼운 겨울용 옷감으로 만들어진 노란 모롤라 가방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서 씨익 웃었다. 오늘은 정말 많은 물건을 샀다. 에이드리안이 이상한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가 보는 물건마다 모두 사주었다. 고무 지우개가 달린 연필부터 시작해 빨간 보석 핀, 하얀 레이스가 달린 장갑, 손수건, 노란색 잠옷 등 상점가에서 산 물건이 너무 많아서 사람을 시켜 미리 집에 보낸 참이었다. 그 중 모롤라 가방이 제일 마음에 들었던 쥬느비에브는 가방만 손수 들고 온 것이다. 어깨를 으쓱하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잔뜩 인상을 쓰며 자신을 쳐다보자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화났어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잔뜩 인상만 쓴 채 걸음을 옮겼다. 밤바람이 꽤 싸늘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의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하며 간질간질한 코를 훌쩍였다. "에, 에취! 아코, 콧물 나네." 손수건으로 코를 풀며 쥬느비에브는 다시 한 번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그 때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우뚝 자리에 섰다. 쥬느비에브는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그에게 눈짓을 했다. "왜, 왜 그러는 데요?"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끌러 쥬느비에브의 목에 칭칭 감아 주었다. "에, 에이드리안. 나 숨막혀요." "이래야 감기 안 걸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말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목이 부자유스러우니 몸 전체가 눈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목도리에서 은근히 스며나오는 에이드리안의 냄새에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미소를 띄며 참방참방 뛰어갔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그녀를 살짝 쳐다보며 물었다. "쥬르, 그래서 그 복숭아를 집 앞 땅에 묻었다고?" "으응, 그런데요, 놀라운 얘기 해 줄까요? 거기서 싹이 나서 지금은 삐죽하게 솟아올라와 있다니까요. 나 가끔씩 물도 줘요. 에이드리안은 몰랐죠? 복숭아가 열리면 에이드리안한테 꼬옥 줄게요. 맛난 복숭아."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기분이 나쁜 듯 고개를 돌리며 쥬느비에브의 손을 꾸욱 잡았다. "미안. 그 때는." "에에?" 쥬느비에브는 뒤뚱거리며 걸으면서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내듯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고! 그 때 너한테 모질게 대해서!"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치만 괜찮아요. 나 지금은 너무 행복하니까. 아마 그 때도 에이드리안을 만나서 너무 행복했을 거에요. 그랬던 거 같아요. 에이드리안이 나 한테 무슨 말을 해도 아마 사실은 무척 행복했었던 것 같아요. 에슈비츠 공작님...아니 아버지도 그 때 날 보고 파파 생각이 나서 차갑게 대하셨다고 했으니까...이제는 내가 아주 좋다고 하셨으니까. 다 좋아요."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하고 듣기 좋은 흙 소리가 났다. 멀리 집이 보였다. 생각만 해도 너무 기분 좋은 '우리 집'이다. ******** 집에 들어와 방에 들어선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보통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루이즈가 불을 켜놓는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방안이 캄캄했다. 무서운데 에이드리안을 부를까.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벌써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아직 목도리를 풀지 않아 답답한 목을 잡고 뒤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방안에서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때 갑자기 쿵 하고 방문이 닫혔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버둥버둥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뭔가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인지 무언가에 쿵 하고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데구르르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일어 난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렸다. 불을 켜야 했다. 어둡고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부, 불 켜야 되는데. 우웅~" 에이드리안대신 에이드리안이 매준 목도리를 두 손으로 꾸욱 잡고 쥬느비에브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목도리가 확 당겨졌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쩍 벌렸다. 유, 유령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순간,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생일 축하해, 쥬르."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방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쥬느비에브는 그 순간 레플리카로 불이 켜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따뜻한 레플리카의 주인공은...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뒤돌아서 목에 매어져 있는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둥그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의 목도리를 풀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쥬느비에브의 눈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방이 모롤라로 뒤덮여 있었다! 침대도 서랍도 소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은 모롤라로 꽉 차 있었다. 방금 그녀가 부딪힌 것도 모롤라였던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놀라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어느 새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코트까지 벗겨 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쥬느비에브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만지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 에이드리안, 새, 생일이라니...새, 생일이라니..." 너무 생소한 단어였다. 생일이라니. 태어난 날을 말하는 단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생일이라는 단어를 써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에이드리안은 그녀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덮여있는 테라스는 전혀 춥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테라스의 갈색 테이블 앞에 앉혔다.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던 고급스러운 테이블이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맞은 편으로 가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에이드리안은 언제 방에 들어온 거람?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쥬르, 16번째 생일, 축하해. 루이즈와 <르 뤼센부르> 요리사가 신경 써서 만든 거니까 많이 먹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을 듣고 그제야 테이블 위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포크를 놀려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을 쿡 찍어 우물우물 씹어먹던 쥬느비에브는 툭 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역시 음식을 맛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쥬, 쥬르. 맛없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 포크로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너, 너무 맛있어요, 에이드리안.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 훌쩍." 쥬느비에브는 계속 음식을 삼키며 눈물을 쏟아냈다. 쥬느비에브의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은 다름 아닌 '사과 파이'였다. 쥬느비에브는 어느 새 달려온 강아지를 무릎에 앉혀 놓고 사과 파이를 떼어내 먹여 주었다. 강아지는 사과 파이를 입안에 넣고는 쥬느비에브에게 몸을 비벼댔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방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렇게 맛있는 사과 파이는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이야." 언제나 울기만 하던 까만 생머리의 꼬마는 이제 없었다. 대신 누구보다 멋지고 자상한 약혼자와 귀여운 강아지를 곁에 두고 있는 행복한 소녀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먹는 사과 파이의 맛은 몹시 짭쪼롬했다. 눈물 섞인 사과 파이가 이토록 감동적이고 따뜻한 맛이라는 것을 소녀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과 파이가 입안에서 녹으면서 현실감이 들었다. 행복한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곳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 다음 날. 쥬느비에브는 학생회실 안에 있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서서 함박 미소를 짓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싸여있는 선물꾸러미가 잔뜩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야아- 이게 다 뭐야? 선물? 나, 주는 거야?" "그렇다니까. 어제는 에이드리안 님이 오지 말라고 하셔서 선물도 못 주고. 쥬느비에브, 어제 데이트 재밌었어? 에이드리안 님, 어제 굉장히 바쁘셨는데도 시간 내신 거야." 안느마리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으응. 안느마리. 에이드리안이 선물도 잔뜩 사주고 모롤라 가방도 사줬어. 맛난 것도 많이 사주고. 뽀, 뽀뽀도 해주고. 아참, 안느마리, 이 거 먹어. 에이드리안이 준 모롤란데, 너무 많아서 나 혼자 못 먹을 거 같아." 발그레 얼굴을 붉힌 쥬느비에브는 모롤라 가방에서 모롤라를 세 개 꺼내서 건네주었다. 안느마리가 씨익 웃으며 모롤라를 받아들자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선물꾸러미를 펼치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원피스다! 히야- 프, 프릴이...레, 레이스가 이렇게 주렁주렁... 미라벨 언니 선물?" "맞아, 맞아." "우웅~ 이건 뭘까. 음...음.... 어라, 책이다. <일로세나기에다로미나세트의 심오한 세계>?! 어, 이건 케이로프 님 선물이다." "그렇지, 그렇지." 쥬느비에브가 선물을 하나씩 풀 때마다 안느마리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노란색 포장지의 선물 상자를 풀어보았다. "어? 이 건 뭐지? 어? 어? 어? 에이드리안 초상화다! 야아- 에이드리안 초상화다! 에이드리안 초상화,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 다 가져가서 구하기도 힘든데!" "유벨 님이 주신 거야. 고이 간직하고 있던 건데 너 생일 선물로 주시는 거래. 어서 내 선물도 풀어 봐." "응!" 쥬느비에브는 주섬주섬 빨간색 포장지의 커다란 선물 상자를 풀었다. 상자가 열리면서 드러난 것은 금색 테의 액자로 둘러싸인 초상화였다. 쥬느비에브는 초상화의 주인공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이건 내 초상화다. 나, 초상화 따로 그린 적 없는데..." "쥬느비에브, 그거 내가 그린 거야." "에에? 정말?" 안느마리의 즐거운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놀란 얼굴로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핑크색 원피스 차림의 즐거워 보이는 소녀. 쥬느비에브는 마음 속 깊이 잔잔한 행복을 맛보았다.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참! 미라벨 님이랑 케이로프 님하고 유벨 님, 기다리고 계셔. 어제 못 해준 쥬느비에브 생일 파티, 오늘 해 주신다고 하더라. 다들 축하해 주실거야. 빨리 가자!" "새, 생일 파티? 와아- 기분 좋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밖으로 달려갔다. 생일 파티라니! 마망! 쥬느비에브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던 안느마리는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주먹을 흔들며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악령을 불러오는 부적을 준비하고... 도끼는 필수 지참. 머리뼈가 산산조각난 멧돼지의 뼈를 준비하고... 각종 곤충의 내장을 깨끗하게 거른 다음, 개구리의 눈알... 아, 뱀 머리도 준비하고. 이 정도면 저주의 의식에 쓸 수 있겠군. 아아... 아직도 모자라. 뭔가 잔인하고 끔찍한 벌을 준비해야 해. 말뚝. 그래, 말뚝도 좋겠군. 심장 위에 내려쳐지는 말뚝의 소리. 탕. 탕. 탕. 아아- 황홀해. 케이로프 님이 그 못된 계집애한테 132개의 죄목을 만들어 주셨다고 했는데 나라고 가만 있을 수는 없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를 괴롭힌 그 마을 놈들. 훗, 후후후후후- 모두 기다리고 있어. 이 안느마리가 징벌을 내리리. 화이트를 수호하고 블랙을 멸하는 나, 안느마리가 가만 두지 않겠어. 훗후후후후후-아하하하하하하---" 제97음(第97音) 체리욜파쳰(1)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서재 안의 공기를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테라스의 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은 소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갔다. 차가운 기운에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무심히 창 밖을 쳐다보았다. 이제 잎사귀는 보이지 않고 그저 앙상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를 눈 속에 넣으며 소년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소년은 고개를 숙여 손에 들려 있는 그림책에 눈을 가져갔다. "...그리하여 왕자님의 키스로 공주님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소년은 그림책의 알록달록한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를 띄었다. "정말로 구원받은 건 왕자님일지도 몰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함께...혼자가 아니라 함께." 테라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소년은 미소를 띈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갑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타고 스쳐갔다. ******** 맑은 밤하늘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오랜만의 맑은 하늘에 포옥 한숨을 쉬었다. 아마 내일은 날씨가 무척 좋을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기에 그만이겠지. 체리욜파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요즘 열심히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번에 꼭 좋은 성적을 내서 에이드리안에게 칭찬 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다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엘로이즈의 죽음과 프란체스의 불길한 소식. 평온한 하루하루였기에 이러한 일들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러한 나쁜일에도 불구하고 쥬느비에브는 너무나 행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손에 들어온 행복은 정신을 마비시킬 만큼 달콤해서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순간이 계속될수록 쥬느비에브는 미안하고 불안했다. 자신이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걸까. 자신이 행복 한 만큼 다른 사람, 아니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찾아왔듯 자신의 행복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았다. "무서워..." 무엇보다 무섭고 초조한 것은 자신의 욕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좋은 음식과 예쁜 옷들, 멋진 친구와 언니, 오빠... 그리고 에이드리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싶었다. 자신만을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해, 쥬느비에브." 쥬느비에브는 자신을 다독거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그 때 작은 발자국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점점 옅어지며 발자국의 주인이 테라스에 들어오자 쥬느비에브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에이드리안!" 하얀 옷차림의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쥬르, 잘 시간인데 뭐 하고 있어? 또 늦잠 자려고 그러는 거지?" "아, 아니에요. 나, 명상을 하고 있었어요." 쥬느비에브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뚱하게 말하다 에이드리안을 흘끗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왜 아직 안 잤어요?" "아, 뭐 이것저것 일 좀 하느라고. 너도 빨리 자."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기대어 섰다.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 기분 좋았다. 두근거리고 따스한 느낌이다. 쥬느비에브는 미소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이 유난히 깨끗해 보였다. 희미하게 보이는 달도 매력적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달도 따주고 별도 따준대요." "갖고 싶어?"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뇨. 진짜 갖고 싶은 게 있지만 말 안 할래요. 그런데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미소를 흘렸다. "에이드리안, 만약에... 만약에 내가 에이드리안 곁에서 떠나게 되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헤어지게 되면 그 때는 나를 잊어줘요. 쥬느비에브라는 사람이 누군 지도 알 수 없게 까맣게 잊어줘요." "무슨 소리야? 헤어지긴 누가 헤어져?" 에이드리안이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에이드리안,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거에요. 난 에이드리안이랑 함께 하길 원하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난 파파도 마망도 영원히 내 곁에 계셔줄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파파도, 마망도 나한테 무엇하나, 다정한 말 한 마디 남겨주시지 않고 내 곁에서 떠나셨어요. 파파가 없어지면 혹은 마망이 없어지면 이렇게 살아라- 혼자서 울지도 말고 식사도 꼬박꼬박 하고... 이런 말도 없으셨어. 그래서 난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별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쥬르..."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그가 안쓰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쥬느비에브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에이드리안. 많이 이야기하고 같이 있을 때, 얘기하는 게 좋아요. 혹시 혼자 남겨지게 되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때를 대비해서. 그래서 나, 만약 에이드리안과 내가 헤어지게 되면... 그 때는 에이드리안, 꼭 날 잊어줘요."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나빴다. 왜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에이드리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몰라. 난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안 헤어지면 되잖아." "에이드리안, 나 말이에요. 욕심이 자꾸 커져서 걱정이에요. 사실은 만약에 내가 에이드리안 곁에서 없어져도... 에이드리안이 나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없어지면 에이드리안은 슬플 텐데... 에이드리안은 상냥한 사람이라 분명히 슬퍼해 줄 거에요. 날 생각하면 슬프고 눈물이 나고...그럴 거에요. 그게 더 싫어. 나 때문에 에이드리안이 슬퍼하는 게 더 싫어. 그러니까 차라리 난 잊혀져 버릴래. 그러니까 꼭 날 잊어줘요." "싫어." 에이드리안은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쓰며 테라스 밖의 시커먼 나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미소를 띄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을 잡고 놔주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아마 없을 거에요. 나 찐드기 같을 때가 있거든요. 찐드기처럼 붙어서 안 놔줄 거에요. 나중에 귀찮다고 해도 하는 수 없어요. 알았죠?"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장난스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분이 풀린 듯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쿡. 알았어."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미소를 흘리며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쳐다보며 두 사람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밤하늘은 마치 두 사람을 위해 조용히 해주려는 듯 고요했다. 상냥한 밤하늘이라고 생각하며 쥬느비에브는 미소를 머금었다. 에이드리안을 놔 줄 생각 티끌만큼도 없었다. 부릴 수 있는 만큼 욕심을 부려볼 테다. 그래서 자신도, 에이드리안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밤하늘에 자신의 마음을 맹세했다. 꼭 이루어지도록... ******** 다음 날. 쥬느비에브는 아침 일찍 연습실에서 노래 연습을 했다. 체리욜파쳰을 위해 그녀는 정말 열심이었다. 에이드리안이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가 제일 뿌듯했다. 에이드리안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르면 더할 나위없이 깨끗하고 기분 좋은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노래가 너무 잘 불러졌다. 덕분에 지금처럼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에이드리안에게 듬뿍 칭찬을 받겠지! 기분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쥬느비에브였다. 쥬느비에브는 지금 애너벨 정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 곳에서 에이드리안을 만나기로 했다. 오늘 그녀는 그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미라벨에게서 오늘 아침 에이드리안이 애너벨 정원을 아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곳을 아주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추운 겨울이었다. 꽃도 나무도 앙상해서 정원은 형편없었다. 작은 정원이라서 겨울에는 따로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에이드리안도 겨울에는 정원을 잘 찾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정원의 꽃과 나무에게 레플리카를 먹여 쑥쑥 자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원은 마치 봄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게 될 것이고 에이드리안이 무척 기뻐할 테다. 무엇보다 자신의 레플리카 실력을 에이드리안에게 내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헤에- 난 정말 똑똑하다니까."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빙그레 웃었다. 에이드리안의 웃는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맴돌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핑크색 코트의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같은 색의 목도리를 예쁘게 매듭지은 다음 하늘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오늘은 하늘도 파란 게 너무 기분 좋았다. "가자! 애너벨 정원으로!" 쥬느비에브는 손을 번쩍 들어 발을 동동 구른 다음 힘차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 공기가 쌀쌀했지만 쥬느비에브는 즐거운 기분으로 추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뛰어갔다. ******** 애너벨 정원에 도착한 쥬느비에브는 훅훅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빴지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뿌듯함에 마냥 즐거웠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았다. 잎사귀 하나 없는 마른 가지의 나무와 말라버린 풀을 보고 있자니 너무 쓸쓸해 졌다. 이래서 겨울은 싫었다. 겨울은 뭐라 그래도 춥고 메마른 계절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떡 하니 서서 두 손으로 허리를 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너희들을 예쁘게 해 줄게! 잎사귀도 퐁퐁 나게 해 줄게! 에헴, 에헴." 쥬느비에브는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분수대에 솟아나고 있는 투명한 물줄기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외로운 밤이었지 나무도 새도 바람도 울지 않는 조용한 밤. 난 가만히 노래하네 내 노래가 울리면 당신들도 노래할까. 조용한 밤. 나의 노래가 당신에게 들리면 그 것은 운명. 부디 노래해 줘. 조용한 밤은 외로운 밤. 함께 노래해 줘. ]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주위로 파란빛이 뿜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빛은 정원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벅찬 마음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빛이 머문 곳에 물기가 돌며 꽃들이 천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멈추고 폴짝폴짝 뛰며 정원을 뛰어다녔다. "꽃 핀다! 꽃 핀다! 야아--" 에이드리안이 깜짝 놀랄 것이다. 자신의 쑥쑥 성장한 레플리카 능력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아직 그녀의 레플리카 실력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하긴 거의 매일 함께 레슨 하는 케이로프도 잘 모르고 있다. 자신의 레플리카는 숨겨온 비밀이었다. 에이드리안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뿌듯하다.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라라라 라 라라랄 라라라---"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원 가장자리로 손을 뻗었다. 손 끝에서 빛이 퍼져 미처 레플리카의 빛이 닿지 않은 곳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쥬느비에브는 빙그레 웃으며 초록색으로 뒤덮여 가는 정원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겨울은 싫어. 난..."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발 밑에 소복이 돋아나고 있는 풀을 쳐다보았다. 그 때 갑자기 머리 속에 무언가가 따끔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 노래하지 마! 노랠 해서는 안 돼! ] 순간 쥬느비에브는 머리 속에 울린 이상한 소리에 눈을 찡그리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뭔가 웅웅하며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싫...어... 머리 아파." [ 쥬르! 노래하지 마. 부디... 부탁이야. 쥬르.... ] "파파?" 쥬느비에브는 계속 욱신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눈 앞이 희미해졌다. 아직 빛이 맴돌고 있는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자꾸 눈이 감겨왔다. 하지만 조금만 더 노래하면 정원은 훨씬 근사한 모습이 될 텐데... 에이드리안이 무척 기뻐할 텐데.... 쥬느비에브는 감겨오는 눈꺼풀을 안간힘을 써서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새하얀 숲 속에 날아드는 바람과 물과 불과 대지의 기운... 그 아름다운 기운을 빛과 어둠이 감싸...읏!" 억지로 노래를 하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목을 타고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에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아팠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아팠다.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몸을 숙이며 계속 기침을 해댔다. 옆구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얼마나 지났을까. 통증이 잦아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입에서 손을 떼어 눈앞에 가져온 쥬느비에브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것을 바라보았다. "피... 피?" 온 몸이 떨려왔다. 동공이 한 순간에 확장되며 쥬느비에브는 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누르며 손을 쥐었다 다시 폈다. 손바닥에 흥건한 피가 타고 흘렀다. 쥬느비에브는 어느 새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고개를 쳐들고 풀밭에 흩어져 있는 붉은 색의 피를 보았다. "아, 안 돼. 생각하면 안 돼. 생각하면...."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입을 막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꾹꾹 눌렀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을 압박하는 온갖 생각에 쥬느비에브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몸을 가눴다. 그러나 결국 쥬느비에브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생각하지 마. 생각하면 안 돼. 안 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 작은 이야기 01. 어느 날 아침 아침 10도르 경. 바깥에는 겨울의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방안은 몹시 따뜻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쿡 하고 웃음을 삼켰다.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올려 침대에 폭 파묻힌 채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장난기가 돈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볼을 양손으로 잡아 쭉 늘어뜨렸다. 그녀가 잠잘 때 가끔씩 하는 장난이지만 할 때마다 정말 너무 재미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터지는 웃음을 삼키며 다시 손을 뻗어 볼 살을 쭉 잡아당겼다. "귀여워...쿡쿡..." 쥬느비에브는 볼이 간지러운지 실룩거리다 홱 하고 뒤돌아 엎드렸다. 쥬느비에브가 엎드리는 바람에 더 이상 장난을 칠 수 없게 된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눈치를 살피다가 협탁 위의 머리 끈을 들고 가만히 침대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나서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기 시작했다. '재밌어. 쥬르가 나 머리 자르지 말라고 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런 재미가...쿡쿡쿡....' 에이드리안은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누르며 쥬느비에브의 생머리를 가닥가닥 땋아 내렸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그가 8번째 갈래의 머리를 반쯤 땋아 내렸을 때 쥬느비에브가 뻐끔하게 눈을 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쥬느비에브는 눈썹을 실룩이며 입을 조물조물 움직였다. "모롤라 30개를 길 가다 샀는데 하나는 모롤라, 하나는 딸기, 하나는 오렌지, 하나는 에이드리안...으....으응?"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꾸, 꿈이 아니야? 쥬느비에브는 놀라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꼬대 한 거 들켰겠지?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힐끗힐끗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한편, 에이드리안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쥬느비에브의 중얼거림에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모롤라 30개를 샀는데 그 중 하나가 나라고? 내가 모롤라? 에이드리안은 그 속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뜻을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그 중얼거림이 잠꼬대였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쥬르, 오늘 늦잠 잤잖아. 나 깨우러 오지도 않고." "어, 어제 노래 연습하느라고 늦게 잤단 말이에요. 하아아아암--" 쥬느비에브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킨 다음 눈물을 찍 매달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오늘 그녀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기분 좋게 씨익 웃다가 에이드리안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에이드리안. 내가 늦잠 잔 게 그렇게 우스워요? 또 화풀이하려는 거죠? 나, 이제 에이드리안이 아무리 투덜거려도 나의 깊은 마음으로 다 감싸줄 수 있어요. 아유, 왜 자꾸 웃는 건데요!" 쥬느비에브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 위에 엎드린 에이드리안을 보고 인상을 썼다. "아이, 몰라요. 난 씻고 연습실 갈 거니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침대 위에 두고 욕실로 뽈뽈 걸어갔다. 눈을 끔뻑이며 화장대 근처를 지나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언 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걸음을 되돌려 거울 앞으로 달려 간 쥬느비에브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내 머리!" 쥬느비에브는 종종 땋아져 있는 머리를 하나씩 풀어내면서 홱 뒤돌아 섰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내 머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범인은!! "에이드리안! 내 머리 어떻게 할 거에요? 이 것 봐요! 파마 머리 됐잖아요. 이게 뭐야. 한 쪽은 생머리고 한 쪽은 뽀글뽀글 파마 머리고...흐엉. 흐어어어엉---" "쥬, 쥬르 울지 마. 울지 말래두." 침대에서 엎드려 웃음을 삼키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울음에 침대에서 내려와 당황한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내 그는 시원한 미소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살며시 입을 열었다. "쥬르. 사람들은 이런 걸 애정의 표현이라고 불러.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매만져 주면서 애정을 확인하는 거지. 싫어?" "애, 애정의 표현요?" 쥬느비에브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으며 눈을 실룩였다. 에이드리안은 환한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멋진 미소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이다 베시시 웃으며 돌아섰다. "헤에- 그랬구나. 그럼 나머지 머리도 땋아줘요. 에헤헤. 기분 좋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로 뽀르르 달려가 머리카락을 땋기 좋게 고개까지 들고 헤실헤실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또 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침대로 걸어갔다. '하여튼 단순하다니까...' 오늘도 그렇게 쥬느비에브의 단순한 아침과 에이드리안의 멋쩍은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98음(第98音) 체리욜파쳰(2) 에이드리안은 까만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다른 한 손은 하얀 목도리에 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얀 하늘이 보기 좋았다. 겨울이라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이었지만 그는 오늘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발을 옮길 때마다 사박사박하고 들리는 마른 흙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쌀쌀하지만 시원한 느낌을 주는 공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 쥬느비에브가 식사를 하면서 수줍은 얼굴로, 점심 무렵에 애너벨 정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일종의 데이트 신청이라면 데이트 신청이랄까. 그녀의 표정으로 짐작해 보건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이 너무 기분 좋았던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계속 기분이 안정되어 있었다. 얼마 전, 엘로이즈의 죽음을 들은 순간만 해도 괴롭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프란체스가 이번 대의 희생자라는 사실도 몹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몹시 행복했다. 슬픈 사실은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그 것이 프란체스와 엘로이즈의 뜻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며... 위선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괴롭고 슬픈 일은 이제 잊고 싶었다. 어차피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은 사람이다. 죽음을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슬퍼하는 것이 오히려 엘로이즈와 프란체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행복해져서 그들의 마음에 보답하자. 에이드리안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쥬르,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후훗." 에이드리안은 혹여 쥬느비에브가 기다릴까 빠르게 발을 놀리며 애너벨 정원으로 향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애처로운 숲이 그를 스쳐갔다. 곧 이어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 특선 메뉴가 쥬느비에브가 특히 좋아하는 메뉴라고 그녀가 그랬던 것 같다.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해야겠다. 쿡. 오늘도 혼자 2인분을 먹을지도 몰라, 쥬르. 좋아하는 음식은 정말 폭식해 버리니까."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를 흘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달콤한 꽃향기가 났다. "꽃...향기? 이 계절에?" 에이드리안은 의아한 눈빛으로 안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그만 놀라 멈춰서 버렸다. 정원의 모습이 마치 봄날의 그것처럼 화사하게 변해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짝 말라버린 풀과 시들어 버린 꽃, 그리고 앙상한 나무로 보기 흉했던 정원이 너무나 훌륭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랗게 돋아나 있는 풀과 가지마다 가득 잎사귀를 달고 있는 나무들,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꽃과 시원하게 쏟아지는 분수. 초록색과 분홍색, 노란색으로 채색된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어리둥절 할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둘러 정원을 둘러보다 꽃이 머금고 있는 하얀빛을 발견했다. 다가가 손으로 만지자 빛은 한순간에 흩어져버렸다. "레...플리카? 누가 이런... 설마 쥬르?" 에이드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상급 능력자라고 해줄 만 했다. 쥬느비에브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믿기 어려웠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전에 보여줬던 '환영'도 대단하긴 했지만... 이 정도 레플리카 능력이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한 거야." 에이드리안은 한편으로 기쁘면서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뒤돌아 섰다. "그런데 쥬르는 어디에?" 에이드리안은 걸음을 옮겨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얼마를 살폈을까. 에이드리안은 뭔가 불안한 느낌과 두근거리는 느낌에 침을 삼키고 천천히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이내 자신의 발 밑을 붉게 적시고 있는 피를 발견했다. "피?" 에이드리안은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했던 예감이 들어맞아 가는 느낌이었다. 피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에이드리안은 검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흩트린 채 쓰러져 있는 쥬느비에브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에이드리안은 온 몸이 한 순간에 경직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신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쥬르! 쥬르, 어떻게 된 거야! 쥬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입술에 말라버린 피를 발견하고 주머니 안의 손수건을 꺼내기 위해 팔을 내렸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좀처럼 손수건을 꺼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가까스로 손수건을 꺼낸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입가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미 말라버린 피는 닦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바짝 말라버린 입술로 중얼거렸다. "쥬르, 어떻게 된 거야..." ******** 쥬느비에브를 집에 데려온 에이드리안은 바짝바짝 타는 속을 진정시키지 못해 연신 아랫입술을 깨물며 방안을 서성였다. 하우먼 박사가 기다리라며 쥬느비에브의 방에서 내보내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방에서 속만 태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갔다. 희미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 앞을 덮쳐오던 붉은 피...그 때 나는... "피가...피가...욱, 우욱.." 구역질이 났다. 에이드리안은 급하게 욕실로 뛰어가 속을 게워냈다. 세수를 하고 에이드리안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힘없이 쳐다보았다. "무서워. 쥬르... 괜찮은 거지? 그런 거지?" 눈에 눈물이 맺혀왔다. 에이드리안은 욕탕 모서리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무서웠다. 불안했다. 너무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계속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압박하고 속박하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무서웠다. "미레이유, 너한테 지지 않을 거야. 지지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하아...하아..." 몸이 무거웠다. 숨이 가빠왔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욕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때 어렴풋이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미라벨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미라벨. 쥬르는... 쥬르는 어떻게 됐어? 깨어났어? 하우먼 선생은 쥬르, 괜찮대? 그렇대? 빨리 말해 봐." 미라벨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초조하게 시선을 돌리다 결심했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쥬느비에브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요, 에이드리안 님. 그리고 하우먼 선생님의 말로는...토혈의 이유를 알 수가 없다더군요. 지금 온 몸에 열이 나서... 에이드리안 님?" 미라벨은 자신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달려나가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이마를 짚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떻게 된 거야, 쥬느비에브는. 큰 일이네." 미라벨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 쥬느비에브의 방 안은 레플리카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곧장 그녀의 침대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를 발견한 케이로프와 안느마리가 인사를 건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침대의 휘장을 걷어내며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살폈다. 파리한 안색이 너무 안쓰러웠다. 숨쉬기가 힘든지 연신 쌕쌕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안타까운 얼굴로 가만히 손을 내려 이마를 만져보았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하우먼 박사를 쳐다보았다. "이렇게...고열이 나는데. 몇 도르째 계속 이러고 있다고? 약을 먹게 하든 뭐든 수를 써 봐야...." 에이드리안은 험악한 표정으로 하우먼 박사에게 따지듯 말을 하다 순간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힘에 휙 뒤돌아보았다. 유벨이었다. "유벨, 왜 그래? 지금 쥬르가 아파서..."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아당겨서 테라스로 데려갔다. 에이드리안은 다짜고짜 말도 없이 자신을 데려가는 유벨의 행동에 화가 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빨리 낫게 해줘야...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팔을 뿌리치고 소리를 질렀다. "이 거 놔. 지금 쥬르가 아프다니까..." "에드."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놀라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가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필시 안 좋은 일이 있다. 에이드리안은 불안한 눈으로 그에게 눈짓을 했다. "말해 봐. 뭔데?" 유벨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 레플리카가 안 먹어. 아까부터 내가 계속 레플리카를 썼는데 열이 내리기는커녕 더 올라가기만 해." "무슨...말이야? 뭐라고? 뭐?" 에이드리안은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이 일순간 새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시야가 회복되고 있었다. 유벨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플 때 레플리카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 너도 잘 알지? 이건 직접 아픈 사람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거야. 죽을 병에 걸렸어도 레플리카를 사용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기력을 회복시킬 수 있어. 그런데... 아무리 레플리카를 써도 기력이 회복되기는커녕... 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그, 그만 해. 유벨. 말도 안 돼. 그런 일이... 아닐 거야. 쥬르는 그냥 너무 아파서...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쥬느비에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끔찍한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 에이드리안은 마치 주문을 걸 듯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다시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갔다. 에이드리안은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한번 흔든 다음 하우먼 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해열제는? 그리고 다른 상처 같은 건?" "갑작스런 토혈과 고열로 쓰러지신 것 같은데... 별다른 외상은 없고 그저 지금은 열만 내리면 될 것 같습니다, 도련님. 해열제도 투여했고... 그저 열만 내려가면 될 것 같은데. 토혈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돌아보았다. "유벨, 쥬르는 내가 보살필 테니까 안느마리하고 데려가. 케이로프, 미라벨 데리고 가. 곧 체리욜파쳰도 있으니까 다들 걱정하지 말고 연습해. 쥬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학생회실에는 당분간 못 갈 것 같으니까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고." 보고 있던 안느마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 쥬느비에브, 괜찮겠죠?" "안느마리, 에이드리안이 알아서 할 테니까 우선은 돌아가자." 유벨이 안느마리를 데리고 가며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에이드리안은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불안한 얼굴로 건넨 인사에 답해 주고 다시 쥬느비에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마를 쓰다듬어 주니 손바닥 가득 땀이 묻어났다. 에이드리안은 곁에 있는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셔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뺨에 묻어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떼어내 주며 에이드리안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쥬르, 내가 낫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무서운 일은 아무 것도 없을거야."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쥐었다. 왜 쥬느비에브가 이렇게 된 걸까. 언제쯤 깨어나서 자신을 바라보아 줄까... ******** 쥬느비에브가 자리에 누운 지 꼬박 사흘이 지났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방에서 나가는 하녀장과 하녀를 보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의 온 몸이 땀에 젖어 옷을 갈아 입힌 참이었다. 쥬느비에브의 고열은 쉽게 내릴 줄을 몰랐다. 에이드리안은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쓰러져 있는 그녀를 데려온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쥬느비에브 자신도 지쳐 가는 것 같았다. 다행히 어제 저녁부터 레플리카의 기운이 작용하는 것 같아 지금은 덕분에 그나마 열이 많이 내린 셈이었다. 며칠 째 핼쑥해진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 왔다. 에이드리안은 침대 가에 앉아 그녀의 마른 입술을 물 묻힌 수건으로 적셔 주었다. "쥬르, 꿈꾸는 거야? 악몽을 꾸는 건 아니지? 그런 거라면...내가 어떻게 깨워줘야 할까."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쥬느비에브의 얼굴과 목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며칠째 밤잠도 제대로 자지 않아 몹시 피곤했다. 하지만 이렇게 끙끙 앓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두고 편하게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느마리와 미라벨이 간호를 하는 동안 1, 2 도르씩 눈을 붙이긴 했지만 제대로 잘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우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쥬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난 너무 행복했었는데... 갑자기 너무 무서워졌어. 쥬르, 깨어나 줄 거지? 다시 웃어줄 거지?" 에이드리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눈을 감았다. 유벨의 말이 생각났다. 아픈 사람에게 레플리카가 작용하지 않는 경우는 단 두 가지 밖에 없다. 병자가 마음 속으로 강하게 레플리카 사용자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와 또 한가지... "쥬르 스스로 이렇게 아파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텐데... 내 얼굴을 보고 싶을 텐데..."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귀를 쥬느비에브의 심장 위에 갖다댔다. 미약한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전해 졌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뛰고 있는데..."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쥬느비에브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깨어나서 방긋 미소지어 줄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노래를 불렀다. [ 세계의 가운데 심어져 있는 세계수 내가 건네는 단어 하나를 가만히 집어 드네. 조용한 세계 물방울이 떨어져 생긴 작은 파문 내 마음으로 번져 가는 작은 소망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소망 세계수에게 이뤄달라고 단어를 건넸어 나의 소망 나의 사랑 모든 것을 이뤄 달라고 작은 단어를 건넸어 조용한 세계 나의 바램이 이루어지는 당신의 작은 세계... ]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 중으로 퍼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몸을 일으켜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쥬르, 빨리 일어나. 계속 눈뜨지 않으면 나, 도망가 버릴지도 몰라. 난 약하고 비겁하니까... 쥬르, 무서워.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어서 눈떠 줘. 그리고 웃어 줘... 부디..." 제99음(第99音) 체리욜파쳰(3) 까만 생머리의 작은 꼬마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파란 나무들이 우거진 숲에는 소녀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소녀는 눈을 말똥거리며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검은머리의 그는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온화한 얼굴로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남자의 노래는 너무 아름다웠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환한 빛줄기보다도, 부드럽게 스쳐 가는 바람보다도 아름다웠다. 작은 꼬마는 노랫소리에 홀린 듯 귀를 기울였다. 노래는 마치 공기 중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렇게 흩어져 소녀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순간 남자가 노래를 멈췄다. 남자는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기침을 하고 있었다. 꼬마는 깜짝 놀라 나무 뒤에서 뛰쳐나갔다. "파파!" 꼬마의 외침에 남자가 기침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그는 몹시 놀란 표정으로 꼬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려온 꼬마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눈 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쥬르, 들었어? 들은 거야?" 꼬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너무 하얘서 걱정이 되었다. 꼬마는 통통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쥐며 말했다. "파파. 아파요?" "쥬르, 들었어?" 남자는 꼬마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방금 물었던 질문을 재차 반복했다. 꼬마는 남자의 물음에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파파는 너무 노래 잘 해요. 쥬르도 파파처럼 노래하고 싶..." 꼬마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꼬마를 확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슬픈 눈으로 꼬마를 품에 안으며 흐느끼듯 말했다. "쥬르, 노래 같은 건 해서는 안 돼. 노래를 해서는 안 돼. 쥬르, 절대 노래해서는 안 돼. 알았지? 쥬르, 무슨 일이 있어도 노래 같은 건 해서는 안돼..." 꼬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노래를 하지 말라는 거지? 노래하면 너무 예쁘고 부드럽고 기분이 좋은데... 꼬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노래 같은 건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노래하지 말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다. 꼬마는 갑자기 눈 앞이 하얗게 변해오는 것을 느꼈다. 꼬마는 놀란 눈으로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의 손을 눈 앞으로 올려 쳐다보았다. 손이 커졌다. 손이 커진 게 아니라 자신이 커진 것 같았다. 순간 눈 앞에 거울이 나타났다. 거울 앞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검은 생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때, 뒤쪽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쥬르, 준비 다 됐어?" 소녀는 기쁘게 대답했다. "으응. 에이드리안. 우리 빨리 데이트하러 가요." 소녀는 금발의 소년에게 팔짱을 끼고 기쁜 듯 방실방실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초록색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나왔다. 소녀는 손에 들고 가던 손가방을 뱅글뱅글 돌리며 숲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았다. 그때 금발의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쥬르, 그런데.... 왜 노래 같은 거 하면 안 되는 건데?" 소년의 물음에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소녀는 가방을 두 손으로 꾸욱 쥐며 대답했다. "파파랑 마망이 노래하지 말랬어요." "하지만 난 네 노래, 듣고 싶은 걸. 네 노래, 나 좋아해." "에에? 정말? 그럼 나, 노래할래. 노래할 거야. 에이드리안이 기뻐하면 뭐든지 할거야." 소녀는 소년에게 생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소년은 기쁜 듯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 이잖아?" "에이드리안?"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뻔뻔해. 어떻게 그걸 알면서 내 곁에 있을 생각을 하는 거야? 네가 '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내가 널 곁에 둘 거라고 생각해?" 냉랭한 파란 눈동자 속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녀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소녀는 주눅이 든 마음을 가까스로 일으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하지만 난 에이드리안 곁에 있고 싶어요. 안 돼요?" 소녀의 말에 소년은 파란 눈동자를 싸늘하게 빛내며 매정하게 말했다. "안 돼. 그런 저주받은 피를 내 곁에 둘 수는 없어. 노래 할 수 없는 그 끔찍하고 더러운 피를 내 곁에 둘 수는 없어." 소년은 말을 마치고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소년의 뒷모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몸이 떨려왔다.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거세게 외쳤다. "모두 당신 탓이야. 당신 탓이야. 당신이 날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어. 당신이 내 행복을 전부 가져가 버렸어. 내 가족도, 내 힘도... 내 소중한 것 모두를 가져가 버렸어! 광속성 레플리카 따위 없어져버렷! 없어졋! 없어져버렷!! 당신 따위 없어져버리라구!!!! 흐윽...흐윽....흐어어어엉----" ******** 쥬느비에브는 번쩍 눈을 떴다. 눈 가에서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섭고 섬뜩한 기억에 소름이 끼쳤다. 뻐끔하게 열린 동공 너머로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상냥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어머니... 쥬느비에브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행복했던 시절.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너무나 그리웠다. 파파와 마망이 너무 보고 싶었다. 순간 금발의 소년이 눈 앞에 떠올랐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자신의 약혼자. 나의 새로운 가족. [ 네가 '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내가 널 곁에 둘 거라고 생각해? ] 쥬느비에브는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목에서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폐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방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그 때 주전자에 새로 물을 받아 방으로 들어오던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비명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전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쩔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주전자가 떨어지고 바닥에 물이 엎질러졌다. 그러나 쥬느비에브의 비명 소리에 놀란 에이드리안은 개의치 않고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쥬느비에브는 귀가 터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쥬르. 깼어? 쥬르!" "다가오지 말아요!!"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외마디 비명에 당황해 순간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침대 옆에 걸터앉아 쥬느비에브의 몸을 돌렸다. "쥬르, 나쁜 꿈 꿨어? 쥬르..." 에이드리안은 눈물 범벅이 된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쥬느비에브는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리다 와락 에이드리안의 품에 안겼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등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 쥬느비에브는 뭔가에 많이 놀란 듯 했다. 다행히 깨어나서 다행이었지만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울어대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속삭이듯 그녀의 귀에 말했다. "쥬르, 꿈 꾼 거지? 나쁜 꿈 꾼 거지? 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흐엉. 흐어어어엉.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쏟아내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끌어안으며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다독였다. 그녀의 울음에 안타까운 마음과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안도감으로 에이드리안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 쥬느비에브가 깨어난 지 이틀이 지났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침대 기둥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아침 일찍 찾아온 하우먼 박사에게서 진찰을 받고 있었다. 하우먼 박사는 쥬느비에브의 상태를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피고는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지금 상태라면 걱정하실 것 없을 것 같습니다. 충분한 영양 섭취만 하시면 원래 건강하시던 아가씨의 모습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녀장에게 약을 맡겨 놓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도련님." 하우먼 박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하우먼 박사의 진료 결과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안느마리가 활짝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손을 덥썩 잡았다. "쥬느비에브, 이제 다 나은 거나 마찬가지야. 당분간은 푸욱 쉬어. 내가 동방에서 가져온 귀한 보약을 가져올 테니까." "안느마리 말이 맞아요, 쥬느비에브. 당분간은 노래 연습 같은 건 잊어버리고 푹 쉬는 게 좋겠어요. 체리욜파쳰 연습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미라벨이 미소 띈 얼굴로 쥬느비에브에게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미소지었다. "으응. 나, 당분간은 푹 쉬어야 겠어요. 요즘 노래 연습 너무 많이 해서 아팠던 거 같으니까. 헤헤- 나 정말 바보라니까요. 아플 줄도 모르고 연습만 하다니." "맞아. 쥬느비에브. 몸 생각도 좀 하면서 연습하라고. 우리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기나 알아?" 유벨이 싱겁게 웃으며 거들었다. 케이로프도 오랜만에 미소를 보이며 쥬느비에브를 독려했다. "역시 쉬는 게 좋겠군. 다 나으면 다시 레슨을 하도록 하지. 내가 좀 더 시간을 내 볼 테니." "고마워요. 케이로프 님. 다음 레슨 때부터는 도망 안 가고 수업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나 쉰다고 다들 놀지 말고 연습 열심히 하세요. 헤헤- 매일 침대에서 뒹굴렁거리니까 기분은 좋아요."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쥬느비에브가 쉴 수 있도록 유벨과 안느마리,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짧게 면회를 마쳤다. 쥬느비에브는 모두에게 정답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에이드리안은 걸어나와 쥬느비에브의 앞에 섰다. "쥬르."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나 쉬고 싶으니까 혼자 있게 해줄래요?" 쥬느비에브는 언제나의 모습처럼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벌리다 다시 꾸욱 닫았다. 쥬느비에브는 침대에 누워 목까지 이불을 끌어당기고 몸을 돌려 눈을 감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며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어나고 나서 쥬느비에브는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그녀가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었으나 묘하게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견딜 수 없이 화나고 속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쥬느비에브에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파서 핼쑥한 모습의 그녀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나고 속상했다. ******** 깊고 고요한 밤이었다. 비인 가의 장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저택의 서재 안에는 겨울의 차가운 달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작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넓은 책상 앞에 앉아 테라스 밖의 달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검은머리의 남자는 피식 웃으며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쥬느비에브가 무사히 깨어났다?" "그렇습니다." 어두워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서재 안쪽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머리의 남자는 천천히 턱을 괴며 자유로운 한 쪽 손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곧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어. 게다가 체리욜파쳰이 다가오고... 흠, 일을 좀 더 서두르는 게 좋겠어." 검은머리의 남자는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로 다가간 그는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에 남자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난 겨울이 좋아. 춥고 메말라서, 그래서 좋아. 따뜻한 온기가 더 따뜻하게 느껴지거든. 후훗. 너희들의 온기도 전해져와. 이런 밤에는..." "저희들은 그저 당신이 행복하시다면..." 방안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은머리의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난 내 소망을 반드시 이루고 말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에겐 고맙게 생각해. 오르탕스, 올슈틴. 그리고..." 남자는 검은 옷자락을 날리며 뒤돌아 섰다. "이제 네가 나서 줘. 내가 원하는 건...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가르쳐 주신 일이니까요." 방 안 깊숙한 곳에서 울린 소년의 싸늘한 목소리에 검은머리의 남자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 네가 슬퍼해도, 마음 아파해도 하는 수 없어. 이미 모든 게 어긋나 버렸거든." 에스프라드는 물기로 촉촉한 눈을 들어 달을 쳐다보았다. 하얗고 하얀 달. "에이드리안, 네가 좋아한 달이지. 저건... 하얗고 하얀..." 제100음(第100音) 체리욜파쳰(4) 에이드리안은 미라벨이 아침에 가져다 주고 간 꽃들을 다듬어 꽃병에 넣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정성스레 한 송이씩 꽃을 꽂았다.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부드러운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좋아할 것 같아 흐뭇하게 미소가 퍼졌다. 꽃병에 무사히 꽃을 꽂아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하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두런두런 들리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에 우뚝 멈춰섰다. "꼬마 에드, 나 아플 동안 심심했었지? 걱정하지 마. 이제 다 나았으니까 꼬마 에드, 강아지 밥도 꼬박꼬박 주고 산책도 시켜줄게. 헤에- 기분 좋지?" 강아지와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이제 거의 기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스콜라에 나가고 있진 않지만 일상 생활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마 에드, 그런데 좀 살찐 거 같다? 에이드리안이... 밥 꼬박꼬박 줬나보네? 다행이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꽃병을 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꼬마 에드, 넌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에이드리안이 떠나가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꼬마 에드도 떠나버린다면 너무 마음이 아플 거야. 이번에 아팠던 거 보다 훨씬 아플 거야." 에이드리안은 다시 멈춰 섰다. 쥬느비에브는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내가 쥬느비에브의 곁을 떠난다니... 그녀는 아픈 뒤로 확실히 이상했다.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가끔씩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왜 아팠는지 왜 애너벨 정원에서 쓰러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겨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본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슬쩍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강아지를 안고 침대로 달려갔다. 계속 이런 식이다. 쥬느비에브는 자신만 보면 시선을 피하거나 하던 말을 그만둔다. 분명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서랍 쪽으로 걸어가 꽃병을 서랍 위에 올렸다. 보기 좋은 쪽으로 꽃병을 돌린 에이드리안은 애써 무심한 척 말을 건넸다. "몸은 어때?" "좋아요." "약은 먹었어?" "네." 최소한 간단하게 끝내려는 대답. 에이드리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뒤로 돌아서 버럭 화를 냈다. "도대체 왜 그래? 내가 뭐 잘못 한 거 있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봐!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그, 그런 거 없어요."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꼬옥 품에 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화를 부채질했다. "그럼 뭐야! 왜 자꾸 피하는 거야?" "피, 피한 적 없어요." 쥬느비에브는 더욱 움츠러들며 작게 대답을 했다. 에이드리안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도 못 들고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애써 얼굴을 풀고 달래듯 물었다. "쥬르, 뭐 마음에 안 드는 것 있어? 방 분위기 질린 거야? 바꿔줄까? 겨울 옷 더 필요해? 아니면 계속 방에만 있어서 답답한 거야? 우리 밖에 나가서 오늘 식사할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대답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럼 뭐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계속 피하고 말도 안 하고.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너 도대체..." 에이드리안은 버럭 소리를 지르다 말끝을 흐렸다. 쥬느비에브가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쥬느비에브나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내렸다. "네 마음대로 해. 말을 하던지 말던지!" 에이드리안은 말을 내뱉고 밖으로 나갔다. 쥬느비에브는 소맷자락으로 슥슥 눈물을 닦으며 그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가지 말아요. 에이드리안..." ******** 시간이 꽤 흘렀다. 쥬느비에브는 창 밖으로 다가가 흘끗 밖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프고 나서 그로서는 첫 외출인 셈이었다. 계속 아픈 그녀의 곁을 지켜 주느라 에이드리안은 학생회 업무와 체리욜파쳰 준비도 미루어 오고 있었다. 이번의 체리욜파쳰은 에이드리안에게도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미라벨이 말했었다. 이번 테스트는 에스프라드에게 뒤쳐진 랭크를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안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신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안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에 사실을 알게 되면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싫어할 게 틀림없었다. 그건 너무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편이 낫다. 헤어지는 것보다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 그에게 다가가면 눈치빠른 그가 분명 눈치챌 것이다. 자신의 이런 마음과 생각을...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꼬옥 품에 안으며 슬프게 속삭였다. "생각하기 싫었는데 다 생각나 버렸어. 생각하면 에이드리안과 헤어져야 할지도 모르는데... 에이드리안, 나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가지 말아요..." ******** 어느 새 밤이 깊었다. 에이드리안은 낮에 나간 뒤에 단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몸을 움츠렸다. 마음이 무거웠다. 바보 같은 자신 때문에 에이드리안을 아프게 만들었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이드리안 곁에 있고 싶었다. 사랑 받고 싶었다. 소중하게 생각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문득 깨달아 버린 사실이 있었다. '그것'을 에이드리안이 알아버린다면 그는 도망가 버릴지도 몰랐다. 아니다. 자신을 내쫓아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너무나 상냥하고 친절해서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을. 그리고 그 끝에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을 것이다. 마음 아프고 속상한 일이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안고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계속 아팠던 탓에 약간 마른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보기 싫은 건 거울 속 소녀의 우울한 얼굴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포옥 한숨을 쉬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발을 디디며 쥬느비에브는 몸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집 안은 레플리카 온도 장치로 무척이나 따뜻했는데도 이상했다. 자꾸 추웠다. 강아지를 더욱 품에 안았다. 가르릉 거리는 강아지의 몸으로부터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애써 웃으며 강아지에게 미소지어 주었다. "꼬마 에드. 나 우울하니까 꼬마 에드도 싫지? 나, 꼬마 에드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쥬느비에브는 다시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다들 준비를 하느라 집사도 하녀장도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현관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살짝 인상을 쓰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은 어두웠다. 나무들이 전부 시커멓게 보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하늘도 어둡고 모두가 너무 어두웠다. 쥬느비에브는 무서웠다. 어디선가 무언가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강아지를 더욱 품에 꼭 끌어안고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는 작은 키의 가로등 쪽으로 달려갔다. "에, 에이드리안이 언제쯤 올까. 꼬마 에드."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강아지를 쳐다보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아마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기다릴 셈이었다. 그가 뭐라고 하든 사과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이유든, 어떤 식으로든 그를 마음 아프게 한 일은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기가 겁이 났다. 상반된 마음이 서로 뒤엉켜 몹시 힘들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아니다. 에이드리안은 결코 자신의 마음을 알아서는 안 된다. 알게 되면...날 싫어할지도 몰라. ******** 에이드리안이 돌아온 것은 새벽 2 도르 경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저녁도 거른 채 서서 에이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것도, 배가 고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에이드리안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야 어쨌든 분명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것은 사과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벨과 인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바짝 긴장을 해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곧 에이드리안이 이쪽으로 오겠지. 그럼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발의 에이드리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 쪽으로 다가왔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해야 해. 말해야 해!'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꾸욱 쥐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흘깃 쳐다보고는 사과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눈 앞에 지나간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쥬느비에브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눈물이 났다. 사과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에이드리안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한 팔로 강아지를 안고 나머지 한 쪽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눈물을 닦다가 다시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멈추고 멀뚱멀뚱 현관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웃고 있지 않았다. 분명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쥬느비에브는 손등으로 슥슥 눈물을 닦았다. 그 때 어느 새 다가온 에이드리안이 눈물을 닦던 손을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 곧장 집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데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화 많이 났나 봐. 어쩌지? 어쩌지? 훌쩍.'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며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손을 끌고 다짜고짜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은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 그러니까 쥬느비에브의 마음 따위 살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울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손을 뿌리쳐 소파위에 던지듯 앉혔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거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에이드리안은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뒤돌아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쥬느비에브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그득 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모습에 다소 당황하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는 쥬느비에브의 우는 모습이 정말 싫었다. "울지 맛!" 그가 소리를 지르자 쥬느비에브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파에 강아지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입을 꾸욱 막았다. 눈물을 참아보려는 시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기는커녕 더 큰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에,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자꾸 눈물이 나요. 미안해요...흐윽..흐윽..."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울먹이는 모습에 인상을 쓰며 다시 뒤돌아 섰다. 저런 모습을 보면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녀의 마음을 캐보리라. "말해. 요즘 왜 그러는지. 말 안 하면 방에 가둬놓고 안 보내줄 거야." 에이드리안은 단호하게 말을 끝맺고 다시 뒤돌아 섰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망울을 들어 쥬느비에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꾸욱 입을 닫았다. 에이드리안은 답답함에 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옆으로 가 앉아 계속 다그쳤다. "너 계속 이러기야? 우리 가족이라며? 이런 가족이 어디 있어?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넌 아프고 나서 나만 보면 피하고. 너, 나하고 결혼하기 싫어진 거야? 그런 거야?" "아, 아니에요!" 쥬느비에브는 바닥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실 쥬느비에브 자신도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서웠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너무나 무서웠다. 쥬느비에브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이드리안은 몰라. 에이드리안은 몰라. 날 싫어하게 될 거야. 분명 그렇게 될 거야. 내가 아플 때마다 에이드리안은 날 너무 싫어하게 될 거야. 그건 싫어. 너무 무서워. 무섭고 싫어. 흑흑. 흐어엉-"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쥬느비에브가 떨고 있었다. 무언가에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물었다. "쥬르, 무슨 일인데 그래? 말해 봐. 나, 널 싫어하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싫어하지 않을 테니까." 쥬느비에브가 손을 내리고 눈물로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드리안. 나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밤에 잠도 안 와. 에이드리안이 나한테 말했어. 날 곁에 둘 수 없다고 꿈에서 그랬어. 너무 무서워. 무서워." "쥬르. 그거 꿈이잖아.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하게 될 거에요. 알게 되면 에이드리안도 무서울 거에요. 내가 아플 때마다 에이드리안도 너무 아플 거야. 날 싫어하게 될 거야. 무서워... 너무 무서워..." 쥬느비에브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정말 답답했다. 쥬느비에브는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쥬느비에브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는 쥬느비에브를 꼬옥 품에 안았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쥬르. 무서워하지 마. 네가 아플 때마다 나, 가슴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널 싫어하지는 않아.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래서, 내가 널 싫어할까 봐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러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바보. 너 정말 바보야. 가족끼리는 슬픔도 나눈다고 너 전에 그렇게 말했잖아. 왜 네 마음은 혼자만 숨겨두려고 하는 거야? 네 불안한 마음, 나한테도 나눠 줘. 나눠서 반으로 만들자." 에이드리안은 싱긋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꾸욱 다물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품에서 떼어내고 살짝 미소를 띈 채 입을 열었다. "쥬르, 난 절대 널 싫어하지 않을 거야. 내 레플리카를 걸고 맹세해. 쥬르는 내게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까 아껴줄게. 어때? 이제 안심이 되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와락 에이드리안의 품에 안겼다.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나 너무 불안해서 심술부린 건지도 몰라요. 에이드리안, 내 투정 다 받아줘서 고마워요. 나, 나... 어떻게든 싸워 볼래. 에이드리안 곁에 주욱 같이 있을 거야. 같이 있을 거야...." 에이드리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현실이라는 믿음을 주는 따뜻한 온기...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치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제101음(第101音) 체리욜파쳰(5)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의자 밑으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었다. 그녀는 지금 에이드리안의 연습실에 와 있는 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종이에 싸여 있는 모롤라 파이 하나를 쏙 빼어 입에 물고 웅웅거리며 강아지의 발을 잡고 흔들었다. "음음, 얌냠... 꼬마 에드, 맛나지?" 쥬느비에브는 파이 한 쪽을 떼어내어 강아지의 입에 물렸다. 강아지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거리며 꿀꺽 삼켰다. 파이의 달콤한 맛에 기분이 좋은지 강아지는 쥬느비에브의 무릎에서 풀쩍 뛰어내려가 달려갔다. 강아지는 다짜고짜 에이드리안의 다리에 돌진해 척 달라 붙었다. 그리고 꾸물꾸물거리며 몸을 비벼댔다. 테이블 위에 한가득 악보를 펼쳐놓고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이 녀석. 쥬르랑 놀라고 했잖아. 난 지금 바빠. 강아지 군."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갔다. 쥬느비에브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피크닉용 바구니를 부지런히 들쑤시며 간식을 챙겨 먹고 있었다. 달콤한 소스가 듬뿍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이 건네주는 강아지를 품에 받아 안았다. "에이드리안, 꼭 소풍 온 거 같아요. 에이드리안 연습실에 소풍 온 거 같아요." "쥬르, 안 심심해?" "아아-뇨. 안 심심해요. 먹을 것도 많고 꼬마 에드도 있고. 짜잔! 그림책도 가져 왔어요. 그러니까 에이드리안은 신경 쓰지 말고 연습해요."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 듯 그림책을 들어 보이며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웃어주고 다시 악보를 펼쳐놓은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안은 오늘부터 체리욜파쳰을 대비한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쥬느비에브가 부산을 떨더니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집에만 있으면 재미없다며 자신을 따라나선 쥬느비에브였다. 유벨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체리욜파쳰 준비 때문에 몹시 바빴다. 에이드리안은 결국 자신이 아니면 쥬느비에브 혼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어젯밤 쥬느비에브는 조심스럽게 이번 체리욜파쳰은 불참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노래 연습은 무리라고 말하며 쥬느비에브는 그의 동의를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흔쾌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열에 시달리느라 아직 몸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는데 굳이 테스트를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조금 섭섭하기도 한 그였다.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그녀였다. 그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이번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받길 원했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도 스스로에게 좀 더 자신감이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랭크에 대해 조금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던 쥬느비에브였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음 해에도 기회는 있으니 보채지 않을 생각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악보에 시선을 가져가며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지금은 만족스러웠다. 쥬느비에브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다정하게 웃어준다. 그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 케이로프의 연습실에서 미라벨은 악보를 보며 음정을 맞추고 있었다. 이번 테스트에서 그녀의 각오는 대단했다. 어떻게 해서든 올해에도 케이로프를 누르고 상위 랭크를 받을 생각이었다. 이 것은 어떻게 말하면 자존심 대결이었다. 약혼을 한 뒤로 약간은 해이해진 마음을 바로잡고 당당하게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로서의 자부심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어. 그래! 인간 미라벨! 멋지군요. 오호호호호호호----" 미라벨은 환희에 찬 얼굴로 외치며 그녀의 보라색 스커트를 휘날렸다. 마침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마치 산 정상에서 아래를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그 때 뒤에서 케이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은 열어 놓고 뭐하나.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미라벨은 화끈 얼굴을 붉히며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돌렸다. 케이로프가 악보를 들고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라벨은 그의 의아한 표정에 헛기침을 하며 외쳤다. "그, 그저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맑게 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 뿐이라니까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별 이상한 취미군." 케이로프는 툭 말을 던지고 다시 악보에 눈을 돌렸다. 미라벨의 그의 말에 발끈해서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요, 당신. 당신은 왜 날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거에요? 말만 하면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또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우린 약혼한 사이라구요. 좀 더 다정하게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미라벨은 이마를 찡그리며 케이로프에게 외쳤다. 케이로프는 눈썹을 실룩이더니 자신의 갈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부를까. 나의 사랑하는 그대라고 부를까?" "그, 그런 촌스런 말은 싫어요!" 미라벨은 얼굴을 붉히며 팔짱을 꼈다. 저런 민망한 말을 혈색 하나 안 바꾸고 말하는 자신의 약혼자가 참으로 신기한 그녀였다. 케이로프는 악보를 넘기며 다시 말했다. "그럼 나의 반쪽? 아니면 당신? 여보?" "정말! 그건 결혼한 사람들의 호칭이잖아요! 그냥 미라벨이라고 불러요." 미라벨은 부끄러운 마음을 애써 숨기며 태연한 척 말했다. 케이로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미라벨 브레시아 모르 뤼베이크 양." 미라벨은 케이로프의 대답에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숨을 훅훅 내쉬었다. 그의 입에서 미라벨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정말 듣기 힘들 것 같았다. 미라벨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에이드리안 님, 아무래도 뭔가 불안해요." "뭐가?" "저번 엘로이즈 님의 죽음도 그렇고 유벨 님의 눈치를 봐서 또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집안 문제라니 물어보기도 그렇고. 이번에 쥬느비에브는 쓰러져서 며칠동안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속 안 좋은 일만 있잖아요. 게다가 그 재수 없는 에스프라드 '씨'의 졸업은 다가오고. 혹시 3년 전 같이 불행한 일이 생기면...." 미라벨은 어두운 안색으로 그에게 말했다. 케이로프는 살짝 인상을 쓰며 미라벨의 말을 끊었다. "그만 둬.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 때는 아무 일도 못 했던 우리지만 이번에는 꼭 그 분의 힘이 되어드릴 테니. 그리고 쥬느비에브 양이 곁에 있으니 에이드리안 님도 3년 전처럼 무너지진 않을 거야." "그렇죠? 그 분 곁엔 쥬느비에브도, 유벨 님도, 안느마리도, 그리고 우리도 있으니까. 훗,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참 행복하네요." 미라벨은 미소를 띄며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케이로프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만 행복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가만히 손을 잡고 테이블에 기대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소슬하게 바람이 부는 풍경이 메말라 보였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평안했다. 그들과 그들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기원하며 두 사람은 미소지었다. ******** 같은 시각, 유벨은 자신의 연습실에서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있으면 자꾸 형의 생각이 났다. 에이드리안이 혹시 슬퍼할까 봐 그의 앞에서는 절대 형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혼자일 때는 어쩔 수 없이 형의 생각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부모님이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생각만 해도 가슴아픈 광경이다. 눈물을 쏟으며 통곡을 하실 지도, 아니면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 지도 몰랐다. 비인 가에서 태어난 이유로 받게 된 고통. 형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은 어쩌면 편안한 마음이었을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그에게 안식을 주었을지도. 유벨은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생각났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 한 순간 스쳐 가는 미안함과 죄책감. 유벨은 그런 그의 눈동자가 싫었다. 그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형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래도 요즘은 에이드리안도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형과 자신이 그에게 짐을 지운 셈이다. "형... 어릴 때부터 날 위해 많을 걸 희생했었는데..." 유벨은 미소를 지었다. 형은 본성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했다. 하고 싶지 않은 스콜라의 학생회장 직을 억지로 수락했고 힘든 교육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형이 몹시 고마웠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젠 모두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는데... 후- 형, 제발 죽기 전에는 한 번 보자구. 그래야 울어줄 수도 있을 테니까." 유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쳤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는데 비인 가의 저주도 끝이 났는데...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 ******** 유벨이 불안한 마음으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안느마리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사택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리고 수수한 검정 색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원피스 위에 입은 같은 색의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느마리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악보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악보 책은 쥬느비에브에게 건네줄 책이었다. 안느마리는 무표정하게 악보 책을 보다 이내 활짝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 내가 도와줄게! 쥬느비에브가 노래할 수 있게 도와줄게!" 안느마리는 기쁘게 미소지으며 힘껏 사택 쪽으로 달려갔다. ********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에이드리안의 연습실에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에이드리안이 노래부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는 정말 좋았다. 탁하지 않고 깨끗한 소리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의 노래는 마음을 울리는 커다란 감동이었다.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걸까.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린 채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노래에 집중하며 두 눈을 꼬옥 감았다. 다행이었다. 그가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할 테니.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가슴 벅찬 울림. "노래하고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쿵 쿵 쿵...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며 아랫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에이드리안이 부러웠다. 시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그녀도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었다. 목 저 안 쪽에서 계속 무언가가 울컥한다. 노래가 하고 싶다. 입만 벌리면 바로 노랫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위해서, 에이드리안을 위해서. 목이 탔다. 어서 입을 벌리고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꾸욱 쥐며 쥬느비에브는 더욱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에이드리안의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붉게 물든 그 곳에서 작은 한숨이, 새하얀 하늘엔..." "그만!! 그만해요!!"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고 말았다. 견딜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의 에이드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또 그에게 심술을 부렸다. 자신에게 혐오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나, 먼저 집에 갈게요."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억누르며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내 모습, 너무 흉하겠지. 에이드리안은 이런 모습에 질려버릴 거야. 나한테 질려버릴 거야.' 쥬느비에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쥬느비에브는 울면서 집으로 향했다. 잠을 자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의 놀란 표정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에게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데... ******** 힘없는 발걸음으로 쥬느비에브는 집 안에 들어섰다. 어지러웠다.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하녀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힘없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하녀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님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가씨." "안느마리가요?" 쥬느비에브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신을 기다렸을 친구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미소지으며 걸음을 돌려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안 쪽의 소파에 안느마리가 앉아있었다. 안느마리가 손을 흔들자 쥬느비에브는 애써 방긋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느마리,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너 보러 왔지. 잘 있나 보러." 안느마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좀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 때 곰곰이 쥬느비에브의 안색을 살피던 안느마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쥬느비에브, 또 아픈 거야? 힘도 없어 보이고 안색도 나쁘고. 거기다 이번 테스트 불참하기로 했다며? 체리욜파쳰은 스콜라 최대의 테스튼데." "으응. 그냥. 기분이 우울해서. 겨울엔 날씨도 꾸물꾸물하니까. 체리욜파쳰은 그냥 몸도 좀 안 좋고 해서."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쥐며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이 실망이 크시겠다. 에이드리안 님, 네 노래 은근히 기대하고 계셨는데. 학년 배정 테스트 후에 에이드리안 님 앞에서 정식으로 노래 부른 적 없잖아, 너. 이번에 10학년 심사 위원, 에이드리안 님이 자청하셨다던데...나 때문에 그러셨을 리는 없고, 네 노래 들으려고 그러신거 아니겠니? 테스트 때는 테스트 받는 학생과 심사위원 외에는 방청이 안 되거든. 그래서 심사위원 밖에 노래 못 들어." 안느마리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드리안이... 내 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그런 말, 나한테는 하지 않았었는데..." 쥬느비에브의 말에 안느마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이 내 노래를 기대하고 있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눈이 확 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음 한 쪽이 뭉클했다. 무언가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녀였다. 그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노래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행복이 될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사실 그녀는 계속 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해주기를...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102음(第102音) 체리욜파쳰(6) 안느마리와 주스를 마시며 쥬느비에브는 살풋 미소를 띄었다. 갑자기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풀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은 싫었다. 하지만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기울어 버린 마음을 바로 잡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안느마리의 말을 듣고 조금은 길이 보이는 듯 했다. 자신이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 그 힘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에이드리안과 함께 하고, 그와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 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정답이었다. 자신이 자신답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그 무엇도 아닌 에이드리안과 함께 하고 싶다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지금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안느마리에게 말했다. "안느마리. 에이드리안이 정말... 내 노랠 듣고 싶어할까? 내 노랠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행복해 질까?" "그러엄! 사실 난 그렇게 생각해. 노래라는 거,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부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거 아니니?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노래해준다면 정말 감격스러운 일일 거야." 안느마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를 흘렸다. "안느마리, 나 갑자기 막 힘이 솟아. 에이드리안이 내 노래를 정말 듣고 싶어한다면... 나 노래하고 싶어. 조금 무섭긴 하지만 용기를 내고 싶어." "쥬느비에브, 갑자기 혈색이 돌잖아?"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쾌활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느마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쥬느비에브. 나, 네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참 기분이 좋아. 내 소중한 친구가 웃으면 나도 기분이 좋단 말씀이야." "으응. 안느마리, 고마워." 쥬느비에브는 다시 웃으며 주스잔을 들이켰다. 그래. 기운내자!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마음이 편안해 졌다. 우선 에이드리안에게 연습실에서의 일을 사과하자. 그리고 자신도 체리욜파쳰에 참가하겠다고 다시 말하자. 랭크 따위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면 된다. 자신은 에이드리안 한 사람만을 위해 노래할 것이다.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노래를 할 것이다. 레플리카가 아닌 노래를. ******** 에이드리안은 이른 저녁에 집에 돌아왔다. 쥬느비에브가 뛰쳐나가듯 집으로 돌아간 뒤로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 코트와 머플러를 벗었다. 갑갑했던 기분이 약간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 끼익 하고 문이 열리며 쥬느비에브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겼다. 아직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하지도 못 했는데. 약간은 당혹스러운 그였다. 그는 셔츠의 타이를 풀어 드레스 룸에 던져 넣고 방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다. '낮에 왜 갑자기 나갔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저녁 먹었냐고? 내일은 날씨가 추울 것 같으니 옷 많이 입으라고 말할까?' 그 때 문득 뒤돌아본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강아지는 내가 데려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결국 전혀 생각 밖의 말을 해버린 그였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고 당혹스럽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또 쥬느비에브가 자신에게 말도 안 하고 눈을 피하는 건 정말 싫었다. 그 때 뒤쪽에서 쥬느비에브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돼요?" "어? 응, 응. 들어 와." 에이드리안은 다소 놀란 듯 말을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쥬느비에브는 낮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방실방실 웃으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쏜살같이 소파로 달려가 풀썩 앉았다. "에이드리안. 나, 할 말이 있어요. 여기 앉아 봐요." 쥬느비에브가 자신의 맞은 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눈동자를 움직이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쥬느비에브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나, 요즘 많이 심술부리죠? 헤헤- 나 요즘 사춘긴가 봐요. 책에서 읽었는데 내 또래 애들은 사춘기가 되면 막 심술도 부리고 그런데요. 나, 많이 미안하니까 에이드리안 화 내지 말아요. 아까 낮에도 미안해요." 에이드리안은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리 화가 난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의 웃는 얼굴에 긴장이 단번에 풀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집에 오기 전까지 무척 고민했었다. 요즘 쥬느비에브의 우울한 표정과 억지로 웃는 듯한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리고 그 날, 쥬느비에브가 왜 피를 토하고 그토록 심하게 열이 났는지도 궁금했다. 하우먼 박사의 말로는 특별히 병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평상시에 영양 섭취도 잘 하고 있고 근래 노래 연습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과로한 것 같지도 않았다. 아파서 그런지 쥬느비에브는 평상시의 그녀와는 달리 가끔씩 무척 우울해 보였다. 그런 모습이 그에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리 만무했다. 에이드리안은 애써 표정을 밝게 만들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화 안내." "헤에- 사춘기 때는요, 갑자기 막 우울하고 그렇기도 하대요. 나처럼 아프고 나서 사춘기가 오는 애들도 많대요. 그리고요..."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발갛게 얼굴을 달구며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움켜쥐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리고 사춘기 때는요, 그게 저기... 음...음... 이, 이성이 좋아진대요. 그래서 에이드리안이 자꾸 좋아지나 봐요." 말을 마치고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빨간 토마토처럼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다. "쥬르, 너 많이 더 커야겠다. 사춘기라니...쿡쿡..." 에이드리안은 웃음을 멈추고 가만히 쥬느비에브는 쳐다보았다. 다행히 쥬느비에브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쥬르, 요즘 들어서 너 자꾸 아프잖아. 이상해. 뭔가 영양제라도 좀 먹어야겠어. 내일 하우먼 선생에게 조제를 하라고 할 테니까 꼬박꼬박 먹어." "응. 나, 건강해질 거에요. 나 원래 튼튼해요." 쥬느비에브는 팔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며 움직였다. 그러더니 쥬느비에브는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 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눈짓을 하자 쥬느비에브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에이드리안, 10학년 심사위원 자청했다던데 사실이에요?" "아아- 응. 그랬지. 하지만 뭐..." 에이드리안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말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두근거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그럼, 에이드리안. 내 노래... 듣고 싶어요?" "듣고... 싶긴 하지만, 너 어차피 이번 체리욜파쳰에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듣고 싶은 말은 들었다는 듯 손뼉을 딱 치며 방실방실 웃었다. "나, 체리욜파쳰 나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에이드리안한테 내 노래, 들려주고 싶어요. 에이드리안이 날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멋진 노래 부를 거에요. 기대해...줄 거죠?" 활짝 미소지으며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한참 눈을 깜빡이다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쥬르, 열심히 해. 나, 네 노래, 꼭 듣고 싶으니까."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두 손을 아래위로 흔들며 헤실헤실 웃었다. 멋진 노래를 불러서 에이드리안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멋진 무대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에이드리안만을 위해 부르는 것이다. 그에겐 아주 멋진 선물이 될 것이다. ******** 다음 날. 자신의 연습실에 들어선 쥬느비에브는 들어오자 말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연습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편하게 입고 온 연한 연두색의 원피스 자락을 툭툭 털며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었다. 오늘부터 다시 연습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다시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음 속의 앙금이 싹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연습실 안을 환기시키며 쥬느비에브는 창문에 매달렸다. 마른 나뭇잎이 대롱대롱 달려 있는 키 큰 나무가 보였다. 이 나무도 봄이 되면 다시 나뭇잎으로 새파랗게 덮이겠지. 쥬느비에브는 문득 자신이 레플리카를 써서 예쁘게 만들어 놓은 애너벨 정원을 에이드리안이 본 것인지 궁금해졌다. 자신을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 에이드리안이라고 했으니 분명히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긴 그녀가 계속 아팠던 터라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연습실의 환기가 다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창문을 닫았다. 겨울의 바람이라 오래 쐬고 있으니 몸이 떨려왔다. 쥬느비에브는 연습실 가장자리 쪽에 놓여 있는 깜찍한 디자인의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악보를 가득 펼쳐 놓았다. 곡을 먼저 골라야 할 것이다. 미라벨이 잘 가르쳐준 까닭에 그녀는 이제 악보를 줄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이 것 저 것 신경 써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참 고마운 두 사람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꼬옥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은혜 갚은 제비... 뭐 그런 것도 있었잖아. 모롤라 씨를 물어준다고 했었나? 나중에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 가난해 지면 내가 모롤라씨를 물어다 줘야지. 난 정말 착하다니까." 쥬느비에브는 흐뭇하게 웃으며 악보를 뒤적였다. 두꺼운 미백지에는 검고 흰 기호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악보를 한 장 한 장 정성껏 들여다보았다. "이건 너무 분위기가 무겁네. 라라라 라-- 음, 이 건 미라벨 언니 분위기다. 우웅~ 난 뭘 하지?" 쥬느비에브는 악보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그 위에 푹 엎드렸다. 창 밖의 나무와 하늘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웅얼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좋은 노래 불러야 되는데... 에이드리안을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데..." 쥬느비에브는 미소지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노래를 멈추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두 눈 가득 창 밖의 풍경을 담은 채 쥬느비에브는 속삭이듯 말했다. "파파. 나 깨달았어요. 그 때...내가 아주 어렸던 그 때, 마망이 파파한테 노래 불러줬을 때, 왜 그렇게 마망이 행복해 보였는지, 왜 그렇게 파파가 행복해 보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아. 파파와는 달리 마망은 평범한 여자였어. 레플리카 같은 건 쓰지도 못 했어. 하지만 파파, 그 때 마망이 파파에게 건네준 건 레플리카가 아니라 '노래'였어요. 파파를 생각하는 마망의 마음이 담긴 노래였어. 이제 알 것 같아..."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음 가득 기분 좋은 느낌이 가득 찼다. 그녀는 작은 계기로 깨닫게 되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건 기교로 가득찬 레플리카가 담긴 그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담은 '노래'였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노래가 아니라 레플리카를 숭상했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레플리카가 아니라 노래다. 힘이 아니라 마음이다. ********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한 쥬느비에브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훅훅 숨을 들이마셨다. 심호흡을 한 다음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러볼 참이었다. 그때 문 소리가 들리고 안느마리가 커다란 바구니를 흔들며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콩콩 뛰어 안느마리에게 달려갔다. "안느마리!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쥬느비에브! 짜잔! 간식 사왔어." "야아-" 안느마리가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쥬느비에브는 눈을 반짝이며 바구니를 열어 갖가지 간식거리를 꺼내 놓았다. 바구니에는 달콤한 케이크를 비롯해 사탕과 쿠키, 모롤라 등 맛있는 음식이 잔뜩 들어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쿠키를 덥석 물었다. 달콤한 쿠키의 질감이 너무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두 손을 꾹 쥐고 빙빙 돌리며 까르르 웃었다. "너무 맛난다, 안느마리."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보며 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베이지색 원피스를 툭툭 털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 연습 시작했다며? 에이드리안 님이 좋아하시지?" "응! 에이드리안, 말은 안 해도 기쁜 거 같았어. 그래서 기분 좋아. 안느마리, 고마워. 나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 다 안느마리 덕분이야." 쥬느비에브가 방긋 웃으면서 말하자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싱긋 웃었다. "우리, 친구잖아. 당연히 해야될 일을 했을 뿐. 사실 쥬느비에브도 노래하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너 노래 좋아하잖아." "응, 전에 준 악보 책도 고마워."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양이 모양의 쿠키를 입안에 쏘옥 던져 넣었다. 그리고 두 손을 허리에 두고 거나하게 웃었다. "우하하하하하. 고양이 한 마리 잡아먹었다! 좋아. 오늘은 이 쥬느비에브 님이 기분이 좋으니까 안느마리를 위해 노래를 해 줄게. 오호호호호호-"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안느마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느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진짜? 날 위해 노래해 주는 거야?" "그렇다니까. 있어 봐. 준비 운동." 쥬느비에브는 움찔움찔 몸을 흔들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 잡고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는 한참 창 밖을 쳐다보다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 환하게 비치는 햇살 아래 두 손 모아 가득 물방울을 모았어. 물방울은 흩어져 당신에게로 모여드네. 흩어진 물방울 사이에 당신이 보여. 두 눈 가득 당신을 바라보았어. 마음이 흩어져 당신에게로 모여드네.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흩어지고 모여들어 새롭게 태어나는 나의 마음... ] 안느마리는 멍하게 쥬느비에브가 노래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겨울의 가느다란 햇살을 받으며 쥬느비에브는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안느마리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쥬느비에브는 노래하는 모습이 제일 예뻐. 내 소중한 친구. 후회 따윈 하지 않아." 제103음(第103音) 체리욜파쳰(7) 체리욜파쳰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체리욜파쳰은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모든 행사 중 가장 으뜸 되는 행사로서 학생들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는 랭크를 결정하는데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테스트이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테스트를 받게 되고 고학년을 비롯한 상급 능력자들은 평의회에서 내려온 대귀족과 평의회 의원의 심사를 받아 점수를 받게 되고 저학년과 중, 하급 능력자들은 스콜라에 재학 중인 상급 능력자들과 평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을 통해 점수를 받게 된다. 테스트는 최소 10명 이상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하도록 되어 있고 무엇보다 공정성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테스트 내용은 공개되지 않지만 행사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는 터라 학생회 주요 임원들과 그 밖의 상급 능력자들의 테스트는 공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상급 능력자들의 능력과 그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번 체리욜파쳰의 최대 이슈는 역시 <엘크로이츠>의 학생회장, 에이드리안과 <라데팡스>의 학생회장, 에스프라드 중 누가 상위 랭크를 따느냐 하는 것 이었다. 에이드리안은 3년 전의 체리욜파쳰에 불참하는 바람에 종합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의 테스트로 다시 1위 자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인지가 스콜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미라벨과 케이로프, 올슈틴과 오르탕스의 학생회 별 대결도 만만치 않은 양상을 보여 학생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유벨과 평민으로서 당당하게 학생회 중앙 집행부에 소속되어 있는 안느마리 또한 가십 기사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학생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이드리안의 약혼녀, 쥬느비에브였다. 능력이 미지에 싸여 있는 그녀였던 터라 학생들의 호기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 때 불참 의사를 밝혔던 그녀였기에 사람들의 기대는 더욱 컸다. ******** 쥬느비에브는 빨간색 스커트와 초록색 코트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부지런히 대연습실로 발을 놀리고 있었다. 손에는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방실방실 웃으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안느마리가 테스트하는 날이었다. 안느마리에게 축하의 뜻으로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을 줄 참이었다. 아침에 손수 꺾어온 꽃이 아주 싱싱했다. 향기도 좋았다. 안느마리가 아주 기뻐하겠지.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원래 테스트에는 심사위원 외에는 참관할 수 없다. <엘크로이츠>에서 테스트가 공개되는 사람은 에이드리안을 비롯해 유벨, 케이로프, 미라벨 뿐이었다. 그래서 쥬느비에브와 안느마리의 테스트는 비공개로 치러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에게는 안느마리의 테스트를 볼 방법이 있었다. 사실 어제 안느마리와 함께 대연습실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놨던 것이다. 안느마리의 레플리카로 가장 잘 보일 만한 곳에 보이지 않게 구멍을 뚫어놨다. 그래서 맞은 편 연습실에 들어가서 구멍으로 보면 안느마리의 테스트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물론 들키면 징계 처분감이지만. 하지만 안느마리는 자신의 테스트를 보여줌으로서 쥬느비에브에게 용기를 주려는 모양이었다. 체리욜파쳰의 경험이 많은 그녀였기에 처음 테스트를 받는 쥬느비에브의 긴장감이 얼마나 클지 잘 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헤실헤실 웃으며 연습실로 향했다. 미라벨도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참관한다고 들었다. 에이드리안도 10학년 심사위원을 자청했기 때문에 당연히 참관할 것이다. 유벨과 케이로프는 안타깝게도 다른 학생들을 심사하러 가서 참관하지 못한다고 했다. 유벨은 왠지 모르게 즐거워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안느마리, 파이팅이야! ******** 대연습실의 맞은 편 작은 연습실에 들어온 쥬느비에브는 어제 안느마리가 성의껏 뚫어놓은 구멍에 눈을 가져갔다. 대연습실 안은 무척 환했다. 덕분에 작은 움직임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안느마리가 서서 악보를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안느마리의 진지한 표정이다. 쥬느비에브는 쿡쿡 웃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느마리, 오늘 옷 정말 웃긴다." 안느마리가 입고 있는 옷은 참 이상한 옷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의 옷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까칠까칠하게 보이는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옷은 발목까지 오는 기다랗고 벙벙한 스커트와 짤막한 윗도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윗도리는 가슴팍에 긴 리본으로 매듭을 지어놓았다. 그리고 삐죽 보이는 발끝에는 시커먼 고무신이 신겨져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복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문득 안느마리가 말했었다. 체리욜파쳰 때는 꼭 입고 나가는 옷이 있는데 그 옷을 입지 않으면 제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저 이상한 옷이 그 옷인 모양이었다. 연습실에 심사위원이 한 사람씩 들어오고 있었다.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저씨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고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청년도 있었다. 계속 관찰하던 쥬느비에브는 몸이 쑤셔와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다시 구멍에 눈을 가져가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환하게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과 미라벨이 들어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언제 봐도 멋졌다. 쥬느비에브는 사실 에이드리안과 미라벨이 조금 부러웠다. 자신도 테스트를 참관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구멍으로 봐도 안느마리와 심사위원이 모두 잘 보였다. 보이면 된 거지 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일렬로 놓여진 테이블 중 가장 앞쪽에 앉은 에이드리안은 무언가를 쓰다가 고개를 들어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다 다시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안느마리의 괴상한 옷차림에 눈이 간 모양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볼을 뭉실뭉실 만졌다. 에이드리안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학생회 위원이 외쳤다. "시작!" 드디어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 굴리며 안느마리를 관찰했다. 테스트를 받고 있는 것은 안느마리인데 이상하게 자신이 긴장되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안느마리는 노래는 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서 시작하지 않으면 감점 당할 텐데. 쥬느비에브는 걱정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 때 안느마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당 놈들아- 이 안느마리가 너희들을 무찔러 줄테니 어서 와라 악당 놈들아- 여기 안느마리 특제 부적도 있다아- 여기 안느마리 특제 쥐덫도 있다아- 덤벼 봐라 악당 놈들아- .... ] 안느마리는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품에서 부적과 쥐덫을 꺼내 흔들어댔다. 쥬느비에브는 그저 멍하게 그녀가 노래부르는 것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나 미라벨의 우아한 노래를 생각해 보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제대로 랭크를 받을 수 있을지 너무나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상당했다. 저마다 일그러진 얼굴로 점수를 체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과 미라벨은 멍하니 쳐다보다 웃음을 삼키며 계속 안느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박력 하나만은 끝내주는 노래였다. 어깨춤이 덩실덩실 춰진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안느마리다운 노래였다. 쥬느비에브는 박수를 쳐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들다가 들키면 징계 처분을 받을 거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계속 안느마리를 관찰하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느마리, 레플리카 안 쓰면 전에 학년 배정 테스트 때 나처럼 점수 없는데. 레플리카는 언제 쓸 거람. 어휴- 정말 걱정시킨다니까."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며 다시 안느마리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노래를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레플리카는커녕 엉덩이 춤만 추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계속 노래를 이어나갔다. 물론 덩실덩실 엉덩이를 흔들며. [ 그래도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악당들아 내가 다 무찔러 주마. 귀신을 불러주마. 귀이-신을 불러주마 ... ]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온 몸이 오싹해졌다. 귀, 귀신이라니?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안느마리 특유의 기괴한 레플리카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안느마리는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를 방울을 꺼내 흔들면서 춤을 췄다. 기괴하고 음침한 레플리카와 안느마리의 신들린 듯한 춤은 그야말로 괴상하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 끼에에에에엑--- 크르르르르르르릉---- 이예에에에에에에엣- 꾜오오오오오오옷--- ] 쥬느비에브는 눈을 끔뻑였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있는 맞은 편 연습실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머리카락이 마구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센 바람이 대연습실 안을 강타했다. 연습실은 레플리카 장치가 견고하게 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레플리카에는 타격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불안했다. 바람 때문에 창문까지 덜컹거리고 있었다. 금새라도 깨어질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베시시 웃었다. "야아- 안느마리, 대단하다. 레플리카도 저렇게 세고." 방금 전까지 안느마리를 우습게 보던 심사위원들이 모두 점수를 고치고 있었다. 그러나 안느마리의 진짜 실력은 지금부터였다. 지금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을 기절시켜 실려나가게 한 바로 그 기술! [ 귀이-신을 불러주마. 귀이-신을 불러주마. ] 뭔가 희끄므레한 것이 꾸물꾸물 몰려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 안을 살폈다. 뭔가 구름같기도 하고....그리고...그리고...유령 같았다! 유령같이 므흐흐한 것이 방 안을 가득 메우더니 심사위원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놀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유, 유령이 연습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아, 아아- 유, 유령이다. 유, 유령이다앗!!" 쥬느비에브는 놀라 얼른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구멍을 꾸욱꾸욱 막았다. 구멍으로 유령이 나오면 정말 큰 일이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손수건으로 꾸욱 막아놓은 구멍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꾸욱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느마리. 미안해. 우정도 중요하지만...나 이 꽃다발 꼭 직접 전해 주고 싶지만... 유, 유령은 너무 무서운 걸..." 쥬느비에브는 꽃다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유령은...정말 무서웠다! ******** 집으로 돌아온 쥬느비에브는 다짜고짜 방으로 뛰어가 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손가방 안의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던 그녀는 순간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 "크, 큰 일이다. 에이드리안이랑 미라벨 언니랑 놔두고 와 버렸네. 유령이 잡아가고 그러면 어쩌지? 에, 에이드리안이 잡혀갔으면 어쩌지? 우웅~ 우리 아직 결혼도 못 해봤는데. 난 이제 결혼도 못 하고 노처녀로 평생 살아야 할 지도 몰라. 훌쩍. 훌쩍. 흐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이내 눈물을 터뜨리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울면서 침대로 간 그녀는 침대 위에 풀썩 앉아 둥실둥실 뛰어온 강아지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계속해서 눈물을 뿜어냈다. "흐어어어엉--- 에이드리안--- 안느마리, 미워. 왜 유, 유령 같은 걸 불러와서. 흐엉. 흐어어엉----" 눈물을 훌쩍이다 강아지를 슬쩍 쳐다본 쥬느비에브는 눈꼬리에 눈물 한방울을 찍 달고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꼬마 에드. 이제 네 이름이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유령한테 잡혀가 버렸단다. 어쩌지? 훌쩍. 우리가 용기를 내서 에이드리안을 잡아간 유령을 물리치러 가자. 꼬마 에드가 같이 가 준다면 나, 용기가 솟을 것 같아." 꼬마 에드가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쳐다보자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북받쳐 왔다. "에이드리안... 어떻게 날 두고 혼자 잡혀갈 수 있어요. 흐어어어엉---" "누가 잡혀가?" "누가 잡혀가긴요, 에이드리안이 잡혀갔지...어...어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앞에 서 있는 잘생긴 자신의 약혼자를 쳐다보았다. 순간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유, 유령이닷! 에이드리안이랑 똑같이 생긴 유령이닷! 유령이 에이드리안 잡아가고 나도 잡아가려고 왔나 봐. 으아아아아악----"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두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유령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가 무거워 두 팔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나, 나쁜 유령, 어, 어서 에이드리안을 돌려 줘요. 아, 안 돌려주면..." "안 돌려주면?"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유령은 어떻게 목소리도 에이드리안과 똑같을까. 머리 속에 맴도는 의문점을 치워버리고 쥬느비에브는 꾸욱 다물고 있던 입을 벌렸다. "에, 에이드리안 몰래 숨겨 놓은 모롤라 세 상자, 줄게요. 그러니까 에이드리안 돌려줘요." "나... 몰래 숨겨놨다고?" 순간 쥬느비에브는 귀가 쭉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귀가 얼얼할 정도로 고함소리가 울려댔다. "너는! 도대체 내가 과식하지 말라고 얼마나 그랬어? 모롤라 다 내 놔! 어서 내 놔! 압수야. 그러니까 매일 배탈나지."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귀를 잡고 눈을 멀뚱거리며 유령을 쳐다보았다. "에, 에이드리안? 진짜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눈을 내리깔며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제야 활짝 미소지으며 그의 품에 쏙 안겼다. "헤헤- 에이드리안, 안 잡혀갔었구나. 난 에이드리안이 유령한테 잡혀간 줄 알았어요. 아유, 다행이다." 자신의 품에서 볼을 비벼대는 쥬느비에브를 가까스로 떼어내고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앉았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무릎 위에 앉히고 에이드리안에게 방실방실 웃으며 물었다. "그럼...안느마리, 안느마리는 어떻게 됐어요? 점수 잘 받았어요?" "응. 랭크는 다른 사람들 테스트 다 하고 나오겠지만. 뭐 해마다 있는 연례 행사니까. 안느마리, 유명해. 꼭 체리욜파쳰 때마다 심사위원들이 몇 명씩 심장발작으로 실려가거든. 오늘도 세 사람 기절했지, 아마?" "유, 유령 보고 놀라서?" "응. 정확하게 말하면 유령이 아니라 환영이라고 해야겠지만. 뭐 그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니까. 레플리카 실력은 인정해 줄 만 하지." 에이드리안은 소매를 매만지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강아지의 발을 흔들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안느마리한테 신세졌어요. 이번에 안느마리가 아니었다면 체리욜파쳰 나갈 용기가 안 생겼을 거에요. 안느마리가 곁에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 줬거든요. 에이드리안이 내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라고 매일 맛난 것도 사주고, 그랬어요." "훗. 안느마리가 열심이었네. 체리욜파쳰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안고 있는 강아지를 받아 품에 안으며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었다. 하얀 강아지 털의 감촉이 기분 좋았던 모양인지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에이드리안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안느마리가 나한테 용기를 줬다니까요. 내가 에이드리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줬어요. 그렇다니까요. 네에?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자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상. 상 주라고요. 안느마리한테 에이드리안이 상 줘요." 쥬느비에브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칭얼댔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까만 생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 알았어. 어린애 같이 어리광부리지 마."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뿌루퉁한 표정으로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심상치 않은 그녀의 표정에 왜 그러냐고 눈짓을 했다.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구기며 퉁 하게 말했다. "안 돼요. 나 계속 어리광부릴 거야. 할 수 있는 만큼 어리광부릴 거에요. 이건 내 권리라고요." 쥬느비에브는 짐짓 심통 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표정에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권리?" 쥬느비에브는 샐쭉한 표정을 지우고 방긋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옆으로 뭉그적거리며 다가와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에이드리안이 나한테 준 권리요. 에이드리안은 날 좋아하니까...내 가족이니까 어리광부려도 다 받아줘야 되는 거에요. 원래 그런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 듯 혀를 쏙 내밀었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눈썹을 실룩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내 권리는?" "에에- 에이드리안의 권리요? 그, 그건...음...음...음..."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질문에 당황한 듯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리더니 손뼉을 탁 쳤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의 권리는요... 그건요... 내 마음을 몽땅 가져가도 되는 거에요. 그게 에이드리안의 권리에요. 좋죠?"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드리안은 나직이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살며시 안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쥬느비에브의 마음을 몽땅 가져가서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자신만이 비치고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만을 부르고 그녀의 미소가 자신만을 향하도록,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때는.... 제104음(第104音) 체리욜파쳰(8)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안느마리에 이어 미라벨과 케이로프, 유벨이 차례차례 테스트를 받았다. 쥬느비에브는 그들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자신의 테스트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 따뜻한 방안의 푹신한 소파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걱정스럽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방 소파에 앉아 잔뜩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나 여유 만만하던 그였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멀뚱거리며 생각했다. '역시 시험이란 거, 무서운 거로구나. 에이드리안이 긴장을 다 하고.'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의 옆에서 그의 팔을 손가락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파. 왜 찌르고 난리야?" "에이드리안, 긴장하고 있는 거죠?" "기, 긴장은 무슨..." 에이드리안이 다소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도 보통 사람이었구나! 에이드리안이 긴장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에이드리안의 테스트가 바로 내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유벨의 테스트 날이라 유벨이 아침부터 잔뜩 너스레를 떨고 간 참이었다. 덕분에 에이드리안은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방실방실 웃었다. "에이드리안, 긴장하지 말아요. 그 까짓 테스트쯤 못 보면 어때요? 점수 조금 못 받는다고 해도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예쁘고 힘도 세잖아요. 괜찮다니까요." "올 학기에 에스프라드 형이 졸업한단 말이야. 지금 최대한 랭크를 받아야 돼. 난 그보다 훨씬 평의회 진출이 늦단 말이야." 에이드리안이 심술난 듯 퉁하게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두 눈을 말똥거리며 에이드리안의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평의회 의장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에요? 왜 평의회 의장이 되고 싶은 건데요?" 쥬느비에브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다소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날 믿고 따라와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난 평의회 의장이 되어야 해. 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날 지지해 준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서 꼭 평의회 의장이 되어야 해. 그리고..." "그리고?" 쥬느비에브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떨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고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르헨의 최고 위치를 내 손에 쥐게 되면 아무도 날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할 거야.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난 이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 질색이야. 그리고 내게 힘이 있으면 쥬르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랬다. 에이드리안의 아버지는 비인 가의 복잡한 혈통 중에서 방계 출신으로 그다지 신분상으로는 가문에서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들었다. 혹시 에이드리안도 방계 출신이라서 구박받으며 자랐나? 쥬느비에브는 눈을 뱅글뱅글 돌리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머리 속에 충격적인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소맷자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발끈한 목소리로 톡 말을 내뱉었다. "에이드리안! 난 에이드리안이 수염 기르는 거 싫어요! 정말 싫어요. 에이드리안이 수염 기르면 난 모롤라 싸들고 가출해 버릴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에이드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쥬느비에브는 짐짓 얼굴을 구기며 팔짱을 꼈다. 분명 에이드리안은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걸 거야. 쥬느비에브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높은 사람은 수염 기르고 막 그러잖아요. 초상화 같은데도 수염 길러서 무뚝뚝하게 이렇-게 있고. 나 에이드리안 수염 기르는 거 너무너무 싫어요." "그거야 아저씨들이나 하는 거잖아. 난 아저씨 아냐!" "그치만 에이드리안도 나중에 아저씨가 되면..."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지지 않고 응수를 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하하하하하하- 에드, 나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랭킹 1위, 내가 먹겠다! 우하하하하하---" 유벨이 뒷짐을 지고 엄청난 성량으로 웃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온 유벨을 멍하게 쳐다보던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왜 저러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였다. 유벨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여전히 유쾌한 얼굴로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왔다. 유벨이 소파에 앉는 것을 보고 에이드리안이 그에게 물었다. "테스트 잘 했나 보지?" "그렇지! 이번 테스트 사상 최고의 점수다 이 말씀이야. 에드, 너 이번에 열심히 안 하면 나한테 밀린다. 우하하하하하하---" "그러셔?" 에이드리안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턱을 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체리욜파쳰에서 유벨은 한 번도 자신을 이긴 적이 없었다. 또 허풍이려니 하고 생각하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머리 속에 떠오른 사실에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벨, 너 오늘 아침에 컨디션 나쁘다고 그러더니." "맞아요, 유벨 오빠. 오늘 테스트 못 볼 것 같다고 그랬잖아요." 쥬느비에브도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의 말에 동조했다. 유벨은 씨익 웃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게 말이지. 오늘은 안느마리의 덕을 봤지.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더라구. 내가 테스트를 하러 가는데 안느마리가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더라구. 날 보면서 씨익 웃는데....어휴, 소름이 바짝 돋으면서... 그 기분은 아무도 모를 거다. 그리고 테스트가 시작되었는데 안느마리가 또 손을 흔들지 않겠어?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야. 그리고 레플리카가 펑! 하고 터져 나왔지. 성적은 대만족." 유벨의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에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유벨이 다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아무래도 랭크 변화가 좀 있지 않을까? 미라벨도 그렇게 애쓰더니 이번에는 케이로프한테 졌잖아. 미라벨 양, 여간 상심이 큰 게 아니더라고. 하긴 두 사람 랭크야 늘 엎치락뒤치락하니까." "뭐 그 두 사람이야 늘 그렇지. 아마 다음 번에는 미라벨이 이길 걸? 쿡." 에이드리안은 늘 그랬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쥬느비에브가 못 참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다리를 쭈욱 뻗으며 말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 미라벨 언니, 화나서 레플리카 특별 훈련을 한다면서 집에 가버렸잖아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 걸." 쥬느비에브는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에이드리안에게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심각한 표정이 우스운지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곧 돌아올 거야. 작년에는 케이로프가 그랬거든. 뭐 해마다 있는 일이야." "그렇지. 두 사람 늘 그렇다고. 에드, 내일 테스트지? 잘 해라. 이번에는 에스프라드 형을 꺾어야지." 유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입을 벌리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응..." 에이드리안은 다시 생각난 자신의 테스트에 힘없이 대답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에스프라드가 있는 마지막 체리욜파쳰이라고 생각하니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 "곧 눈 올 거 같아요. 날씨가 추워." 쥬느비에브는 하얀 벙어리 장갑을 낀 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유벨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오늘의 테스트로 피곤했던 것인지 쉬고싶다면서 유벨은 유쾌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 덕분에 테스트를 잘 쳤다는 그의 말에 안느마리가 기뻐할지 슬퍼할지 무척 궁금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안느마리가 무척 얼굴 표정을 구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유벨 오빠, 안느마리 레플리카 조심해야 할텐데. 쿡쿡." "응?" 쥬느비에브의 혼잣말에 에이드리안이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의 뭘 그렇게 생각 하냐는 눈짓에 쥬느비에브는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헤헤. 에이드리안은 아직도 긴장되는 거에요?" "쥬르, 내 걱정하지 말고 네 생각이나 해. 너야말로 내일 오전에 테스트 잖아." "아, 맞아. 그랬지. 헤헤." 쥬느비에브는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나 벙어리 장갑 덕분에 턱턱 하는 소리만 났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핑크색 코트를 여며주고 하얀 목도리를 답답하지 않게 다시 매어주었다. "안 추워?" "응. 코트 따뜻한 걸요. 호호- 그런데 김 난다. 담배 연기! 후우후우- 어때요, 나?" "감기 걸려. 코 막아." 장난스레 담배 피는 연기를 하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려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배려에 답을 하려는 듯 그의 군청색 코트를 탁탁 털어 주었다. 그리고 생긋 미소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겨울의 건조한 바람에 바짝 말라있던 흙이 오늘따라 촉촉한 습기가 머금고 있는 건지 발 밑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았다. 차갑지만 오히려 그 느낌 때문에 깨끗하고 맑은 느낌의 공기는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이마와 볼을 기분 좋게 스치며 지나갔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졌다. 새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으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보폭에 발을 맞춰 주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방긋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 나, 내일 테스트 빵점 먹을 지도 몰라요." "무슨 소리야. 너, 연습도 많이 했잖아. 성적 잘 나올 거야." "나, 내일 랭크 받으려고 노래하는 거 아니에요. 나, 에이드리안한테 내 노래 들려주려고, 그래서 체리욜파쳰 나가는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벙어리 장갑으로 코트를 탁탁 치며 방실방실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쥬느비에브는 한 걸음 앞서 나가 에이드리안 쪽으로 빙글 돌았다. 그리고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나, 내일 레플리카 안 쓸 거에요. 내 노래를 할 거에요. 그건 에이드리안을 위해서 부르는 노래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에이드리안이 내 자랑을 할 수 있도록 멋지게 부를 거에요. 하지만 내 노래는 에이드리안만을 위한 거야. 에이드리안을 생각하면 노래가 잘 불러져요."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짓더니 다시 앞으로 돌아 콩당콩당 뛰어갔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말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떠올렸다. "영광인걸? 쥬르. 날 위해 노래해 준다니.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순간 어두운 표정을 하더니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쥬르! 기다려. 같이 가." 뛰어가던 쥬느비에브가 살짝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신나게 손을 흔들며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은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제 행복한 일만 있었으면... 더 이상 아픈 일 따위 없었으면... 계속 쥬느비에브의 미소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녀가 우는 일이 없도록 자신이 지켜주고 싶었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쥬느비에브는 손님이 와 있다는 하녀장 루이즈의 말에 깜짝 놀라 응접실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도 쥬느비에브의 손님이 궁금한 것인지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쥬느비에브는 응접실의 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 "쥬느비에브의 손님, 어디 계세요오?" 쥬느비에브는 정말 신났다. 손님이라니, 손님이라니!! 연일 다른 스콜라나 귀족 가문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에이드리안과 달리 그녀는 기껏해야 1모네에 한 번씩 에슈비츠 공작이 찾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당연히 신날 수밖에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방에 들어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휘둘렀다. 그 때 소파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어? 크리스티안이다. 로잘리 아주머니랑 카를로스 아저씨도 있네." "안녕하셨어요, 쥬느비에브 님." 오랜만에 보는 크리스티안이었다. 어쩌다 보니 쥬느비에브와는 절친한 사이가 된 사람들이었다. 카를로스와 로잘리가 쑥스러운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쥬느비에브 님." "맞아요. 오랜만이에요." "응! 우리 집에 잘 오셨어요, 손님." 쥬느비에브는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고 쪼르르 소파로 달려갔다. 크리스티안이 웃으며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이번에 체리욜파쳰에 나가신다고 해서 준비해 왔어요. 마시면 목이 시원해지는 드링크랍니다." "와아- 선물도 받고 기분 좋다! 다들, 잘 지내고 있었던 거죠? 그 동안 연락을 많이 못 해서 미안해요. 나, 조금 바빴거든요. 집안 일도 좀 있고 해서." 쥬느비에브는 상자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며 방긋 웃었다. 로잘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들도 그 때 소란 이후로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레플리카 연습도 하고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쥬느비에브 님은 우리에게 아주 멋진 선물을 해주신 거니까요." "맞습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해도, 우리 입장을 생각해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을 쥬느비에브 님이 해 주셨습니다." 카를로스가 미소를 띄며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험상궂게 생긴 그들이 지만 웃으면 참으로 따스한 인상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저, 저야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어쨌든 너무 보기 좋아요. 다들 자신감을 가진 모습이. 에스플리크도 지지 않게 노력해야 겠어요." 쥬느비에브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쥬르, 손님 누구야?" "응! 슐뢰르겐의 학생회 분들이세요. 에이드리안도 어서 와봐요." 에이드리안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쥬느비에브의 옆으로 가 앉았다. 쥬느비에브는 상자를 보여주며 선물 받았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가 크리스티안과 카를로스, 로잘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쥬느비에브였지만 그들과 꽤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도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쥬르, 많이 변했어. 처음 왔을 때는 비쩍 마른 불쌍한 여자 애 같았는데 지금은 달라. 공부도 곧잘 하고 예법도 많이 익혀서 잘 차려 입고 있으면 정말 레이디 같아. 아니, 이미 레이디지. 내 약혼녀니까.' 에이드리안은 찻잔을 손을 들고 입으로 기울이며 미소를 흘렸다. 그녀가 변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그건 정말 재미있고 행복한 일일 것이다. 더 없이 가슴 따뜻한 행복... ******** 작은 금발의 소녀가 하늘색 원피스 차림으로 잔디밭을 거닐고 있었다. 맑고 화창한 봄 날씨에 소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하늘도 맑고 시야도 선명했다. 소녀는 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과 길. 숲을 지나 정원을 지나 소녀는 하염없이 걸어갔다. 대장원의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건지 여기저기 풀이 자라 가장자리가 선명하지 못했다. 소녀는 호기심이 일었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날이었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만날 것 같은 예감. 소녀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멀리까지 온 것을 할머니가 아시면 야단치실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날따라 소녀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소녀는 어디선가 실려온 향긋한 꽃향기에 눈을 돌렸다. 숲이 우거진 작은 공간에 비밀의 화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아아악!!" 에이드리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이마에 축축하게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쳐다 보았다.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복도 밖에서 시계가 육중하게 울렸다. 댕- 댕- 댕- 에이드리안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때처럼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 눈동자가 따끔거렸다.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에이드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미레이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부탁이야. 나타나지 마." 에이드리안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머리 속에 레플리카가 울렸다. 아주 먼 곳에서 자신을 향해 온 레플리카. 따스하지만 소름끼치는 감촉.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에이드리안은 아랫 입술을 깨물고 협탁 위의 사기 재질의 시계를 창문으로 집어던졌다. 와장창 하고 창문이 박살났다. 에이드리안은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주먹을 꾸욱 쥐었다.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미레이유. 그 땐 널 정말 용서 안 할지도 몰라. 건드리지 마, 쥬르는." 에이드리안은 순간 고개를 내저으며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이게 뭔가, 도대체. 아직도 그녀에게 사로잡혀 벌벌 기는 꼴이라니. 에이드리안은 냉소를 머금으며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멀리 달이 보였다. 차갑고 따스한 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몹시 불안하면서 초조한 기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 "정말 용서 안 할지도 몰라. 그게 누구든." 제105음(第105音) 체리욜파쳰(9) 날씨가 너무 화창했다. 겨울 날씨 같지 않았다. 마치 따스한 봄날 같은 날씨에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테라스로 나온 쥬느비에브는 얇은 잠옷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춥지 않은 날씨에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메마르지만 황량하지 않은 대지.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달과 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아 기분이 묘했다. "정말 꿈이 아닐까. 깨어나면 난 혼자고, 마망도 파파도 없는 쓸쓸하고 불쌍한 고아가 되어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난 죽어서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꿈이라면...나도 마망과 파파가 있는 곳으로 가버릴 거야. 사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니까."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작은 호수. 마망과 파파가 곁에 웃고 계셨던 그 곳.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쥬느비에브는 테라스의 난간에 두 팔을 포개어 기대고 가만히 미소지었다. "파파. 마망. 나, 에이드리안이 있어서 지금은 아주 행복해요. 곁에 좋은 사람도 많고 참 즐거워요. 그러니까 제발 꿈에서 깨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쥬르 부탁, 들어주실 거죠?" 하지만 쥬느비에브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오늘은 노래를 할 거에요. 에이드리안을 위해서 노래 할 거에요. 오늘 노래가 에이드리안에게 전해지면 영원히 꿈속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예감이 들어요."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뒤돌아 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에는 그저 하얀 커튼만이 나부끼고 있었다. ******** 하얀색 코트를 걸치며 밖으로 나가는 에이드리안에게 쥬느비에브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좀 있다 봐요, 에이드리안." "그래. 좀 있다 게노리체 정원에서 봅시다, 약혼녀 양." 에이드리안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쥬느비에브의 뺨에 살짝 입맞춰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기분이 좋은지 연신 뺨을 문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발그레한 뺨을 실룩이며 말했다. "응. 늦으면 안 돼요. 나, 에이드리안 안 오면 노래 안 할 거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말하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결국 방긋 웃는 쥬느비에브에게 에이드리안은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쥬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혹시 또...아플지도 모르니까." "응. 걱정하지 말아요. 나, 오늘 근사하게 노래부를 거에요. 노래요." 쥬느비에브는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으며 치맛자락을 툭툭 쳤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어주며 발걸음을 떼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손을 흔들며 웃어 주었다. 문을 열고 나가던 에이드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쥬르. 우리 테스트 끝나면 반지 맞추러 가자." "반지요?" 쥬느비에브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멀뚱거렸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뒤돌아 서서 걸음을 옮겼다. "결혼 반지." 어느 새 저만치 걸어가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맞아. 겨울이 끝나면 봄이지. 우린 봄에 결혼을 하는 거고. 난 에이드리안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권리를 받는 거야. 아주 행복하고 기분 좋은 느낌. 곧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 꼬옥." 쥬느비에브는 문 가에 기대어 서서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 꿈에서 깨지 않을 것이다. 설사 이것이 진짜 꿈이라고 해도 눈뜨지 않으면 계속 행복한 이대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가 미소짓는 얼굴에 미소로 답하고... 마음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행복한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 스콜라의 대로가 햇빛에 따스하게 데워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화사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테스트를 받기 위해 테스트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기분 좋았다.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안느마리가 그녀의 기분을 눈치챈 듯 빙그레 웃었다. "쥬느비에브, 기분 좋아?" "응. 나, 장소 잘 정했다고 생각해. 게노리체 정원, 스콜라에서 제일 큰 정원이니까 목소리가 작으면 좀 곤란하지만... 대신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잖아. 안느마리도 볼 수 있고. 우리 테스트는 비공개니까 이런 장소를 잡으면 편법이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어서 좋아. 나, 오늘 노래 잘 불러서 에이드리안이 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다른 사람들이 에이드리안 곁에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도록 꼭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어." 쥬느비에브는 하얀 원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수줍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안느마리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팔짱을 꼈다. "쥬느비에브, 너 오늘 분명 근사하게 노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옆에서 매일 같이 있어 줬잖아. 미라벨 님이랑 케이로프 님이 심사 때문에 못 오셔서 좀 슬프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맞아. 안느마리. 안느마리 덕분이야. 나, 이번 체리욜파쳰에 나가게 된 거 안느마리 덕분이야. 안느마리가 내 바보 같은 마음을 깨워줬어. 노래할 수 있는 용기를 줬어. 고마워, 안느마리." 활짝 미소지으며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안느마리는 코를 훌쩍였다. "왜, 괘, 괜히 눈물이 나오냐. 난,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내 친구, 쥬느비에브가 행복해지는 게 좋아. 쥬느비에브는 노래 아주 좋아하니까 노래부르는 모습도 예쁘니까..." "알아. 안느마리. 안느마리야 늘 날 걱정해 주잖아. 난 안느마리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해." 쥬느비에브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안느마리는 한 발자국 앞서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흘렸다. "응. 난 쥬느비에브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노래 부르는 쥬느비에브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걸." ******** "쥬느비에브!" 게노리체 정원에 막 걸음을 옮기려던 쥬느비에브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달려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미라벨 언니! 케이로프 님! 심사 있다고 하던데..." "응원하러 왔어요, 쥬느비에브. 테스트, 잘 하라고요." 미라벨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았다. 옆에 있던 케이로프도 오랜만에 부드러운 얼굴을 하며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열심히 연습한 만큼 큰 성과를 거두길 빌지." "고마워요. 미라벨 언니, 케이로프 님." 쥬느비에브는 붉은 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하며 방긋 미소지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더니 오늘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분위기며 색깔이며 너무 비슷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웃음을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그 때 옆에서 보고 있던 안느마리가 팔을 잡아당겼다. "미라벨 님, 케이로프 님. 심사 늦으시겠어요. 쥬느비에브, 너도 빨리 가서 준비해야지."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끌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미소를 짓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군.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케이로프 님도 그러세요? 정말 이상하네요. 이 불안한 느낌은..."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쉬다가 웃으며 뒤돌아 섰다. 미라벨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뭐 괜찮을 거에요. 에이드리안 님도 계시고.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말을 마치고 미라벨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미라벨은 그 예감이 들어맞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게노리체 정원에 도착한 쥬느비에브는 하늘을 향해 방긋 미소지어 주었다. 따뜻한 모직물로 만든 하얀 원피스가 무척 따뜻했다. 목선에 달린 두개의 방울을 흔들며 쥬느비에브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곧 테스트가 시작 될 예정이었다. 별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자신의 마음이 가는 데로 노래를 부르면 된다. 에이드리안이 잘 했다고 칭찬해 주면 더 좋을 텐데. 쥬느비에브는 속으로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옆머리에 매고 있던 하얀 리본을 매만졌다. 게노리체 정원은 스콜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원이었다. 학생들이 점심 먹고 산책 삼아 거닐곤 하지만 에이드리안이나 자신 같은 경우는 집 근처의 호수나 숲 쪽으로 산책 가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자주 오는 곳은 아니었다. 스콜라에서 따로 정원 관리사를 두고 레플리카 장치를 항상 작동시키기 때문에 이 곳은 항상 봄처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물론 유벨이 예산이 많이 든다고 늘 투덜거리긴 하지만. 살며시 스며드는 꽃향기와 풀 냄새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정원 가운데의 너른 공간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테스트 받는 공간은 자신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소리가 퍼져나가 노래 부르기에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정원을 택했다. 그리고 오늘 벌써부터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니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바보같이 굴기만 했어. 인정받고 싶어. 에이드리안에게, 사람들에게. 그래서 에이드리안이 날 곁에 두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쥬느비에브는 미소를 머금으며 파란 잔디밭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고개를 든 쥬느비에브는 저 뒤쪽에 서 있는 안느마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신경 써준 안느마리를 위해서도 오늘은 꼭 멋진 노래를 불러야 한다. 잠시 후, 심사위원들이 차례로 줄지어 왔다. 심사위원의 얼굴을 살피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래 떴다. 평의회 의장인 헤르만과 라데팡스의 학생회장인 에스프라드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헤르만과 에스프라드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좀 의외였다. 에이드리안이 보면 또 인상을 쓸 거 같았다. 전에 본 헤르만 의장은 몹시 야위어 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약간 껄끄러웠던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에이드리안은 왜 안 올까?' 코를 킁 하며 주름을 잡던 쥬느비에브는 살짝 눈을 들어 에스프라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던 것인지 에스프라드는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에이드리안이 그를 볼 때마다 정색을 하는 것과는 달리 쥬느비에브가 에스프라드가 별로 싫지 않았다. 인상이 좀 날카로워서 그런거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에스프라드가 참석한게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노래를 인정받고 싶었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유벨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심사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쥬느비에브가 손을 들어 웃어주며 유벨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에게 손을 들어 답을 해 주었다. 이제 시작이다. ******** 에이드리안은 심사위원의 자리에 앉으며 유쾌하게 유벨에게 말했다. "유벨, 이상하게 자꾸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아." "허이구. 약혼녀 있으신 분은 좋으시겠수. 심사는 공정하게! 알았지?" 유벨은 부럽다는 듯이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옆쪽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헤르만 부자를 보았다. 그는 급히 유벨의 팔을 쳤다. "유벨, 저 사람들이 여긴 왜 왔어? 심사위원 중에 이름이 없었는데." "어? 그러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원래 내정되어 있던 두 사람이 없잖아? 바꿨나 본데?" 유벨은 긴장된 얼굴로 에스프라드를 쳐다보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에드, 신경 쓰지 마. 뭐, 사정이 생긴 거겠지. 쥬느비에브도 오늘 점수 잘 받으면 좋고. 뭐라 그래도 평의회 의장에게서 인정받는 거잖아." 에이드리안은 기분이 언짢은 듯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유벨은 갑자기 나타난 에스프라드와 헤르만의 존재에 위화감을 느끼며 걱정스레 사촌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유벨은 최대한 목소리의 톤을 조절하며 에이드리안에게 물었다. "에드, 쥬느비에브는 그 뒤로 아프거나...그러지는 않았지?" "...응.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에이드리안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하다 이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곧 시작하겠다. 내가 딴 짓하고 있는 거 쥬르가 보면 나중에 화 낼 거야. 집중해서 들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거든." 에이드리안은 밝게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에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또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 "시작!" 학생회 위원이 드디어 테스트의 시작을 알렸다.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온 것 같았다. 만약 노래가 잘 안 되면 어쩌나. 쥬느비에브는 덜컥 겁이 났다. 그 때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맞아. 난 오늘 에이드리안을 위해 노래하려고 여기 온 거지. 맞아." 쥬느비에브는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 하늘은 몹시 맑아 하얗게 보였다. 차갑지만 시원하게 느껴지는 공기. 노래를 부르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인 것 같았다. 최고의 노래를 부르리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하늘로 향하게 했다. 온통 새하얀 공간. 날개를 펼쳐서... [ 새하얀 날개를 펼쳐 저 먼 하늘로 날아 세계의 가운데, 우주의 가운데로 나아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단 하나의 소망을 보여줘. .... .... ] 쥬느비에브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노래는 정말 신기하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을 나는 감촉을 느낄 수 있다. 주위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가벼워진 몸이 날아오른다.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작은 소망을 들어준다. 새하얀 하늘 위에 뿌려지는 노래의 환희.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작은 증거. 당신에게 내 존재를 말할 수 있는 커다란 시도. [ ... 공기의 한숨 바다의 노래 대지의 속삭임 모든 것이 되돌려져 언제까지나 되풀이되네 축복 받은 순간의 환희 .... ] 쥬느비에브는 꽉 짜여진 화음을 몸으로 느끼며 살며시 고개를 내렸다. 에이드리안이 미소짓고 있다. 내 노래에 귀기울이고 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에이드리안과 함께 하고 싶어. 그에게 언제나 내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텐데.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아름다운 노래. 되풀이되는 마음. 그 속에서 미소짓는 당신.' 쥬느비에브는 벅찬 마음을 안고 몸을 돌렸다. 마음이 들떠 오르고 있었다. 더, 더 노래하고 싶었다. 더 날아오르고 싶었다. 더 큰 환희를, 더 큰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더! 더!! 더!!! 순간, 쥬느비에브는 노래를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넓은 정원에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에 눈물이 맺혀 왔다.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쥬느비에브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노래를 해서는 안 된다. 더 노래하게 되면 레플리카를 쓰게 된다. 그것만은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다. 어겨서는 안 되는 약속. 약속을 어기면 불행하게 된다. 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허탈해진 마음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더 노래해 주고 싶었는데!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서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느낌이었다. 사람들을 말라죽게 만든 느낌. 노래는 마약과 같아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노래하지 못했다. 마약처럼 조금씩 몸을 집어삼킨 노래는 끝내 그들에게 노래 대신 죽음을 내려주니. 목이 탔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고개를 돌리다 순간 에스프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쥬느비에브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입술을 마치 홀린 듯 바라보았다. 무언가 들린다. 머리 속에 울리고 있었다. [ 레플리카는 소망의 힘. 작은 의지를 현실로 이루어주는 힘. 때로는 자신의 마. 음. 조차 무시하며 바람을 이루어주는 힘. ] 에스프라드가 눈을 감았다. [ 너도 알고 있지? 지금은 의지가 마음을 삼키는 순간. ] 쥬느비에브는 순간 자신을 휘감고 있는 무언가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게 자신을 죄고 있던 그 어떤 것. 그 힘은 너무나 그립고 마음 아픈 힘. 에스프라드의 레플리카가 전해져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말은 하나의 키워드가 되어 모든 것을 해방시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노래하고 있었다. 말라버린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레플리카... [ 푸르른 나무 아래 작은 아이 작은 아이는 투명한 미소로 손안에 담긴 작은 소망을 빌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알고 있는데도... 알고 있는데도... .... ]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하늘이었다. 하얀 하늘에 빨간 색 물방울들이 번지고 있었다. 눈앞에 빨간 물방울이 번지고 있었다. 눈물이 뺨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젠 행복해 질 수 없어. 이젠...안 돼...." 정신이 아득해지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귓가를 맴돌았다. '에이드리안, 거기 있어요? 응? 미안해요... 미안...해요...' ******** 사람들이 환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노랫소리에 공기가 맑아지며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커다랗게 자라고 있었다. 아찔할 정도의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노래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환희에 찬 웅성거림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머리 속에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자리에 앉아 바짝 마른 입술을 벌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이 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심장이 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리를 질러야 할텐데. 쥬느비에브에게 노래를 그만 하라고 외쳐야 할텐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눈앞에서 쓰러지고 유벨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갈 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에스프라드가 고개를 숙인 채 희미하게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넋 나간 듯 그가 말하는 바를 하나씩 짚었다. 바짝 마른 입술이 멋대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첫. 번. 째. 카. 드. 패."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죽은 듯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의자가 넘어지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학생회 위원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이드리안은 반쯤 감긴 눈을 들었다. 쥬느비에브가 실려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눈에 눈물이 솟아오른다. '내가...구원받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미안해, 쥬르. 미안해...쥬르....' 제106음(第106音) 첫 번째 카드 패(1) 유벨의 서재 안으로 서서히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소파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햇빛에 눈이 부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얇은 셔츠와 바지만을 걸치고 있는 터라 차가운 공기가 그대로 몸으로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두르고 있는 담요를 더욱 몸에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꺼풀이 무겁고 아팠다. 잠을 설쳤던 탓인 듯 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눈의 감각을 되찾고자 했다. 그 때 서재의 문이 열리며 사촌 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드리안, 집에 안 갈 거야? 쥬느비에브, 안 볼 거야?" 유벨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더니 곧 흩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발소리가 났다. 유벨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에드, 쥬느비에브 아침에 일어났대. 꼬박 사흘 누워있었잖아. 몸 괜찮은 건지 궁금하지도 않아?" "많이 아팠겠지. 그렇게 레플리카를 썼는데." 에이드리안은 빛 바랜 파란 눈동자로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유벨이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만해." 에이드리안은 담요를 더 끌어당기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벨은 귀찮다는 표정의 에이드리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마음 한 쪽 불안감으로 자리잡고 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어떤 식으로든 원하지 않았던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유벨은 다시 길게 한숨을 쉬며 뒤돌아 섰다. 에이드리안은 심한 충격으로 며칠째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체리욜파쳰도 못 나가고..하긴 그게 문제가 아니지. 먹을 거라도 좀 가져 올게. 몸 상하겠어." 유벨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히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있었지? 기억 안 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 ******** 구두 굽과 대리석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안느마리는 손으로 눈물을 흩어내며 라데팡스 학생회실을 찾았다. 문을 열자 테라스에 몸에 기대고 있는 에스프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안느마리는 뛰듯이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에스프라드 님! 쥬느비에브가 저렇게 다칠 거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안느마리는 아랫입술을 악물고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에스프라드가 몸을 돌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 탓이라고...그래서 달려온 건가?" "에스프라드 님..." 안느마리는 에스프라드의 차가운 눈빛에 입을 벌렸다. 그러나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가 이번 체리욜파쳰에 꼭 참가하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노래하면...쥬느비에브가 다칠 거라고는." "날 위해서 뭐든 해주겠다고 했잖아?"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에스프라드의 모습에 안느마리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전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내 친구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당신을 따르고 싶진 않아요! 쥬느비에브는 며칠 째 깨어나지도 못하고..." "하지만 그건 네 소망이었잖아. 그녀가 아름답게 노래부르는 것." "그렇지만 쥬느비에브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진 않았어요!" 안느마리의 절망적인 목소리에 에스프라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많이 변했군. 그 쪽에 가서 완전히 변했어. 자신만 알고 자신만 생각하던 이기적인 안느마리가 많이 변했어." "난 쥬느비에브가 좋아요. 내 친구니까. 스스럼없이 내 친구가 되어줬어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나 하나만을 봐 준 친구에요. 에이드리안 님도, 유벨 님도, 미라벨 님과 케이로프 님도 모두 좋은 분들이에요. 전 이제 그만 두겠어요. 당신의 잔인한 놀이에 더는 끼여들 수 없어." 안느마리는 회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프라드는 검은 옷자락을 날리며 다시 난간에 기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쥬느비에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에이드리안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스콜라를 떠나겠어요. 더 이상 쥬느비에브를 볼 자신이 없으니까..." 안느마리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 섰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안느마리는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프라드 님. 올슈틴 님도, 오르탕스 님도 모두 당신을 존경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만 두세요. 결국 당신을 상처 입히는 거니까. 그 분들은 마음 아파하면서도 당신을 돕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괴로워하고 있어요. 전 지금 떠나지만 여전히 당신이 행복해지길 원하니까요. 자신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이 빈껍데기만 있던 날 이끌어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안느마리는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희미하게 에스프라드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고마워. 안느마리." 안느마리는 뜨겁게 솟아오르는 눈물에 서러움이 몰려왔다. 집 안의 막내로서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다 들어온 스콜라에는 보기에도 대단해 보이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 중 아무도 평민 출신의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자아를 상실할 만큼 혼자만의 쓸쓸하고 고독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내가 왜 이 곳에 있는 것인가. 왜! 사무치는 고독에 자신을 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 애를 썼다. 마음이 없다면, '내'가 없다면 고독따위 느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어릴 때 잠시 했었던 여장을 다시 시작했다. 여장을 하고 다니면 마음이 편했다. 진짜 자신은 꼭꼭 감춰둔 느낌이었다. 외로워하거나 쓸쓸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왜냐면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어느 날, 검은머리의 남자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느마리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혼자 따돌림당하고 있는 것을 미처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 채 혼자만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혼자서만 고민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 때부터 안느마리는 보이지 않게 에스프라드를 뒤에서 도왔다. 안느마리는 그를 존경했다. 매사에 분명하며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늘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변해 있었다. 에이드리안에 대한 집착. 그것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그의 뒤를 받쳐주고 있던 올슈틴과 오르탕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존경하고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면서도 그가 원하는 데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다. 에스프라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손을 내밀어 준 쥬느비에브. 그녀는 그저 그녀의 친구로서 자신을 바라보아 주었다.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 없이 그저 안느마리 자체를 바라보아 주었다. 상냥하고 마음 착한 쥬느비에브. 그러나 이제 그녀는 쥬느비에브를 만날 수 없다. 쥬느비에브가 노래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노래할 때의 그녀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은 그녀를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구덩이로 밀어 넣은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다. 안느마리는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거두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울 자격조차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안느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뿌연 하늘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 미안해..." ******** 머리 속이 멍했다. 에이드리안은 하녀가 새로 가져온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윤기 없는 파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얼굴이 조금 마른 듯 했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 분명 알고 있는데도 머리 속에 또렷하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마치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일기장처럼 단단히 숨겨져 꺼내기가 힘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펴서 눈 앞으로 가져갔다. "쥬르가...날 위해 아주 멋진 노래를 해주었는데... 그리고...그리고... 첫 번째 카드 패라고... 윽." 순간 두통이 찾아왔다. 에이드리안은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눈이 따가웠다. 그는 이마를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셔츠 갈아입어야지." 걸음을 옮기던 에이드리안은 얼마 안 가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방금 갈아입었지." 그는 맥없이 고개를 흔들며 소파로 가 걸쳐져 있는 코트를 집어들었다. "쥬르가 걱정하겠어. 어서 집에 가서..." 에이드리안은 넋 나간 표정으로 코트를 입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나가자 하녀들과 하인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에이드리안은 그들이 곁으로 지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때 1층 복도 쪽에서 유벨이 나왔다. "에드! 너 어디 가려고. 집에 가려는 거야?"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반사적으로 유벨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응. 쥬르가 기다릴 거야. 어서 가야지..." 희미하게 미소 띈 채 걸음을 옮기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유벨은 왈칵 울음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에이드리안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응. 고마워." 에이드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벨은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애써 분별하며 코트를 가지러 방으로 뛰어갔다.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에이드리안은 아무래도 넋이 나간 듯 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듯 했다. 유벨은 하늘이 저주스러웠다. 결국 그토록 바랬던 사촌 동생의 행복을 이토록 무참히 짓밟아버리다니. 자신에게서 형을 빼앗아 가고 사랑하는 동생마저 빼앗아 가려는 것인가! ******** 에이드리안은 집 앞에 서서 멍하니 저택을 바라보았다. 흐드러지게 꽃이 핀 나무들이 저택 위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파란 나뭇잎과 하얗고 빨간 꽃들... "유벨, 내 사택이 이렇게 생겼던가?" "에드, 춥잖아. 어서 들어가자."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재촉했다. 에이드리안은 멍한 얼굴로 유벨의 손에 의해 끌려가다 갑자기 멈춰 섰다. "무서워. 유벨. 이상한 기분이 들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쥬르를 만나야 하는데... 만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유벨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 사촌 동생. 난 네가 행복하길 빌어. 어떤 식으로든. 난 널 잘 알아. 지금 쥬느비에브를 만나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쥬느비에브도 지금 힘들고 아프니까. 그런 쥬느비에브를 내버려두고 도망갈 네가 아니라는 거, 나 잘알아." 유벨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너무 추운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를 만나면 좀 더 따뜻해질까. 그래, 쥬르는 따뜻하니까.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쥬느비에브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진다. 그랬다. 아마...앞으로도 그렇겠지. ******** 에이드리안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톨레와 루이즈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쥬느비에브를 못 본지 며칠 째던가. 그러고 보니 왜 내가 유벨의 집에 있었지? 에이드리안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의 방은 조용했다. 아무도 문병 오지 않은 건가? 이상하게 너무나 조용했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삼키고 천천히 그녀의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훑었다. 이상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침대 휘장을 걷고 쥬느비에브를 찾았다. "쥬르, 자는 거야? 쥬...르..." 에이드리안은 커다랗게 눈을 뜨고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몸을 일으키고 있는 그녀도 까만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쥬르, 많이 말랐잖아? 머리카락는 왜 이래?" 톡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쥬느비에브도 어느 새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나...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바보 같아서...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뭐가...미안하다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물은 그도 어쩌지 못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불 위로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그는 웃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리고 다시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쥬르, 사람 불러서 머리 정리 좀 해야겠다. 많이 자랐잖아 염색도 하고..." 순간 에이드리안은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저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흐느끼며 얼굴을 숙였다. "어째서..어째서 이런 일이... 어째서 너한테 이런 일이..."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다 다시 거둬들였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눈물을 흩어냈다.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까만 생머리의 누구보다 착하고 예쁘게 미소짓던 자신의 그녀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그보다 더 하얀 얼굴로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고 하얀.... ******** 조용히 쥬느비에브의 방문을 닫고 나온 에이드리안은 곧장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 속이 또렷하게 정리되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쥬느비에브가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인지.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에 마음마저 무감각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서재의 테라스로 가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대리석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 날, 쥬느비에브는 자신을 위해 노래를 했었다.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상냥하게 노래부르던 그녀. 그 때까지만 해도 그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놀라울 정도의 레플리카를 쏟아냈다. 넓은 스콜라 안은 지금 봄의 그것과 같이 놀라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레플리카가 스콜라의 모든 초목을 꽃피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녀의 레플리카에서 느껴지던 기운. 그것은 그 이전, 그녀의 레플리카와는 완전히 다른 기운의 그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단 한 번 느껴보았던 참혹했던 선율의 감촉. 아름답지만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느낌의 레플리카. "젠장. 젠장!"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으로 난간을 쳤다. 쥬느비에브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앞이 캄캄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섭고 두렵고 슬퍼서 죽을 것만 같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천천히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흑.......흐윽....흑....." 떨려오는 입술을 깨물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옷깃이 눈물로 젖어갔다. 무언가를 탓할 정신도,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볼 정신도 없었다.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문소리가 들렸다. 유벨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얼른 눈물을 훔치고 무표정하게 뒤돌아서 유벨에게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했다. 유벨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유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두려운 것이다. 형을 잃고 동생을 잃고.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하지만 에이드리안에게 그를 위로할 여력 따윈 없었다. 유벨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에드, 쥬느비에브는 좀 어때? 괜찮은...거지?" 에이드리안은 한참 검은 밤하늘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괜찮아 보였어. 그것보다 나, 너한테 부탁이 있어." 에이드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유벨은 그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 "뭐든 말해 봐." "학생회, 네가 맡아 줘. 난 내일 부로 학생회장직 사퇴하겠어." "에드!!" 유벨이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심이야. 학생회 따위에 매달려 있을 여력이 내겐 없어. 네가 맡아 줘.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무서운 얼굴로 주먹을 꾸욱 쥐며 차갑게 눈을 빛냈다.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오늘 부로 퇴출시키겠어. 오늘까지는 내가 회장이니까 내 말 따라 줘." "에드... 안느마리는 왜..." 유벨의 잔뜩 찡그린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띄며 고개를 돌렸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섬뜩함마저 느끼며 마른 입술을 벌렸다.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지금 당장 가서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아! 쥬느비에브를 체리욜파쳰에 나오게 만든 것도 안느마리였어! 에스프라드는 다 알고서 안느마리를 보낸거야. 첫 번째 카드 패를 쓰려고... 그래서 안느마리를 보냈던 거야." 에이드리안은 잔인하게 미소지으며 하얀 달을 쳐다보았다. "그래. 다 알고서 그가 꾸민 짓이야. 쥬르가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는 걸 알고 내게 보냈던 거야!" 제107음(第107音) 첫 번째 카드 패(2) 유벨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더 이상 보기가 싫어 억지로 그를 돌려보낸 에이드리안은 창백한 표정으로 달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과 함께 세상을 비추고 있는 달을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달은...어느 때든 같군. 기쁠 때도, 그리고...슬플 때도." 에이드리안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재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현실로 닥쳐왔다. 꿈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든 깨어날텐데. 에이드리안은 주먹을 꾸욱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쥬르가...암속성 레플리카...하! 하하하...하하.." 자신도 알 수 없는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그대로 맥없이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소리지를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이 것이 정말 현실인가? 이렇게 멍한데 현실이라고?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갔다. "노래할 수 없는 레플리카...씻을 수 없는 저주의 레플리카..."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떨려왔다. "벌...받은 건가? 미레이유... 아니야! 쥬르는 절대 안 돼! 절대!" 에이드리안은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쥬느비에브가 저주받았다니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암속성 레플리카. 비인 가문의 가장 저주받은 피. 한 치의 기대도 허용치 않는 가장 진한 저주의 피. 에이드리안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쿡. 쿡쿡쿡. 아하하하하! 그래. 벌받은 건가? 내가 다 빼앗아 버려서 이제야 벌받은 건가? 훗. 후후후. 큭큭큭." 에이드리안은 순간 웃음을 뚝 그치고 몸을 일으켜 차가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매섭게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벌은 내가 받아야 하는데 왜 쥬르에게 형벌을 주는 거야! 왜! 왜!! 쥬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어서 되돌려. 로스페니르든 뭐든 어서 되돌려! 되돌리라구!!" 아무런 대답도 기대할 수 없는 그의 처량한 울림이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악물고 덜덜 떨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슬픔. 아픔. 고통. 절망. 무엇 하나 그가 원치 않은 감정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용서할 수 없었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지금 쥬느비에브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쥬느비에브가 자고 있었다.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아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그가 곁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굳게 닫힌 창과 커튼 사이로 작은 빛줄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한참 창을 주시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스럽던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과다한 레플리카 사용의 흔적이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보니 어서 잘라주고 싶었다. 어서 원래의 쥬느비에브로 돌려놓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살짝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공기에 뺨이 서늘했다. 며칠 사이에 많이 마른 듯한 모습. 다시 눈이 따끔거렸다. "쥬르, 나 우는 거, 싫지? 그런데...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해." 에이드리안은 서글프게 속삭이며 고개를 숙여 쥬느비에브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감촉에 쥬느비에브가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응..." 쥬느비에브는 눈을 비비며 입을 웅얼거리다 눈을 크게 뜨고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 "잘 잤어? 좋은 아침이야, 쥬르."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의 밝은 미소에 쥬느비에브는 벌떡 몸을 일으켜 그를 쳐다보았다. 이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미안해요...나..." "자꾸 울면 화 낼 거야."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오전에 사람이 올 거야. 머리 다듬고 우리 산책 가자. 며칠째 계속 방 안에만 있었잖아. 답답하지?" "......."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대답대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나, 정말 나쁜 애야. 에이드리안이 아파할 거 알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 내가..." 쥬느비에브가 뚝뚝 눈물을 쏟아냈다. 에이드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 쥬느비에브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만해, 쥬르. 다 아니까...이제 그만해." "에이드리안. 나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 무서워..." 흐느끼는 쥬느비에브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에이드리안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등을 다독거렸다. 그녀의 심정을 그는 알 수 없었다. 당사자가 느끼는 것과 제삼자가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궁금했다. 자신이 아픈 것만큼 쥬느비에브가 아플까. 그가 아픈 것보다 쥬느비에브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두렵고 무서워서 눈물 밖에 나오지 않겠지.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 자신도 그랬다.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쥬느비에브가 우는 모습이 마음 아플 뿐. "쥬르, 울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원래의 네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난 지금 네 곁에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무서워하지 마. 다시...노래할 수 있게 해 줄게." 쥬느비에브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안도감에 숨을 내쉬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멍한 눈으로 살며시 날리는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보았다. 눈앞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하얀 머리카락. '정말 내 곁에 있어 줄 거에요? 내가...저주받았어도?' ******** 에이드리안은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쥬느비에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지금 미용사가 찾아와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질질 끌릴 만큼 길어버린 머리를 허리까지 자르고 지금은 염색을 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마음이라는 공간에 무거운 돌이 쌓여 있는 것인지 자꾸만 무거워지는 느낌에 눈이 감겨왔다. 머리 속에는 단 한 가지의 생각뿐이었다. '쥬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며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선택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이 잔인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쥬느비에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많이 보고 듣고 만지고... 그녀를 느껴보고 싶었다. 염색이 다 된 것인지 쥬느비에브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은 걸음을 옮겨 방안의 작은 소파에 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쥬느비에브가 미용사와 함께 욕실에서 나왔다. "에이드리안. 너무 신기해요. 나, 머리 다시 까맣게 됐어요." 에이드리안은 방긋 미소짓고 있는 쥬느비에브에게 미소지어 주었다. "응. 이리 와 봐." 쥬느비에브가 수건으로 머리를 쓱쓱 닦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생긋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염색 아주 잘 된 거 같아요. 에이드리안 좀 봐요. 여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까맣게 된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웃어주었다. "바보. 할머니 될 뻔했잖아. 난 할머니랑은 결혼 안 할거야." "에에? 안 돼요. 나 에이드리안이랑 꼭 결혼하고 싶은데!" 장난스러운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심술난 듯 입술을 쑥 내밀고 뚱하게 대답했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쥬느비에브는 그제야 혀를 쏙 내밀며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나, 머리 말리고 옷 입고 우리 산책 가요." "으응..."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그는 문득 멈춰 뒤돌아보았다. 쥬느비에브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그는 알 것 같았다. '가지 말아요, 에이드리안. 곁에 있어줘요.'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그제야 안심한 것인지 몸을 돌려 미용사에게로 갔다. 에이드리안은 측은한 그녀의 뒷모습에 다시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쥬느비에브는 미용사가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는 동안 멍하니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에이드리안이 방에서 나가며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동정심, 안타까움, 미안함.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가끔씩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다. 불쌍한 운명을 점지 받은 자신의 아이. 보고 있으면 아이의 운명에 안타깝고 연민의 감정의 든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운명을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데 대한 미안함... 쥬느비에브는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걸 정말 원치 않았다. 불쌍해서 곁에 있어 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런 눈빛은 정말 싫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와 자신이 아무 것도 몰랐던 그 때로. 심장이 콕콕 쑤셔왔다. 에이드리안이 어떤 생각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모른 척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서웠다. 행여 말이나 행동을 잘못해서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떠날까봐 너무 무서웠다. 자신의 불행을 함께 감당할 수 없다며 곁에서 떠날까봐 몹시 두려웠다. "노래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노래만..." "네?" 쥬느비에브의 중얼거림을 미용사가 들었던 것인지 눈짓을 했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미용사에게 말했다. "머리, 예쁘게 다듬어 주시라구요. 에이드리안한테 머리 예쁘다고 칭찬 받고 싶어요. 리본은 저기 서랍에 많이 있어요. 머리 삐죽 안 서게 해주세요." "그럴 게요. 예쁘게 묶어드릴 게요, 아가씨." 미용사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다시 빗질했다. 쥬느비에브는 싸늘하게 표정을 얼리며 다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까만 생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어두운 표정의 소녀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에이드리안. 나, 다시는 노래 안 할 테니까 곁에 있어 줘요. 제발...' ******** 쥬느비에브는 하늘색의 두꺼운 원피스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에이드리안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서재로 달려갔다. 미용사가 정성스럽게 하늘색 리본으로 묶어준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리며 아주 기분이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면서 서재 안으로 머리를 쏘옥 내밀었다. "에이드리안 아저씨, 계십니까아?" 쥬느비에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책상에 기대어 있던 에이드리안이 밝게 미소지으며 손짓했다. "들어오시지요. 쥬느비에브 아주머니." "헤에- 나, 아주머니 아닌데." 쥬느비에브가 깡총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에이드리안에게로 뛰어갔다. 에이드리안은 그의 금발을 넘기며 장난스레 눈을 깜빡였다. "그러는 이 몸도 아저씨 아닙니다만."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서로 바라보며 쿡 하고 웃음을 삼켰다. 에이드리안이 손을 뻗어 살며시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매만졌다. 순간적으로 슬픈 빛이 그의 파란 눈동자에 스쳐갔다. "이제...원래 쥬르 같다. 응... 까만 머리가 예뻐, 쥬르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그의 눈빛에 마음 한쪽이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에이드리안이 그녀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이내 웃으며 어깨를 다독거렸다. "쥬르, 우리 오늘은 멀리까지 산책 가자. 많이 걷고 싶어." "으응... 응!"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대답하다 에이드리안의 미소에 활짝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에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슬픈 생각을 하는 것도, 자신을 동정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싫었다. 죽기보다 싫은 감정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청록색 코트를 입는 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항상 이만큼의 틈이 있었다. 그 틈이 무엇 때문에 벌어져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틈이 에이드리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틈 옆에 다른 틈이 생겼다. 틈이 너무 커 서로의 마음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번에 생긴 틈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닥쳐온 불운한 운명이 에이드리안과 자신 사이의 틈을 더 벌여놓고 말았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겉만 돌고 있다. 서로 애써 미소를 보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것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얼음 조각과도 같았다. "쥬르, 춥잖아. 코트 안 입어?"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미소에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원피스 두꺼운 거고, 스타킹도 따뜻한 거라서 괜찮아요." "그래도, 추우니까." 에이드리안이 다가와 털이 보풀보풀 날리는 따뜻한 보라색 목도리를 목에 돌돌 매어 주었다. 그의 따뜻한 손길에 머리 속이 아련해지는 것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끌어당겼다. "가자. 오랜만의 산책." "응, 가요."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그의 손이 잡아끄는 데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미소짓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괴로워 울고 싶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가끔씩 아주 슬픈 눈동자를 보여주는 그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자신이 아니라면 계속 행복할 수 있었던 그였다.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만들어 버렸다. 서로 미안하고 안타까움만 남게 된 두 사람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미소를 띄웠다. 그가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알게 되면 더 슬픈 표정을 할 것이다. 웃는 것이 힘들지만 그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108음(第108音) 첫 번째 카드 패(3)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이 산책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서재에 들어왔다. 뒤따라 어두운 표정의 유벨이 들어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들의 얼굴에 놀라 에이드리안을 올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다 다시 풀렸다. 그는 유벨을 힐끗 쳐다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둘 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에이드리안이 왜 저렇게 쌀쌀맞게 구는 걸까. 목소리도 차갑고 딱딱했다. 평소의 그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쥬느비에브는 불길한 느낌에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때 미라벨이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를 쳤다.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요, 에이드리안 님! 어떻게 저희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학생회장직을 사퇴하실 수가 있으세요? 안느마리의 퇴출은 또 뭐죠? 대답해 주세요!" 쥬느비에브는 놀라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학생회장을 사퇴해? 안느마리가 퇴출?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그런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에이드리안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쥬느비에브를 내려다보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쥬르, 금방 내려갈 테니까 잠시만 내려가 있어." 상냥한 에이드리안의 말에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의 뜻이 담겨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가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에이드리안은 예의 부드러운 표정을 지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라벨에게 말했다. "무슨 무례한 짓이야, 미라벨. 내가 지시한 내용에 대해서 토다는 건 원치않아." "저희들도 그 이유에 대해서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케이로프가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다가 유벨에게 눈짓을 했다. 유벨은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며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던졌다. 그리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근심이 드리우는 것을 보고 화를 누그러뜨리며 눈짓을 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쥬느비에브가 체리욜파쳰에서 쓰러지고 유벨과 에이드리안은 철저히 쥬느비에브를 감추었다. 그리고 안느마리는 그 때부터 행방불명 상태이다.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유벨이 전해준 에이드리안의 사퇴 소식과 안느마리의 퇴출. 그들은 아연실색했고 무작정 그에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천천히 뒤돌아 서며 입을 열었다. 어둡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미라벨, 케이로프. 너희들에겐 감사하고 있어. 모자란 날 따라 여기까지 와 주었지. 언제나 날 생각하며 많은 힘이 되어 주었어.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감사하다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어." 에이드리안은 말을 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쥬르가 많이 아파. 저런 쥬르를 두고 다른 일에 매달릴 여력이 없어. 그러니까 이해해 줘. 뭐라 비난해도 좋아. 난 학생회장이니 평의회 의장이니 하는 것보다 쥬르가 소중해. 쥬르를 저렇게 놔둘 수 없어." 그의 말에 미라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진작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저희들도 돕고 싶어요. 실력 있는 의사를 알아보겠어요, 당장. 그러니..." "아니. 너희들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쥬르가 아픈 건...병 때문이 아니야. 쥬르는...." 에이드리안은 말하기가 힘든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케이로프와 미라벨은 그의 표정에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읊조리듯 말했다. "쥬르, 저주받았어. 비인 가의 가장 잔혹한 저주를..." "에드!!"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유벨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리고 험악하게 그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에드, 그건 가문의 비밀이야! 말하면..." "뭐가 비밀이야! 이 딴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저주따위가 비밀이라고? 하! 가문에서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어! 다 빼앗아 가고 기껏 던져준 행복이라는 게 암속성 레플리카? 다 죽어버리라고 해, 미쳐버린 비인 가 따위. 다 죽어버리라고 해!!" 눈물까지 머금고 앙칼지게 말하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유벨은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내렸다. 알고 있었다. 비인이라는 이름에 매여 지긋지긋한 아픔만 당하고 있는 자신들. 유벨은 울고 싶었다. 놀라고 당황한 표정의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에이드리안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인 가문에는 두 가지의 저주가 내려오고 있어. 대상은 대속성 레플리카. 그 중 하나는 암속성을 제외한 나머지 속성 전승자에 대한 무작위적인 유전병. 그리고 또 하나는... 대대로 물려받는 암속성의 저주."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허탈한 것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자 갑자기 케이로프가 단호한 얼굴로 소리쳤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에... 저희가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당신이 괴롭게 된다면 저희는 모른 척 귀를 닫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그 사실로 인해 에이드리안 님이 괴롭다면...그래서 함께 고통을 나눌 자가 필요하다면 말씀해 주세요." 미라벨이 진지한 표정으로 케이로프의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긴장된 얼굴로 에이드리안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소 당황한 듯한 얼굴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바보 같아. 보살펴줄 필요도 없는 나쁜 사람인데, 난..."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고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한참 바라보다 유벨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유벨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이 드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세간에는 암속성 레플리카가 전승되지 못하고 어느 대에서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비인 가에서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들을 철저하게 숨겼거든. 그들이 저주받았기 때문이지. 선조 로스페 니르의 저주를 가장 확실히 전승한 대속성 레플리카, 그것이 암속성 레플 리카야."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표정이 굳어갔다. 에이드리안은 그들의 표정에 안쓰 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속성의 전승자들에겐 저주가 유전병의 형태로 주어지지. 하지만 암 속성은 달라. 레플리카를 쓸 때마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거든. 노 래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의 수명대로 살 수 있지만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노래를 하지 말라는 건 죽음보다 가혹한 일이지." 미라벨은 손을 떨며 입으로 가져갔다. 에이드리안의 말이 갑자기 현실감 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가 묻고 싶었던 말을 케이로프가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설마...그럼 쥬느비에브......암속성 레플리카... 말도...안 돼....아니겠...지요?" "아니에요! 쥬느비에브가 그럴 리가! 그녀는 평민 출신인데 어떻게 비인 가에만 전승되는 암속성 레플리카를 어떻게...어떻게 말도 안 돼요! 믿을 수 없어요!" 어느 새 눈에 눈물이 맺힌 미라벨을 부축하며 케이로프는 눈빛으로 에이 드리안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상황에 맞닥뜨린 자신보다 더 슬픈 표 정을 짓고 있는 미라벨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쥬르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 그 때는 몰랐는데 얼마 전에 깨달았어. 그 때 어린 쥬느비에브도 만났었지. 쥬르의 아버지, 세스는 분명한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였어. 그리고 암속성은 무작위 전승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지는 힘이야." 에이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미라벨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라벨, 부탁이 있어. 쥬르, 곧 괜찮아질 테니까 원래대로, 늘 하던 데로 그녀를 대해 줘. 동정심 같은 걸로 그녀를 대하면 그녀, 상처받을 거야. 그러니까 부탁해." "쥬느비에브가...괜찮아진다고요?" "응. 그래서 학생회장직도 그만두는 거야. 그녀가 괜찮아지면...다시 돌아 올게. 아마 오래....아주 오래 걸리겠지만." 미라벨의 눈물 맺힌 눈을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는 몰랐다. 유벨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잠자코 있던 케 이로프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안느마리 아리나 올 모스테츠 양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순간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모스테츠 양은 에스프라드가 보낸 자였어. 순순히 믿었던 내 불찰이지." "그...그런! 안느마리가..." 미라벨과 케이로프의 경악한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다시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얼마동안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잘 부탁해. 스콜라도, 쥬 르도." "에이드리안 님, 어디... 가시는 건가요? 쥬느비에브는요?" 미라벨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의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에이드리 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르는 괜찮아 질 거야. 노래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그러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다들, 쥬르를 부탁해. 난...잠시 떠나있어야 할 거 같아. 아무래도 내 속성이 반대속성이다 보니...서로 자극을 주게 되니까. 곧 만나게 될 거 야."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에이드리안 님의 뜻이라면 저희들은 뭐든 따르겠어요. 부디...어떤 식으로 든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는 참 고마운 것이 많았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그들이 쥬 르를 돌봐 줄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때 유벨이 다가와 거칠게 팔을 잡아끌 었다. "에드.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쥬느비에브가 괜찮아 질 거라니? 저주는 절대 풀리지 않아. 엘로이즈 누님도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어. 그런데 괜찮 아질 거라니?" "유벨. 난 쥬르가 노래하는 모습이 좋아. 그녀가 웃는 게 좋아."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숙이며 희미하게 미소 띈 채 말했다. 유벨은 울화가 치밀어 그의 팔을 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그런 거지!!"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 주고 사랑해주었던 사촌 형이다. 에이드리안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미소지었다. "유벨. 쥬르의 암속성 레플리카는 무언가에 의해 봉인된 상태였어. 그건 아마도... 쥬르의 아버지, 세스가 그의 레플리카 전부를 희생해 쥬르에게 걸어놓은 봉인이었을 거야. 반대 속성인 내가 그녀의 힘을 봉인한다면...좀 더 효과를 낼 수 있을 거야. 물론 영구적이진 않겠지만...그렇지만... 쥬르 가 날 생각해 준다면...아마 괜찮을 거야." "에드!! 무슨 소리야. 레플리카를 전부 건다고? 너 미쳤어?" 유벨이 에이드리안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뿌리 치고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내 레플리카가 사라져도....그래서 쥬르가 괜찮아진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야. 단지 레플리카가 사라지는 것뿐이잖아." "너 누굴 바보로 알아?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레플리카는 영혼과도 같아! 영혼이 없어진다는 게 무슨 의미야? 죽는다는 걸 의미하잖아! 난 용납 못 해. 쥬느비에브도 물론 소중해. 하지만 그건 내 동생의 약혼녀로서야. 난 쥬느비에브는 포기해도 넌 포기 못해! 절대 안 돼, 에드!!" "내가 포기 못 해!! 내가 쥬르를 포기할 수 없어! 알아. 알아... 이게 얼마 나 잔인한 짓이라는 걸. 내가 죽고 나면 쥬르가 웃으면서 살아갈 리 만무 한데! 내가 죽어버리면 쥬르, 매일 울면서 소리칠 텐데! 다 알아! 하지만 쥬르가 죽는 건 안 돼. 절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 같이 죽자고는 못해. 내게 힘이 있는데...같이 죽자고 할 수는 없어." 에이드리안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벨은 그의 모습에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유벨은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이 밖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유벨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에이드리안에게 외쳤다. "차라리 에드! 내가, 내가 할게!" 에이드리안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유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안 돼. 암속성은 너보다 레벨이 높은 속성이야. 네가 감당할 수 없어. 나 밖에 할 수 없어. 그리고...내 사랑하는 형을 죽게 할 수야 없지." 에이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벨은 몸을 축 늘어뜨리고 하염없이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한숨 소리와 눈물. 유벨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형. 에드는 데려가지 마. 부탁이야. 엘로이즈 누나. 에드는 부탁이야, 데려가지 마." 제109음(第109音) 첫 번째 카드 패(4)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동자를 그곳에 향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자꾸 에이드리안의 서재에서 들었던 말이 머리 속에 메아리 쳤다. 쥬느비에브는 하얀 목도리를 두 손으로 잡아당기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에이드리안이...학생회장 안 한다고? 안느마리가...퇴출?"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하얀 털모자를 꾸욱 눌러쓰며 우울하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목 저 안쪽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크게 뜨고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얼마 전부터, 정확하게 체리욜파쳰이 끝난 뒤로 자주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왜 이렇게 울컥하는 느낌이 드는지 알고 있었다. "노래하고 싶어..." 쥬느비에브는 솟구쳐 오는 무언가를 안간힘으로 누르며 침을 삼켰다. 노래하면 안 된다. 이제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슬픈 눈빛. 자신의 짐을 딸에게까지 물려주었다는 그 죄책감. 그래서 아버지는 가끔씩 마음이 얼어버릴 정도로 슬픈 눈빛을 하고 계셨다. [엘, 쥬르한테 미안해. 너한테도 미안해. 널...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릴 적에 천둥이 무섭다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이 든 날, 어렴풋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머리 속에 아련히 남겨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끼고 목도리로 눈물을 쓸었다. "파파. 파파죠? 지금까지 날 지켜주었던 사람이. 왜 기억을 못했을까. 파파가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날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줬었는데. 왜 기억을 못했을까." 쥬느비에브는 손등으로 눈물을 흩어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었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을 품에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몸 속 가득 퍼지던 아버지의 레플리카. 아버지는 그녀의 암속성 레플리카와 함께 기억마저 봉인하셨다. 자신이 슬퍼할까 봐 기억을 봉인하셨던 것일까. 쥬느비에브는 아직도 완전하지 않은 기억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어렸을 때의 어느 날, 커다란 집 안에 꽃이 많았던 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났었다. 그리고... "쥬르!"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에이드리안이 싱긋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폴짝폴짝 뛰어 에이드리안에게 달려갔다.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랑 가는 거 봤어요. 얘기는 다 한 거에요?" "응."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손뼉을 쳤다. "미라벨 언니가 내일 사택으로 오래요. 책 빌려준다고 그랬어요. 귀한 연애소설 입수했다나? 헤에-" 쥬느비에브가 혀를 쏙 내밀며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그녀의 목도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털모자 끝에 달린 두 개의 방울을 툭 하고 건드렸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산책." "응!"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학생회장을 그만 두려고 하는지, 안느마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싶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쥬느비에브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 하얀 흙바닥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자극이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작은 말 한 마디에도 그는 조심스레 반응한다. 자칫하다가는 지금의 아슬아슬한 관계마저 깨질 수 있었다. 그저 지금처럼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음 속의 말이야 어쨌든 지금 현재가 중요했다. 쥬느비에브는 마음을 닫아 버렸다. '에이드리안 곁에 있고 싶어. 마음이 통하지 않아도 좋아.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테니까. 무서운 말은 하지 않을래.' 쥬느비에브는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묵묵히 하늘을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에이드리안,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에요? 행복했었는데... ******** "어? 눈 오잖아." 산책에 나선 지 얼마 가지 않아 하늘에서 하얀 솜털 같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쥬느비에브가 탄성을 질렀다. "야아- 눈이다! 눈이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오솔길을 마구 내달렸다. 그리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에이드리안에게 흔들었다. "에이드리안! 눈 와요! 눈 온다구요!" 하늘색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쥬느비에브는 까르르 웃어댔다. 그녀의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여 에이드리안은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얼른 손을 들어 쥬느비에브에게 외쳤다. "쥬르, 넘어져! 뛰지 마!" 에이드리안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벌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눈은 금새 쌓이고 있었다. 이렇게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에이드리안은 경이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미소를 떠올렸다. 그 때 쥬느비에브가 그에게 달려왔다. "짜잔! 나, 장갑 가져왔어요. 나, 눈사람 만들래. 에이드리안 눈사람 만들어 줄게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하얀 벙어리 장갑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하던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작은 눈뭉치를 뭉쳐 바닥에 데구르르 굴리고 있는 쥬느비에브는 작은 어린 아이 같았다. 온통 하얗게 채색되어 가는 세상 속에 쥬느비에브만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따끔따끔한 눈을 살짝 비비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쥬르, 그럼 내가 쥬르 눈사람 만들어 줄게." "에에? 정말? 날씬하게 만들어 줘요. 예쁘게." "알았어. 빗자루 몸매니까 빗자루 같이 만들어야 겠다." "에에? 에이! 나, 빗자루 몸매 아니에요!" 쥬느비에브가 볼멘 소리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손에 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뭉쳤다. 작은 눈송이들이 하얗게 뭉쳐져 커다랗게 변해갔다. 쥬느비에브는 어느 새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야아- 눈사람 몸통이다!" 쥬느비에브가 즐거운 듯, 행복한 듯 미소짓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이 녹아 뺨에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 앞이 뿌옇게 적셔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의 하늘색 원피스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끔씩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소리를 낸다.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선택도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는 지금,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운명이 내려졌는지. 어째서 쥬느비에브인지. 왜 하필 쥬느비에브인지. 너무 기막힌 운명에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은 잔혹한 운명에 오히려 무감각한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울면서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미소지을 뿐이다. 그러나... 가끔씩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 "다 됐다! 에이드리안 눈사람 완성!" 쥬느비에브가 허리에 두 손을 올려놓고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나뭇가지로 눈과 입도 만들어 놓았다. 옆에서 눈사람의 머리를 몸통 위에 올리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힐끗 쥬느비에브가 만든 눈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썹을 실룩이며 쥬느비에브에게 핀잔을 주었다. "쥬르, 눈이 너무 찢어졌잖아. 내 눈이 저래?" "어? 어라. 그러고 보니. 눈이 너무 올라갔나?" 에이드리안의 지적에 쥬느비에브는 하얀 털모자를 두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뒤뚱뒤뚱 걸어가 눈이라고 붙여놓은 나뭇가지를 떼어내 중간을 툭 부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정성스럽게 눈사람 얼굴에 눈을 붙여놓았다. "어때요? 이제 좀 나은 거 같죠? 손도 있어요. 에이드리안 손!" 쥬느비에브는 자랑스레 부러진 나뭇가지로 만들어 놓은 눈사람의 손을 가리켰다. 에이드리안은 쿡 하고 웃으며 자신이 만들고 있는 눈사람에 집중했다. "쥬르 눈은 동글동글하니까 돌멩이로 눈 붙이고... 입은 웃는 모양. 팔도 붙이고...흐음...다리는 어떻게 한담?" "에이, 원래 눈사람은 다리가 없는 거에요. 이제 완성! 쥬느비에브 눈사람도 완성!"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며 방실방실 웃었다. 눈사람 만들기에 성공한 에이드리안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두 개의 눈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흐음. 아무리 봐도 내가 만든 게 더 잘 만든 거 같은데..." "아니에요! 내가 만든 눈사람이 더 예뻐요! 봐요, 얼굴도 더 크고." "내 얼굴이 저렇게 커?" "으, 으음...." 쥬느비에브의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에 에이드리안은 그만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새 세상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 눈이 아렸다. 에이드리안은 앉을 만한 곳을 찾다 나무 밑의 커다란 돌덩이를 발견했다. 커다란 나무덕분인지 돌덩이는 비교적 덜 축축해 보였다. 그는 걸음을 옮겨 돌 위에 쌓인 눈을 치우고 쥬느비에브에게 손짓했다. 쥬느비에브가 폴짝폴짝 뛰면서 다가왔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다리 아프지? 앉아."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깔아준 손수건에 생긋 웃으며 조신한 레이디 처럼 살며시 그 위에 앉았다. "에이드리안, 역시 멋지다니까. 손수건도 깔아주고." "그야 당연한 일." 에이드리안은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은지 연신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옆에 자리잡았다. 쥬느비에브는 우뚝 솟아있는 두 개의 눈사람을 쳐다보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이런 날, 연인끼리 막 웃으면서 눈싸움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라벨 언니가 빌려준 연애 소설에서는 막 그러던데. 눈싸움하고 나면 <두 사람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러던데. 우리는 안 해요?" "안 해. 눈싸움하면 옷 버리잖아. 안 해." "에이, 해야 되는 건데. 까르르 웃으면서 '에이드리안! 나 잡아 봐라!'도 하고 싶었는데." "안 해. 안 한다니까. 쓸데없이 뛰어 다니는 거 싫어." 에이드리안의 허탈한 대답에 쥬느비에브는 맥이 빠진 듯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사람 만들 때 눈을 맞아서 그런지 머리카락이 조금 축축했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힐끗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에이드리안의 머리는 많이 젖어있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륵사륵하며 눈이 조용히 가라앉아 바닥에 내려온다. 그 모습이 아주 예뻤다. 계속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어색하다고 느껴질 즈음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학생회장 왜 안 하는 건데요?" "그냥. 귀찮아 져서." 메마른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눈 오는 숲 속의 모습에 눈을 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안느마리는 왜 학생회 그만 두는 건데요?" "집에 일이 있대." 다시 무미건조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고동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삼켰다. 결심을 할 때다. "에이드리안, 떠나도 돼요. 멀리 도망가도 돼요."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에이드리안까지 불행해지는 건 싫으니까 멀리 도망가 버려요. 그냥 모른 척 해버려요. 그래도 나, 울거나 원망하지 않을 게요. 그러니까..." "싫어."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쥬느비에브의 눈에서 순간 눈물이 톡 하고 떨어졌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외쳤다.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고 있는 그녀였다. "왜 싫은데요? 나하고 같이 있어봤자 에이드리안은 괴롭잖아요! 나, 다 알아요. 에이드리안은 요즘 날 볼 때마다 미안해하고, 불쌍하게 보고! 나, 다 안단 말이에요. 아닌 척 해도 소용없어요! 나도 에이드리안만 보면 미안하고 두렵고 괴로워요. 어차피 곁에 있어 봤자 서로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차라리 도망가요. 네에? 에이드리안만이라도 멀리 도망가라구요!" 어느 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눈 쌓인 바닥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쥬느비에브의 저런 모습에 눈을 감고 싶었다.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쥬르, 그렇게 울 필요 없어. 우린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이니까 그렇게 울 필요 없어. 깨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울먹이던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들고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악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따뜻하죠? 꿈이 아니란 거, 에이드리안이 더 잘 알잖아. 그러니까 어서 도망가요. 멀리 가서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려요. 아니면, 정말 놓아주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가 울면서 떼쓰면 에이드리안 도망가고 싶어도 못 갈 거야. 마음 아파서 못 갈 거니까 차라리 지금 도망가요. 에이드리안, 부탁이에요. 내가 더 후회하기 전에 어서 도망가요." 쥬느비에브는 끝내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쥬르,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기억해?" 쥬느비에브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때 내가 너 문에 머리 끼인 거 구해줬잖아. 너한테 있는 거면 뭐든 다 나한테 준다고 했어. 그렇지?" "가,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건데요." 쥬느비에브가 희미하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쥬르, 갖고 싶은 게 있어. 지금, 생각났어." "뭐, 뭔데요?" 쥬느비에브는 대뜸 이상한 질문만 하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네 불행."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입을 벌렸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눈발이 가늘어지고 있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불행, 내가 다 가져가 버릴 테니까 넌 행복해져. 그래.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야. 소중한 사람과 한 약속은 반드시...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거야."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마치... 그녀의 생각을 자르려는 듯 에이드리안이 가만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 눈 덮인 대지 위에 혼자서 조용히 돌아가는 작은 바람개비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바람개비의 간절한 소리 바람개비의 작은 소리는 눈 덮인 대지 위에 흩어져 아무도 들을 수 없네 돌아가고 싶어. 행복한 그 때로 가고 싶어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 가여운 소리 .... ]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눈 위로 손을 들었다. "쥬르, 내가 없어도...그래도 네 생명 아껴주고 행복해져. 부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입에서 메아리치는 알 수 없는 노랫소리와 하얀빛으로 순간 정신이 아득해 졌다. 아니야, 아니야. 정신을 잃어서는 안되는데. 에이드리안이... 그러나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에이드리안의 품으로 쓰러졌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품에 안긴 쥬느비에브를 꼬옥 껴안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쥬르, 내 목소리 들려?" 쥬느비에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하얗게 물든 세상을 바라보며 쥬느비에브의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언제까지나, 영원이라 불리는 순간까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쥬르, 사랑해." 제110음(第110音) 첫 번째 카드 패(5)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웠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 다홍 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머리가 아팠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레 입술을 움직였다. "미...라벨 언니?" 쥬느비에브는 안간힘을 쓰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오늘따라 묵직하게 느 껴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천천히 시야가 확보되었다. 미라벨과 케이 로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케이로프 님. 매일 무표정하더니 오늘 표정은 이상해. 헤헤." 쥬느비에브는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의 농담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라벨이 얼른 그녀를 도와주었다. 쥬느비에브는 등뒤로 베개를 놓고 몸을 기대었다. 오늘따라 몸이 너무 피곤했다. "미라벨 언니. 왜 그래요? 케이로프 님. 왜 그러는 건데요." "쥬느비에브. 그게..." 미라벨이 곤란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케이로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생각났다는 듯 딱 손뼉을 쳤다. "아하! 나 빌려주겠다던 그 책, 아직 못 본 거죠? 나, 그 책 나중에 봐도 돼요. 천천히 보고 빌려주세요." "쥬느비에브. 그게 아니라... 에이드리안 님이..." "에이드리안이요?"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미라벨을 쳐다보았다. 미라벨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케이로프를 쳐다보았다. "케이로프 님. 에이드리안이 왜요?" 케이로프는 결심한 듯 주먹을 꾸욱 쥐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떠나셨어. 어제 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케이로프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미라벨은 보이지 않게 떨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안쓰러워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은 곧 돌아오실 거에요. 그러니...." 미라벨이 말을 마치기 전에 쥬느비에브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하얀 잠옷 차림으로 쥬느비에브는 곧장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달려갔다. 벌컥 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간 에이드리안의 방은 차갑고 서늘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와 욕실,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에이드리안, 없어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아무도 없는 방에 우뚝 서서 한참을 있다 다시 뒤돌아 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복도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은 어젯밤에 가셨어요. 떠나셨다구요!" 미라벨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쥬느비에브는 서재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에이드리안이 있을 거야! 그럴 거야! 쥬느비에브는 어느새 송송 맺힌 눈물을 떨궈내려고 고개를 흔들며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도 그의 방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에이드리안. 나 놀리려고 숨어 있는 거죠? 에이드리안, 어서 나와 봐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방안을 서성이며 에이드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부름에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방 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정말 도망가 버렸어. 내가 도망가라고 해서 정말 도망가 버렸어.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그게 아닌데... 사실은 같이 있고 싶었는데. 괴롭고 슬퍼도 같이 있고 싶었는데... 흐윽...."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떨구고 하얀 잠옷이 촉촉해질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은 계속해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방문앞에서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 쥬느비에브를 위해 준비한 맛있는 요리가 가득 올려져 있는 테이블 위에 손수 식기를 차려놓으며 미라벨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서재에 들어간 뒤로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언가 좀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미라벨은 집사 톨레와 하녀장을 불러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미라벨은 다시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는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유벨 님이 다시 설명해주셔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비인 가에 그런 상상도 못할 끔찍한 사정이 있었다니...아마 아버님도 모르시겠죠. 하긴, 사실을 알면 대귀족 가문에서 가만있지 않겠죠. 결격 사유가 있는 자를 평의회 의장으로 뽑을 수는 없다면서 나머지 멀쩡한 대속성 레플리카까지 몰아붙일 게 뻔해요." "그러니 비인 가에서 지금까지 숨겨왔겠지. 들키지 않고 지금까지 숨겨온게 신기할 따름이야." 케이로프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일에 사실 아연실색한 그들이었다. 미라벨은 포크와 나이프를 마저 보기 좋게 올려놓고 케이로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케이로프가 왜 그러냐고 눈짓을 하자 미라벨은 고개를 숙이고 우울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 괜찮으신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불길해요. 유벨 님도 보이지 않으시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해. 만약에...혹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말도 안 돼요!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겠어요. 사실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가...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니. 그토록 예쁘게 노래했는데... 흑..." 미라벨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케이로프를 쳐다보았다. 케이로프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착해. 그런 점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가 그 분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 주도록 하지. 이번에는 꼭." 미라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에이드리안이 또 다시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소중하게 생각하고 따라온 사람이다. 그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3년 전, 그 때 한 번으로 족했다. ******** 에이드리안은 비인 가의 대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번 엘로이즈의 장례식 때 이후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곳이다. 에이드리안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집사가 달려와 코트를 받아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집사에게 일로나 할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물어보았다. 할머니가 침실에 있다는 말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자꾸 쥬느비에브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쓰러진 쥬느비에브를 침대에 눕히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하얀 피부에 창백해 보이는 쥬느비에브를 보고 있으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얀 달빛 아래 보이던 쥬느비에브의 모습, 따스한 손... [ 쥬르, 만약에...만약에... 네가 암속성 레플리카가 아니었다면...그랬다면 우리 어땠을까. 우린 아마 봄에 결혼할 거고, 나중에 일로나 할머니가 대저택, 내게 상속해 주실 테니 우린 거기서 생활하게 될 거야. 미라벨과 케이로프, 내 사돈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니 아이도 낳아야 할거고...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 ]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벌받은 거야. 벌받은 거야. 행복 따위... 내겐 자격 없어." 에이드리안은 걸음을 옮겨 일로나 할머니의 침실 방문 앞에 섰다. 엘로이즈의 장례식 때 보았던 초췌한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에이드리안은 방문 손잡이에 힘을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저에요. 에이드리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할머니의 흔들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에이드리안이에요." 엘로이즈의 장례식 이후로 부쩍 늙어버린 것 같은 할머니의 마른 얼굴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할머니의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있던 일로나 할머니가 천천히 눈을 뜨며 미소지었다. "왔구나,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일로나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할머니. 쥬르가...쥬르가요... 암속성 레플리카래요."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일로나의 손이 순간 멈칫하다 다시 움직였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눈을 뜨고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온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아직도 세상에는 하얀 붓 자국이 남아있었다. "할머니, 알고 계셨죠? 그래서 쥬르, 나한테 보내신 거에요?"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이번에도 일로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할머니. 나, 사실은 할머니한테 소리치고 화내려고 했는데... 응, 사실은 할머니한테 나, 많이 감사해야 해. 쥬르를 만나게 해 줬으니까." "변명 같이 들릴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내쳐버린 세레스라엘... 그의 아이에게 보상해 주고 싶었다. 맑고 환한 미소의 네가 날 바꿔준 것처럼 네가 쥬느비에브도 행복하게 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내 욕심이었구나. 내 욕심이었어." 일로나는 마치 참회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안은 일로나의 손을 잡고 뺨으로 가져갔다. "할머니, 오래 살아야 해요. 그래야 쥬르가 행복해지는 모습 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쥬르는....곧 괜찮아 질 거에요." 에이드리안의 말에 일로나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일으켰다. 그리고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 너 설마 네 레플리카로 쥬느비에브의.... 안 된다. 쥬느비에브가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에이드리안 네가 불행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난.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히스페르와 세레스라엘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내가 감싸줬더라면... 이 저주받은 운명을 내가 감싸줬더라면...흐윽..." "할머니..." 마른 눈가에 눈물을 쏟고 있는 일로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할머니. 나, 할머니 많이 좋아해요. 아버지도...할머니에게 감사하다고 그러실 거에요. 날 지금까지 보살펴 주고 아껴 주셨잖아요." 에이드리안은 할머니의 손을 토닥이며 미소지었다. 할머니는 지금 누구보다 괴로워하고 계셨다. 비인 가문의 어른 중의 어른이신 할머니는 저주받은 대속성 레플리카를 억압하고 속박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할머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었다. 아버지, 히스페르가 평생 감금당하다시피 살다 끝내 도피 생활을 해야했던 것도,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비인의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숨어살았던 세레스라엘의 불운한 운명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세레스라엘의 딸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할머니는 그녀를 만나러 갔고 거기서 쥬느비에브를 만난 것이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과거의 자신의 행동. 일로나는 쥬느비에브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불운한 운명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길 바랬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할머니. 나, 할머니 원망 안 해요. 할머니가 쥬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듯,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일로나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히스페르의 아이라며 찾아온 작은 아기.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아이는 한없이 맑고 꾸밈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팔에 안겼다. 작은 아이의 미소에 자신의 굳어버린 마음이 풀렸고 지금은 아이를 만난 것을 세상이 자신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만난 동그란 눈동자를 반짝이던 까만 생머리의 소녀.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순수한 소녀를 보며 일로나는 소녀의 아버지에게 해주지 못한 보상을 대신 해주고 싶었다. 그 소녀가 행복하길 원했다. 소녀의 잔혹한 운명을 알기에 더욱 마음은 절실했다.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했으면... 그리고 그녀는 소녀를 자신의 아이가 된 소년에게 데려갔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하길 원하며.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하게 미소짓던 두 아이는 모두 불행해져 버렸다. 자신으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져 버렸다. 일로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히스페르. 세레스라엘의 원망의 눈초리. 그리고 자신의 슬픈 운명에도 미소짓던 엘로이즈의 얼굴. 또 하나. 사랑스럽게 미소짓던 쥬느비에브의 모습. 일로나는 눈앞에 하나하나 스쳐 가는 얼굴에 울며서, 혹은 웃으면서 에이드리안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이 저주의 고리를 끊고 행복을 되찾길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로스페니르.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이 저주의 매듭을 풀고 행복해지길 바라지요? 부디...부디...힘을 주세요. 아이들이 다시 행복하게 노래할 수 있도록. 당신이 사랑한 아이슬로데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도록...' ******** 에이드리안은 일로나의 방에서 나와 밖으로 나갔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갔다. 차가운 공기와 회색 하늘. 기분이 우울했다. 이제는 평범한 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일로나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부와 마차를 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을 했다. 회색 하늘 저 쪽으로 날아가는 새가 보였다. "아버지. 이제 알 것 같아. 저주받은 자들이 왜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함께 데려갔는지. 혼자서 견딜 자신이 없었겠지. 죽음이라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에 혼자 맞서기가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그 마음을 아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동행해 준거야. 그렇지? 날 버린 게 아니라 아버지를 버리지 못한 거야." 에이드리안은 솟아오르는 눈물에 희뿌옇게 흐려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 들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더니 노래를 불러주었다.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노래. 가느다란 선율 가운데 참혹한 심정이 느껴졌던 이상한 노래. [ 암속성 레플리카를 처음 보는 모양이구나. 생명을 짜내 부르는 노래라 가장 아름답지만...가장 잔인한 레플리카지. 하지만 레플리카란 건 힘이야. 정말 중요한 건 마음. 마음이야. 아직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 에이드리안은 장갑을 손에 끼며 천천히 미소지었다. "맞아. 중요한 건 마음이지. 하지만...세스. 난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용기가 없나 봐. 내가 없어지면 쥬르가 괴로워할 걸 알면서도 죽음을 택하려 해. 내 마음만 편하려고. 내가 죽어 쥬르가 살면, 쥬르는 훨씬 괴로울 텐데. 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쥬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죽음을 택하려 해. 하지만 내게 힘이 있는데... 쥬르를 죽게 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같이 죽자고도 할 수 없어. 난...정말 비겁하고 잔인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어. 그리고 한편으로는...쥬르가 날 잡으러 와줬으면 해. 끝까지 함께 하자고 말해 주길 원해. 정말 이기적이야, 난." 에이드리안은 장갑을 끼고 마차로 갔다. 그가 마차에 타자 곧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고 말은 시원한 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길게 자국이 생기며 해가 지고 있었다. 제111음(第111音) 첫 번째 카드 패(6) "마망 말이 맞았어.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 무서운 말이야. 에이드리안, 나 그 말 듣고 싶지 않았는데. 이젠 싫은데... 사랑한다고 하구선 떠나버렸어, 에이드리안..." 머리 속에 맴도는 희미한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내저었다. 쥬느비에브는 서재의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하얀 강아지를 품에 안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눈발이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의 하얀 털을 뺨에 비비며 눈을 감았다. "꼬마 에드. 에이드리안이 떠나 버렸어. 난 이제 에이드리안을 잡을 수도 없어. 나, 살고 싶지 않아. 에이드리안 없이 혼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죽으면...에이드리안이 슬퍼하겠지? 에이드리안은 상냥한 사람이라서 내가 죽으면 몹시 마음 아파할 거야. 날 좋아하지 않아도. 그래도 마음 아파할 거야. 그래서 죽을 수도 없어." 강아지가 가르릉거렸다. 쥬느비에브는 서재 한 구석에 서 있는 초상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 웃고 있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아주 먼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이질감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순간순간이 너무 무서웠다. 혹시 이러다가 덜컥 죽음을 맞게 되면 어쩌나. 체리욜파쳰이 끝난 뒤로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래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약간이라도 노래를 흥얼거리면 온 몸이 아파 왔다.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있어 노래를 한다는 것은 곧 레플리카를 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노래와 레플리카는 거의 같은 의미로 간주된다. 자신이 레플리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레플리카는 소리 없이 퍼지는 것이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노래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바라고 느끼며 노래를 하고 그 마음이 레플리카로 형상화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도 노래와 함께 반드시 표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를 할 수 없었다. 노래를 하면 레플리카를 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생명은 노래의 환희만큼 줄어들게 된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머금으며 강아지를 더욱 품에 껴안았다. "누굴 원망해야 하지? 왜 하필이면 나야? 왜 나만 불행해져야 해? 누가 내 행복을 다 가져가 버린 거야? 누구야!!" 작은 호소가 절망으로 번져갔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터뜨리며 꾸욱 눈꺼풀을 내렸다. 눈앞에 금발의 소녀가 스쳐갔다. 아버지는 소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그보다 더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소녀가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뜨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행복, 다 가져가 버렸어. 용서하고 싶지 않아. 안 할 거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어냈다. 강아지가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낑낑거리며 움직여댔다. 그 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뒤 문이 열렸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삼키고 뒤돌아보았다. 유벨의 모습이 보였다. 비인 영지에 가 있다더니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썼다. "유벨 오빠. 미안해요. 나, 혼자 있고 싶어요." "쥬느비에브. 에드 일로 할 얘기가 있어." "에이드리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쥬느비에브는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유벨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 초조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심각한 표정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유벨 오빠. 에이드리안 얘긴..."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 쥬느비에브." 유벨이 입을 열었다. 그는 두 손을 깍지 껴 초조하게 오므렸다 벌였다는 반복하며 고개를 들어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난 쥬느비에브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는 데에 대해 아주 슬프게 생각해. 진심이야. 내 형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쥬느비에브. 날 이기적이고 내 생각만 하는 놈이라고 생각해도 돼. 하지만 에드는 안 돼. 내겐, 적어도 내겐 너보다 에이드리안이 소중해. 에드를 죽게 할 수는 없어." 유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뻐끔하게 입을 벌렸다. 유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머리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유벨 오빠. 에이드리안이...주, 죽다니... 무슨 말이에요?" 쥬느비에브의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에 유벨은 입을 꾸욱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강아지를 내려놓고 유벨 앞에 같이 꿇어앉았다. "유벨 오빠. 무슨 일인데요." "쥬느비에브. 도와줘. 에드를 살려 줘. 부탁이야.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유벨 오빠." 쥬느비에브는 잔뜩 인상을 쓰며 유벨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슨 얘긴지 말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에이드리안이...어디 아파요?" 유벨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쥬느비에브의 소리 없는 추궁에 유벨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 "죽으러 간 거야. 에드 녀석, 널 살리려고 죽으러 간 거야. 광속성 레플리카로 네 레플리카를 봉인하고 에드 녀석, 죽으려는 거야.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레플리카가 사라지면 그건 죽음과 같아. 쥬느비에브, 에드를 살려줘. 내 이기적인 부탁을 들어 줘. 에드까지 잃을 수는 없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유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지금 어디 있어요? 어디 있어요?" "......루텐의 비인 영지에 가 있어." 유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유벨은 맥없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제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를 볼 면목이 없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쥬느비에브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정작 가장 괴롭고 힘든 사람은 쥬느비에브인데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그 때 함께 했던 많은 사람이 곁을 떠났다. 엘로이즈와 프란체스가 떠난 지금, 그에게는 에이드리안밖에 남지 않았다. 더 잃을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이 알면 다시는 자신의 얼굴을 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에이드리안을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설사 그 것으로 쥬느비에브가 죽게 되어도. 쥬느비에브가 사라진다면 에이드리안이 다시 무너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두가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늦어버렸고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유벨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미안해, 쥬느비에브. 날 용서해. 하지만 에드를 잃을 수는 없어. 미안해..." ******** 쥬느비에브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신 없이 나오느라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했다. 입고 있는 하얀 원피스가 전부였다. 얇은 옷 사이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쥬느비에브는 바짝 말라버린 입을 달싹이며 몸을 웅크렸다. 마차는 지금 에이드리안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작은 눈발과 함께 나무가 빠르게 스쳐간다. 마음이 아파 왔다. 에이드리안은 왜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싶었지만 못 한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흩어내며 침을 삼켰다. 목이 따가웠다. 또 노래하고 싶어졌다.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악물고 꾹꾹 침을 삼켰다. 기분이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 혹은 마음이 아파 오면 꼭 이런 느낌이 온다. 노래를 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노래를 할 수는 없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떨구었다. "에이드리안은 바보야. 내 불행 다 가져간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아나? 나 정말 싫단 말이야. 에이드리안,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내 불행 가져가 버리면 난 뭐야? 에이드리안은 정말 나빠. 자기 생각밖에 안 해."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꾸욱 다물고 덜컹거리는 마차 벽에 머리를 단단히 고정한 다음 눈을 감았다. 마차가 자꾸 덜컹거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절대 안 돼. 에이드리안이 주, 죽다니. 난 그런 거 용납 못해. 도망가라고 했더니 주, 죽으러 갔다고? 안 돼. 내가 용서 안 할 거야. 내 말은 잘 듣지도 않는다니까. 에이드리안 바보." 쥬느비에브는 또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스윽 닦고 눈을 감았다. 눈떴을 무렵에는 도착해 있겠지.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자두려고 했다. 그래야 에이드리안에게 소리칠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 마차가 선 곳은 작고 아담한 집 앞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비비며 마차 밖으로 나왔다. 얇은 옷차림 때문에 몹시 추웠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먼저 돌아가세요. 여기가 에이드리안이 있다는 그 곳 맞죠?" "예, 아가씨. 하지만 제가 기다리는 편이..." 사람 좋아 보이는 마부가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신과 에이드리안의 문제로 애꿎은 사람을 추위에 떨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아저씨 먼저 가세요. 난 에이드리안 보고 나중에 갈 테니까요. 그리고... 유벨 오빠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다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예... 그럼, 전 이만..." 마부는 쥬느비에브의 간곡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뒤돌아 섰다. 마부가 마차를 끌고 돌아간 것을 확인한 쥬느비에브는 작은 집 앞의 철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집을 살펴보았다. 집은 스콜라의 사택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았다. 게다가 집의 크기에 비해 철문은 너무 높았다. 마치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고 의도적으로 문을 높게 만든 것 같았다. 문득 바람 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을씨년스러운 숲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는 눈발이 흩어지고 있어 숲은 더욱 무서워 보였다. 영지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도 불명이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고 다시 철문을 쳐다보았다. 아주 낡아 보이는 철문이었지만 관리를 잘 한 것인지 녹이 슨 곳은 없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에이드리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자신 때문에 에이드리안이 대신 죽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왜 자신 때문에 에이드리안이 고통받아야 하는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에이드리안은 그렇게 마음먹고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까. [ 쥬르, 내가 없어도...그래도 네 생명 아껴주고 행복해져. 부디... ] 에이드리안은 이미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고 슬퍼서 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쥬느비에브는 소맷자락으로 슥슥 눈물을 닦고 철문 사이의 창살을 두 손으로 꾸욱 잡았다. 철의 싸늘한 냉기에 온몸이 떨려왔지만 쥬느비에브는 입을 악물고 창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나에요,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 벽난로에 장작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안락의자에 앉아 가만히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피곤했다. 에이드리안은 길게 자란 금발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피식 웃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하! 미레이유, 놔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후후." 에이드리안은 허탈하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벽난로의 장작불이 고작인 어두운 방안에 자신의 흐릿한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입을 벌렸다. 입에서 무미건조한 음색이 퍼져 나왔다. "새하얀 달빛 속에 환하게 빛나는 태양. 바람은 그저 붉게 스쳐..." 허공에 하얀빛이 어렸다. 그러나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에이드리안은 입을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떨려왔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며 손을 뻗어 협탁 위의 길다란 꽃병을 벽난로 안으로 집어 던졌다. "왜 그래! 도대체 왜 이래?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죽어? 놔 줘! 놔 줘! 미레이유! 어서...."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붉게 충혈 되고 있는 눈으로 장작불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가 이 곳에 도착한 순간,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며 속성의 기운이 사라져버렸다. 광속성의 기운이 사라진 이상, 쥬느비에브의 암속성을 봉인하는 것은 절대 무리였다. 그로서는 그저 자신의 속성이 되돌아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몹시도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도 쥬느비에브는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기분이 나빴다. 어서 힘이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서 힘이 돌아와 쥬느비에브를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색 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이라도 좀 마실 생각이었다. 그 때 밖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관리인이 다가왔다. 이 집의 관리인으로 있는 헤르테는 40대의 중년 여인으로 그가 가끔씩 찾아올 때마다 집사와 하녀장을 대신해서 그의 시중을 드는 여인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실룩이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웬 아가씨가 오셔서 문을 두들기고 있는데요..." "아가씨?" 에이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라벨이 온 건 아닐 테고... 누구지? 에이드리안은 슬쩍 창을 열고 힐끗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에이드리안은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창을 닫아 버렸다. 쥬느비에브가 있었다. 분명 쥬느비에브였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쥬르가... 쥬르가 여긴 어떻게...." [ 에이드리안! 나에요!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아-안!! ]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였다. 분명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창 밖을 곁눈질했다. 차가운 눈발을 그대로 맞으며 철문을 두드리고 있는 작은 소녀는 분명 쥬느비에브였다. 코트도 입지 않고 하얀 원피스만 입은 채 추위에 몸을 떨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헤르테를 불렀다. "헤르테, 밖에 있는 아가씨. 어서 돌아가라고 말해. 어서." 헤르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르테가 밖으로 나와 쥬느비에브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헤르테의 타이름에도 불구하고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내저으며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서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쥬느비에브가 여기에 있는 걸까.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유벨 녀석이?" 에이드리안은 유벨을 떠올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헤르테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련님, 아가씨가 막무가내로 도련님을 만나시겠다고 하던데요. 우선 마차를 불러놓긴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빨리 돌려보내! 어떻게 해서든 돌려보내라고!" 에이드리안은 괜히 헤르테에게 화풀이를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마음 한쪽은 무거운 돌을 얹어 놓은 듯 무거웠다. 밖은 지금 많이 추울텐데 어쩌자고 저런 얇은 옷차림으로 온 거야?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로 걸어가 몸을 뉘였다. 모른 척 하고 잠을 잘 생각이었다. 자고 나면 돌아가고 없을 테지.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 아팠다.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른 척 하고 잠을 자기로 마음먹은 그였다. 자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제112음(第112音) 첫 번째 카드 패(7) 너무 추웠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쥬느비에브는 추위에 빨갛게 변한 귀를 문지르며 발을 굴렀다. 너무 추워서 턱이 덜덜 떨려왔다. 에이드리안은 도무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몸집 좋은 아주머니가 나와서 어서 돌아가라며 마차를 불러주겠다고 했을 뿐 에이드리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춥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집을 쳐다보았다. 아까 까지만 해도 그렇게 작아 보였던 집이 왜 이렇게 크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철문을 잡고 외쳤다. "에이드리안! 나 추워요! 춥단 말이에요! 어서 나와 봐요! 나 안 돌아가고 여기 계속 있을 거에요! 에이드리안! 내 말 안 들려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너무 추워 도저히 그냥 서있을 수가 없어 무릎을 굽히고 쪼그리고 앉았다. 에이드리안이 야속했다. 왜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걸까. 눈꺼풀이 힘없이 내려왔다. 쥬느비에브는 화들짝 놀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데서 잤다가는 얼어죽기 십상이다. 얼어죽다니. 정말 폼도 안 나고 불쌍한 죽음이 아닌가. 쥬느비에브는 그것만은 사양이라며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자꾸 눈꺼풀이 감겨오는데는 그녀도 별 수 없었다. ******** 잠에서 깨어난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눈을 뜨고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다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로 달려갔다. "맙소사! 아직 안 갔어?" 에이드리안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아연실색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코트를 걸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자 헤르테가 근심 어린 얼굴로 달려왔다. "도련님, 아가씨더러 아무리 돌아가시라고 해도 묵묵히...." "됐어. 내가 나가볼 테니까." 에이드리안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밖으로 뛰어갔다. 바보 같은 쥬느비에브!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갔어야지! 자꾸 부아가 치솟는 에이드리안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 감겨오는 눈꺼풀을 안간힘으로 끌어올리던 쥬느비에브는 집 안 쪽의 인기척에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에이드리안이 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또 길게 자라있고 안색이 다소 창백한 것을 빼면 달라진 게 없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눈물이 솟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좀 저렸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서럽고 슬픈 감정이 녹아 눈물로 쏟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가 두꺼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달려가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았다.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 보려고..." "놔!" 자신의 팔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넋 나간 듯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 "여긴 왜 왔어? 무슨 일로 온 거야?" "나, 난...유벨 오빠가...에, 에이드리안이 나 대신 죽으려고 한 대서...그래서..." 평소와는 사뭇 다른 에이드리안의 냉랭한 태도에 쥬느비에브는 말을 더듬었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너무 차갑고 무서웠다. 쥬느비에브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얼른 손등으로 훔치고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이 몹시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미쳤어? 내가 왜 너 때문에 죽는데? 유벨 녀석, 허튼 소리 하기는." "하, 하지만! 그러면 왜 여기 온 건데요? 호, 혼자 주, 죽으려고 그러던 거 아니었어요?"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집스레 물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비아냥거리는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쥬르.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난 네가 도망치라고 해서, 그래서 그런 것 뿐이야. 암속성 레플리카 따위 옆에 있어봤자 좋은 일 없으니, 그래서 도망친 거야. 너 없어지면 그 때 돌아가려고 여기 온 거야. 됐어?" 에이드리안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몸이 떨려왔다. 추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쥬느비에브는 온 몸을 휘감는 한기에 주먹을 꾸욱 쥐며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롭고 차가운 말속에 숨어있는 진짜 뜻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얼음 가면을 쓴 듯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잔인하게 미소지었다. "조금 더 말해 볼까? 암속성 레플리카 중에서 제 명대로 산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어. 네 아버지가 그랬고 너도 그럴 거야. 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 불쌍한 내 딸아이...라고 하더군. 훗, 맞아. 불쌍한 쥬르.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아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만약에 네 피를 남기게 된다면, 네 피를 받은 그 아이도 너와 똑같은 운명을 받게 되겠지. 암속성은 다른 속성과는 달리 대물림되는 속성이니까. 네 아이가 하루하루 죽어 가는 모습을 미치광이처럼 괴로워하며 너도, 그 아이도 죽어 가는 거지. 내가 왜 그런 고통을 짊어져야 해? 너와 함께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왜 그런 고통을 느껴야 하냐고!" 에이드리안은 숨을 고르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안이 왜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이야기하는 걸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떤 마음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무서웠다. 자신의 짐작이 틀릴까 봐, 그의 저렇게 차가운 말이 혹여 진심일까 봐 너무 무서웠다.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더욱 힘껏 쥐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건네기 전에 에이드리안이 먼저 말을 뱉었다. "후회해, 쥬르. 후회가 되어서 미치겠어. 네가 처음 암속성이라는 것을 알고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한 내 모습이 바보 같아서 기가 차. 애초에 널 만난 게 잘못이었어. 후회해. 그래, 널 행복하게 해주고도 싶었어. 그런데 다 틀렸어. 난 네게서 슬픔만을 보고 넌 내게서 더 이상 행복을 가져갈 수 없어. 너와 난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어야 했어. 아니, 이젠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 내가 널 버릴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지. 너와 나, 행복하다고 믿었던 시간은 모두 레플리카가 만들어낸 신기루일 뿐이야." 에이드리안은 냉랭하게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바르르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이제 정말 확신할 수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말하면서 계속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도 떨고 있었다. 마음이 아플 것이다. 이제 에이드리안이 왜 저렇게 차갑게 자신을 몰아 붙이는지 알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결심한 듯 주먹을 다시 한 번 꾸욱 쥐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에게 쏘아붙였다. "나, 바보 아니에요! 에이드리안이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말해도 그거 진심 아닌 거, 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왜 멋대로 나 대신 죽으려고 하는 건데요? 내가 언제 에이드리안더러 나 대신 죽어 달랬어요? 왜 멋대로 그러는 건데요? 그렇게 차갑게 말하고 나 구박하면 내가 울면서 돌아갈 줄 알았어요? 나, 에이드리안이 나랑 같이 돌아갈 때까지 계속 여기 있을 거에요!" "맘대로 해! 너 혼자 멋대로 착각을 하든, 공상을 하든 난 상관 안 해!" 에이드리안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그가 갑자기 숲 쪽으로 걸어가자 깜짝 놀라 다급히 뛰어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에이드리안. 우리 그러지 말고 돌아가요! 네에?" "놔!" 에이드리안은 다시 쥬느비에브의 팔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하얀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코를 훌쩍이며 에이드리안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추위에 굳어버린 몸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에 언제나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어주던 에이드리안이 지금은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자꾸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옛날에 어머니와 시장에 가서 말 안 듣고 떼쓰면 어머니가 자신을 내버려두고 큰 걸음으로 멀리 가버리시곤 했다. 그럴 때면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곤 했다. 어찌나 서럽고 슬펐던 기분이었는지. 쥬느비에브는 그 때 그 기분이 들어 눈물이 더 쏟아지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굳어버린 다리가 바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엉켜 버렸다. 쥬느비에브는 차가운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일어설 힘도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벌써 저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하얀 원피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다 이내 체념한 듯 축 늘어져 버렸다. "흐엉, 흐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어어엉---" 커다란 눈물 방울이 뚝뚝 하염없이 떨어졌다. 눈물 때문에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서러운 기분에 계속 눈물을 쏟아냈다. 차갑게 쏟아지는 눈과 뜨겁게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정신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흐어어엉-- 에이드리안, 가지 마요. 에이드리안. 흐어어어어어어어---" 목이 따끔거렸다. 계속 울어댔더니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꺽꺽하는 소리가 목 안 쪽에서 울린다. 머리 속에 에이드리안의 존재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에이드리안을 돌아오게 해야 했다. 눈물이 말라 끈적한 얼굴을 흔들며 쥬느비에브는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노래 해버릴 거야! 죽을 때까지 노래해 버릴 거야! 나 죽어버리면 에이드리안 평생 마음 아플 테니까! 너무 맘 아파서 죽지도 못하게 나, 죽을 때 까지 노래해 버릴 거야! 노래할 거야!" 쥬느비에브는 흔들리는 뿌연 시야에 한숨을 쉬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 하얗고 차가운 달 속에 울려 퍼지는 작은 빛줄기 그 속에 하나하나 흔들리는 꽃잎들 읽어보네 ........ ]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 많은 눈들이 어디로 가는 걸까. 쥬느비에브는 다시 감겨오는 눈꺼풀을 들고 다시 입을 벌렸다. 그러나 다시 노래할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던 것이다. "너, 미쳤어? 왜 그래? 노래하지 마! 하지 마!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노래하지 마!" 언제 다가온 것인지 에이드리안이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대며 흐느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말라왔다. 이러다 정말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죽음이란 건 어떤 걸까. 많이 아프고 그러고 나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거겠지. 다른 곳에 간다... 그건 싫은데. 에이드리안 혼자 두고 죽는 건 싫은데... 또 눈물이 나온다. 지금쯤 말라버렸어야 하는 눈물인데 자꾸 흘러내린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에이드리안은 몸을 숙이고 오열하고 있었다. 불쌍한 에이드리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차갑게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도, 그도 이제 서로에게 슬픔만 느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정말 불쌍했다. 바보 같은 자신 때문에 그가 아파하고 있다. 말은 모질게 하고 있지만 그는 정말 아파하고 있다. 그가 저렇게 흘린 눈물을 어떻게 보상해 줘야 하나. 어쩔 수 없는 불행. 하지만 그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다면...그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뒤로 그녀가 흘렸던 눈물만큼 에이드리안도 울게 될 것이다. 너무 싫었다. 혼자 남겨져서...외롭고 슬프고 마음 아프고. 혼자 남겨두기 싫었다. 같이...같이... 쥬느비에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 목소리가 멋대로 흘러나왔다. "에이드리안. 우리 같이 죽어 버릴까요?"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한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음은 미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느 새 다시 눈물이 맺혀 왔다. "같이...죽어 버릴까? 에이드리안." "...원해?" 에이드리안의 탁한 음성이 들린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떨구어냈다. 불쌍한 에이드리안. 불쌍한 에이드리안. 혼자 남겨둘 수는 없잖아. "응. 혼자 남겨둘 수 없으니까 차라리 데려갈래." "좋아. 네가 원한다면..." 에이드리안이 손을 뻗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하얀빛이 어린다. 쥬느비에브는 멍하게 그 빛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참 예쁘기도 하다. 저 빛이 죽음으로 인도해 줄까? 많이 아플까? 죽어서도 에이드리안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툭.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하얗게 덮인 눈 위로 눈물이 떨어져 눈을 녹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어두운 파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어두운 눈동자. 하얗게 쌓이는 눈. 눈... 눈... 쥬느비에브는 입을 꾸욱 다물며 에이드리안의 팔을 잡았다.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진다.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에이드리안.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난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살고 싶어! 죽고 싶은 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흐윽... 미안해...흑..흐윽..미안해..." 에이드리안의 레플리카가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다. 쥬느비에브는 눈밭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아마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떻게 내가! 에이드리안에게 같이 죽자고 하다니... 미쳤어! 미쳤어!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나, 미쳤나 봐. 너무 무서워서...그래서 미쳤나 봐. 어떻게 에이드리안에게 같이 죽자고...미쳤어. 미쳤어.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었다. 쥬느비에브의 머리가 눈 때문에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기가 막혀. 우리 왜 이렇게 되어 버렸어? 하, 하하...하하.... 어떻게...하지. 어떻게 하지, 쥬르? 너 혼자 죽게 할 수도, 나 혼자 죽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어. 이제...어떻게 하지? 함께 죽을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하지? 난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 눈물이 흐르는지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흐느끼는 쥬느비에브의 등을 다독이며 그녀를 일으켰다. "쥬르, 울지 마. 울지 마. 나도 무서워.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나도...그랬을지 몰라. 함께 죽자고 말했을 거야. 혼자는 너무 쓸쓸하니까. 외롭고 아프니까. 차라리 함께...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좀 더 방법을 찾아보자. 만약에...그래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면, 그 때는 함께 해줄게. 함께..." "에이드리안...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가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에이드리안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에이드리안은 차가워진 쥬느비에브의 체온을 느끼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올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달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 환한 대낮인데 달이 보였다. 달에게 빌어 볼까. '행복 따위 이제 바라지 않을 테니 부디 함께 하게 해주세요. 마음 아파도...그래도 함께 하게 해주세요.' 눈이 감겨왔다.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에이드리안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 ******** 루텐 영지의 별장으로 다시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침대에 누워있는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작은 초 하나만 켜 있는 방안은 몹시 어두웠다. 쥬느비에브의 얼굴에 지는 그림자에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왔다. 에이드리안은 얼굴에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천천히 미소지었다. "쥬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네가 살면...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너 울 거,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했어. 잔인한 말을 내뱉고 그리고 날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지. 하지만. 그러면서...한편으로는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날 잡아주기를. 어떤 식으로든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해 주길 기다렸어. 그 것이 삶이든, 혹은 죽음이든."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주고 살며시 뺨에 키스해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자. 너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해. 널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구하고, 나 또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해. 그 때까지는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 에이드리안은 창 쪽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밤하늘에 하얀 달이 덩그렇게 걸려있었다. 오늘따라 하늘의 달이 처량해 보였다. 그는 냉랭한 눈동자로 달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첫 번째 카드 패라... 그럼 두 번째도 있다는 소리군.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피식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에스프라드 형. 내가 카드 게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걸 생각했어야지. 형에게 어떤 카드가 있는지 몰라도, 내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말이야. 슬슬...게임에 참여해 볼까." ******** 비인 가의 대영지에도 하얀 달은 차갑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원에서 홀로 달을 지켜보고 있던 에스프라드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알아. 에이드리안. 난 네게 한 번도 카드로 이긴 적이 없지. 그래서 시작 한 거야, 이 게임을." 에스프라드는 천천히 뒤돌아 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아름답게 울리던 작은 소녀의 목소리. 소년들의 함성. 온화하게 미소짓던 누이. 언제나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형. 눈앞에 펼쳐지는 그립고도 그리운 그 때. [ 에이드리안! 그렇게 노래하다가는 목쉰다니까! ] [ 기원제는 아직 많이 남았는 걸! 에스프라드 형이나 신경 써. 난 노래하는 게 좋아! ] [ 에스프라드 형, 에드는 그냥 놔 둬. 그래도 항상 기막히게 노래하잖아. ] [ 유벨, 넌 노래 연습 안 하냐? 에이드리안 뒷바라지만 하지말고 너 자신도 좀 챙기지 그러냐? ] [ 후후- 놔 둬. 프란체스. 다들 좋아서 그러는 걸. 에이드리안! 노래 한 곡만 더 불러 줘. 한 곡만! ] 아름답게 빛나던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안타까운 환상. 눈앞에 어리는 데자뷰에 에스프라드는 눈물을 머금고 미소지었다. "다시...되돌아 갈 수는 없어. 이제..." 제113음(第113音) 행복했던 그 때로...(1) "우왕!"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나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환한 아침 햇살이 아주 기분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베시시 웃었다. 매일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방이 새삼스레 너무 좋아졌다. "내 방, 내 침대, 내 서랍...아웅~ 너무 좋아!" 쥬느비에브는 뺨을 쭈욱 늘이며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때 강아지가 껑충 뛰어 침대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삐친 듯 얼굴을 홱 돌리며 쥬느비에브의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강아지를 안아들었다. "꼬마 에드. 나, 꼬마 에드도 좋단 말이야. 삐치지 마." 신통방통하게 쥬느비에브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강아지는 그제야 꼬리를 흔들며 쥬느비에브의 손에 얼굴을 비벼댔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강아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드레스룸으로 힘찬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꼬마 에드, 나 옷 입고 에이드리안 깨우러 가자. 잠시만 기다려." 드레스룸의 문을 활짝 연 쥬느비에브는 옷장 가득한 옷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라. 옷 다 바뀌었네. 일레시아 아주머니가 다녀가셨나 보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옷 구경을 시작했다. 1모네 한 번씩, 그녀가 직접 옷을 하러 가지 않아도 마담 일레시아가 찾아와 그 계절에 맞는 옷으로 다 바꿔주고 가곤 했다. 그리고 특별히 필요한 옷이 있으면 일레시아를 부르거나 직접 찾아가 옷을 맞췄다. 쥬느비에브는 눈동자를 뱅글뱅글 굴리며 옷을 살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로, 갖가지 옷이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바지, 스커트, 코트를 비롯해 어떻게 입는 건지도 알 수 없는 괴상한 옷까지. 이번 계절에 다 입을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많은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오, 옷이 너무 많네. 나중에 불우이웃 돕기 해야겠다. 으음... 나도 한 때는 불우이웃이었는데. 디올레 마을에 나중에 기증해야겠다." 쥬느비에브는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옷장에서 노란색 반바지와 분홍색 티셔츠, 체크무늬로 된 두껍고 긴 양말을 꺼내 주섬주섬 옆구리에 끼고 방 가운데로 갔다. 소파에 옷을 펼쳐놓은 쥬느비에브는 입고 있던 하얀 원피스 잠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레이스 달린 하얀 캐미솔과 역시 아랫단에 귀여운 프릴이 달린 드로어즈 차림으로 쿵쾅쿵쾅 뛰어다녔다. "꼬마 에드! 꼬마 에드도 옷 입어야지!" 쥬느비에브는 서랍으로 달려가 제일 아래쪽에 있는 서랍을 쑥 빼내어 노란색 강아지 옷을 꺼냈다. 그리고 잽싸게 침대로 달려가 침대 위에 꾸물거리고 있는 강아지를 잡고 쓱쓱 옷을 입혔다. 옷을 입혀 놓고 보니 강아지가 훨씬 귀여워 보였다. 강아지도 기분이 좋은 건지, 쑥스러운 건지 머리를 치켜들고 침대 위에서 둥실둥실 뛰어다녔다.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강아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꼬마 에드, 너무 귀엽다. 아웅~ 모자도 쓸래? 싫다고? 그럼 나중에 쓰자." 쥬느비에브는 알아서 묻고 알아서 대답한 다음 자신의 옷이 있는 소파로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 노란색 모직 바지에 다리를 쑥 집어넣고 분홍색 티셔츠에 머리를 밀어 넣어 금새 옷을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양말을 무릎까지 쑥 잡아당겨 신은 쥬느비에브는 우뚝 서서 꼬마 에드를 불렀다. "꼬마 에드! 빨리 와! 아침 체조!" 쥬느비에브의 부름에 노란 옷을 입은 강아지가 움찔거리며 다가왔다. 뭔가 귀찮은 듯한 얼굴의 강아지를 흘끔 쳐다보고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꼬마 에드! 오늘도 열심히 체조를 해야 건강해 지는 거야! 내 목소리에 맞춰서 체조하는 거야. 알았지? 하낫 둘 셋!" 쥬느비에브는 옆에서 뭉그적거리는 강아지의 옆구리를 발로 슬쩍 찌르고는 까르르 웃어댔다. 그리고 방실방실 웃으며 노래라고 부르기엔 뭔가 좀 부족한 듯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착한 쥬르 뱅뱅. 꼬마 에드 뱅뱅. 오늘도 신나게 체조를 합니다요. 읏쌰 읏쌰! 오옷!" 엉거주춤 몸을 움직이며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었다. 역시 아침 체조를 해야 몸이 개운하다니까! 그녀는 옆에서 움찔움찔 엉덩이를 움직이며 운동 아닌 운동을 하고 있는 강아지를 곁눈질하면서 다시 미소를 지었다. "됐다! 꼬마 에드, 우리 에이드리안 아저씨를 깨우러 가자." 슬슬 운동하는데 가속도가 붙은 강아지는 쥬느비에브가 품에 안고 걸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엉덩이를 들썩였다. 쥬느비에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꼬마 에드는 아무래도 엉덩이가 제일 발달했나 봐." ******** 에이드리안은 오늘도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잠. 이 얼마나 축복 받은 행위인가. 이토록 기분 좋고 편한 기분을 어느 때 느껴보겠는가. 에이드리안은 이불 안으로 파고들며 베개를 꽈악 끌어안았다. "에이드리안. 일어나요." "으음..." 에이드리안은 살짝 인상을 쓰며 숨을 내쉬었다. 뭔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벌레라도 들어왔나? 신경 쓰이게.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허공을 휘휘젓고 다시 잠의 세계에 파져들었다. "에이드리안 바보. 꽁치. 호빵. 에에- 이래도 안 깨네." "아이, 정말." 귀찮게 왜 자꾸 옆에서 웅얼거리는 건가. 뭔지는 모르지만 정말 기분 나빴다. 에이드리안은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이러면 귀찮게 하지 않겠지. "간질 간질. 간질이기- 에이드리안, 일어나 봐요."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옆구리에 뭔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어 몸을 웅크렸다. 신경 쓰이는 웅얼거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안 일어나면 꼬마 에드가 깨문대요. 에이드리안, 빨리 일어나 보라니까요." 꼬마 에드가 깨물어? 꼬마 에드가 누군데? 에이드리안은 비몽사몽간에 나름대로 기억을 되짚어 보며 꼬마 에드의 정체를 추리하고 있었다. 그 때 였다. 손목에 욱신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에이드리안은 힘껏 눈꺼풀에 힘을 주고 한 쪽 눈을 천천히 떴다.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흐릿한 그림이 점점 선명하게 채색되고... "쥬르?"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입을 열어 말을 하다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예상대로 손목에 강아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야! 강아지! 왜 또 깨물어?" 에이드리안은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가까스로 떼어내고 이빨 자국이 남은 손목을 끔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가 강아지를 품에 안고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러게 빨리 일어나라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깨물게 놔두면 어떻게 해!" 에이드리안은 버럭 소리를 치고 울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오늘도 이 모양이다. 우아하고 조용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오늘도 이런 소란 속에서 깨어버렸다. 정말 화나고 신경질 나고... 말로 다 못할 기분이었다. 그의 이런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잠옷 자락을 잡아당겼다. "빨리 식사하러 가요." "아침 안 먹어. 너 혼자 가." "에이! 어서 가자니까요!" 결국 에이드리안의 쥬느비에브의 엄청난 힘에 식당으로 질질 끌려갔다. '쥬르는 힘도 세지. 강아지 안고 나 끌고 가고. 정말 힘도 세다니까.' 에이드리안은 반쯤 눈을 감은 채 휘청휘청 쥬느비에브의 손에 끌려갔다. 오늘도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깨작거리며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에이드리안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갔다. 잠이 덜 깬 것인지 머리가 멍했다. 늦잠을 좋아하는 그였다. 아침일찍 일어나려니 온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끔뻑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옷을 고르면서도 여전히 눈을 떠지지 않자 에이드리안은 손바닥으로 뺨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졸려."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붉은 색 스웨터와 베이지 색 바지를 꺼냈다. 잠옷 윗도리를 벗고 스웨터를 입은 에이드리안은 미처 깨지 않는 정신을 추스르며 겨우 바지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며 거울 앞으로 가 머리를 매만졌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감겨서 자꾸 신경질이 났다. "아윽! 가뜩이나 졸린 데..." 그 때 벌컥 문이 열리고 쥬느비에브는 폴짝폴짝 뛰며 다가왔다. 그녀는 양손에 머리 끈과 빗을 들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머리 묶어 줄게요!" 평소 같으면 귀찮다고 고개를 내저을 그였지만 지금은 너무 졸려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로 가 풀썩 앉았다. 침대로 달려온 쥬느비에브는 신이 났는지 배시시 웃으며 빗으로 그의 금발을 슥슥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갑자기 머리가 왜 또 길어진 거에요?" "몰라. 그냥 길었어." 에이드리안은 반쯤 졸며 힘없이 대답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고개를 끄떡끄떡 흔들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향해 살며시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빗질을 했다. 에이드리안 머리는 참 신기하다니까. 이렇게 쑥쑥 자라는 걸 보면. 쥬느비에브는 싱긋 웃으며 노란색 머리 끈으로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묶어 예쁘게 매듭지었다. "다 됐다! 완성! 에이드리안! 머리 다 묶었어요. 일어나 봐요!" "........"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잠에 빠져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어깨를 툭 치자 그는 마치 솜인형처럼 쥬느비에브의 품에 푹 안겼다. "에이드리안. 자나 보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고 에이드리안을 품에 안았다. 따뜻한 그의 체온에 기분마저 따스해지는 듯 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즐거운 일상. 따뜻한 가족. "에이드리안.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꿈 같아요. 슬프고...괴로운 일들 모두..." 쥬느비에브는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 지겨운 겨울이 언제 끝나려는 것인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다시 미소지었다. 지금은 괜찮았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자신의 곁에 있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눈을 감고 에이드리안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대로 계속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쥬느비에브는 이제 습관처럼 되어버린 기도를 중얼거렸다. "함께 하게...해주세요..." ******** "에이드리안, 이제 일어나요. 미용사 언니 왔단 말이에요." "으응..."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쥬느비에브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이었다. 그는 지금 쥬느비에브의 다리를 베개삼아 누워있었다. 자고 일어나서 갈라진 목소리로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물었다. "나, 언제 잔 거야?" "아까요. 머리 묶다가 잤어요." "더 잘래. 무릎 베고 있으니까 기분 좋아." 에이드리안은 웅얼거리며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고 다시 눈을 감았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꿈나라로 가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한 쪽 눈을 실룩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에이드리안의 볼살을 쭉 잡아당겼다. "일어나요. 미용사 언니 왔단 말이에요." "무,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쥬느비에브가 잡아당긴 뺨을 문지르며 에이드리안은 불만 어린 얼굴로 일어났다. 쥬느비에브는 모른 척 새침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한숨을 쉬며 물었다. "나, 머리 안 잘라. 당분간은 이렇게 있을 거야." "에이드리안 때문에 부른 거 아닌데요." 쥬느비에브는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답했다. 그녀는 꼼지락거리며 노란 반바지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묘한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스웨터 소매를 걷었다. "그럼? 너 영양 앰플 받으려고 부른 거야?" "으으응- 나, 오늘 머리, 뽀글뽀글 파마할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에이드리안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렇게 날 빤히 쳐다보는 걸까.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항상 이런 침묵 뒤에는 에이드리안의 잔소리가 터져 나온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고 슬쩍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에이드리안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될 때까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파마? 누가 파마를 하는 건데!!" "나요." 쥬느비에브는 찔끔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이 에이드리안의 화를 더 돋운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양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의 귀를 잡아당기며 흔들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냥 있어. 생머리가 나아. 파마하지마." "아, 아파요! 나 토끼 귀 되겠어요. 그만 잡아당겨요. 우웅~" 쥬느비에브는 눈에 찔끔 눈물이 나오는 걸 느끼며 귀를 붙잡았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포기하지 않고 무서운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파마 할거야, 안 할거야?" "아, 안 할 테니까 귀...귀... 아웅~" 쥬느비에브의 항복을 받고서야 에이드리안은 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쏘아보며 말했다. "왜 나한테 한 마디도 안하고 결정한 거야?" "하, 하지만 뽀글뽀글 파마하면 기분전환도 되고..." 쥬느비에브의 의기소침한 얼굴에 에이드리안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인지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마주할 수 있게 올렸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꾸욱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도, 생머리가 예뻐." "에에?"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속삭임에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미소지었다. 파마하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에이드리안도 나지막하게 웃으며 침대 위에 다시 몸을 떨어뜨렸다. "아아- 기분 좋다." "나도. 나도." 쥬느비에브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두 주먹을 꾸욱 쥐어 가슴팍에 모은 다음 에이드리안의 옆에 풀썩 드러누웠다. 공기도 시원해서 기분 좋고, 방은 따뜻하고 에이드리안도 옆에 있고... 정말 꿈 같았다. 깨지 말아야 하는데...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미소지었다. 그래도 뭔가가 보이는 듯 했다. 아주 멀리 있지만 에이드리안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한참 망설이다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주 따뜻해서 자꾸 미소가 흘렀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행복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에이드리안, 고마워요. 함께 해 줘서. 나...지금 이 순간만은 정말 행복해요. 응.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거에요. 그쵸?"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았다. 기분좋게 낮잠이나 자볼까? 일어나면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오후를 맞이하게 되겠지. 쿨쿨 잠이나 자야겠다. 에이드리안도 어서 자요, 낮잠. 제114음(第114音) 행복했던 그 때로...(2) "누구야?" 금발의 작은 소녀가 검은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웃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파란 눈동자를 들어 남자를 추궁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의 금발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당신 노래는 불안해. 아주 위태로워.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암속성 레플리카를 처음 보는 모양이구나. 생명을 짜내 부르는 노래라 가장 아름답지만...가장 잔인한 레플리카지. 하지만 레플리카란 건 힘이야. 정말 중요한 건 마음, 마음이야. 아직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남자의 말에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많이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암속성 레플리카? 당신이? 난 처음 봤어. 이름이 뭐야?" "그렇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숨어서' 살지 않으면 그나마 짧은 생, 유지하기도 힘들거든. 내 이름은 세레스라엘. 나의 엘은 날 세스라고 불러. 넌... '위장'이구나. 그렇지?"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소녀는 살짝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남자는 허탈하게 웃더니 소녀를 향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내 딸, 만났지? 그 애에게 노래를 불러줬어. 그렇지? 그 애 몸에서 광속성의 기운이 돌더군." "꼬마...말이야?" "하지 마. 불쌍한 내 딸아이, 노래하면 죽어. 하지 마. 혹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어도 노래하게 하지 마. 광속성은 암속성을 자극하게 돼. 불쌍한 아이야. 태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행복을 빼앗겼으니." 남자는 일순 슬픈 표정을 짓더니 측은한 미소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너도...불쌍하지만." ******** 오랜만의 화창한 날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서재에서 유벨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를 정리하며 그는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살아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떠났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이다. 하지만 루텐 영지에서 돌아온 뒤로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조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분명 쥬느비에브의 저주를 잡고 있는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반드시. 어떻게든 쥬느비에브를 원래의 그녀로 돌려놓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도 돌아온 뒤로는 마음을 비웠는지 예전처럼 화사하게 미소짓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밤마다, 혹은 그가 집에 없을 때마다 쥬느비에브는 벙어리 가수처럼 몹시도 슬픈 눈동자로 창 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괴로운 듯 숨을 멈춘다. "노래가...하고 싶은 거겠지. 그건 참을 수 없는 본능이니까." 순간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기분 전환을 하려는 듯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공기를 폐 깊숙이 끌어들이며 눈을 감았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유벨이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찬 바깥 공기를 맞으며 뒤돌아 섰다. 유벨은 고개를 숙이며 머뭇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측은한 눈빛으로 유벨을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자신 때문에 괜히 유벨만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유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에드. 내 마음대로 해서. 네 뜻이 있었겠지만..." "고마워, 유벨." 에이드리안의 미소에 유벨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서 창틀에 손을 얹고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메말라 보이진 않았다. "형 덕분이야. 나, 뭔가 깨달은 것 같아. 바보같이 당하지만 말고 어떤 식으로든 저항해 보고 싶어졌어. 쥬르도 마찬가지 기분일 거야. 하긴 고집으로 치면 쥬르가 더 대단하니까." "에드..." 유벨은 미안함과 안도감 가득한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제, 쥬르가 말했어. 전력으로 대항해 보겠대. 노래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노래만 포기하면 다른 행복을 다 찾을 수 있으니까 참아 보겠대. 하지만...난 쥬르에게 노래를 찾아주고 싶어.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죽겠다는 것도 아니야. 쥬르와 함께 있을 수 있는...그런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 그동안 쥬르가 괴롭겠지만..." 에이드리안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잔뜩 기죽어 있는 유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야. 천하의 유벨이 의기소침이라...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네." 에이드리안의 장난스런 표정에 유벨은 피식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쳤다. "이 녀석. 형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아- 형님?"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서로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유벨은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휴우- 사실 나 진짜 쫄았다, 아우. 혹시 네가 진짜 나 안 보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었단 말이다." 에이드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유벨을 바라보며 맞은 편에 자리했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미안해. 너한테 언제나 화풀이만 해대지, 난. 아주 고약한 버릇이야." "알긴 아는구나. 그런데 너... 스콜라 자퇴 얘기가 있던데?" 유벨이 근심 어린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살피자 그는 미소를 흘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에 마른 잎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자퇴...하려고 했었어. 쥬르한테 레플리카 스콜라는 괴로울 테니까. 둘이서 어디 멀리... 루텐의 내 영지나 아니면 다른 어디라도 둘이 가서 살려고 했는데 쥬르가 싫대. 미라벨이나 케이로프, 네가 있는 여기가 좋대. 그녀가 원하는 데로 해주고 싶어. 그리고...내가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에이드리안은 시선을 돌려 유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학생회장직 돌려줘야겠다. 줬다 뺏으니 기분이 별론 걸?" "어이구! 잘도 아는구나. 난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 일부러 스콜라에 너 사퇴 승인도 안 받은 걸. 신문에 기사도 안 났으니까 걱정 마. 하지만 이번 체리욜파쳰도 빠졌으니 랭크 올리려면 고생 좀 해야할 거다. 에스프라드 형은 이번에도 1위 먹었어. 쥬느비에브가...이번 랭크 2위고."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흘렸다. 에이드리안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유벨은 그의 표정에 오히려 자신이 쑥스러워져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모습에 웃음을 보였다. 자신이 돌아올 줄 알고 마음 쓴 그였다. 그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나...이제 노래는 안 할 거야. 쥬르가 노래 안 하면 나도 안 해. 내가 노래부르면 쥬르를 더 자극하게 돼. 내 속성은 쥬르의 반대 속성이니까. 너무 후회돼. 그녀 앞에서 노래불렀던 모든 순간이 너무 후회돼. 세스가 해 놓은 봉인이 그렇게 빨리 풀렸던 건 내 탓이야. 내 레플리카가 보이지 않게 그녀를 자극한 게 틀림없어. 내가 노래하면 그녀도 노래 하고팠겠지." "그건 아니라고 봐. 쥬느비에브는 널 위해서 노래하고 싶어했어. 단지 널 위해서. 쥬느비에브는 항상 네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노래했던 거야. 그녀를 조금만 관찰해 봐도 알 수 있다고." 유벨이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알고 있어. 착한 쥬르. 항상 날 위해 노래했었지."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오랜만에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사촌 동생과 언제나 믿고 투정부릴 수 있는 사촌 형을 새삼스레 소중하게 생각하며 두 사람은 오랫동안 웃음을 터뜨리며 이야기했다. 에이드리안은 마음 속으로 유벨에게 감사의 말을 반복했다. 그의 배려가 없었다면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고 쥬느비에브도 더 이상 웃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지금 이렇게 함께 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을까. 조금 더, 작은 시간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한 가운데서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동안은 쥬느비에브와 함께 할 수 있고 행복한 모습 그대로 지낼 수 있다. 마음 속의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순간의 행복이 모여 나중에 따스한 추억 하나가 되지 않을까.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으며 유벨을 바라보았다. 그도 두려웠을 것이다. 형을 잃고 동생을 잃고... 그를 생각해서도 좀 더 목숨을 귀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도 좀 더 소중하게... "어디에 있을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에이드리안은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딘가에 있겠지. 반드시 찾고 말리라. 반드시! ******** 유벨이 돌아가고 에이드리안은 그를 마중하러 밖으로 나왔다.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멀어져 가자 에이드리안은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사촌 형의 존재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얇은 셔츠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멈칫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얀 하늘과 바람에 날리는 자신의 금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레이유. 너도 내가 죽는 걸 바라지 않은 건가?"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빛의 기운을 띈 푸른빛이 허공에 어렸다. 다시 자신이 광속성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뒤돌아 섰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세레스라엘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 너도...불쌍하지만. ] 오늘 아침에 그의 꿈을 꿨었다. 그래서일까. 자꾸 잊고 있었던 그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에이드리안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관으로 들어서며 우울한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의문점이 맴돌고 있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그 말은. 내가...불쌍하다라...역시 그 일 때문인가?'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다 순간 멈칫했다.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자신의 금발을 한 손으로 매만지며 에이드리안은 숲 안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쯤...선전포고를 하는 게 좋겠어." 에이드리안은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3년 전, 그 때 이후로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자신에게 그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이대로 쥬느비에브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내게 함부로 굴지 못하게 만들겠어. 그 누구도 내 소중한 것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 에이드리안은 냉소를 지으며 천천히 숲으로 들어갔다. ******** "오랜만이야, 에스프라드 형."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에스프라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 편으로 손짓을 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 띈 채 그가 따라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제젠 차야. 어릴 때 즐겨 마시곤 했지. 형은...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나봐." "글쎄. 그 때는...행복했었으니까." 에스프라드는 찻잔을 기울이며 무감각하게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 때는 행복했었지." 에이드리안은 마치 꿈을 꾸듯 말하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행복했던 시절. 그렇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이제는 현재가 더 중요했다. 현재의 행복,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차가운 공기와 침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쥬르, 형 짓이야. 그렇지? 쥬르를 알고 있었어. 그 날, 형도 세스를 본 거야. 그렇지? 그녀가 암속성 레플리카를 계승할 거란 걸 알고 내게 보낸 거지." "그랬지. 그 날, 너와 세레스라엘이 하는 얘길 엿들었지. 우연찮게." 에스프라드는 다시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차를 따랐다. 에이드리안은 그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쥬르의 봉인은 이미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그 정도 레플리카에 깨질 정도는 아니었어. 형이... 체리욜파쳰의 그 날, 쥬르의 봉인을 깬 거야. 그 때 수속성 레플리카를 감지 못한 내가 어리석었지. 훗, 아주 기막혔어. 난 괴로워 죽을 뻔했으니까. 아주 괜찮은 카드를 뽑은 것 같아. 데미지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죽으려고도 했어. 그랬다면 이미 게임은 끝나버렸겠지만." 에이드리안의 주위에 갑자기 붉은 색 빛이 어렸다. 그리고 한 곳에 모인 빛은 곧바로 에이드리안의 앞에 있는 찻잔으로 날아갔다. 찻잔은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차가 흘러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박살난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제 제젠 차는 마시지 않아. 마실 때마다 소름이 끼치거든. 이제 어린 시절은 없어. 그리고 더 이상 어린 시절의 나도, 형도 없는 거야. 이미 너무 많이 틀어져 버렸거든." 에이드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경고하겠어. 이제부터는 조금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계속 지켜보기만 했던 게임이지만 이제 슬슬 나서 보려고 해. 이미 너무 많은 판돈을 뺏겨 버려서 남은 것도 별로 없지만." "쿡. 슬슬 나서 보겠다라... 에이드리안, 너야말로 조심하는 게 좋아. 내겐 아직도 결정적인 카드가 하나 더 남았거든." "미레이유겠지. 형에게 있을 만한 건 그 것밖에 남지 않았으니. 난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미련 없어. 그녀가 죽든 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쥬느비에브는...알고 있어?" 에스프라드가 교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에이드리안은 순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미소지었다. "쥬르가 알아도...상관없어. 어린 시절 날 구속했던 것들이 이제는 두렵지 않으니까. 아무 것도."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해 차마 형에게 못된 짓을 못한 내가 바보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 차라리 모른 척 해버릴 걸. 하지만 형. 이번에는 아무래도 형의 실책인 거 같아. 건드려서는 안 될 것까지 건드려 버렸거든. 이제 내 상처가 너무 커져 버려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 않으면 그 상처의 고통으로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아. 나와 같은 꼴을 하나 만들지 않고서는 고통이 계속될 것 같아. 후훗. 후후후-"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를 남겨두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찻잔 속에 일렁이는 자신의 얼굴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자꾸 아파 오는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스프라드는 찻잔을 들어 입술에 기울였다. 어린 시절 틈만 나면 마셨던 제젠 차. 그 때처럼 차는 약간은 달고 약간은 씁쓸했다. 에스프라드는 천천히 미소를 띄며 눈을 감았다. 행복했던 그 때가 눈 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제115음(第115音) Preparation(1) 오는 듯 마는 듯 가느다란 눈발이 잘 정리된 벽돌 바닥 위에서 바람에 흩어졌다. 쥬느비에브는 빨간 색 모자를 꾹꾹 누르며 에이드리안을 곁눈질했다. 그는 하얀 모자에 하늘색 머플러, 하얀 코트로 온 몸을 무장하고 있었다. 물론 손에는 두꺼운 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빨간색 코트를 하얀 벙어리 장갑으로 톡톡 치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에이드리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면 혼날까 봐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그녀였다.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쥬느비에브는 하얀 목도리를 손으로 뱅글뱅글 돌리다 결국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에이드리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목도리로 코까지 막고 있는 에이드리안이 눈만 내리깔며 물었다. "왜?" "에이드리안." "응." "눈사람 같은데요." 쥬느비에브는 큰 맘 먹고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으아! 이제 잔소리를 하겠지!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쥬느비에브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모자를 다시 꾹꾹 눌러썼다. 참 이상했다. 평상시의 그라면 지금쯤 화내면서 왜 자기가 눈사람이냐며 소리쳤어야 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그저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복잡해진 머리 속을 정리하며 원인 분석을 시작했다. 그 때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툭 말을 던졌다. "넌 산타 할아버지 같아."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산타 할아버지! 서방에 가끔씩 출연한다는 정체 불명의 괴도! 항상 빨간 옷을 입고 흰 수염을 붙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친다는 괴도둑! 얼마 전 <오늘의 에스플리크>에 특집 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실렸었다. 쥬느비에브는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외쳤다. "내가 왜 산타 할아버진데요! 나, 할아버지 아니에요!" "훗. 내가 이겼다." 장난스럽게 웃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쥬느비에브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번에도 그녀만 흥분하고 말았다. 왠지 억울하고 분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양 볼에 바람을 넣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 맨날 나만 놀리고. 에이드리안 나빠요." 삐친 듯 고개를 돌리던 쥬느비에브는 벙어리 장갑 낀 손을 슬쩍 뻗어 에이드리안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가슴을 솜방망이로 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콩닥거릴까.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자유로운 한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장갑의 보드라운 털을 뚫고 열기가 느껴졌다. 그 때 슬쩍 고개를 들던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과 딱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머쓱해진 쥬느비에브는 말을 더듬으며 버둥거렸다. "에, 에이드리안. 그러니까 내가 팔짱끼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추워서. 맞아요. 추워서요. 이러고 있으면 덜 춥거든요. 전에 안느마리도 말했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팔짱 끼고 있으면 얼음 속에서도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던가...하, 하여튼...."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던 쥬느비에브는 순간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것을 보았다. 안느마리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에이드리안은 몹시 안 좋은 얼굴을 했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안느마리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가 안느마리에 대해 계속 추궁하자 에이드리안은 어젯밤에 안느마리가 에스프라드의 청을 받고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자신을 몰아세워서 에이드리안에게 데미지를 주기 위해, 그 목적을 위해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고 쥬느비에브는 어젯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행복을 빈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던 안느마리. 그녀가 단지 그런 이유로 자신의 친구가 되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안느마리를 믿고 싶었다. "에이드리안. 나, 안느마리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에이드리안 말이 사실이라서...그래서 내 친구가 된 거라고 해도 나, 안느마리 믿어요. 안느마리가 날 아주 좋아해 줬고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은 변함 없는 진실이니까요. 설혹 그 마음에 다른 마음이 같이 존재했다해도 날 좋아해 줬던 마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난 안느마리를 믿어요. 지금은 나한테 미안해서 도망간 건지도 모르지만 나, 기다릴래요. 안느마리가 다시 돌아오면 용서한다고 말해 줄 거야. 안느마리한테는 그 말 한마디가 필요한 건지도 몰라요."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어른스럽게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네, 쥬르는. 아주 건실하고 멋진 생각인걸." 웃으며 말한 에이드리안이었지만 마음 속이 싸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착하다. 사람을 잘 믿고, 미워하더라도 잔인한 복수 같은 걸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안느마리가 쥬느비에브에게 해가 될 존재라면 없애 버리리라. 쥬느비에브가 우선이었다. 그녀에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 모르게 냉소를 띄며 걸음을 옮겼다. '내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려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어. 어떤 식으로든. 그 누가 되더라도 반드시 없애버리겠어.' ******** 학생회실에 도착한 쥬느비에브는 우두커니 문 앞에 서서 눈을 끔뻑거렸다. 학생회실에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코를 킁킁거리며 안으로 달려갔다. 미라벨과 케이로프, 그리고 유벨이 수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케이로프에게 얼굴을 쑥 내밀고 코를 킁킁거렸다. "마, 맛난 냄새나는데요?" 쥬느비에브의 예리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케이로프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무표정한 케이로프를 상대로 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미라벨에게 눈을 돌렸다. 쥬느비에브의 시선에 미라벨이 단단히 긴장하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비교적 공략이 쉬운 미라벨 언니. 쥬느비에브는 배시시 웃으면서 다가갔다. 그리고 미라벨의 팔을 쿡쿡 찔렀다. "미라벨 언니, 쿰쿰한 냄새나요. 아유, 이상한 냄새. 이래서는 레이디 체면이 말이 아닌 걸요?" "뭐, 뭐라고요? 그럴 리가! 고작 고구마 구워 먹은 것 밖에는! 앗! 아앗! 말했다!" 미라벨은 놀란 얼굴로 소리를 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며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쥬느비에브가 눈썹을 실룩이며 이내 꽥 소리를 질렀다. "고구마라니! 너무해요! 나도 고구만지 뭔지 먹고픈데! 에잇! 다 미워요! 맛난 거 혼자서만 먹고! 너무해. 흐어어어엉--- 고구마야, 흐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고마구마야-----" "쥬, 쥬느비에브! 삐치지 마! 고, 고구마 구워 줄게." 미라벨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쥬느비에브의 팔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두 주먹을 붕붕 흔들었다. "으응! 나, 빨리 구워줘요! 배고파요." "쥬르. 너 식사한지 얼마 지났다고..." "하, 하지만 고구마 먹고픈데..." 에이드리안의 핀잔에 쥬느비에브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다 이내 씨익 웃으며 미라벨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고구마! 고구마! 미라벨 언니, 맛나게 구워줘요!"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쥬느비에브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는 미라벨을 두고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소파에 가 앉았다. 케이로프와 유벨도 미라벨을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리에 앉았다. 에이드리안은 짐짓 표정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같이 먹어놓고 미라벨만 덮어씌우다니 남자답지 못해, 둘 다." "그, 그게 어차피 당할 거 혼자만 고생하면 다른 두 사람은 살잖냐, 그게. 쥬느비에브 떼쓸 때는 아무도 못 당하니. 아. 하. 하." 유벨이 머리를 긁으며 미라벨을 곁눈질했다. 미라벨은 눈물을 머금은 채 접시에 담긴 고구마를 레플리카로 익히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케이로프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아- 오늘도 잔소리겠군. 우아한 레이디가 고구마를, 그것도 레플리카로 익히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단단한 가십 기사거린데..." 근심, 걱정 가득한 케이로프의 표정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 때 유벨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너, 평의회 총회 소집, 건의했다며?" "응." "무엇... 때문에?" 유벨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라니! 총회 소집이란 게 얼마나 큰 일인데! 왜 우리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오늘 하려고 했어." 에이드리안의 미소에 유벨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의 학생회장에게는 평의회 임원 전체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극히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 총회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평의회 의장이 권한을 집행할 수 없을 때나 그 밖의 급박한 일이 있을 때, 그 후보인 대속성 레플리카들이 일을 집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속성 레플리카 중 그 권한을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에이드리안은 그토록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말 한마디 없이 행했던 것이다. 유벨은 마음이 불편했다. 쥬느비에브의 일이 일단락 되고 다시 원래대로의 그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로 그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요즘 들어 에이드리안은 가끔씩 섬뜩할 정도로 무섭게 미소지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온 그도 에이드리안이 무얼 생각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유벨은 두려웠다. 쥬느비에브의 일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가 섣불리 행동할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혹여 쥬느비에브를 지금의 상태로 만든 에스프라드와 그가 싸우기라도 한다면 그로서는 말릴 힘이 없었다. 그에게 쥬느비에브를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쥬느비에브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금기 사항이 되었다. 아픈 상처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깊이깊이 묻어놓고 마치 없었던 일처럼 해야했다. 그래야만 지금 공유하고 있는 행복을 지킬 수 있었다. "아참, 유벨. 사흘 뒤에 총회 열리니까 스콜라 행사는 미뤄주고." "저희도 참석해야 겠군요. 총회라면 평의회 행사 중에서도 큰 행사. 가문의 후계자로서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미라벨을 곁눈질하며 케이로프가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표정을 굳히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남아서 쥬르 좀 보살펴 줘. 부탁해." 에이드리안은 대답을 하며 쥬느비에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고구마를 다 구운 건지 그녀는 미라벨과 아웅다웅 고구마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즐거운 듯 미소짓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미라벨의 레플리카에 분명 마음이 아팠을 텐데. 이제 레플리카를 쓸 수 없는 자신을 비교하며 마음이 아팠을 텐데,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짓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가슴 사무치도록 안타까운 모습에 눈이 아파 왔다. 왜 하필 쥬느비에브였을까. 아무리 물어도 답을 낼 수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가 암속성 레플리카를 전승했다는 것은 현실이고 꿈처럼 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 "아웅~ 맛난다. 에이드리안도 한 입 먹어 봐요. 맛나요." 쥬느비에브는 하얀 종이로 싼 고구마를 오목조목 먹으면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라벨이 슬쩍 숨기던 고구마를 결국 빼앗아 나온 쥬느비에브는 아주 행복한 듯 미소지으며 노오란 고구마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던 에이드리안이 옆을 힐끗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시선을 맞받아 치며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내 에이드리안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맛있어?" "응. 노란 게 너무 달콤하고 맛나요. 속 색깔이 모롤라랑 비슷한 걸. 난 노란 게 좋아. 달콤하고 맛나니까."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방실방실 미소짓는 쥬느비에브를 향해 미소를 머금던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여 쥬느비에브가 들고 있던 고구마를 한 입 물었다. 그리고 뜨거운 듯 입을 막고 씹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뜨겁잖아." "원래 뜨거워야 맛난 거래요. 아유, 나도 데였다." 눈을 찔끔 감았다 뜨며 말하는 쥬느비에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쥬느비에브가 웃고 있어서 기분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멈춰 서서 쥬느비에브의 빨간 목도리를 매만져 주었다. "쥬르,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봄이 되면 우리 멋진 결혼식도 할 수 있을 텐데..."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미소를 멈추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 우리 정말 결혼해요?" "물론이야. 그럼. 약속했잖아.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의 목도리를 잘 정리한 다음,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른 가지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여 에이드리안은 입을 열었다. "저 가지에 잎사귀가 가득 차게 되면 우리,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될 거야. 그럼 누구도 내게서 쥬르를 빼앗아 가지 못하게 될 거야. 내가 지킬게. 그러니까 쥬르는 아무 것도 모른 척, 그냥 행복하게 지내면 돼. 아무 걱정도 하지말고." 쥬느비에브는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원했다. 그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많은 사람들의 눈 앞에서 하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권리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래하고 싶은 갈망에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도 그랬다. 2층의 방에서 자다가 잠이 안 와 부모님의 방으로 내려가다가 열린 문틈 사이로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주 정말 슬픈 얼굴로 어머니를 안고 계셨다.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듯 고통스럽고 슬픈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눈물 맺힌 얼굴로 아버지를 안고 계셨다. 그 때는 몰랐다. 두 분이 왜 그렇게 아파했었는지.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았다. 이제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상처밖에 줄 수 없는 고통. 아버지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괴로웠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를 혼자 남겨 두고 떠나게 될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아버지였기에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을 것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마음. 그리고 하나 있는 딸 때문에 같이 죽어줄 수도 없었던 어머니. 미안하고 슬퍼서 어떻게 아버지를 바라보았을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런 마음일까.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슬프고 안타깝고 미안하고... 쥬느비에브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에이드리안이 알아채면 곤란했다. 자신의 운명에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에이드리안... 그가 더 슬퍼하니까... 제116음(第116音) Preparation(2) 오랜만에 에스프라드를 찾아온 헤르만이었다. 그와 에스프라드는 3년 전 부터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비인 가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고 헤르만은 평의회 의사당 근처에 집을 지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화려함으로 치자면 지금 자신이 머물고 있는 저택이 훨씬 나았지만 헤르만은 비인 가의 저택에 남모르는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비인 가의 저택에서 그의 아내, 르미엔과 신혼을 시작했고 엘로이즈와 에스프라드가 태어났다. 그리고 르미엔을 떠나보낸 곳도 이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곳은 1모네에 한 번 올까 말까한 먼 곳이 되고 말았다. 거리가 멀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의 냉랭한 눈빛에 발걸음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용건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헤르만은 곧장 에스프라드가 있다는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문을 열어젖히자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헤르만은 수행원에게 손짓을 해 밖으로 내보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프라드가 고개를 들어 힐끔 그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은 손님이 많군요. 얼마 전에는 에이드리안이 날 찾더니. 오늘은 아버지라..." "에이드리안이 널 찾았다고? 무슨 말을 했느냐. 혹시 이번 총회에 대한..."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이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이에 의한 주름이 더욱 패어갔다. 에스프라드는 살짝 눈썹을 실룩이며 소파를 가리켰다. "흥분하지 마세요. 우선 앉으세요. 손님처럼 서 계시지 말고." "오, 오냐." 헤르만은 에스프라드의 말에 소파로 가 앉았다. 에스프라드는 헤르만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던 아버지가 이제는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피식 웃으며 헤르만의 맞은편으로 갔다. 하녀가 차를 내오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손짓으로 하녀를 내보내고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총회 문제로 오신 건가요?" "그래. 에이드리안, 그 녀석이 총회 소집을 건의했다. 또 무슨 꿍꿍이로... 내 힘으로 소집을 막아야겠어. 그 녀석, 날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놔 두세요. 그 애가 하고 싶어하는 데로." 에스프라드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눈을 떠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다소 창백한 헤르만의 안색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가 나서봤자 뭘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는 아르헨의 최고 집정인데 그 애에게 당할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나도 있고. 에이드리안은 고작 평의회 의장 후보에 지나지 않아요. 비인 가가 모두 아버지에게 동조하고 있는 이상, 그 애도 아버지를 함부로 하지는 못 해요." "그, 그렇겠지? 내게 덤벼들어 봤자... 그렇겠지. 차라리 내가 선수를 치는게 좋겠군.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까. 하하하하-" 헤르만은 에스프라드의 말에 안심했다는 듯 차를 마셨다. 에스프라드는 냉랭하게 미소를 띄우며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 ******** 차가운 밤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서재에서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이상하게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테라스로 걸어나가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시선은 밤하늘에 향한 채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달이...숨어버렸나...." 작게 한숨을 쉬며 에이드리안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 라데팡스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훑어보며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계속 서류를 넘겨보던 그는 이내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며 신경질이 난 듯 서류를 방안으로 던졌다. "중요한 건 다 빠졌군. 내가 가져오라고 한 중요한 것들은 전부 빠졌어. 어떻게 설명할 테지?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은데."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에스프라드 형을 지키고 싶은가 보지? 쥬르를 배신하게 되어도." 방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났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방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에이드리안은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도 마음은 아픈가 보지? 좋아. 내 제안은 없었던 걸로 하지. 두 번 다시 쥬르 앞에 나타나지 마. 쥬르 앞에 모습을 보였다가는 내가 가만 두지 않겠어. 돌아가. 안.느.마.리." 잠시동안의 머뭇거림에 이어 방 안의 인기척이 없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차갑게 냉소를 띄며 고개를 내렸다. "하... 에스프라드를 지키고 싶다라. 쥬르를 만나지 못 하게 되어도 그를 배신할 수는 없단 말이지. 흥. 없앨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 되었군."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언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하얀 달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내게서 쥬르를 빼앗아 가려는 자는 누구든 용서 못해. 그 때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어. 에스프라드, 헤르만... 내게 잘못 한 거야. 날 이렇게까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 두고 봐. 다 망가뜨려 줄 테니." ******** 다음 날 아침.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은 미소로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재에서 그녀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그는 몹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웃는 모습을 생각했다. 어서 그녀가 행복하게 미소짓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거의 뛰듯이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방문 앞에 선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쥬르, 기뻐해 줄까?" 에이드리안은 싱긋 미소지으며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를 빗지도 않고 평소의 그녀처럼 단정하게 리본을 묶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잠옷 차림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크게 눈을 떴다. 쥬느비에브가 몸을 떨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쉬기 어려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문을 닫았다.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그는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쥬느비에브는 지금 노래하고 싶은 마음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노래를 하는 것은 공기를 마셔 숨을 쉬는 것과도 같았다. 혹은 물과도 같았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않으면 갈증이 나고 괴로운 것처럼 레플리카 사용자가 오랫동안 노래를 하지 않으면 갈증이 나는 것이다. 감기가 걸렸을 때 기침을 참을 수 없듯 울컥하는 느낌이 치밀고 저절로 입이 열린다. 그 고통이 얼마나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상상만 해도 온 몸이 떨려왔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여 눈물을 흩어내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밝게 미소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쥬르! 뭐해?" 쥬느비에브가 당황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아무 것도 모른 척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큰 일이다. 갈수록 늦잠만 자고 게을러지잖아. 너 그러다가 살 쪄서 허리 퉁실퉁실해지면 어떻게 하려구?" "아, 아니에요! 나, 허리 퉁실퉁실해지지 않을 거야. 오, 오늘만 늦게 일어난 거란 말이에요." 에이드리안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짐짓 화가 난다는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에이드리안은 평상시의 그녀처럼 새침하게 말하는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를 일으켜 세워 소파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레이디를 대하듯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깍듯한 태도에 눈을 말똥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에, 에이드리안. 오늘 내가 안 깨우러 가서 화난 거에요? 그래서 막 이러는 거죠? 친절하게 대해줬다가 한 번에 잔소리하려고 그러는 거죠?" "아냐." 에이드리안은 의심이 가득한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아 고개를 내렸다. 쥬느비에브는 알밤을 생각했던 것인지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해주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으니까 괜찮아. 기분 좋으니까 이거 줄게." "에에? 이게 뭔데요? 선물?"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내미는 작은 상자를 손에 들고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란색 포장지로 깔끔하게 싸여져있는 상자였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한 번 쓰윽 보고 포장지를 풀어 보았다. 포장지를 풀고 상자를 열어본 쥬느비에브는 탄성을 질렀다. "야아- 귀여운 방울이다! 종소리 딸랑! 딸랑! 아유, 귀여워. 전에 준 것 보다 더 예뻐요. 아유, 딸랑딸랑!" 쥬느비에브는 금색의 동그란 방울을 꺼내 흔들어댔다. 방울이 흔들리며 딸랑딸랑 소리가 나자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 듯 손으로 입을 막고 쿡쿡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에이드리안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좋아?" "응! 너무 귀여운 걸. 나 이 거 머리에 달고 다녀야 겠어요. 그럼 내가 걸을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날 거야. 아유, 멋지다."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운 듯 헤실헤실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행복한 듯 미소짓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겉으로만 행복해 보여도 웃게 하고 싶었다. 침울하고 우울한 모습의 쥬느비에브는 싫었다. 그녀가 기분 좋은 듯 웃는 모습이어야 마음이 편했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어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았다. "쥬르. 내가 만약에...나쁜 사람이어도 쥬르는 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거지?"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곧 함박 미소를 머금으며 에이드리안의 목으로 팔을 둘렀다. "에이드리안. 난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어요. 에이드리안이 어떤 사람이든 난 에이드리안 편이에요." 쥬느비에브의 속삭임에 에이드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따뜻한 쥬느비에브의 체온은 그녀가 지금 살아 숨쉬며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녀가 곁에 있는 동안에는 그도 약간의 행복을 더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작은 행복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행복을 망가뜨리려는 것을 모두 없애고 그 행복을 쥬느비에브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은 살며시 쥬느비에브를 품에서 떼어내며 싱긋 미소지었다. "쥬르. 참. 나 그 이야기했었던가?" "무슨 이야기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을 말똥거리며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까만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다시 싱긋 웃었다. "나, 며칠 평의회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에에?" 쥬느비에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볼멘 소리를 냈다. "나도 따라가면 안 되요?" "안 돼." 에이드리안은 단호하게 말하며 쥬느비에브의 볼을 손가락으로 푹 눌렀다. 공기를 채워 빵빵하게 만들어 놓았던 볼이 푹 꺼지자 쥬느비에브는 짐짓 화난 표정을 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표정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슬쩍 물었다. "뭐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봐." "진짜요?" "응." 에이드리안의 부드러운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한껏 조마조마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기대감에 웃음이 새어나오는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쥬느비에브가 손으로 창을 가리키며 외쳤다. "에이드리안! 저기!" "응?" 쥬느비에브의 외침에 에이드리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쥬느비에브가 일어나 에이드리안의 입술에 쪼옥 입을 맞췄다.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쥬느비에브의 기습에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쥬느비에브의 키스를 받았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쥬느비에브는 뻣뻣한 몸놀림으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푸욱 숙인 채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 아유. 부끄러워. 부끄러워라. 아웅~"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에 에이드리안은 결국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기습 키스를 하고 혼자 부끄러워하는 쥬느비에브가 너무 귀엽게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쥬느비에브의 입에 다시 한 번 쪼옥 입맞춤을 했다. 에이드리안의 키스에 쥬느비에브는 그대로 굳어 눈만 깜빡이며 키스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달아오른 얼굴에 한꺼번에 열이 몰리자 쥬느비에브는 손바닥으로 뺨을 톡톡 치며 뻐끔하게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쥬느비에브의 얼굴에 에이드리안은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빛내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아- 부끄러워라." 말만 부끄럽다고 하고 얼굴 표정은 하나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쥬느비에브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 손을 허리에 갖다대고 뚱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이. 에이드리안은 맨날 나만 놀리고. 에이, 재미없어요. 나만 맨날 얼굴 빨개지고..." 그러나 쥬느비에브는 슬며시 얼굴을 돌린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멋쩍은 표정을 얼핏 보았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모른 척 어깨를 으쓱하고는 에이드리안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나 잘 있을 테니까 빨리 다녀오세요. 올 때 선물도 많이 사가지고." "알았어. 미라벨이랑 케이로프가 남을 테니까 같이 있어." "으응."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에게 하나하나 배려해주는 그가 좋았다. 하지만 가끔씩 스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대로 계속 행복한 생활이 이어지게 될까. 불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생각할수록 점점 커져 갔다. 곁에 있음에도 언뜻 스쳐 가는 어두운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그 마음을 꼭꼭 숨겨둘 생각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행복한 쥬느비에브로 남을 수 있게 단단히 숨겨 놓을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제117음(第117音) a Revenge Tragedy(1) 아르헨에서도 최고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평의회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회의를 여는 의사당만 해도 거대한 건물이 몇 개나 되었고, 평의회 의원들과 행정을 맡고 있는 관리들이 머무는 곳은 거의 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 평의회 총회가 열리는 곳은 많은 의사당 가운데서도 규모 면에서 단연 으뜸인 '아이슬로데 기념관' 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마차에서 내려 우아한 몸짓으로 걸음을 옮기며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의사당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이 들도록 지어진 건물은 커다란 건물 외에도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정원으로 하여금 마치 왕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뒤쳐지지 않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유벨에게 말을 건넸다. "우스워. 우리는 제국과는 달리 왕이나 황제가 없어. 하지만 이런 의사당이 몇 개나 되니 평의회 의장도 황제가 부럽지 않겠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의회 의장이 되려고 그토록이나 몸부림을 쳤나 봐. 그래. 저기 의사당 중앙의 의자에 앉아 평의회 의원들을 내려다보면 아르헨을 손바닥 위에 올린 듯한 느낌이 들겠지. 후후- 맞아." 비웃는 듯한 미소의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며 유벨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에드, 너 조심해. 아무래도 이번 총회 때 헤르만 숙부가 나설 거라는 얘기가 있어. 평의회 쪽에서 나온 소식이니까 아마 근거 있는 이야기일 거야." "쿡. 그래?"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차갑고 냉랭한 모습의 사촌 동생을 보며 유벨은 한기를 느꼈다. 이 곳에 오기 전, 쥬느비에브에게 화사하게 미소짓던 모습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사촌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우선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사촌 동생의 편에 서리라 결심하며... ******** 에이드리안은 많은 대귀족의 인사를 받고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곁에서 시중 들기 위해 서 있는 하인에게 대충 걸치고 있던 코트를 건네주고 잠시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귀족의 공식복인 아비 아 라 프랑세즈(주. 참조)풍의 상의와 하얀 색 퀼로트(주. 참조), 검은 색의 긴 부츠를 둘러 본 그는 무의식적으로 상의의 소매에 그려져 있는 비인 가의 문장을 매만졌다. 금색의 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 상의의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하나로 묶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손이 자신도 모르게 비인 가의 문장에 가 있었다. "흥. 비인이라... 웃기는 군." 에이드리안은 냉랭하게 미소를 짓다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대귀족을 발견했다. 그는 냉소를 풀고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록과 다른 일로 잠시 나가있던 유벨이 어느 새 다가와 옆에 앉았다. "히야- 역시 총회라니까.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오냐." 유벨은 투덜거리며 회의록을 펼쳤다. 에이드리안은 싱긋 웃으며 의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U자 형의 의사당은 중앙에 회의를 주재할 의장이 자리하고 양 날개에 가장 신분이 높은 평의회 의원부터 순서대로 자리한다. 에이드리안과 유벨은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오른쪽 날개 가장 첫 번째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헤르만 평의회 의장의 건의로 의장 보좌인 셀레자스 후작이 회의 주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셀레자스 후작이 의장 자격으로 가장 중앙에 자리하고 헤르만과 그의 아들, 에스프라드는 왼쪽 날개 첫 번째에 자리하게 되었다. 에이드리안은 한 사람씩 의원들의 모습을 눈여겨보다 이제 막 들어오고 있는 에스프라드와 헤르만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발견한 헤르만이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에스프라드는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은 다음 음료로 목을 축였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헤르만에게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헤르만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곧 이어 의사당 안에 평의회 의원과 직속의 하급 관리들까지 모인 총회의 개회를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여 가만히 미소지었다. "시작이야..." ******** "오늘 총회는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 에이드리안 로르 비인 님의 건의로 개회한 것으로서 특별한 안건을 다루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친애하는 많은 평의회 의원 여러분과 이 자리에 참석한 많은 관리 여러분들께 신중한 자세를 부탁드리며 본 의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창한 인사말과 함께 회의의 진행을 맡은 셀레자스 후작은 준비해온 데로 회의를 진행시켰다. 거대한 의사당 안에는 그의 레플리카로 확성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우선 오늘의 안건은 총회 건의자인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서..." "그 전에 내가 먼저 안건을 제시하겠소." 헤르만이 손을 들고 말했다. 거대한 의사당 안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유벨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드. 헤르만 숙부가..." "괜찮아. 놔 둬." 에이드리안은 그저 가만히 미소를 머금은 채 헤르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속이 탄 유벨은 혼자 초조하게 헤르만과 에스프라드, 그리고 셀레자스 후작을 바라보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에이드리안이라면 혀를 두르며 미워하는 헤르만 숙부였다. 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일 것이 틀림없었다. 조용히 앉아 있는 에스프라드의 표정때문에 더욱 불안해 졌다. 유벨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헤르만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난 오늘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을 이 자리에서 고발하고자 합니다. 친애하는 평의회 의원님들과 많은 관리 여러분. 광속성 레플리카를 계승했다고는 하나 그는 아직 의장 후보일 뿐 현재 아무런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입장을 생각지도 않고 많은 방자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헤르만의 말에 오른쪽 날개에 앉아 있던 젊은 대귀족 한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나 말했다. "정확한 근거를 대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식의 모략은 명예 훼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을 고발한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옹호하는 말에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드리안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유벨은 헤르만이 돼먹지 않은 꼬투리로 에이드리안을 몰아 세우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헤르만은 너무나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면에 에이드리안의 표정은 초연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띈 채 그저 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벨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며 헤르만에게 시선을 돌렸다. 헤르만은 오랜 시간 평의회 의장을 지켜온 경력에서 나오는 능란한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나의 조카이자 비인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신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 님의 양자인 그는 사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르만은 잠시 말을 끊은 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 보았다. 에이드리안도 천천히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에게 그에게만 전해지는 레플리카를 보냈다. [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언제까지나 널 날뛰게 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이제 네 놈도 끝이다. ] 헤르만은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헤르만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 놈도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겠지. 제깟 놈이 무슨!' 헤르만은 천천히 의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팔을 가슴께로 가져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서글픈 미소를 머금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숙부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참으로 유감입니다. 우리 비인 가문을 대표해서 여러분들께 사죄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사태는 모두 저희 가문과 저의 불찰입니다. 허나 아르헨 평의회 의장으로서, 그리고 영광스러운 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그의 악행을 더 이상 간과할 수는 없는 법!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은 오랜 시간 동방 제국과 비밀스럽게 밀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동방 제국의 전 재상인 류연이 그가 나중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제국의 방대한 영지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저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 것은 아르헨을 제국에 팔아 넘기는 행위! 절대 용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를 아르헨에서 영구 추방하기를 건의합니다!!" 순식간에 의사당 안이 시끄러워졌다. 유벨은 질린 얼굴로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헛소리야, 저게? 에드, 너한테 동방의 땅이 어디 있다고... 에드?" 유벨은 계속 미소만 머금고 있는 사촌 동생을 바라보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땅이야 있지. 용케도 알아냈군. 케이로프 밖에 모르는 사실인데..." "뭐...라고? 그럼?" 유벨은 놀란 눈으로 에이드리안을 다그쳤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의사당 안을 바라보았다. 헤르만의 말에 대한 반대와 찬성을 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붉은 색과 푸른 색 수술이 달린 작고 넓적한 막대기를 들었다. 붉은 색 수술의 막대기는 반대를 뜻하고 푸른 색 수술의 막대기는 찬성을 뜻하는 의사 표시 수단이었다. 막대기를 들고 회의 진행자가 지목하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셀레자스 후작이 붉은 색 수술의 막대기를 든 왼쪽 날개의 나이든 귀족을 지목하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인사를 하고 말했다. "헤르만 의장 각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 사실이 진실이라면 이 것은 아르헨의 중대사!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가 국가를 팔아먹은 기막힌 일이지요. 저는 헤르만 의장의 뜻에 확고한 동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번에는 푸른 수술의 막대기를 든 젊은 여자가 일어나 말했다. "타당하지 않은 근거입니다. 헤르만 의장 각하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영구 추방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헤르만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근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헤르만은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눈을 돌려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변함 없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미소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헤르만은 견딜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그 작은 소년이 이제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앉아 웃고 있다. 어린 소년의 절규에 찬 목소리가 머리 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 왜 그랬어요, 숙부! 왜 그랬냐고! 차라리 나도 죽여요, 죽여요!! ] 헤르만은 울컥 솟는 무언가에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의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불쾌한 기억이었다. 헤르만이 일어서자 시끄럽게 웅성거리던 회의장이 다시 조용해 졌다. 헤르만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의 추방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아르헨의 가장 축복 받은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아르헨 귀족 연합 평의회>의 의장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축복과 대자연의 축복을 받아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는 아르헨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의장인 저는 곧 평의회의 대변자! 그러나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은 3년 전, 저를 죽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 것은 평의회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자 씻을 수 없는 패악입니다! 지금까지 숙부로서 숨겨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바입니다." 헤르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시 의사당 안이 소란스러워 졌다. 셀레자스 후작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한 귀족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평의회 의장직을 노리고 한 행동이 분명한 것! 아르헨의 평화와 평의회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을 추방하는 것이 옳은 일인 듯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말로만 그렇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몰아 세울 수 있는 일입니다! 헤르만 의장 각하께서는 증인을 세워 주십시오!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의장 후보인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과 평의회를 농락하는 일! 신중하십시오!" 다시 찬반 토론이 시작되었다. 헤르만은 손을 들어 장내의 소란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제 아들인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헤르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유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헤르만을 쏘아보며 말했다. "어불성설! 헤르만 의장 각하께서 증인으로 채택한 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은 의장 각하의 아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의장 각하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을 리는 없는 법! 그런 사람을 증인으로 내세워 말도 되지 않는 건의를 하다니! 그것은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을 모욕하고 아울러 <엘크로이츠>에 소속되어 있는 귀족 전체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나는 엘크로이츠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의장 각하께 사과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유벨은 숨을 몰아쉬며 헤르만을 노려보았다. 헤르만의 안색이 나빠졌다.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유벨이 나서자 장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돌아섰다. 장내는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셀레자스 후작 또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때 에스프라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애하는 평의회 의원 여러분, 그리고 관리 여러분. 아버님이신 헤르만 의장 각하의 말씀에 따라 제가 증언을 하겠습니다. 저는 제 두 눈 똑똑히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 제 아버지에게 레플리카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의장 각하께서는 많이 다치셨고, 조카라는 이유로 그 사실을 숨겨 오고 계셨습니다. 이 것은 제 수속성 레플리카를 걸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시점에서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의 변(辯)을 들어보기를 건의합니다." 에스프라드의 싸늘한 눈빛을 보며 유벨은 불안한 마음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시종일관 가만히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양쪽의 치열한 공방으로 당황했던 셀레자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좋습니다. 여기서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의 반론을 들어보겠습니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 말씀해 주십시오." 셀레자스 의장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앉아있는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에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감탄하며 숨을 죽였다. 그가 어떻게든 반론을 잘 해주길 바라면서 유벨은 초조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장내를 바라보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했던 모양인지 셀레자스 후작이 그를 재촉했다. "비인 님, 말씀해 주시지요." 셀레자스 후작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안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에 의사당 안은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뒤에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먼저 헤르만 의장 각하께서 말씀해 주신 동방 제국과의 밀통 건에 대해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국의 전 재상이신 류연 님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관계입니다. 그 덕분에 그 분께서 가지고 있던 땅을 조금 선물 받았을 뿐, 다른 관계는 없습니다. 또한 그 땅에는 성을 포함한 일체의 다른 시설은 없으며 전체가 과수원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르헨 곳곳에 있는 제 영지에 비한다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지요. 아르헨의 모든 영지를 버리고 과수원 하나만 바라보고 그 땅에 정착한다라. 우습군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경솔한 발언을 하시다니 의장 각하답지 않군요.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잠시 숨을 돌리며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묘한 미소를 띄며 눈을 내리깔았다. 순간 헤르만은 오싹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에이드리안에게 레플리카를 보냈든 그도 레플리카를 보내고 있었다. [ 숙부, 멍청한 짓을 하셨군요. 3년 전의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어. ]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의 레플리카에 아연실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를 막아야 했다. "네, 네 놈이!!" 그러나 이미 에이드리안의 시선은 그를 떠난 뒤였다.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헤르만을 가리키며 날카롭게 외쳤다. "저는 이 자리에서 헤르만 마리에 로르 비인 평의회 의장의 해임을 건의 합니다! 그는 3년 전, 정당한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이자 평의회 의장 후보인 나,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을 죽이려고 했으며 또한!" 에이드리안은 말을 멈추고 헤르만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헤르만의 얼굴을 보며 그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말을 뱉었다. "또한! 저 자가 영광스러운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내 아버지인 히스페르 이스타냐 로르 비인을 죽였소!!" 제118음(第118音) a Revenge Tragedy(2)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뒹굴렁 거리며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창 밖에 하얀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떠나고 나니 너무 심심했다. 에이드리안은 뭘 하고 있을까. 이럴 때 안느마리가 곁에 있어주면 괜찮을 텐데. 쥬느비에브가 안느마리가 몹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꾸욱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안느마리가 자신의 곁에 돌아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참을 생각이었다. 안느마리에게는 안느마리만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녀를 기다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안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이 없으니까 심심하잖아. 공기 놀이도 질렸고. 딱지 치기도 혼자는 재미없고. 그냥 오늘은 쿠키를 구워야겠다, 꼬마 에드. 꼬마 에드도 줄게. '쥬르의 울트라 스페셜 빅 러브 쉐이크 오로라 로망스 쿠키'를 구워야겠네.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도 오전에 학생회 업무 마치고 온다고 했으니까. 손님 접대를 잘 해야 복 받는 거야. 일로나 할머니가 말씀하셨는걸." 쥬느비에브는 엉덩이를 움찔움찔 흔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같이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꼬마 에드는 나의 쿠키를 너무 기대하고 있나 봐. 엉덩이 춤까지 추다니." ******** 3도르 후. 깨끗했던 주방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반나절 걸려 완성된 쿠키를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장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쿠키 하나를 번쩍 들고 외쳤다. "쥬르의 울트라 스페셜 빅 러브 쉐이크 오로라 로망스 쿠키 완성!!" 하얀 앞치마와 머릿수건에는 쿠키 반죽이 묻어 얼룩덜룩 했고 얼굴과 손에도 온통 반죽투성이었지만 쥬느비에브는 정말 뿌듯했다. 전에 에이드리안을 졸라서 겨우겨우 산 금테가 둘러져 있는 우윳빛의 커다란 접시를 특별히 내놓은 쥬느비에브는 하얀 종이를 깔고 예쁘게 쿠키를 올려놓았다. 땅콩과 아몬드가 박혀 있는 쿠키를 보고 있으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고양이 모양, 병아리 모양, 양 모양 등 갖가지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쿠키가 퍽 먹음직스러웠다.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꾸욱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웅~ 나의 울트라 스페셜 빅...뭐냐, 하여튼 쿠키가 완성되니까 너무 기쁘다. 아웅~" 쥬느비에브는 쿠키를 담은 접시를 트롤리에 담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바퀴가 부드럽게 돌돌 굴러가는 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실로 나갔다. 그 때 루이즈가 웃으며 나와 말했다. "아가씨, 미라벨 아가씨와 케이로프 도련님이 와 계세요." "어어? 진짜요? 아참, 루이즈 아주머니. 쿠키. 드세요." 쥬느비에브는 쿠키를 집어서 루이즈에게 건넸다. 그리고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했다. "주방에 톨레 아저씨랑 루이즈 아주머니랑 하인 아저씨랑 하녀 아주머니랑 드릴 쿠키도 따로 놔 뒀어요." 루이즈가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흐뭇한 얼굴로 트롤리를 끌며 응접실로 향했다. ******** "노크 해야 될까?" 쥬느비에브는 응접실 문 앞에서 인상을 쓰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었다. '여긴 우리 집이니까, 내가 안주인이니까 노크를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 뽀, 뽀뽀라도 하고 있으면 어쩐다. 에이드리안이랑 나랑은 둘이 있을 때는 가끔씩 뽀, 뽀뽀도 하니까 아무래도 노크를 해야겠지? 하지만 노크하면 이상하지 않을까? 아유, 고민이네.' 쥬느비에브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방 안에서 뭔가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앗, 혹시? 쥬느비에브는 호기심이 일어 슬쩍 문틈 사이로 귀를 붙였다. 좀 더 소리가 잘 들려왔다. [ ...그러니까 아무래도 에이드리안 님이 이상하세요. 뭔가 위화감이 든다고 할까... ] 에이드리안이라는 단어에 쥬느비에브는 표정을 굳히며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자신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요즘 그 분은 마치 3년 전 그 때의 그 분을 보는 것 같아. 아니, 그 것과는 다르지만... ] [ ...하지만 쥬느비에브 앞에서는 항상 상냥하게 웃으시는 걸요. 쥬느비에브 앞에서의 그 분과 다른 때의 그 분은 이상하게 느낌이 달라요. 난 무서워요. 혹시 3년 전 그 때처럼... ] 3년 전?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3년 전의 에이드리안이 어땠기에? 쥬느비에브는 좀 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문에 귀를 붙였다. [ ...3년 전 그 때, 미레이유 님 때문에 에이드리안 님이 괴로워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무서워요. 그 미레이유 님 때문에... ] 쥬느비에브는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 속이 멍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어째서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는 거지? 어째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레이유... 에이드리안과?" ******** 의사당 안에는 에이드리안의 폭탄 같은 발언으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웅성거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발언이 불러온 충격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유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에드? 너 어쩌자고..." 그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하얗게 질린 헤르만에게 시선을 둔 채 싱긋 미소 지으며 두 손을 깍지꼈다. "재미있게 되었어. 그렇지. 복수극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야. 후훗." 유벨은 잔인하게 미소짓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멍하니 떨리는 손을 주먹쥐었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히스페르 숙부가 헤르만 숙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사고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죽음의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던 히스페르 숙부... 유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가 누구보다 존경하던 히스페르 숙부였다. 그를 헤르만이 죽였다니,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벨은 물끄러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유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들을 망가뜨리려 하고 있었다. 유벨은 잔뜩 갈라져 버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에드, 히스페르 숙부님이....히스페르 숙부님이...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너만 괴롭게 될 뿐이야. 에드." "유벨, 보고 있기만 해. 거추장스럽게 하면 너도 가만히 안 둬. 오랜 시간 준비해 온 거야. 이제 없애 버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버지를, 어머니를, 그리고 나를. 괴롭혀 왔던 것은 저들이지. 괴롭힘 받던 건 나와 내 가족. 쥬르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조금 더 참았을 텐데..." 에이드리안은 냉소를 머금으며 의사장 안을 둘러보았다. 왼쪽 날개 쪽에 앉아 있던 나이든 대귀족이 일어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히스페르 님은 그 당시 가장 강력한 레플리카의 소유자로서, 가장 유력한 평의회 의장 후보였습니다. 그 분의 죽음은 사고사라고 했지만 아직까지 의문시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항간에 암살 당했다는 소리도 있었지요. 그리고 사실, 이번에 저는 그 정확한 증거를 포착했습니다. 그 날, 히스페르 님의 저택 안에 있던 하인이 헤르만 의장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증인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헤르만은 자신을 몰아 붙이는 말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쉐드 후작! 어찌된 거요, 나를 몰아세우다니!" 헤르만은 자신이 믿고 있던 세력이 뒤돌아 선 것에 대해 분노심이 일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때 역시 왼쪽 날개의 중년의 여성이 일어나 말했다. "저 또한 에이드리안 님의 의견에 근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장 각하의 저택에 있는 집사 또한 증언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헤르만 의장 각하께서는 히스페르 님이 돌아가신 그 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으며 혼잣말로 자신이 히스페르 님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을 집사가 들었다고 합니다." 헤르만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에스프라드는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헤르만은 자신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에게 직접적인 근거를 제시하라고 말하고 싶소! 이것은 의장인 나를 기만하고 욕보이는 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향해 내뿜는 헤르만의 말에 피식 미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추하군요, 사실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좋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제 증인을 모실 수 밖에요. 일로나 홀스 로르 비인 님께서 증언을 해주실 겁니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이고 최초로 고백했던 사람이니. 후훗." 에이드리안의 말에 헤르만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셀레자스 후작은 커다란 목소리로 휴회를 알렸다. "오, 오늘은 이만 휴회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셀레자스 후작의 목소리와 함께 의사당의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목례를 해주며 헤르만을 흘끗 쳐다보았다. 헤르만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감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숙부, 숙부의 일생동안 그토록 집착하던 의장 자리를 뺏기게 생겼군요. 뭐 희망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죠. 이미 평의회를 내가 장악했다지만. 숙부와 에스프라드 형을 따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모두 내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숙부도 말했죠. 내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고. 그래요. 그 덕분인지 세력을 모으는 건 쉬운 일이었죠. 내일은 5대 대귀족 중에서 세 개의 가문이 숙부의 해임을 건의할 거에요. 이미 해임은 기정 사실이죠." 에이드리안은 하인에게 장갑을 건네 받으며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에스프라드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천천히...하나씩 다 망쳐주겠어. 내 가족이 당했던 아픔만큼. 내가 당했던 아픔만큼." 에이드리안은 냉랭한 눈동자로 헤르만을 흘겨보고 의사당을 나섰다. 뒤에서 지켜보던 유벨이 회의적인 표정으로 헤르만과 에스프라드에게 말했다. "헤르만 숙부, 나도 당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군요. 히스페르 숙부를 어떻게... 그래요. 당신들이 잘못한 거야. 에이드리안을 저렇게 만든 거, 모두 당신들이잖아. 이제 업보를 받으라구. 이미 멈추기엔 늦어버린 거 같으니까." 유벨이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나가자 에스프라드는 맥없이 앉아 있는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던 어린 날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지금은 너무나 추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헤르만의 저런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싫었다. ******** 평의회 총회가 언제 끝났는지가 까마득했다. 분명 오전과 오후에 치른 일인데도 오래 전 일처럼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임시로 마련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유벨을 포함한 일체의 사람들과 접촉을 금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침대에 앉아 이미 해가 진 지 오래된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두운 방에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혼자서 빛나고 있는 달도 묘한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쿡쿡. 그래. 아직 시작이야. 천천히...하나씩. 다 없애 줄 거야. 3년 전에 못한 복수, 지금 다 해버릴 거야. 내 아버지를 죽여 놓고 잘도 그 낯짝은 들고 다녔겠다. 어머니를 죽인 것도 결국 당신이나 마찬가지지. 그래. 내가 아파했던 것도 모두 다 갚아줄 거야. 쥬르가 저렇게 된 것도 모두 당신들 탓이야. 쿡쿡. 그러니까 다 없애버릴 거야. 아무도 쥬르를 데려가지 못하게. 큭. 큭큭..."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에이드리안은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검은 밤하늘 밑에 힘없이 흔들리는 나무들이 보였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걱정하지 말아요. 3년 전에는 참았지만 이젠 내가 대신 복수해 줄게. 그깟 평의회 의장 자리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저런 추한 얼굴로 날 괴롭혀온 그 사람들을 모두 없애 버릴 거야. 죽고 싶을 만큼 아프게 해서 다 없애버리게 할거야. 그 사람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그리고 에스프라드 형이 3년 전, 날 죽였어. 죽고 싶었을 만큼 아프게 했어. 하지만 이제 안 당해. 아무도 날 못 건드려. 더 이상 약한 내가 아니야. 울고만 있지도 않을 거야. 쥬르는...아무도 건드리지 않게 할거야. 그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나와 쥬르, 행복할 수 있었어. 다 없애 버릴 거야. 큭...큭큭..."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미쳐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헤르만과 에스프라드를 어떻게 해 봤자 쥬느비에브의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필사적이었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건지도 몰랐다. 3년 전부터 쓰고 있던 보기 좋은 가면을 던져 버리고 추한 얼굴로 보여 버렸다. 한 때, 친아버지 이상으로, 친형 이상으로 따르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제 그 사람들을 헤칠 생각을 하고 있다. 무섭고 치가 떨렸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으면 이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괴로워하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목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죄를 줘야 했다. 쥬느비에브가 암속성을 계승한 것이 헤르만과 에스프라드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그들에게 죄를 씌워야 견딜 수가 있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그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눈 앞에서 몰아내면, 그들에게 고통을 주면 쥬느비에브와 자신은 다시 원래의 행복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과 쥬느비에브를 괴롭히지 않고 계속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려 냉랭한 눈동자로 달을 바라보았다. "헤르만 숙부는 평의회 의장이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쳤어. 이제 그에게 남은 소중한 것은 의장이라는 직함과 그의 아들 뿐. 의장 자리도, 그의 프라이드도 산산조각 내버릴 거야.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에스프라드. 그도 쫓아내 버릴 거야. 그럼 쥬르와 난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후훗...후후후......." 에이드리안은 다시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어린 시절. 당당하고 듬직했던 헤르만 숙부와 다정한 일로나 할머니, 그리고 유벨의 부모님들, 에스프라드 형, 엘로이즈 누나, 프란체스 형, 유벨...그리고 나. 행복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달 속에 어린 시절이 보이는 듯 했다. ******** "젠장."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서글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문 기둥을 주먹으로 쳤다. 하얀 달빛과 어두운 방, 그리고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사촌 동생의 모습에 그는 허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막막한 운명에 마음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견뎌왔던 그였다. 그는 에스프라드와 헤르만이 밉고 싫어도 어린 시절의 정을 생각하며 참아왔었다. 말은 언제나 거칠게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들을 어쩌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쥬느비에브의 운명 앞에서 에이드리안은 그만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쥬느비에브의 운명.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는 정신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에스프라드와 헤르만에게 그 화살을 돌리기로 한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의 불운한 운명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워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하여 자신에게 '할 일'을 준 것 같았다. 그들을 단죄하면 다시 자신과 쥬느비에브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그러나 유벨은 이 것으로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행복해 질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도 에이드리안을 괴롭혀 온 헤르만 부자가 미웠다. 게다가 자신의 선대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였던 에이드리안의 아버지, 히스페르를 헤르만이 죽였다면 정말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진심으로 히스페르를 동경했었다. 히스페르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헤르만이 무참히 살해했다면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것과 에이드리안의 문제는 달랐다. 그는 단순히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헤르만을 몰아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에스프라드를 축출함으로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 일의 결과로 에이드리안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아름답게 미소짓던 사촌 동생, 눈 앞을 스치고 가는 프란체스와 엘로이즈, 그리고 에스프라드... 행복했던 그 때였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제119음(第119音) Once upon a Time...(1) [ 옛날 옛날에 저주받은 얼음 성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춥고 어둡고 무서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얼음 성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으로 슬프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스러운 금발의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는 따뜻하고 맑은 미소로 얼음 성을 녹여 갔습니다. 하지만 금발의 아이는 외로웠습니다. 그 때, 얼음성 안에 잠자코 있던 네 아이가 금발의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금발의 아이는 사랑 받는 이가 되었습니다. 네 명의 아이들도 사랑 받는 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멀고...먼....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이야기... ] ******** 유벨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꼬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대한 체력을 바탕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바지와 셔츠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곧장 형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의 형인 프란체스는 이미 스콜라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도 잘 하고 레플리카도 능숙하게 다루는 자랑스런 형이었지만 유벨은 형을 볼 때마다 늘 미안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가문의 후계자 후보로서 살아가고 있는 형이 몹시 불쌍했다. 게다가 형이 아무 소리하지 않고 그 어려운 공부를 하는 이유 중 한 가지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참 미안하고 마음 아픈 일이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면 다른 형제는 그 형제의 보좌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쪽에 세력을 몰아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유벨은 스콜라 입학을 몇 년 앞두지 않고서도 아직까지 즐겁게 놀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였지만 유벨도 알고 있었다. 형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 형의 마음이 더 불편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형을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유벨은 방문을 벌컥 열어제치고 외쳤다. "혀엉! 준비 아직 덜 된 거야?" 타이를 매고 있던 프란체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몇 년만에 마귀 할멈을 만나러 가는데 깔끔하게 입고 가야 할 것 아냐. 좀 기다려 봐. 에이, 정말. 한 몇 년 편하다 했더니..." 프란체스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유벨은 입을 가리고 웃음을 삼켰다. 프란체스는 일로나 할머니를 몹시 싫어했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기절한 적도 있다고 했다. 유벨도 어렴풋이 할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할머니가 엄청나게 커다란 목소리로 근엄하게 말씀하실 때마다 움찔움찔 놀래곤 했었다.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늦으면 또 잔소리 먹을 텐데?" "그렇겠지? 어이, 정말. 마귀 할멈. 그냥 나오지 말지." 프란체스는 정원을 쉬며 상의를 집어 들었다. 유벨은 형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 유벨은 자신의 망아지를 바라보며 정원을 쉬었다. 이번에 말을 선물 받은 형이 너무 부러웠다. 선물이 아니더라도 마구간에 가면 좋은 말이 가득 있지만 그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아직 어려 말을 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던 것이다. 승마 기술이야 항상 배우고 있지만 언제쯤 저 멋있는 말을 타게 될 것인지. 유벨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에 놀라며 망아지를 재촉했다. 그의 생각을 안 것인지 프란체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유벨, 너도 이 다음에 크면 말 탈 수 있을 거야. 지겹도록 탈 수 있을 거야." 자신과 닮은꼴인 회색 머리, 형의 말에 유벨은 결국 싱긋 웃고 말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데 몇 년간 소식 없으시던 할머니가 무슨 바람으로 다시 등장하셨대?" "내가 그걸 아냐. 그런데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오늘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가 온단다. 할머니랑 지금까지 같이 살았나 봐. 그 애 때문에 할머니가 그동안 자취를 감추고 계셨던 것 같아. 여자 애라고 하던데? 오늘 그 애랑 상견례 겸해서 모이는 거래." 유벨은 프란체스의 말에 놀라 하마터면 망아지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물었다. "광속성 레플리카? 그럼 우리 대의 대속성 레플리카 중에서 레벨이 제일 높은 거잖아. 그런데 일로나 할머니랑 같이 있었다고? 우에~ 그럼 둘 중 하나네." "그렇지. 마귀 할멈에게 붙들린 가련한 소녀거나." "아니면, 마귀 할멈과 똑같은 마귀 할멈 손녀거나." 유벨은 말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 프란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저택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가련한 소녀의 경우는 접고 있었다. 분명 마녀 같이 생긴 여자일 게 틀림없었다. 일로나의 거센 성격을 미루어 볼 때 가련한 소녀가 몇 년간이나 그녀를 견뎌낼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들은 그 불쌍한 소녀를 위해 한숨을 쉬어 주며 부지런히 말과 망아지를 몰았다. 그 때였다. 멀리서 친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프란체스!" 유벨은 얼굴을 찡그렸다. 엘로이즈였다. 자신보다 4살 많은 엘로이즈는 아주 부드럽고 자상한 미소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있는 것을 깨닫고 허탈하게 웃음을 뱉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형, 프란체스가 아마 입이 귀까지 걸려 웃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눈치 빠른 유벨은 프란체스가 엘로이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로이즈도 프란체스를 좋아하는 눈치라는 것이었다. 유벨은 고개를 슥 하고 돌려 프란체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프란체스는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엘로이즈!!" 엘로이즈가 숨이 찬 듯 말을 몰아 왔다. 순간, 유벨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엘로이즈의 뒤에서 말을 몰고 있는 에스프라드가 보였던 것 이다. 어째서! 1살 차이인데 누구는 말을 몰고, 누구는 망아지를 몰고! 유벨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팩 돌렸다. 사실 에스프라드에게는 알 수 없는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1살 차이에다 같은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지만 에스프라드는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우수했다. 역대 수속성 전승자들 중 가장 강력한 능력을 전승했다는 점도 그랬고, 학업이나 다른 일에서도 에스프라드는 언제나 우수하고 어른스러웠다. 그점이 유벨로서는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프란체스. 소문 들었지? 오늘 광속성 레플리카가 나온다잖아.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어. 광속성 레플리카라면 우리 중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속성인데... 와아- 정말 두근거려." 엘로이즈가 손으로 가슴을 치며 눈을 깜빡이자 프란체스는 전적으로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작은 연인들의 다정한 속삭임에 귀를 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망아지를 몰았다. 유벨은 형이....너무 부러웠다! '칫, 나도 여자 친구!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린 나이의 순진한 소망을 품으며 유벨은 우울한 표정으로 망아지를 몰았다. 그 때였다. 뭔가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벨은 갑자기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망아지를 세웠다. [ 눈부신 대지 위에 하얀 빛이 쏟아지고. 반짝이는 초목 위에 새파란 물이 쏟아지면 세상이 열리는 소리 라라라 라라라---- ] 유벨은 눈을 깜빡였다.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오싹한 노래였다. 풍부한 성량과 깨끗한 고음. 아직 어리지만, 아르헨에서 최고라 칭송 받는 솔리스트들의 노래는 죄다 들어온 유벨이었다. 유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도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엘로이즈와 에스프라드도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는 듯 했다. 유벨은 형에게 물었다. "형도 들었어?" "당연히 들었지, 임마. 내 귀가 먹었냐? 이 소리를 못 듣게." 프란체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이내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거기 노래 부른 사람 누구야?" 프란체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사륵사륵 하고 나무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 때 에스프라드가 프란체스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나무 위쪽을 가리켰다. "형. 저기!" 프란체스를 비롯한 세 사람은 에스프라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금발의 작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금발의 소녀는 하얀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들켰네. 후훗. 할머니한테 혼나겠다." 소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에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금발의 소녀는 마치 인형 같았다. 유벨은 침을 꿀꺽 삼키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저, 저렇게 귀여운 애가 있다니... 여자 친구! 그래, 나도 형처럼 여자 친구를!' 유벨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순간, 에스프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차 싶은 심정으로 유벨은 에스프라드를 쳐다보았다. 선수를 치다니! "이 봐! 아까 노래 네가 부른 거였어? 넌 누구지? 여긴 비인 영지야, 다른 사람은 함부로...아니, 그것보다 거기 있으면 위험해! 내려와!" "쿡." 금발의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숲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소녀의 손짓에 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울창한 나무뿐이었다. 네 사람은 인상을 쓰며 다시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소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소녀가 있던 자리에는 그저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과 그 자리를 비추고 있는 햇빛뿐이었다. ******** 대저택의 응접실로 들어서면서도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계속 사라져 버린 금발의 소녀 이야기만 했다. "엘로이즈, 아까 그 노래, 대단했지? 정말 누구였을까?" "글쎄. 프란체스, 혹시 손님으로 온 사람이라든지..." 프란체스와 엘로이즈가 한창 금발의 소녀에 대한 토론을 하는 동안 유벨은 머리 속으로 다시 그 소녀를 만나 여자 친구가 되어 줄 것을 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차분한 표정의 에스프라드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맛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풍채 좋은 일로나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등장과 동시에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고 유벨도 할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에스프라드만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할머니를 주시하고 있었다. 할머니를 못 만난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겉모습만을 봐서는 달라진 것이 없는 할머니였다.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두 손을 꼬옥 쥐고 곧 터져 나올 할머니의 잔소리를 기다렸다. 사실 오는 길에 만난 그 소녀덕분에 약속 시간에서 약간 늦게 도착했던 것이었다. 일로나 할머니의 무서움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인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침을 삼키며 할머니의 우렁찬 목소리를 기다렸다. "오래간만이구나." 일로나 할머니의 첫마디였다.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첫마디가 잔소리가 아니라니!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에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오히려 당혹스럽고 무서웠다. 또 무슨 호통을 치시려고 저렇게 자상한 목소리로! 그러나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동안 잘 지냈으리라 믿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비인 가에 돌아온 것도 있고 또, 너희들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서다. 집사!!" 일로나 할머니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집사를 불렀다. 저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목소리가 이상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커다란 목소리가 아닌가! 어쨌든 할머니의 달라진 행동에 너무나 어리둥절한 네 사람이었다. 유벨은 할머니가 병을 앓아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결론을 내리며 혼자 뿌듯해 하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할머니의 집사가 들어왔다. "예. 마님.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라고 전해 주게."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네 명의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자리가 아닌가! 네 사람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하얀 원피스 자락이 보였다. 그리고...방금 전 만났던 그 금발의 소녀가 나타났다! "할머니, 찾으셨어요?" 소녀는 다소곳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일로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렴, 아가." 순간, 프란체스를 비롯한 네 사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가? 아가라고? 저 일로나 할머니의 입에서 저렇게 낯간지러운 소리가?' 네 사람이 공황 상태를 맛보고 있는 동안 소녀는 사뿐사뿐 걸어 일로나의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생긋 미소지으며 할머니의 팔에 볼을 비볐다. "할머니, 아까 셀로아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저 주시려고 '도로스 차' 사셨다면서요? 고마워요, 할머니." "인사는 나중에 하렴. 오늘은 여기 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모두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이자, 앞으로 전승을 하게 될 후보자란다." 일로나 할머니가 자상하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네 사람은 다시 정신적 공황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평상시에 험악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할머니였다. 어째서 저 소녀에게 저렇게 상냥한 미소와 표정을 보여주시는 건지! 어쨌든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프란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우리 아까 만났지? 난 프란체스. 이 쪽은 엘로이즈, 그리고 유벨과 에스프라드야. 잘 지내자." "아까 만났다니? 너, 또 몰래 외출했던 게냐?" 일로나 할머니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소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 나, 내 이름 소개해야 한다고요." 소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헛기침만 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사람은 그제야 깨달았다. 금발의 소녀의 미소에 얼음 같던 일로나 할머니가 녹아버린 것이다! 금발의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미레이유. 미레이유 리리아 로르 비인이야." 제120음(第120音) Once upon a Time...(2) 초봄이라 저녁에는 불을 피워야 했다. 일로나는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일로나는 입을 열었다. 저녁의 쌀쌀한 기운 탓이었는지 목이 깔깔했다. "어떻더냐. 아이들을 만나보니." 일로나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미레이유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힘없이 말했다. "..으음... 날 별로 좋아하는 거 같진 않았어요. 그냥...그런 것 같았어." 미레이유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일로나를 향해 활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일로나의 팔에 매달렸다. "하지만 할머니가 있으니까 외롭지 않아. 나, 가족이 없는 게 아니니까. 할머니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쯧. 녀석. 나 같이 다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아이들을 만나고 해서 정을 받거라. 부모가 없다고 움츠러들지 말고." 일로나는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며 미레이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레이유는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지만 난 움츠러들지 않아. 난 '나'니까. 나를 잃어버리는 일 따위 하지 않아." 미레이유는 자신을 위로하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에게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친구든...혹은 가족이든...따스한 존재를 곁에 두고 싶었다. 오랜 시간 혼자 있었기에 사람이 그리웠다. ******** 다음 날. 미레이유는 호숫가로 산책을 갔다. 바람이 시원해서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얀 원피스를 깔끔하게 차려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미레이유는 숲길을 지나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르른 나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따스한 햇살에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 하늘, 멀고 아득한 파란 하늘 파란색을 닮고 싶어 작은 나무가 가지를 뻗어 올리네 .... ] 미레이유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산책이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을 공기 중으로 퍼뜨렸다. 발밑에 굴러가는 돌멩이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어준 미레이유는 나무 아래 솟아있는 작은 풀을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작은 생명의 신비랄까. 작은 풀이 안간힘을 내어 피어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응원을 해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좀 더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렀다. [ ...상냥하고 따스한 파란 하늘. 나무는 가지를 뻗어. 파란색이 물들게... 하지만 하늘은 너무나 멀고 아득한 꿈 속 같은 그 곳...] 어두운 숲의 끝이 보였다. 환한 빛이 쏟아지더니 이윽고 파란 물이 가득한 넓은 호수가 드러났다. 미레이유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빛에 반짝이는 맑은 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름다워....너무 예뻐." 미레이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람에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찰랑. 찰랑. 바람 부는 소리와 나무들이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 미레이유는 가슴 벅찬 감동에 다시 눈을 떴다. 저절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 ...하지만 상냥한 하늘. 따스하고 너그러운 파란 하늘. 물빛 같은 햇살로 나무를 푸르게 만들어. ] 미레이유는 노래를 마치고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미레이유는 놀란 얼굴을 한 채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제 만난 네 명의 아이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레이유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회색 머리의 두 형제, 프란체스와 유벨이 웃으며 말했다. "히야- 앵콜이야. 앵콜. 정말 멋진 걸?" "그러니까 내가 기막힌 노랫소리라고 했잖아, 형." 미레이유는 당혹스러웠다. 다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내 노래를 듣고 있었던 건가? 미레이유가 한참 고민에 빠졌을 때 검은 머리를 얌전하게 빗어 내린 엘로이즈가 앞으로 나왔다. 차분한 인상을 주는 그녀는 다짜고짜 미레이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미레이유. 정말 반해 버렸어. 일로나 할머니를 그렇게 홀딱 녹여 버린 모습이나, 노래부르는 모습이나, 너무너무 멋진 걸. 그렇지, 에스프라드?" "응. 노래는 정말 멋졌어. 아, 일로나 할머니와도 걸작이었지." 약간은 날카로운 인상의 에스프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미레이유는 상기되는 얼굴을 감싸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프란체스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미레이유. 이제부터 같이 있자. 어, 그러니까..." 프란체스가 멋쩍게 말을 더듬자 엘로이즈가 나서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함께 지내자는 거야. 같이 노래도 하고, 공부도 하고. 어른들 말씀 들었어. 부모님이 안 계시다며? 우리가 가족이 되어 줄게. 에스프라드도 좋다고 하고 유벨은 벌써 너한테 반한 거 같으니까 문제없어." "누나! 내, 내가 언제 바, 반했다고 그래?" 유벨이 엘로이즈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심술난 듯 뒤돌아 섰다. 미레이유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로이즈가 집게손가락을 흔들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동정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우리 사실 요 앞에서 만났어. 너와 친구가 되려고 각자 여기 오고 있었던 거야. 우린 네가 너무 맘에 들었거든. 넌 어때? 넌 우리가 맘에 드니?" "어서 맘에 든다고 해!!" 유벨이 뒤돌아선 채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미레이유는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 이내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엘로이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다들. 나도...친구가, 가족이 생겨서 너무 기뻐." 미레이유의 미소에 유벨은 겸연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었고 프란체스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프라드 또한 느긋한 미소를 띄었고 엘로이즈는 즐겁다는 듯 미레이유를 덥석 끌어안았다.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환한 호숫가에 오래도록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그렇게 다섯 아이들은 서로에게 몹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미레이유라는 존재가 그들의 중간으로 들어오며 그들은 소중한 고리를 얻었다. 지금까지는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라는 끈이 네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미레이유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서 새로운 끈이 생겼다. 에스프라드와 미레이유는 그 중 가장 단짝 같은 존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미레이유와 마치 친자매 같은 사이가 되었으며 프란체스 또한 미레이유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위한 연결 고리를 찾았다. 그리고 유벨. 유벨은 미레이유에게 첫 눈에 반해 그녀를 여자 친구로 만들 거창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미레이유와의 첫 만남 후, 며칠만에 깨어져 버렸다. 뽀뽀하면 결혼해야 한다는 지극히 어린 아이다운 발상으로 미레이유에게 뽀뽀를 시도했다가 그녀에게 변태 취급을 당했고 그만 발끈한 그는 결국 그녀와 대판 싸우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다섯 사람 사이에는 미레이유라는 끈을 중심으로 아주 끈끈한 정이 싹텄다. ******** 문제의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은 에스프라드와 미레이유, 그리고 유벨이 함께 개울가로 놀러간 날이었다. 한창 단풍이 알록달록하던 가을의 어느 날, 에스프라드와 미레이유가 산책 겸해서 근처의 개울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유벨을 만났고 유벨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사실 아직 미레이유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 유벨이었다. 싸우긴 했지만 첫사랑의 감정이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유벨은 겉으로는 땍땍거렸지만 여전히 미레이유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레이유는 에스프라드와 달라붙어 다녔기 때문에 그가 끼여들 틈이라고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에스프라드를 떼어놓고 미레이유와 친해질 기회라고 생각하며 유벨은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던 것이다. 개울가의 물은 너무 깨끗했다. 미레이유는 하얀 모자를 벗어 들고 에스프라드에게 건넸다. "에스프라드 오빠. 나, 물에 들어가 볼래. 너무 시원할 것 같아." "조심해. 바닥이 미끄러울 것 같은데..." 에스프라드가 미소지으며 말하자 미레이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치맛자락을 살며시 잡아들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다. "야아- 차가워! 기분 좋다-" "난 여기 앉아 있을게." 에스프라드는 미레이유의 즐거운 모습에 기분 좋게 웃으며 풀밭에 앉았다. 그러나 기분 좋은 에스프라드의 모습과는 상반되게 유벨의 표정은 흡사 썩은 사과 씹은 표정이었다. "칫." 유벨은 괜히 심통을 부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모자를 에스프라드에게 맡긴 걸까! 자신이 더 가까이 있었는데! 유벨은 팔짱을 끼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심술난 표정을 본 미레이유는 장난스레 미소짓더니 손을 흔들었다. "유벨! 나 좀 봐!" "왜?" "저어-기. 저기 나무 열매 열린 것 같아. 나, 먹고 싶은데 좀 따주면 안돼?" 미레이유의 미소를 보며 유벨은 아랫입술을 쑥 내밀었다. 어디, 어디야? 유벨은 숲 안쪽을 두리번거리다 드디어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를 발견했다. 저거로군! 유벨은 일부러 심술이 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찮은 거만 나 시키고. 칫." 그러면서도 신나게 숲으로 달려가는 유벨이었다. 에스프라드도 있는데 자신에게 부탁하다니! 너무나 기분 좋은 유벨이었다. 달려가는 유벨의 뒷모습을 보며 미레이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바보같다니까. 나한테 매일 심술만 부리면서...쿡..." 미레이유는 웃으며 다시 개울 속의 맑은 물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물 속에 작은 물고기 같은 것이 보이는 듯 했다. 손가락 만한 작은 물고기를 보며 미레이유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스프라드에게 말했다. "물고기 있어. 물고기. 야아- 신기하다. 어디..." "미레이유. 조심해. 전에 유벨도 미끄러졌..." 풍덩. 에스프라드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물 속에 빨려 들어간 미레이유 때문에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놀라 쿵쾅거리는 가슴을 두드리며 미레이유의 모자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잠시 후, 물 속에서 미레이유의 금발이 떠오르더니 이내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미레이유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젖은 채 개울 밖으로 나왔다. "으...으으....왜 저렇게 미끄러운 거야? 으- 추워." 미레이유는 얼굴에 딱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풀밭으로 걸어나왔다. 에스프라드는 놀란 얼굴로 미레이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어디 다치거나 하진 않았어?" "응. 에취! 그냥 들어가지 말걸. 아, 춥잖아. 빨리 집에 가야겠다. 아참, 유벨...." 미레이유는 풀밭에 풀썩 주저앉았다. 유벨 때문에 집에 갈 수도 없고 푹 젖은 옷 때문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에스프라드가 옆에 앉아 머리의 물기를 짜주었다. "내 옷이라도 입을래? 코트라서 무릎까지는 올 거야." "훌쩍. 그럴까? 추워라. 유벨은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오고." 미레이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에스프라드는 웃으며 입고 있던 검은 빛이 도는 자주색의 얇은 코트를 벗어 미레이유에게 건네주었다. "저기, 뒤쪽으로 가서 입고와." 미레이유는 에스프라드의 코트를 받아들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원피스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에스프라드가 미레이유의 원피스를 다시 올려주며 소리쳤다. "미레이유! 무슨 짓이야? 아무리 우리가 어려도...." "괜찮아. 같은 남잔데 무슨 상관이야." 미레이유는 태연하게 말하고는 원피스를 훌렁 벗었다. 에스프라드는 다시 한 번 놀란 눈으로 미레이유를 쳐다보았다. 미레이유가 원피스 안에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레이디들이 원피스 안에 바지를 입던가? 그는 그다지 여성 복식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레이디의 경우, 하얀 속바지를 입지, 그냥 바지를 입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미레이유는 어느 새 코트를 껴입고 단추를 다 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올려보고 있었다. "휴- 살 것 같다. 음? 에스프라드 오빠. 왜 그러는데?" 미레이유의 물음에 에스프라드는 당황한 듯 눈동자를 깜빡이다 순간 머리 속을 관통한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같은 남자? 그게 무슨 소리야? 남자? 누가? 너, 남자야?" "어? 무, 무슨 소리...핫!" 미레이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뒤돌아서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 들켰잖아. 할머니...어떻게 해." 그 때 뒤쪽에서 무언가 와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레이유는 자기도 모르게 뒤돌아 섰다. 에스프라드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들고 있던 과일을 떨어뜨린 채 유벨이 마치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미레이유가...남자?" 미레이유는 다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 아니 그의 일생 최대의 고비였다. 지금까지 잘 지켜오고 있었던 비밀이었다. 미레이유는 다시 침을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스프라드의 표정과 유벨의 표정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미레이유는 일단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녀, 아니 그는 뒤돌아서 집 쪽으로 무작정 뛰어갔다. 유벨의 고함 소리도 모른 척 하며 정신 없이 달려갔다. 에이, 다 할머니 때문이야!! 제121음(第121音) Once upon a Time...(3) "그 예쁜 얼굴로 남자라고? 하아- 여자인 내가 다 한숨이 나오네." 엘로이즈는 창턱에 팔을 기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프란체스가 노란색과 초록색의 실로 짠 스웨터를 잡아뜯으며 엘로이즈에 이어 한숨을 쉬었다. "유벨의 첫사랑은 끝이 났구나. 불쌍한 내 아우, 유벨... 벌써 며칠째 얼굴이 핼쑥해졌잖아. 아아-불쌍한 나의 아우..." "진짜! 시끄러워, 혀-엉!" 옆에 앉아 있던 유벨이 발끈 화를 내자 프란체스는 눈썹을 실룩이며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사실 유벨은 심히 충격을 받아 며칠째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미레이유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만나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왜 지금까지 남자라는 사실을 속였는지. 그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스프라드가 찻잔을 기울이며 유벨에게 말했다. "다른 어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았어." "내가 고자질쟁인 줄 아나?" 유벨은 화난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그 때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미레이유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레이유는 여전히 여장을 하고 있었다. 노란색의 원피스를 입은 미레이유의 모습에 유벨은 꽥 소리를 질렀다. "남자면서 왜 여자 옷을 입고 다니냐!!" 유벨의 고함소리에 미레이유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약간은 의기소침한 얼굴로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창가에 있다가 소파에 앉던 엘로이즈는 약간 말라 보이는 미레이유의 얼굴에 놀랐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미레이유, 얼굴 말랐잖아?" "하, 할머니한테 잔소리를 많이 들어서..." 미레이유는 힘없이 말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유벨은 미레이유에게 단단히 심술이 난 것인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우릴 놀렸던 거야?" "유벨! 가만 좀 있어 봐! 미레이유, 여장한데는 필시 이유가 있었겠지. 우리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말해 줄 수 있어?" 프란체스는 유벨의 뒤통수를 치며 동생을 흘겨본 다음 미레이유에게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유벨은 오랜만에 보는 형의 의젓한 표정에 혀를 내두르며 입을 다물었다. 미레이유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해. 의도적으로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할머니가 여장하지 않으면 여기 있을 수 없대. 그래서 그런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 아니면 다시 떠나야 한다고 그랬어. 전에 살던 별장으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셨는 걸." "일로나 할머니가?" 에스프라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미레이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프라드를 비롯하여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유벨까지도 너무 놀랐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일로나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필시 중요한 이유가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허튼 소리할 분이 아니었다. 가문의 가장 어른이신 일로나 할머니를 잘 알고 있었던 네 사람이었기에 그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일일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언가 필시 중요한 뜻이 있었다. 갑자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스프라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할머니께 들켰다고 말씀드린 거야?" 에스프라드의 물음에 미레이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힘없이 말했다. "응. 그래서 혼났어. 나, 오늘 떠나. 여기 더 있을 수 없대. 들켰으니까 다시 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어." "뭐? 그건 안 돼!"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 유벨을 바라보며 미레이유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멋쩍어진 유벨은 머리를 긁으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 그러니까...그게..." 겸연쩍어 하는 유벨을 밀어내며 프란체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유벨 말이 맞아. 우리, 말했잖아. 네 친구도 되어 주고, 가족도 되어 주기로. 우리만 모른 척 하면 그만 아니야? 가지 마, 미레이유. 네가 남자든, 여자든 우리들 가족이잖아." "응. 나도 미레이유가 떠나는 거 싫어. 이제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걸. 우리가 꼭! 비밀을 지켜줄 테니까 가지 마, 미레이유." 엘로이즈가 부드럽게 미소를 띄우자 미레이유는 살며시 미소를 띄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레이유는 고개를 들어 환하게 미소지었다. 유벨이 겸연쩍은 듯 눈을 깜빡이다 씨익 웃어주었다. 에스프라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미레이유는 따스한 느낌에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고 일로나 할머니가 나타났다. "미레이유, 작별 인사는 다 된 거냐?" 일로나 할머니의 말에 다섯 사람은 긴장했다. 그 때, 갑자기 유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상한 손짓을 하며 말했다. "미, 미레이유는 여자에요. 그렇죠, 할머니?" "그, 그럼요. 미레이유는 여자고 말고요. 그렇지, 엘로이즈?" 유벨을 힐끗 쳐다보던 프란체스가 엘로이즈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프란체스의 재촉에 엘로이즈는 애써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 말고. 미레이유가 여자지, 어떻게 남자니? 아, 안 그래, 에스프라드?" "그럼요, 누나. 일로나 할머니. 미레이유는 여.자.니까 떠나지 않아도 좋아요. 그렇죠?" 에스프라드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일로나 할머니는 눈썹을 실룩이더니 뒤돌아 섰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더니 이내 언제나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미레이유, 오늘 레이디의 예법에 대해서 솔레게트 선생이 수업을 한다고 했잖느냐. 놀지 말고 어서 수업 준비해라." 일로나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하며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나가자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고 유벨은 팔을 휘두르며 탄성을 질렀다. "야호! 이제 됐다!!"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네 사람의 시선에 멋쩍어진 유벨은 혼자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유벨이 자리에 앉자 엘로이즈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야아- 이제 된 거야, 그렇지? 일로나 할머니가 모른 척 해주실 것 같아. 미레이유,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럼, 언제나처럼 우리랑 함께 할 수 있다고. 아참, 우리 내일 영지 근처 과수원에 놀러 가기로 했잖아. 에스프라드, 준비 다 해 놨지?" 프란체스가 맞장구를 치며 에스프라드를 돌아보았다. 에스프라드 또한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과수원 허가증 받아 놨어요. 누나가 도시락 준비하기로 했고." 어느새 왁자지껄해진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레이유는 따스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지켜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어젯밤,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에 밤새 울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들 한결 같이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미레이유는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 미레이유 아냐." "응?" 에스프라드와 유벨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프란체스와 엘로이즈도 눈을 깜빡이며 미레이유를 쳐다보았다. 미레이유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것도 비밀인데 가르쳐 줄게. 내 이름, 에이드리안이야. 에이드리안 유디스레느 로르 비인. 그게 내 이름이야." 다섯 아이들은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어른들이 모르는 아이들만의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아주 비밀스럽고 두근거리는 느낌! 엘로이즈가 웃으며 말했다. "멋지다! 우리 그 뭐더라, 비밀 결사댄가? 하여튼 그런 거 같아! 미레이유, 아니 에이드리안의 비밀은 우리 다섯 사람만 아는 거야. 어른들께는 절대 비밀! 다들 알았지?" "맡겨 줘, 엘로이즈 누나! 프란체스 형만 입단속 잘 하면 문제없어!" 유벨이 자랑스럽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자 프란체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유벨의 뒤통수를 쳤다. "너나 잘 해. 아우." "미레, 아니 에이드리안. 너 좋겠다? 다들 널 지켜주기 위한 왕자님을 자처하고 있으니." 에스프라드가 웃으며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행복한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들의 따스한 우정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미레이유, 아니 에이드리안은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로도 계속 '미레이유'라는 이름을 쓰고 여자 행세를 했다. 일로나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에이드리안의 이름이 밝혀지면 더 이상 비인 가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에이드리안을 둘러싼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비장한 사명감을 띄고 비밀 엄수를 맹세하였다. 그렇게 작은 비밀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더욱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되었다. 따스한 햇살이 아주 기분 좋은 날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청록색의 원피스 자락을 풀밭에 얌전하게 펴며 자신의 앞에 있는 강아지를 살폈다. 하얀털의 무척이나 귀여운 강아지였다. "강아지야, 이리 와 봐. 안아줄게."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향해 작은 팔을 벌렸다. 그러자 하얀 강아지가 폴짝폴짝 뛰며 품에 안겼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너무 기분 좋았다. 강아지는 할머니의 친구 분이 맡긴 것이라고 했다. 잠시동안 저택에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에이드리안의 눈에는 강아지가 너무 귀엽고 예뻤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자신이 강아지를 돌볼 거라고 말하고는 강아지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은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강아지야. 좀 있다 내가 맛있는 거 줄게." 에이드리안은 강아지에게 볼을 비비다 문득 저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에스프라드 오빠! 유벨!" 에스프라드와 유벨이 옆구리에 책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러자 에스프라드가 짓궂은 얼굴로 다가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빠라니...소름끼쳐. 에이드리안 아가씨." "그러게. 흥." 유벨이 퉁하게 말했다. 첫사랑이 남자라는 충격으로 아직 에이드리안에게 완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그였다. 그가 한편으로는 너무 좋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얄미웠다. 진작 남자라고 말했으면! 유벨은 심술궂은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다 그의 품에 안긴 강아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웬 강아지야?" "할머니 친구 분 강아지래. 귀엽지?"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얀 강아지는 가르릉 거리며 기분 좋게 늘어지고 있었다. 에스프라드가 손을 뻗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혈통 좋은 강아지인 거 같네? 손질도 잘 되어 있고." "응, 귀여워. 에스프라드 형. 나 강아지 한 마리 사 줘. 전에 나랑 카드 내기해서 졌잖아." "사 줄게. 내기에서 지면 아무 거나 해주기로 했잖아." 에스프라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꽃씨가 강아지의 코를 간질였던 것인지 강아지가 날뛰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강아지를 품에 꼬옥 안으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괜찮아. 강아지야. 움직이지 말래두." "에이드리안, 그냥 놔 줘." 계속 몸을 들썩거리는 강아지를 보고 에스프라드가 외쳤다. 강아지는 연신 몸에 힘을 주며 에이드리안을 팔을 긁어댔다. 에이드리안은 팔에 따끔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참았다. "하지만 에스프라드 형." "그냥 놔 줘! 다치잖아." 유벨이 못 참겠다는 듯 강아지에게 다가왔다. 유벨이 갑자기 다가오자 강아지는 놀란 것인지 더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에이드리안의 팔을 꾸욱 물고 말았다. "아얏!" 에이드리안은 놀라 강아지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솟고 있었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팔에서 솟고 있는 피를 보고 놀라 멀뚱하게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스프라드도 놀란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에이드리안의 목에서 알 수 없는 흐느낌이 세어 나왔다. "피...피...피가! 흐윽...피가...에스프라드 형, 나, 피 나. 흐윽....어어어엉! 엉 엉엉! 으어엉!" 에이드리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에스프라드와 유벨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에이드리안의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 울지 마. 울지 마." 에스프라드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이드리안의 손목에 싸매 주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레플리카를 쓰기 시작했다. 유벨은 손수건으로 에이드리안의 눈물을 닦아주며 등을 두드렸다. 아직 작은 꼬마에 불과한 금발의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며 유벨은 심각할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에이드리안을 지키지 못했다! 유벨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에이드리안의 등을 두드렸다. "에이드리안, 울지 마. 나, 나도 슬프잖아. 어엉--- 엉엉. 어어어엉----" "야, 유벨! 울지 마!" 유벨까지 합세해 울기 시작하자 에스프라드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울지 말라니까!!" 그리고 그 날, 에이드리안은 너무 많이 우는 바람에 탈진해 버렸고, 결국 며칠 간 자리 보전을 해야 했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자리에 누운 그 다음 날, 그를 찾아와 또 다시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번에는 유벨이 탈수 증세로 드러누워 버렸다. 유벨은 프란체스와 에스프라드에게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끙끙 앓아야 했다. 제122음(第122音) Once upon a Time...(4) 화창한 어느 날, 유벨은 오랜만에 비인 가의 대회랑을 찾았다. 대회랑 복도에는 대속성 레플리카를 전승 받은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바닥에 드리워진 빛을 바라보며 유벨은 늘 그가 찾던 초상화를 찾았다. "찾았다. 언제 봐도 멋집니다, 숙부님." 유벨은 씨익 웃으며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유벨이 가지고 있는 풍속성 레플리카의 선대 전승자였다. 안타깝게 사고로 죽었지만 선대 대속성 레플리카 중 가장 레플리카의 힘이 강력하다고 일컬어졌던 사람이었다. 정치적 활동을 싫어해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도 않았지만 가끔씩 그가 노래를 부를 때면 모든 사람들이 경외의 눈을 했다고 한다. 그는 비록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마음 속 깊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나도 숙부님처럼 되고 싶어요. 강하고 아름답고." 유벨은 빙그레 웃으며 초상화 밑에 쓰여져 있는 이름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파란 눈동자가 어린 눈에도 퍽 멋져 보였다. 천천히 초상화를 살피던 유벨은 순간 눈썹을 실룩였다. "어라? 이상하네. 오늘따라 이상하게 친근한 느낌이 드네. 어디서 본 듯한...에이, 모르겠다."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 때였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벨! 거기 있어?" "어?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이 오늘도 노란색 원피스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다시 심술이 났다. 왜 남자인 거야? 유벨은 다가온 에이드리안에게 고개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 "휴우- 오늘...책 빌리러 같이 가기로 했잖아. 비앙카 아주머니가 너, 여기 있다고 하셔서... 휴우- 숨차다." 에이드리안은 연신 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벨은 심드렁하게 초상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꼭 귀찮은 건 나한테 그러지? 에스프라드 형이랑은 오페라 구경이나 이런 것만 하고." "유벨, 왜 그래? 나한테 심술 좀 그만 부려. 자꾸 그러다간 머리에 뿔 난다구. 내가 남잔 게, 내 탓이야?" 에이드리안은 유벨의 심술에 얼굴을 찌푸리다 유벨이 보고 있는 초상화에 초점을 맞췄다. "뭘 보고 있는 건데? 어? 이건..." "네가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이 아니야. 이 분은 내 선대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야, 에이드리안. 듣고 있냐?" 유벨은 멍하게 초상화에 시선을 주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역정을 냈다. 그러나 여전히 에이드리안은 초상화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벨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순간, 에이드리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뭐?" "내 아버지야. 히스페르 이스타냐 로르 비인. 내 아버지. 풍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였구나..." 에이드리안의 중얼거림에 유벨은 넋 나간 얼굴로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이내 에이드리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벨, 저 분이 내 아버지야. 할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셨는데 아주 멋진 분이시네. 난 초상화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응... 이렇게 생기셨구나. 아버지는...어떤 분이셨을까?"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며 침을 삼켰다. 히스페르가 에이드리안의 아버지라고? 유벨은 그제야 오늘따라 히스페르의 모습이 친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았다. 유벨은 초상화와 에이드리안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과 히스페르는 닮은 점이 많았다. 유벨은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에이드리안의 등을 두드렸다. "녀석! 그렇게 불쌍한 얼굴하면 어쩌냐? 에이드리안, 히스페르 숙부님은 엄청 멋진 분이셨다고. 선대 대속성 레플리카 중 최고였어!" 유벨의 말에 에이드리안이 눈물 어린 눈으로 웃었다. 유벨은 씨익 웃으며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숙부님! 에이드리안이 여기 온 이유를 알겠어요. 방금 깨달았다고요. 숙부님 대신에 저더러 에이드리안을 보살피라고 여기 보낸 거죠? 맡겨 두시라고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숙부님 대신에 에이드리안을 잘 보살필 게요. 에이드리안이 아주 행복해지도록 할게요.'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내가 히스페르 숙부님 대신이 되어 줄게. 이제부터 심술도 안 부리고 착한 형이 되어 주마. 앞으로는 에드라고 불러야겠다. 숙부님도 분명 널 그렇게 부르셨을 거야. 느낌이 온다고. 그런데 넌 왜 나한테 형이라고 안 부르냐?" "네가 언제 형 구실을 해 줬냐?" 눈물 가득한 눈으로 에이드리안이 웃자 유벨은 씨익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 날부터, 유벨이 에이드리안에게 심술부리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프란체스와 에스프라드가 유벨이 뭔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렸지만 유벨에게는 가슴 벅찬 감동만이 가득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분의 아들이 바로 곁에서 자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도 에이드리안은 보살펴 주고 싶은 아이였다. 에이드리안이 즐겁게 미소지으면 아주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유벨은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 한 여름이 지난 어느 날, 에스프라드는 자신의 집에 책을 빌리러 오겠다던 에이드리안이 약속 시간이 지나서도 나타나지 않자 걱정스런 마음에 그의 저택을 찾았다. 저택 현관에 들어서자 일로나 할머니의 초조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프라드는 할머니의 표정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할머니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에이드리안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할머니는 에이드리안 덕분에 아주 자상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었다. 에이드리안의 따스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고 싶어진다고 하셨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미소를 떠올리며 살며시 웃었다. "할머니, 왜 나와 계세요?" "아! 잘 왔구나, 에스프라드. 에이드리안에게 좀 올라가 보렴." 에스프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으로 향했다. 에이드리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일로나 할머니의 저런 약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에스프라드는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에이드리안의 방에 들어가자 에스프라드는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불도 켜놓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안에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에스프라드는 불을 켜고 침대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이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 쓴 채 울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이불을 끌어내리고 말했다. "에이드리안, 울어? 프란체스 형네 저녁 만찬 간다더니, 무슨 일 있었어?" 에이드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에스프라드는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에이드리안이 빨개진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닦자 에스프라드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너어- 또 어리광이지? 그 집 식구들 보니까 부러웠던 거지?" "아, 아니야!" 에이드리안이 심술부리듯 아랫입술을 쑤욱 내밀었다.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집 식구들, 화목한 가정의 대명사잖아. 상냥한 비앙카 아주머니에다가, 숙부님도 멋지고, 프란체스 형에다 유벨까지. 모두 성격 좋은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 보니까 부러웠던 거지? 너, 고아라는 게 싫었던 거지?" "아, 아니라니까!" 강하게 부정을 하는 에이드리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에스프라드는 여전히 미소 띈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받아 에이드리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 이럴 때 참 한심한 거 아니? 네가 왜 고아야? 왜 아버지, 어머니가 없어? 어머니 대신에 멋진 할머니가 계시고, 아버지 대신에 멋진 숙부가 있잖아. 나도 있고, 엘로이즈 누나도 있고. 아버지가 너 데리고 오래. 너 주려고 일부러 3단 케이크 사오셨어. 어서 옷 입고 가자. 선물도 사오신 것 같아." "헤르만 숙부님이?" 에이드리안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에스프라드는 대답대신 미소를 보여주었다. 에이드리안은 활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와아- 배불러. 3단 케이크는 너무 큰 거 같아. 다음에는 2단 케이크 사오시라고 해야겠다. 그치, 형? 헤르만 숙부는 너무 좋아. 너무 멋지고, 잘 생기고, 친절하고! 그렇지만 선물은 좀 그랬어. 인형이라니 너무하잖아." 에이드리안이 집 앞 계단에 앉아 다리를 쭈욱 뻗으며 웃자 에스프라드는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까지 울어 놓고는. 아참, 아버지가 너랑 나, 약혼시킬지도 모르는거, 알아? 너, 아버지가 친딸처럼 예뻐하시잖아." 에스프라드의 말에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이내 두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 마. 난 예쁜 레이디랑 결혼할 거야. 이미 상대도 정해 놨다고." "아하! 그 아가씨? 나도 미안하지만 남자랑은 사양이야." 에스프라드와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가만히 미소지었다. 부는 듯 마는 듯 스쳐가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상냥한 군청색 하늘도 몹시 따스하게 느껴졌다. 에스프라드의 가족과 함께 하면 진짜 가족과 함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유벨의 가족도 물론 좋았다. 모두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준다. 하지만 문득문득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네 사람이 화목하게 웃고 있을 때 자신만이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에스프라드의 가족과 함께 할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숙부도, 엘로이즈 누나도, 그리고 에스프라드 형도 모두 그를 먼저 위해 주고 아껴준다. 마치 그 속에 진짜 포함되어 있는 사람마냥 허물없고 친근하게 대해준다. 그 느낌이 너무 소중하고 따스해서 에이드리안은 아주 행복한 느낌을 받았다. 에이드리안은 무릎을 두 팔로 감싸안은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이 보였다. 하얗게 빛나는 예쁜 달. "형, 고마워. 나, 형이 있어서 아주 행복한 거 같아. 외롭지 않아. 유벨도 있고, 프란체스 형이랑 엘로이즈 누나도 있고. 할머니랑 헤르만 숙부님도 있고. 아주 행복해." "그래. 오래오래 행복해야 돼, 에이드리안." 에스프라드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에이드리안은 즐거운 듯 눈을 감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행복을 오래오래 느낄 수 있다면...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 화사한 봄 날, 에이드리안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미소를 흘리며 에스프라드를 만났다. 에스프라드는 자신의 방 안 쪽의 커다란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에이드리안, 무슨 좋은 일 있어?" "응. 나, 아주 귀여운 꼬마를 만났어. 까만 머리에다가 볼도 이렇게 토실토실한 게...아주 귀여웠어." 에이드리안이 하얀 원피스 자락을 우아하게 펄럭이며 의자에 앉자 에스프라드는 웃으며 차를 따라주었다. "이 거, 큰 일인데? 영광스런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께서 까만 머리 꼬마에게 한 눈에 반하셨다?" "농담 마. 그냥 귀여운 꼬마애였어. 알잖아. 나한테는...어? 이 거 제젠 차잖아. 요즘엔 구하기 어려울 텐데 잘도 구했네? 음- 향 좋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찻잔을 기울이자 에스프라드는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많이 먹어. 차도 많이 있으니까. 너 주려고 제젠 찻잎 싸놨으니까 갈 때 가져가. 아참, 새로 받은 저택은 편해? 일로나 할머니가 섭섭하신 눈치셨어." "뭐 바로 옆인걸. 할머니는 거의 매일 집에 오시니까. 아참, 나, 내일도 꼬마 만나기로 했어. 할머니 손님인 것 같기도 했는데... 흐음... 어쨌든 눈도 동그란 게...아주 귀여웠어." 에이드리안은 꼬마가 생각난다는 듯 씨익 웃으며 쿠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에스프라드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너, 내일 기원제 사당에 가는 거 몰랐어? 하루 종일 걸릴 텐데..." "앗! 맞다!" 에이드리안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나, 바본가 봐. 괜히 약속했네. 휴우-" 에스프라드는 자책하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에 미소를 흘리며 찻잔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에이드리안의 눈에 그렇게 귀엽게 보인 꼬마가 궁금한 그였다. 도대체 어떤 애길래? 에스프라드는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 에스프라드의 집에서 나와 찻잎이 든 종이 봉투를 흔들며 가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숲 안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랫소리는 분명 아름답다고 말해 줄만 했다. 그렇지만 아주 묘한 느낌이 드는 노래였다. 아름답지만 날카롭고...처연한 노래였다. 에이드리안은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까만 머리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도 노래를 멈추고 에이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누구야?" 남자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답해 주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묘한 느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노래는 불안해. 아주 위태로워.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암속성 레플리카를 처음 보는 모양이구나. 생명을 짜내 부르는 노래라 가장 아름답지만...가장 잔인한 레플리카지. 하지만 레플리카란 건 힘이야. 정말 중요한 건 마음, 마음이야. 아직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남자의 말에 에이드리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소실되었다고 전해지는 암속성 레플리카. 하지만 어딘가에 살아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암속성 레플리카? 당신이? 난 처음 봤어. 이름이 뭐야?" "그렇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숨어서' 살지 않으면 그나마 짧은 생, 유지하기도 힘들거든. 내 이름은 세레스라엘. 나의 엘은 날 세스라고 불러. 넌... '위장'이구나. 그렇지?"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에이드리안은 기분 나쁜 듯 대답했다. 마음 한 쪽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 왔다. 에이드리안의 마음을 아는지 남자는 허탈하게 웃더니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내 딸, 만났지? 그 애에게 노래를 불러줬어. 그렇지? 그 애 몸에서 광속성의 기운이 돌더군." "꼬마...말이야? 그러고 보니 할머니께서 손님이 와 계시다고 했는데 당신이었군." "두번 다시 노래 불러주지 마. 불쌍한 내 딸아이, 노래하면 죽어. 하지 마. 혹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어도 노래하게 하지 마. 광속성은 암속성을 자극하게 돼. 불쌍한 아이야. 태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행복을 빼앗겼으니." 남자는 일순 슬픈 표정을 짓더니 측은한 미소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너도...불쌍하지만. 그 애도, 너도 서로 불쌍한 존재야. 힘을 빼앗겨 버린 그 애나, 힘을 빼앗아 버린 너나.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나도...모두 불쌍해." 에이드리안은 뒤돌아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면 되니까. 그러면 모두 보상될 테니까. 다 아는 척 말하지 마." 에이드리안은 기분이 나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뒤돌아 섰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멀리서 그와 세레스라엘을 지켜보고 있던 에스프라드의 존재를. 그리고 그 날의 짧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훗날,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지도 에이드리안은 몰랐다. 제123음(第123音) Once upon a Time...(5) 시간이 흘러 에스프라드가 스콜라에 입학했다. 에스프라드가 스콜라로 떠나는 날, 그를 배웅하러 나온 에이드리안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에이드리안을 다독거리기 위해 에스프라드는 출발을 늦추어야 했고 저녁에 에이드리안이 잠들고 나서야 그는 스콜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유벨에게 스콜라 입학 허가장이 나왔다. 하지만 유벨은 차마 에이드리안을 혼자 둘 수 없어 입학식만 하고 1년동안 에이드리안과 함께 집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에이드리안도 스콜라에 입학하게 되었다. ******** "할머니. 나 언제까지 여장해야 되는 거에요? 나, 남잔데! 나도 남자 옷 입고 싶어요!" 에이드리안이 칭얼대자 일로나는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에이드리안. 조금만 더 참고...." "할머니! 나, 남자에요! 남자라고요! 신체 건장한 남자라고요! 이런 원피스 같은 거, 더 이상 입고 싶지 않아요! 나도 남자로서 정체성을 찾고 싶다고요!" 에이드리안이 짐짓 화가 난 듯 토라진 얼굴을 하자 결국 일로나는 한숨을 쉬며 결국 항복의 깃발을 들고 말았다. "뭐, 이제는 괜찮겠지. 대신, 에이드리안. 네가 히스페르의 아들이란 건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알았지? 이름도 '에이드리안 유디스레느 로르 비인'이 아니라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이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 알았지?" "아, 알았어요. '블랑쉬'도 어머니 이름이니까. 하지만 '유디스레느'란 이름이 더 좋은데..." "에이드리안! 절대 안 된다! 네 부모를 밝혀서는 안 된다!" 에이드리안의 말에 할머니가 오랜만에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할머니의 커다란 목소리에 놀라 눈을 깜빡이다 이내 할머니의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염려 마세요. 할머니 뜻대로 할게요. 후훗. 그럼 이제부터는 남자 옷 입어도 되죠? 빨리 유벨한테 얘기해 줘야지!" 에이드리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밖으로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로나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헤르만에게 들키면 안 되는데....헤르만이 알면...안 되는데..." ******** 에이드리안이 '남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가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에 입학하고 나서 약 3모네가 지나서였다. 그 날, 에스플리크 레플리카 스콜라는 질식할 정도의 미모를 뽐내며 걸어가는 금발의 소년 때문에 한 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소년의 정체가 다름아닌 '미레이유'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오늘의 에스플리크'를 비롯해 온갖 신문들이 난입하여 스콜라 안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곧 에이드리안이 학생회를 열었고 <엘크로이츠>는 에스프라드의 <라데팡스>를 압도하는 조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 그리고 유벨로 이루어진 집행부는 연일 '오늘의 에스플리크'의 흥미로운 기사거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매력적인 소년, 에이드리안의 이야기는 스콜라의 레이디들을 들뜨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 초겨울이었다. 에이드리안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오랜만에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유벨이 제젠 차를 구했다며 자신의 사택으로 모두를 초대한 것이었다. 그의 응접실에서는 3도르째 즐거운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휴, 난 이제 살 것 같아. 잘 가라, 학생회여-" 프란체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공작새 같은 알록달록한 머리카락을 쭈욱 잡아 당기며 엘로이즈가 말했다. "프란체스, 하지만 비인 가의 어른들이 네 복장은 정말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던데? 너, 그러다가 비인 가의 반항아로 이미지 굳을 것 같아. 에이드리안, 그냥 프란체스 고생하게 놔두지 그랬니? 후훗. 그랬다면 아직까지 할아버지 마냥 끙끙 앓고 있을 텐데..." 엘로이즈가 장난스런 미소로 말하자 프란체스는 너무 한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드리안이 찻잔을 입에 기울이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나, 프란체스 형 울면서 '학생회 때려치울래!' 그랬을 때마다 누나 매일 침대에서 울었잖아. 프란체스가 불쌍해-이러면서. 에스프라드 형이 다 얘기해 줬단 말이야. 음~ 그나저나 제젠 차 정말 향이 좋다." 에이드리안이 다시 차를 홀짝이자 엘로이즈가 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프란체스도 멋쩍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유벨이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저 봐. 부끄러워한다. 하여튼! 아참, 에드, 너는 어떠냐? 그 아리따운 아가씨랑." 유벨이 은근슬쩍 묻자 에이드리안의 뺨이 붉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유벨을 바라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유벨 형! 무슨 소리하는 거야!" "어이구! 부끄러워 하긴." 유벨이 귀가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귀를 문지르자 지금까지 잠자코 차를 마시던 에스프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만 둬. 에이드리안도 헤어져 있던 연인을 만나 어쩔 줄을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만 둬. 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이 잔뜩 심통난 듯 볼멘 소리로 말하자 에스프라드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쿠키를 집었다. 에이드리안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에스프라드에게 물었다. "자, 잘 지내고 있대? 형은 알 것 아냐. 형네 집에 있으니까." "잘 지내고 있어. 같이 스콜라에 다니면 더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엘로이즈가 쿠키를 먹으며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빙긋이 미소지었다.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의 미소를 보며 씁쓸하게 차를 마셨다. ********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오랜만에 일로나 할머니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스콜라에서 사택을 얻어 살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를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친부모 같이 길러주고 아껴주신 분이었다. 공부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할머니를 혼자 쓸쓸하게 영지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은 언제나 마음 한 쪽에 우울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자주 영지를 찾으려고 했지만 막상 생활을 하다보면 시간이 나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에이드리안은 현관에 들어서며 오랜만에 만나는 집사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집사는 언제나처럼 미소로 그를 맞아 주었다. 에이드리안은 윗도리를 집사에게 건네주고 말했다. "할머니는?" "위층에 계십니다. 지금 헤르만 님이 와 계십니다."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이 와 있다는 소리에 반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서둘러 계단으로 향했다. "숙부님이 와 계시다고?" 에이드리안은 한 달음에 할머니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내쉬었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헤르만을 만난지도 꽤 오래되었다.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숨을 고르고 문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에이드리안은 안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숙부의 목소리였다. [ 히스페르의 아들이 살아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 [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난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을 테다. 이제 그만 둬라, 헤르만. 이제 원하는 건 다 가졌잖느냐. ] 에이드리안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평상시에 언제나 온순한 목소리로 말하는 숙부였다. 이상하게 날이 서린 숙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 일로나,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 내가 히스페르를 죽였어! 히스페르, 그녀석만 없었다면 아무 방해 없이 내가 의장이 될 수 있었어! 저주받은 자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니! 그래, 그래서 내가 히스페르를 죽였어. 그 녀석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알면서 태연하게 날 쳐다볼 것 같아? 흥! 히스페르의 아들도 내가 없애버릴 거야! 제 아비의 일로 내게 앙갚음을 하면 곤란해. 일로나, 가만있어요. 내가 알아서 해. ]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숙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옆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허물어 졌다. 떨리는 몸을 감싸 안으며 에이드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숙부가...아버지를? 아니야. 아니야! 못 들은 거야. 난 못 들었어. 아무 것도 못 들었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듣지 않았어!!" 너무 무서워 몸에 한기가 돌았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너무나 참혹한 현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듣지 않은 것으로, 아무 것도 믿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행복을 깨뜨릴 수 없었다. 에스프라드 형과 엘로이즈 누나, 그리고 헤르만 숙부를 잃을 수 없었다. 차라리 입을 막고 귀를 닫고 눈을 감아버리는 게 나았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 바짝 말라버린 가지를 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파란 하늘 아래 삐죽이 솟아있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우울하게 눈동자를 깜빡였다. 겨울은 언제나 너무 싫었다. 춥고 서글펐다. 에이드리안은 하얀 코트를 여미고 한 팔을 위로 뻗었다. "끌어낼 수 있다면 끌어내고 싶어. 겨울이라는 계절. 이 하늘을 벗겨버리면 봄이 올까?" "에이드리안. 무슨 일 있어?" 에스프라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내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형은...만약에 우리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면...그렇다면 날 떠날 거야?"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에스프라드는 묘한 눈동자를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난 정말 원하는 소원이 하나 있어. 그건...지금은 말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아니, 넌 영원히 모를지도 몰라. 하지만...난 언제나 네 생각을 하고 있어. 넌 아주 소중한 존재니까. 누나에게나 프란체스 형에게나, 그리고 유벨에게나. 그리고 내게도." 에스프라드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이 하얗게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서글퍼 보여 눈물이 났다. '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이렇게 행복한데. 형이 있고, 유벨이 있고, 엘로이즈 누나와 프란체스 형이 있어. 날 친아들처럼 아껴주는 헤르만 숙부와 일로나 할머니.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에이드리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며 에스프라드는 슬프게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모든 것이 변해갈 것이다. 자신도, 에이드리안도. 모두가 변해 갈 것이다. 슬프지만....어쩔 수 없는 현실... ******** "와아- 너무 예쁘다!" 엘로이즈가 함성을 질렀다. 프란체스가 다가와 다시 탄성을 질렀다. 하얗게 반짝이고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다섯 사람은 기분 좋게 미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유벨이 에이드리안에게 다가와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며 유쾌하게 외쳤다. "히야! 겨울 휴가를 이런데서 보내게 되다니! 기분 최고다! 그렇지, 아우?" "누가 아우야? 형 노릇을 해줘야 아우 노릇을 해주지!" 에이드리안이 장난스레 말하자 유벨은 씨익 웃으며 호수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유벨의 팔에서 빠져나오며 에스프라드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형. 여기 정말 좋지? 너무 예뻐. 물이 반짝이는 게. 아참, 형은 약혼녀 생각이 간절하겠네? 올리비엘라도 같이 오면 좋았을 걸." "리에가 잘 다녀오라고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던데? 리에, 여행은 무리야. 올슈틴이랑 조용히 보내겠대."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에게 미소를 보여주며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 새하얀 사과 하나 달빛에 반짝여 반짝임에 이끌린 작은 눈동자 ... ]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노래를 받았다. [ 시린 눈동자에 당신의 작은 위로 눈동자에 비친 하얀 반짝임에 외로움은 사라지고 환희가 떠오르네... ] 에이드리안이 노래를 부르자 모두가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유벨이 씩씩한 목소리로 후렴구를 불렀고, 프란체스와 엘로이즈가 웃으며 그 다음 소절을 불렀다. 아이들의 합창은 점점 커져 호숫가는 레플리카의 빛으로 반짝였다. 에이드리안은 자꾸 눈물이 어리는 눈동자를 비비며 미소지었다. 자신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존재감이 너무나 소중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에게 그들과의 추억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다섯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은 이제 아득한 꿈과 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제124음(第124音) Once upon a Time...(6) 비가 왔다. 에이드리안은 어두운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에스프라드의 저택에 들어서면서도 우울한 기분은 풀어지지 않았다. 복도는 어두웠다. 불을 좀 더 밝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의 서재로 향했다. 집사가 에스프라드와 헤르만이 서재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손에 든 갈색 표지의 책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책은 숙부의 서재에서 빌린 책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책이라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숙부의 서재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을 돌려주러 에스프라드의 집에 들린 참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서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숙부님? 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은 어두운 서재 안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며 안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헤르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반가운 표정으로 숙부에게 다가갔다. "숙부님. 에스프라드 형은 어디 갔어요? 여기 있다고 하던데. 아참, 여기 책.... 숙부님?" 에이드리안은 차가운 공기와 무거운 분위기에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다시 헤르만을 살폈다. 헤르만의 표정이 창백했다. 에이드리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헤르만에게 말했다. "어디 편찮으세요? 하녀장을 부를까요?" "후우.... 네가 히스페르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숙부님?" 에이드리안은 멍한 얼굴로 헤르만을 쳐다보았다. 헤르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에이드리안의 멱살을 잡았다. 헤르만의 목에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음습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의 얼굴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게 내 실수였어. 네 아비의 그 잘난 낯짝을 이리도 닮았는데 왜 몰랐을까. 차라리 네가 여자였다면 에스프라드와 결혼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광속성도 우리 세력에 들어오니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 밉던 히스페르의 자식이라도 말이야." "숙부님..." 에이드리안은 난생 처음 보는 헤르만의 무서운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무서웠다. 언제나 자상하고 다정하게 자신을 대했던 헤르만이었다. 에이드리안의 두려운 마음을 아는지 헤르만은 비웃듯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네가 에스프라드에게 반하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널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지. 에스프라드는 내 뒤를 이어 평의회 의장이 되어야 해. 네까짓 게 방해하도록 둘 수는 없어. 그러고 보니 하는 짓도 네 아비와 똑같군. 저주받은 불길한 놈 주제에 대속성 레플리카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날 비웃듯이 바라봤지. 히스페르 놈! 방계 혈통 주제에!" 헤르만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퍼져 나오며 붉은 빛이 떠올랐다.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이 레플리카를 발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버둥거리며 외쳤다. "숙부님! 그만...하세요! 난 몰라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요. 난.. 숙부님!" 헤르만의 손이 점점 목을 졸라왔다. 에이드리안은 있는 힘을 다해 헤르만을 밀어냈다. 헤르만과 일로나의 언쟁을 들은 그 날 머리 속에 그려보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참혹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잔뜩 굳은 얼굴로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헤르만이 어떻게 자신이 히스페르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목이 따끔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헤르만과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 얘기하고 있는 것 자체가 믿기지가 않았다. 며칠 전에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숙부와 조카였다. 에이드리안은 바싹 말라버린 목소리를 달래려는 듯 목을 누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갈라진 목소리를 뱉었다. "숙부님. 난 아버질 몰라요. 얼굴도 몰라. 난 그저 지금 생활이 좋아요. 엘로이즈 누나도, 에스프라드 형도 내겐 아주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숙부님." 에이드리안의 간청에도 헤르만은 멈추지 않았다. 핏발이 솟은 헤르만의 손에서 붉은 빛이 점차 커지더니 에이드리안에게로 날아왔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날아온 빛은 에이드리안의 얼굴에서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 책장을 박살내 버렸다. 굵은 원목이 와지끈거리는 굉음을 들으며 에이드리안은 멍한 얼굴을 한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숙부님이 원하시는 데로 할게요. 난 잃고 싶지 않아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잃고 싶지 않아요. 숙부님, 살려주세요. 학생회든 뭐든 해체할 테니까...난 평의회 의장 같은 거, 관심 없어요." 에이드리안은 다 말라버린 입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물이 고이고 머리 속이 공허하게 비어갔다. 하지만 헤르만의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만이 머물 뿐이었다. "그럴 수야 없지. 히스페르 놈도 아주 의뭉스러운 놈이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 가장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욕심이 없는 척! 저주받은 불길한 핏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 언제나 날 비웃는 얼굴로! 흐, 흐하하하! 그래. 난 평의회 의장이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을 해도 좋았어. 무슨 짓을 해도! 네 놈들만 없어진다면!" 헤르만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미친 듯한 노랫소리에 에이드리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헤르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다시 한 번 새빨간 빛이 방 안을 메웠다. 그리고 어깨에서 흥건한 피가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차가운 공기를 맛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서 타고 내린 피가 하얀 옷을 적셔 갔다. 어깨부터 시작해 목까지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 앞에 하얀 빛이 번뜩이는 느낌이었다.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 앞의 피만이 선명하게 채색되어 갔다.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달싹였다. "피... 피가... 진짜 날 죽이려고? 나도 죽이려고?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나도? 어째서. 어째서 날 죽이려는 거지?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헤르만 숙부가 날 죽이려들다니...헤르만 숙부가...큭....큭큭큭.....큭큭....날 죽이려 들다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에이드리안은 이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에 순간 헤르만은 움찔했다. 에이드리안은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다 끝났어. 다 끝났어!! 내가 눈 감아봤자 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내 아버지, 왜 죽였어? 고작 그딴 의장 자리 때문에? 하! 그래서 아버지를 죽였다고? 내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자 자살하셨어! 모두 당신 때문이야. 행복할 수 있었는데. 당신이 모두 망쳤어. 왜 그랬어요, 숙부! 왜 그랬냐고! 차라리 나도 죽여요, 죽여요!!" "이 놈이!!" 에이드리안의 서슬 퍼런 고함소리에 헤르만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레플리카를 쏟아냈다. 붉은 빛이 방을 가득 매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이드리안을 상처 입힐 수가 없었다. 그가 노랫소리를 퍼뜨리며 하얀빛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안의 눈물 맺힌 눈에서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래도 숙부님을 믿고 싶었어. 내 아버지를 당신이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어. 하지만 이제 끝이야. 죽일 수 있으면 어디 죽여봐. 비록 제대로 된 힘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본 내 레플리카를 이길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주지. 당신의 영광스런 화속성 레플리카를 보여 보라구."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흘러내린 눈물을 훔쳐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의 독기어린 눈동자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 놈이 살아서는 이제 내가 살 수가 없어. 에스프라드에게도 넌 방해가 될 뿐이다!" 헤르만의 입에서 엄청난 화음으로 짜여진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훗, 후후...결국...이렇게 밖에 안 될 거였어. 다 끝났어...끝이야!!"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입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 소리는 헤르만의 노랫소리를 삼키고 방을 하얗게 채워갔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밀도의 소리가 퍼져나갔다. 창문이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 유리 조각이 흩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얀 빛이 붉은 빛을 삼키며 흩어져 갔다. 깨진 창문으로부터 차가운 빗줄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헤르만의 모습이 보였다. 자꾸 눈물이 흘렀다.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 하인과 하녀들이 입을 가린 채 놀라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너 명의 하녀들이 서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은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이며 피가 흐르는 팔을 붙잡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보이는 붉은 피도, 자신에게 헤르만이 쏟아 부었던 레플리카도, 그리고 자신이 헤르만에게 찔러 내렸던 레플리카도 모두 꿈같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현관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비를 맞고 있는 에스프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한 줄기의 희망을 가지고 입술을 달싹였다. 들릴 듯 말 듯 목소리가 퍼졌다. "형은...아니지? 형은...몰랐지?" 에이드리안의 물음에 에스프라드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알고 있었어. 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내 아버지란 것. 아버지께 네 아버지가 히스페르 숙부라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도 나야. 네 아버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와 유벨, 그리고 엘로이즈 누나와 프란체스 뿐이니까. 너도 눈치채고 있었지?" "어째서...어째서! 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흘러내린 눈물을 주체하지 못 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물들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내가 뭐 잘못했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왜 이래....흐윽....흐윽...." 에이드리안은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에스프라드가 다가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에이드리안.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난 평의회 의장이 되고 싶어. 하지만 네가 자꾸 방해를 하니 이럴 수밖에 없었어. 그냥 내 그늘 아래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넌 선천적으로 사람을 매료시켜. 이인자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지, 넌."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에스프라드가 마치 딴 사람 같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스프라드는 우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에이드리안. 좀 더... 좀 더...괴롭게 될 거야." ******** "아니야. 아니야. 이건 다 꿈이야!!" 에이드리안은 어깨의 상처를 손으로 잡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계속 눈물이 흘렀다. 자신도 모르게 현실을 부정하며 에이드리안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게 자신을 대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 누구보다 무섭고 차가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불과 몇 도르 전까지는 행복했는데! 에이드리안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와 헤르만 숙부 사이의 일이 없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헤르만은 자신의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에스프라드의 앞길에 방해가 될만한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축출할 사람이었다. 대속성 레플리카 중에서도 가장 레벨이 높은데다가, '비인 가의 천재' 라고 칭송 받던 자신이 남자로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 숙부의 표정은 아주 묘하게 변해갔다. 스콜라에 입학한 뒤 학생회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가끔씩 무서울 정도로 쌀쌀맞은 표정을 보여준 헤르만 숙부였다. 에이드리안은 손에 잡히는 나무에 몸을 기대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예전에 보았던 헤르만 숙부의 모습이 하나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이제 숙부와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위로를 받고 싶었다. 이 무서운 현실에 대해 위로의 말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에이드리안은 묵직해지는 팔을 힘겹게 추스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숲의 작은 길이 끝날 즈음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집으로 다가갔다. 비가 와서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그는 순간 멈춰 섰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미레이유." 이제는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그러나... ******** 다음 날.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자신의 방이었다.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축이며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손을 내렸다. 손가락 사이에 무언가가 걸려왔다. 그는 손을 들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금발이 걸려 있었다. 길게 자란 금발. 과다한 레플리카 사용의 흔적이었다. 순간 눈앞에 알 수 없는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목에서 알 수 없는 흐느낌이 세어 나왔다. "아악...아악...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날, 에이드리안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가 예전에 보여주었던 다정하고 따스한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어버린 인형처럼 그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에스프라드와 헤르만, 그리고 엘로이즈는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유벨과 프란체스는 에이드리안의 곁을 지키며 그저 쓸쓸하게 과거를 돌이켜 볼 뿐이었다. ******** [ 금발의 아이는 여전히 사랑 받고 있었지만 너무나 불행했습니다. 다섯 아이가 함께 하는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머언....간절히 원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이야기.... ] 제125음(第125音) Blind, Deaf, Mute...(1)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눈을 끔뻑거렸다. 서랍이 거꾸로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침대 위에 누워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아지가 가르릉거렸다. 쥬느비에브도 가르릉거려 보았다. "가르릉. 가르릉. 아유, 재미없다." 쥬느비에브는 심심하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며 몸을 뒹굴거렸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꾸욱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외쳤다. "쥬느비에브 뒹굴기! 데굴데굴." 강아지를 안고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강아지가 쥬느비에브의 몸에 눌리자 깩깩거렸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스윽 감고 몸이 구르는 감각에 정신을 통일했다. "데굴데굴데굴데굴.....아코! 아파라." 결국 침대 밑에 떨어지고 만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부딪혀 욱신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눈물을 퐁퐁 떨구어냈다. "심심해. 너무 심심해. 에이드리안, 나 심심해요. 흐엉. 흐어어어어어엉----" 그러나 아무리 눈물을 쏟아내도 달래주는 사람이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하고 푼 다음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강아지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꼬마 에드, 너무 심심해. 꼬마 에드, 심심하다니까아~" 강아지를 옆구리에 낀 쥬느비에브는 칭얼거리며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내려가다 마침 위층으로 올라오고 있는 루이즈를 만났다. 쥬느비에브는 코를 훌쩍이며 루이즈에게 손을 흔들었다. "루이즈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아참, 아가씨. 도련님으로부터 편지에요." 루이즈는 웃으며 쥬느비에브에게 하얀 편지 봉투를 건네주었다. "에에? 편지?"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며 발그레 볼을 붉혔다. 그리고 활짝 미소가 떠올랐다. "야아- 에이드리안이 편지를? 아유, 이 거 혹시 말로만 듣던, 그 러, 러브레터? 에헤헤- 빨리 가서 봐야지. 에헤헤-" 쥬느비에브는 신이 나서 쿵쾅거리면서 방으로 뛰어갔다. 쥬느비에브의 즐거워 보이는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루이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쥬느비에브! 다이빙! 꼬마 에드도 다이빙!" 쥬느비에브와 강아지는 동시에 침대 위로 붕 떠올라 그대로 드러누웠다. 쥬느비에브는 활짝 미소지으며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옆구리 쪽에서 강아지가 자꾸 꿈틀거리자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주의를 주었다. 다시 편지지에 정신을 집중한 쥬느비에브는 편지지에 쪽 입을 맞추고 배시시 웃었다. "아웅~ 러, 러브 레터다! 아유, 기분 좋아."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거리며 편지지에 적힌 단정한 글씨를 바라보았다. 마음 가득 행복이 넘실거렸다. "빨리 읽어야지. '보고 싶은 쥬느비에브에게'. 아유, 나도 에이드리안이 너무 보고 싶다고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붕붕 돌리며 편지글에 대해 대답을 했다. "<....난 의회 일로 무척 바빠. 하지만 곧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동안 심심할 것 같아서 선물 보냈어.> 에에? 서언-물? 지, 진짜요? 에이드리안, 그치만 난 에이드리안이 더 보고 싶은데. 우웅~ 마저 읽어야지. <쥬느비에브, 많이 보고 싶어. 곧 돌아갈게. 그동안 잘 지내. 울지 말고.> 아유, 누, 눈물 나네. 에이드리안. 나, 에이드리안 많이 보고 싶은데...훌쩍. 훌쩍." 쥬느비에브는 편지지에 떨어진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그렇지만 자꾸 눈물이 떨어져 결국 편지지를 접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야 했다. 쥬느비에브는 몸을 일으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 결국 통곡을 하고 말았다. "흐어어엉---- 흐어어어어엉----- 에이드리안,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흐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 아가씨? 소포가 왔는데요?" 쥬느비에브는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이즈가 커다란 상자를 가져와 침대 밑에 내려다 놓았다. "에이드리안 님이 보내신 건데, 아까 깜빡했지 뭐에요. 어서 풀어 보세요." 쥬느비에브는 하얀 상자를 보며 콧물을 훌쩍였다. 어느 새 눈물이 그친 그녀였다. 쥬느비에브는 배시시 웃으며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선물?" 씨익 웃으며 쥬느비에브는 재빨리 상자를 풀었다. 에이드리안은 참 멋진 남자였다. 약혼녀에게 선물도 많이 사주고.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런 에이드리안이 정말 좋았다. 상자를 열자 꽃잎 모양의 접시와 찻잔이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입을 '벙' 벌리고 접시를 꺼내 보았다. "어? 접시? 예쁘다. 꽃 모양 접시다. 우웅~ 카드도 들어있네. 어디...<쥬르, 접시에다 맛있는 음식 많이 담아 먹어. 굶지 말고.> 어, 어라. 나 오늘 아침 굶은 거, 에이드리안이 어떻게 알았지? 그치만, 혼자 식사하면 쓸쓸하고 외로운데. 맛도 없고. 헤헤- 그치만 접시 너무 예쁘다. 빨리 맛난 음식 담아 먹어야겠다. 헤에-" 쥬느비에브가 접시를 들어 이리 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다홍색 머리가 삐죽 들어왔다. "쥬느비에브, 자나요? 어머? 웬 접시에요?" 미라벨이었다. 미라벨은 접시를 보더니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헤헤. 이 거, 에이드리안이 나, 굶지 말고 맛난 음식 담아 먹으라고 보내 준 거에요. 찻잔도 있고요, 스프 접시도 있어요. 샐러드 볼도 있고. 예쁘죠?" "어머. 너무 예쁘네요. 어머? 이건 레센호르덴의 그릇이잖아? 쥬느비에브, 이 그릇 엄청 비싼 거에요. 에이드리안 님이 의회 도시에서 사신 건가 봐요." "헤헤. 난 정말 해, 행복한 여자에요. 아유, 멋져. 미라벨 언니, 여기 우리 맛난 거 차려서 먹어요."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쏜살 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미라벨은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따스한 눈동자로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이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을 꼭 지켜주고 싶었다. 쥬느비에브가 미소지으면 에이드리안도 미소짓는다. 그 미소를 꼭 지켜주고 싶었다. ******** 뒤늦게 도착한 케이로프까지 합세해 티파티가 벌어졌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이 선물로 준 찻잔에 차를 따라서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접시에 여러 가지 모양의 쿠키와 생과자를 내어왔고, 과일과 빵, 샐러드도 내왔다. 쥬느비에브는 샐러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차랑 샐러드는 안 어울리나?" "괜찮아요. 의외로 상큼한 느낌이 드니까." 미라벨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으며 차를 한모금 마셨다. 에이드리안이 향이 좋다고 말해 준 차였다. 정말 향이 좋았다. 쥬느비에브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어준다면 더 좋을 텐데.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왜 즐거울 때마다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오를까. 쥬느비에브의 침울한 얼굴에 미라벨이 일부러 활달하게 웃으며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쥬느비에브, 역시 예쁜 접시에 담으니까 더 먹음직스럽게 보이네요. 어서 먹어요."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많이 먹어야 건강해 지는 법이야." 케이로프도 빵이 담긴 접시를 쥬느비에브 쪽으로 옮겨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찻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말했다. "나, 물어볼 거 있어요." "뭔데 그래요? 어서 물어 봐요." 미라벨이 웃으며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한동안 망설이다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미레이유가 누구에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 그, 그게 누구에요? 우리는 모르는..." "전에 케이로프 님이랑 말하는 거, 다 들었어요. 에이드리안이랑 아는 사람이에요?" 쥬느비에브가 고집스레 말하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케이로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신경 쓸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은..." "알고 싶어요! 미레이유란 사람이 에이드리안이랑 무슨 사이였는데요? 나, 꼭 알고 싶어요." 쥬느비에브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하자 미라벨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케이로프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미라벨은 쥬느비에브의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께 그 사람 이름 말해서는 안 돼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레이유 님의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 돼요. 쥬느비에브, 자신의 행복이 소중하다면...그 이름은 입에 올리지 말아요. 세상에는 알아서 안 되는 일도 있는 거에요. 우리도 실수한 거에요. 그 사람은 잊혀져야 하는 사람이에요. 알았나요?" "미라벨 언니...." 쥬느비에브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레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녀와 에이드리안이 어떤 사이인지 알고 싶었다. 혹시 에이드리안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쥬느비에브는 자꾸만 마음 속을 덮어 오는 어두운 생각에 자신이 너무 싫어지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어두운 생각 따위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고 교활해 그런 마음을 먹을수록 더 생각하고 마음에 되뇌게 되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말았다. ******** 며칠 후. 드디어 에이드리안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두꺼운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땋아 내렸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예전에 준 방울을 머리 리본 끝에 매달았다. 딸랑딸랑 소리가 나자 기분이 좋아졌다. 쥬느비에브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씨익 웃어주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루이즈가 활짝 웃으며 현관을 가리켰다. "아가씨. 도련님의 마차가 막 도착했답니다. 어서 나가보세요." "정말요?" 쥬느비에브는 두 발로 콩콩 뛴 다음 폴짝폴짝 뛰어 밖으로 나갔다. 하얗게 눈 덮인 곳에 까만 마차가 서 있고 그 안에서 청록색 옷을 입은 에이드리안이 내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펼쳐 에이드리안에게 달려갔다.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아-안!" 마차에서 내린 에이드리안은 달려오는 쥬느비에브에게 미소지으며 그녀를 품에 안아 주었다. "쥬르, 잘 있었어?" "으응! 에이드리안, 너무 보고 싶었어요! 너무 너무!! 우웅~ 에이드리안 냄새다! 에이드리안이다!" "나도 쥬르, 많이 보고 싶었어. 아주 많이."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의 감동의 재회를 보며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유벨은 혀를 찼다. "어휴, 어디 약혼녀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에드, 쥬느비에브! 그만하고 떨어져!" 유벨이 볼멘 소리를 내자 에이드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더 꼬옥 껴안았다. "부러우면 너도 약혼해. 응?" "응. 유벨 오빠도 약혼해요. 헤헤." 쥬느비에브까지 합세해 자신을 놀리자 유벨은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쥬느비에브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쥬르,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에이드리안 많이 보고 싶었어요. 너무 심심했단 말이에요. 쓸쓸하고 외롭고. 우리, 빨리 들어가요. 나, 맛난 음식 많이 준비해 놨거든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고 방실방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으니까 기분이 붕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에이드리안이랑 매일매일 같이 있어야지! 쥬느비에브는 씨익 웃으며 머리 리본에 매달린 방울을 흔들었다. ********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은 더 컸다. 쥬느비에브는 오랜만에 아주 맛있게 식사를 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까지 찾아와 오랜만에 다섯 명이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왁자지껄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니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자리에 없는 안느마리의 존재가 간절하기는 했지만 쥬느비에브는 그 마음을 꾸욱 접었다. 안느마리에게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던 그녀였다. 안느마리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그녀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자신의 앞에 나타날 때까지 우선은 기다려 보고 싶었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간단한 티타임을 가진 후, 모두가 각자의 사택으로 떠나갔다. 에이드리안은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반가운지 연신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잘 준비를 하는 쥬느비에브에게 찾아와 웃으며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이드리안은 곧장 들어와 쥬느비에브 침대 쪽으로 끌고 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 많이 힘들었죠? 여행, 피곤했을 텐데." "아냐. 안 피곤해. 사실은 조금 피곤해. 쥬르 무릎 베고 있으니까 좋다." 에이드리안이 눈을 감자 쥬느비에브는 미소지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의 긴 금발은 언제나 그렇지만 참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 있잖아요. 나 생각해 봤는데요, 이제 나, 에이드리안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요. 에이드리안 없으면 너무 쓸쓸해. 외롭고 슬퍼져. 자꾸 눈물나서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에이드리안이 눈을 뜨고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쥬르. 돌아와서 너무 기뻐. 쥬르가 있어서 정말 집에 온 기분이 들어. 날 기다려주는 쥬르가 집에 있으니까 진짜 '집'이라는 느낌이 들어. 쥬르, 내가 계속 널 지켜줄 테니까 넌 언제나 여기서 날 기다려 줘. 그럼 어디를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게. 네가 기다려 주면 어느 때든, 반드시 돌아올게." "으응. 나, 에이드리안이 어디를 가도 여기서 기다릴게. 꼬옥. 약속이에요."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며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어준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실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든 그가 옆에 있어주면 그 순간만은 마음 설렐 정도로 행복했다. 마음 한쪽의 불안한 생각들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 하는 아찔한 행복 속에서는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지금은....행복했다. 제126음(第126音) Blind, Deaf, Mute...(2) 오랜만에 학생회실에 들어선 에이드리안은 소파에 앉아 차를 음미했다. 미라벨이 끓여준 차는 언제나처럼 그윽한 향을 자랑했다. 에이드리안은 찻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는 서류를 보며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보며 그는 책상 위에 걸터 앉았다. "나 없어도 학생회는 잘 돌아가는군."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불안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에이드리안은 책장에서 서류를 빼고 있는 유벨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미라벨과 케이로프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아버님이... 헤르만...평의회 의장에 대한 해임 건의를 하셨다고. 에르슈바이크 가 뿐만이 아니라 뤼베이크 가와 에슈비츠 가까지 건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전혀 듣지 못한 일이라..." 케이로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서류철을 손에 들었다. "그래. 너희들에게는 공작 예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나 보군. 헤르만 의장은 곧 실각될 거야. 올해를 못 넘기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하지만 에이드리안 님. 그럼 곧 의장 선거가 있을 텐데! 에이드리안 님께 불리해요. 에스프라드 님은 올해 졸업이지만 에이드리안 님께서는 아직 스콜라에 재학 중이니 선거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에이드리안은 서류철을 탁 소리나게 덮고는 다시 미소를 띄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벨의 불안한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싱긋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 에스프라드 형은....선거에 나오지 못 할 테니까. 너희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들은 모른 척 하도록 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 아무 것도 모르는 척...그렇게 해." 에이드리안은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며 학생회실 밖으로 나갔다.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에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에이드리안 님이...이상해요. 마치...마치...3년 전, 그 때 같아. 인형 같은 얼굴...차갑고....무서운 얼굴..." 케이로프는 미라벨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유벨을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히스페르 님을 죽인 게 정말 헤르만 평의회 의장인가?" 유벨은 케이로프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도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눈을 감았다. "나도... 몰랐어. 대충 이상한 낌새는 눈치챘었지만. 알았다면 나도 헤르만 숙부에게 달려들었겠지. 3년 전에...그 때 헤르만 숙부가 크게 다쳤었잖아. 에드가 그런 거래. 그리고...에드, 아무래도 그 사람들한테 복수하려는 것 같아." 유벨의 말에 미라벨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단호한 목소리로 미라벨은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 말씀대로 난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닫겠어요. 모르는 척. 에이드리안 님이 하시는 데로 두고 보겠어요. 그 것으로 에이드리안 님이 보상받으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 사람들 때문에 에이드리안 님이 얼마나 아파하셨는지... 우리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미라벨의 어깨를 누르며 케이로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 님은 3년이나 참아 오셨어. 너무 오래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도 좋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낼 때가 왔다고 생각해." 유벨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을 깍지끼고 이마를 받쳤다. "하지만... 에드 녀석, 저런 얼굴 하고 있는 거, 마음에 들지 않아. 저 녀석도 마음 편할 리가 없어. 계속...저렇게 잔인한 모습을 보이면...어쩌지? 난 무서워." 유벨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미라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유벨에게 말했다. "쥬느비에브가 있잖아요. 에이드리안 님은 예전처럼 돌아오실 거에요." "3년 전과 지금은 달라.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이 버티고 있는 한 그 분도 다시 돌아오실 거야. 걱정 그만 하고 학생회 일이나 하지." 케이로프와 미라벨의 위로에 유벨은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버린 사촌 동생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랬다. 무섭고 차가운 모습이 아니라 예전의 따스한 미소를 띈 그 모습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유벨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미소짓던 작은 금발의 소년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예전의 그 미소를 바라보고 싶었다. ******** 학생회실에서 돌아온 에이드리안은 곧장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했다.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향할 때면 언제나 마음이 어두웠다. 혹시나 쥬느비에브가 노래하고픈 욕구를 못 이겨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쥬느비에브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에이드리안은 요즘 들어 그녀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하는 버릇을 들이고 있었다. 오늘도 에이드리안은 정확하게 세 번 노크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 아저씨! 들어오세요!"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빨갛게 충혈된 쥬느비에브의 눈을 보면서도 그는 미소를 띄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힘껏 쥐면서도 그는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는 쥬느비에브에게 미소 띈 얼굴만 보여주었다. "쥬느비에브 아주머니는 뭐 하느라 매일 방에만 있는 건가요?" "에이! 나 아주머니 아니라니까요!" 쥬느비에브가 볼멘 소리를 하며 팔짱을 꼈다. 그러다 노란색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그의 옆에 붙었다. 그리고 그의 소맷자락을 꾸욱 잡았다. 에이드리안은 한 순간 쥬느비에브의 얼굴에 스쳐 가는 우울한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잡아 당기며 유쾌하게 말했다. "쥬르. 내일 반지 하러 가자!" "에? 반지요?" "약속했잖아. 결혼 반지 하러 가기로."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품에 안았다. 마른 듯한 쥬느비에브의 몸이 두 팔 안에 쏘옥 들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어깨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쥬르, 노래하고 싶어?" "아, 아니에요. 난 에이드리안이랑 이렇게 있으면 아주 행복하니까. 노래 같은 거, 하지 않아도 행복해요. 난 괜찮아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애써 밝게 말하는 쥬느비에브의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눈물을 멈춘 다음 쥬느비에브의 등을 쓸어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쥬르, 조금만 참아. 곧 노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어떻게 해서든 그렇게 만들어 줄게. 너도, 나도 곧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이질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비싼 반지 사줄게! 다들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반지 사줄게!" 에이드리안이 말이 끝나자 말자 문이 열리고 집사 톨레가 들어왔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도련님. 급히 좀 나오십시오. 헤르만 평의회 의장 각하께서 와 계십니다." "숙부가?"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에게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쥬르, 잠시만. 좀 있다 다시 올게." 쥬느비에브는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쥐었다. 에이드리안이 이상했다. 그는 자신에게 예전보다 훨씬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좋은 말만 해주고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가끔씩 그의 얼굴에서 섬뜩한 표정을 보곤 했다. 그 모습은 너무 무서워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곧잘 바깥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숨기려는 듯이. 온실 속의 작은 꽃을 대하듯 그는 그렇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무서운 일은 말하지 않고 좋은 일만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에게 바짝 신경을 쓰고 있는 그였다. 이미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자신이었다. 그가 더 이상 마음 쓰게 할 수는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우울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미소짓고 있는 에이드리안이 갑자기 무서운 말을 할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훔쳐냈다. "미레이유... 안 돼... 안 돼..." ******** 에이드리안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헤르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를 띄웠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발소리를 들은 헤르만이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내리깔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헤르만의 맞은 편에 자리한 에이드리안은 다리를 꼬고는 헤르만을 힐끗 쳐다보았다. 화려한 예장에 비해 얼굴은 많이 창백한 모습이었다. 그는 조소를 띄우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찾아 주셔서 영광이군요." 에이드리안의 거만한 눈동자에 헤르만은 순간 울컥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난 지금 몹시 곤경에 처했다. 5대 대귀족 가문에서 3개 가문이 내 해임 건의안을 제출했고 대귀족과 소귀족 가에서 속속들이 나에 대한 해임안에 대해 동의를 하고 있지. 내 세력이라 생각했던 자들마저 빠져나가고 있어. 이 게 모두 네 짓이라는 거, 알고 있다." "그래서요?" 에이드리안은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는 차를 가져가 한 모금 마시며 다시 헤르만을 곁눈질했다. 헤르만은 괴로운 듯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냉소를 띄웠다. '프라이드가 망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쿡. 자존심 따위!' 헤르만이 고개를 들고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내가 잘못했다. 지난날의 과거는 잊고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꾸나. 우리 가족이 널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 줬느냐." "하!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에요? 다시 돌아가자고? 숙부, 드디어 미쳤나 보군요." 에이드리안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조소를 띄웠다. 그리고 차갑게 눈동자를 빛내며 앙칼지게 말했다. "3년 전, 그 날. 내가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했을 때, 숙부는 뭐라고 했죠? 내가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그 때를 숙부는 단번에 깨 부셔버렸어.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가자고?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돌리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헤르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나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옛정. 그래, 옛정을 생각해서 다 없었던 일로 해 줄 수도 있어요." 헤르만의 얼굴이 에이드리안의 말에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 에이드리안. 이제 이런 원한 따위 다 없애자꾸나. 이런 불필요한 감정 따위 모두..."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줘야겠어요. 아니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에이드리안의 말에 헤르만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다른 쪽으로 꼬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쥬르, 아니 쥬느비에브 양이 암속성 레플리카랍니다. 에스프라드 형과 숙부님이 짜고 쥬느비에브 양을 내게로 보내셨죠. 그녀가 암속성이라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내게 데미지를 주려고 보내셨던 거죠." "에이드리안..." "모두 숙부 탓이에요. 그러니까 숙부가 쥬느비에브 양을 원래대로 돌려주세요. 암속성 레플리카를 없애고, 저주를 풀어 주세요." 에이드리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띈 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헤르만은 그의 차가운 얼굴에 질려버린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애가 암속성을 계승한 게 어디 내 탓이더냐! 그 애가 저주받은 것을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게냐! 저주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쿡...그래서 못 하시겠다? 하긴. 당신 같이 약한 자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숙부님, 쥬느비에브의 생명이 다 하는 날, 당신도 죽게 될 거에요. 내가...그렇게 만들 거야." "에이드리안, 네 놈이!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지! 네 놈이 날 죽이려고 작심을 했구나! 그래.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거로군. 네 놈이!!" 헤르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섬뜩하리 만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3년 전, 그 날이 지나고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을 거 같아? 믿고 있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망가져 버렸어. 내가 가진 걸 전부 잃고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살아왔을 거 같아? 난 하루하루 죽어있었어. 그리고 오로지 그 생각만 했지. 힘을 기를 테다! 아르헨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어 그 누구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 나와 내 행복을 망가뜨렸던 사람들을 모두 부셔버리겠어! 그래. 그 마음만으로 살아왔어. 미소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조심스럽게 사람을 모았지. 그리고 회기 때마다 날 벌레 보듯 하는 당신의 시선도 참아 왔어. 세력 없는 방계 혈족 따위, 처음부터 제대로 세력을 만들기가 어려웠지만 참고 견뎌왔어!"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으로서는 안타까웠겠지. 그 날, 그 사건이 있은 뒤, 어떻게든 날 없애려고 했지만 일로나 할머니의 양자가 된 날 어쩌지는 못했으니. 쿡쿡... 우스워. 난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견뎌왔어. 망가져 버린 미레이유를 되찾지도 못하고! 하지만 당신을 어쩌진 못했어. 내겐 한 때...가족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 돼. 쥬르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아팠던 만큼, 당신도 아파야 해. 쥬르가 겪는 만큼, 당신도 아파해야 해. " "내 녀석! 미쳤군. 그래, 미쳤어! 그 애를 마음에 담은 네 녀석의 불행이지. 남의 탓을 하기 전에 널 탓해야지! 그래, 그 애가 저주받은 건, 잘난 세레스라엘 덕분이야. 그 불길한 피를 이어준 세레스라엘이!" 헤르만은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의 마치 죽어버린 듯한 차가운 표정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미소를 띄웠다. "알아요. 하지만...헤르만 숙부와 에스프라드 형 때문에 나와 쥬르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도 알아. 맞아. 암속성을 전승한 건, 세스 때문이군. 그런데 말이에요...이것저것 조사를 하다가 우연찮게 알게 되었지 뭐에요?"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에이드리안은 음습한 목소리로 미소 띈 채 말했다. "쥬르의 어머니를 죽인 것도 결국 당신이었어. 그렇지?" 제127음(第127音) Blind, Deaf, Mute...(3) "무, 무슨 소리냐..." 헤르만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실룩이며 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냉소를 띄며 말했다. "대대로 암속성 레플리카가 가드(guard)해 준 사람이 평의회 의장이 되었지. 하지만 숙부는 세스의 가드를 받지 못했어. 세스는 내 아버지의 가드가 되었거든. 그래서 당신은 결심했지. 에스프라드 형에게 세스의 아이를 가드로 붙여주자고. 그래서...쥬르를 찾으러 간 거야. 그렇지?" "네 놈이 터진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 구나!" 헤르만이 역정을 내자 에이드리안은 재미있다는 듯 조소를 띄우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쥬르의 어머니는 쥬르를 지켰어. 그리고 그 와중에 당신이 보낸 자들이 쥬르의 어머니를 죽였지. 다 알고 하는 소리니까 모른 척 해도 소용없어요, 숙부. 난 이제 복수하는 일만 남았고 당신은 당하는 일만 남았어. 더 이상 내게 무릎 꿇고 빌어도 소용없어. 당신,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다고.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도 곧 아주 멋진 모습으로 망가질 거야.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당신들이니 할 말은 없겠지."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끝이 난 동시에 레플리카가 퍼졌다. 에이드리안에게서 뿜어져 나온 레플리카는 붉은 빛으로 변해 헤르만의 목을 둘러쌌다. 에이드리안은 여유롭게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에 에이드리안의 레플리카에 둘러싸인 헤르만은 기겁을 하며 손을 휘둘렀다. "네 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숙부. 지금 내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군요. 내 레플리카는 광속성. 가장 레벨이 높은 속성이란 말입니다. 화속성 따위 내겐 견줄 수 없어요." 에이드리안의 말에 헤르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헤르만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헤르만은 웃으며 외쳤다. "반쪽 짜리 광속성 말이냐! 네 광속성이야 말로 가장 더럽고 추잡한 속성이야! 진짜 네 힘도 아닌 주제에!' "닥쳐!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난 아무 욕심 없었어!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뭐가 잘났다고 지껄여!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이드리안은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레플리카를 뿜어냈다. 방 안이 하얗게 변해가며 헤르만에게 레플리카가 쏟아졌다. 순간 방문이 열리고 유벨이 뛰어 들어왔다. 파란 빛이 쏟아졌다. 그는 에이드리안의 레플리카를 자신의 레플리카로 막은 다음 곧장 그에게 걸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잔뜩 화가 난 유벨의 표정을 보며 인상을 썼다. "무슨 짓이야! 내 레플리카를 막다니..." 철썩! 에이드리안은 멍하니 손을 올려 뺨을 만졌다. 유벨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뺨을 친 것이었다.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유..." 그러나 유벨은 에이드리안을 본척 만척 하며 헤르만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고함을 질렀다. "헤르만 숙부! 당장 나가세요. 무슨 생각으로 에드를 찾은 거죠? 당장 나가요. 다시는 여기 올 생각 마세요!" 유벨은 방문을 열어 수행원들에게 헤르만을 데리고 나가라고 지시했다. 수행원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헤르만은 거의 넋 나간 얼굴로 그들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 헤르만이 밖으로 나가자 에이드리안은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목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아하....하하.....우습군. 우스워." "에드, 정신 좀 차려. 지금 이래서 어쩌자는 거야! 감정 조절 좀 해!" 유벨이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댈 때까지도 에이드리안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유벨은 점점 일그러져 가는 사촌 동생을 보며 답답한 가슴을 쳤다. 에이드리안은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유벨의 어깨를 쳤다. "걱정하지 마, 유벨. 나, 자살 따위 하지 않아. 이제 즐거운 일만 남았는 걸. 다 부수고 나만 살아남을 거야. 그러니까 자살 따윈 하지 않아." ********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방 앞에서 서성이며 초조한 듯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내려간 뒤로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헤르만 평의회 의장과 에이드리안이 몹시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쥬느비에브였기에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기에도 멋쩍은 기분이 들어 그저 방 앞에서 에이드리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유벨과 함께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차마 나서지 못하고 그저 그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무섭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읏! 안 돼...노래하면...안 돼...."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쥬느비에브는 얼른 입을 막고 침을 삼켰다. 입을 벌리면 바로 노래가 나올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조절했다. 아주 기쁘거나, 즐겁거나 혹은 아주 괴롭거나 힘들 때면 으레 노래가 하고싶어 졌다. 하지만 노래를 할 수는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그럴 때마다 눈을 꼭 감고 에이드리안을 생각했다. 에이드리안이 슬퍼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괴롭고 힘들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가 슬퍼하는 것보다 자신이 힘들고 괴로운 편이 나았다. 문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얼른 고개를 들고 에이드리안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유벨이 나온 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유벨에게 걸어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유벨이 돌아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아, 쥬느비에브? 들어가 봐. 에드 녀석, 피곤하다고 좀 잔다던데 아직 잠들지는 않았을 거야." "유벨 오빠. 나 할 말 있어요. 잠시만 나랑 얘기 좀 해 줘요." 쥬느비에브의 진지한 표정에 유벨은 무슨 일이냐며 눈짓을 했다.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유벨은 뭔가 문제가 있음을 예감하며 쥬느비에브의 뒤를 따랐다. ******** 쥬느비에브는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방긋 미소지었다. "유벨 오빠, 찻잔 예쁘죠? 에이드리안이 사준 거에요." "알아. 이 거 산다고 온 시내를 다 돌아다녔으니까. 내가 녀석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헤에. 정말요?" 쥬느비에브는 찻잔을 유벨에게 건네주고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유벨이 차를 마시자 쥬느비에브는 유벨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벨은 따뜻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봐." "유벨 오빠. 나한테 빚진 거 있죠? 나한테 에이드리안 살려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나, 에이드리안 살렸어요. 유벨 오빠는 나한테 빚진 거야. 맞죠?" 유벨은 쥬느비에브가 망설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편하게 자리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한테 빚졌어."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줘요." 유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는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한참 유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결심했다는 듯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꾸욱 움켜쥐고 말했다. "미레이유가 누구에요?" "뭐? 너, 그 이름은 어디서..." "미라벨 언니랑 케이로프 님이랑 말하는 거,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다른 말은 필요 없어요. 미레이유가 누군지 말해 줘요. 난 꼭 알아야 해요. 전에 빚진 거 갚는다고 생각하고 대답해 줘요. 에이드리안에게는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유벨 오빠가 말해 줘요. 난 꼭 알고 싶어요." 쥬느비에브의 간곡한 표정에 유벨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어쩌다 그 이름을 말한 거야? 유벨의 당황한 표정에 쥬느비에브는 의기소침해진 건지 고개를 숙였다. 유벨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눈을 깜빡였다. 유벨은 쥬느비에브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에이드리안도, 쥬느비에브도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암울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노력이 행복하게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야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유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쥬느비에브. 이건 에드가 말해야 하는 이야기일 거야. 하지만 에드는 지금 아주 힘들어하고 있어. 네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여유가 없을 거야. 에드는....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모양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에드는 널 지켜주려고 하는 거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그렇지만 너도, 에드도 행복해 지길 바래.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에이드리안은 널 세상에서 가장 아낀다는 거야." 유벨은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유벨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벨은 쥬느비에브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레이유 누님은... 에이드리안의 약혼녀였어." "약...혼녀?" 쥬느비에브는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벨은 난처한 얼굴을 하며 다시 말했다. "약혼을 하기는 했는데 집 안에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어. 그냥 형식적인...뭐 그런거지. 몸이 약했던 미레이유 누님을 에이드리안이 보살펴 주면서 서로 좋아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에드가... 에드가 마음이 착하니까 그래서... 미레이유 누님을 보살피기 위해 약혼한 거야." "그런데요?" 쥬느비에브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바짝 마른 입술을 놀렸다. 유벨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에스프라드 형이...미레이유 누님을 크게 다치게 했어. 거의 죽을 정도로. 미레이유 누님을 그렇게 만들면 에드가 더 이상 자신의 앞을 가로막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미레이유 누님은 비록 양녀지만 에스프라드 형의 누이이기도 한데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던 거야. 그 후로 에스프라드 형이 미레이유를 데려가 버렸고 에드나 나나 한번도 미레이유 누님을 만난 적이 없어. 에이드리안은 그 후로 에스프라드 형을 정말 미워하게 되었지. 미레이유 누님은...지금 거의 식물인간처럼 지내고 있다고 들었어." "그, 그랬군요..."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자신의 원피스 자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유벨은 애써 미소를 보이며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쥬느비에브. 다 지난 일이야. 넌 무시해도 돼. 이제 에드 녀석도 미레이유 누님을 완전히 잊었다고. 어릴 때 이야기니까. 에드 녀석도 생각할수록 마음도 무겁고 하니까 차라리 잊기로 한 것 같아. 이제 에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너야. 난 네가 에드를 보살펴 주고 아껴줬으면 좋겠어." "으..으응...고마워요, 유벨 오빠. 이야기 해줘서.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 쥬느비에브는 활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쥬느비에브의 의젓한 모습에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미레이유는 오랜 시간 에이드리안의 짐이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가 이제 그 짐을 내려 주지 않을까 하고 유벨은 생각했다. 이제 마음 홀가분하게 천천히 하나씩 행복을 잡아 갈 수 있도록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을 도와줄 것 같았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왜 에드는...미레이유 누님을 찾지 않는 걸까." ******** 유벨이 떠나고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침실로 갔다. 에이드리안은 많이 피곤했던 것인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 앞에 앉아 에이드리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자고 있는 모습이 꼭 어린 아이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얼굴을 만졌다. 감겨있는 눈을 만지고 코를 만지고 뺨을 만지고...입술을 만지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쥬느비에브는 얼른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눈을 깜빡였다. 요즘은 걸핏하면 눈물이 쏟아져서 정말 싫었다. "...쥬르?" 쥬느비에브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에이드리안이 잠에서 깬 건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이 몸을 일으키며 나직하게 웃었다. "뭐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나, 깨우지 그랬어? 흐음...얼마나 잔 거야?" "얼만 안 된걸요. 에이드리안." "응?" 에이드리안은 아직 잠에서 덜 깬 건지 계속 잠옷 소매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쥬느비에브는 생긋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따스하고 소중한 자신의 가족, 에이드리안. 그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웃으며 물었다. "나, 좋아해요?" "응." "얼마만큼요?" "많이. 아주 많이." 에이드리안이 계속 눈을 비비며 대답하자 쥬느비에브는 소리 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자꾸 마음이 아파 왔다. 쥬느비에브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미레이유보다 더?" 에이드리안이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몹시 놀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순간 차가운 빛이 어렸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움찔했지만 굳게 마음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미레이유란 사람, 지금도 좋아해요?"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굳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눈빛에 방금 전과 같은 따스한 빛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에이드리안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차가움만 가득한 미소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며 자신의 긴 금발을 쓸어 넘겼다. "쥬르, 미레이유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말하지 마. 나, 화낼지도 몰라." 에이드리안은 다시 누워 이불을 끌어올렸다. 쥬느비에브는 넋 나간 표정으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다,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두렵고 싫은 감정이 자꾸 솟아났다. "미레이유, 에이드리안은 안 돼... 차라리 듣지 말았으면, 말하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미레이유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마음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추한 자신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에이드리안은 뺏기고 싶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을 빼앗겨도 에이드리안만큼은 가지고 싶었다. 그의 마음 속에 자신 외에 아무 것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여전히 그녀가 남아있는 것 같아 무서울 정도로 괴로웠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불끈 쥐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에이드리안은...안 돼...단 하나 잡은 행복이야. 안 돼, 미레이유. 사라져 버려, 미레이유. 제발 없어져 버려." 제128음(第128音) Silence... 쥬느비에브는 계속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얼마 전, 참을 수 없는 감정의 역류로 결국 노래를 부르고 말았고 결국 노래를 부르고 나서 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열이 너무 나서 거의 3델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깨어나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에이드리안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에게 무엇 하나 바래서도 안 되는데 자꾸 욕심이 커지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그의 마음을 전부 가지고 싶었다. 그가 자신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일그러져 버린 자신의 운명이었지만 그의 마음 전부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틀린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에서 행복이란 항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항상 행복의 주인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은 미레이유를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깊고, 강한 감정으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그의 그런 감정이 못 견디게 싫고 가슴 아팠다. 미레이유가 한없이 원망스럽고... 또한 증오스러웠다. ******** 드레이노 영지에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에스프라드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마른 잔디를 밟았다. 바삭바삭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공기를 마셨다. 차갑지만 머리 속을 맑게 해주는 공기였다. 이 곳의 공기를 그는 무척 좋아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는 작은 정원에 다다랐다. 정원의 가운데에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그 의자가 올리비엘라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햇살이 따스한 날이면 항상 그 의자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올리비엘라는 하얀 옷차림을 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한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렸다. 작고 가냘픈 그녀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올리비엘라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늘 집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자유를 잃어버린 새처럼 작은 영지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늘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에스프라드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그녀를 불렀다. "리에." 하늘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더니 하얀 피부의 소녀가 아름답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 듯 무릎 위에 실타래가 보였다. 에스프라드는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올리비엘라는 실타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프라드에게 달려갔다. "에스프라드!" 에스프라드는 오랜만에 만난 약혼녀를 꼬옥 안아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뛰지 마. 몸에 안 좋아. 잘 있었지? 몸은 괜찮고?" "괜찮아요. 약도 꼬박꼬박 먹고. 산책도 하니까. 올슈틴 오라버니도 자주 들러 주세요." 에스프라드는 올리비엘라를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그녀의 옆에 앉았다. 하얗던 올리비엘라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수줍은 듯 미소를 떠올리며 에스프라드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많이 바빴어요? 요즘 통 안 왔잖아요. 많이 기다렸는데..." "일이...좀 있어서." "오라버니께...이야기 들었어요. 헤르만 님이..." 올리비엘라는 우울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에스프라드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곧 끝날 테니까." "끝...이요?" 올리비엘라는 침울하게 입을 다물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에스프라드를 끌어안았다. "에스프라드. 당신이 에이드리안 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다 알아요. 이제 엘로이즈 언니도 없는데... 에스프라드. 난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테니까 당신에게 아무 말도 못 할 테지만...그래도 당신하고 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바보같이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내가 너무 싫어. 에이드리안 님이 너무 질투 나요." "리에. 에이드리안과 약속한 게 있어. 난 그걸 지키지 못 했어. 하지만 내 소망은... 내 이기적인 소망만은 꼭 이루고 싶어. 리에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날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야. 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리에와 함께 하고 싶어. 내게, 그리고 네게 좀 더 많은 것이 주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난 그 날, 아버지가 히스페르 숙부를 죽였다는 걸 안 그 날, 내 행복 따위 기대하지 않았어." 에스프라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랗고 하얀 하늘이 몹시 아름다웠다. 에스프라드는 올리비엘라에게 고개를 돌려 미소를 보여 주었다. 올리비엘라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에스프라드. 당신은 몸이 약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나에게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말해준 사람이에요. 난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주 행복하다고...내가 말했었나요?" "응. 리에. 나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언제나 행복했어. 엘로이즈 누님은 늘 그러셨는 걸. 나한테 네가 아깝다고 하셨어. 맞는 말이야. 나한테 넌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하지만...욕심나는 사람이지." 에스프라드는 올리비엘라의 긴 하늘색 머리를 손에 감으며 눈을 감았다. 아주 조용한 날이었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바람 소리와 작은 새소리만이 간간이 귀에 울렸다. 너무나 조용해서 마음이 우울해지는 날... 왜 눈물이 나는지 두 사람은 알 수 없었다. ******** 바람 한 점 없는 조용한 날이었다. 햇빛도 약해 우중충한 날씨였다. 유벨과 미라벨, 케이로프는 유벨의 연습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미라벨이 우울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말 우울하네요. 에이드리안 님은 에이드리안 님대로, 쥬느비에브는 쥬느비에브대로 다들 우울한 것 같아요. 이럴 때, 안느마리라도 있었다면..." "어차피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도 미레이유 님에 대해 알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빨랐던 건 아닌가? 우리도 우리지만, 유벨 비앙카 로르 비인 군, 자네도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적어도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께 말씀드렸다면..." 케이로프가 쿠키를 접시 끝에 의미 없이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매마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돌아버리겠어. 왜 이렇게 나쁜 일만 연속해서 터지냐? 엘로이즈 누나가 죽고, 우리 형도 그렇게 떠나고, 쥬느비에브는 암속성 레플리카라지.. 난 비인 가문이 지긋지긋해.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이제 좀 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싶어. 고통도 슬픔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을." 유벨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창 밖에 소리 없이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유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조용하군." ******** 안느마리는 자신의 가게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 바람조차 불지 않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후우- 쥬느비에브. 미안." 버릇처럼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안느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 때였다. 맞은 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맞은 편 가게에 얼마 전, 새로운 의상실이 생겼는데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번들거리는 얼굴의 남자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 것 보세요! 난 돈을 벌려고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요! 이건 내 프라이드에요.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난 옷을 만드는 거에요. 그런데 어쩌고 어째요? 눈이 달려 있으면 제대로 보시라고요! 옷 보는 눈이 없으면 입지도 말아요!" 안느마리는 멀뚱거리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대단한 기세로 남자를 몰아붙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으니 절로 감탄이 났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여자는 의상 디자이너인 모양이었는데 자신의 옷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존경스럽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프라이드였다. 안느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여자의 기세는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아 금방이라도 남자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남자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듯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이미 끝난 싸움인 듯한 상황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것 보세요, 아가씨.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밖에서 싸우시면..." "싸우는 거라뇨? 난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거에요!" 여자가 발끈하며 외쳤다. 안느마리는 난처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여자의 말투에 귀족의 그것과 같은 뉘앙스가 느껴졌다. 안느마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소리쳤다. "이보세요! 여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라고요! 그렇게 소리 치면 피해를 주게 되잖아요!" "그럼 가만 있으라고요? 내 옷을 보고 3류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 사람이!!"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옷을 흔들며 외쳤다. 안느마리는 눈을 깜빡이며 옷을 받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디자인도 훌륭했고, 바느질도 꼼꼼했다. 옷감이나 장식에 쓰인 재료도 최고급품을 쓴 것 같았다. 안느마리는 홱 돌아서 남자에게 외쳤다. "으아아아아아!!!! 아저씨 눈은 밴댕이 눈이에요? 이게 어디 3류에요? 아저씨 잘못이네. 아저씨가 사과해요!!" "그, 그게....아, 미, 미안합니다." 안느마리의 호통에 엄청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소심하게 말은 던진 남자는 뒤돌아서 달려갔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한숨을 쉬며 안느마리가 들고 있던 자신의 옷을 낚아채 갔다. "흥. 감히 내 옷 보고 3류라고? 흥! 내 자부심이 깃들인 옷을..." "그러네요. 옷 만드는 재주가 있나봐요. 부럽네요. 난 장사하는 재주밖에 없어서...." 안느마리는 웃으며 머리를 긁다가 문득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최근에 본 듯한 얼굴이었다. 안느마리는 고개를 숙이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안느마리의 진지한 표정에 의아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이봐요? 지금 뭐하는 거에요?" "아! 맞다! 미라벨 님의 언니, 세린느! 맞죠? 당신, 전에 나 봤었잖아요. 깜짝 놀랐네. 전에는 유령 같더니 오늘은 진짜 사람 같아서...." "날 알아요?" 고민이 해결되어 개운한 듯 안느마리의 표정에 밝은 빛이 돌자 여자는 눈썹을 실룩이며 물었다. 안느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전에 미라벨 님의 약혼식 때 봤었잖아요. 유벨 님이 당신더러 후계자 시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유령같이 지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여자의 표정에 곤혹스러운 감정이 비춰졌다. 안느마리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싶어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여자는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레플리카에서는 미라벨에게 못 이겼지만 옷을 만드는 건 내가 최고에요. 레플리카로 가문을 빛내지는 못했지만 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프라이드도 있어요. 내게도 나만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자신감을 잃고 비실거리던 내가 아니라고요. 비록 지금은 이름 없는 디자이너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꼭 아르헨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요. 그러고 보니 생각났네요. 미라벨이 이상한 여장 남자가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친구를 배신했다면서요?" 안느마리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왜 이러고 있는 거에요? 가서 용서를 빌어야지. 당신이야말로 프라이드가 부족한 사람이네요. 잘 모르는 사이로서 이런 말하는 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든 용기가 필요한 법이죠. 아주 어려운 일이겠지만 용기가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아요. 내가 귀족의 신분으로 의상실을 열겠다고 용기를 내어 결심한 것처럼 당신한테도 용기가 필요한 것 같네요. 언젠가 '때'가 올 거에요. 당신의 용기가 필요한 '때'가요. 그 때 확실히 용기를 내는 게 좋아요. 후회하지 않도록." 여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내려 안느마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정말 조용한 날이죠? 내가 처음 용기를 내기로 결심한 날도 무척 조용한 날이었어요. 마음이 어지러워 갈팡질팡할 때, 결심이 필요하죠. 지금 어렵더라도 '그 때'가 오면 반드시 용기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는 게 필요해요. 오늘 같이 조용한 날, 결심하기엔 꽤 좋은 날씨죠?" 세린느의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느마리는 주먹을 꼬옥 쥐었다. 마음 속에 맺혀 있던 무언가가 녹아나는 느낌이었다. 작은 말이지만 무척이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이었다. 쥬느비에브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굳어버려 작은 움직임도 허용치 않았다. 무엇이 두려운 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쥬느비에브에게 필요치 않다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쥬느비에브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면. 그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일까. 결국 걱정되는 것은 쥬느비에브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자신이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런 마음 속에도 여전히 쥬느비에브에게 용서받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친구에게 용서받고 예전의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안느마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네요. 오늘 같이 조용한 날, 결심하기엔 아주 좋은 날인 것 같아요. 세린느, 나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있을 곳이 마땅치 않네요. 조수 필요 없나요? 내 가게도 처분 직전이라 진짜 갈 곳이 없는데..." "보수는 거의 없다고 보세요.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해요." 세린느가 웃으며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마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용기를 낼 때를. 이 조용한 하늘이 걷히고 나면, '그 때'가 올 거야." ******** 쥬느비에브의 방 안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인 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를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오늘 아침 일찍 산책을 갔다가 학생회 위원으로부터 이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오후가 되어서도 편지를 뜯어보지 못했다.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편지를 뜯어보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몹시도 조용해 보였다. 너무도 조용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편지를 뜯었다. 하얀 봉투가 찢겨져 나가고 같은 하얀 색의 편지지가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펼쳐보았다. "미...레이유...." 쥬느비에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 그 시간. 에이드리안은 책상 위의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스프라드를 몰아내기 위한 준비였다. 그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 이 서류를 평의회에 제출하기만 하면 그를 받쳐주는 세력들이 알아서 에스프라드를 탄핵할 것이다. 그가 스콜라에서 쫓겨나면 이제 자신을 괴롭힐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를 괴롭힐 사람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띄며 테라스로 걸어갔다. 희뿌연 하늘이 보였다. 그는 난간에 팔을 얻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 허탈한 기분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테라스 안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보였다. 아주 이상한 느낌.... "너무 조용해...조용해... 왜 이렇게 기분이 불편한 거지?" 에이드리안은 테이블에 몸을 엎드리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어. 헤르만 숙부와 에스프라드 형을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해도,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야. 저주는...사라지지 않아. 어쩌지..어쩌지..." 에이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구름이 흘러가며 빛을 덮고 있었다. 아주 이상한 느낌... "구름이 빛을...덮어...어둠이... 어둠이...빛을 덮어?" 순간 에이드리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이 떨려왔다. 에이드리안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봉인이...아니라 흡수하면? 내가 쥬르의 속성을 흡수하면? 쥬르의 레플리카는 무속성이 될 거야. 그럼...나는? 내 레플리카는?" 에이드리안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며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았다. "내 속성도....무속성이 되겠지. 아니...레플리카 자체가...사라지겠지. 반대되는 속성이 부딪혀서 몸이 남아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봉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야. 쥬르는...계속 노래할 수 있을 거야. 나만...나만 희생하면... 어차피 대가 없는 기적 따위 없어. 나만 희생하면....기적이 일어 날 거야. 나만..." 머리 속의 복잡했던 생각이 천천히 정리되어 갔다. 뭔가 명백하게 결론이 난 듯한 기분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결국 찾아낸 결론이 이것인가. 허탈하고 공허한 기분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차피...3년 전에 죽었어야 할 나야. 쥬르가...괜찮아 진다면...괜찮은 방법 일지도... 아주 방법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상황이니까. 다시 쥬르를 만나지 못해도... 그렇게 되어도...."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저주가 풀리지 않는다면 쥬느비에브만이라도 그 손길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혼자 그 짐을 짊어지면 쥬느비에브는 해방 될 것이다. 다시 만나지 못 해도 좋았다. 그녀가 다시 노래할 수 있다면! 에이드리안은 손등으로 눈물을 흩어내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루이즈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가 방금 급하게 나가시는 것 같던데... 그것보다, 방금 에스프라드 님의 집사 분이 오셔서 전언을 주셨습니다." "에스..프라드 형이?"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심장이 뛰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하나의 카드 패가 남았다. 지금 그 패를 쓰려는 것인가? 루이즈가 말했다. "미레이유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쥬느비에브 아가씨도 오실 테니 어서 비인의 저택으로 오라고..." "뭐?" 에이드리안은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에스프라드가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까지! 에이드리안은 허둥지둥 코트를 챙겨 들고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갔다. "미레이유... 안 돼. 쥬르는...안 돼... 미레이유...." 단숨에 계단을 내려온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미레이유...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여겼던 아름다운 소녀...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미레이유...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코트를 몸에 걸치며 거칠게 현관문을 열었다. ******** 미라벨과 케이로프를 먼저 보내고 늦게 연습실을 나온 유벨은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조용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자신의 사택으로 향하지 않고 에이드리안을 만나고 가기로 결심했다. 오솔길을 한참 걷자 에이드리안의 사택이 나왔다. 유벨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 때였다. 현관에서 쥬느비에브가 나오더니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급히 가는 것이었다. 유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지? 에이드리안한테 허락은 받았나?" 유벨은 의아한 생각에 숨을 내쉬다 다시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 번에는 에이드리안이었다. 유벨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어이, 에드..." 순간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벨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 끌었다. "에드,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 "유벨.... 유벨. 나 어떻게 해. 기분이 안 좋아. 뭔가가...에스프라드 형이 쥬르를...아니야...아니야...미레이유..안 돼..." 에이드리안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며 초조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등을 두드리며 다시 물었다. "에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까 쥬느비에브가 마차 타고 어딘가 가는 것 같던데..."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유벨은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보았다. 뭔가 일이 생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유벨의 팔을 잡았다. "쥬르, 어느 쪽으로 갔어? 대로 쪽으로...간 거야?" "그런 것 같았는데... 에드, 말 좀 해 봐. 무슨 일이야?" 유벨은 답답한 마음에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에이드리안은 맥없이 흔들리며 그의 손을 후려쳤다. "놔! 어서 가야해. 쥬르가... 쥬르에게 손대면....내가 죽여버릴 거야. 그게 누구든... 어서 가야 해. 쥬르가...쥬르가..." 에이드리안은 비틀거리며 대기된 마차에 올라탔다. 유벨은 미처 따라 타지 못 하고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마차의 창을 열었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유벨에게 물었다. "유벨. 그 날. 3년 전, 그 날. 내가...내가....쓰러져 있는 걸 네가 발견했지. 그럼...그 전에 내가...무슨 짓을 했는지.... 넌 보지 못했지?" "에드. 난 쓰러져 있는 널 데려왔을 뿐이야. 이미 미레이유 누님은 에스프라드 형이 데려간 뒤였고. 에드... 무슨 일이야? 도대체..." 유벨은 에이드리안의 슬픈 표정에 말을 흐렸다. 에이드리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지을 뿐이었다. 마차의 창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유벨은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에스프라드가 움직인 게 틀림없었다. 그는 황급히 사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바람조차 조용했던 그 날, 미쳐버린 마지막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129음(第129音) 두 번째 카드 패...혹은 절망 전에 와 본 적이 있는 에스프라드의 저택이었다. 쥬느비에브는 밤이 늦어서야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소름끼칠 정도의 침묵이 저택을 감돌았다.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서 있었다. 저택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침묵, 침묵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드러운 발소리와 함께 에스프라드가 나타났다. 그는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을 한 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왔군.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미레이유...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며 주먹을 쥐었다. 에스프라드는 손을 뻗어 2층을 가리켰다. "미레이유 누님은 2층에 있어. 너도...궁금한 모양이군? 아직도 에이드리안을 놓아주지 않는 미레이유가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당신이 나쁜 사람이란 건 알아요! 미레이유란 사람을 많이 다치게 한 사람이 당신이라면서요! 에이드리안을 괴롭히는 이유가 뭐에요?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쥬느비에브는 입고 온 빨간 코트를 두 손으로 꾸욱 쥐며 외쳤다. 그러나 에스프라드는 아무런 반응 없이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 에스프라드가 안내해 준 방은 몹시도 조용했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방 안에 들어서자 휘장이 반쯤 내려져 있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쥬느비에브는 마치 홀린 듯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굳어버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악한 쥬느비에브는 결국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겹고 혐오스러운 냄새였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어, 어떻게 이런...." 에스프라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서워? 하긴 온 몸에서 고름이 나오니 냄새가 역겹긴 하지. 나도 데리고 있는 동안 애 먹었지. 그런데 말이야, 쥬느비에브. 누가 미레이유를 그렇게 만들어 놨을까." "무,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잖아요! 당신이..."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뒤돌아 섰다. 달빛이 반사된 에스프라드의 얼굴이 너무나 차갑게 보였다. 그는 혼자 넋두리를 하듯 말했다. "에이드리안을 아주 믿고 있나 보군. 하긴 그 애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아주....아름다운 미소를 지니고 있어, 그 앤. 하지만 그 얼굴 아래 얼마나 무서운 생각을 하는지 넌 모르겠지. 에이드리안은 네게 따스한 얼굴만 보여줬을 테니까. 내게 그랬듯이. 문제를 하나 내 볼까? 정말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 나일까, 에이드리안일까." 에스프라드는 환하게 불을 밝혔다. 쥬느비에브는 확연히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말문을 잃었다. 다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에스프라드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레이유 누님은 내게 정말 소중한 분이었어. 엘로이즈 누님과 함께 내겐 아주 특별한 분이었지. 하지만...에이드리안이 다 망쳐놨어. 그는 미레이유 누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 미레이유 누님을 이용한 것뿐이었어." 쥬느비에브는 뻑뻑한 눈동자를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너무나 무서운 느낌이었다. 에스프라드는 '미레이유'를 바라보다 눈을 감고 말았다. "미레이유 누님을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건 내가 아니라... 에이드리안이야." ******** 쥬느비에브는 눈을 크게 떴다. 에스프라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유벨은 분명 에이드리안이 미레이유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쥬느비에브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왜 에이드리안이 미레이유 누님을 이렇게 잔인하게 부셔버렸을까. 에이드리안은 힘이 필요했거든. 그 힘을 미레이유 누님이 가지고 있었어." "에스프라드 님. 그만 하세요. 난 에스프라드 님의 말, 믿지 않아요. 에이드리안은 좋은 사람이에요. 이런 잔인한 짓을 할 리 없어." 쥬느비에브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은 에이드리안의 변호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에스프라드의 목에서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나왔다. "에이드리안이 정말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인 줄 알고 있겠지? 아니야. 그 앤 단지 전승 후보자에 지나지 않아. 내 대(代)의 대속성 레플리카는 나와 아버지, 유벨과 프란체스 형, 암속성 레플리카인 너, 그리고...미레이유 누님이야. 에이드리안은 엘로이즈 누님처럼 속성을 계승하지 못한 다음 대의 전승 후보자일 뿐이야." "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에요? 에이드리안은 광속성 레플리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고요!" 쥬느비에브는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며 힘껏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그런 아픔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에스프라드가 희미하게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 "대속성 레플리카는 한 사람에게만 전승되지. 전승 후보자는 허울 좋은 이름일 뿐. 대속성 레플리카의 힘은 조금도 받지 못한, 이름 그대로 '후보자'일 뿐이야. 에이드리안은 그게 싫었던 거지. 내 아버님과 나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했던 그 애에게는 절대적으로 힘이 필요했거든. 하지만 그가 광속성을 전승하려면 미레이유 누님이 죽어야 했어. 미레이유 누님이 살아있는 이상, 그는 광속성을 전승 받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그는 미레이유 누님을 죽이기로 했지. 하지만 다행히 미레이유 누님은 목숨만은 건졌어. 하지만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된 덕분에 광속성은 에이드리안에게 전승되어 버렸어. 그래, 에이드리안은 미레이유 누님을 이 꼴로 만들고 광속성을 전승한 거야." 에스프라드는 슬픈 표정으로 '미레이유'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레이유'의 참혹한 그 모습에 다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웠다. 복잡한 마음과 그리고 굳어져 가는 머리 속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눈을 깜빡였다. 목이 뻑뻑하게 아파 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에스프라드가 들려줄 그 다음 이야기를 그녀는 알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로 유혹하고 저렇게 잔인하게 망가뜨려 버렸지. 미레이유 누님은 정말로 에이드리안을 사랑했어. 진심으로..." 에스프라드는 멍하게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떠올렸다. [ 에이드리안, 마지막 카드 패야. 잘 봐. ] "쥬느비에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지?" 에스프라드의 낮은 목소리에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스프라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의 마음이 알고 싶은 거겠지? 그가 미레이유 누님을 저 꼴로 만들었다는 사실 따위 사실 네게는 상관없는 거지? 그가 정말로 미레이유 누님을 사랑했는지가 알고 싶은 거지?" 쥬느비에브는 두근두근 자신도 모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에스프라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에스프라드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 잘 봐, 에이드리안. 하나씩 부서지는 거야. ]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이 왜 널 받아들였는지 알아?" "무, 무슨..." 쥬느비에브는 굳어버린 입술을 움직였다. 에스프라드가 하는 말은 머리 속에 하나씩 박혀 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너무나 날카롭고 차가운 말이라 마음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에스프라드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네게 끌린 점도 있겠지. 하지만....네가 암속성이라는 것을 에이드리안은 알고 있었어. 그는 어릴 때 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거든.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는 아주 쓸모 있는 존재야. 에이드리안이 놓칠 리가 없지. 그는 모른 척 연극을 한 거야. 마음 아픈 척. 슬픈 척." "아니야! 에이드리안은 정말 슬퍼했어! 아니야!" 쥬느비에브는 귀를 막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무서웠다. 눈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프라드의 날카로운 말을 계속해서 마음을 찔렀다. "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야. 생각해 봐. 지금 대속성 레플리카 중 누가 남았지? 에이드리안과 나, 그리고 유벨 밖에 없어. 유벨은 어차피 에이드리안의 사람이니 이제 그에게 대항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리고 네 속성이 드러나자마자 그것을 트집잡아 나와 아버지를 몰아내려고 해. 그 애는 평의회 의장이 되기 위해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아. 그래서 나와 내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그 마음 밖에 없어. 그리고...너도 대속성 레플리카지. 암속성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해. 하지만 왜 에이드리안은 널 곁에 두는 걸까." "그만해요! 듣고 싶지 않아요! 나, 난 에이드리안을 믿어. 에이드리안은 날 좋아했어. 그건 진심이었어. 다른 이유는 없어. 날 좋아해서 나와 함께 있는 거야. 그건 진심일 거야. 분명히...분명히..."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에스프라드의 차가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만해요...그만해!! ...흐윽...흐윽...."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무서웠다. 목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에스프라드의 입에서 나올 무서운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이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 그의 마음에 들어있었던 사람. 그것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더 두렵고 무서웠다. 에스프라드는 엎드려서 오열하고 쥬느비에브를 향해 잔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있어? 광속성 레플리카가 왜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보다 레벨이 높다고 하는 건지. 광속성은....암속성을 흡수할 수 있거든. 속성이 흡수되면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는 레플리카를 빼앗기고....죽게 되는 거야. 하나 더...얘기해 줄까? 에이드리안은 미레이유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강한 마음으로, 그녀만을 사랑했어. 비록 한 때의 실수 아닌 실수로 미레이유 누님을 저렇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에이드리안은 네 레플리카를 흡수해서 보다 강력한 레플리카로...미레이유를 살리고 싶어해. 네 존재 이유는 미레이유를 되살리기 위한 힘, 단지 그 것 뿐이야." 에스프라드는 창 밖의 달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쥬느비에브. 넌 에이드리안에게 아무 것도 아니야. 불쌍한 쥬느비에브... 쿡쿡. 언니에게 모두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았어. 아하하하하---" 에스프라드는 미친 듯이 웃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뒤이어 거센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에스프라드는 고개 숙여 오열하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너 따위, 질색이야.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은...어릴 때의 행복했던 그 곳에 있어야 해. 모두에게 같은 미소를 보여줘야 해." ******** 에스프라드의 저택 앞에 도착한 에이드리안은 마차에서 내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것 같았다. 어두운 하늘 아래 저택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도 하녀나 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코트를 벗어 팔에 걸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저택 안은 몹시 조용했다. 에이드리안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세어 나오는 방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엄청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드리안은 익숙한 울음소리에 놀라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냉랭하게 미소짓고 있는 에스프라드와 자지러질 듯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에게 걸어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쥬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늦게 등장했군. 좀 더 빨리 오지 그랬어? 쿡쿡....큭큭...네가 아끼는 인형은 이미 부서진 것 같은데..." 에스프라드는 비웃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를 거칠게 밀어내고 쥬느비에브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저앉아 정신 없이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랬다. "쥬르, 쥬르. 울지 마. 쥬르. 무슨 일이야, 쥬르...." "흐어어엉. 흐어어어어엉---- 다 미워! 이제 다 미워! 용서 안 해. 다 용서 안 할 거야!! 어흐흐흐흑...."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날카로운 외침에 주먹을 꾸욱 쥐며 에스프라드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그가 쥬느비에브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방안 가득 퍼지는 쥬느비에브의 울음소리는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다독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표정의 에스프라드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굳어버린 입술을 열어 에스프라드에게 거세게 말했다. "에스프라드 형, 쥬르한테 뭐라고 한 거야? 대답해!" "미레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네가 미레이유를...그렇게 만들었다고." "무슨 소리야! 미레이유를 망친 건 형이잖아!!"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일으켜 바로 옆의 소파에 앉혀 주었다. 그리고 에스프라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왜. 내가 형을 축출할 걸 생각하니 불안했던 거야? 없던 이야기나 지어내고. 그 날, 형이 미레이유에게 레플리카를 퍼부었잖아. 아니야?" "에이드리안. 그만하고 솔직해 지는 게 어때? 그 날, 넌 제 정신이 아니었어. 미레이유에게 레플리카를 쏟아 붓고 바로 기절했지. 기억이...나지 않는 거야?" "닥쳐! 난 그런 적 없어! 난 미레이유에게 배신당했고, 형에게 배신당했어. 난 아무 잘못도 없어!! 난 아무 잘못 없다고!!" 에이드리안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머리 속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자꾸 되살아났다. 에이드리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날, 비가 오던 그 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에스프라드는 괴로워 보이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 뒤돌아 봐. 미레이유가...거기 있어. 네가 망가뜨리고 부셔버린 미레이유...네가 모두 빼앗아 버린 미레이유가 거기 있어." 귀를 막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무언가에 홀린 듯 뒤돌아 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눈 앞에 무언가가 비춰졌다. 시커먼...무엇. 다 타버린 끈적끈적해 보이는 무엇.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에 비치는 것은 같은 '것'이었다. 시커먼 그것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마치 시체 같은.... 그것은 사람이었다. 온 몸에 화상을 당한 사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니야!!!!!" 제130음(第130音) 미레이유(1) 어린 나이에 나는 여자 옷을 입고 '미레이유'란 이름을 지닌 여자아이의 행세를 해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일로나 할머니는 그렇게 해야 내가 세상에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것은 내 아버지와 헤르만 숙부 때문이었다. 평의회 의장의 강력한 후보였던 아버지를 죽인 헤르만 숙부... 헤르만 숙부는 아버지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늘 아버지에게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미워했다고 한다. 내 아버지는 저주받은 자였다. 로스페니르의 저주를 받은 불우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강하고...아름다운. 헤르만 숙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늘 시샘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끝내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다. 헤르만 숙부는 아버지에게 대한 콤플렉스에다 죄책감까지 얻고 말았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인 나는 오죽 미웠을까. 평소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나를 할머니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헤르만 숙부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를 비인 가의 별장 중에서도 아주 변두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 나를 키우셨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숨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는 결국 나를 데리고 비인 가로 나오셨고, 헤르만 숙부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에 나는 '미레이유 리리아 로르 비인'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여자로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사람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할머니와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접한 '사람'은 고작 하녀와 하인들 뿐. 그리고 내 또래의 아이를 만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정에 굶주려 있던 나에게 비인 가의 많은 사람들은 몹시 신기하고 멋진 존재였다. 나는 아름다운 비인의 영지에서 네 사람의 좋은 아이들을 만났다. 에스프라드 형과 유벨, 프란체스 형과 엘로이즈. 내게는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날. 그녀를 만났다. 나는 산책을 좋아했다. 비인의 영지에는 작은 숲이 많아서 산책하기에는 그만인 날씨였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봄의 아주 즐거운 날씨였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에 무척 즐거운 기분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숲 안 쪽으로 계속 길이 나 있었다. 나는 무척 의아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창고가 있거나 사냥 오두막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온갖 꽃이 만발한 화원이었다. 꽃으로 둘러싸인 아주 보기 좋고 아담한 집.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집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보았다. 나와 비슷한 금발을 가진 따뜻한 녹색 눈의 소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호기심에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야?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소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을 하며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놀라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 나와 그녀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 다음 날도 난 그곳으로 갔다. 그 소녀의 존재는 무척 친근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난 소녀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여전히 소녀의 집은 만발한 꽃으로 싸여 있었다. 소녀는 처음 본 그 날과 마찬가지로 집 앞에 나와있었다. 나는 쉽게 소녀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소녀는 나를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모른 척 흙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 소녀를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집 앞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았다. 소녀는 다시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흙을 만졌다. "안녕?" 나는 뒤늦은 인사를 했다. 하지만 소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했다. 왜 기분 좋게 인사하는데 받아 주지 않는 걸까.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소녀가 인상을 쓰며 나를 밀어냈다. 나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고 무릎에 생채기가 나고 말았다. 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소녀의 초록색 눈망울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고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소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 무릎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작게 노래를 불렀다. 하얀빛이 퍼지면서 상처가 아물어 갔다. 소녀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레플리카야. 노래를 부르면 소원을 이루어 줘. 내 이름은 미레이유야. 너는?" 내 물음에 소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으로 달려가 버렸다. 나와 그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 난 그 뒤로도 시간만 나면 그 소녀를 찾아갔다. 소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잘 웃지도 않고 늘 흙을 만지거나 멍하게 숲을 바라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쪼그리고 앉아 꽃구경만 하는 그녀였지만 내 눈에는 아주 아름답고 예뻐 보였다. 소녀가 왜 비인 영지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게 왜 한 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았는지가 궁금하긴 했지만 어느 새 그런 의문점은 머리 속에서 사라져 갔다. 나는 그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 날,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에스프라드 형에게 구하기 어려운 귀중한 책을 선물 받았던 것이다. 나는 책을 들고 소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소녀에게 책을 보여주고 아주 귀한 책이라고 자랑을 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소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흥이 깨져 내가 늘 앉던 벤치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렸다. <숲 속의 아리아>라는 곡이었다. 한창 노래를 흥얼거리던 나는 문득 고개를 숙이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노래를 귀기울여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몹시 기뻐져서 큰 목소리를 내어 노래를 불렀다. 소녀는 흙 만지던 손을 옷에 털어 내고 내 옆으로 와서 노래를 들었다. 노래를 하면서 그토록 가슴 벅찼던 적은 일생에서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녀가 내 노래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나는 내가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들뜬 기분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노래, 가르쳐 줄까? 내일 내가 악보 가져올게." 내 말에 소녀는 순간 아주 슬픈 표정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소녀의 우울한 표정을 보며 다시 말했다. "괜찮아. 아주 쉬운 노래니까." 소녀의 우울한 표정을 더 어두워졌다. 나는 내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다지 잘못한 말은 없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 때 소녀가 내 손을 들어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어 주었다. 나는 처음에 소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소녀는 다시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제야 나는 소녀가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내 손바닥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 난 말 못 해. ] 나는 순간 너무 슬프고 당황하여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그 때 처음으로 웃었다. 그것은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미소였다.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한 번도 내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이름이...뭐야?" 소녀는 한참 나를 바라보다 다시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다시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어 주었다. [ 미레이유 리리아 로르 비인 ] 나는 깜짝 놀라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가 '미레이유' 였다. 내가 '위장'하고 있던 미레이유였다. 나는 어느 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닦아내도 다시 눈물이 흘렀다. "네가 미레이유구나.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는 미레이유구나. 흐윽... 흐윽...." 나는 그 날 하루종일 울었다. '미레이유 리리아 로르 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내 선대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고 들었다. 나는 아직 대속성 레플리카를 전승 받지 못한 전승 후보자였다. 할머니는 미레이유에게 사정이 있어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를 마냥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행세를 하게 되었다. 마침 나도 내 존재를 숨겨야 했었기에 그것은 아주 적절한 기회였다. 나는 비록 전승 후보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나의 레플리카에는 강한 광속성의 기운이 있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라고 해도 의심받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레이유가 벙어리였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함으로서 힘을 발휘하는 레플리카다. 그런데 벙어리라니...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대속성 레플리카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광속성 레플리카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노래할 수 없는 미레이유. 자연히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약해졌고 그 다음 전승 후보자인 내 힘이 강해졌던 것이다. 불쌍한 미레이유. 그녀에게 약속된 모든 영광을 내게 빼앗기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광속성 레플리카라는 이름도, 그녀 자신의 이름조차도 내게 빼앗기고 말도 못하는 답답한 마음으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녀는 혼자 쓸쓸하게 작은 집을 거닐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내가 아이들과 즐겁게 뛰어 놀 때, 그녀는 작은 꽃을 벗 삼아 마음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을까. 나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안아 주었을 뿐 다른 무엇도 해주지 못 했다. "내가 다 보상해 줄게. 내가 널 행복하게 해주고 아껴줄게. 슬펐던 만큼 내가 다...." ******** 미레이유는 더 이상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주었고 시간이 될 때마다 미레이유에게 찾아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녀가 노래하지 못하는데 내가 노래한다면...그녀로서는 너무 슬프지 않을까. 하지만 미레이유는 언제나 내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살며시 웃으며 내게 부탁하는 그녀를 거절할 수 없었다. 많은 노래를 불렀다. 기원제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른 노래로 불러주었고 동요집에 있던 동요도 불러주었다. 그 때마다 미레이유는 몹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도 몹시 행복했다. 가끔씩 미레이유에게 악보 책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미레이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노래를 따라 부르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의 목에서 소리가 나온다면...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정말 기쁠 텐데. 기적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찾아오는 법이다. 그 날, 나는 유벨에게 억지로 빼앗아온 악보 책을 미레이유에게 보여주었다. 유벨이 프란체스 형에게 선물 받았다고 하루 종일 자랑하던 악보책이었다. 나는 악보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 하얗게 채색되는 작은 새의 노래 조금 더 불러볼까 렐레루아 렐레루아 ... ] 미레이유는 흥미로운 것인지 악보 책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내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늘 하듯 입술을 달싹이며 악보 책을 두드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미레이유, 맘에 들어?" 미레이유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파랗게 물들어 가는 하늘의 흐름 조금 더 바라볼까 렐레루아 렐레루아 ... ] 나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미레이유를 바라보았다. 미레이유가 웃고 있었다. 나는 탄성을 지르며 미레이유를 끌어안았다. "미레이유, 너 말할 줄 아는 구나! 노래할 수 있구나!" 나는 미레이유를 안고 한참을 웃었다. 기분이 들떠서 하늘 위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레이유는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널 위해서야. 널 위해서만... 에이드리안. ]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레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성대가 망가져서 아무리 레플리카로 치료를 해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레플리카가 있었다. 따스한 빛과 같은 레플리카. 그녀는 레플리카로 말했다.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따스한 레플리카. 그것은 나만을 위한 레플리카였고, 내게는 마음 아플 정도로 고맙고 소중한 레플리카였다. 내가 지켜주지 못한 아름다운 선율... ******** 미레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내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녀가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일로나 할머니를 통해 수소문해 보았지만 미레이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에스프라드 형이 스콜라에 입학했다. 나는 그 후, 거의 유벨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에스프라드 형이 없으니 무척 쓸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벨덕분에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유벨이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나도 스콜라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레이유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간절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녀가 날 찾으면 어쩌나. 하지만 스콜라에 입학한 뒤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에스프라드 형이 하루는 찾아와 미레이유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곧장 에스프라드 형과 비인의 영지를 찾았고 형의 집에서 미레이유를 만났다. 미레이유는 헤르만 숙부의 양녀로 입적되어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미레이유가,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에스프라드 형의 누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몹시 기뻤다. 에스프라드 형은 미레이유에게 엘로이즈 누나를 대하듯 해주었고 미레이유에게도 가족이 생기는 듯 했다. 다시 미레이유를 만난 나는 할머니에게 떼를 썼다. 더 이상 미레이유의 앞에서 여자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떼를 쓰면 절대 당해내지 못하셨다. 결국 나는 내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미레이유에게 이름을 돌려주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하지만 미레이유가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나설 수 없었기에 나는 계속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행세를 해야 했다.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는 비인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이자 평의회 의장의 후보가 되기 때문에 가문에서는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들에 대해 몹시 까다로웠다. 나는 비인의 어른들에게 미레이유를 내보이기 싫었다. 세력 다툼이니 뭐니 그런 것을 미레이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 행세를 했다. 덕분에 미레이유는 숨겨진 채 계속 조용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미레이유 자신이 바란 일이기도 했다. ******** 미레이유와 난 어렸지만 일로나 할머니와 몇몇 가족들만 모아 놓고 작은 약혼식을 했다. 난 미레이유와 계속 함께 하고 싶었고 미레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와 약혼을 한 뒤로는 곧잘 웃곤 했다. 미레이유는 나보다 3살이나 많았지만 언제나 어린 아이처럼 미소지었다. 난 그녀의 미소가 아주 보기 좋았다. 학생회 '엘크로이츠'의 일 때문에 스콜라에서의 생활은 바빴다. 그래서 미레이유를 자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성 있게 날 기다려 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행복을 찾았다. 내가 다 빼앗아 버린 행복이었지만 그녀도 분명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녀에게 준 행복이었다. 그녀에게 빼앗은 행복을 나는 다른 행복으로 채워주었다. 나도 행복했고, 그녀도 행복했다. 하지만 이미 먼 곳에서 불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131음(第131音) 미레이유(2) 화창한 가을 어느 날에 나는 오랜만에 미레이유를 찾았다. 편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를 정말 보고 싶었다. 나는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있는 미레이유를 발견했다. 미레이유는 얼마 전부터 에스프라드 형의 집에서 나와 예전에 살았던 작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레이유. 미레이유. 미레이유. 이렇게 불러 보고 싶었어. 이렇게...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미레이유의 금발을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미레이유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미레이유. 어디 아파?" 미레이유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끌어안았다. 나는 미레이유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직감하며 그녀의 등을 다독거렸다. "미레이유. 무슨 일 있었어? 말해 봐. 나한테..." [ 에이드리안 곁에 있고 싶어.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나만 바라보도록 하고 싶어. 가지 마, 에이드리안. 난 다른 사람에게 널 주지 않을 거야. 네가 오래도록 날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 미레이유의 레플리카가 몹시 슬프게 들렸다. 레플리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나는 미레이유를 품에 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미레이유.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내가 약속했잖아. 네 행복, 모두 보상해 주기로..." [ 보상... ] 미레이유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날 밀어냈다.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미레이유에게 말했다. "미레이유..." [ 보상 같은 거 필요 없어. 에이드리안은 내가 '미레이유'가 아니었다면 좋아해 주지 않았을 거야. 내가 불쌍하니까 그러니까 곁에 있어 주는 거야. 알아... 나도 알아. 내가 에이드리안의 족쇄라는 거, 다 알아. 그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파. ] 나는 가만히 미소를 띄웠다. 미레이유의 말이 몹시 기분 좋게 들렸다. 내가 소리 없이 웃자 미레이유는 토라진 얼굴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미레이유가 발걸음을 옮기자 당황해서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미레이유. 아냐. 너, 놀리려고 그러는 거 아냐. 나, 미레이유 많이 좋아해. 네가 '미레이유'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네가 날 위해 웃어주고 노래 불러주는 게 좋아서...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 미레이유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나는 미레이유를 근처의 의자에 앉히고 나도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미레이유. 나, 기분 좋아.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 주는 거 같아서. 나, 나쁘지?" [ 아니. 내가 더 나빠. ] 미레이유는 다시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미레이유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미레이유. 내가 지켜줄게. 미레이유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지켜 줄게." 미레이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미레이유는 웃으며 말했다. [ 나도...나도 에이드리안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오래오래...곁에 있고 싶어. 에이드리안. 내가 광속성 레플리카 따위 전승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 미레이유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 에이드리안. 난 예전에는 말이야. 내 행복을 누군가가 다 가져버렸다고 생각했어. 날 버리고 떠난 아버지, 미쳐 버린 내 어머니. 그리고 노래조차 할 수 없는 가련한 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내게 올 행복 따위, 없다고 생각했어. 누군가가 내 행복을 다 가져가 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야. 나...행복해 질 수 있었어. 아주 많이. 그래서 에이드리안에게 감사해. 내가 죽는 날까지...에이드리안을 생각하고, 생각하고...잊지 않을 거야. 네 곁에...좀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어. ] 나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미레이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파란 하늘이 아주 높고 맑아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행복해 질 거야. 지금보다 훨씬 더. 내가 네 곁에 있고,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 나도, 그녀도 망가져 버린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나는 에스프라드 형의 집에 갔었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에 갔지만 집에서 나올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헤르만 숙부가 아버지를 죽였고...나도 죽이려 했다. 헤르만 숙부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연히 할머니와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울면서 그 사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것으로 내 행복을 깰 수는 없었다. 에스프라드 형이 헤르만 숙부의 아들이었고, 엘로이즈 누나가 헤르만 숙부의 딸이었다. 그리고 미레이유가...숙부의 양녀였다. 내가 그토록 아끼는 사람을 모두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숙부는 그렇지 않았다. 날 죽이려고 했다. 나는 헤르만 숙부를 크게 상처 입히고 나도 다쳤다. 그리고 에스프라드 형이 날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날 없애고 싶어했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정신 없이 미레이유를 찾아갔다. 위로를 받고 싶었다. 다 괜찮아 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는 미레이유를 찾아 미친 듯이 걸어갔다. 미레이유는 비를 맞으며 바깥에 서 있었다. 나는 웃으며 미레이유에게 다가갔다. "미레이유. 왜 나와 있어. 비가 와. 아. 이 거? 좀 다쳤어. 약간..." 나는 미레이유에게 다가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이상했다. 미레이유가 몹시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미레이유? 왜 그래?" "에이드리안. 잘못 찾아왔어. 미레이유는 널 죽일 거야." 나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빗속에 에스프라드가 서 있었다. 날 쫓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여긴 왜 온 거야! 형이...날 죽이려고? 숙부님 대신에...형이 날 죽이려고?"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무엇이 뺨을 타고 내렸다. 에스프라드는 잔인하게 웃었다. "아니. 내가 아니야. 그건 미레이유 누님이 할거야." 나는 에스프라드의 말에 멍하니 미레이유를 쳐다보았다. 미레이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말라버린 입술을 움직여 그녀에게 물었다. "미레이유. 무슨..." "눈치채지 못했나? 에이드리안. 미레이유야 말로 정당한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야. 너만 없으면...너만 없으면 완벽한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지. 미레이유 누님은 널 없애고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려고 네 곁에 있었던 거야.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와 내 힘을 빌리고자 했지. 그래서 아버지의 양녀로 들어온 거야. 그리고 다시 네게 접근하기 위해 내가 다리를 놔줬던 거고." 머리 속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미레이유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소리를 질렀다. "미레이유. 무슨 말이야? 대답해 봐! 아니지? 아니지? 내가 소중하다고,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잖아! 에스프라드 형이 틀렸어. 아니지? 아니지?" 미레이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내게 들려주었던 아름다운 선율도 그녀의 레플리카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미레이유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는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야... 그렇지?" [ 미안해. 에이드리안. ] 미레이유의 서글픈 레플리카였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 속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갔다. 미칠 것만 같았다. 목 안쪽에서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몇 도르 동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모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레이유에게 말했다. "날...죽일 거야?" [ 미안해, 에이드리안. 널 살리면...내가 죽어. ] "미레이유!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날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언제나 소중하게 아껴주겠다고 말했으면서!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말해 봐!" 미레이유는 눈을 감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기는 군. 꿈이야...꿈이야...이건 꿈이야...." "꿈이 아냐, 에이드리안. 이건 현실이야. 너와 내가 겪고 있는. 미레이유, 이제 작별 인사는 그만해도 좋겠어." 에스프라드의 목소리에 나는 넋 나간 얼굴로 미레이유를 쳐다보았다. 미레이유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더니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서 노래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노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미레이유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그녀가 날 죽이려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눈동자가 말라버린 듯 따가웠다. 목에서 메말라버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레이유, 널 좋아했는데. 사랑했는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웠다. 죽도록 미웠다. 그녀가 미웠다. 너무 미웠다. 너무나 밉고 미워서 허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가장 미워하고...가장 증오하고.... 머리 속이 깨끗하게 변해 갔다. 내가 '나'라는 존재가 아닌 느낌. 나라는 존재는 어디 먼 곳에 가 있고 다른 존재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마음과 의지가 제 각각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미웠다. 밉지만 사랑한다. 그녀가 살고 내가 죽는다면... 내가 죽고 그녀가 산다면... 죽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죽으라고 말한다. 죽는 건...싫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배신했고 날 이렇게 아프게 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게 했다. 차라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엄청난 선율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길어지며 정신을 가득 메운 레플리카가 뿜어져 나왔다. 하얀빛이 퍼지며 미레이유에게 날아갔다. 빛은 뜨겁게 타올라 미레이유를 덮었다. 이리저리 날리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드리워졌다.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나는 멍하니 빛에 싸여 있는 미레이유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타오르는 빛...하얗게....하얗게.... "...미레이유?" 머리 속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미레이유가 늘 내게 들려주었던 노래. 아름다운 선율. 행복해지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났다. 내겐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 미레이유... 순간 정신이 들었다. 시야가 뚜렷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하얀 빛에 휩싸인 미레이유가 쓰러졌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빛을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눈 앞에 번져 가는 붉은 피를 보며 정신 없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이 게 아니야! 죽이려던 게 아니야. 단지 미웠을 뿐이야!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미레이유, 미레이유, 널 죽이려던 게 아니야. 차라리.,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내가 무슨 짓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정신을 잃었다. 멀리 유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 앞에 스쳐 가는 아름다웠던 날들을 보내며 나는 차마 울지도 못했다. 내 잔혹한 의지가 마음을 삼켜버린 그 날, 나도 죽고 그녀도 죽었다. ********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유벨의 얼굴이었다. 언제나 날 걱정하고 챙겨주는 유벨. 머리가 멍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유벨이 무어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길어져 있었다. 과도한 레플리카 사용의 흔적.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에스프라드 형의 집에 갔었다... 헤르만 숙부를 만났고...에스프라드 형을 만났고, 미레이유....미레이유... "하..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생각났다. 미레이유. 내가 미레이유를 죽였다. 내 손으로 그녀를..그녀를...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정신 없이 소리를 질렀다. 유벨이 뭐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들리지 않았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손으로 그녀를!! 구역질이 났다. 나는 몇 번이나 속을 게워내고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몇 번의 자살 시도는 유벨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매일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어쩌면 정말 미쳐버린 건지도 몰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때때로 미레이유가 떠오르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기운이 빠지면 다시 멍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에스프라드 형으로부터 미레이유가 살아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레플리카를 썼다. 광속성 레플리카가 내게 전승되어 있었다. 미레이유는 자신에게 남은 실낱같은 레플리카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웃었다. 모두 미레이유 때문이었다. 나를 배신하고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내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모두 헤르만 숙부와 에스프라드 형, 그리고 미레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것도 모두 그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응징해야 했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 이제 모른 척 가면을 쓸 것이다. 나는...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미레이유를 그렇게 만든 건...에스프라드 형이야. 난 아무런 잘못 없어. 전부 에스프라드 형이 잘못 한 거야. 미레이유를 그렇게 만든 건...에스프라드 형이야. 내가 아니야. 나는 수 백, 수 천 번을 머리 속에 되뇌었다. 유벨이 들어왔다. "에드,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얘기 들었어. 미레이유 누님이..." 나는 웃으며 돌아섰다. "에스프라드 형이...미레이유를 망가뜨렸어." 외전 06.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1.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동이 트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무심한 눈동자로 자신의 눈 앞에 뒹굴고 있는 중년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 남자의 비싼 비단 재질의 코트는 반쯤 피에 젖어 보기 좋던 모양이 일그러져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사이로 남자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내비쳐 졌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돌리고 잠시 어두운 골목길에 햇살을 뿌리고 있는 장면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만 해도 어둡고 음습한 느낌이었던 골목길에도 은은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중년 남성을 쳐다보았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이런 일에는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 감각이 끔찍하긴 했지만 그는 이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중년 남자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괴로운 듯 거친 호흡을 하며 눈동자를 치켜올렸다. "사, 살려 주게. 살려 줘..." 세레스라엘은 검은 색의 목도리를 코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부터 비인 가에 대항한 게 잘못이었습니다, 하덴츠 백작님." "사, 살려 주게. 자네만 모른 척 해주면 어디든 도망가서 눈에 띄지 않게 여생을 살겠네. 제발..." 세레스라엘은 뒤돌아 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자신의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불쾌하고 차가운 노랫소리가 퍼졌다. 노랫소리가 그친 뒤, 중년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차가운 시신 위로 햇살이 비칠 뿐이었다. ******** 세레스라엘은 비인 영지의 대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저택 안에서도 가장 구석지고 비밀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시커먼 문의 방으로 향했다. 불도 제대로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며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옷에 튀겨 있는 피도, 자신의 흉측했던 노랫소리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데로 일로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을 한참 넘어선 일로나의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살과 함께 엄하고 냉철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여전히 무감각한 자신의 느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일로나가 베이지 색 숄을 여미며 물었다. "일은 제대로 했겠지?" "늘 그랬듯이." 세레스라엘은 창가로 가 창문을 조금 밀어 올렸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일로나가 그의 곁에 오더니 입을 열었다. "그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우리 비인 가에 대적하려고 작당을 하다니! 그리고. 이번에도 네가 맡아줘야 할 사람이 있다. 제로냔 자작. 하덴츠 백작의 오른팔이었던 그 놈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어. 하긴! 이 아르헨에서 제깟 놈이 숨어봤자 우린 손바닥에 있는 거지. 이번에도 잘 처리해 주리라 믿는다. 그것이 암속성 레플리카의 존재 이유니까." "안 하겠다면?" "또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게냐?" 일로나의 냉랭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세레스라엘은 뒤돌아 서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해!! 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는 것도! 사람을 죽이기 위해 노래해야 하는 것도! 소름끼치고 치 떨려! 이제 놔 줘요, 일로나! 제발!!" 세레스라엘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지긋지긋 했다. 어서 자유롭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아르헨에서 가장 추앙 받는 대속성 레플리카. 그 자신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는 달랐다. 암속성 레플리카. 선조 로스페니르의 저주를 가장 확실히 이어받은 저주받은 레플리카. 레플리카를 쓸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줄어드는 기구한 힘이었다. 때문에 혹여 이런 사실이 가문에 누가 될까 저어한 비인 가의 어른들은 아르헨 곳곳에 암속성 레플리카가 소실되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암속성 레플리카는 대대로 전해져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비인 가의 어른들은 암속성 레플리카를 가문을 지키는 칼과 방패로 사용했다. 암속성 레플리카를 가문에 대항하는 귀족들을 암살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비록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만 암속성 레플리카는 무속성에 비해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상위 레벨인 광속성과 맞먹는 레벨이었기에 그 힘의 세기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레플리카 능력이 뛰어난 대귀족들조차 암속성 레플리카의 목표가 되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대우를 알면서도 비인 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친다 해도 비인 가의 눈에 어떤 식으로든 발견되었고, 또한 그들 스스로에게 비인 가를 벗어나 살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이 없었다. 그들에게 비인 가는 싫지만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였다. 일로나는 숄을 다시 여미며 뒤돌아 섰다.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 가 보려무나. 죽는 게 무섭지 않으면 말이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는 건데 지금 누릴 수 있는 생명은 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일로나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세레스라엘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말라버린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도 않았다. 말라버린 눈물과 말라버린 가슴이 몹시 아프고 쓰라릴 뿐이었다. ******** 밖으로 나온 세레스라엘은 환하게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택 안의 어둠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빛이었다.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세레스라엘은 문득 저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금발의 남자를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다. 팔 한 가득 꽃을 안고 있는 금발의 남자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세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히스페르 님."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히스페르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이내 표정을 밝게 만든 히스페르는 품 안의 꽃 한 송이를 꺼내 세레스라엘에게 건네주었다. "경어는 그만 두라고 했잖아요. 같은 비인 가인데. 나이도 세스가 많잖아요. 오늘도 기분이 나쁜가 보죠?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풀려요. 자요, 어서." 밝은 표정의 히스페르를 바라보며 세레스라엘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가 건네준 꽃을 손에 받아 시선을 내렸다. 붉은 꽃잎의 꽃은 퍽 탐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꽃을 보면서 아름답다기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올려 히스페르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 저주를... 받았는데도." "행복하거든요.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예전에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훨씬 더 행복해요. 내가 누릴 수 있는 만큼은 행복해질 생각이에요. 세스도 행복해지길 바래요." 히스페르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레스라엘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절박한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이번 대속성 레플리카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라는 올가미에 잡혀 그는 숨어살 듯 그렇게 유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매력은 몹시 불가사의했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추앙하고 있었다. 스콜라에 다니고 있지도 않은데 평의회 의장의 강력한 후보자로 회자되고 있는 히스페르였다. 정작 자신은 별 관심이 없는 듯 하지만. 세레스라엘은 그가 몹시 부러웠다. 자신도 그와 같이 작은 행복에 커다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기분이 나빴다. 비인 영지에서는 언제나 기분이 나빴다. 화려하게 꾸며진 겉모습 안의 추한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이 곳에 오면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기분 나쁘고 구역질이 났다. 아르헨의 모든 권력이 통하는 비인 가. 하지만 뒤에서는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진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많은 사람을 헤쳤다. 단지 자신의 목숨을 위해 한 행동이었다. 세레스라엘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계속 걷다 보면 마차를 탈 수 있는 곳이 나온다. 그 곳에서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의 집은 비인 영지와는 제법 먼 누아렌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비인 가의 핏줄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그는 비인 가로부터 무엇 하나 받지 못했다. '비인'이라는 이름조차 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비인 가에 존재치 않는 사람이었다. 암속성 레플리카를 전승하게 되면 태어나자 마자 영지에서 추방당하게 되고 죽는 그 날까지 감시를 받게 되어 있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르헨을 손아귀에 넣고 있는 비인 가였다. 도망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비인 가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노래할 수 없는 저주의 몸.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데도 죽는 게 무서웠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죽는 건 싫었다. "머리가 무거워. 어지러워." 세레스라엘은 잠시 멈춰 서서 이마를 짚었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앞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머리를 흔들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몽롱한 정신 속에서 시야를 가다듬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다가와서... "음? 어디 아파요?" 세레스라엘은 눈을 깜빡였다. 머리 속이 희뿌옇게 흐려져 갔다. 세레스라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세레스라엘은 손 끝에 느껴지는 그것을 꽈악 잡고 몸을 지탱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라? 많이 아픈가 보네? 얼굴이 하얗잖아. 음...음...어쩌지. 이, 이보세요, 저기요, 아픈 건 아픈건데요, 난 아직 결혼도 안 했거든요. 결혼도 안한 미혼 여성을 이렇게 껴안으면 안 되는 건데요, 음...저기, 듣고 있나요?... 음?" 세레스라엘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외간 남자, 그것도 기절한 남자에게 안기는 바람에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된 검은 머리의 소녀는 울상을 지었다. "오, 오랜만에 분홍색 원피스 입고 산책 나왔더니, 이게 뭐야. 어, 어쩌지? 난 약한 여잔데. 이 사람, 어쩌지? 우웅~ 너무너무 무겁다. 우웅~" 소녀는 너무 힘을 주어서 바르르 떨리는 팔로 남자를 지탱하며 울상을 지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소녀는 눈물을 글썽글썽하며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 흐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 "으음...." 세레스라엘은 눈 앞의 환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그는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두 눈 가득 눈물을 그득하게 달고 있는 까만 머리의 소녀가 울먹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퍼뜩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 어떻게 된 일인지. 왜 내가 여기에...." "난 몰라요! 물어내요! 아저씨 때문에 나, 해고당했단 말이에요! 어떻게 해! 요즘 취직이 얼마나 어려운데! 난 몰라! 흐어어어어어엉------" 소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세레스라엘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까지 머리 속이 정리가 안 된 탓인지 욱신욱신거렸다. 세레스라엘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여전히 울고 있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녀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눈을 깜빡이며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낡은 집이었다. 천장의 나무 기둥으로 보아 목수들이 대충 나무를 가져와 지은 집 같았다. 세레스라엘은 다시 고개를 내리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치지도 않나." "뭐라고요?" 소녀는 손을 내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세레스라엘은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쓰러졌었나? 아아- 저 여자가 날 구해줬나 보군. 지치지도 않고 잘도 우는군. 후우-' "이, 이보세요! 어디 가는 거에요? 저기요!" 소녀는 세레스라엘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쪼르르 달려와 문 앞을 막아 섰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외쳤다. "이 것 보세요! 난 아저씨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니까요! 당신이 3델라동안 안 일어나는 바람에 일하러 못 가서 해고당했다구요! 거기다 아저씨 약이랑 옷 사느라 빚까지 생겼는데! 다 물어내요!"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남루한 면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들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순간 소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소녀는 두 손을 내밀어 흔들며 소리쳤다. "내가 갈아 입힌 거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에이, 사람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구요! 오빠가 갈아 입힌 거라구요! 그러니까...딸꾹. 딸꾹. 아, 아유, 딸꾹질이...딸꾹." 소녀는 딸꾹질을 하며 뒤돌아 섰다. 그리고 눈을 끔뻑이며 딸꾹질을 해댔다.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소녀의 등을 두드렸다. "딸꾹. 아저씨 때문에...딸꾹. 이게 뭐야. 딸꾹. 에..딸꾹. 딸꾹." "내 옷은?" 세레스라엘이 묻자 소녀는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침대 옆의 작은 탁자를 가리켰다. 세레스라엘은 자신의 옷을 뒤져 지갑을 찾아냈다. 그리고 금화를 몇 개 꺼내 소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소녀는 자신의 손에 올려져 있는 금화를 바라보며 배시시 미소지었다. "에에? 아저씨, 정말 부자에요? 옷, 엄청 좋은 옷이던데, 진짜 부자?" 세레스라엘은 무표정하게 침대 쪽으로 걸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금화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소녀는 세레스라엘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라 두 눈을 가리고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버렸다. "으아아아! 안 돼요! 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렇게 이상한 장면을 보여 주면 어떻게 해요. 아유, 난 아직 순진한 소녀인데...음....음?" 소녀는 고개를 들어 빠꼼하게 눈을 올렸다. 어느 새 옷을 다 갈아입은 세레스라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소녀는 다시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세레스라엘의 소맷자락을 꾸욱 붙잡았다. "음...음...저기요...." "뭐야?" 소녀는 세레스라엘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주먹을 불끈 쥔 소녀는 두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돈 많아요? 부자에요? 금화 100개 있어요?" "응." 세레스라엘은 아무 생각 없이 소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걸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소녀는 세레스라엘의 팔에 꽉 매달리며 외쳤다. "그럼 나, 아저씨한테 시집가야지! 그래서 팔자 펴야지! 헤헤- 멋지다!"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소녀의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세레스라엘을 뒤쫓아갔다. "아저씨! 원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랑 결혼하고 그런다구요! 동화책도 못 봤어요? 아저씨! 에이, 무슨 걸음이 저렇게 빨라?"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미 세레스라엘은 놓친 것 같지만 인생에 새로운 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헤헤! 이제 엘의 목표는 저 아저씨다! 나도 성공 인생을 살아보는 거야! 에헷!" 화창한 날씨에 너무나 기분 좋은 엘이었다.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2.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새로운 인물은 많아. 우리 비인 가를 위해 일해 줄 사람은 많단 말이다. 로쉔 후작따위, 사라져 버려도 우리 비인 가로서는 전혀 영향이 없지." 일로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세레스라엘은 방의 무거운 공기에 질식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일로나의 서재 겸 집무실이었다. 귀한 양서가 즐비하게 꽂혀 있는 책장과 반짝거리는 책상만으로도 비인 가의 위엄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방이었다. 세레스라엘은 언제나 그랬든 무표정하게 일로나를 바라보았다. "로쉔 후작입니까?" "비인 가의 어른들과도 합의를 봤다. 지금 약간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되지. 비인 가는 일인자다. 이인자는 필요 없어." 일로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뒤돌아 섰다. "날 원망하는 눈빛이로구나. 하지만 네겐 그럴 자격이 없다. 저주받은 네 운명을 탓해야지. 그래, 네가 가드(guard)할 사람은 정했느냐? 내가 말한 데로 헤르만이..." "아니오. 히스페르로 하겠습니다." 세레스라엘은 검은 옷자락을 움켜쥐며 고개를 돌렸다. 일로나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보기 싫었다. 비인 가의 내부에서만 알려져 있는 사실이있었다. 그것은 암속성 레플리카의 가드를 받는 다른 대속성 레플리카가 대대로 평의회 의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암속성 레플리카의 힘을 실어줌으로써 보다 힘을 강력하게 만들자는 뜻이었다. 세력이 강한 다른 대귀족을 견제할 수 있는 확실한 힘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암속성 레플리카의 가드를 받게 되면 평의회 의장에 선출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암속성 레플리카의 가드를 받는 사람은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항은 전부 비인 가의 어른들의 합의로 이루어져 왔다. 암속성 레플리카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일로나의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 놈이 또 내 말을 거역하는 거냐! 히스페르는 저주받은 자다!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없단 말이다!" "아니오. 히스페르입니다. 번복하지 않겠습니다. 일로나, 히스페르를 아끼면서 왜 그를 핍박하는 겁니까. 왜 헤르만과 결탁하여 그를 괴롭히는 겁니까!" 세레스라엘의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일로나는 움찔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가문을 위해서야. 우리 비인 가문을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죽어 가는 우리들은 보이지 않나 보군요. 난 당신이 원망스러워. 이 비인이라는 이름이 지긋지긋해. 참을 수 없을 만큼 구역질나." 세레스라엘은 뒤돌아 서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살짝 연 그는 잠시 멈춰 일로나를 돌아보았다. "로쉔 후작은 처리하겠습니다." 일로나는 밖으로 나가는 세레스라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떠난 뒤에는 씁쓸한 미소만이 남을 뿐이었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씁쓸한 마음.... ******** 대저택에서 나온 세레스라엘은 승마를 마치고 돌아오는 듯한 헤르만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헤르만은 대하기가 싫은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권력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피하기도 전에 그를 발견한 헤르만이 유쾌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밝은 다갈색 머리의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세레스라엘 군. 오랜만이야. 요즘 잘 지내나? 가문의 행사 때도 좀 처럼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깝군 그래." "별로." 세레스라엘은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헤르만이 한걸음 다가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 건은 어떻게 되었나. 내 가드가 되어 주기로 한 것." "알고 있을 텐데. 난 히스페르의 가드가 될 거야. 당신을 가드하긴 싫으니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헤르만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세레스라엘은 피식 웃으며 그가 잡고 있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줍잖은 콤플렉스로 히스페르를 괴롭히지 말고 자신을 좀 더 돌아보는 게 어때? 네 얼굴에 흐르는 미소가 거짓이라는 거,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어. 적어도 내겐, 정말 행복하게 미소짓는 히스페르를 훨씬 더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네, 네 놈이!! 저주 받은 암속성 주제에!! 네 깟 놈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런 식으로 오만하게 굴면 네 불행한 운명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나?"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피식 미소를 띄웠다. "적어도 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해 질 거야." 세레스라엘은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행복이라... 생각만 해도 아찔한 단어였다. 과연 그 단어를 마음 속으로 느끼는 날이 오기는 올까. 세레스라엘은 냉랭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 그녀였다. 그 까만 머리의 소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베이지 색 원피스 자락을 꾸욱 잡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요즘 들어 비인 영지에 올 때마다 소녀를 만나고 있었다. 소녀는 어떻게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아는 것인지 그가 오솔길 자락에 도착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뭐야, 귀찮게 하지 마." "저기요, 전에 대답 안 해줬잖아요. 우리 결혼 안 할래요? 나, 다시 취직도 했는데. 나, 이래봬도 꽤 괜찮아요. 얼굴도 이만 하면 뭐, 예쁜 편이고요, 성격도 나름대로 원만하고요, 음....공부도 잘 해요, 나, 선생님이거든요. 저기 영지 안에 하인이랑 하녀가 엄청 많잖아요. 그 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나, 멋지죠?" 소녀는 쉴새 없이 종알거리며 그를 따라왔다. 세레스라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다음부터 올 때는 마차를 가지고 오던지 말을 가지고 오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소녀는 생긋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참, 내 이름이요, 엘이에요. 엘 르웬도르 올 라센. 이름도 멋지죠? 나름대로 지성미가 쫄쫄 흐르잖아요. 음, 맞아. 나, 월급도 꽤 많아요. 돈도 잘 벌거든요. 그런데 왜 부자 아저씨한테 시집가려고 하냐면요, 음... 동화책에서 봤는데요, 부자 왕자님한테 시집가는 공주님들은 다 행복하게 잘 산다라고 끝나잖아요. 그래서 부자한테 시집가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요. 어때요? 괜찮죠? 공주님 말고 왕자님도 행복해졌으니까 아저씨도 행복해 질거에요. 아이, 그렇게 인상만 쓰지 말고 '응'이라고 대답해 보라니까요. 나, 꽤 인기도 많아서 우물쭈물하다가는 나 같이 좋은 아가씨 놓치기 쉬워요." 한참 재잘거리던 소녀는 세레스라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지친 것인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공중에 그림을 그리며 흐느적 걸음을 옮겼다. "이건 곰돌이에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이건 구름 모양. 이건 귀여운 모자, 이건...으응?" 쿵. 세레스라엘은 순간 조잘거림이 사라지자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 엘이 바닥에 이마를 박고 넘어져 있었다. 바닥의 돌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엘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몸을 일으켜 이마를 문질렀다. "아파라. 힝, 피 나네. 피, 피다....힝....오빠한테 또 혼나겠다. 아참, 나 오빠가 있거든요, 아주 멋진 오빤데, 장사하러 다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들어와요. 엘한테는 제일 멋지고 소중한 가족이에요. 가족이 오빠 밖에 없지만...어라?" 엘은 두 손으로 이마를 꾸욱 누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레스라엘이 웃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였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긋 미소지었다. "아저씨, 웃을 줄도 아네요. 하긴 왕자님은 늘 예쁘게 웃던 걸. 웃으니까 훨씬 예뻐요." 세레스라엘은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엘은 그의 손을 잡고 폴짝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쭉쭉 당기며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안녕! 이제 가야 되는 걸요. 있잖아요, 나 매일 여기서 아저씨 기다렸어요. 여긴 언제 오는 거에요? 언제 오는지 알면 나, 혹시 아저씨 놓칠까 봐 조마조마 안 해도 되는데."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바닥을 쳐다보다 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3델라 뒤에 이 시간쯤." "으응, 그렇구나. 난 그 날 애들 수업이 일찍 끝나요. 여기서 기다릴 게요. 그럼 안녕!" 엘은 방긋 미소짓더니 뒤돌아 달려갔다. 세레스라엘은 희미하게 미소짓다 순간 표정을 지웠다. 엘이 뒤돌아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신나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이름이 뭔데요? 이름도 안 가르쳐 줬잖아요!" "세레스라엘 야나 올 다렌느."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을 흔들더니 달려가 버렸다. 세레스라엘은 자꾸 세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나지막하게 터뜨렸다. 이상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엘은 무척 이상한 여자 애였다. 잘 웃고 잘 울고. 세레스라엘은 어서 3델라가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이상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 3델라 후. "저기, 아저씨. 지,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엘은 한 손에 도시락 바구니를 꾸욱 든 채 종종 걸음으로 세레스라엘을 따라가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엘을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식사하기 싫다며." "그, 그렇지만 아저씨 집에 가면....음...부끄럽단 말이에요. 오빠가 그러는데 여자는 그저 조신해야 한다던데." 순간 세레스라엘이 우뚝 멈춰 섰다. 화들짝 놀란 엘은 머리띠를 꾹 누르고 뻣뻣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그냥 빠, 빨리 가요, 우리. 아. 하. 하." 뻣뻣하게 걸어가고 있는 엘을 바라보며 세레스라엘은 피식 미소를 흘렸다. 머리 속의 생각이 너무 빤히 보이는 엘이었다. 세레스라엘이 혼자 가버릴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약간 걷고 마차를 조금 타고 세레스라엘의 집에 도착한 엘은 그저 놀라 입을 벙 하고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떠봐도, 눈을 비볐다 다시 떠 봐도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으리으리한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비인 가를 밥 먹듯이 드나드는 엘이었지만 저택에 들어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하인들의 숙소에서나 야외의 한적한 호숫가 등에서 였다. 엘은, 태어나서 가장 비싸고 멋져 보이는 집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엘은 고개를 홱 돌려 세레스라엘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진짜 부자에요? 이 집, 아저씨 집 맞아요?" "응." 세레스라엘은 검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회색 바지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직업이 뭐에요? 아유, 나도 청혼했으면서 아저씨 직업도 모르고 있네. 아저씨, 땅 투기해요? 요즘 땅 값이 안정적이라서 투기도 안 된다고 하던데. 도대체 직업이 뭔데 이런데 살아요?" "살인청부업자. 덕분에 1모네마다 연금이 나와." 세레스라엘은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엘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살인청부업자? 그게 뭐 하는 거야? 엘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들며 세레스라엘의 뒤를 따라 쫓아 들어갔다. ******** 엘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만들었던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먼저 맛을 봤다. 뭐, 괜찮은 수준인 것 같았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스라엘도 포크를 들어 튀김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엘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방긋방긋 웃었다. "어때요? 맛있죠? 오빠가 맛있다고 그랬는데. 이게 뭐냐면요, 커다란 김에다가 밥을 넣고 각종 야채와 소스를 넣은 다음 돌돌 말아서 말이죠, 기름을 듬뿍 넣은 냄비에 넣어서 한 번에 쏘옥 튀기는 거에요. 그럼 이렇게 노릇노릇하고 담백한 김밥말이 튀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재료비가 얼마 안 든다고 무시하면 안 되요. 엄청나게 정성이 들어가는 거라고요." "맛있어." 세레스라엘은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튀김을 집어먹고 있었다. 엘은 눈을 깜빡이며 부지런히 포크를 놀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택한 왕자님은 말수가 너무 적은 것 같았다. 야채 샐러드를 입에 가져간 엘은 순간 머리 속에 스쳐 가는 생각에 손뼉을 탁 하고 치고 입을 열었다. "살인청부업자가 뭐 하는 건지 알았어요. 요즘 동방에서 살구랑 인삼을 갈아서 피부에 바르면 그렇게 피부가 좋아진다고 난리라면서요? 하녀장 아주머니가 그러셨는데 귀부인들이 살구랑 인삼을 못 구해서 난리래요. 아저씨, 살구랑 인삼 중간에서 팔아주고 돈 챙기는...뭐 그런 거 맞죠? 역시 장사는 이윤이 많이 남는 걸 해야 한다니까요." "아냐. 사람 죽이는 일이야. 레플리카로 사람을 죽여." 콜록. 엘은 세레스라엘의 말에 놀라 먹고 있던 샐러드를 제대로 넘기지 못 하고 기침을 해댔다. 세레스라엘은 포크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엘을 쳐다보았다. 물을 마시고 진정하던 엘은 세레스라엘의 진지한 눈빛에 당황해 물컵을 내려놓고 자신도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다. 세레스라엘의 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무서워?" 엘은 고개를 들고 세레스라엘을 쳐다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작은 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엘은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파요?" "뭐가?" "그냥 마음이 아파 보여서." 세레스라엘은 엘을 한참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 엘은 방 안으로 사라지는 세레스라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차라리 그의 눈동자를 보지 말 걸. 무섭도록 차갑고 외롭고 슬퍼보이는 저 눈동자를 보지 말 걸. 그랬다면 외면해 버릴 수 있을 텐데. 모른 척 외면해 버릴 수 있을 텐데. 엘은 쓸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식사 시간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3.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집 앞의 나무로 만든 테이블 위에 양동이를 올려놓고 엘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이 너무 파랗고 깨끗해 집에서 일만 하고 있으려니 억울한 기분이었다. "우욱. 놀고 싶다. 아저씨도 보고 싶은데..." 엘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리다 말 발굽 소리를 듣고 귀를 솔깃하게 세웠다. 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갈색 말이 집 앞에 나타나자 엘은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말에 타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원스러운 인상의 젊은 청년은 말에서 내려 곧장 엘에게 다가왔다. 엘은 손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안녕하세요, 벤 도련님." "엘! 그저께는 왜 안 온 거야? 내가 전갈 보냈잖아." 청년이 다가와 소리치자 엘은 머리를 긁으며 앞치마 자락을 꾸욱 움켜쥐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바빴거든요. 아이들 책도 사러가야 했고..." "엘, 정말 내 마음 몰라서 그러는 거야? 얘기했잖아. 난 너와 결혼하고 싶어. 너도 부자랑 결혼하고 싶다며. 나, 곧 에슈비츠 공작이 될 테고..." 청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다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엘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요.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부자면서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벤 도련님이 부자고 착한 사람인건 아는데요, 그 아저씨가 더 좋아요." "무슨 소리야? 그 아저씨라니? 엘, 난 곧 의회 도시로 떠나야 해. 널 사랑해, 네가 평민이라도 상관없어. 지금 우리..." 청년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엘은 지극히 느긋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아아- 날씨 좋다. 일만 하지말고 좀 쉬어야 겠네." 엘은 하늘을 향해 씨익 웃어주고 테이블 위의 양동이를 들었다. 그리고 청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시냇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벤 도련님, 안녕! 다른 예쁜 아가씨 찾아보세요." 허탈한 얼굴의 청년을 뒤로 하고 엘은 즐겁게 걸음을 옮겼다. 저녁에 오빠가 온다고 했다. 장사를 하느라 오래 집에 있지 못하는 오빠였다. 맛있는 요리를 많이 해줄 생각이었다. 내일은 쉬니까 맛있는 쿠키를 잔뜩 구워야지! ******** 다음 날. 엘은 방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손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7델라 중 하루는 아이들도 쉬고 엘도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엘은 여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여유롭다기 보다는 고민에 휩싸여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지만. 엘이 한숨을 쉬자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동생과 함께 휴일을 보내고 있던 오빠, 렌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에게 쿠키 접시를 건네주었다. 렌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엘의 표정을 살폈다. "엘, 오랜만에 내가 왔는데 별로 반갑지 않은 거냐? 내가 일부러 비싼 양과자도 사왔는데." "휴우- 오빠.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졌나 봐." 엘이 다시 한숨을 쉬며 말하자 렌스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막 스무 살이 된 렌스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랑이라니? 렌스는 테이블을 탁 치며 외쳤다. "뭐라고? 도대체 어떤 놈이야?" "놈이라니. 아저씨야. 멋진 아저씨. 얼굴도 잘 생겼고, 아주 부자야. 옷도 정말 멋진 걸." 엘은 여전히 턱을 괸 채 꿈을 꾸듯 말했다. 렌스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아저씨? 안 돼!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돈만 많다고 다 좋은 사람인 건 아니야. 엘, 남자란 그저...." "으음.... 오빠보다는 훨씬 어리겠다." "뭐? 그게 무슨 아저씨야? 나 이제 겨우 스물이야!" 렌스는 버럭 화를 내며 이내 민망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쿠키를 덥석 집어먹었다. "하아- 내 나이, 벌써 스물. 괴롭다." "그런데 오빠." "왜?" 렌스는 엘을 빤히 쳐다봤다. 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해. 그 사람 보고 있으면 아주 쓸쓸하고 불쌍하고...그런 느낌이 드는데...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불행해질 것 같은데 그치만 그 사람이 뭐라고 해도 괜찮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그 사람만 보여. 자꾸 위로해 주고 싶어. 부자인 것도 좋은데, 그 사람 많이 가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그럼 나만 바라보고 웃어줄 지도 모르는데. 자꾸 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어져." "엘...." 렌스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소중한 동생게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엘은 렌스의 품에 폭 안겨서 볼을 비벼댔다. "아니야, 오빠. 오빠 결혼할 때까지는 나도 오빠랑 같이 있어 줄게. 그래야 오빠가 혼자 안 외롭지. 헤헤-" "엘..." 남매는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두 사람에게는 뭐라 그래도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엘은 그 날을 렌스와의 마지막 휴일로 기억해야 했다. ******** 파란 하늘이 하얗게 보였다. 세레스라엘은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고 말았다. 입술을 깨물고 애써 견뎌왔지만 파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 그만 노래를 부르고 말았다. 그는 가까스로 피를 닦아 내고 분수의 물로 입가를 씻어냈다. 분수대 안으로 붉은 피가 실 같이 흩어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조소가 떠올랐다. "이까짓 레플리카...." 세레스라엘은 분수대에 몸을 기대고 한참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 날, 엘을 보내고 나서 한 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 날 이후, 엘은 오솔길에 나타나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일부러 하인들의 숙소 근처까지 가본 적도 있었지만 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존재를 찾는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 느낌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따스한 기분이었다. 그는 그 느낌을 원하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찾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몸을 일으켜 대저택으로 향했다. 일로나가 급한 전갈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 "미쳤어. 아이를 낳으라고?" 세레스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을 누르며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일로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뚝뚝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일로나는 마치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과 같이 엄숙하고 근엄했다. "대속성 레플리카로서의 의무다. 아이를 낳아 다음 대의 전승자를 남겨야지. 무작위 전승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대속성 레플리카를 이어 받은 피가 그렇지 않은 피보다 진한 것은 사실. 너도 엄연한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서 의무를 다하도록 해라." "하...하하.... 아이를..낳으라? 그 아이가 암속성 레플리카를 전승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이를 낳으라고? 나 한 사람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아이? 미쳤어! 일로나, 당신은 미쳤어!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말이 아니야. 얼마나 괴로운지 뻔히 알면서! 난 못 해!" 세레스라엘은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도자기를 들어 집어 던졌다. 도자기가 박살이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세레스라엘은 떨리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음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절대 못 해. 비인 가는 미쳤어. 그 잘난 영광이 얼마나 오래갈지 두고 봐야 겠군." 세레스라엘은 뒤돌아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방 안에서 일로나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네 놈이 도망쳐 봤자 다시 끌려오게 될 것이다! 죽지 않는 이상 반드시!" 세레스라엘은 귀를 막고 밖으로 달려갔다. ******** 세레스라엘은 정신 없이 걸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생각만으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물며 내 피를 받은 아이에게! 어차피 자신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전승 되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이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 괴롭고 서글픈 운명을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세레스라엘은 눈을 감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어느 새 도착한 곳은 무척 낯익은 곳이었다. 하인들의 숙소가 무리 지어있는 곳이었다. 세레스라엘은 무의식적으로 또 다시 '그녀'를 찾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어쨌든 좋았다. 어서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오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맥이 빠졌다. 그 때였다. "엘, 뭐 좀 먹어 봐요. 이러다가 정말 죽겠어." 체격 좋은 중년의 부인이 바구니를 들고 긴 의자에 앉아 있는 까만 머리의 소녀를 타이르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푸욱 숙인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엘이었다. 세레스라엘은 긴장하는 자신을 느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소녀는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멍하니 잔디밭을 쳐다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지 않았다. 세레스라엘은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엘?" "..............."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녀였다.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엘을 아시는 분이세요? 에구, 가여운 것. 제 오빠가 사고로 죽은 다음부터 말도 안 하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아. 하긴 얼마나 잘 따랐던 오빠니. 렌스도 불쌍하지. 하필이면 그렇게 비 오는 날 마차를 몰게 뭐람. 에휴, 엘,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던 앤데. 애들도 잘 따르고 정말 좋은 아가씨였는데... 에구, 불쌍해서 어쩌나." 세레스라엘은 중년 부인을 제치고 무릎을 꿇고 엘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안 웃어? 이제 웃어 주지 않을 거야?" 엘은 천천히 눈을 깜빡일 뿐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이내 세레스라엘은 미소지었다. "비인 가에 복수해 버릴까? 가장 저주받은 내 피와 미쳐버린 네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괴물... 괴물이겠지. 후후- 괜찮은 생각인거 같아." 세레스라엘은 엘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같이 가자. 도망가 버리자, 이 세상에서." ********* 1모네 뒤. 세레스라엘은 즐거운 듯 미소지으며 바구니 안의 과일을 들여다보았다. 잘 익어서 빨간 빛깔을 자랑하고 있는 과일이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3도르째 과일을 따고 있는 그였지만 별로 힘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과수원의 주인인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세기로에 씨가 막대기를 휘두르며 웃었다. "허허! 이번에는 정말 굉장하구만! 이렇게 많은 과일이 열린 건 올해가 처음이야! 다렌느 군이 와줘서 그런가? 허허!" "아저씨가 농사를 잘 지어서 하늘이 감동했나 보죠." 세레스라엘은 웃으며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그 때 고개를 돌려 과수원을 살피던 세기로에 씨가 다시 함박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어서 들어가 보게. 색시가 기다리다 지치겠어. 자고로 신혼 때 데이트도 많이 하고 그래야 하는 거야."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일은 평상 위에 둘게요." 세레스라엘은 과일 바구니를 옆의 평상 위에 올려놓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 나무에 달린 과일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고 있는 엘에게 달려갔다. "엘. 언제 왔어? 왔으면 빨리 나한테 오지 그랬어?" 엘은 눈을 말똥거리며 보라색 손가방을 움켜쥐었다. 세레스라엘은 웃으며 손가방을 건네 받아 안을 열어 보았다. 작은 나무 막대기 하나가 덩그렇게 들어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꼬치구이가 먹고 싶은 거야? 어제는 사과 씨를 가져오더니." 세레스라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엘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그래도...행복하다. 그렇지?" 엘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하늘이 오늘도 새파랗게 드리워져 있었다. "노래하고 싶은 날이야. 응... 난 할 수 없지만..." [ 작고 고운 풍선 하나. 아기가 들고 뒤뚱뒤뚱. 엄마가 뒤따라가 예쁜 풍선 하나 더 쥐어주면 아기는 좋아서 방실방실 엄마도 기뻐서 방긋방긋 ] 세레스라엘은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예전처럼 웃어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노래를 불렀다. 작은아이들이 배우는 동요였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곤 하던 유치하고 평범한 동요였다. 하지만 그 작은 노랫소리에 세레스라엘은 가슴 따스한 감격을 느꼈다. 자신이 노래할 수 없어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노래하지 않아도 노래하고 있는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이 미래에 어떻게 느껴질 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너무나 행복한 느낌이었다. "히스페르가 말한 게... 이런 느낌이구나." 세레스라엘은 가만히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행복한 느낌.... ********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벽 일찍 일어난 세레스라엘은 물을 받기 위해 근처의 개울가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그들이 비인 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세레스라엘은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멀리 벗어나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오래지 않아 발걸음은 점점 좁혀 졌고 그는 개울가에 다다랐다.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양동이를 내려놓았다. "새벽부터 불청객이로군." "오랜만이네, 세레스라엘." 헤르만이었다. 세레스라엘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는지... 히스페르에게 밀려 일거리가 없어졌나?" 헤르만은 순간 얼굴을 구기더니 이내 거만하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고급스러운 코트를 여몄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수행원들이 물러가자 헤르만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비인 가의 전언일세. 급히 돌아오지 않으면 아주 불행한 일이 터질 거라고 하던데. 자네의 신부가 될 꿈에 부풀어 있는 리리아 양도 기다리고 있고." "난 돌아가지 않아." 세레스라엘은 헤르만을 노려보며 말했다. 헤르만은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장갑을 털어 냈다. "인간 사냥꾼 주제에... 아무리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 텐데." "그 인간 사냥꾼 덕분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인 가지. 더럽고 더러워서 입에 담는 것조차 치욕스러울 정도야." 세레스라엘이 무표정하게 말하자 헤르만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네와 함께 살고 있는 착한 아가씨 이야기는 들었지. 일로나가 그러더군. 혼자 죽을 건지...아니면 같이 죽을 건지 택하라고." "무슨...!!" 세레스라엘은 당혹감에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엘은 상관없어. 내 마음대로 데리고 온 것 뿐이야." "글쎄, 나도 믿어주곤 싶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아서 문제지. 일로나의 전언은 분명히 전했네. 이번 모네가 지나기 전에 비인 가로 오게. 다시 비인의 이름을 받을 수도 있을 걸세. 후후- 그러니 히스페르 녀석이 아니라 날 따랐다면 힘을 빌려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헤르만이 웃으며 사라지자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울고 싶었다. 자신에게 주어졌지만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생명,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대항조차 할 수 없는 힘없는 자신. 어느 것 하나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운명에 따를 뿐. 차라리 죽음을 택할 용기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용기 없고 비겁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다.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4.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벽난로 안의 장작이 보기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장작을 집어넣으며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엘을 바라보았다. 추운지 계속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바닥에 있는 담요를 펴서 엘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그제야 엘은 무릎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담요를 끌어당겼다. 세레스라엘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장작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있잖아. 나, 비인 가문의 핏줄을 이어 받았어. 대단한 혈통이지. 아르헨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귀족 가문보다 훨씬 대단한 가문."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숙이고 짙은 고동색의 나무바닥을 쳐다보았다. 전에 살던 사람이 꽤 집에 신경을 썼었다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바닥이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다시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가문의 핏줄을 타고났는데 난 아버지 얼굴도, 어머니 얼굴도 몰라.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거든. 난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했어. 그 사람들은 날 감시할 목적으로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지. 난, '흠'이었거든. 영광스럽고 대단한 비인 가에서 나만이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존재였어. 난 노래할 수 없거든. 노래하면 그만큼 고통스럽고 수명이 줄어 버려. 우습지? 이런 노래도 있어. 아름다운 노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섭고 섬뜩한 노래도 있어."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돌려 엘을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카락이 한 올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멍한 시선으로 벽난로 안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듯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죽였어. 아주 많이. 이제 꿈에서조차 무감각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처음엔 너무 무서워서 자다가도 토악질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아. 하지만 내 레플리카에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우울해져. 왜 내가 이러고 있나. 그냥 죽어버릴까. 그런데 죽기는 싫은 거야. 생에 미련은 없는데 왜 죽음이 무서운 걸까." 세레스라엘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엘의 이마에 살며시 키스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추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가야했다. 세레스라엘은 코트를 들고 문 가로 걸어갔다. 엘은 여전히 웅크린채 아무 말도 없었다. "널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잊게 돼. 하지만 넌 이제 웃지 않고 나도 내 운명에 대항할 용기도, 마음도 없어져 버렸어. 체념해 버렸지. 이제 난 내 마음 따위 버릴 거야. 안녕, 엘." 세레스라엘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집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엘은 뺨을 타고 손등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멍한 표정으로 장작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이가 태어나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세레스라엘은 하루하루 마치 죽은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죽은 사람처럼,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일로나의 뜻으로 그와 결혼한 리리아는 조용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 속에 무엇보다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세레스라엘이 그녀를 마치 물건 보듯 해도 그녀는 싫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세레스라엘은 따로 집을 얻어 생활했다. 이미 만나본지도 오래된 리리아였다. 그리고 미레이유. 어머니의 금발을 타고 난 미레이유를 세레스라엘은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저주받은 피. 그 피를 이어받은 아이를 두 눈 똑똑히 뜨고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정말 무책임하고 비열한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살다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리리아와 미레이유와 함께 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감금되어 있듯 저택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하는 몸이었지만 모든 희망을 버린 그였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엘을 떠나올 때 그렇게 마음먹었고, 그녀가 곁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무감각해진 그였다. 아무 것도 의미 없었다. 하지만 문득 엘이 보고 싶어졌다. 그럴 때면 그는 입술을 깨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노래하면 무언가에 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르고 있었다. ******** 새하얀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세레스라엘은 오늘도 자신의 방에 들어앉아 창틀에 몸을 기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뜰 쪽으로 통하는 창이라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세레스라엘은 눈을 감았다. 바람이 기분 좋았다. 이런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고 무섭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몹시 평온하고 조용했다.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노랫소리... [ 작은 나무 밑에 작은 토끼. 엄마 토끼를 찾아 깡총깡총 작은 토끼풀 하나 들고 작은 토끼는 다시 깡총깡총 작은 토끼는 엄마 토끼를 만났네 오늘 저녁은 맛있는 토끼풀 반찬 ] 까만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잔디밭에 앉아 있는 작은 여자가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멍하니 그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였다.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걸까. 세레스라엘은 창을 닫았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눈을 감고 주저앉았다.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이 곳을 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레스라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저 단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가 다시 웃고 있는지, 그것만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녀가 웃고 있다면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웃고만 있다면... 그리움 같은 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레스라엘은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 그녀를 불렀다. "엘!" 검은머리가 흔들리더니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소녀 티는 약간 사라진 듯 동그랗게만 보이던 눈동자가 깊어 보였다. 엘은 방긋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저씨?" 세레스라엘은 숨을 내쉬었다. 엘이었다. 분명 엘이었다.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엘은 여전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나빠요.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나, 아저씨 찾느라 진짜 오래 걸렸단 말이에요. 있던 돈도 다 도둑 맞아 버리고.... 같이 도망가자고 하구선 혼자만 가버렸어. 주방 담당 하녀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소식도 몰랐어. 나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엘은 훌쩍훌쩍 울먹이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세레스라엘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엘... 엘... 이제 도망 못 가. 나, 이제 못 가." "아저씨?" 엘은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올렸다. 세레스라엘은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애써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3년도 더 지났는데...지금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들어. 조심해서 돌아가." 세레스라엘은 뒤돌아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걸음을 느끼며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향했다. 그녀가 웃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마음이 허전하다 해도 참을 수 있었다. 이미 그는 자신의 운명에 희망을 버린 지 오래였다. 다시 행복해 질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 엘은 날마다 찾아왔다. 경비가 삼엄한 비인 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들어온 것인진 날마다 저택에 찾아왔다. 그리고 잔뜩 눈물 머금은 눈동자로 바라보다 세레스라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우울한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세레스라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엘이 울적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몹시 기분이 불편했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가을 문턱에 들어설 즈음, 엘이 다시 찾아왔다. 엘은 집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세레스라엘을 애처롭게 부르고 있었다. 마지못해 창가로 나온 세레스라엘은 준비해 놓았던 작은 갈색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롤빵이야. 가져가." "아저씨..." 엘은 빵 주머니를 들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고 말했다. "나, 정신 차려보니 아저씨가 없어져서... 그래서 많이 울었어요. 오빠도... 죽고, 아저씨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매일 울다가 아저씨를 찾기로 했어요. 나, 아저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세레스라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꾸욱 주먹을 쥐었다. 말하기 싫어도 이제 말해야 했다. 엘을 계속 만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세레스라엘은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엘을 바라보았다. "얘기... 못 들었어? 나, 결혼했어. 이제 너와는 결혼할 수 없어. 아이도 있어." 순간 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엘은 넋 나간 표정을 짓더니 한참 세레스라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울 것 같은 얼굴을 숙이더니 뒤돌아서 달려갔다. 엘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세레스라엘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말았다. 하지만 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세레스라엘은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손을 가슴 쪽으로 올렸다. 가슴이 아팠다. 날카로운 바늘로 상처난 곳을 헤집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엘은 오지 않겠지.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다시는.... 어느 새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 그 날 밤, 세레스라엘은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이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우울했다. 시계 종이 육중한 소리로 세 번 울릴 때였다. 세레스라엘은 창 밖에 심상치 않은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 바로 앞에 검은 망토 차림의 누군가가 서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지?" "나에요." 검은 망토를 살짝 들어 얼굴을 보여준 사람은 히스페르였다. 벌꿀색 머리 빛깔로 어둠 속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감금되어 있었을 텐데..." "도망쳐 나왔어요. 난 이제 떠나요.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는 없거든요. 내 아이도 데리고 갈 거에요. 짧은 생이지만 난 행복해질 거에요." 히스페르의 눈동자에 미소가 어렸다. 다급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의 조각이 박혀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헤르만이?" "네. 날 못 견뎌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없어져 주려고요. 그 편이 우리 두 사람에게는 나아요." "네 능력으로 충분히 헤르만을 압도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을 원할 뿐이에요. 더는 원치 않아요. 받아요, 세스." 히스페르는 커다란 소맷자락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세레스라엘에게 건네주었다. 히스페르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곁에 있었는데도 당신의 불행한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후원의 열쇠에요. 지키고 있는 수문장은 없을 거에요. 그리고 길을 따라가면 마차가 준비되어 있을 거에요. 곧장 마렌 지방으로 가서 로사리오를 찾으세요. 그 곳에서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에요." "히스페르?" 세레스라엘은 놀란 표정으로 히스페르를 응시했다. 히스페르는 한 발자국 물러서며 말했다. "선택은 당신이 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우리의 만남은 오늘로서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안녕히, 세레스라엘. 난 당신의 노랠 아주 좋아했어요. 그럼." 히스페르는 뒤돌아서 달려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열쇠를 바라보았다. "엘...." 세레스라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하루하루 숨쉬는 것이 힘들었다.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리리아와 미레이유. 아무 잘못도 없이 자신의 운명에 들어온 두 사람을 버려 두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아무런 애정도 없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세레스라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엘이 우는 모습은 정말 보기 싫었다. 보고 싶지 않고, 보면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마음이라는 것이 사라졌으면 할 정도로 애틋하고 서글픈 심정이었다. 엘을 보고 싶었다. 곁에 있고 싶고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망이 너무나 강해 마음을 전부 차지해 버렸다. 세레스라엘은 울적하게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어둠이 내려 있었다. 이 지독한 울타리에서 벗어나도 어둠이 숨겨줄까.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내젓고 얇은 상의를 챙겨 어깨에 걸친 다음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여관 주인에게 마차를 맡기고 여관 안으로 들어온 세레스라엘은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복도를 걸어갔다. 며칠 전 엘이 마을 입구의 여관에 머물고 있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가 이 곳에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는 무작정 기대를 걸고 있었다. 구석진 방에 검은 머리의 소녀가 묵고 있다는 말에 세레스라엘은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낡은 나무 문 앞에 선 세레스라엘은 말없이 한참 문 손잡이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엘을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후우-" 세레스라엘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분별 없는 자신에 대한 화를 삭였다. '이제 와서 뭐라고 해야 하지?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몸이지만 함께 하고 싶으니 같이 가자고? 게다가 쫓기는 몸이라 숨어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라고? 얼마...살지는 못 하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란 말이야? 난 못 해!' 세레스라엘은 입술을 꾸욱 다물고 슬픈 눈동자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무작정 나온 것이긴 하지만 정말 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하면 엘은 불행해질 것이다. 헤르만과 일로나가 곧 추격자를 보낼 것이고, 리리아와 미레이유도 엘에게 평생 마음의 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평생 노래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래를 하면 그만큼 죽음이 순간이 더 가까워진다. 세레스라엘은 다시금 떠오른 엘의 우는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어차피 결국 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 때였다. 뒤쪽에서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세레스라엘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의 엘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짐을 싸서 떠나려는 듯 보였다. 세레스라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가방을 든 엘의 손이 벌어지며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엘은 울먹이며 달려와 세레스라엘의 품에 안겼다. 세레스라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한참 엘을 내려보았다. 창 밖에 빗줄기가 떨어질 무렵, 세레스라엘은 팔을 올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벗어나 그 옆의 길을 가게 될 것 같았다. 그 길 끝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밖에 존재치 않는다 해도....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5.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가을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날이었다. 엘은 연한 오렌지빛의 원피스를 두 손으로 잡고 살금살금 집에서 걸어나왔다. 집 앞뜰에 주저앉아 몹시 고민하는 그가 보였다. 엘은 세레스라엘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는 지금 작은 의자를 만드는 중이었다. 주방의 찬장에 손이 닿지 않는다는 엘의 말에 그녀만을 위한 의자를 만들어 주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라 벌써 몇 도르째 의자 그림만 붙잡고 끙끙 앓고 있었다. 엘은 빙긋 웃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잘 안 되는 거에요?" "응? 아, 응. 못을 어느 방향으로 쳐야되는 건지 모르겠어." 세레스라엘은 자신의 머리를 넘기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엘은 씨익 웃으며 바닥에 내려져 있는 망치와 못을 들고 의자 한 쪽에 못을 박기 시작했다. "이 쪽에서 이렇게 하면 되는 걸요. 오빠가 의자 만드는 거 봐서 알아요." "내, 내가 할게." 세레스라엘은 상기된 얼굴로 엘이 박던 못을 마저 박아 넣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어설픈 모습에 엘은 쿡 하고 웃고 말았다. "아저씨는 이런 일은 정말 맞지 않은 것 같아요." "또 아저씨! 너, 나보다 2살밖에 안 어려." 세레스라엘이 이마에 주름을 넣으며 핀잔을 주자 엘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찡긋 했다. "아차차... 미안. 미안해요. 세. 스. 됐죠?" 엘이 웃으며 말하자 세레스라엘은 피식 웃으며 다시 의자에 집중했다. 엘은 치맛자락을 모으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 날, 세레스라엘은 결국 울면서 말했다. 자신의 사정을 말하면서 그래도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엘은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가 처한 모든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고만 싶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있었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가 남겨두고 온 아이와 그 어머니가 괴로워할 게 틀림없었지만 엘은 눈을 감고 무시해 버렸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신경 쓰기에는 눈 앞에 있는 세레스라엘이 너무나 절실했다. 처음부터 좋았지만 이제는 정말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마음이 무거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 따스한 봄,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따스했던 어느 날, 엘은 세레스라엘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다. 세레스라엘은 멍한 얼굴로 진짜냐고 물었고 엘은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세레스라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내 아이가...암속성 레플리카를 전승하게 된다는 건 알지?" 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고 슬픈 현실이었지만 엘은 태어나게 될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 아이가 잔인한 운명을 받게 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꼭 그 아이를 보고 싶었다. 그와 자신의 가족이 될 그 아이를 꼭 만나고 싶었다. 엘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세레스라엘은 애써 미소지었다. "그래. 무섭고 잔인한 말이지만.... 미레이유가 암속성을 받았을 거야. 장녀나 장남이 전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 아이는...괜찮을 거야." 세레스라엘은 슬픈 눈동자로 엘을 바라보며 다시 미소지었다.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엘." 엘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스라엘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애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미레이유도 그의 아이였다. 마음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엘은 자신과 그와 태어나게 될 아이의 행복을 빌 수 밖에 없었다. 행복해 지고 싶었다... ******** 태어난 아이는 인형처럼 예뻤다. 세레스라엘은 딸아이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그런 그를 보며 엘은 매일 그를 놀려댔다. 작은 집이었지만 단란한 가족이었다. 세레스라엘은 며칠 동안 고심하더니 아이에게 '쥬느비에브'라는 이름을 주었다. "나같이 천박한 인생을 살지 않도록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줄 거야. 응... 그럴 거야." 세레스라엘은 아이의 이름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고, 엘도 만족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아이는 '쥬르'라는 짤막한 이름으로 불렸다. 까만 머리카락의 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곧잘 아버지를 웃게 만들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엘도 같이 웃었고 작은 집에는 늘 웃음이 감돌았다. ******** 깊고 고요한 밤, 세레스라엘은 침대 위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를 보며 미소지었다. 옆에 앉아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엘을 바라보며 그는 싱긋 미소지었다. "엘, 쥬르 뺨이 발그레한 게 너무 예뻐." "아기는 다 그래요." 엘은 생긋 웃으며 다시 바늘을 놀렸다. 세레스라엘은 아기의 뺨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다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피부도 뽀얗고 팔도 작고 통통해. 다리도 이렇게 작고. 정말 신기해. 코는 날 닮은 것 같기도 해." "응. 원래 딸은 아빠를 많이 닮는다잖아요." "응...맞아. 난, 내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괴물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나도...행복해질 수가 있구나. 노래하지 않아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 세레스라엘이 행복하게 미소짓자 엘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해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해질 거에요." 하지만 세레스라엘과 엘은 얼마 안 가 끔찍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들에게 숨을 곳과 돈을 대주고 있던 히스페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세레스라엘은 헤르만의 짓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히스페르가 없어진 이상 그들은 더 이상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가 그토록 잘 따르던 유모도 보내야 했고 세 사람만의 힘든 도망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 "마망! 나, 저거 먹고 싶은데요." 까만 생머리의 꼬마가 볼을 주먹으로 뭉실뭉실 돌리며 말했다. 엘은 짐짓 모른 척 꼬마가 가리킨 접시를 세레스라엘의 쪽으로 밀어놓았다. 접시에는 꼬마가 좋아하는 야채 볶음 요리가 담겨 있었다. 꼬마는 볼을 빵빵하게 만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히잉- 나 먹고 싶은데. 이이잉-" "안 돼, 쥬르. 파파가 드실 거야. 파파는 어제까지 아팠잖아." 엘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하자 꼬마, 쥬느비에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쥬느비에브는 냅킨을 두 손으로 꾸욱 쥐며 울먹였다. "그치만.... 나도 좋아하는데..." "먹어, 쥬르. 파파는 별로 안 좋아해." 세레스라엘이 웃으며 접시를 밀어주자 그제야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포크를 꾸욱 눌렀다. 그리고 야채 볶음을 입 안에 쏘옥 집어넣고는 웃으면서 우물우물 씹었다. 꿀꺽 목구멍으로 넘긴 쥬느비에브는 두 주먹을 꾸욱 쥐고 몸을 부르르 떨며 까르르 웃었다. "너무 맛나요! 마망 최고! 파파도 최고!" 세레스라엘은 천천히 미소지으며 음식을 삼켰다. 며칠동안 앓았더니 몸이 좋지 않았다. 엘이 손을 뻗어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은 떨어진 것 같은데..." "괜찮아, 엘. 미안. 괜히 노래를 불러서...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할게." 창백한 안색의 세레스라엘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엘은 세레스라엘을 조심스레 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파파! 마망! 식사하다가 딴짓하면 벌받는다고 그랬잖아요." 쥬느비에브가 심통난 표정으로 말하자 엘은 혀를 쏙 내밀었다.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의 말이 우스운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엘은 짐짓 심각한 어조로 쥬느비에브에게 말했다. "파파랑 마망은 서로 좋아하니까 식사 중에 안아도 되는 거야." "에에?" 쥬느비에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쥬느비에브는 갑자기 손뼉을 탁 치더니 의자에서 낑낑거리며 내려왔다. 그리고 엘에게 쪼르르 달려와 폭 안겼다. "나, 나도. 나도 파파랑 마망이랑 좋아하니까 안아 주세요." "녀석. 조그만 게 말은 잘 한다니까."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를 안아 올려 꼬옥 품에 안았다. 쥬느비에브는 기분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헤헤- 난 파파가 너무 좋아. 마망도 좋아." "나도 쥬르가 너무 좋아. 아주아주 좋아. 쥬르, 우리 오늘 시장에 가 볼까? 파파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우리 쥬르, 예쁜 리본도 사고." "에? 정말요? 나 갈래. 파파랑 갈래!" 세레스라엘은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등을 다독거렸다. 엘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다 먹고 빈 그릇을 한 곳에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집 청소 좀 하고 있을 테니까 얼른 다녀오세요. 아참, 살 물건 적어 놨으니까 가져가고요."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를 다시 꼬옥 껴안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의 반만 있어도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그래서 더 불안할 정도로 그는 지금 생애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씩 솟아오르는 노래의 욕구도 훨씬 참아내기가 쉬웠다. 엘과 쥬느비에브를 생각하면 마음이 단단해졌다. 지금의 행복을 주욱 지켜나가고 싶었다. 가끔씩 미레이유의 생각이 났지만 그것은 극히 일순간이었다. 잔인하다고 말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엘과 쥬느비에브였다. 누구에게 변명할 생각도, 용서받을 생각도 없었다. 미레이유에게도 차라리 자신같이 이기적이고 잔혹한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사랑 받지 못할 바에야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변명 따위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과 눈 속에 온통 쥬느비에브와 엘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시장은 시끌벅적했다. 이 소란스러움 덕분에 세레스라엘과 엘도 외출을 할 수가 있었다. 비인 가의 추격자들 때문에 거의 숨어살고 있는 그들이었다. 될 수 있으면 외출하지 않았고 이렇게 대규모 시장이 열릴 때면 숲속의 집에서 내려오곤 했다.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의 목도리와 작은 코트를 여며 주고 작은 벙어리 장갑을 낀 손을 잡았다. 아장아장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파파. 나도 분홍색 코트 입고 싶어요. 마망은 까만색만 좋아하나 봐. 까만색 코트에다 까만색 치마, 까만색 스타킹...에이, 난 분홍색이 좋은데." 쥬느비에브가 못마땅하다는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자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의 까만 모자를 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마망이 열심히 만들어서 입혀준 거잖아. 쥬르는 싫어?" "우, 우웅~ 안 싫어요. 그치만 마망이 만들어 주는 옷은 좋은데 까만 색은 싫어요." 여전히 심통이 난 얼굴로 쥬느비에브는 열심히 작은 발걸음을 옮겼다.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의 작은 손을 꼬옥 잡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엘이 어두운 색의 옷을 입히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될 수 있으면 평범하고 수수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어둡고 칙칙한 색만 선택하는 것이었다. 쥬느비에브도 비인 가의 피를 이어받고 있었다.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엘은 옷감을 파는 가게 앞에서 우울한 눈빛을 하곤 했다. 빨간색이나 노란색 옷을 만들어 주고 싶다며 칭얼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곧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자신의 기분을 세레스라엘에게 들키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였다. "어? 솜사탕이닷!"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세레스라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유난히 단 음식을 좋아했다. 물론 엘이 이빨을 꼬박꼬박 닦아주기 때문에 이빨은 튼튼했지만 어쨌든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쥬느비에브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보면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세레스라엘은 결국 솜사탕 하나를 사서 쥬느비에브에게 건네고 말았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솜사탕을 입 안으로 쪼옥 빨아들였다. "아유, 너무 맛난다. 아유, 맛난다." 솜사탕 하나로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세레스라엘은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종이에 시선을 돌렸다. "어디... 사과 5개라... 과일 가게가 어디쯤..." 상점을 둘러보던 세레스라엘은 작은 과일 가게를 찾았다. 그는 웃으며 여전히 솜사탕에 정신을 뺏기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내려다보았다. "쥬르, 이제 과일 사러 가자." "으응. 솜사탕은 너무 맛나요, 파파." 혹여나 쥬느비에브를 잃어버릴까 손을 꼬옥 잡은 세레스라엘은 과일 가게로 향했다. 작은 과일 가게에는 중년 부인이 이미 손님으로 와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천천히 과일을 둘러보며 사과를 골랐다. 쥬느비에브는 솜사탕을 후루룩 먹으면서 눈을 말똥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를 흘끗 쳐다보고는 빙긋 미소지었다. 가끔 외출할 때마다 쥬느비에브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넋을 빼놓고 사람 구경을 했다. 중년 부인과 가게 주인의 시끄러운 대화가 귓속에 들어왔다. [ 들었어요? 이번에 세금을 올린다지? 헤르만 평의회 의장이 일은 잘 한다지만 세금은 그만 좀 올렸으면 좋겠어. ] [ 맞아요. 아참, 얘기 들었어요? 이번 대속성 레플리카 다섯 분이 다 나왔다잖아요. 비어있던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 분도 이번에 나오셨대요. 다들 어린 아이들이래요. 다음 의장은 누가 되려나? ] [ 아무래도 광속성 레플리카 분이 되지 않겠어요? 어린데도 힘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그 이름이 뭐더라, 미...미레이유. 그래, 미레이유라는 여자애 레플리카가 비인 가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대단하다고 하던데요? ] 과일 가게 주인은 순간 말을 멈추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과일을 고르고 있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과일 과게 주인은 버럭 화를 내며 떨어진 사과를 주웠다. "아니, 이봐요? 과일을 이렇게 바닥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해요? 멍들었잖아. 이건 당신이 떨어뜨린 거니까 당신이....어? 이봐요!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주인은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듯 멍든 사과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오늘 장사도 망했구만! 저렇게 재수 없는 손님이 올게 뭐야? 날씨는 갑자기 또 왜 이래?" 주인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곧 이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커먼 하늘 아래 미친 듯이 비가 퍼붓고 있었다.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6.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속의 행복 ] 문을 연 엘은 깜짝 놀라 세레스라엘을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그와 옆에서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엘은 우선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였다. 먼저 수건으로 쥬느비에브의 머리와 얼굴을 닦아 준 엘은 쥬느비에브의 옷을 벗기고 잘 때 입고 자는 하얀 면 원피스로 갈아 입혔다. "이이잉- 마망--- 마망--- 이이잉---- 파파가 리본도 안 사주고 그냥 막 왔어. 파파가--- 이잉----" "쥬르, 울지 마. 응? 울지 마, 쥬르." 쥬느비에브는 옷을 갈아 입혀줘도 계속 울고만 있었다. 엘은 쥬느비에브를 꼬옥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쥬느비에브는 계속 훌쩍이다 이내 눈물을 그쳤다. 한참 울어서 지친 것인지 어느 새 잠들어 버린 쥬느비에브를 침대에 눕히고 나온 엘은 의자에 앉아 멍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세레스라엘을 발견했다. 시선에 초점이 없어 정확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몸의 물기도 닦지 않고 앉아 있었다. 엘은 마른 수건을 들고 가서 그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세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감기 걸려요. 옷부터 갈아입고..." 세레스라엘의 머리를 부지런히 닦으며 엘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순간, 세레스라엘이 엘의 허리를 꽉 안았다. 엘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눈을 깜빡이며 수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스..." "엘,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자만했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어. 불쌍한 우리 쥬르, 어쩌지? 어쩌지?" 엘은 세레스라엘의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속상한 일이 있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엘은 허리 쪽에 촉촉히 젖어오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세스. 비인 가에서 사람들이 나온 거에요? 그럼 어서 도망 쳐야..."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엘은 그의 팔을 풀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세스, 말해 봐요." 세레스라엘의 눈동자가 절망감에 번들거렸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엘.... 엘... 미안해. 미레이유가 광속성을 계승했대. 암속성이 아니라...광속성을 받았대." 엘은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걸까. 그 아이가 광속성을 계승했다면 내 아이는? 엘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엘은 천천히 손을 올려 뺨을 만졌다. "그럼...쥬르는.... 쥬르는... 쥬르가 암속성...을?" 엘은 고개를 떨구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단 한번도 쥬느비에브가 암속성 레플리카를 전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세레스라엘에게 대속성 레플리카의 잔혹함에 대해 들은 그 날부터 쭈욱 그렇게 생각해 왔다. 당연히 미레이유라는 아이가 암속성을 전승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잔인한 말일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길 바랬다. 그 아이가 암속성을 전승해서 쥬느비에브만은 그 불행을 피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괴로워하는 세레스라엘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암속성 레플리카의 잔혹한 운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모든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는 레플리카 사용자에게 노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살을 물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세레스라엘의 모습을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지켜보는 자에게 그것은 정말로 극심한 고통이었다. 엘은 손을 뻗어 세레스라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세스. 쥬르는.... 쥬르는.... 어떤 식으로든 행복해질 거에요. 당신이랑은 달라서 쥬르는 훨씬 씩씩하거든요. 너무 자책 말아요. 당신이라서 쥬르를 저렇게 예쁘게 낳은 거에요. 당신이 쥬르에게 생명을 줬잖아요." "이런 빌어먹을 운명을 던져줄 줄 알았다면 낳지 않았을 거야. 난... 난.... 엘, 미안해. 그 때 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쥬르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 후회해. 이미 늦어버렸지만 너무 후회해. 미안해. 엘.... 널 불행하게 만들어서 너무 미안해." 엘은 세레스라엘의 흐느낌을 들으며 애써 미소지었다. 그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앞으로 괴로워 할 것을 생각하니 그가 자연스레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그리고 쥬느비에브보다 더 아플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엘은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세스. 난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이 곁에 있고, 쥬르가 생겨서 너무 행복한 걸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쥬르는...쥬르는....당신 탓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마음 아픈 것도 당신 탓이 아니에요. 난 당신 전부를 사랑한 거니까, 내가 감수해야 할 고통이 있다면 견뎌낼 거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미안해 하지 말아요. 내가 당연히 견뎌내야 할 고통이니까. 대신 당신이 곁에 있잖아요. 그걸로 만족해요. 쥬르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엘은 소리 없이 울며 눈을 감았다. 불쌍한 쥬느비에브. 어떻게 운명을 이겨낼 것인지... 앞이 막막하고 눈물만 나왔다. 이 눈물이 다 마르면 쥬느비에브의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세레스라엘의 미소짓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엘은 세레스라엘의 작은 떨림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행복해진 자신이었다.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 세레스라엘은 갈수록 약해졌다. 쥬느비에브를 볼 때마다 몹시 슬픈 눈을 했고, 어쩌다 쥬느비에브가 작은 노래라도 흥얼거릴 때면 울면서 쥬느비에브를 끌어안곤 했다. 영문을 모르는 쥬느비에브는 그저 웃으며 즐거워 할 따름이었다. 해가 바뀌고, 따스한 봄의 어느 날,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본가에 다녀오겠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엘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지만 세레스라엘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를 보호해 줄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만 말했다. 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스라엘과 쥬느비에브는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 그리고 몇 델라 후. 세레스라엘은 달라진 듯한 일로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를 소개하고 있었다. "쥬르, 여기 할머니한테 인사해." "음...음... 아, 안녕하세요. 쥬, 쥬느비에브 엘 올 다렌느라고 해요." 쥬느비에브는 회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두 손을 꾸욱 잡고 꾸벅 인사를 했다. 일로나는 묘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는 바라보며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라."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를 데리고 가 먼저 소파에 앉힌 다음 자신도 그 옆에 자리했다 일로나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어찌된 게냐. 지금껏 연락 한 번 없다가. 내가 찾을 수 없을 만큼 꼭꼭 숨었더구나." "쥬르...제 딸아이를 지켜달라고...부탁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쥬느비에브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두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말똥말똥거리는 눈망울로 집 안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내 흥미를 잃었던 것인지 쥬느비에브는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볼을 부풀렸다 말다를 반복하며 까만 생머리를 쭉쭉 잡아당겼다.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쥬르, 집 앞에 나가서 놀래? 예쁜 분수랑 꽃이 있어. 먼 곳에 가면 안 된다. 알았지?" "으응. 나, 나가서 놀래요. 파파, 안녕! 할머니도 안녕!"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밖으로 나가자 세레스라엘은 한숨을 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쥬르, 암속성을 받았어요. 저 혼자로서는...역부족이에요. 저 앨 지킬 자신이 없어요. 비앙카가 연락을 줬어요. 히스페르의 아이가 여기... 있다고. 전 어차피 오래 살지는 못하겠죠. 제가 죽으면... 쥬느비에브를 부탁드려요. 히스페르의 아이를 거둬 주신 것처럼 쥬르를 부탁드려요." "네 놈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건방지구나. 내가 저 아일 이용하면? 헤르만에게 넘겨버린다면 어떠냐." 일로나가 이마에 주름을 넣으며 말했다. 세레스라엘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히스페르가 죽었어요. 당신이 가장 아끼던 히스페르가. 당신에게도 더 이상의 차가움은 느껴지지 않아요. 이제 가문을 위한다는 허세는 던져 버리신 것 같군요. 난, 당신을 여전히 원망하고 있어요. 내게 힘이 있다면 이런 부탁은 안 해. 하지만 쥬느비에브만은...지켜주고 싶어요. 그 앨 부탁드려요." "미레이유는 어쩔 셈이냐. 리리아가 미쳤다는 건 알고 있는 게냐." 일로나의 딱딱한 어조에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들었다.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리리아는 이제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서로에게 정이 없었고,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그저 미레이유라는 끈만 존재할 뿐이었다. 세레스라엘은 뻐끔하게 입을 열었다. "미치..다니?" "네가 떠나고 미쳐버렸지. 그 애 나름대로 널 사랑했었다. 너만 몰랐겠지만. 미레이유는 그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성대가 완전히 고장나 버렸어. 레플리카로도 치유가 안 될 정도로. 네 놈은 그렇게 무책임한 놈이다. 그 두 사람을 그렇게 버려 놓고 행복하게 지냈더냐." 일로나가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세레스라엘은 서글픈 표정으로 두 손을 깍지낀 채 말했다. "내 이 불쌍한 운명에 두 사람을 동참시킨 사람이 당신 아닌가요.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으니 슬플 리도 없죠. 슬플 이유가...없어요. 그저 불쌍하고 가련해서 한숨만 나와. 일로나, 난 내 운명과 엘 그리고 쥬느비에브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서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쥬느비에브를 지켜준다고 말해요. 헤르만에게서 지켜준다고 말해요." "히스페르는...좋은 아이였지. 헤르만은 너무나 쉽게 무서운 일을 저질러 버렸다. 난 더 이상 그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작정이다. 그 조그만 아이가 헤르만에게 이용되도록 두지는 않겠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일로나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세레스라엘은 똑바로 눈을 뜨고 일로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사람을 죽이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런 일은 이제 할 필요 없다. 리리아와 미레이유와 함께 지내도록 해라. 불쌍한 사람들이야."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들고 일로나를 쳐다보았다. 일로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1 모네의 반 정도라도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해." "또 제가 원치 않는 일을 주시는 군요. 난 당신이 원망스러워. 쥬르만 저렇지 않았어도 당신에게 손 벌리는 일은 없었어. 말씀, 알았습니다." 세레스라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걸어나갔다. 거절할 수 없었다. 쥬느비에브를 지켜 줄 사람은 일로나 밖에 남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에 따라야 했다. 세레스라엘은 울적한 마음으로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고 하늘의 푸른 색이 꼭 눈물 같이 보였다. ******** 금발의 작은 소녀가 흙을 만지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숲에 숨어 몰래 그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는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흙을 만지고만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마음 한 쪽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엾은 미레이유, 광속성을 이어받고도 넌 행복하지 않구나. 불쌍한 미레이유. 내 피에 저주가 담겨 있는 거야. 너도 쥬느비에브도 불행한 운명을 받았으니. 내 불쌍한 아이...미레이유." 세레스라엘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뒤늦게 죄책감에 시달릴 생각도 없었다. 정말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은 엘과 쥬느비에브였다. 두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그 소망을 비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세레스라엘은 어수선한 마음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장난스런 마음에 자신을 몰래 따라온 쥬느비에브가 미레이유를 보고 말았다는 것을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 돌아오는 길에 그는 울적한 마음에 노래를 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장면을 우연히 히스페르의 아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의 금발을 이어받은 아주 아름다운 아이였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몹시 호기심 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그 아이의 몸에서 광속성의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은 쥬느비에브의 몸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이었다. 그 아이가 쥬느비에브에게 노래를 불러준 모양이었다. 세레스라엘은 대화를 나누다가 어렴풋이 그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말 못하는 미레이유의 '위장'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일로나의 간계가 분명했다. 대외적으로 히스페르의 아이를 광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 내세움으로서 그 아이를 헤르만의 손에서 보호할 수 있고, 말 못 하는 핸디캡을 안고 있는 미레이유도 나름대로 대중의 눈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 애도, 너도 서로 불쌍한 존재야. 힘을 빼앗겨 버린 그 애나, 힘을 빼앗아 버린 너나.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나도...모두 불쌍해. 미레이유와 넌, 오래지 않아 서로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거야. 그 애의 전승 후보자가 너라면, 미레이유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테니." "함부로 말하지 마.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면 되니까. 그러면 모두 보상될 테니까. 다 아는 척 말하지 마. 내가 미레이유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아이는 화를 내며 사라졌다. 미레이유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말도 못 하고 갇혀 사는 미레이유를 무척이나 아끼는 듯 했다. 저런 아이가 쥬느비에브를 사랑해 준다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될 텐데... 조건 없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발걸음을 돌리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의 맑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서 있었다. 영리해 보이는 소년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암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로군요. 난 수속성 레플리카의 에스프라드입니다. 실례인 줄 압니다만, 에이드리안을 따라왔다가 우연히 엿듣고 말았어요."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좋은 아이 같았다. 나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헤르만의 아이로군. 후- 헤르만의 아이와 히스페르의 아이가 이토록 사이가 좋을 줄이야. 의외로군. 넌, 그 아이를 아끼나 보지?" "그래요. 소중한 친구이자 동생이에요." "그 마음, 변치 않았으면 좋겠군." 세레스라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뒤돌아 섰다. 아이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아버지를 그의 아버지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우울하고 슬펐다. 세레스라엘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조금은 다른 노래 하나 06-07. ----세레스라엘과 엘 [ 따스함 ] "파파, 어디 가요?" 쥬느비에브가 볼을 부풀리며 물었다. 세레스라엘은 애써 미소지으며 쥬느비에브의 통통한 볼을 톡톡 쳐주었다. "쥬르, 파파는 조금 먼 곳에 볼일 보러 갈 거야. 그동안 마망이랑 잘 있어야 한다. 알았지?" "우웅~ 싫은데. 파파, 나도 가면 안 돼요?" 세레스라엘은 물끄러미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엘의 한쪽 손을 꾸욱 잡고 여전히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리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새삼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피를 이어 받은 아이.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아이. 쥬느비에브가 불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웠다. 자신처럼 추한 삶이 아니라 밝고 따스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쥬느비에브만은 계속 행복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세레스라엘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쥬느비에브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쥬르, 파파는 쥬르가 너무 좋아. 그렇지만 쥬르. 쥬르와 같이 갈 수는 없으니까, 쥬르는 여기서 파파를 기다려 줘. 그러면 파파가 맛있는 케이크랑 과자 잔뜩 사 가지고 올게." "케, 케이크?" 쥬느비에브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까만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세레스라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쥬느비에브는 배시시 웃으며 몸을 베베 꼬았다. "그럼 기다릴래. 그런데 몇 밤 자면 오는데요?" "음... 조금...그냥 조금." 쥬느비에브의 동그란 눈을 세레스라엘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이 침울한 얼굴로 쥬느비에브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세레스라엘은 손을 뻗어 엘의 뺨을 매만졌다. "엘..." 안타깝고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울고만 싶었다. 왜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걸까. 엘과 함께 하고, 쥬느비에브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쥬느비에브를 지킬 힘이 없었고, 이 것이 최선이었다. 일로나라면 쥬느비에브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하자는 데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엘, 다녀올게." "..................." 엘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울적한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세레스라엘은 엘의 이마에 살짝 입맞추고 돌아섰다. 행복하게 해주고 아껴주고 싶었다. 곁에서 함께 하고 싶었다. 단지 그 것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았다. 작은 소망조차 그에게는 너무 벅찼다. ********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리아, 그리고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미레이유와 함께 하는 시간은 고역이었다. 마음이 아파 그들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그들과 함께 하는 순간조차 엘과 쥬느비에브를 생각하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서글퍼졌다. 그렇게 보름이 가면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하지만 막상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엘의 슬픈 표정에 마음이 저려왔다. 다른 여자에게 자신을 보내놓고 마음이 좋을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빼앗기는 기분일 것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힘없고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 빨래를 개키던 엘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파랗게 돋아나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들, 그리고 우직하게 서 있는 아름드리 나무. 너무나 평화로와 보였다. 엘은 우울한 얼굴을 돌려 다시 빨래를 개키기 시작했다. 너무 야속했다. 새카맣게 타고 있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세상은 너무나 평온했다. "뱅글뱅글- 마망 얼굴 그리기-" 엘은 고개를 들어 마룻바닥에 엎드려 하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쥬느비에브는 착하고 순진한 아이였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불쌍한 아이였다. 지금은 철없이 웃고만 있지만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깨닫게 되면 과연 쥬느비에브가 이겨낼 수 있을까. 부모를 원망하며 비뚤어지지는 않을까. 엘은 처량한 마음으로 빨래를 개키던 손을 멈췄다.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통통한 팔을 들어 종이를 보여주었다. "마망! 마망 얼굴이에요. 예쁜 얼굴! 나, 그림 잘 그렸죠?" 헤실헤실 귀엽게 웃는 딸에게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신이 났는지 다시 엎드려 그림에 열중했다. "이제 파파 얼굴! 쥬르 얼굴도 그려야지." 노란 크레용으로 쓱쓱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미소짓던 엘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세레스라엘이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을 그를 생각할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다른 여자와 함께 하고, 그 여자의 아이와 미소짓는 세레스라엘. 그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지는 알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세레스라엘은 그들에게 애정이 없었다. 정략 결혼으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로 인해 괴로움만 느꼈을 뿐, 다른 느낌은 없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욕하겠지만 자신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애정이 없었고, 그저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그들이 불쌍하고, 그들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 함께 있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나눠 갖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떨어졌다. "어? 마망? 아파요?" "아니야, 쥬르. 그냥. 눈이 좀 아파서..." 엘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쳐냈다. 하지만 뭐가 잘못된 건지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쥬느비에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원피스 소맷자락으로 엘의 눈을 닦으며 자신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망, 울지 마요. 마망...." "괜찮아. 쥬르.....흐흑.....흐흑...." 엘은 고개를 숙여 흐느끼고 말았다. 세레스라엘과 함께 할 수조차 없는 힘없는 자신이 불쌍했고,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세레스라엘이 불쌍했고, 또한 가엾고도 가여운 자신의 딸, 쥬느비에브가 불쌍해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다. 엘은 쥬느비에브를 꼬옥 끌어안았다. 죽은 오빠, 렌스가 말했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행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과연 그녀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 또 한 번의 보름이 지났다. 세레스라엘은 쥬느비에브에게 줄 과자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처음 그를 맞이한 것은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와 엘이 아니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였다. 세레스라엘은 과자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울음소리가 들린 쥬느비에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쥬느비에브의 방에 들어선 세레스라엘은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누워 있는 쥬느비에브와 눈물 범벅이 된 엘을 발견했다. 그는 한눈에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했다. 쥬느비에브가 노래를 불렀던 것이 틀림없었다. 창백한 안색의 쥬느비에브를 보고 있으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 쥬느비에브가! 세레스라엘은 정신 없이 울고 있는 엘을 밀어내고 쥬느비에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직 전승 후보자에 불과한데도 여전히 저주의 효력은 무시무시했다. 막상 전승을 하게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노래를 부르면 몸서리쳐지도록 몸이 아파 온다. 하지만 이 것은 다른 레플리카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저주의 산물이었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돌려 엘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 엘을 바라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자신의 마음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한 눈먼 장님이었다. 세레스라엘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제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해왔다. 엘과, 그리고 쥬느비에브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고, 아무리 원해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세레스라엘은 눈을 감았다. 결국 비겁한 자신이었다. 혼자 남을 엘은 어떻게... ******** "와아- 파파, 눈 와요! 눈 온다니까요! 야아-" 귀여운 곰 모양의 모자를 쓰고 폴짝폴짝 뛰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세레스라엘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하얀 눈밭에서 쥬느비에브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웅- 눈이 와요, 눈이 온다!" 한참 뛰어다니던 쥬느비에브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뭉치던 쥬느비에브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열심히 손을 놀렸다. 눈을 뭉치면서 쥬느비에브는 신나게 떠들었다. "파파. 요렇게 눈을 뭉쳐서 나뭇가지를 이렇게 쿡 찌르면. 짜잔! 사과 완성!" 동그란 눈뭉치에 나뭇가지를 찔러 넣어 자랑스레 세레스라엘에게 보인 쥬느비에브는 눈뭉치를 세레스라엘에게 건네주고 또다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마망도 같이 올걸. 마망- 쥬르는 지금 너무 재미있어요- 마망-" 세레스라엘은 말없이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눈뭉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가장 깨끗한 눈으로만 만들었는지 눈뭉치는 깨끗하게 반짝였다. 손바닥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싸늘하게....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휩싸여 눈이 부셨다. 하늘조차 하얗게 보였다. 세레스라엘은 다시 고개를 내려 쥬느비에브를 눈으로 쫓았다. 즐겁게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세레스라엘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쥬르, 노래 불러줄까?" "에에? 진짜? 응! 응! 나, 파파 노래 좋아요. 파파는 노래 너무 예쁘게 부르는 걸. 그치만..." 쥬느비에브가 웃으면서 깡총깡총 뛰어왔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느비에브의 조그만 손을 잡았다. "그치만?" "그치만 파파는 노래부르는 거 싫어하잖아요. 마망도, 파파도 나한테 노래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우웅~" 쥬느비에브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자못 심각하게 말하자 세레스라엘은 웃으며 쥬느비에브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쥬느비에브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난 쥬르가 세상에서 제일 좋거든. 음, 마망을 빼고. 쥬르가 노래부르는 것도 아주 좋아. 쥬르도 노래 잘 하잖아. 날 닮아서 노래는 정말 잘 하는 걸." "마망도 노래 잘 해요. 전에 마망이 노래불러줬잖아요. 파파도 웃었는데." 쥬느비에브가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세레스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하얀 세상. 엘이 준 세상도 하얗고 깨끗했다. 자신의 짧은 생애에서 가장 하얗고 빛나던 때. 세레스라엘은 뺨의 눈물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파파가 노래해 줄게. 쥬르, 잘 들어. 내가 쥬르에게 주는 노래야. 사랑하는 나의 쥬르에게 주는 노래야." 쥬느비에브가 숨을 죽이고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세레스라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 투명한 유리 구슬 하나 파란 물 속으로 잠겨 바닥으로 미끄러지네 유리 구슬이 말해 무서워 무서워 깊고 어두운 곳은 무서워 노래를 불러줄까 어둡고 차가운 곳이라도 나의 노래는 그곳에도 퍼져 작은 사랑의 노래 위로의 노래 안타까운 이별의 노래 그래도 노랫소리에 위안을 받네 흔들리는 마음 새롭게 빛나고... ] 세레스라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파란빛이 눈밭에 반사되어 하얗게 흩어졌다. 세레스라엘은 눈을 감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빈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몸이 흐느적거렸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것이 하나씩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리고 안간힘을 써서 안고 있던 쥬느비에브를 눈밭에 내려놓았다. 다리가 꺾여왔다. 세레스라엘은 결국 눈밭에 나뒹굴고 말았다. "쿨럭." 시커먼 피가 솟아올랐다. 손으로 입을 닦아내자 시커먼 핏물이 손을 흠뻑 적셔갔다. 세레스라엘은 레플리카의 빛이 떠 다니는 눈밭 위에 엎드려 엘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가 따끔거렸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나의 쥬르, 이젠 조금은 덜 아플 거야. 기적 같은 건 없어. 정당한 대가를 치른 소망만이 이루어지지. 쥬르, 난 내 생명을 걸고서라도 널 지키고 싶어. 나의 소중한 아이. 엘과 사랑해서 태어난 아이.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고, 내가 행복했다는 증거. 쥬르, 부디 행복하길. 사랑하는 나의 쥬르...' 세레스라엘은 눈밭에 펼쳐진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자신의 레플리카 전부를 걸어 쥬느비에브의 암속성을 봉인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 이제 자신이 죽으면 암속성이 전승되겠지만 발동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강한 마음과 목숨을 담보로 봉인을 한 것이니 쉽게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서 조금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세레스라엘은 눈을 감았다. 침을 삼켜 고통을 이겨내 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엘...엘... 어디에?' 무감각해지는 신체를 느끼며 세레스라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엘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 뺨에 반짝이는 저것은 무엇일까. "당신이 불러서 나와봤는데... 작별 인사도 안 하려고?" "미안해." "세스.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쥬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어. 미안해요. 혼자 짐을 지워서. 내가 이렇게 약해서. 혼자 가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엘, 영혼과 마음은 다른 걸까? 내 레플리카는 사라져 버렸는데, 내 영혼이 사라져버렸는데 지금도 나, 네가 보고 싶고 그리워. 마음이 아파. 엘, 보고 싶어. 그리워. 다시 한 번....다시 한 번..." "당신이 마중 나와 줘요. 내가 갈 때, 당신이 마중 나와 줘요. 내가 길 잃지 않게..." "응... 사랑해, 엘." 세레스라엘은 손을 뻗어 엘의 손을 잡았다. 따스했다. 손등 위에 더 따스한 게 느껴졌다. 눈밭이 몹시 따뜻했다. 레플리카의 빛으로 따스해진 탓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더라... 엘의 생일날, 케이크에 꽂았던 초가 아주 따뜻하고 밝았고, 쥬르가 태어난 날, 방 안에 밝혀있었던 불빛이 아주 따스했지. 쥬르가 내 얼굴을 그렸다며 그림을 보여줬을 때도 뭔가 따뜻했고, 엘이 만들어준 사과 파이도 따뜻했어. 엘이 미소짓는 모습은 참 따뜻했고, 쥬르가 웃을 때도 따스했어. 그래, 엘과 쥬르와 함께 했던 때는 따뜻했구나. 꽤 행복했구나, 나... 엘, 너도 행복했어? 쥬르, 파파와 함께여서 행복했니? 세레스라엘은 눈을 감고 미소지었다. 행복했던 날들이 떠올라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떠나도...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은 미소지으며 세레스라엘을 품에 안았다. "세스, 꼬옥 마중 나와 줘요. 약속했어요." 엘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이별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저 작은 이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고장난 것 같았다. 이제 울고 싶지 않았다. ******** 세레스라엘이 집에 남겨둔 돈은 생각보다 많았다. 히스페르에게 받은 돈과 그가 이미 가지고 있던 돈이었다. 엘은 그 돈으로 예전에 쥬느비에브를 돌봐 주었던 유모를 다시 불렀다. 쥬느비에브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레스라엘의 봉인 때문인지 쥬느비에브의 기억은 헝클어져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세레스라엘이 늘 그랬듯 여행을 떠났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유모와 외출하고 온 쥬느비에브는 울면서 엘에게 매달렸다. 파파가 어디갔냐고 울면서 말했다. 이제야 세레스라엘이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모양이었다. 엘은 참으려고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쥬느비에브와 엘은 세레스라엘의 죽음을 힘들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은 남아있었다. 엘은 계속 숨어살기로 마음먹었다. 유모를 다시 보내고 일부러 외출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고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다른 사람들과도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슈비츠 공작이 된 벤이 찾아왔고, 그는 쥬느비에브를 착잡한 마음으로 쳐다보더니 엘을 원망하며 입을 다물었다. 엘은 벤에게 쥬느비에브를 맡아줄 수 없겠냐고 말했다.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 쥬느비에브가 혼자가 되면 쥬느비에브를 보살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벤은 고개를 돌리고 떠나버렸다.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아 힘겹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와 헤어지게 된 날은 봄의 어느 부분쯤 되는 날이었다. 엘은 쥬느비에브와 전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벽 일찍 장에 다녀온 길이었다. 들고 있는 커다란 종이 봉투 안에는 사과가 잔뜩 들어 있었다. 쥬느비에브에게 사과 파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엘은 좋아할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슬슬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어서가서 파이를 구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엘은 서둘러 걸어갔다. 쥬느비에브가 자고 일어나서 자신을 찾을게 틀림없었다. 또 울지도 모르니까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강 가에 도착할 즈음, 엘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녀의 앞에 회색 옷을 입은 사람 여럿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 엘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누..누구세요?" "우리는 헤르만 평의회 의장 각하의 명령을 전하러 왔습니다. 엘 르웬도르 올 라센이 맞습니까?" 엘은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만이라면 세레스라엘이 그토록 얘기 했던 그 사람이 아닌가. 엘은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어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망갈 곳은 보이지 않았다. 회색 옷의 남자가 다시 말했다. "쥬느비에브 엘 올 다렌느를 데리러 왔습니다. 안내해 주시죠." "쥬, 쥬르를? 안 돼요!" 엘은 입술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쥬느비에브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쥬느비에브도 비인 가의 한 사람, 게다가 대속성 레플리카의 전승자였다. 비인 가에서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아이였다. 넘겨줄 수 없었다. 세레스라엘이 그랬듯 쥬느비에브도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놔 둘 수는 없었다. "쥬, 쥬르는 나와 함께 있지 않아요. 머, 멀리 떠났어요." 엘은 사과 봉지를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회색 옷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왔습니다. 의장 각하께서 좋게 해결하라고 하셔서 당신에게 통고를 하는 겁니다." "쥬르는 못 데려가!!" 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회색 옷의 남자가 인상을 쓰며 손을 휘둘렀다. "안 되겠다. 그냥 해치워. 그 편이 쉽겠어." 그러자 한 남자가 귀찮다는 듯 다가와 날카로운 소리를 뱉었다. 엘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배에 무언가가 쑤욱 들어온 느낌이었다. 피가 번지고 있었다. 목에서 울컥 피가 솟으며 엘은 자리에 쓰러졌다. 종이 봉지에서 사과가 빠져나와 데굴거리고 있었다. 회색 옷의 남자들이 수군거리며 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은 떨리는 몸을 감싸며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쥬르는...안 돼. 세스가 목숨 걸고 지켰어. 쥬르는 안 돼...." 엘은 눈을 꾸욱 감았다 다시 떴다. 몸이 떨려왔다. "세스 말이 맞아. 기적 같은 건 없어. 정당하게 대가를 치러야 소원은 이루어져. 레플리카는 마음. 세스가 그랬어. 강한 마음은 레플리카가 되어... 비록 내 생명이 사라지더라도..." 엘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회색 옷의 남자들이 다시 수군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레플리카로 엘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간 남자들의 머리 속에 강한 충격이 왔다. 남자들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엘은 미소지었다. "세스 말이 맞아. 난 레플리카를 쓰지 못하는데. 마음이...중요한 거야. 마음이... 세스, 어서 마중 나와요. 나, 자꾸 눈이 감겨. 사과..사과가 보여. 쥬르가 사과 파이를 해달라고 했는데... 추워. 세스가 있으면 따뜻한데... 세스? 거기 있어요?" 엘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세레스라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솟았다. "약속했으면서.... 세스, 보고 싶어요. 빨리 와줘요..." 억울하고 야속한 기분이었다. "쥬르,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어쩌지... 쥬르, 나의 사랑하는 쥬르... 마망은 쥬르가 너무 좋은데..."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세레스라엘이 가끔씩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그만 하라고 말해도 이정도는 괜찮다며 웃으면서 말했었다. 엘은 천천히 미소지었다. "이제야 오다니. 기다렸잖아요. 세스, 이상하게 오늘따라 강이 반짝거려요. 응, 우리 이번에 강 깊숙한 곳에 집을 지으면 되겠다. 아무도 우릴 발견하지 못할 거고, 아주 따뜻할 것 같아. 우리 집은 아주 따뜻할 거야." 엘은 눈을 감았다. 자꾸 잠이 왔다. 그리고 엘은 깨지 않는 잠에 영원히 빠져들었다. 고요히 울리는 그리운 노랫소리에 잠겨... ******** 헤르만의 수행원인 회색 옷의 남자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머리야. 어? 우리가 왜 여기 쓰러져 있었지?" "몰라. 어우.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어? 저 여자는 뭐야?" 회색 옷의 남자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한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어내렸다. "이런. 맞아. 우리가 이 여자를 죽였잖아!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야?" "몰라. 빨리 그냥 처리하자고. 잘됐군. 강에 던져 넣으면 되겠군." 남자들은 재빨리 쓰러져 있는 여자를 강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참, 엘 르웬도르 올 라센이라는 여자는?" "이 마을에 없었잖아. 헤르만 의장 각하의 정보가 잘못 된 모양이야. 이 마을엔 없으니 다른 곳을 조사해 봐야겠어." "맞아. 그랬지." 남자들은 수군거리며 뒤쪽에 세워놓았던 말에 올라탔다. 강이 소리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휴우- 오늘따라 강이 이상하네. 바람도 없는데 왜 저리 물결 치냐." 남자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몰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강이 흔들리며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 [ 엘, 있잖아. 나, 고백할 게 있어. ] [ 뭔데요? ] [ 나, 엘이 아주 따스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녹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 [ 녹아요? 나, 난로 아닌데... ] [ 으응. 엘이 너무 따스해서 기분이 좋았어. 그래서 널 안고 싶었나 봐. 그래서 곁에 있고 싶었나 봐. 그래서....행복해졌나 봐. ] [ 세스가 미소지으면 나도 따뜻해요. ] [ 응. 너와 함께 하면 따스하고...또 행복했어. 아주.... 따뜻한 느낌이 들어. 엘, 만약 이 느낌이 그리워지면 내가 널 데리러 갈게. 꼭.... ] 제132음(第132音) Replica...(1)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 앞이 흐려져 갔다. 그는 눈동자에 박힌 미레이유의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였어. 내가...미레이유를 망가뜨렸어. 잊고 싶었는데. 망각하고 싶었는데. 나의 죄..." 에이드리안은 힘없이 미레이유에게 다가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이제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따가운 눈을 깜빡였다. 목이 메어왔다. "말 좀 해 봐. 미레이유. 내가 왔는데... 원망이라도 해 봐. 레플리카든...뭐든..." 에이드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망가진 거야. 너 때문이야.... 난 아무 잘못 없었어." 목이 메어왔다. 에이드리안은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가려왔다. 자신이 미레이유를 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억을 가리고 아무 것도 모른 척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자신은 그저 피해자인 척 연극을 했다. 미레이유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만을 각인하며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완벽하게 전승되지 못한 광속성 레플리카를 쓸 때 마다 마음을 죽여갔다. 가끔씩은 너무나 괴로웠다. 자신이 약해질 때마다 완벽하지 않은 광속성은 다시 미레이유에게 넘어갔고 그녀와는 알 수 없는 공존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녀의 호흡을 느끼고, 그녀의 생명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너무 괴로웠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그녀를 증오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 사람을 망가뜨려 버리다니!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러버리다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그 때 내가 죽었다면!! "미안해, 미레이유. 미안해. 미안해...널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내가 널 망쳤어. 내가 널 망가뜨렸어.... "그 날, 왜 미레이유는 네 레플리카를 피하지 않았을까." 에스프라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이드리안은 매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스프라드가 묘한 표정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목에서 터져 나오는 이질적인 목소리를 느꼈다.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어두운 목소리.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미레이유는 널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을까. 에이드리안. 그 날. 난 미레이유를 찾아갔었어. 그리고..." [ 그만 해!! ]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에스프라드의 어깻죽지로 하얀 빛이 선을 그으며 사라졌다. 그리고 곧 이어 그의 어깨가 붉게 물들어 갔다. 에이드리안과 에스프라드는 동시에 미레이유를 쳐다보았다. 미레이유의 타버린 신체는 여전히 침대 위에 뉘여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미레이유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레플리카... "미레..이유?" 에이드리안의 모습을 본 에스프라드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며 미레이유에게 퍼부었다. "닥쳐!! 네까짓 게 나설 자리가 아니야! 어차피 너도 네 욕심을 부린 거잖아?" 에스프라드는 미레이유를 향해 팔을 들어 노래를 퍼부었다. 파란빛이 뿜어지며 침대를 덮쳤다.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의 레플리카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뺨을 쳤다. 거친 목소리가 뱉어져 나왔다.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구!!" "후! 에이드리안. 널 배신한 미레이유에게 아직 정이 남은 모양이지? 하긴 그토록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미레이윤데 말이야. 후훗. 아하하하하!!" 에스프라드는 팔을 내리고 다시 미소를 띄웠다. "미레이유는 널 정말 사랑했어. 널 배신하겠다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지. 하지만 난 미레이유의 존재를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망가뜨리기로 마음먹었어. 그것도 네 손을 빌려서 말이야. 미레이유에게 말했지. 너만 죽어버리면 에이드리안은 광속성 레플리카를 전승 받아 최고의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아르헨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쥘 수도 있고 누구보다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했어!! 미레이유, 네가 있으면 에이드리안은 평생 네 그늘 아래 살아야 해. 에이드리안은 결국 널 증오하게 될 거야! 이렇게 말했지." "무슨..."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에스프라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불쌍한 미레이유. 하지만 미레이유에겐 단 하나, 간절한 소망이 있었어. 오래도록 네 곁에 있고 싶다는 것. 하지만 미레이유가 살아있는 이상, 넌 광속성을 전승할 수 없지. 미레이유는 몹시 고민했어. 네 곁에 있고 싶지만, 자신이 곁에 있으면 넌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죽음과 삶.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웠지. 하지만 미레이유는 자신의 욕심을 이기지 못했어. 네게 미움받더라도 널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다고 했어. 그녀는 '삶'을 선택한 거야. 그 간절한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더군. 그래서 그녀와 약속했어." 에스프라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미레이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에 미소를 띄우며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내 말에 따라주면 그녀를 지켜주기로. 난 미레이유에게 널 죽이겠다고 말하라고 했어.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어. 네 곁에 있고 싶었거든. 그래서 내 말을 따랐어. 네가 아무리 미레이유를 미워하게 되어도 내가 그녀를 지켜줄 테니까 믿고 내 말을 따랐던 거겠지. 아, 하나 더. 내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면...그녀를 죽이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지. 네가...그녀를 저렇게 만들었으니. 후후-" "에스프라드 형...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그럼 미레이유는...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런 건가? 머리 속이 복잡했다. 미레이유는 에스프라드의 간계에 속은 것이었다. 자신을 미끼로 삼은 에스프라드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정신 없이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구! 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미레이유를 증오했던 시간들은 무엇인가! 도대체! 정신이 일그러져 갔다.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에스프라드를 이대로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자신을 망가뜨리고 미레이유를 망가뜨린 사람이었다. 한 때, 소중했던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은 그냥 둘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웃옷 안주머니에서 은빛의 피스톨을 꺼냈다. ********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머리 속이 웅웅거리며 울려왔다.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울 기운도 없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세계.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믿음.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녹아 사라진 것 같았다. 행복했던 쥬느비에브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내 행복은 어디로 간 것일까. 누가 가져가 버린 것일까. [ 마망, 어디 아파요? 왜 우는 거에요? ] [아니야, 쥬르. 불쌍한 쥬르. 마망은....그냥 마망은....파파가 보고 싶어서...] [ 파파는 일 하러 갔다고 했잖아요. 빨리 온다고 했는데... ] [ 불쌍한 쥬르.... ] 어머니는 우셨다. 아버지가 어디론가 떠나시고 나면 울적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 밤마다 혼자 슬프게 우셨다. 쥬느비에브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아버지가 어디로 가셨는지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던 그녀였다. 커다란 집이 있는 곳에서 본 금발의 소녀. 그 소녀에게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사실이 몹시 불길하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어머니. 아버지를 보내고 늘 혼자 우셨던 불쌍한 어머니. 그리고 자신. 어렸을 때, '미레이유'라는 소녀를 보았었다. 쥬느비에브는 그 소녀가 너무 미웠다. 그 소녀가 아버지를 훔쳐 간 것이었다. 어머니와 자신이 우는 동안 그 소녀는 행복하게 미소지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데려가 마음껏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자신이 불길한 운명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래만 부르면 아팠던 자신.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몹시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어느 날, 쥬느비에브는 밤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자신이 암속성 레플리카라고 했다. 그리고 미레이유가 광속성 레플리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그 당시에는 몰랐다. 암속성이 무엇인지 광속성이 무엇인지...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내 행복은 전부 가져가 버리는 거지? 아버지를 빼앗아 가버리고... 덕분에 나와 마망은 늘 울었어. 괴롭고 슬퍼서 울었어. 왜 하필이면 내가 암속성이야? 미레이유가 암속성을 가져갔으면 난 이렇게 불행해지지 않았어. 내가 광속성을 받았으면 이렇게 불행해지지 않았어.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까지 가져가 버렸어. 이제 나한테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쥬느비에브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레이유를 향해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나보다 미레이유가 더 크겠지? 난 아무 것도 아닐 거야.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미레이유가 내 행복을 빼앗아 버릴 거야. 에이드리안을 빼앗아 가버릴 거야. 쥬느비에브는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미레이유에게만 매달리는 그가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 "에스프라드 형, 더는...뒤로 물러설 틈이 없어. 형을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나도, 형도 용서받을 수 없어." 에이드리안은 피스톨을 겨누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이 고여갔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끝을 내고 싶었다. 자신의 죄도, 에스프라드도, 미레이유도 모두 끝내고 싶었다. 더 이상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였다.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노랫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노랫소리.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쥬느비에브가 보였다. "죽일 거야. 이제...아무 것도 없으니까...죽일 거야. 미레이유. 내 행복, 다 가져가 버렸어. 파파... 내가 광속성을 전승할 수도 있었는데. 미레이유가 광속성을 전승해서 내가 암속성을 받았어. 이제, 에이드리안마저 데려가 버렸어. 죽일 거야, 미레이유..." 쥬느비에브의 눈동자에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에스프라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랬다. 쥬느비에브가 있었다. 너무나 당혹스럽고 잔혹한 사실에 마음을 빼앗겨 쥬느비에브를 잊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쥬르. 쥬르, 정신 차려! 쥬르!!" 하지만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쥬느비에브는 그저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노래를 흥얼거렸다. 쥬느비에브의 입에서 퍼진 작은 노랫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검은 빛이 모여들었다. 에이드리안은 그 빛이 미레이유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이 미레이유를 향하는 순간, 에이드리안은 다급하게 레플리카를 뿜어내어 쥬느비에브의 레플리카를 막았다. 하얀빛과 검은색의 빛이 충돌하여 흩어졌다. 방 안에는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의 화음이 섞여 찢어질 듯한 굉음이 퍼졌다. 쥬느비에브의 눈에 한 순간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에이드리안을 거칠게 밀어내고 그를 노려보았다. 쥬느비에브의 입에서 고함 소리가 터졌다. "왜 말려요! 왜 말리는 건데요?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죽게 할 수 없는 거에요? 거짓말쟁이! 에이드리안은 거짓말쟁이야! 미레이유를 미워한다고 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야! 미레이유를 좋아하잖아. 나보다 미레이유가 소중하잖아!! 에이드리안, 알아요? 미레이유는 내 언니에요! 이복 언니라구요! 미레이유가 내 행복, 다 가져가 버렸어! 미레이유 때문에 파파는 나와 마망 곁에 있지도 못했어! 마망은 매일 울었어! 미레이유가 암속성을 받았으면 난 이 꼴이 되지도 않았어! 이제는 에이드리안마저 빼앗아 가버렸어! 난 미레이유를 없애 버릴 거야! 없애 버릴 거야!!" 철썩. 방 안에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 퍼졌다. 쥬느비에브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뺨이 얼얼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이 거친 표정으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때린 것이었다. 맥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정말 자신보다 미레이유가 소중한 걸까. "이복 언니.... 미레이유가... 하아... 그만 해, 쥬르. 그만 해... 나도...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어. 쥬르, 부탁이야. 그만 해..."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말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여 에이드리안에게 말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 목에서 멋대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에이드리안. 물어볼 게 있어요. 에이드리안은 왜 저주받은 날 곁에 둔 거에요?"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쥬느비에브의 눈빛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만 해. 그만 해. 쥬르. 이제 그만 해." "대답해 줘요! 내 레플리카를 흡수하려고 날 곁에 둔 거 아니에요?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 레플리카 때문에 날 곁에 둔 거, 맞죠? 레플리카를 흡수해서 날 죽일 거야! 그렇죠? 말해 봐요!! 미레이유를 살리려고 날 곁에 두고 있다고!!"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의 외침에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앙칼지게 외치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몸이 떨려왔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순간 머리 속에 작은 선율이 스쳐갔다. [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 아닌가? ] 에스프라드의 레플리카였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에스프라드가 웃고 있었다. [ 3년 전, 넌 미레이유에게 달려왔어. 그리고 날 죽일 거냐고 외쳤지. 오늘, 쥬느비에브가 날 죽일 거냐고 외치는 군. 에이드리안. 이번에는 미레이유가 맡았던 역을 네가 맡아야 겠어. 어차피...넌 쥬느비에브의 레플리카를 흡수할 생각이었을 테니... ] 에이드리안은 어느 새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받으며 멍하게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눈 앞이 맑아져 왔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몹시 위험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3년 전의 그 잔혹했던 장면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소리지르던 자신, 눈물을 보이던 미레이유, 잔인하게 웃고 있던 에스프라드. 이제 그 모습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소리치는 쥬느비에브, 잔혹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 웃고 있는 에스프라드. 그 때, 저항하고 발버둥 쳐봤지만 결국 자신은 미레이유를 상처 입히고 말았다. 한 쪽으로 흐르는 마음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비참하고 허탈한 마음이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별의 순간이 온 것 같았다. "어째서...이렇게 되는 거지? 왜..." 에이드리안은 눈물을 흩어내며 눈을 감았다. 이젠 체념할 때라는 예감이 들었다. 더 이상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3년 전, 자신과 미레이유가 그랬듯,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미레이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미레이유, 그녀를 미워하고 상처 입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였다. 미움 받고 상처받을 차례다. 에이드리안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아니야. 쥬르. 그런 게 아니야. 내겐 네가 소중해. 널...죽이려는 게 아니야." "거짓말!! 어차피 난 쓸모 없는 존재야!! 미레이유만 소중하잖아! 내게서 레플리카를 가져가 버리고 날 죽일 거야! 그리고 미레이유를 살릴 거야! 에이드리안은 그렇게 할 거야!!" 쥬느비에브가 울면서 외쳤다. 에이드리안은 슬픈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자신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그랬다. 미레이유가 그토록 슬픈 얼굴로 말했는데 자신은 그 것을 못 본 척 했다. 미레이유의 입에서 나오는 잔혹한 말에 홀려 진실을 보지 못했다. 쥬느비에브도 그럴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이렇게 된 거야."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많은 것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불쌍한 쥬느비에브. 그는 그녀의 레플리카를 흡수할 생각이었다. 암속성을 흡수하려면 같은 레벨의 광속성이라야 가능했다. 하지만 암속성과 광속성을 함께 소유하게 되면 상반되는 속성은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레플리카는 그 충돌을 못 이기고 흩어지고 만다. 레플리카는 마음이다. 마음이 흩어지면 몸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은 죽을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미소지었다. 어차피 결심한 일이었다. 자신만 희생하면 쥬느비에브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자유롭게...자유롭게... 자신 따위 금방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싫었다. 쥬느비에브의 머리 속에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었다. 차라리 미움받아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었다. 지금 자신이 죽으면 쥬느비에브는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되겠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소망은 이뤄지게 될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미소지었다. 그도 그랬었다. 미레이유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미레이유를 잊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미레이유를 바라보았다. 이제 미안하다고 말해도 때는 너무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미안해. 미안해...." 이제 정말 이별의 시간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쥬르. 네 말이 맞아. 널 죽이고 네 레플리카를 흡수할 거야. 그래서 미레이유를 살릴 거야." 쥬느비에브의 눈에 절망의 빛이 비쳤다.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쥬느비에브의 슬퍼하는 표정도, 울고 있는 표정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속삭임 같은 레플리카 나의 마음은 여기에 두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지만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작은 화살. 날 잊지 말아요. 날 잊지 말아요. 공허한 노랫소리는 울려 당신의 손길을 적시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노랫소리가 퍼지며 점점 커다란 빛의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에이드리안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는 미레이유만을 원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정말 에이드리안을 좋아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이렇게 날 떠나다니... 이렇게 날 버리다니... 차라리 에이드리안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으면! 에이드리안이 없어져 버렸으면!! 죽어버렸으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쥬느비에브는 눈을 가리고 미친 듯이 노래를 퍼부었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엄청난 소리가 퍼져나갔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을 향해 정신 없이 소리를 질렀다. 레플리카가 퍼져 나가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레플리카가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무섭고 소름끼쳤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의 레플리카를 흡수하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미친 선율이 퍼져나갔다. 순간 하얀 빛이 공중에 뿌려졌다. 그리고 방 안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쥬느비에브는 다리가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거친 호흡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방 문쪽에서 벌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벨의 고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머리 속에 전달되지는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넋 나간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자신은 '살아'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자신에게 속해 있던 것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무겁고 암울한 느낌의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것'이 보였다. 붉은 액체가 흥건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바닥으로 흘러 내려오는 붉은 액체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질퍽한 피에 절어 있는 사람의 형상 위에 멈췄다. 바닥에 흩어진 금발. 그녀는 그 금발을 참 좋아했었다. 그 금발을 지닌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의 하얀 피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붉은 피뿐...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니야. 꿈이지? 내가...아주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죽이려던 게 아니야. 그냥 미웠어. 너무 미워서... 아니야. 이게 아니야. 에이드리안. 빨리 나 좀 깨워줘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알 수 없는 비명 소리가 터지며 그녀는 쓰러지고 말았다. 유벨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떻게 된 거야, 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 "끝이야. 이제..." 에스프라드의 목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에이드리안. 꿈을 꾸고 있어요. 빨리 깨워줘요.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보고 싶어. 많이 보고 싶어. 에이드리안...' 제133음(第133音) Replica...(2) 쥬느비에브는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밖에 비가 오는 듯 했다. 후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몹시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쉬운 기분이기도 했다. 몸 속에서 맴돌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손을 들어 눈 앞에 가져왔다. "내...레플리카..."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쥬느비에브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머리를 뒤로 넘기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순간 뺨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거짓말쟁이. 에이드리안, 또 거짓말 해버렸어. 나한테 또 거짓말했어." 쥬느비에브는 꾸욱 눈을 감았다. 계속 되풀이되는 악몽 속에서 에이드리안에 대한 원망만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어째서...내 레플리카...내 레플리카...사라져 버렸어.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소리내어 울었다. 너무 끔찍한 느낌에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돌며 마음을 파먹어 갔다. 비참한 기분에 죽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베개에서 살며시 얼굴을 들었다. 창 밖에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새가 힘겹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쥬느비에브는 알게 되었다. 에이드리안이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자신을 죽이고 미레이유를 살리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미레이유는 죽었다. 자신이 내뿜은 레플리카로부터 에이드리안을 지키고 죽어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암속성 레플리카. 자신의 레플리카도 사라져 버렸다. 에이드리안이 암속성 레플리카를 흡수해 버렸다. 그리고 그도 사라졌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잔혹한 결론에 쥬느비에브는 몸을 떨었다. 그토록 피범벅이 되어 있었던 에이드리안의 모습.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던 처참한 모습.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제 후회해 봤자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비참하고 참혹하게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 때는 그를 믿어 주지 못했을까. 왜 그 때는.... "어떻게 내 손으로... 내 손으로 에이드리안을... 미쳤어. 난 미친 거야. 에이드리안. 죽은 건...아니죠? 그렇죠? ....죽고 싶어." 쥬느비에브는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에이드리안에게 상처를 주었다. 자신의 손으로... 레플리카가 퍼져나갈 때의 그 끔찍한 감각이 자꾸 되살아났다. 에이드리안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자신도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 쥬르, 내가 계속 널 지켜줄 테니까 넌 언제나 여기서 날 기다려 줘. 그럼 어디를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게. 네가 기다려 주면 어느 때든, 반드시 돌아올게. ] [ 으응. 나, 에이드리안이 어디를 가도 여기서 기다릴게. 꼬옥. 약속이에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에이드리안이 말했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다. 쥬느비에브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애써 미소지었다. "기다리면.... 돌아와 줄 거에요? 진짜?" 쥬느비에브는 눈을 감고 미소지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에게 보상해주고 싶었다. 용서받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작은 희망을 갖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뻔뻔한 소망을 가져 버렸다. 쥬느비에브는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가져왔다.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요. 이제 저주 따위 사라지게 해주세요. 로스페니르, 저주 같은 건 이제 거둬 가 주세요. 당신의 아픔, 이젠 알 것 같으니까 부디... 이제 행복하게 해주세요. 아늑한 밤하늘 같은 어둠에게 빌어 볼게요. 부디...행복하게..." ******** 눈물 가득한 눈으로 유벨은 작은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어린 시절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는 눈물로 초상화가 젖지 않게 조심스레 책상 위에 밀어 놓았다. "에드... 정말 죽어버리거나 한 건...아니지?" 유벨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줄기차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어두운 서재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주란...이런 거겠지.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찢어지고... 이런 게 저주겠지. 정말 지긋지긋해. 저주 따위. 로스페니르, 이제 그만해요. 저주 같은거, 이제 그만 가져가 버려요. 내 바람의 레플리카를 걸고 빌어 볼게. 이제 행복할 수 있도록. 제발..." 유벨은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떨어졌다. 유벨은 초상화를 바라보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마음 속에 간절한 소원을 빌며 그는 눈물을 훔쳤다. ******** "아저씨! 나무 심으면 정말 과일이 열려요?" 조그만 꼬마의 조마조마한 표정을 바라보며 프란체스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바닥에 삽을 쿡 찔러 넣었다. "음~ 좋은 질문이야, 꼬마야. 나무를 심기만 해서는 과일이 나오지 않는단다. 정성껏 돌봐 줘야 나무가 쑥쑥 자라는 거야. 심심하면 노래도 한 번씩 불러 주고. 어때, 답이 되었냐, 꼬마야? 으하하하하하하!!!" 프란체스는 거나하게 웃고 다시 삽질을 했다. 작은 나무 둥치 아래에 짙은 고동색의 흙이 덮여 갔다. 꼬마는 자신의 볼을 살짝 살짝 꼬집으며 배시시 웃었다. "햐아- 엄마 오면 자랑해야지! 내가 심었다고 자랑해야지!" "이 것 보게. 꼬마야. 이 나무는 이 오빠가 땀 뻘뻘 흘려서 심은 거야." 프란체스가 핀잔을 주자 꼬마는 눈을 말똥거리며 물었다. "누가 오빠에요?" "나." "에이, 아저씨잖아요. 나도 그 정도는 다 알아요. 엄마 오기 전에 빨리 나무 심어 줘요." 꼬마가 화가 난 듯 고개를 팩 하고 돌리자 프란체스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으며 얼른 삽질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는 단단하게 땅에 고정되었다. 프란체스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됐다. 꼬마야. 네가 쥬느비에브를 닮아서 특별히 심어 준거야. 내가 심은 나무는 특별해서 엄청 잘 자라니까 가끔씩 노래나 불러 줘." "쥬느비에브가 누군데요?" 꼬마가 볼을 실룩이며 물었다. 프란체스는 씨익 웃으며 꼬마의 볼을 잡아 당겼다. "내 동생의 약혼녀인데, 아주 귀여운 애가 있어." 프란체스는 뒤돌아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르헨의 하늘처럼 동방의 하늘도 무척 파랗게 보였다. 갑자기 향수가 밀려들었다. 아르헨의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프란체스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흩어냈다. "저주라니... 이제 먼 꿈 속 이야기 같아. 엘로이즈, 잘 있지? 너도 빌어줘. 저주 따위 사라져 버려서... 에이드리안도, 에스프라드도 행복할 수 있게. 더 이상 상처입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저주가 사라져서, 너도, 나도, 그 애들도 해방되도록...대지의 기운에게 간절히 빌어." 프란체스는 싱긋 웃으며 꼬마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를 닮은 듯한 꼬마를 보니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 생각이 간절했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하겠지? 그렇겠지. 아마... ******** 콜록, 콜록. 헤르만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해댔다. 벽난로에서 자작거리며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보며 그는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흔들의자를 흔들며 멍한 눈동자로 붉게 타오르고 있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펼쳐진 편지지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비인 가의 문장과 라데팡스의 문장이 있는 편지를 흘끗 바라본 헤르만은 여전히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흔들었다. "이만 가보게. 이제 됐으니까. 편지는 잘 읽어보았다고 에스프라드, 그 애에게 전해 주게. 에스프라드를 곁에서 지켜봐 줘서 모두 고맙네. 잊지 않을 게야. 못난 아비지만, 그래도 자네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 "저희들이야말로 에스프라드 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 분과 헤어지게 되면...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년과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 졌다. 오르탕스와 올슈틴은 오래도록 에스프라드를 따르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에스프라드의 곁을 지킬 생각인 것 같았다. 헤르만은 진심으로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헤르만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히스페르. 네가 부럽군. 내겐 부끄러움 밖에 남지 않았어. 네 말대로 난 좀 더 인생을 쉽게 살았어야 했어.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어쩌면 우린 꽤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후훗. 세레스라엘, 내기는 자네가 이긴 것 같아. 자네가 나보다 훨씬 행복했던 것 같아. 내가 졌어. 내가..." 헤르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편지지를 손에 들고 눈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이내 흐느끼며 편지지에 얼굴을 묻었다. "내 죄야. 내 죄.... 에스프라드.... 엘로이즈... 르미엔..." 헤르만은 고개를 들었다. 장작불이 시원스럽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 죄를 모두 인정하고 후회합니다. 하지만 그 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입니까. 로스페니르. 이제 저주 따위 거둬 주세요. 불의 기운에게 빌겠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내 추한 죄의 대가는 내가 받을 테니 이제 아이들이 행복해 지도록...." 헤르만은 편지를 가슴에 품고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오래도록 흔들의자가 흔들리며 삐걱삐걱하고 소리를 냈다. 오래도록... ******** 비가 오고 있었다. 자신의 겨울 별장에 이토록 많은 비가 내린 적이 있던가. 어두운 방 안에서 에스프라드는 의자에 앉아 창 밖의 비를 보며 한참을 보냈다. 무심하게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에스프라드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눈을 수건으로 감싼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 날, 에스프라드는 쥬느비에브의 레플리카를 흡수하고 만신창이가 된 에이드리안을 레플리카로 공간 이동시켰다. 에이드리안은 살아있었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고서도 살아 있었다. 그 이유를 에스프라드는 알고 있었다. 미레이유가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실낱같은 레플리카를 극한으로 뿜어내어 에이드리안을 지켰던 것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대단해, 미레이유. 죽어서 에이드리안을 지켰어. 훗. 미안하다고 말해도 이제는 들어주지 않겠지. 하지만..." 에스프라드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자신의 욕심...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만 묻어두었던 자신의 소망. 에스프라드는 눈을 뜨고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가 굳어 있는 금발을 살며시 넘겨주었다. "에이드리안. 미안해. 미안해. 날 미워해. 미워하고 증오하고 날 원망해. 그래서 날 잊지 마. 날...잊지 말아 줘." 에스프라드는 슬픈 미소를 띄우며 눈을 감았다.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다. 시계 침이 째깍째깍하고 움직였다. 얼마나 더 이 순간을 소유할 수 있을까.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어두워. 왜 이렇게 어두워?" 에스프라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에이드리안이 수건을 걷어내고 빛 바랜 파란 눈동자를 들어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눈은 회복시키지 못했어.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피부가 찢어져서 엉망이었어. 그 쪽은 거의 재생되었지만 눈은 민감한 곳이니까." "에스프라드 형?" 에스프라드는 눈을 깜빡이고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옆에 떨어져 있는 피 묻은 수건을 들어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당분간은 잘 보이지 않을 거야. 사실 시력이 회복될지도 미지수지만..." "시력이... 에스프라드 형. 꿈 꾼 거 같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아주.. 아주....끔찍한 꿈... 내가...미레이유를....쥬느...비에브?" 순간 에이드리안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왜 날 살렸어? 왜!" "미레이유가 죽었어. 널 살리고 죽었어. 난 그저 널 치료한 것 뿐이야." 에이드리안의 손이 힘없이 침대 위에 떨어졌다. 그는 넋 나간 표정으로 초점 없는 눈을 막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그런...하하....하하하...." "내가 미워?" ".....................미운 건지. 혹은..."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미워하지 않아. 이제 다 끝났잖아.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 없어. 무의미해. 이제...다 끝났어. 이제 아무런 감정도 원하지 않아." "안 돼. 넌 날 미워해야 해. 증오하고 원망해야 해. 그래서 날 잊지 않도록. 날 잊어서는 안 돼, 에이드리안." "................." 에스프라드는 대답 없이 누워 있는 에이드리안을 바라보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에스프라드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빗속에 검은머리의 소년이 비치는 듯 했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작은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소년은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 아버지가...아버지가....에이드리안의 아버지를 죽였다니!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이제 다 끝난 거야. 에이드리안은 다시는 내게 웃어주지 않을 거야. 이런....이런 일이... ] 소년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부모도 없이 자라난 쓸쓸한 금발의 소년. 하지만 금발의 소년은 누구보다 밝고 따스하게 미소지어 주었다. 검은머리의 소년에게 그 미소는 너무나 소중해 그 미소만으로도 행복해지곤 했었다. 검은머리의 소년은 언제까지나 금발의 소년이 자신에게 미소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소망은 어느 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방을 나섰던 소년은 아버지와 일로나 할머니의 언쟁을 듣게 되었다. 호기심으로 대화를 듣게된 소년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권력이라는 치졸한 목적을 위해 금발의 소년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이다. 검은머리의 소년은 절망했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따랐던 금발의 소년.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금발의 소년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미소짓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을 깨달은 날, 소년은 남몰래 울며 아버지를 증오했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행복했던 그대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파렴치한 행동으로 인해 행복은 조각조각 깨어지고 있었다. 검은머리의 소년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금발의 소년이 그 사실을 알까봐 너무 두려웠다. 그가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행복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눈물날 정도로 소중한 행복이었다. 그대로 깨어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소년은 울고 싶은 심정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변함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행복은 그가 모르는 곳에서 이미 깨어지고 있었다. 제134음(第134音) Replica...(3) 창 밖의 빗소리는 쉼 없이 들려왔다. 유리창에 빗줄기가 부딪히며 투닥거렸다. 에스프라드는 에이드리안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미소지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립고도 그리운 시절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물들여 졌다. 에스프라드는 향수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드리안, 생각 나? 우리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어. 그 때 넌 노래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그리고 내가 그 소망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했었어. 난, 그 약속을 정말 지키고 싶었어." 에스프라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대답 없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쿡 하고 웃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이드리안. 프란체스 형은 잘 있을까?" "..................." "잘 있겠지. 오래오래 엘로이즈 누님을 생각하면서, 아주 오래오래 살겠지. 엘로이즈 누님은 아마 프란체스 형 곁에 있을 거야.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겠지. 프란체스 형은 아마 노인이 되어도 엘로이즈 누님을 잊지 못할 거야. 부러워." "....무슨 소리야? 프란체스 형은 저주받았어. 형은..." 잠잠하던 에이드리안이 이윽고 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에스프라드는 턱을 괴고 피식 웃으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엘로이즈의 장례식이 끝나고, 프란체스는 여행을 떠났다. 그가 여행을 가기 전 날, 에스프라드는 프란체스를 만났었다. [ 프란체스 형, 나 부탁이 있어요. ] [ 무슨 일이야? ] [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도...저주받았어요. ] [ 뭐...뭐? ] [ 에이드리안에게는... '형'이 저주받았다고 말해줘요. 꼭 들어줘요. 내 마지 막 부탁이 될 거야. ] [ 에스프라드...] 프란체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에스프라드는 눈을 감고 가만히 미소지었다. 이건 모두 아버지의 업보였다. 히스페르 숙부를 아버지가 살해했기에 그 업보가 자식들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엘로이즈 누님에 이어 자신마저 저주를 받다니... 업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히스페르 숙부의 저주가 자신들에게 나눠진 건지도 몰랐다. 에스프라드는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에이드리안, 이번 대의 저주받은 자는 나야. 프란체스 형이 아니라..." "......더 이상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런 거짓말로 날 속여봤자 이제 아무 소용없어." 에이드리안의 탁한 목소리에 에스프라드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지가 히스페르 숙부를 죽였다는 걸 알게되고 얼마 안 가서,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왔어. 난 직감했어. 내가 저주받았구나. 얼마 살지 못하겠구나.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지. 왜 하필 난가. 난 삶의 이유를 잃어버렸어. 어차피 네겐 미움받을 거고, 난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어버릴 테니까." "에스...프라드 형?" 에이드리안의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에스프라드의 표정에 슬픈 빛이 떠올랐다. "에이드리안. 정말 억울했어. 너와 나. 아주 행복했는데 다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아버지의 일만 숨기면 너와 나, 계속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난 견딜 수 없었어. 난 이제 네게 미움받을 테고 곧 죽어 네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겠구나-하고. 그래서 난 결심했어. 어차피 미움 받을 거라면 증오하고 증오해서 영원히 잊지 못 하게, 네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되어버리자고, 그렇게 결심했어. 그럼 내가 죽어서도 넌 날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며 계속 날 생각하겠지. 그렇게 난, 네게 잊혀지지 않을 거야." "무슨...소리야. 무슨 소리야!!" 에이드리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직감한 듯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 감겨 있던 피 먹은 붉은 붕대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에스프라드는 눈을 감았다. "네 소망을 이루어 주고 싶었어. 미레이유, 그녀만 죽어버리면 넌 광속성을 전승 받게 되겠지. 그러면 넌 보다 자유롭고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비로소 네가 원하는 '노래'가 될 수 있겠지. 그래서 미레이유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어. 네 손을 빌어서. 미레이유는 내 뜻대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넌 광속성을 전승했지. 그 대가로 넌 날 몹시 증오하게 되었고. 모두 내가 원한 그대로였어. 물론 미레이유가 살아날 거란 것도 내 예상 그대로였지. 그녀의 소망은 네 곁에 있고 싶다- 단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녀는 네 곁에 있겠다는 소망으로 간신히 레플리카를 몸에 지닐 수 있었어. 그리고 그 힘이 그녀의 생명을 유지시켜주었지. 더 알고 싶어?"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넋 나간 듯 힘없이 침대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자신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에이드리안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 어줍잖은 동정심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이제야... 그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넌 여전히 날 완전히 미워하지 못했어. 착한 에이드리안. 넌 마음이 약해 나에 대한 예전의 마음과 새롭게 생겨난 증오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지. 그래서 쥬느비에브라는 카드를 썼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날 미워하도록. 미치도록 날 증오하도록." "나더러...어쩌라는 거야?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아무 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거...형도 알잖아. 이제 다 끝났는데... 다 끝났는데...." 에이드리안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정말 자신이 미쳐버렸나 하고 생각했다. 마음은 너무 울고 싶었는데 얼굴은 웃고 있었다. 내가 왜 웃고 있는 걸까. 너무 기막힌 현실에 정말 미쳐버린 건가.... 에스프라드는 두 손을 마주잡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어내렸다. 약한 통증이 느껴지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난, 아직 살아있어. 에이드리안. 여전히 살아서 이런 속물 같은 마음으로 숨쉬고 있어. 난...네게 미움받으려고 했어. 그리고 내 뜻대로 이루어졌지. 하지만 이상해. 네게...미움받고 싶지 않아. 내 모든 걸 이해해 주고 같이 아파해 줬으면 하고 생각해 버렸어. 이기적이고...심술궂은 마음이야. 착한 에이드리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넌 날 미워하지 못할 거야. 어차피 난...죽을 테니까. 내가 불쌍해서라도 넌 날 미워하지 못하겠지." "....차라리 처음부터 말해 주었으면 좋았잖아. 차라리..." "내 소망이었어. 네게 기억되고 싶다는 건. 내겐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이었어. 양보할 수도 없는 소망이었지." 에이드리안의 회한이 가득한 표정을 바라보며 에스프라드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내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난 돌아가지 않아. 이제 다 끝난 거야. 미레이유가 내 곁에 없듯이, 나도 쥬르 곁에 있을 수 없어. 이제 다....끝난 거니까."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팔에 감긴 붕대를 거칠게 뜯어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 쪽 손으로 팔을 만져보았다.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쥬르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아무렇지 않다 해도...쥬르는 내게 상처 준 걸 마음 아파하며 결국 날 원망하겠지. 내가 미레이유를 원망했듯 쥬르도 날 원망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지 않아. 쥬르가 말했어.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되거든 자신을 잊어 달라고. 난 그렇게 할 생각이야. 쥬르를 잊어버릴 거야." 에이드리안의 눈에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에스프라드는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널 불행하게 만든 거지?" "응. 형이 날 불행하게 만들었어. 그래. 나, 형을 미워해. 증오하고 원망할거야. 미레이유를 그렇게 만들고, 날 이렇게 만들고, 쥬르를 아프게 한 것도 전부 형이니까. 그래서...잊혀지지 않을 때까지 형을 미워할 거야. 그래서 난, 죽을 때까지 형을 잊어주지 않을 거야." 에스프라드는 자신을 향해 울리는 목 메인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손등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에이드리안은 언제나 자신보다 착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어도 웃으며 용서해 주곤 했었다. 나를 잊지 않겠다라... 그것은 자신을 용서하겠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그토록 그를 괴롭힌 자신을 에이드리안은 용서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을 용서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추악한 소망을 그는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스프라드는 웃었다. "그래. 고맙다는 말 따위는 안 해. 날 잊지 말아 줘. 미워하고 또 미워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이드리안도, 에스프라드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용서한다, 혹은 미안하다란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기만하는 일이란 것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너무 상처주고 상처받은 두 사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 끝에 다시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비릿하고 끈적끈적한... 에이드리안은 보이지도 않는 눈을 들어 에스프라드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이... 있어. 내 기억, 형이 지워 줘. 어차피 나, 레플리카는 못 쓰니까. 내 레플리카...사라져 버렸으니까. 나, 혹시 쥬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쥬르를 기억하고 싶어질 거야. 마음 저 안쪽에서 그렇게 되길 원하게 될 거야. 쥬르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질 테니까. 그건 싫어. 내 기억, 형이 완전히 지워 줘. 쥬르에 대한 기억만 완전히 지워 줘. 그럼 난 쥬르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게...쥬르가 원한 거니까." 에스프라드는 자신의 코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드리안. 약속, 지켜 줘. 날 기억해 주기로 한 약속. 이제 작별의 시간이 된 것 같아. 나중에...선물 하나를 남겨둘 지도 모르지. 잘 있어." "에스프라드 형? 형!" 에이드리안은 어두운 시야를 움직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사라졌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 이기적이야. 자신 밖에 생각 안 해. 남은 사람은....어쩌라고. 이렇게 상처만 남겨놓으면 어쩌라고. 기억해 달라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할 거야.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잊지 말아 달라고? 내가 어떻게 형을 잊어. 내가 어떻게..." 에이드리안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어둠이 흩어지고 빛이 보였다. 시야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하얀색 빛과 회색, 검은 색이 뒤섞여 눈앞을 흐려놓았다. 에이드리안은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레이유, 거기 있지?" [ 에이드리안. ] "미안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거지?" [ 널 갖고 싶었어. 내 소중한 에이드리안.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 "난 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어. 이제 다 어긋나고 말았지만." [ 하지만 네겐 그 아이가 소중해져 버렸어. 암속성을 받은 가여운 아이. 너도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아이를 없애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 네가...웃고 있어서. ] "응. 너만큼 쥬르가 소중해. 이젠 너보다 더 소중해져 버렸어. 너에 대한 마음은 잘라 버릴 거야. 그러니까...미레이유, 이 마음은 네가 가져가 버려. 그럼 넌 너만으로 가득한 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야." [ 기뻐. 네가 준 이 마음은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니까. ] "다시...만날 수 있을까." [ 널 사랑했던 내 마음이 진실이었듯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죽어서도 이렇게 사념을 남겨놓은 것처럼. ] "행복해져야 해. 미레이유. 약속해." [ 응. 이제 행복해 질 것 같아. 네가 준 이 마음이 있으니까. ] "잘 가. 미레이유."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금발의 여자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작지만 분명한 그 소리. 미레이유가 자신을 향해 불러 주었던 노래. 그리고 에스프라드가 자신을 위해 불러 주었던 노래. 에이드리안은 노랫소리를 들으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소중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었다. "쥬르. 널 기억하지 못 할 거야. 넌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질 거고, 난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하는 데로 해줄게. 널 잊어버릴 거야. 그리고...이제 저주 따위 사라져 버렸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게. 눈 앞에 비치는 저 빛에게 빌어볼까. 이제 너희들도 아파하지 마. 저주라는 족쇄 따위 이제 벗어버려. 쥬르. 쥬르. 이제 노래할 수 있는 거지? 난 널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하지만....만나고 싶어. 다시...만나고 싶어."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 에스프라드는 검은 숲을 바라보며 노래를 멈추었다. 자신의 레플리카로 에이드리안의 기억을 막 봉인한 참이었다. 에스프라드는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에이드리안.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어렸을 때부터 다 알 수 있었어. 훗, 다시 시작하겠다는 욕심이지? 어리광부리는 데는 뭐가 있어." 에스프라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늑한 밤하늘과 부드럽게 비추는 달빛, 시원하게 출렁이는 물소리, 어디선가 타오르고 있는 불꽃, 드넓은 대지, 소리 없이 스쳐 가는 바람. 에스프라드는 눈을 감았다. "나만큼 당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로스페니르. 당신의 저주는 이제 지긋지긋해. 그만 했으면 좋겠어. 당신 마음, 이제 다 아니까. 나도 그랬어. 차라리 미움 받더라도 기억되고 싶었어. 하지만 진짜 본심은 그게 아니야. 당신의 마음을 한 사람이라도 이해해 주었으면 한 거지. 아니야? 당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리고 싶었던 거야. 나도 그랬어. 에이드리안 이라도 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야. 사실은 사랑 받고 싶었어. 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좀 더...곁에 있고 싶었어. 좀 더 행복해 지고 싶었어. 이젠 그만 해. 내가 위로해 줄게. 두 번 다시 슬퍼하지 마. 당신이 사랑했던 아이슬로데의 노래야. 이제 그만 용서해." 에스프라드는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노래를 불렀다. [ 텅 비어버린 공허한 마음. 달랠 길 없는 비참함 날 바라봐 줘. 날 이해해 줘. 날 사랑해 줘. 작은 속삭임에 당신의 외로움은 사라질지도 몰라. 라- 라- 라- 라- 작은 노랫소리에 다시 시작되는 마음... 라- 라- 라- 라-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행복... ] 숲이 일렁였다. 하늘도 맑게 개였다. 에스프라드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뒤돌아보았다. 어둠에 쌓인 저택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는 따스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죄 없는 미레이유를 죽였어. 내 이기적인 소망 때문이었어. 에이드리안은 나 때문에 망가졌고 쥬느비에브마저 상처받았어. 후회는 안 해. 내가 한 짓을 후회하는 건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까. 누가 뭐라 그래도 내겐 너무나 간절한 소망이었어. 에이드리안에게 기억되고 싶었어. 내가 죽어도 그만은 오래오래 날 기억해 줬으면 했어. 하지만... 문득 깨달아 버렸어. 그는 예전처럼 미소짓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 얼마나 소중했던 미소였는데 난 내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었던 거야. 그가 미소 짓던, 예전의 행복했던 그 때처럼 밝게 살아가 줬으면 해. 미레이유에게도, 쥬느비에브에게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어. 이제 새로 시작했으면..." 소슬하게 바람이 불었다. 에스프라드는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다시 뒤돌아섰다. 미레이유와 쥬느비에브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말하지는 못 할 것이다. 자신의 이 못난 마음은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것이 될 것이다. 에이드리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것처럼.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못한 것처럼. 온 몸에 시뻘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에이드리안을 데려와서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자신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찢어질 듯 마음이 아파 왔다. 언제부터인가 에이드리안은 예전처럼 미소지어 주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후회하며 에스프라드는 눈물을 흘렸다. 정말 소중했던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프라드는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얀 달이 빛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늘 달이 아름답다고 말했어. 그래. 그럼 달에게 빌어 볼까. 저주는 로스페니르의 강한 바람으로 만들어 진 거야. 그러면 난 그 보다 더 강한 마음으로 빌어보겠어. 로스페니르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그래서 저주가 사라지기를. 물의 기운을 빌어 빛과 어둠, 불과 바람, 대지에게 부탁해 보겠어. 에이드리안이 행복해 지도록. 보잘 것 없는 나를 지켜주었던 사람들이 행복해 지도록.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도록....내 생명을 바쳐 소원을 빌어 보겠어. 강하게,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빌어 볼 거야." 가느다란 선율이 퍼지며 에스프라드의 몸에서 푸른 빛이 쏟아졌다. 빛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 검은 숲을 파랗게 비추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파란 빛을 바라보며 에스프라드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에이드리안에게서 칭찬 받겠는 걸? 훗. 엘로이즈 누나. 나도 곧 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조금만 더... 리에에게 작별 인사를 못 했거든. 프란체스 형이 아니어서 섭섭한 거야?" 에스프라드는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동이 트고 있었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그는 미소지었다. 그는 너무나 약했다. 자신에게 닥쳐진 운명에 울면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과거와 현재는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새로운 시작이 움트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주어지지는 않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자신의 레플리카는 다시 반복되어 세상에 비춰질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아름답게.... 제135음(第135音) Adrian(1) ............ 나의 노래는 여기까지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은 사라졌고 나의 노래는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나의 레플리카... 에이드리안은 사라지고 나만이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 쥬느비에브는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은색 펜을 들어 천천히 편지를 써내려 갔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편지지에 검은색의 글씨가 하나하나 생겨나고 있었다.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편지지에 글씨가 가득 채워져 갔다. 쥬느비에브는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편지지의 끝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편지 봉투에 정성스럽게 편지지를 접어 넣고 비인 가의 인장을 찍어 봉투를 봉했다. 편지 봉투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던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소슬한 기운이 느껴졌다. "겨울은...언제쯤 끝이 날까."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리고 편지 봉투에 또박또박 이름을 적었다. "안느마리..." 쥬느비에브는 간절하게 속삭이며 봉투를 가슴에 안았다. 훅 하고 숨을 내쉰 쥬느비에브는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편지 봉투의 이름을 말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방긋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크리스티안. 아침 일찍 왔네요." "예. 처리할 일이 많으니까요." 크리스티안이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티안은 옅은 붉은 색 머리를 짤막하게 잘라 아주 시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로잘리와 카를로스가 수줍은 표정으로 따랐다. 쥬느비에브는 반갑게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요, 다들. 좋은 차가 있거든요." 쥬느비에브는 얼른 차를 준비해 테이블로 가져갔다. 그리고 손수 차를 따라 건네주었다. 크리스티안은 학생회실을 둘러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여기서 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꿈만 같네요. 잠시뿐이라고 해도 아주 멋진 경험이 될 거에요. 카를로스, 로잘리. 그렇지?" 크리스티안의 물음에 카를로스와 로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쥬느비에브는 따뜻하게 웃으며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고마워요, 다들. 이렇게 어려울 때 도와줘서.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학생회, 이렇게 유지하지 못했을 거에요." 쥬느비에브의 우울한 표정을 바라보며 크리스티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티안은 쥬느비에브의 손을 꼬옥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에요. 엘크로이츠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고요. 쥬느비에브 님이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요. 실종된 에이드리안 님도 곧 돌아오실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크리스티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겨울이 사라지고 있었다. 곧 봄이 올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없다. 자신의 곁에 에이드리안은 없었다. 이제 그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 유벨은 비인 가의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로나 할머니가 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가장 어른이신 일로나 할머니였기에 집 안 사람들이 전부 영지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스콜라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학생회에 나가기도 싫었고 쥬느비에브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그는 마치 도망쳐 나오듯이 비인 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화창한 겨울의 어느 날, 유벨은 자신의 방에서 한 통의 편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단히 밀봉된 편지를 바라보며 유벨은 그 편지를 뜯어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었다. "프란체스 형..." 유벨은 눈을 감았다. 형이 보낸 편지였다. 어떤 내용일까. 유벨은 눈을 뜨고 편지 봉투를 쳐다보았다. 무서웠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형의 소식이었다. 유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편지 봉투를 찢었다. 그 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도련님, 미라벨 아가씨입니다." "미라벨이? 들어오라고 해." 유벨은 편지 봉투를 서랍 위에 내려놓고 중앙으로 걸어갔다. 하얀 색의 단순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미라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말라 보이는 미라벨을 바라보며 유벨은 미소를 띄웠다. "미라벨, 오랜만이네? 그런데 웬 일이야? 네가 프릴 원피스를 안 입고." "오랜만이네요, 유벨 님. 기분 전환하려고요. 프릴 원피스는 지긋지긋해요." 미라벨은 힘없이 미소지으며 중앙의 소파로 가 앉았다. 유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라벨의 반대편에 자리잡았다. 침묵이 흘렀다. 방문이 열리고 하녀가 다과를 차려놓고 나갈 때까지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벨이었다. "케이로프, 여행 갔다며?" "네. 동방으로 기인을 만나러 간다나... 웃기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케이로프 님, 그 날 제 앞에서 밤새도록 우셨어요. 떠나고...싶었겠죠." 미라벨은 두 손을 꼬옥 잡고 읊조리듯 말했다. 유벨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창 밖에 하얀 햇빛이 들고 있었다. 미라벨은 눈을 깜빡여 눈 가에 고인 눈물을 떨구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안 님의 소식은....아직 없는 거죠?" 유벨은 참기 힘든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불끈 주먹을 쥐었다. 미라벨은 그런 유벨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곧 이어 떨리는 유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날, 바로 내 눈 앞에서 에드는 사라져 버렸어. 살았을 리가...없지. 그런 참혹한...모습으로..." 유벨은 목이 메는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눈 앞에 그 날 보았던 피투성이 사촌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았을 때의 모습을 그려낼 수도 없을 정도의 참혹한 모습. 이내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쥬느비에브를 용서할 수가 없어! 어떻게 에드를...어떻게... 에드가 쥬느비에브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쥬느비에브가 에드를 죽였어. 어떻게 이런 참혹한 일이... 에드는 목숨 걸고 쥬느비에브의 암속성을 흡수했는데 쥬느비에브는...에드를 향해 레플리카를 퍼부었어. 어떻게 이런..." "그만...하세요. 또 떠올려 봤자...흐윽...흐윽... 어떻게 이런 일이...에이드리안 님이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 님을. 난 정말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모두 꿈만 같아...흑..흐흑...." 미라벨은 결국 눈물을 떨구어 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유벨은 주먹을 꾸욱 쥐고 힘없이 말했다. "이번에도 난 아무 것도 못 했어. 에스프라드 형이 밉고 쥬느비에브가 원망스러워. 이제 더 이상 눈물도 안 나오지만... 하지만 미라벨. 정말 화가 나는 건, 내가 쥬느비에브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걸 에드가 바라지 않을 거란 거야. 에드는...쥬느비에브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했으니까..." 유벨과 미라벨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돌이킬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돌이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마음이 무너질 듯 아프고 계속 눈물이 날 뿐이었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그 날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쥬느비에브는 울면서 말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에이드리안을 상처 입혔다고 울면서 고백했다. 에이드리안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비명을 지르듯 고백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 유벨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쥬느비에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에스프라드의 일과 미레이유의 일. 그리고 자신과 에이드리안의 일. 그리고 참회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미라벨은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고 케이로프는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유벨은 그저 질린 듯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쥬느비에브를 홀로 남겨두고 그녀의 곁을 떠났다. 쥬느비에브는 혼자 학생회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 혼자서... 세 사람은 알고 있었다. 쥬느비에브의 잘못이 아니었다. 에이드리안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이용한 에스프라드의 간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쥬느비에브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미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 슬프고 가슴아팠다. 창 밖을 바라보던 미라벨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안 님과 함께 했던 나날들. 참 즐거웠어요. 그렇죠?" "그랬지." "...쥬느비에브와 함께 했던 날들도 즐거웠어요. ...그렇죠?" "...그랬지." 유벨은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미라벨을 바라보았다. 즐겁고 행복했었다. 에이드리안과 쥬느비에브가 웃고 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과 미라벨, 케이로프가 웃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안느마리가 웃고 있었다. 행복했던 그 때에는 그랬다.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었다. 미라벨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참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에이드리안 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아주...멀게만 느껴져요. ...그래도, 쥬느비에브를 아주 미워할 수는 없어요. 그렇죠? 쥬느비에브와 함께 한 시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져 버렸으니까요. 그 속에 에이드리안 님도 함께 계셨으니까요. 우리는 이번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에이드리안 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지도 몰라요. 대신 쥬느비에브를 돌봐 주라고. 혼자가 된 쥬느비에브를 도와주라고." 유벨은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환한 하늘이 보였다. 곧 봄이 올 것 같았다. "그래. 에드 녀석. 죽어서도 날 고생시킨다니까. 쥬느비에브 구박했다가는 꿈에서도 날 괴롭힐 녀석이야. 에드는...쥬느비에브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 했으니까. 바보 같은 녀석. 고작 한다는 게...." 유벨은 허망한 눈빛으로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꼬마 아이가 보였다. 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회색 머리의 꼬마가 작은 금발의 소년을 손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 에드, 낙서는 그만 하고 나랑 놀자. ] [ 싫어. 유벨 너 혼자 놀아. 난 그림 그릴 거야. 심심하면 가만 있어 봐. 내가 네 얼굴 그려줄게. 커다랗게 그려야지. 유벨 얼굴, 아주 커다랗게 그려줄게. ] [ 내 얼굴이 뭐 이러냐? 더 잘생기게 그리라구! ] 두 소년이 웃고 있었다. 유벨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미소지었다. 소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차 오르는 것 같았다. 유벨은 눈을 감았다. "행복했던 시간은 지나고...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인 것 같아. 에드...너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 많은 상점들이 즐비한 상점가였다. 큰 도시를 곁에 둔 상점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즐거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상점가에서도 중심가에 속하는 번화한 대로변에 한 의상실이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간판이 손님을 맞기 위해 반질반질한 모습을 뽐내며 가게 위에 걸려 있었다. 그 의상실 앞에서 갈색 머리의 한 소년이 천이 가득 담긴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소년은 상자가 무거운지 무릎으로 상자를 지탱하며 장갑 낀 손으로 상자의 모서리를 꽉 잡았다. 그러나 몇 걸음 못 옮겨 소년은 멈춰 서고 말았다. "어휴, 엄청 무겁네." 바닥에 잠시 상자를 내려놓은 소년은 베이지 색 모자를 꾹 눌러쓰고 반바지에 매달려 있는 멜빵을 어깨에 똑바로 걸쳤다. 다시 상자를 들고 의상실 안으로 들어가던 소년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파란색 칠을 한 작은 마차가 달려오더니 의상실 앞에 멈췄던 것이다. 파란색 마차 안에서 건장한 청년이 뛰어내리더니 하얀 편지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느마리 씨! 편지에요!" "안녕하세요, 레스테 씨. 오랜만이네요." 소년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청년은 소년에게 편지를 건네주고 다시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편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편지 봉투에 비인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한 소년은 순간 안색을 바꾸었다. 그리고 툭 하고 상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년은 서둘러 편지 봉투를 뜯기 시작했다. 그 때, 의상실 안에서 옅은 보라색 머리결의 여자가 나와 소리를 질렀다. "이보세요, 안느마리 군!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다가 옷은 언제 만든단 말이에요!" "아이, 정말! 기다려 봐요! 지금 중요한 편지 보고 있잖아요, 세린느!!" 소년은 투덜거리며 보라색 머리의 여자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편지지에 눈을 돌렸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년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소년의 옆에 서서 편지지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쥬느비에브?" "맞아요. 내 친구, 쥬느비에브." 소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보라색 머리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린느. 나 이제 가야될 것 같아요. 생각보다 당신이 말한 '그 때'가 빨리 왔네요. 이제 정말 용기를 낼 때인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세린느. 아무래도 이번 옷은 혼자 만들어야겠어요." 소년은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짧은 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보라색 머리의 여자에게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고마워요. 그동안 내게 용기를 줘서. 당신덕분에 지금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어요. 나도 이제 용기를 낼 거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거에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인 거죠. 그렇죠?" 소년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눈을 깜빡였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한순간 아쉬운 표정을 하더니 이내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잘 다녀와요, 안느마리 군. 옷은 만들고 나서 다림질은 제 때 해야 하는 법! 아니면 구겨져서 다시 많은 시간을 들어야 하는 법이에요. 안느마리 군도 다시 마음 고생하지 않게 확실히 용기를 내도록 해요. 지금이 '그 때'라면 최고의 용기를 내는 거에요. 나도 고마워요. 안느마리 때문에 좀더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나도...좀 더 열심히 살아갈게요."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손을 흔들어 지나가던 마차를 세웠다. 소년은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소년은 마차의 창을 열어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요, 세린느! 꼭 다시 만나요!" "물론이에요. 바늘이 있어도 꿰맬 천이 있어야 하는 법이에요! 다시 돌아와요! 기다릴 테니까!" 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마차의 뒤를 따라 뛰어오며 외쳤다. 소년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이제 행복해질 시간인 거 같아요, 세린느!" 소년이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이젠...행복해질 시간이죠." 제136음(第136音) Adrian(2) '루벤 대농장'이라는 이름표를 받은 과실은 다른 과실에 비해 월등히 비싼 값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벤 대농장은 동방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벤 대농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농장주가 바뀌고 난 뒤부터였다. 새로운 농장주는 늘 최고의 수익을 위해 새로운 토지 개발법을 제시했고, 그 방법들이 좋은 방향으로 농장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낙후된 부분을 개발하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터라 루벤 대농장에서 다른 곳보다 질 좋은 상품이 생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루벤 대농장에서 50여년 동안 농장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네스웰 씨는 오늘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늘, 그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농장주를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농장주가 바뀌고 난 뒤, 농장 감독관이었던 자신조차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늘 그의 비서라는 사람이 지시사항을 전달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농장주를 몹시 존경했다. 필시 농장주는 사고 방식이 트인 사람인 것 같았다. 새로운 농장주는 고지식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파격적인 방식으로 농장을 경영하곤 했다. 게다가 운 좋게도 항상 그 방법은 대성공을 거두곤 했다. 네스웰씨로서는 그가 너무 신기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주가 농장을 시찰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지! 네스웰 씨는 거의 일생을 바쳐 농장을 가꾸어 왔다. 자식처럼 과실과 채소를 챙기며 살아왔다. 그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농장은 활기찼고 기쁨이 넘쳤다. 농장주도 멋진 농장의 모습을 보면 필시 기뻐할 것이 틀림없었다. 네스웰 씨는 초조하게 농장 중앙에 있는 관리실에서 농장주를 기다렸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것을 보며 네스웰 씨는 소파에 앉아 그가 오기만을 고대했다. 관리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끔씩 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꾸민 관리실은 농장 장부를 비치해 놓은 책장과 경리를 맡아주는 아가씨가 쓰는 책상,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이 깔끔하게 방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차를 미리 끓여 놓아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던 네스웰 씨는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문이 열리고 어깨까지 밝은 금발을 기른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잘생겼다는 말이 딱 맞는 듯한 남자는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밉지 않은 인상이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와 악수를 청했다. "케이로프 로라 모르 에르슈바이크입니다. 농장 감독관이신 네스웰 씨, 맞습니까?" "아, 예. 제가 네스웰입니다. 그럼 이 분이..." 네스웰 씨는 눈을 깜빡이며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남자는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미소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에이드리안 유디스레느 로르 비인입니다. 오다가 대충 농장을 보았는데 관리가 잘 되었더군요. 수고하셨어요." 금발의 남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스웰 씨는 그의 목소리에 몹시 감동했다. 아주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네스웰 씨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밖을 가리켰다. "나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에이드리안 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우리 농장은 제국에서 최고랍니다. 허허." 네스웰 씨는 즐거운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농장주가 저렇게 어린 사람일 줄이야! 하지만 정말 잘 생겼고 똑똑하게 생긴 농장주였다. 다른 농장의 거칠게 생긴 노인 농장주에 비하면 우리 농장은 황금 모롤라에 비견하겠구만! 네스웰 씨는 자부심에 벅차 오르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 "이 것이 이번에 가장 좋은 수익을 올렸던 모롤라 과수원입니다. 농장주 님의 말씀대로 구획을 나눴더니 훨씬 효율이 오르더군요." 네스웰 씨가 자랑스럽게 과수원을 보여주자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미소지으며 과수원 안으로 들어갔다. 굵은 가지에 노란색 과실이 매달려 있었다. 네스웰 씨가 다시 설명해 주었다. "우리 모롤라는 다른 곳보다 약간 더 밝은 노란 빛을 띄고 있는 게 특징이랍니다. 크기도 좀 더 크지요. 모롤라는 사계절 과일이라 수익률도 좋은 편입니다. 이 모롤라는 잘 포장되어서 황실에 들어가기도 한답니다. 눈치 빠른 과일 가게 주인들에게 조금씩 팔기도 하고요." 에이드리안은 네스웰 씨의 설명을 들으며 모롤라를 하나 따서 껍질을 벗겼다. 즙 많은 노란색 과육이 드러나며 달콤한 향이 퍼졌다. 에이드리안은 은테 안경을 다시 고쳐 쓰고 모롤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는 웃으며 케이로프에게 모롤라를 건넸다. "정말 달아. 확실히 다른 모롤라보다 맛이 나은 것 같은데?" "제가 가서 튼실한 놈으로 몇 개 더 골라오겠습니다." 에이드리안의 칭찬에 신이 난 네스웰 씨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과수원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은 빙긋 미소지었다. "좋은 사람이네."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른 대지에 햇살이 비쳤다. 추운 겨울의 장막이 걷어지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말로 못할 묘한 감동을 느꼈다. "케이로프. 정말 놀라워. 이토록 추운데... 나무들은 불평도 하지 않고 이렇게 튼튼하게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니. 아름답고 선명하게 자신을 보이고 있어. 사랑스러울 정도로...아름다워." 에이드리안은 눈을 감고 차갑지만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었다. 머리 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살짝 웨이브진 금발이 바람에 날리며 뺨을 간질였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이로프는 말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에이드리안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힘없이 주저앉아 보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동방에서 온 서류 하나를 받았다. 에이드리안이 그에게 맡겨놓은 동방의 농장에 대한 서류였다. 서류를 받자마자 책상에 내팽개친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상한 느낌에 끌려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그는 당황하고 놀라운 감정에 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농장주가 나타나 새로운 계획서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농장주라니... 농장주는 에이드리안이 아닌가! 그는 바로 짐을 싸서 동방으로 향했다. 작은 희망을 갖고 싶었다. 케이로프는 몇 델라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루벤 대농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을 만났다. 여전한 모습의 에이드리안이었다. 달라졌다면 길었던 머리가 어깨까지 짧아졌고, 전에 쓰지 않았던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처음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케이로프는 울면서 에이드리안에게 매달렸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짧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장 기막히고 가슴 터지는 일이었다. 케이로프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웃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에게 유벨과 미라벨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이드리안은 따뜻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케이로프는 머뭇거리며 쥬느비에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 미안해. 케이로프. 동방에 온 직후에 사고를 당해서...기억이 온전치 못해.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어서 기억이 안 나는 부분도 많아. 기억이 안 났다가 떠오르기도 하고. 1년 전에 있었던 일이 1모네 전에 있었던 일 같기도 하고... 에스프라드 형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그런데...쥬느비에브가 누구야? ] 에이드리안은 웃으면서 쥬느비에브가 누구냐고 물었다. 케이로프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에이드리안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처음 보았을 때의 그였다. 다정하게 미소짓는 원래의 에이드리안. 가끔씩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막 기억이 났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루벤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농장주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스콜라를 휴학하고 몇 년 전부터 동방에 와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에스프라드와 함께 길을 가다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의 끔찍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케이로프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미라벨과 유벨, 심지어 안느마리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만은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야기해주어도 그냥 미소짓기만 할 뿐, 그녀만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와 관련된 작은 일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에이드리안이 뒤돌아보았다.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맞아. 저번에 시장에 갔었어. 시장에 내 농장의 모롤라를 팔고 있기에 잔뜩 사서 별장에서 먹었어. 뭐랄까. 아주 묘한 느낌이었어. 직접 내가 과수원을 돌보는 건 아니지만 아주 독특한 느낌이었어. 나중에 이런 농장이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도 멋질 것 같아. 흐음.... 아르헨에서 모롤라를 수입할 수 없겠냐고 서신이 왔던데...협상은 역시 내가 하는 게 좋겠지? 조만간 아르헨에 한 번 가봐야겠어. 상표 시장도 개척하고..." 케이로프는 미소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안이 미소짓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졌다. 에이드리안은 케이로프에게 미소를 보여주고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색이 눈동자를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시원하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시의 답답한 공기가 아니라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폐를 시원하게 울리고 지나갔다. 에이드리안은 문득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 네스웰 씨가 왔나 보다하며 고개를 내려 발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회색 머리의 청년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에이드리안! 시장에서의 그 사람, 역시 에이드리안이구나!" "프란체스 형? 여긴 어떻게..." 에이드리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프란체스를 바라보았다. 프란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랑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수소문해 봤지. 너야말로 여긴 무슨 일이냐? 히야- 여기서 널 만나게 되다니! 어어? 케이로프 군까지!" 프란체스가 웃으며 에이드리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에이드리안과 프란체스는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케이로프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이내 가만히 미소지었다. 동방으로 여행을 떠난 프란체스를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대단한 우연이었다. 그는 지금 에이드리안의 사정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지금,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다시 시작해서 더 행복해지면 된다. 그리고 프란체스와 에이드리안이 이렇듯 대단한 우연으로 만났듯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케이로프는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봄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이 눈부시게 빛났다. ******** 유벨은 자신의 사택에서 서류를 챙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스콜라였다. 거의 3모네만인 것 같았다. 유벨은 씁쓸하게 웃으며 방 안을 돌아보았다. "돌아왔어, 에드. 그냥... 너 없어도 잘 살아보려고. 다시 시작해 보려고. 쥬느비에브는 내가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마. 아무리 쥬느비에브가 미워도, 내가 잘 챙겨줄 테니까 징징거리지 마. 알았냐, 아우?" 유벨은 씨익 웃으며 돌아서서 서류를 가방 안에 넣었다. 순간 그는 서류사이에 끼여 있는 편지를 발견했다. 전에 받았던 프란체스의 편지였다. 유벨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형이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까지 뜯어보지도 않았다니. 휴우- 형, 이제 안 놀라. 무슨 소식을 보냈어도 안 놀랄 거야." 유벨은 편지 봉투를 찢어 편지지를 꺼냈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며 미라벨이 들어왔다. 얼마 전부터 프릴 원피스를 입지 않았던 그녀는 여전히 단순한 디자인의 베이지 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라벨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유벨 님, 좋은 아침이네요. 학생회 가실 준비는 다 하셨어요?" "잠깐만, 미라벨. 형한테서 편지가 왔거든." 유벨은 미라벨에게 웃어주고 스스럼없이 편지지를 펼쳤다. 그리고 웃으면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가 글씨를 따라 내려가면서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미라벨은 유벨의 굳은 표정과 떨리는 두 손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유벨 님, 프란체스 님께서 무슨 내용을?" "마, 말도 안 돼. 이런..." 유벨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초조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말도 안 돼... 이런. 이런..." "왜 그러세요, 유벨 님! 안색이 창백해요." 미라벨의 외침에 유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흡사 믿지 못할 어떤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프란체스 형이...동방에서 에이드리안을 봤대. 에드가...살아있어. 에드가... 맙소사. 에드가..." "뭐...라고요? 에이드리안 님이? 정말이에요? 정말?" 미라벨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믿어지지 않은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유벨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새 눈물이 맺힌 눈을 문지르며 그는 웃었다. 그리고 투덜거리며 말했다. "에드 녀석, 동방에 숨어 있었어. 농장 주인 행세를 하면서 잘 지내고 있대. 곧 아르헨에 온다고... 자식, 살아있었으면서 왜 연락을 안 해? 나쁜 자식... 케이로프 녀석, 선수 쳐서 에드랑 같이 있대. 그 녀석, 여행간다고 하고는 에드한테 간 게 틀림없어. 우리만 따돌리고... 나쁜 자식. 잘 먹고 잘 살아라!" 미라벨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활짝 미소지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우리...마중 나가야 되지 않나요? 아참, 나 옷 갈아입어야겠어요. 이번에 의상실에서 프릴이랑 레이스가 잔뜩 달린 빨간색 원피스를 가져왔거든요. 에이드리안 님을 마중하러 가는데 이런 우중충한 모습으로 갈 수는 없죠." 미라벨은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울이 끝나려는 모양이었다. 유벨과 미라벨은 마주 보고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팠던 순간을 모두 덮어두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행복한 그 순간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시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137음(第137音) Adrian(3) 쥬느비에브의 방에서 작은 티타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안느마리의 '남자 모습'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짧아진 갈색 머리와 셔츠, 바지 차림의 안느마리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어울리는 묘한 조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가 쿡 하고 웃자 안느마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쥬느비에브, 자꾸 그렇게 보지 마. 부끄럽잖아." "안느마리. 이제 계속 남자가 되는 거야?" 쥬느비에브가 쿠키를 아작 깨물고 묻자 안느마리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안느마리는 손을 흔들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했다. "으응. 세, 세린느가...그러니까 세린느가...음...음...음...세린느가 그러니까 말이지..." "세린느 언니랑 결혼하고 싶어서? 그럼 미라벨 언니랑 친척 되겠네?"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하자 안느마리는 순간 당황함에 차를 엎지를 뻔했다. 안느마리는 멋쩍게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런 건 아니고...그러니까... 하여튼 계속 남자로 지낼 거야."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모습의 안느마리도 보기 좋았다. 에이드리안이 곁에 없어 너무 힘들었던 쥬느비에브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안느마리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곁에 자신의 곁에 있어줄 사람은 안느마리 밖에 없다고 편지에 썼다. 그리고 안느마리는 아주 멋진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쥬느비에브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너무 마음 아프고 슬펐다. 에이드리안이 보고 싶고, 자신이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안느마리가 곁에 있어줘서 그래도 지금까지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안느마리, 고마워. 난 안느마리한테 늘 고마워할 일밖에 없어. 안느마리가 와 주지 않았다면 나, 너무 외롭고 슬펐을 거야. 혼자 견뎌낼 수 없었을 거야. 고마워, 안느마리. 안느마리는 내 최고의 친구야." "난 쥬느비에브 친구니까 당연한 거잖아. 나야말로 고마워, 쥬느비에브. 날 용서한다고 말해줘서. 난 그 말이 정말 필요했는데 그동안 용기가 없었어. 널 마주할 용기가 없었거든. 하지만 쥬느비에브, 쥬느비에브는 나한테 먼저 손 내밀어 주고, 모든 걸 용서한다고 말해줬어. 나, 쥬느비에브에게 정말 감사해." 안느마리는 씨익 웃으며 찻잔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안느마리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웃으면서 '용서한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얼마나 그 말을 갈구했던지... 그 말을 들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안느마리는 세린느에게서 용기를 배웠다. 그리고 이제는 시작의 출발선에 서 있었다. 안느마리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이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다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널 아끼고 사랑하셨어. 물론 그 미레이유라는 사람에 대한 마음도 진심이었을 거야. 하지만 쥬느비에브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은 쥬느비에브만을 생각하고 쥬느비에브만 소중하게 생각했어. 난 알 수 있었어. 나, 사실 에이드리안 님께 협박당한 적이 있어. 라데팡스 기밀 서류를 가져오면 널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셨어.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에스프라드 님도 내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분이니까. 사실 에이드리안 님을 조금 원망했었어. 내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망했어. 그런데...어느 날, 에이드리안 님의 편지를 받았어. 쥬느비에브가 혹시 혼자가 되면 곁에 있어주라는 내용이었어. 그 때 난 깨달았어. 에이드리안 님은 정말 쥬느비에브를 아끼고 사랑하는구나. 그 모든 게 쥬느비에브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구나-하고. 그러니까 쥬느비에브도 에이드리안님 미워하면 안 돼. 알았지?" 안느마리는 찻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미소지었다.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말에 일순 슬픈 표정을 짓다가 다시 방긋 미소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안느마리. 나, 에이드리안 미워 안 해. 내가 바보 같았어. 에이드리안은 거짓말을 했던 거야. 사실 날 살리고 자신이 죽으려고 했으면서... 날 죽이고 미레이유를 살리겠다고 거짓말을 했었던 거야.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내게 거짓말을 했어. 난 그 때 눈이 멀었었어. 에이드리안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어. 내 마음만 가득 차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 난 에이드리안이 날 죽이고 미레이유와 행복해지려는 건 줄 알았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에이드리안의 마음을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어. 변명 같겠지만 그랬어. 내가 에이드리안을 믿어줬어야 했는데...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나약하고 바보 같았어. 이제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 아파. 그 때 나, 미쳤었던 것 같아. 지금도 너무 무서워.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돌려 찻잔을 바라보았다. 황갈색 빛의 차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눈물이 고여갔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듯 말을 이었다. "마음은 에이드리안이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고 있었어. 하지만 내 미쳐버린 의지는 그렇지 않았어. 에이드리안이 차라리 눈 앞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작은 의지가 엄청난 레플리카로 변해버린 거야.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말없이 내 레플리카를 받아버렸어. 내 암속성을 흡수하면서 레플리카를 그냥 받아버렸어. 암속성과 광속성이 한 몸에 깃들면 그 사람은 살 수가 없대. 몸이 견디지 못한대. 에이드리안은 그 충격과 내 레플리카의 살기로 무너져 버린 거야. 미레이유는 에이드리안을 감싸고 나는 에이드리안을 무너뜨려 버렸어. 비참한 기분이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그건 내가 저지른 짓이고 내가 보상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쥬느비에브..." 안느마리는 울적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의 손을 꼬옥 잡았다. 쥬느비에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느마리. 에이드리안과 나, 약속한 게 있어. 죽음이든, 삶이든 함께 하자고 말했었어. 하지만 나, 그러지 못했어. 에이드리안이 말했거든.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이 곳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거든. 그래서 나, 죽을 수가 없었어. 내가 기다리고 있으면 에이드리안이 언젠가는 여기로 돌아올 거거든. 내가 기다리지 않으면 에이드리안은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래서 나, 기다리려고. 언제가 되었든 에이드리안은 다시 돌아올 테니까." 쥬느비에브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고 싶었다. 에이드리안을 자신의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말 죽고 싶었다. 차라리 자신도 사라져 버리면 마음이 사라져 버리면 편할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그의 생명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었다. 자신의 끔찍하기만 했던 레플리카를 에이드리안이 가져가 버렸다. 그녀는 이제 마음껏 노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쥬느비에브는 노래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에이드리안이 이제는 곁에 없었다. 끔찍했던 그 날만이 악몽같이 되풀이되며 그녀를 괴롭혔다. 정말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에이드리안과의 약속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에이드리안이 말했었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었다. 기다리면 그가 다시 돌아올까.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만나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해도 좋았다. 다시...그를 만나고 싶었다. ******** 몇 델라 후. 에이드리안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발 밑에 풀이 밟히며 사락사락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심드렁하게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스콜라에 오긴 했는데...협상 시간에 늦겠는 걸." 그는 에슈비츠 가의 영애와 농장의 과실 수출에 대해 협상을 하러 온 참이었다. 에슈비츠 가의 영애가 스콜라에 재학 중이라고 해서 어제 아르헨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오랜 여행 탓인지 몸이 여기저기 쑤셔왔다. 그래서 케이로프에게 일부러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오겠다고 말했다. 좀 걸으면 나을 것 같았다. 케이로프는 에이드리안의 고집에 결국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된 산책이었다. 처음은 좋았다. 오랜만에 들어선 스콜라에 왠지 모를 향수도 느끼며 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지금 거의 3도르간을 숲에서 헤매고 있었다. 사실 스콜라 바깥 숲에는 걸음을 하지 않는 그였다. 오랜만에 나와보니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익숙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에이드리안은 그제야 찌푸린 얼굴을 풀고 싱긋 미소지었다. "저기다. 저기로 가면 길이 나오니까..." 에이드리안은 어깨에서 살랑거리는 금발을 쓸어 넘기고 은테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산책하는 거야, 꼬마 에드. 집에서 놀기만 하면 뚱뚱해진다구. 알았지? 쥬느비에브 양과 같이 산책하는 거야." 쥬느비에브는 무거워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낑낑거리며 저택 뒤로 향했다. 강아지는 집에서 잘 먹고 잘 잔 탓인지 무척 살이 올라 있었다. 그렇다고 뚱뚱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처음 데려왔을 때 워낙 말라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보통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꼼지락거리는 강아지를 품에 꼬옥 안고 비틀비틀 거리며 뒤쪽의 숲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쥬느비에브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사택 후문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힘껏 밀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인상을 썼다. "또...레플리카? 우웅~ 나, 이제 레플리카 못 쓰는데... 어쩌지?" 쥬느비에브는 우뚝 서서 뚫어져라 청동으로 만들어진 문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약간은 낡았지만 다시 보아도 고풍스러운 맛이 나는 문이었다. 쥬느비에브는 순간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녀는 강아지를 꼬옥 끌어안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이드리안을...처음 봤는데. 여기서 처음 봤는데..."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꾸 눈물이 났다. 에이드리안이 너무 보고 싶었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노래를 불렀다. [ 빨간 사과 속에 새로운 세계를 보아요 생명의 움직임 움터오는 마음 신의 손길에 새롭게 태어나는 작은 기운 새로운 시작이에요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나요 다시...만나요. ]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청동 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비볐다. 문이 열려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닦을 틈도 없이 부리나케 강아지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갔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린 문 사이를 통과했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가 무거워 낑낑거리며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눈 속에 들어온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분명 문이 열려 있었다! "무, 문이 왜 열렸지? 나, 레플리카 못 쓰는데..."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뒤돌아 섰다. 그리고 방긋 미소지었다. "헤. 헤헤- 문 열려서 나왔다. 다시 산책해야지. 아웅~ 난 정말 운도 좋다니까." 쥬느비에브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발랄하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얇은 노란색 원피스만 입고 있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상기된 뺨을 뭉실뭉실 문지르며 방실방실 미소지었다. 그리고 강아지를 풀밭에 내려놓았다. "걸어야지 건강해 지는 거야, 꼬마 에드. 빨리 걸어. 뒤뚱뒤뚱 걸어도 좋으니까 빨리 걸어 보라구, 꼬마 에드. 건강해져야 강아지 밥도 더 맛있어 지는 거야." 쥬느비에브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강아지는 하얀 털을 보송보송 털고 뒤뚱뒤뚱 걸어갔다.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강아지를 보며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우우우웅~ 기분 좋다! 맑은 공기! 훅훅! 아유, 공기가 맛난다. 어어?" 쥬느비에브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을 보고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그리고 데굴데굴 구르듯이 달려갔다. 쥬느비에브가 본 것은 작은 꽃이었다. 쥬느비에브는 꽆 앞에 엎드렸다. 꽃 앞에 얼굴을 들이민 쥬느비에브는 천천히 미소짓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리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야아! 꽃이다! 봄이다! 봄이 왔다!!"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턱을 괴고 꽃을 구경했다. 선명한 노란 꽃잎이 너무 예뻤다. 그 때였다. 무언가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깽깽 하는 소리도 들렸다. 쥬느비에브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 꼬마 에드! 꼬마 에드!!" 쥬느비에브는 후문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강아지가 문 사이에 끼여 있었다! 문이 닫히면서 강아지가 달려든 모양이었다. 강아지가 아픈 듯 계속 깽깽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문을 잡아당겼다. "꼬마 에드가 문에 끼였잖아? 어, 어떻게 해! 안 열리잖아! 난 레플리카도 못 쓰는데. 꼬마 에드, 꼬마 에드! 흐어어엉! 어떻게 해-- 꼬마 에드!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낑낑거리며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작년에 자신이 문에 끼였던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흐어어엉--- 꼬마 에드, 나처럼 문에 끼이면 어떻게 해! 이러니까 나 닮았다는 소리 듣잖아. 흐어어어어어엉---- 여긴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꼬마 에드, 꼬마 에드! 어떻게 해. 문이 안 열려. 흐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끝내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아지는 여전히 끼잉거리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주저앉은 채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흐어어어어어어어어엉---------" "뭐야?" 사람이었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사한 금발의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은테 안경을 올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등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또 한 방울 떨어졌다. 또 한 방울... 또 한 방울... "에이드리안?"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노랫소리는 너무나 그리워 그립다고도 말하지 못한 노래였다. 그가 불러주던 노래. 아름답게 미소지으며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립게...그립게... 이제는 그립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아련한 기억 속의 노래였다. 마음은 언제나 노래하고 있었다. 그에게 들려주려고 마음을 기울여 노래를 했었다. 그 노래는 비록 전해지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곳에 행복이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그 곳에 나의 노래가 있고, 당신의 노래가 있고, 행복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당신이 있었다. 단 하나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노래는 이제야 비로소 전해졌다. 쥬느비에브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시작하는 거야?" 바람이 불어왔다. 금발의 그가 문득 불어온 바람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그를 바라보며,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파란 하늘 아래 봄의 기운이 돋아나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 왔다. 따스한 봄... 레플리카는 소망을 이루어 주는 힘.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그리워하고 소중히 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노래의 근원. 아름답게 노래한다. 노래는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향한다. 간절한 마음을 담은 노래는 레플리카의 힘을 지닌다. 그래서 반복되는 마음. 쥬느비에브에게서 에이드리안에게로... 그리고 내게서 당신에게로. 그래서 마음을 품은 노래야말로 진정한 레플리카. 반복되는 레플리카.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당신에게로의 선율. 그리하여... 지금은 행복해질 시간. The End... to be continued. =========================================================== 안녕하세요, anata입니다. ^-^ 음....음....음....엔딩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거에요!! 드디어 봄이 왔고, 에이드리안도 돌아왔습니다. 쥬르가 스콜라에 왔듯 에드도 스콜라에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시작하는 거에요. 어차피 과거의 잔상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하겠지만요. 어쨌든 새로운 시작이라는 타이틀입니다. <레플리카 replica....당신에게로의 선율>에서 레플리카의 의미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답니다. 그 중 레플리카라는 단어에 반복이라는 의미가 있죠. 글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로 쓰인답니다. 우선 미레 양과 에드 군의 일이 쥬르 양과 에드 군의 일로 반복되었죠. 그리고 쥬르 양이 스콜라에 왔듯 에드 군이 스콜라로 돌아와 "반복"되었 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쥬르 양이 에드 군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에드 군이 쥬르 양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돌고 돌아 계속 그 마음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마음은 변 치 않고 다시 반복된다는 거죠. 그래서 당신에게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계속 반복되어 떠돌다 결국은 상대방에게 그 마음이 전해지는 거에요. 마음을 담은 레플리카가 반복되어 되살아나다 결국 당신에게로의 선율로 전해지는 거죠. 그래서 레플리카...당신에게로의 선율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제 레플리카가 전해질까요. 저의 마음도 계속 반복되어 언젠가 쥬르의 마음처럼, 혹은 에드의 마음처 럼 전해지리라 믿어요. 당신도 반드시 행복해질 거에요. 반드시. [ 공 지 ] 레플리카의 마지막, 혹은 시작... 레플리카가 끝났습니다. 긴 시간, 137음의 여정으로 쥬르 양도, 에드 군도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켜봐 주시던 분들과의 정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레플리카는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들과 함께할 이야기입니다.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있습니다. 쥬르 양과 에드 군의 이야기는 조금 더 계속됩니다만, 본편은 이로서 끝을 맺습니다. 끝이 있으면 다시 시작이 있습니다. 레플리카도 끝으로서 다시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지켜봐 주신 모든 분께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저 자신에게도 대견함을 느낍니다. 행복해지세요. 그것만이 당신의 존재에 진정한 확신을 줄 것입니다. 레플리카로 인해 당신이 조금이라도 행복했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귀여운 쥬르 양도, 그리고 멋진 에드 군도, 듬직한 유벨 군도, 알고보면 순진한 미라벨 양도, 무뚝뚝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상한 케이로프 군도, 그리고 남자가 되어버린 소녀, 안느마리 양도 이제 그들의 자리를 찾아갔지만 가끔씩 여러분들이 그들을 찾아가 주세요. 레플리카는 많이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여러분의 기억 한 켠에 기억되어 오래도록 노래하고픈 글입니다. 당신에 대한 마음이 계속 반복되어 영원으로 이어지도록... 짧은 순간의 행복이 모여 커다란 기쁨이 되도록... 마음으로 소망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그리고 레플리카는 일주일 뒤에 자폭할 예정입니다. 끝을 내고 화사하게 사라지고 싶어요. ^-^ 혹 글을 못 보신 분들은 제 홈페이지를 찾아 주세요. anata.x-y.net 입니다. 그럼,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조금 더 뒷 이야기. ...또 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시 시작되긴 한 것 같은데 시작부터 영 신통치 않습니다. 저는 오늘도 눈물로 하루를 보냅니다. 아유, 쥬느비에브가 정말 불쌍합니다. 불쌍한 기념으로 모롤라나 먹어야겠습니다. 아웅~ 그런데 모롤라는 언제 먹어도 맛나요. ******** 쥬느비에브는 침울하게 집 뒤뜰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길다란 풀을 꺾어 바닥을 쓸고 있었다. 옆에서 하얀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그녀의 옆을 맴돌았다. 쥬느비에브는 힘없이 한숨을 쉬며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이 너무 파랗고 예뻤다.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우울했다. 그 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노란색 원피스를 토닥토닥 털고 맥없이 축 늘어진 몸짓으로 어기적거리며 뒤돌아 섰다. 하얀 강아지가 다리에 매달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쥬느비에브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꼬마 에드. 나, 너무 힘이 없는 걸. 나중에 나 기운이 펄펄 나면 그 때 같이 놀아 줄게." 쥬느비에브는 폐 끝까지 숨을 몰아쉬고 후우 하고 내뱉었다. 멀리서 반바지에 멜빵을 매고 있는 안느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쥬느비에브!" "어? 안느마리. 차 마시는 거 아니었어?" 쥬느비에브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꾸욱 쥐고 힘없이 말했다. 안느마리는 헉헉 하고 숨을 내뱉으며 쥬느비에브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어휴, 너 찾느라 정말 힘들었어. 티 타임인데 왜 혼자 이러고 있는 거야? 미라벨 님이랑 케이로프 님이 너 찾았어." "그냥. 차 마시고 싶지 않아."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떨구며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쥬느비에브의 우울한 얼굴을 본 안느마리는 가만히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 님 때문이야?" "............" 쥬느비에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강아지가 쫄레쫄레 달려왔다. 강아지가 달릴 때마다 딸랑딸랑하는 소리가 났다.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강아지의 방울은 에이드리안이 예전에 선물해 준 방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이드리안에게 관련된 어떤 것도 마음 아프게만 느껴졌다. 안느마리가 쫓아와서 물었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 동방에서 사고를 당하셨다잖아. 그 바람에 널 잊어버린 거고. 아마 널 가장 최근에 만나서, 그래서 널 기억하지 못하시는 걸 거야." "하지만 더 늦게 만난 안느마리도 기억하잖아." 쥬느비에브의 뿌루퉁한 목소리에 안느마리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쥬느비에브는 속상한 듯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아마 날 기억하고 싶지 않을 거야. 내가 에이드리안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는데.... 흐엉. 흐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안느마리는 갑자기 쥬느비에브가 울자 당황하여 쥬느비에브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쥬느비에브. 울지 마. 그런 게 아니래두. 어서 가서 같이 차 마시자. 에이드리안 님이랑 다 계실 거야. 응?" "훌쩍. 안가.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에이드리안은 보고 싶지 않아. 보면 마음만 아픈 걸. 훌쩍. 흐어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엉-------" 안느마리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쥬느비에브의 눈물을 닦아주고 코에 수건을 갖다 대주었다.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안느마리가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자 쥬느비에브는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을 들어 안느마리를 쳐다보았다. "안느마리. 그 손수건, 내가 코 풀었는데 그냥 주머니에 넣는 거야? 더럽잖아." 울먹울먹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쥬느비에브를 바라보며 안느마리는 탁 맥이 풀렸다. 안느마리는 주먹을 쥐어 쥬느비에브의 머리에 꽁 하고 때렸다. 쥬느비에브가 아픈지 눈물을 그득하게 눈꼬리에 단 채 안느마리를 노려보았다. "너, 너무해! 아프잖아! 왜 알밤 주는 건데! 에이드리안도 아니면서 왜 알밤 주는 건데!" "너무 웃기잖아. 쥬느비에브. 지금 손수건이 중요한 게 아니고 에이드리안 님이 중요한 거라고." "아, 맞아.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훌쩍. 에이드리안. 훌쩍, 훌쩍. 흐어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다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안느마리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이마를 짚었다. 하얀 강아지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둥실둥실 뛰어다니고 있었다. 안느마리는 턱을 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와아- 하늘 참 파랗네. 이번 주말에 세린느랑 데이트나 하자고 해야 겠다. 어이! 쥬느비에브 양! 울지 말라고! 이보세요, 꼬마 에드 씨! 그렇게 촐랑촐랑 뛰어다니지 말라고!" 처치곤란인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보며 안느마리는 한숨을 쉬었다.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린단 말인가.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에이드리안은 공교롭게도 쥬느비에브만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 훨씬 부드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쥬느비에브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아도 기억을 살리지 못했다. 울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내버려두고, 안느마리는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장을 꺼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동방 비화 물산의 기억 회복 비약은 소용없었고, 서방 얀센 제약 회사의 단기 기억 충동 요법도 효과가 없었고...보자...그럼 다음엔 무슨 방법을 써야 하나..." ******** 유벨의 집에서는 한창 티타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라벨은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참이었다. 찻잎을 가득 주전자에 넣고 한참을 우려내니 방 안 가득 차 향이 감돌았다. 케이로프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미라벨을 도와 주었다. 미라벨은 케이로프의 시선에 부끄러운 듯 웃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케이로프는 요즘 들어 곧잘 웃어주곤 했다. [ 신혼 때는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라도 쉽게 웃는 법. 아무리 솜씨 없는 재단사라도 신혼 때는 평소보다 일을 잘하는 것처럼 말이야. ] 언니 세린느의 말을 생각하며 미라벨은 위기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결혼하고 몇 년 지나면... 케이로프가 영영 안 웃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미라벨은 웃음을 지우며 찻잔 가득 차를 부어 유벨과 에이드리안에게 건네주었다. 유벨은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히야- 향이 끝내주는 구만. 프란체스 형, 이런 차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 하여튼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니는 사람은 좋겠구만." "프란체스 님 말로는 일명 <모험가>라고 하잖아요. 음..이 차, 향이 정말 좋은데요? 어머, 에이드리안 님?" 유벨의 말에 즐겁게 대꾸하던 미라벨은 에이드리안이 테이블을 더듬는 것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은테 안경을 고쳐 쓰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 괜찮아. 가끔씩 안 보일 때가 있어. 이제 괜찮아." 에이드리안은 여전히 미소 띈 표정으로 찻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향을 한 번 맡고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음...차 향이 정말 괜찮은데? 나중에 프란체스 형에게 좀 더 구해달라고 해야겠어. 에스프라드 형에게도 좀 갖다 주고." 에이드리안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굳어버린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뭐 말 잘못한 거야?" "아닙니다. 그저...에스프라드 르미엔 로르 비인 님의 이야기를 하셔서..." 케이로프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어깨에서 살랑거리는 금발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에스프라드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나도 형이 미워. 너무 미워." 에이드리안은 말을 끝내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말은 밉다고 하지만 미움의 감정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는 에이드리안의 표정을 바라보며 미라벨과 유벨, 케이로프는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에이드리안은 창 밖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꽃이 폈네. 이제 정말 봄이야. 에스프라드 형이 있는 내 별장에도 지금쯤은 꽃이 피었겠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향긋한 향이 느껴지는 듯 했다. ******** 각자의 사택으로 향하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숲 길을 걷고 있었다. 오후의 느긋하고 기분 좋은 공기에 맥이 풀리는 듯 했다. 미라벨은 찻잔이 든 바구니를 흔들며 자신의 다홍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핀으로 양쪽을 고정시킨 다홍색 머리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에이드리안 님, 예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분 같아요. 근심 걱정 같은 감정 없이 깨끗하고 시원한 미소요. 따스하고...기분 좋은." "맞아. 그 때의 그 분으로 돌아오신 것 같아. 예전에 보이던 억지 웃음은 더 이상 볼 수 없으니까. 나도 기뻐." 케이로프가 손을 뻗어 미라벨이 들고 있는 바구니를 들었다. 미라벨은 웃으며 하늘로 두 팔을 뻗었다. "기분 좋아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뭐, 에이드리안 님 기억이 들쭉날쭉 이라는 게 문제지만."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 케이로프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라벨은 팔을 내리고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에스프라드, 그 사람 때문이잖아요. 에이드리안 님은 말은 밉다! 밉다! 그러시면서 챙길 거 다 챙겨주고. 도대체 에스프라드 님은 어떻게 된 거에요? 에이드리안 님 별장에서 요양? 정말 우스워요." "뭔가...두 분 사이에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했어. 에이드리안 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더군. 에스프라드 형이 나 때문에 그렇게 됐어-하고." 미라벨은 힘없이 걸음을 옮기며 프릴 가득한 치맛자락의 주름을 폈다. "그렇지만... 하여튼 좋아요. 뭐 에스프라드 님이야 어찌되었든 알 바 아니에요. 쥬느비에브도 이제 노래 불러도 괜찮으니까 되었고. 하긴 쥬느비에브, 이제 레플리카 못 쓰죠. 안타까워요. 하긴, 뭐. 여전히 노래는 잘 하지만요."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야. 나도 좀 더 열심히 노래를 가르쳐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쥬느비에브 양은 레플리카 때문에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위해 노래하는 거니까. 훨씬 감동을 느껴." "맞아요. 나도 그 점은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서로 미소를 교환하며 기분 좋게 산책을 즐겼다. 새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 따스한 햇살 속에서 만가지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였기에 자신의 사택에 쥬느비에브가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유벨의 집에 머물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로서는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 쥬느비에브가 에이드리안은 몹시 거북한 듯 했다. 유벨은 침대로 걸어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프란체스의 편지였다. 유벨은 침대에 몸을 쓰러뜨리고 편지를 들어보았다. 하얀 편지 위에 단정한 형의 필체가 보였다. 글씨체가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형은 겉으로는 불량스럽고 대충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우 꼼꼼한 사람이었다. 유벨은 씨익 웃으며 편지 봉투를 뜯었다. "오랜만이야, 형. 요즘은 정말 착하다니까? 꼬박꼬박 편지도 보내고. 어디 보자..." 유벨은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프란체스는 지금 에이드리안이 가지고 있는 동방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여행을 잠시 중단하고 잠시 정착해서 과수원에서 생활할 거라고 했다. 그는 편지에 과수원의 나무를 돌보는 일이 적성에 딱 맞는 일이라며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유벨은 피식 웃으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형. 형이...저주받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형에게는 차라리 괴로운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유벨은 눈을 깜빡였다. 눈 가가 촉촉해 지고 있었다. 이번 대의 희생자가 프란체스가 아니라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그는 깜짝 놀랐었다.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는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프란체스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에이드리안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벨은 직감으로 '에스프라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대의 저주받은 자는 '에스프라드'였던 것이다. 솔직히 착잡한 기분이었다. 에스프라드를 미워하긴 했지만 그도 어린 시절, 행복했던 그 시절의 한 부분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물며 에이드리안은 오죽할까. 기억은 엉망이었지만 그는 에스프라드가 한 짓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늘 입버릇처럼 에스프라드가 너무 밉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그런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몹시 복잡하고 묘한 표정. 혹은 슬픈 표정이었다. 유벨은 눈을 감고 미소지었다. "그래. 밉든 좋든,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고. 다 행복해져 버리자고. 에스프라드 형. 독한 사람이었으니까 저주따위 독하게 이겨내 버리라고." 유벨은 자신의 말에 멋쩍은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푸른지... 새하얀 구름 사이에 파란 하늘, 그 사이에 하얀 새들... 정말 평화로웠다. ******** 며칠 후.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의 방문을 받았다. 몇 모네 사이에 초췌하게 변한 헤르만의 모습을 보며 에이드리안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를 맞았다. 유벨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눈짓으로 부탁을 하며 그는 헤르만을 소파로 안내했다. "오랜...만이네요. 숙부님." 헤르만은 까칠한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며 자리에 앉았다. 에이드리안은 하녀장이 들여온 차와 과자, 과일을 헤르만에게 내밀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주름이 가득 패인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파 왔다. 황갈색의 차가 담긴 자신의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르만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에이드리안은 대답 없이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는 하얀 찻잔을 바라보았다. 서먹한 침묵이 흘렀다. "옛날이...좋았죠? 아무 것도 몰랐던 때가..." "그랬지. 그 때는 정말 널 내 친아들처럼 생각했으니까. 부끄럽구나. 지난 세월이..." 헤르만이 회한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안은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말랐던 목이 약간 축여진 것 같았다. "에스프라드 형은 잘 지내고 있어요. 올리비엘라와 함께 지금 제 별장에 있어요. 가끔씩은...편지 연락도 하고.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지만." 헤르만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평의회 의장 자리는 내놓을 생각이다. 나도 조금 쉬고 싶구나. 내 영지안에 있는 별장에 가서 당분간 생활할 생각이다. 시골의 공기도 마시고... 흐음... 거기에 르미엔의 묘가 있기도 하니까. 참 좋은 곳이지. 엘로이즈를 보러 가끔씩은 올라올 생각이다. 내 뒤는 네가 봐주렴." "숙부님..." 에이드리안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숙부님.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전 이제 광속성 레플리카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전..." "아니다. 이제 정말 쉬고 싶구나. 히스페르, 네 아버지처럼 인생을 즐겨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히스페르는 자신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늘 아름답게 살았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미소로... 부러웠지. 그래서 그를 질투한 건지도 몰라. 후우- 이제 그만 일어나야 겠구나." 헤르만은 힘이 드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소파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헤르만을 부축해 주었다.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에게 씨익 웃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 부축 받을 정도의 나이는 아니다." 헤르만은 에이드리안의 부축을 물리치고 가지고 온 지팡이를 짚으며 혼자서 응접실 밖으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안은 헤르만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숙부님!" 헤르만이 뒤돌아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에스프라드 형이... 이제 숙부님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전해달라고 그랬어요. 다 용서한다고. 숙부님을 사랑한다고...전해달라고 했어요." 헤르만은 미소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녀석. 에이드리안, 에스프라드를 돌봐 줘서 고맙다. 난 그 애한테 너무 모자란 아비였어. 그리고 에이드리안. 레플리카란 단순한 힘이 아니다. 노래란 마음이야. 네 마음이 원할 때, 다시 광속성을 돌려 받을 수 있을 거다. 그건 네가 원해서 생긴 힘이 아니라, 빛이 원해서 네게 준 힘이니까." 헤르만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에이드리안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예전에 따뜻했던 헤르만 숙부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때는...행복했었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거야. 아마...." ******** 헤르만을 돌려보내고 에이드리안은 착잡한 마음에 산책을 나왔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에 공백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자신이 원해서 사라진 것이었다. 어렴풋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에이드리안은 파란 나뭇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시원한 걸음걸이로 산보를 시작했다. "시원해. 봄은 따스하고 시원하구나. 나무도 보기 좋고. 하늘도 아름다워." 에이드리안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추웠던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렇게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봄을 만끽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다시 겨울이 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무작정 걸음을 옮기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언가가 나무 뒤로 휙 하고 사라졌다.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꼭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번에는 꼼꼼히 주위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풀 사이에 삐죽이 하늘색 옷자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누구야?" 에이드리안은 수풀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자아이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눈을 질끈 감싸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여자아이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하늘색 원피스 차림의 검은머리의 소녀는 그와 안면이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소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쥬느...비에브 양?" "에? 에? 에엣!" 검은머리의 소녀가 눈을 번쩍 뜨고 멀뚱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두 팔을 내저으며 버둥거렸다. "에에- 그러니까 미행하려고 했던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에이드리안이 어디 가나 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요! 에이드리안이랑 얘기하고 싶어서 따라왔던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음...음....음.... 그러니까요, 아, 맞다! 에이드리안 머리 손질 어디서 했는지 궁금해서...아니, 그게 아니고...그래! 에이드리안 옷 어디서 맞춘 건지 궁금해서....음...." 소녀는 갈팡질팡하며 혼자 헤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버둥거리는 소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일어날 거에요?" "에에? 아, 저기...그러니까...음...." 소녀는 입을 오물조물 움직이다 눈을 질끈 감고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손의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안은 일어나서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눈 떠요." "음...음...아, 네." 소녀는 눈을 뜨고 멀뚱멀뚱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이만..." "에에? 안 돼요!!"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벌려 또 다시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에이드리안은 소녀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며 세 번째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요?" "저, 저기요. 그러니까...그게 저기...음...음...음....그러니까..." "그러니까?" "얘기하고 싶어요! 에이드리안이랑..." 소녀는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에이드리안은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 잠시 살펴보았다. 아직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안경을 고쳐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고, 고마워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에이드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는 말도 못 하게... 쥬느비에브는 주먹으로 볼을 뭉실뭉실 돌리며 토닥토닥 걸음을 옮겼다. ******** "앉아요." 호숫가 앞의 작은 벤치를 가리키며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쥬느비에브는 말없이 벤치에 앉아 자신의 옆에 앉는 에이드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수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안이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와 보는 건데... 호수는 여전히 맑네요." "..........." 쥬느비에브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에이드리안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야기하자면서요?" "네. 그치만..." 쥬느비에브는 하늘색 원피스를 두 손으로 꾸욱 쥐며 침울하게 말했다. 쥬느비에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이드리안은 마침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박수를 쳤다. "맞아. 우리 친척이라면서요? 어차피 난 방계라서 먼 친척뻘 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런데 왜 '비인'의 이름을 쓰지 않는 거에요? 아, 에슈비츠 공작 예하의 양녀로 들어갔다고 했던가... 미안해요. 기억이 제멋대로 라서... 뒤죽박죽이에요." "...난 그냥 에슈비츠 성이 좋아요. 제 약혼자를 만났을 때, 에슈비츠 성을 썼거든요. 그래서 계속 에슈비츠 성을 쓰려고요. 양아버지도 기뻐하시고요." 쥬느비에브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말했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호수에 시선을 고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사람, 사랑 받았나 보네요. 나도 좋아한 사람이 있었는데, 보내줬어요. 그랬던 것 같아. 잘 기억은 안 나는데...그런 것 같아요. 그 사람, 지금은 행복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미련 없어." 에이드리안은 유쾌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이번 협상 손쉽게 되었어요. 모롤라 수출은 꽤 무리 없이 진행될 거 같아요. 나도 루벤에 좀 더 빨리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빨리 돌아가서 농장을 살펴보고 싶어요. 원래 이런 일에 취미 없었는데 직접 보니까 꽤 흥미로운 것 같아요." "..................훌쩍......" 갑자기 들린 울음소리에 에이드리안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쥬느비에브가 커다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놀라서 주머니의 손수건을 얼른 꺼냈다. "쥬느비에브 양?" "흐엉. 흐어어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쥬느비에브의 통곡에 에이드리안은 놀라 그녀의 눈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왜 그래요, 쥬느비에브 양?" "바보. 꽁치. 바보. 꽁치!! 에이드리안 바보! 흐어엉. 흐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안은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손수건만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손에 들려 있는 손수건을 빼앗아 얼굴을 북북 문지르며 소리쳤다. "에이드리안은 나한테 그렇게 말 안 해! 에이드리안은 나한테 존대 안 한단 말이야. 에이드리안은 나 혼자 두고 멀리 가지도 않아. 바보 에이드리안!! 바보야!!" 쥬느비에브는 손수건으로 코를 팽하고 푼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 주고 원피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후다닥 달려갔다. 에이드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여자네. 이야기하자고 하구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중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7도르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식사시간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장 그의 침대 위에 뛰어 올라가 벌렁 누웠다.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코 아래 까지 끌어올리고 눈물을 쏟아냈다. 너무 서럽고 슬프고 기가 막혔다. 에이드리안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 하다니! 다른 사람은 다 기억하고 자신만 모르다니!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이불로 얼굴을 닦았다. "바보. 꽁치. 메추리알. 너무해, 에이드리안. 나만 모르고. 훌쩍. 훌쩍." 쥬느비에브는 이불을 끌어올려 눈을 닦았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소용이 없었다.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고, 용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침대에 엎드리며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에이드리안 냄새가 났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치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만치 거리를 두고 자신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밤마다 그 날의 악몽을 꾼다. 무섭고 섬뜩해서 자고 일어나면 눈물로 베개가 촉촉하게 젖어있다. 이런 일상이 반복 될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안이 영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너무 무서워서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바로 곁에 있는데도 예전처럼 말 한 마디 건넬 수가 없었다. 쥬느비에브는 베개의 냄새를 맡으며 서럽게 눈물 방울을 떨궈냈다. ******** 식사를 마치고 유벨의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은 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를 흘끔 바라보고는 서류 하나를 가져와 주루룩 넘기며 훑어 보았다. "이게 뭐야?" "이번하고, 저번 회기 서류랑 기타 등등. 정리 좀 하려고." 에이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회색 바지를 매만지며 유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내가 없으면 어쩔래? 나, 모레쯤 다시 돌아갈 건데." 유벨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참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책장을 향해 뒤돌아 섰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셔. 형 하나로 족해. 내가 너 보낼 것 같아? 가서 과수원 주인 노릇이나 하려고? 그래서 프란체스 형 일하는 거 방해하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요. 아우님. 프란체스 형, 한참 직업의 세계에 눈뜬 참인데. 게다가 헤르만 숙부가 평의회 의장 관둔다고 하던데. 그럼 후임은 누가 하냐?" "난 이제 18살이야. 졸업은 내년이고. 네가 하면 되잖아." 에이드리안은 심술궂게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유벨의 부글부글 끓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에이드리안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한찬 서류를 넘기던 에이드리안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이상한 페이지를 발견하고 다시 그 페이지를 찾아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한 쪽은 회기 보고 내용을 담고 있는 페이지였고 그 반대쪽에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그림을 가리켰다. "유벨. 이 것 좀 봐. 이게 뭐야? 쿡쿡. 뭐야, 이 거. 사람인가?" 유벨은 에이드리안이 가리키는 그림을 힐끗 바라보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미소지었다. "아아- 그거? 예전에 쥬느비에브가 그린 거잖아. 그 거, 네 모습이야. 쥬느비에브가 그 그림 그렸다가 너한테 엄청 잔소리 들었지." 유벨은 말하고 나서 아차 하는 마음에 에이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은 멍하게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쥬느비에브? 쥬느비에브 양 말이야?" "휴우- 나도 모르겠다. 그 거, 너 밥 먹고 있는 모습이란다." 유벨은 한숨을 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유벨이 나간 뒤에도 에이드리안은 한참동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둥근 과일 모양과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그림, 그리고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림... 에이드리안은 비뚤비뚤하게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다시 봐도 하나도 안 닮았잖아. 쥬르." ******** 다시 며칠 뒤. 쥬느비에브는 번쩍 눈을 떴다. 두 눈가가 촉촉했다. 또 꿈을 꿨다. 너무 무서워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쥬느비에브는 손을 쭈욱 뻗어 침대 위를 더듬거렸다. 이내 손 끝에 보드라운 느낌이 느껴졌다. 쥬느비에브는 그것을 꼬옥 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꽉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가짜 쥬르. 나, 너무 무서워. 자꾸 울고 싶어져." 쥬느비에브는 까만 머리카락의 인형을 꼬옥 안고 훌쩍였다. 그 때였다. 하얀 무언가가 붕 하고 침대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곧장 쥬느비에브의 얼굴 위로 푹 하고 떨어졌다. 무슨 소린가 하고 돌아보던 쥬느비에브는 하얀 그것에 얼굴이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 쥬느비에브는 두 팔을 벌려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으에에- 뭐야, 뭐야!!" 팔을 버둥거리며 뭉실뭉실한 그것을 얼굴에서 떼어낸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지었다. "꼬마 에드! 나 지금 기분이 울적한데 이러면 어떻게 해! 누구 닮아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거야? 응? 꼬마 에드, 밖에 나가서도 이러면 안 돼. 알았지? 에이드리안 헤르디스......음...음....잠깐 있어 봐." 쥬느비에브는 꼼지락거리는 강아지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서랍장으로 돌돌 구르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서랍 안에서 하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침대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 앉아 이불을 쑤욱 끌어올린 쥬느비에브는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에이드리안 헤르디스테르네스 리코도메스 페르난테스 돌로레스 미오르바 스티스....헥헥. 하여튼 이렇게 멋지고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내 얼굴에 올라간다든지, 가짜 쥬르를 괴롭힌다든지 하여튼 이런 일을 하면 이름이 아깝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아유, 그런데 이름이 너무 긴가? 우웅~ 그치만....멋지다." 쥬느비에브는 볼살을 뭉실뭉실 돌리고 '가짜 쥬르'를 침대 머리 쪽에 앉혀 주었다. 그리고 턱을 괴고 상념에 잠겼다. "난 정말 비운의 여주인공인 거 같아. 이렇게 나름대로 귀, 귀엽고, 까, 깜찍한데 에이드리안은 나도 몰라보는 바보가 되어 버리고, 강아지는 매일 맨둥맨둥 놀기만 하고, 가짜 쥬르는 말도 못 하고, 전에 사 놨던 모롤라는 어제 다 먹어 버렸고....훌쩍. 그러고 보니까 나, 정말 불쌍하잖아. 훌쩍. 훌쩍. 흐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펑펑 눈물을 쏟아 부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을 강아지의 털에 닦았다. 콧물을 훌쩍이며 쥬느비에브는 강아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조금 있다가 목욕시켜줄 테니까 섭섭해하지 마. 가출하고 그러면 난... 난...흐어어어어어어어어엉-------------" 강아지는 체념한 듯 쥬느비에브의 무릎에 누워 발을 버둥거리며 놀고 있었다. 강아지의 모습이 맘에 안 들었던 쥬느비에브는 입술을 쑥 내밀며 강아지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바보 꼬마 에드. 난 이렇게 슬픈데...." 쥬느비에브는 하얀 잠옷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고 멀뚱멀뚱 창 밖을 쳐다 보았다. 오늘도 날씨가 너무 좋은 듯 했다. 맑은 하늘에 화가 난 쥬느비에브는 혀를 쏙 내밀었다. "메롱이다. 난 슬픈데 날씨는 너무 좋잖아. 에이, 기분 나빠. 메롱. 메롱메롱." 쥬느비에브는 강아지를 내려놓고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모롤라 모양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모양의 노란 스커트와 초록색 스웨터를 꺼냈다. 잠옷을 휙 벗어 던진 쥬느비에브는 스커트와 스웨터를 슥슥 입은 다음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노란색 예쁜 신발...노란색...노란색....앗! 찾았다! 헤에- 새 신발이다!" 노란색 구두를 꺼내 손에 들고 있던 쥬느비에브는 문득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몹시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였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끔뻑이며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문이 벌컥 열리며 안느마리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안느마리를 바라보며 쥬느비에브는 배시시 웃었다. "어? 안녕, 안느마리. 오늘은 정장했네. 예쁘다. 갈색 정장." "지금 그런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빨리 가자! 나도 세린느랑 데이트하다 부리나케 온 거란 말이야." 안느마리는 다짜고짜 쥬느비에브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쥬느비에브는 얼른 신발을 신고 안느마리를 쫓아가며 외쳤다. "어, 어디 가는 건데? 나, 아침도 못 먹었는데...늦잠 자서 아침도 못 먹었단 말이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에이드리안 님이 떠나신다는데!!" "어어?" 쥬느비에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느마리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이 돌아가? 에이드리안이 가버린다고? "에이드리안 님, 다시 동방으로 돌아가신다잖아! 나도 유벨 님께 급하게 연락을 받았단 말이야." "에이드리안이 가버린다고? 싫은데....그건 싫은데.... 흐엉. 흐어어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안느마리의 손을 뿌리치고 쌩하고 달려갔다. 안느마리는 벅찬 숨을 몰아 쉬며 순식간에 달려가 버린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찾으며 이마를 짚었다. "후우- 힘들어. 하여튼 유벨 님 말씀이 맞아. 에이드리안 님이랑 쥬느비에브 곁에 있으면 늘 뒤치다꺼리만 하게된단 말이야. 휴우-" 안느마리는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의 뒤를 쫓아갔다. ******** 쥬느비에브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유벨의 사택으로 달려갔다. 유벨의 사택은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쥬느비에브는 까만 칠을 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를 보고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짐을 싣고 있었다. 계단에서 목록을 체크하고 있는 케이로프를 발견한 쥬느비에브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그에게 달려갔다. "케이로프 님! 에이드리안, 진짜 가는 거에요?" "아,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케이로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훌쩍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안에서 나오던 미라벨을 발견한 케이로프는 반가운 마음으로 미라벨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 일이냐고 눈짓을 하던 미라벨은 쥬느비에브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 만나러 온 거에요? 지금 여기 안 계신데..." "미라벨 언니, 에이드리안 진짜 가요? 멀리 가는 거에요? 훌쩍..." 쥬느비에브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묻자 미라벨은 곤란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의 핑크색 프릴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도, 동방으로 영 가시는 건 아니고... 그게...농장 일도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저희로서는 말릴 재주가 없고... 뭐 그, 그런 거죠. 금방 다시 돌아오실 거에요. 그, 그런 거죠." 힐끗 고개를 돌리던 미라벨은 순간 쥬느비에브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당황해 얼른 손수건을 꺼내 쥬느비에브의 얼굴에 가져갔다. "쥬느비에브, 울지 말아요. 지금은 에이드리안 님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오실 거에요." "흐엉. 에이드리안은 내가 미워서 나만 몰라보는 거에요. 나, 다 알아요. 에이드리안은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나한테 질려버린 게 분명해. 흐어엉-- 흐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짐을 나르던 하인들이 곁눈질을 하며 쥬느비에브를 보자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쥬느비에브를 일으켰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에이드리안 블랑쉬 로르 비인 님은 지금 후원에 계시니 그 쪽으로..." "맞아요. 쥬느비에브, 에이드리안 님이랑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해요. 알았죠?"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다독거리자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토닥토닥 후원으로 달려갔다. 미라벨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쥬느비에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스커트는 도대체 뭐죠? 모롤라?" "아아- 그런 것 같군. 이별의 순간에 모롤라 모양 스커트라... 정말 분위기 꽝이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차에 실을 물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목록에 집중했다. ******** "새로 나온 잎인가 보군." 에이드리안은 연두색 빛을 띈 반질반질한 나뭇잎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자연이 내미는 손길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에이드리안은 나무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봄의 향취를 느끼며 에이드리안은 막간의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은 그가 나뭇가지에 열린 작은 열매를 딸 때였다. 어디선가 투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안은 무심코 뒤돌아보다 순간 뒤로 넘어질 뻔했다. 까만 머리의 소녀가 등 뒤에서 그를 덥석 안더니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보낼 거야! 에이드리안은 못 가! 내가 안 보낼 거야!" 에이드리안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힘겹게 뒤로 돌아섰다. 까만 머리의 소녀, 쥬느비에브가 또 다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머리 속에 상황을 정리하며 자신의 반응을 정하고 있었다. 다시 소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 에이드리안 안 보낼 거에요! 에이드리안이 나 싫어졌어도 안 보낼 거야. 보내기 싫단 말이야!" "아...저, 쥬느비에브 양?" "쥬느비에브가 아니고 쥬르에요! 에이드리안은 쥬르라고 불러줬단 말이야!" 쥬느비에브의 잔뜩 화가 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을 안고 있는 쥬느비에브의 팔을 떼어내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레이디. 난...."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울먹이며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나, 알아요. 내가 에이드리안한테 얼마나 무서운 짓을 했는지도 알고, 에이드리안이 그것 때문에 날 싫어하리라는 것도 다 알아요. 나한테 질려버렸을 거야. 너무 무섭고 싫어졌을 거야. 하지만 난 에이드리안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뻔뻔하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랬으면 좋겠어." "쥬느비에브 양..." "날 기억 못 해도 좋아. 그래도 곁에 있어줘요. 난 이제 에이드리안이 없으면 너무 싫어. 너무 무서워. 밤마다 무서운 꿈을 꾸는데 에이드리안 방에 울면서 달려가도 에이드리안이 없어.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단 말이야. 훌쩍 훌쩍.....흐어어엉....그래도 에이드리안이 예전의 날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욕심꾸러기라고 해도 좋아. 흐, 흐어어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가리던 손으로 무릎을 잡고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흙바닥에 떨어져 흙을 동그란 모양으로 적셔갔다. 아마 에이드리안은 질려버렸을 것이다. 기억에도 없는 여자가 이렇게 울면서 매달리는데 아주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가버릴 지도 몰랐다. 쥬느비에브는 온갖 상상을 다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에이드리안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빼꼼 들어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쥬느비에브는 깨달았다. 에이드리안의 파란색 눈동자 색깔이 무척 옅어져 있었다. 새파랗던 눈동자 색이 파란 하늘처럼 옅은 하늘색으로 변해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새로운 발견에 눈을 깜빡이며 한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안이 은테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돌렸다. "어리광쟁이." "에?"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들고 눈을 끔뻑거렸다.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눈을 말똥말똥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그리운 듯한 말이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뒤돌아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잊어버리라며?" "에, 에이드리안?" "네 말대로 난, 쥬르를 잊어버렸어. 그런데 이제 와서 기억해 내라니 너무하잖아?" "에이드리안? 나, 알아요? 나 기억나요?" 쥬느비에브는 벌떡 일어나 눈물을 슥슥 닦고 물었다. 에이드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뒤돌아 섰다. "그렇게 옆에서 쟁쟁거리는데 시끄러워서 잠가뒀던 기억이 나와버렸나봐. 에스프라드 형도 별 수 없네. 기껏 부탁했더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 흐어어어어엉-----------"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에게 달려가 풀썩 안겼다. 에이드리안이었다. 에이드리안이었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쥬느비에브는 지금까지 울었던 것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터뜨려 냈다. 에이드리안이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셔츠를 눈물로 적시며 그에게 말했다. "에이드리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는..." "됐어. 슬펐던 일은 기억 안 나. 잊어버렸어." 에이드리안은 쥬느비에브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쥬느비에브는 눈물을 다 흘렸던 것인지 에이드리안의 품에서 벗어나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생글생글 미소지었다. "헤헤. 헤헤- 좋다. 에이드리안이 옆에 있어서." "아, 미안. 나, 당분간은 내 농장에 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은 너 혼자 있어야 겠어." "에에? 싫어요! 나,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있을래! 혼자 있는 거 싫단 말이에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다시 울먹이며 에이드리안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에이드리안~ 싫어요. 나, 에이드리안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계속 떨어져 있었잖아요. 싫어요!!" "알았어, 알았어." 에이드리안이 웃으며 쥬느비에브의 손에서 셔츠 자락을 떼어놓았다. 쥬느비에브는 에이드리안의 말에 눈물을 찍 달고 있던 눈을 슥슥 닦고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있을 거죠?" "알았어. 오늘은 너하고 있고 내일 떠날게. 처리해둘 일이 많아서 당분간은 거기 가 있어야 해." "에엣?" 쥬느비에브는 울상을 하며 에이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아- 오늘 정말 날씨 좋다. 진짜 봄이네..." ******** ...그래서 에이드리안은 또 다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날, 하루만 나랑 있고 떠나버렸어요. 정말 떠나가 버렸어요. 편지 한 장도 없습니다. 아유, 야속하다니까요. 칫, 오면 잔소리해줄 거에요! 쥬느비에브는 오늘도 눈물로 하루를 보냅니다. 아유, 쥬느비에브는 정말 불쌍하다니까요. 아참, 오늘 에슈비츠 가의 아버지가 은퇴를 하셨습니다. 뒤늦게 낚시에 취미를 들이셨다나? 그래서 낚시하러 멀리 떠나셨어요. 그래서 쥬느비에브는 에슈비츠 공작 부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념으로 모롤라나 먹어야 겠어요. 아유, 모롤라는 오늘도 맛나요. ******** 그리고 어느 날. 미라벨은 바구니 가득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빵을 담아 쥬느비에브가 있다는 정원으로 향했다. 쥬느비에브는 지금 스콜라를 나와 비인 가의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없는 사택은 싫다며 결국 가출을 했던 것이다. 가출한 쥬느비에브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에슈비츠 가의 영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비인 가로 갈 것인가. 쥬느비에브는 결국 땅 바닥에 길게 금을 그어 놓고 돌멩이를 던져 결정하기로 했다. 오른쪽이 비인 가, 왼쪽이 에슈비츠 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있는 힘을 다 해 던진 돌멩이가 금에 딱 물려 떨어졌던 것이다. 쥬느비에브는 배시시 웃으며 돌멩이를 슬쩍 오른쪽으로 밀었다. "비인 가의 에이드리안 집으로 가야지~" 결국 쥬느비에브는 짐을 싸들고 비인 가로 갔던 것이다. 한 때 병세가 악화되었던 일로나 할머니는 에이드리안이 아르헨에 돌아온 이후 쾌차하여 서방 제국으로 떠났다. 서방에서 유행하고 있는 레저 스포츠에 눈을 뜨셨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풍선 같은 것에 잔뜩 공기를 넣으면 하늘로 붕 하고 날아오르는 기가 막힌 게 있다고 하시며 떠나셨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쥬느비에브는 '기구'라고 하는 그것을 타고, 웃으며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할머니의 작은 초상화를 받게 되었다. 쥬느비에브는 또 다시 배시시 웃으며 또박또박한 글씨로 답장을 썼다. "할머니, 오실 때 그 '기구'라는 거 사 오세요. 저도 타고 싶어요. 헤헷." 쥬느비에브의 인생은 오늘도 '화창'이었다. 물론 에이드리안이 곁에 없다는 것만 빼고. 미라벨은 케이로프가 마차를 하인에게 잘 건네고 온 건지 궁금해하며 뒤돌아보았다. 멀리 붉은 머리결의 케이로프가 언 듯 눈에 들어왔다. 미라벨은 웃으며 발랄하게 걸음을 옮겼다. 내년에는 그와 결혼할 것이다! 1년만 기다리면! 그리고 쥬느비에브와 에이드리안도 이제 관계가 회복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년 겨울이나 그 다음 해에 아이를 낳으면 에이드리안 님의 사돈이! 미라벨은 감격스럽게 웃으며 정원으로 달려갔다. 미라벨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꽃으로 만발한 정원이 아니라 흙이 완전히 드러난 '밭'이었다. 한쪽은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정원이었지만 다른 한쪽은 고랑까지 나있는 '밭'이었다. 미라벨은 놀라 고개를 돌려 쥬느비에브를 찾았다. 얼마 안 가 쥬느비에브를 찾을 수 있었다. 쥬느비에브는 연두색 원피스 차림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까만 머리 한 쪽을 쫑쫑 땋아 노란색 리본으로 묶고 있는 쥬느비에브는 여전히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미라벨은 바구니를 한 쪽에 내려놓고 쥬느비에브에게 다가갔다. 쥬느비에브는 작은 통에 가득한 씨앗을 흙에 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라벨은 놀란 표정으로 '밭'을 둘러보며 물었다. "쥬, 쥬느비에브. 이게 뭐에요? 꽃은 다 어디 가고?" "에? 미라벨 언니, 왔어요?" 쥬느비에브가 방실방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라벨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쥬느비에브. 도대체 뭐하는 거에요? 정원이 엉망이 되었잖아요." "헤헤. 양배추 밭 만들어요." 쥬느비에브가 씨를 뿌리며 말하자 미라벨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배추 밭이요? 갑자기 양배추 밭은 왜요?" 미라벨은 말을 마치고 문득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케이로프가 걸어오고 있었다. 미라벨은 그에게 웃어주고 다시 쥬느비에브를 쳐다보았다. 쥬느비에브는 다시 씨앗을 꼼꼼하게 뿌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응. 나, 아기가 생겼거든요. 하우먼 선생님이 그러는데 올해 말에는 아기가 나올 거래요. 그 때 양배추 밭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아기는 양배추 밭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래서 급하게 양배추 밭을 만들고 있어요. 집 앞에 만들어야 아기를 찾기 쉬울 테니까요.' "뭐, 뭐라고요?" "뭐, 뭐라고?" 동시에 들린 외마디 비명에 쥬느비에브는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라벨과 곧 이어 도착한 케이로프가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미라벨과 케이로프, 두 사람은 동시에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렇다면 자신들의 가족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도대체! 아니, 그것보다... 미라벨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에요? 농담이죠? 쥬느비에브는 아직 '미혼'이라고요. 결혼도 안 했는데.... 그것보다 에이드리안 님도 안 계신데 어떻게 애를 가져요? 전처럼 그냥 소동이죠? 전에도 아기 가졌다고 난리가 났었잖아요!" "아, 아유. 부끄러운데..." 미라벨의 말에 쥬느비에브는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케이로프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쥬느비에브가 말했다. "쥬느비에브 엘 모르 에슈비츠 양, 에이드리안 님이 동방으로 떠난 지 3모네가 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아이를 가졌다니...말이 안 되는 군요." 쥬느비에브는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씨앗이 든 통을 만지작거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지, 진짜에요. 아기. 에이드리안이랑 내 아기가 생기는 거에요. 하우먼 선생님이 그랬다니까요."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다시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럼 설마? 설마 에이드리안 님이 떠나시기 전에 쥬느비에브랑 하루 같이 계셨던 것이?" "아아- 우리의 목표는...우리의 목표는.... 아버님이 결혼은 절대 내년에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아아-" 미라벨과 케이로프가 한동안 정신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쥬느비에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라벨 언니, 케이로프 님! 그 소식 들었어요? 유벨 오빠가요, 독신 선언 했대요! 그런데요, 안느마리 동생이요, 리즈벨리가 아무래도 유벨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유벨 오빠가 안아주면 안 운다니까요! 아유, 우리 아기도 예뻐야 하는데.... 헤헤! 양배추야 빨리 자라 줘~" 즐거운 듯 까르르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를 얄밉게 바라보며 미라벨과 케이로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웅크리고 앉아 어둠 속에 침잠하고 있는 미라벨과 케이로프와는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 속에서 한편, 쥬느비에브는 밝게 비치는 햇살 아래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제 또 한 명의 가족이 생겼다는 느낌에 너무너무 행복한 쥬느비에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 아저씨!! 좀 있으면 나올 아기말고 두 명만 더 줘요! 가족은 다섯 명이 좋아요. 꼬마 에드까지 합쳐서 다섯 명이랑 한 마리! 이게 딱 좋겠어요. 헤헤. 에이드리안, 빨리 돌아와요~" 쥬느비에브는 고개를 내리고 배시시 웃다가 멀리서 언 듯 보이는 그림자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단정한 금발의 그가 보였다. 쥬느비에브는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에이드리안? 나 여기에요! 에이드리안!" 쥬느비에브는 방실방실 웃으며 양배추 씨가 담긴 통을 꾸욱 잡았다. 어제도 신나고 보람된 날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멋진 날이 될 것 같았다! ******** 또 시간이 흘렀어요. 가족이 많이 생겨서 쥬느비에브는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쥬느비에브는 오늘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할 거에요. 에이드리안도 오늘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하겠죠? 그럼 난 에이드리안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는 거에요. 작은 행복이 모여서 이젠 정말 커다란 행복이 되었어요. 그렇게 모두 모두 행복해질 거에요. 아유, 정말 멋지죠? 그런 기념으로 모롤라를 하나 먹어야 겠어요. 아웅~ 모롤라는 정말 맛나요. 어어? 로렌! 그건 내 모롤라야! 에? 엘즈! 넌 모롤라 싫다며? 에이, 슈노! 모롤라, 내 모롤라! 에이, 모롤라 다 뺏겨버렸어요. 헤헷. 에이드리안한테 또 사 달래야지. 오늘도 즐거운 쥬느비에브에요. 슬펐던 일 때문에 매일 불행해질 필요는 없잖아요. 슬펐던 일을 대가로 삼아 더 행복해질 거에요. 그래서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해지고 말 거라구요! 그래서 내 주위의 사람들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에요. 멋지죠? 그럼 안녕! 모두 행복해집시다! 아유, 내가 말했지만 정말 멋져요. 진짜 안녕!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