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4 조회수: 1338 [번 호] 8591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05일 21:22 Page : 1 / 13 [등록자] EGALITE [조 회] 663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 REBIAN (레비앙) "아아~! 심심해 죽을 거 같아~!"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로 마치 시체 마냥 풀밭에 누워있던 미소년은 순 식간에 벌떡 일어나 앉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5월의 새파란 하늘... 청량한 공기가 숨막힐 듯 들어찬 작은 언덕 위에는 살포시 연 두빛의 바람이 나부끼고 있었다. 마치 산발이라도 한 듯 붉게 흩날리는 소년의 특이한 곱슬 머리카락은 그의 가냘픈 어깨 위에서 어지럽고도 탐스럽게 출렁거렸다. 타는 듯이 붉은 곱슬머 리와 대조적인 흰색 셔츠 깃은 마치 꽃받침처럼 약간은 도발적으로 세워져 있 었으며 길게 뻗은 소매의 레이스 끝으로 나온 가늘고 흰 손가락은 마치 자신 의 생명이라도 되는 양 긴 검을 꼬옥 쥐고 있었다.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한참동안이나 정겨운 눈길로 뇌살적인 외모의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엘스헤른 은 피식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심심해 죽을 지경에 이르른 저 미소년과는 벌써 10년째 친구 사이. 그런고로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다. "너.... 장가가고 싶은 거지? 괜찮은 계집이라도 꼬셔다 주련?" 나직하면서도 포근한 엘스헤른의 물음에 레비앙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에 희색이 돈다. "정말? 무슨 건수라도 있는 거야?" "으음. 몰랐나 보군, 자네. 내일 트리메르 후작 가에서 파티가 있다네. 자네 도 알다시피 트리메르 후작에겐 일곱 명의 딸이 있어 그녀들 또래의 숙녀들 이 많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네. 모르긴 해도 명문가의 영애라면 대부분 참석할 걸?" 엘스헤른은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파티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트리메르 후작 가의 파티? 내일?" 그러나, 막상 레비앙은 금새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뒤로 해 기대어 앉았다. 엘스헤른은 그의 그런 반응에 놀라워하며, 오히려 그런 깔쌈한 정보를 알려준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며 펄펄펄 날뛰기 라도 할 기세였다. "왜?! 왜 그러는 거야? 기껏 말해줬는데?! 뭐가 문제야? 나 몰래 애인이라도 사귀는 거야? 애인이 파티 같은 덴 가지 말래? 아니면 그런 파티엔 이제 흥 미를 잃은 거야? 응? ..... 그런 거야? .....서, 설마... 정력 감퇴?" 그 커다란 두 손으로 레비앙의 가냘픈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는 엘스헤른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은 그의 손을 탁 뿌리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말아. 열 여덟 살 나이에 정력 감퇴라니... 노인네들이 들으면 배꼽을 잡겠군." "그럼 뭐야?" "난 내일 입궐이야. 국왕 폐하의 어명이지. 황태자 전하와 즐거운 한때를 보 내라는..." 그제서야 엘스헤른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나 시원스레 웃던 엘스헤른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치켜올리면서 레비앙을 지긋이 응시했다. "잊고 있었지 뭐야. 자네가 황태자의 장난감이었단 사실을..." 장난감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레비앙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은 채 엘 스헤른을 향해 눈을 치켜 떴다. 엘스헤른의 말이 사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일 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절친하다고 하는 친구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엘스헤른이 저렇게 약간은 비꼬는 표정으로 그 런 식의 말을 할 때면 그와의 관계가 친구 사이가 아닌, 에스트르 왕국의 존 엄한 왕족과 왕가에 예속된 일개 귀족의 관계 같아 적잖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엘스헤른은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레비앙에게 빙긋이 웃어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그런 표정은 무섭다고. 황태자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 보모 되는 자네 가 그런 표정을 지어준다면 정서상으로 별반 좋진 않을 거야. 황태자의 외 삼촌으로서 심히 염려되는군." 엘스헤른이 아직도 깐죽거리고 있는 꼴을 더 이상 못 봐주겠는지 레비앙은 울컥 하는 심정에 쥐고 있던 검을 자루 째 그의 목에 겨누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구, 엘스헤른. 장난감이니, 보모니... 그런 소 리 듣고 싶지 않아. 나도 하고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어라라? 이건 반역이라고. 자네, 설마 왕족에게 칼을 들이밀었다는 오명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싶진 않겠지?" 그래도 여유를 잃지 않고 빙글거리는 그를 보면서 레비앙은 가득 표정을 구 겼다. 저 엘스헤른 녀석은 뭐가 좋은 겐지 항상 저렇게 싱글 벙글이다. 그렇 긴 해도 놀고먹는 왕족은 아닌 모양인지 가끔씩 국왕 폐하가 그의 능력에 대 해 이런 저런 칭찬을 늘어놓는 걸 볼 때면 레비앙은 지금 눈앞의 이 헤픈 녀 석이 국왕 폐하께서 총애해 마지않는 그 녀석과 동일 인물임을 당최 믿을 수 가 없었다. 레비앙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한동안 엘스헤른을 노려보다가 싸늘 한 바람이 일 정도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계속 죽치고 앉아 있다간 엘스헤른 으로부터 놀림을 당하게 될 시 분명하므로 얼른 자리를 뜨자는 심산이었다. "삐잇--." 레비앙이 손가락을 모아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어디에선가 홀연히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말 한마디가 경쾌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어라? 갈 거야? 레비앙." 엘스헤른은 그새 말 등 위로 훌쩍 올라앉는 레비앙을 바라보며 약간은 아쉬 운 표정으로 물었다. 레비앙은 그런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말고삐를 꽈악 움켜쥐었다. "왕족의 장난감인 미천한 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작 전하. 그럼 안녕히 가시지요." 레비앙은 말머리를 돌려 아르떼이유 가의 성 - 로자리움(rosarium : 장미정 원이라는 뜻)으로 향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이내 자리를 뜨는 레비앙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엘스헤른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녀석 또 삐진 게지... 언제나 토라지면 저런 표정으로 사라져버리곤 한다니까. "훗... 계집애 같은 녀석..." ·‥…━━━━…‥· 쿵짝짝 쿵짝짝... 왈츠의 삼박자 리듬이 로코코 풍으로 정교하게 꾸며진 홀의 내부를 가득 채우 고 있다. 홀 내부는 최고급 양초의 밝은 불빛을 받아 발그레하게 들떠 있었고 왈츠를 추고 있는 사람들은 그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 고 있었다. 확실히 왈츠 소리는 사람의 심장을 비정상적으로 들뜨게 하는 뭔 가가 있다.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마치 자신이 새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저 리듬... 하지만 엘스헤른은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서 파티장 을 빌빌 돌아다니는 건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그는 뺨을 가득 부풀려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역시 레비앙이 곁에 없으니 까 아무리 수많은 꽃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도 꼬드겨 보고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 "어머나~! 공작 전하,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호호호, 오늘은 죽마고우이신 레비앙 님을 때놓고 오셨군요.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어두운 건가요?" 꽃 같은 처녀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건만 어쩐지 재미가 붙지 않는 엘스 헤른은 그냥 붉은 와인이 담긴 크리스탈 잔을 들고 이리저리 배회했다. 울긋 불긋하게 채색된 파티장 안은 어쩐지 숨막힐 듯이 갑갑했다. 짙은 향수 내음 과 묘하게 들뜨는 분위기가 더더욱 그를 갑갑하게 하고 있었다. 뭔가 청량하 고도 시원한.... 그런 싸하면서도 자극적인 요소가 그에겐 절실했다. 엘스헤 른은 자꾸만 칼칼해져 오는 목을 축이기 위해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크 라바트(레이스 넥타이죠.;)를 느슨하게 잡아 당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역시 파티 같은 덴 오지 말고 사냥이나 갈 것을... 이래저래 후회가 막심한 그는 레비앙이 없으면 그 어떤 것에도 재미를 붙일 수 없는 자신이 어쩐지 한심스 럽게 느껴졌다. 어제 언덕에 앉아서, 괜스레 여자를 꼬셔다 주느니 운운 말은 그렇게 했어 도 사실 레비앙은 그다지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 만 큼 아직까진 그다지 후계자에 신경 쓸 처지도 아닌 게고, 그저 독서나 사냥, 혹은 토론 같은 것에나 취미를 붙이는 레비앙은 이런 파티에 나오면 항상 엘 스헤른과 같이 있어 줬고, 두 미남이 같이 있으니 온갖 꽃들이 모여드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었다. 그 때문에 엘스헤른은 그런 재미로나 파티에 오는 것이 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꽃들이 모여들어도 귀찮기만 할 뿐 재미가 없었 다. 엘스헤른은 자신이 들고 있던 포도주 잔으로 시선을 떨구고 재차 한숨을 지 었다. 발그레한 와인을 보니 어쩐지 그 녀석의 붉은 빛 금발이 떠오른다. 선 이 가는 어깨 위에서 무게감 있게 찰랑거리는 모습이 뒤에서 보면 마치 앳된 소녀 같은 느낌인데.... 곰곰 곱씹다보니 어쩐지 더더욱 레비앙 녀석이 보고 싶어 진다. "우음.. 나도 왕궁에나 갈 걸 그랬나?" 실없는 혼잣말에 스스로 피식 웃음을 지은 엘스헤른은 넌지시 고개를 들었 다. '...어라?' 잠시 뭔가가 시야에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어 이리 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 던 그는 문득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환한 붉은 빛의 잔영... 저건 붉은 빛의 곱슬머리... 엘스헤른의 입꼬리엔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레비앙의 붉 은 금발이다. 저 머리카락은 하도 특이해서 언제나 레비앙의 표식이 되어온 것이다. 물론 엘스헤른은 태어난 이래로 레비앙 외에는 저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맹세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붉은 머리카락의 소유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 궐한다더니 어쩐 일로 파티장으로 온 걸까? 훗... 놀래켜 주려고 그런 건가? 안 그래도 보고싶어 하던 차에 친구를 발견한 엘스헤른은 흐뭇한 미소를 띄면 서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엘스헤른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 TO BE CONTINUE - ==================================================================== 안녕하세요?^^ 펠티 괭이 인사드립니다. 짧은 글 하나 쓰려고 해요. 길어봤 자 중편이겠죠.;;; (얼마나 길어질지는 예상 못함.;;;) 뭐, 어두침침한 이야 기....도 아니고, 피 튀는 이야기....도 아니고, <피의 보석> 때 럼 허무맹랑 한 이야기.... 도 아니고, 구냥 사랑 이야기나 한 편 써 볼까 해서요.^^ (아 앗! 실망하고 떠나가는 사람들.... 가지마아~! <-- 바짓 가랭이에 매달리는 괭이.) 사랑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연재 도중에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군요. 좀 삐리리(?)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Y물적인 경 향이 없지 않다는 거죠. 그렇긴 해도 Y물은 아닌 거니까(우정을 과소 평가하 지 마세요!) 이봐, 당신! 처음부터 그렇게 얼굴이 새파래질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그 시대에는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성행했다고도 하니까 (물론 정신 적인 쪽을 선호했죠.;;) 아주 배제할 수는 없군요.; 그렇긴 해도 원작(1997년쯤에 썼던 걸로 생각됨.)에 비하면 이번에 리메를 하면서 많이 걸러진 건데.; 암튼, Y물은 아닌 겁니다.(우정이라니까!) 참!.. 이 글의 오무(五無)를 미리 말씀드려야 겠군요.(충격을 조금이라도 완화해보고저 하는..;) 뭐, 말해보자면 문학성 없음, 문장력 없음, 묘사력 없 음, 줄거리 없음, 주제 없음. 덧붙이자면 마법 없음도...;;; 흑흑..T-T 원래 제 글이 다 그렇죠 뭐.; (또, 배경이 가상이란 것 외에는 판타지적 요소가 전 무함.;;;;;;;) 암튼, 에스트르라는 유럽 가상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강력한 전제왕 권의 나라죠.^^ 하지만 뭐, 국제 정세 같은 건 설명 필요 없을 듯. (왜냐 면... 그냥 사랑 이야기니까.;;)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솨겠어요.^^ (<피의 보석> 리메이크 하라고 독촉해주신 아횬 양과 X천 양과 루X 언니, 나 이X 언니, 극악의 대가 제X슨 아찌, 귀연 X엘 양, 108마당쇠와 메X 군 그리 고 올리는데 용기를 주신 파X 언니와 팬X발톱 님, 나X지, 작은 미X 님, 리X 와 카X링, 타X번, X류, 케X, 글쿠 많은 판츠 사람들께 감솨..... 라고 했지 만 시상식도 아닌데 왜 이러지? -_-;;;)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4 조회수: 932 [번 호] 8611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06일 21:24 Page : 1 / 1 [등록자] EGALITE [조 회] 506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 REBIAN?!(레비앙?!) "뭐야? 저 녀석, 그 휘황찬란한 머리 장식은?" 저건 분명히 요즘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는 머리장식이다. 폭신한 타조깃 털과 윤기 흐르는 공단의 리본, 그리고 색색의 보석과 조화로 만들어진 머리 장식. 뭐, 별다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남자와는 상관없는 용도라는 것 이다. 즉, 여성용 머리 장식이라는 것! ....더 놀라운 점은.... 레비앙의 옷 차림이 예장이 아닌 아이보리색의 풍성한 드.레.스. 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프랑스에서 한창 유행 중인 로브 아 라 프랑세에즈라는 스타일의 옷으로, 어 디서 구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복장 하나만으로도 튀고도 남았다.) "뭐... 뭐야?" 미친 놈. 여자 취급하는 거 그렇게 싫어하면서 드레스까지 입 냐?" 엘스헤른은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레비앙 저 녀석 뭔가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어제, 입궐할거라 했던 것도 속임수였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참 별일이다. 드레스를 입혀놓으면 분명히 진짜 계집애들보다 더 계집애 같은 모양일 테지만, 그렇게 계집애 취급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녀석이 무슨 꿍꿍이로 저런 차림으로 파티에 참석한 걸까? 아무리 장난인 것으로 치부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다. 어렸을 때는 가끔씩 "너 계집애 아냐?" 등의 황당한 장난을 주고받긴 했어도, 세상에... 여장이라 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혹시, 레비앙이 아닌 걸까? 하지만, 저 머리카 락... 그리고, 야리야리한 뒷모습을 보면 레비앙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살금살금 레비앙의 뒤로 다가갔다. 그런 데... "어머! 공작 전하!" "에스트리온 공작 전하. 인사 올립니다." 레비앙 주변의 잡꽃들이 엘스헤른을 알아보고는 살포시 인사들을 하는 바람 에 뒤에서 기습을 하려던 그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소란스러운 그 녀들의 재잘거림 덕분에 붉은 금발이 먼저 돌아보고 만 것이다. 새하얀 얼굴 에 진초록의 눈동자... 아니나 다를까 레비앙이다. 엘스헤른은 내심 안도해 하면서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띄 운 채 레비앙을 응시했다. "레....." 그는 장난스럽게 친구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광경 에 자지러질 듯이 놀라고야 말았다. "......?!!" 드레스의 깊게 패인 목선을 따라 드러난 뽀얗고 풍만한.... ..... 가슴!!!! 엘스헤른은 하마터면 휘청해버릴 만큼이나 놀라 한 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이건.... 맙소사.... 이럴 리가 없다. 이, 이건.... 여장이 아니라 진 짜로 여자인 것이다!! 엘스헤른이 정신을 못 차리고 어리벙벙해 있자 주변의 잡꽃들이 재재재 웃 어댔다. "호호호, 공작 전하도 놀라셨죠?" "저희도 깜빡 속았지 뭐예요. 워낙에 레비앙 님의 머리카락 색깔이 특이한지 라..." "그러게요, 어쩜 레비앙 님과 똑같이 생기셨을까?" 저 참새들의 말대로 정말 얼굴은 레비앙과 똑같이 생겼다. 솔직히 이건 여 성판 레비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스헤른은 얼떨떨한 표정을 떨치지 못 하고 있다가 숙녀가 빙긋이 웃으면서 내미는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몽셰뇌르." *주 - 몽셰뇌르(Monseigneur) : 왕족에 대해 '전하'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어죠. 발음이 맞는 건지.^^;; 프랑스어... 그(녀)는 프랑스 태생이라 해도 무색할 정도의 완벽한 프랑스 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건 레비앙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레비앙이 얼 마나 프랑스어에 대해 문외한인지는 같이 공부한 친구로서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일! 레비앙과 꼭 빼 닮은 숙녀는 아직까지 얼떨떨해 하는 엘스헤른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가볍게 뒤돌아 서서 사람들 사이를 사뿐사뿐 걸 어다녔다. 넋을 놓고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 지 얼른 그녀의 뒤를 좇아갔다. 한달음에 그녀를 따라잡은 엘스헤른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실례라면 용서하십시오, 마드모아젤. 당신은 저의 친구와 너무나도 닮았습 니다. 당신의 꽃다운 이름을 제가 알게되는 게 무례가 되지는 않을는지..?" 엘스헤른은 극도로 예의를 갖추어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레비앙을 닮은 아가씨는 싱긋이 눈웃음을 짓더니 "글쎄요, 말씀드리고 싶지 않군요." 하고, 소름끼치도록 완벽한 프랑스어로 거절의 뜻을 표한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히 알고 싶으시다면 제가 묵고 있는 곳으로 예를 갖추어 찾아오세요. 저는 아르떼이유 가에 당분간 머물 생각이랍니다." 아르떼이유?! 엘스헤른은 그 단어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비앙의 패밀리 네임이 아르때이유... 그렇다면 이 숙녀는 레비앙의 성관에서 머물고 있다는 말인 데... 그녀가 레비앙의 집에 있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 거지? "자, 잠시만요!" 엘스헤른은 얼김에 숙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리넨 장갑의 빳빳한 레이스가 바스락거리며 그의 손바닥에 가득히 닿아온다. 그리고 숙녀의 진초록 빛 눈에는 약간의 짜증스러운 빛이 서렸다. "무례하시군요, 놓아주십시오." 또다시 들려오는 또랑또랑하고도 정확한 프랑스어의 발음에 엘스헤른은 슬 그머니 그녀의 손을 놓았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다가도 저 똑 부러지도록 정확한 프랑스어를 듣는 순간엔 어느새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겐지 흠짓 놀라곤 하는 것이었다. 숙녀는 기분이 상했는지 엘스헤른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걸음으로 사람들 사 이로 걸어갔다. 엘스헤른은 아직까지 레이스의 감촉이 남아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얼른 그녀의 뒤를 좇았다. 아르떼이유.... 어째 머리가 한없이 복잡해진다. 그녀의 저 탐스러운 붉은 금발을 보니 더더욱 그렇다. 저 빛깔은... 마치 해질 무렵의 노을 같은, 가을 에 물드는 단풍과도 같은 저 빛깔은 오직 한 사람, 레비앙의 것이다. 게다가 얼굴 생김까지 판에 박은 듯 똑 같으니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엘스헤른은 빠른 걸음으로 숙녀에게 다가가 또 한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 다. 자신이 무얼 확인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몰랐지만 그는 조금은 미심쩍은 목 소리로 나직히 말했다. "레비앙." 엘스헤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숙녀는 약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그의 옆으로 비켜섰다. 그가 자꾸만 가로막는 것이 귀찮은지 또다시 도망 을 칠 심산인 모양이다. 엘스헤른은 그녀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설마.... 레비앙?" 엘스헤른이 의혹에 찬 말투로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뿐만 아니 라, 그녀의 진초록 빛 눈에도 별다른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엘스헤른은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고 있 는 - 지금 눈앞의 여자가 레비앙일지도 모른다는 - 것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 인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같이 지내온 친구인데 레비앙 이 외모 외에는 그 어느 점도 여자라고 치부될 만한 곳이 없다는 것 따위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레비앙과 똑 같이 생긴... 그저 여자라는 점 밖에 는 의심스러울 게 없는 이 숙녀를 보니 엘스헤른은 어쩐지 가득히 혼란스러워 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뭔지는 잘 모를 일이었지 만, 그는 목소리를 착 깔면서 그녀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맞지?" 어깨를 붙들린 채로 약간은 거만하게 엘스헤른을 올려다보고 있던 숙녀는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보시다 시피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오늘 처음 뵈었어요." 숙녀는 미간을 살풋 찌푸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 스헤른은 애가 탔다. 저렇게 화난 모습까지도 똑같은 얼굴이 레비앙이 아니라 니.... 아, 아니지. 아까도 생각했다시피 레비앙이 여자란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그 녀석이 어떤 구석이 여자 같단 말인가?! .... .... 아닌가? .... 뭐 지?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게 맞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 고.... 엘스헤른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리를 정리하려고 노력하며 심호흡 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꽈악 붙들고 있던 숙녀의 어깨를 놓고, 그 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왜 레비앙과 똑 같이 생겼으며 그와는 무슨 관계인지..." 갑자기 정중해진 엘스헤른의 예의바른 태도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숙녀는 간결하게 대답을 던졌다. "저는 그의 누이이며 어제 막 프랑스에서 도착했습니다. 오늘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 어제 레비앙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구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엘스헤른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근데 레비 앙에게 누이가? ....아, 그러고 보니 레비앙이 아주 오래 전에 말해줬던 기억 이 불현듯 떠오른다. 정말 오래 전에 얼핏 이야기했던 거라 그간 잊고 있었던 사실.... 레비앙에겐 누이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에서 자란 쌍둥이 누 이.... 그래서 이 숙녀가 그토록이나 프랑스어에 능하고 프랑스식 예법에 충 실한 모양이다. 짧은 시간 동안에 마치 연극의 대본처럼 척척 맞아떨어지는 수많은 생각들 이 밀어닥쳐 감상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문득 숙녀의 눈을 쳐다보며 이 나 라의 왕족답게 다시 예를 갖추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실례했습니다, 마드모아젤. 저는 그의 오랜 친구인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 트리온이라고 합니다.." 뾰로통해 있던 숙녀는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의 정중함에 예의상 가볍게 미소를 띄었다. "공작 전하에 대해서는 레비앙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그는 언제나 편지에 전 하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적어서 보내거든요." 뭔가 더 말을 할 듯 하던 그녀는 그만 그 입술에 새초롬한 미소만 띄우고는 치마 자락을 살풋 올리며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가 반동으로 몸을 곧게 폈다. 몸에 완전히 익은 듯 한 프랑스식의 예법. 인사까지도 저렇게 하니 엘스헤른 은 조금은 체념이 되었다. "그럼 전 이만..." 숙녀는 천천히 걸으면서 엘스헤른과는 더 이상의 이야길 하고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스헤른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뭐라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붉은 금발은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뉴에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엘스헤른의 주변에는 그와 미뉴에트를 같이 추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꽃들이 모여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그 붉은 금발을 찾고 있었다. 귀엽고 경쾌한 삼박자의 미뉴에트 리듬과 함께 붉게 흔들리는 곱슬머리가 먼발치에 보였다. 사뿐히 움직이는 그녀의 아이보리색 치마 자 락...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누군가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의 상대 는.... "제기랄..." 그 잘난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이다. 레비앙의 또 다른 절친한 친구인... - TO BE CONTINUE - ==================================================================== 드디어! 2편입니다.^^ 기다려주지 않으신 거 다 알아요... T-T 재미없다는 것도 다 알아요.... T-T 하지만 꿋꿋이 하렵니다!! (매일 연재는 힘들어.;;) 방학을 해서 짬이 났으니 쓰는 거지만, 개학을 하면 또 실습이고 언제 연중이 될 지 모르니 방학 안에 다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답니다.^^ (무, 물론 피의 보석 리메이크도 할 거예요. 조금만 기둘려 주세요..T-T .....라지만 과 연 짬이 날는지.;;) 여전히 강조하는 거지만서도, 이 글은 그 유명한 오무(五無의) 정신(문학 성, 문장력, 묘사력, 주제, 줄거리 없음)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아아~! 허접 글의 비애여~!) 아, 참! 글 읽는 도중에 이런 의문을 가지실 분이 있을 거 같아 미리 말씀 드립니다. 레비앙의 누이와 레비앙은 성별이 다른 쌍둥이죠. 이란성 쌍둥이는 잘 닮지 않는다는데, 어째서 얼굴도 모습도 똑같이 생겼다고 나오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물론, 저로서도 할 말 없슴다. 이봐! 당신! 왜 그런 걸 물 고 늘어지냔 마랴~! 뭐, 구냥 가볍게 봐 주세요.;; 그럼, 더욱 흥미진진하지 못한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5 조회수: 874 [번 호] 8656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07일 23:19 Page : 1 / 12[등록자] EGALITE [조 회] 477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 REBIANNE(레비안느)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엘스헤른이 레비앙을 찾아간 것은... 아니, 레비앙 의 집으로 그의 누이를 보러 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 로자리움(레비앙 네 집) 성관에 도착하자마자 엘스헤른은 다짜고짜 레비앙을 붙들고 그의 누이 를 내 놓으라고 성화였다. 그건 그가 어젯밤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 백작 때문 에 레비앙의 누이와 단 한 번도 춤을 춰 보지 못한 것과는 절대로, 정말로 절 대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과연.;) 아무튼, 누이를 내 놓으라는 엘스헤른 때문에 극도로 피곤해진 레비앙은 그 를 말끄러미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자고 있어. 어제 피곤했나보지." "물론 그랬겠지. 파티 내내 에르띠낭 백작과 쉬지 않고 춤췄으니까." "하지만 뭐, 자고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레비앙은 더 이상 어쩌겠냐는 투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니 엘스헤른도 어쩔 수 없을 밖에.... 엘스헤른은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우겼고 레비앙은 그런 그를 보며 조금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아마 어지간해서는 기다리기 힘들 거야. 그녀는 해가 중천에 뜨기 전 까지 는 일어나지 않을 걸? 프랑스 여자들은 다 그런 다나?"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레비앙의 말투에 엘스헤른은 한 풀 기운이 꺾인 표정이다. 그러고 보면 여자 하나 때문에 아침부터 로자리움에서 이 소 란을 피우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또 왕족 체면에 한나절 동안이나 여자를 기 다린다는 것은 더더욱 우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기다려 보라고. 아마 점심 식사는 같이 할 수 있을 거야." 입궐을 위해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레비앙은 던지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엘스헤른을 향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고귀하신 공작 전하께서 레비안느에게 그렇게 관심을 표하 시는 이유가 사뭇 궁금해지는군. 자네의 그 천성적인 늑대 근성 때문인지, 아니면 어젯밤의 퇴짜 때문인지...? 가득 비웃음이 섞인 레비앙의 말에 엘스헤른은 미간을 찌푸렸다. 레비안느 인지 뭔지, 레비앙의 누이가 어제 저녁의 일을 이야기 삼아 모두 레비앙에게 말한 모양이다. 레비앙은 마치 벌레라도 씹은 듯한 엘스헤른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자네의 그 표정 정말 볼 만 하군." 그는 약이 올라 얼굴이 새빨개진 엘스헤른을 뒤로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현 관으로 향했다. 엘스헤른은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양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는 레비앙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가 놀린 것을 곱씹고는 완 전히 토마토가 된 얼굴을 하고선 집사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으로 향했다. 과연 레비앙의 말대로 레비안느가 손님방으로 온 것은 무려 다섯 시간이 지 난 오후 한 시였다. 그녀는 아랫단에 초록빛의 작은 잎사귀 무늬가 수놓아진 하얀 드레스를 입고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났음이 분명 하지만 말끔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등장한 그녀는 안내를 해준 하녀를 내보내 고는 가볍게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조금은 당돌한 모습으로 엘스헤른 앞에 다가섰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구요? 공작전하." 엘스헤른은 깔깔하고 인정머리 없이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분통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싱긋이 웃었다. "그렇습니다, 마드모아젤. 마드모아젤 아르떼이유를 만나 뵙기 위해 이곳에서 무려 다섯 시간을 기다 렸습니다만..." 엘스헤른이 <다섯 시간>이라는 단어에 무척이나 힘주어 말했음에도 불구하 고 레비안느는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이... 아니,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꽤나 당돌하게 엘스헤른의 맞은 편 의자에 사뿐히 앉았다. "용건이 뭐죠?" 엘스헤른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땠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비안느 의 말을 듣고 보니 스스로도 별로 용건이 있어서 찾아 온 건 아니다. 그는 약 간 우물쭈물 하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일순 입꼬리에 미소를 띄웠다. 레비안 느는 그런 그가 어쩐지 미심쩍은 모양인지 약간 경계하는 눈빛을 지었다. 아 니나 다를까, 엘스헤른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오늘 이렇게 찾아온 용건을 거창하게 늘어놓았다. "글쎄요, 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어제의 퇴짜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나 할까요?" 엘스헤른의 말에 레비안느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복수하실 생각이죠?" "으음... 저도 생각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가지 생각이 나네요." 엘스헤른은 종시 싱글거리면서 뭔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하루 종일 마드모아젤 아르떼이유를 좇아 다니면서 괴롭혀 드릴까요? 아니 면... 아, 이것도 좋겠군요." 엘스헤른의 엉큼한 웃음에 레비안느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엘 스헤른은 그런 숙녀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슬그머니 일어서서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짧고 굵게 단 한 번의 키스로 끝내는 건 어때요?" 숙녀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백지장 같이 하얀 얼굴이 더더욱 새하얘졌 다.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는 뭔가 가득 아니꼬운 듯 팔짱을 딱 낀 채 엘스헤 른에게 대들었다. "무례하시군요. 전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시죠, 공작 전하. 당신 같은 사람이 레비앙의 친구라니.... 정말 역겹군요." "푸훗... 레비앙도 저와 같은 상황이라면 맹세코 그랬을 테죠." 엘스헤른의 깐죽거림에 레비안느는 가득히 노한 얼굴로 획 돌아섰다. 그녀 는 금방이라도 이 자리를 떠버릴 기세로 빠르게 몇 걸음을 옮겼다. 엘스헤른 은 레비안느가 채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녀를 좇아가 손목을 가볍게 낚아챘 다. "아직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마드모아젤." "대답할 필요를 못 느끼겠군요. 당신 같은 사람과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전 이만..." 레비안느는 도도한 표정으로 엘스헤른을 올려다보며 그의 손을 획 뿌리치고 는 한달음에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 그녀의 도도함에 엘스헤른 은 은근히 더 장난기가 뻗쳤다. 귀족집 계집애들의 허영에 가득 찬 이런 쌀쌀 한 면은 언제나 그의 구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아니던가? 엘스헤른은 그녀가 채 문을 다 열기도 전에 한 팔로 문을 밀어 닫아버렸다. 때문에 레비안느는 거의 울상이 되고야 말았다. 치맛자락이 문에 끼어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을 뿐더러 지금 엘스헤른이 등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 고, 또 바로 코앞에는 문짝이 버티고 있다. 엘스헤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 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숙녀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이제 항복하시지요, 마드모아젤. 당신이 반항하실 수록 저는 더 재미있어집 니다." 엘스헤른의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가득 역겨워진 숙녀는 그래도 오기가 남았 는지 싸늘하게 외쳤다. "천만에요!" 엘스헤른은 승리에 도취된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의 붉은 금발에 입맞추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순간 예상치도 못한 숙녀의 공격이 가해졌 다. 레비안느가 엘스헤른이 방심한 틈을 타서 뒷발질로 그의 정강이를 힘껏 차버린 것이었다! 뾰족한 비단 하이힐로 정강이를 쪼인 엘스헤른은 소리도 못 지르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뒤가 자유로워진 레비안느는 가득히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한 번 돌아보더 니 표독스럽게 그를 한 번 비웃어 주고는 유유자적하며 호로록 나가버렸다. 엘스헤른은 간신히 의자를 찾아 앉아서는 채인 곳을 쓰다듬으며 쓰라린 아픔 에 눈물을 찔끔거렸다. "Diantre!!(제기랄!!)" - TO BE CONTINUE - ==================================================================== 허접인데다가 분량마저 적다니...; 용서해주세요.. T-T 하지만 길게 써 놓 고 자르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게 되네요.;; 대신 저의 주저리로 한 두 페이 지 정도를 때울까 합니다. .....집어치라고요?;;; 지금은 7편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레비앙이나 레비안느 에 대한 이런 저런 묘사만 늘어놓았지 엘스헤른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없 군요. 원래 잘 생긴 놈인데...; 뭐, 3인칭 시점이지만 엘스헤른이 화자가 되 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을는지도..;; 구상할 당시엔 레비앙이 주인공 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쓰다보니 엘스헤른이 주인공이로군요.; (바보 펠 티.;;) 으음, 1편 잡담에 Y물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저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 파래졌던 분들은 이쯤 되면 얼굴색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다지 그런 분위기가 없었으니 말이죠.^^ 맞아요. 엘스헤른은 여자를 좋아하지 요. 하지만 방심하시면 안됩니다! 오오, 위험 인물이 속속 도착을 하는군 요.(7편을 쓰고 있는 현재.;) 흠냐, <레비앙 & 레비안느>의 일러스트를 두 달 전에 그려뒀었는데,(그 때 당시 1편을 쓰고 있었던 관계로.)지금 분위기랑은 많이 달라서 올리고싶지 않 아요...T-T 그러고 보면 레비앙은 구상할 당시의 일러스트(1997년 작)보다 훨 씬 섹쉬해졌고, 그건 덩달아 레비안느도 마찬가지고, 엘스헤른은 약간 멍청해 졌습니다.; 엘스헤른을 멋지게 키우려고 했지만, 이미 손을 떠난 자식은 마음 대로 안 되는군요. 응? 위 글을 읽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군요. 하긴, 구상은 언제고, 쓰기는 언제고.... 중얼중얼 하니 말이죠. 정확히는 1997년에 구상 및 대충 쓰기(노트에 썼음)를 했고 리메이크 버전을 쓰기 시작한 건 거 의 두 달 전쯤입니다. 주절주절 이야기가 써 있는 옛 노트를 발견하게 된 게 화근이었죠. 뭐, 1997년 당시엔 눈에 고립되어(제 생애에 그런 일도 있었던 겁니다.) 할 일이 없었던 관계로 이상한 노란 종이의 노트(그것 외엔 구할 방 도도 없었어요!)에 택도 없는 이야길 끄적이곤 했죠. 오오! 정말 잡담으로 한 페이지를 때웠군요! 돌 맞기 전에 관둬야겠습니 다.^^ 그럼 4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5 조회수: 732 [번 호] 8693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08일 22:28 Page : 1 / 15[등록자] EGALITE [조 회] 461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 엘스헤른, 수모의 나날. 다음날도 어김없이 엘스헤른은 아침 일찍부터 로자리움으로 달려왔으나, 이 번엔 레비앙조차 그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라는 레비앙의 전 갈을 전하는 집사를 어르고 협박하고 회유한 끝에, 견디지 못한 집사의 설득 으로 손님접대실로 나타난 레비앙은 뭔가 못마땅한 듯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엘스헤른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대뜸 물었 다. "너, 어제 레비안느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다면서?" 레비앙이 다짜고짜 화를 내자 엘스헤른은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저번 파 티 때의 일 이후로 알게된 것이지만, 이들 남매 사이엔 비밀이란 없나보다. 필시 어제 화가 난 레비안느가 레비앙에게 이런 저런 고자질을 했으리라. 그 것도 아주 부풀려서 이야기했을 지도 모르지. 물론, 레비앙은 펄펄 뛸 기세였다. 명색이 죽마고우라는 녀석이 자기의 둘 도 없는 누이를 해꼬지 하려고 했다면서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는 가득 히 화가 난 모양으로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평소 엘스헤른의 행실 중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이번 일과 연관을 해 이런 저런 핀잔을 늘어놓았다. 눈살을 가득 찌푸리고 초록색의 아름다운 눈에 노기가 가득 서려서는.... 레 비앙이 화내는 폼이 꼭 레비안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 동안 주눅이 들 어 있던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쿡쿡 웃고야 말았다. "왜 웃는 거얏? 너, 반성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계속 그러면 다 시는 로자리움에 발끝도 못 딛도록 하겠어." "푸후훗... 미안, 난 그저 너와 레비안느가 정말 화내는 것까지도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 말에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곱게 흘기면서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괜히 말 돌리려고 하지 마.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 가버리기가 너의 특 기란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너, 앞으로 레비안느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 했다간 봐.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레비앙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싸늘한 말투로 말하고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가? 레비앙." 엘스헤른이 따라 일어서자 레비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입궐하라는 국왕 폐하의 어명이야. 자네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자네 같은 왕족이야 놀고먹어도 녹봉이 나오지만, 나 같은 평범한(?) 귀족은 국왕 폐 하의 눈에 나지 않아야 먹고 살 수 있다구." "쳇, 늙은이 같이 구는군. 이봐, 레비앙 군. 넌 고작해야 열 여덟 살이라고. 그런 먹고 살 일에 대한 걱정은 아르떼이유 경(레비앙의 할아버지)이 해야 옳은 거 아냐?" 엘스헤른은 뭔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려다가 레비앙을 바라보면서 싱긋 이 웃었다. "음... 여차하면 내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평생동안 공으로 먹고 살 수 있도 록 해 줄 수도 있어." 그의 그런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레비앙은 또다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너 한 번씩 그러는 거 정말 밥맛인 거 알아? 네 지위가 무진장 높아서 거의 폐하와 맞먹을 정도란 것쯤은 익히 알고 있지만 말야, 레비안느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군다면 넌 영원히 퇴짜 맞을 걸?" 레비앙은 뭔가 더 쏘아붙이려다가 말고 그만 돌아섰다. 그러고는 엘스헤른 에게 까딱 목례를 하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렇게 몇 번씩이나 로자리움을 들락거렸지만 두 남매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엘스헤른을 잘 만나주지 않았다. 여차저차해서 엘스헤른은 자존심이 극도로 상했으나 여전히 로자리움을 방문했고, 그러고는 두 남매에게 교대로 퇴짜였 다. 그러던 와중에 그의 쫀심이 완전히 구겨진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건 다 름 아닌 엘스헤른이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으로 인한 것이며, 퐁띠에 백작 가의 파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레비앙이 국왕폐하에게 자주 불려 가 바쁜 관계로 파티에 같이 참석할 수 없어 기분이 상한 엘스헤른이었지만, 그도 나이가 스무 살인 만큼 집에서 파티 같은 데에 등 떠밀어 보내는지라 안 올 수도 없는 일이었 다. 에스트리온 가에서는 그가 얼른 참한 아가씨를 건져 하루빨리 장가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으나 막상 당사자인 엘스헤른은 아직까지는 그다지 장가가 고픈 마음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인생은 즐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그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따라서 한 여자에 얽매이는 삶이 이 피끓는 젊 은 청춘에게는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형님과 부 모님의 따가운 눈초리에 집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지라, 기대에 찬 그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파티장을 배회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레비앙 없는 파티는 <노른자 없는 달걀 후라이>라는 생각에 잠겨 파티장을 빌빌 돌아다니던 엘스헤른은 레비안느가 또 이 파티에 참석한 것을 발견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의 주변엔 온갖 잡벌들이 윙 윙대고 있었다. 물론 잡벌들 가운데서도 왕 잡벌인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도 레비안느의 곁에서 그 가식적인 웃음을 띄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레비안느에 게 며칠간 받아온 퇴짜로 인해 기분이 상해있던 터라 그 광경이 그렇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엘스헤른은 그 잡벌들의 뒤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뭐, 에스트르 왕국 최고의 귀족인 에스트리온 가를 무시할 잡벌들은 없는 모 양인지 그의 기침소리 하나에 레비안느 곁에 모여있던 남정네들은 모조리 엘 스헤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앞길을 터 주었다. 유유자적하며 레비안느 앞에 당도한 엘스헤른은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또 뵙게 되는군요. 마드모아젤." 그가 정중한 말투로 인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비안느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 으며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인사도 받아주지 않겠다는 투다. 프랑스 예법 상 숙녀가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숙녀에게 아무 말도 건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는 엘스헤른은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비 안느는 그런 그를 본체 만체 하고는 리하르트가 내미는 손에 가볍게 손을 올 리고 미뉴에트를 추기 위해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버렸다. 주변의 잡벌들은 차 마 자신들의 목전에서 퇴짜맞은 왕족을 비웃지는 못하고 웃음을 참느라 죽을 상이 되어서는 그의 주변을 슬슬 피했다. 그쯤 되자 엘스헤른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프랑스 예법!! 대 에스트르 제국의 왕족으로 <에스트 리온>이라는 성을 쓸 수 있는 영예로운 가문의 일원으로서, 이런 모독은 도저 히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은 허리를 빳빳이 펴고는 자존심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을 때 짓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미뉴에트를 추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약간은 냉소를 띈 엘스헤른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얼떨떨해 하는 레비안 느와 리하르트에게 다가서서 딱 부러지게 정확한 에스트르 어로 레비안느에게 말했다.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당신이 프랑스에서 자라셔서 프랑스의 예법에 몸에 베신 것 같은데 여기는 에스트르입니다. 저는 에스트르의 예법으로 당신을 대하도록 하지요." * 주 - 프로이덴느(froydenne) : 미혼녀에 대한 존칭으로 "마드모아젤"의 에스트르 말입니다. 물론 지어낸 말이죠. (하하핫.;;) 엘스헤른은 당황해 하는 레비안느를 향해 씨익 웃어주고는 리하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하르트는 아직도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왕족이 에 스트르의 예법을 들먹이자 긴장했는지 조금은 어색한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엘스헤른은 그런 그를 실컷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숙녀의 앞인 이상 참아주기 로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리하르트에게 무언의 뜻을 전했다. 리하 르트는 두말 없이 그의 손위로 레비안느의 손을 인도해 주고는 엘스헤른에게 목례를 했다. 엘스헤른은 그런 그를 무시하고서 레비안느의 가늘 가늘한 허리 를 한쪽 팔로 감싸안은 채 그녀의 귀에 나직히 속삭였다. "왕족에 대한 모독으로 아르떼이유 가가 멸족 당하는 것을 원한다면 지금 반 항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웃으면 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파티가 끝날 때까지 저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굳건하고도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나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은 영예로운 나의 이름을 걸고 기필코 당 신을 굴복시키겠습니다." 말을 마친 엘스헤른은 미뉴에트의 음악에 맞춰 그녀를 끌어당겼다. 레비안 느는 모욕감에 가득히 붉어진 얼굴로 엘스헤른을 한 번 노려보고는 억지로 웃 으려고 노력했다. 가만있지 않으면 멸족시켜버리겠다는 협박이 두렵긴 했나보 다. 그도 그럴 것이 레비앙에게 들었다면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에스트르는 지금의 여느 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라서 프랑스의 태양왕 저리 가라 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및 전재 왕권을 확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왕족에 대한 예우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더더욱, 대대로 왕비를 배출해온 에 스트리온 가문은 왕의 방계보다도 월등한 지위를 가지는 명실상부한 에스트르 최고의 가문인데다가, 그런 가문의 차남이자, 그 누이가 왕비전하인 엘스헤른 인 만큼, 웬만한 귀족 하나 멸족시켜버리는 것쯤은 그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 름없었다. 모멸감에 얼굴이 빨갛게 되어버린 레비안느는 그의 무례함에 치가 떨릴 지 경이었지만, 에스트르는 프랑스와는 다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문을 지키 기 위해서라도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파티가 끝날 때까지 엘스헤른의 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파티가 끝나자 마자 마치 떨치기라 도 하듯이 그의 곁을 떠나서는 얼른 밖으로 달려나왔다. 엘스헤른은 여유롭게 그녀를 좇아 나와서는 마차에 오르려 하는 그녀를 붙들었다.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댁까지 에스코트 하고싶습니다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숙녀는 차갑고도 매몰차게 말하고는 마차의 문을 닫으려했다. 그러나 그녀 가 문을 닫지 못하게 한 팔로 버티고 있던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띄우더니 이내 그녀의 마차에 올라 타버렸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레비안느는 가득 굳은 표정으로 엘스헤른을 외면했다.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엘스헤른은 마차가 움직이고서 얼마 지나지 않 아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씨익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 에 손을 둘렀다. 레비안느는 흠칫 놀랬는지 눈이 동그래지더니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손이 무색해진 엘스헤른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서 자기 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엘스헤른의 바로 코앞까지 끌려온 레비 안느는 그를 뿌리치려고 바둥거렸고, 엘스헤른은 그녀를 마차 벽에 바짝 밀어 붙였다. "호오~~. 장난치기를 좋아하시는군요, 프로이덴느. 저도 장난치기를 무척 좋아하지요. 까탈을 부리는 귀족 계집과는 더더욱..." 레비안느는 당황하긴 했는지 입술을 가볍게 악물고 있더니 그래도 양가집 규수로서의 도도함은 잃지 않으려는 듯이 엘스헤른을 노려보았다. "당신 같은 저질과 내 동생이 친구라는 건 두고두고 우리 가문의 수치가 될 거예요.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한다면 당장 내일부터는 레비앙과 인연을 끊을 각오를 하시는 것이 좋을 걸요!" 레비안느의 표독스러움이 못내 귀여운 듯 엘스헤른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안될 말씀이죠,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그는 나의 절친한 친구요. 여 자 하나로 의가 상할 만큼 레비앙이 속 좁은 사람은 아니지요. 그건 그의 누이인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죠? 물론, 레비앙이 당신 일에 다소 민감 하긴 해도 이런 일을 문제 삼아 10년 지기 친구와 인연을 끊을 리 없을 뿐 더러, 만에 하나 그런다고 하면 아마 그는 세인의 웃음거리가 될 거요. 장 래가 촉망받는 젊은이가 벌써부터 악평을 받게 되는 건 곤란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프로이덴느." 엘스헤른의 조목조목한 말에 레비안느는 분해서 입술까지 파르르 떨었다. 엘스헤른은 그러는 그녀가 너무나도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 끝을 받 쳐 올렸다. 흠짓 놀라면서 동그래지는 그녀의 커다란 초록색 눈을 바라보면서 엘스헤른은 의외라는 듯 피식 웃었다. "왜 놀라십니까? 프로이덴느. 프랑스에서 놀다 오셨다면야 이 정도는 능숙하 실 텐데요." 엘스헤른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녀에게 바짝 다가앉아서는 슬그머니 고개 를 가까이 숙였다. 입술이 마주 닿자 어쩐 일인지 레비안느는 전혀 반항을 않 는다. 물론, 이런 기회를 고이 놓칠 엘스헤른이 아닌지라, 그는 그대로 그녀 에게 키스해버렸다. 기분 좋으리만큼 따스한 그녀의 입술을 만끽하면서 엘스 헤른은 그녀가 가볍게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언제까지나 도도할 것 같던 레비안느의 초록빛 눈에는 한가득 눈물이 고여 있 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무표정하게 엘스헤른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획 돌려 그를 외면해버렸다. 괜히 머쓱해진 엘스헤른은 여지껏 붙들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슬그머니 놓 아주고는 뭐라 말해야 할 지 몰라 망설였다. 그녀가 울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 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장난이었고, 정도가 지나쳤다면 그가 왕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상한 것 때문에 오기가 생겨 그런 것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프로이덴느. 당신을 울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엘스헤른이 나직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를 했으나 레비안느는 구석으로 획 돌아앉고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울먹거리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손끝으로 가만히 입술을 막고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레비안느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엘스헤른은 더더욱 무안 해졌다. "저... 프로이덴느..." 엘스헤른은 넌지시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얀 리넨 자수가 놓여진 손수건을 흘깃 쳐다본 레비안느는 별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 쥐고는 주르륵 흘러내리 는 눈물을 가볍게 닦았다. 로자리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을 안 했고, 이러저러해서 두 사람의 기분은 최악이 되고야 말았다. - TO BE CONTINUE - ==================================================================== 저번의 부실함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이번 편은 좀 양호한 분량이군요.^^ (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허접하게 자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 괭이.;;) 어 쩔 수 없다구요. 5편 정도의 분량은 길게 줄글로 되어 있어서 자른다고 자르 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구요. 비축분을 마련하기 위한 고초를 생각해 주세 요~! (라고 아양을 떨어보나 소용없다.;;) 흠냐.^^ 오늘은 분량이 많으니 주저리를 조금만 떨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 다.^^ 핫핫. 이렇게 많다니.... (라지만 이어지는 5, 6, 7편은 정말..;) 그럼 담 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6 조회수: 729 [번 호] 8722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09일 21:26 Page : 1 / 1 [등록자] EGALITE [조 회] 437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 한여름의 눈꽃(KESIRNIA) - 화해 뭐, 결과야 어쨌든 엘스헤른은 신사였던지라, 레비안느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분간 레비안느는 엘스헤른이 눈 앞에 나타나지 않 기를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날 그렇게 강제로 키스를 해 버린 사람을 다시 보고 싶을 리는 없을 게다.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엘스헤른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 았다. 그는 레비안느의 마음을 헤아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동안 로자리움에 놀러가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트리온 성관에서 빌빌거리면서 내내 생각해봐도 절친한 친구의 누이와 이런 식으로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레비앙과 다시는 얼굴 안 보고 살 것도 아니니, 그가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날을 잡아 다시 로자리움을 방문했다. 예상한 대로 레비앙 역시 몹시 화가 난 모양인지 그를 반기지 않았을 뿐더 러 아예 외면까지 했다. 절대로 만나주지 않겠다는 전갈을 집사를 통해 전해 온 것이었다. 물론 그가 그런 식으로 나오리란 것을 잘 알고 있은 엘스헤른이 었지만 그래도 막상 얼어붙을 듯 차가운 레비앙의 전언을 듣자 어쩐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이 났다. 뭐, 그런다고 그대로 돌아갈 엘스헤른은 절대 아니었 다. 저번처럼 엘스헤른이 집사를 꼬드긴 끝에, 시달리다 못한 집사의 푸념이 지 겨워 겨우 손님방으로 나온 레비앙은 도끼눈이 되어 그를 노려볼 뿐 단 한마 디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레비앙을 보자니 아무리 능구렁이인 엘스헤른 이라도 그를 풀어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레비앙의 눈치를 살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급기야 왕족의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수모까지 마다 않고 용서를 빌었다. 물론 왕족이 무릎을 꿇는 바람에 흠칫 놀래며 하마터면 덩달아 무릎 을 꿇을 뻔 했던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노력 끝에 한참 후에야 좀 누그러진 듯 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눈빛은 지우지 않고서 엘스헤른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앞으론 레비안느에게 그런 짓 하지마." 물론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지만 레비앙이 말을 걸어 준 사실만으로도 눈물 나게 감격해버린 엘스헤른은 레비안느에게도 사과를 하겠으니 그녀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레비앙은 자신의 끈질긴 친구를 싸늘한 표정으로 물끄러 미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 쉬며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역시 그런 걸까? 레비안느는 아마 레비앙에게 다시는 그런 무례한 사람은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레비앙이 저렇게 언짢아하며 화를 낼 정도인데 당사자인 레비안느야 오죽하랴! 뭐, 레비안느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 십분 당연한 일이지만, 엘스헤른은 오늘 여기에 찾 아온 목적을 달성해야 했으므로 레비앙의 바지가랑이에 매달리기라도 할 모양 으로 애걸복걸했다. "레비안느를 만나보고 용서를 빌게 해 줘. 그래야 나도 좀 체면이 살지." 그러나 레비앙은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 만나보기 힘들 걸?" "아니, 왜?! 그녀가 만나주기 싫다고 그런 거야? 아니면 네가 그녀에게 다시 는 나를 만나지 말라고 한 건가? 아니면 너희 부모님이? 아니면...." 엘스헤른의 말이 주절주절 길어지자 레비앙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자고 있어." 언제나처럼 엘스헤른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죽여가면서 한나절을 꼬박 기다 린 끝에야 모습을 드러낸 레비안느는 어째 좀 피곤한 모양새였지만 여전히 도 도하게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급히 손질을 했는지 약간은 부스스한 머릿 결이었으나 여전히 탐스러운 붉은 빛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엘스헤른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한시름 놓았으나, 그녀를 울렸던 전과가 있 기 때문에 몹시도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 그녀에게 잠시 시간을 내 어 줄 것을 부탁했다. 레비안느는 느닷없는 엘스헤른의 부탁에 짐짓 경계하는 눈빛을 띄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엘스헤른은 자신이 완전히 나쁜 놈으로 낙인찍혀버린 것이 상당히 괴로웠으나, 한결같이 웃는 표정으로 숙녀에게 결 코 저번과 같은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철석같은 맹세를 했다. 레비안느는 못 내 못 미더운 표정을 떨치지 못했지만 엘스헤른의 정중하고도 진지한 표정에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자신의 말에 태운 엘스헤른은 말고삐를 느슨히 잡고 천천히 말을 걸렸다. 엘스헤른이 그녀를 뒤에서 가볍게 안은 포즈가 되자 레 비안느는 또 흠칫하며 흘깃 그를 노려보았다. 억울해진 엘스헤른은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레비안느는 머슥했는지 가볍 게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린다. 마치 어린 고양이 같이 구는 그녀의 행동에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곧 약간 빠르게 말을 몰았다. 초여름의 훈훈한 바람이 레비안느의 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는다. 그런 그녀에게서 풋풋한 분 내음과 함께 아련하게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어째 참 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엘스헤른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비록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묘했다. 엘스헤른의 말은 어느새 그가 살고 있는 고성으로 통하는 숲으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타박타박 말을 달리던 끝에 엘스헤른은 잠시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그러고는 차 분한 목소리로 레비안느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레비앙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것 이지만, 숙녀분께는 어제의 제 무례를 사죄하는 뜻에서 보여드리는 겁니 다." 숲의 중간 즈음에서 엘스헤른은 길이 아닌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말이 약간 거친 길을 달리고 있긴 해도 숙녀는 어쩐지 말에 익숙한 폼이다. 아무리 어릴 적부터 프랑스에서 자랐다고는 해도 역시 에스트르의 여인답다. 조금 새초롬하고 앙칼스럽긴 해도 높은 긍지와 자존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 인해 보이는 모습이 왕족의 아내가 된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문득 엘스 헤른은 자신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음에 놀라 가슴이 철렁 했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발상이란 말인가?! 자신이 별 상상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 엘스 헤른이었지만 어쩐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뒤에 앉은 사람이 무슨 망상에 빠져 있는지 알 리가 만무한 숙녀는 마냥 조 용하기만 했다. 엘스헤른은 말의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리는 그녀의 붉은 머리 카락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숲으로 눈길을 돌렸다. 맑고도 환한 빛의 알갱이가 숲을 뒤덮은 초록의 틈 사이에서 망울지어 움직이 고 있었다. 싱그러운 숲의 내음에 섞여 레비안느의 분 내음이 코 끝을 간지럽 혔다. 엘스헤른은 눈 앞에 있는 가냘픈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싶다는 충동 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떠올리며 간신히 자 신의 욕구를 참아냈다. 왕족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만든 기회를 한 순간의 충동으로 놓쳐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엘스헤른은 가벼운 한숨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는 그냥 앞을 주시했 다. 눈에 익지 않은 숲의 정경에 빠져 있는지 레비안느는 여전히 아무 말 없 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눈 앞에 갑작스레 펼쳐지는 새하얀 풍경에 감탄사를 지었다. "어머나...." 그 때 그들의 눈 앞에는 거대한 케시르니아 나무숲이 새하얗게 펼쳐지고 있 었다. 초여름이라 케시르니아 나무에서는 하얀 꽃들이 만발을 했고 그 때문에 그 일대는 온통 눈부시도록 하얀빛으로 채색된 모습이었다. 마치 흰 눈이 날 리는 동굴처럼 이 곳은 온통 케시르니아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하늘을 뒤덮은 케시르니아 가지에는 눈부실 정도의 꽃들이 하얀 자태를 뽐내며 솜처럼 뒤덮 여 있었다. 엘스헤른은 케시르니아 숲 한 가운데에서 말을 세우고는 숙녀를 안아서 말 에서 내려주었다. 바람에 날려 숲의 바닥을 온통 뽀얗게 뒤덮고 있는 케시르 니아 꽃을 사뿐히 즈려 밟는 레비안느의 아이보리색 비단 구두가 참 조그마했 다. 저 발로 어떻게 걸어다니는지 신기할 정도다. 레비안느는 양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서, 눈처럼 하얗게 뒤덮인 숲을 쭉 둘 러보고는 두 걸음 앞서서 걸었다. 숲 사이에서 상큼하고도 시원한 바람이 불 어오자 케시르니아의 하얗고 조그마한 꽃잎들이 바람결에 사르르 날렸다. 그 것들은 마치 눈처럼 날려 숲 바닥과 레비안느의 드레스 자락과 그녀의 붉은 머리칼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레비안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라 말할 수 없으리만큼 포근하고, 손대 면 깨져버릴 듯이 순수한.... 마치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숲과 꽃과 공기에 둘러싸여 레비안느는 뭔가 아스라한 기분에 잠겨들 것만 같았다. 숨결과도 같 은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날리는 꽃잎에.... 한참을 감상에 젖어 케시르니아 숲을 거닐던 레비안느는 처음으로 활짝 웃 는 표정을 지으며 엘스헤른을 돌아보았다. 숲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서 산란되고 있었다. 선명한 붉은 빛의 반짝임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그녀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 쏟아져 들어오 는 작게 부서지는 햇살의 알갱이, 그리고 마치 순수한 마음처럼 뽀얗게 흩어 지는 꽃잎들이 모두 그녀 한 사람을 꾸며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레비안느에게로 다가섰다. 흩날리는 꽃잎을 신기한 듯 쳐다보 면서 가늘고 긴 손을 뻗어 잡으려 하고 있는 그녀 앞에 다가선 엘스헤른은, 햇빛이 투영되어 맑고도 깊게 보이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다 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귀하신 프로이덴느, 비록 음악은 없습니다만 당신께 왈츠를 청하고 싶습 니다." 엘스헤른이 살며시 내민 손을 한참 쳐다보던 레비안느는 그의 진지한 표정 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 손 위에 케시르니아 꽃잎의 움직임과도 같이 새하얀 손을 사뿐히 올려놓았다. 왈츠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듯 옅게 여울지는 햇살 사이로 바람결에 케시르니아 꽃잎이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 그들이 케시르니아 숲에서 빠져 나왔을 때는 벌써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붉은 공기에 물든 숲 사이로 말을 몰아 그녀를 로자리움까지 무사 히 데려다 주었다. 로자리움의 현관 앞에 도착해 레비안느를 말에서 내려준 엘스헤른은 말끄러 미 그녀를 쳐다보더니 무슨 생각에선지 숙녀의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비안느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스헤른의 커다란 손에 흠칫 놀랬는 지 어깨를 움찔 했다. 엘스헤른의 손길은 그녀의 붉은 머리칼 위에 장난스레 얹혀 있는 케시르니아 꽃잎을 조심해서 털어 내고는 얌전하게 그녀에게서 멀 어졌다. 레비안느는 연유도 모르고 경계했던 자신이 내심 부끄러웠는지 석양빛에 약 간의 홍조를 띄우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평소의 싸늘하던 태도와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언행으로 그에게 정중히 작별인사를 했다. "에스트리온 대공 전하, 댁까지 무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그만 뒤돌아 들어가려다가 문득 잿빛의 눈동자에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엘스헤른과 눈이 마주치자 살풋 보조개를 패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럼..." 레비안느는 치마 자락을 움켜쥐고는 가볍게 뒤돌아 현관으로 들어가 버렸 다. 엘스헤른은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한숨을 내 쉬고는 그만 말 위에 올랐 다. 에스트리온 성관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는 엘스헤른의 마음은 아침에 이 곳에 올 때와는 달리 한결 가벼웠다. * 주 - 케시르니아 : 에스트르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초여름에는 하얀 꽃을 피운다. 열매는 식용으로 쓰인다. <케시르니아>라는 이름은 에스트르 어의 케시른(여름)과 사르니아(눈)의 합성어로 한여름의 눈 꽃이라 불린다. (물론, 지어낸 식물.;) - TO BE CONTINUE - ==================================================================== 에구구구... 이제서야 엘스헤른이 체면이 좀 사는군요. 하지만, 앞날이 순 탄하진 않을 듯.;; 라이벌들이 줄을 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으음, 그렇긴 해 도... 힘내라, 엘스! 넌 설정에서부터 주인공이잖아!(....라지만 레비앙도 주 인공.;) 지금은 10편을 쓰고 있습니다만... 원작에서 나 버린 스토리상의 구멍을 메 우기가 어려워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에휴.... 한숨이 나는 군요. 풀썩... (여기서 쓰러지고 마는 펠티 괭이.) 뭐,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심장으로 무장 해서 구냥 밀고 나가는 겁니다! 허접한 스토리에 대해 아무리 항의가 빗발쳐 도! 누군가가 비평의 칼날을 들이대도 귀 막고 꿋꿋이 이겨내는 겁니다! 우화 화화화~! 하지만, 불행히도.... 펠티 괭이는 귀가 얇았던 겁니다! T-T <-- 비평이나 항의에 쉽게 흔들리는 타입.;;;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나...;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6 조회수: 677 [번 호] 8769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0일 22:25 Page : 1 / 12 [등록자] EGALITE [조 회] 430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 RICHARD (리하르트) 레비앙은 책을 읽다 말고 슬그머니 책 너머로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 겐지 엘스헤른은 탁자 위에 엎드린 채 넋을 놓고 있었다. 마 치 젖어 드는 듯한 짙은 잿빛의 머리카락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 람에 의해 산들산들 흔들리고 있었지만, 귀찮지도 않은 모양인지 엘스헤른은 미동 없이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이봐,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한 거야?" 그 멍한 모습에 참다 못한 레비앙이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그의 등을 툭 치 자 엘스헤른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으응? .....아...." 엘스헤른은 멋 적은 표정으로 상체를 일으키고는 잠시 싱긋이 웃었다. 그러 더니 이내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아무 것도 아냐.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었어." "쳇, 싱거운 녀석..." 레비앙은 은으로 된 쟁반 위에 놓인 잘 익은 사과를 집어들고는 살풋 미간 을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엘스헤른은 다시 그런 레비앙 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다. 종잡을 수 없이 나른하고도 정신없는.... 알 수 없이 마음이 들뜨는.... 뭘까? 이 기분은.... 엘스헤른의 시선 앞에서 레비앙은 사과를 던졌다 받았다 하더니 곧 다시 책 을 들었다. 햇살이 잘 드는 책상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 약간은 위태로워 보였 다. 하지만.... 고개를 약간 갸웃하게 돌린 엘스헤른은 책에 집중해 있는 레비앙을 응시했 다. 호수 같은 초록빛 눈동자.... 뽀얀 뺨과 발그레한 입술.... 탐스럽게 어 깨 위를 뒤덮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 여린 몸매를 따라 레이스가 풍성한 하얀 비단 셔츠의 자연스러운 주름...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만지작거리고 있 는 긴 손가락.... 날씬한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 바지.... 길게 뻗은 부 츠..... 오랫동안 친구였던 사람이 오늘따라 참으로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에 대한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한 것처럼.... 하지만, 레비앙은 변함없이 레비앙이었다. 묘한 동요가 엘스헤른의 마음 속에 파문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 르게 뭔가가 불안했다. 아.... 그래, 이건 불안한 마음인 걸까? 아니, 그것과 는 달랐다. 충족되지 못할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기분.... 불안함과는 다른 어떤 결여된 느낌이 마음 한 구석에서 시작되어 온 몸으로... 그리고 머릿속 을 가득히 채우는 기분이었다. 한참이나 그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넌지시 친구의 이름을 불 렀다. "레비앙..." "음?" 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건성으로 답하는 레비앙의 대답을 곁 귀로 들 으며 엘스헤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음..... 레비안느는.... 언제 프랑스로 돌아가지?" 사과를 든 손으로 겨우 책장을 넘기던 레비앙은 문득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서 엘스헤른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약간 못마땅한 듯 톡 쏘는 어투로 말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u "어.... 아니, 상관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탁자에 엎드린 자세에서 팔에 가만히 턱을 공그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 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너.... 혹시....?" 그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엘스헤른을 쏘아보자 레비앙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혹시 그럴까봐 겁나는 거야?" 여지껏 멍해 있던 눈빛과는 달리 싱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장난기를 띄우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금새 새큰한 표정이 되어서는 발끈 했다. "언감생심이야!!" "훗..." 화르륵 불타오르길 좋아하는, 아직은 어린 친구를 향해 엘스헤른은 작게 웃 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그다지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은 들 지 않았다. "걱정 마. 난 그런 타입은 별로야. 그냥 하도 너랑 닮았기에 한 번 찝적여 본 거라구. 귀족 계집애들이야 다 그렇고 그렇지..." "호... 그래? 그렇담.... 다행이고." 레비앙은 사과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한 입 깨물고는 빙긋이 웃었다. 웃는 모습이 레비안느와 참 닮았다. 양옆으로 탄력성 있게 끌어당겨지는 발그 레한 입술과 보조개가 살풋 패는 뽀얀 뺨... 남매니까... 닮는 건 당연한 거 겠지. 이런 저런 생각에 또다시 탁자 위에 엎드리며 망상에 빠져드는 엘스헤른의 눈 앞에 레비앙은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가볍게 던졌다. "할 일 없으면 이거나 읽어봐라." "응? 뭔데?" "<이상한 나라의 페르티>라고.... 뭔가 허무맹랑하지만 네 타입일 듯 해."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 녀석이 로자리움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집사로부터 전 해져 온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전갈이 전해지자 레비앙은 그다지 생각 하는 것 같지도 않게, 리하르트를 곧장 서재로 오도록 하라고 집사에게 말했 다. 레비앙이 준 책을 읽느라 책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엘스헤른은, 고개를 반짝 들어 레비앙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그만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 가섰다. 창가의 레이스 커튼을 살며시 잡아 쥔 엘스헤른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늘 손님방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도록 만들고, 리하르트 녀석은 오자마 자 대면을 하는 레비앙의 처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엘스헤른이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십 년 지기가 일 년 지기보다 대우가 덜 한 건 엄연히 틀린 처사가 아니냐고 레비앙에게 막 따지려는 순간 서재의 문이 열리 면서 리하르트가 들어섰다. "오랜만이군, 레비앙. 자네 요즘 황태자님을 돌봐드리는 일로 꽤나 바쁜가보 지?" 리하르트는 푸른색의 눈에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레비앙에게 인사를 했고 레비앙 역시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친구. 그렇지 않아도 내, 자네 집을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었는 데...." 그들의 인사를 듣고 있던 엘스헤른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가득히 불만스럽다. 이건 레비안느가 파티에서 리하르트와 가까이 지내는 걸 볼 때마 다 느껴지는 것과는 달랐다. 무엇이 목에 딱 걸리기라도 한 듯이 불쾌하고도 답답한 느낌이었다. 창 옆의 그늘진 곳에 기대어 서 있던 엘스헤른은 작은 한 숨을 내 쉬고는 그만 햇빛이 비쳐드는 쪽으로 또각 또각 걸어나왔다. "에르띠낭 경께서 방문하실 줄 알았더라면 이 몸은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어 드릴 것을 그랬군요..." 상대가 엘스헤른임을 확인하자 리하르트는 숙련된 포즈로 허리를 깊숙히 숙 여 인사를 했다. "존경하옵는 에스트리온 대공 전하,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참만에 고개를 든 리하르트는 최대한 웃으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엘스헤른 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어쩐지 엘스헤른에게는 역겹게 느껴졌다. 그 렇겠지. 물론,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그날 파티에서 에스트르 식의 모욕을 준 사람과..... 엘스헤른은 속 시원하게 비꼬아서 그를 경멸해 주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 만 잠자코 참았다. 엘스헤른에겐 리하르트의 그 어떠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 았다. 항상 웃는 저 표정과 레비앙이 언제나 칭찬해 마지 않는 예의바르고 신 사다운 면과 박식함, 항시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 등등등... 무엇보다도 마음 에 들지 않는 것은 레비앙이 항상 아끼는 녀석이라는 것이다! 엘스헤른은 탁자 위에 올려 놓았던 모자를 집어쓰고는 싱긋이 웃었다. 억지 로 웃는 것이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지만 저 따위 만년 웃음 가면 녀석에게 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귀족의 상징인 짧은 지팡이까지 집어든 그는 리하르트 에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이내 레비앙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의 가호 하에 내내 평안하시기를..." 가벼운 인사를 마친 그는 무덤덤한 레비앙을 뒤로하고 서재를 나왔다. 그가 서재의 무거운 문을 닫자 마자 곧 서재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엘스 헤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직히 중얼거렸다. "Diantre.... (제기랄....)" - TO BE CONTINUE - ==================================================================== 쓰다보서 계속 생각하는 거지만 <레비앙 & 레비안느>는 참.... 스토리의 흐 름이 평이하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복선 없이 그 어떤 사건의 교차 없 이 계속 한 흐름만 유지하고 있는 거죠. 핫핫. 별로 골치 아플 이유도 없군 요. 그러고 보면...^^ (근데 글에 구멍이 나는 이유가 머야!!) 하지만, 어떠한 사실 한 가지만은 숨겨 놓고서 조금씩 드러내야 하기 때문 에 뭔가 그 조절이 힘들답니다. (나머지 양,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웃음을..? 오오,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마시길.^^) 사실, 알고 보면 별 일 아닌 거지만... 엘스가 멍청한 거예요. 아아! 일러스트를 그렸답니다. 레비앙이 설정보다 너무 섹쉬하게 그려져 버 려서 걱정하고 있어요..T-T 뭐야? 저 요염한 포즈는...;(이봐! 정신차려!! 넌 남자라고!!) 조만간 올릴까... 라고 생각도 하지만, 글에다 일러를 붙여버 리면 그만큼 상상의 폭이 줄어들어 버리니까 어쩔는지 생각중입니다. 레비앙 의 머리카락 그리기는 정말 힘들어요...; 설정에서부터 특이하니까 구냥 그릴 수도 없는데다가 어쩌다보니 자꾸 레비앙은 섹시하게 그려지네요. 오히려 레 비안느가 수수한 편. -_- 흠냐흠냐. 일러 이야긴 접어두고, 뭐,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세요.^^ 조 금 있으면 뉴 페이스도 등장할테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7 조회수: 660 [번 호] 8798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1일 23:09 Page : 1 / 1 [등록자] EGALITE [조 회] 411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 레비앙의 아침 식사. 레비앙의 하루는 언제나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아침 식사로부터 시작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느직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는 프랑스 식의 풍습과는 달 리, 유독 부지런하신 할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어나셔서는 정장을 하고 식당으 로 나오셨고, 레비앙도 그에 맞추어 할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 를 해야 했다. 긴 테이블의 한 편에 자리잡은 레비앙은 물그릇에 가만 손을 씻고는 건너편 에 앉은 아르떼이유 후작을 문득 쳐다보았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할아버지 와 식사를 하는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해 온 일이 지만, 언제나 단 두 사람만의 식사가 레비앙에게 있어선 익숙해지지 않는 과 제였다. 손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근엄한 모습의 노후작 은 레비앙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주름진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띄 우며 그의 일상을 물었다. "황태자 전하를 돌봐 드리는 일은 어떠냐?" "아... 그다지 힘들진 않습니다." "황태자 전하는 요즘 어떠시지?" "네.... 어제는 폐하를 따라 사냥터까지 데려다 드렸는데 아직 어리시지만 사냥을 참 좋아하세요." "음... 그래." 항상 할아버지와 이야기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뭐랄까... 상당히 무미 건조한 기분이었다. 그냥 식사를 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하는 어떤 절차인 마 냥 형식적인 느낌이랄까? 아마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해 온 이래 줄곧 그래 온 것일 테지만 레비앙에겐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그다지 내키진 않았다. 그들이 별 의미도 없는 대화를 주고받을 동안 하인들이 음식을 식탁으로 날 라 왔다. 아침은 간단하게 드시는 할아버지의 취향 때문에 식탁 위가 그다지 어지럽지는 않았으나 데운 포도주와 연한 과일즙, 음료로 쓰일 물까지 한 사 람 앞에 놓이는 유리잔만 해도 벌써 세 개였다. 그런데다가 아무리 양이 적다 고는 하지만 종류가 만만치 않은 여러 요리들은, 엘스헤른의 배려로 아르떼이 유 가에 보내진 최고급 요리사의 손을 거쳐 레비앙과 아르떼이유 후작이 먹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에스트르의 여느 귀족집에 비하면 검소하기 그 지없는 식단이다. 그렇다해도 레비앙은 이런 것들을 다 먹어야 한다는 것에 가끔은 염증을 느끼기도 했다. 원래 귀족문화라는 것이 다 먹고 입고 즐기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기 마 련이라 해도 레비앙에겐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해 서는 안되고 더더욱 할아버지 앞에선 그에 대한 건 입도 열어선 안 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건 레비앙의 출신과 관련된 일이라 할아버지에겐 마음 다 치기 쉬운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 난 행복해요, 레비앙 도련님. 그러니... 이젠 나에게 오지 말아요. 당신은 나를 불행하게 만드니까... 당신이 자꾸 날 찾아오면 나는 슬퍼져요. -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로 다시는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어 쩔 수가 없었다. 언제나 너무나도 그립고, 그렇게 따스한 그녀의 품이 필요했 으니까. - 돌아가요, 도련님. 후작님께서 알게 되면 난 이곳에 살 수 조차 없어요. 그러길 바라나요? - 아주 어릴 적에 할아버지 몰래 로자리움을 빠져 나와 달려가곤 했던 벨라시 그네(에스트르의 수도)의 뒷골목에는 그녀가 있었다. 새빨간 머리칼과 초록빛 의 눈을 지닌... 빛 바랜 흰 앞치마에 수수한 옷차림의 그녀는 고작 감자 다 섯 개를 얻기 위해 온종일 빨래를 해야 했었다. 그런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자신이 먹고 있는 수많은 음식들이 보기 싫어지곤 했다. 할아버지도 미웠고, 그녀와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조차 미웠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비앙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또 문득 그녀가 떠오른 것을 보면 요즘은 마음이 심란한 모양이다. 언제나 뭔 가 마음 속에 위안이 필요할 때는 그녀를 생각하곤 한 걸 보면.... 하인들이 물러가고 나자 레비앙과 후작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항 시 이때부터 시작된 침묵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웬 일인 건지 오늘은 할아버지가 포도주를 들이키시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나 직히 말을 걸어오셨다. "힘들진 않니?" 그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묻는 건지 레비앙은 금새 파악할 수 있었다. 요즈음 레비안느의 일로 일상의 생활이 약간 흐트러진 것에 대해 묻는 말일 게다. "아... 예. 그다지..." "사람들은?" "그냥 그래요." 레비앙은 시무룩한 말투로 말끝을 흐리며 포크를 집어들었다. "오늘은 어쩔 거냐?" 후작은 아직도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그다 지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고프지 않는 레비앙이었지만 아무 말 않고 있기가 좀 그래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침엔 왕궁에 다녀올 테고... 오후엔...." "그래..." 아르떼이유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손자의 표정이 어 두워 진 것을 보고는 섣불리 물어보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레비안느를 파티에 내 보낸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건 할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절제된 목소리로 단 한 가지만을 물었다. "....그래 결정은 했느냐?" "....예...." 한참만에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긴 했지만 레비앙은 별로 내키지는 않 는 표정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늙은이의 고집이 너를 힘들게 하는 구나." 한숨 섞인 할아버지의 말에 레비앙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눈물 이 날 것만 같아서였다. 그때 할아버지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결심을 하셨던 가 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왜 그 결심을 번복하 시는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아르떼이유 가문의 후계자 문제가 걸 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레비앙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포크로 음식을 집어 꾸역꾸역 삼켰다. 하지만 음식의 맛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서 복도로 나왔을 즈음 나이 많은 집사가 아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레비앙에게 전갈을 전해왔다. 집사의 표정만 봐도 누가 온 건지 뻔 히 알 수 있었다. 바로... "아이고, 도련님! 대공전하께서 또 저를 들들 들볶으시면서 당장 도련님을 모셔오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으시겠답니다." "푸훗..." 레비앙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엘스헤른이 집사를 못살게 군 모양이다. 요 며칠 동안 내내 이런 저런 일로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그래도 꾸준히 새벽 같이 찾아오는 걸 보면,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대공 전하의 꿍꿍 이가 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레비앙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 라도, 언제나처럼 아주 시시한 것에 목숨 걸고 있는 거겠지. "걱정 마세요, 내가 복수해 드릴게요." 레비앙은 집사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주고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복도의 창가에 서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여름... 맑은 공기에 가득 장미향이 실려 있었다. 로자리움을 온통 뒤덮은 장미꽃밭을 쳐다보던 레 비앙은 아예 창가에 기대어 따스한 햇살을 만끽했다. 뭐, 어차피 복수하는 거 라면 성질 급한 엘스헤른을 더 기다리게 만들어 애간장을 끓게 하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을 테다. 그렇게 성질이 급하긴 해도 그는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친구라는 것을 레비앙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면박을 줘도 웃는 표정으로 돌 아올 친구.... 창틀에 가볍게 엎드린 레비앙은 살며시 눈을 내리 감았다. 따사롭고 부드러 운 아침의 햇살이 그의 뺨에 부벼져 왔다. 할아버지와의 식사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난 그에겐 햇살은 수면제처럼 그를 나른한 꿈결로 인도할 것만 같았다. 약간은 젖은 듯한 공기에 번져드는 장미 향기.... 머리칼을 살 며시 어루만지는 햇살... 그래, 아침부터 우울해 있을 이유는 없지. 괜히 어릴 적 생각이 떠올라 울 적하긴 했지만, 그 기분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뭔가 할 일이 가득하다. 지금 가서 엘스헤른도 놀려줘야 할 테고, 레비안느의 일도 좀 더 생각해봐야 할 테고, 오후엔 리하르트도 방문할 테고, 그리고 저녁 때는.... 차근 차근 계획을 세우고 있긴 했지만 어느 샌가 그의 머릿속은 몽롱해지고 있었다. 정말 잠이라도 들 듯이... 뭔가, 약간은 짜릿하면서도 나른한 쾌 감... 누군가가 살며시... 정말 살며시.... ......머리카락을....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다! 레비앙은 순간 눈을 반짝 떴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뺨에 흩날리고 있는 머 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있었다. "음....?" 아아, 엘스헤른이다. 잿빛의 눈동자에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있는 이 사람 은... 엘스헤른은 가만히 손을 거두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도 안 오길래 나와봤더니, 바로 손님방 옆 창가에서 잠들어 있잖아." "아... 응. .....내가 잠이 들었었나?" 그러고 보니 아무 데서나 잠든 모습을 들킨 게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고 머 쓱하기도 해서 레비앙은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나 잠들었을 때 무슨 짓 한 거지?" "아아... 그냥,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을 뿐이라고." 엘스헤른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약간의 변명조로 말했으나 레비앙은 도끼눈 을 하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남의 머리카락을 왜 만져?!" "그, 그냥 잠든 모습보고는 깨우려고 하다가... 살짝 불러도 대답이 없길 래..." "흥!" 레비앙은 쌀쌀한 표정으로 엘스헤른을 지나쳐 걸었고 엘스헤른은 설렁설렁 웃으면서 그를 뒤따라왔다. "어디가? 레비앙." "입궐해야 해." "폐하도 참, 처남의 건전한 우정을 장려해주지는 못할 망정 처남의 내면의 연인을 매일같이 불러가다니, 너무하잖아." 푸념 섞인 엘스헤른의 말에 레비앙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소화가 안 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누, 누가 네 내면의 연인이란 말야?! 레비안느 만나러 왔으면서 그런 소릴 하다니 찔리지도 않아?" "하핫. 뭐, 레비안느도 보고 너도 보고 일석이조지." 뭔가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던 레비앙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툭 한마디 했다. "레비안느는 오늘 친척집에 보낼 예정이야." "에? 뭣 때문에?"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친척에게 인사는 해야지." 물론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아마 엘스헤른은 아주 실망한 얼굴이 되었을 테 다.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나선 레비앙은 대기 중인 마차 위에 훌쩍 올랐다. 엘스헤른은 현관까지 따라나왔다. 그러더니 빙긋 웃는 표정으로 레비앙의 마 차로 다가왔다. 저건.... 뭔가 위험천만인 표정이다. 언제나 엘스헤른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항상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레비 앙은 경계하는 눈빛을 지었으나, 미처 그의 행동을 추측하기도 전에 엘스헤른 은 마차 문을 열고 훌쩍 마차에 올랐다. "이, 이봐! 에스트리온 성관까지 데려다 줄 순 없다고." "뭐, 에스트리온 성에 가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앉은 엘스헤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팔 짱을 떡 끼었다. "그럼 뭐야?" "아, 나도 입궐하려고." "따라오지 마." "호~! 너 따라 가는 거 아니야." "그럼?" "글쎄, 나도 왕성에 볼 일이 좀 있고." "그렇담 넌 말 타고 가!" "아아, 귀찮아. 난 마차가 좋아." "그럼 에스트리온 성까지 말 타고 가서 마차로 갈아타고 입궐해." "귀찮잖아?" 마차가 출발해서 로자리움을 빠져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의 말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물론, 말다툼을 벌이는 쪽은 레비앙이었고 의외로 화근인 엘스헤른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태격거리는 가운데 마차는 왕성을 향하 고 있었다. -TO BE CONTINUE- ==================================================================== 어제,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컨디션이 엉망이랍니다. 콧물은 줄줄 머리는 지끈지끈...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오늘은 최악이에요. 뭔가 입 맛도 없구... T-T 한여름에 웬 감기? 라고 생각 하실는지 모르겠지만, 비 맞구 제사 장보고, 남은 추워 죽겠는데 엄마는 차에 에어컨을 틀고 가고, 비오는데 내내 계단을 오르내렸더니 잠깐 졸고 일어난 후로는 내 몸이 아닌 것 같네요. 오늘은 잡담도 조금만 써야겠어요.; 본문 내용도 많은뎅 잡담으로 때울 필 욘 없을 듯.^^;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7 조회수: 618 [번 호] 8839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3일 00:41 Page : 1 / 16 [등록자] EGALITE [조 회] 411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 장미 정원. 레비안느가 친척집에 갔다는 소리를 듣고 난 후로는 역시나, 엘스헤른은 적 잖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새벽같이 찾아와 집사를 못 살게 굴고 레비앙을 괴롭히고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느직하게 로자리움에 도 착해 오랜만에 휴가를 즐기고 있는 레비앙을 찾았다. 물론 어제 엘스헤른과 입궐했을 때 폐하께서 갑자기 휴가를 내려주시는 바 람에 레비앙으로서는 무척 어리둥절했지만, 약간의 추리력을 발휘한 결과 엘 스헤른이 한 짓이란 것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엘스헤른은, 처남의 말이라면 콩이 팥이라 해도 믿으실 황제 폐하를 이리저리 부추겨서 친구의 휴 가를 따냈을 테다. 오랜만의 휴가가 레비앙에게 정말 고마운 건 사실이었지만 막상 그런 식으로 휴가를 얻게 된 건 사실 그다지 달갑진 않았다. 모르긴 몰 라도 세인들의 관점에서는 레비앙이 대공 전하의 후광에 힘입어 이런 저런 혜 택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와 식사를 한 후에도 여유를 부릴 수 있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땐 엘스헤른이 아주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그러 나 그런 기분도 잠시. 이젠 일례 행사처럼 로자리움을 방문하는 엘스헤른을 대하고는 레비앙의 그 여유로웠던 기분도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게 되는 엘스헤른이 달갑지 않은 겐지 레 비앙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더구나 모처럼의 짬에 정원에 앉아 조용히 책이나 탐독할까 했던 그의 작은 계획이 엘스헤른으로 인해 방해받게 되어 더더욱 그런 심정일 테다. 뭐, 엘스헤른이 오건 말건 간에 레비앙은 자 신의 오전 시간을 장미정원에서의 한적한 독서로 때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로자리움을 방문한 대공 전하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는 것이 엘스헤른을 위한 레비앙의 유일한 인사였다. 오랜 친구라 평소 둘 사이엔 그렇게 예를 따지지 않지만 요즘 레비앙은 그런 것 마저 잊어버린 듯 행동하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그런 그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건 마치 엘스 헤른이 원하지 않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고, 레비앙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와 거리를 두고자 한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 손에 책을 쥐고 장미 정원을 거닐고 있는 아름다운 소년은 여전 히 엘스헤른이 알고있는 그대로의 레비앙이었다. 햇살이 가득 맺히는 붉은 금 발도, 도도하게 빛나는 초록색의 눈동자도....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걸으 면서도 엘스헤른은 어쩐지 뭔가가 마음 속에 맺힌 기분이었다. 이렇게 레비앙 은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이는데 왠지 모르게 가득 불안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레비앙을 알게 되고 그와 친하게 지낸 지난 10여 년 동안 이런 기분 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은 다루기 힘들고 까탈스럽긴 해도 레비 앙은 그에게 있어서 둘도 없이 편하고 허물없는 친구였다. "오랜만에 벨라시그네에 가지 않을래?" 레비앙과 같이 걷던 엘스헤른은 느닷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비앙 은 의외라는 듯 그를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책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건성으 로 되물었다. "수도엔 갑자기 왜?" "아.... 둘이서 가본 지 오래되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가보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왕성에 갈 때마다 지나가기 때문에 식상해." 물론 레비앙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을 거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엘스헤 른은 약간 씁쓸해졌다. "왜? 어렸을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가더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벨라시그네.... 어렸을 때에 그 곳을 향해 달려가곤 했던 건 그 곳엔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곤 하는 장면 은....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에 펄럭거리던 하얀 빨래들과 맑은 날 햇살에 비 쳐 화려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새빨간 불꽃같은 머리카락,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짓던 초록색의 눈.... 빛 바랜 흰색의 앞치마 자락... "그냥.... 가고싶지 않아." 생각에 잠겨 아랫입술을 살풋 깨물고 있던 레비앙은 건성으로 웃음을 짓고 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엘 스헤른은 더 이상 재촉하진 않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다른 쪽으로 화재를 돌렸다. "사냥 가기 좋은 날씨지?" "음...." "사냥이나 갈까?" "....아니." 레비앙은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는지 아니면 옆에서 말을 걸고 있는 엘스헤 른이 귀찮은 건지 건성으로 그의 대답을 받아 넘겼다. 레비앙과 별 의미 없는 몇 마디를 나누던 엘스헤른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그가 읽고 있는 책 을 탁 빼앗아버렸다. "뭐야?" 약간은 앙칼스러운 레비앙의 목소리가 톤을 높였지만 엘스헤른은 못 들은 사람처럼 그 책을 옆구리에 끼고는 앞장을 서서 걸었다. "돌려줘! 아직 덜 읽었다구." 레비앙이 뭐라고 외치든 엘스헤른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 었다. "너 가만 안 둘 거야!!" 레비앙은 어지간히도 땍땍거리면서 그를 좇아왔다. 엘스헤른은 그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따사로운 날씨를 만끽하기라도 하듯 귀족적인 걸음새로 장미 정원 사이로 난 산책로를 노닐었다. "엘스헤른!!" 레비앙이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자 그제야 엘스헤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뒤돌아 섰고 때마침 그에게로 달려들던 레비앙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바로 앞 에 정지했다.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가 가득 짓궂은 빛을 띄우며 레비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비앙은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째리면서 올려다보는 것 밖에 응수할 수 있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무슨 생각에선지 입가에 가득 미 소를 띄우고는 슬그머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비앙의 초록빛 눈동자가 가득 휘둥그래지는 것을 천천히 즐기면서 엘스헤른은 점점 더 그에게로 가까 이 얼굴을 가져다댔다. "너..... 무, 무슨....." 소스라칠 듯 놀라는 친구를 놀려주기라도 하듯 엘스헤른은 싱긋이 웃음을 지었고 레비앙은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짙은 장미 내음... 싱그러운 오 전의 햇살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뭔가 어쩐지.... 너무나도 조용하고도 조 용했다. "레비앙...." 마치 청량한 바람과도 같은 엘스헤른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그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조용하던 공간이 하나 가득히 채워지는 기분이다. "....응?" 레비앙은 눈을 꼬옥 감은 채 저도 모르게 그의 부름에 대답을 했다. "너 얼굴 빨개졌어."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레비앙은 한동안 그가 무슨 소릴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놀림을 당한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이미 때는 늦어, 엘스헤른은 친구를 골탕 먹인 것을 즐거워하며 키득거리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뭐야? 키스를 바랬던 거야? .....오오, 위험하기 그지없는 걸? 날 그저 너 의 정신적인 연인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해 달라구."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엘스헤른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레비앙은 얼굴이 붉 으락푸르락 했지만, 아까 그 순간에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에 엘스헤른의 말 을 어떻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눈을 감아버렸다는 사실이 치가 떨릴 만큼 분했다. 그건 너무 당황해버린 나머지 나온 행동일 뿐인데 마치 그게 엘스헤른이 말한 그런 의미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 레비앙은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너.... 가만 안 둘 거야, 제길. 가만 안 둬!" 레비앙이 방방 날뛰기라도 할 기세를 보이자 엘스헤른은 금새 근엄한 표정 이 되어서는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만 안 두면 어쩔 테지?" "...." 엘스헤른이 저런 말투로 말할 때면 꼭 그를 대하는 게 친구가 아니라 일개 귀족의 신분으로서 고귀하고도 존엄한 대공 전하를 대하는 기분이라 레비앙은 어쩐지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이번 역시 그런 기분이 들자 레비앙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엘스헤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재빨 리 레비앙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레비앙은 요번엔 속지 않겠다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엘스헤른은 자신의 가냘픈 친구의 허리에 손 을 둘러 그가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했다. "뭐, 뭐야!!" 어쩐지 안아버린 포즈가 되어버리자 레비앙은 길길이 날 뛰며 흥분을 했고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던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짓궂게 웃고 있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엘스헤른 을 밀어내느라 바둥바둥하고 있던 레비앙도 그가 움직임이 없자 그냥 가만히 서버렸다. "레비앙...." 엘스헤른의 낮은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으며 레비앙은 이번엔 아주 도끼눈 을 하고는 뾰로통하게 답했다. "뭐야?! 왜?!" 레비앙의 반응이 재미있는 겐지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어깨에 기댄 채 가볍 게 웃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멈추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오랜만에 내 이름 불러준 거 알아?" 순간 레비앙은 약간 뻥쪄버린 표정이 되었다가 가만 눈을 내리깔았다. 엘스 헤른은 한 번씩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다. 늘 생 각지도 못한 것을 꼬집어내곤 하지. 레비앙은 뭔가 가슴이 뜨끔하긴 했지만 되려 눈꼬리를 올리며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언제 네 이름을 불렀다고 그래?" "푸훗... 거 봐. 10년이나 된 친구 이름을 얼마나 안 불렀으면 언제 불렀는 지조차 잊어버렸겠냐? 아까 불렀잖아. 책도둑을 막 뒤쫓아오면서 말이지." "몰라, 기억 안 나." 레비앙의 대답은 차가우리 만큼이나 매몰찼다. 엘스헤른은 무슨 생각에선지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만히 있더니 곧 레비앙에게서 떨어져 섰다. "그럴 줄 알았어." 레비앙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해 그다지 화난 것 같진 않았지만 엘스헤른은 거의 무표정하게 레비앙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책을 받아 쥔 레비 앙은 넌지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어쩐지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엘스헤른을 톡 쏘아붙였다. "너야말로 엉큼하기 그지없잖아? 느닷없이...." "아아, 엉큼하다고? 푸훗... 난 그냥.... 너를 안아 줘 본지 오래되어서 그 래본 거야. 아마도 잊었을 테지만 소시 적엔 종종 네가 울 땐 내 품을 빌려 주곤 했다고." 엘스헤른은 마치 혼잣말이라도 하듯 중얼중얼하며 그를 지나쳐 그들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은 살 짝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가득 못마땅했다. 요즘 내내 엘스헤른을 보면서 어 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건 엘스헤른이 레 비안느에게 무례하게 행동해서일 뿐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엘스헤른이 요즘 들어 못마땅해 진 것도.... 그에게 쌀쌀맞게 대하곤 하는 것도.... 모두 마음 속에 어떤 거 리낌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그래, 엘스헤른과는 정말 많은 어린 시절의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아주 아스라해서 잊어버릴 것만 같 은 것들까지도 모두 다 엘스헤른과 같이 한 기억들인 게다. '난 얼른 어른이 되어버리려고 하는데.... 어릴 적 같은 건 얼른 잊어버리려 고 어른이 되려고 하는데.... 넌 ....'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뒤쫓아 걷지 못하고 그냥 멈춰 선 채 가만히 눈을 내 리깔았다. 조금 먼발치서 엘스헤른은 약간 미소 띈 얼굴로 장미꽃을 꺾어 향 기를 맡아보고 있었다. 두 살 터울이란 것이 이렇게나 차이 나는 걸까? 마냥 장난기 가득하던 친구는 어느 새인가 어른이 되어 훌쩍 커버린 모습으로 레비 앙을 응시하곤 한다. 잿빛의 눈동자에 알지 못할 의미를 담고서.... 레비앙은 어쩐지 우울해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책을 펼쳐들었지만 어쩐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나직히 혼잣말을 흘 렸다. "엘스.... 네 눈은 내 어릴 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너 자신은 어른이 되 어가면서.... 네가 날 보는 눈길은 그렇게 나의 어릴 적을 더듬고 있는 걸? 그래서...." 무겁게 한숨을 내 쉰 레비앙은 다시 고개를 들어, 말도 안 들릴 먼 거리에 서 이쪽을 향해 장미꽃을 내미는 친구를 쳐다보았다. "네가 자꾸만 싫어져." -TO BE CONTINUE - ==================================================================== 펠티는 어제 쏴랑하는 친구 아횬 양과 학원에 앉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즐거운 이야기라는 것은 주로 게임 이야기라든지 요리 이야기 - 오늘의 주제는 국수! 라든지, 간혹은 곰인형 이야기라든지....;) 근데 문득 아횬 양이 펠티의 글에 있는 오류를 찝어주지 않겠습니까!! 아아, 펠티가 깜빡 잊고 고치지 않았던 부분은 5편에서 엘스헤른이 레비안 느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케시르니아 숲으로 데리고 가는 도중의 부분입니 다.(아래 참조.)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레비앙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것 이지만, 숙녀분께는 어제의 제 무례를 사죄하는 뜻에서 보여드리는 겁니 다." 어디가 틀렸는지 멀겠다구요?! T-T 분명히 엘스헤른은 레비안느에게 몹쓸 짓(?)을 하고 며칠 동안 고민하느라 로자리움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엘스헤른은 "어제의 무례"라고 한 겁니다! 무례했던 것은 며칠 전이었던 겁니다! 아아~! T-T 뭐, 이미 틀려버린 것을 어쩌겠습니까! (리메이크를 다시 할 생각은 없다구 요.) 펠티는 횬 양이 황송하게도 이런 오류를 찾아준 것에 감격해 횬 양의 손 을 부여잡고 외쳤습니다! "아앗! 친구! 옥의 티를 찾아주다니 정말 고마워~!" 그러자 횬 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친구, 설마 자신의 글을 옥이라고 생각 하는 건....?" ".......;;;;;;;;" 하하핫.^^; 그,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8 조회수: 616 [번 호] 8870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3일 23:15 Page : 1 / 11 [등록자] EGALITE [조 회] 408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 귀찮은 사촌의 방문.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롬 녀석이.... 에스트르에 온다구요?! 그것도 오늘쯤 도착할 예정이라구요?!" 엘스헤른은 에스트리온 공작 부인(엄마)의 느닷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언성 을 높였다. 오후의 한가한 티타임에 공작부인이 무심코 한 말은 그에게는 청 천 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듣기만 해도 머릿속에 번개가 칠 것만 같은 그 녀석 의 이름!! 안 그래도 요즈음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개구쟁이로 소문난 사 촌 녀석과 놀아줘야 한다니!!!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홍차 잔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도 모르게 탁자를 탁 치 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럴 순 없습니다! 말도 안 된다구요! 어머니께서 데리고 노시든지! 집으로 돌려보내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오, 아들아. 제롬이 날 보려고 머나먼 에스트르까지 오는 건 아니지 않니? 사랑하는 사촌형을 보러 오는 건데 그렇게 흥분할 거까지야..." "누, 누가 누굴 사랑한다구요?! 그 녀석은 절 골탕먹이는 것을 즐기는 거라 구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찻잔에 입을 대던 공작부인은 평상시의 엘스헤른 보다 한술 더 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살포시 지으며, 흥분해 있는 아들을 쳐 다보았다. "뭐, 한 달 전에 너의 고모(제롬의 엄마)로부터 제롬이 에스트르를 방문할 거라는 편지가 온 것을 너에게 이야기 해 준다는 걸 잊은 내 잘못도 있지만 온다는 애를 막을 수도 없지 않겠니? 게다가 제롬도 널 잘 따르고 말이 지..." "난 그 녀석이 싫단 말입니다!" "왜? 천사 같은 얼굴의 네 사촌 동생이 너에게 무슨 해꼬지라도 했더란 말이 냐? 말해보렴. 내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네가 제롬을 잘 대해주지 못하는 것 같은데? 자기 다섯 살이나 어린 애를 제대로 못 다룬다는 것은 에스트리온 가문의 사람으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구나." 어머니와는 논쟁의 적수가 안 되는 것을 알고 있는 엘스헤른은 가득 구겨진 표정으로 돌아섰다. 뭐, 더 떠들어 보았자 입만 아플 게 뻔 했다. 에스트리온 가문의 최강자는 역시 에스트리온 공작부인 - 즉 어머니로서, 아버지와 결혼 하게 된 것도 막강한 그녀의 재담 덕분이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왜 어머니 와 결혼하셨는지 물었더니 아버지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네 엄마가 수다 떠 는 모습을 보고 반했지." 뭐, 눈에 콩꺼풀이 씌면 무엇인들 안 예뻐 보이랴! 엘스헤른은, 언제 장난 기를 발동했냐는 듯 또 얌전한 표정이 되어 홍차를 음미하고 있는 어머니를 슬쩍 한 번 돌아보고는 한숨을 포오옥 내 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차소리 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가 이 시간에 여길 방문..... 서.... 설마.... "맙소사...." 엘스헤른은 가득 구겨진 표정으로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슥슥 문지르며 얼 른 다실(茶室)을 빠져 나왔다. 이럴 땐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그는 급히 계단을 뛰쳐 내려와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한 발 늦은 모양이다. 현관을 열자 마자 엘스헤른의 코 앞으로 마차가 주차하고 있었다. "후훗... 형님, 도망치실 생각이셨나본데.... 어쩌지? 늦었다구." 마차 문이 열리면서 예쁘장하게 생긴 열 다섯 살의 소년이 빠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개구쟁이 티를 벗고 제법 젊은 신사 티가 나기는 해도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다. "흠흠... 어서 와라, 제롬. 기다리고 있었다." 엘스헤른이 헛기침을 하며 정색을 하자 미소년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마차 에서 내리섰다. 이제 키가 제법 큰 것이 엘스헤른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지만 아직 뺨이 발그레 한 게 어린 티가 났다. 제롬은 뺨에 찰랑대는 금발의 곱슬 머리를 쓸어 올리며 엘스헤른의 주위를 쭉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형님. 장가가실 나이가 되셨는데.... 행색을 보아하니, 아직 아가씨가 없는 모양이야? 하긴, 에스트르에 여자 같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 하고 엘스헤른을 비꼰다. 물론, 그 속에는 에스트르의 여자들이 억척스럽다 는 것을 비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는 너희 나라엔 여자다운 여자가 수두룩한가 보지?" 엘스헤른이 이내 되받아 치자 제롬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 헤프고 물러 보이긴 해도 저 녀석은 엄연히 영국의 왕족이다. 제롬의 아버지는 왕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엘스헤른에겐 고모가 되므로 엘스헤른의 아버지의 여동 생...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영국의 왕족이 되는 거지만서도 에스트르 쪽에서 봐도 제롬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왕족의 자손이다. 족보를 따지자면 이래저 래 복잡하긴 한데, 어쨌든 이 녀석은 소위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불구 하고 어릴 적부터 엄청난 개구쟁이로 양국에 이름을 날린 터였다. 불과 5년 전까지는... 근데, 5년이 지났다 한들 그 명성이 어딜 갈까.... 넋을 잃고 사촌 동생을 쳐다보고 있는 엘스헤른은 암담하고 괴롭기 그지없었 다. 다음날, 엘스헤른은 아침 일찍 제롬 몰래 혼자서 로자리움으로 향했다. 로 자리움에 숨어버리면 아무리 진드기인 녀석도 어쩔 수 없겠지..... 라는 엄청 난(?) 계획이었다. 녀석이 세상 모르고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기 때문에 엘 스헤른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로자리움까지 말을 달렸다. 싸늘한 새벽 안개가 시원하게 뺨에 부벼져 왔다. 귀찮은 사촌으로부터 벗어 난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상쾌하고도 날아갈 듯한 일인지는 진즉에 몰랐던 것 이었다.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까지 불어가면서 로자리움으로 향했 다. 그런데..... 로자리움으로 들어서는 로코코 풍의 섬세하고도 장식적인 철문 앞에 떡 버 티고 서 있는 사람은.... 저 천사 같은 환한 금발과 장난기 가득한 연녹색 눈 동자에 서글서글한 미소는.... "네, 네 녀석이 여긴 왠 일이냐? 제롬."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이... "너 자고 있었잖아!" "순진하긴.... 자는 척이란 것도 있다구." 말고삐를 가볍게 쥐고 철문에 기대어 선 제롬의 모습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엘스헤른은 이럴 것도 모르고 희희락락하며 로자리움으로 달려온 자신이 한심 스러워지기까지 했다. "형님도 이젠 늙은이가 다 되었나봐? 그렇게 행동이 굼떠서야 원...." "미행이라도 한 거냐?" "음, 새벽같이 가는 데라면 주요 관심사가 있는 곳일 테고... 형님이 요즘 무엇에 빠져 사는지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제롬은 빙글빙글 웃다가 로자리움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형님의 목적지가 여기야? 흠.... 이 안에 아리따운 아가씨라도?" 가만 놔두면 별의 별 상상을 다 할 것 같은 사촌을 그냥 둘 수 없어 엘스헤 른은 녀석을 로자리움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녀석이 버릇없이 건들거리면 서 따라오고 있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지만 엘스헤른은 새벽부터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현관의 문고리를 잡아 두드렸다. 이내 집사가 나타났고, 그들은 집사를 따라 손님방으로 향했다. 물론 집사 는 곧장 레비앙에게 전갈을 전했을 테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금방 나타나지 는 않았다. "오, 배짱 좋은 아가씨인데? 왕족을 기다리게 하다니 말야...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제롬 녀석의 비아냥거림을 간신히 참고 있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피곤한 기색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벌떡 일어섰다. "저... 레비앙." "뭐야? 새벽 같이..... 레비안느는 친척집에 보냈다니까. 뭐, 친척집에까지 쫓아가서 그녀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기라도 한 거야??" "아, 그런 건 아니고...." 옆에서 눈을 말똥거리고 있는 제롬 때문에 괜스레 당황해버린 엘스헤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의 사촌 녀석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말이지...." 그러나 엘스헤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제롬은 레비앙의 앞으로 걸어나가 더니 그의 손 등에 가볍게 입맞추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제롬 루스틴 윈저라고 합니다. 누님, 우린 구면이죠?" - TO BE CONTINUE - ==================================================================== 여전히 분량 적음...^^;; 하하핫, 이번엔 새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15살 먹 은 개구쟁이 소년이죠. 소년이라고 보기엔 좀 성숙한....^^ 제롬은 영국 출신이고 또 왕족이기 때문에 이 즈음의 영국에 대해 잠시 조 사를 해 봤는데 하노버 왕조 시기더라구요. 뭐, 하노버 왕조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인데... 제롬의 성씨를 지으려고 고민하다 보니, 문득 윈저가 떠오르던데... 윈저는 현재 영국 왕조의 이름이죠. 현재 영국 왕조도 하노버 왕조지만, 왕실의 여름 별장 이름을 따서 윈저라 한다나요? 아무튼, 윈저라 지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역시 나중에 이런 걸 꼬투리 삼아 물고 늘어지는 분이 계실 거 같아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뭐, 괜히 왕족으로 설정하다 보니 이래저래 골치가 아프네요. 아무튼 다 가상의 인물인 거니까 괜히 역사적으로 연관시키려고 하지 마시길...^^ 아아, 골치 아푸다구요. 이 건 다만 가상의 사.랑.이.야.기 일 뿐입니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8 조회수: 575 [번 호] 8898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4일 22:57 Page : 1 / 15 [등록자] EGALITE [조 회] 397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0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0) 제롬, 너마저.... 제롬의 입에서 나온 <누님>이라는 말에 엘스헤른은 성호라도 긋고 싶은 심 정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사촌 동생을 위해 명복(?)을 빌어주고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레비앙은 자기가 아무리 예쁘게 생겼어도 여자 취급 당하는 것만은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것을 엘스헤른은 10년 지기 친구로서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처음 보는 상대가 그런 식의 농담이라도 비추면 그 일 을 두고두고 씹는 다는 것도....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레비앙은 저 예쁜 입술에 가득 싸늘한 미소를 띄 겠지? 그리고는 이 버르장머리없는 제롬 녀석에게 뭔가 톡 쏘듯이 쏘아붙일 테지. 오! 폭풍 전의 이 고요! ....멋지군. 어라? 그런데 이게 웬 일? 레비앙은 의.외.로. 입가에 차분한 미소를 띄우더니 제롬에게 나직히 말했다. "저는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윈저 경과는 초면일뿐더러 누님이라는 호칭을 쓸 수 없는 성별입니다." 레비앙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엘스헤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뭔가 사촌 동생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 놓을 좋은 기회라고 생 각하고 있었던 그에게는 이건 정말 너무나도 허무해져버린 일이었다. 사촌 형의 속마음을 알 리 만무한 제롬은 레비앙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더 니 아랫입술을 살풋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밝은 연녹색의 눈동 자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레비앙을 응시했다. "특이한 머리칼을 가지셔서 제가 잠시 착각했나봅니다. 제가 일고 있는 어떤 프로이덴느도 당신과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거든요. 아, 그러 고 보니.... 그 분 역시 저를 모르겠군요. 그 프로이덴느를 처음 봤을 땐 일방 적으로 저 혼자 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레비앙과 꼭 닮은 붉은 머리칼의 아가씨? 그건.... 물론 레비앙은 제롬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들어 넘겼지만 엘스헤른은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는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이 언제 레비안느를 본 거란 말인가?! 엘스헤른이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동안 제롬과 레비앙은 자기 소개도 끝내 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고민에 여념 없는 엘스헤른은 소외 되는 분위기였다. 의외로 레비앙은 제롬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 기는 듯 했고, 제롬 역시 그를 잘 따라 어느새 친해져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엘스헤른은 적수가 또 하나 늘었으니, 그게 자신의 어리 디 어린 사촌 동생일 줄은 누군들 미리 상상이나 했단 말이던가?! 엘스헤른은 그 사실에 한탄에 한탄을 거듭했고, 형님 놀리기에 재미가 쏠쏠한 제롬은 날 마다 로자리움으로 놀러가서 레비앙과 즐거운 대화의 나날을 보냈다. 그 동안 이래저래 일이 많았던 레비앙은 휴가철을 한가하게 보낼 수 있어서 조금은 여유로웠다. 리하르트와 사냥을 가거나 토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 게 된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고, 더불어 뜻하지 않은 어린 친구를 알게 되어 뭔가 신선한 자극이 생긴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레비안느가 친 척집으로 인사하러 간 상황이라 레비앙은 오히려 좀 더 여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전의 산책도 그에겐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요 며칠간 로 자리움에 갇혀 있다시피 했던 레비앙에겐 성관에서 벗어나 조금은 멀리 떨어 진 야외로의 외출이 어쩐지 설레기까지 했다. 오후 늦게 전해진 제롬의 서신을 받고 늦지 않게 루르드 강가에 도착한 레 비앙은 말을 탄 채 제롬과 함께 강가를 거닐며 이런 저런 토론으로 시간을 보 냈다. "음... 제 생각이지만, 프랑스는 지금 썩을 대로 썩었어요. 곪은 종기는 언 젠가는 터지게 마련이라구요. 아마도 프랑스 왕국은 이번 세기를 넘기기 힘 들 거예요." 밝은 금발에 해사한 기품이 돋보이는 소년은 뺨에 가득 홍조를 띄운 채 자 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레비앙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 에스트르 역시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 고.... 프랑스보다 한 걸음 늦은 것일 뿐이야. 에스트르도 그렇게 안으로부 터 곪아 들어가고 있어." 레비앙은 애마를 천천히 걸리면서 약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하 는 바는 아니었지만, 에스트르도 프랑스처럼.... 귀족들은 사치에 들뜨고 반 대로 평민들의 불만은 높아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평민들 중 부유한 족속들 은 귀족의 특권에 눈독을 들이면서 죄 없는 평민들을 선동하고.... 마치, 자 신들이 평민들을 위한 정의의 사자인 듯 가면을 쓰고... 약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레비앙은 말고삐를 당기며 강 쪽으로 눈길 을 돌렸다. 해질녘의 강은 핏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롬도 자신의 말을 세우고는 말에서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말을 다독이고는 레비앙 쪽으로 돌아 섰다. 레비앙 역시 말에서 내리 서더니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제롬을 보 고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말(馬)을 잘 다루시는군요. 쁘띠(작은, 귀여운,) 공작님." "앗, 말(言) 놓기로 하셨잖아요! 제가 온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가 끔 그런 식으로 말을 높이시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구요." 제롬의 볼 멘 소리에 레비앙은 그냥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강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엘스가 그 나이었을 때도 그랬는데..." "엘스? 아... 형님 말씀이로군요. 형님과 저를 비교하시는 마세요. 모든 면 에 있어서 전 형님보다 월등하다구요." 제롬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레비앙은 또다시 웃음을 지었다. 제롬을 보고 있 는 것이 꼭 엘스헤른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제롬 군은.... 엘스헤른과 많이 닮았어." "예에?!" 제롬이 못 마땅한 표정을 짓자 레비앙은 미소를 머금고 강둑에 올라앉았다. "불쾌했나보군.... 하지만, 정말.... 엘스헤른과 닮았어." 제롬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레비앙의 곁에 와서 앉았다. 약간은 싸늘한 주홍 빛의 바람이 강둑 위를 스치듯이 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레비앙의 붉은 빛 머리카락도 무게감 있게 흔들렸다. 제롬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넌지시 레비앙에게 물었다. "어째서... 형님과 친구가 되셨죠?" 레비앙은 잠시 별 걸 다 묻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짧게 대답을 했다. "그가 날 꼬드겼으니까...." "푸훗..."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롬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연녹색의 눈을 말똥거리며 "형님은 남자도 꼬드기나요?" 하고 묻는다. 레비앙은 가벼운 눈웃음을 지으며 건성으로 말했다. "뭐, 내가 마음에 들었나보지." 쿡쿡거리며 웃어대던 제롬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레비앙에게 넌지 시 물었다. "제가 알고 있는 붉은 금발의 프로이덴느를... 레비앙 역시 알고 있죠?" "....." 레비앙이 대답이 없자 제롬은 약간 풀이 죽은 표정으로 강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고 제롬은 괜히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약간은 후회가 되고 있었다. "그녀를... 어디서 보았지?" 한참만에 레비앙이 의외의 질문을 하자 제롬의 뺨에는 이내 생기가 돌았다. "그러니까... 저... 한 8년 전쯤에 에스트르를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에스 트르의 어느 귀족집 파티에서였죠. 글쎄... 그때는 아홉 살 정도의 꼬마 숙 녀였는데... 당신과 같은 붉은 금발을 하고 있었어요. 마치 인형같이 생겨 서...솔직히 그녀가 안고 있던 인형보다 더 인형처럼 생겨서 유심히 쳐다보 고 있었더랬죠." 제롬의 설명을 듣고 있던 레비앙의 입꼬리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후후...." 레비앙은 마치 심호흡이라도 하듯 고개를 들고 가득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 고는 작은 한숨과 함께 제롬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르떼이유 가의 파티에서였지, 꼬마 프리미르. 그래, 우리 집이었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나의 누이이고. 좀 여려 보였나보지만, 그녀는 그때 열 살이었어. 로자리움에 한 번 온 적이 있었군. ...아마, 그래서 이번에 제롬 군이 에스트리온 성관에서 로자리움으로 찾아왔던 그 길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텐데?" * 주 - 프리미르(Frimir) : Mr.에 해당하는 에스트르 어. 신사에 대한 호칭 이죠. 무, 물론 지어낸 말...; "아, .... 레비앙의.... 누이였어요?" 제롬은 약간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때 잠시 프랑스에서 돌아와 있었던 때였고, 당시엔 파티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다지 사람들과 어울리진 않았지. 그러고는 이 내 다시 프랑스로 갔고.... 뭐, 최근에 다시 로자리움에 와 있어. 제롬은 레비앙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무슨 생각 끝에 이내 고개를 반짝 들고 물었다. "근데 왜... 이번에 로자리움을 방문했을 때는 한 번도 못 뵈었을까요?" "아.... 그건...." 레비앙은 약간 뜸을 들이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건성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에스트르에 들른 거라서 얼마 동안 친척들에게 인사 갔어. 그리 고..." 레비앙은 초록빛의 눈에 작은 미소를 띄우면서 제롬을 쳐다보았다. "뭐, 그녀가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제롬 군과 마주칠 기회는 잘 없었을 거야." "에? 무슨 말씀...?" "그녀는 잠꾸러기거든. 자네는 그녀가 잠들어 있는 오전 중에 다녀가곤 하니 까..." "그야 레비앙이 오후에는 왕성에 입궐하니까 그렇죠." 뾰로통한 표정의 제롬의 변명에 레비앙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무슨 말에든 민감한 반응과 호기심을 가지는 어린 신사. 마치 천사 같은 외모를 하 고서도 언제나 약간은 색기 어린 눈빛을 짓고 있는.... 그래도 마냥 귀엽기만 한.... 남동생이라는 존재의 느낌은 이런 것일까? 레비앙은 문득 제롬 같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곧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훗.... 남동생이라니.... 한참을 아무 말 않고 있던 레비앙은 초록빛의 눈에 약간의 장난기를 띄우며 제롬에게 넌지시 물었다. "꼬마 프리미르께서는 그 때 겨우 일곱 살이셨을 텐데.... 어떻게 그녀를 그 렇게 상세히 기억하고 있을까?" 레비앙의 물음에 제롬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제 첫사랑이었으니까요." - TO BE CONTINUE - ==================================================================== 어제! 쏴랑하는 친구 아횬 양으로부터 메모가 도착해 있었답니다. (언제나 사랑스런 친구죠.^^) 메모의 내용인 즉. "친구! 왜 엘스헤른이 대공이라 불리는 거지?!" 어라라? 그러고 보니 왜 엘스헤른이 대공이라 불리는 거지?;;;;; 순간 당황 한 펠티는 파닥파닥하다가 문득 '근데 대공이 뭐야?' 라는 생각에 이래저래 뒤져본 결과. 대ː공 (大公) ① 유럽에서, 왕가(王家)의 황태자 또는 여왕의 부군(夫君)을 이르는 말. ¶ 영국의 필립 ∼. ② 유럽에서, 작은 공국(公國)의 군주의 호칭. 곰곰 생각을 해 보니, 엘스헤른은 황태자도 아닌데다가 여왕의 부군도 아니 고 공국의 군주도 아닌 겁니다.;;; 또한 설정에는 그냥 공작 가의 차남이라 되어 있었으나, 세습 귀족에 있어서도 작위는 가장 가까운 친자에게 물려주는 지라 엘스헤른의 형이 에스트리온 공작이 되는 겁니다.(종신 귀족이라면 또 몰라.;) 그리고, 아빠인 에스트리온 공작이 죽기 전에는 형도 역시 에스트리 온 공작이라고도 불릴 수 없구요.;; 펠티는 바보였던 겁니다!!! 라고 외치는 순간 문득 생각난 것은.... 여기는 가상왕국이 아니겠습니까?! 캬하하하핫.^^(가상...이라는 설정은 이래서 행복하답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는 처남인 엘스헤른을 너무너무 총애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작위 문제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설정을 조금 바꾸고(엘스헤른이 멋져지는 순간입 니다!) 하기로 했답니다.;; 우웅... 아횬 양 미안.;;; 뭔가 대책을 마련하기로 해 놓구선 이렇게 마무 리를 하다닝.;; P.S. 요즘 펠티의 최대 목표가 된 것은 아횬 양을 토모요 짱으로 코스프레 하 도록 하는 거랍니다! 아아~! 너무 잘 어울릴 거예요.^^ 아횬 양은 앞머리부터 가 귀여운 토모요 짱 같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헐렁이 양말을 신은 아횬 양 은.... 상상이 안 가는군요.;;; 뭐, 문제는 아횬 양이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는 거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1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9 조회수: 605 [번 호] 8932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5일 21:49 Page : 1 / 12 [등록자] EGALITE [조 회] 385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1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1) 조심성 없는 장난스러움. 제롬의 황당한 대답에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사랑이라... 뭐랄까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그만큼 뭔가 참신하고도 신선했다. 요즘에 듣 기 힘든 단어라 그런 걸까? 어쩐지 <순수>라는 단어와 결부지어 지는 첫사랑 이란 건... 요즘의 귀족사회에서는 되려 비웃음의 대상처럼 되어버린... 그나저나 제롬의 첫사랑이 레비안느였다니....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나직 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제롬 군은 무척이나 조숙하셨군." "아, 아니.... 그렇진 않다구요." 제롬이 버벅대자 레비앙은 더욱더 소리내어 웃어댔고 무안해진 미소년의 뺨 은 한결 붉어졌다. 얼굴 가득 홍조를 띈 제롬을 보며 레비앙은 어째서 자꾸 그를 순수와 결부시키게 되는 지 알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것을 혹은 좋아했 다는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 아무 거리낌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저 모습이 제롬을 그렇게 빛나 보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런 용기야말로 지금 레 비앙에겐 절실하게 부러운 것이었다. 레비앙은 어쩐지 마음이 씁쓸해졌다. 어쩌면 멀지 않은 옛날에 엘스헤른도 저랬을지 모른다. 제롬은 엘스헤른의 어릴 적과 꼭 닮았으니까..... 하지만 그땐 레비앙 자신도 어릴 적이라 그의 그런 순수함을 보지 못했을 테다. 아이 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른이 됨으로 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반면에 어릴 때 볼 수 있었던 어떤 것들은 포기하게 되어버린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릴 적의 것을 포기하고, 어릴 적의 자신을 탈피하고 뭔가를 버림으로서 얻 을 수 있는 것을 얻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기 위해 포기하는 것은 뭘까? ....그것은 자신이 지녔던 그 깨끗하고도 투명한 열정의 순수인 걸까? 어떻게든 사람은 성장하고 또 아주 문득... 순식간에 변화하기도 한다. 그 래, 사람은 언제고 변해간다. 문득 레비앙은 자신의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절친한 사람들이 변해 가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뺨을 한가득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싸늘하고 날카로운 우울함은 온몸을 감싸며 그의 어깨를 떨게 했다. 레비앙은 가만히 두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문득 레비앙은 벨라시그네의 뒷골목에 살던 붉은 머리칼의 그녀가 그리웠다. 그렇게 따뜻하던 그녀의 품이.... 하지만 더 이상 은 어린애가 아닌 이상에, 레비앙은 이젠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자장가를 불러주던 그 따스한 목소리도 이제 들을 수 없고, 온몸을 얼어붙게 할 듯이 불어대던 차가운 한겨울의 바람으로부터 그를 따스 하게 안아주던 그녀의 체온도 이젠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이란 것은 어떻게든 변하게 마련이다. 아니면.... 그녀처럼 어느 한 순간에 죽어버린다 든지. 문득 공상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레비앙은 붉은 햇살이 일렁이는 루르드 강 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햇살이 느릿한 강의 물결에 의해 살며시 동요되고 있었다. 얼핏 곁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와 레비앙은 제롬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석양이 스며드는 밝은 금발을 바람에 내 맡긴 채 아직까지 발그레하게 물든 뺨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년은 레비앙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르드 강에 부서지는 햇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레비안느를 만나보고 싶지는 않아?" 레비앙은 감싸고 있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마치 지나가는 투로 넌지시 물 었다.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 제롬은 약간 놀란 표정과 함께 눈빛을 반짝거렸 다. 석양의 하늘이 비치는 연녹색의 반짝이는 눈. 역시 소년답다. 금새 저렇 게 기대에 찬 눈빛이라니... 하지만 제롬은 살며시 눈을 내리깔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나 보고싶지 않아요." "음? ....왜?" 레비앙이 의외라는 듯 묻자 제롬은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흘렸다. "이번에...... 만일 이번에 그녀를 보게 된다면.... 정말로 사랑해버리게 될 거 같아서요. .....그러면 곤란하거든요." 제롬의 소년답지 않은 대답에 레비앙은 피식 웃었다. 사랑에 빠져버리면 곤 란하다고? 엘스헤른의 사촌동생 답지 않은 말인 걸? 만일 엘스헤른이 제롬 같 은 상황이었다면 기필코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나려고 했을 텐데..... 레비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약간은 경고하듯 제롬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로자리움에는 오후엔 방문하지 않도록 해. 얼마 안 있으면 그녀도 로자리움으로 돌아올 테니까. 뭐, 제롬 군은 파티 같은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파티에서 그녀를 보게 될 일은 잘 없겠지." 레비앙은 강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고 제롬은 그 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석양이 레비앙의 머리카락을 더욱 붉게 물들이 고 있었다. 마치 불꽃같이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넋을 잃고 바라 보고 있던 제롬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8년 전의 로자리움에서의 파티.... 어른들의 눈길을 피해 장미정원의 한 구 석에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소녀의 머리카락도 이렇게 아름다운 붉 은 색이었다. 때아닌 독감으로 앓아 누워 있었던 엘스헤른 대신 참석한 파티 라는 것은 아직 꼬마였던 제롬에겐 시시하고 흥미 없는 것이었다. 파티장 밖 으로 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중에 에스트리온 성관에 돌아가면 병상 (?)에 누워있을 형을 어떻게 골려줄까를 궁리하던 장난꾸러기 꼬마는 문득 장 미정원 저 쪽에 앉아있는 그 인상적인 붉은 머리칼의 소녀를 발견했다. 가득 숨을 죽인 채 장미 넝쿨에 몸을 숨기고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던 꼬마는 영원 히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그녀가 가만히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까 레비앙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어린 숙녀는 울고 있었 다. 그 맑은 초록빛의 눈에 가득히 고여있던 눈물이 그녀의 뽀얀 뺨을 따르륵 굴러 떨어지는 것을.... 그리고 그 눈물을 들킬세라 얼른 손등으로 훔쳐버리 는 것을 제롬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그가 조금만 더 컸었더라면 그녀에게 다가가 손수건이라도 건제 주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때 제롬은 어렸을 뿐더러 손수건도 없었다. 게다가 이세상의 사람 같지 않 게 아무 움직임 없이 앉아있는 그녀의 앞에, 몰래 엿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던 그였다. "레비안느 양은.... 행복한가요?" 제롬은 레비앙을 쳐다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쩐지 어렸을 적에 레 비안느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보았던 것이 생각나 그렇게 묻고 싶어진 것 이었다. 약간은 이상한 제롬의 질문에 레비앙은 그를 말끄러미 보더니 이내 눈길을 떨구었다. 이상한 물음이긴 해도 그걸 묻는 제롬의 눈빛만은 무척 진 지했다. "아니.... 행복하지 않아." 답하는 레비앙의 목소리는 가득히 가라앉아 있었다. "행복하지 않을 거야, 정말...." 확신이라도 하듯 레비앙은 한 번 더 말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흐려지고 있었 다. 제롬은 어느새 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려버린 레비앙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겨있는 레비앙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문득 제 롬과 눈빛이 마주치자 레비앙은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던 소년은 어느새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제롬은 소년답게 미소 띈 눈을 약간 내리깔고는 레비앙의 머리칼을 향해 손 을 뻗었다. "당신의 머리카락.... 만져봐도 될까요?" 레비앙이 채 허락을 하기도 전에 제롬은 그의 곱슬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 볍게 꼬고 있었다. 레비앙은 호기심 많은 소년의 행동에 피식 웃음만 짓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제롬은 그런 레비앙의 뺨 위에 가만 손을 올려 자신 쪽으 로 고개를 향하게 했다. 약간은 반강제적으로 제롬을 응시하게 된 레비앙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냥 보아오던 소년다움이 아닌.... 마치 어른 같은 제롬의 눈빛이 자신의 내면을 뚫어보기라도 하듯 그렇게 말끄러미 자신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제롬의 입술이 더없이 포근한 느낌으로 입술 끝에 닿아왔다. 방심했던 레비앙은 그대로 떠밀려 누워버렸고 제롬은 그에게 키스를 하며 그의 위에 가볍게 엎드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비앙은 그의 어깨를 떠밀어 내려고 했으나 제롬이 레비앙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힘껏 깍지를 껴버려서 꼼 짝도 할 수가 없었다. 레비앙은 자신보다 키가 크긴 하지만 마냥 어리게만 보 고 있었던 제롬이 의외의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고 있는 것에 놀랐으나 어떻게 이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도가 없었다. 키스를 끝내고 고개를 든 제롬은 약간 내리깐 눈에 가득히 미소를 띄우며 생긋 웃었다. 뺨까지 찰랑거리는 그의 금발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레 비앙은 소년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별로 그의 행동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냥 이건 장난일 뿐이라 는 것을.... "제롬 군은... 남자에게도 키스를 하나?" 레비앙이 그를 응시하면서 묻자 소년은 변성기의 약간 낮은 목소리로 대답 했다. "아마도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보죠." 그 대답에 레비앙은 큭큭 웃어댔고 제롬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여전 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고 레비앙의 귓가에서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당신의 친구가 된 기념으로.... 한 가지만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어 요? "음? 뭔데..?" 레비앙의 건성의 대답에 제롬은 약간 고개를 들어 석양의 하늘이 가득 담긴 레비앙의 초록빛 눈을 응시했다. 제롬의 낮은 숨결이 어느새 또다시 레비앙의 입술 끝에 따스하게 닿아왔다. 그리고 소년은 나직히 속삭였다. "Once more..." -TO BE CONTINUE - ==================================================================== 으윽.. 이번 편은 분량의 채우기 위해 무진장 노력에 노력을 마지않았습니 다! 중간에 끼워 넣기 및 대사로 때우기 등등... 때문에 뭔가 흐름이 이상하 지만 이해해주세요.;; 요즘 이 글을 쓸 땐 라는 곡을 듣고 쓴답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서 좋아요.^^ 가뜩이나 고민이 많은 엘스헤른이 나오는 장면을 쓸 때 면 글이 술술술 써지곤 한답니다. (술술 써지면 뭐해? 허접인데. T-T;;) 분량도 적은데 오늘은 잠이 오는 관계로 잡담도 길게 못하겠네요. 왜 이리 피곤한 건지 원...;; 요즘은 하는 일없이 피곤하다니까요. 잠은 하루에도 지 나칠 정도로 많이 자는데.... 암튼,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시고... 펠티 괭이는 이만.... 호로록....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2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09 조회수: 574 [번 호] 8984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6일 22:36 Page : 1 / 13 [등록자] EGALITE [조 회] 383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2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2) 숨길 수 없는 마음. 제롬이 에스트리온 성관에 도착한 것은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여지껏 기다 린 건지 엘스헤른이 도끼눈을 하고는 현관 밖에 서 있었다. 그렇게 가득 구겨 진 형의 얼굴이 멀리서도 보이자 제롬은 어쩐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꼭 저런 표정을 보면 놀리고 싶어진다니까... 제롬은 싱글싱글 웃는 표정으로 사촌 형의 바로 앞에다 말을 세웠다. 제롬 이 미처 말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엘스헤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설교 조로 그 를 나무랐다. "좀 일찍일찍 다니고 그래라. 네 녀석이 외출하는 데에 따라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 저 고귀하신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엘스의 엄마)에게 하루 종일 들들 볶였단 말이다.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아작을 내 주려고 했었 는데..." 형이 뭐라 그러던 간에 제롬은 여전히 기분 좋은 웃는 얼굴을 하고는 말에 서 훌쩍 내려섰다. 요 며칠 관찰해본 결과 느낀 거지만 항상 사촌 형은 레비 앙과 관련된 일에만 저렇게 민감하게 화를 내곤 했다. 뭐, 아까 아침녘에 레 비앙에게 루르드 강에서 만나자는 서신을 쓸 때 엘스헤른도 옆에 있었기 때문 에,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사촌 동생이 여지껏 레비앙과 놀다 왔다는 것 쯤은 알고 있을 테고, 저렇게 화가 난 것도 분명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제 대충 형과 관련된 인간 관계에 대해 정리를 끝낸 제롬은 이제부터 조 금 엉뚱한 장난을 시작할 생각에 약간은 들뜨기조차 했다. 어른인 척들은 해 도 아직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뭘 먼저 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이 사 람들을 조금 도와줄까 하는 계획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다니고 그래? 밤늦게 혼자 나돌아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당 하면 어쩌려고!" 엘스헤른은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사촌동생을 향해 쉴 새 없이 땍땍거렸 다. 제롬은 도끼눈을 한 잔소리꾼의 앞으로 여유롭게 다가서서는 어깨를 으쓱 했다. "오오~! 어린애 취급은 사양하겠어.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 라구. 게다가 왕족으로서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기사 교육도 마쳤고 말이 지. 뭐, 혹여 형님이 간절히 바라는 대로 내가 무슨 일을 당한다 해도 존경 하옵는 형님을 남겨두고는 호락호락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구." "제롬! 너.... " 예상대로, 조금 깐죽거려주니까 엘스헤른은 달아오른 주전자처럼 가득 화낼 기색을 보였다. 제롬은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형님의 행동에 뒹굴거리며 웃 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은 참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엘스헤른을 향해 약간 비꼬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씨익 웃었다. "좀 솔직해지시는 게 어때? 형님." 빙글빙글 웃고 있던 제롬은 - 엘스헤른이 보기에 - 악마 같은 눈빛을 띄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 지금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게 단순히 내가 늦은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껏 레비앙과 있었기 때문.... 아니야?" 제롬의 비꼼에 엘스헤른은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제롬은 냉소를 한층 더해 붉은 입술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레비앙을 내게 빼앗겨서 질투하는 거야?" 엘스헤른은 아무 말 없이 잠시 눈을 내리 감고 있더니(분을 삭이는 중), 그 냥 뒤돌아서버렸다. "얼른 들어가자. 어머니께서 걱정하셔." 그가 재미없게 돌아서 버리자 제롬은 그의 등 뒤에서 큰소리로 웃어댔다. 오오~! 거짓말쟁이. 그럴 땐 마음껏 화를 표출해야 하는 거라구. 제롬은 애써 자신을 자제하고 있는 사촌 형을 도발하기 위해 조금 더 톤을 높였다. "하하하. 질투하는 거 맞나본데?" 제롬의 깔깔거림에 엘스헤른은 가득히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이 뭘 잘 못 먹은 걸까? 오늘따라 왜 이리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지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가뜩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인데 저러는 꼴을 보니 악마도 저 자식 보단 나을 듯 했다. "그럼 이건 어때? 고귀한 척 하시는 나의 형님.... 이 말을 들어도 그렇게 담담한 척 할 수 있을까?" 제롬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엘스헤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현관을 향해 척척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럴 땐 얼른 저 녀석을 피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현관을 향해 걸음을 때어 놓는 엘스헤른의 다리와 팔에 힘이 가득 들어있었다. 제롬은 그런 그를 한껏 비웃 어주며 살며시 입을 열었다. "나, 레비앙과..... 키스했거든." 순간 엘스헤른의 어깨가 움찔 하더니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오오! 성공!! 제롬은 박수라도 치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오늘의 작전을 위 해 애써 참았다. 이렇게까지 약을 올렸으니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뭐, 여지껏 장난을 쳐 본 결과, 엘스헤른은 이럴 때면 여지없이 길길이 날뛰곤 했다. 제 롬은 우뚝 멈춰서버린 사촌 형의 등을 말끄러미 쳐다보며 기대에 찬 눈빛을 반짝였다. 등을 돌린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엘스헤른은 낮게 한숨을 짓더니 제롬 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마치 얼어붙은 듯한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가 깐 죽거리는 건방진 표정을 하고 있는 제롬을 응시했다. "그래서?" 엘스헤른의 표정은 싸늘하리만큼 담담했다. 정말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아 직 발동이 덜 걸린 걸까? 제롬은 엘스헤른이 의외로 무심해 보이자 어깨를 으 쓱했다. "역시 에스트르의 왕족답군. 감정 처리 하나는 끝내주는데?" 제롬은 빈정거리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럼?" 엘스헤른은 냉정한 표정으로 사촌동생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러면, 네가 내 친구와 키스한 걸로 내가 너에게 결투라도 신청해야 하는 것이었던가? 네 얼굴에 내 장갑이라도 던져주련?" 그 말에 제롬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그런 반응에 엘스헤른은 더더 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기분 나빠? 영국의 왕족으로서 모욕감이라도 느낀 거야?" "형님." "그는 남자야. 네가 남자와 키스를 하든 같이 뒹굴든...." 재빨리 말을 잇던 엘스헤른은 잠시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차가운 눈길로 그 를 응시했다. "....난 관심 없어." 엘스헤른의 말에 제롬은 가득히 표정이 굳었다. 레비앙의 일이라면 그렇게 목숨이라도 걸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던 사람이.... 그를 향한 우정이 이 정도 밖엔 되지 않는 거였을까? 하지만, 잘 못 짚었을 리 없다. "그렇겠지. 관심 없겠지. 그러니까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자신에게서 멀어지 려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거겠지." "무슨 소리야? 엉뚱한 상상은 관 둬." 엘스헤른은 정말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제롬의 말에 어쩐지 가슴이 철렁했다. 저 녀석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요즘 레비앙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것을..... 저 녀석이 어떻게 알고 있은 걸까? 제롬은 여전히 밋밋한 반응만 보이고 있는 엘스헤른이 어쩐지 답답했다. 아 무리 형이 이 나라 최고의..... 아아, 누설해서는 안될 비밀을 누설할 뻔했 군. 아무튼, 지금 형님은 자신의 권위에 걸 맞는 냉정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왜? .....이건 일이 아닌데! 왜, 마치 일이라도 처리하는 듯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 하는 거지? 제롬은 엘스헤른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노려보았다. 형님만 아니라면 뺨이 라도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점 동요도 없는 엘스헤른의 짙은 잿빛 눈동자를 보니 더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형님은.... 그렇게 레비앙과 오래도록 친구였으면서.... 전혀 있는 그대로 의 레비앙을 보려고 하지 않아. 그거 알아? 형님은 레비앙의 옛 모습에 연 연해 있는 거라구. 그는 자꾸 변하는데, 형님은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아. 계속 예전의 그로 있어주길 바라는 거지. 어릴 적의 그 모습 그대로! 그러 니까 그의 지금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거야. 그의 무엇이 변했는지를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니까! 보기 싫은 것은 눈을 감아버리면 보이지 않지.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뭐야! 형님은 조금도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아." 제롬이 언성을 높이자 엘스헤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어. 내가 알고 있던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그 대로야." "그건 형님의 바램이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내내 깐죽거리던 제롬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소리를 치자 엘스헤른은 적응이 되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는 한숨을 지으면 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어린애 소꿉놀이 같은 거 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래. 내 말 뜻 알겠어? 그건 어린애 식의 소유욕으로 해결 될 일도 아닌데다가, 내가 생각하듯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야." "바보 같아! 그런 식의 어른이 될 수밖엔 없는 거야?!" "제롬." "그렇담 레비앙이 형님 아닌 다른 사람과 친해져버린다 해도 상관없어?" "레비앙에게도 다른 친구는 필요해." "정말 상관없어? 정말이야? 훗.... 자기 자신까지 속이려 하지 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야? 이제는 그 가면을 벗을 때도 되지 않았어? 형님의 가장 절친한 친구를 다른 녀석에게 정말 빼앗겨버린다면, 그런 후에도 그렇 게 가식적인 미소만 지을 수 있을까?" 제롬은 뭔가 분한 듯 계속 언성을 높였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엘스헤른은 어깨가 싸늘해져 오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 다. 여기서 흔들려버리면 결국 제롬이 말을 인정해버리는 것이 될 테다. 비록 제롬이 말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세상엔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엘스헤른의 표정을 빤히 읽고 있는 듯 제롬은 가득 미간을 찌푸린 채 내뱉 듯 말했다. "형님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소중한 건 스스로 지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 만일.... 지키지 못한 거라면...." 제롬은 잠시 말을 끊더니 무겁게 한숨을 지었다. "그렇게 미련 같은 것 따윈 갖지 마. 몹시도 추하니까...." 그는 엘스헤른을 지나쳐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동안 멍하게 서있던 엘 스헤른은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었다. 역시 제롬 녀석은 아직 어린 게다. 자 신의 열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어릴 적의 순수가 가 슴속에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제롬.... 네가 잊은 게 있어." 엘스헤른은 별 빛이 스며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는.... 남자야. 내가 애태워서 될 대상이 아닌 거야." - TO BE CONTINUE - ==================================================================== 요즘 펠티는 게으름의 극치랍니다. 기상시간은 오후 1시.(물론 일어나서 아 침을 먹고는 또 자는 거죠.;) 그러고 나서 내내 뒹굴거리다가 12시도 안 되어 서 또 잔답니다. 이건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이 자는데 허비해버리는 시간보 다 적군요...T-T 그렇다고 깨어 있는 시간 동안에 열심히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죠. 대충 밥 먹고 간식 먹고 먹고 먹고.... 먹다가 볼 일 다 보고. 이러 다 뚱땡 괭이가 되어버릴 거예요... 글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지만(호홋.;;) 또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3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0 조회수: 606 [번 호] 9028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7일 22:25 Page : 1 / 12 [등록자] EGALITE [조 회] 376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3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3) 엘스헤른의 늦잠. 어제 제롬이 하는 말을 들은 후로는 내내 가슴에 돌이라도 들어앉은 듯 뭔 가가 가득 묵직했다. 오늘은 로자리움에도 방문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에 틀어 박혀 있었지만 엘스헤른이 한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숨쉬는 것조차 자신의 숨소리가 방을 한가득 채우고 돌아와 다시 귓가에 들리지 않았더라면 잊고 있 었을 듯 했다. "레비앙은....." 그 빨강 머리칼의 예쁘장한 녀석은.... "그 녀석은 친구야." 내내 혼자 중얼거린 말도 단 한 마디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숨 쉴 수도 없 을 만큼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절친하고.... 소중한.... 내 친구." 이렇게 천장을 보고 누워서도 계속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 뭔가를 확 신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으면 그가 친구라는 사 실조차 잊어버릴까봐 염려라도 된 걸까? 일어나자마자 내내 보고 있었던 천장은 새하얀 색이었다. 침대의 커튼에 가 려 반쯤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그의 머리 속처럼 새하앴다. "난....." 몸이 가득 가라앉기라도 하듯 한숨이 뿜어져 나온다. 어제 현관에서 제롬으 로부터 들은 것은 그렇게 의미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동?사후에 형님의 그 방 대한 재산을 물려받는 꿈도 영 그른 것은 아니로군." "멀쩡한 사람 죽이지 마. 게다가 너한테 그 일에 대한 비밀을 말해준 것은 무덤에 가서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다." "아, 그럼그럼. 나 같아도 그걸 두고는 고이 눈감을 수 없을 것 같아." 제롬의 깐죽대는 소리를 곁 귀로 흘리며 엘스헤른은 멍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다지 일어나고 싶진 않았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지금이 꽤 늦은 시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팔을 들어 눈을 가려버렸다. "여어! 형님! 벌써 죽게?!" 제롬의 비아냥거리는 호들갑이 어쩐지 멀게 느껴진다. 다른 때 같았으면 비 록 꽁꽁 묶인 채 관속에 묻혀있다 하더라도, 아니 그보다 더 극한 상황에 처 했다 하더라도 벌떡 일어나 제롬을 산 채로 짓밟아주고도 남았을 테지만 오늘 은 어쩐지 그럴 의욕이 나지 않았다. "뭐야? 정말로 시체나 다를 바 없잖아." "으음...." 엘스헤른은 제롬이 간절히 바라는(?) 대로 망자의 신음소리 같은 한숨을 내 쉬었다. "설마 그 건강 체질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니지?" 제롬 녀석은 염려의 말도 저런 식으로 밖에 할 줄 모르나보다. 엘스헤른은 지끈지끈 엄습해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라도 누르고 싶었지만 손 하나 꼼짝하고 싶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제롬은 팔짱을 딱 낀 채 엘스헤른을 내려다보 고 있더니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다. "꾀병인 거 다 알아." "그래, 아프지는 않아." 엘스헤른은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고는 또록하게 눈을 떴다. 아프지 않다니....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엘스헤른은 어쩐지 웃 음이 날 것만 같았다. 이유도 없이 이렇게 가슴이 아프면서 아프지 않다는 말 을 "쳇, 바보. 사랑에 빠졌겠지 뭐." 비꼬는 투의 제롬의 말에 엘스헤른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사랑 에... 빠졌다고? 엘스헤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롬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상대가 누구냐고? 레비안느 양, 아니면 레비앙, 아니면 리하르트 씨, 아니 면 나." 아아, 역시.... 또다시 녀석의 농담에 놀아나다니. 엘스헤른은 분한 표정으 로 미간을 가득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채 뭐라고 하기 전에 제롬은 장난스럽 게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턱 내리쳤다. 무방비 상태에서 한 대 얻어맞은 엘 스헤른은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쿨룩쿨룩.... 컥.... 콜록.... 이, 이 자식!!" 엘스헤른이 벌떡 일어나 앉자 그의 침대 맡에 앉아있던 제롬도 용수철 마냥 튕기듯 일어섰다. "그래. 그렇게 일어나야 형님답지. 뭐야? 이 좋은 여름날에 반 혼수 상태라 니 청승스럽잖아?" 제롬의 말이 맞다. 이유도 없이 이렇게 누워 있는 걸 알면 가만두지 않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우선 에스트리온 공작 부인부터 펄펄 날뛸 일이 다. "어머닌 아무 말씀 없으셨어?" "어, 아침 일찍 로자리움으로 날라 버린 줄 알고 계셔." 뭐, 하긴 그게 요즘의 일상이었으니까 아들이 아침식사 시간에 나오지 않아 도 별 의심 안 하셨을 것이다. 엘스헤른은 부스스 흐트러진 잿빛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넘겼다. 그러면서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불효자가 된 기분이로군." "그렇겠지. 부모보다 많은 재산을 숨기...." "제롬." 제롬 녀석이 또 입을 나불거릴 기색을 보이자 엘스헤른은 그의 말을 딱 끊 으며 근엄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일은 좀 그만 씹어라. 어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폐하께서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지만 않으셨더라도 난 그 일을 수락하지 않았을 거야." "재산이 탐나서가 아니고? 대공 전하~!" "재산 따위가 뭐가 필요 있겠니. 나한테 걸맞지 않은 짐을 떠맡게 되었는데. 훗.... 대공 전하라.... 이유도 모르고 나를 대공이라 칭해야 하는 사람들 은 배 꽤나 아플 테지." 엘스헤른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막상 일어서니 달리 할 일 도 없었다. 게다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묵직한 것이 꼭 개구리가 스무 마리 정도는 들어앉아 왁자거리는 기분이었다. 엘스헤른이 도로 침대에 앉아버릴 기색을 보이자 제롬은 그의 소매 자락을 끌어당겼다. "하루종일 시체 놀이라도 하려는 거야? 볼썽사납잖아." 제롬은 그를 문 쪽으로 잡아끌면서 활기찬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파티에나 가자. 형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많고 많은 꽃들이 모여있을 테니까 말야. 혹시 알아? 레비안느 양이 로자리움에 돌아와서 오늘 파티에 참석할 는지." 그러나 엘스헤른은 완강히 거부하며 자신의 소매 자락을 붙들고 있는 제롬 의 손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 도하는 저승사자처럼 자신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이끌고 있는 제롬에게서 벗어 나기 위해 눈물겹게 바둥거렸다. "이 자식!! 놓지 못해?! 난 잠옷차림이란 말이닷!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말란 말야!!" - TO BE CONTINUE - ==================================================================== 요즘은 점점 제목 정하기가 힘들어지네요. 이번 편의 제목은 원래 <마음은 풀잎처럼 흔들리고....>인데 어쩐지 촌스러워서 때려 치웠답니다. 게다가 뭔 가 닭살스럽기까지 하고요. 막상 적어놓고 보니 소름이 쫙 돋아서 때아닌 오 한을 경험했죠. 그나저나, 어젯밤에 놀다가 루프스 오빠의 비평(?)을 듣고는 꺄아~! 하면서 열심히 쓰고 있답니다. 뭔가 힘이 솟는 거 있죠.^^ (꺄아~!) 예전에 썼던 글 이랑 많이 달라서 매일 "우엥! 허접해."라면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오라버니 말을 듣고 나니 힘이나요. 오늘도 더워서 잡담은 여기서 그만.^^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4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0 조회수: 549 [번 호] 9078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8일 22:47 Page : 1 / 15 [등록자] EGALITE [조 회] 384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4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4) 마음의 그림자. 다행히 하늘하늘하고 하얀 치마형의 잠옷을 입고 나오진 않았지만, 제롬에 게 이끌려 참석한 파티가 엘스헤른에겐 그다지 즐거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파티장 내부는 약간 들뜬 듯한 즐거운 분위기에서 쉴 새 없이 춤곡이 흐르고 있었다. "제롬. 너 점술가가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배를 곯지는 않을 것 같구나." "어, 나도 내가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는 예전에 몰랐어." 두 사촌은 지금 리하르트와 미뉴엣을 추고 있는 아가씨를 물끄러미 보며 동 시에 한숨을 내 쉬었다. 제롬의 말대로 레비안느는 언제 돌아온 겐지 오늘 파 티에 버젓히 참석해 있었다. 8년만에 만난 첫사랑인 레비안느와 간단한 인사 를 나눈 제롬은 엘스헤른이 미처 그녀와 따스한 이야기들을 몇 마디 나눠보기 도 전에 그를 끌고 홀의 가장자리로 와 버렸고 그런 이래 그들은 줄곧 이 곳 의 의자에 앉아 레비안느의 춤추는 자태만 감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파티라는 것은 말이지...." "무슨 말하려는지 알아. 형님. 정말 재미없다고 말하려고 했지?" "응." "....이해해. 동감이야." 두 사촌은 파티 내내 와인만 홀짝거리며 넋 나간 듯이 앉아있었다. 그런 그 들의 눈 앞에 문득 정교한 무늬 수놓인 명아주 풀잎 뒷면 색의 드레스 자락이 나타났다. 프랑스 풍의 드레스. 뭐, 요즘 프랑스에선 폭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들 하지만 현재 프랑스의 최신 유행 형식인 로브 아 라 폴로네즈(robe a la polonaise) 형식의 이 드레스는 연한 에메랄드빛의 오버 스커트가 여러 개의 드레이프로 부풀려서 양옆과 뒤쪽에 앙증맞게 놓여있었다. 두 사촌의 눈 앞에 나타난 숙녀는 치마 자락이 흔들릴세라 조심스래 걸음을 옮겨서는 그들의 바 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두 분은 별로 춤추는 것을 즐기지 않으시나 봐요." 레비안느 양.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다. 레비앙과 똑 같은... 하지만 약 간은 부드러운 목소리. 엘스헤른은, 뭔가 눈빛을 가득 반짝이며 레비안느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제롬 녀석을 흘깃 쳐다보고는 제롬의 시선을 따라 그녀 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렇게 그녀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약간 은.... 뭐랄까 허탈했다. 촛불의 불빛 때문일까? 저번의 케시르니아 숲에서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런 웃음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훨씬.... 가식적 인..... 그런 식으로 그녀를 간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레비앙에게 말 한 것처럼 레비안느는 그저 일반의 다른 귀족 계집애들과 다를 바 없을 지도 몰랐다. 비단으로 된 화려한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몸에 두르고 꽃과 보석과 리본과 비싼 타조 깃털로 머리를 높게 장식한 채 부채로 입을 가리고 호.호. 호 하고 웃어대는 귀족 계집애들..... 엘스헤른은 애써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려고 노력했다. 레비안느는 뭔가 특 별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다른 계집애들을 대할 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지만 그녀를 볼 때 마다 어쩐지.... 마치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득히 설레어버리는 것이었다. 레비안느는 이전에 엘스헤른이 했던 무례하게 굴지 않겠다던 맹세를 아직 믿고 있는 건지 경계심을 떨친 맑은 눈빛으로 빤히 엘스헤른을 쳐다보고 있었 다.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엘스헤른은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저... 이해하세요. 형님은 오늘 별로 몸이 좋지 않거든요." 엘스헤른이 내내 아무 말 없자 제롬이 벌떡 일어서서 마치 고전을 읽는 듯 한 말투? "잠시.... 저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엘스헤른의 느닷없는 제안에 숙녀는 잠시 당황한 듯 했다. 두 사람의 눈치 를 살피던 제롬은 엘스헤른의 심각한 표정에서 뭔가를 읽고는 자신의 와인 잔 을 들고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홀 가운데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럼, 나는 춤이나 추러 갈까?" 제롬이 사라지고 나자 엘스헤른은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파티장 밖으로 데리 고 나왔다. 숙녀는 잠시 미심쩍어했으나 이내 순순히 그를 따라 나와주었다. 달빛이 공기에 녹아 하얗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포도빛으로 물든 밤하늘에 는 온통 달빛의 알갱이가 떠다니고 그것은 숨쉬기 힘들만큼이나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홀에서 들려오는 왈츠 소리도 희미했고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의 즐거운 재잘거림도 마치 풀벌레의 울음소리 마냥 멀게 들렸다. 대신 그녀 의 작은 숨소리와 분 내음, 향수 내음이 그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앞서서 걷던 엘스헤른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인 레비안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불러냈으니 뭔가 말을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이 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불러내서...." 아주 한참만에 엘스헤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레비안느는 그런 그를 말 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떨구었고 엘스헤른은 가득히 망설여지는 마음을 다 독여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당신이 에스트르에 오고 나서부터.....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게 무슨 생각인 지도 모르게 그냥 가득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당신은.... 레비앙과 정말 똑 같이 생겼고.... 그래서.... 뭐랄까.... 저는 가득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저... 공작 전하." 횡설수설하는 엘스헤른 앞에서 레비안느는 어쩔 줄 몰라하며 치마 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바라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괜히 가슴 가득 한숨이 차 올랐다. 뭘 말해야 될지도,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불러낸 것조차가 잘 못 된 걸까? 하지만 그 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가슴이 꽈리처럼 부풀어서는 끝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제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 알고 있습니다. 전혀 생각의 정리를 할 겨 를도 없었구요. 하지만 당신에게 뭔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서...." 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마음이 가득 가라앉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갑자기 레비앙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비앙과 똑 같으 되 같지 않는 레비안느에게선 자신도 모르게 어떠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는 것을 엘스헤른은 알 수 있었다. 레비안느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이렇게 가 슴?답답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레비앙이라는 생각 에 거부감이 드는 건지도 몰랐다. 둘도 없는 친구와 똑 같은 또 다른 존재라 니.... 정말 그녀는 레비앙과 똑 같이 생겼지만, 지금 이 순간은 레비앙이 보 고싶었다. 엘스헤른은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저.... 가봐야 할 데가 있습니다." 엘스헤른은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나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허리 를 깊이 숙여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원하신다면 홀 안까지 에스코트 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공작 전하." 레비안느가 생긋 웃어주자 엘스헤른은 목례를 하고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 다. 그가 가버린 곳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비안느는 가볍게 한숨을 짓 고는 몸을 돌렸다. 뒤로 돌아서자 마자 그녀는 하마터면 바로 뒤에 있던 누군 가와 부딪힐 뻔 했다. "어머나!" 언제 온 건지 그녀의 뒤에는 제롬이 서 있었다. 제롬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 면서 그녀에게 목례를 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 아니예요. 근데.... 이렇게 기척도 없이 언제 나오신 건가요?" 레비안느가 미소 띈 얼굴로 묻자 제롬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엿들은 거죠. 저 쪽 뒤에서 엿듣다가 형님이 사라 지는 걸보고는 이쪽으로 도망 온 겁니다." "훗..." 숙녀는 그의 무례한 행동을 그다지 나무라고 싶지 않았는지 그냥 웃고 말았 다. 제롬은 그녀에게 산책을 제안하는 뜻으로 팔을 내밀었고 레비안느는 그의 팔짱을 끼며 사뿐히 걸음을 때어 놓았다. 달빛이 고즈넉한 산책로를 첫사랑이었던 여인과 걷고 있다는 사실이 제롬에 겐 약간 묘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뭐, 지금 이런 기분에 한가하게 그녀와의 산책을 즐긴다면 장차 곤란해질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란 것도 잘 알았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제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님이 어디에 가는 건 지 아세요?" "예?" 제롬의 느닷없는 질문에 레비안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롬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제롬은 미소 띈 얼굴로 앞만 보면서 그녀를 이끌고 산책로를 걸었 다. "급히 사라진 걸 보면 알 수 있죠. 언제나 그 곳에 갈 땐 저렇게 서두르니까 요." "어디에.... 가셨길래...." 레비안느가 말끝을 흐리자 제롬은 콧등을 약간 찌푸리며 짓궂은 웃음을 지 었다. 그는 마치 어린애 앞에서 사탕을 들고 줄까 말까를 반복하는 장난꾸러 기처럼 굴었고 레비안느는 그가 줄 사탕을 기다리는 순진 무구한 눈으로 계속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작은 풀벌레 소리를 즐기며 몇 걸음을 더 걷고서야 제 롬은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곳이죠.... 로자리움...." 제롬이 선뜻 대답을 하자 레비안느는 어쩐 일인지 딱 걸음을 멈추었다. 저 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어 진 것이 당황스러웠는지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제롬은 규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이 웃었다. "뭐, 요즘은 레비앙이 휴가라 로자리움에 있을 테니까.... 레비안느 양께서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굳이 레비안느 양이 없더라도 레비앙은 손님 접대 잘 하니까요." 제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숙녀는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걸음을 멈추었고 자신을 향해 뒤돌아보는 제롬을 슬그머 니 올려다보았다. "저....." 치마 자락을 말아 쥔 그녀의 손이 뭔가 불안한 모양으로 살풋 떨리고 있었 다. 그녀는 붉게 칠한 입술을 열어 나즉하게 말했다. "저.... 이만 돌아가 봐야 할까봐요. 레비앙이 일찍 오라고 그랬거든요." "아... 그러시려구요?" 제롬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의 의미를 알 리 만무한 레비안느 는 치마 자락을 잡고는 까딱 인사를 했다. 그녀는 제롬이 채 인사할 겨를도 주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비록 인사를 못 받은 제롬이었지만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는 그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큰일 날 뻔했잖아. 이번에 레비앙보다 레비안느를 먼저 만났더라면 정말 사랑에 빠져버릴 뻔 했지 뭐야." 소년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뒷짐을 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무사히 귀가하시길..... 아름다운 레이디." - TO BE CONTINUE - ==================================================================== 이번이 14편인 건가요? 아아, 정신이 없군요.;; 학원에서 내내 골았더니 좀 피곤하답니다. 비축분도 많이 줄었는데 이러고 있다니 정말 한심해요. T-T 하 지만... 우엥~! 오늘은 날씨도 너무 더운 걸요! 풀썩... (설마 이러다가 연재 중단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이번 편은 분량도 많아 잡담을 적게 해도 무사히 넘어갈 듯 하네 요.^^; 그럼 펠티는 이만....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5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1 조회수: 566 [번 호] 9109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19일 22:10 Page : 1 / 14 [등록자] EGALITE [조 회] 386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5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5) 기다림. 제롬의 예상대로 엘스헤른은 곧장 로자리움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왜 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 레비앙을 보지 않는다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 다. 심장은 제 정신이 아닌 듯 마구 뛰고 있었고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멀리에 로자리움이 밤 안개에 싸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엘스헤른 은 정신 없이 말을 달렸다. 공기 중에 섞인 달콤한 장미 향기와 로자리움 저 택의 자태가 그에겐 어쩐지 에스트리온 성관보다도 더 반갑고 정겨웠다. 어느덧 로자리움에 도착한 엘스헤른은 집사를 붙들고 레비앙을 내놓으라고 다짜고짜 성화를 부렸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레비앙을 내 놓으라 는 엘스헤른에게 질렸는지 집사는 흐늘거리면서 대답했다. "도련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님방에서 잠시 기다리시 면...." "뭐야?! 정말 안 왔단 말이야?!" 엘스헤른은 집사를 팽개쳐두고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집사가 저렇게 말하 긴 해도 레비앙은 분명 로자리움에 들어와 있을 터였다. 레비앙이 느직하게 손님방에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갇혀 얌전한 애완 동물처럼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도 보고 싶은데.... 이렇게도 정신 없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기다릴 수가 있단 말인가! 무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엘스헤른은 허락 없이 무단 가택 침입(?)을 해 서는 한달음에 서재로 달려가 문을 휙 열어 젖혔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익숙한 책 내음이 풍겨오긴 했지만 서재엔 불이 꺼져있는 채였다. 레비앙이 앉아있을 법한 자리엔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온 달빛만이 흠뻑 젖어들어 있었 다. 엘스헤른은 서재의 문을 고이 닫아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서 책 읽기엔 늦은 시간이라면 분명, 자기 방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끈질기 게 따라오는 집사의 만류를 뿌리치며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방을 향해 걸었다. 이건 꼭 어릴 적의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초조했다. 저택의 이층에 있는 레비앙의 방에 도착한 엘스헤른은 문고리를 잡고는 잠 시 멈칫했다. 만일 안에 레비앙이 있다면 허락도 없이 방 문을 연 것에 대해 무척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화난 그의 모습보다 두려운 자신의 마음이 한 걸음 앞질러 가고 있었다. 비록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지만 레비앙을 보게 되 면 봄비에 씻겨 내릴 겨울동안의 먼지처럼 사그라져 버릴 거란 것을 엘스헤른 은 알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어쩐지 익숙한 내 음.... 마음이 한 가득 가라앉아 안정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방 역시 불이 꺼져있고 레비앙도 없었다. 엘스헤른은 등 뒤에서 자신을 조마조마한 눈 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집사를 무시하고는 레비앙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고 즈넉한 달빛이 크고 긴 창을 통해 들어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인 없이 텅 빈 방은 지금 이 곳을 둘러보고 있는 엘스헤른 자신의 마음과도 같았 다. 이 방 안에 레비앙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지금 그 자신의 마음도 레비앙 이 절실히 필요했다. "....정말 없군...." 그가 나직히 중얼거린 것은 집사에게 겸연쩍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가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엘스헤른은 방 안을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천천히 방을 빠져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게 넋을 잃고서 현관까지 내려온 엘 스헤른에게 집사는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도련님께서 돌아오실 텐데요." 그러나 엘스헤른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지긋지긋한 손님방에 갇혀 있 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곳은 엘스헤른에겐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 다. 엘스헤른은 답답한 가슴을 부여 쥐고는 정원으로 나와버렸다. 집사는 더 이 상 따라오지 않았다. 손에 한가득 크라바트(넥타이의 일종)의 레이스가 구겨 지는 느낌이 났지만 그것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에스트리온 성관으로 돌아 갈까 라고 생각해보긴 했으나 어쩐지 이대로 돌아가 봤자 별 수 없을 듯 했 다. 오늘 낮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물먹은 행주 마냥 내일도 그런 아침을 맞이하게 되겠지. 몇 걸음 거닐던 엘스헤른은 장미 덩쿨 사이의 잔디밭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 다.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예장이 풀잎과 흙에 엉망이 될 거란 생각 같은 따위는 들지 않았다. 아이보리색에 금실로 수놓아져 풀물이 들기 쉬운 프락 코트였지만 엘스헤른은 아무렇게나 앉은 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까 레비안느와 서 있었던 산책로처럼 이 곳도 작은 풀벌레의 소리가 싸늘 한 공기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장미 넝쿨의 잎사귀는 바람에 바스락거렸고 꽃잎의 빛깔처럼 짙은 향기는 독한 술 마냥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참 바보 같은 짓을 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 충분히 바보 같았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끌려 무작정 달려와 놓고서는 그가 아직 돌아와 있지 않은 걸로 화를 내고.... 엘스헤른은 자신의 무릎을 가슴에 안으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은 싸 늘한 밤바람이 시간을 업고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찬 공기와 함께 가득 가 라앉는 진한 장미향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지만 그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 아있었다. 레비앙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게 참 청 승맞기도 했다. 시간이란 것은 참 상대적이다. 언제나 똑같이 흐르고 있을지 는 몰라도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시간을 앞 질러 기다리는 마음이 항상 먼저 달려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도 한참 기울고 밤의 빛도 한층 짙어져서야 로자리움의 저택에서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이쪽을 향하는 잔 걸 음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몸을 일으켜 그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하 고 싶지는 않았다. 멍하게 앞을 주시하고 있긴 했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 았다. 십 년 동안을 들어오고도 무심했던 레비앙의 발 소리. "네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선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곧장 나왔어. 근데, 밤늦게 웬 일...." "좀 일찍 다니고 그래!" 레비앙의 말을 끊으면서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짜증을 내고야 말 았다. 기다린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린 게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로 울컥 화가 치밀 것만 같았다. 자신은 이토록이나 보 고 싶어했는데 레비앙은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그게 그렇게 화나 고 분할 줄은 예전엔 몰랐던 일이었다. "엘스헤른...." 레비앙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친구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 렀다. 뭔가 가득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 한마디에 엘스헤른은 여지껏 서러웠 던 것이 확 풀려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뒤에 그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는 자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만 몸을 일으켜서 레비앙에게로 돌 아섰다. "미안해.... 그냥 난.... 좀 걱정이 되어서 그랬어." 나즉히 사과하는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레 비앙은 그의 눈을 찬찬히 살폈다. 자신을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레비앙의 예쁜 눈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웃고싶은 심정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잘 다녀왔어?" "아.... 으응. 저.... 오늘은 황태자 전하께 연락이 와서.... 심심하다구 놀 아 달래는 거야. 휴가 기간이 좀 길어서 섭섭하셨나봐. 전하께서 좀 오래 놀다 가라고 하셔서.... 네가 올 줄 알았더라면 일찍 돌아 왔을 텐데 말 야." 어쩐지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는 레비앙을 보며 엘스헤른은 짧은 한숨을 지 었다. 여기 올 줄 알았더라면 일찍 왔을 거라고? 거짓말쟁이. 로자리움에 뻔 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저런 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엘스헤른은 어쩐지 씁쓸해졌다. 자신이 이 곳에 올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 마 레비앙은 황태자 전하와 더 오래 놀다 왔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 어서였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는 친구를 비꼬고 싶지는 않아 엘 스헤른은 그만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고싶었노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선뜻 말이 나오진 않았다. 어쩐지 그 말을 하면 레비앙이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도망갈 것만 같았다. 아 니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난으로 치부해 버리든지.... 말은 하지 않아도 그 냥 이대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정말 미칠 듯이 보고 싶을 때는 이렇게 봐 버려야 속이 풀린다. 엘스헤른은 아직도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레비앙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서는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에, 엘스...." 레비앙이 당황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지만 엘스헤른은 그를 꼬옥 끌어안 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냥..... 왈츠를 추고 있다고 생각해, 레비앙. 나랑 춤을 추고 있다고 생 각하구.... 가만히 있어 줘." 귓가에서 들려오는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레비앙은 숨이 막 힐 것만 같았지만 어쩐지 가득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그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뺨에 부벼져 오는 크라바트의 레이스가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심장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쩐지 그 고동소리가 자장가 마냥 그를 편안하게 하고 있었다. 옛 친구라는 건 역시 이 런 걸까? 이렇게 가득히 감싸 오는 따스한 편안함.... 레비앙은 엘스헤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동안 가슴속에 너무 고민 이 많아 이렇게 따뜻한 친구를 홀대한 것이 어쩐지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엘 스헤른이 여전히 지금의 자신을 봐 주지 않는다는 것을 레비앙은 알고 있었 다. 그 자신은 훌쩍 어른으로 커서 지금 이렇게 커다란 품으로 안아주고 있으 면서 어릴 적부터 같이 커 왔던 친구를 여전히 그 때의 그 모습으로만 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레비앙은 망설임 없이 엘스헤른을 밀어냈다. 그의 따스함과 멀어지자 아주 잠시 허탈하기까지 했지만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온 레 비앙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내리깐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엘 스헤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뭐하자는 거야?" 레비앙의 냉랭한 목소리..... 엘스헤른은 차가운 비수라도 맞은 듯이 심장 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듯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가 네 장난감이야?" "레비앙..... 난....." 엘스헤른의 우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레비앙은 마음이 가득 무거워졌다. 하 지만 더 이상은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를 벗어나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레비앙은 잘 알고 있었다. 레비앙에게 있어서 엘 스헤른은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일 뿐이었다. 늘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가 로막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족쇄.... 언제나 그의 따스함에 이렇게 마음이 약 해져버리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래선 안 되는 일이다. 마냥 어릴 적의 일들에, 어릴 적의 감정에, 어릴 적의 마음에 젖어있다면 그렇게 여리기만한 어린 레비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 네 말대로 난 황태자 전하의 장난감일 지도 몰라. 하지만 너 따위의 장난감이 되진 않겠어. 내가 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하찮다는 거 알아. 그렇다고 해서 네 녀석이 날 함부로 대 하는 건 참을 수 없어." 하잔한 눈빛을 지으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긴 했지만 레비앙은 어쩐지 가 슴이 가득히 아팠다. 자신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친구의 우울한 모습이 마 음을 묵직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바보같이 아무 대꾸도 못하고 저러고 서 있 는 걸까? 왜 다른 때처럼 장난이라도 치지 않고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돌아가. 나 무지 피곤해."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섰다. 저택으로 걸 음을 때어 놓는 그를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이 조그맣게 입을 열 었다. "레비앙...." 가득히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 레비앙은 뭔가 못 먹을 것을 먹고 체한 듯 속이 가득 울렁거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멈추면, 멈추어서 엘 스헤른에게 다가가면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간다. 그를 벗어나기 위해 애썼 던 그 동안의 노력들 모두.... 레비앙은 마치 깊은 물 속에 잠겨들 듯 무겁 기만 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태연한 척 엘스헤른에게서 멀어져갔다. 아무런 동요 없이 자신을 떠나가는 친구를 보며 엘스헤른은 멍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TO BE CONTINUE - ==================================================================== 더, 더워요... 풀썩. 뭔가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16편과 17편을 퇴 고 중인데 어쩐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 생각도 없이 머리가 멍 해서 식상한 문장만 나열하고 있는 거죠. 진도도 안 나가는데다가 땀만 뻘뻘 빼고 있답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요즘엔 라는 음악을 들으면서 쓰고 있는데 원래는 그 음악을 들으면 술술 잘 써지곤 했지만 오늘 은 짜증만 났답니다. 더위를 먹은 걸까요? T-T 비축분이 동나려 하고 있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겨우 다섯 편.(두 편은 퇴 고도 안 했고.;;) 우으으... 쓰러지면 안돼... T-T p.s. 아횬 양, 응원해줘서 고마워... >_> ┃┃ ┃┃ ┃┃ ┃┃ ┃┃ ┗╋━━━━━━━━━━━━━━━━━━━━━━━━━━━━━━━━━╋┛ ┗━━━━━━━━━━━━━━━━━━━━━━━━━━━━━━━━━┛ (16) 알 수 없어.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땐 어쩐지 어제 일이 꿈결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느 닷없이 레비앙을 안아버리다니.... 파티에서 그다지 와인을 많이 마신 게 아 닌데 왜 그랬을까? 엘스헤른은 누운 채로 멀뚱히 천장을 보고 있다가 심란한 마음에 모로 돌아누웠다. 어제 그랬던 것은 순전히 달빛 때문이었어.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달빛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니까..... 하지만.... 곰곰 생각을 해봐도 그다지 레비앙에게 크게 잘못 한 건 없었 다. 무슨 생각에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냥 그를 한 번 안았을 뿐이었고, 그 건 어렸을 때도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레비앙이 그렇게 화를 냈을 때 뭔가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던 것은..... 어쩌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어떤 불순 한 마음으로 그를 안았기 때문인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랬다. 그를 안으면서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엘스헤른은 자신이 요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문하고 싶었 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거나, 생각 없이 제롬을 질투하거나, 내내 멍해 있 거나, 아니면 불안해하고, 아니면 들떠있는 게 고작이다. 이건 모두 다 레비 안느가 나타난 후에 시작된 증세였다. 원인은 역시 레비안느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레비안느가 왜? 엘스헤른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가득 뒤 죽박죽이 되어서는 마치 이래저래 꼬여버린 장미 넝쿨과도 같았다. 게다가 그 생각들이 가시 마냥 제 각각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두 통이 엄습했다. 정말 엉망진창이다. 마음은 가득 불편하고 생각은 뒤죽박죽, 이래저래 몸도 무겁고.....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눕자 문득 어제 그렇게 화를 내던 레비앙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거리는 것 같았다. - 내가 네 장난감이야? - 네가 나에게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 네 말대로 난 황태자 전하의 장난감일 지도 몰라. 하지만 너 따위의 장난감이 되진 않겠어. 내가 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하찮다는 거 알아. 그렇다고 해서 네 녀석이 날 함부로 대 하는 건 참을 수 없어. 장난감....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맺혔던 걸까? 언젠가 무심코 했던 말을 레비앙이 그렇게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는지는 몰랐던 일이었다. 여지껏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레비앙을 상처 입히고서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난스럽게 던진 말들이 아마도 레비앙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을 테다. 레비앙이 나날이 싸늘해지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일까.....? 뭔가 이 씁쓸한 마음을 위안할 수 있을 만한 것이 필요했지만 그다지 좋은 방안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리에 멍하니 누워있기는 해도 엘스헤른은 당장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일단 레비앙을 방문해서 어제 일을 사 과해야만 했다. 레비앙은 무지 화가 났을 테고 언제나처럼 또 며칠 동안 그를 안 보려고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급히 로자리움으로 향할 외출 준비를 하긴 했으나 엘스헤른은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달리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비오기 직전의 덥덥하고 우중충한 공기 같은 기분이랄까? 보이지 않는 회색 알갱이가 마음을 가득 채워버린 듯 엘스 헤른의 기분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외출하는 아들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 도끼눈을 치켜 뜨는 어머니와, 뭔가 알 듯 말 듯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롬에게 간단한 인사 를 한 엘스헤른은 어둡고 침침한 마음을 어찌 해보려고 노력하며 현관을 나섰 다. 이런 기분으로 사과를 하러 간다는 자체가 이상하기 그지없다. 전혀 마음 의 준비도 하지 않고, 아니, 할 겨를도 없이 무턱대고 나서기만 하다니.... 이래저래 싱숭생숭 했으나, 에스트리온 성관을 나선 엘스헤른은 요즘의 일 상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애마를 타고 로자리움을 향해 달렸다. 단숨에 로자리움까지 달려온 엘스헤른은 이번엔 손님방에서 기다리지 않고 레비앙의 서재로 향했다. 물론 집사가 울상이 되어서 그를 만류하느라 난리도 아니었지만 늙은 집사가 매달린다고 해서 꼼짝 못할 엘스헤른이 아니었다. 곧장 서재까지 걸어온 그는 짙은 고동색의 커다란 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 었다. 레비앙을 만나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정도는 생각하고 왔 어야 했지만 오는 동안 내내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쩐지 가슴이 한가득 불 편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다가 계획 따위를 하기엔 뭔가 마 음이 너무 급했다.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문손잡이를 잡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가만 히 문을 열었다. 서재의 커다란 문을 열자 오래된 책의 텁텁한 내음이 확 풍 겨져 나왔다. 엘스헤른은 마음을 굳게 먹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의 안은 창문을 통해 초여름의 아침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 었다. 그 햇살이 투명하게 맺히는 책상에 엎드린 채 레비앙은 눈을 감고 있었 다. 인기척이 나는데도 아무 움직임이 없는 걸로 봐서 아마 살풋 잠이 든 모 양이었다. 소리나지 않게 서재의 육중한 문을 닫은 엘스헤른은 그 자리에서 문에 기대 어 선 채 한동안 레비앙을 응시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레비앙의 붉은 머리카락 위에서 말린 꽃 마냥 바스스 부스러지고 있었다. 뽀얀 빛 무리가 그 를 감싸고 있는 게 마치 그의 몸에서 빛이 스며 나오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 였다. 그의 하얀 셔츠 깃 위로 흐트러진 붉은 금발이 밝은 햇살에 의해 더욱 더 선명해 보였다. 고른 숨소리와 함께 레비앙의 익숙한 체취가 언뜻 느껴졌다. 엘스헤른은 뭔 가 가득 어지러워지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레비앙의 향기.... 그리고 그를 감싸며 밝게 부서지는 빛무리.... 이 저택을 가득히 채우는 장미꽃 내 음.... 마약에 취하기라도 하듯 몽롱한 느낌이랄까?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괜한 생각 따위는 떨쳐버리기 위해 가볍게 한숨을 내 쉰 엘스헤른은 천천히 레비앙에게로 다가섰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자 니 안 그래도 새하얀 레비앙의 얼굴이 어쩐지 창백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언 젠가 창가에 기대어 잠든 레비앙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어쩐지 생소한 느낌이 들어 기어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야 말았던 적이 있다. 레비앙이 금새 깨어나서 흠칫 놀랬었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들키는 것만 같아서 애써 담담한 척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엘스헤른은 뭔가 가득히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잠든 것을 보면 자꾸만 레비앙을 만져보고 싶었다. 지금 창백한 그의 뺨을 보니 그런 불순한 충동을 더더욱 떨칠 수가 없었다. 작게 숨을 몰아쉰 그는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고 레비앙에게로 손을 내밀었 다. 어쩐지 몹쓸 행동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려 머릿속을 쾅 쾅 울리고 있었다. 레비앙의 뽀얀 뺨을 향해 살며시 손을 내밀던 엘스헤른은 순간 멈칫하며 손을 거두었다. 미처 그의 손 끝에 닿기도 전에 소매의 거추장 스러운 레이스가 레비앙의 뺨에 먼저 닿아버린 것이다. 작은 죄책감과 함께 알지 못할 아쉬움에 엘스헤른은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그는 나직히 숨을 고 르고는 자신의 손을 떨구어버렸다. 정말 너무나도 심각하게 굴고 있었던 자신의 행동에 엘스헤른은 어쩐지 웃 음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 비웃어주고 싶었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망설인단 말인가?! 왜 친구의 뺨을 쓰다듬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거지? 친구 사이라면 지극히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들에까 지 왜 죄를 짓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란 말인가?! 하지만 엘스헤른은 다시 손을 올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 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불온한 마음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 되는 것 같지만 마음 한 가득 뭔가 거리껴지는 게 있어서, 지금 그의 뺨을 만 져버리면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엘스헤른은 잠든 레비앙의 곁에서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엘스헤른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자각했다. 잠시 그의 잠 든 모습에 취해서 잊고 있은 거지만, 오늘 여기 온 까닭은 분명 그에게 사과 를 하기 위해서였다. "레비앙." 엘스헤른은 생각 끝에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깨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왠지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곤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깨우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저렇게 예쁘게 잠에 취한 친구를 그다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나직히 작은 한숨을 지었다. 아무래도 다음에 방문해야 할 모양이다. 이대로 둔다면 레비앙은 언제 깨어날지 모를 일이었고, 물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있지만 엘스헤른은 그를 눈 앞에 두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 다. 엘스헤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뭐, 생각 같아서라면 그의 뺨에 작별의 키 스라도 해 주고싶었으나, 어쩐지 그것마저 불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돌 아섰다. 그런데, 막 걸음을 때어놓으려는 순간 어쩐지 오른쪽의 소매가 묵직 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등 뒤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잠에 서 깬 걸까? 설마 아까 소매가 뺨에 닿아서? 아아,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게 아니다. 우선은....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걸까? 엘스헤른은 저 도 모르게 놀라고 망설여지는 마음을 가다듬느라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선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엘스헬른...." 마치 몸을 돌려주는 손길처럼 레비앙의 목소리가 나직히 이름을 불러왔다. 엘스헤른은 대답 대신 천천히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레비앙은 여전히 엎드린 채 자신이 움켜쥔 엘스헤른의 소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응시하고 있었다. "저... 레비앙. 어제는 말야...."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자신의 소매라도 잡고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이 어쩐지 가득히 위안이 되었다. 지금 같아서라면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비록 무표정하긴 했지만 레비앙은 그의 소 매를 만지고 있었고, 엘스헤른은 소매 끝이 마치 자신의 전체라도 되는 기분 이 들었다. "어젠.... 그냥 마음이 너무 무거웠었어. 이유도 모르게 말야. 그래서 횡설 수설 하고 정신없이 굴었나봐. 너를 찾아왔던 건.... 어쩌면 나.... 너에게 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뭔가.... 가득히 불안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에 위로가 필요했던 건 지도 모르지. 나 말야..... 네가 피곤했을 거라 는 건 헤아리지 못했어. 나 혼자만의 괴로움으로도 가슴이 터져 나가는 것 만 같았으니까.... 어제 일 사과할게. 무례하게 굴었다면 미안해." 엘스헤른은 담담하게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내내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던 레비앙은 여전히 그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낮게 말했다.. ".....괜찮아." 뭔가 더 따스한 대답을 바랬던 엘스헤른이었지만 무미건조하기만 한 그 대 답 한 마디만으로도 답답했던 심정이 비오는 날의 먼지 마냥 말끔히 씻겨나가 는 기분이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상태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그다지 무거운 침묵은 아 니었지만 엘스헤른은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이렇게 레비앙을 내려 다보자니 그에게 내맡겨진 소매가 차라리 자신의 손이었으면 좋겠다는 사치스 러운 욕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 레비앙이 자신의 무언가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 것만은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엘스헤른은 자신의 끝 레이스에 시선을 두고 있는 레비앙의 초록빛 눈을 물 끄러미 응시했다. 뭐랄까.... 그의 눈빛은 마치 맹수 앞에 던져져 저항할 의 사를 잃어버린 작은 동물의 눈 같아 보였다.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무언가 에 가득 잠식 당해버린 듯한 눈빛.... 레비앙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그에게 붙들려 있는 소매를 돌 려 그의 손등을 감싸 잡았다. 어쩐 일인지 레비앙은 아무 저항이 없었다. 요 즘 전혀 스킨 쉽을 꺼려하는 레비앙의 행동치고는 의외였다. 엘스헤른은 뭔가 알 것 같아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민이.... 있구나?" 문득 레비앙의 어깨가 아주 작게 움찔 하는 것을 보고서야 엘스헤른은 자신 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을 감싸 잡은 엘스헤른의 커 다란 손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피식 웃으면 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래." 레비앙의 웃는 모습이 엘스헤른에겐 어쩐지 못마땅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려고 노력하는 가식의 미소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웃느니 차라리 아까 같은 무표정이 나았다. 바보같이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 을 레비앙은 모르는 모양이다. "역시 오래된 친구라 말이 필요 없군." 레비앙은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그런 그에 게 맞추어 줄 수가 없었다. 덩달아 웃으면서 장난을 쳐버린다면 그와의 멀어 진 거리는 영영 좁힐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스헤른은 몹시도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고민이... 뭔지.... 내가 알아도 될까?" - TO BE CONTINUE - ==================================================================== 이번 편은 정말 쓰면서 무진장 애먹었답니다. 갑자기 이렇게 쓰는 것이 힘 들어진 걸 보면 슬럼프라는 것일까요?! 우에~! 슬럼프 싫어. 하지만 슬럼프라 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되는 것이므로 스스로 슬럼프가 아니라고 최면 을 걸고 있답니다.("슬럼프 아냐! 슬럼프일 리가 없어! 절대로 아니야! 아아 아! 아니야!! 누가 아니라고 말 좀 해줘!" <--절규하는 괭이 ) 이번 편은 그러고 보면 별로 퇴고다운 퇴고도 한 번 못했어요. 이건 마치 어린애를 옷을 덜 입혀서 밖에 내 보내는 기분이로군요. 하지만 매일 연재를 위해서는.... 풀썩.; 제목이 <알 수 없어>라는 것은 엘스헤른이 자신의 심정을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라, 솔직히 털어놓자면 제목을 뭘로 지을지 알 수 없어서 그렇게 지은 거랍니다.; 나날이 제목 짓는 것도 힘들어 지네요.; 16편과 17편은 좀 우울한 분위기라서 안 그래도 더위에 지쳐있는 독자님들 께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하지만 뒤로 가면 좀 복귀가 되니까 기다려 주 세요. p.s. 사악신 오빠, 고마워~!^^ 아아~! 첫 추천이라니.^^ 역시, 추천이 보약 이야~!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아!! 아자! 힘내서 열심히 써야지.*^-^*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7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2 조회수: 493 [번 호] 9218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21일 21:54 Page : 1 / 15 [등록자] EGALITE [조 회] 365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7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7) 미안해. 어쩐지 너무나도 가라앉은 목소리.... 레비앙은 문득 엘스헤른을 올려다보 았다. 그의 짙은 잿빛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진지하게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거두었다. 엘스헤른은 지금 언제나처럼 장난만 치곤 하던 철없 는 공작 전하가 아닌 한 사람의 친구로서 자신의 친구를 염려해주는 그런 어 른 같은 눈빛을 짓고 있었다. 문득 이렇게 그의 어른스러운 모습을 대하게 될 때마다 레비앙은 마음이 한 가득 불편했다. 겨우 두 살 터울인데 예전의 그 장난기 많고 어리기만 한 친 구는 저렇게 훌쩍 커버린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커버 린 채 이렇게 익숙하지 못한 행동을 하곤 하는 그에게 레비앙은 점차 예전처 럼 편하게 대할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에스트리온 공작(엘스 아빠) 전하도 살아 계시고, 또 형도 있어서 작위 계 승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열 여섯 살 때부터 공작 전하라 고 불리고 있는 엘스헤른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정말 천진난만하기만 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작위를 떠나서 그때의 엘스헤른은 레비앙에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아무리 신분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는 해도 무슨 이야기 든, 무슨 일이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쩐지 자 꾸만 그가 꺼려지고 있었다. 물론 엘스헤른이 자신을 변함없이 친구로 대하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 마음이 정말 고맙긴 하지만..... 엘스헤른의 변해 버린 모습을 그는 감당할 길이 없었다. 저렇게 친구를 걱정해주는 눈빛을 띄 고 있긴 해도 그건 엄연히 어른으로서의 눈빛이었다. 이제는 알 수 없는 존재 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엘스헤른은 여전히 그의 손등을 따스하게 감싼 채 깊은 눈동자에 가득히 걱정을 담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 이 고민이 먼지 말해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 해 보였다. 그런 엘스헤 른을 쳐다보며 레비앙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뭔가 가득히 두려워하고 있지?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에 대해서.... 그렇지? 뭔가 짐작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네 추측이 맞 을까봐서.... 그래서 두려운 거지?" 레비앙의 물음에 엘스헤른은 한숨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긍정을 표하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왠지 묵직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엘 스헤른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그 와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의 반 이상을 같이 했으니까 어쩌면 그렇게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가 고마울 때는 어디까지나, <변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지금 눈 앞의 엘스헤른은 우정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던 그 어릴 때의 엘스헤른이 아니 었다. 비록 마음은 같을지라도.... 레비앙은 그가 더 이상은 자신이 알지 못할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 가슴 아 팠다. 그렇다고 그의 시간을 말에 고삐를 채우듯 그렇게 붙들어 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언제고 변하게 마련인 것이고 그 변화를 쉽게 받 아들이지 못하고 절친하던 친구에게서 점점 멀어지려 하는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레비앙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멀어져버린다면 더 이상은 친구가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레비앙은 한숨을 지으며 엘스헤른에게 건성으로 물었다. "무엇을.... 추측하고 있는 거야?" "...." 엘스헤른은 무거운 한숨을 지었다. ".....말하고 싶지가 않아. 너무나도 두려운 거라서...." 역시나.... 엘스헤른은 알고 있는 게다. 레비앙의 입가에는 천천히 쓴웃음 이 번졌고 엘스헤른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레비앙은 자신의 손등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엘스헤른의 손을 때어놓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따라 엘스헤른의 시선이 움직였다. "엘스헤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테지만 레비앙은 그에게 확인을 시켜 주고 싶었다. 물론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다거나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 었다. 하지만 아무리 묵시적으로 통하는 의미라 하더라도 말로써 결정지어주 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언어로 표현되는 의미가 생각이 뜻하는 바의 반도 못 미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라는 것은 의외로 결정적인 위력을 가지 고 있다. "너는..... 내 친구지?" 마치 무슨 의식을 치르기 전에 하는 경건한 행위처럼 레비앙은 자신의 고민 을 말로써 털어놓기 전에 엘스헤른에게서 자신들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졌 다. 저 물음 따위가 어떠한 관계를 개선하는 데 소용이 될 리 없음은 분명하 다. 그냥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다. 이렇게 말로써 말하 고 듣지 않는다면 지금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하는 이 마음이 흔들려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레비앙의 바램대로 엘스헤른은 더없이 진지하게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래. 나는 네 친구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비웃지 않을 수 있어?" "응...." 뭐랄까? 이런 식의 대화가 어쩐지 레비앙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다지 의미 없는 약속 같은 것이지만 그런 따위의 다짐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자못 진지한 엘스헤른을 말끄러미 쳐다보던 레비앙은 천천히 돌아서서 창가 로 걸어갔다. 한동안 창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창을 등지 고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이제는 말 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 저 편안한 시선에 눈을 맞추며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말을 듣고 보일 엘스헤른의 반응을 상상하며 레비앙은 천천히 말문 을 텄다. "나.... 아무래도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레비앙의 한 마디가 떨어지고 나자 주위는 온통 소름끼칠 듯한 고요로 잦아 들었다. 엘스헤른은 귀가 멍해질 정도로 조용해져 버린 이 현실에 적응할 수 가 없었다. 이 숨막힐 듯 한 고요는 엘스헤른에게 레비앙이 방금 한 말을 증 폭시켜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들으리란 것 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 바로 지금 레비앙이 한 말 그대로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어쩐지 레비앙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닿아 깊숙이 꽂혀들었다. 비수가 꽂힌 상처에서 묵직한 고통이 생선의 비늘처럼 얇게 저며져 한 겹 한 겹 일어나고 있었다. 레비앙이 지칭하는 '그' 가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 마치 해바라기 꽃 마냥 언제나 해사하게 웃는 그 녀석. 엘스헤른은 그만 눈을 내리 감아 버렸다. 어쩐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다 예 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마음의 준비까지 단단 히 하고서 들은 말인데 이토록이나 극심한 고통이 밀려올 줄은 몰랐었다. 그 건 레비앙이 남자로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 었다. 그 따위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엘스헤른은 알 고 있었다. 레비앙이라면 그 누굴 좋아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더한 것이라 하더라도 레비앙이라면 무조건 받아줄 수 있었다. 고통의 근원은 레비앙이 아 니라 엘스헤른 자신이었다. 엘스헤른은 상처를 통해 혈액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런 그를 쳐다보며 레비앙은 쓴웃음을 지었 다. 의외의... 아니,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슨 대답이 나오리란 것쯤 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안다는 것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엔 지금 눈 앞에 벌어진 현실 따위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보고싶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레비 앙은 엘스헤른에게로 천천히 걸어가 그의 바로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떠... 나의 친구. .....그리고 나를 봐." 레비앙의 차분한 목소리에 엘스헤른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말 대로 그 깊은 초록색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 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때로는 가식이란 것도 감정에 의해 가로막혀 버릴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엘스헤른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웃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금처럼 이렇게 굳어버린 표정을 계속 짓고 있다면 레비앙은 모처럼 자신의 마 음을 말해주고서도 못내 가슴 아파할 것이다. 엘스헤른은 내키지 않는 기분으 로라도 친구를 배려해주려고 노력했다. 입언저리가 파르르 떨릴 것만 같았지 만 그는 웃으려고 애썼다. 그런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낮게 한숨을 지었 다. 그러고는 엘스헤른의 손을 가볍게 잡아 올렸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 등에 가만히 입맞추고는 그의 손을 놓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수고했어, 엘스헤른.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 엘스헤른은 어쩐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 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움이 밀려왔 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기란 정말 무리인 모양이다.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좁아져버린 시야 사이로 레비앙이 알 수 없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다면.... 난 너에게 계속 말할 수가 없어." 뭐랄까.... 그렇게 말하는 레비앙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 맑고도 커다란 초록빛의 눈동자에 그늘이 드리우는 것을 보며 엘스헤른은 한숨을 몰아쉬었 다. 억지로 가식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은 어쩌면 레비앙을 더욱 힘들게 만 드는 건지도 모른다. 친구 사이라면 가식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어느새 레비앙은 다시 창가로 돌아서더니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리하르트가 레비안느에게 청혼을 하러 왔었어. 먼저 너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넌..... 내 친구니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 저.... 엘스헤른.... 난 너에게 말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겐지 엘스헤른은 자각할 수 없었다. 그냥 어딘가 에 앉고 싶다는.... 아니 아예 누워버리고 싶다는 욕구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 고 있었다. 언젠가 제롬이 말한 것처럼 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한 시체 라도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정말 지금 심정으로라면 관 속이라 하더라도 마다 하지 않고 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엘스헤른은 농도 짙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한숨이 문득 레비앙의 말을 끊었다. 레비앙은 말을 멈추고 엘스헤른을 돌아다보았고, 엘스헤른은 한달음 에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다시 한 번 한숨을 지은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뺨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 채 가볍게 쓰 다듬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끌어당겨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그의 이마 위에 가만히 입맞추었다. "엘스...." 낮게 가라앉은 레비앙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스헤른은 그에게서 한 걸음 물 러섰다. "나.... 그만 돌아가야겠어." "엘스헤른...." 레비앙의 뺨에서 살며시 손을 내린 엘스헤른은 그만 돌아서서 문쪽으로 걸 음을 옮겼다. 그런 엘스헤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비앙은 한숨을 지으며 머 리칼을 쓸어 넘겼다. "미안해.... 엘스." "....레비앙." 엘스헤른은 문 손잡이를 잡고선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하다는 따위 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의 고민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 이 레비앙을 힘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 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뭐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해. 엘스헤른. 정말.... 미안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저렇게 미안해하는 레비앙의 말이 듣기가 싫었다. 귀 를 틀어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엘스헤른은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 려고 노력하며 나직히 말했다. "그만.... 우리....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러는 게 좋겠어. 다음에... 내가 다시 올게. ....그렇게 하자. 레비앙." 엘스헤른은 무겁게 한숨을 내 쉬며 서재를 나왔다. 길게 뻗은 복도에 나와 서자 그는 하마터면 정말로 주저앉아버릴 뻔 했다. 다행히 그런 꼴사나운 일 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한동안 문에 의지해 멍하게 서 있던 그는 어떻게 걸음 을 때어 놓는지도 모르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TO BE CONTINUE - ==================================================================== 요즘 펠티는 멱살을 잡고 흔들리고 있다. "바보 펠티!! Y물이 아니라며!!" 당연히 Y물이 아니다. 분명 처음부터 밝히기를 Y물적인 면을 띈다고 했지 Y 물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의외로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하신 독자님들이 계시 다는 사실! .....응? 무슨 말이냐고요? 물론, 내 입으론 말못해~! (퓨슝~! <-- 돌 날아오는 소리.;) 이번 편도 분위기는 우중충.... 하지만 다음 편은 제롬 군의 활약(?)으로 어두 침침한 분위기는 면할 듯. 뭐, 잠시 면하기만 하면 뭘 할까.; 몇 편 건 너서는 다시 우중충.... 고민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글은 이럴 수 밖에 없는 건가?! T-T 아무튼, 오늘도 날이 더운 관계로 잡담은 줄이고, 요즘 까먹기만 하고 보충 은 되지 않는 비축분에 대한 애도를.... P.S.1. 시아레스 님,(맞나요?^^) 격려 메일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할게요~! P.S.2. 룹스 오빠. 말만이라도 고마워.^o^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8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2 조회수: 469 [번 호] 9270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22일 21:19 Page : 1 / 14 [등록자] EGALITE [조 회] 367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8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18) 제롬의 건전한(?) 충고 "그래서!! 그냥 왔단 말이야?! 그냥?!!" 뭐랄까... 지금 이 순간 엘스헤른에겐 정말 관이라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 다. 관 속에 뉘어져 깊고 깊은 땅 아래에 파묻힐 수만 있다면 하찮은 목숨 따 위는 버려도 상관없을 듯 했다. 그렇게 깊숙히 파묻혀 버리면 저 지긋지긋한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은 죽음과도 같은 고요를 만끽할 수 있을 텐데.... 안 그래도 가득 어지럽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토할 것만 같고 미쳐버릴 것 만 같은데 제롬 녀석까지 옆에서 펄펄 날뛰니 엘스헤른은 거의 죽을 지경이었 다. 아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이 상황 보다 훨씬 더 나을 듯 했다. "뭐야?! 바보 같잖아!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렇게 나와버리다니!!" "제로옴!! 제발!!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안 된다고 너처럼 펄펄 날뛸 까? 아니면 레비앙 앞에서 목매는 시늉이라도 하리?" 엘스헤른은 실제로 자신의 목을 졸라매는 시늉을 하며 제롬에게 소리를 질 렀다. 저 악마 같은 녀석만 떨어져 나가게 할 수 있다면야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뜩 혼자 있고 싶은 때에 저 녀석은 왜 외출하지 않고 이렇 게 옆에 마쉬멜로우 같이 끈적끈적 달라붙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아아, 형님! 그렇다고..... 그렇다고..... 그렇게 그냥 돌아온단 말이 야?" 이제는 녀석이 마쉬멜로우 같다 못해 남의 집 불을 향해 알랑거리며 달려드 는 괘씸한 나방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저렇게 뱅뱅 돌면서 시선을 교란시키 는 모양이 꼭 나방이나 진배 다를 바가 없었다. 엘스헤른은 아까 답답한 마음에 제롬 녀석에게 모든 일을 털어 놓아버린 자 신을 저주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제롬 녀석의 목소리는 엘스헤른에겐 피 한 모금이라도 빨려고 그의 주위를 서성대는 모기 소리 같이 성가시기 그 지없었다. "그래도 거기서 그냥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구! 게다가 한 마디도 못하다니.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 "제로오오옴!!!" 엘스헤른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에스트리온 성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제 롬은 그제서야 찔끔 쫄아서는 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 자신 때문에 퀭 하게 꺼져버린 엘스헤른의 눈을 보고는, 로자리움에서의 일로 많이 상심한 것 이라 오인한 제롬은 더더욱 바삐 방 안을 돌아다녔다. "아아, 저 지경이 되어버리다니.... 정말..... 얼마나 애가 탔을까! 그래, 형님 같은 사람이 한 마디도 못하고 나왔을 정도라면...." "어지럽다, 제롬! 제발 좀 앉아서 말하렴." 엘스헤른이 다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제롬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엘스 헤른의 앞에 와서 앉았다. 그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선 이미 빛을 잃어버 린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형님, 싱숭생숭해서 미칠 것 같지?" 아아, 저 깐죽거림의 극치란.... 제롬의 물음에 엘스헤른은 상처 입은 맹수 마냥 사납게 그르릉거리며 제롬을 노려보았다. ".....놀리는 거냐? 지금!!" "아, 아냐, 형님. ......형님의 심정을 묻는 거야." 제롬은 토끼처럼 재빠르게 자리에서 퉁겨 일어나며 양손을 부지런히 저었 다. 엘스헤른이 내장이라도 토해 놓을 듯이 한가득 한숨을 뿜어내고는 다시 푹 고꾸라지며 어깨를 늘어뜨리자 제롬은 꼭 토끼 면상 같이 맹숭 맹숭한 표 정으로 눈을 매롱거렸다. "정말.... 심정이 어때? 싱숭생숭해?" 아아아, 신이여! 영예로운 이름에 맹세코 저 녀석을 죽도록 저주하나이다!! 엘스헤른은 코르크 마개가 날아간 샴페인 마냥 부풀어오르면서 고래고래 소리 를 질러댔다. "그래!! 싱숭생숭해! 싱숭생숭해서 미칠 것 같아! 뭔가 가득 안절부절 못하 겠고! 가슴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고! 머리 꼭대기에서 김이 천 길 만 길은 치솟는 것 같고. ....가슴이 미어져서 터질 것 같고!!" "무엇 때문에?" 폭주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엘스헤른의 말을 비집고 제롬의 나직한 물 음이 방 안에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정색을 하고 묻는 제롬의 말에 엘스헤른 은 딸꾹질을 하듯 말을 뚝 멈추고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제롬은 그럴 줄 알았다며 씨익 웃더니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턱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곧 다시금 엘스헤른에게 넌지시 물었다. "....레비안느 때문이야? 아님, 레비앙 때문이야? 아님... 둘 다야?" 아아.... 이건.... 정곡을 찔렸다. 엘스헤른은 느닷없이 한 대 얻어맞아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정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 동안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나, 나도.... 뭐가 뭔지.... 무엇 때문인지...." "으음, 그래? 뭐.... 어쨌든 레비앙이나 레비안느 둘 다 형님이 싫어해 마지 않는 리하르트 씨를 좋아하잖아? 쌍둥이란 것은 정말 오묘한 가봐. 생긴 것 역시 복사판 것도 모자라 어떻게 취향까지 같을 수가 있을까?" 리하르트의 이름이 나오자 엘스헤른은 또 미간을 가득 찌푸렸다. 형님의 얼 굴이 휴지처럼 구겨지는 것을 보며 제롬은 진지한 표정으로 엘스헤른을 응시 했다. "형님. 냉정해지라구. 이건 전혀 형님답지 않잖아. 이렇게 무조건 화를 내고 있는 건 말야." 제롬은 잠시 숨을 돌리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침착하게 생각해. 일단은 형님의 감정을 숨기고서.... 형님은 그렇게 잘 하 잖아. 심지어는 부모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까지 숨기는 형님인데 그런 것 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 "제롬!" 또 어느 샌가 장난 모드로 돌아서 버린 제롬에게 엘스헤른은 매서운 눈초리 를 던져 주었다. 녀석이 의외로 지금 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있긴 하지만 엘스헤른은 자신이 이번 일을 털어놓은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를 끊임없이 의 심하고 또 의심했다. 부모님께도 숨기고 있는 저 일처럼 두고두고 제롬의 입 에 회자되면서 그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흠칫 흠칫 놀라게 되는 형벌을 당하 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아무튼 제롬은 엘스헤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은 듯이 생글생글 웃으면 서 즐거워했다. "아무튼, 지금은 감정을 숨기는 것이 중요하겠군. 진실한 것이 좋지만 무릇 일이란 것은 다 때가 있게 마련이니까 말야. 마치 어른 같이 말하는 사촌 동생을 보며 엘스헤른은 한숨을 지었다. 녀석 의 말을 듣게 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더란 말인가! 하지만 엘스헤른은 지금 자신이 이 일의 당사자인 만큼 타인의 일을 보듯 냉정해질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제 삼자인 제롬의 도움을 빌리는 것도 나쁘 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저 깐죽거림과 재수 없는 비꼼에 시달릴 것을 생각 하면 끔찍하다 못해 참혹하고 처참하기 그지없지만 지금 엘스헤른에겐 누군가 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열기를 식혀 가라앉은 듯한 엘스헤른의 물음에 제롬은 안심한 듯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뭐, 에스트르의 황제가 저 멍청한 형을 왜 믿고 있 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 닥치든 금새 냉정함을 되찾아 일을 분석하고 해결하는 그런 면모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감정 놀음의 노예가 되어있는 이유로 저렇게 정신없이 굴지만 말이다. 제롬은 그런 방면엔 어쩐 일로 쑥맥 같은 이 형님을 확실히 도와주기 로 마음먹고는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계획을 구상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제롬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형님에게 자기 계획의 신뢰성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말이지...." 물론 제롬을 향한 신뢰성 따위가 엘스헤른의 마음 속에 단 한 점이라도 있 을 리가 만무하지만 엘스헤른은 도움을 받기로 작정한 이상 제롬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제롬이 하는 말은 어쩐지 점술가처럼 딱딱 맞아떨어지기 일쑤였으므로, 엘스헤른은 미심쩍지만 속는 셈 치고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일단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 자신이 어떤 위치 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야. 자칫 잘 못하면 형님은 레비앙과의 우정마저 놓쳐버릴 수 있다구." 뭔가 알 듯 말 듯한 눈빛을 지으며 싱글거리는 녀석이 어쩐지 꺼림직하기까 지 했으나 엘스헤른은 비장한 표정으로 넌지시 되물었다. "나의..... 위치?" 엘스헤른의 물음에 제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님의 위치! 형님은 여지껏 레비앙의 가장 친한 친구였잖아." 가장 친한..... 친구..... 어쩐지 엘스헤른은 쓴 약이라도 삼킨 듯 입안이 씁쓸했다. 그는 피식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은 아닐지도 몰라." "형님. 그건 형님이 하기에 달렸다구. 그렇게 마음이 약해져버려서는..." 제롬은 잠시 말을 끊고 엘스헤른의 짙은 잿빛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냉 연한 태도로 의젓하던 사람이 말 한마디에 금새 저렇게 시큰둥해지는 것을 보 니 엘스헤른의 마음이 어떨 것이라는 것쯤은 가볍게 짐작되고도 남았다. 제롬 은 이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약해지면 안돼. 형님. 형님은 할 수 있다구. 해야 할 일이 무진장 많은 걸? 긴 길을 달려가려면 벌써부터 지쳐선 안돼." 제롬은 자신이 생각해도 닭살스러운 격려를 부끄러움을 꾹 참고 엘스헤른에 게 일러주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형님, 우선은.... 형님이 여전히 변함없는 친구라는 것을 보여줘야만 해.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모습으로 레비앙의 곁에 있어주라구. 레비앙도 지금 많이 심란할 테니까 형님이 그 마음을 달래주어야 해. 시간이 촉박하군, 어 쩔 수 없어. 당장 내일이라도 형님은 레비앙을 찾아가도록 해. 나머지 준비 는 내가 알아서 해 볼게." 제롬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엘스헤른은 뭔가 일이 거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긴 몰라도, 제롬 녀석은 상당히 이상한 것들을 잔뜩 계획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엘스헤른은 자신이 제롬의 미심쩍은 계획에 휘말려 들어 지금으로서는 도저 히 발을 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제롬이 들려주는 이런 저런 일들이 대체 장차 레비앙과의 우정을 되찾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 건지 어쩐지 자꾸만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긴 해도 녀석이 이렇게 발벗고 도와주는 게 어디인가?! .....그러고 보면 지금 무얼 하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지? 엘스헤른은 점차 정신이 없 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제롬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믿지 못할 태도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러는 가운데 제롬의 얄궂은 장난질 속에 엘스헤른은 자각하지도 못 한 채 빠져들고 있었다. - TO BE CONTINUE - ==================================================================== 비축분이 다 떨어져 가는 것을 보니 어쩐지 쌀이 다 떨어진 쌀통 안을 들여 다보고 있는 듯한 처참한 기분이 드네요.; 밥을 굶는 건 아니라도 쌀이 떨어 진 것을 보게 될 때면 어쩐지 가난해져버린 것 같다! 라는 등의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면 역시 저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는 <음식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 고 있는 듯 합니다. 아아, 밥 이야기가 아니라 비축분 이야기였지.;; 엘스헤른만큼이나 저도 제롬으로 인해 정신이 없군요. 제롬이 나오는 부분 은 도통 퇴고를 할 수가 없더군요. 정신이 없어서리.; 이번 편 역시 마찬가지 랍니다. 거의 손 안대고 올리게 되었답니다.;; 허접해도 참아주세요.;; 오늘은 분량도 모자라 많은 잡담으로 때워야 하는데... 날도 무진장 덥고 그다지 이야기도 없네요.^^;; 그러면 오늘은 감사 퍼레이드를!! 1) 흰매발톱 양. 추천과 팬 메일 고마워~! T-T 아아아~! 감격했어~! >_> ┃┃ ┃┃ ┃┃ ┃┃ ┃┃ ┗╋━━━━━━━━━━━━━━━━━━━━━━━━━━━━━━━━━╋┛ ┗━━━━━━━━━━━━━━━━━━━━━━━━━━━━━━━━━┛ (19) 친구. 다음 날 바로 엘스헤른이 로자리움을 방문할 것이라고 정해놓았던 제롬의 계획과는 다르게 엘스헤른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레비앙에게 서신을 보냈다. 물론 만나자는 내용이었지만, 그것도 제롬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로자리움이 아닌 다른 장소였다. 왜냐고 따지는 사촌의 물음에 로자리움은 식상해서라고 대답해준 엘스헤른은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외출할 차비를 서둘렀다. 제롬이 이것저것을 따지고 드는 판에 어쩌다 보니 약속 시간에 늦어버린 엘 스헤른이었지만 그다지 급할 것 없이 마음은 느긋했다. 어차피 레비앙이 기다 리게 하는 데는 이골이 난 그였으므로 천천히 간다해도 레비앙 녀석이 약속 장소에 먼저 나타나 있을 리는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롬 녀석의 계획과는 달리 레비앙을 찾아가기에 앞서 일주일의 유예를 둔 것은 스스로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정말 폭발해버릴 것만 같 은 심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만일 제롬이 밀어붙인 대로 그 즈음에 로자리 움을 방문했더라면 분명 가라앉지 않은 마음에 또 레비앙을 힘들게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마음을 굳게 먹겠다는 다짐을 하는데는 딱 적당한 시 간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일이 있어서 종종 황궁을 방문해야 했으므로 엘 스헤른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뭐, 일이라고 해 봤자, 요즘 프랑스에 서 폭도들에 의해 왕권이 실추하고 있는 등의 일을 걱정하고 계시는 황제 폐 하께 몇 가지 약속을 해 주는 정도였고 적당히 바쁜 것도 그에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편지에 적어 보낸 약속 장소는 어릴 적에 레비앙과 종종 놀곤 했던 에스트 리온 숲 안쪽에 있는 나즈막한 고목 나무였다. 거기라면 혹여나 있을지도 모 르는 제롬의 미행을 피할 수도 있을뿐더러,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곳이라 어 쩐지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았다.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대견스러워 하며 그곳으 로 향하는 엘스헤른은 약간 들뜨기까지 했다. 며칠 비가 오고 난 후라 공기는 더없이 맑고 투명했으며 숲은 푸르름을 더 해 있었다. 아른하고 맑은 햇살이 스민 초록 잎들이 아름답게 하늘을 수 놓은 숲길은 옛 책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요정이라도 나타날 듯 뽀샤샤했다. 어느새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는 길목의 숲은 나날이 오묘한 색채의 변화로 옷 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섬세하리만큼 미묘해서 하루하루 지나갈 때 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조금씩 빛깔을 더해서는 어느 순간에 정말 짙푸 른 모습이 되어 있곤 했다. 라임 같은 연두 빛 숲의 상큼함을 오감을 통해 만끽하면서 약속장소에 도착 한 엘스헤른은 말에서 내리다 말고 언뜻 놀랬다. 뭔가 잘 못 본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숲과는 대조적인 선명한 붉은 빛이 얼핏 시야에 들어 와서였다. 이 렇게 일찍 레비앙이 이 곳에 도착했을 리는 없고 대체 무엇일.....까? 엘스헤른이 마저 생각을 정리해서 그 붉은 빛의 존재를 추측하기도 전에 그 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비앙.... 생각해보 면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었지만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자기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환영을 보 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쩌면 레비앙을 보고싶어 하 는 자신의 마음이 그런 환상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목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몸을 일으키는 그는 분명 레비앙이었다. 문득 이쪽을 돌아보는 레비앙과 눈이 마주치자 엘스헤른 저도 모르게 눈 가득히 미소를 띄웠다. 그는 넘칠 듯이 벅차 오르는 마음을 진정시 키려 노력하며 그래도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레비앙에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야, 레비앙."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음에도 불구하고 레비앙은 어쩐 일인지 좀 쭈볏거렷다. 아무래도 저번의 일로 아직까지 엘스헤른을 아무렇지 않게 대 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엘스헤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살풋 내려 깐 레비앙의 눈을 보며 엘스헤른은 그가 뭔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그래도 그 날 그런 식으로 뛰쳐나가 버린 친구를 갑자기 그렇게 반갑게 대하기는 쉽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미안해하 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그의 기분을 엘스헤른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때에 자신마저 어색하게 군다면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마 물먹은 솜처럼 축 처져버리고 말 것이다. "어라? 그 표정은 뭐야? 전혀 내가 그립지 않았던 모양인데?" 엘스헤른은 약간 목소리의 톤을 높이며 더없이 다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장난스러운 말투로 꼭 잊지 않는 멘트를 덧붙였다. "아무리 자네의 내면의 연인이라 지만 이렇게 푸대접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 다구. 그렇게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이라니, 흠.... 섭섭한 걸?" 엘스헤른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빙글거리자 레비앙은 작게 숨을 몰아쉬 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녀석이 왜 그립겠어?" 엘스헤른의 말을 응수한 레비앙은 고목 나무 아래에 다시 자리잡고 앉았다. 잠시의 대화였지만 레비앙은 엘스헤른으로 인해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듯 해 보였다. 엘스헤른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로 다가서 설레는 마음으 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뾰로통해 보이는 저 눈빛.... 아아, 역시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레비앙이다. 엘스헤른은 거리낌없이 레비앙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카락을 부스스 흐 트러 놓았다. 느닷없이 엘스헤른의 공격을 받은 레비앙은 흠칫 어깨를 빼더니 놀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물론 그런 과격한(?) 스킨 쉽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스스럼없이 해 버린 엘스헤른 스스로도 놀랐지만 당사자 인 레비앙은 거의 눈이 빠질 정도로 토끼눈이 되어 있었다. "무, 무슨...."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독일 생각조차 못하고 몹시도 당황해 하는 그를 바 라보고 있자니 엘스헤른은 어쩐지 장난기가 발동해 온 몸이 근질근질했다. "언제고 꼭 한 번 이래보고 싶었지. 깨작깨작 만지고 있는 건 내 성깔에 안 맞아. 아무리 정신적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애정 표현은 허용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또다시 내연 운운하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도끼눈을 떴다. 또 속절없 이 녀석에게 놀림을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그런 레비앙의 화난 표정은 무시하고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다. 퉁명스러운 얼굴로 엘스헤른을 째 리고 있던 레비앙은 문득 자신의 코 앞에 엘스헤른의 손이 다가오자 흠칫 했 다. "무슨 의미야?" 바로 앞에서 정지해 있는 엘스헤른의 커다란 손과 저 장난스러운 잿빛의 눈 동자를 번갈아 보며 레비앙은 미심쩍은 눈빛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엘스헤른 은 생긋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한 번 추측해봐." 추측이라..... 아무래도 이렇게 내민 채 가만히 있는 걸로 봐서는 손을 잡 으라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레비앙은 손끝을 움찔했다. 그러고 는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엘스헤른의 손 위에 포개듯 손을 올려놓았다. 이 익숙한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온 몸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런 따스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엘스헤른은 그의 손을 낚아채고선 그를 홱 끌어당겼다. 갑자기 당겨지는 힘에 못 이겨 레비앙은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레비앙이 빨딱 일어서게 된 위치는 엘스헤른의 바로 앞이었다. 문득 엘스헤른의 단정한 크라바트(넥타이의 일종)가 하얀 레이스를 빛내며 바 람결이 흔들리고 있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엘스헤른이 저번처 럼 또다시 끌어안아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레비앙은 그에게 손이 붙들린 채 잠자코 서 있었다. 다행히(?) 엘스헤른은 한참이 지나도 그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다만 레비앙 의 손등을 살풋 들어올려 그 위에 가볍게 키스를 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손등에 입맞추는 동안 엘스헤른은 몹시도 경건하고 진지했다. 성스러운 의식 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아주 느리면서도 정중하게 엘스헤른은 그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런 그의 태도에 매료되어버린 레비앙은 미심쩍 었던 기분도 날려버리고 엘스헤른을 가만히 응시하며 서 있었다. 한참만에 그의 손등으로부터 천천히 고개를 든 엘스헤른은 바람과도 같이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레비앙과 눈을 맞추었다. "혹시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옛날에 읊었던 시...." 엘스헤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엘 스헤른은 그들이 아주 오래 전에 발견해 장미꽃잎을 말려 책갈피 해 두었던 작은 시집에 있는 내용을 읊조리고 있었다. "친구란... 영원의 믿음을 나누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이 새록새록 새로운 마음으로 끝없는 길을 함께 가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의 이름이다...." "...." 레비앙은 어쩐지 가슴이 벅차 올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해인가 장미 정원의 그 수 천 송이, 수 만 송이의 꽃에 파묻힌 작은 공간에 나란히 누워 읊곤 했던 많은 시들.... 장미 꽃잎을 말려두면서 그 꽃잎 속에 가둬둔 그 해의 여름처럼 영원히 변하지 말자고 약속했던 어린 시절의 순수..... 엘 스헤른은 그걸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엘스헤른은 옛 일을 더듬듯 아련한 눈빛을 짓고 있는 친구를 응시하며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나 지금만큼만.... 딱 지금만큼만 그 자리에 있어 줘. 그러면 나는 너 의 영원한 엘스헤른이 될 테니까." "엘스...." 레비앙의 초록빛 눈에 어린 하늘이 살풋 흔들렸다. 그의 눈빛에 반짝이듯 맑은 물기가 어리자 엘스헤른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어~! 감동한 모양인걸?" "응..... 조금은...." 레비앙이 약간의 긍정을 하자 엘스헤른은 이내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고 는 이내 그를 가볍게 품안으로 그러안아 천천히 다독였다. 레비앙은 울어버리 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살풋 깨문 채 엘스헤른에게 몸을 기대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이렇게 안겨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이렇게 친구로서 안아 다독여 주는 거라면.... 긴 한숨과 함께 엘스헤른이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온기와 함께 온 몸을 통 해 들려왔다. "난 네가 내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기뻐. 내 말 뜻 알지? ....레비앙. 너만큼 은 내가 지키고 싶어. 내 마음 속에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의 자리로...." 다시 한숨을 쉬기 위해서인지 엘스헤른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말야.... 네가 변한다면... 만일 그런다면.... 난 미쳐버릴지도 몰라." 아아.... 바보 같은 엘스헤른. 레비앙은 그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지금 말을 하면 가득히 잠긴 목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 그냥 그에게 기 댄 채 잠자코 있었다. 바보 같이 저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바보 같이.... 엘스헤른의 몇 번의 한숨.... 그리고 숲을 감싸고 도는 향기로운 바람결... 동글동글 망울지는 숲 속의 햇살....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 어린 시절의 웃음 소리들.... 레비앙은 그런 것들에 가득 잠긴 채 엘스헤른의 다독임을 받아들 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엘스헤른은 그를 가만히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를 말끄 러미 바라보며 싱긋이 해사한 미소를 띄었다. 어디까지나, 거기 까진 좋았다. 뭐, 그렇게 웃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뿐더 러 레비앙은 감격에 겨워 하마터면 눈물방울이라도 흘릴 뻔 했으니까. 그,러, 나.... 어느 새 그 잿빛의 눈동자에 새록새록 장난기가 어리는 것을 보면서 레비앙은 잠시 감동했던 마음의 한 구석으로 어쩐지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저 녀석 또 뭔가 장난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아니나 다를까 엘스헤른은 능글한 미소를 띄우면서 목소리를 깔았다. "그래.... 넌 역시 내 친구 하기엔 적당하게 예쁜 거 같아. 허리도 호리호리 하고...." 엘스헤른의 손이 자신의 허리에 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챈 레비앙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숨을 가득 들이쉬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너.... 엘스헤른!!! 가만 안 둬!!! - TO BE CONTINUE - ==================================================================== 아아. 19편인가요?! 비축분의 위기... 휘청.;; 밤을 새서라도 쓰라는 친구 횬 양의 압박이 방금 전화로 접수되었답니다.;; (아아~! 횬 양.. T-T) 그러고 보면 오늘밤엔 잠자기 그른 거 같아요. 아아~! 들려드릴 이야기 감 이 생겼답니다. 이름하여 홍차괴담! 저녁 티타임이 오늘은 좀 늦어서 9시 이후에 있었는데, 펠티는 오늘 특별히 레몬 홍차를 탔답니다. 비도 오고 말이죠.(물론 아무 생각 없이.;) 홍차는 5 인분(식구가 다섯 명)의 빵빵한 분량이었죠. 레몬도 듬뿍, 꿀도 듬뿍.... 맛 도 얼마나 기똥찼겠습니까! .....허나, 즐거움도 잠시. 부모님은 홍차가 잔으로 부어지려는 순간 홍차 를 외면하셨습니다. 잘 밤에 무슨 홍차.... 라면서.... 그러면서 두 분은 거 실을 떠나 안방의 모기장 안으로 오붓이 들어가시더군요.; 뭐, 그러고 보면 홍차 마시면 잠 안 오잖아요. 어쩔 수 없었죠. 남동생 씽익 군, 여동생 디아 양, 저 펠티. 셋이서 홍차를 해치우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배신자는 속출하여 씽익 군은 자신이 차와는 거리가 멀 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며, 레몬만 입에 물고 자기 방으로 사라져 갔습 니다.(레몬을 그냥 씹어먹죠.;) 남은 이는 디아 양과 펠티. 둘은 지원군을 포 기 한 채 차 마시기에 돌입했습니다. 나중엔.... 아예 건배(?)까지 해가며 차 예절은 싸그리 무시한 채 부어라 마셔라.... (예절 따져 가며 먹기엔 남은 홍차의 양이 장난 아니었죠.;; 냉장 고라도 비었다면 식혀두었다가 내일 먹을 테지만, 먹을 거 없이 빵빵하기만 한 냉장고란 정말...) 홍차로 배 채우긴 첨이군요.; 잠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가 빵빵 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하답니다. 글쓰기는 그른 거죠. 어디 바람 잘 부는 곳 에 기대어 앉아 밤 새 뜬눈으로 먼 산이나 쳐다볼 수 밖에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3 조회수: 471 [번 호] 9387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24일 22:19 Page : 1 / 15 [등록자] EGALITE [조 회] 324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0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0) 레비앙의 우울한 기분. 고목 나무 아래서의 이런 저런 어릴 적 이야기 끝에 어느새 숲에 석양이 내 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레비앙은 기분이 좀 묘했다. 최근 들어 엘스헤른과 이 렇게 길게 이야기 한 적이 없어서일까? 어쩐지 이렇게 마음 편하게 오래도록 앉아서 이야길 해도 질리지 않는 상대가 바로 친구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엘 스헤른이 친구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의 다른 한편으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 게 저런 표정으로 웃어주고 있는 저 녀석의 심정이 어떨까....하는 약간은 측 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뭔가.... 상실감이 가슴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을 테다. 아직은 말하지 못 한 이야기들로 인해.... 가득히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내 색도 않고 저렇게 묻어두려는 저 녀석의 웃음은.... 그건 가식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또 해사하게.... 그렇게 부담 없이 웃어주는 건 가식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구에 대한 염려와 커다란 배려일 것이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으로 인해 어쩐지 한 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움이 새벽 안개처럼 스멀거리듯 엄습해왔다. 이렇게 엘스헤 른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덮어두기엔 마음 가득히 차 오 르는 어떤 불안감이 온 몸을 잠식해버릴 것처럼 너무 컸다. 아직은 엘스헤른 에게 못한 말들이 많았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들도 많았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엘스헤른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줄 수 있을까? 더 이상은 변하지 말라며 다시 한 번 그 넓은 품으로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을까? .....아니, 비단 그런 것들 뿐 아니라 뭔가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쩐지 마 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그 깊고 깊은 걱정들을 풀어줄 수 있을 어떤 것 일 테다. 그러고 보면.... - 물론 잊고 있을 때도 있지만 - 엘스헤른과는 정말 오랫 동안 친구였다. 살아온 생애의 반보다 더 긴 시간만큼 엘스헤른과 함께 해왔 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시간은 흘러가고 아이는 어른 으로 성장하고.... 시간을 멈춰버릴 수 없는 이상에 앞으로 무슨 일들이 닥쳐 올지 모른다. 지금, 그와 지냈던 과거가 현재보다 더 그리운 것은 아마도 그때만큼은 정 말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를 사귀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점 차 그런 것을 잊어 가는 모양이다. 뭔가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바보 같 이 지금의 자신처럼.... 레비앙은 스스로가 엘스헤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곰곰 곱씹고 있었 다. 벨라시그네에서 놀던 옛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를 곁 귀로 들으며 그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그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엘스헤른에게 바라고 있는 건 따뜻하고, 보드라운.... 뭔가 커다란 어떤 것이었다. 그게 뭔지 정확 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어쩐지 욕심이 많아져서 엘스헤른의 다정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레비앙은 아까 엘스헤른이 더 이상은 변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던 것을 떠 올렸다. 그는 도저히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약간 은 짓궂게도 그런 말을 한 엘스헤른을 비웃어 주고싶기도 했다. 자신은 저렇 게 변해가면서..... 스스로는 그렇게나 변해버렸으면서 친구가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다니....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숲이 어둑해질 쯤에야 엘스헤른은 너무 오래 앉아 있어 뻣뻣해진 몸을 일으켰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비앙은 그가 일어서는 것 도 모른 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하자니까. ....싫어?" ".....응?" 느닷없는 엘스헤른의 물음에 레비앙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제서야 레비앙은 자신이 엘스의 이야기에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엘스헤른은 주의력 없는 이 친구에게 친절하게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벨라시그네에 가자구." "아..... 지금?" "그래." 레비앙은 약간 머뭇거리며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벨라시그네라니.... 너무 뜻밖의 제안인데다가 갑작스럽다. 옷자락에 붙은 풀을 털면서도 어쩐지 레비 앙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엘스헤른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아~! 싫은 거로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실은 좀 피곤...." "휴가철인데 피곤은 무슨?!"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귓가에 재잘거리고 있긴 했지만 레비앙은 그에게 설득 되고 싶지 않았다. 벨라시그네엔 그녀가 죽은 이후로는 어쩐지 정이 떨어져버 렸고, 그녀에 대한 일은 엘스헤른에겐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 레비앙은 그에 게 뭐라고 거절을 해야 할지 궁리해야만 했다. "저... 엘스헤른...." 레비앙이 무슨 말을 할 거란 것을 금새 표정으로 읽어낸 엘스헤른은 손을 들어 손끝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안 된다고 하기만 해봐. 어깨에 떠 매고서라도 데리고 갈 테니까. 자, 말해 봐. .....갈 거야? 안 갈 거야?" 입이 틀어 막힌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멍청한 행동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만 같았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등 뒤에서 눈 가리고 "누구게?!"라고 외치는 유치한 장난을 유독 엘스헤른만은 입을 가리고 해서 대답을 못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곤 했다. 그땐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 줬었지만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 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은 가기 싫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야 했다. "읍읍읍읍..." 레비앙은 스스로도 얼마나 생각이 짧고 점잖지 못한가를 실감하고 말았다. 입이 틀어 막혔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만무하다. "지금 그 말 허락한 걸로 듣겠어." 엘스헤른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의 입에서 손을 내렸고 레비앙은 손이라도 내 저을 만큼 당황해버렸다. "그게 아니라... 난 말야." "아아, 걱정 마. 술은 내가 살게." "엘스헤른!" "몸만 가면 된다니까." "그게 아냐!" "그럼 술도 네가 살 거야?" "아아아! 엘스헤른!" "그렇게 반갑게 불러주다니 고맙군." 말싸움이 시작되면 끝이 없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에게 이기지도 못할 말다 툼을 계속하는 것은 불필요한 체력의 낭비라는 것을 현명하게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리하여 엘스헤른의 뜻대로 레비앙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이끌려 벨라시그네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엘스헤른과 술자리를 같이 한 것도 참 오랜만이다. 술을 마시 며 주고받는 화재는 아까 숲에서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밤이라 그런 지 레비앙은 어쩐지 자신이 자꾸 감상적인 기분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포도 빛으로 젖어드는 밤의 공기는 때로는 술 보다 더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도 한 다. 주점 안의 분위기는 몽롱하고 약간은 덥고 어두웠다. 침침한 초의 불빛은 어룽어룽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흔들렸다. 무명의 악사가 연주하고 있는 류 트의 작은 음색이 손님들의 작은 두런거림 사이로 끊겼다 이어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이 곳의 공기는 술처럼 알싸한 느낌이었고, 폐으로 천천히 스며들어 어느 샌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맞은 편에 앉은 엘스헤른에게서는 끊임없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 다. 저 녀석은 정말 천성적인 이야기꾼일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저렇게 쉴 새 없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듯 내내 이야기하고 있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그냥 말을 아끼고 있었다. 아니, 그다지 이야기 하고싶은 기분이 아 니었다. 왠지 자꾸만 우울해지고 있었다. 뭔가 쓸모 없는 생각들만 장미나무 넝쿨처 럼 무럭무럭 자라나서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는 것 같았다. 아까 떼를 써서라 도 벨라시그네에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곳에 도착하자 또 뒷골목의 그녀가 떠올라 어쩐지 서글퍼져 버리는 것이었다. 바보같이 불러 보지도 못했던 이름의 그녀..... 아아, 취한 걸까? 술잔에 고인 포도주가 붉게 일렁거리는 것을 보며 레비앙 은 어쩐지 머리가 핑 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정신이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는 것 같은.... 레비앙은 마시던 술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엘스. 나 .....취했나봐." "응?" 잘 마시다 말고 레비앙이 느닷없는 소리를 하자 엘스헤른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얼마나 마셨다고....?" 그러고 보면 엘스헤른의 말대로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시야가 아 른아른했다. 왜 이러는 걸까? 금새 취해버릴 만큼 몸이 아프거나 한 것도 아 닌데....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디맑던 정신은 어느덧 저만치 달 아나 그를 온통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 정도로 취해버릴 리 없건만, 레 비앙은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류트로 연주되고 있는 작 은 곡조가 먼 세계의 소리처럼 아니... 파도 위에 뜬 작은 배처럼 천천히 오 르내리고 있었다. "....몰라. 기분이 좀...." 레비앙은 갑자기 밀어닥치는 술기운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스르륵 탁자 위로 엎드려버렸다. 화들짝 놀란 엘스헤른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서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레비앙." "...." 작게 흔들어봐도 약간 거친 숨소리 외에 아무런 대꾸가 없자 엘스헤른은 레 비앙의 상반신을 일으켜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질 수 있도록 바로 앉혔다. "괜찮은 거야? 레비앙." 눈을 감은 채 엘스헤른의 팔과 의자에 기대어 있던 레비앙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더니 한참만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탁자를 짚으며 의자에서 일어선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몹시도 심각한 표정으 로 엘스헤른을 쳐다보았다. "나, 가 볼 데가 있어. 너 먼저 돌아가." "뭐야? 어디에 갈 생각인 거야?" 엘스헤른은 느닷없이 어딜 가겠다고 우기는 친구로 인해 복장이 터질 것 같 았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술 마시다 말고 어딜 간단 말이야? 게다가 지금은 밤...." 레비앙은 귀찮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엘스헤른의 말을 단숨에 끊었다. "몰라도 돼."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을 뿌리치고는 약간 휘청 하더니 이내 출입구 쪽으 로 걸음을 옮겼다. 어이가 없어진 엘스헤른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급히 술값을 계산했다. 어디에 가려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취했는데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TO BE CONTINUE - ==================================================================== 뭔가.... 하루 사이의 일로 이렇게 길게 쓰고 있다니 저도 참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밤 사이에 레비앙과 엘스헤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23편까지 이어집니다.; 어제 시디 정리를 하다가 문득 97년에 구입했던 시다 두 장을 찾았어요. 하 나는 <비발디 협주곡 모음집>이고, 하나는 <바로크 명작>이랍니다. 공교롭게 도 제가 97년 <레비앙 & 레비안느>를 처음 구상해서 쓰고 있을 그 무렵에 구 입한 것들이죠.(눈에 고립되어 글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요.;) 그때 이 음악을 들으면서 <레비앙 & 레비안느>(이하 R & R)를 썼답니 다. 배경(로코코 시대 <-- 바로크에 포함되기도.)과 같은 시대의 음악이라 그 런지 분위기가 너무 잘 맞았죠.^^ 원작 이야기가 났으니까 말인데 은 원작과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달 라지고 뭔가 사건도 좀 더 생기고 결말도 확실시되었지만 사실 노트에 적힌 원작 쪽이 저에게는 더 흥미롭답니다. 상당히 스피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올 봄에 이 노트를 찾아내어 읽고는 한동안 들떠 있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원작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도 제가 가장 애용하는 이름을 캐스팅(?)해서 썼 고, 지금의 레비앙 격인 녀석은 정말 싸늘하기 그지없는 인물이고, 엘스헤른 격인 녀석도 지금처럼 망가지진 않았고.... 조금 있으면 노트에 적힌 분량의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겠지만(다 썼던 건 아니었어요.), 펠티는 어쩐지 가끔 후회가 되기도 한답니다. 원작의 경쾌함을 에서는 살리지 못한 것 같 아서요. 오늘은 이 바로크 시대의 음악들을 들으면서 처음 마음을 되살려 볼까.... 라고 생각 중이랍니다. 지금은 <바로크 명작>에 들어 있는 바흐의 클라비어 협주곡을 듣고 있는데 무지 좋아요. >_> ┃┃ ┃┃ ┃┃ ┃┃ ┃┃ ┗╋━━━━━━━━━━━━━━━━━━━━━━━━━━━━━━━━━╋┛ ┗━━━━━━━━━━━━━━━━━━━━━━━━━━━━━━━━━┛ (21) 벨라시그네, 그 뒷골목의 그녀. 엘스헤른이 대충 술값을 치르고 말을 잠시 맡겨 놓겠다는 말만 하고 나왔음 에도 불구하고 어느 샌가 레비앙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는 휘청거리기까지 하던 녀석이 언제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주위는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었 다. 엘스헤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심호흡이라도 해서 일단 침착하려고 노력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론가로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저 발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저건.... 레비앙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심정으로 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엘스헤른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달렸다. 레비앙이 어린애도 아닌데 왠지 그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취하기까지 했고, 요즘 내내 기분도 좋지 않았을 텐데....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엘스헤른은 온갖 생 각들이 떠오르고 있는 자신의 머릿속을 저주하고 싶었다. 지금 가서 그를 찾 으면 그만일 텐데 왜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괜히 눈 앞에 보이 지 않으니까 더욱 더 걱정이 앞섰다. 어딜 가고 있건 보이기라도 한다면 덜 걱정스러울 텐데.... 아니, 모습이 아니더라도.... 목소리라도 들린다면 이렇 게 걱정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심시킬 수 있을 텐데.... 가득 구불어진 골목 사이를 뛰면서 엘스헤른은 점점 더 마음이 불안했다. 왜 이렇게까지 구석지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걸까? 정말 아까의 발소리는 레비앙의 것이 아니었던 건가? 잘 못 따라온 것일까? 레비앙은.... 다른 곳으 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애당초 술 마시러 오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면 레비앙은 아 까 내내 어쩐지 우울해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레비앙의 그 초록빛의 눈에 가득 그늘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위로라는 것 도 원인을 알아야 해 주는 것일 테고.... 왜 우울해 보이는 거냐고 레비앙에 게 묻기라도 한다면 그는 단연코 아무렇지 않게 웃으려 할 게 분명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엘스헤른은 눈치채지 못한 척 하면서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일찍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온갖 후회가 그의 가슴 속을 넘쳐날 듯 가득히 채우고 있 었다. 걱정과 후회에 겨워 정신없이 달리던 엘스헤른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머 릿속을 채우는 잡념들 때문에 소리를 놓쳐버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벨라시그네의 빈민가 뒷골목에 어울리는 술주정 뱅이의 고함소리와 창녀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하게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엘스헤른은 어쩐지 이 곳이 눈에 익은 듯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와 봤던 듯한.... .....뭘까? 이 알지 못할 익숙함은....? 주위를 둘러 보던 엘스헤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아!"하고 작은 탄식을 흘렸다. ....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한 번 이랬던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에 둘 이서 벨라시그네에 놀러왔다가 어느 새 어디론가 도망쳐버린 레비앙을 좇아 서.... 뭔가 많이 퇴색한 데다가 달라진 것도 있어 보였지만 확실히 익숙한 곳이었다. 엘스헤른은 골목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눈에 익숙하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오래 전의 일이었을 뿐더러, 그때는 레비앙에게 뒤따라온 것을 들켜 핀잔을 가득 먹고는 끌려나왔던 만큼 주위를 눈에 넣어둘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어둠은 모든 익숙한 것들 을 감출 수 있을 만큼 농후했다. 뒷골목 특유의 음침함과 퀴퀴한 공기가 그의 몸을 감싸왔다. 어쩐지 눅진한 기운과 함께 으슬으슬하기까지 한 뒷골목이 최고의 귀족이라 불리는 이 사람 에게 그다지 유쾌할 리 없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밖엔 없었다. 발치를 감싸고도는 검은 고양이 같은 밤 안개의 스멀거림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걷다보니 문득 이쪽을 향해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그의 발끝에 맺혔다. 그 그림자가 시작되는 곳에는 누군가가 아주 천천히 벽 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뜨린 풍성하고 무게감 있는 머리카락.... 아아, 그 실루엣 만 봐도 레비앙임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엘스헤른은 어쩐지 안심이 되 어 온 몸에 기운이 모조리 빠져버리기라도 하듯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딱 멈 추었던 피가 다시 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른하고 따스한 안도감... "레......" 엘스헤른은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쩐지 지금 불 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뭐랄까..... 벽에 손을 대고 기대어 있는 레비앙의 모습은 왠지 손을 대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 같은 유리 같았다. 어쩐지 가득 위태롭고.... 슬퍼 보이는....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면 서 기척 없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레비앙의 손끝은 마치 그 곳의 추억이라도 쓸어모을 듯, 부드럽게 벽을 쓰 다듬고 있었다. 밤 공기의 리듬이라도 타는 듯이 벽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움 직이는 가벼운 손길.... 어두워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 레비앙은 무 척 진지해 보였다. ".....엄마." 문득, 엘스헤른은 자신이 뭔가를 잘 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지금 이 장소와 이 순간에 가당치 않은 단어를 레비앙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 뱉듯이 말했다. 엄마.....라고.... 엄마....? 레비앙이 엄마라고 부를 만한 존재라면.... 아아.... 이런.... 이내 엘스헤른은 뭔가 많은 것이 순간적으로 모두 이해되어버리는 바람에 약 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벽에 기대어 섰다. 레비앙의 어머니....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처음 레비앙을 알았을 때부 터 레비앙에겐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었다. 물론 레비앙의 아버지인 아르떼이 유 후작은 레비앙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초상화로도 확인한 바 있고, 종종 레비앙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무런 언급이 없었 던 레비앙이었다. 왜 그랬었는지.... 왜 그래야만 했었는지.... 엘스헤른은 이제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레비앙을 좇아 이 곳에 왔을 때 보았던 불꽃같은 붉은 머리칼의 여 인. 레비앙보다 더 붉은 빛의 머리카락 외에는 그다지 닮은 점이 없었던.... 그래서 아무 의심조차 해 보지 않았던 그녀가 레비앙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엘스헤른은 머릿속이 터져 나갈 듯 어지러웠다. 뭔가 그가 기억하는 많은 것들이 톱니바퀴의 나사처럼 하나 하나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잘 짜 맞 추기라도 한 퍼즐 마냥..... 어릴 적 로자리움에서 보았던 레비앙과 많이 닮았던 초상화.... 레비앙의 아버지를 그린 초상화를 보며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 레비앙. 너희 아버지는 빨간색 머리카락이 아니잖아? 음... 밝은 색 금발 인걸? - 아.... 응. 그건 말야.... 내 머리카락은 다른 사람을 닮아서 그래. 말해주지 못할 어떤 사람을 닮은 레비앙의 붉은 머리카락.... 절대로 말해 서는 안 될.... - 아마도 어린 레비앙은 그렇게 교육받았을 것이다. - 그 누 구에게도 털어놓아서는 안 될, 그리고 부르지도 못할.... 어머니의 존재.... 아르떼이유 가문에서 유일한 붉은 머리카락. 모계의 혈통을 숨겨야 했던 것 은 레비앙이 아르떼이유 가의 단 한 명뿐인 후계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라 일컬을 수조차 없었던 레비앙의 모친은 평민 중에서도 최하층의 생 활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건 가문을 중시하는 귀족 가에서는 숨기고 싶은 비 밀이었을 것이다. 더더욱, 장차 가문을 짊어져야 하는 아이의 어머니가 그런 존재라면.... 하지만 어느 새인가 아이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을 것 이다. 가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세상엔 많으니 까.... 아무리 엄했던 레비앙의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엄마를 향한 아이의 마 음까지 가로막지는 못했을 테다. 따스하고 포근한 엄마라는 존재는 가문이라 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을 홀로 떠 안은 어린 아이에겐 어쩌면 더더욱 절실했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의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이 곳을 찾아오던 레비앙 이 더 이상 여기에 오지 않게 되었을 때는 분명 그녀가 죽고 난 이후였으리 라. 바보같이 그렇게나 이 곳에 오고싶었으면서도 더 이상은 그녀를 볼 수 없다 는 이유로 얼마나 참아야 했을까? 볼 수 없다고 해서 잊혀져야 한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죽고 없다고 해서 추억마저 잊혀져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인 게다. 레비앙은 아마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은 모양이다. 자신의 어릴 적 그 마음을 온통 차지했던 엄마라는 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녀의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엘스헤른은 가슴 깊은 곳의 한숨을 이끌어내 모두 토해놓았다. 어쩐지 한 편으로 레비앙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의 거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스스 로 자부하면서도 정작은 아무 것도 알아주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기조차 했 다. 이렇게 바보 같은 녀석이 친구라고 자처하고 있었으니, 레비앙은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바보같이 아픈 곳을 자꾸 건드리는 녀석을 대할 때 마다 얼마나 속상해야 했을까.... 엘스헤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레비앙의 곁으로 다가섰다. "레비앙. 갑자기 사라져서 놀랬잖아. 괜찮은 거야?" 문득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비앙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는 순간 좀 당황한 듯 해 보였으나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괜찮아.... 저기... 난...." "가자." 엘스헤른은 짧게 말하고는 뒤 돌아서서 먼저 걸었다. 아마도 레비앙은 지금 자신의 표정을 별로 들키고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이 곳으로 와 버 린 자신의 행동을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 속의 탈출 구를 모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엘스헤른은 그냥 이렇게 앞서서 걸어주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면 레비앙이 애써 변명하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킬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다. 엘스헤른은 문득 레비앙에 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손을 내밀어 이곳의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 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아무 말 말고 그의 앞에서 먼 저 걸어가 주는 것이 나았다. 레비앙은 잠자코 엘스헤른의 등을 보며 그 뒤를 따라나오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엘스헤른은 다행이라 는 생각을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레비앙이 아무 말 없이 뒤따라 나와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길고 긴 골목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없었다. 엘스헤른은 그가 따라오고 있는지 가끔씩 소리로만 확인하며 앞서 걸었고, 그 렇게 한동안 걸어서 어느 새 그들은 루르드 강의 강 둑에 도착해 있었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엘스헤른은 여전히 레비앙에게서 등을 돌린 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 의 바람소리에 섞여 대답 대신 레비앙의 작은 한숨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곧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곁으로 와서는 강둑에 주저앉았다. "시원하지?" 나직히 물어오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비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 였다. 엘스헤른의 말대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한 밤의 강바람은 싸늘하기까 지 했다. 풀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올 만큼 주위는 조용했다. 그런데 다가 평소 말많은 엘스헤른도 어쩐지 잠자코 있었다. 비싼 옷이 더럽혀져도 상관없다는 모양으로 엘스헤른은 어느 새 그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 다. 가까이 앉아 맞닿은 팔뚝으로 레비앙의 온기가 느껴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유난히 따뜻했다. 가까이 들려오는 레비앙의 숨결에 옅은 술내음 이 묻어 있었다. 어쩌면 이러고 있는 이 상황을 즐기고 싶었던 건지 엘스헤른 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강 너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 TO BE CONTINUE - ==================================================================== 오늘은 왼 종일 졸림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비 축분은 이틀 동안 단 한 편도 쓰지 못했구요. 마음은 나날이 초조해 집니다. 그리고 때 아니게 이유도 없이 우울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늘 친구 횬 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니 뭔가 좀 계획도 생기고 나 름대로 괜찮아졌답니다. 리하르트의 입장에 대해서도 한 번 써보는 게 어떻겠 냐고 해서 아마 그 부분의 분량이 나중에 추가 될 예정이구요. 24편에 등장할 새로운 인물의 비중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죠. 역시 경쾌함을 잃고 나니 연재분은 묘사와 설명으로만 가득가득 채워져서 물먹은 스펀지 같이 되어버렸어요. T-T 놀랬습니다. 오늘은 대사도 거의 없고 말이죠. 열심히 하려고는 하지만 정말로 슬럼프인 모양입니다. 자꾸만 어깨 가 처지네요.... P.S.1. 아횬 양 고마워!!! 역시 친구 밖엔 없어~! T-T 하지만 임용 D - DAY 로 압박을 넣는 것은 좀...;;; P.S.2. 레몬 민트 설탕 양.^^ 추천 고마워~! 잘 먹을게요.^^ 부빗부빗. P.S.3. 성적표가 날아왔습니다.; 우리 집안 전설의 4.3학점인 동생이 펠티의 성적표를 보며 코웃음을 칩니다. "호~! 뭐야? 장학금은 글렀잖아?"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2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4 조회수: 458 [번 호] 9504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26일 22:23 Page : 1 / 13 [등록자] EGALITE [조 회] 328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2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2) 등에 기대도 될까요? "바보 같아." 한참만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비앙이었다.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까 엘스 헤른은 웃음이 날 것만 같았지만 가득 복잡하기만 할 레비앙의 기분을 생각해 서라도 잠자코 있어주었다. 대신 아주 건성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누구 말야?" "누구긴.... 너지." 역시 취하긴 했는지 평소 그렇게도 되지 않던 의 발음을 유난히 굴리며 레비앙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녀석.... 프랑스 어 공부할 땐 술이라 도 마시고 할 것이지.... 그랬다면야, 못해도 레비안느의 반 정도는 프랑스 어 발음을 능숙하게 할 수 있을 텐데 말야. 엘스헤른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 음을 속으로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기다려주고 바보 소릴 듣다니.... 가히 좋진 않군." "그러게 누가 기다리랬어?" "기다리지 않았으면 다음에 또 의리 없다고 했을 거 아냐?" "바보. 당연하잖아!" 뭔가 꼬투리라도 잡고 싶었던 걸까? 레비앙은 괜한 걸로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엘스헤른은 알고 있었다. 그냥 언성만 높이는 것일 뿐 정말로 화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걸.... 정작 바보는 자신이란 것도 모르는 듯 레비앙은 가득 삐진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엘스헤른은 잠시 그런 그를 곁눈질하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입술 좀 넣어. 아무리 네 정신적인 연인인 나지만.... 그 모습만은 정말 눈 뜨고 봐주기 힘들다고." "쳇! 시비 걸지 마." "시비는 누가 걸었다고 그래." "너 말야! 너." 엘스헤른은 깡깡거리는 레비앙의 투정을 더 받아주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 물었다. 물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주는 것이 레비앙을 위해 더 나 을는지 몰라도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너무 긴장했기 때문인지 지금은 온 몸이 나른했고, 늘어질 듯 피곤해서 어디 아무 데라도 뻗고싶은 심 정이었다. 그렇게 저절로 대화가 끊겼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아무 말 없자 덩달아 입을 다물어 버렸고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그냥 앞을 주시했다. 얼핏 그가 좀 시무룩해 보이긴 했지만 엘스헤른은 별로 참견 않기로 마음먹었다. 말 할 정신이 아닌데 자꾸 입을 놀렸다가는 무슨 말이 나오게 될 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만에 하나 책임지지 못할 말이라도 내뱉는다면 레비앙은 기겁을 할지 도 모를 일이지.... 두 사람은 물 흘러가는 소리라도 감상하듯 장승처럼 굳은 채 앉아 있었다. 밤 날씨는 싸늘했지만 술 취한 난로가 옆에 있어 엘스헤른은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어깨가 잔잔히 떨리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비앙은 추운 걸까? "추운 거야? 레비앙." 엘스헤른이 그를 살피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리자 레비앙은 무릎에 얼굴을 물은 채 어깨를 움찔 했다. "쳐다보지 마." 아..... 이런..... 가득 물기가 배어 촉촉하리만큼 가느다란 목소리.... 엘 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저렇게 소리 죽여 울고 있는데도 바로 옆에 앉아서는 모르고 있었다니..... 엘스헤른은 그를 향해 손을 뻗다 말고 문득 멈칫 했다. "보지 마. 제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바보같이 이런 일에까지 자 존심을 내세우는 걸까? 사내가 울어서는 안 된다고 그 늙은 후작이 레비앙에 게 몹시 나무란 걸까?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추한 일면을 감추려는 것처럼 레비앙은 그렇게 꼭꼭 숨은 채 어깨만 가늘게 떨고 있었다. 엘스헤른 은 레비앙을 다독여 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억눌렀다. 오늘따라 유 난히 작아 보이는 레비앙의 어깨를 측은한 눈길로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엘 스헤른은 그저 아무 말 않고 그에게서 등을 돌려 앉았다. 등 뒤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레비앙의 젖은 한숨소리에 어쩐지 엘스헤른은 한가득 마음을 무거웠다. 품에 안고 다독여 주고 싶은데.... 아마 레비앙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게다. 친구 사이에 이런 일조차 아무 도움이 못 되고 있 다는 생각에 엘스헤른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엘스헤른...." 도움의 손길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매몰차게 굴 때와는 달리 레 비앙은 한참만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음?" 문득 대답하긴 했지만 엘스헤른은 어쩐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무미건조한 것 같아 레비앙에게 미안했다. 레비앙은 그렇게 불러 놓고선 한동안 아무 말 없었다. 왜 불렀던 걸까? 엘스헤른은 여러모로 짐작해보려 했으나 방금 들려 온 레비앙의 젖은 숨소리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파 왔 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왜 이 순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걸까? 저렇게 혼자서 울고 있는데.... "....엘스헤른...." 다시 한번 레비앙이 자신을 불렀을 때, 엘스헤른은 그제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건.... 아마도 도와 달라는 뜻일 게다.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아 저렇게 젖은 목소리로 이름만 부르고 있는 것일 테다. "엘스.... 나..... 등 좀 빌려줘." 가득히 잠긴 레비앙의 목소리.... 엘스헤른은 망설임 없이 뒤로 손을 돌려 레비앙의 손을 더듬어 잡고는 자신의 등 쪽으로 살며시 잡아 이끌었다. 이내 등 뒤에 묵직히 레비앙이 기대어 왔고 엘스헤른은 작은 한숨을 내 쉬 고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목이 메어서 숨쉬기도 힘들만큼이나 아팠으 나 지금은 아무 내색 말고 태연하게 등을 빌려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친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이것뿐이라 는 것을 엘스헤른은 알고 있었다. 등을 통해서 레비앙의 작은 떨림이 느껴져 왔다.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손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에 더더욱 힘을 주어 감 싸 잡았다. 밤이 한창 깊어질 때까지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등을 빌어 울었다. 아마도 가슴 속에 묻어둔 것이 많아 한꺼번에 눈물로 쏟아져 나올 것이 그리도 많았 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소리조차 높이지 않고 작게 흐느끼는 걸 보면 녀석의 자존심도 알아 줄만 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며 지키려 하는 건 지, 원.... 그렇게 울다가 지쳐버린 친구를 엘스헤른은 그대로 들쳐업고 일어섰다. "돌아가야지. 아르떼이유 후작님께서 걱정하실 거야." "응...." 어쩌다 보니 엘스헤른의 등에 업혀버린 레비앙은 완강하게 거부하기엔 이미 시기를 놓친 데다가 여지껏 울고 있었던 게 머쓱하기도 해서 잠자코 그에게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도 술이 덜 깬 모양인지 레비앙은 축 늘어진 채 그냥 얹혀 있는 형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엘스헤른은 들쳐업은 레비앙이 주르륵 흘러내려 떨어져버릴 것 같아 수시로 추스렸다. 그러다 보니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 서기가 일쑤였고, 견디다 못 한 엘스헤른은 의식이 있을지 의문스러운 친구에게 약간 핀잔을 주었다. "레비앙.... 아무 데나 처박히고 싶지 않다면 말야.... 제발 꽉 좀 잡아." 이런 곳에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는지 레비앙은 어정쩡하게 늘어져 흔들리 고 있던 팔을 움츠려 엉거주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레비앙이 등에 착 붙어 오자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긴 했으나 가볍게 헛기침 을 하는 정도로 마음을 다스렸다. "휴우...." 레비앙의 나직한 한숨소리가 엘스헤른의 등을 통해 울려왔다. 엘스헤른은 이렇게 레비앙을 업고 있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작은 한숨소리 하나도 언어가 아닌 몸 전체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좀 더 밀접해진 느낌이랄 까? 하지만 그런 색다른 경험도 잠시. 레비앙은 곧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엘스.... 있잖아. 나 아무래도 결혼을 하게 될 거 같아." 주정인 걸까? 엘스헤른은 피곤하고 또 피곤해서 뭔가 말할 기분은 아니었으 나 아까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다가는 또 언제 레비앙을 울게 만들지 몰라 그냥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음.... 당연히 해야지. 근데 색시나 있어야 하지." "아니.... 그거 말구!" "그럼?" "나 정말 결혼하게 될 거야." 주정 맞구나.... 아직도 꼬인 발음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라니.... 엘 스헤른은 레비앙의 말들을 그냥 술꼬대라 넘겨 들으면서 계속 대꾸를 해 주었 다. "그래. 결혼하렴." "축하.... 해..... 줄 거지?" "아아, 당연하지. 아마 내가 증인도 서야 할 걸?" "쳇.... 바보. 그런 거 말고 말야. 진짜로 결혼." "그럼 누군 가짜 결혼도 하냐?" "아아... 바보."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점점 더 세게 끌어 앉는 통에 목이 졸려 그의 팔을 앞 으로 잡아 당겼다. 그 바람에 레비앙의 몸이 약간 앞으로 쏠렸고 그의 머리카 락이 찰랑거리며 엘스헤른의 뺨을 간지럽혔다. 뭐랄까.... 이젠 묘한 기분으 로도 모자라 엘스헤른은 뭔가 울컥 솟구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웅.... 힘든가봐? 엘스. 나.... 내릴까?" "누가 힘들다고 그래? 넌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가벼운지 모르겠다." "근데 왜 그렇게 숨을 몰아쉬는 거야?" 아아, 이런.... 엘스헤른은 자신의 부끄러운 심정이 들통나기라도 한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 바람에 레비앙은 의외로 상당히 좋아하고 있었다. "아아! 금새 따뜻해졌잖아. 난로 같아...." "제, 젠장....." - TO BE CONTINUE - ==================================================================== 빨강색 긴 바지와 남색 건빵 반바지와 아이보리색 3부 반바지를 샀답니다. 그리고 원피스를 만들어 입을 곰 무늬 옷감도 샀구요. 흰색 티도 하나 샀네 요. 쇼핑을 하느라 피곤해졌어요. 잡담을 덧붙이는 것도 의외로 힘들군요.; 뭔가 말할 거리를 쉴새 없이 생각 해야 하니까요. 구래서 오늘은 그만 쓰렵니다.;; 뭔가.... 쇼핑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가득 피곤하구, 어쩐지 힘들어요. T-T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3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5 조회수: 434 [번 호] 9566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27일 22:23 Page : 1 / 16 [등록자] EGALITE [조 회] 357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3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3) 작은 밤의 소야곡. 여차여차해서 로자리움에 도착한 엘스헤른은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 다. 아까의 일도 일이었지만, 레비앙이 난로(?)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말에 타지도 못한 채 그를 업고 로자리움까지 걸어와야 했던 것 이다. 레비앙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맹세는 했었으나 이런 일 이라면 좀 곤란했다. 취하거나, 정신이 없거나, 잠이 들어버린 레비앙은 생각 보다 무거웠다. 지금 엘스헤른은 팔에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뭐, 그래도 업는다든지 하는...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레비앙이 술김이 라는 틈을 타서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는 어느 정도 보람이 되었다.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업혀온 모습을 보고 집사가 난장을 떨 것이 두려워 하 인들의 출입구인 뒷문을 이용해 로자리움 저택 안으로 숨어들었다. 운 좋게도 1층의 집사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엘스헤른은 계단에서 레비앙을 한 번 추스릴 여유도 없이 2층으로 올라왔다. 계단에 깔려 있는 붉은 카펫이 이렇게 고마웠 던 적은 처음이었다.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2층까지 올라온 엘스헤른은 무사 히 레비앙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오밤중이라 저택 안을 배회하는 하인, 하녀 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엘스헤른은 한숨을 돌리기에 앞서 레비앙을 침대 위에 대충 내러 놓고서 우 선 초를 밝혔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방 안은 칠흑 같았고, 이런 어둠 속에서 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듯 했다. 여러 개의 초에 불을 밝히고서 어느 정 도 방 안이 환해지자 엘스헤른은 새우처럼 누워있는 레비앙을 조심스레 바로 눕혔다. 백색의 리넨 자수로 온통 뒤덮인 침대보 위로 살며시 뉘어진 레비앙 은 마치 솜털 구름 위에 낮잠이라도 청하기 위해 누운 천사 같았다. 아, 그러 고 보니 빨강 머리칼의 천사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잠든 모습을 보니 이렇게 천사 같은데 취해서 술주정을 부리는 건 정말....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뻐근한 팔을 크게 한 번 휘두르고 자신의 어 깨를 주물렀다. "훗.... 그렇게 술꼬대 할 때는 언제고 세상 모르고 잠들다니...." 술꼬대라.... 오늘 내내 레비앙에게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있다면 아마 < 결혼>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결혼할지도 몰라.... 결혼 할 거라니까.... 그거 말고 결혼 말야. 아아니, 그거 말고 진짜 결혼 말이래도. .....어쩌면..... 레비앙은 누이가 먼저 결혼하는 것을 섭섭해하는 걸까? 레비안느가 결혼하는 것이 그렇게도..... 아마 상대가 누구냐 하는 문제도 있겠지. .....문득 레비 안느의 생각이 떠오르자 엘스헤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주무르던 동작을 스르륵 멈추었다. 레비안느....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아마 그녀는 리하르트 와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우선 약혼부터 할 테고.... 그렇게..... 그녀는 행 복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파티에서 리하르트와 춤 추고 있을 때면 다른 때 볼 수 없는 밝은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 얄미운 녀석, 복도 지지리도 많지. 레비안느까지도 모자라 레비앙의 사랑도 듬뿍 받다니.... 엘스헤른은 씁쓸한 듯 입꼬리를 그러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억지로라도 웃으려는 걸 보면 가식이란 것은 습관처럼 입에 찰싹 붙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엘스헤른은 낮게 한숨을 짓고는 레비앙이 잠든 침대 맡에 다가섰다. 어쩌면 자는 모양이 좀 불편해 보이기도 해서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외투와 부츠만 벗 겨주었다. 그리고 자는데 목에 감기지 않도록 크라바트도 풀어서 탁자 위에 고이 얹어 놓았다.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이것이야말로 친구의 할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엘스헤른은 뿌듯하기조차 했다. 이제 좀 편해진 건지 레비앙은 쌕쌕거리며 고른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렇게 침대 맡에 앉아 양초의 불빛 아래에서 레비앙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엘스헤른은 꼭 자신이 수호천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라 면 언제까지라도 레비앙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레비앙의 뺨에 얹혀져 있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옆으로 밀어 주었다. 얼핏 손 끝에 그 뺨의 촉감이 스치듯이 느껴졌다. 엘스헤른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손을 땠다. 그러고는 손 끝을 자신도 모르게 입술 에 가져다 댔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어쩐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렇게까지 긴장해버리다니... 아무리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레비앙이지만, 뭔가 그를 향해 몹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엘스헤른은 조용히 침대 맡에 서 몸을 일으켰다. 레비앙을 무사히 재워 놨으니 이제 에스트리온 성관으로 돌아가야지. 그러 고 보면 제롬 녀석이 아마 오늘의 결과와 함께 돌아올 형님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게다. 제롬을 생각하니.... 우우,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엘스 헤른은 살풋 미간을 찌푸리고는 주머니에서 금으로 된 줄 시계를 끄집어내었 다. 12시를 훨씬 넘긴 시각.... 그래도 돌아가야지. 내일 아침에 내내 그 고귀하신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의 영예로운 수다와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엘스헤른은 서 있다 말고 왠지 모를 아쉬움에 다시 침대 맡에 앉으며 레비 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새 뒤척였는지 리본 풀린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무방비로 잠들어 있다니.... 정말 누가 업어간다 해도 모를 정도로 레비앙은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훗....." 가볍게 웃은 엘스헤른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는 작별 인사를 위해 이마에 입맞추어 주려고 살풋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가까운 거 리까지 다가간 엘스헤른은 어쩐 일인지 말끄러미 레비앙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냥 고개를 들었다. 잠이 들었다고 해서 이렇게 몰래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친구로서 못할 짓이란 생각에서였다. 엘스헤른은 자신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는 가만히 레비앙의 이마 위에 댔다. 그것만으로도 엘스헤른은 만족할 수 있었다. 좀 서운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간접 인사만으로도 충분했다. 친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 킬 수 있는 것은 지켜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둘이서 그어 놓은 잠정적인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더 이상 친구도 아닌 것이다.... 엘스헤른은 발그레하게 뺨이 물들어 있는 레비앙을 한동안 더 쳐다보고 있 다가 한숨을 돌리면서 일어섰다. 이제 정말로 가 봐야 할..... "엄마...." 아아, 이런.... 어린애도 아니고 엄마를 찾는 잠꼬대라니.... 물론 아까의 일과 겹쳐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잠꼬대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 애써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는 해도 이렇게 무 방비 상태가 되면 그 속마음이 그대로 다 드러나 버리니까.... ".....엄마....." 쳇, 바보 같이.... 엘스헤른은 욕설이 나올 것만 같은 심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어쩐지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저건.... 엘스헤른 자신이 알고 있 는 그런 레비앙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렇게 약하고 여린 모습 따위는.... 레 비앙은 그 따위의 모습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녀석이었다. 아까는 술에 취해 그런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여느 때라면 항상 도도하고 콧대높은.... 심지어 는 우는 것조차 들키고싶지 않아 하는 녀석인데. 왜 하필은 저런 모습을 보여 줘서는.....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게 만드는 걸까? 그다지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레비앙은 약간 거칠어진 숨을 몰아 쉬며 간간히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어느새 꼭 감은 눈가에 맑은 눈물이 방울 지어 스며있었다. 엘스헤른은 손을 내밀어 그의 눈가를 훔쳐주다 말고 흠칫 놀랬다. "가지마....." 이런, 제기랄.... 왜 저따위의 잠꼬대를 하는 걸까?! 대체 무슨 꿈을 꾸길 래! "나 혼자 두고 가지마...." 혼자.... 어쩐지 그 단어를 듣자 마자 엘스헤른은 소름이 끼치듯 온 몸에 알지 못할 전율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싸늘하게 마음이 얼어붙는 듯 한 기분이었다. 레비앙은 항상....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걸까? 이렇게 옆 에 있어주는데도.... "흐윽... 제발." 레비앙의 잠꼬대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아까 그렇게 울었으면 서 또 울어야 할 것이 남았던 모양이다. 꿈속에서까지 저렇게 가슴앓이를 하 다니... 엘스헤른은 가늘게 손끝을 떨고 있는 레비앙의 손을 꼭 잡았다. 이상하게도 손을 주자마자 레비앙은 그의 손을 놓칠세라 자기 품으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엘스헤른은 중심을 잃을 뻔 했지만 레비앙의 머리맡에 손을 기대어 지탱함으 로써 다행히 그의 위로 쏠려버리지는 않았다. "가지마..... 응....?" 뭔가 가득 슬프고도 안타까운 모양인지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을 꼬옥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엘스헤른은 가까이서 그를 내려다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 었다. 도대체 누가 떠나가는 꿈을 꾸길래 저렇게 울기까지 하는 걸까.... 한참 레비앙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그의 이마를 쓸어 넘 겨주면서 나직히 속삭였다. "쉿.... 래비앙. 괜찮아. 안 갈게..... 네가 원한다면 말야.... 자, 괜찮아. 울지 말고.... 그래....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울지 마." 아주 오랜만에 너무나도 편하고 맛있는 잠을 잔 기분이다. 레비앙은 잠에 취해 몽롱한 기분에 눈을 뜨지 않고서 숨을 가득 들이쉬었다. 마치 봄볕 마냥 나른하고도 뽀송송한 느낌이다. 물론 좀 더 잘까도 생각했지만 지금쯤이라면 할아버지와의 아침 식사시간에 늦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른 일어나서 세수 도 해야 하고 옷도 갈아입고 식사하러 나가야 한다. 하지만 마치 잠의 요정이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구는 듯 레비앙은 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그런데 숙면을 취한 상쾌한 기분과는 달리 어쩐지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다. 무엇에 눌리기라도 한 걸까? 어쩐지 두터운 겨울 이불 밑으로 가득 숨어들었을 때의 그 무게감 같은 느낌이 든다. 잠을 깨기 전에는 몰랐는데 의 식이 돌아올수록 레비앙은 더더욱 또렷하게 뭔가가 자신을 꾸욱 누르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레비앙은 자신의 가슴 위에 얹혀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귀찮지만 가슴 녘에 손을 올려보았다. 몇 번 더듬거린 끝에 뭔가 신선 한 바스락거림이 손안에 가득 차 올랐다. 아무래도 레이스의 촉감 같다..... 레이스.... 그리고 그 레이스의 아래로 뭔가 따스한 것이 잡혔다. 레비앙은 자신이 잡은 것을 불끈 쥐면서 눈을 반짝 떴다. 설마.... 이것은..... 잠든 내내 온 몸을 감싸던 기분 좋은 온기와 그 포근함의 정체는....?! 레비앙은 자신의 가슴을 옥죄고 있는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소매의 팔뚝을 들어올렸다. 아아.... 지, 지금.... 설마 이....이렇게 등이 따뜻한 것은.... 레비앙은 누워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핑 돌아 땅속으로 꺼져들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레비 앙은 알 수 있었다. 숨소리만으로도 지금 등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문득 머릿속이 표백이라도 되어버린 듯 레비앙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물론 뭔가 화를 내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조차, 아니....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곧, 잠에서 깬 듯이 작게 몰아쉬는 엘스헤른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찌나 가까이에서 들려오는지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쟁 그러움에 어깨를 움츨 떨었다. "아.... 이런. 자버렸잖아...." 엘스헤른은 잠결에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았 다. 그는 아직도 졸린 듯 한 손으로 눈을 부비다 말고 문득 가득 웅크린 채 아직까지 돌아누워 있는 레비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자고 있는 건 가? 음, 그러고 보면.... 어제, 잠꼬대하며 흐느끼던 레비앙을 안아서 다독이 다가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어느새 깊게 잠들어서 이렇게 아침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엘스헤른은 곰곰 더 생각을 하다가 슥슥 뒤통수를 매만졌다. 밤새 안고 잔 것을 알게 된다면 레비앙 녀석, 아마 펄펄 뛰고 난리가 날 테다. 우... 먼저 일어난 것이 천만 다행이로군. 엘스헤른은 피식 웃으면서 얼른 일어나 앉았다. 창을 덮은 하얀 리넨의 레 이스 커튼 사이로 아른거리는 햇살을 보니 아침 시간인..... 아, 참!! 레비앙 은 지금 아르떼이유 후작과 아침 식사를 해야 하는데. 그는 갑자기 떠오른 생 각에 자신의 이마를 톡 두드리다 말고 레비앙에게로 손을 뻗었다. 지금 깨우 지 않는다면 집사가 식사시간을 알리려고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집사도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레비앙만큼이나 펄펄 날뛰겠지. "레비앙...."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손길이 스치지 마자 레 비앙은 잠을 깨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마치 작은 동물처럼 몸을 옴츠렸다. 엘 스헤른은 그 서슬에 놀라 흠칫 손을 거두었다. 뭐야? 이 민감한 반응은.... 일어나 있은 건가? ....설마 어디 아프기라도? "너 어디 아파?" 엘스헤른은 돌아누워 있는 레비앙을 돌리기 위해 다시 손을 뻗으며 물었다. 다시금 그의 손이 다가오자 레비앙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발딱 일어나 앉았 다. "왜 그래? 레비앙...." "아, 아냐.... 아무 것도 아냐." 레비앙은 얼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수습할 생각조차 못하고는 엘스헤 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옷자락을 여몄다. 뭔가 가득 당황해버린 듯한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진 엘스헤른은 뒤통수를 매만지다 말고 그에게로 다가앉았 다. "어디 봐. 어제 찬바람 쏘여서 감기라도 들은 거 아냐?" 레비앙이 채 도망칠 겨를도 없이 종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엘스헤른은 어 느 새 그의 바로 앞으로 와서는 그 붉은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엘 스헤른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레비앙은 자리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어쩐지 피할 수가 없었다. 레비앙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엘스헤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비앙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의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댔다. 레비앙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잘 익은 토마토만 큼이나 빨갛고 이마에 미열이 있는 걸로 봐서는 정말 감기라도 든 모양이다. "이런.... 어제는 왼 종일 본의 아니게 널 괴롭힌 게 되었나보군. 괜히 놀러 가자고 해서는 감기까지 들게 하고 말이야." 엘스헤른은 미간을 가득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침대에서 내려서서 레비앙 을 도로 자리에 눕혔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떠미는 것 을 느끼면서 뒤로 풀썩 누워버렸다. 얼굴이 가득 화닥거리는 걸 아마 엘스헤 른은 다행히도 감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문득 엘스헤른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레비앙의 시야에 들어왔다. 엘스헤른은 손수 이불을 덮어 다독여 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좀더 자도록 해. 자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런 그를 보며 레비앙은 어쩐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그를 보면서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는데 왜 이러는 지 모를 일이다. 어젯밤 자 신을 감싸 안았던 저 넓은 가슴을 보니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레비앙은 이불을 뺨까지나 끌어올리며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정말 꼭 감기처 럼 뺨에 가득 열이 나고 나른하고 쟁그러웠다. 그래, 감기야, 감기. 레비앙은 자신의 심정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아예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 써 버렸다. 부끄러워진 마음을 이불로라도 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쩐 지 지금 엘스헤른이 등 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레비앙 은 안절부절 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엘스헤른이 뭐라고 말을 하건만 레비앙은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 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께 오늘 아침식사는 못할 거 같다는 걸 전해준다는 말 인 듯 했다. 그리고 엘스는 뭐라고 더 말했고 꽤나 걱정스러워 하는 것 같았 다. 하지만 레비앙은 눈을 꼭 감은 채 엘스헤른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누에처 럼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 TO BE CONTINUE - ==================================================================== 오늘은 분량이 넘 많군요.; 규칙적인 분량을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 즘은 도통 바빠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요.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뭔가 정성을 기울이고 싶었지만 항상 아쉬운 생각만 드는군요. 그럼 다음 편에서 또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4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5 조회수: 427 [번 호] 9640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28일 22:24 Page : 1 / 14 [등록자] EGALITE [조 회] 335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4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4) 의외의 방문자 & 의외의 사건. 요즈음 프랑스 쪽의 일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는 듯 해서 황 제 폐하께서는 뭔가 대책을 강구하고 계셨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프랑스 국 왕인 루이 16세가 망명을 하려다가 실패해 파리로 압송되었고, 그 때문에 지 금 프랑스는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였다.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프랑스 폭동이 이젠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때문에 유럽은 상당히 긴 장된 상태였다. 그로 인해 엘스헤른은 궁성 출입이 잦았고, 여차저차해서 레 비앙에게 가 볼 기회가 잘 없었다. 뭐, 레비앙도 휴가를 틈타 레비안느의 약 혼식 준비로 바쁜 건지 요즘은 통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에 감기는 좀 어떻느냐고 레비앙에게 편지를 띄운 이후로는 거의 안부 물 을 틈조차 없었던 엘스헤른은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에스트리온 가에 손님이 한 명 더 느는 바람에 더더욱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방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 누나. 여기 있었어?" 바로크 식으로 꾸며진 에스트리온 가의 정원 한 켠에서 하얀 벤치에 앉아 수를 놓고 있는 밝은 금발의 여인에게로 다가선 소년은 제롬이었다. "아.... 제롬. ....여기서 수 놓고 있었어. 방 안은 갑갑하기도 하고 말야. 에스트르의 날씨는 영국과는 달라서 방 안에서 감상하기엔 너무 아름다워." 그녀는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동생에게 옆자 리를 권했다. 며칠 전 영국으로부터 에스트르에 도착한 이 숙녀는 바로 제롬 의 누이인 아이린이었다. "집에만 있으려니까 심심하지? 요즘은 형님도 바쁘니까 무도회 같은데 데려 가 줄 수도 없고 말야." 제롬은 괜히 에스트르까지 불려오느라, 여기에 도착한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도 불구하고 여전히 헬쓱해 보이는 누이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다정하 게 말을 건넸다. 천하의 악동으로 소문난 제롬이라 할지라도 세 살 터울인 이 넷째 누나에겐 껌뻑 죽고 못 살았다. 언제나 다섯째와 여섯째 누나의 해코지 로부터 그를 보호해왔던 아이린인만큼, 제롬은 크면 클수록 그런 넷째 누나를 끔찍이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아, 괜찮아. 그런 일로 오라버니를 귀찮게 군다면 안되지. 난 그다지 파티 같은 건 즐기지 않고 말야. 게다가 엘스 오라버니는 어쩐지 바쁜 모습이 더 멋있거든. 뭔가.... 사람이 반짝반짝 빛이 나 보인다고나 할까?" 솜사탕이 녹아드는 듯한 아이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롬은 씨익 미소를 지 었다. 도도하고도 깐깐한 레비안느를 상큼하면서도 자극적인 레몬에 비한다면 아이린은 은은한 멜론의 향 같다고나 할까? 제롬은 내심 자신의 누이를 뿌듯 해 하면서도 속으로 레비안느와 이런 저런 비교 대조를 해 보느라 어느새 한 눈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확연하게 반대의 성격이라면 아마 이번에 그녀들끼 리 만나는 일이라도 생길 때엔 정말 재미있어질는지도 모른다. 제롬은 다시 한 번 계획을 머릿속으로 검토하면서 누이가 수를 놓고 있는 수틀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린의 섬세한 손가락이 작은 바늘을 쥐고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을 대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눈길로 자 신이 놓고 있는 수에 몰두해 있었다.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 제롬의 수많은 누이들 중 가장 제롬과 닮았고 또 가 까우면서도, 그 성격만은 판이하게 다른 이 아름다운 숙녀는 올해로 18살을 맞이한 레비안느와는 동갑내기의 아가씨. 물론 취미 삼아 하고 있는 저 자수도 얼마나 꼼꼼한지 그녀에게서 손수 자 수를 놓은 물건을 선물 받기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 만큼 솜씨에 서 소문이 나 있었고, 영국에 있을 때엔 구혼하러 온 신사들이 손님방에 넘쳐 날 정도로 인물 또한 빼어났다. 제롬과 마찬가지로 옅은 연록빛을 띈 아이린의 눈동자는 청순한 에메랄드의 보석처럼 반짝이고 흰 살결은 햇살을 품기라도 한 뜻 뽀샤샤하고 눈부셨다. 영국식으로 땋아서 말아 올린 머리카락은 마치 금빛 실로 빚은 실타래 같았으 며, 새초롬하게 웃음을 띄는 도톰한 입술 사이로 살풋 하얀 이가 드러나곤 하 는..... 한마디로 미(美)의 집대성 같은 이 여인은 그 많은 구혼자들을 뿌리 치고 편지 한 통에 한 달음에 에스트르로 온 것이었다. 그녀가 이 곳에 온 이 유는 바로.... "약혼?" 레비앙은 느닷없이 들려온 단어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엘스헤른에게 되물 었다. 정색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레비앙을 보며 엘스헤른은 가볍게 고 개를 끄덕였다. "응. 뭐... 네가 요즘 레비안느의 약혼 준비로 조금 바쁜 듯 해서 알리지 못 했어. 서신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 간만에 황태자 전하를 뵙기 위해 입궁한 레비앙과 마주치게 된 것이 내심 반가운 듯 엘스헤른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몇 번 흔들더니 그 동안의 일을 주 절주절 이야기했다. 엘스헤른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곁귀로 흘리며 왠지 저번 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발그레해져 있던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믿을 수 없는 말에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린 것이다. "약혼이라고?" 믿지 못하는 듯 되물어보는 레비앙의 반응을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즐기고 있던 엘스헤른은 정확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뭐, 그냥 가족들과 조촐하게 한 거라서.... 주변에 알리지는 않았어. 하지 만 폐하께 엊그제 결혼 승인서를 신청해 놓았으니까, 승인서가 도착하는 대 로 알려도 늦진 않는다고 생각해."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엘스헤른을 올려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모자를 벗 어 쥐며 또 다시 엘스헤른이 이야기 해 준 것을 되물었다. "아.... 상대가 누구라고?" "아이린, 내 사촌 동생 말야. 아아.... 넌 그녀를 본 적 없지? 제롬의 누이 야." "하지만, 엘스.... 넌...." 레비앙은 어리둥절하고도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 따질 듯이 입 을 열었다. 그런 그의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엘스헤른은 씨익 웃으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혹여.... 레비안느 말인 건가?" "...." "푸훗....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난 그런 타입은 별로라고..... 그냥 너랑 닮았기에 한 번 찝적거려 본 거라구. 세상에 자네만큼 최고의 지성을 갖춘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면야 내 바랄 게 없지만.... 불행히 자네와 꼭 닮은 자네 누이는 내 취향이 아닌 걸 어쩌나. 어쩔 수 없지. 자네와의 정신적 외 도만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뭔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렇게 너스레를 떨어대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가슴 가득히 못마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 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리하르트가 레비안느에게 청혼을 하러 왔었 다는 이야기를 했던 때 그렇게나 놀란 표정을 지었던 엘스헤른이 어째서....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끝을 모를 바닥을 향해 치닫는 기분을 느끼며 여전히 웃고 있는 엘스헤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그러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약혼을 해? 그러니까 내 말 은.... 그녀가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훗.... 아이린과는 어릴 적부터 알아온 사이인걸 뭐. 어릴 적엔 그 울보와 내가 약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야. 정말 사람 사는 일이란 묘하기도 하지." 엘스헤른의 이런 저런 이야기가 어쩐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비앙은 뭔 가 따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정말 이럴 리는 없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약 혼이라니.... 아무 언질도 없이. 게다가 레비앙 자신으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엘스헤른의 약혼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배신감이 그의 마음 속 가득히 샘솟았다. 하지만 레비앙은 자신이 그런 내색을 낼 만한 상황 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엘스헤른의 개인적인 일이었고,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는 해도 약혼을 한다는 것을 왈가왈부해서 걸고넘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약혼에 앞서서 한 마디 말이라도 해 주거나 하지 않고 이렇게 느닷없는 통보라니..... 레비앙은 여전히 섭섭한 마음을 떨칠 수는 없 었지만 곧 표정을 추스리며 엘스헤른에게 물었다. "그녀를..... 좋아해?"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의외의 질문에 피식 웃더니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일말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 꼈다. 자신이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사이도 없이 그는 엘 스헤른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녀와 결혼을 하려고 하는 거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레비앙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엘스헤른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의 초록색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랑하니까." 그 말에 할말을 잃은 레비앙은 멍하니 엘스헤른을 보고 있더니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놓쳐버렸다. 엘스헤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정 말 간지러울 것 같다고 예전에 놀리곤 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 엘스헤른 은 어쩐지 너무나도 진지하고 또 엄숙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레 비앙은 한가득 소름이 끼쳐옴을 느꼈다. 마치 눈물이 쏟아지기 전의 기분처 럼.... 그렇게 싸늘한 기운이 마음 속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이런 왠지 모를 기분에 레비앙은 머릿속이 묵직했다. 어린애 같이.... 지금 치졸하게도 이기심이 발동하는 걸까? 여지껏 단 한 번도 엘스헤른의 이런 미 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레비앙이었던 만큼, 지금 너무 당혹스럽 고도 얄 수 없는 자질구레한 감정을 어떻게 수용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흔하 게 하는 약혼을.... 그런 약혼이 왜 유독 엘스헤른에게만은 상관없는 일이라 도 되는 듯 그렇게 상상하지도 못했던 걸까? 그리고, 그토록 낯간지러운 그 <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왜 지금은 이렇게 입안을 쓰라리게 만드는 단어로 들리 는 걸까? 엘스헤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의 레비앙에게 모자를 주워주고는 언제나와 다 를 바 없는 웃음을 지었다. "조만 간에 에스트리온 성관에 방문해주겠어? 그녀가 널 만나고 싶어해." 레비앙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건네 받았다. 당연히 만나봐야 할 일이었다. 엘스헤른이 누구와 약혼을 한 겐지. 그 누가 장차, 엘스헤른의 신 부가 될 것인지.... 만나 보고 가득 심통이라도 부려 줘야 하질 않겠는가! 그러나 이내 다시 레비앙의 손에서 모자가 미끄러져 버렸다.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해도 스스로 숨길 수 없는 마음일랑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또다시 발치에 팔랑 내려앉는 모자를 보며 엘스헤른은 뭔가 추궁이라도 하 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래? 레비앙. 모자를 못 들만큼 팔에 힘이 없기라도 한 거야? 아아, 아 직 감기가 덜 나은 건가?" "으응.....? 아....." 레비앙은 그제서야 짧게 한숨을 짓더니 약간 미소를 지었다. "좀 황당해서..... 네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게..... 그 러니까.... 저.... 내 말은...." 조금은 횡설수설하던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엘스헤른이 약혼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묵직한 이유가 갑자기 떠오를 리 없지. 지금 당장은 엘스헤른에게 가 장 절친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 레비앙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던 눈가에 가볍게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축하해. 진심으로 축하해." - TO BE CONTINUE - ==================================================================== 새 등장인물이 나왔답니다.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 양. 제롬의 셋째 누이죠. 동갑인 레비안느와 비교해서 뭐랄까.... 상당히 조신하달까요? 뒤늦게 나온 인물이라 제 기능을 다 할진 모르겠지만, 괜히 앞이 길어져버리는 바람에 이 렇게 되었군요. 아무튼, 아이린의 여염집 규수 같은 얌전한 모습을 기대해 주 세요. 뭐, 눈치 채신 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엘스헤른이 갑자기 행동을 바꾼 것 에 대해서는 너무 질책하지 말아주세용. T-T 엘스헤른도 다 피해자랍니다.; P.S.1. 추천해 주신 분들께 감사.^^ P.S.2. 파람 언니~! 비평 고마워~! >_> ┃┃ ┃┃ ┃┃ ┃┃ ┃┃ ┗╋━━━━━━━━━━━━━━━━━━━━━━━━━━━━━━━━━╋┛ ┗━━━━━━━━━━━━━━━━━━━━━━━━━━━━━━━━━┛ (25) 아이린 레비앙이 엘스헤른의 성관에 방문했을 때는 여차저차해서 좀 떠들썩한 분위 기였다. 성관의 새로운 안주인이 될 사람을 위한 준비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 가 방문했을 즈음엔 에스트리온 성관은 한적하고 중후한 그런 여느 때와는 판 이하게 달랐다. 에스트리온 공작부인도 성관을 꽃으로 장식한다고 바빴고, 제 롬은 그런 외숙모님을 거드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엘스헤른은 결혼 식 때 입을 옷 때문에 벨라시그네에 가고 없었다. 그리고 그의 피앙세인 아이 린은 어디에 꼭꼭 숨어버린 겐지 보이지도 않았다. 때마침 거대한 옷상자를 든 엘스헤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레비앙은 그대로 돌아갔어야 할 판이었다. 엘스헤른은 에스트리온 성관의 어수선한 상황에 얼 떨떨해 하는 레비앙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그와 함께 성관의 뒷편 정원으로 향 했다. 뒷문을 통해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키 낮은 나무들로 장식된 바로크식 정원이 펼쳐진 뒤뜰로 레비앙을 안내한 엘스헤른은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목 소리를 가다듬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봐. 레비앙 군이 방문했어."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채 정원을 다 채우기도 전에 낮게 이어진 초록빛 나무 회랑 뒤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핏 보기에 열 여덟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숙녀였는데 손에 수틀을 쥐고 있는 모습이 참 정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뽀샤샤한 햇살 마냥으로 빛나 보이는 그녀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제롬과 닮았으되 정 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가 누구라는 것 쯤은 당연히 짐작하고 남았다. 엘스헤른의 피앙세인 아이린 양. 옅은 색 금발을 영국식으로 땋아서 뒷머리 쪽에 동그랗게 말아 올린 아이린 은 바늘을 수틀에 꽂아두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다지 부풀리지 않은 영국식 드레스가 그녀의 걸음걸이에 따라 살며시 출렁거렸다. 화려하지도 않고, 장식도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몹시도 고상하고 우 아해 보였다. 나른한 봄날의 햇살처럼.... 어느덧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아이린은 제롬 군과 같은 연녹색의 눈에 약 간 수줍음을 띄고 있었다. 그녀는 엘스헤른의 곁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약간 고개를 숙여 레비앙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프리미르 아르떼이유..... 저는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라 고 합니다." 의외로 에스트르 어에 능한 숙녀의 태도에 레비앙은 당황한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숙녀가 내미는 손등에 입맞추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이린 양." "저야말로 영광인 걸요. 엘스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으시는 분 을 직접 뵙게 되어서요." 하늘거리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 레비앙은 그런 그녀의 여성스러운 섬세 함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 보다는 뭔가 좀 뒤틀린 심사에서 나온 심술이라고나 할까? 여차 저차 인사 치레가 끝나자 엘스헤른은 피앙세와 친구를 정원에 비치해 놓은 다과용 탁자로 안내했다. 때마침 티타임이라 엘스헤른은 하녀에게 차를 가져오도록 시켰다. 평소 엘스헤른이 즐기던, 케시르니아 열매를 끓인 차가 아니라 재스민 차를 시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레비앙은 물끄러미 엘스헤 른을 쳐다보았다. 레비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 챘는지 엘스헤른은 빙긋 이 웃음을 지었다. "아.... 아이린이 재스민 차를 좋아해." 그런 것이었구나.... 레비앙은 수긍을 하긴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착찹해지 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앞에서 엘스헤른이 다른 누군가를 배려해 주고 있 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기필코 처음이었다. 이건..... 마치 잘 간직하고 있던 어떤 것이라도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이다. "아이, 참. 오라버니도..... 제 생각보다는 우선 손님이신 레비앙 님의 생각 을 물으셨어야죠." 아이린의 가벼운 핀잔에도 엘스헤른은 싱글벙글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레비앙은 아직 차를 마시지도 않아서 벌써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식사도 거르지 않았는데 가슴 속이 어쩐지 가득 쓰라렸다. 자꾸 아이린을 향해 있는 엘스헤른의 시선과..... 그리고, 여지껏 다른 사람 에게 허용된 적이 없었던 저 헤픈 웃음이 왠지 못마땅한 것이었다. "레비앙도 재스민 차라면 나쁘지 않지?" 물론 레비앙의 의견을 묻는 물음이었지만, 어쩐지 그것조차 아이린을 먼저 고려하는 냄새가 역력한 질문이었다. 레비앙은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 이었으나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은 심술을 부린다고 해서 통할 상황도 아니었을 뿐더러 처음 뵙는 숙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 괜찮아. 엘스헤른. 전 괜찮습니다. 아이린 양." 레비앙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목구멍에서 말을 꺼냈다. 왠지 모를 씁 쓸함이 입안을 가득 감돌았다. 지금 아이린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엘스헤른이 어쩐지 그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단 며칠 사이었다. 그 사이에..... 친구는 약혼을 하고 생전 모르던 누군가 와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바로 눈 앞에 있어도 다른 사람으로 착각이 될 만큼이나.....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진 레비앙은 그들이 나누는 알 수 없는 이야 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하녀가 날라 온 차를 들이켰다. 엘스헤른과 아이린 의 이야기는 레비앙으로서는 금시 초문의 일들이었다. 그건 두 사람만의 추억 이 담긴 이야기들이었고, 그 자신은 거기에 끼어 들 소지가 없다는 것을 레비 앙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홍차 마시기 싫어서 고모님으로부터 도망다니곤 했던 적도 있 었잖아." "그러게요. 오라버니는 유난히 티타임 같은 걸 싫어했잖아요." 엘스헤른이.... 차 마시는 것을 싫어했던가? 레비앙은 문득 그와 관련된 기 억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물론 장난꾸러기 인데다가 항상 웃음이 헤픈 녀석이긴 해도 티타임 때만은 언제나 왕족다운 깎 듯한 예절의 극치를 보여주곤 했었는데..... 하긴, 그런 기억은 엘스헤른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러니까, 아이린과 엘스헤른이 이야기하고 있는 건 그 전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레비앙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 까지라도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를 즐기는 엘스헤른.... 그리고 그에 잘 호응해서 이야기를 경청하는 아이린. 뭐랄까.... 두 사람은 어쩐지 죽이 참 잘 맞는 것 같았다. 항상 엘스헤른이 지껄이는 이야기라면 한 귀로 흘려버리 곤 하는 자신과는 대조적인 아이린을 보면서 레비앙은 뭔가 그 동안 자신이 엘스헤른에게 잘 못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아, 영국에서의 일이라면 말도 마. 왜 그..... 생각나지 않아? 나의 불 장난으로 인해서 윈저가의 저택이 쑥대밭이 될 뻔 했던 거 말야." "하마터면 윈저가는 집도 없는 왕족이 될 뻔 했던 거죠." "으음.... 그 일이 있고 나서 고모님이 한동안 몸져누우셨지. 다시는 날 보 고 싶어하지 않으셨을 지도 몰라." "제롬이나 거의 다를 바 없었다구요. 예전의 오라버니는..." "우우우.... 그 녀석은 극악이야. 아무도 그 녀석을 능가할 순 없지." 문득 레비앙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셋이서 한 테이블에 앉아 있긴 해도 자신은 지금 철저히 혼자였다. 그들 사이에는 레 비앙이 끼어 들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다정하고도 따스한.... 문득 두 사람이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상기한 레비앙은 들키지 않게 작고 낮은 한 숨을 내쉬었다. 하도 의외의 일이라 깜빡 잊곤 하는 거지만..... 저 사람 은... 저렇게 예쁜 웃음을 지으면서 앉아 있는 아가씨는 엘스헤른의 사촌이자 장차 아내가 될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다정해 보이지 않는다면 이상할 일인 것이다. 레비앙은 혼자서 찻잔을 놓았다 들었다 하며 그들의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딴 생각을 하고.... 그런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 앞의 두 연인은 거의 틈을 보이고 있지 않아 어떻게 끼어 들어야 할 지 난감한 난공불락의 성 같았다. 약간 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 고 레비앙은 어깨가 싸늘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온 몸을 잠식하듯 퍼져드는 그런 싸늘한 전율에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우울해졌다. 바보같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이 너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서 충격이 크긴 했지만 비단 그런 것 뿐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곁귀로 흘리며 레비앙은 다시 차를 들이켰다. 은은한 재스민의 향이 입안에 가득 머금어졌다. 재스민 향기.... 마치 아이린의 이미 지와도 비슷하게 부드럽고 향긋하고 따스한 느낌.... 엘스헤른의 이야기를 들 어주는 내내 그렇게 크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또한 우아한 손길로 사람의 마음 을 평안하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분위기를 가진..... 엘스헤른의 약혼녀 아 이린. 전혀 가식이 아닌 그녀의 그런 행동들, 작고 부드러운 언행들이 어쩐지 레비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너무나도 뽀샤샤한 정말 미워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이 여인이 얼마 있지 않아 엘스헤른의 아내가 된 다는 것을 레비앙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곱씹어 생각해내지 않는다면 금새 잊어버릴 만큼이나 그렇게 그의 마음은 이 사실을 수긍할 수 없었다. "레비앙 님은 오라버니의 오랜 친구시라니까 어릴 적에 어땠는지 잘 알고 계 실 거예요. 그렇죠?" 봄볕 같이 보들보들하고 나른한 말투..... 그리고 타인을 위한 배려까 지.... 레비앙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마음씨까지 천사나 다를 바 없는 아이린 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얼김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엘스헤른에 대한 이야기를 바라는 듯 눈빛을 반짝거리는 그녀를 보며 레비앙은 이야기 할 거리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엘스헤른과 지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만큼만 싹 도려내 버린 듯이 갑자 기 머릿속은 암흑 세계에라도 빠져버린 것 같았다. "아.... 저..... 엘스헤른은....."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말을 흐리다 말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두 사 람을 향해 번갈아 미소를 지었다. "엘스는..... 좋은 녀석이예요." 자신이 뭘 말하는 지도 모르게 레비앙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아무런 말 안하고 땀을 흘리고 있는 것보다는 얼토당토않더라도 일단 말하고 보는 게 나았다. "엘스는 예나 지금이나..... 밝고 또.... 잘 웃고..... 어렸을 땐 장난이 심 하긴 했지만...." 바보 같다. 기껏 할 말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었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친구 였으면서 어째서 그 어린 날의 나날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 레비앙은 쓰 라린 가슴 대신에 찻잔을 두 손으로 꽈악 감싸쥐었다. 어느새 식어버린 것인 지 찻잔에서 온기를 느끼기가 힘들었다. 레비앙의 표정이 살풋 흐려지는 것을 본 엘스헤른은 이내 화재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말야. 이 녀석 말은 저렇게 해도 나한테 사실 원한이 많지." 자신이 곤란해하는 걸 눈치 채고 이내 또 이것저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엘스헤른이 레비앙은 내심 고맙기도 했지만 어쩐지 더더욱 우울해질 것만 같 았다. 알지 못할 기분을 내내 추스르고 있기라는 것도 참 힘든 일이다. 뭔 가... 처음부터 엘스헤른에게 약혼녀 따윈 마음에 안 든다고 해 줄 심산이었 는데.... 그리고 그의 약혼녀라는 사람에게 도도하게 비웃어주고 싶었는 데....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내내 어쩐지 의기소침해져버린 자신을 이 해할 수 없었다. 사실 아이린은 엘스헤른의 약혼녀로는 손색이 없었다. 그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점차 이렇게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레비앙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찻잔을 들어 재스 민 차를 들이켰다. 아련한 연보라 빛의 향내.... 그 미묘한 향기가 입안을 가 득 채웠지만 레비앙의 마음은 어쩐지 여전히 허전했다. - TO BE CONTINUE - ==================================================================== 날씨가 무진장 덥습니다. 올라온다는 태풍은 소식조차 없습니다. 덥덥한 공 기는 지붕 위에서부터 방 안의 곳곳까지 꾹꾹 채워져, 정지한 채 움직일 줄을 모릅니다. 선풍기 바람은 찝찝합니다. 더워서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냥 방바닥에 누룽지 마냥 눌어붙어 있습니다. 등에는 땀띠가 생겨납니다. 가렵습 니다. 긁습니다. 긁다 지쳐 잡니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붓고 머리가 아픕 니다. 식욕이 떨어집니다. 밥을 굶습니다. 허기에 지쳐 잡니다. 으으음...; 너무 더운 이야긴가요? 하지만 펠티의 요즘 생활을 여실히 드러 내주는 이야기죠. 진주의 날씨는 항상 더없이 맑은 날에도 공기에 어느 정도 수분이 섞여 있어 뽀송뽀송하지 않답니다. (강과 저수지 때문인가?;) 다음날 비가 올 예정(?)이면 더더욱 찝찝하고 더워지죠.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부모님은 일기예보를 믿지 않는군요. 극구 해수욕을 가겠다고 하시는데...;; 펠튀는 죽을 지경입니다. 아아아.... 구냥 쉬고 싶어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6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6 조회수: 427 [번 호] 9742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30일 21:59 Page : 1 / 12 [등록자] EGALITE [조 회] 314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6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6) 한여름, 숲의 전경. 레비앙을 돌려보내고 나서 엘스헤른은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꼭 이 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찜찜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제롬 녀석은 뭐가 좋은 겐지 실실거리며 웃어댔다. 심지어 에스트리온 공작부인도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제롬과 맞장구를 쳤다. 그들이 그 렇게 기뻐하는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엘스헤른은 그다지 알고싶은 마음 도 없었다. 제롬이 방문하는 것이 그렇게도 싫은 이유는 저렇게 어머니와 손 발이 척척 맞아서는 뭔가 계략을 꾸미기 일쑤고, 언제나 저들의 손에 놀아나 는 사람은 엘스헤른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제롬의 계획대로 따르고 있기는 해도 이건 원, 레비앙과의 우정을 위한 것 과는 정말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계획임에 틀림없었다. 아이린이 이 성 관에 오는 순간부터 엘스헤른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무슨 남녀 관계도 아닌데 굳이 아이린까지 데리고 와서는 약혼을 하는 둥의 해프닝을 벌 일 필요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스헤른은 동생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야릇한 기분과 레비앙을 홀대하고 있 는 그런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추스리려고 노력하면서 그냥 황궁에 입궐해 일에 집중했다. 집안 분위기가 당최 마음에 들지 않으니 별로 집에 붙어있고 싶은 기분이 들리 없었다. 제롬으로 인해 정신과 영혼이 고달플 바에야 차라 리 국가 중대사를 논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쪽이 나았다. 모처럼 방문해준 아이린을 혼자 남겨 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안 그래도 때맞추어 일이 많아져버린지라 엘스헤른은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착한 사촌을 돌볼 겨 를이 없었다. 요즘은 프랑스의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은 바짝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고, 어쩌면 전쟁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전 유럽에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몰지각한 지식층들이 프랑 스에 만연한 사상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에스트르로 끌어와, 프랑스의 혁명을 미화시키는 등 요즘 에스트르는 이래저래 잠잠할 날이 없었다. 일단, 엘스헤른은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혁명을 정당화시키려는 에스트르 내 부의 무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 혁명으로 인해서 프랑스라는 국 가 하나가 뿌리 째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국가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다는 모양으로 날뛰고 있었다. 물론 특권층이 향유하는 권력과 재산 운 운하는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는 쳐도 그게 그렇게 프랑스식의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국민들은 지금 국왕을 파리에 압류해 놓았을 만큼이나 반 미쳐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 있는 프랑스의 사상들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에스트르 역시 프랑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황제 폐하께서는 뭔가 대책을 강구하고 계셨는데 엘스헤른은 요즘 그 분에게 조언을 해 드리기 위해 매일같이 입궁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는 동안, 일과 여러 고민에 찌들대로 찌들고 잠길 듯이 푹 파묻혀 있던 엘스헤른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바로, 에 스트리온 공작부인의 생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황제 폐하께서 문득 자신의 장모인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의 생일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그냥 잊고 지나칠 뻔 했던 것이다. 엘스헤른은 아 무리 폐하와의 대화 도중이었지만 파랗게 사색이 된 얼굴로 곧 양해를 구하고 는 곧장 선물 마련을 위해 궁성을 뛰쳐나왔다. 잊을 것을 잊어야지, 어떻게 어머니의 생신까지 잊는단 말인가?! 생일 선물을 꼬박꼬박 챙겨주지 않는다면 언제나 토라져버리곤 하는, 아직 도 소녀 같기만 한 어머니를 위해서는 언제나 특별한 선물이 필요했다. 올해 도 엘스헤른은 항상 어머니를 만족시키곤 했던 케시르니아 꽃잎으로 만든 잼 을 선물하기로 했다. 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해도,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은 엘스헤른이 직접 만들어주는 이 향긋하고 달콤한 선물에 항상 감동하시곤 했 다. 생신에 맞게 선물을 준비하려면 이 즈음에는 꽃잎을 따 놓아야 했다. 좀 있 으면 케시르니아는 꽃잎이 다 져버릴 뿐만 아니라 꽃잎으로 잼을 만들려면 채 취한 꽃잎을 한동안 꿀에 재워둬야 하기 때문에 지금 서두르지 않는다면 늦어 버리기 십상이었다. 황궁을 나와 벨라시그네를 벗어난 후 곧장 에스트리온 가 의 숲으로 향하는 엘스헤른은 궁에서 급히 빌려 나온 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서 말을 몰았다. 말의 흔들거림에 엘스헤른은 어쩐지 오늘따라 정신이 없었다. 뭔가 어디 아 프기라도 한 것도 아닌데 말 멀미라도 하는 듯이 가득 어지럽기까지 했다. 20 년의 세월동안 너무나도 익숙해버린 숲 속의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 스헤른은 어쩐지 마음이 어수선해서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 앞을 어지럽히는 밝은 햇살의 알갱이들이 요정의 무리처럼 춤추고 있는 숲을 들어서면서부터 엘스헤른은 부쩍 더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 같았다. 요 며칠 일에 치여 무리를 했던 게 잘 못 된 걸까? 그렇지만 그리 무리할 일도 아니었는데.... 아마도 너무 오랜만에 숲에 들어서서 그런 모양이다. 오랜만 이라 해도 단 며칠 사이었지만, 하루가 달리 숲은 모습을 바꾸어 있었고, 그 간 너무 바빠 돌아볼 틈이 없었기에 이렇게 숲을 보는 마음이 어수선한 것이 리라. 오랜만에 밝은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숲과 맑은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만끽 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문득 자신이 요즘 모든 것에 너무 무심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비단 에스트리온 성관을 둘러싼 이 숲 뿐만이 아니 라 레비앙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확실히 레비앙에게 무심하긴 했다. 제롬 의 알지 못할 계획에 휘말려 그가 하라는 대로 하고는 있지만 사실 아무 것도 내키지 않았다. 언젠가 맹세했던 것처럼 레비앙이 원한다면 그의 곁에서 그렇 게 현실에 안주해버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뭐, 현실에의 안주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포기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르지만.... 엘스헤른은 그날 어쩐지 좀 섭섭해하던 레비앙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뭔가 자신이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아서 죄책감이 내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 다. 그냥 얼김에 그 모든 관계를 억지로 수긍해버리긴 했어도 지금 엘스헤른 은 복잡해져버린 심정을 어떻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레비앙, 그리고 레비안 느.... 어떤 구체적인 심정이라기 보다는 그냥 그와 그녀를 생각할 때면 어쩐 지 가슴이 묵직했다. 그리고 그렇게도 속이 상하면서도 모든 걸 다 묻어버리 고 레비앙과의 우정이나마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 다. 엘스헤른은 말고삐를 당겨 속력을 줄였다. 어지럽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걸 보면 급한 마음에 너무 빨리 말을 몰고 있었던 것도 그 현기증의 원인일지 도 몰랐다. 이 길을 걷고 있으니까 어쩐지 전에 레비안느를 말에 태우고 케시르니아 숲 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정말 아무 근심도 없었던 것 같다. 햇살을 머금어 온통 반짝거리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그에 대조적인 새하얀 케시르니아의 꽃잎, 눈발 같이 흩날리는 향기와 색채.... 어지러이 원 을 그리며 낙하하는 순수의 조각들.... 하냥 아름답고 아름답기만 한 초여름 의 전경. 떠올려보자면 마치 그림처럼 선명한 그 때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후훗....." 엘스헤른은 일말의 아쉬움에 가벼운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남 의 부인이 될 사람을 떠올려서 뭘 할까.... 쓸 데 없는 생각들은 위험하기 그 지없다. 어느 샌가 사람을 망상의 구덩이로 몰아 넣어 후회에 쩔어 버리도록 하니 말이다. 언젠가 사춘기 무렵에 더도 덜도 말고 꼭 레비앙과 같은 여인이 있다면야 아내로 맞이한다 해도 손색이 없겠다는 식의 상상을 해 본적이 있었지만, 그 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었고, 레비안느가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는 거의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파티에서 그녀를 본 순간부터 엘 스헤른은 자신이 미묘한 바램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 비앙으로 충족되지 못한 그 어떤 것을 어쩌면 레비앙과 똑 같이 생간 여성인 레비안느를 통해 얻으려 했던 지도 모른다.... 위험할는지도 모르지만 우정을 넘어선 그 어떤 섬세하고도 야릇한 감정을..... 그의 한숨은 또다시 바람결에 실려 어디론가로 흩어졌다. 엘스헤른은 괜한 생각들로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숲에 취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어머니를 위한 꽃 잼만을 생각한다 해 도 나쁘지 않을 테다. 숲의 바람은 습했지만 상쾌했고, 늦은 오후의 노랗게 익은 공기가 숲에 가 득 스며 잘 구워진 달걀쿠키의 냄새가 어디에선가 풍겨올 것만 같았다. 지금 의 목적지야 그 비밀의 장소 - 케시르니아 숲이었지만, 엘스헤른은 어쩐지 에 스트리온 성관의 부엌으로 줄달음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황 제 폐하와의 대화로 인해 여지껏 점심 식사를 할 틈이 없었다. 엘스헤른은 괜 히 허기로 몰아가는 이 숲의 분위기에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케시르니아 숲으 로 통하는 비밀의 통로로 말을 돌렸다. 쿠키의 내음 대신에 이쪽 숲은 미약하나마 벌써부터 케시르니아의 향내가 잔잔히 녹아 있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상큼한 꽃내음을 만끽하면서 엘스헤른 은 케시르니아 숲 입구까지 천천히 말을 몰았다. 숲의 풋풋한 냄새와 미묘하 게 섞여드는 꽃향기는 점점 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해서일까? 엘스헤른은 자신의 마음을 점차로 잠식해오는 알 수 없는 설레임을 느끼면서 숨을 가득 몰아쉬었다. 마치 그날 레비안느를 이 곳에 데리고 왔던 그 때가 다시 재현되기라도 한 모양으로 그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일부러 입구에서 멀찌감치 말에서 내린 엘스헤른은 설레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천천히 숲을 걸었다. 어쩐지 지금 눈 앞에 펼쳐질 케시르니아 숲에는 그날처럼 그녀가 그렇게 햇살 같은 미소를 띄우면 서 서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한 바램은 실망만 안겨줄 뿐이라는 것 을 알고 있으면서도 엘스헤른은 그런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바람에 나무 가지들이 흔들리고 날개짓 마냥 미약한 소리가 우수수 들려왔 다. 그 작은 떨림이 물결처럼 케시르니아 잎을 한가득 흩뿌려 엘스헤른의 눈 앞에는 정말 한 여름에 눈이라도 내리는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뭐랄까? 지금 이 심정은.... 마치 낙하하는 저 수많은 꽃잎들처럼 그렇게 철렁거리는 이 가 슴은.... 엘스헤른은 자신의 시야를 스치는 붉은 빛에 넋을 잃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쩌면 여지껏 그렇게 어지럽고도 들떴던 심정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 같은 머리카락과 그 부드러운 움 직임을 살며시 가다듬는 하얗고도 긴 손가락....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설마 환상인 걸까? 문득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멍하니 눈 앞의 전경을 응시하고 있던 엘스 헤른은 반짝 정신이 들었다. 지금 저 뒷모습은.... - TO BE CONTINUE - ==================================================================== 오늘은 분량은 적지만.... 쓰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 번 편의 대사는 단 한 줄. 그것도 대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쓴웃음 수준.; 그 외의 나머지는 다 묘사나 생각이나 설명이라는 겁니다.;; 힘들군요.; 그러니 분량이 적더라도 양해를.^~^; 낮에는 비도 오는데 해수욕을 다녀왔습니다. 오~! 비오는 바다에서 헤엄치 기란 정말 멋있더군요. 파도도 크고 물도 차갑고.; 무모한 짓을 한 겁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쯤은 짠물에 몸을 담그었다가 올 필요가 있는 거 같아요. 피부가 한결 매끈.... 암튼, 오늘 아침엔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불편했지만 막상 집을 떠나 놀러 가다보니 어쩐지 상쾌해지더군요. 간식거리가 잔뜩 옆에 있다는 것도 어쩌면 위안이 되었을지도...;; (먹자괭이.;) 아, 그러고 보니 원피스를 만들어 입을 요량으로 옷감을 떠왔는데 손도 안 대고 있군요.;(펠티는 가끔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한답니다. 허접하긴 해도 엄 마는 대 만족이죠.;) 글도 못 쓸 형편인데 옷 만들기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차 라리 옷감 장만한 그 돈을 아껴서 국어 사전이라도 마련할 걸 그랬습니다. 지 금 가지고 있는 국어사전은 오래 전 것이라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해요.;; 글 쓰는 데는 역시 국어사전이 옆에 있어야 든든하니까 조만간 하나 장만을.... (에? 왜냐구요? 그야... 알고 있는 단어가 많이 딸리니까 글이 식상해져서 그 렇죠.;; 요즘은 귀찮아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정식으로 쓰려면 역시 국어사전도 같이 있어야.;) 어라? 벌써 10시가 다가오는군요.;; 10시가 넘으면 항상 글을 올리기 땜시 그 시간이 다가오면 심장이 두근거리곤 한답니다. 아아아, 오늘도 펠티는 잡 담으로 거의 한바닥을 때운 건가요?;; 면목이 없군요. 헤~!^^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7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7 조회수: 438 [번 호] 9803 / 12932 [등록일] 2000년 07월 31일 23:36 Page : 1 / 14 [등록자] EGALITE [조 회] 320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7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7) 다툼. "레비앙." 어째서 레비앙이 이 곳에 있는 걸까? 불현듯 불려온 자신의 이름에 넌지시 뒤돌아서는 저 모습은 레비안느가 아니라 틀림없이 레비앙이다. "아......" 어쩐지 당황해버린 듯 레비앙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 않고 있었다. 엘스헤 른은 그가 반갑기도 했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 어쩐지 찜찜 하고 불만스럽기도 했다. 어째서 레비앙이 이 곳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 곳 은 엘스헤른 자신과 레비안느 밖에는 모르는 곳이었다. 짐짓 의혹이 차 오르는 엘스헤른의 눈빛을 피하며 레비앙은 살며시 눈을 내 리깔았다. 그런 레비앙의 모습에 엘스헤른은 뭔가 더더욱 심사가 뒤틀리는 것 을 느꼈다. 물론 언젠가는 레비앙에게도 이 곳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지만 지 금은 아니었다. 지금 레비앙이 이 케시르니아 숲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 음을 알지 못할 불안으로 떠밀고 있었다. "레비안느가..... 말해준 거야?" 그 따위를 물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엘스헤른은 정리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 을 어쩌지 못하고 대뜸 그렇게 물었다. 몹시도 당황해버린 듯 대답조차 못하 고 있는 레비앙을 보고 있자니 엘스헤른은 어쩐지 가득 화가 치밀어 오를 것 만 같았다. 뭐지? 이 복잡한 심정은.... 알 수 없이 울화가 끓어오르고, 또 불안하고, 또 싱숭생숭해지는 이 마음은. "레비안느가 말해준 거지?" 엘스헤른은 이유 없이 묵직해지는 심정을 다독이려고 노력하면서 약간 가라 앉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자꾸만 그렇게 묻는 것은 어쩌면 그 질문으로 인 해 한 가지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뭘 두려워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미쳐 인식하지 못할 수많은 의문들이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뭉쳐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건지도 모르는 채 자꾸만 물밀 듯이 차 오르 는 의심이 엘스헤른을 괴롭게 했다. 뭔가, 일단은 알고 봐야 했다. 레비안느 가 이 곳을 말해준 것이라는 말을 꼭 들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지금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향한 알 수 없는 의심 속에 끝없이 빠져버릴 것만 같았 다. 그런 엘스헤른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내리 깔고 선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레비안느의 기억이 곧 내 기억인 게지. 어떻게 보면 레비안느가 나에 게 말해줬다고 하는 것도 옳을지도 몰라." 레비앙의 대답은 모호했다. 엘스헤른이 듣고싶었던, 아니 들어야만 했던 그 런 대답은 아니었다. 언제나 딱 부러질 정도로 정확하게 구는 레비앙의 입에 서 나온 말이라고 상상도 안 될 만큼이나 망설임이 역력하고도 분명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런 레비앙의 말을 듣고서 엘스헤른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목 구멍까지 차오르던 의심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뭔가 좀 꺼림직하긴 해도 어쨌든 대답을 들었으니 의심 따위는 단념해버리고 싶었다. 레비앙을 향한 의 심이라니.... 젠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 따위 생각일랑 하지 말고 레비앙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어야 했던 것을, 이 장소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갑자기 그렇게 무섭게 굴 것까지는 없었는데.... 가 득 예민하게 굴었던 자신을 다독이며 엘스헤른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바보 같이 이런 사소한 일에 민감한 걸 보면, 역시 요즘 제롬에게 시달리고 있는 것에 신경이 쇠약해졌는지도 모른다. 엘스헤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 쉬고는 성큼성큼 레비앙에게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레비앙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난 잠시 말야..... 아냐. 그냥 좀 혼란했을 뿐이야. 그냥.... 좀 그랬어. 요즘 좀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부쩍 아무렇게나 화 를 잘 내곤 하게 되었지 뭐야...." 횡설수설하는 엘스헤른의 말을 들으면서 레비앙은 어쩐지 섭섭한 눈빛을 지 었다. 뭔가 알아주기를 바라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탓하기라도 하는 것처 럼.... 엘스헤른은 그의 그런 표정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가까이 다가선 김에 레 비앙을 가볍게 안아 인사를 하고는 그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섰다. 괜스레 속상 해버려 친구를 놀라게 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엘스헤른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섭섭했던 것은 그 붉은 머리칼의 주인공이 레비안느가 아니었 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이 직접 이 곳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그런 계획이 틀어져버려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었다. 엘스헤른은 그렇 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레비앙은 그러한 엘스헤른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뭔가 알 수 없는 미묘한 눈빛을 띄우더니 작게 한숨을 지었다.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뭔가를 포기해버 린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렴풋이 그런 느낌이 들자 엘스헤른은 왠지 모 를 상실감에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가만히 서 있던 레비앙은 엘스헤른에게서 돌아서서 수북히 쌓인 꽃잎 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가 이 숲을 거니는 모습은 레비안느와 그다지 다를 바 없 었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릴 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러운 걸음새로 꽃잎 더미를 즈려 밟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레비앙은 한참만에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나직히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아.... 응." 그의 뒷모습을 따라 여전히 시선을 옮기며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엘스헤른 은 문득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긴 하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어쩐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마음이 불편했 다. 비록 레비안느와 똑같이 생기긴 했어도 그녀가 아닌 레비앙과 이 곳에 있 다는 사실이 왠지 어색했다. 마치 레비안느와의 추억을 들켜버리기라도 한 듯 엘스헤른은 씁쓸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 오는 게 싫은 모양이구나." 레비앙은 뒤돌아 선 채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나직히 말했다. 엘스헤른은 문득 자신의 마음을 읽혀버린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하긴 했지만 담담하게 그의 말을 부인했다. "그.... 그건 아니야. 레비앙." "아냐. 아까 내가 돌아섰을 때 네 표정이 그래 보였어." 빤히 들여다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레비앙은 그의 심정을 그렇게 꿰뚫었 다. 왠지 자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엘스헤른은 할 말 없이 만들어버리는 레비앙의 핀잔에 그냥 입을 다물 었다. 아무렇게나 걷고 있는 레비앙의 뒷모습은 잡아주지 않는다면 쓰러져버릴 것 같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저 흩날리는 꽃잎에 휩쓸려버리기라도 할 듯 그렇게 가냘파 보이는 것이었다. 엘스헤른은 아무 말 할 수 없는 자신이 불만 스러웠다.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가 장난이라도 건다면 한결 분위 기를 밝게 만드는데 도움이 될 테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을 뿐 더러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아이린 양도 이 곳을 좋아할 거야, 아마." 한참만에 레비앙에게서 들려온 말에 엘스헤른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어 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설마 레비안느 외에 아이린도 이 곳으로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엘스헤른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음? 뭐가? 의외의 대답을 들은 듯 레비앙은 엘스헤른에게 되물었다. 그는 전혀 무방비 상태에 놓인 것 같은 약간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엘스헤른의 쪽으로 돌아섰 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어쩐지 이런 것을 따지는 게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둘 사이엔 영영 해결하지 못할 어떤 앙금이 남을지도 몰랐다. "말해봐, 뭐가 불만이야? ....불만인 쪽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네 쪽인 거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구는 엘스헤른의 말에, 그나마 미약하게 웃음을 짓고 있던 레비앙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레비앙은 어쩐지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을 내비쳤고, 그런 그의 표정에서 뭔가 심증을 얻은 엘스헤른은 다 시 한 번 더 힘주어 물었다. "나에게 불만 있잖아. 그게 뭐야?" "....불만 같은 건 없어. 난 다만... 네가 좀 섭섭해 보여서..." 왠지 얼렁뚱땅 넘겨버리려 하는 레비앙의 말을 자르며 엘스헤른은 좀더 강 하게 밀어붙였다. "거짓말 마. 그리고 내 핑계를 끌어댈 필요는 없어. 그런 식으로 숨기려고 해도 다 보여. 대체 뭐가 불만이야?" 엘스헤른이 점점 더 쏘아붙이자 레비앙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 런 그의 모습에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뭔가 불만이 그득히 있다는 것을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비앙은 여전히 고집스레 버티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엘스헤른은 어쩐지 울화가 치밀 것만 같았다. 모름지기 친구사이라면서 이 런 것까지 숨기고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솟구쳤다. 허울만 친구일 뿐 이즈음 엔 아무 것도 같이 나눈 적 없는 사이이지 않느냐고 레비앙에게 따지고 싶었 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말을 못해? 대체 무슨 불만이길래!" "제길...." 레비앙은 짜증이 어린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돌렸다. 자꾸 만 회피해버리려 하는 레비앙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더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이 따위 일로 자존심 내세울 거 뭐 있다고.... 왜 말을 안 하는 걸까? "말해보란 말야. 나 같은 건 둔해서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몰라. 내가 뭔가 너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면 알아야 고치든지 할 거 아냐." "알량하게 배려하는 척 하지 마." 가득 미간을 찌푸린 채 엘스헤른의 말을 듣고 있던 레비앙은 하잔한 눈빛을 하고는 그렇게 쏘아붙였다. 알량한.... 배려.... 레비앙을 향한 자신의 보살핌과 관심이 그런 식으로 평가받을 줄을 몰랐던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숨 도 쉴 수 없을 만큼 목구멍 가득히 화가 치밀었다. 엘스헤른은 울컥 하는 심 정에 레비앙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난 너에겐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너 한 사람만을 배려했어. 단 한 사람 너에게만 말야. 그런데 이게 다 뭐야? 너를 위한 내 배려가, 내 행동들이! 고작 알량하다는 말밖엔 듣지 못할 정도였어?!" 그런 엘스헤른을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의 눈초리가 점점 더 하잔해졌다. 그 초록빛 눈에는 어느덧 한가득 냉기가 감돌았다.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고 있던 레비앙은 급기야 비웃음 서린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끄러 올렸다. ".....나한테? 후훗.... 나 한 사람?" 레비앙은 냉소를 띈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엘스헤른을 노려보았다. "훗. 웃기지 마. 내가 아니라 레비안느였겠지. 그녀가 네 눈 앞에 나타난 순 간부터! 그 순간부터 넌 누굴 봐 왔지? 너 따위가 내 생각쯤은 해 봤어?! 넌 날 보면서도 내가 아닌 레비안느를 보고 있었을 뿐이야! 나 자신은 봐주 지 않으면서 뭐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훗..... 그래. 레비안느가 약혼 한다는 소릴 듣고는 곧바로 약혼 해버린 네 녀석의 행동은 그럼 뭐야? 갑자 기 한마디 말도 없이 약혼해 버리고선.... 그렇게 차츰 나에게서 멀어져가 면서.... 그러면서 날 위해 배려한다구? 그게 날 위한 배려라고?! ....그 래! 알아, 알고 있다구!! 이제 더 이상 너에게 난 필요 없다는 것을 말이 야!!"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던 레비앙은 젖은 듯한 한숨을 한가득 내쉬더 니 그만 엘스헤른을 스쳐 뛰어 가버렸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가 외친 그 낱말 하나 하나가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을 가득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채찍처럼 레비앙의 말은 엘스헤른의 마음을 가득 후벼파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가만히 눈을 내리 감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 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마치 찢어발기는 것처럼 쓰라린 가슴을 가득 움 켜쥐었다. 그리고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 다. - TO BE CONTINUE - ==================================================================== 점심 식사 이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더니 허기에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랑 양이 열쒸미 응원과 독려를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독려인가?! 구박 인가?!) 암튼, 오늘은 배 고픈 관계로 잡담은 줄이죠.;; 내용 진행이 좀 느리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요즘은 비축분도 바닥나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그럼 다음 회에서 뵙죠. *^~^*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8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7 조회수: 428 [번 호] 9835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01일 21:55 Page : 1 / 13 [등록자] EGALITE [조 회] 298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8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8) 미뉴엣 "오늘 라트리에 백작 가에서 파티가 열린다는데..... 같이 갈까?" 저녁 식사 후 산책길에서 엘스헤른은 마치 지나치는 말투로 아이린에게 넌 지시 제안을 했다. 요 며칠동안 어쩐지 엘스헤른이 기운이 없어 보여 걱정하 고 있던 아이린은 그의 의외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안색을 보아하니 그다지 파티에 가고 싶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데 대체 무슨 일인 걸까? "갑자기 왜요?" 아이린이 정색을 하자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 그냥...." 그런 그의 어색한 미소가 더더욱 마음에 걸린 아이린은 내내 옆모습만을 보 여주고 있는 사촌 오라버니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일이 바쁘지 않으셨던가요?" ".....오늘은 좀 쉬고 싶어서.... 간만에 아무 생각하지 말고 놀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엘스헤른이 어쩐지 좀 안쓰러워 아이린은 그냥 가만히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요즘 그가 많이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의 욕도 없어 보이고, 간혹은 상심한 표정도 짓곤 해서 아이린은 혹여나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뭐, 말을 해주지 않 으니 모를 일이지만, 뭔가 걱정되거나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다면 간혹은 기 분 전환을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럼 그러도록 해요. 곧 준비할 게요." 아이린은 생긋 웃음을 지으면서 오빠의 팔을 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었 다. 그리고는 먼저 성관을 향해 총총 걸음을 옮겼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 기라도 하는 듯 행동하는 사촌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엘스헤른은 나직히 한숨 을 흘렸다. 라트리에 백작가로 향하는 동안 엘스헤른은 아무 말 없었다. 그는 그냥 조 용히 창 밖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고, 아이린은 그런 그 의 기분을 고려해 섣불리 말을 건다던지 하는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 러고 보면 요즘은 부쩍 오빠가 쓸쓸해 보이곤 했다. 아마도 제롬이 말한 일과 관계가 있을 터였지만 아이린은 그가 직접 말해줄 때까지는 잠자코 묻지 않기 로 마음먹었다. 괜히 타인의 아픈 곳을 건드려 상처를 덧나게 할 이유는 없었 다. 어떨 때는 그냥 그렇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 편이 고민하는 이를 위한 좋 은 처방전일지도 몰랐다. 어느덧 마차는 라트리에 백작 가의 앞마당에 도착했다. 파티에까지 온 이상 우중충한 표정으로 일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엘스헤른은 싱긋 웃 으면서 아이린을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 해 주었다. 그런 그의 표 정을 보며 한결 안심이 된 아이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빠의 팔에 가볍 게 팔짱을 끼고는 그를 따라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홀 안으로 들어선 엘스헤른은 자신을 향해 쏠리는 수많 은 시선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자신의 팔에 매달려 있는 아이린의 손을 자신의 손 위에 살풋 올려 그녀를 홀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물론 파티에는 간만에 모습을 보인 엘스헤른이 알지 못할 여성과 함께 등장 을 하자 여기저기에서 작은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마치 꽃처럼 화려한 모습으 로 치장한 부인들과 아가씨들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이쪽을 힐끗거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에스트르 최고의 귀족으로 일컬어지는 엘스헤른과 함께 등장 한 이 숙녀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마치 지상의 것 같지 않은 그녀의 미모에 다들 넋을 잃고도 남았을 터였다. 한껏 프랑스식으로 꾸며 입 은 허영에 가득 찬 자신들과는 다른 정갈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 떨 기 난초 같은 아가씨가 어쩌면 부럽기도 하고 눈에 거슬리기도 했으리라.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라트리에 백작 부인이 호리호리한 몸매를 살랑거리며 만면에 웃음을 띈 채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아, 백작 부인...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엘스헤른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주자 백작 부인은 허리를 깊이 숙여 그 에게 답례를 했다. "친히 참석해주셔서 영광이옵니다. 대공 전하." 인사를 마친 백작부인은 엘스헤른의 곁에 서 있는 낯선 아가씨를 흘깃 보고 는 엘스헤른에게 넌지시 물었다. "같이 오신 분은....?" "아, 소개를 잊고 있었군요. 이쪽은 영국에서 온 저의 사촌입니다." 백작 부인은 짐짓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린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아 이린은 문득 프랑스식 예법과는 차이가 있는 에스트르의 예법을 떠올리고는 생긋 미소를 지으면서 백작 부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이린은 공작 가 의 딸인 만큼 지금 백작 부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면 아마 백작부 인이 곤란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 부인.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라고 합니다." 아이린이 치마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하자 백작 부인은 그 제서야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아이린에게 인사를 했다. "아름다우신 분, 부디 오늘 저의 집에서의 파티가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 랍니다." 백작부인과 아이린의 인사가 끝나자 곁에서 가득 수근거리고 있던 아낙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외국에서 왔다고는 해도 공작 가의 출신 인 만큼, 그리고 에스트리온 가문의 사촌인 만큼, 지금 아이린에게 말을 걸어 줄 만큼 높은 신분의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과 인사를 하 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친히 말을 걸어줘야 하는 곤욕을 치를 수 밖 에 없었다. 엘스헤른은 아무 생각 없이 사촌 동생을 파티에 데려와 고생만 시 키게 되어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싫은 내색 않고 끝까지 웃는 표정을 잃지 않는 그녀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녀가 많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눌 동안 라트리에 백작 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엘스헤른에게 넌지시 귀뜸을 해주었다. "오늘은 아르떼이유 가의 레비안느 양과 에르띠낭 가의 리하르트 님도 함께 오셨답니다. 레비앙 님과 죽마고우이신 만큼 레비안느 양과도 친하실 텐데, 인사라도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레비안느가 이 파티에 참석을 했다는 소리에 엘스헤른은 어쩐지 가슴이 철 렁했지만 내색은 않고 백작 부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그러도록 하지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트리에 백작 부인에게 눈인사로 답례를 한 엘스헤른은 자신도 모르게 레 비안느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 쳔쳔히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를 살폈다. 하 지만 왕족이 볼썽사납게 두리번거리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 도 그는 곧 아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린은 아직 사람들과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엘스헤른에게 흑심을 품어왔던 수많은 처자들이 아쉬움 반 안도감 반의 표정으로 아이린과의 인사를 위해 줄을 서 있었고, 그 런 여인들을 보니 엘스헤른은 어쩐지 정신이 없었다. 하얀 가루분 통에라도 빠져버린 듯 정신을 마비시키는 이 짙은 향기들이란.... 엘스헤른은 하얗게 칠해 마치 가면 같아 보이는 그녀들을 비웃어주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았다. 그리고는 인사 치르느라 진이 빠져버릴까 염려스러운 자신의 가냘픈 사촌동생 을 구해주기로 마음을 먹고 아이린에게로 다가섰다. 아이린의 뒤에서 걸음을 멈춘 엘스헤른은 간만에 아주 색기 어린 미소를 지 으면서 아이린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그 바람에 넋을 잃고 자신과 아이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엘스헤른은 나직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춤 출 수 있는 여유는 주셔야지요. 나의 사랑스러운 사촌 동생을 이 곳에서 내내 인사만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군요." 엘스헤른은 짓궂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이린을 훔쳐내듯 끌어당겨 홀 가운데로 안내했다. 사촌오빠의 장난스러움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쿡쿡 웃어버렸고, 엘스헤른은 그녀에게 근사한 포즈로 미뉴엣을 청했다. "미천한 상대이나마 같이 한 곡 추시겠나이까?" "영광이옵니다." 아이린은 엘스헤른의 장난에 응해주면서 그가 내민 넓은 손바닥 위에 자신 의 손을 나비마냥 살풋 올려놓았다. 미뉴엣이 시작되고 그 우아한 선율에 따 라 엘스헤른은 아이린을 이끌었다. 단조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감 있는 아담한 음악이 춤추는 무리들 사이로 공처럼 동글동글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 박자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엘스헤른과 아이린은 깃털처럼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바흐의 곡인 거 같은데?" "아, B miner일 거예요, 아마. 하프시코드로 쳐 본적이 있어요." "하프시코드도 칠 줄 알았단 말이야? 아아~! 정말 멋진 숙녀시로군요. 저 같 은 하찮은 녀석에겐 정말 상대로 과분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엘스헤른이 또 점잔 빼는 귀족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장난을 치자 아이린은 미뉴엣을 추는 도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와 매 한가지로 밝게 웃음을 짓던 엘스헤른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빛을 반짝이더니 아이린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중에 구경시켜 줄 거지?" 엘스헤른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이린은 토끼 눈이 되어 그를 말끄러미 쳐 다보았다. "여기서요?" "응.... 사람이 너무 많은 건 역시 무리인가?" "아.... 그렇진 않지만...." 엘스헤른의 말대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하프시코드를 연주한다는 것 이 아이린에겐 좀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사촌오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짬이 생긴다면 해 볼게요." 아이린은 생긋 웃으면서 춤동작에 따라 엘스헤른과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 댔다. 에스트르에서의 파티라는 것은 이 영국 숙녀에겐 의외로 흥미로웠다. 뭐랄 까.... 타락하기 직전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고나 할까? 비단과 리본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의 치맛자락처럼, 그리고 그들의 춤동작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이란 마치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반짝거렸다. 수백 개의 초와 크리스탈로 장식된 홀은 화려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고 주홍색으로 한가득 채워진 이 곳의 공기는 그녀의 기분을 한층 더 들뜨게 했다. 문득 자신이 너무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이린 은 오랜만에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이건 수를 놓거나 독서를 할 때와는 또 다 른 쾌감이었다. 이렇게 놀고 있는 것을 영국에 계신 부모님이 알게 되신다면 얼마나 실망을 하시겠냐마는 아이린은 그런 생각들로 인해 오랜만에 일탈(?) 을 해 보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엘스헤른을 즐겁게 해 주려 면 우선 자신부터 흥이 나야 했으므로 그녀는 이래저래 자신을 정당화시킬 거 리들이 많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 TO BE CONTINUE - ==================================================================== 뭔가 이번 편은 이상한 데서 잘렸습니다만, 다음 편과 같이 보신다면 그다 지 나쁘진 않으실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자르게 된 괭이를 용서해 주시길...;; 요 사이에 부쩍 느끼는 거지만.... 역시 은 뭔가 좀 소녀취향인데다 가 별로 대중적이지는 못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뭐, 소녀 취향이 라는 게 나쁜 건 아니에요. 뭐랄까... 어디까지나, 남자 분들은 읽지 않으실 거 같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첨부터 펠티는 독자 층이 소녀였으니까요. (중학교 땐 중학교 친구들. 고등학교 땐 고등학교 친구 들, 대학교 땐 여동생의 친구들 & 횬 양.) 독자층을 골고루 확보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일까요? 흠냐, 요즘 어쩐지 좀 정체된 듯한 기분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축분 이 없어 그런 거예요...T-T 역시 비축분이 없으니 전혀 조절을 할 수 없더군 요.;; 열심히 만들어야 할 테지만 ...... 겜에 정신이 팔려서.;; (요즘은 영 웅전설 5편 - <바다의 함가>를 하고 있습니다. 뭐, 저야 음악에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즐기고 있죠.;; 듣다 보면 꽤 괜찮은 음악들도 나오곤 하는데다가 3 편 하안 마녀와 4편 주홍 물방울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을 여기서 찾아보는 재 미도 쏠쏠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고 있답니다. (어디까지나 재밌다는 건 괭이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 흠흠.;; 비축분도 안 만들고 면목이 없군요.;; 그럼 여전히 정체된 분위기 의 다음 편에서 만나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9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8 조회수: 408 [번 호] 9892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02일 23:14 Page : 1 / 16 [등록자] EGALITE [조 회] 298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29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29) Sonata for Viola da gamba & Harpsichord 너무 어지러워서일까? 어쩐지 레비앙과 똑 같이 생긴 사람을 본 듯한데.... 혹여 그 사람이 제롬이 항상 말하곤 하던 레비안느 양이 아닐까? 좀 의아해진 아이린은 엘스헤른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쪽 창가에서 우릴 보고 있는 분이 혹여 레비앙 님의 누이 되시는가요?" "에에?" 아이린의 느닷없는 물음에 엘스헤른은 당황한 듯 잠시 춤동작이 흐트러졌 다. 레비앙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덜컥 놀라기도 했을 뿐더러, 아이린이 말한 사람은 분명 레비안느임에 틀림없으므로 엘스헤른은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딴 생각을 해 버린 것이었다. 얼른 다시 미뉴엣에 집중한 엘스헤른은 뭔가 곰곰 생각을 하더니 뺨을 가득 부풀려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뭐, 누가보고 있다면야 더더욱 재밌게 놀아줘야지. 안 그래?" 엘스헤른은 짓궂은 표정으로 아이린에게 한 눈을 찡긋해 보였고 마치 어린 애처럼 구는 오빠의 행동에 그녀는 영문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것도 제롬이 말했던 계획이라는 것에 들어가는 건가요?" 아아, 이런 데서까지 제롬의 이름을 들어야 하다니.... 엘스헤른은 떱떨해 보이는 얼굴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신나게 놀자는 거야. 별다른 이유는 없어. 오랜만에 파티에 왔으니까 눈치 살필 거 없이 놀면 좋잖아." 아이린은 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춤의 마무리를 위해 치마 자락을 손끝으로 말아 쥐었다. 허리를 깊이 숙인 인사, 그리고 그 끝에 가벼 운 입맞춤으로 춤은 끝이 났다. 엘스헤른이 언제나처럼 뺨에 키스해 줄 거라 고 생각하고 있던 아이린은 그가 마치 연인에게나 하듯 자신의 입술 위에 입 술을 포개자 저도 모르게 살풋 얼굴을 붉혔다. 약혼한 사이라는 것은 집 안에 있을 때만 해당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짓궂게 구는 이유를 그녀 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다가온 그의 상큼한 체취에 취해버려 아이린 은 그냥 그가 그렇게 입맞출 수 있도록 내버려뒀다. 인사 끝에 허리를 편 엘스헤른은 곰살가운 표정으로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의 그런 웃음을 보고 이것 또한 장난이구나 하는 것을 눈치챈 아이린은 이 장난꾸러기 오빠에게 마치 어릴 적의 제롬에게나 하듯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 었지만 작게 흘기는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오랜만에 춤을 췄더니 가슴 가득히 숨도 차 오르고 해서, 아이린은 엘스헤 른의 팔짱을 끼고 홀의 가장자리로 걸어나왔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천 천히 따라 걷던 아이린은 엘스헤른이 건네주는 아름다운 색상의 과일주가 담 긴 잔을 받아들고는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엘스헤른은 정말 남 주기 아까울 정도의 사촌누이를 정겨운 시선으로 쳐다보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흠, 그러고 보니 아이린의 말대로 레비안느와 리하르트 커플이 저쪽 창가에 서 있 다. 때마침 레비안느도 고개를 들었고 그 바람에 엘스헤른은 그녀와 바로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숙녀에게 미소 로써 눈인사를 했다. 뭐, 보지 않았다면야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눈까지 마주 쳤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고 해서 엘스헤른은 아이린을 에스코트해 서 레비안느가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뵙겠습니다.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아.... 대공 전하." 레비안느는 여유로운 웃음을 띄며 자신에게로 다가 선 엘스헤른에게 살풋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잠시 그녀의 표정에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 보여 의 아했던 엘스헤른은 레비안느의 뒤쪽에 서 있는 리하르트를 발견하고는 예의상 까딱 목례를 했다. 허리를 가득 굽힌 리하르트의 예의바른 인사를 받은 엘스 헤른은 레비안느에게 생긋 웃어주며 아이린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 당겨 그녀 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사촌이자 약혼녀입니다." 느닷없는 소개였지만 아이린은 총명하게 머리를 굴려 지금 이 순간은 제롬 의 계획이라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구나 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잠시 엘 스헤른을 살짝 돌아보았고, 엘스헤른은 아이린에게 먼저 인사하라고 눈짓을 했다.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라고 합니다. 레비앙 님의 누이 되시죠?" "예, 레비안느 레비오네 아르떼이유입니다. 아이린 님에 대해서는 레비앙에 게 이야길 들었어요." 그녀들의 인사를 보면서 엘스헤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레비안느는 어쩐 지 섭섭한 표정이었고, 그건 아이린을 처음 소개시켰을 때 레비앙이 지었던 표정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곧 레비안느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아 이린과의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들의 관심사야 엘스헤른으로서는 그다 지 흥미가 없었으나 알게 모르게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그는 무심한 시선 으로 아이린과 레비안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이린이 하얀 연꽃이나 밝은 노랑의 소국 같은 이미지라면 레비안느는 마 치 붉은 빛의 양귀비꽃 같았다. 그렇게 매혹적이면서도 손놀림 하나 하나까지 도도하고 자존심에 넘치는 레비안느의 모습은 어찌 보면 흑장미 같아 보이기 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정말 로자리움 출신답게 장미꽃의 이미지와 묘 하게 잘 어울린다. 뭐, 쌍둥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레비앙 역시.... 그 역시도 그렇게 당당하고 아름다운데.... 그러고 보면 그날 숲에서 다툰 이후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다가 찾아 가 볼 기회를 놓쳐버려 레비앙과 화해도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 통에 이런 곳에서 레비안느를 만나게 되니, 뭐랄까.... 엘스헤른은 좀 이상한 기분이 들 었다. 그렇게 다툰 이후로 마음이 아파서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레비앙이 말한 그대로일지도 몰랐다. 너무 레비안느 에게 집착해 있었던 자신이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집착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레비앙과 꼭 닮은 여.성. 이라는 것. 스스로 부인하려고 하긴 했어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레비안느에게 그 렇게 미묘한 감정을 느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가 레비앙과 똑 같이 생 겼다는 것 밖엔 없었다. 그것만큼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그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픈 것은, 그녀 뿐만 아니라 레비앙의 마 음조차 자신이 잡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서였다. 엘스헤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생기고 매너 좋은 해사한 청년이 레비 안느의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쩐지 기분이 착찹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같이 서 있는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어떻게 흠집 을 잡으려야 잡을 수조차 없었다. 엘스헤른은 자신의 서운한 표정이 드러나기 전에 얼른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러고는 아이린의 허리에 가만히 손을 올 리며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약속한 것 지켜야지." 아, 하프시코드 연주.... 아이린은 엘스헤른과의 약속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만에 어쩐지 말이 통하는 동갑내기의 숙 녀와의 대화를 벌써 끝내버리기가 아쉬웠는지 레비안느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싱긋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에스트리온 성관에 놀러와 주세요. 당신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 습니다. 레비안느 양." "아.... 택일하신다면 제가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레비안느가 어디까지나 공작 가의 영애에게 대하는 깎듯이 예의바른 태도로 아이린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엘스헤른은 어쩐지 입안이 씁쓸했다. 작위라는 것은 그 지위라는 것은 이토록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설 마.... 레비앙도 요즘 부쩍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일까? 자신과 친구의 작위가 엄청난 차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쓰이게 할만큼 그 렇게 자신이 생색을 내었었는지 엘스헤른은 곰곰 곱씹었다. 요새는 그런 작은 사실 하나 하나도 어쩐지 레비앙과 연관하게 되어버려서, 그 수많은 생각들이 엘스헤른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문제는 엘스헤른 자신에게 있는 모양인 건지, 어쩐지 언제나 자신이 잘 못한 일만 떠오르는 것이다. 아이린이 레비안느가 방문하면 좋을 시간을 잡고 있는 동안 엘스헤른은 짧 게 한숨을 지으면서 레비안느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길을 느꼈는지 그녀는 잠시 엘스헤른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에겐 뭔가 하고싶은 말이 산더미 같은데.... 항상 이렇게 마음만 아프고 한 마디 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엘스헤른은 어쩐지 부끄럽기조차 했다. 내일 모레쯤으로 방문 날짜를 잡은 두 숙녀는 예의바른 인사를 하고는 생긋 웃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마냥 밝기 그지없는 아이린에 비해 레비안느의 미 소가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마치 웃는 가면이라도 쓴 모양으로.... 그는 자신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는 레비안느와 리하르트에게 목례를 해 주고 아이린을 쳄발로가 놓여진 곳으로 안내했다. 아이린은 문득 고개를 들어 엘스헤른의 표정을 살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엘스헤른은 아까 미뉴 엣을 출 때와는 달리 무표정이었다. 아무 감정 없어 뵈는 것처럼 저러고 있긴 하지만 아이린은 그의 음울함이 눈에 보였다. 마치 사탕을 원하는 어린애가 전혀 상관없는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엘스헤른의 그런 담담한 표정은 어쩐지 그런 의미 같았다. 아이린은 자신을 이끌고 있는 엘스헤른을 한 번 더 쳐다보 며 생각을 다졌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그리고 오라버니의 저 침울한 표정 을 보자면 역시 오라버니는.... "마음대로 추측하지 말아 줘. 그리 단순한 건 아니야." 마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는 듯한 엘스헤른의 말에 아이린은 딸꾹질을 하 듯 움찔 놀랐다. 언제나 아이같이 구는 엘스헤른도 저럴 땐 영락없이 에스트 리온 공작(엘스헤른의 아버지)만큼이나 근엄하고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아이 린은 활짝 피기 직전의 새초롬한 꽃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엘스헤른의 팔을 감 싸 잡았다. "오라버니와 파티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건데....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하 고 있으면 아이린은 하프시코드 쳐 줄 수 없어요. 들어주는 사람이 즐겁지 않다면 나 역시 하나도 즐겁지 않은 걸?" 영특하고 뽀얀 고양이처럼 팔에 엉기는 사촌동생의 애교에 엘스헤른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이린은 자신의 애교가 반은 성공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 으며 살짝 미소를 띄었다. 오라버니가 저렇게 점잔을 빼며 헛기침을 하는 이 유는 애써 웃음을 참기 위한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린과 엘스헤른이, 라트리에 백작 부인이 초청한 악단이 연주하고 있는 부스의 옆에 놓인 쳄발로(= 하프시코드)에 도착하자, 파티가 시작한 이래 아 이린에게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 그들 곁으로 모여들었다. "어머나~! 아이린 님께서 손수 연주도 하시나봐요." "솜씨를 감상할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인 걸요?" 기대감과 부러움, 그리고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숙녀들의 조잘거림에 아이 린은 살짝 웃는 미소로 답을 하고는 천천히 건반 위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녀의 하얀 손가락 끝은 카랑카랑하면서도 맑은 쳄발로의 음색을 실을 잣 듯 빚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구슬이 구르는 것 같은 또랑또랑한 쳄발로 소리는 비웃음이 서려있던 여자들의 붉은 입술을 두 말 없이 딱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쳄발로 앞에 앉은 아이린의 자태는 온화하면서도 우아해 보여 오히려 여유 있게 느껴졌다. 아이린이 쳄발로를 연주하는 그 바로 옆에 서 있던 엘스헤른은 지금 저 아 리따운 아가씨를 주시하고 있는 귀부인들과 숙녀들의 마음에 자존심 금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내심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저 허영에 찬 얼굴들 이 구겨지는 모습들이라니.... 뭐, 당장 내일부터 에스트르 사교계에서 쳄발 로 가정 교사의 품귀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지금 아이린이 쳄발로를 치는 것을 본 여자라면야 서로 앞 다투어 쳄발로를 배우려고 할 것 이 뻔할 테니까. 그리 길지 않은 곡이었지만, 아이린이 연주를 마치고 쳄발로에서 손이 떨어 지자 마자 여기저기서 존경해 마지않는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왔다. "클라브생(= 쳄발로)이라면.... 그럼 아이린 양은 클라비코드도 그 만큼 잘 치시나요?" "어머나~! 클라비코드라뇨. 촌스럽기도 하셔라. 저희 집엔 최신형의 피아노 포르테를 구입해 놓았답니다. 아이린 양, 언제 한 번 저희 집에 방문해 주 셔서 악기를 시험해봐 주지 않으시겠어요?" "피아노포르테라면 저희 집에도 있답니다. 남편이 워낙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서...." 아이린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겉치레에 여념 없는 귀부인들의 술렁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는 듯 했지만 나름대로 그녀들의 말에 잘 대답을 해 주고 있 었다. 피아노포르테라면 당연히 에스트리온 성관에도 있지만, 엘스헤른은 자 랑하기 좋아하는 저 부인들의 허영심에 금이 가지 않도록 내색은 않고 그냥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엘스헤른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레비안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얼핏 느낀 거지만 그녀는 뭔가.... 야릇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내 무슨 일이 있었 냐는 듯 리하르트의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그녀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다 말고 아이린에게로 눈길을 떨구 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내 반주에 맞춰서 노래라도 불러보는 건?" "아이 참, 오라버니도....." 아이린은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양 손으로 살풋 붉어진 뺨을 감쌌다. 하지만 그녀가 노래 부르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찬 눈빛에 못 이겨 아이린은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엘스헤른은 다재 다능한 사촌 동생 을 뿌듯해 마지 않으면서 그녀 대신 쳄발로 앞에 앉았다. 엘스헤른이 반주를 하고 아이린이 노래를 하자 라트리에 백작 부인을 비롯 해 이제는 아이린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수많은 여인들이 진심으로 감탄해 하 는 표정으로 그들을 에워싸고서 감상의 시간을 즐겼다. 엘스헤른은 지금 자신들을 보고 있을 레비안느의 표정이 궁금해졌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녀를 살필 수가 없었다. 뭐, 이왕 시작해버린 것 아이린의 말대로 즐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엘스헤른은 내심 묘 한 미소를 지으면서 쳄발로를 열심히 연주했다. 어디선가 보고 있는다 해도 상관없겠지. 이렇게 즐거운 모습을 보여 준다면야.... - TO BE CONTINUE - ==================================================================== 저번 편의 배경 음악이 J.S. 바흐의 관현악모음곡 2번 중 미뉴엣 이었던 데 반해서 이번은 역시 바흐의 비올라 다 감바와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을 들으면 서 글을 썼답니다. 혹여 mp3이 필요하신 분은 저에게 메머를.^^; 오늘은 용어 해설로 잡담을 때우죠.^^;; 분량이 너무 길어져버려서 잡담을 쓸 여유가 없네요.;; 참! 잊을 뻔 했지만, 어제 글꼬리 잡담을 읽고 "앗! 저는 남자 독자입니다! 잘 읽고 있으니 열심히 써주세요!"라고 메모 보내주신 네이시 님께 감사하단 말씀 드려요. *^~^* 네이시 님의 말씀을 듣고 부쩍 힘이 났어요!^^ 그럼 오늘 나왔던 악기에 대한 설명을..... * 쳄발로 CAMBALO (이탈리아, 독일 - Cembalo, 프랑스 - clavecin, 영국 - harpsichord). 피 아노에서와 같이 설치된 줄을 건반 장치에 의해 움직여 소리 내는 악기. 깃촉 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며 피크로 기타 줄을 퉁기듯이 뜯는다. 16-18세기에 대표적인 화음반주 악기(통주저음 연주)로 쓰였다. 쳄발로는 이탈리아에서 그 라비쳄발로(gravicembalo)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마 클라비쳄발로 (clavicembalo)라고 불린 것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clavis는 건반을 의미하 고 cymbal은 치는 또는 뜨는 살테리움 계통의 악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이 악기를 클라브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클라비- 또는 그라비 쳄발로에서 이태리는 뒤 부분을, 프랑스는 앞 부분을 취한 셈이다. 영국에서 는 건반 장치보다 뜯는 방법에 우선적 관심을 두었던지 이 악기를 하프와 연 관시켜 하프시코드라고 한다. * 건반악기 (영국 - keyboard instruments, 독일 - Tasteninstrumente). 피아노, 쳄발로, 첼레스타,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등 건반을 통해 소리내는 악기들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특히 18세기 말 이전에 작곡된 음악 을 위해 사용되었는데, 그때에는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를 위해 작 곡된 작품들 간에 명확한 구별이 없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는 현을 사용한다는 중요한 악기 구조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진다. 따라서 이 세 악기의 역사와 음악을 연구할 때 이 악기들은 함께 묶여 취급된다. 악기종 류: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풍금, 아코디언, 전자오르간, 첼레스타. * 피아노포르테(PIANO-FORTE) 현재 피아노라고 불리고 있는 악기의 원래 이름. 클라비코드에서 개량된 것이 피아노포르테이다. 클라비코드와 여타 하프시코드 계열의 악기들이 셈여림의 변화를 나타내기 어려워 음의 지속으로 변화를 줬던데 반해 피아노포르테는 명확한 셈여림을 나타낼 수 있어 18세기 후반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피아노는 피아노포르테를 줄인 말이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8 조회수: 435 [번 호] 9939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03일 22:10 Page : 1 / 14 [등록자] EGALITE [조 회] 324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0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0) 아침 숲 속의 산책길. "음, 금새 알겠던 걸? 하지만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에게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거야? 잠시 당황했었단 말이야." "아. 미안해, 누나. 뭐, 그래도 금새 알아냈잖아. 굳이 말해 줄 것까지도 없 었지 뭐. 역시 여성의 육감이란....." "그렇긴 해도.... 그나저나 엘스 오라버니는 정말 모르고 있는 거야?" "응. 무지 둔하지?" "그러게 말야. 어떻게 여지껏 모를 수가 있었을까?" "그거야 뭐, 형님은 그가 변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 자연히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그를 보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쉽사리 눈치채지 못한 거겠 지." "으음, 그래.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일 테니까.... 상상조차 안 해봤을 거야. 그치?" 이 녀석들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엘스헤른은 식사실에 들어 서면서부터 왠지 귀가 간지러운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이린과 제롬 녀 석이 아침 일찍부터 식사실에 나와서 뭔가를 소근거리고 있긴 한데 그가 모습 을 드러내자 마자 마치 시치미라도 때듯이 대화를 뚝 끊어버려 당최 무슨 소 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희들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은 거냐?" 엘스헤른은 토끼 같은 이 사촌들을 번갈아 보면서 눈빛으로 제압하려고 했 다. 하지만 제롬이 전혀 그런 눈칫발에 굴하지 않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을 뿐더러, 순진한 것 같아도 윈저 가문의 피를 타고난 아이린 역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생글거리고만 있었다. 자리에 앉긴 했으나 엘스헤른은 어쩐지 내내 찜찜했다. 지금 식사실에는 단 세 사람뿐이다. 아이린, 제롬, 그리고 엘스헤른 자신. 엘스헤른은 왠지 소외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맑은 스프에 스푼을 담구었다. 곧장 키득거리며 웃어대는 저 녀석들이 뭔가 역시 심상치 않다. 언제나 천사 같고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린조차 지금 엘스헤른의 눈에는 제롬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아침부터 저 녀석들이 왜 저런단 말인가! 뭔가 자신을 앞에 다 두고 두 남매 사이에 알지 못할 눈길이 오고가는 가운데 엘스헤른은 애써 담담 하려고 노력하면서 스프를 떠올렸다. 아주 묘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와중에 제롬 녀석이 뭔가 발표라도 하는 듯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렇게 셋이 모였으니 또 다음 작전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지." 제롬은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으면서 엘스헤른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엘스 헤른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런 제롬을 가볍게 노려보아 주었다. 이제 계 획이고 뭐고 진절머리가 났다. 그 거창하고도 허무맹랑한 계획으로 인해 지금 이 상황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는가! 레비앙과는 별 이유도 없이 싸워버려 말도 안하고 있는데다가, 레비안느와는 어색해지기 이루 말할 수 없고! 게다가 밤마다 제롬 녀석이 계획 운운하며 꿈에 나타날까 두렵고! 엘스헤른은 바보같이 저 장난꾸러기 사촌동생의 농간에 놀아나 버린 자신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계획에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이는 엘스헤른의 반응에 제롬은 그를 뚫어져 라 쳐다보더니 자신의 아래턱을 매만지면서 대뜸 물었다. "싸웠어?" 엘스헤른은 가슴이 뜨끔해 수프를 들이키다 말고 쿨룩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런 그의 모양새가 재밌기라도 한 듯, 엘스헤른의 옆쪽에 앉아 있던 아이린 은 나직하게 쿡쿡 웃음을 흘리면서 그에게 붉은 빛의 손수건을 건넸다. 아직 기침이 멎지 않아 한참을 쿨럭거린 후에야 엘스헤른은 겨우 팔을 뻗어 아이린 이 건네주는 손수건을 받아 쥐었다. 그러고는 곧 무서운 눈초리로 제롬을 쏘 아보았다. "누가 싸워? 함부로 넘겨짚지 마." 눈살을 가득 찌푸린 그런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손수건으로 입 언저리를 닦고 있는 엘스헤른에게 제롬은 자신의 이마를 콕콕 두드리면서 쫑알쫑알 말 대꾸를 했다. "얼굴에 쓰여 있네. 레비앙이랑 또 싸웠다고 말야." "...." 엘스헤른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지으며 다시 수저를 들자 제롬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싸운 거 맞구나?" "경고하건데.... 나 건드리지 마." 엘스헤른은 눈에 거슬러 미칠 것만 같은 제롬 녀석에게 나직히 주의를 주고 는 숟가락으로 스프를 휘저었다. 식사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임은 알고 있었지 만 스프에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는다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그렇 게 짐짓 무게를 잡자 아이린은 또 뭔가 깐죽거리려고 구는 자신의 동생을 살 며시 저지했다. 그녀는 제롬의 손을 잡아 그에게 눈치를 주고는 자신이 이 일 을 해결하겠다며 무언의 의미를 전했다. 아침부터 식욕이 뚝 떨어져버린 건지 엘스헤른은 그만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르되브르도 다 들지 않고서 식사실에서 나가버리는 그 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린은 제롬에게 작게 핀잔을 주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는 안 된다구, 제롬."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극을 주지 않는다면 저 인간은 자기 일에 대해 곱씹어 보지도 않을 인간이야." "쉿.... 암튼, 내가 달래볼게. 넌 잠자코 있어봐." 아이린은 짓궂게 굴긴 해도 사촌 형의 앞날(?)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자신의 동생을 가만히 다독여 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제롬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면서 아이린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누나, 식사 안 할 거야?" "아, 외숙모님 나오시면 같이 식사하도록 하렴. 난 네가 벌여 놓은 일을 수 습해야지." 아이린은 동생을 향해 싱긋이 미소지어주고는 이내 엘스헤른을 좇아 식당을 빠져 나왔다. 복도에는 이미 흔적도 없는 걸로 봐서, 엘스헤른은 아마 길길이 화를 내면서 어디엔가에 푹 처박혀버린 모양이다. 아이린은 곰곰 생각을 하고 는 짚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그렇게 열받았다면야 곧장 바람 쐬러 나갔을 테고, 아침 녘 숲길의 산책로만큼 화를 삭이기엔 좋은 장소가 없다. 아이린은 잔잔한 꽃무늬가 수놓 아진 은은한 황색의 치맛자락을 살풋 말아 쥐고서는 이내 복도를 지나 현관으 로 나왔다. 숲으로 둘러싸인 성관이라 그런지 현관을 나서자 마자 상큼한 숲 의 내음이 촉촉한 습기와 함께 가득 폐부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사 촌 오라버니가 갔음직한 길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어느새 엘스헤른의 뒷모습이 길의 저쪽에 나타났다. 아이린 은 쓸쓸하게 거닐고 있는 오라버니를 놀래줄 겸사 발소리를 줄여 그를 뒤쫓았 다.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인지 그녀가 무척이나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 고 엘스헤른은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생긋 웃으면서 오라버니의 옆으로 가서 그의 팔짱을 끼었다. 갑작 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랬는지 엘스헤른은 잠시 흠칫 하더니 해사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안도한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난 또.... 누구라고...." "에스트리온 성관에서 오라버니에게 팔짱 낄 만한 사람이 저 밖에 더 있겠어 요?" 살랑살랑 눈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며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치 봉봉 사탕이 입안에 녹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달콤하게 녹이 는 재주가 있는 이 아리따운 동생을 보면서 그는 또 주체할 수 없는 상념에 빠져들 것만 같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식사나 하지 왜 나왔어?" "아.... 제롬에게 놀림받고선 혼자 울고 있으면 어쩌나 해서요." "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겠군." 농담에도 적절하게 응해주는 것을 보면 엘스헤른은 아마, 어느 정도는 마음 이 가라앉은 모양이다. 아이린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뽀샤샤하기만 한 숲의 산책로를 따라 걷는 기분은 비록 아침식사를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쾌하기 그지없었 다. 벌써부터 작은 새소리가 들려오고 아침의 햇살이 산책로를 따라 가만히 일렁이는 것을 보면 곧 안개도 맑게 걷힐 것 같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을 거 같죠?" 아이린이 문득 침묵을 깨고 걸어온 말에 엘스헤른은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누가 영국 출신 아니랠까봐.... 말해봐. 날씨 같은 거 괜히 덧붙이지 말고 말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말해도 돼." 아이린은 뭔가 말을 걸려고 했던 자신의 심중을 바로 꿰뚫어버린 엘스헤른 의 영민함에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곱게 미소를 띄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곧바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그대로 좀 더 걸으면서 엘스헤른의 팔을 매달리듯 감싸 안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한마디에 엘스헤른은 금새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지 알아챘다. 아마도 아이린은 그 이야기가 엘스헤른에게 상처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라 섣불리 말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배려해 주는 아이린의 마음씨를 고맙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씁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정면을 보면서 걸음을 옮겼 다. "네가 무슨 이야길 하려는지 대충 알 거 같아." "그래도 들을 건가요?" 몹시도 조심스러워 하는 아이린의 물음에 엘스헤른은 피식 쓴웃음을 흘리면 서 넌지시 되물었다. ".....말하지 말라면 안 할 거야?" "후훗." "아이린 넌 제롬보다 한 수 더 떴어. 그렇게 웃는 표정이라면 누구도 화를 내진 못할 테니까...." "그렇다곤 해도 제롬만 하겠어요?" 아이린은 엘스헤른을 위해 제롬이 잡아놓은 방대한 계획을 떠올리며 은근히 동생을 추켜세웠다. 물론 아이린은 자신 역시 제롬의 계획에 이용되는 수단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라버니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이용당해 줄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고향을 떠나 이 멀고먼 에스트르까지 배를 타고 온 것이었다. 그다지 몇 마디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잔잔하고 의미 있는 미소에 설득 당해버린 엘스헤른은 낮게 웃으면서 백기를 흔들었다. "항복했어. 이야기 해봐. 무슨 말이라도 화 안내고 들을게." "네,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린은 입가에 백합 같은 새하얀 미소를 띄면서 천천히 그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봄바람 같이 살랑거리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보조를 맞추어 걸 으며 엘스헤른은 사촌동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TO BE CONTINUE - ==================================================================== 오늘도 여전히 영웅전설 5편 <바다의 함가>에 심취해서 글쓰기를 등한시했 습니다.. 죽을 죄를.;;; 하지만.... 그 음악에 푹 빠져버려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답니다. 어디 게임 음악 구할 수 있는데는 없는 가요? T-T 오프닝 음악을 결국 듣고 악보로 적어서 피아노로 쳐보고 있습니다. 오프닝 은 악보로 적기 쉬웠어요.; 3/4박자고 가락도 대체로 쉬웠구요. 피아노로 치 기 좋게 치기 좋게 F조로 조옮김도 하구요. 아직 미완성이지만, 동생이 듣고 는 "앗! 그거 바다의 함가 오프닝이다!" 라고 금새 알아주더군요.*^~^* 언젠 가 악보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열쒸미!! (라고 외치다 말고 랑 양의 눈치를 슬 금..;;) 랑 양이 응원(구박.;)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아마 글을 올릴 수 없었을 지도...;;; 호홋. 랑, 고마워~!^^ 날씨도 시원한데 계속 게으름이라니.... 하지만 주변엔 글쓰기에 악조건으 로 작용하는 것들이 아직 너무 많답니다. D-day 117일이라는 아횬 양의 외 침.; 컴퓨터를 켜 놓으면 찜통이 되는 내 방.(바다의 함가는 동생 방에서 해 요.;;) 또.... 수시로 찾아오는 허기의 공포.; 네, 네, 알고 있다구요! 구래요! 다 변명이에요! T-T 구찮아서 안 쓰고 있 답니다! (이실직고.;) 그럼 늦장을 부리지 않는다면 내일 뵐 수 있을 거예요. ^^; P.S. 아쉬테르 님(맞나?;), 섭섭하셨나요?^^;; 하지만 전 몰랐다구요.; 암튼, 재밌게 읽어주신다니 감사.^^;;;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1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19 조회수: 435 [번 호] 10267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09일 22:01 Page : 1 / 13 [등록자] EGALITE [조 회] 289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1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1) 레비앙 & 레비안느 - 1 아이린의 설득 끝에 엘스헤른은 레비앙과의 화해를 위해 로자리움을 방문하 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채 로자리움에 들르기 전에 레비안느가 아이린 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스트리온 성관을 찾아왔고, 엘스헤른은 어쩔 수 없이 레비앙을 찾아가 보는 걸 뒤로 미뤄야 했다. 뭐, 레비안느가 이 곳에 와 있거나 말거나 그가 레비앙에게 가는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린이 극구 말기는 바람에 그냥 연기하기로 해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성관에 찾아온 레비안느는 그 붉은 머리카락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 는 짙은 황색의 드레스차림이었는데, 그런 그녀를 맞이하는 아이린의 뽀얀 미 색의 드레스 차림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레비안느가 오달리스크 풍의 관능 적인 드레스임에 반해서 아이린은 그다지 장식이 없는 드레스에 실용성과 기 능성을 강조한 마치 정원을 가꾸다 나온 듯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사실 레비안느가 오기 전에는 정말로 뒤뜰에 꽃 심는 일을 돕고 있었던 그녀 는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손님을 맞이해야 했었다. 그건 그녀가 꽃 심는 도 중에 에스트리온 공작부인과의 대화에 심취해버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 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개인적으로는 그런 차림을 선호하기 때문에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면 굳이 치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리라 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아이린은 새로 사귄 친구가 온 김에 사촌오빠와 함께 티타임을 가질 계획이 었다. 허나, 공교롭게도 때마침 궁성에서 엘스헤른을 찾는 전갈이 와서 엘스 헤른은 숙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미 처 레비안느와 긴 이야기를 나눠볼 사이도 없이 간단한 인사로 예를 차린 엘 스헤른은 아쉬운 마음을 추스리며 폐하께서 보내오신 마차에 올라 궁성으로 가버렸다. 레비안느와 둘이서 엘스헤른을 배웅해준 아이린은 그녀를 자신이 묶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죠? 워낙 숲길을 오래 와야 하는 거라서 말이죠." "아.... 웬 걸요." 자리를 권하며 묻는 아이린의 물음에 레비안느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을 했 다. 그러나 그녀는 말실수라도 할 뻔 한 모양으로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말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이린의 맞은 편에 앉아서는 얌전하게 모자를 벗어 내려놓았다. 아이린은 찬찬한 시선으로 테이블의 건너에 앉은 레비안느를 살피며 살풋 미소를 지었다. "어떠세요? 차라도 드시겠어요? 레비안느 양." "예, 케시르니아 차로 주시겠어요?" "케시르니아.... 오라버니가 좋아하시는 차죠. 아, 레비앙 님도 케시르니아 차를 즐겨 드신다고 오라버니로부터 이야길 들었어요. 케시르니아 열매를 채집하면 종종 차로 만들어 선물하곤 한다고 하더군요." 레비안느의 주문을 받은 아이린은 여전히 웃음을 띈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하녀에게 케시르니아 차를 시켰다. 하녀는 아이린과 레비안느에게 살 짝 인사를 하고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하녀가 나가고 나자 아이린은 살며시 손을 뻗어 레비안느의 손등을 감싸 잡 았다. "그때 잠시 뵌 후로는 그대로 못 뵈면 어쩌나 하고 걱정 많이 했었어요. 레 비안느 양 같은 분을 친구로 삼기가 쉽지 않거든요." 아이린이 느닷없이 친근스레 굴어서 레비안느는 잠시 멈칫 했지만 그녀의 미소에 답해 저 역시 살풋 웃음을 지었다. "제가 할 말인 걸요. 아이린 님 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분은 어디서도 뵙지 못했어요." "아름다우시기는 제가 레비안느 양보다 못하지요. 지난번 편지에 오라버니께 서 칭찬하시곤 했던 터라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어쩌면 레비안느 양 을 뵙기 위해서 이렇게 에스트르에 오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과찬이세요." 레비안느는 어쩐지 쑥스러운 모양으로 뺨을 살포시 붉혔다. 그녀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하녀는 달콤한 향기가 풍 기는 케시르니아 열매 차를 준비해 왔다. 아이린은 손수 다기를 테이블 위에 정렬하고는 잘 데워진 차를 레비안느 앞에 놓여진 새하얀 찻잔에 쪼르르 따라 부었다. 그녀는 브리산 치즈와 함께 작고 예쁜 쿠키가 담긴 그릇을 테이블의 정 중앙에 놓고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이 차려지자 하녀는 공손한 인사를 하고는 나갔고, 아이린은 레비안 느에게 차와 쿠키를 권했다. 길고 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짝 열어 놓은 커다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옅은 바람이 하얀 리넨의 레이스 커튼을 살포시 흔들고 맑은 햇살이 그 틈으로 살랑살랑 비쳐 드는 가운데에 작고도 부드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 었다. 케시르니아의 붉은 향기가 잔잔하면서도 온화하게 감도는 가운데 그녀 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찻잔 위를 맴돌다가 사라져버리는 아스라한 김처럼 여름날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숲을 통과하느라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었으나 레비안느는 마차의 흔 들림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에스트리온 성관에서 아이린과 나누었던 대화 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큼 즐거웠지만, 그녀는 알지 못할 불편함을 느껴야 만 했었다. 아이린은 더없이 다소곳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여성이었다. 아이린과 함께 이야기한 많은 주제 들은 그녀 자신을 들뜨게 할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레비안느는 왠지 모르게 편하지가 않았다. 그건 아이린이 가끔 이야기하는 도중 알게 모르게 짓는 오묘한 미소 탓이기 도 했으나, 그 미소 자체가 그렇게 나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되려 아이린 은 웃는 모습 하나하나까지 사람의 호감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다 만, 그녀의 그런 미소가 어쩐지 레비안느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고 있는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은 마치 몸 속으로 어떤 날카롭고도 싸늘한 이물 질이라도 뚫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아이린은 레비안느보다 더 높 은 곳에 앉아 그녀를 관망하는 듯한 눈빛을 지을 때가 종종 있었고, 레비안느 는 그런 눈빛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어떤 고민을 들킬세라 염려해야만 했었 다. 레비안느는 어두워진 차창 밖을 내다 보다 말고 그 유리에 비추어지는 자신 의 얼굴을 쳐다보며 지긋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창에는 잠시 김이 시렸다가 곧 사그라졌다. 그 초록빛의 눈은 종시 창에 비친 흐릿한 자신의 얼굴을 응시 하고 있었다.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거짓말쟁이.... 얼른 사라져버려. 그 따위 일로 가슴아파 할 거 없잖아. 엘스헤른은 약혼했어. 당연히 너 같은 건 이 제 돌보지 않아. 그는 너의 것이 아니야. 친구란 그런 것이었어...." 어느새 창에 비친 초록색의 눈에는 물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보 같이.... 레비앙 너 역시.... 그런 식으로 엘스헤른을 상처 줬을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안타까운 눈빛을 외면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게 뭐 야." 레비안느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늙은 집사가 다소곳이 허리를 굽혔다. 레 비안느는 귀찮은 듯 약간은 무표정하게 모자를 벗어 집사에게 건네었다. "저.... 리하르트 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집사가 갑자기 전하는 말에 레비안느는 문득 고개를 들더니 집사를 물끄러 미 쳐다보았다. "내가 어디를 방문했는지 그에게 말했나?" "예. 에스트리온 성관에 아이린 님을 뵈러 갔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어디 있지?" "서재에 계십니다." 레비안느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더니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면서 집사에게 말했다. "옷 갈아입고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전해 줘." 리하르트는 아까 집사가 손수 켜 주고 간 양초의 촛대 아래서 책장을 슬렁 슬렁 넘기고 있었다. 그다지 흥미로운 책은 아니라서 빠져들어 정독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별로 관심 없이 눈요기나 하고 있었다. 사실 요즘 쏟아 져 나오는 책들이란 것이 도통 계몽사상이니 사회계약이니 해서 눈에 거슬리 는 게 많았다. 물론 그런 사상들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디 까지나 귀족이었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의 기반인 귀족계급을 싸그리 깎아 뭉 게는 류의 과격한 사상들이라면 아무리 학문에 트인 이 청년에게도 눈에 가시 일 수 밖에 없었다. 촛불을 주위로 해서 주홍색의 불빛이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가고 끝내는 어둠 에 스며들어 서재 맞은 편 언저리는 통 캄캄한 분위기였다. 문득 불꽃을 응시 하고 있던 그는 서재를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를 느끼며 언뜻 고개를 들었다. 문이 딸깍 열림과 동시에 촛불이 흔들려 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기울어버 릴 듯이 옆으로 눕던 촛불은 한줄기의 긴 연기를 남기면서 다시 오뚜기 마냥 바로 서 올랐다. 문간에 가만히 서 있던 그 누군가는 발끝을 바닥에 툭툭 치다말고 리하르트 가 있는 책상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발그레한 촛불의 온기 사이로 하얀 레이 스 셔츠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레비앙...."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레비앙이었다. 리하르트는 천 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에게로 다가섰다. "에스트리온 성관에 갔었다며?" "응." 레비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꽂이에 기대섰다. 그는 아직 자신에게 서 지워지지 않은 다소 짙은 향수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이 차림 으로 있을 때는 어디까지나 레비앙이고 싶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에게로 다 가서서는 그의 손을 잡아 올렸다. "보고 싶었어..... 나의 약혼녀." - TO BE CONTINUE - ==================================================================== 4일째인가요? 글을 올리지 않았던 것이.... 원래는 2일 쯤으로 예상하고 있 었는데 여행 후유증이 크군요. 판츠 오프를 다녀왔었어요. 서울까지의 여행이 조금은 힘들었던 모양인지 요즘 몸살에 배탈에 말이 아니랍니다. 오프는 재미있었어요. 많은 판츠 사람들을 보게 되었을 뿐더러, 다들 너무 나도 좋은 사람들인 거 있죠? 보고싶었지만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아쉬웠어 요.; 이래저래 망가지게(?) 되는 사건이 많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답니다.^^ 아, 참.; 이 올라오지 않고 있을 때 신경 써주시고 메머 보내주신 시귀 님, 흰매발톱 동생, 그리고 항상 채찍질(?)을 아끼지 않는 랑 양에게 감 사를...^^ 님들이 독촉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페르티는 주저앉아서 일어 나지 못했을지도..;; 게다가 요즘은 기분이 극과 극을 달리기 때문에(조울증 같아.;) 기분이 바 닥으로 가라앉는 날이면 여지없이 글을 쓰지 못하고 자버린답니다. 다행히 이 글을 쓰던 어제 밤은 괜히 기분이 좋았어요.^~^; 그 전날 밤은 밤새 이불 둘 러쓰고 울었죠.;; 글쎄요, 요즘의 제 상태가 같은 로맨스를 쓰기엔 최적의 마음(이란 것은..;;;;)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막상 아무 생각 없이 멍할 때가 많아 서리.;; 한가지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시도 때도 없이 그 생각에만 빠져드 는 게 괭이의 단점 중 하나랍니다. 아무튼, 연재는 계속됩니다. 연중 아니냐고 걱정해주셨던 분들께 죄송하고 도 감사드려요. 앞으로는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할게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2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0 조회수: 425 [번 호] 10338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11일 01:30 Page : 1 / 15 [등록자] EGALITE [조 회] 308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2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2) 레비앙 & 레비안느 - 2 마차로 귀가하던 엘스헤른은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레비안느 양도 집으로 돌아갔을 테고, 레비앙 역시 왕궁에서 돌아와 있을 것 이다. 문득 엘스헤른은 로자리움이 참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가보 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을 뿐더러 이번 여름엔 이래저래 일이 많아져서 레비앙 과 함께 장미정원의 잔디밭에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거나 장미꽃잎을 책장에 가득 넣어 말려둘 일도 없었다. 그와는 지금 싸워버려서 어쩐지 사과 조차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엘스헤른은 더더욱 레비앙이 보고싶 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부석과 통 하는 마차의 앞쪽 창문으로 다가앉아 가볍게 유리창을 톡톡톡 두드렸다. "예, 대공 전하." 마부의 걸걸한 목소리가 마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엘스헤른은 잠시 자신의 생각을 재고하려는지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마부에게 명령했다. "로자리움으로 가자." "예." 마부는 주인에게 한마디 이유도 묻지 않고 곧바로 말머리를 로자리움으로 돌렸다. 엘스헤른은 약간의 설렘과 함께 홀가분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의자에 느긋이 기대어 앉았다. 일단은 로자리움에 방문하고 볼일이었다. 매일 이렇게 망설이기만 한다면 끝내 말 한 마디 하지 못할 사이가 되어버릴 지도 모르 지.... 그리고 어쩐지 지금 가야만 사과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그 렇게 무심하게 굴어서 미안했노라고.... 엘스헤른은 레비앙에게 할 말을 생각하며 살풋 눈을 내리 감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엘스헤른은 로자리움에만 오면 난폭해지기 그지없 었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만류하는 집사를 때내려고 팔을 휘두르기까지 하면 서 무례하게도 예고도 없이 서재로 향했다. 지쳐버린 겐지 집사는 더 이상 따 라오지 않았다. 집사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레비앙 녀석 서재에 있는 것이 분 명하긴 한데, 방해하지 말라고 한 걸 보니 뭔가 재미있는 새 책이라도 입수한 모양이다. 그렇긴 해도 오밤중에 눈 아프게 책 같은 걸 읽는다는 사실이 엘스 헤른은 좀 꺼림직하긴 했다. 서재의 육중한 나무 문이 눈에 들어오자 엘스헤른은 살짝 발소리를 줄였다. 사과하러 온 것인 만큼 정중하게 굴어야 할 일이지만, 어쩐지 그는 오랜만에 레비앙에게 장난을 쳐보고 싶었다. 문까지 다가서는 동안 엘스헤른은 이런 저런 생각을 다 떠올렸다. 문을 획 열면 분명 레비앙은 도끼눈을 하고 쳐다볼 테고, 그러면 그에게로 다가가 정 중하게 미안하다고 말해줘야지. 녀석은 아마 내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녀석의 화가 풀리기만 할 량이면 밤새도록 이라도 미안하단 말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레비앙이 못이기는 척 웃어주기만 한다면 그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해도 다 괜찮은 게다. 엘스헤른은 설레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잡은 손에 힘을 주 어 문고리를 딸깍 열어 젖혔다. 뭘까..... 어쩐지 서재 내의 공기는 묘한 이질감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하 얀 달빛과 충돌하는 무거운 어둠.... 흔들리는 촛불로 인해 일그러지는 주홍 빛의 파동.... 사르락거리는 레이스의 소음.... 방 안을 한가득 채우는 알 수 없는 향기.... 그 짙은 향수의 내음..... 서재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는지 화들짝 하 며 떨어져 섰다. 적응하지 못할 분위기에 젖어 멍하니 앞을 주시하고 있던 엘 스헤른은 자신도 모르게 문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았다. 아주 잠시였지 만 그는 분명히 보았었다. "......엘스헤른." 당황한 듯한 레비앙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새하얗게 텅 비어버린 머리 와 가슴으로 알지 못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째서.... 어째서 저 리하르 트 녀석이 레비앙에게 키스를 하고 있었던 거지? "저기..... 엘스헤른." 자신을 부르는 레비앙의 목소리가 엘스헤른에게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숨도 쉴 수 없으리만큼 가득히 차 오르는 심화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 저 빌어먹을 녀석이 레비앙을 손대느냔 말이다! 하냥 조심스 럽고 소중해 잠든 모습조차 만질 수 없었던 레비앙을! 어째서 저 녀석이!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면서 엘스헤른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체념했다고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비앙으로부터 리하르트 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체념했던 것은..... 그것은 결코 이런 게 아니 었던 모양이다. "엘스." 문득 차갑게도 섬뜩하게 엘스헤른은 정신이 또렷이 들었다. 레비앙이 부르 는 소리가 비로소 귀에 들어왔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돌아선 리하르트의 뒷모습.....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 소중한 친구. 그 친구가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숨길 수 없이 놀라고 정신없어 하 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아무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레비앙의 새하얀 손을 탁 뿌리친 채 그대로 뒤 돌아 서서 달렸다. 이 따위를 보기 위해서 이 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렇게 가슴 졸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설레어하면서 로자리움까지 온 것은..... 다만 레비앙과 화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예전과 다름없이 그에게 해맑게 웃어주고 싶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단지 그에게 자신이 변함없는 친구임을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엘스헤른은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인지 가슴 녘 의 옷깃을 한가득 움켜쥐었다. 어쩐지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 저 녀석 따위가 레비앙마저..... 다른 사람도 아닌 레비앙마저 낚아채 가는 걸 까? 레비안느의 마음도 가져갔으면서! 아니, 레비안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 따위는 다 가져 가버리라지. 하지만 레비앙만은 아니었다. "제길.... 레비앙은 내꺼야..... 10년 동안, 그렇게 오랫동안 나에게 둘도 없는.... 내 소중한 사람이야!" "엘스!" 어느새 레비앙이 좇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멈추어 서지 않았다. 레비앙이 누굴 사랑하느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저 리하르트 녀석이 라면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달래지 못할 이 마음을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왜 이렇게 정신이 혼미해지는지....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만 같은지..... 왜 이렇게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 이 밀려오는지.... "제기랄. 빌어먹을!!" 엘스헤른은 입술을 악문 채 저택의 현관을 거칠게 빠져 나왔다. "엘스헤른!!" 끈질기게 뒤따라오는 레비앙의 목소리가 어쩐지 듣고싶지 않았다. 다른 사 람을 향해 사랑을 속삭일 그 목소리라면 아예 필요 없었다. 내 것이 되지 못 할 바에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것이다. "거기 서봐. 엘스헤른." "젠장! 꺼져!" "엘스!" 엘스헤른은 귀를 틀어막으면서 마차 위에 올라탔다. "출발해!! 에스트리온 성관으로...., 어서!!!" 마부에게 고함을 지른 그는 의자에 처박히듯 몸을 기댔다. 뽀얀 먼지를 일 으키면서 엘스헤른이 탄 마차는 로자리움의 산책로를 따라 저택을 빠져나갔 다. 바로 뒤따라 나온 레비앙은 그 마차를 따라 뛰다 말고 거칠어진 숨을 몰 아쉬면서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레비앙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의 얼어 붙은 잿빛 눈동자가.... 아까 방을 들어서던 순간 그가 지었던 그 표정이 가 슴에 꾹 박혀들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마차 소리는 어느덧 희미 해지고 흙먼지로 인해 뽀얗던 시야엔 다시 투명하고도 어두운 밤 공기가 빼곡 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레비앙은 걸음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듯 엘스헤른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으로부터 물밀 듯이 밀려들어 목구멍을 가득히 채우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없 었다. 하냥 답답하고 목이 가득 아파 왔지만 레비앙은 어떻게 해야할 지, 아 니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폐부를 짓누르며 차곡하게 치밀어 오르던 그 어떤 것이 동그란 물방울이 되어서 굴러 떨어졌다. 넘치도록 함뿍 부풀어 있던 눈가의 눈물 방울이 또르륵 뺨 위를 굴러 내렸다. 그제서야 레비 앙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어깨를 등 뒤에서 누군가가 감싸 안았다.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거였어?"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 레비앙은 자신을 한가득 안아 감싸는 리하르트 의 팔을 떨리는 손을 들어 움켜잡으며 흠뻑 잠기어 쉬어버린 것 같은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말 할 수가..... 없어." "....왜?" "......" 레비앙은 어지러워 가누기 힘든 몸을 리하르트에게 기댄 채 낮게 울음을 흘 렸다. 그런 그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리하르트는 낮은 한숨만 지으면서 그를 다독거렸다. - TO BE CONTINUE - ==================================================================== 요즘의 배경음악(글 쓰면서 듣는 음악)은 거의 비발디의 곡들이랍니다. 너 무 멋져요! 비발디적 색채라고 일컬을 수 있는 그런 생동감과 모티브의 전위 와 반복..... 왠지 반해버렸다고나 할까요? >_를 작곡한 토마스 J. 알비노니였고...;; 물론 지어낸 이야기들이죠.; 그냥 이름과 곡만 빌려다 쓴 정도랄까요?^^;; 하지만 그 글은 지금 읽어봐도 뭔가 아스라한 느낌이 든답니다. 베니스의 수로 사이 로 걸쳐진 안개에 살며시 떠오르는 작은 배의 그림자,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주인공과 그녀와의 슬픈 사랑을 하고 있는 토마소, 산 마르코 성당의 비둘기 떼가 육중한 종소리에 놀라 새파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그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내 맡기고 서있는 사제, 안토니오.(비 발디는 실제로도 사제였던 적이 있었음.;) 뭐, 그 글을 쓸 당시만 해도 글쓰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과 비슷한 구조를 지녔던 라는 글이 또 생각나네요. 그건 고 1때 썼던 건데, 짓궂은 장난꾸러 기 레이몽과 브랑비에 백작 가의 사생아 샤를르 사이의 사랑 이야기였죠.^^; (루이 14세 때를 배경으로...) 사실 은 감정을 무척 자제해서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감성만 폭발적일 때라 거침없이 울고 웃는 감 정을 쏟아 부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레이몽의 인기는 정말.;;;; 그러고 보니 전 17세기나 18세기를 배경으로 쓴 글이 무려 네 편이나 되는 군요.;; 고 2때 시작해서 아직 완결하지 못한 <세느 강 물결처럼...>(일명 "세느 강변의 정사"로 불릴 만큼 야했던.;; 쿨럭.;;)은 이라는 이름으로 가상을 배경으로 해서 재구성 중에 있고..... (내용은 혁명당시의 사회상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었답니다. 비록 야한 장면이 난무하긴 했어도.;; 전 그 당시의 성적 차별과 문란함을 배경으로 깔고싶었을 뿐이예요. 당시의 독자가 친구들인 고딩이었단 사실을 생각하면 좀 과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저 위의 와, 그 위의 <영원의 아다지오>, 그리고 을 쓴 다음 리메이크 할 예정에 있는, 펠티의 꿈 이야기 . 뭔가 쓰기는 잔뜩 썼던 것 같은데....(사실, 쓰기만 잔뜩 쓸 뿐 완결을 짓 지 않은.;;) 지금 다락에는 수많은 공책들이 뒹굴거리고 있답니다. 참, 이제 야 생각나는 거지만 신바빌로니아를 배경으로 했던 <신의 문>이라는 글도 있 군요.^^ 이슈타르 여신과 푸른 타일의 문이 나오죠.^^ 공중 정원도 나오 고.... 뭐, 전쟁 이야기였습니다.; 그, 그러고 보면 전쟁 이야기를 배경으로 썼던 것이 참 많군요. <검은 전나 무 숲>이라는 글은 1, 2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해서 독일인의 시각에서 보는 전쟁에 대해 썼었고.... (물론 허접하게도 중 3때 쓴 글이니 주제가 드 러날 리가 없죠.; 쿨럭.;; 그래도 주인공의 일대기 형식으로 쥔공의 멋진 모 습만 소설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에게만은 획기적이었다고요. 쥔공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나오니까.; 뭔가 무기력한 주인공이였죠.;), <장미전쟁> 이라고 영국의 그 유명한 장미전쟁을 배경으로 쓴 이야기도 있었고. 종교전쟁 을 배경으로 쓴 글도 있었던 거 같은데 제목이 감감....;; 그 외 야오이의 극치! 20금에 도전한 <관념> 이라는 글도 있었고.(고 3때의 글로 거의 사회적 매장을 당할 뻔 했음.;) 역시 동성애를 소재로 했으나 이쪽 은 뭔가 가득 정신적인 것만 줄줄 나열하고 있었던 (그래도 살인, 질투, 음모 가 내제.;) 라는 글도 있었군요. 는 마피아 대부의 아들 이자 천재 피아니스트가 평범한 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30대의 중년에 빠 져들면서 생기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거의 야하지 않은 글이었습니다만, 그 어두침침과 징징 스토리의 극치란.; 그래도 제 글 가운데서는 가장 정상적인 글이라 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보면서 우는 독자도.;;) 판타지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썼던, 요즘에 보니 "아! 저게 판타지구나!" 라고 생각되는 글들도 있네요. <클라우디아>가 그 대표적인 예죠. 악마와 신 들의 싸움, 둘로 분리된 채 봉인된 악마, 그리고 그 봉인을 푸는 촉매가 되는 소년 프리츠. 뭔가 시커멓고 시뻘건 배경의 글이었답니다.;; 그리고, <사신전 기>라는 동양 판타지도 있었구요. 뭔가 허무맹랑했습니다.; 외계(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봉인된 신을 찾아 내계(글의 배경이 되는 곳)를 구해야 하는 둥 어쩌구..... 라며 주인공은 그 신 천우를 사랑하지만 그가 신으로서의 각 성이 이루어지면 현무로 화해 버릴 운명의 어쩌구....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리미시스 이야기>도 그래요. 판타지인줄 모르고 썼던 글이죠. 은표라는 소녀가 리미시스에 떨어진 후 생기는 흔한 스토리였어요. 제목도 원 래는 <은표 in 리미시스>라고 하려다가 촌스럽다는 주위의 의견에.;; 쿨럭, 아무튼 흔한 스토리이긴 해도 전 우주를 망라하고 우주를 넘어서기까지 하는 방대한 이야기였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걸 구상할 당시에는 미쳤다고 밖에 는...; 암튼, <피의 보석>의 배경이 되는 나라들이 저 이야기에서 모두 구성 되었답니다. 물론 제 닉네임인 페르티도 그 글에서 꼬마왕자로 나오죠.^-^ 쿨럭.;; 이 무슨 미친 짓이지?; 이렇게 주절거리다니.... 이해하세요.;; 오 늘 잡담은 정말 정신없군요. 감상을 해주신 루시퍼 군(일명 개미허리 군)께 감사를... *^~^*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3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1 조회수: 417 [번 호] 10453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12일 22:11 Page : 1 / 14 [등록자] EGALITE [조 회] 302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3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3) 회의.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레비앙은 시선 둘 곳을 잃고는 그냥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들어와 하얀 커튼을 흔 드는 사르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울거리는 커튼의 모양새는 그의 마음 마냥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벌써 일주일도 훨씬 더 된 일이다. 그렇게 엘스헤 른이 화를 내고 로자리움을 떠나버린 것은..... 처음부터 선뜻 말하지 못한 마음 같은 걸 엘스헤른은 알 리 없겠지.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는 해도.... "레비앙! 아이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곁에서 누군가가 옷자락을 붙들고 흔드는 녘에 레비앙은 살며시 고개를 들 었다. 열 살 남짓, 뽀얀 얼굴에 허니 블론드의 귀여운 꼬마가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그의 눈 앞에 서 있었다. "예, 황태자 전하." 레비앙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넋을 잃고 있던 눈빛을 거두고는 어린 황 태자 클로티엔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너무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잊고 있은 일이지만, 지금 그는 황태자와 놀아줘야만 했다. 그게 그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황궁에 방문한 이유였다. "책 읽어드릴까요?" 레비앙은 그다지 웃고싶은 심정은 아니었지만 입꼬리를 붙들어매며 책을 집 어 올렸다. "응? 아냐 아냐. 책 말구...." 이 직위 높은 꼬마는 레비앙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동안 뭔가 창 밖으로 본 것이 있는지 눈빛을 반짝이면서 레비앙의 소매를 이끌었다. "그럼 산책을 할까요?" "산책 같은 거 말고..... 저기.... 레비앙은 알아?" "뭘 말입니까?" "오늘은 있잖아. 대신들이 모두 모여서는 아버지가 들어가시곤 하는 큰 방이 있는 쪽으로 가던걸? 으음... 그 왜.... 꼭 세모처럼 생긴 대장성 대신도 가고 말야. 수염이 덥수룩한 국방성 대신도 가고.... 또.... 외무성 대신도 가고....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황태자의 말을 듣고 보니, 대신들이 다 모여서 뭔가 중대한 일이라도 결정 하는 모양이었지만, 레비앙은 전혀 금시초문이었다. 그렇게 고위 관직자들이 속속 다 모일 정도라면 아마 보통 일은 아닐 것이고, 적어도 나라의 중대사와 관련된 일임에 틀림없었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이대로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해버리는 것은 아 니겠지? 얼마 전 오스트리아 대신이 다녀갔고, 외교성에서는 어쩐지 뭔가 위 기가 감돌고 있는 듯 했는데.... 레비앙은 알 수 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클로티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회의실에 저희도 가보는 게 어떨까요? 황제 폐하께서는 황태자님 이 구경하신다고 하면 허락해주실 텐데요." 뭐, 아직 열살 밖에 되지 않은 황태자가 국가의 중대사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으나, 레비앙의 말대로 황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종종 대신 들의 일이나 황제 자신의 일을 구경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건 황제가 열 세 살의 나이에 옥좌에 앉게 된 것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클로티엔은 뭔가 흥미라도 생긴 듯 생글거리면서 레비앙의 손을 잡았다. 이 꼬마는 지금 당장은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지만, 회의실에 들어가서는 얼마 지 나지도 않아서 레비앙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고 말 것이 분명했다. "차암, 엘스 외삼촌도 왔던데. 뭐, 요즘은 자주 오고 있지만.... 그래도 오 늘은 웬 일인지 아침에 나에게 인사도 안 해주고 표정도 좋지 않았어.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언제나 입궁 하면 내방부터 들르 는데 말야. 오늘은 곧장 회의실로 가버리지 뭐야." 꼬마가 무심결에 한 말에 레비앙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엘스헤른도 오늘 회의에 참석했단 말이구나..... 저번의 그 일 이후로는 궁 안에서 마주쳐도 어쩐지 말 한마디 못했는데..... 레비앙은 가슴 한 구석에 묵직한 통증을 느 꼈다. 그때 엘스헤른이 짓고 있었던 그 눈빛이, 그 싸늘한 시선이 지금껏 뇌 리에 남아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이제는 말을 붙이려 해도 엘스 헤른이 먼저 말 걸어주지 않는다면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게 다. 친구 사이를 벗어난 엘스헤른과 레비앙 자신의 관계는 그랬다. 황제와 티 아란의 대공을 제외한 에스트르 최고의 권력자와 왕실에 예속된 귀족 사이의 관계.....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주쳐도 눈길 주는 법 없 는 엘스헤른의 싸늘한 표정에 비한다면..... "저기 아침에 시종장이 말하던데, 티아란의 대공도 온다던데....? 음, 난 그 할아버지 한 번도 못 봤지만.... 레비앙은 봤어?" 클로티엔이 옆에서 조잘거리는 소리가 레비앙에겐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뭔가 소름끼치도록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이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 할 만큼.... 정말,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레비앙은 애써 마음을 다독여 보려고 노력했다. 회의실에 들어가게 되면 분 명 엘스헤른과 마주치게 될 테지만, 아마 그는 또다시 외면을 할 게다. 그런 것에 대한 각오를 미리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엘스헤른은 더 이상 다정한 눈길로 바라봐 주지 않을 테다. 이런 걸 바란 적은 없는데..... 이렇게 될 줄 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인데..... 황제와 그 일가가 거처하고 있는 본궁을 지나 대신들의 회의가 열리는 회의 장으로 이어져 있는 넓다란 길을 걸으면서 레비앙은 낮게 한숨을 지었다. 어 쩐지 그는 지금 회의장으로 가고싶지가 않았다. 엘스헤른을 보게 될 것이 두 려웠다. 그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레비앙을 이끌고 있는 클로티엔의 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꼬마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장소에 들어가 본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로운 모양이다. 회의장의 육중한 문 앞에서 레비앙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황태자와 함께 입 실했다. 황태자가 구경을 온 것에 황제 폐하는 당연히 기뻐하는 눈치를 보였 고, 황태자와 레비앙을 위해 회의실 한 켠에 별도의 의자가 마련되었다. 의자 에 앉게 되어서야 황태자는 레비앙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렇긴 해도 그가 어 디론가 가버릴까 두려운 모양인지 손 대신 코트자락을 꼬옥 쥔 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천장이 높은 돔 형태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회의장은 크게 뚫린 창으로 들어온 햇살로 인해 상당히 밝은 분위기였다. 고위대관들이 어느덧 자리를 잡 고 앉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진정이 되자 총리대신의 진행으로 회의가 시작되 었다. 아니나다를까, 회의의 주제는 역시 프랑스에서의 혁명과 관련된 것들이 었다. 평소 그다지 그런 쪽에 관심이 지대하지 못했던 레비앙은 회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덧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잿빛의 찰랑거리는 머리카 락을 찾고 있었다. 엘스헤른..... 분명히 황태자의 말로는 엘스헤른 역시 회 의에 참석했다고 하던데.... 어쩐 일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폐하와는 언제나 허울 없이 지내곤 하는 엘스헤른인 만큼, 그런 황태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반 드시 참석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레비앙은 무례하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엘스헤른이 없다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과 함께 알지 못할 실망감으 로 다가왔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뭔가 중요한 어떤 것이라도 빠 져 나가버린 듯이.... 레비앙은 그만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등으로 시선을 떨 구었다. 바보 같은 짓이다. 이제 거들떠보지도 않는 친구를 향해 목 메여 한 다는 것은. 그날.... 케시르니아 숲에 갔던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채울 수 없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 숲에 갔었던 것부터.... 거기서 엘스헤 른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부터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갔었 던 것은 어쩌면 레비안느로서의 감정에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항상 엘스헤 른이 레비안느를 보던 그 시선을.... 그렇게 따스하고도 열정적인 그 시선을 돌이켜 추억해보기 위해서였는지도.... 그리고, 그가 그렇게도 갑작스레 약혼 해버린 사실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처음 레비안느로서 엘스 헤른과 그 숲에 갔을 때, 그때의 엘스헤른은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고 멋있 었다. 내내 같이 지내온 10여 년 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레비앙은 자기 자신인 레비안느에게 질투심마저 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말쑥 하고도 점잖은 모습으로 춤을 청하는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알고 있던 그가 아 니었다. 그렇게 장난스럽고 어리던 친구는 어느새 커버려 어른스러운 모습의 한 남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보 같아...." 레비앙은 마치 한숨과도 같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황태자는 그에게 기대 어 잠들어 있었고, 회의장은 워낙 넓어서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레비앙은 이런저런 의견이 오고 가고, 다소는 시끄러운 분위기의 회 의에 집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마음이 너무나도 싱숭생숭해서 그냥 뛰쳐나가 버리고 싶었지만, 별로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때마침 황제폐하가 뭔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건지 이쪽을 한 번 쳐다보았고, 레비앙은 엉뚱한 생각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흠칫하며 작게 목례를 했다. 전 쟁을 하느냐 마느냐의 심각한 회의 속에서도 황제는 레비앙에게 싱긋이 미소 를 지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웬 일인지 황제의 옆자리 - 즉, 티아란 공국의 대공자리가 비 어 있다. 티아란이라면 에스트르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공국으로, 에스트르의 군사적 주요지이자, 군사적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역대에 전 쟁과 관련된 에스트르의 역사는 전부 티아란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럼에도 불 구하고, 티아란이 에스트르를 위협하지 않는 이유는 에스트르가 티아란을 주 종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등하게 대우해 주고 있기 때 문이었다. 크게 보면 티아란 공국도 제국에 포함된 황제의 땅이었으나, 군사 적 이유에서나 여러 이유에서 황제는 공국에 많은 독립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잘 볼일이 없지만, 역시 군사와 관련된 문제로 회의가 진행될 때 는 티아란 대공도 참석을 하는데, 오늘은 그 유명한 늙은이가 어쩐지 아까부 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지금쯤 그 늙은이는 칠순을 바라보는 고 령이 되었을 터, 회의실에 앉아있기가 상당히 무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저렇 게 좋은 의자를 비워두고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레비앙은 생각만 하고 앉아있기에도 불편한 자신의 의자에서 비척거리다 말 고, 또다시 그 불편함 따윈 잊어버리고서 곰곰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공, 에스트르에서 대공이라면 단 두 명, 티아란 대공과 엘스헤른이다. 물 론 엘스헤른은 호칭만 대공일 뿐,(그것도 억지로 황제의 명령에 의해.) 대공 에 걸 맞는 예우가 있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귀족 들은 엘스헤른을 일컬어 <땅 없는 대공>이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가 그 런 명령을 내렸을 때 엘스헤른 네 집에서도 난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에스트 리온 공작은 엘스헤른더러 황궁에 발길을 끊으라고까지 하곤 했었다. 대공이 라 함은 황제의 바로 아래라고 해도 무방한 직위인데, 황제폐하의 총애를 받 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사랑스러운 둘째 아들이 험언을 일삼는 그런 귀족들의 표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었 다. 아무튼 황제로서도 그 문제에 대해 상당히 완강했고, 엘스헤른은 정말 폐 하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 말고는 아무런 내력도 없이, 허울만 대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야 엘스헤른도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은 나날을 살아온 것 같다. 귀족들의 온갖 부러움과 질타와 시기를 한 몸에 받아오면서, 그럼에 도 불구하고 엘스헤른은 일에 대해서나 마치 속이 빈 빵과도 같은 자신의 직 위에 대해서나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동안 그렇게 아무 렇지도 않게 이 나라 최고의 왕족과 친구일 수 있었던 것은.... "이제는 아무 것도 말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어...." 레비앙은 씁쓸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듣지 못할 거 이렇게 말로 내뱉어 버리는 것도 우울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 가 있다. 하지만 그 효과를 기대해보기도 전에 레비앙이 앉은 의자 뒤에서 나 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해봐..... 회의 끝나고 나서." - TO BE CONTINUE - ==================================================================== 에에, 또 이틀만이 되어버렸군요. 게다가 이번 편은 퇴고도 못한 채....;; 저, 빨리 올릴 생각이었지만, 요즘 역시 우울해져버려서 글 쓸만한 여건이 조 성되지 않고 있답니다. 열심히 해야한다고 마음을 다잡고는 있습니다만, 하루 종일 망상에 빠져버려서, 혹은,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길 하느라 거의 아무 것 도 쓰지 못한 채 어느 샌가 밤이 되어버리고 마는군요. 게다가 이제는 골치 아픈 이야기로 들어서기 때문에 예전같이 즐기면서 쓸 수는 없는 거 같아요. T-T 그나마 "우엥~! 엘스 멋져!" 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쓰던 때는 좀 나았다 구요.;; 그건 그렇구,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거지만..... 생각을 해 보니 엘스헤른 은 저의 이상형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콜록.;; 전 엘스처럼 뭔가 열정이 가득한 남자가 좋아요.*^~^* 그리고, 어찌 보면 냉철하지만 또 어찌 보면 좀 순진하다고나 할까? 아닌가요? 순진은 아닌 모양이로군요. 암튼, 장난스럽고 도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진지해지는 그런 엘스가 좋답니다. 우웃, 그렇다고 제 아들이나 다름없는 저 가상의 인물을 상대로 사랑에 빠 져버리거나 한 건 아니라구요. 다만 여기서는 말하지 못할 사정에 가슴이 아 플 뿐이죠. T-T 계속 우울하거나 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라는 것은 엘스랑 상관없다는 거예요.; (왜 자꾸 이상한 눈으로 보지?;) 내내 우울해진 분위기로 가라앉아버린 이유는..... 저도 몰라요! T_T 우 엥~! 흠흠, 동네의 수많은 고양이들이 울어대는 밤이로군요. 그것도 우리 집 뒷 담 담벼락 근처에서...; (문득 담벼락을 담부락으로 적고는 기뻐하고 있었답 니다. 어쩌면 사투리라 하는 것은 오히려 표준어보다 어감이 좋게 느껴지는 지도...) 에,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귀뚜라미 소리가 벌써 들리죠. 모두 두 마 리예요. 뭐랄까, 귀뚜라미 소리란 것은 밤 공기에 굴러다니는 작은 동그라미 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망구 제 생각인거죠.; 암튼, 담 근처에 웅크리고 있는 괭이들로부터 무사하기를....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4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2 조회수: 378 [번 호] 10589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15일 12:04 Page : 1 / 14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91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4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4)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레비앙은 마치 온 몸이 굳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 었다. 왜 이렇게 심장 박동이 빨라져버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 꼼짝 도 할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갈 듯이 머리 속에 쿵쿵 울리고 있었다. "돌아볼 것 없어. 지금 네 얼굴을 본다면 난 회의 따위엔 집중 할 수 없을 테니까 말야." 그 싸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차마 돌아보기도 전에 그 가 앉아 있는 자리를 지나쳐 황제 폐하께로 다가갔다. 웬 일인지 예장을 말쑥 하게 차려입은 그의 뒷모습이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그가 다가서자 황제폐하 께서는 몸을 일으키셨고, 레비앙으로서는 그 동안 회의 내용을 듣고 있지 않 아 모를 일이지만, 이런 저런 공론을 벌이고 있던 대신들의 시선이 폐하에게 로 집중되었다. "여러분들께 소개하겠소. 티아란의 대공,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이 오." 황제의 한마디에 회의장은 레비앙의 머릿속만큼이나 소란스러워졌다. 티아 란의 대공이라면 분명히.... "티아란의 전대 대공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소. 그리고 4년 전에 비 밀리에 대공 계승식이 있었소. 물론, 비밀에 부쳤던 것은 티아란 대공의 부 탁도 있었지만, 티아란이 흔들린다는 것은 에스트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 칠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티아란 대공의 서거는 비밀로 처리하고 그 대신 엘스헤른이 대공에 오르게 된 것이오." "하지만 폐하, 엘스헤른 대공 전하께서는...." 뭔가 불만이 많은 겐지 귀족 연합 측에서는 술렁거림이 멎지 않았다. 그러 나 황제 폐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의 발언을 저지했다. "엘스헤른 대공이 즉위해 있은 지난 4년 동안 티아란에서의 반란은 눈에 띄 게 줄었을 텐데요? 그리고, 역대 티아란의 여느 대공보다 티아란을 잘 이끌 어오고 있소. 그나마 문제 될 게 있다면....." "대공 전하께서는 아직 어린 나이십니다." 대신 중 한 명의 불만에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직 어리다는 게지. 성년을 지난지도 몇 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외의 불만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그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다 는 이유로 인해 발생하게 될 어떤 문제라도 있소? 그의 능력 여부에 대해서 는 지난 4년간 티아란에서의 치정이 잘 설명해줄 것이오." "제가 알기로는 대공전하께서는 거의 벨라시그네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만 어떻게 티아란을 4년간 다스려오셨습니까?"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내무 대신이 날카롭게 한 마디 하자 또다시 장 내 는 술렁거림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물론 엘스헤른을 멍하니 보고 앉은 레비 앙 역시 못 믿을 일이었지만, 저 콧대높은 귀족들 역시 엘스헤른의 지위를 쉽 사리 수용할 수 없는 모양이다. "비밀에 부쳤다고 했으니, 당연히 엘스헤른 대공이 티아란에 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대공이 여기에 와 있는 동안은 일단 대행을 하고 있소. 물론 모 든 명령은 대공이 직접 내리고." 황제의 말을 듣고 보니 레비앙은 문득 엘스헤른이 한 번씩 긴 여행을 떠나 곤 했던 것이 생각났다. 일년에 한 번 씩은 꼭 혼자서 어디엔가로 여행을 가 곤 했었는데 그게 아마도 티아란이었던 모양이다. 레비앙이 듣지 않고 있었던 지금까지, 회의는 전반적으로 프랑스와의 전쟁 은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나 본데, 아무래도 전쟁을 위해서는 티 아란이 나서야 했다. 그건 여지껏 에스트르의 전쟁사에 있어서 공식이나 다름 없었다. 티아란은 에스트르에 있어서 일종의 무기고 내지는 방벽이라고 봐도 무관했으며,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전쟁의 전말에 대한 모든 책임은 티아란의 대공이 쥐게 된다. 그 모든 것을.... 엘스헤른이 책임진다는 것이다. 레비앙은 비록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텅 빈 저 귀족들이야 지금 실질적인 "대공"이라는 직위에 눈이 뒤집혀 왈가왈 부를 해 대고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에는 생각이 미 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엘스헤른은 어쩌면.... "뭔가 불만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예상은 했습니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묻고 싶군요." 엘스헤른은 진지한 표정으로 좌중을 살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스트르는 전쟁을 시작하려하고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누가 전시에 티아란의 대공이 되고 싶으신 지를.... 그 누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자리에 앉고 싶으신 지를 말입니다." 그는 정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으며, 이내 회의장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목숨을 거십시오. 지위가 부럽다면 그만한 모험은 해볼만한 가치가 있 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전쟁터에서 제가 죽은 후에 이 자리의 정당한 주인에 대해서 논하시든지요." 티아란의 대공은.... 전시에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자리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더없이 찬란하고 화려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지만 그것은 전시를 위한 일종의 보상일 뿐이었다. 아직 귀족들은 불만에 쩔어 입술이 구두코만큼 이나 나와 있었으나 누구 하나 그 불만을 입 밖으로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리고 멍하니 엘스헤른을 보고 있던 레비앙은 급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더 이상 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시간 동안 회의는 다시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면 전국을 대상으로 군대가 조직되겠지 만, 물자 조달을 제외한 전쟁의 대부분의 일들은 티아란 대공이 도맡아 하게 된다. 엘스헤른은.... 그래서 요즈음 그렇게 지쳐 보였나보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못할 자신의 일로 힘들어하면서.... 문득 레비앙은 가슴 한 켠에 돌덩이라도 들어앉은 듯 묵직한 통증을 느꼈 다. 언제나 엘스헤른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투정을 부리고 괜스레 짜증 도 내곤 했었으나 막상 친구를 알아주지 못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저렇게 큰짐을 매고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따스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던 것은 바 로 자신인 것이다. 무엇이 불만인지도 모르게 화를 내서 친구를 당황하게 하 고 가뜩이나 신경 쓰이게 굴었던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 린 게다. 레비앙은 회의로 인해 실내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 잠든 황태자를 추스려 안으면서 가만히 일어섰다. 이로써 이제는 더더욱 멀어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는 엘스헤른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곧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이 렇게 곁눈질하면서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엘스헤른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이 죄책감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회의장을 나서면서 레비앙은 한 번 더 엘스헤른을 돌아보았다. 그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 속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정말.... 왜 이렇게 가 슴이 아픈 걸까? 해주지 못했던 것들만 생각나고.... 또 나쁘게 굴었던 것들 만 생각나고..... 어쩐지 눈 앞이 흐릿해지는 거 같아, 레비앙은 그만 돌아서서 천천히 걸음 을 때어 놓았다. 어떻게 걷는 건지도 모르게 본궁에 있는 황태자의 방으로 돌 아온 레비앙은 잠든 클로티엔을 침실로 옮겨 침대 위에 눕혀 놓고는 거실로 나왔다. 테이블에 몸을 기대어 의자에 앉으면서도 그는 한숨조차 내 쉴 수 없 을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쓰러져버릴 것 같은 몸을 추스려 의자에 앉은 레비앙은 가득 메어오는 목을 가다듬으려는 듯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 기침이 시발점이 되어 그는 몇 번 콜록거리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에 엉거주춤 손을 올려 눈가를 훔쳤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왜 이렇게 미어질 거 같이 마음이 아리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레비앙은 혹여나 자신의 흐느낌에 황태자 가 깨기라도 할 세라 손끝으로 입을 막았다. 싸늘하게 어깨가 떨려왔다. 어쩐지 그렇게 마음이 서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 이었다. 얼어붙을 것처럼.... 레비앙은 흐려지는 시야를 주체하지 못해 그냥 테이블에 엎드려버렸다. 뭔가 가득 못마땅했다. 알고는 있지만 그건 자기 자 신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이해해 주지 못한 자신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눈가가 따스하게 눈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레비앙은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동안 엘스헤른이 했던 많은 행동들이 마치 보이기라 도 하는 것처럼 떠올랐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리고 많이 지쳤을 텐 데.... 그래도 그렇게 밝게 웃어주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생각나 레비앙은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래도 여전히 멎지 않는 눈물을 추스려 보려고 레비앙이 고개를 들었을 즈음 이쪽을 향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이 울고 있 었다는 사실에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얼른 눈가와 뺨을 닦고 흐트러진 머리카 락을 다독였다. 딸깍.... 하고 가볍게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엘스헤른이었다. 그는 다소 지쳐 보였고 어쩐지 초췌하기까지 했다. 그 도 그럴 것이 여지껏 회의에 시달렸을 것이며, 더더구나 티아란 대공의 신분 으로 모든 전쟁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일 터, 더더욱 어 깨가 무거울 테다. 레비앙은 문을 열고 들어와 그 문에 기대어 선 상대를 확인하고는 저도 모 르게 카펫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공 전하....." 울어서일까? 레비앙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스헤른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를 일이었고, 또 자신의 마음 또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떠한 일로든 울었다는 것을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레비 앙의 머리 위로 최초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볼썽사나워." 뭔가 차갑고도 냉랭한 말에 레비앙은 가슴이라도 찔린 듯 흠칫 하며 고개를 들었다. 뭔가 잘 못 들은 걸까? 그는 엘스헤른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 기 위해서 동그랗게 눈을 떴다. ".....예?" 그가 고개를 들어 응시한 그 곳에는 싸늘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한 청 년이 서 있었다. 그는 잿빛의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냉정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고, 그 단정한 눈초리에는 약간 화난 빛이 감돌았다. "일어서란 말이야. ......네 눈에는 내가 티아란 공국의 대공으로 보여?"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무슨 말을 하는 지를 곱씹으려 노력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그 자리에 가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레비앙의 눈 앞에 서 있는 저 훤칠한 청년은 티아란 대공이 틀림없다. "....." 레비앙이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자 엘스헤른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의 양쪽 눈썹 사이에 가느다랗게 주름이 잡혀드는 걸 보면서 레비앙은 그만 고개를 숙였다. 뭐랄까.... 정말 너무나도 당혹스럽고도 어려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너마저 그렇게 구는구나. 티아란의 대공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나 자신 엘스헤른이 아닌.... 대공으로서의 나. .....너도 그것만을 보고 있는 거니?"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그렇게 한가득 지쳐버린 듯한 목 소리를 들은 건 이번이 기필코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장난스럽게 굴고, 웃음을 잃지 않던 그 친구의 음성이 아니었다. 레비앙은 떨리고 있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 TO BE CONTINUE - ==================================================================== 구렁구렁구렁..... 요샌 성격이 정말 포악해져버려서 혼자 궁시렁거리지 않 으면 맹렬하게 뭔가를 씹고(욕하고.;) 있답니다. 아아, 다 관둘 거예요! 라고 소리 치면서도 내심은 찝찝해져 갑니다.; 뭐, 벌써 관뒀어.라고 혼자 구렁거 리다가도 문득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져서 말이죠. 하지만 정말로 관둘 거예 요! (콜록.; 뭐냐고 묻는다면 곤란하다구요.;;) 요즘은 정말 이래저래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껴져서 의욕을 상실해가고 있습 니다.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말꼬리에 이렇게 구렁거리는 것도 어찌보면 혼자의 위안을 위해서인지도.;; 콜록.;; 오늘은 컨디션 최악의 날로서 다래끼, 배탈, 감기가 동시에 밀어닥친 날입 니다. 외출요? 우웃, 꿈도 못 꾸죠. 아침에 정로환 먹고 누워 있다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눈 뜸질하고 멀뚱멀뚱 누워있는 게 다였습니다. 콜록.; 물론, 누 워서 손톱 깎기라는 고 난이도의 손 운동을 잠시 하기도 했었습니다.; 아, 참.... 독촉 잡담을 남겨주신 제뉴엔 양께 감사를. ^^ 랑이가 없으니까 제뉴엔 양이 계속 독촉을 해주시는군요.^^; 덕분에 쓰고 있습니다.^^;; 글코, 흰매 양과 네이시 님께도 감사.^^ (아무래도 전 독촉이 없으면 안 쓰는 괭이 인가 보오.;) 글코, 추천 날려주신 메이 님과 월 군에게도 감사.^^ 넘넘 고마워요~! 에... 그리고, 팬멜 날려주신 ID: 혀니향기(맞나.;) 님께도 감사말씀 드립 니다. 우웃, 덕분에 용기백배! ^^ 아아, 잊을 뻔 했군요. 저.... 페르티의 아이디가 <마쉬멜로우>가 되었답니 다. 뭐, 이래저래 사연은 많지만... 가슴이 아픈고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T-T 그래도 여전히 검색할 때 라고 쳐주시면 제 글들이 다 나온답니 다. 이상한 아이디라고 경계하진 말아주세요. 콜록.;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5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3 조회수: 436 [번 호] 10649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16일 10:10 Page : 1 / 13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81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5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5) 가질 수 없는 마음. ".....전쟁이란 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끝내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지. 그다 지 자랑할만한 것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나에겐 거추장스러운 오래된 코트 같은 지위니까.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런 것이었어. 티아란의 대 공은 너랑은 상관없으니까. 너와 상관 있는 사람은 티아란의 대공이 아니 라, 네 친구로서의 엘스헤른이었으니까." 엘스헤른은 담담한 어투로 말을 하다 말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리만큼 밝은 날씨가, 그리고 상큼한 바람이 창을 통해 방 안을 기웃 거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날름거리는 비단 커튼이 차분하게 창가에 내리 앉 고, 일렁이던 햇살이 무릎을 꿇고 앉은 레비앙의 붉은 머리카락에 맺혀 들었 다. 이렇게 위에서 레비앙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란 건 참 오묘했다. 뭐랄 까... 지금 엘스헤른은 진심으로 레비앙을 굴복시켜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었다. 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심정이었다. 엘스헤른은 잠깐 엄습해오는 어지러움에 가볍게 눈을 내리 감았다. 뭔가 두 려워 할 게 더 남았던가? 이제는 그 어떤 것에도 예속되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 버린 것.....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좋아. 네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네가 무엇으로 보든 내 알 바 아니야." 엘스헤른은 살며시 눈을 뜨고서 가만히 레비앙을 응시했다. 더없이 아름답 고, 뽀얗고, 사랑스러운.... 아니, 엘스헤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말로도 표 현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레비앙이었다. 언제나 햇살은 그를 감싸며 반짝거 리고 바람결은 그를 스쳐 향기롭고.... 그렇게 화나고 노여웠던 마음도 저 초 록빛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어느 샌가 언 눈이 녹아 없어지듯 사그라 지는 것이다. 레비앙의 모습을 시선으로 찬찬히 훑으면서 엘스헤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 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던 것 같다. 지금 레비앙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렇다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빌어먹을. 세상에는 자신의 손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억지로 노력한다해서 얻을 수 있을 리 없지. 엘스헤른의 입가에 천천히 쓴웃음이 번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깨트려 버리는 게다. 다른 사람도 손댈 수 없도록.... 산산히 부수어 트려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게다. 행복을 빌어줄 마음 따위는 이제 남 지 않는지도 모르지. 남에게 줄 행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일말의 결심에 잔잔하게 미소를 띄운 엘스헤른은 약간은 거만한 목소리로 레비앙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먼저 기회를 주지. 말해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있던 레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냉랭하게 쳐다보고 있는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는 그만 저도 모르게 눈길을 떨구고야 말았다. 조용하게 입가에 미소를 띄 우고는 있지만 엘스헤른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뭐랄까, 여지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웃음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 때문일까? 레비앙은 저도 모 르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가득 망설여져서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일단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레비안느에 대해서 이야길 해야 하는 걸까? 레비앙은 먼저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 깔았 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가슴을 가득 넘칠 만큼이나 많은데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 것인지 난감하기만 했다. ".....아까 회의장에서 보기엔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는데...... 내 착 각이었나?" 무미건조한 엘스헤른의 말이 레비앙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레비앙은 어깨를 움츨 했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아마 엘스헤른은 영영 오해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대공 전하...... 저, 저는....." 어깨를 떨고 있던 레비앙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 엘스헤른이 그의 말을 가볍게 끊었다. "나에게 할 말이 아니라, 대공 전하께 고할 일인가보지? 그런 거라면 나중에 내 방으로 와서 정식으로 고하도록 해. 그리고 지금은 그 말을 들으러 여기 에 온 게 아니니까." 엘스헤른의 차가운 말투에 레비앙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껏 잘 참고 있었는데 이번엔 어쩐지 참아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엘스헤른을 쳐 다보고 있던 자신의 시야가 차츰 흐려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레비앙 은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말하도록 하지. 그 동안 곰곰 생각해봤어. 그리 고 오늘의 너를 보니 더더욱 어떤 확신이 드는군. 어차피 넌 더 이상 나를 대공 전하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보지 않을 테니까...."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엘스헤른이 어쩐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레비앙이 알고 있는 예전의 그 친절하고 배려 넘 치는 미소가 아니었다. 얼어버릴 듯이 차갑고도 투명한.... 그건 레비앙을 향 한 냉소였다. "좋아. 여지껏 내가 당한 수모를 모두 갚아주지. 네 곁에서 친구로 있을 때 는.... 그다지 수모라고 느끼지 못한 것들이.... 어쩐지 돌이켜보니까 그렇 지 않더란 말이야. 게다가 난 지금 네가 보는 대로 티아란 대공이고, 대공 으로서 손상된 명예만 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더란 말이지. 그것도 모두, 너 한 사람으로 인한 것들이....." 문에 기대어 있던 엘스헤른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워 팔짱을 낀 채 레비앙 에게로 다가섰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내 권위에 대항해서 네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봐 주겠어. 나 티아란 대공이 널 철저하게 굴복시키는 그날까지....! 뭐,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너의 누이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그 땐 내가 대상을 잘 못 파악했던 것일 뿐이야. 네 누이는 이제 상관없어. 지난 번 네가 보여준 걸로 인해서 분명히 깨달았지. 내가 이 처 절한 복수심을 불태워야 할 대상이.... 레비안느가 아니라 너라는 사실을 말이야." 레비앙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엘스헤른은 그의 앞에 허리를 숙여 앉았다. 그리고는 레비앙의 초록빛 눈에 한가득 부풀었다가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감 상이라도 하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런 엘스헤른의 눈빛에는 한치의 흔들림 조차 없어 보였다. 정말 어디까지나 미술작품이라도 감상하는 듯한 눈빛이었 다. 레비앙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에서 부끄러움마저 느낄 수 없었다. 이 렇게 흉하게도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닦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훗, 참회의 눈물인가? 날 위한 거라면 기꺼이 받아주지. 하지만.... 늦었 어. 아름다운 나의 친구. 아아, 어디까지나 예전엔 친구였지." 엘스헤른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레비앙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끝은 레비앙의 뺨을 구르고 있는 눈물을 살며시 닦아냈다. 레비앙은 울음으로 인해 떨리는 입술을 꼬옥 다물고는 젖은 눈을 들어 엘스헤른을 살폈다. 그러 나 눈물을 훔쳐주는 엘스헤른에게서는 그 어떤 다정함이나 따스함도 느낄 수 없었다. 뺨을 스치는 손끝은 이렇게도 따스한데.....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왜 그리 시린 북풍마냥 차가운 걸까? "엘스......" 작게 벌어진 레비앙의 붉은 입술에서 한숨처럼 엘스헤른의 이름이 새어나왔 다.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 레비앙은 가슴속을 한가득 쥐어짜는 고통을 감내 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여전히 아무런 감흥이 없는 눈초리를 고수 하고 있었다. 엘스헤른이 손끝은 어느새 레비앙의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고 있 었다. "쉬잇.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지. 그렇지 않아? 아까는 잘 하더니 갑 자기 잊기라도 한 거야? 응? .....대공 전하라고 불러야지." 나직한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봄날의 나른한 아지랑이마냥 감미로웠다. 그토 록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레비앙은 온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입술 끝 을 보드랍게 쓰다듬던 엘스헤른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레 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 감았다. 더 이상은 저 차가운 눈빛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치 가슴을 후벼파기라도 하는 듯한 엘스헤른의 눈초리에 어쩌 면 쓰러져버리게 될 것 같이 위태로웠다. 엘스헤른의 상큼한 체취가 코끝을 감돌았다. 가까이 있으면 언제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생소하고도 아련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 그 전엔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것들이 가득 느껴졌다. 엘스헤른의 온기, 엘스 헤른의 향긋한 내음, 엘스헤른의 숨소리.... 예전에는 그렇게 무심히 넘겼던 것들이 지금은 이 방을 한가득 채우고도 남을 듯이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 다. 입술 끝에 머물러 있던 엘스헤른의 손이 부드럽고도 찬찬히 움직여 이내 뺨 을 감쌌다. 레비앙은 그 쟁그러운 느낌에 어쩐지 거칠어져버릴 것만 같은 숨 결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풋 물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두근거리고 있는 건지 레비앙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쉴새없이 눈가에서 베어 나오는 눈물조차 어쩌면 가 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을 내내 같이 보내온 이 사람이 이토록이나 부드럽고 감미로운 사람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겁먹지 않아도 돼. 긴장 할 것도 없어. 이렇게 내가 너의 뺨을 쓰다듬 는 것처럼.... 난 그렇게 아주 천천히 너에게 복수를 해 줄 테니 말야. 내 권위로 조금씩 널 잠식해 가주지.... 그거 알아? 넌.... 내가 죽으라면 이 자리에서 몸 속에 칼을 박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아. 사실 그건 너무 시시해. 그렇지?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괴롭혀 줄 거야. 후훗.... 난 말야, 타락할 것까지 각오한 몸이니 까...." 나즉히 속삭이던 엘스헤른은 끝 말에 여운을 남기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길이 뺨에서 멀어지자 레비앙은 일말의 허탈감에 눈을 떠서 고개를 들었다. 엘스헤른은 싱긋이 웃으면서 그런 레비앙을 향해 냉소를 던지고 있었다. 레비앙이 뭔가 말이라도 할 듯 입술을 움직이자 엘스헤른은 다시금 손을 내 밀어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지긋이 눌렀다.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거야? 네 의도에 따라줄 만큼 나는 그렇게 착하 지가 않아. 울어도 소용없어. 내게 있어서 너의 눈물은.... 수 천 수 만 송 이의 장미꽃처럼.... 그렇게 그저 감상을 위한 것일 뿐이니까.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 장미꽃을 꺾 는 것과 다를 바 없지." 나즉한 음성으로 말을 잇고 있던 엘스헤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 다. 더없이 부드럽고 따사로운.... 창가에 영그는 햇살마냥 포근한 미소가 향 기로운 빛을 발하듯 그렇게 그의 발그레한 입가에 맴돌았다. 엘스헤른은 싱긋 이 웃음을 짓다 말고 레비앙의 초록빛 눈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몹시도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잊지 말아. 넌......." 잠시 생각이라도 곱씹는 듯 살풋 눈을 내리깔았던 엘스헤른은 그 잿빛의 눈 동자에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내 장난감이야." - TO BE CONTINUE - ==================================================================== 엘스가 왜 이렇게 변했냐구요? 글쎄요. 누군가를 닮아 가는 거겠죠. (무책 임성 발언) 아무튼 이번 편은 "아아, 정말 이런 건 싫어!"라고 외치면서 썼답 니다. 혼자서 "레비앙이 어째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거지?" 라고 구렁거리기도 했답니다. 으음. 이전의 <피의 보석>에서는 모든 남녀 관계를 "여권의 신장!"쪽에서 서술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덕분에 루딘에게 말빨로 나 무력으로나 당해야만 했던 수많은 남자들에게 애도) 은 어쩐지 그 렇지도 않아요. 불쌍한 건 레비앙 뿐인 듯. -_- 더군다나, 엘스의 지위가 월 등하니....; 아무래도 설정을 잘 못 한 걸까나? 아니면 레비앙이 남장으로 나 와서 뭔가.... "저 애는 여자가 아니야."라는 기분으로 써서 그런 걸까?; 아무튼 상당히 이번 편은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앞으로 나와야 하는 몇몇 씬들도 마음에 들지 않을 예정입니다. 곧 전쟁이 예상되고, 아마도 전쟁이 일 어나기 전들의 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겠죠. (엘스헤른은 아직은 떠나 지 않는다고요.) 에에, 그러고 보니 저번 편은 제목도 안 붙이고 올렸더군요! 새삼 제가 바 보 고양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3일 동안 을 다시금 읽어봤는 데..... 그 수많은 오타들과, 이상한 문장들과, 느끼한 말들에 닭살이.... 혼 자서 읽으면서 갸웃갸웃 했죠. "어라라? 의외로 재미없잖아!" 라면서.. TT-TT 뭐, 곰곰 생각해본 거지만 아무래도 자기가 쓴 글은 자신에겐 재미없나보아 요. 아아, 글쿠, 밤새 눈을 비비는 바람에 다래끼가 극에 달했습니다. 삼겹살과 닭을 먹는 게 아니었어.; 콜록콜록.;; 에, 저기.... 격려 멜 보내주신 뉴디(맞죠?)님 감사합니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6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4 조회수: 477 [번 호] 10768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18일 01:42 Page : 1 / 12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92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6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6) ..... 엘스헤른은 지쳐서 대지에 흔적도 없이 스며들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에스 트리온 성관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벌써 어둠은 소리 없이 다가서는 검 은 고양이처럼 숲을 휘감아 자욱하게 퍼져들었고 그 웅장한 고요함에 묻힌 작 은 소리들이 튀어 오르는 감각이 되어 엘스헤른을 자극해왔다. 숲을 통과하는 마차는 약간 덜그덕거리는 정도였지만, 엘스헤른은 묘한 울렁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녹아들 듯이 의자에 푹 파묻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까지 덜컹거리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울렁거림 와중에도 묘한 안정감이 한줄기 빛 마냥 마음 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 래도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인 걸까? 그 동안 유치하게 마음을 괴롭히던 사유 들이 창 밖에 깔린 어둠에 녹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덧 아득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엘스헤른은 문득 팔짱을 끼고 있던 자신의 손을 풀어 물끄러미 그 하얗고 길다란 손 끝을 응시했다. 손끝은 아직도 레비앙의 그 투명한 눈물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작은 전율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투명하고 미지근한 온기와 매끈한 곡선의 터질 듯한 위태로움.... 그 뽀얀 뺨 위를 구 르던 눈물에 손을 댔을 때 손끝이 쩌릿거렸던 것은 일종의 희열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리고 최초로 그 눈물과 손 끝이 교접하던 순간 느꼈던 일말의 긴장감 은 엘스헤른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 입었을 레비앙의 마음처럼 그렇 게 그 투명한 구슬방울로 하여금 영롱한 형체를 잃고 의미를 잃어버리게 했으 리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엘스헤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금단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문득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을 위해 허용된 것들이라는 그 규칙들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해서는 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구분 짓는 잣대는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뭐랄까.... 실을 잡아당기는 것과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팽팽하게 당기면 당길수록 자신을 채찍질하고 억누르는 마음의 사슬 이 되지만 일단 끊어져버리고 나면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리는 파열음처럼 그 렇게 허무하게도 마음을 구속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관념을 떠나면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것을.... 그렇게도 자신을 애태웠어야 했던 이유 가 있었던 걸까? 친구라는 굴레는 자신을 앞질러 달려가는 그 마음을 가로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는지도 모른다. 애써 그 단어로 자신을 달래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 거운 감정을 삼키려 했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아, 분명히 그랬던 것 같다. 친구로서의 선을 마음 속에 그어 놓고서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무던 노력 해왔던 자신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며 억눌러 왔던가? 그런 의문에 당면했을 때,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행복 따위를 빌어줄 마음은 이제 없어.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고 마음 을 다독이던 때는 이제 지났으니까.... 사실,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나 다 를 바 없었지.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야. 그건 곧.... 너의 불행이 나 의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사유의 달콤한 유혹을 불러일으키지. 알지 못할 전율과 함께 말야. 너를 굴복시키고 싶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온몸을 떨려오게 하는 야릇한 흥분의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해. 어쩐지 가슴 한가득 뿌듯한 감흥이 차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지없이 다 투고 있는 두 가지의 마음이 충돌하는 그 뜨거운 열기가 오히려 더 상쾌한 기 분으로 그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몹시도 잔인하게 레비앙을 굴복시키려 드는 묘한 쾌감 가운데서도 한사코 그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이렇게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면..... "훗.... 사랑했는지도 모르지." 잔잔히 미소짓던 엘스헤른의 입술에서 옅은 향기가 맴도는 말이 스며 나왔 다. 생각하던 바를 무심결에 말로서 토해놓고 보니 오히려 심장을 옥죄는 싸 늘한 전율이 엄습해오는 듯했다. 온 몸을 싸하게 훑어 내리고 입술을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그 쾌감에 엘스헤른은 지긋이 눈을 내리 감았다. 역시나 그랬던 걸까? 그 한 마디 만으로도 육체를 온통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걸 보면.... 레비앙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아니.... 레비안느를 보게 되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마음은 그것을 느끼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레비안느는 그저 엘스헤른이 레비앙을 보면서 닿을 수 없었 던 이상의 한 그림자였다. 그녀는 레비앙에게서 늘 갈망해오면서도 드러낼 수 없었던, 엘스헤른의 마음 속에 안개처럼 스멀거리며 엉기어 있던 알 수 없는 욕망의 돌파구이자 구실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성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얽매여 스스로로 하여금 그 욕망이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 록 물꼬를 다른 쪽으로 트고 있었을 테다. 그 대상이 바로 레비안느였고, 그 건 그녀가 레비앙과 꼭 닮았으되 여성이라는데 기인한 것이었다. 수 천년 동 안 인간이 쌓아놓은 관념에 의하면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못할 일종의 죄악처럼 여겨져 온 것이므로.... 이제 와서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지금 엘스헤른 자신이 직면한 상황과도 무관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입가에서 싸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아까의 회의 내내 언급되었던 그 <전쟁>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그것은 그 자신이 티아란 대공으로 공포되기 이전 에는 마치 유리벽 너머의 풍경처럼 그렇게 아득하게 느껴졌던 사실이었다. 그 러나 황제폐하의 입을 통해 티아란 대공으로 선포되는 순간부터 전쟁은 그에 게 죽음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창 밖을 넘실대는 저 어둠처럼.... 아니 그 배후에 있을 법한 어떤 것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삶을 빼곡히 채워왔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티아란에서 비밀리에 대공에 즉위하게 되었을 때부터 찬찬히 예견된 일이었다. 아직은 소 년이었던 그 시절에 그렇게 무겁고도 힘겨운 짐을 어깨에 지게 되었을 때부 터.... 싸한 냉소는 그간의 자신의 삶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 면 그렇게 미련스러울 데가 없었다. 레비앙을 대하던 자신의 모습도, 그리고 못내 가슴아파 하던 그 마음도.... 그렇게 서툴게 굴었던 모든 것들이.... 이 젠 다 부질 없는 것이다. 가지고 갈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 앞의 남 은 마지막 것들을 버릴 수야 없지. 많은 생각들 끝에 엘스헤른은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머리를 뒤로 젖혀 마차의 벽에 기대었다. 이렇게 심신이 지쳐버린 것은 그 길고 긴 회의 때문만은 아니다. 잠시의 휴식 시간에 레비앙을 만났던 것 때문도 아니다. 코끝에 맺히는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릿하고도 잠겨들 듯이 코끝이 아릿 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 눈가가 따스했다. 알 수 없는 자극 이 온 몸을 훑어 아린 느낌으로 다가왔다. 문득 엘스헤른은 뺨 위를 구르는 동그랗고 재빠른 자극에 놀라 눈을 떴다. 눈에서부터 시작되어 뺨을 지나 곧 장 옷섶으로 떨어져 톡...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이것은.... "눈물....인 거로구나." 자신에게서도 눈물이 난다는 사실이 엘스헤른은 못내 흥미로운 듯 피식 웃 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살며시 내리 그어져 어느 샌가 굳게 다물어진 입술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방울지어 흘러내리는 이 감정들이 무엇인지 엘 스헤른은 사뭇 궁금했다. ....레비앙을 향한 걸까? 아까, 같이 울어주지 못했 던 감정이 지금에서야 폭발하듯 굴러 떨어지는 것일까? 목에 메어와서인지 엘스헤른은 두어 차례 기침을 뱉어냈다. 그 기침으로 인 해 마음이 흔들러 버린 모양이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참아볼 수도 없을 만큼 속에서부터 뜨뜻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눈 앞을 흐리는 안개 같은 물방울 들은 어디서 샘솟는 건지 모르게 자꾸만 굴러 떨어져 깊은 심연을 향해 곤두 박질 쳤다. 이 생소한 감정은 기어코 꼭 다물려 떨리고 있던 그의 입술을 열리게 만들 었다. "미안해..... 레비앙..... 내가.... 나의 소중한 너를......" 에스트리온 성관에서의 분위기는 엘스헤른에겐 사뭇 무거웠다. 아버지를 통 해서 집안 식구들에게 미리 통보되었을 회의장에서의 일들이 아마도 지금 엘 스헤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눈빛을 흐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식사는 했니?" 평소 때와 다르게 가라앉은 듯한 어머니의 물음에 엘스헤른은 생긋 웃으면 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따로 저녁을 준비하게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는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뺨에 살풋 입을 맞추고 물러섰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엘스헤른에게는 어쩐지 다 보였다. 지금 여기 거실 을 감돌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만 해도 그랬다. 누군가가 이 긴장감에 작은 흠 집이라도 낸다면 아마 저들이 참고 있던 감정들은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올 게 다. 엘스헤른은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마중 나온 이 사람들을 보고는 대 충 상황을 짐작했다. 울었는지 아이린과 어머니는 눈이 발갛게 충혈 되어 있 었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으로 형님도 성관에 와 있었고, 아버지도 웬 일로 서재가 아닌 현관에서 모습을 뵐 수 있었다. 더더구나 제롬 녀석의 표정 이 가관이었다. 녀석이 저렇게 진지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줄기차게 서 있는 모습은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뺨에 찰랑거 리는 옅은 금발의 머리카락이 귀찮기라도 한 모양인지 그는 종시 머리칼을 쓸 어 넘기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엘스헤른은 녀석이 어째 어울리 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들을 대하면서 엘스헤른은 그냥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오늘만은 그 냥 일상과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내일부터 펼쳐질 많은 일들에 대 한 보상으로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지껏 누려 왔던 평범한 일상을 만끽하고 싶 었다. 물론 그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식구들은 거의 아무 말 없었고 심지어 먼 길을 달려온 형님조차도 아주 희미하나마 미소를 지어줄 뿐 뭐라고 섣불리 입 을 열지는 않았다. "회의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이만 가서 자려무나."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아버지의 따스한 말투가 엘스헤른에겐 묘한 이질감으 로 느껴졌다. 위해주는 마음인 걸까? 항시 자신을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만 어쩐지 아버지의 저 짧은 말이 뭉클한 감동이 되어 가슴에 맺혔다. 아버지 라는 존재는....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 그건 항 시 엄격하고 근엄하던 에스트리온 공작으로서의 면모가 아닌 한 아들의 진정 한 아버지로서의 면모였다. 엘스헤른은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목례를 했다. 아마도 뭔가 이야기를 듣고싶을 테지만 그들은 가볍 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는 엘스헤른을 고이 보내주었다. 그렇게 엘스헤른은 일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따스해진 가슴 한 구석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눈물 따위는 아까 쏟아버린 게 전부였고, 더 이상의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쫓아오는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면서 엘스 헤른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을 내딛었다. - TO BE CONTINUE - ==================================================================== 구렁구렁구렁.... 36편의 앞부분(마차 안에서의 엘스헤른)은 저도 알아듣지 못할 단어의 나열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처음 한글창을 띄우면서 또 고민한 것은.... "아아, 이번 편... 설마 대사가 전무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것이었답니다. 뭐, 다행스럽게도 대사가 좀 있군요. 콜록.; 언젠가 한 번 대사가 단 한마디 나오는 편이 있었던 기억이.... 아련.;; 이번 편... 왠 지 읽기 힘드시리라는 것 이해합니다. 내내 혼자서 주절거린 말들이라 두서도 없을뿐더러 저 역시 정신도 없군요..;; TT-TT (큰 눈물.;) 문득 글이란 것은 단어를 실로 해서 잦는 옷감과도 같은 게 아닐까 라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한 올 한 올 잘 잦지 않는다면 그리고, 옷감에 알맞은 실을 쓰지 않는다면 완성된 옷감은 형편없이 되어버리겠죠. 전 형편없는 옷감을 잣 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전편의 엘스헤른의 행동에 대해 찬반 논란이 많았었기 때문에 (콜 록.; 메모 창과 대화 방에 쇄도하는 질문들이라니.;;) 이번 편은 엘스헤른이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심리적 기재를 마련해보고자 했던 것이 목적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실패입니다.;; 우웃, 정말...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구렁구렁구렁. T-T 제 목도 <.....>이 뭡니까?! 우에엥~!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7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5 조회수: 422 [번 호] 10902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20일 00:10 Page : 1 / 13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76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7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7) 상념 "흐음......." 아직은 아니야.... 아직까지는 전쟁과는 상관없는 삶이야. 눈뜨는 순간부터 걱정해야 할 것은 나라의 일, 혹은 -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 그 얼토당토않 은 전쟁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방금 이렇게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의식이 돌아오면서부터 엘스헤른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안온한 아침이 눈 밖 세상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제 같은 심정으로 는, 다가올 아침이란 건 분명 그가 여지껏 맞이했었던 그 아침과는 완연히 다 를 것만 같았다. 이렇게 찬란하고도 따뜻한, 그 아스름한 공기의 미동을 다시 는 느낄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마도 직면한 모든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가느다랗게 뜬 눈을 통해 인식되는 저 아침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일까? 의식을 차 린 그는 저도 모르게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어떻게 방에 들어온 건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침대에 누워버린 것이 그의 의식의 마지막 자락이었다. 뭔가 길고 긴 꿈을 꾼 모양인지 잠을 자면서 도 잔 것 같지가 않았지만 이렇게 눈을 뜨고 보니 어김없이 아침이라는 것이 돌아와 있다. 꿈이라.... 어째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깊이 잠들지 못했나보다. 창에 맺히는 아침의 색이 저렇게 오렌지 즙과도 같은 맑은 빛깔에서 차츰 병아리 같은 햇노란 색으로 변해 가는 걸 보면, 지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식사에 참석해야 하고 이내 황궁에 가 봐야 할 시간이다. 오늘도 그 형식상의 길고 긴 회의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엘스헤른은 눈을 뜬 그 상태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손가락 끝 하나라도 까딱한다면 지금 이렇게 만끽하고 있는 마음의 평형이 깨어져버릴 것 같았다.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창가를 응시하며 엘스헤른은 다시 한 번 오늘의 아침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따위의 생 각은 하지도 않을 테지만 역시 마음 속에는 무언가 회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일렁거리는 맑은 빛의 알갱이들은 살풋 흔들리는 리넨의 하얀 레이스 커튼 자락의 움직임을 따라 동그랗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움직임은 흡 사 낙하하는 케시르니아의 꽃잎과도 같이 불규칙적인 도형을 그려냈다. 흩날 리는 케시르니아 꽃잎.... 아아, 제기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해냈 다. 그날의 레비안느.... 그렇게 그림 마냥 아름답던 그녀의 미소를.... 그러 고는 어김없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지. .....레비앙. 이렇게 힘들고 지치고 노곤한 것은, 그리고 이 아침이 여느 아침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레비앙 때문이었다. 전쟁 때문에 싱숭생숭해 할 마음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지 오래였다. 이미 차곡차곡 예견되어 왔던 사실 에 대해 다시 상념에 젖어들 만큼 엘스헤른 자신은 그렇게 어리지 않았다. 어 제 그리도 혼란스러웠던 건 다만 그 예견된 책임이라는 것의 무게가 의외로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옷을 둘렀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 의 시선이 사뭇 달라진 것도 결정적인 이유라면 이유겠지. 더더구나 레비앙의 그 반응은.... 엘스헤른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어제. 뭐랄까.... 모든 것이 꼬이다 못해 융합되어버린 거대한 넝쿨처럼 이리저리 뒤섞인 기분 이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자 신으로부터 시작해 평소와는 달리 그렇게 울고만 있었던 레비앙의 모습.... 엘스헤른은 가만히 누운 채로 마구잡이로 솟아오르는 의문과 생각들을 곱씹었 다. 어쩌면.... 레비앙에게 있어서는 눈 앞에서 냉랭히 서 있던 사람을 친구 아닌 대공으로 대했던 그 행동이....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아무리 친구 라고는 해도 그 신분차를 극복할 만큼의 확신을 주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자 신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레비앙이 보인 정당한 반응에 되려 화를 내고 기 분 나빠하며 울컥 치솟는 불같은 마음으로 모질게 대한 것은.... 진정 그 자 신인 것이다. 만일에.... 정말 만에 하나, 레비앙에게 진실된 이 마음을 내 비추었더라면 레비앙은 받아들여줬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이 쓰라린 고통을 손내 밀어 다독여 줄까?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이 심정을..... 어떻게든 받아줄 수 있을까? 레비앙은.....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을까? 섣부른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있을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보면서 일말 의 위안이나마 해 보자는 의도일 뿐.... 하지 못한 일, 그리고 하고 싶었던 일, 그 수많은 것들..... 그것들로 인해 그토록 마음이 괴로웠나보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책임이라는 단어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게 될 희미한 먼지가 되어버릴 것이므로.... 전쟁은 아무렇지 도 않을지 모르는데도 이렇게 마냥 슬픈 생각에 젖어드는 것은 아마도 그런 자질구레한 상념들 때문일 테다. 한낱 삶이란 그런 것인 모양이지. 문득 돌이 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야 비로소 후회로 가슴을 적시게 되는 것이다. 억지일지도 모른다. 전쟁으로 인한 뒤숭숭한 마음과 레비앙에게 그렇게 모 질게 대했던 자신의 마음을 애써 연결 지으려 하는 것은.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가슴은 냉정함을 잃고, 스스로의 제어를 잃어버린 채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야생마처럼 레비앙을 향해 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이 어 줍잖은 마음이 뭔지를 알아버린 이상에.... 그토록 애타게 마음을 불태우고 알지 못할 쾌감으로 야릇한 고통 속에 등을 떠밀던 그 어떤 것, 그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너무 늦어 버린 걸까? 이 마음을 깨달은 것이.... 역시 너무 늦어버려서 그래서 스스로 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매몰차게 레비앙을 몰아세운 걸까? .....그건 아니다. 이렇게 온 마음이 불붙은 듯 열렬히 레비앙 한 사람만을 향한다는 것 은 벌써 오래 전에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다만, 그것을 확실히 무어 라 일컫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감정이 돌파구를 찾지 못해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이다. .....물론, 바로 어 제, 마치 악몽이라도 꾸듯이 레비앙을 몰아세우던 그 자신의 모습이 어지러운 감정의 잘못된 분출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한다? 막상 그렇게 싸늘하게 대하긴 했어도 아무 것도 내키지 않는다. 어제를 곱씹어, 엘스헤른은 자신이 그렇게도 잔인한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신선 한 충격이랄까? 하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을 괴롭히는 후회에 반하여 알 수 없 는 쾌감이 밀려왔다. 어차피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그렇게 느닷없이 시작 하게 된 것이라도 이 채울 수 없는 욕구를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끝을 맺고 싶 었다. 일말의 후회 따위는 접어두는 게 좋겠지. 볼썽사납게 또 어제처럼 눈물 을 쏟지 않으려면..... 엘스헤른은 폐부의 남은 공기를 짜내듯 힘겹게 냉소를 흘렸다. 마음을 가다 듬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지만 어쩐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렇 게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바보 같은 상념 들 때문일까? 그렇게 모질게 자신을 몰아세워 레비앙을 냉대하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샤베트의 차갑고도 아찔한 느낌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아름 답고도 즐거웠던 과거의 수많은 추억들 때문일까? 엘스헤른은 자신으로부터 그 어떤 명확한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지금 자 신은 애매함과 모호함의 극치인.... 하나의 헝클어진 의식체에 지나지 않았 다. 그는 그 어떠한 존재감도 자신에게서 느낄 수 없었다. 숨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면 아마,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겠지. 똑똑똑.... 그런 그의 상념을 깨우듯 나무문을 두드리는 둔탁하고도 부드러운 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분명, 노크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엘스헤른은 들어오라는 둥의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까부터 왠지 목까지 차 오른 어떤 이물감 때문에 한 마디도 내 뱉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딸깍.... 아주 조심스럽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노크의 주인공은 아이린인 듯 싶다. 아니나다를까, 거의 발소리도 내지 않고 그 뽀얀 숙녀는 엘스헤른이 누워있는 침대 맡까지 다가왔다. "아, 일어나셨네요." 엘스헤른이 눈을 뜨고 있는 것을 확인한 아이린은 살짝 놀란 눈빛을 짓다 말고 생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제서야 엘스헤른은 입술을 달싹거려 몇 마디 내뱉었다. "어. 진즉에 일어났는데.... 만사가 귀찮아서 말야." 침전되는 앙금과도 같은 엘스헤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아이린은 고개를 갸 웃했다. 그러고 보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는 오라버 니가 왠지 심상치 않다. 아아, 역시.... 그 전쟁 때문인 걸까? .....하지만 그 생각으로 인해 괜스레 서글퍼지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아이린은 짐짓 커다란 연녹색의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그런 누이를 보 며 엘스헤른은 억지로 미소를 띄우면서 자신의 침대 맡을 톡톡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아봐." "...." 아이린은 엘스헤른이 시키는 대로 그의 침대 맡에 살풋 걸터앉았다. 연한 백록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가만히 누운 엘스헤른의 귓가에 들려왔다.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소리엔 어쩌면 푸른 바람결이라도 묻 어 나올 것만 같다. 엘스헤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린을 말끄러미 올려 보았다. "....위로하러 온 거야?" "아... 아니에요. 식사하러 오시라구...." 편하게 미소를 지어주는 사촌동생을 보며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달처럼 은은하고 새하얀 미소. 뭔가 묻고싶은 게 많을 텐데도 저렇게 하냥 배 려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걸 보면 아이린은 천사일지도 모른다. "배고프지 않아." 엘스헤른은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겐지 그렇게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아이린은 연녹색의 눈에 잔잔한 미소를 띄었다. 이렇게 오라버니를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어느 샌가 다시 시선을 돌려 창가에 맺히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잿빛 눈동자가 가라앉을 듯이 차분해 보였다. 밤새 괴로운 꿈이라도 꾼 걸까? 눈동자의 색깔 과 다를 바 없는 짙은 머리카락이 젖은 제비마냥 함초롬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이린은 문득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서늘하게 닿아오는 부드러운 촉감이 작은 저항감을 담아 풍성하게 느껴졌다. 손 끝에 부벼지는 실낱같은 감촉은, 그녀의 손길이 그 촉촉한 머리카락에서 떠날 때까 지 조심성 없는 간지러움으로 그녀의 차분한 마음에 묘한 파문을 던졌다. 그녀의 갑작스럽다고도 할 수 있는 손길에 놀랬는지 엘스헤른은 눈을 들어 시선을 아이린에게로 향했다. 엘스헤른과 눈길이 마주치자 아이린은 흠칫 손 을 거두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놀랬는지 아이린은 시선 둘 곳을 몰라 당황해 했고, 엘스헤른은 작고 힘없는 미소를 흘 렸다. 발그레한 입술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엘스헤른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 녀의 치마폭 위에 올려진 새하얀 손을 꼬옥 끌어 잡았다. "우리.... 결혼..... 할까?" - TO BE CONTINUE - ==================================================================== 뭔가, 어렵고도 어려운 소설책이 읽고싶어집니다. (그런 책 있다면 말해주 세요.) 저번 편부터 문체가 조금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신 분은 눈치 채셨을 거예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다구요. 구렁구렁. 어려운 책을 잃 고 싶은 건..... 그냥 단어 실력이나 시험해 볼까 하는....;; 알고 있는 단어들도 막상 글에 쓰려면 생각나지 않아 한참 사전을 뒤지곤 하는데 글 쓸 때 사전은 아무래도 필수인 듯 합니다. 그래야 중복되는 단어도 없애고, 의미가 불분명해 갸우뚱하는 일도 없어지고, 재밌는 표현들도 찾아볼 수 있고 하죠.^^;; 하지만.... 역시 만사가 귀찮아요. -_- 웬 일인지 요즘은 자주 어찔어찔해서 한참을 보고 있어도 뒤를 이을 문장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답니다. 그냥 어지러움에 멍....해지는 거죠. 배가 고파서 구런가? 갸웃. 아아, 그렇지 않아도 방금( 밤 12시를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 가서 곰탕에 밥 말아먹고 왔습니다. 콜록.;; 정말 배고픈 건 참을 수 없다구요. 원래 오늘 후기가 구렁구렁 해서 좀 길었습니다만,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일 상의 이야기나 하고 있습니다. 아아, 감잎 차를 두 병 마셨다는 소리는 안 썼 군요. 밤에 물 마시기를 좋아하는 저는, 물 대신에 비타민 C가 많다고 하는 감잎 차를 마시기로 작정하고 부엌에 가서 감잎 차를 가득 끓여뒀죠. 그리고 500mL 들이 병 두 개에 부어두고는 차게 식혀 뒀습니다.(이런 거 종종 해요. ^^;) 그러고는 저녁 8시부터 시작해서는 줄기차게 마시고 있었죠. 딱 10시가 되 니 두 병이 모두 끝나더군요. (아껴 마셨음.) 하지만 감잎 차를 마시면 나타 나는 최악의 증세.... 라는 것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장실(;;;)을 뻔질나게 드나들게 됩니다. 휴우..;; 또 장실 소식이 올까 두렵군요. 아아, 오늘도 겨우 한 편을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다들 엘스의 변한 모습 에 실망하신 모양인지 37편은 독촉 한 번 없이 올라가게 되는군요. TT-TT (폭 포 같은 눈물이라는 겁니다.) 다들 엘스가 싫어지신 건가요? 갸웃. 암튼, 다음 편에서 뵙죠. ^^;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8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6 조회수: 404 [번 호] 11055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22일 23:13 Page : 1 / 13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71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8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8) 후회. 놀란 걸까? 작은 떨림이 아이린의 손등 위에 살며시 감싸 얹힌 엘스헤른의 손에 느껴져 왔다. 아이린의 연록색 눈은 놀란 토끼마냥 동그란 모양으로 엘 스헤른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아이린의 촉촉한 분홍빛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탄식을 들으면서 엘스헤 른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왜? ....싫은 거야?" 순간 아이린의 청명하던 눈빛이 살풋 흔들렸다. 그녀는 엘스헤른의 눈을 물 끄러미 쳐다보며 지금 이 상황이 장난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려 했다. 장난이라 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사촌 오라버니가 너무나도 진지해 보였다. 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만큼.... 뭔가 괴로운 게 있는 걸까? 설마 그 아리땁던 분과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번엔 아무리 총명한 아이린이라 해도 그렇게 쉽게 엘스헤른의 눈 빛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불과 하루 사이였지만 오라버니는 예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스스로 그렇게 보이려 노력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 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너 조차도..... 내가 싫은 거니?" 씁쓸함이 함뿍 묻어나는 엘스헤른의 목소리에 아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였다.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모를 일이다. "그 누구도 오라버니를 싫어하지 않아요." ".....너도?" "예." 망설임 없는 아이린의 대답을 들으면서 엘스헤른은 입술에 싱긋 미소를 머 금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 아래 놓인 아이린의 손을 보드랍고 따스하게 매 만졌다. 하지만 막상 엘스헤른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양으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깊은 잿빛의 눈동자에 그늘이 깔리는 것을 보며 아이린은 한 층 더 걱정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싫지는 않은데.... 결혼은 안 되는 거니?" 무심히 내뱉는 엘스헤른의 말에 아이린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여 느 때와는 다르게 눈이 웃지 않고 있다. 그저 애써 입꼬리만 살풋 올리고 있 을 뿐이었다. 그 어색한 모습을 보며 엘스헤른은 자신이 짓궂게도 사촌 누이 를 괴롭히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되 받아 치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절 불행한 신부로 만들고 싶진 않으시겠죠?" ".....음?" 한참만에 아이린이 한 차분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엘스헤른은 눈꼬리를 올 리면서 되물었다. 차마 엘스헤른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던 모양인지 아이린은 아직까지 자신의 손 위에 머물러 있는 엘스헤른의 커다란 손으로 시선을 떨구 었다. 그녀는 작은 한숨과 함께 그다지 높지 않은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나 아닌 누군가가 이미 한가득 가슴 속에 차 있는 사람과는 결혼하고프지 않은 걸요? 그 마음 가득히 한 사람으로만 차있어서.... 나는 다가설 틈도 없을 거예요. 나를 향해 있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아이린은 평생을 같이 지낼 자신이 없어요. 그 눈은 나를 보고 있어도 마음 향하는 곳은 언제나 다른 곳일 텐데.... 그러면 아이린은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 나요?" 아이린의 말을 들은 엘스헤른은 "하하."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 고는 이내 재미있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어대더니 눈빛을 말똥거리며 총명한 사촌 누이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눈치채고 있었군." "......" 엘스헤른이 재미있어하는 반면에 아이린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는 눈빛을 지으며 두어 번 엘스헤른을 곁눈질하더니 곧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스헤른은 그런 아이린의 손을 다독거리면 서 넌지시 물었다. "그래..... 누굴 거 같아? 이 마음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말이야." "....." 아이린은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사촌 오라 버니에게 어떻게 비치리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오라버니의 표정에 그녀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크 게 한숨을 지었다. 이렇게 숨이라도 들이쉬지 않는다면 아마 그 슬픔에 좀먹 어 가슴은 한겨울 찬바람에 내던져진 작은 공처럼 오그라들고 말 것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엔 엘스헤른이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는 반듯이 누워서는 말끄러미 창만 쳐다보다가 곧 눈을 감아버렸다. 문득 침묵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아이린은 새삼 깨달았다. 그건 창 밖으로 부터 구를 듯이 맑은 톤의 새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서야 알게된 사실이었 다. 요염하게 비추어 드는 햇빛의 속살 사이로 새 소리가 날아다니는 아침... 그 아침의 포근함을 짓누르고 있는 이 침묵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무나 무겁고도 무거워서 심장을 옥죄고 있는 이 침묵을.... 하지만 그녀는 그 것을 깨뜨릴만한 어떤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까지 엘스헤른은 그녀 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지금은 그것만이 그와의 유일한 대화였다. 손등을 통해 느껴지는 이 온기가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지는 이유가 왜일까? 아무런 의미 없는 이 만지작거림이.... 어째서 이렇게 싸한 슬픔으로 다가오 는 걸까? 아이린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심정을 다독이느라 눈을 깜빡거렸다. 어차피 오라버니는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 않을 테니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슬픔에 못 이겨 울어버린다면 스스로도 볼썽사나울 게 틀림없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 엘스헤른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아이린은 문득 들려오는 말소리에 놀라 그를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그대로 눈을 감은 채였다. "봄꽃이 열 번도 더 피고 졌을 만큼 아주 오래.... 그렇게 오래된 일이라 종 종 잊고도 하는데..... 신년 인사를 위해 에스트리온 성관에 방문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그 눈꽃처럼 새하얀 얼굴을 한 아이가 있었어. 그때 처음 본 게로구나..... 라고 느낄 때에는 말야. 항상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 곤 해. .....난 왜 그때 좀 더 친근하게 굴어주지 못했던 걸까? 좀 더 부담 없이 굴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든 그토록 어색하게 나를 대하지는 않을 텐데.... 하찮은 후회가 샘솟는 거지..... 아마도 나는 그때 너무 어렸었나봐. 나에게 부여된 알량한 권위는 자랑삼아 이야기 할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게지.... 그 새하얗고 말없던 아이에게 심술궂게 대하기 위한 도구였는지도 모르고." 아이린은 엘스헤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흐릿한 목소리는 분명 무언가를 말 하고 싶어했다. 힘들고도 짙은 상념의 한 자락을 토해놓는 듯한 그 음성에 아 이린은 낮게 숨소리를 죽였다. 엘스헤른은 여전히 눈을 감고선 나직히 말을 이었다. "난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난 예의 바르게 짓궂은 녀석이었으니까..... 나 의 예의라는 것은 항상 그 녀석을 당황하게 만들곤 했지. 조금 더 커서까지 나는.... 그런 식으로 녀석을 괴롭혀 왔어.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거야. 그게 그 녀석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괴롭혀 온 거지.... 마음 속의 그 상처가 되려 나를 괴롭힐 독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가슴이 아픈 듯 엘스헤른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고요한 가운데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아스름한 공기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다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뿐인 아침인데 저 창으로 비쳐 들 어오는 햇살은 그의 서글픈 상념을 닮기라도 한 모양으로 아련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한숨을 내쉬고는 약간 톤을 높여 말했다. 이렇게 가라앉 아 버리다가는 침대 속으로 꺼져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말야.... 처음 만날 때, 나중에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리란 것을 전혀 모르고 시작하지.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러워야 하고, 더더욱 잘 돌봐 야만 하는 건데.... 난 어리석게도 그런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게 야." 무슨 말이든 내내 떠들어대면 그나마 마음이 편 할 것 같았는데.... 왜 이 러는지 모를 일이다. 왜 이렇게.... 말하다 말고 젖은 한숨이 나는지.... 그 리고 이렇게나 가슴이 아프고 이렇게나.... 보고 싶은 것인지.... "나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녀석은 나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 지. 절친한 친구라는 것은 그저 외면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몰라. 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여도.... 기실은 각자 다른 방향을 걸어가고 있었던 건지 도.... 그러다 마침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난 너무 많이 와버려서 이 젠 되돌아 갈 수조차 없게 된 후였지. 이제야 따라잡기엔 아득히 멀고도 먼 곳에 그 뒷모습만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어. 그래, 너무 멀었지. 너무나도 멀고, 난 되돌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리고.... .....불러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보니까 이제서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이 가슴속에 가득 들어 차서 그토록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것이 누군지를...." 격양되어 오르는 감정을 삭여 보려고 일부러 낮은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 지만 어쩐지 목이 싸하게 아파 오는 듯한 기분을 엘스헤른은 떨칠 수가 없었 다. 뭔가 꾸욱 차오르기라도 하는 듯 목이 아프고 코끝이 쌔큰했다. 그는 숨 결이 흐트러질 새라 얼른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바보라서 어떡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야..... 아주 길고도 오랜 시간 동안에 이렇게 가슴속에 맺혀 있는 것을..... 난 어떻게 주체를 할 수 가 없었던 게지. .....꿈에도 삼삼하게 밟히고..... 그렇게나 그리워 했는 데.... 왜 정작.... 자신은 몰랐던 걸까? 그러고는 아주 뒤늦게 서야 깨닫 고서.... 왜.....그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가다듬지 못한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언뜻 떨리는 것을 깨달은 아이린은 자 신도 모르게 촉촉히 젖고 있던 눈을 들어 오라버니를 살폈다. 창가를 향해 고 정시켜 놓은 엘스헤른의 시선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이야 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인지도 몰라. 잡을 수 없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 게 모질게 몰아세운 걸지도 모르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지도.... 헛된 몸짓일 뿐인데도.... 정말..... 이제는 어찌할 수조차 없는데도 말이야." 엘스헤른의 또렷한 눈매를 따라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다 못한 아이린은 오라버니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눈 앞을 흐리는 눈물 따위엔 신경 쓸 여념이 없었다. 가슴이 미어진다.... 라는 느낌을 그녀는 절 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일도 아닐 진데 이토록이나 마음이 아픈 걸 보면 저 가엾은 오라버니는 그 예리한 고통에 얼마나 마음이 베었을까? "......레비앙 님을 사랑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마음이 아픈 거죠? 전 쟁 같은 걸로 고민할 겨를도 없이.... 오로지 레비앙 님에 대한 생각 하나 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거죠?" 엘스헤른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동하듯 흔들리는 짙은 잿빛의 눈동자에는 차마 하지 못한 대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이린은 울음에 떨려오는 입술을 지긋이 깨문 채 그만 엘스헤른의 가슴에 엎드려 나직히 흐느 꼈다. 울지 않으려고 다독이던 마음 따윈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다만 아프고 아픈 의식을 치르듯 그렇게 엘스헤른에게 기대어 눈물 을 흘렸다. 오라버니가 참아야 하는 눈물을 대신 울어주기라도 하듯 아이린은 작은 어깨를 오열했다. 아침은 그렇게 차분히 젖어들었다. 살랑거리던 바람조 차 멎은 듯 그렇게 아름답던 아침의 전경에는 물기가 스몄다. - TO BE CONTINUE - ==================================================================== 살다 보니 대사가 이토록 많은 때도 있군요. 뭔가.... 횡설수설 하긴 했지 만 이번 편도 무사히 다 썼습니다. 끝맺음이 이상한 것은 쓰고 있는 저 스스 로가 너무나도 지루해서 얼릉 끝맺어버려 그런 거예요.; 콜록.; 아아~! 두통이 엄습해옵니다. TT-TT 이런 장면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아! 라 면서 외치고 있어요. 그나마 독촉해주시는 분들이 없었더라면 전 그대로 며칠 이고 손도 안 댔을지도 모르죠.; (네이시 님 매번 독촉 감사.^^ 혀니향기 님, 포켓몬5 님, 격려 메일 감사.^^ 그리고, 메이 님께도 메일 감사.^^ 흰매 양도 감사.^^ 아, 참. 사랑스러운 세츠나 군도 읽어줘서 감사.^^)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라 어제 무려 4시까지나 퍼질러 잤습니다. 쿨럭.; 새벽 4시냐고요? 아니죠.;; 오후 4시라구요. 동네 괭이들이 감히 내 방 앞에 서 싸움질을 벌이고 있는 소리에 짜증스레 눈을 떠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더군요. 아아, 오늘도 R & R을 올리지 않으면 저는 신용 없는 괭이가 되 버릴 듯 해서 부랴부랴 쓰고 있었답니다.(결국 퇴고도 안해보고 올리는군 요.;) 에고고고, 잡담조차도 지겨운 날이로군요. 암튼, 엘스의 결혼 이야기 때문 에 놀라셨던 분들, 안심하시고 다음 편을 읽어주세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9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7 조회수: 385 [번 호] 11285 / 12932 [등록일] 2000년 08월 27일 13:48 Page : 1 / 16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73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39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39) Liebes Leid 오라버니와의 대화로 식사시간을 놓쳐버린 아이린이었지만 굳이 이 시간에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벌써 시간은 아침 때를 훨 씬 넘어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고, 그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기도 새하얗게 맑아지고 있었다. 창밖 파란 하늘에 펼쳐진 구름은 시간을 좇아 빠르게 흘러 가고 그 투명한 하늘빛이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임을 말해주고 있 었다. 아, 어느 사이에 가을이 되어버린 걸까? 아직 날씨는 한여름이나 아침의 공 기나 가끔씩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혹은 늦은 저녁의 어둠 속에는 가을의 향 기가 함뿍 묻어져 나곤 했다. 예년 같았으면 반가이 맞이했을 가을이었지만 어쩐지 올해는 그 찬 기운이 씁쓸하기만 했다. 마치 머지않아 벌어지게 될 어 떤 일들에 대한 경고마냥 가끔 불어대는 그 바람결에 아이린은 가슴이 시렸 다. 아침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벨라시그네의 황궁으로 출근하던 오라 버니의 뒷모습이 아련한 잔상으로 그녀의 눈 앞에 삼삼 밟히고 있었다. 진정 으로 가슴아파 하는 그 싸한 눈빛 때문일까? 아무리 웃고 있어도 그 뒤의 젖 은 속마음이 모두 들여다보이는 건.... 긴 창이 하늘을 드리우며 늘어선 성관의 복도를 걷던 아이린은 문득 축 처 진 어깨를 바로 펴고 표정을 추스렸다. 이렇게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모습이 라니....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해도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그녀는 코르셋으로 조여진 허리에 힘을 주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면.... 제롬 녀석도 참 궁금해하고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식사시간에 누이와 형님이 나란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아이린은 자신의 부덕함을 나무라며 제롬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동생을 신경 쓰이게 하고도 상념에 쩔어 여태껏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니.... 이 시간이라면 승마를 나갔거나 아니면 어디 다른 곳에 있을 법도 한데.... 어쩐지 그녀는 지금 어린 동생의 방 쪽에 마음이 쏠렸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고 있는 성관의 복도는 길고도 한적했다. 한참을 걸어도 사람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성관이란 그런 곳인 모양이다. 아이린은 자꾸 만 자신의 상념을 자극하는 그 어떤 상황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 실은 무엇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상황을 그렇게 보도록 하고 있는 거겠지 만, 지금 그녀의 심정은 그랬다. 사람의 마음이란 진정 그렇다. 그 어떤 것이 라도 우선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고 말지.... 이토록 텅 빈 마음도 역시 생각하기 나름인 것을 한적한 복도를 탓으로 애써 정당화하려는 것을 보 면 그녀 자신도 예외는 아닌 듯 했다. 다시 젖은 듯한 한숨을 토해내기 전에 다행히도 아이린은 동생이 묵고 있는 방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짙은 흑갈색의 고풍스러운 문을 열기에 앞 서 그녀는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머뭇했다. 문을 열어 젖힐 순간 저도 모르 게 웃음을 머금으려하는 자신에 대한 일말의 자책감이 들어서였다. 아마도 영 특한 저 아이는 누이가 가식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뻔히 꿰뚫을 텐 데.... 아이린은 피식 쓴웃음을 흘리면서 멍하니 문을 주시했다. 무엇으로 인해 이 렇게 마음이 쓰라린 것일까? 그토록 다정하고도 친절하던 오라버니가 이제 얼 마 지나지 않아 남쪽의 티아란으로 가버릴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소중한 오라버니가 티아란이라는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곧장 프랑스로 떠나 기 약 없는 전쟁의 길에 오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바보인 거야. 왜 슬픈 지도 모르고 이렇게 가슴앓이라니...." 그녀는 나직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딸깍 소리를 내며 문은 약간의 저항감을 싣고 열렸다. 남향이라 햇살이 한가득 차 오르는 방의 전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은 마치 갓 구운 방의 속살처럼 방 안을 온통 뽀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따스 하고도 나른한 공기에 취한 듯 밝은 금발의 소년이 문득 멍한 시선을 하고 이 쪽으로 돌아보았다. "누나...." "아.... 역시 방에 있었구나." 아이린은 살풋 웃음을 지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억지로 웃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동생 앞에서는 여지없이 가식이나마 이런 미소를 짓는 걸로 봐서 역시 누나의 동생에 대한 배려는 지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아이린은 씁쓸한 마음에 어정쩡한 표정을 거두며 제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키가 말 쑥하게 큰 소년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누이를 위해 의자를 당겨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제롬이 앉아 있었던 맞은 편으로 가서 다소곳하게 앉은 아이 린은 그 사이에 무슨 생각에라도 빠진 겐지 멍하니 서 있는 동생의 손을 다독 여 얼른 안도록 권했다. "앉으렴.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앉아서도 마주볼 수 있었을 테지만 어느새 꼬마 제롬이 너무 자라버려서 누나는 올려다보고 있기가 힘이 든단다." "아.... 응." 제롬은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 했고, 아이린은 그런 그가 사뭇 염려스러웠 으나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다만 생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제롬에게 넌지 시 말을 걸었다. "그렇게 멍해 있다니...... 역시 영국에 두고 온 애인이 그립기라도 한 모양 이로구나?" 누님의 말에 제롬은 넋을 놓고 있다 말고 느닷없이 정신이라도 든 모양으로 튀어 오를 듯이 화들짝 놀랬다. "에에?! 누, 누나, 내가 애인이 어디 있어?!" 비록 제롬이 과민반응을 나타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이린은 그다지 캐묻지 는 않았다. 그냥 작은 미소를 띄우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첫사랑이 멀지 않은 근처에 있는데, 바다 건너 먼 곳의 애인이 생각날 리가 있겠니? 그래서 기다리는 여인이란 불행하다는 거지." 평소의 자신과 매한가지로 능글하게 구는 아이린의 말에 예전 같았으면 한 바탕 난장을 부려서라도 반박을 했을 터나, 제롬은 그냥 조용히 눈웃음만 지 었다. 그다지 날뛰고싶은 심정도 아니었을 뿐더러 누님이 첫사랑 운운 하니까 어쩐지 역시나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레비앙이 생각나 가슴 한 구석이 저릿 한 것이었다. 그는 숨결을 내뿜어 앞으로 쏠리는 머리카락을 치우고는 어렵사 리 입을 열었다. "형님은..... 좀 어때?" 물론 동생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아이린은 그 무겁디무거운 물음에 작게 대답을 했다. "음.... 뭐, 그냥 그래." 차마 그녀가 아침 녘에 엘스헤른이 아픈 마음에 눈물을 떨구었더라.... 라 는 이야기를 제롬에게 소상히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착한 동생이 자신이 세운 계획 같은 걸로 자책을 할까하는 우려에서였다. 사실 제롬으로서는, 레비앙이 자신의 첫사랑인 그 소녀였더라는 것 따위는 그녀를 만나자 마자 눈치챈 일일 테고, 제 감정들을 몰라 전전긍긍하는 이 가련한(?) 사람들을 엮어주자.... 고 시작한 일이 예상치 못한 사건의 시작과 함께 이렇게 되어버린 만큼, 지금 엘스헤른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명 괜스레 마음 아파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누님의 동정 어린 눈길을 보며 제롬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 를 떨구며 아이린에게 힘없이 물었다. "역시 전쟁 때문이 아닌 거지....?" "음..." "...." "그런 걸로 괴로워 할 사람 아닌 거 알잖아." 그렇지. 형님은.... 일이라면 언제나 냉정하게 처리하던 사람이니까.... 어 차피 전쟁이라는 것도 - 물론 목숨을 내던지러 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에게는 그저 일일 뿐일 테니 오히려 차분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어 젯밤 현관을 들어섰을 때 그 초췌해 보이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일 때문이 라면.... 그런 눈빛을 짓지는 않았을 테다. "....레비앙 때문인 거지? 그렇게 흔들리는 건...." 알고 있는 일이지만 제롬은 다시 한 번 허공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특별히 누님에게 묻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일종의 확인이었다. 아무도 대답 없 다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스스로가 그렇게 인식해 버렸 으니까..... "응...." 하지만 친절한 누이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동생의 물음에 대답을 해 주었 다. 비록 한숨과 뒤섞인 대답이었다고는 하나 제롬은 그런 누이의 목소리에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마..... 레비앙 님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 아. 오라버니 말씀으로는 자신이 매정하게 굴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시던 데...." "무슨 일이란 건 언제나 있어왔잖아. 언제나 만나면....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인데. 형님이 레비앙에게 매정하게 굴었다는 것은...." 제롬은 잠시 생각하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랑하고 있다고 깨달아 버린 거겠지. 그래서 혼자서 힘들어하는 거야. 그런 거지?" ".....응." "바보같이.... 레비앙이.... 자신이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라고 생각하고는 내내 마음 졸여 하고 있을 거야. 어쩔 수 없는 마음에 들뜨더라도 형님은 항상 현실을 보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했다고 해도 그 렇게 비뚤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거야. 스스로를 괴롭혀 가면서도 아닌 척 웃음을 짓겠지. 돌아서서는 그렇게 괴로운 눈빛을 지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던 제롬의 목소리가 차츰 격해지고 있었다. 아이린 은 손을 내밀어 어느새 힘이 꽉 들어가 있는 제롬의 손을 다독여 잡았다. 하 지만 제롬은 그런 누나의 손을 떨궈 내듯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길! 나 말해 버릴래. 레비앙이 레비안느라고. 그러니 가서 사랑한다고 말 하라고! 그렇게 아무 말 못하고선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제롬." 고개를 들어 제롬을 응시하고 있던 아이린의 눈에는 어느새 맑게 눈물이 글 썽거리고 있었다. 그 옅은 장미 잎새 같은 연록색의 눈동자에 물빛이 번지는 것을 보며 제롬은 자신의 눈 앞도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제 롬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눈을 크게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바보같이 그게 뭐야! 사랑한다면서.... 사랑한다면서 왜 말하지 못해? 그런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지위라면 다 벗어버리라고 그래. 차라리 도망가 버리라고 그래! 이게 다 뭐야! 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을 계획하고선 즐 거워했던 거야. 그런 따위의 일로 누님까지 이곳에 오게 하고.... 저 바보 같은 형님은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데만 해도 장장 10년이 걸렸는데! 아마 절대로 말하지 못할 걸? 지금 같아서는 절대로 그 심정 같은 건 입밖에도 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해주어야 해. .....고백 해도 된다구.... 말해주어야 해." "제롬.... 그러지 마." "마음껏 외치란 말이야. 그렇게 속으로 꾹꾹 앓아 있지만 말고!! 사랑한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게 뭐가 어려워서..... 뭐가....." 제롬은 쓰러지듯 탁자에 몸을 쏠아 두 팔로 지탱했다. 눈물 따위는 누님에 게라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가득 숙인 채였다. 하지만 괘씸한 물방울들 은 눈으로부터 떨어져내려 하얀 테이블 시트 위로 곤두박질쳐 머리를 막곤 했 다. 작고 둔탁한 그 소리를 누님이 못 들었을 리 없다. 저렇게 측은해 하는 눈빛으로 내내 바라보고 있는데..... 곧 그런 제롬에게 아이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마, 제롬.... 아직도 모르겠어? 이젠 우리가 손 쓸 수 있는 일이 아 니야. 오라버니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깨달아야 해." ....누님의 말이 맞다. 이제는 옆에서 간섭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일이 되 어버린 거다. 어떻게 되든 간에 형님이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모처럼 알게된 그 감정 따위도 아무 소용없어질지 모른다. "하아...." 제롬은 한껏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일이 자신으로 인해 더더욱 크게 부풀려진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였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을 들고는 주먹으로 거칠게 눈가를 훔쳐냈다. 어느새 아이린이 손수건을 건네고 있었으나 제롬은 고개를 가로 저 였다. 대신 누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애써 창 밖에 눈길을 두었다. - TO BE CONTINUE - ==================================================================== 기분이 마구 구리고 있는(?) 중입니다. 음, 이래저래 몸도 안 좋고, 편두통 도 심해지고, 짜증이 샘솟고 있어요. (글을 안 쓰고 있었던 것도 어쩌면.;;) 뭐, 이럴 땐 일찍 자는 것이 장땡이지만 낮에 많이 자서 잠도 안 옵니다. 여 러모로 괴롭군요. 뭔지는 몰라도, 뭔가.... 힘들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 뭐 가 힘든 건지는 몰라도 힘들어요. 뭔지 모르니까 더 힘들게 느껴지는 걸 수 도... 그런 거겠죠. 원인을 안다면야 원인 제거 해버리면 그만일 텐데. 억지 로 버티고 있는 기분인 거 있죠. 힘들 때 붙들어 줄 사람이 없다.... 라고 한 탄하다 보면 여지없이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는 거 같아 부끄럽습니다. 애써 밝은 척이라는 것에 익숙해진 펠티라서 항상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 어도 혼자 있을 때는 이렇게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용돈 타면 아횬 양이랑 시내 가서 맛난 거 먹고 실컷 노래나 부르다 와야겠 어요. (요즘 제 우울증에 최고의 약발.) 그러고 보니 용돈이 내일 저녁! 26일 이나 되어야 시내에 가겠군요. -_- 그때까지는 역시 우울과 가난에 휩싸여 괴 로운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인가요! TT-TT (이 후기를 썼을 당시가 24일 밤인 겁니다.) 비탈리의 샤콘느를 듣고 있습니다. 우울할 때 듣는 우울한 음악이죠. 뭐, 두통이 심할 때면 모차르트의 장송곡을 듣곤 합니다만, 장송곡을 듣다 보면 어쩐지 눈물이 나버려서....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겐을 위한 아다지오도 마 찬가지예요.) 암튼, 우울할 땐 우울한 음악도 좋답니다. 하늘이 깨질 듯이 푸 르른 날이면 파헬벨의 캐논(피아노 말고 관현악)을 듣는 게 제 취향이고 말이 죠. 레스피기의 옛 춤곡과 아리아를 들으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들어 서 요즘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쿨럭.... 대체로는 어두운 톤의 음악이나 아니 면 간접모방진행의 음악을 좋아해요.(비발디를 좋아하는 이유도 어쩌면....) 아, 참. 독촉에 여념이 없으신 네이시 님께 감사를... TT-TT 네이시 님이 안 계셨더라면 분명 펠티는 뼈빠지게(?) 놀고 있었을 거예요. 훌쩍. 아아~! 또 구렁거리고 있었군요. 이 넘의 구렁거림은 언제쯤 멎을 건지 원...; 아, 밑의 말꼬리는 문득 수첩 한 켠에 적어놓아져 있던 것을 찾아내서 옮겨본 것이니 괘념치 마세요.; <생명에의 갈증에 허덕이는 내 심장에 쐐기를 박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안 식의 키스를 약속해 주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8 조회수: 387 [번 호] 11553 / 12932 [등록일] 2000년 09월 02일 01:19 Page : 1 / 16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46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0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0) Like.... 한줄기의 섬광 같은 고통이 심장을 관통해 지나갔다. 예리하게 저며드는 듯 한 아픔은 그의 마음을 좀먹고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 다. 하지만 그 아픔이 뭔지 레비앙은 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벌써 이틀 째였다. 이렇게 자리에 누운 채 황궁에 나가지 않은 것이.... 폐 하께는 가벼운 감기라 글을 올렸고, 자상하신 그분은 아무리 사소한 병이더라 도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집에서 푹 쉬고 있으라고 친필 편지까지 보내주셨 다. 그 편지를 읽으며 감격해하고 잠시 자리에 누웠던 것이 어젯밤의 일. 그 러고는 여지껏 열에 들떠 비몽사몽간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반은 꿈에 잠겨 있었던 그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으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그저 눈을 감았다 뜬 그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십 년이라는 세월은 시간을 자락 자락 접어 커다란 상자 속에 차곡차곡 넣어둔 듯 길지만 어제 하루의 일인 양 짧게도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레비앙은 천천히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들이 모두 아지랑이처럼 부드럽게 왜곡되어 보였다.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아서일까? 아니 면 아까 의사가 다녀가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말 지독한 감기에라도 든 걸 까? 이 한여름에! 이유야 어떻든 그는 어지러움에 다시금 눈을 감아버렸다. 뭐, 눈을 감으나 뜨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잔상이 떠오르는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차가운 눈꽃 같은 엘스헤른의 미소.... 그 싸한 웃음이 마치 가까이 닿을 듯이 선명 하게 떠올랐다. 그러고는 여지없이 숨막힐 듯한 아릿한 통증이 뒤따르는 것이 었다. "쿨룩...." 레비앙은 가슴 녘의 잠옷 깃을 움켜쥐며 힘겹게 기침을 뱉어내었다.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마귀 할멈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기침 소리에 그는 얼 핏 웃음을 지었으나 어느새 그 웃음은 한숨으로 바뀌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깨어 있을 때도, 자면서도 내내 울고 있었 는데.... 괜찮을 듯 싶다가도 문득 엘스를 생각하기만 하면 그렇게 눈시울이 따뜻해졌다. 그건.... 엘스헤른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랭함 때문인 걸까? 뭐, 이유가 없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엘스헤른은 많이 실망했을 테고, 어쩌면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그 일로 내내 사과도 하지 못한 채 ..... 그렇게 엘스를 다시 만나다니... 하지만 울었던 건 비단 그런 엘스헤른의 차가움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 다. 그의 그 지친 모습에 괜스레 속상해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엘스헤 른이 그렇게 초췌한 이유가 다만 전쟁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친구 같지 도 않은 자신(레비앙)인 것 같기도 해서. 그래서 너무나 미안하고 또..... 슬 펐었는지도..... 더 이상은 예전 같지 않으리란 것을 말하던 그의 입술이 그토록 싸늘한 미 소를 띄고 있었는데도 단 한 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모습이 눈 물겹도록 아름다워서였던 것 같다. 뽀샤샤한 햇살에 어우러진 얼어붙을 듯 차 가운 눈동자와 절도 있는 그 귀족적인 자태. 그는 그렇게 침범할 수 없는 영 역에 서 있는 듯 고고한 아름다움을 내 비추고 있었다. 이제는 친구라 일컬을 수 없으리만큼 높고도 신성한 곳에 자리한 사람.... ".....엘스....." 그 앞에서는 다시 못 부를 이름이지만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리 만큼 그리웠 다. 그러고 보면 그 이름을 단 한 번도 따스하게 불러준 기억이 없는 것 같 다. 언제나 친절하고 고맙게 굴던 그에게.... 왜 이름조차 따스하게 불러주지 못했던 걸까? 그러면서도.... 항상 엘스에게 바라기만 했던 건 자신이었 지.... 언제나 그에게 짜증부리고, 화만 내고.... 그래도 늘 웃어주던 친구가 그였는데.... 그 어떤 투정도 받아줄 듯이 굴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선 한 웃음을 지을 줄 알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눈물겹고.... 따스하 게.... 그렇게 포근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뒤늦게서야 후회가 되는 걸까? 왜.... 그 모든 것이..... 그때는 그렇게 외면이라도 해버린 듯 모르다 가.... 지금에서야 이렇게 가슴을 적시는 아픔이 되어 가라앉는 것일까? 그토록 그와의 추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쳤었는데 그 추억들이 지금에 와서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이라니.... 단 하나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 그 따스한 어릴 적의 추억들.... ".....바보는 나였어." 쓴웃음이 껄끄럽게 그의 입술을 감돌았다. 정말 바보같이 군 것은 자신이었 는지도 모른다. 쓸 데 없이 자존심만 앞세우고 끝없이 자신을 무장하고는 절 대로 남이 들여다보지 못하게.... 그런 바보짓을 하고 있었던 그에게 마음을 열라고 속삭여 준 사람이 바로 엘스헤른이었는데.... 차가운 마음의 장벽을 녹일 수 있도록 항상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던 사람이 그였는데.... "엘스는..... 좋은 친구인데 말야..... 난....." 레비앙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쩐지 가득 가라 앉아버리는 기분이라 가 슴이 답답했다. 이게 무슨 추태일까? 아무리 혼자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넋을 잃고 중얼거리고 있다니.... 눈물 어리는 눈을 꼬옥 감은 그는 실타래를 풀어 내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에게.....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어. 좋은 친구라고..... 그 렇다고 한 번도 이야기 해 주지 않았어..... 말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어버리기 전에.... 이야기 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게.... 그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준 소중한 사람인데.... 잃 고 나니까 정말 눈물겹게 보고싶은.... 그리운 사람인데.....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는데...." ....이렇게 가슴이 시리도록....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걸까?.... 진정 그런 걸까?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 한 수많은 나날들을 그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던 걸까? 진정으로 그랬던 걸까? 그건 진심이었을까? "후훗....." 문득 그의 입술에서는 옅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 토록이나 얄밉던 녀석인데 막상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라니! .... 정작은 좋아했노라고...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친구였노라고. 자신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은 레비앙은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이불을 끌 어당겨 다독였다. 머리카락이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들려왔다. 그는 베개의 하얀 리넨 시트 위며, 그의 시야를 잔뜩 붉게 어지럽히는 머리카 락을 귀 너머로 쓸어 넘기고는 한가득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잠이라 도 들어버렸으면. 뭐, 지금 심정은 그랬다. 악몽을 꾸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잡 념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잠자기는 글렀는지 문 밖으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는 알지 못할 설레임에 얼핏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베개로 힘없이 곤두박질 쳐버렸다. 엘스가 여기에 올 리 없지. 이제 다시는 오고싶지도 않을 곳에 얼 굴을 내비칠 이유가 없는데.... 그가 피식 웃음을 지을 즈음,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레비앙."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 엘스헤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소유자.... 레 비앙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푸른 눈동자에 한가득 미소를 띄운 해사한 금발의 청년이 서 있었다. 레비앙은 애써 미소를 띄우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 아프다고 아침 내내 집사 할아범이 난리를 떨어대더니 결국 그쪽까지 소 문이 뻗쳤나 보네? .....문병이라도 온 거야? 리하르트." "음. 안 그래도 소식 듣고 막 달려오는 길이야." 리하르트는 따스한 미소를 실어 정중한 목례를 하고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걱정스러움을 해사한 웃음 속에 감추면서 레비앙의 침 대 맡으로 다가갔다. 좀 어떠냐는 안부와 함께 그는 레비앙의 이마를 향해 손 을 내밀었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하얀 손이 자 신의 뺨을 향해 다가오자 레비앙은 문득 그 손을 붙들어 내렸다. "괜찮아. 가벼운 감기래." 리하르트는 레비앙의 행동에 다소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웃으면서 고 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의자를 가져다가 레비앙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감기라기 보다 어쩐지 좀 힘들어 보이는 걸?" 무심히 말한 그의 말에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 보니.... 내 말이 맞는 모양이로군." ".....내가 힘들 게 뭐가 있다구...." 레비앙은 작은 웃음과 함께 넌지시 말 끝을 얼버무렸다. 힘들다니.... 그냥 좀 괴롭고 정신이 산만할 뿐인데.... 가끔씩 엘스에 대해서 떠오를 때만 아주 조금 심란할 뿐인데.... 하지만 리하르트는 뭔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파르스름한 예쁜 눈동자 로 레비앙을 찬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다 말고 마치 혼 잣말처럼 나직히 중얼거렸다. "힘들 것이 전혀 없을 리가 없지..... 이즈음에 내내 자신도 모르게 힘들어 하다가 이제서야 증상이 나타나는 거겠지." ".....?" 과연 리하르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힘들 일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봐 도 없었는데.... 레비앙은 괜스러운 불안과 함께 아침 안개처럼 슬금슬금 차 오르는 야릇한 의문을 다독여 삼키고는 리하르트에게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잠잠히 입다물고 있었다. 그의 그런 눈빛에 리하르트는 조금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 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뭘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인 줄 알이야 이야길 하지." 아직 얼떨떨해하고 있는 레비앙을 보며 리하르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가, 이내 곧 언제나와 같은 미소 짓는 표정을 되돌 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듯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싱긋이 입꼬리를 그러 올렸다. ".....너나 그 분이나.... 후훗.... 정말 닮았지. 그게 언제나 두려웠었는 데....." ".....음? 누구?" "아, 아니야. 그 말이 아니고.... 그냥 네가 어쩌고 있나 싶어서 보러 온 것 이었어." "음...." 리하르트의 알 수 없는 말에 레비앙은 잠시 의문을 가졌다가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한가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다른 생각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리하르트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 치 반은 바보가 되어버린 듯 아른아른한 것이 도통 생각나지가 않았다. ".....고마워. 와줘서." 마치 입에 발린 말처럼 레비앙은 리하르트를 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입에 발린 말 같다라고 생각 한 것은 스스로가 그 말을 하고 난 후였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이라 그런지 그런 상념도 아주 잠시였다. 아까 정말 잠깐이 었지만, 문 밖에서 발소리를 내던 방문자가 엘스헤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던 찰나에, 만일 정말로 저 사람이 엘스헤른이라면 앞 뒤 가릴 것 없이 눈 물부터 쏟을 만큼 고마울 거라고 여겼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렇게 문병까 지 와 준 리하르트에겐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확인 시켜주기라도 하듯 리하르트는 여전히 미소 띈 얼굴로 무심히 중얼거렸 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오히려 내 쪽이 더 고맙군.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순간 레비앙은 가슴이 뜨 끔해서는 얼른 뭔가 변명할 거리를 찾았다. "아..... 그건..... 굳이 그런 게 아니라....." "혹시나.... 내가 부담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해봤어. 이래저래 마음 쓰이는 곳도 많을 텐데 말야. ....곧 약혼식도 어쩌면 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리하르트는 문득 아주 오래된 생각을 털어놓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조금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변명의 소지를 잃어버린 레비앙은 멍하니 그런 리하 르트를 주시했다. 과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 TO BE CONTINUE - ==================================================================== 비발디의 <두 대의 만돌린을 위한 협주곡 G장조, RV 532>를 듣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좀 경망스러운 분위기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습니다만, 2악장 의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 너무 마음에 들어버렸습니다. (뭐, 펠티가 고등학교 때라지요.) 당시 친구 동 모(이름이 그란이라고 밝힐 수 없음)양과 함께 저녁 시간 강당에서 피아노로 치곤 했던 곡입니다. 뭐, 악보가 없었으니 저희로서 야 정확한 연주법을 알 수 없었던 데다가 원래 만돌린 곡을 피아노로 쳤으니 뭐 얼렁뚱땅 청음편곡의 실력을 발휘한 셈이죠. 듣고 있으면 어느새 녹녹하게 젖어들 듯이 슬퍼져 버리는 곡이라 요즘 레비 앙의 기분을 쓸 때 즐겨듣고 있답니다. 차분하고 아늑하고 따스한 슬픔이 마 음에 스며들죠. (기왕 들으실 거면 만돌린으로 연주된 원곡보다는 로메로스 가족이 연주한 기타 편곡 버전을 들어보시길....) 펠티가 비발디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쩐지 음 한 올 한 올에 숨길 수 없는 열정이 묻어있는 거 같아서예요. (라고 말하면 어쩐지 좀 거창해 보이지만 뭐, 들었을 때 심장이 열렬히 두근거리는 현상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암튼, 비발디 음악에는 심정을 울렁이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서 참 좋답니 다. 중학생 시절엔 <합주 협주곡 - 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 6번 a 단조 RV 356>의 1악장을 듣고 울기도(?) 했었지만 워낙에 유명한 곡이라 요즘은 감 흥이 좀 덜합니다. 차라리 3악장 쪽이 더 멋지죠. 그 예리한 감동이 가슴을 저며내는 기분! 주제의 간접모방 하행진행 부분에서는 가슴이 울렁울렁~! 음 이 착착 떨어져 내리듯이 마음도 착 내리 깔리는 기분이 들죠. 뭐, 주제가 멋 진 곡이었습니다. 원래 단조곡을 좋아하는 펠티지만 비발디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의 단조곡 이 너무나도 멋져요~! >_라는 것에 충실한 곡이랄까요! 비탈리의 <샤콘느>가 비애와 좌절과 절망에 찌들대로 찌든 분위기의 곡이라면, 비발디의 빠른 단조곡은 슬픔보다 는 오히려 생동감과 생명력이 넘치고 있죠. <합주 협주곡 - 조화의 영감 10번 b단조 RV 580>의 경우가 여실히 그러하답니다. 뭐, 제일 처음 이야기 했던 g 장조의 2악장(은 단조곡임)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요. 하긴, 곰곰 생각해보면 비발디 곡 중에도 암울의 극치인 곡이 없지는 않네요.(제목도 잊은 걸 보면 그다지 관심은 없었던 듯) 바흐에 비하자면 비발디는 어쩐지 좀 허무한 듯한 냄새가 물씬 풍기곤 하 죠. (망구 제 생각입니다.;) 뭐, 사제였다가 쫓겨난 일도 있을뿐더러, 여자 관계가 복잡했다던 괴소문(?)도 있던데 제가 그런 거 까지는 알 리 없고, 암 튼,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기에 "이 사람, 혹여 열심히 살아가던 와중에 도 사는 게 귀찮다거나 혹은 세상의 일에 닳아 가는 자신의 모습에 염증을 느 끼곤 하지 않았던 걸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답니다. 그러고 보면 구빈원에 서 고아 여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곤 했다던데 음악 선생을 했을 빨강머 리칼의 비발디의 이미지를 한 번씩 떠올려보면 재밌기도 해요.^^ 흠냐..... 휘청휘청.... 이번 편은 퇴고도 제대로 못하고 올립니다. 훌쩍. 허접해도 이해해 주세요. 훌쩍훌쩍. 컨디션 최악의 날입니다. 훌쩍. 괭이꼬리// 우녕자 오프 차 서울 갑니다. 생긋.^^ 또 며칠 못 올릴 듯.;; 하지만 열심히 기다려 주시고 독촉해주시 는 분들 덕에 펠티는 또 근근히 쓴답니다. 생긋생긋.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1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0-29 조회수: 419 [번 호] 11758 / 12932 [등록일] 2000년 09월 07일 00:32 Page : 1 / 13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76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1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1) 보고 싶어. "너 뭔가 나에게 하고싶은 말 같은 거 없어? 문득 그렇게 묻는 리하르트의 말에 레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할 말이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도 그게 무언지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레비앙은 그저 긍정의 말만 던져 놓고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밖에서 들려 오는 모든 소리가 투명하게 느껴질 만큼 그들 사이는 잠잠했다. 리하르트는 레비앙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했고 레비앙은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한 참만에 레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 옅은 웃음을 지었다. "....뭔가 말할 게 있는데, 생각이 안 나." "음...." 레비앙의 말에 리하르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물끄러미 레 비앙의 초록빛 눈을 응시했다. "....생각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좀 곤란한 거겠지." "무슨....말이야?" "글쎄. 그냥 그렇다고 짐작해 보는 거야. 어쩐지 네 마음이 한가득 들여다보 여서 네가 장차 무슨 말을 할거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져. 너는 의식조차 못할 정도로 다른 곳에 마음이 향해 있는 데.... 나는 그런 너를 좇기가 버거워. 어느 새인가 훌쩍 물러서 버리는 너 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레비앙은 애써 손을 내밀어 리하르트의 손을 다독여 잡았다. 리하르트가 한 말이 어쩐지 가슴을 뜨끔하게 하긴 했지만 그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가로 저 었다. 문득 내 진심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한가득 아프고, 그래서 뭔가 깊이 고민하고 싶 지가 않았다. "물러서다니.... 당치도 않아. 괜한 걱정을 하고 있잖아?" ".....진심이야?" 리하르트가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묻자 레비앙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 다. 뭔가 긍정해야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그렇다>라는 대답을 해버리면 왠지 마음이 아플 것만 같았다. 레비앙은 리하르트에게서 손을 거두면서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을 가득 찬 공기가 자신을 무섭게 짓눌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 단 공기뿐만이 아니라 지금 리하르트와의 이 분위기조차도 그를 가득 불편하 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리 길지 않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속되고 있 는 침묵이 레비앙에겐 너무나도 무게감 있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마. 레비앙." 간만에 입을 연 리하르트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뭘 곤란해하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야? ....그렇게도 자신의 마 음을 모르면서 그런 표정이라니...." "....내가 ....곤란해하고 있어?" "훗.... 거울이라도 가져다줄까?" "....." 레비앙은 곧 입을 다물며 시선을 떨구었다. 오늘따라 리하르트가 참 이상했 다. 뭔가 말을 할 듯 할 듯 하면서도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내용인 모양이다. 그런데다가 어쩌면 무척이나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리하르트.... 너 역시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거지?" "....." 리하르트는 대답 대신 쌉싸름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레비앙에게서 눈길 을 돌려 한동안 창 밖을 쳐다보고 있더니 이번에 피식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말할 듯이 입을 열었다가 그저 한숨만 내쉬는 그를 보며 레비앙은 안아서 다 독여 주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리하르트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어느 순간에 그 생각에 제어를 가하는 어떤 생각이 자리잡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엘스가 생각나서 섣불리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레비앙 역 시 가득 무거워진 마음에 한숨을 지었다. 그 한숨 소리에 리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거 알아? 요즈음은 말야... 나, 종종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곤 해. 아주 몹쓸 생각이지.... 하지만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까 그다지 죄책감은 들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져보는 거야. 그러고는 날 마다 그를 죽여보는 생각을 해.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 어떻게 죽여버리면 그로 인해 불편하고 어지러운 내 마음에 평온을 얻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죽이면 이 가증스러운 내 질투심을 함께 매장시킬 수 있을까." ".....리하르트." 레비앙이 살풋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부르자 리하르트는 그저 입꼬리를 올 린 채 말을 이었다. "불순한 마음이라는 거 알아. 그렇지만.... 하루에도 수 십 번 내 마음 속에 서 그를 죽여.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보지 않는 너의 그 시선을 견딜 수가 없으니까. 마음 속에서라지만 죽어서 싸늘한 시체가 된 그의 모습을 봐야만, 나는 네가 나와 약혼할.... 그리고 곧 결혼할 사람이 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게 돼. 후훗.... 그런데.... 과연 그가 누굴 까?" "....리하르트. 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거야?" 레비앙은 가로막듯 그의 말에 끼어 들었다. 리하르트의 말에 어쩐지 등골이 시리도록 섬뜩했다. 저토록 차분하고도 착한 사람이 그렇게 증오하는 상대라 니.... 하지만 어쩐지 그런 그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마치 거미줄에 뭔가 걸 리기라도 한 것처럼 팽팽한 긴장이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잘은 모르 지만 느낌이 그랬다. 리하르트가 미워하는 사람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 일 것이라는 예감 때문인 지도 몰랐다. 리하르트는 그런 레비앙의 불안해하는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미소 띈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 쉬더니 싱긋이 웃으면서 레비앙을 응시했 다. "나 결투라도 신청하고 싶은 심정인 거 알아? .....내가 그토록이나 죽이고 싶은 사람.... 바로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대공 전하에게 말야." 리하르트는 종시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으나 레비앙은 거의 경악에 차 버린 시선으로 넋을 잃고 있었다. 엘스를 향한.... 증오였던 건가? 그래 서.... 그토록 마음이 불안하고, 어지러웠던 걸까? 레비앙은 문득 눈 앞이 감 감하게 현기증이 핑 돌아,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대체 왜? .....왜.... 엘스를 그렇게 미워하는 거지? 어째서?" "그가.... 항상 네 마음 속에 있으니까." 리하르트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그의 담담 함이 레비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레비앙은 울컥 차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대뜸 언성을 높였다. "대공전하는 내 친구야!....아니, 친구였던 분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그를 좋아해. 하지만 그 마음이 전혀 불순하거나 하지는 않아." 홧김에 소리를 지른 레비앙은 가득 미간을 찌푸린 채 한 숨을 돌렸다. 그러 고는 곧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그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10년을 같이 살아온 친구니까 그건 당연한 거라고 봐. 널 만나기 이전부터 줄곧 알 아 왔고 언제나 함께 했던 사람이니까,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을 같이 한 사 람이니까 난 당연히 편하게 여기게 돼. 세상 누구보다도 내겐 편한 사람이 야. 내 어릴 적부터 언제나 내 주변을 한 가득 채워온 사람이니까. 그 는.... 누구보다도 나에게만은 친절하고 착하게 배려해주던 사람이었어. 그 런 친구를.... 난 좋아해서는 안 되는 거였니? 내게 그렇게 포근하게 굴어 준 둘도 없는 사람에게 난 좋아하는 마음조차 가져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우려하는 건 그게 아니야. 레비앙." "그게 아니면 뭐야? 단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못한 채 떠나 보내버린 내 친구에 대한 내 감정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말아! 한 번도 따스하게 말 건네지 못한 내 친구에게.... 너는 어쩌면 그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어? 왜 내가 좋아하는 친구까지 좋아해 주지 못해? 그가 너에게 종종 좀스럽게 군 거 알아.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왜 내 일부인 그를 좋아해 줄 수는 없는 거야? 그는 내 친구야! 내가 따스하게 해 주지 않아도 그렇게 긴 시간을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었던 단 한 사람의 친구였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었어. 난 바보 같아서 그것조차 몰랐는 데. 알고 나니까 이젠 늦어버려서 사큰한 한 마디 말조차 해 줄 수 없게 되 어버렸는데! 너는 어째서 그런 사람을.... 그렇게 착한 사람을 미워할 수가 있어?" 리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치던 레비앙의 눈에 언뜻 눈물이 어렸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어쩐지 숨이 막힐 듯이 가슴 가득 히 뜨거운 무언가가 차 올랐다. 차마 엘스헤른에게 하지 못했던 그 말들이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봇물 터지듯이 마음 밖으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정작 이제 엘스헤른에게는 하지 못할 말이라서 그런 걸까? 그의 초록빛 눈동자에 녹녹하게 물기가 번지는 것을 보고 있던 리하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레비앙을 품에 안고 가볍게 다독거렸다. 어지러운 마음처럼 시야를 뿌옇게 흐 리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지자 레비앙은 한가득 미간을 찌푸린 채 몸부림 을 치며 리하르트의 가슴을 쳐 댔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생각해내 버렸어! 그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 나에게 많이 실망하고 화가 났을 테지. 그래.... 알고 있어. 그토록 착한 내 친구는.... 이제 내가 보고 싶 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차가운 눈빛을 짓는 그를 보느니.... 차라리 안 보 는 게 나아. 이제 보지 않을 거야! 난.... 보지 않을 거야!" 마치 어린애가 때를 쓰듯 리하르트의 가슴을 두들겨 대던 레비앙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대신에 작은 떨림을 실은 흐느낌 소리가 또렷해졌다. ".....하지만..... 보고싶어....." 레비앙의 여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리하르트는 낮은 한숨 끝에 그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레비앙이 이렇게나 동요하는 걸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리고 그를 이렇게 흔들리게 만든 대상이 다름 아닌 에스트리온, 티아란 대공 전하라는 사실이 리하르트는 못마땅했다. 작게 어깨를 떨고 있는 레비앙을 가 슴에 안은 채 리하르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다해도 난 상관없어. 네 마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 네가 누구를 보고 있든 지금 너는 내 품에 있어. .....알아둬, 레비앙. 난 말야. 절대로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 TO BE CONTINUE - ====================================================================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우녕자 오프하러요.^^; 뭐.... 광란의 밤을 불태웠다 고들 하는데, 흠흠....; 그나저나 기분이 하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에구구. 맨날 이러니 냅둬요. 라 지만.... 사실 소설 쓰는데는 도움이 됩니다. -_- 요즘 내용이 이래서 그런 가? 갸웃. 아무튼, 누군가 때문에 무진장 기분이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호홋, 아마도 모를 거예요. 어차피 안 들릴 테니 마구 소리쳐 줬습니다. "당신은 나 쁜 사람이야! 당신, 정말 미워!" 라고.... 에? 보는 앞에서 그래 보라구요? 안돼요. -_- 전 그 사람이 무섭거든요. 콜록. 흠냐.... 잠이나 잘래요. 역시 구린 기분엔 잠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꿈속 에서도 외쳐줄 거예요. "당신 정말 정말 나쁜 사람이야!" 라고... 캬하하하. (라지만 막상 꿈에는 대형 베개로 죽도록 맞는 꿈만 꾼다. TT-TT) 아, 이번에 추천 심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콜록. 그 동안 추천해 주신 분들 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리구요. 무엇보다도 요즘 꾸준히 읽어주고 계신 님들께 너무나도 감사 드립니다. 부빗.^^ 글쿠 축하해주신 분들도 넘넘 감사해요. 생 긋. (하지만 역시 심사에 대한 본인의 심정은 무덤덤.... 한 번 떨어져 보라 구요. -_-) 요즘 취미 붙인 건 향초 피우기입니다. 엊그제 박하향 초를 사왔는데 거의 다 태워서 오늘은 장미향 초를 사왔습니다. 역시나 향기가 좋군요. 생긋. 그 리고 조만간 재스민향 초를 살 생각입니다. 뭐, 쇼핑에 대해서 말이 났으니 말인데.... 오늘 친구랑 이 - 마트에서 장을 봐서는 마파두부밥을 만들어 먹 었습니다! 물론 대 성공! 무진장 맛있더군요. >_> ┃┃ ┃┃ ┃┃ ┃┃ ┃┃ ┗╋━━━━━━━━━━━━━━━━━━━━━━━━━━━━━━━━━╋┛ ┗━━━━━━━━━━━━━━━━━━━━━━━━━━━━━━━━━┛ (42) Concert for 2 Mandolins RV 532, G-dur. The second movement. 문득 오늘 아침 입궁하면서 마차의 창을 통해서 본 유난히도 파란 하늘에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이 순간을 예견했기 때문일까? 아침의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을이 온 거 같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했던, 평소와는 다른 행동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닿으려고 쏘아진 화살인 건지도 모른다. 투명하리만큼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황궁의 고풍 스러운 하얀 기둥, 정원에서 한가득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 더운 숨을 가슴에 차 오르도록 만드는 텁텁한 땅의 기운, 바람결에 실려오는 서늘한 향 기, 가득 냉랭한 웃음을 머금은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 그 모든 게 지금 레비앙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엘스헤른과의 시선이 맞닥뜨린 그 순간 그는 창백하게 굳어버려 석상처럼 단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재밌잖아. 이거.... 요 며칠 어째 잘 마주치지 않는다 했더니... 그래, 고 작 피해 다니고 있었던 건가?" 엘스헤른의 잘 다문 입술에서 가늘게 피어오르는 옅은 붉은 빛의 미소를 보 고 있던 레비앙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공 전하. 저는 다만 이쪽에 용무가 있을 따름입니 다." "그렇지, 아무도 다니지 않는 정원 뒤쪽의 한적한 길이라니.... 뭔가 일이 있는 거겠지. 가령, 나를 피해 다닐 용무라든지." 적잖이 거리를 두고 있던 엘스헤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레비앙에게로 다 가섰다. 아까부터 미약하게나마 바람결에 실려오던 향기는 그가 가까이 다가 올 수록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상큼한 아침의 안개 같은 엘 스헤른의 체취였다. 결코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도 않을 여전히 변함없는 향 내.... 엘스헤른은 허리를 약간 구부려 미소 띈 얼굴을 숨결이 느껴질 거리까지 레 비앙의 가까이로 가져대며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왜 피하는지 말해봐." 지금 레비앙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싶은 기분이었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얼핏 엘스헤른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대답도 피하겠다는 뜻인가?" "...." 아니라는 대답이 목에 걸려 까츨한 고통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레비앙은 섣 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뭐, 좋아. 끝까지 나를 무시하겠다는 말로 알아듣지." 그게.... 아닌데..... 레비앙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가슴이 얼어 버린 듯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답은 여전히 입안을 맴돌 뿐 단 한 마디 도 나오지 않았다. 그 어떤 말로도 저토록 냉담한 엘스헤른을 만족시킬 수 없다 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아직도 그의 지위에 맞서고자 하 는 그런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것이 남아있어서일까? 기어코 굴복시키고 말겠 노라며 싸늘히 웃던 엘스헤른의 말이 귓가에 쟁쟁거리는 듯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 따위는 알고 있었다. "너와 나의 상황이라는 것이 묘하게 재미있군. 마치.... 쥐와 고양이 같지. 이제사 내가 두려워진 모양인가? 도망쳐 다닐 생각이 들 정도로....? 뭐, 아무래도 좋아. 그래. 지금 독 안에 갇힌 심정이라는 게 어때? "....." 엘스헤른의 싸늘한 말투가 레비앙에겐 가슴에 날카롭게 꽂히는 얼음 조각 같았다. 그렇게 닿자 마자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을 보면 정말 예리한 얼음이나 다를 바 없었다. 레비앙은 한숨을 내 쉬면서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지금 그 자신의 눈 앞에 선 저 사람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눈물이 날 만 큼.... 가슴이 시릴 만큼 차가운 아름다움으로 저렇게 굳건하게 서 있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함 없이 마치 잘 그려진 초상화처럼.... 어쩌면 그래서 더 더욱 저 사람이 그가 10여 년 간 사귀어왔던 친구인 엘스헤른이 아니라고 여 겨지는 지도 모른다. 레비앙이 알고 있는 엘스헤른은 저토록 사람을 절망의 나락으로 떠미는 아찔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마냥 따스하 고도 따스해서 그 포근함에 등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얼음으로 깎아 만듬직한 조각상 모양으로 엘스헤른은 싸늘한 기운을 풍기면 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분히 내 쉬는 숨소리가 직선으로 활주할 정도로 레비앙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조용하군." 엘스헤른은 주변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로 축약하고는 물끄러미 레비앙을 쳐다보았다. 그는 문득 손을 올려 레비앙의 뺨 언저리에 잠시 머물렀다. 미온 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그의 손이 다가온 것을 느끼며 레비앙은 아찔하게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을 붙들어 매느라 가득 숨을 들이쉬었다. "....장난치기에 딱 좋은 때로군. 날씨조차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방해 될 만한 소음조차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적이 드문 곳에 너와 내가 지금 서 있다는 거지." 지금.... 엘스헤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레비앙은 묘한 긴장감 을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엘스헤른의 손을 피했다. "직감이라는 건가? 훗.... 들켰나보군." "대공 전하...." "뭐야. 옛 친구라 키스 정도는 받아줄거라 생각했었는데." 레비앙이 살풋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엘스 헤른은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레비앙 의 표정이 점점 얼어붙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고 당황해버린 그의 모습이 어쩌면 짜릿한 쾌감으로 엘스헤른의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상관없지 않나? 아무 보는 사람도 없고.... 아주 잠시면 될 텐데 말야." "대... 대공 전하, 저는...." 레비앙은 아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하더니 문득 고개를 떨구 었다. 언젠가 마차 안에서 레비안느에게 입맞춤하던 엘스헤른의 느긋한 장난 스러움이 스미는 안개처럼 지금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의 엘 스헤른 역시 지금과 다름없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짓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렇게 냉랭하지는 않았다. 그때, 엘스헤른이 키스했을 때, 알지 못할 설움에 기어코 울고 말았던 것은.... 어쩌면 차마 저항하지 못한 분함이 콧대높은 자 존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약간은, 자기 자신인 레비안느를 향한 질투였는지도 모르고.... 어차피 지금 이 순간 피할 이유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를 그토록이나 가슴저린 충격으로 내미는 것은,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예전에 친구 였던 저 아름다운 사람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몹시도 허탈한 눈 빛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여름내 달구어져 있던 대지를 스치는 서늘 한 가을의 바람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한 눈으로 지금 자신을 향해 요구를 하고 있는 이유였다. 레비앙은 가슴 한가득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지금 자신의 뺨에 묘한 온기를 전하고 있는 엘스헤른의 손을 잡아 내리면서 나직히 말했다. ".....전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껏과는 달리 의외로 당당하게 구는 레비앙의 행동에 엘스헤른은 입술을 얇게 비틀며 웃음을 지었다. 그 겁 모를 당당함에 대한 작은 비웃음이었다. 언젠가 그 누이인 레비안느가 그랬던 것처럼 저 맑은 초록빛 눈동자에 반항을 싣고서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비앙을 보며 엘스헤른은 종시 싸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굴어야 너답지. 가당치 않게 눈물 로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애련하게 바라보는 것 따위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짓 이야. 그렇게 의젓한 반항이 너에겐 어울려. 이 대공조차도 겁 없이 멸시해오 던 그 까탈스러움.... 역시나 마음에 들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엘스헤른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가, 약간은 싸늘한 냉소를 실은 치켜 뜬 시선으로 레비앙을 응시했다. "지금 너의 행동이 왕족의 명령에 대한 반항이라 해도?" "....설령 .....왕족에 대한 반항이라 해도..... 응해드릴 수 없습니다. 지 금 대공 전하께서는 저에게 정당하지 못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레비앙이 강경하게 나오자 엘스헤른은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소리내어 웃었 다. 비록 경어를 쓰고 있긴 했지만, 여느 때의 레비앙과 다를 바 없이 도전적 인 자세임에는 틀림없다. 키득거리며 웃어대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한 말을 중얼중얼 곱씹으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당하지 못하다.....? 후훗...." 엘스헤른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물론 정당하지 못하지. 아무리 미화한다해도 지금 이 요구는 신에 대한, 은밀해야할 반항일 테니까. 이토록 아름다운 피조물을 눈 앞에 내려놓고서는 사랑조차 할 수 없게 가로막는 빌어 먹을 신에 대한.... 아주 은밀한 반항. 곧 엘스헤른은 웃음을 살며시 거두면 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소리는 곧 청명한 초가을의 공기 속으로 흔적 도 없이 흐트러졌고 대신 그의 입술에는 조금은 감상적인 목소리가 맴돌았다. "묘하게 돌려서 말하는군. 그저..... 내 취향이라 생각해둬. 그래. 취향인 게지. .....한때 그토록 믿었던, 그리고 언제나 날 믿어주리라 생각했던 내 아름다운 친구가 널 닮았어. 아주 판에 박은 듯이 말야.... 뭐, 그를 향한 작은 복수를.... 너에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둬. 비록 정당하지 못하다 해 도.... 너는 내 요구에 응해줘야 해. 난...." 엘스헤른은 잠시 숨을 멈추는 것으로 이야기를 끊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들끓어 오를 것만 같은 열정을 삭이며 차분히 레비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 식적으로 냉랭함을 담고있지만, 언제나 시야 속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만 같은 저 녀석을 볼 때면, 뜨겁게 치솟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금 새라도 흐트러질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이 그는 종시 불안했다. 그 흔들림이 분 명 자신의 눈에 서릴 것만 같았다. 엘스헤른은 천천히 싸늘히 식은 미소를 담 고 있는 입술을 열었다. "....나는.... 너를 보면서 가슴이 아프니까. 언제나 그 녀석과 함께 있는 듯한 기분에 찢어질 듯 가슴이 아프니까......" 아파하는 나를.... 보지 말아. 그래, 날 보지 말아. 그렇게 날 보고 있지 마. 단 한 점 티조차 없는 보석 같은 그 눈동자로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지 말란 말이야. 흔들리는 모습 따위 이제는 보여줘서는 안 될 것. 절대로 봐서는 안 될 추한 모습이니까. 그렇게 보고 있으면 이 미칠 것 같은 마음을 들켜버릴지도 모르는데.....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어깨를 붙들어 끌어당겼다. 엘스헤른에게로 쏠리는 순 간 레비앙은 입술에 닿아오는 따스함을 느꼈다. 싸늘하고 청명한 익숙한 향기 와 어지러이 스쳐 지나는 바람결, 그 손길에 몸을 내맡긴 나뭇잎의 잔잔한 비 명, 내리쪼이고 있는 햇살의 따사로움. 그 모든 자극이 마치 시간이 정지해버 린 양 그의 주변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고여드는 흐름은 레비앙의 감 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 엘스헤른은 너무나도 따스하고 눈물 날 만 큼 포근한 사람이었다. 숨 가쁠 만큼 아찔한 간지러움이 위험한 감정으로 등 떠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엘스헤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마 치 처음부터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이토록 그의 체취가, 그의 체온이 그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레비앙은 어지러 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지금 엘스헤른을 향해 느 끼고 있는 이 감정이.... 이 묘한 기분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립고 간 절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엘스헤른은 엄연히 친구인데.... 언제나 친구로 지내 온 사람인데.... 레비앙은 있는 힘껏 엘스헤른을 밀쳐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는 손을 들어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한 걸음 물러선 엘스헤른은 찰랑 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숨을 고르더니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이 레비앙의 상기된 뺨을 식혀주고 있 었지만 그런 걸로는 어쩐지 마음에 위안이 되지 않았다. 레비앙은 자신의 아 랫입술을 꽈악 깨문 채 멀리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금은 도저히 엘스헤른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가 그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던 것이 아 니었냐고 자문하는 순간 어쩐지 가슴이 철렁해버려서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 이었다. "....왜 그렇게 당황하지? 어차피 내가 처음은 아닐 텐데...." 엘스헤른의 차분한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깨달아버린 레비앙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따뜻하던 그 입술에는 냉소가 감돌고 있었다. 역시.... 그날 들켜버렸던 리하르트와의 키스를 엘스헤른은 그런 식 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TO BE CONTINUED - ==================================================================== 호오.;; 오랜만이죠? 여러분. 죄송해요. 요즘은 글 쓸 정신이... 콜록콜록. 게다가 감기도 도저 버렸구요.;; 추석이라 이래저래 바빴네요. (변명의 괭이 가 되어버린 페르티.) 아아,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펠티에겐 고욕의 나날이었답니다. 음식 장만 에 애 보기 등등.... 귀찮은 녀석들을 몇 패대기쳤더니 그 수많은 사촌 아이 들에게 <마녀>라는 평판도 받게 되었어요. 덕분에 주름살도 깊이 패었군요. 엊그제 때부터 내내 몸이 추워요. 가끔 열도 나고 하는데도 춥네요. 콜 록.;; 지금도 무려 세 겹의 옷을 입고 두 겹의 양말을 신고 있는데도 전혀 따 뜻하질 않답니다. 물론 보일러도 틀었다구요. 흠냥... 몸살이 나려나? 아무 튼, 이런 저런 일이 있은 후라서 뭐가 원인인 건지...;;;;; 그다지 원인 될만 한 것이 없는 거 같기도. 뭐, 그래요. 별스러운 일은 없었군요. 헤헹.^^; 갑자기 잠이 쏟아 붓네.;; 쿨럭.;; 위의 말을 쓴 직후 바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 네요. -_- 어머니는 병상에 누운 딸에게 줄 당근 주스를 사러....라는 것은 농담이고, 시장 가시는 길에 당근 주스를 부탁드렸더니 웬일로 흔쾌히 사 오 신다 그러네요. 생긋.^^ 아! 다음주부터 펠티는 초등학교로 교생실습을 갑니다. 교생실습이라는 것 이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라 - 여러분들의 교생들도 모두 그랬답니다. 쿨쩍. - 당분간 글이 올라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더군다나 이번 실습은 소위 실무실습 이라고 불리는 실습인데, 그야말로 한 교실의 담임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 해야 하는 실습인 것입니다! 게다가 공문작성의 요령도 배우고, 뭐 기타등등 기타등등.... (심지어 운동회를 맞이하여 운동장에 줄긋는 일도 해야한다구 요. 구렁구렁) 아무튼 바빠질 듯 하답니다.^^; 하지만 아무쪼록 짬을 내서 글을 올려보도 록 하겠습니다. 사실 요즘 는 것이라고는 역시 살과 게으름과 지나친 감상 - 가을을 타는 걸까요? - 밖에 없어서리 글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이유도 글이 늦게 올라오는 것에 일조를 하는군요. 아마도 11월말까지는 쭉 이런 기 세로 게으름과 할 일 많음과 덩달아 정신없음의 나날을 보낼 것 같습니다. 11 월말에 임용고사를 치고 나면 연재 주기를 되찾도록 하겠습니다. (앗! 왜 떠 나가시나요?! 여러분!! 11월말까지 연중한다는 소리가 아니잖아요!! 쿨럭.;; 다만 11월말까지는 지금처럼 좀 띄엄띄엄 연재할 거라는 소리죠.;;) 흠냐. 오늘 장면을 쓰면서는 왠지 스스로 가슴 아파하면서 구렁거렸습니다.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은 비발디의 분위기가 일조를 하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오늘 날씨가 너무나도 좋았어요. 이런 날씨에 이런 바람결에 비발디라니.... 쥐약입니다. 쿨럭.;; 아마도 설레임에 죽으려고 작정했나봅니다. 비발디 하나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는데 말이죠. 가뜩이나 가을을 타는데 센티해지기라도 한다면....;; 뭐, 실습기간 중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그나마 다행입 니다. 아아, 일주일동안 간간히 독촉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고 항시 옆에서 말 걸어주는 티나 양께도 감사를.^^ 글코, 오늘 즐거운 이모티콘을 가득 보내 준 아횬 양에게도 감솨.^^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3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01 조회수: 346 [번 호] 12918 / 12932 [등록일] 2000년 10월 03일 22:50 Page : 1 / 12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18 건 [제 목] [ 중편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3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3) 레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이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는지 난 감하기만 했다. 그런 그를 향해 엘스헤른은 변함없는 냉소를 던지고 있었다. "....나쁘진 않군. 간혹 궁금하곤 했었는데 말야.... 너에게 키스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는지..... 아쉬운 걸? 이런 느낌이라면 조금 더 만끽하고 싶 은데." 엘스헤른은 옅은 미소를 흘리면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눈에 한 가득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가만히 레비앙을 응시했다. 초가을의 맑고도 투 명한 햇살이 투영되는 짙은 잿빛의 눈동자가 진지한 호기심을 담은 반짝거림 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눈웃음에 레비앙은 하마터면 예전의 엘스헤른 을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버릴 뻔 했다. 간간히 그가 보여주는 변함없는 모 습이 어쩌면 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레비앙을 등 떠밀고 있었다. 하지만 레 비앙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문 채 약해지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독였다. 절대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울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은 이유였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허락하진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아까의 일은 제가 방심했기 때문임을 알아두십시오. 아무리 대공전하라 한들 저를 꺾으실 수는 없을 것 입니다." 마음 한 켠이 아릿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란 언제나 이 런 기분을 동반하곤 한다. 엘스헤른의 따스함이 그토록이나 그리우면서, 언제 나 포근했던 옛 기억을 더듬어 아련히 추억하곤 하면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으리란 건 예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훗.... 내가 또다시 널 건드린다면 어쩔 테지?" 엘스헤른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를 비웃었다. 순결을 유린당하기 직전의 계 집애처럼 구는 레비앙이 그에겐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열세에 몰렸는데 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자존심 높은 레비앙의 저 당찬 눈초리는 엘스헤른에 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말해봐. 네가 무슨 방법으로 날 거절할 수 있을까? 무슨 수로 내 명령을 거 역할 수 있지?" "...." 레비앙은 뭔가 비장한 눈빛을 지으면서 그를 말끄러미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런 레비앙의 반응이 재미있는 모양인지 엘스헤른은 무겁고도 낮게 깔려드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어떻게든 해보라구. 그는 소리내어 웃다 말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레비앙에게 다가섰다. 레비 앙이 표정이 굳어지며 오른 손을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종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자, 하려던 것을 마저 해 봐. 그 검을 뽑아서 내 목을 향해 겨누어 봐. 내 가 할 수 있을까? 10년을 너와 함께 살아온.... 네 친구었던 나에게?" 엘스헤른의 말에 레비앙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째서.... 어째서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할 수가 있는 걸까? 지금까지 줄곧 그토록 높은 곳에서 대공전하로써 일개 귀족을 대하듯 굴어왔으면서.... 그랬으면서.... 어째서 저렇게.... 친구였던 엘스헤른의 모습으로 이야길 하는 걸까? 검을 쥔 손에는 땀이 촉촉히 베어나고 있다. 이렇게 긴장해버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레비앙은 조금도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만일 아까처럼 방심해버린 다면 이번엔 엘스헤른을 밀쳐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한 번만 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목마른 생물이 샘을 찾듯이 그렇게 엘스헤른에게 이끌려 버릴 것만 같아서 그는 두려웠다. 레비앙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엘스헤른은 입매를 살풋 끌어올리면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까지나 다가왔는데도 왜 검을 뽑지 못하지? 상대가 예전의 나였더라 면, 벌써 넌 그러고도 남지 않았을까? 새삼스레 내가 두려워지기라도 한 건 가? 네가 날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군..... 내가 에스트르 최고의 대 공이라서? 아아, 그건 거였어. 친구였을 때는 검이라도 겨눌 수 있을 만큼 마구 대할 수 있었지만 역시 자신보다 상위의 귀족이라는 인식이 들고 보니 그럴 수 없었을 테지. 절친했던.... 이라는 단어보다는 존엄하신.... 이라 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 테니까. 날 보면서 네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인 <엘스헤른> 이 아니라 <티아란의 대공>이라는 거겠지." 엘스헤른은 작게 숨을 돌리며 레비앙을 넌지시 응시했다. 굳게 다물린 그의 발그레한 입술과 아름다운 빛을 반사하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 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북받쳐 올라서 가득 가슴 벅차게 만드는 묘한 떨림. 그 감정의 언어를 무어라고 일컫는지, 왜 이 렇게 묵직한 앙금처럼 고통이 차곡차곡 가라앉는지 엘스헤른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뽀얗게 초여름의 햇살이 영그는 저 아리따운 붉은 머리카락에 경건히 입맞추고 이 심정을, 이 진심을 고스란히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그의 마음 속 에서 장미 꽃잎처럼 켜켜히 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그러고 싶었 다. 하지만.... 진심이라. 언제고 변하게 마련인 것이 바로 그 진심이라지? 그러나 변하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을 다 태울 만큼 열렬히 한 곳만을 바라보도 록 만드는 것 또한 진심인 것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레비앙이 검을 쥐고 있는 오른 손을 감싸 잡았다. 스르릉...하는 소름끼치도록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검날이 모습을 드 러냈다. 순간 당황한 듯 흐트러지는 레비앙의 눈빛을 바라보며 엘스헤른은 나 즉히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그들 둘 사이에서 비스듬히 밝은 빛을 반사해 흩뿌리고 있었다. 그 빛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던 엘스헤른은 검 날이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하여 천천히 기울였다. 검의 끝으로 닿아오는 크라 바트의 서걱거리는 감촉이 고스란히 레비앙에게로, 그의 손아귀로 전해져 왔 다. 검의 끝은 사선으로 엘스헤른의 왼쪽 가슴 녘에 멈추었다. "망설이지 말아. 나의 아름다운 친구. 그대로 여기 내 심장을 노리는 거야. 네 눈 앞에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건 대공 따위가 아닌 너의 오랜 친구인 엘스헤른일 테니까 겁먹지 말고.... 마음먹은 그대로 여기 이 곳을 찔러 버 려. 다시는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추악한 마음으로 너를 망가뜨리지 못 하게 말야...." 검을 쥔 레비앙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음이 그의 손을 통해 여실히 느껴졌다. 이런 장난 따윌 레비앙이 좋아할 리가 없었지만 엘스헤른은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진심이란 이런 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회피해버리 고 싶었는지도.... 이토록 숨차게 달려나가는 마음에 제어를 걸어 싸늘하게 얼어붙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이 상황을 이런 식으로라도 벗어나고 싶었는지 도....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낙엽마냥 떨고 있던 레비앙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 다. 아마도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을 테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찌르라고 재촉하는 옛 친구의 모습을....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 었다. 그가 얼마나 곤란해하고 힘겨워 하는지 따위는.... 그렇게 놀라 흔들리 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그런 것만으로는 마음을 충 족시킬 수 없었다. 얻을 수 없는 것을 향한 욕심이란 이토록이나 위험한 것이 었나 보다. 더욱더 커다란 바램을 가지고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바라는.... 엘스헤른은 칼칼해져오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나직히 말했다. "눈을 감아버리면 똑바로 찌르지 못해. 역시 넌 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길 바라나보군. 단 한 번에 끝내줄 아량은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건가? 그래도 예전의 친구였던 사이라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한숨을 몰아쉰 엘스헤른은 잠시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레비앙의 손을 만지 작거리다가 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 손을 감싸쥔 그대로 아까 검을 뽑을 때와 같이 그렇게 검집에 살며시 검을 넣어주었다. "알고 있어. 나는 안 된다는 걸 말야. 너의 그 어떤 것도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지. 아주 사소한 것들도.... 심지어는 너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쁨 조차. 네가 허락하지 않은 그 많은 것들.... 글쎄, 이젠 명령 하나만으로도 얻을 수 있을 테지. 네가 아무리 까탈을 부린다 하더라도 내가 너에게서 얻 을 수 없는 건 없어. 어느 순간 나를 대하는 너를 보면서 문득 깨달은 내 지위란 그런 것이더군. 우습게도 난 모든 것을 명령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거야. 단 하나만 제외하고 말야." 단 한 가지.... 그 마음만은 명령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엘스헤른은 씁쓸함에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고개를 든 레비앙은 뭐라고 할 말을 잃은 채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려올 만큼 그렇게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엘스헤른은 여전히 레비앙의 손을 잡고 있었 고 그 손을 통한 온기는 레비앙의 마음을 묘하게 동요시키고 있었다. 절대로 흔들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저 멀리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이 사람은, 그리고 포근할 만큼이나 손이 따뜻한 이 사람은 예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엘 스헤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네가.... 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토록 당당하던 네 가.... 너의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대공이라서? 그건 내가 너의 친구였던 그 당시에도 여전히 난 대공이었어. 변한 건 네가 날 보는 인식이라는 거 지. 덩달아서 난 그런 너에게 맞추어 줘야 하고 말야. 싸늘하고 냉철한 대 공 전하로서의 면모를 보여 줄 수 밖에...."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작게 중얼거리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손을 놓았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제자리로 돌아온 레비앙의 손은 좀 전의 따스함을 그리워하듯 살짝 주먹지어졌다. 레비앙은 지금 당장이라도 엘스헤른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여지껏 모든 것을 속여올 수 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그에게 상 처 밖에 줄 수 없었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그에게 그럴만한 짬을 주지 않았다. 이미 엘스헤른의 마음은 차가 운 얼음 속에 갇혀 버린 듯 그렇게 레비앙에게서 돌아서고 있었다. "다음엔..... 정말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해. 만일 다시금 나와 마주치게 된 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로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난 말야.... 네가 남자라 해도 상관없어. 철저하게 널....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말 거야." 싱긋이 미소를 지은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스쳐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옷깃에 서 스쳐 나오는 바람결에는 그립고도 아스라한 그의 체취가 묻어 있었으나 레 비앙에겐 더없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엘스헤른이 자신에게서 떠나가고 있었지만 레비앙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TO BE CONTINUED - ==================================================================== 허어업.; 이상한 마무리를 짓게 되어 죄송.; 하지만 이번 회는 얼렁 끝내고 싶었다구요. -_- (아앗? 레비앙 & 레비안느가 끝난 게 아니라구요! 이번 회가 끝났다는 거지...;;; 위의 - TO BE CONTINUED - 가 안 보이는 겁니까?! 사 람 말 좀 끝까지 들어욧! 이, 이봐요! 떠나가지 말라구요!!) 커헉.;; 정말 오랜만에 올리는 군요. 한 15일 정도 되지 않았나요? 아무튼, 펠티는 무사히 교생 실습을 마쳤습니다요. 교생실습 후기를 적고 싶습니다마 는 너무 긴 관계로 생략하고, 좋은 담임 선생님과 좋은 교생 동기생들(무려 아홉 명)을 만나 복에 겨운 생활을 하느라 무려 몸무게 4킬로가 늘었다는 것 만.... 쿨럭.; 뭐 피곤하긴 했지만서도 펠티의 교생실습은 먹자의 나날이었던 겁니다. 꼬박꼬박 챙겨먹는 식사에 고칼로리 식단, 끊이지 않는 간식과 군것 질. 피곤했던 것은 다만 수업에 대한 약간의 부담과 실습록 기재, 연구수업 준비를 위한 자료 제작 등이었을 뿐이에요.^^; 아아, 그러고 보면 펠튀의 친구 아횬냥은 모범실습록에 뽑혔을 뿐만 아니라 연구수업도 캡빵으로 잘 했구요, 자료전시회에서도 단연 돋보였구요, 정말 멋 진 친구가 아닐 수 없답니다.^^ (아횬냥의 이름이 연구주임을 통해 불리거나, 아횬냥이 돋보일 때마다 펠튀는 외쳤습니다! "쟤가 제 친구예요!!") 암튼, 뭔가 파란만장한 실습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별로 한 일은 없지만 이래저래 피곤에 겨워 글도 못 썼던 것은... 쿨럭.; 아무튼 앞으론 정신을 차 리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편은 올리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요. 그나저나.... 정녕 모두들 떠나가신 건가요? TT-TT (폭포 같은 눈물!) 어째 서 2주 동안 그 누구도 독촉을 안 해주시는 겁니까! 쿨럭.;; (독촉이 없으면 역시 쓰기가 싫어지는 괭이.;;) 그나마 어제 나머지 양께서 "펠튀, 왜 요새 글이 안 올라와?" 라고 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글도 없었을 겁니다요. 쿨 쩍. 아아, 그러고 보면 티나 양도 간간히 독촉을. 모두 고마워요. 쿨쩍. 그, 그러면 저는 이만 다음 편을 쓰기 위해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요.;; 구 럼.... 휘리릭.^^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4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01 조회수: 346 ┌───────────────────────────────────┐ │ ▶ 번 호 : 0/48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0월 08일 19:46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4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4) 본궁 안으로 들어선 엘스헤른은 자신의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시종 을 대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 폐하께서 찾으신다고? 갑자기 웬 일인 거지?" 어린 시종의 안내를 받아 엘스헤른은 황후 알현실로 걸음을 옮겼다. 알현실 로 통하는 본궁의 긴 복도에는 역대 에스트르 황제들의 초상화가 즐비해 있었 다. 우스꽝스러운 옛 옷차림의 늙은이들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엘스헤른으로선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 길을 돌아갈 이 유란 건 없었다. 햇살이 눈부시도록 길게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그 밝음과 그림자의 어 둠을 번갈아 스치면서 엘스헤른은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레비앙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까?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서 아직도 거기에 그렇게 서 있을까? 묘한 감정의 파문이 가슴 속에서 잔잔히 퍼져나가 고 있다. 그 동심원의 한 가운데, 그것은 묵직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바로 자 신이라는 걸 엘스헤른은 알고 있었다. 현기증이 뇌부를 엄습해왔다. 작은 물결 같이 파도치는 감정의 흐름은 닿을 곳을 찾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 지 못하다니 언젠가 레비앙이 투덜댄 것처럼 정말 바보인지도 모른다. 진정.... 알지 못하 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걸까? 그의 입술에 입맞추는 순간부 터 포기해버린, 이성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마음 속을 혼란스럽 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욕이라도 내 뱉어주고 싶은 스스로의 존재. 그런 자신을 향한 냉소와 더불어 가슴을 한가득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레비앙을 향한 멈추지 않는 이끌림이었다. 그렇게 싸늘하게 돌아서 버린 순간에도 마음만은 그 곳에 남아 그를 추억하고, 그를 그리워하고, 그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열정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이 마음을 싸늘히 짓눌러야 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 쥐어짜듯 한숨을 내 쉰 엘스헤른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그는 알 현실 앞에 당도해 있었다. "황후 폐하. 에스트리온 티아란 대공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린 시종의 낭랑한 목소리에 뒤이어 알현실 안에서 황후의 음성이 나직히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엘스헤른은 심호흡을 하고선 시종이 열어주는 육중한 고동색의 문 사이로 들어섰다. 맑은 공기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으며 몇 걸음 옮긴 엘스헤 른은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어 앞을 주시했다. 그 의 앞에서 황후가 앉는 고풍스러운 의자까지 일직선으로 깔린, 화려한 수가 놓인 붉은 카펫의 끝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아드레이드가 부채를 살랑거리 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한 포즈로 우아하게 손을 들어올렸고 엘스헤른은 곧장 앞으로 다가가 그녀가 내민 하얀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에스트 르 식의 경의의 표현입니다.) "간만에 인사올립니다. 아름다우신 황후 폐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가득 격식을 차린 엘스헤른의 말투가 재미있는지 아드레이드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훨씬 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네? 적어도 둘만 있을 때는 그런 격식 차린 말투가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야. 벌써 때가 타 버렸어. 안 그래? 귀여운 나의 동생." "황후께선 이 미천한 자의 누이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존엄하신 어머니이십 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황후 폐하를 그리 대하겠습니까?" 엘스헤른이 깐죽거리기라도 하듯 그렇게 말하자 아드레이드는 부채를 두어 번 흔들면서 눅진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관둬. 지겨워, 그런 말투. 너한테까지 그런 말 듣자니 속이 불편 해." "흥, 이제 면역될 때쯤 되지 않았어? 벌써 10년 동안이나 듣고 살았을 텐데 말야. 10년 동안이나 녹은 버터처럼 흐믈거리는 모리배들에게 둘러싸여서 번지르르한 말들만 듣고 살아서 나의 말 정도는 가볍게 들어 넘길 정도 아 닌가?" "이제야 나오는군. 에스트리온 가문 특유의 은근히 비꼬는 말투가." "뭐, 에스트르 최고의 여성이라는 고귀한 신분이 되셨지만 그쪽도 여전히 속 일 순 없겠군. 에스트리온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당연하지. 누구 핏줄을 타고났는데." 남이 듣기에도 비위 상할 만큼 빈정거리는 말이 한동안 오고 간 끝에 두 남 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야, 누나." 엘스헤른이 밝게 웃으면서 친근하게 굴자 아드레이드도 그제서야 얼굴을 풀 고서, 늘 짓곤 하던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황궁에 있으면서 나에겐 거의 다녀가지 않다니, 너무해. 이러다간 한 때 난하기로 널리 명성을 날렸던 귀여운 동생의 얼굴마저 잊어버리는 게 아 닐까 염려스럽군." 그녀의 푸념에 엘스헤른은 어깨를 으쓱하며 근처의 의자에 편한 자세로 주 저앉았다. "히스테리가 는 것을 보면 역시 매형이 섭섭하게 대하나보지?" "그러는 너는 네 매형이랑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허구한날 캬라멜처럼 둘이 찐득하게 들러붙어서는....." 아드레이드는 접은 부채를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면서 느끼한 표정을 지어보 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과 말에 엘스헤른은 숨이 막히는 듯 기침을 늘어놓으 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반격을 날렸다. "컥.... 둘 밖에 없는 동생 중에서도 가장 잘생긴 나를 그렇게까지 매도하고 싶어?" "아, 미모로 친다면 우리 세 남매 중에서 나를 능가할 자는 없지." "....." 지지 않는 너스레를 늘어놓는 그녀를 보며 엘스헤른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딱 벌렸다. 뭐,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의 딸이니 어련하겠냐마는 황궁에 갇혀 사느라 많이 희석되었을 법한 능청이 아직까지 불굴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에스트리온 공작 부인과 한판 붙는다 해도 승산이 없지는 않을 듯 했다. 잘 한다면 비길 정도는 될 지도.... "항복. 내가 졌어." 엘스헤른은 두 손을 들어올리며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그러고 는 승리에 도취된 표정으로 생글거리고 있는 누이에게 딱 부러지는 말투로 물 었다. "그래 용건이 뭐야?" "흠.... 둘 중 하나인 동생을 꼭 용건이 있어야만 부르는 건 아니지." "미적거리는 걸 보니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일인 모양인데?" "눈치 빠르기는. 역시 내 동생이야." "에스트리온 가의 남자라면 당연히 익혀야 할 미덕이지. 당찬 여성들의 틈바 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으로 획득된 능력이라 할 수 있거든." 어느 샌가 또 깐죽거림으로 빠져드는 대화를 붙들어매듯이 아드레이드는 자 신의 손바닥에 톡톡 두드리고 있던 부채를 펼쳐들며 말끄러미 엘스헤른을 응 시했다. 그런 그녀의 서늘한 잿빛 눈동자를 대하자 엘스헤른은 괜히 마음이 뜨끔했다. 언제나 체통 없이 굴어대는 누나지만 저럴 때면 영락없는 여섯 살 터울이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곤 했다. 주눅든 마음을, 되쏘아보는 눈빛으로 무마하려고 노력하는 동생을 보며 아드레이드는 작게 한숨을 지었다. "좀 전에 클로티엔이 다녀갔어." 무슨 말이 떨어질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던 엘스헤른은 누이의 입에서 어 린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안도한 듯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일로?" "엄마한테 작은 외삼촌을 좀 혼내주라는군." "음?" "작은 외삼촌이 자신의 소중한 레비앙을 못살게 굴었대." "에?" 누이와 무심히 말을 주고받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철렁 해서는 반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반응에 뭔가 대략 짐작을 한 모양인지 아드레이드는 입꼬리에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넌지시 동생을 추궁했다. "황태자의 발언에 의하자면.... 존엄하신 티아란 대공 전하께서 황태자의 말 벗에게 몹쓸 짓을 했다지?" "....." 짐작했던 그대로를 추궁하는 누이의 말에 놀라 버린 엘스헤른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어쩌자고 그런 모습을 황태자에게 들켜버렸을까? 레비앙에 게만 너무 집중해 있었던 터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자신을 나무라 며 그는 아랫입술을 살풋 깨물었다. 그런 엘스헤른을 향해 아드레이드는 나직 히 말을 이어나갔다. "클로티엔이 화가 단단히 났던걸? 그 애가 조금만 더 어른이었더라면 상대가 대공 전하라 하더라도 당당히 결투를 신청했을 법한 기세였어." "....." 엘스헤른은 여전히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드레 이드는 은근한 눈빛을 지으면서 낮은 말투로 동생을 구슬렸다. "자, 말해봐. 대체 아르떼이유 경에게 무슨 행동을 한 거지? 대체 황태자는 무엇을 봤기에 그토록이나 놀래고 화난 표정으로 황후 알현실로 달려들어 와서는 그런 청원을 했을까?" 그녀의 물음에 엘스헤른은 반항심 어린 눈빛을 지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몰라서 묻는 척 하지 말아. 다 알고 있다는 거 알아." "물론 알고야 있지. 하지만 네 입으로 하는 진술을 듣고 싶어." 엘스헤른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듯 아드레이드는 침착하고도 흔들림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겐 반항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엘스 헤른은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여섯 살 터울인 누이는 그가 아주 어릴 적부 터 항시 그래왔었다. 동생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 은근하고도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냉랭한 시선으로 그렇게 동생의 눈을 하염없이 응시 하는 것이다. 동생이 기어이 스스로의 입으로 사실을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 엘스헤른은 묵묵히 입다물고 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개 기고 있어봤자 라는 것 쯤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 일이 대 놓 고 외칠만한 성격의 것이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말 따위조차 못할 용기로 그런 행동을 했을 리 없겠지?" 말조차 못할 용기.... 누이의 물음이 어쩐지 자신을 빗대는 말 같아 엘스헤 른은 한가득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있다. 그렇게 레비앙을 괴롭히고 있는 자 신의 마음 한 켠은 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그릇된 오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이토록 열렬한 심정을 그렇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어리 석음의 표출이 그것이라는 것을.... ".....참견 마. 그건 레비앙과 내 문제야." 엘스헤른은 내뱉듯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둘 만의 문제를 제롬 남매로도 모 자라 이제는 황태자와 하나뿐인 누이까지 가세해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는 무척 못마땅했다. 하지만 아드레이드는 전혀 관심을 꺼줄 의향이 없다는 듯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훗. 황태자를 기겁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너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지 않아? 글쎄, 네가 황태자에게 그 모습을 들켜버리는 순간부터 그건 이미 황태자의 문제도 되었을 뿐더러 너는 내 아이의 외삼촌이자 내 동생이니, 나의 문제 이기도 하지." 아드레이드의 말에 엘스헤른은 혼잣말이라도 하듯, 그러나 불만에 가득 찬 투로 나직히 중얼거렸다. "쳇. 무심한 누나 따위...." ....TO BE CONTINUED.... ==================================================================== 오랜만이죠? ^^; 잘 지내셨어요? 펠티는 감기와 함께 지독한 나태와 약간의 몸살기운, 그리고 엄마의 구박과 싸우느라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아직 할 일 은 - 논문 쓰기(컥, 빨랑 써야하는데.), story telling 대본 외우기, 임용고 사 준비하기, 과학조 발표 준비 등등.... 산더미 같습니다만, 하나도 안하고 있습니다요.; 이런 와중에도 마음 편히 글쓰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정말.; 아무튼 졸업이 다가오고 있는 관계로 요즘 무진장 바쁩니다. (마음만 바쁩 니다.) 할 일은 많은데 막상 시작하지 않으니 마음에 얹혀지는 그 중압감이 란.... 쿨럭쿨럭.; 뭐, 논문 쓰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글 쓸 시간은 줄어들 듯 합니다. 요즘도 자주 올리는 건 아니지만 더더욱 자주 못 올리게 될는지도... (캭.;; 칼 날아온다.;) 아, 그러고 보니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아드레이드 조쉬 루스티느 드 에스트르, 바로 에스트르의 황제의 아내, 즉 황후입니다. 결혼 전의 이름 은 아드레이드 조슈아 루스틴 에스트리온입니다. 에스트리온 가에서는 에스트 르 토박이 식의 발음을 쓰기 때문에 원래 이름이 저렇습니다.(황후로서의 이 름은 에스트르 표준어로서의 발음인 거죠.) 아드레이드의 세 번째 이름인 <루 스틴>은 제롬의 두 번째 이름과 같습니다.^^; 제롬과 그녀는 사촌 관계로군 요. (제롬에겐 사촌 누나.) 뭐, 그다지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좋아하는 성격의 인물입니다. (저를 빼 닮았어요~! 커헉.;; 그렇다고 돌 던질 거 까진 없잖아요!) 아무튼 어머니이신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을 닮아 강인하고 지성미 넘치며 풍부한 감성을 자랑하는 성격의 소유자랍니다. 인물 소개는 이쯤에서 접고, 요즘의 배경 음악 소개가 있겠습니다. 그다지 브람스의 음악을 좋아하진 않지만 요즘 펠티가 배경 음악으로 즐겨 듣는 것은 브람스 교향곡 3번의 3악장입니다. 잔잔하면서도 격정을 내재한 아름다운 선 율이 요즘 같은 가을의 나날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곡이죠. (아쉬운 대로 ra파 일이 있으니 들어보고 싶으신 분은 메모를 주시면....) 마치 요즈음의 엘스헤 른의 마음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은 곡이라 멋져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들 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지만 (반 고흐의 일생 을 다룬 영화였다지요.) 자세히 아는 바는 없고, 아무튼, 요즘의 의 배경 음악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브람스의 곡이라고는 역시 교 향곡 3번의 3악장과 4번의 1악장, 그리고 헝가리 무곡의 6번 밖에는 좋아하지 않는 고로 그다지 깊이 있게 접근해드릴 순 없군요. TT-TT 아악.;; 또 주저리가 길어졌습니다. 쿨럭.;; 그럼 여기서 줄이고 다음 편의 한글 창을 향해 풀쩍....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5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02 조회수: 394 ┌───────────────────────────────────┐ │ ▶ 번 호 : 45/48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0월 12일 20:24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5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5) 엘스헤른이 궁시렁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아드레이드는 피식 웃음을 내뱉었 다. 그러고는 그에게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대며 나직히 속삭였다. "역시 아직도 내가 황제 폐하와 결혼하게 된 것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지?" 느닷없이 다가오는 그녀를 피해 흠칫 몸을 뒤로 뺀 엘스헤른은 경계와 반발 이 가득한 눈초리로 누이를 보며 외쳤다. "누가 불만이래?!" "기억하고 있다구. 폐하께서 나에게 청혼하러 에스트리온 성관에 방문하셨을 때 네가 폐하의 앞에 장갑을 던졌다는 사실을." "그, 그건...." 갑자기 하얗게 질려버린 동생의 얼굴색에 흡족해 하며 아드레이드는 짓궂게 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뭐, 폐하께서 전혀 의심도 하지 않으신 채 다만 네가 장갑을 떨어뜨린 것으 로 생각하신 게 다행이지. 하마터면 반역죄로 에스트리온 가가 깨끗이 멸족 될 뻔 했지. 누가 감히 황제 폐하께 결투를 신청할 생각을 하겠어?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열 살 박이 철부지 꼬마라 하더라도...." 아드레이드는 내색은 안 해도 불만에 가득 쩔은 것이 표가 나는 동생을 대 하며 살풋 미소를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를 보면서 아 드레이드는 다시 한 번 작게 구슬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 고집 부리지 말고 말해봐. 존엄하신 황제 폐하께 까지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사랑했던 누나에게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 네 사랑을 모른 척 할 만 큼이나 무심한 누나지만 네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들어줄 수는 있어." "....." 아드레이드의 은근한 말에 속이 뉘엇거리는지 안색이 창백해진 엘스헤른은 잠시 그녀를 외면했다. 커다란 창으로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 와 환하기 그지없는 알현실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엘스헤른에겐 무척 갑갑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제롬만큼이나 집요하게 따라붙는 누이의 저 호기심에 찬 눈 빛에 그는 질식할 만큼이나 숨이 막혀왔다. 엘스헤른은 이내 정색을 하면서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상엔 말 못 할 일이란 것도 있는 거야. 누나." "훗, 말 못 할 일이라...." 아드레이드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선 엘스헤른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말 못 할 일들의 예를 들면 뭐가 있지?" "예를 들자면.... 지금 내 상황 같은 거지." 누이의 추궁이 귀찮아진 엘스헤른은 어깨를 으쓱하며 건성으로 대답해버렸 다. 간만에 만났는데도 언제나와 같은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을 줄은 생각 못했던 일이다. 저런 누나를 빼앗길까 두려워, 존엄하신 황제 폐하께 결투까 지 신청했다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어주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엘스헤른은 떱떨한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의 맞은 편에서 흥미롭게 동생을 주시하던 아드레이드는 이내 냉정한 표정을 되찾고서 넌지시 속삭였다. "누나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네 상황이란 것은.... 남자에게 키스할 정도의 모험 같은 건가?" 순간 엘스헤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아드레이드는 회심의 미소 를 지었다. 엘스헤른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뭔가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려 어떤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평소 레비앙을 대하면서 느끼 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아드레이드의 한 마디로 형상화 되어버린 듯 그의 가 슴을 짓눌러왔다. 그녀의 말투는 엄격했으며 한 올 흔들림조차 없었다. 누이 의 말 한 마디는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 다. 아드레이드는 아직 엘스헤른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물끄러미 동생을 바라보 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반응이 엘스헤른에게는 더더욱 감당하기 힘든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네 입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건, 역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이로군." 한참만에 입을 연 아드레이드의 말은 의외로 비꼬거나 경멸하는 투가 아니 었다. 하지만 엄격함을 잃지 않은 그녀의 말에 엘스헤른은 여전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한 동안 마치 무언의 실랑이라도 하듯 그렇게 알현실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드레이드는 동생이 자신의 말을 곱씹을 만큼 오래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었다. "어차피 현실에 맞서 싸울 자신은 없다라는 거잖아. ....조금은 실망했어. 난 네가 좀 더 떳떳하길 바랬는데..... 그런 식으로 네 행동을 책임지지 못 할만큼 아직 네가 어리다면.... 무슨 생각에선지 잠시 말을 멈춘 아드레이드는 더없이 싸늘한 눈빛을 짓더 니, 이내 자신의 자리에 걸맞도록 나즉하고도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너에게 에스트르의 군사력을 맡기는 것은 다시 재고해봐야 할 거 같군." "책임지지 못할 행동 따윈 하지 않았어." 아드레이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스헤른은 진지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 다. 그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누이에게 반박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다만 레비앙에게 입맞추었던 그 행동을 자신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심경으로 숨기 려 하는 게 아님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 뭐야?" 아니나다를까 곧 아드레이드가 씨익 웃는 표정으로 그 이유를 물어왔다. 호 기심 어린 추궁의 눈빛을 던지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녀의 시선을 대하면서 엘스헤른은 또다시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다만...." "다만?" 엘스헤른이 한동안 말이 없자 아드레이드는 그의 할 말을 상기시켜 주기라 도 하듯 그를 줄기차게 응시하며 되물었다. 누이의 페이스에 그대로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엘스헤른은 지금 대답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무 리 황후의 앞이라고는 하지만 티아란의 대공이 이토록이나 주눅이 들어있다는 것도 어찌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다. 엘스헤른이 황후 앞에서 주눅들어 있을 단 하나의 이유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의 누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몰아쉰 엘스헤른은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나직한 목소 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든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것일 뿐이야. 안타깝게도 세상이란 내가 바라는 것을 쉽사리 넘겨줄 만큼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의 당당함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아드레이드의 비꼬는 말이 날아 왔다. "어째도 못 먹을 거, 한 번 찔러나 보자.... 라는 것이로군." "그렇지 않아!" 누이의 비꼼에 울컥 울화가 치민 엘스헤른은 미간을 가득 찌푸린 채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점잖은 체 하길 좋아하곤 하던 남동생이 이렇게 감정 적인 행동을 보이곤 하는 것에 짐짓 재미를 붙인 아드레이드는 곱게 치켜 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다면?" 여지없이 따라붙는 아드레이드의 되물음을 들은 듯 만 듯, 엘스헤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 절대로.... 내가 못 가질 거라면....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아." 엘스헤른의 말에 아드레이드는 나즉한 웃음을 흘렸다. 저런 위험한 소유욕 이라니....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차 높아지는 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 고 있던 엘스헤른은 가슴이 답답한 듯 숨을 한가득 몰아쉬었다. "비웃을 줄 알았어. 누나가 알 수 있을 리 없지.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을 향한 열렬한 감정을 말야. 끝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라는 것을 누나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스스로 손 쓸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깊이 빠져들어 있었 는데.... 그렇게 사랑한다고 깨달은 순간에 이미 그는 나에게서 뒤돌아 저 멀리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드레이드는 웃음을 멈추고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 만 엘스헤른에겐 누이의 눈길에 신경 쓸 수 있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고통스러운 고백성사라도 끝낸 듯 엘스헤른은 침울하고도 지친 눈빛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라는 거야?" 한참만에 아드레이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엘스헤른은 대답이 없었 다. 그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자신의 깍지 낀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봐서는 좀체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 네 권위로 그를 곁에 묶어두는 것 이란 말이지? 자신의 심정을 역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으로 표출하고 말야." "....." "그래서 네게 남는 건 뭐지? 그런 식으로 그를 괴롭혀서 통쾌했어? 보지 않 아도 뻔하군. 언제나 너는 그의 우정을 시험하는 듯이 굴었겠지. 그러고는 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겨워 하는 그를 보면서 속이 시원했어?" "....그만해." 엘스헤른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드레이드의 말을 저지했다. 더 이상 듣 고싶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한 그녀의 말에 어쩌면 심사가 꼬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저런 모습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의 말이 가시처럼 귀에 거슬리는 것이다. 그는 가득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문제로 단 하나 뿐인 누이와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저 명분이라고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기실은 누나와 더 이야기 하다간 정말 감정을 추스를 수 없게 될 것 같아 두려워서였다. 누이의 말을 통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이, 어지러운 감정의 표출인 그 형편없는 행 동들이 양심의 가책마냥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회의에 늦겠어. 이만 가 볼게." "훗...." 어느새 자신으로부터 몸을 돌린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아드레이드는 혼잣말 처럼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 웃음의 끝에 그녀 특유의 나직하고도 싸 늘한 말이 안개처럼 스몄다. "언제나 넌 그런 식으로 도망을 치곤 하지. 자신을 곤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쳐버리는 것이 네 특기 아니야? ....좋아.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으실 티아란 대공 전하시니까 오늘은 그냥 보내주 지. 하지만 잊지 말아. 나에겐 아직 황태자의 청원으로 너를 벌 줘야 할 일 이 남아 있어." ".....무슨 벌을 내릴 생각이지? "뭐,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서 오늘은 아껴두도록 하겠어." "두렵군." 엘스헤른은 비꼬듯 한 마디 남기고는 커다란 고동색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 겼다. 그의 정확한 발걸음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자신의 손바닥 위로 접은 부 채를 가볍게 내리치던 아드레이드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는 나직히 동생의 이 름을 불렀다. "엘스헤른." "....음?" 문고리를 잡은 채 걸음을 멈춘 엘스헤른은 뒤돌아보지는 않고 그냥 누이의 부름에 나직히 답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인 아드레이드는 약 간은 아쉬운 표정을 거두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돌아서서 후회하지 말아. 언제나 자신이 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뒤돌아서더라도 속으로 눈물짓는 일 따윈 없을 거야. 내 동생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나약하지 않으리라는 것, 믿어 의심치 않아." "....응." "그럼 가 봐." 뒤돌아 서 있던 엘스헤른은 누이에게 작게 목례를 하고 알현실을 떠났다. 그가 나가고 알현실의 육중한 문이 다시 닫히자 아드레이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예전에 제롬이 다녀갔었다는 말은 안 하길 잘했나?" - TO BE CONTINUED - ==================================================================== 커걱. 간만에 뵙습니다.^^; 한참만이죠?^^ 그 동안 <레비앙 & 레비안느>에 커다란 일이 생겼습니다. 출판을 하게 된 거예요.;; 하지만 민망하기도 하고 해서 여러 곳에 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에... 또 출판을 하게 된다 하니 여 러모로 걱정되는 것도 많고, 또 원고의 마감이 정해져버리는 바람에 조금은 쫓기는 심정이 되기도 하고 해서 이래저래 정신이 없네요. @_@ 에... 출판은 예쁜 표지를 하게 되었으면 좋겠구, 삽화도 좀 계획 중이구, 암튼 예쁘게 또 예쁘게 할 생각이지만... 자, 잘 될는지.; 오늘은 친구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출판본에는 실리지 않을 분 량에 대한 것들도 생각해봤어요. 이를테면 외전인거죠. 외전? 외전이라 하니 좀 이상하지만. 뭐, 사이드 스토리(SIDE STORY)라는 편이 정확할지도.... 아 무튼 외전에서 다루어질 이야기들은.... 제롬에 대한 이야기.(아이린과의 대 화에서 얼핏 이야기했었지만... 역시 영국에 두고 온...;) 글쿠, 아드레이드 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레비앙의 부모님 이야기. 또 뭔가 있었던 것 같은 데.... -_-;; (머리 나쁜 괭이.) 아무튼, 등등등이었습니다. 그다지 애착을 가지지 않고 시작했던 글이라 이만큼 온 것도 놀라워요.; 에, 출판본에 싣지 않을 이유는 분량도 분량이지만서도 역시 본편과는 따로 놀기 땜시.;;; 흠냥.; 오늘은 이만 줄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내일 제출해야 할 리포트 두 개와 작곡 열 개가 남아 있습니다. 동일 리듬을 가진 다른 가락의 곡을 한 리듬 당 다섯 개 씩 두 리듬을 만들어가야 하거든요. 캭! 이런 일을 왜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요. 아, 출판 축하해주신 분들 넘넘 감사드려요~! 부빗부빗부빗 *^---^* 아아, 참, 또 광고. 에.... 레비앙을 읽고 계시는 분 중에서 혹시나 표지 디자인 쪽에 관심이 있거나 하신 분은.... 분위기에 맞는 표지를 생각해봐 주 시겠어요?^^; (표지는 공모로 할 생각이라서...;) 그럼, 이번엔 진짜로 휘리릭.... (컥, 이번 편도 시간 관계상 퇴고를 못하고 올림을 알려드립니다.TT-TT 오자 나 탈자 혹은 문법적 오류가 있으면 메모로 연락해 주세요. 앞으로 유의하 겠습니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6 ~ 49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05 조회수: 386 [번 호] 46 / 49 [등록일] 2000년 10월 21일 20:24 Page : 1 / 16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483 건 [제 목]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6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6) 외출 "레비앙?"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레비앙의 멍한 주의를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레비앙은 고개를 들 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는 황태자 클로티엔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 잠시 생각할 것이 있었을 뿐입니다. 전하." "음.... 요즘의 레비앙은 생각할 게 많은 모양이야. 그렇게 자주 멍한 모습 이라니." "그냥.... 사소한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레비앙이 입꼬리를 올려 싱긋이 웃음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로티엔은 그 파란 눈동자를 흐리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10살 인 이 어리고도 존엄한 꼬마는 나이에 맞지 않는 무거운 한숨을 지으며 레비 앙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마치 내면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그 눈빛에 레비앙 은 조금 뜨끔하기도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하게 웃으면서 의자에서 몸 을 일으켰다. 황태자의 시선이 내내 자신을 따르는 것을 느끼며 레비앙은 창가로 다가섰 다. 창 밖으로 펼쳐진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이나 파랗다. 어쩐지 저렇게 파 란 하늘을 보니 며칠 전의 일이 떠오르는 것 같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자신의 입술 위에 지긋이 올려놓았다. 따스한 두근거림이 온 몸에 전율처럼 퍼져나간다. 어째서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들어버리는 건지 모를 일이다. 마치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그런 어지러우리만큼 서늘하면서도 들뜨는 기분.... 레비앙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살며시 커튼을 움켜쥐었다. 그때 엘스헤른 이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토록 놀라고 당황해버린 것은 그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레비앙>이라는 존재에게 키스한 것이기 때문이었 다. 그의 온기를 느끼며 그렇게나 두근거렸던 것은 레비안느로서가 아닌 바로 레비앙으로서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건 어쩌면 만져서는 안 될 은밀한 것에 손대는 모험 같은 건지도 모른다. 아마도 엘스헤른에겐 그랬을 테다. 적어도 엘스헤른에게 자신은 남자이자 오 랜 친구인 이유로, 레비앙은 더더욱 이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어째서 엘 스헤른은 스스로에게 치명적일지도 모를 그런 모험을 향해 스스럼없이 걸음을 내딛는 거란 말인가? 역시나 자신은 미움받고 있는 거라고 밖에 레비앙은 다른 생각을 떠올릴 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유희를 시도해서 까지 괴롭힐 만큼이나, 엘스헤 른은 레비앙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거라고.... 요즘은 그런 생각들이 차곡차 곡 쌓여 마음이 끝없이 가라앉을 정도로 묵직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항상 엘스헤른을 피하게 되어버리는 스스로 에게 레비앙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은, 이 상황 이 힘들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싸늘하게 변해버린 엘스헤 른을 대하는 것이, 그리고 요즘 내내 이상하게 구는 리하르트와의 관계가, 또 바로 자기 자신인 레비안느와 스스로의 괴리감 때문에.... 아니, 그런 것을 포함한 지금 현재의 모든 상황이 얼른 깨버리고 싶은 악몽처럼 여겨지는 것이 다. "레비앙." 꽤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그의 주의를 상기시켰다. 황태자가 사뭇 근엄하게 다시금 그를 부른 것이었다. "네, 전하." 레비앙은 클로티엔에게로 돌아서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따뜻한 웃음을 지었 다. 하지만 꼬마는 뭔가 가득 추궁할 것만 같은 눈빛으로 그의 눈을 빤히 쳐 다보고만 있다. "또 멍해지다니!!" "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소풍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전하. 좀 더 찬바람이 분다면 외출은 힘들어질 테니까.... 뭐, 이즈음이라면 아마 황후 폐하께서도 허락해 주실테구요." 황태자의 끈질긴 눈길을 피하기 위해 레비앙은 건성으로 말을 던졌다. 허 나, 그것이 의외로 효과가 있는 모양인지 클로티엔의 새파란 눈동자엔 초롱초 롱하게 흥미로운 빛이 감돌았다. "소풍?" "아, 네..... 굳이 소풍이라기 보다는 황궁 밖이나 벨라시그네 근교의 야외 라도 산책한다면 나쁘지 않을 듯 해서요." 장차 에스트르의 황제가 될 존귀한 존재라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역시 어린 아이에 불과한 클로티엔은 레비앙의 한마디에 금방 희색이 돌아서는 벌써 소 풍이라도 나온 양 기뻐하고 있었다. "간식도 준비시키면 좋을 거야. 그렇지?" "예, 황태자 전하." "아아, 아냐아냐." 꼬마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고개를 가로젓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외삼촌에게 놀러가자." "예?" 황태자의 외삼촌이라면....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게 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클로티엔의 의중을 다시 한 번 물었다. "외삼촌이라 하옵시면...." "아, 제국 아카데미에 놀러가자는 말이었어." 제국 아카데미. 황태자의 큰외삼촌이 있는 곳이다. 바로 엘스헤른의 형님이 신 루엘 프레데릭 경께서 계신 곳. 레비앙은 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제국 아카데미로 향하는 수도의 동편으로 난 긴 길을 달리고 있는 황실 마 차 안에서도 클로티엔은 레비앙이 다시금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버릴까 감시의 눈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똥거리는 꼬마의 눈초리 때문인 지 레비앙은 그다지 다른 생각에 빠지지 않고 마차 안에서의 시간을 내내 그 와의 대화에 치중했다. "그러고 보면 큰외삼촌 본지도 참 오래된 것 같아." "언제나 제국 아카데미에 계시니까요." "공부벌레인 거지." 공부라는 말에 유난히 콧등을 찌푸리며 클로티엔은 특유의 구르는 듯한 맑 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오랜만의 외출이라 꽤나 즐겁고 설레는 모양이 다. 항상 황궁에 갇혀있다시피 하는 황태자에게는 그다지 멀리 가지 않는 작 은 소풍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가벼울 것이다. 게다가 아직 어리신 분이니.... 그러고 보면 엘스헤른을 처음 만났던 때가 그의 나이 열 살이었던 그 겨울 이었다. 고집스럽고 똘망똘망해 보이는 잿빛 눈동자로 2층 계단의 난간에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그 열 살의 꼬마. 그가 엘스헤른이었다. 무슨 일인 겐지 가득 굳은 표정을 하고 뾰로통해 있었던. 뭐,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날 신년 인사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 중에는 그의 누이에게 청혼을 하러온 건실한 청년이 있었고, 어린 엘스헤른은 그에게 아주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날 내내 심술궂은 아이마냥 툴툴거 리고 있었던 것일 테다. "너처럼 예쁜 애들을 보면.... 재수가 없어." 깔끔하게 예장을 차려입은 소년은 그날 어린 레비앙을 스쳐 지나가며 그렇 게 말했다. 어린애답지 않은 싸늘하고 냉랭한 말투였지만 그날의 자신은 그다 지 그런 그에게 주눅들지 않았던 것 같다. 간 크게도 그토록 신분 높은 분의 말을 무시해버린 것을 보면.... 어쩌면 약간은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그 즈음 에는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훈련의 성과로 인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거의 암기 되어버린 듯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재수 없다는 말보다는 오히 려 예쁘다는 말 쪽이 더 신경에 거슬렸는지도 모르지. 레비앙은 다만 그런 말 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두 살 터울의 소년을 한 번 쳐다봐 주었을 뿐이었고 이 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겨버렸다. 아마도 여지껏 그 누구에게 서도 무시당한 적 없는 엘스헤른에겐 좀 당황스러웠을 테다. 그래서 더더욱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뒤쫓아 왔는지도.... "나를 무시할 만큼 간이 큰 걸 보면.... 너, 내가 누군지나 알기나 해?"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전하." 신년 인사 가기 일주일 전부터 예절 선생으로부터 수 십 번도 더 들어온 에 스트리온 가문의 사람들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 레비앙은 불만 가득 차 보이 는 소년에게 그 한 마디를 던지고는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그와 대면한 처음의 일이었다. "레비앙!" 조금은 화난 듯한 꼬마의 음성에 레비앙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문득 황태 자 전하의 뾰로통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 죄송합니다. 전하. 잠시 생각에...." 무안해진 레비앙은 작게 얼버무리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아닌 모양인지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향해 눈을 치켜 떴다. "왜 그렇게 자꾸만 넋이 나가버리는 거야? 레비앙이 지금 해야할 일이 나와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줘야 하는 것이란 걸 잊어버리는 이유가 뭐야? 황태 자인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중요한 생각이 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아닙니다. 전하.... 그저...." "엘스헤른 외삼촌에 대한 생각? ....그런 거야?" 클로티엔의 느닷없는 추궁에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반짝 들었다. 하 지만 곧 그는 자신이 얼마나 경망스러운 행동을 했는가를 깨달았다. 자신의 행동에 벌써 황태자 전하의 눈빛이 달라져버린 것을 본 순간이었다. 아마도 저 눈치 빠른 황태자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버렸음을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꼬마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 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을 볼 때, 분명 가득히 화가 났음에 틀림없다. 레비앙은 당황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떻게든 그를 구슬려 보기 위해 밝게 웃 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런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전하. 다만 요즘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여러모 로 계획을 세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물론 황태자 전하와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습니 다. 그리고 또...." "....레비앙." 조금은 수선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레비앙의 말을 끊으면서 클로티엔은 새파란 눈동자에 힘을 주며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그렇게 잠시 레비앙을 응시하고 있던 꼬마는 도톰하고 발그레한 입술을 열어 말을 이 었다. "자꾸 그렇게 군다면 나, 외삼촌을 미워할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충분히 외삼촌이 미우니까.... 내가 아직 어린애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를 거 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레비앙이 생각하는 것 만큼 나 그렇게 어리지는 않 아. .....혹여나 엘스 외삼촌이 레비앙을 괴롭힌다면 언제든 나에게 말해. 내가 혼내줄게." 꽤나 근엄하게 구는 꼬마의 말을 들으면서 레비앙은 하마터면 가슴이 철렁 할 뻔 했다. 설마 그날의 일을 황태자 전하도 알고 있는 건.... 하지만 그 곳 은 인적이 없는 뒤뜰이었고, 황태자 전하께서 평소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는 데..... 레비앙은 뭔가 달리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리고 이내 꼬마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만에 하나, 외삼촌이 내게서 레비앙을 빼앗아 간다면, 나 외삼촌에게 결투를 신청할 의향도 있어." - TO BE CONTINUED - ==================================================================== 안녕하시죠?^^ 네, 페르티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논문의 중압감과 언제 닥칠지 모를 특수교육의 시험과 남들 공부하는데 혼자 놀고 있다는 불길 한 예감과 시험에서 과락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으스스한 느낌, 임용고시 공부는 뒷전에 두고 있는 이 불안한 마음....등등만 제외하면요. TT-TT) 아, 최근 민트 홍차를 샀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군요.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 맛과 향이 날 줄은....TT^TT 감동의 극치인 것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 면 오늘은 죙일 밥도 먹지 않고 차만 마신.... 콜록콜록.; 아무튼 구하실 수 있다면 한 번 마셔보셔도.... (아, 민트향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유의하세요. 강한 민트맛이 나니까요.) 네, 요즘은 한층 다른 음악과 접하고 있습니다. 뭐, 예를 들자면 차이코프 스키의 교향곡 5번의 2악장 같은 거요. (나름대로 감동이....라지만 역시 클 라이맥스랍시고 커지는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아. -_- 뭐, 원래 차이코프스키 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구요.) 에, 브람스는 전편의 말꼬리에도 말씀드렸 죠?^^ 브람스 교향곡 4번의 1악장을 좋아하지만 구할 수 없어 여전히 3번의 3 악장만 듣고 있습니다. T^T 여전히 바흐는 좋아해요. 바흐를 듣고 있으면 (아까 낮에 아횬냥과 이야기 했듯이) 뭔가 정화되는 기분이라서.^^; 요즘은 특히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 한 협주곡> 1악장과 3악장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고딩 때 그 곡을 모티브로 쓴 소설도 있을 정도로 좋아하긴 했지만... 잠시 애정이 식었다가 다시 불타 오르는군요!^^ (가상의 음악학교를 배경으로 천재 소년 소녀들이 어쩌구저쩌 구.... 하는 이야기였어요. 쥔공은 천재가 아니었지만서도.;) 아, 그러고 보니.... 바흐의 을 관악기(소 리가 따뜻한 것이 아마도 오보에가 아닐까.)로 연주한 것을 구했어요. 배경으 로 깔리는 건 파이프 오르겐 같기도 한데 음색이 상당히 가벼워서 들으면서도 의문이 물씬. 암튼, 듣기에도 정말 부드러운 곡이랍니다.^^ 그러고 보면 종종 TV에 CF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한답니다. 에, 또... 코렐리의 음악들은 무지무지 좋아하지만.... 진주에선 잘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요. T-T) 그나마 천신만고 하나 있던 코렐리 테 이프는 알맹이가 사라져 버렸지 뭡니까! 즐겨듣고 있는 코렐리의 음악은 뭐, 사라방드 정도예요. (구할 수 없어!!!) <현을 위한 아다지오>라고 바버가 작곡한 곡이 있죠. <플래툰>이라는 영화 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던 거 같은데.(잠결에 봐서 잊었음.) 이 곡도 분 위기가 참 멋지답니다. .....문제는 요즘 듣고 있는 파일들이 모두 확장자명이 "ra"라서 무진장 번 거롭다는 겁니다.(아마도 모아놓은 mp3인 파일들은 너무 들어서 질렸나보오.) -_- 아아~! 이 파일들을 mp3으로 구할 수 있다면.... T^T 게다가 바흐의 저 제목 긴 곡을 제외하고는 어두운 음악 일색. 나날이 구려지는 취향입니다. 콜 록. 그,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루엘 프레데릭 경(엘스 형님)의 망가진 모습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콜록콜록. 아아, 오늘도 무퇴고의 전형. 바쁘다는 핑계 밖엔.... 매일 연재 하면서도 열쒸미 퇴고하던 나날이 그립군요~! [번 호] 47 / 49 [등록일] 2000년 10월 23일 16:28 Page : 1 / 4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738 건 [제 목] [ 인사 ] 인사 올립니다. 생긋.^^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에, 안녕하세요? 저는 페르티 파르페 마쉬멜로우라고 합니다. 당분간 이 방 에 붙어살게 된 꽃순이(...)예요. 오늘 아침에 방이 만들어진 걸 보고, 글들 이 옮겨지기 전에 뭔가 인사말을 써야하지 않을까...하고 이렇게 쓰기 창을 띄워 봅니다. 그렇다고 제 소개로 이 칸을 때우자니 날아올 돌들이 두렵군요. (제 소개는 항시 pf egalite를 해 보시길.;) 그럼 역시 앞으로 이 방을 채우게 될 <레비 앙 & 레비안느>라는 글에 대한 소개를 해야 하는 건가요? T^T <레비앙 & 레비안느>는 1997년 겨울 당시, 무료하던 감금생활(...)을 견디 지 못한 나머지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항시 밖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살을 애는 듯한 영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보니 자연히 글이라 도 쓰게 된 것이죠. 하긴, 부모님의 감시를 벗어났다는 기쁨 하나만으로도 왼 종일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 그리고, 글쓰고, 상상에 잠기는 일들이 질리지 않 았던 겁니다. 원래 <레비앙 & 레비안느>는 3년간이나 쓰려고 벼르고 있었던 <혁명>이라는 글의 떨거지 격이었어요. 뭐, 아직도 <혁명>은 구상만 해 두고 손조차 못 대 고 있는 처지지만... 아무튼, 18세기에 매료되어 있던 저로서는 <혁명>을 쓰 기 전에 이런 저런 연습을 해 볼 필요를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나오 는 주인공 중 두 명을 빌어다가 이런 저런 사랑이야기를 꾸며 본 거였어요. 뭔가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써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1997년 당시에 쓰고 있던 <레비앙 & 레비안느>는 마치 모차르트의 가벼운 오페라를 보는 듯한 분위기였답니다. 빠르고 경쾌한 템포와 무겁지 않 는 상황처리 및 대사들....(뭐, 마술피리나 피가로의 결혼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조금은 방정맞다고 싶을 성격의 주인공들.... 아마도 나 름대로 즐기면서 써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제 유일의 희극인 거였 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레비앙 & 레비안느>를 반정도 밖에 쓰지 못하고 집으로 돌 아오게 되었죠. 그 뒤로는 그런 글을 썼었는지 조차 까맣게 잊어버렸고 말입 니다. 그 후 2년 반이 흘러, 2000년 봄이 되었어요. 대청소를 하던 도중 문득 발견한 공책엔 그 예전에 썼던 그 글이 고스란히 있지 않겠습니까? <피의 보 석>을 연중한 이후 1년 가까이 놀고 있던 저로서는 종전의 분위기랑 사뭇 다 른 그 글이 색다른 구미를 자극하더군요. 뭔가, 18세기의 그림 같은, 잔잔한 묘사를 연습하기엔 딱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리메이크를 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레비앙 & 레비안느>입니 다. 역시 리메이크를 하고 나니 무게감이 더해져서, 처음의 아기자기한 분위 기는 없어져버린 것이 탈이지만요.(;;;) 뭔가 이래저래 말이 길어졌군요. 읽느라 힘드셨죠? 아무튼, 이래저래 방도 생기고 하니 기쁜 마음에 횡설수설하게 되는군요. 네, 또, 언제나처럼 감사 퍼레이드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미스 코리아 대회로 착각하고 있는 페르티.;;) 항상 관심 가져주시는 여러분들(아 악, 열거하라고 하지 말아요. 머리에 한계가....;)과 특히, 언제나 묵묵히 읽 어주시는 여러분들과 항상 격려해 주는 티나 양, 히나 양, 흰매 양, 나머지 양, 샥신 빠, 심사 땜시 고생하신 뱀파 언냐, 하텔에 퍼간다구 고생 많은 례 이 양, 울 남푠 청청냐, 그리고 곁에서 이런 저런 충고에 여념 없는 아횬냥께 깊은 감사를.^^ .....2000년 10월 23일 아침 10시 25분 .....페르티 파르페 마쉬멜로우 괭이꼬리// 아아아~! 뿌듯하군요. T^T 기념 일러스트라도 올려야지 않을까 라 고... 쿨럭. [번 호] 48 / 49 [등록일] 2000년 10월 29일 23:22 Page : 1 / 14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66 건 [제 목]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7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7) 내내 잘 떠들어대던 클로티엔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마차 안은 이내 정적으 로 잦아들었다. 제국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 상대로 뽑혀 함께 지내온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당혹감에 레비 앙은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레비앙 앞에서는 항상 여느 꼬마와 다름없이 굴던 클로티엔은 어쩐 일인지 지금 이 순간만은 황태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좀전 의 자신의 말이 얼마나 진지하고 정중한 맹세인가를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았 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탄 황실마차는 제국 아카데미의 정문을 통과했다. 지루하리만큼 긴 침묵 속에서 황태자를 화나게 한 죄를 반성하고 있어야만 했던 레비앙에게는 제국 아카데미 특유의 웅장한 아치형 대리석 문 이 마치 천국의 문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 에 들떠서인지, 여지껏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위엄을 보여주고 있던 클로티엔 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희색을 띄며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와앗! 다 왔어. 미리 전갈을 보냈으니까 큰외삼촌이 마중 나와 있을 거야." 장차 에스트르의 국왕이 되실 분이긴 해도, 역시나 어린 마음은 감출 수 없 는 모양이다. 꼬마는 언제 심각했냐는 듯이 또 쉴새 없이 떠들어댔고, 레비앙 은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차가 바로크 풍으로 가꾸어진 장대한 정원을 가로질러 제국 아카데미의 본관에 멈추어 서자, 클로티엔의 말대로 미리 마중을 나온 루엘 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잿빛의 머리카락.... 부스스한 분위기에 두툼한 안경을 쓴 것만 빼면 역시나 엘스헤른과 똑같이 생겼다. 루엘은 마차 가 멈춰 서자마자 문을 열고서 자신의 품으로 안겨드는 클로티엔을 반갑게 다 독거렸다. "간만에 뵙는군요. 황태자 전하." "우헤헤. 보고 싶었어. 외삼촌." 숙질간의 돈독한 인사 끝에, 문득 마차에서 내려서는 레비앙을 발견한 루엘 은 레비앙이 허리를 굽히기 전에 먼저 까딱 목례를 했다. "번거로운 인사는 생략하죠, 레비앙 경. ....잘 지냈어요?" "아.... 예." 순간 당황해버린 레비앙은 덩달아 목례를 한 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야 말았다. 뭐, 엘스헤른의 형님인 이유로 십 년 이상이나 봐 온 사람이지만 루엘은 언제나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있잖아, 외삼촌! 도시락도 싸 왔어. 외삼촌에게 놀러간다니까 어마마마께서 궁중 요리사들을 들들 볶았지. 외삼촌이라면 아마 책에 미쳐서 밥도 잘 챙 겨먹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시던 걸." "황후 폐하께서 준비해 주신 거라면 무지 기대가 되는 걸요? 황제 폐하와 결 혼하시기 전에도 아주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셨으니까요. 물론, 잡수시 는데 관심이 많았지만.... 아무튼,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주세요." 클로티엔의 아이다운 수다에 간간히 잘 응해주면서 루엘은 꼬마를 보듬어 올린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말고 문득 당황해하며 서 있는 레비앙을 돌아 다보고는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따라오세요, 레비앙. 제가 소풍에 좋은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옅은 파란빛이 묻어날 것만 같은 바람이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다.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의 끝으로 멀리 벨라시그네의 아름다 운 황궁이 보이는 곳. 그 작은 언덕에 앉은 레비앙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 이 든 클로티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작은 감상에 잠겨들었다. 클로티 엔의 머리카락은 이즈음의 들판을 물들이고 있는 밀밭의 색채처럼 선명한 금 빛의 보드라움으로 그의 손끝에 부벼져 왔다. 오후의 짙은 햇살은 충분히 따 스했고, 주변은 꼬마의 낮잠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조용하기만 하다. 잠시 말을 잃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던 루엘은 문득,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클로티엔을 다독거리는 레비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싱긋이 웃음을 흘렸다. 마치 어린 동생을 대하는 누나 같은 레비앙의 행동이 지금 그의 분위기와 묘 하게도 잘 어울린다. 클로티엔의 황금빛 머릿결을 따라 세심하게 움직이는 레 비앙의 손길을 보면서 루엘은 얼마 전 에스트리온 성관에 갔을 때 제롬이 했 던 묘한 말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엘스헤른이 티아란 대공임이 막 밝혀진 직 후라 성관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길 들을 수 없 었을 뿐만 아니라, 뭔가 제롬도 의기소침해 보여 섣불리 캐물을 수조차 없어 서 묘하게 여운을 남기는 그의 말이 뜻하는 의미는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 엘스 형님은 레비앙이 아니라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걸요? - 하긴, 성관에만 갔다하면 결혼에 대한 구박을 받는 루엘로서는 그 말이 어 떤 면에서는 충분히 와 닫고도 남았다. 아버지에게서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그가 쓰곤 하는 고정 멘트인 "저는 과학과 결혼했습니다." 와 마찬가지 로....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묘한 말이다. 평소 아무리 엘스헤른이 레비 앙과 가까이 지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엘스가 남자와 결혼 할 건.... 뭐, 일종의 비유일 테지. 아니라면 또 제롬 녀석의 작은 꿍꿍이라든지. 귀찮은 듯 생각을 접어버린 루엘은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한다는 소리를 듣 고 모처럼 꺼내 입은 청회색의 외투를 벗어 클로티엔에게 살짝 덮어 주었다. 사실 연구 중에는 거의 셔츠와 베스트차림이기 때문에 간만에 입은 외투가 답 답하기도 해서, 이유가 생긴 김에 마치 떨치기라도 하듯 벗어버린 것이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레비앙은 꼬마의 다정해 보이기만 하는 외삼촌을 감동 어 린 시선으로 응시했고, 루엘은 내심 부끄러운 듯 다른 말을 하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오랜만에 외출이라 피곤했나봐요. 이런.... 곤하게 골아 떨어졌네. ....레비앙 경도 피곤하죠?" "아닙니다. 뭐, 피곤할 것까지야...." 루엘의 느닷없는 물음에 레비앙은 작게 미소로 답했다. 그러자 루엘은 예전 의 엘스헤른처럼 콧등을 살풋 찡그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이,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요즘 피곤한 일이 많은가봐요?" "메일 하는 일이 같은데 피곤할 게 있겠어요? 루엘 경이야 말로 하시는 일이 많아 고달프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황후폐하께서 늘 걱정하시는데..." "아하하하~! 폐하가요?" 루엘은 아까 클로티엔이 그 말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도 안돼."라는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레비앙은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 는 그를 고개를 들어 슬며시 쳐다보았다. 어쩜 생긴 것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엘스헤른과 똑 같을까? 누가 형제 아니 랄까봐.... 뭐, 물론 말투는 극과 극을 달리지만.... 그러고 보면, 엘스헤른 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못된 말투였다. 그에 비해서 엘스헤른보다 4살 터 울, 즉, 레비앙이 처음 봤을 당시 열 네 살이었던 루엘 경은 부드럽고 온화한 말씨로 뭇 귀족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곤 했었는데.... 언제나 못되게 구는 엘스헤른과는 달리 루엘 경은 어린 신사답게 항시 그를 존대해 주었기 때문에, 레비앙은 가끔씩 당황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가슴 찡하게 감동해서 정말 어른스럽다라고 동경해 마지않곤 했었다. 뭐, 사실, 그때 여기기로, 루 엘 경이 어른이 되면 분명 바람둥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벌써 애 아빠가 되었어도 한참 남을 나이에 과학에 미쳐 연 구실에 틀어박혀 있다니.... 뭐, 본인의 말로는 장남에게 기대가 큰 에스트리 온 공작 전하의 눈을 피해 도망 와 있는 거라고는 하지만.... 문득 레비앙은 어느새 또 멍하게 망상에 잠겨버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아주 조금의 짬 만 생겼다 하면 생각에 잠겨버리기 일쑤라니....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나 무라실 만도 하다. 하긴.... 엘스헤른과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 이후로는 아 무래도 이래저래 심란해져서 그 어떤 일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막상 이 렇게 되고 나니까 그 동안 자신이 엘스헤른을 향해 부려온 투정이 얼마만큼의 사치였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더욱더 후회되는 건지도 모른 다. 아아, .....또, 멍해지다니. 이젠 습관이라도 되어버린 건가? 쓰잘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비앙은 머리를 휘휘 가로 저었다. 그런 그의 행동 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루엘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면서 불쑥 물었 다. "역시 피곤한가봐요? 뭐, 그렇다면 기꺼이 제 무릎을 빌려드릴 의향도 있는 데...." "네?!" 당황해버린 레비앙이 딸꾹질이라도 하듯 큰소리로 되묻자 루엘은 장난스럽 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농담입니다." 시원한 웃음을 흘리는 루엘을 보며 레비앙 역시 억지로 웃긴 했지만 그의 농담 삼은 제안에 느닷없이 놀래버렸는지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놀란 마 음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멀리로 시선을 돌린 레비앙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 다. 파랗고 투명한 공기에 그의 한숨은 흔적도 없이 녹아들었다. 눈물이 나올 만큼 파란 하늘에 눈길을 두며, 레비앙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서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역시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겠네요." "아... 뭐, 좀 그렇죠. 내내 틀어박혀서 책을 파거나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도 에스트리온 공작전하의 잔소리를 덜 들을 수 있어서 집에 비하면 오히려 천국 같은 걸요?"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매만지며 싱긋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레비앙은 잠시 의아해졌다. 사실, 루엘 경 정도의 매너와 외모와 집안이라면 그와의 혼인에 목메는 아가씨들도 수두룩할 테고, 나이도 이미 찰 대로 찬만큼 스스로도 장 가를 가야겠다는 자각이 있을 텐데.... 아무튼, 루엘 경도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을 테니까 에스트리온 공작 전하의 그 으름장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독신 을 지키고 있는 것일 테다. 역시 여자 꽁무니나 좇아 다니는 엘스헤른에 비하 면 뭔가 훨씬 더 생각이 깊은 듯도 하다. "특별히 염두에 두고 계신 분이라도 계신가봐요. 집에서 정해주는 혼처에는 눈도 안 돌리시는 걸 보면...." 레비앙이 눈을 말똥거리며 묻자 루엘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럼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아.... 뭐, 별다른 건 없어요. 그냥.... 뭐랄까, 최고의 지성을 가진 여성 에게 취해 살고싶은 것이 제 소망이라서.... 어렸을 때보고 자란 누님 덕에 눈만 높아진 거죠." "하긴, 황후 폐하시라면 에스트르 최고의 미모에 학식까지 풍부하신 분이니 그럴만도 하네요." 레비앙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공감이 달갑지는 않 은 겐지 루엘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에, 너무 추켜세우진 말라구요. 불손한 말이지만 누나로서의 성격은 꽝이었 으니까요. 언제나 동생들 골탕 먹일 생각에 눈빛을 반짝거리는 소녀를 상상 해보세요. 그 비상한 머리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동생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인가 하는 것에만 골몰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는 자신의 잘못을 무 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니까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알겠습니 까." 자신의 누이에 대한 험담아닌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루엘은 포오옥 한숨을 내쉬었다. 엘스 역시 언제나 말했다시피 누나는 - 아아, 황후 폐하께는 불손 한 말이지만 - 어머니와 작당하여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진 사 람 같다 했었다. 뭔지는 몰라도 엘스헤른과 루엘 형제는 황후 폐하나 에스트 리온 공작부인에 대해 깊은 사랑과 함께 그 어떤 특별한 감정도 갖고 있는 듯 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증오심 이었다. 엘스헤른이 황후 폐하와 에스트리온 공작부인의 험담에 열을 올리던 것을 떠올리며 레비앙은 입꼬리에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레비앙이 웃느라고 한동안 말이 없자, 루엘은 기회를 놓칠 새라 얼른 화재 를 돌렸다. 아무래도 결혼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변명만 늘어놓게 되기 때문에 되도록은 피하고 싶은 그였다. "아, 나중에 입궁 할 때는 같이 가요. 황후 폐하께서 잠시 오라고 하셨거든 요. 누님의 명인데 당연히 따라야겠죠." - TO BE CONTINUED - ==================================================================== 안녕하시죠? 펠티는 요즘 안녕 못합니다. 쿨럭. 여러모로 바빠서요. (오죽 하면 아기를 안고 있는 꿈을 꾸겠습니까? - 아기를 안은 꿈은 근심이 있다는 뜻이랍니다. - 뭐, 꿈 속의 남편이 잘생겼으니 그럭저럭 슬프진 않았습니다.)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논문 때문에 불안함은 더욱 가중되구 요. 이래저래 정신없는 나날입니다. 아, 이번 글이 추천 연재란에서 처음 올려보는 글이 되는 거로군요.; 가, 감격입니다. T-T 열쒸미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바빠진지라, 그 동안 글을 올 리지 못했네요. 아무튼, 노력해서 뒷 이야기는 다 잡아뒀으니 그나마 안심입 니다. 오늘 잡담은 이만. 할말은 산더미 같지만.... 역시 독자여러분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잡담을 줄여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요. 콜록.; 그럼 다음에 뵙죠. [번 호] 49 / 49 [등록일] 2000년 11월 04일 07:35 Page : 1 / 14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149 건 [제 목]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8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8) 역시나 요즘의 일로 내내 마음이 싱숭생숭해서인지 엘스헤른은 좀체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미 에스트르에서는 오스트리아로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 을 내린 상황이고 요즘 회의의 주된 내용이라는 것은 그와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들과 세금 문제라든지 하는 것들이어서 엘스헤른으로서는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물론 모든 결정권은 그에게 달려 있어 회의 도중에는 잠시라도 자리를 뜰 수 없을뿐더러, 빈 호두껍질 같은 헐렁한 소리만 늘어놓 는 귀족들의 이야기까지 모조리 경청해야하는 고초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그는 심신으로 이래저래 고달팠다.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보니 회의는 벌써 일주일이 훨씬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젊은 엘스헤른을 얕잡아보는 귀족 들의 눈초리 또한 사그라지지 않은 터라 회의는 시종일관 비꼬는 투로 나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엘스헤른은 에스트리온 가문 특유의 은근한 말투로 되 받아 쳐주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그런 말투는 엘스헤른 자신이 아 버지 에스트리온 공작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드러 내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런 이유 외에도 심히 뒤틀려 있는 심사라 어쩌면 무 척이나 자연스러운 언사로 입에 익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회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상에서의 그의 생활 또한 꼬여있기가 장미넝 쿨 보다도 더 심해서 요즘 내내 무심해 보이는 제롬의 저 속에 또 다른 무슨 계획이 들어앉아 있는지, 혹은 새로 들여온 영국산 홍차를 시음해 보기 위해 레비안느를 종종 성관에 불러들이곤 하는 아이린과 어머니는 대체 무슨 계략 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하는 사사로운 것들에도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은 엘스헤른에게 더더욱 괴로운 일 이 생겼으니..... 이 철부지 누이, 존엄하신 황후 폐하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트르가 전시체제에 돌입하게 될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이번 주말에 살롱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오후 회의를 마친 시간에 맞추어 시종 을 통해 그에게 배달되어 온, 둥글게 말려 붉은 리본이 매어진 문서에는 황후 직인이 찍혀 있는데, 별 생각 없이 열어본 문서의 내용은 바로 황후께서 주최 하시는 살롱에 대한 초대의 글이었다.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라는 말로 시작되는 글은 평소의 누이 답지 않은 온화하고도 품위 넘치는 말투를 고수하 고 있어 읽고 있는 엘스헤른을 괴롭게 만들었다. 더욱이 추신으로 붙은 날렵 한 문장을 읽는 순간, 엘스헤른은 아드레이드가 이 초대장을 쓰면서 얼마나 통쾌해 했을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 추신, 에스트르의 붉은 장미 아르떼이유 경도 초대했음. - 한동안 넋을 놓고 문서를 쳐다보던 엘스헤른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면서 넌 지시 황제 폐하를 돌아다보았다. 황제 폐하 역시 비슷한 종이 두루마리에 시 선을 두고 계시더니 이내 싱긋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저, 저런 행복한 표정이라니.... 아아,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엘스헤른은 미간을 찌푸리고 싶 은 심정을 애써 참으며 거칠게 종이를 말았다. 제각각 초대받은 대신들의 술 렁거림이 그의 귀에는 마치 벌떼의 날개짓 마냥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때에 어인 살롱이냐는 푸념도 잠시, 이 초대장이 그간 길고 길었던 회의에 대 한 보상이라도 되는 양 담소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괜스레 짜증이 치솟을 것만 같았다. 아직 결정해야할 사안은 산더미 같은데 벌써 회 의가 종결된 것처럼 떠드는 저들을 보고 있자니 그는 앞날이 감감하기만 했 다. 초대장을 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고 회의장을 먼저 빠져 나온 엘스헤른 은 발걸음이 옮겨지는 데로 걸었다. 뭔가 가득 복잡한 심사를, 걷는 것으로나 마 위안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는 긴 복도에는 그 자신의 흔적인양 낮은 발자국 소 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복도의 양 옆을 밝힌 촛불의 어른거림이 만드는 둥근 그림자를 밟으며 엘스헤른은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떼어놓았다. 지금 이 순 간은 너무나도 피곤하고 정신이 산만해서 그냥 시선 두는 곳 없이 멍할 따름 이다. 레비앙은 지금쯤.... 퇴근했겠지. 문득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 게 황태자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엘스헤른은 머리 카락을 쓸어 넘겼다. 레비앙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참으로 뻔뻔스 럽기 그지없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굴어놓고서는, 다시는 보지 않을 듯이 굴 어 놓고서는 보고싶은 마음에 이렇게 발걸음까지 저절로 옮겨지다니.... 그런 자각 때문인지 아까보다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엘스헤른은 여전히 황태자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쩐지 정신이 깨끗하게 맑아져온다. 뺨 에 느껴지는 싸한 전율 때문일까? 묘한 두근거림이 가슴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다. 그리고 살며시 주먹을 쥐고 있는 손바닥 안이 푸근하게 따스해져 온다. .....누군가가 보고싶다는 것은, 이런 기분인 걸까? 그저 보고싶고, 꼭 봐야 만 마음이 놓일 것 같은 기분이라는 건..... 하지만 그의 그런 기분도 잠시, 그가 복도를 돌아서는 순간 황태자의 방 쪽 에서는 작으면서도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레비앙의 목소리다. 약간 톤이 높은.... 어찌 들으면 계집애 목소리 같은 맑은 음성. 그러나, 들 려오는 것은 레비앙의 목소리 만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에서 문이 열리는 순 간 보인 것은 키가 훤칠한, 엘스헤른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이제 퇴근하시는 거죠? 레비앙." "네. 황태자 전하도 잠드셨으니까...." 지금 황태자의 방을 나서면서 레비앙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쥔 엘스헤른은 눈썹을 찌푸리며 앞을 주시했다. 어째서! 천년 묵은 먼지 가 폭폭 쌓인 제국 아카데미에 처박혀 먼지나 마시고 있어야 할 형님이 지금 레비앙과 이야기를 하며 저 방을 나서는 것인가?! "저기.... 집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그것도 저토록 친절한 말을 건네면서! 엘스헤른은 짐짓 가득히 가라앉은 마 음으로, 루엘의 그런 말에 어떻게든 반응할 레비앙을 쳐다보며 심정을 졸였 다. 아니나다를까, 레비앙은 흠칫 놀라면서 그 특유의 동그란 초록빛 눈동자 를 크게 뜨며 루엘을 쳐다본다. "네에?! 아, 저.... 괘, 괜찮습니다." "하하하. 저도 황후 폐하와의 이야기도 끝났고, 이만 제국 아카데미로 돌아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가는 길에 동행이나 할까 해서요." "아.... 네...." 루엘의 어수룩한 웃음에 레비앙은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앙은 어쩐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면서 살며시 눈을 내리깐 채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겐지 조금은 뾰로통한 모양으로 입술을 모으고 있었다. 어쨌든, 엘스헤른은 지금의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 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지금 정면에서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엘 스헤른 본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화를 낼 계기를 만들기 위한 작은 꼬투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작은 저들의 그런 분 위기에 견디지 못할 만큼 마음 속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치솟아서였다. 레비 앙이 형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형의 말에 웃어주고, 뺨을 살짝 붉히고 있다 는 것조차....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작은 기침을 한 엘스헤른은, 비로소 그제서야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는 시선을 보내는 두 사람을 보며 싱긋이 웃음을 지었 다. "오랜만인 걸. 두 사람 모두." "엘스!" 그나마 반가운 표정을 짓는 루엘과는 달리 레비앙은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 으로 그 자리에 굳어서버렸다. 마치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 얼굴에 핏기를 잃은 레비앙을 흘깃 쳐다보며 엘스헤른은 작은 냉소를 한숨에 실어 보냈다. 그러고는 짐짓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형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야. 책벌레만 잡아 먹고살았어? 왜 이렇게 마른 거야? 마지막으로 본 지 며칠 지났다고...." "아, 뭐.... 일주일도 훨씬 넘었으니 마지막으로 본 지는 꽤 지난 게로군." 어수룩하게 손으로 날짜를 꼽고 있는 형님을 보며 엘스헤른은 눈 꼬리를 치 켜올렸다. "여전히 멍청해. 동생의 말조차 되받아 치지 못하다니.... 그 머리를 어째서 제국 아카데미에서 받아준 건지 몰라. 역시 에스트리온 가문의 후광이라는 건 아무리 제국 아카데미에서라도 매몰차게 뿌리치기엔 너무 큰 것이었나?" "아, 그거야 뭐..... 내가 총장님께 싹싹 빈 거지. 집에서 옭아 매려하는 결 혼의 마수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구원해 주십사 하고...." 입술을 씨익 끌어올리며 비웃는 엘스헤른에게 루엘은 여전히 숫된 표정으로 대꾸했다. 졸지에 두 형제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구경하게 된 레비앙은 그 동안 쭈뼛거리면서 이 상황을 모면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엘스헤른을 만 나 그간 묵직했던 기분이 더운물에 설탕 녹듯이 화악 풀리는 것도 잠시, 어쩐 지 그로 인해 상처받게될 일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예감은 여지없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어깨를 스멀거려 온 몸을 소름끼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레비앙이 이 상황을 벗어날 방도라는 것을 미처 세우기도 전에 엘스헤 른은 이쪽을 향해 싱긋이 웃는 눈빛을 던졌다. 레비앙은 이내 성큼성큼 자신 에게로 다가오는 엘스헤른을 보며, 이제는 딸꾹질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심정 이 되었다. "레비앙. 오늘 약속 잊은 건 아니겠지?" 자신의 앞에 걸음을 딱 멈추고 따스하게 웃으면서 다정한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이 엘스헤른이라는 사실을.... 레비앙은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웃고 있는 모습은.... 예전의 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레비앙은 그가 과 연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곱씹을 생각도 못하고, 그래도 어쩐지 경계되는 마음 한 켠으로도 그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뿌듯하고 가슴 벅차서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말끄러미 엘스헤른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나랑 아침에 약속 한 거 있잖아. 잊었어?" 엘스헤른은 생각해내라는 듯이 간절한 눈빛을 지었고, 잠시 두 사람의 눈치 를 살피고 있던 루엘은 뭔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 있다면, 레비앙 경은 나와 같이 귀가하긴 힘들겠네." 루엘의 말을 듣고서야 번쩍 정신이 든 레비앙은 고개를 들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저...."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레비앙" 레비앙의 말을 살며시 가로막으며 싱긋 웃음으로 답한 루엘은 예의 바른 말 을 남기고는 벌써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잘 가.... 형님." 그의 등 뒤로 싸늘한 한 마디를 날리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더 이상 루엘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루엘이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 엘스헤른은 다시 얼음장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래서인지 레비앙은 루엘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루엘의 발소리는 점차 멀어져서 어느덧 복도에는 싸한 정적이 어둠처 럼 내리 깔리고 있었다. "후후훗...." 어두운 공기 중으로 싸늘하게 흩어지는 엘스헤른의 낮은 웃음소리에 레비앙 은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엘스헤른의 눈에 살풋 웃음이 서리고 있었다. "왜 놀래지? 뭐, 내가 널 곤란하게 했던가?" "....."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어서? 그것도.... 조금은 야비한 수법으로 말야." "대공 전하...." 깐죽거리는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띄우며 레비앙이 착 가 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엘스헤른은 자신의 손을 들어 레비앙의 턱 끝 을 받쳐 올리면서 차가운 눈빛을 지었다. "대공 전하라....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난 말야. 네 가 다시는 그 말을 못하도록 네 입술을 훔쳐버리고 싶거든." "....." 엘스헤른의 말에 레비앙이 시선을 피하며 언뜻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싱긋 이 여유 있는 웃음을 내뱉었다. "왜? .....싫어?" .....To Be Continued ====================================================================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며칠 전엔 비도 왔구요. 이래저래 피곤하고 노곤함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눈물 나도록 새파란 하늘에 어쩐지 분해하면서도 가슴은 새처럼 소심해서 멀리 떠나보는 모험도 해 보지 못하고 있답니다. (임용 셤이 코 앞으로 다가와 버린 겁니다!) 암튼, 추운 날씨에 몸조리 잘 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얼굴도 트기 쉬운 계절이니까 세수하시고는 꼭꼭 화장품 발라주는 거 잊지 말구요. 요즘 글이 잘 올라오지 않는다고 투정부려 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 그 맛에 산답니다. T-T) 조금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으니까 이해해 주세요. 어 느새 좀 느긋해지려고 하니.... 역시 셤이 목을 졸라오는군요. 커걱. 아, 독촉해주신 지우스 님과, 네이시 님 감사드립니다.^^ 글쿠, 최근 추천해 주신 지우스 님을 비롯한 세 분(크악! 갈무리 해 두지 않아서 두 분의 이름을 까먹었어요! T-T 죄송죄송.;)께도 감사를.^^ 글코, 지우스 님, 감상 감사드려 요!(아앗, 너무 늦게 감사의 인사를... 쿨럭.; 답변 해 드리지 못한 거 죄송 합니다. 뭔가 답변 할 게 많았는데. 때를 놓쳐 버렸군요.;;;;;) 네, 이제 감사 퍼레이드도 끝났고,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9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10 조회수: 355 ┌───────────────────────────────────┐ │ ▶ 번 호 : 0/5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1월 09일 23:08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49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49) "……." 잠시 아무 말 없이 엘스헤른을 쳐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 의 손을 쳐내었다. 이런 식의 농락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종잡 을 수조차 없는 엘스헤른의 행동들에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는 것조차도 지겨 워질 지경이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게 되어버리 는 경솔함과 그와 마주보고 있으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그에게로 쏠 려버리는 마음을 스스로 비웃기도 이젠 이골이 났다. 요즘 결혼을 서두르려 하는 리하르트의 묘한 태도를 그저 약간의 불안함 정도로 덮어둔다 치더라도 레비앙은 지금의 모든 상황을 벗어나 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어지럽고 혼란스 러웠다. 어찌 보면 짧다고도 여겨질 열흘 남짓의 그 시간이 그에겐 너무나도 힘들었다. 앞으로 쏠려 흘러내리는 붉은 빛 머리칼을 희고 긴 손으로 쓸어 넘긴 레비 앙은 나즉한 목소리로 엘스헤른에게 물었다. "대체 제가 어떻게 해 드리길 바라시는 겁니까?" 의외의 질문인지 엘스헤른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레비앙을 쳐다보았고 이내 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내가 바라는 대로 응해줄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훗…… 후후후……." 엘스헤른은 재미있다는 듯 계속 웃음을 흘렸다. 어둠을 채무며 깔아들 듯한 낮은 웃음소리에 레비앙은 소름이 끼칠 것 같았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그 를 응시했다. "예전에 말씀 드렸듯이 정당하지 못한 요구라면 아무리 대공 전하라 하더라 도 응해 드릴 수 없습니다." "……쳇. 까탈스럽기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입술을 비틀어 웃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 앙은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그렇게 멀지 않은 예전에 저 사람과 함께 떠들고 웃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당최 믿어지지 않을 일이 되어버렸다. 잿빛 눈동자에 진지한 호기심을 담고 자신을 말끄러미 쳐다보곤 하던 엘스헤른을 그토록 매몰차게 대하던 때에 자신은 정말 무슨 심정이었을까? 어째서 그때는 저토록 그리운 사람에게 그렇게 못되게 대했던 걸까? 이렇게 되어버릴 거라는 걸…… 미쳐 몰랐기 때문일까? 레비앙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엘스헤른에게서 그만 시선을 돌려버렸다. 긴 속눈썹이 가만히 내리 깔리는 그 아름다운 눈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옛 생 각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인데…… 내내 그리워 지는 이유를 모를 일이다. 엘스헤른이 어른스럽게 구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그가 변해버린 거 같아서 마냥 고민하곤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찌 생 각하면…… 그때는 정말 행복한 고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공 전하." 레비앙은 엘스헤른에게서 등을 돌려 걸음을 때어 놓았다. 등 뒤에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의미를 곱씹을 겨를도 없이 레비앙은 뛰는 듯한 걸 음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자기도 모를 사이에 시야가 뽀얗게 흐려져서였 다. 이렇게 우는 모습 따위 엘스헤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약하고 어 리석은 모습으로 용서를 빌 이유라는 건 없다. 만일 그렇게 해서 엘스헤른의 마음이 풀린다면 벌써 수없이 그러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레비앙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엘스헤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렇게 레비앙이 사라지고 난 복도에는 어둠과 함께 무거운 정적이 깔려들 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춘 복도의 저 끝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엘 스헤른은 젖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길……." "다녀오셨어요?" 언제나처럼 밝은 웃음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아이린을 보며 엘스헤른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아침에 황궁으로 출근할 때에도 역시나 변함없는 포근한 표정을 지어 주었던 사촌 동생에게, 따스한 말 한 마디 건네 줄 수 없 을 만큼이나 마음이 지쳐버려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무 말 없이 2층으로 올라가는 엘스헤른을 뒤따르며 아이린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알거렸다. 레비안느 양은 어쩐 일인지 오후에 하인을 보내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에스트리온 성관에서의 약속을 취소 해버렸고 그래서 하루종일 심심한 시간을 보냈노라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린에 게에게 그는 어쩐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처럼 에스트르까지 다니러 온 사촌누이와 함께 놀아주거나 할 여유도 없이 이런 일들이 터져 바빠져 버 린 데다가, 예전에 고민을 털어놓은 이후로는 어쩐지 그녀에게서 아주 사소로 운 것까지도 세심하게 배려 받는 것 같아서, 엘스헤른은 여러모로 면목이 없 었다. "아,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 살롱의 초대장을 보내주셨어요." 아이린의 이런 저런 이야기 와중에 문득 살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엘스 헤른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추어 섰다. 계단의 한 가운데에서 엘스헤른에 우뚝 멈추어 서버리자 뒤따라오던 아이린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아, 미안……. 어떻게 하면 황후 폐하의 살롱에 불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 느라……." "훗……. 설마요. 오라버니가 어릴 적에 황후폐하를 얼마나 따랐는지는 외숙 모님을 통해서 들었는걸요." "……." 엘스헤른은 아이린의 말에 죽이라도 쑨 표정이 되어서는 툴툴거렸다. 제길, 이 수다쟁이 공작부인이 또 엉뚱한 이야길 늘어놓지나 않았는지 몰라. 물론 입 속으로 투덜거린 말이라 아이린이 들었을 리 만무하지만 엘스헤른은 그녀 가 자신의 표정을 볼세라 얼른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어쩐지 엘스헤른은 아이린이 늘어놓고 있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지금 귀 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아까 복도에서 레비앙과 있었던 일이 저도 모르게 머 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꾸만 후회되는 심정이 아까 의 일을 회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렇게 아주 사소한 것에 까지 질투로 달아오를 만큼 자제심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 았다. 이제는 형에게까지 질투를 느끼게 되다니……. 그저 둘이 이야기를 했 을 뿐인데도 그렇게 화가 치밀어 오를 줄이야……. 엘스헤른은 뭔가가 꽉 막 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이 지경이 되어가면서까지, 레비앙 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일말의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해야만 하는지 자 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약한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행복했던 순 간을 향해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을뿐더러, 만에 하나 이전처럼 돌아간다 하 더라도 이미 예전의 자신은 아닌 것이며, 또한 예전의 레비앙이 아닐 테니 까……. 흘러 가버린 물은 되돌릴 수 없는 게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스스로 해야할 일도 명백해진다. 레비앙을…… 엘스헤른 자신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리 는 것. 물론 그것이 어쩌면 다시는 그의 미소를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뜻 한다 하더라도…… 그 녀석이 남을 위해 웃어주는 웃음 따위는 절대로 보고싶 지 않다. 엘스헤른은 입안이 칼칼해질 만큼이나 쓰라리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깊 이 심호흡을 했다. 이러는 것이 삐뚤어진 소유욕에서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 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어린애 같은 심술로 밖에 나타낼 수 없는 자신이 어쩌면 처량하게도 느껴졌다. 허나, 그 보다 더 괴로운 것은 레비앙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대하는 옛친구를 바라보면서 레비앙이 느끼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레비앙도 지금의 나만큼이나…… 괴로울까? 이렇게 아프고…… 잘 못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한 바탕 눈물이라도 쏟아버릴 정도로 터질 것 같은 심정일까? 문득 또다시 약해져버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엘스헤른은 고개를 들었다. 당최 이렇게 생각에 잠겨 버리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곤해서 늘어 질 것 같은 심정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샌가 머릿속을 온통 잠식하고 있는 건 오로지 레비앙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이……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만, 그리고 그 사람에 관한 일들만 줄곧 생각날 수가 있는 걸 까? 복도를 돌아서서 자신의 방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춘 엘스헤른은, 아직도 이 야기를 계속하며 자신의 등 뒤를 따르고 있는 아이린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제지하고는 생긋이 웃음을 지었다. "이 봐, 아가씨. 사촌 오라버니의 옷 갈아입는 모습까지 감상하실 생각은 아 니지?" "아……." 아이린은 장난스레 웃으면서 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엘스헤른을 보며 살 풋 얼굴을 붉혔다.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미처 그 생각까지 못한 것이다. 그녀 는 발갛게 홍조를 띈 뺨을 살짝살짝 두드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복도의 한 켠에서 도둑 고양이 소리마냥 가득 낮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흠칫 놀란 아이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말고 발소리를 죽여 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을 향해 종종걸음 쳤다. 아니나다를까, 엘스헤른의 방에서 얼마 떨 어져 있지 않은 복도의 코너에서 제롬이 납작하게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언제 따라 온 거야?" 아이린은 누나답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제롬은 이내 이것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콧등을 살풋 찌푸리며 생글거렸다. "궁금해서 말야. 그건 그렇고……. 어때? 형님으로부터 뭐 좀 떠 봤어?" "아니……. 좀체 말을 해야 떠보든지 말든지 하지." "으음." 조금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누나를 보며 제롬은 나직히 앓는 소리를 내 었다. 덩달아 포옥 한숨을 내 쉰 아이린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황후폐하의 살롱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는 조금 움 찔 했더랬어." "살롱에 대한 이야기는 왜?" "……모르지. 가기 싫은가봐." "흐음……." 두 남매는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곰곰 고민에 잠겼다. 요즘은 엘 스헤른이 내내 황궁에 가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 물론, 엘스헤른 과 레비안느 사이의 상황 - 통 알 길이 없었다. 황후폐하의 비밀 서신을 통해 서 화끈한 소식이 날아오곤 할 때도 있지만 그것도 가끔 있는 일이고, 역시 여전히 엘스헤른이 레비앙을 구박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뭔가 깊이 있는 내 용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거의 겉돌고 있는 루엘과 근엄한 에스트리온 공작 전하를 제외한 모든 식구 들이 수시로 자신을 떠보고 심지어 속이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엘스헤 른이 알게 되면 펄펄 날뛰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이건 다 그가 잘 되길 바라 는 마음에서라고, 이 장난기 많은 식구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속사정을 듣 고선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에스트리온 공작 부인과 황후 폐하 덕에 아이린과 제롬은 이 와중에도 엘스헤른을 위한 모종의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추호도 행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 참!"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린이 갑자기 감탄사를 연발하자 제롬은 흠칫 놀라며 누나의 입술 앞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엘스 형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아……. 그래그래. 그건 그렇고 말야……."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도 놀라며 소리를 줄인 아이린은 가득 심각한 표정 으로 연록색의 눈동자를 말똥거렸다. "만에 하나, 리하르트 경이 결혼을 서둘러서……. 두 사람이 결혼을 해버리 면 어떡하지?" "……." 아이린의 말에 제롬은 뭐라도 씹은 듯 침울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큰일이지." "음……. 모든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야. 그렇지? 제롬. 그리고 우리 엘스 오라버니는 절망에 빠지겠지? 절망에 빠진 채 전쟁터로 가면 살아 돌 아오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지 몰라." "그, 그렇게 정확하게 확인시켜서 말해줄 필요는 없어! 누나." "으음……. 사실이잖아. 서두르지 않는다면 저렇게 되어버릴 게 뻔해." 아이린은 푸념 섞인 말투로 종알거렸고, 제롬은 꺼질 듯이 한숨을 내 쉬었 다. "일단은 말야. 아드레이드 누님, 아, 아니, 황후 폐하를 믿어보자구. 이번 살롱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주겠지." 그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듯한 제롬의 말에 아이린은 내키지는 않는 듯 했지만 역시 끄덕였다. 그 순간 문득, 엘스헤른의 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 가 들려왔고,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면서 계단을 돌아 아래층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나, 나중에 이야기 해, 제롬." "응! 뒤에 누나 방으로 갈게." - To Be Continued - ==================================================================== 안녕하십니까? 독자 여러분.^^ 정말 오랜만에 찾아 뵙습니다. (쿨 럭.;) 요즘은 이래저래 글 쓸 틈이 없어서리……. 아무튼 잊지 않고 독촉해주 시는 여러분들께 매번 감사드립니다.(티나 양, 지우스 님, 흰매 양, 메이 님, 글쿠……. 블루 님. 아, 빼먹을 뻔 했지만 샥신빠도.^^ ……또 누구더라?; 잠 시 생각이 안 나는 관계로 이하 생략.;) 물론, 말씀 없이 읽어주시는 모든 분 들이 저에겐 가장 소중하답니다.^^ 아무튼,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서 좀 분량이 깁니다. 체감적으로도 그렇게 느껴지시죠?^^ (아, 아니라고요?! ……절망.T^T) 아무튼, 3일에 걸쳐서 쓴 것이라 중간에 흐름이 끊긴다든지 하는 괴현상을 목격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 니다. 아, 이번 회부터는 말 줄임표를 <....>에서 <……>로 바꿔봤습니다. 어떠신 지? 바꾼 이유라면 역시 <.....>와 <....>이 구별되지 않아서랍니다. 그, 그 러니까 <…….>와 <……>의 구별을 위해서지요.; 뭐, 몇 번 해 보다가 귀찮으 면 관 둘 생각입니다. 앞으로는 이 여세를 타고 다음 편도 분량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 럼 여러분 모두 좋은 하루 되시구요. 다음 편은 아드레이드 황후 폐하의 살롱 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13 조회수: 416 ┌───────────────────────────────────┐ │ ▶ 번 호 : 0/5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1월 12일 21:48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0 -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0) 현악의 잔잔한 음색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은촛대 위의 수많은 촛불들은 공기를 온화한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황후의 살롱이 열리고 있는, <풍요 의 계절>이라는 이름이 붙은 방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아늑하고도 편 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벽난로를 통해 따스하게 데워진 공기는 벌써 싸늘해진 바깥의 온도를 잊게 해 줄 수 있을 만큼이나 푸근했고, 그다지 소리 를 높이지 않는 사람들의 두런거림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느새 손님들은 하나 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가식의 미소와 멋진 옷 차림으로 중무장한 신사들을 비롯하여, 초대받은 귀부인들과 아가씨들은 일찌 감치 도착해서는 아찔할 향기로 이 방의 공기를 혼탁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 었다. 현란하게 차려입은 그녀들의 옷차림은 아름답거나 자랑스럽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리게 할만큼이나 조잡스러워 보였다. 혁명이 한창 시작되고 있을 즈음의 프랑스 역시 화려했다던 베르사유 궁의 <거울의 방>에선 저와 똑같은 모습들의 여인들이 짙은 향수 내음을 풍기며 자신의 허영심을 과시하고 있었 을 테다. 그리고 자신들을 깨부술 그 미묘한 조짐을 한갓 농민들의 사소한 반 란으로 치부하며 웃고 떠들고 쾌락에 빠져 있었겠지……. 뭔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엘스헤른은 짜증스레 한숨을 내 쉬었다. 벌써부터 자신의 자리에 약간은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자리잡고 앉은 그는 앞으로 닥칠 것만 같은 두려운 상황에 안절 부절한 심정을 떨칠 수가 없 었다. 황후의 살롱은 그다지 자주 열리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엘스헤른은 기대는 고사 하고 어쩐지 거북한 기분에 안심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이 살롱의 주최자이 자 자애로우신 황후 폐하, 즉, 괴짜 누님이 대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 두려워서였다. 더더구나 그녀가 초대장의 끝에 장난스레 덧붙였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레비앙도 초대했다는 말을 굳이 초대장에다 적어 보낸 이유라 면, 역시 뭔가 동생을 골탕먹일 상황을 계획하고 있으니 기대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누님이 시집가버린 이후 더 이 상 꾸지 않아도 되었던, 그녀가 끈질기게 괴롭히는 악몽을 지금 다시 꾸고 있 는 심정에 엘스헤른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다가 제발 좀 접근하지 말아줬으면 했던 귀부인들과 아가씨들이 티아 란에 대한 이런 저런 것들을 묻느라 엘스헤른의 곁에서 당최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의 검은 속셈이야 불을 보듯 뻔한 것으로, 이제 놀고먹는 놈팽이 귀족이 아니라고 밝혀진 - 에스트르 최고의 귀족이자 티아란의 대공, 엘스헤른에게 어떻게든 예쁘게 보여 볼 심산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엘스헤른 은 귀찮은 마음에 그녀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앞으 로 자신에게 닥쳐 올, 누님으로부터의 시련에 즉각적으로 대처해 살아남기 위 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하지 만, 불쾌함으로 인해 그의 살풋 찡그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이 끈질긴 여인들 은 좀체 비켜날 생각들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속마음을 숨기면서 엉뚱한 것을 물어보고 있는, 참새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그녀들의 재재거림에 엘스헤른은 벌써부터 두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대공 전하~! 티아란은 에스트르보다 따뜻한가요?" "어머나~! 그렇다면 이번 겨울엔 티아란에 한 번 가 보고 싶은데...." "어머머……. 티아란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인가요? 대공 전하께서 가실 때 동행한다면 또 모를까……." 제길, 이런 때에 아이린이라도 곁에 있다면 이 여인네들이 어떻게든 떨구어 져 나갈텐데……. 엘스헤른은 아이린을 방패막이 삼으려는 자신의 못된 생각 에 잠시 죄책감이 들기도 했으나, 한층 더 시끄러워진 참새 부인들의 수다 앞 에서는 그 생각도 바람 앞의 깃털처럼 날아가 버렸다. 때마침 그녀들의 목소 리가 갑자기 잘라놓기라도 한 듯 잠잠해지지 않았다면 엘스헤른은 시끄러움에 못 이겨 훌쩍 뛰쳐나갔거나, 아니면 예의 상 앉아 있기는 한다 하더라도 피가 말라 퀭한 모습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잠시 술렁거리던 그녀들은 갑자기 넋이라도 나간 듯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해 있었다. 뭔가, 매너 좋은 바람둥이라도 나타난 모양이 지……. 엘스헤른은 혀를 차며 이제는 좀 느긋해진 태도로 의자 등받이에 몸 을 기댔다. 그러나, 그의 휴식을 방해하기라도 하듯,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저 귀부인들의 한 가운데에서 멋진 모습으로 그녀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오, 맙소사……. 그는 분명 엘스헤른이 너 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는 저 화려한 차림에 칼날 같이 깔끔한 모습이라니……. 그는 중후한 느낌이 드는 황갈색 벨벳의 예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서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아가씨들과 귀부인들 에게 공평히 미소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당연히, 저렇게 변해버린 모습을 알 아 볼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 것이란 말인가?! 뭐, 설령 정체를 안다 하더라도 그는 충분히 수많은 여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지위와 매너와 외모를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딴 사람 같아 보이 는 그의 모습에 엘스헤른은 어쩐지 말문이 막히고 기가 찼다. 엘스헤른은 벌떡 일어서서 그야말로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힘 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마침 시종장이 황후의 만찬이 시작됨을 알리지 않았더라면 엘스헤른은 분명 그를 피해 멀리 도망가버렸을 것이었다. 저런 차림을 한 그와는 별달리 이야기하거나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 나 엘스헤른이 미처 마음먹은 바를 행하기도 전에 뻔뻔한 바람둥이를 방불케 하는 차림새의 그는 시종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은 후 엘스헤른의 곁으로 다가 왔다. 엘스헤른의 코 앞까지 다가선 그는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엘스헤른을 유심 히 쳐다보고 있더니 싱긋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엘스헤른." 그는 약간 푸른빛이 도는 잿빛의 눈동자에 온화함을 머금으며 한동안 그렇 게 엘스헤른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한참을 지나도 앉을 생각을 않는 그에 게 엘스헤른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핀잔을 던졌다. "솔직히 말해. 의자가 안 보여서 앉지 못하고 있는 거지?" "하하핫. 역시 내 동생이야." 그는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매만지며 엘스헤른이 빼 주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내키지 않는 손을 내밀어 그가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엘스헤 른은, 곁에서 보자 더더욱 빛나는 듯한 형님을 애써 외면하면서 투덜거렸다. "안경을 쓰고 오지 그랬어? 아무도 못 알아보잖아. 게다가 차림새가 이게 뭐 야? 화려한 걸 싫어하면서 사람이 이렇게나 변하다니!" "어……. 나도 대충 입고 올 생각이었는데…… 어머니께 황후 폐하의 살롱에 참석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당장 이런 옷을 마련해 주시지 뭐야. 게다가 아버지는 한 수 더 떠셔서 아예 전속 디자이너까지 붙여 주시고……. 그러 다보니 이 지경이 되었어. 그런데다가…… 마침 출발하려는데 아이린이 이 런 차림엔 안경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길래 그냥 두고 온 거야." 뭔가 파란만장해 보이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엘스헤른은 한숨을 포옥 내쉬 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군. 오늘 살롱에 가거든 기필코 신부감을 마련해오라는 말씀이겠지. 설마 그 정도도 못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루엘 형님." "흠……. 난 최고의 지성을 소유한 여인이 아니라면 싫은데……." 루엘은 뭔가 행복한 상상에라도 잠긴 듯 눈을 반짝거리면서, 자신이 말한 그러한 여성이라도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될 수 있는 대로 한 껏 단꿈에 젖어 있는 형님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엘스헤른은 싱긋이 사악 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고생 끝에 찾아낸 최고의 지성을 지닌 여인이 누님과 같은 성 격을 가졌다면 어쩔 거야?" "……." 잠시 할 말을 잃은 루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엘스헤른을 응시하면서 입술을 열었다. "……차라리 저주를 해." "저주가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지." "……." 루엘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금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긴, 어린 시절 그토록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누님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평온해야 할 절반의 남은 인 생과 노후에까지 누님과 같은 성격의 여인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루엘은 엘스헤른을 향해 곱게 눈을 치켜 뜨며 그답 지 않게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엘스, 넌…… 어렸을 적 우리 가 당한 수모를 벌써 잊었나보지?" "……잊을 리 없지." 엘스헤른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덩달아 침울한 표정이 되었 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나마 좀 덜할는지는 몰라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 던 사춘기 시절에는 에스트리온 공작부인께서 그 일과 관련된 아주 조금의 말 만 꺼냈다 하더라도 집이 발칵 뒤집힐 만큼 화를 내곤 했던 이들 형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스헤른은 그 당시에 자신이 누님을 그토록 따랐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눈에 콩 꺼풀이 씌었다든지 하지 않은 이상에 황제폐하께 결투를 신청할 만큼 간 큰 짓을 할 정도로 누님에 대한 애착이 강 할 리 없겠지만…… 누님은 그만큼이나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돌이켜 생각 해본다면 어릴 적의 누님은 그 짓궂은 장난기 외에는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녀는 친절하고 상냥한 어린 숙녀였었다. 항시 따스한 손길로 동생들을 다독이고 무엇이든 동생들을 먼저 배려하곤 함으로써 누나로 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던……. "누님은 무서운 사람이야……." "음……. 동감이야. 형님." "이번 살롱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제롬 녀석이 독감으로 앓아 누워 서 오늘 살롱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그 녀석에겐 정말 행운인 거야. 제롬을 간호하느라 역시 살롱에 오지 못하게 된 아이린이 부럽기까지 하더라니까." 그러고 보면 제롬 녀석 며칠 전부터 기침을 심하게 해 대더니 결국 감기로 앓아 누운 모양이다. 요 며칠 회의 때문에 집에 귀가하지 않고 황궁에서 지내 고 있었던 엘스헤른은 당연히 집안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 낮에 황후 폐하께서 그들의 살롱 불참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시는 모습 을 보고는 이 남매가 오지 못할 것을 알게된 엘스헤른이었지만 어쩌면 조금은 섭섭하기도 했다. 모처럼 에스트르에 놀러와서는 황후가 주최하는 살롱에 초 대되는 최고의 영광을 누려보지도 못하게 되다니……. 엘스헤른은 아이린이 초대장을 받은 날 기뻐하며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작게 한숨을 지었 다. 곧이어 황제 폐하와 황후께서 입장하신다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방 안에 있 던 모든 사람들이 경건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엘스 헤른은 루엘이 친절하게 어깨를 쳐주고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살롱에서는 그다지 격식을 차리거나 하지 않지만 내빈들은 모두 허리를 깊숙 이 숙이는 것으로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들이 의자에 자리를 잡 아 앉고서야 인사의 예로부터 자유로워진 손님들은 제각각 지정된 자신의 자 리에 앉았다. 길고 긴 식탁의 한쪽 끝에 황제와 황후의 자리가 나란히 마련되어 있고 황 제의 옆쪽으로 티아란의 대공이자 에스트르 최고의 귀족인 엘스헤른의 자리, 그리고 엘스헤른의 옆자리가 원래 에스트리온 공작의 자리인 루엘의 자리였 다. 루엘은 당연하게도 장차 에스트리온 가문을 이어받을 장손이므로 아버지 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대신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서열 순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내빈들을 주욱 훑어보던 엘스헤른은 문득 자신의 앞자리가 비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위로 따진다면 그의 맞은 편 자리는 왕족 여성이 앉아 야 하는 것이지만, 선황의 외동아들이었던 황제폐하께 누님이나 여동생이 있 을 리 없고, 그렇다고 해서 황제폐하의 따님이신 공주 전하들께서 앉기엔 그 분들은 너무 어렸다. 이제야 걸음마를 하시는 첫째 공주 님이나 아직 젖먹이 이신 둘째 공주 님이 살롱에 참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 와중에 엘스헤른은 뭔가 등골을 스멀거리는 듯 소름이 끼쳐 옴을 느꼈다. 이 불안함이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지만, 엘스헤른의 직감 은 영락없이 맞아떨어져, 황후 폐하보다 조금 뒤에 도착한 그가 자신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문 득 자리에 앉다가 고개를 들고 엘스헤른과 눈이 마주 쳐버린 그 역시 아주 놀 라버린 듯 잠시 멍하니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그는 자신을 부르 는 황후에게로 황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레비앙 경." "네. 황후 폐하. 저……. 황태자 전하께서 잠드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드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래요? 요즘 황태자가 레비앙 경을 많이 괴롭히는가봐요." "당치 않습니다, 폐하. 저에겐 영광이옵니다." 레비앙은 앉은 채로 살풋 머리를 조아렸고, 그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엘스헤른에게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엘스헤른 은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바로 눈 앞에 레비앙을 두고, 게다가 누님의 앞에 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저나, 어째서 레비앙이 공주들이나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배정을 받는단 말인가?! 이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아무리 이것이야말로 황후 폐하께서 사랑하는 둘째 동생을 위해 준비 한 이벤트라고는 하지만 궁정 법규에 맞지 않는 일이지 않는가?! 엘스헤른은 어지러워질 것만 같은 정신을 붙들어매며 살짝 눈썹을 찡그렸 다. 지금 자신이 궁정법규 운운하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그런 것을 따지고자 함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레비앙이 자신의 맞은 편 자리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마음에 안 든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고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롱이 열릴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레비앙을 마주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터질 것만 같은데.... 그런 그의 불만스러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듯 아드레이드는 천천 히, 그러나 이 방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만한 목소리로 이야기했 다. "참석해주신 분들께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아, 지금의 좌석은 서열순 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만, 레비앙 경은 특별히 황태자의 가정교사나 다를 바 없으므로 제 옆자리로 배정했답니다. 혹시나 불만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 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랍니다. 아이의 선생님과 곁에서 이야기하고픈 어미의 심정을 여러분들께선 이해해주시라 믿습니다." 그녀는 빛나는 웃음으로 인사를 마감했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다 수긍을 하는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여전히 불만스 러운 시선을 아드레이드에게 던졌다. 이런 것인 줄 알았더라면 아예 참석을 안 했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라는 무언의 의미와 함께 남 몰래 그녀를 흘겨봐 준 엘스헤른은, 무덤덤하게 그리고 어쩌면 약간은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레이드에게 질려 아예 형님에게로 눈길을 돌려버 렸다. ...TO BE CONTINUED ==================================================================== 에, 50편입니다! (폭죽~! 팡팡팡팡~!~! ☜ 자축하는 원맨쇼의 페르티.) 드 디어! 50편이로군요. 훌쩍. T^T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은 머나멀고, 쌓아야 할 만리장성은 길고도 깁니다. 음, 원래는 50회 맞이 이벤트를 준비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뭘로 할까 망설 이고 있는 중입니다. 캐릭터 인기 투표를 하면 결과가 뻔하므로(아마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엘스가 뽑히지 않을까 합니다.) 인기 투표는 관두기로 했답니 다. 대신 일러 맞추기 대회 등을 해서 당첨되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이 책으로 나온다면 1권을 댁으로 우송해드리는 것은 어떨까…… 라고 생각중 입니다. (도, 돈으로 달라구요?!) 네, 이벤트는 조만간 생각해서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렇게 오 래도록 변함없이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은 적어도 80회 이상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쿨럭.;) 오늘의 감사 퍼레이드는 없습니다. 이, 이번 편을 쓰는 도중엔 독촉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T-T …. 에, 그럼 다음 편에서 뵐게요. 다음 편 맛보기! 황후의 살롱에서, 레비앙과 엘스의 미묘한 분위기…… 아드레이드의 농간은 저것만으로 끝날 것인가?! 천 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P.S. 아, 지우스 님. 저번에 말씀하시던 일은 역시 물 건너 간 건가요? T^T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1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23 조회수: 392 ┌───────────────────────────────────┐ │ ▶ 번 호 : 0/54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0일 09:18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1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1) 소위 고위층 귀족들이 식사 후의 화기애애한 담소를 즐기고 있는 와중에도 엘스헤른은 조금도 한 눈 팔 정신이 없었다. 레비앙에게 자꾸만 술을 권하는 황후 폐하를 표 안 나게 노려봐 주느라 여념이 없는 그는 누군가가 옆에서 말 을 걸거나 해도 역시 건성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후 폐하의 권주를 레비앙으로서는 당연히 마다하기 힘들었을 테다. 싫은 내색도 못하고 벌써 자신의 주량을 훨씬 넘겨서까지 황후가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시고 있는 레비앙을 곁눈질하며 엘스헤른은 괜스레 불안해지고 있었다. 황후폐하의 앞이 아니라면 분명히 지금쯤 주정을 부리고 엘스헤른을 몇 대 날렸을 만큼 레비앙 이 취한 상태임을 10년 지기인 그로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저 능글맞은 누님이 무얼 계획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지금 레비앙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고 괴롭기 그 지없는데,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더욱 마음이 어지러웠 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님이라면 이 정도 선에서 장난을 그만 둘 사람 이 아니었다. 지금 저렇게 레비앙에게 술을 권하고 있는 것 역시도 엘스헤른 에겐 누이의 못된 계략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선지 엘스헤른은 종시 살롱의 느긋한 분위기를 즐길 수가 없 었다. 황후는 그런 엘스헤른을 보면서 싱긋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레비앙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처음엔 황태자 클로티엔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엘스헤른은 그다지 관심을 쓰지 않았지만, 차츰 그 이야기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주제로 옮겨가자 그는 여차하면 자리를 박 차고 나가버릴 만큼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티아란 대공께선 어렸을 때 얼마나 예뻤었다구요. 뾰로통하게 화가 나 있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이나 귀여웠거든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황후 폐하의 그 말에 엘스헤른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고, 그 순간 공교롭게도 레비앙과 눈이 맞아버려 그는 당황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술기운에선지 뺨이 발그레하게 물든 레비앙을 보고 어쩐지 가슴이 철렁해서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버린 엘스헤른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또다시 남몰래 누님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녀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그는 어 쩐지 오늘따라 레비앙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자신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약간 취한 듯 홍조를 띈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는 레비앙의 미 소년다운 모습은 마주 바라볼 수 없을 만큼이나 반짝거리며 빛나는 것 같았 다. 정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훔쳐봐야 한다는 사실 에……. 엘스헤른은 한숨을 지으면서 자신의 술잔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천천히 술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지만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의 알싸한 기운을 어 쩐지 느낄 수가 없다. 이렇게 조마조마한 것은, 그리고 이토록 들뜨는 것은 바로 눈 앞에 레비앙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보리색의 옷자락 위로 탐스럽게 놓여있는 붉은 빛의 머리카락이 시야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을 차마 마주보지 못해서 살풋 내리깐 초록빛의 눈동자는 선명 한 빛깔로 반짝였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다울까? 지금 당장이라도 저 붉은 입술에 입맞추고 싶을 만큼이 나……. 그는 은근히 레비앙을 응시하고 있다가 한숨과 함께 그만 눈길을 돌렸다. 어깨를 움찔거리게 할만큼 쿵쾅거리는 이 소리는 분명히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다. 어째서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는 걸까? 그냥 눈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두근거림 이 밀려오는 이유는 뭘까? 왜 옛날에 그를 보며 느끼곤 하던 편안함을…… 이 제는 느낄 수 없는 걸까? 마음의 엇갈림에 어쩐지 심란하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 과, 그래도 레비앙을 계속 바라보고 있고싶은 마음……. 둘 다 자신의 마음임 에도 어쩌면 이렇게 극과 극을 향해 달리는 거지? 엘스헤른은 혼미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붙들어 매기 위해 자신의 잔에 가득 담긴 냉수를 들이켰다. "어머나, 티아란 대공. 러시아산 술은 그렇게 한꺼번에 들이키기엔 좀 독하 않나요?" 염려스러운, 그러나 다분히 장난기가 섞인 투로 들려오는 황후 폐하의 목소 리가 왠지 멀게 느껴진다. 엘스헤른은 갑자기 밀려오는 취기에 아찔함을 느끼 면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제기랄, 누가 이 잔에 술을 따라 놓았단 말인가?! 그것도 물처럼 한가득이나! "아아, 대공……, 미안하네. 술잔인 줄 알고 그만……." 벌써 거나하게 취하신 황제 폐하께서 난색을 표하자 엘스헤른은 얼른 미소 를 지으며 살풋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습니다. 폐하." 물론 괜찮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엘스헤른은 터져 나올 것 같은 기침을 애 써 참느라 얼굴을 붉혔다. 황제 폐하의 곁에선 아드레이드가 뭐가 재미있는 겐지 얌전하면서도 사악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엄습해오는 두 통에 콧등을 살짝 찌푸리고 있다 말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 선이 닿은 곳에 레비앙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금 눈길이 마 주치자 레비앙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이내 눈길을 떨구어 버린다. 자신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 그의 행동을 보며 엘스헤른은 어쩐지 어깨에 소 름이 끼쳐옴을 느꼈다. 온 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다. 괜찮은 거 냐고 한 마디쯤은 건네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예전의 사이였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말인데…….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는 것이 문득 이런 식으로 체감될 줄은 몰랐던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자 초한 일임에도 엘스헤른은 서글퍼지려는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눈빛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고, 건너에 앉은 레비앙 역시 주저하는 시선을 애써 자신의 손등 위에 고정시켜두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황후는 싱긋이 뜻깊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아주 넌지시 엘스헤른에게 은근한 말투로 제안을 했다. "보아하니 레비앙 경이 좀 취한 것 같은데……, 티아란 대공께서 에스코트를 해 주시는 건 어떻겠어요? 두 사람은 죽마고우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하겠 죠?" 아드레이드의 말에 엘스헤른은 핏기가 사라져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저 황후 폐하께서 노리고 있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나? 레비앙을 취하게 만들어 놓고선…… 두 사람을 함께 있도록 만드는 것……. 엘스헤른은 어떻게 누나라는 사람이 동생의 감정을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애써 눌러 참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눈을 뜨 고는 싸늘하게 아드레이드를 응시했다. 그렇게 그가 눈을 치켜 뜬 채 노려보 고 있다고 해서 겁먹을 그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엘스헤른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내 일에 간섭하지 말아." 가득 목소리를 낮춘 그의 말에 아드레이드는 역시 입술에 싸늘한 미소를 머 금고는 나직히 대답을 던졌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온화하고 화목한 가운데 약간은 시끄러운 살롱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엘스헤른은 가득 미간을 찌푸리고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다투어 봤자, 엘스헤른은 그녀의 상대가 될만한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아드레이드는 만면에 황후 폐하다운 자애로운 웃음을 띄면서 레비앙에게 속삭였다. "티아란 대공께서 에스코트를 잘 해주실 거예요." "아, 저……. 아닙니다. 황후 폐하. 충분히 저 혼자서도……." 레비앙은 당황한 듯 몸둘 바를 몰라하다가 얼핏 엘스헤른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한가득 눈살을 찌푸리고서 무거운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그에게 부담이 될 거라는 걸 레비앙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 금 자신은 취했고, 이런 상태에서 엘스헤른과 단 둘이 있고 싶은 생각은 조금 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엘스헤른과 같이 있고싶긴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을 보니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애써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건지도……. "아, 황후 폐하. 레비앙 경을 에스코트하는 일이라면, 제가 맡겠습니다." 문득, 그의 머리 위에서 상냥하고도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든 레비앙은, 아까 이곳에서 처음 봤을 때는 평상시 와 너무 다른 모습이라 얼핏 알아보지 못할 뻔 했던 루엘 경이 친절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레비앙은 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루엘 경이라면 괜찮을지 모른다며 안심하는 자신에게 어쩐지 조금 실망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루엘을 대하면서 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만 지금 엘스헤른과의 관계에 몹시도 가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냐고 자문하 고 싶었다. 엘스헤른을 잃고서 마음 속을, 그리고 일상의 생활을 가득히 잠식 하고 있는 상실감을, 루엘의 따스함으로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레비앙은 어수선해지려는 마음을 다독이려 했지만 눈 앞의 엘스헤른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은 레비앙과 시선이 마주치자 마자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풋 깨물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의 사이에서 흥미진진 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던 아드레이드는 짐짓 밝은 얼굴빛을 띄며 루엘에게 말했다. "어머나…… 루엘 경이 레비앙 경을 에스코트 해 주시겠어요?"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다면 루엘 경, 레비앙 경을 잘……." 아드레이드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엘스헤른은 탁자를 탁 짚으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루엘에게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형님. 내가 할게……." "아니야, 엘스헤른.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레비앙 경을 잘 데려다 줄……." "……됐어. 내가 해." 짧게 끊어 말한 엘스헤른은 의아하게 여기는 형님을 뒤로하고 레비앙에게로 다가섰다. "가시지요, 레비앙 경."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빼 주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선 황후 폐하에게 정 중히 인사를 했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엘스헤른의 느닷없는 행동에 머릿속이 새하얘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토록 싫은 표정을 지었으 면서 루엘 경이 에스코트를 하겠다고 나서자 마자, 마치 떨치기라도 하듯 선 뜻 자신이 하겠노라고 나서는 걸까? 엘스헤른의 행동 하나 하나에까지 계산을 하게 되는 자신이 끔찍스럽기까지 했지만 레비앙은 방어기제를 펼칠 수 밖에 없는 스스로를 위안하려 노력했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엘스헤른은 위험하 기 그지없는 존재이고, 그런 이유로 그의 행동이 품은 속뜻을 알아내려고 곱 씹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환송의 말을 들으면서 엘스헤른의 뒤를 따라나오면서도 레비앙은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대체 엘스헤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까? 지금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건 두려움 때문일까? 묘한 격정이 손끝을 나른하게 만들고 있다. 레비앙은 일부러 손끝을 말아 주먹을 쥐어보았 다. 지금 자신은 취해있고, 그래서 엘스헤른이 조금만 따스한 모습을 보인다 해도 여지없이 그의 품에 안겨 울어버릴 것만 같은 심정임을 그는 잘 알고 있 었다. 제발 엘스헤른이 에스코트해서 집으로 돌아갈 그 긴 시간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는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득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 레비앙은 이제 자신이 저 방 안의 소란스러움과 분리되었음을 깨달았다. 온몸을 통해 느껴지는 고요함 과 어깨를 감싸는 한기가 이제는 정말 엘스헤른과 단 둘이 남게 되었음을 절 감하게 해 주고 있었다.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레비앙은 한층 더 얼굴이 달 아오름을 느꼈다. 달빛이 하얗게 복도를 적시고 있다. 포도빛의 짙은 보라색이 감도는 어둠을 가로지르는 희미한 띠처럼 복도의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은 선명하게 발 아래 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서서 엘스헤른은 천천히 몸을 돌려 무표정하 게 레비앙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잿빛의 눈동자는 지금 어깨를 떨게 만들고 있는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싸늘한 빛을 띄고 있었 다. 그래서인지 레비앙은 똑바로 그를 마주보지 못하고 그냥 눈을 내리깔았 다. 나직히 들려오는 한숨소리가 가슴을 저며오는 기분이다. 그 작은 한숨 끝 에 엘스헤른은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고 레비앙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서 있다가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살얼음이 슨 빙판 위를 걷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이렇게 마냥 조심스럽고 위태로운 마 음이라니……. - To Be Continued - ==================================================================== 오늘은 분량이 좀 적습니다. 부디 용서를.^^; 하지만 정말 진도가 나가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아침에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유치한 감정다툼 같이 느 껴지기도 하는군요. 뭐, 어쩔 수 없습니다. 라부라부(?) 모드는 아직 만들어 서는 안돼요.;;; 좀 찐한 라부라부 모드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지만, 역시 써 먹을지 여부는 나중에 가서 생각해봐야 할 듯.; 네, 그리고, 보시다시피 50회 맞이 이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많 이 참가해 주시길 바랍니다요. (보잘 것 없는 상품이지만…….;) 글코, 갑자기 독촉 메머가 증가하고 있어서 힘이 부쩍부쩍 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주의 독촉 메머를 보내주신 분들은 따로 아이디를 적어놓지 못 했어요. TT-TT (죄송하여라…….) 정신없는 한 주여서 그런가봅니다.; 다음부 터는 꼬옥 아이디를 적어두었다가 감사 퍼레이드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자, 그럼. 다음 편 맛보기~! 이제 드디어 엘스헤른과 레비앙, 단 둘만 남았 군요.^^ (뿌듯.)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아앗, 거기 숨어 있는 친구! 무 슨 소리예욧! "보나마나 또 싸우겠지!" 라니…….;; 아무튼, 단 둘이 남았으 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있겠죠. 게다가 둘 다 한 잔씩 한 상태!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다음 편부터는 좀 많이 쓸게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2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1-24 조회수: 413 ┌───────────────────────────────────┐ │ ▶ 번 호 : 0/55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4일 16:36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2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2) 눈 앞을 가득 가리고 있는 엘스헤른의 등이 무척이나 넓게 느껴진다. 그러 고 보면, 예전에 언젠가 한 번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있었던 듯도 하다. 지금 처럼 엘스헤른은 등을 보인 채 말없이 걸었고, 자신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 걸었던……. 그다지 멀지 않은 옛날에, 지금처럼 이렇게 달빛이 새하얗고 고 즈넉한 밤에…… 뭔가 그리운 향기라도 가득히 묻어날 것만 같았던 그 밤 에……. 그때의 엘스헤른은 기꺼이 자신의 등을 빌려주며 마음껏 울 수 있게 다독여준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잊고 있은 일인데 문득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그때 루르드 강변의 바람결이 지금의 공기처럼 싸늘해서일까? 아니면, 그때처럼 저 등에 기대어 목놓아 울고싶은 심정에서일까? 콧등을 싸하게 만드는 기분에 레비앙은 어깨를 움찔 했다. 이런 예감이란 여지없다. 눈가에 새록새록 어려서 시야를 가득 흐려지게 만들 눈물이라는 것……. 만에 하나, 엘스헤른이 뒤돌아보기라도 한다면 몹시도 부끄러울 일이 지만 레비앙은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참아보려고 눈을 크게 떠보고, 입 술이 아프도록 꼬옥 깨물어보기도 했지만, 기어코는 방울지어 또르륵 뺨 위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서러울까?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불안함이 되어 마음을 가득 적시는 걸까?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보기라도 할세라 얼른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컥 토해놓기라도 하 듯 솟아 나오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한 레비앙은 울음으로 인해 거칠어지는 숨 결을 엘스헤른에게 들킬까봐 애써 숨을 죽였다. 어째서 그때는 몰랐던 걸까? 그렇게 선뜻 등을 내 주던 이 사람이 이렇게나 소중하고 그리워질 거라는 것을……. 왜 바보같이, 이 사람만은 영원히 곁에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걸까? 그저 멀어져 버린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 저미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어째서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 었던 걸까…….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언제고 새처럼 훌쩍 날아 가버릴 수 있 는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잊고 있었던 것은……. 그것은, 엘스헤른이 - 예전 엔 친구였던 저 사람이 - 무척이나 따뜻하고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마치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 던 것일 테다.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에 레비앙은 어쩐지 흐느껴 울 것만 같아 서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혹여나 엘스헤른이 낌새를 챌까봐 걸음걸이조차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마냥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 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들었다. 엘스헤른의 넓은 등이 이제 자신이 기대 울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아니라 다가설 수 없는 벽같이 느껴져서였다. 정신없이 걷던 레비앙은 문득 이마에 부딪혀 오는 부드러운 것에 놀라 고개 를 들었다. 어느 샌가 엘스헤른이 걸음을 멈추고서 그에게로 뒤돌아서 있었 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걸어서인지 벌써 정원에까지 나왔다는 것을 레 비앙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인식한 순간부터 주변의 모 든 것이 오감을 통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밤의 풀밭을 빼곡하게 메우는 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 음악의 선율처럼 느릿느릿 흩어지는 달빛의 파동, 숨막힐 듯이 빽빽한 밀도로 내려앉은 포도빛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스헤른의 눈빛……. 말없이 레비앙을 응시하고 있 는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도 서려있지 않은 듯 청명하기만 했다. 마치, 투명한 유리 같은 무감정의 눈빛이랄까……. 레비앙은 숨이 멈춰버릴 듯이 놀라서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툭 떨구고야 말았다. 아찔한 어지러움이 밀려온다. 이렇게 넋을 놓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 인 건, 예전에 엘스헤른이 차갑게 돌아서던 그 순간 이후엔 없었던 일인 데……. 하지만 레비앙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가볍게 보일 거라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걸까? 눈물을 감추려고 뒤돌아서거나 할 생각도, 심지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훗……." 엘스헤른이 나직한 소리를 내며 잠시 웃었다. 그러나 웃느라 약간 올라갔던 입꼬리는 이내 빠른 속도로 내리그어졌다. "여지껏 잘 참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우는 이유가 뭐야? ……왜? 저 가식에 찌든 살롱 안에서, 황후 폐하 앞에서…… 주정이라도 부려보지 그랬어?" 엘스헤른의 싸늘한 목소리가 날카로운 얼음 조각 같이 심장을 찔러온다. 지 금껏 무엇을 기대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봐 온 것일까? 이런 여지없이 차가 운 말과 행동들? 레비앙은 작은 회의를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쩐 일인지 눈물은 멎지를 않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엘스헤른의 저런 말에 오기가 생겨서 라도 그쳤을 테지만, 오늘은 정말 취했나보다. 사르락거리며 바람결에 레이스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엘스헤른의 가 슴 녘에 크라바트가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 깊은 한숨소리와 힘께 크라바트도 한가득 풀었다가 내려앉는다. 그렇게 한숨을 내쉰 엘스헤른은 천천히 레비앙 에게로 손을 내밀어 뺨을 가득 적시고 있는 눈물을 훔쳐냈다. 싸늘한 말투와 는 사뭇 다른 포근함에 레비앙은 움찔 어깨를 떨었으나 곧 그의 손길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얼어붙은 마음이 아늑히 녹아버릴 만큼이나 따뜻한 손이다. 그 러고 보면, 아주 어릴 적에 엘스헤른이 앉아주면 잠들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 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만큼이나 추운 것도 못 견뎌하는 그를 포근하게 안은 채 같이 잠들곤 했었던 어릴 때의 엘스헤른을 떠올리며 레비앙은 더더욱 울음 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따스한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멀어져버린 걸까? 잃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를,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그 길고 긴 나 날의 기억들을…… 왜 그토록 홀대했던 걸까? 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는 물처럼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었던 걸까? 붙들지 못하고서 이렇게 울게 되 리라는 것을…… 어째서 알지 못했던 걸까? 뺨을 쓰다듬던 엘스헤른의 손이 거짓말같이 멀어져 간다. 아직도 뺨에 남아 있는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엘스헤른은 다시 한 번 싸늘한 웃음을 흘렸고 레 비앙은 적응할 수 없는 현실에 혼란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긴 한숨을 지었다. "왜 우는지 알아 맞춰 볼까?" 엘스헤른의 낮은 목소리가 공기 중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슴을 철렁하게 할만큼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다. "나에게 뭔가 불만이 있는 거야,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취했 다고는 한들 내 앞에서 그렇게 넋 놓고 울고 있지는 않겠지. 내가 누군데, 네가 그토록 두려워 마지않는 대공 전하가 아니었던가?" "……." 레비앙은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오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어깨 를 감쌌다. 어쩐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엘스헤른의 저런 말을 듣는 것은 어 쩌면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지난 과오들을 질책하기라도 하는 듯이 가슴 속을 파고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한 고통 이 되어 가라앉는다. "후훗……, 뭐야? 그렇게 상처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라니……. 새삼스럽지 않아? 이제 이런 나에게 적응 될 때도 되었잖아." 뼛속까지 침범할 것만 같은 한기가 마음을 한가득 휘감아 돈다. 어째서 이 런 걸까? 단 한 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 든다. 얼어붙은 저 달빛마냥 뽀얗게 머릿속을 잠식해 가는 서러움에 레비앙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입술을 악물었다. "왜? 그런 식으로라도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알고 있을 텐데? ……너를 측은하게 여길 마음 따위는 없어. 그런 건…… 버린 지 아 주 오래 되었거든." "……." "한 번 쓰다듬어 줬다고 해서, 그게 마음을 돌린 거라는 의미는 아니야. 알 잖아, 너에게 나는…… 몹시도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엘스헤른은 싱긋이 웃음을 흘렸고, 그 희미한 미소의 의미를 아는 레비앙은 여전히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어지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몸을 가누고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어지럽고 정신이 없다. 천천히 엘스헤른이 다가오고 있다. 기분을 아찔한 나락으로 떠미는 아스라한 체취가, 그 옅은 향내가 코끝에서 달콤하게 번져나간다. 가만히 다가오는 숨결이 가까 이에서 한숨을 짓고 뽀송한 따스함이 입술 끝에 닿아온다. 레비앙은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그 바람에 그는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 가버릴 뻔 했지만 어 느 샌가 엘스헤른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에게로 끌 어당기고 있었다. 뭘까? 이 기분은……. 이렇게 예민하게 들뜨는 기분은……. 아무 것도 들리 지 않고,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가운데서 이토록이나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 은……? 가슴 속 가득히 뭔가 뭉클한 울렁거림이 일어난다. 시린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것 같기도 한 묘한 전율. 씻어버린 듯 새하얀 머릿속을 심장의 고동소리가 채우고 있다. 따뜻한, 더없이 따뜻한 그 그리움의 근원을 향한 목 마름을 채우기라도 할 듯 마음 한 가득 열기가 몰려든다. 하지만 이내 그 따스함은 입술을 떠나 허공으로 사라졌다. 엘스헤른의 짧은 한숨 소리에 눈을 뜬 레비앙은 갑자기 몰려드는 온갖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엘스헤른을 밀쳐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엘스헤른의 품에 안겨서 그와 키스 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는 것 같아 그는 가만히 얼굴을 붉히 고선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그의 머리 위로 엘스헤른의 웃음소리가 들 려왔다. "뭐야? 갑자기 술이 깨기라도 한 건가? 덕분에 즐거웠는데…… 아쉽군. 평소 같지 않은 그런 나긋한 태도라니……. 너를 취하게 만든 황후폐하께 감사하 기라도 해야 할 일인 모양이야." 한참 웃어대던 엘스헤른은 숨을 몰아쉬면서 미묘하게 어두워지고 있는 레비 앙의 표정에 코웃음을 쳤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너 역시도 즐기고 있었으면서……."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레비앙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바 보 같았는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술김이라는 핑계 따위 는 용납되지 않을 상황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엘스헤른의 저 아찔한 냉소였다. "하, 나한테 실망하기라도 한 표정이로군. ……뭐, 실망할 거라도 있으려나? 내가 원래 이런 녀석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지 않았어? 네가 그렇게 애지중 지해 마지않는 네 누이에게조차 장난으로 키스한 나야. 그런 것을 너에게 쯤 못할 이유라는 건 없지." 엘스헤른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고, 레 비앙은 쏠려 내리는 머리카락을 그냥 내버려둔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말 에 묵직하게 아파 오는 마음을 어쩔 수 없어, 어쩐지 귀라도 막고싶은 심정에 레비앙은 두 손을 올려 자신의 뺨을 감쌌다. 어째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 까? 레비안느에게 무례를 범한 이후 사과를 하러 온 날의 엘스헤른은 거짓이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정중한 모습이었는데……. 그날, 케 시르니아 숲에서 그렇게 점잖고 엄숙하게 춤을 청하던 그의 모습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아아, 껄끄러운 표정 짓는 건…… 일국의 대공 씩이나 된다는 녀석이 남자 인 너에게 키스를 해서인 건가? 후훗…….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넌…… 내 장난감인데……." "그만해……." 견디다 못한 레비앙은 떨리는 입술을 열어 작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 번 입을 열고 나니까 서러운 감정은 마치 봇물이라도 터지듯 울컥 치솟아 올 라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차츰 언성을 높였다. "그만……. 제발 그만해. 이런 게 아니야……. 이 따위로…… 이 따위로 엘 스, 너랑 멀어지는 건 싫어. 이런 건 싫어! 이런 게 아니야!" 자신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기듯 싸늘한 공기 중에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레 비앙은 스르륵 주저앉고야 말았다. 어쩐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이 멍하고, 지금 느껴지는 것은 다만 촉촉해진 뺨이 너무나도 차갑다는 것 뿐이었다. ...To Be Continued - ==================================================================== 꺅.;;; 이번 편은 야하군요! 에, 저……, 다름이 아니라…… 그냥 분위기가 요. (허억.;;; 돌 날아온다. 칵! 누가 던진 거야? 샥신! 당신이야?!) 흠흠, 이번 편은 그냥 내내 술 취한 레비앙의 입장에서만 서술해봤습니다. 가슴 아파할 엘스헤른의 생각들이 빠진 점이 아쉽지만, 뭐, 제 역량의 부족이 라 생각하시고...TT-TT 근데, 역시 불안한 마음에서인지 글이 예전처럼 써지 지가 않는군요. 괴로버라~! ( 초등교사임용경쟁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다구요! 12월 3일에 시험을 치는데 해 둔 공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원……. 합 격 쵸코 보내줘요~! ) 글코, 오늘은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만, 의도적인 겁니다. 여기서 끊어야만 했어요. 뭐, 다음 편을 위해서죠.^^; 죄송합니다~! 이번 편에 계획된 내용의 분량이 저것밖엔 안 되는군요. 잡담으로 다 때우면 역시 짱돌을 머리에 맞게 될는지도 모를 거 같아서 참기로 했습니다. 네, 그럼 다음 편 맛보기! 52편의 끝에서, 레비앙이 드디어 소리를 쳤습니 다! "고만해!" 53편에서는 그에 따른 엘스의 반응이 적나라하게 기술될 예정 인 것입니다! 싱긋. 기대해주세요. 엘스헤른,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힘내 라, 레비앙! 이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닷! 음, 잡담을 조금만 쓰려고 했습니다만, 어느새 길어졌군요.; 마지막으로 감 사 퍼레이드. 흰매 양! 고마버. T-T 이벤트는 어렵지만, 잘 참여해 줘~! 글코 변함없이 항상 안부 물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티나 님! 짧지만 감상 감사합니 다! 오오~! 또한, 야샤 양. 그 긴긴긴 장문의 감상문과 독후감 고마벙~!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야! Kypros 님.^^ 격려멜 감사합니다. 오호호홋. 열쒸미 할게요~! Zbshero1(독자A) 님. 제일 처음 이벤트 테입을 끊어주셨군요.^^ 감 사 감사~! 글코, Liberion님의 이벤트 격려 메일도 넘넘 감사합니다. 네이시 님, 독촉 메일도 감사드리구요.^^ 에……,빠진 사람 손들어봐요~! 아, 글코 덧붙이겠습니다만, 2번 이벤트 비중이 큽니다요! 왜 등한시하시는 지?; 경쟁자가 적을수록 상품의 기회는 높아져 갑니다. 그 점 잊지 마시고. 경쟁자가 적은 품목을 선택해 주세요~! (무, 무슨 경품대잔치 같아.;)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3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05 조회수: 383 ┌───────────────────────────────────┐ │ ▶ 번 호 : 56/5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1월 29일 22:0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3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3) 한숨 끝에 뽀얀 입김이 싸늘한 공기 중으로 흐트러진다. 어깨를 짚어오는 손길……. 레비앙은 쓰러져 울고싶은 심정을 다독이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 앞에 엘스헤른이 어느새 한 쪽 무릎을 꿇고서 시선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 의 투명한 잿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 는 기분이 든다. 왜 저렇게……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는 걸까? 저 사람이 엘 스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친구의 앞에서 저런 무심한 눈길로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텐데……. "엘스……. 나, 힘들어……. 그러지 마, 제발……." 작게 울먹이는 레비앙을 보며 엘스헤른은 심란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버렸 다. 지금,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을 레비앙은 알고 있기나 할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심정에 숨이 멎을 만큼이나 답답하다는 것을……. "……내가…… 널…… 동정해 주기를 바라는 거니?" 도저히 레비앙을 보면서 말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린 엘스헤른은 천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그것은 마치 쓴 약 과도 같아서 입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입안을 씁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레비앙의 지금 표정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둔 손에 한가득 떨림이 느껴지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레비앙의 심정을 알 수 있 었다. 엘스헤른은 콧등이 시릴 것만 같아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레비앙을 바라보았다. 함뿍 젖은 초록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냥 이대 로 끌어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운다. "엘스……." 촉촉한 붉은 입술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어째서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을 사랑해 버리게 된 걸까? 이렇게 아프리라는 것을 미쳐 몰랐던 것은 그 동안 레비앙과 지내온 나날들이 꿈결같이 포근해서일 것이다. 차라리 이 마음을 몰 랐더라면, 그냥 웃으면서 지나칠 수도 있었던 많은 일들에 이렇게 애태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날, 그렇게…… 레비앙을 몰아세우고서, 엘스헤른 이 아닌 대공 전하로서의 모습으로 그를 대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리고, 이렇게 레비앙을 울리는 날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테지. "……울지 ……말아. 나는 네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나는…… 엘스가 아 니야. 난…… 대공 전하여야 해. 그래야만 해. 그래야…… 내 마음을 다독 일 수가 있으니까……. 눈이라도 먼 것처럼 너에게로만 달려나가는 내 마음 을 다잡을 수 있으니까. 네 곁에, 네 친구로 있는 나는…… 내 자신을 봐 주지 않는 너를 견딜 수가 없으니까." 느릿하고 담담하게 말을 잇던 엘스헤른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일부러 천천히 말하고 있는데도 감정은 생각을 앞질러 치솟아 올랐 다. 가슴 속은 싸늘한 바람이라도 불고 있는 양 시리기만 하다. "바보 같이…… 어차피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했던 모든 말을 잊을 거 면서…… 술김에 네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잊을 거면서, 왜 이러 는 거니? 왜…… 그런 눈으로 나를 힘들게 만들어?" 가득히 목이 메어 온다. 말하는 것조차 아플 만큼이나 목소리가 가득히 잠 긴다. 엘스헤른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 같 지가 않아서 다시금 먼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빼곡히 내려앉은 밤의 밀도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짓눌려 묵직한 심정을 떨칠 수 없었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레비앙. 이러는 나는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울고 싶은 심정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엘스." "부르지 말아. 난…… 너에게서 도망쳐야 해. 내 있는 힘껏 도망칠 거야. 숨 이 차서 쓰러질 거 같아도 널 돌아봐서는 안돼. 내가 이대로 도망친다면, 넌 그저 친구를 잃는 것이겠지만, 난…… 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 으니까." 엘스헤른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 이 아릿해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몹시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엘스헤른의 가득 잠긴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엘스." "그거 알아? ……내가 살고 있는 의미의 절반이 너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런 너를 지켜보고 있는 나라는 것을 말야. ……어쩌 면, 나 역시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몰랐으면 오히려 다행 이었을 텐데…… 이렇게…… 타버릴 듯이 괴롭지 않아도…… 될 텐데." 엘스헤른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말고 다시 한 번 웃었다. 마치 기침이라 도 하듯 웃음을 짜내는 그를 보며 레비앙은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 게로 다가오는 레비앙의 하얀 손을 잡아 내리면서 엘스헤른은 나직히 말했다. "말했잖아. 나는 너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고. 그러니…… 나에게 따뜻 하게 굴어선 안돼. ……네가 날 도와줘야 하거든. 많이 미워하고, 나를 싫 어하고, 나에게서 멀어져 줘야 해. 네가 그래 줘야만 해. ……나를 봐, 레 비앙. 난 네 친구인 엘스헤른이 아니야. 나는, 너를 괴롭히는 대공 전하야. 널 못살게 굴고, 너에게 몹쓸 짓을 일삼는…… 그런 나쁜 녀석이야.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나를 봐 줘. 어차피 오늘의 일을 기억 못할 너라는 것을 잘 알아. 너 많이 취했어. 나에게 이렇게 투정부릴 만큼이나 많이 취했잖 아. 당당하고 굽힘 없던 네가 나에게 이럴 정도라면…… 내일이면 하나도 기억 못할 만큼 취했다는 것일 테니까." 엘스헤른의 말을 들으며 레비앙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아무런 생각도 나 지 않는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정신이 아련한 것은 꿈을 꾸 고 있기 때문인 걸까? "엘스헤른……. 나…… 꿈 속에 있는 거지? 이건…… 꿈인 거지? 내가 늘상 헤매고 있는 것이 악몽인 걸까? 너랑 싸운 이후로 내내 그렇게 마음 아파하 는 악몽 말야.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거야? 꿈에서 깨어 현실 로 돌아가면 너는 또다시 싸늘해진 모습으로 나를 대할 거니? 그게 악몽이 아니라 현실인 거야? 나는…… 그런 현실 속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야? 이, 이렇게 따뜻한 널 두고 내가 왜 그런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거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엘스, 내 따스한 친구 엘스인데……. 나……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게 꿈이라면 난…… 깨고 싶지 않아. 나, 꿈 에서 깨지 않을래."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 아래에 눌려진 자신의 손을 빼 내어 그의 소매 자 락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꼭 잡고 있을 거야. 네가 도망가버리지 못하도록 말야. 잡고 있 으면 가버리지 않을 거야. 너무나도 오랜만에 널 만났는데……, 네가 여행 을 떠나 있었던 지난 봄의 두 달보다도 훨씬 더 길게 느껴진 그 동안이었는 데……. 너, 정말 나빠. 어쩌면 그렇게…… 훌쩍 사라져버린 거야? 내가 보 고 싶지도 않았어? 너는 내 친구이면서…… 내가 그립지도 않았던 거야?" "그만둬, 레비앙. 더 듣고 싶지 않아. 난 예전의 엘스로 돌아가지 않아. 너 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그러는 게 나아." "엘스……. ……." 엘스헤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부른 레비앙은 뭔가 이야기 할 듯이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가 곧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드리운 붉은빛 속눈썹 아래로 살 며시 내리 깐 눈이 물빛에 반짝인다. 마음이 얼어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만큼 아프고 시려서 엘스헤른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자 고 이렇게 동요되어버린 것이란 말인가?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으면서, 어째 서! "흐읍.... 제길." 엘스헤른은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어디에도 시선을 둘 곳이 없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잔상처럼 선명한 것이 레비앙의 느낌인 것 을…… 작은 숨소리도, 편안한 이 체취도, 그리고 손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 도, 모두 레비앙을 느낄 수 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느끼 는 그 만큼, 마음 속은 산산히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엘스헤른……. 레비앙의 부름에 엘스헤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쩐지 시야가 뽀얗다. 그 러고 보니 멍하게 콧등도 아릿거린다. 이런 어색한 기분이라니……. 엘스헤른 은 짧게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스스로도 어떻게 자신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 으니까……. "하아……." 웃음 소리를 내 보는 것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서였 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세상이 맑게 부푼다. 뽀얗게 일렁이던 것이 일순 가득히 둥글어져서는 시원스럽게 굴러 떨어졌다. 여지껏 잘 참고 있었는데 한 숨이라도 지어 볼 것을 그랬던가! 제기랄,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게 되어버 린 것을……. 엘스헤른은 젖은 숨을 내 쉬면서 레비앙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싸늘하게 젖은 뺨이 손 끝에 닿아 온다. 그는 레비앙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레비앙의 귓가로 고개를 돌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작게 속삭인 엘스헤른은 그대로 레비앙을 끌어다 안았다. 바스락거리는 소 리를 내며 레비앙의 머리카락이 뺨에 부벼져 왔다. 아픈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되돌아 왔다. 불규칙적인 숨소리는 엘스헤 른에게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어쩌면 마음의 한 자락을 풀어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또한, 다시 괴로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내일에 대한 푸념이기도 했다. "미안해, 레비앙……. 미안해……." 엘스헤른은 숨이라도 몰아 쉬듯이 가슴에 가득한 젖은 한숨을 내 뿜고는 레 비앙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레비앙의 말처럼…… 차라리 이것이 깨지 않 을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깨지 않고, 영원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버릴 수 있다면…… "제길……, 레비앙! 나……." - To Be Continued - ==================================================================== 오늘은 괴로운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들으시겠습니까? 뭐, 둘 다 안 좋은 소식이니 그냥 순서대로.;; 괴로운 소식>> 펠티가 12월 3일에 초등교사 임용 경쟁 시험을 칩니다. 겅부 도 안하고 괴로워 죽겠습니다요, 정말. 하지만 잘 치라고 응원해 주신다면 한 결 힘이 날는지도……. 네, 게다가 이러한 이유로 12월 4일 이전에는 글이 올 라가지 못할 듯 합니다. 이번 편이 시험 보기 전에 여러분과의 유일한 의사소 통 창구가 되겠군요.TT-TT 요로분! 빨랑 돌아올게요~! 슬픈 소식>> 네, <레비앙 & 레비안느>가 출판이 안 되겠습니다. 출판을 기다 려 주셨던 많은 분들게 죄송스럽군요. 뭔가 출판사에 일이 생긴 듯 해서 리.^^; 아무튼, 그리하여, 이벤트의 상품은 자비로 마련한 도서상품권이 되겠 으며, 특별히 2번 이벤트에 한하여서는 허접하나마 저의 원화(자필그림)도 드 리오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뭐, 본인에게는 한결 여유가 생기게 되 는 일이었습니다만, 책으로 보길 바라셨던 분들, 좀 아쉬우시죠?^^ 그만큼, 펠티가 빵빵한 사이드 스토리를 마련하고 있으니까 염려들 놓으세요.^^ 네, 소식은 이만하고, 이번 편은 조용한 곳에서 읽으시거나 아니면 를 배경음악으로 들으시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닭살은 마마, 호 환,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어린이나 노약자, 소년, 소녀, 아름다운 미 모를 가지신 분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런 닭살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위와 같은 독서 환경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마는, 역시 스토리의 전개상 어쩔 수가 없네 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시고, 다음 편을 기대해주시길. 그럼, 다음 편 맛 보기. 취해 버린 레비앙, 그리고 본심을 드러내고 뭔가 말할 듯이 구는 엘스 헤른.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는 다음 편에도 계속! 하지만, 여기서 그냥 라부 라부(love love)로 넘어갈 페르티가 아니었으니! 아아~! 기대하시라! 다음 편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어쩐지 옛날 무성 영화를 보는 듯 하다.;) 괭이꼬리// 아횬! 친구의 "취중진담" 이야기를 써먹었어! ^^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4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07 조회수: 404 ┌───────────────────────────────────┐ │ ▶ 번 호 : 0/57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06일 23:4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4 - │ └───────────────────────────────────┘ ┏━━━━━━━━━━━━━━━━━━━━━━━━━━━━━━━━━┓ ┏╋━━━━━━━━━━━━━━━━━━━━━━━━━━━━━━━━━╋┓ ━━━━╋┛ ┗━━━━━━━━━━━━━━━━━━━━━━━━━━━━━━━━━┛ (54)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어쩌면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렇게 목이 메어오는 것을 보면…… 숨이 차도록 외치고 싶은 말인데도 이처럼 고통스럽게 입 안을 까츨하게 하는 것을 보면……. 세상엔 지킬 수 없는 것이 왜 이렇게도 많은지 모를 일이다. 이 아름다운 사람과의 우정이라는 것도, 그 리고 자신의 소중한 감정도……. "나…… 너를……."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마음의 그 어떤 한 자락도 이제는 내 보여서는 안 된 다. 머지 않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미 련에 연연해하다니……. 하지만……. 가득 잠긴 목이 묵직하게 아파 온다. 차마 한 마디를 토해 내 놓지 못하는 입술은 싸늘함에 떨려온다. 어지러운 갈등에 가슴 속 가득하게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왜 이러는 걸까? 눈시울은 뜨겁기만 하고 숨이 막힐 듯이 울음만이 목에 맺혀 있다. "……." 끝내 말을 흐려버린 엘스헤른은, 대신 자신의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레비앙 을 더더욱 힘 주어 안았다. 살얼음 같은 한숨에 입술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다. 그리고, 드러내지 못한 감정은 앙금처럼 가라앉고 있다. 끝없이…… 끝 없이…… 깊은 마음 속…… 심연으로……. 괜찮아, 이제는……. 이렇게, 잠시라도 이렇게 진심일 수 있었던 것은 기대 하지도 않았던 축복인 것을……. 마음은 한없이 추락해버린다 해도, 이제는 괜찮다.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때가 언제고 있을 것을……. 그때 가 온다면, 좀 더 편안하게 레비앙을 대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저 친구로……. ……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 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펼쳐진 것이 이 얼마나 불투명한 미래이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들을 헛되이 희 망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이 순간 만이다. 이 순간만 진심이고 싶다. 그것 을 바라는 것조차 사치일는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레비앙을 안고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니까 어쩐지 격정에 불타오르 던 심정이 진정되는 것 같다. 가까이에서 심장소리를 듣고, 온기를 느끼고, 체취에 가득 취해있으니까…… 마치 위안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편해져 온다. 어느새 어깨의 떨림은 멈추고 그토록 추웠던 가슴도 뭉근하게 따뜻해졌 다. "엘스……." 레비앙의 음성이 귓가에 간지럽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름을 들어보는 것도 얼마 만이란 말인가?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살며시 떼어놓았다. 좀 더 안고있 고 싶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을 뿐이었다. "왜…… 울어? 엘스헤른."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레비앙이 투명한 초록색의 눈동자가 어쩐지 뽀얗게 흐려져 보인다. 모든 것이, 심지어 레비앙마저 눈물로 얼룩져 보이다 니…….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눈물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코끝이 싸하고, 목이 가득 매이고 정신은 혼미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였다. "울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지금……." 레비앙의 손길이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뺨을 향해 다가왔지만, 엘스헤른은 다시금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지금 레비앙의 호의가 자신에게 닿는다면 다시 는 그를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엘스헤른은 어쩐지 가늘게 느껴 지는 레비앙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자신의 가슴 녘으로 잡아 당겼다. "……잊어버려. 내가 너에게 못할 말을 하려 했다는 것도, 목이 매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도……. 그리고, 너에게 그렇게 몹쓸 짓 하는 나 역시 힘 들다는 것도……, 너로 인해 이렇게…… 내가 울고 있다는 것도…… 너를 이 품에 안았다는 것도……. 너는 나에게 나 자신만큼 소중하다는 것도…… 그 누구도 너만큼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너는 내 마음 속 가장 깊고도 높은 곳에 자리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 모두 다……, 모두 말야. 레비앙, 잊는다고 약속해 줘. 제발…… 잊어 줘. 내일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깨끗하게 잊어버려." "……." 레비앙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엘스헤 른의 젖어있는 잿빛의 눈을 찬찬히 살폈다. 한 자락 이해의 끈을 얻어보려는 듯 그렇게 엘스헤른을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은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이내 눈 길을 떨구며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꿈…… 이라는 건가?" "음……." "…… 모두 다?" "그래." 엘스헤른의 대답을 들은 레비앙은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뺨을 하고서 피식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엘스헤른, …… 네가 왜 우는지…… 알 거 같아." "음?" "꿈이라서 그런 거야. 꿈에서는 어쩐지…… 내가 널 괴롭힌 것처럼 되었나 봐. …… 그런 거지?" "…… 그래……." 목이 가득 잠겨서 바람소리 같은 목소리가 되어버렸지만 엘스헤른은 목청을 가다듬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소중하게 품에 안은 레비앙의 손으로부터 미동이 느껴져 왔다. 천천히 미끄 러지던 그의 손은 엘스헤른의 손바닥 안에 허탈한 미온을 남기고서 멀어져갔 다. 쌀쌀하고 메마른 바람이 침묵의 공간을 느슨하게 채우고 있다. 여전히 엘 스헤른을 응시하고 있던 레비앙은 어지러운 듯 살풋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잠 이 들듯 눈을 내리 감았다.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는데……." 잠꼬대처럼 낮은 숨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레비앙을 향해 엘스헤른은 팔을 뻗어 그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깊숙히 숙여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품 속에서 잠이 들기 시작한 레비앙을 내려다보며 엘스헤른은 그의 이마에 가 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미안해. 좋은 꿈을 선물해주지 못해서." ·‥…━━━━…‥· "리하르트 도련님. 황궁으로부터 전언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리하르트는 집사의 말을 듣고는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황궁에서 전할 말이 뭐가 있을까? 혹여 레비앙이 서신이라도 전해 온 걸까? 당최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레비앙이 서신을 전하거나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황궁으로부터라니……. 살짝 미 간을 찌푸린 리하르트는 읽던 책을 덮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켜 서재를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리하르트에게,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다소 곳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 님께 전언이 있습니다."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흰색 상의……. 그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황제 폐하 와 그 분의 가족이 기거하고 계시는 본궁 소속의 시종임에 틀림없다. 리하르 트는 사뭇 궁금함을 떨치지 못하며 시종이 머리를 조아린 채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경청했다. "브리에르 엘스헤른 티아란 대공 전하께서 리하르트 드 에르띠낭 님을 본궁 뒤 <겨울의 정원> 입구에서 뵙고자 청하십니다." "대공 전하께서 말씀입니까?" 리하르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한 번 더 되물었다. "네, 되도록 빨리 오셨으면 한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겨울의 정원>이라면 에르띠낭 저택이 있는 황궁 동편의 대신의 저택구역에 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시종을 본궁으로 먼저 돌려보낸 리하르트는 집사가 건네주는 프록코트를 걸치고 나서면서도 어쩐지 대공 전하가 자신을 불러냈다 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지껏 자신을 적대시 해 오던 태도를 보더라 도 그랬다. 갑작스럽게, 그것도 황궁의 시종을 시켜 불러내는 이유는 무엇일 까? 저녁 내내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밖은 깊은 밤에 잠겨 있었다. 타일이 규칙적으로 깔려 있는 황궁의 거리를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리하르트는 속으로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공 전하가 이 밤중에 자신을 불러낼 이유라는 건 도무지 없다. 게 다가 - 레비앙의 말에 의하면 - 오늘은 황후 폐하의 살롱이 있는 날이라 지금 쯤 대공 전하께선 살롱에 참석해 계실 텐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곳곳에 등이 켜져 있어 어둡지 않은 거리였지만 황궁 안은 에스트르의 수도 벨라시그네의 중심부답지 않게 조용했다. 물론, 이 곳이 허락 받은 사람 외에 는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궁성 안이라 하더라도, 왠지 오늘따라 더욱 더 고요 하기만 하다. 이런 무거운 정적이 지금 리하르트의 마음 속에 불안감을 부추 기고 있었다. 그의 빠른 걸음걸이에 가로등의 불빛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급히 걸어서 인지 얼굴을 향해 바람이 세게 부딪혀 온다. 그 싸늘한 느낌이 리하르트에겐 어쩐지 좋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자꾸만 한숨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걸로 봐 서는, 아무래도 지금 대공 전하께서 불러내는 일이 레비앙과 관련된 일일 것 같다. 예감이라는 건…… 벌써부터 마음을 싸늘하게 얼어붙도록 만든다. 리하르트는 바람에 날리는 코트자락을 추스르며 <미로의 정원>으로 들어섰 다. 황궁의 대로를 따라가면 계절별로 이름이 붙은 정원이 꾸며져 있지만 지 금은 급한 마음에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비록 미로를 통과해야 하지만 대로 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보다는 이 쪽이 훨씬 빨랐다. 어른의 키를 조금 넘기 는 높이의 나무로 이루어진 미로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사리 통 과할 수 있는 길이었다. 싸늘한 공기는 옅은 나무 내음을 싣고 미로의 바닥으 로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 차가움이 마치 자신의 불안함인 양 리하 르트는 그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이 애써 빠른 걸음으로 미로를 벗어났다. 나무로 된 미로의 출구는 작은 관목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눈 앞에 보이는 영 국식의 작은 숲을 지나면 이제 <겨울의 정원>이 그 입구를 드러낼 테다. 하지만 약속 장소가 가까워 올수록, 리하르트는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걸음 걸이를 늦추고 있었다. 영국식 숲을 가로지르면서도 그는 아까처럼 거침없는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조금은…… 아니, 조금 많이 불안하고, 또 뭔가 마음 속으로 꺼려지는 것이 있어서였다. 작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멀리 겨울의 정원 이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겨울의 정원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 대가 그 입구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다. 둥근 대리석 분수의 모습이 시야에 들 어옴과 함께 리하르트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버렸다. 지금껏 불안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만 같다. 달빛을 받아서 더더욱 새 하얗게 보이는 대리석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는 대공 전하, 자신이 그토록 불 편해 마지않는 상대의 품 안에 기대어 잠든 사람의 모습은 조금 먼 거리에서 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레비앙……. 그리고, 대공 전하는 자신의 코 트를 벗어 레비앙에게 덮어 둔 채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숨을 죽였다. 조금은 악취미 같기도 했지 만 어쩐지 지금 대공전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에게도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건 여기에 서서 조 금만 더 지켜본다면 쉽사리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대공 전하에게 레비앙이 안겨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싫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 대책 없이 그 의 앞에 나서는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대공 전하가 이리로 불렀다는 것은, 뭔가 할 말이 있어서거나, 아니 면 하다 못해 지금 레비앙을 안고 있는 그런 모습이라도 보여주기 위해서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지금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 무방비 상태였다. 잠시 레비앙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멀리로 시선을 돌리는 그는 평소 같지 않게 우울한 눈빛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달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달빛 아래에 드러난 겨울의 정원과 그곳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 는 두 사람, 그 모든 것이 우울한 흰색으로 젖어있는 듯 했다. - To Be Continued - ==================================================================== <레비앙 & 레비안느>를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그간 무고하셨나요? 저는 2001년도 초등교사 임용 경쟁 시험을 치르고 여러분의 품으로 복귀했습니다. (휘익~! 데구르르르르르…… 쿵!!!) 캭! 그렇다고 그렇게 떨쳐 내실 것 까진 없잖아요! T-T 컥.;; 분량이 너무 적어서 저절로 떨쳐내게 된다구요? 죄, 죄 송.; 기말고사가 끝나지 않은 겁니다.TT-TT 게다가 이번 편은 제대로 퇴고도 못하고…….;; 에, 너무 쉬다가 쓰는 글이라서 그런지, 슬럼프의 기운이 으슬으슬 손가락 끝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던 장면이라 더더욱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밝은 분위기의 글이 쓰고 싶은데, 어쩐지 어두침침하죠?;;; 뭔 가, 많이 생각했던 장면인데도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될 지 몰라서 우왕좌 왕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에사 깨달았습니다. 저는 대사 쓰는 걸 보다 서술 문 형식을 더 쉬워한다는 것을 말이죠. 역시나…… 대사는 쉬운 일이 아닙니 다. 여러분에게 본의 아니게 닭살 증후군(Chicken Skin Syndrome)에 시달리 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_-; 요즘 같아선 국어 사전이 절실합니다. 단어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 죠. 조만간 꼬옥 큰 국어사전을 구입하고 말 겁니다! (불끈!) 뭐, 아직은 사 전이 없는 관계로 그나마 알맞은 단어를 찾기 위해 뇌세포의 잠재력까지 끌어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든 기억력과 상황적용력을 총동원해서 단어 생각해 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소설 한 편 쓰는 것도 두뇌와의 전쟁! 두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두드리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녹슨 머리가 어딜 가겠습니 까.; 자, 군말은 이제 그만, 다음 편 맛보기! (라지만 사실 아무 계획 없음.;) 영국식 숲에 몸을 숨기고 서 있는 리하르트, 과연 그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 가?! 그리고, 리하르트가 엘스헤른의 앞에 나서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는 지. 설마 눈싸움은 아니겠죠?; 레비앙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다음 편에서 펼쳐집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끝으로, 모든 독자 여러분! 추운데 감기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학생독자 여러분! 기말고사에 행운이 깃들기를!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참. 끝맺기 전에, 선전인 겁니다! 내내 재미있게 보고 있는 글인데…… 제목은 <이지엔느를 찾아서>. 판츠 창연란에 있습니다. 크~! 그 재치 발랄함 은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읽고 나면 어쩐지, 글을 써야겠다는 욕 구가 물씬 들게 하곤 하죠. 부디, 한 번쯤 들러서 읽어보시길.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5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14 조회수: 565 ┌───────────────────────────────────┐ │ ▶ 번 호 : 59/59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12일 16:3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5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5) 리하르트는 내내 앞을 주시한 채, 엘스헤른이 왜 자신을 이 곳으로 불렀을 지에 대해 곱씹었다. 하지만 허탈하고 서글퍼 보이는 그의 눈빛에서 해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랑해……." 문득 들려온 낮은 음성에 리하르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 공으로 흩어져버릴 듯 공허한 목소리……. "사랑해, 레비앙." 리하르트는 못 들을 것을 들은 양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올려 뺨을 감 쌌다. 귀를 막으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어느 샌가 손길은 그 목적을 잊고 그저 미수에 그친 듯 뺨에 머물러 있었다. 놀라버린 심장은 몸 밖으로 튀어나오기 라도 할 듯이 두근거렸다. 사실, 놀랐다. …… 이 정도였단 말인가? 레비앙을 향한 그의 집착이…… 단순히 오랜 친구로서의 집착이 아닌……. 싸늘한 공기 중에 묘한 파문을 흩뿌리는 그의 목소리는 곧 혼잣말로 이어졌 다. 자신의 가슴에 기댄 레비앙을 추스려 불편하지 않은 자세로 잘 수 있도록 해 주면서 엘스헤른은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말하지 않기를 잘 했지? 너 역시 듣고싶지 않은 말일 테니까……. 레비앙에게 덮어준 자신의 코트자락을 잘 다독인 엘스헤른은 그 손을 그의 머리카락에 살짝 가져다댔다. 아주 소중한 것에라도 손대는 듯한 그의 행동을 보면서 리하르트는 어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는 양 손을 내려 어깨를 감싸고서는 계속 그의 독백에 귀 기울였다. "이제 곧…… 그가 올 거야. 그러면 그것으로 내 역할은 끝이지. 네가 기억 할 수 없는 저편에 묻혀버릴 거야. 오늘 내가 너에게 보였던 행동은…… 나 자신, 엘스헤른으로서의 마지막 진심이었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은…… 이기적이게도 날 위해서야. 혹시라도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낼까봐, 만 약 그런다면 네가…… 정말로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그래, 두려웠 거든." 엘스헤른의 손 끝은 레비앙의 붉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뽀얗게 달빛을 반사하는 뺨으로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잠시 멈추었던 그의 혼잣말은 자장가 마냥 낮게 이어졌다. "날 미워하라고 외치면서도…… 본심은 그게 아니니까……. 나는……." 그는 짧게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자조라도 하는 양 낮고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살얼음 같은 웃음이다. 얇고도 싸늘하게 입 꼬리에 맺혔다가 이내 떨어져 나간다. 금새 사그라진 그의 웃음이 어쩐지 그 를 응시하고 있는 리하르트에겐 묘한 여운을 남겼다. "난…… 네게서 미움을 받는 게 두려워. 그러면서도 그 미움을 자처해서 받 고 있는 건…… 엇갈리는 내 마음을 분출할 곳이 없어서인 거야. 널 묶어두 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과, 널 좋아하면서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널 향한 미움을……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거든. ……이런 것엔 너무나도 서투른 나니까…… 어떡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 난…… 어쩌면 어 린애처럼 굴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고 바둥거리며 떼쓰는 어린애 말야.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버텨보는 거야. 내가 가질 수 없는 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네 친구였 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까봐서…… 아플수록 더 선명하게 곱씹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너랑 지내왔던 그 날들을 잊고싶지가 않으니까…… 너 를…… 널 사랑하니까……." 느리게 말을 마친 엘스헤른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번 건 확실히 자조였 다. 차가운 비웃음을 담아 스스로에게 쏘아 보내는 냉혹함의 화살. "그래, …… 그건, 정당화야.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거야. 꼴사납게 도……." 그는 레비앙의 뺨에서 손을 거두고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시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에게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표정이 역력히 드 러나자 리하르트는 낮게 한숨을 내 쉬었다. 레비앙이 말해주지 않은 진실이란 이런 것이었나? 그 동안 레비앙이 그토록 안절부절 못 한 것도, 그리고 그토 록 지쳐 보였던 것도 모두…… 저 사람의 평소와는 행동 때문에 다른 어떤 것 에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였던 모양이다. 그게 그토록이나 레비앙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겠지. 숲의 그늘에 숨어 있던 리하르트는 곧 달빛의 영역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냈 다. 작게 자박거리는 발소리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 엘스헤른은 아직 넋을 놓 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눈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반응하여 그는 리 하르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리하르트에게 눈인사 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무척이나 정중한 말투……. 리하르트는 의외로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내 허리를 깊숙히 숙여 엘스헤른에게 인사를 했다. "부르심에 응하여 대령했습니다. 티아란 대공 전하." 인사 끝에 고개를 든 그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엘스헤른을 바라보았 다. 투명한 잿빛의 눈동자가 그런 그의 움직임을 조용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 대면할 때처럼 그렇게 재고 있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약간은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그를 부른 용건을 이야기하려는 듯, 작은 한숨으로 입술을 떼어놓았다. "복잡한 인사 치레는 생략하도록 하지요, 리하르트 경. 당신을 이 곳으로 부 른 이유는 레비앙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상상하고 있었던 터라 리하르트는 엘스헤른이 이을 다음 말을 잠 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잠시 숨을 내쉬었고, 그건 곧 긴 침묵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 것처럼 아무런 말이 없던 그는 레비앙을 덮어주고 있던 자신의 코트를 걷어 한 팔에 걸친 채 몸을 일으 켰다. 그러고는 레비앙을 리하르트에게 넘겨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를 로자리움까지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예?" 엘스헤른의 느닷없는 부탁에 놀라 리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이런 부탁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직접 한다 해도 될 일인데. 더군다나, 지금 레비앙은 취한 것 같고, 잠까지 든 상태인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리하르트의 표정에 엘스헤른은 벌써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데려다 준다면…… 아마 레비앙이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자신 이 기억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집사를 통해서든 어떻게든 알게 될 일이니 까요. 그래서 리하르트 경을 부른 것입니다. 경이 에스코트 해 준다면 나로 서도 안심이고, 레비앙 역시도 못 마땅해 하지는 않을 테니까……." 엘스헤른은 낮게 흐려버린 말끝을 서늘한 미소로 마무리했다. 그런 그의 표 정에 리하르트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레비앙을 위 해 배려하면서 어떻게 그를 괴롭히는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리하르트는 이유 모를 패배감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도발하면 금새 반응을 드러내곤 하던 예전의 그 어 리디 어린 대공전하가 아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불과 한 달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차는 준비해뒀습니다. 본궁 앞에 주차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멀지는 않습 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엘스헤른은 정중히 목례를 하고는 이내 리하르트에게서 등을 보였다. 리하 르트는 그를 붙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곧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를 부른 후에 할 말이란 것도 없다. 다만 조금 갑작스럽고, 또 조금은 허탈 해서였다. 그리고 묘한 불쾌함이 마음 속 한 켠을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금 엘스헤른의 뒷모습을 향해 눈길을 둔 리하르트는 지금 자신의 마음 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렇게 등을 보인 상대를 향한 자신의 추악한 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 커다란 창에 드리운 하얀 커튼으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이 점차 밝은 빛을 띄 는 것에 한동안 시선을 두고 있던 리하르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아침이 밝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다. 물론 그 광경을 만끽하기 엔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하지만……. 그토록 곱씹고 곱씹어 생각했던 어젯밤의 일이 다시금 떠올라, 리하르트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이건…… 철 저하게 자신이 패배한 싸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장차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 엇이라는 것도……. 그걸 깨달은 건 어제 돌아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반쯤 잠에 취한 레비앙의 주정 때문이었다. 리하르트 자신을 엘스헤른으로 착각하는 레비앙을 그냥 내 버려뒀던 것은 그의 진심을 듣고싶어서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했던 단 한 마디는 그 이후 내내, 지금의 이 아침까지 리하르트에게 많은 것을 곱씹게 하고 있었다. 그가 울면서 말했던 그 말이 마치 목에 걸려버린 생선 가시처럼 순간 순간을 따끔거리게 하면서 결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엘스……. 나는…… 난 말야……,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꿈이 아닐 수 만 있다면…… 내 모든 걸 버려도 좋아." 그 말이 어제 자신이 엿들었던 대공 전하의 독백과 맞물려 감정을 심히 거 슬리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진심이라던 그의 그 말…… 그리고, 꿈이 아니 었으면 좋겠다는 레비앙의 주정…….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그 사이에 있 었을 지에 관한 질투 따위가 아니었다. 언제나 느껴오던 것이었지만, 구체적 으로 확언할 수 없었던 그 사실을 이제서야 확실히 깨달았을 뿐이었다. 리하르트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불안했던 그 동안의 마음이, 그 예감이 이렇게 표면으로 드러나 버린 지금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갈 림길에서의 선택일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레비앙이 불 행해 질는지, 행복해 질는지에 대한 것 따위는 어차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것이, 지금 레비앙의 심정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 다만……, 이기적이게도 마음은 양분되어 아직 까지도 그렇게 다투고 있었다. 문득 그가 가까이 앉아 있던 침대 맡에 작은 미동이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조금의 움직임 없이 의자에 앉아 침대 맡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쪽을 향해 잠 들어 있던 레비앙이 문득 초록색의 눈동자를 드러내며 반짝 눈을 떴다. 그는 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적응이 안 되는지 두어 번 눈을 깜 빡이더니, 아직 깨지 않은 잠이 묻어나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의 눈 앞을 응시 했다. "리하르트……." 묘한 아쉬움을 남기는 그 여운에 리하르트는 싱긋이 미소로 답했다. "잘 잤어? 레비앙." "어……. 응." 레비앙은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추스르며 일어나 앉았다. 잠을 깨려는 모 양으로 눈을 부비다 말고 잠시 리하르트에게 눈길을 둔 레비앙은 어지러운 듯 살짝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을 흘렸다. "…… 꿈……이라도 꾼 모양이야. 정신이 하나도 없군." "어제 과음했잖아." "응, 황후폐하께서 자꾸 권하셔서……." 뭔가 생각을 더듬기라도 하는지 레비앙은 눈살을 찌푸린 채 의아해하는 표 정을 지었다. "이상해. 어제 분명……." "음?" "아니, 어제……." 레비앙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작게 끝을 흐려버렸다. 그가 하려다 가 삼켜버린 말이 무엇인지 리하르트는 벌써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에스코 트를 해 주러 나온 사람은 분명 엘스헤른이었다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게 확실히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의 눈치도 있고 해서 그냥 얼버무려버린 모양이다. 대신 레비앙은 온화하게 웃음을 머금으며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네가 날 집까지 데려다 준 거야?" "응." 망설임 없는 자신의 대답에 리하르트는 죄책감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배려해서 어제의 일에 대 한 궁금함을 물어보려 하지 않는 레비앙의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 것이 겉으로는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지만 결국 대공 전하를 감싸기 위한 것임 에 틀림없다는 생각에 리하르트는 비웃음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시간이 많이 지났나봐. 황궁에 나가봐야 하는데…… 식사 시간에도 늦었고……." 문득 자신의 시계를 꺼내 본 레비앙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기억 나지도 않는 어제의 일 따위는 벌써 단념해버린 듯했다. 아니라면 그것 역시도 그저 옆에서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위한 배려인지도 모르지. 리하르트는 허둥대며 서두르려 하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서는 레비앙의 팔을 붙들었다. "레비앙……." "응?" "우리, 결혼해. 지금 당장." - TO BE CONTINUED - ==================================================================== 소녀, 사약을 들겠사옵니다. 독자 여러분을 뵈올 면목이 없사옵니다. 훌쩍. TT-TT 시험이 끝났음에도 불구, 이토록 늦장을 부리는 제가 스스로도 밉사옵 니다~! ………………… 흐음, 궁상떨지 말고 열심히나 쓰라구요? 하, 하지만 요즘엔 글쓰기엔 너무 춥다구요. 키보드는 얼음장같죠, 방은 외풍으로 인해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지요, (방바닥에 붙어 있어야 함.) 손가락은 얼어붙어서 오타는 수두룩하지요. T^T 그런데다가 결정적인 글쓰기 저해 요인! 바로 슬럼프인 겁니다.;;; 이벤트 참여율이 저조한 것도 역시 슬럼프의 한 요인이 아닐까……라고 했다간 돌맞 겠죠? TT-TT 암튼, 이벤트 마감일이 18일로 연장되었으니 많은 참여 바래요~! 아, 참. 글코, 지루해하시는 듯 해서 예정되어 있었던 마차 씬은 그냥 뺐습 니다. 원래는 리하르트가 레비앙을 데려다 주는 도중에 마차 안에서 레비앙이 술꼬장 & 잠꼬대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냥 리하르트가 회상하는 걸로 처 리했습니다.^^ 잘 했죠?*^o^*(에교!) ………………… T^T 엉뚱한 짓으로 얼 버무리지 말라구요? 쿨쩍. 그래요~! 제가 귀찮아서 빼 먹은 거예요~! 우엉엉 엉. TT-TT 그, 그럼 다음 편 맛보기! (어느새 돌변한 펠튀.) 엘스와의 일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밤새도록 잠든 레비앙을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 그의 결정은?! (앗.; 사악신 사부! 왜 군침을 흘리시는 거죠?) 그리고, 새로이 시작되는 다 음 파트엔 어떤 일이? 살롱 편의 대단원은 어떻게 마무리될는지 기대해 주세 요~!^^ 아, 참. 많은 분들이 격려 & 독촉의 메모와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만, 임용 시험 뒷풀이다, 기말고사다, 사은회다 정신이 없었던 한 주였기 때문에 그 분 들의 아이디를 체크 해 놓지 못했네요. 암튼, 관심 가져 주신 분들 감사드립 니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6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16 조회수: 398 ┌───────────────────────────────────┐ │ ▶ 번 호 : 60/6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16일 22:51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6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6) "…… 뭐…… 라고?" 레비앙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듯 되물었다가 리하르트의 진지한 눈빛에서 이미 그 답을 찾았는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리하르트는 그의 손목을 잡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결혼하자구. 약혼 따위 기다릴 필요 없이…… 그냥 당장 결혼해 버리자." "왜…… 갑자기……?" 회피하는 듯한 레비앙의 목소리에 리하르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 차피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막상 눈 앞에 이렇게 닥치고 보니까 어쩐지 씁쓸해 진다. 역시나 이렇게 패배하고 만 거란 말인가? 리하르트는 살풋 깨물고 있던 자신의 아랫입술을 놓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손아귀에 쥐여 있는 레비앙의 가느다란 손목을 고이 내려놓았다. "…… 그냥…… 해 본 소리야." "리하르트." "널 떠봤다구. …… 내가 느닷없이 그런 말을 하면 넌 어떻게 대답할지…… 한 번 떠 본 거야." 마치 여지껏 장난이라도 쳤다는 듯, 눈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 하는 리하르트를 빤히 쳐다보면서, 레비앙은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 런 말을 농담 삼아 할 리하르트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레비앙이었다. "대체, 왜?" 레비앙이 정색을 하며 묻자 리하르트는 피식 소리내어 웃더니 파란 눈동자 를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곧 곤란한 질문이라도 들은 모양으로 입을 다물어버 린다. 뭔가 말할 듯 하면서도 하지 않는 그의 행동에 답답해진 레비앙은 미간 을 찌푸린 채 그를 재촉했다. "갑자기 왜 그래?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걸 떠 보는 거야?" "이제는 관둘까 해서……." "……뭘 말야?" 말 끝을 흐리는 리하르트의 대답에 묘한 기미를 느낀 레비앙은 망설이면서 도 기어이 의문을 표했다. 아니나다를까, 레비앙의 질문에 싱긋이 해맑은 웃 음을 띄고 있던 리하르트는 미소 끝에 얼핏 한숨을 지으며 느릿하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저 이름뿐인 네 연인의 위치 말야. …… 어쩌면 너도 내가 그만 두길 바 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바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건지도……. 아무래도 좋아. 난…… 그만 두고 싶어졌어." "……!" 리하르트가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 놓았을 때 보다 더더욱 당황해버린 레비 앙은 새하얘진 안색으로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응시했다.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던 그는 정신을 차려보려는 듯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서, 흘러내리는 머리카 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에게서 느닷없이 그런 말을 들으리라는 것은 상 상도 못했던 일이라 레비앙은 가득 혼란스럽기만 했다. 과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레비앙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지금…… 설마…… 네가 말하는 게……." "그래, 맞아. …… 네가 지금 설마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야. 약혼하려 했던 것도…… 그리고, 연인 사이라는 것도 이젠 다 그만두자고." "……왜,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하르트." "모르는 척 하는 거니? …… 아니, 아직까지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몰라. 여전히 너는, 너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건지도……. 하지만……." 리하르트는 잠시 호흡을 멈추더니 아주 맑은 미소로 다시금 숨결을 터뜨려 냈다. "너는…… 나와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니?"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그는 그렇게 그저 웃고 있 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서……. 레비앙은 자신이 생각해 보지 못 한 것에 대해 넌지시 물어오는 리하르트에게 어떠한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서 그냥 그의 이름만 입술에서 맴돌 뿐이었다. "리하르트……."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해버린 듯 넋을 놓고 있는 레비앙에게, 여 전히 웃음을 머금은 리하르트는 재촉하여 다시 물었다. "대답해봐. 나와 결혼하면 너는 행복할 것 같아?" "……." 무슨 대답을 해야 할는지……, 심지어 이게 무슨 질문인 건지…… 새하얀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의문들과 생각들이 한가득 소용돌이치고 있다. 레비앙 은 잠시 망설이는지 입술을 움직였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겠어." 한숨 끝에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정말, 다른 말은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뭔가 한가득 서글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서였다. 리하르트에게 긍정의 대답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지금은 이상하리 만큼 밉지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진심을 말하고 있구나 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리하르트는 레비앙에게로 손을 내밀어 아주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겨오는 그의 느낌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리하르트는 알고 있었다. 지 금 이렇게 그를 안아보는 것이 현재의 관계라는 것에 마지막을 짓는 행위임 을……. "난……." 레비앙을 끌어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천천히 입을 연 리하르트는 진지 한 말투로, 그러나 웃음을 잃지 않고 나직히 말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가까이 마주 닿은 리하르트에게서 울리듯 들려오는 음성에 레비앙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목소리가, 비록 잔잔한 미소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몸을 싸 늘하게 할만큼이나 서글프게 들려서였다. 온 몸을 관통해 흐르는 슬픈 느낌에 레비앙은 그가 무슨 말을 하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 게 한숨을 지으며 여유를 두던 리하르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의 행복이 나와의 결혼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면, 나는 너와 결 혼하지 않아. 내가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를 나에게 옭 아 매고 싶진 않거든.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니까……." 리하르트는 잠시 작게 소리내어 웃었고, 이내 그의 목소리는 일상의 이야기 라도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이어졌다. "만에 하나, 레비앙, 네가…… 나와 결혼해서 행복할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면…… 그때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아직은 시간이라는 게 그 다지 급하지 않아. 너에게나, 나에게나……." "……." 리하르트는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로 그만 레비앙을 놓아주고는 짧게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의 그런 모습이 어쩐지 초췌해 보여 레비앙은 가슴이 아팠다. "……내가 잘 못 한 게 있니?"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난 이해가 안돼……. 어째서 네가……." 조금 우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레비앙에게 리하르트 는 손을 내밀어 살며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손 가득히 가늘고 부드 러운 붉은 빛 촉감이 느껴진다. 이러고 있으니까, 어제의 대공 전하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달빛이 스며드는 밤의 정원에서 그토록 절실하 고도 애절한 손길로 레비앙을 소중하게 쓰다듬는 그를 보며 느꼈던 것은 처절 한 패배감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레비앙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바보 같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버린 그 순간에 이미 이 싸움이라는 건 판가름 나 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것 따위는 무시해도 될 만큼 아직까지는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 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직 레비앙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직 자리를 뜨 지 않은 어린 새와 같아서 자신이 족쇄가 된다면 언제까지고 붙들어 둘 수 있 다는 것을…… 비록, 이 어린 새가 자유라는 것에 눈뜬다 하더라도 더 이상은 달아나게 할 수 없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리하르트는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언뜻 입에 담았던 결혼이라는 것이 그 족쇄였다. 하지만 엘스헤른이 곁에 없 는 레비앙은 좀체 웃지를 않고, 어쩌면 시들해 보이기까지 해서, 그런 그를 보는 것 만으로도 리하르트는 이미 모종의 두려움을 안고 고민해 왔던 것이었 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잠시 마음이 외도 를 했을 뿐임을……. 아직은 굳지 않은 레비앙의 마음이 자신의 곁이 아닌 다 른 곳에 잠깐 한 눈을 판 것임을……. 그런 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을 붙들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만큼은 대공 전하 와 비교한다 해도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레비앙을 다독였다.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네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 그리고 네 마음 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어. 네가 편안해 할 수 있는 작은 여유를 주 고 싶다구." 해맑고, 조금은 짓궂어 보이기까지 하는 리하르트의 파란 보석 같은 눈동자 를 보며 레비앙은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아무렇지 않게 웃는 저 얼굴 너머 로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를 생각하니까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가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이런 말을 할 리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이유 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레비앙은 잘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 난……." 목이 메어 까츨한 목소리로 입을 때어 놓는 레비앙에게 리하르트는 살짝 입 술을 마주 대었다가 이내 싱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쉿, 그렇게 애쓸 거 없어. 그런 일로 울먹이다니 너 답지 않잖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여봐. 파혼 따위의 거창한 말이 아니라……, 난 그냥 잠시 너하고 친구 사이로 돌아가 있으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그저…… 조금 시간을 갖는 거라고 말야…….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네 생각을 다듬어 봐. 그럼 진실을 알 수 있을 거야. 너를 둘러싼…… 그리고 너를 괴롭히는…… 네가 모르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듯이 느릿하게 말하던 리하르트는 이만 레비앙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가 볼게. 바쁠 텐데 아침 시간 빼앗은 게 되어서 어떡하지? 미안해." 그는 활짝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곧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 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잠시 몸을 돌려서는 한 번 더 레비앙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고마워 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리하르트……." 레비앙이 넋 놓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으나 리하르트는 목례만 까딱 하고 서 그만 문을 닫았다. 그가 나가고 나자, 어쩐지 너무나도 조용해서 레비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리하르트가 한 말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기억나지 않 는 어제의 일과도 관련 있을지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요즘 흔들리고 있는 자 신의 행동들 때문임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레비앙은 가득 우울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햇살마저 맑게 비쳐드 는 아침인데 마음은 가라앉은 무거운 회색 같기만 하다. "……미안해. 리하르트……." - To Be Continued - ==================================================================== 안녕하세요?^^ 모두들 잘 지내셨죠? 요즘 전 감기몸살운전면허공포증청결공 포증이라는 긴 병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_-; 칵! 도서관에 책 반납해야 한 다는 것도 잊고 있었군요.;;; 책 빌린 지 어언 4개월!(하하핫.;;;;) 쿨럭쿨럭쿨럭쿨럭쿨럭……. 감기가 아주 심하게 걸려버렸어요. 이번 편은 쓰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_- (여봐, 못 믿겠다는 듯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당신! 딸꾹질과 기침을 동시에 해 봐! 정신이 있나 없나!) 뭐, 좀 이상한 분위기더라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주시길.;; 저번 회 마지막 이후로 리하르트 군이 아주 욕을 많이 들어서 저로서는 슬 프기 따름! 이상한 데에서 끊어버린 제 잘못도 있지만서도……. 뭐, 리하르트 군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예요.^^; 요번 편 내내 미소짓느라 고생한 리하르트 군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군요.;;;;; 자, 그럼 다음 편 맛보기! <살롱>편 대단원의 막이 내렸습니다. 그럼 다음 편은 어떤 주제가 될 것인가?! (주제나 있으려나.;) 살롱의 사건 이후 마주친 엘스와 레비앙! 과연 이들은 어떤 행동을 보일지……. 그 이후 황후의 명령으 로 아르떼이유 가로 향하는 의사! 의사는 왜 동쪽... 아니, 아르떼이유 가로 갔나! 설마 레비앙이 쓰러지기라도?! 훗.훗.훗. (사악한 펠티) 자, 그럼 다음 편을 기대! 그럼 기대하시고 고대하시던(아, 아니라구요? -_-;) 감사 퍼레이드! 네이시 님, 티나 님, 샥신오빠, BABOANIA 님, LIBERION 님, TRUTHJHC 님, EASTCALL 님, 사오정 님, 그리고…… 칵.; 생각이 안 나네요.; 나머지 분들은 다음에 실어드릴게요.T^T 아, EASTCALL 님, 감상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좀 풀리는 듯 한데, 언제 추워질 지 모르겠군요. 모두 몸조심 하시 구요. 저 같이 감기로 고생하진 마세요.T^T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7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19 조회수: 387 ┌───────────────────────────────────┐ │ ▶ 번 호 : 61/6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19일 18:59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7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7) 날씨가 이제 많이 쌀쌀해져, 에스트르는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벌써 전쟁에 관한 회의는 끝나고 이제는 온 나라가 전쟁 준비로 바쁜 가운데 에도, 벨라시그네는 전쟁애 임박한 나라의 수도답지 않게 평온하기만 했다. 느즈막한 오후에 말을 타고 벨라시그네를 둘러본 레비앙은 그런 광경이 오 히려 조금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해서, 제롬과 함께 성관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간간히 한숨을 짓곤 했다. 마치 이 전쟁이 왕정을 지키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등 떠밀어 보내는 것만 같아 꺼림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전쟁 의 책임이 다른 사람도 아닌 엘스헤른의 어깨에 얹혀 있다는 것에 불안함이 더 가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병상을 털고 일어난 제롬과 함께 오랜만에 수도 벨라시그네로 산책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는 아이린 양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어 한가한 하루를 보낸 레비앙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에스트리온 성관으로 향하고 있는 걸음에도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번에 엘스헤른과 마주 치는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 아서였다. 며칠 전 살롱에서 과음한 이후에 -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 엘스 헤른과 어떤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도무지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 으니 속수무책인 것이다. 성관에 도착했을 무렵엔 날이 제법 저물어 하늘은 금색의 비단 위에 수놓은 장미꽃과도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발그레한 색채는 짙은 향기 마냥, 오래된 성관을 온통 감싸고 있었으며 조금씩 그 농도를 더해갔다. 시시 각각으로 저녁의 색채에 물들어 가는 에스트리온 성관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 다가 그 안으로 들어선 레비앙은, 제롬을 따라 에스트리온 공작부인께 들러 일단 안부를 묻고는 아이린에게로 가서 짧은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는 시간이 마치 일상의 일부분인양 안온하기만 해서 레비앙은 조금은 편안해 지는 기분 을 느끼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그건 아이린, 그리고 제롬과 함께 식사실로 향 하는 도중에 엘스헤른과 마주치기 직전까지의 기분이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곤란한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그 시 간이 닥쳐오자 레비앙은 도저히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잘 다듬어 놓은 석 상처럼 굳어져버린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바라보는 엘스헤른의 시선이 꽂 히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주 잠시, 그와의 눈길이 마주치면서 짧은 침묵이 있었다. 허나, 그 순간 만큼은 시간을 붙들어 매어 놓기라도 한 듯이 레비앙에겐 길게만 느껴졌다. 창으로 스며 들어온 장미빛의 석양은 엘스헤른의 잿빛 머리카락을 붉은 색으 로 물들이며 기묘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오감을 통해 느껴지는 그 향내 가 자신이 못내 그리워하던 엘스헤른의 싸한 체취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 만 레비앙은 어쩐지 그 내음에서 생소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엘스헤른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말을 토해 놓았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레비앙 경." 아마도 그 생소한 기운이란 건 이런 것을 예감했을 터이다. 엘스헤른은 한 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아니, 예전의 싸늘함과는 달리 마치, 무관심한 사람 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숨은 뜻 없이 몹시도 건조하게 안부를 묻는 것이다. "예, 대공 전하……." 레비앙은 곧 정신을 차리고서 엘스헤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러 는 자신이 예전에 비해 그다지 치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때문에 레비앙 은, 슬프게도 스스로가 이젠 조금씩 포기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그와의 대등했던 친구의 위치를 포기한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었 던가?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엘스헤른은 작게 목례를 하고서 레비앙과 제롬 남매를 지나쳐 갔고 그런 그 를 기가 차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제롬은 가득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의 누이에게 속삭거렸다. "저, 저거 분명히 우리에게 도전하는 거지?" "……글쎄." 아이린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엘스헤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 다가 짧게 한숨을 지었다. 굳이 제롬과 자신이 있는 앞에서 레비앙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분명히 제롬의 말대로 그런 일종의 경고인 건지도 모 른다. 더 이상 자신의 일에 간섭해도 소용없다는……, 그리고, 이제 너희들이 어떤 말을 해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듯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린은 당사자인 레비앙의 기분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넋을 놓고 있던 자신을 질책하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얼른 가요. 레비앙." "아, 예……." 역시 아직까지도 멍하게 서 있던 레비앙은 미소 띈 그녀의 표정에 애써 웃 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는 제롬이 뭔가 불만에 찬 듯 궁 시렁 대고 있었지만 어쩐지 레비앙은 그 소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어지럽고 아쉬운…… 그런 허전함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들었다. 어쩐지 점점 더 깊은 악몽의 길로 들어선 기분이 든다. 이제는 엘스헤른이 더 이상 손 내밀면 잡힐 곳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님을 그러다가 정말 아무런 상관없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릴 것임을 스스로도 느껴가고 있었다. 레비앙은 긴 복도의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이린 몰래 한숨을 지었 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름답게만 느껴지던 붉은 노을이 어스름에 먹혀들고 있 다. 그게 어쩌면 불길한 앞 일을 계시하기라도 하는 듯 해서 그는 마음이 착 찹했다. 언제나, 날마다 바라는 일이지만, 잠들기 전에 항상 생각하곤 하는 말 한마디가 그런 그의 입가에 살풋 맴돌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 "어쩜, 그런 일이……." 멀찌감치 에서 황궁 주치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후 폐하의 표정이 어쩐지 좋지 않다. 평소 언제나 달고 다니던 미소는 온데 간데 없고, 살풋 눈썹을 찌푸리기까지 한 그녀는 사뭇 진지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최근 그녀가 그토록 심각한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던 터라,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 던 엘스헤른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가 의사인 것으로 봐서는 누군가가 아프다거나 하는 것이 그 주제일 테 고, 황실 주치의가 진료하는 사람은 황실 가족 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 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이런 구석진 곳에서 은밀히 이야길 나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역시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어제 귀가 길에 낙마를 했다더군요. 상태가 심각……" 누가 낙마를 했다는 말일까? 대체, 누가 낙마를 했기에 황후가 주치의까지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꽤 먼 거리여서 그런지 주변에 늘려있는 소음에 묻혀 황후의 목소리가 이어질 듯 말 듯이 들려오고 있었고 엎친 데 덮 친 격으로 모퉁이에 숨어서 듣고 있던 그의 앞에서 두 명의 시녀가 머리를 조 아리는 바람에 엘스헤른은 잠시 황후의 말을 놓치고야 말았다. 엘스헤른은 시녀들을 조용히 다른 길로 돌려보내고는 아드레이드의 목소리 에 집중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걱정이 심하시답니다. 아무래도 그쪽 가문과 황실은 대대 로 연관이 많았으니까요……." "예,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황후 폐하." "나 역시 당혹스럽기 그지없어요. 오늘부터는 황태자에게 에스트르 역사에 관한 수업을 해 주기로 했었는데……." 황태자의 역사 수업이라……. 여지껏 들은 말로 유추해 볼 때 황궁 식구들 중에서 뭔가 봉변을 당한 사람은 없단 말이로군. 하지만 황후가 저토록 걱정 을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엘스헤른은 뭔가 스멀거리듯이 온 몸을 감싸고 도는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어서 좀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어머! 제르트뤼트 공주님, 그리로 가시면 안돼요!" "얘! 공주님을 잡아!" "공주님! 그쪽은……." 복도 저 편에서 쩌렁쩌렁 울리듯이 들려오는 시녀들의 소음에 엘스헤른은 가득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복도에서의 소리는 증폭되어 들리게 마련이지만 사실, 이건 시장 바닥보다 더한 소란처럼 들린다. 어째서 갓 걸음마 하는 애 하나 못 보살펴서 저런 난리들을 피운단 말인가?!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 는데 저렇게 새된 소리들이라니……. "잡았다~!" 제르트뤼트 공주의 보모이자 예절 부인 - 아직 돌 밖에 지나지 않은 공주에 게도 예절 부인이 붙여져 있다! - 인 레인비 백작 부인의 목소리도 또록또록 하게 들려 온다. 평소, 곱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유명한 백작 부인이지만 지 금 엘스헤른에게는 그녀의 목소리가 곱게 들릴 리가 없었다. 레인비 백작 부 인이 제르트뤼트에게 간지럼을 태우고 있는 겐지, 어린 공주가 터뜨려 놓는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 소리 역시 엘스헤른의 신경을 가득 거슬리게 하고 있었 다. "아하하하하하∼! 시여, 시여∼!" "어머, 싫다구요? 공주님." "꺄하하하하하하∼!" 엘스헤른은 당장 달려가서 호통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끓어오르는 신경질을 억누르며 한숨으로 화를 달랬다. 곧 공주와 레인비 백작부인의 무리가 복도를 떠나고 겨우 잠잠해진 가운데 문득 황후 폐하의 한 마디가 그의 귀에 들어왔 다. "……이 어쩐지 오늘은 좀 늦는다 했더니,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오후가 지나서야 그쪽 가문에서 시종을 보내왔더군요. 그런 일이 있어 황궁 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이죠." 누가…… 늦었다고? 분명 무슨 경이 늦어서 못 나온다고 시종을 보내왔노라 는 말이었는데……. 황후 폐하께서 그런 말을 하실 대상이라면 그녀 자신이나 그녀의 자녀들에 관련된 사람일 것이다. 아아, 갑자기 엄습해오는 이 불안함 이 사실이 아니기를……. 엘스헤른은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아드레이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당장 아르떼이유 가로 좀 가 주셨으면 해서요." 아르떼이유 가. 자,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엘스헤른은 많은 생각들이 소 용돌이치는 가운데에서도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쉽사리 종합할 수 있었다. 어제 귀가 길에 낙마한 사람은 아르떼이유 가문의 사람이고, 그는 지금 심각 한 상태이다. 늙은 아르떼이유 후작이 갑자기 외출 같은 걸 할 이유란 건 없 는 것, 그렇다면 역시……. 엘스헤른은 잠시 휘청거리는 걸음을 벽에 손을 짚으며 가다듬었다. 어제 레 비앙에게 그렇게 대하고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얼마나 질책했던가! 그 런데 이런 일까지 생기다니……. - To Be Continued - ==================================================================== 페르티입니다. 초반부의 이상한 분위기에 주목(;;;), 아니, 이상한 분위기 는 그냥 넘어가 주세요. 묘한 옛날 책을 한 권 읽었더니 문체가 구냥 따라가 버리는군요.(무서버라…….) 뭐, 아직도 흔들리는 문체라는 건 수련을 더 쌓 아야 고쳐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됩니다. 아, 이벤트 결과 발표입니다. 마감일이 어제였죠.^^ 당첨자는 다음과 같습 니다.^^ 1번 이벤트 - 히즈 님, 혀니향기 님. 2번 이벤트 - 참파란미침 양. 3번 이벤트 - 혀니향기 님. 1번 이벤트의 답은 다들 궁금해 하셨는데, 바로 엘스헤른입니다. (칵.;; 왜 야유가 날아오지?;) 뭐, 힌트는 단 두 군데 뿐이어서 찾기가 힘드셨으리라 생 각됩니다. 그러나 이벤트가 공고된 직후에 올라간 51편에도 분명히 힌트가 있 습니다. 뭐, 그 소녀(?)가 어째서 엘스헤른인가 하는 이야기는 추후 소설 속 에서 제롬의 입을 통해 들으시길 바라며…….^^ 3번 이벤트는 몇몇 분들이 보내주셨는데, 물론 결과는 모두 저의 결말과는 다릅니다. 쿨럭.;; 하지만 혀니향기 님이 보내주신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정말 혼자 보기 아깝습니다요.^^ (무슨 모험 활극 같았어요. 게다가 전형적인 로맨스도 가미!) 아무튼, 혀니향기 님의 당첨 이유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너 무나도 자세하고(!) 또, 몇 몇 장면에 유사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혀니향기 님의 이야기는 틈이 나면 실어드리지요.^^ 네, 이번 이벤트는, <레비앙 & 레비안느>가 출판되지는 않는 이유로 책을 드리지는 못하고, 상품을 당첨자 본인이 원하시는 것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허나 백수의 생활고를 염려하셔서 너무 비싸거나 한 건 안돼요! (라며 사시미 를 들고 부리부리.) 뭐, 아끼는 켈리 인형을 내놔라는 것도 안돼요!! 쿨럭쿨 럭……. 자, 당첨되신 분들은 얼른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에 대해 메일이 나 메모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구요. 당첨 안 되신 분들에게는 제가 기필코 열쒸미 쓰는 것을 보답해 드리…… 카악.;; 칼 날아온다.;;; 잡 담이 너무 길군요. 쿨럭.; 자, 그럼 다음 편 맛보기! 황후와 주치의의 밀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말을 듣고 엘스헤른의 행동은?! 오오~! 설 마 무슨 일이라도.(하지만 역시, 천하 태평의 페르티.) 사실의 진상은 58편에 서 밝혀집니다. 모두들 기대해 주세요~! 괭이꼬리// 아횬냥, 그대를 공주의 예절 부인(레인비 백작 부인.;;;)으로 써먹어서 미안.T^T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8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21 조회수: 340 ┌───────────────────────────────────┐ │ ▶ 번 호 : 0/62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21일 16:21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8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8)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꽈악 말아 쥔 손끝은 이미 차갑 게 식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 가?! 엘스헤른은 망설일 것 없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타닥탁탁……. 급 한 발자국 소리가 빈 복도에 요란하게 울린다. "황후 폐하, 방금 무슨 소리가……." 주치의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며 주의를 상기시키자, 아드레이드는 놀란 표 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멀찌감치 사라져 가는 발자국 소리가 분명하게 들 린다. 그녀는 치마를 말아 쥐고서 급한 걸음으로 모퉁이까지 나왔다. 잠시 주 위를 살핀 그녀는 저만치 뛰어가고 있는 엘스헤른의 뒷모습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이런……." 상황을 짐작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린 그녀는, 동생을 뒤따라가 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이건…… 의외의 좋은 기회일는지도 모 른다. 엘스헤른이 저토록 서두르는 모습을 보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읽힐 듯도 하다. 그렇다면……. 아드레이드는 저절로 피어오르는 회심의 미소를 그만 거두고, 자신을 따라 나온 주치의를 돌아다보며 짐짓 안타까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아아, 아르떼이유 가에 가시기 전에, 우선 아멜리에 공주의 상태를 좀 봐 주시는 건 어떨까요? 공주가 어젯밤 기침을 심하게 하던데……." "아, 그렇다면 당연히 아멜리에 공주님을 봐드려야지요." 주치의는 황후의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드레이드는 한시름 돌린 듯 작게 한숨을 지었다. 자신 위해 이렇게 누나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그 바보 는 알고 있을까? 자기 혼자선 연애도 제대로 못할 녀석……. 아드레이드는 애 써 웃음을 참으면서 주치의를 아멜리에 공주의 방으로 안내했다. ·‥…━━━━…‥· 마부를 부를 것도 없이 자신의 말을 직접 몰아 로자리움까지 달려온 엘스헤 른은, 턱까지 차 오르는 숨을 달랠 틈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성관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오랜만이긴 하지만 아르떼이유 가문의 집사가 인사와 함께 당 연하다는 듯이 그를 막아선다. "대공 전하, 어인 일로……?" 그러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 대답할 겨를이 없는 엘스헤른은 그를 옆으로 밀치며 2층으로 통하는 중앙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둥글게 원형을 그 리며 뻗어있는, 빨간 카펫이 깔린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오는 동안 집사 역 시 그를 끈질기게 쫓아왔다. "아, 저……. 문병을 오셨습니까? 소문이 빠르기도 하군요." 집사는 2층으로 올라선 엘스헤른이 습관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꺾어 달리기 시작하자 기겁을 하며 외쳤다! "아니, 대공 전하. 문병을 하시려면 그쪽이 아닙……."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귓전에 웅웅거리기만 하는 집사의 목소리에 신경 쓸 여유라는 건 없다. 지금은 오로지 레비앙의 얼굴을 봐야만 이 두근거리는 심 장이 침착을 되찾을 것 같았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자신을 쉴 새 없이 책망해왔고,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싶을 만큼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그는 걱정에 미쳐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도저히 다독일 수가 없었다. 레비앙의 방 앞에는 한 명의 시녀가 문을 지키고 있는지, 조용히 서 있었 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엘스헤른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는 듯 문 앞을 막아 섰다. 어린 시녀는 금새 자신의 눈 앞에 당도한 엘스헤른을 올려다보며 겁먹 은 음성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대공 전하, 지금은……." "비켜라." "저, 전하…….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비켜라 하지 않았느냐!" 엘스헤른은 홧김에 소리를 내지르며 시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문 을 열어 젖혔다. 방 안 가득 햇살이라도 들어앉은 듯 환하다. 시야를 온통 채우는 것은…… 그래, 빛이다. 환하고 포근한 빛. 그리고, 장미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엘스 헤른은 방 안으로 들어설 생각조차 잊은 듯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 버렸다. 지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창을 가리운 백색의 리넨 커튼에 산란되어 퍼 지는 햇살은 뽀얀 곡선에 묘한 실루엣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곡선 에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굴러 떨어진다. 엘스헤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빛을 흐트러 놓는 듯 뽀샤샤하게 아른거 리는 살결. 그 위에 흐드러지게 달라붙어 있는 젖은 머리카락은 감탄스러울 만큼 선명한 붉은 빛이다. 촉촉해 보이는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고 뺨은 마치 복숭아처럼 뽀송한 분홍색을 띄고 있다. 그리고……. 깊고도 깊은 초록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엘스헤른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물러섰다. 지금 이건…… 서, 설마……. "죄송합니다. 레비안느 양." 급한 김에 목례부터 해 버린 엘스헤른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만 몸을 돌 려 밖으로 나와버렸다. 방의 문을 조심스레 닫으면서 그는 당황한 듯 쿵쾅거 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달래볼 양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이 무슨 실례란 말인가?! 목욕 중인 아가씨의 방에 함부로 침입하다니……. 엘스헤른이 고이 밖으로 물러 나오자 집사와 하녀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 다보고 있었다. 시녀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듯 눈물로 눈가가 번 들거리고 있었고, 집사는 어쩐 일인지 침통해 보였다. "아, 로자리움엔 오랜만에 들러서…… 레비앙의 방조차 잊어버린 모양이야." 엘스헤른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변명하려 했지만 그래도 집사와 시녀의 그 어두운 표정은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집사, 레비앙의 방은 어디……." 평소와는 달리 집사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네던 엘스헤른은 문득 의아함이 들어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나온 방의 문을 돌아다보았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신이 혼미해진다. 지금 나온 방은 분명…….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그 방의 방문을 다시 힘껏 얼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있던 그녀 역시 너무 놀래버렸는지 여전히 아까 그대로 이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 그녀는 옷을 주워 가릴 생각조차 못하고 그대로 엘스헤른과 마 주보고 서 있었고 엘스헤른도 그녀의 초록색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프,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아주 한참만에 엘스헤른이 입술을 열었고,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작게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그녀는 평소처럼 발끈 해서 쫓아내거나 하지 않고 저렇게 웃어버리는 걸까? 아직도 뭐가 뭔지 도통 판별할 수 없어, 엘스헤른은 일단 사과의 말을 건넸다. "…… 실례…… 했습니다." 그는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뭔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어쩌면 급히 올라오느라 몰랐을 일이지만, 여기는 레비앙의 방이 있는 2층이 아니라 3층인 건지도 모르지. 급한 마음에 뛰쳐 올라온 것이, 너무 많이 와버 린 건지도……. "이만……." 엘스헤른이 물러날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자신이 서 있던 욕조에서 걸어나 왔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섬뜩하도록 맑게 울린다. 물에 젖은 그녀의 새하 얀 발이, 고개를 숙인 엘스헤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심장이 뛰고 있는 건 아마 놀래서 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눈 앞이 핑 돌만큼 어지러움이 밀 려온다.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엘스헤른이 등 뒤로 돌린 손에 잡히는 문고리에 힘을 주는 순간 또록또록하 고 정확한 에스트르 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셔도 됩니다. 대공 전하." 프랑스 어의 억양이 전혀 섞이지 않은 이 목소리는……. 엘스헤른은 자신이 시험에 들고 있는 것만 같아 불안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한가 득 어지럽고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조금은 거리가 있는 그 곳에는 한 여인이 눈부신 나신으 로 서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엘스헤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 금 자신은 그녀에게 했던 그 어떤 무례보다도 큰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다. "제가…… 누구입니까? 대공전하." 그녀는 아주 느리고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묘한 질문을 했고, 엘스 헤른은 잠시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레비안느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양입니다." 대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에 언뜻 미묘한 빛이 스쳤다. 그녀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흘리더니 이내 맑은 초록빛 눈을 들어 자신의 앞, 엘스헤른을 응시했 다. "대공 전하. 지금 전하의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잠시 숨을 멈춘 그녀는 짧게 한숨을 짓고서 더없이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전하의 옛 친구였던 사람입니다." - To Be Continued - ==================================================================== 네, 잘 계셨죠?^^ 저야 뭐, 기침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하 느라 정신없는 나날이었습니다. 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콜록.; 자, 대단원의 시작입니다. 이번 대단원의 제목은 <엘스, 바보신세를 면하다!> 로 할까 했는데, 역시 엘스가 바보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팬이 되어주 신 분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거 같아서 그냥 <레비앙, 비밀이 들통나다!>라고 하는 건 어떨까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대단원의 제목은 연재 글에서는 붙지 않는군요. 그냥 집에 묶어둔 묶음집에만 붙이고 있습니다. 묶음집은 오 타를 조금 손 보고, 대단원 별로 묶어두었죠.^^; 원하시는 분께는 연락 주시 면 좀 더 점검을 마친 후에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이번 편은 역시, 분량이 쬐끔, 아주 쬐끔 적습니다.; 그렇지만…… 용서해 주실 거죠? *^o^* (☜ 애교.;;) 컥.; 뵨태(...) 짓 하지 말고 얼른 다음 편 이나 쓰라구요? 흑흑흑…… TT-TT 어, 글코, 출판에 대해 물어오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레비앙 & 레비안 느>는 확실히 출판이 안되겠습니다. 뭐, 기회가 닿는다면 출판이 될는지도 모 르겠습니다만, 출판사서 소식이 없군요. T^T (역시 재미없는 글이었던가! 라 며 휘청…….) 뭐, 글이 그다지 길지 않으니까 (많아봤자 3권 분량일 테니 까.;) 출판사에서도 그다지 구미가 댕기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느긋한 연재 가 가능해진 지금. 펠티는 어쩌면 한층 더 편해하고 있는 건지도…… -_-; 자, 그럼. 새로운 대단원의 시작도 축하할 겸. 이벤트를! ………… 농담입 니다. -_-; 그렇게 이벤트의 쓴 잔을 맛보고, 또다시 이벤트를 벌일 제가 아 닙니다! 쿨럭. T^T 아무튼, 다음 편 맛보기! 엘스헤른은 드디어! 드디어! 드 디어! 바보 신세를 면했군요. 아아, 그렇다고 순탄하지만은 않은 앞날! 레비 앙이 여자인 걸 알았다고 모든 게 해결 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요? 일은 점 점 더 복잡해지기만 하는데! 게다가 아직 정식으로 고백도 못한 엘스헤른과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고 있는 레비앙. 이 둘은 과연 해피엔드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인가?! 아아~! 위장약 없이 볼 수 없고, 우황청심원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 다음 편엔 과연! 쿨럭.; 이번 감사 퍼레이드도 구멍이 났습니다. 역시 건강해야 주위에 신경 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벤트 보내주신 분들과, 독촉과 메모, 메일 보내주시는 분들 감사드려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들 건강하세요. 괭이꼬리// <레비앙 & 레비안느> 독자분들을 위한 메모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네, 무슨 뜻인고 하니…… 소설이 올라갈 때마다 이번엔 몇 편이 올라왔습니다! 하고 메모를 보내드리는 서비스입니다. 원래는 연재 주기가 일 정하지 않을 때에 기다려 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으로 마련한 것입니다만, 여러모로 쓸모가 있군요.; 여태까지는 감상해주신 분들과 독촉해 주신 분들, 그리고 종종 메일 보내주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뭐, 구 미가 댕기시는 분들은 바로 메모 주세요. 그러면 제가 다음 편부터 꼬박꼬박 메모 서비스를 해 드리겠습니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9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24 조회수: 317 ┌───────────────────────────────────┐ │ ▶ 번 호 : 0/6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23일 16:19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59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59) "레, 레비안느 양……." 가당치 않은 장난에라도 휘말린 듯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엘스헤른의 앞에 서 그녀는 싱긋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긴 속눈썹을 드리우며 눈 을 내리깔고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 똑똑히 보세요. 제가 누구인지." "프로이덴느……." "전하께서 보고 계신 것이 무엇이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이 순간 제 자신 이 진실입니다. 그 동안, 전하를 알아 온 그 10년 동안에, 미천한 고민으로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었던 그 진실이…… 지금 눈 앞에, 전하의 앞에 서 있 는 이 사람의 모습 그대로에 관한 것입니다. …… 레비안느가 아니라, 저, 레비앙이, 전하께서 보고 계시는 이대로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레……." 엘스헤른은 어지러움이 돌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머릿속이, 아니, 몸 전체가 텅 비어버린 것같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 들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장난이 아닌 진지함을 담고,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악마의 음성에라도 홀린 양, 그렇게 넋이 나갈 것만 같다. 혼란스러움과 놀람에 동그랗게 뜨인, 그저 앞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 시야에 분명히 들어오고 있는 뽀얀 실루엣은…… 여성이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정갈한 음성으로 자신이 레비앙이라고…… 분명히 레비 앙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다. 엘스헤른은 눈 앞에 있는 숙녀를 더 이 상 마주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소나기처럼 엄습해 오는 현기증에 몸은 쓰러질 듯이 문에 기대어진다. "믿지 않고 계시리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거짓된 모습으로 전하의 앞에 있었던 것이 10년. 도저 히 짧다고 볼 수 그 동안을 지금 한 순간을 뒤엎기는 아마, 혁명보다도 힘 든 일이겠지만…… 그 옛날도 지금도 저는 아르떼이유 가의 레비앙인 겁니 다. 물론, 그렇게 오래도록, 아니, 단 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전하를 속인 것은 죽어 마땅한 죄……. 어떠한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레비안느의 것인가? 아니면 레비앙의 것인가? 놀라 서 마비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쳐온다. 등골을 훑어 내리는 냉기는 섬뜩한 상상을 가늠하게 한다. 레비앙이…… 여자였다는 건가? 아니, 절대로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과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레비안느 양. 장난을 치시는 거라면……." "지금 저는 거짓을 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공 전하. 제 말의 어디가 거짓 으로 들린단 말씀입니까? " 저 말투는 틀림없이 레비앙의 말투다. 어떻게 부인할 수조차 없이…… 10년 을 같이 지내오면서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레비앙의 것. 하지만, 그렇 기 때문에, 같이 지내온 그 10년이라는 세월 때문에 오히려 더 믿을 수가 없 다. 아무리 한 치의 거짓도 없으리만큼 단정한 말투라 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지금 저 사람이, 저 여인이 레비앙이라는 것을! "……이런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고귀한 프로이덴느, 저 는 당신께 화낼 지도 모릅니다." 겨우 말을 이어 놓는 엘스헤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눈 앞에 보이 는 것은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꼬옥 감고 있었고, 때문에 양미간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대공 전하……." "레…… 레비안느 양, 제발……." 그녀를 저지하기 위한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절실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 은 채 숨을 몰아쉬었고 그녀는 잠시 침묵하고 서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그리 고 더 이상 레비앙을 닮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어쩐지 기분은 거대한 소 용돌이에 휘말리기라도 한 모양으로 어지럽기만 하다. 이런 건 마치, 한 발만 더 딛으면 중심을 잃어버릴 까마득한 낭떠러지의 끝에 몸을 내맡긴 것 같다. 따사로운 햇빛, 향기로운 장미 내음, 그리고 귀로 되돌아오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 감각들은 어수선하게 온 몸을 훑어 내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딘가를 딛고 서 있다는 느낌은 도저히 느낄 수 없었다. 아뜩한 어지러움에 평형 감각을 잃고 결국은 몸을 싸늘한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것만 같다. 가슴 속에서 꾸역꾸역 치밀고 올라오는 것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산만하고 불안하 고 괴로운 걸까? 아주 작게 그녀의 한숨 소리가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청명한 공기에 금새 라도 녹아버릴 듯이 미약한 울림이다. "눈을 감아버린 건……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눈 앞에 있기 때문일 테지요.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 자신인지…… 아니면 당신의 친구였 던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가 여자라는 사실인지……. 전하께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걸 굳이 보여줄 이유라는 건 없습니다만…… 당신의 옛 벗이 한 마디 충고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짧게 숨을 몰아쉬고서 촉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눈 앞에 있는 것을 볼 수는 없지만, 얻을 수 있는 아 주 작은 것이 있지요. 눈을 뜨고 보았을 때 볼 수 없는, 미묘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 뇌리를 파고드는 그녀의 느릿한 목소리가 이제는 불안함마저 부추겨 온다. 머리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아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저것은 레비 앙의 목소리라는 것을! "제가…… 누굽니까? 대공 전하." 미칠 것만 같다. 저 목소리는…… 분명 레비앙임에 틀림없다. 당장 달려가 서 입맞추고 끌어안고 싶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는 레비앙인 것에 틀림없는 것이다. 드높은 긍지와 자존심이 묻어나는 말투……. 눈을 감 고 있으니까 더욱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데……, 어째서 이토록 격렬하게 거부하고픈 마음이 드는 걸까? 어째서 이렇 게 허탈하고 아쉬운, 그런 상실감이 마음 속을 깊이 후벼파고 있는 것이란 말 인가! "대공 전하……." 재촉하는 듯한 음성. 이젠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 그 말투로 나를 부르지 말아!!" 엘스헤른은 더 이상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귀를 막고선 끓어오르는 격정을 토 해 놓았다. 가슴 가득히 가쁜 숨과도 같은 뭔가가 차 오른다. 눈물로 쏟아내 도 시원치 않을 그것 때문에 목이 한가득 메여 온다. 벌컥 내지른 고함 소리는 그 어떤 여운도 남기지 않았다. 모든 움직임이 멈 춰버린 방 안은, 그런 이유로 괴괴한 침묵에 잠겨들었다. 싸늘하게 한기를 몰 고 오는 침묵, 그것은 쨍 소리를 내며 깨끗하게 깨져버린 유리의 파편과도 같 았다. 마치 그렇게 산산히 흩어지는 유리 조각처럼 마음은 아래로, 아래로 떨 어져 내렸다. 한참만에 다시 들려온 것은 자신의 숨소리. 그 동안 호흡을 멈추어 있기라 도 했었던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가 생소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앞에는 믿지 못할 진실만이 던져져 있다. "이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침묵을 깨고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여지껏까지의 단아함과 담담함과는 달리 어쩐지 젖어있고, 또 한 편으로는 잠긴 듯한…… 그런 묘한 감정이 묻어 나온다. "……." 말없이 눈을 뜬 엘스헤른은 그녀의 몸을 적시고 있던 그 물방울처럼 햇살을 가득 머금은 보석 같은 구슬이 그녀의 눈가로부터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그것이 연이어 뺨 위를 구르고 나서야, 나직히 젖은 숨소리를 내 뱉은 그녀는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을 가리우듯 팔을 모으고 엘스헤 른에게서 뒤돌아 섰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물기가 촉촉히 스며있는 붉은 머리카락은 출 렁이며 등을 가리우고, 이제 들려오는 것은 입술을 꼭 깨물어 흐느낌을 참고 있는 낮은 소리 뿐이었다. 엘스헤른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눈을 내리깐 채 그녀에게 다가선 그는 그녀의 발치에 고이 놓여있는 가운을 들어 뽀얀 어 깨 위에 둘러주었다. 잠시 그녀의 어깨 위에 머물러있던 자신의 손을 놀란 듯이 떼어놓은 그는 물끄러미 그 손을 응시하고 있다가 그만 몸을 돌렸다. 현기증은 어느새 사라 지고 없었지만 왠지 모를 싱숭생숭함이 마음 속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 든 다. 잠깐 동안 눈을 깜빡이며 서 있든 그는 성큼 걸음을 떼어놓았다. 어느덧 문 앞이 가까워지고, 엘스헤른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등 뒤에 있는 진실……. 지금 아무 말 없이 이 방을 나서면…… 그 진실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딸깍―.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아도 문은 작은 소리를 내며 쉽사리 열렸다. 내딛는 발 걸음이 어쩐지 무겁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끌고 오기라도 하는 양, 그렇게 끌리는 걸음은 어느새 문을 나서고 있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그가 서 있는 곳은 텅 빈 복도 였다. "……." 어쩐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이 복도처럼…… 이렇게 마음도 비어버린 모양이다. 아무 것도 남김없이, 말끔하게……. - To Be Continued - ==================================================================== 오늘은 선전 코너부터 우선.; 요즘에 즐겨 읽고 있는 글입니다. ID : 난파된 배 님의 <플라메테르> 라는 글이예요.^^ 물론, 초반이 조금, 아주 조오금 어 렵지만! 인내심을 갖고 읽으시면…… 저얼대로 후회될 리 없습죠! 2장부터는 어렵지도 않아요! 아직 9편 밖에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지금부터 맛들이시면, 나중에 한꺼번에 읽는 수고도 덜 수 있어요. 자, 그럼 한 번 읽어보시길.^^ 네, 다시 로 돌아와서. 과연 전편(58편)에는 열렬한 반응이 동반되 는군요.;; 허무하다 부터 시작해서는 엘스는 역시나 바보, 레비앙은 뻔뻔하 다! 까지……. 각양각색의 의견들을 수집할 수가 있었습니다. 뭐, 허전조잡허 접얄굿바보뻔뻔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 면, 아니면 하루만 더 늦게, 혹은 일찍 썼더라면 저렇게는 쓰지 않았을 것이 라고 생각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튼, 드디어 밝혀진 겁니다! 아자! 저로 선 한 고비 넘겼 …… 지가 않군요.T^T 다음 대단원(61편부터 시작, 어, 어쩌 면 62편일지도.;)이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골치 아플 바로 <사냥!> 대단원 이 아닙니까. -_-;;; 크흑! 저 사냥만 끝나고 나면 좀 쉬려나? 웃! 아니군요. 더 큰 문제가 남아 있군요. 쿨쩍. TT-TT 이제 풀려 가는 스토리가 아니었던 게야. 근데 짜 놓은 스토리라인은 정말 간단하게 되어 있어서 어떤 때는 도무 지 무슨 전개인지를 모를 때가 허다합니다. 가령 <제롬! 엘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다!> 라고 적어 놓고선 막상 그 의미심장한 말이 무엇인지 아래엔 적혀 있지가 않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스토리라인에서 빼버리는 일도 발생하지요. 아마, 기침은 뇌세포들까지 죽여 가는 모양입니다. -_-; 네, 그럼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시죠? *^_______^* (싱그읏~!) 구, 궁금하 지 않으시다구요?! =_= (침울.;;) 뭐, 궁금하지 않으셔도 날이면 날마다 오는 (아니군.;) 이야기! 자, 드디어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 고!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 이면은 과연 어떤 것?! 서, 설마 너, 정말 호모냐?! 아아~! 팬들을 위해서라도 아니기를 바라며! 그렇다면 과 연 낙마로 병상에 누운 사람은 누구?! 이 집에 두 사람 밖에 더 있나, 레비앙 이 아니면 한 사람은 당연하지. -_-; 물론 늙은이는 다리가 분지러져 병상에 누워있긴 하지만 입은 동동 살아있는데! 아아~! 위장약 없인 볼 수 없고, 우 황청심원 없인 볼 수 없는, 울화통 터지고 복장 터지는 이야기! 다음 편은 과 연~! (나, 날마다 약장수가 되어 가고 있는 거 같군요. 쿨럭.; 옛날 영화 보 시는 것 처럼 읽어주시면 감사.;) 네, 잡담이 너무 많은 관계로 감사 퍼레이 드는 다음 편에 몰아서 올리겠습니당.^^ 아쉽겠지만 기다려 주세요. 쿨럭. 감기가 점점 심해지는 겨울입니다. 여러분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아시죠? -_-; 자! 몸을 따뜻하게 하시고! 건강 관리는 철저히! 다같이 외쳐봅시다! "냐옹!" .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12-26 조회수: 289 ┌───────────────────────────────────┐ │ ▶ 번 호 : 0/62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25일 21:49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0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0) 짙게 물든 가을의 색채가 창 밖으로 선명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위에 서 내려다보는 정원도 참으로 이색적이다. 이렇게 여유롭게 밖을 내다보는 것 이 간만이라서 그런 걸까? 이날까지 자신이 자라면서 줄곧 봐 온 저 정원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다. 물론 사계절에 따른 변화야 매년 겪어온 것이라 무엇 보다도 신기해하면서도 친숙한 것이고, 그건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점이 없지 않다. 덜컹거리는 유리창이 지금 밖엔 꽤나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음을 이야기해주 고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라는 건 참으로 묘하다. 어떤 방법으로 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창문의 안쪽에서 차가운 공기로부 터 보호받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에 닿아오는 햇살만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떤 시인이 그랬듯이, 세상 만물에게 공평한 것이 저 태양빛이라고는 하지 만, 문득,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 따스함이 연상시키는 어떠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따뜻하다고 느끼면서 자연스레 떠올려 진 생각은 여지없이 두근거림을 동반하고 이내 심장을 옥죄어 오게 만드니까. 이건 공평하게 따뜻한 게 아니라, 따뜻함과 동시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 는, 독과도 같은 것이다. 그건 눈 앞을 마비시킬 듯이 새하얀 빛, 그 빛무리에 아른하게 비치는, 선 이 고운 실루엣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흉내내지 못할 보드라운 아름다움 을 지닌 나신. 둥그런 물방울이 저항 없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매끈한 살결 과 그리고 장미 향기. "여봐여봐여봐여봐! 아예 넋이 나갔군!" 귓가에 재재거리는 소리는 창 밖 참새들의 울음소리인가? 꽤나 시끄럽기도 하지. "이봐! 형님! 정신 차려!" 으읏, 죽을 날이 머지 않았나? 눈 앞이 갑자기 흔들린…………. 엘스헤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을 마구 흔들어대는 제롬을 향해 뒤돌아섰다. "무슨 일이야? 형님. 오늘은 황궁에도 안 나가?" 변성기를 갓 지난, 약간은 까츨한 목소리에 저 퉁명스러운 천사의 얼굴, 역 시 제롬 녀석이로군. 엘스헤른은 잠시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자신이 넋이 나 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한 모션을 취했다. 그러고는 제롬이 충분히 역 겨워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디 친절한 표정으로 그와 얼굴을 맞댔다. "내일 모레면 여우 사냥이거든. …… 황후 폐하께서 계획하신 일 치고는, 뭔 가 그럴싸 하지 않아? 어차피 이맘때 여우를 잡아줘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 고, 게다가 전쟁터로 보내질 불행스런 몇몇 귀족들을 위한 위안 같은 것도 될 테니까." "그럼 사냥터로 출발할 때까지는 집에서 쉬는 거야?" 녀석이 연록색의 오묘한 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어오고 있다. 뭔 가 꿍꿍이가 있는 게지. 그렇지 않고서야 요즈음 내내 감기로 골골거리던 녀 석이 저렇게 갑자기 생기발랄한 눈빛을 지을 리 없다. 엘스헤른은 그러는 제 롬이 귀엽게 여겨지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가, 자신의 생각을 돌이켜보고는 이내 사색이 되었다. 제롬이 귀엽다니…… 정말 죽을 날이 머지 않았나보다. "에스트르의 황제 폐하께서 동행하는 사냥이라면 당연히 사냥터는 레샤누아 (Le Chat - Noir) 숲이겠군. 레샤블랑쉬(Le Chat - Blanche) 숲이라면 황 제 폐하의 여름 별장이 있는 곳이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듯한 제롬의 말투에 엘스헤른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말을 받아 이었다. "잘 알고 있기는 해도 너처럼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레샤누아(검 은 고양이)와 레샤블랑쉬(하얀 고양이)가 같은 숲이라는 걸 말야." "에에?! 그런데 뭐하러 이름을 따로 지어?" "호기심이 많은 꼬마로군. 옛날 이야기라도 해 주랴?" 아이 보는 보모와도 같은 표정을 짓는 엘스헤른을 보며 제롬은 흠칫 몸을 뒤로 젖혔다. 심각한 충격을 먹은 듯한 사촌동생의 얼굴을 보며 고소해 마지 않는 듯 웃어대던 엘스헤른은 녀석이 뾰로통하게 쏘아붙일 기색이 보이자 이 내 이야기를 꺼냈다. "커다란 숲의 남쪽은 레샤누아, 북쪽은 레샤블랑쉬라고 불리고 있지. 음…… 그건 말이다, 아주 오래된 일인데……." 잠시 뜸을 들인다 싶더니, 엘스헤른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감감 무소식. 제 롬은 뒷 이야기를 기다리며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 다. 또 원점으로 돌아가서 엘스헤른은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특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고, 옆에서 척 보기에도 그냥 넋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리기라도 한 듯 외부의 어떠한 자극에 도 무관심해져버린 태도. 엘스헤른은 그렇게 잿빛의 눈동자에 초점을 흐린 채 마치 밖의 경치라도 즐기는 미동 없이 서 있는 것이다. 뭐, 이런 기회를 쉽게 놓칠 제롬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저 완고한 사촌형님 을 떠 보기라도 한다면 요즘의 일들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그렇지 않아도 요즘 빈틈을 보이지 않아 떠 볼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아아~! 형님. 어젠 어디 다녀왔어?" 제롬은 지나가는 말투로 엘스헤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저런 상태라면 역시 대답이 술술 나오게 마련이다. 아니나다를까, 엘스헤른은 하늘 이 비치는 맑은 잿빛 눈동자에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음……. 로자리움." 오오! 이게 웬 수확이란 말인가?! 로자리움에 갔었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 털어놓다니.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털어놓지 않을 말이지 않은가! 물론, 정작 본인(엘스헤른)은 말 해 놓고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듯 여전히 넋이 나가 있다. "로자리움엔 왜애?" 이번에도 아주 조심스레 묻는 제롬의 질문에 엘스헤른은 한숨을 쉬듯 입을 열더니 그냥 주저리주저리 이야길 늘어놓는다. "누가 다쳤대서……. 가봤더니 아르떼이유 후작이 다쳤더군." 아르떼이유 후작이 다친 걸로 로자리움에 위문 차 방문했단 말인가? 역시 어른들의 일이란……. 잠시 상심해버린 제롬이었지만 곧 영민한 머리를 굴려 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누가 다쳤다고 해서 가봤다.' 라는 건 '다친 사람이 레비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달려갔다는 게 아닐까? 그렇 다면 역시, 형님은 레비앙과 만났겠군. 머릿 속으로 형님과 레비앙의 해후를 떠올리고 있던 제롬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면서 또 다른 질문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막 하려는 순간 그는 문득, 요즘 들어 내내 굳세고 진지한 표정밖에 지을 줄 모르던 엘스헤른이 은 근한 눈빛을 하고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고 있는 것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 라버렸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여봐여봐여봐여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제롬은 엘스헤른의 어깨를 붙들고 앞뒤로 마구 흔들어댔다. 그 흔들림의 여 파로 정신이 반짝 드는 겐지 엘스헤른은 말똥한 눈빛으로 제롬을 쳐다보더니 곧 그의 손을 쳐냈다. "생각은 무슨……?" "다 봤어! 그 발그레하게 홍조를 띄고 있는 표정을 말야!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응?! 뭔가 야한……." 순간 엘스헤른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고, 그걸 목격한 제롬이나 당사자인 엘스헤른, 두 사람은 당황함에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더욱 이 엘스헤른은 순식간에 벌어진 자신의 신체적 반응에 대해 어떻게 수습을 해 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제롬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 한 동안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정말 오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것 을 여실히 증명이라도 하듯 창 밖으로부터는 손에 잡힐 듯한 햇살과 경쾌한 새 소리가 날아든다. 현기증이라도 도는지 창틀에 잠시 기대 있던 엘스헤른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너, 아이린에게는 가보지 않아도 되는 거야?" "흠. 누나에겐 아까 다녀왔는걸." 등 뒤, 제롬의 목소리가 차츰 발랄해 지기 시작한다. 마치 새 봄에 움이 트 는 것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고도 활기찬 기운이 스미기 시작하는 제롬의 목소 리를 들으며 엘스헤른은 스멀스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몸살기운처럼 몸을 엄습해오는 이 한기! 분명히 저 녀석은 방금 전의 그 터무니없는 일의 이유를 캐내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도저히 그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악마 같은 제롬 녀석에게라면 더더욱. 물론 어린(?) 사촌 동생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것부터가 이상할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제롬 녀석 이 혹여나 이 비밀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당할 수가 없어진다. 레비앙이 남자였던 때조차 그에게 키스를 했던 경험이 있는 제롬이 아니었던 가?! 아아, 뭔가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레비앙의 성별에 대해 선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다가, 그렇지 않아도 본인조차 가득 혼 란스러운 이 시점에 제롬 녀석까지 옆에서 설쳐댄다면…… 정말, 상상조차 하 기 싫어진다. "형님∼!" 아아, 예상적중. 드디어 제롬 녀석이 정보수집에 나서기 시작한 모양이다. "음, 제롬. 티아란에서 말야, 군수 물품이…… 해서, 프랑스까지는……." 엘스헤른은 완벽하게 표정관리를 끝내고, 몹시도 진지한 눈빛을 지으며 제 롬에게로 돌아섰다. 어린 녀석들은 자신보다 어른스러움에 당연히 굴복하게 되어 있…… ……지는 않는 모양이다. 저 광채를 내뿜는 호기심의 눈동자가 조금도 그 빛을 잃지 않은 것을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저 녀석은 정말 어 떻게 된 게 항상 남의 일에조차 놀라울 만한 호기심을 발휘하는 걸까? 어쩐지 녀석이 진짜 귀엽게 느껴진다. "……." 오늘 들어 벌써 두 번 이런 생각을 하고서 돌이켜 보니까, 스스로 경악스러 우면서도 뭔가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든다. 저 제롬 녀석과는 사사건건 붙어서 으르렁대던 예전의 자신에서 약간 벗어난 느낌. 뭐랄까? 이런 감정은……? "말 해봐∼! 뭐야? 무슨 일이야?" 제롬의 끈질긴 재촉의 서막이 올랐다. 아마, 제롬 녀석은 앞으로 자신이 원 하는 바를 알아내는 그 순간까지 몹시도 끈질기고 진득하게 따라붙으면서 이 런 저런 걸 떠보고 캐내려 할 것이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니라, 아주 조금은 응해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제 로자리움에 갔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 렸지 뭐야." 물론 이건 농담 삼아 한 말이다. 그런데 제롬 녀석의 표정이 사뭇 묘하다. 저 녀석, 저런 눈빛도 지을 줄 알다니. 꼬맹이로 봐왔었는데 요즘 보니 제롬 도 뭔가 색다르게 어른스러운 눈빛을 짓곤 한다. 하긴, 마냥 장난꾸러기 꼬맹 이로 있을 게 아니니까 그런 변화가 전혀 이상할 게 아니다. "형님……, 레비안느 양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제롬에게 엘스헤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고개를 끄 덕여 주었다. 제롬의 표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 뭔가 아주 깊이 생각하는 듯 한 얼굴이다. "그럼, 형님. 혹시…… 레비앙 말이야?" - To Be Continued ==================================================================== < 60편 제작 비화! 그 뒷이야기! > 1) 원래 60편은 부상당한 아르떼이유 후작(레비앙 할배)과 엘스헤른이 나누 는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귀찮은 나머지 뜅겨 넘어 가버 린 것이다. 솔직히 귀찮다기 보다는, 그 장면을 쓰면 정말 슬럼프에 빠질 것 만 같은 예감(오한, 발열, 두통)에 시달리던 중에 "오오! 이건 이 장면을 쓰 지 말라는 계시가 아닐까?" 라고 확대 해석하여 발생한 일이다. 불쌍한 레비 앙 할아부지, 잘 돌아오지 않는 금쪽 같은 '나올 기회'를 페르티의 이상한 영 감으로 인해 놓쳐버린 것. 이 부분은 그리하여, 엘스헤른의 회상에 넣기로 했 다.; 2) 고양이 숲 (La Foret de le Chat)에 얽힌 이야기! 검은 고양이, 즉 Le Chat Noir의 원래 발음은 르 샤 누아, 하지만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고픈 마음에 레샤누아 라고 표기했다. 하얀 고양이도 마찬가지. 근데, 이 고양이 숲에 대해서 말이 엘스헤른과 제롬 사이에 오가다 보니, 어 쩐지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다른 이야기가 물씬물씬 생각나는 게 아닌가?! 가 령, 이 곳 주민들은 원래 고양이를 숭배했다! 라든지, 아니면 더 허무맹랑하 게 이 곳에는 원래 묘족이 살았는데 말야! 북쪽 숲엔 흰 묘족이 살고 남쪽 숲 엔 검은 묘족이 살았지. 라는 이야기까지……. 그러다 페르티는 문뜩 정신을 차리고 본인의 뺨을 챨싹챨싹 때렸다. 어느새 엘스헤른이 그 숲에 대해 진술 하는 이야기만 한바닥이 넘어가고 있었던 것! 본인은 고양이에 너무나도 약했 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이 글의 배경은 실재했던 프랑스 대 혁명기의 근대 유 럽! 그런데 묘족이 어쩌구 한다면 역시……. -_-; 결국 엘스헤른이 제롬에게 재미있게 들려주던 그 많은 분량의 묘족 이야기는 깨끗이 삭제되고 말았던 것 이다. 복사라도 해 놓을 것을…… 이라고 뒤늦은 후회도 된다.TT-TT (이것은 늦장 연재를 더더욱 부추기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3) <레비앙 & 레비안느> 정말로 Y물 될 뻔 하다! 글 도중 엘스헤른이 얼굴을 붉히는 장면에서의 일이다. < 순간 엘스헤른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고, 그걸 목격한 제롬이 나 당사자인 엘스헤른, 두 사람은 당황함에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더 욱이 엘스헤른은 순식간에 벌어진 자신의 신체적 반응에 대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다만 곧 제롬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본문 인용)> 라는 문장을 써 놓고는 문득 다음에 이어진 제롬의 대사가 "형님, 서, 설마… 나를……?" 이라는 오묘한 문장.; 그러나 이내 지웠다. -_-; 그렇지 않아도 Y 물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데 저런 문장까지 넣었다간…….(두려워 함.;) 그런 데다가 전혀 엘스와 제롬이라면 Y물 다운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아아~! 손 씻은지 오래되었거늘, 아직도 내 손은 Y물을 무의식 적으로? TT-TT 4) 때 아닌 배탈 사건. 2000년 12월 24일 밤과 25일 아침을 기해 페르티네 식구 5명 중 4명이 배탈이 났다는 것! 멀쩡한 유일무이한 사람은 남동생 씽익. 이 녀석은 워낙 강철위장 이라 무얼 먹어도 탈나지 않는다. -_-; 암튼,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 다. 식구들이 어제 저녁으로부터 오늘 아침까지 (어제 점심은 각자 해결했으 므로 제외) 공통적으로 섭취한 식품의 내역을 밝혀본 결과, ① 페르티의 빛나는 마파두부 덧밥 (클스마스 축하 특별요리) ② 크리스마스 축하 생크림 캐익 (참고로 우리 집 종교는 불교다. -_-;) ③ 건배용 포도주 ④ 오늘 아침엔 어제 먹다 남은 마파두부 덧밥 (하루가 지나도 맛있다!) ⑤ 엄마가 만든 식혜. 위와 같았다. 본인은 과감하게 이번 배탈사건의 원인을 과다한 생크림의 섭취 로 보고 있으나, 식구들은 페르티의 마파두부 덧밥을 의심하고 있다. 이 사람 들이 맛있다며 퍼먹을 땐 언제고! 암튼, 본인의 결백함을 뒷받침해 줄 수 있 는 결정적인 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여동생 밖에 없다. 그는 내가 지시한 대로 온갖 재료와 그릇을 허벌나게 씻느라 무진장 고생을 했던 것이다! (난 요리의 위생에 있어선 빈틈없다. -_-+ 번뜩.) 그러나, 어제의 고생으로 인해 서인지 이 녀석은 묵묵부답. -_-; 괴로운 나는 식구들을 공포의 배탈로 몰고 간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러면서도 식구들은 아침에 먹다 남은 마파두부 덧밥을 점심때 먹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 해도 난, 정말 너무 많이 만든 거다. -_-;) 제작비화의 분량이 너무 많은 관계로 감사 퍼레이드는 생략. (허걱 벌써 며 칠 째지? -_-;)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1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01-01 조회수: 158 ┌───────────────────────────────────┐ │ ▶ 번 호 : 0/63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0년 12월 28일 20:50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1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1) "……." 제롬의 표정을 보고 이게 농담이 아님을 알아버린 엘스헤른은 잠시 그를 빤 히 쳐다보고 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면 역시, 제롬은 레비앙이 여자인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비앙의 일을 제롬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묘한 뒤틀림이 마음 속으로부터 일어나 고 있다. 표정을 굳게 하고 몸을 식게 만드는 묘한 감정. 어째서 저 녀석이 레비앙에 관한 일을 알고 있다는 건가! "뭐라고…… 했어? 제롬." 이름을 부르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는 엘스헤른의 진지한 말투에 제롬은 짧 게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냐." "아닌 게 아니잖아. 말해봐. 아까 그 말 무슨 뜻이야?" 엘스헤른은 목소리를 낮추고 사뭇 진중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 싸늘한 목소 리에 실린 협박 따위에 굴할 일은 물론 없지만 제롬은 잠시 망설여졌다. 만에 하나, 잘 못 짚었다면? 그렇다면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고 마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지금, 형님은 겉으로 내색은 않고 있지만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 물고 서 있었다. 요즘처럼 가식에 찌들대로 찌든 형님이 저런 강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은 일의 서막을 예고하는 듯 하다. 정말 잘못 짚고 레비앙에 대한 말을 꺼냈다간, 지금 엘스헤른의 손에도 쥐여 있지 않은 장갑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일도 순식간일 테다. 허나, 저 형님이 말 하는 투를 볼 때, 분명히 레비앙과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고, 그 건 그가 여지껏 속고 있었던 일과도 관련되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섭게 머리를 굴리던 제롬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지름 자신에게 남은 거라고는 영국 최고의 귀족다운 뻔뻔함. 그걸로 밀 어붙이는 수 밖엔 없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형님이 알 고 있는 것과 같아." "……." 제롬의 대답을 들은 엘스헤른은 입을 일자로 꼬옥 다문 채 그와 시선을 나 란히 하고 서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미동 없는, 차가운 얼음 장같은 엘스헤른을 이렇게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으로 다가올 만큼, 제롬은 긴장해 있었다. 손바닥에 흥건히 땀이 고이고 있는 건,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스스로가 가득 겁먹었음을 말해주는 것일 테다. 만일 저 한 마디에 건 모험이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지금 눈 앞에서 저토록 무서 운 표정을 하고 있는 사촌 형님이 당장에 결투를 신청한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정식으로 기사 수업을 받은 그였지만, 솔직히 지금 의 형님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엘스헤른은 지금 전례 없 이 어둡고 냉랭한 기운을 피워내고 있었고, 그런 그라면 결투에서라면 아예 이성 - 사촌동생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 따위는 싸그리 무시해버릴 것만 같았다. 평소에 물렁물렁한 저 사람이 한 번 화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 지는 제롬 역시 분명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면……." 엘스헤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바짝 마음이 쫄렸으나, 제롬은 여유롭고도 태연한 척 팔짱을 끼고서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팔을 토도 독 두드렸다. 사실은 팔에 쥐가 나고, 등골은 오싹하고, 머리카락 끝이 쭈뼛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지만, 이걸 어떻게든 모면하지 못한다면 영국의 왕족으 로서의 위대한 체면은 말도 안 되게 떨어지는 것이다. "제롬, 너 역시…… 알고 있었다는 게냐?" 엘스헤른의 말에 제롬은 주저앉을 듯 긴장이 풀리는 걸 깨달았다. 잘 못 짚 은 게 아니었다니…… 진정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다가 이제야 뭔가 한 고비 넘긴 기분이 든다. 역시나, 어제 형님은 로자리움을 방문해서 레비앙에 관한 일을 알아낸 모양이다. 사실, 좀 과격한 표현이긴 해도, 이제 형님한테 맞아 죽는다 해도 마음 편히 저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너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제롬." 엘스헤른이 재차 확인을 요하는 말을 던졌다. "뭐, ……난 바보가 아니니까." 별로 도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입에 붙어버린 말투는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런 순간에조차 저런 말이 스스럼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아무 튼, 엘스헤른의 표정은 한층 더 싸늘해졌고 - 물론 그건 저 도발과는 별로 상 관없어 보였으나 - 제롬은 순식간에 달아날 준비를 하듯, 경계를 마음 속으로 다지면서, 굳은 표정의 그를 말끄러미 보고 서 있었다. "네 녀석이……." 아주 느릿하게 엘스헤른의 음성이 내리깔아진다. 그건 무겁게 짓눌린 어둠 과 같은 색조로 미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마치…… 분노에 떨리는 그의 입 술과도 같이……. 제롬은 자신을 직선으로 쏘아보는 엘스헤른의 날카로운 시 선에, 한 순간의 안도가 날아 가버리는 듯한 서늘함을 느꼈다. 이건 아까와는 또 다른 무게의 압도감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사뭇 어른스러운 투로 말을 던지는 엘스헤른을 보며 제롬은 어깨를 움찔 떨 었다. 정말 첩첩 산중에라도 갇힌 기분이다. 이건 어떻게 답해야 하는 걸까? 겨우 한 고비 넘긴 듯 했는데 이젠 정말 어떻게 모면해야 한단 말인가! 이번 엔 어쩐지 머릿속이 새하얘서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아, 그건……." 제롬이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엘스헤른은 창틀에 기댄 채 다른 각도로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고 섰다. 이거야말로 또 다른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제롬은 움찔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 었다. "그, 그건 레비앙이 내 첫사랑…… 웁!" 실언을 했다. 순간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에 싸한 살기가 도는 것을 보고 는 제롬은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가 있을까! 제롬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손으로 입을 꾸욱 누른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다가 급기야 손을 뿌리쳐 내리며 급히 말을 고쳤다.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난…… 나는……. 레비앙이……, 그게…… 레비앙 이 아니라, 저 그냥 닮은 거야! 다, 닮았을 뿐이라구!" "누가 레비앙과 닮아?" 엘스헤른의 낮은 목소리는 여전히 온기를 잃고 묵직했다. 그는 제롬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놓치지 않고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제롬은 자신의 실수에 완전히 당황해버린 듯 어떻게 응수해 볼 생각조차 못하고 놀란 토끼 눈을 하 고서 얼어붙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기만 하던 제롬의 그 예쁜 연록색의 눈 동자 위에 이내 뽀얗게 물기가 그렁거렸다. "제롬." "……." "……푸훗." 꾸욱 참고 있었다는 듯이 갑작스레 터뜨려 내는 웃음소리에 제롬은 반짝 고 개를 들었다. 그로 인해 한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주루룩 흘려내려 당황해 하 고 있을 사이에, 어느새 엘스헤른이 그의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녀석. 울기는……." 엘스헤른은 자신이 왜 오늘따라 제롬이 귀엽게만 느껴지는 지 이제야 알 것 같아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 뭐든 다 알고 있는 척 깐죽대긴 해도 아직은 마음이 여린 소년인데……, 지금껏 이 어린 녀석에게 휘둘려져 왔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쩐지 자신이 우스워 지기도 해서, 그다지 제롬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눈물이 글썽글썽하고 뺨이 발갛게 상기된 제롬을 보니 어쩐지 이 녀석이 정말 천사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입다물고 있다면 예쁘기만 한 녀석인데……. "자, 털어 놓아봐. 네 첫사랑이 레비앙이라고는 하지만……." "아, 아냐! 닮았을 뿐이야!" 제롬은 그래도 아직 오기가 남았는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다가오 는 엘스헤른의 손을 뿌리치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물론 이 순간에조차 거짓말 을 하는 이유는, 저 사촌형님이 무섭거나 해서인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래, 뭐. 닮았다고 치고. 아무튼, 어떻게 레비앙이 여자인 걸……, 아! 그 러고 보니…… 너, 처음 레비앙과 만났을 때……." "그래! 난 누구처럼 바보가 아니니까, 그 정도는 처음부터 다 알아차렸다 구!" "흐음. 그래서 누님이라고 했던 거로군." 가볍게 "흥!" 하고 들려오는 제롬의 콧김소리가, 어째 그의 눈물어린 눈동 자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아서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약 간의 깐죽거림을 더해서 혼잣말을 흘렸다. "첫사랑이란 위대한 거로군." 아주 작게 말한 소리였는데도 듣긴 들었는지 제롬이 이내 발끈하며 덤벼든 다. "레비앙이 첫사랑이 아니래도!" "누가 뭐래?" "누, 누가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없는 모양으로 말끝을 흐려버리는 제롬에게 엘스헤른은 의미심장한 표정의 얼굴을 들이댔다. "영국엔 빨강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많지. 그렇다면 분명히 레비앙과 닮은 사 람도 있을 거야. 네가 말 한 네 첫사랑처럼……." "놀리려 들지 마."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이제 더 이상은 휘말려들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 명하는 제롬의 또릿한 눈빛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아쉬운 한숨을 포옥 내 쉬었 다. 이제 평소의 제롬으로 돌아온 건가? 싱긋이 미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이내 자세를 바로 한 그는 제롬을 똑 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숨기려 하는 건 나를 염려해서야?" "……." 쉽게 들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느닷없이 물어오는 엘스헤른의 말 에 제롬은 입이 붙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으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 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건 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미 레비앙도 알고 있는 일인데, 형님에게는 말 못 할 이유라는 건 다만 그것 하나밖엔 없다. 혹여나 형님이 이런 일로 마음을 상할까봐…….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말은 절대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말이다. 듣는 사람이 나 말하는 사람이나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말이므로……. 다만 슬쩍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던 제롬은 한참만에 고개를 들고 는 반듯이 눈을 치켜 떴다. "그래. 굳이 거짓말 할 필요 없다면 속일 거 없지. 형님 때문인 거 맞아. 뭐, 이유 같은 건 말해주고 싶지 않지만." "훗……, 그런 걸 보고, 속담에 '고양이가 쥐 생각한다.'는 거야. 아무튼 고 맙군. 네 염려를 다 받아보고 말야." "방심하지 말아. 난 아직도 레비앙을 좋아하니까……. 뭐, 조금 다른 의미이 기는 하지만……."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제롬을 보며 엘스헤른은 가볍게 웃음 을 흘렸다. "영국에 두고 온 아가씨는 어쩌고! 듣기로는 바다 건너 저 고향 땅에 두고 온 아가씨가 네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던데?" "우왓!" 언제 심각했냐는 듯이 제롬 녀석, 금세 팔딱 뛰어 오를 듯이 군다. 아무리 점잖고 무게 있게 어른인 척 굴어도, 아직은 마음 여린 열 다섯인 것을……. 뭔가 뜻 있는 미소를 싱긋이 머금는 엘스헤른의 앞에서 제롬은 과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누, 누가 그래?!" "아이린이……." "그건……. 누님이 잘 못 알고 있는 거야! 그……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닌데, 아직!" "벌써부터 양다리 걸치면 못써." "누가 양다리란 말야!! 애인 같은 게 아니래도!" 제롬 녀석, 약점을 잡히니까 꼼짝도 못하고 버벅거리기만 한다. 뭐, 아이린 으로부터 얼핏 들은 이야기라 내막은 모르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저렇게 과민 하게 굴 건 없을 테다. 엘스헤른은 일전에 자신을 놀려먹던 제롬의 재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웃음을 참느라 손을 내 저으면서 헛기침을 쿨럭거렸다. 그 것은 제롬에게는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모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자신도 전과가 있는 터라 덤벼들거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참다 못한 제롬은 엘스헤른이 창틀을 붙들고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를 틈타 냅다 줄행랑을 놓았 다. "두고 봐! 내가 두고두고 훼방 놓아 줄 테니!" 떠나가면서 외치는 제롬의 말이 꼭 악당들의 고유 멘트 같아서 엘스헤른은 아예 창틀에 매달려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토해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갑자기 엄습해 오는 우울한 기분에 그는 흐지부지 웃음을 멈추었다. 저, 저건…… 상 황이 역전되기 전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언젠가 한 번 스프 스푼을 집어던지고 식사실을 박차고 나갔던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눈 앞에 삼삼 밟혀 서 엘스헤른은 그만 정색을 하고 일어섰다. "뭐, 별로 웃을 일도 아니잖아." - To Be Continued ==================================================================== < 61편 제작 비화 > 1) 배탈, 심해지다! 지, 지금 극심한 상태. -_-; 24일 이후 식구들은 모두 탈수 증세에 시달리 기까지…… 는 아니지만, 일상에서의 식욕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죠. 펠티도 먹는 게 없으니 글 쓸 의욕도 안 나고 있구요. 식욕이 떨어지면 필욕(글쓰고 자 하는 욕구.;;;; 라고 지어낸 말. 역시 창작욕이 나을까? 뭘 해도 욕은 욕 이지만.;)도 떨어집니다요! 감기, 몸살, 배탈이 겹쳐져 있는 상태란 정말 괴 롭습니다. TT-TT 2) 슬럼프에 빠지다. 배 아프고 등 춥고, 정말 사람 살 형편이 안 되는 요즈음, 커다란 슬럼프에 잡아 먹혀버린 펠티.(허우적 허우적~!) 연재 주기는 점차로 느려질 기미를 보 이며, 아침 최고 기온은 진주가 영하 2도, 낮 최고 기온은 영상 8도를 기록하 겠으며, 그 밖에 지역은…… 칵! 이게 아니잖아! T^T 아무튼 제정신이 아닙니다, 요즘. 쵸콜렛을 안 먹고 써서 그럴까요? T^T 아 니면 역시, 국어사전의 부재로?! 정말 국어사전을 꼬옥 사고야 말렵니다! (두 고 봐!) 뭐, 슬럼프의 원인이야 설마 쵸콜렛이나 국어사전이겠냐 마는, 새 마 음 새 뜻이 필요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뒤로는 : 쵸콜렛이나 국어사 전을 부치실 분은 주소 - 경남 진주시 어쩌구 어쩌구…… 페르티 앞으로 어쩌 구…….) 3) 계획의 빗나감. 60편과 61편에서 계획했던 것은 엘스헤른이 조금 어른이 된 시선으로 주변 을 보기 시작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한 거였는데, 완전 실패. (덕분에 분위기 는 Y로 빠져들고…….) 엘스가 제롬을 귀엽게 보는 것도 그런 의도였습니다 만, 다들 묘한 눈빛을 보내더군요. T^T 4) 다음 편 맛보기!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다음 편 ! 언제 올는지 모릅 니다~!(TT-TT) 다음 편부터 대망의 <사냥> 대단원! 자, 사냥에서 만난 엘스와 레비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잉, 설마 벌써부터 이상한(...) 걸 기대하는 건 아니지? -_-; 사실, 페르티는 아무 계획 없었던 것! 이것은 바야흐로, 펠 티의 스토리라인이 너무 헐렁하게 써져 있음에 기인하는데! 저 네 줄 짜리 스 토리 라인으로 어떻게 일곱 편의 <사냥> 대단원을 만들어 내란 말인가~! 아무 리 네가 쓴다지만, 페르티! 저엉말 너무하다~! 두통, 치통, 울화통을 유발하 고, 닭살, 오한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 다음 편을 기대!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네티즌광장 서비스 바로가기 ------------------- 메일 검색 메신저 iman 게임 ------------------- 커뮤니티 네티즌광장 동호회/작은모임 시티조인 ON & OFF 채팅 ------------------- 컨텐츠 만화/무협 게임 방송/영화 음악 성인 교육/키즈 여성/생활 증권/경제 ------------------- 쇼핑 공동구매 ------------------- 인터넷비즈니스 고객센터 회사소개 하이텔홈>커뮤니티>네티즌광장>창작연재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2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01-02 조회수: 621 ┌───────────────────────────────────┐ │ ▶ 번 호 : 0/64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1월 02일 11:03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2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2) 악단이 연주하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상큼한 가을 바람에 실려 날아오른다. 북부의 가을답게 기온은 싸늘한 편이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사냥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다. 맑직하게 개여, 돌멩이라도 던진다면 동그란 파문을 그려낼 것 같은 새파란 하늘, 그 끝자락이 희미하게 닿아 있는 숲은 오묘한 황금색으로 물들어 풍성함을 자랑하고 있다. 가을의 화려한 정경은 투 명한 공기와 어우러져 섬세한 화폭 속을 들여다보는 듯 아름답다. 사냥터를 목전에 둔 야트막한 평지에는 갖가지 빛깔의 실크로 지붕이 마련 되어 있는 천막이 들어서 있다. 사냥을 구경하러 온 내빈들을 위한 장소다. 아니나다를까 그 천막 안쪽으로 가을볕을 피해 귀부인들이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아직 복숭아 빛깔을 띈 상기된 얼굴을 한 어린 청년들과 풋사과 의 푸르름 마냥 풋풋해 보이는 귀족집 영애들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띄지만 대 체로 천막에서 담소하고 있는 이들은 뽀얀 가루분과 짙은 향수 내음의 주인공 인 귀부인들이었다. 그들이 재재거리는 소음은 별도의 천막이 마련된 황실 가 족들의 장소까지나 들려왔고, 가뜩이나 사냥에 빠져서는 안 될 영국산 개들이 왕왕 거리는 소리와 뒤섞여 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불협화음을 생성해 내고 있 었다. 사냥이란 대저 이런 것이다. 말들이 고개를 거만하게 쳐들고 외치는 투레질 과 대지를 향한 욕망을 담은 힘찬 말발굽 소리, 그리고 다소 흥분한 사냥개들 이 일시에 짖어대는 어수선함, 천막에 들어앉아, 혹은 말을 타고 사냥터까지 뒤쫓아오면서도 끊이지 않는, 비단을 둘러쓴 저 분가루반죽들의 수다. 시종장 은 사냥에 쓰일 총들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고 어린 시종들과 시녀들은 사냥에 참가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구경꾼들을 위한 수발을 들고 있다. 무도회나 오 페라 관람, 혹은 지체 높은 귀부인의 살롱만이 저 콧대높은 부인들의 패션을 뽐내는 장소가 아닌 고로, 이렇게 야외까지 나온 지금에도 저들의 번쩍거리는 의상들은 하나같이 화려하면서도 비실용적인 경향을 띄고 있었다. 의자에 앉 는 것조차 불편한 넓은 치마폭은 겹겹이 포개진 비단으로 주름져 장식되어 있 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꽃이나 반짝거리는 보석, 머나먼 남국의 새깃털 장식 도 그녀들의 옷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우아함을 자랑하는 날개 와도 같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뽐내기 위해서는 이 추운 날씨에조차 코트를 덧입을 수 없을 테니, 웃는 가면들 뒤로는 분명 날씨를 저주하듯 가득 찌푸린 얼굴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맑은 날씨에 어울리는 현악의 음색도 아주 멀리 사냥터에서 바람에 실려 간 간히 날아오는 나팔소리도 그리고 다른 천막에서 들려오는 낮고도 끊임없는 소음도, 여기 이 사람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모든 게 신경에 거슬 리는 듯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저 멀 리에서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숙녀 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많은 귀부인들과 이제 혼기가 찬 아가씨들은 이 고귀하고도 존엄 퓽繭遮? 못 써. 그건 공국의 대공 전하께서 취할 행동이 아니지." "어린애에게 설교하듯 굴지 말아 줘. 누님. 난 그런 말을 고분고분 들을 어 린애가 아니야." "어린애가 아니라고? 우습군, 지금 아이처럼 뾰로통하게 굴고 있는 게 누구 지?" "난 환자야!" "아아, 티아란 대공 전하께서는 감기로 서거 하실는지도 모르겠군."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들의 곁에서 눈치 빠른 레인비 백작 부인이 작게 웃음을 지었고, 이들 고귀한 신분의 남매는 그 소리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정색을 하고는 잠시 딴청을 피웠다. 곧 제르 트뤼트 공주가 칭얼거리며 레인비 부인에게 매달리자, 그 틈을 타서 아드레이 드는 예의 없고 안하무인인 동생에게 남몰래 싸늘한 눈길과 함께 낮은 으름장 을 던졌다. "공주들에게 감기를 옮기기라도 한다면 기필코 수감시켜 버릴 테야." 이번 건 듣지 못했는지 아드레이드의 옆에서 레인비 백작 부인은 제르트뤼 트에게 작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끊일 듯 말 듯 에스트르의 전통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엘스헤른은 그 노랫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지만, 백작 부인이 그 바로 옆에 앉은 아멜리에 공주의 보모인 리에세 부 인과 잠시 담소를 나누느라 노래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엘스헤른은 고개를 돌려 완만한 곡선이 이어지고 있는 저 너른 사냥터로 시 선을 돌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느 새 이 천막을 떠나서 저 멀리에서 자신의 애마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엘스헤른과 마찬가지로 그런 폐하에게 잠시 눈 길을 두고 있던 아드레이드는 심드렁한 말투로 - 역시 바로 곁의 엘스헤른에 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 중얼거렸다. "황태자를 수행해오는 무리는 좀 늦는군. 출발은 같이 해 놓고선 중간에 어 디로 빠져버린 걸까?" 그녀의 말대로 황태자와 같이 오기로 한, 레비앙과 루엘, 그리고 황태자의 시종들은 과연 아직까지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다가 사냥이 시작되어 버리겠는걸." 그녀가 아쉬워하는 게 뭔지 훤히 꿰뚫어 보이는 터라, 엘스헤른은 그냥 테 이블에 가만히 기댄 채 그녀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어차피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말이고, 대꾸한다고 해 봤자 누님에게는 씨도 안 먹힐 게 뻔한 지라, 이 렇게 정신이 없을 때에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뭐, 사실, 전에 로자리움을 방문했을 때의 일 이후로는 레비앙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터여서, 그를 눈 앞에 둔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것에 대해 아주 조금은 생 각을 곱씹어 보긴 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떠올리기가 싫어져, 그는 마치 회피라도 하는 양 책을 읽거나 아니면 아이린과 담소하거나 하는 다른 일들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날 본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데, 되도록 그에 관한 한 별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어쩌면 사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10년이라면 짧은 시 간이 아닌데, 그 길고 긴 기간 동안을 속고 지내왔다는 데서 조금은 배신감 같은 것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건 그 다음으로 마음을 채우고 도는 상실감 에 비할 게 못 되었다. 급기야 그런 마음은 모든 걸 거부해버리고 싶은 심정 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기분이라는 것은 공기 중을 부유하듯 묘하게 불안정한 상태였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의 단편이 그런 기분을 타고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 했다. 그게 어제까지의 심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막 상 다시 레비앙과 대면할 생각을 하니까 또한 약간 들뜨는 설렘이 더해져 지 금의 마음은 엉망진창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태. 게다가 레비앙이 무슨 일 인지 이렇게 늦고 있으니 그로 인한 불안함 마저 가중되어 숨쉬기조차 힘든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테이블에 엎드려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살며시 기댔다. 짙은 빛 깔의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스르륵 눈 앞을 가린다.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있 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지만, 그는 머리카락을 치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시선 두고 있는 곳 없이 멍한 상태이고, 어쩐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서였다. 벌써 태양은 남쪽을 비켜 떠서 높이 올라, 정오가 지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한 시가 되면 사냥은 시작될 것이다. 말이야 여우사냥이지, 막상 사냥이 시작 된다면 여우를 잡든 사슴을 잡든, 이 숲에 사는 어떠한 야생동물을 잡아도 상 관은 없다. 황제께서 직접 벼슬을 하사한 레 샤(Le Chat) 숲의 숲지기가 있기 는 하지만 여기의 동물들은 귀족들이 스스로를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바와 같 이 더없이 자유스럽게 태어나고, 자유롭게 자라고 있다. 그런 이유로 노획물 은 잘 조리되어 만찬에서 귀족들의 식도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 놓아진다. 이러한 야생 동물들이 별도로 잘 키워진 가축들에 비해 맛이 월등하냐하면, 별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아주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되어온 대로 귀족들 은 자신들의 고귀한 구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요리의 재료를 이렇게 사냥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엘스헤른은 오래 전 라는 책에서 읽은, 야생 재료를 사용한 그 수많은 요리 들을 떠올리면서도 그다지 식욕이 돋지 않았다. 심지어는, 황제 폐하를 수행 해 사냥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평소 즐기던 사냥임에도 불 구하고 가차없이 만사가 귀찮아져버린 것이다. 모든 게 이토록이나 귀찮아질 줄이야……. 한숨을 내 쉰 그는 아드레이드가 주의를 주는 헛기침 소리를 듣고는 그만 고개를 들고일어나 앉았다. 저 멀리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계시던 황제께서 어 느새 이쪽의 테이블로 걸음 하신 것이었다. 황제는 마치 널브러진 것처럼 아 무렇게나 엎드려 있던 엘스헤른의 행동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스러 운 표정으로 몇 마디 건넸다. "아침에 약을 먹긴 해도, 아직 효과가 없는 모양이군. 감기가 심하다니, 그 냥 에스트리온 성관에서 쉬게 둘 것을……." "아, 괜찮습니다. 폐하." 애써 웃음을 짓기는 하지만 해쓱하기 그지없는 그의 얼굴빛에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지 황제는 그가 굳이 사냥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를 해 주 었다. 그러고 뭔가 더 염려의 말을 해 줄 듯한 표정을 하던 황제는 갑작스레 희색을 띄며 멀리를 주시했다. "황태자가 오는군." 과연 황제의 말대로 저쪽 언덕을 넘어 황실 마차 두 대가 빠른 속력으로 달 려오고 있었다. 황태자의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 가까이에 주차했고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고귀한 꼬마의 수행원들이 뒷마차에서 우루루 내 려 황태자가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냥용 붉은 코트를 당당하게 차려 입은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천막 안에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 다. 그들이 살풋 정중한 인사를 하는 가운데 황태자 클로티엔은 왕족다운 우 아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앞으로 다가왔다. 새파란 하늘을 닮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황태자는 자신의 아버지 앞에 점 잖게 허리를 굽혔다. "폐하, 저의 불찰로 인해 도착이 늦었음을 깊이 사죄 드립니다." "레샤누아 숲으로 오던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네, 저의 역사 스승님이 되어주시기로 한 아르떼이유 후작님의 안위를 살피 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러는 것이 제가 지켜야 할 도리인 듯 하여……." "음." 황제는 또록또록하게 말을 잇는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황태자의 뒤에 서 있는 레비앙과 루엘에게도 천막 안쪽으 로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황태자를 데리고 천막의 지붕 안쪽으로 들어섰다. "자, 오시느라 수고들 했을 텐데, 사냥이 시작될 때까지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게." 모두들 착석을 하고, 잠시 담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엘스헤른은 슬쩍 고개 를 들어 레비앙을 살폈다. 마치 곁눈질이라도 하는 심정이라 부끄럽기는 하지 만 어쩐지 그를 당당히 마주 볼 자신이 서지 않았다. 레비앙은 시종이 가져다 주는 음료 잔을 입에 대었다가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 하나 하나에 엘스헤른은 어쩐지 가득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 앞의 저 사람은 10년을 알아 온 친구다. 그런데 어떻게 저 모습을 여자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 To Be Continued ==================================================================== <62편 제작 비화> 1) 새해를 맞이하다! 제작 비화와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제목이지만, 사실 가장 상관이 많습니 다. 무슨 일인고 하니, 펠티는 12월 30일 친구와 옷감을 사러 부산을 다녀왔 고(한 해가 가기 전에 만나봐야지 하면서.;), 12월 31일 가족과의 망년회를 위해 장장 3시간에 걸친 퓨전 요리를 했으며 1월 1일 가족과 함께 남해에 다 녀온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글 쓸 틈이란 정말 없었던 거죠. 그렇다 해도 무 려 5일만에 글이 올라오다니…… 자중하겠습니다. 쿨럭.;; 뭐, 어쨌든 간에, 독자 여러분, 새해엔 뜻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고 다들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요. (건강이 최고예요.T^T) 2) 슬럼프,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다! 사실 심각합니다. 이번 편은 자신도 뭘 썼는지 모를 정도로 횡수를 늘어놨 습니다.;; 괴롭습니다만, 언제 헤어날 수 있을는지 의문입니다. 흐흐흙.TT-TT 그런데다가 스스로도 기대하고 고대하던 사냥씬인 만큼, 전혀 기대가 안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뭔가 이상한 문장이긴 하지만.) 아무튼 뭔가 흐지부지 끝날 거 같은 대단원이라 두렵습니다. 이제 시작인데 일곱 편을 어케 다 쓰 지…….;; 3) 다음 편 맛보기. 요번 편을 보니, 다음 편은 별로 안 궁금하다구요? T^T 하지만 모두 사냥에 나설 준비를 하는 와중에 엘스헤른이 드디어 레비앙에게 뭐라고 말할는지도 모르는데요? 아무튼, 저로서도 쓰는 것이 두려운 63편입니다. 쿨럭.;; 암튼, 위험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는지…… 기대 바랍니다. 쿨럭쿨럭.;; 4) 분량이……. 무쟈게 적네요. 쿨럭쿨럭.;; 잡담으로 때우는 데도 한계가 있고. T-T 장차 분량을 늘여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요. 쿨럭.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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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는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세요." 레인비 백작 부인이 넌지시 하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엘스헤른에게로 쏠렸 다.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에서, 어쩐지 듣고싶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 는다. 레비앙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스헤른의 바로 맞은 편에 앉은 그는 잠시 눈을 들었다가 떨구는 것으로만 관심의 표현을 그쳤다. 그러는 레비앙을 보며, 엘스헤른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 다. 무슨 이야기든 어떤 주제든 그냥, 단 둘이서 말해보고 싶었다. 아니, 하 고 싶다기 보다는 해야만 한다는 게 옳을 것이다. 이렇게 서먹한 사이로 지내 기엔 가슴을 가득 채우는 심정은 너무나도 열렬하다. 만일, 지금 해결하지 않 는다면, 영영 이런 상태의 지속으로 그를 대할 수 밖에 없을 테다. 모두의 염려 속에 몸을 일으킨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응시하며 작게 입을 열 었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레비앙 경." 미쳐 레비앙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엘스헤른은 황제에게로 몸을 돌려 양 해를 구했다. "레비앙 경에게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폐하. 제가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 까?" "그렇게 하시게. 사냥이라면 염려 놓고. 잠시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 지." 황제는 핏기 없이 창백한 엘스헤른의 얼굴을 보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빛을 떨치지 못하고는 염려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레비앙에게 나즉한 부탁 조로 말했다. "부디 대공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레비앙 경은 대공의 절친한 친구니까." 절친한 친구라는 말에 잠시 뜨끔하긴 했으나, 황제의 청을 감히 거절하지 못한 레비앙은 의자를 뒤로 빼며 몸을 일으켰다.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그는 고이 인사를 하고 엘스헤른을 따라 천막에서 물러났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레인비 백작 부인이 혼잣말처럼 한 마디 했다. "두 분, 어쩐지 서먹해 보이네요." 내막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황후 - 아드레이드 뿐인 고로, 그녀는 조용히 레인비 백작 부인에게 눈짓을 하며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황제 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라는 표시였다. 레인비 백작 부인은 황후에게 웃음으 로 대답을 하고는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제르트뤼트를 을렀다. 자녀 를 출산하지 못한 채 미망인이 된 여인답지 않게 몹시도 솜씨 좋게 아기를 돌 보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의 관심은 이내 그녀에게로 모아졌다. "어머, 제르트뤼트는 레인비 부인의 품에만 안기면 의젓해지네." "그러게요, 신기하기도 하죠." 황실 전용 천막 안이 화기애애한 웃음과 대화로 가득해진 틈을 타서 아드레 이드는, 그 새 말을 타고 멀어져 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혼잣말을 흘렸다. "아아∼! 엘스헤른, 이 누이를 용서 못한대도 좋아. 그렇지만 이번은 정말 절호의 기회인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말은 어느새 숲의 꽤 깊은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을볕에 잘 익은 나뭇잎과 메마른 가지 사이로 햇 살이 둥근 원을 그리며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엘스헤른은 문득 말을 세웠 다. 이렇게 걷는다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숲을 온통 거닐다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그가 말을 묶어 둘 동안 레비앙 역시 거의 아무런 표정 없이 그를 따라 자 신의 말에서 내려섰다. 레비앙이 손끝으로 말고삐를 말았다 놓는 행동을 반복 하며 서 있는 모양에서 엘스헤른은 어쩐지 그가 서먹해 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도 그 어색한 분위기를 못 이겨 머뭇거리다가 나 무 밑동 옆, 수북히 쌓인 낙엽 위에 몸을 앉혔다. 어쩐지 말이 길어질 것 같 아, 일단 앉아야 할 듯 해서였다. 레비앙은 그다지 않을 생각을 하지 않는지 여전히 말고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엘스헤른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그제서야 레비앙은 - 그 래도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며 - 그의 왼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바스락거리며 낙엽 밟히는 소리가 어쩐지 구겨지는 마음인 것만 같아서, 그리고 지금, 레비 앙이 뭔가 의식적으로 자신과 사이를 두고 멀찍이 물러앉아서 엘스헤른은 가 슴속이 착찹했다. 그의 긴 한숨 소리를 끝으로 또 한동안 짧지 않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숲은 조금 쌀쌀하고, 자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낮게 우는 새소리나 저 멀리 낙엽과 말라붙은 풀을 여유롭게 밟고 있는 말들의 소리, 아주 가끔 이름 모를 벌레의 소리도 들려온다. 그리고, 허허로운 가슴을 할퀼 것만 같은 바람결도 소리로 느껴져 왔다. 보이는 것 보다 들리는 것에 신경을 집중하며,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엘스헤른은 언뜻 레비앙에게로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본다는 것 은, 또한,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일이다. 생각하거나 마음 먹기에 따 라서 어쩌면 이토록 정 반대의 것 만 눈에 들어오는 걸까? 지금 눈 앞의 레비 앙은 조금 중성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확실히 여자다. 하얗고 둥근 얼굴 선, 그리고 숨을 내 쉬며 약간 벌어진 붉은 입술까지 모두, 분명한 여자로 보인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에게 약간의 혼란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 치 뇌리에 새겨져버린 듯 선명한 잔상이 문득 떠올랐다. 그날, 로자리움에서 보았던, 햇빛을 등진 나신의 유연한 곡선이……. 엘스헤른은 아주 느리게 오른손을 들어 레비앙을 향해 뻗었다. 가볍게 뜬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던 엘스헤른의 손은 레비앙의 가슴 녘에 와서 멎었다. 보드라운 레이스의 크라바트 위에서 손을 멈춘 엘스헤른은 고개를 들어 레비 앙을 마주보았다. - To Be Continued ==================================================================== <제 63편 제작 비화!> 1) 상심, 상심, 상심.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아끼는 녹색 장갑을 잃어버린 겁니다! 결코 구할 수 없는, 우리 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그 장갑을! TT-TT) 글코, 안 좋은 일이 있고 있는 중입니다.(방이 왕창 어질어져서 청소로 애먹고 있는 중이죠.) 때 문에 여러모로 상심. 그런데다가 멀카락까지 잘려서 기분도 구려졌습니다. 쿨 쩍. TT-TT 2) 레인비 백작 부인에 대해서. 레인비 백작 부인의 모델은 펠티의 친구, 아횬냥.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 식, 상냥하고 애교스러운 행동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 하는, 정말 한 매력 하는 아횬냥을 모델로 하여 레인비 백작 부인의 성격을 디자인했습니다.^^ 근데 성씨는 어케 아뒤로 때웠지만 이름은 아횬냥으로 붙 이자니 역시 너무 동양스러워서리.; 생각중입니다. 아, 그러고 보면 레인비 백작 부인은 지성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는 이유로, 루엘 경과 맺어주면 어떨 까라고 계략을 꾸며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레인비 백작 부인이 처음 나왔 을 때 아횬냥은 펄쩍 뛰었지요. 자신을 느닷없이 미망인으로 만들었다고, 또, 남편 살려내라고... 쿨럭.; 그리고 루엘 경과 맺어준다는 소리에도 펄쩍 뛰었 습니다.;; 멀쩡한 남푠 죽여 놓고 엄한(엉뚱한) 사람과 연결시킨다고.;;) 여 하튼 미망인이라 에스트리온 집안의 반대는 심하겠지만, 레인비 부인과 루엘 은 어쩌면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답니다.^^; 3) 슬럼프는 여전. 뭐, 연초부터 안 좋은 일들을 겪다보니, 자연히 슬럼프에서 헤어날 계기도 마련되지 않는군요. 때문에 하루 죙일 집안 일이나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에 E - 마트 가서 사온 조립식 상자에 때 지난 옷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습 니다. 근데, 그 종이 상자, 꽤 쓸만 하더군요.;;; 튼튼하고, 모양도 예쁘고. 칵! 지금 종이 상자 이야기가 아니고, 슬럼프 이야기였지.;; 아무튼 슬럼프는 여전. 4) 다음 편 맛보기! 헉! 엘스! 무슨 짓이냐?! 라고 마구마구 외쳐주고 싶은 순간! >_커뮤니티>네티즌광장>창작연재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64-65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01-16 조회수: 525 안녕하셔요. 죄송합니다. 제가 하이텔 접속을 잘 못해서 늦게 퍼올리게 되었네 요. 작가님께서는 일주일마다 계속 한 편씩 올리고 있으니.. 최근에 올리지 못한 것은 모두 제 탓..T.T 그럼 R & R 64, 65 한꺼번에 올립니다. [번 호] 66 / 67 [등록일] 2001년 01월 10일 14:31 Page : 1 / 13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517 건 [제 목]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4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4) 엘스헤른의 행동을 아무런 의심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레비앙은 방금 움직임을 멈춘 그의 손으로 눈길을 떨구었다가 다시금 천천히 시선을 마주했 다. 지금, 엘스헤른의 손은 가슴 위에 놓여 있고, 그의 눈동자는 그저 맑은 잿빛을 띄고 있었다. 가슴속으로부터 일어나는 묘한 두근거림에 어쩐지 땅으 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레비앙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엘스 헤른은 손끝으로 이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가슴 위에 놓여 있던 엘스헤른의 손에 힘이 실렸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 동시에 레비앙은 아찔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어느 새 올려다 보이는 시야에 엘스헤른이 들어왔다.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고 땅의 내음이 갑작스레 물씬 느껴진다. 지금…… 바람 결에 살랑거리는 엘스헤른의 머리카락 위로 새파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 늘이 펼쳐져 있다. 비둘기처럼 휘둥그래진 레비앙의 초록빛 눈동자. 엘스헤른은 놀라버린 듯 저항이 없는 레비앙을 내려다보며 그의 크라바트를 천천히 풀어냈다. 작게 사 르락거리는 레이스의 촉감이 엘스헤른의 손을 휘감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싸 늘한 보드라움의 감촉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그의 눈 앞에는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뽀얗고 가는 목이 드러났다. 매끈한 목선만 봐도 레비앙의 성별을 가 늠하기앤 충분하다. 믿을 수 밖에 없는, 그러나 믿지 못할 이 사실이 이렇게 베일을 벗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엘스헤른의 손끝이 목에 닿아오 자 레비앙은 움찔거리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얼핏 엘스헤른의 눈빛이 그 정갈함을 잃고 흔들리는 것을 본 것 같아서였다. 지금 어떻게든 엘스헤른 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레비앙은 그가 무슨 행동을 할는지 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버릴 수 없었다. 손목을 붙들고 있는 레비앙의 흰 손가락으로 눈길을 돌린 엘스헤른은 자신 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른 손을 거두어 레비앙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 는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비단 외투를 열고 조끼의 단추를 풀어냈다. 그의 그런 진지한 눈빛과 시선을 맞추며 레비앙은 머릿속에 물밀 듯 밀려들어오는 혼란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지금 엘스헤른이 하려는 것이 단순히 확인을 위한 절차인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지……. 만일, 그가 품고 있는 뜻이 전자의 것이라 하더라도 거부해야 마땅한 지금, 그를 밀쳐내지 못하는 자신의 또 다른 마음이란 무엇인지……. 어째서 이토록,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이 사람에게 관대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을 방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과 작은 죄책감, 그리고 이건 두려 움일까? 어지럽도록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앞으로 쏠려 내린 엘스헤른의 잿빛 머리 카락 사이로 그렇게 햇살이 반짝거리고 있다. 레비앙은 눈이 부셔 한 손을 들 어 이마에 가까이 댔다가 문득 눈을 깜빡거리며 엘스헤른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옅은 미온이 앙가슴에 놓이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까 목을 만질 때처럼 엘스헤른은 그렇게 가슴 위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아주 느린 움직임이었 지만 그건 확실히 다른 의미를 실은 것이었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셔츠 단이 사르락거리며 배 위를 간지럽혔다. 유난히 춥다고 느껴진 순간, 레비앙은 한 손을 허리춤으로 내렸다. 손바닥에 감겨 닿 아오는 싸늘한 기운은 항상 함께 해서 익숙해 질대로 익숙한 검자루. '여차하 면…….' 이라는 생각에 힘을 주어 잡은 검이 더욱 불안한 마음을 부추긴다.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만큼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귓가에 들려올 만큼이나 높아 진 자신의 숨소리였다. 목에 차 오르는 숨결은 자신의 두려움을 여실히 드러 내고 있는 것만 같아 레비앙은 그만 아랫입술을 살풋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엘스헤른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눈 앞에 가까이 있는 것 은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할 진실.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고 매혹적인 유 혹인 것이다. 어차피 레비앙을 대하며, 그날 로자리움에서 본 것을 떠올린 순 간에 자신을 지탱하던 끈이란 끊어져버린 것이지만, 그는 몹시도 경건하게 레 비앙의 가슴 위에 입술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온기가 입술에 닿아왔다. 입술 에 촉감으로 느껴지는 솜털에 봄볕처럼 간지러운 나른함이 밀려온다. 코 끝에 느껴지는 미묘한 향내와 작은 맥박소리, 그리고 그 따스함에 매료되어 그는 입술을 떼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그가, 문득 한 사람의 남자라고 느껴진 순간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엘스헤른을 밀쳐냈다. 그리고 금속의 서느런 마찰음과 함께 그는 어느새 칼날을 엘스헤른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이날까지 같이 자라온 친구가 아닌 모르는 사람. 어쩌면 이 떨림 은, 이건 옛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 빚 어내는 건지도 모른다. 시선 위에 있는 이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 린 것이다.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버린 듯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 이면 상처를 입을 만큼 칼날은 엘스헤른의 목에 바짝 닿아 있었다.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의 머리카락이, 참다 못한 바람의 장난에 살풋 흔들렸다. 모든 것을 다 담을 듯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잿빛의 눈동 자에 살짝 웃음이 서렸다. "이거…… 베는 검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레비앙 경."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미동이 검을 통해 느껴져 왔다. 레비앙은 자칫 검을 놓쳐 버릴까봐 다른 한 손으로 검의 끝을 받쳐들었다. 그리고 엘스헤른의 목 이 닿은 검날에 붉은 빛이 맺히는 것을 그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따 끔했을 텐데 엘스헤른은 내색도 않고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야기 해 줬던 거죠. 자신의 어깨에 얹힌 무게 같아서 싫어하는 검 이라고. 아르떼이유 가문의 후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오래된 검이라 고." 그가 몇 마디를 더 하는 사이에 레비앙은 뺨에 톡 떨어지는 따뜻한 물기에 놀라 검을 쳐다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칼날 끝에 둥글게 맺히는 것은 핏물이 다. 레비앙의 동요하는 눈을 고요하게 응시하면서 엘스헤른은 싱긋 웃음을 지 었다. "오래된 검이지만 날은 아주 잘 서있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경은 그걸 무기 삼아 무례하기 그지 없었던 나를 겁주곤 했으니까……. 요 즘의 검처럼 찌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옛 검인 만큼 벨 수도 있는 거라 고…… 그렇게 말하면서 장난 삼아 뭔가를 베어 보이던 것도 기억하고 있습 니다." 엘스헤른이 말을 할 때마다 확실히 새하얀 크라바트는 붉은 핏자국이 물들 어갔다. 레이스에 스미는 핏물은 고운 무늬를 타고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이 대로 검을 거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레비앙은 안타 까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말하지 마십시오. 대공 전하." 하지만 엘스헤른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담담하고도 나직하게 귓가에 깔리는 것은 엘스헤른의 음성. "그리고 언젠가, 경의 손에 쥐여 있던 그 검에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내 자신도 떠오르는군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죠. 그 누구보다 당신의 손 에 죽는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한 순간이니까……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을 사람이 당신이라고……." "대공 전하, 말씀을 그만……." 레비앙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아 미간을 가득 찌푸렸다. 황궁의 뒤뜰, 오늘처 럼 눈부시게 하늘이 파란 날에, 그리운 향내를 실어다주는 바람결에 못내 미 쳐버릴 것만 같았던 그날, 몹시도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찌르라 말하던, 그 때의 엘스헤른이 떠올라서 어쩐지 가득 목이 메여왔다. 그때…… 정말, 엘스 헤른은 죽고싶을 만큼이나 힘들었던 걸까? "어째서 경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저는 진심이었으니 까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일거라고…… 그렇게 믿으면 될텐데……." 낮고도 조용히 들려오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참으로 무미건조했다. <진심> 이라는 것을 일컫는 목소리답지 않게,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진실 되게 그의 음성은 더없이 담담했다. "전하, 제발…… 그만…… 말을 그만……. 눈가에 맺히는 뜨거운 기운. 그리고 가슴속에 맺힌 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응어리. 레비앙은 그것을 삼켜버리고 숨을 가득 들이쉬었다. "……말하지 마, 엘스헤른. ……다치잖아." 토해놓듯이 말한 그는 시린 눈을 깜빡거렸다. 눈물이 부끄럽다고 여길 사이 도 없이 그렇게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참았던 것을 모두 게워낸 듯이 어쩐 지 가슴속이 후련했다. 옭아매고 있던 마음의 사슬을 풀고 자유의 한 자락을 맛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묘한 상쾌함에 레비앙은 목놓아 울어버렸다. 심정이 마치 에스트르를 뒤덮은 저 새파란 하늘마냥 말끔해질 때까지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두었다. 뺨을 쓸어 내리는 온기는 엘스헤른의 손길일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엘스헤른이 쓰다듬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편안함.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변함없이 곁에 있어왔던 포근함이다. 눈물이 멎지 않는 것은, 마음 속에서부터 갈구해 온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가슴 속을 가득 채우는 안도에 절로 한숨이 지어지 고 긴장해 있던 마음이 풀리면서 어쩐지 나른했다. 그리고 그를 다독이듯이 작고 따스한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레비앙." ·‥…━━━━…‥· 뭔가 태풍이라도 불고 지나간 듯한 기분에 레비앙은 크게 숨을 내 쉬었다. 너무 울어서인지 숨결에 딸꾹질이라도 묻어 나올 것 같아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있는 중이지만 여전히 숨결은 불규칙적이다. 눈도 묵직한 것이 틀림없이 부었을 테고, 어쩌면 빨갛게 되었을 것 같기도 해서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 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은, 지금 이 어색한 상태의 지속인 것 이다. 엘스헤른이 무슨 행동을 저지를지 몰라 가뜩 경계하고 있던 요전의 나 날들 보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무겁고 힘들었다. 지금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앉은 자리의 조금 옆에서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엘스헤른 역시 눈을 내리깔고선 한숨만 내 쉬는 중이었다. 뭔가 갑자기 상황이 달라져버리는 바람에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몰라 이렇게 멀뚱 히 앉아 있기는 해도, 엘스헤른은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 떻게 되었든, 이제는 전처럼 그렇게 불편한 관계는 아니어도 되니까……. 그러고 보면, 조금 머쓱하기도 하다. 아까 레비앙을 밀어서 넘어뜨렸던 것 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건 명백한 자신의 과오인데다가 칼을 뽑아들게 할 만큼이나 레비앙을 놀라게 해 버렸고, 그런 일로 인해 뭐라고 말 꺼내기가 민망해진 탓이었다. "미안해." 한참만에 먼저 말문을 튼 엘스헤른은 그렇게 한 마디 하고선 뜸을 들었다. 갑작스런 그의 목소리에 놀랬는지 레비앙은 고개를 반짝 들고 엘스헤른을 쳐 다보았다. "응?" - To Be Continued - ==================================================================== <64편 제작 비화> 1) 펠튀, 보모 되다. 숙모님이 입원을 하시는 바람에 이틀 동안 그 집 애들을 돌봤습니다. 초등 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 의 남매인데, 뭐, 그럭저럭 잘 따르더군요. 마 침 눈이 와서 밖에 데리고 나갔더니 강아지처럼 좋아하고 말이죠. 게다가 내 가 만들어주는(재료가 변변찮은 이유로 아주 허접이 되어버린.;) 음식에도 상 당한 호응이 있었구요.^^; (메뉴는 주로 스크램블드 에그, 달걀 국, 오뎅 국, 카레. -_-;;;) 암튼, 저런 이유로 컴터를 쓸 수가 없어 글쓰기 작업은 꽝이 되어버린…….(것은 변명. 그 집에도 컴터가 있는데.; 게다가 통신도 되고.) 2) 펠튀, 대청소에 휘말리다! 지금 방의 상태는 초 청결! 뭐, 어쩌다보니 벌써 삼일 째 대청소에 휘말려 있는 중입니다. 저 가지런한 테이프 장과 화장대 및 책상, 방바닥을 보니 적 응이 안 되네요.;; 뭐, 옷장 정리도 끝나고 펠티의 방과 펠티의 방 현관(방 문 말고.) 사이의 작은 방도 벌써 다 치웠습니다. 이제 남은 건 펠티 방에 딸 린 다락. 저긴 추워서 봄에나 치울 수 있을 듯 합니다. 3) 뭔가… 이번 편은…. 묘한 씬이 나왔기 때문에 고심. 사실은 엘스 녀석이 확 돌아서 갈 데 까지 (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농도 짙게) 나가는 게 원래의 이야기였습니다만, 약간 손 봤습니다. 뭐, 아무래도 아직 이런 분야(...)에 있어서의 중도라는 것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얼핏 잘 못하면 정말 18금까지 나가버리는 저라서, 되도록이면 묘하지 않은 분위기로 만들려고 노력하다보니 사실 뭐하는 건지도 모르는 장면이 되어버린 겁니다. -_-; (이, 이건 정말 비화(悲話).;;) 그냥 원래대로 할까 라고 생각해봤습니다만, 역시 과격한 엘스는 시러요. -_-; 게 다가 엘스를 밀쳐내려고 발버둥치는 레비앙은 더 시러요. -_-;; 뭐, 원래 장 "어머~! 이러면……", "아아~! 안돼요~!" (발그레발그레발그레.)를 기대하셨 던 분들에게 정말 죄송. -_-; 하지만 저번 편 후기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아무튼, 다음 편은 서먹서먹한 이들 두 사람 면은 대충 그렇고 그랬답니다. 바둥바둥.;; 4) 다음 편을 알려주마! 에게 닥칠 또다른 시련(?)이 펼쳐집니다. 그럼 기대! [번 호] 67 / 67 [등록일] 2001년 01월 15일 17:18 Page : 1 / 14 [등록자] 마쉬멜로우 [조 회] 231 건 [제 목]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5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5) "음……. 미안하다고." "…… 뭐가?" "아까의…… 그 일도 그렇고, 그냥 모두 다. 여지껏 내가 너에게 한 모든 행 동들이 다 미안해. 어리석은 마음에 너를 괴롭혀 온 여지껏의 그 모든 일들 이……." 엘스헤른은 미간에 힘을 주고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니까 레비앙은 어쩐지 정말 옛날로 돌아간 듯 해서 멎었던 눈 물이 다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벅차 오르는 기분을 그 누가 알 수 있 을까? 손에 닿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이 행복의 기분을……. "그런 말…… 하지 말아, 엘스. 네가 미안해 할 게 뭐가 있다구." "너는, 내가 밉지 않았어?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맑고 투명한 하늘이 담긴 잿빛의 눈동자를 말끄러미 뜨며 그렇게 묻는 엘스 헤른의 모습에 레비앙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몹시도 미워 졌어야 할 그인데도 미워지기는커녕, 그를 향해 나날이 쌓여 가는 그리움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그런 마음을 엘스헤른은 모를 것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마냥 밉게만 보이는 않는다는 것을……. 괴롭고 눈물겨워도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뭘까?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가 있겠어? 너는……." 잠시 말을 멈춘 레비앙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정말로 소중한 내 오랜 친구인데." 친구. 그 말을 듣자마자 엘스헤른은 왠지 소름이 끼쳐 오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조금 아릿하고 어쩌면 시리기도 하다. 마치 불협화음이라도 들은 것 같이 묘하게 어긋나는 기분……. 그는 피식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이 따위로 되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린 게다. 친구로는 만족할 수 없는 감정을 이제는 억누를 수가 없는데도……. 엘스헤른은 두어 번 기침을 토해내고는 숨을 가득 들이쉬었다. 사랑하고 있 다는 것을, 레비앙이 알게 되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몹시도 놀라 고 어쩌면 조금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정말로 나를 그렇게 생각해?" 대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허허로운 마음에 입술이 제멋대로 그런 말을 토해놓았다. 말해 놓고 보니 머쓱하기도 하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은 것 처럼 엘스헤른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다른 대답이라도 듣고 싶은 거야?" "……." 긍정의 말 대신에 금새 레비앙에게서 돌아온 물음을 듣고서 엘스헤른은 한 동안 묵묵히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비앙에게서 듣고 싶은 말……,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저 녀석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만 생각했을 뿐 별달리 어떤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본 기억도 없다. 신기하게도 돌이켜보면 그랬다. 친구가 되지 않아 도 좋으니까 다만 열렬히 달아오르는 이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딱히 저 입술로 듣고싶은 말 같은 건 고민해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지금 당장 생각해 내려 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지금은 어쩐지 정 신이 하나도 없고 너무나도 산만하다.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어 엘스헤른은 가만히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엘스?" 낌새를 차렸는지 레비앙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엘스헤른은 입 꼬리를 끌어 올려 약하게 웃었다. "조금 피곤해. 새벽같이 출발해서 간밤에 잠을 설쳤더니……." "아, 그럼…… 천막으로 돌아가는 게……." 왠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는 레비앙의 행동에 엘스헤른은 손을 뻗어 그를 붙들었다. 아주 간만에 편한 마음으로 단 둘이 있게 된 시간을 그냥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그냥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하지만……." 레비앙은 못내 근심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뭐, 그렇긴 해도 기침을 몇 번 한 것 뿐, 그다지 엘스헤른의 상태가 나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아서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천막은 너무 시끄러워. 난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눈살을 살풋 찌푸리며 이야기하는 엘스헤른의 말 뜻이 대충 짐작이 가서 레 비앙은 작게 웃으면서 말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대공 전하께서는, 그를 에워싸고 참새처럼 조잘거리는 귀부인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무정함에 애태우는 아가씨들이 저 드높은 눈에는 차지 않는 것일 테지. 그가 아이린 양을 대하는 것의 아주 일부분만큼 만이라도 그 아가씨들에게 다정하게 군다면 아마도 그녀들은 전쟁터조차 마다 하지 않고 그를 쫓아갈 텐데……. 레비앙은 아이린과 함께 있을 때는 유난히 온순하고 곰살갑게 구는 엘스헤른의 행동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 게 착잡해지는 기분, 여성으로서는 둘도 없는 친구인 아이린 양을 향한 이 마 음은 틀림없는 질투, 그것은 엘스헤른을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녀의 아름다움도, 온화함도, 다재 다능함도 모두 언제나 선망하고 경애해 마 지않는 것이지만 그녀와 결코 마음을 터놓을 만큼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엘스헤른 때문이다. 그녀가 엘스헤른과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 그것이 언제나 충격과 회한으로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것이다. 풀어도, 풀어도 끊임없이 풀려 나오는 실처럼, 마음 속을 어지럽히는 일들 이란 그렇게 끝이 없는 게다. 리하르트와의 문제는 일단 보류해 둔 상태지만, 이 알 수 없는 마음은 엘스헤른이 정말 결혼까지 해 버려야 진정될 문제일까? 엘스헤른이 결혼을 하고 조그마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거라는 사실이 어쩐 지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남들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일 조차 어째서 엘스헤른 과는 연결지어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따 위는 버린 지 오래 되었는데……, 눈 앞의 저 사람은 이미 예전에 알아오던 그가 아닌데……. 그리고 엘스헤른이 티아란의 대공으로서 오스트리아로 떠날 날이 머지 않았 다는 것 또한 묵직한 불안감이 되어 가슴속을 짓누른다. 전쟁이라는 단어 하 나만으로도 어쩐지 불길한 쪽으로만 상상하게 되는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결국 엔 걱정으로 인해 무섭게 술렁거리는 마음이란 다독일 수가 없는 것. 레비앙 은 숨을 몰아쉬고선 이내 다시금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나무 밑동에 비스듬히 몸을 의지하고 있는 그는 따뜻한 가을볕을 모두 받아 들이려는 듯 미동 없이 햇살 아래 자신을 드러내어 놓고 있었다. 조금 위태로 워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 그의 모습에 레비앙은 가 슴 한 구석이 조금 따뜻해져 왔다. 아주 오래 전에 그와 친구가 되었던 그 어 릴 적의 꼬마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품위와 함께 묘한 반항을 실은 그 의 표정을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어서였다. 햇빛이 눈부신 듯 조용히 눈을 내리 감고 있던 엘스헤른은 조금은 장난스럽 게 레비앙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이대로 조금만 자게 해 줘." 나른한 온기를 실은 엘스헤른의 말이 조금 간지럽기도 해서 레비앙은 퉁명 스레 대꾸를 했다. "……무거워." "조금만 잘게. 아주 조금만……." 잠결에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끝말을 옹알거리면서 엘스헤른은 금새 고 른 숨소리를 냈다.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내맡긴 친구를 어깨에 기대인 채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어쩐지 좀 무색하기도 하고 해서 레비앙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뿌듯해져오는 마음에 그는 이내 살짝 미소를 흘 렸다. 입술 끝으로 다행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한참 흘러 벌써 오후의 공 기는 노릇한 색채로 익어 있었다. 태양은 흘러간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어느 덧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고 바람결에 실린 온도는 한층 싸늘해졌다. 잠시만 잔다고 하던 엘스헤른은 깊은 잠에 빠져버렸는지 아직도 일어날 줄을 모른다. 자리를 비운 지 오래 되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비 록 숲 깊이 들어오긴 했지만 사냥터치고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해서 레비앙은 짐짓, 소리가 나도록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바람결에 나뭇잎 떨리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아, 조금 심심하기도 해서였다. 아마도 사냥은 숲 가장자리 근처에서 만 하는 모양이다. 나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여긴 아마도 황제가 계시는 곳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일지도 모르지.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깨울 마음에 살짝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활처럼 휜 속눈썹이 길게 드리 워진 게 상당히 온순해 보인다. 눈을 감은 모습은 부릅뜨고 있을 때와는 많이 다르다. 뭔가, 아기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조금, 귀엽기도 하고……. '……귀엽다니.' 문득 자신의 생각이 바보 같다고 여겨진 레비앙은 소리를 죽여 작게 웃다말 고 여전히 엘스헤른의 잠든 얼굴을 살폈다. 날렵하게 잘 뻗은 콧등에는 어째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다. 더운 걸까? 그래도, 꽤나 쌀쌀한 날씨인데……. 레비앙은 조금 망설이면서도 손을 뻗어 손가락 끝을 엘스헤른의 콧등 위에 올려보았다. 잠들었는데도 느낌이 있는지 엘스헤른은 조금 움찔 하더니 이내 또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그 녘에 놀란 레비앙은 손을 잠시 들었다가 이 상한 기분에 다시 엘스헤른의 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발그레해진 엘스헤른 의 얼굴이 조금……. "너무 따뜻하네……." 레비앙은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엘스헤른 이야 뭐, 원래 따뜻한 체질이지만, 그래도 날씨가 쌀쌀한 것에 비하면 얼굴이 지나치게 따뜻하다. 레비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엘스헤른의 이마에 손을 가져 다댔다. '뜨거워.' 흠칫 놀라며 손을 땐 레비앙은, 자신의 어깨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는 엘스헤 른을 부축해서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는 그를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깨웠 다. "엘스. 일어나 봐. 이제 돌아 가야해." 금방 깨어날 듯 살풋 잠든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엘스헤른은 대답이 없었다. "엘스헤른." 레비앙은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가 어쩐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 분에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엘스.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장난은……." 옷깃을 붙들고 두어 번 흔들어도 엘스헤른은 전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 는다. 어떻게 된 걸까?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에 엘스헤른은 너무나도 창백하고 조용했다. "이런 장난은…… 싫어."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달싹거리는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그는 손을 올 려 엘스헤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일어나, 엘스. 일어나 봐!" - To BE Continued - ==================================================================== <65편 제작 비화> 1) 그녀에겐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2년 반만에 친구 만남, 제사용 전 부치기, 가족 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요 며칠 동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뭐, 하마터면 천애 고아가 될 뻔했습니다만, 가족들은 다행히 무사.(아부지의 저속 운전으로 살 아남.) 뭐, 이래저래 파란만장한 나날을 보내느라 글 쓸 틈이 없었다는.;; 2) 새로운 취미가 발생. 곰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 마리 만들고 나니 손을 놓을 수가 없더군요. 현 재 두 마리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_커뮤니티>네티즌광장>창작연재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6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01-19 조회수: 519 ┌───────────────────────────────────┐ │ ▶ 번 호 : 0/68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1월 19일 22:16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66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66) 너무 세 개 때린 모양인지 얼핏, 엘스헤른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는 귀찮은 듯이 손을 들었다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힘없이 툭 떨구어버렸다. "뭐라고? 안 들려." 레비앙은 다급한 마음에 엘스헤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다가 그의 얼굴 가 까이 귀를 댔다. "어지러워……. 흔들지…… 마." 물기 없이 마른 입술이 달싹거리며 작은 말소리를 토해 놓는다. 레비앙은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망연해 있다가 일단 엘스헤른을 잡아 당겨 앉혔다. 힘 들게 앉혀 놓았더니 엘스헤른은 가물거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싱긋이 웃는 다. "괜찮……." 미처 괜찮다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는 레비앙에게로 폭 고꾸라져 버렸 다. 품에 턱 안겨오는 엘스헤른의 무게에 밀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레비앙은 뒤로 급히 손을 짚고선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도무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무거운 녀석은 아예 제 몸 하나 가누지를 못하고 있는데……. 레비앙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가 다시금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 낌 새가 이상할 때 천막으로 돌아갔어야 했던 것을,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채우 고 든다. 기침을 연거푸 토해 낸 엘스헤른은 눈을 찡그린 채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녀석의 등을 다독여 주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레비 앙은 자꾸만 나약해지려 하는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일단 말에 태울 수 만 있다면 천막까지는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엘스헤른……."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부른 레비앙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처진 엘스헤른의 몸을 가누기엔, 레비앙 혼자의 힘으로 는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일으켜 세워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여차 잘못하면 쓰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길게 휘파람을 불어 근처를 노닐고 있을 말을 불러들였다. "엘스, 제발……." 어깨에 기대어 서 있는 엘스헤른을 쓰러지지 않도록 잘 붙들고서 레비앙은 말고삐를 잡았다. 이제, 어떻게 말에 태워야 하는 걸까? 발이라도 잘 못 때어 놓는다면 무게에 못 이겨 뒤로 꼬꾸라져 버릴 텐데……. 버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제는 어깨가 묵직하게 아파 오기 시작한다. "으음……." 나직하게 앓는 소리를 내던 엘스헤른은 레비앙에게 기대어 서 있는 자세가 자못 불편한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 며 서 있는 레비앙을 흘깃 보고는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시끄러워. 그런 말 할 정신 있으면 말에나 올라타." 뭔가 부드러운 말을 기대했던 엘스헤른은 날벼락같이 떨어지는 그의 말을 듣고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입에 발린 말을 하기엔 지금 버티어 견디고 있 는 이 상황이 레비앙에게는 무척이나 힘이 든 모양이다. 엘스헤른은 자꾸 풀 려버릴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돌려서 레비앙이 잡아 놓은 말에 기대 었다. "조심해서 기대어 서 있어." 엘스헤른에게 주의를 준 레비앙은 먼저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밑에서 잠자코 기대어 서 있는 엘스헤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서 엘스헤른은 자꾸만 누워버리고 싶은 몸뚱아리를 다독이며 안간힘을 다해 레비앙의 뒤로 올라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극심한 현기증이 돌아 레비 앙의 등에 푹 기대어 버렸다. 말에 오르는 것조차 무리가 된 건지 엘스헤른은 위태로울 만큼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레비앙은 걱정으로 바싹 타오르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서는 엘스헤른의 두 팔을 끌어다가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혹여 속력을 내어 달리 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큰일 터. 그는 한 손으로는 엘스헤른의 손을 모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고삐를 잡아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이제 무사히 천막이 있는 곳까지만 찾아가면……. ·‥…━━━━…‥· 천막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천막이 있었던 곳까지 찾아왔는데 눈 앞에는 그저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다. 레비앙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고 전방을 주시했다. 숲을 한 시간 동안이나 헤 맨 끝에 찾아온 장소이거늘, 그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 고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좋아……." 황당함에 넋없이 벌어져버린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숲이 그토 록 조용하던 것이 이제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개 짖는 소리는커녕 나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이 멀리에까지 사냥을 나가서였던 것이 아니라 이곳을 떠나버려서인 것이라고……. 한 순간에 이렇게 떠나버린 거라 면 아마 그다지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레비앙은 그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급박한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어떻게 연락조차 없이 다들 이 렇게 사라져버린 걸까? 레비앙은 이미 서쪽에 뉘엇 해진 해를 보고는 더더욱 참담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숲을 헤매느라 시간을 지체해서, 어느덧 해지는 맞은 편의 하늘은 감 청색의 아스라한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다른 말에 실려 가는 주인을 따라 여기까지 달려온 기특한 말의 자잘한 말발굽 소 리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레비앙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한숨 소리, 그리고 허허로워진 심정을 더욱 깊게 할퀼 것만 같은 싸늘한 바람 소리 뿐이 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갈 길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등 뒤의 엘스헤른은 괴로운 듯 기침을 쿨럭거렸다. 말을 달리느라 찬바람을 쐬어서 그 런지 아까보다 훨씬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다. 그의 잦은 기침소리에 마음이 아파, 레비앙은 일단 말(馬)을 걸렸다. 사람들이 갑자기 이렇게 철수해버린 거라면 아마 황궁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북쪽 레샤블랑쉬 숲의 여름별장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황궁은 이 곳으로부터 반나절을 꼬박 넘겨 말을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이기 때문에 수도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레샤블랑쉬로 가야겠어." 레샤블랑쉬라면 만에 하나 사람들이 그리로 향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황제 의 별장인 만큼,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시종들이 있을 것이다. 결심을 굳힌 레 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을 다독여 잡고서는 말의 속력을 높였다. 이대로 숲에서 해가 져버리기 전에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밤의 숲 같은 건 혼자서 헤맬 자신이 없었다. 비록 엘스헤른이 같이 있기는 해도 지금 거의 의 식이 없다시피 한데다가 환자이지 않은가. 말을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평원을 지나서 곧장 숲이 펼쳐졌다. 숲은 평 원에서보다 한층 어둡고 방향을 알아내기도 힘들어진다. 레샤블랑쉬라면 아주 어릴 적에 한 번 황제의 초청을 받아 가 본 것일 뿐, 가는 길에 대한 조금의 기억조차 없었다. 무작정 북녘을 향해 말을 몰고 있는 레비앙은, 긴장되고 초 조한 마음을 달래듯이 따스한 엘스헤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온 기 때문일까? 초저녁의 숲이 토해놓는 미묘한 소리들이 이제는 더 이상 겁나 지 않는다. 잔잔하게 스며오는 어둠이 공기를 포도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이제 얼마 있 지 않아 해가 질 텐데 레비앙의 말은 아직 레샤누아를 벗어나지 조차 못하고 있었다. 기침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엘스헤른의 몸부림이 레비앙의 등 에 여실히 닿아왔다. 레비앙은 자신이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가득 찌 푸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비록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엘스헤른을 안심시키기 위해 혼잣말을 꺼낸 레 비앙은 그 끝을 차마 맺지 못했다. 문득 숲 저쪽에 반짝거리며 아스라히 모습 을 드러낸 것에 다시금 말문이 막혀버려서였다. 아연한 주인을 아랑곳하지 않 고 기어코 그 곳에 닿아버린 말을 고삐를 당겨 세운 레비앙은, 조금 기쁘기도 한 마음과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드는 걱정에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지 금 눈 앞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것은, 레샤누아와 레샤블랑쉬 사이를 흐르는 강. 이제 레샤누아를 벗어났다는 다행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지금 레비앙은 과 연 이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어디엔가 분명 다리가 있을 테지만, 벌써 해는 저 멀리의 산을 넘어가 버린 터라, 다리를 찾 을 시간이 마땅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강을 걸어 건널 수도 없는 것이, 깊이 가 어느 정도 되는 지도 모를뿐더러 환자인 엘스헤른을 물에 젖게 할 수는 없 는 노릇이지 않은가! 레비앙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고서는 엘스헤른을 두고 말에서 내려섰다. 엘스헤른을 태우고 달린다면 그리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더 지체 될는지도 모른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얹혀져 있는 자신의 말을 끌어다가 근 처 나무에 잘 묶어 놓고 비단 외투를 벗어 들었다. 날카롭고 쌀쌀한데다가 습 하기까지 한 강가의 바람에 엘스헤른의 상태가 더 나빠지거나 할까봐 그는 자 신의 옷을 펼쳐 엘스헤른의 등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곧 여기까지 잘 따라 와준 엘스헤른의 말에게로 다가섰다. 말을 잘 다독여 고삐를 잡은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돌아다보며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곧 돌아올게, 엘스.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니까 아프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줘." 자꾸만 껄끄러워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삼키고서 레비앙은 말 위에 훌쩍 올 라탔다. 그러고는 강변을 따라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66편 제작 비화> 1) 자꾸만... 이번 회에서는 자꾸만 코믹스러운 분위기로 바뀌려고 해서 분위기를 붙들어 놓느라 고생했습니다. 어쩐지 이번의 장면들은 좀 우스꽝스럽게 써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만, 앞 뒤의 일관성을 위해 참았습니다. 흙흙.TT-TT 마음 대로 꼼지락거리려고 하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아직도 남아 있는 시 련을 향해 돌진! 2) 사이드 스토리 준비 중. 레비앙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오묘하네요. 춥 고 메마르고 경직되어 보인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현재 <레비앙 & 레비 안느>의 시점에서 아주 조금 과거(약 20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많이 과거틱 한 것 같이 느껴진다는. 본인은 쓰면서 상당히 재미있어 하고 있습니 다. 아, 내용이 재미있다는 게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자체가 재미있다는 거 죠. 뭐랄까, 상당히 상큼하니까.^^;; 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시도해보 고 있습니다. 묘사도 많이 줄였어요. 암튼, 이 이야기는 짧게 쓸 예정입니다. 지금 에 싫증을 느낀 페르티의 호구지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연재 중단 방지 정책의 일환입니다. 글이 안 써질 때는 놀지 말고 다른 글이라도 쓰는 거죠.^^ 곧 관심이 로 돌아올 테니 두고 보십시오.; 3) 신체검사를 가다! 2001학년도 초등교사 임용 경쟁시험에서 일단 합격을 했습니다.만.;; 그러 고 나니까 할 일이 무지 많아지는군요. 뭐, 채용신체검사 및 서류구비작업에 난황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신검에서 피를 한 움큼이나 뽑혔기 때문에 지금 은 빈혈. 따라서 뇌의 회전속도도 그만큼 줄고, 글 쓸 기력도…… 휘청휘청. 4) 다음 편 맛보기!! 하핫.; 이번 편은 너무 했나요? 두 사람만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많 은 사람들이라니. 그런데다가 해는 지고, 건너야할 장애물도 나타나고. 오호 호호홋~! 하지만, 펠티는 "아직 전혀 심하지 않아!" 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누가 말했던가, 시련은 뭉탱이로 온다고!!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답니다. 생긋.^^ (마구마구 괴롭혀 주마, 레비앙!)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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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진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고작 그것밖에 없었 다. 정말로 지금 이 순간, 처참한 이 상황을 향해 시원하게 욕이라도 뱉고싶 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하는 탄식도 잠시 레비앙은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황을 살폈다. 문득, 올려다보는 시야에 엘스헤른의 말이 어슬렁거리면서 나타나서 그를 말똥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들어와, 그는 그나마 안도를 했다. 녀석은 레비앙이 괜찮은지를 살피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콧등으로 가만히 그를 두드렸다. 레비앙은 비록 자신을 떨어뜨리긴 했 지만 그런 녀석이 대견스러워,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녀석의 목을 두드렸다. "다행이야, 네가 다치지 않아서……. 나도 곧 일어날게." 마음이 놓여서일까? 어째 정신이 아득해진다. 레비앙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만 손을 떨구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거나 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가물가물한 기분은 정말 꼭 정신을 잃는 거나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곁에서 엘스헤른의 말이 팔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느낌 도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고, 등을 온통 파고드는 것 같은 냉기도 어쩐지 옅 어지는 느낌이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 ·‥…━━━━…‥· "하아."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에 문득 놀라 눈을 뜬 레비앙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 았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걸까? 검게 보이는 나무 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밤의 색채는 한결 짙어져 있다.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머리 위 저 까마 득한 곳에서 들려오고 풀숲에는 알지 못할 것들의 소리가 자욱하다. 숨을 들 이 쉴 때마다 폐 속으로 스며드는 것은 저녁 숲의 내음. 아마도 시간이 꽤 지 난 모양이다. 레비앙은 부서질 것만 같은 몸을 추스려 일어나 앉았다. 차가운 곳에 쓰러 져 있어서 그런지 몸 구석구석을 얼음 바늘로 찌르는 듯한 냉기가 파고든다. 엄습해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가 그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간 정 말, 로자리움에 돌아갈 언젠가는 - 지금, 그는 자신이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몸이 넝마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레비앙은 나직히 쓴웃음을 지었다. 풀숲에 떨어진 것이 천만 다행으로, 온 몸이 욱씬거리는 것만 빼면 특별히 부러지거나 삔 데는 없는 것 같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쉬고는 얼른 몸을 일 으켰다. 바닥에 발을 딛고 서는 것만으로도 몸이 아스러질 듯이 아파 왔다. 레비앙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고서 힘겹게 나무에 기대어 섰다. "최악이야, 정말. 이 꼴로 집에 가면 다들 난리를 피우겠군." 수석 시녀 메리벨 부인, 그리고 전속 시녀인 모니카, 그 외에도 수많은 시 녀들과 시종들, 심지어는 집사 할아범까지 온 집을 발칵 뒤집어 놓을 듯이 굴 겠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재미있을 듯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춥고 아프고 심지어 외롭기까지 하다. 문득 괜스럽게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하염없이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져버리는 것이었다. 혼자서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인적 없는 곳에 쓰려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터. 정말 모를 일이다. 어째서 이토록 마음이 허허로운지. 그는 옷에 붙은 나뭇잎과 먼지를 대충 떨어낸 후, 자신의 곁에서 어슬렁거 리고 있는 엘스헤른의 말을 다독여 잡았다. "착한 아이로구나. 여기서 계속 기다려 주다니……." 말의 콧잔등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레비앙은 욱씬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말 위에 올랐다. 겨우 말에 오르긴 했으나, 막상 말을 달리려다 말고 생각해보니 어째 두고 온 엘스헤른이 걱정된다. 모르긴 해도 여기에서 쓰러져 있은 시간 이 꽤 되는 것 같고, 기온도 한층 떨어져, 가뜩이나 감기로 열이 펄펄 끓는 녀석의 환후가 지금쯤 더 심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곱씹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말고 천천히 말을 걷게 했다. 이왕 이렇게 되어버린 것, 좀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엘스헤른을 데리고 가 는 것이 마음에 놓일 듯 했다. 아픈 모습을 보더라도 옆에 있는 것이 한결 걱 정이 덜 들 테니까……. 숲을 막 벗어나자 습기를 머금은 강바람이 확 불어 젖힌다. 어지러운 마음 과도 같이 오갈 데 없이 나부끼는 바람은 달빛의 가루를 실은 듯 눈에 보여 손을 내밀기만 해도 잡힐 것 같다. 고통스러운 육체와는 반대로 정신은 어쩌 면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인식하고 있는 걸까?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미간 을 살풋 찌푸렸다. 가라앉은 숲의 내음은 검푸른 색채로 일렁거렸다. 숲의 야 경은 이 곳의 이름과도 같이, 그렇게 검은 고양이의 움직임처럼 때로는 느리 고 얌전하게, 때로는 신선하리만큼 발랄하게, 또 때로는 녹녹한 움직임으로 느껴져 온다. 어지럽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쉴 새 없는 움직임이 강가를 비추 는 뽀송한 달빛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레비앙은 한숨과 함께 살짝 눈을 내리 감았다가 떴다. 마치 환상을 보고 있 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주 문득, 정작 자신은 아까 말에서 떨어졌을 때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실소를 머금기도 했다. 자신 의 육체는 그 곳에 죽어있고, 지금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은 영혼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저 멀리에 누군가가 말을 몰 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스름히 눈에 들어왔다. 레비앙은 반가운 마음에 속력을 내어 그쪽으로 다가갔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만 말을 멈추어버렸다. "엘스……."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아마도 너무 감상에 젖어 있었던 모양이라고 자신을 질책한 레비앙은 그가 이쪽으로 다가올 때까지 잠자코 서 있었다. 이 시간 이 곳에 있을 사람이라고는 그 자신이 두고 온 엘스헤른 밖 엔 없다. 밤의 숲에는 숲지기조차도 어지간한 일이 없다면 잘 돌아다니지 않 는다. 게다가 근처에는 변변히 마을도 없지 않은가! 그냥 얌전히 그 곳에 있 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 아픈 녀석이 어쩌자고 저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레비앙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가득 불편해 한숨을 몰아쉬었다. 걱정이 소용 돌이처럼 가슴 속을 휘돌아 목에 뭔가 뜨뜻한 것이 걸린 기분이다. "레비앙?" 그를 확인하기 위해 들려오는 힘없는 목소리에 레비앙은 가볍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고는 젖은 한숨과 함께 엘스헤른에게 작게 핀잔을 날렸다. "어련히 데리러 갈텐데 왜 온 거야? 아픈 사람이……." "내버리고 갔다고 생각했어." 담담하게 웃음 짓는 엘스헤른. 그 모습에 레비앙은 어쩐지 목에 걸린 뜨거 운 것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숨을 꾸욱 눌러 참았다. "아, 농담 한 거였는데……." 엘스헤른이 무안한 듯 말끝을 흐리는 것을 듣고서야 레비앙은 자신이 굉장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아마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너무 깊이 감상에 빠져 있었나보다. 이렇게 사소한 농담 따위 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버리다니. 레비앙은 애써 마음을 다독이고서는 엘스헤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버리고 갈 리 없잖아. 난…… 길을 몰라서, 그냥 찾고 있었던 거야. 아픈 녀석을 끌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도 무리일 것 같고 해서." "그래, 길은 찾은 거야?" "…… 아니." - To Be Continued - ==================================================================== <67편 제작 비화! 그것을 알려주마!> 1) 또다른 취미생활의 간섭효과. 그것은 다름 아닌, 바비 인형 옷 만들기. 시간을 아주 많이 잡아먹는 끔찍 스런 괴물과도 같은 취미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산물은 아주 빛나고도 찬란해 서 떨칠 수 없는 유혹이 되어버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선 펠티의 화장 대 앞에는 이 날 동안 드레스를 만들어서 꾸며둔 바비 인형이 생긋 웃으면서 서 있다. 어찌 저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손이 저주스럽기 그 지없다. -_-; 2) 까치 까치 설날은∼ 네, 까치 설날과 우리 설날 모두 잘 지내셨나요? 여러분.^^ 저는 집안의 장 녀 노릇을 독톡히 하고 이렇게 몸살을 안고 복귀했습니다.(위에는 반말인데 갑자기 존댓말로 돌변.;) 설날 동안 너무 많은 일과 너무 많은 잠과 너무 많 은 아이들에 시달린 탓에 피곤의 극에 달한 저는 지금 헤롱헤롱 상태. 그런 고로 원고가 늦어진 겁니다. 쿨럭.; 3) 의욕 부진. 요즘, 만사가 귀찮고 뭘 해도 재미없으며(라면서도 줄기차게 인형옷을 제작 중.) 집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때기 싫은 페르티. 그런 고로 컴터 앞에 앉기도 귀찮아져 즐기던 통신은 물론 인터넷 서핑까지도 너무 안하고 있는 상태. 몸 이 허해서 그럴까요? (허리도 아푸고. 쿨럭쿨럭.) 4) 다음 회 맛보기. 네, 드디어, 기다리시고 고대하시던 다음 회 맛보기 시간! 자, 엘스헤른이 애써 레비앙을 마중 나왔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열이 펄펄 끓는 사람이 언제 까지 저렇게 멀쩡해 있을까요? 호호호홋. 이내 또 정신을 잃는 건 아닐까요? 아무튼, 레비앙의 시련은 여기서 끝난게 아닙니다. 말에서 떨어진 걸로 끝이 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자, 그럼 다음 시련은 무엇?! 과연 그들의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다음 회, 기대 만땅!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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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야." 주고받는 말은 참으로 무미건조했지만 레비앙은 이런 것에서나마 어째 위안 이 되었다. 지금은 적어도 혼자가 아닐뿐더러, 이 녀석 또한 어쩐지 아까보다 는 괜찮아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어서 터져 나온 엘스헤른의 기침소리에 그는 녀석이 전혀 나아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겨우 감기 따위로 도 깊은 병이 될 수 있음을, 죽을 만큼이나 아플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 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감기가 악화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엘스헤른은 그저 곤한 표정으로 싱긋 웃음을 지으면서 앞장을 섰다. "가자. 네가 레샤블랑쉬로 가려고 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가는 길을 알고 있으니까 잘 따라와." 앞서 말을 몰고 가는 엘스헤른의 뒷모습에 넋을 놓고 있던 레비앙은 정신을 일깨우는 싸늘한 바람결에 한숨을 몰아쉬고서 그의 뒤를 따랐다. 별 말 없이 그저 묵묵하기만 한 엘스헤른이 오늘따라 무척 듬직하다. 저 넓은 등을 보고 있으니까 안도가 되는 마음이란 참으로 묘하다. 기대고 싶은…… 심정. 그저 나비가 내려앉듯이 그렇게 살며시 기대고 싶은, 그런 심정을 달래느라 레비앙 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밤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아득한 어둠이, 그 싸늘한 그림자가, 밤을 따 라 무거워 지려하는 마음을 삼켜주면 좋으련만. 어찌 이리도 마음은 느리고 답답한 완만한 굴곡을 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레비앙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벗어나지 못할 동그란 쳇바퀴를 자꾸만 돌고 있는 작은 동물, 자신의 마음은 그와 같다는 것을,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바람결처럼 그렇게 갑자기 깨 달았다. 이 작은 두근거림을 두려워함은 오로지, 앞서 걷고 있는 저 사람과의 관계 때문임을 그는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그와 다시금 멀어져 버릴까봐 염 려되는 마음, 단지 그 한 이유였다. 어디까지나 지금 이대로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큰 기대일는 지도 모른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그런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끝내 수긍하고 싶지 않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변화는 끔찍 하게도 그 기대를 허무하게 흩어지는 물거품처럼 만들어버린다. 영원히, 그저 웃고 웃을 수 있는 어릴 적의 사이 같으면 좋겠다고 그가 생각한 것은 엘스헤 른의 변해버린 모습을 보기에 앞서 훨씬 이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냥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만으로도 그를 놓칠세라 두려워했던 자신을 레비앙은 잘 기억 하고 있었다. 안타까움은 발을 구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흘러가 는 시간도 아쉬워한다고 해서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변하는 마음일랑 어떻게 잡을 수가 있을까? 레비앙은 밀려드는 서글픔에 콧등이 아려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엘 스헤른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는데도 아득히 불안하고 마음이 들뜨는 것은 뭔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그는 두려웠다. 어쩐지 알지 못할 두근거림이 가슴을 채우는 느낌은 달갑지 않은 일이므로……. 잔인한 달빛은 그런 그의 마음을 비출 듯이 뽀얗기만 했다. 하얀 가루가 되 어 어지럽게 내려앉는 달빛은 앙상한 나뭇가지 뒤로 가끔씩 몸을 숨겼다가 다 시금 어두운 하늘에 자신의 몸을 내 던지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잔잔한 소리를 토해놓는 강을 지나서 레샤블랑쉬 숲으로 들어섰을 때는 한참 따라오 던 달빛도 상당히 뒤로 물러난 후였다. 다행히도 얼마가지 않아 레샤블랑쉬의 경관이 눈 앞에 펼쳐졌다. 자그마한 저택은 아스름한 밤의 두터운 장막이 드리워진 채 믿을 수 없는 고요 속에 파 묻혀 있었다. 오목조목 꾸며진 아름다운 정원에 둘러싸인 본관은 오로지 달빛 으로만 그 모습을 밝히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처녀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게 자태를 내 보인 저택은 어쩌면 마치, 처음부터 적막과 하나였던 듯 해 보였 다. 레비앙의 기억 속에 있는 예전의 언젠가, 그 때 보았던 왁자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일부러 그래놓은 것처럼 전혀 불빛조차 새어 나지 않았다. 물론 저 안에는 환자인 엘스헤른을 돌봐 줄만한 누군가가 있으 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레비앙은 어쩐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있을 것이 라고. 허나, 단 한군데도 불이 켜진 창이 없는 저택을 바라보면서 그 어떤 믿 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낮에 사냥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그 어떤 사람도 저 곳 에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는 심연으로부터 고개를 드는 걱정을 달랠 도리 가 없었다. "하아, 이상하게 조용하네. 쿨럭쿨럭." 엘스헤른이 흘린 말 한 조각은 그렇지 않아도 미심쩍어하던 레비앙의 마음 에 파문이라도 일으킬 듯이 던져졌다. 앞서서 가고 있던 엘스헤른 역시도 이 비정상적인 고요에서 적지 않은 불안을 느낀 모양이었다. "콜록……, 제길. 대체 어디까지 장난을 쳐 놓았단 말이야. 컥, 쿨럭 쿨럭." 비록 기침과 섞여있다고는 하지만,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분명한 그 말의 의 미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장난이라니……? 대체 무슨 말 일까? 의아해하는 레비앙을 뒤로하고, 엘스헤른은 문득 말을 세워 그 등에서 내려 섰다. 정교하게 꾸며진 정원을 통과하는 하얀 타일의 길 한가운데에서 저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자신을 따라 말에서 내려선, 등 뒤의 레비 앙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응?" "너까지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말야……. 정말…… 미안해." 여전히 엘스헤른이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레비앙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 가섰다. 느닷없이 사과하는 그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나 뒤에서 본 엘스헤른은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일단 안에 들어가면 괜찮을……." 레비앙은 뭔가 그를 안심시키고 싶어서 웃으며 말을 건넸으나 곧 엘스헤른 이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 여기엔 우리 둘 밖에 없어." "무슨… …소리야?" "지금 저 레샤블랑쉬 저택은 텅 비었다구." 엘스헤른이 하는 말을 듣자마자 레비앙은 소용돌이 속에라도 휘말린 듯한 어지러움이 밀려옴을 느꼈다. 언어라는 것은, 그 힘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이미 지레짐작하고 있었던 것임에도 그것이 언어로 확인되는 순간에는 거부할 수 없는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사실이라는 족쇄가 되어 마음을 옥죄어 온다. 허나, 행여나 하는 생각이 그 와중에도 문득 솟아올라 레비앙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하인들이라도 있을 거야. 없을 리가 없잖아. 여기는 폐하의 별장인데." "하인들,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저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저토록 어두울 리 없겠지. 잠겨있지 않다면 오히려 다행일 걸?" 고생 해가며 찾아온 곳이 기껏 아무도 없는데다가 텅 비어있는 잠긴 저택이 라니, 레비앙은 허탈함에 온 몸이 다시금 욱씬거리는 것 같았다. 엘스헤른의 연이은 기침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레비앙은 심하게 기침을 토해놓는 그 를 얼른 붙들었다. 멈추지 않는 기침에 괴로워하면서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엘스헤른을 붙잡으며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주저앉고야 말았다. 엘 스헤른을 다독일 겨를도 없이 일순 가슴에 통증이 밀어닥쳤다. 아까 낙마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듯 했다. 언뜻 엘스헤른의 기침이 멎었다고 생각되는 찰나, 레비앙은 장미꽃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 정신이 들었다. 금방 넘어가기라도 할 듯한 엘스 헤른의 다급하고도 거친 숨소리, 등골을 싸하게 훑어 내릴 것만 같은 불안, 쓰러진 친구의 얼굴색과도 같은 창백한 달빛…… 지금 오감을 자극하는 이 모 든 것들이 그를 알지 못할 공포로 등 떠밀고 있었다. "엘스?"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지만 허망하게 열린 입술은 문득 그의 이름을 읊조 렸다. 이내 그 입술은 한숨을 토해내고서 파르르 떨렸다. 레비앙은 미간을 찌 푸리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제길." ·‥…━━━━…‥ 벽난로에 발갛게 불이 오르는 것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작게 한숨을 돌렸다. 손에 들린 쟁반에는 잘 데운 포도주가 고풍스러운 무늬가 돋 을 새겨져 있는 은빛 병에 담겨 뽀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을 데우느라 불에 데인 상처가 쓰라려왔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만한 정신이 그에겐 남아있 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엘스헤른을 침대에 눕혀 놓고, 장작으로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등의 일을 끝냈지만 지금은 아까 어떻게 창문을 넘어 이 곳으로 들어 왔는지 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 간혹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놓는 - 엘스헤 른의 곁으로 다가가 포도주를 침대 맡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엘스헤른의 매 끈한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물수건을 다시 다독여 얹은 레비앙은 손에 스며 상 처를 따갑게 하는 물기에 흠칫 놀라 손을 거두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스며 드는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신없이 장작을 나르느라 긁힌 상처인 듯, 촛불 아래 드러난 그의 손은 온통 발그레하게 핏물이 베어 있었다. 추워하는 엘스헤른을 위해서 한 일 치고는, 고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또래의 평범한 여자애들은 일상처 럼 하는 그런 일조차 힘겨워하는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신분이 증오스러워지 기까지 하니까. 뭐, 지금에서야 느끼건대, 그다지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음 에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먼 일처럼 여겨진다. 레비앙은 내려다보고 있던 손을 가볍게 주먹 지으며 이내 엘스헤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데운 포도주라도 먹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부랴부랴 마련해서 가져오니 먹일 일이 아득하다. 의식이 없다면 삼키는 일도 만만치 않을 텐 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말고 포도주를 컵에 따랐다. 쪼르륵 맑 은 소리를 내면서 불빛에 발그레하게 비치는 반투명한 액체가 하얗게 흐트러 지는 김 속에서 컵에 담겨 든다. 막상 만반의 준비를 취하긴 해도 그는 컵에 담긴 포도주와 엘스헤른을 말끄러미 번갈아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도리가 생각 나지 않았다. 컵을 통해 포도주의 온기가 손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레비앙은 일말 의 결심에 짧게 숨을 돌렸다. 달리 떠오르는 방도라고는 이것 밖에 없어 망설 여지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 그는, 침대 맡에 걸터앉아 들고 있던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엘스헤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 닿았다. - To Be Continued ==================================================================== <68편 제작 비화, 그것을 알려주마!> 1) 펠튀는 지금 연수 중. 아침 7시에 집(진주시)에서 나서서 8시 30분에 창원에 있는 연수원에 도착, 저녁 5시가 되도록 그 곳을 떠나지 못하며 연수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뭐, 판소리 같은 재미있는 것을 배우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강의를 듣고 있지요. 집에 도착하면 저녁 6시 30분이 되고 밥 먹고 이래저래 일처리 하다보면 밤이 후딱 지나서 잠이 들게 되어버리네요. 2) 몸이 안 좋다.T-T 무릎과 허리가 시린 것은 아예 일상사! 요전에는 체해서 내내 페퍼민트 차 를 마시고 있는 중입니다. 온 몸이 찌뿌둥한 것이 파스가 떠날 날이 없네요. 이건 아마도 레비앙을 말에서 떨어뜨린 죄가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쿨 럭.; 3) 썰렁……. 내용이 요즘 구리해서 그런지 몰라도, 독촉이 거의 없는 중.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글쓰려 하니 눈물이 핑 돌고 손이 시릴 수 밖에.TT-TT 아, 참 이번에 "레비앙 안 보면 금단 증세가 나타난다!" 라고 독촉해주신 분, 아뒤를 따로 적어놓지 못 했네요. 다시 메모 주시면 앞으로 메모 서비스 해드리겠습니 다.^^ 그리고 티나 님, 데빌로아 님, 귀쥬 양 감사.^^ 초아도취 님도 메일 감 사드려요. 에, 그리고 도묘지츠카사 님, Choi1110 님, 감상 감사드립니다. 빠 진 분 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기억력 감퇴가 극심하여.;;; 4) 다음 편 맛보기! 저와 독자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소리. "이제 사냥 대단원은 지겨 워!" 허나,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BUT!! 다음 편이 마무리가 될 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며누리도 모릅니다, 귀신도 모릅니다! 뭐, 다음 편에 는 엘스헤른이 XXXXXX해서 XXXX하고 XXXXX하지 않을까 하고 감히 상상해 봅 니다. 엘스가 뭘 하느냐고요?! 아앗, 위에 말했잖습니까! XXXXXX해서 XXXX하 고 XXXXX한다고! 그럼 기대만땅! (뭔가 사기꾼 같은 기분에 빠져드는 펠튀.;)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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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워……. 음? 춥다는 걸까?" 눈을 말똥거리며 엘스헤른을 관찰하고 있던 레비앙은 손을 내밀어 엘스헤른 의 뺨을 만져보았다. 이렇게 뜨거운데 어째서 추워하는 걸까? 의아해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엘스헤른의 얼굴을 따라 손을 쓸어 내렸다. 한 점 티 조차 없는 매끈한 곡선은 새하얀 달의 윤곽처럼 보드랍게 떨어진다. 살짝 감 겨진 것 같은 눈은 지금이라도 그 잿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뜨일 듯 했으나 참 으로 깊이 잠든 듯 어쩌면 미동조차 없었다. 레비앙의 손 끝은 그의 시선과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감은 눈의 눈꺼풀, 길다란 속눈썹, 오똑한 콧망울, 인 중을 지나 발그레한 입술 위……. "다른 사람 같아." 혼잣말은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나온다. 정말, 지금 그가 손 대 고 있는 이 사람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그 사람과는 전연 다른 이 같았다. 이 렇게 무방비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은 어쩌면 생소하기까지 했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어릴 적의 일들이 눈에 잡힐 것만 같은데 이렇게 커버린 어른이라니……. 그는 그만 손을 거두고는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괜한 생각들에 마음 이 설레긴 했으나 추워하는 엘스헤른을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할 터였고, 그가 날라 올 수 있는 이불은 이미 동이 난 터였으므로 레비앙은 결국 체온으로 데 워 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했건 친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니 까, 추위를 타는 친구를 위해 가볍게 안아주는 정도도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 다. 레비앙은 머뭇거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엘스헤른을 끌어안았다. 이 두 근거림에 곤히 잠든 친구가 깨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엘스헤른의 허리를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꼭 안긴 것처럼 되어버려 이상한 모양새이긴 해도, 이러고 있는다는 게 참으로 안온했다. 따스한 온기와 규칙 적인 고동 소리…….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감고서 그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 였다. 의식의 한 자락을 놓는 기분이란 뽀얀 새털이 날리 듯 그렇게 보드라웠 다. ·‥…━━━━…‥ "콜록……." 스스로의 기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엘스헤른은 뭔가 가득 짓눌리는 느낌 에 가만히 몸을 뒤척였다. 알 수 없는 무게가 겹겹이 쌓여 내리누르는 것이 돌아눕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깜빡여 갑갑하 게 옥죄어 오는 무게감의 정체를 살폈다. 그러나, 채 인식할 수 없는 거대하 고도 새하얀 동굴에 파묻혀 버린 듯한 상황에 그는 할 말을 잃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이…… 이불?' 어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의 정체를 속으로만 외치 고 만 엘스헤른은 묵직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갑자기 나타난 이 수많은 이불들은 대체 어디서 난 거란 말인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문득 시야에 들어온 상황에 놀라 기침을 속으로 삼켰다. "크읍!" 돌아눕자 마자, 이건 또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바로 눈 앞에서 잠들어 있는 이 사람은 정녕 레비앙임에 틀림없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엘스헤른은 문득 여기가 자신의 방이 아님을 깨닫고는 어제 정신을 잃은 이후 일어난 일 들을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이곳은 분명 레샤누아 저택 안이고, 쓰러져버린 자신을 이리로 옮긴 사람은 다름 아닌 레비앙이라는 것. 그래서 그가 이토록 곤한 모습으로 잠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레비앙의 작은 숨소리가 금새라도 닿을 만한 거리에서 은은한 유혹을 던지 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놀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에 가빠진 자신의 숨결을 가다 듬으며 미동 없이 레비앙을 응시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아른하게 비치 는 살결이란 진정 만져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마음 속에서 절실하게 샘솟는 충동을 억눌렀다. 이 아름다운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햇살이 흩뿌려놓은 옅은 황금빛에 레비앙의 탐스러운 머리칼이 선명하게 반 짝거린다. 어쩐지 조금 흐트러져 있기는 해도, 그것은 하늘하늘 움직이는 불 길처럼 그렇게 곱디고운 빛깔로 적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저 하얀 얼 굴을 감싸는 듯이……. 이렇게 정신없이 레비앙을 감상하고 있으려니까 묘한 감회가 엘스헤른의 마음을 가만히 채우고 들었다. 빛의 안개에 감싸 놓이기라 도 한 양 뽀얗고 감미로운 레비앙의 잠든 모습, 그 아름다움은 깔끔하도록 청 명함에 반해, 되려 요요한 영롱함을 풍기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고요에 따스한 나른함으로 다가오는 평온. 그것을 가득 채우는 단 하나의 것은 두근거리는 엘스헤른 자신의 고동소리였다. 간지 러운 온기를 실은 박동은 점점 그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애써 다독인 마음 은 미풍에 날리는 민들레 꽃씨와도 같은 것. 그리고 그 빈자리를 천천히 채우 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욕심. 작은 불씨처럼 마음 속을 비추기 시작하는 애틋 함은 간절하게 레비앙을 향하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가만히 고개를 내밀어 레 비앙의 분홍빛 입술 위에 입을 포개고야 말았다. 그저 마주 닿아 있는 것 만 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소유한 것 같은 충만함이 가슴을 채운다. 한참만에 그가 숨을 몰아쉬며 다시금 베개로 고개를 떨구었을 때, 문득 그 의 시야에 맑은 초록빛이 스쳤다. 반짝 눈을 뜬 레비앙은 미온의 감촉을 남겨 놓고 잠시 멀어진 엘스헤른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한 거야?" 또록하게 눈을 깜빡이기는 하지만 아직 잠결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금방 전 그의 입술에 머물렀던 알지 못할 감촉에 대해 물어오는 레비앙을 보며 엘 스헤른은 소리 없이 투명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아직 채 돌아오지 않 은 약간은 까칠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하고 싶은 것의 반……." "응?" 알아듣지 못한 레비앙이 되묻자, 그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은 입 술을 움직였다. "너에게 입맞추고 싶어." 그의 대답을 들은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끄러미 그를 쳐다보았 다. 순간 가슴이 철렁 했던 것의 이유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 금은 한 조각의 생각조차 없어져버린 듯 멍해져서, 이렇게 엘스헤른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엘스헤른이 상체를 일으켜 팔을 뻗었고 그의 그림자가 떨어지듯 레 비앙에게로 드리워졌다. 그가 내민 손은 이내 레비앙의 길고 하얀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하나 하나마다 온기를 전해오는 엘스헤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서야 레비앙은 정신을 차리고 엘스헤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찰나, 엘스헤른의 입술이 따뜻한 탄력을 싣고 그의 입을 막아 놓았다. 하 려고 했던 말은 미처 나오지도 못한 채 묻혀버리고 엘스헤른의 부드러운 입술 만이 레비앙의 감각을 잠식해왔다. 순간의 망설임은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에 충분하다. 마음 속으로부터 일어난 동요에, 마치 잔잔한 수면으 로 던져진 물체로 인해 파문이 일 듯이 싸한 감정은 점점 퍼져나간다. 그저 망설이는 마음만으로도 어느새 거부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해져버리는 이 유를 레비앙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엘스헤른이 잡고 있지 않은 손을 올려 그의 가슴을 지긋이 밀어냈다. 친구라고 애써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쩐지 진정되지 않을 마음 때문 이었다. 이것은 친구 사이에는 분명 용납되지 않을 행위. 그런 고로, 레비앙 은 갈등을 접고 선뜻 그를 밀어낸 것이었다. "이러지 마." 문득 고개를 든 엘스헤른에게 레비앙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심 정을 말로 나타내기에는 때로 정말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의 무리가 있을 때 도 있다. 그는 자신의 심중을 설명하기 어려워 그저 짧은 말로 일축하고 말았 다. 이 마음을 밝혀 말하려 한들, 그것은 그대로 사뭇 변명이 되어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서였다. "……." 엘스헤른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말없이 레비앙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자신이 실수하고 말았음에 아연하여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 같았지만 애써 내색을 감 추었다. 저 단호한 말 한 마디와 살짝 찌푸린 표정만으로도 그는 레비앙이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했다. 레비앙이 바라는 것은 진정, <친구>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런 것을, 아주 당연스럽게 무시하고 있었던 것 은 바로 엘스헤른 자신인 것이다. 그는 깍지를 껴 잡고 있던 레비앙의 손을 살며시 놓아두고는 깊은 한숨과 함께 침대에 도로 누워버렸다. 원하지 않는 후퇴였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면 지금 간신히 레비앙과의 관계에서 이루고 있는 균형은 또다시 깨져버릴 것이다. 한숨을 내쉰 엘스헤른 은 입을 열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흘려냈다. "나…… 잠이 덜 깨었나봐. 꿈인 줄 알았지 뭐야." 가슴 속에서 짜여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고통스럽다. 엘스헤른은 아 릿해져 오는 가슴 녘을, 그 언저리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욕구불만인 걸까? 그런 묘한 꿈이라니 말이야……." 넌지시 마음의 한 자락을 흘리고 작은 기대를 실었으나, 레비앙은 잔인하게 도 그런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했다. 엘스헤른이 말한 그대로의 껍질 같 은 의미를 고스란히 믿는 듯, 레비앙은 안도하는 것 같은 한숨을 지었다. 그 러고는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엘스헤른의 위에 덧쌓인 수많은 이불들을 조금 치워주었다. "내내 추워하기에 이렇게 많이 덮어줬는데도 소용없었지 뭐야." 이제 완전히 안심해 버린 듯, 레비앙은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어젯밤의 이 야기를 털어놓았다. "추워했다고?" 별 의미 없이 그의 말에 대꾸한 엘스헤른은 씁쓸해지는 심사를 달랠 길이 없어 그나마 이불이 좀 얕아져 홀가분한 몸을 작게 뒤척였다. "음. 뭐라고 종알종알 하길래, 가까이서 쳐다봤더니 "추워."라고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마도 "무거워."였을 걸?" "응?" "저 산더미 같은 이불이라니, 질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로군." 일상의 대화 같은 뜻 없는 말들. 엘스헤른은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그 러지 않는다면 이렇게 아파 오는 마음은 평정을 잃고 날뛰어버릴 것만 같았 다. 겨우 되찾게 된 소중한 관계를 한 순간의 고통에 못 이겨 다시금 져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념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 히려 굳건하게 타오르는 소유욕이 마음 속을 잠식할 듯한 불길처럼 번져들고 있었다. 그저,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라는 말로 그는 자신을 제어했다. 그러고는 아 직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레비앙에게서 등을 돌리고 가만히 눈 을 내리 감았다. 억눌러진 욕망이 돌출구를 찾아 마음 속을 맴돌고 있음을 엘 스헤른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은 유리벽 너머에 있는 것, 생 각 없이 달려들었다가는 여지없이 부딪히고 말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국 다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 역시. 레 비앙이 그어 놓은 <친구>라는 투명한 벽은 어쩌면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인지 도 모른다. 그저 태연하게 벽 너머 저 편에서 자신도 모를 유혹을 던지는 레 비앙을 보면서 애를 태우는 사람은 결국 자기 혼자라는 것이 차갑도록 씁쓸했 다. 밝은 햇살 때문에 다시금 가늘게 눈을 뜬 엘스헤른은 낮은 한숨과 함께 작 게 입을 움직였다. "잔인해, 정말." 하지만 그것은 레비앙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 To Be Continued ==================================================================== <<69편 제작 비화>> 1) 메모 서비스 아이디 목록을 날려먹다. -_-; 으음, 메모 서비스에 들어 계시는 분들은 그나마 독자 여러분들 중에서도 저 페르티에게 피드백을 던져주시는 분들인데, 저의 한 순간의 실수로(다른 것을 지운다는 것이 메모 서비스 아이디 목록을 날려버림) 지워져버렸습니다. 달리 목록을 손으로 적어 놓은 것도 없고 하여, 나름대로 복구를 한다고 하긴 했으나 결국 새로 만들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이 글을 보 시는 즉시, "이번 편(69편)이 올라왔다."는 내용의 메모 서비스를 받지 못하 신 분은 저에게 메모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아무쪼록, 고마우신 독자 여러분들께 폐가 되는 것 같아 송 구스럽습니다. TT-TT 2) 연수가 끝나고 나니 도로 주행 연습.;;; 빡빡한 스케줄이 사람을 녹초로 만들고 있습니다. 겨우 연수(초등신규임용 예정교사 연수)가 끝나 쉬게 되었나 싶었더니, 바로 도로주행 시험 연습에 돌 입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신없는 나날이 반복되는군요. 아, 임용지는 선 지망을 합천으로 냈습니다. (해인사가 있는 도시죠.;;) 근처에 사시는 분은 연락을.;;; (뭐, 뭐하게.;;;) 3) 다음 편 예고. 이번 편도 자체 심의에 걸려 삭제된 부분이 있어 안타까울 나름. 삐리리한 장면은 결국 언제 나올 것인가?! 하지만, 다음 편에는 이 불운한 두 사람이 그토록 고난을 겪었던 이유가 밝혀지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레비앙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지도. (오호호호호호홋.^^;) 그럼 모두 다음 편을 애타게 외쳐봐요~! "냐옹!" 4) Thanks for you~! 68편은 감상도 많았습니다. 세 편이나! >__커뮤니티>네티즌광장>창작연재 창작연재 (serial) [펌/천리안]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0 - 등록자: 꼬마엘프(이승연) 등록일: 02-17 조회수: 342 ┌───────────────────────────────────┐ │ ▶ 번 호 : 0/72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20:20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0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0) 벨라시그네 땅을 밟아보는 것이 꿈만 같을 정도로 엘스헤른은 어제의 그 긴 긴 밤이 되새겨 볼수록 끔찍했다. 레비앙을 로자리움 성까지 데려다 주고, 아 직도 병상에 있는 아르떼이유 후작의 핀잔을 조금 들은 다음에야 에스트리온 성관으로 돌아온 그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말쑥히 차려입고 입궁 했다. 어젯 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던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여서, 황후 폐하 로부터 당장에 이 일에 대한 해명을 들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입성하고부터 내내 성관을 가득 채우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좋지 않은 일의 낌새를 채고, 엘스헤른은 일단 몸을 사렸다. 황후 폐하의 방 문 앞까지 와서도 잠시 머뭇거린 그는 시종의 안내를 기다리며 잠자코 서 있 었다. 생각 같아선 문을 세게 열어 젖힌 후 뛰어들고 싶었으나 저 시종의 표 정을 보니 뭔가 황후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우려심에, 그런 무례한 충동은 저절로 꾸욱 눌러 참아졌다. "황후 폐하,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티아란 대공께서 방문하셨습니 다." "들어오시라 이르거라." 어쩐지 회답하는 황후의 목소리도 몹시 차분하여, 예전 같지 않은 것을 의 아해 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들어가도 된다며 문을 열어주는 시종을 뒤로하고 황후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 엘스헤른. 무사히 돌아왔구나." 짐짓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는 아드레이드의 얼굴이 어쩐지 초췌해 보여 엘 스헤른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고는 가득 경계하는 눈빛을 지으며 넌지시 운을 띄웠다. "무슨 일이야? 황궁이 온통 어두침침한 게 꼭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 데, 설마 이것까지 누님이 계획해 둔 것의 일부분인가? 물론 황후 폐하의 저력으로는 황궁 전체를 이렇게 착 가라앉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 니지. 게다가, 얼굴은 왜 그래? 며칠 못 잔 것 같아보여." "흐음." 아드레이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깊은 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 다. 언제나 그녀를 감싸고 있던 우아함조차 지금은 흔들려 꺼지기 직전의 촛 불처럼 위태로워 보였고, 밤새 잠이라도 설친 양, 곱고 하얀 피부는 오히려 파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등받이에 깊이 기댄 채 겨우 목을 가누어 엘스헤 른을 응시했다. "믿지 않겠지만, 너를 두고 온 것은 경황이 없어서야. 두고 왔다는 사실조차 어젯밤에야 알아챘어." "물론, 당연히 믿지 않고 있지만, …… 경황이 없다니?" "아멜리에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켜서 말야." "응?" 아드레이드가 자신의 소중한 막내딸이 아프다는 말을 너무나도 무미건조하 게 이야기하는 통에, 엘스헤른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가만 눈을 내리 깔았 다. 공주가 심하게 아팠을 정도라면 역시 사냥이 갑작스럽게 취소될 만도 하 다. 그리고, 두고 온 사람조차 챙기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는 것 역시 이해 될 만 했으나 엘스헤른은 아직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 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 아드레이드는 까츨하고도 어두운 목소리로 마지막 일 격을 날렸다. "주치의의 말로는 급성 폐렴이라던데." "폐……렴?" 아드레이드가 노린 그대로 엘스헤른은 충격에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멜리에 같은 젖먹이 어린아이에게는 급성 폐렴이란 몹시 위중한 병이다.(* 주 - 의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전엔 그랬다죠.;) 더러 목 숨을 잃기도 하는, 아니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십중팔구 치사하고 마는……. 엘스헤른은 속으로 뜨끔해버린 나머지 잠시 숙연해졌다가 애써 태연하게 물 었다. "아, 지금은 좀 어때?" "왜? …… 어제, 공주에게 감기라도 옮기면 수감시켜버린다고 했던 말이 불 현듯 떠올라 겁먹기라도 한 거야?" 이런 상황에서조차 조소를 잃지 않는 그녀의 위대함에 맞서 엘스헤른은 가 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멜리에가 좀 나아졌다면, 역시 누님에게 추궁해야할 것이 있어서. 공주 때문에 정신이 없다면야 나중으로 미루고. 하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당 장에라도 따지고 들고 싶은데, 나와 레비앙만 남겨두고 다들 떠나버린 것에 대해서. 그런데다가 어쩌면 레샤블랑쉬 저택의 고용인들을 모두 휴가 보낼 수가 있는 거지? 그것도 때를 딱 맞추어서 말이야. 물론, 오늘 아침에 저택 관리인인지 집사인지, 아무튼 그 사람이라도 와서, 초췌해진 우리를 발견하 고는 휴가 간 요리사를 불러들이는 둥의 소란을 떨지 않았더라면 아침도 굶 을 뻔 했거든." 담담하게 말을 이어놓는 엘스헤른을 한 번 올려다보고 시선을 떨군 아드레 이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피곤이 여실히 드러나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건성으로 말했다. "이 맘 때는 언제나, 레샤블랑쉬의 사람들에게 휴가를 줘왔다구. 새삼스럽게 내 계략이라 왈가왈부 할 건 없잖아. 당연히 그 곳에 사람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으니까, 일이 터지고 곧바로 벨라시그네로 되돌아 온 게 아니겠어?" "그럼, 누님의 얄팍한 동생 골려주기 계략을 하늘도 도왔다는 거야?" "음, 하늘도 도울 만 하면 돕겠지. 하지만 어쩐지 죄받은 거 같아 찜찜해. 아멜리아가 저렇게 아프다니 말야." 비꼬는 말에도 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그녀를 쳐다보며 엘스헤른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토록 영악하던 누님도, 막상 부모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은 걸 보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기도 해서였다. 그는 한바탕 따지려 했던 전의를 상실해버리고 가만히 손을 내밀어 아드레이드의 한 손등 위에 포개놓 았다. "뭐, 난 위로 같은 건 서툴지만…… 아무튼 아멜리에는 괜찮을 거야." "음, 그게 네 진심은 아닐 거라고 봐." 아드레이드는 엘스헤른의 위로에 단호하게 일축했다. 때문에 엘스헤른은 조 금 머쓱해져서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었다가 나직히 입을 열었다. "환자인 채 오지에 내 팽개쳐진 동안에 죽을 고비를 넘겨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해 둬." "그렇다고…… 절대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들거나 하지는 않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자존심 덩어리의 누님을 대하면서 엘스헤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있어.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래, 네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게 이럴 때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구나." "그럼, 다음에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어제 일의 전말에 대해서." 엘스헤른은 아드레이드의 손을 다독이느라 가득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아드레이드는 사뭇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이번 일은 잊으라구. 기억하고 있어봤자 네 앞날에 별반 이로울 것도 없을 테고." 물론, 일부러 그랬을 테지만, 연기가 뻔히 드러나는 그녀의 말에 실소를 머 금은 엘스헤른은 가만히 뒷짐을 지고 누나를 내려다보았다. "…… 글쎄. 하지만, 누님의 한 순간의 실수 - 아, 물론 본인이 실수라고 말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계략일 거라 의심이 들어서 말야. 아무튼, 그 실 수로 인해 죽을 뻔 한 기억이 쉽사리 잊혀질 리 없지. 안 그래?" "뭐, 그렇겠지. 더불어, 대공전하의 어렸을 적에, 욕심 많은 누님으로 인해 하마터면 자신의 성 정체성도 잃을 뻔 했던 기억도 말야." 아드레이드는 깐죽거리기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향해 은근히 눈을 치켜 떴다. 그녀의 그런 매섭고도 표독한 모습에, 마치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등골이 서늘해진 엘스헤른이었으나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주억거 렸다. "그래, 그것 역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질 만큼이나, 끔찍해. 단 하루도 아 닌 그 오랜 나날 동안을 누님 때문에 여자 아이의 옷을 입고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말야." 담담한 척 하려고 했으나, 엘스헤른은 어릴 적의 그 일만 생각하면 속이 뒤 집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얇게 비틀며 냉소를 지었다. 어느새 굳어져버 린 그의 싸늘한 표정에 만족을 하는지 아드레이드는 언제 자신이 초췌했냐는 듯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러게 어머니와 나의 소원대로 여자 아이가 되어 태아나주지 그랬어? 어머 니는 사랑스러운 둘째 딸을, 나는 귀여운 여동생을 간절히 바랬는데. 여섯 살 나이의 어린 나에게는 그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얼마만큼 의 상처였는지 몰라. 그러니, 자연히 여동생이 아닌 남동생인 네가 얄미울 수 밖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떠올라버려 가득 기분이 상한 엘스헤른은 끓어오 를 것 같은 울화를 짙은 한숨을 내쉬어 다독였다. 얇은 얼음장같은 미소를 머 금은 그의 입술은 음산한 목소리를 토해놓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멀쩡한 사내아이를 여동생을 삼아?" "아아, 그거야……." 아드레이드는 맑은 잿빛 눈을 또랑하게 치켜 뜨며 온화한 미소를 흘렸다. "그만큼 네가 예뻤으니까." 겉보기엔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엘스헤른이 보기에 는 은근한 장난기에 짙은 요염함 뒤섞인 것 같아 속이 뉘엇거릴 정도였다. 찜 찜해 하고 있는 동생을 무시한 채 아드레이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 깔았다가 의자 등받이에 깊이 어깨를 기댔다. "그런데 말야, 그래서 일까? 네가 레비앙에게 집착하는 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엘스헤른은 펄쩍 날뛸 듯이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야?" 조금 거리끼는 것이 있기도 했거니와, 마치 그녀가, 레비앙이 여자라는 사 실을 알고 있는 듯한 말을 해서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어버릴 뻔 한 엘스헤른 은 흥분한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드레이드는 동생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말을 돌렸다. "뭐, 레비앙은 예쁘장한 남자아이니까, 그런 그를 보면서 너는 어릴 적의 자 신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잖아." "아니야, 나는…… 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말로 끼워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토록 단순한 거라면 어째서 이토록 아프겠어?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린 엘스헤른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콧등을 찌푸렸다. "…… 그저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을…… 누님은 알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을 생각하면 여기 가슴 한 구석이 뜨겁고도 시린, 그런 기분 말야. 그대로 사뭇 보고싶어 그리워지고, 어떤 때는 눈물이 날 만큼 간절한 기 분…….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단 한 사람. 그냥 그런 일상을 보내다가도 가슴을 따끔하게 하면서 문득 생각나는 단 한 사람. ……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레비앙이야." 여운을 남기듯 말을 맺는 엘스헤른을 올려다보며 아드레이드는 어쩐지 묘한 기분에 나직히 웃음을 흘렸다. 그 어리던 동생이, 어릴 때는 반항조차 못하던 그 동생이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랑 때문에 훌쩍 자라 누나의 치 마폭을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소하고, 섭섭 하고, 조금은 씁쓸한……. - 똑똑똑. 문득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감상에 잠겨버릴 뻔 하여, 아드레이드는 급히 정신을 붙들어 맸다. "황후 폐하. 아르떼이유 가에서의 전언입니다." 아르떼이유 가문에서 말을 전해왔다는 어린 시종의 목소리에 잠시 그녀는 엘스헤른의 눈치를 살폈다가 시종을 불러들였다. "들어오너라." "예, 폐하." 시종은 공손하게 황후의 방 안에 들어서서는 가만히 허리를 굽혔다. "폐하,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님의 전언입니다. 하오나…… 대공 전하 께서 곁에 있으시면 말씀 올리지 말라 이르셨다 합니다." "무슨 일이기에?" 아드레이드는 시종의 말에 엘스헤른이 뜨끔 하는 것 같아서 내심 재미있어 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나, 시종은 여전히 엘스헤른의 존재를 불편해 하면 서 황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 올려도 될는지요?" "그래, 어서 말해보려무나." "예, 저, 레비앙 님께서 심한 몸살이라, 오늘 황태자 전하를 돌봐드리지 못 할 것 같다 하셨습니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엘스헤른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서 급히 문 쪽으로 걸음을 때어 놓았다. 아드레이드는 레비앙이 왜 "엘스헤른 이 없는 곳에서 전해 달라." 라고 했는지를 알 것 같아 작게 웃음을 짓고는 시종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엘스헤른의 등 뒤로 비웃음이 역력히 섞인 음성으 로 가볍게 꼬아 말했다. "티아란 대공, 나에게 할 말이 많으신 것 같더니, 벌써 가십니까?" "예, 그 일은 다음에 말씀 드리지요. 그럼 저는 이만……." 바쁘게 방을 나서기 전에, 엘스헤른은 한 번 더 아드레이드를 돌아 본 후, 예의 상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을 머금은 채 목례를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런 동생을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아드레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리 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레비앙의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린다니까. 그나저나, 후훗, 이 번 에도 한 건수 올렸네. 아멜리에가 아픈 건 사실이라도, 감기 쯤이야 가뿐히 나을 거라고 주치의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내 동생이라지만 역시 지독한 녀석이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죽어도 흘려놓지 않는군. 궁금했 는데 말야……." - To Be Continued ==================================================================== <70편 제작 비화> 1) 오~! 게으른 괭이의 삶이여. =^ㅅ^= 여전히 게으르고 있는 중입니다. 열심히 떠오르는 생각들은 다 게으른 몸 때문에 날아가 버리고, 막상 써야지 하고 컴터 앞에 앉으면 "버엉~!" 해지니 말입니다. 이렇게 게으르다 보니 자연 귀도 가려워지는군요. (누군가 욕을 참 많이 하고 계신가봅니다. 쿨럭.;) 귓밥 파 줄 섬세한 사람도 곁에 없으니, 더 더욱 괴로울 수 밖에요. 흐흙, 옆구리 시려.TT-TT 누구, 곰살곰살한 괭이 거 두어 갈 사람 없나요? 2) 강박관념. "잘 써야지." 라고 말이죠. 처음 마음 그대로를 잊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자 꾸 그저 잘 써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군요. 별반 잘 쓰지도 못하면서. "사랑 이야기니까 사랑스럽게 쓰자!" 라고 했던 초지를 왜 자꾸 까먹는지 모 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편은 아주 편하게 허접으로 써 놓고도 퇴고도 안 해봤습니다. 쿨럭.;; 고칠 게 아주 많으리라 염려됩니다.TTㅅTT;; 부디 너그 러우신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길.; 아무튼 오늘은 분량이 꽤 많으니까, 생 긋.;;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3) 마음이 바쁘다. 졸업도 다가오고, 발령도 다가오고, 여러모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쁘네요. 그래서 더더욱 글이 손에 안 잡히고 있는 건지도. 4) 다음 편, 맛보기~! 자,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몸살 났다는 소리만 듣고도 달려가는데~! 과연 달 려가면 무엇이 있으려나! (아마도 별 일 없을 듯.;) 그럼 다음 편을 기대.; 라지만 병상에 누운 레비앙과 엘스헤른의 애틋한 모모 장면 등을 상상하진 마 시라.;; 그런데다가, 이번 편에 야릇한 내용이 나오리라 기대하신 분들에겐 정말 죄송.; 쿨럭.;; 전 원래 이런 애예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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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엘스헤른. 밖에 무슨 일이라도 났어?" 그가 들어오자 마자, 레비앙은 밖에서 들여온 소란에 대해 물으며 고개를 갸웃 했다. 밝은 햇빛이 산란되어 구르는 하얀 침구에 몸을 기대인 채 한 손 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불을 붙잡고 있는 그를 보며 그 아름다움 에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엘스헤른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서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건 그렇고, 일주일만에 보는 인사치고는 너무한 거 아 니야? 대뜸 얼굴 보자마자 그렇게 묻는다는 건." "으음." 엘스헤른의 작은 투정에 레비앙은 들고 있던 책을 접어 무릎 위에 내려놓으 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엘스헤른을 다시금 응시하고 가볍 게 웃음을 머금었다. "반가워, 엘스. 오래간만이지?" "야, 이거. 정말 반갑기는 한 거야? 어쩐지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기분이 드는 걸?" "정말이야, 정말 반가워. 그렇지 않아도 혼자 집에서 심심하던 차였어. 그런 데……." 잠시 묘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내리깔았던 레비앙은 깜짝 놀라하면서 다시 금 눈을 치켜 떴다. "그런데, 엘스헤른, 너 지금 여기에 있어서 될 일이 아니지 않아? 분명히 황 궁에……." "아, 도망쳤어." 레비앙의 말을 가볍게 자르며 엘스헤른은 장난스레 말을 했다. 뭐, 지금 이 시간에, 그 누구도 아닌, 에스트르의 전쟁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티아란의 대 공 전하께서 여기 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을 레비앙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일로 황궁은 발칵 뒤집혀 있을 터이고, 그것으로 엘스헤른이 지어야할 책임이 사뭇 막중할 것임은 더 생각할 나위도 없었다. 레비앙은 퍽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어느새 자신에게로 다가온 엘스헤른을 올려다보았다. 레비앙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저 표정만으로도 알 것 같아, 엘스헤른은 그 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뭐, 날씨가 너무 좋잖아. 이런 날에는 지루한 일 같은 건 잊어버리고 싶어 져서 말야. 모든 걸 잠시만 잊고서 다른 것들에 취해있고 싶어서." "하지만, "…… 응." 좀 껄끄러워하는 레비앙의 표정을 보면서 엘스헤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 론, 옷을 갈아입을 때에는 나가 주는 것이 정한 도리이지만 - 더군다나 레비 앙은 여자였으므로 나가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지만 - 어쩐지 그가 여성임을 들켰다는 것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착잡 한 것이었다. 그것은 레비앙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엘스헤른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그러니까 오직 "친구"로서의 레비앙으로 있겠다는 모종의 의지 같 아 보이기도 했다. 엘스헤른은 그런 그의 마음이 어쩐지 꿰뚫어 보이는 듯하 여 씁쓸한 심사를 어찌할 길이 없었다. "나, 소원이 하나 있는데……." 심란한 마음에 엘스헤른은 느리고 나직한 말을 흘렸다. 말해 놓고 보니 조 금 황당하기도 하고, 레비앙이 들어줄 것 같지 않은 내용이라 그는 섣불리 말 을 잇지 않았다. "…… 뭔데?" 레비앙이 넌지시 물어주지 않았더라면 엘스헤른은 그저 말끝을 흐려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짧은 한 마디로라도 궁금함을 표해주니 엘스헤른으 로서는 다행스럽기 그지없었다.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내려다보면서 살짝 미소 를 지었다.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부터 해 줘." "에?"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그 어린아이 같은 말에 조금 당황한 듯 가볍게 되물었 다가 잠시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으로 눈을 지긋이 내리깔았다. "네 소원이라면 들으나 마나 황당한 것일 텐데, 섣불리 들어주겠다는 말은 역시 할 수 없어. 위험해." "아, 결코 못 들어 줄만한 소원은 아니니까……." 엘스헤른이 급히 반론을 했으나 레비앙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돼." "모처럼의 외출이잖아. 게다가 나에게는 에스트르에서의 마지막 외출이 될는 지도 모르고 말야. 그런데도 간단한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다는 거야?" 짐짓 감성적인 말투를 늘어놓는 엘스헤른의 말에 레비앙은 가슴 한 구석이 뜨끔했다. 에스트르에서의 마지막 외출……. 그 말이 그토록이나 쓰라리게 가 슴에 박혀 들지는 몰랐던 일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면 그 따위 소원 하나 들어주는 일이 무엇 그리 대수가 될 일이란 말인가! 생 각 끝에 레비앙은 - 내키지는 않았지만 -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은 들어줄게. 그래, 대체 뭐야? 말을 해봐." 레비앙 쪽에서 예상외로 쉽게 포기를 하고 나오자 엘스헤른은 회심의 미소 를 지으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내 소원은 말야……." - To Be Continued ==================================================================== 안녕하세요? 페르티입니다. 이제부터는 잡담을 좀 줄일까 합니다. 찔끔 찔 리는 일이 여러모로 많아서 말이죠. 아무튼, 저의 근황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 도, 저 가련한 괭이 페르티는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해 주시길. 아, 저 합천 으로 발령이 났답니다. 내일 오후에는 초등학교까지 발표날 예정이니 기다리 고 있습니다. 싱긋. 네, 이제부터는 좀 바빠질 테죠.^^;; 네, 이번 편이 제 때에 올라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귀쥬 양의 도움이 컸습니다. 날마다, 날마 다, 만날 때마다 독촉을 해 주지 않았던들.(게다가 포를 뜬다고 협박해주지 않았던들) 저는 게으름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메모로 독촉 해주신 분들도 참으로 감사.^^ 하지만 오늘도 피곤하여 퇴고를 못하고 초본을 그대로 올립니다. (아마도 허접하겠지만.T-T) 그럼, 허접하더라도 봐 주세 용.; 다음 편부터를 기대해 주시고 말이죠. 다음 편은 조금 일찍 올리겠습니 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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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레비안느가 되어 줘." 그의 부탁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워 레비앙은 가만히 시선을 떨구었다. 과연 이 친구가 그런 부탁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레비안느가 되어달라 는 말은 그저 여성의 차림으로 외출을 하자는 단순한 뜻인지, 아니면 그 이상 의 것이 있는지. 만일 그저 단순한 뜻이라 하더라도 레비앙으로서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엘스헤른이 <오늘은 친구가 아닌 상태로 있고 싶다.>라고 말하는 듯 해서 더더욱 그랬다. "꼭 그래야 하나?" "응, 네가 약속한 거니까." 레비앙의 목소리가 사뭇 무거웠음에도 불구하고, 엘스헤른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레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미 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할게." "정말이야?" 그의 순순함에 오히려 엘스헤른이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내가 약속한 거니까, 꼭 해야하는 거라며? 딱 오늘만 그렇게 해 줄 테니까 옷 갈아입게 그만 나가." "응." 엘스헤른은 마치 어린아이 같이 즐거움에 못 이겨 생글거렸다. 그는 헤실헤 실 웃음을 흘리면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체념한 듯한 레비앙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면서 메리벨 부인을 좀 불러 줘. 모니카는 문 밖에 와 있을 테니까 그 냥 들어오라고 그러고."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프로이덴느 아르떼이유." 엘스헤른은 격식 차린 말투로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그의 방에서 물 러났다. ·‥…━━━━…‥ 벨라시그네 시가지로 나온 후 엘스헤른은 내내 즐거운 표정이었다. 종종 휘 파람도 불고, 심호흡을 하면서 웃기도 하는 그의 모습에 레비앙은 뒷맛이 좀 씁쓸했다. 요즈음 일에 치여 산책조차도 못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런 단순한 일에조차 기뻐하는 엘스헤른을 보면서 같이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측은한 마음 이 들었다. 하지만 모처럼 만에 둘이서 산책을 하는 것을 자신의 숙연함으로 망치고 싶지 않아 그는 종시 같이 웃으면서 엘스헤른의 팔짱을 끼고 보조를 맞추었다. 팔짱을 낀 것은, 본인은 그리할 생각이 아니었으나 엘스헤른이 억 지로 레비앙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팔에 감았던 터라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 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너무 오래간만의 데이트라니, 사랑하는 내연에게 나도 참 무심하긴 했어." "내연이라니! 누, 누가 누구의 내연이라는 거야!"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를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거닐면서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하는 농담에 자신도 모르게 발끈 했다. "아아, 프로이덴느. 지금 자신의 차림을 유념해 주시겠습니까? 아리따운 아 가씨의 목소리치고는 너무 거칠군요. 그리고, 당연히 제 곁에 계신 분께서 저의 사랑스러운 내면의 연인이 아니겠습니까?" 능글맞은 그의 말에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면서도 레비앙은 내심 그가 예 전처럼 되돌아온 것에 안도가 되었다. 저 말투와 자연스러운 장난기, 무엇보 다도 레비앙을 안심시키는 것은 그의 그 행동에 가득한 여유로움이었다. 비록 국가 중대사를 논하다가 도망친 도주범(?)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그를 보고 있으니까 그런 무거운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레비앙의 마음은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것은, 그가 얼핏 잘 못하면 발치에 옷자락이 밟혀 엎어져버릴 지도 모르는 이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 뿐. 아까 로자리움에서 그가 레비안느의 차림을 하고 눈 앞 에 섰을 때부터 엘스헤른은 계속 감탄을 하고 있었던 터였으나 막상 이 거추 장스러운 옷차림의 당사자인 레비앙은 기분이 그리 흡족하지 않았다. 물론 메 리벨 부인의 높은 안목으로 마련된 이 복식은 여느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소 유하고 있는 최고의 외출복에 전혀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독 특한 매력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폴로네즈 형식의 로 브(robe a la polonaise)는 옅은 베이지 색에 부드러운 꽃무늬가 수놓인 공 단으로 은은한 광택을 흩뿌리고 있었으며, 외출용 코트인 하얀 펠레린느의 단 을 마감 처리한 폭신한 여우 털 자락 아래로 살며시 드러나는 세 개의 드레이 프는 허리 아래로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혀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뽐냈다. 귀 부인들 사이의 유행인 하얀색 분가루가 발린 높은 가발은 - 레비앙 자신이 경 멸하고 있었으므로 - 착용하지 않았으나, 가볍게 틀어 올려 리본으로 장식된 붉은 빛이 고운 머리카락 위로 드레스와 같은 빛깔과 소재의 비단 모자가 얹 혀져 있었고, 그 모자의 꽃과 보석 장식 옆으로 보드랍게 흘러내리는 타조의 깃털은 옅은 황갈색으로 풍성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프로이덴느." 엘스헤른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의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지 레비앙은 살 풋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최대한 쌀쌀맞게 되받아 쳤다. "참으로 능글맞기도 하시군요, 프리미르. 저는 바람기 많은 유부남은 달갑지 않답니다." "뭐? 유부남? 아하하하하∼." 레비앙이 무슨 뜻으로 <유부남>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서, 엘스헤른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그는 아이린을 염두 에 두고 있었을 테다. 언젠가 그의 앞에서 아이린과 약혼했노라고 큰소리를 쳤으니, 그리 생각할 만도 하다. "나 유부남 아니야." "거짓말 말아." "내가 거짓말을 왜 해?" 엘스헤른 저 녀석이 흥얼거리면서 말하긴 해도, 그다지 거짓말 같이 들리지 는 않아서 레비앙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 거나를 떠나서 아이린 양과의 약혼은……. "너, 아이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레비앙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런 그를 살짝 돌아본 엘스헤른은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면서 싱긋이 미소를 흘렸다. "역시 내가 아이린과 약혼한 것이 그 이유인가 보군." 어쩐지 엘스헤른의 말투는 그 약혼을 확신하는 듯 했다. 그래서 레비앙은 더더욱 퉁명하게 쏘아붙였다. "약혼했으면 당연히 유부남인 거야." "약혼했다고 다 결혼하는 게 아닌데도?" "응?" 엘스헤른이 하는 말이 꼭 자신과 리하르트를 일컫는 것만 같아서 레비앙은 뜨끔한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니나다를까, 엘스헤른은 그대 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그 말을 꺼냈다. "그 때, 사냥에서 돌아온 날 네가 몸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로자리움에 갔을 적에, 에르띠낭 경을 만났어." "음, 리하르트가 무슨 이야길 했나보구나." 레비앙은 조금 멋쩍게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리하르트가 일렀던 그대로 파혼 같은 것을 떠나서 생각해 본다하더라도, 어쩐지 그 일은 돌이켜 볼수록 씁쓸했다. 리하르트에게는 많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한 그리 떠나가는 그를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냥 내버려둔 자신이 조금은 얄밉기도 해서, 가급적이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일인데……. 마치, 그런 레비앙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엘스헤른은 더 이상 그 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직히 휘파람을 불었다. 귀족답지 않게 길거리를 거닐면서 휘파람이라니, 조금 무례해 보이기도 하지만 레비앙은 그 저 듣기가 좋았다. 귀에 익은 그 가락은 뺨에 부벼져 오는 바람결에 마치 살 랑살랑 흔들릴 듯 가느다랗기도 하고, 또한 햇살마냥 보드랍기도 했다. 그리 고 어쩌면 에스트르를 지붕처럼 온통 뒤덮고 있는 저 하늘처럼 새파랗게 청명 하게 느껴졌다. '뭘까?' 어느 사이인가, 싫은 생각은 모두 잊어버리고 그 곱디고운 선율에 귀를 기 울이고 있던 레비앙은 문득 떠오르는 옛 생각에 뜻깊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엘스헤른이 휘파람을 불고 있는 이 곡은 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단 둘이 음 악회에 갔을 적에 여가수가 불렀던 아리아였다. 그때 엘스헤른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참으 로 감동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 엘스헤른을 보기에 부끄러웠던 찰나, 마침 그가 잠든 것을 보고는 안도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그가 그 멜로디를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을 보면, 그날 잠든 척 했던 것은 도 도한 친구의 자존심을 위한 엘스헤른의 연극이 아니었을까? 물론, 달리 생각 해 보자면, 그리 하기에는 열 다섯 살 즈음의 엘스헤른은 너무나도 장난꾸러 기였지만. 얼마나 걸었을까? 언뜻 엘스헤른의 휘파람소리가 끊인 것 같아 레비앙은 살 며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앞선 옆에서 걷고 있는 이 사람의 어깨가 참으 로 든든해 보인다. 레비앙이 그리 생각한 순간, 엘스헤른은 조용히 입을 열었 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약혼 같은 건 취소해버릴 수도 있어." - To Be Continued ==================================================================== 여러분,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울먹.) 조금 일찍 올릴 거라 언약 드려놓 고서는 참으로 5일만에 이렇게 올리게 되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습니다. 바 빴다고 하면 더 이상 믿지 않으시겠죠? 그러나, 변명 같습니다마는, 정말로 바빴습니다. (흠칫.;;) 졸업식도 했구요, 여차저차한 일이 좀 많았기 때문이 죠. 아무튼 늦게 올리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다음 편은 언제 올릴지 말 씀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앗, 뻔뻔.;;) 그렇지만 글이 올라갈 때면 메모서 비스 가동을 할 테니 걱정 말아주세요. 아, 참, 저는 3월 2일부터 직장 생활 을 시작합니다. 드디어 초등학교로 갑니다. 일단 학교생활과 글쓰기는 겸하도 록 할 테니까 연중할 거라는 염려는 놓으시길, 정 힘들더라도 한 달에 다섯 편은 꼭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죽어났다.TT-TT) 네, 그럼 다음 편에서 인사 올리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메모로 격려 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려요. 생긋.^^) ................그, 그나저나, 양이 너무 적다.;;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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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어?"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그렇게 물었다. 다시금 듣지 않는다면 무슨 말이었 는지 떠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할 듯 해서였다. "……." 무슨 생각인 건지 엘스헤른은 여전히 레비앙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아무런 말 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는 모양으로 묵묵히 서 있기만 한 그를 보며 레비앙은 애가 탔다. "엘스헤른." 레비앙이 재촉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엘스헤른은 싱긋이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레비앙을 돌아다보았다. "나를, 용서해 주겠어?" "응?" 지금의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다가 짐짓 느닷없기까지 한 그의 질문 에 레비앙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연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 것인 지 지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지금, 어쩐지 그가 해 달라는 것을 해 주 지 않는다면 간신히 지키고 있는 이 평형이 무너질 것만 같아, 레비앙은 사뭇 두려웠다. "무엇을 말야?" 조립된 인형처럼 어색하게 미소를 띄우는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레비 앙은 엘스헤른에게 넌짓 되물었다. "그게 무엇이든." 엘스헤른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또다시 그에겐 난해했다. 아까 소원을 말하던 것처럼, 그런 식의 장난을 엘스헤른은 한 번 더 하려는 것 같았다. 레 비앙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아. 뭐든 용서해 줄게." "정말이지?" 다짐을 받듯이 힘주어 묻는 엘스헤른은 진지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쩐지 서먹하여 레비앙은 점잖게 시선을 떨구었다. 짓궂게도 엘스헤른은 잠시 말을 아꼈다. 잔잔한 바람이 허허로운 공간을 채우 고 돈다. 그 고요함 와중에 문득, 엘스헤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사실 아이린과 약혼하지 않았어." "……."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레비앙은 언뜻 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놀림을 받는 것 같아서 조금 언짢기도 하고, 기분이 묘해서 그냥 웃어버리는 것이었 다. 레비앙이 거짓말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웃자, 엘스헤른도 같이 그를 바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믿어주지 않는 거지?" "그러면…… 믿으라는 거야?" 레비앙의 목소리가 사뭇 표독스러워 엘스헤른은 말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믿지 않아?"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못 믿을 것도 없잖아. 사실 그대로인데. 나는 아이린과 약혼한 적 없다는 것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혼란스러움에 미소를 거 두었다. 방금, 그가 용서해달라고 했던 것은 분명, 아이린과 약혼을 했다고 거짓말 한 것에 대한 듯 하다. "하지만 약혼처럼 중요한 일을 거짓으로 할 리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내, 너에게 맹세코 절대 약혼은 하지 않았어. 그저 그렇 게 꾸민 것일 뿐이지." 그러면 그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 위한? …… 레비 앙의 생각을 자르면서 엘스헤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롬 녀석의 계략이었어. 너나 나나 모두 제롬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거지, 뭐.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 설마 이 소중한 데이트 시간을 그 녀석 농간 의 역사로 때우고자 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는 레비앙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다시금 걸 음을 때어 놓았다. 마지못해 그에게 이끌려 걸으면서 레비앙은 싱숭생숭한 마 음에 아랫입술을 살풋 깨물었다. 참으로 모를 일이다. 기만당한 것에 대한 껄 끄러운 기분 이면에 어쩐지 안심이 되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내내 가 슴 속에 묵직하게 들어앉아 있던 돌덩이 하나를 치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속았다고 조금은 분하게 생각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홀가분한 걸까? 레비앙은 마치 구름마냥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생각들을 떨치려고 노력하면 서 엘스헤른을 따라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발을 옥죄어 걷기조차 힘들게 하던 비단구두의 느낌이 어느새 폭신한 새털 위를 걷는 것 보다 더 가볍게 느 껴진다. 그는 엘스헤른의 팔짱을 끼지 않은 한 손으로, 바람에 날리는 펠레린 느 코트자락을 추스려 잡으면서 종종걸음을 했다. ·‥…━━━━…‥· 맑은 하늘 저 편으로 높이 치솟은 첨탑이 보인다. 벨라시그네의 한 가운데 에 있는 성 도미니크 대성당. 양쪽의 대칭을 이루는 수많은 첨탑과 그 가운데 거대하고 둥근 스테인드글라스의 장식이 돋보이는 웅장한 본체, 오래되고 오 래된 짙은 회갈색의 건물은 장중하고 근엄하게 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종 탑의 종소리가 무거운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공기를 헤엄치고 성당 앞 광장의 비둘기 때는 일순 무리를 지어 바쁘게 날개를 움직인다. 기이한 무늬를 그리면서 광장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타일을 밟으면서 문득,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왜 이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데리고 왔다는 그 말은 조금 어폐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까지 걸 음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지금 시간이라면 아마 소년 미사가 있을 테지?" 성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걸음을 멈춘 엘스헤른이 문득, 그렇게 말을 꺼낸 다. 시계를 꺼내보지 않아도, 종소리는 세 시를 알려주고 있었다. "미사가 있을지 없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말이 못미더워 되받아 치고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 년 미사라면 벨라시그네 근교에 살고 있는 귀족집의 어린 도련님들을 위한 미 사로 그 자신도 몇 번 참석해 본 적이 있었으나 그렇게 시간까지 상세히 기억 나지는 않았다. "왜, 너랑 종종 왔었잖아. 미사 참가하러. 그러니까 기억하고 있는 거지." 성당을 보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그대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는 레비앙을 돌아다보았다. "우리, 성당 안에 들어가 볼까?" "뭐, 미사가 있다면 다들 정신없을 텐데. 별 볼일 없다면 그냥 가자." 레비앙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투로 말하자 엘스헤른은 묘한 장난기가 서린 눈빛을 띄우며 그를 응시했다. "나, 고해 안 한지 석 달이 넘었어." 그다지 대답은 없었으나, 레비앙의 표정은 무척이나 떨떠름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레비앙의 아르떼이유 가문은 대대로 그 높은 신앙심을 자랑하고 있 었기 때문에, 그런 집의 유일한 후계자인 그의 신앙심을 자극하는 것은 상당 히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심하다, 정말." 간신히 입을 연 레비앙은 신음소리 같은 말을 토해놓았다. 그러나, 그가 뭐 라고 나무라기 전에 엘스헤른은 얼른 변명을 하여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 즈음부터는 계속 바빴다구, 전쟁을 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 치? 게다가 이래저래 불려 다녀야 했고, 그 땍땍거리는 귀족들과 싸우고, 쥐꼬리 만한 전쟁 예산으로 모병에, 군수 물품 관리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 했고. 또……." 엘스헤른의 주저리가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아, 레비앙은 마지못해 수긍하 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가서 고해 성사나 봐!" 체념한 양으로 투덜거리는 레비앙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그에게 등 떠밀리 면서도 엘스헤른은 종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노려봐주며 레 비앙은 입술 끝으로 작게 종알거렸다. "쳇, 고해 성사 볼 사람이 어째서 미사 시작 되자마자 들어가는 거야? 끝나 고 가든지 하지 않고. 아니면, 가는 김에 미사도 참여한다면 좋을 테지만. 하여튼, 이건 분명 신부님들과 날 골탕먹이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어." - To Be Continued ==================================================================== <73편 후기> 지독한 감기에 들어버렸습니다.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의 감각도 없답니다. 이런 감기는 정말 난생 처음입니다. 흑 흑. 그건 그렇고, 이번 회에 엘스헤른의 <고해성사>에 관한 문제로 카톨릭 교 도들의 만은 자문을 구해야 했답니다. 저는 불교이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입니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이라면 당연히 카톨릭이 아니면 프로테스 탄트라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뭐, 이번 고해성사의 그 장면 하나 때문에 결국 에스트르는 카톨릭 국가가 되어버리고, 저는 알지 못할 종교의 교리로 정신이 없어야 했답니다. 이번에 카톨릭에 대한 정보로 많은 도움을 주신 아 시르 군, 루시퍼 씨, 귀쥬 양. 감사해요.^^ (세 분 모두 카톨릭이라죠.^^;) 아,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카톨릭교인이신 분. 틀린 점이 있더라도 화내지 마시고, 친절하게 틀린 점을 지적해 주세요.^^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카악! 고해성사 편은 빼버릴까아?!!!) 에, 그리고 독촉해주신 여러분들 감사 해요.^^ 네티즌광장ㅣ 목록처음ㅣ목록상위ㅣ수정ㅣ삭제 제목날짜ID이름 회사소개 | 사업제휴 | 광고안내 | 인터넷비즈니스 | 고객센터 | 개인정보보호정책 | 사이트맵 | 도움말 Copyright ⓒ 2001 Korea Telecom Hitel Co.,Ltd. All rights reserved. 『SF & FANTASY (go SF)』 17419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74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04 22:26 읽음:208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76/8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3월 04일 23:55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4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4) 성 도미니크 대성당, 그 내부는 조용하고 경건한 가운데에서도 무언가 안온 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유를 알지 못할 그 평온함은, 무릇 생각해보 면, 빛을 수 십 가지의 색깔로 산란시키는 저 기묘한 스테인드 글래스에 담긴 것도 아니고,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인간의 목소리 외에 유일하게 신에게 바 치는 노래에 사용 될 수 있었던 파이프 오르겐, 그 음색의 장중함이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곳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한결같이, 그렇게 지긋한 무게감이 있는 편안함을 풍기고 있었다. 레비앙은 복도에서 엘스헤른을 기다리면서 잠시 기분 좋은 평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언제나 성당에 오면 느낄 수 있는, 이 청명한 기운이 충만한 경건 함……. 그것은 마치 티끌만큼의 더러움조차 없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깨끗 한 물을 대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 물 속으로 조용히, 천천히 가라앉는 느 낌과 함께……. 이렇게 가득 마음이 잠잠해지고 나니, 세상에 사는 일이라는 것들은 어쩌면 한 호흡에 날릴 먼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그의 묵상을 문득, 귀걸이의 딸랑거리는 소리가 깨웠다. 레비앙은 천 천히 귓가로 손을 가까이 하여, 은은한 초록빛이 감도는 보석이 섬세하게 세 공 되어 농염한 반짝임을 흩뿌리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리하르트 가 주었던 선물이다. 지금, 아무런 스스럼없이 리하르트가 준 귀걸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묘하기도 하다. 리하르트를 생각할 때면 아직도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아릿해지곤 하건만……. "레비앙." 잔뜩 소리를 낮춘 엘스헤른의 음성이 들려왔을 즈음에야 그는 귀걸이를 그 대로 두고는 손을 내렸다. 가느다란 금줄에 꿰어 있는 초록의 보석은 작게 흔 들리다가 곧 자리를 잡는다. 무슨 일인 건지, 엘스헤른은 성당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레비앙을 복도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레비앙은, 뭔가 꿍꿍이가 있 는 양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엘스헤른을 향해 근엄한 표정을 하고는 가벼운 핀 잔을 날렸다. "미사 끝나려면 멀었으니까,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에 진중히 앉아서 기다리거나 해. 미사가 끝나야 고해 성사를 보지." "음, 그래도 되겠지만…… 역시 그냥 갈까?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신부님으 로부터 받을 훈계와 보속이 두려워." "얼씨구, 고해 성사 봐야 한다고 난리를 피우던 때는 언제고. 그런데, 막상 들어오니까 꼬리를 내리고 내 빼다니, 천하의 티아란 대공 전하 답지 않 아!" 레비앙이 조소 서린 입술로 깐죽대며 말하자 엘스헤른은 피식 웃음을 흘렸 다. "그러는 너는? <얼씨구.>라니. 그 유명하고 고귀한 아르떼이유 가문의 아리 따운 영애께서 입에 담을 말이 아니지." 가벼운 말다툼도 잠시. 레비앙은 표독스레 엘스헤른을 노려봐 주고는 목 선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 인다. 엘스헤른은 그의 손 끝에 시선을 두고 있다 말고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 다. 예전의 그 비밀을 드러내버려서인지 레비앙은 <레비안느> 일 때 보여주곤 하던 그 깍듯한 프랑스식 예법을 취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는 편이 엘스헤 른에게는 훨씬 편하긴 했으나, 어쩐지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았다. 막말 로 지금의 레비앙은 드레스만 걸쳤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고한 사내아 이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래도 그가 엘스헤른 자신을 의 식하고 하는 행동인 것만 같아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자 신의 모습은 친구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어디까지나 그 경계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엘스헤른에게 씁쓸한 기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했 다. 레비앙은 지금, 비록 드레스를 입고 있기는 하나, 자신은 <여성>이 아니 라 <친구> 임을 엘스헤른에게 인식시켜 주려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래 보였 다. 말투도, 행동도, 사소한 표정 하나까지도……. 그리 생각하고 나니, 어쩐지 허탈한 마음이 들어 엘스헤른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경계하고 있는 저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은 진정 힘든 일일까? 저 사 람에게 그 선을 넘어 이곳으로 와 달라고 한다면, 이 마음을 알아 달라고 한 다면, 그것은 그릇된 아집에서 비롯된 욕심이 되는 걸까? 저렇게 더 이상은 다가오지 않으려고 애쓰는 레비앙에게, 진정 아무 것도 바래서는 안 될는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옳은 것을,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뭘까? 그저 눈 길 하나, 손길 하나에도 참지 못하고 울컥 말해버리고 싶은, 이 심정은 무엇 일까? 옅게 웃음을 띈 눈으로 레비앙을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문득 손을 뻗어 레비앙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의 아무렇게나 놓여 있어 도 빛나 보이던 그 풍성함과는 달리, 리본으로 잘 정돈되어 동그랗게 말려 내 려온 우아함도 참으로 잘 어울린다. 보드라운 탄력을 가지고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움직이는 붉은빛의 아름다움. 레비앙은 은은한 눈빛을 짓고 있는 엘스헤른의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의 손을 탁 쳐냈다. 그 은근함에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곧 엘스헤른이 무안해 할세라 일부러 뾰로통하게 눈을 치켜 떴다. "뭐야? 함부로 만지지 마. 머리카락 세팅하느라 모니카와 메리벨 부인이 얼 마나 애쓴 지 알기나 해? 게다가 당하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고달픈 데. 괜스레 네 녀석의 시커먼 속에 속아넘어간 내 탓에 무려 세 사람이 고 생 했다구. 역시, 여자애들의 그 예술적으로 말려진 머리카락은 어지간한 고통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니까." "음." 그다지 별 말은 없었으나, 어쩐지 절실하게 동조하는 듯한 엘스헤른의 표정 을 보며 레비앙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어째, 저 녀석 마치 자신도 꼭 그런 일을 당해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조금 꺼림직하다. 엘스헤른은 한동안 뭔가 요묘한 - 실은 자신을 괴롭히는 옛 생각에 잠겨 있 은 터였으나 - 눈빛을 짓고 한숨을 내 쉬는 둥 하더니, 자신을 수상하게 쳐다 보는 레비앙을 내려다보고는 싱긋 웃어버렸다. 그러고는 몇 발자국을 옮겨 레 비앙이 서 있는 옆, 복도 벽에 가만히 기대어 섰다. 잠시 엘스헤른이 입을 다문 사이에 경건한 공기의 기류가 느껴질 만큼 깨끗 한 침묵이 흘렀다. 레비앙은 그런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말고 자신도 벽에 기대었다. 또각거리는 비단 구두의 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맑게 되돌아온 다. 풍성한 치마 때문에 기대어 서기란, 또 버티고 서 있기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막상 등이 벽에 닿고 나니 어쩐지, 다시금 아까와 같은 그런 편 안한 마음이 찾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등을 통해 스며들어 혈액을 타 고 온 몸으로 퍼져드는 듯한 차가운 기운은 정신을 또렷하게 하기에 충분하 다. 그렇게 성스럽도록 조용한 가운데 문득, 엘스헤른이 나직히 입을 열었다. "레비앙." "음?" "내 고해 성사를…… 받아 줄 수 있어?" 참으로 평온한 마음이어서 그런지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으나, 레비앙은 의 문을 표하듯 약간 고개를 돌려 엘스헤른을 쳐다보았다. 딸랑이면서 귀걸이가 춤추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가 멈출 때까지 레비앙은 아 무 말 없이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그에게 내내 옆모습만 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눈 앞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주 길게 느껴질 만큼의 시간 동안 엘스헤른은 생각에라도 잠겨버린 듯, 그렇게 말을 아꼈다. 그러고 한참만에, 그는 조금 까츨 해진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나는 죄가 너무 많아. 특히 너에게는……." "……." 너무나도 진지한 분위기에, 레비앙은 할 말이 없어 묵묵히 자신의 손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손 끝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는 자신의 양 손을 깍지 껴 잡고는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지금 서 있는, 이 곳, 복도는 약간 어둡고, 공기는 차갑다. 맑고 정한 빛이 저 높은 곳 아름다운 색유리를 통해 부드럽게 산란되어 들어온다. 길고 긴 복 도에 맺히는 색색의 형상은 빛의 올곧음이 만들어 내는 진실된 이치. 긴 숨결 은 그 위로 소리 없이 내리 앉는다. …… 레비앙은 곧 입가에 가만 미소를 띄 우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나 먼저…… 나도 너에게 해야할 말이 많아."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 동안 가슴속에 묻고 살았던 이야기들, 그리 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저 듬직한 친구가 궁금해하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았 을 그 의문에 관한 이야기들. "나에게 궁금했을 일이 참 많았을 거야. 그렇지? 엘스헤른." "…… 응." 긍정을 표하는 엘스헤른의 음성을 들으면서 레비앙은 숨을 가득 들이쉬었 다. 이대로라면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무슨 말이든……. "부디 물어봐 줘. 무엇이든 말야. 그 어떤 것에 대해서건, 내가…… 모두 말 해 줄게." 평온한 목소리……. 지금 나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레비앙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으나 그리 어수룩한 표정은 아님을 곧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는 그러한 자신을 여실히 비추어주고 있었으므로……. 그냥, 아까 말했던 그 목소리와도 같이 그저 그 렇게 담담한 눈빛이어서 레비앙은 안심이 되었다. 의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엘스헤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궁금했던 것들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물어보려니까 어색하군.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네가 어째서 남자아이로 살고 있는 건지, 그래, 그것에 관한 것도 궁금하고, 또 네가 말 해 주지 않았던 너의 어머니 이야 기,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 "음……." 엘스헤른이 말하는 것은 레비앙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 래서인지 더더욱 담담해지는 마음으로 레비앙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나는……." - TO BE CONTINUED ==================================================================== 요 며칠 고민 끝에 이 부분에 관한 스토리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우웃, 시 르 군, 귀쥬 양, 루시퍼 군, 미안해용.;;; 애써 찾아 준 것들을 많이 써 먹지 도 못하고 말이죠. 아무튼, 이래저래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중간에서 막히고 하는 일도 허다하고 해서 그냥 위와 같이 바꾸었습니다. 원래 이야기야 뭐, 좀 황당했던 거죠. 대신 진지한 분위기로 바꾸었으니 불평이 많으실 듯.; 그리고, 이번 편은 <닉네임 내기>로 인하여 급히 올리는 고로, 퇴고를 하지 못하고 올립니다. 3월 4일이 넘어가기 전에 글을 올리지 못하면, 저는 닉네임 을 "페르티"나 "홍홍", 혹은 요즘 즐겨 쓰기 시작한 "紅天東郞" 이나 "月猫" 대신에 한 달 동안 "귀쥬의괭이" 라고 써야 하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웃, 채 5분도 남지 않은 거예요!!! 분명히 12시 이전에 올려서 나를 괭이 찜으로 만증려 하는 귀쥬 양에게 <귀쥬만듀>나 <홍홍의만듀> 라는 닉네임을 한달 동안 쓰도록 만들겠습니다! 와앗! 빨랑 올려야겠습니다. 올리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까.^^;;; 그럼, 여러분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SF & FANTASY (go SF)』 17420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75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04 22:26 읽음:213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77/8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3월 16일 23:52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5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5) 잠시의 망설임은 그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것이었다. 레비앙은 곧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 놓았다. "나는 사생아였대. 아주 어릴 적에 시녀들끼리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엿들은 거라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했던 내 어머니는 천민이었다 지. 아르떼이유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마도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진 아기가 탐났었나봐. 천한 신분이라 그녀를 아들 의 아내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낳을 아이는 아무래도 아르떼 이유 가문의 핏줄일 테니 말야. 그래서,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렸 을 적에 할아버지가 나를 아르떼이유 가로 데려 온 거야." 마주보고 있던 엘스헤른의 눈길이 잠시 의문을 표했다. 그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 것 같아 레비앙은 씁쓸하게 미소를 흘렸다.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쉽사리 아이를 내 주었는가에 관한 것일 테다. "나중에 아주 오랫동안 생각한 거지만, 아마도 그녀에게는 나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었을 거야. 그래서, 그렇게 빼앗길 수 밖에 없었겠지. 혼자서 맞 서기에 내 할아버지는 너무나도 높은 신분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무어라고 했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그녀의 출신을 교 묘히 비꼬았겠지. 그녀는…… 창녀였거든." 마지막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 그 다음으로 레비앙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마주보고 있던 눈길은 서로를 떠나 각자의 앞을 바라 보고 있었다. 투명한 오르겐 소리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색색의 빛과 어우러 져 그 고요한 공간을 채웠다. 옅고 푸른 향기라도 실려올 듯 싸늘한 공기는 경건함의 색채로 물들어 가라앉는다. 어디서에서건 쉴 새 없이 소리가 날아오 고 있었으나 그것은 이미 인식 밖의 일이었다. 공간과 동떨어진 자신처럼 그 렇게 정적은 세상의 그 고운 소리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무거운 자물쇠 같은 침묵을 깨고 엘스헤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옆 으로 넌지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온기가 닿아오고 이내 레비앙의 가느 다란 손이 잡혀져 왔다. 이렇게 멍하니 앞을 보고 서서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닿자, 레비앙은 다소 놀란 듯 움찔했으나 곧 엘스헤른이 잡고 있 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지금 그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엘스헤 른의 손은 마냥 따뜻했다. 그리고, 어릴 적 언젠가 잡아보았던 그 때와는 달 리, 조금 단단하고 커다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모든 것을 감싸기라도 할 듯 이……. 그가 손을 잡아주자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어 레비앙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랬던 거였어. 나는…… 그렇게 내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는, 아버지를 대 신해서 아르떼이유 가문의 후계자로 키워졌지. 할아버지는 내가 남자아이 이기를 원했어. …… 남자아이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야만, 아르떼이유 가 문의 원로들을 입막음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 늙은이들을 안심 시켜 놓아 야만 했었거든. 대가 끊기는 것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늙은이들이라서…… 하다 못하면 양자라도 들이었을 테지. 그렇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아들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이니까…… 할아버지는 못내 안타까웠던 거겠 지. 어처구니없이 아들을 잃고 남은 유일한 혈육이 나니까……. 아마도, 그 래서일 거야. 내가 남자아이로 자란 것은……." "음." 엘스헤른은 짧게 숨을 내쉬고는 감상에 젖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오래 전 그 신년에, 에스트리온 저택의 2층 난간에서 레비앙을 처음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 아래 홀에서 마치 세상과 격리된 것처럼 서 있던 그 아이. 웃고 떠드는 어른들 사이에, 어린애 답지 않게 허무한 눈을 하고 있던 뽀얀 소년. 처음에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그가 소녀처럼 예 쁘장해서였기 보다, 어쩐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해버린 자신의 마음에 대한 거부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괜히 다가가서 시비를 걸었던 것 역시 말을 걸어볼 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함이고. 만일에…… 레비앙이 그때 소녀의 차림이었더라면, 선뜻 그러고 싶은 마음 이 들었을까? 엘스헤른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에 잠겨 들어서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진정, 만에 하나, 그 빨강 머리칼의 소년이 여자아이인줄 처 음부터 알았더라면…… 그렇게 흥미를 가졌을까? 아마 "친구가 되고 싶다." 라고 느낀, 처음 그 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마음의 갈등 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 그때 레비앙이 그저 그런 인식으로 남아 있었 더라면, 그토록 길고 오랜 시간 동안을 공유하며 친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 리고, 같이 지내온 그 나날이 없었다면…… 결코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 것이 다.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를 거두며 다시금 한숨을 내 쉰 엘스헤른은 레비앙 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만일, 네가 그렇게 <레비앙>으로 자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친 구가 될 수 없었을 지도 몰라." 엘스헤른의 말은 느릿하고 낮았다. 어쩌면 아주 무미건조한 듯도 했지만 레 비앙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레비앙은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 그냥 가만히 아랫입술을 물고 치마 자락만 내려다 보았다. 지금 왠지 이렇게 엘스헤른이 손을 잡아주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위로가 되는 듯 하여 마음 한 구석이 푸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위로를 넘어선 안도라고 할 까, 이보다 더한 평온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이런 것일 테다. 그저 손을 잡 는 것 만으로도,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여전히 둘의 관계가 변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 될 것임을 약속해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고 또 받아들여 줄 영원한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 만큼 든든한 것이 세 상에 또 어디 있을까? "나는…… 네가 나의 친구인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레비앙은 그렇게 엘스헤른에게 털어놓았다. 언젠가 정말 하고싶어서 혼자서 되뇌이던 말을, 지금이라면, 이 순간이라면 스스럼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널 좋아해. 엘스." 말이 입술을 떠난 이후로도 그 한 마디로 인해 가슴에 한 가득 뭔가가 차 오를 듯이 두근거린다. 그 여운을 만끽하듯 레비앙은 가만히 눈을 들어 엘스 헤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엘스헤른 역시 레비앙 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방금 말한 것이 쑥스러워져 레비 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작게 스치는 옷자락의 소리와 함께 문득 엘스헤른이 그의 뺨 언저리로 손을 가져다 댔다. "나를 봐, 레비앙." 엘스헤른의 손에 실리는 힘에 의해 그를 보게 된 레비앙은 그 새 사뭇 진지 해져버린 그의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조금 떨 어져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가까운 거리에 엘스헤른이 서 있고, 그가 평소의 장난스러움이 아닌 뭔가 무게감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어지러움이 말려온다. 그러나, 그런 레비앙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엘스헤른은 전혀 변함없는 눈길로 그렇게 그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뭔가를 알아주기를 바 라는 눈빛이랄까, 엘스헤른은 그렇게 간곡하고 절실해 보였다. 한참만에 엘스헤른은 꼬옥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올려 그 손등 위에 입맞추 었다. 그 모든 것이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경건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이루어지고 있었다. 입술이 숨결과 함께 손등에 닿아오고 지긋이 키스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레비앙은 뭔가 조금 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고 싶어졌다. 그것은, 어쩌면 작은 예감 같은 걸지도 모른다. 왠지 엘 스헤른의 이 행동 하나 하나가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마지막으로,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손을 자신의 가슴 녘으로 이끌어 머물게 하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진중한 눈빛을 하고 자신의 앞, 오로지 레비앙 만을 응시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너를 사랑해." "……." 순간 가슴 속으로 싸하게 밀려드는 뜻 모를 고통에 레비앙은 살풋 미간을 찌푸리며 엘스헤른의 시선을 좇았다. 방금 그가 한 말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서였다. 엘스헤른이 지금 보고 있는 레비앙 자신을 향해 던져진 그 말이 과연 어떠한 본질을 향한 것인지, 아니, 우선, 지금 들은 말이 어떤 의미인 건 지……. 혼란스러움은 뇌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어깨가 차갑게 시려오고, 입 술 끝이 파르르 떨린다. 장난 따위는 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입술을 열었으 나 어쩐지 엘스헤른의 진지한 눈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아 레비앙은 답답함을 한숨으로 토해내었다. 지금 떨고 있다는 것이, 엘스헤른에게 느껴지고 있을까? 레비앙은 치밀어 오르는 싫은 감정에 질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잡지 않는다면 마음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 뛸 것만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려 노력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치마 자락을 움켜쥐었다. "…… 무슨 말을 한 거야?" 간신히 반문한 레비앙은 눈을 치켜 뜨며 엘스헤른을 응시했다. 냉정함으로 가리지 않는다면 결코 가라앉히지 못할 격앙된 마음.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 르기에 레비앙은 더더욱 불쾌했다. 어쩐지 그렇게 냉랭해져버린 레비앙을 보며 엘스헤른은 긴 속눈썹을 드리워 살풋 시선을 내리깔았다. 곤란해지면 언제나, 레비앙은 저렇게 한 걸음 물러 서서 싸늘함으로 자신을 무장하곤 한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엘스헤른이 었지만, 이미 시작해버린 일을 철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두 손을 모아 가슴 녘에서 소중히 쥐고 있는 레비앙의 손을 꼬옥 품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해. 너를 사랑하고 있어. 지금 이 가슴 속을 가득 채워 넘칠 만큼, 아 니, 그 보다 더 많이, 너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너를 사랑해. 사랑해. 레비앙." 되도록 감정을 싣지 않고서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점점 가빠지는 숨결처럼 그렇게 간절해지는 말을 엘스헤른은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을 끊으며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을 뿌리쳤다. "……." 완전히 차가워진 눈빛의 레비앙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섰 다. 또각거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에 엘스헤른은 모든 것이 산산히 깨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레비앙의 손이 떠난 후, 손바닥에 남아 있던 온기는 이미 식 었고, 지금 깨어진 것들의 파편들이 정지된 시간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 To Be Continued ==================================================================== 아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역시 귀쥬 양이 뒤에서 열쒸미 떵침 (...독촉의 다른 말.;)을 놓아 주지 않는다면 글이 제 때에 올라가기가 예사 일이 아니로군요. 역시 오늘도 귀쥬 양과 내기 글 쓰기를 하여... 이렇게 허 접입니다. (다섯 시간만에 한 편을 쓰다니! 스스로 대견스러워 함.^^) 흐음.. 나날이 부실해져 가는 내용에 대해서는 역시 사죄의 말씀. 꾸벅. 죄송합니다. 이번 편은 내기를 해서는 될 내용이 아니었는데.;;; 아주 공을 들였어야 했을 내용임에도 올려야 한다는 신념 하나에 쫓기여 이렇게 되는군요. 훌쩍.T-T 아 무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 생긋. 『SF & FANTASY (go SF)』 17421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76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04 22:26 읽음:284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78/8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3월 25일 23:21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6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6) 가득 잡아당겨진 실과도 같은 긴장감. 엘스헤른은 자신에게서 물러나 하잔 한 표정으로 서 있는 레비앙을 보며 숨조차 제대로 내 쉴 수 없었다. 한 순간 을 참지 못한 마음이 빚어낸 결과는 이것,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레비앙의 저 얼음과도 같은 초록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까, 엘스헤른은 자신의 전부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 레비앙." 입술은 하릴없이, 농후한 숨결과 함께 허공에 그 이름을 토해놓는다. 그러 나, 레비앙은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양 가득 찌푸린 얼굴을 하고는 딱 잘라 말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는 사뭇 단호했다. 마주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조금도 흔들림 없이, 레비 앙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굳어버린 그의 표정을 보며 엘스헤른은 허탈감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는 레비앙의 목소리가 매 정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 레비앙을 설득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저 차갑고 아름다운 눈을, 쏘아져 오는 냉랭한 화살이 아닌, 부드럽고 따스한 것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어쩌면 처음부터 역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던 걸까? 역시 그랬던 걸까? 담담하게 받아 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은 오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기대조차가 우스운 것이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레비앙이 이렇게까지 거부할 지는 몰랐던 일이었다. 바싹 메말라 타 버릴 것 같은 입술을 조금 열고서 엘스헤른은 까칠한 음성 을 흘렸다. "전혀 몰랐겠지만…… 나 많이 고민했어. 절대로 이 말 만은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때도 있었어. 그저 친구의 상태라도 지키기 위해서……. 네가 원 하는 그대로 그저 친구만으로도 만족해 보려고 했었어. 하지만 그래 보니까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던 걸. 너를 곁에 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가……." "그만해."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말을 단 번에 잘랐다. 더 이상 듣고 있는다면 가슴 속 에서 한 가득 뭔가가 치밀어 올라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잠 시 잠잠했을 뿐 하던 말을 그만두지 않았다. "네 곁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가…… 너무 힘든데. 가슴이 터질 만큼 아 픈데……. 너는 언제나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있으니까…… 미루는 수 밖에 없었어. 하고 싶은 말을, 그토록 털어놓고 싶은 그 말을 그냥 참는 수 밖에 없었거든. …… 네가 그 자리에만 있어줘도 좋았을 텐데, 넌 너도 모르게 자꾸만 도망치니까……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야. 괴롭고…… 힘들어서……. 자꾸만 뒤쳐져서는 문득 널 놓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어. 나는 너를 잃는다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레비앙, 네가 곁에 없 다면……." "……." 엘스헤른의 말이 멈출 것 같지 않자, 레비앙은 냉랭함이 묻어나는 눈길을 거두며, 펠레린느 망토 자락을 꽈악 움켜쥐고선 엘스헤른에게서 등을 돌렸다. "…… 나는 용납 못 해." 싸늘한 한 마디를 남긴 그는 잠시 망설일 사이도 없이 걸음을 때어 놓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망토 자락 위에서 거칠게 흩날린다. 붉은 잔상이 어 지럽게 눈 앞을 맴돈다. 그리고 차갑게 또각거리는 비단 구두의 소리가 그녀 를 점점 엘스헤른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그 선명한 소리에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레비앙을 뒤따르기엔 그의 싸늘한 표정 이 자꾸만 떠올라 그 길을 가로막았다. 좇아가 봤자 어쩔 수 없음을…… 가서 붙들어 봤자 놀래버린 그의 마음을 돌리기엔 이미 늦었음을, 엘스헤른은 알고 있었다. 또한, 붙들지 못하는 것은 지금, 온갖 고통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온 몸을 저미는 것 같아서였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땐다면, 겨우 지켜내고 있는 자신의 균형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사랑해, 레비앙……." 온 힘을 다 짜내어 빚어낸 마지막 한 마디를 엘스헤른은 함뿍 젖은 숨과 함 께 입에 담았다. 그러나, 그 말 마저 떨쳐 버리듯이 멀어져 가는 레비앙의 모 습은 차가운 기류를 일으켜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 지 않는 싸늘한 보석과도 같은 그 모습이 가슴에 깊이 박혀든다. 무디면서도 묵직한 통증을 동반하면서. 어느새 복도의 저 끝으로 레비앙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남은 소 리도 점점 멀어져 희미해진다. 그리고, 여지껏 멈추어 있던, 깨어진 그 모든 것들이 흩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끝을 모를 마음 속으로, 그 심연 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엘스헤른은 떨리는 입술 끝을 악물었다. 이제는 이것으로 끝일는지 모른다. 너무 아스라해서 기억조차 못할 쾌락의 끝……. 행복의 순간이라는 것은 여기 까지가 아마 마지막일 모양이다.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 아픔이 스며온다. 엘 스헤른은 멀어져 가는 소리와, 망막에 남은 잔상조차 멀어져 가는 레비앙에게 서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 황실 친위대의 아슈텔 드 리베리옹 대장에게 직접 끌려가 황제 폐하의 집무 실에 던져진(…) 엘스헤른은, 업무에 대한 부실로 하마터면 귀족 재판까지 받 을 뻔 했으나, 그가 잡혀왔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황후의 눈물 섞인(과 연.;) 설득으로 2주간의 근신만 내려졌다. 물론 그 정도로 황제 폐하의 화가 풀리지는 않아, 당분간은 엘스헤른을 보지도 않겠으니 업무에 관한 일들은 서 신으로만 의논하라며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먼저 뜨셨다. 집무실을 나오면서도 내내 아무 말 없는 엘스헤른에게 아드레이드는 못마땅 한 눈치를 했다. "뭐한 거니? 어린애도 아니면서 어째서 갑자기 없어질 수 있지? 하루 종일 친위대가 얼마나 너를 찾아서 헤매었는지 알기나 해? 친위대만 그랬을 줄 알아? 심지어는 벨라시그네 위병대까지 나섰어. 너 하나 때문에 말이야. 티 아란 대공 전하라는 사람 때문에! 참∼ 멋지기도 한 일이로군." 비아냥 섞인 황후의 말에도 아랑곳 없이 엘스헤른은 여전히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아드레이드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는 넌 지시 엘스헤른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어째서 성당에서 발견이 된 거지? 고해성사라 도 하러 간 거냐?"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역시나 유령처럼 걸음을 옮기던 엘스헤른은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누나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는 그냥 옅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 것도 아니야." 힘없는 그 말투에서부터, 벌써 아드레이드는 동생이 고민하는 대상이 무엇 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엘스헤른이 뛰쳐나가서 만난 사 람은 다름 아닌 레비앙일 테다. 그리고, 저렇게 초췌한 모습이란 뭔가 둘 사 이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일 테고. 아드레이드는 은근히 눈을 내리깔고서는 엘스헤른을 곁눈질했다. 뭐, 황후 로서의 체신에 안 맞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빤히 바라봐 주는 것으로 지금 엘 스헤른의 심기를 건드려서 별로 좋을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밖에서 무언가 알지 못할 - 그러나, 싸웠음에 틀림없을 거라고 짐작은 가는 - 일이 있은 데다가, 2주간 근신까지 받아 황궁 바깥 출입은 꿈도 못 꾸 게 되어버렸고, 또 그렇게 그와 찰떡 같이 사이가 좋던 황제께서 얼굴도 보지 않겠다며 진노까지 하셨으니 아마 지금 심정은 숨쉬기조차 싫을 정도 일 것이 다. 아까 잠시 웃던 웃음조차 그저 곤란함을 무마하기 위한 가식이었다는 듯 어느새 입가에서 홀연히 미소가 사그러든, 그런 엘스헤른을 보며 그녀는 나직 한 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 지금의 네 자리가, 그리고 이 나라의 외교 문제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야." "…… 알고 있어." 사뭇 기운 없는 엘스헤른의 말에 괜히 가슴 안 구석이 찜찜해진 아드레이드 였으나,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런 때일수록 다독거려준다면 오히려 더 정신을 못 차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내 말 명심해. 너는 지금 티아란의 대공, 너의 그 같잖고 사사로운 연애 감 정 때문에 국가의 대사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알겠 어? 시시콜콜한 유희 따위는 접어. 그런 것은 너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물러터지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대공직에서 물러나. 어차피 그 자릴 노리는 사람이 한 둘은 아니니까. 너처럼 그렇게 네 개인적인 일에 정 신 없어 하는 녀석이 아닌 제대로 된 인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 엘스헤른은 아무 대꾸 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잠시 그의 눈치를 살핀 아드 레이드는 확인 사살 겸 무겁게 헛기침을 하고는 정면을 주시했다. "난 내 방으로 돌아가겠어. 너는 곧장 집무실로 가. 티아란에서 네이쉬 드 시아르 백작 이 와 있으니까." 그녀는 동생을 돌아다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 그저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문득 엘스헤른의 발자국 소리가 멈추고 대신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내 다시금 걸음을 옮겼으나 아드레이드는 그 짧은 순간의 한숨만으로도 어쩐지 엘스헤른이 가엾게 느껴져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아드레이드는 곧 엘스헤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구렁거리면 서 가던 걸음을 마저 재촉했다. "대체 이번엔 무슨 일인 거야?" - To Be Continued ==================================================================== 지난 75회는 메모 서비스를 날려드리지 못했습니다. 메모 서비스를 받으시 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랸 2000 플러스가 업글 되면서 메모 시스템이 묘하게 변하여, 사용법이 익숙지 않은 저로서는 메모 서비스를 보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좀 번거롭더라도 수동으로 메모 서비스를 보내어 드리겠습니다. 혹여 메모가 도착하지 않았으면 연락주 시기 바랍니다, 생긋.^^ 그건 그렇고, 이번 편 역시 부실하군요. 졸음과의 치열한 전쟁 속에 피어난 글(...)이라 그런가봅니다. 한 일도 없이 피곤하군요. 아무튼 매 15분마다 독 촉해주느라 피곤했을 귀쥬 양에게 감솨. 언제나 글 쓸 때는 귀쥬양의 신세를 입는군요. 그러나, 이제는 정말 뻑 갈 정도로 졸음이.......zzzZZZ. 커허~! 우웃, 이번엔 정말 도저히 잠이 와서... 퇴고 못하고 올립니다. 흑흑. 틀리더 라도 이해 해 주시길.; 요, 요즘 퇴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한 번도.;;; 아, 참. 저 학교는 잘 다니고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 감솨.^^ ...페르티 파르페 마쉬멜로우 『SF & FANTASY (go SF)』 18271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77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10 18:51 읽음:243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80/80 ▶ 등록자 : DIABLESS │ │ ▶ 등록일 : 2001년 03월 31일 23:58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7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7) "오셨습니까?"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네이쉬 드 시아르 백작이 깍듯한 예의로 엘스헤른을 맞이했다. 엘스헤른은 잠시 문간에 가만히 서 있다가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 면서 그에게로 다가섰다. "간만에 뵙습니다. 시아르 백작." 어쩐지 안도감이 묻어나는 엘스헤른의 말투에 시아르 백작은 의아한 눈빛을 지으며 싱긋이 미소를 띄웠다. "저를 보고도 반갑게 맞으시다니,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말은 그리 해도 이제 30대 후반 밖에 되지 않은 그라, 엘스헤른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였다. "티아란에 있을 적, 어린 날의 치기를 이기지 못해 백작께 못할 말을 몇 번 하기는 했습니다만, 지난 일이니 부디 잊어주십시오." "어린 날…… 이라고는 해도, 역시 겨우 4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 오래된 일 도 아닌 거지요." 은근한 시아르 백작의 말에 엘스헤른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백작과 함께 집무실 한 켠의 고풍스러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후 시종을 불러 차를 부탁 한 엘스헤른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히 오신 것은 역시, 티아란의 분위기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 까?" "하하하! 너무 하십니다. 저는 그간의 안부도 좀 묻고 이곳 근황에 대해서도 일단 이야기를 한 다음에 티아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만, 업무에 관해서라면 어찌 그리도 단호하십니까? 역시 대공 전하답습니다." 시아르 백작은 사뭇 진지해지는 엘스헤른의 말을 붙들며 크게 웃음을 터뜨 렸다. 그와 같이 티아란을 다스려온 지난 4년 동안, 이 어린 대공은 항상 일 에 대한 한 이런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럽기는 했지만, 시아르 백작으로서는 거의 아들 뻘 (물론, 첫사랑에 성공을 했다는 전제 하 에…….)인 그가 조금 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는 않았다. 뭐든 완벽 하려고만 하는 엘스헤른을 볼 때면 어쩐지 꼭 언젠가는 부러지고 말 단 단한 유리 막대를 보는 것 같아서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대공 이라는 막대한 짐을 짊어지게 된 것이 이 아름다우신 분의 성격 을 그리 만든 것이리라. "티아란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먼 길을 떠나 이제야 도착을 한 저를 좀 가엽게 여겨주십시오. 저는 전하로부터 듣고 싶 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아무리, 티아란에서는 아무리 견원지간이었 다고 하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역시 전하를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더군 요. 어찌 지내시는지 염려도 되고, 더욱, 전쟁 준비로 바쁘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진정 뵙고 싶었습니다." 시아르 백작이 그리 분위기를 돌린 연후에야 엘스헤른은 가뜩 굳어있던 표 정을 풀고서 머쓱하게 옅은 웃음을 흘렸다. "사실, 긴장해 있었답니다. 백작께서 이 곳에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뭔 가 큰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별 다른 기별도 없이 갑자기 제 스승 되시는 백작께서 방문해 계신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가슴이 철렁 했습 니다. 아무래도 저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지 않을까 하고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가뜩이나 오늘,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황제 폐하의 심기를 어지 럽혀 드린 일도 있고 하여…… 마음 속 깊이 조심스러워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차에 황후 폐하로부터 백작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 지 모릅니다." "스승이라니요, 일단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 하의 특별한 그 이벤트는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폐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 다. 갑자기 <실종>되셨다 하시더군요. 물론 그것이 나중에는 <가출>로 말이 바뀌어 지기는 했습니다만." 백작은 이 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황제 폐하로부터 일찌감치 전해들은, 엘 스헤른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소리내어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사실인지 의심스럽기조차 했던 그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대공 전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정 치의 "정"자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대공 전하조차도 - 당시는 그저 어른의 흉 내였는지는 모르지만 - 매사에 사적인 감정은 무서우리만큼 깨끗이 접어두었 지 않던가! 그런 이미지를 깨어 놓고 무엇보다도 위중한 국가의 중대사 앞에 서 그렇게 이유 없이 도망친 엘스헤른의 모습이 시아르 백작으로서는 생소하 기까지 했다. 내심 그 믿을 수 없는 <가출>의 이유가 궁금했던 시아르 백작은 웃음을 거두며 엘스헤른에게 넌지시 물었다. "역시 일이 싫증나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저……." 엘스헤른은 시아르 백작의 지나친 관심에 쑥스러워 하며 말끝을 흐렸다. 레 비앙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시아르 백작 앞이라 하지만 그다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고, 원래부터 그런 시시콜콜한 것에 대답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 러나, 시아르 백작은 비단 리본으로 곱게 묶은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과 같은 다갈색의 점잖은 눈동자를 진지하게 반짝이면서 엘스헤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그런 기대에 찬 시선이 퍽 부담스러워, 엘스헤른은 무례하지 않 을 만큼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때마침 시종이 차를 들여왔고, 테이블 위에 찻잔을 세팅할 동안 엘스헤른은 백작의 관심이 다른 곳에 향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종이 다소곳이 물러난 후, 한참이 지나서 까지도 백작은 그다지 다른 곳에는 흥미가 가지 않는 모양 이었다. 그의 줄기찬 관심에 지쳐, 엘스헤른은 가만히 손을 내 저었다. "자꾸 그리 보시면 곤란합니다, 시아르 백작. 그저 바람 쐴 겸사 해서 나간 겁니다." "그러나, 바람을 쏘일 일이라면 역시 이 넓디 넓은 황궁 안에서도 가능한 일 이지 않습니까? 유럽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벨라시그네 황성은 차라리 하나의 도시이니 말입니다. 저 넓고도 아름다운 정원을 거니는 것 만으로도 아마 대공 전하의 그러하신 욕구는 충족되었을 겁니다. 아아~! 대공 전하, 저를 속이실 생각은 조금도 마십시오. 저는 전하를 비밀리에 4년간 모셔온 사람입니다. 전하가 이 나라 최고의 대공이 될 수 있도록 전하의 일을 도운 사람이 저입니다. 그것도 전하와 아옹다옹 싸워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다 른 건 몰라도 전하의 속은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그런가요? 후훗……." 엘스헤른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아르 백작의 말이 우습거 나 해서는 아니었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맞는 것이, 지난 4년 동안, 티아란 땅을 떠나 있는 무책임한(?) 대공의 명을 받들어 그 영지를 성심껏 다스려온 실질적인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인 고로, 그 어리던 소년을 이만큼 키워온 공로 와 함께 무엇보다도 스승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왔다는 점에서 시아르 백작 은 엘스헤른의 마음을 꿰뚫을 듯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있자니, 그는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어디서 어떤 공격을 당하게 될 지 몰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가령은……, "제가 모르는 사이에…… 혹여……티아란 대공 부인감이라도 봐 두신 걸까 요?" …… 이런 간 떨리는 질문이라든지. 그리 은근하게, 또 넌지시 물어오는 시아르 백작의 물음에 엘스헤른은 눈을 반짝 떴다. 물론, 각오를 하고 있었던 터라 그리 갑작스러워 할 생각은 아니 었으나, 그렇지 않아도 방금, 아까 낮의 일의 떠올리고 있었던 터여서 그의 질문에 순간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한 것이었다. "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살짝 흐려지는 그의 말꼬리를 잡고 시아르 백작은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을 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전하는 스물을 넘기셨습니다. 명문 가의 다른 영랑들에 비하면 혼인이 늦으신 편입니다. 벌써 여러 자제를 두 셨을 나이가 아닙니까? 후사를 생각하셔서라도 혼인을 서두르셔야 하지 않 겠습니까." 대공 부인에, 자제에 후사 문제까지…… 아무래도 이야기가 짐짓 이상한 곳 으로 흘러갈 것 같은 두려움에 엘스헤른은 헛기침으로 주의를 상기시켰다. "저는 아직 형님도 독신으로 계신 이유도 있고 하여 그다지 혼인에 뜻이 없 답니다." 그러나, 엘스헤른의 친절한 안내와 부인에도 불구하고 시아르 백작은 그다 지 그를 믿어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되려, 백작은 더더욱 흥미로운 얼굴을 하 고서 만면에 알지 못할 미소를 가득 띄우고 있었다. "루엘 프레데릭 경께서는, 소문에 의하면 요즈음 과학의 연구에 시간이 없으 시다 들었습니다만……?" "그리 따지자면 저도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랍니다. 하루 같이 회의에, 공 문 처리에, 사안의 해결은 또 어떻고, 당최 무슨 짬이 있어 연애에 발을 들 여 보겠습니까?" "…… 그러게, 오늘 같은 가출 사건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시아르 백작의 비약에 엘스헤른은 말문을 잃고 말았다. 물론, 백작의 말이 조금도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그로부터 이렇게 조목조목 듣고 보니, 그 저 자신은 주체 못할 연애 감정을 어쩌지 못해 황궁을 뛰쳐나가 한 나절 동안 궁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아 어쩌면 조금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마디로 축약해버리기에는, 오늘 자신이 저지른 일을 과감히 실행할 그 당시의 그 심정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저 보고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 마음이 곤란해 질 수 있음을 그 누가 알아줄까? 생각에 잠겨들어 시시각각 어두워져 가는 엘스헤른의 표정을 바라보며 시아 르 백작은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에 빠지셨군요."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에 문득, 엘스헤른은 가슴이 철렁하여 시선을 내리 깔았다. 상대가 시아르 백작임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 게 쉽게 마음을 읽혀버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자신 이 해이해져 있다는 증거였다. 모든 것에 방심하고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그 리 않으려 해도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방만함의 댓가인 것이다. "……." 자신을 비웃으며 침묵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아르 백작과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며 수더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보이십니까?" "예."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게, 시아르 백작은 그리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엘스 헤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덧붙여 이야기했다. "그래서 일까요? 어쩐지…… 제가 뵈어 온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 전하께서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 To Be Continued ==================================================================== 77회입니다. 너무나도 늦은 연재에 사죄드립니다. 그러나, 연중은 없습니 다! 아무리 4월이 과학의 달이라 학교 행사가 많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제가 글라이더의 "더" 자도 모르면서 글라이더 부문의 지도를 맡게 되었다 하더라 도! 4월 달 적어도 5편은 올리겠음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4월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오늘도 무 퇴고. 언제쯤 제대로 된 글을 올릴 수 있으려나.TT-TT) 『SF & FANTASY (go SF)』 18272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78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10 18:51 읽음:252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81/8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4월 07일 18:31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8 - (re)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8) "훗……." 엘스헤른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아름다워 보인다? 시아르 백작의 말이 어쩐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지금, 사랑을 고백한 그 상대에게 거부당하고 이렇게 볼품없이 지쳐버린 이 모습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토록 가슴 가득히 쓰잘데없는 고민과, 알지 못할 불안과, 앞 일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데……. "개인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고……." 엘스헤른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진지함으로 자신을 마 무리했다. "티아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시아르 백작, 당신이 직접 여기 벨라시그네까지 온 것은,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인 거겠죠." 더 이상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아 하는 듯한 엘스헤른의 태도에 시 아르 백작은 조심스레 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것은, 저 분에게는 건드리면 쓰라릴 상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아니라고 우기긴 해도 오늘 일 역시 아마 그것과 연관된 것일 테다. 그 정도는 가볍게 눈치챈 백작 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러고는 엘스헤른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지요." 티아란의 문제……. 엘스헤른은 진지해진 시아르 백작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티아란의 백성들 말입니다, 전하.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에스트르가 자신들을 필요할 때만 쓰고 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에스트르의 전쟁에 관한 한 모든 책임은 티아란이 진다.> 그것은 에스트르 의 제 2대 황제와 그 형님이신 티아란 대공과의 약속이래 조금도 변함없이 이어져 온 불문율입니다. 대신 티아란 대공이 보장받은 것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의 자유. 티아란 대공을 따르는 백성들은 평상의 자유를 약속 받은 대신 전시에는 에스트르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어, 온 유럽이 달아오르고 있는데, 이들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 습니까?" 시아르 백작의 긴 설명 끝에 엘스헤른은 마르는 목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티아란의 일. 그 짐의 무게 때문일까? 어쩐지 자꾸 갈증이 엄습해 온 다. 이렇게 될 것을, 언제고 한 번 쯤은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을…… 대공의 직위를 이어 받게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 면 그 순간부터 <전쟁>이라는 말은 피해온 건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짊어지게 될 이 무거운 책임을 두려워하며 회피하고 외면해 온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무도회나 사교계, 사냥터 등을 전전하며 웃고 떠들고 소일하는 것이 낙이었던 게다. 자꾸만 레비앙에게로 도망치려 했던 것도 어쩌면 이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그 일상을 함께 해 온 레비앙에게……. 엘스헤른은 입술을 적시던 찻잔을 내려놓고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마음 속은 그 어떤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저 마음 속에 담긴 것은 수많은 문제들과, 그것으로 인해 얽혀드는 자신의 무능한 고민 뿐. 짜증스레 눈 앞을 가리는 잿빛의 머리카락을 다시금 쓸어 넘기면서 엘스헤른은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티아란의 문제와, 자신의 문제. 둘 중 어떤 것도 먼저 가 될 수 없고 나중이 될 수 없음을 안다. 큰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한 다면 그것은 제롬의 말 그대로 위선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두 문제 모두, 수습하지 못한다면 이 마음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엘스헤른은 깍지 낀 손에 얼굴을 고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반란인 겁니까?" 그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아르 백작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것이 무 엇을 뜻하는지 엘스헤른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반란. 이 전시에 반란이라니……. 문득 전 티아란 대공이 임종 자리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의 목소리였으나, 어쩐지 쟁쟁하게 귀에 꽂히는 그 말이 4년 전 그때 는 몰랐는데, 어째서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 걸까? - 자네와 나는 남이나 다름없네, 거슬러 올라가면 티아란 대공과 애스트리온 공작은 형제였네만, 그것은 자네에게나 나에게나 그저 먼 이야기일 뿐이 야. 아주 오래된, 우리로서는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일인 게지. 이것은 비 단 우리의 일 뿐만이 아니야. 나의 백성…… 아니, 나의 먼 할아버지를 따 르던 그 백성들의 핏줄에게 자네는 더더욱 남일세. 자신의 고통과는 동떨 어진 에스트르의 사람이란 말일세. 자네가 내 뒤를 이어, 티아란의 대공이 된다면, 자네는 티아란 사람이 되어야 하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자네 를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자네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 제든지 뒤엎고 일어설 걸세. 그들에게는 분명한 명분이 있다네.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오로지 <티아란 대공> 이라는 명분 말일세. 그저 이름 뿐인 티아란의 대공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해주는 티아란의 대공 말일세. 그들이 믿고 따랐던 초대의 그 티아란 대공은 그들을 위해서, 황 제가 될 수도 있었던 자신의 권리마저 버리지 않았던가? - 티아란의 대공. 그 직위는 누구도 아닌 티아란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 나, 막상 그들을 책임져야 할 이 대공은, 자신의 일 하나만으로도 힘들어 휘 청거리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다. 반란은 애초부터 당연한 것이었던가? 티아 란 대공위를 이 어리석은 한 남자가 물려받았던 그 순간부터 예견되었던 것이 었던가? 엘스헤른은 또다시 도망치려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폐부를 짓눌러 숨도 쉴 수 없게 만드는 그 무게는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 로 거절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었던 그 상황을 받아들인 게 아 니었던가!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4년 전 티아란 대공의 임종을 지켜보 았단 그 순간부터 자신은 지금 이 반란에 대한, 그리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몰 라하며 뭉쳐 일어선 저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지금 도망친다면…… 이렇게 도망쳐버린다면 영원히 이 어린 마음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순 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알고 있다. 레비앙은 손이 닿지 않을 저만큼 물러서 버렸으니까. 엘스헤른은 악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평정심을 찾은 듯한 엘스헤른의 차분한 목소리에 시아르 백작은 어쩐지 안 도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엘스헤른이 묻는 말에 쉽사리 대답 을 놓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무언가 어려운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임을 엘스 헤른은 예상할 수 있었다. "전하……." 한참만에 시아르 백작은 엘스헤른을 마주보면서 나직히 말을 꺼내 놓았다. "티아란의 국민들은 전하가 하루 속히 티아란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있습 니다." ·‥…━━━━…‥ 정신없이 로자리움으로 돌아온 레비앙은 자신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차를 잡아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은, 애써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제서야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발을 옥죄고 있는 비단 구두…… 문득, 발에 아련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조그마한 것을 신고, 성당을 나서서 그토록 뛰었으니 발이 온전할 리 없다. 그는 신발을 벗 어 내려놓았다. 고운 수가 놓인 베이지 색 비단 구두, 그 발등에 장식된 복슬 복슬한 깃털과 리본이 손가락 끝에 걸린다. 하얗고 긴 손가락…… 문득, 아까 엘스헤른이 넌지시 손을 잡던, 그 감촉이 떠오른다. 아주 은근히…… 그렇게 체온이 전해져 오는 느낌을 한 순간에 떨쳐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손을 잡고 있던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평온해서 이 세상 무엇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 했었는데……. 레비앙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방의 저 편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 친다. 아니, 이것은 레비안느의 모습……. 틀어 올려 꽃과 리본과 보석으로 치장한 붉은 머리카락, 동그랗게 말려 내려온 그 오묘한 빛깔이 사뭇 새초롬 하다. "레비안느……." 거울 속의 자신이, 붉은 입술을 움직여 스스로의 이름을 읊조리고 있다. 이 름. 그것은 참으로 오묘한 단어이다. 어째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레비안느 라고 불렀을 때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까? 레비앙은 생소한 자신 을 바라보며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그리고 알 수 없던 것들, 그것들의 진실을 이제 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으로 레비안느가 되어 엘스헤른의 앞에 섰을 때 그토록 기분 나빴던 것은, 친구인 엘스헤른이 자신에게 보인 이성으로서의 관 심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았기 때문임을, 지 금껏 내내 친구로서의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엘스헤른이 자신을 여성 으로 볼까봐 두려웠음을…… 레비앙은 자신의 심정을 돌이켜 생각했다. "나는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계집애 따위가 아니야." 그러나 지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틀림없는 레비안느다. 화려하게 치장해 여느 귀족집 영애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영락없는 계집아이. 엘스헤른이 사랑한다고 말 한 상대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한 계 집애다. 마음이 한 가득 혼란스러워 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서 가슴 한 켠이 덜 컹 하고 움직인 것은 놀라서 뿐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뭔 가가 치솟았던 것은, 엘스헤른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보여준 레비안느로서의 이미지. 엘스헤른은 아마도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째서 이토록 어지러운 걸까? 용납 할 수 없는 마음은, 그 한도를 알지 못한다. 어디까지란 말인가! 도대체 자신 은 어디까지를 용납할 수 없는 걸까? 친구의 사이를 넘어서려는 엘스헤른을? 아니면, 자신을 레비앙이 아닌, 레비안느의 모습으로 있어주길 바라는 엘스헤 른을? "둘 다…… 싫어." 어쩐지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에게 엘스헤른을 빼 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스울 일이지만 그랬다. 레비안느는, 엘스헤른이 고백을 한 그 레비안느는 진실된 레비앙 자신의 모습이 아니니까. "엘스헤른이 고백한 상대는…… 내가 아닌 너야. 레비안느." 레비앙은 천천히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장식 리본을 풀어냈다. 부풀어 있던 리본은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스르륵 풀려진다. 머리카락은 붉은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이내 오른 손에 끼여진 보석 반지에 뭔가 걸렸다. 조금 힘을 주어 잡아당겼더니, 그것은 툭하는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작은 알맹이 들이 좌르르 흘러내려 그의 치마 위, 침대의 위, 그리고 양탄자의 위를 소리 없이 굴렀다. 치마 자락 위에 두 세 알 놓인 진주 구슬을 보며 레비앙은 눈을 내리깔았다. 씁쓸함이 마음을 채운다. 보석으로 치장한 아름다움…… 그것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다. 리본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리본으로 묶여져 있던 꽃 이 바스스 흐트러져 내린다. 마치 춤을 추듯, 동그랗게 돌면서 떨어져 내리는 꽃잎. 떨어져 내리는 것은 오히려 마음의 조각들. 어지러이 흩날리는 것은 꽃 잎이 아니라 마음이다. "친구라면 좋을 텐데……." 친구. 엘스헤른이 자신을 레비안느로 보고 있는 한, 영영 글러버린 일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엘스헤른의 그 진지함이 레비앙은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지 금껏 그가 봐 왔던 게 평소의 자신인 레비앙이 아닌, 레비안느라는 것이 어쩌 면 배신감 마저 들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독한 약이라도 먹은 듯이 붕 뜬 기분에 힘이 하나도 없다. 애써 자신의 나약함을 무장했던 싸늘함마저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 다. 그때, 그 봄에 엘스헤른이 마차 안에서 장난스레 키스했던 때가 떠오른 다. 첫 키스를 이 따위 친구 녀석에게 빼앗겨 버렸다고 분해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 아쉬워했던 것은, 엘스헤른이 레비안느를 대할 때면 언제나 자신이 모르는 사람 같아 보여서였다. 오늘 그렇게 경건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던 그 사람도 평소의 엘스헤른이 아니었다. 두려운 마음은…… 변해버린 엘스헤 른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임을 레비앙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성장 하는 것만으로도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한, 그 친구가 훌쩍 자라 간혹 남자로 서의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 얼마만큼 껄끄러운 일인지……. "이러는 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엘스헤른. 내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게 아닌데……." 일순 거울이 뿌옇게 흐려진다 했더니 거울 속 레비안느의 뽀얀 뺨 위로 눈 물이 굴러 떨어진다. 바닥을 구르는 진주 구슬처럼, 그렇게 동그란 것이 연이 어 눈에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네가 변해 버릴까봐 무서워. 그런 건 내가 알고 있는 네가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엘스는 이러지 않아." 목이 메인다.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치솟아 오르는 울음 때문이 아니 라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레비앙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을 손등으로 가리며 침대에 누워버렸다. 손 등에 닿는 눈물, 그 뜨거운 감촉이 지금 울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문 득 느끼게 해 준다.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사람은…… 친구라 믿어 의 심치 않았던 엘스헤른에게서 외면 당한 <레비앙>이라는 이름의 자신임을. 울 고 싶은 것은, 아니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다. 10년 동안, 그 오랜 동안을 쌓아온 길고 끈질긴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허상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허탈했다. - To Be Continued - ==================================================================== 원래 이 편을 써서 올렸던 날은 4월 5일입니다. 식목일에 노는 기념으로 한 편을 썼었는데, 중간에 "아앗! 너무 이상해요!" 라는 독자님들의 목소리가 높 아 올렸던 78편을 지우고 보수공사를 해서 다시 올리는 겁니다. TT-TT (저는 귀가 너무 얇은 거예요. 남들의 말은 예사롭지가 않으니…… 쿨럭.) 네, 그런 데 보수공사가 너무 늦어졌죠? 그것은 말입니다. 원래 어제 4월 6일에 올리려 고 다 써놨던 것을, 어제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려진 이래 오늘 아침 출근할 시간에나 깨어나서 짬이 없었던 겁니다. 때아닌 감기를 만났네요.^^ 게다가 요즘 목도 무리하게 쓰고 있는가 봅니다. 역시 교사란 직업은 목이 생 명……. 네, 아무튼, 보수공사 차 늦게 올리게 된 점 사과 드립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죠. 괭이꼬리// 교내 과학대회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생전 만들어보지도 못 한 글라이더도 무사히 만들었고 말이죠. -_- 문제는 무거워서 날지 못했다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SF & FANTASY (go SF)』 19730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79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19 19:10 읽음:275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82/82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4월 15일 22:2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79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79) 건강을 회복하신 할아버지와 간만에 함께 아침식사를 한 후 집을 나선 레비 앙은 마차에 앉아 옷매무새를 다시 살폈다. 크라바트는 똑바로 메어졌는지, 베스트의 단추는 모두 잠갔는지, 외투의 깃은 바로 서 있는지 일일이 매만진 그는 길게 한숨을 지으면서 푹신한 벨벳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평소 입궐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선 것은 리하르트의 저택에 들르기 위해서 였다. 오늘 아침, 할아버지께서 느닷없이 리하르트와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으셔서, 하릴없이 이런 저런 변명을 해 대느라 진땀을 뺐던 그로 서는, 문득 그간 리하르트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이 조금 무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어찌했건, 리하르트는 그의 친구였고 종종은 찾아보았어 야 했으나, 예전의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도통 얼굴을 본 적도 오래 되었기 도 하여 이렇게 그를 방문하려는 것이었다. 마차는 숲 길을 벗어나 이내 도성의 타일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벨라시그 네 황성까지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아서, 레비앙은 조금 설레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쭉 뻗은 <영광의 대로> 끝에는 황성이 시작되는 거대한 문이 있는데 그 곳을 통과하면 곧바로 광장이 펼쳐진다. 리하르트네 집인 에르띠낭 저택은 그의 아버지 에르띠낭 백작이 고위 관료인 관계로 벨라시그네 황성 안에 있 다. 대신들의 주거 구역이 황성 안에 따로이 정해져 있는 것은 궁궐의 업무를 원활히 하기 위한 선대 황제들의 배려였고, 선택된 귀족들만이 황성 안에 저 택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에스트리온 저택이나 로자리움처럼 황성에서 그 리 멀지 않은 곳에 저택 혹은 성관이 있는 경우에는 굳이 황성 안에 거주할 필요는 없다. 대신에 아침마다 이렇게 출근 길에 마차를 재촉해야하지만. 어느새 황성에 다다른 마차는 그를 에르띠낭 저택 앞에서 내려 주었다. 마 차에서 내려서 심호흡을 하며 둘러본 벨라시그네의 황성 안은, 습하고도 투명 한 대기의 저편으로 하얀 대리석 건물이 웅장하게 즐비하여 그렇지 않아도 푸 르른 하늘과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었다. 간만의 출근이라 그럴까? 오늘 따라 이 황성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레비앙은 한동안 주변을 그렇게 둘러보고 서 있었다. 선 자리에서 성관을 한 번 주욱 훑은 레비앙은 이내 시선을 거두며 하얀 타 일 위를 또각 또각 소리가 나도록 걸어 에르띠낭 저택의 문 앞에 섰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하여 마음을 가다듬은 후, 문고리를 잡아 똑똑 두드렸다. 곧 장중한 고동빛의 문이 열리고 에르띠낭 가의 집사가 고개를 내민다. 집사는 곧 그를 알아보고는 사뭇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히 숙여 인사를 했 다. "오셨습니까? 레비앙 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 예. …… 저, 리하르트는 안에 있습니까?" 레비앙은 가히 건성조로 물었고, 집사는 앞장을 서서 그를 안내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니 서재에 있을 리는 없을 거라는 그의 생각이 맞아 떨어져, 집사 는 그를 곧장 리하르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안내했다. 둥글게 꼬여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 위에 손을 올리고 걸으면서 문득 2층으로 눈길을 돌린 레비앙은 간만에 대면하게 될 리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처럼 깔끔한 모습 그대로이겠지만, 이렇게 사전의 예고 없이 갑자기 방문하게 되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그는 앞서 가는 집사 몰래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덧, 리하르트의 방 앞에 도착한 레비앙은 벗어든 모자를 추스려 잡은 채 가만 뒷짐 지고 서서 집사가 리하르트를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리하르트 님, 레비앙 님께서 오셨습니다." 다소 소리를 높인 집사의 부름에 리하르트의 방 안은 조금 소란스러워졌 다. 무얼 하는 것인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가벼운 흰색 셔츠 차림에 그 고운 금빛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묶은 리하르트가 놀란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레비앙?" 집사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 레비앙은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안녕?" 그의 의외의 방문에 무척 당황했는지 리하르트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 어 넘기며 푸른 눈동자를 두어 번 깜박였다. "레비앙……." "이름도 두 번 씩이나 불러야 확인이 되는 모양이야?" "아, 아니. 들어와." 리하르트는 레비앙을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선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레비앙은 간만에 와 보는 리하르트의 방을 주욱 한 번 훑어 보았다. 여전히 깔끔하고 뽀얀 이 방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티 한 점 없을 것 같은 이런 청명함이야말로 리하르트다운 이미지. 이 깨끗함이 참 으로 편안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예전이었는데. 레비앙은 감상에 잠길 것만 같은 정신을 붙들어 매며 리하르트에게로 눈길 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언제 자신이 레비앙을 보고 있었냐는 듯 곧 다른 곳 에 시선을 둔다. 깊이 한숨을 내 쉰 레비앙은 어쩐지 자꾸만 겉돌고 있는 리 하르트를 끌어당겨 자신의 맞은 편에 앉혔다. "간만에 인사차 들렀어." "응."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그간 별 일은 없었지?" "물론. 별 일 없었어." 그저 그런 일상의 시시콜콜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 후 잠시 침묵이 찾아 들자, 레비앙은 한동안 리하르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의 눈길을 느끼고선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뭔가 이상하기라도 해?" "아……. 응." 레비앙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으로, 지금 이 순간 기분이 묘하다. 한 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지금 눈 앞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애써서 자신을 외면한다. 그리 겉으로 표를 내고 있지는 않 아도, 레비앙은 리하르트의 행동이나 눈빛에서 어느 정도 그런 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외면이 어쩐지 가슴 아파서 레비앙은 말없이 그에게로 손을 내밀 었다. 리하르트의 커다랗고 하얀 손이 손 안에 가득 잡혀온다. "리하르트." "음?"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고개를 든 리하르트의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레비 앙을 향했다. 새파란 눈동자. 그 선명함 푸르름이 아까 황성에 들어서서 본 하늘을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시리고, 또 투명한. 무거운 숨결은 구슬처럼 굴러 내린다. 말하지 못할 심정과, 떠오르지 않고 맴도는 생각들. 무엇을 바라며 지금 저 푸른 눈을 대하고 있는지 레비앙은 자 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조금, 위안이 필요한 건 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목놓아 울고 싶은 마땅한 장소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만, 잠시의 바램일 뿐. 정말로 그래버린다면 오히려 마음은 편하지 않을 듯 했다. 우는 것은 스스로도 용납하지 못할, 나 약한 자신을 내 비추는 일. 그런 것은 단 한 번, 엘스헤른에게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긴, 그것도 정말로 오래된 일인 건가? 다시 있을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한 자락. 어느 순간 리하르트의 손 위에 포개져 있던 레비앙의 손이 살며시 떠났다. 그러나 레비앙이 미처 손을 내리기도 전에 리하르트는 그의 손을 잡아채며 물 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 원했던 그대로를 물어봐 주는 리하르트를 보며 레비앙은 살풋 미소를 지었 다. 그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은 일이 있었어." 여전히 지켜보고 있는 리하르트의 눈동자는 말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레비앙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은, 할아버지가 궁금해 하셔. 너와 나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지……." "아, 그래?" 리하르트는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 그리 가볍게 되묻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보드라운 금빛의 가는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그의 눈을 가린다. 안타까운 마음 에 레비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하르트……." "미안해, 레비앙. 그런 일이라면, 자꾸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나 역 시도 무척 힘들다는 거…… 이해해 줄 수 있어?" 잡고 있는 레비앙의 손이 움찔 떨리는 것 만으로도 리하르트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리란 걸 쉽사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그다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마음을 이어 말했다. "나는, 네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고, 또 지금 당장에라 도 너와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 그런 나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그런 말은 꺼내지 말아 줘. 나는 한 순간, 한 순간을 겨우 참아내며 너를 보고 있어. 울컥하는 찰나의 심정에 너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네가 불행 하면 나도 슬플 거야. 너를 불행하게 하지 않으려면, 좀 더 많이 생각해 보 는 수 밖에 없다고, 나 말야,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이고 있어." 리하르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조를 머금던 입술을 내리 그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푸근한 눈빛으로 레비앙을 응시했다. "있잖아, 레비앙. 한 때는 말야. 이렇게 미적거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믿 었던 때가 있었어. 자신에게 솔직해야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그렇게 생 각 했던 때가 있었거든.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거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참으로 달라. 도저히 생각으로 감당 못할 맹목 적인 심정이 되어버릴 때가 있어. 그리고 생각만으로 라면 절대로 들지 못 할 마음이 될 때도 있고. …… 나는 너를 붙들고 싶어. 그것이 내 생각이 야. 하지만,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 앞에 아무 것 도 보이지 않고 너에게로 달려가는 심정일 때조차도 나는 언제나 불안했어. 언젠가는 그 불안이 나를 잠식하고도 모자라 너까지 망치게 될 것만 같아 서, 난 두려웠거든.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선 거야. 나약한 나 자신으로부터 너를 지키기 위해서. 자꾸만 당치도 않은 질투에 눈멀어 가는 내가 어느 순 간 너무나도 우습고 하찮게 여겨져서……." 리하르트의 말이 어쩐지 가슴을 파고든다. 레비앙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 를 떨구었다. 콧등이 아릿하다.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어 쩌면 붙들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레비앙은 무릎 위에 놓인 모자의 장 식 깃털에 내내 시선을 두고 있다 말고 가만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떠나버리면 어쩔 거야? 네가 한 걸음 물러선 사이에 내가 널 기다리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면……." - To Be Continued - ==================================================================== 늦어서 죄송합니다. 잊지 않고 독촉해주신 소르바스 님, 그리고 QHAMA18 님, 귀쥬 양, 감사해요.(더 있었나? -_-; 귀쥬 양의 언제나와 같은 강렬한 독촉 때문에 까먹었음.;) 아, GEAGLE 님은 새롬은 새로 깔으셨나요? 잘 되시길.^^ 페르티는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집에 꽃을 심느라 글 쓸 여가가 그다지 없었네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조차 일을 해 야 하다니.TT-TT 그렇지만 오후에 농원엘 다녀온 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답 니다. 간만에 산책도 하고 말이죠. 바람도 많이 불어서 머리카락을 퍼럭퍼럭 날리면서 산책을 했죠. 으음, 이런 이야길 할 것이 아니었지.;;; 아무튼, 오늘은 잠이 오는 관계로 퇴고를 못하고 구냥 올립니다. 이러다가 또 78편처럼 RE 버전을 써야 할는지도. 쿨럭.;;;;; 네, 어찌하였든 아무쪼록 좋은 나날들 되십시오. 꽃가루 알르레기도 조심하 시고 말이죠. 피부 관리에 관심을 소홀히 하시면 안돼요~! 『SF & FANTASY (go SF)』 20371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0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23 19:34 읽음:254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83/83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4월 23일 01:25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0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0) "……." 리하르트는 잠시 아무런 대답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그리 오래 끌 지 않았다. 이내 가지런히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었고 조심스러운 말을 끌어 내어 놓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만약에 내가 널 붙들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잃을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아주 중요한 순간에 내 가…… 허무하게 물러서 버리는 거라고." "알면서도 놓아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야?" "두려움을, 내 마음 안의 파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조용하다. 리하르트의 마지막 말 이후 줄곧 레비앙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 용하다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고. 그래서 그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 다. 이런 시린 기분을 견디면서 까지 이 곳에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손을 붙들고 있던 리하르트의 손이 어느새 아래로 떨어진다. 독한 한기가 어 지럽도록 신경을 몰아붙인다. "비겁해." 고요함을 깨며 레비앙은 한 마디 던졌다. 그것은 말 그대로 던져진 채 곡선 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그 한 마디가 눈에 보이는 듯하여 레비앙 은 리하르트에게서 눈길을 돌려버렸다. 상처받은 그의 표정 따위는 보고싶지 않다. "알아. 나 정말 비겁해." 의외로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웃음을 실은 채 담담했다. 그는, 그다지 아무 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어서서 레비앙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비겁한 사람의 에스코트는 받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도, 출근길이지? 내가 황궁까지 같이 가 줄게." "……." 레비앙은 그런 그의 여상스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답도 않고 뒤돌아 섰 다. 리하르트가 그리 무덤덤한 것이 어쩌면 더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서, 아니, 꼭 그러한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 다. 레비앙은 망설임 없이 문간으로 걸어나왔다. 순간의 망설임이라도 있었더 라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 테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은 들지 않 았다. 먼저 복도를 나서서 걸음을 때어 놓는 마음은 진정 착잡했다. 무얼 바라고 이 곳에 왔더란 말인가. 처음 마음은 그저 간만에 얼굴을 보고 인사나 할 생 각이었는데, 막상 그를 보니 잡다한 사념이 마음을 차지해버린 것일까? 레비 앙은 자신의 심정을 곱씹어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꺼져버릴 듯이 움츠려드는 것은 가슴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지금 자신을 감싼 모든 것이 싸늘하게 응축되어 있다. 이 슬프고도 차가운, 옅은 안개는 떠나지 않을 듯이 그의 마 음 속을 감돌았다. 문득, 규칙적인 걸음소리가 다가와, 익숙한 손길이 어깨를 두드린다. 어깨 에 닿는 온기는 마음을 더더욱 싸늘하게 만든다. 그 손길처럼 따스한 목소리 가 나직하게 귀에 와 닿는다. "어깨를 펴. 그리고 앞을 보고 걸어. 아래만 보고 걷는 것은 너답지 않아." 어느새 리하르트는 외투를 걸치고 나와 그의 곁에 서서 걸었다. 레비앙은 리하르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금 깊은 숨결을 내쉬었다. 가라앉은 마음일 랑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무슨 말을 듣는다 해도, 이제는 닫혀버린 마음을 어찌 할 수 없다. "난 말이야, 레비앙." 잠시 숨을 돌린 리하르트는 레비앙과 보조를 맞추어 걸으며 말을 이었다. "난 너의 당당한 아름다움을 사랑해. 언제나 반짝반짝하게 빛나 보이는 너의 그 자긍심 높은 모습을……. 그래서 네가 이토록 가라앉은 모습일 때면 어 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 "…… 그냥 내버려 둬." 싸늘하게 입을 땐 레비앙은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얇게 다물어버렸다. 이 럴 때는 어찌해야 할까? 기분이 이렇게 가득 가라앉아 버릴 때는. 또, 그 어 떤 곳에서도 위로 받을 데가 없을 때에는. 레비앙은 심란한 마음을 표 내지 않으려고 그저 무표정하게 걸음을 놓았다.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당장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한나절. 단 한나절이 지났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지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무슨 소용이랴. 지금 엘스헤른은 자신이 가진 시간이 이 세상의 어느 것 보다 느리게 느껴지고 있었다. 때문에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죄어왔 다. 그 때 이후, 내내 깨어 있었고, 결코 잠들지 않는 정신에는 쉴새 없이 괴 로운 생각들이 몰아붙였다. 어제, 레비앙의 그 싸늘한 표정.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얼음의 기둥이 가슴을 꿰뚫는 듯한 차갑고 예리한 고통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어젯밤 시아르 백작과 이야기를 나눈 후 이제는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버린 신세가 되어, 끔찍하리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티아란에서 움직이고 있는 반란 세력을 막을 길은 단 하나. 그 자신이 지금 당장 티아란으로 향하는 것이다. 에스트르 인이라는 포로의 역할이든, 티아란 대공의 진정한 자리이든 상관없 이, 그들에게는 우선 대공이 필요했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그 영지를 떠나 다스리는 것에도 한도가 있으니까. 더더구나, 지금은 전시로, 분명 항간에 뒤 숭숭한 소문이 퍼지고 있을 터. 그 곳으로 가는 것이야 그다지 문제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미련이 될 것이라고는 없다. 아니, 단 하나는 빼고. 지금 가 는 걸음을 가로막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레비앙. 세인들이 비웃는다 해도 어 쩔 수 없다. 자신의 감정 그 한 가지 만으로도 티아란 대공 전하는 이토록 나 약한 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빌어먹을……." 이제 입에서는 한숨 대신에 거친 말이 튀어나온다. 두려움을 막을 수 없는 감정은 마구 폭주할 것만 같다. 그는 몰려오는 두통을 주체하지 못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이라도 쐰 다면 이 마음이 조금은 진정될까? 그는 발코니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에 있을 회의를 위해 말쑥하게 차려 입은 정장이 거추장스럽게 사락거린다. 발코 니로 통하는 문을 열기 위해 반투명한 리넨 커튼을 걷으며, 흰 창틀에 손을 올린 엘스헤른은 눈 앞에 놓인 자신의 손을 멍하니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 다. 창틀의 차디찬 감촉이 문득 혼미한 정신을 일깨운다. 아무 것도 잡지 못 하는 이 손으로 대체 무엇을 하자는 걸까?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이 유리창에 뽀얀 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진다. 손자국을 따라 불투명하게 서린 김은 어느새 사그러 든다. 허망하게도. 엘스헤른은 손에 힘을 주어 발코니 창을 열었다.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향 해 밀려온다. 청명한 아침의 공기는 그 깨끗함에 도리어 숨이 막히게 한다. 그 알싸한 고통에 몸을 내맡기며 발코니로 나선 엘스헤른은 깨끗하게 맑은 하 늘의 빛깔을 응시하며 눈을 지긋이 찌푸렸다.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이나 부 시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하늘이 너무 눈부셔서……. 발코니의 난 간에 기대어 선 엘스헤른은 곧 시선을 떨구었다. 괜한 생각들로 싱숭생숭 한 때에 코끝마저 시큰해지다니, 어쩐지 마음이 흔들려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저 아래 정원에서는 제르트뤼트 공주와 레인비 백작부인이 시녀를 거느리고 산책을 나와 있었다. 레몬색의 우아한 드레스 차림을 한 레인비 백작부인은 아장아장 걷는 제르트뤼트 공주의 손을 잡고 한적하게 정원을 거닐다가 동그 랗게 꾸며진 상록 수풀의 한 켠에 설치된 고풍스러운 벤치 앞에서 걸음을 멈 추었다. 아침볕 아래에도 살결이 다칠세라 햇살을 향해 곱게 받친 옅은 노란 빛 양산은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 중 한 명이 받아서 든다. 그리고 다른 시 녀들은 준비된 폭신한 방석을 벤치 위에 놓아 다독였고, 자리가 준비되자 레 인비 부인은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살포시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러 운 손길로 공주를 안아다가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는 온화한 미소를 짓는 다. "공주님, 조금 쉬었다가 갈까요?" "네!" 예의바른 말에 대해 배운 듯, 제르트뤼트는 제법 존대하는 말투로 옹알거리 며 대꾸했다. "어머나, 아침 산책이 힘드셨나보네. 이 땀방울 좀 봐." 레인비 백작부인은 손수건을 내어 제르트뤼트의 콧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 다. 어린 공주는 보모의 그런 보드라운 손길이 못내 간지러운 듯 꺄르르 웃음 을 터뜨린다. 그 소리가 얼마나 경쾌하던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엘스헤 른은 저도 모르게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근심이 없어 보이는 아 래의 풍경은 마치 딴 세상의 그림 같이 느껴진다. 잘 그려진 화폭의 한 장면 처럼 그리 따스하고 아스라한 저들의 한때를 바라보며 그는 가만히 턱을 괴었 다. 저것이 <행복>이라는 걸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평화로운 한 때. 저 아름다운 것이 진정 행복이라면, 어쩌면 자신에게는 그 행복이 영영 찾아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엘스헤른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제르트뤼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이내 레인비 백작부인의 고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같이 노래해요. 공주님." "네! 노래 조.아.해. 제르는요." 또박또박하게 한 마디를 때어 놓는 제르트뤼트. 곱게 모아 올려 리본과 꽃 으로 장식된 잿빛 머리카락의 꼬마 아이는 총명한 눈빛을 반짝거리며 레인비 부인을 말끄러미 바라본다. 레인비 백작부인은 작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 다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귓가를 노니는 연보라빛 새의 지저귐이 들리나요? 가만히 행복을 속삭이는 고운 목소리가 들리나요? 그러면 이 심정을 말할 때가, 지금, 이 순간인가요? 마음은 설레어 하늘을 날아요. 저 새처럼. 기분은 가볍게 수면을 굴러요. 저 비처럼. 한 걸음 더 다가서 주실래요? 아름다운 그 모습 가까이 볼 수 있게. 두 걸음 더 다가서 주실래요? 두 손에 닿는 따스함 느낄 수 있게. 마지막 세 걸음 째에는, 나의 소중한 그대 눈에 내가 담길 수 있게." 잔잔한 음률을 탄 노래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먼 곳에 서 있는 엘스 헤른에게는 그저 조그맣고 아득하게 들릴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 스헤른은 젖은 한숨을 토해놓는 자신을 말릴 길이 없었다. 어찌 사랑노래 따 위에 이렇게 마음이 설레어 버리는 걸까? - To Be Continued - ==================================================================== 네, 일요일에 올린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 놓고서는 시간을 넘겨버린 점 정 말 사과 드립니다. 지금이 11시 58분이니 올린다 하더라도 월요일이 되어버리 겠군요. 으흑. 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훑어보고, 오타가 없는지 나 살핀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으이구, 다리 쑤셔.) 한 번 확인을 했으나, 정확히 오타를 고쳤다고는 장담 못해드리겠군요. (역 시 졸음과의 전쟁 중.) 네, 오늘 편이 80회입니다. 4월이 가기 전에 약속드린 대로 2편을 더 올릴 테니, 종종 확인바랍니다. 참, 메모서비스는 복구 안 되 고 있습니다. 일일이 쳐서 보낼 수도 있기는 하지만 조금 바쁘니까 말이 죠.^^;; 제 게으름을 꼬집어 주세요. 아얏.; 음, 오늘은 80회가 올라갔군요. 무사히 81회도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 습니다. 오밤중에 독촉하느라 힘써주신 소르바스 씨, 귀쥬 양, 카엣 양, 감솨. 그리고 때 아니게 불려나와 허접 노래에 동참해준 아들 팀군도 고맙. 『SF & FANTASY (go SF)』 21726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1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4/29 22:58 읽음:243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84/84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4월 27일 22:55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1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1) 가슴은 가득 부풀어올라 숨을 막히게 한다. 그리고 코끝을 아릿하게 하는 고통이 싸하게 밀려온다. 이런 뜻 모를 감정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목이 메이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들떠 오르는……. 그것은 사뭇 견디어 내 기 힘든 심정이다. 알 수 없는 병을 앓는 것처럼, 엘스헤른은 어리둥절한 심 경에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가슴 속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고통은, 그의 두 손을 들어올려 스스로의 눈 앞을 살며시 가리게 했 다. 보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아픔이 되어 다가오고, 들려오는 모든 행복한 소리들이 마음 속 저 깊은 곳, 바닥에 깔린 두려움을 이끌어 낸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아침이 이렇게 아름답게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손으로 가려 진 세상 - 저 너머는 지금 그의 이 아픔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눈부시다. 고즈넉한 가을의 투명한 공기는 싸늘히 가득 차 있고, 새들은 가지에 모여 앉 아 즐거웠던 지난 날을 지저귄다. 차곡차곡 떨어져 쌓이는 것은 저 넓은 정원 의 낙엽만이 아니다. 산산이 깨어진 마음의 파편들도 일상이 만들어 내는 저 평범한 선율을 따라 쌓여든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세상과 동떨어져 있음 이, 어쩌면 이렇게도 처절하리만큼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름답던 지난날이 꿈이었다고 말하지는 말아요. 오랫동안 지켜왔던 추억일랑은 가슴속에 있지요. 이 순간이 지나기 전, 지금, 나에게 속삭여 주겠어요? 마음은 기대에 부풀어 피어나요. 저 꽃처럼. 하지만 그대 한마디에 변할 구름이 될지도 모른답니다. 새초롬 붉은 그 입술로 말해줘요, 그대 눈동자, 오직 진실을 담고서 - 그대의 말이 아니라면 귀머거리인 나에게. 소중한 내 사람. 부디 말해줘요, 그대 두 팔로 포근히 감싸 안으며 - 그대 품 아니면 고이 잠들지 못할 나에게……." 레인비 백작부인은 연이어 다음 가락을 노래하고는 살며시 여운을 남겼다. 그 길고 촉촉한 끝맺음은 그대로 끊이지 않고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엘스헤른 의 마음에 맺혔다. '제길, 같잖은 사랑 노래 따위…….' 애써 마음을 다독이려 엘스헤른은 그렇게 치부했다. 그러나, 생각 같지 않 게 가슴은 뭉클하게 젖어든다. 그리고, 짙은 현기증이 물결처럼 싸하게 밀려 온다. 마음일랑, 어찌 이리도 혼잡스러울까? "하아……." 엘스헤른은 가슴을 가득 쓸어낼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손이 촉촉해 져 있다. 지금 이 손을 따스하게 적시는 것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은 눈 물이다. 어째서 그토록, 마음을 졸이며 괴로워했었는지 지금에서야 그 연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죽을 듯이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어와도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진심을. …… 그것은 이름 붙이지 못할 작고 따뜻한 평화. 오로지 한 사람 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그 안온함을 원했을 뿐이다. 다만 그것 뿐이 었다. 질투에 몸부림 쳤던 것도, 싸늘하게 그를 대했던 그 순간에도, 심지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그 어떤 순간조차도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레비앙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오로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은 바 랄 것 없는 그 심정을 누가 알까? 유치한 가사의 노래 하나에 이렇게 울고 서 있을 자신을 예전 같으면 상상 이나 할 수 있었을까? 비웃어 마땅한 어리석음이 어째서 가슴을 애여 오는 고 통이 되는 걸까? 차 오르는 격한 감정에 숨을 쉬기가 힘들다. 당장에 보고싶 은 마음이 온 몸을 가득히 채운다. 달려가서 이 품에, 이 가슴에 안아야만 어 지러운 이 심정이 진정될 것 같다. 그 따스함도, 그 향기로움도 지금 너무나 도 간절하게 그립다. "아? 엘스 외삼촌이다." 문득, 발랄한 꼬마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그제야 그는 정신이 들 어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난간에서 물러섰다. 그는 금세 현실로 떨어지는 것 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얼른 손으로 얼굴을 훑어냈다. 저 아래까지는 제법 먼 거리라 반짝이는 눈물까지 보일 리는 없었으나, 어쩐지 그러고 멍하니 서 있었다는 사실이, 어린 조카의 앞에서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였다. 제르트뤼트 공주의 느닷없는 외침에 뒤를 돌아본 레인비 백작부인은 엘스헤 른만큼이나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어머, 대공 전하께서 보고 계셨다니……." 그녀는 공주를 추슬러 안아 일어섰다. 어른들의 예의 따위에 전연 신경이 쓰 일 리 없는 꼬마 숙녀는 백작부인의 품에 안긴 채로 엘스헤른에게 두 손을 흔 들며 해맑게 웃어댔다. "삼촌, 같이 놀아요! 제르랑 노래.해요." 제르트뤼트 공주가 시끄럽게 하고 있는 와중에도 레인비 백작부인은 저 발 코니 위의 대공전하를 향해 부드럽게 목례를 했다. "대공 전하, 미쳐 알아차리지 못한 저의 불찰을 용서 바랍니다. 늦었으나, 우선 문안 올립니다." 그녀의 인사에 답해, 엘스헤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인비 백작부인." "예, 너무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죠. 공기도 맑고, 약간 싸늘하긴 하 지만 그리 춥지는 않은……, 사랑스러운 한 때랍니다." "노래가 저절로 나올 만큼 말이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늘어놓는 엘스헤른의 말에 레인비 백작부인은 살풋 얼 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노래 부르는 모습을 무방비상태로 들켜버린 것이 아마도 사뭇 부끄러웠으리라. "아, 덕분에 상쾌해졌습니다." 엘스헤른은 어쩐지 무안해 하는 백작부인을 위해 작은 인사말을 잊지 않았 다. 그러나, 그 말이 더욱 그녀의 수치심을 부추겼는지 레인비 백작부인의 발 그레한 뺨은 더욱 홍조를 더했다. "웬 걸요. 민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부인께서 얼마나 미성의 소유자신지, 이미 사교계에선 소문이 파다 한 걸요?" "어마, 대공 전하께선 어쩜 그런 농담을……." 레인비 백작부인과의 대화 끝에, 엘스헤른은 자꾸만 같이 놀자고 하며 자신 을 불러대는 제르트뤼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예쁜 공주님, 좋은 아침이죠?" "응. 제르트뤼트는, 외삼촌, 같이 놀면 좋아요!" "이런, 곤란한걸? 나중에 놓아줄게요. 외삼촌은 아무래도 조금 있다가 바빠 질 것 같거든." "응!" 무슨 말인지 알고 답변을 하는 건지, 칭얼대던 제르트뤼트는 금세 굳센 표 정으로 돌변하여,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대답을 했다. 엘스헤른은 어린 조카 에게 손에 키스를 실어 공중으로 날려보내 주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건지, 시녀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보지 않아도 느껴지 는 것 같다. 이제 이 자리를 떠나, 그녀들은 좀 더 따뜻하고 노래부르기 좋은 장소로 이동을 할 것이다. 엘스헤른은 가만 한숨을 지었다. 아침 나절의 감상 은 이제 끝났다. 심란했던 마음 따위는 묻어버리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제 눈을 감고 저 안으로 들어서면 그때는 해야 할 많은 것들과 짊어져야 할 무거운 책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발코니 창틀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열고 나올 때와는 또 다른 상념 에 마음을 차갑게 깨운다. 훌쩍 벗어나고 싶은 두려움. 마음의 안온을 위해, 오로지 그 평화를 위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다시금 그의 마음을 채우고 들 었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단 하나 뿐인 마음의 안식처조차 이제는 그 자신을 외면한 채 싸늘히 떠나버렸음을. 어쩌면 좋을까? 마음은 이대로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다. 그 어디에도 의지 하지 못한 채. 홀로 서기에는 아직도 어린 마음이었던 걸까? 엘스헤른은 스스 로를, 그리고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린 감정을 감 추기 위해서 일부러 싸늘한 척, 강한 척 했던 자신이 못내 우습기 그지없었 다. 기실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주제에…….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엘스헤른은 자신에 대한 조소를 흘리며 창틀에 올린 손에 힘을 주어 손잡이 를 당겼다. 딸깍-. 문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방 안의 무거운 공기가 뱀의 혓바닥처럼 스멀스멀 밀려나온다. 그는, 잠시 안으로 들어서기를 망설였다. 역시 나약한 자신을 어찌할 수 없 어 이토록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그는 가만 숨을 돌렸다. 이러면 안 된다고 억지로라도 마음을 돌렸다. 오늘따라 어쩜 이리도 심정을 가다듬는 일이 힘든 걸까? 신경은 가득히 산만하여 온갖 소리들이 귀를 뚫을 듯이 들려오고, 옅게 비 치는 햇살에조차 현기증이 돈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 가 들려온다. 문을 당기고 들어서려고 하는 순간, 엘스헤른은 아무 생각 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온 그 마차가 장 미 문양이 그려진, 아르떼이유 가의 것임을 확인한 그 때에, 그는 다리에 힘 이 풀려버릴 것만 같아 창틀에 몸을 기대었다. 마차는 이내 이 아래에까지 달 려와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레비앙이 내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마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에르띠낭 경, 즉, 리하르트였다. 리하르트는 내려서자 마자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어 레비앙이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레 비앙은 리하르트의 도움을 받아 내려서서는 곧 시야에 들어온 레인비 백작부 인과 제르트뤼트 공주에게 예의바른 인사를 했다. 간결한 인사치레가 오가고 백작 부인이 공주와 함께 그 자리를 뜨고 난 다음에야 리하르트는 레비앙의 뺨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좋은 하루 되길 바래." 리하르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엘스헤른의 귀에는 상당히 거슬린다. - To Be Continued - 〓〓〓〓〓〓〓〓〓〓〓〓〓〓〓〓〓〓〓〓〓〓〓〓〓〓〓〓〓〓〓〓〓〓〓〓 네, 81편입니다. 80편 자축행사(?)를 조촐하게나마 치른 탓인지 지금은 무 지 아프고 있는 중입니다. 두통을 동반하여 열이 오르내리고 있군요. 역시 길 었던 출장의 영향도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얼릉 다음 편을 써서, 4월 중 5 편을 채워야겠지요. 염려 놓으십시오! 펠티 괭이, 묘인족의 명예를 걸고 꼭 한 편을 더 써서 4월이 끝나기 전에 올리겠습니다! (쿠하하하하하!) 아앗, 머 리가…… 휘청……. @_@∼#$%*& 자, 그럼.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엔 레비앙과 엘스헤른이 만납니다. 끝~! …… 휘오오오오. (앗, 썰렁한 바람이.) 죄송.^^; 네, 지켜봐주십쇼! 『SF & FANTASY (go SF)』 22344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2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5/02 19:38 읽음:249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85/85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5월 01일 03:20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2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2) "……." 레비앙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눈길을 내리깔고 있었다. "갈게." 리하르트가 작별의 인사를 남기고 돌아설 즈음에야 레비앙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했어. 그저, 어제부터 내내 기분이 안 좋았던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 "음. 그래. 별 일 아니라면 다행이야. 리하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그에게 손을 흔들며 되돌아 걸 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던 레비앙은 한숨을 지으면서 궁 안으 로 걸음을 재촉한다.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착잡하고도 씁쓸한 감회에 잠겨 있던 엘스헤른은 문득 정신이 들어, 망설일 겨를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곧장 방 을 나서 복도를 내달았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복도를 달리면서, 지금은 오로지 레비앙을 만나서 뭔가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 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 갑갑한 가슴 속을 어찌할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뛰는 도중에 부딪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쳐 사과의 말을 건넬 틈도 없이 중앙계단까지 달려온 엘스헤른은 숨을 고르며 레비앙의 모습을 찾았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야에 문득, 저 아래에서 난간에 손을 올 리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레비앙이 들어왔다. 레비앙 역시 그 즈음 저 위층 에 서 있는 엘스헤른을 발견하고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찰나, 그것은 사뭇 짧은 시간이었으나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리 짧지만은 않았다. 시선을 붙박은 듯이 올려다보고 있는 레비 앙, 그의 깊고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에 얼핏 짜증스러움이 서린다. 마치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그의 눈동자, 그것 은 무언의 말을 속삭이는 듯 하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없어져 줘." 라고. 엘 스헤른은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아서 가슴 녘의 크라바트를 움켜쥐었다. 바스 락거리며 구겨지는 하얀 레이스는 지금 그의 심정 같기만 하다. 잠시 동안의 팽팽했던 긴장감을 깨트리며 레비앙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다지 피해버리거나 할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신 엘스헤른을 향해 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떨어뜨린 레비앙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엘스 헤른을 무시하며 지나쳐 걸었다. 아주 절도 있게, 단 한 순간의 흐트러짐 없 이 그를 스쳐 걷는 레비앙의 옷자락에서 싸늘한 향기가 감돌았다. 옷깃조차 닿으려 하지 않는 레비앙의 의도가 무엇인지 엘스헤른은 알고 있 었다. 그가 얼마나 기분 나빠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혐오스러워하고 있 는지……. 엘스헤른은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심정을 달래며, 자신을 지나쳐버린 레비앙에게로 돌아섰다. "레비앙." 그의 부름에 언뜻 레비앙은 움찔 걸음을 멈추었으나, 곧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또각거리는 레비앙의 발걸음 소리는 살얼음처 럼 차갑다. 그러나, 레비앙이 그렇게 멀어지는 것을, 엘스헤른은 그저 멍하니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는 레비앙에게로 한 달음에 달려가 팔을 붙들었 다. "이야기 좀 해." "……." 레비앙은 느닷없이 팔을 붙들린 것이 내심 기분 나빠하며 노골적으로 역정 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자 엘스헤른 은 답답한 듯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잠시만 할 이야기가 있어." "…… 너라는 사람과 할 이야기 따윈 없어." 레비앙은 노기 어린 눈초리 가득히 찌푸리며 지으며 엘스헤른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다시금 도망가려하는 레비앙을 두 손으로 꽉 붙잡 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나는 할 이야기가 있어, 이야길 해야만 해. 무례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어. 지금 이야길 하지 않는다면, 난 미쳐버릴 것만 같으니까!" 엘스헤른은 간절함을 담아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황제의 가족이 기거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궁 내의 복도를 쩌렁하게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의 외침에 레비앙은 질려버린 표정으로 눈을 치켜 떴다. "어쩌자는 거야?" "제발…… 조금만 시간을 내 줘." 엘스헤른의 손이 어깨를 어찌나 세게 붙들고 있었던지 레비앙은 붙들린 자 리가 욱씬하게 아파 와, 양미간에 가득 힘을 주었다. "이것 좀 놓고 이야기 해." "싫어." 그 한마디에 레비앙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말끄러미 응시 했다. 전혀 평소답지 않게,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형편 따위는 조금도 고려해 줄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 이 순간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라 하더 라도, 레비앙은 그가 이런 식으로 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레비앙 은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고 짐짓 싸늘한 눈초리를 지었다. "뭐 하자는 거야? 놓아줘." "그럴 수 없어. 놓아주면 넌 도망쳐 버릴 테니까." 레비앙이 마주한 엘스헤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 진지함 이 레비앙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가 이대로 어떻게 해 버릴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요즘에 들어 가끔씩 보여주곤 했던 그의 저 돌적인 행동들을 떠올리며, 지금 레비앙은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것을 깨달았 다. 이건 분명히 충분하게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아파, 이것 놔!" 레비앙은 바락 소리를 지르며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몸부림을 쳤 다. 언성을 높이고 싶은 마음은 애초 없었으나 지금은 다만 엘스헤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밖엔 없었다. "나는 너 따위와는 이야기하고픈 마음 없어. 지금 같이 있다는 사실조차 끔 찍하니까! 알겠어? 싫다구!" 레비앙의 한 마디가 맑게 복도를 울렸다. 쾌청한 이 공기에 어울리도록 너 무나도 깨끗하게……. 엘스헤른에게 그것은, 얼음의 장미넝쿨이 마음을 휘감 아 그 차갑고 날카로운 가시로 순간 힘을 주어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엘스헤른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꽈악 악물었다. 끔찍할 만큼 싫다는 말을 듣고 보니, 이제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마음 은 끝없이 차가운 고통 속으로 가라앉는다. "제길!" 미간을 찌푸리며 레비앙을 응시하고 있던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 다. 레비앙이 그렇게 느낀 순간, 엘스헤른은 이미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있 었다. 미처 그가 놀란 숨결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엘스헤른은 그의 입술 위로 입술을 포개었다. "읍……." 레비앙은 손을 들어 엘스헤른의 가슴을 밀쳐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그의 손목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소리치기는커녕, 움직일 자유조차 빼앗겨버린 레비앙은 어찌할 줄 몰라 눈을 꼬옥 감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복도의 긴 창 너머 하늘의 그 새파란 기운이 잔상으로 남아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지금 엘스헤른이 붙들고 있지 않는다면 정말 주저앉아버릴 만큼이나 그렇게 현기증이 몰아닥친다. 숨결과 입술이 마주 닿은 그 긴 시간 동안, 레비앙은 그 어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달리, 너무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서 딱히 어떠한 정확한 것이 뇌리에 남지 않았음이리라. 어쩌면 투명하게 텅 비어 있던 머릿 속이, 너무나도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새하얘졌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만 큼……. 그러다 한 순간, 문득 레비앙은 자신이 이러고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 들었다. 여기는 다름 아닌, 황제 폐하와 그 존엄하신 분의 일가가 생활하 시는 곳이 아니었던가! 정신이 들자마자,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입술을 깨물었 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 세게 깨물지는 않았으나, 엘스헤른은 놀란 듯 레비 앙에게서 떨어져 섰다. 엘스헤른의 당황한 시선에 이내 그의 싸늘한 표정이 맺혔다. "지엄하신 대공 전하께서……,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낮은 목소리로 근엄하게 꾸짖는 레비앙의 말에 엘스헤른은 숨을 돌리며 고 개를 떨구었다. "미안…….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너를 그냥 놔 둘 수 없었어." "듣고 싶지 않은 말? 아니, 내가 했던 말은 나에게 네가 심어준 너의 이미지 인 거야. 네가 얼마나 위험한지, 정말 네가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존재라는 것, 충분히 알고 있어. 너 스스로가 과거의 언젠가에 나에 게 깨우쳐 줬던 그대로 말야." 레비앙은 가슴 가득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지금 자신의 행동 하나로 미치게 될 여파가 어떤 것일는지는 쉽사리 예상할 수 있 었다. 더군다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금방 전의 그 일조차도 다른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간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쪼록 엘스헤른이 더 이상 예상 밖의 일을 안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일단 자신이 참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이런 상황이 그 누 구에게 라고 하더라도 소소히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붉고도 긴 속눈썹을 살풋 내리깔았다. 엘스헤른과 있으면 어쩐지 기분을 종잡 을 수 없어서, 스스로도 위태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냉정을 지키는 수 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어쩐지 들어주겠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레비앙의 말에 엘스헤른은 무안해 하 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의 젖은 듯한 잿빛 머리카락이 일순 가볍게 찰랑거린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의 눈빛이 곧장 레비앙의 초록색 눈동 자에 가 닿았다. 이렇게 빤히 응시 당하는 기분이란, 레비앙에게는 그다지 좋 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그렇다고 생각만 했을 뿐, 상대가 엘스헤른인 이상 에 그것은 좀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쩐지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라버리는 증상까지 동반해서……. "할 이야기란 게 뭐야?" 레비앙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물었다. 그러고는 아직까지 자신의 손을 붙들 고 있는 엘스헤른을 떨쳐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던 엘스헤른은 "아."하고 감탄사를 내 뱉더니 "내 방에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라며 차분해진 목소리로 제안을 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갑자기 되살아난 그의 기사도 정신을 속으로 비웃어주며 레비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찌했거나, 지금은 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 볼 일이고, 언쟁을 벌이더라도 이렇게 확 트인 복도가 아닌, 엘스헤른의 방이 더 적격일 테니까. 엘스헤른은 조금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곧장 앞장을 섰다. 이내 침착 해진 듯이 그의 어깨는 안정되게 흔들렸다. 장미 무늬의 옥색의 옅푸른 공단 으로 된 옷차림이 다소 화려하기는 하나 깨끗한 인상을 남긴다. 그의 코트는 짙은 잿빛의 머리카락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완벽히 지니고 있는, 그러나 역시 단정한 저 모습을 보면 결코 그가 방금 전 그렇게 돌진하듯 키스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허나, 그의 뒤를 따라 걸으 면서 레비앙은 자신의 처사가 약간 후회되기도 했다. 이건 정말 자진해서 호 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To Be Continued - 〓〓〓〓〓〓〓〓〓〓〓〓〓〓〓〓〓〓〓〓〓〓〓〓〓〓〓〓〓〓〓〓〓〓〓〓 쿠아악! 올리기 직전에 자버렸습니다. 세 시간이나 늦었군요. Kypros 님 죄 송해요! 서, 설마 기다리신 건? 우우웃, 어쩌자고 이런 실수를.TT-TT 결국 저 는 약속을 어긴 셈입니다. 죄송하기 그지없군요.(치마를 꽃과 같이 펼치며 이 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해 봅니다.) 불과 여섯 시간 전과 별로 달라진 내용 은 없습니다.(지금은 새벽 세 시.) 설마, 제가 잠든 사이에 메모를 날리셨을 분들을 위해 일단 사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바닥으로 떨어져서 자 버린 걸 보면 어지간히 피곤했나봅니다. -_-; (쿠아악! 알람이라도 맞춰놓 지 않고!) 아무튼, 이번 편은 여기까지입니다. 꽤 많이 쓸 생각이었지만 여섯 시간 전 에 잠들어버리느라……. 쿨럭.; 아, 그리고 81편의 메모서비스는 일일이 손으 로 친 것이랍니다. 어흑.TT-TT 얼마나 힘들었다구요~! 역시 업글된 천랸2000 의 메모 시스템이 저에게는 적응되기 힘든 것이로군요. 아, 히나 양.^^; 레비 앙을 리하르트와 맺어주고 엘스헤른은 널 달라고? -_- (그 멍청한 녀석을 사 다가 뭐하게?;) 네. 다음 편 예고요? 당연히 레비앙이 엘스헤른의 방으로 가겠죠. 그러고 거기서……. (므흣.>_> ┃┃ ┃┃ ┃┃ ┃┃ ┃┃ ┗╋━━━━━━━━━━━━━━━━━━━━━━━━━━━━━━━━━╋┛ ┗━━━━━━━━━━━━━━━━━━━━━━━━━━━━━━━━━┛ (83) 엘스헤른의 방은 대공전하에 대한 예우답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벽의 한 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는 에스트르 영웅들의 장렬했던 이 야기가 역동적인 장면으로 수 놓여 있었고, 섬세한 장식이 된 금색과 고동색 의 우아한 목공예 가구들이 그에 어울리게 나열되어 있었다. 크리스탈로 이루 어진 샹들리에는 정교한 쇠사슬로 고정되어 천장에 매달려 눈부시게 빛났다. 침실로 통하는 문은 왕족이 기거하는 곳의 어떠한 문이 그러하듯 왕가의 문장 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남향의 거대한 창은 곧바로 발코니로 통할 수 있 도록 되어 있고, 하얀 리넨 커튼이 차분하고 정갈하게 드리워져 은은한 햇살 이 비쳐 들었다. 그러한 방 한 가운데에, 엘스헤른은 마치 그림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그렇게 자리를 잡고 섰다.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채 레비앙이 자신의 방 안에 완전히 들어와 설 때까지 기다렸다. 레비앙은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이 제 세상과 분리된 채 엘스헤른과 단 둘이 있게 되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발을 딛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엘스헤른 역시 그런 그를 응시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열려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커 튼이 조금씩 흔들렸다. 싸늘하고 상큼한 가을의 향기가 커튼의 끝, 레이스 자 락에 매달리듯 묻어 났다. 커튼의 보드라운 너울거림에 시선을 두고 있던 레 비앙은 그와는 상반되는 이 묵직한 고요함을 깨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그의 물음에 정신이 들었는지 엘스헤른은 그제서야 레비앙을 향해있던 눈길 을 거두고는 우선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레비앙은 그의 호의를 가볍 게 거절했다. "네 이야길 진중히 듣기 위해 앉을만한 시간이 불행히도 나에겐 없어. 황태 자 전하께 가는 일이 지금 여기서 네가 할 말을 듣는 것 보다 중요해." "흠……." 싸늘하게 구는 레비앙의 태도에 엘스헤른은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그럼 네가 편할 대로 해. 그리 많은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거야. 저, 레비앙. 내가 하고싶은 말은, 아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은……." 그는 레비앙을 똑바로 응시하기 위해 잿빛의 진지한 눈동자를 들었다. 아무 흔들림 없이 그렇게 직선으로 꽂히는 시선을 마주하며 레비앙은 눈길을 떨구 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엘스헤른의 저 은은한 눈빛에 밀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호락호락하게 보이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한 동안 그런 레비앙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한숨 섞인 말을 토해놓았다. "네가 어째서 나를 피하는지 말해줄 수 있겠어?" 마치 자신은 피해자인양 애처로운 눈빛을 담담함 속에 감추고 있는 엘스헤 른을 보며 레비앙은 냉소를 흘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버티어 서서는 붉은 입 꼬리를 싸늘하게 끌어 올렸다.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 "아니,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네가 우리의 사이를 친구로 단정지은 것 외에, 너를 향한 내 마음을 가로막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거야." "하, 웃기지 마. 말장난이라도 하고싶었던 거라면 상대를 잘 못 택했어. 나 는 그다지 한가하지가 않아." "레비앙.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야. 나에게는 지금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 제야. 티아란, 전쟁, 그 어떤 것보다 지금 너와의 문제가 더 심각해." 심각함을 입에 올리는 엘스헤른은 그저 살풋 눈살을 찌푸린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레비앙은 그가 얼마나 자신을 자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의자의 등받이에 올려둔 그의 손에는 힘줄이 설 만큼이나 힘이 들어가 있었 다. 담담하고 차분한 어투는 다만 끓어오를 것 같은 자신을 감추기 위한 가면 에 불과했다. "레비앙, 부디 말해 줘. 나는 너에게 내 심정을 고백한 것 밖에 없어. 그 동 안 네가 얼마나 나를 애타게 했는지,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를 이해 해주고 다독여 달라는 게 아니야. 난 너의 곁에 있고 싶고, 그 마음은 친구일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여전히 너와 함께 있어야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다구. 그런데, 진심을 말했다고 네가 피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너를 사랑하는 나는……." "그런 말 한 마디만 더 하면 가버리겠어."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말을 끝마칠 시간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의 단호함에 그다지 굴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엘스헤른은 잠시 입술을 내리 다물고 말 을 아꼈다. 그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젖은 듯한 눈동자로 자신의 생각을 곱씹고 있는 듯 해 보였다. 한참만에 그가 눈을 치켜 떴을 때, 아직까지 그를 보고 있던 레비앙은 다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의 시 선이 마치 꿰뚫기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마음에 꽂히는 기분을 그는 떨칠 수 가 없었다. 그가 채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엘스헤른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 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듣기 싫어?" "그만해." "내가 이렇게 눈을 똑바로 보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듣기 싫은 거야?"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파르르 떨릴 것만 같은 입 술을 꼬옥 내리 다물었다. 그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버린 자신의 심장소리에 귀라도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토록 진지하게 한 점 거짓이나 가식 없는 참된 눈빛을 하고는 자신의 그런 심정을 털어놓는 엘스헤른의 말은 그것을 마치 사실인 양 믿게 만들고 있었다. 레비앙은 그 말을 믿고 싶은 자 신의 심정에 한편으로는 치가 떨렸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는 모든 것들 이 자꾸만 진실이라 여겨지는 스스로의 감정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싫어!" 순간 레비앙은 언성을 높였다. 이제야 막히던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하지만 목에 빼곡히 쌓인 통증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목소 리를 가다듬을 것도 없이 연이어 외쳤다. "나는 네가 그러는 게 싫어! 조금도 달갑지 않아. 네가 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레비안느라는 그림자야. 10년 동안, 너의 친구로 있어 온, 나,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가 아니라, 단 한 순간에 너의 마음을 사 로잡았던 것은 그저 여장을 한 내 모습이었어! 너와 친하게 지내고 너와 생활 했던 나의 진실된 모습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겉모습을, 너는 그런 것을 사랑 한다고 여긴 거야." 어쩐지 한가득 숨이 차 올라 레비앙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쏟아진 물병처럼 그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아니 레비안느였던 나를 에스코트 해 준답시고 마차 안에서 강 제로 키스했던 것 기억 나?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참을 수 없을만큼 끔찍했어. 나는 네가 그러는 건 처음 봤거든. 10년 동안을 친하게 지내온 친 구,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친구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 같으면 어떤 기 분이 들겠어? 그리고 케시르니아 숲, 모든 걸 잊고 감동해버릴 만큼이나 아름 다웠던 그 숲을 레비안느에게 보여주면서 너는 뭐라고 했지? 레비앙에게도 보 여주지 않은! …… 너와 가장 친하던 친구조차 외면할 만큼, 나의 그 겉모습 이 너에겐 사랑스러웠던 거야? 그랬던 거야? 우습지도 않게 나는 내 스스로를 질투하게 되었는데! 나에게 친구로서의 너를 돌려주지 않는 내 자신, 레비안 느를! 그러면서 너에게 내가 레비안느라는 걸 털어놓으면, 과연 저 대공 전하 께선 어떤 표정이 될지 몹시도 기대가 되었지. 너의 가득 구겨진 얼굴을 보며 한껏 비웃어 주고 싶었어." 레비앙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실망한 표정이 아니라 아예 믿지를 않으려고 했었지. 그럴 리 없다고 외치는 너를 보면서…… 한숨도 비웃음도 아닌 그저 눈물 밖에 나지 않았어. 그러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나는 그래도 너에게 기대를 버릴 수 가 없었어. 네가 언제고 내 친구의 자리로…… 레비안느가 아닌 진정한 나를 봐 주며 예전처럼 내 친구의 자리로 돌아와 주길 바라는 어리석은 기대를 ……. 그래, 그건 전말 어리석은 기대였어. 너는 끝까지 레비안느를 보면서 <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지. 내가 레비안느라는 사실을 알게된 그 이후에는 나를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주기를 바라면서 까지." 그는 가득 치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키려고 잠시 말을 끊었다. 이런 걸 목이 메인다고 하는 걸까? 숨이 차 오르고 목이 잠긴 듯 아파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은 이런 느낌이……. 레비앙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엘스헤른을 향해,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나는 레비안느의 모습으로, 너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어하는 전부." "그게…… 네 마음이야? 그것이……?" 엘스헤른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레비앙은 곧장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레비앙, 왜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해?" 느닷없이 높아진 엘스헤른의 목소리에 레비앙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반짝 눈을 들었다. 그의 시야에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진중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엘스헤른이 어느새 한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등에는 아까 굳건 히 닫혔던 커다란 고동색의 문이 버티고 있었다. 엘스헤른은 왼 손을 들어 레 비앙의 붉은 머리카락 옆, 그 문 위에 손을 짚었다. "나를 똑바로 봐. 피하지 말고 나를 보면서 이야길 들어."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힘이 있었다. 레비앙은 불쾌한 듯 입술을 얇게 비틀며 한 마디 하려 했으나, 그가 채 자신의 기분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엘스헤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말야. 레비앙, 너를 사랑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너를. 내 눈 앞에 있는, 바로 이 사람, 너, 레비앙을 사랑한다구."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엘스헤른을, 그의 깊고도 짙은 잿빛의 눈동자를 올려 다보며, 레비앙은 다리에 힘이 빠질 것만 같았다. - TO BE CONTINUED - 〓〓〓〓〓〓〓〓〓〓〓〓〓〓〓〓〓〓〓〓〓〓〓〓〓〓〓〓〓〓〓〓〓〓〓〓 간만입니다. 쿠아아악.(갑자기 날아오는 돌세례에 비명횡사...) 아앗, 죄송 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 5월 1일 당시 글을 올리면서 글꼬리에 이런 말 을 했던 기억이……. "이제는 좀 자주 올릴 듯해요. 생긋." 그러고 무려 12일 이 지난 것입니다. 돌 맞을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울먹) 네, 어쨌든 변명으 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5월이면 좀 한가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학교 생활이 라는 것이 그렇지 않더군요. 5월은 무슨 행사가 그리도 많은지 원. 아이들은 신나도 선생들은 골병듭디다. 덕분에 저는 전치 2주의 몸살감기를 얻었습니 다. 걸걸해진 목소리는 언제라도 감상이 가능하니 교무실로 전화 주시길. 아아, 어지럽군요. @_@ 그런 고로 오늘도 퇴고를 못하고……. 새, 생긋.^^; 자,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아무쪼록 감기와 몸살이 나아서 다시 찾아 뵙도록 하지요. 아아, 히즈 님, 그리고 주영 님, 독촉 감사드려요.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뼈빠지게 자고 있었을는지도. 더불어, 귀쥬 양에겐 언제나 감솨.^^ 괭이꼬리// 혹시 기타(혹은 류트, 아마도 류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 되지만.) 반주에 영국어(?) 발음으로 된 라는 노래의 mp3을 가지고 계신 분은 좀 나눠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꼭 필요합니다. 흑흑.T-T 『SF & FANTASY (go SF)』 25200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4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5/22 21:12 읽음:280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64/64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5월 22일 04:54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4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4) 똑똑똑―. 때마침 등 뒤에서 노크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레비앙은 그대로 엘스헤른 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릴 뻔 했다. 엘스헤른의 날렵한 눈썹이 가만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서 레비앙은 자신이 어느 정도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대공 전하, 프리에르 씨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안내에 엘스헤른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그를 당황하게 한 모양이었다. 레비앙은 그런 그를 밀치고 이 방에서 뛰쳐나가려고 했으나,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채 그런 행동을 옮기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끌어다 자신의 침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처박듯 넣어버렸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을 뿌리치며 짜증을 부렸다. "왜 이래?! 아파, 이거 놔." "우선, 거기 있어." "뭐야? 난 가봐야 해! 나 나가고 나서 저 사람과 만나봐도 되잖아! 어차피 내가 있으면 곤란한 것 같은데!" "이대로 널 놓아주면, 또 언제 볼 수 있으려고?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아직 내 이야긴 끝나지 않았어!" 엘스헤른은 낮게 협박하고는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레비앙은 너무 당황 한 나머지 말도 안 나와 문짝을 꽝 걷어 차버렸다. "제길."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레비앙은 팔짱을 끼고 방 안을 왔다갔다하다 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프리에르인지 뭔 지 하는 사람이 들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이내 저쪽 방은 잠잠해졌다. 화가 나기는 해도, 솔직히 궁금하기는 해서, 레비앙은 저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훔쳐듣기 위해 방 문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대공 전하." "아아, 프리에르 씨야 말로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다행입니다. 그런 위험한 곳에 계시게 해서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의 일이야 언제나 그렇죠." 프리에르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는 조금 웃었고,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저 사람의 모든 것을 가늠하기에는 역시 역부족이 었다. 레비앙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짜증은 나지만 엘스헤른이 여 기에 자신을 숨겨버린 이유가, 일단은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가령은, 밀사 라도 와서 정식 직무실이 아닌, 이 곳에서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든지. '음? 설마……, 밀사?' 레비앙은 더더욱 흥미가 생겨 귀를 쫑긋 세우고는 문에 머리를 가까이 댔 다. "전선에서는 어떻습니까? 티아란에서는 - 알고 계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엘스헤른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침실에 있는 레비앙을 의식했는지 목소리 를 아주 낮추었다. 레비앙은 끝까지 들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그다지 소득은 없 었다.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몹시도 낮았고, 평소 같은 독특하게 튀는 억양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름끼치도록 차분하고 냉랭했다. 그런 그의 말을 알아듣 기란 역부족이었다. 레비앙은 가슴 속이 싸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 긴 이야기였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단어라고는 "티아란" 밖 에 없었다. "…… 해서 그곳은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서 이제는……." "예, 그래야겠지요. 그건 그렇고, 프리에르 씨. 이번에는 왜 서신으로 보내 지 않고 직접 오셨습니까?" "예, 서신보다는 직접 여쭈고 상의를 드리는 것이 나을 듯 해서입니다." 엘스헤른은 프리에르와 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제 정세에 대 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프리에르라는 저 사람은 밀사가 확실 한 듯했다.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레비앙은 답답하 기만 했다. 뭔가 많은 이야기가 오가기는 한데, 그리고 두 사람이 다름 아닌 에스트르 어로 대화를 하고 있기는 한데, 사뭇 중요한 내용이다 싶을 때마다 목소리가 낮아져서 어떻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역시 좋지 않은 소식인가 봅니다. 프리에르 씨, 당신이 이렇게 직접 온 것 을 보면 말입니다." 엘스헤른은 웃었으나, 레비앙이 듣기에도 그 목소리가 심히 무겁게 느껴졌 다. 좋지 않은 일이라…….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문에 잔뜩 기댔다.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제가 직접 온 것은, 아무래도 에스트르에 직접 전 해질 소식에 한 발 앞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 하는 것이 대공전하 께서 이 일로 인해 파급될 여러 일들을 대처하시기에 편하실 듯하여,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본론을 말씀해보십시오." "대공 전하,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저를 용서하옵소서. 믿을 수 없는 일 이기는 합니다만, 그 오합지졸이던 프랑스 군이 확실히 승기를 잡았습니다." "니스와 시부아에서의 승리 말입니까? 그 이야기라면 이미 시아르 백작에게 서……."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 정도가 아닙니다. 프랑스 군은 지금 독일의 슈파 이어와 보름스까지 진군해 있습니다." "……." 엘스헤른은 침묵을 지켰다. 레비앙은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의 자신이 그러하듯,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독일까지 진군한 프랑스 군. 프랑스 군이 지금 사기가 높아 있다면 밀리고 있는 오스트 리아 연합 쪽은 원군을 충원하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은 동맹을 맺어 놓은 에스트르 측에 압력을 넣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 책임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말하지 않아도 뻔 한 것이다. 에스트르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 티아란의 대공, 바로 엘스헤른이 아니던가! '오, 맙소사…….' 레비앙은 탄식이 새어나올 것만 같은 자신의 입을 한 손을 들어 틀어막았 다. 그리고 스르륵 힘이 빠져 현기증이 도는 몸을 문에 기대어 간신히 지탱하 고 섰다. "이 전쟁이 일찍 끝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만,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는 시점이 된 것이로군요. 좀 더 시간을 끌려 했었는데……. 역시, 티아란 과 전쟁, 이 두 가지 일의 해결책은 단 하나 밖에 없나봅니다." 한참만에 엘스헤른은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차분히, 오히려 차갑게, 그는 말을 이었다. "무리가 되겠지만 단행하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대공 전하." 프리에르가 그의 말을 저지하듯 엘스헤른을 불렀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뜸 조차 들이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실 지 알겠습니다. 프리에르 씨. 하지만, 망설임에 대한 대 가를 치러야 하겠지요.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인데 제가 너무 끌었나봅니 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 성급하게 말씀하시진 말아주십시오, 전하." "내게 위험한 일이라면 이미 당신에게도 충분히 위험할 일인 겁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말입니다. 나는 충분히 많은 이에게 목숨을 요 구했습니다. 어째서 전쟁이 났는지조차 모르는 자들에게…….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앉아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리 생각하실 것이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누구 보다도 이 전쟁에서 중요하신 분입니다. 그런 것을……." "프리에르 씨." 엘스헤른은 숨을 돌리려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종시 말하던 바와 다름없이,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너무나도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티아란은 혼란에 빠집니다. 지금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또한 내가 없 으면 에스트르 군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에스트르 군 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나 를 필요로 하고, 나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것 이 설렁 내 자신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목숨. 엘스헤른은 지금 그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아무런 격한 감정 없이 들려오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얼마나 가 혹하고 무섭던지 레비앙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대공 전하. 부디……." 프리에르 역시, 엿듣고 있는 레비앙과 같은 마음인지 엘스헤른을 만류하려 고 노력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듣던 것과는 다르게 많이 격해져 있었다.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전하. 그리 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전하의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전하 대신이라면 목 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를 소중히 생각해주시는 마음 감사드립니다, 프리에르 씨. 그리고 당신의 말처럼 내 마음을 가로막는 일이 아직 한 가지 있긴 하군요. 그러나, 내 결정 을 번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아직 젊습니다. 그러기에, 해 볼만한 일이 아닙니까?" "대공 전하, 전하께선 젊으시기에 오히려 사리셔야 할 일입니다!" "예, 솔직히, 도망치는 거라고 해 두죠." "말도 안됩니다! 그것이 무슨 도망이란 말씀입니까? 그리……." 엘스헤른에 의해 가로막혔는지, 프리에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레 비앙은 엘스헤른이 자신을 의식해서 일부러 그의 말을 막았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졌어야 할 그 말이 레비앙은 너무나도 궁금했다. 지금, 엘스헤른 이 "도망"이라고 표현한, 자신의 심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행하려하는 일 이 과연 무엇일는지, 참을 수 없이 알고 싶어 마음이 안타까웠다. "내 성격을 아신다면, 프리에르 씨, 하지 못하게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 하실 겁니다. 나는 지금 궁지에 몰려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생 쥐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꼴로 아둔하게 굴지는 않을 겁니다. 이것이 최악의 선택인 동시에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 역시 최후에는 그러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최후가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그래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말릴 생각은 마십시오." "대공 전하……." 프리에르 씨는 깊이 탄식했다. 그 탄식의 소리에 레비앙은 겨우 버티고 있 던 평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리 굴곡 없이 말을 하던 저 사람조차 저런 반응을 보이는데, 대체 엘스헤른이 하려는 일이란 무엇일까? 레비앙은 스르륵 주저앉았다. 다행히 소리는 내지 않았으나 마음은 캄캄할 만큼 아찔해졌다.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카펫의 뭉근하고 까츨한 느낌이 손에 그대로 닿아온다. 그래도 곤두박질 칠 것만 같은 기분에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곧, 엘스헤른의 말이 이어졌다. "프리에르 씨, 그리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래도 준비해야 할 일도 있고 해 서, 아직 보름쯤은 여유를 두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시아르 백작에게 그렇게 일러두었습니다. 아마도 티아란에는 좀 더 일찍 전해질 겁니다." "보름이라면, 전하, 주변을 정리 하시기에는 너무나도 빠듯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프리에르 씨. 그러기에 당신이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티아 란에서의 준비는 시아르 백작에게 맡겼습니다. 에스트르의 군대는 늦으면 보 름 안에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먼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셔서, 군대가 무사히 닿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십시오." "…… 뜻이 정히 그리하시다면, 제가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분부대로 시 행하지요. 하명에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기 를." 한참의 실랑이 끝에 백기를 든 프리에르가 그리 말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 다. 말다툼에서 승리한 엘스헤른은, 평소 같으면 조금이라도 웃었을 법도 했 으나 역시 잠잠했다. 두 사람의 침묵의 깊이가 사뭇 깊어 레비앙은 더더욱 마 음이 심란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불안해지는 마음은 그를 어지럽게 했다. 눈 앞이 아뜩해질 것만 같다. 어쩌면 좋을까? 아니, 도대체 무엇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는 정신없는 머릿속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며 몸을 일으켜 섰다. 작은 발 소리와 함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엘스헤른의 배웅하는 몇 마디가 더 해졌다. 프리에르는 방에서 나간 듯 했다. 하지만 레비앙은 침실 문의 손잡이 만 잡은 채 그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쪽으로 향하는 발자국 소리가 카펫을 밟으며 둔탁하게 들려왔다. 문의 바로 앞에 다가선 발소리는 우뚝 멈 추었다. 건너편의 그 역시 문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꼼짝 않고 있었 다. 레비앙은 손을 뗄까 망설였다. 어쩐지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날 것 같아 이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엘스헤른이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 지를 생각하니, 끔찍할 만큼 콧잔등이 아파 왔 다. "하아." 무거운 한숨이 들려온다. 엘스헤른의 목소리임에 틀림없는……. 레비앙은 예민해진 감각을 총 동원해 문 너머의 엘스헤른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평소답 지 않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엘스헤른의 마음은 싸늘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 을 것이다. 저 한숨소리조차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있지 않은가. 레비앙은 두 려웠다. 지금 이 문의 건너편에는 엘스헤른이 서 있다. 무겁고도 어두운 마음 을 하고……. 만일 지금 문이 열린다면 엘스헤른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딸깍―. 환한 빛이 갑작스레 들어오는 바람에, 레비앙은 눈을 깜빡거렸다. 문이 열 렸다. 그리고 그 앞에 엘스헤른이 싱긋 웃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막상 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우려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엘스헤른은 언제 무거웠 냐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고 고통의 흔적은 뒤로 감춘 후였다. "많이 기다렸지? 레비앙." 사뭇 발랄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비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런 순간에조차, 엘스헤른이 가식의 가면을 쓰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레비앙은 참을 수 없을 만큼이나 딱하고, 한심하고, 슬펐다. "레비앙?" 레비앙이 그런 복잡한 심정이 모두 드러난 엄청난 표정을 하고 서 있자, 엘 스헤른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붙들려 했다. 그러나, 레비앙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을 뿌리쳤다. 아플 만큼 세게 엘스헤른의 손을 쳐 낸 후, 그는 엘 스헤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끔찍한 사람이야. 너무 끔찍하다못해……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겁 나. 네가 엘스헤른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지, 회의가 들어. 난 지 금, 너한테서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 너를 보고싶지 도 않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 내가 널 보며 대체 누구를 보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너는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어. 내 앞에서만 너는 항상 가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은 거로구나? 나는 네 친구라 믿고, 너와 가 장 친한 사람이라 믿고, 너의 기쁜 일과 슬픈 일들을 모두 같이 나누었다 믿 었는데, 내가 아는 너는 어디까지나 이렇게 꾸며낸 너일 뿐이었어. 아아, 제 길.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끔찍해. 내 기분이 뭔지, 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 내가 무엇 하러 여기 서 있는 건지, 제길. 너는 정말…… 어쩌면 이 따위로…… 이 따위로 사람 마음을 휘저을 수가 있 지?" 그 표정만큼이나 횡설수설하던 레비앙은 그 초록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몹시도 미간을 찌푸리고는 엘스헤른을 지나쳐 뛰어갔다. 엘스헤른은 레비앙이 서 있던 그 자리를 넋을 놓고 응시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엘스 헤른은 눈을 내리깔았다. 레비앙이 서 있던 자리, 그 곳에는 짧은 잔상과 옅 은 향기 밖에 남지 않았다. - TO BE CONTINUED - 〓〓〓〓〓〓〓〓〓〓〓〓〓〓〓〓〓〓〓〓〓〓〓〓〓〓〓〓〓〓〓〓〓〓〓〓 좋은 저녁입니다. 적당한 온도에, 적당히 잠도 오고.(...) 그러나, 숙제를 하지 않았더니 사뭇 골치가 아프군요. (글쓰고 목욕하고 청소하느라.) 숙제 란, 역시 6월 초의 야영준비입니다. 계획 세우는 일이 만만찮아요.T-T 그렇지 만 간만에 글을 많이(...) 썼다는 건 기분이 좋군요. 네, 출판을 하게 되어, 놀라신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쿨럭.; 알림 에 말씀드렸다시피, 1권은 꽤 변했으므로(...) 출판본을 읽어보시는 것도 나 쁘진 않으실 듯. (선전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시는 분들도 꼭 있으리라 봅니다. 역시 리메이크 버전은 분위기가 확 달라지니까 말이죠. 우웃, 아무튼 실제 역사를 끌어오면 골치 아픈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끼워 맞추는 것도 그렇고, 지명 관계도 그렇고, 연도나 왕 이름 같은 것도 그렇고. 역시 자료가 별로 없는 저로서는 힘든...T-T 출판 축하해주신 여러분들 감사드려요. 연제나 격려해주시는 분들이죠? 고 마우신 분들, 기억하고 있답니다. 생긋.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린슬리브스> MP3을 찾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던 카르셀 씨, 정말 감사드립니다. 『SF & FANTASY (go SF)』 27209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5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6/04 19:12 읽음:189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65/6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5월 31일 22:39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5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5) "연극?" 황태자는 레비앙의 제안을 듣고 반짝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때마침 읽고 있던 책이 지루해졌고 오후엔 뭘 하나 궁금하기도 했던 차에 레비앙이 신선한 제안을 하자 흥미가 당긴 것이었다. 그는 아이다운 호기심이 담긴 눈빛을 지 으며, 창가에 선 레비앙을 쳐다보았다. "연극을 보러 가자고?" "예. 왕립극장에서 <우아한 향연>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한다고 하는데, 어떠 십니까? 황태자님께서도 관심이 있으시면……." "<우아한 향연>이라면, 트레아티의 작품인가?" 황태자는 그렇지 않아도 요즘 황실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연극에 관심 이 있었던지 대뜸 그렇게 물어왔다. 레비앙은 가볍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 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예, 전하. 트레아티는 에스트르 사상 최고의 문호인데다가, <우아한 향연> 은 그의 걸작으로 칭해지고 있으니까, 분명 황제 폐하께서도 황태자 전하께서 연극을 관람하시는 것을 허락 해 주실 겁니다." "음……." 황태자는 짐짓 고민하는 척 해 보였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좀 더 생각을 해 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레비앙은 그의 눈에 한가득 담긴 기대 감을 놓치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지위에 걸맞게 점잖은 모습을 보이려고는 해 도, 그는 어디까지나 아홉 살의 꼬마였다. 감정을 숨기기에는 존엄하신 황태 자 전하의 눈은 거울처럼 맑았다. "좋아. 그럼 오늘 오후엔 연극을 보러 가는 거야." 진지하게 결정을 내린 클로티엔은 한동안 그런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듯 했으나, 웃음을 함박 머금은 그의 입술은 이내, 기쁨을 참지 못 한 웃음 소리를 "쿡쿡."하고 토해놓았다. 황태자는 읽던 책을 덮어놓고는 탁 자 위로 턱을 괴며 마냥 즐거운 듯 두 다리를 앞 뒤로 흔들었다. 꽃술이 달린 아이보리색 예쁜 비단 구두가 조금 높은 의자의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것을 보 며 레비앙은 그의 무례함을 탓해 조언을 하기보다는 그저 조금 웃고 말았다. ·‥…━━━━…‥· 왕립 극장에 모여든 인원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은 황태자 전하와 함께 황제 부부께서도 납실 뿐만 아니라, 에스트리온 가문의 루엘 프 레데릭 경이 천사 같은 사촌누이 아이린과 함께 참석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온갖 귀족들이 왕립극장에 도착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아름답게 차려입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태 자가 도착했다. 황실 가족이 도착했다는 나팔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에 흩어 져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일제히 황제가 납실 길가로 모여들어 정중한 태 도로 서리를 숙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귀족들이 길게 도열한 가운데, 황 실 가족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왕가의 상징인 인동덩굴이 금색 실로 수놓인 하얀 예장을 똑 같이 맞추어 입은 차림은 이들 세 가족을 더더욱 아름답게 연출해 주었다. 그들은 고운 빛 깔로 물들인 모자의 장식 깃털이 보드랍게 나부낄 정도의 가벼운 걸음걸이로, 그들을 위해 깔아둔 붉은 융단을 밟으며 왕립 극장의 귀빈석으로 향했다. 그 뒤로 왕가의 수행원들이 줄을 이어 뒤따랐는데, 그 행렬 가운데에서도 화려한 아이보리색 예장의 어깨 위로 가발 대신 그냥 붉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진 레비 앙이 가장 돋보였다. 황실 가족 수행원의 행렬에 낄 수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될 만큼 대단히 영애로운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는 뭇 귀족들의 상당 한 시샘과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레비앙과 나란히 등장한 레인비 백작부인도 - 비록 그녀가 담당한 제르트뤼트 공주는 어린 관계로 연극 관람에 동참하지 는 못했으나 - 당당히 황실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황제 일가가 자리를 잡고 그 수행원들은 황실 가족들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 기 위해 다소 떨어진 곳에 차례로 착석을 했다. 그러고서야 귀족들도 하나 둘 자신들의 자리에 앉았다. 인사와 답례로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가라앉 고, 신사들의 가벼운 헛기침 소리와 낮게 파닥거리는 부인들의 부채소리만 들 려올 즈음에서야 종소리와 함께 무대의 붉은 휘장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붉은 커튼자락 사이로 아름답게 꾸민 배경이 드러났다. 고풍스러운 식사실을 연상시키는 가구들이 각각 적절한 장소에 놓여 있는 가 운데 만찬을 위한 테이블이 붉은 테이블 보로 씌어져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반짝이는 은제 식기들이 놓여 있고 그 주변은 온통 꽃과 촛불로 화려하게 장 식되어 있었다. 또한 우아한 조각이 새겨진 의자들이 식탁의 양 옆으로 즐비 해 있어 머지 않아 성대한 만찬이 열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배경으로 여주인공이 연록색의 치마 자락을 손끝으로 잡고 살랑 살랑 흔들면서 등장했다. 연극이 시작되자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나 엘스헤른이 오지 않았나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소문에도 없었던 그 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리는 만무했다. 루엘과 아이린의 모습은 멀지 않은 곳에 보였으나 역시 엘스헤른은 없었다. 지난번의 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지금 그는 몹시도 바쁠 테고, 연극을 볼 만한 마음의 여유 같은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문득 레비앙은 자신이 지나치게 엘스헤른을 염려하고 있다고 여겨져 가만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 번, 다시는 보지 않을 듯이 뿌리치고 나온 일이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레비앙은 여전히 엘스헤른이 신경 쓰였다. 이러는 자신의 마 음을 스스로도 알 길이 없어 레비앙은 조금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매몰 차게 외치고 나왔는데, 막상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그를 먼 저 찾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할 일이었다. 엘스헤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레비앙은 한숨을 지으며 무대 쪽으로 시선 을 돌렸다. 그가 없다는 사실이 편한 마음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오히려 천천히 밀려드는 한기로 느껴졌다. "티아란 대공 전하를 찾으시는 거죠?" 곁에서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자리에는 아까 함께 등장한 레인비 백작부인이 여전히 무 대에 눈길을 둔 채 싱긋 웃고 있었다. "그렇게 놀라는 표정은 곤란해요, 아르떼이유 경. 여기는 사교계의 한가운데 죠. 당신의 솔직한 표정 하나 하나가 당신에게는 독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 요. 어디인가에서 분명 지금 당신을 보고 있는 눈이 있을 테니까요." 마치 샛노란 깃털을 지닌 작은 새의 목소리 같이 아름다운 레인비 백작부인 의 음성은 낮게 이어졌다. 옆자리의 사람도 유심히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놓쳐 버릴 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그녀는 무심하게 이야기를 했다. "대공 전하와 당분간 멀리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말을 듣다못해 레비앙은 문득 입을 열었다. 영문을 모르고 그저 듣 고만 있기에는 그녀가 말하는 내용이 사뭇 진지했다. "……." 레인비 백작부인은 가만 입을 내리 다물더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동안 연극을 보고 있었고, 약간 웃었으며 간혹 부채를 파닥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들이 레비앙을 조바심 나게 하고 있었다. 레비앙은 그녀의 충고대로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연극을 보고 있는 척 하며 그녀의 소매 자락을 살풋 잡아당겼다. "어마, 이러시는 건 무례해요." 레인비 백작부인이 조그만 목소리로 푸념을 했으나 레비앙은 그저 눈을 살 짝 내리까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백작 부인, 부디 하시던 말씀을 마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하기엔 긴 이야기죠. 그리고 누군가 들을까봐 두렵군요. 하지만 대 공 전하를 위하시는 마음이 있다면, 레비앙 님, 제 충고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녀는 부채로 입을 가리지 않은 채 빠르게 속삭였다. 오히려 부채로 입을 가린 행동이 타인들에겐 더더욱 은밀해 보일 거라는 현명한 생각에서였다. "레비앙 님, 대공전하께서는 지금, 상당히 심각한 소문에 휘말려 있답니다. 그것이 그 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는지는 오로지 신만이 아실 일이지만 일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어요." 낮고도 속도감 있는 말 끝에 그녀는 레비앙을 살짝 쳐다보았다. "당신의 일인 거예요." 조용하고도 강한 강세를 넣어 말한 그녀는 이내 연극 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무대 위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녀 복장의 배우들이 오가며 바구 니의 꽃을 뿌리고 여자 주인공은 화려한 황색의 의상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에스코트 해 주던 남자 주인공은 맞은 편의 식탁에 앉았다. 그러고 많 은 대화들이 오간다. 상당히 주옥같은 운율의 말이었으나, 레비앙은 그 묘미에 신경 쓸 틈이 없 었다. 그가 신경 쓰이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엘스헤른이 어떤 소문에 휩쓸렸는가 하는 것,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이 일을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느 냐 하는 것. 비록 얼마 전에 엘스헤른과 다투었다하더라도 막상 이런 말을 듣 고 보면 누구보다도 궁금해지고 속이 탔다. 그는 답답한 심정이 들어,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 TO BE CONTINUED - 〓〓〓〓〓〓〓〓〓〓〓〓〓〓〓〓〓〓〓〓〓〓〓〓〓〓〓〓〓〓〓〓〓〓〓〓 너무 바빠서 살기가 싫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언제나 "이번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다 잘 될 거야." 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만, 이번에는 정말 숨이 턱 끝까지 차 오릅니다. 마음의 여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요. 왜 이렇 게 일이 많은 건지, 원. "차근차근 하자!" 라고 생각하기엔 시일이 너무 빠듯 하네요. 모든 것이 내일, 모레, 내일, 모레... 코앞에 닥친 일들이 숨통을 조 여가고 있답니다. 하핫. 푸념이었어요. 글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점, 독자 여 러분들께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기다려 주세요. 어떻게든 쓰고는 있으니까요. 『SF & FANTASY (go SF)』 27210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6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6/04 19:12 읽음:224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66/6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5월 31일 22:40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6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6) 엘스헤른에 대한 소문을 알아내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레비앙은 막과 막 사이의 쉬는 시간을 틈타 루엘 경과 아이린을 창가의 커튼 아래, 은 밀한 곳으로 데리고 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도 레비앙이 하는 말 은 금시초문인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더 궁금해하며 매달리는 아이린을 루엘에게 맡겨둔 채 자리로 돌아온 레비 앙은 주변의 좌석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서는 레인비 백작부인을 비롯해 여러 부인들이 막간을 이용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주변에 앉은 상냥한 부인들의 이야기에 끼었다. "간만에 뵙습니다. 아름다우신 분들." "드디어 인사드릴 기회가 오는군요, 레비앙 님." "사교계엔 오랜만이죠? 레비앙 님. 뭔가 일이 많으셨나봐요." 그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착석한 레비앙은 그들이 궁금해 여기는 것 을 답해주려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황태자 전하를 돌보아드리는 일로 파티에 나갈 틈이 잘 없답니다." "어마, 그런가요?" 되묻는 말투가 사뭇 과장되어서 레비앙은 그녀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금새 눈치챘다. 그러나, 레비앙은 모르는 척 하고 말을 이었다. "황태자님께선 요즘 새로운 분야에 관심이 많아지셨답니다. 가령, 에스트르 의 고대사라든지……." "뭐, 그 정도라면 아르떼이유 가문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황태자님께 충분히 가르침을 선사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돌연 들려오는 우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레비앙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레비앙은 자신이 황태자의 시종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두고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는 그녀, 몽바종 후작 부인을 돌아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로 레비앙을 넌지시 응시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젊은 여인 못지 않은 아름다움과 우아함 을 빛내고 있는 그녀는 레비앙을 보며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 상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녀를 향해, 레비앙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황태자님께서는 총명하신 분이니까요. 그분은 진 정 훌륭한 학생이랍니다." 레비앙이 재치 있게 되받아 치자 후작부인은 하얀 깃털이 수북히 달린 부채 를 펴 살랑살랑 흔들며 입꼬리를 얇게 비틀어 웃었다. "어쨌든, 저희 같은 일반 귀족과는 달라서 ― 아, 레인비 백작부인도 물론 이 자리에 계시지만, 백작부인,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랍니다. ― 레비앙 님께서는,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되실 황태자 전하의 총애 뿐만이 아 니라 에스트르 최고의 귀족이시자 티아란의 종주이신 대공 전하의 은밀한 애 정까지 독차지하시니 좋으시겠군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해 있던 레비앙은 예의 상 냉소를 흘리지 않으려고 노 력하며, 여전히 미소 띈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일이야 제 한 몸 모두 바쳐서라도 기꺼이 해야 할 일 이고, 또, 대공 전하에 대한 제 우정은 그 분과 친구로 지내온 지난 10년의 나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이랍니다. 그러니 새삼스러운 것이 더 이상할 일이 지요." 그 때, 때마침 막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레비앙에게 더 깐 죽거려 주려는지 몽바종 부인은 입술을 쫑긋 했다가, 그가 그저 웃으면서 자 리에 바로 앉아버리자,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부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부채 로 입을 가린 채 속삭거렸다. "공공연한 소문이란 역시 당사자들만 모르는 법이라니까."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짐짓 소리를 높인 그 말을 등 뒤로 들으며 레비앙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문이라는 것은 그가 항상 두려워하던 그것임에 틀림없었 다. 엘스헤른의,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행동들……. 그 행동들이 몰고 온 여파는 이렇듯 그가 염려해 마지않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아마 도 몽바종 부인이 말한 <은밀한 애정>이라는 표현은 그런 행동들을 뜻하는 것 일 테다. 아무리 일방적이었다고는 하나, 그 <은밀한 애정>의 행각을 누군가 가 봤을 테고, 평소 두 사람에게 반감이 많았던 이들은 과장을 더 얹어 주워 퍼트렸을 것이다. 저 몽바종 부인 역시 자신의 아들이 황태자의 시종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르떼이유 가문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 까, 소문을 퍼트리는데 일조 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여느 스캔들에 비해 심각 하게 문제가 될 점이라면, 지금 사교계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레비앙이 여자 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비앙은 더더욱 난감했다. 반발하고 나섰다가는 오히려 더 일이 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보자니, 그것은 대외적인 일로 이미지를 더럽혀서는 안 될 엘스헤른에게는 진정 치명 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흠……." 레비앙이 고민 끝에 한숨을 내쉬자, 여지껏 잠자코 있던 레인비 백작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배를 인정하시는 건가요?" "예?" "한숨 소리가 너무 커요." 레인비 백작부인은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소리나지 않게 웃음을 흘리 고는, 계속되는 연극을 관람했다. 물론, 그녀의 주변에 앉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 테지만, 레비앙 쪽으로 그다지 표나지 않게 고개를 기울 인 레인비 백작부인은 특유의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의 한숨 소리는, 저들에게는 패배를 시인하는 백기와도 같은 것일 거예 요. 의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요. 사교계에 대해서라면 당신 역시 잘 알고 계실 텐데, 그런 실수는 당신답지 않아요." "하지만, 백작부인……. 어째서 저들은 저와 대공 전하를 음해 하려 하는 걸 까요?" 레비앙은 답답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 레인비 백작부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다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연극을 보는 척 했다. 무대 위 만찬 의 장소에서 두 주인공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우아하게도 운율을 멋지게 맞추어 논쟁을 주고받았다. 레비앙은 연극이 그다지 안중에 없 었고 그저 레인비 백작 부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얼른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인비 백작 부인은 잠시 아무 말 없더니 한참만에 레비앙을 살짝 쳐다보았 다.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죠?" 그녀는 생긋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때아닌 장난기에 레비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허탈해졌으나, 그런 내색은 않고 그저 두어 번 눈을 깜빡 거린 후 담담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레인비 백작부인 역시 차분하게 세팅된 금발을 살짝 쓸어 넘긴 다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 다. 백작 부인은 잠시 뜸을 들인 후에서야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야 여태껏 귀족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죠. 그 분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는 해도 귀족들은 어떻게든 흠집을 잡고 싶을 거예요. 그 젊은 나이 에 에스트르의 군권을 손에 쥔 티아란의 대공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질 투가 날 만 하죠." "하, 그들은 그 자리가 얼마나……." 레비앙이 항의하려 했으나, 백작 부인은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까 두려워 급 히 그의 말을 끊었다. "쉿! 그래요, 알아요.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인지 저 역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알고 있는 것>일 뿐, 경험 해보지 않은 이 상에는 동경을 가지게 되는 거죠. 더군다나 그 분은 아름답고, 유능하시죠. 타인이 보기에는 더없이 완벽해 보인다는 거예요. 그 분이 어떠한 고민을 가 지고 있고, 얼마만큼 힘들며, 얼마나 고달픈지……, 그런 것은 알고 있다고는 해도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 거죠.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에만 부러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니까요." "끔찍하군요." 레비앙은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심정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백작부인은 그 말 끝에 그저 입을 꼬옥 다무는 레비앙의 모습을 살짝 보고는 눈을 가만 내리 깔았다. "그러실 거예요. 당신 역시도 저 귀족들에게는 그런 대상일 테니까요." "어째서입니까?" "아아, 레비앙 님. 설마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계신 건 아니겠죠? 황태자 전 하의 수석시종 자리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영광된 것이던가요? 고귀 한 귀족가문이 아니라면 결코 선택받을 수 없는 자리인 거예요. 레비앙 님은 충분히 그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죠. 아,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부러움의 원 천이 <황태자 전하의 시종 직위>라는 것일 테지만요. 별 볼일 없는 귀족들은 그 분과 당신을 구설수에 올릴 날만을 기다려 왔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두 분 은 친구 사이니까, 한꺼번에 비방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들에게는 더더욱 만 족스러울 일이 아닐 수 없겠죠." "한꺼번에 비방할 수 있는 일…… 이라구요?" 레비앙은 담담하게 물었다. 물론, 속이 조금 뜨끔하기는 했으나, 그는 레인 비 백작 부인이 과연 얼마만큼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백작 부인을 떠 보기로 마음먹었다. - TO BE CONTINUED - 〓〓〓〓〓〓〓〓〓〓〓〓〓〓〓〓〓〓〓〓〓〓〓〓〓〓〓〓〓〓〓〓〓〓〓〓 수업 연구대회가 끝났습니다. 뭐, 비록 제가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2 년차 선배 선생님의 수업 연구를 돕는 일도 참으로 일이 많았답니다. 수업 연 구의 자료를 제작하는 일이 예사 일이 아니거든요. 이제 저에게 남은 일은 역시 6월의 야영 수련회를 무사히 치르는 일과 출판 의 일이로군요. (마감을 넘긴지 대체 며칠이 지났단 말이던가! 쿨럭. 죽을죄 를 지었나이다. 부디 용서를…….) 두 일도 이만저만 벅찬 게 아니랍니다. (아련) 9일 이전까지는 아무래도 그 어떤 여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 지만, 글은 어떻게든 써 보겠습니다. 그럼, 몸조심하시고. 격려와 축하해주시 는 Kypros님과 카르셀 씨,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SF & FANTASY (go SF)』 30225번 제 목:[신간]레비앙&레비안느1권 올린이:환영진 (이태규 ) 01/06/26 00:23 읽음:232 관련자료 없음 ----------------------------------------------------------------------------- 천랸에서 추천연재란에 연재하던 레비앙앤레비안느 1권이 나왔습니다.. 출판사는 창조신이 나왔던 코믹스토데이.... 그럼 이만 즐통하십시오...... 『SF & FANTASY (go SF)』 31000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7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7/01 16:33 읽음:180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0/3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6월 30일 23:23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7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7) "어마, 제 우려가 사실이 아니길 바래요. 레비앙 경, 설마 아직까지도 모르 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저들이 당신을 그렇게까지 비꼬는 것을 듣고도 아직도 모르겠다는 건가요?" 레인비 백작부인의 말은 재빨랐다. "이래서야 원, 대책을 세우기도 힘들겠군요."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레비앙은 백작 부인이 가볍게 혀를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연극 대신 자신의 손 끝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담담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대책이라뇨? 무엇에 대해서?" 그녀는 레비앙이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기꺼이 그 함 정 속에 걸어 들어가 주었다. "레비앙 경과 대공 전하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 말예요. 그 소문에 대한 대 책을 세워야죠. 당신과 그 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그냥 덮어둘 수 없는 거예요." 순간 레비앙은 하마터면 미간을 찌푸릴 뻔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두 손 에 힘을 주어 깍지를 끼는 것으로, 끓어오를 것 같은 자신의 감정을 다독였 다. 분명 자신이 우려했던 그대로의 소문임을 확실히 안 이상에 레인비 백작 부인의 말대로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이지 않는가! 소문 내기를 좋아하는 저 무리들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는 뻔히 보이는 일인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더없이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은 줄곧 무대 위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과 엘스헤른을 궁지에 몰아넣으 려는 무리들의 윤곽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저 비속한 무리들을 비웃어주는 눈빛을 짓고 있 기는 했으나, 레비앙은 내심 걱정이 쌓였다. '이제 어쩐다?' ·‥…━━━━…‥· 어떻게 연극이 끝났는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온 레비앙은 아까의 일로 인 한 시름 때문에 도저히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근심은 이미 잠을 멀리 쫓고 있었다. 모니카가 잠옷으로 갈아 입혀주고 나간이래, 줄 곧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레비앙은 입술 끝에 가만히 한숨을 머 금었다. 사건의 내막은 레인비 백작부인이 이야기했던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미 소 문은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 있는 상태인 듯했다. 지금 전쟁을 책임져야 하 는 대공 전하는 동성연애자라는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고, 그것이 그의 앞 일에 미칠 여파란 굳이 따져보지 않는다 해도 뻔한 것이었다. 아무리 요즈음 의 사회가 은밀히 동성애적 분위기를 수용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 지나 정신적인 수준까지의 문제였다. 그 정도 선에서 이 일을 마무리하기엔 그간 엘스헤른이 보여온 과감한 행동들이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 일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레비앙은 얼굴을 가리며 쏠려 내리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렸다. 도무지 해결책이라는게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좋을까? 전쟁에 집중해있어 야 할 대공 전하께서 사랑에 빠졌다는 것도 우스울 진데, 그 상대가 남자라고 소문이 나 있으니 엘스헤른의 입지가 상당히 곤란하다. "제길. 그래서 그토록 걱정이 되었던 건가?" 레비앙은 심란한 마음에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무언가를 하 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답답한 심정에 숨이 막혀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시야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지게 어깨 위에 놓여있고, 고민에 절어서인지 얼굴은 창백하다.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레비앙은 천천히 손을 올려 뺨을 쓰다듬었다. - 레비앙 님, 대공전하께서는 지금, 상당히 심각한 소문에 휘말려 있답니다. 그것이 그 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는지는 오로지 신만이 아실 일이지만 일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어요. 연극 공연장에서 레인비 백작부인이 했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이번 일을 막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에 레비앙은 더더욱 마음이 복잡했다. 대체 어떻게 막 을 수 있단 말인가? 저 입 싼 부인들이 퍼뜨려대는 지독한 소문을 무슨 방법 으로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레비앙은 소름이 끼쳐올 만큼 끔찍한 기분에 어 깨를 떨었다. 소문이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 뿐이지만 그것은 때 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는 극심한 독이 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이 소 문을 그냥 모른 척 해 버린다면? 레비앙은 소문을 모른 척 하면 조금 사그라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다지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당신의 일인 거예요. 다시 한 번 레인비 백작부인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나의 일……." 그는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곱씹었다. "나의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지?" 말을 입밖으로 내보지만 그다지 생각이 정리될 것 같지 않다. 레비앙은 다 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레이스와 솜이불 위로 온 몸이 묻혀들 듯한 기분 이 든다. 레비앙은 문득, 다시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저 너 머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 혹은 레비안느다. "아!" 레비앙은 마음 속에 닿아오는 무언가 입술을 열고 소리를 내뱉었다. 생각을 해 보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내 일일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걸 걸어야 할는지도 모르겠군." 레비앙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모아서 가슴 녘에 껴 앉은 무릎 위에 가만 고개를 공그었다. 아직 확신이 선 것도 아닌데 괜스레 가슴이 묵직해져 온다. 그는 가슴 속 깊이에서 긴 한숨을 끌어내 놓았다. 농후한 한숨은 이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레비앙은 거울 속 자신을 내내 응시하다 말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엘스헤른을 위한 선택……. 이 방법이 가져올 위험이라는 것은 닥쳐보지 않 고서는 아직까지 상상해 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레비앙은 그것이 엘스헤 른이 시달리는 못된 소문을 잠재우는 것 외에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 화살을 나에게로 돌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레비앙은 어깨가 싸늘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엘스헤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만한 가치? 친구 사이에 그런 것을 따지자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며 칠 전, 엘스헤른을 그토록 몰아세우기는 했으나 레비앙은 알고 있었다. 아무 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렇게 미소 지어주는 것은, 가식이 아니라 자신을 위 한 순수한 배려라는 것을……. 다만 그날 그렇게 그에게서 도망쳤던 것은 그 저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파서였다. 여지껏 그가 보여왔던 밝은 행동들 모두가 그런 이유인 것만 같아서 레비앙은 그 자리에서 도저히 그를 보고 있 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럴 만한 가치란 충분하다. 우정에서 비롯되었건, - 믿고 싶지는 않 지만 - 사랑하는 마음에서건, 엘스헤른이 그간 보여줘 온 모든 것들은 과분할 만큼 벅찬 것들이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비단 이유가 없다 하 더라도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고 레비앙은 마음을 다잡 았다. "엘스는…… 내겐 소중한 사람이야." 굳이 이유라는 것을 내세우라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지 않는다. 지금 비록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 있기는 하지만, 그간의 일들을 계기로 레비앙은 그를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엘스헤른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차라리 절망이었다. 그런 감정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지금, 엘스헤른의 느닷없는 고백으로 인해 그에게서 멀어져있기 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돌연, 결심은 망설임으로 인해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흐 려진다. "꼭 그래야만 할까?" 그는 낮은 혼잣말을 흘리며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누워서 이렇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야만 하는 걸까? 레 비앙은 다시 한 번 입술 끝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그대로 눈 물이 스며나는 시야를 가려버렸다. - TO BE CONTINUED - 〓〓〓〓〓〓〓〓〓〓〓〓〓〓〓〓〓〓〓〓〓〓〓〓〓〓〓〓〓〓〓〓〓〓〓〓 간만에 뵙습니다. 허억.; 돌이 날아오는군요. 저는 공주과이니 대신 장미꽃 을 날려주세요. 생긋.^^ (자신의 과오를 미소로 무마해보려 함.) 연재가 참으로 늦었습니다. 그 점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직장을 가지게 된 이래 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여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무슨 초등학교엔 할 일이 그렇게 많은 건지……. 예, 제 이야긴 접어두고. 우선, 책이 나왔군요. 표지가 파란색이던데 (동생 이 서점 가서 빌려온 것을 옆에 두고 있다는.)…… 감회가 새롭군요. 다시 읽 어봐도 어찌나 민망한지. -_-; 새삼 부끄럽다는 것을 느끼고 있답니다. 게다 가 1권엔 새로운 내용들이 좀 추가되고 해서, 통신상에서 이렇게 보시는 분들 께는 죄송하기까지 하네요.^^; 2권은 곧 나올 예정이예요. 책이 참, 생각보다 빨리 나오는군요. 하핫.^^; 일전 50회 축하 이벤트 당첨자들께서는 주소 보내주세요. 책이 제 손에 도 착하는 대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이벤트 상품은 책으로 땜빵하 는군요.;) 자, 이제 88편을 써야하는군요. 6월도 하루 남은 이 시점에…… 할 일은 많 고 글은 써야 하구, 미치겠습니다.TT-TT (거대폭포눈물) 그럼, 읽으시는 분들 께서는 느긋한 마음으로 다음 편을 기다려 주세요. 『SF & FANTASY (go SF)』 31001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8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7/01 16:33 읽음:196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1/3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6월 30일 23:2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8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8) 레비앙은 그대로 꼼짝없이 누워 있다가 새벽녘에서야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부터 빗방울 듣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한바탕 쏟아 부을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간간히 들려오던 비 소리는 어느새 빈 공간 이 없을 만큼 주위를 가득 채웠다. 간밤을 뜬눈으로 지샌 그는 묵직하게 엄습해오는 두통에 눈살을 살풋 찌푸 렸다. 진한 현기증이 밀려와, 그는 하마터면 다시금 주저앉을 뻔 했다. 애써 자신을 가누고서 고개를 들자 창밖의 푸르름이 아련히 눈에 들어왔다. 짙은 회색에 잠긴 새벽의 푸른빛은 조금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 방울이 동그랗게 얼룩졌다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며 레비앙은 아직까지 눈가에 서려 있던 눈물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지금 눈물 따위를 짓고 있을 여유란 없다. 무엇보다도, 엘스헤른을 위해 해 야 할 일이 지금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지 않는다면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견뎌낼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결심이 서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왔다. 그는 더 생각할 여유 없이 옷방의 문을 열어 평소 입던 대로 갖추어 입었다. 크라바트를 매는 손이 떨리고 있었 으나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모니카가 챙겨주던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림이 부실했지만, 레비앙은 부츠를 껴 신고 얼른 방을 나섰다. 급히 모니카의 방까지 내려온 레 비앙은 그녀의 방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예, 나가요." 아직까지 잠 기운이 섞인 모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녀는 흰색 보네트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가린 채 문을 열었다. "어머나! 레비앙 님. 이 새벽에 무슨 일로……." 문을 두드린 상대가 레비앙임을 확인한 모니카는 잠시 후 그 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높였다.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그 크라바트는 리본으로 매는 용도라구요!" 무엇보다도 주인의 차림새에 신경을 쓰는 시녀에게 가볍게 웃음을 보낸 레 비앙은 그녀를 조용히 시킨 후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 갈 데가 있어. 그러니까 나중에 아침 식사시간에 할아버지께 같이 식 사를 못하겠다고 말씀드려 줘." "에? 새벽에 어딜 가시려구요? 에그머니, 비까지 오네?" 모니카는 문득 비가 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더더욱 호들갑을 떨어댔다. 레비앙은 그녀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급히 가 봐야 해. 저 정도의 비는 맞아도 괜찮으니까 염려 말고 할아버지가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 좀 둘러대 줘. 원래 모니카는 그런 것 잘 하잖아." "후작님께는 어디 갔다고 말씀드려야 해요? 적어도 그것만이라도 말해 주세 요." 모니카가 한 풀 꺾여 볼멘 소리로 중얼거리자 레비앙은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려 주며 속삭였다. "비.밀." "레비앙 님!" 발끈 달아오를 기세의 그녀를 두고 레비앙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는 모니카가 더 외치기 전에 얼른 복도를 내달아 현관으로 달려나왔다. 자 신의 시녀에게조차 가는 곳을 말하지 않은 것은, 지금 그 곳에 가려한다는 것 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모니카라면 길길이 날뛰며 반 대할 것이 분명했다. 현관 문 앞에 선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고는 잠금 장치를 풀고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묵직하던 문이 어느새 틈을 내며 열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감상할 겨를도 없이 레비앙은 곧장 마굿간으로 행했다. 자신의 말을 풀 어낸 그는 마굿간을 벗어나자마자 말 위에 올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일직선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은 말이 달림과 동시에 이내 그에게 사선으로 달려들었다. 뺨을 때려오는 그 차가운 감촉에 레비앙은 몸을 가득 움츠렸다. 그의 말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 무언가가 창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엘스헤른은 억지로 눈을 떴다. 창문 두드리는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아 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아직까지 아스름했고 그저 눈으로 보기엔 아무 도 없었다. "참, 나. 여긴 2층이잖아. 사람이 두드릴 리 없지." 그는 몹시도 귀찮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다시금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어제 재무성 대신들과 예산문제로 싸우느라 피곤해, 방에 돌아오자마자 코트 만 벗어 던져 놓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는데, 아까운 새벽잠을 방해하는 것이 누구인지 확인할 만큼 잠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그가 발코니로 나와주기를 누군가가 간절히 기대하고 있기라 도 한 듯,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좀 전보다 더 심해졌다. "젠장! 누구야? 무례하게시리. 올 테면 정식으로 알현 신청을 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란 말야!" 그는 졸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저 밖의 1층 에서 누군가가 돌을 던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개구쟁이 짓을 할 사람이 라면 제롬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제롬이 여기에 올 이유라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제롬이라 하더라도 문을 두고 굳이 창 문을 두드려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엘스헤른은 입끝으로 불만을 구시렁거리며 창으로 다가섰다. 사람의 키를 넘는 거대한 창을 막 열려는 순간 작은 돌 하나가 날아와 놀래기는 했으나, 엘스헤른은 다행히 그 조그마한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더더욱 화가 난 그는 발코니의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어 호통을 칠 자세를 갖추었다. "어?" 호통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스스로도 허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허무함을 느끼기도 전에 엘스헤른은 또다른 말을 입술에 담았다. "레비앙……." 저 아래서 이쪽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레비앙이었다. 비에 젖 은 붉은 머리칼이 그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 TO BE CONTINUED - 〓〓〓〓〓〓〓〓〓〓〓〓〓〓〓〓〓〓〓〓〓〓〓〓〓〓〓〓〓〓〓〓〓〓〓〓 @ 요즘의 근황 (1) @ 요즘의 근황을 들려드리죠. 구, 궁금하지 않으시다구요? 너무하세요. 어흑. TT-TT;;;;; 보고 싶지 않으시더라도 저는 꿋꿋하게 밀고 나가렵니다! 저는 불 굴의 괭이라구요. 싱긋.^^ 예, 요즘은 인형 모으기를 취미 삼고 있습니다. 요즘이라고 보기는 꽤 된 취미로군요. 주로 바비, 제니, 리카 등을 모으죠. 골고루 모으고 있습니다. 초기엔 바비를 모으고, 또 멋도 모를 땐 제니도 모았습니다만, 요즘은 리카 쪽에 더 관심이 갑니다. 14살 정도의 체격과 외모에 조금은 귀족스러운 표정 을 한 아이죠. 얼마 전 짙은 오렌지색(거의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네오 리카짱을 발견하고는 구입버튼을 클릭 해 버렸습니다. "캬아~! 레비앙으로 꾸 며볼 테야!" 라고 말이죠. 무려 10마넌이나 했습니다. (낭비의 여왕 페르티.) 하지만, 아마도 꾸며진다면 사진을 찍어서 올려볼게요. 완결 이벤트쯤이라면 될는지. 그러나, 역시 너무 기대는 마세요. 그 인형은 머리카락이 너무 짧았 어요.TT-TT 게다가 18세기의 옷도 만들어야 하고 저로서는 역부족. (캬갹!!)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군요. 손바느질은 허접할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과 피를 요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만들고야 말겠어요. -_- (굳건.)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카짱을 모으는 이유는…… 뒤에 언젠가는 쓰게 될 < 루페르시나>라는 글의 사립여학교 학생들을 꾸며볼까 해서예요. 로리로리한 14살 소녀들로 가득한 학원물이랄까요. 그러나, 쥔공 루페르시나는 사실 300 살도 넘게 먹은 뱀파이어인데다가 상급생 언니(라고 말하기엔 어폐가..)들은 로리로리 대마왕이고 - 귀여운 것엔 사족을 못 쓰죠. - 동급생들도 하나같이 이상한 여자애들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시는 사랑이야기 를 쓰지 않겠다! 는 굳건한 의지에서 마련한 리메이크 제품입니다. -_-; (사 실은 고딩 때 만화로 끄적여 보던 것…….) 하지만, 염려는 놓으세요. 그 글 에 요술봉 같은 건 안 나오니까. (어라? 확신은 못하겠음.;;) 자,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느긋하게 다음 편을 클릭해 주세요. 『SF & FANTASY (go SF)』 36486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89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8/04 10:16 읽음: 37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2/3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7월 31일 23:46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89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89) '이 시간에 누굴까?' 궁금한 마음에 돌아보기는 했으나, 엘스헤른은 그다지 지대하게 신경이 쓰 이지는 않았다. 생각을 해 보면 지금 쯤이면 황궁 친위대가 순찰을 나설 때도 되었다. 그리고 사람의 출입이 많은 황궁에 새벽부터 누군가가 급한 일로 달 려온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말발굽 소리가 이쪽을 향해 점점 더 다가올수록, 그 소리가 빗물 가득한 황궁의 타일 바닥을 가득 채울수록 엘스헤른은 두근거리는 심정을 가 다듬을 수가 없었다. 비까지 오고, 새벽이라 시야가 그다지 분명하지는 않았 으나 그는 저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이를 쉽사리 식별할 수 있었다. "레비앙……."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던 엘스헤른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얼른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코트를 챙길 여유도 없이 방에서 뛰쳐나와 복도를 내 달렸다. 어쩐 일일까? 어쩐 일로 이렇게 비가 오는 새벽에 황궁에 온 걸까? 엘스헤른은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정신없 이 달렸다. 새벽의 어스름한 어둠에 아련히 거대한 현관문이 보인다. 그는 뛰 어오던 속도 그대로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빗방울이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가깝게 들려온다. 그 소리는 소름끼칠 만큼이나 차가웠지만 엘스헤른은 젖을 거라는 생각도 없이 그 빗속으로 한 걸음 나섰다. 멀리에서 달려오던 말이 현관 앞에서 멈추어 섰다. 몹시 빠른 속력으로 달 려온 모양인지 말은 뽀얀 입김을 내뿜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엘스헤른은 그 말 위에 앉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반짝 들었다. "레비앙." 이렇게 부를 생각이 아니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하릴없이 입술이 열리 고 만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입술 끝에 올린 그 순간, 어쩌면 이리도 마음이 설레는 걸까? "엘스……?" 의외라는 듯한 레비앙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스헤른은 들뜨려 하던 마음을 잠시 가다듬었다. 그는 조금 망설여졌다. 지금 레비앙의 목소리에서, 새벽같 이 여기로 말을 달려온 목적이 엘스헤른 자신이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 다. 어떤 다른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하다못해 황태자 전하께서 그를 불러 들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여긴 웬 일이야?" 마지못해 물음을 때어 놓은 그는 여전히 레비앙을 쳐다보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말 위에서 역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눈을 가만 내리깔더 니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내가 묻고 싶은 거야. 넌 어째서, 여기에 나와 있는 거지? 비도 오고, 더군 다나, 지금은 새벽인데……." "아, 그건……." 엘스헤른은 슬쩍 말을 흐렸다. 지금 진심을 말하면 레비앙이 싫어할까? 언제나 처럼 역정을 내며, 레비앙 은 이번에도 그렇게 뒤돌아 도망을 칠까? 작은 고민이 마음 속을 채운다. 젖은 공기 중으로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한 숨이 뽀얀 입김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그는 시선을 떨구다 말고 반짝 고개를 들어 레비앙을 응시했다. "너일 것만 같아서……." "응?" 엘스헤른의 느닷없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레비앙은 눈을 치켜 뜨며 되물었다. "뭐라구?" "……너인 것 같았다구.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이쪽을 향해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너 인 것 같아서, 그래서 달려 내려온 거야. 진짜 네가 맞다 면……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런 생각할 겨를 없이 그냥 뛰쳐 내려왔어. 정신없이……. 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야." 엘스헤른은 언제 망설였냐는 듯 심중의 실타래를 자연스럽게 풀어놓았다. 그가 우려했던 그대로, 그의 말을 들으며 레비앙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급기야, 레비앙은 그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떨구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 다. "그런 이야긴……." 엘스헤른의 이야기를 끊으려는 레비앙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레비앙의 말 을 끊으며 엘스헤른이 먼저 말했다. "그런 이야긴 그만 두라고? 아니, 그럴 수 없어. 나 이제는 솔직해 지기로 했으니까……." "아아, 그만해. 이런 식으로 군다면 언제나처럼 말다툼 밖에 할 수 없어. 난 너랑 싸우기 위해 여길 온 게 아니야. 그런 이야길 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 고." "그러면?" "다만, 너와 꼭 해야할 이야기가 있어. 길진 않아. 여기서 말할게." 레비앙이 여기까지 걸음을 한 목적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엘스 헤른은 다소 놀랐다.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는 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 지나 바램일 뿐이었고, 막상 이렇게 그 사실이 진실로 확인되고 나니 심지어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그는 마치 빗방울 소리만큼이나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 는 자신의 심장을 가다듬지 못하고 그만 한 걸음 더 레비앙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의 걸음보다도 빨리 레비앙의 손이 그를 막았다. "거기 서. 지금부터는 나를 안거나 나를 붙드는 것, 심지어는 악수조차도 용 납하지 않겠어." 지금 뺨에 스치는 바람결 만큼이나 싸늘한 레비앙의 목소리에 엘스헤른은 정신이 반짝 들었다. 그제서야 옷에 스며든 빗물이 아찔한 한기로 피부를 파 고드는 듯 느껴졌다. 그는 정신없이 달려나가려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매며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비도 오는데 내 방으로 잠시 들어가는 건 어떻겠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레비앙은 단호함으로 무장을 하고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엘스헤른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그런 눈빛을 마주하며 엘스헤른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레비앙, 지금 한 말은 그저 단순한 호의야. 설마 우리가 친구였다는 것까지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그저, 먼 길을 달려온 친구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고, 마땅히 권할 것을 권하였을 뿐이라구." "친구? 훗, …… 궁금하군. 네가 지금 진정으로 나를 친구로 보고 있는 거 야? 그렇다면 나의 우려가 진정 우려로 끝날 테니 더 신경 쓸 것 없겠지." 비웃음 섞인 레비앙의 말을 듣고서 엘스헤른은 뭔가 발끈 할 듯이 입을 열 었으나 잠시 다른 생각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레비앙의 말을 곱씹고 있다 말고 천천히 속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려…… 라니?" 엘스헤른이 넌지시 되묻자 레비앙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레비앙은 무거 운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뭐를? 대체 뭘 말야? 레비앙." 안타까워하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레비앙은 작게 거친 말을 흘렸 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끈덕지게 묻는 그를 다시금 저지한 레비앙은 손을 뻗 어 그를 막은 그 상태에서 눈을 들어 엘스헤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엘스헤른은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처럼 눈을 말똥거리고 있었다. 새벽 의 오묘한 빛을 담아내는 그 눈빛은 티끌조차 없이 순수해 보였다. 정말 조금 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역시…… 나의 일인 건가? 내가 해야만 하는……." 레비앙은 낮은 탄식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레비 앙을 더욱 서글프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빗물 속에 잠겨들 것 같은 우울 한 눈빛을 내리깔고 있었다. - To Be Continued - 〓〓〓〓〓〓〓〓〓〓〓〓〓〓〓〓〓〓〓〓〓〓〓〓〓〓〓〓〓〓〓〓〓〓〓〓 진정, 참으로 간만입니다. 그간 잘 사셨습니까? 저는 불볕더위 및 열대야 현상에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차마 사람의 생활이라 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더위로 베개를 눈물로 적시고… 낮에는 그 땡볕에 운전석에 앉아 고 문의 드라이브를 해야 하고. 죽겠습니다. 아주. 게다가 여름만 되면 저를 괴 롭히는 땀띠! 파우다 병이 어디로 갔는지, 가난한 생활에 다시 장만하기도 어 려운 일인데 정말 괴롭습니다. 그리고, 파우다를 뿌려놔도 잠깐입니다. 몸이 찐득해지는 기분은 정말 싫어요.! (누군들 좋아하겠냐마는.;;) 어이구, 게다가 잠까지 쏟아지네요. 몸통을 주축으로 해서 머리가 원형을 그리며 뱅글뱅글 돕니다요. 초저녁 졸음은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그럼 다 음 번에 또 뵙겠습니다. 너무 어지럽고 덥고 잠 오고…… 이런 데 게기고 있 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쿨럭. 『SF & FANTASY (go SF)』 36487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90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8/04 10:16 읽음: 21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3/3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7월 31일 23:4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0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0) "하아……." 뽀얀 한숨이 새의 날개짓 마냥 가볍게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레비앙은 그렇게 한숨을 내 쉬고선 생각이라도 하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고, 엘스헤른 은 눈살을 찌푸린 채 몹시도 심각해 보이는 그를 마주하며 어찌해야 할는지를 망설였다. 지금 자신이 레비앙에게로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레비앙의 손을 내 려다보면서 엘스헤른은 더욱 기분이 착잡했다. 빗방울은 그런 마음을 부추기 기라도 하듯 차갑게 떨어져 내렸다. 속눈썹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스헤른은 다시 눈 을 들어 레비앙을 응시했다. 분명히 지금 레비앙은 심각한 고민에 잠겨있는 듯 했고 그것이 자신으로 인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레비앙." 그는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레비앙이 언뜻 고개를 들었 다. 레비앙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매달렸다. 그것은 오히려 자조에 가까운 미소였다. "엘스헤른. 너에게 이런 말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을?" 조심스레 물어오는 엘스헤른을 똑바로 쳐다보며 레비앙은 아예 소리내어 웃 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엘스헤른은 알 수가 있었다. 그가 대체 어떤 곤란한 이야기를 가슴 속에 품고 있기에 이토록 망설 이는 건지, 엘스헤른은 궁금했다. "레비앙." 이름을 부르며 재촉하는 엘스헤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레비앙은 입꼬 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 "……너와 나,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응?" 엘스헤른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천 진스럽게 깜빡거리는 그의 속눈썹 끝에 매달려 굴러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레비앙은 가슴 속을 꽉 메우는, 울고 싶은 심정을 애써 다독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내가 너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더군.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마땅히 한 나라의 군권을 책임지고 전쟁에만 관심이 있으셔야 할 티아란 대공전하께서 아주 위험한 놀이에 심취되셨더란 말이야. 10년 동안 친구 사이었다는 건 그럴듯한 포장에 지나지 않았단 이야 기지. 그 속을 들여다보니 친구가 아니라 위험한 관계였더란 말이지. 네가 늘 상 농담 삼아 이야기했던 것처럼, 알고 보니 내연이더란 말이야. 에스트르의 황궁이 온통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점점 격해지는 레비앙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엘스헤른은 다소 무덤덤 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엘스헤른은 그의 이야기가 그다지 자극되지 않는 지 그저 어깨만 으쓱 했다. "아. 그래? 그런 이야기라면…… 그다지 상관없잖아." 엘스헤른의 무심한 말에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엘스헤른의 가슴 녘에 놓여 있던 자신의 손에 잡혀오는 셔츠 깃을 꾸욱 말아 쥐었다. "상관없어? 지금…… 상관없다는 말이 나와?" 느닷없이 멱살이 잡힌 꼴이 된 엘스헤른은 자신의 가슴과 레비앙의 화난 눈 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걱정 할 것 없잖아. 그냥 떠들다 말겠지. 원래 소문이란 다 그런 거야." "소문이란 다 그런 거라구? 지금 네가 그렇게 되지도 않는 말을 해도 아무렇 지도 않을 처지인지를 생각해봐. 너는 지금……." "알아. 내 처지 같은 건 충분히 알고 있어." "그래, 그런 처지에 소문이라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거…… 생각도 안 해봤어?" "그건……" 엘스헤른은 자신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레비앙에게 변명을 하려다 말고 문득 그를 빤히 응시했다. 하려던 이야기를 접고 그렇게 말끄러미 쳐다보자 레비앙 은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빗방울이 좀 더 거세졌다. 후두둑거리는 빗소리에 정신이 아득하게 산만해 지는 것 같았으나 레비앙은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무슨 속셈인지 갑자 기 입을 다문 엘스헤른이 여전히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것 만으 로도 그는 어깨가 굳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큰소리 치기는 했으나, 지금 유일한 방벽인 이 손을 떨쳐내고 엘스 헤른이 가까이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돌연 마주 쳐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온화하게 올라 가는 입꼬리를 바라보며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옷깃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저 위험한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긴장의 줄을 느슨 하게 할 수 없었다. "고마워." 문득 엘스헤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가득 긴장하고 있던 레비앙을 허탈하 게 했다. 레비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당해져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손을 툭 떨어뜨렸다. 그 사이를 놓칠세라 엘스헤른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고, 그 온 기가 뺨에 닿자 레비앙은 흠칫 놀라 눈을 들었다. 엘스헤른의 따스한 손가락은 빗물로 그의 뺨에 달라붙은 붉은 빛 머리카락 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 손길보다도 더 은근하게 엘스헤른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거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비앙은 자신의 뺨에 머물러 있던 엘스헤른의 손을 탁 쳐냈다. "착각하지 마. 나는 그런 소문 따위에 너와 연루되는 게 싫어서야. 그래서 방법을 의논하러 온 것일 뿐이야. 네 걱정을 할 여유 같은 것, 나에겐 없어. 지금은 내 일만으로도 미쳐버릴 듯이 머리가 아프니까. 나는 그런 소문에 시 달리는 게 기분 나빠." "그래?" 레비앙의 매몰찬 언행에 엘스헤른은 그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기 울였다. 그는 갸우뚱하게 레비앙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떨구고 눈 을 깜빡거렸다. 여전히 웃음 띈 표정으로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 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지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내 걱정 좀 해 줘. 아주 조금만……. 자주 하지 말고 아주 가끔씩……. 나 사실은 네가 걱정해 주는 걸 받아보고 싶거든. 예 전엔 그런 기대가 그렇게 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다 나의 욕 심이었던가 봐. 그 욕심으로 인해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이 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어버렸으니까……." 여상스레 이야기하는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조금 껄끄러웠다. 레비앙은 그렇 게 생각했다. 비록 자신의 귀에만 그렇게 들리는지는 몰라도 지금 엘스헤른이 하고 있는 말은 담담함을 가장한 고통이 함뿍 묻어나고 있었다. "나 말야…… 사실은 두려워. 어리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태 연한 척 하고는 있지만…… 무서워. 전쟁이라는 것도, 그리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래서 너에게로 도망치고 싶은데…… 내 유일한 안식처 가 너인데…… 넌 그런 나에게서 도망을 쳐. 너마저 나를 떠나면…… 나는 혼 자야." 하고 있는 말과는 전혀 맞지 않게 엘스헤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표정 은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해맑게 웃음을 머금은 그의 짙은 눈동자에 회청 색의 새벽빛이 비쳤다. 차츰 밝아져 오는 새벽은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에 가 려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말과 표정이 너무나도 부담스 러워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우울한 회색빛에 질려 그만 시선을 떨구었 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네 말을 곧이 듣지는 않을 거야. 너는 언제나 말 만 앞세우던 녀석이었으니까." "믿음을 주지 못한 거라면 미안해. 언제나 나는 시시껄렁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랬을 만도 해. 너를 대하던 나의 행동들, 그리고 널 아프게 했던 나의 말 들…… 지금은 너무나도 후회하고 있어." 엘스헤른은 자신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레비앙을 대하며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얼어붙을 듯 날카로운 한기에 심장은 차츰 느려져 어 느 순간에는 멈추어 버릴 듯 했다. 가슴 속에는 한숨이 차 올랐다. 그러나 엘 스헤른은 그 독한 슬픔을 밖으로 짜내어 버릴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그저 속마음을 감추고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만으로도 쓰러질 듯 힘들 었다. "후회되는 마음 따위…… 이제는 소용없겠지. 잃은 후에 후회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야. 난 내 모든 걸 잃었어. 너, 그리고 너로 인해 행복을 느끼던 나, 너와 함께 해서 즐거웠던 나날……. 남은 거라고는 이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이라는 짐 뿐." 자신의 중얼거림이 넋두리라고 생각된 순간 엘스헤른은 그만 입을 다물었 다. 레비앙은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착잡하게 가라앉는 심정은 이제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아, 엘스헤른은 레비앙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러고는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 To Be Continued - 〓〓〓〓〓〓〓〓〓〓〓〓〓〓〓〓〓〓〓〓〓〓〓〓〓〓〓〓〓〓〓〓〓〓〓〓 신사 숙녀 여러분. (신사는 과연 몇 분이나 되겠냐 마는...쿨럭.;) 드디어 90편입니다. 저로서는 상당히 긴 연재였군요. 뭐, 물론 분량은 얼마 안 됩니 다만. 콜록.; 앞으로 남은 분량은 약 20편 정도.로 예상 중입니다. 애당초 계 획했던 100편 완성의 꿈은 아마 물 건너 간 듯 합니다. 하지만, 사정을 봐서 120편 정도로 더 연장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세월에 쓰려고. 쿨럭.;) 아무래도 아직 빠진 챕터들이 꽤 되고 있는데다가 출 판본의 분량을 채워야 하니까...TT-TT 이런 고로, 아직 앞날은 까마득 합니다. 비록 독촉이 없어도, 열심히 배째 렵니다. (독촉이 있을 때는 저절로 배째진다.) 아아, 말씀 안 드렸나 봅니다. 아직도 연수 중이라 글 쓰는 일은 무리라고 말이죠.^^; 헉.; 그럼 지금 쓰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냐? 과연!!! 돌연 "내가 아직 페르티로 보여?" 라는 시시 껄렁한 농담이 떠오르는군요. 캬르릉.;; 썰렁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마음의 준비는 전혀 하지 마시 고 91편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생긋.^^ 『SF & FANTASY (go SF)』 36488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91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8/04 10:17 읽음: 22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4/3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7월 31일 23:4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1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1) 그다지 특별한 의도가 있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안고 싶다는 마음 이 들었을 뿐이었고 그와 동시에 그냥 끌어 안아버린 것이었다. 레비앙의 반 응이 어떠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으나, 엘스헤른은 지금 자신 외의 다 른 사람의 심정 같은 건 신경 쓰고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싸늘해진 마음에는 위안이, 그리고 빗물에 젖어 얼어붙을 듯 식어버린 몸뚱이에는 따스한 체온이 필요했다. "뭐, 뭐하는 거야?" 많이 놀란 듯 레비앙의 다급한 목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커다랗게 들려온다. 하지만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다고, 절대로 이대로 놓아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놓아버린다 면 두 번 다시 이렇게 레비앙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듯 했다. 엘스헤른 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아픔에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으로나마 입술 끝에 매달려 있던 미소는 어느새 찬 빗물에 녹아버린 듯 사그라졌다. 뼛속까지 스미는 듯한 고통은 저 빗물의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두고 떠나야 할 이 사람을, 어쩌면 두 번 다시 만나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상상 때문이었다. 또한 그 날이 이제 머지 않았음을,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유였다. "나는 무서워. 두렵다구. 다시는 너를 못 보게 될까봐…… 전쟁이…… 나를 그렇게 만들까봐."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레비앙은 순간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아픔에, 엘스헤른을 밀어내려고 들어올렸던 손을 멈칫 멈추었다. 전쟁이 엘스헤른을 다시는 못 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말을 듣고서야 별안간 그럴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아 니, 여지껏 그와 전쟁을 연관시키며 목이 매이도록 가슴 아팠던 것이 그러한 사실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레비앙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 도 애써 외면했던 것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자기 최면이라도 걸지 않는다 면 슬픈 생각으로 마음이 좀 먹어 어느 사이인가 시커멓게 타버릴 것 같아서 였다. "이것 놔." 레비앙은 아픈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겨우 입을 떼어놓았다. 비록 이토록 엘스헤른을 향한 연민에 가슴이 아프다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엘스헤른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지금 이 기분에 못 이겨 그를 다독여 주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예전의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 더 이상은 예전 같은 관계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러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린 게 아닐까? 레비앙은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처 럼 허공에 뜬 손을 천천히 떨구었다. "…… 놓아 줘." 매몰차야 할 목소리엔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목에 하나 가득 차 오 르는 뜨거운 것에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빗물에 젖어 차갑기만 하 던 뺨에 어느 새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레비앙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다독이며,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꼬옥 악물었다. 엘스헤른의 온기가 그의 마음을 데우고 있었다. 언제나 편하게 여겼던 그 따스함이 여전히 레비앙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불과 셔츠 한 장, 그 너머의 박동소 리가 너무나도 생생히 온 몸에 닿아왔다.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어떻게 하면 치유될 지 알지 못할 마음 속 상처가 쓰라렸다.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엘스헤른의 모든 것들이 지금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느껴졌다. "사랑해. 스스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어, 레비앙. 내가 널 사랑해도 되게끔 그냥 날 내버려 둬. 너의 관심조차, 아니, 네 허락조차 바라 지 않을 테니…… 날 위해 마지막으로 마련된 작은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도 록 그냥 내버려 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엘스헤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레비앙 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레비앙은 여전히 엘스헤른의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기보다는 그 진심의 이야기들이 마치 자 신의 가슴 속을 예리하게 에어내는 듯 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이만큼 아 프고 두렵고 어지러운 심정을 견디어 내는 것은 엘스헤른을 마주하고서는 힘 든 일이었다. 레비앙은 떨구어져 있던 자신의 손을 서서히 올렸다. 그러고는 아픈 마음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엘스헤른의 팔을 떨쳐 냈다. 그를 감싸고 있던 그 평온함이, 그리고 온기가, 익숙한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마음 속은 순식간에 텅 비어 싸늘해졌다. 물기 어린 한숨이 입술 끝에 매달렸 다가 사라진다. 한 걸음을 물러선 엘스헤른은 붉어진 눈시울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아름다운 잿빛 머리카락을 적시며 떨어져 내리는 빗물은 마치 그를 곁눈질하 고 있는 레비앙의 마음처럼 곤두박질 쳤다.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던 레비앙은 싸늘하게 눈을 치켜 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엘스헤른의 눈동자가 흐렸다. 빗물에 씻겨 보이지 않을 줄 알았으나,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눈에 가득 고인 것이 눈물임을 알 수 있었다. 엘스헤른은 아무 표정도 담지 않은 채 그렇게 하염없이 레비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스헤른과 눈길을 마주하며 레비앙은 가슴 속에 무언가가 덜컹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어.' 이렇게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멍한 표정이 얼마나 많은 진심을 담고 있는지를. 레비앙은 터져 버릴 듯 쿵쾅거리는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끌어올렸다. 그 가슴 속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싸늘하게 얼어 있던 마음을 녹이며 엘스헤른의 진심이 그대로 와 닿았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도 포근해서 어지러움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레비앙은 애써 한 걸음을 물러섰다. 지금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지 않는다면, 엘스헤른이 곤란해질 것임을 모를 리 없었다. 엘스헤른을 궁지 로 몰아넣을 험한 소문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확실히 굳게 마음을 먹어야만 한다. 결심한 계획이 몰고 올 길고 긴 어려운 나날들이 눈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은 자명한 터, 그러니 지금 이렇게 감상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다. "이제……, 너를 만나지 않겠어." 엄중한 선고처럼 레비앙은 그 한 마디를 떼어놓았다. 눈이 동그래지며 뭔가 말 할 듯이 입술을 작게 움직이는 엘스헤른을 보며, 레비앙은 그 보다 앞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몰라. 너는 내 친구였던 엘스헤른이 아니 야. 나를 괴롭게 만드는 너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 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리고, 나로 인해 어떠한 일이 생기든 간에, 넌…… 참견하지 마." 레비앙은 싸늘하게 말을 마치고는 서둘러 말 위에 올랐다. 말 등에 올라앉 아 고삐를 쥔 그는 아직까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는 엘스헤른이 더 이상 시야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그 말을 하려고 왔었어. 할 말을 했으니까, 가 볼게." 레비앙은 고삐를 당겨 말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일 틈도 없이 말에 세게 박 차를 가했다. 차가운 비가 거세게 얼굴을 때려왔으나 레비앙은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지금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엘스헤른을 뒤돌아 보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만일 그렇게 엘스헤른을 뒤돌아 본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말 을 세우고 그에게로 달려갈 것이 지금 레비앙의 심정이었다. 의지를 다지듯 입술을 꼭 악문 레비앙은 더욱 빨리 말을 몰았다. ·‥…━━━━…‥· 집으로 돌아온 레비앙은 비를 쫄딱 맞은 자신의 모습에 한 가득 불만을 품 은 모니카로부터 잔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이게 다 뭐예요? 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냐구요? 지금 레비앙 님 몰골이 어 떠신지 아시기나 해요?" 쉼 없이 땍땍거리는 모니카의 잔소리를 곁귀로 흘리며 레비앙은 터벅 걸음 으로 자신의 방에 당도했다. 메리벨 부인이 시녀들과 함께 목욕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문을 열고 들어선 레비앙은 젖은 모습 그대로 침대에 누으려 했다가, 기겁한 모니카의 초인적인 힘에 의해 팔이 끌어 당겨져 의자에 몸을 앉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피곤하다구. 제발 좀 내버려 둬, 모니카." "레비앙 니임!! 이런 날씨에 침대가 젖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구요! 그러게 누가 이렇게 물에 빠진 새앙쥐 같은 모습이 되어서 돌아오랬어요? 새벽같이 나가셔서 뭐 하신 거예요? 그러실 시간에 잠이나 더 주무셨더라면 피곤하시진 않으실 거 아니예요?" 쉼 없이 종알대던 모니카는 문득 핀잔을 멈추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혹 에 찬 표정으로 레비앙을 쳐다보았다. "레비앙 님, 설마……." - To Be Continued - 〓〓〓〓〓〓〓〓〓〓〓〓〓〓〓〓〓〓〓〓〓〓〓〓〓〓〓〓〓〓〓〓〓〓〓〓 신사 숙녀 여러분! (앞의 편과 첫 멘트가 같은 이유는... 같은 날 후기를 쓰고 있기 때문. 쿨럭.;) 하루에 두 편이나 후기를 쓰려니 좀 쑥스럽군요. 그 렇기는 해도, 앞 편의 후기를 쓴 후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쓰는 거라, 이번 후기는 좀 정신이 맑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칸에는 저의 최근 근황을 알려드릴까...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시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오래된 컴터가 고장나, 저의 한글파 일이 모조리 날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답니다. 괴로운 일입니다. 레비앙도 모 조리 날아갔답니다. 심지어 3권의 챕터 3은 연재분에는 없던 거라, 새로이 마 련한 이야기였는데 그것도 예외 없이 날아가 버려 한 동안 상심에 잠겨 있었 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애지중지하던 와 <삭월> 까지 모두 날아가 버려서 허탈함에 방황까지!!! 또, 애써 모아 놓았던 Mp3파일들은 어떻구요.T-T 이제 뭘 들으며 글을 쓰란 말이던가... 아무튼, 이러한 일로, 기필코 컴터를 새로 사야겠노라고 생각중 입니다. 물론 요즘 글쓰는 작업은 동생 방의 컴터를 애용하고 있답니다. 제 컴터를 고치기는 했습니다만 - 게다가 올바른 작동까지 되고 있습니다만 - 역 시 이유는, 제 방의 살인적인 무더위 때문입니다. 쿨럭.; 저는 더위가 싫어 요. 여러분도 날씨도 더운데 아무쪼록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름감기 무섭습니다요. -_-; (뭔 말이냐? 횡설수설.) 『SF & FANTASY (go SF)』 36489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92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8/04 10:17 읽음: 20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5/3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7월 31일 23:4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2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2) 그 "설마"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 것 같아서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 음을 흘렸다. 설마 이렇게 비오는 날씨에 엘스헤른을 찾아 간 건 아니냐고 묻 고 있는 것일 터. 그러나, 레비앙은 눈치 빠른 시녀에게 그 어떤 단서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웃음을 거두고는 탁자 위에 엎드려 버렸다. 만일, 빗발이 이토록 거센 와중에 그가 정말로 엘스헤른에게 갔었다는 사실을 모니카가 알게 된다면 아르떼이유 가문이 발칵 뒤집힐 만큼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해서였다. 여러 이유에서 엘스헤른을 적대시 하고 있는 모니카로서는 자신의 주인이 아무리 자발적인 이유에서 그를 찾아갔다고 한 들 이 험한 날씨에 비를 맞게 한 잘못을 모두 엘스헤른에게 뒤집어 씌울 게 분명했다. 게다가 조용히 그것 으로 끝난다면 다행이련만, 수다스러운 어린 시녀는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찧고 까불어댈 것이고, 그러다 보면 로자리움은 한동안 지나치게 떠들썩할 것 이었다. "레비앙 님! 설마 대공 전하께 가신 건 아니겠죠?" 이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모니카를 옆에 두고, 레비앙은 눈을 가늘 게 뜬 채 몹시도 고단한 표정을 한 얼굴을 들었다. "모니카. 나 피곤하니까 그만 좀 떠들어. 제발, 조금이라도 쉬자고. 나중에 입궁해야 하니까." "딴 소리 하시는 것 보니까 대공 전하께 가신 게 맞군요!" 발을 동동 구르는 시녀에게 레비앙은 더더욱 기운 없는 표정을 지어주며 한 숨을 포옥 내쉬었다. "아니야. 모니카." "그럼 어디 가신 거예요? 이 새벽에, 그것도 비가 이렇게 마구 쏟아지는 때 에!" 비록 자신을 염려해서 하는 행동이지만, 그런 그녀가 몹시도 귀찮아진 레비 앙은 그다지 뜸을 들이지 않고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다른 곳에 다녀왔어. 대공 전하께선 황궁에서 근신 중이시니까 굳이 이 새 벽에 만나러 가지 않아도, 입궁하면서 뵐 수 있잖아? 그런 것을 굳이 비까지 맞으면서 만나러 갈 이유가 없지." "그건…… 그렇지만……."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모니카는 아직도 수긍이 가지 않는 듯이 빤히 레비 앙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달리 어디에 다녀오신 거예요?" "응, 리하르트에게 다녀왔어." 스스럼 없는 거짓말에 리하르트의 이름이 나와, 스스로도 흠칫 놀란 그였으 나, 레비앙은 곧 자신을 가다듬고 모니카가 이해 할 수 있도록 길게 이어 말 했다. "그냥 이런 저런 일로 잠을 설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리하르트가 생각나 서…… 그래서 간 거야. 때 아니게 비도 오고 있었지만…… 할 이야기도 있 고, 그간 만나본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해서." 무미 건조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레비앙을 보며, 모니카는 아직도 의혹에 찬 눈길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채 더 캐물어 보기도 전에, 메리벨 부인이 시녀들을 시켜 욕조를 들여왔다. 메리벨 부인은 쓰러지듯 탁자에 엎드려 있는 레비앙을 측은 한 눈길로 바라보다 말고 모니카에게 다가가 수건 몇 장과 새로 갈아 입을 옷, 그리고 목욕 용품을 넘겨 주었다. "모니카, 레비앙 님께서 몹시 피곤하신 모양이니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하렴. 아무쪼록 편안하게 목욕을 하실 수 있게 도와드려." 메리벨 부인은 아예 푹 엎드린 채 자신들을 보고 있지도 않은 레비앙에게 정중하게 목례를 하고는 시녀들을 거느리고 물러났다. 그들이 떠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모니카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레비앙에게 어렴풋이 들려왔다. 레비앙은 모니카에게 걱정을 끼쳐 조금 미안 한 생각이 들었으나, 별달리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계속 엎드려 있었다. 목욕 물에 장미 꽃잎이 띄워져 있는지 그 향이 은은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 었다. 달콤하면서도 매혹적인 장미 향에 취해 레비앙은 모든 걸 잊고 싶었다. 또한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두려움도 지금 이 순간만은 지운 듯이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 앞이 하얗게 변색 되고, 마치 꿈길을 걷듯 풍성한 장 미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장미 향기는 마치 독처럼 번져 엘스헤른과의 옛 추억들을 떠올려 내도록 했다. 언젠가 먼발치서 장미꽃을 건네주던 그의 모 습, 그리고, 장미향에 취해 창틀에서 잠들었을 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던 모습, 지금처럼 장미꽃 붉은 향이 가득 번지는 욕조에 서서 나신인 자신을 넋 을 잃고 바라보던 엘스헤른, 무엇보다도 이전의 여러 해 여름을 지나며 둘이 서 같이 책 속 한 가득 장미 꽃잎을 말려두며 하늘을 향해 우정을 맹세하던 그 아름답던 추억……. "흐윽……."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흐느낌을 흘렸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모니카의 조 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레비앙 님?" 모니카가 바로 옆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었으나, 레비앙은 터 져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까 엘스헤른의 앞에서 못 다 운 설움 이 지금에서야 이렇게 터져 나오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레비앙은 여전히 엎드린 채 어깨를 떨며 목놓아 울었다. 자신의 시녀가 당 황하여 우왕좌왕하는 것도 느낄 새 없이 그는 아픈 마음을 울음으로 토해 놓 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나빠서…… 너를 아프게 해서…… 미안……." ·‥…━━━━…‥· "대체 무슨 일이야?" 제롬은 뾰로통한 소년의 표정이 그대로 서린 얼굴을 아이린에게 들이밀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만 빼 놓고 둘이서 속닥거린 거지? 그것도 공개적으 로 나를 이 방에서 내쫓은 후에 말야!" "응?" 아이린은 가까이 다가온 동생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천진스러운 미 소를 지었다. "뭐라고?" "못 들은 척 하지 마! 나도 눈치가 있다고! 어째서 레비안느가 누님을 찾아 와서는 둘이서만 은밀하게 속삭였는지…… 그건 필경 뭔가 꿍꿍이가 있기 때 문 아니겠어?" "꿍꿍이라니……. 후훗. 내가 너인 줄 아니?"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내어 웃었다. 누나의 그런 맹숭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롬은 얼굴 가득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팔짱을 끼고 창문에 기 대어 서는 무게 있는 모습을 보였다. "나만 꿍꿍이가 있으란 법은 없잖아. 게다가 누님이라면 확실히 나를 능가하 는 속셈이 있을 법도 해." "어마, 제롬……. 너의 그 천사 같은 모습에 맹세코, 난 진심으로 결백하단 다." 맹세까지 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아이린의 모습이 웬 일인지 느물스럽기까지 해서 제롬은 떨떠름한 표정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근엄한 포즈를 풀고는 아 이린이 앉아 있는 고풍스러운 바로크 형식의 테이블 곁으로 다가섰다. 언제나 와 같이 곱게 땋아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에 풍성한 드레스와 같은 색 의 분홍 리본을 드리운 깔끔한 모습의 아이린은, 그런 동생을 한 번 쳐다봐 주고는 곧 자신의 책으로 눈길을 떨구었다. 테이블과 아이린의 주위를 느릿한 걸음으로 한 바퀴 돈 제롬은, 여상스럽게 요리 도감에 눈길을 두고 있는 누님의 맞은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창 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모두 머금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투명한 금발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쓸어 올리며 자신의 앞, 의자를 끌어 그 위에 앉았다. 마침내 절도 있는 동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한 손으로 가만히 턱을 괴인 그는 연록색의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아이린을 넌지시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금방 느낀, 섬세한 아이린은 동생을 마주 봐 주 며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제롬은 불굴의 가면을 둘러쓴 듯한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누님에게 질세라 목소리를 촤악 내리깔며 은근히 물었다. "누님,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 To Be Continued - 〓〓〓〓〓〓〓〓〓〓〓〓〓〓〓〓〓〓〓〓〓〓〓〓〓〓〓〓〓〓〓〓〓〓〓〓 아아, 이제 마지막 한 편만 더 쓰면 다섯 편입니까? 에구궁... 어깨가 빠질 것 같군요. 게다가 머리는 한계를 느낍니다. (그다지 작은 사이즈가 아닌데 도.;;;) 한달에 다섯 편은 꼬옥 올리겠노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6월을 돌이켜 볼 때, 독자님들에게 지은 저의 죄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래서 7월은 열 심히 노력하…… 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만, 7월의 복병 - 갖가지 시험과, 통 지표, 통계 및, 방학 중 연수 등등등이 저를 글로부터 멀어지게 하더군요. 쿠아악, 떠들지 말고 남은 한 편이나 더 쓰라구요? (그, 그렇다고, 그렇게 흉기를 집어던지실 거 까지야.;;;) 네, 그럼 저도, 7월 31일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을 허비할 수 없 어 글을 쓰러 93번 창으로 워프해야 하겠습니다. 기필코 오늘 다섯 편을 올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과연 어느 누가! T-T 신용을 잃 은 작가의 말로란 이렇게 비참하더란 말이냐! 넋두리를 할 때가 아니군요. 쿨럭. 그럼. 워프~! 『SF & FANTASY (go SF)』 36490번 제 목:[천/펌] 레비앙 & 레비안느 #093 올린이:wizardk (정명권 ) 01/08/04 10:17 읽음: 30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6/36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7월 31일 23:48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3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3) 무게를 잡는 동생 앞에서 말똥말똥 눈을 빛내고 있던 아이린은 그를 놀리기 라도 하는 듯, 또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글쎄∼. 무슨 이야기일까?" "까, 깐죽거리지 말라구! 그러는 건 절대로 누님 답지 않으니까! 느끼하게 < 글쎄∼.> 라니!" 제롬은 아이린이 마치 자신처럼 구는 것을 끔찍해 하며 좀 더 격해진 목소 리로 발끈해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한 거야?!" "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더 이상 놀릴 의사는 없는 건지, 아이린은 친절한 목소리로 넌지시 말 머리 를 꺼내 놓았다. 제롬은 아까 레비안느가 방문한 이래 내내 궁금하던 것에 대 한 해답을 듣게되어 몹시도 흥미로운 듯 눈빛을 반짝이며 아이린이 어서 이야 기 하기를 기다렸다. "무슨 이야기냐면…… 별 것 아냐." 아이린은 눈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했고, 제롬은 분한 듯 탁자를 두드 려 댔다. "누님! 너무해!" "아아, 그렇게 탁자를 두드리다니. 점잖지 못해, 제롬. 너무 시끄럽잖아." 아이린은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제롬 을 놀려먹은 것이 내심 재미있는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녀는 살 며시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내려 제롬이 더 이상 탁자를 두드리지 못하도록 그의 손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사실이야, 제롬. 그다지 별 이야긴 하지 않았어." "그럼 왜 나더러 나가 있으라고 한 거야?" 제롬이 토라진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하자 아이린은 제롬의 손등을 다독거리 며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레비안느 양은 내 친구니까, 나를 찾아 온 거잖아." "하지만, 레비앙은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 같이 있었어도 상관 없었다 구!" 쉽게 발끈 달아오르는 동생을 여전히 다독거리면서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야, 오늘은 레비안느 차림이니까, 내 손님이라고 볼 수 있지. 안 그 래?" "같은 사람인데, 억지잖아!" 아이린은 열 받은 제롬이 버럭 소리를 치며 의자에서 튀어 올라 펄펄 날뛰 기 전에,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제롬의 손을 살짝 잡아 당겼다. 덕분에 그가 방방 날뛰는 일은 미연에 막을 수 있었으나, 제롬의 불만에 찬 투덜거림은 계 속 되고 있었다. "너무해. 아아, 너무 한다고. 어떻게 나만 빼 놓고 이야기를 속닥거릴 수가 있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형님과 레비앙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 미치 겠는데. 정말 너무해∼! 이럴 순 없어. 아아, 배신감까지 느껴져. 어쩜, 나만 쏙 빼 놓고……" 끊이지 않는 제롬의 푸념에 지친 아이린은 고개를 내 저으며 말문을 열었 다. "사실 말야. 너를 내 보냈던 것은 여자들끼리의 할 이야기가 있어서일 뿐이 었어." "응? 여자들의 이야기라니?" 아이린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자 제롬은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생기 있는 얼 굴로 아이린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아이린은 그런 동생의 콧잔등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퉁기고는 밉지는 않은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뭐, 그저 시시콜콜한 것들이지. 가령, 선호하는 색깔의 드레스나 보석이라 든지. 근데, 여자들끼리의 이야기가 뭐가 궁금해?" "그, 그래도 궁금해!" "아아, 그리고 엘스 오라버니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 "오∼! 그래?" 드디어, 두 여인이 엘스헤른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흥미로운 진술이 당사자 중 한 명으로부터 나오자 제롬은 감탄한 표정으로 아이린을 재촉했다. "무슨 말인데? 대체 엘스 형님의 무엇에 대한 이야길 한 거야?" "으음……." 아이린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옅은 분홍빛으로 상기된 뺨 을 하고는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엘스 오라버니가 어디가 멋있는가. 하는 이야길 했어." 아이린의 대답에 가벼운 충격을 받은 듯 제롬은 떠름한 표정을 고수하며 그 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각처럼 잘생긴 눈썹을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긴 대체 왜 한 거야? 게다가 누나가 왜 얼굴을 붉혀?" "사실, 엘스 오라버니는 멋있잖아." 아이린은 꿈 속에라도 잠긴 양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제롬은 그녀의 눈 앞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대뜸 소리를 쳤다. "망상에 빠지지 말고 좀, 영양가 있는 이야길 해 달란 말야!" "하지만, 이런 화제도 꽤 영양가가 있었다구." "영양가라니! 무슨 영양가? 차라리 나에 대해 토론하지 그랬어?" 제롬이 마구 떠드는 녘에 꿈결에서 깨어난 아이린은 제롬에게 가볍게 핀잔 을 먹인 후 그가 바라는 대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레비안느 양과 함께 엘스 오라버니에 대해서 이것 저것 이야길 했 는데 말야. 그녀가 문득 그런 말을 하더라구……." "무슨?" "대공 전하께서는 참으로 따스한 분이세요. 그 따스함이 한 때는 부담스러움 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 분을 옳게 보지 못한 저의 불찰이었죠. 가까이에서 보면, 멀리서의 시야에선 볼 수 있는 것을 모르게 된다고들 하잖 아요. 그때의 저는 그랬던 것 같네요. 대공 전하의 가까이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멀리에 서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어? 정말?" "대충 그런 말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덧붙이기를……." 잠시 숨을 몰아쉰 아이린은 이야기가 끊어질세라 이어 말했다. "이제는 그걸 알아도 가까이 다가 갈 수 없을 거예요. 라고 했어." "응? 무슨 말……? …… 서, 설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제롬이 곧 무언가 추측을 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리하르트에게로 가 버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제롬의 경악에 찬 목소리에 아이린은 다소 심각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 는 자신의 깍지 낀 하얀 손을 물끄러미 쳐다 보다 말고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거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 같았어." "에?" "그러니까, 뭔가…… 어떤 결심이 선 것 같다고나 할까?" "결심이라니?" "나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는걸. 여자로서의 직 감을 발휘해 보자면…… 조만간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아." 아이린이 들먹인 <여자의 직감>이라는 것이 어쩐지 이번에는 좋지 않은 쪽 으로 느껴졌는지 그녀는 상당히 고민하는 눈빛을 지었다. 제롬은 진지한 아이린을 내내 응시하고 있다가,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발 큰 일은 아니이어야 할 텐데…….' - To Be Continued - 〓〓〓〓〓〓〓〓〓〓〓〓〓〓〓〓〓〓〓〓〓〓〓〓〓〓〓〓〓〓〓〓〓〓〓〓 드디어!! 5편 째입니다. (감격, 감격.T-T) 지금 시각은 11시 37분. 후기를 쓸만한 여유로움이 있군요. 그러나, 짐작하셨겠지만, 이렇게 급히 쓰느라 퇴 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오타, 문법적 오류, 말도 안되는 말(...) 등을 너그 럽게 봐 주십사.... 샤바샤바. 옆에서 남동생이 째려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컴터가 남동 생의 방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 방은 너무 더워서 접근 불가예요. 그런데서 글을 썼다면 아마, 폭주하여 날뛰는 엘스헤른…… 을 기대하셨어도 될 듯 했 네요. 네, 오늘은 여지껏 글쓰느라 목욕을 못했더니 매우 찜찜하네요. 그런데다가 허리에 내내 선풍기를 쐬고 있었더니 신경통이…… 에구구구. @_@ (할매 괭이 가 다 되어 간다.;;) 이제 느긋하게 더운 물 목욕을 즐겨볼까 합니다. 찜찜하게 눅눅한 얼굴도 좀 씻고.T-T 아아, 감격입니다. 허걱.;; 11시 47분.;; 잡담 쓰다가 글 못 올리는 거 아냐?;;; 자, 저는 그 럼 이만 워프입니다. 여러분 다음 편에서 뵙지요. 『SF & FANTASY (go SF)』 39812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094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08/26 03:44 읽음:122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7/4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8월 24일 14:10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4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4) 글라디에 백작 가에서의 파티는 여느 다른 파티와 다를 바 없이 한가한 귀 족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글라디에 백작 부인이 거액의 돈을 들여 홀 을 최신형 로코코 풍으로 꾸민 이래 그녀가 여는 파티에는 새로운 것을 추구 하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홀의 가장자리를 둘러싸듯 2층으로 바로 연 결되는 우아한 나선형 계단은 섬세하고 우아한 문양의 난간을 지닌 최신 모드 일 뿐만 아니라, 홀 내부 벽지의 작은 꽃무늬와 화려한 색채의 기둥 역시 이 번에 새로이 손 본 것이었다. 밤이 되면 수 백 개의 초와 세심한 커팅이 된 유리로 장식되어진 샹들리에 가 실내의 아름다움을 더욱 찬란하게 밝혀 주었다. 파티의 여주인인 글라디에 백작 부인은 파티에서 자신의 집을 보며 그 아름다움과 자신의 안목에 대해 찬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를 기꺼이 즐기곤 했다. 백작 가의 대대적인 공사 이후, 이곳에서의 파티는 최근 젊은 층 사교 인사 들의 집결지로 유명해졌다. 그런 만큼 이 곳은 에스트르 최신의 패션이 모조 리 선보여지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눈을 현란하게 할 만큼 갖가지 색채의 드레스와 예장을 입은 숙녀들과 신사들은 반짝이는 보석과 보드랍게 펄럭이는 깃털을 머리와 모자에 달고서 한껏 자신의 차림을 뽐내었다. 허영심 이 한창일 젊은 나이인 만큼, 그들은 치장으로 인해 자리에 앉기조차 불편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꾸민 차림새를 하고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홀 안을 거닐었 다. 이 곳이 젊은이들의 집결지가 된 것은 그러한 이유 뿐만이 아니라 좀 더 은 밀한 이야기들의 근원이 이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 규수가 어느 가문 영 랑과 눈이 맞았다는 등 흥미진진한 연애담이 모두 이 곳에서부터 퍼져나가곤 했는데, 그럴 때일수록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재담꾼들이 나서서 소문을 부풀려 놓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재담꾼들이 어쩐 일인지 입을 꼬옥 다물고 있었다. 그것 도 그럴 것이, 오늘 이 곳에는 간만에 특별한 손님이 참석해 있었다. 그는 최근에는 거의 사교계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을 뿐만 아니라, 사교계를 후끈하게 할 만큼 커다란 루머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 쏠려 있었다. 본인의 앞에서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해도, 젊은 남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에 대한 뒷담론을 나직히 속삭이곤 했다. 이쪽 코너의 폭신한 의 자에 앉은 두 아가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기…… 오늘의 레비앙 님은…… 어쩐지 예전과는 달라지신 것 같죠?"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하는 숙녀의 옆자리에서 역시, 그녀와 비슷하게 화려한 차림을 한 또 다른 숙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본 사이에, 뭐랄까…… 좀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죠? 그게, 좀 위험한 아름다움 같지만 말예요." "어마, 저와 같은 걸 느끼셨군요. 사교계에서 못 본 동안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어쩌면 그 소문이 사실일는지도……." "아? 소문이라면……." 두 숙녀는 수다에 심취해 어느덧 부채로 입을 가리는 것조차 잊고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조잘거려 댔다. "레비앙 님께서 티아란 대공 전하의 놀이 상대라는 그 소문 말이예요." "호호홋, 완곡하기도 하셔라. 이미 공공연한 소문인데 그런 식으로 돌려 말 하실 필요 있나요?" "그렇긴 하지만, 본인이 파티에 참석해 있으니까 조금은 조심해야……." 그녀들은 쉴새 없이 떠들어대느라 주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천천히 긴 그림자가 그녀들의 위로 드리워져서야 그녀들은 떠들어대 던 목소리를 낮추고 이상한 낌새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내 그녀들의 예쁘게 치장된 머리 위로 몹시도 정중하고 우아한 목소리가 살며시 내리 앉았다. "아름다우신 프로이덴느. 저를 그 이야기를 나누는데 끼워주시겠습니까?" 그녀들은 순간 딸꾹질이라도 하듯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목소 리가 들려온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그녀들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실내를 밝히는 수많은 촛불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붉은 그의 머리카락이 더더욱 붉어 보였다. 또한 잘 다듬어 놓은 조각 품처럼 뽀얀 얼굴의 양 볼은 잘 익은 복숭아같이 발그레했고, 매력적인 눈매 가 싱긋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어찌 할 줄 모르고 있는 숙녀들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입을 열 었다. "이야기에 동참시켜 주시는 게 껄끄러우시다면, 대신 춤을 신청해도 될까요? 두 분 중 어느 분이 저와……." 당황함에 직면해 넋을 놓고 있던 두 사람은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약 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레, 레비앙 님…….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춤을……." "어마, 아니예요. 그 보단 제가……." 은근히 다투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레비앙은 입가에 가는 미소를 머 금더니 아이보리색의 드레스를 입은 숙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 나비 마냥 살풋 머무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고는 사람들이 춤을 추 고 있는 홀 가운데로 이끌었다. 레비앙에게 이끌려 나온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꿈 속에라도 있는 양 얼떨떨 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 최고의 미소년이었던 그가 여지껏 사 교계 파티에서는 여성과 춤을 추어 준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 비앙의 춤 상대인 숙녀 뿐만 아니라, 레비앙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많은 아가 씨들이 아예 넋을 놓고 그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제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레비앙 님이 춤을……?" "정말 저기 춤 추고 계신 분이 레비앙 님이 맞죠? 어머나,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 "세상에, 이,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다음 번에 또 다른 아가씨와 춤을 추실는지도 몰라요." 파티장은 이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막간의 치장을 위해 휴게실로 달 려가는 아가씨들이 속출했다. 레비앙은 자신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너무나 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그녀들을 속으로 비웃어 주며, 자신의 파트너 에게 가까이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프로이덴느." "네, 네?"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그녀에게 레비앙은 은근한 미소를 담아 보 낸 후 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앞으로 남의 이야기를 하실 땐, 부디 주변에 누군가 있는지를 보고 이야기 하시길……." "네?" 숙녀는 갈색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뺨이 토마토 마냥 새빨갛게 익어 서는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레비앙은 여전히 미소 띈 표정으로 그 녀를 이끌었고, 숙녀는 춤을 추는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곤욕스러 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춤곡이 끝나자 레비앙은 그녀를 정중히 홀의 가장자리로 안내해 주고는 가 볍게 떨치고 청년들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많은 아가씨들이 그가 더 춤을 추지 않을지를 눈이 빠지도록 바라고 있었으나 레비앙은 점잖은 걸음 걸이로 자신의 또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멋들어진 옷차림을 하고는 과일주 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고위층 자제들로 이루어진 무리로, 게 중에는 상 당한 미모와 학식을 갖춘 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외모에만 신경을 쓸 뿐 그다지 실속은 없어, 레비앙은 그다지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던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자진해서 그 무리들에게 다가섰고, 그들은 바랬다는 듯이 기꺼이 자신들의 자리를 넓혀 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레비앙 경, 오늘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갑자기 춤이라니요." 또래의 청년들 역시 그가 갑작스럽게 춤을 춘 연유가 궁금했는지, 그가 도 착하자마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레비앙은 위험할 만큼이나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 었다. "그저 기분 전환을 위한 거랍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굳이 이유라 고 친다면…… 쉴새 없이 찧고 까부는 참새 숙녀들을 입막음하는 방법에 대한 작은 탐구를 위해서라 할까요? 춤이라도 추고 있는다면 시끄럽게 떠들어대지 않을 테니까요." 레비앙은 조금 소리를 높여 웃었고, 주변의 무리들은 숙녀들이 다소 소란스 럽다는 것에 동의를 하며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럽던 차에, 레비앙 경이 갑자기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 시니까 한 층 더 심해졌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숙녀들이 그토록 바래도 들어주지 않으셨던 춤이 라니요! 레비앙 경이 춤을 추기 시작하니까 숙녀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 걸 요? 덕분에 저희는 파트너마저 잃은 처지가 되었답니다." 누군가 은근한 부러움을 담아 하는 말을 듣고서 레비앙은 그쪽을 향해 눈웃 음을 지어주었다. "사실, 여성들의 심리란 작은 새와 같은 거죠.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고 안심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겁니다. 방심했다가는 작은 날개짓만으로도 금새 날아올라 당신의 품에서 훌쩍 떠나갈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럼 그 새들이 금새 가지를 옮겨 앉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거야, 그녀들 취향이죠.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나무에 앉았다가도, 잠시 향기와 색채에 혹해서는 장미나무로 옮겨 앉기도 하거든요. 가시에 찔릴 거라 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죠. 아마 속은 걸 알면 상당히 분해 할는지도 모르겠 군요. 나는 그녀들을 포근히 대해주기에는 너무나도 많이 그녀들에 대해 알고 있고, 또한 그녀들과 닮아 있으니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친 레비앙은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시종 에게서 과일주 잔을 하나 받아들었다. 연노랑색 과일주가 담긴 목이 긴 유리 잔을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감싸 잡은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여 천천히 음료를 들이켰다. 그는 투명한 유리잔의 곡선이 도톰한 입술 끝에 겨 우 닿도록 과일주를 마시고는 빈 유리잔을 시종의 둥근 쟁반 위에 올려 놓았 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가만히 초록색의 눈을 치켜 뜨자, 그를 넋 놓고 바라보 고 있던 또래의 무리들이 갑자기 먼 산을 보며 난데 없는 화제를 꺼내느라 어 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붉힌 이도 있었고, 가 벼운 헛기침으로 감정을 마무리 하는 사람도 있었다. 레비앙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둘러보다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 려 붉은 입술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를 보며 군침을 흘리시는 건지, 아니면 내 자신의 모습에서 비치는 레비 안느에게 흑심이 있는 건지……, 확실히 해 주세요. 은근히 질투를 가장한 추 파를 던지지 마시길. 그런 건 달갑지 않으니까요. 내가 여성에게 관심이 없기 는 하지만, 당신네들이 입방아 찧고 있듯 남색을 즐기는 것 역시 아니니까, 그런 식의 관심은 오히려 역겹답니다." 레비앙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로 좌중은 어색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레비앙 은 특유의 콧대 높인 표정으로 그들을 비웃어주고는 자신의 민트색 옷자락을 획 나부끼며 뒤돌아 섰다. 등 뒤의 저들이 모욕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 못하는 것은, 그들이 레비 앙이 도착하기 전까지 수근거리던 이야기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였다. 티아란 대공 전하와의 염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레비앙이 그 소 문에 대해 되 받아쳐 하는 말에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런 그들을 빤히 꿰뚫고 있는 레비앙은 뒤도 안 돌아보고 이제 또 다른 무리를 향해 이동했다. 아니, 그리 할 것도 없이 이내 그의 주변으로 아가씨들이 몰려들 었다. 레비앙은 노골적으로 귀찮음을 나타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그 조심성 없는 아가씨들에게 뭔가 한 마디 하려는 찰나, 그는 시종이 불 러주는 익숙한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프로이덴느,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레비앙은 예상지 못했던 그 이름에 은근한 반가움이 담긴 눈빛을 지으며 얼른 문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종이 이름을 불러준 후, 비로소 파티장으로 한 걸음 들어선 숙녀는 이런 파티 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수수한 영국식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다지 장식 이 없는 담황색 드레스는 그저 간결한 레이스와 몇 곂의 드레이프로 꾸며진 게 전 부였고 머리 장식 역시 이 곳의 아가씨들과는 구별되는 영국식의 올림머리였다. 꼼꼼하고 섬세하게 땋아 올린 옅은 금빛의 머리카락은 드레스와 같은 옷감으로 된 리본으로 드리워 있었다. 그녀가 파티에 참석하며 특별히 달고 온 보석은 물방울 모양의 진주 브로치가 전부였으나, 드레스의 가슴 앞섶에서 은은한 빛을 내고 있 는 진주는 아이린의 정갈한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레비앙은 너무나도 깨끗한 아름다움으로 이 난잡한 파티장을 빛내주고 있는 아 이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질투해 마지않았던 저 아름다움이 지금은 마치 구원의 손길같이 느껴져서였다. 그는 곧장 아이린에게로 걸어갔다. 아직 레비앙에게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한 아가씨들이 그를 따라오며 괴롭히고 있었으나, 그는 그녀들에게 안중도 없는 듯 떨쳐둔 채 걸음을 빨리 했 다. "아이린 양." 파티장의 풍경에 익숙지 않은 듯 잠시 두리번거리던 아이린은 누군가 자신을 부 르는 소리를 듣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어마? 레비앙 님." 아이린 역시 레비앙을 만난 반가움에, 얼굴에 희색을 띄우고는 곧장 레비앙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레비앙의 두 손을 잡고서는 은근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레비앙 님." "의외의 곳에서 아이린 양을 뵙게 되어, 저야말로 반갑기 그지없군요. 그런데 이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아이린 양은 그다지 파티를 즐기시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 거든요." "그야, 레비앙 님을 뵈러 왔죠." "예? 저를…… 만나러 왔다구요?" "네, 그렇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고……." 아이린은 말 끝을 흐리는 것만으로도 얼른 이 복잡한 아가씨들의 무리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뜻을 레비앙에게 충분히 전달했다. 그렇지 않아도 레비앙은 이 아가 씨들이 귀찮던 터였으므로, 그녀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아이린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던 아가씨들은 레비앙이 아이린을 자신에게 팔짱 끼우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바라 보며 그저 입맛을 다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들과 멀어지며 레비앙이 나직하게 "쿡쿡" 웃음을 흘리자, 아이린은 살그머니 뒤로 곁눈질을 하고는 레비앙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러다가는 저 저분들로부터 무척이나 미움을 사겠는 걸요." "그래도 저에게는 아이린 양이 너무나도 고마운 은인이 되어주시지 않습니까?" "후훗, 아가씨들을 떼어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구요?" 아이린이 장난스레 하는 말을 되받아 치며 레비앙은 눈을 살짝 찡긋 했다. "아니, 오히려 구세주라 할 수 있겠죠. 아이린 양이 오시기 전에는 마구 시달리 고 있었답니다." "저런, 조금 더 서둘러 올 것을 그랬네요. 그랬다면 마치 파트너처럼 보였을 게 아니겠어요?"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레비앙의 팔짱을 끼고선 그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거닐었 다. 그녀는, 참새 숙녀들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타격을 입혀준 것을 내심 즐 거워하고 있는 레비앙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어수선한 거죠? 또, 레비앙 님은 어째서 그리 즐거워 하고 계신 거예요?" "아." 레비앙은 실없이 웃고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아이린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이린 양. 그저 상황이 조금 재미있어서 웃었을 뿐입 니다. 당신이 오시기 전엔 정말 가관이었거든요. 그나저나,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죠. 아이린 양은 이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저를 만나러 왔다는 건, 아까 의 상황을 해학적으로 넘기기 위한 당신의 현명한 농담이라고 믿겠습니다. 우리는 약속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여기 있을 거라는 걸 아이린 양은 전혀 모 르셨을 테니 말입니다.," 자신의 일을 대충 얼버무리고 이내 되물어오는 레비앙을 빤히 올려다보며 아이 린은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일상이 지루해서요." "예?" 아이린의 짧은 대답이 듣고도 도무지 그녀가 한 말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아 레비 앙은 걸음을 멈추고 아이린 쪽으로 몸을 돌려섰다. "제가 잘 못 들은 거겠죠? 아이린 양. 당신 같은 분이 어째서 일상이 지루하시겠 습니까?" "어마, 아니예요. 정말 지루하고 심심했답니다. 제롬은 영국에서 온 편지 - 아, 집에서 편지가 왔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보여주지 않는 거 있죠. - 그 편지를 보 며 고민에 잠겨서는 저와 놀아주지도 않고, 엘스헤른 오라버니는 왕궁에 근신 중 이시고, 외숙모님께선 루엘 오라버니께 결혼을 설득하러 왕국 아카데미에 가신 데 다가, 일전에 놓고 있던 자수마저 이젠 완성해버렸으니, 저라고 어디 심심하지 않 겠어요?" 아이린의 긴 사설을 들으며, 레비앙은 제롬이 받았다는 편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냥 입을 다물었다. 편지 한 장에 제롬이 고민에 빠졌다는 걸 보니 심 상지 않은 내용일 것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내용에 대해 물을만한 별다른 이유 가 없어서였다. 레비앙이 가벼운 웃음으로 생각을 정리한 사이, 아이린은 온화한 목소리로 이어 서 말했다. "그래서, 레비앙 님 댁에 놀러 갔었죠.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불쑥 방문하는 것 은 예의에 어긋나지만, 지금쯤이라면 퇴근해서 댁에 가 있을 테니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벌써 저녁때도 한참 지났으니까 말예요." "로자리움으로 갔었습니까?" "네, 갔더니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작고 귀여운 아가씨가……." "아, 모니카예요." "네, 모니카 양이 레비앙 님이 어디계신지 가르쳐 주더라구요. 그래서 곧장 달려 온 거죠. 전 레비앙 님과 놀고 싶었어요." 아이린은 손에 든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흔들며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아 가씨들이 짐짓 요염한 척 할 때 하는 행동이었으나, 아이린이 그러는 모습은 오히 려 귀여워 보였다. 레비앙은 아이린을 따라 웃다 말고,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 라 그녀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초대장. 초대장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아, 그런 거라면……." 아이린은 마술 같은 부드러운 손길로 옷자락 속에서 잘 접어둔 종이를 꺼냈다. 붉은 리본이 메어진 초대장은 아이린의 길고 하얀 손가락 끝에서 그 손길을 따라 두어 번 팔락거렸다. "글라디에 가문의 파티 초대장은 저도 받았어요. 그다지 올 생각은 없었던 거였 지만, 이런 용도로 사용 될 줄은 몰랐죠. 버리지 않기를 잘 했어요. 어떤 때는 정 말 버려야 할 만큼 많은 초대장이 오기도 해서 귀찮은 적도 있었죠. 에스트르에 있는 동안은 아마도 저 역시, 티아란 대공 전하의 사촌 누이라는 이유로 레비앙 님 만큼이나 파티의 초대장을 많이 받을 걸요?" 그녀는 초대장을 다시 옷 속에 집어넣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그 등장에 의심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그녀였으나, 레비앙은 그냥 더 이 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늘따라 상당히 활달해 보이는 아이린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그녀 의 손을 이끌었다. "춤 추지 않겠어요? 아이린 양." 레비앙의 느닷없는 신청에 우아하게 화답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이끌린 아이린 은 어느새 자신이 홀의 중앙에 와 있는 걸 알고는 잠시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 다. "아, 저기…… 춤 출 생각은 없었는데……." "파티에까지 와서, 춤 출 생각이 없었다구요? 농담이시죠?" 레비앙은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아이린의 손을 잡아 당겼다. 느닷없이 추기 시 작한 춤이라 우왕좌왕하던 아이린은 곧 파트너와 음악에 맞추어 동작을 가다듬었 다. 악단이 연주하는 춤곡은 아가씨들의 화려한 치맛단처럼 동그랗게 퍼져나가고 있 었다. 손에 잡힐 듯 샛노란 음색은 춤추는 이들 사이로 포근하게 녹아들었다. 마치 치마 폭 아래 조그마한 발에 밟힐 것 같은 리듬에 몸을 맡기고 레비앙에게 이끌려 춤을 추던 아이린은 문득, 자신을 아니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을 아가씨 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 해서 레비앙에게 작게 속삭였다. "짓궂어요, 레비앙 님. 저를 어디까지 미움받게 하실 생각인 거죠? 저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는 저 아가씨들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아이린은 콧잔등을 살풋 찌푸려 불만을 표시했고, 그것이 그저 장난임을 알고 있는 레비앙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되받아 쳤다. "아이린 양이 저 대신 미움을 사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죠. 대신 저는 아이린 양 한사람의 미움만 받으면 되지 않겠어요?" "어마, 아시잖아요. 레비앙 님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분이예요." 그녀가 정색을 하며 하는 말을 듣고서 레비앙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렇게 청명하고 단정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진심을 내보이고 있는 모습이 그는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그녀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녀는 서늘하 리만큼 깨끗한 진실함으로 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기분을 가득 가라앉게 만 들었다. 아이린을 근본적으로 질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비단 그녀가 엘스헤른 의 총애를 받는 사촌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에 있었음을 그는 깨달 았다. 이렇게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마음. 단 한 점 의심조차 없는 저 눈동자가 그토록이나 부럽고 질투가 났던 모양이다. 레비앙은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조금 씁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미소는 레비 앙의 입술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제가…… 어떠한 면에서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해도 당신의 마음이 한결같이 그럴까요? 그렇다 해도 저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점점 빨라진 춤과는 달리 몹시도 천천히 말을 잇는 레비앙을 말끄러미 쳐다보 며, 아이린은 그가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 는 문득 춤을 추던 동작을 멈추었다. 돌고 있던 치마 자락이 살며시 다리 맡에 감 긴다. 아이린은 옷자락을 다독일 사이도 없이 손을 내밀어 레비앙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레비앙 님은, 제가 레비앙 님을 속이고 있다면 저를 미워하실 건가요?" 아이린이 붙들어둔 그대로 춤을 멈추고 선 레비앙은 아이린의 연록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리 없겠지요. 아이린 양이야 말로……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분이니 까……." "설령, 제가…… 레비앙 님이 절 속이고 있다고 믿는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아이린이 눈을 가만히 치켜 뜨고 묻자 레비앙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아이린 양……." "저, 알고 있어요, 레비앙 님. 당신이 저에게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진실을 저는 알고 있어요. 당신의 그 비밀, 당신이 바로 레비안느라는 것, 오라버니조차 모르고 있을 적에도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저 뿐만 아니라 제롬 역시. 저는 그걸 여지껏 당신께 숨겨 왔죠. …… 어떠신가요? 이제 저를 미워하실 건가요?" 아이린은 아주 담담한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쩌면 무심해보이기까지 하 는 그녀를 대하며 레비앙은 복잡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감추고 있던 것을 들킨 것에 대한 불안함이 아니었다. "그러면……." 숨을 들이킨 레비앙은 아이린의 연녹색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나직히 말을 이었 다. "…… 그러면, 나를 가지고 노신 건가요? 다 알면서 여지껏 속아주는 척……?" "사실이 아니라는 건, 아마도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아이린은 레비앙의 자존심을 알고 있기에 가만 눈길을 떨구었다. 이렇게 털어놓 은 이상 더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변명을 늘어놓는 것 은 오히려 레비앙을 더 거슬리게 할 터였다. 대신에 현명한 아이린은 그저 잠시 후 가만히 눈을 들어 레비앙을 바라봐 주었다. 그녀의 여린 장미나무 잎 같은 아름다운 눈과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대하며 미 동 없이 서 있던 레비앙은 한참만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다 밝혔어야 했을 일이죠. 그런 것을 미리 알았다고 다를 게 있겠 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그래서 아이린은 다소 당황했다. 그녀는 레비앙이 조금이라도 화를 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신의 예 상이 빗나가자, 조금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것은 요 며칠간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것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터였 다. 지난 번 레비안느가 에스트리온 성을 다녀간 이후, 레비안느가 무슨 결심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내심 걱정하던 아이린이었다. 오늘 아까, 로자리움 을 찾아갔던 것도 레비앙과 그러한 주제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레비앙의 속내를 조금은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불안한 마음에 여기까지 따라오기는 했으나, 막상 예전과는 달리 어쩐지 차분하 고 조금 슬퍼 보이는 레비앙을 마주하니까 얼음물에 손을 담그는 것 같이 시퍼런 아찔함이 몰려왔다. "무슨 일인가요?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저는, 레비앙 님, 당신의 친 구잖아요." 아이린은 자신이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며 레비앙에게 물었다. 지금 심정으 로는 매달리기라도 할 수 있을 듯 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무슨 일이 라도 - 설령 그것이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도 - 거리낌없이 그 위험 속 으로 걸어 들어갈 것만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무섭고 두려웠다. "레비앙 님." 아이린은 한 번 더 재촉했다.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레비앙은 그저 가만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 일 없어요." 아무 일 없노라고 이야기하는 레비앙의 얼굴은 다소 창백해 보였다. 아이린은 그가 억지로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신가요?" 급기야 아이린의 목소리가 살풋 흔들렸다. 레비앙은 그녀가 왜 그렇게 동요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명한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는지 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으로 만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이린 양." 레비앙은 겨우 입을 떼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아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한참만에 그는 입에 붙은 가식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웃고 싶은 마음 은 없었으나, 아이린의 걱정에 절은 눈을 보고 있자니 웃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아이린 양, 당신의 눈을 속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지 요. 저는…… 어쩌면 당신이 염려하고 있는 대로 일을 하나 계획 중입니다. 이제 천천히 시작하고 있는 일 말입니다." "……." 아이린의 눈에 예상이 적중했다는 듯한 두려운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섣 불리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레비앙을 바라보며 그가 얼른 다음 말을 해 주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비앙은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살얼음 같이 투명하고 얇은 미소를 입가에 매 달고서 머뭇거리며 입술을 떼어놓았다. "엘스헤른을 위해서……." "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란 듯 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대하면서 레비앙은 곧 차분함을 되찾았다. "이제 곧, 당신도 알게 되겠죠. 제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를." "아니, 안돼요. 저 지금 알아야겠어요. 그래야 당신을 도울 수 있죠. 여기에 와 서 사귄 소중한 친구가 당신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돕지 않을 수가 있겠어 요?" 아이린의 생떼에 맞서 레비앙은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도울 수…… 없다면, 만약, 당신이 도울 수 없을 만큼 큰 일이라면 어쩌시겠습 니까?" 잉글랜드의 청순한 아가씨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레비앙이 계획하고 있는 것, 그 실체는 생각한 것 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올 만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아 직 그 정체를 파악하지도 못했는데도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담담함으로 무장한 레비앙은 역설적으로 그 여느 때보다도 결의에 차 보였다. 자연의 보석과도 같이 반짝거리는 청록색의 눈동자에는 냉랭한 빛이 감돌고 있었 다. 하지만 발그레한 입술은 가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참만에 아이린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떨구어내며 그는 씁쓸한 한 마디를 흘렸다. "나는 괜찮아요. …… 엘스헤른을 위한 거니까……." 어쩌면 흘려들을 수도 있는 그 말 이후, 레비앙은 전혀 그 일에 대해서는 조금 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는 내내 아이린은 웬지 서글픈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 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막을 수 없는 어떤 커다란 불행 앞에 레비앙이 몸을 내맡 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그 불행 속으로 걸어 들 어가는 레비앙을 그냥 방치하는 것 같은 죄책감도 함께였다. - TO BE CONTINUED - 〓〓〓〓〓〓〓〓〓〓〓〓〓〓〓〓〓〓〓〓〓〓〓〓〓〓〓〓〓〓〓〓〓〓〓〓 반갑습니다, 여러분. 어느새 연재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군요. ...라고 말 한 것은, 잘라서 올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해 뭉텅이로 올리고 있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120편 정도로 계획 했던 것이, 뭉텅이 연재로 인해 100편 안에 끝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 이번 편만 해도 한글로 무려 10장이 되는군요. 즐거워라.^^ 읽으시기에는 좀 지루하시겠지만,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걱정거리도 좀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연재가 출판에게 잡아 먹혀서 (무슨 말인고 하니, 출판사 마감이 다되었기 때문에 연재도 못하고 넘기는 수 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임.) 뒷 부분은 책으로나마 보실 수 있게 될는지도 모 른다는 우려입니다. 하지만, 단 며칠 상간에 지우는 일이 생겨도 좋으니, 독 자 여러분을 위해 레비앙 방에 연재를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그럼,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편을 클릭해 주세요. 괭이꼬리// 요즘의 연재는 거의 날림입니다. 글쓰기만으로도 너무 바빠 용.;; 오타나 어색한 문장은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고치겠습니다. 『SF & FANTASY (go SF)』 39813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095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08/26 03:44 읽음: 77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8/4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8월 24일 14:12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5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5) "확실히!" 힘주어 말한 아이린은 뒤로 획 돌아서면서 제롬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래. 레비앙 님은 두려울 만큼 큰 일을 준비하고 있어." 가득 힘이 들어간 아이린의 진지한 눈을 보며, 제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쳐. 그 이야기는 누님이 아까부터 벌써 다섯 번은 더 이야기 한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그 <뭔가>가 대체 뭔지 알아아 대책을 세울 거 아냐?" "글쎄, 그걸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린은 금새 풀이 죽어 한숨을 지었다. 그녀는 방을 몇 발자국 거닐다 말고 솜을 넣어 비단으로 감싼 폭신한 의자에 와 몸을 풀썩 기대며 다시금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롬.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몹시도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를 보며 제롬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렇게 동요하는 거야? 누나. 이러는 건 도무지 평소의 누나답지 않잖 아." "하지만 제롬……."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서게 하고는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너무나도 걱정이 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짐작하지 못하니까…… 아무리 눈을 보고 이야기 해도 소용없어. 레비앙 님은 속내를 조금도 비추어 보이지 않아. 어찌 해야 할 지를 모 르겠어. 그래서 두려워." "두려워?" "응. 그것도 아주 많이…….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걸. 지금의 레비앙 님은 겉으 로 보기엔 상당히 공격적이야. 파티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그랬어. 금 방이라도 화르륵 불타오를 것만 같은 몹시도 메마른 장작 같은 느낌 말야. 그런데 기실은 차가울 만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그들의 말을 표독스레 되받아 치곤 하는 것이 그저 한 순간의 객기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레 비앙 님은……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어. 또한, 그 무대가 반드시 사교 계라는 거야. 그런데, 대체 왜?" "……." 자신의 논리의 끝을 떠맡기기라도 하듯 제롬에게 시선을 던진 아이린은 동생이 제발 영특한 결론을 내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롬은 조금 생각하는 듯 눈 을 내리깔고는 아이린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탐색의 자락을 더듬었다. "의도적으로…… 사교계를 적대시하고 있다?" "응." "그는 원래 그다지 사교계를 좋아하지는 않았잖아. 예전에도 파티에 가면 언제나 심드렁한 표정이었다고 엘스 형님이 이야기하곤 했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요즘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구. 아무리 자신의 눈에 거슬리 는 사람에게라도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는 건 위험해. 그 정도의 처세술 을 모를 레비앙 님이 아니야." "흐음." "그런데 왜 하필은 사교계야?" "그건…… 모르지." 짦은 대화가 오가다 말고 두 남매는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깊은 한숨으로 입을 모았다. 하지만 곧,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제롬은 얼른 달려나가는 논 지의 길을 바꾸어 보았다. "혹시 사교계에 원한이라도?" "응? 원한이라니? 레비앙 님이 사교계에 무슨 원한?"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럽게 고개를 젖는 바람에 조금은 익살스럽게 보이는 아이린에게 평소 같으면 웃어주었을 법한 제롬이었으나 오늘은 생각이 넘 쳐나 그저 턱을 좀 더 매만지며 입을 다물었다. 한참 생각하던 제롬은 소년답지 않은 중후한 표정을 지으며 누나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그 파티에서 말야, 혹시 다른 이상한 낌새 같은 건 없었어?" "다른 낌새?" 의미를 몰라서 되물은 것은 아니지만 제롬이 앞서 말한 단어를 두 어 번 중얼거 리던 아이린은 그때의 상황을 생각해내려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낌새라…… 글쎄, 그다지 기억나는 건 없는데, 사람들이 우리들 뒤에서 뭔 가 수근거리긴 했어. 조금 예사롭지 않은 수다들이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 써서 들어둘 것을……." 아이린이 아쉬운 눈빛으로 한숨을 짓자 제롬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아, 누나. 못 들을 수도 있는 일이지, 뭐."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뭐든 주워들어야 하는 거라고……." 그녀는 못내 아쉬워하다 말고 뭔가 기억난 것이 있는 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 다. "그러고 보니…… 레비앙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 새에 웬 아가씨가 나에게 몹 시도 거만한 말투로 물었어. <당신은 대공 전하의 사촌이시니 아시겠죠? 레비앙 님은 여전히 대공 전하와 친밀한 사이인가요?> 하고 말야. 그렇게 적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흥미로워 하며 비꼬는 말투였어." "음……." 누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기는 했으나 제롬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지 작게 입맛을 다셨다. "난 또, 뭔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나온 줄 알았네." "그래, 나도 그냥 인사인가보다 하고 들었는데, 그 말투가 상당히 마음에 걸려. 그냥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였거든." "그럼, 뭔가 숨은 뜻이 있다는 거야?" "그럴 지도 모르지." 두 남매는 똑같은 표정으로 심각함을 대변하며 같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대체로 비꼬는 말이란 독특한 어투로 아는 것을 모르는 척 물어본다든지, 그 말 속에 이 중적인 의미를 닫아 이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레비앙 님은 여전히 대공 전하 와 친밀한 사이인가요?>라는 말은 단순히 두 사람이 여전히 돈독한 우정으로 뭉쳐 있는지를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그저 마주보 고 있는 것 만으로도 똑같은 우려를 하고 있음을 두 사람은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한참만에 먼저 입을 연 제롬이 그리 운을 띄우자 아이린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 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조금 망설이는 기미가 없지는 않지만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로 인해 제 롬은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그렇다면, 그 말이…… 레비앙과 엘스 형님의 염문설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러면…… 그 염문설 때문에 레비앙이 화가 났다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고?" 지나친 비약을 하는 제롬에게 가만히 고개를 저어준 아이린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아무래도 문제는…… 사람들이 레비앙을 남자라고 생각 하고 있는 거니까……." "아!" 제롬은 아이린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 을 딱 쳤다. "그러니까, 레비앙과 엘스 형님을 위험한 관계로 보고 있다는 거겠군." "응. 더군다나, 그러한 소문은 두 사람에게 상당히 해가 될 게 분명해." "으음……. 엘스 형님은 대외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니까, 만일 헛소문이라도 난 다면 명성에 누가 되겠군. 만약 우리의 추측이 사실이라면……이거,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닌 걸?" 제롬의 말에 긍정을 하듯 아이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이린은 정작 엘스헤른보다도 레비앙이 더 걱정되었다. - 괜찮아요. …… 엘스헤른을 위한 거니까……. 어제 파티에서 레비앙이 한 말이 그녀는 마음에 걸렸다. 그건 마치 엘스헤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위해 뭔가 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여지껏 소 극적으로 도망치고 물러서기만 하던 그가 왜……? 도무지 머리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아이린은 의자에 기댄 채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불길한 예감이 사정없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직감은 닥 쳐올 불행을 여지없이 경고하는데,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직감으로 모든 걸 알아차리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또한, 레비앙이 미리 벽을 쳐 놓은 바람에 곧 일어날 그 두려운 일에 조금도 다가설 수가 없다. "아아, 바보같아." 그녀는 가만히 혼잣말을 흘렸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지만, 주변사 람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려 하는 레비앙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레비앙에게 분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고 혼자서 위험한 일 을 꾸미려는 그의 행동이 얄밉기까지 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 해도……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끈질기게 따라다 니면서 알아내고야 말 테야. 우리가 벌인 일로 인해 당신 혼자 불행해지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아. 당신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든, 그 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벌 어지든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야.' 일말의 결심이 선 아이린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 나는 바람에 곁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제롬은 흠칫 한 걸음 물러났다. "우왓! 조심해! 누나." "아, 미안해, 제롬." 당장에 동생의 두 손을 잡으며 사과를 한 그녀는 일부러 미소 띈 표정을 지어보 였다. "나 파티에 가야겠어." "응?" 그녀의 느닷없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제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파티는 무슨?" "아아, 제롬. 내가 정보를 물어올게. 레비앙 님이 어딜 가든 끝까지 쫓아가서라 도 말야." 아이린은 곧 제롬의 손을 고이 놓아두고는 부산스레 움직였다. "하녀를 좀 불러 줘.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 할 테니까." "어, 그, 그래." "머리도 다시 손질해야겠지?" "웬 걸, 그대로도 예뻐." "아냐, 아냐. 최고로 예쁘게 꾸며 가지 않으면 안돼. 사교계 사람들은 화려한 걸 좋아하니까. 그들이 나에게 스스로 접근하도록 만들려면 눈부시게 아름다워야 한 다구. 그렇지만 지나치게 화려한 건 안돼. 내 취향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무슨 색 드레스가 나을까?" "이, 이봐. 누나!" 아이린이 정신없이 설치는 바람에 넋이 나갈 뻔한 제롬은 갑작스레 수선을 떠는 그녀를 말리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제롬보다 한 발 앞서 그녀는 뒤로 몸을 돌리 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나의 반짝이는 시선이 자신에게 대뜸 와 닿자 제롬은 흠칫 굳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이린은 치맛자락이 날리도록 제롬에게 다가가 그의 두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서 딱 부러지는 어조로 말했다. "제롬. 너는 할 일이 있어." "응? 무슨?" "가서 오늘 파티의 초대장을 모두 정리해서 보여줘. 요즘 레비앙 님이 갑자기 사 교계 출입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오늘 저녁도 예외는 아니겠지. 그러니 초대장 모 두를 지참했다가, 그가 가는 곳을 따라가야겠어."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상당히 빠른 말투에 홀리듯 정신이 혼미해진 제롬은 한 마디 말도 못 꺼내고 입만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을 지시 받고 정 신없이 방을 나서는 제롬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보다말고 아이린은 얼른 화장대 앞 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의 무리가 그녀의 방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 TO BE CONTINUED - 〓〓〓〓〓〓〓〓〓〓〓〓〓〓〓〓〓〓〓〓〓〓〓〓〓〓〓〓〓〓〓〓〓〓〓〓 어라, 이번 편은 분량이 좀 적군요. 쿨럭.;; 급한 마음에 이상하게 잘라서 그런 겁니다. 하지만 다음 편은 분량이 많을 테니, 읽으시려면 각오하셔야 할 는지도. 게다가 중요한 내용이라고나 할까요?^^ 네, 아무튼, 더우시겠지만, 즐기시며 읽어주세용.^^ 『SF & FANTASY (go SF)』 39814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096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08/26 03:45 읽음: 81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39/4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8월 24일 14:12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6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6) 아니나다를까, 아이린이 예상했던 그대로, 오늘 저녁 역시 레비앙은 파티에 참 석할 모양이었다. 그가 어느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리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침 나절에 이미, 그가 서신으로 파티에 참석 의사를 밝혀 놓은 이래, - 그것은 마치 선전포고 같아 보였다. - 벌써 벨라시그네에서는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오늘 저녁 레비앙이 참석한다고 알려진 그 파티에 대한 정보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레비앙이 참석하리라고 알려진 파티는 몽바종 후작 부인이 자신의 저택에서 개 최하는 것이었다. 몽바종 후작 부인은 일전, 오페라 극장에서 레비앙과 가벼운 말 다툼이 있었던 바로 그녀였다. 그 작은 말다툼에 대해서조차 입소문이 번진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적이나 다름없는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 참석하는 레비앙의 의외로운 행동을 참으로 흥미로워 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즈음 레비앙의 행동이 상당히 매정하고 쌀쌀맞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이유를 무척이나 궁금해 여겼다. 한편에서는 오히려 그러는 모습이 과거의 무 관심하면서도 허무한 태도보다 훨씬 낫다는 평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는 그의 그런 예기치 않은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고, 은근히 그 이유가 최근 불 길처럼 화끈하게 퍼지고 있는 악성 루머 때문일 거라고 짐작해 마지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레비앙의 그런 신경질적인 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까지 했 다. 또한 오늘 혹시나 벌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몽바종 후작 부인과의 대결을 기대 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러한 미묘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 가운데, 어느덧 시간은 저녁 즈음 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붉은 빛과 보라빛의 노을이 하늘을 온통 뒤덮는 여섯 시 경에야 모든 준비를 마친 아이린은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풍겨내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 차림은 드레이프의 주름이 그대로 자연스러운 장식으로 쓰인 분홍색의 새틴 드레 스였다. 소매나 로브의 끝자락에 달린 하얀 레이스와 조화를 이루며 눈부시지 않 은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드레스는 그녀의 깔끔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러면서도 그녀는 조금 더 화려하게 보석 브로치와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는 것 으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연출했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서는 그녀를 뒤쫓아 자신도 따라가겠노라고 억지를 부리는 제롬을 잘 달래어 떼어 둔 아이린은 느긋하게 마차에 올라 에스트리온 성을 나섰 다. 그녀를 태운 에스트리온 가문의 하얀 마차는 성을 빠져 나와 어느덧 숲길로 접어들었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깥의 풍경을 보고 있던 아이린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몸을 바로 해서 앞을 보고 앉았다. 마차 안에서라면 생각에 잠기는 것보 다 바깥 구경을 하는 것이 더 즐겁지만 이 시간 즈음에는 숲과 하늘, 그리고 노을 에 물든 나무들의 붉고도 푸르고도 검은 색채가 무척 대비가 심해 쉽게 어지러워 지곤 한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로자리움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는 않다. 이 숲 길만 벗어나면 아름다운 장미의 성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비앙에게 자신의 심중을 눈 치 채인다면 아마도 그는 그녀를 따라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도 않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녀는 한숨을 내 쉬며 눈을 떴다. 노을에 잠겨들어 붉게 물든 아름다운 성이 멀리 창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외벽은 그녀가 탄 마차가 다가가는 시시각각 다양한 색채로 변모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만 같은 성을 물끄 러미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 오늘은 기필코 레비앙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리라 마음먹었던 아이린의 계획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로자리움에서 접한 소식은, 레비앙은 왕 궁에서의 일을 마친 후 바로 파티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계획이 어긋나자 다소 실망한 그녀였으나, 파티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녀 는 생각을 달리했다. 레비앙에게 아이린 자신이 지원병임을 밝히지 않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여상스러워 보여야만 하는 것을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정보수집과 함께 여차하면 레비앙을 몰래 뒤에서 지 원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사람들에게는 중립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 고로, 굳이 파트너를 자청해서 그를 따라갈 이유란 없는 것이다. 일행이 아닌 듯, 오히려 레비앙보다 먼저 파티장에 도착하면 아마도 레비앙에 대한, 이번 일과 관 련된 이야기들을 쉽게 수집할 수 있을 테다. 그녀가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긴 것은 몽바종 후작 부인의 저택에 도 착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몽바종 저택의 홀은 오늘 파티를 위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평소 몽바종 후 작 부인의 겉치레에 대한 집착은 이미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터였으나, 오늘 이 곳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홀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이 정도일 줄은 상상지도 못했다 는 듯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옅은 레몬빛의 벽지는 금박의 꽃무늬로 이루어져 있고, 은은한 상아빛 기둥에도 역시 부드럽게 흘려내릴듯 꼬이는 금빛 돋을 장식 이 있어 화려함을 더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초의 불빛을 아름답게 반사 해 낼 수 있도록 수 백 개의 정교한 보석 같은 유리알이 매달려 있었다. 또한, 온 통 반짝거리는 벽면의 군데군데에 우아한 촛대와 꽃이 치장되어 밝고도 우아한 분 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자주빛 제복을 입은 하인, 하녀들이 이리 저리 걸음을 옮기며 손님들의 편의를 돌봐주고 있는 가운데 아이린은 집사의 소개를 받고 사교장의 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녀는 레비앙보다 다행히 먼저 도착한 것을 알고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곧 안주인 몽바종 후작 부인이 그녀의 방문을 짐짓 기뻐하는 듯 홀연히 나타나 조심스레 인사를 청했다. 이 곳의 실내 장식과도 같이 레몬 색에 금색 수를 놓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려 보석과 조화로 장식한 그녀는 약간 거드름이 섞인 걸음걸이로 아이린에게 다가와 치마자락을 펼치며 우 아하게 인사를 했다. 신분상 고개를 숙인 채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후작 부인에게 - 아이린은 공작 가의 따님으로 후작 부인보다 신분이 높다. - 아이린은 친절한 말을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라고 합니다." 후작 부인은 그녀의 온화한 목소리에 감격해 우아한 미소를 띄우며 정중한 인사 를 올렸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초대장을 보냈는데, 이렇게 친히 참석해 주시니 영광입니 다. 윈저 양. 윈저 양은 제가 초면일는지 몰라도, 저는 일전 파티에서 뵌 적이 있 었어요. 언젠가 쳄발로를 치시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죠. 그때 저는 윈저 양을 저희 집 파티에 꼭 초대하고 싶다고 생각했답니다." "어머, 과찬이세요. 저야말로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파티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즐겁기 그지없는 걸요." 아이린으로서는 곁치레에 불과한 이 인사말이 몽바종 후작부인에게는 상당히 좋 게 들렸는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다른 손님이 등장하 여 그녀가 인사를 하러 가야하는 일이 생길 때 쯤에서야 아이린은 그녀의 관심에 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린은 평소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은근한 대화 속에 숨어있는 정보를 알 아내는 것은 현명한 그녀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확인한 정 보는 제롬과 그녀가 낮 동안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며 추측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이번 일의 본질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엘스헤른과 레비앙의 소문, 그것의 바탕은 질투와 동경이었다. 소문의 주축이 누구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뒤에서 속삭이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저 소 문의 당사자들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순수하게 흥미거리 로 떠드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서조차 옅은 시샘의 안개가 깔려 있 었다. 소문이 그리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이유는 당사자인 두 사람이 아주 특별한 지위 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지위는 범상한 이들에게 그 두 사람을 더욱 빛나 보이게 했을 터였다. 호의가 없는 시샘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놀고 떠드는 것 외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이 무리들은 자신들의 흥미를 위해 회자되는 소문거리가 당사 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평소 자 신들보다 우월해 보여 아니꼽던 사람을 맛나게 씹어줄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 는 것이다. 아이린은 자신의 앞에서도 예외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입방아를 더 듣고 있 기가 거북해, 그들에게 무례하지 않을 만큼 살짝 인사를 하고는 곧 걸음을 옮겼 다. '아이참. 레비앙 님은 왜 안 오시는 거지?' 그녀가 속으로 푸념을 하며 문으로 시선을 돌리는 찰나, 마침 집사가 도착을 알 려주기를 기다리며 입구에 서 있는 레비앙의 모습이 보였다. 흰색의 새틴에 옅은 베이지 색의 광택 있는 실로 장미수가 놓인 예장 차림의 레비앙은 전쟁터의 군인 보다도 더 당당해 보였다. 그의 특별한 붉은 머리카락은 하얀 옷깃과 레이스 위에 서 별다른 장식 없이도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프리미르,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비로소 집사의 소개가 떨어지고, 레비앙은 귀족의 상징인 보석 장식의 지팡이를 팔에 끼우고는 홀 안으로 한 걸음 떼어놓았다. 아이린은 반가움을 애써 감추며 얼른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레비앙의 등장에 좌중은 다소 소란스러워졌고, 그 틈을 타서 아이린은 그에게 가까운 장소로 이동 을 했다. 그에게 다가가서 먼저 인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올 것을 미리 예상했다 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그가 얼른 자신의 존 재를 알아채 주기를 원해 가까이에서 알짱거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 그녀의 바램대로 레비앙은 곧 아이린을 발견하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 다. "아이린 양?" 아이린은 이름이 불린 뒤에야 그에게 뒤돌아서는 것으로 이 만남이 우연인 것처 럼 가장해 냈다. "아, 레비앙 님이시군요. 도착하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정말 언제 오신 건 가요?" 자연스레 너스레를 떨며 반가워하는 그녀의 심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서 레 비앙은 우연의 만남으로 인해 얼떨떨함을 떨치지 못했다. "방금 도착했답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참석할 생각이었는데 왕태자 전하의 저 녁 과제를 조금 봐 드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요즈음은 왕국 아카데미의 저명하 신 교수님들이 왕태자 전하의 수업을 지도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과제가 많거든 요." "왕태자 님이라면 일전에 한 번 만나 뵈었어요. 어린 나이임에도 참으로 영명하 신 분이셨죠." 레비앙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준 아이린은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좀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한 은닉 작전으로 들고 있던 작은 은접시 위의 포도잼 케이 크로 레비앙의 시선이 옮아오자, 그녀는 민망함에 몸둘 바를 몰라하다가 얼른 포 크로 작은 조각을 떠서 입 속에 집어넣었다. "머, 먹고 있던 중이었어요. 저는 포도잼 케이크를 좋아해요." "아, 신경 쓰시지 마세요. 그냥 무얼 그리 들고 있는지 보았을 뿐이니까. 그나저 나, 오늘은 유난히 아름다우시군요. 아이린 양도 이제 사교계의 생리를 익혀 가는 건가요?" 레비앙은 부끄러워하는 아이린을 다독여 놓고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많은 시선들이 그를 향해 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바닥 혹은 천장 혹은 벽 등으로 흩어졌다. 여전히 예의주시 당하고 있음을 느낀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아 이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거, 조금 곤란하군요. 당신이 참석했을 때의 일은 계획에 넣어두지 않았는 데……." 그리 말하며 싱긋 웃는 레비앙의 모습에서 아이린은 레비앙이 자신을 은근히 불 편해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 서글퍼지는 마음에서 레비앙에게 한 마 디 하려했으나 꾸욱 눌러 참았다. 만약의 일을 대비한 지원병이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일로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일. 마음을 굳게 먹은 그녀는 "그럼 전, 여기서 포도잼 케이크를 좀 더 먹어도 될까요?" 라며 슬며시 다과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의외로 다과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작은 미소를 지어준 레비앙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럴 틈이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아이린에게 목례를 하고는, 자신을 흘깃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린은 만족스럽게 속였다는 안 도를 느낌과 동시에 마음 속에서 스멀거리는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말은 꼭, 오늘 여기에서 일을 벌일 것만 같은 뉘앙스였다. "아아, 설마.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그녀의 작은 혼잣말대로 오늘 파티장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해 있었 다. 그 이유가 레비앙으로 인한 것임을 아이린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떠한 기 대를 가지고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는 일일이 그 속내를 파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 다. 그들은 몽바종 후작 부인과 레비앙이 오늘은 어떤 식으로 부딪힐 것인가를 구 경하기 위해서 이렇게 몰려들었다. 물론, 수많은 아가씨들 중에는 그런 이유보다, 오히려 순수하게 "레비앙 님이 오늘 파티에서 또 춤을 추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걸음을 한 이들도 있었다. 그녀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로 부지런히 입방아를 찧기는 했지만 레비앙에게 근본적으로 악의는 없는 듯 해 보였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몽바종 저택은 과밀도로 인해 다소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어쩌면 몽바종 후작 부인은 이러한 효과를 미리 노리고 레비앙에게 초대장을 보냈 는지도 모른다. 요즘같이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가 파티에 참석한다고 알려지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그녀의 계획이 그러 하다면 충분히 성공한 일이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다른 곳으로 이동 을 할 때에도 지나갈 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정도 였다. 자신이 개최하는 파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석했느냐 하는 것은 안주인들에 게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그 자존심과 허영심이 상당히 충족이 되었는지 곧 어디에선가 몽바종 후작 부인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입에 떠 넣은 포도잼 케이크를 오물거리며 여전히 시선으로 레비앙의 뒤를 좇았다. 몽바종 후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바로 레비앙의 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파티가 성황리에 치루어 질 수 있도록 미끼가 되어준 레비앙에게 인사를 건네려 하고 있었다. "어머나, 레비앙 님. 영광스럽게도 와 주셨군요. 참석 의사만 밝히시고 안 오시 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답니다. 예정 시간보다 좀 늦으시기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역겨울 만큼 빈정거림이 묻어 났다. 먼발치서 듣고 있던 아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다른 사 람들이 볼세라 이내 포도잼 케이크를 한 입 더 떠먹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무마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쪽 상황을 곁눈질하며 얼른 레비 앙이 되받아 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대대로, 레비앙은 전혀 변함없는 당당한 표정을 고수하며 그녀의 말에 응수했다. "어쩌겠습니까? 제가 존엄하신 왕태자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 보니, 이렇게 늦 었답니다. 미천한 저로서는 송구스럽게도, 왕태자 전하께선 아예 전하의 방 근처 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 주실 생각까지 하고 계시거든요." 레비앙이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이라는 것은 언제나 몽바종 부인의 신경을 거슬 리게 한다는 것을 이 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알고 있었다. 레비앙이 일부러 왕태자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기선 제압 에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쉽게 꺾일 몽바종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이, 전력을 가다 듬기 위해 레비앙에게 가벼운 인사말을 건네는 것으로 우선 일보 후퇴했다. "아무튼, 오셨으니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 그러지요." 두 사람의 첫 대결은 잠시 접히는 듯했다. 다소 실망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 으나, 먼발치서 보고 있던 아이린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 비앙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고 그를 향한 수근 거림은 여전히 끊기지 않고 있었다. 아이린은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척 하면서 그의 뒤를 남모르게 밟았 다. 그녀에게 춤을 청하고 싶어 주변에 모여드는 청년들의 수도 꽤 되었으나, 공 작가의 자제 이상의 직위가 아닐 경우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는지라 - 그녀 에게는 다행스럽게도 - 섣불리 춤을 청해오지 않았다. 그들을 적당히 상대해 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 아이린은 레비앙이 어떤 부인 들의 무리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소근거리는 그 녀들의 모습에서, 아이린은 부인들이 혹시 레비앙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들은 레비앙에 대한 뒷담론으로 정신이 없는지 그가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까?' 아이린은 고민되는 마음에 연분홍색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며 잠시 걸음을 멈추 었다. 지금 레비앙은 분명 저 부인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다가가고 있는 것일 테다. 그의 행동을 막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계속 지켜봐야 하는 걸까?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레비앙은 부인들 틈에 자리를 잡고 섰다. 부인들 은 레비앙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는지 잠시 딴청을 피우곤 했으나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머, 레비앙 님. 저희들에게까지 발걸음을 해 주시다니, 오늘 역시 특별 이벤 트로 춤 출 상대를 찾고 계신 건가요?" "간만에 두각을 드러내시더니 예전의 인기는 그대로시군요." 가식에 찬 인사말이 오가는 가운데 레비앙은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잘 거리는 그녀들의 말을 더 들어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다소 무례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미소를 머금은 입술을 열었다. "어디선가 자꾸 내 이름을 들먹이는 말이 들려와서, 이리로 걸음을 했답니다. 뒤 에서 듣고 있자니,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게 아니더군요."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뜨끔한 부인들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부채를 펼쳐 파 닥거리자 레비앙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무엇 때문에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자, 제 앞에서 아까 하 시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보십시오. 당신들이 수근거리는 그 소문에 대해 저도 꼭 들어보고 싶었답니다." 레비앙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음산함이 자욱하 게 깔려 있었다. 이미 사교계에서는 구를 만큼 굴러 그런 것을 못 느낄 그녀들이 아니었기에 부인들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생 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어머나, 그건 레비앙 님이 잘 못 알고 계신 거예요." 한 부인이 그렇게 운을 띄우자, 무리의 다른 부인들도 다 그에 맞추어 한 마디 씩 덧붙였다. "그럼요. 저희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레비앙 님에 관련된 소문이라뇨? 저희는 금시초문이예요." "그러게 말이죠. 저희는, 레비앙 님이 오늘은 어떤 아가씨와 춤을 추실는지에 대 해 이야기했어요." "호호홋, 지난 번 글라디에 백작 가에서도 레비앙 님께서 춤추신 일로 얼마나 떠 들썩 했다구요."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갑자기 조잘거리기 시작한 그녀들의 수다는 오히려 더 열이 올라 끊일 줄을 몰랐다. 그녀들이 참새처럼 떠들어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 지 레비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이런 점잖은 사교계에서 어울리지 않을 법한 무례한 인상을 짓자 부인들은 슬그머니 말을 멈추고는 서로를 바라보느라 조심스 레 두리번거렸다. 레비앙은 그녀들에게서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입술을 가늘게 비틀어 살 얼음 같은 냉소를 지었다. 가볍게 코웃음까지 친 그는 들고 있던 루비 지팡이로 세게 바닥을 짚었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놀랐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놀란 부인들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레비앙은 음산할 만큼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당신네들이 나를 뒤에 두고는 그리도 잘 떠들어대던 이야기를…… 어째서 본인 앞에서는 하지 못하는 거죠? 어쩌면 그렇게 용기가 없습니까? 이왕 하려는 모욕이 라면 당사자의 면전에서 확실히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지금 제가 이렇게 당신들 에게 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는 쿡쿡 웃음을 흘린 다음 부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썩어 문드러진 밀가루 반죽 얼굴로 잘도 아양을 떨어대더군요. 어머, 레비앙 님이 잘 못 아신거예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저희는 금시초문이예 요." 그녀들의 수다스러운 말투를 흉내내어 그대로 되돌려준 레비앙은 입가에서 미소 를 싹 지웠다. "얼굴에 덕지덕지 처바른 분 때문에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건가요? 내가 다 듣 고 있었는데 발뺌을 하시려 하다니, 뻔뻔스럽지 않고서야 어찌 가능할 일이겠습니 까? 바로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내가 있었다는 게 당신들에게는 불행이겠지요. 그 불행이 닥쳐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둔해진 엉덩이는 저 루르드 강물에나 던져 버려요." 모욕을 당해 얼굴이 새빨갛게 된 부인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이리저리 흩 어졌다. 레비앙은 속이 후련한 듯 그녀들의 뒷꽁무니를 바라봐 주며 웃음소리를 높였다. "후훗, 도망가는 암말의 뒤태와 당신네들이 졸랑거리며 꽁무니를 빼는 게 다를 바가 뭐죠? 이봐요, 부인들. 도망가려면 더 빨리 움직이는 게 어때요? 언제 나의 채찍이 날아들는지 모르니까 말야." 그녀들이 도망치듯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구경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했 다. 그들은 마치 이 상황이 자신들과는 동떨어진 세계인 양 연극이라도 관람하는 태도들이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린은 좀 전 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며 레비앙과 엘스 헤른에 대한 뒷담론을 나누던 그들이 지금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이렇게 구경하고 있는 모습들이 역겹기까지 했다. 아이린은 여전히 말아 쥔 드레스 자락이 볼품없 이 구겨지리라는 것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직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더 지켜봐야 하는 걸까? ……아냐. 나가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도와주지 않는다면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레 비앙은 혼자서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이들 구경꾼들은 구경 뿐만이 아니라, 틈이 나면 그를 깎아 내릴 폭언도 서슴지 않고 할 사람들이었다. 원래 혼자라면 아무 말도 못하다가도 무리를 이루면 그 큰 덩어리 속에 숨어서 목소리를 높이곤 하는 게 저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섣불리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을 담론 삼아 뒤에서 수근거리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모욕을 주는 것이 레비앙이 말하던 계 획의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 그저 그런 단순한 것이었다면, 레비앙이 그토록 비 장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까 부인들을 능멸하던 그의 모습은 얼음보다 더 아찔한 차가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은 그저 다음 단계를 위한 시 작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린은 알 수 있었다. 그 다음 단계가 도대체 무 엇인지 모르는 이상, 그녀는 무턱대고 레비앙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곧 사람들을 헤치며 몽바종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눈썹을 가득 치켜올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그녀는 함부로 언성을 높 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요?" 레비앙에게 다가선 그녀는 표정과는 달리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를 대하 는 레비앙의 표정에 짐짓 흥미로워 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몽바종 후작 부인." "저는 문간에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러 운 거죠?" 몽바종 후작 부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딴전을 부렸다. "아, 그러셨습니까? 저는 후작 부인께서 어디에선가 저를 예의주시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거든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응수한 레비앙은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았 다. "몽바종 후작 부인, 그 따가운 시선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여기 계시는 구경꾼 들께서 저를 너무 흥미진진하게 바라봐 주셔서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 니다." 그 한 마디에 구경을 하고 있던 무리들은 나직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린은 수근거리는 대중들 사이 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한 시선으로 좌우를 살폈다. 레비앙은 지금 여기에 있 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두고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도와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녀 자신조차 지금 레비앙에게 아군이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녀는 레 비앙에게로 뛰어나가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쥐고 기도라도 하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능청을 부리는 레비앙에게 몽바종 후작 부인은 예의바른 어투를 고수하며 말했 다. "레비앙 님.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내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인가요? 몽바종 후작 부인. 단순히 내가 소 란을 부린 일에 대한 경위? 아니면 당신의 콧대를 높여주기 위해 내가 사과라도 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말발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레비앙은 몽바종 후작 부인의 예의를 가장한 거만한 태도를 물고 늘어지며 조금은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역시 부인께서 확실히 하지 않으시면 곤란하답니다. 몽바종 후작 부인, 나는 당신의 진심이 궁금합니다. 알면서 모르는 척, 나의 잘못을 내 입으로 유도해 내 려하는 당신의 그 숨겨진 의도 말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예절이 철철 넘치는 모습 으로 속마음을 숨기고 계시는 건 저 뿐만이 아니라 구경꾼들까지 속이실 생각입니 까?" 몽바종 부인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레비앙은 그런 것으로 꼬투리를 물지는 않았다. 그는 더없이 싸늘했으며 철저하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 록 군중들의 눈에는 빈정거리기만 하는 난봉꾼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아이린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를 모두 분석하고 있었다. 결코 그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고, 덤빌 때와 물러설 때를 적절히 가리고 있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의도된 싸움이었다. 몽바종 후작 부인은 그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것은 포기했는지 작전을 바꾸었다. "아무튼, 당신이 소동의 장본인인 것은 확실하군요.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말 이죠." 부인의 거만한 말을 듣고 레비앙은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는 도도하게 후작 부인을 비웃어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 그걸 이제서야 아셨습니까? 나는 부인께서 곧장 나를 향해 오길래 다 알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 이거야 원, 그렇게 큰 목소리로 저 부인들을 모욕했는데, 대 체 어디에 계셨기에 못 들으셨단 말입니까? 손님들을 안내하기 위해 문간에 계셨 던 게 아니라, 여기가 아닌 다른 방에서 은밀히 애정행각이라도 벌이다 오신 겁니 까? 그런 거라면 무척이나 죄송하군요, 부인의 일을 방해한 것이 되었으니 말입니 다." 몽바종 후작 부인이 엘스헤른과 레비앙에 관한 소문을 이야기하곤 할 때 주로 쓰이던 <은밀한 애정 행각>이라는 말이 나오자, 구경하던 무리에서는 낮은 웃음소 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남의 풍설을 퍼트리기 즐기는 몇몇 사람들은 군중에 숨어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주변에 충분히 들릴 정도의 소리로 쑥덕거리기도 했 다. "나날이 아름다워지시는 걸로 봐서, 어쩌면 몽바종 후작 부인께 정부라도 있는지 몰라." "후훗, <은밀한 애정 행각>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던가 봐요." "그렇다면, 소문을 내면서 자신도 내심 찔렸겠네." "하긴, 후작 부인 정도의 재력과 재담으로 어떤 정부인들 못 두겠어요? 돈을 탐 하는 남자들이라면 다 덤볐을는지도 모르겠군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몽바종 부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은밀한 애정 행각>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그녀 는 방심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관객들이 레비앙을 질투 혹은 동경하는 마음에서 소문을 내는데 동참했다고는 하나,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생기면 언제라도 등을 돌릴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저들이 다른 생각들 을 하기 전에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레비앙 님. 어쨌든, 저의 파티에서 그런 난동을 부리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 니다. 이 파티의 안주인으로서 말씀드리건데, 당장 아까 당신이 모욕한 부인들께 과를 하세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도 불구하고 레비앙은 전혀 그녀의 말대로 따를 기미를 보이 지 않았다. 그는 초록빛 눈동자에 오히려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몽바종 후작 부인 을 똑바로 응시했다. "부인의 진심이 바로 그것입니까? 내가 부인들에게 사과를 하면 모든 일이 해결 된다? 그런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 거죠? 내 명예를 먼저 모욕한 것은 바로 당신들인데. 오히려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요? 이거야 원, 주 객이 전도되지 않았습니까? 뒤에서 하는 모욕은 모욕이 아니고, 면전에서 노골적 으로 이야기해야만 모욕이 되는 겁니까? 나는 당연하게도 나의 명예를 모독한 사 람에게 복수를 한 겁니다. 그런데, 나에게 사과를 하라구요? …… 후훗, 나의 자 존심을 잘 모르고 있었다면…… 몽바종 후작 부인, 분명히 기억해 두시길. 당신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겁니다." 그는 빙글 웃으면서 루비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잡이의 커다란 루비 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의 눈에는 아름다운 입술이 담아내던 싸늘한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선명한 초록색의 눈동자가 담아내는 미소는 오히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좀 전에 그가 나직하게 으름장을 놓았던 탓에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관중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들어 몽바종 부 인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어느새 미소가 사그라든 그의 눈은 오싹한 기운을 풍 겨내고 있었다. 입술 끝에는 아직 위태롭게 미소 한 조각이 매달려 있었으나, 그 것은 보기에도 싸늘한 냉소였다. 또각. 레비앙은 만지작거리던 지팡이를 내려 맑은 소리가 울리도록 가볍게 땅을 짚고 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몽바종 부인. 내가 당신의 속내를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나 를 자신의 자존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생각이었나 본데, 상대를 잘 못 골랐습니다. 이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라는 도구는 오히려 당신의 자존심 을 산산히 부셔 놓을 테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되받아 치는 몽바종 부인의 목소리는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당황한 마음이 그녀의 목소리를 새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면, 승기는 레비앙 쪽에 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구요? 이런…… 나는 당신이 영악할 만큼 똑똑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나 봅니다, 그려. 무슨 말인지 내 입으로 이야기 할까요? 당신이 오늘 이 파티에 나를 초대한 이유를 말입니다. 지금 이 곳에 서 있는 사람 들의 대부분은, 내가 이 파티에 참석할 거라는 것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겠죠. 나에게서 당신네들이 퍼트려대는 소문의 진상을 한 조각이라도 확인하기 위해서. 또한 저 어리고 순진한 아가씨들은 내가 춤을 신청해 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 를 품고 왔는지도 모르죠. 당신은 저들이 그런 심리에 내 이름을 팔았던 거야. …… 그렇지 않습니까? 몽바종 후작 부인." 레비앙이 구경꾼들과 몽바종 후작 부인의 속마음을 한꺼번에 까발려 놓자 또다 시 홀 안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몽바종 부인은 이번 역시도 가슴이 철렁 했 는지 붉게 칠한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레비앙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당황한 마음을 감추었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조마조마해 하며 서 있던 아이린은 조금 안도했다. 아직 레 비앙의 계획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몽바종 부인과의 대결에서 이긴다면 그 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몽바종 부인 역시,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느꼈는지 또 다른 작전에 돌입했다. "무례하시군요.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낸 내가 잘못이었어요. 당신이 나의 손님들 을 더 모욕하기 전에 나는 안주인으로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겠군요. 지금 당 장 여기서 나가 주세요." 그녀는 되도록 차분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격해진 음성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여전히 비웃음 띈 눈길을 보내고 있던 레비앙은 "하!" 하고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길 수 없으니 내쫓겠다는 건가요? 당연히 이길 수 없겠죠. 당신이 어떻게 나 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의 약점을 꿰고 있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당신처럼 무례한 사람이 잠시라도 내 집에 있 다는 건 참으로 불쾌하니까 얼른 나가주세요.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을 부르겠어 요. 당신의 그 고귀하신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자진해서 나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나, 레비앙은 몽바종 후작 부인이 바라는 대로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질데로 일그러 지는 걸 감상하고 있었다. "당신이……." 낮은 목소리로 운을 띄운 레비앙은 피식 웃음을 머금은 후 은은하게 빛을 발하 는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째서 나를 적대시하고 있는지 알아. 그래서 나는 당신의 머리 꼭대기 에 올라 앉을 수 있지. 구경이나 하고 있는 저들은 당신의 앞에서 섣불리 입에 담 지 못했겠지만…… 나는 당신의 귀에 대고 똑바로 말해주지. 나에 대한 은근한 반 감의 이유 - 그건 바로, 당신의 아들이 극심하게도 무능하여, 지금의 내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무관하다 할 수 없겠지?" 몹시도 낮은 레비앙의 목소리를 따라 고요함에 잠겨 있던 구경꾼들은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금 웅성거렸다. 레비앙의 말 그대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몽바종 부인의 앞에서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던 그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풀려 나오 자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구경꾼들은 옆에선 사람과 함께 한 마 디씩 수근댔다. 그 중에는 아주 통쾌해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듯이 거만하게 구는 몽바종 후작 부인을 은근히 아니꼽게 생각 하는 이들이었다. 레비앙은 분위기를 타 한층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당신 아들이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로군. 만일 이 곳에 있었더라면 나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보다, 자신을 무능하게 낳아준 당신을 원망했을 테니까. 물론 결 투를 신청한다 하더라도, 나를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왕태자 전하의 시종으로 당 당히 뽑힐 만큼, 어떤 면에서도 뒤지지 않으니 말야." 이제 몽바종 부인은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모욕당한 자신의 일로 화 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신경이 가득 곤두선 서슬에 부들거리는 손으로 치마 자락을 꽈악 말아 쥐었다. 이대로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는 듯, 그녀는 예의바르던 태도는 간데 없이 입술 을 비틀어 깨물며 레비앙을 노려보았다. 몽바종 부인의 매서운 시선을 그대로 맞고 서 있는 레비앙은 그녀의 그런 반응 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린은 좋지 않은 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레비앙의 목적이 몽바종 후작 부인과의 말다툼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후작 부인을 도발 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 레비앙의 태도는 충분히 그래 보였다. 그는 몽바종 후작 부인의 예민한 부 분을 건드려 그녀가 이성을 잃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후작 부인은 흉한 모습까지 마다 않고 레비앙에게 덤벼들는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대체 무슨 일을 계획 중인 거야?' 아이린은 자신의 추측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 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레비앙이 최종적으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일어날 일이란 말인가? 지금 몽바종 부인과의 이 싸움 역시, 아까 부인들에게 모욕을 주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후의 일을 위한 반석에 불과하다면…… 만일 그렇다면, 이 다음에 벌어질 일은 또 얼마만큼 끔찍한 것일 까? 그녀는 애타는 마음에 바싹 메말라버린 입술을 가볍게 물고는 레비앙을 주시했 다. 그녀가 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은 단정해 보일 만큼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그 에게서 샤베트 같이 차갑고도 옅은 미소가 번진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린은 몽바종 부인이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따위 말로 나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새파랗게 어린 네 녀석에게 당하고 있을 만큼 나는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니야!" 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몽바종 후작 부인의 호통에 놀란 것은 구경꾼들 뿐 이었다. 정작 그녀가 꺾으려 했던 레비앙은 오히려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그 녀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술에는 느긋한 웃음까지 서 려 있었다. 그가 아무런 동요 없는 모습을 보이자 몽바종 부인은 양미간을 가득 주름잡으며 표독스레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무능해서 왕태자 전하의 시종이 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는 네 녀석은 어디 그 자리가 가당키나 한가? 남자이면서 대공 전하의 애인 노릇이나 하 는 주제에……. 어리고 고결하신 왕태자 전하께 너는 불손하기 그지없어! 어디 변 명이나 해 보시지. 이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는 이 곳에서 말야." 급기야 몽바종 부인의 입에서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비장의 마지막 카 드를 제시한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높이며 레비앙을 노려보았다. 구경하던 사람들 역시 레비앙의 반응을 궁금해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비앙이 버럭 화를 내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레비앙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의젓하게 버티고 선 채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당신의 입에서 기대하던 말이 나오는군. 언제 그 말이 나오나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거든." 소문에 대해 몽바종 부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내심 고대하고 있었다는 듯 한 레비앙의 반응에 사람들은 의아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몽바종 부인 역시, 무언가 잘못 되어 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지 의혹이 담긴 당황한 표정을 감추 지 못했다. 구경꾼들이 원을 그리며 둘러싼 가운데 몽바종 부인과 팽팽히 대치하고 있던 레 비앙은 문득 들고 있던 루비 지팡이를 바닥으로 던졌다. 지팡이가 "딸그락."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을 때, 레비앙은 자신의 크라바트를 당 겨 풀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하늘거리는 하얀 레이스가 곧 홀의 바닥으로 소리 없 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레비앙은 힘을 주어 조끼와 셔츠를 동시에 잡고 옷깃을 확 열어 젖혔다. 그의 옷에 고급스럽게 매달려 있던 단추가 순식간에 튕겨 나가고 레비앙의 당당한 목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몽바종 후작 부인. 당신의 그 멍청한 두 눈으로 확인하시길. 대공 전하가 사랑 하는 이 사람이 과연 그런 모욕을 받아 마땅한지를……. 당신네들이 뒤에서 수근 거리는 그대로, 내가 티아란 대공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기는 해. 하지만, 그게 어때서?" 레비앙은 옷자락을 잡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꼬리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이 자리에서 공포하건데 당신들 눈으로 확인 하고 있는 그대로 여자야. 대공 전하께서 나를 총애하시는 일이 당신들의 천박한 입방아에 놓일 만큼 이상할 일인가? 그렇다면 당신네들이 하는 사랑 역시 모두 비 정상적이야. 어디 더 찧고 까불려면 떠들어 봐. 내 명예는 어찌되어도 상관없지만 더 이상 그 분을 모멸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레비앙의 단호한 말이 멈추자 홀 안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숨쉬는 것 마저 잊어버린 듯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건 아이린이나 레비앙 의 바로 맞은 편에 서 있던 몽바종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 는 이가 없었다. 숨소리조차 없는 공간은 짧은 정적을 지나치게 긴 시간으로 느껴 지게 했다.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되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몽바종 후작 부인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멍하게 서 있다가 급기야 자신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정신적인 타격이 너무 커서인지 다리가 풀려버린 그 녀는 주변에서 부축해 주는 사람도 없이 볼품없는 모습으로 고꾸라졌다. "마, 말도 안돼." 좀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세등등 하던 그녀의 입에서 귀신에 홀린 듯 한 말이 새어 나오자 그제서야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하나 둘 나직한 수근거림이 번지기 시 작해 곧 커다란 술렁임이 홀 안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레비앙의 예상외의 행동으로 인해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아이린은 귓전이 떠 들썩해질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악몽에서 갑작스레 깨어난 듯 퍼뜩 정신을 차 린 그녀는 얼른 눈을 들어 레비앙을 살폈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떨구었다. 그러고는 답답할 만큼 이나 느리게 고개를 들어 아이린이 서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그 곳 에 서 있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아이린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지쳐 보였으나, 그는 여전히 의젓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이린은 목이 메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꽈악 악물고는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 들을 해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말 없이 그의 손을 붙들고 무작정 뒤 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레비앙을 잡지 않은 손으로는 앞 길에 걸리적거리는 사 람들을 마구 밀치며 그녀는 정신없이 걸음을 떼어 놓았다. 지금 그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그를 얼른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가야 하는 것 이었다. 이대로 그를 관객 앞의 구경거리가 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토록 짙은 능멸을 참아낸 그는 지금 아무런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여 기서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 만이, 그녀가 레비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도 도와주려고 애썼으나, 결국은 이것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린은 지금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수근거리는 소리마저 다른 세계에서 들러오는 것처럼 둔하고 멀기만 하다. 그녀는 아뜩해지는 현기증 속에서 비로소 울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레비앙을 그 끔찍한 장소에서 도망시켜 마차에 태운 아이린은 마부에게 곧장 로 자리움으로 향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입을 연 것은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한 동안 그저 앉아 있기에도 지친 듯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이린은 마차 가 몽바종 부인의 저택을 벗어나자 안도와 회한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는 자신의 한숨 소리에조차 아무런 반응이 없는 레비앙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창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특 별히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까, 몽바종 저택의 홀 안에서 그렇게 도도하 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모습은 조금 초췌해 보이 기까지 했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의 옷자락을 여며주었다. 단추로 여 미기에는 남아 있는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옷과 모자를 장식하고 있 던 브로치를 떼어 내어 정성스러운 손길로 레비앙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레비앙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움직일 기 력조차 남아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이린은 너무나도 우울한 기분에 숨이 가득 쌓이는 것 같았다. 한숨이라도 내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마치 목에 딱 걸리기라도 한 듯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다. 그녀는 우울함을 떨치려고 애써 손을 더 바삐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손 끝에 문득 레비앙의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의 한숨을 손으로 느끼고서야 비로소 아이린은 코끝이 시큰해져 오는 느낌이 들어 숨을 삼켰다. 그러나 젖은 슬픔은 이미 목구멍까지 차 있었다. 삼켜도 삼켜도 넘기지 못할 뜨거운 기운이 목으로 울컥 넘어올 것만 같았 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득 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였다. 하지만 벌써 고이기 시작한 눈물은 그녀의 연록색 눈동자에 그렁그렁하게 차 올랐다. 투둑. 맑은 눈물은 그녀가 일부러 눈을 크게 떴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옷자락으로 곤 두박질 쳐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레비앙이 눈길을 옮겨 그녀를 응시했다. "왜…… 우는 건가요? 힘든 대결 끝에 지친 듯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아이린은 그 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으나, 그러는 바람에 눈물은 더욱 많이 굴러 떨어졌 다. 겉잡을 수 없이 되어버린 눈물을 어찌하지 못한 채 아이린은 레비앙의 옷을 다독이던 손을 거두어 손 끝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이대로 자신을 내버려두면 소리내어 울 것만 같아서였다. "왜 울어요? 아이린 양." 레비앙이 안타까운 듯 다시 물었다. 아이린은 숨을 삼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억누르고는 양쪽 손등으로 뺨을 적시는 눈물을 번갈아 닦아 냈다. 그러고 는 불규칙한 호흡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무 한심해요." "무엇이…… 말이죠? "내 자신이, 그리고 당신이……." 짤막짤막한데다가 그나마 알아듣기 힘든 그녀의 울음 섞인 말을 유심히 들어주 며 레비앙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 참 한심하죠?" 그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웃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그 역시 자연스레 웃음 이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눈물 사이로 그를 바라보며 아이린은 울음을 애써 참느라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아주 작은 귀띔이라도 미리 해 주었으면 좋았잖아요. 왜 그랬어요?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 미안합니다. 아이린 양.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미리 야이기 했더 라면 누구라도 말리기부터 했을 테니까요." 차분한 그의 말을 아이린은 거세게 되받아 쳤다. "이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만큼 작은 일인가요? 당신이 지금 한 행동은 귀족 들을 발칵 뒤집어지게 할 수도 있다구요. 그런 책임을 알기나 해요? 저 몽바종 부 인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요? 오늘은 비록 폐배했지만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 을 거예요. 자신이 모욕당한 만큼, 아니, 오히려 그 보다도 더 당신에게 해코지를 하려 들지도 모른다구요." 그녀는 울음 섞인 숨결로 딸꾹질을 하듯 잠시 말을 쉬었다. 하지만 숨이 끊어지 는 한이 있더라도 할 이야기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그녀의 입술은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당신이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란 말이예요? 대체 무엇 을 위해서요!" 그녀의 다그침 끝에 레비앙은 가는 미소를 흘렸다. "말했잖아요. 엘스헤른을 위해서라고." "그런 따위의 변명은 달갑지 않아요!" 아이린은 매몰차게 응수했다. 레비앙이 무슨 심정으로 혼자서 그 일을 감행했는 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오로지 엘스헤른만을 위 해 어떤 무서운 책임이 따를는지도 모르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오로지, 엘스헤른 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하지만, 아이린은 울컥 넘쳐날 만큼이나 화가 났다. 레비앙이 스스로를 조금도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는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고집스럽게도 함부로 자신을 내 던지는 건 당신이 할 행동이 아니었어 요. 당신은 나에게 비밀로 했듯이 오라버니에게 역시 당신이 오늘 하려는 일을 숨 겼겠죠. 오늘 당신의 열렬한 희생으로 인해 명예를 건진 당사자인 오라버니는 당 신이 이러리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모르는 게 나아요."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거죠? 오라버니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과연 상상이나 해 봤어요? 당신은 오늘 일로 오 라버니의 명예를 되찾아 주었지만 분명 이건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게 될 거 예요. 그만 했으면 되었잖아요! 그만큼 오라버니의 마음을 괴롭혔으면 이제는 이 해해 줄 수 있지 않나요? 줄곧 그를 외면하다가 이제 와서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 로 자신을 내던지다니…… 오라버니가 과연 진정으로 달가워할 것 같아요?" 그녀의 질책을 잠자코 듣고 있던 레비앙은 천천히 눈길을 떨구었다. 그의 입술 은 아직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다지 동 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가 다시금 눈을 들었을 때는 아이린과 마찬가지로 눈동자의 선명한 초록색이 번져 보일 만큼 가득 눈물이 고여있었다. "아이린 양, 당신의 말이 옳아요." 그는 힘없이 시인했다. 그러고는 그다지 변명하는 것 같지는 않은, 담담한 어투 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말 그대로, 나는 엘스헤른에게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게 그를 얼마나 아프게 했을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난 가시 돋친 말과 행동으로 그를 괴 롭혔죠. 그래서…… 나에겐 그를 도울 수 있는 자격이 없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습니다. …… 하지만, 그를 위해 나 밖에 할 수 없는 방법을 깨달았을 때는, 앞 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답니다. 다른 길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죠. 그냥 눈을 감고 미친 듯이 달려나가면 그것으로 엘스헤른을 능멸하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또한, 내 자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기적이던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 일이 기회일는지도 모른다고 여겼어요. 나 자 신은 어째도 상관없다고……." 레비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린은 미간을 가득 찌푸린 채 그를 향해 쏘 아 붙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정말 잔인해요. 나에게는 도울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나요?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참으로 의심스럽군요. 레비안느로서 맹세한 우정은 레비앙의 모습일 때는 통하지 않기라도 한 건가요?" 진지하게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뜻을 레비앙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아이린의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이 아까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에겐 큰 용기가 되었어요." "그만 둬요! 당신의 그런 가당치 않은 일에 용기가 되었다는 말은 나를 더욱 우 습게 만드는 거예요. 나는 그런 따위의 도움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아이린 양. 우정으로도 도울 수 없는 일이 있죠. 그건…… 마음의 문제예요." 몹시도 차분한 레비앙의 음성은 잠시 둘의 대화를 끊었다. "마음의…… 문제라구요?" 한참만에 아이린은 복잡한 심정이 가득 드러나는 표정으로 되물었고, 레비앙은 그저 촉촉하게 젖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벨라시그네를 벗어나 숲으로 접어드는 건지 마차가 한 차례 덜컹거렸다. 레비앙 은 그것을 빌미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린의 시선이 종시 자신에게서 멀 어지지 않고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을 꺼낸 사람이 자신인 이 상, 해명을 해야 함은 누군가 다그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몹시도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엘스헤른을 알고 지낸 그 10년 동안…… 그는 간혹 엉뚱한 행동을 하곤 하는 약 간은 짓궂은 친구였죠. 은근한 장난이나 농담 걸기를 즐기는, 그다지 진지하지는 않은 친구……. 그런데, 지금에서야 새삼 돌이켜 보면 엉뚱하다고 여겼던 그의 행 동 하나 하나가, 아픈 감동으로 가슴을 채워요. 그저 무심히 보았던 그의 행동들 이 지녔던 의미가…… 이제서야 느껴지거든요. 그와 공유했던 모든 추억들이 그래 요. 예전엔 떨쳐버리고 싶을 만큼 귀찮았던 그것들이…… 새로운 색깔로 보이기 시작한 거죠. 눈을 시리게 할 만큼, 그렇게 눈물겨운 아름다운 색깔로……." 레비앙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한 손으로 입술을 지긋이 누른 채 한숨과 뒤섞여 내뱉는 그 헛기침은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목이 가득 잠겨서임을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린은 알 수 있었 다. 지금의 자신이 꼭 그래서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아이린은 새록새록 젖어오는 눈시울을 손가락 끝으로 훔쳤다. 곧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비앙은 말 할 여력을 되찾기 위해 가볍게 소리내어 웃 었다. 보조개가 패이도록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웃는 그의 모습은 도리어 지독 하게 서글퍼 보였다. "예전에 나는 그를 그저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장난스러운 죽마고우 정도로 바라 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그저 나 하나만을 위한 모습이었다는 걸 알 게 되었죠. 그저 나를 위해서만 실없이 웃고 장난기 넘치는 눈을 반짝이고 따스한 넓은 품을 빌려주고…… 엘스헤른은 그런 녀석이었어요. 그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 게 생각했는지 그때는 차마 몰라서, 그의 그런 행동들을 귀찮게만 여겼었는데, 막 상 그게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어찌나 당황하고 화 가 나던지 그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죠. <너는 나에게 가식의 모습만을 보여주었 어!> 라고…….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막상 자신의 고통은 철저히 숨기고 나를 향해서는 여전히 웃고 서 있는 그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복잡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를 향한 미안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출할 수 없었나봐요. …… 엘스헤른에게 나는 언제나 그랬어요. 진심을 똑바로 표현한 적은 손에 꼽을 만큼 거의 없었답니다. 항상 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않았던 게 나였죠. 늘 화를 내고 짜증스러워 하고, 귀찮아했던 것이, 지금 떠오르는 - 엘스헤른을 대하던 내 모습이군요. 나는 그에게 어쩌면 그리도 쌀쌀맞게 대했을까요? 지금에서야 그런 내 행동들이 후회되는 이유를 이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는데, 나는 애써 외면했 어요. 그가 소중하게 인식되는 만큼, 예전의 그를 잃을까봐 두려웠거든요. 과거에 집착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이기적이어서…… 엘스헤른의 마음은 깨끗이 무시해 버린 거예요." 레비앙은 다시금 웃었다. 웃는 것으로 숨을 돌린 그는 끝을 모르고 가라앉는 마 음처럼 묵직하기만 한 자신의 말투를 띄워보려고 짐짓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하지만 어쩌면 좋죠? 차츰 많은 생각에 가슴이 아프곤 해요. 무시해버린 만큼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어느샌가 나는 그와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을 떠올 리고 있죠. 그럴 때면 어째서 눈물이 나는 걸까요? 아무렇지 않다가도 문득 그를 떠올리면 왜 그리도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걸까요?" 기나긴 이야기 끝에 레비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심중을 풀어 놓는 일 이 아이린의 앞이 아니라면 힘들었을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아이린이 헤아려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를 확인하기 전에, 그는 긴 호흡으로 달려온 이야기를 매듭 지어야 했다. 입술을 떠난 한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 그와 아이린 사이에 는 청명하리만큼 깨끗한 고요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순수한 적막을 깨뜨리며 레비앙은 평온함을 가장한 열정을 담아 말을 이었 다. "그를 대하는 것이 두려웠던 이유는, 그래서 내내 도망치기만 했던 이유는…… 머리로 인식하기 전에 이미…… 가슴은 내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이상, 내가 그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의 이야기는 조용히 끝이 났다. 아이린은 젖은 눈을 들어 레비앙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짧은 말이 갖는 많은 의미를 그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레비앙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저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 마차 안은 곧 침묵으로 잦아들 것 같았다. 레비앙이 아이린과 시선을 마주하다 가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 후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예요. 나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그의 발목을 붙드 는 족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엘스헤른은, 나에게 얽매여서는 될 사람이 아니니 까……." 레비앙의 말끝이 가늘게 흐려졌다. 점점 잠겨들던 목소리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 었다. 대신 창을 향한 그의 뺨 위로 맑은 눈물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 TO BE CONTINUED - 〓〓〓〓〓〓〓〓〓〓〓〓〓〓〓〓〓〓〓〓〓〓〓〓〓〓〓〓〓〓〓〓〓〓〓〓 생각을 해 보니, 여지껏 연재 할 때는 대사 칸을 쓸 때 엔터로 하나 띄워놓 고 썼었는데 말이죠. 읽으시기가 다소 불편하실 것 같네요. 지금 건 출판본으 로 만든 거라 다닥다닥 붙어 있거든요. 배려해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느라고 너무 수고하셨어요.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 쿨럭.;) 『SF & FANTASY (go SF)』 39815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097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08/26 03:45 읽음: 99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40/40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8월 24일 14:13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7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7) 레비앙을 로자리움에 데려다 준 아이린은 곧장 벨라시그네 왕성으로 향했다. 이 미 한창 밤이 깊었으나 마부는 왕성으로 가자는 그녀의 부탁을 군말 없이 받아들 였고, 그녀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력으로 마차를 몰았다. 왕성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린은 눈을 감고 격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덕분에 마 차가 왕성의 가장 크고 웅장한 건축물 앞에 정지했을 즈음에는 수면과도 같이 잔 잔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부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러고는 우직해 보이는 마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동 안, 마부는 마부석에 올라앉아, 마차를 적당한 곳에 주차시켰다. 아이린은 자신이 저 왕궁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올 때까지 그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곧 치마 자락을 가볍게 들고 왕궁의 계단을 올랐다. 국왕 폐하와 왕실 가족이 기거하는 아름다운 건물의 입구에서 그녀는 시종장으 로 부터의 간단한 신분 확인을 받고서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시종장은 그녀 에게 어린 시종을 붙여주어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얀 제복을 입고 단정한 흰 가발을 쓴 어린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아이린은 잰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왕궁의 복도를 따라 금색 수가 놓인 붉은 카펫이 길게 이 어져 있었다. 카펫을 밟는 보드랍고 폭신한 느낌은, 온종일 긴장해 있느라 피곤해 진 그녀의 발목을 기분 좋게 위로해 주고 있었다. 어느새 시종이 들고 있던 초의 불빛이 커다란 고동색 문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 었다. 시종은 커다란 눈을 말똥거리며 여기가 그녀의 목적지임을 알려주었다. "다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어린 기가 남아 있는 소년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잠시 기다릴 것을 당부하 고는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방 안에다 고했다. "티아란 대공 전하, 윈저 양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방 안에서는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시종은 익숙한 손길로 문 을 열어 그녀가 방 안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문을 닫고 조용히 물러나 문 밖에서 대기했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방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아이린은 선 자리에서 살 짝 목례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엘스헤른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반가운 눈길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인 것 같구나, 아이린." 그는 몸을 일으켜 서류더미가 가득한 책상에서 빠져 나와서는 그녀를 향해 팔 을 벌렸다. 아이린은 한 달음에 그에게 다가가 그를 포옹하고 뺨에 입을 맞추었 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오라버니. 근신 중이시니 자주 볼 수 없네요. 외숙모님께서 도 오라버니의 근황을 무척 궁금해하세요. 아, 외숙모님께선 근자에 한 번 들르지 않으셨던가요?" "어머니께서야 한 번 다녀가긴 하셨지. 왕국 아카데미에 루엘 형님을 만나러 가 셨다가, 그곳에서 쌓인 울분을 나에게 다 갚아 놓고 가셨어. 형님이 절대로 장가 가지 않겠다고 했었나봐." "루엘 오라버니는 무척 눈이 높으셔서 그런 거라구요. 모든 여성에게 친절하기는 해도 아직 딱히 마음에 드는 분을 만나지 못한 거죠." "이런, 이런. 네가 형님의 대변인이 다 되었구나?" "오라버니야 말로, 점점 루엘 오라버닐 닮아가는 거 같네요. 후줄근하게 그냥 셔 츠에 바지 차림이라니, 너무해요. 그렇게 깔끔하시던 분이……." 여상스러운 인사말이 오간 다음에야 엘스헤른은 여지껏 그녀를 세워둔 자신을 가볍게 책망하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리로 와서 좀 앉으렴. 그나저나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네가 여기를 다 오 고……. 아가씨가 혼자서 외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지 않아?" "아, 파티에 다녀오는 길이예요." "오오! 그래서 아이린 양께선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이었나 보 군. 그런데, 혼자서 다녀온 거야?" "그럼요. 오라버니가 없어도 요즘은 혼자서 잘 다닌다구요." 엘스헤른의 말에 대꾸해 능청을 떨어대면서도 아이린은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 았다. 두렵고도 답답한 심정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었으나, 막상 엘스헤른의 앞 에 서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그녀는 아직까지 망설여지고 있었다. 엘스헤른 은 오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고,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는 것보다는 지금 그녀가 차분한 심정으로 말해주는 게 충격이 덜할 거라는 결심에서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그녀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엘스헤른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평소와 별로 다 를 바 없이 담담했다. 별 의미도 없는 일상과 관련된 대화가 오가고 있는 가운데 아이린은 전혀 충격에 대비하고 있지 않은 그에게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고 민스러웠다. "참, 레비앙은 요즘 어떻게 지내?" 레비앙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은 의외로 엘스헤른이었다. 아이린은 뜻밖 의 질문을 받고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갑작스 레 그가 그렇게 묻는 것이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라버니도 참, 레비앙 님의 안부를 어째서 저에게 물어요?" 아이린이 짐짓 웃으면서 되받아치자 엘스헤른은 수더분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너는 레비앙이랑 친하게 지내잖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 분과 친하기로 따지자면 저보다야 단연 오라버니죠. 그런데다가 레비앙 님은 매일 왕궁에 오시잖아요. 매일 마주치는 사이면서 저에게 굳이 안부를 묻는 저의 가 뭐예요?" 마음 속으로 짚이는 게 있기는 했으나, 아이린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때고 농담 삼아 물었다. "그냥, 요즘도 네가 레비앙과 친하게 지내나 해서……."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힘없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다지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낼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는 않았던 일이었으나, 아이린 은 어쩐지 맥이 풀렸다.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해지면 좀 좋아?'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아이 린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그녀의 재미있는 표정에 피식 소리내 어 웃으면서 "왜 그러는 거야? 아이린. 너 그 표정 정말 재미있어." 라며 그녀를 은근히 놀렸다. 아이린은 그가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돌아서 버리기 전에 얼른 진지한 안색으로 표정을 무마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엘스헤른의 손을 꼬옥 잡고는 짐 짓 근엄한 눈빛을 지었다. "오라버니." 그녀가 갑자기 무섭게 굴자 엘스헤른은 이것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댔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웃지 마세요. 저 지금 무지 진지하니까 말예요." "음. 그래. 그런데 꼭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같이 구는구나?" 엘스헤른은 웃음을 참으려고 애써 헛기침을 했다.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을 거두 고 온화한 경청자의 자세를 갖추자, 아이린은 그의 눈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사실을 말해 주셔야 해요." "음? 무슨 사실?" "레비앙 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예요."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엘스헤른은 그저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잔잔한 잿빛의 눈동자로 그녀의 내면을 꿰뚫어 볼 듯 그렇게 바 라보았다. 아이린은 그의 시선을 대하며 오히려 자신이 흔들려 버릴 것만 같아서 꼼짝 않고 그의 눈길을 받아냈다. "레비앙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그걸 묻고 있는 거니?" 한참만에 입을 연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아이린은 그의 목소리 처럼 냉랭하게 식을 것 같은 마음을 다독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짐작인 거야?" 엘스헤른은 다시금 물었고, 이번 역시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 는 것으로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그런 모습을 내 보였니?" 이번의 물음에는 여지껏과는 달리 조금 씁쓸한 기운이 묻어있음을 아이린은 느 낄 수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엘스헤른을 가만히 쳐다보았 다. "아이린은 오라버니를 떠 볼만큼 현명하지 못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하며 엘스헤른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따스하게 토닥거리는 그녀의 희고 고운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엘스헤른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아이린. 너는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을 짓고 있구나." "알지는 못해요. 그저 느낄 뿐이죠. 지금 오라버니가 어쩐지 마음이 아파 보인다 는 것을 말예요. 담담하게 말씀하시고는 있지만…… 지독하게 슬픈 느낌이 오라버 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묻어나요." "그랬던가?" 엘스헤른의 입가에 머금어 있던 미소는 어느새 쌉싸름한 자조로 변해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내 모습…… 몹시도 흉하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이린은 미간을 한가득 찌푸렸다. 마치 넋두리 같은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 아서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오라버니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까 그녀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만큼이나 어색했다. 그리고 아까 레비앙을 대할 때 처럼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너무나도 똑같이 자학에 빠진 두 사람의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이 도울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그녀는 더욱 슬펐다. "아이린." 엘스헤른은 조용히 눈을 들고 사촌 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린은 근심이 가 득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 표정을 보니까, 언젠가 내가 너에게 레비앙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털어놓았 던 때의 일이 떠올라. 그때도 너는 지금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 그리고 참 많이 울었어. 나의 일인데도 너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아파했어. 그래서 나 는…… 더 이상 너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었어. 어쩐지 너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말야." 그녀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는 이유를 엘스헤른은 그런 말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고이 물러날 아이린이 아니었다. 그녀는 투정이라도 부리는 심정으로 엘스헤른에게 매달렸다. "말해 주지 않는다면 아이린은 더 괴로워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오라버니는 모를 거예요. 아이린은 버림받은 기 분이라구요. 레비앙 님은 조금도 내 친구 같지 않고, 오라버닌 조금도 나의 오라 버니 같지 않아요. 아이린은 그저 귀 막고 눈 감은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고 얌전히 인형처럼 있고 싶지는 않다구요. 왜냐면 오라버니도 레비앙 님도, 아이린 에겐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그녀를 보며 엘스헤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에는 짙은 남색의 어둠이 빼곡히 내려 있었다. 왕궁의 대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이 멀리에서 희뿌옇게 빛무리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나 밖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간간이 근위병들이 타고 지나가는 말의 발자국 소리가 또각또각 들리기 는 해도, 그 소리가 곧 아련히 멀어지고 나면 숨막힐 정도로 농도 짙은 정적이 찾 아들었다.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무심히 내다보고 있던 창에서 시선을 거둔 그는 다 시금 아이린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엘스헤른은 그녀의 고집에 체념을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 자 가슴 속은 오그라들 듯이 고통스러웠다. 어렴풋하게 조차도 떠올리기 싫은 그 날의 일이, 그리고 레비앙의 싸늘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듯이 선명했다. 그는 망설이고 있던 입술을 가만히 떼어놓았다. "레비앙이……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고 했어." 말을 하고 나니, 매섭게 가슴이 시려온다. 아이린에게 말하기 싫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고 나면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던 것이다. 입술에 말을 담는 순간, 레비앙에게 서 들었던 그 말이 생생한 아픔이 되어 가슴을 에어 낸다. 그는 고통을 감추려고 애써 웃었다. 하지만 애쓴 만큼 입술이 움직여 주지 않았 다. 그저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탈진할 듯이 힘들었다. "설마……." 아이린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여왔다. 엘스헤른은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그 말…… 예전에도 여러 번 들었었지만, 이번에는 느 낌이 달랐어. 그는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래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를 듯이 꽂혀 들었거든. 의 심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말야." 엘스헤른의 말을 들으며, 아이린은 아까 레비앙이 했던 말이 떠올라 살짝 눈살 을 찌푸렸다. - 이것으로 끝이예요. 나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그의 발목을 붙드는 족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엘스헤른은, 나에게 얽매여서는 될 사람이 아니니까……. 그가 말했던 "끝"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아이린은 두려운 기분이 들 었다. 레비앙은 이미 오라버니에게 그 <끝>을 선언해 두고 혼자서 모든 책임을 감 당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조차도 오라버니를 그 일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하 는 그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레비앙은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지게 될 모든 책임도 모두 염두에 두었 다는 것인가? 그 어떤 일이 닥쳐온다 해도 책임은 자신이 질 수 있도록. 그는 처 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싸우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 아직 시련이 끝나지 않았 다는 말이 되지 않은가! 그토록 지쳐 보이던 레비앙이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이번 일의 <책임>을 짊어지는 일은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다. 무섭고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아이린은 엘스헤른의 손을 놓고는 대신 무릎 위에서 자신의 치마 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 그렇지 않을 거예요. 오라버니. 찾아가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한다면 그도 그렇게 매몰차게는 굴지 않을 거라구요." 그녀는 레비앙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선 엘스헤른의 마음부터 돌리기로 했다. 레비앙이 선언한 <끝>이라는 말로 인해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그를 무슨 수 를 내서라도 레비앙의 곁에 있도록 유도해 내야 했다. 왕궁에 있을 때 한 번 찾아가 볼 것을 제안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엘스헤른 은 그것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만나서 이야기 해 볼 생각을 내가 왜 하지 않았겠니? 그저 찾아가서 얼굴을 보 며 대화를 한다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기대까지 했었는데 말야. 그런데, 아이린. 몇 번이고, 레비앙이 있는 왕태자 전하의 방에 찾아갔었지만 나 는 그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묻고 싶었는데 …… 내가 무얼 잘 못 했느냐고 묻고 싶은데…… 막상 거기까지 가 놓고서도 문 앞에 서서 그의 목소리만 듣고는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떠났는데, 내가 불쑥 나타나면 그가 당황할 것 같아 서……. 곤란해하며 나를 못 본 채 피할 것만 같아서 그냥……목소리만 듣고는 걸 음을 돌렸지. 한 번 더 그가 나를 피하는 모습을 본다면 나는 못 견딜 것만 같아 서 말야." 엘스헤른은 힘없이 웃었다. 그는 지친 사자처럼 등을 구부린 채 테이블에 기대 어 있었다. 아이린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활달하고 영민하기 그지없던 그가 이렇게 초췌 하게 일과 마음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보여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애 가 탔다. 지금의 엘스헤른을 보고 있으니, 아까 파티에서의 일은 말을 꺼내는 것 조차 두려웠다. 그가 그 소식을 접하고는 여기서 더 얼마나 무너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도무지 그에게 그 일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라버니." 아이린은 바싹 타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는 비장한 눈빛으로 엘스헤른을 응 시했다. 엘스헤른 역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 을 만큼 가라앉아 보였다. 그녀는 흐려지는 결심을 붙들며, 엘스헤른이 부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레비앙 님을 도와주셔야 해요." "……."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이라도 하듯 떨리고 있었다. 좀 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 야기하고 싶었으나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 그녀는 잠시 엘스헤른을 바라보며 그 를 살피는 것으로 감정을 마무리하려 했다. 엘스헤른은 그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깔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린에게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묻지도 않았을 뿐더러, 짧은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 다. 하지만 아이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의기소침해 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한참 만에 엘스헤른이 한 말은 그런 그녀의 추측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그를 도울 일이 뭐가 있겠니? 레비앙을 도우는 일이라면…… 아이린, 너는 잘 못 찾아온 거야. 나보다는 에르띠낭 경이 훨씬 더 나을 텐데. 애당초 레비앙이 택했던 사람도 리하르트잖아. 게다가 그는 아직도 레비앙을 사랑하니까……." 차분함을 가장한 그 우울한 말에 아이린은 울화가 치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 아귀에 한가득 들어오는 드레스자락이 구겨져라 말아 쥐며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 였다. "그런 이야긴 그만 둬요! 그러면, 오라버니는 이제 더 이상 레비앙 님을 사랑하 지 않는단 말인가요? 그 한 마디 때문에 오라버니의 마음도 그분에게서 멀어진 거 냐구요! 레비앙 님이 지금 누구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오라버니는 그걸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레비앙이…… 위험하다고?" 엘스헤른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해 가는 걸 느낄 사이도 없이 아이린은 좀 전에 몰아세우던 그 여세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너무나도 큰 위험에 처해서 저 혼자서는 도울 수도 없을 정도예요. 이 게 다 오라버니 때문인데, 오라버니는 그런 약한 소리만 하시다니…… 아이린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라구요. 오라버니가 이렇게 당치도 않은 우울증에 빠져 있 을 동안, 레비앙은 자신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저 위험한 사교계에 자신을 내던졌 어요. 오로지 오라버니의 명예를 위해서요!" 분한 마음을 말로 내뱉는 동안 아이린은 눈물이 마구 샘솟아 흘러내리는 것을 그냥 내버려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레비앙이 무모하게 저지른 그 일이 너 무나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일을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지는 동안 레비앙이 혼자서 얼마나 고민하고 두려워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무도 도와주 지 않는 길을 걸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오로지 엘스헤른을 위해 자 신의 실제를 밝힌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그런데다가 그 일로 인한 여파가 아 직 끝나지 않고 그의 앞에 고스란히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아이린은 그것이 자신의 일인 양, 어깨가 떨려올 만큼 무서웠다.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이럴진데 당사자야 오죽할까? 그녀는 연민과 걱정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펑펑 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하 려니 하염없이 눈물부터 났다. "무슨 말이야? 자세히 좀 말해 봐." 엘스헤른은 어느새 불안과 혼란이 그득한 눈으로 아이린을 훑었다. 그가 보기에 도 아이린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감정에 복받쳐 울고 있는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았다. 엘스헤른은 손수건도 없이 손 끝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그녀를 보다못해 얼른 일 어서서 서랍을 뒤져 손수건을 찾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인해 힘 조절에 실패 한 탓에 쑤욱 딸려 나온 서랍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아, 제기랄." 그는 바닥에 쏟아져버린 내용물들을 내려다보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엉뚱한 것 에 화를 내는 것은 레비앙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위험에 처할 때, 그저 궁상이나 떨고 앉아 있은 스스로가 너무나도 못마땅해서였다. 엘스헤른은 화나는 심정을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 것 으로 표출하고는 손수건을 찾아 아이린에게 대령했다. "그만 울고 이야기를 해. 대체, 레비앙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그는 스멀스멀 들떠 오르는 걱정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테이블 옆에 서서 아 이린을 다그쳤다. 그러나, 우느라고 격양된 마음을 쉽사리 삭히지 못하고 있는 아 이린에게서는 그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답답해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다독이지 못해 거친 발걸음으로 방안을 왔 다 갔다하며 그녀가 얼른 안정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곧, 내내 훌쩍거리던 아이린은 엘스헤른이 가져다 준 손수건으로 눈물 을 닦아 내고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려 안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우느라 마치 딸꾹질처럼 되어버린 숨결을 다독이려 심호흡을 하며 아이린은 은근히 엘스헤른을 살폈다. 카펫으로부터 먼지가 물씬 피어오를 정도로 난폭하게 방 안을 거니는 그의 모습 에서는 혼란과 불안이 격렬하게 피어오르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단지 레비앙이 위험에 처했다는 한 마디 만으로도 그는 당치도 않은 우울증에서 빠져 나와 펄펄 날뛸 듯이 굴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이 온전하 게 그 모습을 보전하기는 그를 것 같아 - 엘스헤른은 손에 잡히는 것은 때려부수 기라도 할 기세였다. - 아이린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진정하고 들어요, 오라버니. 그렇게 옆에서 돌아다니면 아이린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구요." 그녀가 겨우 말문을 열자 엘스헤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린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다만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허리를 굽 혀 그녀의 이야기를 충분히 경청할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고 섰다. 그러나 마음이 몹시 급했는지 그녀의 말보다 한 걸음 앞질러 묻기 시작했다. "얼른 말해봐. 레비앙은 도대체 무슨 위험에 빠진 거야? 지금은 어디에 있어? 다 치기라도 한 거야?" 아이린은 그가 정신없이 묻는 말에 조용히 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레비앙 님은 집에 있어요. 몸을 다치거나 한 건 아니예요. 하지만, 오히려 다친 것 보다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구요. 그가 아까 파티에서 저지른 일로 인해서요." "파티? 레비앙이 파티에 나갔단 말야?" "요즘 갑자기 사교계 출입을 하기 시작하셔서, 어쩐지 이상한 낌새에 제가 따라 가보곤 했죠. 하지만, 오라버니에게 알릴만한 여유는 없었어요. 이상하다고 생각 했을 때 이미, 레비앙 님은 사교계에서 일을 착착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일이라니?" 아이린은 젖은 속눈썹을 들어 궁금함에 애가 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는 엘스헤른을 바라보며 아직까지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숨결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 시 뜸을 들인 후, 그가 궁금해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라버니. 요즘 사교계에서 떠들어대는 소문에 대해 알고 계세요?" "…… 레비앙과 나 사이의 소문 말이더냐?" "그 소문…… 누구로부터 들으셨어요?" "소문이니 딱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다만…… 그런 소문이 퍼지더라는 말을 듣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비앙이 찾아왔었어. 그리고 그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더 군." 엘스헤른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그 말은 아이린으로서는 가슴이 폭삭 내려앉을 만큼의 실망이었다. 그의 말대로 라면 그때 레비앙의 그 무 모한 행동을 막을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린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분 해서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라버니! 대체 뭐하신 거예요? 레비앙 님이 그 문제를 상의하러 왔었는데도 오 라버니는 그가 혼자서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단 말이예요? 그가 분명히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며 뭔가 다른 말을 했을 텐데요. 하다못해 작은 단서 라도, 작은 의미 하나라도 흘렸을 텐데, 어째서 그냥 방치하신 거냐구요." "그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었어, 그때는. 그땐 그저 레비 앙이 던지듯 하고 떠난 그 말로 인해 넋이 나가 있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레비앙이 종시 매몰차게 나를 몰아세우는데, 나의 마음을 잔인하게 거 부하는데, 그가 과연 왜 그런 소문에 집착하는지를 생각해 볼 기회 같은 것이 있 기나 했겠어? 아아, 제길. 어째서 나는 내 감정에만 눈이 멀어 있었던 거지? 이기 적이게도 나는 레비앙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어. 알량한 내 넋두리를 하기 에 바빠서!" 엘스헤른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는 곁에서 보기에도 측은 할 만큼 가득 구겨진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이린은 그가 너무나도 가여웠으나 아무런 위로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막 그를 다독여 주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가 주먹으로 미친 듯이 테이블을 내려 쳤기 때문이었다. 테이블이 부서져버릴 듯한 큰 소리가 방 안을 그득 채웠다. 하 지만 엘스헤른은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지 그 손으로 아이린의 어깨를 붙들고 처절 하게 매달렸다. "아이린. 레비앙이 도대체 파티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대체 무얼 했기에 네가 그렇게 심각하게 구는 거야? 내 마음을 안다면 제발 더 이상 끌지 말고 이야기를 해 줘.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잖아! 레비앙을 그렇게 방치한 책임을 내 손으로 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엘스헤른이 너무 세게 잡고 있는 탓에 그녀는 어깨가 욱씬하게 아려왔다. "아파요, 오라버니." 그녀가 몸부림을 치며 불평을 하자, 엘스헤른은 그제서야 난폭하게 굴던 행동을 멈추었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아이린, 나를 애태울 생각이라면 제발 그만 둬. 그 만큼 애태운 것 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워. 이 가슴 속이 새까만 숯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다구. 그러니 이제 이야기를 해 줘. 레비앙이 뭘 한 거야?" 다소 차분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거친 목소리인 그의 물음에 답해 아이린은 깊 은 심호흡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레비앙 님은 요즘 내내 사교계에서 그 소문을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모욕하곤 했 어요. 그런데 그게 단순히 홧김에 그러는 게 아니라, 상당히 계획적이었어요. 그 다지 입이 가볍지 않은 지긋한 신사들을 제외하고는 아가씨들이나, 혹은 레비앙 님의 또래인 젊은 신사들이나, 수다쟁이 부인들에게 한 번씩은 면전에서 비방을 하곤 했나봐요. 제가 파티에 갔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그의 그런 행동에 대해 쑥 덕거리고 있었으니까요. 제 눈으로 본 것만 해도 그래요. 그는 자신의 소문을 퍼 뜨리는 이들에 대해 결코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집요하게 능멸했을 뿐이죠. 그리고는 아까,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서 그녀와 심하게 다투었어 요." "그 돈만 많은 요부는 나도 알아. 소문을 퍼트린 일도 그녀가 힘썼을 테지. 레비 앙에 대해선 몹시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여자잖아." "그래요, 후작 부인은……." "아아, 후작 부인이라고 부르지도 말아. 그 여자에게는 그 호칭은 과분해." 엘스헤른이 그녀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며 그녀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소리를 질러 대자, 아이린은 말하는 중간 흐름이 끊겨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눈 썹을 살짝 찌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고서야 엘스헤른은 그녀에게 사과를 했고 얼 른 이야기를 계속할 것을 종용했다. 아이린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몽바종 부인은 레비앙 님을 자신의 파티에 초대하는 것으로 많은 손님들을 끌어 들일 생각이었나봐요.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황 을 이루는 것은 주최자로서의 당연한 바람이니까요. 그녀는 은밀하고 사사로운 이 야기들을 즐기는 사교계의 심리를 이용한 거죠. 레비앙 님이 몽바종 부인의 파티 에 참석할 거라는 이야기는 아침녘부터 파다했어요." "빌어먹을 요부 같으니라고! 레비앙을 그런 더러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해 먹다니!" 끼어 들지 않기로 했던 엘스헤른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아이린은 그가 왜 평소보다 더 격렬한 감정을 내 보이는지, 어째서 그냥 차분하 게 듣지를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 다. 레비앙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방치해버린 자신에게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었 다. 아이린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자신이 위로한다고 해서 풀릴 마음이 아니 란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멈춘 김에 조금 더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몽바종 부인의 파티에서도 예외 없이 레비앙 님은 부인들을 모욕했었죠. 그런데 갑자기 몽바종 부인이 그 소동 끝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레비앙 님께 사과할 것을 요구했어요. 아마도,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레비앙 님의 자존심을 꺾을 의도 였나봐요." 아이린은 숨이라도 내쉬고 싶었으나 엘스헤른이 또다시 펄펄 날뛸 것만 같아서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레비앙 님과 몽바종 부인이 말다툼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말다툼이 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레비앙 님이 그녀를 비꼬는 분위기였는데, - 아무래도 몽 바종 부인은 사람들 앞에서 고고함을 유지하고 싶었을 거예요. - 레비앙 님이 그 녀의 속마음을 모두 밝혀 놓으셔서 몽바종 부인도 역시 언성을 높인 거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레비앙의 말발에 실컷 당했겠지."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싸움 끝에 몽바종 부인이 소문에 대해 들먹이면서 남자이면서 대공 전하의 애인 노릇을 하는 주제에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이라니 불 손하다는 식으로 말을 했어요." "쳇,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레비앙은 여자잖아!" "그래요, 오라버니. 그 순간 레비앙 님은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혀버리셨어요. 그것도 몹시도 과격하게 말예요." 아이린의 이야기에 맞추어 내내 떠들어대던 엘스헤른은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 고 넋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서버렸다. 그는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린을 응시했 다. "레비앙이…… 자신의 비밀을…… 밝혀 버렸다고?" 충격이 컸는지 그는 띄엄띄엄 되물었다. "나 때문에…… 그 녀석, 그런…… 그런 짓을……." 엘스헤른은 눈을 질끈 감더니 카펫 바닥위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도저히 가만 히 있지 못할 만큼 마음을 괴롭히던 자책감은 더욱 커져, 이제는 그를 무기력할 정도로 짓누르고 있었다. "레비앙이 어떻게 한 거야?" 그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절망감이 묻어 났다. 그것은 또한, 아무 것도 하지 못 한 자신에 대한 처절한 혐오감이었다. 아이린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지독한 상심에 빠져버린 그를 도저히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가슴 속을 차곡차곡 차오르는 울음을 목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레비앙 님은…… 갑자기 크라바트를 푸시더니…… 옷깃을 열어 젖히셨어요. 그 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몰랐기 때문에…… 저도 말릴 수가 없었어요. 이 손 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나중에 그 분을 그 혼잡한 곳에서 데리고 도망치는 것 밖에 없었다구요." 아이린은 울먹이다말고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격하지는 않았으나 흐 느낌 소리는 작게 이어지고 있었다. 엘스헤른에게서는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멍한 시선 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무릎 위의 주먹 쥐어진 손등에 동그란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연거푸 곤두박질치는 물방울은 달리 시선 두는 곳 없는 그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크흑……." 세게 이를 악문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며 올라오는 슬픔을 토해냈다. 자신 으로 인해, 레비앙이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은 뒤집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눈물을 떨구고 있다 말고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석상처럼 우뚝 일어 선 그는 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 되겠어! 레비앙에게 가봐야겠어." 그의 격한 목소리에 놀란 아이린 역시 의자에서 일어섰다. "안돼요, 오라버니. 근신 중이잖아요!" "근신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가봐야 해. 혼자 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엘스헤른은 의자 등받이에 벗어둔 외투만 낚아채고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 세였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다급한 김에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두고 엘스헤른은 언성을 높였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일은 또 뭐야? 여기서 상심에 절어 있는다고 달라지는 게 뭐냐구. 내가 당치도 않은 슬픔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이 며칠동 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네가 똑똑히 보았다며! …… 안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돼." "그냥 두지 않을 거라면 어쩔 거예요? 장차 그 분에게 닥칠 책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마냥 달려가면 무슨 수가 있겠어요?" "책임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어째서 그에게 책임을 지워야 하지? 몽바종인지 뭔지, 그 여자가 아무리 돈이 넘쳐난다고 해도 레비앙을 해코지하게 두지는 않겠 어. 아마 그런 시도조차 할 수 없을 테지. 내가 지금 당장 레비앙을 데리고 아무 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버릴 테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그러는 걸 레비앙 님이 달가워 하겠어요? 지금 찾아가서 도망가자고 한다면 레비앙 님이 기꺼이 따라 나서줄 것 같아요? 그 분은 오라버니 께 절교 선언까지 할 정도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구요. 지금 가 봤자 만나주지도 않을 거예요. 오라버니, 진정하고 좀 들어요." 아이린은 그가 들고 나가려 하는 외투를 낚아채 바닥에 던져 놓고는 재빨리 말 을 이었다. "무모한 행동은 절대로 안 돼요. 오라버니가 지금 국왕 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레 비앙 님을 찾아간다면 레비앙 님이 그렇게 자신의 자존심까지 던져가면서 해 낸 일은 뭐가 되는 거죠? 그 분의 마음을, 그렇게 어렵게 결심하고 한 행동을 모두 수포로 만들 생각이신가요?"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야! 무모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레비앙이지. 내가 가야 할 이유가 또 생겼군. 지금 가서 그 녀석을 혼내줘야 하겠어. 그런 짓 하는 걸 누 가 바라기나 했대? 왜 그렇게 자신을 함부로 하지? 내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으면서……." 엘스헤른은 한달음에 문간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그를 놓쳐버릴 뻔한 아이린 은 놀란 심정을 다독일 겨를도 없이 그의 뒤를 좇아, 그가 문을 열기 전에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러시면 안돼요. 오라버니, 부탁이예요. 제발 진정하세요."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어?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냐구! 지금 그 녀 석이 무슨 심정으로 방에서 울고 있을지 알 것 같은데. 얼마나 외롭고 무서울지 알고 있는데! 이것 놔, 아이린. 레비앙은 나에게 그 누구보다도, 내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둔다면 나는 숨쉬고 있을 자격도 없 어." 엘스헤른은 울부짖으면서 아이린의 팔을 풀어내려 했다. 아이린 역시 지지 않고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면서 그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오라버니, 지금 가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지금은 그를 닥쳐올 위험에서 구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한다구요. 오라버니 말대로 몽바종 부인이 무슨 해 코지를 할는지 모르잖아요. 그녀라면 당한 모욕을 그대로 참고 있지 않을뿐더러 레비앙 님이 여자라는 것을 빌미로 왕태자 전하의 시종자리에서 끌어내릴 음모를 꾸밀는지도 모른다구요! 지금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때지 이렇게 감정적으 로 굴어서는 안돼요. 도망치는 방법은 당치도 않아요! 도망쳐서 어쩌겠다는 거예 요? 도망을 치면 오라버니는 대역죄인이 된다구요. 에스트르의 전쟁의 책임을 회 피한 티아란의 대공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으세요? 레비앙 님이 그걸 바랄 것 같아 요? 그리고, 오라버니는 레비앙 님께 평생 도망자의 생활을 맛보게 해 주고 싶으 세요? 그런 건 아니잖아요……. 지금 오라버니가 레비앙 님께로 가는 것 역시 안 돼요. 국왕 폐하의 명령을 더 이상 어겨선 안 된다구요. 그러면 오라버니는 레비 앙 님을 구할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될는지도 몰라요." 길고 긴 설득 끝에 아이린은 애원하듯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레비앙 님을 생각하신다면, 제발 무턱대고 하려는 행동은 자제해 주세요. 오라 버니, 마음이 아프고 괴롭겠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해요. 저도 레비앙 님의 일을 떠올리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구요." 그녀는 엘스헤른의 등에 이마를 기댄 채 울먹거렸다. 이성에 호소하는 그녀의 타이름이 어느 정도는 먹혀들었는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던 엘스헤른의 격 렬한 몸부림이 이제는 잦아들었다. 대신 그는 우두커니 선 채로 눈물을 떨구었다. 그의 눈시울을 적시던 물기는 아직까지 마를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린은 안고 있던 그의 허리에서 손을 풀어내고는 자신의 눈가를 흐르는 눈물 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엘스헤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그를 이끌어 방의 가운데 로 데리고 왔다.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찌든 그의 잿빛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채 빛을 잃고 있 었다. 그는 여전히 그렁거리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앉아요, 오라버니. 아이린과 함께 이야기해요." 아이린은 넋을 놓고 있는 그를 달래며 그가 쉽사리 앉을 수 있도록 가까운 곳의 의자를 빼 주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엘스헤른은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그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어깨를 다독거렸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이번 일은 오라버니와 나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지 도 몰라요. 왕비 전하의 도움이 필요할는지 모르니까, 그 분께는 자초지종을 이야 기 해 둘 필요가 있어요." "왕비 전하가 날 도와줄까?" 평소 같으면 누나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칠 엘스헤른이었으나, 그는 지 금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거친 손길로 마구 헤집어 놓은 짙은 잿빛의 머리 카락은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이린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결대로 쓸어내려 차분하게 매만져 주고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다 잘될 거예요. 너무 걱정 말아요, 오라버니. 이번 일이 무사히 지나가면 레비 앙 님도 절교 선언을 거두실 거예요. 좋은 앞날만 생각해요, 우리." - TO BE CONTINUED - 〓〓〓〓〓〓〓〓〓〓〓〓〓〓〓〓〓〓〓〓〓〓〓〓〓〓〓〓〓〓〓〓〓〓〓〓 오늘 올리는 분량의 마지막이로군요. 어떠세요? 좀 날림 같은 분위기가 없 지 않죠? T-T 급히 쓰느라 저도 정신이 없네요. 쿨럭쿨럭. 요즘은 감기가 아직 낫지 않은데다가 참외과다섭취로 인한 배탈 및 마감임 박컴터과다사용전자파과잉노출로 인한 다래끼, 만성 피로감, 우울증, 히스테 리 등이 겹쳐 사람의 모습과 생활이 아닙니다. 얼른 이 생활이 끝나고 상큼한 백수의 나날로 돌아가야 할텐데 말이죠. 아무 튼, 다음 편은 곧 올리겠습니다. (내일이나, 모레나...) 『SF & FANTASY (go SF)』 40698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098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09/01 03:44 읽음: 26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41/41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08월 30일 23:27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8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8) 귀족 재판 바람이 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하늘은 몹시도 우중충 했다. 울퉁불퉁한 빵처럼 불규칙한 모양새로 하늘을 온통 뒤덮은 짙은 회색의 구름은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를 향해 움직였다. 밖의 기온은 참 싸늘할 것 같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한기가 도 는 바깥의 풍경은 그에게 그 온도를 여실히 전해주고 있었다. "겨울이 오려나봐." 레비앙은 입술을 열어 작게 중얼거렸다.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은 목소리는 다소 우울한 그의 기분을 대변해 주 고 있었다. 바깥의 회색빛 경치와는 달리 방 안에는 나른할 정도의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 다. 창 틈으로 스며드는 싸늘함이 생소할 정도로 따뜻한 방은, 모니카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돌보아 놓은 탓에 그 어떤 부족함도 없었다. 붉은 불길 속에서 옛 정령의 나무망치 소리 같은 "타닥."하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 다. 벽난로 속에 담긴 불은 그 온화한 주홍빛의 색채만으로도 한결 포근하게 감성 을 자극했다. 국왕 폐하께는 휴가를 신청해 놓아, 레비앙은 오늘 왕궁에 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은 왕궁에서도 역시 엊그제의 일을 입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황해 하실 국왕 폐하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 분을 뵙지 않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 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분을 속인 거니까…… 존엄하신 국왕 폐하를 기만한 죄를 쉽게 용서받 을 생각 따윈 없어. 어차피 몽바종 후작 부인측에서 역시 그것을 물고 늘어지려 할 테고.' 레비앙은 벽난로에서 강아지의 혓바닥처럼 낼름거리는 불길을 바라보며 피식 소 리내어 웃었다. "재판을 받는 것은 불가피 해." 모든 것을 알고 기다리는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하다. 그래서 그는 외출하지 않 는 날임에도 정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니카는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레 의복을 차려입는 그를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주인의 안색을 살펴 집요하게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민감한 애완동물처럼 주인의 우울한 기분을 금새 알아차리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여 방의 온도를 높여 놓고, 그가 좋아하는 케시르니아 차를 타서 대령해 놓았다. 문득 레비앙은 허기가 돌아, 향긋한 내음을 품어내는 다기(茶器)가 옹기종기 모 여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케시르니아 차와 함께 편도쿠키가 소복하 게 놓여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쿠키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을 귀신처럼 알아차려 준 모니카를 속으로 칭찬하며 쿠키를 깨물었다. 편도과 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마치 엄마 몰래 찬장 위의 쿠키를 몰 래 내어 먹는 어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몇 개를 더 집어먹은 레비앙은 케시르니아 차로 목을 축이고는 만족한 듯 옷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그가 막 행복한 간식을 끝냈을 즈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모니카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비앙 님, 저……." 레비앙은 모니카를 칭찬해주려 했으나, 그녀의 표정에 유난히 근심이 서린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 했다. "무슨 일이야? 모니카." "왕궁에서 사람이 오셨어요." "왕궁에서?" "지금 피에르 씨가 그 분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요." "아아, 그래. 네가 자주 보던 왕궁의 사람들은 아니겠지." 레비앙은 잔뜩 겁먹은 듯 해 보이는 모니카를 다독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 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걸었고, 뒤따라 오는 모니카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역시 영특한 애완동물을 연상시키는 이 귀여운 아가씨는 눈치가 너무 빨라서 탈이다. 그녀는 예사롭지 않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는지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그를 따르며 넌짓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레비앙 님." "아, 그럴 일이 좀 있어." 레비앙은 여전히 태연했다. "뭐, 곧 알게 될 거야.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는 말라구." "저 사람들, 조금 무서운 분위기였다구요." "네가 겁먹지는 않아도 돼. 귀여운 아가씨." 잠시 후면 알게 될 일에 거짓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아 레비앙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니카는 초콜릿 색의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한 근심을 그대 로 드러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레비앙은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 기도 했으나 집사 피에르 혼자서 왕궁에서 온 낯선 손님들을 대하며 애먹고 있을 것을 생각해서 얼른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1층 현관이 내려다 보이는 계단의 난간에 도착했을 때, 아래층은 다소 어수선했다. 회색 새틴의 제복을 차려입은 세 명의 사람들은 집사에게 정중한 말 투로 얼른 레비앙을 데려올 것을 종용하고 있었고, 시녀들과 시종들은 전혀 처음 보는 그들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위압감을 느끼고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에게 볼 일이 있으시다구요?" 레비앙은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계단을 내려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래층의 시선이 곧 그에게로 쏠리며 시끄럽던 분위기는 조금 진정 되었다. 그가 막 마지막 계단에서 도톰한 적갈색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내려서자 세 명 의 외부인은 그에게로 다가와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나머지 두 사람과는 다른 좀 더 화려한 휘장(徽章)이 모자에 붙어 있는,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우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님. 저는 귀족재판소 직속 위병대 소속의 오웬 드 소르바스 대위입니다. 귀족 재판소 주석 판사님으로부터 경을 모시고 오라는 분부 를 받았습니다. 부디 동행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기꺼이 따라가 줄 생각이었으나, 그의 정중한 말투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레비앙은 먼저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귀족재판소에서의 소환이라는 소리가 나온 후 로자리움은 발칵 뒤집혔는데, 레 비앙은 그 소란이 있기 직전에 다행히도 현관을 나설 수 있었다. "성의 식구들이 좀 다혈질이랍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는 빙긋 웃으면서, 지나칠 정도로 소란스러워진 로자리움에 대해 소르바스 대 위에게 슬쩍 변명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레 터져 나온 비명소리 - 모니카 의 것이 분명하다. - 와 성이 들썩들썩할 정도의 부산함에 다소 놀란 대위는 레비 앙이 종시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자 다행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기도 하죠. 아무튼, 소 환에 순순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레비앙은 그가 좋은 사람일 거라고 확신하고는, 손수 문까지 열어주는 마차 위 에 몸을 실었다. 성에서는 시끄러움이 잦아들지 않는 가운데 이내 메리벨 부인과 시종장 필립이 아르떼이유 후작을 부축하고 나왔다. 노후작은 메리벨 부인으로부터 대충의 이야 기를 전해듣고는 얼굴이 밀가루보다 더 하얘져 있었다. 그는 마차가 떠날세라 서 둘러 손자가 타고 있는 창가로 다가섰다. "레비앙!" "아, 할아버지?" 레비앙은 의외로 밝은 표정으로 창을 열어 후작을 대하며 우선, 마차에서 내리 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사과했다. "작별 인사를 먼져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이분들이 조금 바빠 보여서요."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언젠가는 아시게 되겠지만, 제가 없을 동안 들으셔서 너무 충격 받으셔서 돌아 가시거나 하면 안 되니까, 미리 말씀드릴게요."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생긋 웃더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 사고 쳤어요. 그것도 이만 저만 큰 사고가 아닌 거 같은데, 어쩌 죠?" 평소답지 않은 레비앙의 장난스러운 어투에 당황했는지, 후작은 메리벨 부인과 필립을 한 번씩 둘러보고는 레비앙에게 의문에 찬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레비앙 은 더 이상은 말하지 않고 그저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소르바스 대위가 레비앙 대신 마차에서 내리더니 후작의 앞에 서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다소 간단한 설명을 했다.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님께서는 몽바종 후작 부인에 의해 자신의 명예 훼 손 및 국왕 폐하를 기만한 죄로 귀족재판에 회부되셨습니다. 지금 귀족재판소로 소환되어 가시는 겁니다." 소르바스 대위의 설명을 들을 동안 그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후작은 다시금 레비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국왕 폐하를 기만 했다니, 무슨 소리냐? 설마 너……."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그 <설마>가 아마도 맞을 것 같네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 장가가기는 글렀는데, 어쩌면 좋죠?" 이번 역시 농담기 섞인 투로 이야기 하긴 했으나, 레비앙은 씁쓸하게 번지는 미 소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이내 농담을 접고 진지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 건강하세요." 그는 그 한마디로 인사를 마치고는 창을 닫았다. 소르바스 대위가 다시 마차에 오르고 떠날 기미를 보이자, 충격으로 넋을 잃은 채 아무 말 없던 후작은 서둘러 창문을 두드려 레비앙을 불렀다. "레비앙, 걱정하지 말고 가 있으려무나. 내가 어떻게든 손 써 보마. 이 할애비는 염려하지 말거라." 야단칠 줄 알았던 후작의 입에서 침착하고도 다정한 말이 나오자, 레비앙은 코 끝이 시큰했다. 할아버지에게서는 거의 느껴볼 수 없었던 감동이었다. 하지만, 여 지껏 어색한 관계였던 할아버지께 무슨 대답을 해야 할는지 몰라, 레비앙은 다시 창문을 열고 할아버지 대신 메리벨 부인과 시종장 필립, 집사 피에르에게 당부를 했다. "할아버지를 부탁드려요. 아무쪼록 건강 상하시는 일 없도록 잘 보살펴 드리세 요." 그리고 그는 먼발치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모니카에게 조금 큰 소리로 외 쳤다. "모니카, 네 편도과자는 정말 맛있었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비앙은 모니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의자에 바 른 자세로 몸을 기댔다. "레비앙 님! 가시면 안돼요." 모니카가 마차를 따라오면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레비앙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자리움을 빠져나가는 마차 밖 으로는 낯익을 대로 익은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입술 끝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네가 보고싶을 거야, 모니카." ·‥…━━━━…‥· 로자리움에 방문했다가 레비앙이 귀족 재판소로 소환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린은 곧장 제롬을 데리고 입궁 했다. 그녀로서는 예상지도 못할 만큼 빨리 닥 쳐온 위험에 놀랐고, 뒤늦게 자초지종을 들은 제롬은 왜 진즉 자신에게 말하지 않 았느냐며 펄펄 날뛰었다. 입궁하는 동안 마차 안에서 머리를 맞대어 보았으나 이들 남매는 뭔가 뾰족한 수를 찾지는 못했다. 그들은 마부가 궁의 현관 앞에 주차를 하는 대로 뛰어내려 곧장 아드레이드 왕비 전하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 역시 어린 시종이 왕비 전하의 방으로 안내를 해 주었는데, 잘 치장된 왕궁의 장식품 같은 이 어여쁜 꼬마가 너 무 느리게 걸음을 걷는 바람에 남매는 애가 타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왕비의 알현실에 도착한 이들은 미처 정중한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왕비의 무 릎녘에 쓰러지듯 매달려 도움을 요청했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아드레이드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촌동생들이 도움을 청하며 울상을 짓자 잠시 얼떨떨함을 떨치지 못하다가 이내 자애로운 표정 을 지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들이니? 왜 이렇게들 표정이 어두운 거야?"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맘 때 쯤이면 왕궁에도 소문이 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제롬과 아이린은 왕비 전하께서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더욱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우선, 이리로 와서 의자에 앉으렴. 아이린, 그리고, 제롬. 내 방의 양탄자는 깨 끗하기는 하지만 너희들이 앉아서 이야기 할 데는 못 된단다." 그녀는 사촌 동생들에게 의자와 차를 권했다. 우선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로 마 음을 가라앉힌 그들은 숨을 돌린 다음 곧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이 야기를 들으면서, 아드레이드는 손에 든 찻잔의 차가 식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녀는 간혹 눈썹을 살풋 찌푸리기도 하고, 엘스헤른이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근신 중인 사실도 잊고 뛰쳐나갈 뻔 했다는 이야기에서는 나직히 웃으면서 혀끝을 차기도 했다. 아이린은 오늘 아침에 레비앙이 귀족 재판소에 소환되어 갔다는 것까지 이야기 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아드레이드는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귀족 재판소에 소환되었다는 건 말야, 국왕 폐하께서 그 사건이 재판에 회 부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뜻이야. 귀족재판의 안건은 국왕 폐하께서 일차적으로 재판의 여부를 결정하신 다음에 재판소로 넘겨지거든.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요 며칠간 왕궁에 있으면서 그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국왕 폐 하로부터도 듣지 못했어. 말씀하실 기회가 있었다면 진작에 들었어야 말이 되지 않니?" "국왕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구요?" 아드레이드가 풀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린은 가득 걱정 어린 눈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겁먹은 아이린의 시선 앞에서 아드레이드는 천천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폐하께서는 적어도 어제 검사의 공소장(公訴狀)과 관련 서류를 받으셨을 거야. 늦어도 어제 아침까지는 그 분의 허락이 났다는 거지. 그래야 오늘 아침에 레비앙이 소환되어 갔다는 것이 말이 맞을 테니까. 그런데 국왕 폐하께서는 왜 나 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을까? 어제는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나와 이야기를 나누 셨다고. 물론 그 일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야. 레비앙은 왕태자의 시종이기도 하니까 왕태자의 어미인 나에게 미리 말씀을 하셨을 법도 한데." 아드레이드는 나직히 중얼거리며 살풋 인상을 지었다. "아이린, 이번 일은 확실히 심상지 않구나. 국왕 폐하의 처사도 의문이지만, 재 판 자체에 대해서도 그래. 몽바종 후작 부인은, 나도 알고 있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여자야. 모욕을 당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재판관들을 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번 재판에서 이기려고 할 거야." "하지만, 국왕 폐하를 돈으로 매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설마 국왕 폐하 께서 그 여자의 돈에 매수되어 재판을 허락하시기야 했겠어요?" 제롬이 한 마디 끼어 들자, 아드레이드는 수긍한다는 듯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국왕 폐하께서 어째서 이번 재판을 허락하신 거지? 그 것도 웬만한 귀족 재판 같으면 재판에 회부되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짧아야 일 주일 이상이야. 일이 일어난 지 단 삼 일 만이라니, 아무리 몽바종 후작부인이 재 빨리 손을 썼다고는 하지만, 국왕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는데 걸린 시간도 너무 짧 은 게 아니니? 왜 그렇게 급히 재판 일정을 잡으신 걸까?" "설마……." 아이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에 젖어들자, 아드레이드 역시 그녀의 마음을 읽고는 심각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국왕 폐하 역시 이 일로 화가 났는지도 몰라. 그 분은 믿고 있던 아르떼이유 가문에 속았다고 생각하고 계실는지도 모르니까 말야." "만약 국왕 폐하께서 노하신 거라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달려와 왕비 전하께 도 움을 간청 드리는 것도 레비앙을 구해내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잖아요. 그 러면 더 이상 무슨 방법이 있지?" 제롬이 소년 특유의 열정이 담긴 얼굴로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드 레이드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그녀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잠 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일단 내가 지금 당장 국왕 폐하를 찾아가 봐야겠어. 아이린, 제롬. 너희는 엘스 헤른이 무모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를 잘 지켜 줘. 너희들은 모르고 있었겠지 만, 티아란 대공은 에스트르 내에서는 티아란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아무런 사 법권이 없어. 그는 이번 일에 도움이 못 돼. 그러니까, 방해라도 되지 않게 붙들 어 놔. 알겠지?" 그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방의 주인으로서 먼저 방에서 나서는 것이 예의는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따지고 있을만한 상 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촌 동생들을 쳐다보며 한 번 더 당부했다. "이번 일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큰 일일는지도 모르겠어.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야. 그러니 제발, 엘스헤른만 날뛰지 못하게 한다면 너 희들은 최선을 다 한 게 되는 거야. 그리고, 지금 내가 국왕 폐하를 찾아가는 일 에는 너무 기대를 걸지 말길 바래. 앞서 우리가 추측한 그대로, 국왕 폐하께서 이 번 일로 화가 나셨다면 재판의 승소는 물 건너 간 일이야. 그 분은 그렇게 절친하 던 엘스헤른에게 근신을 내릴 만큼 냉정한 면이 있는 분이니까. 그러면 우리는 다 음 일을 생각해둘 필요가 있어. 만약 재판에서 패소(敗訴) 할 경우를 말야. 그때 는 레비앙이 받을 형을 최소화시킬 방법을 찾아봐야 해. 하다 못해, 우리가 재판 관들을 매수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말야. 오, 이런. 제롬, 아이린. 레비앙이 우 리 왕태자의 시종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왕태자는 무척 슬퍼할 거야. 왕태자가 얼 마나 레비앙을 좋아하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가득 근심을 띄우며 잰 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그녀 는 문을 열고 나서면서 사촌들에게 엘스헤른을 부탁한다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곧 장 국왕 폐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고동색의 문에 황금색의 인동덩굴 문장이 붙어 있는 국왕 폐하의 집무실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아드레이드는 시종이 얼른 방 안에다 자신이 왔음을 고해주기를 기다렸다. "국왕 폐하, 왕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어린 시종의 낭랑한 목소리에 이어 국왕의 출입 허락이 떨어지자 아드레이드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러나, 방을 걸어들어 오던 당당함과는 달 리, 그녀는 방의 한 가운데 국왕의 책상 앞에서 은은한 아이보리색 치마를 꽃처럼 펼치며 무릎을 꿇었다. "국왕 폐하. 긴히 간청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미천한 제가 폐하의 업무를 방 해한 것이 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급히 달려 올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 었습니다." 그녀의 장황한 서두에 국왕은 온화한 미소로 답했다. "알고 있소, 부인. 부인이 무슨 일로 이렇게 서둘러 달려왔는지를 말이오. 레비 앙 경의 일 때문이겠지?" 이미 그녀가 올 것을 예견했다는 국왕의 말에 아드레이드는 일이 더 어렵게 되 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그건 심각한 절망에 빠져버릴 지도 모르는 동생을 돕기 위한 일이기도 했거 니와, 상심이 깊을 아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폐하, 그러시다면 어째서 저에게는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는 벌써 알고 계셨으면서 말입니다." "그건, 그다지 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부인." "아닙니다, 폐하. 저와도 기필코 상관 있는 일입니다." 아드레이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버티었다. 그러나, 국왕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 았다. 이미 행동의 의도가 눈치 채인 이상 이러한 방법은 소용이 없을 거라고 그 녀는 속으로 얼른 계산을 했다. 이렇게 된 바에, 그녀는 자신 역시 이 일의 한 가 운데로 걸어들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국모다운 강인하고도 굳센 눈빛으로 국왕을 쳐다보고는 천천 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저 역시 벌해주십시오. 레비앙에 대해서는 저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 폐하를 기만한 죄는 저에게도 적용됩니다. 결혼 서약에 서 폐하께 평생 거짓이 없을 것이라 맹세한 것을 깨뜨렸으니 저는 폐하의 아내된 도리를 저버렸습니다. 또한, 폐하를 기만하는 자를 눈감아 주었으니 폐하의 신하 된 도리를 저버렸습니다. 또한, 그 자의 과오를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하여 왕태자 의 시종으로 두었으니 폐하의 혈육의 어미된 도리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니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이마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왕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국왕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부인. 부인은 레비앙 경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의 아내의 자리 도 포기하시겠다는 말씀이오?" "아니, 폐하, 그러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나도 물러설 생각이 없소. 그러니 부인께서는 나를 설득하는 일은 그만 두시오. 그래서 부인께 말하지 않았던 게요. 부인이 이렇듯 나를 찾아와 재판 승인을 취소해 줄 것을 부탁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 방법 역시 먹혀들지가 않자, 아드레이드는 고민에 잠겼다. 이런 모든 것까지 계산에 넣고 계시는 국왕 폐하라면 이미 레비앙에 대한 언급 을 더 해봤자 소용이 없다. 국왕이 노하신 거라면 재판은 해 보지도 않아서 패소 의 가능성을 더 농후하게 가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는 지도 모른 다. 국왕 폐하께서는 재판을 승인하기만 하실 뿐, 재판관은 다른 사람이다. 주석 판사 한 사람과 차석 판사 두 사람을 매수한다면 어떨까? 몽바종 부인 역시 매수 를 시도하고 있겠지만, 왕비의 지위에 비한다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지. "부인, 더 이상 생각을 해 봤자 소용 없을 것이오." 문득, 그녀의 상념을 자르며 국왕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와는 달 리 국왕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까지 띄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이오. 분명 판사들을 매수할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안 그렇소? 하지만, 부인. 판사들은 이미 내가 만나봤소. 그들은 당 신은 물론이거니와, 몽바종 후작 부인에게도 매수되지 않을 것이오. 내 그들에게 특별히 당부를 내려놓았지." 국왕은 읽고 있던 서류를 한 장 넘겨놓고 그 위에 단정하게 두 손을 포개어 올 린 다음, 닥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모로 머리를 굴리어 대는 아름다운 아내 를 빤히 쳐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부인께서는 도대체 왜 레비앙 경의 일에 그렇게 집착을 하시오? 나는 부인의 속 내가 참으로 궁금하오. 아, 왕태자의 핑계를 댈 거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요. 그가 참으로 훌륭하게 왕태자의 시종 자리를 수행해 왔고, 왕태자 역시 그를 잘 따른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인이 그렇게 애쓰기에는 이유가 너무 빈약하오." "폐하, 아르떼이유 가문은 대대로 에스트르에 충성을 받쳐온 가문입니다. 에스트 르 후작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가문의 자제가 지나친 형벌을 받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입니다." 아드레이드가 젖은 듯한 잿빛 눈동자에 온갖 표정을 담고 혼신을 다해 연기했으 나, 이번 역시 국왕은 그녀의 머리 위에 있었다. "어째 그 말이 안 나오나 했소. 그러나, 과거의 기록을 보더라도, 충신의 가문에 서 역신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소. 비록 레비앙 경의 일은 그의 사적인 사정 에 의한 것이나, 나를 기만한 것임에 틀림없으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소. 그러 니 당치도 않은 충신의 가문 소리는 접어두고, 부인, 이제 진심을 말해보시오." 마치 갖고 노는 듯한 국왕의 태도에 아드레이드는 다소 짜증스러웠다. 겉으로 어수룩해 보이기는 해도, 국왕은 그녀가 절대 당해 낼 수 없는 사람임을 아내로서 잘 알고 있었다. 발목이 잡혀 하는 수 없이 결혼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 다. 처녀시절 콧대가 높을 대로 높았던 그녀를 말로서 굴복해 낸 유일한 남자가 바로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저 고귀하신 분이었다. 수더분해 보이는 것 역시 연극이 아닐까하고 의심한 적도 있었으나, 같이 살아 보니 그건 확실하게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인 국왕은 착하면서도 막 상은 치밀한 -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냉정할 때는 확실하게 냉정하고, 후덕 할 때는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곤 했다. 처음 청혼을 받았을 때부터 어리무 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이 희한하게도 왕국 아카데미의 교수들 저리가라 할 정도의 조리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결혼을 해 보니 이 건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왕은 언제나 왕 비와 이런 저런 일들로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심지어는 말다툼하는 것도 즐겼다. 아드레이드 역시 남편과 함께 하는 토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이 런 식이라면, 아무리 남편과의 대화를 즐기는 그녀라도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 다. 그녀는 점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한숨을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폐하께 전후 사정을 털어놓겠습니다. 제가 레비앙 경의 일 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티아란의 대공이자 저의 막내 동생인 엘스헤른과 무관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일전 그를 근신에 처하신 일을 기억하고 계실는지 모르 겠습니다." "그 유명한 가출사건을 잊어버릴 리 없지." 개인적으로 원한은 없는 모양인지, 국왕은 그 일을 떠올리며 싱긋 웃음까지 지 었다. 그때 국왕이 짐짓 화난 척 하며 그를 근신시킨 것은, 그를 정신차리게 할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일이 귀족 대신들에 의해 크게 부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상서하기에 앞서 국왕이 먼저 노하여 처분을 내리면 그들도 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처분이 옳았다 고 확신하며 왕비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아드레이드는 국왕이 심상지 않게 계속 웃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목소 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근신을 내리실 수 밖에 없었던 그 사건의 원인이 바로 레비앙 경이었 습니다. 티아란 대공은 레비앙 경을 만나러 가기 위해 왕궁에서 무단으로 외출한 겁니다. 갑자기 많은 일이 닥쳐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만나보지 못했으니까요. 티 아란 대공은…… 레비앙 경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서툴러서 무 엇을 어찌해야 할는지 그런 감정에 있어서는 익숙지 않습니다. 소중한 동생이 - 그것도 티아란의 대공인 그가 단지 사랑의 감정만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레비앙 경과 엘스헤른을 엮어주고 그를 일에 집 중하게 하는 것이 저의 의도였습니다. 폐하, 동생을 두고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 하오나, 티아란 대공은 엊그제도 사촌인 아이린으로부터 레비앙의 일을 전해 듣고 는 폐하의 근신 명령을 어기고 왕궁을 뛰쳐나가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이번 재판의 소식까지 더해진다면 그의 마 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흐음, 이미 대충은 짐작했지만,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군." 국왕은 만족한 눈빛을 지으며 멋진 황금빛의 수염이 단정하게 뒤덥힌 턱을 매만 졌다. "아쉽구려, 부인. 나를 그 놀이에 좀 더 일찍 끼워 주었더라면 레비앙 경이 재판 에 회부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오. 왕비와 왕비의 사촌들만 티아란 대공을 놀 리는 일로 재미를 보았다니, 나는 기분이 더 상하는구료." 국왕의 농담을 재미있게 받아들일 기분이 아닌 아드레이드는 한 번 더 애처로운 눈길로 국왕에게 매달렸다. "폐하, 티아란 대공을 봐서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까?" "티아란 대공을 봐서?" 국왕은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이내 갑작스러운 자신의 웃음으로 놀랬을 부인 의 자존심도 있고 하여 느릿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웃어서 미안하오. 그리 크게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티아란 대공을 생각 하면 재미있어서 말이오. 아무튼, 이번 재판은 티아란 대공에게 주는 전쟁 기념 선물이 될 것이오. 그래서 재판 일자도 급히 잡았지. 날림 재판이 아니냐고 말들 이 많겠지만, 그가 티아란 대공으로서의 진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얼른 선 물을 주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하지만, 선물이라고 해서 꼭 좋은 선물만 있으 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 나는 그가 절망을 하든 희망을 가지든 전쟁에 최선을 다 해 임할 수 있는 계기를 줄 거요." 국왕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다 말고 "아!" 하는 감탄사를 지으며 아드레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인은 모르고 계셨겠지만, 티아란 대공은 일주일 후면 티아란으로 복귀할 거 요. 티아란에서 잠시 머무른 다음 곧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로 갈 것으로 알고 있소." 국왕의 느닷없는 통보에 놀란 아드레이드은 무릎을 꿇느라 곧추세우고 있던 허 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다행히 폭삭 주저앉지는 않았으나 절망감 이 가득한 눈을 들어 남편에게 따질 듯이 물었다. "어째서…… 입니까, 폐하? 어째서, 어째서 그가 전쟁터로 직접 가는 겁니까? 그 는 군의 총 책임자일 뿐 직접 지휘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오, 하느 님. 그런데다가 어떻게 가족들에게는 여태껏 아무런 기별도 없다가 그리도 갑자기 떠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일주일…… 일주일 후라구요? 여염집에서 징집을 받 는다 해도 이런 식으로 시일이 촉박한, 갑작스러운 통보는 없습니다. 하물며 귀족 가의 정점에 있는 에스트리온 공작 가문에 이런 처사라니요!" 국왕은 진실한 좌절과 불안이 드러나는 왕비의 눈을 보며, 곧 책상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이 충격에 쓰러지거나 하지 않도록 그녀 를 일으켜 세워 집무실 한 켠에 있는 손님용 의자로 부축해 옮겨 앉혔다. "그 일은 그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오, 부인. 티아란의 상황이 급박하고, 전쟁이 난항을 겪고 있으니 그의 입장도 곤란했을 것이오. 그가 내린 결정이니 나로서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오. 이런, 이렇게 상심하다니." 국왕이 다정한 손길로 어깨를 다독이자, 아드레이드는 눈가에 눈물이 어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국왕 폐하, 전쟁터로 나가는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주실 생각이십니까?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그는 폐하의 처남입니다!" "내 처남이기 이전에 티아란0 대공이지. 그리고, 그는 마음이 너무 여려서 탈이 오. 냉정한 척 하는데는 한계가 있소. 전쟁터는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을 정도 로 급박하고 냉혹한 곳이오. 그런 곳을 향하는 사람이, 또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 마음에 잡념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남겨진 미련이 있으 면 다른 생각이 들게 마련이오. 나는 그 미련을 없애주려는 것일 뿐이오." "그 말씀은……, 폐하, 그럼 레비앙 경이 최악의 형을 선도 받을 수도 있다는 뜻 입니까?" 아드레이드는 경악에 차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다. 국왕은 특유의 어수룩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국왕을 기만한 죄는…… 부인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큰 것이오." "하지만, 폐하!" 국왕은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손을 올려 아드레이드를 저 지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 온화하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부인이 할 일은, 여기, 나에게 와서 레비앙 경의 방면을 간청할 것이 아니 라 에스트리온 성으로 가서 방금 들은 티아란 대공의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오. 누 구보다도 부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가족들의 충격이 덜할 테니 말이오. 그럼 부인, 오늘은 친정으로 외출을 하고 오시오. 모레부터는 나와 함께 재판을 방청해 야 하지 않겠소." ·‥…━━━━…‥· 국왕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아드레이드는 가장 기본적인 호위만 거느린 채 벨 라시그네의 왕성을 나섰다. 국왕으로부터 간만에 허락 받은 외출을 통해 그녀는 가족들에게 씁쓸한 소식을 안겨주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에스트리온 성관에서 한층 더 절망적인 소식을 접할 수 있 었다. 아이린과 제롬이 곧 에스트르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영국에서 윈저 공작이 에스트르가 전쟁에 돌입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안 전한 가정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 아드레이드로서는 고모부인 윈저 공작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는 않 았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가는 것 역시 엘스헤른이 티아란으로 가는 것만큼 시일 이 얼마 남지 않아 그녀의 마음은 참으로 묵직했다. 영국에서 온 편지에 대해 제롬이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린은 아까 들은 엘스헤 른의 일과, 재판의 불가피함, 그리고 더 이상 레비앙을 도울 여유가 없는 이유 등 복잡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마음 여린 사촌동생이 눈물을 거둘 수 있도록 충분히 달래 주고, 엘스헤른의 소 식에 상심에 빠진 에스트리온 공작 부인을 잘 다독인 다음에서야, 아드레이드는 에스트리온 성을 나설 수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아르떼이유 후작을 위로 하기 위해 로자리움에 들렀고, 생각한 바가 있어 왕국 아카데미에도 잠시 들렀다. 느닷없는 외출과 여러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왕성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몹 시도 피곤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잠시 쉴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막 피곤한 몸을 긴 의자에 기대려 했을 때 왕태자가 방문을 한 까닭이었다. "어머니, 저녁 문안 여쭈러 왔습니다." 너무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더니, 왕태자가 저녁문안을 올 시간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던 아드레이드는 예절 바르게 저녁 인사를 하러 온 아들을 가까이로 불렀다. "이리로 오렴, 클로드." 국왕을 닮아 가을의 황금밀밭 같이 멋들어진 금발을 지닌 클로드는 아드레이드 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을 하고 뺨에 입술을 맞춘 다음 한 걸음 물러섰다. 단정 한 하얀 정장을 입은 소년은 사파이어보다 밝은 새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할 말 이 있다는 의사를 눈으로 전했다. "문안 외에, 또 할 말이 있나보구나. 우리 귀여운 미래의 왕께서,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할 생각이지?" 그녀가 몹시도 온정적으로 묻자 클로드는 그제서야 어린 소년답지 않게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조그마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레비앙은 재판을 받게 되나요?" 눈을 말똥거리며 자신의 시종에 대해 묻는 아이를 보자, 아드레이드는 가슴 한 구석이 새큰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별다른 감정을 싣지 않은 듯한 담담한 목 소리로 대답했다. "…… 아마도 그럴 것 같아." "네……." 클로드는 힘없이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긴 황금색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채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던 소년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전에 아드레이드를 쳐 다보며 조금 더 이야기했다. "아바마마께는, 방금 문안 인사 드리러 갔다가 분명히 말씀 드렸어요. 저는 레 비앙이 아니라면 그 어떤 시종도 필요 없다구요. 그리고, 폐하께서 제 말이 어린 애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으로 오인하실 까봐 한 마디 더 덧붙였어요. 만약에 아바마마께서 레비앙을 나에게서 떼어 놓으신다면, 미래에 제가 이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에 저는 이미 소중한 신하를 한 명 잃은 왕이 되었을 거라구요." 침착하고 또박또박하게 말을 마친 그는 아드레이드에게 꾸벅 목례를 했다.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어머니." 아이는 상심한 마음이 거울처럼 빤히 드러나는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뒤로 걸음을 옮겼다. "잘 자렴, 아가." 아드레이드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 말 밖에 더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 무나도 미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클로드가 방을 완전히 나설 때까지 단정한 자세 를 유지하고 앉아 있었다. 아들이 나가고 나자, 그녀는 밀려드는 피로감에 눈을 감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후우, 미안하구나, 클로드.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이제 더 이상은 없어." ·‥…━━━━…‥· 왕궁 안에 위치한 귀족재판소로 소환된 레비앙은 재판소 안의 지정된 저택 안에 서 당분간 생활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것은 자고로 귀족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 중 에 지방이나 외국으로 피신해버리는 귀족들이 있곤 했기 때문인데, 귀족재판소로 서는 피고를 미리 소환하여 재판소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게 하는 것으로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막을 수 있었다. 피고용 저택은 로자리움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정도였 다. 레비앙이 지정 받은 방은 후작가의 자제이자 일전 왕태자 전하의 시종이었던 그의 직위에 크게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가구는 갖추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지낼만 할 것 같은데요?" 호위를 맡아 여기까지 데려다 준 소르바스 대위에게 그렇게 말한 레비앙은 방의 한쪽 벽에 걸린 장려한 규모와 무늬의 태피스트리(tapestry - 다채로운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양탄자나 벽걸이)를 보고는 "이건 사치품이잖아?" 하고 빙긋 웃었다. 소르바스 대위는 의외로 소환에 잘 응해준 데다가 이 곳에도 빠른 적응을 해 보이는 레비앙의 태도에 상당히 다행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고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신의 부하를 시켜 해결해 주겠노라는 말을 잊지 않았 다. "아, 책이 필요해요. 이 방은 좋기는 하지만, 책이 없군요. 책이라도 읽지 않는 다면 혼자서 무척 심심할 것 같은데요." "당장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이 곳에 있는 동안 편안하시길 바라겠습니 다." 소르바스 대위는 레비앙이 마음에 들어하는 그 예의바른 태도로 인사를 하고는 고이 물러났다. 그가 약속대로 레비앙의 방에 몇 권의 책을 넣어준 것은 얼마 지 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레비앙의 독서실력을 상당히 경시했는지 그가 보내준 책은 벌써 다 읽은 것들이 허다했다. 레비앙은 그것들이나마 읽을 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고 저녁식사 전까지 줄기차게 독서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제공하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가 운 손님들의 방문을 받았다. 저쪽 먼 복도에서 들려오는 다소 소란스러운 여인들의 수다가 자신과는 상관없 다고 생각한 레비앙은 그녀들 중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책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오오! 이런, 많이 야위었구나, 아가!" 다정하면서도 우아한, 가녀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레비앙은 자신의 방에 들어와 서 있는 귀부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모님? 아,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레비앙은 읽던 책을 덮어두고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랑쥬 공작 부인에게로 달려 갔다. 그는 공작 부인의 손을 마주잡고는 눈물이라도 글썽일 듯이 반가워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원래 의외의 곳에서 만나게 되면 더 반가운 법이지." 공작 부인은 그의 손을 토닥거리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감싸고 있던 흑자주색의 커다란 공단 망토를 목까지만 내려 레비 앙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어쩜, 정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혼자서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겠니?" 그녀는 측은한 눈빛을 하고서 레비앙의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지다 말고, 잊은 것이 있는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런, 내가 귀여운 아가씨를 너무 많이 기다리게 만들었나보다. 그녀가 몹시 조 바심을 내고 있을 텐데 말야. 여기까지 나와 같이 동행한 아가씨가 있는데, 한 번 만나보겠니?" 레비앙이 채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랑쥬 공작 부인은 고개를 옆으로 젖혀 문 밖 에서 대기하고 있는 아가씨를 불러들였다. "들어오렴, 귀여운 아가씨." 방 문이 열리고, 양 손을 커다란 짐으로 무겁게 해서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그녀는 달콤한 향이 묻어날 것 같은 초콜릿 색 머리카락 위에 생크림 처럼 하얗게 부푼 보닛을 둘러쓴, 레비앙이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니카! 네가 여긴 웬 일이야? 혹시, 대모님? 대모님이 저 아일 데리고 오셨어 요?" 레비앙이 당황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묻자 랑쥬 공작 부인은 웃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데리고 오는 일 뿐이라면 나도 역할을 하긴 했지. 하지만 저 아이가 이 곳에서 너를 수행할 수 있도록 손써 주신 분은 내가 아니라 다른 분이란다. 나는 그저 동행을 부탁 받았을 뿐이야." 공작 부인이 더 설명할 틈도 없이 레비앙은 모니카에게 다가가 그녀를 와락 끌 어안았다. "모니카, 네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저도 제가 여기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다시는 레비앙 님을 못 보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울었다구요. 나중엔 로자리움의 아이들이 제 눈을 보고 물에 불은 건 빵 같다고 놀리기까지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콜록, 레비앙 님. 숨 막히니 좀 놓 아주세요. 콜록콜록." 모니카는 레비앙의 격렬한 포옹에 숨이 막혀 연거푸 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레 비앙은 반가운 마음을 못 이겨 그녀를 너무 세게 껴안았음을 깨닫고는 얼른 한 걸 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기쁨이 역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또 바라 보았다. "누가 너를 이 곳에 오게 했지?" "아, 그건……. 어떤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부인이 오후에 로자리움을 방문하셨을 때, 후작님께서 그분께 저를 이리로 보낼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하셨어요. 레비앙 님의 시중을 들려면 제가 꼭 필요할 거라구요. 그 분, 우아한 잿빛머리카락을 지 니신 너무나도 아름다우신 분이었는데…… 대공 전하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 고, 아무튼, 저는 잘 모르는 분이셨어요." "후훗, 왕비 전하께서 이 아이를 이 곳에 올 수 있도록 힘써 주셨단다." 굳이 랑쥬 공작부인이 모니카의 곁에서 부연 설명해 주지 않아도, 레비앙은 모 니카가 한 이야기만 듣고도 그 분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왕비 전하의 배려에 깊이 감동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왕비 전하와 그 분의 아드님인 왕태자 전하를 속여 드린 게 되어 죄송할 따름이었다. 레비앙이 이 곳에서는 맛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예상지도 못한 감동에 젖어 있는 동안, 모니카는 그의 시녀답게 부산히 움직였다. "옷이랑,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좀 챙겨 가지고 왔어요. 급히 와야 했지만, 빈 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재판하는 동안에 내내 같은 옷만 입고 계신다 면 상대방이 얼마나 레비앙 님을 깔보겠어요? 그건 레비앙 님의 직속 시녀인 저의 자존심도 걸린 문제라구요. 그러니, 그런 점은 걱정 마세요. 제가 최고로 멋지게 꾸며드릴 테니까요." 귀여운 아기 새처럼 수다를 떨며 챙겨온 물건을 바지런히 정리하는 그녀를 보 며, 랑쥬 공작부인과 레비앙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아이로구나." "그럼요.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이죠." 모니카의 붙임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 곳에 도착한지 단 몇시 간 만에 이곳의 식료계 시종들과 시녀들에게 금새 환심을 사서, 부엌에서 레비앙 을 위한 밤 간식을 빼내 올 수 있을 정도로 영민하게 행동했다. 아침 내내 우느라 고 눈이 건빵처럼 부었다던 이 아가씨는 어느새 철의 여인으로 돌변하여 과로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레비앙을 위한 일에 몸을 바쳤다. 자신의 일을 지나치게 열심히 하고 있는 모니카를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만으 로도 마치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양, 마음이 편안해진 레비앙은 랑쥬 공작부인과 간만의 회포를 푸느라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고, 공작 부인이 못내 아쉬워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남기 고 돌아간 후, 레비앙은 이 방에 한 번 더 들린 소르바스 대위에게 다른 책을 부 탁해 놓고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서둘었다. 아까 낮에,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주석 판사로부터 재판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은 바대로,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보고 그 들과 함께 모레 열릴 재판을 대비해야 하니까 오늘은 잠을 푹 자 둘 필요가 있었 다. 모니카가 잠자리를 봐 주고, 잠옷을 입혀주는 동안 레비앙은 너무 급히 짜여 있 는 재판 일정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솔직히 한 달은 족히 넘어 걸릴 재판인데, 이러다가는 길어도 일주일 안에 끝 날 것 같아 그로서는 찜찜한 기분이 없지는 않았다. 이런 날림형 재판은 원래 재판의 결과가 뻔히 정해진 경우 에 횡행했고 그러한 경우가 근래에는 극히 희박했기 때문에 그는 조심스러운 의문 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귀족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부터가 국왕 폐하께서 재판을 허락했다는 것 이고 그것은 국왕 폐하께서 이번 일로 상당히 기분이 상하셨다는 뜻이 된다. 국왕 폐하의 뜻이 개입된다면, 재판의 결과는 뻔해진다. '아마도 유죄 판결을 받게 되겠지.' 곁에 있는 모니카를 염려해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놓지는 않았으나, 레비앙은 틀림없다는 생각에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에 후회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레비앙은 모니카가 다독여 준 베개에 머리를 기대어 누우면서 가만히 눈을 감았 다. 문득 엘스헤른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직 근신이 풀리지 않았으니 왕궁에 있을 터이고, 수많은 서류더미에 파묻혀 평소 그 차림새에 대해 경멸해 마지않던 루엘 경의 모습 - 종이에 둘러싸여 자신을 돌보지 않아 후줄근하 고 꾀죄죄한 모습이 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레비앙은 피식 웃었다. 지금 쯤이면 엘스헤른도 이 소식을 전해들었을 터인데, 그가 국왕 폐하의 명으로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를 잊고 밖으로 나가겠노라고 난 리를 치고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만도 해.' 그는 조금 더 웃었으나, 이내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그라졌다. 돌이켜 생각 하다 보니, 며칠 전, 비오던 그날 매몰차던 그의 말에 넋을 잃을 정도로 충격 받 은 엘스헤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싸늘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제는 나라의 죄인이 될 자신에게 티아란의 대공전하인 엘스헤른이 연관되는 것을 미리 막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진정 진심을 담아 이제 다시는 보지 않겠 노라고 외쳤다. '지금은 조금,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는 쓴 웃음을 흘리며 벽 쪽으로 빙글 돌아누웠다. 사실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우는 모습을 모니카에게 보이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예감처럼 눈가에서는 눈물이 촉촉하게 스며 나왔다. 아직도 모니카가 부지런히 방 안을 왔 다갔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비앙은 훌쩍거릴 수도 없이 그저 눈물로 젖어드는 베 개를 찜찜해 하며 잠들 수 밖에 없었다. ·‥…━━━━…‥· 다음 날 느닷없이 두 변호사의 방문을 받은 레비앙은 다소 어리둥절함을 떨치지 못했다. 두 변호사는, 어느 고귀하신 분의 부탁을 받고 레비앙의 변호를 하게 되 었다며 자신들의 느닷없는 방문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변호사라 하기보다는 좀 더 학문적인 냄새를 풍기는 교수 같은 타입이었고, 그들 이 가득 짊어지고 온 자료들만 봐도, 대학 같은 곳에서나 볼 만한 것들이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그 변호사들과의 면담 과정에서 레비앙은 또, 전혀 생각 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레비앙이 어젯밤, 꾀죄죄함의 표본으로 생각했던 바 로 그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레비앙 경. 우리, 너무 오랜만이죠?" "루엘 경, 여기는 웬 일이세요?" 이번에는 반가움보다는 당황함으로 그를 맞이한 레비앙은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그에게 우선 자리를 권했다. 웬 일인지 평소의 패션에서 탈피해 깔끔하면서도 정중한 정장을 갖춰 입은 루엘은 레비앙의 변호사로 지정된 두 사람 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먼저 도착하셨군요, 두 분 변호사님. 아카데미 밖에서 만나 뵈니 감회가 새롭습 니다." "여어, 루엘 교수. 오늘은 신수가 훤∼ 한데? 설마, 여기 아가씨를 뵈러 오느라 특별히 신경을 쓰신 건 아니겠죠?" "연구실에서도 좀 그렇게 갖춰 입고 사는 게 어떻겠습니까? 행색이 인물을 다 버 려 놓는다니까." 변호사들이 루엘을 대하는 스스럼없는 태도에 정신이 없는 레비앙에게 그는 해 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비앙 경, 사실은 이 분들, 왕국 아카데미의 동료분들이에요. 비록 학과는 다 르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들입니다. 법학과의 권위 있는 교수님들이죠. 이번 사건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잘 봐달라고 부탁해 볼까 하는 마음에 찾아 왔답니다. 또한, 저도 어떤 고귀하신 분의 명으로, 부족하나마 머리를 더해볼까 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레비앙이 루엘을 보고 있던 시선을 두 변호사들에게로 옮기자 그들은 미소 띈 얼굴들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루엘 교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귀족 재판은 일반 사법 재판과는 좀 다릅니 다. 진행 방식이나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 등에 있어서 해이하게 느껴질 만큼 자 유롭다고나 할까요? 또한 상당히 간소화되어서 귀족 재판소에서 논의를 하다보면 단순한 말다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질 때도 있답니다." 푸근해 보일 정도의 풍채와 덕망 있어 보이는 얼굴을 지닌 로베르 드 트로슈 변 호사가 먼저 운을 띄웠다. 그러자, 전체적으로 수도사 같은 깡마른 분위기에 눈빛 이 매서운 아벨 빌레르트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배 부르고 등 따뜻한 귀족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귀족 재판 소의 소임인 만큼, 그들에게 익숙한 분위기로 변질된 거죠. 저 위대하신 조세프 1 세께서 귀족 재판소를 처음 만드실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랍니다. 국왕께서 먼 저 재판의 안건을 열람하신 후 재판 여부를 판단하시는 것은 그때부터의 관습이 죠." "과거엔 무척 엄숙하고 엄격했었지요. 불과 200년 전의 귀족 재판 기록을 보아도 법정에서 라틴어 외에는 사용되지 않았지요." "과거의 영광이 현재에 와서는 퇴색된 게지. 그만큼 귀족들의 힘이 드세졌다는 말도 되고. 자기들 구미에 맞게 재판 형식을 바꾸어 가다니." 귀족 재판소의 옛 영광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의 가운데로 끼어 들 기 위해 루엘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저래서 순수 과학쪽은 말발이 딸린다니까. 루엘 교수,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 시오. 헛기침은 허영심 높은 귀족들의 집단 수용소인 사교계의 밖에서는 군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랍니다. 더군다나, 우리 같이 영원 한 법학도 앞에서라니요." 에스트르 최고의 귀족, 에스트리온 가문의 장자인 루엘의 출신을 가볍게 비꼬며 빌레르트 변호사가 빙글 날카로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 그다지 적의 는 없었다. 그는 첫인상이 다소 매서웠을 뿐 그다지 호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 다. 긴 얼굴에 알맞게 자리잡아 총기 있게 빛나는 검은 두 눈은 오히려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트로슈 변호사에 비하면 오히려 검사 같은 분 위기를 풍기는 이 사내는 절도 있는 자세로 루엘의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그가 말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루엘은 다소 쑥스러워하며 어리무던하게 미소를 지 었다. "저어, 옛날의 광영을 논하시기 보다, 우선 이번 재판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최초의 공판일이 내일로 잡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두 분께서는 레 비앙 경과 미리 이야기를 나누어 두어야 할 것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럼요! 그거야, 루엘 경께서 갑작스레 등장하신 바람에 지체된 일이지요." 트로슈 변호사는 살이 많은 뺨에 보조개가 폭 패이도록 활짝 웃고는 팔짱을 끼 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건 그렇고, 이번 재판은 상당히 흥미진진할 것 같던 걸요?" 낮은 포물선이라도 그릴 듯 넌지시 던지는 트로슈 변호사의 말에 답해 빌레르트 변호사 역시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얼어 있던 심장을 꿈틀거리게 할 만큼 우리 인텔리들에겐 자극이 되는 재판이라 볼 수 있지." "이번 재판은 최근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형태인데……. 우리들끼리의 말로는 소위 <급진(急診)형>이라고 하지요. 과거를 돌이켜 보면 독재자가 왕위에 오른 때 라든지, 정치적으로 권력이 안정되지 못했던 때에 횡행했던 귀족재판의 형태인데, 판결의 내용을 미리 짜 놓고 일정을 급히 짜서 재판을 진행하죠. 그래서 <급조(急 造)형>이라고도 하고. 우리 에스트르의 역사에 부끄럽게도, 판사들을 매수해 상대 세력을 축출하는 도구로 이 귀족 재판소가 이용될 때가 있었는데 그때 사용되곤 했던 방법이죠." "아, 물론 이번 재판의 판결 내용이 미리 짜여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재 판 일정이 너무 급박하게 짜여 있어 그럴 의심이 보인다는 게지요. 또한, 아까 말 씀드렸다시피 귀족 재판은 국왕 폐하께서 먼저 공소장을 열람하십니다. 그리고 재 판의 여부를 내리시지요. 원고측에서 제시한 공소장에는 이 아가씨의 죄에 몽바종 후작 부인의 명예 훼손 뿐만 아니라 <국왕 폐하를 기만한 죄>라는 항목이 덧붙여 져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이 재판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 죄에 대해 재판 을 붙임으로서 판사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라 명하신 것이고, 판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피고의 패소를 확정 지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루엘이 가운데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빌레르트 변호사가 옆에 앉은 레비 앙을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 아가씨가 성별을 속이고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게 국 왕 폐하를 기만한 죄입니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국왕 폐하께서 자신을 기만한 것에 대해 노하셔서 재판을 고사하고 당장 잡아들이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입니다. 국왕 폐하를 기만한 죄명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하게 패소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원고측에서는 머리를 쓴 게지요. 그것과 더불어 자신들이 진짜로 신경 을 쓰고 있는 <몽바종 부인의 명예를 훼손한 죄>를 함께 성사시키려는 겁니다. 물 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 그런데 뭐가 흥미진진하단 말입니까?!" 중간에 루엘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끼어 들었고, 피고측 회의실은 이내 세 사람이 머리를 마주 대고 나누는 아카데미 풍의 열렬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현장으 로 바뀌었다. "그야, 흥미진진하기 그지없지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찌 국왕 폐하의 반대편 에 서 보겠소?" 빌레르트 씨의 말에 이어 트로슈 씨 역시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인텔리란 권력에 은밀히 반항하는 기분을 알고 있는 법이지요. 아무리 에스트르가 전에 없던 발전을 거듭하고 절대 왕권을 확립하였다고는 하나, 우리 같은 인텔리들까지 해이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신랄하게 혀 끝을 놀려서 국왕께서 방심하지 않으시도록 하는 것 역시 우리들의 역할이 아닙니 까. 이번 일 역시 예외는 아니지요. 국왕 폐하의 명예도 중요하긴 합니다만, 그 분이 지나치게 자신의 명예에 집착할 경우, 영명함을 잃고 냉혹한 독재자로 전락 하게 될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는 그것을 막을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이번 재판에서는 패소한 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두 변호사는 이번 재판을 상당히 즐거워하면서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의 인텔리 의식에 젖은 말을 그냥 듣고 있던 루엘이 또다시 중간에 난입해 한 마디 했다. "국가에 대한 인텔리의 작용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서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패소가 확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여기 피소인(被訴人)인 레비앙 경이 받게 될 형을 최대한 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두 분의 역할입니다. 제가, 우려하여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도 그것을 당부 드리 기 위해서입니다. 두 분이 지나치게 인텔리 의식에 집착한 나머지, 본분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레비앙 경을 변호하여 그를 최대한 보호할 수 있는 판결이 나도록 부 디 노력해 주십시오." 루엘의 긴 말을 들으면서도 두 변호사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엘이 크게 염려하지는 않도록 그의 어깨를 부서져라 툭툭 두드 리며 걱정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 것이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저 간만에 아카데미의 강단에서 벗 어나 진정한 인텔리의 기분에 젖어보는 척 했을 뿐이니까요." 트로슈 씨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깡마른 빌레르 트 씨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학생들만 가르치고 있는 삶이란 지루하기 그지없지. 한 번 씩 이렇게 재판에 서 는 재미라도 없었더라면, 왕국 아카데미 같이 퀴퀴한 곳에 있을 이유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그럼요. 왕국 아카데미는 우리의 루엘 교수 같은 책벌레만 우글거리는 곳이 니까 그런 곳에 갇혀 있는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고루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도 이 번에 빌레르트 교수를 따라 나온 겁니다." "그나마 우리 법학과는 날카로운 토론의 장이 벌어지곤 해서 숨통이 트이지만, 루엘 교수네 순수 과학은 대체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허구한날 실험 실에 틀어박혀서는 대 폭발이나 일으키고. 청소만 하기도 지겹겠소." 두 변호사는 외모의 차이와는 달리 상당히 죽이 잘 맞는 듯 했다. 레비앙은 그 들의 대화에 한 마디도 끼어 들지 못했으나, 루엘에 대한 그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속으로 동감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대 폭발을 일으키고 잿가루를 시커멓게 둘러쓰 고 있을 미남 교수를 떠올리고는 쿡쿡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문득 인텔리들의 이야기가 끊겼다. 루엘은 이 변호사들이 또다 시 만담의 꽃을 펼치기 전에 얼른 재판의 논조에 대한 말을 꺼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좀 접고, 이제 쟁점에 대해 논해봅시다." "아, 이번 재판의 쟁점이라면……." 트로슈 변호사는 가방 가득 챙겨온 종이들을 꺼내 뒤적거리다가 그 많은 종이더 미 가운데 단 한 장을 꺼내더니 만족한 듯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가 채 그것을 펼쳐 읽기도 전에 빌레르트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재판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요. 그 두 가지를 하루에 하나 씩 논의할 겁니다. 하루 안에 한 건씩 해결 안 날 것도 없지, 결말이 다 정해진 싸움이니까. 여기 있 는 아가씨 - 아,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시길. 진짜 아가씨이지 않소? …… 자,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들은 아가씨도 아셔야 할 것들입니다. 아무리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고, 단 3일 안에 판결을 내야 하는 날림 재판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안하고 손 놓고 있어서야, 재판이 무슨 재미가 있겠소." 빌레르트 변호사가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다소 어색하여 레비앙은 조 금 헛기침을 했다. 곁에서 그를 보고 있던 루엘이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빌레 르트 변호사에게 부탁조로 말했다. "빌레르트 교수님, 아가씨라는 호칭은 좀……." "아가씨가 어떻소! 안 그렇소, 아가씨?" 빌레르트 변호사는 대뜸 짓궂은 웃음을 띄고 레비앙을 돌아보았다. 레비앙은 그 와 동시에 자신에게로 쏠리는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냥, 레비앙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제 이름이니까요." "오! 하지만, 재판소에서는 내내 <피고>라고 불릴 겁니다, 아가씨. 호칭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남자로 키워졌다고는 해도, 분명히 여성이니까요." 빌레르트 변호사는 힘주어 말 한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호칭에 대한 논쟁을 접 었고, 그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자 트로슈 변호사는 자신의 기회가 온 것을 즐거워 하며 재판의 쟁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 이만하고, 논점에 관해 정리해 봅시다. 원고측에서 내세울 쟁점 두 가지 중 내일 재판에서 논의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추측한 것이 사실인지 확인 하느라고 좀 수고했죠." "트로슈 교수, 당신이 어제 밤새 왕국 아카데미 법학과 학생들을 시켜서 한 밀정 짓에 대해서는 일일이 털어놓지 않아도 되니까, 얼른 쟁점에 대한 이야기나 아가 씨에게 이야기 해 줘요!" "아무튼, 기를 쓰고 알아낸 우리 학생들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아무리 학점이 걸린 일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열심인 걸 보면 법학과 학생들이 자랑스럽기 그지없 답니다. 우리 법조계의 미래가 어둡지 만은 않은 게지요." "그 녀석들이 알아낸 내용도 다 우리 두 사람이 책상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추 측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았소!" 두 변호사가 잠시 투닥거린 끝에 트로슈 변호사가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 다듬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 보죠. 다음 문제는 다음 번에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 고, 내일 논의될 쟁점부터 의논해 봅시다. 우리에겐 그다지 많은 시간이 없으니 까. 우선은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서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경께서 부 린 난동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쟁점은, <피고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몽바종 후작 가의 파티에서 난동을 부린 의심이 있다.> 입니다." 첫 번째 쟁점이 발표되자 루엘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습니다만, 이 쟁점 역시도 어떻게 발뺌 할 방법이 없겠군요. 레비앙 경이 난동을 부린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렇지요. 게다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몽바종 부인측에서 많은 증인들을 매 수했을 겁니다. 그 자리에는 이미 아가씨의 적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원고 측에서는 이 쟁점을 발전시켜 여기 이 아가씨가 몽바종 후작 부인의 명예를 훼손 했다고 물고 늘어질 게요." 빌레르트 변호사는 짧게 깎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루엘의 의견에 동해 고개 를 주억거렸다. 통통한 손가락으로 종이를 들고 있던 트로슈 변호사는 루엘과 빌 레르트 변호사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리 앞에서 그 종이를 열심히 흔들어 댔다. "이봐요들. 매수당한 증인들의 특징이 뭡니까? 바로 위증과 과장입니다! 그들은 원고측에서 넘겨준 각본대로 사실을 과장한 증언을 할 테지요. 우리는 그걸 막아 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여기 저 당돌한 아가씨에 의해 싸잡아 모욕을 당했던 자들이오. 마음 속에 반감이 있는 자들은 원래 그 감정에 의해 자 신이 모욕당한 상황을 굴절시켜 보게 마련이죠. 과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그 쟁점에 있어서는 논박할 수 없는 상황이오." 빌레르트 변호사의 의견에 부쳐 루엘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 밀고 나가는 건 어떻습니까? 두 분 교수님." "난동을 부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트로슈 변호사가 되묻고 있는 사이, 빌레르트 변호사는 레비앙에게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떻소, 아가씨의 의견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레비앙은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당당히 말했다. "그 모든 것이 계획 하에 실행한 난동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모습을 냉철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던 빌레르트 변호사가 문득 너 털웃음을 터뜨렸다. "법정에서는 간혹 거짓말도 해야하는 법입니다. 아가씨. 선서를 하는 성경 위에 손을 올려놓지 입을 올려놓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손으로는 성경 앞에 진실할 것을 맹세하지만, 그건 그 순간 뿐이지요. 법정은 전쟁터입니다. 말을 무기로 하는 전쟁터요.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말이 라도 하게 되는 겁니다." 트로슈 변호사의 부연 설명을 듣고 있던 레비앙은 머리를 감싸쥐며 곤란한 표정 을 지었다. "뭔가, 복잡하군요. 그러면 저는 법정에서 뭘 해야 하는 거죠?" "그거야, 아가씨의 특기 그대로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예?" 레비앙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트로슈 변호사가 빙긋 웃었으 며 빌레르트 변호사를 대신해 대답했다. "레비앙 경 특유의 그 당당함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그 당당함으로 반대편에 앉아 있을 몽바종 부인과 검사들을 노려 봐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 마도 판사들은 레비앙 경의 당당함을 높이 살 겁니다." 그저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변호사들의 말이 잘 납 득되지 않는지 레비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가 채 그것에 대해 더 물어보기도 전에 두 변호사는 루엘과 함께 머 리를 모으고는 첫 번째 쟁점에 대한 대토론에 들어갔다. 발뺌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손놓고 있을 수 만은 없지. 루엘 교수의 말대로 <어 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밀고 나가봅시다. 몰아붙이는 것은 빌레르트 교수의 특기 니까 맡겨두면 될 거요. 이런, 이런. 나를 무슨 불한당으로 보는 모양인데, 몰아 붙이는 것도 어느 정도 우리에게 요긴한 증언을 해 줄 증인이 확보되어 있어야 되 는 법입니다. 증인을 물색해야 하는 걸까요? 당연한 일 아니겠소. 우리는 원고측 에 비해 상당히 뒤쳐진 상황입니다. 원고측이 상당한 증인을 모은 동안 우리는 증 인 한 명 없는 실정이오. 오전 중에 논점에 대한 정리를 끝내고 오후에는 증인을 물색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원고측 증인들의 명단을 좀 알아내야 할텐데……. 하하핫, 이번에도 우리 법학과 학생들을 풀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꽤 영특한 녀 석들이 많아서 좋은 걸 물고 올 겁니다. 가을 학기 학점을 걸어 보는 건 어떨까 요? 이런, 이러다가 법조계의 큰 별을 양성하는 게 아니고 스파이계의 거물을 양 성하는 꼴이 되겠소. 세 사람의 이야기는 한 데 뒤섞여 누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를 정도였다. 레비 앙은 트로슈 변호사가 말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며 책상에 가만히 턱을 괴었다. 내일은…… 재판이 시작되는 날이다. ·‥…━━━━…‥· 요 며칠동안 내내 흐리던 날씨는 간 데 없이 새파랗고 아름다운 하늘이 귀족 재 판소의 뾰족한 고동색 지붕 위로 펼쳐져 있었다. 이렇듯 완벽한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요 며칠간의 사교계를 후끈하게 했던 사건 때문인지 귀족 재판소의 방청석 은 수많은 귀족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 방청객들 때문에 법정 안은 그녀들이 뿜어내는 각종 향수 냄새와 분 내음으 로 가득 차 숨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것저것 뒤섞인 귀족들의 향내는 오히려 악취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이렇듯 재판을 방청하러 오면서까지 그녀들은 옷 차림에 각별하게 신경을 썼는지, 엉덩이를 상당히 부풀린 드레스들의 충돌로 인해 여기저기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방청석의 여인들은 분봉을 하는 벌 떼처럼 마구 웅성거렸고, 부채를 파닥이고,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끔찍해.' 수 백 명의 시선을 동시에 받으면서 레비앙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재판정은 정면의 판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원고석과 피고석이 삼각형을 이루며 놓여 있었고, 그 한 꼭지점에 레비앙은 두 변호사들과 함께 착석하고 있었다. 판 사석에는 한 명의 주석 판사와 두 명의 차석 판사가 자리했으며, 레비앙이 앉은 피고석 맞은 편인 원고석에는 몽바종 부인과 두 명의 검사가 뭔가를 논의하는 듯 머리를 맞대는 중이었다. 법정 내부는, 간만의 화창한 날씨로 투명한 노란색의 햇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 다. 그 청명하고 맑은 분위기에 취해 평소 같으면 깊고 평온한 감상에 빠질 법도 했으나, 레비앙은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혼이 달아날 만큼 정신이 없었다. "개정하겠습니다." 주석 판사의 개정선언에 이어 나무망치 소리가 동그랗게 들려왔다. 그제서야 시 끄럽던 법정은 다소 조용해졌다. 여지껏 귀를 괴롭히고 있던 소음이 잦아든 가운 데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어제 두 변호사가 일러준 대로 자신이 할 수 있 는 최대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빛이 들어오는 쪽에 앉은 그는 햇살이 자신에게 가득 맺히는 것을 느끼고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재판이 시작되었다는 긴장을 느끼기보다는, 어쩌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따 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그는 초록색의 선명한 눈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눈 앞, 얼 마 떨어지지 않은 책상의 건너에는 황색의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몽바종 부인이 앉아 있었다. 옷차림에 대해서라면 레비앙은 몽바종 부인에 비해 그다지 모자람이 없었다. 모니카가 새벽같이 일어나 정성껏 챙겨준 하얀색 정장은 그의 가장 순수 한 본질을 드러내 줄 듯 깔끔해 보였다. 더군다나 지금 햇살을 받고 있어 눈부시 기 그지없는 하얀색의 모자는 햇빛이 바스러질 듯 산란되는 붉은 머리카락과 어울 려 최고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레비앙은 콧대 높인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몽바종 부인을 향해 사심 없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판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검사는 판사석 앞에서 공소 요지(주 - 공소장에 의한 기소(起訴)의 요지, 즉 피고인이 원고에 의해 기소된 이유와 경 위 등을 요약한 내용)를 진술하고 있었다. 하품이 날 정도로 지루한 이야기는 그 날 파티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상당히 과장되었 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검사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방청석을 훑어보고 있던 레비 앙은 문득 눈 앞에 보이는 쪽의 방청석이 아니라 등 뒤쪽의 방청석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미 그가 눈 앞의 방청석 쪽은 이미 다 살핀 이유도 있었 으나, 등 뒤에는 왠지 그리운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비록, 그가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그의 그러한 생각대로, 뒤쪽에는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서 평범한 귀족의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 평소 같으면 변장이 잘 먹 힐 리가 없겠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으므로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리하르트와 랑쥬 공작 부인이 아르떼이유 후작을 모시고 와 있었다. 주 목 할만 한 것은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소문의 또 다른 주인공이 참석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레비앙의 얼굴이 보이는 쪽으로 가겠노라며 억지를 부리다가 사촌 동생인 제롬의 손에 팔을 살짝 꼬집히기까지 했다. 길고 지루했던 사건 설명이 끝나고 법정은 심리에 들어갔다. 그 전에 피고측에 서 간단한 입장을 밝히는 최초의 피고인 진술이 있었지만, 레비앙 대신 트로슈 변 호사가 일사천리로 해치워버렸다. "우선, 기소된 내용의 일부에 이의를 신청하며, 그 사건이 여기 피고에게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귀족 재판소에서는 피고인 진술을 피고 본인 대신 변호인이 하는 것이 가능했으 나, 트로슈 변호사의 진술을 듣자니 레비앙은 스스로 진술하지 않은 것이 아쉽게 생각될 정도였다. 트로슈 변호사의 느릿한 진술은 그 한 마디가 끝이었다. 일차적인 피고인 심문은 귀족 재판의 특성상 생략되었다. 그 부분이야말로 어제 두 변호사가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했던 귀족 재판의 변질에 관한 것이었다. 귀족 들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서 자주 심문 받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고 꺼려했다. 심 지어 최초의 피고인 진술을 본인이 아닌 변호사에게 맡겨버리는 관례가 생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남 말 하기는 좋아하면서 자신의 변호는 귀찮아하다니, 대체 귀족들은 머릿속이 어찌 생겨먹은 족속들이야? 어제 피고 회의실에서, 평민 출신으로서 교수의 자리 까지 올라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왕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된 빌레르트 변호 사가 그리 지껄이자 트로슈 변호사가 자신의 통통한 머리를 들이밀며, 이 머리를 갈라 보는 건 어떻습니까? 라고 농담했던 것이 떠올라, 레비앙은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본격적인 심리가 열림과 동시에 증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양쪽 진영의 증인들이 하나씩 소환될 예정이었으나, 레비앙은 아직 피고측 증인이 누구인지 듣지도 못했 을 뿐더러, 과연 있기나 할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곁에 앉아있는 두 변호사가 이론에만 능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제의 토론 현장을 분명히 목격한 고로, 또다시 인텔리 운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측에서 요구한 증인이 들어와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을 말할 것을 선서한 후, 검사가 묻는 의례적인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증인은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 참석했습니까?" "네." "파티에 참석해서 때 증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친구들과 간식을 즐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죠. 소란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해 보니 아르떼이유 경이 부인들을 모욕하고 있었어요." 레비앙은 저 여자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 곳에 있었는지,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났다. 분명히 지금 그녀는 레비앙에게 불리한 증언 을 하고 있었으나, 레비앙은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오늘 검사가 들고 나온 쟁점은 어제 변호사들이 일러주었던 그대로, <피고 레비 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몽바종 후작 가의 파티에서 난동을 부린 의심이 있다.> 였다. 그렇다면 저 증인은 그날 난동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떠한 기준 으로 선출되었는지, 대체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기나 한 지 레비앙은 궁금했다. 그녀는 중년의 부인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텅 비었을 것 같은 화려한 생김새에 비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잘 하고 있었다. "오오, 이런! 지나치게 각본을 잘 외우면 표가 나게 마련이라고." 빌레르트 변호사가 자기 선조들의 고향인 프로이센 사투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레비앙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프로이센 사투리라면 그곳 출신인 아르떼이 유 가의 시종장 필립과 그의 딸이자 레비앙의 시녀인 모니카가 타의 추종을 불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비앙은 단번에 빌레르트 변호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런, 아가씨. 아무리 귀족재판소가 해이해졌다고는 하지만, 법정은 신성한 곳 이야. 피고가 벌써부터 웃고 있다니." 소리를 낮춘 투박한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레비앙 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웃음이 나서……." "어라? 프로이센의 사투리를 안단 말이지? 잘 되었군요. 아가씨. 앞으로는 수시 로 암호를 주고받아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빌레르트는 콧등을 찡긋하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곧 증인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녀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레비앙 역시 그녀가 무어라 고 하는지 들어보려 했으나, 검사의 질문에 꼬박꼬박 너무나도 잘 대답하는 그녀 를 보고 있으니 정신이 산만해 마음은 창 밖으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졸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으나, 이대로라면 졸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변호사측, 반대 심문해 주십시오." 판사의 요청에 벌떡 일어난 사람은 레비앙의 왼쪽 곁에 있던 빌레르트 변호사였 다. 그는 특유의 긴 코를 추켜세우듯 들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증인석을 향했다. 증인석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증인을 보는 대신 약간의 침묵을 할애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좌중을 훑었다. "저런, 빌레르트 교수, 특기가 나왔군. 저 찬란한 쇼맨쉽이라니." 트로슈 변호사의 적의 없는 비아냥거림이 끝나자 마자, 다소 소란스럽던 방청석 은 빌레르트 교수의 눈빛 하나로 제압되고 모든 시선에 그에게 쏠렸다. 방청석을 잘 다스려놓은 빌레르트 교수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관객들의 시선을 후광처럼 받으면서 증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증인은 그 파티에 누구와 동행했습니까?" "아, 남편과 동행했어요." "파티에서 증인은 내내 남편과 함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곧 친구들의 무리에 섞이게 되었죠. 남편은 남편대로 신사들과 어울 리구요." "아, 그렇군요. 그럼 친구인 부인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겠군요." "네." 평이한 톤으로 묻고 있던 빌레르트 변호사의 말투가 일순 은근해졌다. "증인은 친구들과 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나, 남편 이야기, 요즘에 흥미로워 하는 것들……." 증인이 이것 저것 열거하는 말 중에 요긴한 것이 나오지 않았는지 변호사는 그 녀를 재촉했다. "또?" "예?" "또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그 외의 다른 이야기는……." 끝을 흐리는 대답과 함께 증인은 가만히 눈을 들더니 변호사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걸려들었음을 직감하고는, 여지껏 은근하던 목소리를 높여 방청석 끝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말했다. "가령, 이 즈음 파다하게 퍼져있던 소문에 관한 것이라든지요." "이의있습니다! 변호인은 지금, 증인에게 심리적 불안을 부추기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원고측 검사가 단번에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주석 판사가 그를 저지했다. "이의를 기각합니다. 변호인 증인 심문을 계속해 주세요." 얼핏 보기에도 그저 목소리만 커졌을 뿐 증인에 대한 공격이나, 별다른 속뜻은 없어 보였으므로 검사측의 이의는 기각되었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판사에게서 등 을 돌린 채 방청석을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그 시선을 다시금 증 인에게로 향했다. "간단히 예, 아니오로 대답해 주십시오." 온화하게 증인을 구슬린 빌레르트 변호사는 방금과는 달리 상당히 빠른 투로 물 었다. "증인은 요즘, 증인이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파티나, 오페라나, 극장 등에 서 한 번씩은 떠들었던 그 소문에 대해서,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증인으로 하여금 교묘하게 자신의 행동이 대중들 속에 묻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언변은,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으나 증인의 대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 예."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증인 외의 다른 사람들도,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 장에서 그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그, 그래요. 워낙 유명한 소문이니까요." "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이끌어낸 증인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빌레르트는 긴 코를 드높이 치켜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 증인이 소환되었고, 검사측 심문의 내용은 종전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피고측 진영 역시 그랬다. 적절한 말의 속도와 언변으로 변호사들은 앞의 증인에 게 했던 그대로를 묻고 바로 그 대답을 받아냈다. 그 외의 별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원고측의 검사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재판의 논조는 그들이 불러들인 증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피고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는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 참석해 많은 사람들을 심각하게 모독하 고, 파티가 중단될 정도의 난동을 부렸다. 이는 원고 몽바종 후작 부인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일이며, 더불어 그가 행한 몽바종 부인에 대한 폭력적인 언사도 부인 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무리 그들에게는 승소가 약속된 재판이라고는 하지만 불러들인 증인들이 하는 말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모여 입이라도 맞춘 양 하나같이 똑같았다. 법정이라 는 무대는 순식간에 연극이 공연되는 무대처럼 변했고, 검사와 증인들은 배우라도 된 양 맡은 바 대사를 멋들어지게 지껄여댔다. 이에 비해 피고측 변호사들은 무엇을 할 요량인지 예상도 못할 정도로 증인 심 문을 간결히 했고, 심문의 내용도 한결 같았다. "그 파티에서 남들도 다 이야기하는 그 소문에 대해 한 번쯤은 담소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변호사들은 이 질문에 대해 "예."라는 대답만 받아내면 만족한 듯 자리로 돌아 가곤 했다. 재판은 상당히 지루했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연신 하품을 했고 조는 이도 없지 않았다. 증인을 법정으로 출두시킬 때마다 방울을 울 리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이들의 잠을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음 증인 출두하세요." 차석 판사의 목소리에 이어 열 두 번째로 방울 소리가 들리고 지금 껏과 다를 바 없이 증인이 증언대에 올랐다. 형식적인 증인 심문 수속인 선서를 하기 위해 성경 위에 손을 올려 놓은 증인은 "증인은 신의 이름과 말씀 앞에 진실 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라는 질문에 맑고도 청량한 목소리로 "예. 신의 이름과 말씀 앞에 진실만을 말 할 것을 맹세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치 천사가 강림하여 노래하는 듯한 그 목 소리는 레비앙에게는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그는 고개를 반짝 들어 증언대에 올 라있는 여인을 살폈다. 목소리 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로 함뿍 쏟아지는 빛무리 에 둘러싸여 자태마저도 천사 같은 그녀는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였다. 아이린이 증인석에 앉고 나서는 변호사측에서도, 검사측에서도 질문의 양상이 다소 달라졌다. 그녀는 피고측에서 소환한 유일한 증인이었고 여지껏 법정의 논조 를 쥐고 있던 각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검사측에서는 다소 긴 장하고 있었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아이린에게 그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아무리 거짓말을 한다해도 믿어줄 법한, 진실이 가득 담긴 눈을 들어 판사석과 빌레르트를 쳐다보고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파티장은 상당히 소란스러웠고 복잡했습니다." "그날, 증인이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비앙 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증인은 그가 그 곳에 갈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레비앙 님이 참석하실 거라는 소문이 아침부터 벨라시그네에 파다했기 때문에 굳이 알아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 벌써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 참석할 거라는 소문이 나 있었군요?" "네, 사람들은 상당히 흥미로워 했어요. 레비앙 님은 최근 사교계에서 입방아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소문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벨라시그네에서,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을 들 으셨습니까?" "벨라시그네에서 젊은 귀족들은 몽바종 후작 부인이 레비앙 님을 미끼로 사람들 을 끌어 모으는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카페든 길거리에서든 어디에서 든 들을 수 있었어요."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당당한 아이린의 증언을 끊으며 검사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졸고 있던 사람들도 눈을 번쩍 뜰 정도였다. 본인 역시 스스로의 목소리에 다소 놀랐는지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 말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인의 증언은…… 검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훗, 말도 안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빌레르트 변호사의 증인 심문을 지켜보고 앉아 있던 트로슈 변호사가 특유의 볼 록한 배를 울렁거리며 나직히 웃어댔다. 웃는 이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검사의 느닷없는 고함으로 깨어난 방청석에서도 웃음이 번져 나왔다. 또한 야유의 목소리 도 드높았다. 검사의 이의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었다. "원고측 이의를 기각합니다. 피고측 변호사, 심문 계속해 주십시오." 단호한 차석 판사의 목소리에 이어 마치 혼잣말 같이 나직한 프로이센 사투리가 들려왔다. "숨길 걸 숨겨야지. 여기에 모여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검증되지 않 았다며 입을 틀어막으려 하다니." 빌레르트 변호사가 홀쭉한 얼굴을 살풋 찡그리는 짓궂은 표정으로 검사와 몽바 종 부인의 뻔뻔한 얼굴을 쳐다봐 주었다. 원고측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투박하 고도 촌스러운 어투에 어리둥절해 하는 기운이 역력했다. 하지만 방청석의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듣고 통역해서 옆 자리에 퍼트리곤 했다. 방청석에는 또다 시 뭉근한 웃음이 일었다. "다행이로군요. 레비앙 경. 원고측에서는 아무도 우리 빌레르트 변호사의 암호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트로슈 변호사는 레비앙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웃음에 답해 레비앙 역시 조금 웃어주었으나 이내 그는, 술렁이는 방청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투리 쓰는 것에 대해서는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지 몰라." 검사측의 연이은 이의 제기에 대한 트로슈 변호사의 빈정거림은 곧 계속된 빌레 르트 변호사의 증인 심문으로 인해 묻혀버렸다. 빌레르트 변호사가 계속 아이린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안 레비앙은 슬그머니 뒤 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시선으로 방청객들을 죽 훑다 말고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랑쥬 공작 부인과 할아버지 아르떼이유 후작이었다. 랑쥬 후작부인은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레비앙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바로 앉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문득 시야를 스치는 사람이 있어, 그는 다시금 뒤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멈춘 곳에는 싸늘한 분위기를 피워내는 남자가 줄곧 이쪽을 쳐다보 며 앉아 있었다. 레비앙은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바다거품 같은 하얗고 커 다란 깃털이 달린, 연한 하늘색의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으나 그 아래로 아름다운 잿빛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깨끗한 겨울의 공기를 대하는 것 같은 청명 한 아찔함에 레비앙은 소름이 끼칠 것만 같았다. 저 사람의 깊은 눈동자가 지금껏 그래왔다는 듯,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내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먼발치 여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레비앙은 그에게서 지독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 다. 잘 알아볼 수는 없는 연한 무늬가 수놓아진 연하늘색의 예장은 화려하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글퍼 보이는 색채였다. 이 나라에서 국왕 다음으로 최고 권력을 가진 그 남자는 자신의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이 재판에 참석해 있었다. 레비앙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이 곳에 온 단 하나의 이유는 오로지 자신을 보기 위해서임을. - 이제……, 너를 만나지 않겠어. 저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그 말이 눈처럼 싸늘한 앙금이 되어 가슴 속에 쌓 인다. 저 사람을 볼 때마다, 혹은 생각할 때마다 차곡차곡 쌓일 그 눈은 영원히 녹지 않을 얼음이 될 것이다. '미안해…….' 마음의 언어는 말하지 않아도 전달될 수 있을까? 거짓말은 입에 담을 수는 있지 만 마음에 담을 수는 없다. 마음 속에 있는 단 하나의 진실, 이 미안함을 전달하 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가로막고 있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나를 둘러싼 많은 비밀들과 많은 가식들로부터……. 그것 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너에게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는지도 몰라. 하 지만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은 떨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워. 혼자서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나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혼자서 점점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 이제는 이미 네 손을 잡기엔 너무 깊은 곳에 다다라버린 거야.'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곧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을 주 시하고 앉았다. 자세를 가다듬은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아이린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 소문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했고, 레비 앙 님의 뒤에서 떠들어대기를 즐겼습니다. 저는 레비앙 님의 일행이 아닌 채 파티 에 참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 다." 아이린에 대한 심문은 다소 길었다. 검사측에서도 그녀에게 많은 질문을 했기 때문에 가녀린 그녀는 조금 지쳐 보였다. 하지만 진실함이 가득 비쳐나는 아름다 운 연록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피고가 난동을 부렸느냐는 검사측 질문에 아이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난동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난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보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합니다." "증인은 묻는 말에만 답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재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어째서 재판에서 는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고 난 후에는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더 들 으려 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증인석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닌, 아이린의 당당한 대꾸에 검사는 살짝 인상을 찌 푸렸다. "오! 천사인 줄로만 알았더니 상당히 용기 있는 아가씨로군." 피고석에서는 빌레르트 변호사의 사투리가 나직히 들려왔다. 트로슈 변호사는 판사석을 살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증인이 한 의미심장한 말을 판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증인은 증언을 계속해 주십시오." 연륜이 느껴질 정도로 하얗게 늙은 주석 판사의 목소리였다. 트로슈 변호사는 비록 작은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체면과 장소도 잊고 "아자!"라고 외치며 즐거워했 고 빌레르트 변호사 역시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존엄하신 재판장님." 검사가 항의를 하고 나서자 주석 판사가 손을 올려 그의 말을 중지 시켰다. "좀 더 들어보는 것이 좋겠소. 증인, 계속하시오." 다시금 주석 판사의 허락이 떨어지고, 아이린의 투명한 목소리가 천천히 법정 안을 채웠다. "레비앙 님은, 난동을 피우기보다는 사람들의 모욕에 맞서 보복을 한 것입니다. 소문을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태도는 레비앙 님을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듯 해 보였고, 간혹 경멸이 섞인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사자였다 하더 라도 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집단으로 행한 무례는 용서가 되고, 혼자 서 그 무례에 맞선 사람의 행동은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은, 학문이 깊지 못한 여 성인 제가 봐도 불공평합니다. 하물며 이러한 법정에서 그것을 정당화시키려 함은 무슨 연유인지 소견이 짧은 저로서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레비앙 님을 적대하시는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 다. 만일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을 둘러싸고 험담을 일삼는 그 상황에 처한다면 말입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을 마쳤다. 검사는 기가 찬 듯 더 묻지도 않았다. "양쪽, 증인 심문이 끝났습니까? 그러면 증인은 퇴장해 주십시오." 차석판사 중 한 명이 시키는 대로, 아이린은 치마 자락을 살짝 쥐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증언대의 계단을 사뿐한 걸음걸이로 내 려가 긴 통로를 걸어 법정을 나갔다. ·‥…━━━━…‥· "확실히 변호사의 기질이 있어!" 트로슈 변호사는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며 누군가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 고 있었다. 첫날 심리가 끝난 이래 그가 줄곧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오늘 낮에 그토록 진실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녀, 아이린이었다. "단 한 번의 증언으로 열 한 명 증인의 증언을 무색하게 하다니, 이것으로 오늘 심리는 거의 비긴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의도대로, 아이린 양은 그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확고히 해 주었습니다. 물론, 빌레르트 교수가 열 한 명의 증인으로부터 받아낸 소문에 관한 증언도 효과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아 아, 아이린 양은 정식으로 법학을 공부한다면 틀림없이 희대의 여성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이것 봐요, 트로슈 교수. 영특한 제자들은 왕국 아카데미에도 많다면서요?" 빌레르트 변호사가 언제나처럼 비꼬자 트로슈 변호사는 잘 부푼 빵처럼 통통한 두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지요. 왕국 아카데미의 영특한 제자들은 이름을 날려봤자 이 좁은 에 스트르 안에서 저희들끼리 오십 보 백 보일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윈저 양은 역 시 심상치 않은 자질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고향도 영국이라고 하니, 우리에게 < 영국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여성 변호사 아이린 유지니아 윈저 양의 스승> 이라는 직명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꿈 깨시오!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니오." 빌레르트 변호사의 비아냥거리는 외침에 흥이 깨졌는지 트로슈 변호사는 거대한 몸을 털썩 의자에 앉혔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들썩거려 빈약한 빌레르트 변호사 는 멋지게 턱을 괴고 있던 자신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겸연쩍은 몸짓으로 자 세를 바로 하고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자, 제 2차 작전 회의나 시작합시다. 아무래도 내일 심리할 쟁점에 대해서는 다 소 까다롭기 때문에 재판이 하루 쯤 더 연장될는지도 모르겠소. 그런데, 오늘은 루엘 교수께서 좀 늦는구려." "아, 루엘 경께서 오늘도 오시기로 했습니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비앙이 문득 끼어 들었다. 두 변호사는 당연하 지 않느냐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 트로슈 변호사가 한 마디 했다. "루엘 교수께서는 우리의 토론이 너무 학문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중간에 적절 히 제재를 가해주니 우리들에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는 아까 만나볼 사람이 있다고 조금 늦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 동생분을 만나본다고 그러 던데……." "루엘 교수의 동생분이라면, 티아란 대공 전하?" 타인의 대화 속에서 그 직함만 듣고도 레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하며 고개 를 떨구었다. 엘스헤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태연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였다. "이런, 그 분도 함께 오시면 좋을 텐데 말야. 안 그런가요? 아가씨." 레비앙의 표정을 잘 살피고 있던 빌레르트 변호사는 짓궂게 질문을 던졌다. 레 비앙은 그다지 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테이블 위에 깍지를 끼고 올려둔 자신의 손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씨 가 된 모양인지 잠시 후에 등장한 루엘은 엘스헤른까지 이 방에 데리고 왔다. "아무리 귀족재판소의 기강이 과거에 비해 해이해졌다고는 하나, 이거야 원, 너 무하지 않습니까? 위대하신 조세프 1세께서 귀족재판소를 설립하실 때, 귀족재판 소에 따로 격리되어 있는 피고의 면회를 엄격히 제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아가씨는 너무 많은 사람들과 면회를 하는군요." 상대가 티아란의 대공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은근히 비꼬는 빌레르트 변호사에게 엘스헤른은 깎듯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이라고 합니다." 그는 정중한 목례와 함께 악수를 청하러 손을 내밀었다. 비꼬던 말투와는 달리 은근히 흐뭇해하며, 엘스헤른이 내민 손에 악수를 하려던 빌레르트 변호사는 갑자기 온몸으로 달려드는 트로슈 변호사에 의해 밀려났다. "이렇게 지척에서 뵙게 되오니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티아란 대공 전하. 저 는 왕국 아카데미의 법학과 교수이자 이번 사건의 보조 변호사 로베르 드 트로슈 라고 합니다." 트로슈 변호사는 엘스헤른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잡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하지 만 떠밀렸던 빌레르트 변호사의 매서운 눈총을 뒷통수로 느꼈는지 두 세 번을 더 흔든 후에는 고이 물러났다. 트로슈 변호사가 출렁거리는 몸을 움직여 옆으로 비 켜주자 깡마른 빌레르트는 엘스헤른이 여전히 내밀고 있는 손을 잡고 절도 있게 몇 번 흔들었다. "아벨 빌레르트라고 합니다. 아까 법정에서 보셨을 겁니다." "예, 훌륭하신 심리 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오! 대공 전하께서는 여기 이 아가씨를 보고 계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던 게 아 니구요?" 빌레르트의 가시 섞인 농담에 엘스헤른은 한 방 먹은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님들의 고객이 참 아름다워서 도저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 릴 수가 없었습니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의외로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엘스헤른에게 놀랬는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트로슈 변호사를 돌아보았다. 트로슈 변호사 역시 웃음 띈 얼굴 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 여러분. 농담은 접어두고, 내일 있을 심리에 대한 작전회의를 서둘러야 하 지 않겠습니까? 모두들 자리에 앉읍시다." 루엘의 중재로 자리가 정리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모두들 착석하고 나 서야, 엘스헤른은 레비앙을 쳐다보며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레비앙 경." 비록 존대를 하고는 있으나 더없이 온화하고 따뜻한 그의 말투는 레비앙을 놀라 게 했다. 행여나 다시 대면하게 되었을 때 엘스헤른이 보여줄 반응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이유였다. 엘스헤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 다는 듯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굴고 있었다. 당황한 레비앙은 대답 대신에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떨구었다. "이봐요, 아가씨. 너무 부끄러워 할 것 없소. 여기 있는 모두다 두 분의 사이에 대해 자초지종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빌레르트 변호사의 입에서 <아가씨>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오자, 엘스헤른은 습 관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레비앙이 실제로 여성이라고는 해도 그가 여지껏 얼마나 저 말을 싫어해 왔는지는 엘스헤른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 빌레르트 변호사님. 아가씨라는 호칭은 좀……." 엘스헤른이 웃으면서 하는 말을 갑자기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괜찮습니다, 빌레르트 변호사님. 좋으실 데로 부르세요." 말을 마친 레비앙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눈을 내리깔고선 줄곧 자신의 손 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싸늘한 태도를 보며 엘스헤른을 제외한 세 사람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가장 눈치 빠른 빌레르트 변 호사가 빙긋 웃으며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이런, 두 분 싸우셨군요. 티아란 대공 전하 같은 높으신 분께도 이러한 고 민이 있을는지는 몰랐습니다. 이유 없이 토라지는 여인은 사내에게는 때로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당히 난감하게 하는 문제가 되기도 하죠." "예, 지금 저의 가장 큰 문제랍니다. 티아란을 통치하는 문제는 오히려 저 사람 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빌레르트 변호사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평온한 웃음까지 지으며 대꾸 하는 엘스헤른이 레비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레비앙이 진심을 담아서 말 한 절교선언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마치 자기 애인이라 도 되는 양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레비앙의 기분을 상당히 거슬리게 했다. 레비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모니카에게 좀 다녀오겠습니다. 재판 끝나고 숙소에는 들르지 않아 서 아마도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그가 찬바람이 날 정도로 매몰차게 회의실에서 나가버리자, 엘스헤른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한 마음이라도 된 듯 은근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응원했다. "잘 하고 오십시오! 대공 전하." "대충의 문제는 저희들이 알아서 의논해 둘 테니, 아가씨 마음이나 잘 풀어 주십 시오. 재판에 임하려면 편안한 마음이 갖춰져 있어야 할 테니까." "엘스, 네가 얼른 레비앙 경을 구슬려 보내줘야 좀 더 알찬 2차 회의를 할 수 있 을 것 같구나. 가서 힘 써 보렴." 평소 숙맥이라고 그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루엘까지 한 마디 덧붙였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엘스헤른은 몸 둘 바를 몰라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자, 그러면 우리들은 내일 심리할 두 번째 쟁점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빌레르 트 교수님, 얼른 말해 보시지요." "아, 두 번째 쟁점은 짐작하고 계시다 시피 <피고는 실제의 성별을 속이고 왕태 자 전하의 시종직에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위 사실이 국왕 폐하를 감히 기만한 죄에 해당하는 의심이 있다.>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건 국왕 폐하께서도 은근히 인정하셨으리라 추측되는 죄에 해당됩니다. 재판 허락이 났다는 것으로 봐 도 검사측에서 제출한 이 쟁점에 대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 다. 아니면, 다른 깊으신 뜻이 있으시던가요." "깊으신 뜻이라?" "꿍꿍이속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스트르의 다시 없을 명군이라 칭송 받 으시는 국왕 폐하께서 자신의 찬란한 치정의 역사에 오점이 될 날림 재판을 허락 하셨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분의 명예와도 직결된 일입니다. 그러니 허락할 수 밖 에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것은 외적인 관점일 뿐이죠. 어찌되었건, 판사단에서는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 주고 있습니다. 검사의 이의 신청을 매번 기각해 주지 않습디까? 우리 쪽의 패소가 거의 명백한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의실을 나서는 엘스헤른의 등 뒤로 왕국 아카데미 풍의 활발한 토론 분위기가 펼쳐졌다. 엘스헤른은 그들이 열 띈 토론의 장을 벌인 이유가 존엄하신 대공 전하 께서 더 이상 부끄러워하실 필요가 없도록 배려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달 음에 회의실에서 나와 레비앙이 간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크게 애쓸 것도 없이 한 군인과 함께 복도의 저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엘스헤른은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왕비 전하께서 신신당부한 티아란 대공 으로서의 체통을 생각해 입을 꾸욱 다물고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쫓았다. 어느새 레비앙을 따라잡은 엘스헤른은 갑작스러운 자신의 등장에 흠칫 놀라는 레 비앙을 보고는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례지만, 레비앙 경.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레비앙의 인상이 살풋 구겨졌다. 그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싸늘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대공 전하. 저의 호위는 소르바스 대위가 항상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레비앙의 뒤를 따르던 소르바스 대위는 홀연히 나타난 남자를 대공 전하라 칭하 는 레비앙의 말을 듣고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세가 흐트러질 뻔 했다. 그 러나 그는 군인다운 인내심으로 위기를 모면해 낸 후, 절도 있는 걸음을 옮기며 말로만 듣던 티아란 대공 전하를 흘깃 곁눈질했다. 그런데 문득, 그 대공전하라는 사람이 뒤를 쳐다보며 딱 걸음을 멈추더니 그에게로 몸을 돌려 정중히 목례까지 하는 게 아닌가! "소르바스 대위라 하셨습니까? 나는 티아란 대공,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 입니다." 소르바스 대위는 당황함이 역력한,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왕궁 귀족재판소 직속 위병대 소속, 대위, 오웬 드 소르바스입니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아, 귀족재판소 직속 위병대 소속이라면 모를 수도 있죠. 그런데, 레비앙 경의 호위를 맡고 계시다구요?" 엘스헤른이 웃으면서 친절히 건네는 말투에도 소르바스 대위는 여전히 굳어서는 군인 특유의 딱딱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 사람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재판 기간 동안 아무쪼록 잘 돌보아 주십시오." 엘스헤른은 진실이 담기기는 했으나 조금은 능청스럽게 소르바스 대위에게 단단 히 당부를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 던 레비앙은 대위가 보고있다는 생각도 할 겨를 없이 코웃음을 친 후, 빠른 걸음 으로 그들을 두고 걸어 가버렸다. 엘스헤른은 거칠게 도망가고 있는 레비앙의 뒷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으면서 소 르바스 대위에게 명했다. "대위는 지금부터 레비앙 경과 내가 하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호위를 하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명령입니다." 그는 얼떨떨해 하는 소르바스 대위의 어깨를 툭툭 쳐 두고는 곧 레비앙을 따라 잡았다. "레비앙." 이번에는 소르바스 대위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이, 엘스헤른은 대뜸 그의 이름 을 불렀다. 이미 소르바스 대위는 지엄하신 티아란 대공 전하의 명령으로, 잘 보 이면서도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뒤로 물러선 후였다. 엘스헤른은 자꾸만 도망치려 하는 레비앙을 붙들어 자신에게로 돌려 놓았다. "레비앙, 우리 이야기 좀 해." 엘스헤른으로서는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으나, 레비앙은 그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이것 놔. 잊었어? 나는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했어." "그 맹세라면 네가 먼저 깨었으니 이제는 무효야. 아까 법정에서 네 뒤에 있는 나를 보았잖아." 엘스헤른의 말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레비앙은 또 다른 말로 그를 쏘아붙였다. "사람 있는데서 이게 무슨 짓이야?" "소르바스 대위라면 우리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곳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하지 말아. 그리고, 내가 너를 저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변호사들도 루엘 형님도 이쪽으로는 나오지 않을 거야. 혹시 모르지, 몽바종 후작 부인의 밀 정이 어디엔가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레 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만 천하에 모두 밝혀진 판에." 재빠른 엘스헤른의 논지에 레비앙은 질렸다는 듯 그만 입술을 깨물고는 그를 노 려봐 주었다. 그러나, 엘스헤른은 절대로 지지 않고 그의 초록색 눈을 똑바로 쳐 다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노려봐도 소용없어. 네가 나를 만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이제 절대로 믿지 않기 로 했으니까. 만나주지 않는다면, 어디든 내가 찾아가서 널 찾아내면 돼." 막무가내로 구는 그를 대하며 극도의 피로를 느낀 레비앙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탁 쳐서 떨쳐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런 이야기로 다투고 싶은 마음 없어. 지금은 몹시도 피곤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피곤하리라는 것 알아. 하지만, 레비앙. 나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엘스헤른은 잠시 허허로워졌던 두 손을 올려 또다시 그의 어깨를 붙들며 절실하 게 외쳤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두 눈을 번갈아 살피던 엘스헤른은 그를 품으로 깊히 끌 어안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레비앙이 푸드득거리는 싱싱한 생선처럼 품 안에서 아둥바둥 날뛰고 있었으나, 그는 힘주어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소르바스 대위가 보고 있단 말야! 이것 놔! 놓으라구!" 레비앙의 숨막히는 목소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숙여 붉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레비앙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나를 버리지 말아 줘, 레비앙. 부탁이야. …… 남자는 때로 너무 약해서 여자에 게 기댈 수 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 아니, 어 쩌면 인정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나는 말야, 레비앙. 너무 어리석고 별로 강하 지도 못해서 너에게 기댈 수 밖에 없어. 그 사실을 줄곧 인정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너의 곁에 있는 나만이 진정한 나인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넌 저만치 도 망을 간 후였어. 내 진심을 말했을 때는 더더욱 멀리 달아났지. 하지만, 어떡하 지? 너는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낮지만 힘있는 그 목소리는 심하게 비척거리던 그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레비 앙은 일순 멍해진 기분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을 발 견했다. 싸늘한 늦가을의 날씨에 이렇게 따뜻하고 커다란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니, 오히려 폭신한 털 코트라도 입은 양 벗어나기 싫 었으나 그는 반짝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 기 시작한다. 당황한 레비앙은 자신을 안고 있는 엘스헤른을 떼어내려다 잘 되지 않자 그의 등을 주먹으로 펑펑 두드려 댔다. "이것 놓지 못해? 제발 좀 떨어지라구! 네가 이러면 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 어버린단 말야!" 레비앙이 계획 운운하며 떠들어대자 엘스헤른은 문득 안고 있던 그를 풀어주며 어깨를 감싸 잡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응? 무슨 계획? 계획이 또 있었어?" "내가 죄인이라는 거 잊었어? 내 죄명에는 국왕 폐하를 기만한 것도 덧붙여져 있 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아, 나는 상관없어." "나는 상관이 있어! 왜냐하면……" 엘스헤른의 무신경한 태도에 대해 한껏 열을 올리던 레비앙의 말이 어느 순간 차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려졌다. 그녀는 한숨과 함께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죄인이니까……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어. 네 곁에 있어서는 안돼." "뭐야? 누가 그래?" 엘스헤른이 대뜸 못마땅한 어투로 묻는다. 레비앙은 줄곧 자신을 향하고 있는 짙은 잿빛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금 한숨을 지었다. 깨끗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차 오른다. 그 느낌은 레비앙의 마음을 더더욱 가라앉게 했 다. "누가 그런 게 아니야. 그건…… 내가 그렇게 다짐한 거야. 난 죄인이니까 널 가 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더 이상 너를 보지 않겠다고 말했었어." "그런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문득 엘스헤른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바람에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란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태껏 보고 있 었다고 생각했던 그 잿빛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어느새 몰라 볼 만큼 새록하게 노 기가 서려있었다. 그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레비앙의 어깨를 더욱 힘주어 잡고 외쳤다. "그것이 어째서 너의 죄야? 네가 원한 게 아니었잖아! 또한, 네가 죄인이라 해도 내가 너를 포기할 것 같아? 내가 누구야? 브리에르 엘스헤른 에스트리온이라구. 나는 나의 일도 너도 포기하지 않아. 한때 내 모든 지위를 버리고 너를 데리고 도 망갈 생각까지 했었어. 하지만, 그런 나는 나 역시도 싫어. 그래버린다면 네 앞에 서 난 무능한 남자가 될 테니까. 울컥하는 감정 하나만으로 널 데리고 도망쳐서는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남자 말이야. 난 그리 강하지도 않고 어수룩하 기까지 하지만, 네 앞에서만은 그렇게 보이기 싫어. 네 앞에서만은 누구보다도 강 하고 누구보다도 여유롭고 누구보다도 능력 있게 보이고 싶다구. 남자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건 그런 이유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지 만 어쩌면 지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게 하니까. 나는 너를 지킬 수가 없어. 지켜줄 수가 없다구. 지금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 어. 그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지…… 너는 알기나 해?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곁 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내가 너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말 밖에 되지 않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무너져버릴 것만 같다구. 난 너 하나만 보고 버티고 있는데, 비록 이 손으로 널 지키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는데……." 엘스헤른은 굳건한 표정으로 긴 말을 단숨에 해 냈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 분 명히 다 풀어내지 못한 고통이 스며 있음을, 레비앙은 그의 눈을 보며 느낄 수 있 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속과도 같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레비앙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릿해져오는 가슴을 움켜쥐고 그는 몹시도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엘스헤른…….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슬픈 표정을 짓고싶지는 않았으나, 막상 마음 속의 말을 꺼내어 묻고 나니 가슴 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찬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싸늘해서 레비앙은 마음과 몸이 얼어붙을 만큼 괴로웠다. "국왕 폐하를 속인 죄는 어떻게 되는 거지? …… 네가 강하다고 생각한 나는, 대 범하지 못하게도 재판의 끝이 두려워. 며칠 뒤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판결은 어떤 건지, 나를 어떻게 할 건지…… 패소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지금 내 앞에 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 버티고 있는데……."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음은 어두운 심연을 향해 가득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엘스헤른의 손을 떼어냈 다. 메마르기까지 한 그의 말에 동요하고 있는지, 엘스헤른의 손은 쉽게 떨어졌 다. 언제까지라도 붙잡고 있을 듯 굳세던 그의 손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맥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행동이 자유로워진 레비앙은 그를 두고 몇 걸음 앞서 걸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는 살며시 뒤를 돌아섰다. "나에게 강요하지 마, 엘스헤른. 나는 네 사랑을 받는 게 두려워. 네가 원하고 있는 그 만큼의 사랑을 주기도 두려워.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강하지도 않고, 그래서 너를 지탱해줄 자신도 없어. 너를 향한 내 감정을 묻는다면…… 솔직 히…… 그 어느 때보다도 네가 절실해. …… 하지만, 난 모험이 두려워. 너를 사 랑하게 된다면, 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너를 향해 끝없이 갈구하고, 네가 내 곁에 잠시라도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될 것만 같아서 싫어. 어쩌면 이 재판이 끝나고 나서는 그럴만한 기회조차 없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숨을 들이쉬느라 잠시 말을 끊은 그는 곧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지금은 모르겠어……. 지금은 정말 모르겠어." 지금, 공기에 가득 묻어 있는 이 청명한 기운처럼 레비앙은 그것과 똑같은 서늘 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앞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 고 있었으나, 엘스헤른이 따라오지 않을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몹시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테니까.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만큼, 절실하고 깊은 생 각에. ·‥…━━━━…‥· 날씨는 여전히 맑고 투명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은 간혹 눈물겹도 록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옅은 회색이 섞인 것 같은 공기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고 보석처럼 깨끗하다. 재판 둘째 날의 심리가 시작되었다. 어제의 심리가 그토록 지루했음에도 불구하 고 방청석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서, 레비앙은 엘스헤른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주석 판사가 개정을 선언하기 직전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을 거야. 그래, 여기엔 오지 않아.' 엘스헤른이 이 곳에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오히려 그에게 작은 안정감을 선 사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지도 않을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정감의 끝에는 씁쓸함이 맞물려 있었다. 레비앙은 술이라도 한 잔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추운 감각이 있으면서도 뺨이 확 달아오른다. 이런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스스로에게 진실 되지 못해서? 레비앙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스스로에게까지 끝내 거짓말을 하 고 있는 이유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이봐요, 아가씨. 그렇게 넋이 나가 있으면 안 됩니다. 법정에서는 당당한 모습 을 유지하라고 했지 않소?" 문득 빌레르트 변호사의 꺼칠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레비앙은 내리깔 고 있던 시선을 들고 허리를 폈다. 비로소 방청석 및 법정의 전경이 모두 눈에 들 어왔다. 삼각형 구도의 판사석과 원고석, 피고석. 법정을 반원형으로 동그랗게 둘 러싼, 고대의 원형경기장 같은 방청석. 밝은 갈색의 나무로 마감 처리한 내부의 장식, 높고 커다란 창……. 어제와 전혀 다름없는 장소임에도 그는 오히려 첫날인 어제보다 더한 생소함을 느꼈다. 이 곳이 이렇게 크고 넓은 장소였던가? 방청석에 터져 나갈 듯이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제도 저렇게 많았었나? 레비앙은 아찔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빌레르트 변호사가 넌짓 눈길을 던졌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겁니까?" 레비앙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어지러웠을 뿐이예요." "왜요? 갑자기 이 법정이 겁나기라도 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는 마치 증인에게나 하듯 꼬치꼬치 캐묻는 변호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건성으로 답하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그냥, 아무도 방해하 지 않는 곳에 앉아 심호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요. 그럴 리가 없겠죠, 아가씨." 눈빛이 날카로운 변호사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대뜸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이유는 아가씨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했던 그 남자가 여기에 없기 때문인 것 같군요." "……." 레비앙은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변호사는 그다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왜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기해서 화라도 난 겁니까? 그렇다 면 사과하지요. …… 하지만, 아가씨, 당신이 그 남자를 지키려 했다면 끝까지 지 켜주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물러나는 것은, 그 분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타인인 내가 보기에도, 그 분, 충분히 위태로워 보 이더군요. 당신이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리 없겠지요. 지금이야, 아가씨 자신 에게 닥친 일 때문에 정신이 없겠지만, 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 사람의 시간이란 그리 길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아가씨가 그 분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시간 역시, 얼마 남지 않았을 지 누가 알겠소?" 말 끝에 변호사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곧 시선을 돌 려, 자신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검사에게 눈길을 두었다. "허헛, 저 사람, 신났군." 투박한 프로이센 사투리가 웃음을 터뜨린다. 레비앙은 중년의 연륜이 묻어나는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가만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까? 그래서 이토록 불안하고…… 두려운 걸까? 진정, 이토록 어 지러운 기분을 모를 일이다. 레비앙은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방청석을 살폈다. 하 지만 그가 찾는 사람은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심리는 줄곧 레비앙을 국왕을 속인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뭔가 일을 낼 것 같던 날카로운 변호사는 오늘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독무대 가 된 법정에서 검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국왕 폐하를 기만하는 일이 얼마나 위 험한 일인지를 떠들어댔다. 그러나, 활기찬 그의 언변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은 오 히려 지루해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방청석에 숨어 앉아 있던 국왕 역시 마치 자신 에게 아부하는 듯한 그의 말이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당신은, 저런 남자의 편을 드실 거예요? 아니, 편을 들지 않는 게 이상하겠군 요. 국왕 폐하라는 분의 열렬한 추종자니까요." 변장을 했기 때문에, <폐하> 대신 여느 부부처럼 <당신>이라는 호칭을 써서 묻 는 왕비의 말에 대해 국왕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검사에 대한 찜찜한 기 분의 표출을 대신했다. "검사가 저런 남자인 줄은 몰랐소. 미리 만나보지 못했거든." 국왕은 다소 심드렁하게 말했다. 영특한 아드레이드는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검사도 만나보지 않고 재판을 허락했다는 거예요?" "검사를 내가 왜 만나보겠소? 내가 몽바종 후작 부인인 것도 아닌데……. 검사는 만나보지 않았지만, 판사들은 만나봤다오." 느긋한 웃음까지 띄는 국왕을 보며 아드레이드는 가득 눈살을 찌푸렸다. "폐……, 아니, 당신. 대체 꿍꿍이가 뭐예요?" "꿍꿍이라니?" "재판을 허락했으면서, <국왕을 기만한 죄>를 놓고 당신에 대해 변론을 펼칠 검 사도 만나보지 않았다니. 대체 무슨 이유로 재판을 허락한 거죠? 재판에서 이겨서 당신의 명예를 되찾으려는 생각 아니었던가요?" "명예? …… 내 명예는 실추된 적이 없는데? 설마, 남자인줄 알았던 신하 한 명 이 알고보니 여자였다고 내 명예가 실추되었겠소?" 국왕은 뒤통수를 긁기라도 할 듯이 아방한 표정으로 아드레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대체 뭐예요? 재판을 허락한 이유가!" 그렇게 정숙하던 왕비, 아드레이드가 잔뜩 열을 올리자, 국왕은 싱긋이 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했다. "부인, 내 정체를 만인 앞에 들통낼 요량이 아니라면 조금만 소리를 낮추어 주 오, 그런 의외의 모습은 무섭소." "뭐예요! 당신이야말로 국왕을 기만한 죄 운운하며 무서운 표정을 지을 때는 언 제고……." 목소리를 낮추기는 했으나 가득 약이 올라있는 아드레이드에게 국왕은 넌지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하지만, 이 느긋하고 존엄하신 분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유로운 시선을 저 아래 한창 심리가 진행 중인 법정의 한가운데로 돌렸다. "검사측은 피고를 증인으로 요구합니다." 검사는 마치 자신이 큰 일이라도 해 낸 양 착각에 빠져 날아갈 듯한 목소리로 판사석에 피고를 증언대에 세울 것을 요구했다. "검사측 요구를 수락합니다. 피고는 증언대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증인으로 지목된 레비앙은 지명에 답하여 몸을 일으키면서도 어리둥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해 거만하게 앉아 있는 빌레르트 변호사를 쳐다보며 어찌된 영문인지를 눈으로 물었다. "아, 미안하오, 아가씨. 일부러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요. 어제 검사측에서 아가 씨의 증인 소환을 요구하러 왔을 때, 내가 대신 수락해 줬었소." 변호사의 대답은 실로 황당했다. 레비앙은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로 쏠 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직하고도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일부러 그랬다니요? 그런 일을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게다가, 대신 수락해주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그러게 귀족 재판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하지 않았소. 그냥 나가서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될 겁니다. 허나, 잊지 마시길, 아가씨. 성의껏 대답해야 합니다. 누구 를 위해서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를 잊지 마시오." 빌레르트 변호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일러두고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팔짱 을 딱 끼고 검사를 쳐다봐 주었다. 레비앙은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옅은 민트색 새틴에 같은 색으로 수놓 여 우아한 광택을 띄는 옷자락의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는 증언대 앞으로 걸어갔 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자신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그는 어느 때 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증언대의 계단을 올랐다. 증언대에 자리를 잡고 서자, 앉아 있을 때보다 더 확실히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옆 사람과 수근거리거나, 부채질을 하 거나, 이쪽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날리거나, 아니면 그저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크게 울렁거리는 듯 했다. "증인은 신의 이름과 말씀 앞에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눈을 내리깔자 마자 곧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커다란 성경과 함께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듯 가까운 목소리는 마치 진실을 강요하는 듯 하다. 레비앙은 내키지 않는 입을 열어 천천히 대답했다. "신의 이름과 말씀 앞에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검사측, 증인 심문 해주십시오." 주석 판사의 요청에 따라 검사가 콧대를 세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걸어나 가려는 검사의 소매를 잡으며 몽바종 후작 부인이 나직히 한 마디 속삭인다. "어지간한 말발이 아니니 조심해요." 하지만 검사의 표정은 절대로 조심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어제의 심리가 거의 1:1로 비긴 것을 설욕하기라도 하려는 듯, 오늘은 잘 나가고 있는 자 신의 독무대에서 저 피고를 확실히 심문해 오늘 심리에 커다란 한 획을 그어야겠 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다만, 그것이 의지라기보다는 자만에 가까워 보였지만. 검사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레비앙에게 다가와 자신이 들고 나온 종이를 보며 한 참 뜸을 들였다. "아, 증인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에게 묻겠습니다." 한참만에 그가 꺼낸 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검사는 차석 판사로부터 증 인 심문을 서두를 것을 경고 받았다. 검사가 오전 내내 떠들어대던 말로 인해 이 미 점심시간도 한참 지나, 판사들은 다분히 짜증이 나 있는 듯 했다. "푸핫, 뜸 들이는 것도 기술인데 어중이떠중이가 사용할 건 못 되지." 걸걸한 사투리가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그 검사는 어중이떠중이니까 두려워할 것 없다는 뜻이 담긴 듯 한 빌레르트 변호사의 조소는 레비앙의 마음을 조금 안정시켜 주었다. 그는 멀리에, 늑대 같은 모습으로 도사리 고 앉아 있는 빌레르트 변호사를 쳐다봐 주며 짧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럼…… 증인은 언제부터 남장을 하고 살게 되었습니까?" 검사의 심문이 시작되자 레비앙은 천천히 눈을 들어 검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 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적부터입니다. 그건, 남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생활이 었습니다. 저는 남자아이로 길러졌으니까요. 남자아이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은 당 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레비앙의 대답이 자신들의 논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느꼈는지, 검 사는 종이를 훑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최근, 여장을 하여 사람들을 속인 적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여성복을 착용한 적은 있습니다만, 저의 원래 성이 여성이므로 여장을 했다고 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또한, 원래의 성에 알맞은 차림을 한 것을 속였다 고 표현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잘 받아치고 있는 레비앙의 말을 들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빌레르트 변 호사가 대뜸 판사들에게 외쳤다. "재판장님. 검사측에 확실한 용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장난 삼아 요청한 것 치고는 판사단의 반응이 진지했다. "검사는 증인에게 알맞은 용어를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내내 잘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자신의 심리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을 느 꼈는지 검사는 얼른 재정비를 하기 위해 종이에서 다른 질문을 읽어 내렸다. "증인은 자신의 성별이 여성임을 숨기고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을 수행해 온 사실 이 있습니까?" "예." 이번 질문에 대한 레비앙의 답은 오히려 명쾌하게 들리기까지 할 정도로 짧았 다. 그는 고개를 당당히 든 채 똑바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긍정으로 답한 그 대답은 잘못을 시인한다 하기보다는 오히려 거리낌없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해 보였다. 그는 시원하게 뻗은 콧날을 도도하게 치켜들고 있 었다. 검사 역시 기본적인 식견은 있었던 터라, 그의 대답을 이끌어 내고서도 내심은 뒤가 깨끗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미묘하게 자연스러운 분위기 는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나 행동 하나 하나까지도 당당함이 되어 뒷받침해주 고 있었다. 검사는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증인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을 수행하는 동안 내내 남자 로 행동해 왔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 사실입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가 남자 로 지내온 나날의 이야기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대한 레비앙의 대답들은 모두 긍 정이었다. 검사는 피고에게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답변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하지 만, 그는 썩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매끄러울 만큼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피고가 저 증인석에 앉아 보여주고 있는 자세는, 죄를 지은 여느 피고들의 자세와는 확실하게 차이가 있었다. 그는 없는 죄를 추궁 받는 무고한 사람처럼, 거리낌 없는 의젓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입으로는 죄 를 시인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죄가 아닌 듯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 이상입니다. 증인 심문을 마치겠습니다." 검사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떨칠 수 없어 심문을 일찌감치 마감해버렸다. 그가 바랬던 것은 이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죄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 고, 그것이 또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되는 그러한 분위기를 원했 었다. 꼭 그랬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심문하는 동안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국왕을 속이고 그 존엄하신 국왕 폐하의 둘도 없는 아드님인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을 수행해 왔다는 죄를. 그러나, 그가 인정한 죄는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결코 그의 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미묘한 분위기에 휩싸이는 게 문제였다. 검사는 눈살을 가득 찌푸린 채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변호인측은 반대 심문을 해 주십시오." 차석 판사의 요구에 따라 빌레르트 변호사가 몸을 일으켰다. 빌레르트 변호사가 다가오자 레비앙은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권위 있는 검은색 법의(法衣)가 헐렁하게 느껴질 만큼 깡 마른 빌레르트 변호사는 증인석 앞에 서서는 잠시 레비앙에게 미소 어린 눈길을 보냈다. 수고했다는 뜻이었다. 레비앙은 가볍게 한숨을 내 쉰 다음 더욱 고고한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빌레르트 변호사의 질문을 기다렸다. "증인은 작고하신 르네 프랑수아 드 아르떼이유 경의 사생아입니다. 이 사실이 맞습니까?" 비록 <아가씨>라는 호칭을 뒤에 붙이지는 않았으나, 빌레르트 변호사의 말투는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레비앙은 편안한 마음으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증인은 할아버지인 아르떼이유 후작의 손에서 남자아이로 키워졌습니다. 맞습니 까?" "예." "그렇다면, 증인은 어린 시절, 자신을 남자아이로 알고 커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변호사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런 후, 줄곧 눈을 두고 있던 종이 - 사실은 별 이야기가 쓰여있지 않은 것이었지만, 성실한 심문을 하고 있는 척 연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그 종이에서 방청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청석에 이어 판사석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그는 말 없이 자신의 뜻을 확고히 했다. 여기 이 피고는 자의가 아니게 다른 성별로 자라 왔다. 그러니, 처음부터 국왕 을 의도적으로 기만한 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이 자에게 감히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돌을 던질 테면 던져봐라, 무고한 이에게 돌을 던지는 너희들 이야말로 죄인일 테니. 변호사의 이유 있는 항변의 시선에 제압 당한 방청석은 무 척이나 조용했다. 빽빽하게 채워진 사람들로 인한 열기 때문에 가끔 부채를 파닥 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그 누구도 저 매서운 눈빛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변호사는 다시금 자신의 정면에 앉아 있는 레비앙을 주시했다. 그의 심문은 계 속되었다. "증인은, 자신이 남자아이로 살아왔다고 증언했었습니다. 그러면, 남자아이로 지 냈던 그 기간 중,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된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 오." "다섯 살 때입니다. 아르떼이유 가문의 원로들을 방문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후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원로들은, 증인이 여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 알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저 를 후계자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그 분들이 심한 언쟁을 벌이셨습니다." "그랬다면, 양자를 들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원로들은 여자인 당신을 후계자로 정해 당신의 인생이 이렇게 기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을까요?" "그건…… 저 역시 자라면서 늘 해온 생각입니다. 당시의 저는 어려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컸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저는……." 레비앙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방청석을 살폈다. 어제와 같은 그 자리에 할아버지와 랑쥬 공작 부인이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지긋이 눈을 감 고 계셨다. 두 손은 지팡이를 기도하듯이 모아 잡고 입술은 하얗게 샌 턱수염이 떨리도록 굳게 다물고 있는 모습은 그에게 소리 없는 말을 전해 오는 듯 했다. 그 런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레비앙은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용기를 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저는…… 그 분들에게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단 하나 남은 혈육이 저였습니 다. 아르떼이유 가문이 왜 그렇게 쇠락하게 되었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지만, 저 는 이 세상에 <아르떼이유>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마지막 아이였습니다. 원로 님들은 그 사실을 포기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비록 여자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아르떼이유 가문의 자손이 분명한 아이를 두고 양자를 들이는 것을 그냥 볼 수 없 었겠지요. 그런 존재인 제가 여자로 태어났던 것이, 저와 가문의 불행이었습니다 만, 지금에 와서 굳이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저는 이 세 상의 여자아이들이 택할 수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여자의 몸으로는 누릴 수 없는 축복이었으니까요. 제가 선택한 길은 아닙니다만, 이 길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 그리고 저의 영원한 주군이신 왕태자 전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레비앙은 증언 끝에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도도하던 초록색의 눈동자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졌다. 변호사는 들고 있던 종이를 손 끝으로 접었다. 그는 줄곧 레비앙을 쳐다보고 있 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자신에게 모이던 시선을 레비앙에게로 집중시켜 줄 수 있었다. 깊은 참회라도 하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 모습에서는 경건한 진 실함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판사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깨끗하게 끝을 맺은 변호사는 자리로 돌아갔다. "증인,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차석 판사의 말이 떨어지고서야 레비앙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증언대에서 내려 와 자신의 자리인 피고석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피고석에서는 빌레르 트 변호사가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로 그를 맞이했다. 트로슈 변호사 역시 푸근한 웃음으로 그를 맞아 주었다. "수고했어요, 레비앙 경." "잘 했소, 아가씨." 하지만, 레비앙은 아무런 대답 없이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두 변호사의 사 이에 자리고 앉은 그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방청석에서는 아직까지 레비앙의 증언을 두고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다지 새삼스러운 증언을 한 것이 아님에도 그 들이 술렁거리는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여자이면서 남자의 삶을 살아온 이 사 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들 한 마디씩 지껄이고 있는 것일 테다. 그것이 동 정에서건, 아니면 적의에서건 레비앙은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비앙은 잠시 긴 속눈썹으로 내리 깔았던 눈을 천천히 치켜 떴다. 그리고, 옆 좌석에 앉은 빌레르트 변호사에게, 마치 혼잣말을 하듯 작게 속삭였다. "나는…… 동정은 싫습니다, 변호사 님. 그 누구도 나를 동정하는 건 원하지 않 아요.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삶을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째서 내가 동정을 받아야 하는 거죠? 여자가 여자로서의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르다고 그 누가 이야기하던가요? …… 나는, 여자이면서 남자로 살아온 과거에 별다른 후회가 없 습니다." 레비앙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빌레르트 변호사는 앙상한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그래서 잘 했다는 겁니다, 아가씨. 지금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맞서는 겁니다. 아무도 아가씨가 살아온 길을 틀렸다고 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 니…… 의젓하게 싸워서 이겨요. 비록 이번 싸움에서 패소를 한다 하더라도, 아가 씨에게 그건 진정한 패배가 아닐 거요." 재판은 오랜 시간 계속 되었다. 내일 있을 결심 공판을 남겨두고는 단 한나절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검사측이나 변호사측 모두 물러설 수 없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오후에는 아르떼이유 후작과 랑쥬 공작 부인도 증언대에 섰다. 변호사 측 에서 소환을 요청한 증인이었다. 레비앙은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이 증언대에 서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노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의 말은 그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그 답답함이 울고 싶은 심정임을, 레비앙은 이 내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그것을 인정한다 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재판이 계속되는 내내 그는 할 수 있는 한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증인들은 소환되어 증언대 위에 오르고, 선서를 하고, 검사, 혹은 변호사의 질문에 따라 증 언을 했다. 간혹 양측에서는 상대측의 심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공기를 노란색에서 오렌지 색으로 물들인 해는 어느덧 구름을 빨갛게 태우며 서 편에 깔린 구름의 바다로 가라앉고 있었다. 법정 안에는 창을 통해 들어온 긴 해 그림자가 깔리고 있었다. "오늘 심리는 여기서 접도록 하지요. 휴정하겠습니다." 주석 판사의 휴정 선언에 따라, 정숙하던 법정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나무 망치 소리를 채 들을 겨를도 없이, 방청객들이 재판장에서 빠져나가느라 소동을 부리고 있었다. 여자들의 치마는 문을 지나가기엔 상당히 넓었다. 서로의 치마자 락을 밟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방청석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넋을 놓고 앉아 있던 레비앙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빌레르트 변호사가 어깨를 툭 친 까닭 이었다. "무게를 가득 잡고 앉아 있기에 생각에라도 잠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넋을 놓고 있은 거로군요, 아가씨." "아, 죄송합니다." 그제서야 레비앙은 오늘의 심리가 끝난 것을 깨닫고는 딱딱한 의자에서 몸을 일 으켰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던지 온 몸이 쑤시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 는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기보다는 우선 두 변호사에게 인사를 했다.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변호사님. 드디어 내일이면 끝이로군요." "아, 그렇군요, 내일이면 끝이로군요." 트로슈 변호사는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겉 으로 드러나는 장난이었다. 육중한 몸매의 트로슈 변호사는 웃으면서 짐을 챙겼 고, 그 일을 거들고 있던 빌레르트 변호사 역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 끝이 아니지 않소, 아가씨. 저녁 식사 후에 회의실에서 봅시다." 빌레르트 변호사는 레비앙에게 까딱 목례를 한 후 짐 챙기는 일을 계속하다 말 고 트로슈 변호사에게 가볍게 핀잔을 했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 겁니까? 응? 이건 왕국 아카데미 강의서지 않소! 이런 걸 왜 챙겨왔습니까?" "어? 그게 왜 여기 있지? 조교에게 분명 넘기고 왔는데……." 두 사람의 사소한 다툼을 뒤로하고 레비앙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욱 씬거리는 어깨를 이제서야 천천히 주물렀다. 열린 문을 통해 길게 남은 해가 들어 오고 있다. 지는 해는 붉은 빛으로 아름답게 가라앉는다.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 록, 이 땅 위에서 마지막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 길게 뻗어나간다. 레비앙은 그 환한 빛을 향해 걸음을 때어 놓았다. 그가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문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수고했어." 아직 문을 나서지는 않았으나, 레비앙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 사람이 누 구인지 알 수 있었다. 레비앙은 한 걸음 더 나서서 건물의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쩐 일이야? 일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다정하지는 않은 레비앙의 말투를 예상했는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 식 소리내어 웃으면서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에스트르에서의 내 일은 이제 끝났어. 모자람 없이 모두 준비해 뒀으니까." 그는 푹 눌러쓰고 있던, 화려한 깃털이 달린 모자를 벗어 들고는 머리카락을 스 윽 쓸어 넘겼다. 짙은 잿빛의 머리카락이 노을의 주홍빛에 물들어 아름답게 찰랑 거린다. 쓸어 넘겨도 제 자리로 돌아오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은 이제 많이 길어 묶 어도 될 정도였다. "내내 여기에 있었던 거야?" 대답을 뻔히 알고는 있었으나, 레비앙은 그에게 물었다. 왜 들어오지 않았는지 를 묻는 건 오히려 어리석은 짓일 테다. 어제 그렇게 엘스헤른을 몰아세웠으면서 그런 이유까지 물을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 사실은 너무 지루해서 몇 번은 산책하러 갔었어. 그러니까 내내 있었던 것 은 아니야." 거짓말.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것 을 간신히 참았다. 표정을 보면 빤히 드러나는 거짓말을 입에 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가슴속에서 뭉근히 일어나는 화를 삭이기 위해 엘스헤른에게서 시선 을 돌렸다. "용건이 뭐야?" "아……,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레비앙의 싸늘한 물음에도 엘스헤른은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대답을 했다. 레비 앙은 그의 미소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묘한 힘 을 가진 따뜻한 미소였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레비앙 자신에게 만을 향한 가식 임을 이미 알아버린 이유였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에게 동요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요즘 항상 나에게 하는 말이 <할 말이 있어서>라는 거 알아? 그래, 할 말이 라는 게 뭐야? 늘 하듯이 그저 그런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어." 그의 단호한 말을 그냥 웃으면서 들어 넘긴 엘스헤른은 입술 끝을 가볍게 축이 고는 레비앙이 핀잔을 한 <그저 그런 이야기>를 말하는 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말야. 너에게 부담이 된다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게." 그가 너무 여상스럽게 이야기해서 잠시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레비앙은 그의 말을 속으로 곱씹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게. 눈 앞의 이 남자는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로 그 말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한 이야기의 뜻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레비앙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얼른 자신이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이 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게. 너에게 나는 항상 그랬어야 했 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그래서일 거야. 네가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는. 너를 먼저 생각하고, 너를 먼저 배려하던 나를 내 스스로가 잃어버려서. …… 나 는, 네가 아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네 앞에서 유지해 줄 필요가 있었던 거야. 이기적이게도 내 감정만을 내세우고 몰아붙이는 내 모습…… 너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가 두려워하고 물러서버리는 게 당연해. …… 내 잘못이야. 그 걸, 이제서야 깨달았어. 너와 함께 있는 내가, 가장 자연스러운 나라는 사실을 진 작에 알았으면서도 내 감정에 눈이 멀어 그것만은 여태껏 깨닫지 못했어. 미안해, 레비앙." 어깨 너머로 노을을 지고 있는 남자는 사과의 말 끝에 또 웃음을 지었다. 공기 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저녁의 시간 속에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레비앙이 알고 있 던 그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토록 바랬던 일이건만 레비앙은 불만만 차곡차곡 쌓이는 자신의 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못마땅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레비앙의 표정을 읽었는지 엘스헤른은 한 번 더 당부하듯 말했다. "미안해, 그러니까 나 같은 녀석 때문에 화내지 마." 그건 가식이잖아. 목에 걸린 그 말이 나오지 않아 레비앙은 아픈 숨을 삼켰다. 나는 네 가식이 보기 싫어. 나를 향한다는 명목 따윈 붙이지 말아. 그런 명목 따 위에 나를 넣어 네 가식을 정당화시키지마. 그런 건 바라지 않아. 아프면서도 아 무렇지 않은 척 하는 네 모습은 보기 싫다구.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할 말이 너무 한꺼번에 목을 막아 레비앙은 한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엘스헤른." 한참만에 간신히 입을 연 레비앙이 이름을 부르자, 그는 천진하게 모자를 휘둘 러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할 말 다했어. 이제 가 볼게. 오늘 부로 국왕 폐하께서 근신령(謹愼令)을 거두 셔서 간만에 집에 들러 봐야 해. 그럼……." 그는 곧 등을 보였다. 남자의 어깨는 규칙적으로 흔들리면서 멀어져 갔다. 레비 앙은 말하려고 열었던 입술을 가만히 내리 다물었다. 대신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 었다. 긴 길의 저 끝을 향해 멀어져 가던 남자가 큰 소리로 한 마디를 남겼다. "내일 또 올게." 레비앙은 콧등이 시큰해져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 음을 이미 알고 있고, 모든 게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가도 마음만은 예전 같지 않 으리라는 것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여상스럽게 구는 엘스헤른의 모습이 비위에 거슬릴 만큼이나 보기 싫었다. '하지만……, 과거에 집착했던 것은 나였잖아.' 보기 싫다고 생각한 것은 엘스헤른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자 신에게 하는 말을 담아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 TO BE CONTINUED - 〓〓〓〓〓〓〓〓〓〓〓〓〓〓〓〓〓〓〓〓〓〓〓〓〓〓〓〓〓〓〓〓〓〓〓〓 @ 또, 요즘의 근황 @ 지난 번 말씀드렸다 시피, 마감을 아직 못해서… (날짜가 벌써 지났음.) 무 진장 겁을 먹고 있는 중입니다. 쿨럭. 하지만, 열심히는 쓰고 있습니다. 다만 내용이 허접함에 문제가 있다고나 할까. 오늘은 많이 올라가는군요. 이건, 한글 페이지로 85페이지입니다.^^ 읽으시 느라 고생이 많으실 겁니다. 아마도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들도….;; 아, 참. 깜빡했습니다만, 랑쥬 공작부인, 즉 레비앙의 대모라는 이 여인은 연재분에는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출판분에만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요즘은 연재분부터 써 두고 그걸 손봐서 출판분으로 옮기는 패턴에 차질이 생기는 바 람에, 출판분의 것을 쓰면서 연재분 것도 다듬어 올리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 습니다. 갑자기 나온 이 아줌마 때문에 혼란이 있으실까봐 일단 말씀드려 놓 겠습니다.^^; 요즘의 저는 롯데리아의 김치 버거에 빠져 사는 중입니다. 그러나, 먹고 나 면 심각한 가려움이 유발된다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 만 지금 팔에 두드러기가….) 하지만, 상당히 먹을만 하더군요. 이 나이가 되 니 김치만 있어도 밥을 먹게 되는지라…. 오늘은 김치 버거를 두 개 반이나 먹었습니다. 사람의 위장이 아니라고 동생으로부터 핀잔도 들었습니다.; 에궁…. 그럼 저는 다음 편을 계속 써야겠네요. 다음 편은 써지는데로 올리 겠습니다. 아마도 100편을 채워서 끝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말씀드리 건데, 어색한 곳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재판에 관해서는 거 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써 놓고도 어디가 틀렸는지 잘 모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지도편달(이런 구태의연한 말을 쓰다니.;) 부탁드립니다. 그럼, 건강하세요.^^ 『SF & FANTASY (go SF)』 47929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099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10/11 00:48 읽음: 98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42/43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10월 10일 16:11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99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99) "……이러한 이유로, 존경하는 세 분 판사 님, 원고는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피 고에게 정중한 사과와 함께 보상금을 요구하며, 또한, 존엄하신 국왕 폐하를 기만 한 죄에 있어서는 피고가 일전 수행하고 있던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합니다. 이상입니다." "피고측 변호인 최후 변론을 해 주십시오." 검사의 최후 논고가 끝나고, 차석 판사의 요구에 응해 빌레르트 변호사가 종이 를 들고 나선다. 그 종이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그저 손에 들고 있기 위한 장 식용이다. 잠시 보는 척 하지만 기실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 어제 그가 보고 있 었던 종이도 트로슈 변호사가 잘 못 들고 온 왕국 아카데미의 교양과목 강의서였 다. 최후 변론의 내용은 이 날카로운 변호사의 머릿속에 다 들어있다. 이미 왕국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평민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귀족의 반열로 올려놓 은 그다. 하지만 아직까지 평민 근성이 남아 귀족들의 이러한 시시콜콜한 싸움들 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입을 연다.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린다. 변호사 는 은근한 말투로 말을 잇는다. 덩달아 방청객들 역시 숨을 죽인다. "피고는 몽바종 후작 부인에게 모욕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것 이 일방적인 모욕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피고는 다수의 사람들이 퍼트리는 소문에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명예 를 모욕당했습니다. 먼저 당한 모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을 모욕이라고 칭합니 까? 그것은 복수라고 칭해져야 옳겠지요. 또한 싸움을 시작한 이와 받아들인 이가 있으니 양측간에 행해진 결투와도 같은 겁니다. 꼭 장갑을 벗어 던져야만 결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트르의 법에서의 결투는 서로간의 문제 해결의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목적이 정당할 때는 인정이 됩니다. 에스 트르 법전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듯이 결투는 성별과 도구를 가리지 않습니다. 명예를 걸고, 목숨을 걸고, 피를 걸고 하는 싸움에서는 다만 서로 똑같은 종류 도 구를 사용해 그 결과를 자신의 능력과 신이 내려주신 운에 맡기는 겁니다. 즉, 정 당한 목적의 바탕 하에, 같은 종류의 도구를 사용하여 싸운다면 결투는 성립되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검이면 검, 총이면 총, 말[言]이면 말. 피고와 원고는 무엇 으로 결투했습니까? 바로 말로서 결투를 벌였습니다." 변호사의 번뜩이는 눈이 회중을 둘러본다. 그의 변론은 상당히 긴 감이 없지 않 으나, 방청객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느끼지 못 할만큼 집중해 있다. 그만큼 변호 사의 목소리는 흡입력이 있었다. "피고의 행동은 원고가 그 구실을 마련해 주었으므로 정당했습니다. 원고 뿐만이 아니라, 그날 파티에 참석했던 손님들은 피고의 등 뒤에서 은근한 모욕을 일삼았 습니다. 피고의 행동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이러한 모욕들에 대한 정당한 자기 방어였습니다." 첫 번째 쟁점을 매듭지은 변호사는 잠시 숨을 고른다. 빠르게 이어온 그의 변론 이 잠깐동안 멈춘 사이 방청객들은 더더욱 숨을 죽인다. 변호사가 말을 멈춘 것은 오히려 늑대가 사냥감을 향해 뛰어나가기 직전에 몸을 가득 웅크리는 것 같아 보 인다. 변호사는 들고 있던 종이를 말아 손바닥을 탁탁 두드린다.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변호사는 또다시 입을 연다. "또한, 피고가 자신의 실제 성별과는 다른 성별로서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에 있 었다는 사실이 국왕 폐하를 기만한 일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이 확실합니다." 변호사는 또 먼저 죄를 긍정하고 나선다. 아까와 똑같은 방법이지만, 이번에는 훨씬 강한 목소리다. 그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는, 어느 정도 식견이 있고 오늘까 지의 재판을 모두 방청하고 있었던 사람이면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문서로 옮겨 놓는다면 오히려 나약하기까지 해 보일 내용이다. 그러나, 그 말이 일단 이 변호사의 입에서 나오면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한층 더 강력하고 한층 더 설득력 있는 의미로 받아들 여지는 것이다. 피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변호사의 목소리는 차분하 다. 차분하지만 힘이 있다. 변호사의 변론은 이제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피고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자의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고의도 아 니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가 사실을 좀 더 일찍 국왕 폐하께 이야기 하지 못한 것이랄까요. 하지만, 여기에도 피고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 습니다. 비록 남자아이로 자라기는 했으나, 피고의 원래 성이 여성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피고에게는 걸어보지 않은 길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는 것과도 같은 겁니다. 오기가 있기는 하겠지만, 두려움과 불안함이 더 앞서는 겁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 폐하의 앞이라면 한층 더하겠 지요." 두 번째 쟁점을 마무리하며 변호사는 방청석의 어느 한 점에 시선을 둔다. 그 곳에는 자신들에게 레비앙 경을 변호해 줄 것을 의뢰했던 귀부인이 있다. 평범한 귀족 여인으로 가장하느라 레이스가 잔뜩 달린 모자를 푹 둘러썼지만 그의 날카로 운 눈썰미로 금새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곁에 앉은 남자는 분명히 일 전 변호사에게 작위를 내려준 적이 있는 존엄하신 분이다. 그 일을 저 존엄하신 분이 기억하고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작위를 하사 받은 사람으로서는 확실하게 기 억하고 있다. 에스트르 최고의 권력을 지닌 저 분의 푸근해 보이는 미소를. 변호사는 그 고귀한 내외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고는 자리에 가 앉는다. 판 사들이 판결을 합의하기 위해 잠시 휴정을 선언한다. 그와 동시에 변호사의 눈길 이 잠시 머물렀던 곳의 고귀한 내외가 슬며시 자리를 뜬다. 마치 꿈 속에 있듯 몽롱한 것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뺨에 세게 부딪혀 오는 것 은 바람이다. 싸늘하고 날카롭게 스치는 감촉이 사뭇 아프기까지 한 것이 영락없 는 칼날 같은 바람이다. 정신이 든 레비앙은 별안간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어두운 풍경들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몸을 젖혔다. 지금 달리는 말 위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뒤로 굴러 떨어질 행동을 하고도 그런 불상사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의 등이 가 닿은 곳은 길게 뻗은 길의 차가운 돌 바닥이 아니라 넓고 부드러운 품 안이었 다. 레비앙은 문득 자신을 단단히 붙든 채 말고삐를 쥐고 있는 듬직한 팔의 존재 를 느끼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엘스?!" 눈으로 확인한, 바람에 흩날리는 잿빛의 머리카락 뿐만이 아니더라도, 의식이 들고난 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특유의 은은한 향내로 그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으나, 막상 레비앙의 입에서는 비명이나 다를 바 없는 외침이 터져 나왔 다. "엘스헤른!!" "무얼 그리 놀래?"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간 떨어질 뻔 했다며, 오히려 엘스헤른 쪽이 더 핀잔이 다. 투덜거리는 그의 빠른 어조와 얼굴로 불어닥치는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어리 둥절하기만 한 레비앙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엘스헤른." "어떻게 되기는, 뭐가?" "재판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신이 묻는 말에 맞서 물음으로 응수하는 엘스헤른 때문에 더더욱 혼란스러워 진 레비앙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재판, 재판은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내가 말 위에 있지? 이게 뭐야? 대체 어 디로 가고 있는 거지? 엘스헤른? 엘스헤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레비앙의 다급한 질문에 신경이 가득 곤두선 엘스헤른은 말 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삐를 잘 잡고는 눈 앞에서 시끄럽게 알짱거리는 그에게 으 름장을 놓았다. "또 기절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좀 조용히 해. 자꾸만 정신없이 만든다면 아까처 럼 확 기절시켜 버릴 거야." 바로 뒤통수에 대고 외치는 소리에 레비앙은 딸꾹질이 날 만큼 깜짝 놀랐으나 그제서야 문득, 그는 어렴풋이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잠시 휴정했던 법정은 다시 열렸다. 그리고, 세 명의 판사가 합의한 판결문이 주석 판사에 의해 낭독되었다. "지금부터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원고 몽바종 후작 부인의 파티에서 피고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 경이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파 티에 참석했던 다수의 객인들과 원고에 의해 피고에게는 불미스러울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한 소문이 퍼트려지고 있었던 까닭으로, 피고의 행동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 원고측의 요구를 기각합니다. 또한 피고가 자신의 타고 난 성별을 숨기고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을 수행해온 바, 그것은 존엄하신 국왕 폐 하를 기만한 행동임에 틀림없음을 인정합니다. 그 일의 시발이 아무리 피고의 자 의가 아니었다고는 하더라도,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국왕 폐하께 말씀을 올리 지 않은 것은 사실에 대한 피고의 고의적인 은닉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법정에서는 피고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가 국왕 폐하를 기만한 죄를 인정합 니다." 주석 판사의 꼬장꼬장한 노인 목소리가, 마치 빌레르트 변호사를 흉내내기라도 하듯 잠시 숨을 쉬느라 끊긴다. 원고측에서는 첫 번째 쟁점이 무산된 이상 두 번 째 쟁점에서 요구한 대로, 레비앙이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에서 쫓겨나는 것만이라 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도 이루어 낸다면 이번 일로 재판까지 벌인 수확 이 충분히 있는 셈이다. 몽바종 후작 부인이 애당초 바랬던 것은 그것이었다. 그 녀는 손수건을 양 손에 팽팽하게 말아 움켜쥔 채 주석 판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주석 판사의 길고 하얀 턱수염이 그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움직였다. "본 법정에서는 두 번째 쟁점에 대해 피고를 처벌할 권한을 국왕 폐하께 일임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방청객들은 법관들의 결론을 듣고서 들쑤셔 놓은 벌집처럼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마음속으로는 거의 동의하고 있듯이, 기만당한 사람이 존엄하신 국왕 폐하인 만큼, 법관들이 합의하여 내린 결론은 충분히 합당해 보인다. 이제 국왕이 내리실 판결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믿었던 가문으로부터 기만당한 당사자인 만큼 국왕께서는 한 층 더 강력한 처벌을 내리실지도 모른다. 그때, 문지기의 급한 연락과 함께, 법정의 문이 열리면서 국왕 폐하께서 시종과 간단한 호위를 거느린 채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국왕 폐하로 인 해 방청석에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한다며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국왕 폐하는 자신의 등장과 법관들이 내린 판결에 대해 웅성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버티고 서서 위엄 있는 헛기침을 했다. 국왕의 기침 소리는 수 백 명 이 들어찬 법정을 찬물 뿌린 듯 고요하게 만들었다. 비로소 국왕 폐하는 좌우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법관들의 판결에 대해서라면 금방전 밖에서 시종으로부터 전해 들었소. 법관들 은 상소가 인정되지 않는 귀족 재판인 만큼 잘 판결을 내렸소. 이제 레비앙 경에 대한 나의 판결만이 남은 것이군요. 나 역시 이번 재판을 줄곧 방청해 왔으므로 레비앙 경의 입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지를 했소. 그럼 판결을 내리겠소." 문득 레비앙은 눈을 깜빡였다. 눈에 찬 바람이 가득 불어닥쳐 건조해진 이유였 다. 게다가 위험천만으로 말 위에서 넋을 놓고 있었더니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으면 어떡해? 얼굴 따갑지도 않냐?" 뒤에서 커다란 손이 머리를 짓누르는 바람에 레비앙은 저도 모르게 숨을 가득 들이쉬며 몸을 낮추었다. 생각에 잠겨 있은 이유에서인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 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국왕 폐하의 판결까지 받고 재판이 끝나는 것을 두 눈으 로 확인했는데도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기분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의식이 들기는 해도 아직까지 얼떨떨해, 그는 투덜거리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 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여기가 대체……." "말 등이지 어디긴 어디야?" 엘스헤른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레비앙은 발끈 화를 냈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게다가 갑자기 이게 뭐야? 말 위라니! 내가 어 째서, 무슨 이유로 말 위에서 깨어나야 하는 거야?!" "그럴 일이 있어." 레비앙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조차 태연하게 구는 엘스헤른이 얄밉기 그지없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어디로 가는 거야? 말 세워. 멈추란 말야!" 달리는 말 위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듯한 그의 행동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엘스 헤른은 말을 멈추기는커녕 속력조차 줄이지 않았다. 레비앙은 납치라도 당하는 심정이 들어 더더욱 소리를 높여 외쳐댔다. 마구 소 리를 치다 말고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내리 다물 었다. 생각을 해 보니 분명히 알 것 같다. 재판이 끝난 후 갑자기 의식이 없어졌 다가 지금 깨어난 이유가……. 국왕 폐하의 판결을 듣기 위해 방청석은 숨을 죽인 듯 조용해졌다. 그들을 주욱 한 번 둘러본 후, 국왕 폐하께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레비앙 레비오네 아르떼이유에게 왕가를 위해 종신할 것을 명하오. 여성으 로서는 이례적이겠지만 왕태자를 위해 평생 봉사하길 바라오. "평생"이라는 조건 이 그대 죄에 대한 대가요. 또한, 그대는 그대 본연의 성별이 지닌 의무대로 결혼 해서 아르떼이유 가문의 피가 섞인 자손을 생산할 것을 명하오. 상대가 누가 되든 지 간섭치 않겠소. 단,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결혼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작위를 박탈하고 신의 신부가 되기를 명할 것이오. 물론, 그대가 수 녀가 되든, 부인이 되든 왕태자를 위한 종신 봉사의 의무는 변함이 없을 것이오." 국왕 폐하의 판결이 떨어지자 방청석이 온통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원고석 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몽바종 후작 부인은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에서 레비앙을 끌어내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레비앙이 왕태자 전하의 시종직으로 종신 봉사의 의무까지 부여받자 분함을 못 이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감히 국왕 폐하께서 내린 판결에 대들지는 못했다. 감히 국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것은 상소가 인정되지 않는 귀족재판이 아니던가! 국왕 폐하는 자신을 기만한 죄인에게 시종직에서 물러남으로서 죄를 물라 할 생 각은 눈꼽 만큼도 없는 듯 해 보였다. 대신 국왕 폐하는 그가 6개월 이내에 결혼 하지 않는다면 아르떼이유 가문의 장래는 없다는 식의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결혼하든지, 아니면 레비앙을 끝으로 아르떼이유 가문이 멸족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수녀는 자손을 남길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만약 6개월의 기한을 넘겨 수녀가 된다면 아르떼이유라는 성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있을 수 없 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6개월이라는 기한의 의미를 궁금해했으나, 국왕 폐하는 그것에 관 한 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국왕 폐하의 판결에 대해 다소 불만을 가 지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판결을 국왕께서 마무리 지음으로서 이 일 은 무사히 일단락 되었다.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변호사들은 반쯤은 승소했다는 기쁨에 들떠, 재판의 결 과를 짜 놓았을 것이라며 괜한 의심을 마지않았던 상대인 국왕 폐하께 사죄를 하 는 둥 바삐 움직였다. 레비앙은 그들에게 후일을 기약하며 법정을 나섰다. 방에서 조마조마해 하며 기다리고 있을 모니카에게 당장 달려갈 생각이었다. 빠른 걸음으 로 법정의 문을 막 나섰을 때, 그는 문득 문 옆에 잘 차려 입은 어떤 신사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문득 깨닫는 순간, 레비앙은 배에 작은 아픔을 느끼 며 의식을 잃었다. "이제 생각났어!" 레비앙은 분하다는 듯 마구 소리를 질렀다. 급습해서 기절시킨 것으로 모자라 지금 이렇게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납치해 가고 있는 것까지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 파렴치한 사람이 너였다구! 너!" "그래, 그 파렴치한 사람이 나였다구, 나! …… 알고 있으니까, 제발 이제 그만 좀 소리 질러." "그러게 왜 그랬어? 아팠다구!" "말로 해서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더라고.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주지 않는 너니까 말야. 말다툼을 해서 데리고 가기에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마음 이 급했어. 아팠다면 미안해." 은근한 목소리로 사과를 한 엘스헤른은 말을 적절히 후려치면서 좀 더 빠른 속 도로 달리게 했다. 레비앙은 얼떨떨하니 정신이 없다가 갑자기 모든 상황이 이해 가 되자 몸에 힘이 빠지고 눈 앞이 핑 돌만큼 현기증이 돌았다. 그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엘스헤른에게로 몸을 기대 버렸다. 엘스헤른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 온 몸 으로 느껴졌으나 레비앙은 몸을 바로 할 생각도 그를 놀려줄 생각도 없었다. 지금 가장 마음 속에 걸리는 것은, 어째서 엘스헤른이 자신을 마치 납치라도 하듯 기절 시켜 말에 태운 다음 대체 어디로 데리고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음. 그럴만한 데가 있어." "어디로 가는지는 가르쳐 줘도 되잖아! 납치가 아니라면야." "당연히 납치는 아니지. 나중에 로자리움에 고이 데려다 줄 테니까. 너처럼 생각 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국왕 폐하께도 미리 말씀드렸고, 아르떼이유 후작이나 모니 카에게도 일러뒀어. 내가 잠시 어디 좀 데리고 가야겠다고. 그런데 말야, 평소에 네가 모니카에게 무슨 말을 하길래, 그 애는 나만 보면 적대심으로 자지러지는 거 지?" 엘스헤른은 아까 모니카를 만나 그 어린 하녀에게 당한 수모를 떠올리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모니카는 그를 만나자마자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후닥탁 도망을 가더니 문을 닫아버리고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아무리 협박을 하거나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고는 방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 레비 앙 님은 여기 없어요! 아, 없다니까요!! …… 뭐요? 우리 레비앙 님을 어디로 데 려간다구요? 안돼요! 절대로 안돼요!! "…… 어찌나 시끄럽던지 아직도 귀가 얼얼해." 몹시도 억울한 모양인지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시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불평이 주의를 딴 곳으로 환기시키기 위한 것임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싸 늘하게 물었다. "엘스헤른, 딴 청 피우지 말고, 사실대로 이야기 해.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티 아란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테니 이야기를 좀 해 봐." "사실은 이대로 티아란까지 가고 싶지만, 배가 준비되지 않아서 말야. 아쉽군." "딴청 피우지 말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너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거야? 아까 법정에서……." "응?" "법정에서 늘 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말야." "무슨 소리야?" "방청석 쪽은 아예 안 봤어?" "보기는 했지만……." 레비앙은 기억을 더듬었다. 방청석에는 언제나 보던 얼굴들이 꽤 보였다. 할아 버지, 랑쥬 공작 부인, 리하르트, 레인비 백작 부인, 그리고 또 왕궁의 수많은 사 람들…… 하지만, 확실히 있어야 할 사람 중에 빠진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이린과 제롬?!" 두 사람이 오늘 법정에 없었던 것이 별안간 떠오르자 레비앙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또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 두 사람은 왜 오지 않은 거지?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 확실해." 무슨 일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의 말투 치고, 엘스헤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까 지 해서 레비앙은 마음 속에서 무럭무럭 샘솟는 의심을 꾹꾹 누르며 다시금 물었 다. "대체 무슨 일인데? 왜 오지 않은 거야?" "좀 큰 일이 있어." 엘스헤른은 여전히 이야기할 마음은 없는 모양인지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끈질기게 채근해서라도 알아낼 테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다가 그 럴 만한 힘도 없어, 레비앙은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비릿하고 짠 내음이 공기에 섞여 있는 것이 마치 바다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바다라면 에스트르에서는 어디든 흔한 곳이지만 수도 벨라시그네에서는 다소 떨어져 있어 레비앙은 자신의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아무리 기절해 있었다고는 해도 설마 바다까지야…….' 그러나, 설마라고 생각하기에는 공기에 뒤섞인 축축하고 특이한 내음이 너무나 도 선명하다. 한 순간, 이것이 확실하게 바다의 냄새라는 인식이 들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티아란으로는 안 간다면서! 웬 바다 냄새야?" "바다에만 오면 다 티아란이야? 티아란으로 가는 배를 타려면 남쪽으로 가야 한 다구. 우리는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어. 네가 기절해 있은 동안 줄곧 서쪽으로만 달려왔으니 안심해." 안심하라는 그의 말이 전혀 안심할 수 없는 이야기로 귀에 들어왔으나, 레비앙 은 우선은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까지는 바다 대신에 길다랗게 늘어선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의 정문을 통과하면서부터는 그렇게 크지는 않은 도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길을 달리다가 마을과 불빛이 보이자 레비앙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어느새 말은 마을의 안으로 들어섰다.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의 사이를 달리면 서, 레비앙은 저 멀리 검게 일렁이며 간혹 반짝이고 있는 것의 정체가 뭔지 알아 차렸다. 칠흑 같은 수면 위에 떨어진 달빛이 조각 조각으로 나뉘어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 고 있던 레비앙은 문득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지는 너른 항구의 모습에 정신이 반짝 들었다. "저기 배도 있어." "항구에 배가 없는 게 이상할 일이잖아." 엘스헤른은 레비앙의 말도 안 되는 독백에 가벼운 핀잔을 주고는 피식 실없는 웃음까지 지었다. 그런 엘스헤른의 태도가 하도 의심스러운데다가 문득 두려운 생 각이 엄습해와, 레비앙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소리를 질러댔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 생각이야? 대체! 이 밤중에 웬 배야? 오! 안돼. 국왕 폐 하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큰일이야. 난 이제 왕궁에 종속된 몸이라구! 읍!" 엘스헤른은 쪽 소리가 날 만큼 가벼운 기습 뽀뽀로 레비앙의 길고 긴 사설을 막 아 놓은 다음 한 손에 고삐를 몰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고개를 돌려 바로 앉도록 했다. "앞이나 잘 봐. 정신없게 만들지 말고." "말 해주지 않으니까 더 수상하잖아!" "지금 말하면 네가 더 난리를 칠 것 같아서 그래." 뒷모습만 봐도 불만에 절어 입이 가득 튀어나와 있을 게 분명해 보이는 레비앙 을 다정한 말투로 달랜 엘스헤른은 천천히 말의 속도를 줄였다. 목적지인 부두에 도착하자 그는 말을 세워 먼저 훌쩍 뛰어 내린 다음 레비앙이 내릴 수 있도록 손 을 내밀어 도와주었다. 그런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레비앙은 그냥 엘스헤른이 친절을 베풀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말에서 내린 그는 익숙지 않은 부두의 풍경과 정박해 있는 커다란 배를 둘러보 느라 고개를 가득 들고는 뒷걸음질 쳤다. 항구의 밤은 아직까지 시끌벅적했다. 늦 게 출항하는 배가 한 척 남아있어서인지 부두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이별 의 말을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짠 바다 내음에 걸맞게 여기저기 걸쳐 진 젖은 밧줄과 그물에 걸리지 않게 걸음을 옮기면서 레비앙은 커다란 조각상이 선수(船首)에 붙어 있는 고급스러운 배를 쳐다보았다. 밤에 보아도 알아 볼 수 있 는 하얀색 선체는 날렵한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속력을 충분히 가늠하게 했다. 레비앙이 시선을 두고 있는 배를 같이 쳐다보고 있다 말고, 엘스헤른은 천천히 먼 바다로 눈을 돌렸다. 달빛은 느끼지 못할 만큼 옅게 깔린 바다 안개에 뽀얗게 녹아 마법처럼 바다와 사물들을 감싸고 있었다. 달이 떨어진 수면 위는 하얗고 아 름다운 빛이 일렁거렸다. 파도에 실려 불규칙적으로 어룽거리는 달빛에 넋을 잃을 것 같아 엘스헤른은 그만, 레비앙을 시선으로 좇았다. 숨 막힐 듯 빼곡하게 들어 찬 달의 기운이 앞서 걷고 있는 레비앙을 축복하기라도 할 양 어루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은, 햇빛 아래서 는 보지 못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햇살 아래서 선명한 반짝임으로 눈부시 던 그 붉은 머리카락은 만월이 빚어내는 마술 아래에서는 서늘함이 묻어날 것 같 은 은은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레비앙의 뒤를 따라 걷던 엘스헤른은 문득 그가 걸음을 멈추자 덩달아 멈춰 섰다. 잠시 정지했다고 생각했던 레비앙이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 로 어디론가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엘스헤른은 저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풍성한 회색 망토를 두른 숙녀와 검은 코트를 걸친 청년이 서 있었 다. 그들이 아이린과 제롬임은 그냥 느낌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어, 엘스헤른은 걷던 걸음 그대로 느긋하게 그들에게로 걸었다. 먼저 달려간 레비앙이 그들의 손을 붙들고 자초지종을 묻고 있는 듯 했다. 아직 은 먼 거리인데다가 망토까지 둘러쓰고 있는 아이린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 만 엘스헤른은 그녀가 매우 아쉬워하고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제 그가 실로 간만에 에스트리온 성으로 갔을 때 역시 아이린은 사정을 설명하며 그런 눈빛을 지었다. 아쉽고 섭섭하고 서글픈, 조금은 젖어있는 눈빛을. "아버지께서 당장 출발하라고 서신을 보내셨어요. 제롬이 그걸 먼저 보고는 이야 기 해 주지 않아서, 나중에 그 소릴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놀랐답니다. 아버지께 서 배편을 미리 정해 놓으셔서 내일 출발하지 않으면 안돼요. 내일이면 레비앙 님 의 재판 마지막 날인데 말예요. 재판을 다 못보고 가게 되어서 어떡하죠? 재판도 재판이지만, 레비앙 님에게 작별 인사도 못 하고 가게 되어서 어떡해요?" 안타깝게 말을 하며 급기야 커다란 눈에서 맑은 눈물을 떨구는 아이린에게, 엘 스헤른은 출발하기 직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비앙을 만나게 해 주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 지금, 배 시간에 늦지 않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벌써 선원들의 발길이 바빠지 고, 부두에 쌓였던 짐들도 어느새 배 안으로 모두 옮겨진 후였다. 어두운 밤 바다 위에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가야 할 시간인가 봐요." 아이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레비앙을 보지 못하고 떠날지도 모른다고 울먹거 리던 어제의 그녀를 떠올리자면 다소 의외의 모습이었다. "고마웠어요, 아이린 양." 오히려 레비앙의 목소리가 더 떨리고 있었다. 레비앙은 아이린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서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볼 수 있는 거죠?" "꼭 다시 올게요. 편지 해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녀들이 인사를 끝내고 떨어져 섰을 즈음에야 엘스헤 른은 느긋하게 그 자리에 당도했다. 엘스헤른은 그들이 좀 더 이야기를 하도록 내 버려두고 제롬에게 다가서서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떠나니까…… 너무나도 홀가분하구나." "흥, 지금의 일보 후퇴는 나중의 이보 전진을 위한 거야. 두고 봐, 다음 번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제롬은 지지 않겠다는 듯 느긋한 코웃음으로 엘스헤른의 말에 응수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 어느새 엘스헤른과 눈 높이가 같을 정도로 키가 자란 그는 사촌형님을 대등한 높이로 바라봐 주며 약올리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음에 볼 때는 형님보다 훨씬 더 커져 있을 테니까 각오해둬." "다음 번엔 우유나 떼고 와.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와는 대적해 줄 수 없어." 엘스헤른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른인 척 하는 이 녀석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깐죽거리는 고양이의 얼굴 같은 이 녀석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제롬 은 어느새 짓궂은 눈빛을 지으며 엘스헤른을 두고 레비앙에게로 몸을 돌려서는 그 를 와락 끌어안았다. 느닷없는 제롬의 행동에 놀라 기침을 쿨럭거리는 엘스헤른을 뒤로 하고 제롬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레비앙을 놓아주었다. 그는 이제 소년에서 벗어난 은근한 눈빛 을 지으며 레비앙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스트르에 신랑감이 없으면, 언제든 나에게로 와요. 기다리고 있을 게요." 자신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눈으로 전달하는 제롬에게 레비앙은 그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지만 엘스헤른이 음산한 기운을 피워 내며 중간에 끼어 드는 바람에 레비앙은 제롬에게 뭐라고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 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승객들은 서둘러 주세요. 배가 곧 떠납니다." 선원들의 걸걸한 목소리가 출항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나 누느라 서 있던 남매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서 배를 한 번 돌아다보았다. "에스트르 사람들은 정말, 심각하게 서두른다니까." 불만에 가득 차 투덜거리는 제롬의 손을 잡으면서 아이린이 살짝 두 사람에게 목례를 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꼭 뵐 수 있길 빌게요."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제롬의 손을 이끌었다. 배에 오르기 전에 그녀는 잊은 게 있는 듯 문득 고개를 돌려 엘스헤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오라버니, 힘내요!" 그녀는 망토자락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힘차게 흔들며 배에 올랐다. 아이린에 뒤이어 제롬도 크게 한 마디 했다. "레비앙,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나를 택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 녀석, 끝까지!!" 발끈하는 엘스헤른을 두고 키득거리면서 배 위에 오르는 제롬을 보며 레비앙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엘스헤른은 양쪽에서 조롱 당하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을 떨치지 못해 레비앙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비앙, 너는 또 왜 심상치 않게 웃는 거야?" "그냥, 든든하다고나 할까? 제롬이 있으니까 수녀는 안 되어도 될 것 같아서 말 야." 레비앙은 은근히 약올리는 말투로 그를 놀리며 배 위에서 이쪽을 향해 손 흔드 는 제롬에게 열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엘스헤른은 은근히 손을 올려 레비앙의 손을 꼬옥 잡아 내리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저런 바람둥이 녀석을 믿다니." 강샘이 농후한 엘스헤른의 혼잣말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레비앙은 눈을 깜빡 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질투하는 거야?" 대뜸 그렇게 물어오는 레비앙의 눈길을 피하며 엘스헤른은 딴청을 피우느라 일 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아냐, 질투는 무슨……." "그럼 이 손은 왜 계속 붙들고 있는 거야? 흔들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그거야, 팔 아플까봐 그러는 거지." "사실은…… 질투하는 거 맞지?" 은근하게 다시 묻는 레비앙을 엘스헤른은 밉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면서 조금은 천진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한 그 표정을 대하며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그 손을 꼬옥 맞잡았다. 그러고는 출항을 서두르는 눈 앞의 배로 시선을 돌리면서 마치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내가 아는 너는 친구일 때도 심하게 질투가 많은 녀석이 었어." 배가 떠나고 있었다. 뱃전에 출렁이는 물살이 한층 소리를 높였다. 배 위에서는 아이린이 아직까지 난간에 붙어 서서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부두를 시끄럽게 하 던 종소리는 이제 멎었다. 커다란 흰색 배는 검은 바닷물이 출렁이는 북해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 "이제는 털어놔 봐요." 누워 있던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아드레이드가 다소 앙칼진 목소리로 옆 자리에 누운 사람을 마구 흔들었다. 곤한 잠을 방해받고 있는 이 존엄하신 분은 아내가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전에 없었다. 그녀의 진지한 정숙함은 호기심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잠 좀 자요, 부인. 오늘 하루 종일 부인에게 시달렸소. 부인은 지치지도 않소?" "아뇨! 알아낼 때까지는 쓰러질 순 없죠. 내가 쓰러지지 않는 한, 폐하도 잠은 다 주무신줄 아세요. 자, 이야기 해 봐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드레이드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로 이 나라의 국왕을 몹시 괴롭혔다. 그 녀는 국왕의 어깨를 흔들어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주먹으로 등을 토닥토닥 두드 리는 폭력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급기야 그녀는 최후의 방법으로 국왕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따뜻한 숨결을 "호∼!"하고 불면서 간지럽게 속삭였 다. "이제는 이야기 해 줘도 되잖아요∼! 게다가 아무도 없다구요∼!" 국왕은 소름이 끼치는지 어깨를 움찔하더니 아드레이드가 좀 전에 그랬던 것처 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거의 체념한 표정으로, 하얀 레이스가 치렁하게 붙 어 있는 잠옷의 소매에 뒤덮인 손을 들었다. "쉽게 생각해 보면 되지 않소. 무어가 그리 궁금해서 대체 잠을 못 자게 하는 게 요?" "저는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라 쉽게 생각이 안 돼요. 음, 우선은…… 어째서 재 판을 하도록 한 거죠? 그냥 폐하의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잖아요." 아드레이드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마치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국왕에게 로 바짝 다가앉았다. 국왕은 호기심에 넘치는 그녀를 잠 오는 눈으로 한 번 쳐다 봐 주고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재판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면 레비앙 경이 아무리 여자더라도 계속 왕태자의 시 종으로 있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으니까 그 방법을 택했소. 귀족재판은 상소를 허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오. 안 그랬으면 아무리 내가 그를 시종직에 두고자 한 들 귀족들이 가만히 있었겠소?" "그러면, 소문대로 재판의 결과가 짜여 있었더란 말이예요? 폐하께서 판사들을 불러 당부하셨다는 게 그런 거였어요?" 아드레이드가 남편의 공정성에 대해 짐짓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자 국 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짜 놓지는 않았었소. 다만, 재판은 아무쪼록 공정하게 진행하고, 만일 레비앙 경이 나를 속인 죄가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나에게 그 처벌권을 넘겨달라고만 했을 뿐이오." "그게 짜 놓은 거지 뭐예요!" "하지만, 그리 하지 않았으면 아마 우리 왕태자는 미래에 충직한 신하를 이미 한 명 잃은 왕이 되지 않겠소?" "푸훗, 왕태자의 청원이 폐하의 마음을 움직였나보군요."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오. 다만 나도 어렸을 적에 여자 가정교사를 좋아했던 경 험이 있어서……." "뭐요?" 아드레이드의 앙칼진 목소리에 잠이 깼는지 국왕은 눈을 반짝 떴다. 하지만 이 내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눈이 반쯤 스르륵 감겼다. 아드레이드는 잠에 못 이기고 있는 남편을 곱게 흘겨봐 주며 연이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러면, 폐하. 대체 그 6개월이라는 판결은 뭐죠?" "아, 그건…… 전에 말했잖소. 티아란 대공에게 전쟁에 열심히 임할 수 있는 계 기를 만들어 줄 거라고 말이오. 6개월 안에 모든 것을 끝내고 돌아오지 않으면, 레비앙이 남의 부인 혹은 수녀가 되어버릴 테니 알아서 하지 않겠소? 이것보다 확 실한 계기는 없을 게요." "그러다가 혹여 6개월 안에 못 돌아온다면 어떡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 6개월 안에 도망쳐 오면 어떡해요?" "설마 도망쳐온 주제에 청혼을 하겠소? 레비앙 경을 보기에 부끄러워서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게요. 티아란 대공은 남자의 명예를 아는 사람이오." "하지만 레비앙 경의 마음은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티아란 대공이 없는 동안 그 가 다른 사람을 택하기라도 한다면……." "그런다면 미련을 버리고 티아란을 열심히 다스리면 되지 않겠소?" "그 녀석, 아니 티아란 대공이 그렇게 쉽게 미련을 버릴 것 같아요? 아마도 난리 가 날 걸요? 대 티아란의 대공이 남의 부인을 데리고 도망갔다는 소리가 나오지나 않을까 모르겠군요." 아드레이드가 혀를 끌끌 차자, 국왕은 그녀가 한 이야기를 상상만 해도 재미있 는지 잠에 취한 모습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하품으로 이어졌 다. "아함, 이제는 자도 되겠소? 부인." "아, 안돼요!" 아드레이드는 자리에 스르륵 쓰러지려는 남편의 팔을 끌어당겨 다시 일으켜 앉 혔다. 일국의 국왕으로서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잠도 마음대로 자지 못하는 상황 을 한탄하며, 국왕은 앉은 자리에서 꾸벅꾸벅 머리로 헛 방아를 찧고 있었다. "폐하, 졸지 말고 말씀해 주셔야지요! 그 여자 가정교사는 대체 누구예요?" 누구예요? 대체 누구냐구요? 귀찮게 채근하는 목소리도 이제 멀어지고 그는 이 번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즐거움에 단꿈으로 젖어 들었다. ·‥…━━━━…‥· 뭐야? 아직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단 말야? 참 잘∼ 하는 짓이구나. 하루 밖 에 남지 않았는데 어떡할 거야? 잊었어? 내일 아침엔 출발이라구. 너, 이대로 떠 나서 6개월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레비앙이 누구와 결혼해버릴 지 장담 못해. 어떻게든 확답이라도 받아놓고 가야 할 거 아냐. 아직까지 귀에 쟁쟁한 누나의 잔소리를 떨치기라도 할 듯 엘스헤른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드레이드가 그렇게 이야기한 의도는 알고 있지만, 엘스헤른 은 그리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일전, 레비앙에게 한 맹세도 있고, 또 내일 떠난다고 생각되니 이상하게도 느긋해져서 스스로도 의아하게 여기고 있 는 중이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조바심이 날 줄 알았는데 막상 코앞에 닥치고 보니 마음은 심지어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몹시도 여유롭게 오전에는 레비앙과 함께 햇볕이 잘 드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점심 식사를 하기 전에는 간단한 산책도 하고, 식사 후에는 이 렇게 티타임까지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 려니까 마치 멀지 않은 과거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엘스헤른 은 간만에 느끼는 이런 여유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져 단 일 초도 놓치고 싶 지 않았다. 레비앙에게 아직까지 티아란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헤어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이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다소 깊이 생각에 잠긴 그를 일깨우며 약간의 핀잔이 섞인 레비앙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엘스헤른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반짝 들었다가 싱긋이 웃는 미 소로 무마했다. "간만에 이렇게 한가하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너, 오늘은 왜 이렇게 한가한 거야? 전시의 티아란 대공께 한 가함이라니,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야?" 찻잔을 내려놓으며 은근히 묻는 레비앙의 추궁을 피하려고 엘스헤른은 너스 레 섞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거야 뭐, 에스트르에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그런데 너 는 내가 오랜만에 이렇게 하루종일 같이 있게 된 것이 그렇게나 아니꼬운 거 야? 왜 나의 즐거운 마음에 재를 뿌리고 그래?" "과거의 악몽이 떠올라서 그래. 네가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잊었어? 온종 일 따라다니며 괴롭히곤 했지. 내연이 어쩌구 하면서……. 그때는 네가 정말 로 귀찮았어." 레비앙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다 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붉은 향기를 진 하게 품어내는 케시르니아 차가 둥글게 담긴 찻잔은 티없는 그의 웃음처럼 무 늬가 없는 하얀색이다. 무심히 손 끝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레비앙에게 엘스헤른은 넌지시 물었 다. "…… 지금은? 지금은 어때?" 진지함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까는 엘스헤른의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와는 달리 조금 서글퍼 보였다. 레비앙은 그렇게 느끼고 있는 자신의 마 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일부 러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이 받침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그 깨끗한 소리는 시 선을 내리깔고 있던 엘스헤른을 문득 일깨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앞에는 여름의 숲과도 같은 짙은 초록의 고요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렇게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는 더 이상 피하지 못할 그물에 걸 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하하, 내가 괜한 걸 물었나봐……." 웃음이라는 술책으로 빠져나가려 몸부림 쳐보지만 깊게 가라앉은 저 초록빛 고요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읽혀버린 것이다. 감정이 담겨 비쳐 보이는, 마음이라는 투명한 창을……. 작은 한숨소리가 문득 어지러운 상념을 깨운다. 그 한숨 끝에 마치 작은 돌 파구를 내어주는 듯 한 레비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너는…… 나를 자주 곤란하게 해." 레비앙은 조금 웃었다. 그 웃음이 장식에 지나지 않음을 엘스헤른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꾸만 진지해지려하는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내가 널…… 어떻게 곤란하게 하는데?" 엘스헤른의 잿빛 눈동자가 차분한 색채로 가라앉았다. 레비앙은 그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전에 늘상 같이 있어 왔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 했던 친구는 그 눈빛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더 이상 친구가 아 닌, 다른 사람으로……. 그리고, 친구가 아닌 그를 대하는 순간 마음 속에는 친구로 여길 때 느끼지 못했던, 마치 불협화음 같은 파문이 일어난다. 불안하 리만큼 어지러운 마음 속 파동, 지금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채 알지 못해 그토록 매몰차게 저 사람을 거절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알고 있는 그것 이, 그릇을 넘쳐나는 물처럼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래서…… 간혹 너무나도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건 말야……." 레비앙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케시르니아 차의 붉은 빛처럼 투명하고 촉 촉한 입술에 언뜻 향기 같은 미소가 감돈다. "그건,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잘 익은 열매처럼 완연한 웃음으로 가득 찬 그의 입술은 짓궂게도 단호한 말로 매듭을 지어버렸다. 가득 긴장해있던 엘스헤른은 그제서야 자신이 놀림을 받았음을 깨닫고는 실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조금은 거칠 다. 그래서 레비앙은 그가 많이 실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망은 기대로부터 온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라고 묻고 싶은 심정을 레비앙은 애써 억눌렀다. 그렇게 묻는다고 해도, 지금의 엘스헤 른에게서는 솔직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까지 당혹스러울 만큼이나 저돌적인 진실함을 내보이던 엘스헤른이 과연 무슨 심경의 변화로 자신을 그토록 걸어 잠그고 있는 건지, 레비앙은 궁금했다. 물 론 얼마 전 그에게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했던 자신을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 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절교를 선언했을 때조차 어느새 곁에 다가 와 있던 그가 그 정도의 말로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이었다.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커다란 이유가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레비앙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안함으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레비앙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손을 올려 턱을 괴었다. 그는 농염한 아름다움 이 빛나는 눈을 들어 엘스헤른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주 바라보고 있던 잿빛 의 눈동자가 가만히 흔들린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것이 역력히 드러난다. 결국 엘스헤른은 딴청을 부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집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해 냈다. "이거 누가 구운 거지? 정말 맛있군." 짐짓 활기차게 떠들며 편도쿠키를 집어 올리는 그를 향해 레비앙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고 엘스헤른이 집어 올리던 편도쿠키가 톡 하는 소 리를 내면서 다시 접시로 떨어진다. 레비앙은 엘스헤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조용히 말했다. "무리하고 있는 거 다 알아, 엘스. 그러는 너는… 많이 답답해 보여. 조금은 솔직해져도 괜찮아." 말을 하고 나니 기분이 너무나도 상쾌해져서 그는 그대로 싱긋 미소를 지었 다. 그 맑은 미소를 대하며 당황함으로 넋을 놓고 있던 엘스헤른은 문득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난 말야……." 곧바로 변명을 하려하는 엘스헤른이 어쩐지 얄밉기까지 해서, 레비앙은 붙 들고 있던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세게 때려주었다. "자꾸 그러면 못써. 네가 그러면 마음이 편하지 않단 말야. 나도 조금은 반 성하고 있다구." 곱게 흘기면서 나무라는 그의 행동에 적잖이 당혹해 하고 있던 엘스헤른은 아직까지 얼얼하게 아픈 손등을 내려다보며 할말을 잃었다. 빨갛게 변해버린 손등에 문득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레비앙의 손이 알알한 고통을 감해주려 는 듯 다시금 손등을 감싸 왔다. 싸늘하다고 느낀 처음의 감각이 점차 은근한 온기로 데워진다. 고통은 그 온기에 녹아 어느새 가만히 사그라든다. 엘스헤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의 눈이 한 점 티 없이 깨끗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 속에 초상화라도 그려두고 싶을 만큼이나 잊고싶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맑게 웃어주고 있었다. 이내 그 역시 레비앙에게 시원스러운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그러면…… 내일부터, 내일부터는 솔직해질게." 마음껏 웃으면서도 충족되지 못할 한계를 안다. 내일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둘이서 가질 수 없는 이름이다.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로서 마지 막이다. 그래서 엘스헤른은 거짓말이 아닌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그걸 알 리 없는 레비앙은 한결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솔직해지려면 지금부터 솔직해져야지, 내일부터는 또 뭐야?" 핀잔을 늘어놓느라 눈을 살짝 찌푸린 그가 확실히 여느 때와는 다르게 보인 다. 마치, 추억처럼 아스라하고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이 이제 곧 과거가 될 것, 추억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보석처럼 푸르다. 투명하고 깨끗한 공기가 충만한 가운데, 레비앙이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하얀 살결과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색의 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 그 아름다운 사람이, 그리고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이 한 때가 점점 뽀얀 물안개로 젖어든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몹시도 벅 차 오른다. 이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할만한 용기가 나지를 않을 것 같다. 어쩌 면 좋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비로소 아름답다고 여긴 이 시간을 어찌하면 좋을까? "어? 엘스, 우는 거야?"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엘스, 엘스헤른……. 잃고 싶지 않은 저 목소리 가 귓가에서 멀어져 간다. 이대로 두고 떠나야 할 일상이라는 이름의 평온, 그리고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던 단 한 사람도……. 『SF & FANTASY (go SF)』 47930번 제 목:[펌/천리안] 레비앙 & 레비안느 #100 올린이:elosis (배현정 ) 01/10/11 00:48 읽음:120 관련자료 없음 ----------------------------------------------------------------------------- ┌───────────────────────────────────┐ │ ▶ 번 호 : 43/43 ▶ 등록자 : 마쉬멜로우 │ │ ▶ 등록일 : 2001년 10월 10일 16:12 │ │ ▶ 제 목 : REBIAN & REBIANNE ( 레비앙 & 레비안느 ) - 100 - │ └───────────────────────────────────┘ ┏━━━━━━━━━━━━━━━━━━━━━━━━━━━━━━━━━┓ ┏╋━━━━━━━━━━━━━━━━━━━━━━━━━━━━━━━━━╋┓ ┃┃ ┃┃ ┃┃ ┃┃ ┃┃ REBIAN & REBIANNE ┃┃ ┃┃ << 레비앙 & 레비안느 >> ┃┃ ┃┃ ┃┃ ┃┃ ┃┃ ┗╋━━━━━━━━━━━━━━━━━━━━━━━━━━━━━━━━━╋┛ ┗━━━━━━━━━━━━━━━━━━━━━━━━━━━━━━━━━┛ - EPILOGUE 저녁때 오페라 보러 가자. 아니면 무도회라도 좋아. 하도 담담한 목소리의 제안이라 레비앙은 엘스헤른이 하고 간 말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는 쉽사리 엘스헤른의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그 여상스러운 음성이 다른 여느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걸 눈치채긴 했 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엘스헤른이 제안을 했을 그 당시 뿐이었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며 마치 혼잣말처럼 하는 그 말투는 평소처럼 조르 거나 은근한 장난기를 담은 것이 아니었다. 조금 건조하고 어쩌면 허탈하기까 지 해서 "갈 거지?"라고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저 지나는 말 쯤으로 넘겨 버릴 뻔 했다. 그가 자택으로 돌아간 후, 로자리움은 조금 떠들썩했다. 하녀들이 메리벨 부인의 말에 따라 부산히 움직이는 이유는 레비앙을 멋들어지게 꾸며주기 위 해서였다. 오페라에 가기 위해서는 예장을 차려입어야 한다는 것이 레비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일을 즐거워하는 듯 해 보이는 어린 하녀 들 역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주인에 비해 모니카는 몹시도 신이 나 있었다. 그녀는 메리벨 부인과 함께 레비앙을 아름답게 치장해주는 것을 확실하게 즐기고 있었다. 비록 오늘 저녁 주인님의 파트너가 엘스헤른이라는 사실이 조금 걸리기는 했으나 간만에 친구와 분위기를 내려는 레비앙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또 다 른 작은 불만이라면, 레비앙이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 정도 역 시 그를 최고로 아름다운 미소년처럼 꾸며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옅은 레몬 빛의 우아한 예장에는 그에 어울릴 법한 루비 브로치를 꼭 달아 야 한다든지 모자 깃털은 흰색과 짙은 황색이어야만 한다든지 혹은 머리카락 은 비단 리본으로 묶을 필요도 없이 우아하게 세팅해서 늘어뜨려야 한다고 떼 를 쓰는 모니카 때문에 치장에 다소 시간이 많이 걸려, 레비앙은 저녁 즈음 서둘러 로자리움을 나섰다. 이미 엘스헤른은 에스트리온 성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레비앙은 어쩐 지 조바심이 나서 마차를 타고 가기보다는 시종에게 시켜 꺼내온 말을 탔다. 애써 차려입은 예장이 구겨진다고 배웅 나온 모니카가 기겁하기는 했으나 그 는 그녀에게 한 번 웃어주는 것으로 용서를 구하고는 얼른 말을 달렸다. 어둠은 벌써 차곡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로자리움의 성문을 나서고 눈 앞에 드러난 숲은 맞닿은 하늘과 이루는 검고 뚜렷한 실루엣으로 마치 오려낸 듯 해 보였다. 익숙한 숲이지만 그 속으로 뻗은 길 앞에서 잠시 주춤한 레비앙은 곧 속력을 높였다. 지난 번 사냥 숲에서 길 찾으러 돌아다니다 낙마한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오늘은 설마, 아는 길을 가는데 그렇게 되겠냐마는 어쩐지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불안함이 어둠에 대한 것과는 다르다는 걸 레비앙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은 엘스헤른에게로 가고 있는 중인 만큼, 그는 이 마음이 아까 엘스헤른이 보여준 일상과는 조금 다른 행동들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고 해도, 아까의 엘스헤른은 여느 때 보다 무겁고 경직되어 보였다. 아주 미묘한 차이라서 눈치채지 못할 뻔 했지만 느닷없는 그의 눈물을 보고는 확실히 평소답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름다 운 잿빛의 눈동자에서 동그랗게 부풀어 굴러 떨어지는 눈물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가만히 눈을 응시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훌쩍이지도 어깨를 떨지도 않았고 그저 눈물만 떨구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못 견디게 슬픈 것처럼 그 눈은 순식간에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담은 영롱한 눈물 빛으 로 젖어들었다. 그것조차도 금새 손등으로 훔쳐버리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미 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목놓아 우는 것보다도 훨씬 서글퍼 보였다. 그 순간 어째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 한 구석이 뜨끔할 정도의 아픔이 느껴졌다. "참, 곤란한 녀석이라니까." 레비앙은 괜히 불안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혼잣말 끝에 피식 웃어버 리고는 부지런히 말을 달렸다. 멀리 에스트리온 성이 윤곽을 드러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 았다. 검고도 깊은 숲에 포옥 잠긴 성은 겨울을 목전에 둔 싸늘한 날씨임에도 아늑해 보였다. 레비앙은 성 문앞에 잠시 멈추었다가 낯익은 문지기의 인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쩐 일인지 에스트리온 성에서도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왕실의 황금색 인 동덩굴 문장이 새겨진 마차도 와 있고 저택의 현관 입구 앞에 왕실 제복의 시 종들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 왕비 전하께서 도착해 계신 모양이었다. 말에서 내린 레비앙은 조금 망설이다 말고 저택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대리석의 계단을 오르고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그는 따뜻한 공기를 뺨에 가득 느낌과 동시에 그의 느닷없는 등장을 어리둥절해 하는 이 곳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서와요, 레비앙 경." 그나마 루엘 경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그제서야 왕비를 비롯한 에스트리 온 가의 사람들이 가벼운 인사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반가워요, 레비앙 경. 그런데 엘스헤른은 같이 오지 않았나요? 어디 들르기 라도 한다던가요?" 엘스헤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아드레이드의 물음을 의아한 눈빛으로 받은 레비앙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회중을 둘러보았다. "대공 전하께선 아까 먼저 에스트리온 성으로 가셨습니다. 오래 되었어요. 네 시간 전 쯤……." "네 시간 전에 로자리움에 나섰다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우아하게 차려입은 에스트리온 공작 부인이 살풋 근심 어린 눈빛을 지었다. 레비앙은 언제나 장난기 많고 약간은 뻔뻔한 모습을 보이곤 했던 그녀가 평소 와는 조금 달라 보여 이상하게 느끼기는 했으나 이내 그녀가 시녀를 시켜 엘 스헤른의 방에 가 보라고 하는 녘에, 2층으로 달려가는 시녀에게로 시선을 돌 렸다. 2층에 올라가 복도로 모습을 감추었던 시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겁지 겁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대공 전하께선 방에 계시지 않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는 시녀의 앞에서 공작부인은 미간을 살풋 찌푸리는 것으로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녀의 곁에 있던 아드레이드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에스트리온 성의 집사에게 얼른 온 집안 구석구석을 뒤질 것을 명했다. 집사와 하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사이, 레비앙은 역시 분위기가 심상지 않음 을 느끼고는 루엘 경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오늘 대공 전하와 오페라를 관람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이곳에 방문했습니다." "오페라요?" 루엘은 오히려 레비앙보다 더 어리둥절해 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 에 서 있는 누이를 돌아다보았다. 그나마 침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아드레이 드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사실, 레비앙 경, 엘스헤른은 오늘 가족들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약속이 되 어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모처럼 여기에 온 거구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비앙 경 역시 엘스헤른과 또다른 약속이 있는가 보군요.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한들 중복해서 약속을 잡을 사람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군요. 게다가 이렇게 사라져버리다니……." 아드레이드는 다소 심각한 눈빛으로 집사가 간 곳을 쳐다보며 마치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도망이라도 간 걸까?" 비록 소리를 낮춘 말이었으나 레비앙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 엘스헤른이 도망을 칠만한 이유에 대해 곱씹어 생각해 보기도 전에 흩어졌 던 하인들과 집사가 돌아왔다. "저택 안에는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아드레이드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녀는 굳어진 얼굴로 레비앙에 게 다가와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시간 전 쯤에 로자리움을 떠난 게 확실한가요? 레비앙 경." "예, 그렇습니다. 왕비 전하. 분명 에스트리온 성으로 돌아가 있겠다고 했습 니다." 레비앙의 확실한 대답을 들으며 아드레이드의 눈에는 근심의 빛이 더욱 짙 어졌다. 그녀는 동생을 찾을 궁리를 하기 위해 레비앙에게서 몸을 돌리며 나 직히 중얼거렸다.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 내일 떠난다는 사람이 대체 이게 무슨 행동이 야?" 그녀의 독백은 예리한 칼날이 그려내는 빛처럼 선명한 잔상을 남기면서 레 비앙의 마음 속에 따끔한 고통을 남겼다. 레비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 었다. "떠나다니요?"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레비앙의 물음은 제각각 고민에 잠겨 있던 에스트리 온 가문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모으기에 충분했다. 영문을 모르고 세게 얻 어맞은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아드레이드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지었 다. "설마…… 엘스헤른이 아직 말해주지 않은 건가요?" 아드레이드는 느릿하게 물으며 레비앙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내일 아침 일찍 프랑스를 향해 출전할 거예요. 물론 잠시 티아란에 들 르긴 할 테지만." 프랑스……. 입술 끝으로 작게 말을 곱씹던 레비앙은 초점을 잃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려 아무런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순간 넋을 잃고 마치 인형처럼 모든 행동을 멈추어버린 그를 걱정스레 바라 보던 루엘이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이런, 레비앙 경은 엘스헤른으로부터 아직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보군 요." "아아, 최악이야. 엘스헤른, 잡히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테니까." 아드레이드가 채신도 잊고 언성을 높이는 사이에 루엘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딱 부러지는 어조로 한 마디 했다. "화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전하. 지금은 어떻게든 찾아야 할 게 아닙니 까? 게다가 도망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전하께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침착한 얼굴로, 모여있는 하인들에게 성 내 구석구석을 살필 것을 명 하고 집사에게는 왕궁에 조심스럽게 들러보라고 일러두었다. 그러고는 두 손 으로 레비앙의 어깨를 붙들고는 가볍게 그를 흔들었다. "레비앙 경, 넋 놓고 있어서는 안돼요. 엘스헤른이 갈만한 곳을 좀 생각해 봐요. 그 녀석 요즈음 많이 심란해 보여서 걱정이 되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충격이 컸던지 레비앙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겨우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떠난다는 것…… 정말입니까?"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그의 초록색 눈을 진지하 게 응시하며 루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레비앙 경에겐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내일 떠나는 건 확실합 니다.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일인 걸요. 자, 레비앙 경, 지금은 조금 혼란스 러우시겠더라도, 우선 엘스헤른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레비앙 경이라면, 엘스헤른이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가 도망쳤으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디엔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거겠죠. 최악의 경우라면, 이대로 인사 한마디 남기지 않고 벌써 티아란으로 향했거나. …… 레비앙 경, 일단은 그 애를 찾아야만 해요." 루엘은 재촉이라도 하는 듯 말했으나, 레비앙은 그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 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엘스헤른이 떠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졌다. 설마, 아까 눈물을 보인 것은 그래서 일까? 아니, 엊그제 느닷없이 친구로 있어주겠노라고 말했던 것 역시 떠나기 위한 준비였던 걸까? 그리고, 내일의 약속……, "그러면…… 내일부터, 내일부터는 솔직해질게." 라고 했던 그 말 은 이미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서 한 말이었던가?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레비앙은 문득 그를 찾아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든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레비앙은 자신의 어깨에 놓인 루엘의 손을 떨쳐내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 다. 딱히 짚이는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 떠날 거라는 소리를 다른 사 람의 입으로 전해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필사적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엘스헤른이니까……. 시종이 붙들고 있던 말에 훌쩍 올라탄 레비앙은 고삐를 세게 휘둘렀다. 가 슴 속에서 뜀박질하는 박동은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보다도 세차고, 강렬하 게 다가오는 어둠의 농도보다도 짙었다. 어둠 따위를 두려워 할 여유는 없다. 지금은 어디든 달려가서 그를, 엘스헤른을 만나야만 한다. 농후한 어둠을 향해 희고 긴 입김을 내뿜으며 말은 숲으로 들어섰다. 어둠 이 짙게 내린 숲은 의외의 익숙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숲 은 엘스헤른을 알게 된 이래 10년 동안을 줄곧 다니던 곳이 아니던가! 너무나 도 당연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아릿한 그리움이 되어 마음 속에 쌓인다. 이 길, 그저 무심히 지나쳤던 많은 이야기들…… 추억이란 이런 걸까? 이렇게 새 삼 떠올라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마법 같은 영상들. 지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결 코 지울 수 없는 그것이 지금 이렇게 눈 앞에 보듯이 되살아나 입술을 떨려오 게 만든다. "엘스헤른." 그 이름을 부르면서 이렇게 애절한 마음이 될 수 있었음을 왜 예전에는 몰 랐을까?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그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어째서 몰랐던 걸까? 눈가에 뜨거운 물기가 스친다. 뽀얗게 흐려지는 앞 길은 과거로 이어진 작 은 통로. 마음은 지금 걸음을 앞질러 이어진 길을 향해 거슬러 간다. 행복했 던 그 순간 순간에 깨닫지 못한 마음이란, 지금 마치 퍼즐의 어려운 조각을 맞추어 낸 듯 이제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자라는 것을 왜 싫어했던 걸까? 왜 그토록 시간을 묶어두려 했던 걸 까? 그건 아마도 이러한 순간을 예견했던 것이 아닐까? 성장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엘스헤른을 빼앗아 갈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 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책임이라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고 자신의 책임에 충 실하려면 어릴적 만큼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더 이상은 행복할 수 없다 는 것을, 멀어져버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스헤른이야말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루하고도 허무한 삶에 있어 유일한 행복이었음을 마 음속 깊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 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엘스헤른과 거리를 두려 했던 걸까? 그토록 소중하면서 도 마치 치기라도 부리듯 그렇게 그를 멀리했던 것은…… 그건, 이미 스스로 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여자의 마음으로 그의 앞에 섰기 때문이 아닐까? 전라 의 육신으로, 여성의 성별로 그의 앞에 서기 이전에 이미 마음은 그런 시덥지 않다 여겼던 친구를 점점 친구가 아닌 존재로 느끼게 되었던 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또다른 마음이 제어를 걸지 않았더라면 반해버릴 지도 몰랐을 테 지. 확실히, 점점 다른 느낌이 새록새록 쌓여 가는 묘한 기분에 대한 반발이 었다. 이끌리고 있음을 채 깨달을 사이도 없이 어린 마음은 그렇게 문을 닫아 걸었다. 자신과, 또한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힐 것을 모르는 채. 어린 마음이 얼마만큼이나 잔인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단 한 사람을 위한 행동을 <가식>이라 몰아붙일 만큼 매몰찼던 것은 사실이다. 엘스 헤른의 그 미소와 장난기 어린 행동들이 정말은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마음이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아서……,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 받을 수 없을 거라 착 각하고 있던 비뚤어진 마음이 도저히 그 커다란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 누군가로부터 전해오는 따스하게 위해주는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어쩌면 너무나도 비뚤어져 있어, 더욱이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엘스헤른이라고 생 각했을 때는 10년간 쌓아온 우정을 방패로 삼더라도 그런 식으로 물러서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게. 너에게 나는 항상 그랬어야 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그래서일 거야. 네가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 는. 너를 먼저 생각하고, 너를 먼저 배려하던 나를 내 스스로가 잃어버려서. …… 나는, 네가 아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네 앞에서 유지해 줄 필요가 있었던 거야. 이기적이게도 내 감정만을 내세우고 몰아붙이는 내 모습…… 너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가 두려워하고 물러서 버리는 게 당연해. …… 내 잘못이야. 그 걸, 이제서야 깨달았어. 너와 함께 있는 내가, 가장 자연스러운 나라는 사실을 진 작에 알았으면서도 내 감정에 눈이 멀어 그것만은 여태껏 깨닫지 못했어. 미안해, 레비앙. - 귀족 재판소의 정문에서 하늘을 물들이는 깊은 주홍색 노을을 등지고 선 그 가 그리 말 한 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마음. 그의 말 뜻을 마지막 퍼즐 을 맞추어놓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떠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안타까 움에 그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남을 수 있는 것은 엘스헤른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같이 만들었던 추억 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나마 더없이 아름답게 남겨두려고 했던 그의 마음. 그것을 왜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려 주지 못했던 걸까? - 미안해, 그러니까 나 같은 녀석 때문에 화내지 마. - 서글한 미소를 동반한 그 한 마디에 이제는 옛날로 돌아가는 거라고 믿었던 것은 착각이었다. <옛날>이라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조각임을 잠시 잊은 이유였다. 마치, 행복했던 어느 해 여름에 말려둔 장미꽃잎이 옛날을 그 리며 탐스러웠던 꽃송이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도 같이 이미 과거는 손대지 못할 벽장 속에 조심스레 장식되어 있다. 그리워하는 것은 용납되지만 그것에 얽매여 앞을 향해 걷지 않는다면 장미꽃은 다시금 새 생명으로 화려하게 피어 날 수 없다. 엘스헤른이 했던 말은 결코 과거에 머물러 있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과거라 는 라벨을 붙여 남겨두는 것은 추억일 뿐 그 자신은 이미 앞을 향해 달려나가 고 있었다. 떠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지지 않기를…… 엘스헤른은 간절히 바라 고 있는 것이다.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돌아올 거야." 라는 다 짐을 포근하게 품고 있는 듯 했다. 문득, 레비앙은 조금 전과는 달라진 공기를 느끼고는 말을 멈추었다. 심장 이 터져 나갈 듯이 말을 달려온 끝에 입술에는 불규칙한 숨결이 매달려 있었 으나, 숨을 고르거나 할 여유는 없었다. 대신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 다. 이미 어둠은 치밀하게 내려 있었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는 듯 가지가 뒤엉킨 숲의 저 하늘 위에서는 은은한 달빛이 비추고 있었 다. "이 길…… 알고 있어." 너무나도 익숙한 이 길을 모를 리가 없다. 아무런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너무나도 어두워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숨이 끊어질 듯이 달 려온 곳은 여기였다. 봄과 여름이 만나는 길목에 하얀 눈이 내리는 곳, 추억 이 닿아 있는 한 자락. 레비앙은 말에서 훌쩍 내려섰다. 이미 겨울로 접어든 숲은 잎 마저 떨구어 내고 앙상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난 초여름, 하얗게 만발했던 케시르 니아의 화려한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금은 쓸쓸한 풍경만을 자 아내는 숲을 거닐며 레비앙은 뺨과 눈가를 적시던 눈물을 닦아냈다. "여기라면 있을 지도 몰라."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있어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엘 스헤른이라면 지금 꼭 이곳에 있을 것 같았다. 훌쩍 커 버린 키로 그 봄의 아 름답던 이 숲을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마치 또 다른 나무처럼 서 있을 것 같았 다. 바로 지금, 저기에……. "엘스헤른……."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레비앙 자신도 놀랄 만큼이나 안정되어 있었 다. 울먹거리는 모습이 아니라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순간, 레비앙은 한달음에 달려가 엘스헤른의 곁에 섰다. 달빛에 젖은 채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 뽀얀 축복에 흠뻑 잠겨 있던 엘스헤른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은은한 빛과 숲의 옅은 안개가 만 들어내는 하얀 마법에 촉촉히 젖은 듯 서 있던 그는 가만히 내쉬는 숨결과 함 께 레비앙을 은근히 응시했다. "왔어?" 건조하리만큼 짧은 말이었으나 뽀얀 입김을 담은 그 말은 그를 현실로 이끌 어 내리기에 충분했다. 레비앙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무엇을 먼저 말해 야 할지를 몰라 그저 엘스헤른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엘스헤른은 부드러 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잡지 않는다면 금새 사 라져버릴 것처럼 보여 레비앙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손내밀어 잡아야 한 다고 마음 속으로부터 끊임없는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으나 손을 들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존심에서가 아니었다. 이미 자존심 따위 가 막기에는 가득 차 올라 흘러 넘치는 물이 되어버린 마음이 아니던가. 레비앙은 홍조를 띄며 달아오른 뺨과 서글퍼지는 마음을 상큼하고 그리운 체취를 실어 날아 주는 바람결에 내 맡긴 채 가만히 눈을 내리 감았다. 그리 고 곧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분명 눈 앞에는 엘스헤른이 꼼짝 않고 서 있었 다. "네가 여기에 있어서…… 다행이야."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레비앙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 말 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모두 전한 것 같아 어쩌면 조금 안심이 되었다. 싱긋 눈웃음을 짓고 있던 엘스헤른 역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응, 나도 네가 날 찾아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의 움직임처럼 그는 레비앙 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레비앙은 알고 있었다. 그 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려놓으면서 레비앙도 살풋 미소를 지 었다. 시리도록 희고 투명한 달빛은 자신의 손길이 머무르는 모든 것을 촉촉히 적 셔 놓고 있다. 바람이 일깨워주는 향기는 지금 혼자가 아님을 속삭여 준다. 숲은 이미 추억의 한 자락과 맞닿아 장차 피워낼 화려한 초여름의 눈을 그리 워 하게 한다. 눈물이 묻어날 듯 아스라한 추억은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 눈 꽃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달빛과 바람과 숲과 추억, 그 모든 것이 음악이 되어 주변을 보드랍게 감싼다. 그리고, 그립고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낮게 속삭여 온다. "여기서 나와 함께…… 미뉴에트를 추지 않을래?"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