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FANTASY (go SF)』 87548번 제 목:[잡담] 드래곤레이디 입니다.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08 13:26 읽음:1117 관련자료 없음 -------------------------------------------------------------------------- --- 정창길 님. 제가 작가분께 퍼가도 되냐고 연락했거든요. 작가께서 허락하시는데로 곧 나우에 올려드릴께요. 『SF & FANTASY (go SF)』 8765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09 02:50 읽음:192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1 :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 관련자료:없음 [42879]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2 04:41 조회:1421 공동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그것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나를 향한 첫 마디 였고 그때부터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의 길이 뒤바뀌어 버렸다. << DRAGON LADY >> /F Chapter#1-1: 누군가의 주인이 되는 것. 0.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3년도 되지 못하는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의 이야기인데... 어떤 부분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고 또 어떤 부분은 떠올리 기만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이 흘러내려서...정말 어디부터 말 해야 할지 모르겠다. 3년 동안 난 한뼘 정도 키가 컸고 좀 더 검을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술을 조금 즐기게 되었고...아마도 이 세상의 절반 정도는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고 또 얼마전 그녀를 잃었다. 아니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옳은 표현이겠지? 그녀의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까...3년 전이나 지금 이나 우유부단한 내 성격은 전혀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그냥 조금 긴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 그녀를 처음 본 그때부터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때...분명히 몹시 추웠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 그때부터 말하는게 좋겠다. 1.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이젠 제법 쌓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때묻은 옷깃을 세우고는 머리며 어깨에 내려앉는 눈을 털 며 작은 마을 마을 키오네의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런 이른 아침부터 마을 광장에 모여드는 것은 일년에 한번 있는 의식을 치루기 위해서 이다. '대체 어느 멍청한 조상님께서 예복을 입고 1)페세테르의 배를 가르는 의식을 치루라고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리탄은 어깨를 죄고 있는 작은 예복이 싫었다. 이런 의식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것이다. 피곤한 표정으로 줄리 탄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족히 자기 몸의 10배는 되는 듯한 가장 큰 바다 물고기 페세테르 앞으로 다가서며 손을 풀었다. 이 북부의 어촌 키오네는 헤스페리아 대륙에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 은 작은 마을이지만 나름대로 마을 풍습이랄 것이 있다. 그 해 바다에서 처음으로 잡히는 거대하고 굉장히 둔해 보이는 물고기 페세테르를 바다의 신 휘멘에게 배를 가르고 살을 발라 바치는 것이다. 도시의 축제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꽤나 소박해 보이는 의식이지만 사실 그 페세테르를 손질하는 일을 맡은 마 을 유일의 요리사 줄리탄으로서는 일년에 한번 죽어나는 날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몸집에 몇 배가 되는 저 물고기의 내장을 제거하고 지방을 떼어낸 뒤에 살을 발라내는 끔찍하게 길고 지 루한 과정을 혼자서 하는 것이 어디 아직 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사람에게 시킬 짓인가. 게다가 날은 땅이 바위처럼 단단히 얼어 버릴 정?물고기는 거친 바다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연한 살갖을 가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너무 힘을 주어 칼을 넣으면 눈 더미 속으로 손을 넣은 것 마냥 푹 들어 가 버려 내장 어딘가를 건드려 버린다. 줄리탄은 익숙한 칼 놀림으 로 칼을 넣었고 곧 실밥이 터지는 듯한 톡하는 소리와 함께 뱃살이 튿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어깨에 힘을 주어 뱃살을 가르기 시작한 것 까진 좋았다. 그런데 무언가 줄리탄의 칼에 걸리 기 시작했고 더 이상 칼이 움직이질 않는 것이었다. 줄리탄은 머뭇 거리며 칼을 뽑았다. 실수로 내장을 건드렸다면 마을 어른들에게 의식을 망쳤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되어 씹힐 지경이었으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으으으 실수한 건가?' "뭐하냐! 줄리탄! 설마..." "아, 아니에요! 뱃속에 무언가..." "무언가...라니?" 이 마을 출신이지만 먼 도시 까지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 그러 니까 이 마을에서 가장 박식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스테온이 고개 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실 줄리탄의 형 뻘 되는 나이의 스테온을 줄리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만 하면 전혀 듣도 못한 말 들로 반박해 버리니까. 똑똑하다는 건 알겠는데 말야...사람 말 좀 막지 않았음 좋겠다고 그는 투덜거리곤 했다. "그래요. 무언가 뱃속에..." "페세테르는 회유성 물고기다. 먼 바다에서 소화가 안되는 것들을 집어삼키는 경우는 허다하니까 그렇게 허둥되지 말고 잘 빼 내면 돼. 줄리탄." 아니나 다를까. 스테온은 줄리탄의 말을 막으며 자신의 박식하기 이를데 없는 조언을 늘어 놓았다. '회유'? 그런 어려운 말 몰라도 페세테르가 아무거나 집어 삼키는 멍청한 대식가 라는 사실은 오 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게다가 누가 허둥댔다고 그래? 라는 표정으로 줄리탄은 찢어진 뱃살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물컹한 지방질 덩어리들이 끈적거리며 줄리탄의 손을 차갑게 휘감기 시작했다. "의식에 쓰일 거야! 조심해라!" "예 예 알고 있다고요." 줄리탄의 손은 조심스럽게 그 뱃속의 '이물질'을 찾기 시작했고 곧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이 그 손에 잡혔다. '윽!' 줄리탄은 갑작스레 뜨끔하는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뱃속에서 손을 뽑았다.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줄리탄의 손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 상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제길!!!" 결국 '신성한' 의식에 상스런 소리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야!!" "칼! 뱃 속에 칼이 들어 있나 봐요!" 다행이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줄리탄은 황당할 뿐이었다. 물고기 뱃속에 칼이라니...칼을 삼키고도 살아 있었던 말인가. 정말 우둔한 물고기다 페세테르는. "칼이라...그거 정말 특이한 경우로군. 확인해 봐라." 스테온은 아주 강 건너 불보는 듯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남의 손엔 피가 흐르는데 말야...뭐라 말해도 줄리탄 역시 그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에 피가 흐르는 손을 대충닦으며 조심스레 찢어진 뱃속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곧 그 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칼은...줄리탄의 두 눈이 확대되었다. 그 칼은 기사들이나 쓸 법한 길고 날카로우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 이었던 것이다. 이 대식가 물고기께서 호신용으로 삼키기라도 한 건가. "자, 잠깐..." 하지만 이상한 점은 그 것만이 아니었다. 그 칼을 꺼낼 수 없었다. 무언가 그 칼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근육에 엉켜있을 것 이라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역시 칼인가? 신께서 우리에게 칼을 보내신 건가?" 스테온의 분위기 잡는 말은 무시하면서 줄리탄은 계속해서 조심스럽게 뱃속에 손을 넣으며 '이물질'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니까 칼에 베이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말이다. 그리고 조금 있어 부드러운 것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줄리탄은 그것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했다. 이 마을 키오네에 태어나 요리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줄리탄은 페세테르를 거의 껴안듯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은 세세하게 알고 있던 터 였지만...뭐랄까 지금 그가 잡은 '무언가'는 도무지 처음 느끼는 감촉이었다. '뭐랄까...사람의 살결 같은데?' 줄리탄은 그런 난생 처음 느끼는 감촉에 의아해 하며 결국 칼을 들어 뱃속을 갈라내기 시작했다. "줄리탄. 왜 그러냐." 줄리탄은 대답하는 것도 잊은체로 조심스레 배를 깊게 가르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은 계속 그 부드러운 무언가를 잡고 있는 상태로.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귓볼까지 빨개진 줄리탄의 나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가...가슴?" "뭐?" "그, 그러니까...여자..."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페세테르의 뱃속에선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진 나신의 여자가 그 차가워 보이는 은빛의 검을 두 손으로 잡은 채로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줄리탄의 왼손은 아직도 그녀 의 조금 작아 보이는 가슴을 잡고 있었다. 뭐랄까 손을 뗄 생각 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 여자의 모습이 그의 머리속에서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 악신의 청혼을 피해 페세테르의 뱃속에서 수백년을 잠들어 지냈던 불운한 왕녀의 이야기를 꿈처럼 떠오르게 만들 뿐이었다. 아름다웠다. 1)페세테르(physeter) :이 세계에서는 고래를 닮은 거대한 회유성 물고기로 추운 바다에 살고 있으며 난류를 따라서 모이를 찾거나 알을 낳기 해 회유를 한다. 고래와는 달리 포유류가 아닌 어류이며 그 모습은 고래와 비슷하지만 좀 더 검붉고 연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줄리탄의 마을 키오네에서는 페세테르를 잡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Blind Talk ...으 시작했다. 『SF & FANTASY (go SF)』 87658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09 02:51 읽음:137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2 :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 관련자료:없음 [42880]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2 04:43 조회:1108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너희는 이 곳,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는 '평범한 영혼'들이 잠시 들려 쓸쓸히 방황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은 그녀의 입에서 의외로 빨리 나왔다. 명확하지만 슬픈 답변이어서 난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 DRAGON LADY >> /F Chapter#1-2 : 누군가의 주인이 되는 것. 1. 하루가 흘렀다. 그 갑작스런 여자의 출현으로 의식이 중지되었 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사건의 장본인인 그 여자는 줄 리탄의 집에서 잠들어 있는 중이다. 왜 하필 줄리탄의 집이냐고? 스테온의 명령이다. "흐음..." 줄리탄은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그녀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적당히 옷은 입힌 상태이지만 줄리탄은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볼 때마다 귓볼까지 붉어져 버리곤 했다. "정말 이상적인 여체지? 도시에서도 저 정도의 여잔 본 적이 없어." "스, 스테온!" 화들짝. 어느샌가 들어온 스테온이 씨익 웃으며 말하는 바람에 줄리탄은 대충 기대어 있는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그런데 문제는 말야..." 스테온은 그 이름 모를 여자에게 다가가 상아조각 같은 그녀 의 얼굴을 훌터보며 말을 이었다. 뭐 듣지 않아도 뻔한 자신의 박식함에 대한 자랑이겠지만서도. "이 여자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 "뭐?!" 이건 또 뭔소린지. 스테온의 담담한 얼굴에 비해서 몹시도 충격 적인 말이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뭐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물고기라고 되는 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잖아. 인간이라면 페세테르의 뱃속에서 이렇게 살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인간은 아니라는 거지." "그럼 뭐야? 인어?" "낸들 아냐." 그래 분명 그녀는 조그맣게 숨을 내쉬고 있다. 즉 죽지 않은 것은 확실한데...그럼 인간 외에 저런 형태를 가지고 저렇게 숨을 쉬는 다른 생물 있었던가? 차라리 억수로 운이 좋은 인간 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이 상황을 이해하기에 편할 것 같다고 줄리탄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던 칼. 지금 탁자에 놓여 있는 저 칼은 대체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알 몸으로 칼을 잡은 채 페세테르의 뱃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자라...뭐냐. 전혀 정리가 되질 않는다. "저 여자 설마!!" "응? 뭔데?" "에이, 아무 것도 아냐." "..." 스테온이라는 이 남자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아무튼 깨어나면 얘기해라. 난 좀 잘테니." 스테온은 그런 말을 흘리며 집 밖으로 나가 버렸고 다시 집 에는 줄리탄과 여자 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집에 이렇게 오래 다른 사람이(뭐 스테온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상관 없다.) 있었던 적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줄리탄 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너무나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기 때 문이다.) 아버지 역시 나이 10살이 되었을 때 였나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줄리탄은 스테온이 들어와 잔소리를 늘어 놓을 때가 아니라면 거의 혼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름 모를 여자와 함께라...그런 생각 만으로도 줄리탄은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뭐 얼굴 정도 보는 건 문제가 안 되겠...지?' 줄리탄은 뒷머리를 긁으며 잠들어 있는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뭐랄까...그냥 자세히 보고 싶었다고 말해두자. 그녀는 조금 의 미동도 없이 작은 입으로만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꽤 나 편안한 얼굴이어서 마치 자신의 집에서 자고 있는 것과도 같은 그런 분위기. 곱게 깎은 상아의 표면을 보는 것과 같은 그녀의 피부는...그러니까 최소한 거친 북부의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고 말해두자. 어쩌면 그 신화, 악신의 청혼을 피해 페세테르의 뱃속에 숨어 버렸다는 왕녀가 아닐까...라는 한심 한 착각마저 들게 만들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귀 뒤로 흘러내 린 긴 머리칼까지 아름다웠다. 몹시도 얇고 결이 좋은 검은 머 리칼은 아마 그녀가 일어난다면 어깨 근처에서 귀엽게 찰랑 거 릴 것이다. 줄리탄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눈을 감 고 있어 길고 가지런한 속 눈썹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 다. 그래도...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깨어난다면 이런 곳에 있을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잠들어 있을 때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줄리탄은 그녀의 얼굴로 조금씩 자신의 눈빛 을 가져다 대었다. '눈동자...보고 싶다.' 그는 한심한 바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마치 정해졌던 것 처럼 그녀가 눈을 떴고 무표정한 얼굴로 줄리탄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줄리탄의 검푸른 눈빛과 그녀의 눈 빛이 아무 말 없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은 빛이었다. 맑은 오후의 하늘 밑에서 보는 순도 높은 붉은 보석과 같은 밝 고 투명한 붉은 빛의 눈동자. 다른 것을 모두 잊고 빠져 들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인간의 것이 아닌 것 처럼 아름다웠다. 참 진부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걸. '허억! 일어났다!!!' 줄리탄은 당황하며 급히 그녀에게서 몸을 때었고 그녀는 조금 힘들어 하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그 작은 눈을 깜빡거 리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겁을 내거나 낮선 주변에 무서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하하하. 일어나셨군요." 아하하하. 일어나셨군요? 16세 시골 요리사 줄리탄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 그녀에게 한 첫 말이라곤 고작 그거였다. 아무튼 그는 페세테르를 손질하다 실수했을 때보다 몇십배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럴 때 스테온이 있어야 하는데 대체 그 사람 필요할 땐 꼭 없다니까.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줄리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라기 보다는 몹시 작고 귀여운 동물 이 잠에서 깨어나 주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직 소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하얗고 작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고 잘 다듬은 검은 머리칼은 그 아름다운 곡선의 어깨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줄리탄을 바라보며 그 붉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귀...귀엽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레? 도무지 왜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줄리탄으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에게 표정이 생기자 그냥 아름답다는 말 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다. 심장이 터질듯이 뛰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름은...무엇입니까?" 그녀는 꽤 어색한 말투와 처음 들어보는 억양으로 물었다. 약간은 높은 톤의 청명한 음성이었다. "나, 나?" "예.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그녀는 계속 엷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가 오길 기다리던 여자 친구의 모습처럼. "나...난 줄리탄." 머리를 긁적이며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줄리탄은 갑작스런 그녀의 미소에 머리가 하얗게 지워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 "저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 줄리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남의 이름을 말해 달라니 무슨 소리야...라고 그는 멍한 얼굴이 되어 버렸지만 그녀의 표정은 분명 농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Blind Talk ...가볍게 한번? 『SF & FANTASY (go SF)』 8765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09 02:52 읽음:132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3 :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 관련자료:없음 [42881]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2 04:44 조회:1083 "정말 훌륭한 기사가 되셨군요. 이젠 저...당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는 힘들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식하지도 않은 채 흐르는 내 눈물은 그녀의 뺨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한번도 그녀의 이런 모습 본 적 없지만 난 이것이 그녀의 본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뭐야...이런게 어딨어.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난 기사 같은 거 되지 않았을 꺼야. 그냥...요리사로 남아 있었을 꺼라고!!" 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잡으며 끝내 소리쳤다. 가슴이 저려왔고 말을 이어 나가기가 힘들었다. "이제야 왜 당신이 절 깨울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 말 하지마...멋대로 나타나 놓곤 이렇게 멋대로 끝낼 꺼 알고 있었으면서...제발...내게 그런 말 하지 마." "당신이 죽어도, 그래서 세상 모든 존재가 당신을 잊어버려도...전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그녀도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DRAGON LADY >> /F Chapter#1-3 :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 1. 줄리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랜 잠에서 갑자기 깨어난 여자가 할 수 있는 수 백 가지의 말들을 예상했지만 이름을 지어 달라니...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당신의 이름을 왜 내가..." "정해 주셔야 합니다. 제 이름을...어서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탄에게 다가오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야 줄리탄! 그 여자 괜찮냐? 어엉!?"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스테온이 그녀가 일어나 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러나 줄리탄의 입장은 스테온 이 들어온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황. 단지 그녀 의 얼굴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고 있을 뿐. "이름이라니. 갑자기 그런 걸 어떻게..." "어서 정해 주세요. 제 이름을." 이름? 계속되는 그녀의 재촉에 줄리탄은 무언가가 머리속에서 떠올랐 다. 오래전 한번 보았던 아름다운 붉은 돌의 이름. 그녀의 눈빛 은 분명 그 돌의 투명한 붉은빛을 닮았다. '뭐였지? 그 돌의 이름이...' "이, 이름을 정하는 것이라면? 설마..." 스테온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제 이름...정해주세요." "안돼 줄리탄!!! 이름을 말하면 안돼!!!" 스테온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줄리탄에게 뛰어왔다. 마치 함정에 막 빠지려는 멍청한 동생을 구해주려는 얼굴이 되어서.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줄리탄의 귀에는 지금 그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그의 머리 속은 그 붉은 돌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카넬리안..." 줄리탄은 그 돌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 내며 중얼거렸다. 그래 분명 그 붉은 돌의 이름은 카넬리안이었다. "맞아! 카넬리안이었어!" "카넬리안? 좋은 이름입니다. 이제 저의 이름은 카넬리안 입니다." "아? 좋다니까...다행이네." 줄리탄은 멍청한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줄리탄님은 이제부터 저의 테이머.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이제부터 카넬리안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그녀는 하얀 미소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테이머? 그게 뭐지?" "크, 큰일이다. 저 여자 씰이었어..." 스테온이 당황하는 모습으로 멍하니 서 버렸다. "줄리탄 님은 어디의 기사 이십니까?" 카넬리안은 가지런한 모습으로 줄리탄에게 물었다. "기사라니. 난 요리사야." "요리사라니요. 그런 농담을..." 그녀는 방긋 웃으며 줄리탄을 바라보았지만 줄리탄으로선 전혀 농담이 아닌 걸. "나 정말 요리사 맞아. 기사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선 웃음이 가셨다가 복잡해 지는 듯 싶다가 갑자기 창백해져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는 듯이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줄리탄에 게 다시 물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그 말 농담이지? 그렇지?'라는 애절한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정말?" "응. 정말." 줄리탄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지만 카넬리안 의 표정은 정반대로 심각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뭐랄까 줄여서 표현하자면 '망했다.'라는 표정이랄까. "세, 세상에...요리사라니!!"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고개를 숙인체로 '하필이면 요리사라니...말도 안돼.' 라는 말만 중얼 거렸다. 그리고 그 모 습에 줄리탄의 속좋게 웃는 표정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은 금방이였다. "왜,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이,이런 멍청아! 지금 요리사라고 말했냐!!!" "헉!" 갑자기 엄청난 고함소리와 함께 고개를 쳐 든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멱살을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얇은 팔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라고 믿기엔 엄청난 힘으로 말이다. "요리사가 뭣하러 날 깨운 거야!!! 책임져 이 멍청한 놈!" "크허헉!! 깨우다니? 왜 이러는 거야!!! 살려줘!!" "죽어! 이대로 죽어라! 지상최악의 사내 놈아!!" 뭔지 모르겠지만 멋진 왕자에 대한 가련한 시녀의 고백 같았던 장 면은 갑자기 박력이 넘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장난이나 농남이 아님을 파악한 스테온이 허겁지겁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정말 그녀와의 추억이고 나발이고 그녀와의 만남 10여분 만에 줄리탄 16세 인생 종치게 되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이후에 소상하게 알게 될 그녀의 성격에 의하면 분명 골로 보냈을 꺼다.... -Blind Talk ...위에 써 넣는 것을 잊었지만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입니다.' 『SF & FANTASY (go SF)』 8766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09 02:52 읽음:136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4 :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 관련자료:없음 [42883]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2 04:47 조회:1094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예전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던데. ...아아 정말 못 믿을 말이야." "바보! 짐작으로 그런 말 하지마!!"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내 말에 엄청나게 화를 내는 바람에 하루 종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에야 그녀는 기분을 조금 푼 것 같았다. << DRAGON LADY >> /F Chapter#1-4 : 누군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 1. 피곤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카넬리안과 억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줄리탄과 한심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는 스테온이 한 방에 있다. "난 널 깨운 적 없어!! 왜 자길 깨웠다고 난리야!!" 줄리탄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듯 카넬리안에게 외쳤지만 그녀는 '무식해서 좋겠다.'라는 눈빛으로 줄리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전 까지 줄리탄을 바라보는 카넬리안의 눈빛이 주인에게 몸을 부비려는 고양이의 그것이었다면 지금은 대충 비교하자면...욕실해서 샤워하려던 찰나 발견하게 된 쥐며느리 한마리를 바라보며 분홍색 슬리퍼를 들었을 때의 그 표정... 뭐 그것과 비슷했다. "...내 이름을 정해 버리는 게 깨우는 것인지도 몰랐단 거냐. 이 멍청아." "몰라! 몰랐단 말야! 난 그런 거 몰라도 지금까지 잘 살아 왔다고!!" 줄리탄 역시 지지 않는 표정으로 외쳤지만 카넬리안의 표정은 계속 변화가 없었다. '무식해서 좋겠구나...' "저 여자는 씰이야. 이런 시골 사람들이 그런 것 알고 있을 리가 없지." "호오, 당신은 좀 알고 있는 분위기인데...이 무식한 인간에게 나에 대해 설명 좀 해 주는게 어때." 카넬리안은 스테온을 바라보며 비아냥 거리듯이 말했고 스테온 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씰이라는 것은...세상 곳곳에서 봉인된 채로 나타나는 존재들 이지. 광산이나 숲 속, 동굴 속에서 발견되곤 하는데...물고기 뱃 속에서 나타났다는 말은 들은 아직까진 들은 적 없어." "사정이 있어서 그래. 사정이." 카넬리안은 조금 헝크러진 머리를 다듬으며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씰들을 봉인에서 깨우는 것을 계약이라고 하는데 그 계약은 사실 기사라 부르는 족속 들만이 가능하지. 뭐랄까 씰들은 강한 것에 반응한다고나 할까. 강한 자가 원하지 않으면 씰들은 깨어 나지 않아. 그리고 깨어난 씰의 이름을 정해 주면 그 씰은 깨운 자를 위해 일하게 되는 거야. 씰을 깨운 자를 테이머라 부르지." 그 말을 들은 줄리탄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자신에게 사기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이상했다. "그런데 나는 전혀 강하지 않은데...어떻게 내가 깨울 수 있었던 거지?" "불량품인가 보지." 스테온이 딱 잘라 말했다. "시끄러워!!!" 듣기만 해도 섬뜩한 히스테리컬한 고음이었다. "씰들의 능력은 종류에 따라 다른데 저렇게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씰들의 능력은 보통..." 스테온은 분위기라도 잡으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능력은?" "수만의 정규군과도 바꿀 수 없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 "수만명? 그건 나에 대한 과소평가야." 카넬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녀 옆의 두 남자 들에게 수만이란 사실 전혀 실감나지 않는 숫자이다. "말도 안돼." 줄리탄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저런 작고 귀여워 보이는 여자가 수만 명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농담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제 알겠지. 왜 너 같은 요리사가 날 깨워선 안되는지."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단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뭐야! 다시 말해두는데 난 널 깨울 생각 추호도 없었다고! 게다가 멋대로 찾아온 건 너잖아!!" "일 저질러 놓고 난 잘못 없다는 거냐!! 정말 형편 없는 남자구나!! 너!!" "아아 그만들 해 줬으면 좋겠어." 스테온은 자기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둘을 뜯어 말 렸다. 그리고 갑자기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야...직접 본 적은 없지만 씰들은 테이머에게 순종적 이라고 하던데 넌 왜 아니지? 정말 불량품인가." "그건 이 줄리탄이라는 녀석이 요리사라서 그래." "내가 요리사인게 어때서!!! 왜 말끝마다!!" "너와는 공명이 되질 않는다고. 말하지면 전혀 내 주인이라는 것이 느껴지질 않아. 순종적이 될 이유 따윈 없는거지." "...별 해괴한 경우 다보겠군. 그럼 주인임을 느낄 수 없다면서 어떻게 깨웠다는 거야." "그건..." 카넬리안이 잠시 침묵하며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나도 몰라." 스테온과 카넬리안, 줄리탄이 거의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닳은 것이다 모두가. "그런데 말야, 너." 줄리탄이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리할 줄 알아?" "이 칼로?" 카넬리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길고 아름다워 보이는 장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한심하다는 표정은 말하자면 '너라 면 이걸로 요리 할 수 있겠냐?'였다. 정말 훌륭한 검임에 분명 하지만 그런 대검으로 페세테르를 다듬었다간 듣도 보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요리가 탄생할께 분명하다. "...." "...." 줄리탄의 회심의 반격이었다. "뭐야. 너 정말 하나도 쓸모가 없잖아." 카넬리안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키야아아아 이런 우둔하고 멍청한 남정네!! 그러니까 씰이라는 건 테이머를 도와 세계를 지켜나가야 할 존재야! 요리 같은 건 안한다니까 그러네!!" 줄리탄 역시 질 수 없었다. "내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은 요리하는 거야!!! 요리도 못하는 씰 따위 내겐 필요 없다고!!" 줄리탄은 운명의 신이 있다면 흠씬 두드려 주고 싶다는 얼굴으로 씩씩 거리며 외쳤다. "이적 시키자." 갑자기 스테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이적?" 줄리탄은 그게 뭐냐는 얼굴이었다. "아아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카넬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적이라는 것은 다른 테이머에게 씰을 전해주는 절차야. 다른 테이머가 저 여자에게 새로운 이름을 말해주고 넌 그 것에 동의 하면 저 씰은 다른 테이머에게 가버리는 거지." "간단하네." 줄리탄은 저 알지 못할 씰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쉽게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뭐 이런 상황에선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에겐 요리 못하는 씰은 필요 없었고 그녀 역시 기사가 아닌 테어머는 필요 없었다. 서로 필요없는 관계 ...썰렁하긴 하지만 둘의 공통점을 찾긴 찾은 것 같았다. "뭐 들은 얘기긴 하지만 확실할 거야. 이 지방 영주의 아들 카스텔로 는 테이머라는 말 들은 적 있으니까 그 영주 아들에게 이적을 부탁 하면 될꺼다. 저 정도의 상급 씰이라면 절대 마다하 지 않을껄." 줄리탄은 전혀 느끼지 못하겠지만 스테온의 말대로 자신의 무기까지 가지고 있는 카넬리안은 정말 상급의 씰이다. 다른 기사 들에게 발견 되었다면 차지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씰이지 만 이런 시골 구석에서 요리사에게 발견되어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카넬리안의 기분은 최악일 수 밖에 없었다. 뭐 이제와서 그런 말 한 다고 이해하고 가만 있을 줄리탄도 아니지만. "뭐야아아~~ 이런 시골 지방 영주 아들? 별 볼일 없는 테이머일 것 같은데..." 잠시의 정적... "하긴. 이런 요리사보단 괜찮겠지." 카넬리안은 앞서 말한 쥐며느리 바라보는 표정으로 줄리탄은 바라 보며 척 보기에도 얄밉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고 줄리탄이 분노에 가득찬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대꾸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 뭐야 너 대체!!! 너 내가 요리사인게 그렇게!!" "아아 시끄럽네. 그럼 난 계속 잘테니까 그 지방 영주 아들인지 뭔지 올 때까진 깨우지 말고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모두 나가 있어." 카넬리안은 작은 손으로 허공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 줄리탄과 스테온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카넬 리안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덮어 버리고는 금새 잠들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적응이 빠른데다가 성격도 건방지기 이를데 없는 씰이었다. 아마 이 세상의 씰들이 모두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세상 되게 암울해 졌을 거다. "이제 좀 조용하군. 그럼 난 카스텔로에게 서신을 전하러 가야 갔다. 저 카넬리안이라는 여자 잘 다뤄. 어쨌든 당장은 네가 테이머니까 말야." 스테온은 씨익 웃으며 줄리탄을 바라 보았다. "그 영주 아들 오기 전까지 이 여자 손에 죽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줄리탄이 피곤한 모습으로 대꾸했다. 스테온은 그 말에 웃으며 나가기 전에 줄리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들은 말인데 말야...저 씰들은 수백 수천년 전부터 강한 자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주인이 죽으면 다시 잠드는 일을 반복해 왔던 존재라는 말 들은 적 있어. 그러니까 어쩌면 인간 보다도 훨씬 더 이 세상을 오래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그런 초월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런 자들이 아직까지 요리하나 못해요?" 줄리탄은 농담 섞인 말로 대꾸하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테온의 그 말은 줄리탄의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태고부터 인간의 곁에서 있던 자들. 무한한 생명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누군가가 정해준 일들 만을 반복하며 깨어나 잠들고 다시 깨어나는 자들. 어쩌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 하고 일찍 부모를 잃었던 줄리탄은 생각했다. 그리고보니 카넬리안이 줄리탄 을 자신의 주인이라 말할 때 그녀의 표정에 살짝 슬픈 기운이 지나 간 것도 같았다. '그래도 말야...어떻게 내가 기사가 아니라고 태도가 이렇게 돌변할 수가 있는 거지. 어쩌면 이게 순종적이라는 씰들의 원래 성격이 아닐까?' 줄리탄은 카넬리안에게 괜한 배신감을 느끼며 의자에 누워 이른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태양은 이제 마을 건물의 그림자 들을 길게 잡아 끌며 자전의 풍차 뒤로 넘어가고 있었고 줄리탄의 두 눈도 카넬리안이 누워 있는 침대 곁에서 감기기 시작했다. 2. 오직 건조한 갈색의 사암들과 진회색 자갈들의 단순한 조합으로 만 이뤄져 있는 헤스페리아 북동부 벨레시마. 아마 이곳이 대륙 의 거상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만 아니었다면 인간의 모습 따윈 끝까지 찾아볼 수 없는 정지한 시간의 땅처럼 존재했을 것이다. 석조 건물 2층에 위치한 아름다운 베란다에서 이 벨레시마의 차가운 황량의 미를 감상하고 있던 여기사 리이 디트리히는 자신 의 씰 이카테스가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카 테스는 귀를 반쯤 덮는 잘 정리된 머리칼이 진홍빛으로 빛나고 있 었고 푸른 눈에는 가벼운 웃음이 베어 있는 - 누가 봐도 착하고 얌전해 보이는 그런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는 씰이다. 리이가 5년 전 쯤 이카테스를 봉인에서 풀었을 때부터 그는 쭉 그런 모습이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노을이야. 넌 이런 걸 보면 뭘 느끼는지 물어봐도 될까. 사람들하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거야? 아니면..." 리이는 창밖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리이의 하얀 살결은 노을 빛을 받아 취한 듯이 붉어 보였다. "인간들이 저런 모습에 어떤 것을 느끼는지 전 아직 알지 못합니다. 리이님." "살아 있다는 것을...느끼겠지. 아마도." 리이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놓인 물빛 와인에 목을 축였다. 살아 있는 것을 느끼는 모습 치고는 외로워 보였다. "리이님. 어제 새로운 씰이 깨어난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느낌은 익숙해요." 이카테스도 창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모래섞인 미풍에 그의 머리칼이 살짝 흔들거린다. "그래? 너도 알고 있는 씰인가 보구나." "예. 하지만 무척이나 아픈 과거가 있는 그런 씰입니다. 마지막으로 절 만났을 때 그녀는 제게,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깨어났다면...좋은 주인 만났으면 좋겠구나." 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 잔뜩 기록된 양피지들이 쌓여있는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카테스는 모래 바람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는 창가의 문을 닫고는 아 직 반쯤 와인이 남아 있는 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Blind Talk 사실 글 쓰는 것 좋아하긴 하지만...주변 친구들에 비해 형편 없습니다... 게다가 다른 분들 처럼 부지런히 많은 양을 올릴 자신도 없구요.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진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즐겁게 올리겠습니다. 『SF & FANTASY (go SF)』 87661번 제 목:[잡담] 드래곤 레이디 신청하신분..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09 02:53 읽음:1204 관련자료 없음 -------------------------------------------------------------------------- --- 드디어 작가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오늘은 일단 1편 입니다^^ 『SF & FANTASY (go SF)』 87898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2-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1 00:31 읽음:126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2-1 : 살아남는 방법. 관련자료:없음 [42943]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3 07:07 조회:1094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세상에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들 하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건 당장 죽어버려도 이 세상에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야." 어디선가 동물도 자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F Chapter#2-1 : 살아 남는 방법 1. 이 지역 영주의 아들인 카스텔로 라는 자가 키오네에 도착한 것은 서신을 받은지 이틀 후였다. 결 나쁜 금발에 꽤나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그는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기쁨에 가득찬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카넬리안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있는 거야! 나의 씰은!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뭐랄까...천박한 모습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악취미야. 저런건..." 스테온은 카스텔로와 동행한 자신의 씰 두명과 30여명의 군인 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카넬리안을 얻으려 왔으면서 씰과 군대는 뭐하러 데려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카스텔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삐딱한 태도와는 달리 스테온은 카스텔로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방문해 주신 것에..." "너희 들에겐 볼일 없으니 발견했다는 씰이나 빨리 데려와!" 카스텔로는 거만한 모습으로 스테온의 말을 막았다. "예...지금 곧." 스테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2. '제길, 대체 어디 간거야.'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찾으며 해안가를 뒤지고 있었다. 영주 의 아들 까지 불렀는데 정작 그가 데려가야 할 카넬리안이 사 라져 버린다면 아마 그 자 성격에 이 마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저기 있군. 대체 뭘하고 있는 건지...' 카넬리안은 해안가에 앉아 수평선 넘어로 떨어지고 있는 태 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천에 쌓여 있는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채로. 기뻐 보이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봐 거기서 뭐해! 니 주인 왔어!!" 줄리탄으로서는 그런 카넬리안의 분위기에 장단 맞춰 줄 시간 도 없었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잠시 그녀는 줄리탄을 바라 보다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줄리탄의 말투에 뭐라고 한마디 쏘아버릴 것도 같았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아아. 당장 내 주인은 너니까."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흘러 내리는 검은 머리칼을 넘기며 그녀가 말했다. 붉은 눈빛은 살짝 줄리탄의 얼굴을 올려보고 있었다. "뭐야. 그 태도는." "아무튼..."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영주의 아들이라는 녀석...정말 기사 맞는 거야?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의 힘이..." "힘? 넌 그런 것도 느끼는 거야? 정말 인간하곤 다르군." "넌 아직 진짜 기사가 어떤 자들이지 몰라. 그런 기사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게될 껄?" 그런 말을 흘리며 그녀는 줄리탄을 앞질러 마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체...그녀는 몇 명의 기사를 만났던 걸까. "넌...아니 너희 씰 들은 왜 그렇게 힘에 집착하는 거지? 그래 네 말대로 난 멍청한 시골의 요리사라서 그런 거 이해 못하는 건지도 모르지만...너희 들이 살아가는 방식 을 난 이해할 수 없어. 아무런 의지도 없이 강한 사람을 찾아 복종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어?" 줄리탄이 뒤따라가며 그렇게 말하는 동안 카넬리안은 돌아보지 도 않았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많이 들어왔던 소리라서 그 랬던 것일까? 잠시간의 침묵 이후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 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할 이유라...이제 기억 안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차라리 울먹이는 목소리였다면 어울렸겠지만 메말라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카넬리안은...씰 들은 몇 년을 살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인간의 어떤 면을 바라보고 느끼고 있었던 걸까. 실은 몹시도 인간을 증오하고 자신의 운명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 걸까? 마을로 향하고 있는 카넬리안의 맨발이 해변가에 작은 발자국 을 만들고 있었다. 3. "오오오오오!!! 대단해!!!!!!!!!!!!!" 카넬리안을 처음 본 카스텔로의 목소리였다. 스스로 기사와 테이머 임을 자처하지만 어찌되었던 카스텔로는 작은 지방의 하급 기사. 카 넬리안과 같은 상급의 씰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영지 전체 보 다도 높은 값어지의 극상을 씰을 곧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만으 로도 카스텔로의 기분은 최고조. 당장이라도 희열의 웅덩이 속에 빠 져 익사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카넬리안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뭐 뻔뻔한 카넬리안이라도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보인다. "자, 잠깐..." 카넬리안은 다가오는 카스텔로를 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런 놈의 씰이 되어야 해?' "저는 이미 줄리탄님의 씰이며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금새 평정을 되찾은 카넬리안이 기계적인 어조로 카스텔로에게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알아. 알아. 그래서 이적시키려고 온 거 아냐. 그런 촌놈에게 너 같은 아름다운 씰은 필요 없지. 그럼!" 하필이면 씰을 평가할 때 아름다운...이냐? 라는 조소에 찬 눈빛 으로 스테온이 씰룩였지만 줄리탄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보다 그의 머리속은 아까 전 카넬리안이 건낸 말에 골몰하고 있 었다. "자. 그럼 시작하지." 카스텔로는 음흉한 얼굴로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전에 스테온 이 말한 것처럼 이적의 절차는 굉장히 간단하다. 새로운 주인이 카넬리안에게 새로운 이름을 정해준 다음에 전 주인 즉, 줄리탄이 그 말에 동의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실력보다 뛰어난 씰을 얻은 자들도 적잖게 있다. 보통 가난한 기사로부터 씰들을 사들인 거상이나 돈 많은 귀족들이지만. "너의 이름은 말야...으음. 그러니까..." 카스텔로는 전혀 훌륭한 이름 같은 것이 나올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우스꽝스럽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넬리안의 얼굴 에 불안감이 돌았다. "카스테라!! 좋다! 이 이름이다 너는!" 그럴줄 알았다...라는 표정을 그녀는 애써 감추고 있었다. 대 체 자신의 이름에 맞먹는 괴상한 억양은 또 뭐란 말인가. 그녀 는 카스텔로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여성 하급 씰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고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감정에 둔한 그 씰들은 분명 전투능력도 낮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하 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저 씰들도 비슷한 취향의 이름이겠군. 아무튼. 최근들어 '카'로 시작하는 이름을 많이 접하게 되네.' 카넬리안은 복잡한 생각을 접으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이제 줄리탄이 카스텔로의 말에 동의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카스텔로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놈이라면 이 마을 키오네에 배 몇 척이라도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지만 줄리탄은 잠시 카넬 리안을 미묘한 감정이 담겨져 있는 얼굴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말해. 내 말에 동의한다고!" "..." "저의 테이머시여.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차분하고 미성이지만 무감정한 목소리로 카넬리안이 존칭어를 사용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결국 줄리탄에겐 어떤 감정도 없던 것인지. 억겁의 세월을 살아 왔을지도 모를 자에게 찰나의 관계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 말에...동의 합니다."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붉은 눈빛을 피하며 뱉어내 듯이 말했다. "좋아!!! 이제 너는 카스테라. 내 어떤 명령이라도 따라라." 카스텔로의 천박한 말버릇이 또 시작되었지만 카넬리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다가 대단히 피곤한 표정으로 변해 버리고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이름은 카넬리안인 것 같군...쳇." "뭐라고!!" 카넬리안 주변 모두의 눈이 커졌지만 카넬리안은 예전의 태도 로 돌아와 버려서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내 주인 줄리탄은 전혀 나와 공명을 느낄 수 없는 요리사. 그 녀석이 날 이적시키는 것에 동의했지만...역시 그 말도 전혀 공명이 되질 않는다는게 문제야. 그러니까 요 약해서 말하자면...조금도 주인의 말에 따라야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젠장 이적조차 제대로 시키질 못하는 주인이 라니 정말 운도 지지리도 없지." 이적 실패. 뭐 이런 막 되먹는 경우가 다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 를 바라봤지만 씰과의 공명이라고는 조금도 할 수 없는 우매한 줄리탄이 그녀를 깨운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하지 사실 그런 힘 없는 놈에게 이적 시킬 능력이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었다. "그, 그렇다면 공명이 안된다면 어, 어떻게 널 깨운 거야!!" 방금 전까지 카스텔로가 천상의 구름 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면 지금 카스텔로의 모습은 일주일 만에 먹은 식사에 독이 들어 있을 때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낸들 아냐. 그건 그렇고...카스테라라는 이름 정말 최악이야." 카넬리안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카스텔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작스런 태도 돌변. 이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변신은 놀랍고 뻔뻔스러웠다. "너 그런 건방진 태도는!!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구긴 누구야. 귀꼬리만한 지방 영주의 멍청한 아들놈이지." 카넬리안의 독설에는 신분고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주특기 인 벌레보듯 하기가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렇다면...억지로라도 너를 갖겠다!!" "얼레?" 카스텔로는 갑자기 시퍼런 칼을 뽑으며 줄리탄에게 성큼 성큼 걸어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줄리탄은 갑작스런 위기에 뒷걸음질 치고 있었지만 난생 처음 칼을 뽑아 다가오는 상대에게 얼어버려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저 씰의 테이머니까 널 죽이면 주인은 사라지는 거지. 그리고 내가 주인이 된 뒤에 저 건방진 씰의 성격을 고쳐 주겠어." "예? 예?" 다른 건 몰라도 복수는 꼭 하는 성격으로 보인다. "네 집안에 충분히 보상할테니 날 원망하지마라." 줄리탄이 죽어버리면 부모도 없는 줄리탄 가문의 대가 끊어져 버린다는 것도 모르면서 집안 운운하며 카스텔로는 칼을 쳐들었다.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기세.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카넬리안을 차지해야 겠다는 욕망에 멀어 있었다. 뭐 멀지 않았어도 마음 바꿀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자, 잠깐만 왜 내가!!!" 과연. 위의 외마디는 줄리탄 인생 마지막 유언이 될껀가. "귀족을 위해 죽는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카스텔로의 무뢰한 칼날이 줄리탄의 목으로 날아들었고 줄리탄 은 놀라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순간 개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그리고 죽었어야 하는데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 를 들었을 뿐. 그리고 카스텔로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으, 응?' 줄리탄은 찔끔 눈을 뜨며 자신의 목을 어루 만졌다. 뭐야... 카스텔로가 마음을 바꾼건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줄리탄은 자신의 발 밑에서 뒹굴고 있는 카스텔로의 머리를 볼 수 있 었다. "...." "제길. 저런 놈을 베다니 내 칼에게 미안하잖아 정말." 모든 마을 사람과 카스텔로 군인들의 눈은 투덜거리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는 카넬리안에게 집중되었다. 뭐 대체 언제 그렇게 빨리 다가와서 목을 베어버린 뒤에 투덜거릴 여유까지 갖을 수 있는지 있는 감탄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을을 방문한 영주 아들의 머리 가 뒹굴고 있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당장 뒷일이고 뭐고 잘려나간 머리를 보며 놀라버린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통을 발로 차서 저 하늘로 날려버리며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방금전 까지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허 우대의 영주 아들 카스텔로씨는 지금은 그 머리가 평민의 공차 기 상대가 되어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악인의 종말 은 처참하다는 경구를 예외없이 확인하는 순간이다. "왜! 왜! 왜! 왜! 왜 죽인거냐아아아!!!" 줄리탄은 촛점이 풀어져 버린 얼굴로 카넬리안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귀족은 평민을 대량생산된 물건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자기 아들 죽은 것을 안 이 지방 영주 가 어떻게 이 마을을 처리하게 될지는 뻔한 것이었다. 분명 한명 한명 국가반역자에게나 처하는 극한의 고문을 맞보여 주다가 페 세테르의 먹이로 잘게 갈아 바다에 뿌려 버릴꺼다. "저 놈을 안죽였으면 네가 죽었을테니까." 카넬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뭐? 그렇다면...날 위해서." 감동의 물결이 물밀듯이 닥칠 찰나. "바보. 네 놈이 죽던 말던 난 상관 없어. 하지만 씰의 주인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이제 알게 될 꺼다." 카넬리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카넬리안의 뒤 에는 감전된 것 처럼 온몸에 경련이 일고 있는 카스텔로의 씰 2명이 있었다. 카넬리안을 공격하려던 군인 들 역시 옆의 씰 들을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왜, 왜 저러는 거야..." "어떠한 명령도 없이 주인이 죽어버리면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사라지고 주변의 아무나...공격하게 되지. 우리들은 그것을 '실연'이라고 말해." 라는 카넬리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스텔로의 씰 들은 옆 의 군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급의 씰이지만 보통 사람들보다는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강력한 존재. 그것은 일방적 학살이었다. 순식간에 군인 들의 목이 달아나고 갑옷이 뚫리며 가슴이 터져버렸고 피를 뿌리는 팔 조각 들이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야수가 사람을 공껴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공포에 질릴 겨를도 없이 마을 입구는 말그대로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피를 토하는 지독한 비명에 귀가 멀어버릴 그런 상황. "쳇. 같은 씰들과 싸우는 것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줄리탄은 그때 처음으로 카넬리안이 가진 엄청난 '능력'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줄리탄 앞에서 사라 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넬리안은 군인 들의 몸을 뜯어내고 있는 씰 들의 뒤에 있었고 그렇다고 느꼈을 때 상 대방 씰의 몸은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단 두번, 섬광으로 보인 그녀의 검의 은빛 궤적이 끝나는 순간 야수처럼 사람 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던 씰 들의 움직임은 영원히 멈춰 버렸다. 그리고 정적. 카넬리안의 칼 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의 소리까지 들럴 정도의 침묵.그 침묵은 마을 사람들 몇이 참지 못해 구토를 일으킬 때까지 계속 되었다. 카넬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줄리탄에게 다가왔다. 얼굴의 핏 방울을 닦지도 않은 그녀의 모습은 인간 사냥을 막 마친 적룡의 모습을 연상케 하여 자기도 모르게 주저 앉게 만들었다. "뭐야 그 표정은. 내가 이런지 처음 알았다는 얼굴이잖아." 카넬리안의 비웃는 듯한 말과는 달리 표정에은 착잡함이 서려 있 었다. 아무래도 같은 씰을 베어버렸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죄 책감인가. "저런 하급 씰이 맛이 가도 이 지경인데 만약 내가 저렇게 되었다면 누가 말릴꺼야. 저 정도와는 비교도 안돼. 나도 내가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한다고. 이제 왜 니가 죽는 것을 막았는지 알겠지?" 줄리탄은 멍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이제 어쩔꺼지?" 심각한 표정의 스테온이 카넬리안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애써 평정을 찾으려는 얼굴로 스테온은 이제 '뒷일'을 걱정하기 시작 한 것이다. "어쩌다니? 저 시체들 말야? 에엥 그런 것까지 내가 처리해야 하는거야?" "그거 말고 젠장...어찌되었건 이 마을에 온 영주 아들과 병사 들, 씰들 까지 모조리 죽어버렸어. 영주가 조용히 있을리가 없을 꺼 아냐. 아마 이 사실을 안다면 이 마을로 영주의 군대가 쳐들어 올껄." 스테온의 심각한 표정과는 달리 카넬리안은 뭐야 그런 거야? 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헤에 그런 거였어? 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오지 않을 껄? 만약 온다 하더라도 전멸하는데 1분 안걸린다는 것에... 내 주인을 걸께." "대, 대체 너란 여자는 왜 모든 일을!!" 스테온의 인내심도 바닥난 것 같았다. "안돼. 절대로 안돼." 줄리탄이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더 이상 그런 일은 그만 둬. 설사 영주의 군대를 전멸시킨다고 하더라도 더 강한...그런 군대가 올테고 그때도 모두 죽일꺼야? 언젠가는 너와 같은 능력의 씰도 올텐데. 그땐 어떻게 할꺼야. 넌 주인이 시키는데로 싸우다가 죽어버리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그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쩔꺼야. 그냥 약해서 죽어버린 거라고 비웃어 버릴꺼야?" 줄리탄은 떨리는 목소리지만 뚜렷하게 말했고 카넬리안은 잠시 그의 눈빛을 피하다가 중얼거렸다. "그럼 어쩔꺼야. 주인님." "내가 가서 말해 보겠어." 스테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뭐? 영주에게? 가서? 말하겠다고? 뭔 말을?" 카넬리안은 변태라도 바라보는 눈빛으로 스테온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줄 꺼야. 분명히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카넬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하하하. 넌 꽤 공부 많이 했다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인간이란 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구나. 어찌되었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그것도 귀족이 이.해.해.준.다.고? 오오 내가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구나. 용감한 청년 이여 라고 말해주기라도 기대하는 거야 지금? 대체... 차라리 낫과 삽이라도 들고 맞서 싸우는 편이 나아!!" 카넬리안은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인간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언젠가는 그녀에게 그녀가 생각 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듣고 싶다고 줄리탄은 생각했다. "그래도 가겠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 없어. 가서 영주에게 말해 보겠어. 나를 믿어." "그래. 스테온 형을 믿어보자." 줄리탄의 말에 카넬리안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대충...내 주인이 어떤 성격인지 조금 알 것 같군. 난 매번 왜 평범한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 거지? 우리 같은 존재에게도 운명이란게 있는 건가..." -Blind Talk 뭐 언제나 My pace로 가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SF & FANTASY (go SF)』 8789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2-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1 00:32 읽음:110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2-2 : 살아남는 방법. 관련자료:없음 [43013]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4 08:51 조회:1101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씰은...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제이미아의 푸른 눈빛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F Chapter#2-2 : 살아 남는 방법 1. 모두의 불안과 기대 속에 이 지방 영주 란세르 카스텔로에게 갔던 스테온이 삼일 후에 돌아왔다. "헤에. 목이 붙어 있네. 의외인 걸." 스테온의 무덤덤한 모습을 본 카넬리안의 첫마디다. "영주 카스텔로 공은 너와 줄리탄이 찾아와 정식으로 사과 한다면 용서해 주겠다고 말 하더군. 영주를 설득시키는데 정말 애먹었어." "정말이야? 그런 거라면 몇 번이라도 할께. 다행이다!" 줄리탄은 스테온의 그 말에 환호성을 울렸지만 카넬리안은 좀 달랐다. 그녀는 검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사과? 사과하면 받아 준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넌 수천년에 걸쳐 인간의 나쁜 면만 본거야? 대체 왜 그렇게 삐딱한 거지?" 스테온이 가시 박힌 말을 그녀에게 건냈지만 카넬리안은 조소 에 찬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뭐 맘대로 해. 난 주인의 명령에 따르겠어." "가자 카넬리안. 그 영주는 아들과는 달리 이성적인 사람 이 분명해. 같이 가서 사과하면..."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말을 막으며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 될꺼 아냐." 2. 영주의 성으로 향한 둘은 결국 성을 앞두고 스테온이 야영을 했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 다. 줄리탄이 타고 온 나트의 등짐에서 모포와 먹을꺼리를 꺼 냈고 카넬리안은 꽤 능숙한 솜씨로 모닥불을 만들었다. "그러고보니 카넬리안...너는 식사 같은 거 안하지?" 줄리탄은 입속으로 마른 어포를 밀어 넣으며 우물거렷다. "맛있는 것 먹는 거 좋아해. 뭐 하지만 너희와는 달리 난 아사해서 죽지는 않으니까 규칙적으로 먹을 필요는 없어. 게다가 최근에는 입맛이 없어서..." 라고 말하면서도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손에서 어포 하나를 뺏 어서 입속에 넣었다. 미각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너희들은 어떤 힘으로 움직이는 거야? 식사를 안한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라도 힘을 얻어야 하는 거 아냐?" "너 되게 궁금한 거 많은 녀석이구나. 응 뭐랄까...나는 주변 에 산재해 있는 모든 에너지를 받아들인다고 할까. 식물들이 광합성하는 것과도 비슷하다면 비슷한, 뭐 그런 거지." "그, 그런데 에너지? 광합성? 그게 뭐야?" "...관두자." 카넬리안의 표정이 피곤해 졌다. "그런데 카넬리안?" "또 뭐..." 그녀는 자신의 검을 이리 저리 바라보며 말했다. 밤의 달빛에 반사된 푸르스름한 빛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 언저리에 맴돌았 다. "넌 나 이전에 어떤 주인을 만났지? 너와 있었다는 주인 들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 대단한 기사였어?" "......" 카넬리안은 못들은 척 계속 자신의 검 표면만 바라보았다. 은빛의 검 표면에 비쳐진 카넬리안의 흐릿한 표정은 잘 보이지 는 않았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 혹시...프라이버시 라는 말 알아?" "뭐야. 그 말은, 마법 같은 건가?" 더 피곤해져 버렸다. "휴우 그래. 다른 사람이 자신의 감정 속으로 침입하지 못하 게 막는 마법의 주문이야. 지금 내 감정에는 그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더 이상 그만 물어보고 자라구." "넌?" "신경 끄셔. 수면부족으로 죽지는 않으니까." 줄리탄이 선잠에 들었다가 잠시 깰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검 을 바라보며 줄리탄 옆에 앉아 있을 뿐 잠들지 않았다. 그때 줄리탄이 바라본 그녀의 눈빛을 그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당장 울어버릴 것 같았지만 결국 눈물은 흐를 것 같지 않았던 그런 눈동자.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난 이후 줄리탄은 그녀가 가슴 아픈 추억을 잊지 못하는 미망인의 마음 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엄청난 크기 잖아!! 이런게 성이라니 놀랐어." "뭐야. 이 쬐끄만 성은. 역시 시골이군." 영주 카스텔로의 성을 바라보면 줄리탄과 카넬리안의 평가였 다. 그리 높지 않은 성곽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영주의 석조 성은 4층 정도의 규모로 척 보기에도 방어적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박한 휘장이나 깃발 같은 것이 잔뜩 달려 있지만 았았다면 소박하는 칭찬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랄까? 카넬리안은 꽤 도회지 취향이었는지 둔 탁한 모습의 석조성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의 입구에서 시종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딱딱한 태도로 맞이했다. 뭐 거만하지 않은게 다행이지. "저 여기서부터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 검은 제게..." 시종관이 카넬리안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 다. "난 내 검과 떨어져 있을 생각은 전혀 없는데... 뭐 난 여기 있을테니까 혼자 들어갔다와. 주인님." "하, 하지만 모두 같이 들어오셔야...잠시만 기다려 주십 시오." 시종관은 잠시 어디론가 가버리는가 싶더니 곧 돌아왔다. "검을 가지고 들어오셔도 된다고 합니다. 그럼 저 문으로.." "뭐야. 번거롭게. '정식으로' 사과하기 되게 힘드네." 카넬리안은 투덜거리며 앞장섰고 줄리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도대체 속을 모를 여자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4. "자네들인가. 스테온이라는 청년으로부터 잘 들었네. 내가 보기에도 저 씰은...정말 아름답군." 란세르 카스텔로라는 영주의 첫인상은 이랬다. 아들과 붕어빵 이다. "불행한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사과를..." "제길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줄리탄이 란세르 앞에 서며 몸을 숙이려는 카넬리안이 날카 롭게 외쳤다. 그리고 거대한 파동이 홀 내부를 덮치며 카넬리 안의 몸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 카넬리안의 온몸을 휘감는 파동의 충격으로 줄리탄은 멀리 날아가 버렸고 카넬리안은 거대한 중력에 눌려버린 듯이 쓰러 져 버렸다. 파동은 그녀의 온몸을 계속 죄어 오고 있어 별 다 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저 씰의 테이머가 될 수는 없지만...저 정도의 씰이라면 내 아들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지. 널 원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자, 잘도...이런 봉인...을..." 바닥에 쓰러진 카넬리안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영주를 노려 보았다. 끝없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파동의 고통 때문에 그녀 는 곧 고개를 꺾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저희의 사과를 받아주신다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줄리탄이 영주에게 소리쳤다. 바닥에 부 딪친 이마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스테온이라는 청년. 현명하더군. 저 씰을 봉인에 가둔 뒤에 널 죽이면 저 씰이 난동을 부릴 수가 없을테니... 그 청년에게 감사하는게 좋아. 저 씰을 내게 바치는 대가로 너희 마을을 살려두는 거니까." "저, 정말로...스테온형이 그런 말을..." 줄리탄은 촛점잃은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배신에 대한 분노 라기 보다는 친한 친구에게 등을 찔렸을 때의 모습이었다. "너...이 빌어먹을 영주 놈아. 이 봉인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렸지? 분명 어줍잖은 마법사 몇명이 달라붙어 하루 이틀 만에 준비한 거겠지?" 카넬리안은 어렵게 냉소를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계속 봉인 의 파동은 거대한 뱀처럼 카넬리안의 몸을 휘감으며 그녀의 옷을 찢어내고 하얀 살결에 날카로운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입이 거친 씰이로군. 네 주인이 죽는 모습이나 지켜보고 있어." "내 멍청한 주인의 심리를 잘 이용한 좋은 작전이긴 했는데 ...한가지 실수한게 있어 너는." 카넬리안은 조금씩 몸을 떨며 일으켰다. 멀리 있는 줄리탄의 귀까지 그녀의 힘들어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 무슨 소리냐?" "역시 시골 촌구석의 영주라서 나에 대해 잘 모르는가 본데 이 따위 어설픈 봉인 따위로 날 가둘 수 있을 줄 알았냐!!"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눈빛이 순간 빛나고 있다고 줄리탄은 생각했고 그녀가 꽉 잡고 있던 검을 휘두르며 파동의 사슬은 그 고리가 끊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넬리 안은 자신의 거친 숨을 고르며 영주를 노려보며 칼을 들었다. 카넬리안의 옷은 이미 반쯤 그 형체가 사라져 있었고 그 사이 사이로 하얀 그녀의 살결이 보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 봉인을..." "내 옷을 이렇게 만들다니! 용서 못해!!" '나한테 빌린 옷이 잖아....' 줄리탄은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씰은 되게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잔인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 다. "니가 말하는 내 가치라는 것 보여줄까? 너 따위에겐 아깝지만 쬐끔만 내 능력을 보여주도록 하지." 곧 카넬리안이 나직하게 무언가를 외우는 것 같았지만 그 이후 를 줄리탄은 기억할 수 없었다. 무언가 거대한 에너지가 폭팔하 는 기분이 들더니 이내 뭔지 모를 힘에 기절해 버린 것이다. 5. "어, 어떻게 된거야." 줄리탄은 두통에 흔들리는 머리를 잡으며 눈을 떴다. 파란 하늘 이 눈에 들어왔다. 성 안은...아니구나. '그런데 꽤 춥네...얼레?' 그는 자신이 속옷만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옆에 앉아 있는 카넬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줄리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왜 내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어 깨어났어? 너 순진한지는 몰라도 되게 약하다. 어떻게 그 정도에 기절해 버리냐. 아아 앞으로 고생할 게 눈에 선하네." "말 돌리지마. 대체 내 옷을 왜 니가 입고 있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카넬리안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거야 아까 내 옷은 찢어져 버려서 입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내 옷을 벗겼다?" "그럼 여자에게 그런 다 찢어진 옷을 입고 있으라는 거야? 너 정말 형편없는 남자로구나!" "관두자. 난 가다가 나뭇잎이라도 엮어서 입지 뭐...제길." 적반하장. 이런 경우를 위해 생긴 말이 아닐까. "그런데 성은 어떻게 된거야?" "아 그거. 저거." 카넬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뒤쪽을 가리켰다. "..." 줄리탄의 눈에는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는 폐허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녕 저기가 아까전까지 성이 있던 곳이었단 말인가. 전멸이라기 보다는 괴멸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아하하. 그렇게 감동받은 표정 안보여도 돼. 저건 내 능력의 아주 일부분, 연습상대도 안된다고." 카넬리안이 줄리탄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지만 줄리탄의 표정이 밝을리가 없다. 이런 여자에게 페세테르 잡는 것을 맡겼다간 당장 물 속에 뛰어들어 페세테르의 씨를 말려버릴 지도 모른다. "대체 너란 여자는..." "뭐. 내 능력이라는 것, 처음부터 창조보단 파괴에 어울리는 거니까. 화가 나서 쬐끔 오버하긴 했지만..." 줄리탄은 처음 그녀를 깨웠을 때 자신의 마을이 쑥밭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아무튼...이제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겠지?" "뭐가?" "인간이란 애시당초 잔인하고 이기적인 동물이야. 용서니 자비니 하는 말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고. 서로를 잡아먹는 이유를 필요악이라고 둘러대면서도 남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면 태도가 바꿔 더러운 놈이라고 욕하 지.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설치고 다니면서 실은 자기자신 에도 솔직하지 못한 그런 만용의 동물이 바로 인간이야." 카넬리안은 진심을 말할 때면 목소리가 낮아지는 버릇이 있 다. "나도...그렇다고 생각해?" "이제부터 그걸 알아보려고 해." 카넬리안은 살짝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을로 돌아가면 스테온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까. 줄리탄은 그것이 궁금하고 두려웠다. -Blind Talk 인간이란 본래 자기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존재다. 그래서 과장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말하지 못한다. 실제의 자기보다 자신이 좀 더 나은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이 거짓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 죽어가는 사람도 이 거짓을 포기 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과 같은 것>> 『SF & FANTASY (go SF)』 8790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2-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1 00:32 읽음:120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2-3 : 살아남는 방법. 관련자료:없음 [43084]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5 10:52 조회:1094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나는...단 한번이라도 검으로 지게 된다면 다시는 검을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이유 입니까? 정말...세상에서 도망치는 방법도 여러가지군요." 그녀가 비웃듯이 말했다. << DRAGON LADY >> /F Chapter#2-3 : 살아 남는 방법 1. "죽을 준비는 되었겠지? 구차한 변명 같은 것 늘어 놓지마. 그런 말 들으면 간단히 끝내지 않을지도 몰라." 카넬리안은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그런 말을 꺼내며 굳은 표정 으로 서 있는 스테온을 향해 자신의 은빛 장검을 들이댔다. "마을을 살리기 위해선...그 방법 외엔 없었어." 스테온은 그녀에게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주장을 굽힐 생 각도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그 말이 카넬리안을 몹시 건 드렸는가 보다. 그녀의 눈빛은 더 차가워 져서 마을 사람 누구 도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경멸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게...너를 믿던 사람을 사지로 보낸 것에 대한 네 변명 의 전부냐. 역겨워. 할 말은 그걸로 끝냈으면 좋겠어." 그녀에겐 의외로 차갑고 냉정한 면이 있다. 상대방을 당장이라 도 얼려버릴 것 같은 목소리. 그것은 이 세상을 수없이 살아오 면서 몸에 베어 버린 얼음 같은 살기가 아닐까. 그녀가 검을 치 켜 올렸다. "죽어 버려. 그리고 절대로 환생 같은 것 하지마. 이 세상이 더러워 질테니까." 대담한 스테온의 눈빛에도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그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신념이라는 것을 굽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만 해. 죽일 필요는 없잖아," 카넬리안의 뒤에 서 있는 줄리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더러운 인간이야. 그래서 죽이는 거야. 널 속였기 때문이 아니야. 참을 수 없이 더러워서 죽이는 거야. 살기 위해 남을 죽여 놓고는 자신이 마을을 지켰다고 흡족해 하겠지? 그리고 죽은 녀석에게 미안하다며 자기 전에 기도라도 한번 하면 죄책감도 사라지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자위 하면서...다 똑같은 놈들이야." 카넬리안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뱉어내듯 말한 그 목소리 에서 줄리탄은 그녀의 마음의 상처가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 었다. "...하지만 스테온을 죽이면 너도 그 똑같은 놈 들이 되는 거야." 줄리탄의 그 말에 카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차갑도록 무표 정한 모습. 그녀는 그런 얼굴로 몇 명을 죽였을까.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지...주인님? 이미 내 몸과 마음은 너희 인간 들의 손에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서 치료할 방법 같은 건 없어. 칠흙 같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내가 뭘 보고 또 뭘 저주했는지 알아? 너흰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을 껄. ...차라리 너희와 똑같은 놈들이 되어버렸으면 좋겠어. 마음 껏 위선과 이기 속에 살다가 적당히 죽어버릴 수 있게." 독한 말을 토하듯 쏟아내며 줄리탄을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 가 처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널...치료해 줄께. 그러니까 날 믿어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잠시 줄리탄의 눈을 바라 보다가 작은 입술을 열었다. "싫어." 카넬리안은 칼을 고쳐 잡으며 다시 스테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칼날이 스테온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기를 그어버리는 파열음...소름끼치는 검의 비명이 울렸다. "제발 그만둬!! 난 널 도와줄 수 있으니까!! 너의 아픈 모습 같은 것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둬!" 줄리탄이 두눈을 감고 부르짖은 목소리... 그녀는 처음으로 줄리탄의 목소리가 자신의 마음 어딘가와 공명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서려 있는 지독한 감정의 기운도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녀의 칼날은 움직임을 멈췄고 조용히 칼을 내렸다. 잠시후 곧 카넬리안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안죽이면 되잖아, 안죽이면! 시끄럽게 소리지르지 말라고." 그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돌아보았다. "헤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 왔네." 사실 줄리탄의 표정이라는 것은 대단히 순진해서 묘사하기에 좀 창피할 정도다. "그리고 말야...주인님. 제발 그런 살 떨리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어떻게 테이머가 씰에게 그런 말을...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그녀의 머쓱해 하는 모습은 의외로 귀엽다. "그리고 날 도와주겠다면 주인님이 첫번째로 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 "...?" 뭔가 불안해 진다. "그건 어서 제대로 된 기사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날 이적 시킬 능력이 된 뒤에 날 잽싸게 훌륭하고 돈 많은 기사에게 이적시키는 거라고. 그게 날 돕는 길이야." 카넬리안은 뻔뻔한 얼굴로 잘도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 멍청한 얼굴로 그 말을 듣던 줄리탄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 요리사가 되면...안될까? 그것도 보통 노력으로는..." "날 도와주겠다며! 신용 없는 남자! 성의를 보이라고 성의를!!" "쳇. 내가 뭐하러 열나게 노력해서 남 좋은 일 해주냐. 차라리 니가 내게 성의를 보여서 요리를 공부하는게 어때. 내가 주인 아냐?" 줄리탄도 많이 늘었다. "으으윽. 너 정말 내가 만난 주인 들 중에서 최악이야." 그녀가 의외로 공격 받는 것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뭐 이후의 말싸움을 다 쓰자면 두 사람의 이미지가 더러워져 버리므로 여기서 줄이기로 한다. 2. 작은 마을 키오네에는 한달에 한번 가량 페세테르 고기를 사 가는 상인이 찾아온다. 그리고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그 상인 의 4마리 나트가 끄는 수레에 올라타고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마을에서 그런 일 들이 벌어졌는데 계속 있는 것도 좀 거북했던 것이 사실이고 무엇보다 줄리탄 역시 한번도 가보 지 않은 '도시'가 궁금했던 것이다. 지붕 없는 수레에 앉아 있는 둘의 머리 위로 한동한 뜸했던 하얀 눈송이가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나 눈 싫어." "..." 줄리탄은 입술을 삐죽 내민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정말 싫은 것도 많은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페세테르 고기더미 위에 털썩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조금 배가 고픈 줄리탄의 코를 고기 냄새가 자극하고 있었다. "이 냄새도 싫어." "...대체..." 뭐 일일이 맞부딪쳤다간 말싸움이 벌어져서 줄리탄을 구둣발 로 걷어차서 수레 밖으로 날릴 것이 뻔했으므로 그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도시라는 것 어떤 모습이야? 엄청나게 크겠지?" "가보면 알아." 가끔 카넬리안이 별 생각 없이 말했는데 꽤 의미심장하게 들릴 때가 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대답해 버리면 계속 얘기 를 진행하기가 불편해 진다. "아참...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아마 그 지명이 바뀌지 않았다면...그 도시 이름 벨레시마 겠지. 맞아 분명 벨레시마야. 거기로 갈꺼야." 카넬리안은 기억을 더듬는 얼굴로 눈발이 흔들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추억에 차 있는 눈동자였다. "왜 거기야?" "여기서 가까우니까." "...." 단순하지만 명쾌한 답변이다. 하지만 역시 그런 식으로 대답 하면 대화 진행하기가 힘들어진다. "아아 정말..." 그녀는 기지개를 펴더니 자신의 어깨와 머리칼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이럴 때는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아아 캔맥주 먹고 싶어. 이런 날엔 정말로..." "캔맥주? 그게 뭐야?" "몰라도 돼." 그녀는 뭐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이내 누워 버렸고 줄리 탄은 그녀가 가끔 알지 못할 단어를 쓴다는 생각을 했다. 뭔지 모를 여자였다. 3. 그런 그들이 벨레시마에 도착한 것은 가깝다는 카넬리안의 말과는 달리 몇 대의 마차를 얻어타고 걷고 또 걸은 뒤 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걸은 적은 없다고 줄리탄은 투덜거렸지만 그녀는 나트 한마리 살 정도의 돈도 없는 가난한 주인이라고 핀잔을 줄 뿐이었다. 쉽사리 사이가 가까워 질 것 같지는 않다. 별다른 묘사는 생략했지만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도시 벨레시마. 그 도시는 근처에 본성을 두고 있는 리센버러 국의 통치권에 있었다. 뭐 그거야 어찌 되었든 줄리탄은 차라리 고 행에 가까운 긴 여행의 피로로 실신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뭐, 뭐야!! 이 곳은!!!" 엄청난 수의 사람 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 이고 있었다. 여러 가게 들에서 나는 빵냄새와 고기냄새, 화장 품 냄새 등에 머리가 혼란스러울 정도다. 공원의 바닥은 흙먼 지가 일어나지 않는 코블스톤. 가슴이 두근 거릴 정도로 시끄 럽고 활기차며 난생 처음보는 물건 등이 당장 보고 있는 눈 앞 에서도 사고 팔리고 있었다. "헤에. 여기도 많이 바꿨네." 카넬리안도 좀 놀랐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도시라는 것...이렇게 대단한 거였어?" 사실 줄리탄으로서는 키오네를 벗어나 도심지로 간 것은 이번 이 처음이었다. 만약 카넬리안을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대부분 의 고향 마을 사람들 처럼 북부 키오네를 벗어날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뭐야. '난 세상을 처음 알았다네.'라는 그 표정은... 이런 도시가 헤스페리아에 수 천개가 넘게 있다는 걸 말하면 기절해 버릴 지도 모르겠네?" "뭐, 뭣!" 카넬리안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줄리탄이 멍해져 버렸다. 뭐 굳이 우주의 별의 갯수 같은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도시의 규모와 숫자 만으로도 충분한 쇼크가 될 수 있었다 이 순진한 시골 청년에겐. "하긴 여긴 이 대륙 이슬라트와 바다 넘어 젤밴더 대륙으로 부터 오는 교역품 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다른 도시에 비해 꽤 큰 편이긴 하지. 덕분에 무계획적으로 커져 버려서 좀 정신 없긴 하지만 활기차기로 치면 이만한 곳도 드물어. 이 도시가 속해 있는 국가가 지금은 어딘지 모르겠지만 꽤나 대단한 수입원이기도 할테고..." 카넬리안의 말을 줄리탄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 줄리탄의 눈은 어떤 생명체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저...저건 뭐야?"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시선을 따라 술집으로 보이는 가게 앞을 바라 보자 거기에는 묶여 있는 나트 들을 돌보고 있는 인간보다 훨씬 덩치가 좋아 보이고 아랫턱이 나와 있으며 푸르스름한 피 부에 긴 팔을 가진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무섭다기 보다는 좀 둔하고 몸집에 비해 순해 보인다고나 할까...입고 있는 것도 부실한 그것은 인간처럼 능숙한 손놀림으로 나트를 묶는 끈을 조이고 있었다. "아 저거...오크(2). 서부의 숫놈 오크인 것 같네." 카넬리안이 말했다. "오크? 이상한 짐승이네..." "짐승이라기 보다는 뭐랄까 사람과는 다른 지적 생명체? 뭐 지식 수준이 높다고 말은 못하지만 아무튼 인간 언어도 대충 할 줄 아니까." 줄리탄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사람 외에 다른 이성 과 지성, 감성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말을 스테온에게 들은 적은 있었지만 솔직히 그때는 별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되자 전에는 없던 묘한 기분이 든 것이다. "넌 잘 모르겠지만 인간 들은 꽤 오래전부터 저런 종 들을 잡아와 사육해서 키우고 있었어. 뭐랄까...노예?" 별로 기분 좋은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명령을 그렇게 쉽게 듣는단 말야?" "바보 같은 말을...당연히 강제로 잡아왔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몇 세대를 거친 뒤엔 저항의식 같은 건 사라지고 스스로 인간의 노예라는 생각을 갖고 복종하게 된 거지." 카넬리안은 눈빛을 조금 흐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나트 를 묶은 줄을 점검하고 있는 오크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특히 '복종'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조소를 보였다. "잔인하잖아 그런 거..." 줄리탄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잔인하다고? 와, 그런 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정말 화석 같은 남자라니깐. 뭐 아무튼 오크 외에도 엘프나 코볼트, 오우거 같은 종 들도 각기 맞는 역할에 배치되어 있고 관련된 책 들도 시립 도서관 가면 많을 테니까 찾아봐. 난 별로..말하고 싶지 않아." 카넬리안은 그런 인간의 '노예'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역시 인간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계속 떠올라서 그랬던 것일까. 줄리탄은 머리 속에 복잡 했고 잠시 잊었던 피곤도 몰려왔다. 가능하다면 어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들고 싶었다...라고 생각하던 순간. "세상에 저 커다란 동물은..." 이라고 줄리탄이 말했다.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서 있는 곳 으로 회색 피부의 거대한 네발 동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동물은 말이 '커다란'이지 집채만하다는 표현이 훨씬 어울릴 정도로 고개를 잔뜩 꺾어 올 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한 동물인데다가 거대한 두 뿔을 가지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육중하고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그 동물 에 눈이 팔려 있는 동안 줄리탄은 주변의 사람들이 그 '집채만 한 것'을 타고 있는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 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엘레파스(3)네. 저건 대륙 남부에나 있는 놈인데... 이런데 까지 끌고 오다니 아무튼 돈만 많은 놈들의 생각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다니까..." 역시 그녀의 전매특허 중에 하나 '삐딱하게 보기.'가 발동 했다. 하지만 줄리탄은 어찌되었던 '세상에 이렇게 큰 동물 도 존재한다니.'라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가까이 올 때마다 엘레파스의 발걸음에 울리는 지면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넋나 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줄리탄의 앞에서 엘레파스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동물 위에 올라타고 있는 터번을 두른 자가 줄리탄을 꽤나 불쾌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엄청 비만한 몸을 두른 원색의 화려한 옷이 불균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그런 자였다. "넌 뭔데 내게 존경을 보이지 않는 거냐. 나는 이 곳 국왕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거상 쿠드로님이시다!!" "예?" 쿠드로 라는 자의 유치찬란한 자기 소개에 대한 줄리탄의 답 변은 '예?'였다.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그건 꽤나 배짱 좋은 대답이다. "건방진! 보아하니 시골 촌뜨기 같은데 나를 모욕하다니 무례의 대가가 뭔지 알려주지." 생긴 것에 비해 말이 빠른 자였다. 줄리탄이 뭐라 변명할 기 회조차 주지 않은 채로 그 엄청난 엘레파스가 앞발을 들었고 그것은 줄리탄을 향해 그대로 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 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줄리탄은 피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본래 때리는 것과 피하는 것에는 별 재능이 없는 남자다 그는. 하지만 줄리탄 정도의 사람은 형채도 없이 짓이겨 버릴 것 같았던 엘레파스의 앞발은 줄리탄의 머리 근처에서 멈춰 버 렸다. 순식간에 끼어든 카넬리안의 오른 팔이 내리찍는 앞발 을 막았던 것이다. 엄청난 굵기의 엘레파스의 앞발을 거뜬히 들고 있는 카넬리안은 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뭐, 뭐야! 그런 힘이라면 분명 씰!!" 엘레파스 위의 자칭 거상 쿠드로 님께서 경악하셨다. "나의 주인님께 무례를 범한 것은 너다 멍청아. 상인 쪼가리 따위가 기사님께 더러운 발을 들이대다니... 너야 말로 이 모욕, 어떻게 보상할 꺼냐." "하, 하지만 나는 기사가 아니.." 줄리탄의 그 말은 카넬리안이 노려보자 당장 기어들어갔다. 카넬리안은 '내게 맞겨둬.'라는 줄리탄이 보기엔 되게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왼 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엘레파스가 세로 절반으로 깨끗하게 갈라져 버린 것은. 줄리탄은 단지 순간 칼을 세우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카넬리 안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보았을 뿐이다. 수박처럼 반쪽으로 갈라져 버린 엘레파스의 몸뚱이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그 위에 타고 있던 쿠드로 는 엘레파스의 등에서 떨어져 엘레파스의 핏덩이 속으로 낙하 해 버렸다. 핏더미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뚱뚱한 쿠드로의 모 습은 어딘가 모르게 코믹...하다면 죽은 엘레파스에게 실례가 될까? 아무튼 물이 가득 찬 풍선이 터져버린 것처럼 거리 산 지 사방에 쏟아져 버린 엘레파스의 시뻘건 피비린내가 사람들 의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피바다...여기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줄리탄은 자신의 이마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내며 황당 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정리하는 말을 했다. "또...이 모양이야..." 카넬리안은 모르긴 몰라도 꽤 신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쿠드 로에게 검을 들이대며 꼭 이 말을 해보고 싶었다는 얼굴로 말 했다. "자. 무릎 꿇고 '정식으로' 사과하면 이쯤에서 용서해주마." 반면 쿠드로는 치욕에 가득 차서 미쳐버릴 것 같은 표정이다. "씰...기사 였다고 왜 말하지 않은 거지. 너희들 처음부터 날 조롱꺼리로 만들 계획이었지!!" 무례하고 말이 빠르고 게다가 병적인 녀석이었다. "기사의 후광을 보지 못한 네 놈의 무지함 때문이다. 너의 무지를 남의 탓으로 돌리다니...천박한 놈." 너무 그럴 듯한 목소리. 그녀는 연기의 달인이다. "후광? 저 자는 전혀 기사로 보이지 않아! 저런 기사가 어딨어!" 쿠드로도 나름대로 굉장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멍청한 놈! 뭐가 기사를 기사로 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나. 화려한 옷? 멋진 검? 똑바로 눈을 뜨고 주인님을 봐. 그런 것 없어도 저 분은 기사님에 틀림 없다.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건 너의 마음이 추하기 때문이야." "...저걸 누가 말려." 줄리탄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쿠드로는 얼빠진 모습으로 서 있는 줄리탄은 멍 하니 바라 보았다. 쿠드로는 그녀의 뭔지 모를 설득력에 동의 해 버린것 같았다. 하여간 그녀가 모든 씰 중에서 가장 강한 지는 몰라도 뻔뻔스럽게 우기는 데는 따라올 씰이 없을 거라고 줄리탄은 생각했다. 줄리탄을 기사라고 확신해 버린 쿠드로는 말투를 바꿨다. "하지만 본인도 기사 작위가 있는 몸! 귀공에게 결투를 신청 하겠소! 내게 이렇게 모욕을 주었으니 귀공도 기사라면 피하 지 않겠지!!" 쿠드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줄리탄을 가리켰다. 상황은 이제 뭣 때문에 이 일이 시작되었는지를 떠나서 줄리탄으로서는 뭐가 뭔지 모를 상황. 악화일로였다. "나? 나하고 결투? 자, 잠깐 당신의 엘레파스인지를 저 모양 으로 만든 건 내가 아니라 카넬리안이었다고! 난 모욕 준 적 없어!" "무슨 말을! 주인의 명령 없이 움직이는 씰이 어디 있어! 귀공이 명령했으니까 씰이 그렇게 행동한 거 아니오!" "카, 카넬리안...뭐라고 말 좀 해봐."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저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 그녀의 연기력은 정말로 뛰어났다. '주, 죽일테다. 저 여자.' 이쯤되면 더 이상 황당해 할 여력도 없다. "이 몸에게도 씰이 있으니 일주일 후에 열릴 어전시합에서 봅시다! 이 몸은 절대 도망치지 않을 것이오!" "무, 무슨 말이야..." 줄리탄의 의문과는 상관 없이 쿠드로는 그 자리를 피했다. 분명 더 이상 거기에 있었다간 결투고 뭐고 카넬리안의 칼에 목이 날아가 버릴 것을 걱정한 탓일게다. "대, 대, 대체!! 너란 여자는 정말!!!" 이쯤되서 줄리탄의 짜증이 터져 버린 건 당연한 것이다. "아아 시끄러운 주인이네. 저런 기사 들의 결투란 게 뭔지 알아?" 카넬리안이 칼에 묻은 피를 털며 말했다. "결투라면 기사 들 끼리 싸우는 거 아냐?" "땡. 진실로 명예로운 소수의 기사 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의 씰끼리 싸움을 붙여. 뭐 그래서 이기는 쪽의 기사 가 결투에서 이긴 거지." 카넬리안은 그런 것에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그건...씰 들끼리 싸운다고?" "뭐. 씰이란 기사의 분신과 같아서 씰들의 싸움 역시 기사 의 결투와 같다고 말하고들 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 실은 결투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운 거짓 기사 들이 고안한 방법이지. 기사니까 결투를 피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죽는 건 무서우니까 씰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거지. 아아 정말 짜증난다니까." 그녀의 말에는 자칭 기사라고 자랑하는 족속 들에 대한 경멸 이 섞여 있었다. 인간에 대한 그녀의 편견이 형성되는데 그런 점도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너 저 쿠드로라는 놈의 씰과 어전대회라는 것에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결투야?"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보다 잠 잘 곳부터 찾는게 어때. 아무리 볼품 없는 기사라도 잘 곳 정도는 있어야 하고...나도 이 놈의 피자국 좀 어떻게 하고 싶으니까." 카넬리안은 질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둘러 보았다. 옷을 하나 새로 사는 편이 좋을 정도였다. "너 자꾸 날 기시라고 말하는데 다시한번 말하지만 난 기사가 아니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넬리안의 날카로운 눈빛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나 절대로 요리사의 씰이라는 비웃음 받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제발 이 도시에서만은 기사로 행동해 줬으면 좋겠어. 주인님." 카넬리안의 뭔지 모를 박력에 줄리탄은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불쌍한 남자다 정말. 아까의 난리 덕에 엘레파스의 시체 주변으로 사람 들이 모이 기 시작했고 나트를 관리하던 오크도 긴 금발과 은발을 내린 엘프 무희들도 술집 이층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줄리탄과 카넬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무시무시 한 기사와 씰이 이 도시에 왔다는 말을 서로 쑥덕이기 시작 했다. 1) 헤스페리아 : 이슬라트와 젤벤더 두 대륙을 포함한 이 세계 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문화권'이라고 말하는 곳까지만 세계의 영역권으로 치고 있다. 즉 미개척된 곳이나 가보지 않아서 그 곳에 대해 알 수 없는 곳은 헤스페리아의 영 역 밖이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생활권을 말하는 개념에 가깝다. 뭐 그 런 말 전혀 매력적이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2) 오크 : '그런 모습이 오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오크를 사육하다니 말도 안돼.' 라고 말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전 사실 많은 소설 등에서 나오는 오크라는 것에 잘 모르는 편입니다. 사실 이런 류의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실격일지도 모르지만 별로 큰 관심도 없구요. 그냥 여기서는 그 이름만 가져왔다고 생각하시고 용서해 주시길. 3) 엘레파스 : 딱 들어도 elephant...코끼리가 생각납니다. 대충 그 분위기인데 코는 길지 않지요. 그럼 불편해서 어떻게 생활할지 의문이지만 뭐 다음부터 거의 나올 일 없을테니 잊어 버립시다. 엘레파스는 코끼리의 라틴어를 발음 나는대로 적어본 거에요. Next chapter : 인간의 가치는... -Blind Talk 이번 편은...몹시 몸이 안좋은 상태에서 한번에 써버린 거라서 변명은 아니지만 제가 읽어봐도 꽤나 두서 없네요. 게다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환타지'라고 말하는 소설 들을 거의 읽어 본 적이 없는데다가 애시당초 문체니 묘사니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서...그럴 듯한 장르 소설이 나오는 건 애시당초 글러먹은 것 같네요. 음 그리고 개인적으로 꽤 심각하고 분위기 있어 보이는 글 들만 써오다가(달리 말하면 궁상맞은 글이 될 수 있고) 이번에 '나도 밝게 살고 싶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밝고 명랑하게 쓰려고 이런 걸 써버렸는데 도통 재능이 없는지 아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면 "뭐야. 이거 어두웠다가 밝았다가 정신 없잖아..."라는 말을 들어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뭐 그래도 달래 방법 없으니까 my pace로 갑니다. 그리고 이 아이디로 올라온 다른 친구의 'SIG'라는 글은 물론 제가 쓴 것 아니고(농담이라도 그렇게 두편씩 올릴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실력이 좋지도 않습니다.) 저와는 꽤나 다른 성격은 친구가 쓴 것입니다. 사실 그 글은 제 것과는 달리 꽤 스케일이 크고 뭐랄까 '정통'(이라는 말을 쓰면 천박해 지려나.)의 분위기가 있어서 어쩌면 좀 어려워(나만 그럴지도) 보일지도 몰라도 굉장한 내용입니다 한번 봐 주세요. 지금 많이 올라와 있지는 않지만 내용이 저와는 달리 꽤 탄탄하게 이어져 있어서 계속 볼 수록 빠져들게...되요. 될까? 그건 뭐 읽는 분의 몫이니까... 마지막으로 SIG에 나오는 인물 들 중에서 몇 몇은 제 스토리에 나오는 인물과(대부분 씰 들이 되겠지만서도...)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실은 이름만 같은게 아니라 동일 인물이죠...몇 명만 빼곤. 아무튼 제 것과는 다른 글이니까 한번 봐주세요. '추천'...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 친구 새 아이디 만들면 분리하겠지만...지금은 돈도 없고...쿨럭 쿨럭.) 덧말1:...대체 내가 이 글을 몇 번이나 수정했단 말인가. 볼 때마다 올릴 때 오류로 날아간 부분이 발견되니...휴웅. 혹시 다른 부분에서라도 날아간 부분이 있어서 문맥이 어어지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면 제발 메일로 살짝 알려주세요. (...창피하니까 게시판에 쓰지는 말아주세용.) 『SF & FANTASY (go SF)』 88046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3-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1 21:31 읽음:118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3-1 : 인간의 가치는... 관련자료:없음 [43277]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8 05:49 조회:1080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기사가 많은 사람 들의 동경의 대상인 것은 아마도 '남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도적이 사람 을 죽이면 잔인한 살인마라는 소리를 하지만 기사가 사람을 죽이면 명예로운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나는 그 이유를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 DRAGON LADY >> /F Chapter #3-1 : 인간의 가치는... 1. "이 도시로 저를 알고 있는 씰이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가까이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리이 디트리히의 씰인 이카테스가 기사치고는 길고 푸른 머리칼을 손질하고 있는 리이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이카테스의 엷은 미소가 '그녀'가 자신과 좋은 관계 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리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테이블에 빗을 내려 놓으며 이카테스 를 바라보았다. "그래? 전에 말했던 그 씰을 말하는 거냐? 네가 알고 있는 씰이라면 분명 너 만큼 훌륭한 씰이겠지. 그런 씰을 데리고 있는 기사라면...한번 보고 싶군." 약간은 기대에 차 있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여간해서는 봉인에서 깨어나지 않는 씰입니다. 그녀를 깨웠을 정도의 테이머라면...분명 뛰어난 기사 임에 틀림 없겠지요." 이카테스의 말에 리이의 기대감도 커졌다. 평소 차분하고 이지적 인 성격의 그녀지만 기사는 기사. 훌륭한 기사를 만나보고자 하는 욕심은 쉽게 잠재울 수 없는 것이다. 뭐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훌륭한' 기사라는 것이 실은 시골 어촌 출신의 연하의 요리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좀처럼 바뀌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카테스에게 외출복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가 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한번 쯤 보고 싶군. 나야 운이 좋아 너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 정도의 씰을 데리고 있는 자라면 분명 만나서 후회 없을 기사일 꺼야." 이카테스는 그 말에 싱긋 웃을 뿐이었다. 리이의 이런 말과는 달리 리이 역시 디트리히 가문이라는 기사의 명가(名家)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의 나이에 리센버러 국의 제1기사 작위를 받은 자. 동대륙 이슬 라트에선 '리센버러의 푸른 맹금(猛禽)'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유명한 여기사 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성격 또한 강직하지만 온화해서 평민 들에게도 친절한 '드물게 볼 수 있는' 그런 기사였다. "그런데 이카테스. 네가 알고 있다는 그 씰의 본래 이름이 뭔지 말해 줄 수 있어?" 본래 이름. 아마도 그것은 테이머가 부여한 이름이 아니라 씰의 고 유한 이름일 것이다. 이카테스는 리이의 외출복을 정리하다가 언제 나 처럼 웃는 호상으로 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 본래 이름을 알려드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뭐 괜찮아. 그냥 단순히 궁금했을 뿐이야." 리이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놓았던 빗을 다시 들어 그녀의 진한 푸른 머리칼을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2. 소문이라는 것은 언제나 많은 사람의 귀와 입을 거치며 실제 사실 보다 부풀어 오르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사람 들이 많이 모 여 있는 장소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이 도시 벨레시마에 퍼져 버린 줄리탄과 카넬리안에 대한 소문은 다음과 같 다. '잔혹한 방랑기사와 그의 최상급의 씰이 도시에 오자마자 한복 판을 피바다로 만들었다.그 기사는 재미로 사람 들을 죽인다더라.' "세상에. 당분간 이 도시 다닐 때 조심해야 겠어. 그 기사에게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라고 사람들이 수근거릴 만도 하지 않은가? 그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소문의 주인공인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어찌되었든 잠자리라도 얻기 위해 어느 여관의 문을 열고 있었다. 1층에선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꽤 큰 곳이었다.두꺼운 나무문이 열 리는 소리와 함께 술자리의 모든 시선 들이 그들에게 집중되었고 순간 작게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자가...그 방랑기사야. 조심하는 게 좋아." 그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 무대 위에서 얇은 목소리로 하프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던 여자 엘프의 목소리가 멈췄다. 줄리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찍소리도 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시작되었 고 홀 내의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의 옷은 방금 전 '사건' 때문에 엘레파스 의 피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상황. "...." 줄리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사람 들의 표정이 창백해 진 것을 알고 자신도 긴장하며 이 집 주인으로 보이는 바 뒤의 사내에게 천 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줄리탄의 생각이야 어쨌건 이 분위기에선 줄리탄이 아무나 어깨를 툭 치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살려주세요. 기사나리. 자식에 다섯명이나 있습니다. 제발!!'이라고 소리칠 것 같다. 이런 걸 웃긴다고 해야하나 불쾌하다고 해야 하나. 줄리탄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가고 있는 이 여관 주인의 이마에서 역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줄리탄의 검에(실은 칼도 없지만) 주인의 목이 날아가 버려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황. 홀에 앉아 있는 사람 들도 조금씩 엉덩이를 들고 여차하면 문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모습이었다. 줄리탄이 이제는 눈동자마저 흔들리고 있는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요리사 필요하지 않으...커억!" 줄리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넬리안의 가열찬 펀치가 보통 사 람들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스피드로 줄리탄의 등에 작렬 했다. 줄리탄의 입에서 고통스런 외마디가 터졌다. "주, 주인님. 아직도 그 때의 상처가..." 카넬리안의 내장이 터져버리는 듯한 펀치의 충격에 온몸을 부들거리 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린 줄리탄을 그녀는 완숙한 연기와 함께 위로하며 일으켰다. 등골이 산산조각나는 고통으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줄리탄은 뻔뻔스럽게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넬리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뭐가 그 때의 상처냐. 너 정말 날 죽이려고...' 하지만 줄리탄이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이런 메세지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지껄이면 진짜 죽여버릴테다. 주인님.' 카넬리안은 고통과 치욕에 몸부림치는 줄리탄을 부축하고 술집 주인 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주인님께서는 얼마전 남부의 달라카트 전투에서 10여명의 기사와 싸우시다가 지금 이렇게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어서 쉴 곳 을 마련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여기는 북부의 도시다. 넓은 대륙 남부에서 뭔 일을 했다고 한들 확 인할 방법도 없고 뭐라 말하던 주인은 '용서 없는 방랑기사' 앞에서 거부하거나 의심할 생각 따위는 없다. 단지 그런 말이 망설임 없이 나오는 카넬리안가 '재치'가 가공할 따름이다. "물론입죠! 저희 가게로선 명예로운 기사나리과 그 분의 씰을 대 접하게 된 것에 대해 한 없이 영광일 따름입니다. 당장 누추하지만 저희 가게에서 가장 좋은 방을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주인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부들부들 거리는 녀석이 뭐가 '명 예로운지' 모르겠지만 주인은 연신 굽실거리며 객실이 있는 이층으로 한걸음에 올라갔고 순식간에 이 여관의 베스트스위트 룸이 준비 되었 다. 3. "너 말야...그게 주인한테 할 짓이냐..." 줄리탄은 방에 들어 왔을 때 까지도 아픈 표정으로 계속 등가를 어 루만지며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과일을 까먹고 있는 카넬리안 에게 말했다. "아 이거 맛있다." 그녀는 계속 작은 포도송이를 닮은 붉은 과일을 입에 넣고 있었다. 사실 이곳 벨레시마는 과일이나 곡식 같은 것이 자랄 정도로 풍요로 운 땅이 못되서 이런 곳에 있는 과일 같은 건 모조리 수입품이다. "제발 한번이라도 남의 말 좀 들어라." 줄리탄은 지친 목소리였다. 카넬리안은 입에 담은 과일을 마저 삼 킨 후에 다른 객실의 세배는 될 정도의 방을 둘러보며 흘러가는 목 소리로 말했다. "기사란 말야...어디를 가도 돈을 낼 필요 같은 건 없어. 특히 씰과 함께 다니는 기사는 씰 자체가 기사임을 증명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무사통과라고. 너도 그런 건 좀 알아둬." "뭐? 그럼 아무나 기사 하려고 하겠다." 줄리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카넬리안은 저쪽 방에서 고개 만 내밀고 말을 이었다. '저쪽 방'이란 욕실이었다. "기사란 일단 작위가 있어야 해. 그게 없으면 아무리 기사라고 외쳐 봐야 소용 없다고. 작위 역시 왕이나 황제 만 줄 수 있는 거니까 일반 소시민들로선 평생 얻을 수 없는 게 기사 작위지." "작위? 난 그런 거 없단 말야." "걱정하지마. 나 같은 씰과 함께 다니는 사람에게 작위를 확인 하려는 배짱 좋은 녀석은 없으니까. 평민이 기사의 작위를 의심 한다는 건 굉장한 모욕이거든." 그녀는 꽤 그런 일 들에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긴 줄리탄 만 제외하면 그녀가 모시던 주인이란 죄다 한가닥 하는 기사 였을 테니까. "그, 그래? 그렇다면 작위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는 거잖아."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진짜 기사라는 것은... 그렇게 쉽고 편한 게 아냐. 권리가 있으면 의무도 있는 거지." "기사의 의무? 그게 뭔데?" 줄리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카넬리안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녀는 언제나 근처에 두고 있는 자신의 검을 잡으며 줄리탄에게 다가왔다. "누가 오고 있어. 두...명. 익숙한 느낌이야." 그렇지 않아도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 밖에 여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나리. 방해드려 죄송합니다. 리이 디트리히 훈작사님께서 기사나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리이 디트리히? 디트리히 가문이잖아. 열어봐." 카넬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이럴 때의 모습은 꽤 믿음직하다. 줄리탄은 카넬 리안을 흘낏 돌아보며 머쓱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고 문 밖에 서 있 는 여성의 모습을 보는 순간 멍해져 버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 사과 드립니다." 카넬리안과는 또 다른 속삭이는 듯한 미성이였다. 화려해 보이진 않 지만 고급스러운 아이보리 빛의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는 리이의 키 는 줄리탄 보다도 조금 컸다. 짙은 푸른 빛의 머리칼과 자수정을 닮 은 눈동자는 아름답지만 조금도 연약해 보이지 않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얇은 선으로 이뤄진 조각품을 닮았다고 할 정도로 매 력적이었다. 하지만 아까 전에 본 엘프 무희 보다도 뛰어나 보이는 미모라도 줄리탄은 왠지 그녀가 '기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의 로브 사이로 살짝 나와 있는 얇은 칼집 때문 만은 아니다. 그것이 카넬리안이 말하던 기사의 힘이라는 건가. 줄리탄은 그녀의 외모와 뭔지 모를 강한 기운에 순식간에 취해버려 할 말을 잃어 버렸 다. "아...저, 저는..." 줄리탄은 제대로 리이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곤 머뭇거렸다. 아무튼 꼴사나운 모습은 줄리탄이 자주 담당한다. "...?" 리이 역시 줄리탄의 모습은 생각하던 바와 너무나 달라서 내심 당황 하고 있었다. 이건 그냥 당장이라도 1층에서 술시중을 나를 것 같은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 아닌가. 자신도 직책에 비해 나이가 굉장히 어 린 편인데 이 자는 자기 보다도 연하로 보였다. 어딜 봐도 일반적 기 사의 모습과는 다른 것 같았지만 리이는 일단 자신이 그의 진짜 모습 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는 리센버러 국의 왕성 기사 중에 하나인 리이 디트리히라고 합니다." 리이는 조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리센버러 제1기사 이며 '푸른 맹금'이라고 불린다.' 라고 자세하게 말하지 않은 이유라면 분명 이 남자 줄리탄도 자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 튼 그녀의 이름은 심지어 남부에서까지 거론되고 있으니까. "아, 예. 저는 줄리탄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줄리탄은 언제나 처럼의 순진함이 흘러 넘치는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 백만 대군 앞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을 리이를 이 정도로 당황하 게 만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냥 '난 줄리탄. 만나서 반가워.'라고 말하고 끝이란 말인가? 리이는 계속 '줄리탄'이라는 이름에 대해 생 각해 봤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덕분에 리이는 자신 이 무슨 결례라도 범한 건지 당황하게 되었다. "주인님께서 현재 나라에 소속되길 멀리하시고 수행을 하고 있는 자유기사(1) 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 역시 말씀하시길 꺼리시는 분이라서...그 점은 죄송하지만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넬리안이 줄리탄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와 행동으로 그렇게 말하자 리이는 그제서야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보였다. 물론 죄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줄리탄 경은 훌륭하신 분이군요. 안정된 삶을 버리고 수행을 하는 기사는 정말 드뭅니다. 그런 분을 뵙고 있으니까 이런 제가 부끄럽 습니다. 당신 같은 분을 저런 훌륭한 씰이 따르고 있는 것은 당연 한 것이군요." '젠장 이젠 나도 모르겠다.' 리이는 카넬리안과는 정 반대의 성격 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의외로 순진하다. 하긴 리이 역시 그 본 모습 역시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들어오세요. 제, 제가 차라도..." 줄리탄은 아직까지도 당황하며 말했다. '으이구. 차를 왜 니가 끓이냐.' 카넬리안은 기사 교육을 기본부터 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에요. 절 기억하시나요? 지금 저의 이름은 이카테스.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리이의 뒤에서 훤칠한 미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카테스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약간 웃음끼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그의 얼굴을 본 카넬리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카테스의 모습은 방 안에 들어 오는 것 만으로도 방 안이 화사해 질 정도로 자신의 주인에 뒤지지 않는 수려한 용모의 씰이었다. "너, 너는!!...아, 아니. 당신이 리이 경의 씰??" 너무 놀라서 평소 말투가 나와 버린 카넬리안이 이카테스에게 다가 갔다. 반갑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등장에 무척이나 놀라버린 모습이 었다. "이 도시에 온 다음부터 뭔가 친숙한 기운이 느껴져서 설마했는데 ...정말 의외로군요. 이런 훌륭한 분의 씰이라니 부럽습니다. 전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애써 존칭어로 이카테스에게 말을 하고 있는 카넬리안의 얼굴에선 진실로 '부러워 죽겠다. 빌어먹을.'이라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카테스는 예의 싱글 거리는 얼굴로 카넬리안 을 바라볼 뿐이었다. 4. 벨레시마에서 반나절 거리에 떨어져 있는 평원에는 리센버러 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헬몬드 국의 군대가 집결해 있었고 그곳 지휘관의 막사에선 작전회의가 진행중에 있었다. "결국 이번 전투의 승패는 젤리드 경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헬몬드의 1군 지휘관인 오코넬은 막사 구석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을 걸친 사내 젤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젤리드는 송곳 같은 눈빛으로 눈을 치켜 올리며 오코넬을 바라보았다. 오코넬이 눈길 을 피할 정도로 강한 눈빛이다. "그런 걸 의심한다면...뭐하러 나를 고용한 거지. 단 약속을 지켜라. 벨레시마를 함락시킨 이후 약속한 대금을 치루지 않으면 다음으로 함락될 도시는 너희 수도니까." 젤리드의 심장을 파고드는 차가운 목소리에 막사에 모여 있는 자 들 모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오코넬은 좀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젤리드에게 다시 물었다. "하, 하지만 벨레시마에는 리젠버러 국의 리이 경과 그의 씰 이카 테스가 있습니다. 그녀는...남부에 까지 이름이 알려진 상급기사... 그리고 이카테스 역시 막강한 마법을 구사하는 상급의 씰.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요." 리이라는 이름을 들은 젤리드의 입가에서 냉소가 감돌았다. 예전부터 리이를 잘 알고 있다는 모습이었다. "내가 하찮은 너희 나라의 의뢰를 받아준 것은 개인적으로도 리이 디트리히에게 볼 일이 있어서야. 그녀는 예전에도 내게 졌고 이번 전투에서는 목숨을 잃게 될 꺼다. 나와 나의 씰 카리나가 리이를 처리하는 동안 너희가 벨레시마를 함락시키면 되는 거야. 간단한 문제인데 계속 겁을 먹는다면 너희 목 부터 베어 버리겠다." 젤리드의 잔혹한 말투와 악마적인 눈빛에 더 이상 아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젤리드 빙크리스틴. 디트리히 가문과 마찬 가지로 빙크리스틴 가문 역시 최고의 기사 들을 배출했던 기사 가문 중에 하나 였지만 지금은 몰락했다. 그리고 그 몰락의 이유는 젤리드 가 가문의 모든 사람 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단독으로 가족을 비롯한 하나의 가문 을 모두 말살시켜 버렸다는 것은 끔찍한 광기, 그 외에는 설명할 길 이 없었다. 그 이후로 젤리드는 자신의 작위를 잃고 파문기사가 되었 고 대등하게 상대할 자조차 거의 없는 그의 악마적인 능력은 그를 여 러나라와 상상도 못할 값으로 계약하여 '더럽고 잔인한 일'만 도맡아 해 주는 자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리이가 사람 들의 존경을 받는 '리 센버러의 푸른 맹금'으로 유명하다면 젤리드는 모든 사람과 기사들 마 저 그의 출현만으로도 공포에 떠는 '흉몽'(凶夢)이라는 악명으로 유명 한 자였던 것이다. 실제 그와 그의 씰 카리나가 결투나 전쟁을 통해서 죽인 기사 들의 수는 이름 있는 기사들만 하더라도 그 수가 수십에 이 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헬몬드 국과 계약하여 리센버러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벨레시마를 함락시키려 한다. "벨레시마라...언제나처럼 태워버리고 싶은 도시야." 1) 자유기사 : 기사단, 훈작사단 같은 것에 소속되지 않고 작위가 있지만 방랑 생활을 하고 있는 기사들을 의미하며 소속되어 있을 때 와는 달리 그냥 그들을 통칭 '자유기사'(free lancer) 라고 부르곤 한다. 이 들은 보통 세상을 돌아다니며 '의행' 을 하며 여러 왕국의 식객으로 지내며 기사도를 수련하고 종당에는 마음에 맞는 주군을 모시기도 한다. 작중 리이의 말처럼 관직 없이 순수하게 수행을 하고 있는 자유기사란 이 시대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Blind Talk 어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하루에 한번 씩 열심히 올리겠다는 다짐은 저 자신도 믿지 않았습니다.) 좀 지루한 부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젤리드 빙크리스틴과 뒤에 나올 오펜바하를 가장 좋아해서 그 들이 '활약'하게 될 부분을 기대하며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역시 필름 느와르에서 나올 법한 Wicked Hero가 매력적. 기사에 대해서는 프랑스도 좋지만 영국식의 훈위와 작위에 대해 참고하고 그런 분위기로 써 나갔습니다. 아무래도...리젠버러나 같은 이름 도 영국 분위기의 지명이니까.(북부는 영국식...입니다. 디트리히는 독일어 같지만.) 『SF & FANTASY (go SF)』 8804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3-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1 21:32 읽음:107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3-2 : 인간의 가치는... 관련자료:없음 [43319]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19 04:10 조회:1238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시끄러..." 내 기분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 /F Chapter #3-2 : 인간의 가치는... 1. "휴우. 어쩌다가 내가 이런 저급한..." 화려한 대기실에서 자신의 은빛 검을 손질하며 카넬리안이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전시합에 나설 준비 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쿠드로 라는 작 자와 결투 신청을 해버려서 그 자의 씰과 카넬리안이 대리 결투를 해야만 하는 귀찮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말 이 어전시합이지 이런 씰 끼리의 토너먼트 같은 건, 폭력성 이 다분한 인간 들의 화려한 눈요기 감 밖에 되지 못한다. 리센버러 국왕이 참관하는 이런 꽤 큰 시합도 예외는 아니 다. "그렇게 싫으면 이런 시합 같은 거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되잖아." 줄리탄의 퉁명스런 말로 카넬리안의 불평을 받아쳤다. 그 역시 이런 시합이라는 것에 적응이 안되는 모습이다. "피하라는 거야? 바보. 결투에서 피하면 넌 분명 대대로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꺼다. 내가 아니라 니가 손가락질 당하게 되는 거라고. 으이구. 그것보단 그 때 그냥 쿠드로인지 뭔지 하는 놈의 목을 베어버렸어야 했어!" "네 전 주인은 단순무식한 산적두목이었냐? 그런 녀석의 씰로 딱 어울린다 정말..." 줄리탄은 피곤한 표정으로 대기실을 둘러 보았다. 이곳은 어전시합에 나갈 씰 들과 그의 테이머가 시합을 준비하는 곳 이다. 역시 '기사의 품위'를 맞게 꽤나 화려한데 줄리탄은 오히려 이런 화려함이 거북했다. "사람 들이 말야...씰에 대해 되게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씰 들이 싸우길 좋아한다는 착각이야. 넌 씰의 성격이 어떻다고 생각해?" 카넬리안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매무새를 훌터보며 말 했다. 카넬리안이 지금 입고 있는 천과 가죽의 질감이 섞여 있는 그 옷은 어전시합을 앞두고 주최측에서 준비해 준 슈트 였다. 줄리탄의 눈에는 다른 건 몰라도 카넬리안이 입고 있는 붉은색 슈트는 그녀의 심홍색 눈빛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카넬리안의 표정은 '어쨌든 상관없다.'였다. "씰의 성격이라...별로 그런 것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뭐 씰 마다 성격이 다르지 않을까?" "백지야." "뭐?" "씰의 본래 성격은 백지야. 그 위에 인간의 성격이 투사되서 씰의 마음이 만들어지는 거라고. 씰 들이 싸우길 좋아한다면 그건 인간 들이 싸우길 좋아해서야." "흐음..." 줄리탄의 귀에는 일리 있는 말로 들렸다. 그런데 수 천년을 살아오며 그 '백지'에 사람들의 성격이 쓰여졌다면 그 양이 너무 많아져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성격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어쩌면 씰의 모습이란 지금까지 긴 많은 세대를 거쳐 살아온 인간 군상 의 거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카넬리안의 말에 의하면 씰이란 자신의 기억을 망각하지 못하고 계속 간직한 채로 환생을 반복하는 존재니까. 마치 호수 바닥에 퇴적층이 계속 계속 쌓이 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줄리탄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카넬리안의 '백지' 위에 기록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준비 끝! 후딱 싸워 이기고 돌아가자!" 카넬리안은 자신의 칼을 내려 놓으며 기지개를 폈다. "그런데 네 칼 말야..." 줄리탄은 물끄러미 테이블에 기대어 놓은 카넬리안의 검을 바 라보았다. 모든 사물에 전혀 집착을 보이지 않는 그녀 였지만 그 은빛의 검 만은 무슨 사연이 있는지 언제나 곁에 두고 있었 다. 어쨌든 여자가 사용하는 검 치고는 좀 컸지만 줄리탄이 지 금까지 본 어떤 검 보다도 아름답고 보석 같은 은은한 은 빛을 풍기고 있었으며 검 표면에 세겨져 있는 알지 못할 문자 들이 신비감을 더하고 있었다. 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줄리탄이 었지만 그의 눈에도 뭔가 사연이 있는 범상치 않은 검으로 보 일 정도로 칼집도 없는 검이 발하는 묘한 매력은 대단했다. "왜? 내 칼이 뭐?" "칼날이 없어." 줄리탄은 착각이려니 생각했다. 그 칼을 만지기라도 하면 그 녀가 굉장히 화를 낼 것이 뻔했으므로 줄리탄은 옆에서 바라보기 만 했을 뿐이지만 아무리 봐도 검날이 없는 것 같았다. 줄리탄 도 기사는 아니지만 요리사다. 칼날이 서 있지 않은 칼 따위로는 아무리 연한 페세테르의 살이라도 잘라내기 힘든 것은 알고 있었다. 줄리탄은 그녀가 그 검으로 몇 번이나 깨끗하게 베어버 린 것을 봤기 때문에 분명 그 검은 섬뜻할 정도로 날이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보고 또 봐도 번뜩이는 검날을 없었다. "칼날이라..." 카넬리안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는 얼굴로 자신의 검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넌 상대를 베어버리는 힘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해?" 또 뭔지 모를 질문이다. 그런 힘은 어깨 힘과 내리치는 각도에서 생기지 않을까? 물론 칼날이 서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상대를 베는 힘이란 베어버리는 자의 마음에 있는 거야. 그 마음이 무디면 아무리 강한 체력과 기술이 있어도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얇은 나뭇가지 하나 자를 수가 없지.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날카롭다면, 상대방의 마음보다 날카롭다면...베어내지 못할 건 없어. 진짜 칼이란 마음 속에 있어서 그런 칼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 만으로 도 상대방의 마음을 잘라버릴 수 있는 거지." 왠지 수라의 길을 살아온 무사가 하는 말 같아서 줄리탄은 조금 움찔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단순한 궤변 이라고 비웃었을지도 모르지만 순간 유리알처럼 변해버린 눈빛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말에 대한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독하게 살아야 한다?" "쳇. 애써 말한 보람이 없잖아." 그녀는 말투와는 달리 표정은 밝게 돌아왔다. 정말 그녀의 성격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하지만 확실히 검날은 세워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마음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두부나 오이 따위로 사람을 벨 수는 없는 거잖아." 뭐 줄리탄 다운 말이다. "두부를 왜 사람 베는데 쓰냐 멍청아. 그리고 역시 난 검날이 없는 편이 좋아." "왜?" "이 칼엔 칼집이 없거든. 검날이 날카로우면 가지고 다니 다가 손 다친단 말야. 게다가 이 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재질 탓인지 언제나 차가워서 더운 한 여름에 안고 자면 밤 새 시원해서 기분 좋아. 우웅." "..." 그녀가 그런 식으로 대답해서 사람 허탈하게 만드는 건 한두번이 아니니까 이젠 화낼 생각도 없다 줄리탄으로선. "이 검의 이름 말해줬던가?" "뭔데?" "광검(狂劍) 미스트랄. 이 놈은 그 이름을 좋아해." 검이 좋아하긴 뭘 좋아한단 말인가. 그녀는 지금의 대화에 기분이 좀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대기실을 나갔다. 그때 줄리탄은 잊고 있던(정말 잊어버리고 있던!)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카넬리안이 페세테르 속에 있을 때 그녀의 칼에 베었던 상흔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칼날이 없다면...어떻게 내 손을 벨 수 있었을까. 어쩌면 카넬리안 의 말대로 그녀의 마음이 줄리탄의 손에 상처를 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경고였던가. (글쓴이 : 이 부분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뻔뻔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뒤늦게라도 말장난으로 수정했습니다.^^) 2. 어전시합이 벌어지는 투기장은 벨레시마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콜롯세움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하고 인기있는 경기라서 그 곳은 시합날이면 언제나 씰 들의 시합 을 보고자 하는 사람 들로 가득찼고 뒷편에선 적잖은 돈이 오가는 내기판도 벌어지고 있었다. 2층의 귀빈석은 거의 리센 버러의 프리스턴 국왕과 그를 호위하고 있는 리이 디트리히 경 그리고 참가한 씰 들의 테이머 들 차지였다. 참고로 리이 는 단 한번도 이 어전시합에 참여한 경험이 없다. 작은 키의 코볼트 들이 원색의 옷을 입고 나와서 콜롯세움의 바닥을 닦은 뒤에 경기장 중앙에 나온 뚱뚱한 사회자가 쩌렁 쩌렁한 목소리로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해서 이 영광스러운 시합의 개시를 알립니다!!" 건물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린다. 거의 광분에 가까워서 그나마 국왕이라도 없었다면 입고 있던 옷이라도 벗어던지고 난리도 아니었을 분위기다. 줄리탄이 살 짝 바라본 리이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재수없게 줄리탄의 옆에는 쿠드로가 앉았다. 쿠드로는 줄리탄 을 바라보며 예전과는 전혀 다른 '친절한' 얼굴로 줄리탄에게 말을 건냈다. "어떻습니까 줄리탄 경. 제 씰을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귀 공의 것도 훌륭하겠지만 제 것도 만만찮습니다." "아 그러세요?" 줄리탄은 징그럽게 웃으며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 자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뭐 줄리탄의 생각이야 어찌되었든 쿠드로라는 자는 줄리탄을 굉장한 기사라고 착각하면서(카넬리안의 힘이 컸지만) 친해지려는 것 같았다. "리이 경과 만나셨다는 데 그거 대단한 영광이지요. 곧 국왕 전하께서도 부르심이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귀 공의 씰은 상당히 그 미모가 아름답던데 재미 좀 보았겠습니다? 제게도 스 명의 외관이 좋은 씰들 이 있긴 하지만 귀공에 씰에는 발끝도 못미치는..." "네?" 재미? 카넬리안으로부터 자신의 씰에게 변태적 행각을 요구 하는 버러지 같은 작자 들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 바로 앞에 있는 자가 그런 변태라는 사실에 경악할 따름이 이었다. 이 작자...정말 생긴대로 노는군. 뭐 줄리탄이 그런 짓 카넬리안에게 요구했더라도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했으 므로 줄리탄은 그런 것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미천한 제게도 귀 공의 씰을 잠시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후사는 충분히..." "닥쳐." 징그러운 표정으로 다가서는 쿠드로에게 완벽하게 정내미 가 떨어져 버렸다.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쿠드로를 쏘아 보고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쿠드로에게 줄리탄은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 공은 기사의 명예라는 것을 뭘로 생각하고 있지. 나의 씰 카넬리안은 내 분신과도 같은 것, 씰을 더럽히는 짓은 곧 나를 더럽히는 것이고 씰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내 마음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야. 귀 공은 씰을 어떻 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씰이란 내 몸 과 마음의 일부분이고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오. 더 이상 나를 모욕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을 뽑 겠소." 도둑질도 계속 하면 익숙해 진다던 말이 생각난다. "아, 아니 전 그런 뜻이 아니고..." 쿠드로는 한없이 연약해 보이던 줄리탄의 갑작스런 독설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모르 긴 해도 다음부턴 줄리탄의 얼굴 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 할 것이다. 줄리탄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쿠드로를 바라보았다. '검을 뽑긴 개뿔. 난 검도 없다고. 아무튼 씰은 테이머를 닮는다는데 나는 씰의 성격을 닮아버 리는 거 같네...' 진행되는 시합은 사람들이 '하급 씰'이라 말하는 전투능력 이 낮은 씰 들의 경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단 훨씬 화려했지만 성 하나를 냉큼 아작내는 카넬리안의 능력과 비교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줄리탄은 무표정한 얼 굴로 싸우고 있는 씰 들의 모습에서 박진감이나 쾌감 보단 거부감과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뿐이었다. 카넬리안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절대 스스로 원해서 싸우지 않는다. 주인의 명령으로 주인이 원해서 왜 싸워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으 며 정해진 상대를 이기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거부하거나 화내거나 슬퍼할 권리조차 그들에겐 없다. 카넬리안과 자사크라고 불리는 쿠드로의 씰 과의 '결투'는 일종의 메인 이벤트. 토너먼트와는 분리되어 토너먼트가 끝 난 이후 벌어질 예정이다. 줄리탄은 경기 중에 계속 왕의 곁에서 경호하고 있는 리이를 흘낏 흘낏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물론 리이의 외모가 여성으로도 더할나위 없이 수려 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며칠 전 그녀와의 대화가 잊혀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탄은 그녀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3. 리이가 차를 마시는 모습은 정말 귀품이 넘쳤다. 가볍게 새하얀 찻잔을 들고 한손으로는 바닥을 살짝 든 채 조용히 향기로운 차 냄새를 감상하며 입술을 가져다 대는 모습이란 너무 자연스럽고 우아해서 숨이 넘어갈 정도다.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가볍게 뒷통수를 때릴 때까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부분의 기사 들이란 거의 태어날 때부터 가문에 의해, 부모에 의해,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의해...기사의 길이 결정되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리이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예의 미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줄리탄 경께선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스스로 기사를 선택하신 겁니까?" 리이는 미소를 지으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아 예. 뭐 비슷합니다..." '사실 전 지금도 기사가 아닙니다!! 못된 씰에게 잡혀서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다고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많은 기사들은 자신 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기사로 태어났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사실 저도 가끔씩 그 점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사 외엔 다른 어떤 존재도 될 수 없다고. 그래서 기사 들은 도리어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지요." 리이의 그 말은 의외였다. 줄리탄의 생각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왜 제게..." 줄리탄의 되물었다. 리이가 담고 있는 미소가 슬퍼 보였다. 그 표정...카넬리안에게서도 보았던 것 같다. "과연 기사라는 존재. 이 세상에 필요한 걸까요?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제 기사도가 부족함을 보여서... 하지만 왠지 귀공이라면 그런 질문에 자유로울 것 같이 보여서..." 4. '결국 난 그 말에 대답하긴 커녕 그 말의 의도가 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지. 하긴 난 기사가 아니니까 모르는게 당연할 지도 모르지.' 줄리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이의 어찌보면 단순한 질문 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 질문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씰의 목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 같은 인연에 휘말려 이 도시 벨레시마까지 와선 여기에 기사를 가장한 채로 멍하니 앉아 있는 자신에게 돌아 오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기대하시던...." 이라는 사회자의 말과 함께 시작된 카넬리안과 자사크의 시합 이 줄리탄의 상념을 깨고 들어왔다. 전 경기와는 비교도 안될 엄청난 환호성이 울리기 시작했고 카넬리안의 모습이 경기장 끝에서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미스트랄이라 불리는 자신의 검 을 껴안듯이 들고 있고선 차분한 모습으로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카넬리안의 멋진 모습을 보며 사람 들은 그 씰의 주인이 '뛰어 난 기사가 분명하다!'라는 '착각'을 하고 있겠지. "으윽. 저건 정말..." 긍지 높은 여신의 모습처럼 경기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카넬리 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구겨지고 말았다. 자사크라는 씰을 보자마자 말이다. '쿠드로가 카넬리안에게 음탕한 관심을 갖는 거... 조금은 동정이 가는군.' 자사크에 대한 줄리탄의 감상 역시 만만치 않았다. 쿠드로가 자랑하는 '최강의 씰' 자사크의 모습이란 카넬리안의 평가에 따르면 '체중조절에 실패한 씰 들의 수치'였다. 뭔가 비정상 적인 적인 것엔 동정이 없는 여자다 정말. 그녀 자체도 모범 적인 '정상'이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후욱. 후욱. 후욱..." 거친 콧김까지 뿜고 있어서 뭐 여행중에 불쾌한 산짐승이라 도 만난 기분이다. 자사크는 보통 남자의 세 배 정도의 덩치 는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엄청난 비만에 시 달리는 씰이라는 것. 근육이라곤 찾아볼 길이 없는 축축 늘어 진 살집들이 출렁거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그 꼴에 웃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씰 들은 모두 미 형이라는 줄리탄의 선입관이 깨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가, 가까이 오지마." 자사크 같은 씰이라면 확실히 실력에 무관하게 다가오는 것 만으로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거다. 카넬리안은 자사크 보단 '압둘라'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압둘라'는 별다른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크아아아아악!!!" 자사크는 낮게 울리는 괴성과 함께 카넬리안에게 돌진했다. 도저히 그런 비만한 몸에서 나오는 순발력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라고 사람 들은 생각했겠지만 카넬 리안의 눈에는 기어다니는 것처럼 느려 보인다. "으윽?" 자사크는 자신의 태클에 관중석 저 멀리 날아갔어야 할 카 넬리안이 사라져 버린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사람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위다! 공중에!!" 얼마나 높이 올랐을까. 정말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카넬리안이 자신의 검을 자사크에게 세우고 지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낮은 신음이 퍼졌다. 그렇게 많은 시합이 있었지만 저렇게 화려한 모습은 처음 이다. 줄리탄의 눈으로 보기에는 단지 카넬리안의 쇼맨쉽 으로 보였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자사크와 최대한 떨어져서 싸우고 싶었나 보다. "으으으..." 사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질 않는 시합이었다. 자사크라는 씰, 벨레시마에선 꽤 유명할지 몰라도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급 의 축엔 들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이상 카넬리안과 대등하게 싸울 능력은 없는 거다. 자사크는 급히 몸을 피했고 유성처럼 경기장 바닥으로 떨어지는 카넬리안이 세운 칼날이 번뜩였다. 붉은 슈트를 펄럭이며 고속으로 낙하하는 그녀의 모습은 하늘에 적색의 직선을 긋고 있었다. 경기장 바닥에 파열되어 버리는 굉장한 폭발음. 카넬리안의 낙하와 함께 경기장 바닥은 한눈에 봐도 복구하기 힘들 정도 로 깊게 파여 버렸다. 그리고 그 흙먼지가 걷히면서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보기 흉하게 넘어져 있는 자사크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카넬리안이었다. "그런 주인 밑에 있으면 넌 절대로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꺼야. 씰의 인생이란게 본래 그렇긴 하지만..." 카넬리안은 속삭이듯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자사크에 게 말했다. 처음부터 카넬리안은 상대의 씰을 죽일 생각은 없 었던 모양이다. 그런 식의 화려하지만 상대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한 것으로 봐선. 그것보단 이런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경기장을 아예 부셔버리는 속셈은 아니었을까. 줄리탄은 그때 리이의 표정이 궁금했다. 카넬리안의 승리가 경기에 대한 거부감과는 별개로 조금 흐뭇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줄리탄이 바라보는 리이는 국왕 프리스턴과 굳은 표정 그런데 줄리탄이 바라보는 리이는 국왕 프리스턴과 굳은 표정 으로 대화 중에 있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건가. 리이는 대화를 마치자 마자 귀빈석의 난간으로 걸어간 뒤에 도저히 그녀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커다란 목소리로 경기장 구석 구석까지 다 들리게 외쳤다. "헬몬드 국의 군대가 이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벌어질 전투 중에 혼란한 틈을 타 약탈이나 그외 어떤 범죄라도 저지르는 자는 전투가 끝난 이후 엄벌에 처하겠다. 리센버러 국은 절대 이 도시를 수비해낼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불안감에 서리기 시작했다. -Blind Talk :이 글을 쓰기 전에...'시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확실히 이건 1인칭이 어울리는 글이고 이어 나가는 분위기도 1인칭에 가깝지만 - 그런 글을 3인칭으로 해보고 작중 글쓴이의 개입도 적잖게 넣는다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지금까지의 결론 은 '혼란'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로서도 당황할 정도로 '혼란' 스러운 것이 사실이네요. 아마도 미숙한 제 필력의 탓이겠지만. (읽는 분들은 어떠세요? 궁금하네...) 쬐끔 후회스럽긴 하지만 이제와서 '오늘부턴 1인칭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싫어서 그냥 이 pace로 나가며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3인칭의 글 중에 훌륭한 작품 하나 있으면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제 글을 보고 '어디선가 많이 본 부분...'을 찾은 분도 많으시겠네요. 그 점에 대해서는 뭐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제 이런 세련되지 못한 글을 추천해 주신 분 들께는 정말 감사 드립니다.(뭐 많은 추천 받은 것은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분도 있었지만...) 제 글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게시판 이나 메일로 부탁드려요. 그럼 이틀 쯤 후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SF & FANTASY (go SF)』 88048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3-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1 21:32 읽음:1166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3-3 : 인간의 가치는... 관련자료:없음 [43546]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22 15:40 조회:933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그를 만나 처음으로...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의 그런 말에 제이미마의 별을 닮은 눈동자가 무언의 위로를 해주었다. <> /F Chapter #3-3 : 인간의 가치는... 1. '이런 전쟁 같은 것...모두가 제1황제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건지도 몰라.' 리이는 헬몬드 국과의 전쟁에 나서기에 앞 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말하는 제1황제 오펜바하를 그녀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헤스페리아 통일 이후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서대륙 젤벤더의 제도(帝都)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동대륙 사람들로서는 이름 높은 기사라 하더라도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거다. 하지만 그런 건 어찌되었든 리이에겐 상관 없었다. 그것보다 리이 는 오펜바하에게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던 것이다. 제1황제 밑에는 동대륙을 분할 통치하고 있는 세 명의 황제가 있고 또 그들의 밑에는 리센버러와 같은 수많은 왕 들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왕 들 밑에는 영주와 기사가, 영주의 발 밑에는 '사람'들 이 살고 있고 사람 들은 엘프, 오크, 트롤 같은 이 종족을 지배하고 있다. '단순한 힘의 논리 같은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돈을 위한 질서와 구조. 처음부터 오펜바하 황제는 자신이 만든 RULE 속에서 이 세상 모든 존재 들이 서로 싸우길 바라고 있는 걸까. 하지만...왜." 리이는 복잡한 퍼즐이라도 풀고 있는 표정으로 그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고 그때마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푸른 머리 칼을 '전쟁'에 어울리게 묶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황제는 소문대로 '보통 인간'의 정신적인 한계로는 접 근할 수 없을 그런 존재일 지도 모른다. 리이는 난신(亂神)이라는 그의 두려운 별칭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리이는 자신의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다급한 표정의 이카테스 였다. "무슨 일이지?" "헬몬드 국의 군대에 기사와 씰이 있습니다. ...그 기사는 젤리드 경, 그리고 그의 씰인 카리나 입니다." 이카테스의 말을 들은 리이의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젤리드 빙크리스틴..." 젤리드의 이름을 중얼거린 그녀의 곤혹스런 표정은 단순한 두려움 이나 증오의 모습이 아니었다. 2. 흔히 포니테일이라고 부르는 뒤로 묶은 곧은 머리칼. 그 흑단같은 머리는 약간 검은 그녀의 피부색과 어울렸다. 진한 눈썹이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치켜 올라 있었고 입고 있는 이국적인 옷 역시 온통 검 은 빛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답지만 굉장히 강한 인상을 주었 다. 그것이 젤리드의 씰, 카리나에 대한 대부분 사람들의 첫 인상이 다. "카리나...이번 일이 끝나면 남부로 여행이나 떠나자. 그녀를 죽인 뒤엔 나도 잠시 쉬어야 할테니까." 헬몬드 국의 장군, 오코넬의 군대가 벨레시마의 앞에서 공격 진형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젤리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좋아." 카리나의 소녀티가 남아 있는 얼굴에 어울리는 목소리. 그녀의 말투 란 씰이라는 그녀의 입장으로선 의외다. 벨레시마 성곽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흙먼지와 함께 리이 디트리히가 이끄는 리센버러의 혼성 부대 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리이를 바라본 젤리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 다. "시작됐군." "그럼 젤리드 경. 약속한대로, 리이 경을..." 오코넬이 말했다. "알고 있어." 스스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젤리드가 자신의 검을 뽑았고 그것을 바 라보는 오코넬의 눈이 확대되었다. 직도인 그의 검은 기사들 사이에 나도는 소문 그대로 그 검 표면 전체에 음각의 뇌문(雷文)이 가득 세 겨져 있었고 검날도 작은 톱니처럼 이어져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젤리드는 허리춤에서 꺼낸 작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자신의 검에 죽은 피를 닮은 검붉은 빛의 액체를 뿌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이니시 에이션 처럼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오코넬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젤 리드의 검 표면에 뿌려진 그 액체는 단숨에 검의 음각 속으로 스며들 어 퍼치며 마치 검 전체에 얇은 혈관들이 생겨버린 것 처럼 보였다. 자신의 검이 그 핏빛의 액체를 잔뜩 머금은 것을 바라본 젤리드가 중얼거렸다. "기사들은 싸움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을까, 를 궁리하겠지만 나는 그때, 상대를 죽이는 방법만 생각하지. 뭐라고 욕해도 좋아. 그것도 죽은 뒤엔 할 수 없을 테니까." 검의 음각으로 스며들고 있는 그 검붉은 액체란 맹독. 그런 검 특유 의 구조 때문에 젤리드의 검은 말 그대로 '독을 머금은 흉검'이 될 수 있었고 실수로라도 그 칼에 베이면 그 독은 순식간에 상대방의 혈 관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육 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기사라면 그 독에 즉사하지는 않더라도 중독 되어 흐트러 졌을 때를 놓칠 젤리드가 아니다. 그런 지독한 짓은 기사 들에게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젤리드는 그 검으로 수 많은 기사 들을 죽여왔고 죽은 기사는 명예를 지켰을지는 몰라도 죽었 다...죽으면 모든 것은 제로로 돌아가고 그걸로 끝이다.라고 젤리드는 생각 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을 죽음으로 이끈 그 검의 이름은 흉수 (凶手). 젤리드가 기사 작위를 잃었을 때부터 사용했다는 그 검의 이 름은 흉몽이라는 젤리드의 악명과 어울린다. "공성포를 준비해라!" 오코넬이 외쳤다. 3. "곧 본성에서 지원군이 옵니다." 이카테스가 리이에게 속삭였지만 리이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 았다. "보통 병사의 수가...수 만이 되어도 젤리드에겐 의미가 없어. 게다가 그가 노리는 것은 분명 나 하나. 벨레시마 따위에는 처음부터 관심 조차 없겠지." "리이님..." 이카테스도 리이의 그런 굳은 표정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녀의 시 선은 헬몬드 국의 선두에 있는 단 한명...젤리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카테스. 부탁한다." 리이는 자신의 얇은 검을 꺼내 이카테스에게 내밀었다. "예." 이카테스의 나직한 주문이 울렸고 곧 이카테스의 손바닥에서 쏟아지 는 에너지가 리이의 검으로 스며들었다. 검표면이 푸르게 달아 오르 는 것 같았다. 카넬리안이 검에 능하다면 이카테스는 여러 종류의 마 법을 구사하는 씰이다. 그리고 상대의 검의 공격력이나 내구력을 올 려주는 부여 마법도 그의 특기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 리이의 시선은 계속 전장의 적들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상태로 조용 히 말을 이었다. 이카테스의 수려한 얼굴이 불안해졌다. "젤리드와 그의 씰은 나 혼자 상대하겠다. 너는 지금부터 병사 들을 돕는데 집중해라."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 하지만..." "젤리드는 오직 나만 노릴 것이 분명해.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목적은 벨레시마를 지키는 거니까. 내가 젤리드를 막고 있을 때 너와 리센버러의 병사들이 헬몬드 군을 몰아낸다면 그것으로 도시는 지킬 수 있다. 그걸로 된거야." "알겠습니다...주인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카테스가 대답했을 때 병사 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다! 공성포다!!"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수십의 돌덩이가 도시로 날아들고 있었다. 저런 것에 맞았다간 진열이 흐트러지는 것은 물론이고 도시의 방책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카테스!" "옛!" 이카테스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고 그의 몸 주변에 푸른 빛의 에너지가 플라즈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이카테스의 몸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 수 많은 기사들이 이카테스를 탐냈던 그 능력이다. "죽지 마세요. 리이님." 이카테스가 진홍색의 단발 머리에 반쯤 가려져 있는 푸른 눈동자를 살짝 뜨며 리이에게 말했고 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순간 벨레시마의 도시 상공에 반투명의 베리어가 발생되었고 날아오던 돌덩어리 들이 그 베리어와 충돌하며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부서져 버리기 시작했다. 한 전장을 덮어버리는 광범위한 베리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법력을 가진 씰이 이카테스였지 만 그것이 그의 한계다. 베리어의 유지에 자신의 모든 정신력을 쏟아 버리고 있는 이상 리이는 도울 수 없는 것이다. 4. 공성포가 무력해 졌음을 안 헬몬드 군이 베터링 램(battering ram)의 돌격 명령을 내렸고 거대한 방패를 들고 있는 중장보병은 공성차를 호위하며 벨레시마의 방책과 성곽으로 돌진을 시작했다. 리센버러군 성곽 넘어에서는 수많은 화살 들이 날아오르며 날카로운 빗무리가 되어 헬몬드 군의 돌격대 위로 떨어졌다. 공성차가 리센버러의 성곽 위에 있는 아발레스크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기계궁의 시위가 풀리며 거대한 활이 공성차를 향해 날아 들었다. 멋진 낭만보다는 피와 고통, 비명이 어울리는 인간 들의 잔인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 전장의 중심에선 리이와 젤리드, 카리나가 만났다. "전에도 말했지만...네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도 그 상처를 지료할 수 있는 것도 나 뿐이야. 리이." 젤리드의 오랜 재회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한가지 묻겠다. 넌 왜 자신의 가문 모두를 몰살시킨 거지?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이유라..." 젤리드는 조롱하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섬뜩하다. "그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기 때문이겠지." 젤리드가 들고 있는 흉수는 검붉은 독을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상대를 향해 지독한 독니를 들어낸 지옥견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넌 끝까지 진심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군." "가라. 카리나." 먼저 움직인 것은 젤리드의 씰 카리나 였다. 그녀의 '무기'란 양쪽 손목에 차고 있는 검푸른 금속빛의 팔찌. 그 팔찌에서 차가운 빛이 일어났고 곧 그녀의 작은 몸은 튀어 나가듯 리이 앞으로 달려갔다. 카리나는 특별히 검을 사용하지 않는 맨손의 격투에 능한 씰이다. 순식간에 리이의 앞에선 카리나의 손날이 리이의 심장을 노렸다. 리 이는 그것을 빠른 몸 놀림으로 피했지만 카리나를 찌르진 않았다. 그 것보다 리이의 시선은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젤리드에게 집 중되어 있었다. 젤리드는 자신의 씰을 도와주거나 보호할 사람이 아 니었기 때문에 도리어 리이가 카리나에게 칼을 휘두를 때를 노려 그녀 를 찌를 것이다. "비겁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 난 이미 기사가 아니니까. 그리고 네게도...기사는 어울리지 않아." 젤리드의 그 말에선 자조의 기운을 숨길 수 없었다. "너 같은 패배자의 말, 듣고 싶지 않아!!" 카리나의 공격을 계속 피하던 리이는 검을 세우며 젤리드에게 뛰쳐 나갔다. 이카테스의 마력을 품고 있는 리이의 얇은 레이피어에서 폭발 하듯 터져 나오는 푸른 플라즈마. '푸른 맹금'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그녀는 공기의 벽을 뚫어버리는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젤 리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치 젤리드를 향해 청색의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이다. "자제심을 잃으면...죽는다." 젤리드의 악마가 경고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고 순간의 격돌 이 후 튕겨나간 자는 도리어 리이였다. 리이는 금새 자세를 정리하며 다 시 검을 들었지만 방금 전 젤리드의 검과 부딧친 충격 덕에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눈을 치켜 올 린 리이의 시선에는 아까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움직이고 있지 않은 젤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흉몽'의 모습이다. "이번엔 내가 공격할 차례인가." 젤리드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도 카리나의 날카로운 손과 발이 리 이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사실 카리나가 없어도 젤리드는 그 자체 로 강하다. 흉수와 같은 잔인한 암검(暗劍)도 필요성 때문에 쓰기 보 다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리이가 아니었다면 젤리드의 한합에 상대는 검을 놓치거나 팔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동등한 입장에서 젤리드와 싸워도 리이가 이길 승산은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그가 그런 식으로 '비열한 싸움'을 하는 이 유라면 단지 그가 남에게 비겁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남고 싶어하는 스 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랄까...젤리드는 단 한번도 자신의 그런 행동에 대해 설명한 적도 정당화 시킨 적도 없었지만. '넌...이 세상의 명예 같은 것을 조롱하고 싶은 거였나? 그 명예의 무력함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젤리드가 서서히 움직이며 리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 리이를 덮 칠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카리나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최대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이 싸움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순간 젤리드의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리이에게 날아드는 젤리드의 모습은 악몽 처럼 보였을 꺼다. '온다!' 리이의 눈에 자신에게 오고 있는 젤리드의 검이 보였다. 이 싸움에 서 단 한번의 기회가 있다면 지금 뿐이라고 리이는 생각하며 자신의 검을 세웠고 푸른 불꽃이 레이피어 주변을 휘감으며 젤리드의 가슴을 향했다. 서로를 죽이려는 뱀과 독수리의 모습을 닮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넌...왜 그렇게 금방 부러져 버릴 것 처럼 강한 모습을 하고 있지? 그렇게 너의 명예라는 게 소중한 건가?" '명예 따위가 아니야.' 젤리드가 속삭임을 리이는 눈빛이 응수하고 있었다. 리이의 검은 젤리 드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지만 젤리드의 검 역시 리이의 오른 팔을 뚫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거의 비슷한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흉수의 독은 이미 리이의 몸을 퍼지기 시작한 상태. 이대로 계 속 싸운다면 리이의 죽음은 불보듯 뻔하다. 둘은 서서히 상대의 몸에 박혀 있는 서로의 검을 뽑으며 뒤로 물러섰다. 젤리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한 자신의 배를 움켜 잡으며 낮게 가라앉 은 미소를 지었다. 카리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표정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결국 이번에도 죽는 건...응?"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 빛을 가친 그것은 엄청난 속력으로 리이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카, 카넬리안?" "뭐야, 이 여자는..." 갑작스런 카넬리안의 등장에 당황한 리이와 젤리드의 말이다. 카넬리안은 서서히 일어서며 리이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등장 덕에 끝없이 우중충하게 말려 들어가던 분위기가 정신 없어져 버렸다. "주인님께서 리이 경을 도와 이 전투에서 승리하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카넬리안의 말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크윽. 아프다.'였다. 그때 갑자기 카넬리안을 바라보던 카리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 너는!!!!!!!!!!!!!!!!!!!!" '허억.' 키리나를 본 카넬리안의 표정도 만만찮다. 전에 없이 그녀가 당황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카리나에게 물었다. "네 이번 이름은 뭐지? 난 카넬리안." "카리나..." 카리나가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도 '카'냐." 카넬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는 뭐야. 보아하니 씰 같은데." 젤리드가 몹시 귀찮은 표정으로 카리나에게 물었지만 카니라는 증오 에 차 있는 눈빛으로 카넬리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여버리겠어...죽여버리겠어!!!" 카리나는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갑작스럽게 카넬리안을 공격하 기 시작했고 덕분에 리이와 젤리드는 싸움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황당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 젤리드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 사람도 의외로 자신이 무대의 중심 에서 밀려나는 것을 되게 싫어하는 사람 같다. "자, 잠깐. 너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 내게..." 카넬리안은 카리나의 주먹을 피하며 말했지만 카리나의 눈빛은 전에 없이 사나웠다. "그럼 잊어버릴 꺼라고 생각했어?!" 젤리드도 카리나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Blind Talk 죄송합니다. 한참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실은 다 써두었던 파일이 날아가는 일이 생겨서...같은 내용으로 다시 쓰자니까 전혀 기분이 나질 않는데다가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쓰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뭐 무아지경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자동기술법이라 부르던가...그런거) 재능이 없어서 먼저 쓴 글을 또 다시 쓰는 건 너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다시 읽어봐도 별로 리듬감이 없어 보여서 한숨이... 뭐 아무튼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런데도 추천과 지적을 해주신 많은 분들과 재미있게 읽어주신 분들께는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3x3아이즈와 드래곤 라자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는 것에는 좀 놀랐네요. 전 아직 두 작품을 보지 못했거든요.(투니버스에서 3x3아이즈 방영하는 건 잠시 봤지만...) 뭐 제가 별로 특이한 사람이 못되서 '장르 법칙'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사람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서도...아무튼 다음에 꼭 읽어봐야 겠네요. 에 그리고 카넬리안의 검에 대한 부분(칼날이 없다는 괴이한...)에 대한 지적은 뜨끔할 수 밖에 없었고 머리를 굴려 현재 수정했습니다. 뻔뻔하지요? ^^; 마지막으로 이 아이디로 SIG를 쓰고 있는 kiyu군에게 감사. 중세식의 전쟁이라는 것 어떻게 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는데 몇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뭐 아무리 그래도 베리어로 공성포탄을 막는다는 황당한 짓도 했지만...-_-) 아...말이 많아졌네. 그럼 다음에 또... 『SF & FANTASY (go SF)』 8843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4-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4 14:34 읽음:111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4-1 :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양 관련자료:없음 [43736]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4-25 02:41 조회:1126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어쩌면 말야...인간은 용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린 존재일지도 몰라. 너무 오래 이런 몸 으로 살아서 본래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 을 잊어버렸고, '나는 절대로 용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말이야." "그럼 씰은 어떨 것 같아? 대체 난 어디서 왔을지 궁금하지 않아?" 취기에 나와 버린 내 추측에 대해 그녀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말해줄 것 같았던 그녀 의 표정과는 달리 그녀가 나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그것만은 내게 말하지 않았다. <> /F Chapter#4-1 :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양 -earthborn- 1. "그만 돌아가자. 카리나." 젤리드는 카넬리안과 죽어라 싸우고 있는 카리나에게 기분 완전히 잡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 하지만 젤리드!" 카리나는 젤리드의 그런 명령에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젤리드는 이미 몸을 돌려 헬몬드 진영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고보자. 카넬리안...가, 같이가요!" 카리나는 카넬리안을 한번 쏘아본 이후에 젤리드를 뒤쫓아가면서 계속 기분나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주인님 답지 않아! 뭐야...이대로 끝내다니." "걱정하지마.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니까." 젤리드는 고개를 돌리며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잡고 있는 리이를 바라보며 예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도망쳐도 좋아. 하지만 피하진 못할 꺼야." "...." 리이의 눈동자가 젤리드를 쏘아보고 있었다. 결국 이카테스가 보호하는 리센버러 군은 헬몬드의 부대를 막아냈고 젤리드도 전투에서 빠져버린 이상 승산이 없음을 안 오코넬이 군대 를 철수 시키며 전투는 리센버러의 승리로 끝났다. 2. "젤리드 경!! 대체! 왜!계약을 지키지 않은 겁니까!!" 오코넬은 얼굴이 빨개져선 젤리드에게 외쳤다. 그는 호언장담하던 젤리드가 리이 경을 더 이상 막지 않고 그대로 퇴각한 것이 이번 전투의 패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넬리안이 있었다면 '니가 멍 청해서 진거다 바보야.'라고 말했을 꺼다 분명히. "너야 말로 나를 속였다." "소, 속이다니? 무엇을?" 오코넬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이번 전쟁에 리이의 이카테스 외에 또 다른 씰이 있었어. 카넬리안이라고 하던가...그것도 최상급의 씰이더군. 난 네 놈에게 리센버러에는 오직 리이와 이카테스만 있다고 들었다...변명해 봐." 젤리드의 '카넬리안'이라는 말에 카리나가 양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굉장한 앙숙인 것 같이 보인다. "그, 그말은!!!" 젤리드의 말에 오코넬이 눈알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러다닐 정도 로 놀라는 바람에 젤리드는 조금 눈빛을 찡그렸다. 입에 개거품 을 물 것 같은 다급한 표정으로 그는 되물었다. "리, 리, 리센버러국에 봉사하는 또 다른 기사가 있다는 말 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냐. 정말 한심하군. 국가 간의 전쟁에 씰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 씰의 기사가 그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것 외엔 달래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 오코넬은 입이 떡 벌어졌다. 리센버러 국을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씰과 기사의 출현이라니...그건 한명의 일류 기사와 씰이 가지는 능력을 생각할 때 리센버러 국의 일반 병사 수 만명이 늘어났다는 것보다도 충격적인 문제다. 게다가 '카넬리안'란 이름은 당연하지만 오코넬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그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뭐 사실을 살짝 말하자면 카넬리안은 그냥 굉장히 지루하던 순간에 마침 전쟁이 일어나서 도와줬을 뿐. 그녀가 자고 있었거나 식사 중이었다면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을 꺼다. 아무튼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흉몽'의 냉철한 판단력도 카넬리안의 죽 끓듯 하는 변덕 에는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서, 설마...소문으로 돌던 벨레시마의 '무자비한 방랑기사'가 리센버러의 기사가 된 건가...' 참 소문은 빠르다. 줄리탄에 대한 소문이 헬몬드의 장군, 오코넬 의 귀에 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것도 '무자비한'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어서. 이러다가 이 소문이 남부로까지 퍼지면 '눈에서 살인광선 을 쏘아대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기사와 그의 극악무도한 씰'이라 고 할지도 모른다. 무지한 시골 청년, 괴물 만드는 거 금방이다. "저, 저로서도 그런 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오코넬은 당황하고 있었다. "뭐, 이런 약소국의 정보망 따위 처음부터 신용하지 않았지만..." 젤리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계약은 파기다. 난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그는 천천히 막사 밖으로 나갔고 카리나가 그의 뒤를 따랐다. 젤리드는 밖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내가 리이가 두려워서 도망치는 바람에 다 이긴 전쟁에서 지게 된거라고 소리치고 다녀도 상관 없어. 너희 같은 약자 들에게 허세라도 없다면 세상 살아가기 힘들 테니까." 무지하게 짜증나는 말이지만 젤리드의 말대로 오코넬은 그에게 화를 낼 용기가 없는 '약자'였다. 3. 카넬리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자신의 애검 미스트랄을 땅에 질질 끌며 '주인님' 줄리탄이 있는 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옷에는 이전 전쟁의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서 남의 눈에는 막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불쌍한 소녀가장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제길. 허리 아파 죽겠네. 멋있게 착지하려고 했는데... 나도 이제 늙었나.'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그런건. '들어가서 주인님에게 허리 찜질해 달라고 해야지. 아무튼 휴우...카리나인지 뭔지 여기서 만날게 뭐람.' 카넬리안의 궁시렁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결국 스스로 최악 의 기분을 만들고 나서야 객실 방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주인님. 나 허리 아프니까 잽싸게 얼음 찜질해....잉?" 방에 들어오던 카넬리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니까 카넬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방의 상황은 이랬다. 막 옷을 벗기 시작해서 가슴과 다리의 하얀 살결이 들어 나 있는 반라의 엘프 무희가 거실에 서 있고 얼떨떨한 표 정의 줄리탄이 그 가련해 보이는 엘프를 바라보고 있다. 대체 이 상황이라면...예상되는 건 하나 뿐. 이쯤되면 그녀의 머리 속엔 주인님이고 나발이고 없다. "이...이...이런 썩을..." 카넬리안의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줄리탄 은 카넬리안을 보며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그의 표정 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마저 서려 있었다. "오, 오, 오, 오해야!! 나는 단지..." 하여튼 시대를 막론하고 당황하는 모습이란 더욱 설득력 을 잃게 한다. 지금 그녀의 표정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내 주인은 대낮부터 엘프와 놀아나는 변태였다.'이다. "야 이 멍청한 놈아아아아!!!!!!!!!!!!!!!" 카넬리안 특유의 고음의 히스테리컬한 목소리란 정말 듣는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녀는 광검 미스트랄을 치켜 든 채로 그녀의 목소리에 짓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줄리 탄에게 성큼 성큼 다가왔다. "남은 전쟁터에 나가 열나게 싸우고 돌아왔는데 주인이라는 작자는 고작 한다는 짓이..." 사실 전쟁터에서 카넬리안이 한 일이라곤 젤리드와 리이 사이에 뚝 떨어져서 허리를 다친 것 뿐이다. "아, 아냐. 내 말 좀 들어봐. 으아아아 뭐하는!!" 줄리탄은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미스트랄의 차가운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장난이 아니다 정말. "네 놈이 내가 날 없는 칼 가지고 다닌다고 물로 보고 있나본데...이 칼이 네 목을 자를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 이 변태 요리사 놈아!" 광기에 가득차다 못해 넘쳐 흐르고 있는 카넬리안의 눈빛.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이 줄리탄의 머리속을 스쳤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줄리탄의 처절한 목소리가 여관 내를 메아리 쳤다. 4. "그러니까 이 집 주인이 엘프를 보냈다?" "그렇다니까!!!" 줄리탄은 되게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카넬리안은 계속 그를 흘겨 보고 있었다. 뭐 줄리탄이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상황은 주인이 '기사나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올려 보낸 엘프 무희가 멋대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말리지도 못하는 지지리도 못한 줄리탄. "나도 말려 보려고 했어! 그런데 아무리 떠들어도 그 엘프...인간의 말은 전혀 몰랐단 말야." "호오. 그러셔?" 의외로 의심 많은 여자다. 줄리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옷홋홋. 너 혹시 지금 질투하고...으아앗!" "...." 카넬리안 아무말 없이 칼을 들이댔다. 의심이 많은데다가 자존심도 세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줄리탄에게 말했다. "너도 나처럼 세상 살만큼 살았나 보구나. 별로 더 살고 싶지 않은 거 같아 보이니까." 실로 무시무시한 성격이었다. "카, 칼...치우고 말 해." "엘프 들도 자기가 원해서 그러고 있는 줄 알아. 이제와서 인간에게 대들 용기를 강요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들도 다른 모든 존재처럼 긍지 높은 종족들이야. 시키니까 할 수 밖에 없을 때처럼...자신의 인생이 한심해 보일 때도 없을 꺼야." 카넬리안은 검을 거둬서 껴안듯이 가슴곁에 가져다대며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줄리탄의 귀에는 그 말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가 섞여 있었다고 느꼈다면 억측일까.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된거야? 리이 경이 싸움에서 이긴 것 같던데." 줄리탄은 얘기가 좀 불편해 지자 화제를 옮겼다. 궁금하기도 했고... "엄청난 사내를 만났어. 리이 경도 죽을 뻔 했다고." "뭐, 뭣?" 줄리탄이 보기에 리이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기사 중의 기사 였는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의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이길래. "젤리드라는 자였는데...하는 짓으로 봐서 정상적인 기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지금 리이 경도 부상 이 심해. 내가 아니었다면 누구 하나 죽었을 껄." 거짓말은 아니다. 카넬리안이 갑자기 싸움터에 추락하는 바람에 왠지 기분을 잡친 젤리드가 돌아가 버렸으니까. "리, 리이 경이 부상? 문병 가야 하는 거 아냐?" "가지마." 카넬리안은 딱 잘라 말했다. "왜?" "괜히 가서 중얼거리다가 기사가 아니라는 것 들통나고 싶진 않으니까 리이 경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라고." "...." 치밀하고 냉철한 여자다. 그녀는 아직도 줄리탄을 기사로 키우려는, 혹은 속이려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튼 그녀는 젤리드에 대해 말하면서도 카리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뭐랄까...조금도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랄까. "뭐 아까 엘프 일 같은 건...걱정하지 않아도 돼." 줄리탄은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난 예전에 니 맨몸을 본 것만으로도 너무 놀라서..." "...!!" 카넬리안의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그런데 너도 성격하곤 달리...몸매가..." 줄리탄은 모르고 있지만 그 말은 큰 실수였다. 그녀의 식어버린 분노가 다시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 그, 그딴 말을 왜 갑자기 하는 거야!!! 죽엇!" "으아아아!! 왜 그러는 거야!!" 카넬리안은 빨갛게 된 얼굴로 줄리탄을 향해 광검 미스트랄 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리 봐도 한심한 테이머다 그는. 5. 박력 넘치는 분위기의 줄리탄네와 달리 리이와 이카테스 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정적이었다. 이카테스는 리이의 오른 팔 관통상을 지혈한 후에 능숙하게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사실 문제는 그런 외상이 아니라 젤리드의 맹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그 독의 위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리이의 얼굴 은 창백했다. "오른팔...움직일 수 있으세요?" 이카테스는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물었지만 의외로 리이는 차분했다. 그녀는 힘들게 웃음을 띄우며 이카테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얕은 상처는 아니니까. 당분간 검술 연습은 못할 거 같군." 분명 리이의 오른팔 근육이 끊어진 것 같았다. 기사 특유 의 강한 치유력에 얼마 안가서 완치되겠지만 그 때까지는 검을 능숙하게 쓸 수 없다. 이카테스는 진심으로 리이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카넬리안에겐 거의 찾아 보기 힘든 표정이라고나 할까. "어서 성으로 돌아가셔서 치료를 받으시는게. 안색이 너무 안좋아 보입니다." "난 젤리드의 독이라는 걸 알아. 성으로 간다고 간단히 치료 되는게 아냐. 그리고 그 자를...기다려야 하니까. 아까의 싸움을 마저 끝내야지. 성에 돌아가는 건 젤리드와 만난 뒤로 하자."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리이의 눈빛에선 비장한 기운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이카테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카테스...내겐 이 시간이 되면 가끔 불안해지는게 하나 있어." 리이는 창밖에서 타오르고 있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을 흠뻑 적시는 저녁 무렵의 노을이란 거대한 산이라도 금새 붉게 염색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난 내일이 오면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끔 정말로 숨이 막혀올 정도로 두려워. 세상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 나는 부담스러운 건지도 몰라. 어쩌면 젤리드가 수년 전에 내게 한 말... 남에게 상처 받는게 두려워서 스스로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는 소심한 계집애...정말 그 말이 맞는지도." 리이의 모습에선 젤리드에 대한 증오나 환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탄 앞에서 보였던 강한 기사 의 모습도 없었다. "리이님..." 이카테스는 드물게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이카테스. 내 옷을 준비해 줄래? 곧 젤리드가 찾아올 꺼야." 그녀가 말하는 '옷'이란 전쟁이나 결투에서 입던 기사의 옷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카테스는 아까 전투의 핏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채 옷걸이에 걸려 있는 리이의 아이보리 빛 슈트를 안카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운명처럼 노을 이 지평선 넘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Blind Talk 당분간 글 올릴 수 없다고 해 놓고는 또 이렇게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긴 싫었지만 아무튼 오늘 해야 하는 일이 얼마 후로 미뤄지게 되서...시간이 남아버려 잽싸게 한 편 작성해서 올립니다. 다음 편이...좀 늦어지게 될 것 같네요.(그래봐야 며칠이지만...) 어제 썼던 사과 겸 잡담은 일단 지우겠습니다. 이번 chapter의 제목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양'은... 정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title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겠지만 (랑그릿사 3편인가 에서도 나왔고...에반게리온에서도 나왔고 심지어는 shape of my heart라는 스팅의 노래도 있고...) 전 그 title이 멋있어서 욕 먹을 것 각오하고 chapter 제목으로 쓴 거라서... 그럼 며칠 후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꾸벅. 『SF & FANTASY (go SF)』 88433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4-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4 14:35 읽음:1020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4-2 :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먕 관련자료:없음 [44162]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5-03 03:24 조회:1048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근처에서 공명이 느껴져..." 갑자기 촛점을 잃은 눈동자를 한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왜 그러는 거야?" "그가 돌아왔어. 나의...테이마가..." "테이머라면 설마..." 그녀의 전 주인에 대한 말을 잠깐 들은 적이 있었지만 분명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했었다. <> /F Chapter#4-2 :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양 -Night Stalker- 1. "누구냐 넌!!" 마치 불길한 숲 속을 칼도 없이 헤매다가 커다란 늑대와 마주한 것과 같다. 차가운 눈빛의 젤리드가 다가오는 것을 본 벨레시마의 경비병이 공포에 질려버린 건 당연한 것이다. 경비병이 젤리드를 향해 들이대고 있는 장창이 무력하게 떨리고 있었다. "잡병들은 비켜." 젤리드는 검도 뽑지 않은 채로 그들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너, 너는..." "카리나." 밤의 카리나는 표범 같은 모습이다. 순식간에 젤리드 뒤에서 튀어나간 카리나가 정말 서너명이 달라붙어야 열릴 것 같았던 커다란 성문에게 직격을 날렸고 곧 커다란 소리와 함께 성문이 무너졌다. "휴...흉몽이다!!" 2. "왔군." 리이는 테이블 앞에 놓여 있는 자신의 레이피어를 들며 일어섰다. 붕대에 감겨 있는 오른팔은 도저히 검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왼손에 칼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의 이카테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이머로서 네게 명령한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너는 다른 주인을 찾아라." 일종의 공명이었다. 자신이 죽어도 이카테스가 이성을 잃지 않게 만드려는. 훌륭한 테이머인 리이의 말은 씰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 의 영향력을 갖는다. "저도 돕고 싶습니다. 리이님이 이런 곳에서 죽는 건.." 이카테스의 말에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안 죽었어 아직. 그리고 그런 표정은 죽고 나서 보여도 늦지 않아." "...하지만" "그럼 갖다올게." 리이는 독에 중독되어 고통을 참는 얼굴과는 달리 예전의 침착함으로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2층에서 내려가는 리이의 작은 발자국 소리 가 멈춰버린 듯한 이카테스의 귀에 계속 들려오다간 이내 멀어졌다. 3. 카넬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스트랄을 잡으며 벨레시마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투를 기다리는 비장한 눈빛으로. "이건 뭐라고 읽는 거야?" "....." 줄리탄이 카넬리안에게 요리책을 들이대자 그녀는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으으 지금 니가 읽어야 할 책은 요리책이 아니라 어린이용 문법책이 아닐까 싶어. 대체...아직까지 글도 제대로 못읽냐!!!" 그녀는 정말 가만히 있고 싶었다. 리이처럼 무게 잡고 싶었다. 카리나가 오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제발 지금 만큼은 멋있게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있고 싶었는데 이 무능한 주인 은 아까부터 '달걀은 노른자를 제거하고 3분간 거품을 내야 한다.' 라는 부분을 세번씩이나 물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튼 줄리탄도 귀찮은 파리 쫓듯이 자신을 대하는 카넬리안에게 화가 난 모양이다. "미안하다 미안해!! 글도 모르는 무지한 요리사라서 미안하네! 쳇!" "키야야야야!! 무릎 꿇고 빌라면 빌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해 쫌!" 역시 이 커플은 분위기 잡기는 애시당초 글러먹은 듯 하다. "엄청 불친절한 씰이네 정말!! 주인이 물어보면 최소한..." "잠깐." 카넬리안은 카리나가 근처까지 온 것을 느꼈다. 그녀의 살기가 느껴진 것이다. "왜 그래?" 줄리탄이 카넬리안의 굳은 표정에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언가 거대한 빛무리가 줄리탄이 있는 여관을 덮치고 있는 것 같았다. 줄리탄의 시야가 하얗게 변해 버리고 뜨거운 기운이 온 몸에 느껴졌다. 그리고 줄리탄은 자신의 몸이 새하얀 폭풍 같은 것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뜨고 있는 것을 알았다. 카리나의 마력이 여관을 날려버린 것이다. '뭐야...이건 갑자기...죽는 거야?' 그때 갑자기 나타난 카넬리안이 줄리탄을 껴안으며 폭풍 속에서 솟아오르듯이 빠져 나왔다. 굉장한 속력이어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녀와 이렇게 밀착해 본 것은 하여튼 처음이다. 카넬리안은 평소와 달리 상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높이 떠오른 줄리탄의 눈에 잠깐 벨레시마의 야경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들은 땅에 착지했다. 줄리탄 눈에 보이는 여관 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카, 카넬리안?" 줄리탄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카넬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넬리안은 좀 힘든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주인님?" "으응..." 줄리탄은 좀 넋나간 표정으로 카넬리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에게 몸을 보호 받은 사내의 꼴이란 별로 멋있어 보이진 않아도 몸을 던져 줄리탄을 구해주다니 어쨌든 그가 주인이 맞긴 맞는... "그럼 됐어. 어서 떨어져!" "으아악!" 충실한 씰 카넬리안은 주인의 안전이 확인되자마자 저 멀리 던져 버렸고 덕분에 줄리탄은 기분좋게 카넬리안의 품 안에 있다가 흙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줄리탄은 순간 자신의 인생이라는게 한심해졌다. "죽여버리겠어. 카넬리안." 카넬리안의 앞에는 포니 테일을 하고 있는 검은 옷의 씰이 서 있었다. 방금 자신의 마력으로 여관을 날려버린 장본인, 카리나다. 그녀는 증오 가 담긴 눈빛으로 카넬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리나의 양 손목을 감고 있는 팔찌에서 기묘한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있겠지...니가 내 전 주인을 죽인 일을. 니가 그 분을 죽여서...나는 갑자기 이성을 잃었어. '실연' 당한 거지." 카리나의 시선은 계속 카넬리안을 향한체 말을 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것 같은 살기등등한 모습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으로 주인님의 가족 들을 모두 죽인 후였지. 날 아껴주던 사람들을 내가 죽였다고!" 그것은 카넬리안이 전에 말했던 '실연'에 대한 것이었다. 갑자기 테이머가 죽어버리면 그의 씰은 이성을 잃고 주변의 누구 라도 해치게 된다는 것. 하필이면 카리나가 '실연'을 당했을 때 그녀 근처에는 주인의 가족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끔찍해...' 줄리탄은 카리나의 말을 들으며 소름이 끼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앞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시체가 뒹굴고 있고 자신이 그를 죽인 것을 알게 된다면...그 기분은 대체 어느정도 비참할까.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카넬리안은 화가 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붉은 눈빛이 유독 차가운 빛을 발하며 카리나를 노려보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한 것도 짜증나는데 왜 모두 내 탓인거야!! 네 주인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내 전 주인이었고! 니 주인의 가족 들을 죽인 것도 너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난리야!! 넌 대체 씰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하냐고!!" "그런 거 몰라! 널 죽이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용서가 될테니까...그리고 지금은 네 전 주인도 이 세상에 없으니까. 날 아껴줬던 주인님에 대한 복수다. 그것 뿐이야." "닥쳐. 그 얘긴 하지마 더 이상." 줄리탄은 그녀가 '전 주인'이라는 말에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알지 못할 '그'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녀는 카리나를 바라보며 뱉어내듯이 말했다. "니가 주인의 가족을 죽여서 마음이 아프다면... 그건 인간을 좋아했던 네 잘못이야." "뭐라고?" 카넬리안은 소름이 끼칠만큼 단호한 표정이었던 반면 카리나는 너무 화가 나서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카넬리안은 조금 망설이다가 떨리는 입술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 싫은 것을 토해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바보같이 씰 주제에 대체 누굴...사랑한다는 거야." 어쩌면 그 말은 반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죽여버릴꺼야!! 죽여버릴꺼야!!" 카넬리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분한 카리나가 달려들었다. 그녀의 팔찌의 빛무리는 그녀의 감정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듯 폭발하듯이 하얀 빛을 뿜고 있었다. 카넬리안이 말한 적이 있다.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거짓과 집착이라고. 부모에게 학대 받으며 자란 자가 자신의 자식을 똑같이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인간의 집착이란 주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어 살면서 죽고 난 이후에도 끝까지 상대방에게 달라붙어 결국 상처를 준다고. 마치 악령처럼. '사랑도...집착의 하나일 뿐이야.'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그 말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4. 리이는 광장의 분수대에 있는 젤리드를 보고 자신의 발걸음을 멈췄다. 벤치에 앉아 있는 젤리드의 모습은 정말로 싸움을 걸기 위해 왔다기 보다는 옛 연인을 오랫만에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을 닮았다. "너의 씰은 어디에 두고 온 거야?" "아아. 카리나도 나름대로 여기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젤리드는 리이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검도 뽑지 않았고 리이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는 리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리이의 묶지도 않은 푸른 머리칼이 흩날리고 있었다. "니가 아무리 네 몸에서 여자의 매력이라는 것...지워버리려고 해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지." "그딴 말 하려고...나를 찾아온 건 아닐텐데." 리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니 추억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넌 정말 단 한번도 기사가 되길 원치 않았었지. 그러면서도 '그 남자' 때문에 지금까지 기사로 남아있다니... 나도 나지만 너도 참 융통성 없는 여자야." "그만둬. 그런 말은." 리이는 젤리드의 말을 피하며 검을 뽑았다. 그녀의 팔이 젤리드의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독의 중독 때문인지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텅 비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까지... 넌 죄책감에 시달릴 셈이야? 그럴 바엔 죽는 게 나아." 젤리드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흉수'를 검집에서 꺼내기 시작했고 리이는 눈빛을 찡그리며 자세를 잡았다. 젤리드는 절대로 용서 없는 사내지만 그녀의 왼손에 들고 있는 레이피어, 창백하게 떨리고 있는 얼굴. 누가 보아도 그녀에겐 승산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널 죽이고 나면...난 정말 이번에는 남부 달라카트로 여행을 갈꺼야.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가르쳐 준 그 스승을 만나 너의 죽음을 전해줄께." "그 분은 네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을꺼야." 그 대화가 결투의 신호탄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젤리드를 향해 돌진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별 다른 잔재주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녀로서도 젤리드와 검을 부딧치기 전까지는 다음 계획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부딧쳤고 그 순간 엄청난 푸른 스파크가 일어나며 귀가 찢어질 듯한 마찰음이 허공을 갈랐다. 평범한 기사였다면 그 충격 에 칼이 부러져 나가거나 몸의 뼈가 산산조각이 났을 충격이다. 젤리드의 몸을 지탱하던 다리가 그 충격에 뒤로 조금 밀려나갔지만 역시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강철이라는 것을 알아? 그건 누구도 부셔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결국 스스로 녹이 슬어 무너져 내리지. 네 마음은 강철을 닮았어.' 서로의 검이 엉킨 가운에 젤리드의 냉소가 차갑게 다가왔다. 그녀는 젤리드가 자신의 힘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칼끝에 전해져 오는 기운으로 느낄 수 있었다. -Blind Talk 죄송합니다. 이제서야 겨우 한편 올리네요. 실은...이 글은 삼일 전 쯤에 써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왠지 얼마 멈췄다가 다시 올리기가 두려워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 이 글 처음 올릴때도 엄청나게 마음 독하게 먹었던 소심한 사내입니다.) "아아 이건 너무 어둡잖아 제길!!!" 다 쓰고 나서 알았습니다. 리이와 젤리드만 등장했다하면 무지막지 어두워지고 궁상맞은 말들만 지껄인다는 것을. 게다가 이번 편은 카넬리안까지... 휴우, 확실히 이번편 즈음에서 계속 어두컴컴하니까 조회수도 떨어지기 시작하네요. 보는 분도 별로 재미 없을테고...글적글적. 물론 곧 즐거워 지겠지만 서도...딴에는 여러 가지 일까지 겹쳐서 기운이 나질 않는 기간입니다. 스토리를 다 준비하고 하는거라서 나름대로 묘사에 신경쓸 수 있는 건 좋지만 역시 그렇다보니까 자꾸 묘사에 덧칠이 심해져서 글의 템포를 잃을 때도 많고. 뭐 그래도 방법 없으니까 my pace로 나갑니다. 처음엔 편하게 올리려고 했는데 확실히 이렇게 글의 밀도가 떨어지니까 부담스럽니다. (허억. 또 chapter번호 틀렸다는 지적을 받아 지금 수정했습니다. 왜 이렇게 실수만 하는 거야 정말...T_T 아무튼 '잘생긴넘'님. 정말 감사.) Impellitly의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들으며.... ****** 그리고 이건 광고!! http://my.dreamwiz.com/eyehead/ 로 한번 찾아가 주세요. 시간 남으시면... 제 친구의 홈페이지인데...'카넬리안'을 그린 일러스트가 있습니다. (결국 조금도 내 설정을 참고하지 않고 그려서 예상치 못한 이미지가 나왔지만 꽤 훌륭합니다. 제가 보기엔...) 가서 카운터도 좀 올려 주시고 방문록에 글이라도...글적 글적. 『SF & FANTASY (go SF)』 88435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4-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4 14:35 읽음:1156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4-3 :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양 관련자료:없음 [44602]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5-10 06:00 조회:944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최근들어 불가능한 소망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내 머리의 바탕이 하얀 것이라면 새하얗게 지워버릴 수 있는 건가 내 마음을? 그렇게 된다면 다시 애써서 그곳에 무언가 써 넣을 노력 따윈 하지 않겠다. 행복한 것을 채울 수 없다면 그러는 것이 좋을 꺼라고 중얼거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차가운 비웃음소리 뿐.' <> /F Chpater#4-3 : 인간의 마음, 마음의 모양 -Clear my mind perfectly 1. 리이와 젤리드의 승패를 가늠하는데는 몇 합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선 당연한 말이겠지만...리이의 패배는 뻔한 일이었고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크윽.'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한 리이의 왼팔에서 레이피어가 떨어져 나간 것은 여섯 번쯤 검을 주고 받은 후 였다. 리이의 검이 스쳐간 젤리드 의 뺨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결국 그것 뿐. 충격 덕에 오른 팔 의 상처가 다시 터져서 리이의 슈트는 어깨까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쩔꺼야? 자결이라도 할꺼야?" 젤리드는 검을 잃은 리이에게 다가오며 낮게 깔린 눈빛으로 말했다. 리이의 검은 다시 잡을 수 있는 거리를 넘어서 떨어져 있었다. "...죽여 줘. 니 손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어." 그녀의 표정이란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차분 했다. 평소의 태도처럼 남에게 꺾이고 싶지 않은 모습 그대로. 젤리드는 몇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흉수를 들었다. 독이 발라져 있지는 않았지만 무방비 상태의 리이의 목에 다가선다면 단 한번에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정말이지 너란 여자는...지금 내가 널 살려준다면 받아들일 꺼야?" "별로..." 젤리드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리이의 눈동자가 자세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였다. 그는 그녀의 물빛 눈동자를 바라보 다가 조용히 들고 있던 칼을 내렸지만 곧 예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오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도와 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 마음을. 나도 참 무책임한 남자야." 리이는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젤리드의 검날을 바라보았 다. 차라리 자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젤리드의 말대로 죽으면 모든 것은 제로로 돌아가고 가슴 아픈 것도, 기쁜 것도, 두려움도, 추억도 모두 사라져 버리는 거다. 살아 있다는 권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뭐, 뭐야!' 삼킬듯 들어오는 젤리드의 검날이 리이의 목 언저리 까지 다가왔을 때 그는 갑작스런 힘에 밀려나고 말았다. "설마?" 리이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양 손으로 마법력을 모으고 있는 이카테스가 흔들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씰은...씰이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주인을 지켜야 하는 존재입니다. 리이님." 이카테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명을...깨버린 거야? 너?' 리이는 이카테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아 잊고 있었네. 너의 씰을. 내 칼을 막다니 배짱도 좋군." 젤리드는 이카테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그는 누가 자기 행동을 막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내다. 이카테스는 젤리드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기력으로 방어벽을 만들었다. 그런 방어벽 따위 젤리드의 검에 단 한번에 깨져버릴테지만. "이카테스에게서 떨어져! 목적은 나잖아!" 리이가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젤리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가 죽인데? 그냥 팔 하나 정도만 잘라버릴 생각이야." 하여튼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내이다. "악취미는 집어치워. 그리고..." "그리고?" "...조금 더 살고 싶어졌어." "...." 리이는 마치 자존심을 꺾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처럼 삐죽거리 는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젤리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리이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귀를 들이댔다. "뭐라고? 안들리는데?" "그, 그러니까...주, 죽고 싶지 않다고. 지금은!" 카넬리안을 억지와 연기의 달인이라고 분류한다고 이 남자, 정말 악취미의 대가다. 리이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더듬 더듬 말했다. "쳇. 누가 살려준데? 세상은 그리 만만한게 아니라고 리이 경." "이, 이 녀석 결투다!!! 어라?" 리이는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옮기다가 저 멀리 차갑게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일생일대의 대망신. "...." "이건 조금 웃겼어." "시, 시끄러!!" 왠지 어쩌면 이 심각해 보이는 커플도 과거에는 카넬리안과 줄리탄 을 능가하는 대화가 오갔을지도 모른다. "졌다고 말해. 그럼 살려줄께." "뭐?" "넌 한번도 나한테 졌다고 말한 적이 없었지. 그런 말을 하면 '그 남자'에게 실례라도 되는 건지. 그러니까...말해봐. 졌습니다 라고. 공손하게." 젤리드는 검집에 자신의 검을 넣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정당당하게 싸운게 아니잖아!" 억울하다. 리이는 이 와중에 와서야 울컥 솟아 올랐다. "쳇. 이젠 변명을 늘어 놓는 거냐? 푸른 맹금이라는 별명이 울겠네. 디트리히 가문도 끝장이군." "내 가문을 욕하지마!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호오. 해보세요. 리이 경?" 한번 말려들면 지독하게 괴롭히는 사내였다 젤리드는. 어쩌면 리이는 이 남자가 자기 무덤에서 웃는 모습을 상상하며 죽지 않겠다는 결심 을 했는지도 모른다. "져...졌습니...됐지?" 그녀의 얼굴이 이 정도로 빨개진 것은 정말 처음이 아닐까. 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되긴 뭐가 돼. 카리나." "내, 내, 내, 내 옛날 이름을 부르지 마!!!!! 대체 너란 놈은 왜 니 씰에도 내 이름을 붙이고 나한테만 달라붙는 거야! 이유라도 알고 싶어!" 그렇다. 카리나는 리이의 아명이었던 것이다. 기사 작위를 받으며 그녀는 이름을 리이로 바꿨지만. "그건, 네가 나에게..." "내가 뭘?" "5년전에 니가 내 귀에 속삭인 그 말 때문이지. 내 침대 위에서 말야. 그때의 너는 정말..." 과거를 들춰내면 불리한 것은 리이였다. "그 말은 하지마!!!!!!! 이, 이카테스. 저 녀석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 없어! 그, 그러니까..." "저, 전 별로 아무렇지도..." 리이는 엄청나게 당황하며 리이와 젤리드를 번갈아 보았다. 뒤에 있는 이카테스까지 얼굴이 빨개진 상태였다. "돌아갈 꺼야. 가자. 이카테스." 리이는 잽싸게 평정을 찾으며 이카테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기가 불리해 지면 의외로 뻔뻔스러워 지는 여자다. "한가지만 물어봐도 돼? 리이?" 젤리드도 이제 리이를 놔줄 모습이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확실히 그는 무언가 끝났다는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마음을 바꾼거야. 너 답지 않게."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이 기억나서. 그것 때문에...죽는게 두려워 진거지. 그걸 지키고 싶거든." 리이는 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리이의 눈빛을 봤다면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뭔데 그게?" "몰라도 돼." 젤리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리이의 검이 있는 곳 으로 걸어가며 그녀의 은색의 레이피어를 집어 들었다. "놓고갈 꺼야? 칠칠치 못하게." 리이는 젤리드가 던진 검을 능숙하게 받으며 검집에 넣었다. "'그 남자' 잊어버려!! 널 지키다가 죽었다면 괴로워하지 말고 고마워 하라고!" 젤리드는 드물게 큰 소리로 리에게 외쳤고 리이는 모르는 채 계속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리이를 죽이진 않았어도 이번엔 꼭 남부로 내려가야지. 그건 그렇고...카리는 대체 뭘하고 있는 거야.' 젤리드는 카리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멈춰버린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2. '하아. 하아...' 카넬리안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스스로 일으켜 세웠다. 들고 있는 미스트랄의 무게가 버거울 정도로 힘들어하는 표정이었다. '카넬리안이...지고 있다?' 줄리탄은 무의식적으로 카넬리안이 언제나처럼 압승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눈에 보이는 상황은 카리나에게 카넬리안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 카넬리안은 절대로 카리나를 봐주고 있 는 것은 아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카리나는 카넬리안보다 강하다. "뭐야. 이제 그 검을 깨우지도 못하는 거야?" 카리나는 스스로도 놀란 모습으로 휘청거리는 몸으로 서 있는 카넬 리안에게 말했다. "시끄러워. 내 검을 어떻게 쓰든 그건 내 맘이야." "정말 형편없이 약해졌구나." "..." 카넬리안은 비웃음에 찬 카리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 검을 '깨운다'고? 약해졌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줄리탄은 멍한 표정으로 카리나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카넬리안이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카리나가 바라보는 카넬리안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오펜바하에게 네 주인이 죽을 때까지... 두려움도 적도 없었던 니가 이렇게 되다니. 기분이 어때? 자신의 검도 깨우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이?" "...전 주인에 대한 말은 그만둬." 그녀는 섬뜩한 눈빛을 치켜 올리며 카리나를 노려보았다. "그 검은 네 주인 몸의 일부, 역린(Dragon scale)으로 만든 것. 용의 기운이 담겨 있는 광검이지만...지금의 네게는 단지 무거운 짐만 되고 있군. 그 검과 같이 죽어버려. 가랑." 가랑(佳娘). 그건 그녀의 오래 전의 이름이었다. "니가 나의 뭘 알고 있어!!" 카넬리안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돌며 미스트랄을 내리쳤다. 플라즈마처럼 타오르는 붉은 파열의 덩어리가 바닥을 긁으며 검날처럼 카리나에게 밀려들었지만 이미 카리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 순간 카넬리안의 측면에 나타난 카리나의 일격에 카넬리안은 검을 놓치며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미스트랄이 바닥에 떨어지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줄리탄의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으윽.' "정말 니 말대로 널 죽여도 내 전 주인과 가족들에겐 조금도 용서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널 죽이고 싶어." 카리나는 카넬리안의 긴 머리칼을 잡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팔찌에서 나온 차가운 하얀 기운이 손날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죽여. 네 마음을 달래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살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어." '카넬리안...' 줄리탄은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단지 피할 수 없는 무력함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줄리탄은 목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그의 목 곁에 기괴한 모습의 검이 다가와 있는 걸을 본 것이다. "저 씰의 테이머지? 넌 기사가 아니로구나." 줄리탄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돌아본 뒤에는 검은 옷을 입고 자신에게 흉수를 들이대고 있는 젤리드가 서 있었다. "...다, 당신은?" "젤리드!!" 카리나는 젤리드를 바라보며 금새 살기를 감추고 반가운 얼굴로 외쳤지만 젤리드는 그 차가운 눈동자로 줄리탄을 내려볼 뿐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니가 기사였다면 당장 목이 달아났을 꺼다. 대체 어떻게 기사도 아닌 자가 저런 씰을 얻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아무런 힘도 없는 너 같은 자가 씰의 주인이 되면 씰의 힘도 약화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건가? 그런 얼굴이군." "...야, 약화된다고?" 줄리탄은 '씰은 자신의 테이머를 닮아가기 마련이야.'라는 카넬리안 의 말이 기억났다. "내가 보기에 저 씰은 자신의 힘의 절반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데...정말 너 형편없는 테이머구나. 이 정도라면 이적시킬 능력도 없을테고." 줄리탄의 가슴이 터져버릴 것처럼 아팠다. 자신 때문에 죽을 위기에 몰렸다는 것...숨고 싶었다. 정말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봐. 카리나. 그런 장난 그만두고 가자." 젤리드는 줄리탄의 생각 같은 건 별로 관심 없다는 모습으로 카리나 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리나는 카넬리안의 머리칼을 놓으며 젤리드에 게 다가가며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하, 하지만 젤리드!!! 곧 끝나는데!" "제대로 자기 힘도 쓰지 못하는 상대를 죽이는 건 찝찝할 뿐이야. 어서 이리와." 그러니까 젤리드는 오른팔을 못쓰는 리이를 죽이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찝찝'한 것은 사실이다. "시, 싫어!" "...카리나.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리와." 젤리드는 좀 화가 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상대가 어떤 상황이라도 상관 없어! 난 가랑을..." 젤리드는 그런 카리나의 말을 막았다. "만약 한번만 더 내 말을 거부하면... 내가 널 죽여버린다. 지금 피곤하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와!" '대체 이 카리나나 저 카리나나 왜 사람말을 죽어라고 안듣는 거지.' 카리나는 볼이 퉁퉁 부어버린 채로 젤리드에게 걸어가다가 카넬리안 을 바라보았다. 카넬리안은 주저앉은 채로 카리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에는 절대로 살려두지 않을 꺼야!! 각오해!" "지금 죽여도, 내일 죽여도, 백년 후에 죽여도 상관 없어." 카넬리안은 귀 밑으로 흐르는 피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으며 중얼 거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젤리드 일행이 사라진 이후 그녀는 줄리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방긋 웃었다. "죽을 뻔 했어. 나 한심하지?" "미, 미안해. 나 때문에..." 줄리탄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카넬리안은 그에게 별의 별 말을 다 했어도 '너 때문에 내 힘이 낮아졌어. 무능한 놈.'이란 소리는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테이머는 자신의 씰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팔아 먹는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미안해 할 건 없는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뭐 그리고...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즐길만 해. 조금은..." 그녀의 말에는 증오도 조소도 없고 줄리탄의 귀를 겉돌고 있을 뿐 이었다.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줄리탄은 무력감을 떨춰낼 수 없었 다. 마치 동생의 죽음을 놔두고 도망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아 정말 한심한 주인이네. 그렇게 미안하면 내 검이나 주어 줘." 카넬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지만 새로운 여관 방에서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도 그들은 더 이상 한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아무말 없이 옷을 벗으며 욕실에 들어가 버릴 뿐이었다. 줄리탄은 침대 위에서 밤새도록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 그토록 자신이 한심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2. "이제 일어나. 카넬리안. 대체 언제까지..." 줄리탄은 침대에 누워서 얼굴까지 이불을 덮어버린 카넬리안에게 한 이십번 쯤 일어나란 말을 했을 꺼다. 아무튼 그녀는 끝도 없이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욕실에서 튀어나와서는 침대 위의 줄리탄을 걷어차 버리곤 침대 안으로 들어가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줄리탄의 무력감의 일부는 예전의 짜증으로 돌아가 버렸다. "더 잘꺼야...피곤하다고." 카넬리안은 이불을 둘둘 말며 몸을 돌렸다. "넌 수면부족으로는 죽지 않는다며!!" 창밖에서는 사람 키의 세배는 되는 길이의 트롤 들이 긴 팔을 이용해 사람들의 지휘를 받으며 어제 박살난 건물 지붕을 수리하고 있는 모습 이 보였다. 활기차다면 활기찬 늦은 아침이다. "꼭 죽지 않기 위해 밥을 먹는 건 아니잖아. 씰이나 인간이나 피곤할 때는 푹 자는게 최고라고." '궤변가...' 줄리탄이 카넬리안을 깨우는 걸 포기하고 근처 도서관에 요리책을 구하기 위해 가려고 할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이였다. "어제는 조금 피곤해서 늦게 일어났습니다. 전해드릴 말이 있어서..." 리이는 살짝 웃는 표정으로 줄리탄과 도롱이처럼 이불 속에서 얼굴 만 내민 카넬리안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이불 속 카넬리안의 표정이란 대충 '제길. 이게 무슨 개망신.'이었다. "아 예."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흘겨보며 대답했다. "리센버러 왕성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벨레시마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보이고 싶다고 하셔서. 바쁘지 않으시다면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리이는 호감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줄리탄의 말에 카넬리안의 표정이 불안해 졌다. 보통 이 상황에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란 뻔하다. "기사가 아닙니다. 전 검도 전혀 쓰지 못하는 요리사 입니다." '망했다.' 카넬리안의 표정은 그랬다. 리이가 없었다면 줄리탄을 흠씬 두들겨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요?" 리이가 싱긋 웃는 표정으로 되묻자 줄리탄은 당황했다. 그는 리이 가 엄청나게 화를 내며 돌아가거나 최악의 상황이라면 들고 있던 칼을 뽑아서 기사를 사칭한 죄로 즉결 심판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까...기사가 아니라니까요." "대충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하지만 기사든 아니든 줄리탄 님과 카넬리안이 리센버러를 도와준 것은 사실입니다. 기사라는 것...어찌보면 특이한 직업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에 얽매인다고 삶에 충실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당신도...도망치지 말아주세요. 이 세상에서..." 줄리탄은 결국 이번에도 리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헬몬드 국으로부터의 수비 임무가 끝난 리이는 곧 벨레시마를 떠나 리센버러로 향했고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이틀이나 지나서 일어난 후에야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왕성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Next Chapter : 믿을놈하나없다! -Blind Talk. (이번엔 잡담이 좀 길이서 offline에서 작성합니다.) 1. 자주 올렸어야 하는 실은 집안에 피치 못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일에 시달리며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또 얼마 동안은 피곤함에 허우적거리며 아무 것도 손에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카넬리안의 엄청난 수면량은 제 마음이었습니다.) 밀린 일을 하다가 '더 이상 느려지면 내가 독자라도 짜증낼 꺼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잽싸게 글을 쳐서 올리게 됩니다. (먼저 써두었던 것은 지우고 다시 쓰는 거죠.) 2. 먼저 나우누리 sf란에 제 글이 (창피하지만) 올라간다는 것을 보고 들렸다가 어떤 분께서 이 장편이 FSS와 닯았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분들이나 제 친구들도 쪽지나 메일, 구두를 통해 비슷하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테이머와 씰의 관계가 FSS의 기사와 파티마의 관계와 거의 똑같다는 지적이었지요. 하지만 그게 똑같다면 사이버 마리오네트 J 와도 같은 것이고 강철천사 쿠루미와도 같은 것이고 확장하면 기생수 와도 같은 것이라서 절대로 FSS와의 관계란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봐도 엄청나게 비슷합니다.(비록 씰의 정체는 전혀 다르고 모터헤드도 나오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란 제가 봐도 상당히 흡사합니다. 그렇다고 FSS를 보지 않고 이걸 썼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제가 중학교 때에 FSS란 제게 '최고로 재밌는 만화' 중에 하나였습니다.(지금이야 시들하지만...) 특별히 그걸 의식하고 쓴 건 아니지만 그런 기묘한 주종관계가 가져오는 위험한 매력이란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것이었고 스며들 듯이 모티브 단계에서 부터 영향을 주었습니다. 뭐 저도 엄청나게 뻔뻔한 사람은 되지 못해서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 차이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진 않습니다.(확실히 남의 작품과 흡사하다는 것은 창피하니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 ) 하지만 부탁드리는 것은 이것 때문에 혹시라도 게시판이 '표절논쟁' 때문에 시끄러워 지는 일은 없었 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게시판의 '쾌적함'을 위해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게시판에서 제 글이 그렇게 오르내리면 굉장히 창피해서. ^^; (그래도 집고 넘어가야 할 건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뭐..글적)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영향 받은 것은 blade runner라고 생각되는데. 몹시 좋아하는 영화라서 수십번을 봤을 정도니까. 카넬리안의 대사 중에 '난 살아오면서 너희들은 믿고 싶지 않을 것 들을 봐왔어.' 라는 대사도 거의 로이의 대사와 비슷하고.^^; 3. 카넬리안의 전 주인의 이름은 가랑(佳娘)이었습니다. 본래는 제 친구 kiyu씨(SIG를 엄청나게 느리게 올리고 있는 녀석)가 찻집에서 갑자기 정해준 이름으로 가랑(嘉娘)이었지만 왠지 嘉란 흔한 한자인 것 같아 서 佳입니다.(전 한자에 약해서 어울리게 정했는지 모르지만...) 왜 로마자 판인 이 소설에서 '동양적'인 이름이냐고 물어보신다면 ...가랑, 어감이 좋지 않습니까? ^^ 뭐 그녀 성격이라면 가랑(苛娘)이 차라리 어울리겠지만서도. 제 핸들네임인 Wise Wolf는 가랑(嘉狼)입니다. 그리고 가랑이란 이름을 주어준 전 주인에 대해서 조금 나왔습니다. 딱 봐도 정체가 뭔지 알 수 있지만...-_-; (그거 설명하느라고 카리나의 군더더기 같은 대사를 했습니다.) 4. 대체 이번 chapter에서 '죽는다.','죽인다.'라는 하여튼 꽤나 섬뜩한 말을 얼마나 넣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특별히 그걸 노린 건 아니었는데 뭐에 홀린 듯이 '죽여주는' chapter가 되어버렸습니다. 본래 계획한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게 썼습니다. 리이는 본래 여기서 죽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일찍 그녀가 죽어버리면 곤란해 지는 건 저 자신이라는 것을 느꼈고 게다가 그녀의 뒷얘기도 아직 보여주지 못해 서...일단 살려두었습니다. ^^a (아아 왜 자꾸 일본어를 직역한 거 같은 말투가 나오는 거지. 싫다.) 5. Close Combat4를 잠시 하고 있었습니다. 하면 할 수록 훌륭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조만간 캐릭터 프로파일 정리를 올려볼까 합니다.(무슨 관계..) 6. 젤리드 빙크리스틴(Zelid Vincristine. Vin cristne이 아닙니다.) :누군가 주변 녀석이 Jellied라고 써서 '젤리 같은 빙크리스틴'이 되어 버려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카넬리안(Carnelian) :말그대로 홍옥수(紅玉髓)라는 돌의 이름입니다. (잘 모르지만 붉게 굳어버린 호박을 의미하기도 하던가...) 실은 그 돌의 색은 카넬리안의 눈동자 색보다 훨씬 진하고 탁하지만 ...어감이 좋아서 썼습니다. 줄리탄(Julitan) :성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사모예드(samoyed)입니다. 아마도 끝까지 나오지 않을 겁니다.(그냥 일본 막부시대 마냥 천민 이라서 성이 없었다고 둘러댈 생각입니다.) 카리나(Carina) :본래는 카라이나라고 읽는 것이 맞지만 어감이 좋지못해 그냥 카리나. 龍骨자리입니다.(Canopus가 등장하면 둘이 연인이 될 껍니다.^^) 벨레시마(Bellesima) :그러니까 PS용 에이스 컴뱃1에 나오는 작전(아니면 지역)이름입니다. 뻔뻔한 줄 알지만 황량한 지역에 자리잡은 도시의 이름으로 어울려서 그냥 썼습니다. 정말 B로 시작하는 도시나 지역 중엔 어감이 멋진 곳 이 많습니다. 벨파스트 도 그렇고 베오그란트 도 그렇고. 이카테스(Ikkates) :이카루스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아무 의미 없습니다. -_-; 그냥 발음이 강한 단어를 좋아해서. (그런 의미에서 Final Fantasy라는 title은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은 한번도 안해 봤지만...-_-) 리이 디트리히((Leigh dietrich) :리이는 Vivian Leigh의 '리이' 디트리히는 Marlene Dietrch의 '디트리히' 독어와 영어의 괴상한 조합이긴 하지만 어감은 좋으니까 통과. 아아 힘들다. 대충 이렇게 정리한 것은 어떤 분께서 인물 들 원어로 써 달라고 말씀하셔서...입니다. 7. 정말 간만에 올리는 거라서 잡담이 보는 사람 짜증낼 정도로 길어 졌습니다. 다음부터는 짧게. FSS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부족한 상상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평도 좋고 악평도 좋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무반응이다. 라는 코폴라 감독의 말마따나(뭐 똑같진 않지만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상보다 많은 들이 관심을 가져주신 건 정말 기쁘네요. 그럼 이만 꾸벅. 허기는 육체적 습관의 부족으로 공허하고 무지는 정신적 습관의 부족으로 공허하다. -플라톤, 국가론 (맞나...) southern all stars의 tsunami를 들으며... ps1:...죄송합니다. 새벽 6:26분. 올리면 짤리고 올리면 짤려서 (현재 e-mail도 먹통) 다섯차례나 다시 올려서 진이 쭉 빠졌습니다. 덕분에 대충 잘려나간 부분과 오탈자 수정하긴 했지만 아마도 잘못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조만간 다시 천천히 보면서 수정하겠지만 지금은 자겠습니다. 에구 그리고 밑에 분. 레니드 전기 쓰시는 분 아이디로 메일 보내드리겠습니다. (e-mail이 어제부터 엉망이네요.) 『SF & FANTASY (go SF)』 8889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5-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7 20:21 읽음:1167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5-1 : 믿을놈하나없다. 관련자료:없음 [45065]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5-17 05:35 조회:341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넌 의외로 생각이 깊은 남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네 품속은 내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야." 리이가 떠난 자리에는 그런 짧은 문장이 특유의 고운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그 글을 읽는 젤리드의 곤혹스러운 표정, 나는 전에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3일쯤 뒤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동안 카넬리안이 그녀가 죽은 곳을 향해 예를 갖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F Chpater#5-1 : 믿을놈하나없다. -quagmire 1. "그러니까 뭐라도 타고 오자니까...왜 고집을!" "아아. 시끄럽네." 리센버러 성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벨레시마 주변은 풀 한 포기 보기 힘든 황무지. 일교차도 심한데다가 근처에 마을도 드물 어서 보통의 인간이라면 개품을 물며 쓰러져 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 '보통의 인간' 중에 하나가 줄리탄이다. "여분의 식량도 안가지고 오고...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러니까 출발하기 전에 충분히 먹어 두라고 했잖아." 카넬리안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줄리탄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바람까지 거의 불지 않는 이곳에서 빈 뱃속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자신의 꼴이 한심했다. 땀 한방울 흘리 지 않고 산책길이라도 걸어가는 것 같은 느긋한 모습의 카넬리안도 싫 었다. 직업이 요리사인게 저주스러울 정도로 머리 속에는 오만가지 음식 들이 주마등처럼 돌았다. "싫어...다 싫다고. 리이 경을 만나기도 전에 죽을 꺼야. 이대로는." 절망. 절망이란 우스울 정도로 엉뚱한 곳에서 찾아온다. "너무 약하다, 주인님. 이 기회에 체력을 키운다고 편하게 생각해." "목숨 걸고 체력 키우는 놈이 세상에 어딨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를 들면 삼일 째 산속을 해메고 있는데 심마니 가 불쑥 나타나서 실실 쪼개며 '약하구만 젊은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을 때의 기분. "너 말야...카넬리안. 만약 여기서 내가 갑자기 탈진으로 죽어버리면 너로서는 '실연' 당한 것일텐데...그러면 이성을 잃게 될까? 너?" "..." 줄리탄은 진지하게 물어봤지만 카넬리안의 표정은 '그런 한심한 경우 는 겪어보지 않아 모르겠네.'였다. "아 저기...마을이다." "뭐, 뭣?" 카넬리안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줄리탄은 '마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마을은 지금은 곧 먹고 쉴 수 있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라고는 생각하지만 줄리탄이 바라보는 곳에는 흙먼지 뿐...마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저기 있잖아. 저기." 카넬리안이 가리키는 쪽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이 어딨어!! 마을이!! 이젠 주인을 놀리는 거냐!!" 줄리탄이 광분했다. "네가 눈이 나빠서 안보이는 것 뿐이야. 조금 더 가면 있다니까 그러네." 사실 줄리탄의 눈이 나쁜 게 아니라 카넬리안의 눈이 엄청나게 좋은 거다. 그리고 카넬리안이 '조금 더 가면'이라는 거리는 반나절에 가까운 거리였다. 결국 줄리탄은 지옥을 경험한 뒤에 그 '마을'에 도착할 수 있 었던 것이다. 2. "야 너희들. 이리와봐. 카악 퉤!" "...뭐야 저 놈은..." 이름도 모를 황무지 한가운데의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설픈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는 녀석이 골목길에서 줄리탄 일행에게 시비다. 정말이 지 '이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조차 찾아볼 수 없는 엄 정나게 작은 이 마을에 어울리는 환영 인사라고나 할까. "내 말 안들리는 거냐 앙? 퉤. 내가 누군 줄 알아!" 지저분하게스리 침까지 뱉으며 골목길에서 나오고 있는 그 녀석의 정체 는...꼬마였다. 줄리탄 보다도 어려 보이는. 씻지 않은 금발이 잔뜩 엉 켜 있고 어디서 구했는지 날이 심하게 깨져 있는 싸구려 검까지 차고 있 는 14살 정도로 보이는 녀석. 키는 줄리탄과 비슷했지만 아이 티를 전혀 벗지 못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꼬마 뒤로 한심한 표정으로 뒤따라 나오 고 있는 여자아이도 보였다. "이 마을에 왔으면 내게 인사부터 해야지. 내가 누군줄 알아? 퉤!" "누군데?" 줄리탄은 협박이고 뭐고 당장 식당에 달려가서 미친듯이 아무거나 먹어 치운 뒤에 샤워도 생략하고 잠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카넬 리안은 그 꼬마의 정체가 되게 궁금한 모습. 보나마나 이 동네 개망나니 겠지만. 줄리탄은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의 별 것이 다 괴롭힌다고 한숨 을 내쉬었다. "흥!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리센버러의 리이 경의 총애를 받고 있는! 라스페르 경이시다!!" "....너 말야..." 죽이고 싶다. 줄리탄은 퀭한 눈동자로 자칭 라스페르 경을 쏘아보았지 만 카넬리안은 간만에 웃겼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어 넘겼다. 기분 나쁜 상태의 카넬리안에게 걸렸다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가죽 갑옷까지 좍좍 찢겨진 후에 마을 입구에 거꾸로 매달려 있을 테지만. "나, 나는 기사라니까! 뭐하는 거야! 무릎을 꿇지 않고!" "...리이 경은 너 따위는 조금도, 전혀, 눈꼽만큼도 모르고 있으니까 닥치고 식당 있는 곳이나 말해!! 에이 씨 뭐이리 총애를 받는 놈들이 많아!" 줄리탄도 육체적인 욕구가 절실할 때는 박력이 넘쳤다. "너 같은 놈이 리이 경을 어떻게 알아? 퉤에엣!" '...더러워.' 줄리탄은 눈살을 찌푸렸다. 카넬리안은 웃음을 참으며 그 레스페르 경 을 바라보곤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스페르 경. 세상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기사는 성인식 전에는 되지 못해." 정곡을 찔렸다. "가, 감히 내가 기사임을 의심하는 거야!! 무례하군!!"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댈 정도로 귀엽게 기사를 '연기'하고 있었다. "호오. 이 녀석. 기본이 되어 있는데. 주인님도 이 녀석 좀 보고 배워." "제발 그만 가자니까..." 같은 '연기의 달인'을 만나서 그런 것인가. 카넬리안은 드물게 관대하 다. "저 뒤의 여자애는 네 동생이냐?" 카넬리안은 꽤 귀여워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창피함을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 여자는 내 씰..." "오빠. 나 갈래." 결국 그 아이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퉁명스러운 말이 나와 버렸다. "자, 잠깐. 거의 끝나간단 말야!!" 끝나가긴 대체 뭐가 끝나가고 있단 말인가. "이게 무슨 돈 벌 수 있는 일이야, 오빠를 믿은 내가 바보지! 그리고 보면 몰라! 이 분들은 기사와 씰이라고!!" "에구. 들켰네." 카넬리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기사는 무슨 얼어죽을. 이런 아이 들까지 속여야 마음이 놓인다는 건가. 치밀한 여자다. '몰라. 난 이제 모른다고. 난 갈꺼야.' 줄리탄은 결국 혼자서 느릿느릿 마을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번 에는 자칭 라스페르 경이 줄리탄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저, 저, 정말 기사에요?" 그가 줄리탄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에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야 임마! 난 너처럼 기사가 아니라 아사 직전의 요리사니까 이것 놔아!!!! 제발 좀 놓으라니까!!" 2. "너 꼭 그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줘야만 했냐." 카넬리안은 무척이나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줄리탄에게 말했다. 지저분한 여관 방이었다. "기사가 아닌 걸 아니라고 말했는데 뭐가 잘못이야. 그리고 카넬리안, 이 마을에서도 기사 행세하며 공짜로 먹고 잘 생각 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이미 이틀 동안 주방에서 일하는 대가로 이 방을 얻었으니까." "크윽. 고지식한 남자." 말 그대로이다. 줄리탄은 카넬리안보다 먼저 여관에 들어가서 분명하게 요리사 임을 밝혀버린 것이다. 줄리탄을 바라보는 카넬리안의 눈빛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렇고 마을 규모에 비해서 이 여관은 굉장히 크네. 술집도 겸하고 있고..." 벨레시마에서는 흔한 곳이지만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여관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줄리탄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벨레시마의 것보다는 훨씬 지저분하고 오래되어 보였지만 그 규모만은 벨레시마의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마치 여관을 중심으로 이 마을이 형성된 것 같이 보일 정도이다. "어쩌면 당연해. 이런 드물게 있는 마을이란 본래 뜨내기 여행자 들이 쉬어가는 곳이 된다고. 아까 1층에서 봤지? 별의 별 녀석들이 다 이곳 에 머물고 있다니까." 카넬리안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있을지 도 모를 빗을 찾고 있었다. "흠. 그건 그래." 확실히 1층의 주점에서는 꽤 흉악해 보이는 자들이 초저녁부터 술을 들이키고 있었던 것이다. 카넬리안을 보는 눈도 심상치 않았다. 뭐 그녀 는 그런 떨거지들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주인님. 오늘 저녁엔 술 한잔 어때? 같이 마셔본 적이 없었잖아." "술? 아직 마셔본 적이 없어서...게다가 피곤하단 말야. 지금은." 줄리탄이 있던 마을 키오네는 의외로 엄격한 곳이어서 미성년이 입에 술을 대기란 불가능했다. 뭐 그게 아니라도 줄리탄 같은 성격이라면 별 로 술을 즐길 리는 없지만. "훗. 내 주인님은 아직 어린애였군." "언제부터 술을 마셔본 경험이 애와 어른을 나누는 기준이었냐." 줄리탄은 실제 성인식을 치룰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른'은 아니었 지만 그런 카넬리안의 말은 왠지 억울했다. 키오네에 있을 때에 스테온 이 도시에서 가져온 술을 마시는 것이 기억났다. '스테온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그도 키오네를 떠났을까.' "이런 곳에 질 좋은 술이 있을리는 만무하지만 마시자. 주인님. 나도 오랜만에 마시고 싶고. 우웅." 카넬리안의 '오랜만'이란 대체 어느 정도의 기간일까. 수십년? 아니면 수백년? 3. 줄리탄 일행이 있는 거대한 대륙, 이슬라트의 동쪽 바다를 건너면 또 다른 대륙인 젤벤더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1황제 오펜바 하가 직접 통치하는 젤벤더 대륙이 있었다. 대륙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 온 제국의 이름이었고 그가 있는 제도(帝都)의 이름도 젤벤더였다. 제도 젤벤더. 벨레시마와도 비교도 안될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그곳은 헤스페리아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 도시 였고 지형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인간 이외의 이종족 은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다. "오늘도 좋은 날씨네." 제도의 중심에 위치한 황성 오버암메르가우. 차라리 산에 가까운 크기의 그 아름답고 위압적인 황성의 꼭대기에 있는 발코니에 앉아 있는 십대의 청년이 한눈에 들어오는 젤번더 시가지를 내 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높은 곳이어서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 의 긴 머리칼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산짐승을 닮은 노 란빛인 것만 제외하면 보통의 훤칠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그는 제1황제 오펜바하 이다. 실제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20명 최상의 씰 들의 테이머이고 3년 만에 헤스페리아를 통일했으며 용 들을 이 세상에서 몰아냈고 불로불사의 몸을 가졌다는 소 문과는 달리...그냥 미소년이다.(보통 이런 녀석들이 실제로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은 이미 진부한 장르공식이긴 하다.) "오펜바하 폐하. 언제까지 그곳에 있으실..." 오펜바하의 뒤에서 좀 못마땅한 표정의 여성이 나타나며 말했다. 그의 씰 중에 하나인 미쉘이었다. 쇼트의 회색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이지 적으로 보이는 - 카넬리안과는 또 다른 매력의 씰이다. "어 미쉘?...미쉘. 미쉘...으음. 정말 이름 잘못 지었어. 무슨 빵가게 이름 같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별로. 제게 내려주신 이름에 불만은 없습니다." 미쉘이 오펜바하의 '빵가게'라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은 그가 미쉘을 볼 때마다 그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밥 해줘. 미쉘. 그런데 그 이름 정말 빵가게 같지 않아?" "이 성 오버암메르가우에는 200여명의 요리사가 폐하를 모시고 있습 니다. 왜 제가..." "오늘은 야채가 좋을 것 같아." "..." 역시 미쉘이 양미간을 찡그린 건 오펜바하가 미쉘이 해준 식사만 하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미쉘이었지만 요리에는 재능 이 없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력으로는 왜 자신이 잘 만들지도 못하는 음 식을 만들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핀잔은 핀잔대로 들어야 하는지 이해 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뭔지 모르게 줄리탄 일행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음식...만들어드리면 이 곳에서 내려오실 건가요? 벌써 한달이 넘도록 여기에서..." "여기로 가져와줘. 내려가기 귀찮아." "...예." 옛말에 자기 힘든 건 알아도 하인 죽어나는 건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까. 만약 이 자리에 미쉘이 아닌 카넬리안이 있었다면 그대로 오펜바하를 구둣발로 걷어차서 발코니 밑으로 떨어트 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지는 오펜바하에게 '그렇게 배고프면 알아 서 해먹어!!' 라고 외치면서. "그리고...오펜바하 님?" 미쉘은 오펜바하의 씰이기 때문에 '폐하'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둘만 있을 때는 '님'이라는 존칭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서로 거부 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펜바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미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어린 야수가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올려볼 때의 모습이다. 반면 그녀는 저신의 '어린' 주인을 내려보며 조금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그녀가...깨어났습니다." "어 정말? 누가 깨웠는데? 대단한데?" 오펜바하의 반응은 미쉘가는 대조적으로 담담하다. 오펜바하도 미쉘도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테이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기운이 헤스팔콘 제국의 북부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사실 미쉘이 카넬리안의 기운을 느낀 것은 그녀가 키오네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부터였다. 보통 씰 들보다는 월등한 감지력을 가지고 있는 미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오펜바하에겐 지금까지 말하 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정말 대단한 씰이지 그 여자는. 예전에도 그 씰 덕분에 애먹었다고." 오펜바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십대의 모습과는 달리 정말 오랜 시간을 살아온 눈빛으로 말이다. "그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미쉘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찾아. 그리고 내 앞으로 대려와." "...하지만." 미쉘은 말을 흐렸다. "싫으면 내가 직접 갈까? 할 일도 없는데." "아닙니다. 제가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마워. 미쉘. 근데 정말 빵가게 이름 같다. 다음 주인 만나면 좋은 이름 받아." "...예." 미쉘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카넬리안의 의미는 무엇일까. 미쉘은 한참 동안을 발코니 밑의 시가지를 내려보고 있는 오펜바하의 뒷 모습을 지켜보았다. 발코니를 타고 들어온 높은 바람이 미쉘의 회색빛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4. 농담이 아니라 줄리탄이 술을 마신 것은 정말 처음이다. 그렇다고 이런 곳에 저알콜 리큐르 같은 것이 있을리도 없고 -벨레시마 에서 싼값에 사온 어떤 나무의 뿌리를 우려낸 독한 술뿐이었다. 게다가 그 이름 모를 술에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마약 성분까지도 들어 있 었다. 도시에 따라서는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인 그런 독주. "...하아. 취, 취하는 건가? 너, 너무..." 딱 두잔 마셨지만 줄리탄은 머리 속에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옆에 서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카넬리안의 모습까지도 흐릿하게 보 였다. 말술을 들이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까지 그 의 귀에는 웅웅 거리는 날개 짓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뭐. 처음 마시기엔 좀 무리한 종류이긴 했지만... 내일 일하는데 지장 있을 것 같네." 카넬리안은 뒷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뭐랄까...괜히 술 마시자고 했다는 기분. 안 그래도 피곤한 줄리탄은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는 반쯤 잠들며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 귀여운데 의외로...그건 그렇고 이 술 되게 맛없네!' 사실 카넬리안은 한모금 입에 대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바닥에 쏟아 버리고는 조금도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맛없는 것은 절대 먹지 않는 다.'라는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이. 아가씨. 내가 한잔 살까?" 가슴에 털이 수북한 거한 하나가 카넬리안의 어깨를 잡으며 술냄새를 풍겼다. 전형적인 얼굴에 전형적인 목소리에 전형적인 대사...결론은 별 볼일 없는 놈이었다. "꺼져. 인간." 카넬리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평소 그런 류의 인간을 대하는 카넬리안의 태도란 매몰차기가 겨울 삭바람 같다. "큭큭. 얼굴은 예쁜 아가씨가 말하는 건..." "내가 지금 가만히 있는 이유는 이 여관이 박살나면 잘 곳이 없어서 일 뿐이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기분 나빴는지 '별볼일 없는 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상을 썼다. 보통 이런 상황이 끝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라고 외칠 차례다. "...꺼져." 카넬리안은 천천히 뒤돌아보며 그 자를 바라보았다. 소름끼치는 살기. 더 이상 찝적거리면 진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녀가 별 것 아닌 일로도 살기를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여자라는 사실 을 안 '별볼 일 없는 놈'은 스멀스멀 가게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자 그러면 저희 가게의 자랑인 메르퀸트의 노래를..." 대충 거적때기 같은 녀석을 처리했을 때 여관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무대 위로 나오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주인의 뒤에는 정말 로 슬픈 눈동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긴 은발의 여성이 조금 고개를 숙인 채 작은 *하프시코드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엘프 잖아.' 카넬리안은 메르퀸트라는 여성을 보며 단박에 그녀가 엘프임을 알 수 있었다. 보나마나 벨레시마 노예시장에서 팔려온 것일 꺼다. 그녀는 지 금까지 수많은 엘프 들을 봐 왔지만 저렇게 가련해 보이는 모습의 엘프 는 처음이었다. 인간에게 잡혀 온 엘프 들은 백이면 백, 모두가 슬프고 가련한 눈동자를 갖는다고 한다. 인간들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엘프 사냥 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술취한 무례한 들의 느끼한 휘파람 소리, 테이블을 두드리는 천박한 행 동 들이 시작되었고 메르퀸트라는 엘프는 계속 눈동자를 사람들과 마주 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의 하프시코드를 켜기 시작했다. 엘프 들은 선 척적으로 음감이 뛰어나서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부르는데 뛰어난 재 능을 보인다고 한다. 그녀가 켜는 하프시코드와 그에 맞춘 그녀의 노래. 엘프어 였다. 여기 있는 사내 들 중에 엘프어를 이해할 수 있을 자는 한 명도 없을테지만 카넬리안은 분명 그 노래가사가 떠나온 숲이 그리워 그 곳으로 돌아갔지만 모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대충 그런 가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몹시도 가느다랗고 슬픈 목소리 였다. '새장 속의 새.' 카넬리안은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무, 무슨 노래야..." 줄리탄이 쾅쾅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부시시 일어나 메르퀸트를 바라보았다. 피곤한 그를 잠에서 깨울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 였기 때 문에. "...저런 노래, 들어본 적 없어." "인간의 손아귀에 있는 엘프는 슬픈 노래밖엔 부르지 못해." 줄리탄은 멍한 표정으로 메르퀸트를 계속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전혀 다른 기분. 그리고 줄리탄은 취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란 왠지 모르게 한번도 보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줄리탄이 그녀의 노래며 얼굴에 빠져 있을 때 카넬리안은 차가운 표정으로 엘프의 가느다란 발목을 감고 있는 쇠사 슬을 지켜볼 뿐이었다. ** 1)하프시코드(harpsichord) :피아노포르테의 전신이었던 악기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울티마 시리즈에서 유명한 '이올로'의 노래는 그것을 연주한 것입니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톡특한 음이 왠지 슬프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건 좋은데...하프시코드는 켜는 것이 아니라 치는 거라고요? 그리고 어떻게 그 무거운 하프시코드를 들고 있냐고요? ...그, 그건...이 글에서는 그 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켜는 현악기입니다. (라고 둘러대겠습니다. 그럼 하프잖아...) -Blind Talk 너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게다가 계속 겹치는 여러 일 때문에 기 운이 나질 않아서 그다지 '밝지' 못한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집중해서 글 을 쓰기도 힘드네요. 생각이 잔뜩 머리 속을 돌아다니는데도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 이 답답합니다. 평소의 절반의 집중력도 없는 것 같음. -_-; 주변이 조금 편해지면 꼭 '제대로' , '자주' 올리겠습니다...그때까지 응원해 주세요.(무리한 부탁인가. -_-a) "잠깐...그러고보니까 또 여관이잖아. 다음부턴 여관에서 자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메모 했습니다.) Lou Bega의 Mambo No.5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89166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5-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19 20:37 읽음:120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5-2 : 믿을놈하나없다 관련자료:없음 [45186]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5-19 07:29 조회:300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북해 기사단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기사단이 모일 때까지의 시간은 일주일 정도..."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에 어두워 지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사단'이라는 것이 뭔지 나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내게 속삭였다. "각 영지의 기사 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인다고 생각해 봐. 적어도 수백은 될 껄.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때의 이유는 단 하나... 전쟁 뿐이야. 그리고 그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는 거지." 북해 기사단. 그들은 국가적 전란이 있을 때만 소집되는 북구 가르바트 제국 최강의 무력집단이었다. <> /F Chpater#5-2 : 믿을놈하나없다. -vis major 1. 리센버러 시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왕성은 헤스페리아 전체 성들의 규모로 치면 중간 정도의 크기이다. 방어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 니기 때문에 요새라기 보다는 거대한 저택저럼 보이는 고풍스런 그곳의 4층 집무실에선 리센버러 유일의 기사이자 훈작사의 작위를 갖고 있는 리 이 디트리히가 한 손에 로제 와인이 담겨진 잔을 든 채로 책을 읽고 있었 다. 책의 제목은 '달라카트 여행기 2권' '줄리탄님이 생각보다 늦는군...' 조금 무료한 표정에 이카테스도 어디론가 사라져 있는 모습에서 헬몬드 국과의 전쟁도 일단락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리 이는 방금 전 승리의 포상으로 영지를 주겠다는 리센버러 왕의 권유를 사 양 했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생각할 시간만 필요했다. '아아. 그는 기사가 아니었지...그렇다면 그 마을에 들렸겠군.' 리이는 현재 줄리탄 일행이 머물고 있는 마을에 대해 알고 있어 보였다. 그녀는 별 걱정 없이 책장을 넘기며 와인잔에 입술을 가져대 댔다. "리이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카테스의 목소리. 자신도 잠시 쉬고 싶다며 시내를 돌아다닐 줄 알았 던 이카테스가 왜 갑자기 찾아온 걸까. 리이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이카테 스는 좀 어두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이카테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리센버러 성에 식객 두 분이 오셨습니다." 보통 성에 찾아오는 식객이라면 다른 지역의 시인이나 귀족, 혹은 기사 다. 특히 명성이 높은 자 들이라면 그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 정도였다. "줄리탄 님과 카넬리안이?" 리이가 밝은 얼굴로 말했지만 이카테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 속을 불길한 기분이 스치고 지나갔고 리이는 불안한 표정으 로 천천히 아카테스에게 되물었다. "설마 그렇다면..." 이카테스 역시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이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톡 두드렸다. "대체...무슨 생각으로 여기로 온거야. 그 녀석." 리이의 불안감 그대로 그 '식객'이란 젤리드와 카리나 였던 것이다. 사실 젤리드는 파문기사에다가 얼마전까지 헬몬드를 위해 싸웠던 자. 다른 기사였다면 무슨 이유에서든 리센버러로 찾아오는 것 만은 피했겠지 만...젤리드는 그런 것에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 같았다. "보나마나 남부로 내려갈 여행비를 뜯기 위해 여기로 온 거겠지. 그렇게 잔뜩 벌어놓곤 대체 다 어디다 써버린 거야." 리이는 감옥에 들어갔던 알콜중독 남편이 다시 찾아와 문을 두드릴 때 처럼 눈을 내리깔며 중얼중얼 거렸다. 신경질 적으로 자신의 어깨 밑으로 내려온 푸른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사실 리이는 자기 돈으로 뭘 사 본 적도 거의 없는데다가 돈 들어가는 취미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여 자라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젤리드의 방탕벽이란 '광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던 것이다. '돈을 가지고 다니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라는 그의 신조처럼 그는 가장 빠르고 방탕하게 돈을 소비하는 수십가지의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어떻게...성으로 들일까요." 이카테스는 조심스럽게 리이에게 물었다. "그 놈을 누가 말리겠어. 전하도 황당해 하겠지만...어쩔 수 없지. 최대한 여기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객실로 잡아 줘." 리이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만약 젤리드를 식객을 받아주지 않 는다면 '예.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물러설 그가 아니다. 분명히 카리 나와 함께 성 앞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나가 보시겠습니까? 리이 님을 찾고 있던데요." "싫어. 만나고 싶으면 그 녀석 보고 여기로 오라고 해. 난 술이나 더 마실래." 리이는 와인잔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고 이카테스는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며 방을 나섰다. 2. 아니나 다를까...어제의 숙취는 줄리탄의 머리속에 계속 남았고 그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 잡으며 낡은 나무 계단을 느릿느릿 내려왔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울리는 끼익 끼익 거리는 소리까지 머리를 울릴 정 도 였으니 그가 술에 무척이나 약하다는 건 증명된 듯 싶다. "이봐!! 대체 지금이 몇 신데 이제서야 모습을 보여! 제대로 일할 마음이 있는 거야!! 엉?" 더러운 가죽 에이프런을 두르고 얼굴에는 잔뜩 턱수염이 나 있는데다가 불룩불룩 튀어나온 근육이 입고 있는 옷을 찢어버릴 것 같은 여관 주인 이 줄리탄에게 무척이나 거칠게 '아침인사'를 건냈다. '잘못 만든 고기만두 같아...' 줄리탄의 여관 주인에 대한 감상은 그랬다. 어쨌든 더 이상 휘청이면 그 고기 만두의 큼지막한 주먹에 육질이 연해지도록 두드려 맞을 것 같 았기 때문에 줄리탄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주방?" 주방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한달 전 쯤에 사 두었던 것 같은 야채 들의 시체가 한쪽에 쌓여 있었고 고깃살 들은 얼음에 보관해 두기는 커 녕 시커멓게 모여든 날벌레 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 어제 자신이 이런 음식 들을 먹었다는 사실에 속이 넘어올 정도. '이건 더 이상 요리가 아니라...전쟁이야.' 줄리탄은 힘이 쭉 빠져서는 전혀 날이 서 있지 않은 거대한 주방칼을 들고는 한번 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 큰 주방은 아니지만 도와 줄 사람 하나 없다. '그냥 기사 할껄.'...조금은 후회가 드는 줄리탄. "어이! 애송이!" 여관 주인이 서빙 도어를 두드리며 줄리탄을 부르는 바람에 그의 비관 적 상상이 잠시 깨져 버렸다. "같이 있던 그 아가씨. 내게 팔 생각 없어?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이것이 말로만 듣던 강제납치. 역시 범죄자 뜨내기 들이 자주 모이는 마을의 아침 대화 답다. "내가 괜찮게 줄테니까 어때? 보면 볼 수록 괜찮은 여자야." '가서 한번 해보시죠.'라고 말하려다가 줄리탄은 그래도 속된 목숨이지 만 살려두고 싶어서 참았다. 많은 사람 들이 착각하는게 보통 남여가 같 이 있으면 남자가 여자를 휘두르고 있다는 우월적인 생각을 한다는 거다. 세상은 그리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리센버러 국의 전하에게 보낼 여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지켜주는...시종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줄리탄은 가는 곳마다 '기사'도 되었다 가 '시종'도 되어버리는 자신의 꼴이 한심해서 눈 앞의 고기를 턱 하고 잘라버렸다. "푸헤헤헤헤!! 너 같은 약골이 누굴 지켜준다고? 내가 보기엔 천상 요리사가 어울릴 것 같은데!" '그 말이 정답이올시다...' 줄리탄은 대답도 할 기운도 없었다. 최근 들어 힘 빠지는 일만 생기는 것이 어째 불안하다. 아무튼 줄리탄은 많은 재료를 다루어본 적이 없는 시골 요리사지만 그래도 그 기술이 어디로 가진 않는다. 첫 손님을 맞을 때까지 줄리탄은 엄청난 속도로 모든 재료의 준비를 마치고 주방까지 꽤 나 청결하게 치워놔서 주인으로부터 '의외로 솜씨 좋은데. 너 차라리 요 리사 해라!'라는 칭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참 신나는 아침이다. '...썅' 3. 여관에는 식사를 하거나 여행자용...그러니까 장기보관용 식량 따위를 사가려는 손님 들이 의외로 많았다. 물론 그 이유는 이곳이 특출나게 맛 이 좋다거나 값이 싸서가 아니라 아무리 뒤져봐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부근에서 여기 뿐이다. 아무튼 여관 주인...생긴건 터진 고기 만두 같아도 돈 깨나 벌었으리라. 제기랄! 줄리탄이 머리 속에서 이 외마디를 몇번이나 터트렸는지 셀 수 도 없을 만큼 바쁘고 교대할 사람이 없으니 쉴 시간도 없다. 본래 이 짓 을 주인이 했다는데 이 정도의 '노동'이라면 그 근육이 이해가 간다. '카넬리안은 어디로 간거지. 뭐 또 허공이나 바라보고 있겠지만.' 줄리탄은 죽어라고 반죽을 하며 갑자기 카넬리안을 떠올렸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검과 함께 여관을 나가더니 해가 지고 있는 지금까 지도 소식이 없다. 하지만 줄리탄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페세테르 배속에서도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고래심줄 같은 여자이기 때문 ...이 아니라 같이 여행하던 중에서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마냥 지평 선이나 하늘 같은 것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좋은 눈으로 뭘 보려고 했던 것일까. (말이 많을 때만 보여줘서 그렇지) 사실 그녀는 줄 리탄보다 훨씬 말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저..." 찰캉 거리는 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메르퀸트가 줄리탄 옆으로 다가 왔다. 이 여관의 '소유물'인 엘프, 메르퀸트 였다. 메르퀸트는 특히 엘 프들 중에서도 겁이 많지, 아니면 버릇인지...그녀는 계속 줄리탄의 시 선을 피하고 있었다. 책 속에서나 나오는 숲 속의 요정의 모습(사실 비 슷한 존재지만) 그대로라고 해도 거짓이 아닐 정도로 메르퀸트는 가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다리가 묶여 있어?' 어제는 취해서 미처 몰랐지만 줄리탄은 그녀의 발목에 사슬이 감겨 있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다리로는 엘프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이라도 달리기는 거녕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메르퀸트가 밤에 노래를 부를 때 를 제외하면 거의 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물을 주시겠어요." 인간의 언어를 잘 사용할 수 없는지 어색하게 들렸다. "아...예." 줄리탄은 왠지 모르게 당황하며 옆의 식수통에서 물을 담아 주었다. "식사는 안해요?" "..."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물컵을 받아 조금 마셨다. 조금은 기대했다. '당 신은 어떤 일로 이곳에 왔습니까?' 혹은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그 것도 아니면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그는 기대했지만 그녀는 반쯤 마신 물컵을 놓으며 주방을 나갔다. 그녀의 그림자를 쇠사슬의 철컹 거리는 소리가 달라붙어 따라가고 있었다. 줄리탄은 그녀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얇고 긴 은발을 바라보았다. "이봐. 주인님. 대체 뭘하고..." '허억!' 이번엔 카넬리안이었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넋나간 줄리탄 옆에서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말도 없이! 놀랐잖아!!" "정말이지...엘프에 관심 많은 것 같아 보이네. 저런 분위기가 좋아?" "벼, 별로. 단지 신기해서..." 아직 줄리탄은 자신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정도로 여자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응?" 줄리탄은 카넬리안에게 뭔가 그리 낮설지 않지만 거부감이 느껴지는 기 운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희미하지만 기분나쁜 냄새였다. "뭐야. 왜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내 스타일에도 관심 있는 거야?" 그때 덜컥 문이 열리며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가 여관 내로 발을 들였다. 바짝 마른 몸이지만 입고 있는 요란한 옷이나 들고 있는 날카 로운 칼이 그가 '범죄자'의 전형 임을 알려주었다. 그 사내는 줄리탄과 카넬리안에게 찢어진 눈을 치켜올리며 서서히 다가왔고 그가 풍기는 살기에 주변 손님 들이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너...내 부하 들을 죽인게 너지."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그 사내는 칼날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딱 봐도 사람 십여명 쯤은 우습게 죽인 자 같다. "저요?" "너 말고!!!" 줄리탄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지만 그 사내가 노려보는 쪽은 카넬리안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애처로운 얼굴로 돌변하며 그 자에게 말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 같은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카, 카넬리안. 무슨 일이야." 줄리탄은 불안했다. 뭔가 일이 벌어질 조짐이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아 글쎄 내가 안죽였다니까."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그러나 그 사내는 눈을 얇게 뜨며 계속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내 부하 들은 붉은 눈의 여자에게 당했다고..." 그때 문에서 피가 흐르는 배를 부여잡고 있는 자가 쓰러지 듯 들어오 며 외쳤다. 그의 손은 분명 카넬리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여자야!! 저 여자가 우리를!!" "...." 너무 나이스한 타이밍이다. "쳇. 저 놈도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더할 나위 없이 뻔뻔했다. "...카넬리안." "역시 너로군!! 흥, 겁도 없구나!!" 흉터의 사내가 살기를 뿜으며 순간 뒤로 물러서선 자신의 곡도를 들었 다. 빠르게 상대를 베어버리기 위해 깊게 휘어 있는 그런 검이었다. "너 대체 어쩌자고..." "변명은 조금 있다 할께." 카넬리안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스트랄을 감고 있던 천을 풀 었다. "나는 인간 사냥꾼 사드로. 내 이름 쯤은 들어봤겠지." "전혀." 사드로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는 검을 현란하게 흔들며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널 죽이지는 않겠어. 대신 내 부하 들을 죽인 값을 톡톡히 치뤄야 할꺼야. 네 혀를 잘라버린 다음, 널 북부로 끌고 가서 비싼 값에 팔아 주지. 물론 내가 충분히 즐긴 후..." 사드로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들고 있던 곡도와 함께 사드로의 몸 이 깨끗하게 두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카넬리안이 자신의 미스 트랄을 휘두를 때는 은빛 광채가 순간 터져나오는 것 같다. 그녀는 별로 검에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지만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만들어진 차 가운 궤적의 범위 내에 있던 사드로의 몸이 종이처럼 갈라져 버렸고 그 는 표독스러운 그 표정 그대로 조각나서 피를 뿌리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 말이 니 유언이었을텐데 끝까지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더 이상 들으면 귀가 더러워질 것 같았거든." 모두 갑작스런 일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깃더미가 된 사드로를 바라보 았지만 카넬리안은 피 한방울 묻지 않은 미스트랄을 내리며 차갑게 쏘아 붙였다. 사람 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조용히 여관을 빠져나가고 있었 다. "카넬리안! 왜 죽인 거야! 대체 넌 왜 맨날 이런 식으로..." "그 놈들 처음부터 날 납치해서 팔아먹으려던 자들이었어. 인간 사냥꾼. 이런 마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놈들이지. 가만히 경치 구경이나 하던 날 덮치더라구." 그녀는 남의 일을 말하는 것 마냥 굉장히 태연했다. "그, 그렇다고 죽일 것 까지야..." "바보! 분명 널 죽이려고 했을 꺼야. 동행이었으니까. 이런 놈들 살려두면...나중에 귀찮아진다고. 지겹게 달라붙어." 줄리탄은 아까전 카넬리안의 몸에서 느껴지던 냄새가 뭔지 알 수 있었 다. 그건 '피냄새 였다.' "그리고...이 집의 주인도 한패겠지?" 카넬리안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 보았다. 거기에는 창피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는 여관 주인이 다리를 움 직일 생각 조차 하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그 주인 역시 방금전 카넬리 안의 믿을 수 없는 솜씨를 본 것이다. 그는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철판 으로 두른 몽둥이를 내려 놓았다. "저, 저는 저 놈들과 아무런 관계 없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황하면서 변명하는 모습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그 따위 더러운 마음으로 이 종족 들을 발밑에 두었다고 으시대는 저 역겨운 꼴이란. 그리고도 자기가 죽는 건 두려운 거야?" "카넬리안." "알아. 안 죽일꺼야. 나도 더 이상 지저분한 건 베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내일 여길 뜨자." 그녀는 대신 주인의 멱살을 잡고 1층 바닥으로 던져 버리고는 그대로 2층에 올라가 문을 쾅 닫아 버리며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대, 대체...어떤 분 들이신지..."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설설 기는 모습으로 줄리탄에게 말했다. 낮에 보여줬던 무례한 모습은 상상히 안갈 정도로 비굴하게 그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줄리탄은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요리사..." '...그리고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여자.' 태양이 떨어지자 아무일 없었던 처럼 밤손님 들이 다시 몰려들고 시작했다. -Blind Talk 해냈습니다. 내용은 현재 엉망이 되어가지만... 이틀 연속으로 올리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웃기게 보이려고' 혹은 '심각하게 보이려고', '무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쓴 부분 들이 읽는 분 들께는 과연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하는 건데요. 소심해 보일지 몰라도 솔직히 그 점이 가장 두려운 부분 입니다. 그래서...게시판이나 메일... billiken@hananet.net 으로 혹시 읽는 분 중에서 괜찮으시다면 평이나 지적, 부탁하고 싶은 것 들을 짧게라도 보내주신다면 정말 감사.(무시무시한 악평이라면 되도록 메일로.^^;) 역시 읽는 분 들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건 글을 올리는 사람 으로는 당연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처음 올려보지만.) 아...답장은 당연히 씁니다. 말은 서툴지만. Stratovarius의 Forever을 들으며... (마음 아프게 슬픈 가사가 좋아요...) 『SF & FANTASY (go SF)』 8997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5-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26 19:27 읽음:93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5-3 : 믿을놈하나없다 관련자료:없음 [45634]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5-26 07:47 조회:435 "나, 기사가 되고 싶어."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뭐? 뭐야...농담이지? 이제 와서 그런...나를 이적 시키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쓸 것 없어. 나는 이대로 지내는 것도 괜찮으니까." 도리어 당황하고 있는 것은 그녀였던 것 같다. "그런 문제가 아냐. 이대로는 난 네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널 지키고 싶으니까...기사가 되고 싶어." "날 지켜주기 위해서? 오펜바하 로부터? 멍청하게...너 같은 실력으로 오펜바하와 맞선다면 넌 분명히 죽어." 그녀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뭐라고 외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인 채 화가 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던 걸까. "내 전주인도 너와 똑같이...날 지켜주겠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결국 날 지키다가 그에게 죽어버렸어. 그 기분 알아? 테이머를 위해 죽어야 하는 건 씰이야. 대체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기사가 아닌 것에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널 만나서 겨우 겨우 그 기억을 잊어버리게 될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F Chpater#5-3 : 믿을놈하나없다. -animalike 1. 바닥에는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지만 여관을 찾은 자 들은 관심초자 없어 보였다. 어둑한 조명에서 마약이 섞여 있는 술을 들이키는 자들에게 돈이 되지 못하는 타인의 죽음 같은 건 흥미 밖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카넬리안 말대로 이런 자들에게 인간성을 강요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이건가. 그렇다고 이들이 세상이라도 집어 삼키려는 악인인 것도 아닌데.' 줄리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그의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고기를 다듬고 있었다. 사실 여관 주인이 이렇게 쩔쩔매게 된 이상 뭐...돈 내놓으라고 말해 도 냉큼 갖다줬지만...줄리탄은 어쨌든 정해진 날 까지는 일을 해줘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에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실 이대로 방에 들어가서 카넬리안 에게 들들 볶이는 것보단 이게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쳇. 기사를 사칭하고 다니더니...결국 요리사였군." "...또 너냐." 아까부터 1층을 서성이고 있던 자칭 라스페르 경이 줄리탄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퉁명스런 말을 던졌다. "이봐. 꼬마. 난 한번도 내가 기사라고 말한 적 없어. 알겠어? 혼자 착각하지 말라고!" "꼬마라니! 내 이름은 라스페르! 너와는 달리 진짜 기사라고! 못 믿겠으면 증명해 볼까!"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의외로 강하게 나온다. "알았으니까 일 방해하지 말고 제발 좀 사라져 줄래?" 줄리탄은 '라스페르 경'의 얼굴만 봐도 피곤했다. 이 집 부모는 뭐하나. 이런 녀석, 인간 만들지 않고. "흥. 누가 너 따위 보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난 메르퀸트를 지키기 위해 온거야. 훗, 너 같은 요리사가 이런 낭만을 알리가 없지만 역시 기사라면 아름다운 여자를 지켜야지. 암." '...유치해서 못 봐주겠군.' 세상에 인구가 많다보니까 별의 별 녀석 들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줄리탄은 신경 끄기로 했다. "아! 메르퀸트!!" 꼬마는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로 2층에서 내려온 메르퀸트에게 달려갔다. 곧 시작될 무대를 위해 쇠사슬을 끌며 내려온 것이다. '딱 봐도 저 꼬마. 메르퀸트를 좋아하는 거로군. 지켜주긴 개뿔을..' 줄리탄은 인간 수명의 수 배는 살았을 엘프와 기사를 사칭하는 꼬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시골 요리사와 최강의 씰의 조합도 어울리지 않기로는 만만치 않다. "메르퀸트. 나 라스페르가 언젠가는 널 여기서 구해줄꺼야!! 그때까지만 참아!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께!" '뭐가 기사의 명예냐. 대체 저 꼬마. 저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줄리탄은 라스페르가 얼굴까지 빨개져 가며 하는 말이 되게 한심하다는 생각 을 했다. 구해주다니...여기가 대마왕의 성, 지하 감옥 쯤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고마와요. 라스페르. 그때까지...기다릴께요." 줄리탄은 메르퀸트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고 말았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메르퀸트에게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던 따뜻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대책 없이 순진한 엘프라고 비웃고 끝낼 수도 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꼬마의 허탈한 '약속'도 자신의 처지에서 어렵게 찾을 수 있는 행복일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 엘프인 그녀에게서 인간의 여관이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하감옥 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뭔지 모를 죄책감이 줄리탄 의 폐부를 따갑게 찔렀다. 곧 그녀가 무대에 올라 하프시코드를 켜며 어제의 그 곡을 부를 때도 라스 페르라는 꼬마는 무대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꼬마가 여인을 지키는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 젤리드라면 '그렇게 구하고 싶으면 이 시간에 검술 연습이나 해. 마음 만으로 지킬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 까.'라고 쏘아 붙였을 꺼다. 줄리탄은 인간과 이종족,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것 들에 대한 답을 낼 수 없는 많은 의문 들에 골몰하며 잠들 듯이 요리에 빠져 들었다. 2. "어이. 거기 엘프. 처량한 노래는 집어 치우고 이리 내려와!" 무대 근처의 테이블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장본인은 야수의 가죽 들을 이어붙여 만든 옷을 두르고 있는 자. 자신의 과격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린 사람의 귀가 잔뜩 꿰어 있는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덕분에 메르퀸트의 연주는 멈춰 버렸고 계속 고개를 숙인 채로 두려운 눈빛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는 것으로 봐도 이런 경우 적잖게 당해본 듯 싶다. "손님. 이러시면..." 여관 주인도 덩치로 따지면 사람 겁 주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상대는 낮의 그 사드로라는 사내처럼 사람 죽이는 걸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자의 모습 그대로 였던 거다. 그는 주인의 목을 한 손으로 잡으며 천천히 들어 올렸다. "크으윽!!" 오늘이 여관 주인 수난의 날 임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주인을 쏘아보며 그 사내가 더러운 웃음과 함께 입을 열 었다. "이봐. 주인장. 내가 누군 줄 알아?" 대체 왜 힘깨나 쓴다는 녀석 들은 죄다 상대방이 자기 정체를 모를까봐 걱정하 는 걸까. 줄리탄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긴장하며 이층 계 단을 바라보았다. 이 이상 시끄러워지면...깊은 동굴 속에 잠들어 있는 야수... 가 아니라 이층 방에 있을 카넬리안이 미스트랄을 들고 튀어 나와 저 사내를 분명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커어어억. 커억...' 사실 주인이 혹시라도 그 사내의 이름을 알더라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었다. 그 사내는 팔을 잡아 당겨 자신의 얼굴로 창백해진 주인의 얼굴을 가져 다대며 또박 또박 말했다. "별로 너희 같은 잡 것들에게 내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능숙하게 말을 잠시 멈추며 긴장감을 주는 방법도 알고 있는 자였다. "...이 몸은 흉몽, 젤리드 빙크리스틴 님이시다!" 흉몽! 순간 그 말을 들은 1층 내의 모든 사람 들의 눈이 확대 되었다. 물론 줄리탄도 놀라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 사람 들과는 달랐다. '저 녀석, 진짜 무덤을 파는 구나.' 줄리탄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꼬마 기사에 고기 만두 주인에 인간 사냥 꾼에 이번에는 젤리드를 사칭하는 놈이라니. 떨거지 같은 인간 군상을 이 마을에 서 다 만나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 들은 이 자가 진짜 젤리드 인지 아닌지 알 리가 없다. 북부와 중부의 사람 들치고 흉몽, 젤리드의 악명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자 들이 몇이나 될까. 이 사내가 진짜 흉몽인지 아닌지 의심하며 칼이라도 뽑아볼 용기 있는 자 들은 없었으므로 주변 사람 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수근거리며 움직일 생각 조차 버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 알겠지!! 어서 저 엘프를 내 앞으로 데려와!" '젤리드'는 주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외쳤고 상대가 '흉몽'임을 알게 된 주인 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메르퀸트의 발목을 감고 있는 자물쇠를 황급히 풀며 몸부림치는 메르퀸트를 끌고 '젤리드' 앞에 대령했다. 강자 앞에 비굴한게 약자 라지만 주인의 경우에는 대단히 적응이 빠른 편이었다. "큭큭큭. 이런 마을에 있는 것 치고는 괜찮은데. 응?" 입을 꽉 다물며 고개를 돌리는 메르퀸트를 거칠게 잡아 챈 사내는 옷을 찢어버릴 듯이 자신의 냄새나는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이대로라면 다음 장면은 뻔하다. 줄리탄은 참지 못하고 주방을 뛰쳐 나왔다. "이 놈, 젤리드!!!그만두지 못해!!" "얼레?" 줄리탄은 라스페르가 자신의 대사를 먼저 꺼내자 놀라며 그를 보았다. 라스페르는 녹이 슬어서 잘 꺼내지지도 않는 자신의 검을 힘들게 뽑으며 '젤리드' 앞에 다가섰다. 분명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결국 상대의 기분을 자극하고 말았 다. 자칭 젤리드는 메르퀸트를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그는 진짜 젤리드 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하겠지만 이런 꼬마는 한손으로 으깨버릴 힘은 가지고 있 다. 그의 가슴의 귀 목걸이가 이리 저리 흔들렸다. "애송이. 지금 나한테 그만두라고 했나? 어엉? 거기 가만히 있어. 지금 그 자리가 무덤이 될테니까." 그 사내는 스스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검집에서 폭이 두꺼운 도를 꺼내며 으르렁 거렸다. 분명 흉수는 아닌 평범한 칼이었지만 그의 힘으로 내리친다면 라 스페르의 부실한 검과 함께 몸이 두동강 나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라스페르 는 어디서 배웠는지 어설픈 자세와 함께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 이상으로 겁 먹는 법을 모르는 꼬마는 아니었다. 두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저 녀석. 분명...메르퀸트를 지키기 위해서 저러는 거겠지만... 이대로는 죽어. 지키기는 커녕 개죽음 당한다고.' 줄리탄은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주방칼을 꽉 쥐었다. -Blind Talk 할 말은 다음 장에서... ps:...혹시 글 깨진 것 발견하시면 꼭 쪽지로 살짝 알려주세요.^^ 『SF & FANTASY (go SF)』 8997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5-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26 19:28 읽음:98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5-4 : 믿을놈하나없다 관련자료:없음 [45635]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5-26 07:50 조회:395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어깨와 허벅지의 창상에서 지겹도록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눈을 계속 괴롭히며 흘러내리는 피를 연신 닦아내며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 는 자를 흐릿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옷 밖으로 들어난 목 언저리와 손등의 푸른 비늘에서 그가 한 눈에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용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아아. 네가 바로 그녀가 말하던 줄리탄이란 인간이군. 내 이름은 테싱. 뭐, 내가 없을 동안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던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줄리탄과 겉으로는 별 나이 차이가 없어 보이는 테싱은 돌 위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길 수 없다. 나도 예전 보다는 훨씬 강해졌지만 오펜바하 조차도 정면에서 싸우는 것 만은 피했던 그녀의 전 테이머 테싱에겐 조금의 상처도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반면 그는 손가락 하나 만으로도 내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듯이 가끔은 '목숨을 버리더 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내 머리칼 끝에서 조금 씩 뭉쳐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을 정했다. "난 그녀와 약속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그리고 곁에 있겠다고." "너 인간 치고는 꽤 그럴 듯한 놈이로군. 그래서?" "그녀를 데려가겠어." 심장이 터질 것 처럼 뛰고 있었지만 내 검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킨 나는 그를 노려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를 올려보던 테싱의 입가에서 차가운 미소가 퍼지 기 시작했다. <> /F Chpater#5-4 : 믿을놈하나없다. -humanlike 1. " 없는 애송이! 죽어!" 그 사내가 어깨 근육을 씰룩이며 내리친 칼은 곧장 라스페르의 허리로 향했다. 라스페르는 그 순간에 그 칼을 막으려고 검을 움직였지만 설사 막는다고 하더 라도 분명 저런 검이라면 순식간에 두조각이 나 버릴 것이다. '제기랄!' 줄리탄이 뛰어들며 주방칼을 들이댔다. 굉장히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줄리탄의 그 칼은 상대의 칼날과 충돌하며 불꽃을 일으켰고 그 충격에 줄리탄은 자신의 칼을 놓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상대의 칼도 튕겨 나가며 라스페르가 두 동강나는 상황만은 피한 것이다. 라스페르는 줄리탄이 끼어들자 놀란 눈빛으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당신. 왜 날 도와주는 거야." "니미럴! 넌 또 뭐야!!!!" 자칭 젤리드는 이번에는 줄리탄을 보며 성을 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다른 곳에 선 젤리드라는 이름만 대도 모두 벌벌기는 판에 여기서는 '건방지게' 대드는 놈 이 둘이나 되는 것이다. 타겟이 되어버린 줄리탄은 조금 뒤로 물러서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는 아니었지만. "너. 내가 흉몽이라는 사실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거냐? 이거 알아? 네 놈은 이미 살려달라고 빌어도 늦었어!" 그는 당장이라도 줄리탄을 잡아 먹을 듯이 광분했다. "흥. 니가 파문기사 젤리드 빙크리스틴이라고? 내가 만난 빙크리스틴과는 많이 다른데?" "뭐, 뭐야?" 역시 광분하는 놈에겐 차갑게 대하는 것이 약이다. 그는 조금 움찔하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증이 없기 전 까지는 어떤 범인이라도 바락바락 우기는 것이 모든 소설의 공식이다. "너 같은 요리사 주제에 젤리드를 어떻게 알아? 말해보라구! 니가 뭔데 흉몽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야. 엉?" "....그건..." 좌중 긴장. 그 사내를 비롯해 라스페르, 고기 만두, 메르퀸트 그리고 홀 내의 사람 들 까지 그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다. 줄리탄은 모든 걸 포기한 초연한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내가...에이 씨앙 기사다! 방랑 기사라서 알고 있는 거다. 벨레시마에 나타났던 무자비한 방랑 기사 얘긴 들어 봤겠지!! 그게 나야 임마!!"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줄리탄도 스스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럴 때는 그냥 기사라고 말해야지 '우연히 엄청난 씰을 얻어 여행하던 중에 우연히 리센버러의 전쟁에 휘말렸다가 우연히 젤리드를 만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면 조금도 설득력이 없다. "그 방랑기사에 대해선 들어봤지만 그런 자가 왜 이런 곳에 있어!!" "믿던 말던 그건 니 자유다. 하지만 네 놈이 진짜 젤리드가 아닌 것 만은 확실해!" 일단 밀고 나가기로 결심한 줄리탄은 가열차게 상대방을 몰아 세웠다. 주변 사람 들도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여론이 줄리탄 쪽으로 기운 것에 그가 뭔지 모를 희열감을 느꼈다면...뻔뻔한 걸까. "오호호호호 오.랫.만.에. 옳은 소리 하셨습니다. 주인님." '이, 이 목소리는!!' 어느샌가 2층에서 내려온 카넬리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줄리탄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줄리탄의 표정은 '제기랄'이었다. "넌...또 뭐하는..." 그 사내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넬리안의 등장으로 사람 들은 더 이상 뭐가 뭔지 모를 상황까지 와 버린 것이다. "척 보면 모르냐. 씰이다. 이 분의." "씰이라고! 그럼 정말 기사?" "무, 물론이지." 줄리탄은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젤리드를 자칭한 그 사내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된다. "믿을 수 없어! 진짜 기사라면 내 칼을 피해 봐라!!" 돌발적인 사태. 그 사내는 줄리탄에게 칼을 내리쳤지만 그 칼날은 줄리탄의 몸 에 닿을 수 없었다. 카넬리안이 맨손으로 그 칼날을 잡은 것이다. 당연한 말이 겠지만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던 칼은 카넬리안의 손에 거짓말처럼 멈춰 버렸고 칼날을 잡은 카넬리안의 손에서는 피 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피해야 하는데 너무 느려서 잡아 버렸어." "...." 줄리탄은 이런 카넬리안의 모습 한두번 본게 아니라서 별로 놀랄 일도 없었지만 자칭 젤리드는 '정말 기사다!'라는 표정으로 뒤바뀌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나. 왜 그런 표정을. 난 정말 당신을 흉몽이라고 생각하는 걸." 카넬리안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던 칼에 힘을 주었고 순간 뚝! 소리가 나며 칼이 두동강 나 버렸다. 그 사내는 조용히 동강난 칼을 떨어트렸다. "언제나 흉몽을 만나면 그냥 두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참 잘됐지 뭐야. 내 앞에 있으니까. 그렇죠 주인님?" "...아무 말도 안할래." 줄리탄은 조금도 카넬리안에게 장단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 그 사내는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들이 박으며 무릎을 꿇고 줄리탄 앞에 절을 했다. 이 남자 역시 적응이 빠른 '인간다운' 녀석이다. "살려주십시오! 나리! 전 젤리드가 아니라 그저 하찮은 좀도둑일 뿐!! 명예로운 기사 나리께서 죽일 가치도 없는 미천한 놈입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두신다면 다시는..." "꺼져." 줄리탄은 피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예?" "니 말대로 죽이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어서 꺼지라니까." 줄리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끝까지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 그 사내는 엄청난 속력으로 여관에서 사라져 버렸다. "명예를 지키는 훌륭한 기사의 모습!! 역시 기사 셨군요!!" 여기 또 적응이 빠른 한 사람이 있었다. 라스페르는 눈물 까지 글썽이며 줄리탄 에게 엉겨 붙었다. 덕분에 줄리탄은 미칠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난 기사가 아냐!! 거짓말이라니까!! 나도 그 놈처럼 사기친거야!" "절 속이려고 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정말 꿈꾸던 기사의 모습 그대로에요!" 기사 무용담을 너무 많은 들은 꼬마가 아닐까. 줄리탄은 한 숨을 내쉬며 이젠 진짜 이름일지도 의심이 생기는 라스페르에게 말했다. "그런 말은 집어 치워. 기사의 겉모습에만 빠져 있는 철 없는 꼬마야."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버지는!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는 기사였다고! 나는 기사의 아들이니까...성인식만 치루면 분명히 기사가 될 수 있어!!" 줄리탄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카넬리안은 궁금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기사였다고? 무슨 가문이지?" "퀸티냥! 유명한 기사 가문이라고 어머니가 그랬어요! 분명 아버지는 뛰어난 기사였다고...지금은 가르바트 제국의 황제를 호위한다고. ...곧 돌아온다고." 라스페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넬리안은 가만히 생각하는 듯 싶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 퀸티냥 가문! 젤벤더 대륙에선 유명한 기사 가문이야! 야아. 너 그 가문의 후계자였구나. 대단한데!" "그렇죠! 내가 거짓말한 거 아니죠!" 라스페르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지만 줄리탄은 의문이었다. 그런 의 유명한 기사 가 뭐하러 이런 곳까지 와서 자식을 낳았단 말인가. 2. 같이 있겠다는 라스페르를 겨우 겨우 떼어놓고 방에 돌아온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퀸티냥 가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카넬리안. 아까 그 아이에게 한 말. 정말이야?" 처음에는 모른 척하던 카넬리안은 줄리탄이 재차 묻자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퀸티냥이라는 가문, 들은 적도 없어. 혹시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유명해진 가문 이라고 하더라도...상식적으로 그런 유명한 기사란 이런 곳에 거의 오지도 않고 오더라도 모르는 여자와 자식을 만드는 무책임한 짓은 하지 않아." "그 말은..." 줄리탄은 대충 카넬리안의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사라고, 귀족이라고, 거상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사람 들을 속이고 책임지지도 못할 짓 들을 저지르고 다니는 꼴은 사라지질 않네. 정말 짐승 같은 놈 들이라고 욕하고 싶지만...짐승 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아." "..." "뭐, 그 아이, 언젠가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나도 나쁜 여자야.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자가 내가 되고 싶지는 않아." '가끔은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행복할 때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일까. 카넬리안은 어쩌면 줄리탄에게도 이 세상의 '당연한' 잔혹함 들을 아직 다 말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줄리탄 역시 그녀가 보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 만을 살아온 '아이'일 테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줄리탄도 좋든 싫든 많은 걸 보고 알게 될 것이다. 그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당사자의 몫이겠지만. 3. 줄리탄이 아침에 일어나서 잽싸게 처리한 일은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같이 가겠 다고 따라붙는 라스페르를 떼어놓는 일이었고(결국 성년이 되면 줄리탄을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나는 여관 주인을 반 설득 반 협박 하다시피 하여 여관에 잡혀 있 는 엘프, 메르퀸트를 풀어주는 일이었다. 메르퀸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 고 있는 줄리탄을 바라보았지만 곧 줄리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에 여관을 떠났 다. "딱 이틀 있었던 건데...굉장히 긴 시간 동안 그 마을에 있었던 것 같아." 줄리탄은 주인이 '제공해 준' 나트를 타고 리센버러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이지만 챕터 하나를 잡아 먹었으니까 길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주인님. 정말 검술 배워볼 생각 없어? 어쩌면 말야...꽤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공짜로 가르쳐 줄께." 줄리탄의 나트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카넬리안이 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카넬리안이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줄리탄은 약간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검술이라니...왠지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 는 생각이 든다. 그때 카넬리안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거기 누구야!!" 그녀는 근처에 있는 꽤 커다란 바위를 보며 외쳤다. "왜 그래?" "누가 저 바위 뒤에 있어." 그리고 바위 뒤에서 누군가 조금 겁을 먹은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은발의 머리칼...메르퀸트 였다. "저...기다리고 있었어요." "메, 메르퀸트? 왜 여기에..."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갑자기 황무리 한 복판에서 메르퀸트를 보고는 두 눈이 커졌다. 지금쯤 자신의 종족 들이 있을 이슬란트 대륙 서부의 끝으로 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방해되지 않는다면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꺼야?" "제가 잡혀올 때 이미 그곳은 불에 타 사라져서... 다른 동족 들은 오랫 동안 인간과 함께 있었던 저를 받아주지 않을 꺼에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결국 엘프나 이 종족 들은 풀어줘도 갈 곳은 없다. 벨레시마에 있던 이종족 들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이제는 이해가 갔 다. 인간에게 더럽혀진 이상 그곳을 떠나봐야 받아줄 곳은 없다. "잠깐. 그런데...어떻게 우리가 이곳을 지나갈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이곳은 사방이 탁 트인 황무지. 길 따위는 없는 곳이다. 이곳으로 지나가게 될 줄 어떻게 알고 기다렸을까. "그건...두 분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조금 예지력이 있다는 말을 들어 왔어요." 엄밀히 말해서 그건 예지력은 아니었지만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인간보다 감각이 발달되어 있는 엘프들에겐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치 근처에 야수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느끼고 도망치는 동물들 처럼. "그렇군. 어쩔꺼야? 주인님?" "그, 글쎄. 그런 사정이라면 같이 가는 것도..." 쥴리탄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엘프와 여행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가 아니라 왠지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냥 놔둔다 면 언젠가는 또다시 인간 들에게 잡힐 것은 뻔했다. "고마워요. 저도 힘은 별로 없지만 남자니까 절대 방해가 되진 않겠습니다." 메르퀸트는 그제서야 안색이 밝아지며 줄리탄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하하. 방해는 무슨...잠깐." 카넬리안과 줄리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자?" 긴 금발과 좁은 어깨, 가느다란 몸과 볼록한 가슴...저건 누가 봐도 여자의 모습 이다. 메르퀸트는 '아차'하는 얼굴로 난감해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예전에 저는 대상인의 아내에게 팔려왔었는데... 그, 그때는 누가 봐도 남자 엘프 였습니다. 저의 주인이 부정을 저지르고 남편에게 들키자 제 탓으로 돌렸어요. 그래서 저는 궁형을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모습으로 변해서..." "......." 카넬리안은 '속았다.'는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니까...거세? 뭐 그렇게 된거야?" 메르퀸트는 카넬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줄리탄은 불안한 표정으로 카넬리안 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카넬리안. 거세가 뭐야?" "여자한테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이 멍청아!!!!!!!!!!" "왜 화를 내고 그래!!!" 4. 결국...메르퀸트는 그들과 동행하여 리센버러 시로 가게 되었다. 이곳은 생각보다 는 작은 곳이었지만 벨레시마와는 달리 역시 왕성이 있는 곳 답게 전체적으로 부유 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건물 들과 잘 포장된 도로가 돋보였다. 줄리탄은 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런데 말야 카넬리안. 여기는 본래 이렇게 분위기가 어두워?" 정말 이상했던 것은 이곳 사람 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침울해 있다는 것이다. 화창한 오후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글쎄...나도 모르겠는데." 카넬리안도 어깨를 으쓱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메르퀸트는 자신 때문에 사람 들의 표정이 안좋은 건지 불안해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크으. 대체 뭐야!"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카넬리안은 주변 사람 들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대화한 이후에 황당한 표정으로 줄리탄에게 돌아왔다. "무, 무슨 일이래?" "왕이 죽었데. 독살 당한 것 같다는데?" 제대로 말하자면 '리센버러 왕국의 프리스턴 국왕 전하가 서거 했다.'였지만 아무 튼 그게 그거다. "정말?" 줄리탄은 놀랐지만 사실 놀란 만한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카넬리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왕을 죽인 자가 젤리드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여기에 젤리드가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왕이 죽었거든. 지금 젤리드도 왕성에 잡혀 있데." 줄리탄은 뭔가 또 커다란 문제에 자신이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Blind Talk 아...(언제나 그렇지만) 너무 늦게 올려서 사죄의 의미로 2편을 올립니다. 한동안 크게 번졌던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에 대한 글들은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엘프라...산문의 에다 에서 나오는 엘프의 원형 이나 독일민간전승에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엘프 들의 기행에 대해서도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어떻게 보게 되었고 지금 이 글에서 보여주고 있는 엘프의 모습이 그때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실제 '엘프압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엘프는 본래 악몽이나 기형아 같은 것과 어울리는 존재인 것에 비해 여기서는 '할 말 못하는 이종족 중에 하나.' 정도니까.) 글의 설정이 타성에 젖어드는 것은 정말로 주의해야 할 요소지만 그렇다고 제 '알량한' 박식함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동기가 불순하지 않고 (짧은 깜냥을 늘어놓을 생각으로 쓰지 않고) 알고 있는 지식 들이 부드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갈 수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그때 머리에 있는 생각 들을 풀어 놓겠습니다. 메타모르포시스를 읽었다고 그 사람이 ovid가 되는 것은 아니고 또 그것을 알고 있다고 메타모르포시스 만으로 그리스 신화 전반을 해석 하려드는 천박한 짓 역시 범하고 싶지 않으니까요.(물론 상대방의 지적 수준이나 교양에 대해서 함부로 의심하고 싶은 생각 역시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메일과 나우와 천리안을 통해서 지적해 주시거나 추천해 주신 분 들께 정말 감사 드립니다.(크윽. 근래 하이텔에선 없음.T_T) (약한 소리 하긴 싫지만) 최근 엄청 기운이 없어서 글도 잘 안써지고 하는데... 정말 많이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지금은 아무 것도 안듣고 있습니다. :-) 『SF & FANTASY (go SF)』 90114번 제 목:[답변] 하이텔에서 환타지 소설 찾는 법.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5/27 16:40 읽음:757 관련자료 없음 -------------------------------------------------------------------------- --- mingirl 님 하이텔에서 환타지 소설을 찾으시다면 go serial 이나 go fnsty 를 쳐서 가보시길 정 안돼면 go 환타지를 쳐서 아무대나 들어가보세요. 그런 이만.... 『SF & FANTASY (go SF)』 9199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6-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6/08 13:50 읽음:896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6-1 : 신념의 대가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관련 자료:없음 [46450]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6-06 07:25 조회:483 나는 카넬리안이 자신의 검, 미스트랄을 깨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치명적인 용의 손길과 같아 보였다. 어떤 것이라도 베어버릴 수 있는 것 같은 날카로운 은빛의 광채가 그녀의 모습이 그 빛 속에 잠겨 버릴 정도로 포효하며 검 속에서 해방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변해 버린 그녀의 붉은 눈빛이 나를 노려 보았다. <> /F Chpater#6-1 : 신념의 대가 -stereo type **** 들어가기에 앞서 죄송스러운 말씀. 전 챕터(5-4)의 내용 중에 바뀐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Scene#4 부분, '젤리드가 리센버러 왕을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가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S#4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은 줄리탄과 카넬리안, 메르퀸트가 아직 리센버러에 도착하지도 않았고 왕은 죽지도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젤리드가 혐의를 받을리도 없습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되게 '치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발을 잘못 들어놨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라도 어떻게 바꿔 보려는 것입니다.^^; (물론 5-4를 다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 부분만 잘려나간 거니까요.) 그럼 사과의 말씀 드리며 - 들어가겠습니다. 1. 줄리탄 일행이 도착한 리센버러 국의 수도, 리센버러 시는 벨레시마보다 작았지만 수도의 그 모습에 어울리게 우아했다. 일단 사람 들이 입고 다니는 옷 들도 깨끗하 고 때론 호와스러웠으며 시끌거리는 유흥가 보다는 곳곳에 잘 손질된 나무 들이 모 두 특색 있는 중부 귀족풍의 2층 건물 들과 더불어 평온하고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 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 들의 억양 조차도 벨레시마 처럼 격하지 않고 좀 느릿하다 는 인상을 줄 정도로 시끄러운 목소리 하나 없이 차분한 '낙원의 오후'다. 줄리탄은 수도의 끝에 위치한 왕성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수레를 바라보았다. 그 수레에는 술을 담은 항아리와 천에 씌여져 있는 음식 들이 실려 있어 보였다. 분명 벨레시마에서부터 온 것이리라. "...느긋한 곳이네." 그는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어 보이는 이곳을 돌아보며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 이 들었다. 메르퀸트 역시 아직 잘 적응을 못하고는 있지만 별로 긴장하고 있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뭐 확실히 아름다운 곳이기는 해도, 이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체 몇 명이나 고생하고 있을지 생각하면...별로 유쾌하진 않아." 언제나처럼 카넬리안은 쉽게 긍정하지 않았다. "되게 삐딱하네." "아직까지는...인간은 좋든 싫는 남에게 피해를 입히며 사는 동물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싶지는 않으니까." "듣는 인간 기분 나쁘니까 그런 말은 머리 속에 끝내 줬으면 좋겠어." 줄리탄은 피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눈동자가 커졌다. 분명히 사람 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두 명은 리이와 이카테스 였다. 인기절정...이 도시의 그들을 간략하게 표현하면 그렇다. 2. "디트리히 님! 헬몬드 놈 들을 혼내주셨다면서요!!" "으, 으응..." "상처는 괜찮으세요? 오른 팔에 부상을 입으셨다고." "괜찮아요. 큰 부상은 아니니까..." 시민 들 사이에 둘러싸인 리이는 굉장히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천성이 사람 들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기에는 글러 먹었다. 어찌되었든 리이는 리센버러 유일의 기사. 사람 들의 눈에 '아름다운 수호신' 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카테스 역시 그 수려한 외모와 미성의 목소리 덕에(능력이야 어찌되었든) 여성 들에게는 인기 만점. 게다가 최근 벨레시마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부터 사람 들은 적잖게 들 떠 있던 참이었다. "저...리이 경." 줄리탄은 좀 머뭇거리며 리이에게 가가갔다. 인기 절정의 리이라. 왠지 주눅드는 분위기다. "아. 줄리탄 님. 카넬리안도 왔군요." "리센버러 시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리이는 예의 엷은 미소로 줄리탄을 맞이했고 이카테스도 줄리탄에게 예를 갖추 었다. "그런데 저 분은..." 리이는 좀 의아한 눈빛으로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메르퀸트를 바라보았다. 얇은 눈썹과 가는 머리칼, 무엇보다 엘프 특유의 흰자위가 거의 없는 연초록의 눈동자에서 그녀 역시 그가 엘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 이 쪽은...그러니까..." 그렇다. 줄리탄은 메르퀸트를 설명하는데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답고 악기도 잘 켜고 노래도 잘 부르고 말 수가 적지만 실은...남자 입니다.' 라고 소개하면 왠지 메르퀸트에게 미안하다. "저는...메르퀸트라고 하는 줄리탄님의 미천한 엘프 입니다. 줄리탄 님께서 제게 과분한 관심을 보여 주셔서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메르퀸트는 거의 몸에 베어 있는 듯한 말을 건냈다. 스스로 자신이 인간의 소유 라고 쉽게 말이 나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줄리탄은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주장하듯이 말했다. "소유물 따위가 아니에요. 제 동료입니다. 카넬리안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여행 동료. 서로 믿고 있으니까...앞으로 같이 여행을 떠날 겁니다. 메르퀸트와 카넬리안은 적잖게 놀란 표정으로 줄리탄을 돌아 보았다. 줄리탄은 되게 쑥쓰러운 표정이었지만. 가끔 줄리탄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로 '용기' 있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리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여행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두들." "그런데 리이 경은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카넬리안이 궁금한 듯이 묻자 리이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흐렸다. "오늘 밤에...승전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립니다. ...그래서 드레스를 사려고..." 척봐도 리이가 별로 드레스를 입는다든지 하는 '보통 여자의' 경험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줄리탄은 지금 상아빛의 하얀 평상복을 입고 있는 지금 리이의 모습도 좋았지만 화려한 드레스의 리이를 상상하는 행복에 빠졌 다. 반면 카넬리안의 표정은 '나도 드레스 입고 싶다.'였다. 아무튼 카넬리안은 예전 벨레시마의 어전 시합에서 받았던 옷을 단벌로 입고 다니는 불쌍한 신세. 그녀는 여기까지 온 이상 옷 한벌 꼭 장만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새로운 드레스를 사시려나 보군요." 줄리탄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리이 정도의 여자라면 드레스가 수십 벌 쯤 있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는 단순한 생각. "아니 그게 아니고...작년 무도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요...그게 가지고 있는 드레스 전부였고." 리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의외로 생활력이 없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카넬리안의 머리를 스쳤다. 사실 리이의 유일한 취미라면 좋은 와인을 음미하며 책을 읽는 것. 도리어 일상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는 여자다. 분명 요리도 못할 것이다. "이봐. 리이 여기까지 나와서 뭐하는 거야." 익숙한 남자 목소리. 저쪽에서 다가오는 있는 자는 젤리드와 카리나 였다. 대충 리이가 말하지 않은 '성 밖을 나오고 싶은 이유'가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리이는 삼일 전에 잡으려다 실패했던 바퀴벌레를 다시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왜 나만 쫓아 다니는 거야. 귀찮아." "내가 가는 길에 니가 있었던 것 뿐이야.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무도회 분위기 엉망으로 만들지 말고 해 떨어지기 전에 여길 떠나는 게 좋아." "난 내가 움직이고 싶을 때만 움직여." 젤리드를 바라보는 리이의 살벌한 눈빛에 줄리탄은 움찔했다. 역시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카리나는 카넬리안을 보자마자 방금 전까지 젤리드에게 응석 부리던 모습은 싸악 사라져 버린 채로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다. "너, 의외로 일찍 다시 만나게 되었군. 죽을 준비는 되었겠지?" "말했을텐데...난 피하지도 숨지도 않아." 돌발 상황. 카리나의 양 팔을 감싼 팔찌에서 하얀 빛이 솟아 올랐고 카넬리안도 카리나를 노려보며 미스트랄을 감고 있던 천을 풀기 시작했다. 메르퀸트는 갑작 스러운 대결 무드에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둬!" "싫어!" 젤리드와 줄리탄이 거의 동시에 외쳤고 카넬리안과 카리나도 동시에 대꾸했다. 뭐 그에 대한 반응에 차이가 있다면 줄리탄은 한숨을 내쉬었다는 거고 젤리드는 자신의 검, 흉수를 뽑았다는 점이다. 두 남자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이었다. 어쨌든 조용한 오후의 평온한 도시 한복판에서 검을 뽑았다는 것은 일상 적이 일은 아니었다. 젤리드가 검을 뽑자 사람 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젤리드의 이런 행동이 나른한 오후의 활력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난폭한 비약일까. "내 권한으로 이 도시에서 내쫓아 버리기 전에...그 검 다시 집어 넣어." 이번에 끼어든 것은 보다 못한 리이였다.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마. 카리나." "날 카리나라고 부르지 말랬지!!!" 리이까지 칼을 뽑는데는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리이의 인내심이 폭발해 버렸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자신의 레이피 어를 뽑은 것이다.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칼 끝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꺄아~ 리이 경이 검을 뽑았다!" "파문 기사 따위는 단번에 끝내 버리세요!" "흉몽! 너 오늘 사람 잘못 만났다!" 속 모르는 시민 들의 원치 않는 환호의 갈채가 리이를 감싸기 시작했고 결국 무대 의 중심에서 벗어나 버린 카리나와 카넬리안은 왠지 싸울 의욕을 잃고 멍청한 표정 으로 리이를 바라보았다. "리, 리이 님. 사람 들이 보는 앞에서는...그것 보다 드레스를 사시는 것이..." "나 안 싸울 테니까 젤리드도 그만 해. 나 여기서 쫓겨나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이카테스와 카리나가 둘을 말리기 시작했지만 리이와 젤리드의 엄악한 분위기는 쉽게 가실 줄을 몰랐다. 3. "붉은 눈의 씰을 본 적이 있나...어서 말해."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거쳐 갔던 황무지의 '이름 모를' 마을에 온 자는 여관 주인 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짧은 금발의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테이블을 닦던 '고기 만두' 여관 주인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알고 싶으면 돈을 내. 나도 그 여자 때문에 피해가 크다고." 주인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테이블을 닦던 걸레를 집어 던졌다. 생각하기도 싫다 는 얼굴이었다. "...그 말은 그 씰을 알고 있다는 말이로군." "내 말 못 들었어? 돈이 없으면 꺼져. 두드려 맞기 전에!" 여관 주인의 난폭한 대꾸에 사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세이드 폰 러셀. 헤스팔콘 제국, 리히트 야거의 일원이다.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하지 않겠다." 리히트 야거(근위엽병)는 헤스팔콘 황제의 직속부대로 가르바트 제국의 북해 기사단 과 비견될 정도의 막강한 정치, 군사 집단이었다. 서대륙 사람들 치고 리히트 야거의 두려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이름 높은 부대였고 세이드 폰 러셀이라고 하면 '검은 추기경'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한 리히트 야거의 상급 기사 중에 하나 인데 ...문제는 대체 그런 거물이 뭣하러 이런 곳까지 온단 말인가. '이놈도 사기꾼이다!'라는 생각이 여관 주인의 뇌리를 스쳤고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 는 사내에게 주인은 욕을 퍼부었다. "쳇! 전에는 흉몽 이더니 이번에는 세이드 라고? 야 이 새꺄! 니가 세이드 라면 난 오펜바하다! 어디서 사발이야! 개폼 그만 잡고 후딱 안 꺼져! 엉?" "...." 세이드가 여관 주인을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4. "주, 주, 주, 죽을 죄를 졌습니다!! 으으...제, 제발 살려 주세요!!" 홀 가운데의 큰 나무 테이블에 여관 주인이 누워 있었고 그의 양 손과 발에는 굵 은 못이 박혀 식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흘러 나오는 붉은 핏방 울이 쉴새 없이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고통을 넘어버 린 공포에 휩쌓인 채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세이드에게 미친듯이 애원 했다. "붉은 눈의 씰이 어디있지...말 해." "그, 그 여자의 이름은 카넬리안, 분명히 그랬습니다!!" "카넬리안? 그의 테이머는 누구지?" 세이드는 고저의 차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도 몰라요. 하, 하지만 리이 경을 만나러 간다고 분명히..." "리이? 리센버러의 푸른 맹금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제, 제발...살려주세요. 나리." "그렇다면...지금쯤 리센버러 시로 갔겠군." 세이드는 그렇게 중얼 거리며 허리춤에서 회를 칠 때 쓰는 칼에 가까울 정도로 얇 고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단도의 손잡이에는 리히트 야거의 심볼이 세겨져 있었 다. "그, 그걸로 뭘 하시려고..." 주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칼은 여관 주인의 오른쪽 귀를 능숙하게 잘라냈다. 비명 보다도 먼저 피가 터져 나왔고 세이드가 잘려나간 귀를 비웃는 표정으로 주인 의 눈 앞에 가져다 대자 주인의 눈동자가 커지며 듣기에도 끔찍한 악소리가 여관 내 를 갈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가 테이블이 부서질 정도로 미친듯이 몸을 흔들 때마다 못에 박힌 손과 발의 상처가 더 크게 벌어졌다.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겼고 형용할 수 없이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세이드의 고막을 때렸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차가운 세이드의 표정 뒤의 뒤틀린 희열이 자극 받았다. "다음은 코?" 차가운 광기. 세이드의 시퍼런 눈동자가 그런 광기를 담은 채로 - 뺨에 붙은 핏방 울을 닦아내며 느릿 느릿 말을 이었다. 주인은 극단적인 공포에 휘말린 모습으로 자기도 모르게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의 온몸이 경직되고 있었다. "그, 그만해!!! 제발 그만!!!" "너는 지금 절벽 한 가운데에서 목이 매달려 있어. 밑은 낭떨어지...네 목에 걸린 줄은 계속 네 목을 죄어 오고 있지. 다행이도 네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어서 그 칼로 네 목을 조르는 줄을 자르면 넌 떨어져서 죽고 줄을 자르지 않으면 목이 졸려 죽게 되지. 빨리 죽든지...천천히 죽든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두 가지 밖에 없어." "으아아아아!! 아아악!!" 세이드가 주인의 머리 속에서 이성을 사라지게 하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물으며 어떤 의지도 없이 순전히 고통과 공포 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이해를 못하는 것 같군. 이봐 저스틴." 세이드는 주인의 배에 자신의 단도를 닦아 허리춤에 집어 넣으며 뒤에 서 있던 자신의 두 씰 중 하나, 저스틴을 불렀다. 소년의 모습인 저스틴은 다른 씰인 줄 리에트와는 달리 항시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씰로 마치 자폐증에 걸린 아이를 연상시키는 쳐진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저스틴은 세이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여관 주인에게 다가가며 그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순간 숨이 얼어버릴 정도의 차가운 냉기가 홀 내부를 감돌며 그의 몸이 딱딱하게 얼기 시작했고 곧 얼어버린 몸에 균열이 생기며 몸이 조각조각 나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붉게 굳어버린 핏덩이 들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녔다. "내가 왜 씰 하나 잡아 오는 하찮은 일을 맡아야 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니까...줄리에트." 세이드는 별로 흥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섰고 검은 빛의 가죽옷을 입고 있는 줄리에트가 치켜 올라간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자 천정과 무대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곧 여관 전체로 불이 옮겨 붙었다. 헤스팔콘의 엘리트 중 엘리트인 세이드가 카넬리안을 잡기 위해 나선 것은 순전히 '난신' 오펜바하의 명령 때문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의 제1황제의 명령에 헤스팔콘의 황제인 하우프트만으로서는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가장 뛰어 난 상급 기사인 리히트 야거의 세이드 폰 러셀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넬 리안이 자신의 영향권 밖인 가르바트 제국이나 달라카트 제국으로 가기 전에 잡아서 오펜바하에게 바치는 것만이 오펜바하에게 충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반면 세이드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줄리탄 일행과 리센버러 국은 헬몬드의 승전을 축하하는 무도회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Blind Talk 엄청 오랜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_-; 사실 그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 없을 바엔 연재를 그만 둘까...라는 생각 까지 했습니다. 제가 지금 남은 시간을 쪼개서 이 글에 쏟는 애정 정도로는 너무 고맙게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 들의 기대를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스스로 다짐했던 my pace가 무너진 것 같아서. 역시 '기대'라는 것은 한번 받으면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 마음인 것 같습니다. 슬럼프라면...슬럼프 였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 앞으로는 할 수 있는 만큼 자주 올리겠습니다.(...이런 말 막해도 될까 몰라.) 에 그리고 세이드에 대해. 앞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젤리드와는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놈입니다. 보기에 좀 짜증나실 분도 있겠지만 참아주세요. 본래 그런 녀석 입니다. -_-; 참고로 세이드(sade)는 새디스트(sadist)의 어원인...마르퀴스 드 세이드 에서 가져왔습니다.(본명 : Louis Donatien Alphonse Francois de sade) 그리고 그가 쓴 책의 이름이 '저스틴'과 '줄리에트' :-) (...본래는 둘 다 여성입니다.) 어원만 봐도 성격을 딱 알 수 있음. -_-; 아무튼 한참 동안 얼어 있다가 막 풀려나서 단번에 써서 올리는 것이라서 제대로 다시 훌터보지도 못했네요.(덕분에 좀 전개가 정신이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문맥이나 내용 상에 오류가 있으면 제가 좀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빨리 1부(현재 1부 진행중...반정도 진행되었습니다.)가 끝나야지 사건도 커지고 상황도 긴박해 질텐데... 1부 : 재래(再來) - 이 세상에 다시 돌아 옴 2부 : 재래(在來) - 예전부터 있어 옴 3부 : 재래(齋來) - 어떠한 현상이나 결과를 가져 옴 ...과연 3부까지 갈 수나 있으려나. -_-; 『SF & FANTASY (go SF)』 9527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6-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7/05 13:34 읽음:66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6-2 : 신념의 대가 관련자료:없음 [48122] 보낸이:김철곤 (KScorp ) 2000-07-05 06:49 조회:150 "주인님은 약하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무리하지마. 그러다가 죽어버리면 곤란해 지는 건 나라고.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야? 응?" 분명 그녀라면 지금의 내게 그런 말을 해주었을 꺼다. 그녀가 있었다면 - 내 옆에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날 위로해 줬을 꺼다. 하지만 이제 없다. 며칠 째 내 눈에 담고 있는 것이란 병실의 공허한 천정뿐, 집요한 악령처럼 내 몸을 떠나지 않고 욱신거리는 고통의 사슬 뿐이다.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줄리탄. 지금 눈물 흘리는 거야? 붕대 갈아 줄까?" "아니...이제 괜찮아," 물키벨이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석상 같이 굳어 버린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 /F Chpater#5-2 : 신념의 대가 -Poem for things that never were 1. "카넬리안, 그만 가자. 곧 무도회가..." "알았어. 알았다구." "...그 말 대체 몇 번째 인 줄 알아?" 카넬리안의 무성의한 대꾸에 줄리탄은 피곤한 몸을 잔뜩 꼬아대며 중얼 중얼 거렸지만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시선은 오직! 눈 앞에 놓여 있는 드레스 들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렇다. 장소는 리이가 이브닝 드레스를 사갔던 리센 버러의 유명한 샵. 그녀는 결국 드레스를 사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물론 줄리탄은 전혀 돈이 없기 때문에 리이가 빌려준 돈을 통해서 사는 거지만.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되잖아. 리이 경이 기다린단 말야." "253년만에 입게 될 드레스야!! 운명적인 순간을 방해하지 말아줘 주인님!" "......" 대단한 박력.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드물게 집착을 보이며 수 시간 째 불타오르고 있는 카넬리안을 보며 줄리탄은 씰 고유의 엄청난 체력 과 지구력을 이런 곳에 이용한다는 건 정말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갖가지 옷 들을 들고 서 있는 직원 들의 표정에도 피곤함의 한계를 지난 두려움의 그림자 까지 깔리기 시작했다. 대체...오늘 중에는 끝낼 수 있을까. "메르퀸트. 너는 이런 옷 들을 잘 알테니까 네가 골라주는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간만에 '인간처럼' 즐거워하고 있는 것에는 왠지 기분은 좋았다...라고는 하지만 정말이지 의외로 이런 쪽엔 우유부단한 여자다. 아무튼, 메르퀸트라면 지금은 얇고 간소한 회색빛의 천 옷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지만 예전에는 이런 저런 드레스 들 많이도 입어 보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하는 듯한 메르퀸트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전 남자라서...여성 들의 옷은 잘 모릅니다." "...." 엘프나 인간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야 있겠지만 얇은 눈썹, 긴 은발의 머리칼에 작은 양손까지 모으고 있는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듣는 사람을 허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줄리탄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창 밖에선 감색 제복을 입은 점등부 들이 돌아 다니며 가로등의 불을 올리고 있었다. 리이가 분명히 무도회는 저녁이 시작 되며 열린다고 했었다. '저렇게 점등부가 돌아다닐 때가...저녁의 시작이라고 분명히 그랬었지?' 도시의 저녁이란 보통 이렇게 '형식적'이었던가. 이런 것 불편하지 않을까. 줄리탄의 머리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흐음. 역시 이게 좋을 것 같아." "골랐어?!"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구원의 빛! 드디어 결국엔 믿기지 않지만 그녀가 결정을 한 것이다. 그녀에게도 일말의 동정심 이라는 것이 있긴 있었던 것이다. 점원들의 창백한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거 어때?" 카넬리안은 수줍게 웃으며 자신이 고른 옷을 들고 줄리탄을 돌아보았다. 특이하게도 레이스가 거의 없는 대신 등과 다리 부분이 깊게 패어 있어서 신체의 굴곡이 매력적으로 들어나는...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장삼이지만 이런 헤스팔콘 중부에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드레스인 것이다. 그녀의 독특한 미적 취향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응? 주인님? 이 드레스 어떠냐니까? 좋지? 그렇지?" "...." 줄리탄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여자의 마음이란... "그거 처음에 싫다고 던졌던 옷이잖아." ...여자의 마음이란 대현자의 지혜 따위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오펜바하가 황제로 있는 젤밴더의 황성 오버암메르가우. 하늘에게 무언의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그 거대한 황성의 지하로 오펜바 하는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황성에 지하에는 믿을 수 없는 규모의 거대한 지하 정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력으로 빛과 열기를 방출하는 인공의 태양과 그 인위적 에너지를 받아 들이고 있는 각종 식물 들이 말 그대 로 인공의 낙원을 만들고 있는 곳.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건가요. 당신." 그 낙원의 한복판에 들어선 오펜바하의 앞에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살며시 나타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얀 피부, 진한 녹색 머리와 별을 닮은 눈빛이 이 낙원의 일부 같이 느껴지지만 쉽게 감정을 엿볼 수 없어 보이는 표정이 카넬리안을 닮은 여자였다. "적어도 나 지금은 대륙의 황제 잖아? 조금은 존칭어를 써 달라고." 오펜바하는 예의 짓꿎은 미소로 장난하듯 말했지만 제이미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인간이 만든 직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그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이미아 역시 카넬리안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아 테싱 녀석의 씰. 뭐 쉽게 끌려올 성격은 아니지만 나로선 그녀가 꼭 필요하니까. 이해가 안가는 건 테싱 이외의 누군가가 그녀를 깨웠다는 건데. 그게 가능할 줄은 몰랐어. 누굴까 그녀의 테이머는? 제이미아 넌 알고 있겠지?" 그녀는 단지 아무말 없이 오펜바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오펜바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그렇고 넌 대체 언제 네 주인을 찾을 꺼야? 주인도 없이 깨어있는 씰이라니...좀 우습지 않아?" "우스운가요?" 그녀는 스치듯이 그렇게 짧게 답한 뒤에 수풀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아마 인간들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녀의 모습이란 모성애가 거세된 지모신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3. 결국 줄리탄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무도회가 시작된 상태. 줄리탄은 왕성에서 연미복까지 빌려서야 무도회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숨 막히게 귀족적인 분위기 덕에 그는 자연스럽게 스물스물 근처의 베란다로 밀려 나가 멍하니 창 밖이나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 까진 좋았는데. "....." "아아. 공기 좋다. 그렇지 주인님?" 카넬리안이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고른 드레스까지 입은 채로. "....." "왜 그런 얼굴이야?" "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줄리탄은 황당한 표정으로 옆에 기대어 있는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무도회 외에는 전혀 입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서 여기서 대체 뭘하고 있는 건가. "왜 여기에 있냐니? 여기 있으면 안되는 거야?" "그게 아니고...너 무도회에 끼려는 거 아니었어? 235년만의 드레스라며." 줄리탄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카넬리안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간단명료 했다. "253년이야. 그리고 난 귀족 들의 무도회 같은 거 싫어. 저들 사이에 뒤섞여 있으면 화장품 냄새, 향수 냄새에 질식할 것 같다고. 웃기지 않아? 저렇게 죄다 똑같은 동작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라는 게." 카넬리안을 말은 확실히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무도회에 참석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옷을 샀냐고. 리이님에게 돈까지 빌려서 말야!" "아아 걱정하지마. 리이님은 그런 작은 돈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줄리탄은 왠지 억울했다. 자기도 그 옷을 고를 때까지 몸을 비비 꼬아대며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뜸 '난 무도회가 싫어요!'라고 말하다니. "뭐랄까나...이런 드레스 꼭 한번 입어보고 싶었으니까." "그게 다야?" "이상한 남자네. 드레스 입고 싶은 거하고 무도회하고 무슨 상관이야?" 카넬리안은 조금 삐죽거리며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어둑하게 보이고 있는 바 위산의 허리를 바라보았다. 어깨가 살짝 들어난 드레스 사이 사이로 파란 달빛 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몸이란 유난히 아름답다. 그녀는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 는 듯 하더니 메르퀸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메르퀸트. 아는 노래 있으면 하나 불러줄래?" "여기서요?" 메르퀸트는 드물게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찌되었든 이곳은 인간 귀족 들의 '놀이터'. 엘프가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켜는 곳은 선술집이지 여기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로부터 굉장한 핀잔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르퀸트도 그걸 알기게 주저하는 것이었지만 카넬리안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할 뿐이었다. "뭐 어때. 안 그래요 주인님?" "언제는 물어보고 결정했냐? 맘대로 하셔." 사실 줄리탄도 메르퀸트의 미성의 노래라면 한번 더 들어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어떤 것을 불러드릴까요." "아무거나. 지금 부르고 싶은 것." 그 말이 끝나자 메르퀸트는 눈 앞에 어둡게 실루엣을 그리고 있는 산, 가로 등이 빛무리를 곳곳에 심어 놓고 있는 리센버러의 시가지를 초록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고 곧 얇게 흔들리는 목소리는 노랫가사가 되어 귓속에 울리기 시작 했다. 줄리탄에 대한 배려였던가? 메르퀸트는 드물게 인간들의 언어로 부르는 것 이었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니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여라. 덩쿨과 돌 들 모두 홀로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를 보지 못해서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활기에 차 있을 때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지만 그러나 지금 안개에 휩싸여 그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홀로 격리시키는 어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일 수가 없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니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여라.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인 것이다. 차라리 노래라기 보다는 긴 이야기를 짧고 슬프게 줄인 것 같이 들렸다. 줄리탄은 '인간의 손아귀에 있는 엘프는 슬픈 노래 밖엔 부르지 못해.'라는 카넬리안의 말이 떠올랐다. 메르퀸트는 좀 멋적은 듯이 고개를 숙였고 카넬리 안은 베란다에 등을 기대어 자신의 검 미스트랄을 껴안듯이 잡으며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잠깐 좀 갔다 올께." "어디?" "화장실." 줄리탄은 베란다를 떠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무도회의 가상자리를 지나서 복도를 향했다. '내 나이가 어려서 일까?' 줄리탄은 메르퀸트의 노래에 마음이 뭔지 모르게 흔들린 것 같았다. 4. '저 여자는...' 복도 한켠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줄리탄은 커다란 붉은 빛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포니테일의 여자를 보았다. 치켜 올라간 두 눈에도 불구 하고 왠지 귀여워 보이는 앳된 동안의 모습. 카넬리안과 사이가 무척이나 안좋은 저 씰의 이름은 분명히 카리나였다. 그녀는 줄리탄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사나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줄리탄을 보며 방긋 웃는 것이었다. "당신은 가랑의 테이머로군요. 성함이...줄리탄님." 줄리탄은 왠지 골목 구석에 웅크려 있는 검은 고양이에게라도 다가가고 있는 기분으로 카리나에게 걸어갔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녀는 젤리드의 검 '흉수'를 무릎에 놓고 있었다. 검은 천에 뒤덮인 작은 무릎 위에 차가운 검 이 무겁게 놓여 있는 모습이란 묘하게 가련해 보인다. 씰은 본래 그런 거지? "네 주인은 어디로 가고..." "글쎄요. 무도회 어딘가에서 귀부인이라도 꼬시고 있지 않을까요? 난 너무 어리다고 무도회에 들어오지 말래요. 수백년이 지나도 영원히 미성년자인 내 입장 따위는 전혀 생각해 주지 않는 주인이니까요. 헤헤." 카리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의외로 편한 씰이다. 덕분에 줄리탄은 갑자기 한가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생각이 들었다. "씰 들은 모두 카넬리안처럼...인간 들을 싫어하는 거야?" "카넬리안..."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굳어질 정도였지만 카리나는 한숨을 내 쉬며 잠시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말을 이었다. "전 아직도...아직도 정말 가랑이 싫지만 그것만은 사실이에요. 가랑이 우리 들보다도 훨씬 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젤리드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젤리드의 차가운 눈빛에 움찔한 줄리탄과는 달리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좀 심통 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젤리드! 너무해! 나 무지하게 심심했단 말야! 무도회 따윈 그만두고 우리 놀러 나가자." 카리나가 거의 울먹이듯 애원하고 있는데도 젤리드의 시선은 줄리탄에게 향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젤리드 경." "난 이미 기사가 아니다. 경이라는 칭호는 내겐 역겨워." 당연한 말이겠지만 보는 사람이 얼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젤리드란 정말 쉽게 호감이 가질 않는 성격이다. 그가 그나마 농담이라도 하는 건 리이 앞에서 뿐인 것 같다. "죄송합니다. 젤리드 님." "님이라니...넌 씰이냐? 약한 네 모습 일부러 증명할 필요 따위 없으니까 그냥 젤리드라고 불러." "아 예." 줄리탄은 조금 울컥했다. 카넬리안의 입담이라도 있으면 한마디 되받아쳤 겠지만. "줄리탄이라고 했지. 리이가 찾고 있더군. 가보는게 좋을꺼야." "그러죠! 젤리드씨." 남이 보기엔 잔뜩 힘이 들어가서 우스운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줄리탄의 머릿속은 카리나가 미처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대체 줄리탄은 알지 못하는 카넬리안의 무엇을 말하려던 것이었을까. 좋은 말은 아니었을 것 같다. -Blind Talk 이제와서 죄송하다고 말해봐야...소용 없겠지요? 되게 늦었습니다. 그렇다고 비축분을 많이 준비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한챕터 정도 써둔 것 정도...뿐.) 솔직히 이번 편을 몇 번이나 뜯어 고쳤는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 이지만 쭉 다시 읽어보니까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라는 말이 실감나네요.-_- 글을 기다려 주신 분들께 정멀 정말 죄송하고 다른 곳에 올려주시는 분들 께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뭐 개인적인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아 보아야 읽는 분들 짜증만 불러 일으킬 것이 뻔하니까 앞으로는 자주 올리겠다는 결심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라고 말해봐야 이젠 믿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_-; 그리고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서도... 메르퀸트가 즉흥으로 부른 노래의 가사...라기 보다는 시에 가깝지만. 헤르만 헤세의 '안개속에서'라는 시 입니다. 제가 지은 게 아닙니다. (혹시 '이런 가사를 쓰다니 이 사람 대단해.'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셨다면 이 글을 읽고 배신감에 몸부림치셔도 할 말 없습니다. 그런 시를 제가 직접 쓸 수 있었다면 뭐 노벨 문학상이라도 도전하고 있었겠지요.) 전공이 국문학이다 보니까 이런 저런 시나 소설 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헤세의 '안개속에서'는 특히 외국 시 중에서 감동 받은 것 들 중에 하나 라서 어떻게든 꼭 넣어 보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문제가 된다면...뭐 삭제하거나 바꿔야 겠지만.) 헤세 특유의 목가적 이미지가 묻어 나오면서도 굉장히 사색적인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고나 할까...역시 독어를 좀 무리해서 의역한 것이라서 본래 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 내용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본 내용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마음속꿈, BYoung, 에레부스, supermew, twohong, AnkyEa, gue7 님 들께 감사드립니다. 본 글에 대해 이모저모 메일이나 게시판, 쪽지, 세이 등을 통해 독촉 혹은 추천, 혹은 의문점을 가져 주신 분들 이라서 글을 제대로 올리지 못한 한달간 적잖게 기뻤습니다.^^ (다른 BBS나 웹 상의 분들은 자주 들려 글을 볼 수가 없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점이 아쉬웠지만.) 물론...특별히 말씀은 없으시더라도 기다려 주신 분들께도 정말 정말 감사. (이렇게 띄엄띄엄 글을 쓰니까 조회수 줄어드는 거야 각오하지만...) ...몇 챕터만 지나면 1부가 끝나네요.(정해진 대로 간다면...) 점점 사건을 키워서 2부에서 크게 터트려 버릴 계획입니다. 마냥 순진한 줄리탄에게도 모종의 시련을 슬슬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T-SQUARE의 knight saga를 들으며... (제목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PS용 그란 트리스모의 오프닝 음악. 일단 현란하고 박력이 있어서 자주 듣습니다...) 『SF & FANTASY (go SF)』 9629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6-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7/12 14:16 읽음:66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6-3 : 신념의 대가 관련자료:없음 [4854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7-12 06:12 조회:190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입니다. 인간이란 어찌 이렇게 이상야릇한 존재인가 하고 절실히 느껴졌다.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즐기며 살 수 있는데도, 세계와 그 세계의 내막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을 전유하고 하는 무모한 욕구로 종종 불편하고 위험한 지경에 놓이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인가 하고 생각 되었던 것이다. <> /F Chpater#6-3 : 신념의 대가 -Come'die noire 1. "조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무도회가 끝나고 곧 어전파티가 시작 됩니다." 줄리탄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 리이는 이전까지 카넬리안, 메르 퀸트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카넬리안의 드물게 다소곳 한 표정을 미뤄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리이는 씰이나 이종족에 대해 상당히 호의 를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저 여자...기사라면 무조껀 좋아하는 씰 일이지도 모르지. 맞아. 분명히 그럴꺼야. 리이 경이 식당 종업원 쯤 된다면 상대도 안해 주었을 꺼야.'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평소 자신을 너무나 '편하게' 대하는 것을 생각하고는 조금 투덜거리며 리이에게 다가가갔다. 그러다가 줄리탄의 두 눈이 커졌다. "왜 그러십니까 줄리탄 님?" "저...그 옷은 드레스가 아닌데요?" 그렇다. 리이가 입고 있는 옷은 평소에 자주 입는 상아빛 외출복. 뭐 그 옷 도 남루해 보이는 옷일리는 없고 게다가 무도회라서 그런지 자신의 기사훈위를 나타내는 휘장도 걸고 있었지만 대체 아까 사왔던 드레스는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이카테스가 입고 있나? 카넬리안에게 이브닝 드레스 덕에 들들 볶인 다음부터 드레스라는 것에 대단히 신경을 쓰게 된 줄리탄이었다. "아...입어 보려고 했는데 역시 제겐 어울리지 않아서..." 리이는 자신 없는 말을 할 때면 그 푸른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며 말꼬리를 흐리는 버릇이 있다. 아무튼 줄리탄은 뭔지 모르게 억울한 기분이 다시 들었다. 리이는 드레스 말이 나온 다음부터 뭔가 대단히 쑥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이리 저리 빙글거리다가 조용히 베란다에서 사라졌다. 분명히 한번 입어 봤을 꺼다. 저래서야 칼 쓰는 것 말고는 도저히 써먹을 데가 없잖아...라고 젤리드가 있 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놀려 먹었을 꺼다. 2. "주인님...뭔가 이상하지 않아? 저 무도회?" 무도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을 연주하고 있는 음악을 통해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카넬리안은 베란다의 끝에서 창 넘어 무도회의 모습을 붉은 눈동자에 담으며 말했다. "이상하다니 뭐가? 넌 본래 인간 들이 하는 일이라면 다 이상하다고 하잖아." "이봐요 농담이 아니라니까. 잘 봐. 죄다 칼을 차고 있잖아." 카넬리안의 말대로 무도회에 참가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 정도 되어 보이는 자 들의 허리춤에는 죄다 칼을 차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냐? 리이 경도 칼을 차고 있었잖아?" 시골 청년 줄리탄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 까지다. 카넬리안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아쳤다. "리이 경이야 이 왕국의 기사로서 혹시라도 생길 문제에 대비해서 검을 소유할 수 있는 건 당연하지만...다른 참가자 들이 검을 차고 무도회에 들어온다는 건 상식 이하라고. 춤추러 오는데 칼이 무슨 필요람? 그리고 말야...뭔가 이상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 같아 이 무도회." "이 마을...아니 이 나라 풍습이 아닐까? 게다가 너도 칼을 가지고 있잖아." 그렇다. 카넬리안 역시 천에 쌓여 있긴 하지만 그 커다란 검 미스트랄을 품 에 안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검을 들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다른 사람 들이 들고 있다고 이상해 할 필요 없는 거잖아. "오호호호. 그거야 나의 뛰어난 최면 마법 덕분이지." "...." "경비병 정도에게 최면 걸어서 구워 삶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 맘만 먹으면 칼이 아니라 공성포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어. 메르퀸트도 그런 방법으로 들어왔지롱. 잘했지?" "...."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하긴 어느 잘난 귀족이 무도회에서 '천박한' 엘프가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겠나. 카넬리안의 성격을 대충 파악한 메르퀸트 역시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술렁이던 사람 들의 목소리가 일시에 정적으로 이어지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리센버러의 노왕 프리스턴이 나타난 것이었다. 결국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메르퀸트를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부탁하고는 '좀 이상한 기운'의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3. "검은 추기경...세이드 폰 러셀 백작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이드라면, 리히트 야거 전체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세이드 단독입니다." 헤스팔콘 4대 가문 중에 하나인 러셀 가문의 후계자 세이드가 황성을 떠났다 는 '사건'이 가르바트 수뇌부의 정보망에 들어온 것은 세이드가 리센버러에 도착하기 얼마 전이었다. "헤스팔콘에 있는 정보원의 말에 의하면...이것은 오펜바하 제1황제의 명령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제1황제...그가 대체 무슨 일로 중부의 여우 하우프트만 황제에게." 수하의 낮은 목소리의 보고에 눈빛을 날카롭게 갈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자는 가르바트 북해 기사단의 일원인 마르켈라이쥬 혼 이었다. 보통 사람의 키로 는 그의 어깨 근처에도 오지 못할 거인의 높이에 오크 정도는 한손으로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은 완벽한 전사의 몸을 가진 그는 헤스팔콘의 세이드 처럼 북구 가르바트의 대표 적인 기사의 하나. 특히 헤스팔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지금 같은 때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당연히 선봉에 설 역량을 지닌 자였다. "저로서도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제1황제의 칙명 이라면 작은 일은 아닐 것 입니다." 마르켈라이쥬에게 보고하고 있는 날렵한 몸의 사내는 제1황제라는 말을 듣거나 꺼낼 때마다 살짝 살짝 두려운 빛이 눈가에 감돌았다. 사실 평민 들 에게 거의 모습을 들어내지 않는 오펜바하의 의미야 '대체 뭐가 뭔지 모를 하늘 위의 존재' 정도겠지만 적어도 문서 상으로라도 제1황제의 관여를 받고 있는 제국의 수뇌부 들에게는 '난신'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범접할 수 없는 외경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앞으로도 짐작할 수도 없는 스스로의 목적으로 제국 들을 움직일 것이다. 물론 그 움직임의 원동력이란 오펜바하가 가지고 있는 불가항력의 힘에 의해 서다. 강대한 힘이란 그 힘이 사라진 뒤라면 안심하고 전설로 구분할 수 있 지만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하고 있다면 언제라도 가슴을 억누르는 악몽이 될 수 있다. "세이드가 혼자서 실행할 수 있는 제1황제의 칙명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 마르켈라이쥬는 거대한 체구에 비해서는 치밀한 남자였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Blind Talk 제기랄 제기랄. 실은 6-3과 6-4는 한 편이었습니다. 내용상 나눠서는 안되는 것인데...올리려고 했지만 올릴 수 있는 제한에 걸렸다는 말이 계속 나와서 (이상하다...560줄 정도 인데...) 어쩔 수 없이 두개로 나눠서 올립니다. 덕분에 이번 6-3은 정말이지 김빠집니다. 꼬옥 6-4까지 연결해서 읽어 주세요. 흐윽...T_T 『SF & FANTASY (go SF)』 9629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6-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7/12 14:17 읽음:61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6-4 : 신념의 대가 관련자료:없음 [4854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7-12 06:13 조회:171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주인님. 초콜렛 만들 수 있어?" 심심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던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나는 달라카트에서 정신 없이 바빠진 지금에 와서도 적어도 요리책을 게을리 본 적은 없었는데...처음 듣는 요리잖아 그건. "초콜렛? 그게 뭔데?" "아아 역시 무리구나. 하긴 이제 그 재료도 구할 수가 없으니까. 역시 너무 오래 산다는 건 별로 좋은게 아냐. 주인님은 적당히 살다 죽어라. 그게 험한 꼴 안보는 지름길이야." 기분 나쁜 말을...요리사로서의 탐구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만드는 법 알려줘! 내가 만들어 보일테니까!" "무리라니까 그러네. 잊어 버리세요. 주인님." "그러니까 일단 알려주기나 하라니까!" 나는 그 이후 반나절 동안 그녀를 따라 다니며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되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피하다가 결국 잠들어 버렸다. <> /F Chpater#6-4 : 신념의 대가 -Cold Blood 1. 리센버러의 어전파티는 줄리탄에겐 정말로 이상했다. 줄리탄이 아무리 무지한 시골 청년이라도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자 들의 표정 이 굳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왕의 농담에 허허 웃으면서도 그 속은 어떤 이유로 굳어 있다는 것 쯤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식객의 자격으로서 왕의 근처에 앉아 있는 줄리탄은 살짝 살짝 두리번 거리며 사람 들의 표정을 살폈 다. 곱슬머리 가발을 눌러쓴 배 나온 남자, 본래 살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두꺼운 화장을 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 삐쩍 마른 몸에 구두쇠의 표 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각양각색의 사람 들이었지만 정말이지 하나 같이 얼굴에 위화감과 긴장감이 덕지 덕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줄리탄이라고 했나. 리이를 도와 벨레시마를 지켜준 것은 고맙게 생각 하고 있네." "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줄리탄은 갑작스런 왕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왕의 모습이라면...늙고 늙어서 제대로 앞이 보일까 걱정이 될 정도의 노인. 벗겨진 머리 위로 자꾸 흘러내리는 왕관만 벗어버린 다면 그냥 길 가에서 동네 꼬마 들에게 있지도 않은 옛날 얘기나 들려주며 조용히 잠들 날을 기다릴 그런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긴 왕이든 소작농이든 산적이든 벗겨 놓고 보면 심장 하나 달린 인간일 뿐이니까. "도리어 리이 경에게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황공하옵니다.'라는 말이 빠지긴 했지만 프리스턴 국왕은 별로 게의치 않아 하는 듯 했다. 그는 마치 어린 사위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웃으며 고개 를 끄덕였고 그 때 마다 이미 오래 전에 탄력을 잃은 목의 살결이 부자연스럽 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줄리탄은 왠지 이런 왕의 모습이 편하게 느껴졌지만 부담스러운 것이라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단 근처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술잔을 집어 들고 있는 젤리 드만 빼고. "원하는 것이 있나? 짐의 고마움을 보여줄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게나. 작위를 원하는가? 리센버러의 기사가 되어주지 않겠나?" 줄리탄은 그 말을 들으며 슬쩍 카넬리안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스프를 마시다가 '작위'라는 말에 놀라서 줄리탄을 바라본 카넬리안의 표정 은 말하자면 '작위를 받아! 기사가 되는 거야! 요리사에겐 미래가 없다구!' 였다. 저렇게 애원의 눈빛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니던가. 어쩌면 줄리탄이 작위를 냉큼 받아 기사로 '변신'해 버리면 카넬리안의 태도 가 바뀔지도 모른다. '저는 주인님이 자랑스럽니다.'라고 말하며 수줍게 웃을 지도 몰라. 하지만 말야...'그런건 너무 형식적이지 않아?' 줄리탄은 카넬리안에게 의미 심장한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며 왕에게 또박 또박 말했다. "전 기사가 될 자질이 없는 몸. 작위는 제게 과분할 따름입니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이 거부하자 눈썹을 떨며 들고 있던 은제 숫가락을 조용히 휘어 버렸다. 그녀의 대단한 증오가 줄리탄의 목언저리까지 스며 온다. 어떠면 이 파티가 끝나면 줄리탄의 허리를 분질러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가. 겸손한 젊은이로군. 하지만 리센버러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아. 디트리히 가문에서도 지금의 기사는 리이 경 하나 뿐. 여성의 몸이면서도 더할나위 없이 훌륭히 이 왕국을 지키고는 있지만 리이, 저 아이는 도무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말야." '아이'라...국왕은 리이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는 듯 했다. 리이는 앉아 있지 않은 채로 관습대로 파티장의 저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말이 나오자 쓴웃음을 잠깐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몸은 내가 알고 있지. 얼마 못 살아. 그런 건 거스를 수 없지. 게다가 왕비도 얼마전 눈을 감았고...그래서 그런지 이 나이에 불안해 지는 건 어쩔 수가 없어. 자네 같이 훌륭한 청년이 이곳에 있어준다면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말야." 조금 들어간 알콜 탓인지 일국의 왕 답지 않게 편한 말투였다. 왕은 상당히 줄리탄을 높게 생각하고 있나 보다. 뭐랄까...씰의 테이머 면서 기사 작위 도 없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일까. 카넬리안이 고개를 돌리며 혼자 서 투덜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왕국에 요리사가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런 약해 빠진 주인님 필요 없을 겁니다.' 였을 꺼다. (게다가 왕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니까 16세 줄리탄은 미성년. 기사 작위를 받는다고 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기사가 되지 못한단 말이다.) "그보다 아버님...아니 전하. 외람되오나 어서 왕세자를 정하시는 것이 이 리센버러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을까 생각 되옵니다. 리센버러의 백성 들도 왕세자가 한시라도 빨리 정해지길 원하고 있사옵니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 왕가의 첫째 왕자인 벨버린이었다. 벌써 40대는 되 어 보이는 모습으로 노쇠한 왕을 대신하여 왕국의 거의 모든 부분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왕국의 실력자로 왕국의 실세라고 해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대를 이어 왕이 될 '왕세자'를 재촉하는 이유라면 분명 둘째 왕자 때문일 것이다. 현재 10살도 되지 못한 어린 둘째왕자 랑스는 왕국에 대한 공헌으로 치자면 첫째 왕자에게 조금도 미치지 못하지만 문제는 랑스가 뒤 늦게 얻게 된 왕비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이다. 반면 첫째왕자 벨버린은 첩의 아들로 적자는 아니었다. 랑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왕세자가 될 것을 당연시 했던 벨버린으로서는 랑스의 존재가 거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벨버린의 반대파 들은 랑스를 중심으로 뭉쳐 랑스를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자리에선 그런 중요한 말을 꺼낸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데..." 프리스턴 국왕 역시 후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첫째 왕자가 왕세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었 지만. 자신하고 있는 것은 첫째 왕자 파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전 20여년 이상을 이 왕국의 번영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어서 한 시라도 빨리 왕세자가 정해져서 헬몬드 놈 들이 더 이상 넘볼 수 없도록 이 왕국이 더욱 더 번성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 는 말씀 입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벨버린 왕자의 20년 운운하는 약장수 선전 같은 자기 자랑과 함께 지금까지 쌍방에서 유지되고 있던 긴장의 기운이 깨지며 홀 내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 다. 이제 대충 줄리탄으로서도 이 이상한 '긴장감'의 근원이 뭔지 이해가 가 기 시작했다. 그것은 첫째 왕자 파와 둘째 왕자 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신 경전. 여기서 벨버린이 이렇게 갑자기 치고 나오니까 둘째 왕자 파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째 왕자 쪽의 측근 한 명이 일어서며 외쳤다. "랑스 왕자님께서도 왕세자가 빨리 정해지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벨버린 왕자님의 공헌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누가 보아도 정통성을 지닌 랑스 왕자님께서 왕세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모르는 소리! 아직 정치를 조금도 배우지 못한 랑스 왕자님께서 왕세자가 된다는 것이 나라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전통성을 핑계로 나라를 망치려는 패거리 들이 어디서 큰소리야!" 이쯤 되면 아직 아무도 안죽었는데 유산 낼름 삼키려고 서로의 머리통을 쥐어 뜯으며 싸우는 가족 들의 아귀다툼과 스케일만 달랐지 본질은 전혀 차이 가 느껴지질 않는다. 도무지 리이는 이런 일에 적응이 안되는지 수심에 찬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개판이군." "쳇. 인간들이란." "귀족 놈들. 가발이나 쓸 줄 알지 형편 없잖아." 젤리드, 카넬리안, 카리나는 거의 동시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분위기 덕에 카넬리안과 카리나가 적어도 여기서는 서로 고개를 돌릴 뿐 으르렁 거리지 않는 것이 유일하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상황은 서로 칼을 뽑아 왕보다 먼저 누구 한 둘 죽어 나갈 기세 였다. "모두 조용히 해! 왕가로서!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없는 건가 너희들은!" 결국 프리스턴 왕이 노쇠한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힘들게 소리를 칠 때에 와서야 조금 조용히 지는 것 같았다. 줄리탄이 보기에 여기서 가장 불쌍 한 사람은 역시 이 나이에 소리를 질러야 하는 프리스턴 국왕, 그리고 그 다음 이 어린 둘째 왕자 랑스가 아닐까. 줄리탄이 보기에 랑스라는 '소년'은 입고 있는 보라빛 벨벳 천의 옷이 너무 커 보여서 옷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은 인상 을 주는 아이. 왕자라는 기분도 들지 않고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쩌면 랑스는 왕위 계승이라는 것에 아무런 생각도 없을 지도 모른다. 단지 하필이면 이렇게 태어나는 바람에 첫째 왕자의 증오 를 한몸에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불쌍한 사람은... '세번째는 나로군. 대체 내가 왜 이 사이에 끼어야 하는 걸까. ...이 왕궁의 주방은 어떨까. 화려하겠지. 주방에 가고 싶다...' 줄리탄은 왕위계승을 첫째 왕자가 할지 둘째 왕자가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넬리안 같은 성격이었다면 '밥 먹을 때 싸우면 체하니까 나가서 좀 싸워욧!'이라고 외쳤을 텐데...줄리탄은 단지 이 왕궁 어딘가에 있을 화려할 주방을 상상하며 현실에서 도피했다. "좋다. 말을 잘 들어라. 나도 곧 말하려 생각하고 있었다." 프리스턴 왕은 양미간을 찡그려 안그래도 많은 주름을 늘려가며 자기 앞의 핏빛 와인에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순간 모두의 이목이 왕의 우물우물 거리는 입술에 집중되었다.(앞서도 말했지만 젤리드만 빼고.) "...리센버러는 오랜 역사를 이어나갈 왕국이다. 그리고 짐은 강한 나라를 원하지는 않아. 단지 항시 평온하여 쓸데 없이 짊어질 걱정거리가 없을 타국의 귀감이 될 나라가 될 수 있길 언제나 기원하고 있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왕은 천천히, 하지만 끊이지 않으며 길게 서두를 뽑았다. "왕세자는 둘째 랑스로 결정한다. 곧 리센버러의 백성들에게 정식으로..." "잠시만! 아버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는 벨버린이었다. 인간의 저런 표정은 어떤 기분이 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흙빛이 되어버린 얼굴에 양 볼 끝이 씰룩거리며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왕실의 예절이고 뭐고 생각날 겨를이 없을 그의 머리 속은 그저 담담한 표정의 프리스턴 왕에게 던질 말이 잘못 만 든 스프처럼 멋대로 뒤엉켜 있을 뿐이었다. "저, 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시 랑스가 적자이기 때문에! 저는 당신의 아들로서 이 나라를 위해 20여년간을 위해 제 모든 것을..." "충분하지 않느냐!" 또 20년 운운하는 말을 막으며 왕의 반론이 시작되었다. "벨버린 너는 왕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낙원의 한가운데에 자라 잡은 옥좌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야. 나도 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어. 그건 남들에게 현명하다는, 뛰어나다는, 존경스럽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 거대한 나라에 서 있는 사람들의 생명과 제물과 그들의 믿음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왕이야." 이미 그것은 왕의 말투가 아니라 곧 평생을 몸담았던 자신의 직업을 그만 둬야 할 시간이 된 늙은 가장이 아들을 바라보며 훈계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기침을 쿨럭이던 왕은 가슴을 가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곧 초원의 흙이 될 이 늙은 몸이 네게 한 가지를 말하주고 한 가지를 부탁하마. 벨버린 너는 왕이 될 자가 아니다. 랑스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도 나는 네게 내 뒤를 이어가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네가 왕이 되면 너와 모두가 불행해 질 것이다. 하지만...너는 이 나라를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랑스가 왕이 되면 네 힘으로 네 동생을 도와 주거라. 그건 치욕이 아니다. 도리어 자랑스러운 것이지." 줄리탄은 귓가를 울리는 그의 말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으며 자신의 아버지 를 떠올렸다. 그도 어린 줄리탄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자신의 가치를 제 대로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을 하든 그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건 맡은 일에 얼마나 충실 하느냐 하는 것이지. 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강한 힘을 얻는다는 것은 곧 그 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된다. 권리와 의무 는 언제나 함께 찾아오는 것이니까...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도 책임질 수 없 다면 잡지 말아라. 너를 불행하게 만들테니까.' 뭐 이 말이 자고 있는 줄리탄을 억지로 깨워서 말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꽤나 줄리탄으로선 소중한 추억이었다. '이 말을 하시고 며칠 뒤에...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지.' 줄리탄은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벨버린이라는 왕자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이런 분위기에서는 줄리탄이 뭐라고 말해도 무시 당하겠지. "아버님. 한번만 더 말하겠습니다. 그 결정을 바꿔 주십시오!" 벨버린은 나름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왕의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역시 왕은 왕. 그 노쇠한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라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대노한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홀 안을 갈랐다. "못난 놈! 그렇게 왕의 자리가 탐난단 말이냐! 이 리센버러를 네 놈이 무너트리려고 작정을 했구나! 썩 여기서 나가! 꼴도 보기 싫다!" 벨버린은 잠시 동안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움직이지도 않았다. 문제는 벨버린의 오른 손이 그의 허리춤의 칼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리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녀의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게...20년 동안 왕위를 기다리며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해 온 저에 대한 마지막 말 입니까? 프리스턴 국왕 전하?" 말이 끝나자마자 벨버린은 검을 뽑아 짐승 같은 외침을 흘리며 왕에게 향했고 온힘을 다해 찌르는 그의 검 끝은 왕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것이 사람의 근육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란 의외로 무서울 정도로 가볍다. 그 소리는 한 인간의 모든 사고를 일순간에 제로로 바꿔버리는 소리 지만 그냥 그것은 단지 파악하는 낮은 마찰음 뿐이다. 벨버린의 검은 오래된 종이 같은 프리스턴 국왕의 살갖을 뚫었고 순식간의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하얀 테이블보와 벨버린의 온몸을 쥐어 싸듯이 물들이기 시작 했다. '제, 제길!' 리이는 날아갈 듯이 레이피어를 뽑으며 자신의 주군에게 달려갔지만 도착 했을 때는 아버지의 피에 뒤덮여 있는 벨버린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볼 수 있을 뿐. 왕인 순식간에 절멸한 상태였다. 당황하는 리이를 비웃는 표정으 로 바라보는 벨버린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이 경. 너는 리센버러의 왕족을 위해 봉사하는 기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넌 왕족 간의 다툼에는 끼어들 권한이 없어! 설마...왕족의 일원인 내게 칼을 들이댈 정도로 기사도가 빈약한 자는 아니겠지? 말해라 리이 디트리히 경."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이를 비롯한 디트리히 가문은 리센버러의 왕가를 위해 봉사하기로 한 계약을 맺은 가문. 리이로서도 리센버러 왕가의 사람 들에게는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상대가 왕을 죽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저는 왕국의 기사. 어찌 벨버린 저하께 위해가 되는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리이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벨버린 왕자에게 칼을 대면 작위가 몰수되는 것은 물론 넓게 보면 제국의 대죄인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리이 스스로도 기사로서 지녀야 하는 자신의 신념이 또 다시 마음 속에서 터져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도, 기.사.도.라는 것 에 어긋난다면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해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 기사라면 그것 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일까. 마치 그것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고 너무 작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당장이라도 찢어져 버릴 것 같은 옷을 억지로 입고 항상 이 옷이 어딘가 찢어지지 않았을까...를 고민하는 바보 같은 노릇일지 도 모른다. 남이 건내준 옷 따위에 얽매여서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 있으면 서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바로 그거다 리이 경. 네가 할 일은 리센버러의 모든 성문을 닫고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감시하는 것 뿐. 왕족의 일에는 간섭하지 말아라." 벨버린은 일단 리이를 무력화시키자 자신을 얻으며 칼을 높이 들고 외쳤다. 둘째 왕자 랑스의 세력은 세력면으로 보면 벨버린 쪽에 비해 아직은 약하다. 벨버린의 행동을 막아설 자가 아무도 없는 이상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축출해 버리면 리센버러는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다...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외친 것이다. "나를 왕을 죽인 자라고 비웃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이 리센버러의 무한한 번영을 위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일 뿐이다! 지금부터 나는 리센버러를 헤스팔콘 최강의 국가 로 키우기 위해 번영을 방해하는 더러운 잡배들을 몰아내겠다!" 벨버린이 외칠 때도 벨버린의 온몸에 묻어 있는 프리스턴 국왕의 피가 바 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랑스를 비롯한 둘째 왕자 세력의 귀 족들과 상인 들의 표정이 사색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잡배'들이 란 바로 그들. 이대로라면 생명이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었다. "번영을 위해서라고? 그게 고작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나오는 말이냐!" "누구냐! 건방진!" 누군가 외친 말이 벨버린의 연설에 찬물을 끼얹었고 벨버린은 성질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답 대신 날린 것은 주먹이었다. '크윽!' 벨버린의 오른뺨으로 날아든 주먹에 벨버린은 바닥에 꼴사납게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벨버린은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왕을 죽였다고 말했냐 이 개 자식아! 똑바로 들어! 넌 왕이 아니라 네 아버지를 찔러 죽인 거야! 그래 놓고는 이제 자기 동생도 죽일테지? 그렇게 왕이 되서...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세상에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 들도 있어! 가족을 죽여 놓고 대체 뭘 번영 시키겠다는 거야!" 카넬리안도 처음 보는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줄리탄이었다. 줄리탄은 그렇게 경멸에 찬 말을 쏟아붓는 동안에도 벨버린을 계속 발로 내리치고 있었고 눈 에는 눈물이 올라 있었다. "네 깟 놈이 뭘 안다고!" 벨버린은 발로 줄리탄의 배를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줄리탄은 밀려난 다음에도 섬뜩한 눈빛으로 계속 벨버린을 쏘아 보고 있었다. 벨버린은 줄리탄 에게 손가락질하며 미친듯이 외쳤다. "리이 경! 이 놈을 잡아! 감히 왕족인 나를 죽이려고 들다니! 네 놈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수 없이 나올 때까지 고문하다가 죽여버릴테다 이 놈!" 아무튼 벨버린의 입에서 '왕족을 죽인다.'는 말이 나오다니 아이러니다. 리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속에서 계속 요동치고 있는 응어리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리이 경! 왕족의 말을 거부할 셈인가!" "하지만..." "기사의 수치가 되고 싶은 건가! 어서 저 놈을 잡아!" 결국 리이는 조금씩 자신의 검을 다시 뽑으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줄리탄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줄리탄은 물러서지도 눈빛을 피하지 도 않았다. 리이는 천천히 검을 뽑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부끄 러웠다. "이 분은 저의 테이머. 어떤 누구도 주인님께 칼을 들이대는 것은 제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카넬리안..." 줄리탄과 리이의 사이에 끼어든 것은 천에 쌓인 자신의 검을 풀으며 나타난 카넬리안이었다. 카넬리안은 특유의 무표정한 눈빛으로 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대가 리이님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발칙한 씰을 봤나! 왕명을 어길 셈이냐!" "제 주인은 이 세상에 오직 줄리탄 님 하나 뿐. 다른 어떤 누구의 명령도, 그것이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복종할 이유 따윈 없습니다." 카넬리안의 차가운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소름을 끼치게 만들었다. "이, 이 놈들이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벨버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이가 있는 곳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더 이상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잠시간 정적으로 지속되는 대치 상황을 깬 것은 젤리드였다. "제길. 달라카트로 내려갈 돈이라도 뜯어내려 했는데 상황이 정말 개판이잖아." 젤리드는 천천히 말하며 일어섰지만 '흉몽' 젤리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람 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카리나. 내 칼 가져와! 오늘을 리센버러 간판 내리는 날로 만들어 줄테니까. 어이 왕자. 나한테 기사의 명예 어쩌구 말할 생각이라면 집어 치우는 게 좋아. 난 이미 그 잘난 기사 때려 쳤으니까. 파문기사라고 들어는 봤나." 젤리드가 마음만 먹으며 이 방에 있는 사람 들, 두동강 내는 건 리이를 제외하면 눈 깜짝 할 사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런 짓을 저지를 자였다. "젤리드! 너는 앉아 있어!" 리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젤리드를 쏘아 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네 꼴이 하도 한심해서 도와주려는 건데."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까 앉아 있으라니까!" "왜 나 한테만 그러는 거야..." 결국 젤리드를 적어도 잠시라도 조용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리이 뿐인 것 같다. 젤리드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젤리드가 가만히 있으면 신나는 것은 벨버린이다. 벨버린은 다시 외쳤다. "리이! 이 건방진 씰과 날 죽이려던 저 흉악한 놈을 어서 처단하라니까!" 2. "내 이름은 세이드 폰 러셀. 황궁으로부터의 명을 받고 왔다. 이 곳에 볼 일이 있으니까 어서 길을 비켜." "지금은 누구도 리센버러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듣지 못했나? 난 리히트 야거의 일원으로 황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출입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 밤이 되어 리센버러에 도착한 세이드는 성 입구를 막고 있는 병사 들에게 저지 당하고 있었다. 벨버린의 명령으로 아무도 리센버러를 나가지고 들어 오지도 못하게 된 것이지만...세이드가 그런 명령에 신경을 사람은 아니고 출입 허가 따위 기다릴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게다가 세이드는 카넬리안을 잡는 과정 중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묵인한다는 황제로부터의 권한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조금도 관심 없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는데...성문을 열어."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지방의 사람 들은 제국을 너무 우습게 알고 있는 것 같군. 그 대가는 크다." 세이드는 나직하게 말하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고 그의 두 씰인 줄리엣과 저스틴이 세이드의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Blind Talk 으음...이 글도 몇 번이나 뜯어 고쳤는지 모르겠는데...그러다보니까 양이 되게 길어졌습니다. 일단! 저는 왕궁에 어울리는 말투 같은 것엔 적응이 안됩니다. 사극을 거의 안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도대체가 복잡해서 프리스턴 왕은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더군요.(결국 아무렇게나 썼지만.) 아아 어찌 되었든 세이드가 나타나니까 저로서는 기분이 좋네요. 다음 편은 지금까지 나왔던 캐릭터 들이 한 장소에 모여 난리도 아닐 듯 합니다.(...라고는 하지만 이미 써두긴 했지만 글적.) 아참 그리고...제가 하이 메일 때문에 아이디를 PULSATOR 로 바꾸는 바람에 먼저 아이디 KScorp로 올렸던 글 들은 더 이상 삭제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바꾸고 알았습니다.-_-;) 왠지 더 이상 손댈 수 없다니까 두렵네요. 그리고 친구 kiyu군의 연재 중단한 줄 알았던(...-_-) SIG도 다시 올라갑니다. 옆에 있습니다.(지금 술마시러 나갑니다.-_-;) 앞으로 방학을 맞이해서 자주 올리기로 결심했다니까...제길 나 보다 많이 올릴까봐 걱정이... (별 걱정을 다하는군.) ...2시간 후... 술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현재 시간 새벽 5:41분 그럼 슬슬 올려야지.. (광고 입니다!) 이번 편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제 친구나 형, 동생 들의 사이트를 선전합니다. 거의 모두 일러스트를 그리는 친구 들의 사이트니까 그림 관람하신다는 생각으로 맘 편하게 한번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사실 거의 다 저 같은 놈의 선전 같은 것 필요 없을 정도로 인기 있지만 서도 저도 그 사람 들의 그림을 상당히 좋아하기 때문에 올립니다.^^ 방문해 주세요. http://www.hitel.net/~3rdBASS/ 잘 나가는 준호의 사이트~ 플래쉬가 끝내줍니다. Born Slippy의 Underworld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97124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6-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7/18 14:37 읽음:597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6-5 : 신념의 대가 관련자료:없음 [4886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7-18 05:11 조회:179 "아 주인님. 그 머리 멋있다." "너야 말로...왜 머리 색이 빨갛게 된 거야." "염색. 염색. 여기선 이런 머리 되게 많아." 나는 이제 코 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진 긴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그녀의 새로운 옷과 똑같이 붉게 변해 버린 머리칼 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의 1년만의 재회한 우리들의 첫 대화 치고는 너무 일상적인가? <> /F Chpater#6-5 : 신념의 대가 -Sadist 1. 홀로 베란다에 남아 있던 메르퀸트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혈극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엘프 특유의 민감한 감지력. 특히 메르퀸트처럼 오랜 시간 인간의 손에 있었던 엘프라면...인간에 대해서는 훨씬 민감해 질 수가 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얼마 전부터 풀벌레 소리도 사라지고 바람도 균형을 잃고 흐트러지고 있는 것을 메르퀸트는 분명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무언가 악의를 가진 것이 다가오고 있어.' 메르퀸트는 베란다 창을 통해 보이는 사람 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줄리탄에게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홀 안에는 쉽게 들어갈 수가 없는 분위기. 그때, 도시의 첨탑에서 비명처럼 다급한 종소리 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못난 부모에게 두드려 맞는 어린 애의 울음 소리 처럼 그 소리는 섬뜩하게 메르퀸트의 머리 속을 갈랐다. 그것은 도시에 갑작스럽고 거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울리는 경고음. 메르퀸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도시를 바라보았다. '저, 저건...' 메르퀸트의 눈빛이 흔들리며 확대되었다. 도시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불과 얼음의 악마가 도시를 조금씩 씹어 먹고 있는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도시의 건물 들이 불길에 휩쌓이거나 거짓말처럼 얼어 붙어 터져 버리기 시작했 던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지독한 저주에 가까웠지 절대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보이진 않았다. 애원하듯 울려대는 타종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는 묶여 있는 어린 아이의 목을 비틀 듯이 잔혹하게 도시를 죽여가고 있었다. '마법이다!' 메르퀸트도 인간이 사용하는 파괴적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선 조금 알고 있 었다. 자신이 잡혀 올 때 고향의 숲을 불태운 것도 누군가의 마법에 의한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고열의 불덩어리 속에서 휘청이며 녹아내리고 있는 가로등의 줄기 들이 보였다. 2. "리이! 뭐하고 있는 거야! 왕명을 어기려는 거냐? 디트리히 가문의 수치로군!" 벨버린은 리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아버지의 피가 베어 있는 침을 튀겨 가며 외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국가의 안녕 같은 문제는 한조각도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광분하는 꼴이란 주인 을 물어 버리려는 잡견의 발악을 닮았다. "벨버린 저하. 이런 상황에서 드릴 말씀이 아닌 줄로 압니다만..." 리이는 머뭇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반쯤 뽑았던 자신의 검을 칼집에 넣었다. 스스릉거리는 검의 마찰음이 리이의 결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억측일까. "...제 기사 작위와 모든 훈위를 반환 하겠습니다. 아울러 왕가에서 내려주신 모든 것 들도..." "주인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확실해 졌고 그에 따라 벨버린의 안색도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리이의 뒤에 서 있던 이카테스 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주인 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한테는 그럴 권리가 없어! 누구 맘대로 기사를 반환 하겠다는 거야! 디트리히 가문에는 뭐라고 변명할 꺼냐! 가문의 먹칠을 할 셈인가!" 평생 자신의 종으로 남을 것 같았던 그녀의 '배신'에 그는 미쳐버릴 듯이 놀라며 악을 썼지만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명료했다. "제 가문에 대한 문제는 저하께서 신경쓰실 일이 아닙니다." "발칙한!" 벨버린은 졸도 할 것 같았다. 그런 벨버린의 마음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언제나처럼 카넬리안이었다. "아아 되게 멍청한 왕자네. 할 줄 아는 수식어는 '영광스러운' 하고 '발칙한' 뿐이냐. 그런 덜 떨어진 언어감각으로 어떻게 간신배 들을 구워 삶겠어?" 평소에는 감히 듣지 못할 말에 벨버린은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지만 카넬리안이 천천히 미스트랄을 그의 얼굴을 향해 들어 올리자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비웃음에 찼던 카넬리안 의 얼굴에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검을 뽑으면 벨버린의 목은 분명히 날아간다. "이거 알아둬. 이름도 잊어버린 왕자야. 난 본래 인간 들을 싫어하고 그 중에서도 너희 같은 족속 들이 가장 싫어. 그 잘난 검 한번 뽑아 보시지. 그럼 난 주인님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서 네 놈을 세 조각으로 만들어 줄테니까." "가, 감히 왕족을 죽이려는 거냐!" "훗. 난 이미 갈데까지 갔다고. 이왕 망가져버린 인생...왕족 하나 죽인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뭐 이런 씰이 다 있어!" 벨버린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검에서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정말 왕족 하나 쯤 우습게 베어버릴 정도로 '막가는' 인생인지 확인해 볼 배짱은 없었던 것이다. "...저 카넬리안이라는 씰. 본래 성격이 저러냐?"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네요. 전에는 저렇게 말이 앞서지 않았으니까..." "전 주인이 누군지...살아 있다면 얼굴이나 보고 싶군." "젤리드는 상상도 못할 껄?"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젤리드의 물음에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카넬리안..." "응? 왜 주인님?" 줄리탄의 나즈막한 음성. 반쯤 채념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목소리다. "...공포 분위기 조성해서 대체 어쩌자는 거야." "어쩌긴? 이 왕자 죽이려는 거 아니었어?" "아냐!" 카넬리안은 '그럼 주인님이야말로 대체 어쩌자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고개 를 갸우뚱 거렸고 덕분에 줄리탄은 잔뜩 잡았던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때 였다. 갑자기 홀 내부에 첨탑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유일하게 성실한 고민을 하던 리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소리는...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 난거야." 그 말과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사색이 되어 있는 경비병 들이 뛰어 들어 왔고 무릎을 꿇으며 통곡하듯이 외쳤다.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모든 사람의 눈이(젤리드 포함) 그 병사에게 집중될 수 있었다. "크, 큰일입니다! 정체 불명의 적이 도시를 무차별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리이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기사는 그만뒀어도 버릇은 남아 있는 것인지.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적의 숫자는?" "그, 그게...단 한 명의 기사와 두 명의 씰." "헬몬드 놈들이다!" 홀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창 밖에서 계속 터져 나오는 불길 이 뿜어내는 붉은 빛무리가 홀 내부를 습격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곧 왕성 까지 불길에 휩싸인다. "어찌되었든 헬몬드 쪽은 아닌 것 같군. 상식이 있는 정규군이라면 저런 식으로 도시를 함락시키지는 않으니까. 저건 함락이 아니고 마치...학살이로군." 젤리드가 '상식'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 좀 어울리진 않았지만 틀린 말 은 아니었다. 저건 도시를 점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광기에 미쳐버린 거인이 사람 들을 밟아 으깨 버리는 것 처럼 도시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시도 에 가까웠다. "도시의 남문을 열고 사람 들을 어서 도시 밖으로 대피 시켜!" 성체도시인 리센버러의 모든 성문은 명령으로 닫혀 있는 상황. 이대로는 도시는 거대한 화로가 되어 버리고 사상자의 숫자는 계산할 수 조차 없다. 리이는 일단 민간인을 대피 시키려고 했다. "내 허가도 없이 무슨 명령을 내리는 거냐!" 갑자기 끼어든 벨버린. 정말이지 이 사람은 치매에 걸렸어도 자신이 왕족 이라는 사실 만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꺼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사람 들은 모두 저하를 증오하며 죽어갈텐데요." 리이는 싸늘한 음성으로 벨버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여자 화났다.'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리이의 노려보는 눈빛에 움찔거린 벨버린 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성문을 열고 사람 들을 피신 시켜라." 결국 벨버린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중얼 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존경 받지 못하는 왕족의 결말이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비 참하다는 것이다. 3. 세이드는 자신의 검조차 뽑지 않은 상태 였다. 단지 그의 양 옆을 걸어가고 있는 저스틴과 줄리에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타오르거나 얼어 버리고 있을 뿐 이었다. 잔혹한 불길에 휩쌓인 집에서 뛰쳐 나오는 여성의 모습. 온몸엔 불이 붙어 있었지만 자신의 아이로 보이는 어린 애를 양 손으로 껴안고 있었다. 세이드가 지나가는 길마다 오후의 낙원은 온통 타 죽거나 얼어 붙어 버린 기괴한 지옥의 형상으로 변했고 사방에서 뒤 섞여 버린 참기 힘든 비명 소리는 리센버러를 사신의 사냥터로 만드는 듯 했다. 산책하는 듯한 보폭으로 왕성을 향하던 세이드는 성의 입구에 도착해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멈춰라." 그 말과 함께 저스틴과 줄리에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대조적인 기운의 흐름 이 끊어졌다. 이카테스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끊임 없이 마력을 뽑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좀 더 즐기고 싶지만...할 일도 있으니까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 세이드는 흉칙하게 변해버린 도시의 밤을 훌터본 뒤에 천천히 성 문으로 들어갔다. 4. 아직 세이드의 존재를 모르는 왕성의 홀 내부에선 이기적인 냄새가 가득찬 언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역시 랑스 왕자님이야 말로 왕위를 이어나갈 정통성을 지니신 분!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 입니다! 어서 여길 빠져 나가셔서 일단 왕위를 인정 받은 뒤에..." 대상인으로 보이는 둘 째 왕자 세력의 한 명이 거의 막무가내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 랑스를 거칠게 끌어 당기고 있었다. "이 나라는 왕족이 짐짝 취급 받는군. 모르지. 나라가 망하면 어디 산속에서라도 그 어린애를 버리고 도망칠지도." 젤리드는 꼴 사납다는 표정으로 비웃으며 말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사실 볼장 다본 이 판국에 와서 할 말이 없는 것도 이유지만 재력이나 명예, 권위 따위도 도통 통하지 않는 젤리드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는 않은 것이 '인간 다운'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그 상인은 머뭇거리는 랑스를 재촉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홀의 정문이 천천히 열렸다. 모두가 돌 아보는 가운데 나타난 것은 짧은 금발 머리 아래로 푸른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세이드 였다. "...이곳의 왕을 내 앞으로 데려와." 갑작스레 나타난 세이드의 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은 줄리탄 뿐 이었다. 다른 사람 들의 표정은 절망적일 정도로 굳어 있었던 것이다. 세이드 는 경멸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너희 들도 죽여 줄까?" 사람들이 세이드를 향해 굳어버린 얼굴을 한 것은 그의 무례한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입고 있는 제복. 위압과 권위의 의미를 가진 노란빛의 스프라이트가 들어가 있는 진한 남색의 제복은 오직 황제 직속의 근위엽병, 리히트야거 뿐. 아무리 무능한 귀족이라도 헤스팔콘 황제 친위 사단인 그들 의 제복 정도는 보거나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기사인 리이나 젤리드 에겐 그들의 존재 정도는 기사 수업 때부터 지겹게 들어 왔었다. 하지만 문제는 왜 지금 여기에 나타났다냐는 것이다. "카리나...내 검을 줘. 비극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군." "젤리드..." 젤리드는 세이드를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제, 제가 리센버러의 왕 벨버린 프리스턴 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든 것은 벨버린이었다. 벨버린은 마치 오랜 기도 끝에 등장한 천사라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껌뻑 죽으면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난리 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놓칠 수 없는 자 들은 또 있었다. "아닙니다! 정통성을 가진 이 분이야 말로!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일대 촌극. 둘째 왕자파의 사람 들이 랑스를 거의 끌고 오다시피 하며 미친 듯이 외쳤다. 황제의 칙사가 직접 등장한 가운데 랑스 왕자에게 왕위를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 그들은 마치 지옥에서 단 한명 만이 빠져나 올 수 있는 출구라도 발견했을 때처럼 아우성치는 것이었다. "이 발칙한 놈들이! 왕은 바로 저 코흘리개 놈이 아니라 접니다!" "왕을 죽인 후레자식의 입에서 감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 역시 첩의 자식이라서 더러운 피는 어쩔 수가 없군!" "......" 마치 '이 물건은 내꺼야!'라고 외치는 듯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천박한 말싸움 이 또 시작되었고 그들은 마치 솔로몬의 판결이라도 바라는 얼굴로 세이드를 쳐다 보았다. 아무리 황제의 명을 받고 온 자라고 하더라도 왕위를 결정할 권 한은 없다. 그리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이드는 그 왕의 도시를 파괴한 자. 그런 자에게 달라 붙어 왕위를 구걸하는 꼴이란 누가 봐도 역겨운 노릇일 거다. "내가 이 따위 작은 나라의 왕이 어떤 놈인지 알게 뭐냐...줄리에트." 벨버린이 랑스보다 세이드에게 가까이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뭐, 뭐야!!" 벨버린은 자신의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불의 뱀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벨버린의 온 몸을 사슬처럼 휘감듯이 타고 올라가며 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온 몸을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마력에 의한 불길이었던 그것 은 누군가 말릴 시간도 없이 벨버린의 온 몸을 태우며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었 고 그의 고통을 담은 듯 미친 듯이 휘몰아치다간 아무 것도 남깆 않고 사라져 버렸다. 세이드는 조용히 랑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네가 왕이다. 내 말 똑똑히 들어." 랑스는 덜덜 떨고 있는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붉은 눈의 씰은 어디 있나...이 곳에 있다고 들었다. 찾아와." 갑자기 사람 들의 눈빛이 카넬리안을 향했다. 카넬리안은 영문도 모르는 상황 이었지만 뭔가 일이 또 꼬이고 있다는 것 쯤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어디에서 '친절한' 사람 들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 외쳤다. "그, 그런 씰이라면 저기 저 여자 입니다." 세이드는 차가운 광기에 얼룩진 눈빛을 들어 카넬리안을 바라보았고 그 눈빛 은 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긴장 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뭐야, 저 괴물 같은 놈은...' "오펜바하 제1황제로부터의 칙령이다. 나와 함께 가줘야 겠어." 줄리탄은 세이드의 그 말에 카넬리안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세이드가 다가오자 두려운 표정으로 미스트랄을 겨눌 정도 였다. 줄리탄 으로서는 그녀가 그렇게 두려워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카넬리안. 어떻게 된거야." "오펜바하...제길, 수백년 정도는 그 녀석의 손에서 빠져나오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나 보군." 카넬리안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다가오는 세이드에게 검을 들이 대고 있었지만 세이드는 검을 빼지도 않고 별 다른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로 단지 악령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발걸 음에 제동을 건 자는 젤리드였다. "야! 이 칙칙한 기사 놈아. 그 따위로 개폼 잡기 전에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게 어때." 젤리드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 놓으며 세이드를 쏘아 보았다. 그 소리에 세이드 는 발걸음을 멈추며 젤리드를 바라 보았고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서 시선 을 돌리지 않았다. "...젤리드." 카리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젤리드를 보았다. 씰인 그녀도 세이드의 힘을 느끼 고 있었던 것이다. 젤리드는 테이블 밑으로 검을 잡은 상태 였지만 카리나가 느끼는 세이드의 기력은 젤리드를 상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젤리드는 적어도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넌 누구냐." "전직 기사였지. 젤리드 빙크리스틴 님이라면 들어본 적 있을 껄."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칼이라도 주고 받는 듯이 날카로웠다. "흉몽...파문기사로군. 너라면 내 이름 쯤 알고 있을텐데." "검은 추기경, 세이드 폰 러셀. 이런 짓을 할 놈의 이름은 헤스팔콘엔 그것 밖엔 없겠지. 황궁의 엘리트께서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행차하신 거지?" "내 일이 끝나고 죽여 줄까...아니면 지금 죽을 테냐." 세이드는 목소리만으로도 듣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젤리드는 피식 웃으면서도 자신의 검에 힘을 모으고 있었다. 순간 젤리드의 눈이 빛나며 검을 들어 올렸고 순간 테이블이 깨끗이 두조각이 나며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젤리드는 엄청난 속력으로 세이드에게 튀어 나갔다. 같은 기사인 리이의 눈으 로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검도 뽑지 않은 채로 날 죽이겠다고!" 공기를 가르는 폭팔음과 함께 젤리드의 검 흉수는 마치 노련한 궁수의 화살처 럼 세이드의 목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보통 젤리드가 뽑은 검을 한번 이상 받 아낸 자는 드물다. 그만큼 날카롭고 강력한 공격으로 상대의 몸을 갈라버리는 젤리드의 검이었지만 이번 만은 달랐다. 젤리드는 자신의 검이 무언가에 튕겨 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세이드는 여전히 자신의 검을 뽑지 않은 상태 였다. 젤리드는 조금 물러서며 말했다. "무슨 장난을 친거냐." 세이드는 대답 대신 자신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젤리드의 검에 부딧쳐 갈라진 하얀 장갑 사이로 검푸른 금속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그것은 지독하게 강력한 합금 따위로 만들어진 기계팔이었다. "그걸로 내 칼을 쳐낸 건가? 어쩐지 왼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외팔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 세이드는 제국의 명문 러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선천적으로 왼팔이 없었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몸은 극도로 허약해서 기사가 되기는 커녕 성인이 되기 도 전에 죽을 것이라는 말이 지배적이었다. 강한 기사를 원하던 러셀 가문에서 는 당연히 천대와 미움을 받던 자. 사실 지금도 호리호리한 세이드의 몸은 조금 도 건장한 상태는 아니었다. 단지 체력을 기를 수 없었던 세이드는 어려서부터 미친 듯이 파고 들었던 마법에 의해 기사가 된 것으로, 말하자면 세이드의 온 몸에는 언제나 시전되어 있는 엄청난 마력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력의 기운 덕분에 보통 사람 들은 세이드의 근처에만 와도 본능적인 두려 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젤리드도 대충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어떻게 죽여 줄까?" 세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검으로 손을 옮겼다. 듣기에 세이드는 검도 다른 기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쓴다고 했었다. "젤리드!" 젤리드의 뒤에서 뛰쳐 나오는 것을 카리나 였다. 주인의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그녀는 다급한 표정으로 순간적으로 자신의 두 팔찌에서 햐안 빛을 뿜어내며 젤리드의 앞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젤리드가 놀란 눈으로 뒤돌아 보며 외쳤다. "카리나 그만 둬!" 쌍두의 뱀과 같이 빛에 싸인 두 손으로 세이드를 공격하려던 카리나에게 날아 오는 것은 세이드의 뒤에 서 있던 줄리에트가 날린 작은 화력구 였다. 그녀가 손바닥을 피자 마치 생명체 같이 뭉친 불덩어리가 카리나를 향해 탄환처럼 날아 간 것이다. '크읏' 카리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을 새하얀 마력으로 감싸는 것으로 방어를 했 지만 그 불덩어리는 그녀의 배에 작렬하며 폭팔하듯이 터져 올랐고 순간 마력의 실루엣이 깨져 버리며 카리나의 입에서 피가 솟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카리나의 온 몸은 계속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쌓여 있었 다. "젤리드! 어서 피해!" "카리나!" 그러나 또 다시 날아온 것은 저스틴이 시전한 화살을 닮은 냉기의 결정이었다. 카리나는 그것을 보며 죽음을 느꼈다. -Blind Talk 이번 챕터에선...리이를 편애했던 제 죄값을 치루는 것 같습니다. 다른 캐릭터에게는 거의 별 생각이랄 것이 없는데 리이에 대해서는 거의 주연 급의 뒷배경을 깔아주고 아끼다 보니까 도리어 캐릭터 성이 무너져 내리게 되네요.(덕분에 재미도 반감되고...말은 길어지고...) 그래도 조만간 좀 숨통이 트이면 외전 격으로 리이의 기사수행 시절에 대한 (뭐 리이와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겠지만) 단편을 써서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올리지 못하는 것은 18금에 가깝기 때문이랄까나...) 아무튼 리이만 나타났다하면 분위기 처량해 진다는 것을 새삼 깨닳았던 한편 이었습니다. 뭐...다음 편은 확실히 밝고 즐겁고 웃기는 분위기니까. 그럼 '신념의 대가' 마지막 편 올라갑니다. (그런데 '대가'가 맞는 건가요 '댓가'가 맞는 건가요. 전 대가...라고 아는데) 아 그리고 울보황소님...그, 그런 너무 고마워서 미친 듯이 몸부림 칠 그런 글을 올려주시다니...정말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광고 입니다.) http://members.tripod.lycos.co.kr/milkland/ ...젖소 수현군의 홈페이지. PLUS+ 라는 연애 게임에서도 2D와 원화 일부를 담당했지요. 귀여운 그림과 파스텔 톤의 색감을 좋아하시면(자기는 아니라고 박박 우기지만) 한번 들려보세요. 그건 그렇고...이 녀석은 내 글 읽어준다면서 대체 읽긴 읽은 건지.(그림이라도 그려주지...) Hirai Ken의 낙원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9737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6-6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7/20 10:17 읽음:60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6-6 : 신념의 대가 관련자료:없음 [4895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7-19 07:44 조회:313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당신이 해룡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모예드 줄리탄? 소문만 들어 왔던 당신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기절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가르바트의 최강 기사라는 마르켈라이쥬 혼을 올려다 보았다. 목을 잔뜩 꺾어 올려다 봐야지 겨우 그의 눈과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사내였다. 이런 자가 지휘하는 군대와 싸워야 한다는 건 왠지 반칙 같다. 뭐 하지만 이제 와서 피할 수는 업으니까... "저야 말로 당신과 이렇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기대는 개뿔...이 사람들! 왜 이런 무시무시한 자리에 나를 밀어 넣은 거야. 돌아가면 잔뜩 욕을 해줄테다. "해룡의 수장이 인정한 당신이 그런 겸손이라니...의외로군요." 해룡의 수장이라...아아, 지금 내 침대 위에 멋대로 엎어져 잠들어 있을 그 푼수 아가씨 말이로군. 정말이지...카넬리안하고 끝내주는 콤비라니까. <> /F Chpater#6-6 : 신념의 대가 -Faith 1. 이미 심한 부상을 당한 카리나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고 있는 냉기의 화살을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씨가 꺼져가는 것처럼 사그러 들기 시작한 팔찌의 하얀 빛 무리가증명하듯이.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젤리드...미안해. 뭐 젤리드라면 금방 다른 씰을 구할 수 있을테니까 별 걱정은 안해도 되겠네.' 카리나도 카넬리안 처럼 계약을 맺은 테이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누군가가 정해 놓은 가혹한 룰. 그렇게 죽는 것 외에는 달리 지겨운 생명의 무게를 덜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이 예상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치지지직.... 무언가 급속도로 얼어 붙어 버리며 주변의 수분을 순간적으으로 얼려버릴 때 들을 수 있는 매마른 소리가 카리나의 귀를 때렸고 그녀는 자신의 앞을 바라보며 쓰러지듯 바닥에 바닥에 내려 앉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중얼 거렸다. "젤리드..." 날아오는 냉기를 막아낸 것은 젤리드의 검, 흉수였다. 그 검을 타고 올라온 냉기 가 검을 들고 있던 젤리드의 팔까지 차갑게 얼려버린 것은 당연한 것. 젤리드가 발산하는 기력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의 온 몸은 예의 여관 주인처럼 산산히 터져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끔찍한 마력에 젤리드의 목까지 혈관 이 붉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카리나를 돌아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정직하게 달려 들어서 이길 수 있을 만큼 이 놈 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카리나." "씰한테 많은 걸 바라네..." 카리나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불길은 사라졌지만 이미 모든 기력을 써버린 카리나 는 희미하게 웃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는 상처 였다. 세이드는 약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씰의 목숨을 구해준 건가? 소문하곤 좀 다르군." "소문이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지. ...그보다 뒤의 그 아이 들은 도무지 씰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 걸?" 젤리드는 자신의 팔을 감고 있던 냉기의 사슬을 끊어 버리며 말했다. 사실 리이 와 카넬리안 등이 보기에도 줄리에트와 저스틴은 씰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공명이 없었다. 게다가 저 정도 능력의 씰이라면 카넬리안도 이카테스도 익히 알고 있었어야 한다. 마치 그들은 마음의 빗장을 닫아 버린 사생아의 모습 같았다. "큭큭큭. 너도 이 들을 씰로 보았던 건가. 하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만들었다니...무슨 의미지?" 젤리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랜 경험으로 세이드의 공격 범위를 예측하며 노련 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리이 역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며 레이피어를 뽑은 채 세이드를 노려 보고 있는 상황. "오래 전부터 궁금했어. 씰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래서...마법에 재능이 있는 두 아이를 사와서 교육시켰지. 자신을 씰이라도 믿게 만드는 거야. 공명도 계약도 없지만 ...보라고 훌륭하게 움직이고 있잖아." 끔찍한 말을 세이드는 즐겁게 내뱉고 있었다. 그는 두 아이의 정신의 부셔버린 뒤 에 세뇌시키며 씰보다 더 씰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수 없이 씰 들의 배를 갈라봤지만 인간과 별 차이가 없더군. 인간을 씰로 만드는 것, 흥미로운 연구라고 생각되지 않나?" "지랄하지마." 젤리드는 세이드에게 검을 내리치는 것으로 대답했다. 방금 전과와 같은 공격이 었다. 세이드의 기계팔이 그 공격을 막아 내기에 충분한 '정직한' 공격이었던 것 이다. 세이드는 비웃음을 띄면서 왼팔로 떨어지는 흉수의 검날을 내리쳤다. '이 놈은 검술의 기본도 모르는 건가. 이번 공격이 막히면 넌 죽는다.' 카앙! 아까와는 비교가 안되는 타격음과 함께 검날과 기계팔이 부딧친 곳에서 불꽃이 튀겨 오르며 세이드의 왼팔이 크게 밀려 나갔다. 세이드는 예상 밖의 힘에 당황 하며 뒤로 물러 섰고 젤리드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다시 한번 그 왼팔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젤리드는 처음부터 상대가 기계팔로 막아낼 것을 예상하며 그 팔목 부분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장난감으로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냐!" 세이드가 다시 왼팔로 젤리드의 검을 막았을 때는 금속이 깨지는 소리가 홀을 울리며 세이드의 왼손이 바닥에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아무리 기계팔의 접합 부분을 노린 것이라고는 해도 마력에 둘러싸인 것을 두동강 내는 힘이란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시도 조차 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이 놈이..." 젤리드는 인상이 굳어져 버린 세이드를 비웃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검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그의 심장을 노리며 무서운 힘으로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얼어 있던 오른 팔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이 강력했다. 결국 세이드는 자신 의 검을 뽑을 수 밖에 없었다. 젤리드의 검과 부딧치며 힘을 겨루고 있는 세이드 는 적잖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검끼리 서로 엉켜 듣기 싫은 마찰음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세이드는 젤리드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까다롭게 굴더니 결국 검을 뽑았잖아." "이 놈...진짜 힘을 숨기고 있었군." "미안. 너 한테는 견디기 힘든 힘이었니?" "후회한다는 것이 뭔지 느끼게 해주지. 젤리드 빙크리스틴." 라고 말하며 세이드는 젤리드를 밀쳐내며 뒤로 빠져 나갔다. 그의 눈은 확실히 황제의 명령이고 뭐고 당장 젤리드를 죽여 버리겠다는 욕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였다. 세이드가 물러나는 것을 보며 젤리드는 품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예의 붉은 극약이 들어 있는 붉은 병이었다. 젤리드는 자신의 검에 그것을 뿌리며 세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래뵈도 구하기 힘든 독이라서 아끼고 있었지만 네 놈에겐 듬뿍 먹여 주지." 붉은 독액을 머금은 젤리드의 흉수는 그 음각에 붉은 문양이 나타나며 검붉은 진액을 핏덩이처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마법 따위가 아니라 베어지는 순간 혈관을 타고 신경을 마비 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이런 것이라면 세이드에게 통할 지도 모른다. 물론 한번이라도 스치기라도 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너도 나와 비슷한 놈이로군." "듣기 싫은 말은 집어 치워." 한편 세이드가 들고 있는 검 역시 기사가 쓰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하게 생긴 것이었다. 회색빛의 폭이 크고 비교적 짧은 그 검에는 반원의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어서 마치 과자를 만드는 틀처럼 보였다. "들어 봤을 것이다. 내 검을 다섯 번 이상 막아본 자가 없다는 것을. 그 이유를 지금부터 알게 해주지." "다섯 번까지 가지도 않을 꺼야. 그 전에 네 놈이 두동강 날테니까." 젤리드는 여유를 부리며 조금씩 세이드와의 간격을 좁혀 갔지만 그 역시 세이드 의 검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 역시 세이드가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검을 쓴다는 사실은 들어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언가 진 동하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공기가 심하게 흔들려 왔고 곧 귓가를 괴롭히는 웅웅 거리는 낮은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잔인한 짐승의 경계음과 같았다. "그런 거였군." 세이드의 검이 떨리면서 진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그 검에 파여진 구멍 들은 진동을 더욱 가중시키기 위한 것일게다. 그리고 그 진동파의 근원은 세이드의 마력. 세이드의 검 주변을 반투명한 기운의 마력 들이 소용돌 이치며 감기 시작했다. 결국 마법에 능한 세이드는 검을 베어버리기 위한 용도 라기 보다는 자신의 마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내 검을 받으면 네가 강하게 공격할 수록 차라리 죽는 것이 낳을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니 몸 자체가 이 마력의 저항이 되는 거지. 보통 놈들 이라면 단 한번에 몸이 터져 버리겠지만...넌 보아하니 두세번 쯤 견디겠군." 세이드는 검을 들어 올리며 맛있는 음식이라도 본 것처럼 눈빛을 굴렸다. 대체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몇 명의 실험체들에게 그런 눈빛을 보였을까. "넌 기사 하기 전에 약장수라도 한 거냐. 친절한 설명 고맙긴 하지만...듣기 귀찮으니까 내가 먼저 들어간다." 젤리드의 자세는 아까와 달랐다. 몸을 조금 숙이며 검을 가슴 쪽에 놓았다. 그 검에 걸려 있는 엄청난 마력을 그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받아내기 쉽게 내려치다가는 꼴 사나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 번에 끝내버린다.' 전투 중에는 빠르게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좋다. 1초 더 생각해 보겠다 는 건 매력적인 유혹이지만 당연히 상대에게도 1초의 시간을 공평하게 부여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공포나 의심 따윈 끼어들 순간도 없이 생각은 빠르고 간결 하게 마치 곧장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젤리드는 곡선의 빠른 움직임으로 스스로 의 가속력을 높이며 상대의 시선보다 빠르게 세이드라는 구심점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치고 들어갔다. '노리는 것은 다리. 균형을 부셔버린다.' 받아치기 어려운 각도라면 상대의 등에서 무릎을 향해 옆에서 낮고 비스듬히 들어가는 것이다. 보통 인간보다 월등히 빠른 기사의 움직이라면 그 각도를 잡 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좋은 시도로군." 세이드는 젤리드를 돌아보며 검을 내질렀다. 물론 검은 젤리드의 몸에 닿을 거 리가 아니었지만 세이드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마력으로 뭉쳐 있는 검기 였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검기에 균형이 무너진 쪽은 젤리드 였다. '망할!' 젤리드는 몸을 크게 돌리며 검기를 피해내는 것에는 성공 했지만 그 순간을 노리고 들어온 세이드의 검은 피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 상황에선 그 검을 받아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젤리드는 최대한 몸을 뒤로 빼며 세이드의 검을 받았다. "으으윽!" 그 검의 위력을 젤리드는 단 한번에 알 수 있을 정도 였다. 검을 타고 들어오는 마력의 진동파가 젤리드의 온 몸으로 빨려 들어갔고 검을 들고 있던 젤리드의 양 팔을 감싸는 검은 천이 타오르듯 갈기 갈기 찢어져 나갔다. 마치 몸의 모든 피가 끓어 오르며 살갗 밖으로 터져 나가는 듯한 기분. 일단 뒤로 빠져 나오면서 도 젤리드는 들고 있던 검을 놓칠 정도로 충격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기분은 어때? 다시 한번 받아낼 용기가 남아 있나?" "제길..." 젤리드는 계속 입으로 올라오고 있는 피를 삼켜내며 세이드를 노려 보았다. 그는 악몽 같은 칼을 든 채로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는 젤리드에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내 검을 막지 않는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어. 선택해라." 세이드는 가학적 광기에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젤리드를 쏘아보며 다시 검기를 뿌렸다. 마치 빠른 독사의 아가리처럼 젤리드에게 돌진하기 시작한 세이드의 검기를 바라보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것이 순간적으로 공포라는 방해물이 머리속에 끼어든 것이다. 그때 젤리드는 옆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끼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리이였다. 그녀는 젤리드 앞으로 날아드는 검기를 검으로 쳐냈고 방향을 잃은 마력의 덩어리는 홀의 구석에 처박 히며 근처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다. "젤리드. 결투 중에 미안하지만...이 놈은 내 상대야." 리이는 예전의 젤리드와의 결투에서 부상 당한 오른 팔이 채 완치되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오른 손으로 자신의 레이피어를 들고 있었고...그건 그녀의 의지 를 보여주었다. 죽이기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운다. 리이의 푸른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오직 세이드 만을 향하고 있었다. "리이...끼어든 건 괜찮은데 저런 괴물을 상대 하겠다는 거야?" '적어도 여기선 네가 죽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젤리드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슬슬 이곳에서 도망칠까도 생각했는데 고집불통 리이가 끼어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리이가 세이드와 싸우려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호오. 귀 공은 푸른 맹금...리이 디트리히 경이 아니신가. 내 손에 죽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세이드는 즐거운 것이라도 연상하는 표정으로 두 눈을 살짝 감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이 도시를 이 꼴로 만든 놈이기 때문이야. 황제로부터 어떤 명령을 받았든지...아무도 네 놈에게 사람 들의 목숨을 맘대로 해칠 수 있는 권리 따윈 주지 못해. 내가 태어나 자란 나라를 짇밟았 기 때문에...그게 널 죽이려는 이유다." 리이는 흥분하지 않았지만 상대에 대한 적의는 보고 있는 줄리탄이 섬뜩하게 느낄 정도로 어느 때보다 강했다. 리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카테스에게 외 쳤다. "이카테스! 넌 사람 들을 이곳에서 대피시켜!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다음엔 좋은 주인을 만나라." 리이는 이카테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공명'을 시킨 뒤에 세이드를 향해 검을 들었다. 세이드는 계속 눈을 감은 채로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리이 경. 당신처럼 드문 여기사가 이렇게 나와 싸워 주다니 영광이군. 귀공이 어떤 생각으로 나를 죽이려는지는 관심 없어. 오직 내가 오래 전부터 당신에 대해 기대하고 있던 것은..." 세이드는 천천히 눈을 뜨며 리이를 내리 깔 듯이 바라 보았다. "고통 속에서 어떤 비명을 지를까 듣고 싶을 뿐이야." 홀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 불길이 이제는 성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2. "주인님. 우린 이쯤에서 퇴장하자고." 카넬리안은 안절 부절하며 리이와 세이드를 바라보고 있는 줄리탄에게 말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의 메르퀸트 역시 줄리탄의 곁으로 온 상태 였다. "무, 무슨 소리야. 이대로는 리이 님이 죽을 지도 모르잖아." "그럼 어쩌려고. 달려 가서 구해주기라도 할꺼야? 나도 예전의 힘을 쓸 수가 없어서...끼어 들었다간 순식 간에 끝장이야. 나야 뭐 여기서 죽어도 상관 없지만서도 주인님까지 죽는 건 바라지 않아." 카넬리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줄리탄도 카넬리안도 메르퀸트도 저 상황 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이렇게 도망친다는 건. 줄리탄이 머뭇거리자 그녀는 화가 난 목소리로 힐난 하듯이 외쳤다. "리이 님은 나름대로의 신념으로 싸우는 거야! 주인님도 그럴 이유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나가 싸우라고! 아무런 신념도 없이 전혀 도움도 안되는 감정 따위에 매여서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이란 정말이지 꼴불견이란 말야." 카넬리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줄리탄의 팔을 잡아 끌며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서 는 이카테스가 복도에 붙어 있는 불길을 끄며 사람 들은 이끌고 있었다. "게다가...저 세이드란 작자가 잡으려는 건 바로 나. 잽싸게 사라져 주는게 도와주는 거라니까 그러네." 카넬리안의 근심에 잔뜩 잠긴 표정을 바라보며 줄리탄이 물었다. "대체 왜 오펜바하 황제가 널 잡으려는 거야? 넌 수백년만에 깨어났다고 했잖아." 황제라니...시골 촌구석의 줄리탄은 조금도 실감나지 않는 단어 였다. 적어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엄청난 일에 휘말렸다는 것 만은 느낄 수 있었다. "오펜바하가 날 쫓고 있다면 앞으로 세이드 같은 놈 들, 지겹게 만나게 될꺼야. 미안해...앞으로는 여행길이 별로 즐겁지 못할 것 같아." Next Chapter : 천국의 가상자리 -Blind Talk 아...끝났다. 이번 챕터의 마지막 문장까지 써 놓고도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주 아주 지겹게 사람을 잡아 끈 챕터인데다가 최근 나오지 못했던 결투씬이 라서 한이 맺혀서 그런지 너무 너무 길게 끌어 버려서...사람 진을 빠지게 만 든 챕터 였습니다....그렇습니다! 이제 젤리드와 리이와는 당분간 안녕 입니다. 아마 2부 쯤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리이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고...) 슬슬 보호자도 떨어트려 놨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 네요. 줄리탄의 레벨을 키워야지...하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실은 그런 것 보단 이제 마음 편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My Pace에서 어긋나서 무리하면 이런 챕터가 튀어 나와 버립니다.-_-; 뭐 개인적으로는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었지만. 최근...굉장히 유명한 환타지 소설을 한 질 들고 읽고 있습니다. 으음...아직도 환타지 소설의 묘미라는 것이 뭔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래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 다. SF라면 단편 위주지만 많이 읽었는데...그래도 SF나 환타지나 뭐나 재미를 주는 요소는 방법론만 달랐지 모두 비슷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제게 e-mail 보내주신 분 정말 감사 드립니다. 꾸벅. 정말 정말 많이 기운이 났습니다! 덕분에 하루 만에 후딱 써서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데지코를 자청하시는 어떤 분께 "이번 편은 재미 없다뉴~" 라는 충격적인 쪽지를 받고 비통함에 잠겨 휘청이고 있었거든요.T_T (아아 전 귀가 얇은 편이라서...) 8월에는 입원 때문에...자주 올리는 것이 또 힘들어 질텐데...이대로는 쿨럭. (광고 입니다.) 정신적 지주 경오형의 홈페이지.-_-; DDR계의 거두시며...(어쩌면) 곧 이 아이디로 경오형의 장편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아아 몇명까지 늘어날 것인가..) http://my.dreamwiz.com/alice74/ 뭐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서 그림은 많지 않지만...볼 것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잘 뒤져보시면 제 얼굴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한동준의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만으로' 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98236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7/25 09:17 읽음:61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1 : 천국의가상자리 관련자료:없음 [49335]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7-24 13:34 조회:113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이번 편 인터메조는 쉽니다. ;-) DRAGON LADY / F chapter 7-1 : 천국의 가상자리 -dunno 1. 앞으로의 여행길은 편치 못할 거라는 카넬리안의 말은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보름 동안 사람 들의 눈을 피하며 마을 한번 들리지 못하고 산속 에서 자급 자족하는 꼴이란 보는 사람에겐 웃길지 몰라도 당사자는 죽을 맛이다. 잘 나가는 용사거나 세상을 구할 무게라도 짊어진 영웅 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후후. 이 정도의 시련이 내 의지를 꺾을 것 같냐!'라는 폼 나는 말 한마디라도 던지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정당화 시켰겠지만... 시골 청년 줄리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현실적'이었다. "거 더럽게 힘드네." 이토록 몹시도 힘들어하는 줄리탄을 카넬리안은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듣는 나까지 힘들어지니까 조용히 좀 해 줘!" 보라. 역시 누가 봐도 훌륭한 주인과 순종적인 씰의 표본이 아닌가. "카넬리안. 대체 달라카트에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뭐...한달 쯤 더 가야하지 않을까. 마을에서 나트라도 훔쳐 온다면 빨라지긴 하겠지만...그런 일 때문에 마을로 들어가긴 싫어. 수배령이 쫘악 깔렸을 게 분명하단 말야." 그런 일이라니...거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엘프 메르퀸트나 전혀 먹지 않아 도 튼튼하기 그지 없는 카넬리안이야 별 걱정 없을지 몰라도 줄리탄은 한달이라는 말에 안 그래도 부실한 다리 힘이 탁 풀려 버릴 지경이었다. 씰보다 훨씬 헌신적 인 메르퀸트가 줄리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백이면 백 줄리탄의 씰을 메르퀸트라고 찍을 것이다. "한달 후라...과연 그 날이 오긴 올까. 왜 그렇게 먼거야 대체." 일상에 지쳐 버려 굉장히 비관적이 되어 버린 줄리탄에게 카넬리안이 말을 꺼냈다. "주인님. 지혜로운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어떤 물고기는 온 가족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데...힘이 세서 잡기가 어려워. 그런데 간단하게 그 물고기 들을 잡는 방법이 있거든. 그게 뭔지 알아?" "...어떤 물고긴데?" "이름은 기억 안나."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닐테니까 줄리탄은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그 물고기 들은 그 무리에서 가장 느린 새끼의 속도에 맞춰 이동하거든. 그래서 새끼를 부상 입히면 자연히 전체의 속도가 느려지게 되고 결국 모두 느리게 가다가 힘이 떨어지게 될 때 잡으면 간단한 거지. 어때?" "...그 지혜로운 얘기의 요점이 뭐야." "주인님이 이 중에서 가장 느리다는 거지." "...." 이 참을 수 없는 허탈감. 아무튼 대체 이 여자는 힘들고 안 좋은 건 별의 별 이유를 다 붙여서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메르퀸트라면 일주일, 나라면 이틀이면 헤스팔콘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꺼야. 주인님 때문에 이렇게 느려지고 있는 거라고! 어때? 미안하지?" "...관두자." 메르퀸트는 뭐가 웃긴지 그 작은 손으로 귀엽게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엘프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사람하고 똑같잖아? 갑자기 웃음을 머금던 메르퀸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어요!" "나도 알고 있어." 카넬리안 역시 자신 들에게 달려오는 '무언가'를 느낀 것이었다. 단지 줄리탄 만이 '뭐야? 뭐야?'라고 당황하고 있을 뿐...카넬리안은 갑자기 돌아온 칼날 같은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 앞을 지키며 미스트랄을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정된 산길 옆 수풀 들이 나뭇가지가 부러지곤 하는 거친 소리 들에 흐느끼며 진동하기 시작했고 점점 더 다가오는 진동의 끝에 그 덤불 숲이 토해내듯 튀어 나오는 것은 흙빛의 1)아드포우 였다. "뭐야 저건!" "벌 것도 아닌게 신경 쓰게 만드네." 카넬리안은 그 말과 함께 검을 내리며 자신에게 돌진 하고 있는 아드포우를 노려 보았다. 줄리탄 정도의 몸집을 가진 네발 동물...부딪치기라도 한다면 공중에 붕 떠버릴 것 같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던 아드포우는 카넬리안을 보며 급정차 하듯이 멈춰서면서 씩씩 거리기 시작했다. 동물이라도 움츠려드는 행동과 미묘한 표정으로 분명히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넬리안 의 날카로운 기력에 둔감한 사람은 아마 줄리탄 뿐일 꺼다. "널 요리해서 주인님에게 먹여주고 싶지만 요리 도구가 없어서 참는다." "..." 아마 아드포우가 알아 들을 수 있었다면 안색이 창백해 졌을 꺼다. 메르퀸트는 겁에 질려 뒤로 조금씩 움찔 거리던 아드포우에게 다가가자 줄리탄 의 입에서는 '조심해.'라는 말이 나오려다 흐려져 버렸다. 역시 숲의 종족, 숲의 생물 들과는 친화적인 것이다. 아드포우는 메르퀸트를 보더니 동족이라도 만난 듯이 오도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오랜만에 보는 구나...어서 집으로 돌아가." 메르퀸트가 아드포우의 털이 듬성 듬성난 머리를 쓰다듬자 그 동물은 메르퀸트 의 몸 주변을 킁킁 거리며 잠시 빙글거리는가 싶더니 숲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 다. 아드포우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이는 그녀...아니 그의 모습에 서 줄리탄은 대충 엘프가 어떤 종족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님 아깝지? 그지?" "뭐가?" "저 녀석 때려 잡으면 바베큐 할 수 있었잖아? 아드포우 구이!" "...." 엘프는 그렇다치고 과연 씰이라면 뭐하는 존재인가. 줄리탄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였다. 또 다시 수풀이 심하게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무기를 손에 든 짙푸른 피부의 거구 들 몇 명이 뛰어 나왔다. 피부며 우락부락하고 넓은 어깨에 키가 작은 몸이며 커다란 눈동자와 벌름거리는 커다란 코가 그들이 중부의 오크 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 오늘은 수풀에서 많이도 뛰어 나오네." 카넬리안은 짙은 우연성에 혀를 차며 자신 들에게 성큼 성큼 걸어오는 오크 들을 바라보았다. 별로 경계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이봐 너희들! 우리가 쫓던 짐승을 보지 못했나!" 물론 오크들의 언어로 외친 거라서 알아들은 자는 이것저것 박식한 카넬리안 뿐. 메르퀸트 역시 예전에는 오크어를 조금 알고 있었지만 인간 손에 잡혀간 뒤에 거의 잊어버려서 '저거 무슨 의미 였더라?'라는 표정으로 갸우뚱 거릴 뿐 이었다. 카넬리안은 오크 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 말로 좀 해 줘. 그리고 초면에 반말 하지말란 말야!" 대단한 기백에 오크 들은 '뭐야. 이 여자는.'이라는 분위기로 움찔 거렸다. 아드포우나 오크나 그녀는 똑같이 상대하는 만인평등의 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짐승, 우리는 그 놈, 조상 말할 시간 동안...쫓았다. 어딨지?" 오크들은 다른 종족 들 보다도 자신들의 길고 긴 선대 조상 들을 숭상하고 기록하며 그들의 인생과 계보를 외우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긴다. 그래서 굉장히 긴 시간을 말할 때 '조상에 대해 읊은 시간'이라고 비유하곤 하는데 아마 엘프 라면 '낙옆이 떨어져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라고 하지 않을까...어쨌든 오크 들의 말을 의역하자면 '무지무지하게 긴 시간 동안 아드포우를 쫓아 다녔는데 어디에 숨겼냐!'라는 것과 비슷하다. 뭐 줄리탄은 그들이 애써 인간의 언어로 말해도 발음이 부정확한데다가 축약이 심해서 거의 알아들 수가 없었지만. "너 내가 아드포우로 보이냐?" 카넬리안은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오크 들을 쏘아보며 말했지만 오크 들은 예의 아드포우 마냥 킁킁 거리며 서로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무슨 의미?" "그 짐승은 갈데로 갔겠지.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게 뭐야. 알고 싶으면 지나가는 아드포우 잡고 물어봐!" 그녀의 특유의 말투는 사실 시비 걸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오크 들의 인상이 험악해 졌다. "역시 너...너도 더러운 인간, 인간 들, 모두 그런가?" 그 말과 함께 메르퀸트와 줄리탄이 안색이 창백해져 버린 것은 오크 들의 인상 이나 말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카넬리안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대사 중에 하나를 불행하게도 그들은 선택한 것이다. "네 놈들이 날 인간 따위로 본 거냐. 모두 장님 아냐?" 카넬리안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한 것에 대해 드물게 격분하며 눈썹을 치켜 올 렸다. 폭발 직전. 그런 타오르는 카넬리안의 가슴에 기름통을 집어 던진 것은 오크 들의 다음 대사 였다. "인간! 인간! 우리, 너 같이 더러운 인간, 증오해!" 오크 들도 나름대로 화가 나서 크게 외치며 들고 있던 둔탁하게 생긴 칼과 도끼 들을 치켜 올렸지만 카넬리안이 거의 치욕에 몸부림을 치며 부들 부들 떠는 것을 보며 움찔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열받으면 미스트랄이라도 깨울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였다. 카넬리안은 자신의 검을 땅에 꼽으며 떨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불쾌해! 이 놈들! 곧 너희 이름 들을 그 잘난 조상님 명단에 오르게 만들어 줄테다!" 카넬리안은 광분하며 오크 들에게 달려 들었고 그녀의 공격은 오크 할아버지가 와도 막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들고 있던 칼이며 방패, 도끼 따위가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고 그래도 전투에 능한 종족임을 자부하는 자랑스런 오크 들은 무한한 공포심을 꾹꾹 숨기며 나름대로 카넬리안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참혹. 보통 이런 때 다른 멋진 주인공 들이었다면 '내가 너무 흥분했나. 미안하군. 하지만 그런 말은 하는게 아냐.'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섰을텐데...그녀는 말 그대로 죽도록 두드려 팼다. 안 그래도 개성적인 그들의 얼굴이 완전히 오븐에서 터져 버린 빵처럼 되어 버릴 때까지 끝도 없이 곤죽을 만들어 버리는 카넬리안이었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냐.' 줄리탄도 이때 만큼은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고는 그래도 자랑스러운 종족 오크 들의 명복을 빌어 줄 수 밖에 없었다. 메르퀸트 역시 아주 질려버린 표정으로 살짝 살짝 뒤로 물러섰다. "허억 허억...이 녀석 들...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카넬리안은 눈도 안보일 정도로 미친 듯이 내지르던 주먹을 잠시 거두며 숨을 돌리고는 완전히 피떡이 되서 본래 얼굴로 돌아올 수나 있을지 걱정인 오크 들 을 바라보았다. 아마 헤스페리아 전체에서 단시간에 가장 많이 두드려 맞은 자 들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말이다...나를 인간이라고 부르지 맛!" "쿠엑!" 끝도 없는 분노!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피박살이 나버린 오크들 에게 달려들며 또 다시 맹렬히 가열찬 주먹을 내질렀고 쓰러진 오크 들을 친히 일으켜 다시 쓰러질 때까지 두드려 패는 열성까지 보였다. 그럼에도 쉽게 죽지 않도록 맞으면 아프고 기절은 하지 않는 부위만 골라서 때리는 그녀의 무공이 가공할 정도였다. 숲 속의 린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수풀 속에서 튀어 나올때 까지 계속 되었다. "그마안!!!" 무두질이 잘 되어 있는 가죽 옷을 걸쳐 입은 청년 하나가 아드포우가 그리고 오크 들이 튀어 나온 곳과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튀어 나오며 외친 것이다. 아무튼 그 장소에선 기똥차게 뭔가가 잘 튀어 나왔다. 카넬리안은 훤칠한 키의 목검을 들고 있는 그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거기서 튀어 나오는 마지막 놈이겠지?" "뭐?" 의미 모를 말에 당황하는 가죽 옷의 사내. "그런데 너도 조상님 말할 시간 동안 오크 들을 쫓아 온거냐?" "뭐?" 뭔가 정리가 안되는 순간이었다. 그 청년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카넬리안이 말을 막았다. "아하! 좋은 표본이 여기 있군. 잘 봐!" 카넬리안은 오크 들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며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청년 을 가리키며 말했다. "똑봐로 저게 인간이다! 더럽고 비열하고 추잡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저거라고!" "이봐 초면에 무슨 그런 말을..." 그 청년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카넬리안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크가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 둘, 똑같아, 보인다." "키야아아아!" 오크 들은 솔직하며 상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 참되고 긍지 높은 종족이다. 결국 카넬리안의 주먹이 그 오크의 얼굴에 직격되며 참된 종족의 하나는 저 하늘 로 날아가 버렸다. "이봐.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청년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씩씩 거리는 카넬리안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지만 거의 동시에 카넬리안은 불결한 것이라도 달라 붙은 것처럼 어깨에 놓인 손을 잡아 치우며 돌아 보았다. "내 친구? 너도 오크 였니?" "인간이야!" "아무튼...근데 넌 누구냐?" 카넬리안은 이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오며 이 청년이 대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작은 발은 계속 쓰러진 오크의 배를 꾹꾹 밟고 있었다. 대단한 집착. 아무튼 적이 되면 피곤한 여자다. "훗. 내 이름은 시오. 멋진 이름이지. 그런데 너..." 시오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청년은 갑자기 카넬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 이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느끼한 시선에 카넬리안은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그런 눈빛은..." "아름다워. '마을의 그녀'를 닮은 분위기야. 아아 너무 아름다운 얼굴..." 시오는 카넬리안이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 들었다. 물론 카넬리안은 여성으로서 이상적인 키에 천상의 것처럼 투명한 붉은 눈동자, 청초한 길고 검은 머리칼에 하얀 피부까지 가지고 있어서 누가 봐도 미소녀의 기준에서 떨어지는 구석이 보이지 않는 여자이긴 했지만...문제는 시오는 대체 뭐하는 남자길래 보자마자 본격적인 말을 들을 늘어 놓냐는 것이었다. 갑자기 두 눈이 휘둥그레 진 것은 멀찌감치 지켜 보던 줄리탄과 메르퀸트 였다. 카넬리안은 침착하고 싸늘하고 나직하게 시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손. 놔." "아름다워. 그 목소리도...그녀도 깨어나면 이런 목소리 일까?" "어. 서. 놔." "아름다운 당신...내 여자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어?" 갑작스런 프로포즈! 카넬리안은 갑자기 폭발하듯이 놀라서는 손을 뿌리치며 줄리탄에게 달려갔다. 진심으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주, 주인님 어떻게 좀 해봐! 이상한 남자야!"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련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카넬리안을 바라보는 줄리탄. 엘프의 지혜 따위로도 도통 모르겠다. 메르퀸트 도 상황 파악이 안되서 당황하고 있었다. "훗. 이미 남자가 있는 여자였나. 뭐 그 정도의 미모라면 무리도 아니지. 하지만...사랑은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 라이벌 따위에 기가 죽을 내가 아니지." 갑자기 시오는 줄리탄에게 적의를 내 뿜으며 동시에 참을 수 없이 느끼한 대사까지 뿜어대며 괴수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카넬리안.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줄리탄은 방금 전까지 아드포우인지 뭔지 하는 짐승이 날아다니다가 금방 오크 들이 곤죽이 되어버리고 지금은 카넬리안 만큼이나 알 수 없는 사내가 나타나 유치찬란한 대사를 사정 없이 읊어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종 잡을 길이 없었다. 아무튼 시오라는 사내의 성격은 이 쯤이면 대충 파악되지 않았을까. 1)아드포우 :듬성한 털이 온 몸에 나 있고 입 양 옆에 두개의 큰 뿔이 솟아 있는 흙빛의 짐승...이라고 하면 맷돼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맷돼지보다 좀 더 크고 꼬리가 개처럼 긴 편 입니다. 두꺼운 몸통과 상대적으로 얇고 단단해 보이는 다리가 숲이나 산악에 어울려서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향하고 있는 피트 산맥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육식 동물 입니다. 역시 앞으로 자주 나올 일이 별로 없을테니 흘려 듣고 잊어 버리시길. -Blind Talk 얼레? 할 말이 없네... 쿨럭, 광고도 쉽니다. 음악도 듣고 있지 않습니다...아아 힘들어라. 『SF & FANTASY (go SF)』 9982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8/01 09:06 읽음:53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2 : 천국의가상자리 관련자료:없음 [4973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7-31 03:55 조회:208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인간 들의 가장 모순 되는 모습 중에 하나라면... 자신은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누구도 자신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 단순한 나쁜 버릇하나 고치지 못해서 인간 들이 멸종해 버린 거야. 쉬운 말로 무덤 판 거지." "멸종하다니...난 인간이고 아직 살아 있다고." "안 보이는 걸 믿는 놈은 멍청한 놈이지만 보이는 거라고 믿는 놈도 경솔한 놈이지." 때로 그녀와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것은 달콤하기 보다는 꽤 격하고 단순한 게임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그녀는 잡아내기에는 너무나 빠르고 엉뚱한 공을 내게 던질 때가 있고 그러면 나는 한참 동안 내 등 뒤로 날아가 버린 공의 실체를 찾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녀야 한다. 결국 그 공을 찾지 못한 채 그녀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DRAGON LADY / F chapter 7-2 : 천국의 가상자리 -beauideal? 1. "훗. 네 녀석은 이 아름다운 숙녀 분께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군. 네 정체를 알아맞춰 볼까! 넌 잘 나가는 귀족 가문의 개망나니야. 돈이면 뭐든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족속 중에 하나겠지. 저 숙녀 분의 부모는 분명 너희 집안에게 억울한 빚을 지게 되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귀여운 딸을 팔 수 밖에 없었지. 그리고 네 놈은!! 그런 가련한 저 아가씨의 약점을 잡고는 이런 으슥한 곳으로 끌고 와서는...아아 그만두지. 아름다운 여성의 슬픈 표정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런 말은 꺼내지 않는 것이 남자의 예의라서 참는 거다." "...다 끝났냐?" 줄리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시오는 귀족의 거만함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수준 의 눈빛과 포즈를 취하며 뭐라고 잔뜩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정작 줄리탄은 아무렇 지도 않았다. 단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뿐이었지만...시오는 계속 시비조의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시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 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남자로서 너 같은 귀족 나부랭이의 더러운 손아귀에 저런 청초한 미녀가 잡혀 있다는 건 지나칠 수 없는 일이란 말야! 어떠냐 너도 남자 답게!" "나 귀족 아냐. 게다가 카넬리안이 어딜 봐서 청초한 미인이란...크억!" 카넬리안의 냉정한 펀치가 가차없이 줄리탄의 등짝으로 날아갔다. 카넬리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줄리탄에게 말했다. "주인님. 조금은 내게 애정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 카넬리안이 맘만 먹으면 멀마든지 청초한 분위기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오크를 두드려 패는 청초한 미인이라니 뭔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오는 자신의 파격적인 상상을 굳게 믿는 표정으로 귀족 줄리탄을 타도하겠다는 눈동자가 불타 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은 카넬리안 이었다. "이봐요 시오씨. 난 당신이 누군지 관심 없고 대체 날 차지하겠다는 환상적인 발상은 그 머리 어디에서 떠오른 거야? 이 분은 내 주인님이고 계약에 묶여 있는 상태란 말야. 보면 몰라? 난 씰이라고!" "씰이 뭐지..." 시오의 이 말에서 이 자가 줄리탄 못지 않은 촌구석의 사내라는 걸 알 수 있었 다. 시오는 언제나처럼 혼자서 멋대로 상상하며 결론을 지었다. "그렇군. 씰은 여자 노예라는 뜻이겠군. 평생을 저런 허여멀건한 놈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살아야 하다니 정말 이 몸이 당신을 구해줄..." 짜아아악! 강력한 힘! 카넬리안의 따귀 한방에 시오의 목이 돌아가 버렸다. 보고 있던 메르퀸트가 흠찟 놀랄 정도의 커다란 소리 였다. "적당히 좀 해. 뭐...씰이 질기게 오래 산다는 것만 빼면 노예와 별 차이 없지만 신경질 나는 건 너도 날 인간으로 봤냐는 거야!" "너 인간 아니었어?" 짜악! 짜악! 짜악! 짜악! 짜악!.... 2. "이 참에 오크 들을 밀어 버립시다!" "어차피 사람 들과 공존할 종족은 아니었어요." "용병 들까지 불러 왔으니까 이 땅에서 밀어내는 건 시간 문제라고요." 사람 들은 서로 거세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헤스팔콘의 가장 악지 중에 하나인 피트 산맥 쪽에서 살고 있는 화전민들. 한마디로 제대로 세금을 내면서 살 수 없는 극빈층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 들이었다. 또한 몹시도 엄준한 피트 산맥에는 인간의 눈을 피해 살고 있는 이종족 들 역시 많았는데 이 마을 의 근처에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오크 들 역시 그런 이종족 중에 하나 였던 것이다. 촌장은 헛기침을 한번 한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들과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까. 도리어 그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고 우리도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 갈 수 가 있었던 건데...이제 와서..." "그런 놈 들이 마을의 귀한 나트 들을 멋대로 도살합니까?" 사건의 발단은 마을에서 방목하여 키우고 있는 나트를 오크 들이 죽여서 먹어 버린 것 부터 였다. 이런 마을에서 몇 마리 있지도 않은 나트 들이란 엄청난 재 산. 목초지를 찾기가 힘든 곳이어서 꽤 멀리까지 끌고 나가서 키우곤 했는데 그 중 길을 잃은 나트 한 마리가 오크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고 오크가 그걸 사냥해 버린 것이 문제 였던 것이다. 당연히 나트의 주인은 오크 들에게 항의 했지만 세상과 물질에 대한 가치관 자체가 다른 오크 들로서는 '개인 소유물로 서의 가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도리어 그러한 항의를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에 있었다. 오크 들로서는 멀쩡한 생명체를 상대가 동의 하지도 않았 는데 '내 꺼!'라며 주장하는 인간 들의 논리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있었다. "그런 야만스러운 종족 들 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해요!" "우리와 가치관이 다를 뿐 입니다." "오크 들의 가치관 따위 우리가 챙겨줄 필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신 들이 모욕 당했다고 생각한 오크 들 역시 마을에 사과할 것을 계속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 무지막지하게 작고 초라한 마을의 외각에는 어설프지만 방책까지 만들어 졌고 용병 들까지 불러 모은 상태. 사실 이 화전민 들을 모아 이 마을을 만들었던 촌장으로선 오크 들과 무의미한 싸움 같은 것은 조금도 벌이고 싶지 않았지만 대부분 마을 사람 들의 여론은 오크 토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촌장은 나이에 비해 손과 얼굴만 봐도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촌장은 고된 농사일로 많이 갈라져 있는 손으로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인간 들에게 오크의 룰을 이해 시키는 것이 힘든 만큼 오크 들을 상대로 인간 들의 방식에 맞춰 달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결국 그 문제의 나트 들은 이미 오크 들에게 먹혀서 그들의 피와 살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돌라달라 어째라 말할 수도 없었다. "내 아들...시오가 오면 다시 한번 상의해 보겠소. 그 녀석은 어려서 부터 오크 들과 친하게 지냈고 오크 족도 시오하고 만은 대화를 나누니까 그 녀석이라면 묘안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어허! 큰일날 소리를! 분명히 시오를 죽일 겁니다! 시오도 나이가 어려서 너무 오크 들을 믿는 것 같아요. 그 놈들은 생살을 뜯어 먹는 족속 들이란 말입니다!" "생살을 먹을 수 있는 건 오크 들의 내장이 인간보다 튼튼하기 때문이겠고 무엇보다...인간의 소유욕 만큼이나 오크 들의 의리와 명예욕은 강하니까 자신 들의 친구로 인정한 시오를 해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촌장은 오크 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는 시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한숨 만 나왔다. 그는 오크나 자신 들이나 제국의 눈을 피해서 살고 있는 이 마당에 서로 또 몰아내고 싸우고 한다는 건 이런 마을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사라지 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를 파는 건 어떻겠습니까. 소문을 들어보니 '그 아이'는 도시에 가지고 나가면 굉장한 값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서로 저마다 수근거리고 동의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촌장의 집 한 켠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씰을 말하는 것이었다. 숲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그 씰은 깨어나질 않고 지금까지도 잠들어 있는 상태. 촌장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거실 한편에 닫혀 있는 엉성하게 만든 나무문을 바 라보았다. 그 안에는 그 씰이 잠들어 있다. 발견할 때 부터 잠들어 있었고 지금 도 앞으로도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며 촌장을 혀를 찼다. "썩 내키지 않는구려. 계속 잠들어 있지만...그래도 20년 전부터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를 팔아 버린다는 건 해선 안될 짓인 것 같아요." 촌장은 마음이 약하다. 왠지 그 씰이 자신의 딸 아이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그 소녀를 판다는 것은 정말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알지요. 저도 그 아이의 얼굴만 봐도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알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 마을의 위기 입니다! 여기서 오크 들에게 밀려나 버리면 우린 갈데도 없어요. 마음을 독하게 먹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우헤헤헤. 이 아이 비싸다며?'라고 군침을 흘리는 악당은 아니 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일상에는 이미 질려 있었고 언제 싸움으로 번질지 모를 오크 들과의 신경전 때문이라도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아마릴리스를 팔겠다는 거요! 남자의 명예를 걸고 그녀에게 손대면 가만 두지 않을꺼야!" 문이 활짝 열리며 들어온 것은 시오 였다. 시오는 그 씰에게 멋대로 아마릴리스 라는 참 목가적인 이름까지 붙여 놓고는 자신의 아버지 촌장 이상으로 엄청나게 아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아이 들이 별로 없는 이 마을에서 시오가 태 어날 때부터 그 씰은 잠들어 있었고 시오의 나이 17세 까지 그녀는 언제나 그 침대에서 조금도 늙지 않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오는 자신과 함께 있어온 그녀를 끔찍하게 아끼고 있었다. 사람 들은 시오가 들어오자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맘에 안든다고 어른을 두드려 팰 정도로 막 되먹는 자는 아니었지만 시오 의 고집과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 보통 사람보다 월등 강한 힘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오에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 왔구나." "아버지! 손님 오셨어요! 남자는 별볼 일 없지만 엘프와 숙녀 분은 정말 끝내준다고요." "..." 시오에 뒤에 서 있던 줄리탄은 한숨을 내쉈다. 하필이면 저렇게 소개할 껀 뭐람. "그런데 시오야." "예?" "니 얼굴은 왜 그 모양이냐." 촌장이 본 것은 자신 만만하게 어깨를 딱 펴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탱탱 부어 있는 자기 아들내미의 양 볼이었다. 당연히 카넬리안의 작품이었다. "아 이건...애정과 질투의 표현...쿠어억!!" 촌장은 자신의 아들이 풀썩 쓰러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마을 사람 들과 함께 두 눈이 휘둥그레져 버렸다. 쓰러지는 시오를 짐짝처럼 밀쳐버리며 혜성처럼 나타난 것은 카넬리안과 줄리탄 그리고 메르퀸트였다. 좌중 긴장. "잠시 신세를 지게 된 카넬리안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분의 성함은 줄리탄이고..." 카넬리안은 방긋 웃으며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카넬리안의 발 밑에선 시오가 움찔움찔 거리고 있었다. 3. 촌장은 '뭔가 불안해.'라며 동요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애써 달래며 돌려 보내 놓으며 카넬리안과 줄리탄을 대접하기 위해 낡은 나무 상자에서 아껴둔 오나칼라 스 잎까지 꺼내서 차를 만들어 주었다. 시오는 그렇게 등짝에 발길질까지 당해 놓고도 카넬리안을 보며 싱글 싱글 거리는 얼굴이었다. "아! 이거 좋은 차네요. 달라카트 남부의 슐리하르 산...인가요?" 카넬리안은 차 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걸 듣는 촌장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슐리하르라면...100년도 더 전에 해체된 도시. 거기선 더 이상 오나칼라스 잎은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도시의 이름을..." "없어졌어요? 이런...남부 최고의 휴양지 였는데. 바람도 좀 건조하긴 하지만...그쪽에선 가장 시원하고 달라카트 유일의 온천까지 있다고요! 최고 였는데...그렇지 메르퀸트?" "저, 전 달라카트 쪽은 잘 몰라서..." 카넬리안은 마치 어제 나녀온 관광지라도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옆 사람 들 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무례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씰이 아니십니까?" 촌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냈고 카넬리안은 계속 그 슐리하르라는 도시가 사라 졌다는 것에 아쉬워 하는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예. 지금은 이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역시 씰은 여자 노예 맞죠! 불쌍한 카넬리안 씨 저런 남자에게..." 시오는 역시 그렇다는 표정으로 말하려다가 카넬리안이 조용히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몸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시오. 이 분은 '그 아이'와 같은 분이시다. 그리고 저기 줄리탄 씨가 이 분의 테이머지." 촌장은 사실 시오에게 씰에 대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오는 그 말을 듣고도 머리 위에 물음표만 잔뜩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촌장 은 시오에게 씰과 테이머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으나 여기서는 예전의 스테온 때와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것이라서 쓰지 않는다. 테어머가 잠들어 있는 씰을 깨운다는 낭만적인 관계에 매료된 표정이 되어버린 시오는 그윽한 눈빛으 로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넬리안. 내가 당신을 깨워 주겠소." "이미 깨어 났어 이 멍청아." 카넬리안은 도통 상대하기 힘든 녀석이라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면서 촌장 에게 말했다. 메르퀸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간만의 휴식에 편안해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그런데 성함이..." "아 죄송합니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레터. 이 작은 마을에서 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모험을 조금 다녔지요." "레터 님. 이곳에 있다는 씰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카넬리안은 조금 궁금했다. 마을에 오기 전 시오에게 들은 말이나 씰끼리 그끼 는 모종의 교감 같은 것에서도 여기에 씰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카넬리안 은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4. 카넬리안과 줄리탄, 메르퀸트는 레터가 이끄는 방으로 들어 갔다. 공기가 차가운 그 작은 방에는 저물고 있는 볕이 들어오고 있는 커다란 창문 하나와 작은 침대 하나만이 놓여 있어서 공주가 잠들어 있다는 전설의 문이라도 열고 들어가는 기분 이었다. 카넬리안은 그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보다도 어리고 작아 보이는 씰을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어떻게 보면 카리나 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 어깨까지 오는 진한 금발의 곱슬머리에 궁글고 뽀얀 뺨이 순진해 보였고 만약 눈을 뜬다고 한다면 크고 동그란 눈동자로 주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분위기 였다. '느껴지는 게 없는데...' 카넬리안은 그녀에게선 조금도 강한 기운이 느껴지질 않자 도리어 당황했다. 아무리 하급의 씰이라도 그 고유의 힘은 같은 씰에게는 전해지게 되어 있는데 시오가 멋대로 아마릴리스라고 이름을 붙여 버린 이 씰은 마치 보통 여자 아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마치 그냥 흔들면 당장이라도 눈을 부비며 일어날 것 같았다. 대체 능력이 있긴 있는 건가...이 귀여운 얼굴 을 적에게 들이대서 적의 전의를 꺾어버리는 능력이 있는건가. "어때. 귀엽지? 아마릴리스?" "으응."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젠가는 깨우고 말꺼야. 하루도 빠짐 없이 그녀 곁에 있어 주었으니까 ...깨어나면 날 기억하고 있을껄?" "씰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인 줄 알아?" 카넬리안은 뭔가 자존심 가득한 표정으로 시오에게 말했다. 맞는 말이다. 주인 이 요리사라는 걸 알자마자 태도가 돌변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가 씰인 것이다. (카넬리안에게만 국한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에에~ 넌 이런 허약한 녀석도 깨울 수 있는 씰이잖아.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걸?" 카넬리안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했다. 불안한 표정의 메르퀸트. "요리사 밑에 있는 것도 성질 나는데,,, 레터 씨. 이런 멍청한 아들은 지금 죽어도 상관 없겠죠?" "카넬리안. 대체 내가 요리사인게 어때서!" 이번에 울컥한 것은 줄리탄이었다. 줄리탄 최고의 프라이드 였던 요리가 왜 자신의 컴플렉스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주인님은 좀 빠져봐! 지금 주인님을 약하다고 놀리잖아!" "난 뭐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데..." "으이구 정말!"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알면서 왜 물어. 줄리탄! 사모예드 줄리탄 이라고!" "주인님." "왜?" "내가 물어본 거 아냐."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했다. 줄리탄과 카넬리안, 시오, 레터, 메르퀸트의 시선 은 점점 한 곳으로 모아 졌다. 그곳에는 두 눈을 부비면서 예상대로 커다란 눈동자 로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는 씰이 있었다. 메르퀸트가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아...깨어났네요." 그 씰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한지 바둥거리면서 침대에서 나와서는 줄리탄에 게 다가갔다.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씰이라기 보다는 시골에서 올라온 귀여운 애인 에 가까웠지만...문제는 그녀는 씰이고 줄리탄이 깨워 버렸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제 이름을 말해 주세요." 줄리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Blind Talk 비축분이...끝 입니다. 두두둥~ 참 특이한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잡담을 쓰게 되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앓는 소리나 하고 끝나 버리는 군요.-_- 그럼 추천해 주신 분 들께 감사드리며...다음 편부터 본격적으로 진행 됩니다. (광고 입니다.) www.stickdeath.com ....-_-; 이미 알려질데로 알려 졌지만...물론 이곳 주인장과는 조금도 아는 사이 아닙니다만...자주 들리는 사이트라서. 잔인과 엽기를 웃음으로 승화시킨 곳이긴 한데...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할 겁니다.-_- EMINEM의 The Real Slim Shady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0047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8/04 08:12 읽음:48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3 : 천국의가장자리 관련자료:없음 [49805]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8-01 11:02 조회:583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살아있다.'라는 것은 남에게 증명하긴 커녕 스스로도 그 당연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사람 들은 계속 그 사실을 자기도 모르게 일깨우려고 노력하는데 누구는 일을 하며 그것을 느끼고 누구는 사랑을 하며 그것을 느끼고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느끼고 또 누구는 남을 죽이거나 스스로 죽음에 직면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DRAGON LADY / F chapter 7-2 : 천국의 가장자리 -AWAKEN 1. "...저의 이름을 말 해 주세요." 발견한지 20년 만에 깨어난 그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줄리탄 이 또 다른 씰을 깨운 것은 사실이었다. 카넬리안을 깨운 것은 그녀가 불량품 이기 때문이라고 애써 둘러댄다쳐도 그럼 이번 경우는 또 뭐란 말인가. 줄리탄 은 계속되는 악운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저렇게 귀엽고 작은 씰이 자신을 따른 것이 뭐가 미칠 일이냐고 물어볼 사람이 있다면...줄리탄이 카넬리안을 깨웠을 때의 사건을 참고해 보면 좋을 것이다. 그토록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순종적이던 카넬리안의 무시무시한 변신을. 단지 줄리탄의 '요리사'라는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이 씰 역시 자 신이 요리사라는 걸 듣는 그 순간부터 그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 끔찍한 말 들 을 쏟아내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울 거라는 생각이 줄리탄의 머리 속을 스치 며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성격파탄의 미녀는 한 명으로 족하다. 절대! 절 대로 이름을 말해선 안된다! 줄리탄은 그 짧은 순간 굳게 다짐했다. 그는 엄청 난 비밀이라도 말해주려는 표정과 절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 있잖아...나 요리사야. 그러니까..." 줄리탄의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멈칫하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가만히 줄리탄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줄리탄은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하며 화색이 돌았 지만 순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을 말 해 주세요." "듣지 못했나 본데 나 요리사 라니까. 기사 아냐. 글씨도 잘 모르는 무지한 요리사라니까...제기랄. 이런 것 까지 말해야 하나." "주인님. 계약 중의 씰은 다른 생각 못 해. 자신의 이름을 받기 전엔 다른 어떤 말도 듣지 않는다고." "알려줘서 고맙군..." 카넬리안이 그런 암울한 사실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자 줄리탄은 숨 넘어가는 잿빛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카넬리안...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뭔데?" "왜 나만 맨날 이 모양이야. 난 저주라도 받은 건가." "이번엔 동정해 줄께." 아무튼 요리사에게 씰이 둘이나 있다는 건 대륙 전체를 통털어 단 한 번도 없을 경우이다. 줄리탄의 머리속에선 '지지리도 불행한 요리사. 두 명의 씰에게 구박 받다가 홧병으로 요절하다.'라는 끔찍한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때 그 상상을 깨버리며 끼어든 건 시오 였다. "오오. 아마릴리스. 드디어 깨어났구나. 매일 네 귓가에 속삭여 주었 듯이 네 이름은 아마릴리스야. 난 네가 깨어나길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시오는 마치 오래 사궜던 애인이라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 무지하게 유지찬란한 말이었지만 줄리탄은 시오의 그 말이 통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 씰은 시오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당신은 누구야?' 라는 표정.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거야 아마릴리스! 어서 내 품으로..." 시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씰은 고개를 홱 돌리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제 이름을 말 해 주세요. 저의 테이머시여." "...." 그렇다. 시오는 그렇게 기다리던 그녀에게 개무시를 당한 것이다. 지금 시오 의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시오가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 였다. 시오 는 이를 갈며 줄리탄을 노려 보았다. 손에 들고 있는 목검이 부르르 떨렸다. "너 줄리탄!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아마릴리스를 빼앗아 가는 거냐! 어서 그만두지 못하겠어!" "...할 수 있으면 니가 한번 말려 보시지." 줄리탄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카넬리안은 다급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자 흠찟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공명은 아니었 지만 자연스럽게 줄리탄의 대단한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카넬리안! 일단 튀자!" 줄리탄이 카넬리안을 깨우고 당했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줄리탄 은 그런 비극을 또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는 얼굴로 '왜 나만!'이라는 비 명을 연발하며 얼굴로 잽싸게 문 밖으로 도망 쳤고 그 뒤로 카넬리안 역시 그 뒤 를 따라 뛰어 나갔다. 메르퀸트가 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미안한 표정으로 레터 에게 인사하며 '차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것만 제외하면 언제나 처럼 엉망친장. 무슨 남의 집 귀한 도자기 깨고 도망치는 3인조도 아니고... 2. 줄리탄은 어느 때보다도 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자신이 요리사 가 아니라 기사였든지 아니면 씰을 아예 깨울 수 없든지 둘 중 하나의 조건이라 도 충족되었면 이 지경은 아니었을텐데...줄리탄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냥 카넬리안이 깨어났을 때 잽싸게 몽둥이로 뒷통수를 내리쳐서 기절시킨 다음 다시 페세테르 뱃속으로 넣어 버리는 건데...하는 끝도 없는 후회가 물밀듯이 줄리탄 의 가슴 속에 몰아치고 있었다. "주인님...너무 속상해 하지마." 울며 뛰쳐나간 줄리탄의 뒤를 따라온 카넬리안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 했다. "이미 주인님의 인생은 구겨질데로 구겨졌잖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오펜바하 황제에게 쫓기고 있다고. 뭐 그런 상황에서 말 안듣는 씰 하 나 더 늘어 난다고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줄리탄이 평가하기에...카넬리안의 무엇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상대를 놀려 먹을 순간을 정확하게 포작하고 적절한 어구를 사용하여 상대의 비참함을 몇 배로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오펜바하 황제가 수 백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그녀를 땀 나게 찾고 있다는 이유도 어쩌면 이 기술에 당했던 것에 대한 복수 때문이 아닐까. 줄리탄은 뒤돌아보며 외쳤다. "황제에게 쫓기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잖아! 그리고 또 나보고 또 다른 씰의 테이머가 되라니! 내 기분도 기분이지만...무엇보다 그 씰에게 미안해. 나 같은 주인이라니..." 줄리탄은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닫았다. 젤리드가 오래 전에 한 말 '네 놈은 테이머가 약하면 씰의 능력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거냐?'...라는 그 말이 아직도 줄리탄의 마음 한 구석엔 남아 있었다. 카넬리안이 자신을 다른 보통 경우 처럼 '순종적으로' 대하지 않 는다는 것은 사실 견딜 수 있었지만...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약해졌기 때문에 죽게 될 경우가 벌어진다면 분명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두려웠 고 그 때문에 또 다른 씰의 테이머가 된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농담이야 농담. 불행한 여자는 나 하나로 족해." 라고 카넬리안은 말하면서도 미안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거렸다. 줄리탄이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에 마음 상하고 있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었고 그녀도 그것 만은 감싸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해진다는 건 그 만큼 자신 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아줘.'라는 그 녀의 말이 입속에서 맴돌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카넬리안. 술집이나 갈까? 기분도 조금 우울하니까..." 줄리탄이 술을 정말 못 마신다는 사실은 둘 째 치더라도 무엇보다 이런 엄청 작은 화전민 마을 같은 곳에 술집이 있을리가 없잖아...라는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주인님. 술집이란 남에게 술을 팔아 먹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야. 이런 곳에 누가 온다고 술집이 있겠어." 하긴 맞는 말이다...줄리탄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메르퀸트가 카넬리안 앞으로 나서며 근처의 집 한 채를 얇고 고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술집의 냄새가 나는데요." "술 냄새?" "아니요. 술집 냄새요." "...." 술집에서 질리도록 살았던 엘프의 말이라니까 맞긴 하겠지만 대체 술집의 냄새 라니 뭘까 그건. 줄리탄은 가만히 간판 하나 없이 굴뚝 연기만 뿜어내고 있는 오래된 나무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가지." 줄리탄은 정말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건지 어디라도 가서 숨 좀 돌리고 싶었던 건지 태연하게 앞장서며 그 집으로 걸어갔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이 기운이 없 자 조금 입을 삐죽이며 메르퀸트와 함께 뒤를 따랐다. "메르퀸트. 넌 씰에 대해 알고 있어?" 카넬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메르퀸트에게 말을 툭 던졌다. "잘 모르고는 있지만...인간 만이 깨울 수 있고 엄청나게 강하고 그리고 또...우리 들 보다도 오래 살고...에 또..." "하하. 인간 만이 깨운다고? 뭐...꼭 그렇진 않지만..." 카넬리안은 뭔가에 쑥스러운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한 손으로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자신의 검 미스트랄은 안은 채로. "가장 중요한 건 충분히 그 씰을 다룰 수 있을 만큼 강한 자 만이 깨울 수 있다는 거야. 강하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고...또 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씰 스스로가 자신의 테이머에게 '강하다.'라는 걸 인식해야만 해." 카넬리안은 축 쳐진 어깨로 술집으로 예상되는 건물로 들어가는 줄리탄의 등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하다...라." 메르퀸트 역시 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카넬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요리하는 것 외에는 어떤 능력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줄리탄이 자신을 어떻게 깨울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새로운 씰을 깨운 것도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억측이었다. 분명히 카넬리안조차 간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모르겠네 정말...제이미아 님이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 내가 만날 수 없을 곳에 있을테고 만나봐야 그 분이 말해 줄리도 없겠지. 자기는 이 세계 모든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카넬리안이 피식 웃으며 '낮선 사람'의 이름을 말하자 메르퀸트는 궁금한 표정이었다. 메르퀸트 역시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언 제나 궁금해하고 있었던 터 였다. "제이미아? 그 분은 누구 신가요..." "아, 내가 제이미아라고 했어 지금? 실언이야. 몰라. 그런 여자는..." 카넬리안이 갑자기 당황하며 말하자 메르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이미아 라는 분은 여성이셨군요." "...." 드물게 실수 했다. 카넬리안은 갑자기 아하하하 라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잽싸게 말을 돌렸다. "어, 어서 주인님에게 가야지! 나, 나도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졌거든?" 메르퀸트는 당황하는 카넬리안에게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런데 카넬리안 씨. 저...씰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해줄 수 있으세요? 궁금해요. 그냥 우리처럼 이 세상의 많은 종족 중에 하나인지. 아니면..." 카넬리안은 순간 멈칫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잘못 질문했는지 미안해 하는 메르퀸트를 방긋 웃는 표정으로 돌 아보며 말했다. "미안. 그건 비밀이야. 그걸 알게 되면 너도 주인님도 날 싫어하게 될테니까. 아 또 실언이다." 그녀의 웃음에는 그늘이 있었다. 3. 줄리탄은 그 '술집'의 문을 열며 좀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굉장히 좁은 그곳 의 거실에는 상당히 험상궂은 표정의 사내 들이 테이블에 몰려 앉아 커다란 술 잔에 잔뜩 술을 담아 퍼 마시고 있던 중이었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 은 문을 열고 들어온 줄리탄을 보며 대화를 멈추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쏘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줄리탄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사람 들 분위기는 분명히 술판이었는데 여긴 아무리 봐도 가정집...테이블도 그들이 있 는 곳 외에는 없었다. "어이 꼬마 넌 뭐야."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사내 하나가 신경질 적인 표정으로 줄리탄을 쏘아 보았다. 제대로 다듬지 않아 잡초마냥 제멋대로인 수염이 흉물스럽다. 줄리탄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중얼 거렸다. "술 마시러 왔는데...앉을 곳이 없나." 평소의 줄리탄 같으면 뒤로 물러서며 싸움을 피했겠지만 지금은 어디라도 좋으 니까 앉아서 좀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기분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런 줄리탄 의 태도가 상대의 기분을 거슬렸나 보다. "야! 뭐하는 놈이냐고 물어보고 있잖아!" 그 사내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만지작거리며 눈동자를 거칠게 굴 렸지만 줄리탄은 문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줄리탄 앞으로 황급히 달려온 자는 이 집 주인 정도로 보이는 뚱뚱한 체구의 여성이었다. 애 열 명 쯤은 너끈히 키울 것 같은 덩치다. 그녀는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누, 누구세요 당신은? 여긴 술집이 아니에요." 줄리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 사람 들은 뭐에요?" "저...저 사람 들은 용병 들이에요. 오크를 잡으러 온..." "주인님. 안들어가고 뭐 해." 카넬리안이 줄리탄을 밀치며 메르퀸트와 함께 들어와 버렸다. 카넬리안과 메르 퀸트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집 구석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성 둘(실은 한 명은 슬픈 사정이 있는 남성이지만...)을 본 남정네 들의 눈이 커져 버렸다. 아마 열흘 굶었다가 진수성찬 만났을 때도 그렇게 기쁜 표정은 아니었 을 꺼다. "이야! 끝내주는 아가씨 들인데~~" 라는 말을 시작으로 표현하기 불결한 말 들을 그들은 잔뜩 늘어 놓았다. 보통 이런 자 들이 여자 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이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언제나 천편일률이다. 즉 듣기 아주 불편한 끈적한 말 들로 여성 들을 겁을 준 뒤에 자신의 별 웃기지도 않는 야성미를 강조하고 슬슬 여성 들이 자신 들을 감히 거부하지 못하게 굳어 버리면 말 보다는 온 몸으로 자신 들의 욕망을 보 여주는 것이다. 단순명료하며 밀폐된 공간을 장소로 하는 대부분의 여성 들을 향한 실전에 의하면 성공률도 극히 높았다. 꽤 긴 레파토리를 가진 꽁지 머리 사내의 음담패설 메들리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되다가 남녀의 성적 접촉을 최 대한 지저분하게 설명하는 대미를 장식하며 끝을 맺었다. "~~~니까 성깔내기 전에 이리로 와! 둘 다!" 카넬리안은 두 눈을 깜빡이며 그 말을 끝까지 들어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두소절 쯤 읊었을 때 상대의 목과 머리가 영원히 이별하도록 만들어 주었겠 지만 그녀는 계속 가만히 있다가 메르퀸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긴 술집이 아닌 것 같지?" "미안해요. 분명히 술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메르퀸트가 느끼는 술집의 냄새란 아마도 취객 들의 흐트러진 모습에서 풍기는 역한 기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르퀸트가 있던 곳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쳇. 귀가 먹었나 이것들이..." 아마 이름조차 절대 언급되지 않을 그 사내 중에 하나가 무식하게 생긴 검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혹가다 위의 패턴이 통하지 않을 여자 들을 위 한 다음 방법. 그것은 행동으로 겁을 주는 것이다. "거기 그 꼬마 놈에겐 볼 일 없으니 죽여도 되겠지?" 줄리탄에게 한 말이다. 줄리탄은 옆에 카넬리안도 있고 하니까 일단 마음은 안심. 게다가 오늘은 왠지 안하던 짓을 해보고 싶었다. "죽여봐." 줄리탄은 눈을 내리깔며 최대한 위압적으로 말했다. "오오!!" 감탄한 표정의 카넬리안. 가끔은 줄리탄이 사건의 주동이 되기도 한다. "뭐야? 이 자식이 약을 처 먹었나!" 그 사내는 테이블을 훌쩍 뛰어 넘어 줄리탄에게 다가오며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메르퀸트는 엄청나게 불안해하며 카넬리안과 줄리탄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줄리탄은 조용히 그 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카넬리안 역시 아무런 행동조차 취하지 않았다. 하긴 무슨 짓을 해도 카넬리안 보다 빠를 수야 없겠지만 줄리탄의 이번 행동은 의외여서 그녀도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 사내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비꼬듯이 말했다. "어디 다시 한번 그 잘난 말을 지껄여 보시지? 죽여 달라고 했던가?" "누가 더 빠를까?" "뭐?" 줄리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난 도박을 좋아해. 특히 언제나 이기는 도박 만을 하지. 네 놈의 그 값싼 인생을 이 칼에 걸어 볼텐가? 서로의 목숨을 걸고 말야."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 카넬리안과 메르퀸트는 줄리탄의 갑작스런 '성장'을 커다랗게 된 눈으로 마냥 바라보았다. "흥! 칼도 없는 주제에 그런 말을 잘도 지껄이는 구나!"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자, 어서 내 목을 잘라봐." 줄리탄은 아주 능숙하게 배짱을 튕기고 있었다. "너...마법사 인가." 사내는 줄리탄의 여유로운 태도에 긴장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곧 죽을 놈이 그걸 알아서 뭐하게. 너희 같은 놈 들과 해충 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그건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계속 나타난다는 거지. 그래서 네 놈이 피거품을 뿜으며 여기서 죽어버려도 난 네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들이킬 때 쯤엔 잊어버리게 되겠지." "나, 날 죽여도 내 동료 들의 칼을 피하지 못할텐데." "그건 네 놈이 걱정할 게 아냐. 뭐하고 있는 거야! 기다리기 귀찮군!" 씨익. 줄리탄의 갑작스런 일갈에 상대는 놀라서 칼을 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줄리탄도 드디어 끌땐 끌고 끊을 땐 끊는 맛을 아는 허세의 대가로 성장한 것인가. 상대는 패닉 상태에 빠지며 당황하다가 줄리탄 일행에게 '두고보자아~~'라는 진부 한 말을 흘리며 집 밖으로 도망쳐 버렸고 그때서야 줄리탄은 크게 한 숨을 내쉬며 의자에 덜썩 앉았다. "주인님! 멋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거야. 아아 사실 웃음 참느라고 혼났다고..."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등짝을 두드리며 엄청나게 웃고 있었고 줄리탄은 스스로도 좀 쑥스러운지 앞의 술잔을 만지작 거리면서 말했다. "니가 할 말을 대신 한 것 뿐이야. 적어도 내가 하면...무 잘려 나가듯이 퍽퍽 죽어나가진 않을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카넬리안이었다면 정말 해충박멸하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순식간 에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러다가 내가 막아주지 못했다면 어떻게 할 뻔 했어. 허세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언제나 통하는 건 아니라고." 카넬리안의 말은 진심이었다. 젤리드나 세이드 같은 성격 더러운 실력자 들을 상대로 그런 식으로 읊어 댔다간 줄리탄 같은 보통 사람 들의 목이야 붙어 있질 못한다. 줄리탄은 자기도 알고 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햇다. "뭐랄까...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시험하다니? 뭘?" "그냥." "그냥? 뭐?" "그냥...시험. 어떤 기분일까." "주인님. 정말이지..." 카넬리안은 잠시 말을 끊으며 줄리탄이 그녀를 돌아볼 때까지 그를 내려 보았다. 찡그린 눈썹과 웃는 입술이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는 줄리탄의 뺨에 손을 가져 다 대며 속삭이 듯이 말했다.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그 뒤에 서 있는 메르퀸트는 아직도 아까의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 지만 그들을 보며 무언가 부럽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치는 것이었다. 하루를 마치는 태양빛의 잔재 들이 창밖을 통해 들어와서는 테이블 위에 뽀얗게 쌓이고 있었다. -Blind Talk '열심히 올려야지!'라는 생각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뭐랄까 역시 내 맘대로 안되네요. 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My Pace 입니다...라고 다짐은 하지만. 전 한편 쓰는 시간이 상당히 늦는 편 입니다. 구상해 보고 정리해 보는 시간 다 빼고 보통 400줄 쓰는데만 5,6시간은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짧게라도 자주 올릴까도 생각해 봤지만...이 글 퍼 가시는 분 들도 귀찮아 하실테고...무엇 보다 짧으면 짧은대로 서두의 인트메조 같은 것도 많아지고 소제목도 많아지 고...그래서 빨리 쓸 수 있도록 단련하자! 라는 의지에서 챕터7은 꽤 빨리 써버렸습니다.(그래도 3시간 정도...) 다시 읽어보니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것 같네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아 어제 '춤추는 대수사선'을 봤습니다. 드라마는 보지 않았지만 그걸 몰 라도 나름대로 재미 있는 영화 였습니다. 그래도 그래도...전 일본 영화 중에선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 들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이제 챕터7 완료까지 2,3편 쯤 남은 것 같네요.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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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주문이란 건 어차피 자신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개인적 형식이니까.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 '얼음화살!'이라고 외쳐 놓고 불덩어리가 튀어 나가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거야. 맞는 사람은 기분 나쁘겠지만." 카넬리안은 책을 덮으며 갑자기 창밖을 바라보곤 으음...하면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바닥에 주저 앉아서 나를 돌아 보았다. 언제 보아도 호감도 적대감도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런 붉은 눈동자다. "주인님. 마법 배우고 싶어?" "아무나 배우는 거 아니잖아 그런 거." 별로. 태어나서 가장 바쁜 최근을 보내고 있는 이상 닥친 일에만 충실하려고 한다. 뭐 그녀의 말은 대충 이해가 간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완전히 서로 다른 요리를 만들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재료로도 비슷비슷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7-3 : 천국의 가장자리 Sub title : Remanberance 1. 계약을 완료하기 위한 씰의 집념이란 무섭다. 아마릴리스를 깨운 이후 3일간 줄리탄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시달렸다. "제 이름을 말해 주세요." 길을 걸을 때도... "제 이름을 말해 주세요." 밥 먹을 때도... "제 이름을..." 화장실에 갈 때까지... 줄리탄은 자신을 계속 따라 다니는 아마릴리스 덕분에 정신붕괴 일보직전 상태. 누구나 3일 정도 계속 똑같은 질문만 하면서 누군가 따라다닌다면 끓어 오르는 짜증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줄리탄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이유라면 그녀에 대한 뭔지 모를 책임감과 죄책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깨운 것이고 이대로 자신이 이 마을에서 도망쳐 버리면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카넬리안 마저도 짐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턱하고 이름을 말해 서 책임질 수도 없는 상황,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골몰하는 꼴이었다. "카넬리안. 말해줘! 넌 수천년 이상을 살았다고 했잖아! 뭔가 이거 해결할 방법이 있을 꺼 아냐." 오늘도 자신을 찾아 마을을 헤매는 아마릴리스의 눈을 피해 창고로 숨어든 줄리탄과 카넬리안, 메르퀸트의 모습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줄리탄은 신경쇠약 에 걸려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수척해진 얼굴로 카넬리안에게 애원하듯이 물어 보았지만 카넬리안은 한심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살다 살다...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나도 씰이지만 씰이 이렇게 질긴 줄 누가 알았겠어." "제기랄...이대로 도망쳐 버릴 수도 없고. 시오는 나만 보면 아마릴리스를 빼앗았다느니 너는 자격 없다느니 설쳐대고...미치겠네 정말." 줄리탄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인생의 쓴 맛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지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으아아! 이제 못참아! 책임 지면 되잖아! 이름 정해 버릴테다!" "멋대로 씰의 인생 망치지 말앗!" 결국 폭발해 버린 줄리탄을 뜯어 말린 것은 카넬리안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몰라. 몰라." 세 명은 그 좁은 창고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엔 없다. 2. "저 아마릴리스..." 줄리탄을 놓쳐버린 채로 두렁에 앉아 있는 아마릴리스의 곁으로 시오가 다가 왔지만 아마릴리스는 그냥 멍한 표정으로 먼 산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오는 너무나 아쉬웠다. 그도 나름대로 태어나면서부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 고 언젠가는 그녀가 깨어나 자신의 애인이 될 꺼라는 기대를 가지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막상 갑자기 나타난 얼치기 같은 녀석이 깨워버리더니 자신을 돌아보 지도 않고 있는 것이 슬펐고 그녀가 이런 모습으로 3일 동안 계속 줄리탄을 찾 아다니며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고 마을을 배회하는 것도 보고 있기 가슴 아 팠다. 시오는 이제는 자신 없는 모습으로 아마릴리스 옆에 조용히 앉으며 그녀 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자신의 존재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 은 그녀의 표정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궁정 한 가운데 장식 된 석상처럼 아름답고 매말라 있다. "할 말이 없네. 너 깨어나면 말해줄 게 잔뜩 있었는데..." 그녀는 듣고 있기나 한 것인가. 산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 칼과 무관하게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살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을 닮은 마음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시오는 머쓱한 모습으로 자신의 눈 앞에 흐르는 실개천의 작은 물결 들을 지켜 보며 한참을...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끔 시오의 귓가의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고 그녀의 어깨 위에 녹색의 풀벌레가 날아 들었다간 다시 사라졌을 뿐...시오는 그제서야 그녀가 아직 정말로 깨어난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는데...무슨 생각을 하고 했었어? 너희는 주인을 찾아서 모신다고 하던데 전 주인에 대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시오는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그리고 뭉쳐 오르는 침을 삼키며 아마릴리스 를 돌아보고 말했다. "내가 네 테이머가 된다면 참 잘해줄 수 있을텐데...바보 같은 소리지? 하지만 진짜...진짜 잘해줄 수 있을 꺼야. 카넬리안 같이 날 구박해도 행복할 꺼야. 그러니까..." 시오는 말을 멈췄다. 그녀가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 빛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잠시 시오의 표정을 이리 저리 살펴보는 듯 했다. 그리고는 결국 닫은 입을 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의 좁은 길을 따라 걸어 갔다. 시오는 따라가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서 멀어 지는 키가 작은 그녀의 뒷모습에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이후에 도 시오는 한참 동안 자신의 목검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시오야. 거기서 뭐하는 거냐. 가죽 들은 언제 다듬을 꺼야." 시오에게 다가온 자는 그의 아버지 레터 였다. 시오는 레터를 보고 예의 여유 로운 웃음을 지으며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터는 양 손에 커다란 물통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버지. 한가지 물어볼 께 있는 데요." 시오는 레터의 양 손에서 물통을 건내 받아 들며 나직하게 말했다. "왜 아마릴리스가 씰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거죠." "그게 중요했니? 그런게 알아도 좋을 게 없을테니까. 별로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씰이 뭐고 테이머가 뭔지 알고 미리 있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나 자신에게 실망하진 않았을 꺼에요." 3. 용병 들은 나름대로 열 받아 있었다. 마을에서 대충 오크 토벌해 주고 큰 돈을 뜯어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놈에게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알량 한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래도 줄리탄에 대한 공포심은 가지고 있었는지 그들이 대려온 자는 떨거지 용병 들 사이에서 그래도 이름 좀 날린다는 도륙마 스키조라는 자였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숲 속에서 숨어 마을을 정탐하며 복수 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이딴 코딱지만한 마을 어쩌지 못하고 날 여기까지 부르다니 이런 병신 같은 것 들." 온 몸에 거친 가죽 갑옷을 두르고 있는 스키조는 연신 혀를 차며 자신 들의 부하 꼴인 용병 들에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 놈 예삿 놈이 아니었어요." 덕분에 줄리탄을 추겨 세워주게 되었다. "흥! 이 스키조에게 피트 산맥에선 덤빌 놈이 없다는 걸 잊진 않았겠지. 어차피 상대는 한 놈 뿐이고 이딴 화전민 마을 박살내 봐야 군대에선 관심도 없을테니까 오히려 잘 되었군." "이 기회에 이 마을 놈 들 족쳐서 돈이나 왕창 뜯어내지요." 이런걸 유유상종이라 부른다. 그들은 복수라는 좋은 명분을 이용해 마을을 털 계획을 세웠다. 사실 용병이란 이름표를 달고 도적질을 하는 자 들은 적잖게 볼 수 있었고 특히 치안의 공백지인 화전민 마을 같은 곳은 도적 들의 주요 습격지 중에 하나 였다. 그렇게 계획을 짜고 마을을 덥치려던 순간 자신 들의 눈에 들어오는 자가 보였다. 줄리탄을 찾고 있는 아마릴리스 였다. 길 가의 숲 속에 숨어 있던 그들이 수근 거렸다. "저 여자는 뭐야." 스키조는 용병 들을 돌아보며 말했지만 용병 들도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레터의 집 한구석에 엄청나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녀의 존재를 그들이 알리 가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 반반하게 생겼는게 잡아다 팔면 돈이 될꺼야. 일단 우리가 품질을 확인해 보고!" 스키조의 그 말에 용병 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니 이 놈 들 정말 쓰레기다. 그들은 아주 오랜만이라는 얼굴로 서로 킥킥 웃었다. "가서 잡아와." 스키조의 명령에 쓰레기1 과 쓰레기2, 쓰레기3 이 출동하며 아마릴리스의 앞과 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찍소리라도 내면 죽여 버릴테다!"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있어." "...." 아마릴리스는 그렇게 외쳐대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당황하는 용병 들. 수많은 여자 들을 위협해 보았지만 이런 막가는 경우는 처음이다. 용병 들은 멍청하게 자신을 지나가는 아마릴리스를 바라보다가 스키조에게 말했다. "저...무시하는데요?" "멍청아! 그냥 잡아와!" 결국 쓰레기1,2,3는 그냥 아마릴리스를 들쳐 업고 숲으로 들어 왔다. 아마릴리스 는 그냥 조금 버둥거릴 뿐 별 저항 조차 없었다. "이 여자 대체 왜 이래." "상관 없어. 얼이 빠졌나 본데 이럴 수록 팔아먹기 쉬우니까." 스키조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마릴리스를 흙밭에 던지듯이 눕힌 뒤에 그녀의 윗옷을 벗길 때도 아마릴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Blind Talk 이번 편은...영양가 없는 한판 이었습니다. 게다가 딱 2시간만에 썼네요.-_- 그리고 왠지 18금으로 가려는 듯한 분위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과연. 이렇게 짧게 올리면 안되는데...하면서도 일단 또 너무 간격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올립니다. 다음 편 부터는 좀 더 밀도를 높여서! 2편 쯤 남았네 챕터 끝까지. 그건 그렇고 그렇게 잘 쓰던 제 Sharp 722 MD가 박살났습니다. 아아 이거 고치러 또 용산에 가야 한단 말인가. 휴우. 앞으로 3챕터 쯤 나가면 1부 끝이구나. 마지막으로 언제나 그렇지만 오탈자 있거나 문맥에 문제 있다면 쪽지로라도 좀 알려주세요오. 하이텔 나우에서 추천해 주신 분 들 감사 드려요. (그리고 빨리 올라온다고 기뻐하시자마자 다시 늦어져서 죄송...그럼 담편은 빨리) (광고 입니다.) http://hut.sarang.net/ ...희범님의 홈페이지. 볼륨감이 있는 캐릭터라면 역시 이 분입니다. 자 그럼. 아 그리고 예전에 소개했지만...http://my.dreamwiz.com/eyehead/ 에 가시면 카넬리안의 새로운 캐릭터 그림이 올라와 있네요.^^ EMINEM의 The Way I Am 을 들으며... (아아 훌륭한 노래야 정말...) 『SF & FANTASY (go SF)』 102324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8/14 12:15 읽음:34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5 : 천국의가장자리 관련자료:없음 [50754]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8-14 06:02 조회:171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카넬리안은 (아주 가끔) 진심으로 웃을 때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 내지 않고 웃는다. 몇 번 안되지만 나도 그녀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리이 경은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때는 이를 꼬옥 물고 웃기 때문에 발그레한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살짝 살짝 보이는 것이 즐겁다. 메르퀸트는 다시 만난 뒤에도 언제나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멋적게 웃는다는 건 변함이 없다. 처음에는 엘프 들은 다 그런지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웃는 모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웃는 모습에 신경 쓰는 건 바보 같은 짓 이니까. 그러니까...웃는 모습이야 말로 그 사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큰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닐까.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7-5 : 천국의 가장자리 Sub title : traditional but happy (전편 줄거리) 세이드를 피해 레터의 화전민 마을로 가게 된 카넬리안과 줄리탄, 메르퀸트는 그 마을에 아직 깨어나지 않은 씰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줄리탄은 그 씰을 깨우게 됩니다. 한편 시오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그 씰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할 때 계약을 마치지 않은 줄리탄을 따라다니는 그 씰을 도적단 들이 납치하게 되지요. 1. "줄리탄! 아마릴리스 못 봤어?" 황혼빛을 등지고 서 있는 시오의 표정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그는 집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씰의 존재가 뭔지는 머리가 아파서 생각해 보고 싶지 않다. 단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얼마 전까지 잠 들어 있던 그녀의 얼굴을 매일 매일 바라보며 생각했던 그 많은 말 들을 꼭 해주 고 싶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 해서 자신은 그녀와 같이 있을 자격 조차 없다는 건 쓸쓸한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참을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진심을 말해 보지도 않고 이대로 끝나는 건 정말로 참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잔뜩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은 채로 그녀를 찾았는데...대체 어딨는 거야. "모르겠는데?" 갑자기 헐떡거리며 달라오는 시오를 본 줄리탄 역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야 이 놈아! 너 아마릴리스를 빼 돌리고 모른 척 하는 거지!" "...맘대로 생각해라." 줄리탄은 손을 내저으며 시오 곁을 지나갔다. 그래도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것 에는 좀 불안한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시오. 너 말야..." 줄리탄을 뒤따르고 있던 카넬리안이 시오에게 말했다. "...?" "너 바보야? 뭣 때문에 니가 아마릴리스라고 부르는 그 씰을 찾으려고 그렇게 애쓰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뭐라고 말해도 한 마디도 그녀에겐 들리지 않아. 혼자서 잔뜩 기대하고 또 실망해 놓고 나중에는 '나는 사람 마음 몰라주는 씰 따윈 정말 싫어.'라고 투덜거리기라도 할 생각인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 눈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카넬리안의 말투는 특별히 경멸어린 어조는 아니었다. "몰라. 난 네 말대로 바보라서 씰이 뭔지 몰라. 날 어떻게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니가 날 바보 멍청이로 생각하든 말든 인간이라면...네가 그렇게 싫어 하는 인간인 나는 말야 좋아하는 상대에겐 그가 누구든지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끝내고 싶어. 그래서 상처 받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것 뿐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시오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길 저편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카넬리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 거릴 뿐이었다. "나중에 땅을 치며 실망해도 몰라. 바보 같긴." "카넬리안." 줄리탄이었다. "왜? 주인님?" "우리도 아마릴리스를 찾자." "......" 카넬리안의 표정은 '여기에도 바보가 하나 더 있었네.'였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 뒤에 굳은 미소를 띄우며 '주인님'에게 말했다. "주인님. 잠시 잊고 있었나 본데 우리 지금까지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찾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땐...또 도망치지 뭐." 줄리탄이 뒷머리를 긁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카넬리안은 이해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아아 나야말로 잊고 있었네. 주인님도 인간이라는 걸. 나야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러지요 뭐." 라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그다지 기분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2. "이젠그람 장군이 달라카트의 국경선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 입니다." "뭐? 아취발드 이젠그람 백작을 말하는 건가 지금?" 첩보대로부터의 소식을 전해 들은 가르바트 북해 기사단의 *프리셉터(preceptor) 마르켈라이쥬 혼은 피지에 그려져 있는 서대륙 이실라트의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지도를 옆으로 던지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수하를 내려다 보았다. "분명히 그 붉은 눈의 씰이 달라카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겠지?" "예. 아무래도..." 일단 마르켈라이쥬라는 자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그는 타고난 기사로 몇 번이 나 있었던 헤스팔콘의 '검은 추기경' 세이드 폰 러셀과의 싸움에서도 승부가 나 질 않았던 인물이었다. 동시에 신의 편애라도 받았는지 헤스팔콘의 군 총사령관 이젠그람을 상대로 한치의 땅도 헤스팔콘에 넘겨주지 않은 지략가. 단순히 힘 만 세서 북해 기사단의 프리셉터 자리에 올라 '북해의 마신'이라는 별칭으로 불 리게 된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이번 경우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처음에는 그 악마 같은 세이드가 움직이고 다음에는... 황실의 수뇌 로이터 막시밀리언 공작이 직접 나서서 수배령을 내린 뒤에 이번에는 군의 우두머리 이젠그람까지 전선에서 이탈하며 남부의 길목을 차단 했다? 그 씰 하나를 잡기 위해서? 아무리 최상급의 씰이라도 하더 라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마르켈라이쥬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세상에는 모를 일이 많다지만 도무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이번 일에는 아주 질려버렸다는 표정이었다. "오펜바하 제1황제의 칙령이니까요." "그러니까 오펜바하 황제가 그 씰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뜻이로군. 헤스팔콘 제국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말야. 그런 정도의 씰이라니 ...힘으로는 부러울 것이 없는 오펜바하 황제가 원하는 것이니까 단순히 그 씰의 전투 능력 때문은 아니겠군. 그렇다면 뭘까." 게다가 그는 테이머가 아니었다. 본래 북구에선 씰이 별로 나타나질 않기 때문 에 테이머가 될 기회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그는 이성적으로 파악 할 수 없는 존재였던 씰에게 자신의 등을 안심하고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의문의 존재...씰에 대해 언제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희 쪽에서도 부대를 보내서 그 씰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괜히 섣불리 끼어 들어서 제1황제의 신경을 거슬리고 싶진 않으니까. 조금만 더...지켜보기로 하지." 3. 가슴이 풀어 헤쳐진 채 바닥에 쓰러진 아마릴리스에게 짐승처럼 들러 붙던 스키조는 단지 인형처럼 촛점 없는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며 한마디의 저항 조차 하지 않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뭔가 인간에게선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지만 그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튼 오랜 만의 여자 였고 저항이 없다면 자기 욕정을 뿜어 내기에 더욱 편하다. "..." 아마릴리스는 정말 아무 말도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머리 속에선 오직 줄리탄 이 있는 곳을 생각하고 있는 것 만으로 꽉 차 있는지도 모른다. 계약이 끝난 뒤에 지금을 기억할 수 있다면 수치심이 터져 올라 괴로워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행동도 없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자신의 몸 을 범하려는 스키조의 존재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스스스스슥. 풀숲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는 용병 들이 그곳으로 고개를 렸을 때는 살의를 띈 무언가가 날아 오르며 그들을 덮치는 것이었다. 따아아악! ...하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골 깨지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본 것은 스키조 였다. "네 놈은 뭐야." 스키조의 시야에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꽁지 머리 용병과 목검을 들고 서 있는 시오의 모습이 보였다. 시오는 마구 화를 내며 이리 저리 목검을 휘둘러 대는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단지 스키조를 쏘아보며 자세를 잡은 채로 차가운 증오심을 내뿜고 있었다. 시오는 독학으로 검술 을 익히긴 했지만 앞 뒤 안가리고 검을 휘둘러 대는 무지랭이는 아니다. 명백한 숫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냉정한 침착함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릴리스에게서 떨어져." "큭큭. 너 이 백치 여자 아이의 애인이라도 되는 거냐?" 여유로운 스키조 였다. "맘대로 생각해." "저 놈. 이 마을 촌장 아들 놈 입니다." 오크 들과 친한 시오와 오크를 사냥하려는 용병 들은 처음부터 갈등이 심했었다. "...어떤 놈이든 상관 없어. 다만 이 스키조 어르신을 방해한 죄 값은 죽음 뿐이라는 걸 알려주지." 이 스키조라는 사람. 딴 건 몰라도 자기애가 지나친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는 단추 풀린 더러운 웃옷 사이로 보이는 수북한 가슴털을 들어내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닥에 놓인 자신의 커다란 곡도조차 들지 않은 자신 만만한 얼굴이었다. 시오는 뱀 같은 그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자 인상을 찡그렸다. 볼을 씰룩이던 스키조가 용병 들을 향해 내 뱉었다. "죽여버려." 그 순간 칼을 뽑아든 용병 들이 시오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 갔다. 상대는 진검도 아닌 목검 따위를 들고 있는 애송이 하나. 대충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분명히 도망칠 것이다...까지가 용병 들의 추측. 그 잘난 예상이 깨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음대로 휘 두르던 그들의 검은 시오에 절제된 타격에 의해 손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 다음 타격은 그들의 머리와 어깨, 무릎 등으로 사정 없이 내리쳤다. 사실 시오의 실력이라면 목검으로도 얼마든지 상대의 숨을 끊어 버릴 수 있었지 만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상대의 무력화 였기 때문에 자칭 용병들은 얻어 맞은 부위를 부여 잡으며 꼴상 사납게 흙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10초. 시 오의 축이 되었던 오른 발이 앞으로 나서고 10초 만에 싱겁게 결론이 나자 입이 쫙 벌어진 것은 스키조 였다. 뭐야 이 꼬마는. "...너 기사 수행자냐 아니면..." "검 들어. 박살내 버리기 전에." 내리 깔고 있는 눈빛의 시오는 섬뜩한 목소리 였다. 스키조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비로서 긴장한 얼굴로 바뀐 스키조는 천천히 자신의 검 을 집어 올리며 시오를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너 실력 괜찮은데 나와 함께 일해 볼 생각..." 타아악! 시오는 검을 잡은 스키조에게 목검을 내려치는 것으로 대답 했다. 스키조는 황급히 검으로 막아냈지만 손목이 욱신거릴 지경.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몸을 뒤로 빼며 도망치려는 스키조에게 달려들며 시오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각도로 내리 쳤다. 기사 들의 싸움처럼 화려한 모습도 마법도 없이 거칠게 땅을 밟는 소리, 휭휭거리는 휘두르는 소리 뿐이었지만 보는 사람의 기가 죽을 정도로 시오의 공격은 강렬 했다. 스키조는 커다란 칼을 들고도 조금도 시오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없자 당황하고 있었다. 그냥 시골 촌 구석의 애송이 정도가 아니다. 도시에 나가도 얼마든지 통할 실력. 목검이 아닌 진검이었다면 분명 몇 번이나 죽었을 것이다. 스키조의 등골이 오싹했다. "자, 잠깐! 이제 그만하자구 응?" 피크 산맥에서 이길 자가 없다는 도살마 스키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스키조는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나 같은 놈 죽여서 얻는 거 없잖아. 이쯤에서 끝내자고." "죽일 생각은 해본 적 없어. 하지만 네 놈은 죽도록 두드려 주겠다." 시오는 이를 갈며 스키조에게 다가갔고 스키조는 그럴 수록 뒤로 물러서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난 내 검을 버렸다고. 설마 검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진 않겠지? 명예롭지...못한 짓이잖아. 안그래?" "명예? 그래서 넌 저항도 못하는 아마릴리스에게 그런 짓을 한 거냐!" 결국 시오가 폭발했고 그때를 노린 것은 스키조 였다. 감정이 격해지며 목검을 든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본 스키조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고 시오에게 달려 들어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하는 시오. 스키조는 한 손으로 목검를 잡아 채고 단검을 들고 있는 다른 손은 시오 의 가슴을 향했다. 퍽. 불길한 소리가 들리며 시오는 자신의 가슴 속으로 깊게 들어온 단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지 따끔했을 뿐인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고 스키조는 계속해서 시오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금새 시오의 가죽 옷 사이 로 붉은 피가 흘러 허벅지를 타고 흘러 내렸고 목 끝까지 뜨거운 피가 솟아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힘을 짜낸 시오가 발길질을 하며 계속 자신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는 스키 조를 밀쳐 냈지만 곧 다리의 힘이 풀리며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하늘이 거대한 무게를 가지고 자신을 찍어 누르는 것처럼 시오는 그냥 쓰러 져 버렸다. "애송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다가오는 스키조는 그렇게 내뱉으며 비열하기 그지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슬슬 죽은 척하던 용병 들도 상황을 살피며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있는 시오에게 몰려 들기 시작했다. 가슴을 부여 잡은 시오의 손가락 사이에 끝없이 흘러 나오는 피방울 들이 바닥에 뭉치며 금새 잔인한 핏무리를 만들었다. 시오는 숨을 쉬기 힘들어 하며 거친 숨을 헐떡일 수 밖 에 없었고 시오의 통각 들이 비명을 지르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전 해 주었다. "역시 도살마 스키조 형님! 훌륭하십니다!" "흥. 뭐 이런 놈 쯤은 내 상대가 아니니까." 기억력이 나쁜 집단인가. 시오에게 두드려 맞던 방금 전의 기억 쯤은 다 잊어 버린 것 같다. "어쩔까요. 이 자식 이대로 놔두면 곧 뒈져버릴 것 같은데." 그건 맞는 말이었다. 어떤 뛰어난 의사가 와서 응급조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살 수 있는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출혈이 심했다. 보기에도 벌써 시오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죽으면 안돼, 충분히 밟아 주기 전엔 죽지 말라고!" 라는 말과 함께 스키조는 웅크리고 있는 시오의 면상을 발로 걷어 찼다. 무방비로 얻어 맞아 바닥에 쓰러져 버린 시오에게 날아드는 것은 용병 들의 발길질이었다. 별로...아픈 생각이 들지 않아. 그냥 아무리 집중해도 계속 흐트러지는 모습의 하늘이 뿌옇게 눈에 들어올 뿐이다. 시오는 눈동자를 움 직이며 아마릴리스를 찾았다. 그녀는 근처에 있었다.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 을 무표정한 얼굴로 인형 같은 두 눈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길 가에 널려 있는 나무나 돌덩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 시오는 그녀에게 외치고 싶었다. '도망쳐. 왜 거기에 서 있는 거야?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마. 도망쳐.' 머릿속에 맴도는 외침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숨이 막혀 올라 도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해 보면...처음에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녀를 찾았지? 그리고 아마랄리스를 구해겠다고 나섰지? 그리고 이젠 죽어가는 모습이나 처량하게 보여주고 있어야 하는 건가. 멋있는 모습 많이 꿈꿔 봤는데...뭐야 여기서 이렇게 끝인가. "역시 대충 걱정은 했는데...그 용병 놈 들이었군." 라는 목소리에 용병 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나타난 것은 줄리탄 일행이었다. 시오의 모습에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은 메르퀸트와 몹시 기분이 상한 얼굴 로 양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카넬리안...그리고 줄리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으로 외쳤다. "시오! 이 놈들! 시오를 어떻게 한거야!" "저, 저 놈 입니다! 우리에게 싸움을 건 놈이에요!" 줄리탄은 격분하며(라고 말해봐야 당장 뽑아들 검도 없지만) 용병 들을 쏘아 보았고 줄리탄의 배짱에 당한 적이 있던 용병 들은 움찔하며 스키조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하지만 스키조가 바라보고 있는 자는 카넬리안과 메르퀸트 였다.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여성을 향한 집착은 꿋꿋하게 지켜 나가는 자였다. 스키조가 입맛을 다시자 카넬리안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난 맨날 저런 놈 들만 만나고 또 저런 놈들만 처리해야 하는 거야. 예전엔 그래도 잘 나갔는데..." 라고 투덜 거리며 카넬리안은 광검 미스크랄을 싸고 있는 하얀 천을 플고 있었다. "뭐야? 여자가 검을 들고 있는 건가? 귀여운데?" 스키조가 피식 웃으며 카넬리안에게 다가 서려고 할 때 그녀는 미스트랄을 가볍게 휘둘렀다. 몇 번 카넬리안의 주변이 번쩍거리는 것 같더니 그 검의 회전이 불러온 바람에 메르퀸트의 은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무언가 투명하고 날카로운 것이 용병 들에게 날아가는 기분이었고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가만 히 서 있는 용병들 몇 몇의 팔과 머리, 다리 따위가 깨끗하게 잘려 나가며 바닥에 뒹굴었다. 스키조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검술.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인데다가 그녀에게선 아무런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스키조로선 과연 그녀가 한 일인지 의심 스러울 정도 였다. "난 뭐 저 시오라는 아이를 돕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 하지만 내 주인님은 너희 들이 죽길 원하고 있거든. 너 놈들 모두 죽어줘야 겠어." "카넬리안! 뭐라고 말해도 좋은데 빨리 시오를 구해야 해!" 줄리탄은 시오가 걱정이었다. 의학 같은 것 전혀 몰랐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카넬리안은 공포에 질려 몸이 굳어버린 용병들 에게 천천히 걸어가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고 또 한 명 용병의 몸뚱이가 그의 뒤에 있는 나무와 함께 두동강 나며 피를 뿌렸다. 검을 들고 있든 방패를 들고 있든 상관 없다. 검의 사정권에 들어온 것은 환상처럼 모두 두동강이 나버렸다. 카넬리안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는 다음 상대에게 걸어 가며 말했다. "주인님.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시오는 살릴 수 없어. 지금 무슨 짓을 해도 살릴 수가 없다고. 저렇게 몸이 엉망진창이 됐는데...어떻게 살리란 하란 말야." 라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급히 뒤돌아서 도망치려는 용병 의 몸을 두조각 내고 있었다. 달려가던 용병의 상반신이 떨어져 나가며 땅을 굴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넬리안! 그럼 시오가 죽는다는 거야? 정말이야?" "주인님. 미안하네. 난 도무지 이렇게 상대의 몸을 갈라 놓거나 성을 때려부시는 능력 밖엔 없어서. 주인님도 이번 기회에 몸 조심 해야한다는 걸 배웠으면 좋겠어. 정말이지 죽음이란 그냥 아무 때나 당연하게 찾아오는 거라니까." "지금 그런 말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줄리탄은 오싹했다. 잊고 있었다. 카넬리안의 차가운 성격을. 아니 일부러 그녀의 그런 성격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겐 자신과 별 관계 도 없는 시오가 어디서 어떻게 죽든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고 줄리탄 은 그런 것 참을 수 없었다. 조용히 아무렇지도 않게 '뭐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거지.'라며 씁쓸한 표정 한번 보이고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아까 까지 대화하던 시오가 사라진다는 걸 실감할 수 없었다. "일단 도망치자!" 스키조는 갑자기 외치며 숲속으로 내질렀고 다른 용병 들이 그의 뒤를 따라 내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도 카넬리안의 검기에 용병 둘의 몸이 폭발하듯 터져 버렸다. 그녀는 도망치는 자 들을 보며 중얼 거렸다. "네 놈 들이 나보다 빠르다면 살 수 있을 꺼야." 그녀는 검을 고쳐 잡았다. 따라가서 모두 죽일 기세였다. 보통 인간 보다 월 등히 빠른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그냥 잔인할 뿐인 용병 들 따위는 별로 힘도 안 들이고 하나 하나 죽이는데 많은 시간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많은 소설이나 설화 따위 와는 달리 이 세상에 막상막하의 대결이란 그다지 많이 존재 하지 않는다. 눈에 띄게 실력 차이가 있는 강자와 약자의 싸움이 대부분일 뿐이다. 이번 경우에도 그냥 벌레 밟아 으깨 버리듯이 끝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도주하는 용병 들을 잡으려는 카넬리안에게 줄리탄이 외쳤다. "이제 그만 해!" 줄리탄은 거의 눈이 감겨 가는 시오를 부축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시오의 몸이 느껴졌다. "잉? 주인님 그럼 저 놈 들 그냥 놔둘꺼야? 시오를 죽인 놈 들이잖아." "아직 안죽었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줄리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고 싶은 지경. 메르퀸트 역시 다가와서 안타까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주인님. 기분은 이해하겠는데 정말 곧 죽는다니까." "죽을 지 안죽을 지 니가 어떻게 알아!" 줄리탄은 시오의 가죽 자켓을 벗기며 그렇게 외쳤다. 어차피 죽을 거라며 포기하고 능력이 안되니까 방법이 없다며 모른 척 할 거라면 뭐하러 노력하고 또 열심히 살아갈 이유 따위도 없다. 시오 말대로 결국 해내지 못해서 실망하 고 좌절하더라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줄리탄은 그렇 게 생각했다. "......" 잠시 화가 난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던 카넬리안은 미스트랄을 땅에 놓고 그의 주인 곁으로 다가 왔다. 계속 피를 뿜는 상처난 시오의 가슴을 말 없이 지켜보던 카넬리안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주인님 미안해. 이런 경우에는 나 정말 방법 없어. 도와주고 싶어! 나도 내 앞에서 누가 이런 꼴로 죽는 거 보기 싫다고. 하지만...방법이 없잖아." 그녀는 죽어가는 시오를 보면서 자신의 되살리기 싫은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그 긴 세월을 살아오며 자기 눈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증오하는 상대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수 없이 바라보았을 지 도 모른다. 그때마다 끔찍하고 이젠 지겨울 것이다. 철저하게 냉정하고 현실적인 이 세상의 규칙이라는 것이. "제길! 제길! 제길!" 줄리탄은 시오를 부축해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시오의 가슴을 향하고 있는 손이 있었다. 줄리탄과 카넬리안, 메르퀸트 모두 돌아 보았다. 아마릴리스 였다. 마치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상의 일이었 던 것처럼 서 있던 아마릴리스가 시오에게 다가온 것이다. "설마..." 카넬리안이 무언가 예상하는 듯한 목소리로 힘 없이 중얼 거렸다. 줄리탄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따스한 빛무리가 그녀의 몸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무언가 주문 같은 것을 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뭔지 모를 자신의 기운을 시오에게 불어넣어 주고 있을 때 누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피비린내를 잊을 만큼 따뜻하다. "이 아이의 능력...치유력이었어." 카넬리안이 흔들리는 놀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거짓말처럼 아물어가고 있는 시오의 가슴이었다. 그녀의 빛이 스며든 곳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흉하게 찢어진 가슴의 상처 들이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 와 함께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하얗게 질린 시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기적. 줄리탄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시오가 쿨럭이며 몸을 뒤척였다. "어, 어떻게 된거야..." 천천히 눈을 뜬 시오에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아마릴리스의 귀엽게 곱슬진 갈색 머리칼과 통통한 앳된 얼굴이 들어 왔다. 그녀는 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니가 날 살려 준 거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시오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나? 나는..." 카넬리안은 '말도 안돼.'라며 중얼 거렸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계약 상대를 바꾼 것이다...자신도 이해할 수 없이 약한 주인에 의해서 깨어 난 '특이 케이스' 였지만 그래도 이건 그 자체가 지독한 우연을 가장한 기적 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나는...시오. 그냥 시오라고 부르면 돼." "그럼 이제 제 이름을 말해 주세요." 시오는 기뻤다.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 그녀의 이름. 그는 꼭 그 이름을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쭈욱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한심하고 순 진한 짓거리라고 누가 욕해도 비웃어도 상관 없어. 말해주고 싶었다. "아마릴리스! 네 이름은 아마릴리스야!" 시오는 외치듯이 말하며 카넬리안을 바라봤다. "어때? 아마릴리스. 좋은 이름이지? 그렇지?" "'카'로 시작하지만 않으면 상관 없어..." 별로 이름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듯한 그녀. 그리고 시오는 처음 보았다. 그가 그렇게 상상해 왔던 그녀의 웃고 있는 모습을. 약간 굵은 눈썹을 하고 있는 아마릴리스는 어떤 다른 속마음도 없는 밝은 미소를 가득 담으며 시오 를 바라보았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럼 시오 님은 이제부터 저의 테이머.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마치 지금까지 가둬져 있던 감정의 덩어리가 한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는 상상도 못할 미소로 자신의 주인이 된 시오를 바 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혹자는 가증스런 여자라고 말할지 몰라도 시오는 미친 듯이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녀는 이제는 피 한방울 흐르지 않는 시오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흉터가 남게 될 거에요. 주인님." "상관 없어. 너의 아름다운 미소라면 나는 그걸로 만족이야. 아마릴리스." ...라는 식으로 상황이 좀 편해지니까 또다시 시오는 감히 입에 담기도 낯 뜨거운 대사 들을 읊어 댔고 덕분에 왠지 기분을 잡친 줄리탄은 부축 하던 시오를 던져 버리곤 카넬리안에게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넬리안. 저 아마릴리스의 치유력이라는 것. 대단한 거야?" "보면 몰라. 대단 하잖아. 저런 특이한 능력이니까 잠들어 있을 때 내가 느낄 수 없었던 거지." 카넬리안은 귀엽게도 아마릴리스를 좀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얼마간 '나는 때려부시는 능력 밖엔 없으니까 쳇.'이라는 푸념어린 그녀 의 짜증을 듣게 생겼다. "확실히 놀라긴 했는데...저런 힘이라는 건 처음 보니까." "아마 대륙 전체의 씰 들을 통 털어도 저런 치유력은 아마릴리스 뿐이 없을지도 몰라. 죽어가는 사람을 말짱하게 살릴 수 있는 능력이란 사실 반칙에 가까운 거라서. 생각해 봐. 상대를 태워서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마법과 잿더미를 가지고 사람을 만들어 낼 수 마법 중에 뭐가 어려울 지." "둘 다 어려울 것 같은데..." "으이구." "시오 씨는 행복해 하는 것 같아요. 부럽네요...저런 행복을 느낀다는 건." 그들 사이에 끼어든 메르퀸트도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메르퀸트는 사소한 행복에도 목말라하며 백여년을 살았을 테니까... 부러울 것이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행복에는. "그건 그렇고 저 아마릴리스라는 씰, 이번이 처음 깨어난 것 같아. 아닐지도 모르지만...그런 기분이 들어." "그래? 처음이라고?" 그 '처음'이라는 말은 줄리탄이 실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씰 들의 '처음'이란 어디에서 부터 일까. 어쩌면 이 세상이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던 아주 오래전...그때부터 잠들어 있었던 건가. 카넬리안이 그런 것에는 노 코멘트로 일관하니까 줄리탄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뭐랄까...상당히 부럽네. 나도 저렇게 깨어나서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미 그런 소원 빌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았지만... 아아 부럽네 정말." 카넬리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주 깨소금이 쏟아지는 시오, 아마릴리스 커플을 흘낏 보았다. 그녀도 그렇게 이상적으로 행복했다면 인간에 대한 악감정 따위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씰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지금 마악 깨어났을 뿐이고 앞으로 끝 없이 살아가며 어떤 일을 겪을 지 모를 테니까. "바보 같은 푸념이지만...남이 죽이거나 자살하기 전까지는 이 지겨운 세상과 이별할 방법이 없는 우리 들은 산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 그런 의미에서 주인님과 함께 있으면 나름대로 사는게 즐거워." 드물게 호감가는 말이다. "그래? 나하고 있으면 즐거워?" "아아 그럼. 주인님 엄청 바보 같아서 보고 있기만 해도 웃기니까." "뭐..."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굳은 표정을 피하며 잽싸게 몸을 휙 둘려서 자신의 검을 다시 천으로 감기 시작했다. 미소를 품고 있는 표정이었다. 한편 아마릴리스와 시오는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해가 이미 떨어진 쪽빛 어두운 숲속에 아예 눌러 앉아 계속 대화하고 있었다. "시오님의 기운. 오늘 처음 봤는데도...오래 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기분 입니다. 이상해요." 아마릴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조금 갸웃 거리고는 계속 웃고 있었다. 4. "스키조 형님! 저, 저 놈들 대체 뭘까요?" 그렇다. 스키조 잔당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들은 미친듯이 숲속으로 도망쳐 근처의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반면 스키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했다. "큭큭. 그 눈이 빨간 여자. 씰이야." "어쩐지! ...그런데 왜 기뻐 하십니까? 그 여자 때문에 동료 들이 죄다 죽었는데." 용병 중 하나는 생각하기도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진절머리를 냈다. 생전 그렇게 무시무시한 여자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놈들아. 지금 헤스팔콘에 수배령이 쫘악 깔려 있는 '붉은 눈의 씰' 이 바로 그 여자란 말씀이야. 군에 신고하기만 해도 상금이 얼만 줄 알아?" 스키조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거였다. 동료가 죽어나가든 비열하게 목숨을 구걸하든 그 큰 돈을 만질 수만 있다면 그걸로 다른 모든 건 용서 된다. 아이러니칼하지만 잔인한 도적 스키조는 군에 카넬리안을 신고하려는 것이 었다. 현상금이란 커다란 귀족 저택 하나 쯤은 너끈히 살 수 있을 정도의 보통 사람은 구경도 못할 액수. 게다가 어차피 군에서 잡아드릴 것이고 자신은 그 위치만 알려주면 되는 거니까 위험하지도 않다. 이렇게 편하게 돈 벌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크헤헤헤. 나도 그 여자 땜에 인생 피는 구나." ...라는 천박한 말이나 지껄이면서 그들은 도시로 향했다. <각주> 1)프리셉터(Preceptor) :직역하면 교훈을 주는 자. 훈계하는 자...라고 해도 되지만 Knights Templars(성전 기사단)의 지방 지부장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글에선 기사단의 단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바트 제국의 마르켈라이쥬 혼이라면 북해 기사단 단장으로서의 프리셉터지요. 여성이 기사단장이라면 프리셉트리스 정도가 되겠지요? 그냥 단장이라고 해도 되는데 프리셉터라는 어감과 의미가 좋아서...한번 써 봤습니다. -Blind Talk 지금부터 수 년에 있었던 일. 우연히 일본 동인지 쪽의 웹사이트 들을 링크 따라 돌아다니던 중에 특히 귀여운 배너가 있어서 그곳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대문에는 예쁘게 스캐치 되어 있는 나코루루라는 게임 캐릭터의 그림 옆에 이런 말이 쓰여 있더군요. '또 면접에 떨어 졌습니다. 빨리 취직해야 하는데 오늘도 나코루루를 그렸습니다.(웃음)' 그 말을 쓴 사람...누군지는 모르지만 힘 없이 웃는 얼굴이 떠올랐 습니다 사실 그 사람 멍청합니다. 전혀 돈이 안되는 나코루루의 그림들만 줄창 그려놓고 있더군요. 이력서에는 몇 줄 쓸 꺼리도 없으면서 나코루루에 대해 말하라면 하룻밤을 세워도 모자를 사람입니다. 밤이면 세븐 일레븐 같은데서 야간 바이트라도 하면서 힘들게 돈을 모으면서 낮에는 나코 루루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그릴까...에만 잔뜩 골몰하는 사람입니다. 며칠 몇날을 재봉틀을 돌려 나코루루의 코스츔을 만드는데 땀을 흘리고 남자면서 나코루루의 코스츔을 거뜬히 입을 수 있는 변태입니다. 보통 '사회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녀석'으로 분류되고 대학을 졸업하는 마당 에 취직자리도 구하지 못한 무능력자입니다. 나코루루 프리크입니다. 바보입니다. 그 바보씨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힘내세요.' 며칠 후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얼마간 형편없어 뜻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짧은 영문으로 몇 번의 대화가 메일을 통해 오갔습니다. 지금 그 사람의 사이트는 사라졌습니다. 죽지는 않았을테니까 어디선가 나코루루 그림이나 그리고 있든지 아니면 넥타이를 입고 취직 했는지 아무튼 살고 있겠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이 돈이 된다면 인생의 절반이 즐겁다...라는 말이 생각 납니다. 결국 나코루루 그려대는 것 가지고는 여간해선 돈이 안됩니다. 환타지에서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난 제대로 몰라. 라고 생각하면서도 꼭 전 글이라도 쓰면 좋아하는 것 만 하며 살 수 있는 인생 이란 존재하지 않아.라는 단순 진부한 목소리를 몇번이나 넣으려고 합니다. 줄리탄도 그렇고 카넬리안도 그렇고 다 그렇겠죠. 그래도 어쨌든 행복은 찾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은 좀 진부합니다. 사실 전 성격이 삐딱한 편이라서 그런지 되도록 '편하게 살아가는 것'은 인정하기 싫고 '바보스럽게 긍정적인 것'도 동의하기 싫어하지만 그래도 잠시라도 좋으니까 즐겁게 웃으며 편하게 쉴 수 있는 무언가를 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사족 같은 말임에 물론이지만 읽는 사람이 뭐라고 비웃어도 좋으니까 그냥 쨘~ 하고 행복해 지는 부분을 쓰고 싶었습니다. (물론 사실 드래곤 레이디라는 글 자체를 가볍게 시작했고 분위기가 가벼운 편이라서 처절하고 무겁고 시리어스한 쪽과는 본래 인연이 없는 글이지만.) 전 한번 감상적이 되면 누가 두드려 패서 뜯어 말리기 전까지 밑도 끝도 없이 궁상 맞게 감상주의에 빠져 어우적 거리기 때문에 최근에는 계속 우울 합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오후 쯤이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나. 여름 감기 때문인가... 아 그리고 이 게으른 글을 추천해 주시고 격려 메일과 쪽지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 쉽지만은 않았어. 지친 나의 영혼을 다시 돌아보며 산다는 게... 내겐 너그럽지 못했던 세상 모든 것 들이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어. 나의 가슴 속에 담아둔 나의 작은 소원은, 나의 인생이 끝나는 날 내가 살아왔던 날 들이 나쁘진 않았다고 누군가 말해 줄 수 있다면... 투니버스판 카우보이 비밥의 엔딩곡 ALONE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0430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6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8/24 05:41 읽음:18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6 : 천국의가장자리 관련자료:없음 [5137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8-22 05:24 조회:550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죽어 줄 수 있습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이 속된 목숨을 건내주는 것 정도...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를 위해서는 죽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당신은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을테니까요." 그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살아 돌아온 그녀가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이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7-6 : 천국의 가장자리 Sub title : better 1. "이건 또 뭐지..." 본격적으로 앞치마까지 두른 채 레터의 집 작은 주방에 서게 된 줄리탄은 난생 처음 보는 재료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릴리스의 일이 해결되어 한결 마음 이 편해진 줄리탄이 자신이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당당하게 주방으로 나선 것 까 진 좋았지만...뭐랄까 피크 산맥 중턱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들은 바닷가에 살 던 그에겐 익숙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줄리탄이 들고 있는 것은 어떤 나무의 뿌리이며 물에 우린 즙을 스프류에 넣어 향긋한 풍미를 더해 주는 향신 료의 하나이다. 줄리탄은 그것을 들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뭘까 이건...갈아 먹는 건가.' 뭔지 모를 때는 직접 체험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다. 줄리탄은 그것을 살짝 물 었다. '....!!!'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냥 씹으면 무지하게 쓰다. 눈물이 팽 돌 정도이다. 결국 줄리탄은 보기 안쓰럽게 인상을 쓰며 옆의 나무통에서 잔뜩 물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아아 걱정되네. 괜히 어렵게 구한 재료 들 낭비하지 말고 레터씨나 시오에게 요리 맞기는게 어때. 주인님." 카넬리안은 아까부터 주방 입구 턱에 걸터 앉아 줄리탄이 실수할 때마다 깔깔 웃으면서 계속 핀잔이다. 게다가 그 재료 들에 대해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긴 지겹도록 살아오면서 모르는 요리 재료야 거의 없겠지만 문제는 자신의 '주인님'에겐 조금도 설명해 주지 않고 내심 줄리탄이 실수하길 기대하며 바라 보고 있다는 것. 자신의 실수에 그녀가 땅을 치며 즐거워 한다는 거...그녀를 즐겁해 해주는 것에 나름대로 보람찬 기분, 일리가 없고 심사가 괴로운 뿐이었다. "와아. 식칼은 그렇게 잘 쓰는데 왜 검은 못 잡을까."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뭔소리를 하든 못들은 척 하고 살짝 데친 푸른 야채를 썰어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래된 칼이었지만 날이 잘 세워져 있는 것 으로 보아 레터의 꼼꼼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님. 있잖아...이제 우리 여기 떠야 하는 거 아닐까." 그녀는 주방 연기에 검게 그을려 있는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줄리탄은 갑자기 마음이 쓸쓸했고 야채를 얇고 깨끗히 썰어내던 식칼을 놓으며 젖은 이마에 달라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래, 달라카트로 도망쳐 내려 가던 중이었지.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그 국경선이라는 것 이 세이드라는 악마를, 오펜바하 황제를 막아낼 수 있는 방어벽이라도 될꺼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며 지금으로선 짐작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이라도 출발 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아, 좋아. 절대로 늙지 않는 카넬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름진 내 눈을 감는 것도. 하지만 뭐야...난 아직 성인도 아니라고. 너무 어른스러운 걱정이잖아. 그건.' 여러 생각 들이 그의 머리 속을 돌았고 그 생각은 화로 위에서 묽은 스프가 끓어 오르는 것을 카넬리안이 알려줄 때 까지 계속 되었다. 2. 파란 하늘 밑에 카넬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저..." 언제나처럼 자신의 커다란 검을 껴안고 새처럼 먼 산을 바라보던 카넬리안의 뒤로 살며시 다가온 아마릴리스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아 보았다. "..." 카넬리안은 예의 붉은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 보며 아무 말도 없다. 아마릴리스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카넬리안 님이시죠? 저어...있잖아요." "뭐?" 대부분 씰 들에겐 공통적으로 인간에게선 쉽게 느낄 수 없는 초연하고 무관심한 분위기가 있다. 대표적으로 카넬리안이 그렇지만...아마릴리스에게선 그런 인형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작은 일에도 깜짝 깜짝 놀라는 모습도 그렇고. 사실 그러한 태도이란 후천적인 것.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인간의 근처에서 살아 오며 몸에 자연스럽게 베인 세상의 냄새이다. 아마릴리스에서 그런 태도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그녀가 카넬리안의 말대로 처음 깨어난 씰이기 때문일까. "저는, 씰 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건가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반면 카넬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피크 산맥의 능선 하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 다. "너 기억 못하는 구나. 니가 태어났을 그 때를." "...예." 사실 거의 대부분의 씰 들이 자신이 어떻게 어디서 왜 태어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기억상실에 걸려 자기도 모르는 어디선가 눈을 뜬 기분일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 있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 이 앉아 있던 들판에서 일어서며 아마릴리스에게 걸어 왔다. 카넬리안도 그다지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마릴리스는 그런 그녀가 내려볼 수 있는 만큼 작았 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아." "하지만..." "그리고 'RULE' 때문에 네게 말해줄 수도 없어 그런 건." 라고 말하며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기분 좋게 살면 되는 거야. 기사니 뭐니 다 잊어버리고 이대로 그냥 하루 하루 웃으면서 살아가면... 그걸로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시오가 도시로 나가겠다고 하면...그래서 이름을 날리고 싶다고 네게 말하면 넌 따라 가야겠지. 형편 없이 놀다가 주정뱅이가 되어서 널 때리고 팔아 먹어도 넌 아무 말도 할 수 없겠지." "제 주인님은 그럴 분이 아니세요." 아마릴리스는 애써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길 바래." 라며 카넬리안은 방긋 미소 지었다. "여어. 아립따운 여성 두 분께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말투로 보아 시오다. 시오가 다가오자 아마릴리스는 그를 바라보며 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은 주정뱅이가 되지 않을 꺼죠? 그렇지요?" "잉? 무슨 소리야?" "아아 난 이만 가볼께." 카넬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3. 그렇게 나름대로 나른하고 평온한 날이 이틀 쯤 지났을까. 촌장 레터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한 때의 마을 사람 들이었다. 그들은 오크 토벌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마을 사람 들은 볼멘 소리로 레터를 힐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오크를 토벌할 용병 들을 시오와 줄리탄 일행이 쫓아낸 것에 대한 문제. 마을 사람을 죽일 뻔한 용병 들을 쫓아낸 것 때문에 화를 낸다는 건 확실히 촌극 같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그들의 말을 들을 시오가 인상을 쓰는 바람에 마을 사람 들 은 움찔 했지만 레터는 자신의 아들을 막으며 말했다. "뭘 어떻게 하잔 말인가요. 우리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오크 들과 굳이 싸워야 한다는 겁니까. 나트 몇 마리 때문에요?" 레터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들이 이 마을로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마을에 방책을 세워뒀기 때문입니다! 아니라면 당장 쳐들어 왔을 꺼에요." "그 오크 부족에서 마음만 먹으면...그런 허술한 방책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셔버리고 이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겁니다." 레터의 말이었다. 오크는 본래 인간에 비해 월등한 체력과 힘을 가진 이종족. 몇 몇 민간인 들이 급조한 방책 따위로 막을 수 있는 자 들이 아님은 물론이 었다. "솔직히 두렵습니다. 그런 무지막지한 놈 들이 언제 여기로 쳐들어 올지..." 마을 사람 들은 사실 직접 무기를 들고 오크와 싸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단지 그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무슨 문제라도 생기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었다. 그런 '두려운' 오크 들을 두드려 패 준 여자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면 훨씬 더 두렵겠지만...아무튼 레터 역시 이런 오크 들과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트 몇 마리 잡아 먹은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을 의 분위기 문제인 것이다. 레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오를 바라보았다. "시오야. 니가 오크 들과 말하고 오거라. 네가 간다면 받아줄꺼야." "안그래도 가려고 했습니다." 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며 한걸음에 오크 들이 있는 어두운 숲속으로 가려고 했다. 아마 한 마을 사람이 던진 말만 아니면 정말 그대로 튀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면...나트 들은 어떻게 하죠? 보상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좀 잊어 버려요!" 4. "그런데 말야.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왜 이렇게 죄다 가야 하는 거지." 시오의 곁에서 줄리탄이 허망하게 걸어가며 중얼 거렸다. "훗. 그거야 혼자 가면 되게 심심하기 때문이지." 시오는 아마릴리스를 포함해서 줄리탄, 카넬리안, 메르퀸트까지 총출동을 시킨 것이었다. 인간 둘에 엘프 하나 씰 둘이라니...꽤나 화려해 보이는 조합 이다. 남들이 보면 이거야 말로 오크 진지 박살내러 출동한 걸로 알 정도였다. "그리고 카넬리안도 같이 있으니까 맹수가 덤벼 들어도 걱정 없고 좋잖아." "좋아 하시네. 넌 네 주인도 아니니까 니가 맹수에게 잡혀 먹히든 같이 춤을 추든 난 알 바 아냐." ...라고 뒤따라 오던 카넬리안이 몹시도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반면 메르퀸트는 의외로 이런 산행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본래 먼저 말 걸기 전엔 여간해선 말이 없는 그녀...가 아니라 그였기 때문에 메르퀸트는 엘프 특유의 가벼운 발놀림으로 조금도 힘들어 하긴 커녕 오히려 즐기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오크 들은 꽤나 인적이 드문 숲 속에 터를 만들고 살고 있었다. 시오나 메르 퀸트 같은 숲에 익숙한 안내자가 없다면 금새 길을 잃을 정도이다. 한참을 시오의 안내를 받으며 숲 속으로 들어오던 줄리탄은 보기 무섭게 붉게 칠해진 나무 들과 단도로 깎아 세긴 듯한 심볼 들을 볼 수 있었다. "뭐지 이건...?" "그건 '여기서부터 오크 부족의 영역 입니다. 우리가 때려 죽여도 원망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의미의 표식이야." "...아 그러냐." 카넬리안의 말에 기분이 오싹해 졌다. 갑자기 나무에서 오크가 뚝 떨어지면서 몽둥이로 머리통을 내려치는 것 아닐까. '우헤헤헤! 사냥감이다!'라고 오크어 로 외치면서 말야. 높이 솟은 나무 들이 빛을 가려 대낮인데도 어둡고 습하기 이를데 없는 숲의 중앙이었다. 정말 오크 들이 누굴 때려 잡아도 비명 조차 묻혀 버릴 것 같은 깊은 숲 속이다. 그리고 그런 숲 속에서 한 때의 거한 들이 몰려 오고 있었다. "오크 들이다..." 그들은 시오 들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커다란 덩치에 푸르 스름한 살결, 자세히 보면 아랫 입술 위로 살짝 송곳니가 튀어 나와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다섯의 오크 들은 동물 가죽을 그대로 뒤집어 쓴 듯한 뒤압 적인 모습으로 시오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네 저런 모습이라니. 전쟁이라도 준비하고 있는 건가. 그건 그렇고 이번엔 별 일 없겠지?' ...라는 걱정으로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돌아 보았다. 저번처럼 오크 들을 묵사 발 만들었다간 이곳 오크 부족 들과 대판 싸워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옆의 메르퀸트와 뭐라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 별로 걱정스런 분위기는 아니다...라고는 하지만 몹시 심사가 꼬여 있는 여자라서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는 하늘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이야! 오랜만이야!" 시오는 오크 들을 보자마자 헤벌쭉 웃으면서 서로 얼싸안고 난리였다. 시오나 오크나 굉장히 감정 표현이 직설적이다. 어찌되었든 2미터가 넘는 키의 건장한 오크 들과 엉켜 있는 시오를 보고 있노라면 뭐 '아빠 품에 안긴 아이'라는 말 이 어울릴 것 같다. 시오는 그 이후에도 한참을 오크어로 서로 떠들고 있었다. 줄리탄으로선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오가 자랑스러운 표정 으로 아마릴리스를 앞에 세우며 웃통까지 벗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걸로 봐선 대충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이지 뭐든 자랑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성격이군.' 한참 동안 시오의 끝도 없이 쏟아내는 오크어와 오크 들의 쩌렁쩌렁 거리는 웃음 소리를 들은 뒤에야 그들은 오크 들의 족장에게 안내될 수 있었다. 5. 줄리탄이 오크의 부락으로 들어오자 마자 깨져버린 선입관이 하나 있다면... 오크 들은 꽤 음침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몹시 시끌 벅적하고 그들의 행동만 봐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하고 직설적이었 다는 것이다. 줄리탄은 시오를 따라 족장의 천막으로 향하다가 창창 거리는 소리로 고개를 돌렸다. 묵직한 칼이 서로 부딧치는 소리였다. '검술 연습인가...' 엄청난 덩치의 오크 들이 날이 없는 연습용 검을 들고 서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 이란 보기에도 참 땀나는 광경이다. 게다가 그들이 내지르는 야수 같은 함성이란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울려대고 있었다. "왜 저렇게 다들 흥분하고 있는 거지?" "저런 식으로 즐기는 거야. 저 들은." "즐긴다고? 저게?" 카넬리안의 설명에 줄리탄은 저런 격렬한 싸움 같은 것에 과연 '즐긴다.'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오크들은...엄청 호전적인 종족이로군." "호전적? 호전적이라는 말은 누굴 때려잡지 않고는 못배기는 성격을 의미하는 거 아냐? 저들은 단지 자신의 몸을 가꾸고 그것을 통해 정신을 바르게 키우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고. 꼭 누구와 싸우기 위해서 저러는 거 아냐. 싸움에 물러서지 않고 용맹한 건 사실이지." "그런 용맹한 종족 들을 줘팼단 말이지 니가..." "갑자기 그 말을 왜 하는 거야!" 불현듯 벨레시마에서 봤던 '사육된' 오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런 표정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나트를 줄에 묶고 있던 그 눈동자를 기억해 냈다. 아 이제야 그 눈동자를 보고 느꼈던 단어가 떠올랐다. '상실.' 누군가 빼앗아 서 사라진 것. 그래서 다시는 돌려 받을 수 없는 것. 6. 사실 오크 들도 줄리탄 일행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수근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여간해서는 찾아오지 않는 엘프가 자신 들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는 것과 두 번째 이유는 여자 복은 지지리도 없는 놈이라고 여기던 시오가 아름 다운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 세 번째는...벌써 오크 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 한 성격 더럽고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이며 '절대로 인간이 아닌' 여자가 왔다는 것 때문이었다. 벌써 족장의 천막 주변에는 다 큰 오크 들이 웅성 웅성 몰려 들어 그 좋은 귀로 엿듣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왔군. 시오." 당연히 오크어로 말하고 있는 오크 족 족장은 놀랍게도 몹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였다. 오크 들은 인간의 두배 정도 오래 산다고 한다. 저렇게 잔뜩 주름이 들 정도라면 족히 150살은 넘지 않았을까. 가죽 의자에 족장 혼자 앉아 있는 그 천막은 천막치곤 좀 큰 편이었지만 줄리탄 일행 까지 우르르 들어오는 바람에 줄리탄은 천막 끝에 위태롭게 서 있을 정도로 비좁아 졌다. 천막의 두꺼운 가죽 천을 울리며 들려오는 밖의 두런 두런한 오크 들의 목소리가 왠지 사람 불안하게 만든다. "먼저 제...아 그러니까 애인! 아마릴리스에게 땅의 축복을 나눠 주세요." "저 아이는 씰이 아닌가? 내겐 그렇게 보이는데." "아무려연 어때요. 서로 행복하자는데." 이 남자, 마을과의 분쟁 문제 때문에 담판을 지으러 온 것이 아니었던가? 시오는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벙실벙실 거리며 오크의 여족 종 앞으로 머뭇거리는 아마릴리스를 내밀었다. 아마릴리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시오를 돌아 보았다. "주인님..." "저 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봐." 아마릴리스는 얼떨떨한 모습으로 시오의 말을 따랐다. 줄리탄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뭔가 신통력이라도 발휘해서 금빛 찬란 한 빛의 물결이라도 일으키려나. 하지만 그런건 꿈에서나 나올 일이다. 넉넉한 미소의 여족장은 굵은 손마디가 보이는 두 손으로 바닥의 흙을 쓰다듬 었고 그리고 그 손을 들어 아마릴리스의 작은 머리를 매만지며 뭐라고 중얼 거릴 뿐이었다. "저게 끝이야?"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보며 속삭였다. "그럼 뭘 바랬어? 저건 자신의 마을을 찾아온 상대를 축복해 주는 것이지 마술시범이 아니란 말야. 불꽃이라도 뻥뻥 터져야 진짜 축복해 주는 거라고 믿는 거야?" '오크의 축복이라. 저런 모습이라면 왠지 저주가 어울릴 것 같은데...' 메르퀸트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엘프의 축복이라는 것도 비슷비슷 할 것 같다. 간단한 의례를 끝내자 아마릴리스는 구석으로 숨어 버려 두 손으로 머리의 흙을 털고 있었다. 그녀는 태어난지 일주일도 안되는 아이 같은 여자다. 이런 갑작스러운 일에 좀 놀란 것 같았다. "나트를 돌려 달라고 온 건가? 레터씨가 보낸 거겠지? 시오?" 역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오크는 오크, 직설적이다. 족장이 본론부터 꺼내자 당황하는 것은 시오 였다. 시오는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뇨. 그건 뭐..." "돌려 줄 수 없어. 돌려줄 이유도 없고. 알고 있겠지?" 오크 들은 별로 돌려서 말하는 것도, 미사어구를 사용하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상대에게 가장 정확하게 의도를 전할 수 있는 말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이다. 시 오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딱하고 어떻게 들으면 몹시 기분 나쁠 수도 있 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우리 마을의 무례한 태도를 사과하러 온 것 입니다. 나트는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요." "인간의 사과라. 난 저기 저 여자 씰에 비하면 훨씬 어리지만 그래도 긴 시간을 살아왔어..." 오크가 말하는 '저 여자'는 카넬리안이었다. 역시 족장. 카넬리안이 씰이라는 것...그 중에서도 살 만큼 살아서 볼 꼴 안볼 꼴 다 본 씰이라는 걸 단번에 알 아본 것 같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살면서 인간의 사과라는 건 처음 받아보는군. 아무도 오크에게 사과하는 인간 따윈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인간 들의 마음 속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이종족에 대한 멸시와 우월감을 그 족장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젊었을 때는 이런 비좁은 산맥의 숲속에 숨듯이 살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말이 통한' 이후 에는 잘 진행되었다. 중요한 것은 오크 들이 쳐들어 온다고 날뛰고 용병 들을 고용하고 겁을 먹은 것도 인간 혼자의 생각에서 한 일 뿐이었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선뜻 시오의 사과를 받아준 오크 족장은 자신 들이 빚은 술까지 선물로 줄 정도 였다. 그리고 얘기가 거의 끝나갈 때 족장은 줄리탄을 바라보며 명확한 인간의 언어로 말을 던졌다. "너는 저 여자의 테이머 인 것 같군." 줄리탄은 그 말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넬리안과의 관계가 일반적인 건 아니지만 일부러 말하고 싶진 않았다. 비참해 지니까. "그런데 별로 현명해 보이지도 강해 보이지도 않아. 그런 네가 어떻게 씰과 계약하게 되었는지 말해주게." 족장의 말에 줄리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게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냐. 그렇다고 '저 여자는 물고기 배를 가르자 튀어 나왔어요. 그리고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계약하자고 조르던데요?''라고 말하면 무성의하게 들리겠지. "나도 모르겠어요. 한가지 확실한 건 내가 대단해서 계약한 건 아니라는 거죠." "그건 맞아." 얄밉게스리 카넬리안은 끄덕거리며 동의하는 것이었다. "후회하고 있나? 테이머가 된 걸?" 줄리탄은 '에이 후회고 뭐고 없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앞으로 그녀와 평생을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죽는 걸 봐야 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죽는 걸 그녀가 봐야 할 수도 있다. 좋게 끝난다 는 보장은 없어. 게다가 힘도 능력도 없어서 자기 목을 축이는 것도 힘든 자신 의 나약한 힘 때문에 그녀를 위기에 내 몰 수도 있다. 음유시인이 맘대로 부풀 려 올린 망국의 왕자와 요정 사이의 사랑 이야기 따위가 아니란 말야 현실은. 두렵다.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 감히 '후회 따윈 조금도 없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바보 같은 관계야 이건. 일방적으로 나는 도움만 받는 거야 이대로는. 그렇다고 나란 놈이 그녀가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그녀가 나를 지키며 '난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아. 그녀는 내게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난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지금은.' 줄리탄은 머리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상념 들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었을 때, 그때 족장님이 다시 그런 질문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게 그녀를 위한 좋은 테 이머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 입니다." 카넬리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아마 카넬리안에게 직접 그런 말을 했 다간 '검도 못 잡으면서 말은 잘해요!'라며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시 오는 엄청나게 감동 받은 표정으로 의아한 얼굴로 서 있는 아마릴리스를 반짝 반짝 거리는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내가 널 지켜 줄꺼야.' 쉽게 감동 받는 녀석이다.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숨기지 않겠네." 족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왜 당신 들은 그렇게 검술을 연습하고 계속 몸을 단련하고 사냥을 하고 그러니까...과격하게 살아가는 거죠? 카넬리안은 그것이 즐기는 거라고 말했지만...전 이해가 가질 않아요. 누구와 싸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죠?" 어떻게 보면 상당히 어린 질문이었지만 여족장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응수 했다. "인간 들은 왜 값진 옷을 입으려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집에서 살려고, 그대로도 충분한 국경을 넓히려고 하는 거지? 그런 것 없어도 충 분히 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죽으면 손에 쥐고 있던 흙한줌도 더 이상 소유할 수 없을는데 왜 그렇게 '소유'하려고 하는 거지?... 이 세상에는 많은 종족 들이 존재하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으로 살고 있어." 족장은 흘낏 메르퀸트를 보며 말했다. 엘프 들도 나름대로 다른 종족은 이해 할 수 없는 기질과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족이 보면 한심하고 도저 히 이해가 안갈 수도 있지만 그것도 그들에겐 나름대로 세상을 영위하는 삶의 방식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왜 너희 인간 들은 그대로도 좋은데 우리 종족 들을, 엘프 들을, 트롤 들을 다른 이종족 들을 모두 사냥하고 사육하고 인간의 방식에 맞춰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는지...그건 말해 줄 수 있겠나?" "그건..." 줄리탄은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인간이 세상에서 최고로 더럽고 추악하고 이기적인 동물이라서 그래요.'라고 카넬리안 말투처럼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트를 사육하는데 이유 따윌 붙이는 사람은 없다. 또한 오크를 사냥하는데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 라는 식 으로 '인간 만의 이유'를 붙일 수는 있어도 어떤 이종족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유 따윈 없다. "미안하군. 심술 맞은 질문이야. 우리는 인간이 우리의 방식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아. 그건 인간 들도 마찬가지 겠지. 하지만...충분히 서로 돕거나 그게 안된다면 방해하지 않고 살 수 있는데 인간이 택한 방식은 그게 아니라는게 문제 겠지. 하긴...우리 역시 인간 처럼 남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다면 인간을 사냥해서 잡아 먹을 지도 모르지. 힘의 균형이 깨져 있다는 건 언제나 피곤한 거야." 오크 들은 보통 말이 짧고 간결한데 간만에 길었다. 아마 오크 족장으로선 수십년 만에 이렇게 길게 풀어서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줄리탄에 대한 배려인가. 그때 밖이 시끌거리고 있었고 모두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족장님. 인간의 마을에 큰 일이 생겼습니다!" 다급한 표정으로 한 오크가 뛰쳐 들어오며 오크어로 외쳤다. '인간의 마을' 이라면 레터씨의 화전민촌. 시오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일이지?" "인간의 군대가 몰려와선 마을을 장악 했습니다. 사냥 중에 보고 황급히 달려오는 길이에요." "아버지는! 마을 사람 들은 어떻게 되었는데!" 시오는 옆의 아마릴리스가 걱정스러워 할 정도로 그 오크에게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볼 때까진 별 일 없었는데...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았어. 험악한 분위기야." 그 말을 들은 카넬리안은 낭패의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메르퀸트의 얼굴도 굳어버린 것 같았다. "제길. 또 날 잡으러 온 거로군. 주인님. 어떻게 할 꺼야? 마을에 군대가 들이닥쳤데." "걱정할 것 없잖아. 어차피 우릴 잡으려는 거고 우린 이미 마을을 빠져 나왔으니까 이대로 도망치면 되는 거 아냐?" 이론 상으로는 그렇다. "도망칠지 도와줄지는 주인님의 판단에 맡기겠어. 하지만 레터씨의 마을 사람 들은 세금도 내지 못해 나라의 눈을 피해 살고 있는 빈민들. 군대는 마을 사람 들을 죄수나 다름 없이 취급할 꺼야." 카넬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기 할까? 그 헤스팔콘의 군대가 마을 사람 들을 몰살 시킬지 아닐지. 나라면 몰살 시키는 쪽에 돈을 걸겠어." "..." 사실 줄리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리이 같이 공정한 지휘관이 있다면 별 일 없이 끝날 수도 있지만...그런 사람은 희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 하지만 이대로 그런 군대와 싸운다는 건 스스로 위험 속에 빠져드는 일. 어쩌면 세이드가 있을지도 모른다. "도와주자." 줄리탄은 단호하게 말했고 카넬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검 미스트랄을 싸인 천에서 풀고 있었다. "이봐. 시오." 밖으로 뛰쳐 나가려던 시오는 족장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도와주지." -Blind Talk 또 또 또 늦었습니다. 저번 주 참 많은 일이 생기고 여러 마감에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 도무지 쓸 시간이 없었던 것도 변명이라면 변명 입니다...그래도 이 글을 쓸 때는 꽤 즐겁기 때문에 '빨리 글을 써야 할텐데...'라며 언제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또 너무 늦어버려 전편 이야기를 잊어버릴 정도 가 되었는데요...아 잊어버리면 정말 곤란한데 말야 글적 글적. 차이나타운, 코메디의 왕, 아미스타드, 사우스파크 극장판...최근 구입한 테잎인데 사 놓고 전혀 보질 못해서 옆에 쌓아 놓은 그 테잎 들이 '날 봐줘. 제발 날 좀 봐줘. 난 장식품이 아니란 말야.'라고 원망 섞인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볼께! 언젠간 볼꺼란 말야! 나도 보고 싶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사람 미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게임 입니다. 전 턴방식 시뮬 레이션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X-COM도 좋고 대전략 시리즈도 좋고 삼국지 시 리즈도 좋고...디아블로 2는 참을 수 있어도 잘 만든 턴 시뮬은 도무지 마약 같이 손을 놓을 수가 없네요. 커피를 옆에 놓고 한참을 생각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여유로움 때문인지...턴 방식은 PC 게임을 처음 시작했던 84년 때 부터 계속 제 곁에 있습니다. DC용 대전략은 손을 대면 끝장이기 때문에 애써서 사놓고 봉인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차하는 순간 '기렌의 야먕 - 지온의 계보' 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하루에 1시간 정도씩 빼앗기는 수난의 나날 입니다. 가끔 적의 얍삽한 인공지능에 화가 나서 패드를 집어 던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밤이면 기어나가 또 파워 버튼을 누르고 맙니다. 별비님의 글을 읽고 '그렇다! 나도 자존심을 걸고 연속으로 올린다!'라고 결심 하며 글을 썼지만...쿨럭. 여기까지가 한계 입니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음 편은 빨리 올라 갑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중얼 중얼.) 이번 편은 뭐랄까나...평이 합니다. 본래 오크 들과의 과격한 분쟁이라도 넣으려고 했지만 억지로 하는 걸 싫어서 My Pace로 갑니다. 뭐 일부러 분쟁 일으키지 않아도 다음 편에서 이것 저것 다 나오니까. sejul군이 이 아이디로 올리는 '드라코니움'과 kiyu군이 올리는 SIG 와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역사를 공유 합니다. 전자가 약 200년 후자가 약 200년 후. 그냥 서로 차 마시다가 '이렇게 해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에 서 시작했는데...나름대로 이것도 즐겁습니다. 아아 아무래도 드라코니움이 굉장히 자주 올라오는게 뜨끔하네요.(난 왜 이렇게 느린 거야.) 그럼 이제 이야기는...'천국의 가장자리'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격려 메일 주시고 추천해 주신 분들...그리고 읽어 주신 분들께 언제나처럼 감사 드립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네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0578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7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9/03 02:58 읽음: 7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7 : 천국의가장자리 관련자료:없음 [51904]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8-29 08:59 조회:565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제발 좀 말 몇 마디로, 한 두 달 고생한 것 정도로 지혜를 얻었다고 착각 하는 짓은 그만 둬 졌으면 좋겠어. 지혜가 무슨 어느 날 집 앞에 배달되는 종합선물세트 정도 쯤 되는 줄 알아? 어느 날 짠하고 갑자기 강해지는 기적이라도 바라고 있는 거야? 기적은 니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거야. 하루 아침에 강해 지고 지혜로워 진다는 건 기적이 아니라 차라리...저주에 가깝겠지."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7-7 : 천국의 가장자리 Sub title : Would be better but not so better 1. "긴급 보고 입니다. 피크 산맥의 마을에서 붉은 눈의 씰을 찾았다고 합니다. 현재 리온헤드 남작이 특무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금테가 둘러져 있는 외알 안경을 끼고 있는 로이터 막시밀리엄은 회색의 내근용 제복을 입고 있는 젊은 청년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중후한 목조 의 테이블과 수많은 책 들이 엄청난 길이의 책장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는 황실의 집무실이었다. "전 제국에 수배령이 깔렸으니...숨어 들 수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피크 산맥 쪽일 것이라 예상 했지." 로이터 막시밀리엄은 반대머리에 50살은 넘은 것 같은 외관을 가진 헤스팔콘 의 3대 실력자 중에 하나 였다. 어느 마을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 은 빵집 주인 같은 평범한 외모에 전혀 검은 한번도 써본 적 없는 것 같은 배 나온 체격의 이 자가 '관문의 사자' 아취발드 이젠그람과 '검은 추기경' 세이 드 폰 러셀과 함께 헤스팔콘의 대표적인 가문의 후계자라는 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제국의 치안과 황실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는 중요하고 권세 높은 역할을 맞고 있다는 건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 그는 황제 하우프트만으로 부터 받은 수많은 훈위와 함께 권위 있는 공작 가 문이었던 것이다. 로이터는 외알 안경을 내려 놓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세이드 같은 놈에게 그 씰을 빼앗길 수야 없지. 난 그 놈이 맘에 안들어." 세이드는 분명 로이터와 함께 헤스팔콘 황실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 였지만 로이터와의 차이가 있다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로이터와는 달리 물질 적인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단 한조각의 영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그를 로이터는 절대로 세속적인 것을 통해서 회유할 수 없 었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었기에 - 자신의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 는 세이드를 로이터는 불편하게 생각했고 한편으론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 강하지만 황실과 친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하우프트만 폐하 역시 그의 힘이 필요할 뿐, 그를 신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황실 역시 많은 사회의 하나라고 생각 합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그런 자는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조금씩 주변에서 격리시켜 무력화 시키는 것이 효율적으로 제압 하는 방법 입니다.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밟고 있을 땅이 사라진다면 힘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이터 공께선 그를 황실에서 격리시킬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로이터에게 보고를 하던 깔끔한 회색 제복의 청년은 어떤 여자도 반할 만 한 섬세한 얼굴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책략적인 말 들을 쏟아 냈다. 그런 조각 같은 얼굴에 어울리는 미성의 목소리 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 리하르트. 하지만 그런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네게 칼을 들이댄다면 어떻게 하겠나? 그때도 그런 말을 할텐가?" 몸을 조금 기울인 채로 말하는 로이터는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 라고 불리는 청년의 입에서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절 공격한다면 분명히 전 죽겠지요. 중요한 건, 그가 그런 짓을 할 수 없도록 미리 그의 행동을 봉쇄해 두는 것 입니다. 절대로 저를 해칠 수 없도록 만든다면 그의 검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리하르트는 세이드를 두려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눈빛에선 세이드에 대한 도전적인 감정을 찾아볼 수 있었다. "넌...정말 빨리 배우는군. 내 양자로 들어온지 5년이 되었나?" 로이터는 눈썹을 조금 찡그린 채 과거를 회상하면서 말을 이었다. "빈민가에서 죽어가던 네가... 그 더럽고 쬐끄만 꼬마애가 감히 시찰하던 내게 달려와서 내 정책을 비판하고 날 비웃었지. 기억하나?" "그 점이 맘에 들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리하르트는 미소조차 머금지 않았다. 바람에 찰랑거릴 정도로 얇고 검은 머 리칼에 보석처럼 짙고 푸른 눈동자, 하얀 피부는 그가 빈민 출신이었다는 걸 믿을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는 자신이 빈민이었다는 것을 황실 어디에서도 숨기지 않을 정도 였다. 불량배 들에게 두드려 맞던 그때나 황실에서 양부인 로이터 막시밀리엄을 보좌하는 지금이나 그의 강렬한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거 나중엔 내가 괴물을 키우고 있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군. ...이대로라면 넌 내 뒤를 이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야." "과찬이십니다." 리하르트는 조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무언가를 강렬하게 갈구하고 있는 듯한 매력적인 눈빛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2. 마을에 몰려든 헤스팔콘의 군대는 카넬리안의 예상대로 였다. '수색'을 명목 으로 멋대로 집기를 박살내며 온 마을의 집안을 쑥밭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 며 마을 사람 들은 마을 중앙에 모아 놓고는 사방에서 미늘창을 들이대며 포위 하고 있었다. "붉은 눈의 씰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한눈에 봐도 '나는 귀족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분위기의 화려한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 제복은 로이터 막시밀리엄 휘하의 특무대 제복. 일반적으로 그들은 소위 수배령이 떨어진 '제국의 반역자' 들을 체포하거나 사살할 때 나타나는 기관원 들로 상당 부분 초법적인 공권력 을 행사할 수 있는 악명 높은 자들이었다. 마을 사람 들을 대변하고 있는 레터 는 그 특무대 제복을 알고 있었고 그 붉은 눈의 씰이 '카넬리안'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저희는 그런 씰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곳까지 씰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일단 레터는 부인하며 상황을 살피기로 생각했다. "이봐 너. 이 몸의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시침 땔 꺼냐? 이 스키조 님 앞에서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갑자기 군인 들 사이에서 나타난 스키조. 레터는 인상을 찡그렸다. 말투도 무척이나 짜증나는 자였고 특무대에 빌붙은 도적놈 주제에 세상의 왕이라도 된 듯이 거들먹 거리는 꼬라지도 보기 싫은 자 였지만 무엇보다 스키조가 신고한 거라면 더 이상 붉은 눈의 씰 따윈 모른다고 잡아 때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레터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제길...' "나, 리온헤드 남작이 이런 더러운 깡촌까지 몸소 행차한 이유는 그 씰을 잡아 들이기 위해서야. 잡기만 한다면 나도 황성으로 진급할 수 있지! 물론 그 씰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기 *장갑패척병 들의 손에 걸리면 꼼짝할 수 없지. 쿠헤헤헤. 이미 저 들은 수많은 기사와 씰 들을 골로 보냈다고." 리온헤드라고 불리는 지휘관도 스키조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천박한 입담 의 소유자였다. 이런걸 유유상종이라 부른다. 아무튼 그가 자랑하고 있는 장갑 패척병이란 자 들은 리온헤드의 등 뒤에 20 명이 서 있고 또 그들의 뒤에는 특무대의 뱀 심볼이 세겨져 있는 검붉은 로브를 입은 다섯명 정도의 마법사 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수배자를 잡아 오기 위해서 이렇게 긁어 모 으는 일은 없다. 카넬리안을 잡기 위한 헤스팔콘 제국의 눈물나는 노력을 엿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씰은 얼마전 이 마을을 떠났습니다. ...이미 이 마을에는 없습니다." 레터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난 오랫동안 특무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너희 같은 놈 들의 거짓말은 한 눈에 꽤뚫어 볼 수 있지. 좋아. 그렇게 나오라고. 그 씰이 있는 곳 을 밝히지 않으면 지금부터 한 명씩 한 명씩 천천히 죽여 줄테니까. 과연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보자고. "정말 이 마을 떠났습니다! 지금 여기에 없..." "에이 시끄럽다! 어디서 거짓말을! 없긴 왜 없어! 너희 같은 더러운 천민 놈 들 몇 명 죽인다고 신경쓸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둬. 죽기 싫으면 어서 그 씰이 있는 곳을 말해!" 리온헤드는 정말이지...성질머리가 더러운데다가 자기 추측을 철썩 처럼 믿는 피곤한 자였다. 레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마을 사람 전체 가 몰살이다. 그렇다고 그 씰이 오크 부족에 가 있다는 걸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아들도 끼어 있는 데다가 특무대라면 눈 하나 꿈쩍 하지 않고 오크 부족 전체를 척살해 버릴 것이다. 난감한 상황...마을 사람 하나가 외쳤다. "그 씰은 이 근처의 오크 들에게 갔습니다! 제발 저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자비를..." 3. 시오와 아마릴리스, 줄리탄 일행은 마을 근처에 숲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오크 들은 반대편 숲에 진을 치고 언제라도 공격을 시작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마을의 대화를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카넬리안은 양미간을 좁히며 줄리탄을 돌아 보았다. "주인님. 난리 났어." "어떤 상황인데?"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 죽인데. 뭐 나타나도 죽일 께 뻔하지만. 이제 나도 지겨우니까 저딴 인간 들 욕하는 건 생략할께." "...더러운 자식 들이." 시오가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중얼 거렸다. 아마릴리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시오의 팔을 잡았다. "주인님. 다치지 마세요." "다치는 건 몸 뿐이 아냐. 만약 마을의 누구라도 죽게 된다면 난 평생 계속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게 될꺼야. 그러니까...싸운다." "잠깐 시오. 싸우는 건 좋은데 개죽음을 피하려면 침착해야 해. 무엇보다...저 놈 들이 신경 쓰이는데." 카넬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보고 있는 것은 장갑패척병 들과 마법사 들이었다. 분명히 자신을 잡기 위해 데려 왔을 그들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메르퀸트는 이곳에 숨어 있어." "미안해요..." 메르퀸트는 미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도저히 싸우는 능력이란 없는 메르퀸트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당연 했지만. 줄리탄은 그를 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싸움이 끝나면 언제나처럼 멋진 노래라도 불러주면 돼." "주인님." "왜?" "주인님도 여기 남아 있어. 적 들 앞에서 요리 시범이라도 보여줄 거 아니라면 여기서 가만히 있어주는데 날 돕는 길이야." "......" 줄리탄이나 메르퀸트나 검이니 싸움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 들과는 도통 재능 없긴 마찬가지 였다. 4. "흥! 오크 마을로 갔다고! 그딴 서툰 거짓말을 노련한 내가 믿을 꺼라 생각 했나? 후후후 난 너희의 눈만 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날 속일 생각 따윈 하지 않는게 좋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였다. 확실히 자신의 생각만이 틀림 없는 진실이고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은 모조리 헛소리라고 굳게 믿는 것도 세상 편하게 사는 방법일 꺼다. 대책 없이 편협한(혹은 교만한) 자에겐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 보단 몽둥이가 약이라는 카넬리안의 지론이 간절한 자였다. "이 분의 말씀 못들었나 이 지저분한 천민 놈 들아! 어서 그 씰을 이 분께 대령해!" 원님 덕에 나발 부는 꼴로 스키조는 자기야 말로 지저분한 침을 튀겨 대면서 소리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어서 그 씰이 있는 곳을 말하지 못하겠냐! 못하겠다면 네 놈 들을..." 스키조가 그렇게 광분하며 외칠 때 할 때 무언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있었다. 뭐지 이 소리는? "으응?" 모두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무언가 이곳을 향해 날아 오고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 자주 떨어지는 것에는...빗방울이 있고 눈이 있고 우박이 있 고 벼락이 있고 카넬리안이 있다. 그녀는 가끔 자신의 쇼맨쉽을 위해 허리가 다 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프로이다. 쉬이이익! 뱀이 독니를 들어 내며 상대를 덮칠 때의 소리에 가까웠다. 카넬리안은 꽉 다문 입술로 자신의 검을 쳐들며 스키조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오직 스키조 하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저, 저 여자!" 저렇게 멀리 있는 상대가 '여자'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정말 칭찬해 줄만한 스키조의 능력이지만...그것도 여기서 끝이다. 카넬리안의 공격은 예전처럼 단 순히 쇼가 아니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치는 스키조의 몸을 세로로 갈라 버리며 착지했고 스키조의 박살난 살덩이 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갈 때 그녀는 핏방울 이 묻어 있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차갑고 붉은 눈빛이었다. "할 수 있으면 잡아봐." "패척병! 패척병!" 갑자기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등장한 카넬리안을 보며 리온헤드는 사색이 되어 자신의 군대 속으로 숨어 들어 갔다. 그때 마치 산이 울리고 숲의 한쪽이 일어 서는 것 같은 착각이 벌어졌다. "뭐, 뭐야?" 엄청난 고함 소리가 산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숲의 한편에서 쏟아 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모두 무기를 들고 무장을 갖춘 한 때의 오크 들이었다. 땅을 울리는 것 같이 밀고 들어오는 오크 들 덕분에 특무대는 순간 패닉 상태. 게다가 오크 들은 힘만 센 바보가 아니었다. 삼인일조로 움직이며 일사분란하게 공격해 오는 오크 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이, 이런 하급한 놈 들이 감히!" 라고 리온헤드가 말하긴 했지만 그런 허세로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미늘창 을 들고 있는 일반 병사 들은 오크 들이 내리찍는 도끼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 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오크 들은 창에 찔린 상황에서도 겁을 먹지 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한편 카넬리안 역시 일말의 주저도 없이 쉴세 없이 병사 들을 베어 버리고 있는 상황. 시오는 일단 싸움에 끼어들기 보단 자신의 아버지 레터에게 뛰어갔다. 레터는 혼란을 노려 마을 사람 들을 숲으로 대피시키고 있 었는 중이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난 괜찮지만...이거 싸움이 커 졌는데." 레터는 혀를 차며 오크 들과 특무대 사이에 난전이 되어 버린 싸움터를 바라 보았다. 그는 당장 살았다고, 자신을 위협하던 자들이 퍽퍽 죽어나가는 걸 보 며 '역시 정의는 승리한다.'라고 지껄일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놀라고 겁먹은 것도 아닌 침작한 모습이다. 그는 씰룩이며 고개를 숙인 채 중얼 거 렸다. "죽을 때 까지, 다시는 이런 장면 볼 일 없을 꺼라고 생각 했는데." "아버지? 무슨 말이세요?" "지금은 내 옛날 얘기 따위 늘어 놓을 시간 없으니까 일단 마을 사람 들을 대피 시키자. 어쟀든 난 지금도 촌장이니까." 레터는 시오에겐 한번도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도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냥 '모험가' 였다는 말을 딴 사람 말하듯이 흘리면서 말했을 뿐. 하긴 검은 커녕 나무 패는 도끼질도 서툴러 보였고 그렇다고 몸 에 잔뜩 상흔이 있는 무시무시한 모습도 아니었으니까 시오로서도 아버지가 과격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이것 저것 아는 것은 많았기 때문에 그냥 학자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이었다. "저 놈들!" 레터는 전쟁터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시오가 돌아본 그 곳에서는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한 장갑패 척병 들이 오크 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저 것들은." 5. "크허허허헉!" 20명 패착병 들의 공격에 오크 들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장갑패착병 은 온몸을 감싸고 있는 특별히 제작된 전신갑주에 모두 거대한 금속제 양수검 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크에 비견될 정도의 거대한 몸집에 두꺼워 보이는 은빛의 갑주로 온 몸을 두르고 있는 그들은 양수 검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 둘러대며 오크 들의 몸을 박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란 베어낸다기 보다는 차라리 내리쳐서 상대의 몸을 찢어 버리는 것 같았다. 쿵쿵거리며 들이닥치고 있는 패착병 들에겐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움직임은 도저히 그런 갑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기 그지 없었 다. '마법?' 카넬리안은 슬슬 일반 병사 들을 모두 처리하고 오크 들을 학살하고 있는 패착병 들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기사가 아니라면 인간의 몸으로 잔뜩 무거운 갑주를 발끝까지 뒤집어 쓰고 저런 움직임은 있을 수가 없다. 카넬 리안은 그것이 패착병 들 뒤에 서 있는 검붉은 마법사 들의 마법에 의한 것임을 간파했다. 즉, 마력으로 움직이는 잔인한 금속인형이었던 것이다. "이 무식한 제국의 앞잡이 놈 들아! 나 지금 안 잡으면 도망칠 테니까 이쪽으로 와!" 카넬리안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지 몰랐다. 날카로운 고성의 그녀의 목소리가 사람 들의 귀를 찢으며 그 아수라장을 갈랐고 리온헤드는 고개를 돌리며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흥. 건방지군. 패척병! 저 씰을 잡아 들여! 대신 죽이지는 마라. 막시밀리엄 공의 명령이니까." 리온헤드의 명령에 패척병 들은 기계적으로 카넬리안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오크 들은 숲 속으로 물러설 기회를 갖을 수 있었다. 이미 상당 수 의 오크들이 죽은 뒤였다. '지금의 내 힘으로선 만만찮은 상대야...게다가 일단 너무 수가 많잖아.' 그녀는 조용히 이미 피에 휘감긴 검을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패척병 들이 수많은 기사와 씰 들을 죽였다는 리온헤드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기사급 으로 20여명을 배치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지만 마법으로 힘과 체력 을 몇 배로 끌어 올린 중장보병 20여명이라면 - 그들이 달려 들었을 때 여간한 기사나 씰 정도는 제대로 반격 조차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일반 병사 수천 수만이 달려들어도 잡을 수 없는 기사 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낸 대기사용 병기라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 다는 것을 새삼 깨닳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 놈들과 일일이 상대하다간 끝도 없어.' 카넬리안이 노리는 것은 후방에서 마력을 집중하고 있는 마법사 들의 무리 였다. 그들만 처리하면 그 잘난 패척병 들은 동력이 끊어진 것이나 다른 없는 거니까. 그녀는 튀어 올랐다. 그들을 뛰어 넘어 마법사 들이 있는 곳으로 직행 할 생각.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다. '뭐, 뭐야!' 날아오른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발돋음조차 못할 것 같은 거대한 패척병 들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며 자신을 가로 막는 것을 본 것이다. 마치 두꺼운 금속의 벽이 순간 공중에 나타난 것 같았다. 그녀도 이 정도로 그들의 힘이 증폭 되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척병의 거대한 검이 카넬리안에게 날아든다. 채앵! 공중에서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상대의 검을 막아 내는 것 까진 성공했지만 그 힘에 눌려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바닥을 뒹굴 수 밖에 없었다. 재빨리 일어서며 몸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그땐 패척병 들 의 갑주와 검에 사방이 포위된 뒤였다. 떨어질 때의 충격인가...그녀는 어깨 가 깨질 듯이 아파옴을 느꼈다. '내 팔자야. 왜 내가 여기서 이런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거야.' 짜증섞인 중얼거림을 내뱉긴 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파해야 한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 결심한 듯 하다. 그리고 순간 그녀를 둘러싼 패척병 들은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듯한 그녀의 살의를 느낀 것이다. 살의라는 것은 아무리 두꺼운 갑주든 방패든 그대로 통과해 버리며 그대로 상대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든다. "오펜바하! 이런 놈 들에게 내가 잡힐 거라 생각한거냐!" 누가 보아도 그녀의 지금 모습은 무모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녀는 미스트랄 을 양손에 쥐어 가슴을 보호하며 절대로 깨지지 않을 장벽 같은 패척병 들에 게 뛰어든 것이다. 6.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패척병 들에게 마력을 보내고 있는 마법사의 무리로 몰래 다가가고 있는 자 들은 줄리탄, 메르퀸트, 시오, 아마릴리스 였다. 그들도 마법사 집단이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카넬리안이 마법사 들을 처리한데 실패한 이상 이대로는 카넬리안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마법사 들을 잡기 위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난 사실 태어나서 한 번도...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적은 없어.' 숲에서 주워 온 나무 막대기를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는 줄리탄은 머리가 지끈 거릴 정도의 긴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그렇겠지. 아무도 일부러 이런 싸움에 휘말려 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까.' 시오 역시 최근 죽음 근처까지 갔다 왔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비장한 표정 따위는 흉내 낼 수 있는 겨를 조차 없다. 엘프인 메르퀸 트도 인간처럼 심장이 뛰는 동물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보기에도 안쓰럽게 전 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은 가느다란 나무 줄기 따위를 쥐고 있는 그의 얼굴 - 하얗게 잘 깎아진 듯한 살결을 타고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인님. 죽으면 안되요. 제발.' 자신의 몸보단 테이머 시오를 향한 불안한 기색만이 가득한 아마릴리스는 계속 시오의 뒤를 조용히 쫓고 있었다. 그녀는 시오의 몸에서 죽음이라는 야수를 떼어 낼 때 분명히 느꼈었다. 언제라도 자신이 위험하면 그때처럼 또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 놓을 것이라고. 그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거 였다. 어쩌면 모두가 - 모든 씰이 그걸 두려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표는 5명의 마법사 들 문제는 그들을 리온헤드가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카넬리안과 패척병 들의 싸움 만 거만하게 지켜볼 뿐, 줄리탄 들이 다가와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둔한 중년 임에 틀림에 없지만 일단 진검을 차고 있고 명색이 특무대, 실력이 어느 정도일 줄은 아무도 모른다. "줄리탄. 내가 리온헤드의 주위를 끈다. 너희 들은...알지?" 근처까지 다가와 둔덕 뒤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시오가 줄리탄을 보며 속삭 였고 줄리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이동했다. 급조한 작전의 전모는 이렇다. 시오가 리온헤드와 붙을 동안 줄리탄과 메르퀸트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조금도 방어하지 못할 마법사 들을 때려 잡는다. 처참하게 웃긴 작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전투에 능하지 못한 적어도 당사자 들은 목숨을 걸고 있다. 줄리탄이 리온헤드의 뒷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시오는 목검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이 더럽고 추악하고 못나서 애인 하나 없을 쪼다 놈아! 내겐 목검 밖엔 없어! 자신 있으면 내게 덤벼봐!" 시오다운...도발이었다. 보통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흥. 날 도발하려 하는군. 그렇다면 노리고 있는 건 마법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리온헤드는 당당하게 외쳤다. "저 새끼가 죽으려고! 목을 쳐주마 이노무시키!" 그리곤 멋들어지게 자신의 장검을 차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뽑으며 시오에게 달려 들었다. 특무대...이름만 번지르르했지 별 거 아니라는 걸 깨닳는 순간 이었다. '정말 단순한 놈이다.' 시오는 자기 작전이 이렇게 쉽게 먹혀 들어간 것에 도리어 의아해 할 정도. 그래도 그 '단순한 놈'이 들고 있는 칼은 환상이 아니다. 방심하면 찔리고 찔리면 죽으며 자신이 무너지면 모두가 죽는다. 시오는 마음을 가라 앉히며 두손으로 목검을 들어 어깨 높이로 가로 세웠다. 저기 달려오는 저 놈은 맨 날 골탕 먹이던 아드포우 보다도 멍청한 놈이야. 이기는 건 간단해. 1분? 30초만 벌어도 돼. "감히 날 모욕해!" '...' 일일이 상대가 지껄이는 소리를 되받아 쳐 줄 정도로 싸움은 만만하게 아니다. 시오는 오직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챙. 타악. 뼈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시오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향하는 상대의 검을 밀쳐버린 뒤에 빈틈을 노려 손목을 내리친 것이다. 그리고 리온헤드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 트렸다. 벌써 끝이야? "......." 시오는 갑자기 허망했다. 특무대 지휘관이라는 놈이 뭐 이래. 리온헤드는 부러진 자신의 손목이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한심. "너 군인 아니지." "바, 방심했을 뿐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궁색한 변명이 또 있을까. 조금만 더 방심 했으면 달려오다 가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시오는 갑자기 뭔가 떠올리며 위험한 것이라도 바 라보는 눈빛으로 리온헤드에게서 슬슬 떨어 졌다. "왜, 왜 그러는 거냐?" "너 말야...갑자기 동료 하자는 둥, 명예 롭지 못하다는 둥 지껄일 생각이면 포기 해라. 너보다 먼저 이미 누가 써먹었거든." "무슨 소리를..." "주인님 괜찮으세요!" 아마릴리스가 참지 못하고 시오에게 달려 왔다.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상대 가 무능한 것만 제외하면 아주 괜찮은 상황이었다. "아마릴리스. 여기는 위험해. 숨어 있으라니까." "저는 씰...테이머이신 시오님을 지키는 것이 제가 존재하는 이유 입니다." "으아아 몰라 난 씰이라는 것 복잡해서 생각하기 싫어. 하지만 분명한건 니가 위험하면 내가 미쳐버릴 정도로 불안해 지니까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숨어 있어줘 아마릴리스. 넌 내가 지킬테니까!" "주인님..." "아마릴리스..." ...라는 틈만 벌어지는 꽃잎 휘날리는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상황은 줄리탄 쪽으로 옮긴다... 줄리탄은 예정대로 메르퀸트와 함께 리온헤드가 없는 틈을 타서(이 모양이라면 그 자가 있든 없는 상관 없을 정도 였지만...) 마법사 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뒷통수를 내려치면 그만이었다. '타아앗!' 근처까지 다가온 줄리탄은 괴성을 내지르며 마법사를 향해 나무 막대기를 휘둘 렀고 메르퀸트 역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늘하늘 달려가며 거의 회초리에 가까운 나무 줄기를 내리쳤다. 둘 다 몽둥이로 무방비의 상대를 두드려 패는 무시무시한 짓은 해본 적이 없는 자 들이다. "우아아아앗!!" 줄리탄은 자신이 내리친 힘의 몇 배를 고스란히 되받은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는 기분 나쁜 로브의 마법사를 때리는가 싶었는데 순간 몸이 붕 떠 오르며 저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이다. 메르퀸트 역시 마찬가지 였다. 안그래도 줄리탄에 비해 체중이 훨씬 가벼운 메르퀸트는 더 멀리 날아가는 불상사를 당했다. '이 힘은 대체!' "푸헤헤헤헷! 우헤헤헤헤헷!" 리온헤드는 그 꼴을 보고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절히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열성까지 보였다. "바보 놈 들! 우리 자랑스런 특무대의 마법사 들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몸을 방어하는 차폐막을 시전해 두고 있다는 걸 몰랐느냐! 설사 석궁이라 하더라도 그건 뚫을 수 없어! 우헤헤 어떠냐 우리 특무대의 강력한 힘이!" 시오가 말했다. "그런데 넌 왜 그 모양이냐...." "방심했을 뿐이라고 말했잖아! 방심했던 거다! 방심한 거라고! 방..." "알았으니까 조용해!" 시오는 리온헤드의 처절한 변명은 무시하기로 하고 저 차폐막이라는 것을 뚫 을 방법을 골몰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카넬리안이라면 모를까 자신이나 줄 리탄(아니면 메르퀸트)의 공격 정도로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게 확실했다. 시도는 해보겠지만...이대로는 언제 그 끔찍한 패척병 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지 모른다. 아마 카넬리안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귀찮게 생각할 것이 리온헤드의 면상을 두드려 패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그를 인질로 삼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오의 '정직한' 머리는 그런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리진 못했다. 7. 패척병들에게 둘러싸인 카넬리안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열 받으면 성도 박살내는 카넬리안이었지만 끝도 없이 공격해 오는 패척병 들을 상대로는 막아 내기도 벅찼던 것이다. '이 놈들은 지치지도 않는 거야?' 사실 그녀는 자신의 귓가로 들려오는 그들의 몹시 거친 숨소리만으로도 그들의 몸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 것을 알고는 있었다. 분명 마법 때문일 것이 다. 그들에게 걸려 있는 마법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평생 몸이 망가질지 도 모를, 혹은 이 싸움을 끝으로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한계까지 힘을 끌어 올 린 것이다. '이 놈 들도 불쌍하지만...동정해 줄 상황이 아니잖아 지금은.' 카넬리안은 이미 두 명의 패척병을 뚫어 버리는데 성공했다. 아무리 예전에 비해 현격하게 힘이 약화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일격은 기사급. 틈을 노린 공격 에 마법이 걸려 있는 상대의 중장갑주라도 뚫어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 20명에서 18명으로 줄어든 것 뿐이었다. 그들은 마법에 의해 공포심도 잊어 버린 채로 검을 내질렀고 그녀는 동시에 날아드는 18개의 검에 반격은 커녕 막 아내기도 힘는 상태 였다. 무서운 속도로 연속되는 검과 검의 충격음, 그녀의 주변에서 쉴새 없이 터져 나오는 불꽃에 보는 사람의 기가 질릴 정도이다. "크아아아아아악!" 아마 이 세상에 지옥의 마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끔찍한 소리를 내진 않을 것이다. 패척병 들은 상대를 죽여버릴 것 같은 고함을 지르며 계속 카넬리안을 공격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공격 들을 침착하게 피하고 있었 다. 무리해서 반격하다간 단번에 몸이 동강난다. '오늘 부로 내가 단 시간에 가장 많은 검을 막아낸 자로 기록되겠군. 제길. 아아 샤워하고 싶다...' 아무리 기사라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정신적 중압감에 눌려서 검을 들고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미스트랄이 아니었다면 몇 번 막아내지도 못하고 검이 깨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주인님은 어떻게 된거지. 혹시 괜히 나서서 죽는 거 아냐? 제발 그렇게 멍청하게 죽진 말아줘. 하긴...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걸 보니 아직 죽진 않았나 보군.' 그녀의 마음 한편에선 줄리탄에 대한 걱정이 커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테이머 인 줄리탄이 죽는다면 - '실연' 당하게 된다면 이성이 사라져서 이른바 '폭주' 할 것이 분명 하니까...아직은 죽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카넬리안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얼레?' 그때 였다. 평생 쉬지도 않고 자신을 공격할 것 같았던 패척병 들이 갑자기 멈춰 버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갑자기 모두 검을 떨어트리며 주저 앉아 질식 할 것 같이 깊은 숨을 잔뜩 몰아쉬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한쪽에선 신음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 "...설마?" 카넬리안은 놀란 표정으로 마법사 들이 있는 곳을 돌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특무대의 마법사 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녀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 거렸다. "레터씨가...마법사 였어?" 8. "아버지...마법 쓸 줄 알았어요?" "조금..." 절망적인 시오에게 끼어든 것은 레터 였다. 레터는 차폐막을 어떻게든 깨보려는 시오에게 침울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시오를 놀라게 하더니 갑자기 뭐라고 중얼 거려서 '혹시 아버지가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을 심어 주고는... 갑자기 그의 두 손이 눈부신 전류에 휘감겼던 것이었다. 분명 마법, 마법이 아 니었다면 레터의 온몸을 사정 없이 지져 버렸을 엄청난 량의 전력체이다. 시오 의 눈으로 보기엔 마치 레터의 몸에 벼락이라도 내리 꽂은 것 같았다. "아,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시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아마릴리스 역시 안 그래도 큰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전 중에는 말 걸지 마." "이건 사기야! 무슨 화전민 촌장이 마법쟁이야!" 리온헤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앞장서서 도망치기 시작했고 커져가고 있는 레터의 힘을 느낀 것일까. 마법사 들은 갑자기 패척병 들에게 걸고 있던 마법을 풀고는 리온헤드를 뒤따라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였던 것이다 패척병 들이 힘을 잃고 쓰러져 버린 건. "아버지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해서 죄송하지만 ...예전에 뭐하던 사람이었어요?" 가벼운 불신. 시오는 언제나 싱글 거리는 아버지가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레터는 왼손이 좀 저리는지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말했잖아. 모험가 였다고." 줄리탄과 메르퀸트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터를 바라보고 있었 다. 저런 강한 힘이 있다면 뭐하러 화전민 촌장 같은 걸 하는 거지. 도시에 나 가 가볍게 마법쇼라도 벌이면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 없을 텐데. "벼락을 다루는...모험가 였나요?" "다시는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다." 뭐 이정도의 대답은 분위기 상 누구라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왜 그 좋은 걸 그만두게 되었냐는 거다. "마법이라는 것...그냥 처음엔 좋아서 익히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날 그냥 두지 않더군.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었고 더러운 권력을 지키는데 적당히 사용 했는데...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이건 틀린 것이다. 이건 틀린 것이다. 그래도 그만두지 못할 유혹이었지. 하지만 그런 내가 마법이란 걸 접은 이유는.." 레터는 조금 주저하다가 시오를 돌아 보았다. 차분하지만 후회에 가득찬 모습 이었다. "그 대단한 마법이란 것이 니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지." 레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9. 패척병 들도 사태를 파악하고 거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며 도망치고 있었 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리온헤드를 따라 도망치고 있었지만 정작 카넬리안 은 쫓아 가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레터의 말을 그녀의 좋은 청력을 통해 전혀 듣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이지...맘 편하게 사는 사람 찾아보기 힘들군.'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으며 줄리탄에게 걸음을 옮겼고 숲 속에서도 부상당한 오크 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10. "나, 난 최선을 다했어! 증원군이 필요해 증원군이!" 리온헤드는 선두에 서서 도망치는 모범을 보여주며 마을 밖으로 내달리고 있 었다. 그리고 누가 들어 줄지도 모를 변명 들을 미리부터 끊임 없이 내뱉고 있었다. "무능한 돼지에게...증원군은 없다." 리온헤드는 자신의 눈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확인한 뒤에는 그 자리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리온헤드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 세이드 경...적 중에 엄청난 마법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그래서?" 리온헤드가 흘낏 흘낏 올려보고 있는 세이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세이드 뒤에 서 있는 줄리에트와 저스틴의 무표정한 눈동자만이 화살처럼 자신 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곧 뒤따라오던 마법사 들과 패척병 들도 세이드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단지 무릎을 꿇을 방법 외에는 없었다. "한마디만 하겠다." 세이드는 그 얼어붙은 눈동자로 그들을 내리 깔며 말했다. "난 이런 병정놀이를 싫어한다." 말이 끝나자 줄리에트가 팔을 들어 손바닥을 펼쳤고 리온헤드가 목숨을 구걸할 겨를도 없이 그들의 사방으로 불꽃의 이빨이 솟아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열기 에 순식간에 주변의 숲이 타 오르기 시작했고 리온헤드를 비롯한 특무대의 머리 칼부터 불타 버리며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의 비명은 몰아치는 불 의 폭풍 속으로 묻혔다. 줄리에트의 마력으로 만들어 낸 불길은 패척병의 두꺼 운 갑주마저 치즈처럼 녹아내리게 만들고 있었다. 붉게 녹아내리는 갑옷 들이 서로 엉켜 마치 지옥불에 빠져 형채를 잃어가는 것처럼 패척병 들은 한 덩어리 로 뭉치는 기괴한 형상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각주) 1)장갑패척병 :제가 또 뭐 이상한 걸 만들어 냈습니다.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엄청나게 두꺼운 갑옷으로 온 몸을 두르고 끔찍하게 큰 검을 들고 마법으로 힘이 증폭되어 움직이는 특화된 군대 입니다.(뭐랄까...게임이나 만화 등에서 이런 거 자주 나오지요?) 사실 이런 기교적이고 형식적인 병사 들은 진짜 전쟁에선 가격 대 성능 비로 볼 때 큰 역할을 발휘하긴 힘듭니다. 고대 로마 같은 전쟁도 아니고... 잡아 들이기에 무척이나 골치 아픈 초인적 기사 들을 상대할 때를 위해 특별히 창설된 '치안유지용' 특수부대(SWAT?) 정도로 보시면 적당하실 듯. 단일의 기사를 상대할 때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병사 들 또 언제 나타날지 저도 모르니까 그냥 듣고 잊어 버리시길... -Blind Talk 2년 전 동경에 갔을 때의 일 입니다. 나리타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우에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초저녁이었습니다. (가장 싸다는 JR를 타고 왔는데 우리나라에 비하면 무지하게 지하철 이용요금이 비쌉니다.) 커다란 트렁크를 질질 끌며 유명한 우에노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호텔에 묵 었는데 창문을 열면 우에노 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최초의 일본행이었고...몹시 기대하는 마음에 커튼을 확 열었습니다. 아아 마음 속에서는 멋지다는 우에노 공원의 모습이 들어오길 기대하며. 까악~~ 까악~~~ 일본에는 까마귀가 참 많습니다. 우에노 공원의 숲에선 까마귀 들이 무시무시 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공원에는 걸인 들이 이열종대로 누워 주무시고 계 시더군요. 거의 세기말적인 분위기 였습니다. 저는 휘청이며 다시 커튼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그때가 생각나서 휴가가고 싶습니다. 국내도 좋지만 되도록 외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동경 같은 대도시도 좋지만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의 빅 서, 원시의 땅으로 가서 높디 높은 세쿼이어 나무 를 내려보고 취하고 싶습니다. 네바다의 자갈사막 한가운데 의자를 놓고 앉 아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고 싶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대평원에 담배를 물고 주저 앉아 매마른 태양빛에 허우적 거리고 싶습니다. 본래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그 고마움도 모르고) 혼자 인적 없는 어딘가에 서서 가슴이 비어버린 것 같은 미망의 감정에 시달리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 그건 그렇고 기렌의 야망 지온편 엔딩 봤습니다. 본래부터 지온의 MA 들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특히 빅잠과 지온그) 이것저것 다 뽑고 능력에 감탄하며 했기 때문에 270턴이나 걸려 클리어 했습니다. 역시 멋졌지만 더 이상 폐인되고 싶진 않기 때문에 CD 꺼내서 케이스에 넣고 봉인해 버렸습니다. 액플 나올 때 까진 다신 하지 않을 생각 입니다. 아아 오크의 절규까지 하시면서 제 글을 독촉해 주셨는데 관심 주셔서 감사 드리고 늦어서 정말 죄송 합니다. 본래 이번 편에 챕터를 끝내려고 했지만 이거 이상하게 길어 졌습니다. 그 패척병인지 뭔지 하는 작자 들 때문 입니다. 다음 편에선 정말 끝납니다. 패러디는...보고 뒤집어 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연참이라는 것은...이번에도 실패 입니다.(이걸 두편 으로 나눠 올리고 이연참이라고 우기려는 얕은 생각도 해 봤지만 의미 가 없겠지만 그런 건...) 추천해 주시고 독촉해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럼 '천국의 가장자리' 정말로 마지막 편 곧 올라 갑니다. 둘이 함께 먼곳으로 가자. 오늘도 새로운 기분을 찾으러. 너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어. 새로운 내일을 즐기고 싶기에. 눈을 뜨고 문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 밖에 나가고 싶어. 맘에 드는 음악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분을 느낄 꺼야. 햇볕을 쬐는 나는 여기에 있어. 비교하기 보단 지금의 나를 소중히 하겠어. 만나고 싶어서, 하지만 만날수 없어서 넘쳐나는 감정을 그저 감싸안고 사람으로 붐비는 거리를 걷고있어도 머리 속에 빙빙도는 너의 미소. Kirari의 Last Piece를 들으며... (G.T.O. 1기 엔딩곡이었지요...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노래.) 『SF & FANTASY (go SF)』 10624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7-8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9/06 11:12 읽음:24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7-8 : 천국의가장자리 관련자료:없음 [5236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9-06 08:13 조회:84 "전쟁...누군가를 죽이는 것, 때로는 누군가에게 죽는 것... 가끔은 동료를, 가족을, 친구를 죽여야 하는 것, 때로는 그 반대가 되는 것. 하지만 가장 두려운 점은 그러한 것 들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7-8 : 천국의 가장자리 Sub title : Flosculus (전편 줄거리) 카넬리안을 잡기 위해 몰려든 특무대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갑자기 발휘된 레터의 마법에 의해 특무대를 물리치게 된다. 하지만 세이드라는 더 거대한 존재가 그 마을에 도착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든다. (짧잖아...) 1. "농담이야." "예?" 아마릴리스는 부상 당한 오크 들을 치료하고 있었고 카넬리안과 줄리탄은 메르퀸트와 함께 다음으로 갈 장소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중이었다. 처음 나온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레터의 말, 그리고 지금까지 잘도 숨겨 왔던 레터의 충격적인 비밀주의...덕에 시오는 뭐라고 정리할 수 없는 감정에 싸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레터가 갑자기 툭 던진 말이다. "농담이라니까. 아까 한 말." 레터는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농담이라뇨?" "그러니까 농담이라고. 네 어머니에 대한 말은. 마법을 배운 건 사실이긴 한데...나, 내 아내를 죽였을 정도로 비극의 주인공은 아냐." 레터는 시오를 설득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분노한 시오. "뭐야 아버지! 너무하잖아요! 한번도 못 본 어머니에 대해서 그런 악질적인 농담을 하다니!" "악질적인...농담이었냐?" "당연하죠!" 시오는 그 말이 농담이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안심하며도 상당히 화가 난 얼굴로 씩씩 거리면서 아마릴리스에게 가버렸다. 그 뒷 모습을 바라보는 레 터는 어느 때 보다도 쓸쓸한 모습이었다. '정말로 농담이었다면...얼마냐 좋겠냐. 시오야.' 2. 카넬리안은 어깨가 아픈지 아까부터 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패척병과의 격렬한 싸움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 미 내려다 보고 있는 줄리탄. "주인님. 나 샤워하고 싶어. 으으 몸 속에 잔뜩 흙이 들어갔나봐. 기분 끔찍해." "샤워?" 그런 단어, 줄리탄이 알리가 없다. "그러니까 뭐랄까...마치 폭우 속에 있는 것 처럼 쏴아아 하면서 물 줄기를 잔뜩 뒤집어 쓰는 것. 역시 난 아주 뜨거운 물이 좋아." "폭우? 쏴아아? 뜨거운 물? 무슨 소리야?" "아무 것도 아냐. 이런 시대가 올 때까지 질기게 살고 있는 내가 죄 많은 여자지...그래도 언젠가는 꼭 샤워기를 만들고 말테다!" "......" 가끔 그녀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것에 대해 강렬한 집착을 보일 때가 있다. 아무튼 줄리탄은 짐작도 못할 정도로 질리도록 오래 산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때 또한 줄리탄에 비해서 몇 배나 더 오래 산 메르퀸트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저건..." 메르퀸트가 가리킨 얇은 손가락의 방향에선 숲이 불타고 있었다. 자연스런 산불 따위가 아님을 증명하듯이 그것은 멀리서도 거대한 불기둥에 가까운 모습으로 불길이 솟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 들이 웅성거리기 시작 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라고 줄리탄이 중얼 거렸다. "그 자가 오고 있습니다. 분명 이 기분은..." 메르퀸트는 가는 눈썹을 떨며 공포에 질려버린 상태 였다. 기억을 더듬는 줄리탄의 머리속에선 생각하기도 싫은 리센버러의 불기둥이 떠올랐다. 카넬 리안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며 조금씩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 선은 그 불길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큰 키의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 던 것이다. 마치 지옥불을 속을 유형하는 악신을 닮았다. "주인님! 피해!" 그녀의 눈은 그 불길을 뚫으며 분명히 줄리탄에게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보 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날카롭게 외치며 뛰어올라 줄리탄을 껴안듯이 안 아서 쓰러트린 것은 순간이었다. '카넬리안?'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줄리탄을 아플 정도로 꽉 감싸안고 있었다. 쓰러진 줄리탄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안고 있는 그녀의 그런 얼굴을 올 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이 타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동시 에 자신의 몸 속으로 파고 드는 그녀의(줄리탄은 분명 그녀의 것이라 확신 할 수 있었다.)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미쳐버릴 것 같은 열사의 태양 빛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 같이 느껴졌다. 그녀의 굳게 다문 입가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카넬리안!"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들을 덮친 불꽃의 폭풍은 주변의 풀 들을 하얀 재로 바꿔 버렸고 그녀의 표정도 전에 없이 고통 스러워 보였다. 불길이 사라지자 그를 아플 정도로 감싸고 있던 그녀의 양 팔의 힘이 천천 히 풀리는 것을 느끼며 줄리탄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카넬리안! 괜찮아? 살아 있는 거야? 대답해!" 평소의 그녀라면 그런 말에 '안 죽었으니까 후딱 나한테서 떨어져!'라고 외쳤을 테지만 가늘게 떨리며 두 눈을 뜬 그녀는 꺼져가는 듯한 붉은 눈빛 으로 희미하게 웃으면서 줄리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인님이야 말로...괜찮은 거야?" "너..." 그리고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일어서며 미스트랄을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다가오는 누군가를 노려보며 줄리탄을 막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줄리탄이 바라보는 그녀의 웃옷은 거의 불길에 타오르고 찢겨져 있었고 그녀의 몸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서 미스트랄을 올리며 아픈 표정을 숨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죽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순간 걱정했다. 넌 오펜바하 황제에게 바칠 물건이니까 죽어버리면 곤란하거든." 일말의 변화도 없는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카넬리안에게 다가오고 있는 자는 카넬리안으로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검은 추기경' 세이드 와 '만들어진 씰' 줄리에트와 저스틴이었다. 메르퀸트는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움직이지 조차 못하고 있을 정도. 줄리탄의 두 눈이 확대되었다. '저 남자...그럼 리이 경은? 젤리드 씨는?' 줄리탄에겐 악몽과도 같은 추측 들이 계속 떠 오르기 시작했다. "리이 님은 어떻게 된거지!" 카넬리안은 쓰러져 가는 정신을 집중하며 적대적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세 이 드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비웃음 뿐이었다. "리이 디트리히 말인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그 여자의 비명은...지금 생각해도 짜릿하지." 세이드의 가학적 웃음은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로 입꼬리가 올라가 카넬 리안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줄리탄의 머리 속에선 생각하기 싫어도 심장이 파헤쳐진 채로 쓰러져 있는 리이의 모습이 떠올라 멈추질 않았다. "짜릿하긴 개뿔이 짜릿하냐! 이 변태 놈아!"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세이드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목검을 볼 수 있었다. 세이드에게 달려든 시오 였다. 카넬리안이 외쳤다. "시오! 위험..." 시오의 검술이라는 것이 분명 수준급이라는 건 맞는 사실이지만 리히트야 거의 일원인 세이드에겐 어린애가 장난치며 휘두르는 막대기와 다를 바가 없을 뿐이었다. 세이드는 수리되어 있는 자신의 기계팔로 목검을 손쉽게 쳐냈다. 가볍게 밀쳐낸 것 같은데 시오는 그 충격에 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 날 막는 놈인가?" 혀를 차는 세이드. 아무튼 성격 더러운 놈은 어딜 가도 장애물 투성이다. "여긴 우리 마을이고 저 들은 우리 식객이야! 내가 마을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하지!" 라며 말하며 시오는 벌떡 일어섰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세이드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았다. 타원의 구멍이 나 있어 소리굽쇠를 닮은 듯한 은빛의 기괴한 그 검이었다. "뭐야...저 이상한 검은." 시오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도 세이드는 그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 다. 세이드의 검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이 냉기를 뿜으며 예의 그 기분 나쁜 진동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악령이 부르는 소리 같다. "세이드! 다른 사람은 건들지마! 내가 목적이잖아!" 카넬리안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외치며 세이드를 향하려 했지만 다친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시오야! 도망쳐!" 세이드의 힘을 느낀 레터도 시오에게 달려가고 있었지만 이미 시오는 세 이드의 사정권 내에 잡혀 있는 상태. 시오 역시 이제는 충분히 느낄 수 있 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 사내는 간단하게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사신 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죽어라." 나직하게 말하는 세이드는 차가운 눈빛으로 굳어버린 시오를 내려보며 검을 휘둘렀다. '응?' 세이드는 자신 앞에 끼어드는 갑작스런 그림자에 검을 접었다. "아마릴리스!" 잘 생각해 보면 예정되어 있는 행동이다. 시오를 삼켜 버리려는 검기 앞을 아마릴리스가 막아선 것은. 세이드 앞에서 양 팔을 벌리고 있는 그녀는 단 호한 표정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너도 씰인가? 요즘에는 개나 소나 씰 들을 데리고 다니는군." 세이드는 아마릴리스를 내려보며 검을 내렸다. 경악에 찬 표정의 시오. 자신의 죽음을 앞두었을 때도 그런 절망적인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릴리스! 그만둬! 피해!" 시오는 자기도 모르게 아마릴리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아무리 뛰어가도 그녀에게 도착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인을 위해 죽으려는 건가?" 세이드는 내린 검을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시오님...미안해요. 하지만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 입니다." 그녀는 시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상관 없겠군." 그 말과 함께 시오는 볼 수 있었다. 마치 끔찍한 상상이 현실화 되는 것 처럼 아마릴리스의 등을 뚫으며 나온 세이드의 검을. 순간 주변의 공기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숨이 막혀 왔고 힘 없이 쓰러지는 아마릴리스의 몸을 받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허공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시오는 아마릴리스의 주검을 잡았을 때도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 분 나쁜 꿈 속에서 방황하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수 많은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 이렇게 여기서 끝난다는 건 농 담으로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눈을 뜨지 않는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시오가 그녀를 껴안으며 아무리 외쳐도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 기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이 그녀의 몸에 방울지기 시작했다. "괴로운가? 시시하군." 세이드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다시 검을 올렸다. 3. 줄리탄의 심장이 터질 것 처럼 뛰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질리도 록 누군가 자기 앞에서 죽는 장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어쩌면 죽음에 무 감정 해 지는 게 아닐까 걱정까지 했는데 - 아마릴리스가 쓰러지는 걸 보면 서 떠오른 감정은 하나 뿐이었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증오라는 이름의 칼이 줄리탄의 가슴을 계속 후벼 파기 시작했다. 4. 순간 공기를 찢어버리는 파열음과 함께 카넬리안이 세이드에게 뛰쳐 나갔다. 부상 당했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생명체가 아닌 것 같은 엄청 난 속도 였다. 증오 섞인 폭발음이 세이드의 귀를 때렸을 때는 이미 그녀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세이드의 두 눈에 차갑게 변해 있는 카넬리안의 붉은 눈빛이 명확하게 들어 온다. '...!' 세이드는 반사적으로 검을 눕혀 그녀가 내리치는 미스트랄을 막았다. 상대 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마력에 둘러싸여 있는 그 검으로. 그러나 밀려난 것 은 세이드 였다. '큭!' 곧장 다음 공격이 들어온다. 용의 일격에 가까운 그녀의 힘은 세이드의 검 에 시전된 마법 따위는 비웃어버리는 듯 세이드를 10여미터 이상 튕겨 나가 게 만들었다. 상대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전해 준다는 세이드의 검을 받은 카넬리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갑자기 전혀 다른 누군가가 된 것 처럼 - 그녀가 변해 있었다.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네겐 시시한 거였나? 그렇다면 네 놈의 입에선 비명 대신 피를 쏟게 만들어 주지." 고저가 없이 차가운 문장처럼 이어지는 카넬리안의 말이었다. "너, 너는 정체가 뭐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세이드가 물었다. 언제나 위압적인 모습을 유지하 던 그였다. 아마 스스로도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 같았던 공포가 자신을 휘감고 있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그녀의 살의에 가득한 눈빛은 그의 머 릿속에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용의 눈동자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정체? 죽기 전에 열심히 짐작해 봐."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곁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싸늘한 기운에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같은 씰을 죽였다고 화가 난 모양이로군." 세이드는 비인간적인 냉정함을 발휘하며 상대를 빈정 거렸다. "언제나 인간 때문에 죽는 게 씰이야. 새삼스럽게 화가 날 이유 따윈 없다. 멋대로 짐작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불을 뿜고 있는 것 같은 미스트랄을 들어 올리며 다시 세이드를 향해 발을 내딛였고 그때 세이드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면 테이머 때문이군." 아차하는 표정의 카넬리안. 세이드의 무언의 명령을 받은 저스틴이 줄리탄 을 쏘아 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끔찍한 냉기가 사방에 퍼지며 줄리탄의 주변을 포위 하듯이 좁혀가기 시작했다. '절대 영 도의 사형대'였다. "주인님! 거기서 피해!" 카넬리안이 다급하게 외치며 줄리탄을 돌아봤지만 그때 세이드의 검이 그 녀의 목까지 날아 들었다. 한편 줄리탄은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냉기에 몸 속의 혈액이 얼어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보통 인간인 줄리 탄이 이런 마력의 함정에서 피할 방법 같은 건 없다. "잘 봐라! 니 주인이 죽는 모습을!" 세이드의 음침한 웃음 섞인 목소리가 카넬리안을 괴롭혔다. 세이드의 검을 막아내느라 줄리탄을 도와줄 수 없는 그녀는 절망적이었다. 그때 또 다른 마력이 줄리탄을 감싸기 시작했다. "사라져라!" 현상을 향한 명령 같은 목소리와 함께 줄리탄의 사방을 좁혀 오던 냉기가 갑자기 힘을 잃었다. 레터 였다. 레터가 보낸 마력이 냉기를 막아낸 것이다. "내 힘을 중화시킨 것인가? 네 놈이..." 세이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 했다. 자기 역시 자기 마법을 그렇게 일순간에 중화 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촘촘한 사슬과 같은 그 냉기를 더 강한 마력으 로 튕겨낼 수는 있어도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그대로 사라지게 만든다는 건 상대가 완벽하게 자신의 마법 체계를 간파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 던 것이다. 불가능. 자연력을 운용하는 개인적인 방식인 마법이 상대에게 순식간에 파악되어 버린 건 세이드로서는 믿을 수 없는 치욕 이었다. "얼레?" 너무 갑작스런 일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얗게 얼어버린 주변 을 바라보고 있는 줄리탄에게 레터가 달려왔다. "괜찮은가요 줄리탄씨?" "아...예." 줄리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평생 남을 해치기만 했던 마법을...정작 지금은 쓰는 것을 주저하다가 아마릴리스가 죽었습니다. 당신마저 죽어버리면 정말 마법사인 나 자신이 저주스러울 것 같아서..." 레터는 그렇게 말하며 세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 좋아 보이던 그의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살기어린 눈빛. 그러면서도 그의 펼친 두 손은 계속 마력을 집중 시키고 있었다. "카넬리안씨. 그 자에게서 물러나세요." 레터의 말에 그녀는 세이드에게서 떨어졌다. 레터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마 력을 그에게 직격시킬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이드는 도리어 삐뚤어 진 흥미를 참지 못하고 얼굴에 들어 냈다. 흥분과 수치심이 억지로 섞여 있 는 기묘하게 뒤틀린 상으로 말이다. 들어본 적 조차 없는 촌구석의 마법사 에게 패한다는 건 삼류소설 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내 마법을 간파했다고 믿고 있는 거냐? 그렇다면 이 장벽을 뚫어 봐라." 세이드가 직접 입으로 시전 주문을 읊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다. 힘 을 실체화 시키는 수많은 마법에 통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낭독 주문이라는 확인 절차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리고 세이드 앞엔 철옹성의 외벽 같은 에너지의 장막이 펼쳐 졌다. 인간 이 저런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건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것은 맹위 를 떨치는 해일처럼 레터를 위협해 왔다. '이 남자야 말로 대체 정체가 뭐야...' 카넬리안은 그 거대한 위압에 흔들리며 레터를 돌아보았지만 레터는 두 눈 을 감은 채로 자신의 마력을 다듬고 있을 뿐 미동조차 없다. 그냥 단순히 지나치게 배짱이 좋은 남자인가? 줄리탄이나 메르퀸트는 세이드의 투지에 눌려 기절해 버릴 것 같은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이 남자 대체 머 릿속이 어떻게 된거야. "아무리 복잡한 마법이라도...따지고 보면 구전을 통해, 문서를 통해 기록되고 이어져온 인간의 언어와 같은 것일 뿐. 결국 거창하게 이름 붙인 마법 들도 잠시 시공간의 힘을 도둑질하는 기술일 뿐이다." 레터는 뜻 모를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두 눈을 떴다. 그와 함께 그의 손바닥에서 만들어진 작은 전력체가 세이드를 향해 날아갔다. 세이드의 장 벽 속에 금새 묻혀 버릴 것 같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저런 걸로 장 벽을 부셔버릴 수 있을까? "고작 그런 원시적인 기술로 내 나를...어, 엇!" 레터의 마력의 화살은 세이드의 장벽을 밀어내지도 부셔 버리지도 않았다. 세이드는 레터의 작은 전력체가 자신의 장벽을 마치 무시하듯이 통과하며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당황하는 순간 세이드의 어깨 에 그 전력체가 직격되며 그의 어깨를 물어 뜯었다. "어떻게!" 전력체 자체가 가지는 힘은 치명적인 것은 아니어서 단지 세이드의 왼쪽 어깨 뼈에 금을 가게 할 정도였지만 - 세이드는 느끼고 있었다. 이건 단지 경고이고 레터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마법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의 심장을 터트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세이드는 더 이상 무의미해진 마력의 장벽을 거둬 드리며 수치심에 범벅이 된 얼굴로 레터를 노려볼 뿐이었다. "마법은 언어와 같다고 했지. 이 세상에 마법이 보편화 된 지금에는 거의 모든 마법사 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꼭 그것만 있는 건 아냐. 네가 아무리 마법에 뛰 어나다고 해도 결국에는 남들 다 할 줄 아는 언어를 조금 유창하게 쓸 수 있는 것 뿐이다." 세이드의 감정은 여전히 용납할 수 없었지만 이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말하자면...나는 너의 마법체계를 알고 있지만 너는 나의 마법체계를 처음 보는 것일 꺼다. 당연히 날 이해할 수도 막을 수도 없겠지!" 레터의 좀 긴 설명은 요컨데 '넌 하나지만 난 이개국어를 할 수 있다! 니가 모르는 말로 내가 쏼라 쏼라 떠들어 대는데 니가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겠냐? 결국 니가 암만 날고 기어도 넌 하나의 언어 밖엔 모르고 있는 거야.' "그런 마법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들었다..." "유감이군. 여기 사라지지 않고 멀쩡하게 있으니까. 너야 말로 이 마을에서 사라져라." 레터가 다시 손에서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전력체를 품기 시작했다. 세이 드의 얼굴에 감도는 치욕의 그림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태어나 처 음으로 느낀 것이다. "줄리에트...저스틴..." 세이드는 그들에게 뭔가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두 아이가 세이드 앞에 섰다. "다음에 만날 때는 지금과는 다를 거다." 세이드는 망또를 펄럭이며 뒤 돌아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줄리에트와 저스틴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서 있는 채로. "다시는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멋대로 다음 약속 잡지 말아!" 세이드가 도주하려는 걸 안 카넬리안이 미스트랄을 치켜 들며 세이드에게 달려 갔지만 그때 공격을 시작한 것은 줄리에트와 저스틴. 무차별의 불덩어 리와 냉기가 재앙처럼 카넬리안과 마을을 덮치고 있었다. "저 아이 들...우리를 막고 죽으려는 거야." 레터도 카넬리안도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 줄리탄 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기세였다. '나를 위해 죽어라.'라는 명령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예 의 패척병 들처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의 몸 속에 남은 마지막 힘까지 긁 어내며 상대를 공격해야만 한다. 잔인한 양부의 손에 걸려 죽도록 일만 하 다가 어느 날 마을 어귀에서 힘이 다해 쓰러져 죽는 불쌍한 아이 하고 상황 과 방법만 다르지 차이가 뭐가 있어? "너희들! 인간이잖아? 그런 어설픈 씰 흉내는 그만 둬!" 카넬리안은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날아드는 마법을 피하며 그들에게 달려 가고 있었다. 그녀는 줄리에트와 저스틴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녀의 얼굴 에서 지금처럼 착잡한 표정을 엿볼 수 있을 때는 언제나 원치 않는 살인 을 저지를 때였다. "카넬리안!" 줄리탄의 목소리 "주인님? 우악!" 카넬리안은 줄리탄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가 바로 앞까지 날아온 불덩어리를 가까스로 피했다. 위험천만. "너 지금 죽이려는 거야? 저 아이 들을?" "나야 말로 주인님 때문에 죽을 뻔 했잖아! 자신의 사랑스러운 씰이 긴박한 상황일 때는 알아서 말 걸지 좀 말아 줘!" 사랑스럽긴 누가...그때 줄리에트와 저스틴에게 무언가 날아간 것 같았다. "응?" 그리고 거짓말처럼 줄리에트와 저스틴의 연사 마법이 멈춰 버렸다. 그 아이 들이 쓰러진 것이다. 레터가 보낸 간단해 보이는 공격. 즉사 마법이라도 되 는 건가? "...죽인 거에요?" "잠시 기절시켰을 뿐입니다." 되게 간단하다. 그녀가 레터를 바라보는 얼굴에 담은 메세지는 '당신 엄청 강해!'였다. 레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아이 들, 제가 키워 보겠습니다." 5. 전투가 끝난 이후, 카넬리안은 힘이란 힘은 다 써 버렸는지 추욱 가라 앉 아서 마을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마릴리스의 죽음 때문에 시오가 비통에 잠겨 있어도, 레터가 화전민 들을 데리고 산맥의 다른 곳으 로 옮길 계획을 세우며 고심하고 있어도 그녀는 모두 다 귀찮다는 듯이 그 냥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한참 찾던 줄리탄이 다가왔다. "카넬리안...왜 그러는 거야?" 줄리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자 카넬리안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우우...만지지 마.. 지금 엄청나게 아프단 말야." 세이드의 검을 받아낸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혼자 이런 구석에 숨어서 끙끙 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줄리탄은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문제는 다 른 멋진 남자였자면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라도 매만지며 '다음에는 내가 지 켜줄께.'라고 속삭일지도 모르지만 줄리탄은 전혀 그럴 주변 머리가 없다는 것. 하긴 갑부나라 왕자님이 그런 짓을 해도 '주인님 멋져요오'라고 달려들 그녀가 아니다. "그리고 말야 주인님." "뭐?" 카넬리안은 딱 봐도 엄청 안 좋아 보이는 안색으로 줄리탄을 돌아보며 말 했다. "다음부턴...내 머리 속에다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지 말아 줘.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어." "외치다니? 내가 언제..." "공명이야. 무척이나 어설프고 제대로 조절도 안되고 있었지만 세이드를 죽이라는 공명을 분명히 느꼈다고. 하긴 그 공명 때문에 순간적으로 내 힘을 일부를 되찾긴 했지만." "공명..." 줄리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릴리스의 죽음을 보며 줄리탄은 도 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느꼈고 - 누군가에게 그 감정을 외치고 싶었다. 그 것이 전달된 것인가. 테이머가 쓰는 공명이란 것은 씰에게 자신의 감정 을 잘 정리해서 보내는 걸 말하는 건가? "인정하기 싫지만...나는 주인님의 감정의 분신과 같은 존재. 주인님의 일부분이야. 우리가 계속 같이 있는다면, 나는 조금씩 줄리탄 이라는 존재의 일부분으로 녹아들게 되겠지. 혹시라도 주인님이... 거의 불가능 하겠지만...완벽하게 나와 공명을 이룰 수 있는 뛰어난 기사로 성장하게 된다면 우리 둘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감정 을 공유하게 될 수도 있는 거야. 나는 당신의 눈이 되고 검이 되고 마음이 되겠지." "지금...돌려서 말하는 거지?" "아니. 말하는 그대로야." 줄리탄은 그렇게 힘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쓰라린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전 주인은 자신 때문에 오펜바하에게 죽었 다고 하는데...아마 그때 그녀는 마음이 둘로 갈라져 버리는 고통을 느꼈 을 것이다. 자신의 일부분이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 주인이 죽어 사라 지면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이별'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 채 계속 아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그것이 두려워 다시는 테이머와 융화하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주인님이 날 치료해 주겠다고...대체 뭘 치료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날 감싸주겠다고 무작정 외쳤던 그 때...난 한번만 더 속자는 생각을 한 건지도 몰라. 아직도 모르겠지만...그래도 믿고 싶어 주인님을." 보통 이럴 때 시오라면 '카넬리안. 싸랑해!'라며 콱 껴안아 버렸을 것이 분명 하지만 줄리탄은 한심하게스리 머리를 긁적거리며 '괜히 미안하네.' 라는 표정으로 머쓱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뭔가 대단히 아쉬운 표정의 카넬리안. "있잖아...주인님. 맨날 하는 말이지만 미안해.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아마릴리스도 죽고 주인님도 죽을 뻔한건데... 이렇게 엉뚱한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런데도 화만 날 뿐 조금도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아서 미안해." 6.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레터의 집에 돌아 왔을 때 레터는 저스틴과 줄리에트 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었고 시오는 없었다. 분명 아마릴리스의 무덤에 가 있을 것이다. 메르퀸트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계속 줄리에 트와 저스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아이들, 이렇게 나둬도 괜찮아요?" 줄리탄은 조금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미친듯이 마력을 내뿜으며 난동을 부 릴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국의 정규군을 전멸시킬 능력의 마법을 구사하는 '무서운 아이들'인 건 사실이니까. "아니 뭐, 괜찮습니다. 처음으로 세이드의 명령을 받고 있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을 뿐...누굴 해친 것도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니까 세이드가 없다면 아무도 해치지 않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 아이 들은 마치 평생 처음으로 우리에서 나온 생 존력이 사라진 들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분명 배가 고플텐데도 눈 앞의 음 식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주눅 든 얼굴로 레터를 올려다 본다. 그들 은 본능적으로 세이드를 물리친 레터가 강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새 로운 주인이 된 레터에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먹으라고 말하지 않으세요?" 메르퀸트가 레터를 돌아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스프가 다 식어간다. 레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먹는 것 하나까지 명령을 받아야 한다면...명령을 내리는 주인 이 사라져 버리면 금방 죽습니다. 그런건...사는게 아니지요. 이제부터 전 혼자 느끼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부터 가르쳐 줄 생각 입니다." 갑자기 레터에게서 훌륭한 부모와 멋진 교육자의 후광이 넘실 거렸다. 이 사람, 도끼질 하는 것 빼곤 못하는 게 없는 남자다. "레터씨. 우리와 함께 여행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에겐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카넬리안의 말이었다. 뭐 그녀의 머리 한편에 '저 자의 마법을 어떻게든 익혀서 써먹어야지.'라는 책략적인 의도가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아뇨. 이 마을 사람 들은 절 믿고 있으니까. 전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시오는 별 필요 없는데...' 입을 삐죽 내민 그녀. 틈만 나면 느끼한 말만 쏟아내는 정의파 무식소년은 별로 도움될 게 없다. "그보다 이 목걸이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레터는 주머니 속에서 아주 오래되어 거의 선대의 유물 정도로 보이는 기 묘한 양식의 목걸이를 꺼내 그녀에게 건내 주었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그걸 들여다 보다가 탄복하며 레터에게 말했다. "이거 비싸보이네요?" "......" "아하하. 노, 농담이에요." "......" 분명 아무 말도 없었다면 그걸 팔아서 돈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썰렁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줄리에트와 저스틴. "그건 제 스승님을 만날 수 있는 열쇠 입니다. 저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지혜를 지니신 분.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군요. 한번 만나보시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세이드를 패주시킨 레터의 스승이라면 대체 얼마나 뛰어나단 말인가. 앉은뱅이 일으키고 모래로 쌀을 만들고 돌을 금으로 만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전능신이라도 된다는 걸까? "열쇠라...어떻게 쓰는 거죠?" 이건 열쇠가 아니라 목걸이다. 카넬리안은 이리 저리 그 목걸이를 훌터 보았지만 쓰임새를 알 수 없었다. "가보시면 압니다. 피크 산맥의 헤이시 산 정상에 계실 겁니다. 시오가 안내할 겁니다. 제가 편지를 써 드리지요." 레터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아 먹으려고 한다!" 저스틴이 스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메르퀸트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7. 다시 산행이 시작 되었다. 목표는 헤이시 산의 정상. 시오 역시 동참한 것이다. 그는 '남자가 되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살 떨리는 말을 외치며 아버지 레터를 떠났다. 그러니까...의외로 빨리 기운을 차린 것이다. "이봐. 시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말도 못하고 아마릴리스의 무덤 앞에서 당장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줄리탄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지만 시오는 의외로 밝은 얼굴로 대답 했다. "그녀의 몫까지 살아 주기로 결심했으니까. 내가 기운 없이 휘청거리는 꼴을 그녀가 원하고 있는 것도 아닐테고. 매일 매일 내가 본 것에 대해 아마릴리스에게 말해줄꺼야. 어이! 듣고 있지 아마릴리스!" 하늘을 보고 손을 흔드는 시오. 정말 대책 없이 직설적인 녀석이다. "...슬픔을 삼키는 방법도 여러가지로군. 뭐 씰에게도 영혼이란게 있다면 보고 있겠지." 카넬리안은 시오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빈정거리지 않았다. "아무튼 아마릴리스. 같이 있으면 무지하게 편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젠장...그녀는 사라지고 저런 썰렁한 남정네나 따라오게 되다니. 그러고 보니까...이 중에 나만 여자잖아." 따지고 보면 그렇다. 문뜩 불안한 기우에 오싹하는 카넬리안. "카넬리안. 넌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 누가 널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면 받아 들이겠어?" 시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지금 저주 거는 거냐? 나보고 인간이 되라니!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그런 소리는 하지 좀 말아라." 당연한 대답이다. 하지만 시오는 아마릴리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 녀의 마지막 귀를 통해 들은 것이 아니었다. 세이드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아마릴리스를 시오가 껴안았을 때 분명 시오는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는 그녀의 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따뜻한 감정을 손으로 잡은 것 같은 기분. 그녀는 남아 있는 힘을 모아 자신의 테이머, 시오와 공명을 시도한 것이었 다. 그는 그것이 공명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공명을 통해 전달된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연인을 향한 짧은 편지와 같았다. '어제 오후...길가에 피어 있는 작은 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겐 너무나 아름답고 슬퍼 보였습니다. 주인님도 그렇게 느꼈나요? 제가 꽃을 보고 느낀 감정이 인간이 꽃을 보고 느낀 감정과 같다면 어쩌면 저도...인간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바보 같이...시오는 또 눈물이 흘렀다. Chapter#7 : '천국의 가장자리' 끝 Next Chapter : '마음의 땅에...' -Blind talk 끝났습니다아!!!!!!!!!!!!!!!!!!!!!!!!!!!!!!!!!!!!!!!!!!!!!!!!!!!!!!!!!!!!! 챕터 끝났습니다아!!!!!!!!!!!!!!!!!!!!!!!!!!!!!!!!!!!!!!!!!!!!!!!!!!!!!!!! 허억 허억 허억... 아무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챕터 였습니다. 첫번 째 : '연재가 늦으면 나까지 내용을 잊어버린다. 읽는 분은 오죽 하겠냐.' 두번 째 : '지 버릇 개 못준다. 결국에는 누굴 죽이고야 말았다.' 세번 째 : '다음 편은 정말 즐겁게 해야지.' 네번 째 : '난 마법이 싫어...' etc bluh bluh bluh... 본래 이번 편의 내용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릴리스도 없었고 아주 음울한 내용이었지요. 시오는 본래 마을의 개망나니 도적이었는데 마을 입구에서 줄리탄 일행을 위협하다가 줄리탄의 실수로 죽게 됩니다. 줄리탄의 첫 살인이 벌어지고 그것의 고통에 몸부림 치다가 결국 시오의 어머니(본래는 아버지가 없 었지요.)에게 사실을 말하고 그 어머니가 찌른 칼에 부상까지 당합니다. 마을에선 사건이 있었는데 촌장의 딸이 산에서 폭행 당한 뒤에 변사체가 되어 발견된 것이었죠. 누가 범인인지를 놓고 마을 간의 엄청난 불신과 암투가 벌어지 게 되며 결국 그들은 오크 들의 탓으로 돌리며 현실을 외면하고...기타 등등. 이렇게 썼는데...'이러면 안돼! 더 이상 어두워 지면 안된단 말이다!'라고 외치며 다 지우고 가볍게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아아 파란만장 했습니다. :-> 천국의 가장자리라는...의미도 사실 '끔찍한 혼란과 무질서'에 가까운 거라서 썼는데...지금 편과도 얼핏 어울리는 제목 같아 그냥 바꾸지 않고 놔뒀습니다. (이미 사라진 스토리를 말한 이유는 왠지 억울해서...) 잘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에...드래곤 레이디가 언젠가 3부까지 연재가 끝났 을 때(그래봐야 다른 분 들의 글에 비해 특별히 길지는 않지만...) 기회가 되어 새로운 글을 쓰게 된다면 그때 보여줘도 늦지 않으니까. 궁상맞고 우중충하게 가지 않으려는 my pace를 놓치긴 싫으니까. 하아...마법에 대해서는 도무지 fireball이라는 말 조차 쓸 수가 없습니다. 제길...뭘 알아야 쓰지. TRPG를 잠시 해본 적도 있었는데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꼭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 안되기 때문에 환타지 소설도 좀 읽어보고 다시 대책을 마련해야 겠네요. 예전에 한 분께서 기렌의 야망의 중독성에 대한 주의를 주셔서 '맞는 말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PS 슈퍼로봇대전알파를 하고 있습니다. :-) 딱다구리 문고와 콩콩 코믹스의 영향 때문에(지금도 몇 권 소장 중...) 메카물을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자랐습니다. 지금도 무척이나 좋아해서 친구 들과 술자리에 있으면 밤 새도록 질리지 않고 떠들고 있습니다.(한심...한가...) 특히 이번 편에는 충격의 알베르토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하고야 말았다는...아무튼 RPG는 MSX시절의 YS I 이후 거의 않았기 때문에 게임에 중독될 일은 없다.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 다. 이번 편의 묘사가 좀 조잡하고 단어 선택이 안좋고 상황에 억지가 많았습니다. 뭐 이미 저질러버린 건 어쩔 수 없고(다음에 수정하든지...) 다음 편 부터는 제대로...그리고 좀 더 편하고 즐겁게 하려고 합니다. (라고는 해도 전쟁을 몇 몇 영웅의 화력시험장 정도로 묘사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과 회의가 앞서네요.) 나우누리를 비롯해서 추천 해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황송했습니다. 그럼 다음 편 곧 올라 갑니다. 새벽창이 비에 젖고 있어요. 만날 사람 없이 거리에 있는 것처럼 오래된 주소에 당신 앞의 편지 돌아왔다면 슬퍼지는군요 혼자일 때를 기억해요 아직도 뺨에 걸린 눈물 잊기 전에 지금 곧 만나고 싶어요... 잠들지 못한 채로 밤으로 가라앉아요 외롭기 때문입니다. 꿈같은 꿈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미소짓는 당신을 무지개의 소매까지 뒤쫓아가도 따라잡을수 없어요 따라잡을수 없어요 (일본어동호회 MISTY님의 번역) 안전 지대의 '외톨이의 무지개'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0736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9/18 12:17 읽음:20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ARGON LADY ] 8-1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319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9-18 10:13 조회:64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몰라. 상대를 죽이는 재능 밖 엔 없어서...즐겁게 사는 게 어떤 건지도 찾지 못했어. 내가 이 세상의 뒤틀린 존재 들을 부셔 버릴테니...넌 그 빈공간에 뭔가 지금보다는 좋 은 걸 채워 넣으면 되는 거야. 나만 쉬운 역할을 맡아서 미안하군.' 언젠가 불현듯 젤리드가 그런 말을 내게 던졌었고 이제 와서 그 말에 대해 그에게 되물어보고 싶은 것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없다. 내 생각이 성장하는 속도 만큼은 기다려 주었다가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 을 품었지만 아무도 나를 기준으로 살아가진 않는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1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Different place, same shit. 1. 레터의 마을로 가는 코스 만 하더라도 줄리탄 같은 노멀한 청년에겐 무리 가 있는데 이제는 아주 험악한 피크 산맥의 헤이시 산 꼭대기다.(이러다간 환타지 등반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 일말의 용서도 없이 험준하게 이어지 는 산길은 - 멀찌감치서 구경하는 사람에겐 '거, 절경일세.'라는 속 편한 소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한번 그 길을 타 보라. 차라리 군대에게 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도시의 포장된 길을 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눈물나는 극한 체력 단련 코스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 만...힘들어 하는 것은 줄리탄 뿐이었다. "와아 힘들다 힘들어. 나도 이 정도까지 깊이 가본 적은 없어. 그런데 줄리탄 너 의외로 대단하다. 아무 말도 없이 걷고 있다니." 시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뒤따라 오고 있는 줄리탄을 돌아 보며 말하자 줄리탄은 보기에도 딱한 퀭한 눈동자로 고개를 들며 중얼 거렸다. "넌...힘들다는 말이라도 나오냐? 난 왜 꼭 챕터는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지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챕터5에서는...마을 하나 찾지 못해 황무지 한가운데 서 아사할 뻔 한 (줄리탄 만의) 위기 상황에서 시작했고 챕터6에서 좀 편해 지는가 싶더니 챕터7에서는 나무뿌리 캐먹으며 산길을 뚫고 나가야 하는 죽 여 주는 상황에서 시작했고 이제는 챕터8, 등산가도 피하는 코스를 타야 하 며 땀마저 바짝 바짝 말라 붙는 고생을 해야 하는 (역시 줄리탄 만의) 위기 에서 챕터가 시작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챕터가 지남에 따라서 점점 그 위기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일까. 아마 다음 챕터에선 줄리탄에게 서대륙 최고봉 무산소등정이라는 시련을 줄지도 모른다. "난 좋아. 이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좀 더 아마릴리스와 가까워 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이런 썰렁한 멘트를 지겹게도 읊어대는 사내를 좋아했던 아마릴리스가 불 쌍할 정도다. "...난 네 녀석이 정말 싫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둘 다 시끄러워. 비슷하게 안좋은 머리로 서로 으르렁 거려 봐야 옆에서 듣는 사람만 짜증나니까. 으으 이제 멍청이가 둘로 늘었어." 그녀 역시 줄리탄의 피로를 가중시키는데 한 몫 든든히 하고 있었다. 메 르퀸트 마저 성격파탄의 냉소주의자 였다면 아마 이 일행은 일찌감치 자멸 해 버렸을 것이다. 메르퀸트는 아까부터 의아한 눈초리로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얼굴로. 그의 표정을 이상하 게 생각한 줄리탄이 물었다. "메르퀸트...왜 그러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상해요. 아까부터 아무 것도 안보여요. 줄리탄씨." "안보여?" 뭐가 안보인다는 거지? 죽어라 이어지는 활엽수림과 흙바닥의 연속인데 '아까부터 안보인다니.' 무슨 의미인지 줄리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카넬리안이 끼어 들었다. 조금 긴장된 표정이었다. "메르퀸트 말 대로야. 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뭔가 강력한 존재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 같군."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부터 어떤 짐승의 소리도, 심지어는 곤충 들 까지 보이지 않아. 지나치게 고요하지. 마치 이 산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아." 엄청나게 귀가 좋은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줄리탄도 차분히 생각 해 보니까 정말 그 흔한 날벌레 소리 하나 듣지 못했다 얼마 전 부터. "어떤 다른 동물도 이 곳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건..이 곳이 아주 적대 적인 강력한 존재의 영역권이라는 걸 의미하지. 일반적인 동물이나 이종족 정도의 서식지가 아니란 말야...여기는." "강력한 존재...혹시 레터의 스승이 아닐까." 갑자기 긴장된 줄리탄이 말했다. 곤충까지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배타적 인 존재라면 자신 들에게만 너그러울리가 없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아직 그건 모르겠어. 아무튼 쉽게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야." 쉽게 친해질 수 없는 기분이라면...카넬리안을 상대할 때의 기분일까나. 그녀가 검을 잡으며 천천히 앞장서기 시작했고 시오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목검을 잡았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모두들 조심해. 그 힘이 접근하고 있어." 그때 무언가 하얀 것이 일행에게 뛰어 오고 있었다. 어두 컴컴한 숲을 해 치며 미친듯이 달려오는 것이 마치 유령 같다. 엄청난 긴장감이 단번에 몰 려 온다. "저, 저건!" "저것은!" "이, 이럴수가!" "설마..." 모두 그 정체에 대해 놀란 눈빛으로 한마디 씩 던졌다. 그리고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냥 여자 잖아." 그렇다. 정체는 다급하게 일행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그냥 여자' 였다. 줄리탄은 허망한 눈동자로 그 여자를 가리키며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카넬리안. 설마 저 여자가 니가 말하는 강하고 적대적이어서 쉽게 친해 질 수 없는 존재?" "......" 그녀도 가끔 틀릴 때가 있나보다. 그녀는 몹시 무안한 얼굴로 자신 들에게 달려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런 분위기로 달려오면...달려오면 ... "자, 잠깐만!" ...밑도 끝도 없이 줄리탄에게 안기고야 말았다. 그 꼴을 보며 이를 가는 시오. "맨날 여자가 너 한테만 가는 이유가 뭐야!" 시오는 생각해 보니까 되게 억울했다. 줄리탄도 거듭 되는 우연에 얼떨떨 한 표정. "그 이유 알면 나한테 좀 알려 주라." 줄리탄은 일단 자신에게 껴안듯이 들러붙고 있는 여자를 좀 떼어냈다. 줄 리탄의 손을 통해 그 여자의 몸이 크게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리 줄리탄이 둔감해도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왜 이러시는지 이유를..." 그녀는 줄리탄에게서 떨어지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말했다. "여기서 도망치세요!" "......" 아가씨. 그렇게 갑자기 결론을 내려버리면 뭔 일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라는 표정으로 줄리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이 영역의 주인에게 쫓기고 있는 걸꺼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줄리탄의 반격. "이번엔 틀리지 않겠지?" "으으 내 말이 맞아! 의심도 많아요!" "그보다...왜 쫓기고 있는 거죠? 누구시길래..." 보통 이런 패턴으로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런 말이 나올때 여자 쪽에서 '저는 어느어느 나라의 공주였는데 저희 나라를 멸망시킨 마왕이 절 강제로 잡아 결혼하려고 하던 중에 도망쳐서...'라는 식의 대 답이 나오면 원패턴이다. 현실적인 소설이라 하더라도 '산을 헤매다 이 지역의 괴물을 만나 도망치던 중에 다행이도 당신 들을...'이라는 식으로 보통 사건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달랐다. "모르겠는데요." "예?" 가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올 때도 있다. "모르겠어요. 왜 도망치고 있는지...그게 중요한가요?" '당연히 중요하죠...' 뭔지 모르게 위험한 여자다...라는 생각이 줄리탄의 머리를 스쳤다. 혹시 독버섯을 먹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산속을 방황하는게 아닐까 이 여자. "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로서는 도무지..." "아무튼 어서 도망치세요!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최소한 무엇 때문에 위험한지 알아야 대처할 방법이라도 궁리해 볼 것 아 닌가. 줄리탄은 불안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끼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 "지금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 거죠?" 카넬리안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말락..." 그녀가 두려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 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시끄러운 곳이었다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 였다. "말락? 처음 듣는 이름인데...그게 뭐죠? 산짐승? 아니면 이종족?" 카넬리안도 모르는 단어라면 고유명사거나 신조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 런데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이 산을 지키는 수호령 입니다." "수호령...그런데 그 수호령에게 왜 쫓기고 있는 거죠?" 보통 이 경우에는 '사실 제가 이 산의 규율을 어겨서 수호령이 절 처단 하기 위해 쫓아오는 중입니다.'라는 상식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또 예상을 벗어났다. "그건 잘...모르겠는데요." '이 아가씨가 정말...' 줄리탄은 왠지 자기가 이 여자에게 놀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모른 채하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이 여자의 분위기는 장난도 농담도 아니고 진지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줄리탄은 억울한 표정으로 '대체 왜 이런 이해 못할 일만 계속 생기는 거야.'라는 얼굴로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먼산 을 바라보았다. "이봐요 아가씨. 우린 당신을 전혀 모르고 도움을 받고 싶으면 사건의 요점을 간단하게라도 설명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화가 난 카넬리안이 쏘아 붙이자 그녀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미, 미안해 할 것 까지는 없는데..." 괜히 자기가 미안해져 버린 줄리탄. 이젠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유가 무슨 필요!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가 위기에 빠졌는데 무조건 도와줘야 할 것 아냐!" 갑자기 나서는 시오. 여자를 향한 거의 맹신에 가까운 정의감이 불 타 오르는 것 같았다. "니가 그 말을 꺼낼 줄 알았지...단순한 녀석." 카넬리안이 눈을 흘겼다. "시오...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주자는 거야. 무슨 방법이라도 있냐?" "그건!" 줄리탄의 말에 시오가 멈칫하며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알 수 없는 여자에게 머뭇거리며 질문하는 것이었다. "저...왜 쫓기고 있는 거죠?" "이 멍청아!!!" 폭발해 버린 카넬리안. 이렇게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버릴 즈음...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줄리탄이나 시오가 잘 훈련된 기사 였다면 사방을 조이듯이 감싸고 있는 기분 나쁜 기운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오고 있어!" 그녀가 미스트랄을 잡으며 외쳤다. "또 뭐가!" "뭐긴 뭐야! 말락이라는 이 곳의 수호령이겠지!" 줄리탄은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펼쳐진 어두컴컴한 숲이 물결치듯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습하고 자극적인 기묘한 물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한다. 눈 앞의 사물 들이 고유의 형채를 잃으며 뒤틀리는 것도 같았다. 멀미할 것 같은 어지러운 기분이 얼마나 계속 되었을까. 그래도 한 발작이라도 나서면 땅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은 현기증. 바람이 자신의 온몸을 매만지며 더듬 더듬 확인해 보는 것 같았다. "너스레는 집어 치우고 어서 나왓!" '.....'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날카롭게 외치자 잠시 생각하는 듯 주변의 공기가 멈춰버렸다간 갑작스레 한 곳으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흙폭풍이 일 어나는 것처럼 땅에 소용돌이가 생기며, 튀겨나온 작은 돌가루 들을 피하느 라 메르퀸트가 고개를 돌렸고 잠잠해져서 다시 앞을 바라보았을 때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땅 속에서...사람이 나와?" 그들의 앞에서 분명히 검은 머리칼을 앞으로 내린 청년의 모습을 한 존재 가 솟아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흙을 흡수하며 자 신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경계의 눈초리, 두 손에 들고 있 는 거대한 낫은 이곳의 수호령 말락이 분명할 거라는 예상을 하게 만들었고 또한 몹시 적대적일 거라는 부정적인 추측까지 설득력을 갖게 했다. "내 이름은 말락. 이곳의 *센티넬이다." 말락은 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주변의 공기를 음침하게 울리는 것 으로 일행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 시켰다. 그와 동시에 일행의 주변에는 말락의 수하인 것으로 보이는 실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이형(異形)의 생명 체 들이 땅과 숲 속에서 솟아 오르며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왜 어딜가도 이 지경이 되는 거야.' (각주) 1)센티넬(sentinel) :보통 특정한 장소를 계약과 목적에 의해 지키고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즉 특별히 종족이나 직업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것에 가깝겠지요. 사실...이 단어는 그 의미가 꽤 샤마니즘에 어울릴 것 같지만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샤마니즘' 백날 뒤져도 이런 단 어는 없습니다.-_-(비슷한 의미는 있습니다.) 그냥 센티넬이라는 의미 자체가 '초병'이나 '파수꾼'에 가까운 것이고 (guardian하고도 좀 비슷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X-MEN의 센티넬 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사용한 단어랄까요.(무책임하군...정말이지..) 아...센티넬 건담은 별로 입니다.-_-; -Blind Talk 짧지요? 그래도 이번 챕터는 자주 올릴 겁니다. ^^ 아 그리고 저 아직 1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T_T 1부 끝으로 아시는 분 들이 계신 듯 해서요,..1부는 예정대로면 앞으로 한 두 챕터 뒤에 끝나게 됩니다.(아마도...저번 편 잡담에 챕터 끝났다고 제가 오도방정을 떨어서 그렇게 느끼시는 것일지도...-_-) 그럼 이 게을러터진 글을 읽어주시고 추천해 주신 분 들께 더 없는 감사 드리며 이번 챕터를 시작 하겠습니다.(아 정말...이번 챕터는 빨리 올라 갑니다.^^;) 아...이번 편은 좀 장난스러웠습니다. Sting의 Desert Rose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0793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09/23 02:27 읽음:30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2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344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09-22 18:54 조회:222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더러운 욕정에 씰룩이는 눈동자로 메르퀸트의 팔을 잡고 있던 휴센이라는 정치가를 보며 나는 검을 뽑아서라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빠른 자가 있었던 것이다. "말락! 하지마!" 휴센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애쓰던 메르퀸트는 주변의 공기가 울리기 시작하자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말락은 말보다는 그의 상징인 대 낫을 쓰는 일에 더 익숙했다. 창이 깨지면서 거칠게 거실의 창문 이 열렸고 흙먼지가 쏟아져 들어오며 그것이 말락이라는 형체를 만들어 내 는 건 순식간 이었다. "으히히히힛! 뭐, 뭐냐! 너는!" 듣기 싫은 괴성을 지으며 휴센은 아무리 말해도 놓지 않던 메르퀸트의 팔 을 놓으며 쓰러져 엉덩방아를 찍었다. 말락은 불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로 휴센을 쏘아보며 그의 가슴을 향해 대낫을 내리 찍었다. "죽이면 안돼!" 메르퀸트가 외치지 않았다면 휴센의 속된 인생은 오늘 부로 마감하게 되 었을 것이 분명했다. 내 주변에는 말귀를 못알아 듣는 상대에게 당근 따윈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 들이 몇 몇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자 들이 홍안의 카넬리안, 흉몽 젤리드 그리고...센티넬 말락이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2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Carnelian Adventure in Wonderland! 1. 말락이라는 센티넬은 몹시 기분이 안좋은 표정으로 일행을 내려보고 있었 다. 큰 키에 어느 정도 공중에 둥 둥 떠 있기 까지 하니까 줄리탄 들은 그 를 올려봐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예의 여자는 말락이 자신을 바라보자 더욱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떨며 줄리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넌 뭐하는 놈이야? 왜 갑자기 솟아 올라서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카넬리안의 간략한 감상 평. 말락은 눈살을 찌부리며 다시 말했다..라곤 하지만 입을 벌리지 않은 채 주변의 공기를 울려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 치 보는 사람은 말락이 복화술을 쓰는 것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난 이 지역을 지키는 센티넬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 목소리의 떨림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섬뜩한 느낌이었다. 말락의 표정 이 험악해 짐에 따라 주변의 악몽을 닮은 이형의 생명체 들도 으르렁 거리 며 일행을 좁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질릴 때도 되었는데 줄리탄은 여전히 두렵다. 무엇보다 바라보고 있으면 꿈 속에서도 튀어나 올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의 이형 들을 처음 봤다는 것이 두려움의 첫 번째 이유. 세상 에 이런 것 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날 정도 였다. "센티넬? 너 악령 이잖아? 딱 보니까 그런데?" "...악...령? 내가?" 뭔가...카넬리안이 내뱉은 '악령'이라는 단어가 말락의 기분을 몹시 상하 게 만든 것 같았다. 줄리탄은 말 그대로 말락의 분노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말락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왜 인간 들은 몸이 불투명하고 날아다니면 모두 악령이라고 단정 짓는 거야! 날 악령이라고 부르지 마!" "하반신이 흐물흐물거리고 그렇게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데 악령 외에 어떤 걸 상상할 수가 있겠냐! 너야 말로 지금 날 인간이라고 부른 거냐! 누가 인간이라는 거야 지금! 이 조물주의 실패작아!" '...또 시작이다.' 라며 줄리탄과 시오, 메르퀸트가 저마다 중얼 거리며 동시에 뒤로 한발자욱씩 물러섰다. "니가 인간인지 아닌지 내가 알게 뭐야! 그딴 것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한번 만 더 날 악령이라고 부르면 그땐 너희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다! 나도 당당한 종족 중에 하나야! 왜 유기체가 아니면 죄다 악령이네 유령이네 하면서 멸시하는 거냐고!" 지금까지 지켜오던 말락의 이미지가 단번에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만약 입 을 통해 하는 말이었다면 사방에 침을 튀겼을 정도로 격하고 빠르고 강한 어조 였다. 카넬리안은 퉁명스런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런 말락을 바라보다가 줄리탄에게 속삭 였다. "주인님. 저 녀석, 악령 주제에 되게 소심한 놈 같아." "...그러냐?" 줄리탄은 자길 인간이라고 불렀다고 오크 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 그 녀나 말락이나 째째하기가 막상막하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 상황에서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크윽. 모르겠어. 나도 지금까지 악령이라는 걸 본 적도 없는데 대체 왜 죄다 날 악령이라고 부르는 거냐고. 그 근거가 뭐야! 형편 없는 미신 때문에 우리 같은 종족 들이 피해를 입고 있단 말야." 갑자기 말락은 이름도 모를 종족을 대표하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모 르긴 해도 엄청나게 당했나 보다. 카넬리안이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 지나가야 하니까 지지리 궁상은 저 구석에 가서 떨어 줄래? 여기에는 성별이 불분명해 져 버린 너보다 훠얼씬 불행한 이종족이 한 명 있으니까 말야." 메르퀸트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악령이라고 무시당하며 살고 있는 말락과 성적 정체성의 상실 위기에 허우적 거리는 메르퀸트 중에 누 가 더 불행할 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지만. 말락은 메르퀸트를 보며 잠시 멍한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여자 엘프 잖아..." "남자 입니다." "...??" 메르퀸트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혼란에 빠져 버린 말락의 얼굴이 가 관 이다. 말락의 부하 정도로 보이는 무시무시한 이형 들도 자신의 지휘관 이 헤매고 있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 맞아. 그리고 난 인간이 아니라 씰이라고. 여기 두 멍청한 남정네 들이 인간이야. 지나가는 곳마다 오해 받는 불행의 주인공은 너 말고도 많다는 걸 이제 알았겠지? 알았으면 후딱 비켜!" "난 이 지역의 센티넬. 보내줄 수 없어."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돌아온 말락의 차가운 말이었다. "너 지금 와서 그런다고 멋있어 보일 것 같아?" "이 곳에 들어온 이상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모두 죽어." 카넬리안의 말을 무시하며 쿨하고 샤프한 이미지로 돌아가려는 말락의 노력이 가상했다. 말락은 노력하고 있었다. "...너 의외로 뻔뻔한 놈이 잖아? 그러니까 악령이라고 불리지. 소심쟁이 악령 놈아." "날 악령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상대의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서 소금을 바르는 듯한 카넬리안의 빈정거 림은 쉽게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락은 흙과 모래로 이뤄진 몸의 형체가 희미해 질 정도 폭발하며 카넬리안을 향해 거대한 낫을 내리쳤고 주변의 이형 들도 일행을 덮치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 말귀를 못 알아 듣는...응?" 카넬리안의 바로 앞에서 낫의 섬뜩한 칼날이 멈춰 섰다. 그녀가 품 속에 서 레터가 주었던 목걸이를 꺼내 들이댄 것이다. 이형 들도 변덕스런 지휘 관 덕에 황급히 멈출 수 밖에 없었고 말락은 그 목걸이를 조용히 바라보았 다. "...이거 어디서 난 거지?" "이게 열쇠라고 하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말야. 네 놈에게 보여주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군." "이건 테시오스 님의 것이다." 말락의 말에 카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마 레터의 스승이 테시오스라는 자겠군. 그 분을 만나러 왔으니까 내 머리 위에 있는 낫 치우고 어서 안내 해!" 칼날 같은 박력이다 그녀는. "...확실히 가짜는 아닌 것 같군." "소심한데다가 의심도 많은 악령이로군." "악령 아니라니까!" "알았어! 너 악령 아니라고 치고 당장 안내 해! 안그러면 악령이란 단어 만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 줄테다!" 카넬리안의 엉뚱한 협박이었지만 말락에겐 통했나 보다. 아아 분명 악령 이라 놀림 받으며 굉장히 불운한 어린 시절은 보냈던 것이 분명 했다. 말 락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주변의 공기를 통해서. "...난 널 안내해 줄 의무 따윈 없어. 계속 걸어가면 테시오스 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야! 잠깐만!" 말락은 그 말과 함께 카넬리안에게 몹시 짜증어린 시선을 보내며 땅 속 으로 사라져 버렸다. 거의 그녀에게 들들 볶이는 것이 지겨워서 도망치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말락에게 줄리탄은 일말의 동정심을 느꼈다. "...아 가버렸네요?" 메르퀸트가 중얼 거렸다. "거 진짜 정신 없네. 뭐가 이리 뒤죽박죽이야." 시오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카넬리안과 함께 다니면 앞으로 이런 일 질리게 겪게 될 꺼야." "주인님. 그거 무슨 의미야!" "아무 것도 아니 올시다." 줄리탄은 한숨을 내쉬면서 아까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 여자의 존 재를 깨닳았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좀 놀란 얼굴로 줄리탄을 보 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대단하세요. 어떻게 말락을 상대로..." "아 뭐. 제가 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줄리탄은 카넬리안과 말락의 말싸움에는 조금도 끼어들지 않았고 끼어들 맘도 전혀 없었다. "도와주셔서 감사 합나다. 제 이름은 아이리스(eyeless). 앞으로 또 보게 될 꺼에요." "예? 아 저도 그러면 좋겠네요." 줄리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확실히 줄리탄에 비해 연상으로 보이는 20대의 얼굴이었고 소박하지만 청초해 보이는 미인임에 분명 했다. 좀 이상한 여자 였지만. 이름도 이상하고. "그럼 저는 이만..." "어? 저희가 가시는 곳 까지 지켜 드릴께요." 아니나 다를까 시오가 나섰다. 추파를 던진다기 보다는 이런 인적 없이 음침한데다가 자신이 악령 임을 부인하는 악령 까지 돌아다니는 숲 속을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제 동생 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가봐야 해요." 동생?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건가? 마당에 악령과 이형 들이 돌 아다니고 산짐승 하나 찾아 오지 않는 집이라. 호적 하다기 보다는...살벌 한 분위기가 아닌가. 그 집 사방에는 부적이 덕지 덕지 붙어 있고 나물이 라도 캐러 나갈 때는 성수로 샤워하고 나가야 하는...그런 곳 밖에는 도무 지 상상할 수가 없다. "정말 이 세계에 인구가 많아지긴 많아졌나 보다. 이런 곳에서 까지 기를 쓰고 살려는 사람이 생기는 걸 보니까." 카넬리안도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 거렸다. 2. 얼마 동안을 길이 아닌 길을 따라 전진 했을까. 카넬리안은 기묘한 기운에 사로 잡혔다. 분명 자연물의 일부분인 이 산기슭에선 자신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작위적인 냄새가 났던 것이다. 착각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 의 시선은 의구심에 머문 채로 계속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아 이런...미안해요." 라는 말을 메르퀸트가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훌륭한 가이 드 였던 메르퀸트가 이 단순해 보이는 산길에선 계속 길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헤매었던 것이다. 숲과 같이 호흡한다는 엘프로선 드문 일이었고 카 넬리안 역시 자신도 무언가에 반쯤 홀려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낮선 도시의 뒷골목을 걷고 있는 기분이야.' 줄리탄의 생각처럼 언제나 보던 나무와 풀, 바위, 흙...당연한 것 들이 멋 대가리 없게 배치되어 있을 뿐인데 - 분명 처음 보는 것 같은 낮선 기분에 휘말려 들었다. 아까부터 이상한 일만 생기는 것이...또 뭔가에 휘말려 든 것이 아닐까? 아무튼 말락이 말한 테시오스가 있는 곳이란 도무지 보일 생 각을 하지 않았다. 기묘한 불안감이 일행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며 커지 고 있을 때...형이상(形而上)의 미궁 같은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저기다!" 시오가 엄청나게 반가운 목소리로 외칠 정도로 일행은 지쳐 있었다. 밝은 빛무리 같은 숲의 끝. 마치 지하실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입구와 같다. 시오가 벌때에게 쫓기는 것 같은 괴이한 몸 동작으로 방정 맞게 그 곳으로 뛰어가며 괴성을 내지르는 바람에 카넬리안이 미간을 찡그리게 만 들었다. 하지만 그 '숲의 끝'에서 밖을 바라보며 시오는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는 것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라는 의문에 줄리탄이 의아한 표 정으로 달려갈 정도로 시오는 갑자기 석상처럼 몸이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분명 그가 보고 있는 어떠한 것 때문일 것이다. "야 시오! 왜 그러는...어..." 줄리탄도 시오가 보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옆의 석상이 되어 버렸다. 대체 뭐가 있는 것일까. 카넬리안과 메르퀸트 역시 그 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다행이도 카넬리안은 굳어 버리지는 않았다. 단지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며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 거릴 뿐이었다. "우리 또 이상한 곳에 와버린 것 같애." 그들의 눈 앞에는 이런 고산지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넓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왜...아니 어떻게 이런 곳에 도시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카넬리안 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 부조리한 도시에 대해서는 전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3.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이런 비상식적인 도시는 들어본 적도 없어! 우리 뭔가 주술에 걸려 있는 게 분명해! 지리적으로 이런 위치에는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있을 수가 없다고! 절대로!" 카넬리안은 도시 안에 들어가서도 시끄럽게 외치며 사방을 바라 보았다. 너무 당연하게 적잖은 사람 들이 흙이며 나무,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 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고 여기 저기서는 서로 대화도 나누고 있는 흔한 도 시의 모습이다. 문제는 그런 모습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분명 엄청나게 머리가 좋고 경험이 많아서 뛰어난 판단력과 설득 력 있는 예측을 할 수 있는 '재녀'임에 분명했지만 가끔씩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훌쩍 뛰어 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에서 물음 표가 사라지질 않는다. "식수는? 농작물은? 상거래는? 치안은? 이 많은 자재 들은? 어, 어떻게 이런 게 있을 수가 있어! 이런 곳엔 물도 별로 없다고!" 카넬리안은 마치 비현실성이라는 사기꾼의 멱살을 잡으며 항변하는 것 같 았다. 그녀의 말 대로 물이 없는 곳엔 사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이종 족 들도 큰 군집을 이루기가 힘들다. 이곳은 분명히 피크 산맥의 험준한 고 원지대. 이런 도시는 평야나 강 하구에나 어울리지...고원 지대에 뻔뻔하게 생길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시골 요리사 줄리탄에겐 그런 지 리적 조건이고 뭐고 전혀 실감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눈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물 아냐?" 줄리탄의 앞에선 꽤 폭이 넓은 물줄기가 얄밉게 흐르고 있었다. 카넬리안 은 멍하니 그 흐르는 물소리를 듣다가 중얼 거렸다. "...그렇네." "흐음. 뭐 살다보면 사정이 있어서 이런 곳에도 사람 들이 모이지 않을까. 세상엔 설명하지 못할 일 들도..." "아, 아냐! 그럴리가 없어!" 시오에 짐작에 대한 카넬리안의 강한 부정이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것도 설 득력이 없다면 일단 부정하고 보는 대단히 현실적인 여자다 그녀는. 카넬리 안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줄리탄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외쳤다. "주인님! 우리 어서 여기서 떠나자! 여기 뭔가 이상해! 우리 말야 지금 누구한테 속고 있는 게 분명해! 죽을지도 몰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라고!" "앨리스가...누구야." "그, 그런 게 있어! 그 여자도 토끼에게 속아서 죽었단 말야!" 그녀는 멋대로 루이스 캐롤의 위대한 업적을 엽기 공포물로 바꿔 놓으면 서 까지 줄리탄을 설득하려 들었다. 그녀의 거친 '설득'에 줄리탄의 어깨 가 아플 지경이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토끼에게 죽다니." "아니면 고양이! 이대로라면 잠시 후엔 티 파티가 있을지도 몰라! 체셔 고양이...제길.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거야." 카넬리안의 드문 패닉 상태. 그녀가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지는 처음 알았다. 줄리탄은 당분간 카넬리안에게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 싸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이 도시의 사람에게 걸어가서 말을 걸었다. 좀 독특한 어투를 가지고 있는 중년의 노점 상인이 었지만 다행이 언어의 장벽 없이 쉽게 말이 통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뭔가요?" "글쎄...잘 모르겠는데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야." "......" 줄리탄은 그의 대답에 순간 아이리스라는 여성도 이 도시에 살고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테시오스 라는 분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어디에 살고 계신지 알고 있으십니까?" 그 말에 그 턱에 수북한 수염이 나 있는 그 상인은 물끄럼하게 줄리탄을 올려다 보았다. 줄리탄이 예상하는 대답은 '모르겠는데 그런 이름은.'이 었다. "그 분 이라면..." 그 상인은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도시 중앙에 있는 비교적 높아 보이는 10여층 정도의 탑을 가리켰다. 이국적 양식의 수 많은 외면석주로 이루어 진 그 탑의 모습은 '여기 대단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간판이라도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저 혹시...테시오스 님이 뭘 하시는 분인지 알고 계신가요?" "항상 걱정하는 분이지." "걱정...이요?" '걱정'하는게 직업인 사람인가?...그런 직업이 있을리가 없잖아. 몹시 애 매모호한 답변이었지만 줄리탄은 그나마 '몰라. 뭐하는 사람인지.'라는 대 답이 안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일행에게 돌아왔다. 카넬리안은 지치 지도 않고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져 시끄럽게 고뇌하고 있었다. 4. "흐음...여기는..." 테시오스가 있다는 탑은 멀리서 보기엔 두껍고 곰팡내 나는 책 들과 마법 도구 같은 것 들만 잔뜩 쌓여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상아탑'이었는데 막 상 들어가 보니까 펑퍼짐한 옷을 입은 남자 들이 잔뜩 주저 앉아 자극적인 향을 풍기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곳이었다. "찻집인가..." 시오가 중얼 거렸다. 향나무 줄기를 태우는 것 같은 냄새가 사방에 놓여 있는 뜨거운 주전자 안에서 피어 올라 가득 차 있는 이곳에는 그늘을 찾아 온 것 같은 남자 들로 가득 했다. 별로 덥지도 않은 데 말야. 메르퀸트는 처음 보는 풍경과 향기에 당황하며 살며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카넬 리안의 모습은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 세이드를 상대할 때보다도 몇 배는 긴장한 모습으로 미스트랄까지 손에 쥐고 줄리탄의 뒤를 따르고 있는 그녀 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그렇게...싫은건가. "우우웅. 주인님...나 정말 싫어 여기." "너도 무서워 하는 게 다 있어? 정말 의외다." "나 같이 섬세한 여자에게 그런 말은 실례야!" "...섬세한 여자 맘에 상처 줘서 미안하게 되었수다." 줄리탄은 투덜거리며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 테시오스 님은 어디 계시죠?" 줄리탄은 작은 찻잔을 들고 있는 한 사람에게 질문 했고 옆 사람과 대화 를 나누던 그는 줄리탄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지하?' 5. 탑 중앙의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자 마자 일행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서늘하고 인적 없는 공기를 느꼈다. 그리고 말끔하고 반짝이는 돌바닥을 밟 는 발소리까지 울릴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지하의 주인 처럼 자리 잡고 있 었다. 모를 일이다...이질적인 몇 개의 세계가 이 도시에는 포개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 어쩌면 카넬리안의 말대로 이 모든게 꿈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차가운 공기를 분명히 뺨으로 느끼는 와 중에서도 가질 정도 였다. "...여긴 대체 무슨 용도로 쓰는 곳이야?" 시오가 투덜거릴 정도로 탑의 지하에는 '일상에 필요한 것'은 조금도 보이 지 않았다. 단지 뭔지 모를 기호가 잔뜩 음각으로 패어 있는 검푸른 석판 들만 줄창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환타지 다운 거...라고 어거지를 쓰며 말 할 수도 있지만 도무지 이런 곳은 사람 사는 곳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안.계.쎄.여.어!" 시오의 외침은 사방으로 울리며 되돌아 오는 바람에 바보 같이 스스로 깜 짝 놀라고 말았다. 이 정도면 주변에 작은 설치류의 숨소리 까지 들릴 정도 일 꺼다. 줄리탄은 대답이 없자 할 수 없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 넬리안은 가지 말라며 손가락으로 줄리탄의 옷을 잡아 당긴다. "...저기 있는 사람 아냐?" 조금 걸어가자 넓직한 석제 테이블이 보였고 그 위에 한 노인이 잠들어 있 었다. 보통 꽃밭 한가운데에 아름다운 공주가 잠 들어 있으면 어떤 설명이 없어도 그럴 듯하게 보일텐데...온통 깎아진 돌 따위로 이루어진 지하실의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노인이라...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도저 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혹시 이 사람이...테시오스 인가?" "...항상 걱정하는 사람이라던데?" "아주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별로 걱정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렇지?" 시오와 줄리탄이 서로 수근거리며 말했다. "깨울까?" "우리가 깨우면 되게 화를 낼 것 같은 분위기야." "그렇지?" "키스해 주면 일어날 것 같은데..." "끔찍한 농담은 사양 한다." 그 노인이 테시오스 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몸까지 뒤척이면서 몹 시 행복하게 잠자고 있는 것 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6. 줄리탄 일행이 건너 왔던 말락의 숲. 그곳을 두 청년이 달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훤칠한 모습의 한 명은 온 몸에 부상을 당해 피투 성이가 된 채로 정신을 잃어 다른 청년의 등에 업혀 있었다. "주인님. 이 숲을 빠져 나갈 때 까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씰의 이름은 호이젠. 호리호리한 몸이었지만 그의 말투나 한 사람을 업고 빠르게 뛸 수 있는 체력에서 분명 정신을 잃은 다른 청년 의 씰임을 알 수 있었다. 호이젠은 보통 사람이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속 력으로 숲을 뚫으며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뒤에선 예의 그 이형 들이 끔찍한 쇳소리를 내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한 때의 악마의 수하 같은 모습의 이형 들이 달려가는 곳마다 우직우직 거리며 나무며 돌 따위가 부 서져 버린다. "나는...괜찮으니까. 너라도 빨리 아버님께 돌아가서 알려. 다시 돌아올 때까지...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반쯤 정신을 차린 그는 작은 목소리로 호이젠의 귓가에 힘 없이 말했다. 이마며 귀를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중상 임을 알려 주었다. "주인님을 버리고 이젠그람 각하에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굳은 눈빛으로 앞 만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는 호이젠이 빠른 어투로 다댑 했다. "미안...이런 곳으로 사냥 오는 게 아니었는데." "주인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이곳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던 제 실수 입니다." 호이젠의 테이머는 키마인 이젠그람이라는 막 기사 작위를 받은 청년이었 다. 헤스팔콘의 정규군 총지휘관인 아취발드 이젠그람의 늦아들로 물론 기 사로서의 자질은 인정 받고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기사 키마인에게 보통 산짐승과는 차원이 다른 이형 들은 상대할 수 없는 난적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취발드를 따라 달라카트와의 국경선으로 내려와서 기분 전환 삼 아서 피크 산맥으로 사냥을 나선 것이었지만...헤이시 산에 위치한 말락의 숲으로 들어온 것이 실수 였다. 같이 사냥을 나선 종자와 부하 들은 이미 이형 들의 먹이가 되었고 겨우 남은 것은 걸을 수도 없는 부상을 입은 키마 인과 그의 씰 호이젠. 호이젠도 복부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로 봐서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 였지만 그는 죽을 힘을 다하며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 추거나 쓰러진다면 무서운 속도로 뒤쫓고 있는 이형 들의 밥이 될이 분명하 다. 호이젠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고 푸른 머리 칼을 휘날리며 계속 끝도 없는 숲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아앗!' 갑자기 호이젠은 눈 앞에 나타난 거대한 낫의 칼날이 자신의 목을 향하자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덕분에 균형을 잃고 땅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다가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호이젠이 자신의 주인 을 감싸며 보호하지 않았다면 키마인은 무방비로 멀리 굴러 떨어졌을 것이 다. 호이젠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오른 팔이 부러져 버린 것을 느꼈다. 욱신 거리는 통증이 온 몸을 감싼다. "주인님!" 호이젠은 검을 뽑으며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키마인의 곁 으로 간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낫에게 고 정되어 있었다. 반대 편에선 칠흙의 쇳덩어리 같은 다수의 이형 들이 악몽 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이제 도망칠 수도 없다. 주인님을 구할 방법이 없 을까? 그때 호이젠은 땅에 있는 흙과 모래의 입자 들이 휘몰아치며 떠 올 라 형체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씰로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처음 보 는 기현상이었다. "...뭐, 뭐지? 저건?" 어느새에 호이젠과 키마인을 둘러싼 이형 들은 가래가 끓는 것 같은 기이 한 소리를 내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 봤다 고 하더라도 심장이 뛸 정도로 무시무시한데 똑같이 기괴하다는 것을 빼면 서로 모습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모습을 묘사하자면 마치 거 대한 딱정벌레와 비슷한데 끔찍한 건 시커먼 철제 방패 같은 두 장의 날개 속에서 끈적이는 소리를 내는 수 많은 촉수 들이 벌레처럼 날개 밖으로 나 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는 것이다. 얼마전 카마인의 종자 중에 하나는 그 촉 수 들에 온몸이 뚫려 모든 채액이 빨려 죽어 버렸다. "나는 말락. 이 숲의 센티넬이다." 산발을 하고 있는 제멋대로의 검은 머리칼이 흙으로 이뤄진 말락은 호이젠 을 벌레보듯 내리깔며 주변의 공기를 웅웅 거려 그 음습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키마인 이젠그람 님의 씰, 호이젠 입니다. 말락 님의 영역에 감히 들어온 것은 절대로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길을 잃었을 뿐...그러니 부디 저희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이 곳에서 당장 나가겠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좀 예의가 있는 놈 들인 것 같군." 물론 줄리탄 일행을 두고 하는 말일꺼다. 호이젠은 그럼에도 경계를 늦추 지 않으면서 말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마 카넬리안이 옆에 있었다면 '저 놈보고 악령이라고 놀리면 흥분해서 미쳐버릴테니까 그때 도망쳐.'라고 속삭여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말락은 상처 입은 복부를 잡고 있는 호이젠 과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키마인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살려둘 수 없어." 말락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호이젠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고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이형 들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동시에 호이젠에게 달려 들었다. -Blind Talk 또 며칠걸려 올려 놓고...'이번엔 빨리 올렸지요?'라고 말하면 화내실 게 분명하겠죠.-_-a 그래도 간격은 좁혀졌습니다. 이번 편은 계속 부분 부분 장난을 치면서 나가는데가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쓰기 때문에 꽤 늘어집니다...그래도 가끔은 늘어지게 쓰는게 (저의)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니까 다음 편에서도 조금 만 더 늘어지겠습니다. 최근에...류승완감독인가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를 보았 습니다. 물론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이 생겼고 무엇보다 인디 영화에서 시 작한 것이라고 하니까 인디 영화 특유의 마이너한 매력을 느끼고 싶어서 였습니다. 결론은...솔직히 몇 몇 지면에서 리얼리즘이라 말하던데 그렇 게는 생각이 안들고...아주 멋진 느와르 영화를 봤다고 해야 할까나. 나 름대로 쓸쓸한 것을 참 좋아하기 때문에 보면서 푸근한 황망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욕과 폭력이 난무하므로 양아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 이라면 보고 화만 날테지만 그런 알레르기가 없는 분께는 추천. 그 외에도 영화는 꽤 좋아해서 많이 보고 있는데 멜로 영화만 아니라면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 부터 아주 마이너한 네크로맨틱 시리즈 까지 즐겁게 잡식을 하는 편 입니다. 특히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가 나 오는 영화라면 기를 쓰고 보려고 노력하는 편. 영화 HEAT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데 왜 사람 들은 하인리히 만의 작품 들을 좋아하면 대단히 품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고 마이클 만의 작품 들을 좋아하면 헐리우드 프 로페셔널리즘의 노예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건데.(그래도...롤랜드 에머리히는 싫습니다. :->) 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를 보면 엄청나게 싸우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그걸 보다가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네요. 아마 제 그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멋있게 '시비 걸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합 니다. 당골 카페가 있었는데...주인 아저씨와 굉장히 친해서 커피 하나 시켜 놓고 문 닫을 때 까지 친구와 수다 떨며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엄청나게 술에 취해서 카페에 술 마시러 온 아저씨 들이 들어 오더군요.-_-; 짜증나게 고함소리 내면서 술 가져오라고 소리 소리 지르자 결국 참지 못한 주인 아저씨가 나가라고 외쳤고 원패턴으로 시비가 붙었습니다. 상황을 재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정뱅이1 : "손님은 왕이야!" 주인 : "나가주세요!" 주정뱅이2 : "니가 뭔데 나가래! 손님은 왕이라니까! 어디서 소리를 쳐!" 주인 : "더 이상 영업 방해하면 경찰 부를 겁니다!" 주정뱅이1 : "우린 손님이야! 왕이라고!" 주인 : "이 사람 들이 정말!" 주정뱅이1,2 : "왕! 왕! 왕! 왕!" ...어지간히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개인적 친분도 있고 제 성격 자체가 짜증 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당당히 친구와 함께 일어서서 그 들을 끌 어 내려고 했지만 정말 질기게 왕왕 거리며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주 먹이 라도 날아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구석의 테이블에서 홀로 버드 와이저를 마시고 있던 의문의 사나이 께서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서시더군요. 모두가 그를 돌아보고 있을 때 그가 주정뱅이 들을 쏘아보며 차갑게 평생 기억에 남을 말을 하는 것이었 습니다. "너희들. 나도 손님인데...우리 왕끼리 한판 붙어 볼래?" 아아 잊혀지지 않는 그 싸늘한 박력. 승냥이 같은 주정뱅이 들은 완전히 눌려서 제게 잡혀 조용히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고 그 분은 상황이 진 정되자 다시 자리에 앉아 마시던 병맥주를 모두 비운 뒤에 조용히 사라졌 습니다.(물론 주인 아저씨께서 그 맥주를 서비스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 습니다.) 아마...지금까지 많은 시비가 붙어 봤고 싸움도 많았지만 그렇게 말펀치 한방으로 상황을 종료 시킨 멋진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무튼...이거 말하다 보니까 쓸데없이 잡담이 길어졌으니까 오늘은 여기 서 이만. 아...음. 도슨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언급한 것에는 큰 뜻 이 있어서가 아니니까(카넬리안이 앨리스를 알고 있는 건 당연하지만...) 별로 깊게 생각하지 말아주시길. 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었을 때 몹히 기괴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이나 레이 브래 드베리의 단편 들을 읽었을 때 같은...기분? Kheops의 Armenian Song을 들으며... (엄정화 나오는 보땅 도도 화장품 선전의 BGM...아아 얼마나 찾던 노래 던가.) 『SF & FANTASY (go SF)』 10884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0/03 20:53 읽음: 6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3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400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0-03 05:05 조회:296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당연하지 않나? 난 나의 신념으로 살아간다. 그러는 너는 남의 말 한마디에 네 생각을 쉽게 바꾸는 인생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상대의 말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니 인생이 그만큼 얄팍하기 때문이야. 그런 싸구려 같은 인생을 살면서 남의 인생에 뭐라고 훈수를 두는 꼴은 정말로 역겹지." 사성(死城) 볼사에 홀로 남아 있는 세이드는 자신의 검을 돌바닥에 깊에 박아 버린 채로 피에 물든 옥좌에 기대어 있었다. 나를 조롱 하기 위해 남아 있는 거야 너는? 알현실 이곳 저곳에 조각난 채로 부패하고 있는 시체 들은 원망과 광기의 악취 들을 뿜어내고 있었 고 - 난 알현실 전체에 가득차 찬 숨이 막히고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無言의 고통소리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세이드의 차가운 채 찍 같은 목소리가 가슴을 칼로 후벼파는 것 같다. 그는 나의 표정 을 감상하는 것 처럼 길게 머리를 가리는 금발 사이의 퀭한 파란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3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To the unknown man 1. "저 제발 좀 일어나시죠!" 십분 정도 떠들었을까.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테이블 위의 노인 덕에 일행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줄리탄도 한숨을 내쉬며 난 처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이런 곳까지 와서 정체 모를 할아버지 깨우려고 이 난리를 피고 있다니." "여자라면 모를까...짜증나네 정말." 시오도 끈질기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백발의 노인 때문에 자신이 바 보 같이 느껴질 정도. 전설의 명검을 뽑으려는 것도 아니고...이게 뭐하는 짓인지. 역시 이 상황에서 끼어든 것은 카넬리안이었다. "주인님. 내가 깨워 볼까?" 카넬리안은 아까부터 '이런 기분나쁜 곳은 잽싸게 빠져 나가는게 이익이 이라니까.'라는 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줄리탄의 뒤에 서 있었는데...그녀의 인내심이 가장 먼저 바닥 났나 보다. "깨울 수 있어?" 씨익.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불안하다. 그녀는 노인 앞으로 다가선 뒤 에 갑자기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잡은 것이다. "카, 카넬리안 지금 뭐 하는...우앗!" 으랏차! 카넬리안이 택한 방법은...테이블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돌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들리면서 거대한 석조 테이블은 거짓말 처럼 돌가루 를 뿌리면서 뒤집혔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노인네를 공중에서 두번 회전 시킨 뒤에 바닥을 구르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씰의 비상식적인 체력을 남용 한 '카넬리안식 즉효 잠 깨우기 비법'이라고나 할까. "어때 주인님. 시체도 깨울 정도로 효과적인 이 방법이? 씰은 정말 여러 모로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너 말야." 줄리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칭찬을 기다리고 있는 그 녀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앞으로...그녀가 깨우면 잽싸게 일어나는 것이 침대 채로 공중 회전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박력 넘치는 행동에 사색이 되어버린 시오가 중얼 거린다. "너 솔직히 말 해. 전 주인도 이런 식으로 죽인 거지! 그렇지!" "흥. 나약한 인간이 드디어 내 능력에 감동 받은 건가." 그녀는 정말...부담스러운 여자다. "아직...잠들어 있는데요." "......" 메르퀸트의 목소리. 정말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뇌진탕으로 죽지 않으 면 깨어나야 하는데 그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빨 까지 갈면서 계속 잠 들어 있었다. 카넬리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크윽! 이 노인데 보통내기가 아니잖아! 도전이라면 좋아! 허리뼈를 분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깨워주마!" 그녀의 자존심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한다. "저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메르퀸트가 뭔가 짐작하는 듯이 말 끝을 흐트렸다. 순간 일행의 뇌리를 스치는 불안한 상상. "설마..." "그, 그럴리가..." "어쩌면...씰인가. 이 노인." 모두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씰은 자신이 원하는 테 이머가 오기 전까지 절대로 잠에서 깨지 않는다. 그리고...늙은 씰이 존재 하지 말라는 규칙은 없다. "아하하하...그, 그럴리가." 카넬리안은 어색한 웃음 소리. 믿고 싶지 않아.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긴 뭐가 있어! 테이블 위에서 잠들어 있는 쭈글쭈글 노인네 씰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어 그런 건!" 그녀의 외침은 마치 씰의 대표로서 씰의 미학을 해치는 불손한 추측에 항 변하는 것 같았다. "씰이 이런 이상한 곳에 잠들어 있을 리가 없단 말야!" "너도 물고기 뱃속에서 잠들어 있었잖아." "물고기 뱃속이 어때서!" 생각해 보면 테이블 위 보다 물고기 뱃속이 더 이상한 장소가 아닐까? "흐음. 정말 씰인가...도무지 아까부터 이해 못할 일만 생기네 정말..." 시오는 그렇게 말하며 잠들어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전혀 아마릴리스와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지만. 그때. "누, 눈을 떴다!" 시오가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그 노인이 눈을 뜨며 부시시 일어난 것이다. 전혀 신비감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안 일어나던 그가 아무튼 눈을 뜨긴 떴다. "서, 설마! 정말 씰?" "음. 너희들은 누구지?" 그 노인은 부서진 테이블과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 정말 씰이 맞는 건가? 그럼 시오가 깨운 거야?" "쳇. 어쩔 수 없군. 귀엽진 않지만 좋든 싫든 내가 테이머가 되었으니까. 내 이름은 시오. 너의 테이머다." "...시오?" 쑥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시오를 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너의 이름은 말야...음...아마릴리스라고 하기엔 너무..." "내 이름은 테시오스다! 이 멍청아!" ...라는 외침과 함께 테시오스의 펀치가 시오의 얼굴에 직격 되었다. 나 가 떨어진 시오.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아주 건방진 젊은이로군! 다짜고짜 내 이름을 정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레터의 스승 테시오스와의 첫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2. "마르켈라이쥬.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말 입니까?" 가르바트의 여황제 우테 크룬세스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근처에 서 있는 북해 기사단의 프리셉터 마르켈라이쥬 혼을 올려다 보며 중얼 거리는 것이 었다. 20세도 되지 않은 그녀의 짙은 회색빛의 긴 머리칼을 내려다보는 혼 의 표정은 감출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차고 있는 검 의 길이 보다도 훨씬 작은 여황제. 선황의 유일한 핏줄로 황제에 자리에 오 르긴 했지만 - 지금까지 가르바트를 유지해 오던 황제의 권위와 외경을 우테 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 아이의 모습이다. "헤스팔콘 제국이 오펜바하 제1황제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들었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나라의 황제로서...나는 뭘 해야 하지?" 그녀는 그런 질문을 수도 없이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헤스팔콘의 하우 프트만 황제가 최근들어 가르바트에게 강완의 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어린 여황제가 즉위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인의 기질을 가진 북의 군사강 국 가르바트의 관료 들은 연약해 보이는 여황제인 우테를 진심으로 신임하 고 있는 상태도 아니다. 지금은 선황의 후광과 기사단장인 마르켈라이쥬의 충성으로 별 다른 일은 생기지 않고 있지만 -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이 '황 제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느끼고 있었다. "폐하. 제가 있던 부족의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무 깊은 생각은 행동을 익사 시킨다.' 일일이 사소한 것 까지 마음에 두신다면 가장 필요할 때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형적인 기사인 혼 다운 말이었다. "하지만...나...아니 짐이 실수 한다면 모두가 또 비웃어 버릴 게 분명하니까..." "외람된 말이오나 폐하...실수는 폐하가 실수라고 인정하기 전 까지는 실수가 아닙니다." "두려워. 그냥 아무 대안도 없이 두려움에 떨고 싶은데...그걸로 충분 했으면 좋겠는데...역시 황제는 그래서는 안되겠지?" 우테의 말투는 그냥 여자아이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혼 스스로도 황제 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이 반란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폐하...왜곡하진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두려움에 겁을 먹은 황제가 될 바에는 차라리 폭군이 되십시오." "폭군...그런 위험한 거 되고 싶지 않아. 아니 할 재능도 없어. 난 정말 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면 또 모두 비웃겠지. 정말 정말 수치스러운 황제라고. 남의 마음 따윈 알아주지도 않고 말야." "이 세상에는 죽을 힘으로 최선을 다해도 실패하는 일 들이 성공하는 일 들보다 더 많습니다." 혼의 말투가 좀 강경했기 때문에 우테는 움찔 했다. 몹시 추운 지역이어서 항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의 붉은 불빛이 우테의 창백한 뺨을 덮어 주고 있었다. "하기 싫어 몸부림 치면서 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폐하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혼자 있을 때 아무리 땅을 치며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더라도 절대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외면 하는 짓 만은 하시면 안됩니다. 누군가 그 자리를 도둑질해 간다면...폐하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사라져 버립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싫더라도 그 자리 는 누구도 아닌 폐하의 것. 부디 소중히 하시옵소서." "잔인한 말이네..." 우테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커다란 자신의 옥좌에 파뭍혀 버렸다. 3. "흐음. 레터가 보냈다고...으음...레터라면..." 테시오스는 일행 사이에 둘러 싸여서 자신의 제자 '레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능력은 장정 급이지만 역시 늙어서 기억력은 감퇴되어 버린 걸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제자인데 한번에 기억해 내지 못한다니. "레터가 대체 누구지?" 허탈. 결국 기억이 안난다 이건가. "이 양반이..." 카넬리안이 눈을 흘기며 테시오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 면 모른 척 하는 거야. "아 기억 났다!" "이제야!" "아아 정말 아름다운 금발 여성이었지. 100년 전이었던가..." "......" "응? 왜 그래?" 일동 경직. 혹시 테시오스는 무척이나 썰렁한 전직 코메디언이 아닐까. "...저 남잔데요. 게다가 100년 전의 사람이라면 저 같은 아들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가." "이봐요! 테시오스 할아버지! 좀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고요!" 카넬리안의 짜증 폭발. 대체 왜 이런 사람을 만나보라고 한 거야 레터씨는. "흥. 천년 묵은 씰에게 할아버지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처, 천년은 아니라고! 멋대로 남의 인생 늘리지 말아!" "뭐 아무튼...내 제자가 한 둘이 아니라서 말야. 생각해 보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내 제자지." 카넬리안 이상으로 뭔지 모를 소리를 남발하는데다가 대화도 전혀 진전 이 없는 상대였다. "아 그건 그렇고 너희들 왜 날 찾아 온거야?" "그건 아버지가 보냈으니까...아 참 여기 편지." 시오는 주머니에서 레터가 써 두었던 편지를 건내 주었고 테시오스는 묘하 게 얼굴을 찡그리며 그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갸웃 거 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거 정말 레터가 보낸 편지 맞냐?" "그런데요...?" 뭔가 불안해 진다. "이렇게 써 있는데?" 테시오스가 펼쳐보인 편지에는 깔끔한 글씨로 딱 한줄의 문장이 쓰여 있 었다. 그 문장을 읽어 나가던 줄리탄의 얼굴이 굳어 간다. "그 사람들...맘대로...하세요? 뭐, 뭐야 이거!" 줄리탄의 경악. 일행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 발로 인신매매 된 것이 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참해 지는 건가. "황당해서 말이 안나오네...우린 한시 빨리 달라카트로 내려가야 하는데 지금 장난 하는 거냐고!" 설마 레터가 그런 편지를 쓸 줄은.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다. "테시오스 님. 저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는데요." "...밥 달라고?" "아뇨 그거 말고요." 줄리탄이 갑자기 진지하게 질문하는 바람에 카넬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저...레터 씨에게 그렇게 강력한 마법을 전수해 주었을 정도라면 저도 뭔가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강해지고 싶습니다." "강.해.지.고.싶.다? 왜?" "그러니까 전 지키고 싶은 사람 들도 있고...그들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테시오스는 가만히 줄리탄을 보다가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눈이 안보이니?" "아뇨." "아니면 두 다리가 불편하니?" "예? 아, 아뇨." "그것도 아니면 정신박약아야?" "아닌데요." "그래? 그럼 사지 멀쩡하고 머리 잘 돌아가네." "그런 셈이죠...그리 똑똑하진 않지만." "그럼 됐잖아." "예?" 머엉...되긴 뭐가 되었다는 건가. "하지만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럼 니 말은 몸에 이상 없는 평범한 사람 들은 지키고 싶은 사람도 못지키고 방해만 된다는 거야?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강해져야지만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거야? 너 너무 세상을 편하게 살려는 거 아냐?" "그런 것은 아니고..." 줄리탄은 말을 흐릴 수 밖에 없었다. "뭐 나로선 째째하기 굴기 싫으니까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지만... 강해지면 된다 이거지? 얼마나 빨리?" "으음 그러니까..." 줄리탄은 잠시 생각을 했다. 달라카트로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카넬리안이 엄청나게 짜증을 부릴 테니까...그러니까... "한 일주일 정도에서 이주일 정도라면...괜찮을 것 같은데요?" "......" 안그래도 삭막한 지하실에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카넬리안의 줄리탄 을 향한 눈 빛은 '내 주인님의 유머 감각이 이렇게 출중한지 여태 몰랐네.' 였다. 테시오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담으며 줄리탄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 거렸다. "예?" "이리 좀 와봐." "아 예...으어억!" 또 다시 날아드는 테시오스의 매운맛 펀치. 줄리탄도 시오 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뺨을 어루 만지며 일어서는 줄리탄을 향해 테시오스는 한껏 숨을 들이킨 뒤에 지하실이 쩌렁 쩌렁 울릴 정도로 외치는 것이었다. "야 이 멍청아! 지금 일주일이라고 말했냐아! 여기가 무슨 속성 일주완성 펜글씨 학원인지 알아! 그게 가능하면 아무나 열 명 데려와서 후딱 가르 친 다음에 세계 정복하지 뭐하러 내가 이 구석에 있겠냐!" "뭐...별로 실력 없나 보네. 저렇게 떠느는 거 보니까." 카넬리안이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 거리자 테시오스는 카넬리안을 바라 보며 손가락을 까닥까닥 거렸다. 그녀는 상황 판단이 좋은 여자다. 그녀의 반응은 도리 도리 였다. "뭐 이런 놈 들이 다 있어. 갑자기 찾아와선 하나 밖에 없는 탁자를 부셔 놓질 않나, 일주일 만에 강해지고 싶어요...라는 세상에서 가장 허탈한 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다니! 그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할 짓이냐! 다 나가! 이런 젠장!" 테시오스는 '일주일 만에 강해지고 싶어요.'라는 부분을 줄리탄의 말투를 흉내내어 재현하는 열의까지 보이며 엄청 성질 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보통 '미안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는 메르퀸트의 전담 대사이다. 하지만 이때 만큼은 줄리탄이 가로채서 테시오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저는 마법에도 검에도 재능이 없고...할 줄 아는 건 어려서 부터 배운 요리 뿐인 평범한 청년 입니다. 우연히 과분한 씰의 테이머가 되어 여 행하던 중에...몇번이나 생명의 위기에 몰렸고 그 때마다 무력하게 지 켜볼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이대로는 앞으로도 아무 것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 서 너무 주제 넘게 강해지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 입니다. 제 말에 기분이 나쁘셨다면...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주인님! 이런 노인네에게 뭣하러 변명하고 있는 거야 정말!" "난 지금 변명하고 있는 게 아니야." 카넬리안의 투정에 줄리탄은 (드물게) 단호하게 말하며 테시오스의 눈 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평생을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만나왔던 기사 들을 조금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한 명이 덤벼도 이길 자신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흔하디 흔한 보통 인간입니다. 그런 제가 싫은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요리만 해도 충분한 인생이고...용기를 내서 피하지 않는 것 만으로 제 소중한 것 들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그 런 인생이라면...강한 힘 같은 것은 갖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 력하는 것 만으로 해볼 만한 인생이라면 무리해서 강한 힘을 얻는 것은 사 양하고 싶다. 그의 아버지의 말대로 '강한 힘이란 그 힘에 대한 책임도 같 이 따라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책임을 짊어지더라도, 그 책임 의 무게에 어깨가 부서지고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다리가 아파 오더라도 적어도 내 주변 사람 만은 지키고 싶었다. "흐음. 발버둥치고 있는 거로군 지금?" 테시오스는 그렇게 중얼 거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 "아아 정말 틈만 나면 심각해 지는 주인님이라니까. 나 정말 이상한 테이머 만났어. 그치?" 쓴웃음을 짓는 카넬리안의 말에 메르퀸트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줄리탄. 너 정말 멋진 남자로구나. 감동 받았다." 시오는 줄리탄의 손을 꽉 잡으며 감동의 도가니에 파묻힌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감동은...현실을 개선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일 다시 와." 테시오스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예?" "내일 여기로 다시 와. 일년도 아니라 일주일 내에 강해지는 건 때려 죽 여도 못하겠고 대신 줄 께 있으니까 다시와." "뭘...주신다는..." "그렇게 좋은 건 아냐. 어쩌면 네 목숨을 빼앗아 갈 수도 있는 거야." "제 목숨을...?" "그렇게 쉽게 강해지고 싶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 서로 공평한 거겠지? 뭐 오기 싫은 안와도 돼." "아뇨. 오겠습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마음대로..." 줄리탄을 보며 희죽 웃고 있는 테시오스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불안하다. 4. 결국 줄리탄 일행은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비현실적인 지하실에 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하아. 주인님. 강하다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거고 그렇게 무리해서 강해질 필요는 없...얼레?" 원형 계단을 타고 지하실에서 올라온 일행은 탑의 일층을 두리번 거리며 놀란 얼굴로 바뀌었다. 탑에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그 수 많은 사람 들이 한명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배우 들이 내려간 텅빈 무대를 보는 것 처럼 탑은 믿을 수 없이 고요 했다 탑의 내부는. "이 사람 들 다 어디 간 거야..." "그 테시오스라는 노인네...대충 정체가 짐작 되는데..." 카넬리안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붉은 눈동자로 탑을 돌아보며 중얼 거렸다. 그녀는 지하로 들어가기 전 그 사람 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주 빠르고 시끄러운 어조였기 때문에 그녀 만이 간신히 알아 들을 수 있을 정 도 였지만 분명 그들이 나누던 대화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복잡 한 상상에 빠져 있는 몽상가의 머리속을 들여다 보는 것 처럼...앞 뒤가 없는 단편 적이고 모호한 말 들을 그들은 계속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부상자 들이 도시에 들어 왔데!" "기사인 것 같다는데?" "숨이 붙어 있는게 기적이래." 갑자기 도시가 술렁이는 듯이 사람 들이 그런 말을 수근 거리고 있었고 일행은 사람 들이 모이고 있는 곳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붉게 젖 은 고원의 태양이 빠르게 산맥의 굴곡 들 사이로 숨어 들고 있었다. -Blind Talk 아아 머리 아파라. 최근 즐겨먹던 타이레놀500을 타이레놀 ER로 바꿔서 하루 4정씩 씹어 먹고 있을 만큼 편두통이 심합니다. 환절기에는 꼭 몸 이 안좋아 지는 징크스 같은게 있는데...이번 년도에도 유감없이 발휘 되는 군요. 글은 엉망 입니다. 몇번이나 수정했는데...오늘에야 올릴 용 기가 생겼을 정도로 최근 컨디션이 정말 영 아니어서 그만두고 싶을 만 큼 최근 생각이 겉돌고 있는 기분 입니다. 하는 일의 양이 많은 편이어 서(먹고 살자니까...) 드래곤 레이디에 큰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것 도 한숨이 나오는데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결국 이렇게 맘에 들지 않는 결과물이 나왔다는 것에 또 한숨이 나네요.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서 대사도 상황도 플롯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귀 찮을 뿐이라니 정말이지...그래도 곧 (언제나처럼) 기운이 날테니까 읽 어주시는 분들...조금만 참아주시고 절 따라와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최근...DC용 캡콤 VS SNK를 가끔 잡고 있습니다. 그나마 잘하는 격투 게임은 철권3와 사쇼3 뿐이었는데 이 게임은 좋아하게 될 것 같네요. 일단 기존 스파 시리즈 보다 조작이 숴워서. 그럼 쪽지를 통해 격려해 주신 분 들께 감사 드리며(아 좋은 소설 올리 시는 분까지 격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 다음 편 비축분은 다듬는대로 올리겠습니다. 꾸벅. e-mail : billiken@hananet.net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Toccata und Fuge d-moll BMV 565(맞나?)를 들으며... (별로 클래식 같은 것엔 문외한이지만 파이프 오르간 연주 만은 너무 멋 져서 관심을...) 『SF & FANTASY (go SF)』 10895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0/04 21:26 읽음: 30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4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407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0-04 04:23 조회:380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저 사람의 성격이 나쁜지 좋은지 추측하는 건 간단해. 성격이 나쁜 자 들은 똑같은 성격 끼리 모아 놓으면 서로 싸우고 성격이 좋은 자 들은 서로 모아 놓으면 서로 잘 먹고 잘 살지." 그녀의 명쾌한 궤변이었다. 생각해 보자...한 방에 카넬리안을 열다섯명 정도 모아 놓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무섭잖아 그런 건...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4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winter in my heart 1. "뭐야. 우리 말고도 이 도시에 온 사람 들이 있는 건가?" 일단 도시에 들어오면 기본적으로 도시에서 적용되고 있는 법이나 규율 등을 파악한 다음 여관 따위의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찾는게 순서인데 이 일행은 도시에 오자마자 지하실에 내려가서 테이블을 박살낸 다음에 노인네에게 주먹질을 당하고 이번에는 부상자 들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우리 여관이라도 잡아둬야 하는 거 아냐? 배고프고 피곤하다고." 줄리탄의 투정에 앞장서고 있는 카넬리안이 말했다. "여관은 나중에 잡아도 어디로 도망가지 않으니까... 난 지금 부상자 들이 누군지 보고 싶다고." "...다친 사람 봐서 뭐해. 그런 취미 있어? 악취미 잖아 그런 거." 그녀를 뒤따라가던 시오가 삐죽거렸다. "으이구. 그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이라면 물어보고 싶단 말야 이 도시를 알고 있는지. 외지 사람이라면 우리처럼 이 도시를 황당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지 금 그 부상자 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그렇게 말하며 일행은 웅성웅성 거리는 군중 들 사이에 도착 했다. "하지만...당장은 물어볼 상황이 아닌 것 같군." 부상자 들을 바라본 줄리탄이 중얼 거렸다. 두 청년이었다. 둘 다 극심한 부상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길고 푸른 머리 칼을 하고 있는 씰, 호이젠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 람 들에게 식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전...저는 키마인 이젠그람 님의 씰 호이젠 입니다. 주인님은 현재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제발 병원으로 옮겨 주신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부탁 드립니다...제발..." 단정했을 옷의 이곳저곳이 찢어져 있고 더 이상 흘러나올 피도 없을 정도로 온 몸에 성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호이젠 은 그 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사람 들은 서로 바라보며 수근 거렸다. 호이젠을 바라본 카넬리안의 눈이 커진다. "이럴수가! 너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줄리탄에게 미스트랄을 건내주고 사람들 을 밀치면서 호이젠의 앞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겠지? 이번에 내 이름은 카넬리안."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호이젠을 바라보며 눈가에 묻은 핏자욱을 닦아 주었다. "...당신은..." 호이젠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카넬리안을 올려 보았다. 어둑한 저녁 공기에서도 밝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내려보고 있었다. "저는 호이젠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깨어나셨군요..." 호이젠은 복잡한 표정을 삼키며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헤. 어쩌다보니까 바보처럼 또 깨어나게 됐어. ...그것보단 네 테이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제 불찰로...죄, 죄송, 으윽." 호이젠은 몸을 일으키다가 상처가 벌어진 배를 움켜 잡으며 카넬 리안 앞으로 쓰러 졌다.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 땀방울이 창백한 그의 얼굴을 타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쓰러지는 그를 잡았다. "제발 제 주인님을..." 카넬리안은 호이젠을 부축하려다가 쓰러져 있는 키마인의 찢어진 귀족 풍의 사냥복을 흘낏 보며 멈췄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진다. "저 테이머...누구지?" 카넬리안이 호이젠의 귀에 차갑게 속삭였다. "그, 그건..." "너 정도라면 헤스팔콘 상급 기사의 씰이 되었겠지? 말해. 저 테이머의 정체가 뭐야." "주인님을 해치지 말아 주세요." 호이젠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이 말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난 네 테이머가 누구냐고 물어봤어." "저 분은...헤스팔콘 제국의 기사, 키마인 이젠그람 님. 군 총사령관 아취발드 이젠그람 각하의 아들 입니다." 호이젠의 표정은 말락을 만났을 때 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 그 를 껴안듯이 부축하고 있는 카넬리안은 정신을 잃은 키마인을 쏘 아 보며 다시 속삭였다. "그럼...제국이 잡으려는 붉은 눈의 씰이 누군지도 알고 있겠군?" 카미인이 헤스팔콘의 기사라면 단번에 카넬리안이 수배령이 내려 있는 붉은 눈의 씰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부탁 입니다...저 분을 죽이지 말아 주세요." "이번의 니 주인은 부드러운 성격인가 보네. 니가 이런 성격이 되어 버린 것으로 봐선." 그녀의 목소리엔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저 두 명 갑자기 껴안고 뭐하고 있는 거야?" 멀리서 카넬리안과 호이젠을 바라보던 시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중 얼거렸지만 줄리탄은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비켜주세요."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군중 들 사이를 뚫으며 나타났다. 아이리 스 였다. 나무로 된 작은 상자를 들고 나타난 아이리스는 키마인 에게 다가가선 상자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투명한 액체를 키마인의 입에 흘려 넣는 것이었다. "아이리스..." 줄리탄이 그녀를 보며 중얼 거렸다. 2. 아이리스의 직업이 도시에서 유일한 치료사 라는 것은 꽤 긍정적인 우연이었다. 결국 키마인을 부축하며 이층으로 된 그녀의 하얀 집까 지 따라가게 된 줄리탄 일행은 키마인을 이층의 침대에 눕혀 응급 치료를 마친 뒤에 일층의 거실에서 다시 모였다. 차가운 차를 대접하 는 아이리스는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몸이 굳어 있어요?" 의아한 줄리탄이 묻자 그녀는 좀 깜짝 놀라며 헤헤 웃는 것이었다. "아, 사실 중환자를 치료해 본 건 처음이라서요. 여기에는 외부인도 거의 오지 않고 아직까지 큰 사고가 한번도 없 었어요. 조용한 도시라서." "그렇군요. 잠깐 그렇다는건..." "여관도 없다는 의미?" 시오의 추측은 맞아 떨어졌다.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정말로 여기는 세상에서 뚝 떨어진 독립된 지역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묵으실래요? 그래도 병원이니까 빈 침대는 많아요. 별로 편한 곳은 못되고 아이 들도 좀 시끄럽지만 괜찮으시다면..." 아이리스는 청초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예? 정말이요? 그래 주시면 저희가 고맙지요." "저희야 말로 드릴 돈도 없지만...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세요." "정말 감사 드립니다." 카넬리안을 제외한 일행이 한마디 씩 감사를 표했다. 줄리탄은 그 녀의 말에 감동 받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간만에 해보는 인간 다운 대화인가. 따뜻하고 온정이 넘치고...카넬리안과 다니다 보니까 정 상적인 것에 감사하는 버릇이 생긴 그 였다. 이해 못할 도시면 어 때. 이렇게 편한데. 그런데 그녀는 계속 굳은 표정으로 눈앞의 찻 잔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뭐라고 한마디라 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인데. 줄리탄이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 었다. "카넬리안 왜 그러는 거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죽여야 할까?" "......" 그녀가 계속 시선은 고정한 채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중얼 거리자 갑자기 방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이 모두 굳어 버렸다. 그녀는 정말 훈훈한 분위기 깨는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주, 죽이다니 누굴?" "아냐. 아무 것도." 호이젠은 키마인의 옆 자리에 누워 윗층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녀 는 천천히 윗층을 올려보며 말했다. "나 정말...미움 받는 여자 되고 싶지 않아." '왜 그러는 거야? 카넬리안?' 줄리탄은 걱정 스러운 눈빛으로 자조어린 표정의 카넬리안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쉽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는 성격이 아니라서 대 체 뭐가 문제인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것이 그녀의 괘씸 한 연극 같은게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가장 좋은 침대를 차지한 뒤에 목욕하러 사라졌을 그녀 였다. "엄마! 갔다 왔어!" 엄마? 두 명의 사내 아이와 한 명의 여자 아이가 방에 뛰어 들어 오며 외쳤다. 설마 아무 집에나 뛰어 드는 실성한 애 들은 아닐테 고...'엄마'라면 아이리스? 시오가 허망하게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동안이시네요." "예? 전 아직 열아홉살 인데요." 아이리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 온다. "..." 아이리스는 수줍게 웃었다. 젊다는 건 좋은데 말야... 대충 계산해 보자. 저 아이 들이 한번에 낳은 세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일곱살은 넘은 것 같은데 그럼 열두살 때 낳았다는 것인가? 인체 구조상 가능 하긴 한 건가...혹시 인간과 매우 흡사한 고양이과가 아닐까 아이리 스는? 시오는 갑자기 그녀의 남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았다. "와! 이 분 들 누구야! 단체 환자야?" 이렇게 건장한 환자가 있을리가 없잖냐...라고 줄리탄이 조그맣게 중얼 거렸다. 그때 작은 소녀가 뭔가에 홀린 듯이 메르퀸트를 바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응? 왜 그러니?" 메르퀸트가 방긋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아이를 좋 아하는 엘프다 정말. "와! 언니, 정말 예뻐요! 그런데 이상한 눈동자야." 엘프의 초록색 눈동자란 인간과 매우 흡사하지만 풀냄새가 나는 것 처럼 기묘하게 인간과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쉽게 감정이 들어 나는 눈동자라고나 할까. 메르퀸트는 '난 남자에요!'라는 차가운 현 실을 알려 주며 아이 들의 꿈을 깨는 짓은 하지 않은 채 그냥 쓴웃음 을 지을 뿐이었다. 다른 아이는 카넬리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정말 아이들이란 신기한 것은 가서 만져봐서 '느끼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작은 생물 들이다. "이 누나도 눈이 이상해. 이렇게 빨간 눈은 처음 봐." 그녀는 아이에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계속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아이 들은 카넬리안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것이었다. "누나. 혹시 눈이 충혈되서 온 거야? 약 줄까?" 그녀는 그래도 침묵이다. "우리 집에 잠시 묵기로 한 손님 들이셔. 그런 말 하면 안돼." "그래도 아파하는 것 같은데..." 환자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몸이 아픈 분 들은 윗층에 계시니까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아라." "예에에."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아이 들의 관심 밖에 외면 당하고 있는 줄리탄과 시오는 뭔지 모를 소외감에 쓸쓸해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카넬 리안의 검고 긴 머리칼을 잡아 당기는 사건을 저질렀다. "에잇!" "아얏!" 미스트랄을 안은 채 우울한 상념 속에 익사할 것 같은 모습의 카넬리 안의 입에서 아픈 소리가 나왔다. 불안한 일행. 아이를 전혀 좋아할 것 같지 않는 카넬리안이 무슨 짓을 해서 아이를 공포 분위기에 몰아 넣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 그녀가 성질내면 운좋게 찾은 잠자리에서 쫓겨날 지도 몰라. 그녀는 아픈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기를 올려보고 있는 사내 아이를 내려 보았다. '뭐야? 이 녀석은?' 이라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 "얘! 무슨 짓이야. 그러면 못써!" "하지만 너무 심각한 모습 이잖아. 엄마도 심각한 생각만 하고 다니면 병에 걸린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거야." 커서 정신과 의사를 해도 걱정 없을 대단한 꼬마였다. 그녀는 무표 정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꼬마야. 너 만약에 숲속을 지나가다가 잠들어 있는 무시무시한 맹수를 만나면 어떻게 할래? 그냥 놔두면 되는데 괜히 가서 머리를 잡아 당긴다던지 하면 엄청나게 화가 나서 널 잡아 먹어 버리거든? 아주 자기 밖에 모르고 용서 없는 맹수야." "으음..." 어린 아이에게 저런 말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라며 시오가 줄리 탄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줄리탄은 살짝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씁쓸 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자기 밖에 모르고 용서 없는 맹수 라고? "그럼 친구 들하고 힘을 합쳐 잡을 꺼야!"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면 장군을 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이 꼬마는. "용감한 꼬마네. 하지만 그 맹수...너무 바보라서 언제나처럼 상대가 강하면 울음을 터트릴 꺼야...그때 죽이렴. 아니면 방심하는 사이에 널 죽일 지도 몰라 분명히. 그러니까 꼭 죽여. 맹수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줄리탄은 갑자기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반지 같은 쓸쓸한 감정의 파편에 가슴이 찔린 것 같았다. 입을 막은 채 쏟아내는 울음 소리가 그의 손가락 끝을 타고 심장을, 혈관을, 마음을 태워버리는 것 같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카넬리안? "아니면 먹을 걸 줄꺼야! 잠들어 있었다며? 분명히 일어나면 배가 고플테니까. 엄마가 그러는데 배가 부르면 마음도 편해진데. 맛있게 먹으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카넬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검고 둥근 아이의 눈동자를 바 라보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맹수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단다...하지만 고마워."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절대로 거칠어 지지 않는 고 운 손으로 아이의 뺨을 어루 만질 뿐이었다. 그리곤 줄리탄을 바라보 며 예의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주인님. 우리 식사하자. 나...오랜만에 배가 고파 졌거든?" 가끔 무엇보다 튼튼하고 고집불통이라고 여겨지는 그녀의 감정은 너무 섬세하고 여리고 가늘어서 금방 부셔저 버릴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그녀는 항시 마음의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짙은 화장을 하지 않고는 누구도 만날 수 없는 불치병의 소녀일지도 모른다. '너는 그렇게 강한 척을 해도 실은 옆에서 욕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외로워 죽어버릴 화초 같애. 하지만 나는 말야...치료해 주고 싶어. 너는 또 '무리에요. 주인님.'이라고 말하며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 겠지만 나는 끝까지 널 쫓아가서 같이 살아 남자고 외칠꺼야. -Blind Talk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젼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자극없이는 죽고 말겁니다. 이런 시대에 문득 편지를 쓰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남에게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싸우는 것과 상처받는 것은 거부하지만, 멋대가리없는 위로에는 눈물 글썽글썽... 가슴 가득히 시대의 바람을 들이마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도시의 공기도 감지덕지 했었습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미숙한 내 자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어른이 어린 자식놈에게 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얻은 자유를 의심하진 않고 모르는, 모르는 새에 눈물 글썽글썽... 예쁜 여자한테 다정하게 행동하는 내 자신을 느낍니다. 좋은 붙임성과 실없는 농담으로 그런 경우를 무마합니다. 오늘밤 침대에 끌어다 눕힐 상대에게 목표를 정하지만 속셈을 눈치채진 않을까하고 신경이 쓰여 한 잔 합니다. 아름다운 여자, 유쾌한 남자. 사람은 모두 봄과는 모순되게 눈물 글썽글썽... 인간사이에 깊은 관계를 맺어봐도 별 시원챦습니다. 서툴러서, 오해받거나 배반당하는 등의 소질조차 없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붙이기도, 떼기도 어려운 편이 좋습니다. 그럴 땐 대세의 무리에 뒤섞여 행복을 잡고 싶습니다. 걸음이 느린 사람을 흘끗 보고 치고 나가니, 친구는 울며 웃으며 글썽글썽... [바람피울려면 들키지 않게나 하세요]라고 빈정대는 아내는 요즘들어 귀가시간이 늦어졌다고 염려하는 척을 합니다. 만원전철의 흠뻑 젖은 창으로 우리집 지붕을 바라보며 오늘밤을 위해서 어젯밤과는 다른 핑계를 찾아봅니다. 아무도 모르는, 있을 곳이 필요하긴 한데... 사랑을 축 늘어뜨리곤 눈물 글썽글썽... 정에 따라움직이면 무기력한 태도라고 옆에서들 힐난하며, [복창터진다]라는 둥 [괴짜다]라고, 아아 다들 피해버리는군요. 고개를 숙이면 그 순간은 어떻게든 피해보겠지만 보고도 못본 척 하려니 내 자신이 웬지 비참해져옵니다. 타인의 시선과 스스로의 평가에 갈팡질팡하려니... 이 봄은 버들잎만 한들한들... 어머니, 당신이 들려주시던 옛날 노래가 그립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에서 본 것은, 시대의 흐름뿐, 다음 세기에도 인간의 마음은 허무하기 쉽겠죠. 이런 아시아의 한 구석탱이같은데 집착하면서 [이제 세계로 발돋움 해볼까]란 소린 하지 않지만 [그냥 울게만 해줘]라고는 글썽글썽... 꿈을 버리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글썽... 추욱 늘어졌습니다. 아주 추우욱. 할 말은 많지만 유행가의 가사 하나 로 대신하고 반쯤 남은 찻잔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이번엔 일기 같은...한 편이었습니다. 참 쓸쓸해서 좋은 가사입니다 제겐. 그건 그렇고...최근 치매에 걸렸는지 자꾸 기본 설정에 어긋나는 부분 이 나타나서 걱정. 조만간 손을 봐야 겠네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Ranum의 Photograph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09593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0/12 15:48 읽음:12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5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441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0-12 08:43 조회:220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얼마나 해메었을까. 밟히는 것은 오직 모래와 자갈의 치근덕 거리는 소리 뿐. 나는 지상이 아닌 곳의 영토를 밟으며 열사의 잔혹한 태양 빛 속에서 내 몸의 모든 추억까지 증발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티브 사막을 이렇게 해메는 것은 내가 태어나 두번째지. 아무도 살 아 돌아올 수 없다는 이 곳에 바보 같이 제발로 들어가서 - 존재하지 않을 이 곳의 누군가를 잡고 그냥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압사해 버 렸다. 싫은 일에, 슬픈 일에, 화가 나는 일에 금방 터져 버릴 것 같 은 나의 새가슴이 아직까지 잘도 살아 남아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랍 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 그냥 지금에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 그때 그녀를 더 세게 껴안아 주지 않았을까...하는 후회 뿐. "줄리탄씨?" 상처 입은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올려다 본 오후 사막에는 모래 폭풍을 배경처럼 하고 있는 그녀의 빨간 눈동자가 날 내려보고 있었 다. 죽어가는 내 상념의 환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5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S.H.I.N.I.N.G. 1. 식사를 마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카넬리안은 간단한 목욕을 마친 뒤에 아이리스에게 편한 잠옷을 빌려 갈아 입고 침대에 올라가 조용 히 잠들어 버렸다. "카넬리안? 정말 자는 거야?" 거짓말처럼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잠들어 있을 때의 모 습은 정말 귀여워. 새끼 고양이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몸을 조금 웅크 리고 있는 그녀의 잠든 모습을 줄리탄은 지금까지 딱 세 번 봤다. 처 음 그녀를 만났을 때 한 번, 벨레시마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그녀 는 싫은 일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잠드는 걸까? 사람 들이 술을 마시 는 것 처럼? 꿈을 꾼다면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아무튼 그녀는 오 늘 정말 인간 같았다. 오랜 만에 밥을 먹고 잠도 자고. '이러다가 또 며칠 동안 일어나지 않는 거 아냐...' 카넬리안의 무지막지한 수면량을 익히 경험한 바 있는 줄리탄이 갑 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릴 때 아이리스가 다가 왔다. 회색 천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몸이 가느다랗다. 그녀는 이층의 키마인과 호이젠을 돌보고 내려오는 길인지 두 손에 피묻은 천과 붕대를 들고 있었다. "...안자요? 이 도시는 밤엔 별로 볼 게 없는 곳이에요. 낮에도 그렇지만..." "아 이제 곧 자려고..." 메르퀸트도 시오도 잠들어 있는 사실 꽤 늦은 밤이다. 평소 같으면 잠들어 있어야 하지만 줄리탄은 계속 '나한테 말 걸지마.'라는 표정 으로 시무룩해져 있는 카넬리안 때문에 걱정하다가 잠잘 시간을 놓 친 것이었는데 한번 놓치니까 도무지 침대에 오를 생각이 들지 않았 다. 그렇게 피곤했는데 말야.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차 한잔 드실래요?" 줄리탄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2. "아...고마워요." 그녀는 검소한 찻잔에 낮의 그 차가운 차를 담아 왔다. 고원이라서 그런지 좀 쌀쌀한 밤인데 이럴 때 마시는 차가운 기분이란 묘하게 어울려 정신을 맑게 만든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찻잔을 낡은 테이블 에 놓은 뒤에 자리에 앉았다. 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밤과 어울린 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한 이 곳은 일상성이 외면한 듯한 공간. 줄리탄은 묘한 긴장감에 후루륵 거리며 차를 들이키는 자신의 소리에 놀라 버렸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신 건가요?" "달라카트로 내려가던 중에 들렸어요..." "달라카트? 그곳엔 무슨 일로..." 라는 말 들로 시동을 걸은 둘의 대화는 꽤 길게 이어 졌다. 조금씩 마음이 편해진 줄리탄은 그녀에게 자신이 근간 얼마 동안 겪어 왔던 일 들을 풀어 놓았고 그녀는 보통 들어 주는 쪽이었다. 궁금했지만 그녀는 자신에 대해선 별 말이 없다. 마치 과거가 없거나 기억이 나 질 않는 것 처럼. 그럼에도 줄리탄의 말에는 꽤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었다. "...아직까진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그냥 '될데로 되겠지.'라고 마음을 놓기에는 전 너무 멍청할 정도로 진지한 녀석이라서요." 차 두잔을 비웠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났다. 줄리탄은 멋적은 표정으 로 말을 끝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진지해 질 거에요. 자신에 대해. 차...더 드시겠어요?" "아, 예. 저 그런데..." "예?" 예쁘게 칠이 되어 있는 작은 토기 주전자를 들어 줄리탄의 찻잔에 진녹빛의 차를 부어 주고 있던 아이리스가 소종이 청명하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줄리탄을 바라 보았다. 정말 밤에 어울리는 여 자다. "아이 들은 어디로 간거죠? 저녁을 먹은 다음 부턴 보이질 않네요." 처음엔 어딜 놀러 나간 거겠지...하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 들은 결 국 나타나질 않았던 것이다. 아이리스의 자식 들이라고 했잖아? "밤엔 사라져요." "아 그렇...예에?" 줄리탄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당연 하게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 밤엔 사라진다니...뭐야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은. 돌려서 말하는 건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사라지거든요." 말 그대로 였다. 그녀는 두손으로 찻잔을 든 상태로 줄리탄의 화들 짝하는 태도가 도리어 놀랍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다른 집에서 자나요? 그 아이 들?" "아뇨. 사라져요." "..." 사라진다? 연기처럼? "이상한가요?" "...이상하네요." 당연히 이상하다. 갑자기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카넬리안 말대 로 이 도시가 뭔가 앞 뒤가 맞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 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더 무섭다. 누가 그랬지? 외눈박이 마을에선 눈이 두개인 사람이 비정상이라고. "그럼 아이리스씨의 남편은요? 그 분도 사라졌나요?" 뭔가 또 정상적이지 않은 대화가 오가는 것 같다. "제...남편?" "예." "글쎄요,.." 아이리스는 '왜 그 생각을 못했지.'라는 상황에 걸맞지 않은 표정으 로 손가락을 살짝 입에 가져다대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하는 것이었다 .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남편이란 애써 생각해야만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 없는 사람 이 아니다 보통은... "그, 그럼 아이는 어떻게...양자?" "아뇨. 제가 낳은 아이 들이에요." 당당하다. 이 여자는 전혀 알라바이에 성립되지 않음에도 놀랍도록 당당했다. "무성생식...하셨어요?" 할 말을 잃은 줄리탄. "제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진담인가요?" "음...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아이리스는 뭔가 줄리탄을 설득할 방법을 찾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정리해 보면 아이리스는 무성생식으로 밤만 되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일리가 없잖아! 그냥 지금 카넬리안을 깨워서 여기서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식은땀과 함께 줄리탄의 목언저리를 돌았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줄리탄의 손을 살짝 잡았다. 흠찟 놀란 줄리탄. "따뜻하죠? 제 손?" "예? 예?"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사람 손을 덥석 잡고. "살아있어요." "누, 누가요?" "당신 들이 절 이상하게 보실 줄 알지만 그래도 전 살아 있어요. 제가 당신 들의 판단 기준점에서 한참 벗어났다는 것 알아요. 그래도 전 분명히 살아 있어요. 당신도 제 온기가 느껴지죠?" "그, 그렇죠." "줄리탄씨. 전 허상이 아니에요. 별로 재미 있게 사는 여자는 되지 못하지만...존재하는 척하고 있는 허상은 아니에요." 그녀는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줄리탄은 진심으로 말도 안되는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인간이고 싶은 것일까? 그냥 존재하고 싶은 것일까? "누구도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어려운 말을 하면서 아이리스가 방긋 웃었다. 줄리탄은 짧은 시간 동안 그 말을 이해하려다 포기 했다. "줄리탄씨는 당신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지요? 아주 실감나는 허상일 수도 있잖아요." "별로...그런 생각은..." "그냥 믿을 뿐 입니다. 나는 굳게 존재하고 있다고. 당신이 절 허상이라고 생각해도 전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혹은 정말로 제가 허상이라 하더라도...상관 없어요. 전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니까. 아직 헛점 투성이지만." 헛점 투성이? 그녀는 줄리탄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픈 과거라도 억지 로 끄집어 내는 무뢰한의 짓거리 같아 그만 두었고 그녀는 곧 테이블을 치웠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3. "와아! 엄마 배고파요!" 라면서...줄리탄 일행이 앉아 있는 아침 식탁에 약속처럼 두 명의 사내 아이와 한 명의 소녀가 찾아 왔다. 분명 뜨거운 김 이 올라오는 진한 갈색의 스튜와 거친 빵조각이 놓여 있는 평 범한 도시의 평범한 아침에 어울리는 평민의 식탁이다. "저 아이들...밤이면 사라진데." "뭐?" "아, 아냐. 아무 것도." 줄리탄의 중얼거림에 시오가 포크를 입으로 빨고 있다가 황당 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친구가 갑자기 실성했나. 아이 들 은 따로 마련된 낮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 아이리스가 이층에서 내려오며 아이 들을 둘러보고 미소 지 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아이리스의 손에는 둥근 찬합이 들려 있었다. 키마인과 호이젠 에게 환자식을 올려다 주었나 보다. 호이젠은 이제 정신이 든 상태 였지만 키마인의 부상은 그보다 심각하여 아직도 혼수 상 태. 호이젠은 키마인을 간호하며 단 한번도 일층으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반쯤 졸리운 눈의 카넬리안은 기계적 손놀림으로 자신의 빵을 계속 잘게 찢고 있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을 때 의 반응이다. "너 카넬리안하고 싸웠냐?" 그녀가 풍기는 뭔지 모를 긴장감에 당황한 시오가 줄리탄의 귀 에 속삭였다. 좀 삐죽거리며 대답하는 줄리탄. "나하고 싸운 것 정도로는 조금도 상처 받지 않을 여자라서..." "주인님?" "응?"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나가 더 이상 잡을 구석도 없을 정도로 빵 을 유린한 카넬리안이 손을 털며 줄리탄에게 대뜸 묻는 것이었다 . 속을 알 수가 없는 여자지만 어제처럼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테시오스라는 노인네, 만나러 가야 하지?" "그렇지." "갈꺼야?" "가야지." "난 여기 남아 있을께. 도시도 좀 둘러봐야 하고." "왜에. 같이 가자." "싫어." "왜?" 카넬리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빵조각을 입에 넣었다. 왠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듣한 아침 분위기다. 줄리탄은 잔뜩 심술이 난 표정으로 볼을 잔뜩 부풀어 올렸다. 반격의 시작이다. "너...씰이라면 조금 쯤은 테이머 말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아 글쎄 싫다니까요! 주.인.님." 그녀는 줄리탄이 갑자기 질기게 나오자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테이머로서 명령한다! 같이 가자!" "저언혀 공명이 안되는데요 주인님? 좀 더 절실하게 말해보시죠." 그녀가 얄미운 웃음을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보통 테이 머의 말에는 씰에 대한 공명이 실려 있지만 무지한 시골요리사 줄 리탄은 그걸 할 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단 말야! "왜 그렇게 반항이야! 너! 날 지켜줘야 하는 거 아냐? 부탁할테까 같이 가자." "부탁이라면 좀 더 간곡하게 해 주세요. 테이머시여." 그녀는 가련한 말투까지 쓰면서 줄리탄을 놀려 먹었다. "부탁...합니다. 저와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싫습니다." 그녀는 아주 다소곳한 모습으로 정중한 어투를 쓰며 얄밉게 웃었 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 젤리드가 봤다면 땅을 구르며 웃었을 것이다. 덕분에 메르퀸트까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너 평소에 이렇게 사냐."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은데..." 시오가 몹시도 한심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건 왜 이렇게 자신의 씰에게 지지리도 못나게 휘둘리면서 웃음을 띈 표정이냐는 것이다. "어 맹수 누나다." "아! 어제 그 용감한 꼬마로군." 예의 꼬마가 식사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카넬리안에게 또 다시 관심 이다. 카넬리안은 몸을 조금 피하며 꼬마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숨 기려는 시늉을 보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싱글 거리면서 줄리탄을 놀 려먹는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언니. 오늘 우리하고 놀아줘요." 메르퀸트의 아름답고 중성적이고 이국적인 모습에 홀딱 반해 버린 듯한 소녀는 거의 애원하는 얼굴로 메르퀸트에게 다가가서 말하는 것이 었다. 메르퀸트도 무척이나 기뻐한다. 역시...아이를 좋아한 다. "저 줄리탄씨. 저도 아이 들과 함께 남아 있을께요." "메르퀸트 까지!" "걱정하지마 줄리탄. 난 함께 갈 테니까." 시오가 든든한 표정으로 줄리탄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줄리탄은 한 숨만 나왔다. "인기 없는 남자 둘이서 잘 해보세요." 카넬리안은 다시 식욕이 생겼는지 국자에 스튜를 담으며 혼잣말처 럼 중얼 거렸다. -Blind Talk 방황하고 있다가 일에 쫓겨서 솔직히 하루 정도 드래곤 레이디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습니다. 그러다가 메일 들을 받았습니다. 왜 안올리냐는... 한동안 그 메일의 문자 들을 마치 큐비즘풍 그 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다가 외쳤습니다. "아 맞아 올려야지!" 그래서 정신 차리고 다시 올립니다. :-) 아주 기쁩니다. 이런 게으른 글이 여기 저기 통신망에 올라가서 예상보다 훠월씬 많은 분 들이 읽어주고 있다는게...구차하게 조 회수 합계를 내 봤더니 최근 평균 1000을 조금 넘네요. 아아 그렇 다면 (끝까지 읽은 분이 몇인지는 몰라도) 1000명이 읽어주는 것 아닌가? 아주 만족한 분 들은 별로 없겠지만서도...그래도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살아있길 잘했다.'라는 감동에 빠지곤 합니다. 카프카의 방패 뒤에 숨어서 말하자면 묘노(墓奴)가 된 기분으로 밤을 어슬렁 거리며 글을 다듬고 있습니다. 그렇듯 전 사실...굳이 강박적인 것을 선호하고 있는 편 입니다. 남을 웃길 수는 있어도 웃는데는 재능 없는 '멍청할 정도로 진지한' 사람이라서. 아이리스 의 말대로 '으아아 CIA가 내 머리속에 도청칩을 장치했다!!'라고 외치면서 정체성 상실의 기우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드래곤 레이디의 많은 캐릭터 들은 거의 서로 다른 방법으 로 하나의 걱정거리를 고민하고 있는 편 입니다. 세상 속에서 자 신을 계속 주장하고 믿지 않으면 자신의 '캐릭터'는 사라져 버린 다는 것. 결국 그래봐야 이 소설 저 소설, 이 만화 저 만화에서 이미 보여줄데로 보여준 진부한 것 들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름 대로 편하게 말하려는 생각을 잊지 않아서...진부해도 my pace로 밀고 나갑니다. <흘려듣는 캐릭터 profile> Entry#1 카넬리안(Carnelian) 1.별명 : DRAGON LADY (...라고는 하지만 스스로는 '비운의 여주인공'이라고 부른다.) 2.성격을 딱 한 단어로 말하면? :UNKNOWN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3.좋아하는 노래는? :엔야, 사라 브라이트만, 기타로, 소지로, 반젤리스, 장 미셀 쟈르 등 등 의 스코틀랜드 적이고 뉴에이지적이고 프로그레시브틱한 경음악 들과 올드팝 들. (이라고는 말하지만 실은 송대관의 '인생은 생방송'을 무척 좋아한다.) 4.백스토리에 대해서 :가슴 아프니까 묻지마! (그냥 꽤 긴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sf연애물 정도가 아닐까...당사자는 신경쓰이겠지만.) 5.주량은? :전혀 못마셔요. (라고는 말해도 성질나면 안주 없이 깡소주 나발 분다.) 6.취미는? :식사와 수면. 질리지도 않고 먼산 보기. (의외로 재미 없는 여자다.) 7.컴플렉스는? :'인간'이라고 부르면 돌아 버린다. 먹이주지 말 것. (실은 자신의 키가 다른 씰 들에 비해 작다는 것에 무척 속상해 하고 있다. 몇백년이 지나도 키가 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최근이다.) 8.아직까지 풀지 못한 문제는? :뉴컴(newcomb)의 패러독스. (...라며 고상한 척하지만 그녀는 수학과 물리에 대단히 약하다.) 9.자신의 테이머에 대해 한마디? :이런 테이머를 만났다는 것은 씰의 인생에선 유니크 하니까 일단은 줄리탄 씨를 인정한다. (라고는 해도 속으로는 줄리탄이 가난하다는 사실에 치를 떨고 있다.) 10.소중한 물건 세가지 :대장간에 갈 필요 없이 평생 보증되는 자신의 검 미스트랄. 지금은 사라진 낡은 사진 하나(누구하고 찍은 건데?) 현재의 테이머 줄리탄. (그렇다. 그녀는 줄리탄을 물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입니다. 10문10답 식의 멋대로 profile은 생각 날 때마다 재미삼아 한 명씩 올리겠습니다. 별로...참고할 내용은 되지 못하니까 그냥 심심하면 읽어 주시길. e-mail : billiken@hananet.net beastie boys의 body movin'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1128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6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01 19:50 읽음: 4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6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541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01 04:07 조회:383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난 아직 다 보여주지 않았어! 이게 내 전부가 아니란 말야! 라고 아무리 외쳐도 정해진 시간이 끝나서 막이 내리면 좋든 싫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해. 그렇다니까...... 막이 내리면 그걸로 끝이야. 애원해도 소용 없다고. 뭐 인생이란게 다 그 런 거지. 정해진 시간 내에 보여줘야 하는 것. 뭘 보여줄지 는 자유주제지만." 그녀는 슬픈 기분을 외면하려는 듯이 빠르게 혼잣말을 늘어 놓 았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6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De.us ex ma.chi.na (지난 줄거리) 레터의 스승 테시오스를 만나러 헤이시 산을 오른 줄리탄 일행 은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의문 투성이의 도시에서 테시오 스와만나게 된다. 카넬리안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어하 는 줄리탄에게 테시오스는 줄 것이 있으니 다음날 다시 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오는 길에 중상을 입은 헤스팔콘의 기사인 키 마인과 그의 씰 호이젠을 보게 된다. 안전을 위해 카마인을 죽 이려는 생각을 하는 카넬리안. 그런 카넬리안을 걱정하며 줄리 탄은 잠시 묵게 된 아이리스의 집에서 그녀로부터 의미심장한 말을 듣는다. 당신도 존재하고 있습니까? 1. "저......계세요? 테시오스 님?" 결국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완강한 저항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겠 다던 메르퀸트의 불참으로 시오와 테시오스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참 사람 기분 묘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쇳조각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까지 들린다. "뭐야 이 소리는..." 시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이젠 이곳으로 헤스팔콘 제국 이 세금을 걷으러 들이닥치지 않는 이상 놀랄 것도 궁금할 것도 없다. "이 쪽으로 와!" 테시오스의 정정한 목소리가 지하실의 끝에서 들려온다. 줄리탄은 여전히 지하실을 온통 장식하고 있는 석판들을 둘러보며 그에게 향 했다. 어제 박살났던 테이블 조각들은 티끌하나 없이 깨끗이 치워 져 있었고 테시오스는 빈 석판(tabula rasa)에 뾰족한 송곳을 가지 고 무슨 문자 혹은 기호와 같은 것들을 세기고 있었다. 어제의 테 시오스와는 달리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진지하게 집중 하고 있는 모습이 뭐랄까......마법사 같다. "뭐하시는 거에요?" 궁금한 표정의 줄리탄이 테시오스에게 다가오며 묻자 테시오스는 줄리탄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소일거리. 늙으니까 금방 쓸쓸해져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휴우." "아 예......" 멋있는 대답을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아진다. 그런데 빈 석판을 송곳같은 걸로 긁으면서 장난치는 게 재미있나? 치매 방지용 인가? 그때 테시오스가 갑자기 신경질적인 얼굴로 바닥에 송곳을 던져 버 리는 것이 아닌가. 짜앙 하는 소리에 흠찟 놀란 줄리탄과 시오가 당황했다. "자, 잘못된 거라도 있으세요?" "으아! 되게 재미없네 이거! 내가 뭣 하러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제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어쩌면 이 테시오스라는 노인, 카넬리안과 변덕스럽다는 것에서는 막상막하일 것 같다. "흠. 너 정말로 왔군. 각오는 되었냐!" "예? 아 예......" 줄리탄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뭘 받을지는 알아야 각오를 하든 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테시오스는 '어디다 뒀더라?'라고 중얼거 리며 한참을 부산하게 지하실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먼저 풀풀 날 것 같아 보이는 구석의 상자 속에 길다란 것을 꺼내 줄리탄에게 불 쑥 내밀었다. "이거야. 가져." "......칼?" 줄리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대륙 이슬라트에선 특이하게도 칼집 이 검푸른 어피(漁皮)에 둘러싸여 있는 신월도, 시미터였다. 너무 나도 평범해 보여 전혀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줄리탄은 그 검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잡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느껴......지지 않고 그냥 차가울 뿐 이었다. 왠지 기운이 쭉 빠지는 줄리탄. "이건가요? 별로 절 강하게 만들어 줄 것 같지는 않은......"이라 고 중얼 거리며 줄리탄은 검을 뽑으려고 했고 그 때 테시오스가 갑 자기 엄청나게 놀란 표정으로 줄리탄에게 주먹을 날렸다. 대체 왜! 옆에 있던 줄리탄이 나가 떨어지자 시오의 눈이 휘둥그레 진다. 벌 떡 일어나면서 외치는 줄리탄. "왜! 왜 그러세요 정말!" "조심해! 그 칼을 뽑으면 넌 죽어!" 무시무시한 말을 단호하게 외치는 테시오스. 줄리탄은 갑자기 머 릿속이 복잡해 졌다. "주, 죽는 다고요? 제가요?" 테시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 그 신월도가 칼집에서 해방되었을 때 발산하는 힘은 상상 을 초월하는 거지만 그 칼은 그 대가로 자신을 사용하는 자의 생명 력을 가져가지. 본래 강한 힘이 있는 자가 사용한다면 버틸 수 있 을지 모르지만 너 같이 약해 빠진 놈이 뽑았다간 순식간에 그 칼은 니 생명의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가져갈 꺼야. 그 칼의 이름은 인 피타르......성검(聖劍)이다 마검(魔劍)이다 치장해서 말할 생각은 없고 그냥 생명력에 굶주려 있는 아귀(餓鬼) 같은 검이지. 뭐 이전 에도 몇 몇 비운의 영웅들이 쓰긴 했지만 너 같은 평범한 녀석의 손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껄." "인피타르? 저 그런데요." 줄리탄이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인피타르라는 시미터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테시오스에게 말했다. "그럼 뽑지도 못할 검을 왜 주신 거죠? 쓸 수도 없는 걸......" 그렇다. 이런 엄청난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주는 테시오스 란 대체 정체가 뭐길래......라는 궁금증은 둘째치고 왜 '뽑으면 죽는' 자살검(自殺劍) 따위를 줬냔 말인가. 테시오스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다. "왜 못 뽑아! 쓸 수 있다니까 그러네." "뽑으면 죽는다면서요!" 나름대로 화가 난 줄리탄이었다. 쓰면 죽는 독약 같은 검을 받아 서 어디다 써먹으란 말인가. 테시오스는 '왜 당연한 걸 물어보냐? '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죽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아마 죽을 꺼야." "그럼 뽑을 수 없는 거잖아요!" "뽑을 수 없는게 아니라 뽑기 두려운 거겠지. 내 목숨을 걸고 지 키고 싶은 게 있다면 뽑으라고. 지키는 것 보다는 죽는게 두려운 거야?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뭘 지키겠다고 말 했었던 거냐 나한 테? 누굴 지킨다는 말은 멋이나 부리려고 쉽게 뱉어내는게 아냐. 자기 아들이 도적한테 죽어가는 걸 본 아버지에게 그 칼을 준다면 목숨을 빼앗든 어쨌든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당장 그걸 뽑을걸? 그 런데 넌 뽑을 수 없다고? 너 별로 절실한 게 아니었구나. 역시 어 린애들이란......" "......" 줄리탄은 상상했다. 카넬리안을,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내 목숨을 가져갈 이 검을 뽑을 수 있을까 나는? 두려움도 없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검이 자신을 향해 비웃는 것 같다. 테시오스가 말했다 . "싫음 돌려줘. 너말고도 세상에는 그 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 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 자신은 지옥불에 떨어지더라도 말야. " "아니요. 제가 쓰겠습니다!" "어이 줄리탄......" 시오는 애써 단호하게 말하는 줄리탄에게 좀 당황하고 있었다.마 치 죽음을 하사 받는 것과 같다. 하나의 소원을 이루고 그 대가로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라. 너무 간단해서 선택하기가 두렵다. "이런 귀한 검을 제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테시오스 님 ." 인피타르를 들고 있는 줄리탄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마 음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고 싶어. 그녀가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건 그냥 바램이었을 뿐, 지킬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지금까진 없었다. 하지만 인피타르는 그걸 가능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키고 싶다면......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고 싶다면 그 대가가 죽음이라 하더라도 받아 들여 야 한다. 16세 줄리탄은 어느 때보다도 죽음이 바로 자신의 등 뒤 에 다가섰다는 서늘함에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몸이 떨리고 있었다. 죽음을 선.택.할.수.있.다. "앞으로는 그 칼을 볼 때마다 니 목숨의 가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꺼야. 너 스스로 자신의 목숨이 하찮다고 생각한다면 넌 일찍 죽게 될 것이고 니 목숨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넌 그 칼이 두렵지 않을 것이야. 성인도 안된 어린애가 실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살다보면 말야...... 정말 자신의 목숨을 감히 현실이 라는 저울 위에 올려 놔야 할 때가 분명히 온단 말야. 누구도 너 에게 그 검을 뽑으라고 강요하진 않아. 뽑지 말라는 말도 안해. 니가 선택하는 거야. 세상의 무게를 짊어져도 상관없다고 말했었 지? 그렇다면 그 검을 차라. 저울에 올린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신념의 무게를 잘 살펴보고 그 신념으로 저울이 기운다면......그 검 인피타르를 뽑는 거다." 테시오스는 웃지도 않았고 무겁게 말하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한 현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일말의 망상과 허세도 끼어 들 틈은 없다. 줄리탄는 아버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라온다. 아무리 멋지고 강하고 아름다 운 것이라도 그 의무를 책임질 수 없다면 잡지 말아라.' 줄리탄은 지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만큼이나 무겁게 느 껴지는 자신의 검 인피타르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떨리는 팔에 힘을 주었다. 2. 카넬리안은 도시의 수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줄리탄 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라면 혼자 이 도시의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서 였던 것이다. 너무도 평범해서 이상한 도시의 수로를 따라 그 녀는 도시의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수로변에서는 빨래를 하거 나 세수를 하고 있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 '이런 곳에 수로가 있다니......이해할 수 없어.' 도시는 상당히 길었다. 그녀는 한참을 걸어가서야 흙모래가 날리 는 을씨년스러운 도시외각에 도착할 수 있었고 길은 끊어져 있었 다. 그녀는 인적이 거의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도시의 끝?' 그녀는 한 손엔 은빛 광채를 발하는 미스트랄을 든 채로 수로를 따라 수풀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었을까. 수풀을 헤치며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계속 거친 수풀을 걸었고 마음속 의 구심의 커져가기 시작할 때 그 수로의 끝과 만날 수 있었다. 그것 은 말 그대로 '수로의 끝'이었다. "뭐, 뭐야 이건......"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서 눈앞에 펼쳐진 인정할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그녀의 눈앞에서는 도저히 시선이 따라갈 수 없을 정 도로 빠르게 이 세상의 '물질'들이, '생각'들이, '구조'들이 만들 어 졌다간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어떤 대현자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긴 시대의 흐름을 단 한장면에 담아서 보 여주는 도큐라마(docurama) 였다. 거대한 세상의 지식들을 믹서기 에 넣어 돌리고 있는 것처럼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하고 난해하며 즉각적인 세상의 부분 부분들이 카넬리안의 사방에서 펼쳐지고 있 었다. 그녀는 한눈에 담을 수조차 없는 그 광경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때 그녀는 등뒤에서 화살처럼 날아오는 살기를 느 꼈다. "누구냐!" 카넬리안은 그렇게 외치며 뒤돌아 날아오고 있는 낫을 받아냈다. 상대는 흙먼지로 만들어진 흐릿한 외형에 야수 같은 눈동자의 사 내. "말락?" "......" 엄청난 힘으로 자신의 낫에 저항하는 카넬리안을 내려 누르고 있 는 말락은 아무런 말도 없다. "이봐 말락. 그 정도로 해. 그 여자 진짜 화나면 큰일이니까." "넌!"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자는 테시오스 였다. 말락은 테시오스의 말에 순간 바람 속의 먼저처럼 사라져 버렸다. 카넬리안이 외친다 . "역시 네 놈이 말락이라는 센티넬을 움직이고 있었군! 그런데 넌 지금쯤 주인님을 만나고 있을텐데 어째서 여기에?" 그녀는 눈빛이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경계하며 테시오스에게 말 했지만 정작 테시오스의 모습은 특별히 카넬리안을 해치려는 것도 없이 일상적이었다. "아아. 네 테이머라면 지금 만나고 있어. 내 지하실에서." "지금 만나고 있다고? 넌 대체 뭐하는 놈이야! 레터 씨의 말대로 넌 단순한 마법사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군." 카넬리안은 차가운 살기를 뿜으며 테시오스를 노려보았다. 주변 의 난해한 풍경들은 계속 그녀를 둘러싸며 나타났다간 사라지고 있었다. "뭐야. 벌써 잊어버린 거야? 말했잖아. 난 테시오스라고." "그게 다가 아니잖아!" "그런가......" 테시오스는 그녀의 말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는 너 는 누구지? 넌 너를 뭐라고 설명하지?" "난 카넬리안이다. 테이머 줄리탄의 씰이지. 지금은 힘을 잃은.. ...."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아?" 테시오스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뭐라고?" "그렇게만 말하면 너와 테싱과의 관계는, 오펜바하와의 관계는 네 모순에 가득 찬 그 마음은 설명하지 못한 거잖아. 그냥 힘을 잃은 씰이라고 말하면 넌 너를 충실히 설명한 건가? 넌 정말 단 지 '힘을 잃은 씰'일 뿐이야?" "어떻게 당신이......테싱님을 알고 있는 거야." 카넬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 모든 존재가 내 제자라고. 내가 제자들 을 모를 이유가 없잖아? 너도 내 제자야." "말도 안되는......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집어 치워!!" 그녀는 미스트랄을 치켜 올린 채로 테시오스에게 뛰어 들었다. 3. 뭔가 억울한 얼굴로 한참을 궁시렁거리던 시오가 드디어 테시오 스 앞에 나서며 몸을 비비 꼬았다. "저도 뭐 좀 줘요. 줄리탄만 주고 너무해엥."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투정하는 시오의 모습이 소름끼친 다. ".....여기가 무슨 빈민 구제소인 줄 알아." 황당한 표정의 테시오스. 대체 뭐 이렇게 달라는 게 많아. "저런 무시무시한 검까지는 필요 없으니까 그럴 듯 한 거 하나만 달라고요." "그럴 듯......한 거?" "뭐랄까 폼나는 거요." "역시 어린애들이란...... 뭐 어쩔 수 없구만. 좋아! 내가 선심 쓰지!" 테시오스는 다른 상자를 뒤져서 시오에게 새로운 검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 노인......검 수집이 취미였던가. 아무튼 이 상자 저 상자 속에서 검들이 많이도 튀어 나왔다. "머, 멋있어!!" 테시오스의 새로운 검을 건내받은 시오의 눈이 감동에 빠졌다. 약간 회색빛이 감도는 하얀 검집에 들어 있는 검. 아름다운 여인 의 살결처럼 매끈하고 얇고 단단해 보이는 모습이 마치 차분한 여 신을 보는 것 같이 고요하면서도 눈부신 환도(環刀)였다. 분명 그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로 매매될 수 있는 '명검'이리라. "우오오오 너무 아름다워! 크윽 죽인다 정말!" 지금까지 시커먼 목검만 가지고 다녔던 시오는 아주 그 하얀색 검을 부여 잡고 난리도 아니었다. 미친듯이 오도방정을 떨며 검을 껴안고 뒹구는 시오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는 줄리탄과 테시오스 . "이것도 뽑으면 목숨을 가져가는 검인가요?" "아냐. 뽑아도 상관 없어." 테시오스가 피곤한 표정으로 시오에게 말하자마자 시오는 단숨에 그 순백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진짜 검을 뽑아보는 건 처음이 라서 좀 당황했지만 나름대로 멋드러지게 뽑은 시오의 눈이 놀라 움으로 뒤바꿨다. 거울같이 번쩍번쩍거리는 검신(劍身)을 예상했 는데..... 그것은 잘 연마된 상아로 만든 듯한 새하얀 검신이었고 그 검신을 타고 흐르는 혈조(血爪)가 그 정숙한 아름다움의 마무 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진게 아니었다. "그건 각도(角刀)야. 수컷 일각수(一角獸)의 뿔을 다듬어서 만들 었다고 하던데......난 일각수 본 적 없고 아무튼 덕분에 보통 검 보다 가볍고 내구력도 좋지. 흔히 볼 수 없는 폼.나.는. 검이다 니 소원대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자랑스럽게 테시오스가 설명해 주자 시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대, 대단해!" 시오는 그 검에 홀딱 반해 버린 것 같았다. 은은한 광채를 풍기 는 갸날프고 새햐안 검이라...... 차고 있는 것 만으로도 여간한 귀족들의 보검과는 비교도 안되는 품위를 풍기기에 충분했다. 시 오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능력은요! 이걸 휘두르면 광풍이 몰아치나요?" "뭐?" "그러니까 이 검의 능력이 뭐에요?" "......날을 잘 세우면 잘 베어져. 폼도 나고." 당연하다는 표정의 테시오스. 시오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 "능력이 없어요?" "검이 잘 벨 수 있으면 그게 최고지 더 이상 뭘바라는 거야!" 테시오스는 화가 나선 외쳤다. 입을 삐죽 내민 시오. "쳇. 그렇다면 생긴건 엄청난데 그냥 칼이라는 소리잖아." 테시오스는 시오의 정내미 떨어지는 태도에 이마의 혈관이 돋았 다. 기껏 선심써서 떡 줬더니 떡 속에 팥고물이 없다고 투정이란 말인가. "이 놈이 왜 줘도 지랄이야! 싫음 돌려줘 임마!" "아뇨. 내가 쓸래요. 공짜라면 받죠 뭐." 테시오스는 시오의 행동에 피가 꺼꾸로 도는 것 같았다. 정리해 보자. 이 정체불명의 일행은 이 도시에 오자마자 자신의 테이블을 박살낸 뒤에 강해지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서 어쩔 수 없이 검 한 자루 줬더니만 또 한놈은 자긴 왜 안주냐고 투정을 부리고...... 어쩔 수 없이 한자루 더 줬더니만 검에서 광풍 안나간다고 난리다 . 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자신이 가진 거는 가진 거 대로 주 고 핀잔은 핀잔대로 들어야 하는가. "이, 이것들이......" 테시오스는 씹어먹을 듯한 얼굴로 짜내듯이 말했다.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줄 마음도 없으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 으아 돌아버리겠네 정말!!" 참 예의바른 제자들과 인자한 스승의 전형이다......라고는 농담 으로라도 못할 상황이었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테시오스에게 서 도망치듯이 지하실 밖으로 나온 줄리탄에게 시오가 물었다. "줄리탄. 그 검 뽑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농담 아닐까?" "글쎄? 그럼 한번 뽑아볼래 니가?" 줄리탄은 시오에게 인피타르를 건내줬다. 잠시 그 검푸른 검집을 내려보던 시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헤헤헤. 사양할래. 아마릴리스가......위험한 짓은 하지 말랜 다." 시오는 겁먹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인피타르에게서 슬슬 떨어졌다. 4. "이제 정신이 드세요? 주인님?" 힘들게 눈을 뜬 키마인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보고 있는 호이 젠은 조금 미소지으며 말했다. 온몸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 키마인 은 고개를 힘들게 돌려 낮선 주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여긴 어디야." "다행이도 근처에 도시가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곳이지만 이렇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런데 우리,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키마인은 말락과 호이젠이 싸우는 것을 보며 완전히 정신을 잃었 다. 창피하게도 채념......이런 상황에서는 죽는게 당연하다고 생 각하며 어렵게 잡고 있던 정신력의 끈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그 런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어떻게..... "그건 그 말락이라는 센티넬이 사라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라져?" "예. 그와 이형들의 힘은 분명 저희를 압도하고 있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갑자기 사 라졌습니다. 그래서 주인님을 업고 이곳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 사실이었다. 말락은 테시오스의 명령으로 키마인과 호이젠을 죽 이지 않고 도시로 들인 것이었다. "미안하다.....나 같은 풋내기 때문에 너까지 죽을 뻔 했구나."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호이젠에 비해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키마 인은 자신의 실책에 깨어나자마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 게 환하게 웃어주는 호이젠. "이젠그람 각하께서 저를 주인님께 이적시켜 준 것은 키마인 님 이 훌륭한 헤스팔콘의 기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좌해 주기를 제 게 바랬기 때문 입니다. 주인님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은 변명할 수 없는 저의 책임. 앞으로는 더욱 더 충실히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호이젠......" 호이젠은 본래 키마인의 아버지인 아취발드 이젠그람 헤스팔콘 총사령관의 씰이었다. 아취발드는 늦게 얻은 자신의 아들 키마인 을 위해 자신의 씰 호이젠을 이적시켜 주었던 것이다. 마치 그 가 문에 계속 이어오는 보검처럼. 본래 막 기사 작위를 받은 풋내기 키마인에게 호이젠 같은 최상급의 씰이란 과분하기 이를데가 없는 것이었고 이적이 아니라면 절대로 자신의 능력 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저 그런데 주인님.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서 떠나시는 편이.... .."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 아뇨.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호이젠은 카넬리안의 존재 때문에 며칠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키마인이 깨어나 카넬리안과 부딧치게 된다면 그녀는 헤스팔콘의 기사 키마인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기사가 자신의 명 예를 꺾을 때는 더 커다란 명예를 위해서 뿐이다.' 라는 아버지의 말을 뼈속까지 세기고 있는 키마인으로서도 수배령이 내린 붉은 눈의 씰 카넬리안을 모른 척 지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호이젠은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너 혹시 내게 숨기는 게 있어?" "예. 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의미야?" 카넬리안의 존재를 말한다면 키마인은 분명히 카넬리안을 잡으려 고 들 것이다. 호이젠은 일단 주인의 안전을 위해 카넬리안에 대 한 것을 숨기려고 했다. 키마인은 기운이 없는 얼굴로 몸을 일으 키려 했지만 엄청난 통증과 함께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아직 움직이시는 건 무리 입니다. 제가 보호하고 있을테니까 조 금만 더 편하게 누워 계세요." "보호? 여긴 위험한 곳이야?" 키마인은 불안감을 숨기고 있는 호이젠의 표정이 의아했다. "그런......편입니다." "드디어 깨어났군요." "카, 카넬리안 씨." 문을 열며 어두운 표정의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천에 감겨 있 는 미스트랄을 들고 있었다. 단번에 키마인의 눈동자가 커지며 호 이젠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검을 급히 집어 들었다. 키마인이 믿 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붉은......눈동자? 설마......" -Blind Talk 다음편에 몰아서 씁니다. :-) 『SF & FANTASY (go SF)』 11128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7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01 19:51 읽음: 3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7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541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01 04:07 조회:338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이 세상의 악의 근원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은 사실 별로 특이한 것이 아냐. 어느 시대에나 그런 결심 을 한 사람은 존재했으니까. 때론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지기도 했고 가끔은 성공해서 악이라 부르는 자나 단체 등을 말살시켜 버리기도 했지. 그런데 말야......그걸로 끝이야. 아름다운 세 상 같은 건 오지 않았다고. 왜 그런지 알아? 그건 그에게 상대 를 때려부시는 힘만 있었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 따위 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야. 마치 '악'이라고 말하는 요 소를 없애는게 좋은 세상을 만드는 전부라고 착각하며......정 의라고 말하는 힘으로 상대를 눌러버리고는 '어? 왜 아직도 세 상이 이 모양이지?'라고 의아해 하는 거지. '악'이라는 덩어리 를 없앴으면 그 빈 공간에 다른 걸 채워 넣을 책임을 져야지. 정말 인간들은 끝이 안좋다니까.' 나의 말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절대악 따윈 존재하지 않아!' 라는 진부한 소리를 아직까지 인류가 끌어안고 사는 건 아마 그'진 부한 말'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넬리안은 말 하곤 한다.'절대악이 있다 없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 세상엔 그런 것 보다 중요한 게 많아.'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7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Untried Wings 1. '설마 저 여자가......제국에서 잡으려는 붉은 눈의 씰?' 완벽한 붉은 눈동자라는 것은 흔한 것이 아니다. 키마인도 붉은 눈동자의 여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대체 그게 무엇인지 상상 하기 힘들었지만 카넬리안을 보는 순간 단번에 그녀의 너무 투명 해서 감정이 잡히지 않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긴장감이 온몸에 들 었다. 마치 수개월을 뒤쫓아 왔던 맹수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 같은 기분. "키마인 이젠그람 님이시지요? 저는 카넬리안이라고 합니다." 카넬리안은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호이젠의 표정이 잿 빛이 되었다. 그녀가 키마인을 죽이려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하지만......그녀의 힘이란 부상당한 키마인은 물론 호이젠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막아도 물리칠 수 있는게 아니다. 아 주 오래전 너무도 두렵게 바라보았던 카넬리안의 막강한 힘을 기 억하고 있는 호이젠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넬리안 은 천에 싸여 있는 광검을 꺼내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시죠?" 그녀는 가면 같은 웃음을 지으며 키마인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키마인의 떨리는 입이 열린다. "카넬리안 씨......당신이 헤스팔콘에 수배령이 내린......" "아니에요." 카넬리안은 키마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놀라는 표정 의 호이젠. 그녀는 호이젠의 얼굴을 한번 훌터본 뒤에 말을 이었 다. "그런 오해 많이 받았어요. 저의 눈도 붉은 색이라서. 드문 눈동 자죠? 그래서 세상의 소문이 미치지 않는 이 도시에 잠시 머물고 있는 거에요. 범인이 잡힐 때 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전......" 그녀는 잠시 자신의 말을 멈췄다.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여 는 그녀의 모습은 싫은 것을 억지로 삼키는 것 같다. 하지만 확실 하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씰이 아니라 인간 입니다." 호이젠은 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마인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키마인은 잠시 카넬리안을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이거 혼자서 당황해서 실례했습니다. 전 기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아버님처럼 의연하지 못하고 자주 실수를 합 니다. 하긴......바라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세이드 후작을 패주시 킨 흉악무도한 제국의 대죄인이 당신처럼 아름답...... 아니 아니 이렇게 제 앞에 나타날리가 없겠지요. 순간이나마 의심해서 죄송 합니다. 카넬리안씨." 사실 세이드를 물리친 건 카넬리안이 아니라 목검소년 시오다. "아뇨. 자주 의심 당하니까요." 그녀는 '흉악무도한'이라는 수식어에서 눈썹을 움찔했지만 아주 훌륭하게'인간'을 연기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 긴 것일까......호이젠은 그것이 의문이었지만 일단 카넬리안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호이젠은 잔뜩 굳은 몸의 긴장을 풀며 검을 다 시 테이블에 놓았다. "넌 이미 알고 있었나 저 분을?" "아 예. 이해심이 많은 좋은 분입니다." 호이젠은 카넬리안을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고 카넬리안도 씁쓸 한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모습 인데...... 호이젠의 햇빛에 그을린 듯이 건강미가 돋보이는 훤칠 한 얼굴에서 고마운 표정이 스쳤다. 호이젠은 살짝 카넬리안에게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고 그녀는 그걸 바라보며 문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주인.....아니 제 애인이 도착한 거 같네 요." 만약 영악한 상인이거나 경험많고 노련한 상급 기사였다면 카넬 리안을 다시 의심하는 절차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마인은 그 녀의 얼굴에 비춰진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단호한 태도와 호이젠 의 동의에 의해 카넬리안은 '독특한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 .'로 믿어 버렸다. 어린 기사 키마인이 씰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을 간파하지 못하지 못한 것도 이유 중에 하나. "정말 아름다운 여자다...... 어느 유명한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아닐까? 아니 뭐. 그런 귀족이라면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지. 아 무튼......애인이 있다는데......누군지 좀 부럽네." 키마인은 살짝 혀를 내밀며 살짝 웃었다. 눈앞을 가리는 푸른 머 리칼을 걷어 내며 키마인을 내려보는 호이젠. '모든 씰들이 두려워 했을 만큼 더 없이 아름답고 무서운 여자입 니다. 주인님.' 2. 세이드의 패주 소식은 이미 헤스팔콘 황실을 발칵 뒤집은 상태였 다. 헤스팔콘 내에서는 물론 가르바트의 '북해의 마신' 마르켈라 이쥬 혼을 상대로도 대등한 싸움을 했던 그가 부상을 입고 두 씰 까지 잃은 상태에서 황실로 돌아왔다는 것은 제국에 소문이 퍼진 다면 러셀 가문과 리히트 야거의 체면은 물론 황실의 권위까지 깎 일 불미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황실에서는 하우 프트만 황제가 직접 세이드 패주에 관한 어떠한 말에도 함구령을 내릴 지경이었다. "......기분 좋은가? 내가 이런 꼴로 누워 있는 모습을 보는게." 황실과 세인의 생각이 관심 없다는 투로 후작의 직위 치고는 너 무도 작은 자신의 저택의 침대에 누워 있는 세이드가 조소어린 표 정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세이드 보다도 연상으로 보이는 여 자에게 말했다. 허리를 꽉 죄는 코르셋을 비롯해서 전형적인 헤스 팔콘 귀족 풍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 고 있었다. "대답하기도 싫은 건가? 그런 건가 에버딘?" 그녀의 이름은 에버딘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세이드의 부인. 정상 적인 이성관계와는 대륙 끝에서 끝만큼이나 거리가 멀 것 같은 세 이드에게 부인이 있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일 수도 있지만 사실 에버딘은 세이드의 형이었던 오스카 폰 러셀의 부인이었다. "내 형과 달리 나는 너와 몸을 섞지 않아서 언제나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건가. 흥. 비싼 인형 같군." 본래 러셀 가문의 자랑스런 후계자로 정식의 기사 수업을 받고 리히트 야거의 일원이 되었던 세이드의 형 오스카는 누가봐도 모 범이 될 만한 기사의 전형이었지만 비상식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동생 세이드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이드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봐 에버딘. 니 전 남편 오스카는 죽었어. 평생 그렇게 뒤져버 린 화초처럼 집구석에 박혀 있는다고 내 형은 무덤에서 일어나서 너에게 돌아오지 않아." 오스카가 훌륭한 기사였다는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동생 세이드 를 이기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댈 수도 없었다. 세이드는 결투에 서 형 오스카를 죽였고 미망인이 된 오스카의 부인 에버딘은 귀족 들의 유행 같은 관습에 따라 친족 중에서 미혼의 세이드에게로 가 게 되었던 것이다. 벌써 이년 전의 일이다. "......" 에버딘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세이드가 내 뿜는 불쾌한 공포에 질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증오하지도 않았다. 그냥 혼이 나가버린 육신처럼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세이 드는 까칠까칠하게 자라고 있는 자신의 턱수염을 천천히 매만지 며 말했다. "싫어 수염이라는 건. 이딴 거 기르면 권위를 세울 수 있다고 믿 는 우매한 우리 친족들을 묶어 놓고 콧속에 쇳물을 부어 넣어 주 고 싶군. 에버딘. 내 턱을 다듬고 싶으니까 준비해."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욕실을 향했다 . 그때 그녀는 문 앞에 나타난 사내를 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 리히트야거의 일원인 '신창'(神槍) 레오폴드 폰 매소크였다. 에 버딘은 그에게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여보인 뒤에 욕실로 들어갔다 . "세이드 공.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흐음. 언제나 내 집을 찾아오는 자는 너 뿐인 거 같군. 쓸데 없 는데 힘을 쓰는구나 네 놈은." 백작인 레오폴드에게 일말의 존칭어도 붙이지 않은 세이드는 시 큰둥한 표정이었지만 별로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레오폴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버딘이 있었던 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으세요? 큰 부상이라고 들었습니다." 레오폴드는 여성스러운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가느다랗게 울리 고 있었다.(물론 메르퀸트의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압도적인 여 성性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큰 부상? 뭐 대부분의 황실 놈들은 내가 죽일 바랬겠지만 '큰 부상' 정도니까 매우 실망들 하고 있겠지."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네 놈의 걱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차라리 비웃으리고. " 굴욕적인 냉소로 대꾸하는 세이드를 상대로 레오폴드는 계속 웃 음을 띄고 있었다. 사실 신창이라는 별명의 레오폴드 폰 매소크는 그 실력 면에서는 여성스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세이드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으며 황실로부터 법창(法槍)이라 불리는 파르티 잔 알-파티아 까지 하사 받은 리히트야거의 대표적인 기사중에 하 나.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세이드와 쌍벽을 이루며 세력을 만 들 수 있었지만 레오폴드는 절대로 세이드 앞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고 도리어 일부러 세이드의 밑에서 그를 따르길 바라고 있었 다. 황실에서의 인기 역시 레오플도는 엄청났지만 레오폴드는 세 이드를 떠나서는 단 하나도 결정하지 않았다. "어서 완치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 그때까지...제가 여기 남 아 있을까요?"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럼 어서 꺼져." 세이드는 무성의하게 말하며 눈동자를 문가로 돌렸다. 어두운 모 습의 에버딘이 면도에 쓸 도구들을 담은 작은 웨건을 끌며 들어오 고 있었다. 3. 한편 같은 시각 로이터 막시밀리엄은 자신의 양자 리하르트와 대 화 중에 있었다. 로이터는 만면에 웃음의 띄며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방음이 잘 되어 있는 집무실이 아니었다면 문 밖 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와하하! 세이드 놈 꼴 좋군! 기고만장하더니 어이 없는 일패라. 이대로 밀고 나가서 세이드를 아예 황실에서 쫓아내 주지. 크흐흐 흐! 그런데......리하르트 넌 왜 그렇게 표정이 굳어 있지? 잘못 된 거라도 있나?" "그 씰을 잡지 못하고 전멸 당한 건 저희 특무대도 마찬가지 입 니다. 세이드와 동급으로 취급 당하는게 전 싫습니다." 리하르트는 조각 같은 수려한 외모에 금이 가는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걱정도 팔자'라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 양부 로이터. "뭐 세이드가 그런 부상을 당한 만큼 더 이상 그 놈에게 붉은 눈 의 씰을 빼앗길 이유는 없으니까 기운 내. 달라카트의 관문을 차 단하고 있는 이젠그람 총사령관이 아니라면 우리가 잡게 되겠지." "세이드를 패주시킨 자들이라면......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어쩌면 이젠그람 각하의 관문을 뚫고 달라카트로 내려갈 수도 있 습니다." "관문의 사자라는 그 완고한 늙은이. 아취발드 이젠그람 공작의 손을 벗어난다고? 상상할 수도 없군. 그의 군대는 가르바트의 북 해기사단도 막아냈어." "아 예." 리하르트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숨기며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했 다. "이번 기회에 어떤 방법을 쓰면 세이드를 내쫓을 수 있을까." 제국안전공안부의 책임자인 로이터는 마치 폭리라도 취하려는 상 인처럼 손바닥을 탐욕스레 비비며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리하르트 는 눈동자를 조금 올려 양아버지에게 말했다. "세이드는 야생의 늑대와 같습니다. 길들이긴 커녕 길들이려 하 는 자를 물어 죽이려고 하지요. 상대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걸 느 끼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물어버리려 할 겁니다. 그게 함정이라 하 더라도 공격적인 본능을 참지 못하고 상대에게 달려드는 것이.... ..세이드 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로이터는 리하르트의 그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뒤바꿨다. "누구를 물게 만들면 그 놈에게 가장 치명적일까요?" "너 설마......" "예 그렇습니다." 리하르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로이터는 혀를 찼다. "황실의 녹을 받는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네 머리속이 의심스럽군." "하지만 아버님도 그 방법이 가장 즉효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 니까?" "그래도 하우프트만 폐하를 세이드의 표적으로 삼게 만들겠다는 건 미친 짓이야!" "저는 천민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런 불손한 생각을 감히 머리 속 에 담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세이드가 폐하를 물어뜯게 만든다 면 저희는 굳이 나설 것도 없이 세이드는 자멸합니다. 물론 폐하 의 옥체에 일말의 흠이라도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수만의 부하들을 사지로 보내는 냉정한 장군의 모습처럼 리하르트는 장기말을 놓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 말을 들은 로이터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미쳤군! 황실에 대한 존경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생각 못할 꺼야!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 이상 좋은 방법도 없는 것 같군." 로이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리하르 트에게 어떤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당장 실행할 수는 없지만...... 혹시 실패하더라도 책임지는 건 저 하나. 아버님은 어떤 해도 입지 않 도록 하겠습니다." "실패는 있을 수 없어." "최선을 지향하며 최악을 대비한다. 제게 가르쳐주신 겁니다." "그럼. 난 이 대화 못들은 걸로 하겠다. 기대하고 있을테니 준비 하도록." "예. 로이터 공." 리하르트는 오랜만에 느끼는 흥분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 였다. 4. "아. 줄리탄 씨. 돌아왔어요?" "......씨?" 시오와 함께 돌아온 줄리탄은 이층에서 내려오고 있는 카넬리안 이 자신을 향해 어느 때 보다 친근감 있는 표정으로 방긋 방긋 웃 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끓어오르는 변덕이 열대지 방 폭우보다도 심한 그녀지만 대체 또 이번엔 무슨 일이람. "어이 카넬리안. 이제 아예 주인 대접하길 포기한 거야?" 시오 역시 그녀의 태도 돌변에 놀란 것 같았다. 뭐랄까 저건.... ..애인 같잖아. 그녀는 불안하게스리 계속 사뿐사뿐 미소지으며 뒷걸음질치는 줄리탄에게 다가와 조그맣게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난 주인님의 씰이 아니라 애인이니까 능 력껏 장단을 맞춰 줬으면 좋겠어. 두번 얘기 안할께." "뭐, 뭐, 뭐야 니가 내 애인?" 줄리탄이 얼굴이 빨개졌고 옆에 있던 시오까지 입이 벌어졌다. 아침에 먹은 스튜에 환각제가 들어 있었나 아니면 드디어 죽을 때 가 되었나. 안하던짓 하면 죽는다던데......줄리탄은 기쁘기 보단 상당히 불안했다.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이거 들통나면 이 집의 누구 하나 죽게 되니까 진지하게 연.기.해.달.라.고. 줄리탄 씨이이이." 협박처럼 말꼬리를 들리는 그녀는 아무튼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여자였다. 줄리탄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카넬리안이 시오도 홱 쏘아보자 시오도 흠찟놀라며 끄떡 끄덕 했다. 거부하면 박살낼 분위기였다. "시오 씨. 그리고 당신은...... 애들하고 놀고 있을 메르퀸트와 아이리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줘. 그 둘이 말 실수하면 모 두다 네 놈 책임이야. 아시겠지요?" 복잡한 감정이 마구 얽혀 있는 듣기 이상한 말이었다. 자신이 새 로 얻은 새하얀 각도를 자랑하려던 참이던 시오는 그녀의 박력에 눌려 문 밖으로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응? 이건 뭔가요? 줄리탄 씨?" 그녀는 벌써부터 완숙하게 연기하며 줄리탄이 들고 있는 인피타 르를 의아한 얼굴로 내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 남자 친구' 줄리탄을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쓸 줄도 모르는 검 가지고 어쩌겠다는 거야?' 였다. "아냐. 그게 아니고 이거 테시오스 님이 준거야." 카넬리안은 테시오스라는 말에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애써 의 연하게 물었다. "그럼 보통 검은 아니겠네요?" "으응, 좀 그래." "뭔지 말해......주세요." 그녀는 다소곳하고 예의바른 애인을 모델로 삼았나 보다. 억지로 그런 연기를 하고 있는 그녀가 꽤나 애처로워 보인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줄리탄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의자에 앉아 테 이블 위에 인피타르를 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뽑으면 죽는다.' 라는 너무 간단한 사실이었지만 너무나 간단해서 카넬리안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줄리탄이 몇차례나 '그러니까 내가 죽는 거라니 까.'라고 재차 설명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알아들 은 듯 했다. "아 뭐, 아직 실감나지는 않아. 일단 천천히 이 검에 대해서 생 각......" 줄리탄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나선 자신을 쏘아 보고 있었 다. "왜 그러는 거야. 카넬....." 콰앙! 그녀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줄리탄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양미간을 찡그리며 커다란 목소리 로 외쳤다. "당연히 실감나지 않지! 지금 죽음을 실감하고 싶은 거야? 어설 픈 영웅 흉내는 제발 그만둬! 이런 끔찍한 칼을 왜 받아 온거야! 정말......그렇게 죽고 싶은 거야? 너는 아직 성인도 아냐! 칭얼 대고 고집부리고 책임 같은 거 지지 않아도 괜찮단 말야! 무리하 지 말라고......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테시 오스 이 늙은이를 그냥 두지 않겠어!" 카넬리안은 미스트랄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집밖 으로 나가려던 카넬리안의 팔을 잡은 것을 줄리탄이었다. "잠깐만!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거놔!" "놓을 수 없어." "정말 너!" "내 말을 들어봐." "나를 위해 죽겠다는 소리나 하려고? 듣고 싶지 않아 그딴 말!" 줄리탄 역시 카넬리안을 똑똑히 바라보며 외쳤다.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다고! 너와 함께 살고 싶으니까! 진심 으로 같이 있고 싶으니까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책임지 고 싶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지키고 싶어." 카넬리안은 찡그린 표정 그대로 입을 다물며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줄리탄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올려 보았다. "같이 살아남자고, 살아남는 벙법 알려주겠다고 네가 그랬잖아. 그 약속 절대로 지키고 싶어. 네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어. 그 러니까 도망치지 말아줘." "정말이지......" 카넬리안은 천천히 두팔을 내밀며 의자에 앉아 있는 줄리탄의 옆 머리를 살짝 스다듬었고 곧 껴안았다. 덕분에 그녀의 가슴속에 얼 굴이 파묻히는 이상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속삭였다. "난 행복한 기분 같은 것에 빠지는게 두려워. 그 속에서 둥둥 떠 있다가 언제 추락할지 모르니까. 그래도 당신은......아주 가끔씩 날 가끔씩 귀엽게 감동시켜. 약하지만 좋은.....주인님이야." 그녀는 줄리탄의 검푸른 머리칼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대었다. 확 달아오른 얼굴로 카넬리안의 품속에서 어쩔줄 모르는 줄리탄. 참 그림 좋다......라고 말할 찰나. "이, 이런 죄송합니다." 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엄청나게 놀란 카 넬리안이 줄리탄을 밀쳐 버리는 바람에 줄리탄은 이 도시에 와서 세번째로 바닥을 뒹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이, 인사드리려고 내려왔는데 애인 분과 같이 계셨군요." 호이젠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온 키마인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카 리안은 어버버버 하면서 변명거릴 찾는 듯 싶지만 아까 전 상황 덕에 둘이 애인 사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키마인에게 증명된 듯 싶다. 줄리탄이 바닥에 충돌한 아픈 머리를 쥐어 싸며 일어섰다. "카넬리안. 정말 주인을 이렇......우어억!" 무의식적으로 나간 카넬리안의 발차기. 줄리탄은 다시 나자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게 '주인'이 아니라 '애인'이라니까. 그들의 폭력적인 '애정표현'에 키마인과 호이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참 독특......하시네요." 키마인은 어렵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참 예절바르고 상황을 긍정 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다, 라는 것이 카넬리안의 생각. 그녀는 광속의 머리 회전으로 재빠르게 변명거리를 찾으며 줄리탄 을 일으켰다. "줄리탄 씨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거에요. 당신이 좋아하니까 하긴 하지만......난 이해할 수 없어요." 가련한 얼굴로 줄리탄을 바라보는 카넬리안. 순간 교차하는 둘의 강렬한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해하긴 뭘 이해해! 그렇다고 구둣발로 면상을 후리치냐!' '자업자득이야! 진지하게 연기해 달라고 말했었지!' 순간 교차한 '공명'을 끝으로 둘은 싱글 싱글 웃으며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의자에 앉았다. 피할 수 없는 당황함을 기사의 인내 력으로 꾹꾹 숨기며 테이블로 다가오는 키마인은 줄리탄의 뺨에 선명히 나 있는 카넬리안의 발자국에서 어렵게 시선을 피하고 있 었다. '호이젠의 말대로 아름답고 또......복잡한 여자인 거 같군.' 5. '대체 메르퀸트는 어디로 간거야. 정말!' 그렇다. 시오는 아직도 메르퀸트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문의 아들, 딸 들과 함께 있는 아이리스에게는 어떻게든 카넬리 안과 줄리탄이 커플이 되었음을 설명했고 그녀도 고개를 갸웃거리 면서도 알았다고 말했지만(그녀는 정말 둘이 애인이 되었는 줄 알 고 있다.) 메르퀸트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말에 의하면... ... '잠시 볼일이 있다면서 사라졌다고? 이런 도시에 뭐 볼일이 있다 고......엘프는 볼일이 있는 건가. 아무튼 말 못 전해주면 카넬리 안이 난리를 칠텐데.' 시오는 한숨을 내쉬며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메르퀸트를 찾 는 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6. "그러니까......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메르퀸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테시오스. 테시오스 는 아찔한 표정으로 흐느적거렸다. 대체 여기가 '마법속성완성 무 료강습실'도 아니고 왜 이 놈 저 놈 가르쳐 달라, 뭣 좀 달라.... ..이 난리를 피는 것인가. "설마 너도 일주완성을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예.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배우고 싶습니다." 메르퀸트는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도 (시오와는 달리) 예의바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일단 얼굴이 예쁜데다가 태도가 좋자 테시 오스는 '나가!'라고 소리치는 대신 힘빠지는 소리로 말했다. "배워서 뭐하게...... 너도 누굴 지키고 싶냐? 아니면 폼나게 살 고 싶어서? 이유나 좀 듣자." "저는......" 메르퀸트는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동족들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이미 전 인간들의 손에 더 럽혀진 몸이고 동족들도 절 받아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동족들은 이제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인간들의 천한 물건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줄리탄 님처럼 저도 노래부르는 것만으로는 이 세상에서 저희 동족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요." 메르퀸트의 몸은 익숙한 슬픔에 가득차 있었다. 여자의 몸이 되 어버린 남자 엘프라...... 그냥 남의 일이라면 킥킥 웃어 넘길 수 있는 '해프닝'정도였겠지만 실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오게 된 것 일까. 동족들도 이런 고통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방법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걸까.'라는 가슴을 찌르는 고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테시오스는 반쯤 벗겨진 머리를 매만지며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가능해." "예?" "넌 딱봐도 마법에 재능이 없어. 재능이 넘치는 극소수의 인재도 갈고 닦으려면 몇년이 필요할지 몰라. 그런데 너같은 평범한 엘프 는 아마 평생 내가 가르쳐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할꺼야. 가르쳐 주기 싫어서 이러는게 아냐. 정말 네가 마법을 배운다는 건 시간 낭비야." "......그렇습니까." 메르퀸트는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느 다란 얼굴에 차오르는 낙심을 예의바른 미소로 대신하며 허리를 굽혀 테시오스에게 인사했다. "방해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냥 제 주변의 고마운 분들을 보며 저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뿐입니다. 제 말을 들 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건강하세 요." "이거 참...." 테시오스는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엘프를 바라보며 말을 흐렸 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서 어쩔 수가 없지만 상대의 이런 모습 보는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는 불가능하지만 소환사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 와준다면......" 테시오스 뒤에서 나타난 말락이 여느때처럼 공기를 울리며 음침 하게 말했다. 메르퀸트는 두려운 그가 갑자기 나타나자 깜짝 놀라 며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저 자가! "말락......네가 도와준다고?" 테시오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락을 뒤돌아 보았다. -Blind Talk 아아 정말 오랜만에 올립니다. '에라 이렇게 늦은 바엔 이연참이라는 거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속으로 올리는 건데......아니나 다 를까 평소 두편 올리는 시간보다도 늦어져서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_- (그래도......양은 많잖아요? 간만에 문단도 정리해 봤고.) 뭐 책이 나와서 책날개에 부끄러운 프로필이 들어가는 바람에 아는 분은 알게 되었지만 저는 게임 시나리오다 만화 스토리 하는 것 들을 써대면서 먹고 사는 사람 입니다 그런 걸 직업으로 삼는 놈이 왜 소설은 이 모양 이냐.....라고 말하신다면 '훗. 전 본래 허접합니다.'라고 대답...... 할 생각은 없고 '시나리오나 콘티와 소설은 상당히 다릅니다.'라고 대답 하고 싶네요. 제 비좁은 깜냥으로 뭘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냐만 아무튼 그렇게 느낍니다. 복잡하게 설명하면서 잘난 듯이 늘어 놓는 것도 추태 니까 그냥 그렇습니다. 그래서 소설이란 것에 대해선 참으로 스타트라인 에 서 있는 편입니다 저는. 이번편은 좀 급하게 썼습니다. 사실 며칠동안 출판후유증인지 전혀 글 에 손을 못대고 있다가 '더 이상 이러면 안돼!'라고 생각하며 단박에 써 버린 것입니다.(그래도 이틀 걸렸음...아아 이 끔찍한 속도라니.) 그래서 좀 상황의 전개나 비약이 심한 편. 게다가 상당히 피곤한 상태라서 불성 실하게스리 문장도 다시 보고 다듬지 않아서 좀 거칠 거 같습니다만... 그냥 귀엽게 봐 주세요. 이번편에 줄리탄이 손에 넣은 신월도 인피타르 (infitarr...infidel이 생각나지요?)는 200여년 이후의 이야기인 kiyu 군의 'SIG'에서 주인공 중에 하나 시그가 들고 다니는 검과 동일 합니다. (뭐 줄리탄이 시그처럼 멋있게 쓸 일은 전혀 없을테지만......) 아무튼 어떻게 그렇게 이어져 가는지는 계속 보시면 아실테고... 이번에 등장한 신 캐릭터 레오폴드 폰 매소크는 그가 누구인지 아시는 분 은 다 아실듯.(가끔...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재미.) 그가 쓰는 파르티잔 알-파티아(Al-Fatia) 역시 이어져 가고....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 혹시 이상한 문맥이나 오탈자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소설 출판이라는 것은 상업 출판이라면 이번이 두번째 입니다. 환타지 단편집인 '윈드 드리머'(명상에서 출판)에 '중국의 달'이라는 작은 단편 이 하나 실린 것이 시작이네요. 지금부터 4년도 더 전에 쓴 글이라서 꽤 부끄럽지만......다행이도 찾아보기 힘든 책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는 못했습니다.(그게 다행이냐?) 그래도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번 봐 주 시길.(대여점엔 거의 없을테니......학교 도서관에 신청하심이?) 장편은 단편 하나 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습니다. 맡은 일에는 잔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 '팔아먹을' 원 고라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 져서 한참을 뒤적이며 이것 저것 손대고 뜯어 고치고(그래봐야 시간이 촉박해서 많이는 못했지만) 한심한 맞춤법 수준에 한탄하기도 하고 그 좋아하는 술도 잠시 미루면서 철야를 반복했습니다. 본래 부족한 원고지만 할 만큼은 했습니다. 한번 봐주세요.(2권에서는 내용도 적잖게 수정되었고 하니까......) 일부러 대사 반복이나 상황 반복이나 동어 반복이나 아무튼 반복하는 걸 드래곤 레이디에서는 자주 넣는 편입니다. 본래 그런건 작품이 '비좁아' 보이는 지름길일테니지만 처음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은 거니까 좀 재미 가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자주 반복이 일어 납니다......라고 말하지만 이것도 이제 끝이네요. 다음 챕터가 지나면 (언제 끝낼지 한숨만 나오던) 1부 재래(再來)가 끝납니다. 옴니버스 식의 반복 진행도 질리도록 해 봤으니까 슬슬 읽어 주시는 분들도 질리기 전에 끝내야겠지요. 그럼 시 원하게 비명을 지르며 기운내서 후딱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각 통신망과 인터넷에서 격려해 주시고 지적해주고 게다가 과분한 감상평 까지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다음 편 곧(과연......) 올라갑니다. 아참 그리고 통신본에서 출판본으로 수정하며 설정이나 명칭이 달라진 몇 부분이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앞으로 통신본에서는 출판본에서 달라진 설정을 따릅니다.(아.....바뀐 설정은 언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뭐 이해를 못할 정도로 많이 바뀐 것도 아니니까. <한번 듣고 흘려버리는 제멋대로 Profile> Entry#2 줄리탄(Julitan) 1.캐릭터 모델은? :처음에는 그냥 우유부단한 정의파 소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아니면 위소보 같은 캐릭터로 보일까? 라며 손 가는대로 이어나가다 보니까 결국 폭력성이 거세된 글쓴이 자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나 시도 때도 없이 궁상맞아 지는 점은 특히나.(글쓴이 자신의 말이 마구 다이렉트로 들어가 면서 글이 필름-코멘트화 되는 건 글의 설득력과 품위가 떨어지는 거지만 ...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질 못해서.) 2.왜 아무 씰이나 깨우고 난리인가? :줄리탄도 모르고 카넬리안도 모름.(아마...이 글 끝날 때 쯤이나 밝혀지지 않을까나...) 3.왜 이다지도 더럽게 약한가. :당연하지 않은가? 보통 시골의 요리사였다. 그런데 강하다면 그건 사기다. (그래도 그 고생을 하면서 마음은 나이에 비해 꽤 단단해 지는 편.) 4.매력 포인트는? :(단호하게) 없음. 가끔 이뻐보이는 면도 금방 무너진다. 이미지 관리할 정도 로 널널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다.(사는게 힘들다 솔직히...) 5.잘 만드는 음식은? :어패류 하나는 기가막히게 다듬고 물고기 비린내 없애는 건 잘한다. 그리고 세이지나 버질의 풍미를 느끼고 있으니까 해물 샐러드라면 잘 할 것이다. (반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쓰면 꼭 요리를 망친다.) 6.앞으로의 계획은? :그거 알면 좀 알려줘. 7.좋아하는 노래는? :시골출신이라서 구전으로 이어져 오는 민요 같은 거나 흥얼거릴 줄 아는데다가 음치다.(메르퀸트의 노래를 듣고 놀라 자빠진 건 당연한 거다.) 좋아하게 된다 면 김광석, 브루스 스프링스틴, 나가부치 쯔요시의 노래들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는 꽤나 조숙한 청년이었다.....) 8.검술 연습은 언제 할 생각인가 대체. :사실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는 숨은 곳에서 혼자서 나무 작대기 같을 휘둘러 보곤 있지만 이런 식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최근 깨닳았다. (도통 재능이 없어서 기본이라도 하고 싶다면 뭔가 사범 같은 것이 필요하다.) 9.카넬리안에게 죽어 사는 이유는? :개기면 맞아 죽으니까...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이리 저리 도망치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편이다. 10.성인이 된다면 뭘 하고 싶은가? :과연...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나 있을까 걱정이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Quiet Riot의 Cum on feel the noise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12348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8-8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11 07:35 읽음:36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8-8 : 마음의 땅에... 관련자료:없음 [55992]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11 04:52 조회:30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8-8 : 마음의 땅에... Sub title : Mind Field 1. 결국 메르퀸트를 찾는데 실패한 시오는 그대로 집에 들어가 카넬리안에게 구박받긴 싫어서.....아이리스의 집 앞에서 일광욕을 하기로 했다. "아 좋구나......" 웃통까지 벗고 집앞 잔디에 누워 있는 시오의 모습이란 영락없는 한량의 표본이다. 시오는 멍한 얼굴로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 하 나 날개짓 하지 않는 마냥 동색의 이른 오후의 하늘이란 도시와 분리되어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하다. 몸이 나른해 진다.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몸을 감싸면서도 땀 한방울 흐르지 않는 포근한 느낌. 시오는 감상적인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가슴의 하얀 상흔 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마릴리스? 자주 얘기 못해줘서 미안. 나 그 녀석들 따라서 달라카트 로 내려가 볼 생각이야. 응? 걱정하지마.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성인이 되면 네가 잠들어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올테니까...그때까지 많은 걸 보고..." "이 남자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는 거야. 실성했나?" 갑자기 시오의 감상을 파고 들며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몹시도 불만스러 운 표정으로 내려보는 카넬리안의 얼굴이었다. 시오는 깜짝 놀라서 일어 났다. 따아악! 청명한 '타종음'. 시오는 주저앉은 채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카넬리안을 볼 수 있었다. "아우우......" "괘, 괜찮아?" 라고 말하면서도 시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는 '저는 괜찮 아요.'라고 다소곳이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어주기 보다는 일단 서너대 때려준 뒤에 왜 때렸는지 설명해 줄 여자다. "네 머리 단단한거 이렇게 온몸으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그녀는 아픈 얼굴로 이마를 쓰다듬으며 일어섰다. 뒤따라 나오던 줄리탄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돌끼리 부딛치는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이야?" "여, 여자에게 돌이라니 너무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의 카넬리안. "너한테 까지 단단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민망한 표정의 시오. 줄리탄은 당황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왜, 왜 들 그러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아. 그건 그렇고......" 그녀는 한숨을 내쉰 뒤에 획 시오를 쏘아 보았다. "메르퀸트는 어떻게 된거야!" "어디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니까." "흐음....." 그녀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시오를 흘겨 보았다.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일광욕을 하며 자폐증에 걸린 것처럼 허공과 대화하던 남정네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저, 정말이라니까!" "알겠어. 알겠으니까 웃옷이나 입어. 잊어버렸어? 난 여자란 말야! 뭐야 여자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여자도 여자 나름이지." "뭐라고!i "아무 것도 아니올시다." 시오는 줄리탄 흉내를 내며 바닥에 던져 두었던 미성숙의 몸에 비해 좀 커다란 셔츠를 주섬주섬 집어 들 졍秉好 입었다. 그때 갑자기 도시 사람 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술렁거리는 소리에 시오는 놀란 얼굴 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얼레?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이리스가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도시의 모습에 의외로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분명 굳어 있었다. "미안해요. 점심 식사는 준비해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아이리스는 어렵게 굳은 표정을 풀어 미소를 지으며 줄리탄 일행에게 다가 왔다. "예? 무슨 일이라도......" "말락이 도시로 들어올 꺼에요. 이제 사라질 때가 된거죠." "사, 사라지다니 누가요?" "저, 그리고 이 도시." 그녀는 직사의 볕에 눈살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2. 일단 집으로 들어간 줄리탄 일행은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리스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병원의 일층은 줄리탄 일행과 아이리스와 아이들, 키마인과 호이젠 까지 테이블 주위에 둘러 있어 몹시 북적거렸고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말락과 그의 부하 들이 이 도시로 곧 들어온다고요?" 가장 아이리스와 가까이 앉아 있던 줄리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말락이라면......우리를 죽이려 했던 그 센티넬?" 부상당한 몸으로 벽에 기대어 있던 키마인은 놀란 얼굴로 호이젠을 돌아보며 말했고 호이젠은 걱정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락의 힘이라면 익 히 뼈에 사무치도록 겪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 자가 여기를 공격하려는 거죠?" 당연한 질문의 연속에 아이리스는 도시의 대변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일층의 사람들을 한번 둘러본 뒤에 허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전담 대사였다. "잘 모르겠어요.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것보다...... 차라도 드실래요? 식사는 준비할 시간은 없을 거 같아서." 이 여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완벽하게 채념 해서 더 이상의 어떤 집착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자기들까리 꺄르르 웃으 면서 서로 장난치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줄리탄의 귀를 겉돌았다. "노, 농담하지 마세요. 허상이라도 좋으니까 어쨌든 존재하고 싶다면서요? 잠시후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차를 마시다니......절 놀리지 마세요!" 조금씩 커져가던 줄리탄의 목소리가 결국 크게 터져 버리며 테이블을 내리 쳤다. 테이블 끝에 힘겹게 놓여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지만 아이리스와 카넬리안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날카롭게 깨져버린 찻잔의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숲에 불이나면 나무는 어떻게 도망쳐야 하죠?" 그녀는 안개같은 엷은 미소를 걷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줄리탄을 바라보는 몽환적인 눈동자가 기묘한 기분을 일으킨다. 줄리탄은 침울한 얼굴로 그녀 의 그런 눈을 올려볼 뿐이었다. "도망치고 싶어서 비명을 지르고 한껏 물을 들이켜도 나무는 바로 앞까지 온 불길을 조금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도시는 테시오스 님의 숲. 말락이 지른 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당신들도......죽음은 피하지 못하잖아요?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언젠가는 당신의 인생을 뒤쫓아 와서 당신의 따라 잡을 거 잖아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유한하기 때문에 사라질 때는 언젠가는 찾아오는 겁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에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줄리탄 씨는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아요. 당신이라는 존재의 끝은 여기서가 아닙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아이리스의 표정은 비단 줄리탄만이 아니라 키마인과 시 오 역시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넬리안과 호이젠의 눈가에서는 비슷한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뒤로 다가왔다. "아이리스 씨는 테시오스의 환상이에요. 그 분이 상상하길 그만두면 환상 도 사라지는 거니까요. 우리도 여기서 떠나요."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탁 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환상은 도와줄 수 없어.'라고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머리속에 울렸다. 줄리탄은 머리가 아파왔다. 왜 도와줄 수 없지? 왜 도와주면 안되는 거지? "당신이 절 도우려는 것은 단지......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절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단지 무서워서 도와 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게 타이르는 것 같 았다. "전 그게 아니고..." "나무가 불에 타면 결국 그 땅의 영양분이 되어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저도 두렵습니 다. 하지만 영원히 그것을 가지고 싶다는 것은 허무한 욕심일 뿐이에 요. 당신은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욕심......어째서 더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이 욕심인가요. 당연한, 당연한 거잖아요. 좋아하는 상대와, 사랑하는 상대와 계속 같이 있으 려고 노력하는 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당연한 거잖아요." 줄리탄은 애원하듯 울먹이며 말했지만 아이리스는 차분하게 미소지 으며 줄리탄의 뺨에 손을 가져다댈 뿐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분명히 착각이 아니라 분명히 느껴졌다. 아이리스가 곧 사라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녁이 되어 태양이 하늘에서 사라지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그렇 다고 태양이 소멸되는 건 아니지요. 당신 인간이지요? 부모도 친구도 애인도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는 걸 느끼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두려워 한다면, 그런 것이 두렵다면 행복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의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에 겁을 먹을 테니까요. 언젠가는 사라진다, 언젠가는 사라진다......라며. 인생의 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들 하지요? 전 환상이지 만 지금까지 충실히 존재하고 있고 행복했습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금도 행복합니다. 존재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행복을 잡으세요. 그게 인생의 가치라고 생각 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금은 없다. 너무 일찍 줄리탄의 앞에서 사라 졌지만 그게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 땅에서 사라진다. 부모의 육신 은 땅으로 귀속되어 그가 나이가 들어 여행을 할 때 낮선 곳 길 옆 에 서 있는 과실수로 다시 태어나 그에게 잘 익은 열매를 건내 줄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관계로 인연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간다. 그런 변화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알고는 있지만......알고는 있지만......" 줄리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힘들었다 부모의 품을 너무 일찍 떠나서 살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누군가가 떠난다는 것이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원망스럽고 무력한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실은 그건 무력한 것이 아니다. 운명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책임질 방법도 없다. 부정한 현실에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면 당연한 순리를 당당하 게 인정하는 것도 용기다. "천년을 혹은 만년을 살더라도......" 송사(送辭)를 닮은 목소리로 카넬리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루 하루가 죽어 있다면 그건 단명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음을 띄며 호이젠을 바라보았고 호이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마릴리스의 생각이 나버린 시오는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물기어린 시선만이 테이 블 위를 맴돌 뿐이었고 키마인은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처럼 깊은 한 숨을 내쉬면서도 아이리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스는 문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말락이 왔나 보네요. 이제 떠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수상환상(水上幻想)이라는 말이 있다. 장시간 바다 만을 보며 긴 항 해를 하는 나간 뱃사람들은 그 백지 같은 바다 위에 아름다운 여자를 세워 놓는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비어있는 마음의 공간 만큼 아름 답다. 언제라도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위의 그녀가 자신만을 향해 웃고 있다. 칠흑 같은 밤에도 폭풍 속에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위해 서 있는 그녀는 고향에 도착해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지내다 가 어느날 그녀의 생각이 나서 바다를 바라보면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는 것이다. 그리곤 다시 항해가 시작되면 자기도 모르게 상상을 빚어 만든 미소짓는 그녀를 또 다시 파란 바다 위에 세워 놓기를 반복한다. 3. 결국 힘없는 발걸음으로 아이리스의 집문을 열었을 때 줄리탄은 멈칫 서며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낫을 들고 공중에 떠 있는 말락이 자신을 차갑게 내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집을 방문하려는 사신의 모습을 닮았다. "......" 줄리탄은 말락의 주변에 펼쳐진 도시의 변해버린 모습을 착잡한 표정 으로 둘러보았다. 느긋하던 도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것은 시커 멓게 불타버린 숲의 밤이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던 이 도시는 고지대의 한기가 차가운 사슬처럼 몸을 죄어 오는 을씨년스러운 황폐한 숲의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아이리스의 하얀 이층 병원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그 불타버린 숲의 중앙에 잔존한 환상이 되어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 검......나에게 뽑을 텐가?" 웅웅거리며 울려대는 말락의 목소리가 줄리탄을 향해 들려온다. 줄리탄 의 손에 들려있는 신월도 인피타르를 말락은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라면 비켜라." 말락은 조용히 말했다. "......" 줄리탄은 오히려 자신을 동정하는 눈빛의 말락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련이 다리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카넬 리안과 시오, 호이젠과 키마인도 집에서 나와 말락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아이리스와 아이들이었다. 줄리탄은 아이리스를 돌아보았다. 그가 조금 주저하다간 말했다. "덕분에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고마웠어요." "줄리탄씨." "예?" "아직 성인도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심각해 지는 건 당연한 거에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참. 키마인 씨?" "에.....예?" 잡작스럽게 아이리스가 키마인을 부르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키마 인이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몸이 불편하실 거에요. 훌륭한 몸이니까 금방 완치 되겠지만 그때까진 무리하지 마시고 꼭 약 드세요. 충고 입니다." "아, 예." 키마인은 어떨떨한 얼굴로 웃고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맹수 누나! 잘가세요!" "아아." 카넬리안은 피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에게 둘 러싸여 있는 아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럼 가시는 길에 많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길 기원 하겠습니다. 저도 기뻤어요. 좋은 분들 집으로 모실 수 있어서. 아주 오랜만에 이 병원이 가득 찼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얘들아. 들어가자." 아이리스와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집으로 들어갔고 문을 닫았다. "아......" 줄리탄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락은 그 집속으로 스며들 듯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집은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져 버리며 그 자리에는 불타버린 나무 한 그루만이 섰다. "끝이구나......" 시오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 검게 불에 탄 나무를 보며 중얼 거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끝이 아니야!" 모두가 돌아본 곳에선 테시오스와 메르퀸트가 서 있었다. 테시오스 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오가 반갑다기 보단 놀란 얼굴로 외쳤다. "메르퀸트! 대체 어디에 있던 거야?" "아 미안해요. 테시오스 님께 부탁할 것이 있어서....." "야. 끝이 아니라니까......내 말 안들려?" 테시오스는 완벽하게 무시 당했다. "너도 검 달라고 했냐?" "아뇨. 그건 아니고......" 그녀는 예전 레터가 건내줬던 그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야 이 놈들아! 내 말 좀 들어봐! 천금같은 지혜를 알려주려고 한단 말야!" 테시오스는 일행의 관심이 메르퀸트에게 쏠려 있자 나이값도 못하고 심통을 내며 윽박질렀다. 그제서야 일행은 피곤한 얼굴로 테시오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들어줄테니까 말해 보세요.'였다. "이 도시는 불타버린 숲의 기억이었다. 아이리스 역시......이 숲의 나무 중에 하나 였지." 줄리탄은 병원 대신 서 있는 흉측하게 불에 탄 나무를 바라보았다. 테시오스의 말이 맞다면 온통 아는 것이 하나도 없던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르겠어요......인간의 모습을 빌린 나무의 기억인 그녀 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방식이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다......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렇게 불타버린 숲과 그 숲을 돌아 다니고 있는 말락 밖에 없었지. 딱 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숲이었 어. 어떠냐!" "어떻긴......뭐가요?" 시오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테시오스는 인상을 구겼다. "내가 숲의 기억을 긁어 모아서 딱 봐도 끝내주는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니까! 대단하지 않아?" "아 대단하시네요." 줄리탄은 고개를 돌리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질량을 가진 환상 을 만들어 낸다는 건 사실 마법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 한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아. 테시오스는 왠지 인정하기 싫다.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만드신 거죠?" 의아한 키마인이 말에 테시오스는 갑자기 고개를 팍 숙이며 중 얼거렸다. "늙어서 뭐라도 소일거리를 하지 않으면 금방 외로워져서......"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넬리안의 얼굴 만은 굳어 있었 다. 그녀는 테시오스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녀가 수로의 끝에서 테시오스를 공격했을 때 단지 테시오 스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넌 테싱이 네게 모든 비밀을 말해 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말 하나였다. 끝까지 테시오스는 그녀도 알아내지 못한 이 세 상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 었다. 인간의 멸종. 용들의 재림.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 장황 한 것은 많은데 '너는 네게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모르고 있어. 나 자신은 누구인가. 왜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가.' 숭고한 이유 일 것 같나? 세상을 파멸시킬 죽음의 병기가 아닐까 하는 두려 움이라도 가지고 있나? 그것보다 사소하고 사적이지만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진실이라면 넌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나? 카넬리안 은 테시오스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고개를 돌렸다. "전 수업을 받기 위해 잠시 여러분을 떠나려고 합니다." 메르퀸트가 일행에게 다가오며 말하자 줄리탄은 깜짝 놀랐고 시오는 혀를 찼다. "어찌된게 다 떠나냐......카넬리안. 너도 갈꺼야?" "내가 가긴 어딜 가냐 멍청아! 얼빠진 소리 하지 좀 마." 카넬리안은 복잡한 심정을 애써 덮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오 를 쏘아 붙였지만 순간 아차 했다. 갑작스럽게 과격해진 그녀의 태도를(본 모습이지만) 키마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 었던 것이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메르퀸트에게 말했다. "금방 돌아올 꺼죠?" "예." 메르퀸트는 베시시 웃었다. 그때 뒤에서 말락이 나타났다. "말락 씨가 절 도와주기로 했어요. 아직 잘 모르지만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에에! 저 악령 놈이 도와준다고!" 카넬리안은 놀라서 커다랗게 말했다간 호이젠의 불안한 표정에 재빨리 표정을 수정했다. 줄리탄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 리며 말했다. "왜 말락, 저 자가 너를......" "딱 보면 모르냐. 말락 저 친구, 메르퀸트를 좋아하고 있잖아." 시오가 핀잔어린 시선으로 말락을 흘겨보며 말하자 고개를 숙인 말락은 흙먼지로 만들어진 몸이 형체를 잃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 리며 온 몸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거참......주변 공기를 통 해 말하기 때문에 귓속말도 못하고 저렇게 자기 감정도 숨기기가 불편하니 이미지 관리하기 참 힘들겠다. "하, 하지만 메르퀸트는 남자 인 걸?" "어차피 나도......나도......이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니까 .......뭐 상관 없잖아." 주변의 공기가 띄엄띄엄 중얼거리는게 귓속이 간지러웠다. 줄리탄 과 카넬리안, 시오는 입이 떡 벌어졌다. 성별이 불분명한 엘프와 무기체의 연애라......어쩌자는 건가. 정말 저렇게 나가도 좋은가. "아무튼!" 테시오스는 괴이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듯이 박수를 딱 치며 말했다. "존재하는 건 그 형태만 바꿀 뿐이지 사라지지 않아. 아아리스 역시 그 모습을 바꿔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야. 이보게 줄리탄 군." "예." "아이리스의 눈과 귀를 통해 자네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네. 아이 리스 역시도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내가 인피타르를 준 것이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여기 모두를 지켜 보도록 하지." 시오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자고 있을 때 테시오스가 천정에서 몰래 내려보고 있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 오싹해져 버렸다. 테시오스는 조물주처럼 모두를 관조적으로 둘러보다가 기운 찬 목 소리로 외쳤다. "말이 길어지면 지루하니까 난 이만 사라지마! 모두들. 이 지랄 같은 세상에서 수고하시게." "으이구. 꼭 말을 해도." ......정말 끝까지 판 깨는 말을 읊어대며 테시오스는 도시처럼 아이리스의 집처럼 사라졌고 말락 역시 슬며시 손을 흔드는 메르 퀸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어두운 밤하늘과 불타버린 숲 뿐. 성급하게 기분이 좋 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없는 기묘한 기분에 일행은 휩싸였다. "주인님. 각하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저희도 이제 떠나지요." 마치 연극이 끝나고 도구들까지 모두 치워버린 황망한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키마인에게 호이젠이 다가오며 예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키마인은 그제서 야 줄리탄 일행을 돌아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언제......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키마인은 몹시 아쉬운 표정을 줄리탄 일행(특히 카넬리안)에게 지어 보였다. "아 뭐. 재워주고 먹여준다면 언제라도......우욱!" 카넬리안은 주접을 떠는 시오를 발로 걷어차 버린 뒤에 키마인을 보며 생긋 웃었다. 키마인과 호이젠의 얼굴에 창백한 기운이 스쳤다. "인연이 허락한다면 내일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키마인 경." 사실 그들은 꽤 일찍 재회를 하게 된다. "저는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카넬리안 씨. 줄리탄 씨. 시오 씨. 언젠가 만날 다음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호이젠 가자." "예. 주인님." 키마인과 호이젠이 공손하게 인사한 뒤에 사라진 것을 줄리탄은 물끄럼 이 바라보고 있었다. "카넬리안." "왜 주인님?" 그녀는 키마인이 사라져 버린 이상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으로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우리 어디로 가야 하지?" "거의 달라카트에 도착했어. 여기서 피크산맥을 내려가면 금방 상트야. 그리고 그곳에서 밀항선을 타고 내려가면 달라카트 도착이지." 그녀는 용의주도하게도 벨레시마에 있을 때 헤스페리아의 지도 전체를 암기했었다. 아무튼 밀항선이라니......그래도 곧 달라카트라는 말에 조금 기운이 났다. "상트? 너 도시로 가면 안되잖아. 금방 네 정체가 탄로날텐데? 모두 키마인 경처럼 속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오호호호호호." 그녀는 갑자기 요사스런 웃음소리를 내며 두 눈을 감았다. 또 왜 이러 는지 불안한 줄리탄. 그때 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떴다. "짜잔!" "우아아앗!!!" "뭐, 뭐야!!!" 줄리탄과 시오 둘 다 바닥에 주저 앉을 정도로 놀라 버렸다. 그녀의 눈이 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것도 꽤 어울려 보이는데 중요 한건 어떻게 눈 색깔이 변할 수 있냐는 것이다. "어때? 예쁘지 않아 이 눈?" "어, 어, 어떻게 눈이 그렇게 된거냐아!" "테시오스가 선물이라며 내게 걸어준 마법이야. 지금 발동했으니까 한달 동안은 지속될꺼야. 내 얼굴을 아는 자는 상트에 없을 거고 찾는 건 붉은 눈의 씰이니까 눈 색만 바꾸면 무사 통과지. 에헤헤." "......" 눈 색을 바꿔주는 마법이라니. 참 유용한 마법이긴 한데 말야. 일단 그런 마법도 있다는 것에 줄리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카넬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그 늙은이 엄청 심술이 들러붙어서 이 마법에 짜증나는 단서를 붙였어." "단서?" "그러니까 내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그때는 마법의 효력이 사라져서 눈빛 이 붉게 돌아온데. 뭐래더라......당분간 마음을 다스리는 버릇을 기르라고 하던가. 아무튼 달라카트로 내려갈 때 까지는 조용히 살아야 겠어." 줄리탄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 말에 의하면 마음이 흔들릴 때는 마법이 풀린다? 괴상한 일이었다. 카넬리안이 다시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자 시오가 이해 한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그렇군. 정말 그 할아버지 너 만큼이나 성질이 더럽구나." "키아아아아!!" "크억!" 갑자기 눈동자가 붉게 돌아와 버린 카넬리안이 시오를 또 다시 저 멀리 걷어차 버렸다. 씩씩 거리는 그녀가 줄리탄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인님 봤지! 성질내면 이렇게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니까!" "아 확실히 이해했어." 줄리탄은 피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안하다. 그녀가 과연 상트를 조용히 통과할 수 있을까. 아마 평소대로라면 눈동자가 붉은 색일 때가 더 많 을 것 같은데. "그런데 상트는 어떤 도시야? 설마 여기처럼......" 시오가 불안한 얼굴로 이제는 들짐승까지 사람 불안하게 울어대는 불타버린 숲을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헤스팔콘 정교회의 본부가 위치한 사원도시야. 성스러운 곳이래. 뭐 우리 에겐 상관 없을 테지만......" 사실 작은 어촌에서만 살아온 줄리탄과 산속에서만 살아온 시오는 종교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는 않았다. 그래도 잘은 몰라도 성스러운 도시라니까 좀 편하게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줄리탄과 시오는 카넬리안을 따라 헤이시 산을 내렸다. '잘있어. 아이리스.' 4. "으으, 으으음......" 줄리탄이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을 때 흐린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사정없이 속을 뒤집는 곰팡내와 술비린내가 들어찬 어두운 방이었다. 뿌연 연기, 테이 블 위에 올라서서 시커먼 술병을 들고 있는 자, 여자? 어두운 구석에서 여자 와 몸을 섞고 있는 자.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나무문을 단도로 긁고 있는 자 . 마귀 소굴인가? 뒷속에서 토해버릴 것 같은 지저분한 말들이 줄리탄의 머리 를 유린하고 있었다. '이런 곳이 뭐가......성스러운 도시냐.' 아직까지 뒷머리가 터질 것처럼 욱신 거렸다. 화장실에 간 것까지는 기억나 는데 갑자기 앞이 어두워 지고는 정신을 차리니까 이런 곳이었다. 몸이 묶여 있고 당연히 인피타르 역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줄리탄은 순간 자신이 납 치되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봐! 이 자식 일어 났는데?" 안그래도 '난 못된 놈이요.'라는 간판을 걸고다니는 얼굴에 촛불까지 들이 대며 줄리탄에게 다가왔다. 카넬리안도 시오도 없어. 침착해야 해......라는 결심이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크윽!" 구석에 묶여 있는 줄리탄의 배에 발길질이 들어왔다. 오전에 식사를 했다면 넘어왔을 정도였다. 줄리탄은 뜨겁게 뭉치는 위액을 뱉어내며 거친 숨을 헐 떡였다. "정상인데. 괜찮은 것 같아." 그 자는 이런 식의 과격한 상태 감별을 많이 해본 것 같았다. 그자는 무릎 을 굽혀 줄리탄과 눈높이를 맞추며 커다란 손으로 줄리탄의 턱을 잡아 억지 로 눈을 마주쳤다. 땀냄새와 술냄새가 입을 틀어 막는 것 같다. "야 임마. 너 잘하는 게 뭐야." "......?" 악랄하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줄리탄의 양 뺨을 눌러 이빨을 훌터 보던 그는 줄리탄의 얼굴에 촛불을 가져다대며 말하는 것이엇다. 뜨거운 촛불의 기운에 고개를 돌리려는 걸 그는 턱을 잡고 있는 무지막지한 아귀 힘으로 막고 있었 다. "여......여기가......어디죠?" 턱이 깨져버릴 것 같고 촛불 덕분에 귓볼이 타는 것 같다. 눈물이 찔끔 찔끔 나오는 빌어먹을 기분. 줄리탄은 턱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더듬더듬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내는 귀찮은 지 턱을 잡아 죄던 손으로 머리를 세게 내 려치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새꺄! 여기가 어딘지 알아서 뭐해! 너 이 새끼 잘 하는 거 없으면 귀족 놈 들 노리개로 팔아 버린다? 그 새끼들 변태거든. 알아들어? 몸도 드럽게 비리 비리하니까 광산 일도 무리겠고." 줄리탄은 그 자의 손이 자신의 팔을 잡아 누르며 밀가루 반죽처럼 험하게 눌러대자 그의 말대로 근육이라곤 찾을 길이 없는 줄리탄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소리를 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들. 두목이 부릅니다." "쳇. 그 꼰대 노는 꼴을 못보누만." 사람들은 저마다 투덜거리며 느릿느릿 일어섰고 덕분에 줄리탄도 지저분하게 들러붙는 거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야, 톨베인! 저 꼬마 잘 감시해라이." 줄리탄이 바라본 톨베인은 줄리탄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기운이 온 몸에 서려 있었다. 그는 반항적으로 치켜 올라간 눈동 자를 조용히 내려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까 놈들보단 낫겠지. "너 같은 놈은 여기 상트에 들어오자 마자 한시간도 못 견뎌. 아마 우리들에 게 잡혀오지 않았다면 겍스 패거리 들에게 칼침 맞고 속옥까지 빼앗겼을 껄." 문을 닫으며 발소리도 없이 걸어온 톨베인은 그런 끔찍한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에도 불구하고 톨베인이라는 청년의 얼굴은 창백할 정도였다. "여, 여기는 성스러운 도시라고......" 줄리탄의 반문에 톨베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 조차 없다는 얼굴 이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양팔이 뒤로 묶여 있는 줄리탄은 톨베 인의 얼굴을 계속 쏘아 보았다. 특별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고......일단 무 섭게 쏘아본다면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에서 였던 것 같다. 그런 줄리탄을 의아한 얼굴로 내려보던 톨베인은 조용히 이 방에 하나 밖에 없는 촛불을 껐다. "그런 멍청한 얼굴로 내 얼굴 바라보지 마." 갑자기 사방에 암흑이 들어찼다. 창문하나 없는 이 방에는 톨베인의 얼굴은 커녕 말 그대로 시커먼 물속에 빠져버린 것 같이 시력이 소용 없다. 줄리탄 의 머리속을 스쳤다. 아직 다리는 자유로우니까 천천히 일어나서 톨베인에게 발차기를 날린다면 기절시킬 수 있지 않을까? 척 봐도 줄리탄 만큼이나 몸이 호리호리하고 별로 싸움을 잘 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라는 혼자만의 상상 과 함께 줄리탄은 천천이 몸을 일으켰다. 카앙! 순간적으로 줄리탄의 왼쪽 귀에 찢어지는 충돌음이 들리며 불꽃이 일어났다. 줄리탄은 그 자리에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톨베인은 주머니에서 개인용 부싯돌을 꺼내며 능숙하게 촛불에 불을 당겼다. 순간 방이 밝아졌고 줄리탄은 자신의 머리 바로 왼쪽에 깊게 박혀 있는 단도를 보았다. 어둠 속 에서 정확하게 노린 것도 그렇고 돌벽인데 이렇게 깊게 박히다니 보통 힘이 아니었다. "말 안했던가? 여긴 살인청부 길드의 본부야." "사, 살인청부 길드?" 줄리탄은 다리 힘이 풀리며 스스르 다시 주저 앉았다. "너 같이 얼빠진 녀석 잡아 노예시장에 팔아 넘기는 것도 우리 부업 중에 하나지." "어, 어떻게 헤스팔콘 정교회의 총본산이 있는 도시에서 그런 일을......" 아무리 생각해도 성스럽다는 정교회와 살인청부 길드는 어울리지 않는다. "큭큭큭." 톨베인은 정말 웃긴다는 듯이 웃음을 참으며 주머니에서 또 무언가를 꺼냈 다. 작은 천봉지와 하얗고 네모난 종이였다. 톨베인은 슬쩍 줄리탄을 올려 보며 말했다. "너도 할래?" "그게 뭐지?" 톨베인은 대답하지 않고는 그대로 봉지의 끈을 풀러 말린 풀을 종이 위에 놓고는 그것을 말아 입에 물었다. 꽤나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뭐하는 거야......그런 걸 입에 물고." 역시 톨베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특이하게 생긴 부싯돌이 달 린 기계로 작은 불을 올려 그 종이의 끝을 불에 붙일 뿐이었다. 빨간 화점 이 달아오르며 잠시 후 톨베인의 코와 입에서 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줄리탄을 무섭게 만들었다. 톨베인은 그것을 입에서 때며 연기 뒤에서 보이는 갈색의 눈동자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그 잘난 정교회가 우리의 최고 고객이거든." 뭐? 살인 청부 길드에 포교활동을 의뢰하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 그 말은 교회가 살인을 청부한다는 것? 톨베인은 다시 그것을 입에 문 채로 연기를 뿜으며 손쉽게 벽에 박힌 단도를 뽑았다. "어제도 나 하나 죽였어. 이 단검으로. 여기선 그 놈들이 신이니까. 뭐 우리야 돈도 짭짤하고 좋지. 덕분에 이 담배잎을 살 돈도 생기고." 단검을 빼내는 캬르륵 거리는 소음이 섬뜩하게 들렸지만 톨베인의 표정 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때 줄리탄의 머리속에 충격적으로 떠오른 사실이 있었다. "카, 카넬리안이......카넬리안이......" "뭐?" 다시 의자에 앉으며 담배라고 말한 말린 종이를 다시 입에서 땐 톨베인은 줄리탄이 실성한 듯이 중얼거리자 불쾌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여기로 올꺼야." 머리 좋고 결단성 있는 카넬리안이 줄리탄이 있는 곳을 찾는데는 분명히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상 막는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가기 보다는 부셔 버린다. 줄리탄은 진정으로 톨베인을 걱정 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너 피하는 게 좋을 꺼야."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어설픈 협박이라면 집어 치워." "카넬리안이 오고 있단 말야." 줄리탄은 자기가 훨씬 긴장하고 있었다. "카넬리안? 누구야? 그 사람은?"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까 줄리탄을 괴롭히던 그 사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야 톨베인! 네가 좀 나서야 겠어!" "무슨 일이죠." "몰라! 어떤 무지막지한 년하고 놈이 쳐들어와선 다짜고짜 여기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어!" "대체 어떤 놈들이......" "그 사람들이 누군지 이제 곧 알게 될꺼야." 줄리탄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로 고개를 팍 숙였다. 상트를 조용히 지나가자던 줄리탄 일행의 다짐은 초장부터 어긋나 버린 것 같다. 톨베인은 단도를 들며 조용히 일어섰다. 그는 거한을 올려보며 무표 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놈들 죽이면 얼마 줄 꺼죠?" Chapter#8 : 마음의 땅에... end Next Chapter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Blind Talk 이번 챕터 끝입니다. 이번 챕터에서 배운 점은.....저 스스로 대답 하지 못할 화두에 대해서는 함부로 글에 넣으면 안된다는 거죠. 아마.....출판본에서는 챕터8은 바뀔 것 같습니다만......모르죠 뭐. 그건 그렇고... 현재 제 작업실에 친구 들이 모여 DC용 팬저 프론트를 하고 있습니다. 나가노 마모루가 E-79/128 의 디자인을 했다는 것도 해볼 만한 이유 지만 본래 전차 자체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구입을 했는데.....게임 의 재미 자체도 최고 입니다. 근자들어 즐겨본 DC용 게임중 가장 훌륭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챕터9의 제목인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이라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하기오 모토의 장편 만화 제목이지요? 내용도 좋지만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역시 차용해 오고 말았습니다. 구상하고 있는 내용과도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챕터9는 1부 마지막 챕터인 만큼 스피디하게 빠르게 진행되고 끝맺음 하려 합니다만......결국 게으르게 올린다면 또 한달을 잡아먹을지도. 그럼 재미있게 즐겨주시길 기원하면서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언제라도 오탈자나 문제되는 문장이 발견되면 연락 부탁합니다. (너무 피곤해서......잠듭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12935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9-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15 14:15 읽음:216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9-1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관련자료:없음 [5618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15 02:00 조회:301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아우 간지러워요오!" 카넬리안과 대화 중에 있던 나는 물키벨이 내 손가락을 입에 넣고 살짝 살짝 씹어대자 흠찟 놀라며 손을 숨겼다. 대체......이 여자는 틈만 나면 몰래 다가와서 꼭 내 손가락을 잘근 잘근 씹는 악취미가 있다. 해룡의 수 장이라는 여자가 말야 하는 짓이라고는...... "주인님. 해룡에게 씹힌 기분이 어때?" 그 장면을 바라보던 카넬리안이 두 손으로 턱을 받힌 채로 싱글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키벨은 내 손을 겁탈하는 일에 실패하자 바닥을 뒹굴 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줄리탄! 밥 해줘! 배고파!" 되도록......그녀의 직위도 직위고 나이도 나이니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해주고 싶지만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 여자는 다 큰 여자가...... "시끄러워요!!" 나와 카넬리안 둘이 동시에 외쳤다. 아무튼 바다에선 무적이고 지상에선 푼수라는 극단적인 양면성을 보여주는 여자다. 장담하건데 자신의 지도자 가 이런 정신 상태라는 것을 해룡들이 알았다간 일대 반란이 일어났을 것 이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9-1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Sub title : Another day in paradise 1. 톨베인은 바닥에 뱉은 담배를 부비며 몹시 귀찮다는 표정으로 형 뻘 되는 거한을 올려보고 있었다. "얼마 줄 거냐니까요. 청부살인의 평균 금액을 말해 드릴까요?"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지금 침입자가 들어왔다니까!" "지금 얘기하지 않으면 이미 죽인 뒤엔 돈을 줄 리가 없을 테니까요. 난 청부 받지 않고 누굴 죽일 정도로 살인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길 드가 무너지든 말든 난 알바 아닙니다." "이, 이 새끼가!" 그 사내는 톨베인을 찍어 누를 듯이 주먹을 올렸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줄리탄이 보기에도 톨베인의 실력은 사내의 목숨 쯤은 쉽게 빼앗 아 갈 수 있을 능력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톨베인. 금화 두닢이다." 사내를 밀치며 들어온 자는 톨베인이 형식적으로라도 고개를 조금 숙이는 것을 봐선 두목이었다. 역시 거구에 얼굴에 흉터 까지 있는 두목은 못마땅 한 얼굴로 짧게 뱉었지만 톨베인은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 외에 당할 자가 없다면 두닢으론 부족하죠." "어린 놈이......욕심이 많군." "지금 제 욕심을 채워주지 않으면 피해를 보는 건 두목일 텐데요." 톨베인은 그늘진 얼굴에 냉소를 깔며 능숙하게 협상하고 있었다. 두목은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주머니에 손을 박으며 금화 세닢을 꺼내 톨베인에게 던졌다. 그것을 능숙하게 잡아 채는 톨베인. "이제 됐지! 당장 그 자식들 죽여버려!" 가짜가 아닐까? 금화를 자세히 훌터본 톨베인은 품속에 그것을 넣으며 대 답도 없이 사라지듯 문 밖으로 나섰다. 줄리탄이 혹시 카넬리안과 시오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로 톨베인은 그 나이와 비교도 안 되는 경험과 실력을 가진 살인청부업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어떻게 살면 성인도 안된 나이에 살인을 업으로 삼을 수가 있을까. 부모? 친구? 혹은 환경 탓일까. 카넬리안, 시오......조심해.' 2. 사원도시 상트에서는 사실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 사원을 찾기 힘들었다. 옛 영광이 몰락한 자리라는 우울한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이곳 저곳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폐허가 되어 있는 크고 작은 사원의 시체들을 상 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사이 사이에는 빈민촌이나 환락가 따위가 자리잡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몰골이란 농담이라도 성스럽다는 말은 입에 다물 수 없었고 허무스러운 퇴폐라는 것에서 톨베인의 눈동자를 닮았다. 단 지 상트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기괴하도록 화려한 헤스팔콘 정교회 본부 만 이 마치 사자(死子)들의 가혹한 맹주처럼 군림하며 극단적인 도시의 부조화 를 자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놈들. 사원을 이용하는 최악의 방법을 쓰고 있군." 살인청부길드는 폐허가 되어 있는 어느 사원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이 사라지자 단숨에 불법 노예로 잡혔다는 것을 도시의 분위기와 자기 주인의 연약함으로 미루어 보아 금새 짐작했고 그 노예 매 매를 독점으로 하고 있는 곳이 살인청부길드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 곳의 위치까지 알아내는 데는 단지 서너시간과 수 명의 코뼈나 팔이 부러진 희 생자 들의 증언 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멋들어진 인물들이었 다면 세련되게 노예상으로 변장, 노예 매매에 참가하여 줄리탄을 찾아내는 이성적인 방법을 택했겠지만 그녀가 택한 것은 정면돌파였고 시오 역시 거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 누구냐! 너희들은!" 라는 매너리즘에 빠진 대사를 외치던 길드원 들은 아무 말 없이 다가오는 카넬리안의 매몰찬 펀치에 턱뼈나 늑골 등이 부러지며 저 멀리 나가 떨어 지곤 했다. 뒤따라오는 시오는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카넬리안. 나도 좀 싸우자. 저놈들 어찌 저리 하약하냐......" 시오는 자신의 새하얀 각도를 뽑아들고 싸우고 싶었다. 저 정도의 상대 라면 죽이지 않고 쓰러트릴 자신도 있었지만......천에 쌓인 미스트랄을 풀지도 않은 채 한손으로 들고도 나머지 왼손 만으로도 일격에 무기까지 들고 몸집도 엄청나게 좋아 보이는 상대들이 푹푹 쓰러지는 통에 시오는 그들이 종이 인형 마냥 바닥에 쓰러질 때마다 짜증을 내며 카넬리안을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 "아아 귀찮네. 뭐가 이 따위로 긴거야! 정말 최악의 길드잖아 여긴!" 그들은 길드의 입구에서 한 백여미터 들어온 것 같았지만 계속 미로 같 은 통로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유의 감지력 때문에 어설프게 만든 함정 정도는 사뿐 사뿐 넘으며 걸어가고 있었지만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내부는 그녀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빛이 푸른 색인 것 으로 보아 느녀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오는 지겨운 지 투 덜거리며 말했다. "그냥 한 놈 잡아다가 노예들 잡혀 있는 곳 알아내면 되잖아." "바보 같은 소리 한다. 우리가 주인님을 구출하러 온 걸 알면 이 놈들 이 멍청한 주인님을 인질로 잡고 우릴 협박할 것이 뻔한데......이럴 때 는 조용히 입 다물고 저항 하는 마지막 한 놈까지 잠재워 버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야." "현명하다기 보다는......너 다운 방법이겠지." 카넬리안의 말에 틀린 건 없었지만 전원 전멸시키는 것이 현명한지는 생각해 봐야할 문제였다. 그나마 상트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최소한 누굴 죽이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결국 그들은 그런 식으로 통로를 막고 있는 나무문까지 도착했다. "하아. 문이라. 여기서부터 살인청부길드입니다......라는 건가?" 그때 카넬리안과 시오의 뒤에 있는 두꺼운 격문이 내려오며 닫혔다. 악당 들이 자주 하는 특색 없는 함정이었다. 벽에 걸린 하나의 촛불만이 희미 하게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안그래도 답답한데 문은 왜 내리고 난리야. 이러면 자기들만 손해... ...아앗!" 그녀는 무언가 날카롭게 날아오는 것에 몸을 숙이며 피했다. 닫힌 문에 차앙 소리를 내며 단도가 박혔다. 엄청난 빠르기였다. '빠르다. 누구지?'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재빠르게 뒤돌아 보았다. 그 앞에 서 있는 나무 문을 열고 나온 톨베인이었다. "무슨 일로 우리 길드를 덮치는 거냐. 어차피 죽을 테지만 그 이유는 두목이 물어 보라더군." 가죽 혁대에서 새로운 단도를 뽑아든 톨베인은 조금의 살기조차 보이지 않는 차가운 태도로 카넬리안과 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너희들 몰아내고 우리가 장사 한번 해보려고." 그녀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며 톨베인을 보았고 시오가 또 한 숨을 내쉴 때 톨베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옮겼다. '인간치고는......굉장히 빠른 녀석인데?' 톨베인이 몸을 움직이며 던진 단도는 벽에 걸린 촛불을 잘라버렸고 곧 내부에는 어두움이 깔렸다. 카넬리안은 당연히 어둠 속에서도 쉽게 상대 를 볼 수 있었지만 톨베인의 움직임은 그녀를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상당히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런 자갈흙이 가득한 바닥에서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물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녀석이 길드의 살수인가? 어리지만......대단하네.' 톨베인은 카넬리안을 향해 두 개의 단도를 던졌고 시오를 향해 하나를 던 졌다. 셋은 거의 동시에 목표를 향해 날아 들었다. 카앙! 카앙! 카앙! "죽을 뻔 했잖아 이 자식아!" 라는 시오의 목소리와 함께 내부에 온기 없는 빛이 퍼졌다. 카넬리안이 손바닥을 펴며 만든 작은 발광체 덕분이었다. 톨베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뒤에서 물러났고 카넬리안은 그 발광체를 공중에 둥둥 띄 우며 말했다. 그녀의 주변의 벽에는 튕겨나간 두 개의 단도가 박혀 있었고 시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각도를 들어 단도를 막아낸 뒤였다. "나 화나기 전에 사라져 줄래? 이 도시에서는 누구 죽이고 싶지 않지만 한번만 더 나한테 저런 거 던지면 그 다음 상황은 책임 못 져." "......" 톨베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허리 뒤에 가로로 묶여 있는 단 도보다 세배 정도 긴 칼을 꺼내들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차가워 졌다. "지금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칼날을 팔목에 가져다 대며 자세를 잡은 톨베인은 천천히 카넬리안에 게 다가왔다. 그녀의 빈틈을 찾아보며 거리를 좁히려는 것이었다. 시오가 말했다. "어이 카넬리안. 저 녀석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죽이지 않고 쓰러 트릴 수 없는 상대라면......어쩔 수 없지."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톨베인이 튀어 올랐다. 기사라고 해도 믿을 정 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카넬리안의 목을 겨냥하며 파고 들었고 그녀는 왼 주먹으로 톨베인의 가슴을 찔렀다. 덕분에 톨베인은 저 멀리 날아가 쓰러 지게 되었다. 분명 늑골이 몇 개는 부러졌을 텐데 톨베인은 가슴을 쥐면서 도 다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너 괜찮은 실력이라는 건 알겠는데......꼭 그렇게 고집 부려야 겠어? 실력 더 키우고 날 죽일 계획을 세우는 게 어때." "돈을 받았으니까 너희를 죽이지 않으면 안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다." 톨베인은 가슴이 아픈지 계속 쿨럭이면서도 자기 최면과 같은 말을 중얼 거렸다. 눈빛에 비해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아 이였다. 시오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카넬리안!" "왜. 나 바빠!" "너 피 흘러." "얼레?" 시오의 말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목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붉은 피가 조금 묻어났다. 그녀의 주먹에 맞으면서 까지도 목에 낸 상처는 깊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놀라게, 그보다 화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큰일......날 뻔 했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눈꼬리를 조금씩 치켜 올리며 톨베인을 바라보았다. 두 손에서는 천에 싸인 미스트랄을 풀고 있었다. 톨베인은 다시 공격할 준 비를 했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카넬리안이었다. 톨베인은 자신 보다 도 월등히 빠르게 거의 날아들 듯이 닥쳐 오는 카넬리안를 보며 순간 공포 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부, 붉은 눈?' 톨베인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파란 색이었는데 지금 자신이 보는 카넬리안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지나가기도 전에 그녀의 미스트랄은 손에 쥐고 있던 톨베인의 칼을 쳐서 놓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그 칼날은 톨베인의 목을 향했다. 방어할 기 회 조차 없었다. "아악!" 톨베인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엄습해 오는 공포. 그녀의 강력한 기운이 숨이 멎을 것 처럼 온 몸을 눌렀다. 생각의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고들 하지. 톨베인은 순간 자기 자신에게 놀랐 다. '언제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해 봤으면서 죽을 때가 되니까 이렇게 무서 워 지는 건가? 비, 빌어먹을. 살고 싶어.' 며칠이 한번에 지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에 톨베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쓰러진 자신의 목을 냉정한 품위가 빛나는 미스트랄로 겨누고 있는 카넬리안 이 보였다. "네가 두려움에 몸이 굳지 않았다면 정말 널 죽일 수 밖에 없었어. 네 본능 에 감사해라." '푸, 푸른 눈? 어떻게 된거야. 착각이었나.' 톨베인이 보는 카넬리안의 눈빛은 다시 푸른색이었다. 카넬리안의 눈에 마 법이 걸려있다는 걸 톨베인이 알 리가 없으니 그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멍청한 자식! 그거 하나 못 죽이냐!" 톨베인이 들어왔던 문이 열리며 못 마땅한 표정의 두목과 부하 들이 나타났 다. 톨베인은 치욕적으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이봐 너." 두목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카넬리안을 가리켰고 부하 들이 그녀에게 아주 친숙한 사람을 끌고 나오자 카넬리안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이 놈을 찾고 있는 거지?" "이......이 멍청한 주인님아아아!!! 그 새를 못참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도 못하냐아! 내가 미쳐 정말!" 카넬리안은 누구보다 줄리탄에게 화내고 있었고 예의 거한의 굵은 팔목에 목이 감겨 있는 줄리탄은 미안한 표정으로 난처하게 웃을 뿐이었다. 시오 는 이 동굴에 들어와 세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 어. 거기 가만히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녀석의 목이 부러 지니까. 일단 그 칼들부터 바닥에 내려 놓으시지." 두목은 씨익 웃으면서 벌써부터 머리 속에선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미모를 가진 카넬리안을 어떻게 써먹을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경질 적 으로 바닥에 미스트랄을 내동댕이 쳤고 시오 역시 자신의 각도를 바닥에 버렸다. "자 이제 얌전히 여기로 와." "날 맘대로 해도 좋으니까 조건이 하나 있어. 저 분을 놔 줘."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길드 원들의 입에선 비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크하하하! 이 애송이가 애인인가? 웃기고 있네! 네 년의 선택권은 조금 도 없으니까 너나 하라는 데로 해! 아니면!" 두목이 흘낏 바라보자 거한은 줄리탄의 목을 졸랐다. 목이 막히며 얼굴 이 창백해진 줄리탄은 몸을 버둥거렸지만 그 힘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그것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다 죽여 버리겠어......" 그녀의 눈빛이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톨베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줄리탄은 그것을 보며 혼신의 힘을 다 해서 자신의 발 뒷축으로 거한의 무릎을 내리 찍었다. "으악!" 순간 자신을 조이던 팔목의 힘이 풀어자자 줄리탄은 이번에는 손등으로 상대의 얼굴을 올려쳤고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줄리탄은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자식이!" 놀란 두목이 바닥에 착지한 줄리탄을 향해 반월도를 뽑는 찰나 미스트랄 을 집어든 카넬리안은 순식간에 두목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놀라서 멈칫한 두목에게 그녀는 차갑게 속삭였다. "주인님이 아니라면 넌 죽었어." 그리고 카넬리안의 주먹이 두목의 얼굴에 날아들었고 그 거구의 몸은 공 중에 붕 뜨며 문을 부시고 날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녀가 세 명을 처리했을 때 나머지 하나가 당황하며 칼을 뽑았지만 "칼 버려. 아저씨." 역시 빠르게 다가선 시오의 각도가 목가에 다가오자 칼을 던지며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서 일어난 톨베인은 동료 들을 도와주기 보다는 자신의 작은 칼을 집어 들어 칼집에 넣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주인님. 다친데는 없어? 제발 나 걱정 좀 시키지 마!"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일으키며 그제서야 다행이라는 얼굴로 외쳤지만 화 가 나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푸른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줄리탄은 자신의 손등이 아픈지 쓰다듬으며 그녀를 바라보곤 미소지었다. "고마워 카넬리안." "으이구. 정말 말은 잘 하네요!"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더 고마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짜증내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웃음을 띈 것 같았다. "나한테도 고마워 해 줘 좀." 시오 역시 으쓱거리며 다가와서는 줄리탄의 어깨를 툭툭 쳤다. 3. "이봐요. 두목 씨." 결국 악날한 살인청부 길드원들은 한 방에 몰려 묶이게 되었고 카넬리안은 자신을 쏘아보는 길드 장(을 가장한 도적 두목)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탁하는 건 간단 해. 달라카트로 내려갈 배 한 척만 준비해 줬으 면 좋겠어. 아무래도 육로는 위험하거든." "흥! 내가 미쳤, 우욱!" 그녀는 듣기 싫은 듯이 싸늘한 얼굴로 두목의 얼굴을 걷어차 버렸고 다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지 말고 소원 한번 들어주세요. 죽.기.싫.으.면." "이, 일단 이걸 풀어주, 어억!" 그녀는 일어서는 두목을 다시 걷어찼다. 두려운 눈으로 모른 채 하며 카넬리 안을 흘낏 흘낏 바라보는 길드 원들. 줄리탄과 시오는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적이 아니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딱 한명만 풀어 줄테니까 후딱 배 한척 구해 오라고. 아니면 여길 불질러 버리고 서로의 몸이 익어가는 걸 지켜보게 만들어 줄테니까. 아참 그리고 여자 옷 한벌, 남자 옷 두벌. 최고급으로. 알아 들었어?" 그러면서 카넬리안은 구석에 묶여 있는 톨베인을 가리켰다. 톨베인은 반항 적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오야. 제 좀 풀어 줘." "왜 하필 가장 센 녀석을?" "흐응. 귀엽게 생겼잖아." "그게 이유가 되냐!" 왠지 화가 나서 외친 것은 줄리탄이었다. 톨베인은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카넬리안이 확 껴안아 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계속 그를 바라 보았기 때문에 톨베인 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카넬리안. 제발 진지하게 좀 해주라." 줄리탄은 되찾은 인피타르의 칼집을 집어 들고 도두(刀頭)로 이마를 톡톡 쳐대며 혼잣말 처럼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저런 아이 보면 장난 쳐 주고 싶어서." "심보 한번......" "난 어때? 나도 이 정도면 귀엽지 않아?" 이상한 것에 인정 받고 싶어하는 시오가 카넬리안 앞에 나서며 포즈를 취 했지만 그녀는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별로 편식은 안하지만......느끼한 건 싫어." 덕분에 시오는 아마릴리스를 외치며 문 밖으로 뛰쳐 나가 버렸다. '저런 놈 들에게 잡혔단 말인가.'라는 탄식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길드 일 원들. 카넬리안이 줄리탄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인님. 우리 배 구할 때까지 두목 놀이나 할까?" "그게 뭔데." 줄리탄은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간단해. 이 녀석들을 자신의 인생이 저주스러울 때까지 마구 부려먹는 거야." "너나 해라......" 줄리탄은 가능한 한 빨리 달라카트로 내려가고 싶은 기분을 충동적으로 느끼며 톨베인을 묶어 두었던 줄을 풀러 주고 있었다. "에에. 심심하단 말야. 어차피 배 구할 때 까지는 여기 신세 좀 져야 하니까 손님 대접 받고 싶어." 그녀가 앙징맞게 칭얼대며(어울리지 않게 스리......) 말하자 줄리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살인청부길드의 식객이라. 남들이 보면 한패인 줄 알 것 아냐. "우리가 당한 것을 알면 정교회에서 너희들을 그냥 놔 둘 줄 알아! 저주를 내릴 꺼다. 큭큭큭큭큭크, 쿠어억!" 두목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정교회를 들먹이다가 카넬리안이 조용히 의자 를 들어 내리찍자 잠들어 버렸다. 박살나는 소리에 놀라 주저앉은 건 줄리 탄이었다. "카, 카넬리안. 죽일 셈이야?" "......난 더러운 권력에 빌붙은 놈들 싫어해." 그녀는 부서진 의자 조각을 휙 던지며 말했다. 무시무시한 여자라는 사실 을 재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묶여 있는 자들을 둘러보며 비꼬듯이 말했다. "너희들 신앙심이 대단한가 보구나. 정교회가 구세주 처럼 도와주리라 믿고 있으니까. 아니면......그 놈의 정교회도 너희 만큼 썩었기 때문이겠 지." 그녀는 뭐가 화가 나는지 부서진 조각들을 발로 걷어차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4. "흐음. 그렇게 되었군. 경솔한 네 실수를 혼내주고 싶지만 어쨌든 좋은 경 험을 했다. 다음 부터는 주의하도록. 군에서의 실수란 너 혼자만의 목숨으 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단호한 어조로 아들 키마인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헤스팔콘의 군 총사령관 아취발트 이젠그람이었다. 백발의 노장인 그에게 키마인은 도착하자마자 예 의 도시에서 겪었던 일들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보고했고 아취발트는 별 다 른 책망없이 무사히 돌아온 아들을 반겨 주었던 것이다. 딱딱하고 완고한데 다가 뼈 속까지 군인인 그였지만 뒤늦게 본 외아들에 대해서는 내심 애지중 지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키마인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최고 상관인 아취발트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 했고 그 옆에 서있는 호이젠 역시 마찬가지 였다. 아직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호이젠은 예전 자신의 테이머였던 아취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키마인 님은 아취발트 님처럼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 분명 합니다." "나 같이 완고한 늙은이가 될 필요는 없어." 아취발트가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말을 던질 때 문을 열고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칼 같은 군례로 아취발트 앞에 경례를 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상트의 관문 봉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헤스팔콘 정교회에서 상트의 항구와 달라카트와의 국경통행로를 막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상트가 군대의 무력으로 통제되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며 정교회를 모독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이유 입니다." "난 황제 폐하로부터 붉은 눈의 씰을 잡기 위해 달라카트로 통하는 모든 육로와 해로를 봉쇄하라는 칙령을 받고 이곳에 왔다." 아취발트는 자신의 임무를 재확인하려는 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정교회는 폐하의 칙령을 거부할 셈인가? 그들의 그러한 말은 이유가 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상트의 모든 관문을 봉쇄하라." 그것은 거부가 있을 수 없는 군인으로서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보고자는 좀 당황하며 부연했다. "그게......정교회 본부에는 제국안전공안부의 특무대가 있고 관문을 봉쇄 하려 한다면 특무대와의 무력 충돌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특무대가 언제부터......교단의 사병들이 되었나." 아취발트는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고개를 들어 병사를 바라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가 아닌 이상 누구도 관문 봉쇄 명령은 거둘 수도 거부할 수도 없어. 설사 특무대라 하더라도 무력 충돌은 불사한다. 제 7 국경 수비대로 하여금 관문 봉쇄를 실행해라." "옛! 알겠습니다!" 본래 아취발트는 가르바트의 국경선을 지키고 있던 '관문의 사자' 였다. 군인과 기사로서의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황제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주저 없이 말할 정도로 완고했기 때문에 일전 정교회 에서 보낸 선물(의 탈을 쓴 뇌물)도 돌려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상트 시민으로부터의 탄원이 있었습니다." "으음?" 병사는 다음 보고를 그대로 이어 나갔다. "상트에는 살인청부길드가 있어 도시 내에서 폭력과 청부살인을 일삼고 있다고 합니다." "살인청부길드? 그런 끔찍한 범죄조직이 상트에?" 아취발트는 이전에는 제국에 북쪽에만 있었기 때문에 상트에 대해서는 처 음이었다. 그는 도시 내부에 살인청부조직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한듯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병사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인가? 정말 그런 반제국적인 놈들이 있단 말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확실 합니다." "이거야 말로 불경스러운 일이로군. 이 도시 그것도 정교회의 본부가 있는 곳에 살인청부조직이라니. 대체 이 놈의 도시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렇다. 이젠그람 총사령관이 임시 거처는 상트였던 것이다. 결국 키마인과 호이젠도 상트에 있는 것이고 그것을 카넬리안이 알게 된다면 몹시 피곤해 질 것이다. 아취발트는 노기에 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키마인!" "예. 아버지.....아니. 이젠그람 각하!" 아버지가 상관이라니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 키마인이었다. "너도 이제 어엿한 헤스팔콘의 기사다. 군인으로서 한 몫을 해야 겠지. 제7 국경 수비대, 제3 팔랑기스의 지휘권을 줄테니 가서 그 범죄조직을 소탕해라! 백성들의 적을 소탕하는 것도 군인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 이지." 팔랑기스라는 것은 헤스팔콘 군 체제로 볼 때 50인의 규모로 되어 있는 집단을 일컷는 말이었다. 아직 대군을 통솔한 능력은 부족한 키마인으로 서는 팔랑기스의 리더가 된다는 것 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임에 물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사 작위를 받은 이후의 공식적인 첫 임무였던 것이다. 키마인은 주저 없이 외쳤다. "옛! 명령 완수 하겠습니다! 가자. 호이젠." "예. 저의 테이머시여." 키마인은 제7 국경 수비대의 휘장이 수놓아져 있는 망토를 휘날리며 호 이젠과 함께 문 밖으로 나섰다. 기사로서의 도리, 군인으로서의 임무 그 리고 아들로서 인정받기 위한 그의 눈빛은 긴장과 자부심에 가득 차 있 었다......라고는 하지만 살인청부길드에서 줄리탄 일행을 만났을 때도 그 눈빛 지킬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아무튼 기사와 군인의 길 이란 멀고도 험하다. -Blind Talk 빨리 올립니다......비교적. 일단 책 보내드린 분들, 잘 받으셨는지요. 어서 3권 원고 보내야 하는데......아직 갈 길이 머네요. 게다가 3권에선 통신본과 출판본의 차이도 좀 많이 두려고 생각하고 있고. 아 지금 난영님으로부터 메일 받았습니다.^^(답장 쓰느라고 잠시 쓰윽.) 돌아왔습니다... 역시 읽어주시는 분들의 관심이란 언제나 과분하지만 즐겁습니다. 나우와 천리안에서도 고마운 감상평을 써주셔서...T_T (하이텔에선 아직 감상이 없음...아아.) 그리고 줄리탄을 좋아하는 분들도 계셨다니 기쁩니다!! 실은 저는 전에도 말했지만 리이나 젤리드, 세이드 같은 캐릭터 들을 좋아 합니다만.....줄리탄이 '전혀 멋진 주인공 답지 않다.'라는 사실에 좀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나도 나중에 캐릭터 인기투표 같은 걸 해볼 까... 다른 분들이 하는 것을 보고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당장은 열심히 쓰는 것 에만 집중하려 합니다.(무엇보다...투표율이 저조하지 않을까나.) 최근에는 틈나는 시간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있습니다만... 몹시 훌륭한 글이라서 사실 단번에 읽어버린 셈입니다. 남녀노소 불문하 고 자신의 환경에 맞춰 느끼는 바가 있을 것 같아서 추천 합니다. 70년대 1쇄를 찍었던데 역시 좋은 책은 오래 갑니다. 또 최근에는 반 우연히 영화 The cell를 보았습니다. 본래 미키 루크를 좋아했고('엔젤 하트'에서 부터 좋아했음.) 카피멘트는 싫지만 포스터 가 좋아서 보려고 했는데 이미 대부분 간판 내렸고 The cell을 만든 감독 이 비주얼 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을 들은 바가 있어서 단숨에 표를 끊었습니다. 영화 내내 그 감독의 표현주의적인 고딕한 스타일에 흠뻑 취해서 드라마가 지루함에도 불구하도 감동 깊게 봤는데 영화를 나오는 대부분 관객들의 반응 은 "쳇! 뭔 영화가 이래! 돈 아깝다 야!" 아아 역시 사람들은 십인십색이라는 걸 재확인 했습니다. 그럼 수능 보시는 분들 좋은 결과 거두시길 기원하며(제 동생도 이번에 보기 때문에... 전 6년전에 봤지요. 7년전이던가?) 다음 편을 구상하며 이만 사라집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멋대로 PROFILE> Entry#3 리이 디트리히 1.왜 기사가 되었는가?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라고 둘러대고 있지만 사실 디트리히 가문 자체가 기사 가문인데다가 '그 남자' 때문에 기사가 되었고 최근 집어 치웠다.) 2.왜 그렇게 재미 없게 사는가? :나름대로 재미있는데요? 3.취미는? :글 중에도 있지만 책 읽기와 와인 수집. (사실 그녀는 좋은 와인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편이다. 덕분에 와인을 모아두긴 커녕 죄다 홀짝 홀짝 마셔서 비워 버린다. 의외의 알콜 중독 증세가... 와인에 대해서는 정통해서 미각과 후각은 왕실의 소믈리에 급이고 콜크 마개의 냄새만으로도 원산지와 와인의 저장년도는 물론 과망간산칼륨의 함유비율까지 맞출 수 있을 정도이다. 적포도주와 로제 와인을 특히 좋아해서 현실이었다면 보르도 샤토 부터 보졸레 누보까지 다양하게 그 맛을 즐겼을 것이며 토케이 같은 백포도주도 거절하지 못 한다. 예전 리센버러 시가지에서는 와인 가게의 주인과 대화하고 있는 리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강우량이 적당하고 일조량이 많은 곳을 들린다면 '여기서는 좋은 포도가 많이 자랄 꺼야.'라는 생각 부터 할지도 모른다.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지만 의외로 자연주의적인 필체를 좋 아해서 아마 버지니아 울프나 잭 런던의 글을 감동깊게 봤을 수도 있 다.의외로 반 부르주아틱 하다.) 4.왜 레이피어 인가? :기사 수행 중에 제게 맞는 걸 찾은 거에요...... (그녀의 레이피어는 현실적으로 말하다면 16세기 스위스풍에 가까운 것으로 구형의 pommel과 ricasso에서 곧장 이어진 얇고 폭의 변화가 거의 없는 ri- dge와 함께 quillion이 없는 대신 황금색 청동으로 주조된 화려한 guard가 손을 보호하고 있다. grip은 손질된 나무로 이뤄져 있으며 지금까지 당골 대장간에서 네번 교환했다. 그 grip에 리센버러의 심볼을 세기는 일은 이 카테스가 대신해 준다. 그녀는 조각에 재능이 없다. 검이 은색의 광채를 가지는 이유는 검신의 제질 탓도 있지만 많은 왕실 기 사들이 그러하듯이 크롬으로 도금했기 때문이다.(대단한 도금술 아닌가?) 당연히 자주 벗겨지기 때문에 그녀는 자주 도금을 반복하고 있다. 기사작위 수여식 때 자신의 스승이 하사한 것이기 때문에 예검과 야전검 모두로 사용 하며 무척 아끼고 있으며 길이 잘 들어서 이카테스의 부여 마법도 잘 머금 는다. 보검까지는 아니지만 당연히 최고급이기 때문에 무게 중심도 좋지만 보통 사 람이 들기에는 꽤 무거운 편이라서 그녀도 익숙해 지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이 작품의 기사들은 거의 금속 갑옷을 입지 않고 검도 시대 흐름과 무관하게 제 각각이라서 자신의 레이피어가 전투시에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아 치를 떨고 있다.) 5.버릇은? :특별히...없어요. (라고는 하지만 그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뭔가 불안할 때면 자신의 머리 카락을 매만진다. 젤리드와 말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서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기도 한다.) 6.이카테스는 어디서 얻었어요? :기사되고 일년 후에 우연히 얻은 거에요. (이카테스는 왠만한 기사들이 와도 절대로 깨어나지 않는 대단한 씰이었는데 리이 역시 포기하고 돌아갈 때 이카테스가 졸 졸 따라와서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그때 너무 놀라서 아명인 카리나라고 말할 뻔 했다.) 7.젤리드와의 관계는? :악연..... (같이 기사수련을 보내면서도 젤리드는 쉴새 없이 리이를 가지고 놀았다. 아주 가끔 푸근하게 대했는데 그것에 속아서 동거까지 하게 된 불행한 여자. 그럼에도 지금 그때를 생각할 때 희미하게 웃는 것은 보통 여자의 미련이다.) 8.기사수련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사도를 익히는 것......이 아닐까요? (기사수행이란 실은 별로 멋진 것이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수 행은 초기에는 검술보다는 성이나 궁전 내에서 잡일 등을 하고 기사들의 시중 을 들며 기초를 닦는데 가장 끔찍한 것은 요리였고 그녀의 스승도 그녀의 요리 만은 먹을 용기가 서질 않았을 정도이다. 결국 그녀는 지금도 요리를 못한다. 줄리탄이 요리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몹시 부러워 했을 것이다. 후에 종자가 되거나 수행자가 되어 야형을 할 때도 요리는 어쩔 수 없이 젤리드가 담당했다.) 9.좋아하는 이상형은? :아,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건. (실은 분위기 있는 연상을 좋아한다. 아마 오마샤리프나 엔서니 홉킨스, 숀 코넬 리, 스티브 맥퀸, 험프리 보가드 같은 사람이 40-50대 였다면 몰래 그들의 사진을 수첩 속에 넣어 두었을지도 모르지만......그녀는 실은 아직 일편단심이다.) 10.앞으로 대체 어쩔 생각인가! :달라카트로 내려가면서 생각해 보려 해요. (실은 그녀는 젤리드와 함께 달라카트로 내려가는 중이다. 부상이 심해서 마차에 의지하고는 있지만 머리 속은 여러 생각으로 복잡하다. 와인 하우스라도 경영해 볼까...생각도 했지만 그녀는 현재 빈털털이다. 먹고 살자면 돈되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끼? 젤리드와 함께는 사양. 아무리 돈을 모아와도 그가 있다면 절대 쌓 이지 않을 것이다.) Love has it's way And like a butterfly You're heading for Another flower. Phonecall from home I'm longing for your voice We'll be together again In a long distance call I whisper my hello 'Cause I'm missing you e-mail : billiken@hananet.net Ranum의 PhoneCall을 들으며......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가사와 랜엄 특유의 슬프고 도회지적인 회색빛 음색이 질리지 않고 계속 듣게 만드네요. photopragh와 함께 좋은, 정말 좋은 음악.) 『SF & FANTASY (go SF)』 11334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9-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18 19:43 읽음:28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9-2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관련자료:없음 [5638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18 04:27 조회:298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오크들은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가만히 있을 때도 항시 자기 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런 오크들에게 눈을 흘기며 속닥거리는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과묵하기가 목석 같은 트롤들이 태양볕에 눈살을 찌푸리며 사열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일렬로 서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것 같은 오거들이 모두 자리에 주저 앉아 입에 연신 먹을 것을 담고 있었고 또 그 뒤에는....... "거참 많이도 긁어 모았네. 저걸 군대라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들 뿐일껄?" 4층의 응접실 창가에 기대어 창밖 연병장의 '자유분방한' 사열을 하고 있는 이종족들을 허탈한 표정으로 내려보던 젤리드의 말이었 다.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종족들에게 인간의 기준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우릴 도와주는 것이니 고마워 해야죠." 갑자기 끼어든 장난 스러운 목소리 "뭐. 이제 우리 나라가 친이종정책을 펴고 있다는 건 선전하지 않 아도 만천하가 알겠네. 선전비 굳었다! 이얍!"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잘도 늘어 놓는 세라피스를 바 라 보았다. 황제라는 작자가 꼭 말을 해도......왜 이 성에는 이런 사람들 밖엔 없는 걸까. 나도 뭐 남들이 보면 이상하다 하겠지만.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9-2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Sub title : Rock is Dead, Love is Dead, God is Dead. 1. "나도 이 도시 구경하고 싶어!"라는 시오의 울부짖음을 "놀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라는 윽박으로 대꾸한 뒤에 결국 시오는 길드에 묶여 있는 도적배 들을 감시하기로 하고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톨베인을 따라 상트 의 항구로 나서게 되었다. 해안 도시인 상트에서는 당연하게도 짠 바다 내음이 느껴지는 것이 어촌 출신인 줄리탄의 향수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줄리탄은 이 도시에 대한 강한 거부감부터 피할 수 없 었다. '확실히 구경할 만한 도시는 아니로군......' 톨베인을 뒤따르던 줄리탄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것에 죄스러움을 느낄 만큼 '성스러운 사원도시' 상트의 몰골이란 눈에서 악취를 느낄 정도. 청교도가 아니라도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수치심을 태워버린 여 성들의 끈적이는 호객행위에는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게다가 곳곳에 더럽게 뒹구는 쓰레기, 시끄러운 욕설, 황폐해진 무덤 같은 판자집들 ,그 집 앞에서 술에 쩔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사내들 여자들, 그런 것들이 시선 속에 뒤섞여 자연이 주는 바닷내를 완전히 망각하게 만들 정도였던 것이다. 갑자기 불편한 상념에 빠져 있던 줄리탄의 팔 을 잡은 것은 작은 키의 엘프였다. "저, 싸게 해드릴께요." 홍등가에 팔려온 엘프들을 보는 일이란 흔한 상황이지만 줄리탄은 깜 짝 놀랐다. 아무리 엘프가 외형으로는 나이를 쉽게 판단할 수 없다지 만 너무 어렸다. 분명히 노예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일 거다. 그녀는 버릇처럼 줄리탄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잡은 팔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 저......저희는 지금......" 머뭇거리는 줄리탄에게 다가온 것은 톨베인이었다. "내 동행이야. 꺼져." 차갑게 말하는 톨베인을 그 엘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겁을 먹으며 줄리탄의 팔을 놓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아마 톨베인은 이 지역 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좀 부드럽게 대해 줄 수 없냐. 불쌍하잖아." "시끄러워." 줄리탄의 말을 막아버리며 톨베인이 즉각 대답했다. 나지막한 윽박과 같다. 그리곤 거친 말이 쏟아져 나오려는 자신의 입을 스스로 막으려 는 것처럼 예의 담배를 말아서는 입에 물었다. 2. 홍등가를 빠져 나온 일행은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도시의 광장은 꽤 컸는데 시민들이 잔쯕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무엇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 같다. 왠만하면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정교회 간부 정도 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일행은 잠시 멈춰서게 되었다. "신께서는 언제나 너희를 굽어 살펴보고 계신다. 너희의 신앙심을 항시 바라보고 계신 것이다. 알겠느냐! 신앙심이 부족한 자에겐 처 벌이 기다리며 신을 믿는 자에겐 축복의 기회를 내려주실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제물과 너희의 목숨, 그 숨소리 하나 까지도 모두 위 대하신 벨티고 님의 것이며 그것을 너희에게 빌려준 이상 너희는 언제나 벨티고 님을 경배하고 모든 일을 할 때 교리에 거스름이 없 어야 하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헌납함에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 다. 곧 그 분의 재림이 있으실 것이며 그때가 되면 신앙심이 없는 이교도의 무리들은 모두 불타 죽어 사라질 것이다!" 몹시 길게 뽑아 내는 그 종교 지도자의 말을 톨베인은 짧은 감상으 로 평했다. "지랄하네." "어라? 너 저 녀석들 밑에 있지 않아? 독실한 신자 아니었어?" 톨베인의 의외의 반응에 놀란 카넬리안의 말이었지만 그는 코웃음 을 칠 뿐이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어떤 미친 작자가 믿어 주겠어?" "그으래? 그럼 왜 사람들이 그 개소리를 왜 저렇게 따르고 있는 거 지?" "저것 때문이지." 연설이 끝나고 군중들에게 너덧대의 수레가 오고 있었다. 수레에선 음 침한 냄새가 멀리 있는 줄리탄 일행에게까지 풍겨오는 주먹 크기의 과일 들이 쌓여 있었다. 칙칙한 초록색의 그 과일은 일단 무지하게 맛없게 생 겼다. "저게 뭐야?" 그 수레 주변으로 몰려가면서 아우성치기 시작한 사람들. 톨베인은 짧게 대답했다. "신의 음식.....이란 말은 개소리고 마약 성분이 강한 과일이지. 정교 회 본부 지하에서 기르고 있을 껄?" "으음. 뻔하군." 카넬리안은 자신들이 벌어 들인 돈주머니를 건내주며 그 과일과 교환하려 서로 밀쳐대고 있는 사람들의 광기어린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고는 독설이 쏟아졌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카넬리안의 낭랑한 목소리 는 명확하게 들렸다. "원망할 신도 죽어버린 이 세상에서 저 놈들은 신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권세를 누리고 있군. 마치 시체들을 부리는 마술사처럼. 광인이 그린 그림 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아아 정말이지 인간들이란......" "신이 죽었다고? 무슨 의미야."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잡아 먹을 듯한 군중들에게서 시선을 피 하며 카넬리안에게 물었다. 그녀는 표정을 숨기려는 듯 방긋 웃으며 줄리 탄에게 말했다. 아무리,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카넬리안의 눈동자는 지금 슬프다. "신의 시체를 본 적 있어? 난 봤거든." 줄리탄은 허탈하게 피식 웃어버리려고 생각했지만 그와 반대로 표정이 굳으며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말은 가끔 칼날처럼 마음의 한토막을 아 프게 토막내는 것 같아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여자의 커다란 비명소리가 광장을 찢었다. 머리체를 잡힌 채 중년 의 남자에게 끌려 오는 소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끊임 없이 비명 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 사내는 소녀의 뺨을 때릴 뿐 끌고 가길 멈추지 않 았다. 줄리탄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자는 예의 간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아주 충성스럽게 외치는 것이었 다. "이 아이를 벨티고 님에게 바치겠나이다!" "저 새끼. 언젠가는 지 마지막 남은 딸년까지 팔아 먹을 줄 알았지." 톨베인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그 살찐 중년을 노려 보았다. 그 다음은 뻔했다. 비명을 지르던 그 소녀는 특무대에게 이끌려 가기 시작했고 그 대가로 딸을 팔아 먹은 자가 받은 것은 50개의 과일 무더기였다. 냉소 적으로 입꼬리를 올린 톨베인이 카넬리안에게 악질적으로 말했다. "저 놈들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알고 싶지 않아."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톨베인은 상트의 참 맛을 알려주려는 듯이 그녀가 어떻게 되는지 말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짐승처럼 끌려 가는 여자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카넬리안의 눈동자가 타오르는 것 처럼 붉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톨베인은 순간 그녀의 살기가 자신의 목을 죄어 오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카넬리안, 괜찮아?" 걱정스런 줄리탄의 얼굴. "확실히......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건 괴로운 일이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푸른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3. 이후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삼십 여분 이상을 더 걸은 뒤에야 그들은 상 트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술집과 홍등가 등이 어지럽게 뒤섞 여 있는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여행지로 이런 곳을 선택할 사람도 없고 뒤가 구린 목적을 가진 자가 아닌 바에야 굳이 여기로 배를 몰아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주인님. 항구 보니까 고향 생각나?" "내 고향 키오네는 작아도......적어도 술냄새는 안나."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겍스 패거리라 불리는 건달 집단이었다. 당연히 정교회의 묵인하에 암시장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가기 위해 일행 은 항구의 미로 같은 뒷골목으로 들어가 어수선해 보이는 가게 앞에 서 있는 깡마른 체구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 가게는 문신을 해주는 곳 이었다. "톨베인 아냐. 여기에 뭔 일로 왔냐?" "네 놈에 이유 들려줘 봐야 입만 아프니까 겍스나 불러." 온 몸을 문신으로 가득 채운 그 자는 옆의 줄리탄과 카넬리안을 훌터 보고는 다시 톨베인을 바라보았다. "이것들 노예로 팔게? 여자는 비싸게 받을 것 같지만 남자는...우욱!"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톨베인은 그 자의 배를 걷어찼다. "누가 너보고 그 개똥같은 머리로 알아 맞춰 보래?" "이 개새....." 허리춤의 단도를 뽑으며 일어서는 그 자의 목에 순식간에 톨베인이 뽑은 칼이 도착하자 그는 단도를 내리며 비굴하게 웃었다. "이, 이봐. 톨베인. 장난이었다고. 너와 싸울 정도로 난 바보아냐." "이런 양아치 놈들은 이렇게 다뤄야 해." 톨베인은 자신을 물끄럼이 바라보고 있는 카넬리안에게 조금 자랑스 럽게 말했지만 그녀는 시큰둥한 얼굴로 툭하고 대답했다. "잘했다고. 칭찬해 줄까?" "야! 톨베인! 우리 애한테 칼 들이대고 있는 거냐 지금!" "겍스....." 톨베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어딜봐도 불량배인 자들 을 바라보곤 곧 칼을 집어 넣었다. 겍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톨베인을 꼬아보고 있었고 톨베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겍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밀항선에 태워 줘. 달라카트 행. 가장 빠른 걸로." 겍스는 그 말을 들으며 손을 내밀었다. 톨베인은 한숨을 내쉬며 품 속 에서 예의 금화 두닢을 꺼내 손에 올려 놓으며 짜증나는 듯 중얼 거렸 다. "제길. 왜 내가 내야 하는 거야." "이걸로는 부족한데?" 겍스는 금화들을 서로 부비며 눈 앞에 가져다 대었다. "한 사람당 금화 한닢. 충분하지 않아?" "그게 말야......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말야." 겍스의 말은 의외였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는 이 놈의 도시에 흉흉 한 일이라면 뭐가 있을까. 겍스는 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붉은 눈의 씰 알지? 지금 헤스팔콘이 그 씰 잡으려고 난리잖아." "얘기는 들어 봤는데......어?" 톨베인은 갑자기 놀라며 카넬리안을 돌아 보았다. 왜 그 생각을 못한 거 지? 어쩌면 이 여자가...... "난 파란 눈이야. 너 색맹이야?" 카넬리안은 쌀쌀맞게 말했다. 의심스런 눈초리의 톨베인. 겍스는 헛기 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군대가 상트를 장악하려 하고 있어. 관문을 봉쇄한데나 뭐래나. 뭐 정교회 놈들이 지들 돈줄 끊기니까 봉쇄하게 놔둘리가 없지만 그래도 들리는 말에는 헤스팔콘 총 사령관이 지휘한다는데 조용히 끝나진 않을 껄? 위험 수당 좀 줘야 겠어. 군대가 들이닥칠 수도 있으니까 말야." "별 거지 같은......" 톨베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품속의 나머지 금화 한닢을 더 줬고 그제서야 겍스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반면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몹시 머리 속이 복잡했다. 일단 관문이 봉쇄되면 도시 안에 묶기게 되는 것 이고 총 사령관이 여기에 왔다면 그의 아들 키마인도 같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겍스는 실실 웃으며 톨베인에게 말했다. "너희 길드도 조심하는게 좋아. 까놓고 말해서 범죄 조직 아냐 너희? 뭐 정교회가 뒤를 봐주고는 있지만 조심해서 손해볼 건 없잖아?" '벌써 이 여자 손에 피박살났다 이 자식아.....' 톨베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때 겍스의 부하 중에 하나가 카넬리안에게 다가가며 지저분한 손으로 그녀의 검을 머리칼을 만지려고 한 것이다. 아무튼 카넬리안은 어디를 가 도 미모 하나만으로 9할의 남자들은 녹여 버릴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성 격이지만. "이야아! 이 여자 괜찮은데! 어때 우리에게....." 카넬리안이 머리칼로 향하는 그의 손을 조용히 잡자 그는 그녀가 자신 에게 관심있는 줄로 대단한 착각을 하며 그녀에게 이번에는 얼굴을 들이 대기 시작했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눈썹이 줄리탄의 눈에 몹시 불안하게 보였다. "나하고 한번 어때. 얼마 원해?" 그녀는 대답 대신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조용히 힘을 주었다. 위협 같은 미소를 동봉하는 것도 잊지 않고. "우아아아악!" 압착기에 손이 빨려들어 갔을 때처럼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며 발광 하던 그를 그녀가 놔준 것은 손가락 뼈가 세개 쯤은 부러진 뒤였다.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다소곳이 말했다. "아팠다면 미안해요. 제가 요즘 호신술을 배우거든요." 호신술 보다는......차라리 차력에 가까웠다. 줄리탄이 보기에 말은 안해도 아까부터 카넬리안이 굉장히 기분이 나쁜 것 같았는데 결국 여 기서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주 다행이도 그녀의 눈은 아직 파란색 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 눈이 붉게 변하는 순간이 겍스 패거리 멸망의 날일 것이다. 아무튼 치료비를 요구하는 그 불량배의 면상에 톨베인이 주먹을 날려 코뼈까지 주저앉게 만든 뒤에 할 말을 잃은 겍스를 뒤로 하고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길드로 향했다. 4. 불행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한 사 이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시오가 묶여 있는 길드원들 앞에서 자신의 각 도를 뽑으며 지겹게도 자랑을 늘어 놓고 있을 때였다. "국경 수비대다! 모두 꼼짝마!" 문을 박차며 밀려 들어온 자들은 모두 헤스팔콘 국경 수비대의 검은 색의 금속제 경갑옷을 입고 있었다. 몹시 실용적으로 만들어 일체의 장식도 찾아 볼 수 없는 그 갑옷에는 검은도료가 두껍게 발라져 있어 빛을 반사하지 않기 때문에 야전에서 주로 쓰이는 군용갑옷이었던 것 이다. 잡혀 있던 대 살인청부길드 두목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 놈이 우릴 죽이려고 해요! 살려 주세요!!!" 시오는 엉겁결에 두목을 주먹으로 내리쳤고 불쌍한 두목은 하루에 세번 기절하는 기염을 토했다. "모두 체포해. 반항하는 자는 군법에 의해 즉결처분 하겠다!"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들어온 자는 키마인과 호이젠. 시오는 자신을 잡아 누르려는 국경 수비대와 영문도 모른 채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동안 키마인과 시오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 에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오 씨......당신이 왜 이 곳에......" "키마인 경......당신이야 말로 왜 여기에......" 난감한 표정의 호이젠. 그는 경험을 통해 이미 알 수 있었다. 살인 청부길드를 이 지경으로 만든건 카넬리안이라는 것을. 여기서 머뭇 거리다가 카넬리안의 정체가 밝혀지면 뒷 일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 다. 호이젠은 주인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충직하고 머리 좋은 씰의 표 본으로서 재빠르게 둘러댔다. "시오 님께서 벌써 이 범죄자 들을 포박했군요!" 호이젠은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시 오를 바라보았고 군인들과 엉켜 있던 시오 역시 갑자기 고개를 끄덕 이며 매우 어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하하하! 이거 내가 먼저 해결했는걸! 아하하하......" "아니에요! 이 놈들이 다짜고짜 여기에 쳐들어 와서는!" 억울해서 외치는 길드원들. 사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그들이었다. "닥쳐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키마인이 외쳤다. 그는 시오에게 다가왔다. "그 분을 풀어줘라. 제국의 귀감이 되는 훌륭한 분이시다." 자랑스런 국경 수비대는 뭐가 뭔지 몰라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오를 풀어 주었고 키마인은 시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얼떨결에 자신도 무릎을 꿇는 시오. "귀하의 용기 있는 행동에 전 군을 대표하여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미숙한 기사 저 키마인은 시오 씨의 용기에 깊게 감동 받았습니다." 키마인은 예의바른 성격에......단순한 남자였다. 리이하고 붙여 놓 으면 딱 어울리는 콤비가 될 것이다. 시오는 갑자기 어깨를 쭉 펴고 일어서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와하하하! 이런 청부살인조직을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지요! 뭐 키마인 경께서 나설 것도 없었습니다." 시오는 자랑하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키마인은 일어서며 시오의 양 어깨를 잡고 감동 받은 얼굴로 말했다. "저는 번번히 당신들의 신세만 지는 군요. 저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키마인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 카넬리안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같이......" 줄리탄은 불쌍하게도 언급조차 안되었다. 키마인은 뭐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좀 숙이며 눈동자를 올려 시오를 바라보았고 시오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달라카트로 도망치려고 밀항선을 준비하기 위해 항 구로 갔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 그녀는 말이죠. 그러니까......카넬리안은......" 갑자기 혼란스럽던 시오의 표정이 잿빛이 되었다. 그는 문 앞을 바라 보며 허망하게 말했다. "저기 있네요." 문 앞에는 들어오던 카넬리안과 줄리탄, 톨베인이 멍한 얼굴로 서 있었 던 것이다. 상황은 언제나처럼 악화일로. '운도 지지리 없지.' 카넬리안은 단번에 사태를 파악하며 뒷걸음질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 었다. 호이젠이 정말 너무한다는 눈빛으로 카넬리안을 원망스럽게 바라 보았다. 그 둘의 눈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카넬리안 님......대체 왜 저희가 가는 곳 마다 있는 겁니까!' '너희야 말로 왜 지나갈 때마다 걸리는 거야! 내가 언젠가는 재회하고 싶다고 말했지 당장 다시 보자고 했어!' 키마인은 그녀를 돌아보며 몹시 반가운 표정이 지으려다가 금새 얼굴 이 굳어 버렸다. 뭔가 예전 도시와는 변해 있잖아. "어떻게 눈동자가......파란......" 그렇다. 키마인이 알고 있는 카넬리안은 붉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절대 씰이 아닌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란 눈이라니 대체. "키마인 씨이이이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카넬리안의 돌격. 그녀는 갑자기 키마인을 덮치듯이 껴안았다. 그녀가 자신을 아주 꽈아아악 포옹하자 정직한 청년 키마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카, 카넬리안 씨. 왜 그러십니까." "무서웠어요. 저 흉악한 놈들에게 납치되서......흑흑."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완숙한 즉흥연기를 펼치고 있었지만 주변 의 냉담한 반응에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시오의 창백한 표정은 '그게 아냐.' 였다. 그녀는 황급히 진로를 수정했다. "그, 그게 아니고 저 녀석들이 우리 돈을 모두 빼앗아 가서 되찾으..." 그녀는 시오의 얼굴을 보며 말을 흐렸다. 시오의 표정은 '그것도 아냐.' 였다. 그녀는 힘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튼......도와줘서 고마워요. 키마인 씨." "제가 도와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저 그런데 그 눈색은......" "칼라!" "예?" 갑자기 키마인에게서 떨어지며 커다랗게 외치는 카넬리안. 그녀의 눈빛 은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에 역시 당황하는 키마인. 카넬 리안은 고개를 폭 숙이고는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카, 칼라 콘텍트 렌즈......에요." 참으로 궁핍한 변명이었다. "그게 뭐죠?" 그런 말을 키마인이 알 리가 없다. 카넬리안은 계속 고개를 숙이며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게......있어요." 그때였다. 카넬리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문을 바라보았고 안 그 래도 좁아 터진 방안으로 쳐들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키마인의 표정이 굳어진다. 검은 가죽 코트, 어깨의 붉은 뱀 문양 - 10여명의 특무대였다. 정교회의 비호를 받는 살인청부길드가 무너지도록 놔둘 특무대가 아니 었다. "너희들이 여기에 무슨 일이지!" 키마인은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대다며 외쳤고 국경 수비대 역시 진형을 이루며 능숙하게 경계태세를 갖췄다. "난 제국안전공안부 특무대의 크라울리 우좌(右座)다. 너희들은 지금 헤스팔콘 정교회에서 관할하는 성스러운 지역에 본부의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다. 이젠그람 각하의 체면을 봐서 이번엔 봐줄테니 썩 여기 에서 꺼져." 독사 같이 뾰족한 송곳니가 말할 때마다 두드러지게 보이는 크라울리 는 검은 가죽 모자의 그늘 밑에서 번뜩이는 경멸에 찬 눈동자로 키마인 을 쏘아보며 손에 쥐고 있는 지휘봉을 만지작 거렸다. 키마인이 말했다. "난 제7 국경 수비대의 기사 키마인 이젠그람이다." "호오 이젠그람 각하의 아들이신가? 도련님이 나설 곳이 아냐 여긴!" "기사의 명예를 모독하려는 건가. 난 이젠그람 총사령관 각하로부터 범죄집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너희 특무대야 말로 더 이상 방해하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크라울리는 매서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키마인은 물러섬이 없었다. 한 편 조용히 줄리탄이 있는 곳으로 모인 카넬리안과 시오, 톨베인은 서로 속삭였다.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팽팽한 주변의 긴장감에 주눅든 시오. "한판 벌어질 분위긴데?" 의외로 담담한 톨베인.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팔꿈치로 찌르며 속삭 였다. "튀자." "키마인 경은 어쩌고?" "훌륭하고 예의바른 제국의 청년이니까 우리 없이도 해결할 거야." "어디로 도망치겠다는 거야 그런데." "저 뒷문으로 나가면 비밀통로가 있어." 톨베인이 속삭였고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울리와 한참 신경전을 벌이던 키마인은 조용히 칼을 뽑았다. "같은 제국군끼리 싸우고 싶진 않지만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즉결처분 하겠다. 마지막 경고다." 호이젠 역시 자신의 장검을 뽑으며 키마인 옆에 섰다. 크라울리는 비웃 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특무대. 전투 준비." 그와 동시에 크라울리의 손에 적빛의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고 부하들 역시 코트 속에 있는 메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금새 그 메이스는 시뻘겋 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원 마법을 쓸 수 있는 특무대원들이다. 키마 인은 계속 크라울리를 쏘아보며 미성의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제2 팔랑기스! 전투 준비!" 동시에 창창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며 국경 수비대가 검을 뽑아 들었고 길 드원들은 곧 벌어질 난전에 묶여 있는 몸을 어렵게 움직이며 벽 쪽으로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리탄 일행은......아주 몰래 고양이 같은 발걸 음으로 뒷문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키마인과 크라울리가 동시에 외쳤 다. "반역자들을 물리쳐라!" "남김 없이 죽여 버려!" 적의를 터트리는 고함소리와 함께 두 집단이 서로 달려 들었고 키마인 이 선두에서 크라울리에게 달려가며 검을 찌를 때 크라울리도 두 손을 펴며 뭉쳐 있는 마력의 덩어리를 키마인에서 쏘았다. -Blind Talk 히에에.....최근에는 빨리 1부를 끝내야 겠다는 일념하게 속도는 높 이고 있지만 환절기 감기와 만성에 가까운 위장병(술을 그렇게 먹으 니.....) 그리고 머리속에 가득 찬 칙칙한 생각 덕분에 컨디션이 저 하되어 글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분 좋고 기운날 때만 글을 써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이 글은 아 마 일년에 두편 정도만 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헤이유. 그래도 할만큼은 하니까......부디 재미있게 봐주시길. 긁적긁적.......뭐 한마디 하자면...... 팔랑기스는 헤스팔콘 군체제로서 특무대는 독자적인 체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팔랑기스가 뭐나면 아루스란 전기에서 나오는 무적 여자 의 이름......이 아니고 여기서는 인체의 뼈 이름 입니다. 커다란 뼈에서부터 말단의 뼈까지 - 그러니까 대충 프론탈, 템포랄 등등에서 이어져서 팔랑기스 이하의 최하 단위는 손가락 끝의 뼈인 메타카르팔스(15인) 입니다. 플라툰 정도? 최소 단위로는 굉장히 많은 인원이지만 이 시대 배경상 그렇다고 치고. 그럼 언제나 읽어주시고 메일 주시고 추천해 주시고 감상해 주신 분 들께 깊은 감사 드리며 이만 밀린 작업 마치고 잠들어야 겠습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제멋대로 PROFILE> Entry#4 젤리드 빙크리스틴 1.왜 리이를 괴롭히는가. :너도 해봐라. 되게 재밌다. (그녀와 얽힌 밝지 않은 과거가 있어 나름대로 그의 방식으로 리이를 챙겨주는 것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지만...역시 성격 탓이다.) 2.카리나는 왜 반말을 하는가. :그러라고 명령했으니까. (그녀가 반말을 하게 만드는데 적잖은 노력이 필요했다. 여자의 존댓 말이란 그의 성격상 소름끼쳐서 들어주기 힘들다. 편하게 편한거다.) 3.가문을 몰살시킨 이유는? :말해줘도 안믿을 텐데? ('믿어 줄테니까 말해봐.'라고 말해도 그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다. 리이에게도 아직까지 말 안했다.) 4.흉수를 쓰는 이유는. :취미다. (브로드 쇼드를 개조한 검인 흉수는 젤리드가 아니면 한손으로 쓰는 건 생각도 못한다. 멀쩡한 검을 그런 식으로 사악하게 바꾼 것은 자신의 손을 가문을 몰살시킨 후다.) 5.흉몽이라는 악명처럼 정말 아무나 죽이는가? :세이드 같은 미친 작자처럼 아무나 죽이진 않아! (젤리드는 민간인에겐 손대지 않으며 그가 노리는 것은 거의 기사다.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한 족속이라니까 명예를 지키고 죽어버리라지.' 그는 언제나 기사라는 것에 대해 화가 나 있다.) 6.줄리탄과 카넬리안을 본 소감은? :전자는 믿을 수 없이 멍청하고 후자는 믿을 수 없이 시끄럽다. (그 둘에 대해서 좀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성격상 생각이 5초 를 넘기지 못한다.) 7.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인가? :달라카트로 내려가 한몫 잡아서 리이하고 오손도손 살꺼다. (......리이는 생각이 다르다.) 8.만약 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할 꺼냐? :도망칠 꺼다. 실패하면 살려달라고 빌꺼다. (말은 그렇게 해도......또 모르지.) 9.세이드에 대한 감정은?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린다. (세이드는 적어도 인생이 심심하진 않을 꺼다. 적이 많아서......) 10.기사 작위를 누가 다시 돌려준다면 받을 건가? :그래? 받아서 또 그만둬 주지. (과연 젤리드를 계약 기사로 두려는 배짱좋은 나라가 있긴 할까.) e-mail : billiken@hananet.net B.B. Queens의 '춤추는 둥둥둥'을 들으며... (치비마루코짱의 주제가? 듣기 좋은 노래라서 가끔 듣습니다.) 『SF & FANTASY (go SF)』 114676번 제 목:[하/퍼온] 드래곤 레이디 9-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29 07:08 읽음:22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9-3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관련자료:없음 [5712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28 07:40 조회:469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남자는 사랑의 감정이 없어진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여자는 사랑하기 시작한 남자에게 거짓말을 한다지......" 내 말에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일부러 실없는 표정을 만들며 그녀의 표정을 되돌리려 애썼지만. "아하하. 우스운 말이네." "나 있잖아. 서로 거짓말을 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게 마음이 편해." 내가 그녀를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내가 볼 수 없는 더욱 깊은 곳에 감쳐두려 한다. 난 그게 싫다. "날 완벽하게 속여줘.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냉정하게 속여줘. 속아줄게. 지금까지는 잘도 운명을 따돌리는데 성공했지만...... 내일 혹은 일년후, 언젠가는 그 운명이 날 찾아내서 당신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날 끌고 갈꺼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는......" "그런 말 하지마!" "그때까지는 날 완벽하게 속여줘. 부탁해. 그게 행복하니까." 이런 말이 있고 얼마 후 그녀가 말했던 '운명'이 찾아왔다. 칼로도 마법으로도 성벽으로도 이 세상 모든 보물과 지혜를 모아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조금 늦추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운명이겠지.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9-3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Sub title : GOD IS NO WHERE (전편 줄거리) ...상트에선 피곤한 일들이 잔뜩.... 그냥 밀항선을 타고 내려가고 싶었을 뿐인데 이 도시에서도 불행신의 저주라도 받고 있는지 줄리탄 일행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게다가 국경 수비대와 특무대는 서로 무력충돌까지 벌어지고 있는 상태. 국경 수비대과 관문을 장악하는 순간에는 달라카트 행은 무기한 연기다. 카넬리안의 머리속엔 빨리 달라카트로 내려가서 마음 좀 편하게 관광 도 하고 온천도 가고 줄리탄을 부려먹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 생 각 뿐이었......던 것 같다. 1. 키마인의 국경 수비대와 크라울리의 특무대가 싸움을 벌이는 틈을 타 길드에서 도망치는 줄리탄 일행. 그들은 톨베인을 따라 좁고 길고 어둡 기 그지 없는 비밀통로를 30분이나 기어가야 했다. 위로 이어지는 통로 의 끝에는 사다리가 있었다. 일행은 오래되어 불안하게 끼익 끼익 거리 는 사다리를 탔다. "카넬리안. 키마인 경을 도와줘야 했었던 거 아닐까?" 줄리탄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궁상이었다. "끈질기네 주인님! 호이젠도 같이 있으니까 괜찮다니까 그러네! 씰의 능력을 무시하지 마!" "그게 아니고, 이렇게 도망치듯이 우리만 빠져 나온다는 게 좀 마음에 걸려서." 줄리탄 마음 속에는 걸리는 것도 많았다. 그렇게 궁시렁 거리는 줄리 탄의 엉덩이를 올려보며 카넬리안의 짜증이 폭발했다. "주인님! 알았으니까 올라가서 얘기해 좀! 30분 전부터 주인님 엉덩이 만 보며 따라 가니까 미쳐 버릴 것 같아! 엉덩이 보면서 얘기하고 싶지 않단 말야!" 줄리탄의 뒤에 따라오던 카넬리안은 머리속에 자꾸 줄리탄의 엉덩이가 어른거려서 신경이 날카롭던 참이었다. "저 여자 말대로 일단 좀 올라오는 게 어때." 톨베인이 손을 내밀며 한심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내려 보았다. 비밀통 로는 다른 사원의 지하와 이어져 있었다. 카넬리안의 밑에서 사다리를 타던 시오 역시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줄리탄, 일단 좀 올라가라. 카넬리안 엉덩이는 니꺼 보단 보기 좋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보고 있자니까 몹시 괴롭단 말야." "닥쳐라!" 카넬리안의 무시무시한 발길질이 거침없이 시오의 얼굴에 직격되었다. 시오는 사다리를 잡던 손을 놓쳐 버렸다. "으아아아!! 야 이 성질 더러운 여자야아아!!" 길고 긴 사다리 밑으로 다시 떨어지는 시오의 비명이 에코가 되어 울 리고 있었다. "카넬리안......" "어서 올라가요 주인님! 저 저질스런 시골소년은 이곳에 가둬 버리고 우리 끼리 가자고." 줄리탄은 '이 여자야! 죽일 셈이냐! 날 죽일 생각이었냐!'라고 지하에 서 외쳐대는 시오의 처절한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 "좀 늦게 물어본 감이 있지만 너희들 진짜 정체가 뭐야." 톨베인은 담배를 물고 줄리탄이 내민 팔을 끌어주며 말했다. 줄리탄은 톨베인이 뿜은 자극적인 연기에 고개를 돌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 했잖아. 달라카트 밀항객이라고." "시끄러운 밀항객들이로군." 톨베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앞장섰다. 2. 길드원들이 아무리 살인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살 인을 행하는 것은 거의 톨베인이었고 부유층의 청부로 무력한 상대를 죽이는 것 뿐이었던 불량배 들의 눈에 길드 내에서 벌어지는 국경 수비 대와 특무대의 난전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키이이익!! 특무대가 들고 있는 마법으로 가열된 메이스는 국경 수비대의 갑옷과 닿는 부분 부분을 녹여 버렸고 그때마다 순간적으로 수분이 증발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국경 수비대 역시 숫적 우세와 노 련한 포위 공격으로 호이젠의 지휘를 받으며 조금씩 특무대를 쓰러트리 는 중. 상황은 누가 우세라고 할 수 없이 서로 뒤섞여 잔인한 무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죽어라! 크하하하하!" 크라울리는 엄청난 연사력으로 키마인에게 작은 화력구들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것은 세이드의 마력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경험이 없는 어린 기사 키마인으로선 막아내기 조차 버거 다. 그렇다고 부하들을 지키고 있는 호이젠의 도움을 바라는 것도 지금 은 무리다. 그때 크라울리의 공격이 잠시 멈췄다. '지친 건가? 지금이다.' 잠시 공격이 늦춰진 틈을 타서 키마인은 크라울리에게 달려 들었다.마 법을 사용하는 크라울리는 아무래도 접근전과 검에 약할 것이라는 막연 한 예상이었으나. "미숙하군!" 키마인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크라울리를 보며 자신이 걸려 들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크라울리의 소매 속에서 발사된 화살촉이 키마인의 얼 굴로 날아들었다. "이딴 걸로!" 키마인은 돌진해 오는 화살촉을 칼날로 걷어냈지만 순간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혀 온 크라울리의 손에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이 잡혀 버렸다 . 크라울리의 가래낀 목소리가 협박처럼 들려왔다. "죽이기 전에 하나 얘기해 주지." "으아아아아아악!!" 키마인의 팔을 잡은 크라울리의 손이 뜨거운 열기에 감싸이며 순식간 에 키마인의 팔을 부식 시키기 시작했고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검게 썩은 피가 저항하는 키마인의 팔을 잡고 있는 크라울리의 손가락 사이 사이에서 세어 나왔다. 키마인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칼을 놓칠 수 밖에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간 키마인은 몸을 축 늘어 틀이며 크라울리의 손에 잡혀 있었다. "으으으으......." "전투 마법사들은 마법 외에 자기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호신구들을 가지고 다니는 게 보통이다. 그것조차 모르는 애송이가 날 이기겠다고? 넌 기사로서 실격이다." "아아아악!" 크라울리는 키마인의 팔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 더욱 힘을 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고통에 금새 입술이 창백하게 변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 는 키마인의 얼굴로 크라울리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왼손이 단검처럼 다 가오기 시작했다. "주인님!" 특무대와 싸우고 있던 호이젠은 순간 키마인의 위험을 느끼며 몸을 돌 려 크라울리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키마인을 향하는 크라울리의 손은 호이젠 보다 빨랐다. 크라울리는 마력에 걸려 있는 왼손으로 키마인의 얼굴을 잡으며 승리에 도취된 목소리로 말했다. "구하기엔 이미 늦었다." "아, 안돼!" 호이젠의 외침과 함께 크라울리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지만 곧 그 표정은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머리가 박살나야 하는데......키 마인의 몸 한점에서 부터 커다란 힘이 거대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는 기분이 들었다. "뭐, 뭐야!" "죽어라!" 키마인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기력을 뿜어냈고 순간 키마인의 얼굴 을 잡고 있던 크라울리의 왼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 버렸 다. 크라울리는 그와 동시에 멀리 밀려나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키마 인이 뽑아낸 기력은 근처에 있던 호이젠 마저 순간적으로 두 팔로 얼굴 을 감싸야 했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아......하아......" 자신의 기력을 모두 뽑아낸 키마인은 얼굴에 묻은 크라울리의 피를 닦아 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키마인이 무릎 꿇고 있는 곳 주변 바닥이 키마인이 뿜어낸 힘에 의해 방사형으로 갈라져 있었다. "애, 애송이 기사 놈이 어떻게 이런 힘을......" 크라울리는 황급히 일어서며 왼손이 사라진 팔목을 쥐어 싸며 뒤로 물 러섰다. 키마인은 힘들게 숨을 고르며 심하게 떨리는 오른손으로 다시 자신의 검을 쥐었다. "너야 말로 마법사로선 실격이군. 한번에 자신의 힘을 뽑아낼 수 있는 건 기사의 기본적인 능력이라고." 키마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면서도 크라울리를 쏘아보며 나직하게 말 했다. 기사는 검이나 무기를 통하지 않고도 자신의 힘을 한번에 터트리 는 수련을 수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는 폭발적인 힘으로 일격을 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키마인은 아직 제대로 자신의 힘 을 조율할 만한 능력은 없지만 분명 그도 기사. 크라울리가 얕잡아 본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호이젠은 부상을 당한데다가 무리하게 기력을 뽑아낸 키마인의 상태가 걱정스러웠지만 한편 성장한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너희 지휘관은 패배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 키마인은 난전을 벌이고 있는 특무대를 향해 화가 난 듯 커다랗게 외 쳤고 곧 특무대들은 놀란 표정으로 크라울리를 돌아보며 싸움을 멈췄다 . "이, 이놈이!!!" 크라울리는 잘린 손목을 쥔 채로 키마인을 노려 보았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된 뒤였다. 키마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크라울리에게 말했다. "넌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특무대로서 도리어 범죄조직을 옹 하며 사리사욕을 챙겼다. 그 죄값은 죽음으로도 값을 수 없어. 불명예 스러운 죽음이지만 조용히 처분을 받는다면 적어도 군인으로서 죽여주 겠다." 키마인은 크라울리가 최소한 마지막은 군인으로서 처분을 받길 바랬지 만 크라울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날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곧 다시 찾아갈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수치스러운 놈!" 부하들의 신변을 버려두고 도망치기 시작한 크라울리를 보면서 키마인 은 눈을 치켜올리며 따라 잡으려고 했다. 그것을 말린 건 호이젠이었다 . 키마인은 사실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몸으로 추적은 무리 입니다. 각하의 명령은 완수했으니까 일단 주인님과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알겠어. 이런 꼴 아이리스 씨가 봤다면 엄청나게 화냈겠 군. 하하." 키마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떨리는 팔로 검집에 자신의 검을 넣었다. 안정을 취하라는 아이리스의 처방과는 정 반대로 격한 전투를 벌여 또 오른팔에 큰 부상을 입은 못 말리는 제국의 기사였던 것이다 그는. 그 는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말했다. "사상자 보고." "부상 17인. 사망 9인. 이상." 전선에서 키마인보다도 오래 살아온 국경 수비대의 보고는 비장할 정 도 로 담담했다. 키마인은 어두운 표정을 숨기며 힘을 주어 말했다. "모두......헤스팔콘 제국의 군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전투를 했다. 사상자들을 부축해서 철수한다! 그리고 이 범죄자들은 주둔지로 호송하 여 군법재판에 회부하겠다." 키마인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길드원들을 내려보자 묶여 있는 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키마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사망한 수비 대원들을 들쳐 업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게 기사로서의 내 첫 전투로군. 기사 수행 때 들었던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나네. 마음이 무거워. 조금도......기쁘지 않아.' 자신을 부축하며 걷고 있는 호이젠의 파란 머리칼이 뺨에 와 닿아 무 거운 마음과는 달리 가볍게 간질거렸다. "그런데 호이젠. 카넬리안씨들은 어디로 간거지?" "그, 글쎄요.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3. 사원에서 나온 톨베인이 줄리탄 일행을 끌고 간 곳은 후미진 홍등가에 서도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이층 집이었다. 이 도시 상트의 대표 적 수식어가 '더러운'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톨 베인이 들어간 집은 지겨운 세상의 때가 지독하게도 덕지덕지 붙어 있 어 집을 보고 구토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톨 베인이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에 문이 열리며 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피 부결이 몹시 나쁜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반갑다기 보다는 의 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톨베인. 오랜만이네. 그런데 뒤의 사람들은......" "누님. 이 집 잠시 빌릴 수 있을까." 톨베인은 언제나처럼 '용건만 간단히'였다. "숨겨주려는 거야? 저 사람들?" "누님이 피해볼 일 없어." "알았어. 알았어. 어차피 나도 일 나가려던 참이니까. 아. 안에 셜린 있다. 니가 어떻게 좀 해봐! 저러다간 써먹기도 전에 병신될꺼야." "알았어." 톨베인은 셜린이라는 여자에 대해 듣자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고 그 여자는 그 길로 솟옷 같은 옷을 입은 채로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톨베인은 문 안으로 들어가며 따라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아우. 냄새." 줄리탄의 코를 심하게 자극한 것은 숨이 막힐 것 같이 방에 가득 찬 거북한 냄새였다. 카넬리안은 불쾌한 얼굴로 옷가지들이 여기 저기 널 려 있는 방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화장품.....을 가장한 피부노화제의 냄새로군." "셜린! 너 미쳤어!" 갑자기 톨베인이 소리치며 구석에 주저 앉아 있는 소녀에게 빠른 걸음 으로 걸어갔다. 셜린이라는 소녀는 풀린 눈동자로 헤헤 웃으며 톨베인 을 올려보았다. 그녀 앞의 바닥에는 반쯤 먹은 예의 마약성분이 강한 과일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이딴 거 먹지 말라고!" "오빠 왔어? 에헤헤 미안해. 그런데 오빠라면 공짜로 해 줄텐데...... 나 싫어?" "창녀 같은 소리 하지마." 톨베인은 과일을 걷어차 버리며 이층 계단으로 향했다. 줄리탄과 시오 는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카넬리안은 별 관심 없다는 투로 중앙의 찢 어진 소파로 가서 앉았다. 톨베인은 이층의 작은 방에 들어가며 일층을 내려보며 말했다. "나 목욕하고 있을 테니까 거기 가만히들 있어. 그리고 저 아이 건드 리면 그냥 두지 않을 줄 알아!" "포주 같은 소리 하지마." 카넬리안은 톨베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줄리탄은 뭔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선 소파에 앉았다. 그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 거리며 조그맣 게 속삭였다. "카넬리안. 여기 뭐하는 곳인 줄 알아?" "이층의 아이는 살인청부업자. 저 여자 아이는 마약중독자. 그리고 여 긴 매음굴. 상트의 특산품들이 한 곳에 모여 있군." 카넬리안은 노래하는 것처럼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때 비틀거리며 일 어난 셜린이 다가와서는 쓰러지듯이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아 줄리탄 일 행을 훌터 보았다. "톨베인 오빠하고 무슨 사이에요? 나 사러 온 거에요? 에헤헤헤." "불쌍해......" 시오가 탄식하듯이 몸이 여윈데다가 팔다리가 몹시 말라 있는 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셜린은 넋나간 것처럼 방글방글 웃으며 계속 말했다. "불쌍해요? 불쌍한 건 톨베인 오빠죠. 자기 아빠한테 이용당했으니까. ......난 뭐 가족이 날 일찌감치 팔아버렸으니까 차라리 편하죠." "무슨 소리야." "말해줄께요 오빠에 대해. 자알 들으세요? 정말 오빠는 불쌍하니까!" 셜린은 웃는 얼굴과 화난 목소리로 외치며 톨베인에 대해 말해주었다. "톨베인 아빠는 오빠가 태어나자마자 눈에 주술을 걸었어요." "주술?" 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웅 그러니까......주술로 눈을 못보게 막아 버렸어요." "시력을 봉인했다는 거로군. 저급한 마법이야 그런건." 카넬리안의 말은 어떻든지 왜 상식 밖의 짓을 한 것일까. "왜 그런 짓을......" 이상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눈이 안보이는 자는 보상작용으로 그 외의 신체 감각이 비이상적으로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뛰어난 살인자로 키울 생각이었거든요? 그건 창녀보다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계속 말하는 셜린의 말에 의하면 톨베인의 아버지는 그의 청각과 후각 등을 비대하게 발달시키는 훈련을 반복했지만 톨베인은 자신이 선천적 인 장님이라고만 생각하며 자신을 버리지 않은 아버지에게 고마워 하며 시키는데로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3살 때 눈에 걸린 주술을 풀어줬어요. 태어난지 십삼년이 지 나서야 세상을 볼 수 있게 된거죠! 자신이 장님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런데 그게......기쁜 일일까요?" 셜린은 이번에는 울먹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를 살인청부길드에 팔아 버렸어요. 아주 비싼 값에...... 13년 동안 키운 거니까 나보다 훠얼씬 비싼 값에." "값의 문제가 아니잖아......"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발달된 톨베인은 살인기술자로서 최적이었기 때 문에 그의 몸값은 일반 노예의 몇십배였다. 마치 우리 속에 가둬져 계 속 계속 주는데로 모이를 먹다가 가장 살이 쪘을 때 믿고 있던 주인손 에 목이 졸려 식탁에 올라가는 것처럼. 톨베인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졌던 대로 만들어지다가 결국 친아버지의 손에 팔려 버린 것이다. "무, 무슨 그딴 아버지가 다 있어!!" 시오는 엄청나게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서선 셜린에게 외쳤다. "그 사람 지금 어딨어! 그냥 두지 않을 꺼야!" "죽었어요. 톨베인 아빠." "잉?" 카넬리안은 다음 셜린의 말을 예상하고 있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녀의 말라붙은 입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톨베인 오빠가 죽였어요. 살인청부길드의 첫 번째 명령은 자신의 아 빠를 죽이고 돈을 되찾아 오라는 거였죠." "그런다고 자기 아버지를 죽이냐!" 시오는 말을 듣는 족족 믿을 수가 없었다. 셜린은 시오를 올려보며 연 신 싱글거리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오빠는 마음이 참 착한 가봐? 자기를 태어나면서부터 이용해 먹고 팔아치운 사람을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나라도 죽여버렸 을 꺼야. 그런 쓰레기 같은 꼰대 자식은......" 셜린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침을 뱉으며 쏘아대더니 아예 바닥에 드러 누워 버렸다. 마약의 후유증인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은 계속 떨고 있었 다. "끔찍해." 줄리탄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꺾었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소름이 끼치는 잔인한 가족사인데 약에 빠져 흔들거리는 셜린의 입을 통해 나온 그 말은 줄리탄의 가슴을 쿵쾅 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면 카넬리안은 자신의 과거라도 상상하는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하아. 나 말고도 눈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 많구나." "카넬리안! 야 이 냉정한 여자야! 이런 말을 듣고도 어쩜 그렇게 태연 할 수 있는 거냐!" 시오가 흥분하며 카넬리안에게 말했지만 카넬리안은 귀찮은 표정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미안. 난 그것보다도 험한 꼴 많이 당해서 감정이 메말라 버린 황폐 한 여자라서 그래. 눈물이라도 흘려주고 싶지만 어쩌나, 난 울 수 있는 기능이 없는 걸. 인간이 아니라서 말야." "울......수가 없어?" "그래. 아무리 슬퍼도 화만 나지 눈물이 안 흘러. 우리들은 본래 그런 가봐. 그런데 희안해. 막 울고 싶은 기분이 백년에 한번 쯤 생기거든? 기분은 있는데 실행은 안되다니 아아 정말 난 저주 받은 인생인가봐."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마. 넌 좋은 여자야." 줄리탄이 말하자 카넬리안이 싱글싱글 거리며 누워있는 셜린에게 말했 다. "톨베인도 너한테 잘해주니? 저 사람은 능력은 없어도 꽤 나한테 잘해 주거든? 나 너무 부담스러워." "거기서 하필 능력이 없다는 말이 나오냐......" 줄리탄은 허탈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이 싫지는 않았다. "오빠는 내 옷도 사주고 나와 얘기도 해주고 가끔 돈도 주고 나한테 너무 잘해주니까. 내가 빨리 죽어야 오빠 마음도 편할 꺼에요." "으윽. 어린애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카넬리안은 셜린의 머리를 콩 때리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톨베인이 나타났다. "셜린. 남한테 내 얘기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래도 오빠 너무 불쌍하니까." 셜린은 톨벨인이 있는 곳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올려보며 말했다. "불행하긴 내가 뭐가 불행해!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팔아먹고 팔리는 두 종류 뿐이고 난 후자였던 것 뿐이야.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불쌍하다고 동정 받아봐야 나 자신만 비참해질 뿐이라고." 톨베인은 물기에 젖어있는 머리칼 그대로 그늘진 눈동자를 조금 덮은 채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살인청부업자로서 체취를 없애기 위한 버 릇 일까, 아니면 도시에 대한 더러움을 씻어내려는 퍼포먼스일까. 톨베 인은 지나칠 정도로 자주 목욕을 했다. 카넬리안이 톨베인이 계단을 타 고 내려오는 것을 눈동자에 계속 담다가 시비조의 말을 톡 던졌다. "흥.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되게 폼 잡네." "겨우 그 정도라고! 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톨베인은 눈을 치켜 올리며 카넬리안을 노려 보았지만 그녀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거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남 은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무게의 불행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 각하고 있는 거잖아 지금? 이봐요 톨베인 군......" 카넬리안은 시선을 돌려 아직도 마약에 취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셀린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 혼자 불행의 주인공이라는 어리광......남이 동정하면 화를 내면 서도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그런 어리광, 바보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리광이라고!! 난 아무에게도 바라는 것 없......" "시끄러워!" 그녀가 눈을 치켜 올리며 톨베인에게 소리쳤다. 순간 눈동자가 붉게 변해 있었다. "자기 혼자서 냉소적인 척 하고 있는게 어리광이 아니면 뭐야. 세상과 싸울 용기라도 있는 거야? 귀를 막고 눈을 감고 '현실은 정말 맘에 안 들어. 난 불행해!'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치면서 청부살인 따위나 하고 다니면 기분이 좋아지니? 잠이 잘 와?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주제에 '난 세상에 등을 돌린 쉽게 감동받지 않는 차가운 남자야! ' 라며 쓸쓸한 허세나 부리는 건 어리광 중에서도 들어주기 가장 힘든 거야." 언제나 그렇지만......그녀의 말은 반쯤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 럼에도 그녀는 톨베인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나 보다. 줄리탄과 시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열세살 때 처음으로 시력을 되찾고 뭘 바라봤는지 알아? 나를 팔아 넘기려던 아버지의 더러운 얼굴이야. 그게 세상에서 처음 본 거라 고. 차라리 장님이었을 때가 좋았어. 그래도 내가 보지 못하는 이 세상 은 아름다울 꺼라고 상상하면서.....살았을 때가 좋았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 속을 방황하는 기분이야.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 서 결국에는 말라 죽어 버리겠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어." 그녀는 톨베인의 말에 반박도 동의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쓰다듬어 주 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도는 해보고......그런 말 하는 거니? 적어도 넌 인간 아냐? 처음 부터 실험쥐처럼 태어나서 싫어도 정해진 일을 반복하며 영원히 살아야 하는 반쪽짜리 생명체도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아아 내 가 마지막으로 행복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지?'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그것마저 포기하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다시 푸른 색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 슬펐다. 카넬리안을 바라보는 톨베인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예의 나 쁜 피부의여자가 들어오며 외쳤다. "구, 군대가 쳐들어왔어! 지금 난리야! 젠장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 니까!" 상트에 도착한 이젠그람의 군 부대는 명령에 따라 상트에 진입하고 있 었다. 곳곳에서 다급한 함성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창밖을 바라 보는 톨베인이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 졌어." "뭐?" "이 눈으로도 이 도시 상트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싶어 졌어. 네 말 대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확인해 보고 싶 어 졌어. 하지만 다른 곳도 이곳과 마찬가지라면, 이 도시 같은 미궁일 뿐이라면 그 땐 어떻게 할꺼지 너?" 톨베인은 카넬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속았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에 화를 내려던 톨베인은 자기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아주 오랜만에 터져 나올 뿐이었다. 그녀는 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아 나한테 '착한 인간'이 전염되었나봐." "......?"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는 셜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넬리안을 바 라볼 뿐이었다. 5. 상트에 도착한 대규모의 헤스팔콘 국경 수비대에게는 상대적 소수의 특무대는 저항이 되지 못했다. 그것보다 특무대 자체가 도시 수비를 포 기하고 도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취발트 이젠그람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는 금새 상트를 장악하고 정교회 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텅 비 어버린 정교회 본부의 추기경실에는 정교회 상트 지부장과 손이 사라진 왼쪽 팔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크라울리가 남아 있었다. "상트는 이제 끝입니다. 도망치시려면 지금 밖엔 없습니다." 크라울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는 지부장에게 말 했다. "나, 나는 상트의 지도자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해! 난 단지 로이터 막 시밀럼 공의 명령으로 이곳에 있었을 뿐이야. 나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 어!" "......" 크라울리는 경멸어린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며 뒷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자, 잠깐 크라울리 우좌! 넌 날 지켜야 하잖나! 어딜 가는 건가! 특 무대는 날 버릴 생각이야?" "소관을 포함한 특무대는 정교회 지하의 포자식물을 보호하는 것이 목 적이지 당신을 지키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 그런......" "이 팔에 대한 답례를 해줄 놈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크라울리는 자신의 왼팔을 들어 올리며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이젠그람이 직접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채 5분도 안되서 였다. 군 총사 령관 아취발트 이젠그람은 노기에 찬 목소리로 덜덜 떨며 퇴락한 옥좌 에 앉아 있는 지부장에게 외쳤다. "황제의 칙령을 거부하고 저항한 것은 제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 행위 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자, 잠깐! 난 단지 로이터 공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오! 반역이라니 당치도 않아!" 지부장은 어느 때보다 애원조의 목소리로 이젠그람에게 말했다. "로이터 공? 국가안전공안부의 로이터 막시밀리엄 공작 말인가. 그가 네게 무슨 명령을 내렸다는 거지?" 이젠그람은 그런 사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기에 지부장의 그런 말을 단지 구차한 변명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부장이 말하는 말은 이젠 그람에겐 믿을 수 없이 충격적이었다. "상트 시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는 환각성 포자식물을 연구, 재배하고 그 효과를 기록해서 로이터 공에게 보내는 것! 그게 내 임무요. 믿을 수 없다면 로이터 공의 친필 문서를 보여줄 수도 있소." 지부장의 말은 변명인지는 몰라도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아취발트는 지부장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마약을? 그런 명령을 왜?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이란 말인가!" "식민지 지배와 하층민 통제를 위한 마약을 연구하는 것이었소. 그 실 험지가 이 도시 상트였고! 난 그 포자 식물의 열매를 먹은 시민들의 효 과와 반응을 연구하고 있었소. 마약을 쓴다면......적국의 사람들이라 고 하더라도 반란 없이 통제할 수 있으니까. 로이터 공이 지휘한 실험 이었고 난 실험 결과를 계속 로이터 공에게 보고 하고 있었다니까!" "환각성 물질의 소유 및 재배는 중범죄일텐데? 게다가 그걸 시민에게 공급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종교로 감싸고 있다면......정교회 본부가 있는 신성한 도시라면 아 무리 불법이라도 누구도 감히 의심할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상트는 그 런 이유로 만들어진 도시요." 상트는 험준한 피크 산맥 서쪽의 고립된 도시였다. 달라카트와의 소규 모 무역과 암거래를 제외하면 먹고 살 길도, 다른 도시와의 교류도 없 는 완벽하게 고립된 도시. 본래 폐허가 된 사원들이 밀집해 있던 유령 도시에 강제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정교회의 본부를 세운 것도 로이터 였다. "그건 황제 폐하의 칙령이 아니라 로이터 공의 개인적인 명령이겠지? 로이터 공이 네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관문을 봉 쇄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어길 수 있는 구실이 되진 못해. 그런 더러운 실험 때문에 폐하의 칙령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취발트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부장은 답답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 "화, 황제 폐하 역시 묵인하고 있던 실험이야! 보면 모르겠소? 이런 거대한 실험을 어떻게 황실의 눈을 피해 십년 이상 진행할 수 있겠냐고 ! 생각을 해보시오! 하우프트만 폐하 역시 이 실험을 인정하고 있었다 니까! 날 해치는 건 결국 폐하를 노하게 만드는 거야!" "닥쳐라! 어디서 그 더러운 입으로 폐하의 존명을 입에 담아!" "다, 당신......이런 말이 안통하는......"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는 지부장은 자신이 수도 없이 실험을 목적 으로 시민들을 잡아갈 때마다 외쳤던 사람들의 비명처럼 찢어질 듯이 소리쳤다. "이 겁대가리 없는 군인 놈아! 날 죽이면 로이터 공이 널 그냥 둘 것 같아! 로이터 공은 황실의 최고 실력자야! 황실에서 널 말려 죽여 버릴 꺼다! 이 실험에 얼마의 시간과 돈이 들어갔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이 걸 망친다면 넌 죽어. 황제 폐하 역시 널 용서하지 않을 꺼야!" 아무렇게나 외쳐대는 소리에 이젠그람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폐하를 욕되게 하지 마라. 폐하는 제국의 아버지다. 절대로 마약 따 위를 보살피고 있는 백성들에게 먹이는 짓 따윈 할 리가 없어!" "좋아하시네. 황실이 그렇게 깨끗한 줄 알아? 네가 모르는 다른 비밀 들도 들려줄까! 오펜바하 제일황제를 위해 헤스팔콘 황실이 뭘 하고 있는지를? 결국 모두 명령 받고 있는 거다. 오펜바하 제일황제라는 잔 혹한 신을 위해서......모든 명령은 그 분으로부터 내려오니까. 네가 믿고 있는 이상적인 제국이란 처음부터 네 머리속에서만 존재하고 있 는 거야." "입 닥쳐!! 이 제국의 반역자!" 아취발트는 그의 말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검을 휘둘렀고 기사인 그의 검에 모인 무형의 검기는 지부장의 몸을 옥좌와 함께 두동강내 버렸다. 어울리지는 않는 고요함이 금새 바닥에 깔렸다. "가, 각하......" 불안감이 가득한 부하가 아취발트에게 다가왔으나 그의 분노한 표정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취발트는 자신의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 며 어렵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 타락한 교회에 있는 모든 마약을 태워버려라. 난 인정할 수 없다 저 더러운 수뢰 성직자의 말을. 난 제국의 군인으로......나의 신념을 믿는다. 제국을 유지하는 기둥인 황실이 그런 끔찍한 부정을 저지를 리 가 없다. 우리 위대한 헤스팔콘 제국이 오펜바하 제일황제의 하수인일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아취발트는 자신의 확신을 재확인하는 듯이 계속 중얼거리며 추기경실 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곧 상트의 모든 관문은 봉쇄 되었다. 6. 오칼란트 제국의 황궁 오버암메르가우의 거대한 정원에서는 오후의 티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백여명의 정원사들의 손에 가꿔지고 있는 이 도시규모의 정원에선 자주 황실 일원이나 귀족들의 티파티가 벌어지곤 했는데 오펜바하 황제가 직접 참여한 건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황실은 그 이유 하나 때문 만으로도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전 티파티에 참여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루해 그리고 맛없어." 오펜바하는 평민들은 일년 내내 벌어도 한모금 마실 돈도 마련하지 못 할 고가의 말차를 새하얀 대리석 테이블에 놓으며 투정을 부렸다. 작은 키에 어린 외모 덕분에 오펜바하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냥 귀족 도 련님의 한심스러운 사치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옆에 있던 미쉘은 어색 한 손놀림으로 차를 타느라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대체 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하필이면 자신에게 시키는지 그녀의 훌륭한 지능으로 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후 내내 오펜바하의 시종처럼 하나 부 터 열까지 챙겨주다가 밤이면 또 오펜바하를 대신해서 집무를 봐야 하 니까 아마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씰이 아니었다면 죽노동에 쓰러져 버 렸을 것이 분명하다. "미쉘. 가랑은 달라카트로 내려 갔겠지?" 오펜바하는 카넬리안을 전 이름이었던 가랑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쯧. 헤스팔콘의 인간들에게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아 내가 잡으러 가면 물키벨이 난리를 칠테니까 귀찮고. 물키벨......그 푼수 같은 여 자가 고집은 세서 죽어도 나 잘되는 꼴을 못보는군." 오펜바하가 물키벨이라는 이름을 말하자 미쉘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 펜바하는 장난스럽게 미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실수 투성이 여자 보다는 내가 훨씬 좋지? 설마 아직까지 물키벨 의 씰이었을 때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전 테이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씰입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닙 니다. 물키벨 님이 절 당신께 이적시켜 주었을 때부터 전 오펜바하님의 씰입니다." 그녀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때 오펜바하의 근처에 앉아 있던 험준하 다는 수식어가 온 몸에 철철 넘치는 거구의 남성 - 우아한 티파티와는 조금도 어울려 보이지 않는 거구의 사내가 말을 꺼냈다. "소인 하켄이 가랑을 잡아 오겠습니다. 부디 폐하에 대한 충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너 가랑에게 죽도록 두드려 맞은 걸 아직까지 마음 속에 두고 있구나 ?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하긴. 힘을 잃었을 때라도 이겨보려고?" "그, 그런게 아니라." 하켄이라는 사내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는 오펜바하의 친위 부대 인 '가이스트 라이히'의 일원이었다. 총 10인으로 이뤄진 집단 가이스 트 라이히는 오펜바하의 헤스페리아 통일을 도왔던 자들로 특별한 작위 나 계급도 없이 황실에 머물러 있는 특이한 조직이다. 게다가 오펜바하 와 마찬가지로 외형으로는 나이를 예측할 수 없었다. "충성은 좋은데......일단은 인간들의 나에 대한 충성심을 보고 싶어. 제 아무리 가랑이라도 힘을 잃었다면 보통 씰들과 다를 바가 없지. 그 런데도 내 도움 없이는 잡지 못한다면 인간들 정말 버러지 같이 무능한 놈들 아니겠어?" 오펜바하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흥에 겨운 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테싱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가랑은 힘을 되찾지 못해. 주인 잃은 고 양이 처럼, 씰의 슬픈 숙명 같은 거지. 지금 가랑의 테이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나를 피해 도망치고 있다는 건 가랑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의미겠지. 테싱 외의 누군가가 어떻게 깨 울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테싱 외에는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던 씰이었던 카넬리안을 줄리탄이 깨운 것은 오펜바하라 하더라도 의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줄리탄이 카넬리안은 커녕 보통 씰들도 깨울 능력이 안되는 촌구석 요리사 청년 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너무 허탈해서 졸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 유를 알고 있는 자는 오직 황궁 인공낙원에 살고 있는 씰, 제이미아 뿐 이었다. "하지만 테싱이 돌아온다면......" 오펜바하의 맡은 편에 앉아 있던 브륜힐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가이스트 라이히의 프리셉트리스(여단장). 큰 키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인 매력이 가득한 그녀는 촉촉한 보라색 눈동자로 오펜바하와 미쉘을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 같은 노란눈으로 브륜힐트를 차갑게 바라보던 오펜바하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테싱은 절대로 못 돌아와. 그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있으 니까." "돌아올 수 없다면 왜 가랑을 잡으려는 거죠? 결국 가랑을 완전히 당 신의 씰로 만드려는 것 아닌가요? 그녀가 당신의 씰이 된다면 그녀와 테싱과의 인연도 끊어지니까......테싱은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없겠지 요. 결국 폐하는 테싱이 다시 오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아닙니까?"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던 오펜바하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갑자 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버리면 재미가 없잖아. 조금은 붙임성을 갖는게 어때? 응? 브륜힐트." "무례했다면 사과 드립니다." 브륜힐트는 딱딱하게 말했고 오펜바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냐. 뭐 가끔씩은 이렇게 상기시키는 것도 좋으니까. 하지만 브륜힐트......잘 들어둬." 오펜바하는 웃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죽여 버리겠어." "명심하지요. 폐하......아니 만물의 지배자. 오펜바하 님." 하켄 마저 당황하며 오펜바하와 브륜힐트의 모습을 살피는 가운데 브 륜힐트는 조용히 일어나 다문 입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에 사라졌다. 미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펜바하를 바라보았다. "오펜바하 님.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지....." "아아 목석 같은 여자! 정말이지 너무 너무 너무 딱딱해서 화가 날 지 경이라니까. 그러니까 아직까지 남자가 없지. 하긴......브륜힐트 눈에 들어올 남자라면 테싱 외에는 없겠지?" 오펜바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미쉘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조용히 찻잔 에 차를 따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브륜힐트 님의 오펜바하 님을 향한 충성심은 저와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켄이 다시 커다랗게 말하는 바람에 오펜바하는 놀란 얼굴로 하켄을 획 돌아보았다. "조용히 좀 말하라고 했잖아! 넌 목소리 하나 조절하지 못하냐." "죄, 죄송합니다." "아무튼......내가 만든 이 세상, 내 손으로 부셔버리고 싶진 않으니 까 한번만 더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난 테싱과는 달리 꽤 인 간들을 아끼고 있으니까." 오펜바하는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하 게 말했다. -Blind Talk 카넬리안 : 우리 여기서.......끝이네. 이제 안녕. 이별이야. 줄리탄 : 뭐? 장난하지마. 막 시작한 거 같은데 끝이라니. 카넬리안 : 원래 서로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질려버릴 거 같이 계속 좋아하다가도 헤어질 때는 아쉽지. 줄리탄 : 아쉬운 게 아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카넬리안 : 지금까지 너무 고마웠어. 가장 행복했던 거 같아. 줄리탄 : 아, 아냐! 가지마! 카넬리안 :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리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난 청춘의 희미한 그림자. 소년의 눈에만 보이는 세월의 흐름 속을 여행하는 여자야. 당신의 추억속에 남는 것 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줄리탄 : 카넬리안 잠깐!! 카넬리안 : 응? 줄리탄 : 그 대사 우리 꺼 아냐. 카넬리안 : 아...... 줄리탄 : 그리고 그 시커먼 털옷하고 가발도 좀 벗어! 틈만 나면 장난이냐! 카넬리안 : 랄라라. 다음엔 뭘로 할까나. .........썰렁한 꽁트였습니다. 그냥 은철 대사는 계속 기억에 남아서 뜬금없이 한번. 그건 그렇고 몹시 늦었습니다. 본래 이거....2편으로 나눠야 하는데 기왕 계속 이어쓴 거 한번에 끝냅니다. 후회 막급. 제가 헤스페리아 지도를 잘못봐서(kiyu군이 만들어 준 것) 엉뚱한 곳에 상트를 박아 버리는 바람에 수습하느라고 본래 진행하는 내용에서 영 반대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몹시 글이 혼란스럽지만 뭐 ......다음 편이면 끝이니까. (그래도 출판본에서는 내용이 상당히 바뀔 듯 하네요.) 톨베인의 과거에 대해서는 - 사실 '이상발달감각'이라는 건 시력이 돌아오면 본래대로 돌아온다지만 여기서는 그냥 발달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설정'대로 둘러 대겠습니다.-_-; 이번에 새로 나온 캐릭터인 브륜힐트(Brungilde)에 대해서는 뭐 아시겠 지만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에게 속아서 군터에게 시 집간 무지막지하게 강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이지요. 다른 책에 나 온 이름을 그냥 가져온다는 건 좀 불성실한 짓인듯 하지만 워낙 유명한 책이고 브륜힐트라는 이름도 이미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으니까 뭐. 하겐도 써먹었겠다 다음에는 크림힐트와 힐테브란트도 쓸까나...... (아 버릇되겠다.) 최근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재기드 얼라이언스2'를 다시 깔 고 하고 있습니다. X-COM 시리즈의 팬인 저로서는 당연히 이것도 좋아 하지만 나름대로 X-COM보다 훌륭한 면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즐거운 게임 입니다. 오래된 게임이지만 번들로라도 나오면 꼭 한번 해보세요. (...혼란스러운 인터페이스 싫어하시는 분들은 질색하시겠지만.) 아 그리고 이 글의 제목 'Dragon Lady'에 대해서는......물어 보는 분 들이 있어서 그런데 -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제목이랍니다. 혹자는 록 히드마틴사의 전술 정찰기 U-2의 기체명인 'DRAGON LADY'에서 따온 것 이 아닐까 하시던데 그 정찰기의 쿨하고 샤프하고 이지적인 이미지가 좋긴 하지만......이 글의 분위기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요? 다음은 크림슨 글로리의 노래인 'DRAGON LADY'도 있는데 뭐 부담스러운 노래이긴 하지만......이런 노래가 있다는 건 최근에 알아서. 결국 제목은 '강렬한 이미지를 지닌 동양 여성'을 의미하는 'Dragon L- -ady'에서 따왔습니다. 단순......합니다. 7년전인가 고등학교 2학년때 우연히 알게되어 써먹은 단어인데 그땐 sf였고 지금은 나름대로 환타지 . 등장인물도 성격도 그때 쓴 것과는 완전히 바꿔버려서...... 지금의 카넬리안의 외모에 대해서는 동양적입니다. 이 글에서는 동양적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긴 하지만. 서태후의 별명도......드래곤 레이디였 지 아마. 이번 편에는 profile 없습니다. 벌써 7:25분...자야지. e-mail : billiken@hananet.net 박완규의 '욕망이라는 이름'을 들으며..... (랩하는 부분은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좋네요.) 『SF & FANTASY (go SF)』 11468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9-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1/29 11:23 읽음:227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9-4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관련자료:없음 [5721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1-29 07:53 조회:132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9-4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Sub title : GOD IS NOW HERE 1. 거친 자갈길에 마차가 흔들리자 침대를 대용한 널판지에 누워 있는 리 이는 통증에 눈을 뜨며 몸을 조금 뒤척이려 했지만 몸이 제것이 아닌 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리이 님. 몸은 어떠세요?" "일어나지마. 더 자고 있어." 흐릿한 리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안타까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 는 이카테스와 심란한 시선으로 마차의 차창 밖을 보면서 말하는 젤리 드의 옆모습이었다. 리이는 눈동자를 돌려 창밖을 흘낏 보았다. 나무, 숲의 공기. 두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지붕이 덮인 마차는 도시를 벗어 나 산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는......" "자고 있으라니까. 바보 같은 여자." 젤리드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에선 안도의 감정이 섞여 들렸다. 흔들리는 마차 덕에 불규칙한 소음이 들려왔다. 마부석에서 고삐를 잡고 있던 카리나는 특유의 앳된 목소리로 불평스럽 게 외쳤다. 예의 상처 때문에 온몸에 두른 붕대가 그녀의 검은 소매 밖 으로 조금 나와 있었다. "젤리드!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달라카트 도착할 때까지." "에에! 싫어 나! 먼지 뒤집어 쓰고 있단 말야! 같이 있고 싶어!" "다음 도시에 들리면 좀 쉬자. 약도 구해야 하고." 젤리드는 별로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징징거리는 카리나에게 짧게 답한 뒤에 젤리드는 리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젤리드는 '깨어났구나! 와아! 기뻐!'라고 외칠 남자가 아니었지만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제 속이 시원해? 그 꼴이 되서?" 젤리드는 자신의 응급치료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 게 부상을 당한 리이의 몸을 보기가 괴로웠지만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 게 대답했다.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 "그런데, 리센버러는......멸망한거지?" "잊어버려."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나는." "잊어버리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리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은 언 제나 검의 일부분이 되어 거칠지만 의외로 따뜻했다. 리이는 살며시 눈 을 감으며 말했다. "이카테스." "예 리이 님." "네게도 미안해." "리이 님......" "아야!" 갑자기 철썩하며 젤리드가 리이의 이마를 가볍게 때리는 바람에 리이 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보았다. "평생 미안하단 말 한번 안하다가 갑자기 밀린 사과를 한번에 하려는 거야? 그렇게 미안하면 빈말하지 말고 몸으로 보여줘." "나한테 화났어?" 찰싹! 살짝 웃는 리이의 이마를 젤리드는 또 한번 때렸다. "나는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관리하는 여자에겐 불쌍해서 화 안내." 리이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지금 스숭님께 가는 거지?" "그래야지......이제 둘 다 빈털털이니까 살아가려면 그 양반에게 돈 이라도 뜯어 내야겠지." 몹시 뻔뻔한 남자였다.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런데......이 마차는 어디서 난 거야?" 리이는 꽤 훌륭해 보이는 마차 내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통증은 참을 수 있었지만 마치 묶여 있는 몸처럼 고개만 간신히 돌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가 몹시 불편했다. "자기 집 마차가 몇 대인지도 모를 정도로 돈 많은 상인 놈의 것을 잠 시 빌린 것 뿐이야. 아무도 안 죽였어." "훔친거야?" 리이는 눈살을 치켜 올리며 말했지만 젤리드는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 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그럼 걸어갈 꺼야? 그 꼴로? 기사가 본래 일년 중 절반 이상을 만신 창이 보내긴 하지만 그렇게 자기 혼자 포크도 들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리면 옆에 있는 사람만 귀찮아져." 리이와 세이드와의 결투는 치명적으로 격렬했던 것 같다. 그녀는 젤리 드에게 '미안......'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이제 검 놓을까?" "'그 남자'가 허락할까?"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젤리드의 말에 리이는 눈빛을 흐렸지만 잠시 후 단호하게 대답했다. "잊어버릴래." 젤리드는 구석에 놔두었던 리이의 레이피어를 그녀 곁에 놓으며 말했 다. "맘대로 해. 이제 너에게 강요할 놈은......아무도 없으니까." "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리이가 말하는 '그들'이란 줄리탄,카넬리안,메르퀸트 였다. 젤리드는 드물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몰라. 갈 곳으로 갔겠지. 세이드 놈이 오펜바하 황제가 찾고 있다고 말했었지? 그 붉은 눈의 씰? 그 여자나 잡아서 한몫 마련해 볼까?" "재미 없는 농담이야. 그것보다 왜 오펜바하 제일황제가......" 리이는 헤스페리아 최고위의 지배자인 오펜바하가 카넬리안을 찾고 있 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반면 젤리드는 간단했다. "그런거 알고 싶지 않아. 너무 많이 알면 걱정만 늘어나거든. 그냥 너 는 편하게 살면 되는 거야. 달라카트에 가게라도 하나 차려서......" 리이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나하고 같이 살려고?" "그러면 안돼?" 젤리드는 쑥스러운지 계속 창밖의 애꿎은 풍경만 쏘아보며 말하고 있 었다. 진절머리를 낼 줄 알았던 리이는 의외로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봐야 바람 불면 일년도 안되서 어디로 또 떠나가 버릴 거 아냐. 그때도 그랬잖아......그런 남자 받아줄 여자가 어딨어." 젤리드의 성격 자체가 방랑벽이 심해서 도무지 한 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예전에는 그 스스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하긴. 그런 무책임한 남자와는 같이 살기 싫겠지. 하지만......" 젤리드는 슬쩍 리이를 내려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 같이 있어 준다면 날 받아줄꺼야?" "농담 하지마." "농담 아냐." 젤리드가 계속 리이를 바라보는 바람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생각해 볼게." "그래? 그럼 됐네. 다음 도시에서 결혼식 올리자." 일격승부라는 젤리드의 성격은 꼭 검술에서만 발휘되는 건 아니었다. 각계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쓰러져 버린 리 이의 외침. "젤리드! 그건 너무 빨라!" 고삐를 놓칠 정도로 놀라서 뒤돌아보며 외치는 카리나. "제, 젤리드 님!" 검을 뽑으려고 버둥거리는 리이를 황급히 말리며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이카테스. 젤리드는 다시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좋아하는 것 같군." "너.....너......" 놀란데다가 얼굴이 빨개지고 화가 나는 복합적인 증상에 시달리는 리 이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린 젤리드의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혼자 지쳐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잠시 천정을 바라보다가 몹시 부끄러운 듯 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말했다. "적어도 신부복을 입을 수 있을 때 까지는 기다려 줘. 이런 몸으로 결 혼하고 싶진 않아." "리이......" 젤리드는 아주 드물게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소녀처럼 두눈을 꼭 감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농담이었어. 너 꽤 진지하다?" "......!!!" 그녀가 폭발했다. 그녀는 잘 익은 과일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일으켜 검을 뽑으려고 했고 젤리드는 아주 뻔뻔한 얼굴로 '완쾌 축하해. 건강한 것 같네.'라며 끝까지 놀려먹었다. 이카테스가 말리지 않았다면 리이는 홧병으로 급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커다랗게 외쳤다. "너라는 놈을 잠시라도 믿은 내가 바보야!!" 하지만 젤리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니 몸이 나을 때까지는 준비해 올게." "뭘!" 리이는 화가 나서는 외쳤다. 대체 뭘 준비해 온단 말야. 젤리드는 싱 긋 웃으며 짧게 툭 던졌다. "신부복." "뭐?" 놀란 표정의 리이. 이 남자는 대체...... "너보다는 내가 여자 옷 잘 고를껄?" "왜 자꾸! 이랬다......저랬다야." 그녀의 말은 점점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젤리드는 희 미하게 웃으며 무언가 즐거운 것을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는 듯 했다. '올해로 스물일곱인가.....흐응. 이제 흉몽도 끝이군.' 2. 줄리탄 쪽은 별로 로맨틱할 상황이 아니었다. 도시는 전쟁에, 관문이 곧 봉쇄될지도 모르며, 사람들은 '망했다!' 혹은 '말세다! 끝장이야!' 라고 외치며 불붙은 거리를 발정난 개마냥 뛰어나다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밀항선 타러 가야 한다니......내 팔자야." 카넬리안은 도시에 깔린 매캐한 연기에 콜록 거리며 저주스러운 자신 의 인생에 새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앞장서는 것은 톨베인이었다. 군인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도시의 눈을 피해 뒷골목을 요리 조리 통하 며 항구까지 안내하는 것은 톨베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톨베인 은 줄리탄 일행에 동참하여 같이 밀항선을 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톨베인. 그 셜린이라는 아이는 정말 놓고 와도 괜찮은 거야?" 뒤따르던 줄리탄의 말이었다. 그는 항시 사소한 것까지 걱정을 끌어안 는다. 톨베인은 걸음을 끊지 않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내 전재산 줬으니까 어딜 가도 굶어죽진 않아." "그게 아니라 널 따르고 있었잖아?" "날 따른다고 셜린의 인생이 행복해 지는 건 아니잖아. 그 대모를 따 라서 다른 도시로 가는게 그녀에게 훨씬 이익이야. 대모는 셜린을 드물 게 아껴줬던 믿을 만한 여자고." '대모'라면 예의 피부 나쁜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톨베인은 대모에 게 전재산을 주며 셜린의 신변을 부탁한 것이다. 의심 많고 냉철한 톨 베인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틀린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톨베인은 잠시 말을 멈춘 뒤에 뭔가 생각하는듯 하다가 말을 이었다. "셜린도 말했잖아. 나 가는데 따라오면 자긴 방해만 될 뿐이라고. 자 기 입으로 싫다는데 굳이 끌고 올 이유 없잖아." "거 쌀쌀맞게 말하네." 시오가 톨베인의 말투에 혀를 찼지만 톨베인의 마음도 셜린의 마음도 이해하곤 있었다. 사실 카넬리안의 '충고'에 톨베인 보다도 감명 받은 건 셜린이었다. 톨베인의 뒤에 붙어 아무리 쫓아간다고 행복해 지는 건 아니라고 느꼈던 거다. 자기에겐 자기 인생이 있고 남의 인생을 뒤따라 가는 건 자기 자신에게 비참했다. 그래서 그녀는 대모를 따라서 지금까 지 찾지 못했던 자기 인생의 목적을 만들어 보려고 결심한 것이다. "10년 후 오늘, 상트의 대사원에서 만나자고 했으니까......그때까지 는 서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톨베인은 그렇게 말하다가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쑥스러운지 입을 다 물었다. 카넬리안은 별로 기특한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톨베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톨베인은 익숙한 뒷골목을 무의식적으로 달려가며 예전엔 없던 상념으로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몇십명을 죽였던가. 언제나 생각했지. 누군가의 손에 죽을 때까지 나는 몇명을 더 죽이게 될까. 그런데 지금은 한명이라도 좋으니 까 지키고 싶어. 죄값을 용서 받기 위해서가 아냐. 실은......죽이는 것보다는 지키는 것이 마음이 즐거우니까. 더 힘들겠지만.' 뒷골목을 빠져 나온 톨베인의 눈에 횃불이 돌고 있는 심야의 항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독한 미궁의 출구라고 말한다면 너무 식상한 비유 일까? -Blind Talk 이번 편에 챕터를 끝내려고 했지만 사정상 둘로 갈랐습니다. 인터메조는......너무 짧은 한편이라 넣지 않았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오카모토 마요의 TOMORROW를 들으며...... (처음엔 ZARD의 노래인 줄 알았습니다.) 『SF & FANTASY (go SF)』 115195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9-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2/02 14:32 읽음:21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9-5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관련자료:없음 [5740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2-02 05:06 조회:261 공동 아이디의 Wise Wolf 입니다. 테싱이 남기고 간 사진 속에는 알 수 없는 직물로 만들어진 하얀 작업 복을 입고 있는 테싱과 오펜바하, 물키벨의 모습이 있었고 그 앞에는 카넬리안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내 모습도 있었다. 교복이라고 말하는 감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카넬리안과 어깨를 맞댄 채 웃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나의 얼굴. 추측조차 못할 만큼의 태고가 담겨져 있는 사진 속에 는 나도 있고 그녀도 있는데 우리 둘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나는 테싱에게 이 인정할 수 없는 '비밀'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이건......" 카넬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그 몹시도 낡은 사진을 힘들게 들며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할 사진 위의 문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서기......이천 사백......구십 칠년. 마드리드에서......" 그녀는 괴로움에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눈동자를 하얀 손바닥으로 가 리며 힘들게 말했다. "왜......아무것도......기억나지 않는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 야! 줄리탄 씨! 제발 말해줘! 테싱 님이 무슨 말을 남긴 거야!" 그녀는 내 두 어깨를 잡으며 소리쳐 애원했지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말하지 않는 편이......그녀에게 행복하다. < DRAGON LADY /F > Section I : 재래(再來) Chapter 9-5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Sub title : Morbid Risk 1. "저 여자......씰이지?" 톨베인은 항구 근처의 4층짜리 여관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옥상 의 굴뚝 위에는 카넬리안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번에 사뿐히 옥상에 올라 항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표정으로 줄리 탄에게 말했다. "으, 응." 카넬리안의 정체를 말해도 되나? 줄리탄은 좀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뭐 이제와서 동행하기로 한 톨베인에게 숨길 건 없겠지. "제국에서 잡으려는 그 씰이야?" "숨길 생각은 없어. 맞아." 시오가 당황했지만 줄리탄은 그렇게 말했다. 톨베인은 뒷생각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궁금증이 풀려서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어쩐지......인간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 "너무 강해서?" "그것보단 기분이. 저 여자 앞에 있으면 기분이 묘해져." '뭐야 이 녀석. 역시 카넬리안에게 관심이?'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시오가 흘겨보자 톨베인은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이, 이상한 생각하지마! 난 단지 사람에게선 느낄 수 없는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던 것 뿐이야!" "나 아무 말도 안했어." "......" 역시 변명하는 쪽이 괜히 불리해 진다. "어쨌든......그럼 모든 씰들에겐 주인이 있다던데 저 여자의 주인은 ......설마 너?" "으응." 줄리탄은 또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유별난 주종관계지만......내가 테이머인게 맞긴 맞지.' 톨베인이 놀란 얼굴로 줄리탄에게 말했다. "너 엄청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거 아냐? 씰들은 나약한 사람은 주인 으로 모시지 않는다고 들었어. 네 특기는 뭐지? 검? 마법?" "요리......" 줄리탄은 고개를 돌리며 '내가 왜 가는 곳마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거야.'라는 탄식어린 표정으로 기어들어가며 말했다. 의아한 표정의 톨 베인. "요리? 음식 만드는 거?" "그렇지 뭐......" "너, 네 실력을 나한테 숨기는 거지." "숨기긴 뭘......" 역시 의심 많은 톨베인이다. 그는 줄리탄이 '사실은 대단한 실력자'라 고 생각하며 계속 캐물었다. "검을 쓰지 너? 사실은 넌 기사수행 하고 있는 무가(武家) 사람 아냐? 자신의 검술을 남이 보는 것을 원치 않는. 맞지!" "난 식칼 외에는 검 써본 적 없어. 내 요리 실력, 남에게 숨길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고." 톨베인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진실을 알고 있는 시오는 웃음 을 참느라고 입을 막고 바닥을 굴렀다. 톨베인은 아직도 줄리탄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은 것 같았다. "거짓말. 그럼 그 손에 들고 있는 곡도는 뭐야. 척 봐도 범상한 칼 같 지는 않은데?" 톨베인은 줄리탄이 들고 있는 신월도 인피타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절 대 요리칼이 아닌 칼을 들고 있으니 확실한 물증 아닌가. 줄리탄은 자 신의 '자살도'(自殺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뽑을 수 없어. 뽑아 본 적도 없고." "무슨 의미야?" "뽑으면 죽거든. 확인은 안해봤지만......" "죽다니? 상대가?" "아니 내가." "니가?" "으응." "왜, 왜지?" 당황하는 톨베인. 그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그건 말야......으음. 그러니까......관두자. 아무튼 난 검을 쓴 적 이 없단 말야!" 줄리탄은 드물게 자신에게 계속 물어보는 톨베인 때문에 몹시 신경이 쓰였다. 평소엔 짧고 퉁명스럽게 말하다가도 강한 것에 대한 궁금증은 대단한가 보다. 톨베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씰의 테이머를 앞에 두고 평소 생각하던 모습과 너무 달라 나름대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럼 누굴 죽여본 적도 없어?" 일반적인 십대는 이런 질문 하지 않는다. 줄리탄은 머리속에 지금까지 있었던 위기상황들이 주마등처럼 돌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대 답했다. "죽을 뻔 한 적은 많아." "......너 정말 보통 녀석이야?" "그렇다고 말했잖아. 나한테 검을 날리고 마법을 날린 놈들은 많아도 난 그런 것 못한 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씰의 주인이 된거야?" '젠장......' 역시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물어봐도 결론은 하나다.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테이머가 되었니?' 굉장히 인기 많고 능력 좋고 잘 나가는 여자 와 결혼한 키도 작고 돈도 없고 매력도 없는 남자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나. 줄리탄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해주었던 대답을 반복했다. "그 이유 알면 나한테도 좀 알려주라." 그때 카넬리안이 날렵하게 바닥에 톡 떨어졌다. 정찰을 마친 것이다. 그녀는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 좋은 청력으로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으이구. 그 새를 못참고 다 말해요. 아무튼 주인님은 요리사 맞아." "요리사가......어떻게 씰을 깨울 수 있지?" 그때 톨베인의 어깨에 시오가 손을 턱 얹으며 씨익 웃었다. "나도 테이머 였다네. 꼭 거창한 성인만 깨우라는 법은 없잖아?" "너도 요리사야?" "아냐!!" 복잡스런 톨베인의 심경을 던져놔 버리고 카넬리안은 항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군대가 장악했어. 한발 늦었다고." "밀항선을 기대하는 건 무리겠군." 톨베인이 탄식했다. 밀항선을 모는 자들이 금화 몇닢에 목숨을 걸고 군이 장악한 항구를 뚫을 리가 없지. 모르긴 해도 도시의 분위기만 보 고도 배를 돌릴 것이 뻔했다. 카넬리안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게다가......지금 항구의 군인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은......" "설마......" 시오는 지나친 우연에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하고는 인연이 지겹게 따라붙는 것 같군." 그녀는 밤공기에 유난히 윤기가 흐르는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 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어쩌지?" "어쩌긴. 강행돌파야." 카넬리안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톨베인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군인들하고 싸우게?" "누가 싸운데!" "그럼?" "제게 맞겨 두세요. 주.인.님." 그녀는 줄리탄을 향해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불안해...... 2. "이곳은 제가 지키고 있을테니 막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 밤의 항구는 입김이 보일 정도로 쌀쌀했다. 호이젠은 경계용으로 피워 놓은 촉탄(燭炭) 앞에 서 있는 안색이 좋지 않은 키마인에게 재차 걱정 스럽게 말했지만 키마인은 계속 고집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새벽까지는 지키고 있을래." 크라울리와의 싸움에서 부상당한 키마인은 막사에서 간단한 치료만 받 고 벌떡 일어나 항구 봉쇄를 지휘했던 것이다. 당연히 군인과 기사로서 의 책임감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테이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 는 씰, 호이젠으로서는 그런 키마인의 행동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특무대도 모두 도주했고 별 일 없을텐데 뭐. 걱정하지마." "예.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자신의 전주인을 빼닳은 어쩔 수 없는 기사다.'라고 호이젠은 생각했 다. 그때 얼굴에 흉터까지 있어 전장에서의 연륜이 보이는 병사의 보고 가 있었다. 전투지라서 계급장을 때고 있었지만 낡은 가죽 갑옷을 아무 렇게나 걸치고 있는 폼이나 자긴의 몸에 맞게 개조해 놓은 대검, 어린 상관을 대하는 '노련한' 태도에서 꽤 잔뼈가 굵은 군인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키마인 경. 왠 여자가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갑쇼?" 싱글거리며 참 편하게 보고 올리는 그의 표정은 조롱까지는 아니었지 만 '역시 너도 여자가 있었구나?'라는 놀림의 의미가 있었다. 부대의 신임 중대장 격인 키마인은 길드에서의 전투로 확실히 부하들의 신임은 받기 시작했지만 나이가 나인지라 '애취급'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여, 여자 라고요?" "이야. 생긴게 장난 아니던데......요?" 키마인은 좀 당황했다. 군 주둔지로 여자를 부른다는 건(키마인의 경 우는 좀 다르지만) 귀족이나 몇 몇 '날나리' 기사들은 자주 저지르는 일이지만 눈꼴 사납기 그지 없는 추태다......라는 것 보다는 '여자라 니! 난 아직 여자 친구도 없단 말야!'라고 키마인이 속으로 외쳤다. 눈 치 빠른 호이젠의 얼굴이 굳은 것이 벌써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챈 것 같았다. "거 뭐래더라....카넬리안? 이라던데 이름이?" "여, 여기로 불러 주세요!" "어엉?" 키마인이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갑자기 커다랗게 외치고 혼자서 얼굴이 벌개지는 바람에 흉터의 사내가 도리어 놀라 버렸다. 그는 '그래. 젊었 을 때 하는 연애가 제 맛이지.'라는 아버지의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서 정중하게 보고를 마쳤다. "예에. 알겠습니다. 키마인 경." "벼, 별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예에에. 물론입니다요. 키마인 대장님." 키마인을 아직까지는 '이래저래 신경 써 줘야할 초보 기사'라고 여기는 건 호이젠 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하들은 키마인의 명령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반면 그를 자기 자식처럼 귀엽게 대하는 발칙함 도 가지고 있었다. 카넬리안이 도착한 것은 키마인이 괜히 멋낼 부분도 없을 투박한 군복을(화려하고 치렁치렁한 귀족옷을 입고 군을 지휘할 정도로 덜 떨어진 자가 아니다 키마인은.) 몇번이나 손보고 있을 때였 다. "키마인 씨." 드디어 나타난 카넬리안의 뒤에는 줄리탄, 시오, 톨베인이 서 있었다. "오셨군요. 아 다른 분들도......" 카넬리안은 언제 다듬었는지 흐트러짐 없이 청초한 검은 머리칼을 길 게 내린 채 키마인 앞으로 다가오며 조금 부끄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누 가 봐도 품위를 알고 있는 청순가련한 미녀의 상. 그러나 그녀의 속마 음은 다음과 같았다. '훗훗. 나한테 빠져 버린 것 같네? 좋았어!' "일단 막사로 들어가실까요? 여기는 춥습니다." 영하 50도에서도 땀을 흘릴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카넬리안이 추위를 느낄리가 없지만 그녀는 남자의 배려에 고마운 표정을 보이면서도 고개 를 가로 저었다. "감사합니다만, 급히 부탁드릴게 있어서 왔습니다." "어떤 부탁을?" 카넬리안은 성질 안부리고 마음만 먹으면 상대가 자기도 모르게 멍하 니 바라보게 만들 정도로 신비스러운 매력이 있다. 그건 쉽게 다가가가 지도 보여주지도 표현하지도 않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 다 선이 가는 이국적인 이목구비는 여자라 하더라도 감히 질투를 느낄 겨를 조차 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대단한 외모를 고래심줄 같은 성 격으로 숨기고 있는 것도 그녀의 재능이라면 재능. "저는 달라카트 태생입니다. 헤스팔콘을 여행하던 중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요." 게다가 거짓말에도 꺼리낌이 없었다. 호이젠은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 는 분이다.'라는 푸념을 애써 숨기며 그녀의 연기를 관찰하고 있을 뿐 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키마인은 완벽하게 속은 것 같았다. "이 분들과 함께 이곳을 거쳐 달라카트로 내려 갈 계획이었으나..... 관문이 봉쇄되어서 내려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라카트로 갈 수 있는 작은 배를 빌려 주실 수 있을까 하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짧고 간결했으며 키마인에 대한 애교나 교태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 었다. 자신에게 들러붙는 귀족의 아가씨들이나 기녀들은 수없이 겪어봤 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점이 더욱 끌리는 것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후후후. 속아 넘어가라. 속아 넘어가라. 속아 넘어가라.'.......였다. 그러나 세상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정말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카넬리안은 '우이씨! 왜 안돼는데!!'라고 평소처럼 외치려다 가 애써 진정하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신했다. 그걸 보는 키마인의 마음이 찢어진다. "저는 일개 카르팔스 대대의 지휘관일 뿐입니다. 함부로 제국의 소유 인 군선을 개인적인 이유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카르팔스라는 것은 240인으로 이뤄진 헤스팔콘 군 단위였다. 즉 키마 인은 240인 대대의 일선 지휘관이지만 아버지가 총사령관이라 마음만 먹으면 군선 몇 척 쯤은 맘대로 유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키마인은 그 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치잇! 군인.......' 속으로는 얼마나 도와주고 싶었겠냐. 카넬리안은 키마인의 정중한 거 절에 '멋진 남자'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궁시렁 거렸다. "아 각하께 말씀드리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각하......라면?" "군 총사령관 아취발트 이젠그람 각하 입니다." 호이젠이 키마인의 뒤에서 놀란 표정으로 카넬리안을 향해 고개를 흔 들었다. 그와 만나면 안된다. 노련한 기사인 아취발트는 한눈에 카넬 리안이 (아무리 눈색을 푸른 빛으로 감췄다 하더라도) 씰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각하께서 새벽 쯤에 이곳으로 검열을 오십니다." '에엥? 군사령관이 직접 검열을? 그쯤 되었으면 쉬엄쉬엄하지.....' "그때 말씀드리면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엄하시지만 존경스러운 판단 력을 지니신 분이니 급한 일이라면 들어주실 겁니다." '그 존경스러운 판단력 덕분에 날 보자마자 알아맞출 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슬 다음 구실을 찾았다. 여기서 물러난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억척 같이 수천년을 살아온 죄많은 인생 . 여기서 착한 기사 하나 울궈 먹는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겠지...... 라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 시키고 있을 때 예의 흉터난 부하가 다가왔다 . 그런데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키마인은 말도 없이 다가오는 그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대는 아무 말도 없다. 순간 카넬리안은 줄리탄 앞에서 서며 기민한 몸동작으로 줄리탄을 보호했다. 무언가 이상하다. 서서히 굳어 지는 호이젠의 표정. 갑자기 그 부하는 대검을 뽑으며 키마인에게 달려 들는 것이었다. "키에에엑!" "!!"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외침. 키마인은 급히 검을 뽑으며 몸을 숙였고 간발의 차이로 그 사내의 예리한 검날을 피할 수 있었다. 호이젠 역시 검을 뽑았지만 일단 급한데로 상대의 옆머리를 자신의 긴 다리로 돌려 차서 멋지게 쓰러트렸다. 호이젠의 강한 일격에 아무리 건장한 체구라 도 기절했을텐데 그렇지 않았다. 호이젠의 머리속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정신오염?!' 그는 분명 누군가의 강제력으로 조종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과 콧 물을 아무렇게나 흘리며 일어서는 그 자는 키마인에게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두 눈이 돌출될 정도로 누군가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젠장!" 키마인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공격하는 부하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그는 계속 조종 당하는 상대의 검을 피하 며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호이젠은 다급하게 외쳤다. "이미 정신이 붕괴되었습니다! 죽여야 합니다! 주인님!" "그, 그럴 수는......" "나......나를 죽여......빠,빨리......" 상대는 키마인에게 다가오면서도 애써 조종 당하는 자신의 육체를 거 부하며 사자(死者)의 목소리처럼 어렵게 말을 이었지만 키마인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근처의 군인들이 재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그들 역시 이런 상황 에 지휘관 키마인의 명령을 기다릴 뿐 정신오염이 된 부하 주변을 포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종당하는 자는 동료다. 그들도 명령 없이 죽 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종자는 근처다. 능숙한 실력인데?' 침착하게 줄리탄을 보호하며 상황만을 지켜보는 카넬리안은 고개를 돌 려 주변을 살폈다. 정신오염은 상급의 전투 마법사가 전장에서 쓰는 방 법이었다. 정신오염의 시전자는 시야반경 내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때 키마인이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걱정스러운 호이젠의 목소리. "키마인 님....." "죽이지 않을 자신 있어." 키마인은 오염된 부하를 살리기 위해 기사로서의 자신의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기사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기사의 일격을 받 아낸 보통 사람은 뼈가 산산조각나고 장기가 터져버려 즉사한다. 정교 하게 자신의 힘을 조절하여 상대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타격을 주는 것 은 키마인으로서는 성공해 본 적이 없는 능력. "크으으으으으으." 혼이 지배 당하는 짐승처럼 다가오는 상대를 보며 키마인은 자신의 기 력을 조절했다. 곧 자신의 얼굴로 날아드는 상대의 검이 똑똑히 보인다 . "고통스럽겠지만 참으세요!" 키마인이 자신의 기력과 함께 휘두른 검은 정확하게 부하의 검신 하단 에 직격되었고 폭발음 같은 것이 터지며 부하는 검을 놓치고 날아가 버 렸다. 쓰러진 부하는 거품을 물며 몸을 비틀었지만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고 상황은 일격에 끝이었다. 놀란 표정의 부하들의 얼굴. 키마인은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외쳤다. "침입자가 있다! 팔랑기스 단위로 주변 경계 수색에 들어간다!" 그 말과 함께 군대는 민첩하게 진형을 짜며 일도의 흐트러짐도 없이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마인은 카넬리안에게 달려오며 다급하 게 말했다. "일단 제 곁에 있으십시오! 위험한 상황 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넬리안의 눈은 호이젠을 향하고 있 었다. 그녀는 이런 치명적이고 즉각적인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절대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상에 주저 함이 없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전투 마법사가 분명 했다. '일반 병사들로 당해낼 수 있는 자가 아냐. 키마인 씨를 지켜라. 호이 젠.' 호이젠은 카넬리안의 무언의 조언을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몇몇 병사들이 스스로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기분이 이상해." "내 손이 왜 이렇게 떨리지?" "머리속이 붕 떠버린 것......같아." '늦었군.' 카넬리안의 탄식대로 이미 새로운 정신오염이 - 그것도 다수가 오염되 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키마인의 신음 소리와 함께 갑자기 이상이 생긴 병사들은 바닥을 구르 며 괴이한 신음소리를 내며 구토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뇌속에 파고들 정신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병사들이라도 이런 상황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키마인이 외쳤다. "그들에게서 떨어져!" 그러나 순간 정신이 오염된 병사들은 자신들의 동료를 향해 검을 찌르 기 시작했고 순간 확고한 아군 진형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피비린내 나 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크라울리다!" 호이젠이 이 시전자의 정체를 눈치채고야 말았을 때 어둠 속에서 형광 의 붉은 빛으로 번뜩이는 가로 일자의 선이 키마인에게 날아들었다. 저 격 마법이다. "으아악!" 화살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빠르기다. 동료들끼리의 원치 않는 혈전 이 되어 버린 전장에 당황하고 있는 어린 기사 키마인에게 날아든 마력 의 가시선(可視線)은 그대로 키마인의 가슴을 꽤뚫어 버렸고 고통을 느 끼기도 전에 키마인의 몸이 공중에 붕 떠서 솟아오르다가 곧 바닥에 떨 어졌다. 무방비 상태나 다름 없을 때 당했다. 절망적이었다. "주인님!" 호이젠은 평소대로라면 크라울리를 어떻게든 찾아내 무력화 시켜야 했 지만 자신의 테이머가 쓰러지는 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키마인에게 달 려갔고 그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으으윽!" 다음 일격은 호이젠의 미간을 향한 것이었고 호이젠은 재빠르게 몸을 피했지만 어깨에 커다란 관통상을 입고 검을 놓쳤다. 그러나 호이젠은 쓰러진 키마인 앞에 서며 계속 키마인을 보호했다. 호이젠은 눈 앞에 또 다시 날아오는 마력선을 보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 그것은 호이젠의 몸을 꽤뚫었고 호이젠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이 쓰러 져 버렸다. 누가보아도 완벽한 패배. "주인님. 지금 배를 타자." 카넬리안은 이런 상황을 보며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놀라는 건 줄리탄 뿐만이 아니라 톨베인과 시오도 마찬가 지였다. 줄리탄이 외쳤다. "이, 이건 길드 때와는 달라. 이러다간 전멸하겠어. 키마인 경도 호이 젠도,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고!" "그래서? 그러니까 지금이 도망칠 기회잖아." 그녀는 파란 눈동자 그대로 싸늘할 정도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차가운 말을 입에 담았다. 줄리탄은 곤혹스러웠지만 주저 없이 대답했다. "사람 들을 지킬 기회야. 말싸움 할 시간 없어." "정체가 탄로날지도 몰라. 게다가 주인님이 위험할지도......" "사람들이 죽는 걸 지켜보면서까지 정체를 숨기고 싶진 않아!" 줄리탄의 외침을 시오는 따른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카넬리 안에게 설득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들고 있던 미스트랄을 싸고 있는 천을 풀었다. "테이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씰이지." "카넬리안......" "그렇지만 복종이 아니라도 당신은......지켜주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그 저주 받은 칼 뽑지마!" 카넬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며 진지로 다가오고 있는 크라울 리를 바라보았다. 승리감에 가득 찬 크라울리의 시선은 쓰러진 키마인 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어떤가. 애송이 기사. 군인이라고 했지? 이게 전쟁이다."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키마인은 크라울리를 보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크라울리는 일어서려는 키마인의 가슴을 밟았다. "으악!"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입에서는 계속 피가 쏟아졌는데 크라울리는 승 리의 의식처럼 계속 키마인을 짖밟고 있었다. 크라울리는 불길한 문신 이 새겨진 손등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난 방금 전 내 몸의 힘을 마지막까지 뽑아내는 주술을 걸었다. 어차 피 제도로 돌아가도 난 상트를 지키지 못한 패장으로 치욕스러운 처분 을 받는다. 설사 로이터 공께서 나를 용서한다 하더라도 나는 네게 당 했던 수치를 참을 수 없어!" 크라울리는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키마인의 상처를 자신의 군화로 거칠게 부비며 광기어린 눈동자로 말했다. "이곳에서 넌 나와 함께 죽는다." 크라울리가 걸고 있는 주술은 학문적으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전투에서 까지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힘을 바닥까지 끌어내서 싸우 는 것. 물론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가 없어 주술이 풀리는 순 간 자멸하게 되지만. 줄리탄 일행은 레터의 화전민 촌에서 장갑패척병 에 시전되었던 비슷한 주술을 본 적은 있었지만 자신의 몸에다가 직접 시전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지독한 짓이었다. "호이젠을! 내.......내 부하들을 저 꼴로 만들어 놓고!" 키마인은 놓친 검을 잡으려 애쓰며 계속 싸우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크 라울리의 발길질에 번번히 쓰러졌다. 그는 키마인을 쉽게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카넬리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적당히 좀 해라. 그런 저급한 복수심을 자랑스럽게 외치다니 마약을 너무 먹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누구냐!" 이를 가는 목소리로 크라울리가 돌아본 쪽에선 줄리탄 일행이 걸어오 고 있었다. 키마인이 놀란 얼굴로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외쳤다. "카넬리안 씨! 위험해요!" 크라울리는 의아한 얼굴로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길드 내에서도 봤 었는데 이런 상황이니까 확실하게 그녀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씰이잖아. 너." "뭐, 뭐라고?" 키마인의 당황한 표정을 카넬리안은 외면하며 굳은 얼굴로 크라울리를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키마인 경에게 손대지 마라. 상대는 이쪽이다." 순간 시오와 톨베인 역시 마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것 처럼 능숙 하게 카넬리안 양 옆으로 흩어졌다. 줄리탄은 자신의 신월도 인피타르 의 검집을 꽉 쥐었다. 이것을 쓰게 될까 여기에서? 크라울리는 카넬리 안의 마법에 걸린 푸른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설마 수배령이 내린 그 씰.......?" 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크라울리에게 달려갔다. 미스트랄의 주변을 붉은 플라즈마의 기운이 맹렬하게 감싸며 바람처럼 다가오는 카넬리안 에게 크라울리는 당황하며 소매 속의 화살촉을 발사했지만 그녀의 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튕겨나갈 뿐이었다. "제, 제길!" 마력을 손에 모으던 크라울리는 카넬리안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자 시 전하던 마법을 풀며 카넬리안이 빛의 송곳처럼 찌르는 검끝을 몸을 돌 려 피했다. "어설프다. 마법사." 즉사는 면했지만 그녀가 검을 찌르며 찢어낸 공기의 파편들이 크라울 의 오른쪽 귀를 밀어버려 흉직하게 찢어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그 충격에 크라울리의 고막이 터져 버렸고 금새 두 눈의 혈관들이 터 지며 두 눈에 피가 찼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 그대로 다시 몸으로 미스 트랄을 끌어 당기며 다음 공격 부위를 찾았다. "카넬리안 씨......" 키마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며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 을 정도로 강력하고 노련한 검술을 구사하는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고통에 욱신거리는 그의 머리속에 그녀와 있었던 장면들이 순식간에 지 나가고 있었다. '강하다! 너무 강하다!' 당황할 시간도 없었다. 크라울리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도망치기 시작 했지만 카넬리안은 뒤쫓지 않았다. 그곳에는 시오가 있었다. 시오는 특 유의 자세로 어깨 위까지 각도를 치켜세운 뒤에 정확하게 크라울리의 팔을 노려 찔렀지만 크라울리는 반사적으로 차폐막을 만들며 시오가 찌 르는 검을 막아냈다. "이 놈들이! 우아아악!" 크라울리의 비명이 터졌다. 톨베인이 크라울리가 눈치채지도 못한 사 이에 유령 같은 발걸음으로 그의 뒤까지 다가와 등에 칼을 꼽은 것이다 . 정확하게 등에서부터 기도를 관통하는 그의 칼은 지금까지 어떤 사람 도 비명을 지르지 못한 채 즉사시켰지만 크라울리는 기도가 뚤려 입에 서 바람소리를 내면서도 계속 저항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살인이 되길.' 톨베인은 냉정하게 크라울리의 등에서 검을 뽑으며 미친 듯이 온몸을 요동하는 크라울리의 목을 날려 버렸다. 크라울리의 몸은 머리가 떨어 져 나간 뒤에도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하다가 그의 몸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불길에 휩쌓여 불타버렸다. "자신의 몸을 힘과 맞바꾼 대가지." 카넬리안은 결국 시커멓게 타버려 그을린 바닥 위에서 침묵하게 된 크 라울리의 시체를 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 그녀의 머 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줄리탄을 돌아보았다. '주인님이 위험해!' 정신이 오염된 병사가 줄리탄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전자는 죽 었지만 이미 정신이 붕괴된 자들은 주변의 아무나 칼로 찌르고 덮치는 것이었는데 이런 자가 카넬리안을 지켜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줄 리탄에게 다가온 것이 문제였다. "이 놈!" 줄리탄은 갑자기 옆에서 날아드는 흉악한 검을 황급히 인피타르의 검 집으로 막았지만 어쩔 수 없는 힘의 차이 때문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 검을 놓쳤다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계속 찌르려는 병사의 칼 을 줄리탄은 검집을 휘두르며 힘겹게 쳐내고 있었다. "주인님에게서 떨어져!!" 카넬리안의 눈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듯이 변했다. 키마인의 눈에 도 그녀의 그 눈동자는 똑똑히 보였다. 그때 줄리탄의 허벅지에 상대의 검이 깊게 박혔다. "으아악! 망할!" 난생처음 검에 찔려 본 것이다. 고통보다도 먼저 공포가 줄리탄의 머 리 속에서 비명을 질렀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인피타르를 뽑으려고 했 다. 솔직히 말해서 평소 생각하던 근엄하고 숭고하고 자기희생적인 다 짐은 공포에 사로 잡힌 줄리탄의 머리속에서 얄밉게 도망쳐 버린 것이 다. 줄리탄은 찐득거리는 침을 자신의 얼굴에 흘리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촛점 잃은 병사의 표정을 떨리는 얼굴로 바라보며 신음소리를 냈 다. "으아아아......죽기 싫어......" 세상을 지키기 위한 엄한 훈련을 걸음마 단계에서 부터 받은 용사 같 은 것이 아니다 줄리탄은. 그는 자기도 인피타르의 검자루를 쥐었고 병사가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목숨을 가져가는 검 인피타르를 뽑으려고 했다. 푸드드드드득! 순간 병사의 뼈와 살이 갈라지며 두동강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 다. 카넬리안의 미스트랄이 병사의 몸을 베어버린 것이다. 줄리탄의 눈 앞에서 자신의 허벅지에 검을 찌른 그 병사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고 후 두둑 소리가 나며 줄리탄의 온 몸으로 핏덩이 들이 쏟아졌다. 그녀는 얼이 빠진 것 같은 얼굴로 누워 있는 줄리탄을 꽉 껴안았다. "카넬리안......."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요!" 이런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울어버릴 것 같이 필사적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고 시오와 톨베인이 한참을 말려서야 진정된 것 같 았다. 3. 사실......줄리탄 보다는 키마인과 호이젠의 부상이 훨씬 심했다. 결 국 아취발트 이젠그람이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하게 되었고 줄리탄 일행 은 이젠그람 헤스팔콘 군총사령관 앞에 서게 되었다. 키마인을 지키다 가 완전히 빈사상태에 빠진 호이젠 곁에 있다가 자신을 지킨 줄리탄 일 행을 변호해야 겠다는 생각에 힘들게 막사로 향했다. "자네들에게 우리 군의 수치를 보여줬군." 아취발트는 복잡한 심경으로 줄리탄 일행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을 시 작했다. 그는 카넬리안을 보며 그녀가 씰이고 어쩌면 제국이 잡으려는 씰일 수도 있다는 것도 오랜 경험과 기사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특무대 잔당에 맞서 항구를 지켜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네." 목소리는 무거웠다. 허벅지에 부상을 당해 붕대를 감고 앉아 있는 줄 리탄과 다른 일행들,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는 키마인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이젠그람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본론을 시작했다.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은 제국의 수배령 때문이야. 붉은 눈의 씰을 잡 기 위해......" "아버님! 아니 각하 제 말을....." "넌 조용히 하고 있어라." 카넬리안을 변호하기 위해 외치려는 키마인을 아취발트는 소리치지 않 았지만 단호하게 막으며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중히 그러나 차갑게 이젠그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면 같은 푸른 눈동자였다. "변명이나 거짓말을 하기엔 너무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군요.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잡으시겠다면 전 최후까지 응전하겠습니다. 하 지만 저의 테이머께서 제게 체포 당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는 그 것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씰이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에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원망도 분노도 아닌 물빛 같은 시선. 아무리 말이 어눌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지? 줄리탄의 말은 확고했다. "난 네게 명령 같은 거 내리지 않아. 도와줄 수 있는 아무 힘도 없고 언제나 방해만 되지만......널 내 인생의 부수물 정도로 여기는 건 참 을 수 없어. 난 씰에게 죽음을 명령하는 테이머 따위는 되지 않아." 무장해제를 당해 미스트랄도 인피타르도 시오의 각도도 톨베인의 검도 없었다. 군대의 포위망을 뚫을 수는 없다. 저항 한다면 몇명쯤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몰살이다. 줄리탄 일행을 돌아보던 이젠그람이 말 했다. "난 붉은 눈의 씰을 잡으라는 폐하의 칙령을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그런 자는 없다. 파란 눈의 씰이 있을 뿐이지. 이상이다." 이젠그람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석 같은 노장 '관문 의 사자' 아취발트 이젠그람은 꼬장꼬장하게 꽉 다문 얼굴 그대로 밖으 로 향했다. 헤스팔콘 군 휘장이 세겨진 그의 낡은 망토를 흘리며 막사 밖으로 향하는 이젠그람을 향해 키마인은 놀라움과 고마움이 섞인 얼굴 로 말했다. "아, 아버지." "넌 좀 더 수련을 해야겠다." 이젠그람은 자신의 아들을 향해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때 카넬리안 이 돌아보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풀어주시는 겁니까? 뭐 나야 좋지만, 이렇게 물러도 되는 건가요? 헤 스팔콘 군을 지휘 하시는 분이?" "못들은 걸로 해 주세요!" 카넬리안의 '무례한' 말을 시오가 말렸지만 이젠그람은 여전히 멋대가 리 없이 대답했다. "내 아들을 지켜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모두들 아무말 도 없었다. 처음으로 말을 꺼낸 것은 줄리탄이었다. "카넬리안.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 성격이 그런 것 뿐이야. 난 과거가 어두운 여자거든." 그녀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줄리탄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제서야 시오 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키마인이 카넬리안에게 다가왔 다. "그런 실력을 가지셨다면 헤이시 산에서도 절 죽일 수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카넬리안 씨." 그녀는 사실 몇번이나 키마인을 죽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줄리탄과 호 이젠 등의 직간접적인 저지 때문에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전의 성격이었다면 애시당초 키마인의 목숨을 끊었을 것이 분명하다. "난 씰이에요. 존댓말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마치 처음만난 사이처럼 키마인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요. 역시 제가 미숙하기 때문 에 그런 걸까요?" 카넬리안은 아무 대답도 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키마인에게 천천히 다 가갔다. 당황하는 모두들. "왜 그러.......어?" 카넬리안은 발끝을 올려 키마인과 키를 맞추며 조용히 키마인에게 입 맞춤을 하였다. 키마인의 몸이 일시에 굳어 버리는 것 같다. 아무런 통 증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머엉......해졌다. 그녀 는 그 상태로 조용히 길게 유지했다. 잠시 정적......또 정적.......계속 정적...... 그녀는 입을 때고 홍조띈 얼굴로 물끄럼이 키마인을 올려보며 말했다. "답례에요." "아 그, 그게......전 아무 것도 한 것이......"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키마인의 얼굴이 술에 취했을 때 보다도 더 달아 오르고 달라 올랐다. 덩달아 얼굴이 달아오른 톨베인, 시오 그리 고 줄리탄. 그녀는 갑자기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키마인의 아픈 어깨 를 마구 치면서 말을 쏘아댔다. "그러니까 내 주인님은 엄청나게 가난해서 가진게 몸 뿐이라니까요. 이걸로 참아줘요! 에헤헤 아? 설마 처음? 얼굴 빨개지셨네. 으음. 기사 란 어떤 여자 앞에서도 당당해야 해요. 당신은 충분히 멋진 남자지만 말이에요. 와아 나도 수백년만이야 이런 건. 그리고 약속했던 배 좀 빌 려주세요. 아참! 주인님은 나중에 해줄께에." "......." 아직 어린애라 이거냐. 줄리탄은 조금 울컥했다. Chapter#9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End Next : 1부 재래. 종장(終章) -Blind Talk 아아 힘드네요...라고는 하지만. 인터메조도 이제 끝. 1부도 곧 끝. 이런 식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 곧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편......좀 더 멋지게 쓰고 싶었지만 최근 주변 수상한 일이 잔뜩이라서 좀 무성의하게 일관한 듯 합니다. 반성하지만 때로는 '그럭저럭'이라는 마음가짐이 정신 건강에 좋으니까. 너무 자주 '맘에 안들어!'라는 불평을 늘어 놓다 보니까 귀가 얇아 지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그러니까......마음 편하게 my pace로 go 1부 종장은 일요일 밤에 올라갑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ganet crow의 mysterious eye를 들으며 ps:.....실은 대검 같이 거창한 것에 허벅지가 깊게 찔린다면 대동맥 같은 것이 끊어져서 출혈과다나 쇼크사로 죽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도 고열에 시달리거나 불구가 되지는 않을까나..... 여기서는 치명적인 부분을 아주 운이 좋게 피해서 줄리탄이 후유증 없이 살아남은 거라고 은근슬쩍 넘기겠습니다. 하긴 다른 멋진 주인공들은 가슴에 정을 박아도 끄덕 없이 부활하던데. 키마인 같이 종자 자체가 우수한 경우는 즉사하지 않는 이상 억세게 살아 남습니다. 『SF & FANTASY (go SF)』 115513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 1부 마지막 장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2/04 18:13 읽음:200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부 마지막 장 관련자료:없음 [5745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2-03 10:03 조회:626 그대는 오로지 난파선 속에서도 잃을 수 없는 것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수피명언 D R A O G N L A D Y 一部 在來 終章 1. 언제 어디서나 토하는 소리는 누구라도 듣기 싫을 것이다. "꾸우에에에에에에엑! 크허억 헉! 헉! 헉!" "......." 줄리탄은 선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름다운 바다를 향해 질리지도 않게 토악질을 계속 해대는 시오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오야. 너 그러다가 몸 상하겠다." "마, 말시키지......우우에엑!" "......" 결국 키마인에게 작은 군선 하나를 뜯어내 달라카트로 향한지 이틀째. 카넬리안은 그 박식함으로 해류와 해도를 보며 항해를 지휘하고 있었고 어촌 출신인 줄리탄 역시 한사람의 선원 몫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문 제는 배는 처음이었던 시오와 톨베인. 톨베인은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 말도 안했지만 작은 침실에 틀어 박혀 베개를 입에 물고 창백한 얼굴로 배멀미를 꾹꾹 참고 있었다. 아무튼 인정하기 싫어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국보급인 녀석이었다. 반면 산골소년 시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우우우우우에에에엑! 으어어 죽겠다! 빌어먹을 바다아아아!!" "......" 시오는 '오오오! 나도 이제 배를 타는구나!'라며 방정맞게 배를 탄지 몇시간도 안되서 배멀미를 시작하더니 이틀 동안 지옥에서 울부짓는 듯 한 괴성으로 줄리탄의 귀를 괴롭게 만들었다. "주, 줄리탄. 넌 어째서 끄덕 없......우우욱!" "그거야 난 어려서부터 배를 탔으니까. 보통은 하루쯤 지나면 진정되 는데 넌 정말 특이 체질이다." "놀리지 마! 우우. 미치겠네 정말." 선상으로 나온 카넬리안이 완전히 탈진해서 헬쑥해진 시오를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화상은 바다에서 까지 끝도 없이 시끄럽게 구네. 못났어 정말!" 그녀는 사실 시오의 속에서 부터 올라오는 그 끔찍한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시오를 번쩍 들어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참아오고 있 었다. 시오는 뭐라고 말하든 신경쓸 정신이 아니라는 듯이 저리가라는 손짓을 하며 계속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이 놈의 배멀미......멈출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겠어. 우우엑!" 시오의 그 말이 첫 번째 실수였다. 카넬리안이 몹시 다정스런 얼굴로 그의 곁에 다가오며 말했다. "그으래? 그럼 내가 즉효법을 알고 있는데 좀 도와줄까?" "뭔데? 좋은 방법 있어?" 카넬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인게 그의 두 번째 실수였다. "일단은 저 수평선을 똑바로 바라봐." "왜?" "바라보라면 바라봐." 바라보란다고 바라본게 그의 마지막 실수였다. 시오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노을이 지고 있는 아름다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정지해 있는 듯한 먼 경치를 바라보면 속이 가라 앉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오가 말했다. "그 다음엔?" 퍼억! 카넬리안은 시오의 복부에 냉혹한 펀치를 날리며 둔탁한 소리가 들렸 다. 끄으으윽 하는 처절한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리는 시오. "야......이 무식한......여자야......왜 때려......" "배멀미를 잊고 싶다며? 기절해 있으면 되잖아. 고맙지?" "......깨, 깨어나서 보자......" 시오는 카넬리안의 옷을 쥐며 스스르 쓰러져 기절해 버렸고 그녀는 그 런 시오를 발로 걷어차서 구석에 몰아버린 뒤에 몹시 기분 좋은 얼굴로 기지개를 폈다. "아아아. 이제야 조용해 졌네." "카넬리안......" 황망스러운 표정의 줄리탄. 정말이지 그녀는 자기 행동에 조금의 후회 도 발전도 없는 여자가 아닐까.....하는 설득력 있는 추측이 그의 머리 를 스쳤다. "주인님도 배멀미야?" "절대." 충격 요법 받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흐으응. 주인님이라면 막 쓰다듬어 주면서 치료해 줄텐데." 그녀는 시오를 잠재운 것이 그렇게도 기쁜지 드물게 폴짝 폴짝 뛰며 줄리탄 곁으로 다가왔다. 이럴 때 가장 불안하다. "카넬리안. 넌 배를 자주 탔나 보지? 아버지 만큼이나 배를 잘 모는 것 같아."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못해본 게 뭐 있겠어." 카넬리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줄리탄 옆에 섰 다. 사실 그녀는 줄리탄과의 오붓한 시간이라도 마련해 보기 위해 시오 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아. 좋은 노을이다." 태양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며 자신의 붉은 색을 바다에 길게 풀어 내고 있었다. 카넬리안은 편한 얼굴로 줄리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한참 동안 그 조용한 풍경화를 두 눈에 담았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 그러다가 줄리탄이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 평범하게 꺼낸 말이어서 카넬리안은 잠시 동안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 지 못했을 정도였다. "나 기사가 되고 싶어." 사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들 며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뭐야......농담이지? 이제 와서 그런.....나를 이적 시키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쓸 것 없어. 나, 나는 이대로 지내는 것도 괜찮으니까." 도리어 당황하는 쪽은 그녀였던 것 같다. 다른 말 같았으면 줄리탄의 뒷머리를 때리며 '실없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라며 핀잔을 주었을 텐 데 지금은 아니다. 황혼에 젖은 줄리탄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그런 문제가 아냐. 이대로는 난 네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널 지키고 싶으니까. 기사가 되고 싶어." 줄리탄을 아직도 붕대에 감겨 있는 자신의 상처 입은 허벅지를 바라보 며 인피타르를 꽉 쥐고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잿빛 이 된 표정으로 설득 하듯이 말했다. "날 지켜 주기 위해서? 오펜바하로부터? 멍청한 소리 하지마! 너 같은 실력으로 오펜바하와 맞선다면 넌 분명히 죽어. 내가 잡힐 때 까지만 같이 있어줘도 난 만족한다고!" 그녀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줄리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카넬리안은 뭐라고 외치려다가 뺨을 때릴 것처럼 화가 난 표정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잊고 싶은 기억이 떠 올랐던 것일까. "내 전 주인도 너와 똑같아...... 날 지켜 주겠다고 말했지. 하지만 결국 날 지키다가 오펜바하에게 죽어 버렸어! 그 기분 알아? 알고 있냐 고! 테이머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게 씰이야. 대체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 그녀는 줄리탄을 바라보며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했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줄리탄이 기사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주인은 워낙 평범하고 멍청하고 겁이 많아서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는 않을테니까......그러면 적어도 불행하게 죽을 이유는 없잖아. 그걸 로 됐어. 그걸로 기뻐하고 만족하고 있었어. "널 만나서 겨우 겨우 그 기억을 잊어버리게 될 줄 알았는데......그 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카넬리안......" "미안해 주인님. 나 위험한 남자는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단정의 말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냉철함도 유연함도 없이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 는 줄리탄의 시선을 피하며 몹시도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보통 여자 같지?" 그 말로 끝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침실로 들어 갔다. 줄리탄은 따라가지 않았다. 잠시 후 복잡한 기분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는 줄리탄에게 침실에서 나온 톨베인이 다가왔다. 배멀미를 참느 라고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카넬리안하고 싸운 거야? 저런 표정 처음 봤어." "......" 대답 없는 줄리탄을 바라보던 톨베인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말아 문 뒤에 노을을 바라보며 불을 붙였다. 줄리탄이 불현듯 말했다. "톨베인. 넌 꿈이 뭐야?" 좀 엉뚱한 질문에 톨베인은 담배를 피워 물며 잠시 생각하다가 언제나 와 같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이라는 거......가지고 있으면 너무 무거워. 그래서 너무 커다란 꿈은 사양이지만 사소한 거라도 잡아볼까 생각해. 그런건 왜 물어." "리이 경이라는 기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기사들은 대부 분 태어날 때부터 기사로 정해져 있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 톨베인은 그렇게 말하는 줄리탄을 좀 의아한 얼굴로 바라 보았다. 줄 리탄은 계속 말했다. "난 그냥 요리사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요리를 대접하고 배도 타고 고기도 잡고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어. 태어날 때부 터 그렇게 정해졌다고 생각해 왔지. 불만도 별로 없었고......세상이 어떤지 궁금하긴 했지만 내 길은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어. 나 평범한 녀석이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그녀를 만났지." "카넬리안을?" 줄리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 페세테르의 뱃속에 거짓말처럼 잠들어 있던 그녀를 봤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그게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나를 향한 첫마디였고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 던 내 인생의 길이 뒤바뀌어 버렸지." 거의 혼잣말에 가깝게 읊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톨베인은 바싹 타버 린 담배를 바다에 던져 버리며 말했다. "그게 지금 후회 스럽다는 거야?" "후회 안해. 아니 모르겠어. 몇번이나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테이머가 될 수 있길 바라며 어떻게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방 법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왔지. 하지만 이제와서 여기까지 와서 고집스레 요리사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꿈을 꿀 수는 없잖아.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냐. 그녀를 만난 뒤 언제부터인가....." 줄리탄은 가슴이 아픈 듯이 쓴 표정을 담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는 내 인생이 떠오르지 않아." 외로움. 그녀를 지워버린 자기 자신을 떠올릴 때의 시린 외로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곁에 있고 싶다. "부담스러운 여자지. 카넬리안은." 톨베인은 나이에 비해 많은 여자를 보았고 확실히 줄리탄 보다는 빠르 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카넬리안은 줄리탄이 따라갈 수 없는 너무 먼 곳에 살고 있는 이성(異星)의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자신이 봤다면 '불가능한 것을 원하는 건 꿈이 아니라 망상이야!'라고 외쳤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 바 보 같은게 나야! 좋든 싫든 나야.' "따라잡기 위해서......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달려가고 또 달려가도 결국 따라잡을 수 없더라도.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자꾸 넘어지고 금새 숨이 차서 쓰러지더라도. 그래도....." 줄리탄의 눈가에 물이 고였다. 톨베인은 생각이 가득찬 듯 고개를 좀 기울이며 묵뚝뚝하게 말했다. "내 나이 고작 십육세야. 너와 같거나 혹은 어리겠지. 그래서 조언 같 은 건 할 줄 몰라. 그냥 들어줄께." "고마워......" 줄리탄은 그 말과 함께 흐흑하며 참았던 숨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뭐. 처음부터 완벽하게 어울리는 남녀라면 서로를 위해 노력할 필요 도 없겠고 뭐랄까......재미 없겠지." 톨베인 다운 위로랄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새로운 담배를 말기 시작 했다. 줄리탄은 뺨에 걸린 눈물을 계속 닦아냈지만 막을 수 없이 흘러 내리는 물방울이 후두둑거리며 떨어져 바다에 선상에 스며들었다. 톨베 인은 석대의 담배를 더 태울 때까지 줄리탄 옆에 있어 주었다. 2. "줄리탄! 줄리탄! 일어나!" 줄리탄은 밤새 잠을 설치다 선상에서 새우잠에 들었다. 그런 그를 깨 운 것은 시오였다. 감기에 걸려 몸이 으슬으슬한데다가 잠에 취해 눈이 잘 뜨이지 앉는 줄리탄에게 시오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카넬리안이 사라졌어!" 줄리탄은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시오를 바라보았다. 시오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이 배에 없어." 씰인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바다 한가운데라 하더라도 어디로라도 사 라질 수 있었다. 줄리탄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났다. 자신을 떠났다. 영원히 사라진 것일 수도 있어. '정말 떠난거야?' 바보 같이 이 작은 배 어딘가에 카넬리안이 숨어서 놀리고 있을 거라 고 흔들리는 걸음으로 반나절이나 배의 곳곳을 찾아보고 또 살펴보았 지만 편지 한장, 쪽지 하나 없었다.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나는 당신의 눈이 되고 검이 되고 마음이 되겠지. 그때 난 한번만 더 속자는 생각을 한 건지도 몰라. 미안해 주인님. 나 위험한 남자는 사랑할 수 없어. 나 보통 여자 같지? '그녀와 있던 시간을 몇번이나 되세겨 보았던가.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 이 떠올른다. 그래 분명히 그녀의 길고 검은 생머리의 끝은 조금 말려 올라가 있었어. 그리고 즐겁게 말할 때는 노래하듯이 콧소리를 내며 귀 엽게 말했지. 변명을 할 때는 눈을 많이 깜빡거렸고. 왜 이제와서 기억 나는 거지?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거야. 그녀에 대한 선입관 때 문이야? '인간이 아닌 강한 여자'라고. 그녀가 사람으로서 가지는 평범 한 모습들에 왜 눈과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걸까. 얼마나 강하지? 능력 은 뭐지? 마법을 써 검을 써? 라는 건 중요하지 않아. 그것보다는 기쁠 때 말끝이 조금 떨린다는 걸 알고 있는 것. 입가에 웃음을 보일 때 보 조개가 패이는지 알고 있는 것. 그런 것도 모르면서 그녀의 무슨 마음 을 이해하고, 그녀의 기분을 알고 있있다는 거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 는 그녀의 사소한 부분들인 만큼 나는 그 사소한 부분들을 좀 더 소중 히 해줬어야 한다. 그녀는 그냥 쉽게 토라지고 가벼운 것에도 행복을 느끼고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주길 바라고 있는 보통 여자니까. 카넬리 안은 내겐 껴안고 놓치고 않고 싶은 여자지 씰이 아니야.' 엉뚱한 곳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줄리탄은 선상의 한구석에 무너져 내려 그렇게 전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한 것 같은 기분에 괴로워 했다. 밤새도록 소리 높여 울고 싶었는데 터질 것 같은 마음, 이 빌어먹을 마음은 눈물이 되어 밖으로 쏟아지는 것 조차 거부했다. 4. 시오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빌어먹을! 이젠 바람도 안불어!" 멋대로 가고 있는 범선은 결국 무풍지역에 걸린 것 같았다. 항해 아니 표류 일주일 째. 지친 하루 하루라서 시간 관념이 부족해 지지만 줄어 드는 음식의 양으로 보건데 일주일 정도 흐른 것 같았다. 시오가 촛점 잃은 눈동자로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줄리탄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히 며 바라보았다. "줄리탄. 뭐라도 먹어.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 머리칼이 헝크러질 대로 헝크리진 줄리탄은 초췌한 눈동자와 마른 입 술로 선상 바닥 만을 바라보며 계속 주저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쓰러 지면 시오와 톨베인이 물을 축여주고 다시 일어나는 답답한 짓을 몇번 이나 반복하며. 걱정스럽게 줄리탄 근처에 앉아 있는 시오에게 다가온 것은 톨베인이었다. 그는 동정을 걷어낸 얼굴로 줄리탄에게 말했다. "궁상도 정도 것 떨어 줄리탄! 니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나마 배를 알고 있는 건 너 뿐이야! 음식도 바닥나 간다고! 이대로 가면 바다 한가운데서 모두 말라 죽어!" 톨베인은 큰소리로 외치며 줄리탄 앞에 해도를 집어 던졌다. 배와 바 다를 전혀 모르는 시오와 톨베인은 카넬리안이 사라지고 줄리탄까지 며 칠 째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자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이리저리 배를 몰아 봤지만 결국 무풍지역에 걸렸을 뿐. 톨베인은 검을 뽑아 줄리탄 머리 위에 가져다대며 소리쳤다. "카넬리안이 사라졌다고 울부짖든 뒤져 버리든 난 알바 아니지만 네 나약한 죽음에 동참하는 건 사양이야! 농담하는 거 아냐. 너 같은 놈은 지켜 보고 있는 것조차 짜증나니까 당장 배를 몰지 않으면 여기서 죽여 버릴 꺼야!" 톨베인의 시퍼런 칼이 줄리탄의 머리 앞에 다가왔는데도 줄리탄은 아 무런 대답도 기척도 없었다. 도리어 울컥한 건 시오였다. "그 칼 치워! 너 친구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냐!" "친구? 지랄하네. 니가 날 얼마 봤다고 친구야." 톨베인은 콧방귀를 끼며 시오를 쏘아 보았다. "니가 말하는 친구라는 건 다 죽게 생겼는데 같잖은 자기 고민에만 빠 져서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안쓰는 놈이냐? 그게 그 잘난 친구야 ? 집어치워! 달라카트에 도착하면 난 따로 가겠어!" "너 말 다했냐. 이 자식아!" 시오는 톨베인의 멱살을 잡았고 서로 누가 질세라 험악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배에 딱 세 명있는데......한 명은 괴로운 상념에 익사해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나머지 둘은 눈을 부라리며 싸움질이니 상황은 최악 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진정한 최악이란 지금이 최악 이라 생각할 때 찾아온다. "저게 뭐지......" 곧 시오와 선상을 뒹굴며 주먹다짐을 할 분위기에서 톨베인이 갑자기 바다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시오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바 다를 바라보았다. 어느 틈엔가 줄리탄 쪽의 두배는 될 정도 크기의 도 선(櫂船)이 빠른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오가 멱살을 풀며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릴 구해주려는 건가봐! 이봐요! 여기 다 죽게 생겼어요! 살려주세 요! 배멀미 안할께요!" 참 난잡하게 들리는 구조 요청이었지만 시오는 절절했다. 그러나 톨베 인의 표정은 그 배가 다가오면서 점점 굳어졌다. "구조선이 아냐....." "뭐? 그럼 뭐야." "해적선이야." "해적이......뭔데?" 바다를 모르고 배를 모르는 산골출신 시오가 해적이라는 걸 알리가 없 다. 톨베인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산에는 산적. 바다에는 해적." "그, 그렇다면!" "이거 몹시도......귀찮게 됬군." 다가오는 배 위로 너덜너덜 거리는 시뻘건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3. 구조선이었다면 몹시 해피한 일이었겠지만 그것은 무풍지역에 멍청하 게 걸려든 범선 같은 것을 노리는 해적선이었던 것이다. 카넬리안이 있 었다면 '육지나 바다나 이 놈의 세상에선 편할 날이 없네.'라며 짜증을 부렸을 것이다. 함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거리 무기는 없기 때문에 마법사나 기사가 없는 이상 보통 배끼리의 해전이란 일단 붙은 뒤에 전투원들 끼리의 육 박전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그걸 증명이라 하려는 듯이 해적선은 맹렬 한 속도로 줄리탄 쪽의 배에 다가오고 있었다. 해적답게 들이 받으려는 생각이다. "주, 줄리탄! 야 임마! 빨랑 배 몰아! 해적이래! 우이씨 미치겠네!" 아무리 외쳐도 대답 없는 메아리인 줄리탄을 보며 시오는 환장하고야 말았다. 톨베인은 침착하게 외쳤다. "시오! 우리끼리 해결한다. 준비해." "돌아버린다 정말! 배멀미 끝나니까 카넬리안 사라지고 이번엔 해적이 냐! 다음은 뭐야! 와라 이 자식들아!" 시오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얼굴로 광분하며 각도를 뽑아들고는 톨베인 곁에 섰다. 그들은 돛을 당기는 밧줄을 꽉 잡으며 충격에 대비 했다. 저쪽에서는 예쌍대로 예상 대로 십여명의 해적들이 칼을 뽑아든 채로 뭐라고 커다랗게 외치며 배를 몰아오고 있었다. 시오와 톨베인이 똑바로 그들을 노려보는 가운데 해적선의 충각은 정확하게 배의 세방향 을 노렸다. 콰과과광!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배 전체가 충격으로 진동하며 마치 배가 뒤집힐 듯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밧줄을 잡고 있는 시오와 톨베인은 균 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멍하니 앉아 있던 줄리탄은 충격 때문에 구석 까지 굴러가 처박혀 버렸다. 긴장한 얼굴의 시오, 톨베인과는 달리 의 기양양한 표정의 해적들. 그때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우지끈!! "우지끈?" 시오는 이 소리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있었다. 해적선이 시오가 보는 눈 앞에서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톨베인......지금 저 배 가라앉고 있는 거냐?" "그런 거 같은데?" "......해적이 뭐 이래." 충돌의 충격으로 해적선의 선체축이 부러져 버린 것이다. 해적들의 표 정이 난색으로 변하며 해적선이 시오의 톨베인의 눈앞에서 참 장엄하게 도 가라앉고 있었다. 둘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톨베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거 내가 다 민망하네. 얼빠진 놈들 같으니라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하던 해적들 사이에서 갑자기 고함소리들이 들렸다. "그러게 이 배는 글러먹었다고 했잖아!" "십년전에 폐선시켜야 했다고!" "우리에겐 이 배 하나 뿐이야!" 아무리 군선이라지만 작은 범선과 충돌했다고 축이 박살나서 침몰하는 걸레 같은 배를 몰고 해적질을 해보겠다고 하다니. 이 자들은 해적으로 서의 프라이드도 없는 것일까. 참 듣기 불쌍한 해적들의 통곡에 시오와 톨베인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빨리 좀 눈 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때 해적 들이 절실한 목소리로 외쳤다. "옮겨타! 저 배로 빨리 옮겨타라!" "오지마 이 것들아!" 시오의 외침에도 해적들은 자신들의 배를 잃고 줄리탄의 배로 우르르 피난을 왔다. 일대촌극. 대체 어쩌자는 건가.....순간 일행은 너무 진 귀하고도 허망한 광경에 싸울 생각을 잃고 해적들과 함께 해적선이 침 몰하는 장면을 말 없이 지켜 볼 뿐이었다. '헤스페리아 유머 100선'에 들어가도 당당히 베스트를 차지할 만한 실화였다. "이거 바보들 아냐!" 생각해 보니까 전직 범죄조직원으로서 그들의 저질스런 짓거리에 굉장 히 화가 난 톨베인이 기가 차서 해적들에게 외쳤다. 안그래도 좁아터진 선상에 해적들까지 몰려 왁자지껄해서 도무지 분위기가 엉망진창이다. 해적 중에 하나가 지금이라도 기선을 제압해야 겠다는 듯이 외쳤다. "우, 우리 배를 침몰시키다니 대단한 실력이구나!" "우린 아무 짓도 안했는데......" 시오의 말마따나 이쪽에선 들이 받힌 것 밖엔 없다. 자기들이 멋대로 돌진해서 멋대로 들이 받아 놓곤 멋대로 침몰해 버린 것 뿐......끼어 들 틈이 없는 요절복통 코메디의 정수였다. "에잇! 시끄럽다! 이제 이 배는 우리가 접수한다!" "그 딴 말은 날 죽인 뒤에 하시지." 톨베인이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검을 치켜 올렸다. 그는 형편 없는 자 칭 해적들의 모습에 비웃음을 띄며 조롱했다. "기분도 더러웠는데 잘됐군. 해적이라니까 바다에서 죽는건 영광이겠 지?" 톨베인은 그들 앞으로 자신 있게 한걸음을 내딛였다. 척 봐도 저런 자 들은 수십명이 달라붙어도 이길 수 있다. 그가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해적들도 한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우, 우리는 해적이다! 두렵지 않냐!" "난 상트의 살인청부업자다. 선수들끼리 안먹히는 협박은 서로 생략하 지." 톨베인은 여유롭게 담배까지 말아 물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그는 카넬리안의 뒤를 이어도 될 정도로 대단한 입심과 협박의 소유자 였던 것이다. 실제 그의 눈빛과 말 몇마디 만으로도 해적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엉성한 얼치기 해적들이었다. "톨베인. 저 사람들 어쩔꺼야?" "바다에 던져버려야지. 식량도 곧 바닥인데 입을 줄여야 할 것 아냐."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었나 보다. 몇명은 벌써 칼을 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오와 톨베인의 사이에서 믿을 수 없이 어두운 표정의 줄리탄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줄리탄!" "응? 갑자기 뭐야 너." 줄리탄은 시오와 톨베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해적들 만을 노려보며 부상당해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인피타르를 손에 쥐고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만로는 '어둠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외로운 검객'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줄리탄은 며칠 동안 연속된 번뇌와 탈진으로 현재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줄리탄이 해적보다 위험한 상황. "피하지 않겠어. 절대로 피하지 않겠어." 카넬리안이 떠나간 것이 모르긴 해도 줄리탄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음울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줄리탄의 모습이 란 해적들 뿐만 아니라 시오와 톨베인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물론 줄 리탄은 거의 무의식중이었다. "이봐. 줄리탄 장난하지 말고 저리 비켜 있어." 톨베인의 짜증섞인 말에 줄리탄이 흘낏 톨베인을 돌아보았다. 흠찟! 악마에게 혼을 판 것처럼 형용할 수 없이 퀭한 눈동자다. 갑자기 이 녀 석 왜 이래? 톨베인은 자기 모르게 주춤하며 침을 삼켰다. 시오가 외쳤 다. "너 그 칼 뽑으면 안돼! 정신 차려!" "내가 뽑지 않으면 카넬리안이 위험해......강해지지 않으면......" "저 녀석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시오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톨베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줄리탄 에게 달려가 그를 막으려 했지만 순간 줄리탄의 몸에서 번져 나오는 눈 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푸른 빛에 고개를 돌렸다. 시오가 현실감없 이 중얼거렸다. "인피타르를......뽑았다." 검집에서 해방되는 인피타르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빛 으로 포효하며 살인 광선을 해적들에게 뿜.......지 않고 그냥 번쩍 번 쩍 빛만 냈다. 단순히 반딧불처럼 번쩍 번쩍. "......" 줄리탄은 무슨 얼빠진 가로등마냥 반짝 반짝거리며 밝아졌다 어두워졌 다 하는 인피타르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뭐야 이건. 술집 선전용 검인가? 이게 선대의 숙명을 짊어진 영웅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쳐 썼다는 그 검이야? 그때 줄리탄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테시오스으으으으으으!!! 날 속였어어어!!!!!" 그때였다. 인피타르의 도파를 쥐고 있는 줄리탄의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가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의아해 할 겨를도 없이 인피타르는 마치 줄리탄 그 자체를 자신 속에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줄리탄이 느 끼는 엄청난 현기증,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최소 단위로 흩어져 소멸 되어 버리는 듯한 미망의 기분, 머리에 담고 있는 기억과 추억 모두를 단번에 갈아 으깨서 태워 버리는 것 같은 상실감. 무서운 너무도 무서 운 기운.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줄리탄을 보기에는...... "끼에에에에에엑!" 이라는 흉내도 못낼 괴상망측한 소리를 지르며 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 고 있는 - 단순히 경기를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줄리탄은 한참 동안 감 전된 것처럼 아주 보기 민망하게 온 몸을 떨다가 쓰러져 버렸다. "......." 좌중 긴장. 해적들의 눈에 쓰러져서 부들부들 거리고 있는 줄리탄의 모습은 몹시 공포스러웠다. 바다의 저주인가 이거? 시오가 줄리탄에게 뛰어가서는 그를 살펴보고 톨베인에게 말했다. "살아 있어. 그냥 기절했는데?" "......" 톨베인은 더 이상 한심해서 말도 안나온다는 표정으로 칼집에 칼을 넣 었다.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선내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잘래. 줄리탄 녀석 죽으면 바다에 던져버리고 살면 일시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내려가려다가 톨베인은 멈칫 멈춰서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해적들을 쏘아 보며 말했다. "너희들. 되도록 누굴 죽이는 건 피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기 때문에 살려두지만......똑똑히 들어! 너희들 줄 식량은 발가락의 때만큼도 없 고 선내는 내가 잘 곳이야. 만약 식량에 손대거나 선내로 들어오는 날 엔 배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주겠다. 그리고 너희들 해적인지는 몰라도 뱃사람이지? 지금 당장 이 배를 움직여서 달라카트로 몰아." "하, 하지만 이렇게 바람도 없는 곳에서 범선은 움직일 수가......" "하루 주겠다." 톨베인은 싸늘하게 말하며 선내로 들어가 버렸다. 시오는 난장판이 되 어버린 이 상황에서 기절한 줄리탄을 바라보며 원망 섞인 탄성을 내뱉 었다. "카넬리안. 왜 가버린 거냐......꼭 갈꺼면 달라카트에 도착해서 가도 되잖아. 으이구." 4. 그리고 또 삼일 후. "줄리탄......낚시 잘되어 가냐?" 시오의 물음에 줄리탄은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줄리탄 은 인피타르 끝에 낚시 줄을 매달고 선내의 금속못을 뽑아 갈아서 낚시 바늘을 만든 뒤에 옷감을 엮어 만들어 낸 미끼를 걸고 낚시를 하는 중 이었다. 무슨 돌변이 생긴건지 아니면 테시오스가 정말로 속인 건지 인 피타르를 뽑은 줄리탄은 몇시간 만에 죽지 않고 깨어날 수 있었지만, 당장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검의 용도로 선택한 것은 낚시대였다. "너 대단한 능력이다? 낚시를 잘 한다니. 전엔 몰랐는데?" "어촌 출신이니까......" 줄리탄은 계속 무표정한 시선을 줄을 던진 바다를 향하며 느릿느릿 말 했다. 아직도 카넬리안이 떠난 것에 대한 충격을 벗어나진 못한 것 같 았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린 줄리탄은 나름대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다 . 게다가 줄리탄은 나무통 같은 걸 손봐서 통발 같은 것을 만들어 배 밑으로 내리기도 하였고 잡힌 물고기는 재빨리 내장을 제거하고 능숙하 게 회를 뜨거나 선상에 말려 어포로 만드는 손재주를 보였다. 역시 어 촌 출신. 아직까지 바람을 타진 못했지만 이틀전에 비가 내려 식수도 충분하기 때문에 당분간 굶어 죽을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 이지만 이 상황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줄리탄 뿐이다. "아니! 해적들이라면서 낚시도 못해요?" 시오가 웃통을 벗어던진 채 선상에 시체처럼 여기 저기 누워 있는 해 적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중 한명이 힘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그물은 쓸 줄 알아......" "여기 그물이 어딨어요! 그물이!" 그때 줄리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청한 고기가 천으로 만든 미끼를 문 것이다. 이상하게 줄리탄은 그런 멍청한 물고기를 하루에 수십마리 씩 잡았다. 줄리탄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낚시대 아니 인피타르를 움직이며 능숙하게 물고기를 몰았다. 그리고 곧 잡힌 물고 기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 어린 물고기였다. 줄리탄은 아무 말 없이 그것에서 바늘을 뽑으며 다 시 바다에 던졌다. "얼레? 왜 놔줘?" "불쌍하잖아." 줄리탄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미끼를 손 본 뒤에 줄을 던 졌다. 시오는 알아듣겠다는 듯이 줄리탄의 어깨를 툭툭치며 선내로 들 어가려고 했다. 줄리탄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다듬어 해적들에게도 충실하게 나눠주고 있었고 그것을 톨베인은 특별히 막지 않았지만 그런 줄리탄의 모습을 꽤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던 터였다.(그게 아니라면 해 적들은 아사하거나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 이건." 갑자기 줄리탄이 낮은 탄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해적들도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바, 바람이다! 바람이 온다!" 시오 역시 자신의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숨결을 분명히 느낄 수 있 었다. 해적들이 신나는 표정으로 선미조타부로 달려가고 밧줄을 당겨서 돛을 팽팽히 하기 시작했다. 바람을 담은 돛이 배를 움직이고 있었다. "우와아아! 톨베인! 바람이 분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어!" 해적들은 덩실덩실 춤을 출 듯이 기뻐하고 줄리탄 역시 흐뭇하게 미소 지은지 10분도 되지 못해 그들의 안색이 바꿔 버렸다. 이건 바람 정도 가 아니라 폭풍이었다. 청명하던 하늘에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매워지기 시작했고 파도가 배를 집어 삼킬 것 처럼 솟아 올랐다. 시오가 또다시 배멀미를 시작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죽으라는 법도 있나보군." 아마도 올해가 그의 인생 최악의 해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적들 은 눈물을 흘리며 돛을 내렸다. 5. "줄리탄! 뭐하는 거야! 그러다가 바다로 빠진다고!" "으응......" 시오가 외쳐도 선상에 다가서서 요동치는 바다를 바라보길 멈추지 않 는 줄리탄의 기분은 정말로 이상했다. '남부의 바다라서 이런 건가. 아냐. 뭔가 이상해.' 줄리탄은 북부 가르바트의 차가운 바닷가에 살아오며 가끔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었고 아버지로 부터 먼바다 선상에서 겪은 무시무시한 폭 풍우에 대한 경험담들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폭풍 의 강도 문제가 아니다. 무풍지역에서 마치 동전을 뒤집어 버린듯 아무 런 전조도 없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급작스러워지는 기습적인 폭풍은 들 은 적도 본 적이 없다. 인간이 자연력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이란 극히 미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폭풍이 다가오기 전 예측할 수 있 는 많은 길이 있었다. '인위적......이랄까.' 거대한 파도의 손길이 줄리탄을 몇번이나 때렸어도 이것이 일반적인 자연현상 같지 않다는 의문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돌았다. 줄리탄은 물에 젖어 집착처럼 온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칼을 쓸어내며 제로에 가깝게 줄어든 시야에서 애써 바다를 지켜보았다. 마치 누가 그러라고 명령한 것처럼 너무도 작위적이다. "어?" 그리고 조금씩 파도가 멈춰갔다. 마치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간 것처럼. 가는 빗줄기가 내리고 하늘도 어두웠지만 웅장한 파고가 거짓말처럼 수 분 내에 사그러들었다. 요컨데 바람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상황에 대한 의심을 놓치 않은 줄리탄은 뒤에서 멍한 얼굴로 '대체 뭐야 이거?'라고 의아해하는 시오에게 말했다. "시오. 배는?" "제대로 살펴봐야 겠지만 부서진 곳은 없는 것 같아." 그때 담배를 문 톨베인이 선상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역시 배멀미가 시작되어 내색하지 않으려는 괴로운 얼굴이었다. "헤스팔콘이 배 하나는 잘 만드는군." " 아! 저, 저, 저......" 해적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줄리탄은 그들이 가리키는 바다, 정확히는 수면 위를 보았다. 똑똑히 보였다. 바다위에 엄청난 량 의 먹물을 뿌린 것 같이 - 둥글고 거대한 무언가의 그림자가 수면 속에 서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배의 몇십배는 될 것 같아 그 크기 만으로도 사람들은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느꼈다. 톨베인 은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담배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저건 대체 뭐야......" "무, 물고긴가?" "그럴리가 없어. 페세테르라고 하더라도 저것에 비하면......" 발견된 물고기 중에 가장 커다란 페세테르를 한입꺼리로 삼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한 '그것'을 보며 해적들이 비명처럼 말했다. "크, 크라켄이다!" "크라켄?" 크라켄? 줄리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바다의 악마......수백개의 촉수를 가진 뱃사람들의 악몽. 우, 우린 죽었어!" "촉수? 에이 설마 그럴리가......제기랄." 시오는 애써 낙관적으로 말하려다가 바다를 완전히 시커멓게 물들이는 듯한 그 거대한 검은 그림자 위로 해적들의 말대로 이 배의 돛대 보다 도 굵은 촉수들이 수 없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촉수 에 붙어 있는 사람 머리만한 빨판들 속에서 뾰족한 이빨들이 들어나며 딱딱거리는 섬뜩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꿈이 아닐까. 이런 생물이 존재할리가 없잖아! 라는 현실이탈도 소용 없었다. 크라켄의 몸이 수면 위로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거 칠고 끈적이는 짙은 붉은 빛의 피부에 축 늘어져 있는 노란색의 두 눈 은 줄리탄의 머리 속에서 문어를 연상케 했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 이건 웃어 주기엔 커도 너무나 크다. 크라켄은 감정이 보이지 않는 노랗고 커다란 눈동자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홀로 존재하시며 영원히 불멸하시는 이 바다의 절대자. 해룡 물키벨 님을 겸허하게 맞을 준비를 하라!" 마음속에 커다랗게 외치는 목소리였다. 분명 크라켄이 말했을 그 목소 리는 그 자체가 무서운 강제력을 가지고 있어 선상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온 몸이 얼음 속에 묻힌 것 같이 떨려 온다. 그리고 크라켄 하나 만으로도 숨이 멎을 지경인데 배 주변 으로는 다른 그림자들도 속속 모습을 들어내며 솟아 올랐다. 하나 같이 '절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무방할 정도였다. "주, 줄리탄. 바,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은 원래......이러냐." 시오는 난색을 하며 고개를 팍 숙인 채 줄리탄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 "서, 설마......" 그럴리가 없잖아. 만약 이런 엄청난 생물들을 하루에 몇차례씩 그물에 잡는게 어부들이었다면 그 힘으로 세계정복하지 뭐하러 영주 밑에서 시 달리고 있겠냐. 그때 또 거대한 무엇이 바다위로 커다란 소리를 내며 솟아 올랐다. 덕분에 배가 심하게 출렁였고 고개 숙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짠 바닷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물세례를 먹 인 존재가 누군지 절대 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 더욱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었다. 잠시후 머리속에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배에선 가랑의 향기가 느껴진다." 가랑? 분명 카넬리안의 예전 이름은 가랑이라 했다. 설마 그녀를 말하 는 건가? 줄리탄은 가랑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어 눈 앞의 존재를 보았다. 줄리탄은 누군가 자신의 뒷머리 를 세게 때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 앞의 존재......끝없이 이어졌을 것 같은 뱀처럼 길다란 몸과 온 몸을 감싼 푸른 비늘, 길다란 입 앞으 로 나와 있는 긴 송곳니 - 강하다기 보다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것 처 럼 너무도 신비스러워 보이는 모습. 보는 이를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 는 경외심의 상징. "난 해룡의 수장 물키벨이다. 궁룡의 수장 테싱의 씰인 가랑이 이곳에 있는가?" 용......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그리고 해룡은 뭐고 궁룡은 또 뭐지 ? 카넬리안이 궁룡의 씰이었다니 그건 무슨 소리야. 줄리탄은 자신을 내려보는 물키벨이라는 해룡을 두려운 얼굴로 올려보며 말했다. "카, 카넬리안 아니 가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넌 누구지." "그녀의 테이머인......줄리탄 입니다." "거짓말!!!" 물키벨이 소리쳤다. 해룡의 목소리는 머리가 터져버리는 것 같고 심장 이 멎어 버리는 것 같은 충격이다. 줄리탄은 자리에 주저 앉으며 온 몸 을 떨면서도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분명 그녀의 테이머 입니다." "그녀가 테싱 외의 다른 자를 선택할 리가 없다. 또 다시 해룡의 지배 자인 나를 속이려 든다면 그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겠다. 진실로 말하라. 너는 누군가?" 일반적인 협박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냉담하게 말하는 해 룡 물키벨의 목소리는 목에 칼을 들이댄 것처럼 두렵게 울렸다. "제 이름은 줄리탄......" 줄리탄은 침을 삼키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결심했다. 마음이 차분해 지고 더 이상 떨리지도 않는다. 죽는건 싫지만 그녀가 내 곁에 있었다 는 걸 부인하며 목숨을 구걸하진 않겠어. 그는 해룡을 똑바로 올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 해룡께서 말하시는 가랑......카넬리안의 테이머 입니다!" 줄리탄은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게 해룡을 올려보았다. 내가 약한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피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고 싶지 않아. 차가 운 해룡의 눈빛이 줄리탄을 내려보는 가운데 선상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이 자신을 향해 속삭이는 사람들의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약 1년 후- 6. 달라카트 서부 해안의 항구 베오폴트는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 에 어울리게 온갖 물품들이 하루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매되는 곳 이었고 그런 만큼 화려한 풍류와 최신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모 습은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내일 오칼란트에서 장미 향수가 들어온다는 소식 들었어? 최고급 품 이래!" "정말? 정말? 어디로 오는데? 좀 알려주라." "로엔비노 상회에서 독점한다던데. 나는 벌써 주문해 놨지. 웃훙." "에에 그 상회 것은 너무 비싸. 또 얼마나 돈을 모아야 하는 거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작은 양산을 쓴 채 코블스 톤의 시가지를 활보하며 재잘거리는 화류계의 여인들. "얼마후면 가르바트에서 향신료를 잔뜩 실은 배가 들어와! 2번 부두에 서! 이보라고. 좀 봐줘. 창고 하나만 비워 달라고. 내 값을 두둑히 쳐 줄테니!" 손에 두꺼운 장부를 든 채 굵은 외안 안경을 끼고 항만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는 무역 상인들, 둥근 모자를 눌러 쓰고 물감에 찌든 옷을 아무 렇게나 걸쳐 입은 채 후원자를 찾아 귀족 저택 앞을 전전하는 화가 지 망생들, 도시 공원에서 몇 몇 군중들 앞에 서 조금 듣기 부끄러운 달콤 한 시를 읊어대는 청년시인들......그것은 달라카트의 자유 분방한 분 위기를 한눈에 보여주었고 그 중에서도 이 항구 베오폴트가 가장 유행 에 빛나고 있었다는 것 또한 모습 자체로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 헤스 팔콘이었다면 귀족적이고 많은 이종족 노예들을 찾아볼 수는 있었더라 도 이처럼 생명력이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야! 가스발 사략함이잖아! 이거 이주일 만인가?" 세로 돛을 달고 있는 강인하고 민첩해 보이는 사략선 한척이 항구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곳 베오폴트의 명물 중에 하나 '가스발 사략함대' 소속의 함선. 배 전면을 원색의 붉은 색 도료 로 포장한 강렬한 이미지의 그 사략선은 빠르지만 유연하게 부두에 정 박하였다. "저 붉은 색이라면 노블리스 경의 것이로군!" 사람들이 그렇게 외칠 때 사략함 선상에서 세 마리의 말이 높이 뛰어 올랐다. 건장한 세 마리 백마가 배 위에서 항구를 향해 날듯이 솟구쳐 나온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파란 하늘에 거칠게 세개의 하얀 점 을 찍어 놓은 것처럼 보일 만큼 아름다웠다. "우와아아! 언제 봐도 대단해 저 모습!" 허공을 밟듯 사람들 위를 지나쳐 우아하게 착지한 말의 기수들은 망토 를 펄럭이며 말에서 내려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해 보인 뒤에 시내 로 향했다. 항구에 모여 있는 화려한 드레스의 여성들이 반한 얼굴로 그 청년들을 향해 추파를 보냈다. 어디에서라도 멋지고 용맹함의 상징 은 남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 여성들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다. "꺄아! 여길 봐주세요!" "지난번 목걸이 고마워요!" "저와 만나줘요! 노블리스 님! 꺄악!" 7. "어이. 이제 됐지? 내 여자가 되라고. 응?" "이거 놔요! 이 무례한 남자!" 시내의 노천 카페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의 뱃사 람 손에 잡혀 소리치는 세련된 여자와 그 옆에 뻗어 있는 선이 가는 남 자의 모습. 딱 봐도 추론할 수 있다. 남녀가 카페에서 다정하게 속삭이 고 있는데 여자에게 반한 뱃사람이 끼어들어 자기를 막는 남자에게 주 먹을 갈겨 기절시킨 뒤에 여자와 실랑이 중이다. 거친 뱃사람들과 유행 을 따르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한량들이 동시에 북적거리 는 항구 도시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말라고. 너도 앙탈부리기엔 좀 늙어 보이는데." "사,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냄새 나니까 저리 떨어져요!" 그런다고 떨어질 꺼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선원은 털이 수북한 손 으로 그 여자의 팔을 계속 히죽 히죽 거렸다. "그 손 놓고 배로 돌아가십시오." "누구야! 이 몸에게......어엇! 노블리스 경!" 선원은 당장 손을 놓으며 그의 앞에서 움찔 거렸다. 악명 높은 가스발 사략함대의 함대장 중 하나 였던 노블리스 앞이었던 것이다. 노블리스 가 두르고 있는 타오르는 붉은 색의 망토와 허리에 차고 있는 두자루의 검 역시 그의 심볼. "먼 항해로 신경이 날카로워 져서 그러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소동을 부리면 곤란하지요." 선원은 노블리스의 온화한 말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노블리스 에게 대항해서 가스발 사략함대를 적으로 돌리는 건 달라카트 선원들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철칙 중에 하나였을 뿐더라 지금 어떻게 주먹을 날려본 들 전 해적들을 단 1년만에 통합시켰다는 노블리스의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이거 소문대로 이해심이 가득하신 분이시군요!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우락부락하고 말술을 마셔대는 선원들을 조용히 돌려 보낼 수 있는 실 력이란 힘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뱃사람이 조용히 사라지자 마 자 예의 여자가 노블리스에게 다가오며 고맙다기 보다는 넋이 나간 얼 굴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노블리스 경을 가까이서 보니 너무나..... 멋있어요." 노블리스는 베오폴트 항구의 여자들에겐 정말로 훤칠하고 매력적이었 다. 항구 술집에서 언제나 오르내르는 가스발 사략함대의 주력인데다가 그가 차고 있는 두개의 검 - 그 중 하나는 절대로 뽑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신비성을 높여 주었던 것이다. 노블리스는 그런 연심을 아는지 모 르는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게 경이라는 호칭은 듣기 부담스럽네요. 전 기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부르잖아요. 노블리스 님은 기사가 될 자격이 있어요!" "그리고 제 이름은 노블리스가 아닙니다. 전 줄리탄입니다." 그렇다. 사어(死語)로 '무뢰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블리스라 는 악명의 주인공은 줄리탄이었다. 해적출신의 사략함대 지휘관 치고는 너무도 고운 얼굴과 세련되게 길게 내린 머리칼, 선원들 중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동안(실은 본래 어리다.) 무엇보다 절대로 무뢰한과는 거리 가 먼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매력은 1년 전과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푹 빠진 듯한 표정으로 노블리스 아니 줄리탄을 바라보던 여자가 조그맣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줄리탄이라는 이름은 너무 촌스러......아. 죄송합니다. " "뭐. 사실 그렇죠." 역시 유행의 도시. 미와 용맹의 극치로 인식되고 있는 노블리스가 시 골 어촌 출신 촌뜨기에게나 붙이는 줄리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그녀 스스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아무튼. "저 분. 애인인가요?" 줄리탄은 선원의 주먹 한방에 날아가 기절해 있는 자를 바라보며 말했 다. 여자가 신경쓰지 말라는 얼굴로 대답한다. "아, 그렇긴 하지만......그래도 저 남자 너무 약해요! 노블리스 님과 는 비교도 안되요오!" "약한 남자라도......아무리 그래도 말이죠......." 줄리탄이 무안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것이 여자의 눈엔 이상해 보 였다. "그래도 좋아하고 있다면......같이 있어 주세요." "머, 멋있어!" 라고 말하며 들러붙는 여자를 힘들게 돌려보낸 줄리탄의 어깨를 두드 리며 시오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우하하! 최고였어 줄리탄! 노블리스 경이라. 니 뜻대로 기사 된 거잖 아?" "놀리지마." 시오는 사자 갈기 같은 금발이었다. 당연히 염색. 자유분방한 달라카 트에서 머리 염색이란 전혀 이상하게 보일 것이 없었지만. 그 머리 덕 분에 호후(虎侯)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자. 역시 이름이 촌스럽긴 마 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자." 그들보단 이름이 덜 촌스러운 톨베인은 차분하게 말하며 노천 카페의 하얀 의자에 앉았다. 말 수가 적고 좀 어두운 그의 성격은 여전하지만 그것 역시 매력이라면 매력. 담배를 무는 톨베인에게 시오가 핀잔이다. "담배 좀 끊어라. 같이 있는 사람 괴롭단 말야." "싫어." 여전히 담배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밝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구나! 이것 좀 들어줘!" 양 손에 잔뜩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들을 들고 있는 두 여자가 다가 오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인간형을 하고 있는 물키벨. 우당탕. 물키벨은 양손에 분명히 충동구매한 옷들이 가득 들고 있을 상자들을 들고 위태롭게 오가다 결국 넘어져 버렸다. 사장에 좌악 흩어지는 옷가 지들. "우왕! 이거 어떻게 해!" 시오와 줄리탄이 쯧쯧거리며 주섬 주섬 담고 나서야 하나도 도와주지 않은 물키벨은 칭얼거리는 것을 멈췄다. 테이블에 둘러 앉고 줄리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물키벨 님. 지상에선 위험하니까 호위를 붙이세요. 지상에선 힘을 쓸 수가 없잖아요?" 줄리탄은 아까도 그렇고 지상에서 헤헤거리면서 불안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아무리 해룡이라지만 지상에선 어떤 힘을 쓸 수도 없는 단지 덤벙거리는 아가씨일 뿐이니까. "이 녀석! 누구한테 명령이냣! 난 저 광활한 바다의 지배자이신 해룡 의 수장 물키벨이란 말이야! 너 내가 가르쳐 주고 귀여워 해줘서 이렇 게 인간개조에 성공 했잖아. 난 호위 따윈 거추장스러서 싫어." 카페 앞에 출렁이는 바다를 자랑스럽게 가리키며 꽤 귀엽게 협박하는 물키벨을 보며 줄리탄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명령이 아니라니까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크라켄 씨들이 난리가 나요. 날 죽이려고 들껄요." 크라켄이란 예의 괴생명체를 말하는 것일까. 물키벨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문어 녀석의 걱정 따위 조금도 고맙지 않아." "그건 그렇고......물키벨 누님. 대체 왜 이렇게 죽어라고 옷을 사는 거에요! 쌓아 놓은 옷 때문에 배가 가라앉을까 걱정이네요!" 이번엔 시오의 투정이었다. 물키벨의 소비력은 거의 병에 가까울 정도 . 젤리드와 함께 였다면 아마 일국의 재산이라도 날려버리지 않았을까 . 물키벨이 울컥해서 말했다. "얼레? 시오 너! 널 구제해 준 내가 이런 천조각 조금 모은다고 투정 부리는 거냐! 자꾸 그러면 이제부터 보석 사 모은다! 사략함대 자금이 거덜 날 때 까지! 난 말야 저 광활한 바다의......" "예. 예. 알겠습니다." 시오는 물키벨의 재방송을 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영원불멸 이라는 용의 정신연령은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가만히 지켜보던 톨베인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쳇. 되게 세속적인 용이네. 전설에 나오는 용들은 뭐 용사하고 싸우 고 마법서 같은 걸 모으고 타락한 인간들을 벌한다고 들었는데. 환상이 깨져 버렸네요." "전설?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조잡한 흥미 위주의 저급한 낭설들이 라니까." "그럼. 다른 용들도 옷 사모아요?" "내 취미야! 빈정거리마!" 언제나 그렇듯이 물키벨과 톨베인을 한 방에 던져 놓으면 둘 중 하나 가 탈진할 때까지 말싸움을 할 것이다. 물키벨은 톨베인이 놀리면 결국 우아앙 하고 울면서 줄리탄에게 달려가곤 했지만. 줄리탄은 그들의 모 습이 소리내서 웃다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갖다올 데가 있어." "너 또......" 시오가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줄리탄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 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키벨이 말했다. "줄리탄. 가랑 아니 아니 카넬리안은 널 버린게 아냐. 그러니까 너무 ......" "알고 있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주인님. 기운 없어 보여요." 줄리탄에게 그렇게 말한 여자는 물키벨의 짐을 들어주었던 씰 그레시 다 였다. 하급의 씰 들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한다고 해도 이해할 정도 로 전투 능력은 전혀 없는 씰. 그렇다고 아마릴리스처럼 막강한 치유 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유명한 가문의 기사였던 그녀 의 전 테이머는 실망해서 그녀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아냐 그레시다. 옷이라도 사갈테니까 배에 돌아가 있어." "전 괜찮습니다. 씰인 제게 그렇게 신경써 주실 필요는......" "조그만 것이라도 신경써 주고 싶어서 그래. 씰이니까......우리보다 행복해질 기회도 적겠지." 그레시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번 웃어준 줄리탄은 시내의 인파 속 으로 사라져 버렸다. 작은 키에 하얀 머리칼을 길게 내리고 있는 그레 시다는 자기 앞에 놓인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잡으며 붉어진 뺨으로 부끄럽게 미소 짓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넬리안 님은 뵌 적은 없지만......정말 대단한 분 같아요. 줄리탄 님이 저렇게 찾고 계시다니." "아하하하! 그레시다 너 일년전의 저 녀석을 봤다면 그런 말 절대 못 했을 껄? 아하하. 또 기억나려고 한다." "예에?" 시오의 웃음섞인 말에 그레시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줄리탄이 '요리만' 잘하는 자에서 '요리도' 잘하는 자로 변신한 건 물키벨의 (자 기말로는) 헌신적인 도움과 뼈와 살을 깎은 노력에 의해서 였지만 - 가 스발 사략함대의 노블리스 줄리탄이 아닌 시골청년 줄리탄의 모습을 그 레시다는 아무리 떠올려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아. 다 내 덕이라니까 그러네." "뭐 지금도 결국 근본은 그때와 다름 없지만......많이 발전했지." 물키벨과 톨베인도 한몫 거들었다. 시오는 그레시다의 머리를 쓸어넘 겨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줄리탄에게 잘해줘. 되게 걱정 많은 남자걸랑." "예. 주인님." 그레시다는 시오를 향해서도 주인님이라도 말했다. 톨베인이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주인님' 좀 어떻게 한 명으로 결정해 줄 수 없냐?" "하지만......시오 님도 톨베인 님도 제 주인님이시니까." "......"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 씰의 유구한 역사상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줄리탄, 시오, 톨베인 모두를 당연하게 테이머로 모시는 그녀는 대체...... 8. "아 노블리스 경. 오셨군요." 줄리탄이 들어간 곳은 시내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정보매매소 였다. 넓은 땅덩이에서 전쟁이나 황제 즉위 같은 커다란 소식들은 입과 문서 를 통해 어떻게든 퍼지지만 은밀한 일이거나 사소한 일들, 혹은 개인적 인 일들은 대륙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전해 듣기가 힘들 어 진다. 정보매매소는 보통 의뢰를 받고 원하는 정보를 알아봐 주거나 장거리 배달 등을 대신해 주는 곳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정보매매 소는 보통 위험한 정보나 음모성의 정보들은 신변의 위협이 있어 취급 하지 않는 평범하고 건실한 곳이었다. "아 예. 여전히 건강하시지요?" 줄리탄은 양피지를 묶어 만든 두꺼운 서류철이나 사전 같이 보이는 곰 팡내를 풍기는 고서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주변을 살펴 보며 말했 다. 좋게 말하면 고풍스러운 낡아빠진 건물 이층에 자리잡은 이곳의 소 장은 반백의 머리에 반짝거릴 정도로 달은 사무용 가죽옷을 입고 있어 공무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여기 앉으세요. 이거 원 여기가 원채 더러워서......" "감사합니다." 그는 줄리탄이 오자 허겁지겁 서류 따위가 잔뜩 놓인 의자를 치워주며 정성스럽게 맞이했다. 줄리탄은 자기의 몫으로 떨어지는 돈을 거의 모 두 여기에 쏟을 만큼 베오폴트 정보매매소의 최고 고객이었다. 그가 찾 고 있는 것은 하나. "이런 말씀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십대 후반의 여성은......각 도시의 정보매매소를 통해서 십방으로 찾아보곤 있지만 도무지 비슷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달라카트 내 엔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줄리탄은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예의 바르게 말하며 속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금화가 가득 차 있는 돈주머니였다. "아, 아니 저희는 성과를 올린게 하나도 없는데 더 이상 받을 수 없습 니다." 줄리탄은 너무도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거절하는 소장에게 미 소 지으며 테이블 위에 그 주머니를 놓고 일어섰다. "그러시면 이 돈......성당에 기부라도 해주세요. 그럼 이만." 줄리탄은 그렇게 인사하며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니 일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평생을 한번에 살아 버린 것 같은. 많은 것을 이뤘고 행복해. 그래도......일년 전으로도 돌아가 버려도 상관 없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어디에 있는 거야... ...카넬리안.' 1부 재래(再來) 종장 끝 Next : 2부 재래(在來) -Blind Talk 끝났습니다......축하해 주세요. 풀썩. 지지리도 인내심 없는 제가 이렇게 1부를 끝내게 된 건 읽어주시는 분 들 때문입니다. 대단한 것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글을 읽어주 시고 계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제 글을 다른 통신망에 웹상에 고맙게 퍼가주시고 널리 알려 주신(흐뭇)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를. 모자란 글을 출판까지 해주신 분들께는 감사드리기 앞서 죄스럽네요. '어어어! 이거 갑자기 스토리가 왜 이래!!'라며 분노에 몸부림 치실 분 들에겐......어쩔 수 없습니다. 정해진 길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그럼 또 언젠가......2부에서 뵙겠습니다. 길게도 끌었던 1 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WISE WOLF 올림 e-mail : billiken@hananet.net ps:...후반부는 제가 다시 읽어보지 못하고 올려서 좀 문맥이 틀린 부 분이나 어색한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죄송. 너무 피곤해서. 발 견하시면 언제라도 연락 부탁드려요. 『SF & FANTASY (go SF)』 11597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2/08 13:18 읽음:38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까지... 관련자료:없음 [5779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2-08 12:42 조회:42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1. "노블리스 경. 도시에서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가스발 사략함대의 선원이 함장실로 들어와서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의아한 표정의 줄리탄. 시오는 청소하고 있는 그레시다를 웃기기 위해 무진장 애쓰던 중이었고 톨베인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작은 입에 담배 를 문채 창밖의 저녁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 라뇨?" 사략함대는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상관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 자립심 강한 선원들은 자기들 선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라면 알 아서 해결하는 것이 보통인데 드물게 노블리스 즉 줄리탄에게 찾아와 보고하고 있는 선원의 얼굴은 '좀 도와주셔야 겠는데요.'였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누구에게 두드려 맞았는지 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저 그게......저와 도시로 놀러 나간 친구들이 어떤 놈에게 잡혔습니 다. 저 그런데 그 놈이......저만 풀어주고는 노블리스 경한테 가서 말 하라고......" 그는 자존심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인체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뻔했다. 정박 중일때 베오폴트로 쉬기 위해 나간 몇 몇 선원들 이 도시 사람과 싸움이 붙은 것이고 분명히 떡이 되도록 얻어 맞은 것 이다. 시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에? 가스발 사략함대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단 말야? 누구야 그 사 람이?" 일단 거칠고 건장하기가 이를데 없는 뱃사람들을 저 지경으로 만든 자 라면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가스발 사략함대의 일원은 여간 해선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베오폴트의 불문율. 줄리탄은 고개를 갸웃거 리다가 말했다. "왜 싸운 겁니까?" "저 그게......저희가 와인을 몇병 사오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외상 으로 해달라고 했는데 그 쪽에서 다짜고짜......" "와인?" 줄리탄의 머리속에 어떤 인물의 얼굴이 잠깐 스쳤다. 하긴, 그는 여자 니까. "술값 드릴테니까 가서 사과하고 돈 주고 오세요." 불필요한 싸움은 피한다......라는 것이 줄리탄의 성격이었고 그가 자 신의 테이블 서랍을 열어 돈을 찾을 때 선원이 다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 "저 그런데......그 놈이 원하는게 술값 정도가 아니라서......" "......?" "금화 열닢을 주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겠다고 해서요......" "그런......" 줄리탄은 혀를 찼다. 금화 10닢을 요구하는 건 거의 협박에 가까운 일 이다. 게다가 가스발 사략함대를 상대로 그런 협박을 한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가지." 시오가 '뭐! 그런 놈이 다 있어!'라고 외치려고 할 때 톨베인이 자리 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톨베인. 괜찮겠어?" "심심하던 차에 잘됐군. 버릇을 고쳐주고 오지." "저 그런데......그 놈 보통 실력이......" "안내나 해." 톨베인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흘리며 먼저 문 밖 으로 나갔고 선원은 허둥지둥 그를 따라 나갔다. 그레시다가 걱정스러 운 표정으로 시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이 괜찮을까요? 주인님." "......" 전자의 주인님은 '톨베인'이고 후자는 '시오'이다. 시오는 잠시 이해 가 안되는 듯이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걱정하지마. 그레시다. 한 시간쯤 후에 '다녀 왔어.'라고 묵뚝뚝하게 말하며 들어올 테니까." 2. 와인 하우스에 도착하기 까지는 이십여분 정도가 걸렸다. "네 놈이......노블리스라는 해적 두목이냐?" "난 톨베인이다. 그리고 노블리스는 두목이 아닐 뿐더러 우리는 해적 도 아니라 사략함대다." 선원의 안내를 받아 꽤 도시 구석에 있는 와인 하우스에 들어간 톨베 인 길고 검은 머리칼과 큰 키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를 바라보며 차가울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그가 금세 훌터본 가게 내부에는 너덧명 의 사략함대 선원들이 박살이 나서 쓰러져 있었고 자신에게 비웃음을 보이는 사내는 나무 테이블 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 "사략함대? 해적질이나 사략질이나 그게 그거지. 안그러냐 꼬마야." 사략함대라는 것은 정부나 귀족들의 지원과 묵인으로 공인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함대를 말하는 것. 해군력이 약한 국가에서 자국의 해상권을 지키기 위해 조직하는 것이 사략함대 였던 것이다. 그런 그 자는 반정규군에 가까운 사략함대에게 연신 비웃음이다. 톨베인은 그 자의 느긋한 조롱해 일순간 울컥했지만 칼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상대를 본격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애써 참고 있었 다. "존경을 표하라는 말은 하지도 않겠다. 단지 여기서 조용히 끝내면 아 무런 문제도 없이 돌아가 주겠다." 톨베인은 생각 같아선 눈 앞에서 자신과 맞먹는 차가운 냉소를 깔고 있는 이 자를 흠씬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괜히 줄리탄의 잔소 리를 듣게 될 것 같아 짧은 시간 동안 참고 또 참았지만 상대는 귀찮다 는 듯이 피식 웃으며 딴소리다. "나도 네 놈들의 사과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금화나 내놔." "이 자식이......네 이름이 뭐냐." 톨베인이 이름을 말하라고 한 것은 이름을 들은 다음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이 입에서 연신 튀어날 때까지 반송장을 만들어 주려고 했기 때 문이다. "나? 저 여자 남편." "뭐?" 톨베인이 돌아본 쪽에선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는 금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자신 보다는 남편되는 사람을 향해 화가 나 있을 얼굴. 톨 베인은 다시 상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정말 술 몇병 외상으로 달라는 말 하나 때문에 우 리 선원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무엇보다 날 화나게 했던 건 내 마누라 한테 너희 지저분한 뱃사람들이 추근거렸다는 거지." "저, 저는 단지.....결혼한 줄도 몰랐고......그냥 예쁘게 생겼으니까 자주 놀러오겠다고......말한 것 뿐......큭!" 정신을 차리고 억울한 목소리로 변명하는 선원들의 머리를 꾹꾹 밟으 며 상대가 말했다. "일년 전에 그딴 소리를 저 여자에게 했다간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 로 당장 골로 갔을 꺼다. 내 이름 물어봤지? 젤리드 빙크리스틴이다." "......?" 톨베인을 얼음장같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자는 역시 젤리드였다. 톨베 인은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 자체로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 '흉몽'의 본래 이름인 젤리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 엇보다 톨베인을 자극한 건...... "그렇게 강하다면 한번 싸워보고 싶군. 젤리드." 톨베인은 언제나 애용하는 작은 칼을 뒷춤에서 뽑으며 말했고 젤리드 는 그런 톨베인의 모습이 몹시 귀엽다는 듯이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검을 들어라. 없다면 하나 줄까?" "검이라......네 검은 너 같은 놈에게 사용하긴 좀 아깝고, 이걸로 대 신하지." 젤리드는 테이블 옆에 놓여 있던 나무 작대기 같은 걸 집어 들었다. 분명 선원들을 혼내줄 때 사용한 것이리라. 톨베인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 따위 건 내 칼에 순식간에 두동강 난다. 날 모욕하는 건가!" "모욕이라고? 네 놈 같은 꼬맹이가 모욕이 뭔지는 알아? 잘 알지도 못 하는 말 지껄이면 애늙은이 취급 받는단다 꼬맹아." "큭! 뭐라고 이 놈이!!" "젤리드!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선원들 돌려 보내줘!"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는 리이는 몹시 화가 나는 듯이 젤리드에게 외쳤 지만 젤리드는 듣는 척도 안하고 톨베인에게 천천히 다가갈 뿐이었다. "톨베인이라고 했지. 넌 가게 잘못 들어왔다." 톨베인은 뭔 소리를 하는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젤리드의 말대로 와인 하우스 '낙원의 오후'에 있는 구성원들은 전직 기사 젤리드와 리 이, 일급 씰들인 이카테스와 카리나가 있는 곳. 무늬만 가게지 마음만 먹으면 보통 왕국의 규모를 넘어가는 전투력의 요새로 돌변할 수도 있 을 껄? -Blind Talk 짧습니다. 너무 짧지요. 죄송. 지금 학교를 가야 하기 때문에 변변하게 수정도 못하고 올립니다. 수정은 갔다와서 다시 읽어보며 e로 하겠습니 다. 더 길게 써 놓긴 했는데 한번에 다 올리려다가 현재 함선이나 군대 에 관련된 부분을 잘 모르고 있어서 자료 찾느라고 늦어질 것 같아서 일단 가볍게 짧은 한편 올리고 다음 편은 역시 짧게 내일모레쯤 올라간 뒤에 본격적인 시작은 12월 15일 쯤부터 올라갈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챕터는 줄리탄의 1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의 회상이 들어갈 계획입 니다.(거의 인간개조 수준임.-_-) 이번 챕터 제목인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순정만화가인 이와다 테 마리코 외 3인의 문답식으로 끌어가는 자전적인 책 제목입니다. 아 직 이 책은 보지 못했지만 제목이 맘에 들어서 차용.(버릇되었습니다.) 보통 장난스럽게 제목을 차용해 온다면 고전 소설 제목이나 sf 소설 제 목 들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건 되도록 원어로 해야 더 재미있 는데......드래곤 레이디 챕터 제목은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다는 나름 대로의 원칙이 있어서. 아 그리고...이제 인터메조는 더 이상 없습니다. 2부와 3부에서는 1부 인터메조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실현되니까요. 어쩌다 보니까 1부가 가장 길어졌네요. 절반 쯤 쓴 것 같습니다. 저녁노을 물드는 거리는 격렬함을 슬쩍 잊고 있어 언젠가 본 하늘이 내 마음을 돌려보내네 어딘가로... 새로운 삶에도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제멋대로인 나는 여전히 그대를 떠올리지. 우리들은 각자의 꽃을 안고서 태어났어 우연히 다시 만나기 위해 물드는 길가는 그리운 바람의 향기 누구나가 가슴 속엔 잘 닮은 석양을 지니고 있지 시들 줄을 모르는 눈물의 색깔은 지금도 꿈을 이야기했던 그 시절과 똑같아 하늘을 쳐다보면 혼자...무턱대고 품은 정열이 들뜨듯 웃네 언젠가 사라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었지만 시대가 돌고돌아 다시 그대를 찾아 내겠지 사랑에 빠져들면 혼자...빛을 쬐며 이 마음을 애태우자 You're gone 언제까지나 계속 노래하는 이 목소리는 어디까지 전해질까 지금 그대를 만나고 싶어 ....B'z의 노래는 무난해서 좋은데 전 지금보단 예전의 스타일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e-mail : billiken@hananet.net Coolio의 Gansta's Paradise를 들으며... (쿨리오 혼자 부른게 아니라고 들었는데...글적.) 『SF & FANTASY (go SF)』 116575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2/11 16:04 읽음:12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2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57949]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2-10 21:57 조회:16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2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1. "어이 노블리스 씨. 대체 왜 그렇게 걱정이 많냐 너는." 그 와인 하우스를 알고 있는 다른 선원의 안내를 받으며 줄리탄의 뒤 를 따라가던 시오가 귀찮고 피곤하고 번거로워 죽겠다는 얼굴로 짜증을 내며 몇번이나 말했지만 줄리탄은 매번 "미안. 하지만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괜히 가면 톨베인 자존심 상한다니까. 그 녀석 째려보는 거 싫어." 시오는 '너희들 뭐하러 왔어.'라며 기분 상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것도 싫었고 도시에서 벌어진 사소한 일 하나에 사략함대 지휘관들이 줄줄이 나선다는 것도 싫었고 그냥 배에 남아 그레시다와 노닥거리고 싶었던 것이다. "야! 줄리탄! 너 가서 아무 일 없으면 나한테 저녁 사는 거다!" "응. 알았어." "크으윽! 이 재미 없는 남자!" 시오는 카넬리안이 있었다면 줄리탄을 두드려 패서라도 다시 배 안으 로 집어 넣었을 거라고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줄리탄 앞에서 함부로 카넬리안의 이름을 꺼내는 짓은 주변 누구도 하지 않았다. 2. "허억......허억......" 톨베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면서도 표독스러운 눈동자로 계 속 젤리드를 쏘아 보고 있었다. 자신은 상대가 되질 않는 것을 인식한 것은 싸움이 시작되고 젤리드가 든 평범하기 그지 없는 막대기의 끝이 몇번이나 가슴을 찔렀을 때였지만 톨베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젤리드 에게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와인 하우스 주변에는 수많은 구 경꾼이 몰려 들어 있었다. "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거냐!" 톨베인은 젤리드가 거의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젤 리드는 이제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히 대답했다. "왜. 와인 가게 주인이 이렇게 강한 건 사기라는 거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네 진짜 힘을 보고 싶다......그것 뿐이야." "하하. 넌 내 기사수행때 모습을 닮았군......그런 말 하다가 스승님 에게 많이 얻어 맞았지." "기사수행......너. 기사였군." "파문 기사지." 젤리드는 옛 생각에 스스로 쑥스러운 듯이 슬쩍 웃으면서 톨베인을 바 라보다가 대뜸 말했다. "돈 필요 없으니까 니 부하들 데리고 가라. 간만에 재밌었다." 젤리드는 들고 있던 막대기를 바닥에 던져 버리며 등을 돌렸다. 톨베 인은 울컥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누구보다 강한 그의 진짜 힘을 보고 싶다. "검을 든 상대 앞에서 등을 보이는게 아냐!!" 시오였다면 '그러지 말고 좀 보여주세요오.'라며 몸을 비비 꼬았을 텐 데 톨베인은 화가 난다는 듯이 소리치며 젤리드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로 등을 찌를 각오로. 젤리드는 걸음을 멈춰 섰다. "자제심을 잃으면......죽는다." 톨베인은 순간적으로 젤리드의 존재 자체가 악마처럼 바꿔버렸다는 기 분이 소름이 끼쳤다. 이게 본래 모습? 거대하고 두려운 손아귀에 온 몸 이 잡혀 버린 기분. 톨베인은 젤리드가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로 멀리 튕겨나가 버렸고 박혀 버리듯 벽과 충돌하며 정신을 잃 었다. 와인 하우스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 '또 저질렀다.'라는 얼굴을 작은 손으로 가리며 리이가 말했다. "젤리드......기사수행자도 아닌 아이에게 그런 짓 좀 하지마. 죽으면 어떻게 해!" 젤리드나 리이나 톨베인을 아직 미성숙의 어린아이로 보는 것은 똑같 았다. 젤리드는 잔소리좀 그만하라는 얼굴로 리이에게 말했다. "저 녀석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선물을 준 것 뿐이야. 나도 참 자상한 남자야." "토, 톨베인!" 시오의 목소리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에 구경꾼들을 밀치면서 들어온 줄리탄과 시오는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톨베인을 보며 경악했고 줄리탄은 그것보다 와인 하우스 안에 있는 두 명의 얼굴에 더욱 놀란 채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먼저 외친 것은 리이였다. 그녀는 변해버린 줄리탄의 모습에 조금 의아해 하다가도 줄 리탄을 기억해 낸 것이다. "줄리탄 씨?" "리이 님......어떻게 그 머리색은......" 예전 카넬리안은 파란 눈동자를 봤을 때의 키마인의 표정도 이렇지 않 았을까. 분명 줄리탄이 알고 있는 리이의 머리칼은 밝은 푸른색이었는 데 지금은 분명 황금을 가늘게 뽑아 만든 것 같은 금발이다. "아 그거......염색이었어요. 지금은 하지 않지만." 리이는 좀 부끄러운 듯이 자신의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가지런한 금발 을 매만지며 말했다. 예전에 봤던 뒤로 묶은 푸른 머리칼도 중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기사다워 보이지 않는' 품위있는 금발은 더없이 여성스러워 보였다. 기사의 맹세를 외쳤을 여자로는 보이지 않 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 줄리탄 님!" 청소도구를 들고 나타난 카리나 역시 줄리탄을 알아보며 특유의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줄리탄 뒷쪽을 기웃기웃 거리 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분명 카넬리안을 경계하는 것이리라. "네 놈이 노블리스라는 녀석이었군. 의외인데." 젤리드였다. 줄리탄의 붉은 망토와 두자루의 검을 보며 단박에 그 유 명한 노블리스가 줄리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심하게 겁을 집어 먹 던 줄리탄이 어떻게 사략함대의 선장이 된 거지? 라는 표정이다. "젤리드......씨. 반갑습니다." 당당하게 반가워 하는 줄리탄의 얼굴에도 젤리드는 여전히 싸늘한 표 정이었다. 젤리드는 조용히 줄리탄을 바라보다가 카리나에게 말했다. "카리나. 내 검 가져와." "젤리드!" 화가 나서 외친 것은 리이. 젤리드는 계속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블리스. 결투다." "예?" 갑자기 이게 뭔소리? 젤리드는 호의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눈빛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사략함대의 두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런 자 리에 어울리는 녀석인지 확인해 보고 싶군. 아까 저 톨베인이라는 애송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널 죽이겠다. 너 남자지? 도망치지 마라. 개처럼 죽여 버린다." 젤리드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흉몽'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실 력을 보고 싶은 정도가 아니다. 정말로 죽여버릴 기세. 카리나가 우물 쭈물하며 말했다. "젤리드......정말로 칼 가져와?" 젤리드의 검 흉수는 달라카트에 내려와서 와인 하우스 지하 창고에 넣 어둔 뒤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 검을 꺼내겠다 는 것은 진심으로 싸우겠다는 의미. "난 이런 일에는 농담하지 않아." 젤리드가 그렇게 말하자 카리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하 창고 로 가 버렸다. 리이가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젤리드. 그만 좀 해!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리이의 말에 긴장한 표정의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는 젤리드의 입꼬리 가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장난하려는게 아냐. 싸우려는 거지." 카리나가 검을 가져올 때까지 젤리드와 줄리탄을 말 없이 서로를 바라 보았다. 줄리탄은 '왜 그러시는 거에요?' 혹은 '제가 당신을 이길리가 없잖아요.'라는 말 대신 굳은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검을 들고 나타난 카리나가 젤리드에게 검을 건내줄 때야 젤리드는 자신의 기괴한 검 흉수를 꺼내며 차갑게 말했다. "학자는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모험가는 자신의 발을 움직여 진리를 깨닳고......나는 검을 통해 상대를 판단한다. 그것 밖엔 모르니까. 들 리는 말에 노블리스라는 자는 상냥하고 강하고 멋진 자라던데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내가 지금부터 직접 그걸 알아보겠다." 젤리드는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일년만에 바라보는 여 전히 날카로운 자신의 검날을 훌터보며 말했다. "자신의 위치가 단지 운이 좋아 얻은 것 뿐이라면......그런 쓰레기 같은 인생, 내 손으로 죽여버리는 것도 속 시원한 일이겠지. 안그런가. 노블리스 경?" "제 이름은 줄리탄 입니다......" 줄리탄은 결심에 찬 표정으로 젤리드를 쏘아보며 흔들리지 않는 목소 리로 말했다. "......밖으로 나가지요. 젤리드 씨." 3. "카, 카넬리안 씨.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프란츠는 옥상으로 힘들게 기어 올라오며 옥상의 굴뚝에 몸을 기대고 아침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카넬리안에게 다가왔다. 프란츠의 머리로 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여자. 어제 오후에 그녀가 사라져 서 레지스탕스 본부가 발칵 뒤집혔는데 계속 옥상 위에 있었단 말인가. 카넬리안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거의 기어오다시피 하고 있는 프란츠의 난감하게 웃음띈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프란츠가 보기에 그녀는 참으로 말 수가 없는 신비스러운 여자였던 것이다. "오늘은 군자금을 받으러 도시로 가야하는데.....같이 가실래요?" 프란츠의 말에 카넬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깨 위까지 쳐낸 고운 머리칼과 눈동자처럼 붉게 염색한 머리칼에서 묘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뭘 보고 계셨던 거에요?" "운석이......떨어진 자리." 라고 말하는 카넬리안의 시선은 옥상 위 멀리서 보아도 커다랗게 보이 는 넓고 깊게 패어 있는 크레이터에 가 있었다. 마치 땅을 원형으로 도 려낸 것처럼 움푹 패어 있는 그 크레이터는 도시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거대했다. "흉칙하죠 저거? 저걸 볼 때마다 무서워요. 마치 포악한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같아서." 본래 소규모의 도시였던 이 곳 케센에는 일년전 쯤에 하늘에서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었다. 당연히 도시의 사람 대부분은 충돌이 만들어 낸 폭 풍에 휘말려 죽었고 살아 남은 사람들도 이 불길한 도시 케센을 떠나 지금은 유령도시. 달라카트 황실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 만이 눈을 피해 폐허 건물들 속에서 살고 있었다. "카넬리안 씨는 운석이 떨어질 때 이곳에 계셨다던데 어떻게 살아 남 으셨어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운석이 떨어질 때 무슨 기분이 들었어요? 무서웠어요?" "별이 움직이는 소리를......들었던 것 같아."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운석은 우연이 아니라 오펜바하가 자신에 대한 경고로 보냈다는 것을. 오펜바하의 씰인 미쉘이라면 운석을 움직이는 인간의 눈에는 도저히 마 법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힘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저 그런데요......" 레지스탕스의 가장 막내인 프란츠는 카넬리안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 화내는 일도 없고 힘들어 하는 적도 없었으며 거의 웃는 모습을 찾아 볼 수도 없는 그녀의 메마른 이미지와는 반대로 가끔 자신들을 공격하 는 산적이나 귀족 사병들과 싸움에선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보고 있기 두려운 잔혹한 싸움을 벌이는 그녀에게 위험한 궁금함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카넬리안 씨의 테이머는 어디에 있어요? 왜 서로 떨어져 있는 거에요 ?" 그녀는 스스로 씰이라고 밝혔지만 단 한번도 그녀의 테이머는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있으면 지켜줄 수 없으니까......나도 모르는 곳으로 보낸 거 야. 그를 지켜주고 싶어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프란츠의 물음에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자주 했다. 카넬리안은 희미하게나마 드물게 미소지으며 운석이 떨어진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 다. "같이 있었다면......저 속에서 죽었겠지." "이름이 뭐에요? 카넬리안 씨의 테이머?" "잊어버렸어." 프란츠는 그것이 대답하길 싫어하는 그녀의 거절의사라는 걸 알고 있 었지만 - 그럴 수록 더 알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 그녀의 테이머에 대해 . 그녀는 언제나 천에 감고 다니는 자신의 검 미스트랄을 꼭 껴안듯이 두 팔로 쥐며 쌀쌀한 하늘을 가느다란 목으로 올려다 보았다. "좋아하니까 같이 있을 수 없을 때도 있는 거야. 원하는 것이 많을 수 록 소중한 것이 많을 수록 현실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 잘은 모르지만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프란츠는 그런 말을 하는 그 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은 그녀의 투명한 아름다움에 취해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느다랗게 울리며 울음소리를 닮은 노래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끔씩이지만 그녀는 말 수가 적은 대신 짧은 노래를 혼자서 부르곤 했 다. 살과 쇠가 뒤엉켜 피가 흐르면 저녁 햇빛에 피는 마르고 내일의 비는 그 흔적을 씻어내리겠지만 우리 마음속 무엇인가는 영원히 남겠지. 아마도 이 마지막 행동은 우리 일평생 동안의 논쟁을 끝내려는 걸꺼야. 싸움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별자리 아래 태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니까. 쉼없이 비는 계속 내리네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계속해서 비는 말 하겠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냐고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냐고 -Blind Talk 참말로 처량한 한편이었습니다만 -_-; 카넬리안이 부르는 노래는 좋지요? 제가 쓴 것이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만은 실은 위의 가사는 sting의 fragile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번역한 겁니다.-_-; 스팅의 노래는 특히 가사가 좋습니다. '내 마음의 모양' 도 그렇고. 그녀는 달라카트 레지스탕스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유령 도시에 숨어 활동하니까 당연히 정보매매소에서 암만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겠지요. 이제 검은 머리도 아니고 붉은 머리니까. 아 그리고 좀 늦은 말이지만 3권 나왔습니다. 한번 봐주세요. 에 그리고 마감에 밀려서 사실 챕터9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편은 수 정을 많이 하지 못했는데 본래 수정하려고 했던 스토리를 공개 합니다. (왜나면......아까우니까.) 상트에 도착하여...... 밀항선을 타고 싶었지만 돈 한푼 없는 줄리탄 일행. 그렇다고 난동을 부릴 수도 없고 - 그때 살인청부길드가 노예들을 잡아 달라카트 노예 시장으로 데려간다는 말을 듣고 카넬리안은 일부러 노예로 잡혀 달라 카트행 노예선을 타려는 무시무시한 결심을 밝힌다. 싫어 죽겠는데도 어쩔 수 없이 카넬리안의 손에 이끌려 노예가 되어 버리는 줄리탄과 시오. 계획대로(?) 노예가 되어 카넬리안은 자신에게 추근거리는 자 들을 향한 살기를 '달라카트에 도착하는 순간 다 죽여 버린다.'라는 결심 하나로 꾹꾹 참으며 노예선에 승선 성공. 상트를 빠져나가게 되지만 그때 관문이 봉쇄되며 해상에서 키마인의 국경 수비대의 함선 들에게 나포된다. 터져 나오는 짜증에 환장하는 카넬리안. 그러나 결국 달라카트로 다시 돌아오고 눈물을 흘리며 키마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와 버렸다. 그녀는 너무도 너무도 너무도 화가 나서는 그 길로 길드로 뛰어가서 쑥밭을 만들어 버리고 톨베인도 두드려 팬다. 길드 두목을 협박해서 어떻게든 달라카트로 자신들을 보내지 않으면 영원히 몸종을 만들어 부려먹겠다는 협박에 두목은 자신 만이 알고 있는 국경선의 '개구멍'을 알려주겠다고 하 지만 알려주기 직전 키마인이 또 쳐들어와서 길드를 일망타진 한다. '이 남자 왜 이렇게 방해하는 거야!'라는 좌절에 몸부림 치며 피눈 물을 흘리며 키마인에게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찰 나 특무 대가 들이닥치고 혈전이 벌어질 때 줄리탄 일행은 톨베인과 함께 도 망친다. 이후에 카넬리안은 항구에서 배를 빼앗아 달라카트로 내려갈 계획을 세운다. (이후는 같음......) 흐윽. 잘 쓸 수 있었는데......뭐. 이제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 ...이번 편 역시 다시 읽어보지 못하고 올리는 것이라서 문맥에 문제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조만간 수정하겠지만 이상한 점 발견하시면 언제 라도 연락을 주세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포지션의 blue day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1722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2/16 04:02 읽음:27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3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58249]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2-15 00:02 조회:65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3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Who's REAL? 1. 노블리스의 결투는 순식간에 커다란 도시 베오폴트를 술렁이게 만들정 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사략함대의 무뢰한이 칼 좀 뽑은 것이 뭐 그렇게 대수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노블리스 즉 줄리 탄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선상이 아닌 지상에선 검을 뽑아본 적이 없었 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명성을 노리고 줄리탄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자 들은 적잖았지만 역시 줄리탄은 정중하게 거절했었다. 그런데 와인가게 주인의 결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건 중의 사건. "줄리탄......정말 결투 받아들일 꺼야?" "이미 받아들였어." 줄리탄은 문 밖으로 나서며 몹시 걱정스런 얼굴로 말하는 시오에게 짧 게 대답했다. 시오의 생각에 젤리드라는 자는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보통 결투에선 죽이기 직전 검을 거두곤 하지만 저런 기세라면 줄리탄 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노, 노블리스 경이다......" 문 밖으로 나온 줄리탄을 보며 구경나온 사람들은 뒤로 슬금 슬금 물 러나며 중얼거렸다. 평소의 상냥하게 웃는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런 결투에서 눈먼 칼날에 찔려 죽는다고 보상받을 길은 없으므로 구경 꾼들은 여기 저기 숨으면서도 슬쩍 슬쩍 고개를 쳐들어 돈 주고도 못보 는 결투를 구경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나?" 흉수를 든 채 걸어나온 젤리드가 말했다. 카리나는 그의 뒤를 쪼르르 따라와선 버릇처럼 젤리드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젤리드......죽이진 마." "그런 거 일일이 신경쓰면서 칼 휘두르지 않아." 줄리탄은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두자루의 검, 검은색의 세이버(sav or)와 신월도 인피타르 중에 세이버를 뽑았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찌르 기 검인 세이버는 뱃사람들이나 해군들이 자주 사용하는 검중에 하나였 다. 젤리드가 들고 있는 마상검(馬上劍)으로 써도 될 정도로 길고 묵직 한 브로드 쇼드, 흉수(凶手)에 비하면 가련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로 가느다란 검. "카리나. 내가 죽으면 다음엔 좋은 주인 찾아라." 젤리드 역시 결투전의 의식처럼 뾰루퉁한 카리나의 머리에 손을 얹으 며 죽음을 대비하는 공명을 시전한 뒤에 줄리탄에게 다가갔다. "히잉. 죽이지나 말라니까." 카리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2.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기대어 그 런 둘을 바라보고 있는 리이 옆으로 시장을 다녀온 이카테스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의 두손에는 가죽 주머니에 들 어 있는 저녁 찬거리가 들려 있었다. "리이 님. 말려야 하지 않을 까요?" "말린다고 그만둘 남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궁금해 졌어. 줄리탄 씨에 대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리이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줄리탄을 진지한 두 눈에 담고는 말을 이었다. "내 레이피어, 가져와 주지 않겠어?" "리이 님." "괜찮아. 그냥 걱정되서 그러는 거야. 다시 검을 들 생각은 없어." 3. 줄리탄은 긴장된 숨을 고르느라고 애썼다. 일년동안 쉴세 없이 배웠지 만 기사의 몸도 아니고 검에 큰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자신을 자기 스 스로도 알고 있었다. 반면 젤리드는 헤스팔콘의 기사 중에서도 가장 뛰 어난 자 중에 하나. 파문 당하지 않았다면 리히트야거에 들어가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실력의 소유자다. '기사의 검은......받아본 적이 없어.'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돌면서 젤리드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간 젤리드의 몸이 스르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마치 연기가 흩어지는 것처럼. '잔상?' 기사의 움직임이란 보통 사람의 눈에는 단지 잔상을 남기는 환영(幻影 )처럼 보인다. 줄리탄은 몸을 뒤로 빼며 검은 바람처럼 발소리도 없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젤리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찰 나의 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젤리드가 줄리탄의 시야 밖으로 사 라져 버렸다.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는 리이를 제외하면 젤리드의 동선 (動線)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일년 동안 어떤 연습도 싸움 도 하지 않은 젤리드지만 여전히 상대에겐 치명적인 악몽 그 자체다. '어, 어디?' 순간 줄리탄의 등에 살기가 느껴졌고 몸을 돌릴 때 젤리드의 주먹에 가슴을 맞아 쓰러졌다. "으윽!" 무력하다. 상대에게 등을 빼앗겼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수치. 몇단계 의 수준차이가 난다는 증거다. 젤리드는 줄리탄을 내려보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니까 단번에 죽이는 건 기사도 아닌 네겐 좀 억울할 것 같군. 한번 봐줬다.....그리고 앞으로 딱 두번 더 봐주겠다. 그때까지 날 멈추게 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젤리드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쓰러진 줄리탄을 향해 검을 찔렀고 줄리 탄이 날렵하게 피한 포장도로는 젤리드의 검에 날카롭게 베어 종이처럼 찢어져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몸이 두동강난다. "이야앗!" 이번에 선공에 들어간 것을 줄리탄이었다. 젤리드는 바닥에 검이 박혀 있으니까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젤리드를 자신의 검격(劍擊)의 반경 내에 넣기도 전에 젤리드의 비웃음이 보였다 . 도리어 간격을 좁힌 것은 젤리드였다. 순식간에 뽑은 흉수를 들어 올 린 채로. '당했다!' 자신의 목에 날아드는 흉수를 줄리탄은 세이버로 받아 흘리면서 젤리 드의 측면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흉수가 세이버와 맞닿는 순간 몸 이 깨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세이버가 두동강 나 버렸다. "아악!" "두 번 봐줬다." 젤리드는 줄리탄의 목에 차가운 검날을 가져다대며 나직하게 말했고 동시에 부러진 세이버의 검신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젤리드는 검 을 빼며 말했다. "이게 네 실력의 전부인가? 선택권을 주겠다." 줄리탄은 뼈에 금이 가서 욱신거리는 자신의 손목을 쥔 채로 젤리드를 쏘아 보고 있었다. 고통 때문에 금새 식은땀이 온 몸에 차 오른다. 정 면으로 흉수를 받았다면 아마 팔의 근육전체가 파열되었을 것이다. 전 속력으로 달려오는 마차를 들이 받은 것 같은 기분. "사략함대의 지휘관이라는 너의 직위는 네 실력과 어울리지 않아. 지 금 이 자리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개처럼 살아가겠다고 말한다면 살려주겠다. 그게 싫다면 넌 과 분한 너의 직위를 안고 이 칼에 죽어라." 사형선고 같은 말이다. 줄리탄은 한참 동안 젤리드를 노려 보았고 젤 리드는 머리속으로 선택권의 제한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듯 가만히 서 있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줄리탄의 다음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 들. 잠시 후 줄리탄이 부러진 자신의 세이버를 땅에 버리며 조용히 말 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전 여기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해드리겠습니다." 젤리드의 입에서 코웃음이 나올 때 줄리탄의 손이 인피타르의 검자루 로 향했다. 시오의 눈이 커지며 '저 녀석. 뽑을 생각이야......'라는 신음소리가 세어 나온다. 줄리탄은 주저 없이 '노블리스가 절대로 뽑지 않는 검'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신월도 인피타르를 서서히 뽑았다. "검을 바꾼다고 될 일이......으응?" 젤리드는 검에서 퍼져 나오면서 줄리탄의 몸 주변을 감싸는 시퍼런 기 운에 눈을 의심했다. 마치 빛이 포효하며 저녁의 어둠을 멀리 쫓아버리 는 것 같은 모습. 이카테스 역시 수 없이 리이의 검에 마법을 부여해 주었지만 인피타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검 자체가 사슬에서 풀려나 주변의 목숨을 노리며 덮칠 것 같은 야수 같은 기분. 온 몸을 두르는 푸른 아우라(aura)속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줄리탄은 고개를 들며 날카 롭게 변한 눈으로 젤리드를 노려 보았다. 인간이 아닌 절대적 생명체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젤리드는 이를 꽉 물면서도 무형의 압력 에 뒷걸음질쳤다. "......" 줄리탄은 기합 조차도 입에 담지 않으며 생령(生靈)같은 파란 기운이 엉켜 있는 인피타르를 들고 젤리드에게 달려 나갔다. 방금전과는 비교 도 안되는 완벽한 움직임. 젤리드는 피하지 않은 채 흉수를 들며 자세 를 잡았다. '받아보고 싶다......그 검.' 순식간에 흉수 앞으로 다가온 인피타르가 서로 충돌하며 눈이 멀어버 리고 고막이 찢어져 버릴 것 같은 극심한 빛과 충격음이 부딧친 검날 사이에서 터져 나왔고 건물들의 비싼 유리창들이 동시에 산산히 깨져 버렸다. 카리나는 본능적으로 젤리드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시퍼런 기 운이 도시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방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리 고 잠시 후 거리 전체에 퍼져 있던 그 아우라는 누군가의 명령처럼 줄 리탄의 검속으로 일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 운 광경. "우아아앙! 제, 젤리드!!!" 시야가 제로가 될 정도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카리나가 뛰어 들었고 폭풍에 날아간 구경꾼들은 겁먹은 듯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흙먼지 중앙 의 광경을 지켜 보았다. 검을 쥔 손에 피가 흐를 정도로 고집스럽게 검 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고 젤리드의 목에는 줄리 탄의 인피타르가 다가와 있었다. "하아......하아......" "줄리탄 님! 줄리탄 님! 우리 주인님 죽이지마요!" 카리나가 난리를 피우며 젤리드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줄리탄은 아무런 정신도 없는 듯이 거친 숨을 뱉어내며 젤리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젤리드가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힘들게 웃으며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내가 졌다. 살려줄 꺼지?" 줄리탄은 그제서야 웃음을 띄우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검집에 인피 타르를 넣은 뒤에 바닥에 스스르 주저앉아 버렸다. "줄리탄! 괜찮아?" "으응." 시오는 줄리탄 곁에 달려와서 외쳤고 줄리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 끄덕였다. 사람들은 생전 두번 보기 힘든 '결투'에 온몸을 떨면서도 노 블리스 줄리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하다는 소문은 알고 있었지 만 저 정도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이다. 4. "그러니까......생명력을 갉아 먹는 검이라고?" "예. 그런 셈입니다." 오늘은 일찍 문을 닫은 리이의 와인 하우스에 사람들이 모여 대화가 시작되었다. 젤리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인피타르를 몹시 흥미로 운 얼굴로 보며 줄리탄에게 물었다. 둘 다 팔이 부러진 상태일텐데 리 이가 아끼는 고급 와인까지 들고 나와서 이야기꽃을 펼치는 광경이 참 훈훈하다......기 보다는 되게 고집스러워 보인다. "요도(妖刀)로군. 이런 것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도 우연히 얻게 된 것이라서." 줄리탄은 버릇처럼 뒷머리를 긁적이려 손을 올리다가 부러진 팔에 뜨 끔하며 조용히 팔을 내렸다. "몸은 괜찮아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좋은데." 리이가 줄리탄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안색이 좋을리가 없다. 생명 력을 빼앗겨 버렸는데. "좀 지나면 괜찮아져요. 아직 이걸 쓰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사실 일년동안 줄리탄이 물키벨에게 배운 것은 인피타르를 다루는 법 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키벨은 줄리탄에게 적당하게 자신의 생 명력을 쓰면서 검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계속 훈련시켰던 것이고 - 필 요한 만큼의 생명력을 검과 '거래'하는 것을 익힌 것이다. 말로 거래하 는게 아니니까 마음가짐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고 욕심을 부린다면 검 은 순식간에 목숨을 가져가 버린다. 냉정하게 검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다. "생명력을 쓴다라......뽑아보지 않곤 모르겠는데?" 젤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뜸 인피타르를 집어들자 화들짝 놀란 리이와 카리나가 젤리드를 뜯어 말렸다. 만약 뽑았다면 거칠것 없이 살 아온 젤리드 인생 27년, 이 자리에서 종칠 뻔 했다. "그럼 나와 싸울 때는 니 생명력의 얼마를 쓴 거지?" "모르겠어요. 일분인지 한시간인지 일년인지 아니면 십년인지. 아무튼 지금 당장 죽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니까 어느 정도 조절에는 성공한 거 죠." 방실방실 웃으며 줄리탄은 섬뜩한 말을 잘도 했다. '자 이번엔 내 생 명력의 오분 삼십초를 쓴다!'라고 딱 잘라 검과 생명력을 거래할 정도 로 똑 부러지는 일이 아니다 인피타르를 쓴다는 것은. 얼마의 생명력이 날아갈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래서 최대한 인피타르를 뽑는 일은 자제하려고 하지만 젤리드를 상대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그건 그렇고......젤리드 씨." 어두운 표정으로 있던 톨베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젤리드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흉몽이죠? 흉몽이 음각이 패어 있는 독검을 쓴다는 말이 기억 나는군요." "말 안했던가?" "말 안했습니다." 젤리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지만 톨베인같은 살인청부업자 출신에겐 악명으로 치면 헤스팔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흉몽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나 할까. 젤리드와 톨베인은 뭔지 모르게 닮은 꼴인 것 같다. "언제가는 당신을 이길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마음대로." 톨베인은 젤리드를 보며 으르렁거렸고 갑자기 카리나가 톨베인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가벼운 전채를 만들어 오던 이카테스가 테이블에 접시를 놓으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리를 전혀 못하는 리이와 요 리를 전혀 안하려는 젤리드와 괜히 시켰다간 재료만 낭비할 것 같은 카 리나 덕분에 언제나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덤으로) 설거지까지 하 는 건 이카테스의 몫이었다.(의외로 가정적인 씰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건 그렇고 모두들......무사하셨다니 다행이에요. 이런 곳에서 다 시 만나게 될 줄은......" 줄리탄은 사실 리이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그녀가 리센버러에서 죽었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전에 만난 세이드의 말도 그렇고 - 내심 마음 아파하고 있었는데 살았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이의 인상이 단번에 어두워져 버렸다. '어?' 줄리탄이 뭔가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당황하던 찰나 리이 가 어렵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세이드 놈은 언젠가는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지만......" 젤리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리이가 조용히 젤리드의 어깨에 손 을 얹으며 말을 막았다. 젤리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그 놈은 이미 행방불명이니까. 어딨는 줄 알아야 죽이든지 말 든지 하지." "예? 세이드가 행방불명?" "모르고 있었나? 세이드 놈, 헤스팔콘 황실에서 수백명을 죽이고 도주 했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알고 싶지도 않고." 광기에 얼룩진 세이드가 무슨 이유 때문에 폭발한 건지는 몰랐지만 젤 리드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단지 다음에 우연히라 도 세이드와 마주치면 둘 중 하나 죽을 때까지 혈전이 벌어질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줄리탄. 세이드라면 그때 그 놈?" 시오가 속삭이듯이 묻자 줄리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은 내가 그냥두지 않겠어." 이번에 이를 가는 것은 시오였다. 아마릴리스를 죽인 세이드를 시오 가 잊어버릴리가 없었다. 젤리드가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이 말했다. "세이드는 좋겠네. 죽이려는 놈 많아서......인생이 심심하진 않겠군. " 따지고 보면 세이드와 원한관계에 있는 자들은 줄리탄을 필두로 카넬 리안, 젤리드, 리이, 시오, 레터 게다가 황실까지.....모르긴 해도 대 륙 전체에서 가장 적이 많은 자가 아닐까. 리이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 를 돌리려는 듯 줄리탄에게 물었다. "그런데 줄리탄 씨. 카넬리안은 보이질 않네요? 다른 곳에 있나요?" 이번에는 줄리탄의 표정이 어두워 졌고 옆에서 숨도 안쉬고 절인 고기 조각들을 집어 먹던 시오 역시 놀라서 목이 막혀 켁켁 거렸다. 젤리드 가 금새 눈치채며 말했다. "헤어졌군. 그렇지?" "예......" "씰은 보통 테이머를 떠나지 않아. 테이머가 씰을 버리지. 씰이 테이 머를 떠날 때의 이유는 단 하나, 자기 주인의 목숨이 자기 때문에 위험 해 질 때 뿐이야. 씰은 어떤 경우라도 테이머를 지켜야 하니까." "......" 줄리탄은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없었다. 남녀관계에 대해선 대단 히 노련한 남자 젤리드는 슬쩍 위로해 주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이런 무시무시한 검을 쓰고 있는 거로군? 너의 씰이 곁에 있 어도 될 정도로 강해지기 위해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사라도 이 런 검은 쓰지 않을 꺼야. 뽑을 때마다 자신의 생명이 잘려나간다는 것 은 참기 힘든 두려움이니까."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뽑으면 분명히 자신의 생명이 얼마씩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뽑는다는 건 그냥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면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행이도 줄리탄은 물키벨의 '지도편달' 덕분 에 자신의 생명력을 잘라서 인피타르에게 먹이로 줄 수 있는 능력이 생 겼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력이 인피타르에게 먹히는 고통 과 두려움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검을 쓰는 건 지독하게 헌신적인 행동 이었다. "지금도 두렵긴 마찬가지 입니다......인피타르를 뽑는 건. 그래도 제 가 강해질 수 있는 길은 지금 당장은 이것 뿐이니까......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몇번이라도 뽑을 겁니다." "호오. 다른 욕심은 없는 거야? 이런 검을 쓴다면 나라 하나 쯤 정복 하는 건 일도 아닐텐데. 자신의 생명의 일부를 바치고 나라의 주인이 되는 건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제 생명을 바쳐고 얻고 싶은 건......카넬리안 뿐입니다. 다른 것을 위해 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녀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때까 지 내 생명이 남아 있기만 한다면 그걸로 더 이상 원하는 건 없으니까 요." 어떻게 보면 참 얼굴 화끈거리는 말인데 줄리탄은 주저 없이 말했다. "젤리드도 좀 본받아." 카리나가 젤리드를 쿡쿡 찌르며 심통을 내며 중얼거렸다. "말해줄 수 있겠나? 지난 일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뭐 난 별로 남의 인생에는 관심은 없지만......너에 대해선 좀 궁금해 지는군." "별로 재미 없는 얘기일 텐데요." "재미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듣고 결정할 일이니까 한번 말해봐. 술도 있고 시간도 있고 들어줄 사람도 있으니까." 젤리드 말대로 이야기를 늘어 놓을만한 분위기였다. 팔이 부러진 상태 라는 것만 빼면. "어디에서 부터 말해야 하나. 음.....해룡을 만났어요." "해, 해룡?" 젤리드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며 리이 역시 귀를 의심했다. 해룡이라니 ......이 사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해는 거야? 반면 이카테스와 카리나 는 해룡 물키벨을 알고 있는듯 놀란 표정으로 줄리탄의 쑥스러워 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줄리탄은 잠시 생각하는 듯이 가만히 있다가 리이 가 아끼고 아끼는 최상급의 물빛 와인에 목을 조금 축인 뒤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시 1년전으로- 5. 물키벨을 향해 자신이 카넬리안의 테이머라는 것을 겁도 없이 외친 줄 리탄은 어떤 사족도 없이 계속 자신을 내려보는 해룡 물키벨을 바라보 았다. 줄리탄의 당돌한 행동 덕분에 엄청나게 불안해 지는 시오와 톨베 인과 해적들. 생각 같아선 줄리탄을 침실로 끌고 가서 묶어 버린 뒤에 해룡에게 '없던 일로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줄리탄은 이대로도 충분한데 한마디를 더 한 것이다. "저도 하나 물어 보고 싶습니다." "무례하다!! 미천한 놈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입을 놀려!!" 마음속에 쩌렁쩌렁 울린 것은 크라켄의 커다란 목소리였다. 시오의 식 은 땀이 바닥에 뚝뚝 떨어진 것은 크라켄의 무지막지한 촉수들이 자신 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룡 내외분들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줄리탄은 결국 입을 열 었다. "카넬리안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해룡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몸을 빛줄기가 감싸기 시작했다. "무, 물키벨 님!" "괜찮아. 저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은 것 뿐이니까." 그리고 해룡의 몸이 빛무리가 되어 산산히 흩어지는 것 같더니 선상에 그 빛이 뭉치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작은 키의 검은 머 리를 하고 있는 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발랄해 보이는 이십대 중반 쯤의 여성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변해 보는군. 얼레? 왜 그런 표정들이야?" 물키벨은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정말 줄리탄 일행을 놀라게 한 것은 물키벨의 인간형의 모습이 전혀 신비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그래도 해룡인데 아무리 인간의 모습이라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신비롭고 절대적으로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래도 아까는 분명 무시무시한 용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줄리탄이라고 했지? 흐음......우앗!" 물키벨은 줄리탄에게 걸어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쾅소리를 내며 넘어져 버렸다. 그녀의 발에 미역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일동 경직. 미역 줄 기에 걸려 넘어지는 용이라니. 이 참을 수 없는 황망감. 용이 뭐 저래. "푼수 같아......" 톨베인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크라켄의 촉수맛을 볼 뻔했다. 물키벨은 아픈 듯이 무릎을 매만지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넘어지는 개망 신을 당했다. 용에 대한 신비감이 머리속에서 싸악 사라져 버리는 순간 이었다. "저......괜찮으세요?" 허망한 줄리탄의 목소리. 물키벨은 눈에 눈물까지 고여서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파아아. 역시 육지에선 힘을 쓸 수가 없다니까. 히잉 불편해. 이리 와서 좀 일으켜 줘." "......예." 줄리탄은 잔뜩 잡았던 비장감이 단번에 탁 풀어져서는 물키벨에게 다 가갔고 줄리탄을 바라보는 물키벨의 안그래도 커다란 눈동자가 점점 커 지며 입이 벌어졌다. "왜, 왜그러세요? 제 얼굴에 무슨......" 물키벨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줄리탄의 얼굴 바로 앞까지 눈을 들이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아까부터 알 수 없이 행동하는 물키벨 의 행동이 이젠 정말로 두렵다. "너 설마......" "예?" "나 전에 본 적 있어?" "아뇨......" 해룡을 봤을리가 없잖냐. 아마 헤스페리아에서 줄리탄 일행이 해룡을 처음으로 본 것일 거다.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냐." "......" 물키벨은 이번에는 혼자서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이리 저리 생각 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서 '설마.....그럴리가.....'라며 몇번이나 중얼거리며 줄리탄을 얼굴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정신 없이 굴 었다. 줄리탄은 하도 정신이 없어서 뒷통수를 한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 각을 잠시나마 품었다. "저 그런데......카넬리안이 궁룡의 씰이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죠?" "그건......" 물키벨이 대답에 조금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물키벨의 뒤로 다가온 것은 톨베인이었다. "꺄아아악!" 톨베인은 물키벨의 목을 손으로 휘감으로 검을 꺼냈다. 인질. 해룡이 인질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톨베인! 무슨 짓이야!" "땅위에선 힘을 쓸 수가 없다고 하잖아. 자기 약점을 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너 이 놈이!!" 미쳐버릴 듯이 분노한 크라켄의 수백개의 촉수들이 선상을 가득 메우 며 톨베인 사방으로 다가왔지만 톨베인은 긴장한 표정으로도 냉소를 보 이며 물키벨의 몸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네 놈들. 우리는 달라카트로 가야 하니까 어서 이 배를 움직여.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 수장의 목숨은......" 톨베인은 물키벨의 얼굴 근처에 천천히 검을 들이댔다. 톨베인으로서 는 이런 무시무시한 생명체들이 절대로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고 헛점이 발견된 순간 모험을 강행한 것이다. 물키벨 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차갑게 톨베인에게 말했다.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그 죄값은 죽음으로도 보상 할 수 없다는 걸 알아라. 지금이라도 날 풀어주면......" "흥! 어차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난 너희들 믿지 않아." 톨베인이 막가는 태도로 일관하자 물키벨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으아아앙! 이 녀석 안 속아! 크라켄! 어떻게 좀 해봐!" "그러게 왜 육지로 올라가셨습니까......." 충직한 크라켄의 힘없는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속에 애절하게 울렸다.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너희들이야 말로 이런 흉악한 놈이 다가오는데 제대로 지켜보지도 않고 뭐하고 있었어! 나 죽길 바라고 있 었지! 그렇지!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단 말야! 우와아앙 놔줘! 놔줘 ! 놓으란 말이야! 가슴 만지지 말앗!" "조용히 좀 해 이 여자야!!" 바둥바둥거리면서 엄청나게 시끄럽게 외쳐대는 물키벨 때문에 톨베인 의 짜증이 터지며 소리치고 말았다. "우아아앙! 해룡의 수장한데 이 여자래! 야 이 무례한 놈아! 내 가슴 만지지 말앗!" "이런 빈약한 가슴 따위 관심 없어!" "비, 비, 빈약한 가슴이라고?" 정곡을 찌른 것인가. 해룡이 가슴에 컴플렉스가 있는지 톨베인이 알게 뭐겠냐만 톨베인의 팔에 몸이 들려 있는 물키벨은 독약이라도 마신 것 처럼 부들부들 떨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오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런 거 건드려서 화나게 할 필요는 없잖아......" "너 이 노오오오오옴!!! 물키벨님의 빈약한 가슴을 들먹이다니! 그냥 죽이지 않겠다아아아!" 크라켄이 엄청 화가나선 소리쳤지만 대사 선택이 잘못 되었다. 물키벨 이 크라켄을 올려보며 시뻘건 얼굴로 외쳤다. "야 이 문어 놈아! 너 누구 편이야! 바다로 돌아가면 널 집어 삼켜 버 릴테다앗! 이거 내려놔아! 이 해룡 물키벨 님의 가슴이 빈약하지 않다 는 걸 보여주겠다!!" "안보여줘도 되니까 가만히 좀 있어!" 물키벨의 악악거리는 소리에 미쳐버릴 것 같은 톨베인. 그때 크라켄의 촉수가 시오의 몸을 감아서는 잡아 올렸다. "물키벨 님을 놔주지 않으면 이 녀석의 몸이 산산조각난다!" 협박에는 협박. 인질에는 인질. 크라켄이 선택한 희생량은 시오였다. 시오가 촉수에 몸이 감긴 채 끌려 올라가며 미친듯이 소리지르기 시작 했다. "으아아아앗!! 왜 내가! 왜 내가! 야 톨베인! 임마! 그 분 놔줘! 우어 어어어 기분나빠아아!" 끈적거리는 촉수에 온몸이 감긴 시오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톨베 인은 야박하게스리 차갑고 냉정했다. "미쳤어? 이 여자 놔주면 모두 죽일텐데! 너야말로 그 녀석 죽이면... ...이 여자도 죽는다. 누가 손해인지는 잘 생각해 봐." "뭐라고 이 천한 인간이 감히!" "그러니까 왜 해룡은 인질로 잡고 난리야! 으아아 문어 아저씨! 저 배 멀미 하도 해서 속이 텅텅 비었어요! 먹어도 맛 없다고요! 싱싱한 줄리 탄 드세요!" "이것놔아! 내 가슴은 빈약하지 않다고! 증명해 보이겠어!" "모두 입 좀 닥치고 있어!" 난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줄리탄은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천천히 고개 를 꺾으며 정말 꺼내기 싫은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또 이모양이야......' 난데없이 자기 가슴을 보여주겠다며 울고불고 빠져나가려는 물키벨과 윽박지르는 톨베인. 촉수에 휘감겨 기분나빠 기절해 버릴 것 같은 얼굴 로 소리소리 지르는 시오. 당장이라도 선상의 모든 사람들을 조각내 버 릴 것 같은 기세로 배를 포위하고 있는 물키벨의 부하들. "우리 그냥 바다에 빠져 버릴까?" "그게 좋을 것 같아......" "다음에 태어날 땐 좋은 해적선 장만하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해적들이 저마다 유서같은 말을 나누었다. 그러 니까 상황은......용을 인질로 잡고 바다 한가운데서 대형 어패류들과 대치하고 있는 중. 줄리탄은 어디선가 많이 겪어본 이런 상황에 다리 힘이 다 풀려 버리는 것 같았다. 카넬리안이 사라져도 상황이 정상적이 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Blind Talk 리, 리, 리 자가 들어가는 말은...... 미나리, 개구리, 항아리, 미아리 리 이 카넬 리 안 아마릴 리 스 카 리 나 디트 리 히 ......-_-;;;; 초기 여성 캐릭터들의 캐릭터 이름은 거의 다 끝에서 두번째 자가 '리' 였습니다.(리이 디트리히 경은 성과 이름 모두 두번째 리가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모르고 있다가 kiyu군이 발견했습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메르퀸트는 여성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고 젤리드는 혹 시 여성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더 재미있게 쓸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최근 밀려 오는 피곤함과 나른함과 답답함과 궁핍함 때문에 머리 속이 엉켜 버리 고 집중이 안되서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10월부터 쭉 이 모양.....만성 슬럼프랄까나.) 본래 어둡고 음침하고 잔혹하고 몽환적 인 글을 쓰길 좋아해서 몰래 몰래 혼자서 새로운 글을 끄적여 보곤 있 지만......결국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감과 일에 밀려서 머리속에 잔뜩 구상만 해 놓고 진행은 더딥니다. 어느정도 쓰면 올리게 될 것 같습니 다.(......쓰고 있는 거나 빨리 하라고요?) 불현듯......몇년동안 키우던 이구아나가 생각나네요. 성깔은 드럽기 그지 없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서 참 많이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름은 존스(......인디아나 존스가 떠올라서 이구아나 존스라고. 대단한 네이 밍 센스야 정말.) 수영을 좋아하고 혼자 사색하는 걸 즐기며 가끔 목걸 이 채우고 여름오후에 마당에 데리고 나가 일광욕을 시켜주면 제가 캔 맥주 마시며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을 때 일렬로 기어가고 있는 개미들 을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 보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같이 키 웠던 고양이 '아령이'(쬐끄만게 무게가 묵직한 아령수준.)와 죽어라 서 로 싸웠던 것도 기억나는데......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날 죽어가 고 있어서 재빨리 파충류 전문 동물 병원에 데려가니까 의사 왈 "암입니다. 엑스레이 찍으니까 종양이 보이네요." 이구아나가 암이 걸리다니......결국 피눈물흘리며 수술비 몇십만원내 고 암 제거 수술에 돌입. 그러나 이구아나 뱃속에서 나온 것은 암이 아 니라 알이었습니다. 그것도 십여개나.(이게 종양으로 보였음.) 그때 이게 암컷이라는 걸 알았고......살 때부터 뱃속에 알이 들어 있 었지만 기후 차이 때문에 낳지 못했다는 사실도 들었습니다.(알을 품고 일년동안 개기다니...무서운 놈.) 덧붙여 이렇게 알이 들어 있는 적은 국내에서 네 번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이구아나가 주인 얼굴을 알아 보는데는 1년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결국 제 얼굴을 알아보긴 했지만 여전히 말은 안들었습니다. 그렇게 꼬리길이까지 1미터 20센티 정도 크 다가 어느날 울릉도로 여행을 다녀와서 보니까 죽었습니다. 너무 갑작 스런 일이라서 놀랐지만. '파충류는 죽기 직전까지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아픈 것을 남이 알면 잡아 먹힐까봐 두려워 혼자 아파하며 죽을 때까지 강한 척 허세를 부리며 사는 거지.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절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이구아나는 평생 혼자 산다는 말을 들었다...... 남에게 정을 주면 스스로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고.' 좀 더 신경써 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을 때면 가끔 제 등으로 뛰어 올라와 착 달라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 것을 떠올 리며 지금도 혼자 히죽거리곤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 배 위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따뜻한 곳을 좋아함). 키우기 힘든 동물입니다. 일단 열대동물이고 고집이 무지하게 세며 여 간해서는 친해지기조차 힘드니까요. 자기가 죽는 걸 알면서도 아무한테 도 내색하지 않아서 키우다보면 원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카넬리안의 캐릭터 모델링은 어느정도 이구아나 존스에서 가져왔습니다. 이구아나 의 고집을 닮은 여자입니다 정말. 아 그리고.....물키벨의 부하로 나오는 해룡(꼭 드래곤처럼 생긴 것만 이 아니라 뭔가 묵직한 건 다 용에 속합니다 여기에선.) 크라켄 씨의 모델은 실은 바다의 야수 크라켄(Krakken이던가?)이라기 보다는 러브크 래프트가 모델한 demigod 크툴루(Cthulhu)입니다.-_- 이름도 크툴루라고 하려고 했지만 이미지 상 크툴루의 악마적 카리스마 와는 어울리지 않고 크툴루라고 하면 관련 매니아 분들이 들고 일어날 것 같아서.(저도 크툴루의 이미지가 손상되는 건 싫어요.) 조만간 마법체계 같은 것도 만들어야 하는데 Call of the Cthulhu TRPG 의 마법체계를 참고하려는 생각도......라고는 하지만 그러면 너무 끔 찍해져 버리겠지. 아아 그래도 phobia와 philia는 병적이라서 너무 멋 져.(다음 작품에선 꼭!) 물키벨의 심복은 크라켄(Krakken), 레비아탄(Leviathan 리바이어던이라 고 부르는 건 싫어.) ,자라탄(Zaratan) 세명인데 현재 크라켄 씨만 나 왔네요. 끝에 '탄'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 때문에 물키벨이 줄리탄을 키 워주었는지도......일리가 없겠지요. 자 이제 잠시 전 잠수합니다.(일주일이나 이주일 정도.) 12월 말이나 1월 초에 뵙지요. 잔뜩 써 놓겠습니다......라는 말은 이제 아무도 귀 담아 듣지 않으시겠지만.(자업자득이지.......) 읽어 주시고 추천해 주시고 감상해 주시고 메일 보내주신 분들께 언제 나처럼 감사드리며......안녕히. e-mail : billiken@hananet.net 성룡의 남아당자강을 들으며...... (아아 좋은 곡이야...^_^) 『SF & FANTASY (go SF)』 11875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0/12/27 09:02 읽음:23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4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5924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0-12-27 05:11 조회:6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4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Too Much Love Kill You (지난 줄거리) 어렵게 어렵게 젤리드와의 결투에서 이긴 줄리탄. 그의 이야기를 따라서 상황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넬리안이 떠나간 배에는 카넬리안의 기운을 느끼고 찾아온 해룡들이 나타난다. 난생처음보는 믿을 수 없이 엄청난 해룡의 모습에 '저런 놈 이 절대로 우릴 살려둘 리가 없어!'라고 생각해 버린 톨베인이 선상에 올라와 힘을 쓸 수 없는 물키벨을 인질로 잡는다. 덕분에 상황은 망망 대해에서 해룡의 수장은 인질로 잡고 초대형 해산물들과 살기등등한 대치를 벌이고 있는 악화일로의 상황. 1. 줄리탄은 사실 물키벨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카넬리안에 대해 듣고 싶 은 마음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난 사실이 흉터처럼 달라붙어 욱 신거려서 머리속이 침울하고 복잡한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지해 지고 싶었고 침착하게 자신의 아픈 마음을 되새기고 싶었지만...... "으이이이이! 너무해! 어떻게 날 인질로 잡을 생각을 해! 이것놔아! 놓으란 말이얏!" "달라카트에 배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못놔. 너희들 용이라면 어서 이 배를 움직여! 아니면 이 시끄러운 여자는 죽는다." '환장하겠네..... ' 줄리탄은 현실이 참 마음처럼 안된다는 것에 통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 10분쯤 대치 상태가 이어졌을 것이다. 크라켄은 자신의 촉수로 감고 있는 시오를 몇번이나 바다속에 담궜다가 꺼냈고 톨베인은 낮선 사람 손에 잡힌 고양이처럼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는 물키벨의 엄청나게 시끄 러운 비명소리 덕에 귀가 멍멍한 상태. 그럼에도 물키벨을 놔주지 않 는 톨베인도 톨베인 답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을 들을 생각도 입 을 다물 생각도 하지 않는 물키벨도 고래심줄처럼 고집센 여자였다. "톨베인." "......?" 툭던진 줄리탄의 말에 톨베인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톨베 인은 드물게 짜증이 온 얼굴에 들어나는 피곤한 표정이다. 보통 여자 라면 톨베인의 무서운 협박 한두번에 고분고분해 질텐데 역시 해룡은 해룡이었던 것이다. "그 분 놔줘." "뭐?" "어서 놓으라고." 어이없는 표정의 톨베인. 줄리탄이 정의파든 아니든 톨베인으로선 알 바 아니었지만 기껏 '협상' 중에 판을 깨려 하다니 '대체 너 누구편이 냐?'라는 눈빛으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 놔주면 모두 죽어. 아니 이 녀석들 처음부터 우리를 살려둘 생각조차 없었다고! 이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놈들을 믿겠다는 거야 너? 사람 좋은 것도 정도껏 해!" "우이이이! 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어! 해룡을 뭘로 아는 거야!" 물키벨은 쉬지도 않고 온몸에 땀이 나도록 바둥바둥 거리고 있었다. 톨베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무지막지한 것도 적당해야지 기사라 하더라도 한입꺼리로 삼켜버릴 것 같은 용들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 들이 '절대로 우리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본능적으 로 품게 될 것이었다. 사실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확신하고 있는 거야 그 말?" "뭘 확신해!" "해룡이 우릴 죽일 꺼라는 것. 확신할 수 있어?" 톨베인은 줄리탄의 말이 마치 식사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것처럼 너무나 담담했기 때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키벨마저도 아무 말 없이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확신이라니...... 당연히 살려둘 리가 없잖아!" "왜 당연한 거지? 그냥 넌 해룡들이 무서운 것 뿐이잖아." "내가 무서워 한다고!" "그래. 떨고 있는 거잖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톨베인은 기분이 상한 듯이 줄리탄을 노려보았고 줄리탄은 잠시 생각 하는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할께. 확신도 없이 상대가 자신을 죽일 꺼라고 이빨을 들어내는 짓, 모두를 위험하게 말들어.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이라고." "......" "카넬리안이 한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줄리탄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족을 붙였고 톨베인은 물키벨을 놔주지 는 않았지만 줄리탄의 말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럼 넌 이 녀석들이 우릴 살려둘 꺼라고 믿고 있는 거냐?" "야 이 우주에서 가장 무례한 놈아! 감히 이 물키벨 님에게 이 녀석 이라니!" 잠시 조용하던 물키벨이 또 다시 시끄럽게 소리치기 시작했지만 줄리 탄은 톨베인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라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 아. 자포자기 같아서 보고 있기 힘들다고. 니가 나한테 말했지? 나약 한 죽음에 동참하는 건 사양이라고. 그 말 되돌려 주고 싶군." "그럼 어쩌라는 거야!" "말했잖아. 놔주라고." "토오올베이인아...... 놔주어어....." 크라켄의 물고문을 당해서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는 시오가 듣기에도 참 딱한 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톨베인은 신경질을 내면서도 물키벨을 놔주었다. 그 즉시 얼씨구나 하는 크라켄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 속을 찔렀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감히 해룡의 수장에게 수작을 걸어! 네 놈들 을 죄다 씹어 먹어 주겠다!" "잠깐만!"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돌아가서 해룡의 본모습으로 변한 뒤에 범선 채 로 자근자근 씹어 버릴 것 같던 물키벨은 의외로 그냥 흐트러진 자기 머리칼을 다듬으며 짜증나는 표정으로 크라켄을 저지할 뿐이었다. "예? 왜 그러십니까 물키벨 님. 제가 당장이라도 이 놈들을!" "가만히 좀 있어봐 이 문어 놈아!" 물키벨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줄리탄에게 다가갔다. '문어'라는 말 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크라켄의 축 늘어지는 모습이 가관이다. "너 줄리탄이라고 했지." "예." 물키벨은 복잡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올려다 보았다. 카넬리안보다 조 금 작아 보이는 체형이었다. 나이에 비해 정말 어려 보인다고나 할까. "넌 누구지?" "예?" "누구냐니까." "전 시골 요리사고...... 카넬리안의 테이머기도 하고요...... " 이제 '왜 요리사가 테이머가 된거냐!'라고 물을 차례인가. 그러나 물 키벨은 한참 동안 줄리탄을 얼굴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 의 얼굴은 아까 전 정신 없이 떠들어 댈 때와는 달리 진지했고 또.... .. 너무나 인간 같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절 바라보시는 거죠?" "니가 말하는 카넬리안은...... 궁룡의 수장 테싱의 씰이다. 그걸 알 고 그녀와 계약을 한 거냐?" "몰랐어요. 궁룡이 뭔지도 몰라요.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도 그녀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심장이 쿵쾅거려도 말은 흐트러짐 없이 나오는 것이 줄리탄 스스로도 놀라웠다. 물키벨은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적이라는 것. 이런 상황을 설명한 단어는...... 그것 뿐이로군." "예? 무슨 뜻이죠?" "몰라도 돼. 아니. 어쩌면 시간이 흘러 알게 될 수도 있겠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장난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물키벨의 표정은 더 없이 쓸쓸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카넬리안에게서 가끔 볼 수 있었던 표정이 겹쳐진다. "우리 모두...... 살아남기 위해 여기까지 도망쳤지." 물키벨은 희미하게 말을 흘리며 아까전의 시끄럽던 그녀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씁쓸한 입가에 즐겁지 않은 미소를 띄우며 몸을 돌려 선상 에 다가갔다. 그녀를 둘러보는 사람들과 부하들의 당황한 모습을 훌터 보듯 바라보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 끝에서 다시 만나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그다지...... 행 복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겨운 일상의 반복은 실은 기적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물키벨은 촛점 없이 굳어버린 눈동자로 말을 마치며 매일 매일 똑같 은 잔잔한 수면을 내려 보았고 쓸쓸한 회상에 잠겨 왈칵 눈물을 쏟아 버릴 것 같은 얼굴은 고개를 숙여 감추었다. "무, 물키벨 님...... " 크라켄은 물키벨의 행동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걱정스러워하며 완전히 연체동물처럼 늘어져 버린 시오를 선상에 내려 놓았다. "가랑...... 아니 카넬리안 지금 떠났다고 했지 너를?" 물키벨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줄리탄을 돌아보곤 말했다. 줄리탄은 굳 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의 사소한 비밀하나 말해줄게." "......" "이 세상엔 세 종류의 용이 있어. 하늘의 궁룡과 지상의 지룡과 바다 의 해룡. 궁룡의 수장은 테싱, 해룡의 수장은 나 그리고 지룡의 수장 은...... 오펜바하지." 줄리탄은 놀라지 못했다. 놀라기엔 너무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 이 야기다. 헤스페리아의 지배자가 지룡이라고?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는 용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는데 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지룡 의 수장이었다는 것인가 물키벨의 말은? "우리들은 본래 서로 싸워선 안돼. 균형이 무너지거든. 그런데 수백 년전인가 아니면 수천년전인가...... 테싱과 오펜바하가 인간들을 사 이에 두고 서로 싸웠지. 난 방관했고. 용들의 싸움이라는 건 너무나 거대하고 끔찍해서 도저히 표현할 수식어가 떠오르질 않으니까 그냥 다시는 없을 재앙이라고만 해둘께. 얘기하자면 아주 긴 이야기라서 결 론만 말하지." "마, 말하세요." 줄리탄이 점점 두려운 기분을 느끼는 것은 비단 운명처럼 자신을 바 라보고 있는 물키벨의 눈동자 때문만은 아니리라. "테싱은 오펜바하에게 졌어. 인간들에게 배신 당했지. 테싱의 씰이었 던 가랑은 인간들의 손에 넘어 갔고 세상은 오펜바하의 것이 되었지. 하지만...... 오펜바하는 너무나도 절대적인 테싱을 죽일 방법은 없었 고 테싱을 이 세상과 격리시켜 버렸지. 가랑은 죽었다고 생각하곤 있 겠지만 실은 아직 우주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 고 방황하고 있을 뿐이야. 만약에...... 혹시라도 테싱이 돌아온다면. ...... " "카넬리안이 테싱이라는 궁룡의 씰이었다는 건가요?" "사실 씰이라기 보다는...... 애인에 가까웠어. 그녀만 아니었다면 테싱의 약점이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 오펜바하가 이 세상을 장악 하고 가장 처음으로 한 것은 세상에서 테싱의 흔적을 지워버린 거야. 그래서 지금의 용은 전설일 뿐이지." 물키벨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줄리탄을 바라보는 눈 빛은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동생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아 줄리탄의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너 카넬리안의 테이머라고 했지?" "예." "그 말,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어." 물키벨은 마치 줄리탄의 마음 한구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가 입을 열었다. "그녀와 계속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테이머가 아니라도 좋아요. 하 지만 테이머가 되어야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전 절대로 그녀의 테이머이길 포기하질 않을 겁니다." "감당할 수 없을 꺼야.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고. 불행할 꺼야 너희둘 의 끝은." 운명의 책을 읽는 것 같은 물키벨의 말에 줄리탄의 온몸에서 핏기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지만. "용들 사이에 저와 카넬리안이 끼어 있다고 해도 좋아요. 그것 때문 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상관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니 까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거라도 말하셔도 좋아요. 어쨌든 우리는 약속 했으니까요. 계속 같이 있어 주겠다고. 그녀의 마음을...... 지켜 주 고 싶다고 분명히 다짐했으니까요." "그때의 너도...... 그런 말을 했었지." 물키벨의 입가엔 정말 슬퍼보이는 웃음이 고였고 곧 줄리탄을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그때라고? 그건 무슨 의미일까. "지금 저한테 숨기는 게 뭐죠?" "알게 될꺼야. 서로의 끝을 보게 된다면...... 싫어도 알게 될 꺼야. 지금은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결국엔 알게 될 꺼야." 끝이라니. 아직 시작도 안한 것 같았는데 그녀는 끝을 말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을 줄리탄은 인정하기 싫었다. "끝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물키벨은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 고 단지 눈물을 태워 만든 듯이 짜디 짠 바닷바람만이 몇 번이나 마음 속에 들어와 휘청거렸다. 2. "어이. 카넬리안 양. 그 친구 또 왔는데?" "그 친구?" "있잖아 왜. 너 따라다니는...... " "아...... " 서부 도시 케센의 작은 펍(PUB)인 '저녁 둥지'의 주인 그렌스는 마른 수건으로 접시를 닦고 있던 카넬리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빗자루를 찾기 위해 사라졌다. 그리고 문 앞에는 한 손에 바보스럽게 잔뜩 부풀 려져 있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안경 낀 사내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헤이우드 씨." 카넬리안은 접시를 놓고는 눈가를 가리는 붉게 염색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아직 선술집은 문을 열기도 전인 이른 오후 이다. 3. "저...... 이것...... " 헤이우드는 어색하게 꽃다발을 건내주며 더듬거렸다. 아직 오픈 하지 않아서 조용한 실내의 십여개의 테이블 한가운데는 카넬리안과 헤이우 드만이 앉아 있다. 그녀는 꽃송이들을 얇은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 다. "비싸잖아요 이런 거? 먹을 수도 읽을 수도 없는 건데...... 요즘 이 런게 유행이라지요?" 그녀는 작은 보석 같은 붉은 색 꽃들이 알알이 뭉쳐 있는 꽃다발을 관조적인 붉은 눈동자에 담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미향(微香)이 테이 블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라카트에선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다발 같은 걸 주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그, 그럼 다음부터 먹는 걸 사올께요!" 머쓱해진 헤이우드가 당황하며 커다랗게 외치는 바람에 카넬리안은 살짝 그를 올려보며 피식 웃었다. 고구마라도 사오겠다는 의미인가? "전 먹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세요. 헤이우드 씨." "그냥 레넌이라고 부르셔도...... " "억지로 가까워 지려는 것, 부담스러워요." "아? 아 예...... 알겠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항시 차분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특별히 배려해 주지 않는 단호한 면이 있었다. 한여름에 눈이 내려도 전혀 놀라지도 않고 '눈이로군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침착함. "저 카넬리안 씨는...... 분명히 주변에 남자가 많겠지만 그래도 괜 찮으시다면...... " 다음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케센에 나타난 카넬리안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카넬리안 은 계속 꽃다발에 눈을 의지한 채로 헤이우드의 말을 끊었다. "전 당신이 갑자기 내 앞에서 죽어도 조금도 슬프지 않아요." "예에?" 단순히 엉뚱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말이어서 헤이우드는 몇번이나 혼자서 중얼거렸던 다음 대사를 잊어버린 채 멍한 얼굴로 그 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서로 타인으로 있는 것이 전 좋아요. 어느날 당신 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 죽었구나. 좋은 사람이었는데.'라는 정도로 끝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헤이우드는 카넬리안의 눈빛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살기 같은 것이 아니라 허무할 정도로 텅 비어 버린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 어떤 무엇에도 영향받고 싶어하지 않는 듯이 무형(無形)의 차가운 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식사하지 않으셨죠. 답례로 먹을 것 만들어 드릴께요? 요리는 잘 못 하지만...... 어떤 사람 옆에서 좀 지켜 봤거든요."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헤이우드는 '당신 싫어요!'라는 말 보다도 훨씬 매몰찬 그녀의 '거절'에 목이 메어 버릴 지경이었지만 그 래도 그녀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마음은 한달쯤 후, 케센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도시 전체가 대륙에서 사라 져 버리는 재앙이 일어날 때 산산히 부셔진 선술집 '저녁 둥지'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Blind Talk 비축분 하나를 올립니다. 대단치도 못한 글,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서요. (사실 별로 써두질 못했습니다.-_-a) 최근에는 조금 쉬고 있습니다. 보고 싶었던 것들도 보면서. (이러니까 내가 대단히 바쁜 사람처럼 보이네?) 최근에는 일본 드라마인 beautiful life를 보고 있어요. 키무라 타쿠야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드라마는 즐기는 편도 아니지만 왕건이나 용의 눈물 같은 대하 드라마들은 시간나는 대로 챙겨보고 friend 같은 미국 시트콤 들도 대사나 상황이 아주 좋아 서 자주 보고 있고 일본 드라마 들은 특유의 감상적인 스타일이 좋 아서 찾아 보는 편입니다. 뭐랄까 '뻔한 스토리를 재미있게 만드는 법'을 엿볼 수 있다고나 할까. 아 저 그리고 '게임비평'이라는 책을 추천하려고요. 거의 국내 유일의 전문 게임비평지랄까. 화려한 그림이나 컬러 화면 같은 것이 없고 흑백 사진들과 빽빽한 글씨들만 잔뜩이지만 여느 게 임 잡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진지하고 전문적인 내용들이라서 콘솔 게임(플스나 DC같은... )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후회 없이 읽 으실 수 있을 거에요. 게임문화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격월간지에 요.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사라져 버리면 참 아쉬운 비평지라고 생 각하네요. 에 그리고 더불어 Gamer'Z 라는 게임 정보지도 한번 봐주세요.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화려한 외향도 멋지지만 잘 보면 편집이나 분석에도 엄청 신경썼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10월호 인가 제 책 광고도 넣어 줬습니다. ^^ 이 자리를 빌어(무슨 자린데?) 신경 써 준 眞男 태룡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저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의 부름'이 국내 번역본으로 나왔다면 혹시 어느 출판사에서 언제 나왔는지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인터넷을 뒤져도 이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네 요.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하시고 이르지만 해피 뉴이어 하시길. 연말엔 우울해 집니다. 왜나면 망년회 나가는 돈 때문에 잔고가 바닥 나서... 그래도 보내주시는 메일 때문에 기쁘네요. 아아 중환자 같은 말을... 전번에는 아주 기쁘게도 울티마 온라인을 하던 중에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에에 빨리 용 한마리를 길 들여서 카넬리안이라고 이름 붙이기 위해 줄리탄이라는 캐릭터를 테이 머로 키우고 있는데 이거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 도통 테이밍이 오르질 않네요. 아 '테이머'라는 말은 울티마 온라인에서 따왔습니다. 그러니 까 tamer의 의미라면 '길들이는 자'라는 것으로 보통 조련사를 테이머 라고 하죠.(조련이라...... 뭔가 위험한 냄새가... ) 다음 편은 1월 초 쯤에... 연재가 들쭉날쭉이라서 퍼가 주시고 읽어 주시는 분들께 미안하네요. 1월부터는 쉴세 없이 올라갑니다...... 라 는 계획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가을 위 불빛들 켜져 가며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 보네.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나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걸.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데로 내 마음에 둘꺼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데로 내버려 두듯이. 흰눈 내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눈에 덮혀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사랑이란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속에 있네. e-mail : billiken@hananet.net 듀스의 사랑, 두려움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067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06 17:52 읽음:170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5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59909]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05 04:23 조회:331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5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Cacophony (지난 줄거리) 줄리탄의 도움으로 톨베인으로부터 풀려난 물키벨은 줄리탄이 카넬리 안과 계속 같이 있으려는 것을 알고 뭔가 불길하고 의미심장한 말들을 잔뜩 늘어 놓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는 카넬리안을 다시 찾겠다고 외치는 줄리탄. 한편 줄리탄과 떨어져 케센의 작은 술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는 그녀 는 줄리탄 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성격으로(본래 성격인지도) 추파 를 던지는 남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데. 미래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괴로운 저주가 아닐까. 1. 이제 이름만 남아 있는 해적인 가스발 해적단의 여리더인 메이트리아 크 가스발은 칼에 베어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쥔 채 스엔 일파로부터 밤의 부두로 쫓기고 있었다. '흐윽. 흐윽...... ' 그녀는 넘어오는 가쁜 숨 속에서도 계속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가 없었다. 비참해. 그리고 너무 억울해. 그녀는 몇 번이나 마음 속으 로 외쳤다. 이미 그녀의 몇 안되는 부하들은 스엔 패거리들의 손에 죽 어버린 상태. 이제 혼자. 그녀 혼자만 남았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자고! 크하하하!" 그녀를 뒤쫓아오는 사내들이 마치 토끼 몰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저마다 칼을 빼들고 낄낄 거리며 달리고 있었고 스엔은 곧 가스발 해 적단을 파멸시키고 그녀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앞장서고 있었다. 열대의 밤공기가 진절머리나게 끈적거리는 한밤중의 추격전. "다가오지마!" 결국 작고 긴 부두의 끝까지 쫓기게 된 메이트리아크는 자신을 막아 선 스엔의 해적들을 향해 세이버를 뽑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일자의 부두 끝에 몰려 있는 상황.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부둣가에 밀려드는 나직한 물결 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그런 그녀 앞에 나선 것은 스엔이었다. 그를 쏘아보는 메이트리아크의 눈에서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이봐 메이. 메이 제독. 이제 가스발 해적단은 너 하나 남았군?"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메이트리아크라는 긴 이름을 줄여 '메이 제독'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19세의 그녀에게 제독이라니, 우습다기보 다는 무거운 별명이었다. "비열한 자식! 잔인한 자식! 더러운 자식아!" 메이는 그를 향해 눈물을 뿌리면서도 억울함에 소리쳤지만 스엔은 콧 방귀를 낄 뿐이었다. "난 해적이야. 비열하고 잔인한 건 당연한 거잖아? 순진한 니가 멍청 한 거야." 스엔은 본래 달라카트 최대의 해적이었던 가스발 해적단의 일원이었 다. 가스발 해적단은 비무장 상선을 공격하지 않은 채 오직 해적만을 상대로 싸움을 해서 부와 명예를 축적해 왔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선 명성이 높았지만 해적들에게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 그런데 두목 발더의 딸인 메이 때문에 가스발 해적단의 두목 후보에서 밀려난 스엔은 가스발 해적단의 이동 루트와 해상본부 위치 등의 기밀을 다른 해적들에게 넘겼고 곧 가스발 해적단은 연합한 다른 해적들의 집중적 인 공격을 받아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스엔이 바란 것은 가스발 해적단의 두목자리. "사실 난 예전부터 널 갖고 싶었거든. 내 첩으로 들어오면 목숨은 살 려주지." 스엔은 지저분한 말을 참으로 거침 없이 내뱉으며 히죽거렸다. "닥쳐!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고개를 숙일 것 같아!" "싫어? 그럼 여기서 우리들이 즐기다가 바다에 던져주마." "크윽!" 메이는 스엔의 손에 아버지 발더가 죽은 뒤에도 두목 자리를 이어 받 아 계속 다른 해적들에게 저항해 왔지만 그것도 여기서 끝이었다. 이 미 대다수의 가스발 해적들은 스엔에게 넘어갔고 그녀를 따르던 소수 의 부하들 역시 거의 죽은 상태. 한척 남은 배도 어디로 갔는지 돌아 오질 않는다. 그녀는 결심한 표정으로 스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 의 밝은 밤색 머리칼이 밤기운 속에서 가련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가스발 해적단을 지휘하는 내 마지막 의지를...... 보여주겠다." 메이는 스엔을 향해 검을 쳐들었다.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스엔은 해 적들 사이에서도 날카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메이의 검술을 알고 있었 기 때문에 뒤로 주춤하면서도 여전히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흥! 너 혼자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미 네 본부도 불타버렸고 여기 모인 수백의 해적연합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거냐? 너 혼자서?" "내 목숨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수십명은 죽일 자신이 있어. 그 리고 그 중에는 너도 끼어있다. 네 놈만은 그냥 두지 않아!" "이 몸이 너 따위와 정식으로 싸워줄 줄 알았냐?" 그 말과 동시에 스엔은 허리 뒷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메이에게 던 졌다. 당황하며 주머니를 검으로 두동강내 버리는 메이.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머니 속에서 터져 나온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메이의 몸을 덮 쳤다. "까악!" "금린어의 비늘가루야. 마비 독이 들어 있다지? 좀 고통스러울 꺼다. " 메이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지만 이미 혈액 속으로 스며든 마비독은 온 몸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그녀의 온 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마치 사슬에 묶여 버린 것처럼 눈가를 떨며 바닥에 주저 앉아 버리는 메이. "으으윽. 비, 비열한!" 팔의 상처에 달라붙은 은색 독가루들은 계속해서 참을 수 없는 고통 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비열하니까 해적이라고." 스엔은 자신의 행동이 자랑스러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메이에게 말했 다.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우리들의 노리개로 살다가 병신이 될테냐 아니면 내 첩이 될꺼냐. 선택은 네 자유야." "내 대답은 이거다." 메이는 자신의 목으로 검날을 가져다 대었다. 자결하려는 그녀의 행 동을 보며 스엔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정말 지 애비를 꼭 닮은 년이로군. 너도 나처럼 해적이야.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아? 더럽게 성스럽게 구네!" "마음대로 지껄여! 난 이렇게 죽더라도...... 언젠가 네 놈은 이 바 다의 분노를 살거다." 메이는 고통스럽게 몸을 떨고 있면서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어투로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 "바다의 분노? 흥. 기대되는군. 어디 와보라고 그래." 그때 스엔은 밤바다를 가르며 자신에게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는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다가오는 헤스팔콘 범선. 바람 도 거의 없는 지금 비상식적인 엄청난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부두로 다가오고 있는 범선의 모습에 스엔 일행은 갑자기 멍한 얼굴로 그 배 를 바라보았다. "저 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야...... " 바람이 없는 곳에서 범선은 움직일 수 없다는 배의 상식을 뒤집어 버 린 그 배는 스엔이 당황하는 사이에 날듯 물살을 가르며 부두 앞에 도 착하며 급정거를 하는 진기를 보였다. "메, 메이 제독!!" '이 목소린?' 메이는 그 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 의 부하들 - 배를 타고 떠났던 가스발 해적단들이었다. 그런데 왜 군 선에 타고 있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소리쳤다. "어서 여기서 도망치세요!!" "저, 저 놈은 스엔! 야 이 자식! 메이한테서 떨어져!" 줄리탄 일행의 범선에선 부두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적들이 저마다 커 다랗게 외치며 터질 듯이 분노하고 있었다. 줄리탄 일행에게 허망하게 잡힌 얼치기 해적들은 메이 제독의 얼마 안 남은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 스엔은 그들을 보며 아주 자신만만하게 비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죽으려고 온거냐! 이리 내려와라! 메이와 함께 수장시켜 주마!" 당황하는 가스발 해적들. 해적연합의 수백의 해적들이 스엔에게 몰려 오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선 절대로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얼굴이 치욕적으로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쉽게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백명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여자 하나를 두고 몰려오 고 있는 부둣가의 상황을 바라보며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시오. "뭐야. 오밤중에 개떼 처럼 몰려드는 저 놈들은......" "우, 우리를 좀 도와 줘!" 갑자기 해적들이 시오의 손을 덥썩 잡으며 다급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 "이대로라면 메이 제독이 저 놈들 손에 넘어가!" "예?" "우리 같은 놈들이야 어떻게 죽어도 상관 없지만 우리 때문에 메이 가 죽어선 안된다고!" 사실 이 해적들에게 메이는 그의 아버지 발더처럼 존경과 경외의 대 상이라기 보다는 메이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있었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자식 같은 존재였다...... 라는 사실을 시오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메이 제독이 누군데요?" "도, 도와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을께!" "그러니까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에요!" 라는 식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대화가 계속대고 있을 때 물키벨이 엄 청나게 불안한 몸짓으로 사다리를 타고 부두로 내려가고 있었다. 물키 벨이 내려가자 놀란 줄리탄. "물키벨 님! 내려가지 마세요!" "히잉. 괜찮아. 괜찮아." 물키벨은 거의 아장아장하며 부두에 발을 디딘 후에 스스로 놀랍다는 듯이 콩콩거리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와아! 나 얼마만에 뭍을 밟아보는 거야? 아! 여긴 부두니까 아직 뭍 이 아닌가? 아무튼 좋아! 이곳을 이 물키벨 님이 첫발을 내딛인 영광 스러운 장소로 명하노라!" 물키벨은 메이의 피눈물나는 상황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사소한 것 에 의미를 부여해 놓고는 혼자 좋아서 싱글거렸는데 그게 스엔의 기분 을 잡치게 만들었나 보다. "야! 너!" 스엔은 씹어 먹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부두 위에서 정신 사납게 굴고 있는 물키벨에게 외쳤다. "나?" "그래 너! 너 뭐하는 년이야 갑자기 나타나선! 죽고 싶은 거야! 엉!" "녀, 년?" 물키벨은 충격을 먹은 듯이 몸이 굳어버리며 멍하니 스엔을 바라보았 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그 장면을 내려보고 있는 톨베인이 중얼거 렸다. "저 자식......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죽었군." 그러나 스엔은 불쌍하게도 쐐기를 박아 버리는 말까지 해버렸다. "빨랑 안 꺼져! 이 젓비린내나는 년이!" "저, 젓비린내!!" 심장에 충격을 받아서 휘청거리기 시작한 물키벨. "...... 아주 무덤을 파는 구나." 톨베인은 스엔의 목숨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렸음을 느끼며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물키벨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크라켄 의 촉수가 조용히 스엔을 바다속으로 끌고 들어가 간식꺼리로 삼아버 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때 메이가 물키벨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 치는 이변이 발생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배로 도망가요!" 메이는 마비되어 가는 몸을 가누기 힘든지 떨리는 목소리였다. 짜내 듯이 쏟아지는 식은땀과 상처에서 흘러 내리는 피로 그녀의 얇고 하얀 프릴 블라우스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는 상태. "너는 누구?" 물키벨은 갑자기 메이가 해룡의 수장인 자신을 감히 보호하려 들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의아해 했다. 스엔은 메이의 행동이 귀찮은 듯 신경질을 섞어가며 외쳤다. "메이...... 아까부터 기사 흉내내고 있는데 우리 해적 답게 살자구. 그러니까 진짜 비참한 꼴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칼 내려놓고 냉큼 여 기로 왓!!" 메이는 그 말에 즉시 응수했다. "해적은 무뢰한이지. 물고기를 잡아 살아 가는 어부는 아냐. 명예로운 기 사는 더더욱 아니고 악명 뿐이지. 하지만 적어도 해적은...... 너 같이 비 겁하고 자부심도 없고 바다에 대한 존경 조차 모르는 얼치기들이 입에 담 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바짝바짝 타오르는 메이의 마른 입술 사이로 차가운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카넬리안처럼 살기 가득하기 보다는 도리어 숭고해 보일 정도 였다. '존경'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물키벨. "이야! 바다에 대한 존경이라고? 제대로 된 생각이잖아? 이 여자 맘 에 든다아! 그냥 내가 도와줘 버릴까나? 우웅. 어쩐다." 물키벨은 메이가 맘에 들었는지 시끄럽게 외쳐댔고 톨베인이 그런 그 녀를 내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아무나 내려가서 저 해룡의 수장인지 뭔지 하는 여자 좀 끌고와 줘. ...... 분위기 깨는데 일가견이 있는 여자야 정말." 그러나 메이의 독설은(특히 '얼치기'이라는 말이) 스엔의 알량한 자존 심을 찔렀나 보다. 스엔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검을 뽑았다. "죽이기엔 아까운 여자라서 살려주려고 했는데....... 쳇. 겁없는 계 집애 같으니. 진짜 해적이란 이런 거다. 원하는 것은 상대를 속여서라 도 손에 넣고 가질수 없는 건 부셔버리거나...... 죽여버리면 되는 거 야." 스엔은 뱀처럼 낼름거리는 혓바닥을 메이를 조롱하듯이 들어내며 그 녀에게 발걸음을 옮겼고 그때마다 낡은 부두의 부분 부분들이 끼익 끼 익 거리는 기분 나쁜 비명을 질렀다. 3. "저, 정말로 하실 생각 입니까?" "왜. 두려운가?" 특무대들의 경호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리하르트에게 그의 보위(保 衛)를 책임지고 있는 로즈마이어 특무대 좌좌(左座)는 불안한 얼굴로 몇번이나 리하르트에게 물었지만 리하르트는 도리어 불안하긴 커녕 기 분 좋은 얼굴이었다. "이 일은...... 황실 내에서도 큰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가 되라고 하는 일이야." "하지만 세이드 공의 저택에 이렇게 가는 건....... " "세이드는 지금 집에 없어.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세이드 공이 돌아온다면...... " "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냐." 리하르트가 말을 끊어 버리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지만 도무지 리하르트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놔둬도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두려운 '검은 추기경' 세이드를 체포하기 위해 가다니. 로즈마이어는 특무대 유일의 여성으로 직위는 높지 않았지만 그래도 검도 마법도 특무대 내에서 빼어난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초법적인 검을 휘두르는 리히트야거의 리더인 세이드라 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그녀는 리하르트를 지키는 입장으로서 만약 세이드라 리하르트를 죽이려 든다면 단 1초도 그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검은 가죽 제복 의 20여명의 특무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이드가 검을 뽑는 순간, 온몸이 조각나 불태워지리라는 것은 불길하지만 틀림 없을 추측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겁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세이드를 화나게 만드는 짓만은 피할 거다. "야수는 힘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자멸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리하르트는 자기 계획의 힌트라도 던져주려는 듯이 그렇게 속담 같은 말을 흘렸지만 로즈마이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가 그의 아버지 로이터에게 말했던 술수. '세이드로 하여금 황제를 치 게 한다.'라는 발상자체가 불손하기 그지 없는 계략을 충성스러운 그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계속 가지를 치고 있을 때 그들은 인적 없는 길을 지나 후작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세이드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정보대로 세이드는 현재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어 집을 떠난 상황 . "리하르트 공이 아니십니까. 여긴 무슨 일로." 세이드의 작은 저택에 그나마 사치스러운 것이라곤 조그마한 정원 하 나와 낡은 정장의 늙은 집사 한명 정도랄까. 말이 집사지 저택의 유일 의 '하인'인 그는 정원의 손질까지 해야했기 때문에 리하르트가 정문 에 도착하자 그 집사는 정원손질용 가위를 내려놓으며 리하르트 앞으 로 달려와 조아렸다. "세이드 공의 황실에 대한 죄를 물으려 왔소."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을 하며 당당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왔고 특무대 원들은 마치 사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듯이 움찔거리면서도 결국 그 를 따라 들어섰다. 기절할 듯이 놀란 것은 집사 쪽이었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 "못 들었나? 황실에 대한 세이드 공의 무례함과 붉은 눈의 씰을 체포 하는 것에 실패한 수치, 그리고 오직 황제 폐하만의 것인 리온헤드 남 작 이하의 특무대원을 살해한 죄를 물으러 왔다고 말했소." "하, 하지만...... " 리하르트의 말이 특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집사의 얼굴이 창백해 져 버린 것은 자신의 주인인 세이드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지 충분히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이드는 이성적으로 시비를 가릴 정도로 '사회적인' 자가 아니었다. 그게 리하르트가 바라는 바 지만. "누구 십니까?" 매마른 목소리로 정원을 지나고 있는 리하르트 앞에 나타난 것은 세 이드의 부인인 애버딘이었다. 그녀는 마치 감정이 바닥나 버린 사람 같은 공허한 눈동자로 자신보다 훨씬 어린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리하르트는 한쪽 무릎을 조금 숙여 보이며 능숙하게 귀부인에 대 한 예의를 보인 뒤에 너무도 침착하게 말했다. "부인의 주군이신 세이드 공의 죄를 알리고자 왔습니다." "그 분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에버딘이 놀라울 정도로 무감정하게 대답해서 리하르트를 조금 놀라 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조각같은 얼굴에 슬며시 웃음을 띄우며 말 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령 받은 일은 행해야 겠습니다." "명령?" "상부로부터의 명령입니다. 로즈마이어. 이 곳을 불태워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로즈마이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리하르트를 보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세이드의 성질을 긁어놓기 충분하게 이 저 택을 불태워 버리라고? 특무대로서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는 했지만 만약 태운다면 리하르트의 목숨도 같이 타버리는 것과 마찬가 지다. 게다가 이 저택에는 세이드가 유일하게 소중하게 여기는 연구실 이 있었다. 리하르트는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귀관의 귀에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니면 발화마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건가. 난 이 저택을 태워 버리라고 말했어. 지금 당장." "하, 하지만...... " "우리한테는 아무 피해도 없어. 그러니까 날 믿고 내 말을 따라줘." 리하르트는 마치 애인에게 하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실 로 즈마이어를 여자가 자리 잡기 힘든 특무대에서 이 정도까지 키워준 것 은 리하르트였다. 같은 천민 출신인 그녀에게 리하르트는 이성적으로 도 섬세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잘해주었고 그 때문에 로즈마이어 는 그를 상관 이상으로서 이성으로서도 매력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몇살이나 어린 그의 말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 알겠습니다." 로즈마이어는 손에 화력구를 뭉치기 시작했고 놀란 집사의 입이 커다 랗게 벌어졌을 때 그녀의 손에서 떠난 불덩어리가 저택에 작렬하며 불 길이 일어났다. 에버딘은 여전히 인형 같은 얼굴로 리하르트에게 말했 다. "지금 이곳을 태우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똑같군요." "무슨 의미죠?" 에버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는 금새 불길에 휩싸여 버린 세이드의 저택을 뒤로한 채 조용히 리하르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문 도구에 가깝게 깊게 조이는 금속제 코르셋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폭넓 은 벨벳, 그리고 무거울 정도의 과잉장식 웨이스트가 헤스팔콘 귀족풍 의 코르셋 웨이스트 룩(Corset Waist look)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그 런 허무할 정도로 화려한 타인의 눈요기를 위한 '구속복'을 두르고 있 는 긴 얼굴의 에버딘의 모습은 불길한 목탄화의 배경처럼 미친듯이 타 오르고 있는 음울한 저택과 어울려 뭔지 모르게 서러워 보인다. "정복욕이라고 하나요? 당신들은 상대를 눌러 버리기 위해서....... 라는 단서가 붙어 버리면 어떤 일이라도 해버리잖아요. 자신이 상대보 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변의 어떤 희생도 상관하지 않죠. 그래놓고 그 지겹고 야만적인 행동을 '남자다운 야망'이라는 수식어로 포장하죠. 제 남편을 왜 파멸시키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 다. 어차피 뻔한 대답이 나올테니까요." 에버딘은 직감적으로 리하르트의 세이드를 눌러 버리려는 거친 욕구 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세이드 곁에 있으면서 언제 나 몸소리쳐질 정도로 자주 느꼈던 감정이기도 했다. 리하르트는 자신 의 감정이 발각당한 것에 기분 상해 하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 "세이드 공이 두려운 겁니까? 제가 보호해 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보호요? 제 인생을 보호해 주겠다는 건가요? 결국 전 또 남편을 잃 고 러셀 가문의 환멸과 비웃음을 받으며 살아가야 겠지요.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제 그런 것...... 지겹습니다." 같은 여자라서 느낄 수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즈마이어는 에버딘 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을 닮은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 다. 그것은 리하르트를 향한 분노와 타의에 의해서만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슬픔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리하르트가 뭐라고 설득할 말을 찾기도 전에 몸을 돌려 저택의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 다. "자, 잠깐만!" 그녀의 치렁치렁한 푸른 미색의 드레스를 삽시간에 불길이 덮쳐 세이 드의 마력처럼 몸을 휘감았지만 에버딘은 그대로 저택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리하르트는 드물게 침울한 표정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저 택을 바라보았지만 불을 끄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에, 에버딘 마님...... " 집사는 핏기 없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고 리하르트는 그런 집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세이드가 돌아오면 이렇게 전하시오. 이 명령을 내린 자는......." 리하르트는 잠시 말을 멈추며 생각하는 듯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세이드의 저택을 불태우고 에버딘의 죽음을 방치한 그 명령의 대상은 헤스팔콘 황제 힌드렌스 하우프트만 3세여야 했다. "명령은 바로 로이터 막시밀리엄 공이 내렸소." "리, 리하르트 님!" 못을 박듯이 말한 리하르트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로즈마이어의 얼 굴은 사색이 되었다. 집사 역시 뒷걸음질 칠 정도로 놀란 듯 했다. "그, 그분이라면 제국안전공안부의 책임자이신 로이터 공작 각하를 말씀하시는....... " "그렇소." "그 분은 리하르트 공, 당신의 아버지 잖습니까." "정확히 말해 양아버지요. 세이드가 오면 확실히 전하시오." 리하르트는 준비했던 말인냥 빠르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세이드의 표적이 황제가 아닌 리하르트의 아버지 로이터 공작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즈마이어는 자신이 마신 술에 독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처럼 당황하고 있었고 리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가 평한 것처럼 오만한 아름다움이 가득찬 파란 눈동자의 리하르트는 입끝을 조금 올려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로즈마이어. 난 달라카트로 내려 갈꺼야. 나와 함께 가겠어?" -Blind Talk 뭐랄까 이번 편은...... 서브 캐릭터들이 주가 되었습니다. 어째 플롯을 나열하다 보니까 두 Scene 모두 그런 분위기가 되어 있는 데 - 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아. 카넬리안 쪽 이야기는 너무 길어지 는 것 같아 잘라버렸으므로 다음에 나옵니다. 딱 한번에 쭈욱 써내려 가면 리듬이 살아 있어서 좋은데 너무 많이 지웠다가 다시 쓰길 반복 한 한 편이라서 읽으시면서 맥이 끊어지는 부분이 많을 것 같네요. (걱정... ) 메이의 본래 이름은 메이트리아크 입니다. 저 스스로도 '아 길다.' 싶어서..... 뚝 잘라 별명으로 불렀더니 메이라는 흔한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메이트리아크는 '여가장'이라는 뜻입니다. 차라리 소녀 가장에 어울리는 이미지지만......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이름이라서 . 아 그리고 에버딘이 입고 있는 코르셋 웨이스트 룩은 확실히 그건 로 코코 풍인데...... 그렇다고 헤스팔콘의 귀족풍이 로코코 양식이라는 건 아니고(헤스팔콘은 비잔틴 풍에 어울리지 않을까나...... ) 그냥 연상되는 그대로 봐주시길. 달라카트 쪽은 아무래도 메이는 이미지 때 문에 남성풍의 프릴 블라우스를 입히긴 했지만 뭐랄까 르네상스와 로 마네스크 풍이 섞여 있는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화려하지만 행동은 편 하고 유행에 민감한 분위기니까...... 라고는 해도 사실 소설에 잔뜩 복식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건 싫어서 잡담에서 간단히 대신합니다. (게다가 복식에 대해선 별로 잘 아는 것이 없어서 자신이 없기도... ) 아...... 솔직히 말해서 비축분은 거의 없지만 지금부터는 최선을 다 해 이틀에 한번은 짧은 분량이라도 올리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럼 언제나 읽어주시고 추천해주시고 감상해 주시고 퍼가 주시고 메 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은 곧 올라갑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조PD의 비애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068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6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06 17:52 읽음:20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6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03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06 08:33 조회:41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6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Matriarch 1. 메이는 흐릿한 자신의 눈 앞에서 썩은 미소를 짓고 있는 스엔의 속마 음 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날 결투에서 죽이고 싶은 거겠지.' 스엔의 검술 따위로는 메이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하지만 지금의 메이 는 들고 있는 세이버 끝이 심하게 떨릴 정도로 몸이 마비되어 가는 상 태. 이럴 때 결투로 수백의 해적연합이 지켜보는 가운데 메이를 누른 다면 해적들의 불문율에 따라 자신이 가스발 해적단의 두목 자리를 차 지할 수 있는 '떳떳한' 명분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의 그따위 비열한 생각 따위 상관 없어.' 계속 몸의 감각이 사라져 가는 걸 느끼는 메이는 주저하지 않고 발을 앞으로 강하게 내딛였다. 찌르기를 노리는 검술의 기본적인 동작. 바 닥이 쾅소리를 내며 울렸고 그와 동시에 해적들 사이에서도 빠르기에 서 비할 자가 없다는 메이의 검끝은 스엔의 심장을 노리며 파고 들었 다. "우아악!" 갑자기 상당한 간격을 좁히며 안전했다고 생각한 자신의 위치까지 검 끝이 파고들자 스엔은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메이의 검을 피했고 스엔 의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더블릿(doublet)의 겨드랑이를 찢었다. 그리 고 평소대로라면 기습적인 일격에 당황하는 스엔의 몸을 메이의 검이 몇번이나 꽤뚫었어야 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기사의 일전이 아 닌 이상 검사들의 결투란 단 한번의 빈틈으로도 끝이니까. '제길!' 빌어먹을, 팔이 움직이질 않아. 메이는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이 자 기 것이 아닌 것처럼 굳어버린 것을 느끼며 절망했다. 몇초만 더 움직 여 주면 스엔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데 메이의 몸은 그것을 허락 하지 않았다. "이 년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스엔이 수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메이의 목을 향 해 검신이 두꺼운 곡도를 휘둘렀다. 겨우 겨우 뒤로 몸을 빼며 억지로 검을 올려 스엔을 막았지만 뒤이은 스엔의 발길질에 뒤로 밀리며 바닥 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제발 메이를 도와줘! 저대로 가면 죽는다고!" 선상의 해적들은 시오를 붙잡고 난리도 아니었고 일부 해적들은 검을 뽑고 배 밑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코웃음을 치는 톨베인. "왜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도와줘야 해." "너한테 한 말 아냐!" 해적들이 화가 나선 톨베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편 메이는 실 신한 듯이 고개를 꺾고 주저 앉아 있을 뿐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스 엔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연설이라도 하듯이 몰려 있는 해적들을 돌아보며 자만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그 유명한 가스발의 메이 제독도 별 거 아니로군. 이렇게 이 겨버리면 싱거운....... 어?" 스엔은 따끔하는 기분과 함께 자신의 허벅지를 뚫고 나온 메이의 검 을 멍하니 내려 보았다. "우아아아앗!!" 입에 개거품을 물 정도로 놀라며 메이를 뒤돌아 본 스엔. 메이는 표 독스러운 눈빛으로 냉소를 띄우며 스엔을 올려 보고 있었다. "그 어설픈 발길질 덕분에 감각이 되살아 났다." "이, 이 년이 기절한 척 하고 있었던 거잖아! 비겁한!" "비겁한게...... 해적이라며?" 경멸어린 얼굴의 메이는 스엔의 허벅지를 관통한 세이버를 다시 뽑으 으며 일어섰다. "끄이이익!" 듣기 싫은 비명소리를 지르는 스엔의 허벅지에선 구멍뚫린 포도주통 처럼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절룩이며 뒷걸음질치면서 공포에 질 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대고 있는 스엔에게 메이는 차가운 표정으 로 다가갈 뿐이었다. "히에에엑! 다, 다가오지마!" "최소한 마지막은 사내 답게 깨끗하게 죽어달란 말은...... 너 같은 쓰레기에겐 무리한 요구겠지?" 그 상황을 내려다보던 줄리탄의 머리속에선 카넬리안이 잡배들의 목 을 내리치기 전의 분위기가 떠오를 정도였다. 그러니까..... 보통 여 자로선 할 수 없는 말이며 행동이었다 메이의 것은. "사, 살려줘. 응? 메이. 제발. 제발...... " "징징 우는 남자는 질색이야." 메이는 조용히 세이버를 들어 올리며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스엔의 심장을 정확하게 겨낭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와 피어 엉켜 있는 냉정한 검신이 불쾌하게 더운 밤공기와 듣기 비굴한 스엔의 말까지 모 두 얼려버리는 듯 했다. "도, 도와줘 나 좀! 모두들 왜 그러는 거야!" 스엔은 자신 뒤에 몰려든 해적들을 돌아보곤 절망적으로 울먹거리며 빌다시피 했지만 스엔을 바라보고 있는 해적들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메이는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넌 저들에게 이용가치가 없어졌나보군. 지금까지 사람들을 배신만 하다가 배신당해 보니까...... 기분이 어때?" "자, 잠까....... " 스엔이 조금이라도 어떻게라도 살아보려고 발악하는 것을 보기 역겨 웠는지 메이는 스엔의 가슴에 검을 꼽았고 심장이 뚫린 스엔은 피거품 을 뱉어대며 바닥에서 뒹굴다가 부두에서 떨어져 바다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악인의 말로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너무도 보기 흉한 끝이었 다. 메이는 잠시 동안 핏방울이 떠오르는 수면을 내려보다가 자신 앞 에 몰려 있는 수백의 해적 연합을 바라보았다. "그럼 너희들 이제 날 죽일 차례인가? 와라. 이게 가스발 해적단의 마지막 전투다." 메이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검을 치켜 들었고 해적들 역시 조금 저 희들끼리 쑥덕이더니 검들을 뽑았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백의 검 이 메이 앞에 칼날의 방책을 만들듯이 형성되었다. 2. 카넬리안은 선술집 '저녁 둥지'의 주인 그렌스가 사 준 꽤 세련되어 보이는 외출용 원피스를 입고 도시 공원의 노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빨간 눈동자는 자신의 발 밑을 배회하고 있는 하얀 새 들의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아. 미스트랄 가져오는 것...... 또 잊어버렸네.' 줄리탄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품에서 놓질 않았던 검 미스트랄을 그녀는 자신의 방 침대 밑에 넣어 둔 뒤에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지킬 사람이 없으니까......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겠지.' 생각들은 그녀의 머리속에서 빠르게 지나갔고 더 많은 상념들이 막을 수 없이 터져버리기 전에 그녀는 애써서 자신 마음 속의 추억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때 헤이우드가 그녀 곁에 다가와 엄청나게 당황하는 얼굴 그대로 말을 더듬 거렸다. 손에는 창피하게도 군것질꺼리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나,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 아 그렇지. 그녀는 자신이 가끔은 남자도 만나라는 주인 그렌스에게 떠밀려 외출복까지 입고 헤이우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으니까 자꾸만 자꾸만 잊어버린다. 말하는 방법까지도 빠르게 잊어버린다. 줄 리탄이 자기 감정에 써놓은 글씨들을 쉬지 않고 지우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의 표면이 쓰라리다. "어, 어, 어디로 갈까요?" "걸어요." 카넬리안은 조용히 일어서며 말했고 둘은 잠시 공원의 굽은 길을 걷 기 시작했다. 헤이우스가 어렵게 어렵게 꺼내는 소리들도 그녀의 귓가 에 겉돌다가 소멸해 버렸고 그녀는 자신 옆을 지나는 나무들의 이름이 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공백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루 하루 시간 시간을 공백으로 지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이 괴로워. "저게...... 뭐죠?" 카넬리안이 고개를 든 건 헤이우드의 떨리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의 마력이 자신 아니 이 도시로 접근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늘이 일그러지는 듯이 오후의 태양빛이 불길한 적빛으로 변해버리며 그 속에서 점점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 는 불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주변 공기들이 미친듯이 울며 사방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오펜바하....... " 카넬리안은 그 짧은 순간에 저것이 우주로부터 낙하하고 있는 거대 운석이며 그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는 오펜바하의 경고라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오펜바하의 씰인 미쉘이라면 저런 운석을 불러오는 것 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물키벨이 바다를 막고 있지 않 았다면 오펜바하는 한걸음에 카넬리안에게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 어서 피해요 우리!" 헤이우드는 카넬리안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몸으로 그녀를 잡아 끌었 지만 그녀는 속삭이듯 그에게 말할 뿐이었다. "저번에 말했지요? 당신이 죽어도 조금도 슬프지 않을 거리를 유지해 달라고." 케센의 사람들은 저마다 절망적으로 외치면서 집안으로 숨어 들고 있 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분명 곧 도시 전체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 헤이우드는 그녀의 두려울 정도로 침착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다, 당신은 누구에요....... " "미안해요. 나 당신을 지킬 수 없어요." 헤이우드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슬픈 표정을 잠시 볼 수 있었던 것 이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몸 주변에 푸른 장막이 쳐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도시 위에 시커멓게 가득 찬 운석은 괴기스런 생 명체처럼 세상을 집어 삼킬 것 같은 굉음을 울리며 도시에서 가장 높 은 첨탑부터 밀어 버리며 도시 위로 낙하했고 곧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폭발이 일어났다. 운석은 헤이우드를 포함한 수천명 케센 시민의 생명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잡아 먹은 뒤에 도시의 흔적을 제로로 바꿔 놓고는 잠들었다. -Blind Talk 겨우 도착해 잡은 작은 침대위에서 우리들은 잠드네 오늘이라는 날이 또 사라져 간다. 거듭해도 밀려나는 마음 싸구려 비누처럼 닳아 없어지고 혼자가 아니니까 더러워지면서 살아가네 죄에 동참한 그녀도 울고 있어 별이 쏟아지는 이 모텔만이 우리들을 어루만져주네 약한 물살의 미지근한 샤워로 몸을 씻고 그저 독선의 목욕제계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한 그대는 그래도 나와 있네요 혼자가 아니니까 잊으면서 살아가는 거지 늦은 눈발 같은 추억이 꿈 속에 밀려와 견딜 수 없이 막히기 시작한 상처를 다시 쥐어 뜯네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면 빼앗으면서라도 살아가야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건 없어도 찬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면 난 널 감싸안네 내일은 어디로 가야하지...... B'z의 노래 가사들은 많은 일본가요 답게 적당히 퇴폐스럽고 꽤 감상 적인 것 같은데 이 곡은 가사가 좋아서..... 특히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한 그대는 그래도 나와 있네요.'라는 부분 은 아 멋있는 문장이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틀연속연재에 성공했습니다. 스스로 장하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지는 짧지만...-_-) E-MAIL : billiken@hananet.net 컨츄리 꼬꼬의 찻잔(remake)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087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7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07 17:01 읽음:27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7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12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07 12:17 조회:263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7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beast & normal 1. 리하르트의 양아버지이자 헤스팔콘의 제국안전공안부의 총책임자인 로이터 공작이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리하르트가 세이드의 저 택을 불태운지 이틀이나 지나서 였다. 로이터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곰곰히 생각했다. '리하르트 녀석. 지방 순찰을 떠난다고 했지? 왜 갑자기 그런 짓을 직접 하려는 거지.' 황실의 실력자인 로이터는 결코 우둔하고 눈치 없는 자가 아니었지만 세이드를 파멸시키려는 책략 일체를 아들 리하르트에게 일임하고 있었 고 무엇보다 리하르트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염두해 두 지 않았던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그때 뭔가 불길한 기분에 휩싸여있 던 로이터의 집무실로 부하가 들어왔다. 다급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각하. 신전으로부터 도착해야할 기부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전로부터의 '기부금'이라는 것은 기부라는 형식을 띄며 황실에게 바치는 엄청난 세금이었으며 그것은 황금과 사치품, 보석 등의 고가품 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관리하는 것은 로이터의 몫이었던 것이다. 물론 세금의 강도를 정하고 징수하는 것도 로이터가 다루었기 때문에 로이터가 개인적으로 많은 뒷돈을 착복할 수 있는 돈 줄이기도 했다. "문제?" "그게..... 신전쪽의 말에 의하면 리하르트 님이 오셔서 자신이 기부 금을 이곳으로 수송하겠다며 가져가셨다고." "뭐라고!!" 로이터는 자기도 모르게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 다. 마음 속에 씨앗처럼 담고 있던 불안감이 단번에 발화하며 온몸을 뒤덮어 버리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를 너무 믿었던 것이 실수다. "리, 리하르트를 당장 잡아와! 어서 국경선을 차단하고! 각 왕국에 체포 명령을 내려!!" "하, 하지만....... " "멍청한 놈! 배신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날 배신한 거야! 그 빌어먹 을 천민 놈이!" 로이터가 미쳐버릴 것처럼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집어 던지며 외 칠 때 특무대원들이 무례할 정도로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로이터 각하!" "뭐야 또!" "어서 여기서 피하셔야 겠습니다." 특무대원들의 얼굴은 수만대군이 몰려오는 것을 본 병사의 얼굴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로이터는 마른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무....... 무슨 일이냐." "세이드 후작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막아보려고 했지만...... " 로이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하르트가 세이드는 물론 자신 을 파멸시키려는 거미줄 같은 계획을 짰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 었지만 이제 늦었다. 2. "머, 멈춰주십시오 세이드 공. 귀공은 지금 황실에 대한 반역을..... . 크악!" 자신 앞에서 벌벌 떨며 가로 막고 있는 관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이드의 손끝이 올라갔고 동시에 관료의 온몸이 불타오르며 찢겨져 나갔다. 제국안전공안부의 본부건물은 갑자기 닥친 세이드 일인에 의 해서 아비규환 그 자체. 이미 세이드가 지나온 복도에는 본부를 지키 고 있던 특무대들의 갈갈이 흩어진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사방 으로 터져나온 검붉은 핏물들이 상아빛의 벽이며 고급스러운 양탄자 들을 모조리 탁한 붉은 빛으로 염색시킨 뒤였다. "리, 리히트야거를 불러와야 해!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냐!" 특무대원들은 세이드를 향해 자신들의 모든 마력을 뽑아 공격했지만 그들이 발사한 화력구나 전력체들은 세이드의 몸 주변에서 맥없이 튕 겨나갈 뿐이었다. 그들은 세이드의 걸음을 단 한번도 멈추게 만들 수 없었다. 절망. 그들은 세이드를 보며 죽음이 뚜렷하게 자신 앞으로 다 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악마다! 저건 인간이 아냐...... " 쉴세 없이 상대를 덮치는 세이드의 불가항력의 마법과 마력에 휘감겨 있는 검은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들을 고깃덩이로 바꿔 버렸고 본부를 호위하고 있는 특무대 전원이 전멸하며 1분도 걸리지 않아 로 이터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이드는 문을 열며 집무실 밖으 로 도망치고 있는 로이터를 보았다. "넌 도망칠 수 없다. 로이터 공작." 쇳소리 같이 울리는 세이드의 목소리에 로이터는 몸을 움찔하며 멈춰 서는 세이드를 돌아 보았다. 로이터의 일그러진 얼굴에선 식은 땀이 흐르고 온몸이 떨고 있었다. "자, 잠깐. 세이드 공. 내 말을 좀 들어...... 크아아악!" 로이터는 세이드가 자신을 향해 손을 벌리자 주변 공기가 얼어 붙으 며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하반신이 굳어 버리며 피까지 얼어 버리는 섬뜩한 고통이 온 몸을 휘감는다. 로이터는 자신 의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로이터의 울부짖음은 들리지도 않는 듯 그에게 걸어온 세이드는 검을 휘둘러 로이터의 얼어버린 양 허벅지를 잘라버렸다. 짜작거리는 파열 음과 함께 두 다리가 끊어져 버린 로이터는 도끼에 찍힌 나무가 쓰러 지는 것처럼 거의 상반신만 남아 바닥을 뒹굴었다. 비명을 지르는 로 이터의 이마에 세이드는 검 끝을 들이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피가 얼어 붙었으니 넌 당장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날 화나게 만든 것에 대해 후회하고 또 후회해라." "나, 나도 속았던 거야 리하르트에게!! 그 놈이 우리 둘 다 속였던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네 놈의 변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난 널 죽이러 온거야." 세이드는 악마를 부르는 싯귀절을 읊듯이 말하면서 이번에는 툭하고 검을 내리치며 로이터의 살집 두툼한 오른 팔목마저 깨끗하게 잘라냈 다. 손이 잘려나간 팔을 미친듯이 흔들어대자 사방으로 핏덩이가 튀겼 고 세이드는 가학적인 비웃음을 보이며 떨어져 나간 로이터의 오른손 을 발로 찼다. "으으으으아아!!" "내 실험실과 아내를 없애 주었더군. 고맙다. 덕분에 헤스팔콘에 내 가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내, 내가 아니야! 리하르트 놈이 한거야!!"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책임이라지?" 악마적인 냉소가 팔다리가 잘려나가 바닥을 뒹구는 로이터의 눈에 들 어왔다.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표정이다. "세이드 님! 그만두세요!" 세이드는 높고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오폴드 폰 매소크였다. 세이드가 로이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황실에서 달려온 다섯명의 리히트 야거들 앞에 서 있는 레오폴드는 소 름 끼칠 정도로 고운 외모로 세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세이드 와 거의 동등한 실력이라는 평이 자자한 리히트 야거의 2인자 였다. "너도 죽고 싶은 거냐." 세이드는 매소크가 들고 있는 법창(法槍) 알-파티아를 바라보며 차가 운 조소와 함께 말했다. 다른 리히트 야거의 기사들이라면 세이드와 싸워 살아남을 수 있를 자는 없겠지만 세이드와 레오폴드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로이터가 구원을 바라는 얼굴로 고통에 눈물을 흘려대며 외쳤다. "매, 매소크 공! 어서 이 반역자를 죽이시오!" 레오폴드는 주저하고 있었다. 황실의 근위엽병인 리히트야거의 일원 이라면 세이드의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반역. 분명히 즉결로 처단해 야 할 일이었지만. 사실 그는 세이드에게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평소 부터 몹시 흠모해 오던 세이드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정말로 싫었기 때문이었다. 로이터는 죽어가는 표정으로 피를 토하며 계속 외쳤다. "매소크 공! 뭐하는 거요!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반역 행위!" 로이터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처절하게 외쳐대자 세이드는 인상을 구기며 로이터를 내려보았다. 그리곤 발을 들어 엄청난 힘으로 로이터의 얼굴을 짙밟았다. 퍼퍽거리는 뼈가 조각나는 소리가 복도를 섬뜩하게 가르며 로이터의 얼굴이 산산조각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 시끄럽군." "세, 세이드 님....... " 레오폴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이드에게 다가가려 했다. "나와 싸울 거라면 그런 계집애 같은 얼굴로 걱정하는 시늉 하지 말 고 그 창을 들어라." 세이드는 감상이라도 하듯이 참혹하게 부서져 버린 로이터의 머리 조 각들을 훌터보며 등 뒤로 다가오는 레오폴드에게 말했다. 레오폴드는 안타까운 얼굴로 대답했다.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 "시시한 놈이로군. 그럼 여기 왜 온거야." 세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레오폴드를 돌아보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남 색의 긴머리에 작은 얼굴을 한 안그래도 기사답지 않은 레오폴드의 얼 굴에 홍조까지 달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다, 당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세이드 님." "너 정말 징그럽구나." 눈앞에서 시체들이 피바다를 이루어도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세 이드가 불쾌한 표정을 보인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그때 레오폴드 뒤 에서 딱딱한 어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도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세이드 공과 정면으로 대적해서 개죽 음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로이터 공작은 죽었으니까요 ." 자신의 씰 이세벨이 앞을 보호하고 있는 리히트야거의 서열 3위 힐데 브란트였다. 사형집행인이라고 불리는 그는 검을 거의 잡아본 적도 없 는 마법사. 그 중에서도 인간의 몸에서 에너지를 뽑아내서 상대에게 쏴 버리는 독특한 능력을 지닌 자였다. 따라서 전투중에는 포탄과 같 은 역할을 하는 희생죄수들을 수십명씩 수레에 넣어 끌고 다니기 때문 에 세이드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마법을 시전하기도 전에 세이드의 검에 몸이 잘려버릴 것이다. "큭큭큭. 하나 같이 한심한 놈들이군. 좋도록 해. 난 떠난다." 세이드는 검집에 자신의 마력에 휩싸인 검을 넣으며 몸을 돌려 걸어 나갔고 그 뒤를 레오폴드가 쫓아가기 시작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세이드 님." "귀찮은 놈...... " 세이드와 레오폴드가 그렇게 빠져나간 뒤 힐데브란트는 황실에 로이 터 공의 사망과 세이드와 레오폴드의 도주를 보고 했으며 황실은 절대 적인 힘을 발휘하던 실력자들이 동시에 사라져 버리자 혼란 상태에 빠 졌다. 그리고 그것은 만성적인 황실의 대립 구조를 알고 있던 리하르 트가 연출해 낸 책략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3. 갑자기 장엄한 분위기로 수백의 해적 연합들과 홀로 대치하고 있는 메이를 돕기 위해 몇명 남지도 않은(게다가 비리비리한) 가스발 해적 단들이 배에서 뛰어 내려 메이에게 달려갔다. "왜 온 거에요! 다 죽고 싶은 거에요? 바보 같이!" 메이는 부하들이 검을 뽑으며 옆에 서자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지만 해적들은 도리어 평정을 찾았는지 능글맞은 얼굴들로 대답했다. "끝까지 바보 같아서 죄송합니다. 메이 제독." "돌아가세요!" "돌아갈 곳도 없어요. 여기 빼곤." 메이는 잠시 그런 부하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적들을 향해 몸을 돌리 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까지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모두들." "너무 비장한 말 하지 말아요. 눈물나니까." 그들은 뭐랄까 꽤 비장한 최후를 멋지게 연출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 자기 하늘에서 시오가 뚝 떨어졌다. 말 그대로 메이 앞에 뜬금 없이 뚝 떨어지더니 자신의 하얀 각도를 뽑은 것이다. 깜짝 놀란 메이는 너 무 놀라서 시오를 찌를 뻔 했다. "다, 당신은 누구에요!" "정의의 용사 입니다." 해적을 도와주는 정의의 용사라...... 좀 이상하긴 해도 시오는 아주 오랫만에 여자 앞에서 멋지게 폼 잡는 것이 되게 기분 좋은지 싱글싱 글 거렸지만 다리는 뼈마디가 아릴 정도로 욱신 욱신거렸다. 아무리 소형 범선이라지만 부두로부터의 높이는 절대 짧지 않았던 것이다. "쳇.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 건지...... " 톨베인 역시 투덜투덜거리며 결국에는 배에서 내려와서는 황당해 하 고 있는 메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봐. 해적 아가씨. 폼나게 사는 건 좋은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렇게 뻣뻣하면 멋대가리 없어 보여. 안 그래도 가슴 작은 여자가 말 야." 한번도 본 적 없는 녀석의 빈정거림에 울컥한 메이가 소리쳤다. "넌 또 뭐하는 놈이야!!" "왜 나한테는 반말이야!!" "나도 도울께." 이번에는 줄리탄이 톨베인 옆에 섰다. 눈을 흘기는 톨베인. "뭐야. 칼도 못쓰면서. 그 검이라도 뽑을 꺼야?" 줄리탄은 목숨을 빼앗아가는 자신의 검 인피타르를 바라보며 나지막 히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뽑아야겠지." "...... 맘대로 해." 톨베인은 줄리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카넬리안이 떠난 이후 줄리탄은 더 이상 어떤 일에도 피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 짐했었다. 매번 도망치고 피하기만 하다가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카넬리안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날 지켜주었지. 씰이기 때문에 지킨 것 뿐이라는 무책임한 변명으로 내 나약함을 둘러대긴 싫어. 그녀가 날 지켜준 마음 그 이상으로 카넬리안을 지켜주고 싶으니까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지 않을 꺼야." -Blind Talk 아아...... 힘들어. 정말 쓰러질 것 같군요. 그래서 이번 편은 몸상태 최악에서 작성해서 좀 딱딱합니다.(구차한 변명일지도?) 그리고 예전에 올렸던 '1부 재래 마지막 장'에서 오류가 있어서 뒤늦 게 알고 적어 봅니다. 거기서 줄리탄 일행이 타고 있는 범선이 적도 근처의 무풍지대로 들어 가게 되는데 바람을 기다릴 때 돛을 내리고 있지요. 아 그런데 실은 그런 경우에는 줄리탄이 타고 있는 범선이 소형 2본 마스트 2층 갑판 선 정도니까 메인 마스트(중앙 돛)의 야드는 오른쪽 뱃전으로 놓고 미 젠 마스트(대충 후방의 보조 돛)의 야드는 왼쪽 뱃전으로 해서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더라도 그걸 탈 수 있도록 조절해야 합니다. 당시에 쓰면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다시 살펴보니까 큰 문 제가.... 그외에도 문제가 많긴 합니다. 그런 정밀한 조절이 가능한 범선을 군용 양산함으로 조선할 능력이 될 정도라면 실제라면 대포같 은 것도 나올 시기이고 사실 2본 마스트 범선이라면 실은 그렇게 작은 범선도 아닌데 제 글에선 거의 고기잡이 배 정도로 나오죠. 또 무풍지 대에서는 보트를 내려서 그걸로 노를 저어 범선을 예인해 주어야 하는 데 그러지도 않고.(보트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둘러대겠음.) 이 글을 쓰면서 미리 선박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긴 했는데 역시 자 료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아무튼 아쉽지만 이미 책이 나왔으니까 어쩔 수가 없으니까...... 다 음 부턴 실수를 줄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이 소설에선 복 식 때와 같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으면 알지도 못할 어려운 단어 잔뜩 늘어놔서 읽는 분들 괴롭히는 건 자제하려고 합니다. 하드하게 표현 해서 어울리는 글이 있고 아닌 글이 있는데 전 제 글이 후자라고 생각 하니까요. 어울리지도 않게 자신의 깜냥을 목적도 없이 늘어 놓으며 '나 많이 알지?'라는 되먹지 못한 자랑을 일삼는 짓,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역겹습니다. 어설픈 움베르트 에코의 추종자가 될 바에는 차라리 유치한 글을 쓰고 싶네요. 전 훈제 연어를 좋아합니다.(사실 미식은 아니지만 식탐에 가깝도록 여러 음식 이나 향신료 따위에 집착하는 편.) 그래서 최근 일본 맥도날드에서 연어버거를 선보였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지금 배가 고파서 갑자기 생각나네요. 저희집 일요일 오후 식단은 거의 90% 수제비. 잠시 후 나가서 수제비에 김을 잔뜩 뿌려 먹고 정말 늦 은 잠자리에 들어야 겠습니다. 몸이 엉망이고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졸립네요.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바네사 메이의 Contradanza를 들으며...... ps: 앗. 눈 많이 내리네요. 이거 치울 생각하니까 아찔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눈이 내리면 마음이 설레이는 것이 아니라 귀찮아 졌다는 건 나이를 먹었다 는 증거일까나.(아니면 메말라 버린 건가 내가.) 『SF & FANTASY (go SF)』 121314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8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10 09:22 읽음:47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8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33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09 08:38 조회:628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8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Human Heart 1. 우여곡절 끝에 부두를 놓고 대치하게 된 메이 쪽과 해적 연합 쪽의 신경전은 적잖은 시간을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 쪽에서는 죽음 을 이미 각오한 입장에서 검을 뽑은 것이었기 때문에 해적 연합이 쉽 게 달려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가스발 해적단이 전멸하기 전까지 수십 명은 죽일텐데 그 사망자 명단에 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 의외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물키벨에게 크라켄의 목소리가 들 려 왔다. '물키벨 님. 명령만 내려주시면 건방진 인간들을 죄다 쓸어 버리겠습 니다.' '아니. 조금 더 보고 있기로 하지. 무엇보다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해결해야 하는 거니까. 단지 줄리탄이 위험해지면 그때 그를 도와라.'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평범한 인간에게 집착하시는 건 가요?' '미안...... 알려줄 수 없어.' '충복인 제게도 말씀해 주실 수 없는 이유 입니까? 그렇게 중요한 비 밀인가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거라서 말해 줄 수 없는 거야. 이 해 해줘.' '알겠습니다. 물키벨 님.' 크라켄은 줄리탄을 만난 이후부터 물키벨의 기분이 계속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메이는 해적 연합들이 주저하며 달려들기 를 꺼리자 도리어 눈을 내리깔고 날카롭게 외치기 시작했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 당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구나! 그렇게 겁이 많은 무지랭이들 주제에 술집에서 추근거릴 때는 자기가 몇 명을 죽였 는지를 자랑 삼겠지? 바지 한번 벗어봐라. 남자 맞나 확인해 보게." 메이는 그 말을 시작으로 표현하기에 얼굴이 빨개지는 노골적인 비아 냥거림을 거침 없이 쏟아냈고 그녀의 도발에 해적 연합의 얼굴들이 흙 빛이 되며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거 산뜻한 얼굴로 음담 한번 일품일세." 톨베인이 '이 여자 장난 아니다.'라는 얼굴로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 다.줄리탄 역시 메이를 흘낏 보며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버렸다. 귀족집안 둘째 딸내미 같은 저런 훤칠한 얼굴에서 음담패설이 주저 없 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순진한 줄리탄에겐 대단한 쇼크였던 것이다. 해적연합 중에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메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가스발 해적단의 해체를 명령하고 항복 해라. 어차피 배 한척과 그런 쪽수의 부하들로 해적질 해먹을 수는 없 잖아. 넌 이미 재기불능이야. 그러니까......" "내 몸에 손을 대고 날 죽여도 결국 '항복'이라는 단어는 내 입에서 꺼낼 수 없을 거다. 내 성격 잘 아는 줄 알았는데? 닥치고 몰려오시지 . 저승길 길동무로 삼아주마." 19세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지만 메이는 주저 없이 응수했고 줄리탄은 '역시 인간은 십인십색'이라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해적들은 또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위험한 웃음을 메이 에게 보였다. "석궁이다." 이상감각을 가지고 있는 톨베인의 시력은 일반인의 몇배이다. 덕분에 그는 해적들이 무리 사이에서 꺼낸 석궁을 어둑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뭐?" "석궁이라니까." "죽어라! 메이!" 결국 검으로 싸우길 피한 해적들은 석궁을 들고 메이를 겨낭했고 그 것에서 발사된 굵은 화살은 메이가 피할 겨를도 없이 쏜살같이 그녀를 향해 빠르게 날아 들었다. 강력한 석궁에서 발사되는 화살의 속도란 상대가 확인도 하기 전에 몸을 뚫어 버릴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톨베 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민첩하게 팔을 들어 올린 것은 순간이었다. "아악!" 메이는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화살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꽉 감았던 두 눈을 조금씩 떳다. 눈 앞에는 톨베인이 믿을 수 없이 빠른 손동작 으로 잡아 챈 화살끝이 있었다. 해적들이 입이 쩍 벌어져서 바라보는 가운데 톨베인은 메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화살에는 약한 여자로군." "...... " 메이는 멍한 얼굴로 아직 앳된 모습의 톨베인을 바라보았다. '이 녀 석 뭐야.'라는 표정. 뭔가 억울한 시오가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쳇! 그 정도 쯤 나도 막을 수 있어!" "난 못해...... " 고개를 돌리며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줄리탄. 그가 갈 길은 정말 이지 멀고도 험하다. "어, 어떻게 된거냐! 에이 싹 쓸어버렷!" 뭔가 대단한 놈이 끼어있다는 것을 느낀 해적 연합들은 가까이 정박 하고 있는 자신들의 대형 해적선에 외쳤고 곧 그 해적선 뱃전 위로 활 을 들고 있는 궁수들이 나타났다. 해적들이나 해군이나 전투선에는 지 근거리 함대전을 위한 많은 궁수들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톨베인이 그것을 올려보며 순식간에 궁수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삼십칠명. 저건 못 막아." "넌 어째서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냐!!" 시오가 톨베인의 태도가 하도 얄미워서 소리칠 때 활시위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른 화살들이 포물선을 그었다. 메이가 있는 지역 전체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빗발이 되어. 일행은 빠르게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화살이 내려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줄리탄은 그것을 바라보 며 자기도 모르게 인피타르의 도두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타아아아!!" 거의 무의식에 가까웠다. 이대로라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줄리탄의 온 몸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찌릿찌릿한 충격을 전해 주었고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인피타르를 뽑게 만들었던 것이다. 스스렁 거리 며 뽑히고 있는 인피라트의 검 전면에서 밤의 암흑을 삼켜 버리는 차 가운 빛줄기들이 봉인에서 풀려나듯 터져 나왔고 줄리탄은 오직 쏟아 지고 있는 화살의 무리만을 노려보며 그것을 휘둘렀다. 파즈즈즈즉! 밤하늘에 너무도 아름다운 오로라가 깔린 것 같다. 검을 휘두른 궤적 의 방향 그대로 푸른 기운이 공기를 찢어버리며 퍼졌고 그것에 닿은 화살들은 금속의 화살촉 마저 녹아버리며 힘을 잃고 공중에서 바다 위 로 후두둑 떨어졌다. "줄리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믿을 수 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이 바라보며 시오 가 소리쳤을 때 줄리탄은 그제서야 자신이 검을 뽑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심장이 멈춰 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피가 돌지 않으며 산소가 차단되고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동시에 비 명을 지르며 죽어버리는 기분. 줄리탄은 인피타르를 떨어트리며 세상 이 뒤집혀 버리는 것 같은 현기증에 가슴을 쥐고 무릎을 꿇었다. 자기 몸에 퍼져 있는 생명의 형체를 잡을 듯이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부서 지며 사라지고 있는 것도 분명히 느껴졌다. "으으으아아악!!"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리는 것 같은 괴로움. 카넬리안의 얼굴이 잠시 스쳤다.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여기서 죽는 거야? 고작 화살 몇 개 막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멋대가리 없는 최후지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꺼야. "줄리탄! 내 말 들려? 정신 차려!" 시오가 숨이 멈춰버린 줄리탄을 눕히며 소리쳤는데 그냥 환청처럼 들 린다. 그리고 뿌연 줄리탄의 눈에 물키벨의 얼굴이 보였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물키벨이 되겠구나. "숨을 크게 들이 쉬세요오" 물키벨은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스리 귀엽게 말하며 줄리탄의 이마 를 쓰다듬었다. 뭐, 뭐야 이 여자는. 놀리는 건가. "아 숨 쉬라니까!!" 물키벨이 작은 주먹으로 줄리탄의 가슴을 퍽하고 찔렀다. 갑자기 트 인 줄리탄의 입과 코로 막혔던 공기가 들어와 온 몸에 퍼지는 것 같다 . 곧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울림도 사라지면서 소리가 들리고 감각이 돌아오고 심장이 빠른 속도로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 살았다?" "오직 화살을 막아야 겠다는 생각만 한 것이 다행이야. 쓸데 없는 생 각이 끼어 들었다면 넌 죽었어." 물키벨은 다정한 목소리로 참 무서운 말을 잘도 속삭였다. 멍해진 줄 리탄. 인피타르가 그런 검이었단 말인가? 인피타르는 뽑는 자가 바라 는 힘 만큼의 생명력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만약 '카넬리안과 평생 같 이 있고 싶어!'라든지 '에이씨! 난 저 놈들 죽이고 세상의 왕이 될꺼 야!'라는 모호하고 거창하고 욕심 많고 무리한 생각을 품고 검을 뽑는 다면 그 순간 그 엄청난 욕심의 대가 만큼 모든 생명력을 가져간다. 도박과 같은 것이다. 무리한 걸 바라면 전부를 잃게 된다. "이 검에 대해...... 알고 계세요?" "테시오스에게 받았겠지? 아아 그 늙은이. 정말 죽지도 않고 이런 순 진한 아이를 아직까지 가지고 논다니까. 아무튼 잘 했어. 검을 쓰는 자는 자고로 처한 상황에 대해서만 집중해야 하거든. 잡생각이 끼어들 면 죽는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검이 바로 이 인피타르지." 나이값 못하는 수장 물키벨과 괴팍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테시오스가 무슨 관계일지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물키벨은 별로 그 노인네 생각 하고 싶지 않다..... 라는 표정으로 줄리탄에게 말했다. 메이는 평소 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들이 자꾸 터지자 좀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 "당신들은...... 정체가 뭐죠?" "아 이 분은요! 바다의 지배자이신 해룡의 수장 물키벨 입니다!" 부하 중에 하나가 신이 난 얼굴로 물키벨을 소개하다가 눈썹을 움찔 한 물키벨이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님! 물키벨 님이라고! 님이 빠졌잖아!" 어떤 의미에서...... 물키벨은 카넬리안과 비슷한 여자였다. 용과 관 계된 여자들은 다 이런가. "해, 해룡?" "아아. 시끄러운 해룡이지." 톨베인이 '저런 여자 싫다.'라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물키벨이 획 노려보았다. 슬쩍 자리에서 피하는 톨베인. 물키벨은 잠시 잊었던 생 각이 돌아와서는 멀찌감치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해적 연합을 보며 이 를 갈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바다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무례한 놈들 을 어떻게 손 봐줘야 잘 처리 했다고 소문이 날까." 그렇다. 물키벨은 자신에게 '젓비린내 나는 년'이라는 잊을 수 없는 모욕을 안겨준 그들을(그녀는 스엔과 해적연합을 한묶음으로 보고 있 었다.) 그냥 놔 둘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레비아탄. 도착했습니다.' 그때 물키벨의 머리속에 충복 중에 하나인 레비아탄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손벽을 짝 치는 물키벨. "와아 정말 오랫만에 와줬구나! 그래! 너하고 크라켄하고 나서서 저 지지리도 우둔한 놈들에게 바다의 위대함을 일깨워 줘라. 한 놈도 빼 놓지 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갑자기 물키벨이 실성한 여자처럼 혼자 신나서 중얼거리자 시오와 톨 베인은 '이 여자 드디어 실성했나.'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 받았 는데 그때 정박해 있던 해적선들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동강 나 버렸다. 그 거대한 배가 갈라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것은 물로 만들어진 칼날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배 밑에서 부터 솟아 올라온 물의 칼날은 순식간에 배를 두조각내며 하늘로 올라 가 핏방울처럼 물기운을 흩뿌렸다. 레비아탄의 힘이었다. "세, 세상에....... " 해적 연합들은 말 그대로 바다의 저주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모습을 도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수백개의 공포스러운 촉수들이 몇백미터나 늘어지며 도망치 는 해적들을 쫓아가서 잡아 올리기 시작했다. 어둠속에서 꿈뜰거리며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는 엄청난 수의 촉수들은 당하는 이 뿐만 아니 라 보는 이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공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 살려줘!!" "죽기 싫어! 으흐흑!" 부서진 해적선에 타고 있던 자들은 바다에 빠져서는 믹서기처럼 소용 돌이치기 시작한 레비아탄의 물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 속에 빠진다 면 몸이 분해되어 형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줄리탄은 그 장면을 보다가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물키벨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두세요! 저런 짓!" "뭐야! 너 감히 해룡의 수장에게 명령하는 거야?" 물키벨은 줄리탄의 행동이 기분 나쁜 듯이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줄 리탄은 키가 작은 물키벨을 내려보며 다시 말했다. "부탁하는 거에요. 저런 건....... 학살이잖아요." "그게 어때서." "어떻다니요. 감정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게 할 짓이에요?!" "나쁜 인간들은 저렇게 다뤄야 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오래 살았다면서, 저런 방법으로 밖에 인간들을 못 다룬다면 당신은...... 당신은 정말 형편 없는 용이야!!!" 줄리탄은 아비규환의 비명 속에서 물키벨이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랗 게 소리질렀다. 줄리탄이 화가 난 얼굴로 외치자 충격을 받은 듯이 울 먹울먹한 표정이 되어 버린 물키벨. "아...... 안할께. 소리지르지 마." 그와 동시에 크라켄과 레비아탄은 행동을 즉시 멈추며 정적으로 돌아 갔다. 그제서야 줄리탄은 다시 가슴이 아픈지 몸을 숙이곤 물키벨에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소리쳐서." "너. 카넬리안이 너 때문에 맘고생 정말 심했겠다. 그 아이 성격에 너 같은 주인이라니. 하긴.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귀여운 녀석이야 정 말." 물키벨은 베시시 웃으며 줄리탄의 머리를 매만졌다. '으이구. 정이 흘러 넘치는 녀석.' 이라고 중얼거리며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려는 톨 베인은 근처에서 다가오고 있는 자를 보며 경계의 눈초리를 품었다. "저 녀석은 뭐야." 그들에게 큰 키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물에 젖은 긴 머리칼. 타 이트한 검은 셔츠가 구름에 걷힌 파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매끈한 체형 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였다. 엷은 미소를 띄고 있는 그가 물키벨에게 다가오자 물키벨은 환한 얼굴로 사뿐사뿐 달려가며 그를 냅다 껴안아 버렸다. 키가 작아서 거의 허리 끝을 안을 수 밖에 없었지만. "레비아탄. 물키벨 님께 인사 드립니다." "레비야아. 백년이나 어디 가 있었어. 딱딱한 문어 녀석하고 재미 없 었단 말야." 물키벨은 굉장히 기쁜 듯이 레비아탄의 미끈한 배에 마구 볼을 부벼 대며 잔뜩 칭얼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구십칠년입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이젠 곁에 있겠 습니다." "으응. 이제 가지 마아. 알았지?" 확실히 용들이라서 그런지 시간 개념이 보통 스케일이 아니었다. 97 년동안 생각할 것이라면 뭔지 모르겠지만 물키벨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보기 민망하게스리 계속 안개 같은 미소를 띄고 있는 레비아탄에 게 꽉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장면을 보던 줄리탄이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들, 보면 볼 수록...... 인간 같아." -Blind Talk 쿠쿠쿵. 일간 연재의 행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그래봐야 3일이지만) 뭐 아무튼 메이의 나와바리 싸움도 일단락 되었습니다만...... 이제 뭐 스토리 쭉쭉 진행해 나가야 겠지요.(비축분은... 끝입니다.) 레비아탄. 바다에선 날렵한 상어 모습입니다. 욥기에서 표현한 모습과 는 좀 다르지만...... 아무려면 어떻겠습니다. 얼굴이나 체형은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지만(소설에서 거의 미형 베스 트5에 들어간다고나?) 뭐랄까 노골적인 묘사는 좀 쑥스럽기도 하고 무 엇보다 말이죠...... 레비아탄이라는 이름과 말쑥한 남성과는 뭔가 괴리감이 느껴져서 걱정 입니다.(이제와서 이름 바꿀 수도 없고.) 물키벨은 줄여서'레비'라고 부르긴 하는데...... 뭐랄까 애완견 이름 같잖아 그거.-_-; 앞으로 잘 가꿔 줘야지. 리바이어던이라고 하면 길고 어감이 안 좋아 서 그냥 희랍어 그대로 레비아탄. 물키벨을 비롯한 용들이 인간형을 하고 있는 건 괜히 폼나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3부쯤에서 밝혀지겠지만...... 뭐 별로 재 밌는 비밀은 아니라서. 최근 EZ2DJ 2가 나와서 기쁩니다. EZ2 시리즈는 dance만 빼고는 모두 질리도록 즐겨 봤습니다.(훗. 피아노 배운 것에 대한 향수일까나.) EZ의 화려한 비주얼도 참 좋아하지만(특히 3rdBASS 준호군의 약간 퇴 폐스러운 스타일은 정말 멋집니다.) 음악에 빠져서 다섯개의 건반을 쉴새 없이 두드리는 맛 때문에 제 주머니돈을 번번히 털어가는 게임입 니다.(얼마전 까지는 키보드매니아를 했었습니다만.) 음 예전에 blind talk에서 잠깐 소개했었지만 http://member.hitel.net/~3rdBASS/ 준호의 사이트. 한번 들려주세요. 요즘은 바쁜지 업데이트 잘 안하지 만 그래도 스타일 좋은 그림들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이트들은 왜 그 런지 모르겠지만 거진 다 close 해 버려서 원. EZ2 덕분에 책사거나 운동하러 외출할 때 한동안 안가던 오락실에 다 시 출입하고 있습니다. 수영장을 다니려고 합니다. 헬스는..... 예전에 다니던 곳이 여성 전 용으로 바꿔 버려서 끝장이고 무너져 내려가는 몸을 추스리기 위해 수 영을 하려고 결심. 일단 근처 수영장 이용료가 매우 싸서 결정했습니 다. 수영은 어려서부터 좋아해서 다니는데 지장은 없겠지만 이 추운 날에 수영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기분도...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하루 종일 싸돌아다니면서 빙판에 한번도 넘 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봐서 최근 운수가 좋은 듯 싶네요. 곳곳이 위험입니다. 빙판 조심. 마음 조심. E-MAIL : billiken@hananet.net Enya의 The train to paris 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1453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9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10 22:28 읽음:19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9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45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10 16:34 조회:37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9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Zaratan, the islet fish 1. 메이와 부하들까지 승선한 가운데 범선이 출발한지 이틀 정도가 지났 다. "좋아! 던져!" "괜찮겠어? 죽어도 난 몰라." "내가 그거 하나 못 잡을 것 같냐! 자아 힘껏 던져!" "내 단검은 그때의 느려터진 화살과는 달라." 범선의 선상이었다. 톨베인은 귀찮은 표정으로 선수에 서 있는 시오 를 바라보며 단검을 손가락으로 돌리고 있었고 시오는 자신만만한 얼 굴로 톨베인에게 외치고 있었다. "아 글쎄 던지라니까!" "쳇. 어쩔 수 없군."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예전 석궁의 화살을 잡아낸 톨베인과 말싸움이 붙은 시오가 자기는 '석궁 할애비'가 와도 잡을 수 있다면서 톨베인에 게 단검을 던져보라고 호언장담을 한 것이다. 그들 주변에서 얄밉게스 리 돈 내기를 하고 있는 해적들 사이에 물키벨이 쭈그려 앉아 팔을 들 어 올리며 힘차게 응원하고 있었다. "와아 재미있겠다아! 시오 이마에 폭하고 박혀 버려라!" "그, 그런 악담 늘어 놓지 말아요 물키벨 누님!" 물키벨 덕분에 갑자기 섬뜩해진 시오가 물키벨을 보며 소리쳤고 그때 파앗하는 소리와 함께 톨베인이 단검을 던졌다. 때 아닌 위기. "우아악!" 박수 치듯이 짝하며 얼굴로 날아든 단검을 두 손바닥으로 잡은 시오. 식은땀이 다 흐른다. 시오가 쳐죽일 것 같은 목소리로 톨베인에게 외 쳤다. "주, 죽을 뻔 했잖아!! 말할 때 던지는 게 어딨어!" "느리게 던진 거야." 또 다시 둘의 말싸움이 시작되었고 멀찌감치서 그 장면을 지켜 보던 줄리탄이 중얼거렸다. "시간 남아돌면 바닥이나 닦지...... 뭐하고 있는 거야 저녀석들." 하도 한심해서 고개를 돌린 쪽에선 미젠 마스트(mizzen mast)에 기대 어 있는 메이가 무거운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살았 지만 이제 배 한척도 남지 않은 해적단의 두목이라니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던 탓일게다. "남해의 바다는 따뜻하네요." 그런 메이에게 줄리탄이 다가왔다. 손에는 다시 낚시대로 전락해 버 린 요도(妖刀) 인피타르가 들려 있었다. 메이는 줄리탄의 목소리에 고 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여자치곤 약간 허스키한 저음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바다에 있었나요? 줄리탄 씨." "예에 뭐. 북해 레오노라. 가르바트 출신이에요 저." "거기선 해적들도 얼어 붙어 버릴 거에요? 이곳 사람들은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곳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해적은 모르겠지만..... 어부들은 많아요. 좋은 물고기들 많으니까. 페세테르 같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줄리탄은 슬쩍 웃고 있는 메이를 바라보았다. 시 원시원한 얼굴과 큰 키, 바닷바람에 물결처럼 흔들거리는 밤색 머리칼 이 중성적인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카넬리안 같은 굉장한 미인 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누님' 같은 편안한 모습이다. "그때는 솔직히 무서워 보였어요. 메이 씨의 모습." "그때?" "그날 밤이요. 부두에서 싸우던...... " "에헤헤. 창피한 모습 보여줘 버렸네요?" 메이는 혀를 쏙 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러니까 더욱 그때 엄청난 입담을 보여주며 사투를 벌였던 여자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졌다. 정말이지 해적일 때와 여자일 때가 확연히 구분되는 사람이다. 그녀가 궁금한 표정으로 말했다. "줄리탄 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평범한 요리사에요." "에에? 당신 평범하지 않아요." "예?"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해룡 들을 알고 있고 그런 무서운 검을 쓰는 사람이 평범하다면.... .. 세상에 평범한 사람 하나 없겠네요." "아, 그렇게 되나요?" 줄리탄은 뒷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이제 남들의 눈에 '범상치 않은' 자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 묘한 느낌이다. 카넬리안을 만나고 아직 일년 아니 반년도 안되었는데 만나기 전과의 자신과는 전 혀 다른 '나'가 되어 있었다. 변해 버렸다기 뭐다는 뭐랄까...... 성 장한 것 같다. "줄리탄 씨는....... " "저 아직 열일곱이에요. 말 편하게 해 주세요." "정말? 그렇게 어려?" 금새 반말을 하게 된 메이가 놀란 얼굴로 줄리탄을 바라 보았다. 덩 달아 자기도 놀란 줄리탄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는 건가......" "아니. 어려보여. 실제로도 어리네 뭐. 난 그냥 그런 검 뽑고 휘두르 는 거 보니까 그래도 보기보다 세상풍파 많이 겪어본 녀석이 아닐까 생각해서 말야." 19세인 메이도 늙었다고는 절대 말 못할 나이지만 해적이기 때문에 자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녀가 보기에도 줄리탄은 그다지 강해 보이 지 않는 외모에 비해 꽤 독한 면이 있어 보였다. 줄리탄은 실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누굴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좋아한다면...... 아빠하고 내 부하들." "아니 그거 말고. 사궈본 적 있냐고요." 줄리탄의 말에 메이는 정색을 하며 손을 내 저었다. "난 남자 친구도 없어. 손도 잡아본 적 없다고. 국보감이지? 하아아 어떤 얼빠진 남자가 해적 두목 같은 위험한 여자를 좋아하겠어." 사실 그녀가 아직까지 애인하나 없는 이유라면 '몹시 바쁘기' 때문이 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옆에서 털난 사내들에게 둘러 싸여 걸음마를 배우고 검을 배우고 이제는 쳐들어 오는 해적들과 정신 없이 싸우느라 바빠 죽겠는데 누굴 사귄다는 건 생각조차 못해본 것이다. 그런 의미 에선 나름대로 불쌍한 여자였다. "넌 사귀는 여자가 있나 보지?" "뭐랄까...... 꼭 사귄다기 보다는....... "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과 카넬리안의 관계를 '사귄다.'라고 표현할 수 는 없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해적 두목보다 궁룡의 성격 엄청난 씰 인 카넬리안이 백배는 위험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잠시 헤어져 있어요." 이렇게 표현하니까 둘의 관계가 꽤 '평범해' 보인다. "왜?" "내가 멋대로 해서 화가 났거든요 그녀가...... " "너 의외로 독단적인 남자로구나?" "좀 그래요. 상대 기분도 몰라주고." 메이의 말에 줄리탄은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니 애인은 어디에 있는데? 달라카트?"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지 않아서." "단단히 삐졌나 보네." "대륙 어디에 있더라도 다시 찾을 꺼에요. 만나서 미안하다고 말해주 고 계속 같이 있자고 붙잡을 테니까. 절대로 놔주지 않을 꺼니까." 줄리탄은 자신의 생각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했고 메이는 슬며시 싱글거리며 느릿느릿 말했다. "차암 낭만적이네. 행복하겠다 그 여자. 이름이 뭐야?" "카넬리안이라고 지어 주었어요. 눈이 빨갛거든요." "으음 붉은 눈동자라...... 어? 지어주다니?" "카넬리안은 씰이에요." 줄리탄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며 뭐라고 외치고 있는 물키벨을 바라보았다. 메이는 놀란 얼굴로 생각을 다듬다가 믿기 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혹시 테이머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줄리탄은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 는 메이가 실소를 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아. 정말 평범한 녀석 아니잖아." "줄리탄! 줄리탄!" 물키벨은 또 뭐가 그렇게 좋은지 호들갑을 떨며 줄리탄의 팔을 끌고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거야! 저거!" "저게 뭔데요?" "자라탄!" "자라탄?" 수평선에 작은 점 하나가 걸쳐 있었다. 섬 같았다. 2. 물키벨은 줄리탄이 카넬리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때 부터 왜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줄리탄을 도와주기로 결심한 듯 싶었다. 거 기에 메이를 보고 '그렇다! 해적이 되는 거야!'라고 혼자서 들떠버린 물키벨은 메이와 부하들까지 끌고 멋진 '섬'을 하나 주겠다면서 이런 망망대해까지 끌고 와 버린 것이다. "자라탄이 뭐에요?" "응. 곧 알게 돼. 에헤헤." "어 섬이잖아? 이런 곳에...... " 메이가 자라탄이라고 불리는 '섬'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머리속에 담고 있는 바다의 개념도에 의하면 이 부근에 섬이 있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섬은...... "저, 저거 여기로 다가오고 있는 거 아냐?" 시오와 톨베인을 비롯해서 메이의 부하들까지 눈을 의심하는 장면이 었다. 시력 좋은 톨베인이 아니라도 자라탄이 빠른 속도로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바람도 없이 범선 이 움직이더니 이제는 섬이 바다를 돌아다니는 건가. "물키벨 누님...... 저건 또 뭐랍니까?" 줄리탄을 만난 뒤로부터 하도 이상한 일들을 많이 당해서 여간해선 놀라지 않을 시오가 이번에도 황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섬물고기(islet fish) 자라탄이야! 저거 빌려줄께에!" "무, 물고기?" "응. 내 충신 중에 하나지. 내가 허락하지 않은 배가 가까이 오면 격 침시켜 버리거든!" "...... 격침시킬 것 까진 없잖아요." "이 부근에서 배들이 이상하게 자주 침몰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 메이가 허망하게 혼잣말을 했다. 아무튼 줄리탄 일행은 또 대단한 걸 얻어 버린 것이다. 이동하는 섬이라니.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자 라탄은 자체적으로 마력방어벽을 섬 전체에 두를 수도 있고 꽤 먼거리 에 있는 바다의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는 그러니까...... 레이더 기 능까지 가지고 있는 (이 시대에선) 전자동 최첨단 하이테크 모함(母艦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라탄이 '불침의 기동요새'라는 화려한 별칭으로 위치가 노출되지 않는 가스발 사략함대의 근거지로 유명해 진 것은 몇달 지나지 않아서 였다. "저 그런데...... 물키벨님?" "왜에?" "저거 물고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거 잠수 안해요?" 생각해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섬물고기 위에서 행복하게 집짓 고 잠들었다가 깨어 보니까 심해 수백미터 였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겠는가. "수백년마다 한번씩 잠수해. 하지만 걱정하지마. 적어도 너희 인간들 죽기 전까지는 잠수 안 하니까. 너희 백년도 못 살잖아?" "빨리 죽는 인생이라서 미안하군요." 줄리탄은 뭔지 모르게 기분 나빠서 투덜 거렸다. 그때 뭔가 떠올랐다 는 듯이 손벽을 탁 치는 물키벨. "생각해 보니까 말야...... 레비아'탄', 자라'탄'....... 그리고 줄 리'탄'? 왜 내 주변 녀석들 이름 끝엔 '탄'이 붙는 거지?" "남의 이름들 가지고 연관성 만들지 말아요." 줄리탄은 카넬리안이 '카'로 시작하는 이름이 많다고 투덜거릴 때를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좋아 뭐. 줄리탄도 '탄'이니까 내 부하로 여기고 많이 가르쳐 줄 께에." "....... 절 도와준다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상당히 맥이 빠지는 줄리탄. 아버지가 이름 하나는 잘 지어 주었다. 그때 시오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나도 이름 시오탄으로 바꿀테니까 뭣 좀 가르쳐 줘요. 누님." "...... " 일순간 전원 침묵. 참으로 한심한 개그였던 것이다. 카넬리안이 있었 다면 그대로 시오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에 바다에 던져 버렸을 거다. 톨베인이 너무 저질스러워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한번만 더 그 피말리는 헛소리를 했다간 친구한테 칼 맞는 비극을 맛보여 줄테다. 진.심.이.야." "....... 아마릴리스였다면 웃어 주었을 꺼야." 시오는 자신의 유머감각이 모두에게 외면 받자 처량하게 어깨를 늘어 트리며 어두컴컴하게 갑판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게...... 자라탄?" 사람들이 시오의 참을 수 없는 허탈함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어느샌 가 자라탄이 배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것은 크라켄보다도 몇백배는 거대할 정도의 수풀이 있는 아늑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줄리탄 일행은 그 섬에서 홀로 방황하고 있는 한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녀는 테이머가 버린 씰 그레시다였다. -Blind Talk 고운 손가락이네 미쳐 몰랐었어 언제나 곁에 있었다고 믿을 수가 없어 이렇게 아름다운 그대가 나를 기다려주었는데... 어떤 괴로움이라도 털어놓으라고 그렇게 말해주었는데... 시간이 언젠가 두사람을 다시 처음만났던 그날로 이끌어준다면... 두사람으로 살아가는 소중한 의미를 포기하지않고서 함께 이야기나누고 노력하자고 약속할꺼야 "내게는 시작이었어, 그대에겐 마지막이지만..." 눈물이 흘르는 그대의 눈동자에 아무것도 말할수 없었어, 아직까지도 사랑하니까... 두번 다시 만나지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던 그 날 겨우 알게된 사실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음이 늦었지만 이 세상 모든 괴로움 혼자서 짊어졌던 그 때 돌아서는 내 뒷모습과 얘기하던 그대는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겠지 시간이 언젠가 두사람을 다시 처음 만났던 그 날로 이끌어준다면 물처럼 공기처럼 그 소중한 의미를 모른 채 당연한 사랑따윈 없다고 가슴에 새겨두자 짧은 여름의 끝을 알리는 파도소리밖엔 들리지않아 이제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께 그대 뒷모습에 조용히 '안녕...' ....... J-WALK의 곡들을 좋아합니다. 꽤 우리나라의 감성에도 어울 리는 컨츄리틱한 노래들이라서.(그리고 나 자신이 아저씨 풍의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고.) 으으 그런데 이 그룹 노래는 CD도 MP3도 구하기가 힘들어서.(CD라고는 일본갔을 때 중고CD샵 뒤져서 구한 세장 뿐.) 아. 레비아탄, 자라탄, 줄리탄을 물키벨은 모두 '탄'으로 끝난다고 말했지만 사실 해수(海獸) 레비아탄은 than이고 도어(島魚) 자라탄 은 tan이니까 영어 발음은 서로 다릅니다. 이 세계에서 한글을 쓰지 않는 이상 같은 '탄' 발음으로 불릴 확률은 별로 없는 듯한데 아무려면 어떻겠습니다...... 그냥 슬쩍 넘어 가렵니다. 이런 세계에서 뜬금없이 욥기에나 나오는 레비아탄이다 베히모스다 하는 이름들 튀어 나오는 이 유는 3부에서 밝혀 집니다.(역시 재미 없는 이유랄까?) 레비아탄하면...... 자꾸 토마스 홉스가 떠올라서.-_-;; 에 그리고 나우에서 어떤 분이 '산뜻한 얼굴로 음담한번 일품일세' 라는 대사와 아스피린이라는 만화에서 나오는 대사를 비교해 주셨는데 실은 말이죠..... 배꼈습니다. 최근 '밀가루 커넥션'과 함께 엄청나게 재미있게 보는 만화라서(특히 뻔뻔스런 대사와 상황이 재미있음.) 그 대사가 계속 머리속에 맴돌았는데 결국 상황에 크게 어울리지 않는 데도 써먹게 되네요. 그 분도 그 대사 재미있었는 듯? (아아 나중에 문제되면 바꿔야지. -_-;) 지뢰진도 끝나고 무한의 주인과 카페 알파(원제가 뭐더라.)도 너무 뜸 하게 나오고 그린 힐도 끝나고 용오도 뜸하게 나오고(거의 좋아하는 일본 만화들은 애프터눈 연재 작품들....... ) 거의 일본 만화는 베르 세르크만 보고 있는데(도리어 우리나라 만화와 미국 만화를 많이 보는 편. 일이기도 하고... ) 세븐틴 러브!(원제가 키라키라 였던가...)같 은 만화가 다시 나와 주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작가(아다치 테츠)의 만화는 뭐랄까 스토리 플롯도 부시고 캐릭터 이미지도 부시고 드라마도 부시고 독자의 기대감까지 부셔버리면서 잔인하게 보여주고 싶은 한가지 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보는 제가 감동을 느꼈습니다. 내 용도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지금까지 보면서 가장 웃었던 출판만화로는 유유백서의 요시히로 도카 시가 월간 챔프에 연재했던 레벨-E 였습니다. 여간하면 웃지 않는데 그건 보다가 숨 넘어갈 뻔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독하게 뻔뻔하고 전 형적인 스토리 구조를 인질로 잡고 그걸 부셔버리면서 웃기는데 아직 까지 그 단행본을 구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울 정도. 국내 해적판으 로 수년전에 '외계인'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지나가다가 발견하지 면 꼭 한번 보세요. 추천 입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만화나 게임 같은 것에 대한 잡담을 늘어 놓으면 길어 지네요. 좋아하기도 하고 직업이기도 하고, 오묘한 경계 선에서 휘청거리며 벌써 7년 정도 살았습니다. 아 그리고 대마왕전 쓰신 아수라 님과 채팅 중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당황스러운 '드래곤 레이디' 염가 판매 사이트.-_-;; http://halla2000.co.kr/home/ng/103002..htm 한번 가보세요. 사달라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누군지 한번 눈여겨 봐 주시길. 대체..... 이사쿠라니. 난 일본인이 아닐 뿐더러 하필이면 이사쿠가 뭐야 이사쿠가. 안그래도 책도 빨간 색이라서 18금 분위기 풍기는데 말야. 화가 난다기 보다는 황당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끔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제 책에 대한 선전문구나 관련글들을 보면 '아아. 창피해...... '라는 생각이 들며서 황급히 브 라우저를 닫아 버리곤 합니다. 역시 잘 적응이 안돼서..... ) E-MAIL : billiken@hananet.net 영화 BLADE RUNNER의 OST 중에서 Tears in rain을 들으며... (너무나 좋아해서 음악도 대사도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 영화.) 『SF & FANTASY (go SF)』 123064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0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0 15:17 읽음: 6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0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75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14 14:27 조회:835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0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useless 1. "어째서 나 혼자서 먹을 걸 찾아다녀야 하냔 말야." 줄리탄은 큼지막한 그물 주머니를 둘러매고 인적이 없어 보이는 자라 탄의 수풀 속으로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대뜸 '줄리탄을 가스발 해적 단의 명예로운 수석 요리사로 임명한다!'라고 물키벨이 멋대로 외친 뒤에 당장 수십인분의 식사를 만들어 놓으라는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 린 것이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어이없는 감투를 쓰고 식사 준비를 해 야하다니 뭔가 상당히 억울한 줄리탄이었다. 말이 수석 요리사지 주방 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꼴이 말이 아니다. "확 그냥 조개살 잔뜩 들어간 해물 스프를 만들어서 억지로 먹여 줄 까 보다!" '해물은 싫어!'라고 외친 해룡의 수장 물키벨을 떠올리며 연신 궁시 렁 거렸다. 확실히 물키벨은 바다의 지배자 답게 자기 자식들 같은 해 물을 먹지 않는 거구나 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물키벨이 해물 을 먹지 않는 이유라면 '꽤 비려서' 였을 뿐이다. 정말 인간 같은 용 이었다. '향신료만 적당히 쓰고 잘 다듬기만 하면 전혀 비리지 않게 만들 수 도 있는데 말야...... ' 아직까지는 검보다는 국자나 부엌칼 쓰는 것에 훨씬 친숙한 줄리탄은 주변을 훌터보며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떠올리곤 나름대로의 레시피 를 머리속에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버섯 요리가 좋을까나?" 줄리탄은 좀 울창하고 어둑하게 이어져 있는 앞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런 곳에선 버섯 같은 균사류가 많이 있다. 물키벨에 게 재료 준비를 맞겼다간 총천연색 독버섯만 잔뜩 따와서 위기감을 조 성시켰겠지만 버섯의 '안전성'을 판단할 수 있는 줄리탄이라면 버섯 요리도 충분히 매력적인 식단의 하나이다. '카넬리안은...... 샐러드를 좋아한다고 그랬었지?' 카넬리안은 특별히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을 뿐더러 거의 먹을 것을 입 에 대지 않았지만 예전에 줄리탄에게 '꼭 만들어 주고 싶다면 차가운 샐러드를 먹고 싶어.'라고 말했었다. 샐러드란 여러가지 맛이 나는 계 절야채와 향채, 과일들을 조화롭게 섞고 그것에 어울리는 드레싱을 만 들어 뿌리는 전체요리라고 했지. 그런데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드레싱 을 만들다니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좋아. 샐러드도 만들어 보자. 어떻게든." 줄리탄은 자라탄 깊은 곳으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2. 해변가에선 메이와 부하들이 동원되어 배의 도구들을 섬으로 끌어 오 고 천막 같은 가건물들을 만들고 있었다. '물키벨 님. 깜빡 잊고 한가지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은 전혀 도와주지도 않고 레비아탄이 나무에서 따 준 큼 직한 과일 하나를 두 손으로 잡고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물키벨에게 자라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는 거대한 섬물고 기에 묘하게 어울리는 가느다란 여성의 것이었다. "뭔데? 이 섬에 원주민이라도 살고 있어?" 물키벨은 딱딱한 과일 껍질을 벗길 방법으로 찾지 못하자 화가 나선 두 손바닥으로 과일을 탁탁 쳐대며 대답했다. '씰이 있습니다 이 섬에는.' "씰? 그런게 왜 여기 있는 거야." '몇년 전 쯤에 작은 씰 하나가 정신을 잃은 채 바다를 떠다니고 있어 서 제 등에 태워 주었습니다.' 자라탄의 등이라면 이 섬이겠지. 물키벨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 과일 껍질을 이제는 주먹을 쥐고 두드리다가 울상이 되어선 소리쳤다. "우이잉! 짜증나! 이 놈의 과일은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 제 말 좀 들어 주시죠.' "아? 응 듣고 있어. 그럼 그 씰 테이머가 있다는 소리야?" '아마 그런 것 같은데...... 테이머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 씰은 저와 대화하려 하지 않고 계속 섬을 방황하고만 있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설마 공격적이진 않겠지?" '그 씰은 아무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혹은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 리고 있거나요.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에 겁을 내고 있더군요.' "으음. 능력이 없는 씰도 있었나. 아무튼 그건 그렇고, 자라탄?" '예?' 물키벨은 두손 한가득히 들고 있는 커다란 과일을 원망스럽게 내려보 며 말했다. "이 과일 먹는 방법 좀 알려줘. 목 마르단 말야." '...... ' "모르는 거야? 니 등 위에서 자라는 과일이잖아." '레비아탄 님께 부탁하십시오.' "우에엥. 왜 그렇게 항상 매몰찬 거야." 도어(島魚) 자라탄은 주의가 산만하기 이를데 없는 자신들의 수장에 게 할 말을 잃었는지 '통신'을 끊어 버렸다. 물키벨은 한동안 자기 머 리 보다도 훨씬 큰 과일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보며 생각하다가 결국 그걸 껴안고 뒤뚱거리며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용으로 변해서 이걸 씹어 먹으면 되겠지. 히잉.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뭐!' 해룡들의 미래가 불안해지는 순간이었다. 3. '발자국? 이런 곳에...... ' 줄리탄은 습한 흙에 찍혀 있는 작은 발자국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 을 지었다. 처음에는 일행 중에 하나 것이려니 했지만 잘 보니까 너무 조그만 크기인데다가 맨발이었다. 물키벨의 발이 작긴 했지만..... 그 녀는 샌들 같은 것을 신고 있었잖아 생각해 보니까?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 ' 허락 받지 않은 누구도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라탄인데 그럴리야 없겠지만 줄리탄은 그걸 분명히 인간(혹은 인간형)의 것이라고 생각하 며 발자국을 따라갔다. 어찌보면 꽤 위험한 행동이건만 상대가 '위험 한 존재'가 아니라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 동굴?' 몇분쯤 걸었을까 작은 발자국의 흔적들은 동굴로 이어져 있었다. 아 무래도 낮선 곳의 시커먼 동굴 입구라는 건 밤이 아닌데도 보고 있자 니 몸이 움츠려든다. 줄리탄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 는 소리쳤다. "아무도 없어요오오?" 대답은 없고 희미한 메아리가 동굴 속의 더운 공기를 타고 돌아올 뿐 이다. 몇번을 불러 봤지만 소용 없었다. 혼자서 들어가긴 좀 무서운데 . 역시 사람들에게 일단 알리는 편이......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들 기 시작했을 때 동굴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어엇!"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잔뜩 헝 크러져 있는 새하얀 머리칼을 길게 내리고 있는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 줄리탄은 두려워하는 표정의 그 아이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여기 살고 있니?" "...... " 그녀는 물빛의 멍한 눈동자로 말없이 줄리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거야?" "...... 주인님?" "?????" 뭔가 불길한 기분이 줄리탄의 등골을 탔다. 이 분위기에 이 대사라면 분명히..... 하지만 이 소녀는 깨어 있었다. 카넬리안이 씰은 계약에 들어가기 전에는 잠들어 있다고 분명히 그랬었단 말이다. "절 버리지 않으셨군요. 주인님. 앞으로는 절대로 주인님을 실망시키 지 않도록...... " "미, 미안하지만. 나 네 테이머 아냐."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애절했기 때문에 줄리탄은 사실을 말하는데도 미안할 정도였다. 그 소녀는 천천히 동굴에서 나오며 줄리탄을 한참 동안 올려다 보았다. "아니었군요. 제 주인님이...... " "으응. " "...... 죄송합니다." "아, 아냐. 이름이 뭐니?" "그레시다...... 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줄리탄은 그녀의 사정은 몰랐지만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이 괴로 워하고 있는 표정에서 카넬리안이 떠올랐다. 씰이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반쪽짜리 생명체'라는 카넬리안의 말이 기억났다. 4. "그 아이는 누구야?" 간단하게라도 집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활엽수잎들을 어깨에 잔뜩 짊 어지고 나르고 있던 시오는 요리 재료를 구하러 갔던 줄리탄이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소녀를 데려오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줄리탄은 그 냥 할 말을 찾지 못한 듯이 뒷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다. 불안한 얼굴 의 시오. "서, 설마 너...... 요리 재료로 가져온 거야?" "그럴리가 없잖냐." 한숨을 내쉬는 줄리탄에게 다가온 것은 톨베인이었다. 그는 후덥지근 한 날씨에 항상 입던 얇은 상의까지 벗어던져 햇빛에 그을려 있는 빈 틈 없는 몸이 들어나 있었다. 그레시다는 크고 작은 흉터 투성이인 톨 베인의 몸을 보며 깜짝 놀라선 줄리탄 뒤에 숨는 것이었다. 눈살을 조 금 찌푸리는 톨베인. "저 계집애, 식량이냐?" "아니라고 그랬잖아!!" "그럼 뭐야?" "얘 씰이야. 그레시다라는....... " "...... " 시오와 톨베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특히 시오는 아마릴리스 때의 일이 떠오르는지 이 더운 날 식은 땀까지 흘리면서 말했다. "벌써...... 이름까지 정한 거야?" "카넬리안은 잊어버리기로 한 거냐? 너 꽤 냉정한 남자구나." 톨베인까지 거들자 억울한 줄리탄이 변명을 시작했다. "나 주인 아냐!! 조, 좀 들어봐!!" 그때 줄리탄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그레시다가 줄리탄의 옷을 살짝 쥐 며 올려다 보았기 때문에 그는 잔뜩 터져 나오려던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저...... 제 주인님이 되주시면 안되나요? 잠시라도." "...... " 테이머와 씰의 계약이라는 것은 신성한지는 모르겠지만 꽤 엄격한 강 제력으로 지켜지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너 이틀 동안 이 녀석 테이머 좀 되어 주라.'라는 식으로 구렁이 담 넘듯이 계약이 수정될 수는 없 었다. 게다가 그레시다의 테이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현재 살아 있는 상태이고 그렇다면 씰 스스로 새로운 주인을 선택하거나 바 꿀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시다의 줄리탄을 향한 '부탁'은 드물게 감정적인 것이었다. "제발......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 그레시다는 줄리탄의 옷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탄은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그 격노의 감 정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그레시다의 테이머를 향한 것이었다. 그 레시다는 카넬리안의 말마따나 씰이기 때문에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감정은, 인간을 닮은 감정은 존재하는 데 - 감정이 있다면 이리저리 팔아 넘길 수 있는 물건 따위가 아니잖 아. 그레시다를 이렇게 멋대로 방치해 둔 테이머에 대해 무엇보다 먼 저 울분이 터졌고 그것에 대한 구차한 이유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았 다. 카넬리안 식으로 말한다면 '일단 죽도록 두드려 패 준 뒤에 왜 때 렸는지를 알려주겠다!' 정도랄까. "저 아이가 자라탄이 말하던 씰인가 보네. 헤에 귀엽잖아." 물키벨이 입에 노란 과일 조각을 물고 웅얼거리면서 걸어왔다. 머리 가 흠뻑 젖어 있는 걸로 봐서 분명 바다에 갔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Blind Talk 빙판은 질색 입니다. 뛰어다닐 수가 없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e-mail : billiken@hananet.net 아무 것도 듣고 있지 않습니다. 『SF & FANTASY (go SF)』 123065번 제 목:[하/파옴] 드래곤 레이디 10-1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0 15:17 읽음: 47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1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86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15 15:25 조회:896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1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Parhelion 1. 케센을 운석이 휩쓴 이후, 불길한 그곳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악지 (惡地)가 되었다. 하기사 본래 케센은 동부 중심으로 발달한 달라카트 제국의 서부에 위치한 외진 도시일 뿐더러 폐허가 되어 버린 건물 일 부 만이 남아 버린 곳에 일상적인 목적으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달빛마저 희미하게 명멸(明滅)하는 을씨년스러 운 밤의 한복판이었다. "뭐야. 이 여자는...... " 케센에 모여든 자들은 지방 귀족의 사병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으로 반(反) 황실 레지스탕스들이 올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하기 위해 매복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병사들은 낡은 천에 감긴 무 언가를 껴안듯이 들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폐허 한가운데 말없이 앉아 동상처럼 사병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상한 눈동자잖아. 빨간 색이라니...... 처음 봐." 반쯤 시선을 내리고 있는 카넬리안의 눈동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심홍색 보석과 같았다. 아름답지만 차갑고 우아하지만 텅 비어 있다. 사병들은 이런 곳에 여자가 홀로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 다는 듯이 그녀 주변으로 다가가며 저마다 중얼거렸다. 묘하게도 폐허 와 어울리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고혹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장난이 아닌데...... 이거 임자있는 여자 아냐?" 비인간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에 사병들은 침을 삼켰다. 살아 있 긴 한건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그녀였지만 - 병사 중에 하나가 카넬 리안에게 말했다. "이봐 너. 이름이 뭐야. 어디 출신이야." "...... " 깨끗하게 깎아낸 조각상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의, 의심스러운 여자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조사해야 겠지?" "마, 맞아. 저항조직의 일원일 수도 있으니까 말야." 사병들은 서로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모두 내심은 홍등가에서 돈 을 억만을 주고도 얻기 힘든 카넬리안의 몸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예전 같았다면...... 그녀 가장 가까이 있는 자부터 미스트랄의 제물 이 되었겠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다. 예전에 아마릴리스가 그랬듯 이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의 존재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모두 매복해! 놈들이 오고 있어!" 사병들은 척후에서부터 들리는 명령에 일단 주변 폐허와 엄폐물들에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말하는 '놈'이란 물론 레지스탕스들이 다. 2. 레지스탕스의 막내로 장난스러운 소년 티가 가득한 프란츠는 기괴하 기까지 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끔찍하네요 여기는...... " 어둑해 지는 밤이 되어서야 을씨년스러운 케센에 도착한 반 황실 레 지스탕스들은 파괴신의 손길이 지나간 것처럼 땅이 뒤집혀 버린 듯한 케센의 모습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있었다. 사람 들 눈에 띄지 않는 레지스탕스 아지트를 만들기에 여기 이상의 적지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귀족의 매복병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채로. 레지스탕스의 리더인 뤼데거가 말했다. "프란츠. 안전을 확인하지 못한 곳에선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마라." "에이. 설마 이런 곳에 누가 있겠어요?" 프란츠는 산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덥수룩한 뤼데거를 돌아보며 '걱 정도 팔자'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살이 날아들었다 . "으아악!" "프, 프란츠!!" 등 뒤에서 날아든 화살이 프란츠의 등에 박힌 것이다. 몸에 힘이 풀 리며 프란츠가 바닥에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활을 들고 있는 매복병 들이 주변 폐허 위에서 나타나며 50여명의 레지스탕스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걸려들었구나!" "제, 제길. 방심했어." 뤼데거는 자기 몸집 만큼이나 커다란 도끼를 들며 주변을 둘러 보았 다. 거의 사방이 포위된 것 같다. 완벽하게 걸려든 것이다. "흥! 졸개들 뿐이로군. 입맛만 버렸어." 사병들의 지휘관이 검을 뽑아들고 다가오며 말했다. 뤼데거 역시 달 라카트 곳곳에 퍼져 있는 레지스탕스들의 일개 리더 중에 하나일 뿐. 사병들이 찾고 있는 것은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총지휘관이었던 것이 다. "아..... 아파...... 으으윽." 프란츠는 자신의 몸을 뚫고 나온 화살촉을 바라보며 흙바닥을 기었다 . 그런 프란츠를 걷어차며 그 소년의 목에 칼을 들이댄 지휘관은 뤼데 거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이런 꼬마까지 동원하다니 비참하군 너희들. 위대한 달라카트 황실 에 도전하려는 용기는 가상하다만 그 이유나 들어 볼까?" "헤스팔콘 제국의 꼭두각시 주제에 위대하다고? 우리들의 피를 빨아 서 만든 돈을 헤스팔콘에 갖다 바치는 주제에 위대해?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에 눈 돌리고 사치품 따위를 긁어 모아 사리사욕을 채우는 황 실을 위대하다고 말하냔 말야! 이 귀족의 사냥개야!!" 뤼데거의 울분대로 국력이 약한 달라카트는 거의 헤스팔콘 제국의 반 식민지 신세였다. 물론 지방 귀족들과 황실은 언제나처럼 부유했고 베 오폴트 같은 대도시들은 활기찼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천민에 가 까운 노동자들의 삶이란 헤스팔콘의 이종족 노예들과 다를 바가 없었 던 것이다. 상상도 못할 고가의 사치품들이 거래되는 바로 옆에선 굶 주린 아이들이 아사하고 있는 그런 나라. "입이 저속한 놈이로군. 본래 너희 천한 놈들은 황실과 귀족들의 소 유물일 뿐이야. 주제도 모르고 감히 주인에게 칼을 들이대다니 은혜도 모르는 놈들. 걱정하마라. 내 자비를 배풀어서 너희들을 여기서 죽이 진 않을 테니까. 너희 우두머리가 누군지 불때 까진 죽이지 않으마." "주, 죽기 싫어...... " 프란츠는 피가 흐르는 아픈 몸을 웅크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휘관은 프란츠를 내려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이 꼬마는 시범으로 죽여주지. 내 칼이 피맛을 본지도 오래되었으니 까. 억울하냐? 그럼 힘없는 너 자신을 원망해라." "사, 살려주세요...... " "하핫. 잘 안들리는데? 약해 빠진 놈이 지껄이는 소리가 내 귀에 들 릴 것 같냐?" 즐거운 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몸을 떨고 있는 프란츠를 찌르려 는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강하지?" "누구야!" 지휘관이 등돌린 쪽에는 무감정한 두 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넬리안이 어느 틈엔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미스트랄 을 감고 있는 천을 풀고 있었다. 분노도 적의도 보이지 않는 그런 태 도가 더욱 두려워 보인다. "네 년은 뭐야." "자기보다 약한 자는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강한 자 의 손에 죽는 것도 억울하지 않겠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짐승처럼 살아 왔을 테니까...... 짐승처럼 죽어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이런 미친 년! 어디 벌집이 되고도 그런 말 나오나 보자! 궁병!"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화살들이 카넬리안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에게 날아드는 화살들 이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방향을 꺾으며 지휘관을 향한 것이다 다. 카넬리안이 만들어낸 무형의 힘이었다. "어, 어떻게 된!! 크에에엑!!" 카넬리안의 충실한 수족처럼 변해버린 수십발의 화살들은 지휘관의 온몸을 뚫어버렸다. 그것은 형장에서 봤던 어떤 모습보다도 참혹한 사 형집행이었던 것이다. "으으윽.....사, 살려...... 주...... " "안들려." 기괴한 고슴도치의 모습처럼 서 있는 지휘관에게 다가간 카넬리안은 단칼에 상대의 몸을 두동강내 버렸다. 그 장면을 믿을 수 없는 표정으 로 지켜보던 뤼데거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며 부하들을 향해 소리 쳤다. "지금이다! 더러운 귀족의 앞잡이들을 물리쳐라!" 그와 함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사병들을 향해 레지스탕스들이 몰려 가기 시작했다. 프란츠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고통조차 잊은 채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카넬리안 을 바라보았다. "그 상처...... 빨리 치료해야 할꺼야." 그녀는 프란츠에게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하며 몸을 돌려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건드리면 손이 얼어 붙을 것 같은 모습. 어둠속에서도 그 색을 잃지 않는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프란츠가 올려 보는 그녀 의 뒷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냉혹한 밤의 여신' 이었다. 그녀는 어 쩌면 활에 맞아 무력하게 고통받고 있는 프란츠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줄리탄이 떠올라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눈 앞에서 그렇게 죽어가는 모 습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서 도와준 건지도 모른다. 그 이후 계속 케센에 남아 있는 그녀는 단 한번도 '도와주겠다.'라는 말을 꺼낸 적 은 없지만 반 황실 레지스탕스의 비공식 일원이 되었다. 3. "이 아이, 외로워하고 있어." 물키벨은 자기 만큼이나 키가 작은 그레시다를 이리저리보며 안타까 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의아한 표정의 시오. "외로워...... 한다니요?" "네 주인이 널 이적시키도 않고 버렸지?" 물키벨은 계속 겁먹은 표정의 그레시다에게 말했고 그레시다는 조용 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키벨이 갑자기 빽하고 소리쳤다. "어떤 자식이야 대체!! 테이머와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씰들은 테이 머와 떨어져 있으면 괴로워 한단 말야!! 아 미안...... 줄리탄 너한테 한 말 아냐." "아, 아니에요." 줄리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금새 마음 속의 공기가 빠져나간 것 처럼 참을 수 없이 답답해 진다. 대충 예상은 했었다. 장시간 동안 테 이머와 멀리 떨어져 있는 씰들은 정신이 계속 황폐해져 간다는 것을. 마치 물이 말라버린 땅에서 죽어가는 화초처럼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떠났단 말인가 카넬리안은. 분명히 그녀가 괴로 워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줄리탄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당장이라 도 그녀를 찾고 싶었다. "너, 테이머가 널 버린지 얼마나 되었어?" "십년 정도....... " 불치병 환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물키벨의 질문에 그레시다는 10년이 라고 대답했다. 자그만치 10년. 테이머와의 계약이 끊어지지도 않고 계속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고문 같은 강제력을 가진 상태에서 10년을 홀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참을 수 없이 외로워서 자살했을 수도 있지만 씰에겐 자살할 권리 조차 없다. 그렇게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그레시다는 줄리탄을 보고 잠시라도,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제 주인님이 되어 주세요.'라는 말도 안되는 부탁을 한 것인지 도 모른다. "뭐 그 따위 개같은 테이머가 다 있어!!" "죽여버리고 싶군. 그런 놈." 시오와 톨베인도 나름대로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레시다는 오 히려 자신의 무책임하기 이를데 없는 테이머를 옹호하고 있었다. "제가 능력이 없어서 그 분이 절 버린 거에요. 제 책임이에요." "씰이 책임 따위 질 필요 없잖아!!"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줄리탄이 바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는 울 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면서....... 투정한번 못 부리고 영원히 인간의 도구처럼 살면서...... 능력이 없으면 버림 받으면서...... 이기적인 테이머 때문에 괴로워 하면서....... 그렇게 살면서 책임까지 질 필요 는 없는 거잖아." "줄리탄....... " "인간들은....... 씰이 아무리 헌신적으로 도와줘도 그게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단 말야. 그게 왜 당연한 거야. 왜 씰들이 대신 죽어주고 버림 받는게 당연한게 되냐고. 어째서 너희들은...... 그딴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싫다.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안전을 당연히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면서 곁에서 떠나버린 것이 싫다.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기 위해 괴로워 하 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싫다. 같이 괴로움을 나누려는 시도 조차 하지 않는 씰의 가슴 아플 정도의 헌신적인 모습이 싫다. 그레시다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것에 화가 난 테이머가 바다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바다를 떠다니다가 자라탄 위에서 자기는 능력 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렇게 된거라는 생각을 하며 말라가는 마 음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줄리탄은 이해할 수 없었 고 이해하기도 싫었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며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줄리탄이 입을 열었다. "네 주인이 되어 줄께." "줄리탄 님....... " "진짜 주인은 아니겠지만 진짜 주인보다 잘해주면 되잖아." 시오는 또 아마릴리스 생각이 나는지 혼자 눈시울이 붉어지다가 그레 시다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널 테이머처럼 보살펴 줄테니까!" 그 말은 실수였다. "톨베인! 너도 같은 생각이지! 그렇지?" 톨베인은 상트에서 헤어진 셜린을 떠오르는 듯 표정을 숨기기 위해 인상을 찌푸리며 못 이기는 척 말했다. "...... 뭐 알았어. 일단 불쌍하니까." 그 말도 실수였던 것이다. 그레시다가 너무 감동 받은 얼굴로 말했다 . "정말로......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님들." "그래.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잠깐만. 주인님....... 들?" "예. 세 분 모두 제 주인님이니까요." "....... " 그레시다는 천진스런 미소를 한가득 담으며 줄리탄과 시오, 톨베인을 바라보았다. 줄리탄은 멍한 얼굴로 물키벨을 보며 말했다. "물키벨 님. 이 상황,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감동적이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정상적으로 잘 나가다가 아니나 다를 까 막판에 또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린 것이다. 테이머는 다수의 씰과 계약할 수 있어도 씰은 오직 하나의 주인만을 모시게 되어 있는 것이 철칙인데 이게 또 어떻게 된 거냔 말야. 물키벨은 놀란 눈을 깜빡거리 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 처음 봐 이런 일은. 확실히 씰이 여러 명의 테이머와 계약할 수 는 없지만 지금 이건 엄밀히 말해서 공명을 통해서 계약을 한게 아니 라 그레시다의 기분이 너희 모두를 자신의 테이머로 여기고 싶다는 거 니까...... 주인을 세명을 선택하든 삼십명을 선택하든 씰 맘이지 뭐. " "...... " 해룡조차 처음보는 희안한 일들이 줄리탄에게선 빈번히도 일어났다. 아무튼 그레시다는 의외로 욕심 많은 씰이었던 것이다. 세 명 모두를 테이머로 모시겠다는 아방가르트한 발상을 하다니. 시오가 방실거리며 외쳤다. "뭐 좋잖아! 그레시다를 더 많이 보살펴 줄 수 있고." "좋긴 뭐가 좋아? 이런 거 정신 사나워서 싫단 말야." 퉁명스럽게 받아친 톨베인과 시오의 말싸움이 또 시작되었고 줄리탄 은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레시다를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카넬리 안의 소리 없이 웃는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 그런데 물키벨 님. 물키벨 님도 씰이 있나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던진 줄리탄의 말에 물키벨이 표정을 흐렸다. "아...... 없나요?" "있어. 아니 있었어." 과거형으로 말하는 물키벨은 뭔가 기분이 착잡해진 듯이 몸을 돌려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 레비아탄에게로 가버렸다. 그녀의 씰은 지금 오 펜바하의 씰인 미쉘이었다. 오펜바하와 싸우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그 대가로 자신의 씰이었던 미쉘을 오펜바하에게 이적시켜 주었던 것이다 . "저 그런데 말야..... 이제부터 어쩔꺼야?" 섬 안쪽에 있는 담수호(淡水湖)에서 목욕을 마친 뒤에 줄리탄 쪽으로 다가온 메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한달쯤 후 항 구 베오폴트의 거상들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달라카트 남해에서 맹 위를 떨치게 된 가스발 사략함대가 조직되었다. 해군력과 치안의 부재 로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남해에서 상선들을 보호하고 해적들을 소 탕하기 위해 조직된 그 함대는 기동요새 자라탄을 근거지로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달라카트 해적들을 격파, 흡수하며 거대 조 직화 되었다. 물론 가스발 사략함대장은 통칭 '메이 제독' 메이트리아 크 가스발이었고 일루미네이터라는 붉은 색 기함을 타는 줄리탄은 노 블리스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베오폴트의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Blind Talk 에에..... blind talk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계셔서 말씀 드리자면 제가 만든 어설픈 신조어 랍니다.(그러니까 아무리 두꺼운 사전을 뒤져 보셔도 안나옵니다 이런 단어는.) 굳이 그 의미를 말하자 면 말그대로 blind(눈먼) talk(대화)입니다. 그러니까 또 굳이 관용적 으로 표현하자면 '혼잣말',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는 말들.' 정도랄까? (만화가 카오리 유키가 원고에 Wild talk라고 써 놓고 자신의 잡스런 이야기들을 늘어 놓는 것을 보고 'wild talk라 꽤 재미있는 센스네.' 라고 생각해서 한번 조합해 본 단어.) 그런데 뭔가 눈감고 대화한다는 이미지가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에서 나오는 신비스런 대화법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전혀 관계 없습니다. 그런데 blind에는 '보는 눈이 없는', '맹목적인' 이라는 의미도 있어 서 해석하기에 따라서 '천박한 잡담'이 되기도 하겠네요.-_-;; 아무튼 전 되도록 따로 잡담을 써서 올리지 않는 성격이라서 잡담들은 모조리 여기에 몰아서 써 버리는 겁니다. 최근 DC게임중에 스폰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도 재미있지만 본래부터 코믹스로 나온 스폰 시리즈를 몹시 좋아했기 때문에.....(몸담고 있는 출판사 중에 하나가 스폰 찍는 곳이라서 일 때문에 보기도 하고.-_-;) 악마적인 카리스마랄까나. 누구도 직접 불행해 지고 싶지는 않지만 불 행의 주인공들을 보면 매력을 느끼는 건 매한가지인 듯 합니다. 특히 어둡고 습한 것을 좋아하는(바퀴벌레냐?) 저 같은 성격이라면 더더욱. 챕터 10은 이제 예정대로라면 2편쯤 남았네요. 역시 생각보다 늘어져 서 걱정입니다. 뭔가 '바로 이거야!'라는 것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손도 감정도 무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추위가 풀려야 할텐데.(이건 변명이군.) 그럼 읽어주시고 감상해 주시고 메일 주시고 퍼가 주시는 분들께 감 사드리며 다음 편은 곧 올라 갑니다. (아울님. 그래도 요즘에는 자주 올라가는 편이잖아요? 비교적....^^) E-MAIL : billiken@hananet.net GARNET CROW의 '여름의 환상'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3066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0 15:18 읽음: 50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2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0969]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16 19:23 조회:928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2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Ataxophobia 1. "그래서 전 지금까지도 카넬리안을 찾고 있는 겁니다." 리이의 와인하우스 '낙원의 오후'에선 지난 1년간을 설명하는 줄리탄 의 이야기가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시오를 웃기는 놈으로 설명한 부 분에서 시오가 끼어들어 '너무 과장시켜서 말하지마!'라고 투덜거린 것만 제외하면 꽤 자세하게 쉼없이 설명한 셈이다. 계속 이야기를 들 어주던 젤리드는 '너 참 별 고생 다했구나.'라는 얼굴로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믿겠는데 용이라...... 정말 믿어지질 않는 걸? 그런거 도 서관에 먼지 쌓인 책에서나 가끔 나오는 환상수(幻想獸)잖아. 안그래. 리이?" "궁룡과 지룡과 해룡이라니, 뭔가 알아선 안될 비밀을 들어버린 것 같아." 떨떠름하게 말하는 리이의 얼굴에는 불안감까지 서려 있었다. 특히 오펜바하가 지룡의 수장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떨 어트릴 정도였던 것이다. 리이는 자신의 씰 이카테스를 바라보며 나직 하게 말했다. "이카테스. 넌 용이 실존하다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어?" "예. 죄송합니다. 그런것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이 녀석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아아!!" 그때 문이 쾅하고 열리며 작은 키의 여자가 나타났다. 물키벨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톨베인이 피곤한 얼굴을 손바닥에 묻으며 중얼거렸다. "또 시끄럽게 되겠군...... " "줄리탄! 너 또 인피타르까지 뽑았지! 어쩌자는거야 정말! 생명력 관 리 좀 잘해! 그렇게 퍽퍽 뽑으면 너 금방 죽는다고! 그런데 여기서 뭣 들 하는 거야? 그레시다가 걱정하고 있다고." "저 분이...... 물키벨 님입니다. 저래뵈도 용이에요." 줄리탄은 난감한 표정으로 등장 10초 안되서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한 물키벨을 소개했고 그런 물키벨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물끄 럼히 그녀를 바라보던 젤리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가슴이 작군." ".......!!!" 난데없는 봉변. 불경하기 이를데가 없는 젤리드의 말에 당한 물키벨 은 온몸을 떨며 젤리드를 가리키곤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너무 황당 해서 말까지 더듬거릴 지경이다. "주, 줄리탄! 이, 이 보자마자 정 떨어지는 무례한 놈은 누구야!!" "...... 젤리드 빙크리스틴 님입니다. 이쪽은 리이 디트리히 님. 그 리고 저기 두 씰은....... " "얼레? 너희들은!" 물키벨은 이카테스와 카리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들 역시 물키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카테스는 언제나처럼 웃음띈 미청년의 얼굴 그대로 물키벨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고 카리나는 아주 반가운 얼 굴로 다가갔다. "저 이번에는 카리나라는 이름 받았어요. 예쁜 이름이죠?" "카넬리안하고는 화해 한거야?" 카리나는 그 말에 뾰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긴 쉽 게 화해할 사이는 아니다 그녀들은. 몇백년만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룡 과 두 씰들 사이의 오랫만의 해후가 시작되는 가운데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젤리드가 줄리탄을 향해 속삭였다. "나 너희 패거리에 들어간다." "젤리드!" 놀란 것은 리이였다. 이 과격하고 삐딱한 난봉꾼 사내가 또 무슨 짓 을 저지를지 몹시 두려웠던 것이다. 줄리탄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바다...... 좋아하세요?" "수영 못하니까 물은 싫지만, 싸움질은 여전히 좋아하거든. 소일거리 로 좋겠지 뭐. 여기 있으면 이 여자 눈치 때문에 뭐하나 맘대로 못해 서 요즘 욕구불만이야. 부부싸움이라도 할지라면 서로 검을 뽑고 항구 을 뒤집어 놓을 테니까 그것도 못하고...... " '그럼 나한테 대뜸 결투를 신청한 것도 욕구불만 때문인가?' 줄리탄은 1년전에 만났던 젤리드와 확실히 뭔가 좀 변해 있다는 기분 이 들었다. 어두워 보이는 눈빛에는 변함이 없지만 뭐랄까 결핍되었던 마음의 무언가가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리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맘대로 해. 결국 네 성격 일년 못 참는군. 아주 확 사라져 버려라." "이러니까 귀여워 보이지? 이 여자." "귀, 귀엽긴 누가!" "리이 님도 오시면 좋을 텐데요...... " 줄리탄은 슬쩍 리이에게 '참여'를 권유해 봤지만 리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방향을 따라 얇은 금발의 머리칼이 출렁이듯 흔들거린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다시 검을 쓸 생각은 없으니까요. 대신 다 음부터 이 가게 오면 와인 싸게 줄께요." "헤헤.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시는 검으로 살지 않겠다는 리이의 다짐이 깨진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좋든 싫든 그녀의 레이피어는 리이의 목숨 끝자락까지 따라다녔던 것이다 숙명처럼. "저 그럼 이만 가봐야 겠어요. 그레시다도 기다리고 있고 이 손목도 치료해야 하니까요." 줄리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서야 자신의 부러진 손목이 부어올라서 '나 좀 치료해! 이 무관심한 놈아!'라고 울부짓는 것을 느 낀 것이다. 게다가 원채 술에 약해서 말하는 도중에 조금씩 홀짝거렸 던 와인 덕에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술을 먹으면 금방 졸린 줄리탄이 었다. 리이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로 줄리탄을 올려보며 말했다. "카넬리안을 꼭 찾으세요. 카넬리안도 분명히 줄리탄 씨를 기다리고 있을 꺼에요." "찾을 겁니다. 꼭." 리이는 처음 만났을 때의 어수룩했던 그를 떠올렸다. 시간과 시련은 그것을 견딘 자를 강하게 만든다. 기사수업때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그 말의 의미를 리이는 줄리탄을 보며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달쯤의 시간이 지나갔다. 2. 달라카트 영해 부근에서는 헤스팔콘 해군의 군함 란부르크가 4척의 호위함과 함께 항해 중에 있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을 죽이려는 겁니까." "명령이다. 제국의 군인으로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지 않나." 주갑판(main deck)에 위치하고 있는 화려한 란부르크의 브릿지에선 키마인이 함장 에어데일에게 항변을 하고 있었지만 함장은 불쾌하다는 얼굴로 키마인의 말을 끊을 뿐이었다. 키마인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명령이라고 하셨습니까? 실은 귀찮아서가 아닙니까. 그들을 달라카 트까지 보내는 것이 귀찮아서 죽이려는 것이잖습니까!" "건방지군!!" 키마인이 언성을 높이자 함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란부르크의 최하위 갑판에는 헤스팔콘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달라 카트 출신의 유랑악단들이 있었다. 조사 후 무죄로 풀려난 그들은 방 침에 따라서 달라카트로 추방시켜야 하는데 그들의 이송을 맡은 함장 에어데일은 그런 '미천한' 놈들 때문에 달라카트까지 가는 것이 귀찮 아진 것이다. 사실 헤스팔콘 사람들 자체가 달라카트 인들을 천하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함장정도의 직위라면 의심스러운 유랑악단 정도는 바다에 던져 버리고 돌아가서 '저항했기 때문에 죽였다.'라고 상부에 보고만 하면 대충 둘러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달라카트 출신 평민들의 목숨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키마인만 빼고. "돌아가면 상부에 에어데일 함장님의 직무유기와 민간인 살해종용을 보고하겠습니다." "키마인 님....... " 키마인이 강경하게 나서자 뒤에 서 있는 그의 씰 호이젠은 걱정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호이젠이 보기에도 함장은 키마인의 말을 들어줄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함장은 치욕이라도 당한듯이 살이 덕지덕지 붙 어 있는 얼굴을 씰룩이며 카마인을 노려 보았다. "기사작위를 박탈당한 군졸 주제에...... 입은 살아 있구만. 왕년에 는 긍지 높은 기사였다 이거냐? 그래서 나같은 하급 장교의 명령 같은 건 들어주기 힘들다는 거냐?"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키마인은 함장의 노골적인 모욕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검을 뽑을 수 없었다. 가문의 몰락과 함께 그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다. 얼마전 제국안전공안부에서는 상트에서 있었던 제국군 총사령관 아취발트 이 젠그람의 행동을 문제삼아 직위를 해제하고 가문의 모든 훈위와 재산 을 몰수하며 불명예 제대시킨다는 로이터 막시밀리엄 공안부장의 판결 문이 떨어졌었다. 그 죄명은 '황실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불경과 월 권행위'였다. "수치스럽게 파문까지 당한 네 놈을 자애로이 군에 남게 해 준 것을 갚을 수 없는 은혜로 생각하지는 못할 지언정 사사껀껀 상관에게 항명 을 하다니 이젠그람 가문은 모두 그렇게 되먹지 못했나?" "저희 가문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대대로 헤스팔콘의 위세 높은 가문으로 이어져 오던 이젠그람 가문이 몰락해 버린 것은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평생을 군에서 살아오던 키마 인의 아버지 아취발트 이젠그람은 직위를 잃고 황실로부터 단검이 도 착하자 그것을 받아들여 자살했고 키마인 역시 황실에 대한 존경을 모 르는 가문의 일원으로 전락해 버려서 기사 작위 박탈이라는 극단적인 처분을 받은 것이었다. 기사가 한명이라도 더 필요한 헤스팔콘에선 키 마인을 계속 군에 남겨 놓긴 했지만 그의 직위는 최하급 장교인 15인 규모 팔랑기스의 지휘관으로 추락한 상태. 그것도 육군이 아닌 해군이 었다. "흥! 이제 기사도 아닌 주제에 씰까지 가지고 다니다니 웃기는군. 저 씰도 국가에 헌납해야 하는게 너의 도리 아닌가. 너같은 놈에겐 과분 하다고 저런 씰은." 본래 성격 더럽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다가 평소부터 추락해버린 키마 인을 괴롭히는 것을 아주 즐기던 참으로 변태같은 에어데일은 대놓고 키마인의 자부심을 부셔버리기 사작했다. 예전에는 마주볼 수도 없는 이젠그람 가문의 후계자를 이렇게 장난감처럼 다룰 수 있는 것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쾌감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호이젠은 아버님으로부터 이어온 저희 가문의 소중한 씰이며 저의 일부 입니다. 국가에 헌납해야할 재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아. 네 아버지라면 황실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고 자살한 아취발트 이젠그람을 말하는 거겠군? 큭큭. 군인의 수치야. 창피스러 워서 원. '이 자식...... ' 키마인은 자기도 모르게 함장을 무섭게 쏘아보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살만 디룩디룩 쪄 있고 전투 한번 제대로 치뤄본 적 없는 함장 따위 순식간에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응? 뭐야 그 표정은! 하극상이라도 벌릴 생각인가? 어디 그 검 뽑아 봐. 네 애비나 네놈이나 되먹지 못한 건 똑같군." '크윽!' 키마인은 검에서 손을 땔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칼을 뽑는다면 그 즉 시 이젠그람 가문은 '구제할 방법이 없는' 황실의 적으로 낙인찍혀 버 린다.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 가문의 긍지를 자기 손으로 망쳐 버리는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어데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기사의 힘을 가지고 있는 키마인을 멋대로 가 지고 놀 수 있었다. "함선 발견! 항로 전방에 함선 일척 발견! 삼층 갑판범선! 전함 같습 니다!" 가장 높은 중앙 마스트(main gallant mast)에 위치한 망루에서부터 전달된 명령이 에어데일에게 도착했다. 그는 안그래도 개성적인 얼굴 의 인상을 구겨대며 정말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달라카트 해군인가?" "붉게 도장되어 있는 함선입니다! 아마도 그 소문의 가스발 사략함대 전함 같습니다." 가스발 사략함대의 명성은 헤스팔콘 해군에 까지도 익히 들려오고 있 었고 특히 붉은색 도장을 한 줄리탄의 기함 일루미네이터는 메이의 초 노급 기함 밴들라이저(Vandalizer)와 함께 가스발의 트레이드 마크였 던 것이다. 물론 헤스팔콘 해군에겐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붉은 색? 그 노블리스라는 놈이 타고 다닌다는 그 거?" "그런 것 같습니다." 키마인은 당연히 줄리탄을 알고 있었지만 노블리스라면 소문으로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에어데일은 공을 세울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지 지저분한 웃음을 참지 못하며 외쳤다. "한척이라고 그랬지? 좋아. 아주 좋아. 전원 전투 준비! 호위함에 알 려라! 목표는 붉은색 가스발 사략함이다!" "하, 하지만 여기는 달라카트 영해...... 게다가 상대는 달라카트로 부터 사략장을 받은 자들인데 선공을 해도 될까요?" "에이 상관 없어! 그 겁대라기 없는 사략함대의 선봉을 나포해서 달 라카트 놈들에게 헤스팔콘 해군의 막강함을 보여주면 되는 거다!" 거의 해적을 방불케하는 함장의 제멋대로 월권행위에 키마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노블리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 대로된 훈련을 받고 충분한 무기와 장비를 공급받고 있는 군부대를 임 시방편으로 만든 사략함대 같은 것이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 고 있었다. "키마인! 네가 앞에 서서 저들과 싸워라. 알겠나?" "...... " 에어데일이 이토록 일부러 싸움을 벌이는 이유라면 키마인이라는 믿 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급의 힘이 있는 키마인과 호이젠이 라면 해적 나부랭이 같은 사략함대 정도는 손쉽게 눌러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사략함대에 기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이다. "와하하하! 너 같은 녀석을 맘대로 부릴 수 있다니, 나도 참 운이 좋 은 놈이로군. 뭐하고 있는 거야. 빨랑 나가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 고! 배에 손실이 생기면 모두 네 놈 책임으로 보고할 꺼다!" "호이젠...... 가자." 키마인은 자신을 거의 노예취급하는 에어데일을 한번 노려본 뒤에 몸 을 돌려 브릿지 밖으로 나갔다. 마음속에서는 분노와 의문이 뒤엉켜 있었다. 이러면서까지 더 이상 남아있지도 않을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 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온몸이 묶여 있는 것처럼 갑갑하고 허무한 기 분이었다. -Blind Talk 그러니까 전편들을 잘 생각해 보면....... 스엔이 메이를 비웃다가 개 죽음 당하고 귀족사병이 카넬리안을 비웃다가 개죽음 당하고...... 이 번에는 에어데일이 키마인을 비웃었으니까? 뭔가 같은 곳을 계속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숨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비슷한 패턴을 연발해 버린 것이 한심해서. 뭐 이미 써버렸지만 ....... 출판본에서 는 바꿀 수 있을까나. 그건 그렇고 이번 챕터 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아차 하고 키마인이 나오는 부분을 빼놓고 계산해서 부랴부랴. 참 길었던 줄리탄의 1년간 은 이제야 끝났는데 세이드와 리하르트가 나오는 부분은 사실 줄리탄 의 회상 속에 있을리가 없지만 그냥 1년전 동안의 이야기니까 넣었습 니다.(무책임...... ) 정리하는 듯한 기분으로 쓴 챕터라서 뭔가 화끈한 이벤트는 없어 보이 지만 가끔씩 이렇게 편하게 (경수필처럼?)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 은듯. 보는 분은 좀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사건은 곧 터집니다. 카넬리안과 오펜바하도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고. 그럼 오탈자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시고 의견이나 감상 있으시도 메 일 주셔도 고맙게 받겠습니다.(아, 답장은 꼭 씁니다..... 방실.) 앗. 그리고 niad님. 제가 아직까지 책을 못보냈습니다. 정말 죄송.T_T 1권이 어디 처박혀 있는지 찾지 못해서(나 자신이 한심해...) 찾으면 1,2,3권 보내드릴께요. 그리고 자주 메일 주시는 '당골' 분들께도 감 사를.^^ 다음 편은 '곧' 올라갑니다. 요즘 빨리 올려서 좋긴 한데..... 피곤 해져서 그런지 자꾸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걱정입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를 들으며... (사라 브라이트만 버전 입니다. 우연히 알게 되서 기분 좋게 듣는 중. 오페라 같은 고급살스런 문화들에는 사실 문외한 입니다 저는.) 『SF & FANTASY (go SF)』 12306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0 15:18 읽음: 7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3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112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18 15:01 조회:938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3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Illuminator 1. 모든 사물에는 나름대로의 추억이 살며시 달라 붙어 있나 보다. 작은 석류 조각을 입에 담으면 벨레시마에 있던 카넬리안이 떠오른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석류의 맛이 마법 처럼 계속 머리속에 남아, 새큼하 게 미각을 자극하는 붉은 과실이 혀에 감길 때마다 벨레시마가 기억나 고 그 도시에 서 있던 그녀의 눈빛 역시 잠깐동안 머리속에 떠올랐다 간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그런지 달라카트에 내려온 뒤로부터 석류를 먹는 일이 많아졌다..... 라는 둥의 궁상스런 생각으로 가득찬 줄리탄 은 매캐한 연기에 끝없이 콜록거리며 자신의 기함 최하위 갑판에 위치 한 주방에서 사투 중이었다. "이, 이 놈의 배는 함장한테 요리를 시키다니! 너무하네 정말!" 줄리탄은 자기 몸통만큼이나 큼지막한 청동구리 가마솥에 막대를 넣 고 온몸을 돌리며 휘저어대며 간간히 소금에 절인 적청어 조각들을 뿌 려 넣는 '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검댕이가 잔뜩임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안타까운 것이 이 배 일루미네이터는 규율이 잡힌 상 선이나 군함이 아니라서 요리사, 전투원, 항해사, 의사 등의 직책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덕분에 힘없고 온순한 줄리탄이 함장겸 '수석요리사'라는 비명 나오는 일거리를 떠맡게 된 것이다. 참고로 톨 베인의 역할은 '망루'였다. 망원경이 필요 없는 녀석이니까...... "모두가 주인님이 만들어 준 요리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레시다 역시 주방의 장작더미 옆에 살포시 앉아 작은 약절구를 들 고 노르스름한 맛이 감도는 향채들을 갈고 있었다. 이 아이는 주방은 덥고 컴컴하니까 갑판에 나가서 시오와 함께 놀라는 줄리탄의 말에도 결국 고집을 부리며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레시다 덕분에 확 실히 줄리탄의 일이 수월해지긴 했다. "나 역시 해적들이 예전에는 완두콩 범벅인 마른 빵이나 곰팡이난 고 기 조각 따위나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식생활 개선을 선도하는 것도 함장의 임무겠지." "에헤헤." 줄리탄은 발로 밑에 있던 풀무를 몇번 눌러서 불살을 조절한 뒤에 조 금 시간이 남는지 다듬기 위해 쌓아 두었던 건대구더미 위에 털썩 주 어 앉아 버렸다. 그리곤 슬쩍 선반에 있는 백납 플라스크를 집어 들더 니 작은 잔에 붉은 색이 감도는 액체를 조금 따랐다. "먹어볼래?" "뭔데요?" "특제 와인." 그레시다는 와인이라는 말에 좀 부담스러워하며 그것을 받아서 살짝 혀를 대더니 금방 놀란 얼굴이 되서 단숨에 입에 담는 것이었다. "와아. 이거 맛있어요!" "리이 님이 선물로 준 와인에 정향과 육두구, 생강을 조금 넣고 석류 소스로 당도를 맞춘 거야. 으음. 가벼운 리큐르라고나 할까." "복잡하네요...... " "달라카트에선 향료나 과일 값이 싸더라고. 그래서 시장에 들린 김에 이것저것 사와서 한번 만들어 본 거야. 많이 먹으면 취한다." 그레시다는 그렇게 말하는 줄리탄에게 다가와 주머니에서 천조각을 꺼내 줄리탄 눈가에 묻은 검댕이와 땀들을 훔쳐내 주었다. 확실히 헌 신적이고....... 10년동안 애정결핍에 시달려서 그런지 보통 씰들보다 훨씬 감성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 씰들의 성격을 결정 짓는다는 카넬리안의 가설은 틀리지 않은 듯 싶다. "줄리이타아아안!!" 엄청난 소리가 주방안을 울렸다. 줄리탄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 번 거렸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대체? "...... ?" "주우우울리이이이타안아아!!" 줄리탄은 황당한 얼굴로 화덕 위에 있는 석제 후드를 바라보았다. 분 명히 그곳에서 들리는 시오의 목소리였다. 연기를 빼내기 위한 후드는 그대로 배를 관통해서 갑판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시오가 급한데로 갑 판의 환풍구에다 대고 소리친 것이었다. '....... 굴뚝보고 대화해야 하다니.' 줄리탄은 얼떨떨한 얼굴로 훈제를 위한 고기조각들을 걸어 놓은 후드 에다 대고 소리쳤다. "왜 그러는데에에에!!" 으으. 후드로부터 검은 깜부기들이 툭툭 떨어져서 기분이 엉망이 되 었다. "빨랑 올라와!! 헤스팔콘 군함이 접근하고 있어!" "뭐!!" 함장이 상황을 전달받는 방식치고는 참 독특했지만 줄리탄은 놀란 얼 굴로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집어 던지며 주방 밖으로 뛰쳐 나가 다가 멈칫했다. "그레시다! 선실에 피해 있어! 어쩌면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저, 저도 같이 있을께요." "고집부리지마." "하지만...... " "그럼 약과 붕대를 준비해 줄래?" "예!" 그레시다는 줄리탄은 돕는 것이 기쁜지 몇번이나 고개를 뜨덕거렸다. 2. 장범장(掌汎長) 격인 시오는 일루미네이터로 다가오고 있는 헤스팔콘 함선들을 바라보며 분주하게 주변에 전투태세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 가 사략함대의 일원이 되어 가장 훌륭하게 성장한 부분이 있다면 배멀 미를 극복했다는 것과 어느 정도 갑판의 상황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는 것이다. "쳇. 아무래도 싸울 기세야." 톨베인은 메인 마스트의 밧줄을 타고 떨어지듯 빠르게 내려오며 말했 다. 헤스팔콘 함대들은 전투의사가 없다는 파란 깃발조차 올리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그 범장함들의 이물쪽 사각돛이 분명히 움직인 것을 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여기를 향해 회두(回頭)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시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혀를 찼다. "여긴 달라카트 영해 아냐? 왜 싸우려는 거야 저 놈들!" "낸들 아냐. 헤스팔콘 해군의 생각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아." "벌써 시작하는 건가? 난 첫번째 항해인데 운이 좋군." 긴 흑발을 내린 채 함교에 걸터 앉아 있던 젤리드가 천천히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헤스팔콘 해군에겐 지독히도 나쁜 뉴스지만 일루미네이터 에는 흉몽 젤리드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카리나가 뭔가 친숙한 기분을 느낀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함선들을 바라보았다. "젤리드. 저 배에...... 씰이 타고 있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 어." "씰? 그럼 테이머도 있다는 건가?" "으응. 아무래도." "재미있군. 제발 강한 놈이었으면 좋겠는데." "젤리드! 쬐끔은 진지해져 달라고!" 카리나의 걱정을 무시해 버린 젤리드는 톨베인에게 툭하고 말을 던졌 다. "이봐 꼬마." "....... 톨베인 입니다." 톨베인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젤리드를 바라보았다. "난 맘대로 싸우겠다. 저 해군들, 죽여도 상관 없는 거겠지?" "맘대로 하세요." "일부러 죽일 필요는 없어요!" 줄리탄은 허겁지겁 갑판으로 올라와선 젤리드를 향해 말했다. 막강한 파문기사 젤리드가 가담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전술을 짜낼 수 있지만 도리어 그가 상대 모두를 수장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된 것 이다. 젤리드가 세이드처럼 눈 앞에 거슬리는 남녀노소 모두를 태워버 리는 광인은 아니었지만 전투나 결투에서 만난 자에게 용서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젤리드는 '리이하고 비슷한 놈이로군.'이라는 피곤한 표 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부러 죽이진 않겠지만....... 일부러 살려줄 생각도 없어." 젤리드는 해전에서는 여간한 실력이 아니라면 선택할 엄두도 못하는 거대한 브로드 쇼드 흉수를 꺼내며 다가오는 적함들을 눈에 담았다. 3. 대형 범장함 란부르크의 갑판은 줄리탄 쪽과는 달리 상당히 느긋한 편이었다. 심지어 갑판을 통솔하는 병조장마저도 현재 절대로 유리하 지는 않은 바람 방향을 읽어내는데 게을리 하고 있는 모습에 키마인은 답답한 심경으로 호이젠을 돌아 보았다. 모두 키마인이 적선에 침투하 기만 하면 전투가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이젠. 준비 됐지?" "예." 키마인 역시 조금도 전의가 생기지 않는 이 조우전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만 잡히면 곧장 붉은색 일루미네이터 안으로 뛰어들어 최소한의 사상자를 내며 노블리스에게 항복을 받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때 호이젠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기사 일인, 씰 일인 접근 중입니다!" "뭐?" 갑작스러운 기사 출현 보고에 키마인이 당황하는 가운데 일루미네이 터의 갑판 위에서 검은 탄환처럼 솟아 오른 두개의 실루엣은 곧장 란 부르크의 함교를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저 배에....... 기사가 있었다?' "위험합니다! 키마인 님!" 젤리드와 카리나의 도약력은 키마인은 물론 호이젠의 예상마저도 상 회할 정도였다. 아찔한 흉탄(凶彈)을 닮은 젤리드는 란부르크의 갑판 으로 낙하하며 검을 뽑아 란부르크의 굵직한 중앙 돛을 잘라 버렸다. 해군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아아아아!! 뭐, 뭐먀!" 이런 기습이라니 상상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이다. 란부르크의 전 투원들이 비명을 지를 때 중앙 돛은 거목이 쓰러지는 것 처럼 잘려나 가며 엄청난 소음과 함께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란부 르크가 항해력을 잃고 멈춰버리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젤리드는 카리 나와 함께 배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검은 옷과 검은 머 리칼을 출렁이며 갑판에 착지했다. 그는 흉수를 들고는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훌터 보았다. "누가 기사냐. 내 앞으로 나와라." "...... 저 자는 파문기사 젤리드 빙크리스틴 입니다." 호이젠은 젤리드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검 흉수와 카리나를 보며 단 박에 그가 헤스팔콘에서 악명의 대상이었던 흉몽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키마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예상치도 못한 너무도 벅찬 상대다. 그 순간 키마인의 머리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이 짧게 터졌다. '하지만 어쩌면 저런 강한 자의 검에 죽는 것이 차라리 지금보단 나 을 수도 있을 꺼야.' "무, 무슨 일이냐!" 거짓말처럼 잘려나가 버린 중앙 돛의 뒤에 위치한 브릿지에서 튀어나 온 에어데일이 놀란 얼굴로 외치다가 젤리드를 바라보았다. "저, 저 놈은 누구야!" "네 놈이 기사인가?" "히익!" 젤리드가 쏘아보자 흠찟한 에어데일은 '전 함장인데요.'라는 말 한마 디도 못하고 다시 브릿지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젤리드는 키마인 이 기사라는 것을 느끼고 그를 향해 검을 치켜 올리며 악마적인 위압 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는 전투 중에 죽는 것도 영광일 것이다. 항복하지 마라." "...... " 키마인은 '저 기사 아닌데요.'라는 변명을 늘어 놓지 않고 조용히 자 세를 잡을 뿐이었다. 몸을 뒤덮는 긴장감이 키마인의 온몸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가문과 황실, 국적 모든 것을 떠나서 하나의 기사로서 자 신을 바라보고 싸우려는 젤리드의 대접이 뭔지 모르게 기뻤다. 여기서 죽어도 좋다, 키마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4.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십시오. 줄리탄 님.' 줄리탄의 머리속에 레비아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키벨의 지시에 따 라 해상에서의 줄리탄을 호위하고 있는 레비아탄과 크라켄은 사실 일 루미네이터에서 수십킬로미터 이상의 먼 거리에 있지만 해룡들 답게 줄리탄이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빠른 시간에 일루미네이터에 도착해 서 적함들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줄리탄은 고개를 저었다. '......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해결 합니다.' 줄리탄의 배로 네척의 적함들이 전방에 둘러싸듯이 포위하며 들어오 고 있었다. 그것은 통상적이고 상투적인 전술이지만 숫적 우세일 때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바람 방향으로 우회한다." 여기서 우회하려 한다면 적들의 사정권내에 들어가게 되지만 줄리탄 은 냉정하게 생각하며 결정했다. 중요한 것은 바람을 탈 수 있는 최적 의 위치를 잡는 것이다. 시오는 결정을 그대로 따르며 곧장 조타수와 갑판원들에게 명령했고 배의 이물이 항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적함들 의 포위망은 계속 좁아지고 있었다. "침로전환!" 줄리탄이 외쳤다. 일루미네이터는 아슬아슬한 각도로 바다를 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적함들의 사정권내로 들어오며 화살들이 쏟아지 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루미네이터는 계속 능숙하게 돛의 방향을 바꾸 며 마치 날렵한 물고기처럼 지그재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급선 회는 배가 전복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해군들 조차 쉽사리 하지 못하 는 어려운 행해술이지만 줄리탄과 선원들은 메이의 지도를 받으며 지 독한 훈련 끝에 단시간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일루미네이터 자체가 이러한 선회에 어울리게 낮은 선체와 상당히 평탄한 밑바닥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오가 주먹을 꽉쥐며 외쳤다. "좋았어! 포위망을 빠져 나왔다!" "침로직진." 차분한 줄리탄의 명령대로 일루미네이터는 능숙하게 바람을 타고 포 위망을 뚫으며 적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일루미네이터는 2 5도라는 최적의 각도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선회하며 적함들 뒤에 섰다. 반격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물 함상포 조준." 일루미네이터의 특수한 무기 중에 하나는 이물에 장착되어 있는 대형 기계궁(Ballista)이였다. 충각(ram)을 포기하는 대신 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화살을 발사하는 기계궁은 적함의 격벽을 뚫고 들어가 행 동을 묶어 버릴 수 있는 회심의 무기였던 것이다. "발사!" 촤르르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쇠사슬을 물고 발사된 활은 그대로 적함의 후미 장갑 갑대를 뚫고 격벽도 뚫어 버리며 적함의 움직임을 그대로 잡아 버렸다. 톨베인의 차례가 오자 줄리탄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톨베인. 조심해라." 톨베인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뱉으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필요 없어." 톨베인은 작은 검은 손에 들고 적함과 연결되어 있는 외줄의 사슬을 타고 바다 위를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리 기 사라도 특별한 훈련이 없이는 할 수 없는 - 반사신경이 초인적인 톨베 인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상대를 너무도 만만하게 보다가 완전 히 허를 찔려버린 헤스팔콘 해군들이 우왕자왕하며 추태를 보이는 가 운데 일루미네이터는 사슬을 감으며 적함들에게 돌진을 시작했다. -Blind Talk 줄리탄의 붉은 기함 일루미네이터의 모델은 거북선입니다. 거북선은 대단한 배 입니다. 학익진을 펼치거나 엄청난 급선회를 할 수 있도록 배 밑바닥이 엄청나게 평평한데다가 선체 자체도 키 150cm이하만 선원 으로 뽑았을 정도로 낮아서(그래서 3층 갑판이었습니다. 대단해... ) 물살의 변화가 심한 근해 전투에 최적화 되어 있는 전함이었습니다. 바닥이 평평하면 안전성이 높아져서 최하위 갑판에 벨러스트(무게추 같은 것들)를 잔뜩 넣을 필요도 없고 거북선처럼 엄청난 철갑선이라도 안심하고 항해할 수 있으며 대포를 쏠 때의 충격도 적습니다.(덕분에 거북석은 훨씬 수월한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전방에 도 포를 달 수 있었지요. 일루미네이터의 이물 발리스타 처럼.) 단 바닥이 평평하면 문제가 장거리 항해를 하기에 부족함이 많은데 거북선에는 가변식(!) 닻이 달려 있어서 어느 정도의 항해도 가능했 다고 합니다. 그 닻은 항해 중에는 올라가 있다가 전투 중에는 닻이 갑판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 최첨단 방식. 게다가 거북선은 많은 노를 쓰기 때문에(선체가 낮아서 노를 젓는 사람들은 거의 누워서 저 었답니다.) 전투중에 움직임이 상당히 자유자재였습니다. 이것만 딱 봐도 거북선은 곳곳이 전투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전함임에 분명하죠. (게다가 노와 키와 닻 모두를 원하는대로 쓸 수 있는 최첨단 함선. 그 런 걸 건조할 수 있는 능력과 발상이 대단할 뿐... ) 물론 일루미네이터는 본질적으로 범선입니다.(물키벨이 도와주면 맘대 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 게다가 거북선보다 조금 크고 좀 더 긴 거리를 움직일 수 있게 범선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편이고요. 그리고 대포 같은 것이 없을 때의 해전을 위해 만들어 졌기 때문에 가로 격벽 쪽이 단순하게 처리된 면도 있습니다. 또한 대양에 나가 파도를 견뎌 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유선형으로. 솔직히 고백하자면 위에서 줄리탄이 쓴 방법은 tacking이라는 항해술 을 조금 '오버'한 것인데 사실 줄리탄 정도의 실력으로 범선을 가지고 그런 무시무시한 지그재그 항해술을 펼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마 배가 전복되어 버리거나 바람을 타지 못하고 선회에 실패할 가 능성이 매우 높을 겁니다.) 하지만 전 배에 대해 잘 아는 편도 아니고(이 글을 쓰기 위해 연말에 몇몇 참고 자료들을 긁어 모아 익힌 것이 전부. 무책임... ) 이 소설 은 '항해교본'이 아니므로 언제나처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 시길 바랍니다.(뻔뻔... ) 그리고... 뭔가 고증에 충실한 것도 좋긴 한데 결국 읽는 분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면 단지 '읽기 지겨울' 뿐이니까. 줄리탄이 타고 있는 일루미네이터(상대를 일깨워주는 자)는 대충 코르 세어 급의 범선입니다.(플라즈마 공격도 아니고 디스트럭션 웹도 쓰지 않습니다.-_-;) 란부르크 같은 것들은 대형 프리기트 급인데...... 사실 내부 구조는 꽤 다른 편이지요.(제가 편의에 따라 재배치 했습니다.) 역시 이것도 대충 '그렇겠구나... '라는 정도로 넘어가 주세요. 이것에 대해 난외주기나 주석을 달 수 있을 정도로 제 지식은 박식하 지 않답니다.(꼭 필요한 주석은 어떻게든 해야 겠지만... ) (이러한 역사적으로 보여지고 증명된 사실에 대해 주석을 단다는 것은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와 상황, 문화권과 국적 등등에 따라서 같은 함선의 이모저모에 대한 설명들도 크게 변하니까 단순히 데이타베이스만 많이 늘어 놓는 것만으로는 상 황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총체적인 상황을 외우는 정도가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을 필요로 하니까요.) 그러니까 좀 틀린 부분이 보이더라도 '못 봐줄' 정도까지만 아니라면 적당히 봐주시길 부탁드리며... 줄리탄이 있던 주방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꽤 고증을 한 편이라고 생각 합니다.(실제 함내 주방보단 아늑한 편이지만...) 아 그러고 보니까 어제 기쁘게도 인세 일부가 통장에 들어왔습니다. 자주 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 큰 돈 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만에 기분내기 위해 돈을 뽑아서 반포 신세계 백화점으로 직행. 이하는 구입한 것들.-_-; 1.우메보시 한병(매실 짱아치) 2.할라페뇨 한병(멕시코 고추? 매운 것을 좋아함.) 3.페퍼로니 200g(가장 좋아하는 소세지 >_<) 4.터키 300g 5.살라미 500g(통후추가 잔뜩 들어간 고급품으로!) 6.아보카도 1개(믹서기 고장나서 결국 먹지 못했음 -_-;) 7.케이퍼 한깡통(식초가 조금 강했음.) 8.브라운 맥주 X2 9.흑 맥주 X1 10. 에일 맥주 X1(젠장. 입만 고급이 되어서.... -_-;) 11. 스카치 위스키 야트 클럽(원하는 버본이 없어서 꿩대신 닭.) 12. 훈제 안한 연어 214g ....... 온통 먹고 마시는 것들 뿐입니다.(이러다가 일찍 죽지... ) 음. 세이지나 로즈마리, 통후추 같은 향료들도 구입하려고 했는데 돈 이 너무 나가서 역시 포기. 지뢰진을 본 다음부터 주인공 이이다가 마 시는 버본 위스키 마스터즈 마크를 좋아하게 되서(본래 버본 좋아합니 다.) 사러 갔는데 절대 없어서(버본은 잭다니엘 뿐.... 대체 여긴...) 그냥 처음보는 야트 클럽이라는 괴이한 위스키를 40% 세일로 사왔습니 다. 값이 싸다고 좋아했는데 그러나! 이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거의 리큐르에 가깝게 달아서 먹다가 돈 아까워 기절해 버렸음.(단 것 싫어 함.) 훗훗. 페퍼로니와 살라미 잔뜩 넣고 양상치 채 썰어 넣고 양파 넣고 할라페뇨 튀겨서 넣고(이상한 방법이지만 선호함) 케이퍼 뿌려 넣고 연어까지 구워 넣어서 괴상망측하고 오로지 제 입맛에만 맞는 초특대 형 콤비네이션 바케트 호기를 만들어 세개나 먹고 배가 터져 씩씩 거 리다가 결국 괴로워하며 잠들어 버렸습니다.(미, 미련해... ) 그래서....... 어제는 올리지 못했습니다.(결국 이 길고 긴 잡담은 변 명 이었군... ) 간만에 평소에는 라면만 죽어라 먹다가 무리해서 잔뜩 사왔으니까 기 분이 좋아서 좀 길게 썼습니다.(전 요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잘 못하는 편인데다가 몹시 게으른 성격이라서 대충 라면이나 맨밥만 우걱우걱 먹어서 배를 채우곤 합니다.-_-;) 아 그러고 보니까 작년 동지 때의 일이 생각 납니다. 동지에는 팥죽 먹잖아요? 그날 가게에 가니까 왠 빵들이 쌓여 있더군요. 그래서 어머니 께 "이거 웬 빵이에요?" "단팥빵. 오늘 동지니까." "...... " 으아아 정말 멋대가리 없는 집안이라니. 팥죽 대신 팥빵이라니...... 그날 인생이 쓸쓸해져서 시장가서 팥죽 잔뜩 사와서 네그릇이다 먹고 결국 배가 터져 괴로워하며 잠들었습니다.(가끔 자신이 한심해 질 때가... ) 아아 요즘 욕구불만인지 뭔지 모를 잡담만 잔뜩이고 본편은 알맹이가 부족한 한 편이었습니다.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 보내주신 분들 감사드 리며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꾸벅) 아 그런데 나우에 퍼가시는 다크네스님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 같아 서 걱정입니다....... 제 글과 관련되서 문제 있으시면 언제라도 메일 주세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박사의 나는 우주의 환타지를 들으며... ('그대 역시 나의 환타지. 남에게는 얘기 못할 환타지.'... 오오 이 거야 말로 환타지인가?) ps:... 아차. 거북선에 관한 자료들은 kiyu군이 알려준 것입니다. 감 사의 말을...... 『SF & FANTASY (go SF)』 12365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3 17:06 읽음:466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4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140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22 14:40 조회:763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4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Serapis is not seraphis! 1. 젤리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뱀의 독액같은 기력과 뭉쳐 타오르며 키마인을 위협해 왔다. 그것은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그 안이한 마음 한구석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올 것이다. '저, 저게 흉몽의 힘? 강하다. 얼마나 많은 수련이 쌓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젤리드의 검의 움직임 조차 읽기 힘든 지경인 키마인은 이미 곳곳이 베어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그와의 실력 차이를 실감했다. 평소에 자주 세이드나 매소크, 젤리드, 리이 등의 헤스팔콘의 최상급 기사들 과의 결투를 머리속에 떠올려 보곤 했었지만 실제로 싸워보는 것은 처 음이었고 그것은 상상할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중압감이었던 것이다. 불가항력의 벽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기분. 그럼에도 마음이 예전처럼 답답하진 않았다. "기사는 기사도를 지키기 때문에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기 사도를 지킬 수 있는 것 뿐이다. 많은 기사 놈들이 그걸 착각하고 있 지." 젤리드는 참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읊으며 다시 키마인에게 검을 내리 쳤다. 반사적으로 막아내는 키마인. 두 검날이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 이 튀겼고 흉수를 막아내는 키마인의 팔과 무릎이 깨져 버릴 것 같았 다. "아아악!" 세이드마저 주춤했던 젤리드의 강격(强擊)은 피하는 편이 옳았다. 즉 각적으로 전달된 반동에 검을 잡고 있는 키마인의 두 손에서 피가 터 졌다. 키마인은 온 정신을 모아서 검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 기 의지와는 상관 없이 바닥에 무너져 내리는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둔기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멍해진 눈동자로 올려본 시선 에는 차가운 표정의 젤리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일어나라. 그런 모습으로 죽고 싶진 않겠지?" 젤리드는 조용히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 섰고 키마인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 공격으로 자신을 죽이기 전에 자신의 씰과 공명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키마인은 힘들게 몸을 일으키 며 호이젠을 돌아 보았다. 그와 카리나는 주인들의 의지에 따라 싸움 에 끼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키마인은 침착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호이젠. 지금까지 부족한 나를 도와주고 가르쳐 준 것......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너와 이젠그람 가문과의 인연도 여기서 끝인 것 같 구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는...... " "다음엔 나보다 더 좋은 주인 만나길 기원할께." "하지만...... " 키마인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표정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울어 버릴 것 같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 던 젤리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사후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나라를 구하고 장렬하게 죽는 것이나 병신이 되서 아사하는 것이나 내게 죽음 자체는 똑같다. 인간 들이 만들어 놓은 기사도니 명예 따위를 신봉할 생각도 없어. 네가 기 사라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사로서의 최선을 다해라. 내가 아는 어떤 녀석도 황실이나 권력자들 따위가 만들어 놓은 규칙이 아닌 자신 의 신념을 지키며 스스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더군. 기사도 아닌데 말 야." '어떤 녀석?' 젤리드는 드물게 말이 길었다. 호감이 가는 풋내기 기사인 키마인에 게 죽이기 전에 한마디 쯤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런 마음과 는 무관하게 키마인을 죽인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젤리드 는 슬슬 끝내야 겠다는 생각에 다시 압도적이기 이를데 없는 검을 들 어 올렸다. "타아아앗!" "...... !!" 놀랍게도 먼저 치고 들어온 것은 키마인이었다. 몸의 모든 기력을 끌 어 모은 일격을 세우고. 보통 죽음의 위기에선 몸이 움츠려들기 마련 이지만 키마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놀란 젤리드는 슬쩍 몸을 빼면서 전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강렬한 키마인의 일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파고든 강맹한 키마인의 검 기에 젤리드의 긴머리칼 끝이 말려들며 잘려 나갔고 동시에 그의 팔에 도 깊은 상처를 세기며 핏방울을 튀겼다. '역시 긴머리는 관리하기 힘들군.' 젤리드는 자신의 팔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머리칼이 상한 것에 눈 살을 찌푸리며 키마인의 혼신의 공격에 응답해 주었다. 그것은 키마인 의 힘과 기술 몇배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세이드의 의수 마저도 잘라 냈던 그 파괴력으로 몸을 돌리며 내리친 검이 또다시 키마인의 검과 충돌했고 젤리드마저도 그 반동으로 뒤로 밀려나며 키마인은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갑판을 부수고 튕겨나가 정신을 잃었다. "키마인 님!!" 호이젠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키마인의 상태는 보는 사람이 눈을 돌릴 정도로 참혹했다. 만신창이가 되서 완전히 혼절한 키마인은 죽어 가는 숨을 쉬고 있는 와중에서도 끝까지 검을 놓치 않고 있었다. 공격 을 멈춘 젤리드는 어깨가 결리는지 검을 든 팔을 살짝 휘두르고 있었 고 카리나까지도 조금 질려서 기가 죽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죽일려면...... 한번에 죽일 것이지..... " 그때 일루미네이터가 란부르크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루미네이 터는 벌써 네척의 호위함을 항복시키고(사실 겁에 질린 두척의 적함은 자진항복하는 모범을 보였다.) 란부르크로 접근한 것이다. 란부르크의 전투원들은 젤리드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왕자왕하는 가운데 줄리탄과 시오, 톨베인 등이 란부르크로 올라탔다. 엉망진창이 된 갑 판을 둘러보며 놀란 얼굴의 줄리탄. "그 팔은 어떻게 된거에요?" "좀 긁혔어." "아 그러십니까...... " 긁힌 정도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나 하듯이 보고 있는 줄리탄이 다 아 플 정도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깊은 상처였지만 젤리드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단지 귀찮아 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이모저모에서 대단한 사내인 것만은 확실하다. 줄리탄의 모습을 보고 놀란 호이젠의 목소리 가 들렸다. "주, 줄리탄 님?" "어? 너는?" "설마 줄리탄 님이...... 노블리스?" 명석하기 이를데 없는 호이젠마저도 어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고 뭔지 모르게 긴장감이 풀려버린 젤리드는 '둘이 아는 사이야?' 는 얼굴로 줄리탄과 호이젠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줄리탄....... 넌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냐?" 2. 케센의 레지스탕스 본부 옥상에는 언제나처럼 카넬리안이 앉아 있었 다. 식사 조차 하지 않는 그녀였기 때문에 같은 '식구'들이라도 그녀 의 얼굴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프란츠가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하루에 한번 쯤 그녀를 보러가는 이유라면 카넬리안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자극되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의 작은 나무 상자 속 에 어머니의 예쁜 장신구를 몰래 숨겨 놓고 자기 전에 한번 씩 기대에 찬 눈으로 열어보는 것 같은 기분. 프란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옥상 을 올라가선 그녀에게 말했다. "카넬리안 씨. 리더가 불러요. 지금 후원자가 도착했데요." "....... " 살포시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며 프란츠를 바라보았 다. "자고 있었어요?" "아니...... 아무 생각도 안하는 중이었어." 그녀는 스스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력의 저항을 외면해 버린 것 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몇층이나 되는 건물 밑으로 몸을 내렸다. 그렇 게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은 프란츠의 눈에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작고 빨간 과실 - 그리고 자살연극처럼 보여서 소 년의 마음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3. 란부르크의 갑판에선 함장 에어데일의 항복 요청이 진행 중이었다. "하, 항복하겠다. 모든 책임은 저 키마인에게 있어! 이미 무장해제를 했으니까 사, 살려....... " "너 같이 무능한 적을 죽이는 건 우리 손해니까 죽일 생각 없어. 그 러니까 입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톨베인이 한심한 얼굴로 에어데일의 입을 막았다. 줄리탄도 가만히 있는 걸로 봐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신을 차린 키마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머리에 흘 러내리는 피가 눈을 가려 시야도 반쯤 잃은 상태였지만 애써서 자세를 잡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줄리탄이 다가갔다. "이제 괜찮아요. 오랜만이에요. 키마인 경." "...... ?" 줄리탄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탁 풀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 나 보다. 키마인은 '내가 이미 죽은 건가? 헛것이 다 보이네.'라는 멍 한 표정으로 변해 버려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 왜 여기 있는 거야. 줄리탄은 키마인이 상황파악을 못하자 난감하게 웃는 표정으로 띄엄띄엄 말했다. "아아. 실은 제가 노블리스...... 에요. 그렇게....... 되었네요." "붉은 옷이....... 아닌데요? 두자루의 검도 없고." "그게 지금 요리하다가 뛰쳐 나와서. 옷 갈아 입을 시간이....... " "...... " 줄리탄은 확실히 맥 빠지는 사내였다. 키마인이 줄리탄을 보고 재회 에 만가워하는 시간도 잠시. 평소였다면 '그런데 카넬리안 씨는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을텐데 키마인은 다시 굳어버린 표정으로 줄리탄에 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잠시 비켜 주시겠습니까?" "주, 주인님." 안타까운 얼굴의 호이젠이 외쳤지만 키마인은 단호했다. "아직 결투 중입니다." "키, 키마인 이 멍청한 놈아! 조용히 항복하라고! 이미 우린 졌어!" 오히려 가발이 벗겨질 정도로 호들갑 떠는 것은 에어데일 쪽이었다. 그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한 것은 목에 톨베인의 칼이 다가와 있기 때문 이다. "히이익! 포, 포로를 죽이지 마세요!" "우린 군인이 아니니까 포로 같은 것도 없어. 전리품 주제에 떠들지 마라." 한편 젤리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키마인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 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어디서 많이 본 녀석 같은데.'라는 얼 굴이다. "타앗!" 키마인은 마치 물 위를 낮게 날아 오르듯이 튀여 나가며 동시에 남아 있는 기력을 끌어 모았다. 부상당한 몸이라고는 믿기 힘든 키마인의 의지를 호이젠 마저도 강하게 느낄 정도였다. '기사가 검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 만을 배웠기 때문이겠지. 특이하거나 성스러운 것이 아냐. 그냥 상인이 물건을 팔 며 살아가고 농부가 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작가가 글을 쓰며 사는 것 것처럼 기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 뿐일지도. 동경의 대상일지는 모르지만...... 외롭고 단순하고 너무 강해서 금방 멸종해 버릴 것 같 은 동물. 그게 기사 일지도 몰라.' 피를 뿌리며 필사적으로 달려든 키마인과 젤리드의 싸움은 예상을 넘 어 30분 이상 이어졌다. 수평선에선 슬슬 석양의 기운이 고개를 내밀 고 있었다. 붉은 태양빛을 머금은 그 거대한 흉수를 한손으로 휘두르 며 쉴세없이 키마인을 몰아붙이던 젤리드는 뭐가 즐거운지 입가에 엷 은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물론 계속 무시무시한 검격을 날리면서. "널 보면 자꾸 리이가 생각나는군." '리이라면..... 푸른 맹금 리이 디트리히?' 키마인은 '검은 추기경' 세이드와 일전을 벌였다는 결투담이 들려오 는 여기사 리이에 대해 만난 적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헤스팔콘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빼어난 실력의 여기사이며 또한 들 리는 소문에는 키가 2m가 넘고 철퇴를 휘두르는 곰 같은 여자라지? (리이가 그 소문을 들었다면 '누구야? 그 여자는.'이라고 황당해 했 겠지만 젤리드의 말대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리이는 기사수행 중에 칼이 부러지면 다른 칼을 뽑아 들고 울며 불 며 계속 나한테 달려 들었지. 하루종일. 내 팔이 아플 정도로." "...... " "그래. 지금 내 팔이 아프다. 그러니까 지금은 널 살려주지." 이상한 이유였다. 젤리드는 갑작스럽게 공격을 멈추면서 '아아 나도 예전같지 않아.'라고 중얼중얼 거렸다. 검을 넣은 젤리드를 보며 화가 치민 것은 키마인이었다. "무, 무슨 짓 입니까! 아직 결투가 끝나지 않았는데!" "누가 결투를 끝낸다고 말했나? 넌 아직 나나 리이와 정식으로 싸울 실력이 아냐.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도전해라...... 그 때까지 우리들은 계속 결투 중이니까." 참 말은 멋있었지만 사실 젤리드의 머리속에는 '줄리탄이 네가 기절 해 있을 때 절대로 널 죽이지 말라고 몇번이나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 에 풋내기 죽이고 두고 두고 잔소리 듣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6할 이었다. 4. 레지스탕스 케센 지부에 찾아온 자는 거물 중에 거물이었다. 즉 달라 카트의 레지스탕스를 배후에 후원해 주고 있는 자. 암약하는 스폰서였 던 것이다. 홀에 모여 후원자를 기다리고 있는 레지스탕스들은 저마다 그가 나타난 이유에 대해 미루어 짐작해 보고 있었고 프란츠 역시 그 '이유'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하면서 카넬리안에게 속삭였다. "누굴까요 대체?" "글쎄....... " 카넬리안은 언제나처럼 별 관심 없어 보이는 듯 싶었다. 그리고 곧 네명의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후원자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는 맹인 인데다가 아무리 늙어봐야 30대 후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예상이라면 고집스럽게 생긴 노인 정도가 아닐까 했지만. 그의 몸은 마치 고목처럼 말라 있었고 입고 있는 모습도 청교적인 마법사의 것 같았지만 풍기는 기품 만큼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않는 자였던 것이다 . 카넬리안은 차가운 눈빛을 들어 그의 움직임을 훌터 보았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풍겨나오는 수은과 안티몬의 냄새에서 그의 정 체를 벌써 짐작한 듯 싶었다. "지금까지 정체를 숨겨야 했던 제 입장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멀어버린 두 눈을 차분히 감고 독경같이 낭랑한 목소리로 홀을 울렸다. "저는 달라카트 황족인 루스 리그나이트 입니다. 현 황제인 멜 리그 나이트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주변이 놀라운 탄성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반 황실 레지스탕스의 후원자가 직계 황족이었다는 것은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 기 때문이다. "현재 달라카트의 황제인 멜 리그나이트, 나의 형은 이 달라카트 제 국을 충실히 이끌 자가 아닙니다. 헤스팔콘에서 보낸 주색에만 관심이 있고 지방 귀족들의 비대해진 힘에 황실이 제국을 이끌 힘을 잃은 지 금, 저는 감히 황실과 달라카트에 극단적 개혁을 원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두 손 불끈 쥐고 외쳐야 어울릴 말이 었는데 루스는 청아할 정도로 조용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잠 시 입을 다물고 마음을 굳힌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연금술이라는 사술에 빠져 두 눈을 잃고 이 쇠약해진 몸으로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힘을 잃은 마법사일 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제 동생을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이름은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몇년 전 황실에 서 도망친 못난 녀석이지만....... 오직 세라피스만이 달라카트의 새 로운 황제로 앉힐만한 능력과 정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스의 말을 너무도 간단했다. '자신의 형인 현 황제를 몰아내고 혈 통과 재능이 있는 동생을 앉히려는 계획하고 있으니까 도망친 동생 놈 을 잡아와라.' 아닌가. "세라피스 태자 저하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케센의 리더인 뤼데거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디있는 줄 알 아야 잡아오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루스는 세라피스를 떠올리며 조금 인상까지 쓰며 대답했다. "그 녀석은...... 황실에서 도망친 이후 황실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 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어디 있는 지 모른다는 의미...... 입니까?" "아니. 제 미약한 능력으로 알아본 결과 현재 서부의 남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다시 한번 찾아봐야 겠습니다만." 역시 마법사. 그의 능력으로 세리피스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루스 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세라피스를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5. 결국 키마인은 줄리탄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일단 이대로 헤 스팔콘으로 돌아간다면 에어데일이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울 것이 뻔했고 무엇보다 가문의 자부심이라는 것은 정해진 틀에서 빠져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골몰한다고 그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는 걸 확실히 느낀 것이다.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아버지가 가슴에 품 었던 칼, 반복하고 싶진 않다. 그리하여 상황은 란부르크 갑판에 잡혀 있는 십여명의 유랑극단들을 풀어주고 있는 중. "이야아! 공기 좋다! 바닷 공기가 차암 좋아요. 그렇죠?" "...... " 갑판 밑에서 올라오자마자 긴장감이 전혀 없는 사내가 있었다. 특별 히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 났는데 '감사 합니다 모두들!' 이라거나 '역시 신은 살아 있었어!'라는 식의 안도의 말 한마디라도 해야 그럴 듯한데 이 자는 뜬금없이 바다 감상에 열중 이지 않은가. 누더기에 가까운 로브를 입고 있는데다가 뒤로 묶고 있 는 밝은 금발의 머리칼도 다듬지 못해 헝크러져 있었지만 건강하게 그 을린 피부와 웃음띈 얼굴이 매력적인 남자였다. "이런 멋진 날엔 싸움질보다는 역시 나른한 음악을 연주하며 술을 마 시는 편이 좋은데 말야......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세 라피스. 춤추고 노래부르고 연극하는 것을 좋아해요. 잘 부탁 합니다. 헤헤." '이 녀석은 또 뭐야?' 너무도 유유자적한데다가 뻔뻔스러운 자는 바로 직계 황가의 일원인 세라피스 리그나이트였지만....... 그런 걸 알턱이 없는 사람들은 황 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는 야유회에 나와 서 즐겁게 통성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 그런데 있잖아요. 그게 정말이에요?" "뭐, 뭐가요?" 세라피스는 또 대뜸 자신을 풀어주는 시오에게 찰싹 달라 붙어서 수 다를 떠는 것 아닌가. 도리어 당황한 시오가 뒤로 슬금슬금 피하기 시 작했다. "그러니까 조오기 저 함장이 우릴 바다에 던져버리려고 했다는 말을 얼핏 들었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말해주실래요?" "아 그건...... " 그런 그에게 못들은 채하고 있는 함장 에어데일을 대신해서 키마인이 다가오며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는 역시 예의바른 제국 청년이었다 .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역시 그랬군요. 잠시 실례." 라는 말을 슬쩍 흘리는 것 같던 세라피스는 웃는 얼굴 그대로 키마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뭐, 뭐야!' 마치 세라피스의 몸이 바람에 휩싸인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았 다. 기력도 살기도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키마인의 등 뒤로 빠져나온 세라피스는 함장 에어데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 다. "내 칼!!" 놀랍게도 세라피스는 어느새 시오의 허리춤에 있던 각도마저 뽑아든 것이다. 시오나 키마인 역시 결코 느린 자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세 라피스가 움직인 것을 느꼈을 때 이미 세라피스는 서 있는 사람들 사 이 사이를 피해가며 거의 에어데일의 앞까지 다가가 있을 정도였다. '빠, 빠르다!!' 줄리탄은 세라피스의 움직임이 흘리는 금빛 흔적만을 볼 수 있었다. 젤리드의 움직임을 굳이 '공포스럽다.'라고 표현한다면 세라피스의 경 우에는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것 마냥 감탄사가 나오는 부드러움이 다. 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 그런 세라피스의 행동을 보 며 검은 벽처럼 그를 막아선 것은 젤리드였다. 파아아아악! 젤리드가 검을 통해 뿜어낸 힘은 세라피스의 몸을 찢어내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세라피스는 그것을 막지 않고 유연하게 뛰어 넘으며 젤리 드의 눈을 향해 향해 검을 내질렀다. "흥!" 젤리드는 몸을 빼며 공중을 유영하는 듯한 세라피스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렀지만 즉시 세라피스가 들고 있는 하얀 각도가 흉수를 백사처 럼 감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헤스팔콘에선 배운 적도 본 적도 없는 그 런 화려한 검술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순식간에 손목이 잘려나갔을 것 이다. 젤리드는 본능적으로 검을 뒤로 뺐고 세라피스는 그런 젤리드의 검을 밟고 튀어 올라가 그를 넘어가며 에어데일 앞에 착지해서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세라피스의 얼굴은 희희낙락하던 방금 전과는 18 0도로 뒤바꿔 에어데일의 심장이 멈춰버릴 만큼 날카로웠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내라고 했지? "만약 저 분들이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널 죽여버렸을 꺼다. 너 같은 놈들이 싫어서 내가 집을 나왔지...... " "이봐. 너. 기사냐?" 젤리드는 몹시 기분이 나쁜 듯이 몸을 돌리며 세라피스에게 말했고 잠시 조용하던 세라피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 와 있었다. 그는 '나도 참 주책이야!'라는 넉살 좋은 얼굴로 들고 있 는 시오의 칼을 보며 헤헤 거리고 있었다. "어라? 내가 왜 칼을 들고 있는 거지? 아하하하. 미안해요. 나도 모 르게 그만. 설마 그 커다란 칼로 절 공격할 생각은 아니겠죠? 용서해 주실 꺼죠? 기사라뇨. 전 그냥 그냥 어설픈 연극배우에요." "...... " 단순한 연극배우 일리가 없다. 젤리드는 단박에 세라피스가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만한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가 쓰는 희안한 검술이나 천부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빠르기 만큼 은 젤리드마저도 잘못하면 당할 뻔 했기 때문이다. 세라피스는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방실방실 웃었다. "석양에 어울리는 노래 불러 드릴까요?" 그 이후 세라피스는 가스발 사략함대에 찐드기처럼 달라붙으며 무전 취식마(無錢取食魔)가 되어 버렸고 그를 '어여삐' 여긴 물키벨로부터 '가스발 사략함대 공식 악사'를 임명 받아 그녀의 '기쁨조'로서 지내 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세라피스는 한번도 검을 쓰지 않았다. 6. 레지스탕스들을 향한 루스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 한가지 조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녀석, 세라피스에게 절대로 검을 주지 마십시오." 이미 세라피스가 한번 칼부림을 부렸다는 것을 루스가 알았다면 통곡 을 금치 못할 일이었겠지만. "설마....... 기사 인가요? 세라피스 태자 저하는?" "특별히 기사 수업을 받은 적은 없지만...... 타고난 검사입니다. 검 한자루만 있으면 아무리 두꺼운 포위망도 뚫어버릴 것이 분명하니까요 . 그리고 여간해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기도 하지요 . 변장도 잘하니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세라피스가 한번 칼부림을 부렸다는 것을 루스가 알았다면 통곡 할 노릇이었겠지만. 뤼데거가 말했다. "그럼 그런 분을 누가 가서 데려와야 한다는....... " 황태자치고는 이상한 성격임에 분명한 자다 세라피스는. 아무리 고귀 한 황가의 일원을 데려오는 거사라고는 해도 상대는 기사급이다. 보통 대원이 갔다간 흠씬 두드려 맞고 돌아올 것이 뻔했다. 그런 생각과 함 께 레지스탕스 일원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뒷자리에 무표정에게 앉아 있는 카넬리안을 돌아 보았다. "제가...... 가야 하나요?" 간만에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 된 카넬리안에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Blind Talk 늦었습니다. 빨리 4권을 내려고 애를 쓰는 만큼 부담감도 커져서 쓰다 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 소심하게 고민하느라 늦었네요. 요즘 엔 캐릭터가 자꾸 불어나는 것이 걱정 입니다.(슬슬 죽여버려야 할 때 가 온 것인가... ) 전 환타지를 잘 모릅니다. 게시판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을 때 에도 전 환타지(순수문학에서 구분짓는 환상 문학말고)를 거의 읽어본 것도 없고 솔직히 큰 관심도 없는 편인데다가 테마톨로지(소재주의) 자체에 무감한 편이어서...... '달나라 이야기인가.'라는 식으로 실감 하지 못했습니다. 창피하지만 하나 일화를 고백하자면 몇년 전에, 나 : "그 환타지 소설이라는 것 있잖아..... 그 중에서 유명한 것 있 으면 좀 알려줘." (실명을 언급해서 죄송스럽지만 뭐 나쁜 이유가 아니니까요.) S : "글쎄. 이영도 씨 것이 요즘 가장 유명하지." 나 : "뭐? 이영도 씨가 소설도 썼어?" S : "왜, 왜 그렇게 놀래?" 나 : "그 사람, 시인 아냐?" S : "........ " 이영도(1916-1976). 호는 정운. 시조 시인. ....... -_-;;; 제가 아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지금도 그때와 별로 발 전한 바는 없지만...... 갑자기 그 분의 시 한수가 떠올라서 책을 뒤 져서 적어 봅니다.(한번 읽어 주세요.)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지금에 와서 읽어도 여전히 죽여주는 시입니다. 본래 모더니즘 풍 의 시를 좋아하긴 하지만 시조의 맛과 종장의 형식미가 멋지게 결합되 었다고 느껴서 오래도록 기억나는 시네요. 아무튼 이게 중요한게 아니 라...... 그때 이후로 환타지라는 것이 뭘까 하며 몇 몇 책들을 뒤적 이다가 '이렇게 쓰면 그럴듯해 보이려나?'라는 생각에 이 소설을 썼지 만...... 그냥 만화 같은 글이지요. 아니 아니 만화 같아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성하기도 전에 매너리즘에 빠져도 좋다고 허우적 거리는 저 는 정말 구제불능입니다. (혹시나 기우에 사족을 붙이자면 절대로 '환타지'라는 것을 폄하하거 나 소설가 이영도 씨를 우스개를 삼은 것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이번 잡담은 시로 시작했으니까 시로 끝내렵니다. 그러고 보니까 김소 윤 씨의 '생명의 서'라는 시리얼 연재작(물론 출판된)의 제목을 보다 가 연상작용에 의해 유치환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생명의 서'라는 유 치환의 시를 몹시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고등학교때...... 시험에 당골로 나왔지요?) 전 참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아마도 조지훈 시인의 '봉황수'와 김종길 시 인의 '성탄제'인 것 같습니다. 그 시를 읽어보면 느껴지는 세월과 연 륜과 고집은 서투른 기교나 장황한 미사어구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천재를 믿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천 재가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말이 사실이라도 저는 여전히 천재를 좋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구제불능'이라도 좋으니까 진실하려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아 또 생각났다. 김광규 시인의 시들을 아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 서 한편 적어 놓을께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랫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르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Niniroso, 밤하늘의 트럼펫을 들으며... (대낮에 들어도 좋네요...... ) ps:...아차!!!!! 저어 이거 읽어주시는 분들 죄송하지만 http://cafe14.daum.net/Cafe-bin/intro.html?cafe=dragonlady 여기 한번 들려 주시겠습니까?^^ 너무 부끄럽게도 제 소설 관련 DAUM 카페가 만들어져 있더라구요. 먼저 만들어 주신 분께 너무 감사드리며(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아직 회원수가 많지 않아서... 시간 나시면 가입 좀 해주시고 활성에 일조해 주세요.(스스로 이런 부탁 하니까 뻔뻔한 것 같긴 하지만... ) 헤에. 만화나 게임 쪽에 있을 때보다 좋은 것은 확실히 읽어주시는 분 들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거랄까요.(먹고 사는 건 여전히 힘들지만) 『SF & FANTASY (go SF)』 124180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8 14:28 읽음:46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5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153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26 06:12 조회:105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5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Sleepless night 1. 가르바트 북해 기사단의 프리셉터 마르켈라이쥬 혼과 거대한 수련장 한가운데서 격렬한 대련을 벌이던 마르켈라이쥬의 심복 가이브러쉬는 수많은 헤스팔콘 기사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마르켈라이쥬의 양수 검(兩手劍)을 검과 방패로 교묘하게 막아내며 몇시간 째 실전을 방불 케 하는 대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르켈라이쥬의 검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을 향해 검을 찌르던 가이브러쉬가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코머런트 상공(相公)을 왜 그냥 놔두시 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헤스팔콘 황실의 실세를 세이드 손에 죽은 로이터였다고 말한다면 가 르바트 황실의 실세는 코머런트 상공이었다. 완숙한 검무(劍舞)를 방 불케 하는 동작들이 이어지며 그들의 낮은 대화는 계속 되었다. "코머런트는 황제 폐하에 대한 모반을 꾸밀 것이 뻔합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미 코머런트가 그의 책사인 스테온을 통해 상당수의 지방 남작들 을 포섭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게 모반의 징조가 아니라면 무엇 이겠습니까!" 가이브러쉬는 마치 자신이 존경하는 상관인 마르켈라이쥬를 질책이라 도 하는 듯이 그를 향해 연속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마르켈라이쥬는 그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단 하나의 공격도 허용치 않 은 채 냉정함 그대로 반격하며 대답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가이브러쉬 경." "폐하를 종용하여 북해 기사단 소집령을 내리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저를 포함한 북해 기사단의 명예로운 기사들은 폐하와 마르켈라이쥬 님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 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제가 앞장서서 코머런트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겠습니 다!" "...... " 늙은 여우같은 코머런트라면 지방남작들과 황실의 관리들을 구워삶아 어리고 겁많은 여제(女帝) 우테 크룬세스를 밀어내고 옥좌에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마르켈라이쥬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 러기 때문에 항시 황제 옆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북해 기사단은 헤스팔콘과의 전쟁을 위해 조 직된 것이지 제국 내분에 움직일 수는 없어. 북해 기사단과 코머런트 쪽이 충돌한다면 웃는 자는 헤스팔콘 황제 뿐이야." "하지만!" "나도 너도 가르바트의 기사다. 폐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력을 분 열시키고 내전을 벌인다는 건 기사가 할 짓이 아니다." "...... 알겠습니다." 코머런트도 유일하게 두려운 대상인 마르켈라이쥬가 그의 성격상 절 대로 파벌을 만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이브러쉬는 잠시 꽉 다문 입으로 마르켈라이쥬의 사방으 로 분신처럼 움직이며 그의 헛점을 노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헤스팔콘의 상황도 엉망인 것 같습니다. 저희 쪽에선 다행인 일이지 만." "아무래도 그렇겠군." 마르켈라이쥬의 귀에도 아취발트 이젠그람이 자결하고 로이터가 살해 당하고 세이드와 매소크 까지 황실에서 도주했다는 놀라운 사건들이 들어 왔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뭐가 말인가." "더 이상 세이드와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되도록 그 자와 싸우고 싶지 않다." 마르켈라이쥬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많은 기사들의 관심사라면 두 제국의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켈라이쥬와 세이드의 대결이 다. 아무래도 기사라는 것이 검과 결투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이브러쉬 역시 그 둘의 싸움은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흥분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싸움을 즐기고 싶다면 기사보다는 불량배가 되는 편이 좋아." 마르켈라이쥬는 전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많은 기사들의 목을 베어버 리는 세이드의 존재 자체가 골치 아팠다. 무엇보다 아군에게 큰 손실 을 입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욕심이야 어찌되었든 세이드와 붙는 것은 되도록 피해 왔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이드 역시 더할나위 없 이 강한데다가 조금도 겁을 먹지 않는 마르켈라이쥬와의 싸움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불경한 말이지만 만약 코머런트의 손에 이 가르바트 제 국이 넘어간다면 그때는 어쩌시겠습니까?" "모르겠다." "비겁합니다. 당신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신의 논리만이 옳고 자신의 방식대로 모 두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는 호사가(好事家)들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또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런 독단에 동참할 바에는 차라리 비겁자가 되겠다." 그 말과 함께 마르켈라이쥬가 내리친 양수검이 가이브러쉬의 방패를 부셔버리며 그의 얼굴에 도착했고 대련은 끝났다. 2. 한달에 한번 가량 벌어지는 베오폴트의 밤축제는 꽤 멀리 떨어진 바 다에서도 베오폴트 전체가 하나의 빛무리로 보일 정도로 불야성이다. 화려하기로 따지면 헤스페리아 어느 도시의 축제도 비할 길이 없을 것 이다. 거기에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일부러 먼 곳에서 오는 관광객들 까지 북적거려 오늘 같은 축제 날이라면 도시 곳곳에서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가스발 사략함대의 사람들 역시 배를 정박하고 시가지 여기 저기에 퍼져 축제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다. "톨베인아! 나 저거 사줘!" "...... " '축제 따위는 질색이야.'라며 선실 침대에 누워 있는 톨베인을 억지 로 끌고 나온 시오와 물키벨은 자극적인 냄새의 먹거리들과 실생활에 는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장신구들을 잔뜩 팔고 있는 대로 한복판 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물키벨은 피곤한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에 손을 불량스레 집어 넣은 채 뒤따라오는 톨베인의 팔을 연신 잡아 당기며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죄다 사 달라고 조르고 또 조르고 있었다. 톨베인은 자신을 사방에서 훔쳐보는 항구 아가씨들의 시선에 괴로워하며(그는 누가 몰래 바라보는 것 싫어한다.) 물키벨에 게 말했다. "해룡이...... 저런 조각품 따위 사서 뭐하려고요. 사봐야 또 자라탄 한 구석에 처박아 둘 꺼면서." "사줘! 갖고 싶단 말이야!" 대체 몇년 살았는지도 모를 그녀에겐 말이 통하질 않았다. "자라탄이 무슨 용굴입니까? 잡동사니만 잔뜩 모아 놓고. 까마귀 같 잖아요." "까, 까마귀? 뭐야 너! 그 무례한 비유는!" "맞잖아요. 이것저것 쓸모도 없는 거 잔뜩 모으고 쉴세 없이 떠드는 게." "우아아앙! 너무해!!" 결국 물키벨은 또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인간형이 되서 그녀를 보호하 던 크라켄이 톨베인의 멱살을 잡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크라켄은 그 의 이미지에 딱 맞게 우락부락한 대머리 흑인의 모습이었다. "너 이 놈! 해룡의 수장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당장 사주지 못하 겠어!" "그렇게 사주고 싶으면 크라켄 씨가 사 주면 되잖아요!" "용이 돈이 어딨어 돈이! 우리에게 인간의 돈 따위는 필요 없다고!" "쳇. 더럽게 가난한 용이네." "뭐, 뭐라고 이 놈이!" 언제나처럼 그들은 사소한 것 가지고 잘도 싸운다. 평소 같으면 이쯤 에서 말려야 할 줄리탄은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고 동행하고 있 던 시오는 베오폴트 특산 얼음조각들을 사먹으며 노점상 주인과 희희 덕 거리고 있었고 레비아탄까지 그 훤칠한 외모 덕에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인간들의 행동이 참 흥미롭다는 얼굴로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너무 제멋대로가 아닐까 하 는 걱정까지 드는 장면이었다. 3. 리이의 와인하우스 '낙원의 오후'에서는 호이젠과 함께 가게를 찾은 키마인이 리이, 젤리드와 대화 중에 있었다. 물론 축제에 걸맞게 가게 안에도 와인을 사가거나 시음을 하는 손님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이카 테스와 카리나가 정신없이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카리나는 축제때 앞 치마까지 두르고 와인을 날라야 하는 것에 기분 퍽 상한 표정이다. "의외입니다. 푸른맹금 리이 경께서 이런 모습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키마인은 조금도 기사답지 않게 길게 내린 금발과 치마까지 입고 있 는 수려한 리이를 보며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리이 외의 여기사들을 몇번 본 적은 있었는데 '여자이길 포기한' 무서운 외모에 키마인의 기 가 질려 버렸었기 때문에 리이에 대한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리이 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어떤 모습을 예상하셨는데요?" "예? 아하하...... 그건 뭐." '키가 2미터에 철퇴를 주무기로 쓰는 공포스런 아줌마'였다고 절대 말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말했다간 조용히 와인을 맛보고 있 던 젤리드가 테이블을 뒤집어 버릴 지도 모른다.(실상 젤리드는 땅을 치며 웃을 성격이지만.) "아 그리고 경이라는 칭호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칭호 들으면 저 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려서."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없는 법이다. 키마인은 리이의 고운 외모에 어 울리지 않게 그녀의 손 곳곳에 있는 상흔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엄청난 훈련을 했다는 의미이며 그녀가 기사였다는 지울 수 없 는 증거이리라. 젤리드는 자신은 도무지 와인의 맛같은 거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리이를 흉내내며 조금씩 음미하려 애쓰던 와인을 단숨에 털 어 넣어 버린 뒤에 말했다. "이봐 키마인. 넌 이제 어쩔꺼냐?" "어쩌다뇨?" "너도 이제 나나 리이처럼 기사 아니잖아. 기사 이름 팔아 먹으면서 편하게 사는 것도 이제 끝이라는 말이야. 어떻게 먹고 살꺼야? 이 가 게 종업원이라도 할래?" "하하. 종업원이요?" "뭐 좋잖아. 대륙 최초로 기사 출신 세명이 운영하는 가게라니. 헤스 팔콘이 쳐들어와도 이 가게는 점령당하지 않을껄?" 기사 3인이면 여간한 왕국도 계약 맺기 힘든 '군사력'이다. 그런 자 들이 좁은 가게에 모여 와인병을 닦고 있는 광경이라니 상상한 해도.. .... 뭔가 대단히 한심하다. 젤리드는 가스발 사략함대의 서포터로 있 긴 했지만. "전 줄리탄 씨 옆에 있겠습니다." "그 말은 가스발 사략함대에 들어가겠다는 뜻?" "예. 아무래도 줄리탄 씨에겐 배울 것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녀석...... 요리 솜씨 하나는 배울만 하지. 리이도 좀 배워." "내, 내 요리 실력이 어때서?"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실력이지....... " "하하하하." 키마인은 줄리탄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 1년 사이 에 노블리스라는 별칭과 함께 해적들을 통합시켰고 한편으로는 카넬리 안과 헤어지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도 쉽게 변하지도 내색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은 공중으로 수십미터를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몇초만에 수백 미터를 주파하지 못해도 충분히 강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젤리드 씨와 전 아직도 결투 중이잖아요?" "젤리드 당신 또 싸웠어! 정말 어쩌려고 그래!" 리이가 젤리드를 홱 돌아보며 소리쳤고 젤리드는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4. 그 '강한' 노블리스 줄리탄은 멍한 표정으로 도시 뒷골목에서 공연하 고 있는 소규모의 어린이 인형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같이 따라 온 그레시다가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메이 역시 아이들이 대부분인 관객들에 쑥쓰러워 하는 얼굴로 앉아 있 었지만 그레시다와 (손수건까지 꺼내들고 있는) 세라피스가 헝겁인형 들이 나와서 조잘거리는 인형극에 푹 빠져 감동 받은 모습이어서 도저 히 이만 가자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그래서 그들의 수천년에 걸친 사랑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집 에서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와아아아!!" 해설자의 나레이션과 함께 아이들의 탄성이 들리며 헝겁인형들이 인 사했고 막이 내렸다. 그레시다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 얼굴로 조금 졸 린 표정의 줄리탄을 올려보며 말했다. "주인님. 너무 아름다운 얘기에요." "으, 응? 아 그래. 그렇네." "크으으으윽!! 정말 명작이야 저 인형극은! 벌써 사십번을 넘게 봤는 데도...... 여전히 감동을 참을 수가...... " 세라피스의 반응은 강렬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미소띈 얼굴로 눈물까 지 훔치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사, 사십번?" 메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세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어린이 인형 극을 사십번? 아무리 인형극매니아 라지만....... 대체 이 남자 뭐하 는 사람이야, 라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때. "주인님. 왜 그러세요?" 그레시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줄리탄을 바라본 것은 갑자기 벌떡 일어선 줄리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 게 크게 당황한 표정, 예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메이 역시 놀란 얼굴 로 말했다. "줄리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줄리탄은 쓸쓸히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히 말했다. '....... 착각이겠지.'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빠져나가는 이 뒷골목의 무대에서 줄리탄 은 카넬리안이 근처에 있다는 '착각'에 가슴이 아팠다. 너무 사랑했지 만 어쩔 수 없이 헤어져버린 연인들의 진부한 이야기가 아직까지 사람 들의 주된 흥미거리로 가공되고 있는 이유라면 그런 '진부한' 일들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도 인형극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길, 줄리탄은 몇번이나 기도했다. 5. "와아. 여기 정말 화려하네요. 그렇죠? 카넬리안 씨?" "...... "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는 카넬리안을 뒤따르던 프란츠가 계속 말 을 걸었지만 카넬리안은 대답도 없이 사략함대의 배가 정박해 있는 항 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루스의 말로 세라피스는 현재 가 스발 사략함대가 있는 곳에 있다고 했었다. '아까부터 가슴이 아파. 기분 탓인가?' 카넬리안은 인파들 사이 사이를 흐르듯이 헤쳐나가며 복잡하게 엉켜 버리고 있는 자신의 기분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세라피스를 잡아 오기 위해 파견된 인원은 카넬리안과 프란츠 뿐.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뤼데거의 말에 카넬리안은 고개를 가로 저었던 것이다. 그녀 가 불현듯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후드 속에서 붉게 빛나는 그녀의 눈 빛에 놀라 프란츠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프란츠." "예?" "네가 위험해져도 난 도와주지 못해. 혼자 자신을 지킬 수 있겠지?" "예. 조심할께요." 차갑다. 프란츠는 그녀가 정말로 자신이 아무리 위험해져도 이번에는 절대로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따 라 여기까지 온 것은 역시 위험한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그녀는 천에 감겨 있는 미스트랄을 꽉 쥐며 기묘하게 떨려오는 자신의 기분을 털어 내려는 듯 항구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6. 얼마후 시가지를 배회하며 불꽃놀이등에 기웃거리던 물키벨 일행과 뒷골목에서 빠져나온 줄리탄 일행이 만나게 되었다. 먼서 시오가 손을 흔들며 싱글거렸다. "여어! 잘 놀았어? 그레시다?" "예. 주인님. 재미있었어요." "좋아! 지칠 때까지 즐기자!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라는 둥의 시오의 잡담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줄리탄은 아주 기분 착잡해 하는 톨베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톨베인. 그 잔뜩 들고 있는 조각상들은 뭐냐?" "아무것도 묻지마...... " 톨베인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한보따리 들고 고개를 푹 숙이며 줄리탄 을 지나쳤고 그 뒤를 씨익 웃고 있는 물키벨이 따라가고 있었다. "아. 모두들 여기 계셨군요." 키마인 역시 호이젠과 함께 다가오며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그의 얼굴에는 술기운에 조금 홍조가 돌고 있었다.(술에 약하기는 줄리탄과 막상막하다.) "아! 이렇게 다 모였으니까 모두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죠? 좋죠 모두 들?" 세라피스가 갑자기 분위기를 띄우며 밝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돌아 보 았다. 확실히 이 사내는 뭔지 모르게 좌중을 끌고 움직이는 매력이 있 다. 그 매력에 가장 먼저 취한 건 아니나 다를까 시오였다. 시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좋아아아! 마시자구! 모두 마시고 죽는 거야!" "와아아! 파티다! 파티다! 나도 술 잘먹어어." 물키벨까지 호들갑이었다. 난감하게 웃는 메이. "에 나도 마시고 싶지만 오늘까지 끝내야 할 일도 있어서...... " "에이 메이 제독 니이임 빼지 말아요! 술 좋아하잖아요? 이 참에 리 이 씨와 젤리드 씨까지 불러서 크게 한번 놀아보자구요!" 세라피스가 기획하고 시오가 감독한 그 알찬 파티 계획에 찬물을 끼 얹어 버린 건 황급히 달려온 함대원의 보고였다. "메, 메이 제독! 모두 여기 계셨군요! 배에 큰 일이 났습니다!" "차분히 말해 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일루미네이터에 침입자 입니다! 세라피스를 내놓으라고 하는데 우리 들 실력으로는 도저히 그 여자를 막을 방법이...... " "그 여자?" 일루미네이터에 침입한 카넬리안은 세라피스가 없다는 걸 알고 배를 점령한 채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배에 남아 있는 선원들이 그녀를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일행은 급히 일루 미네이터로 발을 옮겼다. -Blind Talk 그렇습니다. 본래 이번 편에서 끝내야 하는데 또 한편 늘어나 버렸습 니다. 전 축제를 좋아합니다. 특히 낮선 곳의 축제 속에 혼자 서 있을 때의 화려하지만 멍한 느낌이 좋습니다. 언제인가 다큐멘타리에서 스 페인의 축제를 보여준 일이 있었는데. 그 축제가 벌어지는 스페인의 뒷골목들은 미로처럼 복잡하고 곳곳에 아주 작은 술집이나 무대가 잔 뜩 밀집되어 있더군요. 그런 곳을 방황하며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길을 잃어 결국 숙소로는 아침까지 돌아가지 못하는 상상은 병적 망상 일지도. 그런건 낮선 곳의 이방인 답겠지요. 정말 피곤하네요...... 아 졸려라. 저는 글쓰는 속도가 저 스스로 신 기할 정도로 늦는데다가 잔걱정이 많아서 쓰면서도 걱정 투성이 입니 다. 그리고 설날같은 빨간날이 끼어 버리면 한없이 늘어 집니다. 의자 위에서 아주 추욱 늘어져서 담배만 죽어라 태우다가 거실에 기어나가 뭐라도 요리해 먹고 다시 돌아와 다시 담배를 피우다가 어느 순간엔가 잠들어서 악몽을 꿉니다. 허억! 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시끄럽게 떠들 고 있는 TV와 켜져 있는 하얀 모니터. 뭔가..... 대단히 재미없는 생 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다음 편은 거의 다 썼습니다.(나름대로 비축분이랄까나.) 내일은 올 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주시고 올려주시고 감상 , 추천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잠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관련 사이트 : http://cafe14.daum.net/Cafe-bin/intro.html?cafe=dragonlady (단편 올렸습니다앗! 드래곤 레이디와는 별 관계 없지만... ) SCATMAN JOHN의 SCATMAN'S WORLD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418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0-16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1/28 14:29 읽음:549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0-16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관련자료:없음 [61602]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27 07:15 조회:98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0-16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last I won't last a day without you 1. "누가 널 찾는다는 거야? 너 혹시 범죄조직한테 엄청난 빚이라도 지 고 도망친 거 아냐?" 일루미네이터로 향하는 도중에 시오가 말했지만 세라피스는 아까전과 는 달리 무섭게 굳어 버린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자들의 정 체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라피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 했다. "나, 칼 한자루만 빌려 주겠어?" "뭐? 하지만 너...... " 세라피스는 젤리드와 일전을 벌일 역량을 가진 최상급의 검사였지만 평소에는 검을 차고 다니지 않을 뿐더러 검술 연습조차 하지 않을 정 도. 그렇게 여간해선 검을 가까이 하지 않는 그였다. 줄리탄이 스르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검집에서 세이버를 꺼내 돌리며 세라피스 에게 도파(刀把)를 내밀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껄 써." "너는?" "단신으로 배를 점령할 실력자라면 어차피 이 검으로는 이길 수가 없 어. 나도 필요하다면 인피타르를 써야겠지." "알겠어." 세라피스는 줄리탄의 검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과는 이질 감을 느낄 정도로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먼저 갈게." 그 말과 동시에 그의 모습은 흥청이는 인파 사이를 뛰어 넘으며 단숨 에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로 도약하는 금빛의 새를 닮았다. 2. "넌 어디 소속이냐? 해적인가?" 갑판 위에 서 있는 카넬리안과 프란츠를 둘러싼 가스발 사략함대의 선원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그녀 주변에 는 팔 다리 등이 부러진 동료들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다행이 죽 이지는 않았지만 자신들 수백이 달려 들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 끼고 있었기에 고요히 서 있는 그녀의 존재는 공포였다. 그녀의 목소 리는 감정이 끼어들지 않은 기계의 울림 같았다. "저는 세라피스 씨만 데려가면 됩니다. 당신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세라피스는 지금 여기 없어!"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잠시후면 메이 제독과 노블리스 경 그리고 사략함대의 지휘관들이 올꺼다. 그때 후회하지 말고 항복해!" "그들과도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단 절 공격한다면 저도 그들을 죽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미스트랄을 내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전투 중에 벗 겨진 후드 때문에 들어난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차가운 홍안(紅眼)이 배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제의 빛을 받아 타오르듯이 원색으로 빛 나고 있었다. 그건 마치 독을 품은 생물의 위험한 경계색을 닮았다. '무얼까. 뭐지 이 기분은...... ' 그녀는 몸이 저려올 정도로 마음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불안감을 억누 르기 위해 조금 인상을 찡그렸고 프란츠는 미묘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흔들리는 기분을 알아채며 의아해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축제의 소음 을 뚫고 공중으로 날렵한 실루엣이 떠 올랐다. 프란츠가 경악스런 외 침이 울렸다. "카, 카넬리안 씨!" "...... " 그녀는 반사적으로 미스트랄을 움직이며 송곳처럼 자신을 향해 낙하 하는 세라피스의 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녀를 당황하게 한 것은 자 신의 검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세라피스의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순간 적으로 주문을 외우며 몸 사방으로 칼날같은 기력을 뿜어 냈고 세라피 스는 즉시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카넬리안의 기력에 스쳐버린 세라피스의 뺨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카넬리안은 차 갑고 붉은 눈동자를 올려 굳은 표정의 세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세라피스 씨?" "나는 돌아가더라도 내 발로 돌아간다. 날 데려갈 생각을 한다면 널 죽일 수 밖에 없어. 물러가라." "전 당신의 생각을 들어줄 입장이 아닙니다. 당신을 데려갈 임무만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죽일 수 밖에 없군." 평소 같으면 '농담이었어!'라고 박장대소할 세라피스는 웃지 않았다. 단지 카넬리안 마저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자세 - 그녀 쪽으로 어깨를 향하며 오른발을 내딛은 기습에 어울리는 그런 모습으로 그녀를 죽일 결심을 보인 것이다. 카넬리안 역시 고개를 조금 숙여 세라피스를 치 켜올린 눈으로 바라보며 미스트랄을 가슴쪽으로 끌어 들였다.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걸까. 난 죽을 장소를 찾기 위해 여기로 온 걸까. 저 사람은 강해. 어쩌면 여기서 죽을 지도 모르겠네. 이제 그런 것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먼저 공격에 들어간 것은 카넬리안이었다. 그것은 마치 소중한 아무 것도 남지 않아 삶의 집착이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자멸을 기 다리고 있는 듯. 자살의 다른 모습처럼. 발소리도 없이 달려가는 그녀 의 붉은 단발머리가 마음을 태우는 불길처럼 흩날렸다. '저 여자,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세라피스는 그녀가 어쩐지 인간을 닮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날아드 는 그녀의 검을 빠르게 피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언저리를 노리며 검 을 찔렀다. 흘려야 하는 공격인데 그녀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세라피 스의 가슴으로 검을 찌르며 돌진했다. '너무 지쳤어. 지겨워. 이대로 죽고 싶어. 괴로워.' 의외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 마음의 모양일 것이다. 그 모양은 제멋대로 뿔이 나고 여기 저기 부셔 져 버린채 몸의 이곳저곳을 찔러서 아프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자신 의 마음이 싫다고 외면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넬리안은 크게 소리쳐 울며 자신의 마음을 산산히 부셔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절망적 인 자해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세 라피스를 향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것 밖엔 없으니까 자신에게 허용된 것은. '바보같이...... 들어줄 수 없는 곳에 있겠지만 미안해 주인님. 멋대 로 떠나놓고 이제와서 갑자기 봤으면 좋겠어. 잠시만 봤으면 좋겠어. 죽기 전에 볼 수 있다면 나 때문에 고생만 해서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정말로 미안했다고 그리고 좋아했다고 말해줄께. 그러니까..... .. 그러니까...... ' 짧고도 짧은 시간 사이에 그녀는 마음 속에서 그렇게 외쳤지만, 부질 없어. 뭐하는 짓이야 지금. 그녀는 목이 메어와도 가슴이 터질 것 같 아도 그런 건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며 날아드는 세라피스의 칼끝으로 뛰어들며 검을 내질렀다. '뭐, 뭐야!' 이대로는 같이 죽는다는 생각이 퍼뜩 들며 세라피스는 검을 빼고 민 첩하게 몸을 움직여 그녀의 뒤를 빼앗었다. 그녀의 공격은 정말로 무 모하고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카넬리안은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 이 상한 공허한 붉은 눈동자 그대로 몸을 돌리며 다시 세라피스를 향해 뛰어들며 검을 찔렀지만 세라피스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며 길게 뻗 어 있는 카넬리안의 검의 범위 밖에 섰다. '씰에게 자살할 권리를 줬다면...... 아마 세상 대부분의 씰들은 스 스로 목숨을 끊었을 꺼야. 영원히 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저주일 테니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런 직선적인 공격은 기사급의 실력을 가진 자 들에겐 절대로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세라피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검을 찔렀다. 그녀는 슬쩍 눈 을 감았다. '너무 지쳐서 이만 먼저 갈께요. 잘있어요...... '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터진 푸른 아우라의 무리가 그녀를 지켜주듯이 감싸며 도시 끝에서도 보이는 반투명의 푸른 빛이 갑판 위에서 폭발하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세라피스는 들고 있던 세이버 가 스파크와 함께 잘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청색의 기운에 휘감긴 검 을 든 채 붉은 옷을 휘날리는 자가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둘 사이에 끼 어든 것이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뻔했어. 내가 준 검으로 내가 사랑하는 여자 가 죽을 뻔 했으니까." "설마...... " 카넬리안은 미스트랄을 떨어트리며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세라피스 의 검을 막은 자를 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줄 리탄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인피타르를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까지 어디가 있었던 거야. 카넬리안." "주, 주인님?" 예전과는 입은 옷도 달라지고 그새 키도 조금 커졌지만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기분, 불안할 정도로 행복해서 느끼는 것이 두려운 그런 기분이 몸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나 멍청하게 웃고 화가 날 정도로 사람 좋은 자신의 주인님이었다. 단지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다음부턴 말 없이 사라지지 마. 테이머로서의 명령이니까." 줄리탄을 카넬리안을 돌아보면서 마치 쓰다듬어 주는 듯이 그렇게 말 했다. 카넬리안은 그런 줄리탄을 조용히 올려 보았다. 기분이 푸근하 다. 자신에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던가? 사라진 마음의 일부가 돌 아와서는 몸 속에 섞여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그런 줄리탄을 바 라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히 '미안했어요. 주인님. 절 기 다려 준 거에요? 너무 고마워요.'라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줄리 탄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풋...... 푸하하하하하!! 뭐야 주인님 그 엄청난 옷은! 안 어울려! 저언혀 안 어울린다고! 그건 그렇고 그 요상한 칼 뽑지 말라고 했지! 그러다가 죽는단 말야! 어쩌면 내 걱정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막 뽑아대는 거냐고! 버려! 그런 칼은!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좀!" "너 말야...... " 줄리탄은 '이제부터는 내가 널 지켜주겠어.' 라든지 '좀 웃어봐 예전 처럼.'이라는 말을 준비했다가 그녀의 뻔뻔스러운 태도 덕에 분위기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며 표정이 어둡게 변해 버렸다. 역시 사람 기분 모 르고 멋대로 말해버리는 건 그녀의 전매특허였다. 그녀는 갑자기 줄리 탄의 가슴에 머리를 포옥하고 기대며 싱긋 웃는 빨간 눈동자로 얼떨떨 해 하는 그를 올려 보았다. "아 주인님. 그 머리 멋있다." "너야말로..... 왜 머리색이 빨갛게 된 거야?" "우웅. 염색! 여기선 이런 머리 되게 많아. 예쁘지?" "으응." 줄리탄은 이제 코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자란 긴 앞머리를 손으로 쓸 어 올리며 그녀의 붉게 변해 버린 머리칼을 멍하니 내려보았다. 망할. 머리색을 바꿔버렸으니까...... 아무리 정보매매소에 의뢰해도 찾을 수가 없었지. 아무튼 거의 일 년 만에 재회한 그들의 첫 대화치고는 너무 일상적인 것인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된거 같네? 아무튼 줄리탄, 이 칼 부러진 거, 내 책임 아니다?" 세라피스는 다시 여유롭게 싱글싱글 거리며 부러진 세이버를 바닥에 버리고는 잠시 보류되었던 술판을 준비하기 위해 사라졌다. 3. 세상을 살다보면 우연히 구한 복권이 당첨되는 날도 있는 거다. 라는 궤변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갑자기 재회해 버린 두 사람과 함께 가스발 사략함대의 거대한 파티가 시작되었다. 장소는 일루미네이터의 선상, 물론 참가 인원들의 이목은 카넬리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저 여자가 카넬리안이었어? 정말 눈동자가 빨간 색이네. 신비해 보 여." "귀엽다. 역시 노블리스 경, 저런 대단한 씰과 계약하다니...... " "저 씰, 아까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지 않아?" 라는 말들이 카넬리안 주변에서 터지는 것도 당연했다. 싱긋 웃으며 줄리탄 곁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 카넬리안은 수많은 인파 속에 섞 여 있어도 눈에 띌 만큼 스스로 빛나는 듯한 매력이 있었다. "카, 카넬리안 씨. 본래 그런 성격이었어요?" 프란츠는 배신감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줄리탄 곁에 딱 붙어 있는 카 넬리안에게 말했지만 카넬리안은 절대로 자신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장 난스럽게 웃는 모습 대답했다. "히이. 미안해 프란츠. 내가 좀 오랫동안 센티해져 있어서. 이제 기 분이 편안해 졌어." "센티...... 가 뭐에요?" "그런 우울한 단어는 몰라도 돼." "...... " 그렇다. 잠시 잊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이번 에는 물키벨이 조금 취한 얼굴로 카넬리안에게 다가오며 그녀를 꽉 껴 안고는 부비부비거렸다. "히잉. 카넬리안. 오랜만이양." "아직도 잡동사니 모으세요 물키벨님?" "내, 내 취미다 뭐!" 그녀는 참으로 매몰차게 물키벨을 떼어내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이 분 말은 다 들어주면 안되요. 한도 끝도 없이 칭얼거리 거든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어 정말." "맞아 맞아." 톨베인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물키벨은 그런 톨베인을 울상이 되서 바라보았다. 멀찌감치서 쪼그려 앉은 채 과일주 스가 든 나무잔을 들고 카넬리안 째려보고 있던 카리나를 보며 카넬리 안이 슬며시 웃었다. "오늘은 싸우지 말자?" "좋아. 내일 싸우면 되니까. 흥!" 카리나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하아. 여전하네." "저 카넬리안 씨...... " "응?" 그녀에게 조그맣게 말하는 그레시다였다. 명목상으로는 줄리탄, 시오 , 톨베인의 씰. 그녀는 카넬리안을 보며 조금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고 개를 폭 숙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너 주인님의 씰?" "예에. 그레시다에요." 그레시다는 왠지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당황하며 자신의 이름을 말할 뿐이었다. 카넬리안이 머쓱해 하는 줄리탄을 흘겨 보며 말했다. "주인님...... 능력도 안되면서 다른 씰의 인생 망치지 말라고 했잖 아! 불행한 여자는 나 하나로 족하다니까." "아, 아니에요. 주인님은 절 너무 아껴주고 있어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카넬리안은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줄리탄을 흘겨 보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많이 컸다? 씰한테 저런 말도 듣고. 기.분.좋.겠.네?" "뭐, 뭐가 불만이야." "아냐. 좋.아.보.이.는.데. 뭐."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술을 확하고 입에 털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줄 리탄은 그레시다를 보며 말했다. "그레시다.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잘해줄테니까...... 그러니 까 카넬리안처럼 멋대로 도망치지마. 골치아프다고 그런 건." "예. 주인님. 계속 곁에 있을께요." "에에에! 주인님 그게 뭔 소리야! 난 주인님을 위해 희생한 거라니까!" "그러니까 그런 희생 하지 말라고 앞으로는!" "씰한테 정말 많은 걸 바라네." 그러면서도 카넬리안은 예전보다 단단해진 줄리탄의 어깨에 몸을 기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지?" "그런 말 하는 너는 나보다 힘들겠지." "...... " "앞으로도 날 떠나지 말아줘. 우리를 위해서...... 부탁해." "생각해 볼께. 그러니까 주인님? 우리 술 마시자." "나 별로 술은 잘 못해서...... " "상관 없잖아 오늘 같은 날은?" 줄리탄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검을 들지 않은 세라피스는 자신이 황가 사람이라는 게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 럽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즐기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에 취해 흔들거렸다. 아마 줄리탄이 술맛이 무언지 알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 인 것 같다. 그 이후에도 훗날의 소중한 추억처럼, 가장 기쁜 한순간 처럼 많은 말들을 서로에게 나눠 주었고 그렇게 밤의 축제는 계속 되 었다. 4. 축제의 막바지 즈음 카넬리안은 사람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뱃전에 기대어 어둑한 바다소리를 들으며 희미한 미소로 서 있었다. 그런 그 녀에게 다가온 자는 레비아탄이었다. 밤의 기운에 흠뻑 젖어 청초해 보이는 카넬리안을 조용히 바라보던 레비아탄은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랑 님. 오랜만이로군요." "이제 내 이름은 카넬리안이야. 그렇게 불러줄래?" "줄리탄 님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벌써 술에 취해서 잠들어 있어. 아아. 주인님 술 약한 건 전혀 변하 지 않았다니까." 카넬리안은 좀 아쉽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레비아탄에게 말했다. "카넬리안 님.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 "왜 당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는 거죠? 궁금하군요." "...... " 레비아탄의 그 말에 카넬리안의 표정이 굳으며 잠시 반들반들한 갑판 을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본래 모습? 씰이 본래 모습 같은 게 어딨어." 카넬리안은 술에 조금 취한 듯이 홍조띈 얼굴로 약간 씁쓸하게 웃으 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테싱 님과 함께 있을 때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평범한 인간의 손에 깨어나 이렇게 변해버렸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난...... 씰이야. 씰은 본래 테이머에 따라 변해버리는 거잖아? 마 치 물감 한방울에 물들어 버리는 하얀 백지처럼...... 헤헤 슬픈 인생 이야. 그렇지 레비아탄?" "예전에는...... " 레비아탄은 잠시 말을 멈추며 시선을 돌려 어두운 바다를 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행복했으면 좋겠군요. 당신의 입장으로선 여려운 일이겠지만." "...... " 그녀는 말이 없었다. 마치 레비아탄은 그 깊은 눈동자로 그녀의 과거 와 지금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즐 거운 순간을 벌써부터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듯이 너무 희미해서 잡히지 않는 웃음을 띄우며 눈을 감았고 레비아탄 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보인 뒤에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축제 는 끝났다. 5. 오늘은 베오폴트 축제의 말일이었다. 슬슬 여명이 수평선을 넘을 기 세를 보이며 인적이 사라져 버린 축제 끝의 도시에는 드물게 서늘한 해륙풍이 불어오며 시가지의 버려진 깃발들을, 역할이 끝나버린 노점 천막들을 쓸쓸하게 흔들고 있었다.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하루였어. 또 헤어지는 건 괴롭지만...... ' 붉은 일루미네이터의 갑판 위에서 소리도 없이 훌쩍 떨어지는 여자가 있었다. 천에 감긴 미스트랄을 들고 있는 그녀는 카넬리안이었다. 너 무도 괴로운 짓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 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인님. 나, 당신과의 끝을 알고 있어. 내가 사라져 슬퍼 하 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런 결말이 올꺼라는 걸. 나와 함께 있 으면 오펜바하는 주인님을 죽일 꺼야. 주인님이 죽는 모습 절대로 보 고 싶지 않아. 이번에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정말 미안해 나의 주인님.' 카넬리안은 그런 생각을 쓰디쓴 독약처럼 삼키며 항구를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더 먼 곳으로 도망쳐야겠지. 씰인 자신이 인간처럼 뻔뻔 하게 누굴 좋아한다는 건 불가능한 거니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 야 할 주인인 줄리탄을 지키는 방법은 사라져 주는 것 뿐. 그것 뿐이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거야. 카넬리안." 그녀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가로등빛에 그림자진 건물 벽에 기대어 있는 줄리탄은 굳 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어딜 가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화장실가고 있었...... 을리가 없겠지. 들켜버렸네. 헤헤." 웃는 얼굴로 마음을 숨기는 카넬리안이었지만 줄리탄은 그녀를 쏘아 보며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 "나, 나는 씰이니까 주인님이 위험해지게 만들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래서라니....... 보고 싶지 않단 말야! 나 때문에 주인님이 죽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 "겨우 그딴 이유 때문이야? 아직 죽지도 않은 내가 죽는 것이 그렇게 무서워서 지금까지 도망치고 있었다는 거야!! 난 널 만난 걸 조금도 후회하고 있지 않은데 넌 왜 계속 도망치기만 하는 거냐고!!"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작은 두어깨를 꽉 잡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녀는 고개를 숙이며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몇번이나 말했잖아. 씰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고. 인간처럼 생겼고 인간처럼 말하지만...... 우린 주인님과 달라. 그냥 다른 인간 들처럼 날 이용해 버리고 맘대로 써먹어 줄 수는 없는 거야? 차라리 그러면 좋을텐데...... 당신이 죽어도 조금도 슬프지 않게." "그런 건....... 살고 있는게 아니잖아. 감정을 느끼는 것이 두렵고 괴롭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바꿔볼 조금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살아 있는게 아냐! 행복 같은 건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주인님은 몰라. 나에 대해.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씰의 마 음이 어떤 것이지 인간인 당신은 알 수 없어." "맞아. 네 말대로 난 네가 궁룡의 수장 테싱과 무슨 과거가 있었는지 , 그래서 네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짐작할 수 없어. 그런 건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걸 알고 있다고 널 제대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딴 과거 따위 알지 못해도 지금의 네 모습을 좋아하 면 안되는 거야?" 줄리탄의 말대로 그녀는 줄리탄의 몇십 혹은 몇백배 이상의 시간을 살아왔고 그때마다 슬프고 아픈 기억만 남아 지금은 상처투성이가 되 서 작은 감정 하나도 품는 것 자체가 두려워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제 17살이 된 줄리탄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그 마음의 깊이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한게 아냐. 그녀의 보 여주기 싫은 모습까지 억지로 알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 런걸 알고 싶은 호기심은 그녀를 감싸주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 니까. 줄리탄은 갑작스럽게 카넬리안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난 과거의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게 아냐. 지금의 널 좋아하는 거지. 좋아해. 좋아하니까 더 이상 도망치지 말아줘. 곁에 있어 달라고." 주문 같은 말이다. 카넬리안은 몸의 힘을 스르르 풀며 줄리탄에게 처 음으로 자신을 맡긴 채 말했다. "이 정도에서 울어줘야 하는데...... 미안해 주인님. 난 눈물이 흐르 지 않아." "상관 없어. 그딴 것 아무래도 좋으니까." "낯 뜨거운...... 말이네." 그녀의 입술은 너무나 차가워 보여서 어떻게든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 다. 보이지 않는 경계의 장벽 같은 것이 사라져 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정말 몇번이고 감싸주고 싶은 여자다.' 새삼 그런 기분이 들었 다. 6. '홀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괴로움을 책임져야 하는 씰에게 나 같은 주인은 무척 혼란스러울 것 같다. 어쩌면 난 제대로 된 테이머로서 실 격일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을 내버려 두라는 그녀의 팔을 잡고 놔주 지 않았지만 사실 나도 두렵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차라리 만나지 않 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절망뿐인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언 제나 내마음 한켠에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외면하고 싶진 않다. 두려움이 없는 곳엔 행복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그 말을 나는 믿고 있 으니까. 우리는 이어나가기 힘든 관계라는 것,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만큼 서로 노력해서 극복하면 되는 거겠지.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 '잔뜩 잔뜩 나한테 낯 뜨거운 말들을 꺼낸 주인님은 곧 나를 깨끗한 방으로 안내했고 인간을 대하듯이 잘 자라는 말을 건낸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백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아주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아름다운 꿈이 하늘에 떠 있는 포근한 잠을 잤다.' Chapter#10 : 우리가 할 수 있을 때까지 end Next Chapter : 현재 미정(두둥!) -Blind Talk 만약에 어떻게든 그대 안으로 들어가 그 눈동자로 날 보게된다면 여러가지 일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안개속을 헤메이게 되네. 손잡고 가자, 불타오르는 듯이 달이 빛나는 언덕으로. 내가 데리러갈테니까 그 곳에 있어줘. 그저 파편이라도 좋아. 그대 마음을 알 때까지 오늘밤 난 잠들지 않을거야. 가슴아픈 일 기분좋은 일, 그건 모두 사람마다 제각각 사소한 차이로 좌절하는 거지만, 다시 해봐도 난 또 요란스럽게 굴러대지. 상처받고나서야 겨우 깨달았어. 그래도 좋아, 늦진 않았어. 손잡고 가자, 수상한 별이 숨어드는 언덕으로 우거진 수풀 깊숙이 들어가보자. 좀 다쳐도 좋아. 터져나올듯한 웃음을 띤 얼굴의 그 뒷면을 보고 싶어. .....라는 노래가사 같은 분위기의 챕터10이 이제서야 끝났습니다. 아 마 지금까지 나온 챕터 중에서 가장 긴 것 같습니다. 역시 후회스럽네 요. '이게 아닌데......', '이것보단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아 직도 들지만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고 어설퍼 보이는 것도 인정해야할 분명한 내 모습이니까 열심히 어떻게든 끝냈습니다만. 이제 2부 제래는 1/3 쯤 넘어선 것 같네요...... 갈길이 멀긴 하지만 엔딩 무렵 꼭 보여주고 싶은 대사가 있기 때문에 계속 전진하겠습니다 . 앗 그건 그렇고 드림캐스트용 액플 구입했습니다.>_< '아니 이 놈은 게임만 하는 거냐!'라며 화를 내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도 생각이 있는 놈이라서 4권 나올 때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메일 을 통해 독촉도 좀 받아 봤으니까요. 늦어서 정말 죄송.) 훗훗 하지만 액플로 돈을 무한으로 만든 다음에 HARD로 즐기는 기렌의 야망은 정말 게이머의 낭만이라고 밖에는......(뭔 소린지.) 에에. 전에 잡담에 써 두었던 먹거리들, 죄다 먹어 버려서(거의 신들 린 듯이 먹어 치웠음.) 곧 다시 사러 가야겠습니다.(이젠 돈이 없군.) 떠들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접고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관련 사이트 : http://cafe14.daum.net/Cafe-bin/intro.html?cafe=dragonlady (뻔뻔하지만 이번 편까지 광고합니다.) 나자리노의 When a child is born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12487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2/01 16:13 읽음:36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1-01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1955]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1-31 17:34 조회:76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1 : 세상을 보는 마음 Try to fake that love is not around still it's uncomfortably near 1. 제1황제 오펜바하가 지배하는 오칼란트 제국의 해변가에는 오펜바하 가 그를 호위하는 지룡들 가이스트 라이히와 함께 나와 있었다. 거의 황국 밖으로 외출하는 일이 없는 그가 추운 해변까지 온 이유라면 의 외의 손님인 물키벨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물키벨은 좌우에 크라켄 과 레비아탄을 동행한 채 오펜바하 앞에 섰다. 냉기서린 북해의 바람 에 인적조차 없이 을씨년스러운 바닷가에서 였다. "그때 이후 처음 만나는군. 물키벨." "아." 모두 인간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펜바하와 물키벨은 너무도 일상적 인 짧은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펜바하 옆에 있던 미쉘 은 자신의 전 주인이었던 물키벨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물키벨 은 그런 그녀에게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무슨 일로 날 보자는 거야? 옛날 추억이나 읊어대자고 날 찾아온 것 은 아닐테고...... " "카넬리안의 테이머가 누군 것 같아?" 물키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줄 리탄들과 있을 때의 어리광 피웠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펜바하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가랑 말이로군. 그의 테이머라...... 누구지?"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물키벨의 말투는 불어오는 바람처럼 차가웠지만 눈빛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너무 바래서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런 추억을 떠올 려 보려는 그런 눈동자. 그녀를 바라보던 오펜바하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하며 결국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설마...... " "기적이야. 그들이 만난 건." "날 속일 생각 하지마." "믿고 말고는 네 자유지만....... " 물키벨은 원망과 경멸에 찬 눈빛을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한가지만 말해두지. 그들을 건드리지 마." 지금까지 아무도 헤스페리아의 지배자이자 지룡의 수장인 오펜바하 앞에서 그런 표정과 말을 꺼내 놓고 살아 남은 자는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오펜바하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를 위협하고 있는 거냐? 이 자리에서 죽여줄까!!" 그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오펜바하 옆에 있던 브륜힐트와 하켄 등이 적대적으로 물키벨을 노리며 앞으로 나섰고 레비아탄과 크라켄 역시 물키벨을 보호하려 했다. 물키벨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하며 말했다. "날 죽이면...... 이 세계의 모든 바다가 썩어버리게 될꺼다. 해룡의 수장의 이름으로 단언하건데 모든 바다가 너희들의 적으로 뒤바껴 버 릴 꺼다. 모든 물과 공기를 독으로 변하게 만들어 주지. 잘 들어. 내 가 너와 테싱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것은 무익한 싸움을 원치 않아 서 였을 뿐, 절대로 네가 두려워서가 아냐. 내 경고를 무시한다면 그 때는...... 다시 용들의 전쟁이 벌어질 꺼다. 그때처럼." 물키벨이 저주처럼 쏟아내는 말들 때문에 오펜바하는 행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절대자이며 균형을 유지하는 지룡과 해룡이 서로 싸운다면 그 결과는 인간들에게는 물론 용들에게도 치명적일 것이 뻔 했다. 물론 궁룡이 사라져 버린 이 세계는 이미 균형이 깨져 있는 상 태지만. 오펜바하는 당장 지룡의 모습으로 변해 물키벨을 죽여버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눈빛으로 물키벨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말을 따를 이유 따윈 없어." "난 분명히 경고 했다. 헤르만 오펜바하." 물키벨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돌려 바다로 향했고 크라켄과 레비아탄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 았던 본래 이름을 들은 오펜바하는 늑대 같은 황색의 살기어린 눈동자 로 물키벨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2. "제이미아! 어딨지! 이리 나와!!" 단숨에 자신의 성 오버암메르가우로 돌아온 오펜바하는 곧장 제이미 아가 갖혀 있는 지하정원으로 내려갔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트리 는 두 눈을 치켜 올리고 극도의 살기를 뿜어내는 오펜바하는 자신 앞 을 가로 막고 있는 정원의 나무들을 기력만으로 산산히 부셔버리며 정 원을 헤집고 있었다. "물키벨님이 다녀가셨군요. 그 분의 체취가 베어 있습니다 당신의 몸 에." 인공의 것처럼 보이는 녹색의 머리칼을 길게 내린 나무같은 제이미아 는 두려움도 없이 오펜바하 앞에 나타나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펜바하 는 그런 그녀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넌 가랑의 테어머가 누군지 알고 있었겠지! 왜 테이머가 그 녀석이 라는 걸 말하지 않은 거야!!" "절 잡아서 이런 곳에 가둬 놓았다고 당신이 저의 주인이 된 것은 아 닙니다. 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에 게 말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습니다." 그녀는 오펜바하를 상대로 놀랍도록 차분했고 그런 그녀의 태도는 안 그래도 날카로운 오펜바하의 신경을 잔뜩 긁었다. "씰 주제에...... 씰 따위가 내게 그런 말을 해!!" 오펜바하의 분노는 엄청난 기력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 버리며 파괴신 의 손길과 같은 힘으로 주변의 수목들을 덮쳐 모조리 가루처럼 분해시 키며 날려 버렸다. 그러나 제이미아는 감정이 사라진 듯이 일말의 표 정도 변하지 않으며 단지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여버릴 것 같은 오펜바 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좋아! 어쨌든 난 가랑만 내 것으로 만들면 그만이니까. 물키벨이 든 뭐든 방해하는 건 그냥두지 않을 꺼야!" "당신은 결국 파멸하게 될 겁니다." "파멸? 테싱만 돌아오지 않으면 난 영원불멸이다. 그리고 테싱을 영 원히 가둬 놓기 위해 가랑이 필요한 거니까! 가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 슨 짓이든 할꺼다. 이 세상을 한번 더 뒤집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가랑의 테이머를...... 그 분을 죽일 생각 입니까?" 제이미아의 말이 가슴을 찌른 듯이 오펜바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목적을 위해 수백만명도 단번에 몰살시켰던 오펜바하가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라면 분명히 줄리탄 자신도 모르는 그의 정체 때 문일 것이다. 오펜바하는 어렵게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못할 것 같나? 이미 테싱조차 가둬버린 나! 이 지룡의 수장인 내가 그런 걸 못할 것 같아?" "지룡의 수장이라고요? ...... 당신은 단지 불쌍한 사람입니다." 깊은 의미를 가진 말이었나보다. 오펜바하는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리 며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제이미아를 노려보다가 결국 몸을 돌려 폭풍을 만난 듯이 만신창이가 된 지하정원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올 라가는 어둡게 굳어 있는 그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이제와선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이지만." 3. 자라탄에 세워진 사략함대 본부는 급히 만들어진 것 치고는 꽤나 훌 륭했다. 특히 1층에 위치한 아늑한 홀은 전리품이나 상인들이 보내준 조각, 미술품...... 무엇보다 물키벨이 이를 악물고 모은 잡동사니들 로 가득했는데 샤락함대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에 자주 모여 휴식을 취 하곤 했다. "으아아아아. 심심하다. 너무 지루해." 카넬리안은 오전부터 그 자색 융단이 깔려 있는 홀 바닥을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자신의 지루한 기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여자 는 대체 줄리탄을 만나 행복감에 젖어서 몸둘 바를 몰라도 시원찮을 판에 만나자마자 평소처럼 돌아와서는 '재미없는 일들 투성이!'라며 권태롭게 구는 것이 아닌가. 카넬리안은 물키벨이 준 어깨가 다 들어 나는 얇은 상의를 걸치고 잔뜩 투덜거리면서 홀을 굴러다녔다. "사략함대가 뭐 이래. 시시하다. 주인님. 그렇게 책만 보면서 난 언 제 지켜 줄꺼야. 아아 책임감 없는 남자네요 정말." "...... " 몹시 한심한 투정이었다. 근처에 앉아 요리책을 들여다보던(그는 조 금씩 문맹에서 벗어나고 있다.) 줄리탄은 고개를 들며 피곤한 표정으 로 자기 앞으로 굴러오고 있는 카넬리안의 머리를 책으로 툭하고 내리 쳤다. "정신 사나워. 가만히 좀 있어." "매정하네." 카넬리안은 그렇게 말을 흘리며 또 저만치 굴러가 버렸다. 그런 그녀 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줄리탄이 눈부신 태양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밖으로는 아지랭이가 피어 오르는 하얀 백사장이 보 인다. "이 책 다 읽으면 수영이라도 할래?" "아. 그럴까나...... " 카넬리안은 부시시 일어서며 줄리탄을 향해 나른한 웃음을 보였다. 드물게 냉소적이지 않은 그녀의 그런 얼굴을 보며 줄리탄은 문득 하얀 살결을 들어내며 매끈한 몸매로 수영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 렸다. "어라? 주인님 왜 실실 웃고 있는 거야? 기분 나쁘게...... " "아, 아냐. 아무 것도." "우움. 그러고 보니까...... " 그녀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수영복...... 없는데 나는. 그레시다. 수영복 만들어 줄래?" "수영복이 뭔데요?" 홀의 장식품들을 닦고 있는 그레시다가 카넬리안의 부탁에 의아한 얼 굴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이런 시대에 수영복 같은 것이 따로 존재 할리가 없다. "아아. 역시 모르는 구나. 좋은 거야 그거." 카넬리안은 융단 위에 얼굴을 묻으며 느릿느릿 그렇게 중얼거렸다. 보는 사람이 축 늘어질 정도로 나른한 모습. 뒤늦게 안 사실인데 그녀 는 의외로 더위에 약하다. '카넬리안은 일년전보다 혼자 있을 때가 줄어든 것 같아.' 줄리탄의 생각대로 카넬리안은 예전처럼 하루 종일 하늘이나 먼 경치 를 바라보는 일이 줄어 들었다. 누구와도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하는 얼굴로 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줄리탄 옆에서 뒹굴거리는 시간이 늘어나 버린 건 사실이었다. "카넬리안. 왜 일년동안 레지스탕스에 있었어? 역시 사람들을 도와주 고 싶었던...... " "농담하지 마. 난 인간들을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동물이라고 생각 하고 있다고. 그런 인간들 도와줄 리가 없잖아?" 그녀의 머리속에선 자신을 좋아하다가 케센과 함께 소멸되어 버린 헤 이우드의 모습과 프란츠를 구하기 위해서 귀족 사병의 목을 베어버린 장면들이 지나갔지만 그냥 머리속에만 담아두며 쓴웃음과 퉁명스런 말 투로 대신할 뿐이었다. "카넬리안. 나도 인간이야...... " "당신은 인간이기 전에 내 테이머니까아." 그녀는 다시 바닥에 푸욱 쓰러져 버리며 졸리운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아무튼 참으로 나른한 오후였다. 시오와 톨베인과 세라피스는 키마인을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작은 배를 몰고 나가서 근해에서 놀 고 있을테고 물키벨도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젤리드는 리이의 가게 로 돌아가 있고 메이는 언제나처럼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고 프란츠는 레지스탕스에 보고하기 위해 떠났다. 덕분에 자라탄에는 줄리탄, 카넬 리안, 그레시다 정도만 남아서 제법 중산층 가정의 일요일 오후 같은 휴식을 맛보고 있었는데 - 카넬리안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며 줄 리탄에게 말했다. "주인님. 초콜릿 만들 수 있어? 그거 맛있다?" 심심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던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줄리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듣는 음식이잖아 그건? "초콜릿? 그게 뭔데?" "역시 무리구나. 하긴 이제 그 재료를 구할 수가 없으니까. 역시 너 무 오래 산다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냐. 주인님은 적당히 살다 죽어라. 그게 험한 꼴 안 보는 지름길이야." 기분나쁜 말을...... 요리사로서의 탐구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만드는 법 알려 줘! 내가 만들어 보일 테니까!" "무리라니까 그러네. 잊어버리세요. 주인님." "그러니까 일단 알려 주기나 하라니까!" "끄, 끈질기네." 그렇게 줄리탄의 재촉이 몇번이나 오간 뒤에 카넬리안은 '괜히 말했 다.'라는 표정으로 홀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어? 물키벨 님." 카넬리안은 레비아탄과 함께 본부로 걸어오고 있는 물키벨을 보며 방 긋 인사했고 물키벨은 언제나처럼 카넬리안에게 확 달려들며 얼굴을 마구 부볐다. "우리 항구로 놀러 나가자아. 줄리탄, 그레시다, 레비하고 함께에. 크라켄은 간섭만 하니까 빼고. 너 옷도 사줄께...... 응? 가자아." 그렇게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물키벨을 보며 카넬리안의 표정이 굳어 졌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조금 담으며 말했다. "왜...... 오펜바하를 만나고 오신 거죠?" 그녀는 물키벨에게 묻어 있는 오펜바하의 두려운 기운을 느끼며 그렇 게 말했고 물키벨은 여전히 카넬리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 거렸다. "그냐앙." "...... 전 주인잃은 궁룡의 씰이에요. 저를 위해 오펜바하를 막으려 다간 물키벨 님이 위험해 져요." "괜찮아. 괜찮아." 카넬리안은 물키벨이 왜 오펜바하를 일부러 만나러 갔는지 알 수 있 었다. 또 그것이 자신과 해룡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물키벨은 줄리탄과 카넬리안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카넬리안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작은 물키벨의 목소리가 간질거리는 떨림이 되어 카넬리안의 몸에 전해졌다. "넌 이제 줄리탄의 씰이잖아? 그 아이 좋은 녀석이야. 그러니까 둘이 행복하게 지내야 해. 너도 줄리탄도 내 동생 같으니까." "...... 고마워요." 그녀는 물키벨을 껴안으며 조용히 고맙다고 몇번 속삭여 주었고 레비 아탄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바다로 돌아갔다. -Blind Talk 흐음. 챕터11은 당분간 올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왜냐하면 제가 4권 출판되는 것 보고 잠시 지방으로 쉬러 가려고 했기 때문에... 챕터 진행 중에 끊어져 버리는 것이 싫어서 다시 서울 올라 와서 한번에 올려 버리려고 했지만... 챕터11 일부가 4권에 들어가게 되니까 이거 안올리고 4권내면 욕먹을 것 같아서(괜한 걱정인가... ) 일단 올립니다. 아아. 가이브러쉬는... 물론 저도 원숭이섬의 비밀은 1편부터 쭈욱 팬 이었습니다만(특히 2편의 엔딩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한 반전이었음.) ... 가이브러쉬라는 마르켈라이쥬의 심복은 그와는 관계 없이 SIG라는 kiyu군의 소설(연재중. 200년 후의 이야기 쯤? 아닐 수도 있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긁적. 원숭이섬의 비밀의 최고 캐릭터라면 역시 처키 가..... 루카스 아츠의 것이었지요 그것? 그쪽의 게임들 중 그림 판당 고는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있었는데(어드벤쳐 게임 좋아함. 특히 폴 리스 퀘스트~ >_<) 아직 제대로 해보지 못해서 아쉽네요. 이제 슬슬 밝고 즐겁고 행복하게 나가... 야 할텐데 마음이 콩밭에. 저의 취미는 담배와 라이터 수집입니다.(어른스런 취미... 일리가 없 겠지.) 담배는 애연가인데가가 현재 300종에 가까운 담배 케이스를 모 아놓고 있고(일본가서도 담배만 50여종 뽑아서 가져 왔음. 세관에 걸 릴까봐 모조리 뜯어서 한대씩 피우는 추태까지.) 라이터의 경우에는 지포나 던힐, 듀퐁, 윈드밀등 멋있어 보이고 반짝반짝하는 것은 비싼 것도 어떻게든 사서 모아 놓습니다.(까마귀 같군.) 가장 아끼는 콜렉션은 ZIPPO H.R. GIGER 콜렉션 1000개 한정판 중 141 번.(이거 사고 돈 없어서 몇주일간 라면만... ) 에 그리고 지그소 퍼즐 맞추는 것도 좋아하는데 방에는 다카다 아케미 , 아마노 요시타카, 아키라, 에반게리온 등등의 퍼즐들이 잔뜩 걸려 있습니다. 현재 건담 10주년 기념 1000개 한정 1000피스 퍼즐(1000 이 많이 들어가는군... 제트스트림 어택을 하고는 검은 삼연성의 모습인 데다가... 게다가 야광 퍼즐임!!)을 맞추다가 시간이 없어 접어 놓고 있습니다. 드래곤 레이디 완결하면 다 맞출 생각. 가장 아끼는 퍼즐은 KONAMI에서 나온(이 회사는 퍼즐도 만듭니다.-_-) 1000피스 로미오와 줄리엣 퍼즐.(맞추는데 6개월 걸렸음... ) 예전에는 백화점 퍼즐 코너 에 센트럴이나 코나미 쪽 퍼즐이 많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퍼즐 코너도 사라진 것 같고 같고 에휴... 그러면서도 원더풀 데이즈 1000피스 퍼 즐 충동 구매로 또 사들고 들어 왔습니다. 프라모델 색칠하는 것에 너무 많이 들어서 손을 땐 뒤에 결국 또 이런 '자본주의적인' 취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네요. 물키벨의 잡동사니 긁어 모으는 성격은 제 성격입니다. 제 사주에도 나와 있습니다. '당신은 남들이 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보물이라 고 여기며 모은다!'라고. 쯧. 남이사 뭘하든지.... 최근 소니 868이어폰 샀습니다. 888은... 사봐야 돼지목에 진주 목걸 이고.... 잘 써오던 파나소닉 이어폰을 모르고 발로 밟아 으깨버린 뒤 에 구입한 것인데... 후회는 없네요. 이어폰이 좋아니까 이젠 MD가 노 후되서 오늘내일 하고 있습니다. 역시 물질만능으로 사는 사람은 하루 도 맘 편할 날이 없습니다. 제 집앞에는 도둑 고양이 가족이 밤낮 어슬렁 거립니다. 게다가 가끔 씩 먹을 것을 던져주다보니까 이젠 아예 집 앞에 살림을 차리고 온가 족이 새벽부터 먹을 것을 달라고 울어댑니다. "도둑고양이라면 먹을 것을 강탈해 가라고!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다 니 창피하지도 않냐!" 라고 아무리 소리쳐 봐야 이젠 앞에 와서 뒹굴거리며 교태까지 부리 는 통에... 결국 먹을 것을 줘서 입을 다물게 만드는 방법외엔 없더 군요.(귀엽기나 하면... 험악하게 생긴 주제에 교태라니... ) 그래도 예전 키우던 아령이와 존스가 죽은 뒤부터 더 이상 애완동물 같은 건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를 도둑고양이들은 나름대로 즐겁 게 해주고는 있습니다.(하지만 어떻게든 거실에 들어와서는 테이블 위 의 햄조각을 물고 홱 도망쳐 버리는 걸 볼 때는 치가 떨리지만.) 아무튼 역시 잡담이 길어졌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Metallica의 Enter Sandman을 들으며... (TTL 광고음악으로 쓰이며 다시 여기저기서 많이 들리네요. 고1때인가 처음으로 들었는데 여전히 머리속에 남는 음악.) 『SF & FANTASY (go SF)』 127225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2/14 16:36 읽음:106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1-2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3229]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2-14 07:52 조회:413 "고슴도치라는 걸 알아? 등에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나 있지. 그 놈은 좋 아하는 상대에게 가까이 가면 자신의 가시가 상대를 찌르게 되고 그렇다고 상대와 떨어지게 되면 외로워서 울어 버리거든.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우물쭈물거리며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거야."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2 : 세상을 보는 마음 Hedgehog dilemma 1. 시간의 태엽(胎葉)이 끊어져 버린 듯 마음마저 텅 비어버릴 것 같은 무음 (無音)의 사방, 진홍빛 붉은 천상을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는 수많은 백익(白翼)의 천사들만이 하늘에 하얀 자유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무채색의 궁전에 이어져 있는 회색빛 기둥, 기둥. "알고 계신 거죠? 저희들, 씰이 존재하는 이유를." 모든 씰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두렵다고들 말하는 가랑은 흑단처 럼 검은 생머리를 길게 내린 단아한 모습으로 자신의 주인 테싱의 뒤에 서 있었고 테싱의 등에 솟아 있는 여섯장의 길고 섬세한 날개는 고이 접혀 그 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희미한 외로움을 얼굴에 담으며 재차 물었 다. "저는 당신의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잉태할 수 없는 생명체라면 영생 을 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희는 계속 소멸해가는 존재일 뿐입니까?" 씰들도 용들도 마치 조물주가 내린 저주처럼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후 손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불가항력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생명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인위적인 모습이었다. "오펜바하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의미없는 실험을 반복 하는 창조신의 싸움터일 뿐이라고. 지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떤 이 유로 저희들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인님은 씰들의 기억을 지워버 리신 거죠?" 가랑의 주변으로 단지 너무도 아름다운 공허함만이 눈처럼 내리며 그녀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테싱은 몸을 돌려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로 그 녀를 바라보았다. 빛을 등지고 있는 테싱의 발밑으로 무거운 그림자가 길 게 이어져 있었다. "제 기억의 뒷편에 어떤 것이 존재했는지 알려주세요." 테싱은 말없이 그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앞에 서며 조 각처럼 아름다운 날개들을 조용히 펼쳐 그녀를 자신의 그림자 속에 묻어 주었다. 테싱의 낮은 목소리가 날개 속에서 그를 올려보고 있는 가랑의 귓 가에 울렸다. "신의 후광은 바라봐선 안돼...... 눈도 마음도 멀어버리니까." 신에게 반역한 천사의 모습. 테싱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다. 테싱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신의 신성한 손길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려는 듯이 가랑의 작은 몸을 감싸안았고 그녀는 그런 자신의 주인에게 몸을 맡겼다. "또...... 생각해 버렸다 그 때를." 카넬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집착같은 회상에서 깨어나며 슬며시 눈 을 떴다. 백사장에 홀로 누워 있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파란 열대하늘에 는 잔상처럼 테싱의 마지막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모든 날개가 찢어 진 채 마력의 사슬에 묶여 오펜바하의 손에 죽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그것 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낙인 같았다. 오펜바 하에 의해 테싱과의 계약이 강제로 끊어져 버린지 수백년 후, 또 다른 계 약을 맺으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환멸도 슬픔도 아닌 서글픈 감정이 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해도 계속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테싱 님. 전 어쩌면 당신이 보여준 꿈에서 깨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 니까 이제....... 당신을 잊어도 될까요? 그래도 절 용서해 주실 건가요?' 그리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다 그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고개를 돌렸다. 2. 사략함대를 후원하고 있는 상인길드와 만나기 위해 항구 베오폴트로 간 메이가 남긴 말 때문에 줄리탄은 의아해 하면서도 메이와 만나기로 한 베 오폴트의 한 살롱으로 향하고 있었다. '혼자서만 오라고? 무슨 이유지?' 메이가 자신을 항구로 부른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약 속은 약속이니까. 줄리탄이 혼자서 찾아간 살롱 '요람'은 베오폴트에서도 가장 큰 살롱으로 언제나 상인들이나 자칭 예술가들로 붐비며 화려하다기 보단 무척이나 세련된 곳이었다. 줄리탄으로선 여전히 부담스러운 그런 곳 . 줄리탄은 어색한 표정으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살롱의 문을 열 었다. "꺄아아. 노블리스 씨가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지.......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거야 정말.' 술냄새가 전혀 베어 있지 않은 우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살롱의 아가씨 들은 아무리 불러도 찾아오질 않던 노블리스가 '제발로' 들어온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기뻐하는 얼굴들로 그를 둘러쌌다. 살롱은 홍등가 선술집 마냥 쉽게 몸을 사고 파는 끈적거리는 곳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어른스러 운' 클럽. 게다가 혹시라도 카넬리안이 이 장면을 봤을 때 자신에게 던질 싸늘한 눈초리에 진작부터 등골이 오싹해진 줄리탄은 난감하게 웃으며 용 건을 말했다. "메이 씨를 찾아 왔는데. 지금 여기 있나요?" "아! 저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시간 내주실 수 있죠? 그렇죠?" "아하하. 그, 글쎄요." 살롱의 명성이란 얼마나 더 많은 '유명인'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냐는 것 으로 결정되기 마련이다. 살롱 '요람'의 고객 명단을 훌터보면 대충 이렇 다. 세라피스는 사략함대 자금을 뻔뻔스럽게 써대며 단숨에 살롱의 단골이 되어 버렸고 젤리드 역시 리이의 눈을 피해 자주 드나드는 편. 시오마저 가끔 놀러 오는데다가 톨베인은 가볍게 사귀는 연상의 여자까지 두고 있었 다.(레비아탄 역시 끌려 들어 가며 '역시 인간은 흥미롭구나.'라고 중얼거 렸다.) 이 와중에 '요람'에서 노리는 자들은 당연히 줄리탄과 키마인. 그 들을 차지하려는 살롱들의 무시무시한 쟁탈전에 얼떨결에 끼어버린 줄리탄 은 꽃가마라도 탄듯이 여자들 손에 이끌려 메이에게 배달되었다. 삼면이 아름다운 음각으로 세겨진 병풍들로 둘러싸여 있는 테이블에서 기다리던 메이는 납치되듯이 끌려온 줄리탄을 안경 낀 눈으로 올려보며 피식 웃었다 . 시력이 나쁜 편인 메이는 문서를 보거나 할 때는 꼭 비싼 돈 주고 장만 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인기 많네." "아 예. 뭐." 줄리탄은 헝크러진 하얀 셔츠를 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살롱 전체를 감 돌고 있는 고급스런 향냄새에 담배 연기등이 어울려 '여기는 세련된 곳'이 라는 부담스런 사실이 새삼 느껴지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주변의 사람 들은 대부분 베오폴트 쪽에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들이었고 거창한 거래가 오가는가 하면 뭔소린지 모를 예술 비스끄무리한 대화들도 들리고 있었다. 예술을 논하는데 적잖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씁쓸 한 어불성설이지만. "무슨 일이에요. 절 여기까지 부르고. 그것도 혼자서." "아아 그건 말이지." 메이는 좀 머리가 복잡한 지 안경을 벗어 양미간을 매만진 뒤에 앞에 놓 여 있는 매끈한 유백자기 술잔을 들었고 호박색의 액체를 조금 입에 담았 다. 때마침 줄리탄 앞에도 오나칼라스 입으로 만든 차가 도착해 있었다. 줄리탄은 그 차의 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은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이 차 향기를 맡으면 일년전이 떠올라요. 예전에 레터씨에게 대접 받았 던 차인데..... 그때는 내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레터씨는 잘 계시는지 모르겠네." 아마도 레터는 세이드를 씰처럼 모셨던 줄리엣과 저스틴을 키우느라 정신 이 없을 것이다. 간만에 추억을 회상하며 차를 음미하던 줄리탄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이가 툭하고 말을 던졌다. "나 너 좋아해." 푸우웃!! 자기도 모르게 두눈을 번쩍뜨며 레터씨와의 소중한 추억이 느껴지는 차를 뿜어 버린 줄리탄은 숨막히는 얼굴로 가슴을 치며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이 갑작스런 프로포즈는 또 뭐란 말인가. 우주까지 세번쯤 날아갔다 돌아 온 듯한 넋나간 표정의 줄리탄은 할 말을 잃고 메이를 바라보았지만 메이 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입으로 가리면서 대답했다. "아아. 미안 미안. 농담이야. 농담이었어. 그런데 정말이네? 너한테 그런 말하면 재미있는 광경 보게 될 꺼라고 말해서 한번 해 봤는데." "누, 누가 그런 말을......" "카넬리안. 꼭 해보라던데?" "......" 결국 모든 사건의 원흉은 카넬리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줄리탄은 힘빠 진 표정으로 지금쯤 자기 방에서 뒹굴고 있을 자신의 '소중한' 씰을 떠올 리며 중얼거렸다. '젠장. 돌아가면 그냥두지 않을 테다.' 그런 발칙한 실험을 시키는 카넬리안도 카넬리안이지만 또 그걸 해버리는 메이도 의외로 순진하고 귀여운 청년 괴롭히는 맛을 아는 짓꿎은 여자였다 . 그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자 놀란 아가씨들이 달려와 건내준 손수건 의 산을 황망하게 내려보던 줄리탄이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절 놀려 먹으려고 부른 건가요." "아냐. 일이야. 일 때문에." "아 역시." 메이는 안경을 다시 끼며 무릎에 놔두었던 서류더미들을 꺼내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메이는 천상 '일을 애인처럼 껴안고 살아갈' 팔자였던 것이 다. 줄리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서류를 받아보며 읽어나가다가 표 정이 굳어졌다.(줄리탄이 문맹탈출을 한 것은 최근이다.) "이건......" "사략함대 사람들 중에서 너한테 처음 보여주는 거야." 그 문서는 직속 황가의 일원이자 레지스탕스의 후원자인 루스 리그나이트 의 친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서에는 현 달라카트 황제를 몰아내고 세 라피스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에 가스발 사략함대가 동조해 달라 는 루스로부터의 협조요청이 쓰여져 있었다. 3. 사략함대 본부의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세라피스와 카넬리안은 서로를 한 참 동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는 카넬리안의 표정과 고 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카넬리안을 훌터보는 세라피스의 표정이 대조적 이다. 잠시 후에 세라피스가 맥이 탁 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유. 역시 외로워 보일 때가 더 매력적이었어." "뭐야! 날 죽이려고 한 주제에 그딴 말을 잘도 늘어 놓네!" "무슨 말씀. 니가 먼저 날 죽인다고 했었잖아." "아아. 말싸움하기 귀찮으니까 가던 길 가세요." 카넬리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신경쓰인다는 듯이 세라피스를 지나쳤지 만 세라피스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 있지? 처음 봤을 때 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잖 아. 그때는 당장이라도 자살해 버릴 것 같더니." 세라피스는 '날 죽여줘!'라는 분위기로 자신에게 무방비로 달려들던 그녀 를 떠올리며 말했지만 카넬리안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 연기 잘하거든. 당신하고는 연기 경력 자체가 비교가 안된다고." "줄리탄 때문이겠지? 그렇게 밝아지려고 애쓰는 이유는. 씰들은 원래 그 런거야?" 자기 스스로도 본래 모습을 잘 들어내지 않는데다가 연기의 달인인 세라 피스는 드문드문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카넬리안의 본래 모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카넬리안을 세라피스의 마지막 말에 발걸음을 멈추며 몸 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라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원래 그래." "......" 그녀는 가면같이 웃으며 말했고 세라피스는 화폭 앞에서 모델을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눈빛처럼 말없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런 분위 기 정말 싫다.'라고 중얼거리며 한숨 섞인 말을 던졌다. "하아. 궁금한 거 되게 많은 남자네. 또 궁금한 거 있어? 한번에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 바쁜 몸이니까." "나도 씰하나 구해볼까? 너 같이 아름다운 모습의 씰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세라피스는 카넬리안을 만나기 이전에는 씰이라는 것에 대해 별다른 관심 이 없었다. 무엇보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테 이머를 언제나 따라다니는 씰이란 제법 부담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카넬리 안은 '아름다운'이라는 자신을 수식하는 말에 쓴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 녀의 눈동자는 파도가 오가는 창밖의 밤풍경을 향해 있었다.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이라는 거 달콤한 만큼 허무해서 말야. 금방 질려. 몇년을 벼르며 예쁜 보석을 사서는 결국 금고 속에 넣어두고 꺼내보지도 않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야." "염세주의자가 쓴 시 같은 말이로군. 난 낙관론자라서 말야." 카넬리안은 대답하지 않으며 그대로 몸을 돌려 줄리탄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조소가 묻어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이 세상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생각보다 금방 질려버리더라고. 인간들은 행복한 거야. 슬슬 질릴 때 쯤에 죽을 수 있으니까." 세라피스 역시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 뒤에 자기 길로 걸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복도에서 흘러들어오던 은은한 달빛의 잔재가 벽에 쏟아져 창백하 게 퍼지고 있었다. -Blind Talk 변명부터...... 해야겠지요. 일단 말이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4권 출판 기념 도피성 여행.-_-) 그리고 지금까지 앞으로의 스토리를 다듬느라고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 라는 말은 순 새빨간 거짓말이고 사실 슬럼프였습니다. 솔직히 이번 편 도 '아아 이런 느낌이 아냐.'라는 생각에 올릴까 말까 하다가, 끙끙 앓고 있다고 더 좋은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니니까 '에라 모르겠다.'라며 올립니 다.(대체 이런 변명조의 글을 몇번이나 썼던가... ) 일단 궁상은 이 정도에서 접고...... 앞으로는 자주 올리겠습니다. 라는 부도수표로 읽어주시는 분들의 분노를 매꿀 수 밖에는.(뻔뻔... ) 이번편에는 인터메조(를 가장한 대사)가 들어갔습니다. 가끔 들어갑니다 앞으로. 그 호저(豪猪)에 대한 딜레마는 꽤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고 에반게리온의 서브 타이틀로도 나왔는데 저도 듣고 꽤 맘에 드는 딜레마라서 썼습니다.(이 소설의 부제목들은 모두 통신판 ONLY) 음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살롱은.... 본래 살롱의 의미는 전혀 이것과는 다르지만(공식 미술 전람회에 가깝겠지... ) 관용적으로 '상류 사교클럽'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다가 무대가 항구도시 베오폴트이다보니까 뭐랄까, 중세 베네치아가 떠올라서 살롱을 그려 봤습니다. 천박한 곳은 아니지만 낭만, 퇴폐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에 와선 퇴폐라는 의미가 확장, 오용되고 있는 듯 하지만. '엽기'처럼.) 살롱들이나 물랭루주는 같은 뮤직홀들, 티샵들은 많은 예술가나 철학자들 에 의해 그 맥이 이어졌는데 지금도 베네치아나 밀라노 쪽에는 명맥이 남아 있습니다... 라고 다큐에서 그러더군요. 아무튼 에스프레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꼭 언젠가는 밀라노의 그 유명하다는 에스프레소 바들을 들려보고 싶습니다.(현대적 살롱의 이미지... 랄까나.) 설정상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살롱은 달라카트에만 있습니다. 헤스팔콘에선 살롱보다는 로마식 목욕탕이 어울리겠지요. :-) 에 그리고 테싱의 첫 등장씬.(비록 회상이지만.) 테싱의 모습은 날개 여섯장의 천사... 를 닮은 모습입니다만.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이 '천사'라는 단어를 알리가 없지.) 인터메조에서 나온 모습과는 다릅니다.(나름대로 이유가... ) 하아. 그럼 오랜만에 '제멋대로 프로파일' 씁니다. <제멋대로 프로파일 통신판 only> Entry#5 카리나(Karina) 1.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난 언제쯤 카넬리안하고 싸울 수 있냐고!!(버럭) (이건 넘어 갑시다... 때되면 다 이뤄지니까.) 2.칼은 전혀 못쓰는 겁니까? :그런 거 없어도 잘만 싸운다 뭐. (카리나의 무기는 마력이 담겨져 있....... 을 지도 모르는 양팔의 팔찌. 사실 그녀의 전투력은 일반적인 상급의 씰들을 상회한다. 단 공격이 직선 적이라서 함정에 걸려들기 쉽다는 것이....... 단점이랄까나.) 3.가장 불만은? :젤리드가 어린애 취급하는 것! 영원히 미성년자인 몸이라서 극복할 수도 없단 말야! 그리고 줄리탄 같은 착한 사람이 카넬리안이란 극악무도하고 끔찍한 씰하고 같이 있는 것도 마음에 안들어. 말할 수 없어서 그렇지 그 여자가 얼마나 냉정하고 무시무시한 씰인데! 그리고 또...(중략) (불만이 많은 씰이랍니다.) 4.젤리드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이 있어요? :헤헤. 물어보지 마세요. (대체... ) 5.술은 좋아해요? :사실은 안주를 더 하는데... (카리나는 고집이 세서 못 먹는 술 오기로 잔뜩 마시고 취해서 쓰러져 버 린 적도 많지만 실은 조금만 먹어도 금방 빨개진다. 씰들도 인간과 비슷한 구조인지 알콜에 반응하는 편이다.) 6.카넬리안과의 과거는? :절대로 용서 못해 그 여자!! 언젠가는 꼭...(중략) (사실 카넬리안의 입장을 카리나도 이해하고는 있지만 감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데다가 인간의 씰이었던 카리나와 궁룡의 씰이었던 카넬리안은 서 로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는 관계다. 사실 테싱의 씰이었을 때의 카넬리안 을 두려워하지 않던 씰들은 거의 없었을 거다.) 7.좋아하는 것은? :주인님('것'에 속한다.), 리이 님, 이카테스 등등 카넬리안을 제외한 전 부. (서릿발 날리는 증오심을 엿볼 수 있다.) 8.지금의 상황에 만족해요? :자주 와인병을 깰 때마다 리이 님의 난감한 표정을 보며 미안한 것 외에 는 뭐 큰 문제는 없는데. (사실 그녀는 젤리드와 예전보다 자주 놀지 못한다는 것이 불만이다.) 9.용들을 어떻게 생각해요? :아무리 물키벨 님이 편하게 대해준다고 해도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 자. (아주 오랫동안 이 세계를 살아온 씰들은 이 세상의 지배자를 인간이 아닌 용으로 느끼고 있다.) 10.노래는 잘 불러요? :뭐 마지막 질문이 이래. (그녀는 카넬리안이 자신보다 노래를 훨씬 잘 부른다는 사실에 억울해 하 며 몰래 노래 연습을 하고는 있지만 남들 앞에서 부르는 건 부끄러워서 계 속 미루고 있다.) 푸펑충의 사회가 우리를 안받아 줘 를 들으며. (아무리 들어도 이 음악의 리듬은 컨츄리 음악인 레드 리버 벨리인 것 같 은데... ) 『SF & FANTASY (go SF)』 12739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2/15 14:37 읽음:55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1-03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3312]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2-15 08:40 조회:34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3 : 세상을 보는 마음 the SEAL 1.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건축물인 난신 오펜바하의 황궁 오버암메르 가우로 들어가는 입구 - 식인룡의 아가리 같은 그곳에 서 있는 세이드는 다듬지 못해 야수의 갈기처럼 헝크러진 금발의 머리칼과 퀭한 눈동자였지 만 공포스럽게 풍겨 나오는 위압감만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레오폴트 폰 매소크는 그 위압감이 주는 마력에 홀려버린 듯이 하 얀 입김을 뿜으며 씰처럼 그의 곁에 있었다. "누구냐. 네 놈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판금갑옷을 걸친 정문의 경비병들은 세이드가 다가오자 즉시 그들을 포위하며 창을 들이댔다. 세이드와 레오폴트의 행색이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겁도 없이 오펜바하의 황궁 앞에서 고개를 바짝 들고 서 있다니. 이 정도 행동 만으로도 참형 감이다. 세이드는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경비병들의 존재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이 한눈에 넣을 수도 없이 거대한 황궁을 훑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 다. "너희 무리의 왕을 만나고 싶다." "뭣?" 세이드가 바라보는 시퍼런 차가운 눈길에 움찔거린 경비병들은 자기도 모 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창을 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감히 오펜바하의 황 궁 앞을 기웃거릴 배짱을 지닌 놈은 지금까지 없었을 뿐더러 한밤중에 묘 지를 방황하다가 악령을 만난 것 같은 기분에 경비병들은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무, 무리의 왕이라니 무슨 소리냐!" "오펜바하에게 할 말이 있다." "감히!!" 경비병들은 안그래도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얼굴이 파래졌다. 대체 어떤 미친 작자가 오칼란트에서 오펜바하의 존엄한 이름을 함부러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창을 꼬나들고 세이드를 찔렀 어야 했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세이드에 대한 두려움은 실행을 막아 버렸 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이 오펜바하에게 날 안내해 주리라고 기다리지도 기대하지도 않을테니까." 세이드는 마치 혼자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뒤에 서 있는 레오폴트의 불 안감은 상관 없다는 듯이 세이드는 맹독을 얼려 만든 얼음을 뱉어내는 듯 한 기괴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대신...... " 세이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생명을 빼앗아 갔던 자신의 검을 뽑았다. "횃불이 되어 줘야 겠다." "홰, 횃불?" "오펜바하가 날 볼 수 있도록 화려하게 타올라라. 그게 너희들의 운명이 다." 경비병들은 그 말에 대한 의문을 풀기도 전에 세이드의 검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진동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그들의 목숨은 끝이었다. 세이드의 검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움직이는가 싶더니 경비병들의 피가 역 류하며 퍽소리와 함께 눈과 고막이 터지고 그곳에서 끔찍한 핏줄기가 솟아 나와 황궁의 입구에 뿌려졌다. 내장이 모두 터진 시체가 되어 버린 경비병 들이 바닥에 쓰러질 때 세이드는 레오폴트를 돌아보며 나즈막히 말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일찍 죽게 될 거다. 어서 꺼져 버려." "상관 없습니다...... 전 당신과 계속 있겠습니다." "흥. 너도 하찮은 인생이로군." 세이드는 경비병들의 피를 뒤집어쓴 섬뜩한 모습으로 레오폴트에게 자신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을 말했지만 레오폴트는 고개를 저었다. 추운 날씨 에 바닥에 쏟아진 뜨거운 핏덩이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는 끔찍스러운 광경 이었다. 세이드는 곧 황궁으로 들어가며 주변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의 검기가 닿는 모든 것들이 폭발하며 시뻘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세이드는 오펜바하와 만날 수 있는 가장 공격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레 오폴트 역시 자신의 법창 알-파티아를 꺼내들며 세이드를 따라 불길 속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동안 세이드는 눈에 띄는 모든 인간들을 도륙하 며 황궁의 거대한 정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멈추세요. 당신들." 세이드는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곳에선 세이드의 불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으며 들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단신으로 감정의 미동도 없이 세이드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여자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이드가 냉소어린 표 정으로 말했다. "오펜바하의 기사인 모양이군." "가이스트 라이히의 리더입니다." 그녀는 오펜바하의 친위대인 가이스트 라이히의 브륜힐트였으며 당연히 지룡이었다. 상황은 갑자기 리히트야거의 전 리더와 가이스트 라이히의 리 더의 대면으로 이어졌지만 브륜힐트는 별로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평상 걸음으로 세이드에게 걸어오고 있었고 그 여유로움이 세이드의 신경을 건 드렸다. "당신이 세이드 폰 러셀, 그리고 뒤에 있는 자는 레오폴트 폰 매소크. 그 렇지요?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요." 브륜힐트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경어조의 말투를 끊어버리 며 세이드가 검을 치켜 올렸다. "네 년에겐 볼 일 없다." 세이드에게 정상적인 대화를 두소절 이상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고열의 마력을 뿜어내는 검을 끌어올린 세이드는 브륜힐트를 향해 검기를 날리며 공격해 들어갔고 브륜힐트를 덮친 검기는 그녀의 옷을 하얗게 태워 버리기 시작했지만 브륜힐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강한 인간이로군요." 그렇게 속삭이는 브륜힐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세이드를 바라보았다. 세이 드는 그 눈을 보며 예전 붉은 눈의 씰이 떠올랐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치명적인 눈빛. 둘은 서로 닮았다. 2. 줄리탄은 루스로부터의 협조요청서를 보며 뭐라고 할 할이 없었다. 단지 이런 걸 자꾸 겪으면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과 함께 감미로운 현악기의 음악소리들이 귓가를 겉돌고 있을 뿐이었다. "세라피스 씨는 이 사실을 아나요?" "물론 알겠지. 이 문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그 인간, 도무 지 속을 알 수가 없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딴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작 루스가 황제 자리에 올리려고 하는 세라피스는 '그딴 것 나랑 상관 없는 일'이라는 태도로 태연하게 놀고 마실 뿐이었다는 것이 또 속 터지는 노릇이었다. 물론 루스는 일전에 세라피스와 '은밀한 곳'에서 만나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라피스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도 않았고 그건 거절 의사였다. 그럼에도 루스는 나라꼴이 병문(兵門) 치기배들의 장물시장에 다름 없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자인 세라피스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가스발 사략함대에까지 협조요청서를 보낸 것이었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요." 줄리탄은 복잡한 표정으로 루스로부터의 문서를 내려놓았다. 정치니 반란 이니 하는 단어에는 익숙하지 않고 인생 경험도 짧은 10대인 줄리탄이 '이 렇게 하죠!'라고 능숙하게 답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나이에 그 런 결정이 가능한 자라면 아마 타고난 책사 리하르트 정도일 것이다. "메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난...... " 메이는 눈앞에 놓인 뽀얀 유백술잔을 내려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달라카트가 멸명한다고 생각해. 지금도 망해가고 있고. 루스 저하의 방법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변화가 필요해 달 라카트에는." 메이 역시 루스의 요청을 거절도 승락도 못한 채로 말을 빙빙 돌릴 뿐이 었다. 루스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부하들의 목숨까지 담보로 걸고 황실과 싸워야 할 상황까지 각오해야 하는 일. 순간 의 호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루스가 믿을 만한 자인 지조차 메이는 확신할수 없었다. 그때 그런 복잡한 상념을 깨버리는 비명 이 들렸다. "꺄아아악!" 살롱의 아가씨 중에 한명이 지른 비명에 고개를 돌린 쪽에선 검을 뽑아들 고 있는 30대 쯤으로 보이는 자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지배인이 보였 다. "건방진 새끼! 어디서 말참견이야! 이 가게를 박살내 줄까! 엉?" 비무장의 상대에게 검을 들이대는 짓은 꼴불견이다. 반백인 지배인의 이 마에 날카로운 검끝을 들이대고 욕설을 퍼붓고 있는 자는 살롱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성질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꼴불견' 뒤에 무표정한 얼굴 로 서 있는 여자는...... "씰이잖아." 줄리탄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직감적으로 그 사내 뒤의 여성이 씰이라 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검을 뽑고 있는 자는 분명 기사다. 이런 곳에서 동네 불량배 마냥 아무렇게나 검을 뽑는 꼴을 보니 그리 '명예로워'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기사는 기사. 보통 사람들이 '이 러시면 안되죠.'라며 말려봐야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도, 도와주세요. 노블리스 경." 마치 정해진 순서마냥 아가씨들이 줄리탄 뒤로 숨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 로 도움을 요청했다. 하긴 이런 와중에서 당장 사람들의 '믿음'이 되고 ' 힘'이 되는 건 사략함대의 지휘관인 노블리스나 메이지 살롱에서 모여 있 는 고명한 철학자분들이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랏 걱정에 달변을 토해내시던 예술가니 철학자들 께서는 미친 망아지 날뛰는 꼴이 되자 모조리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려 버리셨다. 이 상황이 진정된 뒤의 그들의 변명이 기대된다 정말로. '이걸 어쩐다...... ' 줄리탄은 이 '피말리는 돌발상황'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정리했다.(예 전 같으면 일단 얼어버렸겠지만) 다행이 인피타르는 가지고 있었지만 카넬 리안을 만난 뒤부터는 카넬리안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면 쓰지 않겠다고 다 짐했기 때문에 자신의 결심을 초장부터 깨버리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쓰지 않는다면 기사를 상대하는 것는 불가능하다. 천년만년 살 수 있 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에 생명력을 낭비하는 것이 '쬐끔' 아깝기도 했다. 그래서 되도록 말로 해결할 방향을 모색해 보고 있었는데....... 그때 그 모색을 무색하게 만드는 또 다른 돌발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야 이 되먹지 못한 자식아! 이 분이 누군 줄 알아? 가스발 사략함대의 노블리스 경이시다! 너 이제 혼쭐이 날꺼다!" 라는 둥의 '위험한 발언'들이 줄리탄 뒤에 숨어 있던 아가씨들 입에서 쏟 아져 나온 것이다. 줄리탄을 그렇게나 높게 평가해 주고 이 소동을 깨끗히 해결해 줄 수 있는 '멋쟁이'로 봐주는 것은 참말로 고맙지만...... 시키지 도 않은 응원은 삼가해 줬으면 좋겠다고 줄리탄은 생각했다. 메이가 떨떠 름한 얼굴로 말했다. "좋겠다. 줄리탄. 인기 많아서." "정말로....... 부담스럽네요." "노블리스? 해적들이 벌벌 떤다는 자가 너 같이 계집애 같은 애송이였나? 넌 내 씰이 상대해 줄꺼다. 카이오스! 가서 저 놈을 해치워!" 정말로 무례하기스리 이름도 안밝힌 그 사내는 마치 사냥견을 다루듯이 자신의 씰에게 소리쳤고 카이오스 라는 이름의 씰은 무표정한 얼굴로 줄리 탄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느껴지질 않는 (주인으로부터의 애정이 결핍된) 전형적인 씰의 모습...... 인 것 까지는 좋은데 카이오스라. 카넬리안이 싫어하는 유형의 이름이었다. '카넬리안이 여기 없길 다행이지. 그녀가 있었다면 단지 '카'로 시작하는 이름을 붙여줬다는 이유만으로 널 곤죽을 만들어 버렸을 꺼다.' 카이오스. 줄리탄은 참 독창성 없는 네이밍 센스라며 생각하며 테이머가 되기 위해선 작명도 잘해야 한다는 얼빠진 생각을 잠시 해 버렸다. 그때 카이오스는 검을 뽑으며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뛰어 올라 테이블들을 넘 어서며 줄리탄을 노렸다. 이 정도까지 와서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인피타르를 뽑아야 한다. '기절만 시킨다. 기절만 시킨다. 기절만 시킨다.' 줄리탄은 이를 꽉물며 인피타르의 도두를 잡았다. 이걸 뽑을 때 느끼는 고통은 익숙해 지니까 나름대로 견딜만 하다고 쳐도 실수로라도 저 씰을 죽여버리면 그건 육체적인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 아....... " 줄리탄은 뽑으려는 순간 몸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카이오스가 마치 '오작동'을 하는 것처럼 줄리탄 앞에 서며 주저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무 관심 속에서 (혹은 육체적 관심만 받으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씰들이란 점 점 감정이 하나둘 사라져 결국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전투에 필요 없는 마음의 요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서 끝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기계'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카이오스도 그런 씰 중에 하나인데 - 그녀는 갑자기 줄리탄을 보며 무언가 느낀 듯이 말을 토 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카이오스!" 그 사내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도리어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자 수치스러운 표정. 그럼에도 카이오스는 줄리탄을 쉽게 찌르 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들어내며 줄리탄 앞에서 검을 떨어트려 버렸다 . 솔직히 카이오스가 만난 '좋은 사람'이 줄리탄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오스는 줄리탄에게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레시다가 줄리탄 에게 말문을 처음으로 열었던 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너...... 괜찮아?" 줄리탄은 조금씩 그녀의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마음 속이 보이는 듯 했다 . 최근 들어 그런 기분을 자주 느끼고는 있었는데 - 순간, 아주 짧은 시간 주인도 아닌 줄리탄과 카이오스의 공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외마디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줄리탄의 머리속에 희미하게 울렸다. '구해주세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어오르기 시작한 줄리탄. 기묘한 기분에 사로 잡 히며 그녀와의 공명을 계속 이어가려 노력했지만 짧은 공명은 그걸로 끝이 었다. 카이오스의 주인은 진흙탕에 뒹굴어 비웃음을 당한듯 굴욕적인 표정 으로 카이오스에게 달려갔고 그가 휘두른 검이 카이오스의 등을 찌르며 몸 을 뚫고 나온 것이다. "이 빌어먹을 씰이! 내 명령을 거역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카이오스를 짙밟고 있는 사내를 줄리탄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정신이 육체를 잃고 어디론가 기억나지는 않 지만 아주 익숙한 곳에 가버린 것 같은 상실감. 그러나 곧 현실로 돌아오 며 눈 앞의 기사가 죽어버린 씰을 향해 쏟아내는 폭언들이 귓가를 때렸다. "날 무시하는 거야? 너 같은 하급씰은 얼마든지 구할 수 었어! 제길 왜 난 제대로 씰 하나 못 구하는 거야! 젠장!" "죽여버리겠어." 메이는 깜짝 놀랐다. 줄리탄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는 걸 처음 봤던 것이다. 사내는 그 소리에 발길질을 멈추고 줄리탄을 쏘아보았다. 화를 참 지 못하고 눈이 풀려버린 - 그러니까 반쯤 미친 모습이다. "나, 나, 나를 죽이겠다고? 너 내가 황실의 호위 기사라는 걸 알고 하는 소리냐! 이 몸은 재무 대신 휴센 공의 호위 기사란 말야! 엑퀼라인 경이라 고 들어 봤어? 헤스팔콘의 세이드도 피하는 나를 죽여? 너야말로 지금 여 기서 죽여 주마!!" 세이드가 피하는 건 마르켈라이쥬 라면 모를까 엑퀼라인은 아니다. 그래 도 황실 직속의 기사라면 일반 하급 기사들보다는 월등하게 강하다는 것이 상식. 그러나 줄리탄은 '그게 어쨌다는 거냐.'라는 얼굴로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꺼냈다. "네 놈의 이름 따윈 관심 없어. 그 더러운 검을 휘두르는 네 놈의 팔, 다 시는 쓸 수 없을 꺼다." 줄리탄은 인피타르에 손을 가져다대며 엑퀼라인과 당장 터져버릴 것 같은 살기를 주고 받았고 메이는 처음 느끼는 줄리탄의 칼날 같은 살기에 소름 이 끼치며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엑퀼라인은 그 레시다를 바다에 던져 버렸던 테이머 였던 것이다. 3. 줄리탄의 방에서 저녁 티세트를 놓고 그레시다와 대화하고 있던 카넬리안 이 갑자기 괴로운 표정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렸다. "왜, 왜 그러세요?" 산산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 그레시다가 카넬리안을 바라보았을 때는 그녀 의 붉은 눈빛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공명이야." "예?" "공명을...... 잠깐 느낀 것 같애." 그 말과 함께 카넬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옆에 두었던 미스트랄을 집 어 들었다. 줄리탄과 재회했을 때부터 그녀는 미스트랄을 잊지 않고 가지 고 다니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잠깐 갔다 올게. 주인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카넬리안을 빠르게 말하며 황급히 줄리탄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레시다의 몸을 휘감았고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바닥에 흩어져 있는 찻잔의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Blind Talk 짜안. 이번엔 일찍 올렸습니다.-_-v (하루에 한번이 뭐 그렇게 자랑이냐고요?) 이건 비축분이었는데 '그래. 저질러 버리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만. 재미 있으셨으면 좋겠네요.(최근 자신감 상실중. 4권을 낸 후유증인가 ...... ) 긁적. 뜬금없는 말이지만 줄리탄의 적색기함 일루미네이터(illuminator)의 이름은 '상대에게 빛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루시퍼냐? -_-;) 본래 계몽적인 단어나 분위기 말은 싫어하는데다가(퇴폐스런 성격임) 이 소설에서 영어단어가 웬 말이냐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루미네이터라 는 단어는... 멋지지 않습니까?(나 혼자 멋있나. 중얼.) 제 G-SHOCK 시계가 일루미네이터 시리즈 중에 하나 입니다.-_-; 지샥의 일루미네이터들은 멋있는게 참 많은데 워낙에 비싸서 선물 받은 것 으로 만족. 더 살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말레이지아 OEM 주제에 왜 이 렇게 비싼 거냐... ) 그래도 최근 브론즈빛이 감도는 은색의 티탸늄 밴드로 만들어진 CASIO RPT -420에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큰일입니다. 시계 전체에 검은 음각이 조각 되어 있는데다가 묵직하고 반짝반짝 거려서 보기만 하면 '사고 싶어!'라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명품! 뭐 사실 그건 산악용인지라... 등반가도 아닌 제가 사는 건 단지 천박한 졸부짓에 진배 없겠지만 뭐랄까... 그래도 사고 싶은 걸. 아아 이 놈의 충동구매 때문에 은행 잔고는 언제나 바닥입니다. 참고로 아직 실체는 등장 안했지만 메이의 초노급(dreadnaught) 전함 밴들 라이저(Vandalizer-문명의 파괴자)의 이름은 만화 스폰에서 나오는 좋아하 는 악역 캐릭터의 이름!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고 반문하시면 할 말 없지만... 사실 그때 조선기술로 초노급의 함선을 만든다는 것도 우습고 게다가 영국 도 아니고 화약무기도 없고... 좀 소프트한 설정이지만 뭐... 그냥 넘어가 죠. 저는 말이죠, 어려서부터 공상이 심했습니다. 지금도 중증. 저의 가게는 약국인데... 또 뜬금없이 예전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시기는 나이 7살 때인가. 여름이면 몰려드는 파리들을 바라보며 또 공상 을 시작해 버렸습니다. '역시 약국에 파리는 보기에 너무 안좋아. 엄마를 위해서 특제 파리약을 발명하자!' 라는 터무니 없는 망상으로부터 시작한 '특제 파리약 제조 프로젝트'는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일단 에프킬라 같은 건 어떻게 만드는지 짐작도 안 가니까 포기하고 파리를 유혹해서 달라붙게 하는 '끈끈이'를 만들어야 겠 다는 생각에 돼지표 노란 본드를 사 왔습니다.(대체 왜!) Process #1 마분지 위에 본드를 잔뜩 짜서 뿌린다. :그 당시 어린 제 생각으로는 탁 달라붙게 만드는 최적의 재료는 돼지표 '뽄드'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_- #2 본드더미 위에 밥알을 뿌린 뒤에 섞는다! :나름대로 파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라는 발칙한 발상을... #3 그 위에 크레파스를 가루를 내어 뿌린다.-_- :알록달록 화려하게 보여서 끌어들이려는 계략이었음. 사실 파리는 인간 의 눈구조와 전혀 다른데다가 크레파스 색에 반해서 달려든 파리는 본 적 도 들은 적도 없지만... 이상 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분지 위에 만들어진 거대한 본드 무더기는 파리가 달려들지는 모르겠지만 딱 보기에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 한 모습과 냄새를 뿜어대기 시작했습니다.(물체X... 같았음.) 그리고 그 정도로 끝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파리가 무슨 바퀴벌레라고 사람들 눈에 잘 안띄는 곳에 그 '특제 파리약'을 몰래 놔두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량의 파리를 척살하길 바라며. 그리고 숨 죽이고(숨은 왜 죽이는데 ?) 가게의 좁은 방 안에서 한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파리약에 걸려든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파리도 못찾을 만큼 아주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그 '지뢰'에 밟힌 어머니 는 당장 그것에 제 작품이라는 것을 파악했고 섬뜩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 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아 그 다음부터는 악몽이라서... 아무튼 그 덕 분에 저는 '오라오라'만 봐도 실웃음이 나네요. 그냥 잠이 안와서 횡설수설이었습니다.(뭔가 자기 이미지 스스로 박살내 고 있다는 생각을... 뭐 이미 늙고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는 몸.) 아아 blind talk는 찻집 수다 같아서 아차 하는 순간에 길어 집니다.-_- 읽어주시고 메일 보내시고 퍼가 주시고 추천해 주시고 감상해 주신 분들 께 감사드리며 드래곤 레이디 카페 회원 분들께도 감사 드려요. 그럼 언제 나 몸조심 마음조심 하시길 바라며 다음 또 언제나 찾아 뵙겠습니다. Hide의 ROCKET DIVE를 들으며... E-MAIL : billiken@hananet.net 『SF & FANTASY (go SF)』 128361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2/19 09:38 읽음:11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1-04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348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2-17 08:32 조회:817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4 : 세상을 보는 마음 Lack of Love in the world 1. 줄리탄과 엑퀼라인의 대치는 5분 이상 이어졌다. 자신만만하던 엑퀼라인 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갑작스럽게 터져나오는 줄리탄의 살기를 느끼며 기사도 아닌 상대에게 쉽게 검을 찌르지 못했을 정도로 줄리탄이 쏘아내는 적대적인 기운이란 뒤에서 보고 있던 메이의 마음까지 오싹하게 만들 정도 였다. '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냐고? 흥 그래! 인간들에겐 별 것 아닌 일이겠지.' 카넬리안이 예전에 줄리탄의 핀잔을 쏘아 붙이던 말이었다. 그때의 그런 그녀와 똑같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있는 줄리탄의 모습을 이 세상의 참 '고 귀한' 기사나으리들이 본다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바보'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화를 낼 정도로 벌써 어른이 되어 버린 건 아냐. 수백년 이상 쌓여 있던 그녀의 인간에 대한 악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줄리탄이었다. '공명이 강제로 끊어져 버리는 것이 이런 기분인가. 서로 팽팽하게 이어 져 있던 실이 툭 끊어져 버리며 마음의 일부분이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괴로움과 두려움. 카넬리안도 전 주인과 공명이 끊어지며 정신이 찢 어져 버리는 이런 고통을 느꼈겠지. 나보다 훨씬 지독하게.' 메이는 줄리탄을 말려야 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무엇보다 저런 상태에서 인피타르를 뽑았다간 그 두려운 검을 제어하지 못하고 상대는 물론 자신의 생명까지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설득력있는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살롱의 바닥에 깔려 있는 융단은 카이오스의 죽은 몸이 흘리고 있는 붉은 피를 머금고 있었고 그에 따라 줄리탄과 엑퀼라인 사이의 검붉은 자국이 마치 생명체처럼 조금씩 그 크기를 더해갔다. "저...... 위험하니까 그 검 치우시죠." 부드러운 목소리. 갑자기 엑퀼라인의 뒷편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에 어울리 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등뒤에 기척이 느껴지자 깜짝 놀란 엑퀼 라인은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누구냣!" 엑퀼라인의 검이 날아들자 그 목소리의 주인의 몸에서 기묘한 은빛의 기 운이 튀어 나왔고 그것은 엑퀼라인의 검을 고밀도의 액체처럼 감쌌다. 엑 퀼라인은 그를 베어버리려 하던 자신의 검이 힘을 잃으며 튕겨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방어 마법이다. "뭐, 뭐야 너는!" "메르퀸트....... "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줄리탄 님." 엑퀼라인 뒤에 서 있던 자는 메르퀸트였던 것이다. 줄리탄을 향해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웃고 있는 메르퀸트는 가느다란 몸을 검은 로브로 감싸고 있었고 예전 레터가 주었던 앤티크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긴 은발머리 는 행동하기 편하게 두가닥으로 길게 땋아 내리고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허리켠에서 찰랑거릴 것이다. "어떻게 여기에...... " "테시오스 님의 '공간'에서 이십여년간 수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왔다가 줄리탄 님의 기운을 느껴 들어와 보니, 결투 중이셨군요? 훌륭히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미소를 띄우는 메르퀸트야 말로 성격이 바꿔 버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 금도 주둑 들어 있지 않은 말투나 씩씩 거리며 흥분하는 엑퀼라인을 가볍 게 무시하며 줄리탄과 대화할 수 있는 배짱에서 확실히 성장했다는 걸 느 낄 수 있었다. 엑퀼라인은 갑자기 등장한 메르퀸트를 향해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며 소리쳤다. "씨앙! 어딜 끼어드는 거야!" 엑퀼라인은 검을 치켜 올리며 메르퀸트의 목을 향해 찌르려 했지만 그때 줄리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메르퀸트가 있다면....... 그 자도 같이 있을까?' 줄리탄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순간적으로 공기가 진동하며 주변의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 이건 또 뭐야!" '역시 같이 있었군.' 카이오스가 흘린 핏방울들이 소용돌이치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리고 마치 씰이 품은 원망의 형상화처럼 엑퀼라인 앞에 그 핏방울들이 뭉 치며 붉은 빛의 두려운 형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말락이었다. "으, 어엇!" 아무리 기사인 엑퀼라인이었지만 난생 처음보는 광경에 소스라칠 듯 놀라 며 카이오스의 피로 형체를 만든 말락을 향해 검을 찔렀지만 그 칼은 단지 물과 공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말락의 몸을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말락은 엑퀼라인을 내려까는 눈동자로 자신의 거대한 낫을 소환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분명 메르퀸트를 공격하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리라. 그리고 주변 공기가 떨리며 줄리탄은 음습한 말락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 을 수 있었다. "난 센티넬 말락이다. 내 부하들의 먹이로 널 던져주지...... " "말락. 소환하지마!" 메르퀸트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말락이 소환하려는 것은 분명히 예의 무시무시한 모습의 이형(異形)들일 것이다. 그런게 이런 도시 한복판에 소 환되어 버리면 도시 전체가 비명과 공포의 아수라장이 되어 버릴 것은 뻔 한 일. 말락 한명만 나타났는데도 이미 살롱 내부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어 서 사람들이 살롱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락은 메르 퀸트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낫을 거두며 계속 엑퀼라인 의 목숨을 당장이라도 가져갈 듯이 쏘아보았다. 핏물로 만들어진 반투명의 몸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이란 누가 보아도 '악령'의 모습, 그 자체였다. "크으윽! 두, 두고 보자! 이 치욕, 꼭 복수해 주마!" 아니나 다를까 잠시 틈이 생기자 엑퀼라인은 줄리탄을 노려본 뒤에 엄청 난 속도로 살롱의 창문을 뚫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다. 확실히 기사로서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행동거지가 개판이니 앞으로 만나면 피곤할 인물이었다 그는. 메르퀸트는 엑퀼라인이 사라져 버리자 줄리탄을 보며 반 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줄리탄 님.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가워요." "응 나도. 그런데 미안하지만, 일단 이 씰부터 묻어주고 얘기하자." 줄리탄은 어두운 얼굴로 죽어버린 카이오스를 내려보며 말했다. 말락은 줄리탄을 흘낏 본 뒤에 별다른 인사도 없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공중에 뭉쳐 있던 핏방울들이 의지를 잃고 후드득 소리를 내며 비처럼 바닥에 쏟 아져 내렸다. 2. 세이드의 검기가 브륜힐트가 입고 있던 진한 회색 빛의 정장을 불태워 버 리며 하얀 어깨의 속살들이 다 들어났지만 정작 자신은 조금도 피해도 입 지 않은 듯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채찍을 꺼내들며 곧바로 세이드의 검 을 휘감았다. "싸울만한 실력이구나 너는!" 세이드는 그녀의 힘을 느끼며 두 눈에서 광기를 터트렸다. 그의 검을 봉 쇄하려는 브륜힐트의 행동은 옳은 일이었지만 스치기만 해도 상대에게 끔 찍한 충격을 전달하는 세이드의 검이었기 때문에 - 세이드의 악랄한 마력 은 순식간에 채찍을 타고 브륜힐트에게 전해졌다. 정원의 솟아오르던 불길 마저 그 마력의 기운에 다가서지 못하고 휘정거릴 정도였다. '아....' 브륜힐트는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린듯이 우아한 자신의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자신의 몸으로 퍼지고 있는 세이드의 마력을 느낀 것이다. 검의 진동음이 귀를 찢을 듯이 커져가며 세이드는 계속 자신의 힘 을 높며 고문처럼 브륜힐트에게 마력을 주입시켰다. 보통 기사들이었다면 몇초 버티지도 못하고 몸이 마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산조각나며 터져 버렸을 것이고 강력한 기사라도 그 마력에 근육이며 뼈가 다 끊어져 버리기 전에 채찍을 놓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륜힐트는 그렇 지 않았다. 그냥 세이드를 시험이라도 해보려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세이드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아주 즐겁 다는 표정으로 얇은 입술을 떨며 뒤에 서 있는 레오폴트를 향해 명령했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바엔 가서 저 년을 찔러 버려." "하, 하지만." "저 년의 사지를 잘라버린 뒤에 즐겨주지." 기사들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예의이며 상식이지만 세이드는 그 따위 것, 처음부터 생각도 안했다는 듯이 레오폴트를 향해 비웃는 얼굴로 브륜힐트를 찌를 것을 말한 것이다. 아무튼 여러 의미에서 세이드는 젤리 드의 숙적으로 어울리는 자였다. "알겠습니다." 세이드를 위해 기사의 명예와 가문까지 버렸던 레오폴트여서 그런지 그는 곧바로 자신의 법창 알-파티아를 들며 브륜힐트를 향해 날아 들었다. 황실 의 무희들처럼 고운 그의 외모와는 달리 창을 화려하게 돌리며 돌격하는 속도와 강맹함은 세이드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륜힐트는 누 구의 명령처럼 세이드의 검을 놔주지 않고 있었고 순식간에 파르티잔 알- 파티아는 새하얀 빛덩이에 휩싸인 채로 브륜힐트의 몸을 향해 날아들고 있 었다. '뭐, 뭐야!' 레오폴트는 자신을 급습하는 파동을 느꼈다. 갑작스런 해일처럼 눈앞에 닥친 그 파동은 온몸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강대한 힘과 함께 불가항력으 로 레오폴트의 몸이 튕겨내 나갔다. 분명 그 강력한 기력의 근원은 브륜힐 트가 아니었다. "아아악!" 레오폴트는 세이드 앞까지 밀려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브륜힐 트는 세이드의 검을 감고 있던 채찍을 풀었고 세이드 역시 드물게 긴장한 모습으로 냉소를 띄우며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레오폴트의 눈 앞에는 브륜힐트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미소년이 있 었다. 그리고 단박에 그가 자신에게 그 힘을 쓴 자이며 또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그는 제1황제 오펜바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펜바하의 뒤에는 가이스트 라이히의 지룡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힐트. 수고 했다. 추운데 가서 옷이라도 입어." 브륜힐트는 오펜바하를 향해 고개를 조금 숙이며 세이드를 무표정한 얼굴 로 흘리듯 바라본 뒤에 사라져 버렸다. 세이드는 시선을 자신을 향해 다가 오는 오펜바하에게 고정시킨 상태로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잘 봐둬라. 저게 난신 오펜바하. 나보다 강한 자다." '절대자......' 레오폴트는 망가진 자신의 정원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느긋한 얼 굴로 자신들을 훑어보고 있는 오펜바하를 보며 '인간답지 않은 그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손가락으로 툭 쳐낸 정도였을 것이다 아까 그의 힘은. 마음만 먹었다면 힘을 모으지 않고도 자신의 몸을 조각낼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운 예상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 들었다. 그것은 화산 이나 벼락을 앞에 두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마 찬가지였다. "무릎을 꿇어라 무례한 놈들!!" 가이스트 라이히 중에 하켄이 눈을 부라리며 세이드에게 외쳤지만 세이드 는 곧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듯이 조소를 퍼부었다. "내가 왜 너희 무리들의 왕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나? 날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난 단지 저 대단하다는 오펜바하와 싸우고 싶 을 뿐. 기왕 죽을 거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의 손에 처참하게 개죽 음 당하는 것이 내 인생에 어울릴 것이다." "뭐 저 따위 놈이 다 있어...... " 하켄은 황당한 듯이 세이드를 보며 혀를 찼고 오펜바하는 요즘들어 드물 게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세이드를 향해 말했다. "차나 한잔 마시면서 얘기할까? 분위기도 좋은데 말야...... " 오펜바하는 불타오르는 자신의 정원을 훑어보며 흥겹다는 듯이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3. 씰들은 보통 주인의 손에 버려져 죽게 되거나 침실에서 노리개가 된 뒤에 그 잘난 '소중한 명예'가 더렵혀 질까봐 주인에게 살해되거나 싸움터에서 다른 씰들의 손에 죽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중 대체 몇명이나 묘 지에 - 아니 그냥 아무 땅에라도 조용히 묻힐 수 있을까. "미안해. 구해주지 못해서." 당장 베오폴트 공동묘지의 자리를 사서 카이오스를 묻어준 줄리탄은 작은 그녀의 석묘(石墓)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전형적이지만 낭 만적으로 그 석묘속의 카이오스와 공명이라도 이뤄졌으면 바랬지만 그런 것도 없이 더운 밤공기에 덥혀진 차가운 석관은 말이 없고 단지 너무 조촐 한 장례식을 끝냈을 뿐이다. 메르퀸트는 그런 줄리탄을 속삭이듯 위로했다 . "줄리탄 님.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했기 때문에...... 슬퍼하는 게 아냐. 그냥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 껴져서." '세상과 싸우겠다는 생각은 포기하는게 좋아. 죽는 그 순간까지 상처 받 거든. 세상은 바뀌지 않아.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자조적인 카넬리안이 말이 떠올랐고 - 바보같은 생각일까? 줄리탄은 더욱 카넬리안에게 잘해줘야 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카넬리 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주인님,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얏! 음침하게스리!" "아, 카넬리안...... " 이런 분위기에 생각 같아선 그냥 냅다 그녀를 확 껴안고 '앞으로 더 잘해 줄께!'라고 말해줘야 겠지만 너무 힘을 써서 헉헉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 은 그런 분위기를 탁 깨버렸다. 아마 자라탄에서 여기까지 배도 안타고 공 중부양으로 단번에 날아왔나 보다.(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다 그건.) "어? 메르퀸트!" "카넬리안 씨. 예쁘게 염색하셨네요. 멋있어요." 메르퀸트는 카넬리안에게 반갑게 인사했고 카넬리안은 마치 어제 헤어졌 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그에게 다가가며 손을 꽉 잡았다. "헤헤. 드디어 그 사악한 테시오스 할아범의 손아귀에서 벗어 났네?" "아 예? 아하하. 좋은 스승님이세요. 확실히 유별난 분이지만." "그런데, 지금도 그 소심쟁이 악령 녀석 놈하고 같이 있는 거야?" 말락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악령'이라는 말에 콤플렉스가 심한지 카넬리안이 그 말을 하자마자 말락은 흙먼지를 휘날리며 등장해서는 낫을 높이 치켜 들었다. "날 악령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이 성격 더러운 여자야!!" "......" 카넬리안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런 말락을 바라보다가 파하하하 커다랗게 웃어버렸고 줄리탄과 메이도 실소를 머금었다. 심지어는 메르퀸트까지 웃 음을 참기에 힘든 얼굴. "왜, 왜들 웃는 거야!" 당연하다. 묘지 한가운데서 낫을 들고 흙먼지와 함께 나타난 말락은 모습 은 바로 '악령' 그 자체 였던 것이다. 스스로 실수한 것을 느낀 말락을 성 질이 나선 이형들을 소환하려다가 결국 풀이 죽어 또 스르르 사라져 버렸 다. 막강한 힘을 지닌 말락도 카넬리안의 빈정거림 앞에서는 번번이 망가 지는 슬픈 영혼일 뿐이었다. 4. 배를 타고 자라탄으로 돌아가며 선상에 나와있는 줄리탄은 카넬리안에게 카이오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물론 당연히 동참하기로 한 메르 퀸트는 메이에게 간략한 '오리엔테이션'을 받느라고 객실안에서 정신이 없 는 와중이다. 줄리탄의 말을 다 듣고 신경질을 내는 그녀의 첫감상은 다음 과 같았다. "에에! 또 '카'로 시작해? 이거 정말 누군가의 농간 아냐? 짜증나네!" '그 말 할 줄 알았다......' "아무튼! 공명을 했다고? 계약도 안맺은 그 카이오스라는 씰과?" "으응." "우웅. 이상하네...... " 카넬리안은 자기하고도 잘 공명이 안되는 '불량 테이머' 줄리탄이 대체 어떻게 계약도 안한 씰과 짧게라도 공명을 할 수 있었는지가 이해가 안가 는 듯 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을 깨울 수 있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아마릴 리스를 깨울 수 있었던 것도, 그레시다가 말을 꺼낸 것도, 만나는 다른 대 부분의 씰들이 줄리탄에게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것도, 물키벨이 줄 리탄을 도와주는 것까지 모두 우연이라고 하기엔 수상한 것 투성이었던 것 이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단지 사람 좋은 것만으로 주변 일들이 만사형통이고 나이스하게 일이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언가 있어!' 카넬리안은 그 의문을 떨쳐버리려는 듯 두 눈에 힘을 주며 획하고 줄리탄 을 바라보았지만 얼떨떨하게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맥 이 탁 풀려 버렸다. 카넬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쳇. 뭔지 알게 뭐냐...... ' "카넬리안. 너도 나와 공명을 느꼈다고?" "응. 좀 색다른 맛이었지만 잠깐 느꼈어." "새, 색다른 맛?" 참 독특한 표현이었다. 그때 줄리탄이 손끝이 슬며시 카넬리안의 귓가에 다가갔다. 줄리탄은 엷게 미소띄우고 그녀의 뽀얀 뺨을 어루만지며 주인님 의 갑작스럽게 대담한 행동에 당황하는 카넬리안에게 속삭였다. 정말이지 '주인님 많이 컸다!' "공명이라니...... 기쁜데? 이제 우리 많이 가까워 진건가?" "으응. 아, 아무래도." 그녀는 답지않게 얼굴이 조금 붉이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줄리탄은 슬쩍 주변을 돌아본 뒤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흠찟 놀라는 카넬리안. "뭐, 뭐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봐." 이 다음 상황은 묘사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뭐랄 까, 공명은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고 말해두는 것 정도로 끝내도록 하자. -Blind Talk 크으으윽. 결국 삼일연속 연재는 못하고 지금에서야 올리게 되네요.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자주 올리는... 편이 아닌가요. 비, 비교적 말이죠. 한달에 한권이라... 한달에 두권 이상을 내고 있는 다른 소설쓰시는 분들 을 보면 '와아 대단해.'라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워낙 잔걱 정이 많고 손이 느려서 한달에 한권으로도 풀가동 해야 합니다. (뭐...... 하고 있는 다른 일들도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오늘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DC용 게임을 오늘 구입했습니다. 이름하여 lol(Lack of Love)!(이번 편 서브 타이틀) 참 좋아하는 제작사인 러브델릭에서 만들었고 마지막 황제등의 음악을 담 당했던 사카모토 류이치가 BGM 등을 맡은 게임이고...... 무엇보다 '도대 체 기사만 봐선 뭔지 모를 내용'에 끌려서 구입하고야 말았습니다.(스팅의 바로크나 러브델릭의 문 같은 내용일까? 두근두근 하면서.) 그러나! 작업 하느라고 결국 저는 하지도 못하고 옆에서 무전취식마 키유군이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나 너무나 몽환적이고 전혀 안팔릴 정도로 마이너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어드벤쳐라서 아주 아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역시 러브델렉 에서 만든 것들은 '대작'이라기는 무거운 감투 없이 그 자체로 사이키델릭 합니다. 스스로에게 충실한 작품. 음 그러고 보니까...... 예전 같은 제작사에서 나온(유통, 판매는 ASCII. 이 회사도 참 좋아함.) 'MOON'이라는 게임에 나오던 에피소드가 떠오르네 요. 얼굴이 식빵으로 되어 있는 빵집주인 베이커 씨는 언제나 우울했습니다. 자신이 파는 빵에서 술냄새가 난다며 손님들이 매일 불평했기 때문이었지 요. 그래서 그는 밤만 되면 술만 마시면서 슬픔을 달랬습니다. 그러던 중 에 주인공은 몰래 그의 밤을 엿보게 되는데 그것은 술을 진탕 마신 뒤에 취한 채로 칼로 자신의 목을 잘라 식빵인 자신의 머리를 진열대에 놓고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머리가 자라있고. 결국 자신이 팔던 빵들은 자신의 머리였고 술을 마셨기 때문에 빵에서 술냄새가 났던 것이었지요. 주인공의 도움으로 베이커씨는 더 이상 빵에서 나는 술냄새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끝. ...... 아아 좋은 에피소드다.T_T 마이너한 성격 때문에 게임에서 주인공이 '난 세상을 구할 꺼야!!'라고 외 쳐도 '그러시던지...'라며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데 이 에피소드는 두고 두고 기억날 정도로 멋졌습니다.(곤란해. 굶어 죽는단 말야 이런 성격으론 .) 그러고보니까 왜 카마게돈 이번 시리즈가 안나오는지 모르겠네요. 확실히 그런류의 게임도(엘비라, 포스탈 플러스, GTA2, BLOOD 등등의 천인공로할 양민학살게임) 좋아하는 지라(마이너한 것들은 별 이유 없이 좋아하고 메 이저 한 것들을 별 이유 없이 싫어하는 못된 성격임) 나오기만 하면 일단 빠져들고 봅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피터 몰리뉴가 만든 게임 들(던젼 키퍼1, 테마 호스피탈, 파퓰러스1,2, 등등)이지만. 그럼 앞으로도 My Pace로 나갈 수 있길 스스로 다짐하며 이만 사라지겠습 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dido의 Thank you를 들으며... (에미넴의 stan에서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죠 이 여가수. 왠지 크렌베레즈 의 돌로레스가 떠올라서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아 5년만에 스피커 바꿨습 니다.^^/ 여전히 알텍 렌싱을 고집하며 이번 모델은 스피커가 작은 것이 필요해서 ACS33으로.)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5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2/20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670 제 목:[ DRAGON LADY ] 11-05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377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2-20 04:23 조회:606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5 : 세상을 보는 마음 Children #1 1. '엔페리에', 이 침 튀기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다리위에서 사는 사람' 이다. 그리고 관용적으로 그 단어는 '도시에 살고 있는 빈민'으로 통한다. "정말 이런 곳에 루스 님이 말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 말을 탄 줄리탄 옆을 따라가고 있던 카넬리안은 베오폴트 도시 외각에 위 치한 빈민구역을 돌아보며 물어보았고 줄리탄과 메이 역시 자신감 없는 얼 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로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사실 예전 루스가 보낸 '협조요청서'에 대해서 메이도 줄리탄도 가부를 못했었다. 무엇보다 그런 문서 한장 만으로는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근 거가 부족했던 것. 그에 따라 루스는 레지스탕스의 중요 인물을 만나달라 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의아한 것은 그 레지스탕스의 '중요인물' 이 다른 곳도 아닌 엔페리에 들이 있는 빈민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쉬지도 않고 쏟아지는 직사볕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에 더럽 게 버려진 쓰레기들 사이에서 뛰놀고 있는 빈민가의 아이들 때문인지 조금 찡그린 상태였다. "기사 나리. 부디 저희 아이들에게 동정을 배풀어 주시옵소서." "아 예...... " 줄리탄이 탄 말 앞에 다가와 제법 간청의 목소리로 구걸하고 있는 한 남 자에게 줄리탄은 품속에서 동전 몇닢을 꺼내 주었다. 정말이지 벌써 몇번 째다. "주인님. 사람 좋은 건 이해하겠는데...... 그렇게 사소하게 동정해 봐야 저 사람들 생활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고. 달라카트의 사회는 극빈자들을 양산해 내는 구조야.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아무리 돈을 뿌려도 빈민들은 사라지지 않아." "응 알아. 그래도 저 돈이면 하루 먹고 살 수 있잖아. 적어도 하루는 편 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내가 엔페리에라면 자신의 힘든 상 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도움 받는 순간은 기쁠 거야. 그래서...... " "예. 예. 알겠습니다. 나의 착한 테이머시여." 구걸도 싫고 구걸을 동정하는 것도 싫어하는 카넬리안의 퉁명스런 말에 줄리탄은 조금 미소 지으며 대답했고 줄리탄의 비단결 같이 감상적인 성격 을 익히 알고 있었던 그녀는 그냥 주인님의 말을 끊어 버리며 건성으로 대 꾸할 뿐이었다. "아. 저기다." 메이는 눈앞에 들어나기 시작한 강을 관통하는 제법 길고 굵은 석조 다리 를 보며 말했다. 달라카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다리는 마치 연립주택처럼 만들어 졌는데, 다리 위에 이층, 삼층짜리 조악한 집들이 다 닥다닥 붙어 있었다. 요컨데 엔페리에라는 단어의 근원이라고나 할까. 비 릿하고 불쾌한 냄새들이 다리에 다가서면서 더욱더 기승을 부렸고 멋대로 널려 있는 음식 쓰레기들 위에서 날벌레들이 윙윙거려 안그래도 귀가 좋은 카넬리안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가스발 사략함대에서 오신 분들이지요?" 그들 앞에 소박하지만 빈민가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하게 옷을 입은 여성 이 다가오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카넬리안은 그녀의 말투에서 헤스팔 콘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2. 사실 밝혀지면 곤란한 일이기 때문에 숨기고 있었지만 가스발 사략함대를 후원하고 있는 베오폴트 상인 길드의 마스터, 도렌 남작은 반황실파였으며 이미 루스에게 협조할 것을 약속한 상태였다. 베오폴트라는 거대 항구도시 의 모든 상권을 쥐고 있는 베오폴트 토박이 도렌은 가문 내력처럼 이어오 는 고집스러운 성격 덕분에 황실에 아양을 떠는 것을 거부했고 덕분에 황 실에서도 세력가인 도렌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물론 도렌이 반황실파 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후원해 주고 있는 메이에게도 숨기고 있는 사 실이었다. 밝혀진다면 그걸 구실로 삼아 황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세라피스 저하. 기회는 지금 뿐이옵니다! 무능한 황실과 아첨꾼 휴센을 몰아내고 이 달라카트를 바로 서게 만들 수 있는 분은 오직 세라피스 리그 나이트 태자 저하 뿐이옵니다." "하아 정말. 아 글쎄 전 싫다니까요." 세라피스는 푹신한 소파에 푸욱 몸을 담근 채 도렌의 쩌렁쩌렁 울리는 간 청을 듣는 둥 마는 둥 비스켓을 물며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베오폴트 중 심가에 위치한 도렌 남작의 대저택, 루스가 몇번이나 불러서 겨우 겨우 세 라피스가 찾아오긴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루스와 도렌의 바램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세라피스는 자기 생각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은 채 '황제 자리는 질색이야.'라는 부잣집 도련님의 투정 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대체 때쓰는 막내아들 장가 보내려는 것도 아니고 - 루스는 한숨을 내쉬며 엄숙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너는 이 달라카트가 어떻게 되도 좋다는 말이냐? 황가의 일원으로 태어 난 것에 대한 의무를 외면할 생각인 거냐." "형이야 말로 그 의무라는 걸 저버린 것 아냐? 나보다는 형이 황제가 되 는 것이 그 잘난 정통성 아냐? 형은 둘째, 난 세째니까." "난 황제가 될 몸이 아니야. 연금술에 빠져 눈과 몸을 버린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보잘 것 없는 마법사일 뿐, 달라카트의 백성들이 바라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세라피스야." "웃기네!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세라피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바람에 루스와 도렌은 흠찟 놀랐다. 세라피스는 자신의 치렁치렁한 금발머리를 뒤로 넘겨 끈으로 묶으 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백성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풍부한 음식과 안전한 국경과 보장된 미래와 적은 세금과 놀고 즐길 수 있는 많은 술집이지...... 형이나 내가 아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네가 황제의 자리에 어울려."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어." 세라피스는 핀잔처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선 소파에 늘어져 있느 라고 헝크러진 자신의 세련된 코트를 다듬었다. "나 이만 갈게. 사략함대 녀석들이 기다려. 아참 그리고 좋은 황제감 찾 길 진심으로 기원해 형." "잠깐 세라피스! 네가 만나볼 사람이 있다." "싫어 이제. 난 빼달라고." 세라피스는 그렇게 말하며 지금쯤 베오폴트에서 죽고 싶은 표정의 톨베인 을 끌고 다니며 쇼핑에 빠져 있을 물키벨을 찾기 위해 문 밖으로 나서려 했지만 갑자기 도렌 남작이 체면도 잊고 세라피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긴 다리를 잡아 채며 들어졌다. "우아아악! 뭐하는 짓이에요 아저씨!" "제에에발 저하!! 다시 한번만, 제발 한번만 더 생각해 주시옵소서!" "이것 좀 놓고 말해요 도렌 아저씨!! 으앗!! 바지 내려가잖아요!! 노, 놓 으세요 좀!" 루스는 자기 눈이 안보이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하며 다시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거대 도시를 관리하고 있는 세력가가 자식뻘 되는 사람의 바지를 잡으며 간청하는 모습이나 마냥 내려가고 있는 자기 옷을 쥐어 잡고 당황 하고 있는 왕자의 모습이나 루스가 일으키려는 '거사'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만약 카넬리안이 봤으면 '자알들 논다. 대낮부터 남자 둘이 엉겨서 뭐하고 있는 거얏!'이라며 미스트랄을 휘두르지 않았을 까.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문이 끼이익 열리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갑자 기 그 민망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는 세라피스와 도렌. "지금 뭐하고 계신 겁니까 세라피스 저하......" "파, 파르낫소......" "저기 가서 앉으세요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저하." 몸에 책냄새가 베어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파란 학자풍의 옷에 하얀 얼 굴에는 동그란 안경까지 걸치고 있는 샌님같은 파르낫소라는 사내에게 의 외로 세라피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세라피스는 너무한다는 얼굴로 루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형. 이거 반칙이다. 파르낫소를 데려오다니......" "널 설득할 자는 그 녀석 밖엔 없을 것 같아서." 루스는 언제나 감고 있는 두 눈에 미소를 띄웠다. 3. 다리 앞에서 만난 여자가 줄리탄 일행을 안내한 곳은 허름하다는 수식어 조차 과분해 보이는 다리 위 엔페리에들의 거주지. 다리 위에 더덕더덕 붙 어 있는 이,삼층의 판자집들 때문에 다리는 겨우 수레 하나가 지나갈 공간 밖에는 없었다. "말은 여기에 묶어 두시겠습니까?" 집과 집 사이의 비좁은 공간 사이를 가리키며 상대가 말했다. 카넬리안은 '내가 이런 걸 왜 해야 하는 거야.'라는 듯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그 공간 속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들을 억지로 밀어 넣듯이 '주차' 시켰고 줄 리탄과 메이는 근원을 짐작할 수 없는 역한 냄새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찡 그려지는 인상을 숨기며 이런 분위기에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여자가 안내 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빈민 굴'이었다. 줄리탄이 안으로 향하며 반쯤 썩은 나무들을 밟을 때마다 습기 찬 나무판의 균열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가스발 사략함대 여러분들." 가구하나 없는 집안에는 잔뜩 휘갈긴 글씨가 가득한 서류 더미들만이 쌓 여 있어서 흡사 언벨런스한 상아탑을 연상시켰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종이뭉치들 가운데 앉아 있는 훤칠한 청년이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웃 음을 띄우며 줄리탄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훑어보고 있던 문 서를 내려 놓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리하르트라고 합니다. 지금은 루스 저하를 돕고 있지요." 줄리탄 일행을 안내했던 로즈마이어는 리하르트가 눈빛을 보내자 조용히 집 밖을 향했다. -Blind Talk 최근... 시인 김광규(김광균말고)의 싯구절말마따나 '살기 위해 살고 있다.'라는 생각에 피곤 합니다. 정말이지 '사는 기분'이라는 건 구멍난 주머니의 동전들 같아서 걸어다니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씩 잊어버려서 결국에는 텅 비어 버리곤 합니다. 바쁘게 산다는 건 좋은 거지만, 악의라도 좋으니까 몰두할 만한 어떤 가치가 절실합니다.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노력하곤 있지만 그 노력을 자꾸만 저울대에 올려 놓는 나 자신이 싫어집니다. '대체 내가 뭘 쓰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글을 쓰며 자판을 두드리곤 있지만 이 정도 괴로움이라면 자살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휘청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 뭐, 이렇게 잔뜩 늘어 놓아도 집 문밖을 나가 패스프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씹고 이어폰에서 커다랗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얼이 빠져 있다보면 거짓말처럼 잊어버릴 그럴 감상이지만...... 담배 몇갑을 태우다 잠들기 전 이불한켠에서 이 시린 감상이 다시 찾아올 걸 알기 때문에 또 두렵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듣고 있는 노래는 없습니다. ps:정말 몸이 피곤해서 엉망이 되어버린 한편이지만 제대로 다시 읽어보 지도 못하는 것 죄송합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 발견하시면 메일 좀 부탁 합니다. 정말로 위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이런 감상주의로는 아무런 위로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적어도 오늘은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상아탑에 틀어박혀 세상을 관조하는 듯 폼재는 인간들은 정말 질색입 니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밤이면 밖으로 나와 소, 돼지를 잡아 먹 고 다음날이면 싸악 모른 채하고 점잔을 빼는 그들은 질색입니다.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6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2/25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641 제 목:[ DRAGON LADY ] 11-06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420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2-24 15:35 조회:70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6 : 세상을 보는 마음 Children#2 (지난 줄거리) 루스의 계획에 절대로 동참하지 않겠다고 더티는 세라피스를 설득하기 위 해 파르낫소라는 자가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 메이 일행을 설득하기 위해 나 타난 자는 바로 책략가 리하르트 였던 것이다. 1. 루스의 명령을 세라피스를 찾아온 파르낫소라는 자는 루스의 참모였으며 세라피스와도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오던 자였다. 물론 현재는 황실의 눈 밖에 나서 거의 황실 도서관에만 틀어 박혀 책을 쓰며 지내고 가끔 귀족자 제들의 '가정교사'나 해주는 한직으로 밀려났지만 세라피스와 동년배인 어 린 나이면서도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천재라는 사실은 루스도 세라피스도 인정하고 있었다...... 는 것 까진 좋은데 하필이면 몇년만에 만나게 된 목적이 세라피스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니. "아하하. 오랜만이네?" 빽빽한 글자들로 가득찬 문서들을 들고 있는 파르낫소는 자신을 보며 당 황하고 있는 세라피스를 지나치며 자기가 먼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서 앉 았다. 한숨을 내쉬며 파르낫소를 따라가 소파 속에 몸을 던져 버리는 세라 피스가 다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파르낫소가 뭐라고 말해도 난 황제 안해. 절대 안할 꺼야." 뭔가 그럴듯한 거절의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땡깡'이었 다. 하지만 그에 대한 파르낫소의 대답은 정말로 의외였다. "하지 마세요." "잉?" "황제하지 마세요. 도리어 제가 부탁드리고 싶네요." 세라피스는 멍한 얼굴로 파르낫소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그런 말 해도 괜찮아?'라는 표정. 파르낫소는 그런 세라피스의 반응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이 테이블 위의 황동색 기름램프에 불을 붙이고 거기에 가지고 있던 문 서들을 불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종이가 화악 타오르며 순식간에 거무스 름한 연기가 피어 오른다. "이게 무슨 냄새인가? 종이가 타고 있는 것 같은데?" 눈이 보이질 않는 루스는 방안에 차오르는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의아한 얼굴로 두리번 거렸다. 그런 그에게 파르낫소가 던진 말은 경악스러운 것 이었다. "저희쪽 귀족들과의 협조서약서를 태우고 있습니다." "뭐!!" 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며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 났다. 파르낫소의 애드립에 뛸듯 놀란 자는 루스만이 아니었다. 세라피스 역시 황당한 얼굴로 말을 던졌다. "그, 그걸 태워도 되는 되야? 그게 형의 유일한 힘일텐데?" 협조서약서. 각 지방에서 루스를 돕는 소수의 반황실파 귀족들과의 암약 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자료인 그 문서를 태워버린다는 것은 루스의 세력 을 해체시켜 버린다는 의미였다. 파르낫소는 아군인지 적인지 모르게 그런 무모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타오르는 문서들을 하나씩 쓰레기통 에 집어 넣고 있었고 순식간에 방안은 검은 연기로 숨막히게 차올랐다. 파 르낫소가 하얗게 타고 있는 종이들을 내려보며 말했다. "세라피스 저하가 기꺼이 황제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저희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시더라도 지금의 황실을 무너트릴 가능성은 미지수 입니다." "......." 세라피스는 아무 말 없이 파르낫소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은 안개 같은 연기 속에서 보이는 파르낫소의 뽀얀 얼굴은 씁쓸한 표정을 담 고 있었다. "당신은 계획의 중심이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기 싫어서 몸부림 치는 것을 저희들이 억지로 붙잡아다가 계획에 동참시켜 봐야 성공 할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도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집어 치우는 게 옳은 일입니다." "넌 루스 형을 도와줘야 하는 참모 아냐? 집어 치우자는 말을 하다니.... .." "예 맞아요. 저는 참모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할 리가 없는 계획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겁니다. 제가 오늘 이곳을 찾아온 것도 저의 이 런 생각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이고요. 저희같은 오합지졸들이 감히 황실에 게 도전하려는 계획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저는 그런 일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반역죄로 죽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다 집어 치우고 저는 황실로 돌아가서 책이나 쓰렵니다." "뭐, 뭐라고?" 세라피스는 지금까지 감정을 숨기던 가면을 벗어던지며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 파르낫소를 쏘아보고 있었다. 파르낫소는 그런 세라피스에게 태연하 게 대답했다. "못 들으셨습니까? 오합지졸이라고 했습니다. 세라피스 저하도 이제 원하 시는 곳에 돌아가셔서 원하시는 일을 하세요." "닥쳐!! 네 맘대로 날 평가하지마!! 내가 저 무능한 황실 하나 이기지 못 할 것 같아? 남의 생각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지 말란 말야!!" 세라피스는 갑자기 파르낫소를 죽여버릴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런 세라피스의 모습을 보며 파르낫소는 조용히 물컵의 물을 쓰레기통에 쏟아 불을 끈 뒤에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야 왕자님의 본심을 들을 수 있어서 소인 파르낫소, 무한이 기쁘옵 니다. 앞으로도 왕자님을 충실히 보좌하겠사옵니다." "어?" 세라피스는 갑자기 멍한 얼굴로 파르낫소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 얼거렸다. "젠장...... 당했다." 파르낫소는 계속 얄밉게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카넬리안 만큼인 자기 본래 모습을 숨기는데 익숙한 그였지만 그에게도 약점이랄 것이 있었으니 - 황실과 자신을 비교하는 소리만 들으면 참지 못하는 세라피스였다. 파르 낫소는 그걸 알고 있었고 결국 '오합지졸'이니 '어불성설'이니 하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폭발한 세라피스가 자기 마음을 들어내 버린 것이다. 도렌 은 여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불타버린 '협조서약서'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이, 이건 어떻게 하죠? 서약서가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아 이거요? 그냥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연출이었습니다. 제 일기들이에 요. 서약서들은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세라피 스 저하께서 동참하시기로 결정한 이상 계획은 절대로 성공합니다." 도렌이 입이 쩍 벌어진 얼굴로 파르낫소를 바라봤다. 샌님 같은 얼굴과 성격 덕에 낭자(娘子)라는 별명까지 붙은 그가 능구렁이 몇개 잡아 먹은 것 같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파르낫소에게 또 말려든 자신 이 한심한지 소파에 얼굴을 박고 있는 세라피스가 중얼중얼거렸다. "알고 있었어..... 가짜인지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세라피스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루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가스발 사략함대 녀석들은 어떻게 할꺼야 형? 솔직히 지금의 허 탈한 달라카트 해군보다 월등히 강해 그 녀석들은. 우리 편으로 끌어 들이 면 분명히 많은 도움이 될꺼야." "그쪽에는 이미 손을 써 놨다. 지금쯤 우리쪽 사람을 만나고 있을 꺼야." "우리쪽 사람?" "아...... 리하르트 씨." 파르낫소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불안감을 깔며 루스에게 말했다. "루스 저하. 리하르트라는 자를 깊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헤스팔콘 황실 에서 일어났던 사건도 리하르트 씨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자를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 파르낫소는 헤스팔콘 황실에서 제국안전공안부의 책임자 로이터 공작과 리히트야거의 리더 세이드 후작이 서로 충돌해던 사건이 리하르트에 의해 서 였다는 것을 한눈에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그런 짓을 저지른 자가 순 수한 목적으로 자신들을 돕고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루스는 파르낫소의 그런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알고 있네. 하지만 리하르트가 파르낫소 군, 자네 만큼이나 뛰어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적이 된다면 정말로 위험하게 되니까 지금은 그 자 의 힘이 필요해." 놀랍게도 루스를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말한 자는 리하르트였다. 그가 왜 하필 위험한 반황실파에 가담하려 했는지는 일단 제쳐놓더라도 비밀조직인 반황실 레지스탕스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리하르트는 이미 반황 실파에 대해 황실보다도 많은 정보를 찾아낸 뒤였던 것이다. 그런 자를 적 대시 했다가 그가 황실쪽으로 가버리면 단숨에 그의 손에 레지스탕스가 와 해되어 버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루스는 리하르트를 받아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저도 리하르트 씨를 도와 계획을 진행하겠습니다." 파르낫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걱정스런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서로 같 은 재능을 가졌으면서 정 반대의 성격인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꽤뚫어 보 고 있었다. 지금은 같은 목적으로 힘을 모아 움직이지만 그것이 동상이몽 일 수 있다는 것을 파르낫소는 언제나 경계했다. 그리고 리하르트가 헤스 팔콘에서 자신의 양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세우면서까지 엄청난 자금을 모 아 달라카트로 내려온 것이 처음부터 반황실파에 가담하기 위한 전초일 것 이라는 예측을 품었다. 또한 그것 역시 다음 단계를 위한 리하르트의 행동 일 것이라는 사실도 느낀 것이다. 과연 리하르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 일까? 파르낫소는 계속 계속 생각했다. 2. "톨베인아. 이번엔 이거 입어봐아." "싫어요." "입어봐!" "나 갈래요." "가, 가지마아." 톨베인이 도망치려고 하자 물키벨은 그에게 달려들며 허리를 꽉 잡고 놔 주질 않았다. 예상대로 죽고 싶은 표정의 톨베인을 항구로 끌고 나온 물키 벨은 창피할 정도로 화려한 옷들을 수십벌이나 톨베인에게 입혔다가 벗겼 다가 난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장소는 베오폴트 최고급의 '수입의류명품점 '. 당연히 이곳의 최대 고객은 해룡의 수장이신 물키벨 님이시다. 톨베인 은 물키벨이 자신을 놔주질 않고 '입어봐! 입어봐! 입어봐!'를 반복하자 결국 자신들을 바라보는 여종업원들의 눈길이 창피한지 소리치고 말았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자고 싶다고요!" "세라피스는 주는데로 잘 받아 먹는데 넌 왜 반항이얏!" "세라피스는 세라피스고 나는 나에요!" "그러지 말고 입어봐아. 응?" "으윽......." 카넬리안과 쌍벽을 이루는 해룡의 고집은 꺾을 방도가 없었다. 톨베인은 미치겠다는 듯이 상의를 훌렁 훌렁 벗어 버리며 물키벨이 건내준 새하얀 실크 프릴셔츠를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삼키 는 것처럼 입고야 말았다. 그 장면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시오가 얼마전 에 뚫은 굵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죽어라고 벌면 뭐해. 누님이 저렇게 다 써버리는 걸......" 시오는 물키벨 같은 스케일의 씀씀이를 가진 자가 사략함대에 한명만 더 있었다면 황실의 금고를 털지 않는 이상 적자를 매꿀 길이 없을 거라는 그 럴 듯한 예상을 하고 있었다. 자라탄 임대료라고 생각하면 위안은 되지만. 한편 톨베인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반짝반짝거리는 모습이 몹시 한심했 는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짜내듯이 말했다. "이제...... 됐죠? 당신의 소원대로 된거죠? 제길......." 톨베인의 일반적인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항해를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방에서 혼자 담배를 피워 물고 아끼는 검을 날카롭게 다듬은 뒤에 해가 떨어질 때까지 침대 속에 들어가 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해변가에 서 역시 혼자 수련을 한 뒤에 해가 뜰 때 돌아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던 지 꽃꽃이를 한더던지하는 취미생활이 전혀 없었던 그로서는 그것이 유일 한 낙이며 몸에 베어 있는 생활 방식인데 - 이 여자는 고요히 잠들어 있는 자신을 억지로 깨워서 베오폴트까지 끌고 와서는 보기에도 민망한 옷들을 입혔다가 벗겼다가 정신 사납게 구는 것이 아닌가. 물키벨은 침울한 톨베 인 주변을 빙글 빙글 돌며 그를 쭈욱 훑어보더니 말했다. "역시 이 옷은 안 어울리네. 다음 옷!" "......" 톨베인은 '적당히 좀 해!!'라고 소리치려다가 그러면 울어버릴 것이 뻔했 기 때문에 벽쪽으로 걸어가선 담배를 피워 물고 깊게 연기를 내뿜었다. 톨 베인을 이정도로 궁지로 몰 수 있는 자는 물키벨 뿐일 것이다. 해룡은 정 말로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톨베인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에서 대타가 되어줘야 할 줄리탄이나 세라피스도 아침부터 어디로 사라져 버린 진퇴양란의 대핀치. 물키벨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우웅. 화났어?"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에요. 말 잘듣는 상어 아저씨나 문어 아 저씨에게나 입힐 것이지." 톨베인은 '당신은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귀찮은 여자야.'라는 눈빛으로 물키벨을 내려보았고 물키벨은 생긋 웃으며 그런 톨베인을 올려보다가 말 했다. "조금 있다가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배 고프지?" "......" 정말이지 허탈할 정도로 위엄이라고 찾아볼 수는 없는 어린애 같은 해룡 의 수장인데 - 가끔은 하루 쯤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톨베인은 그녀 의 순진한 얼굴에 실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3. 로즈마이어가 줄리탄 일행을 안내한 리하르트의 좁은 방에는 사방에 뭐라 고 잔뜩 쓰여 있는 문서들이 쌓여 있었다. 마치 그런 문서들 속에 리하르 트가 파묻혀 있는 것처럼. 카넬리안이 '이게 다 뭐야?'라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리하르트가 말했다. "이런 곳으로 모셔서 죄송하군요." "리하르트 씨는 얼핏 보기에도 빈민 같지 않은데 왜 여기에 살고 있는 거 죠?" 카넬리안은 리하르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많은 빈민 들의 몸에 베어 있는 패배적인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이 비싼 종이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빈민으로선 실격이다. "노출되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도 남의 눈에 띄게 되지요. 하하. 뭐 이런 곳에 익숙하기도 합니다. 본래 천민출신이라서요." "흐음......." 굉장이 수상한 녀석이잖아?, 라고 카넬리안이 생각하긴 했지만 자신이 나 설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로즈마이어 가 곧 네잔의 차를 갖다 주었다. 리하르트는 소박한 찻잔에 담겨진 뿌연 차를 권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니지만 이 차부터 드세요. 역시 헤스팔콘 보다는 달라카트의 차 문화가 더 발달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차에 손이 간 것은 줄리탄이었다. 일단 차를 좋아할 뿐더러 이런 모 습의 차는 처음 봤기 때문에 요리사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카넬 리안은 그런 줄리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잠깐 주인님." "아 괜찮습니다. 독 같은 것은 들어 있지 않아요." 리하르트는 그러면서 먼저 찻잔을 들었고 카넬리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줄리탄은 의아한 표정으로 차의 희안한 향기를 맡으 며 뜨거운 차를 살짝 입에 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름지고 짜다...... 이건 동물지방과 소금을 쓴 것 같은데. 달라카트에 이런 차가 있었던가? 건조한 곳에서나 어울리는 차야.' 반면 메이는 그 차를 마시다가 정말 독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얼굴이 굳어버리며 곧 그 찻잔을 내려 놓더니 리하르트를 쏘아보고 있었다. 리하 르트의 얼굴에도 교만한 웃음이 퍼졌다. "메, 메이 씨. 왜 그러세요?" 줄리탄이 갑자기 메이의 표정이 변하자 놀라며 물어보았지만 메이는 계속 리하르트를 차갑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많이는 모릅니다만...... 당신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육을 받았으 며 당신의 아버지 발더와 왜 해군을 그만두고 해적이 되었는지 정도는 알 고 있지요. 메이트리아크 가스발 씨." "불쾌해......"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하지만, 모든 일은 칼도 마법도 아닌 정보로 시작 됩니다. 정보가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리 막강한 힘도 써먹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전 당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던 것 뿐입니다만." 리하르트가 준 차는 달라카트 북부의 티브 사막 유목민들이 즐겨 마시는 차였다. 그리고 메이의 아버지였던 발더가 어려서부터 메이에게 자주 끌여 주었던 차. 누구나 남에게 밝히기 싫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메이의 경우 에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 메이는 줄리탄에게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일 은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리하르트는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메이 에 대한 과거와, 심지어 그녀가 어려서 마셨던 차가 무엇이었는지까지 조 사해 낸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이용해 먹을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리하 르트의 방식이리라. 분명 줄리탄과 카넬리안, 그리고 가스발 사략함대 일 원들에 대한 '정보'들도 이 방의 문서들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뭐야아! 이 녀석!" 카넬리안은 심히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향해 눈을 흘기며 소리 쳤다. 어쩌면 '주의. 그녀를 절대 인간이라고 부르지 말 것.'이라는 문장 도 기록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음흉한 외계인을 바라보는 눈빛으 로 리하르트를 향해 외쳤다. "벼, 변태! 여자의 뒷조사나 하고 다니다니 기분 오싹해! 솔직히 말해! 내 주인님이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무지한 요리사인데다가 잠버릇도 어린애 같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너!" "이, 이젠 글 읽을 줄 알아!! 그리고 이런 곳에서 잠버릇 말하지 마!!" 도리어 당황하는 것은 줄리탄이었다. 리하르트는 '역시 정보 그대로의 성 격이로군.'이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개인적 취향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훗훗. 거짓부렁. 솔직히 말하라고. 이 음침한 변태 녀석아!!" 카넬리안은 '난 네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네.'라는 얼굴로 뻔뻔스럽게 우 겨대며 리하르트를 몰아붙이고 있었고 - 결국 카넬리안이 참여로 뭔가 딱 딱하고 음흉하고 긴장되야 마땅할 분위기는 뭐가 뭔지 모르게 시끌벅적하 게 변해 버리기 시작했다. -Blind Talk 일단 말이죠... 사실 파르낫소와 리하르트 편은 3일전에 모두 다 썼습니다 . 약 600라인 정도 되었는데.... 날려버렸습니다.(ACROEDIT에 그런 버그가 있을 줄은...) 그래서 다시 쓰려고 하니까 몹시 힘이 빠지더군요. 결국 며 칠 패닉에 빠져 있다가 힘을 모아서 다시 끄려고 했지만... 이번엔 키보드 가 고장나서 S(ㄴ) 키가 먹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ㄴ'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T_T 그걸 고쳐서 이제서야 다시 써서(일부지만) 올리게 됩니다. 변명 끝. 파르낫소의 별명인 '낭자'는 수호지에 나오는 연청의 별명입니다. 물론 연 청처럼 춤을 추지도 않고 창을 잘 쓰지도 않고 교태도 부리지 않습니다만. (본래 화안미라고 하려고 했는데 너무 샤방방해서 그 별명은 다른 녀석에 게... 사실 얼굴은 살아가면서 만들어진다고 믿는 주의라고 타고난 미소년 , 미소녀는 크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줄리탄은 평범하고 그냥 곱상하 게 생긴 정도.) 파르낫소는 발명가에 가깝습니다. 이런 시대가 다 그렇듯 이 아이작 뉴튼이나 다 빈치 마냥 발명가이자 철학자이자 비전주의자이자 전략가이자 전술가이자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화가이자 등등... 겸업하는 경우가 적잖지요. 조언해 준 S군에게 감사를. 리하르트가 말했던 '정보'의 중요성은 카넬리안에 의해 '스토커'로 돌변해 버렸지만 저도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고... 현대전 = 정보전이라고 할 정도 니까 리하르트가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데이타베이스화 시키는 짓은 그 시 대에선 꽤 앞서가는 짓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그래도 드래곤 레이디는 본격정치모략소설이 아닐 뿐더러 그런 것 잘 알지 도 못하니까 루즈하고 소프트하고 심플하게 진행해 나가겠습니다.(뭔 소리 야?) 제가 정말 힘이 없어서(특히 생일날 비참하게 방구석에 틀어 박혀 썼던 글 이 죄다 날아간 것이 주요 원인) 일부분은 다시 읽어보지 못하고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긴급수선한 'ㄴ'키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보 시다 보면 'ㄴ'이 빠진 부분이 눈에 띌 수가 있는데 발견하시면 알려 주시 면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Massive Attack의 Safe from harm을 들으며... (좋아하는 영화 INSIDER의 엔딩 테마. 참 좋네요... 그런데 이거 정말 Massive attack 맞나...) ps:아 그리고 드래곤 레이디 카페 http://cafe14.daum.net/Cafe-bin/intro.html?cafe=dragonlady 에서 캐릭터 인기 투표(부끄...)를 하고 있던데요 시간 나시는 분들은 한번 가서 참여해 주세요. (으음. 아직 캐릭터들이 다 나오지 않은 데다가 성격이 급변해 버릴 캐릭터들도 있어서 '중간집계'라는 말이 어울릴테지만...) 에 그리고. 자료실에 카넬리안 그림들도 몇점 등록했네요. (참 복 받은 캐릭터야... 그림까지 받고...)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1-7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2/27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614 제 목:[ DRAGON LADY ] 11-07 : 세상을 보는 마음 관련자료:없음 [6447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2-27 18:39 조회:537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1-07 : 세상을 보는 마음 The Eye of Mind 1. 가스발 사략함대가 하는 일이란 상선 따위를 노략하는 '해적질'과는 다른 것이다. 베오폴트 상인 길드와 도렌 남작 등에게 자금 지원을 받는 대가로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달라카트 상선들을 보호해 주는 주는 일과 다른 해적 들과 싸우는 일인데, 이미 달라카트의 모든 해적들은 사략함대에 항복하여 그들의 일원으로 통합된 상태여서(그들은 자라탄이 아닌 자신들의 거점지 에서 활동한다.) 무척 큰 규모로 성장했기 때문에 메이나 줄리탄 등의 '지 휘관급'은 직접 상선을 보호하는 일에서 물러나 사략함대의 '경영'을 담당 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즉 달라카트의 남해(南海) 하빌리스를 책임 지는 '기업'과 같은 모습이다. "메이트리아크 씨는 지금의 사략함대에 만족하고 계신 건가요? 물론 큰 돈을 벌고 있고 명예도 있지만, 당신이 해적이 되면서까지 바다에 남아 있 었던 이유가 부와 명예 때문입니까?" 카넬리안의 '변태혐의' 때문에 때 아닌 궁지에 몰리던 리하르트는 결국 카넬리안을 상대하는 걸 포기하고 메이를 향해 말했다. 눈을 흘기는 카넬 리안. "헤엥. 불리해 지니까 화제를 돌리잖아?" 라고 말하면서도 카넬리안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슬슬 리하르트 로부터 '본론'이 나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의 말에 메이는 차갑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에 대해 조사를 했으면 내가 왜 바다에 남으려 했는지 아실 텐데요." "직접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게 말하지요. 나와 아버지의 꿈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바다에 남 아 있는 겁니다." 메이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이 딱 잘라 대답했다. 사실 메이의 아버 지 발더는 해군이었다. 헤스팔콘 해적들로부터 유린당하는 달라카트의 바 다 하빌리스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해군이 되었지만 결국 해군 역시 아무 런 힘도 없는 한심한 헤스팔콘의 노리개 였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며 차라 리 해적이 되서 해적을 치겠다는 생각에 가스발 해적단을 조직한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동료들의 배신과 황실의 방관 속에서 돌아가셨지만.' 메이는 언제나 꿈을 쫓았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에 대해 존경했던 만큼의 죄책감을 느껴 괴로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버지와 가족에 대해 남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리 하르트는 그런 메이의 황실에 대한 숨은 증오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 치고 들어 오듯이 메이의 상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전 당신들, 가스발 사략함대가 없어도 지금의 황실을 무너트리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런 저능아 집단은 군 대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몰살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 파르낫소의 경우처럼 의외의 말이었다. '너희들은 필요 없다.'라는 오만 한 발언은 뭐며 그렇다면 또 뭐하러 여기까지 불렀단 말인가. 책략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사기꾼이 할만한 그런 발언에 메이는 일단 들어보겠다는 눈 빛으로 말없이 리하르트를 지켜 보았고 카넬리안 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황실이 들어서고 나서 당신들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우리 는 몹시 껄끄러운 관계가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고 바다를 사략함대 같은 비정규조직에게 맞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새롭게 해군이 조직될테고 당신들은 황제의 말 한마디에 달라카트의 적이 되어 황실과 싸우게 될 겁 니다." 메이를 비롯해 줄리탄 역시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던 것이다. 자기 편으로 오지 않으면 적이 될 것이다, 라는. 리하르 트는 상대가 화를 낼 여유도 주지 않고 결론을 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주십시오. 첫째, 우리의 협조를 거절해서 우리가 황실을 장악한 뒤에 황실의 적이 되어 달라카트와 싸울 것이냐! 둘째, 우 리와 함께 지금의 황실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달라카트의 해군이 되어 당신 과 당신 아버지의 꿈을 이룰 것인가. 두 가지 경우 모두 제가 책임지고 실 행할 것입니다." "무슨 수로 지금의 황실을 무너트리겠다는 건가요?" 줄리탄이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리하르트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한 설 득력을 지닌 얼굴로 대답했다. "그 방법은 말씀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믿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겠습니 다. 단 제 목숨을 걸고 말하는데, 계획은 이미 진행 중이며 분명히 성공합 니다." "......" 리하르트는 메이를 상대로 고혈을 뽑히고 있는 백성들을 구하자는 성스러 운 명분을 꺼내지도 않았고 썩어빠진 달라카트 제국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정의감도 꺼내지 않은 채 단지 이익과 손해를 말하며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메이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협박을 가미한 것이다. 차가운 눈빛으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메이에게 리하르트 는 여유로운 미소를 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나갈까요?" 2. 다리위에 사는 사람, 엔페리에들의 비좁고 낡은 다리를 걸어가고 있는 리 하르트와 줄리탄 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이런 극빈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리하르트가 아까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솔직히 새로운 황실이 들어서도...... 이런 빈민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 니다. 결국 혁명이 아닌 반란이니까요.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밥벌이에 지 장만 없다면 누가 황제가 되든지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이 빈민들 역시 자 신들에게 빵과 술을 던져줄 것이 아니라면 누가 황제가 되든 알 바 아닐 겁니다. 모두 또 그렇게 적응해 가겠지요." 메이는 그런 감상적인 말에 의외라는듯 슬쩍 리하르트를 훔쳐 보았다. 특 별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그의 얼굴은 따가운 빛을 머금으며 훤칠했지만 그 표정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는 메이를 돌아보며 자조적 인 웃음이 섞인 말을 던졌다. "모두 다 자신들의 정의를 외치면서 싸우지만 사실은 단지 먹히는 자가 될바엔 먹는 자가 되겠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저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 중에 하나이고요." 솔직히 리하르트가 메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이 빈민들을 보라! 우리들이 이런 자들을 구제해 줘야 하지 않겠나!'라고 일대웅변을 하는 것 이 어울렸을텐데 리하르트는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서슬퍼런 칼날 같던 아까와는 전혀 달리 - 그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메이가 다리 밑을 내려보며 더러운 흙탕물에 뒹구는 계집아이를 눈에 담고는 조용 히 말했다. "당신들에게 가담하면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겁니까. 황실파 귀족들과 싸 워야 하나요?" "결정하신 겁니까?" "당신의 대답에 따라서."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단호히 대답했다. "세라피스 저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에 황실로 들어 오시면 됩니다." "그것 뿐?" "말했었죠? 당신들의 힘이 없어도 지금의 황실을 무너트리는 건 전혀 어 렵지 않다고. 사략함대의 힘은 세라피스 저하가 황제가 된 뒤부터 필요합 니다.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계십시오. 제가 실패할 것이 걱정된다면 실패 했을 때 모른 척 하시면 됩니다. 사략함대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겁니 다." "......" "아 그리고 여담인데, 당신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신의 함대를 지원하고 있는 도렌 남작도 이미 우리에게 가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보안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지만 계획이 성공하면 우리쪽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이 누군 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치밀하군요." 메이는 혀를 내둘렀다. 이 자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만난 것이다.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오만불손한 자신감 은 분명 객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리하르트는 이번에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던 줄리탄을 쓱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블리스 경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냥 줄리탄이라고......" 줄리탄은 멋적은 듯 대답했다. 노블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은 선상 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이것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개인적인 호기심이니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 사실 줄리탄과 리하르트는 서로에게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리하르트는 정보에 의하면 난립하던 해적들을 일년도 못되는 시간에 통합하고 베오폴 트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게다가 해룡의 비호를 받는다는 소문까지 무성한) 무뢰한 노블리스가 이런 조용하고 '평범한' 청년이라는 것에 내심 의아해 하고 있었고 줄리탄 역시 '바늘 하나 안들어 갈' 분위기로 일관하 던 리하르트가 갑자기 호기심에 찬 얼굴로 질문을 한다는 것이 의외였던 것이다. "당신의 씰, 카넬리안은 헤스팔콘에서 수배되었던 붉은 눈의 씰이 맞죠? " "아, 예 뭐." 사실 예전 레터의 마을에서 장갑패척병들을 파견한 자가 리하르트였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뒤따라오던 카넬리안이 '바로 네 놈이 있었구나!!'라 며 달려들었겠지만 - 리하르트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카넬리안을 원한 자은 제1황제 오펜바하였습니다. 왜 저 씰을 원했는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몰라요."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면 말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아뇨. 정말 몰라요. 혹시 리하르트 씨는 알고 계세요?" "......" 줄리탄이 너무나 당연하게 대답하자 리하르트가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이유도 모르고 헤스팔콘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달라카트로 내려왔단 말인가? 리하르트의 명석한 머리는 분명 카넬리안에게 엄청난 가치가 있어 서 줄리탄이 그녀를 놔주질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넬 리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향해 핀잔어리게 웅얼거렸다. "아무튼 주인님은 물어보는 거 다 대답해 준다니까. 성격도 좋아요." 리하르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계속 질문했다. "지난 일년동안 카넬리안을 찾기 위해 고생하셨다던데 그것 역시 별 다른 이유가 없는 건가요? 특별히 얻은 이익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저 씰 하나에 목숨을 걸었는지 전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자세히도 알고 계시네요." 줄리탄은 실소를 머금었다. '대체 카넬리안이라는 씰에게 무슨 숨겨진 가 치가 있길래 씰하나 찾으려고 목숨을 건단 말인가.'라는 리하르트의 도저 히 풀지 못할 의문에 줄리탄은 너무 뻔한 답을 내놓았다. "좋아하니까요 카넬리안을.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기 싫은 것은 당연 한 거잖아요." "차, 창피해에! 당사자 앞에서 그 딴 말 하지 마아!!" 카넬리안은 누가 들을새라(이미 다 들었지만) 빨개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 번거리며 소리쳤다. 반면 리하르트는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냐.'라는 표정 의 줄리탄을 어이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 그 이유 뿐입니까? 오펜바하로부터 목숨을 걸고 도망쳤고 일년동안 죽을 힘을 다해 찾아다녔던 이유가 씰을 사랑해서, 그것 뿐인가요?" "예. 그것 뿐입니다. 거기에 다른 이유가 또 필요한가요? 인간은 리하르 트 씨가 말한데로 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런 존재지만 가끔은 작 지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돈도 권력도 정보도 끼어들지 않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며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 우습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는 줄리탄을 리하르트는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고 느릿느릿 움 직이는 엔페리에들의 발소리들만 주변에서 들려왔다. 물론 카넬리안은 자 기 눈동자 마냥 시뻘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제발 그런 말 좀 유창하 게 하지 말아줘. 듣기 창피하단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상 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리하르트는 처음으로 줄리탄에게서 눈빛을 돌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세상을 보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자라온 환경이 다를테니까 같 은 세상이라도 서로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전 누구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몸을 기댈 생각도 없지만 줄리탄 씨의 말은 대충 이해가 갑니다. 당신은 저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군요. 솔직히 말해서....... 전 당신 같은 사람이 가장 무섭습니다. 나의 마음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는 부 류니까요." 리하르트의 꽤나 난해하게 들리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줄리탄을 다시 돌아보며 리하르트는 냉정한 파란색 눈동자에 희미한 동경과 호의를 담아 말을 이었다. "착한 사람은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데...... 당신의 그런 세상을 보는 마 음을 언제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지, 그게 기대되는군요." 그 말을 끝으로 리하르트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에 석상처 럼 생기 없는 엔페리에들 사이를 휘청이듯 지나치며 자신의 비좁은 다리 위의 집으로 향했다. Chapter11 : 세상을 보는 마음 <끝> -Blind Talk 현재 기분 최악!! 덕분에 정말로 불만족스럽게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붙잡고 수정해야 하는데 그럴 기분조차 아니기 때문에 일단 올립니다. 사람들은 가끔 주변 모든 일에 진절머리가 날 때가 있죠? 지금 제 기분이 그러네요. 에휴. 쓰면서도 쓰고 나서도 아무 생각도 안나네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노래 들을 기분 아님.T_T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1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4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387 제 목:[ DRAGON LADY ] 12-01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4849]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04 04:42 조회:591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1 : 전쟁의 조건 The Defiler 1. 카넬리안이나 젤리드 등의 '검에 정통한' 자들의 말에 따르면 줄리탄은 '의외로' 검술에 소질이 있는 편이었다. 서로 검을 쓰는 방법이나 검을 대 하는 태도가 다른 편인 사략함대의 일원들에게 쉬지 않고 검술을 배운 탓 인지 줄리탄을 일년도 안되서 어지간한 검격은 받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략함대 사람들이 보통 녀석들이 아닌지라 불행하게도 사략함대 내에서 줄리탄의 검술 랭킹은 여전히 하위권. 항해 스케쥴이 비어 있는 오 늘도 자라탄의 해변가에서는 사략함대 사람들의 검술 연습이 벌어지고 있 었다. "주인님. 너무 느리다. 우리 이딴 거 집어 치우고 나 낚시나 가르쳐 줘." "하아. 하아. 조금 만 더 해......" "아아. 노력하는 주인님이네." 이번 줄리탄의 검술 사범은 카넬리안이었다. 뛰어다니기만 해도 금새 힘 이 쭈욱 빠져 버릴 정도의 백사장에서 달라카트 명물인 '뙤약볕'을 맞으며 몇시간 째 세이버를 휘두르는 줄리탄은 온 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는 상 태였다. 카넬리안 역시 그런 줄리탄을 미스트랄이 아닌 연습용 세이버를 들고 상대해 주고 있었지만...... 얄밉게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 던 것이다. 울컥한 줄리탄의 일격. "이야아아앗!!" "느려요." 채앵! 머리속에서 검끼리 부딧치는 소리가 환청처럼 계속 울려댈 정도로 카넬리 안을 향해 찔렀건만 그녀는 금새 빨간머리칼을 휘날리며 이리 저리 탕 탕 막아내기만 할 뿐 - 조금도 진지해 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뺨 에 묻어나는 하얀 모래들을 닦아내며 '여자에게 이런 단순노동은 너무 가 혹해'라고 중얼거리며 모래사장에 검을 던져 버렸다. 아주 불성실한 사범 이다. "주인님. 그 정도면 충분해. 산적 해적 수십명 달려들어도 막아낼 수 있 을 꺼야. 그러니까......" 사실 줄리탄의 검술이라는 것은 기사 정도가 아닌 보통 사람이 봤다면 상 당한 수준임에 분명했는데(일말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는 검 인피타르 를 만져왔기 때문인지 검을 다루는 줄리탄의 진지한 태도는 기사들도 감탄 하고 있었다.)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만난 뒤에도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땀을 훔쳐내며 줄리탄이 말했다. "좋아하니까 하는 거야. 검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니까." "헤에." 카넬리안은 너무 힘들어서 모래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줄리탄의 눈높 이로 무릎을 굽히며 눈가를 가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건 행복한 거야. 노력하지 않는 사람 은 자기가 좋아하는게 뭔지도 자신하게 말할 수가 없겠지. 누가 말했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알고 좋아하는 일을 잘하며 잘하는 일이 돈이 된다면 인생의 절반이 행복하다고." "하하. 그런 말이 있어?" 줄리탄은 갑자기 터져나온 카넬리안의 참으로 인간다운 말에 의외라는 얼 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영생을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짊어진 그녀에 게 그런 말은 어쩌면 꽤 의미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나른하게 길다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님은 차암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 뒷바라지하는 내 입장으로서 참 대견해 보인단 말씀이야." 줄리탄은 잔뜩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귀엽다고 느껴진 탓일까. "우리 낚시하러 갈까?" "응!" 줄리탄의 말에 카넬리안이 기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의외로 낚시 를 한번도 안해본 것 같았고 줄리탄이 고기를 잡아올릴 때마다 신기한 얼 굴로 '헤에에!'라며 탄성을 질렀던 것이다. "그런데...... 낚시는 너한테는 좀 지루할 것 같은데? 그거 꽤 느긋한 마 음이 필요하다고."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난 참고 기다리는 건 질리도록 해봤으니까." "일단 목욕 좀 하고." 그렇게 줄리탄은 온몸에 달라붙은 흙모래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처에는 다른 사람들의 검술 연습이 계속되고 있었다. 굳이 줄리탄 곁에 있는 사람들의 검술을 표현하자면 카넬리안은 과감하고 젤리드는 무시무시 하고 세라피스는 요사스러우며 키마인은 고급스럽고 리이는 치밀하고 메이 는 날카로우며 시오는 절도있고 톨베인은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 줄 리탄을 평가하자면 거짓말이 없는 검술이다...... 카넬리안은 그렇게 생각 했고, 그런 검술이라면 상대를 죽이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 었다. 물론 그때가 되면 자기가 대신 죽여주면 된다. 부담스러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입장으로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녀는 괴로울 지도 모를 앞일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 채 줄리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어쨌든 지 금은 행복하니까 먼저 걱정하지 말자. 그를 믿는 거다. 2. 사실 말을 순화시켜서 그렇지 현 달라카트 황제인 멜 리그나이트를 몰아 내고 세라피스를 황제 자리에 앉히겠다는 말은 - 현 황제를 죽여야 한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스스로 황제에서 물러날 생각이 눈꼽만큽도 없 는 멜은 부득불 죽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문제는 암살로 살해했다 가는 그 혐의가 세라피스와 루스 등에게 몰리게 될 것은 물론이요 그것을 빌미로 헤스팔콘의 간섭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어쨌든 현 황제 멜은 '사고로 자연스럽게' 죽어줘야만 했다. 이상이 리하르트가 염두해 두 고 있는 바였다. "저, 정말로 약속을 지켜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당신의 가족들은 제가 책임지고 돌봐 드리겠습니다." "......꼭 지켜 주세요." "당신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항해 삼일 째 되는 날, 배의 식수에 이것을 넣으면 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한밤중 빈민가의 인적 드문 구석에서 리하르트는 늙은 선원을 상대로 은 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두려움에 주저하고 있는 선원에게 밀랍으로 주둥이가 단단히 봉해져 있는 작은 약병을 건내주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당신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해결해 드렸습니다. 그러 니 저를 믿고 그대로 실행해 주십시오. 만약 실수하거나 이 사실을 황실에 알린다면 당신도 죽고 당신의 가족들도 죽게 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리하르트가 루스로부터 받은 정보는 며칠 후 황제 멜과 관리들이 호화 유 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연회를 즐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수십척 의 호위선과 함께. 그리고 그 이후 리하르트는 그 유람선에 탑승할 선원들 에 대해 사략함대에게 했던 것처럼 치밀하게 조사를 했고 - 그 중 이 늙은 선원을 선택한 것이다. 막대한 노름빚을 진데다가 병에 걸린 자식들을 치 료할 돈도 없는 고립무원의 선원. 그런 다급한 자를 돈과 언변으로 구워삶 는 것은 리하르트로서는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병에 들어 있는 것은 뭔가요?" 아무런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뿌연 유리병에는 무색의 액체가 절반쯤 찰 랑거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하르트는 로즈마이어와 함께 자리에서 뜨며 자신의 집 으로 향했다. 로즈마이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리하르트 님. 설마 저 병에 들어 있는 건......" "내 양아버지 로이터 씨의 작품이지. 수천명 이상에게 실험하며 만들어 낸 지독한 전염병균. 저 병 하나만 있어도 베오폴트 정도의 도시는 금새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어. 달라카트로 내려올 때 가져오길 잘했지." 로즈마이어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제국안전공안부에서 적국을 혼란에 빠 트리기 위한 전염병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얼핏 짐작한 적이 있었 다.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로이터의 무기였던 그것은 지금 리하르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리하르트가 선원에게 건내준 약병에 들어 있는 것은 감염 12시간내로 발병하며 기사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감염 3일내로 극 심한 탈수증상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높은 치사율의 수인성 전염 병균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배의 식수를 오염시키면 곧 그 식수를 이용 하는 탑승객 전체가 감염될 것은 당연한 사실. "질병은 공정해. 황제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공격하거든. 내가 태어났 던 헤스팔콘의 빈민촌도 전염병이 돌아서 군대가 들이닥쳐 모두 죽이고 불 태워 버렸어. 그런 일이 황제가 탄 배라고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지." 로즈마이어는 오싹한 리하르트의 냉소를 엿보며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움 츠려 들었다. 황실이다 귀족이다 하는 족속들은 너무 검이니 마법이니 하 는 힘들을 맹신해서 철옹성을 지어 놓고 아주 어이없는 곳에 빈틈을 만들 때가 많은데 양아버지였던 로이터는 리하르트에게 그 빈틈을 이용하라고 가르쳐 줬던 것이다. 물론 로이터 역시 자신이 막지 못한 빈틈 때문에 아 들 리하르트에 당했지만. 리하르트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엔페리에들의 강 가를 차가운 두눈에 담으며 상념의 마침표를 찍었다. "곧 달라카트의 황제는 사고로 죽게 될 꺼야. 슬슬 다음 계획을 준비해야 겠군." 선원이 약속대로 황제의 배에 전염병을 푸는 순간 그 배는 항구로 돌아오 기 전에 탑승한 사람 모두를 죽일 것이다. 황제를 포함해서 모두 바다 한 가운데서 '불의의 질병으로' 죽게 되는 거다. 리하르트가 생각하는 것은 황제가 죽은 뒤의 뒷마무리였다. 3. 사략함대 본부에 위치한 홀 구석에선 물키벨이 새근 새근 잠들어 있었다. 하루종일 그레시다와 잡동사니들 정리하다가 지쳐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홀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조용 했는데. 슬슬 잠에서 깨어나 문 밖으로 나가려던 톨베인은 들어오는 줄리 탄과 마주쳤고 낚시대를 들고 있는 줄리탄은 실내에서부터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있는 톨베인을 보며 말했다. "또 연습하러 나가는 거야?" "그래. 비켜줄래?" 줄리탄은 언제나처럼 어두운 눈빛 그대로 무덤덤이 말하고 있는 톨베인에 게서 비켜주자 뒤따라오던 카넬리안과 톨베인의 눈빛이 마주쳐 버렸다. 서 로 약속한 듯이 인상을 쓰는 두 사람. "쌀쌀맞은 남자." "시끄러운 여자." 그리고 둘은 서로를 지나쳤다. 황당한 표정의 줄리탄. "거 참 인상적인 저녁 인사구나." "저 삐딱한 눈매를 볼 때마다 한마디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서." "성격 한번......" 삐딱한 눈매라면 톨베인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카넬리안은 홀 안에 들 어오며 인형까지 껴안고 구석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물키벨을 보며 또 눈 썹을 꿈틀 거렸다. "대체...... 해룡이면 해룡답게 바다에 가서 잘 것이지. 그냥 확 들어서 바다에 던져 버릴까 보다." 사실 카넬리안의 심기가 이토록 뒤틀린 이유라면 대낮부터 낚시를 했건만 물고기가 하나도 잡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줄리탄이 아무리 가르쳐줘 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낚시에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화가 치밀어 올라 마법으로 얄미운 물고기들을 날려버리겠다고 광분하는 카넬리안을 끌 고 돌아온 줄리탄은 피곤한 표정으로, 잠든 물키벨을 들어 올려 소파에 눕 힌 이후에 청소도구를 들고 다가온 그레시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사략함대의 청소는 모두 그레시다의 몫이었다. "돌아오셨어요 주인님?" "응. 별일 없지?" 언제나처럼 평온한 일상이다. 일찌감치 잠들어 있는 시오나 담수호에서 목욕을 마치고 호이젠과 함께 돌아온 키마인이나 두꺼운 책에 얼굴을 파 묻고 조그맣게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메르퀸트. 그리고 안경을 끼고 뭔가 잔뜩 쓰여 있는 서류들을 훑어보며 줄리탄 앞을 지나가는 메이까지, 일상 적인 사략함대의 밤이었다. 그레시다가 줄리탄을 올려보며 조그맣게 말 했다. "저...... 제가 저녁 식사 준비해도 될까요?" 그레시다는 줄리탄에게 요리를 배운 뒤부터 자기가 음식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주방장에게 이제 자신이 칼을 잡아도 되겠냐는 부탁을 하 는 격. 선선이 고개를 끄덕인 줄리탄은 물고기가 가득 담겨진 양동이를 건 내주며 말했다. 물론 줄리탄이 낚시로 잡은 것이다. "아 그래. 이거 재료로 써." "예에!" 그레시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양동이를 들고 힘든 걸음으로 주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말 지나치게 평온하고 일상적인 저녁이었다. 폭풍전야 같은. -Blind Talk 이제 자주 올려야 겠네요. 컨디션은 여전히 저기압. e-mail : billiken@hananet.net Outkast의 Miss Jackson 을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2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8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540 제 목:[ DRAGON LADY ] 12-02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515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08 03:14 조회:700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2 : 전쟁의 조건 Try your hope again 1. 세이드가 오펜바하를 찾아간 이유는 단지 '죽기 위해서' 였다. 자신의 ' 귀찮은 인생'을 마감하는 것에는 그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만 오펜바하는 세이드를 향해 검을 뽑지 않았다. "왜, 오펜바하 황제와 싸우지 않은 건가요. 세이드 님." 오펜바하가 마련해 준 지독히도 화려한 오버암메르가우의 객실에서 레오 폴트는 순순이 오펜바하를 따른 세이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래 물어보았다. 단 한번도 자신의 생각을 꺾은 적이 없었던 세이드 가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오펜바하 앞에서 검을 거둔 것이다. 그렇다고 오 펜바하의 중압감에 눌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질서가 결핍된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 하루가 허무하지." "......?"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진다. 새로운 욕망 을 발견할 수 없다면 숨쉬는 것조차 지루해 지니까. 가문에게 복수하기 위 해서 마법을 배웠고 날 멸시하던 자들의 목을 베어버리기 위해 검을 배웠 고 희열이라는 구멍난 그릇을 채우기 위해 오직 그 목적 하나만으로 지금 까지 살아왔다. 내가 귀찮게 살아 있어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계속 생각하며. 하지만 슬슬 그것도 지루해 져서 죽어줄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세이드는 자신의 기계팔을 떼어내서 침대에 던져 버리며 조용히 말을 이 었다. 다듬지 않아 멋대로 자란 금발이 피과 기름에 엉겨붙어 있는 짐승 같은 모습 그대로. 세이드가 조소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펜바하라는 자,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나?" "......!!" 레오폴트도 조금은 느끼고 있었다. 오펜바하가 가지고 있는 힘 때문만이 아니다. 왠지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은 피와 땀으로 만든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믿을 수 없는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새로운 이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최 종 포식자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군. 당분간은 오 펜바하 밑에서 그를 지켜볼 생각이다." 레오폴트는 세이드를 따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무슨 결정을 내리던 그대로 따르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세이드는 피에 절어 있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던지며 아무 말도 없었고 잠시 후 레오폴트가 벗은 옷 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며 레오폴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드 님...... " "여자였군. 너." 무표정하게 레오폴트를 바라보는 세이드의 시선에는 얇은 속옷만을 걸치 고 있는 레오폴트의 고개숙인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살결에 가련할 정도 로 얇은 몸을 애써 숨기던 옷들을 벗어버린 레오폴트의 반라는 완연한 여 성이었다. 누가 보아도 신창이라는 별명으로 세이드와 비견되던 리히트야 거의 기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긴 머리칼로 가리고 있는 그녀 의 눈동자는 바닥을 향하며 떨리고 있었고 곧 소름끼치도록 고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저희 매소크 가문에서 기사의 몸으로 태어난 자는 저 하나였고 리히트 야거에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문에서는 제 성별을 숨 기고 남자의 이름을 쥐어준 뒤에 황실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 도 매소크 가문의 위신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시시한 이야기다. 왜 그딴 얘기를 나한테 지껄이는 거냐?" 세이드는 어떤 남자라도 반할 만한 그녀의 모습에 아무런 감흥도 관심도 없다는 투였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고백을 어렵게 이어가고 있 었다. "전 평범한 여자입니다. 평생 누굴 사귈수도 없고 저 자신을 숨긴 채로 괴롭고 답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몇번이나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 었지만...... 가문에서 버림받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보면 서, 타신의 시선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당신을 보면서 의지하고 싶었 고..... 전 당신을......" "큭큭. 웃기는군. 내 손에 죽은 놈들이 들었다면 무덤에 일어날 말이다." 세이드는 흐느끼며 말하는 레오폴트를 감상하듯이 바라보며 냉소를 퍼부 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제는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겐 관심이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전 당신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지금이라도 자살해라. 아니면 내가 죽여줄까?" "흐으윽!"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었고 세이드는 퀭한 눈동자 그대로 그런 레오폴트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세이드 의 한쪽 팔이 없는 것은 모두들 선천적으로 불구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세이드의 형 오스카를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허약했던 세이드의 팔을 잘라 버린 것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세이드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 고 있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가문이 일찌감치부터 자신을 버렸다는 것 을 알고 있었고 불평하기 보단 강력한 힘을 익혀 형을 죽이고 후계자 자리 를 빼앗은 다음 그들을 지금까지도 살려둔 채로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이다. "내 아내 에버딘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줄까? 날 증오하면서 죽어 갔겠 지. 우리는 어차피 악역으로 태어났어. 그렇게 평범한 인간 흉내를 내면서 역겹게 괴로워 해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기형아로 태어났으니까 기형아처럼 살면서 기형아처럼 뒈지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준 역할이지." "그만해요!! 전...... 전 오직 당신에게 의지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것 도 안되나요? 우리는 그런 것도 할 수 없나요?" "시끄럽게 구는군." 세이드는 자신의 혈육들이 집어 던져버린 지옥속에서 기어 올라왔고 그렇 기 때문에 레오폴트가 가문의 권위를 위한 노리개가 되서 느끼는 괴로움을 세이드도 알고 있었다. 정교회와 황실의 신임을 받으며 엘리트로 살고있던 레오폴트나 주변 모든 것들을 적대하며 '검은 추기경'이라는 악명으로 살 고 있던 세이드나 실은 같은 진흙탕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둘 다 태어나 는 순간부터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지만 이미 보통 사람들처럼 서로의 감싸안고 울어주고 상처를 쓰다듬 어 주기에는 세상의 중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늦어 버린 것이다 . "나한테 의지한다고? 잘 들어라. 나도 네 년도 어디서 어떻게 죽든 상관 없는 족속들이니까 내가 널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겠지?" 세이드는 레오폴트의 머리채를 움켜 쥐고 거칠게 들어올리며 광기 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레오폴트에게 세이드가 차갑게 말했다. "정상적인 사랑 따위는 기대하지도 마라." 2. 자신의 거대한 정원에 시커멓게 타버린 자국들을 발코니에서 내려보며 미 쉘이 만들어준 발효차를 느긋하게 마시고 있던 오펜바하에게 브륜힐트가 말했다. "왜 세이드를 살려두신 겁니까. 그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힘 뿐이고 폐 하께 힘은 이미 충분할텐데, 무슨 이유로 살려두신 건가요." 오펜바하는 그 불손한 질문에 어울리는 대답을 찾으려는 듯이 고개를 갸 웃 거렸다. 그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장난감. 잔뜩 상처입고 살아 남으려고 울부짓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딱 장난감에 어울리잖아. 안 그래?" "그 자에겐 불쌍하군요. 그냥 죽여버리는 편이......" "헤에? 너 같은 여자에게도 동정심이라는 것이 있었어?" "......" 오펜바하는 지룡 브륜힐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짓꿎은 장난이라 도 계획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봤는데, 그 녀석에게 가이스트 라이히의 리더 자리를 주려고 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지룡 집단을 지휘하는 인간이라니. 너무 광대 같 아서 보고만 있어도 즐거울 것 같아. 괜찮겠지?" 브륜힐트가 바라보는 오펜바하는 인간들을 특별히 말살시킬 생각도 풀어 줄 생각도 없이 단지 인간들의 목에 줄을 감은 뒤에 이리 저리 끌고 다니 며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마치 너무 오랫동안 어린아이로 살아온 자의 끔찍한 무료함 같은 것. 여간해서는 즐거움도 슬픔도 느끼지 못한다. "폐하의 의지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렇고...... 빨리 가랑을 잡아와야 겠는데, 슬슬 움직여야 겠군. 인간들은 도무지 쓸모가 없으니까 우리들이 직접 나서는게 좋을 것 같아. 에이 정말 귀찮단 말야 해룡 놈들은." 가이스트 라이히의 리더인 브륜힐트는 자신의 자리를 세이드에게 주든 누 구에게 주든 그것은 큰 상관이 없었다. 단지 보이지 않은 실에 묶여 목숨 을 저당잡혀 있는 인간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연민을 품었을 뿐이다. 세상 이 싫다며 학살을 일삼고 다니는 자들이나 정의는 이런 것이라며 소리 높 혀 주장하는 자들이나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나 자신을 위해 가족을 팔아먹는 자들이나 결국 모두 끈에 매달려 열심히 춤추는 광 대인형일 뿐이다. 그녀는 난신 오펜바하를 볼 때마다 그가 조물주처럼 만 들어내는 부조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3. "앗! 앗! 차가워라." 카넬리안은 담수호의 수면에 발끝을 살짝 들이대곤 이 더운날 거짓말처럼 차가운 호수에 기분 좋은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며 텀벙 들어가 버렸다. 열대에 달궈진 몸이 어찔할 정도로 금방 차갑게 식어버리는 산뜻한 기분. 그렇게 늙은 티를 내며 '아아 좋구나.'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눈 앞에 양팔 양다리를 정신없이 휘두르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물키벨이 지나가고 있었다. "......" "으이이이이. 힘들어." "물키벨 님......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꽤 넓직한 담수호였다. 주변 활엽수들 덕에 시원하게 그늘까지 져 있는 담수호에서 물키벨은 아까부터 바둥거리며 수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 이 수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었던 것이다. 물키벨은 힘들어 죽겠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면 몰라? 수영하고 있잖아. 히잉 아까부터 물만 잔뜩 먹었어." "......" 바다의 절대자인 해룡의 수장이 인간 모습으로 물 먹어가며 수영을 가장 한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는 하나 뿐이 었다. "하...... 한심해." 카넬리안은 물키벨이 엄청나게 튀겨대는 물방울을 뒤집어 쓰며 참으로 한 심한 표정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대체!! 수영 같은 거 배워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래요! 혹시 잊어버리 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물키벨 님은 용이라고요. 그것도 해룡! 이런 한심한 모습 오펜바하가 본다면 당장 쳐들어 올꺼라고욧!" "톨베인이 말야! 그 녀석이 나 수영 못한다고 놀렸어! 날 바다에 빠트려 버리고는 담배를 피워물며 사라져 버렸단 말야!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 물론 카넬리안이었다면 당장 용으로 변해서 톨베인을 지져버렸을 테지만. 중요한 건 그게 어째서 해룡이 수영을 배워야할 이유가 되냐는 것이다. "그래서 수영을 배우시겠다?" "이 물키벨 님이 수영 정도는 거뜬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테야!" "하아?" 카넬리안을 바라보는 물키벨의 고집센 눈동자에서 어떻게든 수영을 배우 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노력한다는 건 좋은 거다. 그녀가 해룡만 아니었다면 박수쳐 줬을 것이다. 카넬리안은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뭐, 수고하세요. 오래 살다 보니까 별꼴 다보네요." 그녀는 정말 조용히 생각에 잠겨 목욕과 일광욕을 즐기고 싶었는데 첨벙 첨벙 소리를 내며 가끔 물속에 꼬르륵 가라앉으면서까지 보는 사람 조마조 마 하게 주변을 왔다갔다 하고 있는 물키벨 덕분에 분위기 다 깨진 것이다 . 카넬리안은 벽에 기대어 천천히 물속으로 완전히 몸을 담그며 참 어렵게 고요함을 찾아냈다. 깜빡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아지랭이처럼 흔들거리는 상큼한 물속의 푸른 풍경과...... 보기 안쓰럽게 물속에서 바둥거리고 있 는 물키벨의 모습까지 보였다. '잘하면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익사한 해룡을 볼 수 있겠군.' 그녀는 피곤한 표정으로 두눈을 감으며 생각에 빠졌다. 뭐 그녀가 하고 싶어하는 생각이라는 것도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일은 주인님과 함께 항구로 놀러 갈까? 가서 장신구도 사고 주인님 옷 도 골라주고 연극도 보고 또......' 줄리탄은 일루미네이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었다. 오늘 밤에 돌아온다 고 하는데 그녀는 그를 기다리며 다음날 같이 뭘 할지를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자잘하고 느긋하고 편안한 생각들에 빠져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의 무게가 둥실둥실 떠오를 만 큼 가벼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끝도 없는 시간을 견뎌왔고 그 래서 시간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 그녀는 최근 '지금 이 시간은 소중하다.'라고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행복이라는 건 참 불안해...... 그래서 소중한 것이겠지만.' -Blind Talk 아아. 자주 올린다고 해 놓고 또 이 모양이 되어 버렸는데, 뭐랄까 이번 편은 일찍 써 놓고 비축분으로 가지고 있다가 올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비 축분을 많이 잡아 놓은 것도 아니지만. 세이드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은 지 금도 없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아니라 '나름대로 사정은 있는' 사람이라는 건 보여주고 싶었고, 레오폴트에 대해서는 이전에 자세히 다루 고 싶었는데 페이지가 허락을 안해서 지금껏 띄엄띄엄 보여주는 바람에 난 데없어 진 느낌이 나네요. 뭐 아무튼. 아! 그리고 제 안부를 걱정하며 메일 주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정말 고마 웠습니다. 여전히 몸도 마음도 불편하지만 기운 많이 났습니다.^_^ (답장 모두 보내드렸는데 혹시 못 받으신 분이 계신지...... 한동안 서버 문제인지 메일 시스템이 엉망이 되었거든요. 혹시 도착 안한 건 아닌지 걱 정을...... ) 그럼. 넋두리가 심한 한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은 '곧' 제멋대로 프로파일 <물키벨> 편 Entry No.6 Mulen Kiere Belle The Mulkibell 1.많이 들어오는 질문인데 정말 돈 없어요? :인간의 돈이 용들에게 필요할 리가 없잖아. 돈주고 사먹지 않았다고 우리 들은. 2.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돈을 많이 써요? :히잉. 사 모으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내가 없었다면 사략함대도 없고 줄 리탄도 바다 한가운데서 아사했을 테니까 인생을 개조해 준 대가로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뭐. (용과 관련된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뻔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3.물키벨이라는 이상한 억양의 이름은 대체 누가 어떻게 지은 거에요? :별명인데에....... 모두 날 그렇게 불러서 우웅. 이상해? (별명?) 4.번듯한 해룡이면서 왜 인간 모습을 하고 다니죠? :오펜바하한테 물어봐. (슬쩍 자리를 피하고 있음) 5.카넬리안보다 얼마나 오래 살았어요? :우웅 대충...... 3년 정도? (진심일까.) 6.오펜바하나 테싱하고는 무슨 사이? :우이이이이! 왜 자꾸 이런 것만 물어보는 거얏!(빼액) (꽤 의미심장한 사이였던 것 같음) 7.무슨 게임 좋아해요? :비시바시 스페셔얼!! (......) 8.인간이 되어 버린다면 하고 싶은 것은? :에에. 인어공주 같은 얘기네. 일단 아담한 집을 사서 그 안을 잔뜩 파스 텔 톤의 천장식들로 꾸민 다음에 정원에 꽃을 심고 또오......(하략) (그럴 돈은 있수?) 9.해룡들에 대해 소개하자면? :으음. 일단 툭하면 사라져버리는 레비가 있고 지나치게 충성스런 크라켄 이 있고 인간 모습일 때가 기억도 안나는 자라탄이 있고......그리고 나머 지는 다 죽어서...... 물어보지마 이딴 것!! (나름대로 아픈 과거가 많이 있는 여자였음.) 10.톨베인하고는 왜 그렇게 밤낮 싸우면서 들러붙어 있죠? :헤헤. 일단 착 달라붙었을 때의 촉감이 좋아. (톨베인이 들었다면 소름끼칠 얘기로군.) E-MAIL : billiken@hananet.net TV show 'Survivor'의 오프닝 테마를 들으며... (음. 별로 서바이버 같은 류의 쇼를 좋아하진 않지만 오프닝 음악은 듣기 괜찮더군요.)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3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10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532 제 목:[ DRAGON LADY ] 12-03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520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09 05:02 조회:976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3 : 전쟁의 조건 Human works 1. 일단 달라카트의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을 비춰놓고 볼 때 황제가 며칠이나 연회를 즐기러 황실을 비운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퇴 폐향락의 극을 달리는 멜 리그나이트 황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 습. 게다가 황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의 공무대행은 재무대신 휴센 공작 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센의 정치능력이란 저열하기가 타의 추종 을 불허하며 여색 남색 안가리고 밝히는 온갓 변태적인 놀음의 달인이고 황실 재산 빼돌리는 솜씨만큼은 귀재라는 것이 파르낫소의 객관적인 평이 었지만 그런 암적 존재를 아무도 황실에서 밀어낼 수도 거역할 수 조차 없 었다. 물론 그와 싸울 충신이 이미 황실에 남아 있지 않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의 뒤에 헤스팔콘 황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스팔콘 황실을 등에 업은 휴센과 싸우겠다는 소리는 곧 스스로 삽을 쥐고 무덤자 리를 파는 짓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여어. 자네 씰은 어디에 두고 왔나." "질려버려서 없애 버렸습니다. 도무지 맘에 드는 씰이 없어서." 휴센은 따로 집무실이랄 것이 없었다. 그는 본당하고 맞먹을 정도로 거대 한 황궁의 건물 하나를 통채로 제 집마냥 쓰고 있었는데 그 화려관의 퇴폐 사치스러움이란 헤스팔콘 귀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처음 간 사람들 은 십중팔구 길을 잃을 정도로 거대한 그곳에서 대낮부터 헤스팔콘산 특대 형 물침대에 드러누워 역시 헤스팔콘산 최상급 여자 엘프들을 껴안고 놀아 나고 있는 휴센에게 찾아온 자는 그의 호위기사인 엑퀼라인이었다. 쓰레기 는 쓰레기를 알아본다고나 할까. 둘은 성격적으로나 가치관이나 아주 죽이 잘 맞는 사이. 황실의 돈으로 '구입'한 씰을 태연하게 없애버렸다고 말하 는 엑퀼라인이나 그 소리를 듣고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새로 하나 구해 .'라고 대답하는 휴센이나 백성들이 들었다면 피가 꺼꾸로 돌 소리들이었 던 것이다. "슬슬 폐하가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흥! 오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그 미련한 황제는 앞에서 아부 좀 해주고 적당히 마약과 신기한 것들 쥐어 주면 알아서 모든 권리를 이 몸에 게 대행시킨단 말씀이야. 이 황실도 달라카트도 모두 이 휴센 어르신의 것 이지. 와하하하!" 라는 시덥잖은 자기자랑을 버릇처럼 읊어대며 휴센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엘프들을 비만한 품속으로 끌어들였다. 엑퀼라인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아 무리 생각해도 털이 숭숭난 비만중년의 반나체가 부서져버릴 것 같이 가느 다란 벌거벗은 엘프들을 껴안고 대낮부터 눈앞에서 뒹구는 모습은 보기 싫 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시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현기증 느낄 추한 광경이겠지만. "각하! 큰 일입니다!" 휴센의 보좌관 중 하나가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뭐야." "항구에 도착한 폐하의 호위선으로부터의 보고 입니다. 황폐 폐하께서 붕 어 하였습니다." "뭐라고! 암실인가?" "그, 그게 아니고...... 역병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역병이 배에 돌 아 그만." "젠장! 그렇게 죽어버리면 곤란하단 말야!" 휴센은 장난감처럼 더듬거리고 있던 엘프를 밀쳐내며 일어서선 가운을 걸 쳤다. 갑자기 황제 멜 리그나이트가 죽어버리면 황제 자리는 루스가 이어 받게 된다는 것이 그가 화를 내는 이유였다. 지금 황제의 시신이 있는 배 에 가득찬 역병이 내륙으로 들어와서 도시를 덮치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 었지만 자신과 껄끄러운 관계인 루스가 황제가 되는 것만은 무슨 수를 써 서라도 막아야 겠다고 휴센은 생각하고 있었다. 2. "지금쯤...... 휴센 공작은 당황하고 있겠지? 루스 저하가 황제가 되면 귀찮아 질테니까 말야." 리하르트는 좁은 방 창문으로 보이는 지저분한 빈민가의 풍경을 눈에 담 으며 재밌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제가 붕어했다는 사실에 본능적 으로 긴장하고 있는 로즈마이어와는 달리 리하르트는 황제의 죽음은 이미 지난 일이라며 머리속으로 다음 계획을 짜고 있었다. '슬슬 세라피스 저하가 등장할 때가 되었군. 휴센은 분명 세라피스 저하 를 지지하게 될꺼야. 아무튼 파르낫소라는 녀석, 대단하군. 이렇게 자세하 게 알아내다니.' 리하르트는 물끄럼이 내려보던 휴센에 대한 정보들이 빽빽이 적혀 있는 문서를 손가락으로 툭하고 쳤다. 휴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휴센이 행 동을 예측하여 자세하게 알려준 것은 파르낫소였다. 그는 처음부터휴센이 황제의 연회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헤스팔콘의 공인된 ' 첩자'인 휴센을 처리할 계획도 서신을 통해 리하르트에게 보냈던 것이다. 3. 아니나 다를까 리하르트의 예상대로 황실은 난리도 아니었다. 황제와 그 와 함께 연회에 참가했던 관료들이 모두 때죽음을 당한데다가 역병에 죽었 기 때문에 시신이 있는 배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스 가 황제 권한을 주장하면 막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주색을 탐하는데만 골 몰하던 머리를 오랜만에 굴리고 있는 휴센과 엑퀼라인의 입에선 한숨이 터 져 나왔다. "어떻게....... 루스 왕자가 황제에 오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을까?" "제가 가서 암살을 하는 건 어떨까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황성 한가운데 있는 루스를 어떻게 암살해. 차라리 친한 귀족들을 설득해서 루스를 몰아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짓을 했다간 스스로 반역자를 자청하는 꼴 이 되는데 동참할 귀족들이 있을까요?" "그, 그렇지?" 돌대가리 둘이 머리를 맞대어 봐야 나오는 건 돌가루 뿐이었다. 이미 루 스는 각 지방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려 지방 귀족들이 황성으로 모여들 고 있었고 곧 자동적으로 황제의 지휘봉을 이어 받은 루스의 회견이 있을 것이었다. 그런 만큼 황실은 관료부터 시녀까지 모두 술렁거리고 있었는데 이런 난리통에서 휴센의 보좌관의 새로운 보고가 있었다. "각하! 세라피스 저하가 돌아오셨습니다!" "......세라피스?" "예! 그렇습니다! 지금 중정의 소회랑(小回廊)에서 루스 저하를 알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세라피스 저하라니, 누구지?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 경악. 휴센은 해도 너무했다. 아무리 몇년 전에 황실에서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직계 황족의 존명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니. 얼빠진 신하의 모범 이었던 것이다. 보좌관은 애써 한심한 표정을 숨기며 덧붙였다. "루스 저하의 직계 동생으로 황제(皇弟)십니다." "뭐라? 그 녀석이 황실에 왔다고?" "이거 복잡하게 돌아가는 군요." 엑퀼라인이 자꾸 등장인물이 늘어나자 혀를 찼지만 휴센은 오히려 잘되었 다는 듯이 지저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복잡할 거 하나 없어. 세라피스가 하필 지금 황실에 나타난 이유라 면 뻔하지. 황제 자리가 탐나서야. 그것 밖에 더 있겠나? 마법쟁이 루스 놈 보다는 세라피스 같은 애송이가 황제가 되는 것이 좋아. 좋아! 세라피 스를 황제로 지지하는 거다! 그건 명분이 서겠지?" "지혜로우십니다." "왓핫핫핫! 내가 이 자리를 거저 먹은 줄 아나? 다 이 몸의 출중한 머리 때문이라고. 우하하하!" 지혜롭고 출중하긴 개뿔을. 카넬리안이 봤다면 '넌 참 무식해서 좋겠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휴센은 파르낫소와 리하르트의 계획대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두려운 대상은 휴센이 아닌 그의 뒤에 있는 헤스팔콘이다. 4.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배 안에서 뒹굴고 있는 황제의 시신부터 찾아 와서 암살 여부를 면밀히 조사한 뒤에 국장을 치루는 것이 순서일텐데 놀 랍게도 아무도 시신을 찾아오려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그 배 마저 겨우 겨우 항구 근처로 예인해 왔을 뿐 배 근처에 가고 싶어하는 자도 없었다. 리하르트의 말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병을 고친다고 떵떵거 리며 외치던 황실의 부유한 의사들이나 모든 저주마법을 막을 수 있다고 비싼 돈 받고 황실에 결계를 쳐준 마법사들이나 악운도 행운으로 바꾼다며 금은보화를 받고 점을 쳐 주던 복점관들이나 누구하나 역병 앞에서 나서지 않는 것이다. 루스와 함께 본당 알현실에 나타난 세라피스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관료들을 휙휙 둘러 보더니 삐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어쩌어찌해서 제가 황제가 되기로 했습니다. 뭐, 잘 부탁해요." 웅성웅성웅성웅성웅성! 그것이 세라피스의 첫 '취임사'였다. 그는 어차피 짜고 치는 도박판, 대 충 대충 넘어가자는 투로 불성실하게 한마디 툭 던진 뒤에 머리를 긁적거 리고 있었고 알현실에 잔뜩 모여 있던 휴센을 비롯한 관료와 귀족들은 잔 뜩 무게를 잡고 있다가 세라피스의 그 말을 듣고 두 눈이 휘둥그래져 버렸 다. 내심, 뭐 저런 양아치가 다 있냐! 라는 표정들이다. 그리고 잠시후 루 스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이 영광스런 달라카트 제국의 시국이 몹시 불안하다는 것은 모두 공감할 것이오. 지금 멜 리그나이트 폐하도 갑작스레 붕어하셨고 이 제국 의 안위를 위하여 일각을 다퉈 새로운 황제를 추대해야할 것인데, 부끄럽 게도 일차 황위계승권자인 본인은 스스로 제국을 번창시켜 나갈 황제로서 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오." 라는 말로 시작하여 길고 단호하며 유연하게 이어진 루스의 성명의 요지 는 결국 명분이 있고 능력이 있는 세라피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기겠다는 것이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휴센을 비롯한 신하들은 도리어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모두들 청교도 같은 루스보다는 껄렁껄렁한 세라피스가 황제 가 되는 것인 예전처럼 '즐겁고 편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재산을 끌어 모 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입이 찢어져라 웃음을 머금은 휴센은 옆 에 있던 엑퀼라인을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이거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나? 루스 왕자가 황위를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전 황제보다도 다루기 쉬울 것 같군요 저 애송이는. 큭큭." 어전에서 불손한 속삭임들이 오갈 정도로 황실꼴은 개판이었다. 세라피스 는 루스의 길고도 긴 성명이 끝나자마자 커다랗게 소리쳤다. "자! 자! 이제 모두 일들 합시다! 아 그리고 가장 먼저 내 형이자 전 황 제인 멜 리그나이트의 시신이 있는 배. 그것 말입니다." 세라피스는 잠시 말을 멈추며 단호한 표정으로 첫 칙령을 내렸다. "태워버리시오." "예에?" 달라카트에는 화장 풍습이 없는데다가 황가의 옥체는 지당히 황궁 지하 묘실에 안치되게 되어 있는데 그런 식으로 태워 없애 버린다는 것은 전통 상 상상할 수도 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그런 말을 하다니. 세라피 스는 반응이 신통찮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얼레? 못하겠다는 겁니까?" "말도 안됩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선황에 대한 예우가 그리 부덕하시 옵니까!" 물론 신하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충성스러워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황제 길들이기' 같은 것이었다. 날치기로 황제자리를 먹어버린 세라피스를 상당 히 우습게 보고 있는 신하들은 마치 성인군자라도 된냥 세라피스가 황가의 예의를 모르는 천박한 소리를 한다고 소리치며 비웃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세라피스의 표정에서 실없는 웃음이 싸악 가셔 버렸다. 그가 뚜벅뚜벅 연 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세라피스는 자신에게 항명하 던 신하들 중에 하나를 내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게." "아직 폐하께서 황실의 예를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을 올리옵니다. 선 황 제의 옥체를 불 사르는 짓은 대대로 수치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오니...... ." 투욱! 자기도취에 빠져 침튀기며 말하는 신하의 머리 옆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간 것은 순간이었다. 세라피스는 엄청난 속도로 황제 즉위를 위해 차 고 있던 예검을 뽑아 올렸고 상대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입을 놀리던 신 하의 귀 한쪽이 깨끗하게 절단되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어? 으...... 으아아아아아!!" "황제 면전에서 그렇게 품위 없이 소리치는 것도 수치가 아닌가. 대대로 말이지." 신하는 귀가 잘려나간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핏줄기를 쥐어 싸며 두 려움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칼날 같은 본래모습으로 돌아온 세라피 스는 핏방울이 묻어 있는 예검을 새하얀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천천히 말할 뿐이었다. 알현실에서 황제가 검을 휘두르다니. 창백해진 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황제 앞에서 비명을 참고 있는 신하의 끅끅 거리는 울음소 리만이 섬뜩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아. 고개를 들어." "으으으......" 피가 쏟아져나오는 귓가를 양손을 감싸며 고개를 올린 신하의 몸은 두려 움과 고통으로 미친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하의 얼굴 위로 두려 울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보이지 않는 세라피스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씩 뚝뚝 떨어졌다. "귀공에게 감히 황가의 수치를 운운할 권리를 누가 줬는지 모르겠지만 이 제부터는 짐 앞에서의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귓조각은 제 국의 주인인 짐을 모독한 죄값이니 대대로 곁에 두고 볼때마다 황가에 대 한 충성을 다지기 바라오." "예,예에......." 신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묻건데 선황제를 급사시킨 병의 치료제를 가지고 계시오?" "그, 그건 아직......" "그럼 역병에 감염된 시신이 육지로 들어오면 짐의 백성들이 그 병에 걸 려 죽을 수도 있을텐데, 그때는 어쩌겠소?" "그건......" 세라피스는 잠시 말을 멈추며 냉정히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곤 들고 있던 예검을 선선이 검짐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이 나라는 황제인 나의 것이며 이 나라의 백성들도, 숨쉬고 있는 모든 존재들도 나의 것이야. 짐에겐 그 모든 것들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고 되먹 지 못한 전통이다 뭐다 떠들어대며 그 의무를 방해하는 자들은 모조리 목 을 쳐버릴 것이외다."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지금쯤 이 자리의 귀족들은 차라리 루스가 황제가 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백성들의 안정과 번영이지 이미 죽어버린 시 체 따위가 아니란 말야!! 짐은 귀공들의 모든 충언에 귀를 기울이겠지만 본분을 잊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말보다는 검으로 다스릴 것이오. 귀공들 역시 제국의 일부이니 그것은 곧 나의 것이라는 의미, 귀 공들의 생사여탈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국사에 임하시길 진심 으로 바라는 바요." 그 말을 끝으로 세라피스는 알현실을 떠났고 전대미문의 '취임사' 역시 한 명의 부상자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후 황제와 죽은 탑승객들의 시신을 태운 배는 불길에 휩싸였다. 혹시 발견될지 모를 암살의 증거마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5. 메이와 줄리탄 역시 자라탄 모래사장에 사략함대 전원을 모아 놓고 발표 를 하고 있었다. 세어나가면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에 세라피스가 황제가 된 지금에 와서야 가스발 사략함대가 세라피스를 지지했음을 알려주게 된 것이다. 반응들은 가지각색이었다. "흐음. 인간들의 일이잖아? 난 뭐 아무래도 좋아. 레비야. 과일 따먹으러 가자." 물키벨은 복잡한 말은 귀담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레비아탄과 함께 과실 수가 있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런 윗대가리들 일엔 관심 없어." 자다가 일어나 좀 인상을 찌푸린 톨베인 역시 담배를 모래바닥에 부벼끄 며 사라져 버렸다. "그럼 우리 이제, 달라카트 황실에 봉사하게 되는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본래 헤스팔콘 3대 가문 중에 하나인 이젠그람 백작가문 출신의 키마인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자신의 인생에 얼떨떨한 얼굴로 호이젠에게 물었지만 호이젠 역시 의외라는 얼굴로 드물게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스팔 콘 국경 수비대에 있다가 해군으로 가고 사략함대에 있다가 이제는 달라카 트 황실에 몸을 담다니. 그들의 인생은 정말이지 버라이어티하기 그지 없 었던 것이다. "나야 뭐 줄리탄 녀석을 믿으니까 그 녀석 결정에 따를래. 헤헤. 황실에 들어간다라...... 아버지가 출세했다고 좋아하겠네. 아마릴리스 기뻐해 나 출세했어!!" 시오는 아니나 다를까 혼자 썰렁하게 하늘을 보고 소리치다가 시끄럽다는 톨베인의 손에 등덜미가 잡혀 본부로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젤리드. 이제 어쩔꺼야? 나 황실 구경가고 싶은데." "리이와의 결혼식은 역시 황실에서 올리는게 화려하겠지.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미루고 있었는데 잘됬군." "그, 그런 걸 해줄리가 없잖아." "안해주면 좀 곤란해질 꺼다 황실 녀삭들." 대단한 발표를 한다기에 자라탄에 들린 젤리드는 다른 건 관심 없고 황궁 의 거대한 연회장을 사적인 용도로 써먹을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물론 파 문기사인 그가 황실의 호위 기사 '따위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황실이라니...... 그런 곳은 좀 부담스러운데." "그냥 커다란 집일 뿐이야." "같이 가줄꺼지?" "물론." 아직까지도 귀족적인 곳에 거부감을 느끼는 메르퀸트는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역시 사람들을 따르기로 한 것 같았다. 말락 역시 목소리만 을 들어낸 채 채 동행을 약속했다. 황실에 악령이 돌아다닌다면 확실히 음 산하겠지만..... 메이는 안경을 벗어 이마를 흐르는 땀을 닦아낸 뒤에 발 표를 마쳤다. "계속 우리 가스발 사략함대의 거점지는 이곳 자라탄이며 조만간 세라피 스 씨...... 가 아니라 세라피스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을 방문 할 예정입니다. 이상입니다. 줄리탄. 할 말 있어?" 발표는 모두 메이가 했고 옆에서 멀뚱이 서 있던 줄리탄은 메이가 바라보 자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 오늘 저와 함께 야간항해 나가시는 사람들은 남아 주세요. 중앙돛의 조율 때문에 드릴 말이 있거든요." 역시 노블리스 경, 줄리탄 다운 끝맺음이었다. 뒤에 서 있던카넬리안은 ' 하여튼 성실한 주인님이라니까.'라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고 사략함대 선원들은 저마다 웅성웅성 거리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6. '물키벨님. 어쩌시겠습니까. 이러다간 인간들의 일에 깊게 관여하게 됩니 다.' 해룡이면서도 멋지게 높은 나무를 오르며 과일을 따내고 있는 레비아탄을 신기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물키벨에게 자라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물키벨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 나는 그냥 지켜볼꺼야. 줄리탄의 말대로 인간들의 일은 인간 들이 해결하는 거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오펜바하가 끼어든다면 그때는......' "싸울꺼야!" 물키벨이 갑자기 소리쳤기 때문에 레비아탄은 그녀를 흘낏 내려 보았다. 자라탄의 목소리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그가 본색을 들어낸다면 저희들의 승산은 희박합니다. 이제는 궁룡들도 사라졌고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힘을 아시지 않 습니까.' "난 싸움은 싫지만 도망치지지도 않아." 단호한 말이었다. 그리고 물키벨은 씁쓸한 미소를 띄우고는 저 멀리 삼삼 오오 모여있는 사략함대 사람들을 바라보며 줄리탄과 카넬리안을 떠올리곤 중얼거렸다. "게다가 오펜바하를 막을 수 있는 자는 나 뿐인데 내가 피해 버리면 저 녀석들이 너무 불쌍해 지잖아." '인간들은 가엽게 여시기는 겁니까?' "지켜주고 싶어. 그렇게 원했던 그 녀석들의 사이가 깨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것 뿐이야." 수평선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바닷소리를 등에 지고 물키벨은 곧 레비아 탄에게 걸어갔고 나무에서 내려온 그에게 커다랗고 딱딱한 과일을 받으며 '고마워어!'라고 방긋 방긋 웃어 주었다. 파국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올지, 그것은 해룡의 수장인 그녀도 알 수 없었다. -Blind Talk 조금씩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ㄴ'키는 잘 안눌러지고 날은 쌀쌀하고 몸속에선 한숨만 나옵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좋았던 일들은 금새 잊어버리고 나쁜 일들은 오랫동안 기억하는 이기적이고 나약한 존재인가 봅니까. 건강과 행복의 공통점은 모두 '가지고 있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잃어버린 뒤에는 아쉬워 하는 것'이라지요. 아, 이것 2편 분량인데 그냥 하나로 묶어 올립니다. 비축분이 금새 바닥나 가네요... 아이고. 평생 저금하고는 거리가 먼 팔자라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Limp Bizkit의 Faith(re)를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4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12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417 제 목:[ DRAGON LADY ] 12-04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5405]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12 05:50 조회:472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4 : 전쟁의 조건 Nest for the fool 1. 생각하면 할수록 휴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갑자기 전황제가 역병으로 급사한 것은 좋다. 붕어하자마자 또 갑자기 세라피스 왕자가 왕궁으로 온 것도 좋다. 그리고 루스가 황위를 양보하여 세라피스가 황제가 된 것 까진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하자마자 태연한 얼굴로 신하의 귀를 잘라버리질 않나. 이번에는 꼭두새벽부터 유아독존의 실력자인 자신을 집 회실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뒤따르던 엑퀼라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거 뭔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절대 호락호락한 놈이......" "당연하지! 헤스팔콘에 보고해서 군대를 끌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세라피 스 놈만은 그냥두지 않겠어." 휴센은 다른 제국의 군대를 끌어들이겠다는 망발을 부득부득 가는 입에 담으며 세라피스가 있는 소집회실로 향하고 있었다. 2. "아아. 개판이로고. 아무리 죽은 내 형이라지만 그런 사람에겐 구멍가게 도 맡길 수 없겠어." 거의 써먹지 않아서 먼지까지 쌓여 있는 소집회실에 있던 세라피스는 지 금까지 전황제가 해왔던 '업적'들이 담긴 기록첩들을 책상에 던지며 투덜 거렸다. 기록첩에 적혀 있는 황실의 행적들은 거의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범죄조직의 장물매매록이 훨씬 건실할 것이다. 세라피스가 저질스런 나라수준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소년 시종이 들어오 며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미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아뢰롭니다. 휴센 대공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시라 그래. 그리고 넌 나가 있도록." "예." 잠시 후 애써 짜증나는 표정을 애써 숨기며 들어온 휴센이 무릎을 꿇었다 . "소인 폐하의 부름를 받고...... 에...... 왔습니다." "다음부턴 '도착했사옵니다.'라고 하십시오. 대공." 세라피스는 황제에 대한 경어조차 오락가락하는 휴센을 가까이 불렀다. "무슨 일로......" "휴센 대고오오오옹!!" "으아아악!" 휴센이 갑자기 기겁을 한 것은 세라피스가 그의 퉁퉁한 손을 두손으로 덥 썩 잡았기 때문이다. 휴센을 보는 세라피스의 눈은 간절한 애원의 빛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전 당신 밖에 없어요.'라는 애처로운 눈 동자였다. "왜, 왜 그러십니까! 새벽부터......" 휴센의 남색의 기준으로 보면 세라피스는 최상급 몸종에 속하는 수려한 얼굴로 미끈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는 하지만 설마 황제 세라피 스가 신하 휴센에게 사랑의 구애를 하려는 것은 아닐테고. 그렇지만 이 분 위기, 누가 모르고 들어와 봤다면 '실례했습니다!'하고 황급히 나가버릴 그런 위험한 분위기. "휴센 대공...... 짐은 오직 대공만을 믿고 있습니다." "......??" 세라피스의 가느다랗게 떨리는 애절한 목소리에 두눈이 휘둥그래진 휴센. 그때 세라피스는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입을 막았고 곧 붉은 각혈을 토해 냈다. 휴센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이 쩍 벌어졌다. "괘, 괜찮으십니까?" "대...... 대공...... 나는 사실...... 얼마...... 살지 못하오." 이라고 힘들게 말을 이으며 세라피스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오랫동안 숨을 고른 세라피스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창백한 표정에 미소를 띄우며 휴센을 바라보았다. "짐은 황실을 떠나 위험한 곳을 여행하다가 일년전 불치병에 걸렸소. 사 람들에겐 숨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피해가는 것은 아니지. 그렇소. 짐은 앞으로 몇년 살지 못하오." "그, 그런......" 쿠쿠쿵! 세라피스의 폭탄발언에 휴센은 머리가 복잡했다. 이 놈의 황가는 저주라도 받았는지 첫째는 역병에 죽고 둘 째는 몸이 쇠약하고 세째는 불 치병이라니! 세라피스는 몸을 가누지 힘든지 눈가를 힘없이 떨며 기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시오. 그리고 당분간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 주시오." "예. 아, 알겠습니다." "내 뒤를 휴센 대공께서 이어가 주기 바라오." "예엣?!" 자기도 모르게 입이 찢어지는 것을 어렵게 막은 휴센의 머리속에서는 단 순하면서도 달콤한 논리가 세워졌다. 세라피스는 곧 죽는다. 그리고 그 뒤 의 황제는 자기 것이다. 그리고 그 꿀맛같은 상상은 나머지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황제가 된다. 황제가 된다. 황제가 된다. 황제가 된다. 내가 황제가 된 다!' 휴센의 머리속에선 고장난 레코드 마냥 계속 같은 대사만 지나가고 있었 다. 세라피스의 다음 말은 그런 그에게 더욱 확고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 "일년후, 대공을 황위계승자로 발표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 나약한 황 제의 지나친 부탁일 수도 있으나 뛰어난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 이 달라카 트 제국에도 유익한 일이니 꼭 들어주시기 바라오." "물론입니다!! 당연히 이 몸이...... 아, 아니 제가 어찌 폐하의 어명을 거역할 수 있겠나이까. 이 몸을 바쳐 이 제국을 이끌어 나가겠나이다." 휴센이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찢어지는 웃음을 아주 어렵게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 "황실의 신하들과 지방의 귀족들이 짐의 눈을 속이며 백성들을 착취하고 황실의 재물을 사사로이 쓰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아. 그건......" 착취와 부패의 일등공신은 바로 휴센이었다. "짐이 믿을 수 있는 자는 바로 휴센 대공, 당신 뿐이니 직접 지휘하여 그 제국을 좀먹는 자들을 찾아내고 엄벌하기 바라오. 곧 대공께서 이끌어 나 갈 제국이니 면멸히 밝혀내야 마땅할 것이오." 휴센은 즉시 무릎을 넙죽 꿇으며 커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칙령을 받들겠사옵니다! 소인께 맡겨 주십시오! 그 황실의 은혜도 모르 는 간악한 무리들을 이 손으로 처단해 버리겠나이다!" 물론 휴센 자신도 훌륭한 부패귀족이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휴센은 안전했 다. 도리어 청렴결백한 신하의 표본으로 손쉽게 황제의 신임을 받을 수 있 는 것이다. 이후 몇번이나 열나게 황제에 대한 충성을 열변하던 휴센을 물 러가게 한 뒤에 세라피스는 바닥에 쏟아져 있는 자신의 시뻘건 각혈을 물 끄럼이 바라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기분잡쳤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 했다. "쳇. 내가 죽긴 왜 죽어. 손자의 손자 볼 때까지 살아 남을 테다! 파르낫 소! 물!" 그리고 세라피스 뒤에 겹겹이 있던 책장들 사이에서 물잔을 들고 있는 파 르낫소가 나오며 방긋 웃는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젠장. 황제 되고 나서도 이런 짓을 해야 하다니, 난 정말 연극배우가 팔 자인가봐." 세라피스는 물을 담으며 찜찜한 입속을 양치질했고 곧 파르낫소가 빈틈 없이 준비해 온 둥근 접시에 가짜피가 섞인 물을 뱉어 냈다. 연극에 능한 세라피스에게 삼켰던 가짜피를 뿜고 환자의 표정을 만들어 내는 짓은 어려 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비만고릴라 같은 휴센에게 (아무리 연극이 라도) 애정어린 눈빛을 보였다는 것이 스스로도 악몽 같은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댔다. "이제 휴센은 제 손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칠 겁니다. 곧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착각에 완벽하게 빠져 버렸으니까요. 모두 폐하의 물과 나무도 감 동시키는 훌륭한 연기 덕분이옵니다." "휴센. 정말 멍청한 놈이네. 저렇게 재미없이 홀딱 속아버리다니." "하하. 권력의 맛은 마약과 같은 것이라서요.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단순해집니다." 휴센을 구워 삶으려는 이 계획은 파르낫소가 생각해 낸 것이었다. 우둔하 고 권력만 막강해서 발정한 숫소같은 휴센은 이렇게 극적으로 속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휴센의 뒤에는 헤스팔콘 황실이 있습니다. 일단 휴센의 눈을 막아 놨으니 헤스팔콘에 나쁜 보고를 하진 않겠지만 헤 스팔콘에 폐하의 실체가 들어나는 순간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폐하를 해하려 들 것입니다." "아 그건 걱정없어. 리하르트의 말마따나 헤스팔콘의 삼대 거두였던 세이 드 폰 러셀과 로이터 폰 막시밀리엄, 아취발트 이젠그람 모두 죽거나 사라 진 상태니까 사실상 그 몸집만 비대한 헤스팔콘은 장님이나 다름 없지." "예. 그렇긴 합니다만...... 설마......" "응? 뭐?" 파르낫소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세이드와 로이터를 서로 싸우게 해서 파멸시킨 것은 리하르트였다. 그리고 파르낫소는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로이터를 부추겨서 이젠그람을 자결하게 만든 것도 리하르트 였다. "설마. 리하르트 씨가 자신의 양아버지를 간접살해하고 세이드 후작을 자 멸하게 만든 것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였을까요? 헤스팔콘의 눈을 멀게 만들기 위해서." "그럴지도......"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로군요 리하르트 씨는." "내 앞에서 태연히 내 형을 역병으로 죽이게 만들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알아 봤지. 리하르트는 휴센처럼 단순한 놈이 아냐. 그가 말했지. 일년 안 으로 달라카트를 헤스팔콘과 전쟁을 치룰 수 있을 정도의 강국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달라카트의 완전한 자립을 위해서 헤스팔콘과 싸워야 한다는 사 실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그건 리하르트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겠지 나는 그 자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 "저도 그렇습니다." "오늘 리하르트가 황궁에 오지?" "예. 오늘 저녁 어전만찬에는 사략함대 일원들을 비롯해 리하르트 씨도 참가 합니다." "재미있는 만찬이 되겠군." 세라피스는 즐겁다는 듯이 웃음띈 얼굴로 곱게 다듬은 긴 금발을 쓸어 올 렸다. -Blind Talk 혹시 착각하실 수도 있지만, 주인공은 세라피스가 아닙니다.-_-;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은 한번도 수정하지 못하고 쓰자마자 올립니다. 상당히 어색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쓰는 사람이 요즘 흐물흐물 거리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냥 참고 읽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휴센을 '단순한 놈'으로 할 생각은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모략과 책략 같은 것은 드래곤 레이디에는 별로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 니까 그냥 극적으로 넘겨 버렸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사략함대 사람들이 황실을 방문하니까...... 좀 시끄럽겠네 요.-_-a E-MAIL : billiken@hananet.net 브레이브 하트 OST 중에서 PROTECT YOUR MIND를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5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15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61 제 목:[ DRAGON LADY ] 15-05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559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15 07:07 조회:62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5 : 전쟁의 조건 Ghost Spirit 1. 줄리탄은 코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잠에서 깨어났다. "저어 주인님. 황궁에 도착했어요. 일어나세요." "으,응......" 잠든 줄리탄을 내려보며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그레시다였다. 그 녀의 길고 하얀 머리칼이 살짝살짝 뺨에 스치자 줄리탄은 졸린 미소를 보 이며 몸을 일으켰다. 세라피스의 만찬에 참가하기 위해 황궁에서 보낸 마 차를 타고 이틀이나 달려온 것이다. 줄리탄은 맞은 편 소파에서 자신의 붉 은 망토를 이불삼아 몸에 걸친 채 잠들어 있는 카넬리안에게 말했다. "카넬리안. 너도 그만 일어나." "......싫어요." "으이구. 황궁에 도착했다니까." 줄리탄은 망토를 걷어내고 그녀를 흔들었지만 창가에 머리를 묻고 두 눈 을 꽉 감은 카넬리안은 계속 잠에 취해 웅얼웅얼 거렸다. "숙녀의 수면을 방해하는 건 몰상식한 짓이에요." "그래서 마차 안에서 계속 주무시겠다?" 그녀는 대답대신 부시럭거리며 아예 소파 구석에 파고 들어 몸을 웅크려 버렸다. 잠을 안자도 되는 카넬리안이지만 일단 자기 시작하면 죽어라고 일어나지 않았다. 줄리탄은 한숨을 내쉰 뒤에 그녀의 귓가에 가서 진지하 게 속삭였다. "동면은 겨울에 하라고. 테이머로서 명령하는데 후딱 일어나." 그녀는 부시시 눈을 뜨며 줄리탄을 올려보았다. 별걸 가지고 다 명령한다 는 표정이다. 줄리탄은 방긋 웃으며 카넬리안의 헝크러진 빨간 머리를 쓸 어 올려 주었다. "잘 잤어?" "......" 아직 그녀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몽롱한 기운 때문인가? 흘러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조금 찡그리고 있는 줄리탄의 얼굴을 보며 아주 짧은 순간, 처음 그를 만났던 일년전의 일들이 꿈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그렇게 멍하니 쳐다봐?" "아, 아냐." 그녀는 조금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최근 시도 때도 없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슴이 두근대는 것이 영 불안하다. 그때 다른 마차에서 내린 시오가 쾅쾅거리며 마차문을 두드렸다. "거기 한쌍은 뭐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으으으 이 인간아 시끄러웟! 나가면 되잖아!!" 카넬리안은 기분 잡쳤다는 얼굴로 커다랗게 투덜거렸고 그레시다는 왠지 서운한 표정으로 시오가 건내는 손을 잡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2. 황궁으로 초대받은 사략함대 일원들은 메이와 줄리탄을 비롯해서 지휘관 급과 해룡 일족 그리고 비정규인원인 젤리드, 리이였다. 메이는 '메이 제 독'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세련된 트렌치 코트가 밤색의 찰랑이는 밤색 머리칼과 어울리고 있었고 레비아탄의 큰 키와 몸의 매끈한 굴곡이 들어나 는 타이트한 셔츠 역시 시녀들의 황홀한 눈길을 받고 있었다. 물론 가장 눈에 띈 것은 레이스가 잔뜩 달린 노란 옷을 입고 허리끝까지 내려오는 머 리카락을 흔들거리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있는 물키벨의 인형 같 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멋진 등장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입구에 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그런 것을 물고 있으시면 안됩니다!" 갑갑한지 벗어버린 코트를 손에 든 채 황궁의 정문 로비로 톨베인은 시종 장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자신에게 황급히 다가오며 난색을 표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그것 말입니다!" "아아." 시종장이 자신이 피워물고 있는 담배를 가리키자 톨베인은 고개를 끄덕거 리며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 담배를 버려 부벼 껐다. 시종장의 입이 쩍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 신성한 곳에서!" "아?" 치우라는 말이었군. 톨베인은 시종장이 난리법석을 떨자 옆에 있는 커다 란 화분 뒤로 담배를 툭 차서 밀어 넣었다. "이제 된거죠?" "끄으으윽......" 톨베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종 장을 지나쳤다. 사실 사략함대 사람들이란 대부분 황실예법 같은 것 관심 도 없는데다가 '움직이는 화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이나 키마 인처럼 일단 참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번 화를 내면 말릴 길이 없는 카넬리안을 비롯해서 결심하는데 5초이상 허비하지 않는 톨베인, 언제 튀 어나올지 모르는 말락과 함께 있는 메르퀸트, 검으로 해결해야 할 일에 말 을 쓰지 않는 젤리드 등...... 본의 아니게 이런 집단의 통솔자가 되어버 린 메이는 내심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엉뚱한 사람에게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어엉? 네 놈은!!" "너!!" 본당으로 향하는 대회랑에서 나타난 엑퀼라인은 줄리탄을 보자마자 화들 짝 놀라며 소리쳤고 줄리탄 역시 드물게 살기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 다. 이런걸 보고 조우전(遭遇戰)이라고 해야 하나. 베오폴트의 살롱에서 끝내지 못한 적대관계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그레시다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란 입을 가리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분명 엑퀼라인 을 보고 두려움에 질린 모습이다. "그레시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그레시다의 상태가 이상하자 시오가 다급하게 물었다. 반면 그녀 를 보고 있는 카넬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는 것을 볼 때 카넬리안은 지 금 이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그레시다를 바다에 버렸던 테이머는 바로 엑퀼라인이었던 것이다. "호오. 저 무능한 씰을 네 놈이 데리고 있었군? 와하하! 너같은 놈에게 딱 어울려!" "뭐라고? 그 말은...... 네 놈이!!" 엑퀼라인은 자기가 버린 씰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통쾌한지 크게 웃어 재꼈다. 그리고는 그레시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마침 씰도 없는데 잘 되었군. 그레시다 이리 와! 내가 자비를 배풀어서 널 예전처럼 귀여워 해주지." "예...... 저의 테이머 시여......" 그레시다는 10여년전 엑퀼라인과 계약을 맺은 씰. 그녀는 꽉 감은 두 눈 에서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 었다. 그레시다가 엑퀼라인을 향해 발을 옮기려는 순간시오가 그레시다의 어깨를 잡으며 순백의 각도를 검집에서 뽑았고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 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못난 주인 때문에 고생하는 씰은 아마릴리스 하나로 족해." "뭐야! 너! 감히 황궁에서 검을 뽑은 거냐! 근위대!" 순식간에 사방에서 황실의 호위 기사들과 마법사들, 근위병들이 달려오며 엑퀼라인 뒤에 진을 쳤다. 물론 그런 황궁 근위대를 사략함대가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근위대와 싸웠다간 그 즉시 달라카트 제국의 적이 되어 버린다. 엑퀼라인이 자신만만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지만. 하지만 톨베인은 제국의 적이고 뭐고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시오 옆에 서며 그레시 다에게 말했다. "내 뒤에 있어. 책임감이라고는 모르는 저런 새끼에겐 절대 보내주지 않 으니까." "주인님...... " 젤리드 역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흉수로 손을 옮겼다. "결혼식은 또 연기인가. 카리나. 내 등을 맡긴다." "응! 젤리드!" "리이 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계단 위에 마법사 세명. 싸움이 시작되면 저들의 마법을 봉쇄해라. 이카 테스." "예. 주인님." "이대로는 세라피스 폐하가 빨리 오기만을 바랄 뿐이로군." 리이 역시 이카테스에게 속삭이며 난감한 표정으로 레이피어로 손을 옮겼 다. 또한 키마인과 호이젠, 메르퀸트 역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싸움 이 시작되자마자 말락이 나타나 이형들을 풀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 싱다. "이것들이...... 정말 해볼 생각이냐?" 엑퀼라인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스스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줄리탄의 몸을 시피런 생령(生靈)같은 기운이 감싸오르기 시작했다. 줄리 탄이 인피타르를 뽑는 장면을 엑퀼라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저건 또 뭐야." "또! 또 뽑았어!! 내가 미쳐!!" 줄리탄이 인피타르를 뽑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카넬리안이 환장하겠다 는 듯이 머리를 쥐어 뜯으며 소리쳤지만 줄리탄은 자신을 휘감고 있는 푸 른 폭풍 속에서 오직 엑퀼라인만을 쏘아보며 말했다. "일 대 일. 결투다." 그 말과 함께 줄리탄은 자신의 생명력이 인피타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 꼈다. "뭐? 애송이가 잔재주 좀 부린다고 허세구나!" 엑퀼라인이 줄리탄을 죽여버릴 기세로 검을 뽑았고 줄리탄 역시 차갑게 타오르고 있는 인파타르를 가로로 들어 올렸다. 줄리탄이 처음으로 요구한 결투. 먼저 간격을 좁혀 온 것은 엑퀼라인이었다.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아직 성인도 안된 어린애 주제에 기사에게 싸움을 걸어!! 그 가느다란 목을 따주지!!" "......" 엑퀼라인은 저질스런 성격과는 정반대로 상당한 검술의 소유자였다. 황실 바닥이 푹푹 페일 정도의 강렬한 발걸음으로 줄리탄의 우측으로 우회하던 엑퀼라인의 몸이 번뜩이는 것 같더니 금새 줄리탄의 목으로빠른 검격이 연 속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크하하핫! 막아봐라!" 야수의 발톱같은 몇차례의 검기. 기사라고 하더라도 급히 피하지 않으면 치명상을 입을 그 맹격을 줄리탄은 그대로 뚫으며 엑퀼라인에게 뛰어들었 다. 그 움직임은 보고 있는 카넬리안의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빠르고 격렬했다. "무, 무모한 놈!!" 줄리탄은 기합소리 조차 없었다. 츠츠츠츳 소리와 함께 인피타르로 부셔 버린 검기의 파편들이 줄리탄의 어깨와 뺨을 스치며 상처를 만들어 냈지만 줄리탄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공격적인 시선만이 엑퀼라인을 향하고 있었다. 엑퀼라인은 창백한 아우라를 뿜어내며 자신을 집어 삼킬 듯이 돌 진하는 줄리탄을 보며 검을 놓쳐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Blind Talk 최근 피곤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재기드 얼라이언즈2 확장팩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잡으면 서너시간을 플레이할 정도로 맘에 드는 게임들인데...... 이제 잠시 접어야 겠네요. 마감이 다가옵니다... 아. 밑에 kiyu군이 SIG를 올렸네요. 왠일이람... E-MAIL : billiken@hananet.net TWO-MIX의 White Reflection을 들으며... (이거 무슨 건담에 나오는 음악이었더라...-_-)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6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16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26 제 목:[ DRAGON LADY ] 12-06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567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16 10:22 조회:222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6 : 전쟁의 조건 The Name of sword 1. "크으으읏!" 엑퀼라인은 확실히 뛰어난 기사였다. 공포스런 줄리탄의 돌진을 보며 최 대한 정신력을 추스려 모았고 인피타르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빠르게 몸을 뒤로 이탈시켰다. 순간의 차이로 줄리탄이 휘두른 인피타르가 엑퀼라인이 있던 자리를 찢었고 그때 엑퀼라인이 줄리탄 옆에 나타났다. "주인님 피해!!" "크하하핫! 죽어버려!" 엑퀼라인은 엄청난 기력을 집중시켜 줄리탄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줄리탄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의 목을 잘라 버렸다고 엑퀼 라인은 분명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줄리탄은 잔상을 남기며 순간적으로 몸을 숙인 것이었고 엑퀼라인의 검은 목표를 잃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빠르기. 그 모습에 카넬리안을 비롯한 사람들 은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기사 이상의 움직임이라니...... 말도 안돼.' "거짓말!!" 엑퀼라인은 숙인 몸이 용수철처럼 솟아 오르며 무방비가 된 자신에게 파 고드는 줄리탄을 보며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치고 말았다. 절대로 솜털난 애송이가 아니었다. 결투해 본 기사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최강의 상대. "사, 살려줘!!" 공포에 질린 엑퀼라인에겐 마치 자신을 향해 내리치던 벼락이 눈 앞에서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눈이 얼어버릴 정도로 냉혹한 인피타르의 검 끝이 엑퀼라인의 코 앞에서 정지한 것이다. 하지만 엑퀼라인의 마음은 이 미 베어져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까지 흐르는 그는 검을 떨구며 실이 끊어진 연극인형처럼 스스르 바닥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공격적인 아우라를 뿜으며 자신에게 검을 들이댄 줄리탄은 차갑게 명령했다. "네 놈을 죽여버리지 않은 건 그레시다를 위해서다. 지금 당장 그레시다 를 내게 이적시켜." "......?" "내 말 안들려!!" "아, 알았어. 이, 이, 이적 시킬테니까 그 검 치워. 치, 치워 주세요!" 엑퀼라인은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원한령을 본 것처럼 줄리탄에 게서 눈을 돌리며 애원했고 줄리탄은 그제서야 인피타르를 검집에 집어 넣 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살아있는 듯한 푸른 기 운들도 모두 검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열려 있던 지옥문이 닫혀 버리 는 것 같다. 줄리탄은 힘들게 숨을 내쉬며 그레시다에게 걸어갔고 그런 그 에게 근위대 누구도 검을 들이댈 수도 막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레시다. 이름은 앞으로도 그대로 그레시다로 할께. 이제부터 나는 너 의 테이머이며 너는 나의 씰이야." 이적 절차가 시작되었다. 줄리탄이 새로운 이름을 말해주고 엑퀼라인이 그것에 동의하면 간단히 이적이 이뤄지는 것이다. 물론 줄리탄이 이제는 이적이 가능할 수준이 되었는지는 해봐야 알 일이지만. 그레시다는 고통을 참으며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줄리탄을 올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시, 싫어요. 줄리탄 님과 진짜로 계약하는 건......" "뭐?"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부탁이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말 을 하는 거지? 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이 된 가운데 그레시다는 줄리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절 그렇게 아껴 주셨는데...... 하지만 줄리탄 님에겐 이미 카넬리안 님이 있잖아요." "그, 그게 왜?" 테이머는 다수의 씰과 계약할 수 있다. 카넬리안이 있든 없는 줄리탄이 그레시다와 계약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건 그런 '규칙'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줄리탄 님의 진짜 씰이 된다면 두 분을 지켜보며...... 서운한 기분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주제 넘은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줄리탄 님 곁에 있으면 계속 계속 더 가깝게 있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 그래서 카넬리안 님을 질투할 것 같아요." "그런......" '자신만을 좋아해 달라는' 감정은 인간이나 씰이나 마찬가지 였던 것 같 다. 그레시다는 줄리탄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지만 그의 눈은 카넬리안 만 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이다. 그레시다는 고개를 숙인 채 고백처럼 말했다. "전 줄리탄 님도 카넬리안 님도 너무나 좋아해요. 그래서 좋아하는 분들 을 질투하는 것이 전 싫어요. 두 분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씰들은 일반적으로 테이머가 자신에게 따뜻한 감정을 나눠줄 것이라고 기 대하지도 않고 그래서 요구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인간의 도구'라고 생각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그 감정을 느껴버리면 그들은 인간과 같 았다. 더 관심을 받고 싶어하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갑자기 줄리탄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하기 시작했고 줄리탄 보다 더 당황한 것은 카넬리안이었다. "우, 우리는 니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냐. 아하하하. 어차피 나도 씰이니 까 주인님과 애인 사이 같은 거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테이머와 씰 사 이의 연애라니...... 마, 말도 안되는 거잖아 그런 거." 시뻘개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는 카넬리안의 변명에 그레시다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두 분, 서로 사랑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그 말에 줄리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맞아. 니 말대로야. 우린 서로 사랑해." "아, 안들려!! 난 아무 것도 못들었다고!" 카넬리안은 귀를 막아버리고는 꺄악꺄악 소리치며 구석으로 숨어 버렸다. 입이 쩍 벌어진 관객들. 갑자기 이 무슨 신파극이란 말인가. 멍해진 얼굴 의 엑퀼라인이 중얼거렸다. "이적...... 시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넌 입닥치고 기다려!!" 줄리탄이 성질난 듯이 고개를 홱 돌리며 쏘아붙였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 로 그레시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레시다. 미안해. 사실 난 카넬리안 한명을 좋아하는 것 만으로도 벅차 . 그녀를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에만 신경을 썼고 그 래서...... 네 마음을 제대로 몰라줘서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줄리탄 님은 언제나 저를 감싸주셨고 그것만으로도 저 그레시 다는 행복한 씰입니다." ......갑자기 별빛이 쏟아지고 꽃잎이 휘날리는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톨 베인은 일대 난전이 물건너 간 듯 하자 검집에서 손을 놓으며 투덜거렸다. "거 대충 좀 끝내지. 보는 사람 무안하게." "흐으으윽! 너무 감동적입니다!!" 난데없이 세라피스가 황금빛의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옷을 입고 나타나선 감동에 빠진 얼굴로 소리쳤다. 황제 폐하 등장. 근위대들은 황제가 나타나 자 모두 황급히 무릎을 꿇었지만 세라피스는 줄리탄 옆에 주저앉은 채 초 롱초롱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머쓱한 표정의 줄리탄. "지, 지금 뭐하는....... " "어? 계속 안할 꺼야?" "......" 대체 이 인간은 황제가 되도 바뀌는 거 하나 없다. 줄리탄은 옆에서 황제 가 빤히 지켜보는데 계속 대사를 읊을 정도로 뻔뻔한 사내가 못된다. 줄리 탄과 그레시다는 이상한 사람이라도 대하는 얼굴로 세라피스를 흘겨보며 슬금슬금 사략함대 무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결국 그레시다는 줄리탄 도 시오도 톨베인도 아닌 메이를 자신의 새로운 테이머로 요청했고 메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다. 메이도 이적을 받을 만한 능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세라피스의 황명으로 황궁에서 검을 뽑은 사략함대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 그레시다 덕분에 왠지 어색해 진 건 줄리탄과 카넬리안이었다. 자신들의 검을 황궁에 맡긴 채 본당으로 향하는 대회랑을 걸어가는 줄리탄과 카넬리 안은 우물쭈물거리며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씰조차도 감동 받은 사략함대 공식 커플이 되어 버린 것이 대단히 쑥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러 던 중 카넬리안이 분위기 쇄신을 해야겠다는 듯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일 부러 기운차게 말을 꺼냈다. "흐흠. 주인님 이제는 나를 다른 테이머에게 이적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 장한 것 같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약속한데로 나를 돈많고 잘생긴 세라피스 같은 남자에게로 이적해 줘." 분명히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처음 만났을 때는 그는 그녀를 떼어놓고 싶 었고 그녀도 그와 떨어지고 싶던 '서로 필요 없는' 관계였던 건 사실이다. 줄리탄이 그녀를 돌아보며 딱 잘라 대답했다. "싫어." "노, 농담이었어. 그렇게 정색하지 마. 무서워." 카넬리안이 '진지한 남자'라는 투정어린 얼굴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때 줄리탄은 아치형 회랑 벽의 화폭들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뺨은 요도 인피타르를 뽑은 후 아직까지 창백한 상태였다. "영원히 너와 헤어질 일은 없을 꺼야. 절대로 놔주지 않을 테니까. 그러 니까 다음부턴 그런 말 하지마." "아. 이런. 심각해져 버렸네." 카넬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줄 리탄 앞으로 나서며 걸어갔다. 그리고 뒤쪽에서 걸어오던 물키벨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드물게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레비아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줄리탄 님의 검.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 세상의 것이 아 닌 모습입니다. 물키벨 님은 그 검, 인피타르에 대해 알고 계시지요?" "인티파르에는...... 그러니까 그 검 속에는......" 물키벨은 혼잣말처럼 속삭이다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누구도 모르는 아 주 오래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표정이 어두웠다. '그 검 속에는 지옥이 있어......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방황하는 지옥이 들어있지. 인피타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야. 당연히 이 세상의 것이 아 니지.' 그녀는 또박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말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3. 한편 줄리탄에게 완패를 당한 엑퀼라인은 자신의 분을 참을 수 없었는지 휴센에게 달려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놈들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황궁 한복판에서 날 죽이려고 했다니 까요! 지금 듣고 계신 겁니까 휴센 대공?" "사소한 것 가지고 왜 그렇게 흥분하나. 난 얼마후면 황제가 될 몸이시니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네. 알아서 해결하게나." "크윽!" 휴센은 벌써부터 황제가 된 듯 거드름을 피우며 드물게 국사에 열중이었 다. 그가 종이에 써내려가고 있는 문서는 바로 '부정관리 블랙 리스트'. 황제가 될 것이 분명하니 지금까지 부패동료였던 자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 리려는 것이었다. 그런 놈들은 슬슬 사라져 주는 것이 자신이 황제가 되었 을 때 챙길 수 있는 재물도 많아진다. 게다가 세라피스는 오직 자신에게 의존할 만큼 병약하고 무능하단 말씀이야...... 라는 달콤한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 휴센은 황실개혁을 향해 제발로 힘차게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다 . "휴, 휴센 대공!!" "어허! 이 몸은 국사로 공사다망하시니 그런 일 쯤, 알아서 해결하라니까 그러네! 사략함대 같은 평민놈들 하나 처리 못하고 나한테 손을 빌릴 셈인 가?" '제길!' 엑퀼라인은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하냐며 치를 떨었다. 휴센은 엑퀼라 인을 향해 아예 '너 나랑 친구였냐?'라는 식으로 참 서럽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게 파르낫소가 바라던 바이지만. 엑퀼라인은 분통이 터져 콧김을 뿜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젠장! 자기 혼자만 좋으면 다야? 내가 얼마나 도와줬는데 이제와서 이런 식으로 날 대하다니! 아니...... 잠깐만. 그 방법이 있었군!" 엑퀼라인은 뒷머리를 강타하는 기똥찬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더럽던 인상 이 금새 환하게 밝아졌다. '그 노블리스라는 놈. 어차피 믿는 건 그 무시무시한 검 뿐인 것 같으니 까 그 검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거야! 지금쯤 그 검은 보관실에 맞겨 놨겠지 ? 좋아! 그 검만 있으면 휴센 같은 놈에게 붙어 있을 이유도 없지!' 그는 곧장 식객들의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빠르게 옮기 기 시작했다. -Blind Talk 휴우. 또 한편 썼네요. 다른 분들에겐 이게 보통 속도겠지만 저한테는 꽤 무리를 하고 있는 거랍니다. 최근 감흥을 얻기 위해 클레이브 바커의 '피 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클레이브 바커의 피조물인 악마적 카 리스마 핀헤드를 너무 좋아하고 있는데다가 그가 참가한 한 다큐멘타리 '공포로의 초대' 역시 감동깊게 봤기 때문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단 편들을 읽고 있습니다. 역시 훌륭했지만...... 아직까지는 에드가 앨런 포 우의 세계가 제게 가장 매혹적인 것 같습니다. 요즘 쓰면서 묘사나 문체가 메마르게 나온다는 것에 괴롭지만 그래도 My pace로 전진합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jeff beck의 Love is blue 를 들으며... (이 노래. 꽤 많은 사람들이 연주했죠.)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2-7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19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114 제 목:[ DRAGON LADY ] 12-07 : 전쟁의 조건 관련자료:없음 [6590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19 04:32 조회:591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2-07 : 전쟁의 조건 nolimentangere, touch me not 1.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 세라피스는 중정의 고요한 수도실로 사략함대 일원들을 불렀다. 정적의 명상을 원하는 황실 사람들이나 수도사들이 찾는 그곳에서 세라피스가 가스발 사략함대에게 은밀히 꺼낸 말은 엄숙한 그곳 을 웅성거리게 만들었다. "전쟁? 지금 전쟁이라고 하셨습니까?" 세라피스가 꺼낸 단어 '전쟁'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놀라운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반면 세라피스는 그런 엄청난 말을 꺼내 놓고도 태연한 얼굴이 었다. "예엡. 일년안에 헤스팔콘과의 전쟁 준비를 완료할 겁니다." 검소한 목조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있는 그는 여전히 황제라기 보다는 락 그룹의 리더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 농담을 늘어 놓을 성격도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루스가 두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부연했다. "달라카트는 오래전부터 헤스팔콘에게 고삐가 잡혀 있는 소돼지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지요. 항상 황실을 감시하고 휴센과 같은 자들을 심어 놓고 지방귀족들과 결탁하여 제국의 힘 을 분열시키고 있으며 수탈에 가까운 불평등 무역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건 식민지나 다름 없는 겁니다." "전쟁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만...... 그걸 행해야 할 때 피 해서도 안되는 겁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헤스팔콘의 손에서 벗 어날 길은 오지 않습니다." 학예사(學藝社) 파르낫소까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고 그늘진 벽에 기대어 있는 리하르트 역시 아무 말 없이 동의하고 있었다. 사정상 공식적인 직위 를 받지 않은 리하르트였지만 그가 황실에 깊게 관여하고 있음은 물론이었 다. 달라카트에 온 지 일년이 조금 넘는 줄리탄 또한 달라카트의 모습이 화려한 외면과는 달리 그 이면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 었다. 하지만 어떻게 강대한 제국 헤스팔콘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승산 도 없는 전쟁을 치룬다는 건 세상 최고의 바보 짓이다. 세라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 전쟁은 분명히 승리한다고 호언장담하는 짓은 탁상 앞의 무능한 장군 이나 하는 소리 입니다만...... 여러분께 조만간 승리의 계획을 들려 드리 겠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세라피스는 전쟁을 위한 준비를 위해 사략함대 사람들을 부른 것이었고 이미 계획은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도움? 이봐. 멋대로 생각하지마." 가만히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연건 젤리드였다. 그는 심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수도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세라피스에게 불경스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당신과 달라카트를 위해서 싸워야 할 이유 가 전혀 없어. 차라리 지금 헤스팔콘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돈을 챙기 는게 내겐 더 설득력이 있는걸. 내가 도와야 할 이유를 말해봐. 달라카트 의 황제 세라피스 씨. 그 이유가 마음에 안들면 난 당장 베오폴트로 돌아 가겠다." 흉몽 젤리드에게 우호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그렇다 고 그런 식으로 차갑게 위협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냐는 얼굴로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젤리드는 섬뜩한 표정 그대로 세라피스를 바라보고 있 었다. 황제를 모독한 죄값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세라피스는 이해 한다는 듯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저는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드리고 있는 겁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말하세요. 할 수 있는 거라면......" "결혼식." 젤리드는 흥정할 물건을 던지듯이 툭하고 말을 꺼냈다. "......?"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열어준다면 생각해보지." "젤리드!"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이 리이가 당황했지만 세라피스는 당 장 고개를 뜨덕였다. "물론! 절대로 후회없을 결혼식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된 겁니 까?" "생각해 본다고 했다." 젤리드는 조용히 대답하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줄리탄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흘낏 카넬리안을 보았다. 그녀는 '귀찮은 일이잖아!'라는 얼굴로 뿌루퉁해 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별로 반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히 자신이 세라피스를 도울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아무튼...... 나도 참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여러가지 일들에 휘말리는군. 누구나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바다를 누비며 해적들을 소탕하고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새벽부터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것이나 장소와 방법만 달랐 지만 모두 똑같이 살아가는 거라고 - 줄리탄은 요근래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건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선택한 인생을 얼마 나 충실히 살아가느냐 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고귀하고 근엄하고 부 유한 인생만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줄리탄은 달 라카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전쟁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남들이 '알량한 정의감'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없이 그의 신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긴.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한 걸 수도 있지. 세상엔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들을 해야만 하는 사람 들이 더 많으니까. 이종족들도 그렇겠지.' 누가 그랬더라. 인생이란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우주 속에서 의미를 찾아 내는 여행이라고. 적어도 줄리탄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밥 먹으러 가죠? 배고프네." "폐하. 제발 조금만 더 위엄을 보여주세요." 세라피스가 너무 격식없이 말하자 울상이 된 파르낫소가 '황제에게 그런 말투는 아니되옵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세라피스는 파르낫소에게도 마치 친구를 대하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미안. 버릇이라는 게 하루이틀에 고쳐지는게 아니라서. 난 정말 훌륭한 황제는 못될 것 같아." 사람들이 수도실에서 나가며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던 프란츠가 카넬리안 에게 다가왔다. "저어. 오랜만이에요." "어? 프란츠! 잘 지냈어? 뤼데거 씨는?" "아 예. 폐하의 도움으로 관직을 얻고 열심히 활동하고 계세요. 저도 폐 하의 곁에서 폐하의 시종으로서 황실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프란츠는 숨김없는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며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카넬리 안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프란츠를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달빛 을 등지고 얼음으로 만든 조각처럼 자신을 바라보던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 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 활발한 도시여자처럼 변해 있는 카넬리 안의 모습에 가벼운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일년 동안 같이 있 으면 단 한번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웃어준 적도 먼저 말을 건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줄리탄이 끼어들었다. "카넬리안. 여기서 뭐해? 어? 너는?" "아, 안녕하세요." '노블리스다......' 프란츠는 흠찟 놀라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사실 프란츠는 그토록 차가 웠던 카넬리안이 그리워했던 테이머는 분명히 그녀보다도 훨씬 더 무게가 느껴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사람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 그는 그것과정반대였다. 정이 많아 보이는 형과 같은 모습. 그것 역시 프란츠에 겐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2. 헤스팔콘 황실은 리하르트의 예상대로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황실 을 지탱하는 3대 가문의 대표자였던 세이드, 로이터, 아취발트 모두 사라 져 버린 황실에선 공석이 되어 버린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 간의 암투와 파벌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리히트야거의 경 우에는 세이드와 레오폴트의 뒤를 이어 서열 3위로 인정받는 힐데브란트가 있었기에 그를 비공식 리더로 인정하고 있어서 다소 조용한 편이었다. "달라카트에 새 황제가 등극하였습니다. 세라피스 리그나이트라며 하며 전황제의 둘째 동생입니다." "어떤 자인가?" "휴센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유아왕(幼兒王)이나 다름없어 별로 대단 한 것이 없는 어린 황제라고 합니다." "무성의한 보고로군. 주의를 주게." 힐데브란트는 부관으로부터의 말을 듣고는 읽고 있던 마법이론서를 덮으 며 간단히 대답했다. 검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인 그는 그 마법의 위력 만 큼은 역시 마법에 정통한 세이드조차 내심 인정할 정도였다. 힐데브란트는 아무 말 없이 근처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자신의 씰, 이세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르바트의 상황은?" "코머런트 재상은 가르바트의 여황제 우테 크룬세스를 여전히 신임하지 않 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헤스팔콘과 내통을 하려는 움직임도 없는 것으로 보아 코머런트는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독자적으로 행동할 듯 합니다." "마르켈라이쥬 경의 행동은?" "아직 없습니다." "그는 아마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지. 가르바트의 어떤 사소한 변화라도 즉시 내게 보고해라. 그와 함께 제국안전공안부와 황실귀족들의 행동 역시 철저히 감시하도록." "옛!" '동시에 안팎이 모두 혼란스럽다니......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군. 게다가 제일황제의 오칼란트 역시 무슨 속 셈인지 알 수가 없으니...... 지금 헤스팔콘은 대단히 위험해.' 힐데브란트는 흉할 정도로 메마른 자신의 고목줄기 같은 손으로 다시 책 을 폈다. 그가 보기에도 헤스팔콘의 상황은 비대해진 공룡과 같았다. 너무 거대해서 꼬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머리에서는 볼 수가 없는 반장님 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3. 황실의 저녁 만찬은 화려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달라카트 유명 예술가들 의 그림과 조각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만찬실 전체는 황홀함에 취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음식들의 향력(香力)이 들어차 있었고 슬슬 만찬에 참가할 십 여명의 중신들과 함께 사략함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오며 음식을 내오는 시종들과 섞여 부산해 졌다. 물론 사략함대를 보는 귀족들의 표정이 못마 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투덜거렸다간 또 귀가 잘려나갈지 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고개를 돌리며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 "와앙. 맛있겠다!" 물키벨은 'ㄷ'형의 거대한 원목 테이블에 먹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가지 런히 올라와 있는 전채들을 보며 남 부러울 것 없는 해룡의 수장이면서 놀 이동산에 놀러온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시오는 '맨날 이런거 먹고 산다면 황제도 할만하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줄리탄 옆에 가서 쿡쿡 찔렀 다. "야. 줄리탄. 넌 이것들 어떻게 먹는 건지 알지?" 시오는 눈앞에 포크가 네개씩이나 있는 것을 보며 난해한 입체파 그림을 봤을 때 마냥 얼떨떨한 모습이었지만 줄리탄은 역시 노력하는 요리사여서 그런지 친절하게 시오에게 이것저것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 수록 더 알 수가 없는 시오였다. "......그냥 먹을래." 세라피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식사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자리 에 앉으며 왠지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멍하니 음식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나 름대로 격식을 알고 있는 리이나 키마인 등은 눈앞의 얇게 접혀 있는 수건 을 세련된 손동작으로 풀며 세팅을 하고 있었다. 씰들은 예법상 자리에 앉 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줄리탄 뒤에 서 있던 카넬리안이 퉁명스럽게 속 삭였다. "주인님. 당신의 씰을 보초처럼 세워놓고 혼자서 음식이 넘어 가십니까?" "......" 줄리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꺾어서 의자 뒤의 카넬리안을 거꾸로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눈앞의 초록빛 야채 조각을 샐러드 포크로 집어서 들이 댔다. "먹어봐." "싫어요. 배 안고파." "그럼 먹지마." "냉정해." 변덕스러운데다가 알 수 없는 그녀의 성격에는 줄리탄도 이미 적응이 된 뒤였다. 애교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자신의 고집센 씰과 몇번 속삭인 뒤 에 다시 학구적인 눈빛으로 앞의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달라카트의 음식들 은 대부분 기름기가 적으며 향취가 강한 소스들로 맛을 내는 것들이 많고 특히 어류를 재료로 한 음식이 발달되어 있었다. 분명 더운 열대기후에 때 문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기름기가 많고 자극적이며 열량이 높은 가르바트 의 음식들에 길들여져 있던 줄리탄은 처음에는 달라카트 음식들을 먹으며 상당히 허전한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 나름대로의 달라카트 음식미학을 이 해한다고나 할까, 꽤 즐기게 되었다. '이건 좀 향유가 과하네...... 게다가 향신료를 너무 거칠게 갈아서 향 이 부드럽지 못한 것 같아. 샤프란은 비싼 향신료인데 아깝잖아.' 줄리탄은 유백접시에 그림처럼 담겨 있는 흰살생선을 가볍게 익힌 요리의 냄새를 감상하며 그 속의 불협화음을 잡아냈다. 역시 화려함과 음식맛은 꼭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느긋한 망중한에 빠져 있을 때. "에, 엘프잖아...... 엘프 같이 천한 것이 어떻게 여기에." 자기 눈을 의심하는 얼굴로 메르퀸트에게 다가온 휴센이 말도 안된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결국 사건은 또 터졌다. 예전같으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발할 메르퀸트는 의외로 당차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가스발 사략함대의 일원으로서 어전 만찬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래도 엘프잖아?" 휴센의 눈빛을 보며 메르퀸트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예전 술집에서 자신 을 강제로 더듬던 사람들이 보이던 그런 두려운 눈빛이었던 것이다. 생각 대로 휴센은 여간해선 돈주고도 살 수 없는 메르퀸트의 가녀린 모습을 보 며 욕정을 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사실 수백명의 엘프들을 몸종으로 사들 인 엘프 마니아 였던 것이다. 휴센이 메르퀸트에게 다가올 때마다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젤리드였다. 젤리드는 '이 황실에는 별 놈의 지저분한 동물들이 살고 있군.'라는 눈초 리로 뒤에 서 있는 카리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명령했다. "카리나. 가서 저 돼지의 입을 찢어주고 와라." "응!" 그와 함께 톨베인도 눈앞의 포크를 들며 조용히 일어섰다. 암살자인 그는 식도구인 포크로도 단숨에 휴센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 이대로는 오후 엑퀼라인 때와 마찬가지로 난리가 나게 될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기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휴센은 메르퀸트의 가는 팔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엘프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이리 따라와!" "이, 이것 놓으세요!" 메르퀸트가 갑작스런 봉변에 당황하며 소리쳤고 지저분한 욕정에 씰룩이 는 눈동자로 메르퀸트의 팔을 잡고 있던 휴센을 보며 줄리탄은 검을 뽑아 서라도 말려야 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두 자루의 검이 자기 손에 없다는 걸 잊고 있다.) 하지만 줄리탄보다 카리나보다 톨베인보다 빠른 자가 있었던 것이다. "마, 말락! 안돼!!" 휴센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애쓰던 메르퀸트는 주변의 공기가 불안하 게 울리기 시작하자 당황하며 소리쳤다. "뭐, 뭐야 이 소리는!" 귀족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만찬실 전면에 있던 값비싼 스 테인드 글래스가 끔찍한 진동과 함께 산산이 깨져버리고 창문들이 열리며 흙먼지가 쏟아져 들어와 휘몰아 쳤다. 카넬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 다. "누가 봐도 말락, 너는 악령이야......" 몰아치는 흙먼지는 휴센을 씹어먹을 듯이 다가가며 엄청난 회전력에 의해 스파크가 터져올랐고 곧 청년의 공포스러운 형체가 만들어졌다. "으히히히히히힛! 뭐, 뭐냐! 너는!" 듣기 싫은 괴성을 지으며 휴센은 아무리 말해도 놓지 않던 메르퀸트의 팔을 놓고는 쓰러져 엉덩방아를 찍었다. 말락은 불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로 휴센을 쏘아보며 (아니나 다를까 아무 말도 없이) 그의 가슴을 향해 대낫 을 내리찍었다. "죽이면 안 돼!!" 메르퀸트가 외치지 않았다면 휴센의 속된 인생은 오늘부로 마감하게 되었 을 것이고 그를 이용하려던 파르낫소와 리하르트가 머리를 쥐어쌌을 것이 다. 줄리탄 주변에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상대에게 필요한 건 채찍이지 당 근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몇몇 있는데 그 중 대표 적인 자 들이 홍안(紅眼)의 카넬리안, 흉몽 젤리드 그리고 센티넬 말락이다. "에, 엑퀼라인! 엑퀼라인 어딨나!" 휴센은 몸을 두쪽을 내버리려던 내낫을 멈춘 말락을 올려보며 계속 추하 게 뒤로 몸을 끌며 외쳤지만 - 이상하게도 엑퀼라인은 없었다. 말락의 목 소리가 만찬실을 울렸다. "난 언제나 메르퀸트의 곁에 있다. 한번만 더 메르퀸트 근처에서 그 입 과 손을 놀린다면 그때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네 놈을 산채로 이형들의 먹이로 던져주마." 말락은 그리고는 조용히 사라졌고 공중에 떠 있던 흙먼지가 스스륵 바닥 에 떨어졌다. 휴센이 창백해진 얼굴로 부들거리고 있을 때 세라피스가 뒤 에서 서럽게 외치고 있었다. "이봐요! 나 왔어요! 나...... 황젠데. 몇번을 불러도 아무도 관심이 없 네...... 너무하네 모두들." "폐, 폐하!" 뒤늦게 귀족들은 무릎을 꿇으며 '살았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라피스 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좋아요. 모두들 활기차서. 하지만 짐은 지금 평온히 식사하고 싶으니 더 이상 어떤 소란도......" "노블리스!!" 피곤한 일들은 동시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감히 황제 세라피스의 말을 끊 어버리는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결국 세라피스는 인상을 구겼다. 인피타르를 들고 있는 엑퀼라인이었다. "크크크크! 이 검은 이제 내꺼야! 이 자리에서 우리 결투를 마무리 짓는 게 어때!" "에, 엑퀼라인 경!" 휴센은 갑자기 살기를 뿜으며 등장한 엑퀼라인을 보며 소리쳤지만 엑퀼라 인은 휴센을 벌레보듯 흘낏 내려본 뒤에 줄리탄에게 걸어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인피타르를 보며 줄리탄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 검 뽑지마!!" "아아. 그러시겠지. 하지만 난 이걸로 네 놈의 목을 잘라버린 다음에 건 방진 저 씰 그레시다의 머리채를 끌고 황궁 밖으로 나갈꺼야. 날 막을 수 있는 놈은 이제 아무도 없어!" "그게 아니라 뽑으면 죽는다니까!" "그럼 당연하지! 네 놈은 죽어!" "멍청아! 내가 아니고 니가 죽어!" "푸하하핫! 살아남으려고 별 소리를 다 하는 구나!" 엑퀼라인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세라피스는 '하루에 난동은 두번 으로 족해.'라고 눈을 치켜 올리며 파르낫소에게 말했다. "내 검 가져와. 저 녀석의 목숨을 친히 끊어줄테니까." "폐, 폐하!" 사실 세라피스는 연극을 잘해서 그렇지 자존심을 긁는 짓에 참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건 황제가 되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프를 마시던 물키벨 이 보기에는 세라피스가 나설 기회도 없을 것 같았다. 물키벨이 수저를 내 려 놓으며 레비아탄을 보며 말했다. "레비야. 인피타르가 뭔지 궁금하다고 했지? 저걸 보면 어떤 검인지 대충 느낄 수 있을 꺼야." "......" 엑퀼라인은 인피타르의 도두을 잡았고 곧 놀란 줄리탄 앞에서 인피타르를 뽑아 올리며 소리쳤다. "모두 뒈져버릴 준비는 됐겠지!!" 차아아앙 소리를 내며 멋드러지게 뽑힌 인피타르는 그러나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았다. 당황한 엑퀼라인이 보기에 그 검은 줄리탄 때와는 달리 그냥 얼빠진 신호등마냥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섬광도 검기를 쳐냈던 던 막강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모두들 귀 막아!!" 물키벨이 날카롭게 소리쳤고 - 그때였다. 인피타르가 폭발하듯이 눈이 멀 어버릴 것 같은 푸른 섬광이 작렬했고 곧 거대한 고문실에서 들리는 사람 들의 끔찍한 비명처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옥의 목소리'가 뿜어져 나 오며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다. 그와 함께 엑퀼라인의 몸은 인피타르를 들 고 있는 팔에서부터 기괴하게 뒤틀리며 뼈가 차례대로 산산이 부셔져 버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인피타르 속의 어떤 존재들이 그의 몸으로 파고 들어서는 생명력을 뽑아먹고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 했다. 그는 몸 을 미친듯이 떨며 마지막 생명을 모아 소리쳤다. "주...... 죽여줘! 차라리 죽여줘! 나, 날 그곳으로 끌고 가지마! 으아아 아악!!" 그 피맺힌 단발마를 끝으로 엑퀼라인의 몸은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버린 진흙 인형처럼 사방에서 균열이 생기며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처럼 분해 되어 버렸다. 본 사람이 아니면 말해줘도 절대로 믿지 않을 그런 괴이하고 참혹한 광경이었다. 모두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줄리탄 만이 한 숨을 내쉬며 걸어가선 그 검을 집어 들었다. "주, 주인님!!" "괜찮아. 난 이녀석들하고 약속했으니까." 줄리탄은 인피타르를 살펴보다가 다시 검집에 넣었고 카넬리안은 굳은 표 정으로 말했다. "이녀석들? 약속? 주인님 그 이상한 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무 슨 약속한거야! 말해!" "......별 거 아냐. 그냥 서로 잘 해보자고 말했을 뿐." "거짓말!" "진짜라니까 그러네." 줄리탄 역시 인피타르의 힘의 근원이며 그 검속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어 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줄리탄에게 대화를 걸어오는 것도 아니 었고 자신들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줄리탄은 인피타르를 잡으며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상 인피타르도 자신의 생명력의 일부만을 가 져갈 뿐 더 이상 헤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 뿐이다. 목숨 을 담보로 맡기는 위험한 검이지만 익숙해 지면서 도리어 마음은 편해졌다 테시오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 '세상의 무게를 짊어져도 상관없다고 말했지? 그렇다면 그 검을 차라. 저 울에 올린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신념의 무게를 잘 살펴보고 그 신념으로 저울이 기운다면 그 검 인피타르를 뽑는 거다. 니 목숨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넌 그 검이 두렵지 않을 꺼야.' 이제야 줄리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라피스는 그의 담대한 배 짱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 광경에 질려버렸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안 먹을래. 식욕이 뚝 떨어졌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정말 평범한 모습에 평범한 성격에 평범하게 행 동하고 있는 줄리탄을 새삼 놀라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검을 들 고 평범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정신력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후 줄리탄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인티파르를 뺏어서 숨 기려는 카넬리안을 달래느라 한참동안 진땀을 뺐다. 그렇게 정신 없었던 황궁에서의 하루가 지나갔고 헤스팔콘의 눈을 피해 은밀히 진행될 전쟁의 준비를 위해 다음 날 사략함대 사람들은 베오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Chapter#12 : 전쟁의 조건 끝 Next Chapter : 침묵의 시 -Blind Talk 아아 악령같은 말락이 튀어나오고 '미지의 힘'에 엑퀼라인이 조각나고 펄 프 호러소설 같은 한편이었습니다. 가끔 이런 부분 쓰고 싶을 때가 있습니 다..... 아무튼. 이번 챕터가 끝났네요. 여기서 줄리탄이 말했던 향신료 '샤프란'은 강한 향에 씁쓸한 벌꿀같은 맛이 나는 실제 있는 향신료로 이탈리아 쌀요리인 리조토나 마르세이유의 생선스프 부야베스 등에 넣으면 맛있습니다...... 라고들 하는데 전 잘 모르겠습니다. 중세 때는 황금보다 높은 값어치를 지 녔으며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입니다. 줄리탄이 비싼 걸 엉망 으로 썼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당연하죠.(단 실제 샤프란은 분말로 만들지 않는 편입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학명은 크로쿠스 사티부스이며 샤프란 꽃의 암술머리를 모아서 만드는 것인데 1만4천 개 암술머리에서 나 오는 샤프란의 양은 30g 밖에 안되니까 비쌀 수 밖에 없지요. 달라카트의 황실음식들은 '미스터 초밥왕'같은 만화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 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모든 음식재료는 황실직할의 농장에서 직접 가져 오는 상등품이며 고기류역시 수렵물만을 사용합니다.(꼭 영국 왕실 같군.) 음식류는 프랑스 뉘벨 퀴진 방식에다가 이탈리아 토속풍의 풍미를 퓨전한 스타일 입니다. 모던한 프랑스풍 정찬보다는 푸짐하고 향신료도 많이 쓰는 편이겠죠.(현재 제가 배가 고파서 그런지 말이 많아집니다.) 반면 헤스팔콘의 황실정찬의 재료들은 제국의 각 왕국들에서 보내오는 공물 들로 이뤄지니까 중국황제마냥 이 지방 저 지방 특산물들이 다 올라오는데 신선도는 떨어지는 편입니다.(이 시대는 트럭이나 제트기 같은 고속운송수단 이 없기 때문에 당연함. 기사가 철가방들고 달려다니면 전국 이틀내 배달이 가능할지도...) 가르바트는 날도 상당히 춥고 야채류가 상대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에 육류와 페세테르같은 고지방 어류를 중심으로 섭취하며 진한 탕과 스튜 등이 발달 해 있습니다.(그러니까 그곳 귀족들은 생크림을 듬뿍 넣은 비프트라가노프 - 러시아 스튜 요리등을 자주 먹겠지요. 줄리탄네 마을 키오네는 페세테르 를 이용해서 만드는 요리만 30여종에 가깝습니다.) 오칼란트는 상당히 바람이 많이 눈은 의외로 많이 오지 않아서 건조합니다. 물론 항시 쌀쌀해도 오펜바하도 '전 국민에게 난로를 무상 보급한다.'라고 칙령을 내릴 정도입니다.(난로는 그렇다고 치고 그 엄청난 땔깜은 또 뭘로 충당할 꺼냐?) 그래서 뜨거운 국과 자극적인 음식이 많으며 밀보다는 쌀을 선호하는 편입니다.(오칼란트에는 지형적으로 평야가 적기 때문에 쌀은 거의 다 곡창지대가 있는 헤스팔콘으로부터 전량 수입함. 식량자급능력이 제로인 무시무시한 나라였음.) 오칼란트를 여행한 서대륙 이실라트 사람들은 입에 도무지 맞지 않은 이질적인 음식들에 투덜거릴 정도 입니다. 음식의 미학은 달라카트가 가장 발달되어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달라카트의 세련된 문화와(천민들에겐 달나라 이야기지만) 다양하고 풍족한 식재료가 자라는 풍토 때문일 것 같습니다. 줄리탄도 달라카트에 와서 그 음식문화 에 상당히 쇼크를 먹었고 - 현재는 꽤 노련하게 달라카트풍 풀코스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사실 일년만에 검술의 레벨이 오른 것보다 일년만에 타국 요리에 박식해 지는 것이 훨씬 힘든 것 같습니다. 줄리탄은 정말이지 '타고난 요리사'라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건 아무 없어 보이는 우주에서 의미를 찾는 여행'이라 는 말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나오는 부분를 멋대로 고쳐서 쓴 겁니 다. 이슈마엘이 했던가? 아 그런데 요즘에는 메일도 별로 안오고(사람이 간사한게 오다가 안오니까 쓸쓸해 짐...) 이상하게 카페에 등록된 한메일이나 하이텔 하이메일로만 오네요. 혹시 하나넷 메일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최근에 하나넷으 로 보내신 분 있으세요? 혹시 있으시면 PULSATOR@hitel.net으로 다시 한번 보내주시겠어요?) 그럼 다음 편에서. 헤밍웨이가 말했다. '인생은 아릅답고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난 후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영화 '세븐' 中 마지막 독백 E-MAIL : billiken@hananet.net Mr.Big 의 Wild World를 들으며... ps:죄송. 이번 편도 제대로 다시 읽어보지 못하고 올려서 혹시 읽으시는 분들 거친 부분이 걸릴까봐 걱정되네요. 제 목 : [ DRAGON LADY ] 13-01 : 침묵의 시 등록자 : PULSATOR(김철곤) 등록일 : 03-21 조회수 : 545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3-01 : 침묵의 시 To the waste land 1. 세라피스가 황제에 즉위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그에 반발하는 몇몇 지방 귀족들은 달라카트를 떠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료 였던 휴센의 '배신'과 더불어 세라피스가 '마음에 안드는 자는 타국으로 가도 좋다.'라고 공표했 기 때문. 헤스팔콘으로 떠나는 자들 중에는 황실의 관리였던 자들도 포함 되어 있었다. "흥. 어차피 재산은 모조리 챙겼으니까 헤스팔콘으로 가도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지. 안 그렇소, 자롯 공?" "물론이요. 헤스팔콘에 가서 세파리스 황제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있 다는 걸 알려주겠소! 어디 두고 보자고." 라는 대화를 나누며 달라카트 관문으로 향하고 있는 '이민귀족'들은 모두 보기 거북할 정도의 화려한 마차를 타고 있었고 그 뒤에 잔뜩 따라오고 있 는 수레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긁어 모은 금과 보석들, 사치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렇게 관문으로 향하는 마지막 산길을 넘 어갈 즈음. 갑자기 선두의 마차가 멈춰섰다. 첩들과 마차속에서 엉켜있던 귀족들은 갑작스런 급정차에 몸이 급히 앞으로 쏠렸고 곧 인상을 구기며 소리쳐 대기 시작했다. 감히 누가 귀하신 몸의 마차를 막는단 말인가. "이런 제길! 무슨 일이야!!" "아, 앞에 누가 서 있습니다." "뭐? 어떤 새끼가!" 코를 킁킁거리며 옷을 추려입고 마차 문을 박차고 나온 귀족들은 외길 앞 을 가로 막고 기다리고 있는 훤칠한 청년과 검은 가죽 코트를 입고 메이스 를 들고 있는 여성을 볼 수 있었다. 손에 묵직한 문서를 들고 있는 청년은 바로 리하르트였다. "으응? 저 놈은 뭐야!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해!!" 귀족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사병들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지만 리하르트는 고개를 뻣뻣이 들은 오만한 표정 그대로 커다랗게 외 쳤다.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황제 폐하께서는 폐하가 베푼 황은을 망각하고 부 정을 저지른 당신들은 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은 너희들이 저지른 죄 에 대한 기록이다!" 그 말과 함께 리하르트는 들고 있던 문서를 귀족들에게 집어 던졌다. 영 문을 모르는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리하르트는 곧 황제로 부터 받 은 처벌집행권한을 발동 했다. "그 죄값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한다." "뭐,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귀족들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타국으로 떠나도 좋다고 하더니 갑자 기 관문 앞에서 모두 죽이겠다고? 리하르트는 입가에 차가운 냉소를 띄우 더니 갑자기 조소에 가득찬 웃음소리를 냈다. "와하하하하! 너희 바보들이냐? 너흰 속은 거야!" "뭐라고!" "황실에서 너희들을 조용히 헤스팔콘으로 보낼꺼라고 생각했나? 나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사람들을 수탈해서 긁어모은 그 재산을 우리에게 넘겨주고 너희는 여기서 죽어줘야 겠다. 어때. 너희들이 가난한 백성들 등쳐 먹던 방법 그대로지 않은가." "미친 놈! 우리는 헤스팔콘 황실과 친하다! 이 사실을 해스팔콘에서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우둔한 놈들. 헤스팔콘에 바치는 조공의 량이 줄어들지 않는 이상 그들 은 너희가 죽든 말든 상관 안해. 그들에게 중요한 건 너희들이 바치는 황 금의 무게이지 너희들의 목숨이 아냐. 헤스팔콘 제국안전공안부에 있던 내 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좋다." "......!!" 설마 그 멍청해 보이는 황실에서 뒷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다. 리하르트의 말대로 세라피스는 헤스팔콘에 예전보다 더 많은 조공을 보내고 있었고 달 라카트 지방귀족 몇십명 죽은 것 정도 - 그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것 이다. 그때 귀족들 사이에서 실없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캬캬캬!! 이거 웃기는 군! 그래서 우리들을 너희 둘이서 모두 죽이시겠 다? 니 눈 앞에는 우리들의 사병이 보이지 않나? 우리는 기사들도 고용하 고 있다! 죽는 건 시건방진 네 놈이야!" "황실의 명령에 저항할 생각인가." "황실 좋아하시네! 조금만 더 가면 헤스팔콘이다. 네 놈을 죽이고 그곳까 지 가면 그걸로 끝이야. 세라피스 놈도 멍청하군! 달랑 너희 둘만 보내서 그런 말을 하면 우리가 그 소리를 들어줄 꺼라고 생각하다니! 크하하하!!" 귀족들 말대로 아무리 리하르트 옆에 특무대 출신 로즈마이어가 있다고는 해도 하급이라곤 하지만 기사들까지 끼어 있는 백여명 귀족 사병들을 상대 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리하르트는 역시 자기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다 는 듯한 얼굴로 수풀 속을 보고 말했다. "약속대로 저 자들을 처리해 주셔야 겠습니다." "......부탁한다는게 이런 거 였나." 그 말과 함께 수풀 속에서는 큰 키의 긴 흑발을 하고 있는 남자와 그의 뒤를 따라 작은 키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젤리드와 카리나였다. 귀족들은 그들을 보며 숨막혀 죽을 정도로 더욱 더 크게 비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하하핫!! 기껏 황실에서 보낸 군대가 두명이냐! 그것도 한명은 여자! 푸흐흐흐흣. 이거 이거 황실이 가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웃기는....... 컥!" "그 지저분한 웃음소리, 듣기 싫다." "어...... 떻게...... 이렇게...... 빨리!" 갑자기 공기가 폭발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숨 넘어가게 웃어 재끼던 귀 족 앞에 나타난 젤리드는 상대가 눈치 채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귀족의 배에 자신의 검, 흉수를 쑤셔 넣은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의 경악에 찬 모 습을 싸늘한 표정으로 둘러본 젤리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에 꿰뚫린 자 신의 배를 바라보고 있는 귀족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잘 들어라." "으아악!" 젤리드는 쑤셔넣은 흉수를 비틀어서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젤리드 빙크리스틴, 흉몽이다. 너희같은 조무래기 귀족들은 고용할 수도 없는 파문기사라는 걸 알아둬라." "저, 저 자가 흉몽!!" 귀족들이 고용한 기사들도 흉몽의 악명 정도는 들어 보았기 때문에 그 말 을 들으며 단숨에 공포가 목까지 차 올랐다. 리센버러에서의 혈전 이후 행 방이 묘연했는데 설마 달라카트 황실이 고용했단 말인가. 그들의 공포심에 쐐기를 박아버리는 듯 젤리드는 그대로 찔렀던 검을 들러 올려 귀족의 몸 과 머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고 푸슈슈슉하는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피 가 솟아 올랐다. 몇번이나 말했지만 젤리드가 농담이라도 걸어주는 상대는 리이 디트리히 뿐이다. 젤리드는 흉수에 엉킨 피를 바닥에 휘둘러 털어내 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음." "뭐, 뭐하고 있느냐! 숫자는 우리가 우세해! 어서 쳐라!" 귀족들은 뒷걸음질치면서 소리 소리 질렀지만 사병들은 움츠려 들 수 밖 에 없었다. 우세하긴 커녕 검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지 모를 상황이다. "이, 이런 말은 없었잖아. 상대가 흉몽이라는......" "젤리드만 있는 거 아냐!" 파즈즉! 사병들이 뭉쳐있는 곳을 새하얀 빛무리가 달려들며 머리뼈가 깨지고 몸이 조각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병들 무리 속으로 뛰어든 카리나였다 . 사병들의 절망적인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카리나는 끼고 있는 팔찌에서 빛을 발하며 표범처럼 그런 사병들 위를 날아다니며 사냥하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두꺼운 갑옷도 그녀가 내지르는 공격에 단번에 깨져버렸고 병사 들이 두려움에 검을 휘둘렀을 때는 이미 그들의 머리가 조각난 뒤였다. "너희들이 귀족의 졸개기사 들인가?" 젤리드는 귀족들이 고용한 다섯명의 기사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상황이었 다. 그러나 표정이 잿빛이 된 건 귀족쪽 기사들. 그들은 젤리드가 자신들 과는 격이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흉몽 젤리드에 게 자비를 구걸해 봐야 돌아오는 건 검 뿐이라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먼 저 젤리드 뒤에 있던 기사가 검을 치켜 올리며 돌진했다. "트아아아앗!!" 순간 그는 젤리드가 검을 들며 등뒤로 몸을 돌리는 걸 환각처럼 볼 수 있 었고 그와 함께 들고 있던 검이 흉수와 충돌해 산산조각이나며 몸도 그 충 격에 으깨져 버리며 두동강이 나서는 몇십미터나 날아가서 툭툭 떨어졌다. 그들로서는 절망의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일 것이다. "너희들, 주제를 모르는군. 한꺼번에 덤벼!" 젤리드는 악마같은 눈빛으로 변하며 소름끼치는 목소리와 함께 뿔뿔이 도 주하기 시작한 기사들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2. 서대륙 이실라트에서는 가르바트 북부에 위치한 한성(寒性) 사막과 더불 어 달라카트 최대의 불모지 티브 사막이 양대 사막성 지형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으며 신이 외면한 듯 기후 또한 생명체가 존재하기 에는 너무도 가혹한 곳이었다. 그리고 줄리탄과 카넬리안, 키마인과 호이 젠은 세라피스의 부탁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그 티브 사막을 걷고 있었다. "카넬리안. 괜찮아?" "......으응." 사막지형을 다니는데 좋은 나트를 타고 있는 줄리탄은 자신의 등에 업히 듯이 뒤에 타고 있는 카넬리안에게 연신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메마른 입술 을 조금 열어 힘없이 대답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니가 갑자기 아프다니." "......씰들도 가끔씩 아파해. 내색을 안해서 그렇지." 그녀는 사그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넬리안은 티브 사막에 들어온지 이 틀 째 되는 날부터 무슨 일인지 몸이 아픈 것 같았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도 끄떡없기 때문에 '평생 몸 아플 일이 없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아파하며 식은 땀이 흐르는 얼굴을 줄리탄의 어깨에 부비고 있었다. "내색을 안하다니? 어쩌려고 그래!" "주인님은 참 순진해. 씰이 아파한다면 좋아할 사람 없어. 잘못하면 주인 에게 버림받지. 그래서...... 죽기 전까지 내색하지 않는 거야. 주인님은 차암 좋은 사람이지만...... 씰들의 성격은 어쩔 수가 없어." 지겹게 이어지고 있는 자갈사막에서는 짓눌러 버릴 듯이 강렬한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줄리탄의 몸을 껴안듯이 기대어 있는 그녀는 힘든 숨소리 를 내며 줄리탄의 귓가에 속삭여주고 있었다. 죽기 전까지 내색하지 않아. 곁에서 나트를 타고 따라오던 키마인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안타까운 얼굴 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부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나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줄테니까." "걱정하지마...... 우리는 고통에는 익숙하니까." "그런 말이 어딨어. 옆에 있는 나를 생각해서라도 자기 몸을 좀 소중히 해달라고. 부탁이야." "....... 내가 할 소리네." 그녀는 마른 목소리로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는 계속 몸이 아픈지 조금 인 상을 찡그렸다. 줄리탄은 그녀가 일년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씰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씰은 가족도 자식도 없이 영원 히 혼자라는 사실이야.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가정을 만들 수도 없고 계 속 계속 누군가 죽어가는 모습만 지켜보면서 끝도 없이 살아야 하지. 우습 지? 이런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게? 그런데 말야 솔직히...... 아 무리 겪어도 외로움이라는 것에는 익숙해 지질 않아.' 눈물이라도 쏟으면서 말해야 할 그런 말을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었다. 몸 이 아프고 힘든 것도 받아주고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으니까 혼자서 담아둬야 한다. 세상이 자신을 동정해 줄 꺼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채념해 버린 것이다. "빨리 목적지를 찾아야 겠어. 일단 너부터 쉬게 해야 하니까." "고마워."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인 뒤에 눈을 감았다. 줄리탄은 어깨 넘어 들려오는 그녀의 아픈 숨소리를 들으며 계속 자박자박 밟히는 자갈 사막 앞으로 나 트를 이끌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햇빛을 받아 더욱 빨간 머리칼 끝으로 뭉쳐 줄리탄의 어깨에 떨어졌고 그것은 곧 이 열사의 사막으로 증발해 버렸다. 줄리탄은 자신의 등에 닿아 있는 흠뻑 젖어있는 그녀의 뭉클한 가슴을 느끼며 마음이 무거웠다. "호이젠.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키마인 역시 카넬리안의 상태가 드물게 안좋아 보이는 것이 걱정스러웠는 지 길을 찾으며 앞장서고 있는 호이젠에게 말했다. 호이젠은 매섭게 불어 오는 비사(飛沙)에 흩날리는 푸른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몇시간 더 가면 사막호(沙漠湖)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희미한 물 냄새가 나는군요." "좋아. 빨리 가자!" "예. 저의 테이머시여." 그들이 이런 끔찍한 사막으로 간 이유는 세라피스의 검술 스승이었던 방 랑검사 한명을 설득하여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그랜사이어 스탈리온. 그에 대해 젤리드는 딱 한마디로 평했었다. '오펜바하가 지배하 는 땅 오칼란트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검사는 야수 그랜사이어 한명 뿐이 야.' 그만큼 그는 검으로 살아가는 자들 사이에선 전설로 통했지만 지금은 티브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은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탄은 세라피스가 그런 엄청난 자를 설득하는데 왜 자신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카넬리안을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머리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거친손길 손길처럼 몰아치기 시작한 모래바람을 정면으로 뚫으며 계속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Blind Talk 아아. 난데없이 사략함대 일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임무'를 수행하기 시 작했습니다. 왠지 돌아다니는 모습이 1부 분위기네요. 1부보다 줄리탄은 확실히 성장했지만. 이번에 이름만 언급된 그랜사이어 스탈리온은 오칼란트에서 유명했던 검사 로 기사작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 사이에서 그의 검술이 자주 입 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상당히 독특하게 젤리드가 쓰는 브로드 쇼드 계열의 검 두 자루를 동시에 쓰는 이도류(?)인데 - 일본도도 아니고 두손 으로 들기에도 무거운 검을 두자루 씩 자유자재로 휘두른다는 것이 사람들 눈에 경악스럽게 보이겠죠. 강력한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이름도 그랜사이어(Grandsire - 종마) 스탈리온(Stallion - 종마) 입니다.-_-;; 물론 오칼란트에서 도망쳐 와서 은둔하고 있는 자니까 세라피스의 공식적 인 스승은 아니었습니다만. 으으 이상한 부분에서 5권이 끝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에피소드들을 줄여가 면서 어떻게든 5권 끝부분을 멋지게 맞추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티브 사막은 책에는 지도가 나와 있지만 굉장히 큰 곳입니다. 타클라마칸 같은 고원사막이나 그린랜드 같은 한성사막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교차 엄청 나고 강수량또한 쥐꼬리만한 불모지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대충 모델은 사하라 + 네바다 사막 정도. 모래사막은 전체의 15%이며 줄리탄이 있는 곳 은 비사바람 쌩쌩 불어오는 자갈사막입니다. 사실...... 사막은 관목사막 이나 선인장사막(멕시코 북서부 사막) 초본사막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티브 사막은 염분사막에 가깝고 모래사막은 전체 실제 전체 사막의 5-10%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대부분 자갈이나 선상지로 이뤄진 분지가 많지요. 분위기나게 모래사막을 깔아버리려고 했지만..... 역시 자갈 사막이 멋진 것 같습니다. 카넬리안이 아픈 이유는....... 사실 그녀는 자주 몸이 아픕니다. 그녀만 이 아니라 씰들도 몸이 아플 때가 있는데 그녀 말대로 그걸 내색하는 씰들 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만난 뒤에 꽤 긴장이 풀어져 있기 때문에 아픈 것이 들어나 버린 것인지도.(이번에는 특히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는 죽지는 않습니다. 몸 아픈 것 정도로 죽 는다면 (카넬리안의 말을 빌리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 여 간해선 죽을 수가 없단 말야.' 입니다.(하이랜더냐...) 꼭 손에 넣고 싶은 것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어. 흔해 빠진 달콤한 얘기라면 한번 쯤은 접해 보고 싶군. 용기다 사랑이다 라고 요란떨지 말고 그런 기분이 들면 돼 쥐고 있는 주먹을 쓰지 않고 할 말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상처 입었다면 이빨을 드러내자.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함께, 이제부터 함께 그 놈을 세게 때려주러 가지 않을래? 강하게 잘라 버리면 되는 거야. 뒤에 남는 상처를 무리하게는 감출 수는 없어 새벽이다 아침이다 요란떨지 말고 그 눈을 뜨면 돼 사는 것은 슬픈거야? 믿을 말이 없는 거야? 작은 힘이 사라지지 않는 한 눈물은 언제라도 뿌리칠 수 있어 지금부터 그 놈을, 이제부터 그 놈을 세게 때리러 갈래? ...Chage and Aska 의 Yah Yah Yah 였습니다. 일본 드라마 주제가이기도 했고 가사도 리듬도 좋아서 자주 듣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아참. 티엘님. 이번에는 메일 제대로 도착했나요? ^_^ 역시 일전에 제 메일 서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Kate Bush의 Brazil 을 을으며...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 '브라질'에 나오던 음악이었죠. 그 영화 정말 감동입니다. 국내에선 '여인의 음모'라는 괴이한 제목으로 나왔지만 테리 길리엄 영화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봤고... 또 멋진, 너무도 감동적인 엔딩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로버트 드 니로가 나오는 것도 금상첨화.)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3-2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22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384 제 목:[ DRAGON LADY ] 13-02 : 침묵의 시 관련자료:없음 [66155]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22 12:47 조회:280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3-02 : 침묵의 시 Hard way but happy 1. 세라피스가 사략함대에 부탁한 일들 때문에 그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정신없이 임무를 수행중에 있었다. 그러던 중에 물키벨에게 베오폴트를 끌 려 다니던 톨베인은 갑자기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자라탄에는 나 밖에 안 남았잖아!' 그렇다. 현재 자라탄에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은 톨베인과 물키벨만 남아 있는 것이다. 돌아다니기 귀찮다며 자라탄에 남은 톨베인이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피곤했다. 물키벨이 뒤따라오던 톨베인에게 마구 손을 흔들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톨베인아! 이리 좀 와봐!" '젠장. 줄리탄이나 시오 녀석 따라갈 껄!' 톨베인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물키벨에게 걸어갔다. 보나마나 또 시덥잖 은 물건들 잔뜩 사서 짐꾼이 되거나 요상한 옷들 입히는 옷걸이로 전락해 버릴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며 톨베인은 고요한 휴식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든 해룡의 수장의 집요한 손에서 도망쳐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에잇!" "앗!" 톨베인과 카넬리안의 공통점이 있다면 결심을 실천하는데 긴 시간이나 복 잡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톨베인은 물키벨에게 걸어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골목길로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고 물키벨이 '어딜 도망쳐!! '라고 화를 내며 곁에 서 있던 레비아탄에게 소리쳤다. "레비야! 가서 잡아와!" "......" 과묵한 레비아탄 역시 뭔가 이 놈의 관계가 다람쥐 챗바퀴 도는 것 마냥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키벨 에게 말했다. "잠시 어디 좀 가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또 몇십년 사라져 있으려고?" "아니. 도서관에 반나절 가량 가 있으려고 합니다. 인간들의 애정심리에 대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이잉! 톨베인 찾아주고 갔다와."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레비아탄은 매몰차게 물키벨을 남겨두고 시립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 겼고 황망한 바람이 몰아치는 시가지 한복판에 남아버린 물키벨은 군중 속 의 고독감을 느끼며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뭐야 모두들. 씨잉! 나 혼자 쇼핑할 꺼다 뭐!" 그녀는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번화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2. "야. 저 계집애야. 여기로 오고 있어." "별로 돈 많아 보이지 않는데?" "아냐. 보기는 어린애 같아도 분명히 돈많은 귀족 아가씨가 분명해." "확실한거야?" "그렇다니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나 양아치는 있기 마련이다. 최근 베오폴트로 한몫 잡기 위해 온 다섯명의 건실한 양아치들은 강도짓을 할 사냥감을 물색하던 중 단연 물키벨을 물망에 올렸다. 누가봐도 충동구매의 여왕인데다가 결정 적으로 그들은 물키벨이 해룡의 수장임은 물론 해적들도 피해가는 가스발 사략함대 일원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몹시 풀이 죽 어 있는 표정의 물키벨이 인적이 뜸한 골목길로 들어오자 그들은 준비해 두었던 단검을 뽑아들고 물키벨에게 달려 들었다. 위기 상황이었건만 강도 를 당해봤을 리가 없는 물키벨은 자신을 둘러싼 녀석들에게 고개를 갸웃거 릴 뿐이었다. "응? 너희들은 누구니?" "야! 입 틀어 막아!" 우악스런 손으로 물키벨의 입을 막고 구석으로 끌고 가자 상황의 심각성 을 파악한 물키벨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으으읍!! 읍! 우으으으읍!" 해석하자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이지만 강도들은 '있 는 돈 다 드릴께요!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 들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물키벨의 몸을 더듬으며 '값진 것'을 찾기 시 작했다. 그러나. "젠장! 아무 것도 없잖아!" 당연하다. 물키벨이 산 물건들의 청구서는 모조리 메이에게 전달되기 때 문에 그녀가 돈을 가지고 다닐리가 없는 것이다. 강도짓에도 사전조사는 필수라는 사실을 깨닳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때 한 명이 물키벨의 끼고 있던 반지를 뽑으며 말했다. "쳇. 이거라도 가져가자." "으아아악!!" 순간 물키벨의 입을 틀어막던 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땠다. 물키벨이 손가락을 꽉 물어버린 것이다. 물키벨은 팔다리가 잡혀 바둥거리며 소리 쳤다. 그 청록색 반지는 톨베인이 사준 것이었다. "그거 가져가지마!! 중요한 거란 말야!" "시끄러워!" 짜악! 소리가 나며 물키벨의 뺨을 때렸지만 물키벨은 울먹거리는 얼굴로 계속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반지 돌려줘어!!" "그런데 이 쬐끄만 계집애가 죽으려고!"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달리 도통 입 다물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치밀어 오른 강도가 손바닥을 번쩍 들며 뺨을 다시 때리려는 순간이었다.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충돌음이 들렸다. 푸슉. "어? 어?" "뭐야 이거!!" 뺨을 갈기기 위해 번쩍 든 손을 뚫고 작은 단도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단도가 날아온 쪽에선 다음 단도를 꺼내고 있는 톨베인이 서 있었다. 그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툭하고 말을 꺼냈다. "혼자 돌아다니니까 그런 일을 당하는 거에요." "왜 이제야 온 거야!!" "그럼 다시 돌아 갈까요?" "가지마!!" 톨베인은 능숙하게 단도의 날을 중지와 검지 사이로 잡으며 그들에게 걸 어가기 시작했고 강도들은 톨베인의 태연한 태도에 당황하며 순간적으로 물키벨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가, 가까이 오지마!!" "싫어." "오면 이 계집애를 죽여버린다!" "죽이면 곤란한데...... 그 여자 죽으면 이 세상은 멸망할지도 몰라. 너 희들한테만 하는 말인데, 그 여자 해룡의 수장이야." "그런 거 알려주지마아!!" 도리어 물키벨이 화가 나선 외쳤지만 강도들의 눈엔 황당함이 아른 거렸 다. 용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란 말인가. "너희들,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지는 않겠지?" "에이 썅!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라는 순간 톨베인의 팔이 올라갔고 물키벨을 위협하던 자의 어깨에 단도 가 박혔다. "우아악!!" "너희들 초보로군. 강도는 아무나 하는게 아냐." 톨베인은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 빠른 속도로 품속에 있던 몇개의 단도를 거의 동시에 던졌고 그것은 마치 곡예처럼 물키벨 주변을 둘러싸던 강도 들의 팔과 다리, 어깨를 정확하게 파고 들었다. 이번에도 도리어 화를 낸 건 물키벨이었다. "위험하잖아!! 빗나가서 내가 맞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 "난 빗나간 적 없어요." 실제로 엄청난 팔 힘과 보통 사람의 다섯배의 시력을 가진 톨베인은 선상 에서 물밑 십여미터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단도로 정확하게 뚫어버리고 는 했다. 톨베인 식의 낚시법이라고나 할까. 청년 강도 지망생들이 비싼 수업료에 아파하며 신음하고 있을 때 그들의 머리를 툭툭 걷어차 버린 톨 베인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물키벨 앞에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 며 말했다. "당분간 나하고 같이 다녀요." "헤에! 정말?" "당분간 이에요. 다른 녀석들 돌아올 때까지." 그때 톨베인은 허벅지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방심한 것이다. 쓰러진 강도중 하나가 톨베인에게 달려들며 허벅지에 단검을 박았고 톨베인은 본 능적으로 자신의 소도(小刀)를 뽑아 맹수같은 눈빛으로 상대의 심장을 찔 러 버리려 했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 상대는 두려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살기어린 눈으로 톨베인이 검을 들이대자 강도는 살려달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톨베인은 뭔가 자기 자신에 대해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칼머리로 울고불고 하는 강 도의 정수리를 때려 잠재운 뒤에 인상을 쓰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토, 톨베인아. 괜찮아?" "상대를 죽일 때 주저하게 되면...... 살인전문가로서는 실격이에요." 톨베인은 통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허벅지에 깊게 박힌 단검을 뽑아 던지며 중얼거렸고 물키벨은 재빨리 자신의 드레스를 찢어 지혈해 주었다. . 그리고 톨베인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그의 머리칼이 차르르 흘러내려 눈빛을 감췄다. "빨리 가서 치료받자. 응?" "웃기는 얘기지만 아까 주저할때...... 줄리탄 놈이 떠올랐어요. 그 녀석 은 아직까지 누구도 죽여본 적이 없고 고집스럽게 살리려고 하잖아요. 아 정말 멍청한 녀석이구나. 누가 칭찬해 주지도 않는데 바보같은 고집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 바보한테 영향 받았나 봐요." 물키벨이 보기에 톨베인의 말은 당연한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소년의 독 백처럼 들렸다. 그리고는 누나같은 편안한 미소를 띄우고 지긋이 눈을 감 고 있는 톨베인에게 슬며시 다가더니...... 할짝! 갑자기 그의 뺨을 핥아 버린 것이다. 두 눈을 번쩍 뜨며 화들짝 놀란 톨베인. "우아아아아아앗! 무슨 짓이에요!!" "헤헤. 귀여워서." 그리고 물키벨은 작은 얼굴을 톨베인의 가슴에 비비며 그를 살짝 껴안았 다. 톨베인의 듣기 좋은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피 묻어요. 떨어져요." "괜찮아. 괜찮아." 물키벨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톨베인은 일년전 카넬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반쪽짜리 생명체도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것마저 없으 면 미쳐버리니까.' 물키벨은 이런 엉뚱한 장소에서 자신과 몸을 부비며 소 중하게 느끼는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무언가에 취한 듯한 콧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들의 사는 방식이라는 것도...... 오랜만에 느껴보니까 좋다아. 땀 냄새도 나고 남의 걱정도 들어주고 하루 하루 새롭게 느끼고 그래서 힘들 지만 포근해." "레비아탄 씨.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톨베인은 골목길 어귀에 서 있는 레비아탄을 보며 말했다. 그는 사실 톨 베인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레비아탄은 물키벨과 톨베인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역시, 책으로는 느낄 수가 없는 거였군요." 2. 가랑은 아름다운 인공정원의 그네에 앉아 따뜻한 캔커피를 손에 들고 있 었다. 눈 앞의 푸른 관목들 사이에서는 마치 신들의 담소처럼 테싱과 오펜 바하, 뮬렌 키에르 벨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공원 전체엔 마음을 안정시 켜 주는 음파가 고요한 파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씰들보다 일찍 깨어난 가랑은 자신과 계약한 테싱의 옆모습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다가 고 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황홀한 은하의 강이 꿈처럼 흐르는 우주공간이 그녀의 붉은 눈 속으로 들어왔다. 테싱은 말없는 가랑의 표정 을 세심한 곁눈질로 담고 있었다. "으, 으음......" 뿌연 꿈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카넬리안은 슬며시 눈을 떴다. 언제부터 정 신을 잃은 것일까. 자신의 몸에는 줄리탄의 붉은 망토가 덮혀 있었고 침대 에서 일어난 그녀는 밝은 황색의 흙벽으로 만든 방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근처의 창밖에는 환상 같은 별무리 대신 높디 높은 대추야자나무들이 솟아 있었다. 꿈도 환상도 아닌 사막호의 오후다. "어! 일어 났어? 몸은 어때?" "주인님......" 물이 찰랑이는 나무컵을 들고 나타난 줄리탄이었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돌아보며 잠깐 테싱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 버리며 방긋 웃었다. "말했잖아. 조금만 쉬면 이렇게 금방 좋아진다고." "이거 마셔. 그런데 너 자면서 웅얼거리는 건 처음 봤어." "뭐, 뭐라고 했는데?" 그녀가 매우 당황하자 의아해 하는 줄리탄은 좀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더운 건 정말 질색이야...... 라고 무슨 주문처럼 계속 웅얼거리던데. 듣는 나까지 더워져서 힘들었다고." "아. 그거였어?" 카넬리안은 다행이라는 듯이 물잔을 건내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 기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툴툴거렸다. "숙녀의 잠꼬대를 귀담아 듣는 건 변태나 할 짓이야!" "그럼 어쩌란 말야! 계속 옆에 있었는데 귀라도 막고 있을까?" "아무튼. 여긴 어디야? 그랜사이어 스탈리온이라는 사람은 찾았어?" "그게...... 좀 복잡하게 됐어." "잉?" 줄리탄이 난감하게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리자 이번에는 카넬리안이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문이 덜컥 열리며 터번을 두른 시커먼 사 내가 들어오며 다급하게 말했다. "큰일났어요!! 그랜사이어 패거리들과 키마인 경이 지금 싸우고 있어요!" "예에?" 카넬리안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또 뭔가 꼬였군.'이라고 이라 고 중얼거리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사막호에서 퍼온 물에는 모래가 섞여 있어 입안이 까칠거리고 있었다. -Blind Talk 지금 5권 마감 중입니다.(실은 마감일을 넘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본업의 마감까지 겹쳐서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도리어 이번편처럼 느긋하고(아닌가?) 감상적이고(아닌가?) 전형적으로(아 닌가?)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예전에 카넬리안의 캐릭터 모델링을 키우던 이구아나 '존스'에서 참고해 왔다고 했었는데...... 쓰다보니까 확실히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존스는 상당히 웃겼거든요? 존스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때는 아무리 맛있는 먹 이도 눈치를 보면서 먹지 않습니다. 무지하게 자존심이 세기 때문에 자기 먹는 모습은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한번은 그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딸기를 썰어서 주었습니다. 갑자기 뱀같은 혓바닥을 낼름 거리며 좋아하는 존스... 그러나 역시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괜히 딴 데 쳐다보면서 관심 없는 척 하더군요. 그래서 잠시 숨어 있다가 1분쯤 지나서 급습. 화들짝 놀란 존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딴청을 피우던데 그러나 증거는 남아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린 존스의 입가에는 딸기조각이 잔뜩 묻 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우습던지 딸기조각을 입에 달고 시침 뚝떼는 존스의 사진까지 찍어 두었습니다.(지금까지 현상 안했지만. -_-) 꽤 귀여운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이... 아무튼 이번에는 각 캐릭터들의 키와 나이를 공개하면서 끝냅니다. 물론 대략적으로 0, 5 단위로 끊으며 바뀔 수도 있습니다. 맘대로 상상해 주세 요. 1.카넬리안 : 160Cm-165Cm :상당히 키가 크지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이 많은데 카넬리안은 사실 다른 씰들보다 키가 작은 편입니다. 나이 - 측정불능(외모 : 10대 후반. 고등학생 정도.) 2.줄리탄 : 170-175Cm :평균적인 키네요. 카넬리안을 처음 만났을 때는 170이 조금 못되었는데 일년사이에 부쩍 컸습니다. 한참 클때니까... 나이 - 현재 17세 3.젤리드 빙크리스틴: 185Cm :무지하게 큽니다. 덩어리는 아니지만 근육도 있고 어깨도 넓어서 보통 사 람들은 모습만 봐도 위압적입니다. 나이 - 현재 28세(실력절정의 시기네요.) 4.리이 디트리히 : 175Cm :이 시대 여성들은 힐을 신지 않지만 그래도 리이의 키는 큰 편입니다. 기 사치고는 평균보다 좀 작지만. 나이 - 현재 27세 5.시오 : 180Cm :크죠? 건장한 청년입니다. 나이 - 역시 17세 6.톨베인 : 170Cm :쿨한 청소년의 키도 역시 평균입니다. 나이 - 이 녀석도 17세 7.카리나 : 150Cm :진짜 작습니다. 씰들 중 아마릴리스와 막상막하로 작습니다. 나이 - ???(외모 : 10대 중반. 중학생 정도.) 8.이카테스 : 180Cm :훤칠한 키는 미남의 필수 조건 나이 - ???(외모 : 20대 초반) 9.메르퀸트 : 165Cm :대체적으로 가늘고 키가 큰 엘프치고는 작은 편입니다. 그래서 키가 작은 엘프는 더욱 비쌉니다. 나이 - 백살은 넘었음.(외모 : 10대 후반) 10.메이트리아크 가스발 : 170Cm :사실 그녀의 분위기 때문에 키가 커 보입니다. 나이 - 19세. 11.세이드 폰 러셀 : 190Cm :몸이 말라서 더 커 보입니다. 나이 - 30세(이 나이에 근위엽병 리더라면 초고속 출세지.) 12.키마인 이젠그람 : 180Cm :기사치고는 평균입니다. 생긴게 꼭 아리아인 같고 몸은 좀 호리호리한 편 입니다. 나이 - 22세 13.세라피스 리그나이트: 185Cm :미남 히피 스타일입니다.-_- 나이 - 25세(이건 불확실) 14.물키벨 : 155Cm :작습니다. 정말 작습니다. 게다가 머리칼이 엉덩이까지 오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무슨 인형 같습니다. 나이 - 의미가 없음.(외모 : 20대 초반) ....앗 길어지고 있다! 여기서 이만.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글스의 The Sad Cafe를 들으며... (지금 오후 12:15분입니다. 조용한 집에서 혼자 창밖의 구름 없는 하늘을 보며 이 노래 들으니까 기분이 편해지고 쓸쓸해 지네요.) 제 목 : [ DRAGON LADY ] 13-03 : 침묵의 시 등록자 : PULSATOR(김철곤) 등록일 : 03-23 조회수 : 178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3-03 : 침묵의 시 Double Trouble 1. 학예사이자 발명가이기도 한 파르낫소는 달라카트의 풍부한 자원을 개척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항상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 남부의 광 산지대에선 고품질의 철광을 캘 수 있는데도 그곳은 거의 '버려진 땅'이었 다. 이런 곳을 놔두고 대부분의 금속을 수입하고 있는 현실은 정말 우습지 않은가. "달라카트의 귀족들은 이미 있는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에는 익숙할지 몰 라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투자에는 매우 인색한 편입니다." 남부의 광산지대로 향하는 마차속에서 파르낫소는 직접 그린 설계도를 계 속 꼼꼼히 훑어보며 맞은 편에 앉은 리이에게 넌지시 말했다. 남부로 향한 자들은 파르낫소와 그의 호위역인 리이와 이카테스였던 것이다. 비포장 도 로를 달리는 탓에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리이는 파르낫소에게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 광산지대를 지방귀족들에게 싼 값에 사들인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그것을 개발하실 생각인가요? 저는 이런 쪽은 잘 모르지만 광산개발 같은 대규모 공사에는 상당히 노동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 물론입니다." 파르낫소는 뽀얗고 샌님 같은 얼굴을 들어 빙그레 웃어보인 뒤에 그 의문 을 풀어 주었다. "이종족들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달라카트의 이종족들은......" 리이는 슬며시 말을 흐렸다. 분명히 인간보다 육체적으로도 뛰어나고 종 족에 따라서 손재주도 인간보다 좋은 그들은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광산개 발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달라카트 우림지대에 숨어 살고 있는 이종족들의 세력은 헤스팔콘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들을 힘으로 데려온 다는 것은 달라카트의 국력을 총동원해도 가능할지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 다. 이카테스가 리이의 말을 대신했다. "현재 달라카트의 군사력으로 볼 때 미개척지인 달라카트 남서부의 이종 족들을 잡아서 사육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곳에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거나 트롤, 오크, 다크엘프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 며 인간에 비해 월등히 전투력이 강하고 밀림 지형에서 그들을 상대로 싸 웠다간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열대우림은 그들의 홈그라운드이며 그곳에 들어갔다간 잡는 것은 고사하고 잡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판국이다. 파르낫소는 고개를 끄덕 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들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메르퀸트 씨와 시오 씨를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인간들에게서 밀려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인데." "새로운 광산지대를 이종족들이 완성시키면 그들에게 주겠습니다. 그걸 그들이 믿어주면 됩니다." "예? 하지만." "그리고 저희는 그들과 철광을 공정하게 거래하면 되는 겁니다. 저희는 그들과 같은 땅에서 공존할 것입니다." 이카테스마저 놀랄 정도로 전혀 새로운 발상이었다. 아무도 이종족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공존한다는 황당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까진 말이 다. 그리고 파르낫소는 더욱 놀란 만한 말을 꺼냈다. "그리고 헤스팔콘과의 전쟁에는 이종족들을 참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전투에 훨씬 능숙하며 무엇보다 헤스팔콘의 눈을 속이며 군대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종족들에겐 그만한 보답을 하겠지만." '확실히 기막힌 발상이긴 하지만......' 아무도 이종족들에게 무기를 주고 군대로 쓰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족들이 전투에 참가한다는 것은 헤스팔콘으로서는 생각 치도 못한 변수가 될 것이 분명하겠지만 문제는. '......과연 이종족들이 인간들과 함께 싸워줄까?' 2.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이국적인 오아시스의 토성(土城)에서 뛰어나와 예의 안내자를 뒤따르며 키마인이 '그랜사이어 패거리들'이라고 멋대로 명명된 자들과 싸우고 있는 마을 어귀로 뛰어갔다. 그 와중에도 카넬리안은 자신 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뭔가 어색하고 거북한 마을 분위기다. "아. 줄리탄 씨. 카넬리안 씨도 오셨군요."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싸움은 끝난 뒤였다. 키마인은 능숙하게 검을 검집에 넣은 뒤에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 의 앞에는 부상당한 험상굳은 자(분명 키마인을 습격한 낭인들중에 하나) 가 주저앉아 있었다. 전리품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 전리품은 줄리탄 일행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험한 소리를 쏟아냈다. "흥! 이 개같은 장사치 놈들!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기사까지 고용하다 니! 그랜사이어 씨가 가만히 있지 않을 꺼야!" "야 이 도적 새끼야! 이 분들은 황제 폐하께서 보낸 칙사들이셔! 너희들 은 이제 황실의 적이라고. 알겠어!" 안내자로 따라온 대상인도 그 험악함의 정도는 막상막하였다. 뭐가 뭔지 몰라서 뚱한 표정으로 줄리탄에게 속삭이는 카넬리안. "지금 누가 누굴 고용했다는 거야?" "대충 상황은 이래." 카넬리안이 몸이 아파 의식을 잃은 뒤 몇 시간 후에 줄리탄 일행은 사막 호를 중심으로 발달한 마을에 도착했다. 일단은 그녀를 침대위에 눕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한 줄리탄은 그곳에서 가장 큰 대상인의 저택에 들어 갔고 황제의 칙사임을 밝히며 카넬리안을 눕히는 것 까지는 성공. 그런데. 줄리탄은 머리가 복잡한 듯이 말했다. "그랜사이어 라는 사람이 이 마을의 도적들 두목이래. 상인들을 위협하고 있다는데. 그리고 그 도적들이 키마인 씨를 상인들이 고용한 용병인 줄 알 고 습격했나 봐." "그건 상인들 얘기겠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카넬리안은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잡혀 있는 낭인에게 걸어가선 상냥하게 질문했다. "왜 상인들과 싸우고 있는 거죠?" "흥! 너희들과는 할 말이 없어! 날 죽여라!" "저는 진실을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왜 싸우고 계신......" "어헛!! 날 모욕할 셈이냐! 어서 죽이라니까 그러네!" 카넬리안의 인내심은 여기까지였다. 그녀의 손은 매섭다. 그녀는 비장하 고 의연하게 정좌를 하고 있는 낭인의 뒤통수를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 로 뜨악 소리나게 후리갈긴 뒤에 소리쳤다. "야!! 왜 싸우냐고 물어보고 있잖아!! 그렇게 죽고 싶으면 자살해! 딴 사 람 살인자 만들지 말고!!" "......저럴 줄 알았다." 뒷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구는 낭인들에게 악악 소리를 질러대는 카넬 리안을 보며 줄리탄은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걸어가선 말했다. "저희는 세라피스 폐하의 칙사로 그랜사이어 스탈리온 씨를 황실로 데려 가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 분께 저희를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파핫핫핫! 그 잘난 황실 역시 그랜사이어 씨의 힘이 필요했던 거였군. 안됐지만 그 분께선 여길 떠날 생각이 없어!" "넌 그냥 입 다물고 안내나 해." 카넬리안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흠찟 놀란 낭인이 흡사 코너에 몰린 복서의 가드자세 마냥 양팔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손맛은 아마 그 낭인 의 머리속에서 평생토록 기억될 것 같다. 키마인과 호이젠이 난감한 웃음 을 보이는 가운데 그들은 야수라는 별명을 지닌 은둔자 그랜사이어 스탈리 온에게 안내되었다. 3. 파르낫소가 말한 '대규모 이종족 서식지'인 달라카트 남서부의 열대우림 은 시오가 각도를 뽑아 잡목들을 쳐내면서 들어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더 할 나위 없이 울창한 곳이었다. 게다가 뜨겁게 달궈진 공기에 옷이 축축해 질 정도의 습한 기후 덕에 시오의 불쾌지수는 한계치까지 상승하고 있었다 . "으이구. 가도 가도 끝이 없네. 정말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메르퀸트?" "예. 분명 이쪽이 다크엘프의 숲입니다. 느낄 수 있어요." "어떻게 이런 곳에서 단 말야 그 녀석들은." 시오와 메르퀸트가 있는 곳은 듣고 있으면 어찔할 정도로 윙윙거리는 날 벌레들과 대낮에도 음침한 검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고 땅은 검은 부식토라 서 푹푹 꺼지는 - 아무리 산속에서 자란 시오라도 걷는데 힘이 드는 최악 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투덜거리던 시오가 갑자기 입을 다물며 숨 을 죽였다. 분명히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메르퀸트. 일단 숨어." 시오의 속삭임에 메르퀸트는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작은 키의 소년이 과일들이 달린 덩쿨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보호 색처럼 주변과 어울리는 진한 갈색의 피부에 검은 머리칼, 그리고 커다랗 고 노란 눈동자 - 분명히 어린 다크엘프였다. 그 귀엽게 생긴 꼬마는 바닥 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시오의 발자국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갑자기 빽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낼 수 없는 찢어지는 듯한 고성이었다. 시오는 그게 동족들에게 침입자를 알 리는 소리라는 걸 알며 냉큼 튀어나왔다. "꼬마야! 우린 적이 아냐! 너희 족장과 대화를 나눴으면 하거든? 메르퀸 트! 어서 통역해 줘!" 그와 함께 메르퀸트가 나타나서 뭐라고 말했지만 그 꼬마는 대답으로 흑 요석으로 만든듯한 예리한 검은 단검을 뽑으며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하여 튼 인간을 싫어해도 어지간히 싫어하는 종족들이었다. "피해!" 시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메르퀸트를 잡으며 뒹굴었고 곳 그 자리에는 푸슈슈슉 소리와 함께 바늘같은 독침들이 날아와 박혔다. 벌써 동족들 - 그러니까 다크엘프들이 모여든 것이었다. 시오는 나무들로 가득찬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샌가 나무 가지들에는 그림자같이 검은 다크엘프들로 가득차 있었고 하늘의 불길한 별처럼 다크엘프들의 노란 눈 동자들이 모두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순간 다시 그들은 입에 담고 있던 독침을 화살처럼 뱉어냈고 메르퀸트는 재빠르게 주문을 외우며 주변 공기를 움직여 벽을 만들어냈다. 그 불가시 의 벽은 독침들을 튕겨내며 곧 폭풍처럼 변하며 휘몰아쳐 나무위의 다크엘 프들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단검을 뽑으며 시오에게 달려들 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맘때 쯤에 되면 꼭 등장하는 자가 있다. "맙소사." 순식간에 주변의 썩은 낙옆들로 형체를 만들어 낸 말락이 솟아오르자 다 크엘프들은 흠찟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말락은 다크엘프들 만큼이나 남의 말을 들어줄 성격이 아니었나 보다. 메르퀸트를 공격한 것에 화가 난 말락 은 거대한 낫을 휘둘렀고 그와 함께 주변 나무들이 종이처럼 베어지며 사 방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다크엘프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로 뛰어 올 라 그 사정권 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마, 말락! 죽이지마!!" 그런데 이미 사방에선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말락이 소환한 이형들이 저주받은 피조물처럼 등장하는 소리였고 안 그래 도 음침한 열대우림은 말락 덕분에 거의 세기말적인 분위기로 변해가기 시 작했다. "이건 누가봐도...... 설득하러 온 게 아니잖아." 말락이 휘두르는 낫을 피하며 산지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다크엘프들 을 보며 시오는 고개를 푹 꺾으며 중얼거렸다. 카넬리안과 함께 다니는 줄 리탄의 고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오였다. -Blind Talk 죄송합니다. 지금 급히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번 편 오탈자는 나중에 수정 하겠습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 입니다.(물론 산책하러 나가는 거면 얼마 나 좋겠습니까만...) E-MAIL : billiken@hananet.net 안드레아 보첼리의 Tremo E T'amo 를 들으며... (이거 뭐라고 읽어야 되는 거야?)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3-4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27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194 제 목:[ DRAGON LADY ] 13-04 : 침묵의 시 관련자료:없음 [6651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27 14:26 조회:5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3-04 : 침묵의 시 Never hide out in the world (전편 줄거리) 1) 은둔하고 있는 그랜사이어를 만나기 위해 티브 사막으로 간 줄리탄과 카넬리안, 키마인과 호이젠. 그러나 카넬리안은 몸이 아프질 않나 키마인 은 난데없이 낭인들에게 습격을 받질 않나. 상황은 엉망진창. 2) 시오와 메르퀸트는 남동부의 이종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열대우림지역에 간 것 까진 좋은데 만나자 마자 다크엘프들에게 공격을 받고 말락이 폭주 하기 시작했다. 역시 편하게 일을 처리하긴 글러 먹은 듯 하다. 1. 왕년에 한가닥하던 싸움꾼이 조용한 곳에서 은둔하고 있다, 라는 설정은 사실 시시할 정도로 흔해 빠진 것이며 여간해선 다른 사람들에게 '어? 그 런 사람 나도 하나 알아.'라는 소리 들을 정도였다. 특히 달라카트에는 그 런 낭인들이 많은 편. 문제는 그랜사이어 스탈리온의 경우에는 그 '한가닥 '에 대한 풍문이 전설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일까......' 줄리탄은 마을 외각에 있는 그랜사이어의 '은둔지'를 찾아가며 사람들로 부터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되세겨 보았다. 이하는 젤리드의 증언이 다. '오칼란트에는 무법자가 거의 없어. 제국 전체가 오펜바하의 발 밑에 있 기 때문이지. 그런 그곳에서 오펜바하의 눈을 두려워 하지 않은 자는 그랜 사이어 스탈리온 뿐이야. 한번쯤 정식으로 싸워보고 싶은 사람이지.' 또 세라피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에게 검술을 배운 일이년 동안 단 한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어. 일류 기사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싸움에 형식이 없다는 거지. 말 그 대로 야수와 같아.' 리이 역시 그에 대한 일화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기사수업을 받지 않고 그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인생 자체가 검과 싸움으로 이어져 왔다는 의미겠지요. 사실 많은 기사들이 아 무런 작위도 없는 그를 인정하길 싫어하지만 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에요. 언제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니 줄리탄이나 키마인이 긴장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무슨 이유인지 십여년 전부터 더 이상 활약하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 한 감상이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혹시 수틀리면 냉 큼 검을 뽑아 휘두르는 자는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오를 때 줄리탄 은 힐끗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아아. 여기도 저기도 모조리 더워. 쯧." 그녀는 건강하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즉 동전 뒤집듯이 '쌩쌩'해 졌다는 의미. 하긴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그랜사이어라는 사람이 대단 해도 카넬리안 수준은 아닐것 같다. '그녀를 아는 사람마다 태도가 다르니...... 어떤 여자였는지 도통 모르 겠다니까.' "어!" 그런 살아있는 전설 같은 카넬리안이 갑자기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그 녀의 시선은 물항아리를 든 채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세 소녀들을 향해 있 었다. "와아. 오랜만이네." 카넬리안은 빙그레 웃으며 그 세 자매같은 소녀들에게 다가갔고 그녀들도 너무 놀라 항아리를 떨어트릴 뻔 한 모습으로 카넬리안을 바라보았다. 마 치 침입자가 온 것을 목격한 둥지 속의 어린 새들 같은 모습이다. "카넬리안? 아는 사람들이야?" 의아한 줄리탄이 꽤 수다를 떨 것 같은 소녀들을 쳐다볼 때 그들은 '도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집들 사이로 쪼르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 뭐야!! 도망칠 것 까진 없잖아!" 카넬리안의 짜증섞인 목소리. 그리고 난감하게 쓴웃음을 보이는 호이젠. 이쯤되면 대충 짐작이 간다. "그랜사이어 씨의 씰들이야. 귀여운 아이들이지." 안내자인 낭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계약한 씰들이 세명이나 된다 는 소리? 카넬리안은 양미간을 좁히며 뭐라고 중얼중얼거리고 있을 때 줄 리탄이 머쓱하게 다가와선 속삭였다. "카넬리안. 너 설마...... 저 씰들의 전주인도 죽인 거냐?" "아냐!! 내가 무슨 테이머 사냥꾼인 줄 알아?" "그럼 왜 도망쳐?" "......나 별로 예전에는 사랑 받는 인물이 아니었거든. 으이구. 이 놈의 팔자한번 사나워요 정말. 흐응. 그렇지 호이젠?" 카넬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호이젠을 보자 호이젠은 계속 난감한 미소 로 소리없이 웃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를 여자 다. 2. 시오 쪽은 긴급비상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어디선가 소환되어 온 악몽같 은 이형들 손에 다크엘프들이 죽어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설득이고 뭐고 끝장인 것이다. 그때 사방에서 빛을 삼켜버리는 듯한 어두운 기운들이 말 락 주변으로 몰려 들었고 말락의 몸이 희미해지며 낫을 떨어트렸다. 메르 퀸트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주, 주박(呪搏)의 주문? 주변에 마법을 쓰는 자들이 있어요!!" 말락은 마력의 사슬에 온 몸이 걸려 움직임을 봉쇄당한 채로 그물에 걸린 짐승처럼 그르렁거리고 있었고 그와 함께 말락의 마력도 사라지며 이형들 역시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키가 2미터는 가볍게 넘는 축축한 피부를 가 진 자들이 기묘한 지팡이를 들고 하나 둘 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오가 각도를 세우며 짜내듯이 말했다. "또 뭐야...... 이 녀석들은." "트롤 이에요. 트롤들은 마법에 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거대한 종족들은 말이 없이 말락과 시오 주변에 몰려들며 아무 말 없 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트롤들은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들의 발전된 마법체계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종족끼리는 선천적으로 마치 무전 통신을 하듯 정신적인 교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대가 있음에도 그들은 말 수가 극히 적고 감정또한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끈처럼 종족의 생각이 연결되어 있어 목소리와 표정을 통해 상대에게 감정을 전달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시오가 그들을 보며 허탈하게 말했다. "메르퀸트. 혹시 트롤어 할 줄 알아?" 메르퀸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대화해 본다고 상황 이 바뀔 것은 없지만. 말락은 흥분한 듯이 반투명한 몸이 불타오르는 듯 변하며 공기를 울렸다. "네 놈들...... 이 따위 해괴한 마법으로 날 얼마나 묶어 둘 수 있을 것 같냐. 곧 네 놈들을 쓸어 주지." "말락. 죽이면 안된다니까." "도리어 이 놈들이 우리를 죽일 분위기잖아. 평화스런 분위기 잡을 시간 은 지났어." 트롤들은 자기들끼리 슬쩍슬쩍 바라보기만 할 뿐 대화는 그들의 정신어로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숲이 쿵쿵 울리며 또 다른 종족들이 나타나 기 시작했다. 손에 몽둥이(말이 몽둥이지 거의 나무 줄기에 가까운 굵기) 를 들고 있는 트롤만큼 거대한 그들은 피하지방두께가 한뼘 정도는 될 것 같이 몸이 둥굴둥굴 했는데 - 인간 정도는 그냥 밟아서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덩치였다. 설상가상이 뭔지 실감하는 장면에 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 "......많이도 등장하는군." "저들은 오거입니다. 가까이 가지 마세요. 인간들을 산채로 먹으니까." "알려줘서....... 고마워. 그런데 메르퀸트. 오거어는 할 줄 알아?" "미안해요." "세라피스 폐하. 살아 돌아갈 수 있으면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이런 위 험한 곳으로 통역관도 없이 보내다니!" 언어의 장벽. 지역의 불편함. 숫적 열세. 뭐하나 긍정적인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 시오는 그들의 더할 나위 없이 적대적인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오거의 어깨에 타고 있던 다크엘프들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시오 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트롤들은 오거를 바라보며 드물게 무표정한 얼굴에 험악한 인상이 들어났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이다. "오거와 다크엘프들은 친한 편이지만...... 트롤들과는 사이가 안좋은 것 같아요." "내가 봐도 그래. 지들끼리 한판 벌일 분위기야." 이종족들이라고 모두 다 어깨동무할 만큼 친한 것은 아니었다. 제멋대로 이고 과격한 오거와 일심동체이며 과묵하기 이를데가 없는 트롤들은 딱 봐 도 전혀 상성이 맞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상황은 갑자기 인간침입자 공개 증오대회에서 이종족들의 조우전으로 양상을 바꿔가는 듯 했는데 이 험상 궂은 분위기를 더욱 띄워주는 고함소리가 있었으니. "이, 이 소리는?" 갑자기 쩌렁쩌렁한 고함이 사방에서 휘몰아치며 그 여파로 활엽수 잎들이 파르르 떨러대며 우림지대가 울리는 듯 했다. 흡사 군대의 돌격을 연상케 만드는 이 소리는 분명히. "오크들의 소리다!" 오크에 대해 정통한 시오는 단박에 그것이 오크들의 적대적인 경계음이라 는 걸 알고 있었고 아니나다를까 밀림을 헤치며 거친 가죽갑옷과 투박한 도끼 등으로 무장한 엄청난 수의 오크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오는 이제 더 이상 나타날 종족이 떠오르지 않자 초연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이걸로...... 어둠의 자식들 총집합인가." 오크들은 부리부리한 눈매로 천연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을 쏘아보며 그들 특유의 커다란 목소리로 쏘아붙이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이 도 시오는 오크어를 알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 해석된 그들의 경고의 요 지는 대충 다음과 같다. '감히 우리들의 구역에서 싸움판을 벌리다니 용서하지 않겠어!!' 물론 그 말에 다크엘프들도 오거들도 트롤들도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 '여기가 어째서 너네 구역이냐?'라는 표정들. 시오 일행이 본의 아니게 이종족들의 난투극의 도화선이 되어버린 것인가. 그들을 설득하려는 목적 은 이미 달나라로 가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오크 중에 리더로 보이는 (오 크의 기준에서는) 핸섬한 붉은 문신의 오크가 시오에게 다가오며 킁킁 거 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의아한 눈초리로 시오를 바라보며 오크어로 말 했다. "너...... 오크냐?" "인간인데요." 시오 역시 오크어로 반갑게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오크들과 뒤셖여 지낸 시오의 몸에는 각인처럼 오크들의 기운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말이 통하는' 상대가 나타나서 다행이다. 그와 함께 시오가 상대에서 뭐 라고 오크어로 잔뜩 말을 하니까 그말을 들은 오크 리더가 다른 오크들에 게 또 뭐라고 소리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시오 씨. 뭐라고 하는 거에요?" "히히. 우리를 손님으로 받아주겠데. 나 오크들의 인사예절을 알고 있었 거든." "다행이네요!" 생긴 것과는 달리 명예와 존경을 중요시하는 오크들은 '예의바른' 시오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것 같았고 그와 동시에 다른 이종족들의 눈썰매가 적대적으로 변했다. 특히 다크엘프들은 자신들의 어린 자식을 '죽이려 한' 인간을 감싸고 돌자 송곳니를 들어내며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었 다. 그들에겐 전투 전의 의식 같은 것이겠지. 반면 오크들도 시오가 자기 들의 손님이 된 이상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했다. 무기를 들고 소리를 지 르며 그들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만!!" 시오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소리쳤고 당장 벌어질 것 같았던 이종족 간의 사투를 잠깐 정지시킬 수 있었다. 오크들이 시오에게 소리치는 말은 '우리들의 싸움이니까 저리 비켜라!!'였다. 하지만 시오는 메르퀸트에게 소리쳤다. "메르퀸트! 엘프나 다크엘프나 쓰는 말은 똑같겠지?" "예. 비슷해요."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이 다크엘프들에게 통역해줘." "어떤 말을?" "야! 이 바보 자식들아!! 죄다 정신 상태가 그 따위니까 인간들의 노예가 되는 거다!! 라고 전해 줘!!" "저, 정말 그렇게 해요?" "그래. 그대로 전해 줘!" 메르퀸트는 난색이 되었다. 번역하기 험악한 말인데다가 이런 분위기에 그런 말을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시오를 믿고 메르퀸 트는 그 미성의 목소리로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대로' 통역해서 소리쳤다 . 잠시후 나타난 다크엘프들의 반응은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크아아아악!!" 다크엘프 청년 하나가 단도를 뽑아들고 시오에게 달려들었고 시오는 각도 로 그 칼을 막아내는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메르퀸트에게 다시 소리쳤다 . "지들끼리 서로 싸우기만 하는 꼴이 인간하고 전혀 다를 게 없잖아!! 라 고 전해 줘!!" 다크엘프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오거들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고 이번에 는 귀가 멀어버릴 정도로 포요하기 시작한 오거들이 시오 허리 둘레보다 굵은 몽둥이를 휘둘러대며 시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열화와 같은 반응이었던 것이다. "시, 시오 씨!!" "우리는 그런 너희들이 인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온거 야!! 서로 돕고 싶다고!! 라고 전해 줘!!" 일촉측발의 순간이었다. 메르퀸트가 다크엘프들에게 애원하듯 소리치자 다크엘프들은 그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들이 시오를 짖이겨 버 릴 듯 달려드는 오거들에게도 전해주자 오거들도 그 자리에서 선 것이다. 시오의 머리 바로 앞까지 오거의 나무 몽둥이가 다가온 순간, 갑자기 소란 이 진정되며 정적이 흘렀다.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다고? "헤헤. 겨우 진정되었군. 휴우." 시오는 눈 앞에 들이닥친 오거들을 보며 진땀을 닦아냈다. 그들은 이제야 시오일행이 이곳에 온 목적이 궁금해 진 것 같았다. 목숨걸고 만들어낸 대 화 무드가 형성되자 말락이 묵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 마법, 언제 풀어줄 꺼야." 그리고 메르퀸트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며 센티넬 말락을 소환해제 시켜버 렸다. 3. 그랜사이어가 살고 있다는 집은 마을 외각의 다른 집들과 다름없이 허름 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그 주변에 검을 품고 있는 낭인 십여 명이 모여 다가오는 줄리탄 일행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 "보통 녀석들이 아닌 것 같군요." 키마인이 경계의 눈초리로 말했다. 아까전 그를 기습했던 낭인들 역시 보 통 도적들이라고 하기에는 범상찮았는데 여기 모여 있는 자들은 그 보다도 강해 보인다. 분명 그랜사이어를 따르는 싸움꾼들이리라. 한눈에도 전혀 친절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냉대를 한몸에 받으며 줄리탄은 긴장감이 확 돌았다. 무슨 흉악범죄자 소굴에 들어온 것 처럼 갑자기 덮쳐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분위기다. '젤리드 씨를 안데려 오길 다행이지......' 장담하는데 젤리드 였다면 분명히 이런 분위기에서 '뭘 노려봐!!'라며 선 공을 했을 것이다. 그때 팔짱을 낀 품 속에 검을 끼우고 있는 날렵해 보이 는 낭인 하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삐딱하게 줄리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 저 녀석 본 적 있어." "저요?" "너, 베오폴트의 노블리스라는 놈이지! 그 붉은 옷이라면 확실히 맞아!" "주인님. 의외로 유명하네? 사막 한가운데서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카넬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사내는 동료들에게 쑥덕거렸다. "저 친구, 달라카트 해적들을 일년만에 통합시켰다더구만. 그리고 낭설이 겠지만 해룡들의 비호를 받는데. 웃기지 않아?" "뭐? 정말? 별로 그렇게 대단해 보이진 않는데?" "이상한 검을 쓰는 놈이래. 저 녀석 손에 해적 수백명이 죽어나갔다던데 ?" '멋대로 살인자 만들지 말아달라고. 젠장.' 하여튼 소문은 빠르다. 줄리탄도 어느샌가 달라카트 낭인들의 입담에 오 르는 유명인사. 게다가 노블리스에 얽힌 풍문들도 그랜사이어 만큼이나 경 악할 만한 것이었다. 폭력계의 떠오르는 샛별이라고나 할까. 실제 줄리탄 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낭설들이겠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때 문을 열며 나오는 자가 있었고 줄리탄 일행은 처음 본 그가 분명 이 곳 낭인들의 지존인 그랜사이어 스탈리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반 백의 헝크러진 머리에 40대를 넘은 나이를 무시한 완벽한 몸 근육, 트레이 드 마크 같은 한쪽 눈의 깊은 상흔이 누가 봐도 '검의 귀신'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단 표독스러울 줄 알았던 그의 인상은 상당히 점잖은 편이었다 . "당신들은 누군가?" 그랜사이어는 묵직한 목소리로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세라피스 폐하로부터의 칙사입니다. 그랜사이어 씨를 만나뵈러 왔습니다 ." "세라피스? 설마 그 세라피스?" 그랜사이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의 제자였던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황제 폐하 십니다." "와하하하하하!! 그 놈이 황제가 되었군!! 이거 달라카트도 불쌍해 졌는 걸?" 황제에게 그런 말은 엄청난 불경죄 였건만 말하는 그랜사이어나 들어주는 줄리탄 일행이나 모두 느긋했다. "그 녀석이 보냈다 이거로군. 후후. 들어오게나." 의외로 화통한 자라서 다행이다, 줄리탄은 그를 따라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4. 그랜사이어가 살고 있는 집안은 고급스러운 몇개의 목조 가구들 빼고는 초라할 정도로 수수했다. 사막기후라서 창문도 작고 대낮에도 어둑하긴 했 지만 그냥 도시 외각의 여느 평민들이나 살만한 그런 곳이다. 그랜사이어 는 대화 중에 대뜸 대답했다. "난 더 이상 검을 쓰지 않아. 와하핫! 객기로 칼을 휘두르던 놈이 나이를 먹고 정신차렸다는 이야기는 너무 진부한 거지. 안 그런가?" "아." "가끔씩 세라피스 같은 녀석들을 가르쳐 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그리 대단히 잘 쓰지도 않았으니까 뭐 이렇게 하루 하루를 낭비하 는 것에 아쉬울 것도 없지." 줄리탄은 그랜사이어의 웃음 섞인 말에서 숨기려고 하는 깊은 괴로움 같 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머리속에선 리이가 떠올랐다. '전 이제 기 사로서 살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라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보통 그런 말 이 나오기 까지는 나름대로 깊은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랜사이어는 그 렇게 말하다가 조용히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자네. 이상하게 씰들하고 친한 것 같군." "예?" 그걸 어떻게...... 라고 생각하다가 줄리탄은 근처에서 시선들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헉!' 어두운 방 한구석에선 무릎을 꿇고 있는 예의 씰 '세자매'가 호기심에 가 득 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뭔 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랜사이어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내 아이들이 자네에게 호감을 갖는 것 같애. 다른 사람에게 이러는 건 처음 보는군." "아하하하. 그, 그렇군요." 세 소녀들은 고양이마냥 슬며시 줄리탄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묘한 기분 에 휩싸인 얼굴을 한 채. 줄리탄에게 다가와선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이 어깨와 뺨등을 만져볼 것 만 같다. 그때 줄리탄의 등 뒤에서 목 부근을 뱀 처럼 두르며 껴안은 카넬리안이 그 씰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내. 꺼. 야." 카넬리안은 그레시다 이후 씰들에게 인기 많은 주인님에게 뭔가 확실히 해 둬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넬리안의 의미심장한 눈빛공격을 받은 '세자매'들은 움찔하며 다시 슬슬 뒤로 물러나서 딴청을 피우는 것이었다. "껄껄껄!! 자네의 씰은 정말 특이하군!" "카넬리안. 내가 짐짝이냐? 자기 꺼라니." "어. 때. 서." 줄리탄이 이런 남사스런 연출에 황망스래 중얼거리자 카넬리안은 쿡쿡 웃 으며 조용히 포옹을 풀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을 간호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려는 것이었을지도.(실은 그냥 질투의 화신일 뿐이었다.) 그 모 습에 한참을 박장대소하던 그랜사이어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본론을 말했 다. "대충 찾아온 목적은 짐작이 되네. 이 못난 사내의 힘이 좀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요점은 그렇습니다." "말했지만 난 검을 버렸네. 검을 버린 무사라는 것은 쓸모가 없지. 세라 피스 녀석은 언제 한번 만나서 그 놈의 야한 춤을 또 한번 구경하곤 싶어 도 도와줄 수도 검을 잡을 생각도 없어." "왜 검을 놓으셨습니까?" "말해줄 의무는 없네." "혹시. 사람들 사이에 나돌고 있는 그 소문 때문입니까?" 키마인이 끼어들었고 그랜사이어는 오른쪽 눈을 파먹은 길고 굵은 상흔 을 꿈틀거렸다. "오펜바하 제일황제를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카넬리안이 진절머리를 내는 자인데. 그랜사이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난 오칼란트의 기사도 아니었고 천민 출신이었어. 귀족들의 손에 가족이 모두 죽고 살아 남기 위해서 검을 잡은 것 뿐이야." "......" "어차피 천한 목숨에 지킬 것도 버릴 것도 없는 몸. 하늘 끝까지 올라가 보자는 생각에 닥치는데로 검을 휘두르며 기사들과 결투를 하고 귀족의 집 을 털고 사람들을 긁어모아 저항이라는 것을 해봤어. 두려울 것도 없고 기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지." 그 이야기는 도적들의 위인전처럼 유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랜사이어는 그 '위인전'에는 절대 나와 있지 않은 본심을 꺼냈다. "난 검이면 뭐든 것이 다된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 고 누구도 날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지. 자네 나이 때 그런 오만한 생각을 했어. 실제로 난 그 때까지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어. 모두가 날 두려 워 했지. 난 검을 휘둘러 여자를 얻었고 자식들을 얻었고 씰들을 얻었고 부하들을 얻었고 엄청난 재산도 얻었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검을 잡았다 는 나의 신념은 언제부터인가 병들어 가고 있었던 거야." 술집 취객이 지껄이는 소리였다면 '그래. 너 잘났구나.'라며 무시할 말이 었지만 그랜사이어가 공허하게 바닥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그 말은 슬픈 설 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오의 아버지 레터도 산속에서 장작을 패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난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녔어. 단 한번이라도 지면 검을 버리겠다고. 그 리고 그런 나에게 찾아온 자가 있었지. 아직도 그의 두려운 모습은 생생히 기억해. 바로 제일황제 오펜바하였어. 나의 성채로 온거야. 단신으로. 믿 을 수 있겠나? 황제가 혼자서 나와 싸우기 위해 온 거야." "오펜바하......" 줄리탄은 침을 삼켰고 카넬리안은 긴장된 기색을 보였다. 그가 직접 검을 뽑았다는 말은 정사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난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를 눌렀을 때의 희열을 떠올리며. 그런데 어떻 게 되었는지 아나?" "......" "난 그가 검을 뽑는 모습도 보지 못했어. 단지 내게 다가오는 것 같더니 내 오른쪽 눈을 잃게 만들었어.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또다시 내게 검 으로 얻은 내 마누라와! 아이들과! 씰들과! 부하들까지 모조리 찢어 죽여 버린 거야. 그리고 잔인하게...... 날 죽이지 않고 오칼란트에서 추방했 지. 그게 내가 봤던 하늘의 끝이야." 그랜사이어는 분노와 두려움에 뒤섞여 주먹을 떨며 말을 마쳤다. "다시는 검을 잡고 싶지 않아. 나는...... 단 한 번이라도 검으로 지게 된다면 다시는 검을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 한번에 모든 걸 잃게 되었지만. 한 번으로 족해." 그 처절한 고백을 들은 줄리탄과 키마인은 자기도 모르게 숙연해 졌고 근 처의 낭인들은 감동에 눈시울을 적셨지만 카넬리안만은 '시시한 얘기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툭하고 말을 던졌다. "그게 이유였습니까? 정말...... 세상에서 도망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군요." 카넬리안이 비웃듯이 말하자 굳게 다문 입으로 침묵하는 그랜사이어와는 달리 낭인들의 얼굴이 분노로 바꿨다. 줄리탄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냐 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계속 매몰찼다. "이 계집애가 감히 그랜사이어 씨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여! 죽고 싶냐!!" "흥! 아무리 낭만적으로 들려도 결국에는 인생을 포기한 인간의 넋두리라 고! 그런 말은 귀담아 듣고 싶지 않아. 어쩌라는 거야. 인생을 포기한 이 유를 정당화하고 있는 거야 지금? 죽어버린 시체가 무덤에서 지껄이는 소 리 같잖아!" 그녀의 폭언은 다른 때보다 지독했다. 자신도 오펜바하에게 씻을 수 없 는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까. 키마인도 그녀를 만류했다. "카, 카넬리안 씨. 말씀이 좀 지나치세요." "세상 괴로움 혼자서 다 짊어지고 있는 반송장에게 무슨 말을 못하겠어. 오펜바하에게 희생당한 자들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란 말야! 저건 아무 것 도 아냐.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비극의 주인공 이야. 단지 지켜주는 사람이 있고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살 아가는 걸 포기하지 않는 것 뿐이야. 포기한 사람에게 나눌 동정 따윈 없 어!" 카넬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굳어버린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머리 속에 차오르기 시작한 오펜바하의 악몽을 또 힘들게 떨궈내려는 것일까. 그녀는 자주 그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줄리탄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이 를 물고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험악한 분위기에서 침통한 표정의 그 랜사이어를 보며 줄리탄은 긴 상념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줄리탄 씨!!" "더 이상 검을 쓰지 않으시겠다면 강요하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처 럼 고집스럽게 살아온 분이 몇번의 설득 정도로 마음을 바꿀리가 없을 테 니까요. 하지만 그랜사이어 씨는 분명히 멈춰버린 인간 입니다." "...... 그런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그랜사이어는 괴롭게 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줄리탄은 신성한 주문 을 낭독하는 듯 나직하게 하지만 청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 주변에는 리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지켜야 할 나라도 잃고 기사 작위도 잃고 가문에서도 떨어져서 검을 놓은 채 와인 가게를 운영하 고 있습니다." "리이 디트리히 말인가? 푸른 맹금에 대해선 가끔 들어 봤지. 지금은 그 여자도 검을 놓았나 보군." "예. 하지만 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진정으로 자신의 검이 사 람들에게 필요할 때는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한 검인데도 분명히 다시 잡아 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게 그녀의 살아있는 신념이고 그래서 리이 씨는 멈춰있지 않습니다." "궁금하군." "......?" "그런 말을 하는 자네가 궁금해. 자네는 기사가 아닌가?" 줄리탄은 즉시 대답했다. "요리사 입니다. 검을 잡은지 일년 밖에 안되고 제멋대로인 씰을 사랑하 는 평범한 요리사입니다." "평범한 요리사가 황제의 칙사가 되어 이런 곳까지 왔다는 건...... 자네 의 인생이 살아 있다는 의미겠지." "예. 제 인생은 살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카넬리안을 위해 계속 살아 있 어야 합니다." 줄리탄은 자기 마음이 펑 터져버린 것 같은 청량감을 느꼈다.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예전 오크 족장 앞에서 맞출 수 없었던 마음의 고리가 연결된 것 같은 순수한 기쁨. 그랜사이어는 슬며시 웃으며 카넬리안이 나 가자 또 다시 슬금슬금 줄리탄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자신의 씰들을 바라 보았다. "세라피스 놈이 왜 자네를 내게 보냈는지 알겠군. 검 하나로 살아온 기사 나 투사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야 그건." "주인님! 큰일이야!!" 카넬리안이 다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무슨 일?" "상인 놈이 헤스팔콘의 군대를 끌고 오고 있어. 그랜사이어 씨와 우리들 까지 밀어버리려는 것 같아." "미쳤군!" 뒤듲은 설명이지만 그랜사이어와 그를 따르는 낭인들은 대상인이 독점하 고 있는 사막호 부근의 암염지대를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돌려주고 상인들 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상인들은 돈을 써 서 헤스팔콘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키마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독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군대를 끌고 오다니.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상상도 못할 월권행위로군." 도적단도 아니고 군 지휘관이 멋대로 상인들과 담합하여 몰려드는 말 그 대로 개판이었다. 키마인은 군총사령관인 아버지 아취발트의 죽음 이후 엉 망이 되어버린 헤스팔콘의 군질서에 통탄했다. 카넬리안은 신경질적인 어 조로 천에 감긴 미스트랄을 꺼내며 중얼 거렸다. "하여튼 달라카트 귀족 놈들은 황제 알기를 우습게 안다니까. 뻑하면 남 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고 난리야." 사막호 부근으로는 헤스팔콘의 라디우스(약 2500명) 단위의 '수뢰군대' 가 몰려들고 있었으며 그런 규모의 정규군과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니었다. 그랜사이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멋드러진 상자를 열며 두 자루의 묵직한 검을 꺼냈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검붉은 금속빛이 돌아서 흉수 만 큼이나 기이해 보이는 검이었다. "그, 그랜사이어 씨?" "나는 이제 세상과 싸울 생각이 없지만 세상이 나에게 덤벼든 다면 피하 지 않겠어. 피할 곳도 없고. 하하." 소문은 진실이었다. 그랜사이어는 보통 사람은 한자루도 들 수 없는 무거 운 갑옷파괴검 두 자루를 동시에 들고 싸운다는 말을. 그것을 보고 야수의 두 송곳니라고 평했다던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라디우스 정도의 적군에게 달려든다는 건 엄청 위 험한 일인데요. 저들 중엔 기사들도 끼어 있을 테고." 낭인들이 걱정을 늘어 놓자 마음을 잡은 듯한 그랜사이어는 방이 꽉 차는 듯한 두 자루의 검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난 언제나 이렇게 싸워 왔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호이젠. 문제 없겠지?" 키마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자 호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진격해 오는 헤스팔콘의 군대는 지휘관 독단으로 움직이는 것이 분 명합니다. 싸운다고 해도 국가분쟁으로 확대될 염려는 없습니다." 그랜사이어의 세 씰들은 그에게 다가가며 손바닥을 펼쳐 두 자루의 검에 부여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고 곧 검이 살아나는 듯이 붉게 달아 오을 때 그랜사이어가 줄리탄에게 말했다. "자네. 줄리탄이라고 했지? 내 직업이 뭔지 아나?" "뭐죠?" "목수야. 지금도 간단한 가구들은 직접 만들곤 하지. 나도 멈춰있는 걸 좋아하진 않으니까." "아 예." 줄리탄은 멋진 책상이며 안락의자 등이 들어 차 있는 방안을 둘러보며 미 소를 띄웠다. -Blind Talk 최근에는 공포물의 대가인 클레이브 바커 씨랑 참 인연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참여한 다큐멘타리 '공포로의 초대'를 보는가 하면 그가 쓴 책인 '피의 책'을 읽고 또 우연히 헬레이저를 보았고 이번에는 그가 참여한 게임인 언다잉(Undying)을 플레이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아. 멋있는 게임입니다 정말. 그리고...... 이번 편은 짧은 시간에 너무 빨리 쓰느라고 좀 깔끔하지 못 한듯 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수정은 한번에 미뤄서 합니다. 올해들 어서 마가 끼었는지 기분 쾌청한 날이 거의 없는데 - 그렇다고 안쓸 수는 없는 거죠. 오탈타 수정은 조만간 꼭 하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오탈자 발 견하시면 메일이나 쪽지로 살짝 좀 알려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일 보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 드려요. 많이 힘이 되었습니 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DRUNKEN TIGER의 GOOD LIFE를 들으며... (좋아해요. 이 그룹.)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3-5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29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279 제 목:[ DRAGON LADY ] 13-05 : 침묵의 시 관련자료:없음 [6664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29 00:03 조회:33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3-05 : 침묵의 시 The Promise 1. 메이가 태어나서 이렇게 화려한 옷 입어 본 건 처음일 것이다. 미남자를 연상케 하는 굵은 눈썹과 가는 선의 이목구비에 어울리게 발끝까지 길게 내린 남색의 롱코트에 백색의 실크 셔츠와 정교한 금장식이 조각되어 있는 목걸이 하며 - 모조리 황실에서 제공한 '소품'들이지만 그렇게 차려 입고 헤스팔콘 노예시장에 참가한 메이는 완벽한 '바다의 귀공자'의 자태를 뽐 내고 있었다. "거북해. 이런 옷." "하지만 멋져 보여요." 역시 황궁의 '헤어 코디네이터'들의 달라붙어 귀여운 스타일로 머리를 가 꾼 그레시다는 뒤따라 오면서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메이를 위로했다. 그 러니까 세라피스가 맡긴 그들의 임무는 '이종족 노예를 사오는 것.' 그래 서 그들이 참여한 곳은 헤스팔콘 최대의 이종족 노예시장이었다. 마치 궁 전을 연상케 하는 귀족적인 분위기의 노예시장에는 헤스팔콘 전역의 노예 상들이 모이고 있었고 메이가 둘러보는 노예시장의 전경이란 다리에 이상 이라도 있는지 모조리 가마나 말이나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귀족들과 사슬에 묶여 매매소로 이동하고 있는 이종족들이 뒤섞여 씁쓸한 희극적 분 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달라카트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메이에게 다가온 난쟁이처럼 작은 키의 주름진 사내는 매매대행사 였다. 그를 통해서 노예매매를 한다고나 할까. 메이는 매력적 허스키한 목소리로 준비해 두었던 말을 시작했다. "가스발 사략함대의 총지휘관인 메이트리아크 가스발 이오." 메이는 예전 가스발 해적단의 위풍당당한 두목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노예시장에선 절대로 기죽은 모습 보이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응접실로 향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곳의 노예를 사고 싶소." "하하. 모두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옵죠." "내 말은......" 메이는 슬슬 주변을 둘러보다가 매매대행사의 눈이 튀어 나올 소리를 했 다. "오늘 매매되는 모든 이종족 노예를 사들이겠다는 말이요." "지, 진심 이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칠 정도였다. 이런 대규모 시 장에서 매매되는 노예 전체를 산다는 건 유래가 없었던 일이었다. 즉 시장 이 정지되어 버린다. 메이가 말했다.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오늘 매매될 노예의 종류와 수를 하나도 빠짐 없이 기록해서 내가 차를 다 마시기 전까지 내게 가져 오시오."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메이가 타고온 자신의 기함 밴틀라이저에는 엄청난 량의 금은보화가 잔뜩 실려 있었고 그건 모두 리하르트가 준 것이었다. 메이는 노예상들을 위해 마련된 호화로운 응접실로 향하며 생각에 빠졌다. '배에 있는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이종족들을 사들이라고?' 리하르트는 자신이 헤스팔콘에서 빼돌려 달라카트로 가져온 모든 재산을 이곳에 퍼부었던 것이다. 그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헤스팔콘의 노동력 은 이종족이 없다면 유지가 되질 않는 수준이며 의외로 매매되고 있는 잉 여노동력은 그리 많지 않다. 메이가 매매되는 이종족들을 단번에 모조리 사들여서 달라카트로 가져오기 시작하면 그들은 새로운 노동력을 얻기 위 해 대규모의 이종족 사냥을 시작할테고 헤스팔콘에 숨어 있는 이종족들은 그것을 피해 알아서 달라카트로 도망쳐 내려올 것이다. 가르바트는 살기에 는 너무나 추운 곳이니까 도망칠 수 있는 곳은 달라카트 뿐. '치밀한 도박 같군. 헤스팔콘의 이종족들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것이니.' 리하르트는 헤스팔콘의 만성적인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 국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이종족들의 수가 마치 무한하다는 관념적 착 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종족의 수는 분명 유한하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변화를 준 다면 그 문제들은 금방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헤스팔콘이 그 문제 에 대해 자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리하르트가 노리는 것은 너 무도 당연하고 단순하지만 또 너무나 상식 밖이어서 배부른 헤스팔콘의 황 실은 감히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었다. 메이는 밤색머리칼을 쓸어 올 리며 빠른 걸음으로 인격체를 사고 파는 소란스런 시장 속을 지나갔다. 10 개월 후 2. 달라카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그 '변화'들은 세라피스의 명령 으로 리하르트와 파르낫소의 손에 철저하게 목적을 숨기고 있었으며 여전 히 휴센은 황제의 달콤한 꿈에 빠져 황실이 만들고 있는 '이중장부'를 눈 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며 헤스팔콘은 휴센의 보고만을 듣고 있었다. 결국 황실의 관리가 아닌 사략함대 일원들을 이용해 움직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 엄청난 일들의 낌새를 느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하는 지난 10개월 간의 '업적'들이다. 1.맥주 생산 :맥주는 말 그대로 벼나 보리등의 곡물로 만든 술이다. 세라피스는 예전 여행 때 지방에서 소규모로 만들어 오던 맥주의 맛을 본 뒤에 그 맛을 기억해 파르낫소에게 그 제조법을 단순화 시켜달라고 했고 곧 능금주나 와인 위주의 달라카트 주류술을 맥주로 바꿔 버렸다. 돈 없는 평민들은 당연히 와인 보다 값이 싸고 화주보다 맛이 좋은 맥주를 선호했으며 무 엇보다 맥주를 생산하는 거대 양조장들은 모두 황실 직속의 '공기업'화 하여 엄청난 이익을 뽑아낸 것이다. 세라피스의 말은 이렇다. '좀 더 싸고 맛있는 술을 원하는 것은 전 세계 남자들의 공동심리니까.' 엄청난 맥주 소비로 얻은 이익은 모두 국고로 돌아갔으며 그것은 다시 광산을 개발하는 자금에 쓰였다. 맥주 개량에 줄리탄이 적극 참여 했다 는 소문이 있긴 하다. 2.광산 개발 :파르낫소가 고안해 낸 '중장비'로 인해 광산은 생각보다 빠르게 개발되 었다.(지금까지는 대부분 사육된 트롤이나 오거등을 중장비로 이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오크등의 힘좋은 이종족들에게 공여된 광산이 풀가동 되고 있으며 물론 황실은 그들과 공정한 거래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만들어 지고 개량된 엄청난 수의 대장간에선 당장이라도 무기 생산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3.신무기 개발 :불합리하게도 일반 사병들의 무기체계는 기사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으 며 덕분에 야전에는 전혀 쓸모가 없고 값도 비싼 장검류를 고집하고 있 었다. 이것에 대해 파르낫소는 '습격검'이라고 명명된 짧고 가벼운 검을 제식무기표준으로 삼길 건의했으며 광산에서 나오는 질좋은 철의 공급은 그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와 함께 가공이 복잡하고 수량이 부족한 지금 의 화살 대신 남부의 얇은 대나무를 잘라서 만든 경량의 화살들로 대체 되었다. 물론 모든 제식무기는 그 기준을 표준화 시켜 그 기준에 맞춰 생 산하도록 명령하였다. 4.물자수송로의 확충 :달라카트는 수자원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물자가 이동하는 도로가 주 먹구구식이기 때문에 조금만 내륙에 들어가도 신선한 물고기가 도착할 수 없는 끔찍한 운송방식이었다. 그에 따라 도시들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잘 포장된 도로가 만들어져 졌으며 그에 투자한 비용은 몇배나 원활해 진 도시간 무역의 이익으로 금방 매꿔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포장도로의 진 짜 목적은 전쟁시에 빠른 군대의 이동을 위해서 였다. 파르낫소를 위시한 많은 수의 학자들은 도로확충과 함께 달라카트 전역의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냈다.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역시 황제 따윈 되는 게 아니었어."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일들을 동시에 지휘한 세라피스는 항상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불쌍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집무실 책상에 머리를 박 고 '쉬고 싶어.'라고 중얼 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의 시종이 된 프란츠가 스케쥴을 말해 주었다. "폐하. 본당의 연회실에서 모두들 기다리십니다." "......알았어. 약속은 지켜야지." 세라피스는 부시시 일어서며 황제의 예복으로 가라입기 위해 흐늘흐늘 걸 어갔다. 오늘은 젤리드와 약속한 결혼식이 시작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오 랜만에 사략함대 사람들이 모두 모인 연회실은 세라피스의 피곤한 마음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완연한 축제의 분위기였다. "프란츠...... 갈아입을 옷 좀 갖다 줘." "폐, 폐하. 여기서 옷 벗지 마세요!" 3. 지금까지 달라카트 황궁의 연회실에서 결혼식을 올린 자는 직계 황족들 뿐이었다. 그만큼 그곳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대대로 영광스러운 일이 었던 것이다. 연회실 역시 권위를 상징하는 높은 천정에 사방이 스테인드 글래스와 목조 석조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고 연단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의 객석들도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히잉. 지루하다. 언제 시작하는 거야 이거. 레비야. 우리 나가자." "전 지켜보고 싶습니다." 상석에 앉은 물키벨은 연신 입을 삐죽 내밀고 의자를 들썩들썩 거리며 몸 을 비비 틀고 있었고. "......너무해. 모두들 너무해." 뭐가 싫은지 어두운 구석에 혼자 주끄리고 앉아 있는 카리나는 아침부터 토라져서 우울해 보였다. "야! 담배 꺼!" "싫어!" "끄란 말야!" "싫다니까!" 정장을 입은 채 입구에서부터 멱살 잡은 시오와 톨베인의 말싸움은 끝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모두다 모인 건." 혼자서 느긋한 줄리탄만이 연회실 풍경을 둘러보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카넬리안은 '시끄러워 죽겠다 .'는 얼굴로 한숨이다. "이 인간들은 간만에 모였는데도 변한 게 없어." "카넬리안. 오늘 선물 준비했어." "선물?" "응. 기대해." 사실 지난 10개월 동안 서로 맡은 바 일을 처리하느라 땀나게 뛰어나녔기 때문에 사략함대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다 모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한편 메이는 별실에서 신부가 될 리이 곁에 있었다. 분홍색 천연염료로 물 들인 정숙한 달라카트 풍의 신부복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리이는 그 녀의 성격대로 상당히 엄숙했다. "정말 예쁘네요. 리이 씨는." 메이는 리이의 세련된 조각처럼 틀어올린 금발의 머리칼과 그에 어울리는 하얀 피부를 보며 몇번이나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화려한 결혼 식에 어울리는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리이는 그 말에 쑥쓰러 운 듯 고맙다고 말한 뒤에 다시 얼굴이 굳었다.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요?" "...... 가장 중요한 남자가 아직 안왔잖아요." "아." 젤리드는 며칠 째 '행방불명'이었다. 대체 오늘이 분명히 결혼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디서 술 퍼마시고 있는지, 싱글의 마지막 즐거움을 만끽하 려고 하는지 카리나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카운트다운 1시간을 남 겨 놓고도 그 인간은 소식이 없으니 리이는 결혼식이고 뭐고 다시 레이피 어를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올 꺼에요." 메이는 스스로도 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리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 예전에도 그랬어요. 기사 작위를 얻고도 얼마간 동거했는데... ... 결혼하자고 그때 내가 말했는데...... 알겠다고 말해 놓고 사라졌어요 ." "무슨 사정이 있었나 보죠." "예. 사정이 있었지요." 젤리드가 리이에게서 사라진 뒤에 그가 저지른 일은 자신의 가문을 몰살 시켜 버린 것이었다. 리이도 젤리드도 서로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던 그 때, 리이는 결국 두번째 남자에게서 버림 받았고 젤리드는 자기 파괴와 함께 파문기사가 되어 리이와 다시 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언제나 멋대로인 남자니까 이번에 또 이렇게 헤어진다고 해도 하나도 아 쉬울 것이 없어요." "그런......" 리이의 쓸쓸한 모습에 뒤에 서 있는 이카테스가 안쓰러운 표정을 보였다. 그때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란 여자는 잠시만 혼자 둬도 감상적이 되어 버린 다니까. 자기 몸에 상처내지 말라고 했지?" "젤리드! 어디있다 온거야!" 리이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고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젤리드가 돌 아선 그녀에게 갑자기 키스를 한 것이다. 젤리드는 리이의 귓가를 쓰다듬 은 뒤에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준비하고 있어." "으응." 리이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도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 았다. 그녀는 아주 기뻤다. 4. 달라카트 풍의 결혼식이란 다른 제국에 비해 진행이 빨랐다. 연단에서 주 례를 맡은 세라피스가 리이와 젤리드 앞에서 축복을 해주고 젤리드가 예물 을 건내주면 그걸로 결혼이 증명되는 것이다. 참 우여곡절끝에 시작한 결 혼식이었건만 세라피스의 축하는 그의 성격대로 너무도 너무나도 짧았다. "......잘 사세요." "끝?" "......끝 입니다." "정말?" "......그래요." 졸린 눈의 세라피스가 몽유병 환자마냥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객석의 반응은 경악스러웠다. 키마인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호이젠에게 속 삭였다. "달라카트 결혼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저런 거야?" "그것보다는 폐하의 말투가...... 원래 저렇잖아요." 젤리드는 거의 살기에 가까운 기운을 뿜으며 금방이라도 연단에 쓰러져 잠들어 버릴 것 같은 세라피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실없는 웃음을 띄우고 는 말했다. "고마워. 잘 살께." 할 말을 잃은 리이. 장소만 으리으리했지 이 사람들은 진지해 질 생각이 있긴 한 건가. 그리고 젤리드는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고는 리이의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잡았다. "비싼거야." "이, 이건......" 젤리드가 건내준 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황홀한 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은빛의 링이었다. 그리고 그 보석은 부유한 귀족들이 가보로나 하나 쯤 소유할 수 있는 최고가의 희귀보석. 아마도 달라카트에 있는 그 보석의 숫자는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일 것이다. "이거 구하느라고 고생했어. 잃어버리지마." "젤리드......" 아무리 젤리드라도 그런 보석을 구하려면 며칠은 죽어라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그가 얼마동안 사라진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리이의 얼굴에 감동 의 물결이 일렁거릴 찰나 반지를 끼우려던 리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젤리드." "응?" "반지에 세겨진 이 인장은 뭐야." "아 그거...... 그건 말야." 젤리드는 갑자기 리이의 눈을 피하며 우물쭈물 거렸고 리이는 의심스런 눈빛과 함께 추리를 시작했다. 이름 모를 귀족가문의 인장.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희귀한 반지. 그리고 젤리드의 성격. 비밀은 밝혀졌다! "이거 장물이지!!" "아무려면 어때!!" 리이는 순간적으로 그게 암시장에서 불법으로 거래되는 장물이라는걸 간 파한 것이다. 그리고 성스럽고 감미롭던 결혼식장은 그들의 첫번째 부부싸 움터가 되어 버렸다. "대체 결혼예물로 장물을 주다니!! 이 뻔뻔한 남자야!!" "장물이지만 돈주고 샀어! 아무도 안 죽였다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당황하는 객석. 둘의 성격 차이를 보아 조만간 싸움이 날 것이라고 생각 하곤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피곤에 찌든 세라피스는 힘들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부부싸움은 집에 가서 하세요. 빨리 좀 끝내죠?" "주례는 입 다물고 있어!!" 추락하는 황제의 위신. 주변에 검이 없길 천만 다행인 리이와 젤리드의 싸움은 이카테스와 카리나의 만류로 간신히 진정되었고 두 신혼부부는 식 객들의 축하와 나가서 싸우라는 독촉을 받으며 퇴장해 버렸다. 유사이래 이런 결혼식은 헤스페리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사태가 진정 된 뒤에 세라피스는 다음 절차를 밟았다. "줄리탄 씨. 앞으로 나오세요." "응? 왜 주인님을 불러?" "선물 가져 올게." 놀란 카넬리안에게 방긋 웃어보이며 줄리탄은 연단 앞으로 걸어갔다. 웅 성거리는 객석. 이번엔 또 뭐란 말인가. 세라피스는 줄리탄을 보며 남아 있는 힘을 짜내서 거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옛." 그리고 세라피스는 천천히 자신의 예검을 뽑으며 말했다. "짐은 영원히 번창할 이 달라카트 제국의 황제로서 기사로서의 응당의 가 치를 지닌 청년 줄리탄에게...... 특별히 성년식을 치루지 않았음에도 불 구하고 파격적으로 제국의 기사 작위를 수여하니 겸허히 받아들이기 바라 오." 뒷좌석에 씰들과 함께 앉아 있던 그랜사이어는 터져버릴 것 같은 웃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세라피스 놈. 기사수업도 받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작위를 주다니. 정말 맘대로 황제라니까." 그랬던 것이다. 어느 제국에서도 17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 적은 없었고 수업도 받지 않은 평민에겐 더더욱 그랬건만 세라피스는 '특별히' 줄리탄 에게만 그걸 허용한 것이었다. 물론 그걸 부탁한 것은 줄리탄이었지만. "앞으로 남아 있는 인생을 기사로서의 최선을 다하고...... 사랑하는 하 는 사람을 지키는게 그 힘을 쓰길 바라오." 어쨌든 황제가 수여하는 작위니까 거부할 사람 누구도 없지만. 일반적으 로 읇는 '기사도에 대한 모범'과 '제국에 대한 충성' 등등의 말들을 생략 해 버린 제멋대로 수여식이었던 것이다. 줄리탄은 자신의 어깨에 닿은 황 제의 검을 느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 그리고 기사로서 지니게 될 이름을 내리겠소." 기사들은 모두 성과 이름이 분리되어 있으며 그 가문을 갖고 있는데 평민 인 줄리탄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가 된 이후 앞으로는 번듯한 줄리 탄 가문이 생겨나게 되고 세라피스가 무슨무슨 줄리탄이라는 식으로 이름 을 부여해야 하는데. "그 이름은...... 그러니까 이름은......" 세라피스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흐리고 있었다. 황당한 줄리탄이 고개를 숙인 채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 이름 안 정한 거죠?" "아, 아냐. 정했다고. 아 그게 뭐더라." "......너무해." 뭐하나 제대로 끝나는게 없었던 것이다. 연단 근처에 앉아 있던 파르낫소 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 제발 이름을 기억해 내세요." 이층 객석에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세라피스를 지켜보던 리하르트 역시 로즈마이어를 보며 오랜만에 유쾌하다는 듯 낮은 웃음을 드러냈다. "큭큭. 즐겁지 않아? 헤스팔콘 황실에선 절대로 못볼 광경이야." "리하르트 님이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봐요."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세라피스는 '오오!'하고 검을 번쩍 들며 이름을 기억해 냈다. "맞아! 사모예드! 경에게 사모예드라는 성스럽고 멋진 이름을 주겠소!" "사모예드......" 줄리탄은 그 이상한 억양의 이름을 중얼중얼거렸다. 꼭 애완견에게 붙이 는 이름 같잖아? 줄리탄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거 지금 생각한 이름이죠?" "아, 아니다! 감히 황제를 의심하다! 무, 무례하구나!" 더욱 더 당황하는 세라피스의 모습이 훨씬 의심스럽다. 줄리탄은 아무려 면 어떻겠냐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그때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루스의 입에서 쿡쿡 웃음이 세어 나오며 절대로 말해서는 안될 '비밀'이 나오고야 말았다. "사모예드라. 그건 어렸을 때 키우던 개 이름이로군." "역시 개이름이었어!!" 분노한 줄리탄. 세라피스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잽싸게 연회실에서 도망쳤 다. "짐은 바빠서 이만!!" 코메디 뮤지컬의 한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줄리탄은 뭔가 상상히 찜찜 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카넬리안에게 돌아와 엷은 미소를 띄웠 다. "카넬리안. 선물이야. 예전에 말한대로 나 기사 됐어. 좀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주인님. 대체......" "이제 그럴 듯한 테이머 같지? 헤헤." "엉뚱해!"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팔을 잡아 당기며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가녀 린 양팔로 간지럽게 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께요. 나의 귀여운 주인님." 그리고 잠시후 준비된 만찬이 나오며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너무도 행복 에 충만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5. 가르바트의 도시들은 항상 하얗다. 일상처럼 내리는 눈발에 그들은 모두 익숙해져 있었고 추운 날씨에 옷깃을 여미는 버릇도, 쌓인 눈을 치우는 부 지런함에도 익숙했다. 가르바트 제2의 실력자 코머런트 재상이 머물고 있 는 웅장한 검은 궁전의 정원에서 가죽 코트를 두른 스테온은 하얀 잔설(殘 雪)를 밟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런 걸 황량의 미라고 해야 할까." 스테온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차갑고 고요한데다가 눈 이 아플 정도로 새하얗게 깔려 있는 눈밭만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 정원이 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을씨년스러움에 혀를 찰 것이다. 이 런 미학을 즐기는 자들은 가르바트 사람들 뿐이었다. "줄리탄이라...... 그 녀석이 맞겠지. 얄궂은 운명이군." 그는 앙상한 거목 사이 사이에 차갑게 피어 있는 설화를 눈에 담고 있었 다. 달라카트에 대해서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던 스테온은 관련된 문서 에서 줄리탄이라는 이름을 보며 눈을 의심했었다. 그래도 붉은 눈의 씰과 함께 다니는 줄리탄은 전 세계 한명 뿐일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키오네 마을에서 페세테르를 다듬던 순진하기 그지 없던 줄리탄을 떠올리는 스테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어쩌면...... 적으로 만날 수도 있겠군.' 스테온은 코머런트 재상의 눈에 들어 급속 성장을 한 이후 지금은 지방 남작들을 자신의 편을 끌어들여 가르바트를 뒤집을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시기. 함부로 이빨을 드러냈다간 북해기사단장 마 르켈라이쥬가 나서게 될 것이고 그러면 반란은 분명 실패한다. 스테온이 이용하려고 한 것은 달라카트였다. 그는 누구보다 달라카트의 움직임을 주 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 이제와서 이런 말은 못하겠지." 스테온은 얼어붙는 입술을 슬쩍 훔치며 궁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6. 얼마 후 드디어 사건은 터졌다. 세라피스는 더 이상 휴센과 헤스팔콘에게 숨기며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세라피스는 사실 상 눈속임에 불과한 황실 관리들 앞에서 말 그대로 '혁명적인' 칙령을 내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노예를 해방하다고 했소." 세라피스가 던진 말에 휴센은 심장이 내려앉은 듯이 펄쩍 뛰고 있었다. 노예 해방. 세라피스가 그것을 실행하면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는 것은 물 론이요 지금까지 쉽게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었던 구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착취귀족의 대표주자인 휴센이 소스라치는 것은 당연한 것 이다. "말도 안됩니다! 노예를 해방시켜 버리게 되면." "제국의 수입이 늘게 되지." 세라피스는 휴센의 말을 끊으며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노예는 세금을 내지 않아. 물건 취급을 받기 때문이지. 하지만 꼭 천한 물건 취급을 받지 않아도 그들은 일을 할 수 있고 제국에 충성할 수 있소. 똑같이 심장 하나 달린 인간이란 말야. 단지 당신과 같은 귀족들이 재산처 럼 놔주질 않고 있을 뿐이지. 노예들을 해방시키면 귀족이 아닌 이 황실로 세금이 들어올 것이요. 물론 그 노예출신을 위한 일거리는 얼마든지 준비 해 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서, 서, 설마 나를 속인건가!!" 휴센은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며 풀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소리쳤다. 모두 귀족출신인 다른 관리들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속였다니. 뭘 말이요?" "내, 내가 황제가 될꺼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세라피스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 같은 헤스팔콘의 첩자 놈에게 왜 황제를 시켜 줘? 대공께선 미친 거 아니오?" "이, 이 여우같은 놈이!" 휴센은 자신에게 선물했던 금은보화가 모조리 가짜였다는 걸 깨닳았을 때 처럼 감히 황제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이성을 잃고 펄펄 날뛰었지만 세 라피스는 그런 모습을 기분좋게 즐기며 말했다. "휴센 대공. 당신도 참 순진한 사람이시군.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장 비 열한 자인 황제의 말을 믿을 수가 있소? 나라면 친구들도 배신하는 사기꾼 의 말을 믿을 지언정 황제가 한 말은 절대 믿지 않을 꺼외다. 이거 측은하 구만." 세라피스는 무지막지하게 뻔뻔했고 휴센은 졸도해 버릴 듯 숨 넘어가며 입을 쩍 벌릴 뿐이었다. 저런 놈이었다니. 왜 그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 한 것일까. 절대로 세라피스는 병약하지도 우둔하지도 순진하지도 착하지 도 않은 능구렁이 같은 자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닳은 것이다. 그 능구렁 이는 옥좌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지금 즉시 휴센의 모든 재산과 작위를 몰수하며 당장 이 죄인을 이 제국 에서 추방해라!!" "헤, 헤스팔콘에 가서 모두 다 말하겠어!! 두고보라고!!" "어서 가서 일러바치려무나. 고자질쟁이야." 세라피스는 우는 아이 뒤통수 때리듯이 약을 올리며 휴센이 알현실 밖으 로 뛰어 나가는 등 뒤에다 모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의 관리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속이 다 시원하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며 근위병에게 말했다. "활을 이리 주게나." 세라피스가 창밖으로 보고 있는 건 마차로 달려다고 있는 휴센의 모습이 었다. 세라피스는 능숙하게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며 속삭였다. "내가 널 살려 보낼 리가 없잖아. 황제의 말을 믿는게 아니라니까." 투웅 하는 소리와 함께 창밖으로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휴센의 뒤를 쫓으 며 그의 몸을 꽤뚫었다. 심장이 뚫리며 그는 푹 꼬꾸라졌고 잠시 짐승같은 울부짖음이 들리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휴센은 즉사했다. 수십년간 헤스팔 콘을 등에 업고 황실을 좀먹던 권세가의 최후는 너무나 초라했다. "자 이제...... 전쟁인가. 돌아가지 못할 곳으로 와버렸군." 세라피스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지금까지 누구도 넘지 못한 선을 지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알현실로 돌아가 관리들 앞에 활을 내던지며 소리 쳤다. "지금까지 헤스팔콘의 눈을 속이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당신 들의 역할은 끝났으니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지금쯤 당신들의 저택과 금고에는 내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당신들의 재산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감사히 쓰겠습니다. 오늘 회의 끝." 일년동안 속아 온 귀족관리들은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 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휴센처럼 비참하게 죽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대노한 헤스팔콘 황실로부터 세라피스에게 칙사 가 내려왔다. 당장 지금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전면전을 개 시하겠다는 최후통첩을 가져온 초토사(剿討師)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달라카트 남부와 서부에서는 같이 싸워주기로 약속한 이종족의 부대 가 몰려오고 있었다. -Blind Talk 처음에는 아주 자세한 전쟁 준비과정을 나름대로 치밀하게 꾸미려고 했지 만 모두 지우고 되도록 전쟁 준비는 짧고 간단하게 끝내버렸습니다. 일단 지루하지 않게 표현할 자신이 없을 뿐더러 제 생각에 드래곤 레이디의 포 인트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장면도 처음에는 엄숙 하고 분위기 있게 썼다가 다시 좀 천박하더라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 습니다...... 멋드러지고 엄숙하고 숭고한 분위기는 제 글이 아니라도 다 른 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을테니까. 문제는 제가 봐도 너무 급작스러워서 좀 오류가 있는데. (쯧. 결혼식과 전쟁론에 대한 자료들을 읽어놓고 결국 써먹지 못했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시길. 급히 지우고 다시 쓴 것이라서... 출판본에서는 또 바뀔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오탈자등의 수정은 한번에 몰아서 하겠습니다. 휴우. 피곤해라. E-MAIL : billiken@hananet.net Sting의 fragile을 을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3-6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3/29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251 제 목:[ DRAGON LADY ] 13-06 : 침묵의 시 관련자료:없음 [6669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3-29 18:22 조회:561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3-06 : 침묵의 시 Unvisible Enemy 1. 메이는 드물게 복잡한 표정을 보이며 사략함대 일원들이 모여 있는 연단 위에 섰다. 이번 만큼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약 2년간 활약했던 가스발 사략함대의 해체식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들과 같이 가꾸고 번창시켜 왔던 자랑스런 가스 발 사략함대를 해체합니다. 그와 함께 사락함대의 전 인원은 황실 직속 달 라카트 해군으로 들어 갑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저 메이트 리아크 가스발을 너무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달라카트의 번영을 위해 함 께 노력하길 기원합니다." 사실 전쟁을 즈음하여 사략함대의 해체는 정해진 절차였다. 그리고 메이 는 자신의 별명대로 정말로 제독이 되었다. 이제 갓 20세가 된 메이로서 제독이라는 직위는 감개무량하기 보다는 무겁기 그지 없는 것이지만 그녀 는 거절하지 않았다. 아버지 발더의 못 다한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 때문만 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인의 문턱에 와서, 이것이 자신이 나가야 할 인생 이라는 걸 느낀 것이다. "달라카트 함대의 전시 사령부는 기동요새 자라탄으로 삼으며 첫번째 공 략 목표는 작전 개시 수시간 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자세한 관련 지령은 문서를 통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사략함대 사람들도 이렇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은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 에 특별히 놀랄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선으로 눈속임하여 정박하고 있던 전투함들이 모습을 들어내며 자라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2. 헤스팔콘으로부터의 최후통첩을 가져온 칙사는 세라피스를 만나지도 못했 다. 말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한 격. 헤스팔콘에게 이 이상의 모욕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노린 거지만. "간댕이가 부은 놈들!!" 이라는 절규가 헤스팔콘 황실의 기분일 것이다. 백여년 이상 앞마당 애완 견 마냥 고분고분 말 잘듣던 달라카트가 1년 사이에 '니네가 뭔데 참견이 야!'라는 눈뜨고 봐줄 길이 없는 무례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건들건들한 태 도로 돌변해 버렸으니 어찌 화가 안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상황인 데도 설마 약소한 달라카트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놈들은 눈먼 돼지라는 겁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는데 일조했던 리하르트가 헤스팔콘의 방만한 모습에 자신만만하게 조소를 퍼부었다. 헤스팔콘의 칙사를 구둣발로 걷어 차서 내 쫓아 버린 뒤 4층 응접실에선 몇몇 중요인물들이 모여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흠. 살다보니 별 꼴을 다보는군." 젤리드는 창밖의 광경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연병장으로 돌변한 황 궁의 정원 풍경은 기상천외하기 이를데 없었다. 오크들은 뭐 그렇게 할 말 이 많은지 가만히 있을 때도 항시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고 그 옆에는 그런 오크들에게 눈을 흘기며 속닥거리는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 그리고 그 뒤에는 과묵하기가 목석 같은 트롤들이 태양볕에 눈살을 찌푸 리며 사열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일렬로 서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오거 들이 모두 자리에 주저앉아 먹을 것을 연신 입에 담고 있었고 또 그 뒤에 는..... 이들은 달라카트가 창설한 자랑스러운 이종족 부대의 일부였던 것 이다. "거참 많이도 긁어모았네. 저걸 군대라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들뿐일걸?" 응접실 창가에 기대어 창 밖의 '자유분방한' 모습들을 훑어본 젤리드는 허탈한 표정으로 심정을 털어 놓았다. 그도 세상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별 의 별 모습 다 봤지만 이종족에게 무기를 주고 정식으로 군대로 인정하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달라카트에서 인간과 동등한 자유인 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의 땅도 약속한 상태였다. 줄리탄이 그런 젤리드의 모습에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종족들에게 인간의 기준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우릴 도와주는 것이니 고마워해야죠." "으음. 알고 있어. 인간들을 증오하는 저들을 설득한게 놀라울 뿐이야. 아무튼...... 리이와의 신혼여행은 전쟁터가 될 것 같군." 그때 갑자기 끼어든 장난스러운 목소리. "좋잖아! 이종족들로 이뤄진 정규군이라니. 이 정도면 우리 제국이 친이 종정책을 펴고 있다는 걸 선전하지 않아도 만천하가 알 거 아냐? 그럼 남 는 선전비로 술이나 퍼 마실까나." 사람들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잘도 늘어놓는 세라피스를 바라보 았다. 황제라는 작자가 꼭 말을 해도...... 말은 그래도 세라피스의 머리 속은 치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노예해방 직후 일거리와 돈을 원하 는 엄청난 수의 노예들이 군대에 지원한 후였고 그들은 미리 준비된 기관 에서 속성군사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헤스팔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달라카트의 숨겨진 힘이었다. "우리는 헤스팔콘처럼 군대가 많은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준비할 여유도 없었고 오래 전쟁을 치룰 여력도 없어. 그래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방법 은...... 전격전 뿐이다." 전격전이란 말 그대로 순간적이고 조직적인 총공세로 적이 힘을 모으기 전에 단 시간에 적의 거점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성공한다면 일순간에 전 세를 뒤바꿀 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곧장 전략적 패배를 의미하는 도박이었 다. 그리고 파르낫소가 전격전을 제안하기 전까지는 헤스페리아 누구도 그 런 식의 전술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2. 달라카트와 헤스팔콘은 이어주는 유일한 군사적 요충지는 다카란 요새 하 나 뿐이었다. 그 외의 국경지대는 대규모 군사이동을 할 수 없는 험준한 피크 산맥과 열사의 티브 사막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다카란 요새의 중요성은 국경전의 승패를 가름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다카란은 5만여명의 헤스팔콘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난공 불락의 요새. 그것이 다카란인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곳을 뚫으려 는 무모한 시도는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철 옹성 다카란. 헤스팔콘의 자존심이자 달라카트에겐 강철의 벽과 같은 존재 인 요새 다카란이 달라카트 앞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다카란이 점령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꼭 상식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뭐? 무슨 소리인가?" "달라카트가 전면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다카란이 이렇게나 빨리 점령당하다니! 내통자라도 있었나?" "그게 아니오라." 일반적인 농성전이라는 것은 길게는 몇년이 걸리기까지 한다. 게다가 몇 중의 옹벽에 단단한 아성(牙城)까지 지니고 있는 다카란 요새는 수백년이 걸려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헤스팔콘 군장성들의 호언장담이었다 . 그런데 달라카트 군은 그 무적의 철옹성을 단 반나절만에 점령한 것이다 . 이 보고가 들어왔을 때 달라카트 군은 이미 다카란 내에서 승전파티라도 열고 있지 않을까. "보고에 의하면 다수의 기사가 지휘하는 인간들과 이종족의 혼성부대였다 고 합니다." "이, 이종족?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예. 달라카트 제국은 이종족을 군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나 될 소리야! 그런 우둔하고 짐승같은 이종족들을 어떻게 군 대로 써 먹어!" "역시 보고에 의하면...... 다크엘프들은 아무런 장비 없이 성벽을 타고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거들에게는 화살이 소용 없었습니다. 또한 트 롤들이 성 외각의 마력 차폐막을 무효화시키고 그곳으로 무장오크들이 인 간들의 돌격대와 함께 진군해 들어왔습니다." 무슨 캐캐묵은 민간전승에서나 나올 법한 황당한 보고를 들으며 황제 하 우프트만 3세의 불쾌감이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고귀한 전쟁은 인 간만의 것이다!'라는 관념적 상식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 "그, 그리고 또 보고에는...... 기사들과 함께 요새 내부에 악령들이 출 현해서 전의를 상실하......." "그만!! 악령이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빼앗기고 나니까 말 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 놓는군! 무능한 군인놈들!" 말락과 그의 이형들을 알리가 없는 황제로서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좋아. 다카란이 점령되었다고 위협받을 것은 하 나도 없다. 황제 직속의 정규군은 아직 3만여명이 넘으며 필요한 경우 각 왕국에 소집령을 내려 군대를 끌어 모을 수도 있다. 달라카트 놈들이 한발 자국이라도 더 전진했다간 압도적인 군세에 포위당해 전멸당할 것이 분명 하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명령을 내렸다. " 다카란으로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지고메틱(12만여명 단위의 집단)을 집중시킨다. 먹이를 받아먹는 개 주제에 이종족을 끌어들여 내게 고개를 쳐든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다시는 짐의 연회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주마."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각 지역 주둔군으로부터의 보고가." "또 무슨 소리야!" "각 지역군들의 상당수가 열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달라카트의 공작인 것 같습니다." "여, 열병?" "예. 고열에 시달리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리하르트가 준비했던 '세균전'이었다. 치사율은 낮아도 그 열병에 감염되면 한달 동안은 검을 들기는 커녕 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는다. 그 리고 무엇보다 그 전염발병률은 이전의 수인성 역병과 마찬가지로 즉각적 이었다. 가장 놀라운 건 리하르트는 그 준비를 수년전부터 비밀스레 준비 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 로이터 밑에 있으면서 조금씩 자신을 따르는 군 내부의 첩자를 만들어 온 리하르트는 전쟁개시 직전에 그 병을 퍼트릴 것 을 명령한 것이었다. "이것들이...... 그런 사소한 병 하나에 군대가 못 움직인단 말야!!" 사실 헤스팔콘에서 '보이지 않는 적'이라고 명명한 세균전이나 생화학전 에 관심을 가졌던 자는 로이터와 리하르트 뿐이었다. 황제 역시 그것이 그 렇게 치명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재미있게 노는군. 그렇다면 짐도 진정한 헤스팔콘의 힘을 보여주겠노라! 지금 즉시 각 왕국에 군소집령을 내려라! 기사와 마법사와 군대들을 다카 란으로 집결 시켜! 충성스럽게 싸운 국왕들에겐 자비로운 포상이 있을 것 이니라!" 헤스팔콘은 많은 수의 왕국들로 이뤄진 제국이었다. 그리고 그 왕국은 헤 스팔콘 황실에 공물을 바치며 황제의 칙령이 내린다면 군대를 끌고 전쟁에 참가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의 힘만 모아도 달라카트의 총 군사력을 가볍게 넘어 버린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고 있을 때 리히트야거의 리더 이 힐데브란트가 나타났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마법사인 그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이제는 물어보기도 두려운 '보고'를 올렸다. "폐하. 제국 내에서 대대적인 내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감정이 없는 것 같은 힐데브란트의 말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을 정도로 그 보고는 황제가 경기를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내, 내전이라니!!" 물론 왕국끼리의 소규모 전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예전 리센버러와 헬몬 드 사이의 싸움처럼 왕국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주 싸웠고 황실은 그것에 대해 묵인, 방관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 왜 하필 이 럴 때에 내전이, 그것도 대대적인 내전이 발생하느냐는 것이다. 힐데브란 트는 물기 없는 눈동자를 굴리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달라카트에서 유입되었던 대부분의 황금이 연금술로 만들어낸 가짜 였습 니다. 지금 그 가짜 황금들은 동시에 힘을 잃고 철이나 납으로 본래 모습 을 들어 냈으며 그와 함께 각 왕국들의 무역시장 질서가 엉망이 되며 왕국 들의 전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 루스는 그 수가 희박한 연금술사였다. 그러나 그 역시 납덩이로부터 황금 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고 단지 몇달 동안 황금의 성격을 유지하는 가짜 황금은 (많은 재료가 들긴 하지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알고 있 는 파르낫소는 루스에게 부탁해서 대량의 '위조 황금'을 만들어 냈고 그것 을 헤스팔콘의 시장에 퍼트린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지금 그 위조 황금들은 힘을 잃고 본래의 납덩이로 돌아가 버렸다. 황금은 전 세계 가치 의 척도이다. 이미 사람들 손을 돌고 돌아 헤스팔콘 전역에 퍼져버린 위조 황금들이 왕국들에게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면서 서로 다른 왕국의 짓이라 고 분노하며 전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말은...... 왕국들에게 소집령을 내릴 수 없다는 의미인가?" "지금 헤스팔콘은 아수라장입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헤스팔콘 제국은 달라카트의 '보이지 않는 적'에게 당한 것입니다." "인정할 수 없다." "......" 헤스팔콘 황제 하우프트만 3세의 목가를 처음으로 위기감이 휘감았다. 다 카란은 전격전에 점령되었고 제국군은 열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왕국들은 서로 전쟁 중이다. 어쩌면 달라카트에게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이다. 하우프트만 3세는 분노에 양뺨을 씰룩거리며 서성거리다간 힐데브 란트를 바라보았다. 아직 헤스팔콘에는 가장 강력한 힘이 남아 있다. "힐데브란트 공. 지금 즉시 리히트야거를 지휘하여 다카란으로 내려가시 기 바라오." "하지만......" 결국 황제는 황실근위엽병인 리히트야거를 움직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파괴력에서는 제국정규군 전체의 힘보다도 강력한 기사집단. 가르바트 마저도 두려워하는 최정예 기사들이었다. 세이드와 레오폴트가 빠져 나갔 어도 리히트야거는 여전히 달라카트 군에겐 최악의 상대임에 분명하다. "폐하. 리히트야거가 황실을 떠나면 이 곳, 제도가 비어 버립니다." "상관없소. 어차피 달라카트 놈들은 다카란을 점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 을테니 이곳까지 들어올 군대는 없을테니까. 그리고 헤스팔콘 해군이 바다 를 지키는 이상 나약한 달라카트 함대가 무슨 수로 여기로 오냔 말이오." 헤스팔콘 제국의 수도인 헤스팔콘은 베오폴트와 같은 거대 항구도시였다. 즉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엉성하기 이를데가 없는 달라카트 함대가 강력한 헤스팔콘 해군을 뚫고 북 상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현실적으로나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리히트야거와 함께 다카란으로 내려가겠습니다." "귀 공의 실력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오만 빠른 승전을 기다리겠소." "옛." 힐데브란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급히 자리를 떴다. 하우프트만 3세는 이 제서야 좀 마음이 놓였다. 리히트야거가 참전한다면 달라카트 군이 괴멸하 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오만방자한 놈들에게 다카란을 빼앗긴 것이 불쾌 하긴 하지만 곧 달라카트 황제 세라피스는 자신에게 달려와 발밑에서 고개 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 것이다. 황제는 다시 느긋한 마음으로 돌아와 불안 한 표정의 후궁들을 다독거리며 시종을 향해 말했다. "오펜바하 제일황제께 이렇게 보고하게. 달라카트 제국의 불손한 무리들 이 먼저 이 헤스팔콘을 침공해 왔지만 아무런 위기 없이 물리칠 것이라고. 그리고 언제나 헤스팔콘을 굽어 살펴 주시는 점을 망극하게 여긴다고." "알겠습니다." 하우프트만 3세는 사실 이번 달라카트의 침공이 오펜바하의 신경을 거스 를 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헤스팔콘이 달라카트보 다 우위에 서야만 하듯이 언제나 오펜바하의 제국 오칼란트도 헤스팔콘이 넘볼 수 없는 것이라고 - 하우프트만 3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세라 피스 역시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오칼란트 제국의 참전이었던 것이다. 3. 힐데브란트의 명령으로 즉시 집합한 리히트야거들은 그들의 씰을 제외해 도 그 수가 50여명에 달했다. 모두 헤스팔콘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 출신 의 상급기사나 마법사들. 성벽이고 요새고 무시해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들이었던 것이다. "리히트야거의 목표는 다카란이다. 우리는 충성스런 헤스팔콘 최정예 부 대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죽음은 용서하지만 패배는 용납하지 않겠다." 힐데브란트의 차가운 음성이 리히트야거 일원들을 찔렀고 패전이라고는 겪어본 없는 그들은 오히려 흥분에 사로잡혀 투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힐데브란트 역시 절대 달라카트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염려는 없었지만 더 욱 승리를 굳히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카드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 세라피스라는 황제만 죽어도 달라카트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슬슬 숨겨두었던 디트리히란 작자를 써야 겠군. 이런 일에 어울리는 놈이니까.' 그리고 리히트야거는 곧장 다카란 요새를 향해 맹진을 시작했다. 4. 오펜바하는 사실 하우프트만 3세로부터 연락을 받기 전에도 달라카트가 헤스팔콘을 침공한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황성 오버암메르가우 최상층에 서 불어오는 바람에 파묻혀 있던 오펜바하는 뒤에 서 있는 미쉘에게 조용 히 말했다.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미쉘은 슬쩍 괴로운 표정을 보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물키벨...... 끝도 없는 시간을 이어온 그 여자와의 악연도 이쯤에서 끝 내야 겠군." "그 분을 죽일 생각입니까?" 미쉘은 자신의 전 주인이었던 물키벨을 떠올리며 드물게 흔들리고 있었다 . 오펜바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죽이면 안돼?" "......" "가랑이 그 놈을 테이머로 다시 만났다니 악몽 같애. 빨리 악몽에서 깨어 나고 싶어. 다 죽여버리고 난 가랑만 얻으면 되는 거잖아?" 미쉘도 헤르만 오펜바하가 숨기는 것, 그의 과거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아 는 것이 없었다. 단지 그도 자주 그의 과거 때문에 화를 내고 주저한다는 것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오펜바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내가 시키는데로 하면 돼. 해줄 수 있겠지?" "씰은 테이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불어닥치는 오칼란트의 바람에 뒤셖여 더욱 공허해진 미쉘의 목소리가 오 펜바하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그 바람 속으로 왠지 쓸쓸한 오펜바하의 목소리도 끼어들며 바람에 섞여 날아가 버렸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 기억나네. 그때 이런 높은 건물 위에 서서 밤거리를 내려보면 하얗고, 빨갛고, 파아란 불빛들만 살아 있는 듯이 지평선의 끝까 지 퍼져 있었지. 이렇게 높은 곳이라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냥 모두다 살아 있다는 증거로 광점들만 말없이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야. 마 치 밤하늘을 땅 위에 펼쳐 놓은 것처럼...... 모두 침묵의 시를 읊조리고 있었던 거야. 모두 저마다의 소원을 담은 침묵의 시를 말없이 외치고 있었 어. 내가 생각한게 아냐. 그때 그 녀석이 내게 한 말이지. 이제와서 또 기 억나는군." 인간의 마음은 침묵하는 시야. 그리고 이 세상은 그런 마음들을 길게 펼 쳐 놓은 것이지. 모두 목소리 없이 외치고 있으니까. 오펜바하는 까마득한 과거에 그가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이 지금까지도 왠지 잊혀지지가 않았다. Chapter#13 : 침묵의 시 끝 Next Chapter : 당신과 함께 영원히 -Blind Talk 카페 대문 바꿨내요. 한번 들려주세요. 역시 수정은 한번에 몰아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주주클럽의 나는 나 를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1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4/6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18 제 목:[ DRAGON LADY ] 14-01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741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4-07 04:20 조회: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1 : 당신과 함께 영원히 The Curse named fate 1. 티브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성벽 한켠엔 언제나 낮은 모래언덕 이 기대어 있는 다카란 요새에서 달라카트 점령군은 승전 파티 대신 다음 작전을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러 리히트야거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거라는 말씀이군요." 촉탄을 밝히고 있는 임시 지휘부에서 줄리탄의 말에 파르낫소가 자뭇 굳 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건 사자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격이다. "그들이 여기로 와야만 헤스팔콘 제도가 비어 버리니까요." "그 말은......" "리히트야거는 현재 우리측 전력으로 굴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적 제도가 함락시키고 황제를 잡아서 항복을 받는다면 리히트야거도 응전할 수가 없지요. 노리는 것은 헤스팔콘 제도입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번 전격전에서 선봉에 섰던 그랜사이어가 되물었다. "리히트야거를 이 다카란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메이트 리아크 제독이 지휘하는 해군은 곧장 헤스팔콘 제도를 공략하여 항복을 받 아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 그들을 묶어둔다는 것이 말야." "분명,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리히트야거의 기사들과 일대일로 싸우면 그랜사이어도 젤리드도 이길 자 신이 있었지만 상황은 그리 이상적이지 못했다. 잘못하면 묶어두긴 커녕 전멸해 버린다. "재밌겠군. 난 이런게 좋아." 젤리드는 신혼부터 리이와 떨어져서 칼을 휘두르고 있건만 제법 느긋하게 말하고 있었고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젤리드는 잠시 창밖의 구름낀 저녁하늘을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띈 얼 굴로 말했다. "나. 이번 전쟁 끝나면 검 놓을 꺼야." "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말이었다. 평생 검의 정점에 서 있을 것 같던 흉 몽 젤리드 빙크리스틴이 할 소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젤리드의 표정으로 미뤄 볼 때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일 같았다. "그 여자를 돌봐주는데 검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군요." 줄리탄은 카넬리안과 함께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그도 결국 검은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검 하나 만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라는 건 남의 눈에 낭만적으로 보일지 몰라서 그 자신에겐 외롭고 단순하 기 그지 없다. 결혼까지 한 마당에 그런 길을 고집하긴 싫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사가 되고 내게 남은 건 낭자한 피와 시체 뿐이야. 뭘 지 켜야 겠다는 마음도 없었고 사람을 죽여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도 허무하기 그지없지. 이 세상에 대한 적대감 하나로 버텨 온 것 뿐. 난 내가 한 일에 후회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한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지 못했다는 거겠지. 나나 그 여자나 둘 다 반쪽짜리 인간 이야. 그래서 서로 기대야지 겨우 겨우 살아갈 자신감이 생기는 거지. 빨 리 이 싸움 끝내버리고 리이에게 가고 싶군. 아이도 낳고." "젤리드!" 카리나가 젤리드 답지 않게 갑자기 왠 주책이냐는 듯이 소리쳤다. 싸움중 에 이렇게 감상적인 모습은 카리나 역시 처음 보았던 것이다. 카리나의 마 음을 알고 있는 젤리드는 슬쩍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아주 드물게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이게 내 마지막 싸움이고 마지막 전투에서 죽는 얼빠진 짓 은 절대로 하지 않으니까. 내가 죽으면 너도 리이도 또 화를 내겠지. 죽었 을 때 슬퍼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희들 화내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죽지 않아 나는." "빨리 이 싸움 끝내버리고 리이에게 가고 싶군. 아이도 낳고." "젤리드!" 카리나가 젤리드 답지 않게 갑자기 왠 주책이냐는 듯이 소리쳤다. 싸움전 에 이렇게 감상적인 모습은 카리나 역시 처음 보았던 것이다. "걱정하지마. 이게 내 마지막 싸움이고 마지막 전투에서 죽는 얼빠진 짓 은 절대로 하지 않으니까. 내가 죽으면 또 리이가 화를 내겠지. 그 여자 화내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죽지 않아 나는." 기사들의 인생이란 참 웃기는 면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마치 검을 잡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처럼 기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다가 결국 기사가 되서 수없이 검을 휘두르고 나이를 먹으며 시간이 흐르면 가장 좋 을 때 검을 놓고 싶다는 욕구가 수시로 마음을 휘감는다. 단순한 어린애 같은 것이다. 검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한 탓일 까. 그때 긴급전문을 지닌 전서구가 창밖에서 들어와 파르낫소에게 날아들 며 불길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뭐야. 이 새는?" "이건 황궁으로부터 온 것인데......" 깃털이 황색으로 염색된 맹금은 분명 세라피스가 보낸 '전문'이었다. 파 르낫소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맹금의 다리에 걸려 있는 짧은 쪽지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곧 파르낫소는 사색이 되었다. "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황궁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파르낫소는 급소를 찔린 듯이 신음처럼 목소리를 짜냈다. "저, 정말입니까!" "......" 그 순간 가장 표정이 굳어버린 자는 젤리드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전문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황궁에 세라피스와 함께 남아 있던 자는 리이였던 것이다. 젤리드는 차갑게 변한 눈빛으로 문 밖으로 향 했다. "제, 젤리드 씨. 어디 가십니까?" 젤리드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문을 밀쳐 버리고 밖으로 나갔고 카리나가 빠 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분명히 리이가 있는 황궁으로 갈 생각인 것이다. 2. 달라카트의 제도에 있는 황궁은 거의 모든 전력을 전선으로 내보내서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황궁에 남은 세라피스의 호위 기사라고는 리이 디트 리히와 이카테스 뿐. 그렇다고는 해도 전선에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 데다가 적 군대가 들어올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고 요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황궁의 뜰을 리이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카 테스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주인님.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그냥...... 나 혼자만 편한 것 같아서. 역시 나도 젤리드를 따라서 갈 껄 그랬지?" 리이는 사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 만큼은 다시 검을 잡을 생각이었지 만 젤리드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리이가 옆에 있으면 신경 쓰인다면서 황궁에 남아 있으라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저 역시 주인님이 이곳에 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카테스도 그녀의 씰이 이상 위험한 전쟁터로 나가는 건 그다지 원치 않 는 모양이다. 하긴 그건 대부분 씰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이겠 지만. 물론 리이는 전시 상황이기 때문에 새로 맞춘 상아색 블라우스와 움 직이기 편한 바지로 갈아 입고 레이피어까지 차고 있긴 했지만 더 이상 염 색하지 않는 그녀의 길게 내리 금발 머리칼은 여전히 그녀를 기사가 아닌 청초한 새색시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때 리이는 익숙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 앞에는 거친 가죽옷을 걸쳐 입은 다섯명 의 사내가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만 당신들!" 리이는 그들에게서 보통 사람에게선 절대로 느껴지지 않는 범상찮은 살기 를 감지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자들에게 걸어갔다. 그들은 리이를 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야아. 수고하심다." 약간 남부의 사투리가 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누군데 황궁에 들어 왔는 거죠?" "지들은 말입니다요. 이 달라카트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검사들입니다. 예 전에는 다 좀 날렸던 놈들입죠." "......" 그랜사이어가 온 뒤에 그를 추종하던 달라카트의 낭인들이 도움을 자청하 며 몰려든 것은 분명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황궁 내를 아무렇게나 활보하고 있는데다가 뭔가 기분나쁜 기운을 숨기고 있는 듯 했다. 리이는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도움은 고맙지만 일단 황궁 밖으로 나가세요." "얼라리? 왜 그럽디까? 어여쁜 아가씨가 그런 눈을?" "당신들 아무리 숨겨도, 헤스팔콘 억양이 섞여 있어." 리이의 그 싸늘한 말에 사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순간 사내들 뒷편 에서 후드를 눌러쓰고 있던 자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쿡쿡쿡. 리이 디트리히 아니신가. 내 착한 여동생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다, 당신은!" 후드를 벗은 사내는 마치 마약중독자 같은 음습한 몰골이었다. 나이보다 몇십년은 더 늙어보이게 만드는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이나 퀭하게 패인 눈동자는 분명 무리한 마법운용의 부작용이리라. 그는 리이의 오빠인 휴렌 트 디트리히였던 것이다. "여자가 다 되었군. 약해빠진 모습이야. 리센버러의 총애를 받으며 가문 유일의 기사가 된 계집애가 가문에서 도망쳐서 이런 곳을 서성거리고 있을 줄은. 어때. 이오빠의 이런 모습이?" 휴렌트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들어낸 잇몸에선 덕지덕지 피가 베어 있었 다. 몸이 엉망이 되었다는 증거다. 리이는 그와의 과거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가 되기에는 너무 조악한 실력인데다가 십대 때 리이의 몸 을 강제로 범하려다가 도리어 리이에게 부상을 당하고 그 죄로 가문에서 영구추방된 가문의 오점이었다 휴렌트는. "난 수치덩어리라는 환멸을 받으며 쫓겨난 뒤에 언제나 네 아름다운 나신 을 떠올렸어. 그게 리히트야거의 사냥개가 된 이후에 지금까지도 살아 있 을 수 있는 힘이 되었지.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내 동생." "이카테스." "예. 주인님." "어서 폐하께 가서 알려라. 헤스팔콘의 더러운 개들이 황궁에 침입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라지면 상황은 5대1인데다가 저 암살자들은 절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일년 동안 검을 잡지 않은 리이 혼자서는 벅찬 상대인 것이다. 리이는 자신이 끼고 있는 젤리드로부터의 반지를 슬쩍 본 후에 레이피어로 손을 옮겼다. "빨리 가." "돌아올 때까지 무사하셔야 합니다." 이카테스는 그와 함께 황궁내로 빠르게 발을 옮겼고 그 즉시 암살자들이 리이에게 뛰어들며 검기를 내질렀다. 역시 달라카트 내부에서 잠복하고 있 던 헤스팔콘의 사냥개들이었던 것이다. 가문에서 추방당하고 검술도 뛰어 나지 못한 휴렌트가 갈 곳은 이런 쪽 뿐이었을 것이다. "큭큭! 혼자서 얼마나 견디나 볼까!" 연속적인 칼날처럼 날아드는 검기가 잔디를 불태우며 리이의 사방에서 닥 쳐왔고 그녀는 침착하게 그것을 피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포위되거나 등을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방어적으로 뜰을 날듯이 뛰어다니며 간격을 넓혔고 암살자들은 조직적으로 그런 그녀를 몰아붙였다. '너무 불리해. 젤리드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급히 지워버렸다. 그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잡 념이다. 지금은 혼자 뿐이고 그걸 인정하며 이 위기를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이는 계속 뒤로 물러섰고 암살자들은 엄청난 속도로 그 녀를 쫓고 있었다. 빨리 그녀를 죽이고 황제를 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 도 전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디로 도망칠 테냐!" 리이는 거의 벽까지 몰렸다. 진퇴양란. 암살자들은 그녀를 조여오고 있었 고 그때 그녀가 모아 두었던 기력을 터트내며 뛰어올라 푸른맹금이라는 별 명 그대로 벽을 차며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암살자들 속으로 뛰어 들 었다. "어엇!" 잔뜩 겁을 먹었을 줄 알았던 리이의 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할 시간도 없이 날아드는 리이의 레이피어가 한 사내의 장검과 충돌했다. 파즈즈즈즉! 소름끼치는 충돌음과 함께 사내의 팔목이 부서져 버리며 묵직한 장검이 밀려나 버렸고 그 순간 리이의 검이 빛나듯 우아하게 춤을 추며 그의 목을 깊게 뚫어 버렸다. 그녀의 검술으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던 것이다. "크으으윽!" 피거품을 쏟는 소리와 울렸고 뒤에서 달려드는 자의 검을 느낀 리이는 반 사적으로 몸을 숙여 피하며 몸을 크게 회전시켜 뒤에 서 있는 자의 두 발 목을 잘라 버렸다. "우아아아악!!" '이제 세명 남았다!' 발목이 잘린 사내가 피를 쏟으며 바닥을 굴렀고 리이는 뺨에 튀긴 더러운 핏방울이 주르륵 흐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또 다른 암살자가 내리치는 곡 도를 간발의 차로 막아냈다. 찰나의 순간을 파고든 연속적인 공격이었고 암살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리히트야거와 싸워 도 손색없을 검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깨끗해. 그런 널 더럽히고 싶어." 휴렌트는 리이의 완벽한 동작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리이 가 한가지 실수한 것이 있다면 휴렌트는 더 이상 검을 쓰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휴렌트의 몸에서 뱀의 독과 같은 자주색 아우라가 피워 올랐고 곧 그것은 몇개의 구체로 뭉치며 탄환처럼 리이를 향해 날아들었 다. '마법을!' 리이는 자신의 오빠였던 휴렌트가 마법을 쓰자 다급하게 뒤로 뛰어 올라 그 마력의 탄환들을 피하려 했지만 그것들은 집요하게 리이가 뛰어 오르는 방향을 따라 솟아 올라 휴렌트의 광기어린 집착처럼 그녀의 몸을 쫓아갔다 . '아, 안돼!' 리이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걸 느꼈다. 그와 함께 공중에서 둔탁한 작렬음이 연속으로 들리며 그녀의 온몸에 십여개의 마력덩어리가 충돌했다 . 끔찍한 충격이 연속으로 그녀의 몸을 강타했고 리이는 그대로 검을 놓치 며 십여미터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긍지 높은 새의 추락 같이 비참한 모습 이었다. "아으으......" 괴롭게 낮은 비명을 뱉어내는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금새 몰려 든 암살자의 검이 그녀의 목가에 다가왔다. "꽤 애먹이잖아." "이제 빨리 황제 놈을 찾아 죽여야지!" "너희들이나 가봐. 난 내 여동생과 할 일이 있으니까." "뭐?" 휴렌트는 삐뚫어진 욕정을 들어내며 반쯤 정신을 잃은 리이를 내려보았다 . "검으로는 도저히 널 이길 수 없을테니까 난 마법을 공부했어. 마법에도 재능이 없던 나는 결국 이런 폐인이 되어 버렸지만. 이렇게 된 오빠를 동 정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응? 표정이 왜 그래 리이.' 미쳐버린듯 자조적인 웃음을 씰룩이는 휴렌트를 희미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는 리이에 눈에선 아련한 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젤리드...... 미안해. 좋아한다는 말, 한번도 못해 줬는데...... 나 정 말 그 남자를 잊어버리기로 결심했을 만큼 난 젤리드를 좋아했어. 당신에 겐 왠지 화만 낸 것 같지만 그것만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큭큭큭. 아주 멋진 우리 남매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온몸을 태워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낄 때마다 수만번도 더 너를 상상했어. 응? 뭐 라고 말을 해봐." 휴렌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읊어대며 리이의 블라우스로 손을 가져 댔다. 리이는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저항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뭐, 뭐야......" 암살자 중에 하나가 자기 배를 뚫고 나와 있는 얇고 차가운 검을 내려보 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번뜩이는 검의 궤적이 터지며 그의 몸은 두조각 이 났다. 인기척도 없이 바람처럼 날아든 검이었다. "네, 네 놈은!!" 이제 두명 남은 암살자들은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은 냉혹한 눈빛으로 서 있는 금발의 남자를 보며 소리쳤다. 은빛의 검을 들고 있는 그는 세라피스 리그나이트였다. "너희들, 날 진짜로 화나게 만들었다." "황제가 직접 눈앞에 나오다니 미쳤군! 죽어라!" 암살자는 검을 치켜 올리며 땅을 울리며 뛰어 들었고 세라피스는 그런 그 에게 걸어가며 천천히 검을 세웠다. "나는 훌륭한 황제가 아냐. 그러니까 고통 없이 죽여줄 거라는 자비는 기 대하지 마라." 그 순간 세라피스의 가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대의 검끝을 세라피스의 칼이 은으로 만든 뱀처럼 순간적으로 말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요사스런 검술에 당황한 상대는 몸을 빼려 했지만 세라피스의 검은 암살자의 팔목을 파먹으며 솟구쳐 올랐고 살갖이 찢어지고 뼈가 끊어지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검을 든 팔 전체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크아아아아악!!" 조각나서 바닥에 투두둑 떨어지는 자신의 팔을 바라본 암살자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지만 세라피스의 다음 공격은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공 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른 팔이 잘려 나갔고 곧 두 다리가 잘려 나 갔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몸과 머리가 사형대의 칼날에 짓눌린 듯이 동 시에 조각났다. 그렇게 조각난 몸조각은 스르르 무너지며 바닥에 흩어졌지 만 세라피스는 그런 고깃덩이에 관심 없다는 듯 휴렌트를 쏘아보며 말했다 . "너는 좀 더 천천히 죽여주겠다." 휴렌트는 두려움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절대로 상상하던 이성적인 황제의 모습이 아니다. 적의로 이뤄진 귀신같은 모습. 휴렌트는 자기도 모르게 힘 을 긁어 모으며 세라피스를 향해 엄청난 마력을 뿜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 간적으로 세라피스 앞에 펼쳐진 반투명의 방어벽과 부딧치며 흩어졌다. 이 카테스의 마법이었다. 세라피스는 베어버릴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젤리드 씨가 여기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꺼다." 그리고 이카테스는 리이에게 달려가며 그녀를 부축했다. 리이는 세라피스 를 보며 탈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가 직접 나오시면 어떻해요. 위험하잖아요." "본래 황제라는게 위험한 직업이죠." 세라피스는 리이를 향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생긋 웃었다. 가장 보호되 어야 할 황제가 직접 싸움터에 뛰어 나오다니, 헤스페리아 전체에서 그런 황제는 대대로 세라피스 뿐일 것이다. 그때 휴렌트는 이를 악물며 후드를 벗어던졌다. "응?" "달라카트 황제!! 나와 함께 죽는 거다!!" 휴렌트의 온몸의 핏줄이 튀어나오며 피를 뱉어내기 시작한 입으로 계속 주문을 외웠다. "저, 저주의 주문 입니다!" 이카테스가 경악스런 얼굴로 소리쳤다. 휴렌트의 모든 힘을 뽑으며 만들 어낸 그 사악한 마력의 덩어리는 상대를 덮치며 온몸에 파고들 것이다. 같 이 죽어버리려는 동귀어진의 마법이었다. "크하하하! 리이 똑봐로 봐라! 난 황제와 함께 죽는 거다! 넌 결국 지키 지 못한 거야!" 그렇게 외치는 휴렌트의 온몸에서 핏덩이가 터져 나오며 그의 광기어린 집념에 의해 뭉쳐버린 마력의 아가리가 세라피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금 새 주변 잔디들이 말라 죽어버렸고 세라피스 역시 기력을 모았지만 목숨과 맞바꾼 저 마법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리, 리이 님!!" 찰나의 순간이었다. 리이는 주저없이 세라피스 앞으로 날아들었고 곧 그 저주의 송곳니는 리이를 물어버렸다. 세라피스는 자기 앞을 막아서며 그 저주를 받아들여 쓰러진 리이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표정을 콘트롤할 수가 없었다. 휴렌트는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떨었다. "리이!! 너는 어떻게 마지막까지 나를, 나를......" 휴렌트가 시전한 저주는 그의 능력으로선 목숨을 버려야 하는 마법이다. 곧 그 마법의 저항을 견뎌내지 못한 휴렌트의 몸이 미친듯이 떨리며 몸속 에서 터져나오는 차가운 빛무리에 섞여 폭발해 버렸다. 세라피스는 쓰러진 리이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 음이었다. 눈물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미, 미안해요! 내가 잘못한 거에요! 무슨 벌이든 받을테니까, 그러니까 죽지 말아요! 젤리드 씨를 만나야 하잖아요. 같이 살아야 하잖아요. 그렇 죠? 그러니까..... " "하나를 지켜야 할때는...... 다른 하나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해요. 젤리 드가 내게 한 말이었죠. 죽기전까지 하나라도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 면...... 그게 가치있는 인생이라고." 리이는 흐린 눈동자로 그렇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아직 힘들게 심장이 뛰고는 있었지만 휴렌트의 저주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리이의 몸속에 파 고들고 그녀의 생명을 빠르게 갉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세라피스는 리이를 안고 미친듯이 황궁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금 당장 의사들을 불러!! 정신 차려요! 리이 씨!! 눈을 떠요!" 젤리드와 달라카트 군이 다카란 요새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의 일이었다 . 표정을 잃은 이카테스는 바닥에 떨어진 리이의 피묻은 레이피어를 잡으 며 운명이 찾아온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Blind Talk 사실 이 부분은 분위기가 끊어는 것이 싫기 때문에... 비축분을 좀 모으고 이른바 '연참'으로 올리려고 했으나 본래 5권 끝이 여기까지 라서 엉뚱하 게 5권 끝이 잘려나간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이번 편을 올립니다. 현재 제 다른 일의 마감 덕분에 쭉쭉 쓰고 있진 못한 것이 사실인데 빨리 쓰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습니다. 리이의 마지막을 장식해 줘야 하니까요. 다음 편은 곧 올라갑니다. 아 그리고 메일 주시고 감상, 추천 올려주신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2부의 클라이막스에 가까워지고 있 네요. 몹시 피곤한 상황이라서 5권출판에 관한 한탄은 다음 blind talk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공일오비의 슬픈인연을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2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4/16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86 제 목:[ DRAGON LADY ] 14-02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804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4-16 08:28 조회:57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2 : 당신과 함께 영원히 Dakkaran Strikes (지난 줄거리) 전격전으로 다카란 요새를 함락시킨 기쁨도 잠시. 갑작스럽게 황궁을 습격한 휴렌트의 저주를 세라피스 대신 맞은 리이는 점 점 죽어가고 있는 가운데 리히트야거가 달라카트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리 고 젤리드는 그런 전선에서 이탈하며 리이가 있는 황궁으로 발걸음을 옮긴 다. 1. 헤스팔콘에 의해 황궁이 습격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줄리탄은 내내 등 뒤 에서 누군가가 훔쳐보는 듯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수많은 싸움 을 겪어온 노장도 아니었고 부정적인 감정은 무시할 수 있는 냉혈한도 아 니었고 단지 아직 성인도 안된 기사일 뿐이었기 때문에 혹시 이 전쟁이 자 신의 아주 소중한 것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당연한 불안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줄리탄은 별이 가득 들어 차 있는 하늘을 올려보며 다카란 외성벽의 첨탑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주인님.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으그그 추워라." "카넬리안......" 첨탑의 나선계단으로 올라온 카넬리안은 사실 자신의 감상적인 주인님께 서 이쯤이면 어딘가 조용한 곳에 혼자 가서 우중충하게 궁상 떨고 있을 거 라고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들고 온 깨끗한 모포를 줄리탄의 어 깨에 덮어주며 옆자리에 앉았다. 사막 인근지역의 밤은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매마르고 추웠다. "카넬리안. 리이 씨는 괜찮을까?" "모르지...... " 어둑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줄리탄에게 카넬리안은 그 말 할 줄 알았다 며 인상을 흐렸다. 그리고는 스스로 다짐하는 듯한 냉정한 말을 입에 담았 다. "주인님. 인간 관계에는 영원한 것이 없어." "......알고 있어." "누구나 어디선가 어떻게든 죽어. 시작이 있으니까 끝도 있는 거지. 끝을 거부하는 건 의미없는 집착일 뿐이야." 그녀의 쓸쓸한 말은 차가운 밤공기와 뒤섞여 줄리탄의 몸으로 파고 들었 고 덕분에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줄리탄의 모습을 슬슬 살피던 카 넬리안은 두 무릎을 가슴으로 끌며 복잡한 얼굴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으이구. 이런 분위기에 뭔가 로맨틱한 말을 꺼냈어야 하는데 이 놈의 말 투는 고쳐지질 않네. 주인님. 이해해줘. 난 도통 따뜻한 위로 같은 것엔 서툰 여자라서." 그녀는 사실 줄리탄이 리이를 걱정하고 있으리라는 걸 알고 뭐라고 따끈 한 위로라도 해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자기도 모르게 살벌한 말이 튀어나왔다. 줄리탄은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손빗으로 다듬어 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말투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그녀의 성격을 줄리탄은 이해하고 있었다. "카넬리안. 페세테르가 어떤 모습으로 자는 지 알아?" "응?" 엉뚱한 질문에 카넬리안은 빨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 이 남자, 가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페세테르가 자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나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 그리고 나를 밧줄에 묶어서 페세테르가 잠 들어 있는 바다 속에 집어 넣었지." "주인님...... 별로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었나 보네. 아들을 바다에 쳐 넣어 버리다니." "그, 그게 아냐!" 너무 추워 1분도 잠수할 수 없는 빙해 속에 아들을 밀어 넣었을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줄리탄은 별을 추억처럼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 다. "거기서 난 처음 봤어. 페세테르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수십마리가 모 두 몸을 길게 세우고 수면을 향하며 잠들어 있었지. 흔들리는 빛줄기가 바 다속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페세테르들이 뿜는 기포들이 그 빛과 부딪치며 반짝거리고 있었어. 그리고 귓가에는 바다를 낮게 울리는 잠꼬대 같은 그 들의 울음소리가 노래처럼 들리고 있었고. 마치 바다속에 신비로운 조각상 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었지." 줄리탄의 눈동자는 그때의 추억으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어버릴 것 처럼 차가운 바닷속이었는데 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 따뜻한 광경이었어. 정말 행복해 보였지. 그리고 물밖으로 나와서 덜덜 떨 고 있는 나를 꽉 감싸 안으며 아버지가 말했지. 일부러 빙해 속에 들어가 지 않는 이상 절대로 예상할 수도 볼 수도 없는 광경이라고. 누가 상상이 나 했겠어? 물고기가 그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으리라고." "좋은 광경이고 또...... 좋은 아버지네." "카넬리안." "왜?" "너한테도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줄리탄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모포를 카넬리안에 게 덮어 줬다. 그리고는 어둠에 묻혀버린 지평선을 눈에 담으며 계속 말했 다. "우리, 이 전쟁이 끝나고...... 힘든 일이 다 지나면 고향 키오네로 돌아 가자. 넌 나한테 참 많은 걸 보여준 것 같아. 힘도 용기도 없는 네게 길을 알려주며 여기까지 왔으니까.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 "히잉. 감상적이네요. 주인님." 카넬리안은 멋적은 표정으로 줄리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각 대로...... 인간은 너무 약하고 또 너무 빨리 커버리고 변해 버린다. 단지 그와 몇년 같이 있었을 뿐인데 이제는 조금 기대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 로 - '참 많이 커버린 것 같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야. 고향으로 같이 돌아가면 꼭 페세 테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그때까지......" "주인님." 카넬리안은 밖으로 나오려는 감정을 잠시 삼켰다. 그리고는 사진이라도 찍는 듯 한동안 별의 지도를 등진 줄리탄을 가만히 올려다 보다가 말했다. "나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인간에게 영원한 것을 바란다는 것 은 그 자체가 터무니없는 집착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도 리이 님도 영원히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미래만 같이 걱정하면서 살고 싶어. 부질없을지 모르지만 그런 기분이야." 카넬리안은 별빛을 얇게 발라 더욱 청초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로 줄리 탄을 올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서로 아주 멀리 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지금은 서로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헤헤. 이제야 좀 로맨틱한 대사가 나왔네." "로맨틱이...... 뭐야?" "대책없이 서로 핥아주는 것. 단점까지 좋다며 눈이 멀어버리는 것. 대충 그런 거야." 그녀는 참 단어를 괴상하고 개성적으로 정의하는 버릇이 있다. 줄리탄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실웃음을 내 버렸다. "하하. 뭐야 그거." "치명적이고 위력적인 마법이지. 마구 행복해져 버리는 대신 현실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거든." "으이구. 말투 한번......" "성격입니다." 그녀는 짓굳게 웃으며 줄리탄과 함께 꽤 길게 꼬여 있는 나선계단을 내려 갔다. 매사에 감동 받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아, 그 녀는 총총히 계단을 밟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2. 젤리드는 엄청난 속도로 하루도 되지 않아 달라카트 황실에 도착했다. 물 론 그의 행위는 대전투를 앞두고 단독으로 작전지역을 이탈한 중범죄지만 아무도 그가 리이를 찾아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리이가 누워 있는 병 실로 걸어가는 젤리드의 차가운 눈빛을 본 시녀들은 몸을 떨며 양 옆으로 비켰고 그런 그가 카리나와 함께 도착한 병실 문 앞에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세라피스가 있었다. 젤리드는 세라피스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르는 듯 짧게 말했다. "리이는...... 그 여자는 죽었나?" "아니 아직은. 하지만 위독합니다." "그럴 줄 알았지. 고집만 센 멍청한 여자." "모두 제 책임이에요. 리이 씨는 저를 지키려다가 부상을......." 젤리드는 그렇게 말하는 세라피스의 멱살을 잡으며 벽으로 밀어 붙였고 세라피스의 상아빛 실크 셔츠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단추가 바닥에 떨 어져 굴렀다. 감히 황제의 멱살을 잡았건만 세라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조용히 젤리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젤리드가 애써 격한 마음을 참으며 말했다. "당분간...... 내 눈에 띄지 마라." 그 자체로 참형감인 말이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카리나가 말리려고 했지만 세라피스는 손을 내저으며 막았고 젤리드는 잠시 세라피스를 죽일 듯이 쏘아보다가 곧 세라피스를 놓으며 리이의 병실로 들어갔다. "제, 젤리드?" 하루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진 리이는 문이 덜컥 열리며 젤리드가 들어 오자 놀란 눈동자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서 있는 이카테스는 자 신의 주인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젤리드에게서 시선을 돌리 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3. 젤리드가 보기에도 리이의 모습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였다. 혈색 잃은 얼 굴에 금새 말라버린 두뺨이 껴안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이 죽어가고 있었 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목이 메일 것 같은 모습이다. "뭐 건강하잖아. 당장 전쟁터에 나가도 되겠어." 젤리드의 힘없는 놀림에 리이는 처음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힐책하 듯 말을 꺼낼 뿐이었다. "젤리드. 지금은 전쟁중이야. 다카란에선 당신이 필요할 텐데 여기 오면 어떻게 해. 젤리드 답지 않아!" "나 다운 게 그런 것이었나? 섭섭하군." 젤리드는 마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리이에게 다가갔다. "이카테스. 카리나. 잠시 밖에 나가있어 줄래?" 리이가 얇게 덮고 있던 천이불을 걷으며 그렇게 말했고 곧 방에는 둘 만 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리이는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물빛 반지만을 내려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가녀린 어깨에 걸터앉은 그녀의 얇 은 금발이 처연(悽然)해 보였다. 잠시 작은 공간을 배회하던 젤리드는 저 녁 식사에 대해 묻는 것처럼 툭하고 말을 던졌다. "며칠 남았어?" "아마도 사일쯤." "그런가. 지겹게 대화나눌 시간은 충분하군." 결국 리이에게 남은 시간은 4일 뿐. 젤리드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리이의 모습에서 그녀의 생명력이 급속도로 바닥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릴리스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그 누수(漏水)되는 목숨의 구멍을 막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의학으로는 (심지어 마법으로도) 악화되는 그 녀의 몸을 치료하는 것은 (조금 연장시키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 젤리드 는 거추장스럽게 흔들리는 흉수를 검집 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그녀 의 침대 한켠에 앉았다. 따뜻한 빛무리가 동참하는 차분한 병실 풍경을 한 번 훌터본 뒤에 리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젤리드." "바보같애. 이런 꼴." 젤리드는 무언가 계속 인정할 수 없는 듯 '바보같다.'는 말을 계속 되뇌 다가 불현듯 팔을 뻗어 리이의 몸을 끌어 당겼다. 아직은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얇은 옷을 투과하며 전해진다. "젤리드. 다카란으로 돌아가. 적어도 사람들은 지금 당신을 이 나라를 지 켜줄 기사로 보고 있어." "너야 말로 기사든지 여자든지 하나만 결정해. 여자가 되겠다고 내 앞에 서 울어 놓고 기사로 죽는다니...... 그럼 내 기분은 뭐가 되는 거야." 리이의 뽀얀 여자 냄새가 젤리드의 코끝을 엷게 간지럽히고 있었다. 리이 는 젤리드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긴 마음을 짧고도 짧게 줄여서 말했다. "계속 미안했어. 그리고 계속 고마웠어." "과거형으로 말하지마." 그리고 리이는 아직 달라붙은 흙먼지조차 제대로 털지 못한 젤리드의 길 고 검은 머리칼 속으로 손을 묻으며 그를 껴안았고 곧 울음소리 없는 눈물 이 흐르며 조그맣게 말했다. "괜찮다면 오늘 밤, 나를 부탁해. 마지막이니까." "변명같은 말이지만...... 좀 더 잘해 줄 껄 그랬어." 젤리드는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4. 리히트야거는 다카란 요새에 거의 도착하며 진군을 멈췄다. 먼지낀 지평 선 끝에 다카란이 작은 점처럼 걸쳐 있는 그런 거리에서 리더인 힐데브란 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황제를 암살하는 일은 실패인 것 같군. 하긴, 큰 기대는 안했어.' 더 이상 휴렌트 디트리히로부터 보고가 들어오지 않자 암살에 대한 모든 생각을 지워버린 힐데브란트의 머리속에는 정공법에 대한 계획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는 황실밥을 축내는 무능력자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최대 한 짧은 시간에 달라카트의 숨통에 칼을 꼽아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힘을 아끼며 싸울 생각은 처음 부터 없었던 것이다. "힐데브란트 공. 척후병을 잡아 왔습니다!" 리히트야거 일원의 빠른 움직임에 척후로 매복하고 있던 다크엘프 한명이 잡혀온 것이다. 힐데브란트는 증오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다크엘 프를 무표정하게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통없이 죽여라." "하지만 이 놈을 고문하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혀가 잘린 다크엘프 전사에게 무슨 말을 들을 수 있단 말이냐. 사지가 조각나도 저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다. 포로를 돌봐줄 여유 따윈 없다. 이종족이긴 하지만 전사 답게 깨끗히 죽여 줘라." 힐데브란트의 묵직한 명령이 떨어지자 다크엘프는 굳게 다문 입으로 비명 조차 지르지 않은 채 곧 구석으로 끌려 갔다. 힐데브란트는 요새를 바라보 며 부관에게 말했다. "분명 다카란을 지키는 자들은 이종족들과 긁어 모은 기사들이겠지. 아마 전멸하기 전까지 저들은 항복하지 않을 꺼야. 죽음을 각오한 자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저항하는 마지막 한명까지 확실히 죽여 야 한다. 알겠나." "옛!" 부관은 그늘진 힐데브란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자 흠찟 놀라며 외쳤다 . 세이드와 레오폴트가 사라진 이후에도 리히트야거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힐데브란트의 그런 냉정함과 치밀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쪽에서 선공하기로 하지. 내 무기를 가져와라." 힐데브란트의 말에 몇대의 수레가 그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수레에 는 길다란 형틀에 묶여 있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잔뜩 실려 있었고 공포에 질린 그들의 입에는 모두 재갈이 물려 있었다. 몸 전체에 기괴한 문신이 세겨져 있는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발버둥치려 했지만 완벽하게 몸을 구속하는 형틀은 그들이 몸서리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 이 바로 집행인 힐데브란트의 무기였던 것이다. "너희들은 헤스팔콘 제국의 번영을 위해 희생될 제물이다. 경건하게 마지 막을 맞이하기 바란다." 그는 차가운 축복을 내리고는 회색빛 로브를 휘날리며 가장 끝에 있는 제 물에게 걸어갔다.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었다. 그는 힐데브란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실신할 것 같은 공포감에 질려가기 시 작했다. "우으으읍!!" "네가 제국에 저지른 죄를 이렇게라도 씻을 수 있게 해준 황제 폐하께 감 사드려라." 그말과 함께 힐데브란트는 앙상한 손가락으로 수인(手印)을 맺으며 조용 히 주문을 외웠고 그와 동시에 제물의 온몸에 세겨진 문신이 뜨거운 인장 에 짓눌린 듯 붉게 달아오르며 근육이 우그러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살 이 타는 끔찍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리히트야거의 기사들도 눈을 찡그릴 정도의 끔찍한 마법시전.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제물이 된 사내의 목 에서 끓어 오르는 듯한 단발마가 터져 나왔다. "으우으으으으으으아아!!" 그것은 예전 크라울리나 휴렌트가 썼던 방법으로 마법사들이 가장 금기시 하는 마력운용법. 즉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뽑아내서 그 자체를 마력으로 쓰는 것이었다. 힐데브란트가 쓰는 그 '마력베터리'는 모두 제국의 사형수 들. 힐데브란트가 가는 곳엔 언제나 그 사형수들로 이뤄진 제물들이 함께 했다. 산채로 몸에서 마력을 뽑혀 나가는 고통에 두눈이 하얗게 뒤집힌 사 내는 숨이 끊어질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재갈물린 입가에선 끈적한 침과 거품이 세어 나왔다. "끄으으으으으으!!" 결국 뽑혀져 나가는 마력의 저항을 견뎌내지 못한 사내의 살갗이 투두둑 갈라져 찟겨져 나가며 핏덩이가 사방으로 튀겼고 곧 퍼억 하는 낮은 폭발 음과 함께 제물의 몸속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검게 뭉쳐 회전하는 마력의 덩 어리가 힐데브란트의 손바닥으로 옮겨졌다. 이미 사내의 시체는 형체를 알 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찟겨지고 검게 불타버린 뒤였다. "......." 힐데브란트의 씰 이세벨은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무 감정한 눈빛으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는 구형의 마력체를 보며 힐데브란트는 저주처럼 말을 꺼냈다. "죽어라. 달라카트의 배덕자들." 힐데브란트의 손을 떠난 고밀도의 마력탄환은 적의를 가진 생명체처럼 다 카란 요새로 향했다. 5. "지금 적군이 요새 근처에 도착했소. 그리고 동료 하나가 죽었소." 작전실에 들어온 트롤 한명이 찡그린 표정으로 어눌하게 말했다. 트롤 중 드물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척후에 있던 트롤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무전병이라고나 할까. "모두 전투태세로!" 파르낫소가 비장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리히트야거와의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메르퀸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압감을 느끼며 걸고 있던 레터의 목걸이를 꽉 쥔 채 말했다. "엄청난 마력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파괴적인...... 기운이." "마력?" 차아아아아아앙!!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듯한 찢어지는 파괴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 것은 다카란 주변에 트롤들이 겹겹이 쳐 놓은 마력방어라인들이 단번에 깨 져버리는 소리였다. 트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강력한 힘이 방어벽을 부셔버리며 다가오고 있어." "광범위 마법이에요! 모두 몸을 숙여요!" 메르퀸트가 황급히 외칠 때 갑자기 창밖에서 하얀 빛덩이가 쏟아져 들어 오며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성채 전체가 격하게 흔들렸다. 몸 이 얼얼해 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파르낫소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외성벽이 무너져 버렸어...... 어떻게 인간이 이런 마법을." 파르낫소의 눈 앞에는 엄청난 '폭격'에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린 외성벽의 폐허가 있었다. 힐데브란트가 보낸 마법이었다. 파르낫소는 주먹을 꽉 쥐 며 다시 평정을 찾았다. "내곽의 부대에게 지금 즉시 출격 명령을!" 6. "이거 무지막지한 인사로군. 이게 우리와 싸울 놈들의 힘인가? 여기서 죽 어도 하나도 이상할게 없겠어." 내곽에 있던 그랜사이어는 눈 앞에서 외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의 씰 '세자매'들은 즉시 그랜사이어에게 쪼르 르 달려와 그의 검 한쌍에 부여마법을 걸어주고 있었다. "하하하. 이거 싸워볼만 해." 싸움판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그도 몸을 짜릿짜릿하게 울리는 오랜만의 긴 장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꺼운 검 두자루를 쥐며 부하가 된 낭인 들에게 소리쳤다. "겁먹지 마라!! 어차피 저 놈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한편 숙소에 있던 키마인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가 고 있었다. 그를 뒤따르던 호이젠이 말했다. "분명, 힐데브란트입니다. 세이드가 없는 이상 저런 마법을 쓸 자 수 있 는 자는 힐데브란트 뿐입니다." "그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평생 기억에 남을 싸움이 되겠군." 키마인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오히려 희미하게 웃으며 호이젠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무언의 공명을 받은 호이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곧 다카란의 성문이 열리며 사투를 다짐한 돌격대가 뛰쳐 나갔고 숲 속에 매복해 있던 오크와 오거들의 기습부대들도 땅을 울리는 포효와 함께 리히트야거의 측면을 노리며 맹진을 시작했다. 헤스팔콘과 달라카트 모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 어쩌면 이번 전쟁 최대의 전투가 될지도 모를 다카 란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7. "우웅. 도망치는 것 같아서 싫어. 대체 왜 이렇게 급할 때 황제의 윤허 따위를 받아야 하는 거야!" 전속력으로 달라카트 황실로 향하는 두마리의 말에는 줄리탄과 카넬리안 이 타고 있었다.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자라탄에 주둔하고 있는 메이 제독 의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다카란을 빠져 나왔고 - 지금은 세라피스로부터 함대의 헤스팔콘 수도 공격에 대한 윤허(允許)를 받기 위해 황실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자라탄으로 가는 길에 황실 이 있기 때문에 별로 시간이 많이 낭비될 것은 없지만 번거로운 것이 질색 인 카넬리안은 '그냥 진격하면 된다니까 그러네.'라고 투정이었다. 걱정거 리를 잔뜩 짊어지는 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해 좀 피곤한 얼굴인 줄리탄이 속도를 조금 늦춰 카넬리안의 말 옆에 선 뒤에 말했다. "달라카트 제국의 모든 군대는 세라피스 폐하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윤 허장을 받아야 하는 거야. 무단 출격을 했다간 전쟁에 패했을 때 그 책임 소재를 파악하기가 곤란해 지거든." 꽤나 어려운 말이었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으로부터 복잡한 말이 나오자 의외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뭐야. 그런 말 하니까 정치인 같다. 주인님." "나도 뭔소린지는 잘 몰라. 메이 제독이 해준 말이었거든. 전쟁을 시작했 으면 꼭 승리해야 하지만, 패전했을 때도 대비해야 한다고 하더군." "어쨌든 황실에 들린 김에 리이 님도 봐야 겠네. 그러고보니까 젤리드 님 도 황실에 있겠지? 아무튼 그 사람 멋대로 라니까!" 카넬리안의 투정은 몸이 심하게 떨릴 만큼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때문에 더욱 감정적으로 들렸다. 반면 줄리탄은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 을 열었다. "나도 똑같았을 거야." "뭐가?" "내가 젤리드 씨 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꺼야." "어이구. 눈물나게 고맙네요."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카넬리안은 또 갑자기 낮뜨거운 말이 나오 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말이지 주인님 성격이란.'이라며 중얼거렸다. "자아 가자!!" 줄리탄은 잡념처럼 머리속에 몰아치는 수많은 걱정들을 떨춰버리려는 듯 자신의 백마를 재촉하며 바람이 아프게 뺨을 때릴 때까지 속도를 높였다. -Blind Talk 얼마전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 친구로부터 들은 말인데 한 일본 인 교수가(50년대 출신) '오타쿠'라는 말에 대해 한 말이었습니다. 교수 : 저는 한국오타쿠였습니다. 친구 : ??? 교수는 한국풍물놀이 심취해서 그걸 시작으로 한국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 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신들은 그 당시 그렇게 어느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 며 서로 같은 분야를 파고드는 불특정 다수의 '동료'들을 오타쿠라는 경어 로 불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게 오타쿠라는 단어의 시작이었다고 합니 다.(가이낙스 창시자였던 오카다 토시오 씨는 오타쿠라는 용어가 처음 케 이오우 대학 부속 유치원 출신의 SF매니아들이 서로를 부르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뭐 시기상 교수가 젊었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오타쿠라는 외국어의 정의에 대해 섣불리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교 수에게 그럼 오타쿠라는 단어를 굳이 우리나라 말로 옮긴다면 어떤 단어와 뉘앙스가 비슷할지 물어보자 잠시 생각하던 교수가 말했다고 하네요. 교수 : 아마 '님아'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타쿠라는 말을 사전적으로 억지로 풀면 '댁'이라는 의미겠지만 확실히 그 뉘앙스는 '님아'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합니다. 그 교수가 통신유행어에 대해 알고 그런 말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통신에서 많이들 사 용하는 '님아' 혹은 '님들아'라는 묘한 경어가 떠올라 한참을 생각하게 만 들더군요. 뭐 저는 확실히 유행과 시대에 뒤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호칭에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지만 오타쿠와 '님아'의 묘한 연관성에 대해 서는 그 연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생각해 봄직 했습니다. 둘 다 어떤 특 정 집단이 특정 상황에서 상대에 대해 잘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때 로는 잘 모르는 개인을 향해) 하는 말이니까. 물론 그 이후 오타쿠라는 말은 많은 변화를 갖고 지금은 표준어는 아니지 만 일본 내에서 어떤 관용적 의미를 굳혀가고 있다고는 합니다만.(그래도 반세기의 역사를 지닌 단어로군...) 뭐 제 친구도 상당한 애니메이션 매니 아였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 동료들은 자신들을 오타쿠라고 부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아. 최근 '슈퍼로봇대전 알파 외전'에 손을 대고야 말았습니다. 자붕글 이 나온다는 말에 그만....... 거기서 나오는 아이언 기어는 오래전 딱따 구리문고에서 해적판으로 나온 '로봇백과'(지금도 소장중-_-)에서 보고 아 주 맘에 들어 좋아하다가 무지개극장에서 본 '84태권V'에서 적 거대로봇으 로 나오자 어린 마음에 기겁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그 일제 메카는 태 권V의 필살 공격에 아작이 나버렸지만...(허탈하게 박살나자 가슴 아팠음. ) 그러고보니까 태권V시리즈에는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나 스타 디스트로 이어, 밀레니엄 펠콘을 비롯해서(프란츠 헬멧을 쓴 스톰 트루퍼-_-;;) 수 많은 해외 메카닉이 찬조출현해 줘서 그 위세를 느높였던 기억이. 특히 구프와 그라브로를 때려부수는 태권V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과연 그게 국위선양이었을까 국제망신이었을까.) 그리고 로봇총집합 메카3에서 그 불꽃을 태워버린 뒤엔... 뭔가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가는 그런 마음을 쥐어뜯는 애니메이 션이 나오지 않은 것 같아 무척이나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국가정책덕 분이지만...) 과연... 또 말이 삼천포로. 쯧. 아무튼 최근 기묘한 허탈감에 아주 지겹게 봄을 타고 있습니다. 그럼 메일 보내주시고 감상해 주신 분들, 언제나 관 심 가져 주시는 카페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은 빨리 올리고 싶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김범수의 약속을 들으며... 덧말:아 그리고. 제 글을 소위 불펌하시는 분들. 최소한 출판분량은 지워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마구 성을 내며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고 이것이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논할 기력도 없지만 불신이 쌓여가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3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4/22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606 제 목:[ DRAGON LADY ] 14-03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839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4-22 06:41 조회:136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3 : 당신과 함께 영원히 So Sorrowful Sources (전편 줄거리) 젤리드와 줄리탄, 카넬리안이 빠진 가운데 다카란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힐데브란트의 압도적인 마력을 앞세워 공격해 들어오는 리히트야거 의 모습은 이 전투가 달라카트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혈전이 될 것이라 는 불길한 추측을 하기에 충분했다. 한편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함대 출진에 대한 윤허를 받기 위해 달라카트 황 실로 향하고 있었다. 1. "헤에에. 멋있다아아아아!" 개조가 완료된 채 자라탄에 정박하고 있는 메이의 초노급 기함 밴틀라이 저의 위용을 올려다본 물키벨은 카다란 장난감이라도 본 듯이 커다랗게 감 탄사를 울렸다. 밴틀라이저는 과연 저런 큰 배의 설계가 가능할지 부터가 궁금할 정도로 노블리스의 적색기함 일루미네이터 다섯대 정도는 합쳐 놓 은 듯한 크기였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해룡의 시각으로 보기엔 그 다지 큰 것도 아닐텐데. "멋있어! 멋있어! 그렇지? 톨베인? 응?" 호들갑떠는 물키벨은 선착장에서 팔을 크게 휘저으며 옆에 뚱하니 서있는 톨베인에게 말했지만 톨베인은 별로 동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뭐 어차피 배일 뿐이니까. 전쟁도구가 멋져봐야 뭐하겠어요." "너 정말 감정이 메마른 녀석이구나!" "당신이야말로 해룡이면 해룡답게 좀 근엄해 지는게 어때요." "난 지금도 충분히 근엄해! 난 지금도 충분히 근엄해! 난 지금도 지금도 근엄하단 말야!" "에이. 귀찮아." 물키벨과 톨베인은 예의 사건 이후로 좀 가까워지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서로 성격 바꾸려는 노력은 깨알만큼도 하지 않고 있었다. 톨베인은 담배 를 말아 피우며 따가운 햇빛에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자라탄은 조용 하지만 분명히 지금은 전시상태이며 며칠 후면 헤스팔콘 수도로 진격해야 한다. 해룡들은 절대 모를 인간만의 긴장감을 톨베인은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톨베인아. 저 배 위에 장치된 것들은 뭐야?" "아 저거." 밴틀라이저의 상단에는 회전식 공성포가 다섯기나 무장되어 있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며 파르낫소의 설계로 제작한 것이었다. "해안요새를 부셔버리기 위한 거에요. 저런걸보고 공성함이라고 해야 하 나? 아무튼, 터무니없는 걸 만들어 버렸네요." 항구도시인 헤스팔콘의 수도에는 단단한 해안요새가 있었는데 그걸 효과 적으로 함락시키기 위해 밴틀라이저를 공성포를 쏴대는 무지막지한 전함으 으로 개조시킨 것이었다. 말하자면 신무기였다. 물키벨은 고개를 갸웃거리 며 말했다. "뭐야. 해안요새 같은 건 나한테 부탁하면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데. 뭐하러 저런 걸 만들어?" "인간들 전쟁에 갑자기 용 같은 것이 나타나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 진단 말이에요. 그것도 몰라요?" "흐음.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해결한다 이거야? 고집이로군." "자라탄을 이동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물론 해룡의 힘을 빌리면 훨씬 수월하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어쩌면 해룡의 모습을 본 적군들이 전의를 잃고 그냥 항복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해룡의 실체가 인간들의 세상에 드러나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게 된다면 세상이 엉망이 되버릴 것이다. 용이 실존하 다는 것을 모든 인간들이 알게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인간들의 사회 구조 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건 물키벨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힘을 드러내는 건 오펜바하가 움직였을 때 뿐일 것이다. 물키벨은 갑자기 이 생각 저 생각에 이리저리 빠지다가 갑자기 톨베인의 웃옷을 쥐 어 당기며 올려보았다. "톨베인아." "왜요." "죽지마아." "뭐에요. 그런 불길한 말을." "불길하다니! 걱정해 주는 거란 말야!" "그런 걱정 필요 없어요.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말 하지 마! 이런 전쟁 같은 것에서 죽으면 안돼. 너 죽으면 많이 외로울 꺼야." 그녀는 마치 억지라도 부리듯이 톨베인의 옷을 잡아 끌었다. 아까부터 이 상하게 그녀의 말이 더 많아진 것도 실은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 갑자기 번듯하게 살아있는 자기 죽는 문제로 말싸움하는 것이 싫은지 길게 연기를 뿜으며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물키벨 누나. 인간은 말이죠...... 죽음을 피해가며 살 수 있을 만큼 강 한 생물이 아니에요. 모두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며, 가능하면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죽고 싶다고 바라고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는게 가 치가 있는 거에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거라고요. 영원히 살 수 있는 당신 같은 용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꺼에요." 톨베인은 상트에서 처음 줄리탄들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말을 마쳤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도 상트에서 살인을 업으로 삼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란 행복해 지기가 쉬운 반면 허무하기 쉽고 변질되 기 쉽고 지루하기도 쉽다는 당연한 사실 - 가치가 높은 대신 가치를 잃기 도 쉽다는 그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뭔가에 잔뜩 화가 나서 자기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며 자해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던 그때가 떠올라서 톨베인 은 눈빛을 흐렸다. 반면 물키벨의 반응은 전혀 논리정연하지 못했다. "몰라 몰라! 내가 죽지 말라고 말하면 무조건 죽지마! 만약에 죽으면 알 아서 해! 내가 그냥 두지 않을테얏!" "이미 죽은 사람, 그냥 두지 않으면 어쩔 껀데요." "그, 그런 것 캐묻지 마!" 어떻게 된 것이 18세 인간 톨베인보다 얼마 살았는지 짐작도 못할 해룡 물키벨이 훨씬 정신연령이 낮은 바람에 톨베인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드 물게 실소를 머금으며 바짝 타버린 담배를 바다에 퉁 튕겨 버렸다. "톨베인아." "또 왜요." "정말 죽으면 안돼." 농담도 세번이면 지겨워진다고 했다. 하물며 싫은 소리 연속으로 듣고 참 을 만한 인덕을 지닌 톨베인이 아니었다. "그만 좀 해요!! 난 죽어야 할 땐 죽을 꺼니까!!" 톨베인이 자기도 모르게 터트린 말이 물키벨의 마음에 작은 상흔을 남겼 나 보다. 그대로 받아칠 줄 알았던 물키벨의 표정에선 조그만 원망이 보였 다. "넌 정말...... 여자 많이 울릴 것 같아. 이럴 때는 그냥 절대 안죽을 꺼 에요, 라고 말해주면 난 그걸로 고마운 거야. 용도 씰도 죽음은 어쩌지 못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 몇번이나 실감했단 말야." 물키벨은 씁쓸한 미소로 가느스름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톨베 인은 미안....... 이라고 말을 시작하려다가 목소리를 흐리며 몸을 돌려 본부로 돌아갔다. 여기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정말로 물키벨이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은 보고 있기 힘들다. 2. "사모예드 경. 폐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줄리탄은 자신을 보자 적잖게 긴장한 프란츠(그는 여전히 줄리탄이 카넬 리안의 테이머라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의 뒤를 따라 서 복도를 걸었다. 한편 카넬리안은 이카테스를 만나겠다며 어디론가 가버 린 상황. 전시인데다가 한차례 습격까지 당한 황실의 공기는 전과는 달리 무겁기 그지 없어 줄리탄의 기분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저어. 사모예드 경?" "으응?" 줄리탄은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앞서가던 프란츠가 슬며시 말을 꺼내자 당황하며 눈길을 주었다. 아직 사모예드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경'이라니...... 그런 건 벌써 카넬리안에게 선물로 줘버렸다. "사모예드 경. 이런 것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줄리탄 씨라고 불러줄래?" "예? 아 예에. 저 다름이 아니라...... 카넬리안 씨는 어떤 분인가 궁금 해서요. 다,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니고 그냥......." "카넬리안? 내가 알기로는 너와 일년정도 같이 있었던 걸로......" "그렇긴 하지만, 하나도 모르겠어요. 줄리탄 님을 만나자마자 전혀 다른 모습이 되버려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가." 뚜벅뚜벅 대리석 바닥을 밟는 자신의 발소리를 느끼며 줄리탄은 카넬리안 이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았다. 뭐랄까, 자기 자신도 그녀와 마 음을 공유하는 지금같은 사이가 아니라면 전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그녀를 알.고.있.다.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거다. 줄리탄은 그런 생각에 '나도 잘 몰라.'라고 말하려다가 급히 무슨 생각이 들며 말을 바꿨다. "그냥 평범한 여자야." "평범...... 해요?" 대체. 눈물 한번 흘려본 적 없고 표정하나 안 바꾸고 상대를 베어버릴 수 있는 여자가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 모조리 하품나게 평범한 인 간들 밖에 없을 것이다. "응. 좋아하는 것 많고 싫어하는 것도 많고 기쁘면 웃고 화나면 소리치는 평범한 여자지. 너무 평범해서 특이해 보이는 것 뿐이야." "......" 프란츠는 '이 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표정을 숨기며 줄리탄 을 흘낏 보았다. 자길 놀리려는 수작은 아닌 것 같았는데,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는 소리였다. "하긴 카넬리안은 거짓말을 잘하긴 해. 하지만 뭐...... 거짓말도 그 사 람의 모습이니까." "모, 모르겠어요." 프란츠는 줄리탄이라는 사람이 두렵기까지 한 카넬리안에 대해 마치 몇년 전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된 애인에 대해 소개하듯이 편하게 말하는 것을 보 며 '역시 카넬리안 만큼이나 알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남자도 희노애락이 좌충우돌하고 일반인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생각만 하는 괴인이 아닐까, 하는 한심한 예상까지 들 법 했다. 그렇게 그들의 간간히 이어지며 짧은 화제가 몇차례 오갔을 때 그들은 세 라피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황실 오페라 좌였 다. 3. 세라피스는 상들리에가 잠들어 어둑한 오페라 좌의 한구석 붉은 벨벳 소 파에 멋대로 웃옷을 풀어해친 채 기대어 있었다. 매끈한 가슴과 어깨의 곡 선이 낮은 조명 속에서 들어난 그의 모습은 동성이라도 슬몃 곁눈이 갈 정 도로 매혹적이고 또 조각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속눈썹 밑에 드러난 그의 요요(寥寥)한 눈빛은 벽면의 황금빛 파이프오르간 - 벽 전체를 혈관처럼 장악한 그 수천개의 파이프들을 세어보기라도 하는 듯 시 선을 두고 있었다. 마치, 조물주가 가장 아름다운 청년에게서 생명만 뽑아 간 것 같이 오똑한 콧날 밑으로 숨소리조차 느끼기 힘들었다. "폐하. 사모예드 경께서 부르심을 받고 오셨사옵니다." 두꺼운 문이 열리며 조심스래 들린 프란츠의 말에 세라피스의 침묵이 깨 지며 목소리가 울렸다. "줄리탄. 이쪽으로 와 줘." 세라피스는 여전히 (혹은 일부러) 황제에 걸맞는 말투는 쓰지 않는 것 같 았다. 줄리탄은 처음 들어와 본 오페라 좌를 조금 기웃거리며 안막(眼幕) 이 설치되어 어두컴컴한 오페라 좌의 붉은 동선(動線)을 걸어갔다. 두꺼운 융단 덕에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세라피스 폐하." 뒷좌석의 고급스런 소파에서 옷매무새를 추스리며 슬며시 몸을 일으키는 세라피스에게 줄리탄은 형식적으로나마 다카란 함락에 대한 보고를 올리려 다가 말을 멈췄다. 세라피스의 모습이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담담한 데다 가 - 그의 몸에선 희미하게 밤꽃 냄새가 풍겼다. 좀 전에 여자를 안았던 듯하다. "이거." 세라피스는 바닥에 놔두었던 황제 친필의 달라카트 함대 출진 윤허장을 건내주며 오느라고 수고했다는 듯 슬쩍 웃었다. 보통 이런 건 알현실에서 무릎꿇고 받아야 정상이었다. 하긴 멋지게 전달 받는다고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1퍼센트라도 늘어난다면 몇번이라도 무릎을 꿇었겠지만. "미안. 너무 느긋한 모습이지?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목숨을 걸고 있는데 말야. 변명이지만 솔직히 나도...... 검을 들고 앞장서서 싸우는 편이 마 음에 편할 거야." "황제가 그래선 곤란하겠죠." 검귀(劍鬼)같은 세라피스라면 당연히 전투의 선봉에 서는데 두려움이 없 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죽고 싶어도 죽어선 안된다. 그게 그의 의무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줄리탄 역시 가볍게 그의 말을 받아치며 윤 허장을 잠시 훑어보았다. "달라카트 만큼 인형극을 좋아하는 나라도 없을 꺼야. 이런 거대한 시설 를 만들어 놓고도 저 무대에는 사람들은 올라갈 수 없거든. 너 같은 가르 바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꺼야. 가르바트에서는 아무대서나 노래 부르는 곳이 곧 무대가 되어버리잖아?" 세라피스가 그렇게 말하며 바라보는 무대에는 축 늘어져 있는 정교한 인 형들이 놓여 있었고 노란색 무대조명이 그 위에 쌓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대 뒤로 돌아가 실을 잡아 당기면 벌떡 일어설 것 같은 모습이다. 세라 피스는 뭔가 깊은 푸념을 꺼내 놓으려다가 스스로 말을 빙빙 돌리며 참으 려고 하는 것 같았다. 넋두리를 늘어 놓는 건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에 해 도 늦지 않는다는 그 스스로의 인내심 때문일까. "그런데...... 리이 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순간 세라피스의 숨이 멈춘 것 같았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는 잠시 동안 정지된 무대를 바라보며 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한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줬어." "서, 설마 죽었어요? 리이 씨가?" "아니. 그 여자, 떠났어." "예? 따나다뇨? 어, 어디로?" "나도 참 못난 황제야. 이 정도 일에 이렇게 괴롭다니. 이래서 황제 따윈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야. 울어줄 수도 없잖아." 줄리탄은 차갑게 식은 세라피스의 말을 들으며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는 무사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조차 무참히 사그러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4. 이카테스는 마치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려는 듯 깨끗한 옷을 갖춰 입고 황성의 정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포니테일의 머리를 풀고 길고 검은 머리칼을 내린 카리나가 위로하듯 앉아 있었다. "이카테스." "아. 카넬리안 씨." 그런 그를 찾아온 것은 카넬리안이었다. 사실 그녀는 리이의 신변의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카테스를 만나려고 한 것이다. 불길한 예상은 이상하게도 잘 들어 맞는다. "오늘은 싸우고 싶지 않아." 카리나는 카넬리안을 보며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릴 뿐 더 이상 말이 없었 고 카넬리안도 말싸움할 생각 없다며 이카테스에게 다가갔다. "리이 님이 방금 전 저와의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랬구나." 카넬리안은 이카테스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외로움의 근원을 알 수 있었 다. 리이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끼며 이카테스를 이적시키지 않고 파기 한 것이다. 카넬리안은 그 이유를 느끼고 있었지만 구차하게 다시 한번 물 어 보기로 했다. "왜 널 이적하지 않고 계약을 파기한 거지?" 사실 테이머가 씰과의 계약을 스스로 파기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할 정 도로 극히 드물다. 이카테스는 쓸쓸하게 미소띄며 말했다. "제가 부탁드렸으니까요. 저도 리이 님과 함께 잠들고 싶습니다." "아......." 계약이 파기된 씰은 파기 시점에서 한달 이내에 다시 봉인에 들어가 잠들 게 된다. 불가항력적인 수면이 몰려오고 그리고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될 때까지 보통 100여년 이상을 죽음과 같은 수면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수백년전의 추억만 지닌 채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또 다른 주인을 만나 새로운 이름을 받으며 눈을 뜨게 되겠지. 이승을 벗어나 지 못하는 주박(呪縛)같은 환생의 메커니즘이었다. 이카테스의 말에 특히 카리나는 몹시 괴로운 듯이 눈물이 흐르지 않는 눈동자를 숙여 발밑을 바 라보며 엷게 몸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두려워 하는 것인지 모른다. "리이 님은 참 좋은 주인이었어. 인간 중에 그런 사람 드물지." 카넬리안은 기화요초가 무던히도 만발한 정원의 자태를 씁쓸히 훑어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던 중 자기도 모르게 테싱의 모습이 머리속에 나타났 다. 그 사람과는 정말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줄리탄과 헤 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 그렇게 좋은 테이머만을 만난 행복한 씰인데 왜 씰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이렇게 싫은 걸까. 우리는 대체 몇번을 죽어야 하는 걸까. "이카테스. 이제 너를 이카테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게 마지막 이겠네. 이 제 잠들기 전까지 뭘 할꺼야?" "가능하면 리이 님의 무덤 곁에 있겠습니다. 그분의 검과 함께 잠들고 싶 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카테스의 진홍빛 머리칼이 꽃줄기와 함께 바람이 흔들거 렸다. 씰에게 있어서 계약이 파기된 전주인에게 애정을 보인다는 것은 의 무가 아니다. '이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났구나.'라고 사무적으로 생각 하며 최대한 전주인과의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상관 없는 것이다. 너 무 깊게 추억을 갖다간 결국 괴로움만 늘어난다.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그걸로 끝이지만 씰은 다시 태어날 때마다 계속 계속 추억이 누적되어 결국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질 테니까. "이카테스." "예?" "리이 님과는 행복했어?" 카넬리안의 그 말에 이카테스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었던 이카테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외로운 표정이 드러 났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 나즈막하게 대답했다. "전주인에 대한 말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씰이잖아요?" "아. 그랬지. 미안해. 그런 것 물어봐서."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카리나는 참을 수가 없었던 듯이 먼저 일어나 황궁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찰랑거리는 긴머리칼을 바라보며 카넬리안은 자신들, 씰이라 는 존재의 허무함에 대해 또 생각해 버렸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들.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울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고 자살할 수도 없다. 강한 힘도 영원한 생명도 뛰어난 머리도 필 요 없어. 단지 괴로울 때 펑펑 울어버리고 그대로 잊어벌 수 있는 권리 정 도는 갖고 싶다고 - 그녀는 매번 그렇게 생각했다. -Blind Talk 흐음. 간만에 올렸는데 추욱 늘어지는 한편이었습니다. 현재 뭔가 기운이 나질 않는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한편을 잘라내다 보니까 이렇 게 되어 버렸네요. 이카테스의 마지막 등장 씬이었습니다. 막 감정을 격하 게 표현했다가 제 성격대로 '역시 담담하게 끝내자.'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마침표를. 좀 더 멋있게 할 수 있었는데 최근 엄청 지쳐서 제대로 손이 안 나가는게 괴롭네요. 전편에서 페세테르가 바다에 세로로 누워서 잠든 모습은 - 실제 향유고래 던가 아니면 밍크고래 던가 하는 것이 실제로 그렇게 바다속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다큐멘타리에서 보고 '멋지다. 언젠가는 써먹어야지.'라고 생 각해서 써본 것입니다. 아아 묘사가 미숙하여 그 멋진 모습을 제대로 설명 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그리고 세라피스가 있던 오페라 좌의 모습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실을 모델로 이리저리 바꿔서 써본 겁니다.(뭔가 그것 설명하 는데 어려운 말 잔뜩 들어가서 다 지워버리고 묘사를 대폭 줄이느라 잘 티 가 나진 않지만.) 처음에는 베르사유 궁에 있는 루이 14세의 극장이 멋져 서 그걸 모델로 꾸미려다가 그건 너무 화려하고 또 설명할 부분도 많아서 그냥 오페라 좌에다가 110개 음전에 6000개 파이프가 있는 대형 파이프 오 르간을 밀어 넣고 대신 상대적으로 작은 무대를 안막중심으로 설치해 놓은 기묘한 방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그런 걸 본다면 '뭐야. 이 센스는 !'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로 진행되는 인형 극이라. 상당히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일년전 쯤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보고 난 뒤에 인형극에 대해 상당히 궁 금해져 있던 터라... 이렇게라도.) 최근에는 구독하고 있는 네셔널 지오그래픽에 전화해서 큰 맘 먹고 트레 블러 단행복 1질을 구입해 버렸습니다. 해외 유명도시의 여행 가이드 북 같은 것인데 지금은 프랑스쪽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여행을 좋아할 뿐더러(의외로 여행은 많아 안다니지만...) 여행자 가이드니까 여간한 책 들보다 이국적 지형이나 건물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이 나와서 글 쓰는데도 도움이 되더군요.('세계를 가다!'라는 등의 다른 가이드북보다 설명이 충 실한 편임.) 값은 휘청거릴 정도로 비싸지만 제값은 하니까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대형서점 가서 훑어 보세요.(맘에 들면 사시고...) *********이제부터 공채광고입니다.********* '대체 연재소설 잡담끄트머리에 공채라니 정신이 있는 거냐!'라고 어리둥 절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뭐 거대하게 터트릴 만한 것은 아니니까 일단 짤막하게 쓸께요. 제가 몸담고 있는 곳들 중 하나인 미국 출판사(스폰 시리즈 나온 image) 에서 스토리 브레인스토밍 팀을 뽑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국 연재 만화에 대한 스토리 팀을 뽑는 것인데.(국내와는 구조가 좀 다릅니다.) 혹시 미국 만화 스토리 쪽에 관심 있으신 분들 계시면 제 이메일로 연락 좀 부탁합니다. 뭐 심사는 미국 본사에서 하겠지만서도 일단 저보고도 찾 아봐 달라고 말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이미 몇편이상 미국에 연재가 되 고 있고 조만간 신문이나 여기 저기 매체에 공채를 올릴지도 모르지만 당 장 회사에서 급한 것 같아서요.(이렇게 무성의하게 써도 될까 몰라.) 아무거나 궁금한 점 있는 분들도 연락해 주시면 모두 답변해 드립니다. (e-mail 주소는 이 글 끝에 있어요.) 그럼. 회사일은 이걸로 마칩니다. <제멋대로 프로파일 통신판 only> Entry#6 이카테스(Ikataece) 1.지금 기분 어때요? :이런 건..... 좀 일찍 해 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자기 더 이상 나오지도 않다고 속상한 모양이다.) 2.리이 씨와 있을 때는 뭐했어요? :보통은 그 분의 책들을 정리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와인을 관리하거나 정기적으로 레이피어를 들고 대장간에 뛰어가서 수리해 놓고 다시 제자리 에 갖다 놓는 것 정도? 의외로 마법쓸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렇다. 그는 남자씰 주제에 가정적인 씰이었던 것이다.) 3.카넬리안과는 왜 친한 거죠? :친하면...... 안되나요? (사실 크게 친한 것도 아니다. 그나마 카넬리안에게 부정적이지 않은 드문 씰들 중에 하나일 뿐.) 4.리이 씨와 있으면서 영향 받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말투랄까. 걷는 모습, 책을 읽을 때 꼼꼼해 졌다는 것 정도. (고양이도 주인과 함께 있으면 그 주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던데...) 5.좋아하는 건 뭐죠? :깨끗한 공기. 새소리. 차분한 일상. 등등...... (나코루루냐? -_-) 6.다음 주인은 누가 될 것 같아요? :리이 님과 비슷한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별로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것 같군.) 7.자신이 등장 씬 중에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그래도 등장할 땐 언제나 옷을 깔끔하게 입었는데 그것에 대해 별로 묘사 가 없었어요. (거 사소한 것에 무척 서운했나 보다.....) 8.노래 잘 불러요? :씰들에게 질문할 때는 꼭 이 질문 나오네요? (......단지 질문할 것이 별로 없었을 뿐입니다.) 9.혹시 주인이 누굴 죽이라고 명령하면 할 수 있어요? :예. 싫든 좋든 일이니까요. (이래서 씰들은 본래 성격을 좀처럼 알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리이 씨 잠버릇은 어때요? :전 주인에 대한 말은 해드릴 수가 없어요. (여기선 해도 좋다고 말하자 '머리를 자주 뒤척여서 자고 일어나면 머리칼 이 많이 헝크러지는 편이에요.'라고 속삭여 주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Shela의 Feel을 들으며 (AVEX(테츠야 코무로 사단)의 노래는 전체적으로 별로 와 닿지 않지만 가 금 가볍게 귀에 맞는 노래도 있더군요. 반면 예전 TK가 있던 TMN의 노래들 은 City hunter의 영향인지 때로 듣게 됩니다.) ps1:메일 보내신 분들은 모두 답장 드렸어요. 그런데 전편에서 언급했던 '오따꾸'에 대해 진지한 의견을 보내주신 분은 메일 주소가 잘못되었는지 답장이 반송되어 왔네요.(예전 그분의 메일 주소 잊어버려서... 보낼 방법 이 없습니다.) 아니면 아무래도 제 메일 서버에 문제가 있는지도... ps2:죄송하지만 이번 편은 제대로 수정하지 못하고 올렸습니다. 오타 발견 시에는 제게 슬쩍 좀 알려주세요...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4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4/30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74 제 목:[ DRAGON LADY ] 14-04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8928]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4-30 05:05 조회:203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4 : 당신과 함께 영원히 Never Dying Spirit! 1. 황급히 리이가 있던 병실로 뛰어간 줄리탄이 불길한 정적이 맴도는 병실 의 문을 열었을 때 촛불하나 없이 어두운 그곳에선 오직 열기없는 달빛을 등진 채 작은 쪽지만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젤리드만이 있었다. '넌 의외로 생각이 깊은 남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네 품 속은 나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곳이 아냐. 마지막까지 멋대로여서 미안해 젤리드.' 리이가 떠난 자리에는 그런 짧은 문장이 특유의 고운 글씨로 씌여져 있었 다. 그리고 그 쪽지를 굳은 듯 바라보고 있는 젤리드의 곤혹스러운 표정, 전에는 보지 못했다. "......젤리드 씨?" 젤리드는 줄리탄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이가 너한테 항상 고마웠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 젤리드의 말이 울리는 병실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리이의 차분한 향내가 쓸쓸한 추억처럼 남아있었다. "이봐. 줄리탄. 내가 리이의 과거에 대해선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 "아. 예." "잠시 들어주겠어? 이제 그 여자의 과거, 네게 말해주고 잊어버리려고 하 니까. 담아두고 살기엔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혼잣말처럼 말하는 젤리드의 눈동자는 추억을 향해 있었다. 2. 다카란의 대지는 격노하는 생명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아마 헤스페리아 역사상 단일 전투에서 이 정도 수의 기사들이 참전해 전투를 벌인 적은 없 었을 것이다. 리히트야거로서도 쉽게 괴멸해 버릴 줄 알았던 달라카트의 급조된 혼성부대가 예상 외의 단결력을 보이자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은 이 미 버린지 오래였다. "밀리지 마라! 포위망이 끊어지면 안돼!" 파르낫소에게도 처음부터 리히트야거를 전멸시켜 버리겠다는 생각은 없었 다. 단지 메이 제독이 헤스팔콘 수도를 함락시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그 걸로 성공한 것이다. 그런 그의 계획대로 이종족들과 달라카트의 기사들로 이뤄진 포위망은 필사의 힘을 다해서 리히트야거를 둘러싸며 저항하고 있 었고 지역 곳곳에서 마력이 폭발하고 기와 기가 충돌하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달라카트의 가장 큰 문제는 힐데브란트였다. 그 의 마법은 섣부른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또! 또 온다! 모두 피해!!" 쿠르르르릉!! 죽음을 강요하는 공포스런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눈부신 고열의 불기 둥이 내리꽂으며 달라카트의 진지를 또 한번 밀어버렸고 그 뇌신(雷神)의 손길에 들어간 자들은 순간적으로 몸이 증발해 버리며 뜨거운 피안개로 뒤 바꿨다. 고통과 절망의 절규와 함께 힐데브란트의 마력을 방어하려던 트롤 술사들 역시 혈관이 파열되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렇게 힐데브란트의 공격이 닥쳐 때마다 달라카트 진영의 전력과 전의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 다. "메르퀸트 씨. 좀 쉬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아, 아니에요. 조금 더....... 버틸 수 있어요." 반나절 이상을 쉬지 않고 힐데브란트와 마력을 겨루던 메르퀸트 역시 좀 전부터 가늘게 흐르기 시작한 코피를 닦아내며 괴롭게 숨을 내쉈다. 제물 의 생체에너지로부터 마력을 뽑아내는 힐데브란트에 비해 소환사인 메르퀸 트는 소환을 할 때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계속 극심한 피로와 고 통이 누적되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메르퀸트의 목숨 자체가 위험할 지경이 었다. 파르낫소는 상황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들에게 불리해 지자 잠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적잖은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힐데브란트의 마력을 봉쇄해야 겠습니다!" "으음. 방법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그랜사이어가 쉰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까지 계속 전장 한복판에 나서서 리히트야거의 기사들 두명을 베어버린 그의 온몸은 크고 작은 상처 투성이였지만 눈빛만큼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은 상태. 백전노장의 기백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러나 분명히 지쳐있는 그의 몸을 그의 세 씰들이 바짝 달라붙어 엉킨 피를 분주히 닦아내주고 있었다. "힐데브란트인가 뭔가 하는 작자는 몇중으로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게 분명하단 말이야. 그걸 뚫고 들어가려다간 목숨이 열개 있어도 부족할 걸세." "맞아요. 그랜사이어 씨의 말 대로라고요." 부상당해 붕대를 감고 있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고 치료 받고 있는 이종족들도 서로 수근거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였다. 적의 지 휘관을 전투중에 암살한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파르낫소는 자신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에겐 보이지 않는 아군이 있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다?" 파르낫소는 의아한 표정의 메르퀸트를 바라보며 부탁한다는 말을 꺼냈다. 3. "힐데브란트 공. 적 부대의 포위망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계속된 마법시전으로 제물의 핏덩이를 뒤집어 쓴 섬뜩한 모습으로 서 있 는 힐데브란트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달라카트 측의 완강한 포위망이 깨지 고 있는 것이다. 힐데브란트는 즉시 명령했다. "현재 방어중인 리히트야거의 선두를 진격시킨다. 다카란 요새 외성문루 경사로를 강행돌파하겠다." "옛!" "저들도 이제 한계인가 보군. 숨통을 끊어 주어라." 힐데브란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히트야거의 기사들은 검을 빼 들고 위압적인 기력을 드러내며 퇴각하는 달라카트의 혼성부대를 뒤쫓기 시작했고 이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힐데브란트 측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 러한 상황을 단 두명의 기사들과 자신의 씰 이세벨의 호위를 받으며 지켜 보던 힐데브란트는 속을 슬쩍 꼬집는 듯한 가벼운 위화감에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주변 기사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색의 중압감. 그러나 힐데브란트는 희미하지만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절대로 달라카트의 기사들이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지만 분명히 어떤 힘이 접근하고 있다. "......적의 함정이었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에 리히트야거의 젊은 호위기사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푸드드득! 갑자기 푸석한 땅 속에서 죽은 나뭇가지를 닮은 이형의 촉수가 솟아 오르 며 기사들의 발을 뱀처럼 휘어 감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적이다!" 두 기사는 확실히 헤스팔콘 최정예 기사에 어울리는 자들이었다. 다른 평 범한 기사였다면 당황하다가 그대로 발목이 잘려나갈 것이었지만 그들은 즉시 검을 뽑아 촉수를 잘라낸 뒤 땅속에 검을 깊게 박으며 기력을 터트렸 다. 땅속에선 딱정벌레의 껍질이 깨지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들렸다. 끼아아아아아악!! 곧 땅이 울리며 소름끼치는 이형들의 비명과 함께 땅속에서 썩은 피가 솟 아 올랐지만 이형들은 필사적으로 촉수들을 휘두르며 기사의 몸을 감아 올 리려 했다. 기사들을 죽이겠다기 보다는 움직임을 봉쇄하겠다는 의도처럼 보였다. "이, 이것들이!!" 한편 그런 상황을 침착하게 바라보던 힐데브란트 앞으로 모래바람을 닮은 힘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의지를 지닌 바람 같은 그 모습에 힐데브란트가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저건 뭐야. 악령?" "내 이름은 말락! 악령이 아니란 말이다!!" 달라카트의 비밀병기이자 리히트야거의 기사라 하더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공포의 대상 말락은 정말이지 멋지게 등장하고 싶었건만...... 대체 전장 한복판에서 악령이라는 오명은 떨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더 욱더 분노해 버린 말락은 (평소보다 몇배는 더 스펙터클하게) 강렬한 모래 바람의 스파크를 일으켜 형채를 만들어내며 대낫을 치켜올린 채 엄청난 속 력으로 힐데브란트에게 날아들었다. 참 과격한 암살자였다. "메르퀸트를 위해 네 목을 가져가야 겠다!" 군대를 일순간 후퇴시켜 힐데브란트를 방심시킨 뒤에 말락을 통해 그를 암살하려는 파르낫소의 즉흥적인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대범한 작전이다. 분명 나의 실책이군." 힐데브란트는 순간 자신이 마력을 모으기 전에 말락의 낫이 자신의 생명 끝에 도착하리란 걸 간파했지만 얼굴은 언제나처럼 담담할 뿐이었다. 호위 기사들 역시 미친듯 달려드는 이형들 때문에 도와줄 길이 없는 상황. "히, 힐데브란트 공!!" "난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암살 따위를 당하는 건 세이드 님의 비웃음꺼 리가 될테니까!" 갑작스런 힐데브란트의 외침과 함께 그의 앞에 작은 실루엣이 주저없이 끼어들었다. 그의 씰, 이세벨이었다. 그것은 마치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전 차 앞으로 뛰어드는 모습이었다. "비켜!!" "......." 말락은 힐데브란트 앞을 막아서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세 벨을 향해 어쩔 수 없이 대낫을 휘둘렀고 곧 투툭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아무 생명이 없는 나무조각처럼 이세벨의 몸이 두조각으로 갈라지며 바닥 을 굴렀다. "이세벨. 너의 죽음은 평생 잊지 않으마." 이세벨을 방패로 써서 시간을 번 힐데브란트는 이미 마력을 충분히 모은 뒤였다. 보통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속도로 빠르게 마력을 모을 수 있었던 힐데브란트의 몸에는 회색빛 아우라가 솟아 올랐고 다시 대낫을 끌 어 올리는 말락을 향해 그것이 창날처럼 파고 들었다. "크으아아아악!!" 힐데브란트는 마법의 '화력'으로만 보면 메르퀸트의 힘을 훨씬 상회했다. 아무리 물리적 공격에 강한 저항력을 지닌 말락이었지만 바로 앞에서 직격 해 온 파괴적 마력 앞에서는 당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곧바로 말락의 비명이 사방을 울리며 그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지만 말락은 그래도 죽 을 듯이 으르렁거리며 힐데브란트를 내리찍으려 했다. 필사적인 정신력이 었다. "크윽! 나와 함께 죽는 거다! 이 마법사 놈!" "나는 여기서는 죽지 않는다." 냉정하게 대꾸한 힐데브란트는 다시 한번 말락에게 자신의 마력을 뿜었고 그것은 말락의 몸을 빛의 창처럼 관통하며 그의 몸을 이루는 모래바람이 폭발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말락의 힘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힐데브란트 공!" 힘을 잃은 이형들을 해치운 기사들이 힐데브란트에게 달려왔다. 그들의 몸에는 몇부분 찰과상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힐데브란트는 헝크러진 자신 의 후드를 툭툭 털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달라카트 놈들. 생각보다 자신들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군." "......." "이 싸움. 빨리 끝내야겠어." 4. "마, 말락!!" 말락의 힘이 소멸되어 버리자 창밖을 바라보던 메르퀸트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그는 파르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암살은...... 실패입니다." "말락은 어떻습니까?" "모, 모르겠어요. 어쩌면...... 죽었는지도." 안그래도 계속 힘을 써서 서 있기조차 힘든 메르퀸트의 눈가에는 촉촉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파르낫소가 침통한 목소리로 메르퀸트를 위로했 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아니에요. 말락은 제게 돌아올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 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메르퀸트는 계속 고이는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전투에서 꼭 승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모두 다시 한번 힘내요!" 파르낫소는 어렵게 미소로 호응하며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전쟁이라는 건 탁자에 둘러앉아 궤변만 주절대는 호사가들에겐 제법 낭만적이고 멋진 유희일지 몰라도 검을 뽑고 하루에도 몇번씩 목숨을 걸어야 하는 당사자들 에겐 아군에게나 적군에게나 잔혹한 심판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5. 줄리탄은 젤리드의 말을 들으며 순간 순수한 호기심에 충동질 당했다. 리 이는 누구에게도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단지 젤리드만이 그녀의 과 거에 동참했을 뿐이었다. 젤리드는 잠시 쓴 침을 삼킨 뒤에 곧바로 말을 꺼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선 여러가지 수행이 필요해. 그래서 나도 리이도 열다 섯살 때는 모두 서로 다른 기사의 종자로 전투에 나섰지. 종자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나?" "아, 아뇨. 그건 잘......" 줄리탄이 그런 기사수행 과정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젤리드의 말 이 이어졌다. "종자가 전투중에 검을 휘두르는 일은 거의 없어. 단지 모시고 있는 기사 의 무기를 관리하거나 기사의 뒤를 따르며 전투를 지켜보거나 혹은 기사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야 하지. 말하 자면 기사의 부속품 같은 존재야 종자란." "......그렇군요." 사실 최근에는 기사수행중 종자라는 개념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 다 종자기간 중에 전투에서 죽는 어린 '기사지망생'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 이었다. "가르바트와의 전투 때였어. 나와 리이는 서로 다른 기사에게 뽑혀 그의 종자가 되어 있었지. 하하. 내가 모셨던 기사는 엄청난 겁쟁이라서 앞장서 는 일이 없었고 그래서 나도 별로 죽음에 직면한 적이 없었지만...... 리 이는 달랐어. 리이가 모셨던 기사는 언제나 전투의 선봉이었지. 물론 그건 용감한게 아니라 공적에 눈이 먼 헛짓거리였지만." 젤리드는 자신의 대상 잃은 울분을 리이가 봉사했던 그 기사에게 풀어버 리는 것 같았다. "사실 리이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어. 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단지 자신과 같은 기사의 종자였던 한 녀석을 좋아 했을 뿐이지. 리이가 기사수행을 그만두지 않은 것도 '그 남 자'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라면 말 다한 거잖아?" "......" 줄리탄은 지금까지 리이가 사랑한 남자는 젤리드 하나였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젤리드는 뭔가에 굉장히 억울한 듯이 리이의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을 침대시트를 슬쩍 헝크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리이가 모셨던 그 무모한 기사, 마르켈라이쥬와 상대하려 한게 실수였지 . 멍청한 놈. 그 실력에 말야. 단번에 목이 날아가 버린 거야. 그것도 적 진 한복판에서. 마르켈라이쥬는 어린 종자들은 죽이지 않고 돌아갔지만 그 렇다고 리이가 아군진영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지. 그 빌어먹을 의무, 기사 의 시신을 빼앗기면 안된다는 개같은 규칙 때문에 리이도 '그 남자'도 기 사의 시체를 끌고 숲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었던 거지." "말도 안돼요. 시신이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가요?"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했다. 정말 가당찮은 논리인 거다. 죽은 기 사의 시체만도 못한 목숨이란 말인가 종자란? "내가 기사라는 족속들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지. 이미 죽어버린 시 체, 전쟁 중에 어떻게 되든 알게 뭐냔 말야. 일반 병사들의 시체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전쟁바닥을 뒹구는데 귀족 기사의 시체는 목숨 걸고 지켜 야 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건가? 빌어먹을." 젤리드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화를 내고 있었다. 분명 그는 언제나 세상의 높은 곳을 향해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 그들은 도무지 구제할 길이 없는 이기적인 놈들이라고. "다른 가르바트의 기사들은 마르켈라이쥬만큼 신사적이지 않았어. 숲속에 숨어 있는 리이를 발견해서 겁탈한 뒤에 죽여버리려고 했겠지. 기억해 둬. 그때 리이는 고.작.열.다.섯.살.이었어. 겨우 그 나이에 적 병사들에게 둘 러싸였을 때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자결할 용기조차 없을 그런 나이에 말 야." "......" 줄리탄은 침을 삼켰다. 적진의 숲속에서 피투성이의 목없는 시체를 보호 하며 적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어린 리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심장이 터져버릴 만큼 두려운 기분이겠지? 도망치고 싶어도 종자라 는 부속품 같은 입장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그런 끔찍한 기분. "리이는 그들과 싸우지 못했어. 그녀가 내게 솔직히 말했었지. 머리가 하 얗게 되서 검을 떨어뜨리고 울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리이가 다 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그녀가 뭘 봤을 것 같아?" "적병사들이 살려준 건가요?" "멍청하군. 그런 마음씨를 지닌 자들이 인간이라면 전쟁 같은 건 애시당 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꺼다. 리이가 몇분이나 흐른 뒤 정신을 차려 앞을 봤을 때는 자기 대신 적 기사와 병사들과 싸워 그들을 모두 죽인 후에 만 신창이가 되어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이 있었지. 믿을 수 있겠어? 열다섯 살짜리 꼬마가 기사와 병사들을 혼자서 모두 죽인 거야." 젤리드는 리이가 했줬던 말을 더듬어가며 줄리탄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지만 그것이 더 줄리탄의 소름을 끼치게 만들 었다. '기사란 수행을 시작하면서부터 평범한 인생하고는 이별해야 해.'라 는 카넬리안의 말이 떠오른다. "그 녀석은 기사의 시체보다는 리이를 구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던 거야. 당돌한 꼬마야 정말. 그리고 리이에게 이렇게 말했지. 기 사의 시신을 가지고 본진으로 돌아가라고. 자기 대신 훌륭한 기사가 되어 달라고. 그리고 정말로 사랑했다고. 아마 마지막 힘을 짜내서 꺼낸 고백이 었겠지. 그리고 죽었어 '그 남자'는." "......" 줄리탄은 순간적으로 카넬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죽어버리는 그런 사랑 따위 아무리 낭만적이어도 절대 하고 싶지 않아, 줄리탄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이가 느꼈을 괴로움을 공감했다. "그래서 리이가 어떻게 했을 것 같나? 그 울보 같던 여자가 그때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젤리드는 계속 계속 씁쓸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모르겠어요, 줄리탄은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예상하고 싶지 않았다. "리이는 말야...... 시신를 끌고 쉬지 않고 전쟁터를 뚫으며 며칠이 지나 서야 본진에 도착했지.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 았지. 리이는 두 구의 시신를 끌고 왔던 거야. 기사와 그 남자의 시신을. 열다섯살 짜리 소녀가 전장을 뚫고 두 구나 되는 시신을 끌고 왔다는 건 누구라도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모습이지." "젤리드 씨는 보셨어요?" "봤지. 본진에서 쉬고 있을 때 두 구의 시체와 함께 성문 앞에 도착한 리 이의 말없는 모습을 봤어. 그리고 온갖 미사어구로 그녀를 칭송하는 지휘 관들 속에서 마음을 닫아버린 모습도. 열다섯 여자가 누려야 할 사소한 권 리 따위는 완전히 빼앗겨 버린 그런 모습을 본거야. 하지만 놈들은 기사수 행자들의 귀감이라는 바라지 않는 호의를 멋대로 그녀에게 치장해 주었지. " 젤리드는 멀찌감치서 그녀를 바라봤던 그때의 생각이 나는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정말 지켜줘야 하는 여자다.'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어. 옆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지. 그리고 운이 좋게도 리이와 같은 스승 밑으로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때부터......" 갑자기 장난스럽게 입술을 슬쩍 우물거린 젤리드는 소리없이 웃으며 '사 실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잊은 건 최근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여기까지다. 잘 들었길 바래. 다시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기억하지도 않을 테니까. 오직 한 여자의 추억을 짊어지고 사는 남자는 멋진 놈이지만 그러기엔 너무 괴로울 것 같거든. 도저히 자신이 없어. 그런 추억 자꾸 생 각하면 약해져 버릴 것 같아." 줄리탄은 눈물이 흐르지 않는 슬픔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줄리탄이 잠시 엿본 리이의 인생은 버거운 상처 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향해 몇번이나 웃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힘들게 노력했을 까. '자신을 소중히 여기자.'라는 당연한 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말을 몇만 번이나 되뇌었을까. 그리고 그런 그녀를 감싸준 젤리드의 그 방식대로의 애정을 이제야 좀 느낄 것 같았다. 젤리드는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줄 리탄에게 흘낏 말을 던졌다. "줄리탄. 기사가 뭘 배워야 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있나?" "......글쎄요." 기사가 배우는 것에는 검술과 전술, 기사도, 무기수리 등등이 있겠지만 젤리드가 말하려는 것은 그게 아닌 것 같았기에 줄리탄은 말을 흐렸다. "사람들은 기사가 남을 죽이는 방법을 배우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겠 지만...... 실은 그게 아냐. 기사는 죽는 방법을 배워. 세상 사람 죄다 살 아가는 방법을 배울 때 오직 기사만이 죽는 방법에 골몰하는 거야. 내가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할지, 지치도록 고민하면서 말야. 그렇게...... 우 리들은 죽는 방법을 배운 자들이야.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존재지." 젤리드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대충 느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카넬리안이 예전 벨레시마에서 했던 말, '기사의 의무'라는 것에 대해 이제서야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기사가 된다는 것 이 얼마나 괴로움을 자청해야 하는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리이가 지금 전쟁터 따위 가고 싶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 자신의 마 지막은 나와 함께 있고 싶었을 꺼야. 밀렸던 말들을 모두 해버리고 행복했 다는 말을 주고 받으며 웃고 울면서 그렇게 눈을 감고 싶었다는거 알고 있 어. 그 여자 마음 정도 훤하게 알 수 있지. 하지만 리이는 자기가 기사도 앞에 맹세한 진짜 기사로서 삶의 마지막을 어디서 끝내야 할지를 알고 있 었던 거야. 정말 멋지지 않아? 누가 강요하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는데도 그 여자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잔인한 기사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은 거야. 세상 어떤 기사가 그 여자만큼 강할 수 있겠어." 젤리드는 자신의 두 손을 부서져라 꽉 쥐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터질듯한 슬픔을 참으려는 행동이리라. "빌어먹을. 그렇게 멋진 여잔데...... 내가 유일하게 반했을 만큼 그렇게 멋있는 여자였는데, 왜 나는...... 마지막까지 그 여자에게 화가 나는 걸 까."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며 얇은 침대시트를 적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젤 리드는 한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그가 자신의 가문과 홀로 싸우고 그들의 시체 위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밤을 보냈을 때,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을 모 두 쏟아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리이는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게 만들 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젤리드가 이제 겨우 마음을 잡았다 며 줄리탄에게 건낸 그의 마지막은 줄리탄 인생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 었다. "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몰라. 상대를 죽이는 재능밖엔 없어서...... 즐겁게 사는 게 어떤 건지도 찾지 못했어. 내가 이 세상의 뒤틀린 존재들을 부숴 버릴 테니...... 넌 그 빈 공간에 뭔가 지금보다는 좋은 걸 채워 넣으면 되는 거야. 나만 쉬운 역할을 맡아서 미안하군." 줄리탄이 자라탄으로 떠나기 전 젤리드는 그 말을 남기며 카리나와 함께 다카란으로 향했고 그는 다카란 전투 이후 곧장 자취를 감춰 그 이후 단 한번도 줄리탄과 만나지 못했다. 단지 후대의 음유시인들의 입에서 이후 그의 행적들이 영웅담이 되어 계속 전해질 뿐이었다. 6. 다카란의 상황은 절망에 가까웠다. 힐데브란트의 악몽같은 화력을 앞세운 리히트야거에 의해 달라카트 측의 전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었고 사기 도 극심하게 낮아져 좌절과 공포가 달라카트 진영에 전염병처럼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런 다카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리, 리이 경이다! 리이 경이 오셨다!" "정말인가? 진짜 푸른맹금이 온거야?" 긴 금발을 늘어트린 채 차분하고 청초한 평소의 모습 그대로 다카란 요새 에 나타난 리이의 모습에 사람들은 저마다 경의를 표했다. 리이가 이미 죽 었다는 소문이 군대에 깔린지 며칠이나 된 뒤였기 때문에 그녀의 등장은 마치 수호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신성해 보였다. "리이 경. 어떻게 여기까지." 리이를 맞이한 파르낫소와 키마인 등의 얼굴에 고마움과 동시에 안타까운 기색이 맴돌았다. 그들 역시 리이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녀의 생명이 곧 끝 날 것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도리어 리이는 그들을 달래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주저없이 말했다. "지금 저의 결정에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그 리이의 말을 다카란 전투에 참여한 모든 사람, 그리고 이종족들 까지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카란 요새에서 값진 승리를 기원하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거의 누구도 부르지 않던 까마득한 과거부터 구전되던 전쟁의 노래 였다. 나를 도우소서! 오 신이시여! 죽음이 가까이 있을 때! 날뛰는 공포를 웃어넘길 수 있도록! 내가 쓰러질 때! 쓰러지지 않을 수 없을 때! 티끌 속에서 내 영혼만은 승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달라카트의 대반격이 시작되었고 리이는 이곳에서 28세의 짧은 생 애를 마감했다. -Blind Talk 힘드네요. 글이 맘처럼 안나와서. 그래도 곧 2부 클라이막스인데 열심히 써서 올려야 겠지요. 그리고 위의 전쟁에 대한 노래는 몽고메리 장군이 2차대전중 서부 사막에서 발견한 시라고 하네요. 전쟁사 서적을 읽다가 참 맘에 들어서 조금 의역해 써먹습니다. 설마 이 시에 저작권이 있는 건 아 니겠지...... 아 그리고 혹시 이 글 읽으시는 분들 중에 일본 애니메이션 '불새'(hinotori) 를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사실 그 애니메이션 자체는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데 오래전 MSX로 불새 봉황편을 했을 때부터 그 음악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곡명도 모르지만 십년 이상 애니메이션 불새(아마 봉황편아니면 야마토였던 것 으로...)에 들어갔던 보컬곡을 찾고 있습니다. 국내외 검색엔진을 별의 별 키워 드를 쳐가며 찾아보고 OST 앨범을 사려고 했지만 도무지 구할 수가 없네요. (심지어 NAPSTER를 이용했는데는도... 나오는 거라고는 동명의 락음악...) 혹시 구할 수 있는 방법 아시는 분은 (혹은 가지고 계신 분은) 슬쩍 좀 알려 주시면 너무 고맙겠습니다. 왠지 기타로의 뉴에이지 음악풍이었던 것으로 기억..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E.L.O.의 Last train to london을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5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5/7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414 제 목:[ DRAGON LADY ] 14-05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9531]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07 05:34 조회:45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5 : 당신과 함께 영원히 Vanitas 1. 리하르트는 달라카트에 없었다. 헤스팔콘 내부에서 방해공작을 펴기 위해 잠입한 리하르트와 로즈마이어는 왕국간의 대대적인 내전으로 진한 피냄새 가 바람에 섞여 있는 헤스팔콘의 검붉은 대지를 부랑자로 위장한 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리하르트 님. 이제 달라카트로 돌아가도 될 것 같은데요?" 로즈마이어는 불안한 헤스팔콘에서 한시라도 빨리 리하르트를 모시고 벗 어나고 싶었다. 실수로 정체라도 탄로난다면 즉결처형감임에 물론이고 이 런 치안공백 상태에서 도적단 같은 것들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 실제 로즈마이어는 자신들에게 강도짓을 하는 도적들 십여명을 이미 죽 인 뒤였다. 리하르트는 얼마전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는지 곳곳에 부러진 칼이며 손상된 시체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길가를 훑어보며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엔 달라카트로 돌아가지 않을 꺼야." "예?" "달라카트가 전쟁에서 패한다면 우린 가르바트로 도망친다. 비겁하다고 말해도 좋아. 목숨을 부지해 주는 비겁함이라면 사양하고 싶지 않군." 시뻘건 노을에 그림자진 리하르트의 얼굴은 냉정한 그의 말과는 달리 침 울해 보였다. 마치 자신이 고안한 발명품이 실패작이라는 걸 깨닳은 조숙 한 소년의 모습처럼. 그는 뒤따라오는 로즈마이어에게 반쯤 동정이라도 바 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일 전. 파르낫소라는 학예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이 있었지." "......" "당신의 방식은 결국 더 많은 적을 만든다고. 그렇게 말했어." 리하르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는 한 왕국병사의 시체를 지나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그 적까지 죽여버리면 되는 거라고. 얼마든지 자 신있어 그런 건. 그런데 파르낫소가 그런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글쎄요......" "그러면 결국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말하더군. 맞는 말 이야. 결국 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겠지. 끝이 보이는 도박 같은 거야." 리하르트는 자신의 양아버지를 이용해서 세이드를 파멸시키고 간단한 책 략으로 전 달라카트 황제를 암살했고 또 수년전부터 헤스팔콘 군대에 자신 의 심복들을 만들어서 군인들에게 역병을 풀었다. 그리고 언제나 도박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가슴을 쫙 펴고 의기양양해야 했다. 모두가 자신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장난감에 질려 버린 어린애처럼 감정적인 허탈감만이 남아 있는 것은 왜일까. "결국 세상 사람 죄다 이상한 감정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 안들어?" "리하르트 님......" "맞아. 놀아나고 있는 거야. 나도 나 자신에게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 주변에서 부상당한 시민들이 반쯤 부서진 집 한켠에 모여 흐느끼는 소리 가 들려왔다. 누구는 부모를 잃고 누구는 자식을 잃고 또 누구는 팔이나 다리를 잃었을 것이다. 꿈꿔왔던 미래는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에 의해 산산 이 부서져 버리고 앞으로 가족을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며 살아남을 궁리 를 해야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잔인한 감정들만 곰팡이처럼 피어올라 마음을 얼룩지게 만들 것이다. "결국 나는 또 여기서도 살아 남겠지. 달라카트 황실 사람들이 모두 죽어 도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분명히 나는 살아 남을 꺼야. 아마 내 인생 끝에 는 나 혼자 밖에 안남겠지만...... " "리하르트 님! 그만 하세요!" 로즈마이어는 앞서가던 리하르트의 힘없는 팔을 잡아 끌며 소리쳤다. 갑 작스런 그녀의 외침에 리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 었다. "당신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칭얼거린다고 남에게 준 상처가 사라 지는게 아니잖아요! 동정 받길 원하세요? 전 얼마든지 리하르트 님을 동정 해 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 나지는 않아 요. 못된 짓을 해서 괴로우세요? 그럼 앞으로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 길 뿐이잖아요!" "로즈마이어. 세상 일이라는게 그렇게 간단하지......" "아뇨! 간단해요! 혼자서만 살아 남는게 싫으세요? 그럼 모두를 위해 혼 자 죽겠다는 결심이라도 하세요! 저 역시 당신을 위해 죽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단순한 여자라고 비웃어도 좋아요! 그걸로 내 인생의 가 치는 충분해요." 리하르트는 몇년동안 참아왔던 말을 한번에 쏟아내는 듯 자신을 향해 커 다랗게 외치는 로즈마이어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순하고 확실한 감정이 뭉 쳐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확신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 았다. "그 말, 진심이 아니라도...... 고마워." 십년을 넘게 식어 있던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 같은 고마움. 자신에게 소 리쳐서라도 자기 마음 한 구석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확신하 며 리하르트는 평소의 달변을 모두 버린 채 마냥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 했 다. 2.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윤허장을 가지고 자라탄에 도착하자마자 메이 제독 의 엄숙한 출진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헤스팔콘의 수도! 함락시키지 못한 다면 돌아올 달라카트도 남아 있지 않을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 서 모두는 칼날 같은 긴장감을 마음에 심어둔 채 수평선을 바라보며 굳은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아아. 바람 좋다아아아." 선원들의 나라와 가족과 자신을 위한 불타는 결의를 단번에 물렁하게 만 드는 카넬리안의 흐느적거리는 감탄사가 선상에서 들려왔다. 이 여자는 꼭 중요한 순간에는 혼자 딴 짓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런 기질은 어 김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카, 카넬리안! 뭐야 그 옷은!" "아아. 시끄럽네." 맥빠지게 중얼중얼거리고 있는 카넬리안에게 다가온 시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저 옷은 뭐란 말인가. 선상을 발코니 삼아 누워 있는 그녀의 옷은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속옷도 저 옷보다는 몸을 많이 감춰 줄 거다. "카넬리안...... 너 드디어 미쳤구나." "너 같이 둔한 녀석에게 수영복의 우수성에 대해 설득해 봐야 입만 아프 니까 저 쪽에 가서 걸레질이라도 하지 그래." 그렇다. 카넬리안은 배에 오르자마자 물류실에 있는 천조각을 능숙하게 재단하더니 금새 보이게도 아찔한 수영복을 만들어 입고 느긋하게 일광욕 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오를 비롯한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수 영복이 뭔지 알게 뭐냔 말인가. 시오는 새하얗게 드러난 카넬리안의 매끈 한 허벅지에서 황급히 눈을 돌리며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너. 뭣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줄리탄이 이 꼴을 보면 심장마비로 죽을 지도 몰라. 착한 주인 마음에 충격주고 싶은 거냐 너?" "흥. 시대를 앞서가는 여자는 항상 보수주의자들의 시기를 받아왔지. 썬 글래스도 없는 이 지루한 세상을 살아가라면 수영복 정도는 필요하다고!" 그녀는 자기만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가슴 아픈 명대사를 읊었건만 시오 는 그런 그녀의 절규를 멍하니 듣다가 난감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수백년 이나 지나야 등장할까 말까한 수영복의 컬쳐쇼크는 어리고 순진한 시오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강렬했던 것이다. "뭔지소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쟁중이란 말야! 하필이면 이럴 때 시대 를 앞서가지 말아 달라고!" "남의 취미생활에 신경끄시고 저기 가서 땀나게 검술연습이나 해!" "대, 대체......" 그녀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물론 선원들은 방금전 까지의 승리를 위한 사명감은 싸악 잊어버린 채로 숨죽인 채 선상에 몰려 들어 카넬리안의 '돈 주고도 구경 못하는'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 다.(그들은 내심 카넬리안이 그대로 있길 기대하고 있다.) 그때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시끄러운 선상으로 올라온 톨베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카넬리 안을 바라보다가 퉁명스래 말했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옷을 입는 중이었냐 아니면 벗는 중이었 냐?" "키야아아아!! 긁지 말고 모두 사라지란 말야!!" 카넬리안 주변엔 동물원 중국팬더 보려 몰려든 아이들마냥 뱃사람들의 뜨 거운 시선으로 가득했고 카넬리안의 인내심은 그에 따라 기하급수로 바닥 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슬슬 카넬리안이 미스트랄을 휘두르며 '패션도 모 르는 이 무지한 놈들아!'라고 성깔낼 분위기였다. 그때 카넬리안에게 건내 줄 쥬스잔을 들고 미소띈 얼굴로 선상에 올라오던 줄리탄은 자신의 씰이 지금 무슨 자태인지 확인하며 자기도 모르게 나무 컵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카넬리안이 오펜바하 손에 잡혀 목숨이 위태로운 것 을 봤을 때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카...... 카넬리아아아아안!!!!!!!!!!!!!!!!!!!!!" "어머? 주인님?" 줄리탄이 바라보는 카넬리안의 (급조된) 수영복을 입은 황홀한 몸은 따사 로운 햇빛을 간지럽게 반사시키며 어떤 그림,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왜 난데 없이 옷은 벗고 난리 란 말인가! 시오의 예상대로 줄리탄의 심장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건만 카 넬리안은 도리어 귀엽게 두 눈까지 깜빡거리며 자신에 대한 평가를 기대하 고 있었다. "주인님. 어때? 나 예쁘지? 그렇지? 빨리 말해 줘." 무척이나 파격적인 자신의 씰의 모습에 잠시 휘청거리던 줄리탄은 애써 쇼크먹은 마음을 달래며 카넬리안에게 다가갔고 카넬리안은 조금 부끄럽게 줄리탄을 올려보며 조용히 줄리탄의 따뜻하고 이해심 넘치는 목소리를 기 다리고 있었다. 그런 카넬리안에게 줄리탄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속삭였 다. "카넬리안. 내가 요즘 서운하게 해준 거 있어?" "으이이이!! 주인님 패션감각도 빵점이얏!!" 첨버엉!!! 믿던 것에 대한 배신감. 주인마저 자기 마음 몰라주자 카넬리안은 울상이 되어선 바다속으로 몸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감정표현이 아주 과격한 여자 였다. "대,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저러는 거야!"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예술혼을 불태우는 고독한 스타일리스트의 발버 둥에 대한 톨베인의 평가는 냉정했다. "저 여자 저러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군. 줄리탄. 참견할 건 아니지만 씰 관리 좀 잘해라." "카넬리안이 어때서!" "갑자기 옷벗고 소리지르며 바다로 뛰어드는 씰이 어떨 것 같냐?"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정말 이상해 보였다. 톨베인은 물키벨이나 카넬리 안을 떠올리며 '역시 세상은 오래 살 것이 못돼.'라는 자신의 신념을 재확 인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줄리탄. 카넬리안 건져 올려야 되는 거 아냐?" 시오는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유연성으로 날치마냥 바다위로 폭폭 솟아오 르며 수영을 하고 있는 카넬리안을 보며 말했지만 줄리탄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뿐이었다. "냅둬. 저러다 지겨워지면 올라오겠지 뭐. 해전을 앞두고 우리들의 긴장 감을 없애주려는 나름대로의 배려...... 일지도 모르지." 줄리탄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함교로 돌 아가 버렸고 선원들은 뭐가 아쉬운지 여기저기로 흩어지며 연신 입맛을 쩝 쩝 다셨다. 그리고 시오는 문득 섬하나 안보이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쯤이면 헤스팔콘 정찰선과 만나야 할텐데...... 이상하군. 헤스팔콘 해군이 이렇게 엉성했나?' 분명 지금은 헤스팔콘 국경을 넘은 상태였는데도 단 한척도 헤스팔콘 함 대도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뭐. 행운이 따르는 것인지도. 아마랄리스가 날 지켜주고 있는 건가. 아 마릴리스.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곧장 네 무덤으로 달려달께. 절대 무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줘.' 3. 가르바트의 매서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벽난로가 식어 있는 황실 오버암메르가우의 공허한 방에서 세이드는 며칠 전부터 소파에 기대어 앉 아 벽에 기대어 놓은 자신의 검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물한모금 없이 일주일 이상을 그렇게 보낸 그의 입술은 매말라 있었지만 눈동자가 머금은 음울한 광기는 좀처럼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세이드 님...... 제발. 식사라도 하세요." 세이드에게 조심스래 다가오고 있는 레오폴트의 얼굴에는 이제 스스로 여 성임을 숨기지 않아 전에 없던 매혹적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레오폴트 정도의 외모라면 누가 봐도 중성적인 미인임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이드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귀찮다는 듯 고정된 시선을 풀지 않고 있었다. "저 그리고. 리이 디트리히가 전사했다고 합니다." 레오폴트는 도저히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방금전에 들은 리이의 전 사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세이드가 '그런 여자. 어디서 죽든 말든 알 게 뭐야.'라고 생각할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치켜 올라간 세이드의 냉소적 인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세어 나오는 것이었다. "리이 디트리히라면....... 그 여자로군." "그 여자에게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레오폴트는 세이드가 리이에게 관심을 보이자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세 이드는 지금까지 죽인 기사의 숫자조차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런 그 의 공허한 기억 속에 리이가 남아 있다면 - 그것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드물게 '살아있는' 여자였지. 즐겁게 괴롭힐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냄새를 강하게 풍기던 여자였어." 세이드에게 좋은 평가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의외로 그는 단 한 번 만났던 리이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오폴트는 이 미 죽어버린 리이에게 뭔지 모를 질투를 느꼈고 그런 그녀의 감정을 꼬집 는 듯 세이드는 불협의 목소리로 짧게 리이의 죽음을 위로해 주었다. "큭큭. 결국 그 여자 죽었군. 살아 있는 사람은 죽기 쉬운 법이지. 반쯤 죽어 있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오래 사는 길이야." 레오폴트는 세이드와 리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참을 수 없이 궁 금해 졌다. 분명 세이드의 목소리에선 전에 없이 아쉬워하는 감정이 희미 하게나마 묻어 있었던 것이다. 분명 자기가 죽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레오폴트의 서운함이 그녀의 주먹을 꽉 쥐게 만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큰 키의 여성이 또깍또깍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는 브륜힐트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세이 드와 레오폴트에게 다가오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브륜힐트 님." 레오폴트는 촉촉한 브륜힐트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며 뭔가 인간에게선 느 낄 수 없는 신성한 위압감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렇게 브륜힐 트를 볼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브륜힐트는 단 한번도 그들 앞 에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오펜하바의 몸종께서 여기는 왠일이신가?" 돌아보지도 않은 세이드의 입에서 멸시에 가까운 말이 튀어 나왔지만 눈 빛하나 변하지 않은 브륜힐트는 사무적인 어조로 짧게 말을 전할 뿐이었다 . "오펜바하 황제 폐하께서 두 분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브륜힐트는 곧장 발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지 만 그런 그녀의 목을 세이드의 쇳소리같은 목소리가 잡아챘다. "어이. 브륜힐트라고 했지 네 년의 이름이? 넌 왜 오펜바하의 뒤를 닦아 주며 인형처럼 살아가는 거냐? 오펜바하를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말 야. 역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어쩌면 세이드는 브륜힐트가 화를 내며 예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시무 시한 힘을 쓰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목숨을 여기서 가져가도 상 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 브륜힐트는 조용히 돌아보며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요." "큭큭.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너희 귀신떨거지 들의 생각 같은 건." 세이드는 퀭한 눈동자로 돌아가는 브륜힐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과 같았다. 4. 사실 헤스팔콘 해군이 군기가 서릿발 같은 맹군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지 켜야할 국경은 지키는 자들이었건만...... 현재 출항중이던 헤스팔콘 함대 들은 모조리 바닷길을 놓친 채 어디가 어딘지 짐작도 못하며 방황하고 있 었던 것이다. 해도도 육분의도 소용 없었다. 괴이한 마법에 휘말린 것처럼 해군의 노련한 항해사 누구도 길을 찾지 못한 채 당황할 뿐이었다. '물키벨 님. 이걸로 충분할 까요?' '응! 잘했어 레비야. 이 정도면 아무도 안죽이고 녀석들을 도와줄 수 있 는 거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물키벨의 명령을 받은 레비아탄이 헤스팔콘 함대를 바다 의 미로에 빠트려 버린 것이었다. 바다에서의 그의 능력이라면 꼭 이렇게 귀찮게 배들을 가둘 것도 없이 단번에 바닷물의 밀도를 낮춰서 모든 배를 침몰시켜 버릴 수도 있었지만 - 물키벨은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한 것이었 다. '줄리탄에겐 비밀이다? 그 녀석이 알면 인간들 싸움에 끼어들었다고 또 뭐라고 할 게 분명해.' '물키벨 님.' '왜에?' '줄리탄 님 말대로 그들의 싸움은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 희들의 힘을 인간에게 쓰는 것은 지룡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 니까. 게다가 물키벨님은 궁룡들이 사라진 이후 이 세상일에 방관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웅. 나도 알아. 하지만...... 그녀석들과 정이 들어 버린 것 같아.' '쉽게 정이 드시는군요.' '헤헤. 그런가?' 물키벨은 레비아탄에게도 줄리탄과 카넬리안 사이에 얽힌 자신의 과거는 말하지 않았다. 오펜바하나 물키벨이나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연결고리 같이 이어져 있는 그 과거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말한다 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사기였습니다!'라는 이 세상의 큰 비밀이 들통 나 버리기 때문일까. 물키벨은 이 세상이 실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물키벨 님. 한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뭔데에 레비야?'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올라가 보고 싶습니 다. 제 정체를 숨기고 그들과 뒤섞여 살아 보고 싶습니다.' '또 떠난단 얘기야 너?' '예. 그렇습니다.' '왜 그래! 레비야 가지마아아!' 돌아온지 얼마 되었다고 또 떠나려는 레비아탄에게 물키벨이 칭얼거렸지 만 그렇다고 생각을 바꿀 그가 아니었다. '어쩌면 제게 어울리는 곳은 절대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 바다가 아니 라 항상 앞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넌 내가 말려도 갈 녀석이긴 하지만...... 너 정말 해룡 답지 않 아!' '그런가요? 하지만 어쩌면......' 레비아탄의 차분한 목소리가 물키벨의 마음속에 울렸다. '......처음부터 용 다운 것은 없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키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량한 폐허가 보이는 창문을 얇은 커튼으로 가려 놓고 '이제 그런 폐허 따윈 없어!'라고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누구라도 그 커튼을 조금이라도 들추면 눈 앞에 펼쳐지는 허무한 진실을 깨닳고 주저앉아 버릴 것이다. 어쩌면 레비아탄은 그 커튼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는지도 모른다. -Blind Talk 이 감정은 뭘까, 괜히 화가 나. 성질을 억지로 죽였는데. 시시한 일을 끝내고 집을 돌아오는 차속에서 그냥 내리고 싶어, 뒹굴거리고 싶어 그렇게 투덜대며 오늘이 지나간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훔친다는 건 상처없이 때린다는 것과 같지. 그게 잘 사는 비결이야 인류는 추악해도, 인생은 덧없어도 함께 사랑할 수 있는 때는 올 거라고 기다리는 거야? 쓸모없잖아, 유치하잖아 잘 알잖아. 자, 가자 꿈은 없어도, 희망은 없어도 눈앞에 있는 까마득한 길을 가야해 이제 곧 어딘가에 빛은 비추겠지 그 날까지 영혼을 불태우리라 맹세는 부서지는 것, 법은 어기는 것 그것조차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고, 방황과 번민따윈 평생 지울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수퍼맨이겠지 두려운 거 없어, 가슴을 펴고 싶어 그리고 너와 함께 자, 가자 의미는 없어도, 걸음은 느려도 남겨진 얼마안되는 시간을 다해서. 이제 곧 황야에 꽃은 피겠지 모든 국경선을 넘어서. 보답은 없어도, 구원은 없어도 몹시도 거칠고 위험한 길을 가야해. 언젠가 갑자기 해답이 나올지도. 그 날까지 영혼을 불태우리라 ...예전부터 뭔지 모르게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노래가사네요. 아 물론 이거 번역은 jbbs에서 가져왔습니다. 리이에 대해 젤리드가 말했던 '기사는 죽는 법을 배우는 자들이다.'라는 말에 대해 어떤 분께서 메일로 그것이 하가쿠레(무사도에 대해 썼던 에도 시대의 책)에서 인용해 온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었더랍니다. 물론 하가쿠레에도 '무사도는 죽음으로 완성된다.'라는 말이 있지요. 뭐 이런건 아메리칸 스타일의 사무라이 영화인 '고스트 독'에서도 나옵니다. 즉 꽤나 보편적으로 이 작품 저 작품에서 조미료삼아 써먹는 요소입니다. (고스트 독은 짐 자무쉬 감독의 의외의 면을 보게 된 영화죠 제겐.) 사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에겐 무사도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무 사도를 지켰다면 뭐하러 번거롭게 무사도에 대한 책이 나오겠습니까. 그리 고 그건 유럽 기사들도 마찬가지죠. 십자군 원정 때 각 기사단들이 저지른 만행을 많이 봤어도 기사도 지켰다는 말은 들은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드 래곤 레이디에서 나오는 기사들 역시 리이 만큼 그렇게 고집스럽게 (그게 무사도든 기사도든) 지킨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뭐 그러니까 젤리드나 세 이드가 감동받은 것이겠죠. 상당히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여자입니다. 결국 '죽는 법을 배웠다.'라든지 '국가에 충성'이라든지 하는 구체적인 철 칙은 제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글 중에 별로 기사도라는 것이 뭔지 쭈욱 묘사도 안했구요. 중요한 건 리이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는 것이지요. 하가쿠레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예 그렇습니다.'라 고 대답해 드릴께요. 하가쿠레의 시대착오적인 정신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는 않지만 많이 접하다 보니까 그렇게 써버린 듯 합니다. 뭐 제가 여 기저기서 가져와 써먹은게 사실 한두개가 아니잖아요? ^_^ 음. 최근에는 사실 여러모로 마음이 심란해서 글을 많이 못쓰고 있는데... ...(아무리 써도 스스로 맘에 안들 때 정말 환장합니다.) 덕분에 kiyu군이 옆에서 DC용 일블리드를 하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새디스 틱한 게임을 세번이나 클리어해서 진엔딩을 본 그의 노력과 집착에 감탄하 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같은 게임이 좋습니다. 그냥 깊 게 고민할 것 없이 몸이 움직이는데로 적을 쏴버리면 되니까요.(상당히 단 순한 놈이었음...) 격려메일 보내주신 분들,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최근 들쭉날쭉한 연재주 기 덕분에 퍼가시는 분들께는 미안하다는 말외엔 할 말이 없네요. 슬슬 My Pace를 되찾아 가는 듯 싶습니다. 그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 드리며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불새 에필로그를 들으며... (결국 MSX용 불새 봉황편의 엔딩 음악을 찾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애니 에필로그는 찾을 길이 없네요.) PS:아 참. 그리고 전 답장은 늦더라도 거의 보내드리는데... 나우에서 맞 춤법 등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셨던 분, 계속 메일이 되돌아 오네요. 제게 도착은 하는데 제가 답장 보낼 수는 없다니 참 희안한 현상임.-_-a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6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5/8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353 제 목:[ DRAGON LADY ] 14-06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961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08 04:00 조회:662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6 : 당신과 함께 영원히 Safe From Harm 1. "으아아악! 괴, 괴물이다 이 놈은!" 리히트야거 기사들의 입에서 '괴물'이라는 평가를 받아내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뒤돌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린 악마처럼 두렵게 다가오는 젤리드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공포심을 삼키려 노력했다. 젤리 드는 다카란에 온지 몇시간도 안되서 벌써 세명의 기사를 죽인 뒤였다. 젊 은 기사들이 젤리드의 맹공에 기가 죽어 있을 때 리히트 야거의 상급기사 한명이 기사로서는 드물게 거대한 도끼를 든 채 젤리드 앞에 나타났다. 흉 터투성이의 중년인 그의 모습만으로도 상당한 실력자라고 예상되는 자였 다. "흉몽 젤리드! 이 미천한 파문기사놈! 얼마를 받고 달라카트 쪽에 붙은 거냐!" 상급기사는 멋진 문양이 세겨진 그 길고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외쳤다. 젤리드가 이 전쟁에 참가하며 받은 것은 즐거웠던 결혼식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동료들, 줄리탄이 만들어 준 몇끼의 식사 그리고 리이와 잠들 수 있었던 와인하우스 이층의 작은 침실이었지만 그는 단지 소름끼치는 차 가운 목소리로 상대에게 응수할 뿐이었다. "곧 죽을 놈이 그런게 궁금한가?" "뭐, 뭐라고!" 그와 함께 젤리드는 품속에서 붉은 독약병을 꺼내며 자신의 흉수에 뿌렸 고 금새 독액을 머금은 흉수는 피와 엉키며 검붉게 이빨을 들어냈다. 고작 파문기사 따위에 멸시를 당한 긍지높은 상급기사는 흙먼지가 도끼를 치켜 올려 휘날릴 정도로 강렬한 기력을 모으며 젤리드에게 달려들었다. "겁대가리 없는 놈! 그래도 기사답게 싸워주려 했더니!" 종자의 손에 깨끗하게 손질된 상급기사의 전투용 도끼는 일격으로 젤리드 의 몸을 꽤뚫을 양으로 눈부신 기력에 휘말려 포효했지만 젤리드는 고개를 들어 흘러 내린 흑발사이의 차가운 눈동자로 도끼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 며 흉수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상대의 기백 정도는 젤리드를 조금도 동요 시킬 수가 없었다. 차아아아아앙!! 새하얀 섬광이 튀어오르며 두 기사의 힘이 충돌했고 맞닿은 검과 도끼 사 이에서 기분 나쁜 마찰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순간의 충돌이후 사색이 되 며 얼굴이 일그러진 쪽은 상급기사였다. "그래. 잘난 기사나리의 힘은 여기까지 인가?" 악마의 조롱 같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상급기사는 대꾸할 수 없었다. 충 격을 이기지 못한 상급기사의 팔뼈가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전력을 다하 는 젤리드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그가 진짜 힘을 발휘했 을 때는 죽은 뒤에도 잊을 수 없다는 흉몽의 악명 그 자체였다. "이, 이렇게 강할 줄은......" "너는 이제 곧 죽는다. 만약 이 순간을 후회하고 있다면 넌 거짓인생을 산 거야. 지금 후회하고 있나?" 순간 젤리드의 몸이 사라지는 듯 뒤로 빠지며 흉수를 높이 들어 올렸고 균형을 잃은 상급기사가 앞으로 기울어질 때 붉은 독액을 흘리는 흉수의 검날이 내려찍는 사형대의 칼날처럼 상대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헤, 헤스팔콘 제국 만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느낀 상급기사는 미친듯이 젤리드에게 달려 들 었지만 그의 걸음이 한발 떨어지도 전에 흉수가 몸 깊숙이 파고 들며 상반 신을 단번에 찢어버렸다. 상급기사의 몸을 칼바람처럼 지나치며 그의 몸을 베어버린 젤리드는 자신이 죽인 시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지막 유언까지 공허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군." "이 놈! 젤리드! 복수는 내가 하겠다!" 젤리드 앞의 적은 끝도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모두 쉽게 이길 생각을 버려야 하는 리히트야거의 기사들. 또 다른 기사가 튀어나오며 그렇게 외 쳤고 젤리드는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 진 듯 땀과 피에 엉킨 긴 머리칼을 슬쩍 쓸어넘기며 등 뒤에 서 있는 카리나에게 말했다. "카리나. 이번 싸움 끝나면 가르바트로 여행을 가자. 달라카트는 정말 별 볼일 없는 곳이었어. 이번엔 좀 더 멋진 곳으로 가는 거야." "응! 젤리드!" 검을 꽉 쥐는 젤리드의 손가락에는 리이에게 주었던 반지가 끼어져 있었 다. 2. 헤스팔콘의 수도 해안요새는 수평선 넘어 나타나기 시작한 엄청난 수의 함대를 확인하며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가르트 공! 지, 지금 적 함대가 이곳으로!" "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리히트야거가 수도를 떠난 뒤 임시 수도방위 책임자가 된 가르트 후작은 달라카트 함대 따위는 절대로 이곳으로 올 수 없다고 장담하고 있었기 때 문에 부하의 헐떡거리는 보고를 듣고도 한동한 멍하니 부하의 얼굴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가 있단 말 인가! 해군은 대체 뭐하고 있냔 말야! 실은 물키벨이 살짝 힘을 써줬기 때 문이라고 말한다면 분명 '그건 반칙이잖아!'라고 분노했을 것이다. "말도 안돼. 여긴 적들이 올 수가 없는 곳이야. 아, 안 그런가?" "하지만 분명히 오고 있습니다!" 정말 한심한 대화였다. 가르트 후작은 본래 문인출신의 장교로 단 한번도 전쟁에 나가본 적도 없는 많고 많은 귀족 중에 하나일 뿐. 게다가 헤스팔 콘 수도는 가르바트 해군마저도 단 한번도 들어오지 못했던 철통같은 곳이 었기 때문에 수도 해안가에서 적함대가 보인다는 사실은 환상처럼 보면서 도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괜찮아! 이 해안요새는 단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 아무리 적이 많이 오더라도 상륙조차 할 수 없을 꺼야!" 당연히 쳐들어 온 적도 없으니까 함락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가르트의 말대로 수도 헤스팔콘의 해안요새는 깎아지는 듯한 거대한 곶(串)을 중심 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적 함대는 상륙은 커녕 가까이 오면 마법이나 불화 살 세례를 당할 것이 분명했고 항구역시 그 곶을 뚫지 못하면 들어올 수가 없는 완벽한 자연요새였던 것이다. 실제 이 해안요새는 철벽갑각(鐵壁岬角 )이라 불리며 수많은 장군들이 해상침투는 불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수도에 있는 있는 제국안전공안부 특무대에게 연락해! 마법사들을 동원 해서 가까이 오기만 하면 모두 불태워 버릴테다! 오히려 잘되었군! 폐하께 총애를 받을 기회야 이건! 크하하하!" 화약이 없는 전쟁에서 마법사들이란 대포와 같은 역할이었다. 힐데브란트 처럼 그 능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자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범상한 마법사들이라 할지라도 안전한 위치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배에게 화계마법을 쓰는 일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다. 현재 헤스팔콘 수도에는 50여명가량의 특무대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누가 봐도 헤스팔콘의 압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말하지만 세상 일이 꼭 예상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쿠콰아아앙! 갑자기 하늘에서 돌덩이가 떨어진 듯한 갑작스런 충격이 요새를 울렸고 덕분에 가르트의 둔한 몸은 흉하게 휘청거렸다. 분명 해안요새를 전에 없 던 무언가가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뭐냐 이 충격은! 서, 설마 마법인가!" 그와 함께 다시 한번 연속적으로 요새가 강력한 충격에 휘말리며 벽이 무 너지고 기둥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부하가 좁은 창을 통해 창밖 을 보며 급소가 찔린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저건...... 공성포 입니다." "고, 공성포? 그걸 대체 어디서 쏘고 있단 말이야!" "......적함에서 쏘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제 갓 30대가 넘은 듯한 부하는 엄청난 크기의 적함으로부터 자신들의 요새를 향해 분명히 날아오고 있는 시커먼 돌덩어리를 똑똑히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적함들은 모두 마법사들의 사정범위 밖에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흐음. 의외로 잘 나가는데? 저 정도 힘이면 마력장벽도 부셔버리겠어." 예상대로 수영복에 금새 흥미를 잃어버린 카넬리안은 이번에는 치렁치렁 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함교 위에 쪼그려 앉아 해안요새를 향해 날아가는 공성포탄의 궤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파르낫소가 개조한 메이의 초 노급 기함 밴틀라이저에 장착된 기계식 공성포 4문으로부터 쏘는 것으로 파르낫소의 정교한 설계로 섬세한 해안포격이 가능하게 된 것에는 카넬리 안도 감탄하고 있었다. "파르낫소라는 사람, 정말 대단하네. 발상도 기술도 뛰어나. 아아 이제 전 세계 해안요새 허물 날도 멀지 않았네. 그렇지 주인님?" "카넬리안. 그건 그렇고...... 곧 상륙전을 벌여야 할텐데 정말 그 옷 입 고 싸울 꺼야?" 기사가 아닌지라 얇은 철갑을 몸에 두른 완전무장 태세를 갖추고 있는 줄 리탄은 레이스까지 달린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미스트랄을 품고 있는 카 넬리안을 보며 심히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드레스 를 휘날리며 적진 한복판에서 은빛 미스트랄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상 상만으로도 멋져...... 보일지는 몰라도 적을 조롱할 의도가 아니라면 왜 하필 드레스 입고 싸우겠다고 우기냔 말인가! "아? 걱정하지마. 이 옷 조금도 더럽히지 않을 테니까. 물키벨 님이 사준 옷이거든. 드레스 입고 적 황실에 입성한다면 아주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 겠어?" "그래서 드레스를 입으셨다?" "주인님 왜 자꾸 남의 옷 가지고 트집이야? 남이사 잠옷을 입고 싸우든 말든!" "니가 자꾸 이상한 옷만 입으니까 그렇지!" "히잉. 나 다칠까봐 걱정되는 거야? 걱정하지마세요. 이런 싸움에 죽을 실력이었다면 나 벌써 수백년전에 죽었어야 하니까. 아 참 그리고!!" "으, 응?" "주인님이야 말로 그 인피타르인지 뭔지하는 검 뽑지마! 달라카트 멸망해 도 상관 없으니까 절대 뽑지 말아야 해!" "나 참..... 그런 말이 어딨어." 이쪽 대화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인 듯 하다. 하늘에선 계속 포탄이 쏴 올 려져 휘이잉 소리를 내며 요새에 직격되고 있었고 돌로 만든 거인 같던 요 새는 금새 흉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줄리탄은 왠지 카넬리안이 이카테 스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이후부터 일부러 밝아지려고 애쓰는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 카넬리안이 리이가 죽은 곳을 향해 혼자서 예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도 '어쩌면 카넬리안이야말로 주변 의 소중한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것에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이 아닐까.'하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4. "마르켈라이쥬 경! 이건 함정입니다! 코머런트 그 놈이 파놓은 더러운 함 정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우테 여황 폐하로부터 북해기사단 소집령이 떨어졌다. 그걸로 출진의 이 유는 충분하다." 북해기사단의 기사중 하나인 가이브러쉬는 어린 여황제 우테로부터 북해 기사단 소집령이 떨어진 것에 분개하며 출진을 준비하려는 마르켈라이쥬를 만류했지만 마르켈라이쥬는 '어쨌든 황제의 칙령은 거부할 수 없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코머런트 대공과 그의 책사 스테온이 북해기사단을 소집하도록 폐하를 협박한 것이 분명합니다! 저희가 이 가르바트를 벗어나면 코머런트는 분명 히 반란을 일으킬 겁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북해기사단을 모아 친위반란 (親衛反亂)을 일으킵시다! 기사단 모두는 마르켈라이쥬 경의 말이라면 움 직여줄 겁니다! 그러니까 코머런트를 몰아내고......" "또 그 소리!" 언제나 바위처럼 조용했던 마르켈라이쥬가 조금 큰 소리로 가이브러쉬의 말을 가로 막았다. "친위반란이라고? 그건 어불성설이다. 결국 그렇게 말하는 너 역시 황제 폐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폐하께서 나가 싸우라 명하시면 우린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싸워야 하는 불변의 의무가 있다. 그렇게 지금의 상황을 견딜수 없다면 차라리 기사의 옷을 벗어라." 마르켈라이쥬가 가이브러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헤스팔콘과 달라카트의 전쟁을 명목삼아 하필이면 황실의 정수인 북해기사 단이 참전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분명히 코머런 트가 우테 황제를 심하게 종용해서 북해기사단 소집령을 내리도록 한 것일 테고 어쩌면 가이브러쉬의 말대로 황실을 비우고 출전했을 때 코머런트가 권력을 잡기 위해 해악을 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검인 것이다. 폐하의 의지대로 충실히 움직여 가르바트의 번영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지 검이 멋대로 움직여서 상대를 친다면 그것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제국의 기사 로서 실격이다. 결국 강한 자가 정의를 만드는 신의없는 역사를 만들 뿐이 야. 코머런트가 도리에서 벗어난 짓을 하더라도 그렇다고 우리까지 기사의 도리를 포기한다면 다 똑같은 협잡배들이 되어 버린다." "목숨이 아까우십니까? 불명예가 두려우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그 반대야. 내 목숨과 내 명예는 폐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맘대 로 더럽힐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르켈라이쥬의 논리는 기사로서 너무도 숭고하고 원칙적이었다. 기사는 충성하고 있는 권위를 저울대에 올려서는 안된다. 추호도 의심해선 안된다 그리고 얼마 후 각 남작령의 북해기사단들은 빠르게 마르켈라이쥬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겨울제국 가르바트의 참전이 시작된 것이다. -Blind Talk 살다보면 괜시리 외로운 날 너무도 많아 나도 한번 꿈같은 사랑 해봤으면 좋겠네 살다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어디 혼자서 훌쩍 떠났으면 좋겠네 수많은 근심걱정 멀리 던져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꿈으로 살지만 오늘도 맘껏 행복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네 ...Sejul군 때문에 알게 된 좋은 노래네요. 아름다운 장미가 내 심장을 찔 렀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는 탐미적인 노래도 나쁘진 않지만 전 마냥 솔직 한 가사가 좋더군요.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 한 목숨 선선하게 내던질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도 하나의 성직으로 여긴다네" 저번 화제때 순직한 소방관 고 김기석씨가 죽기 전 후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긴 말이었죠. 뭐 도올 이야기에도 나왔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동했다지만 전 그 프로는 못봤고 - 단지 게시판에서 이 글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 졌습니다. 뭐 소설 내에서는 '그는 남을 구하기 위해 죽은 거야.'라는 말 정도는 '진부한 대사' 정도로 무감정히 넘어갈 수 있겠지만... E-MAIL : billiken@hananet.net 리사 게랄드, 피터 부케의 Sacrifice를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7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5/9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340 제 목:[ DRAGON LADY ] 14-07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9694]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09 07:28 조회:346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7 : 당신과 함께 영원히 Graphophobia, my mind 1. "이물함상포 발사!" 줄리탄의 명령과 함께 수도 헤스팔콘의 항구로 진격해 오던 일루미네이터 의 기계궁에서 쇠사슬에 감겨져 있는 거대한 화살이 발사되며 선창의 석조 건물을 뚫었다. "좋아! 쇠사슬을 감는다. 전속전진!" 차르르르 소리와 함께 톱니바퀴가 돌며 건물에 물려 있는 쇠사슬이 힘차 게 감기기 시작했고 달라카트 함대의 첨병인 일루미네이터는 돛을 내린 채 물살을 가르며 항구로 달렸다. 범선인 일루미네이터가 빠른 속도로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고안된 이 방법은 항상 적의 허를 찌르곤 했다. "특무대는 아직이냐! 화살을 쏴라! 불화살을 쏴!" 적어도 지금은 공포의 색인 적색 도장의 일루미네이터가 상륙병들을 실은 채 항구로 다가오자 항구의 부둣가에선 타오르는 빗줄기처럼 불화살이 솟 아 올랐다. 즉시 줄리탄이 외쳤다. "카넬리안! 네 차례야!" "헤헤. 기대하시라." 두려움 없이 (게다가 붉은 드레스까지 입은 채로) 일루네이터의 뱃머리에 당당하게 서 있는 카넬리안의 모습은 살아 있는 여신의 선수상(船首象)처 럼 신비로워 보였다. 바람을 한몸에 받아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카넬리안은 떨어지는 불화살 앞에서 눈을 감으며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자연력의 힘을 빌려 잔재주를 부리는 미개한 인간들아. 너희의 무력함을 느끼게 해주마!"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기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귓가에 들리 기 시작한 그녀의 목소리에 놀랐다. '주문이..... 들린다?' 예전 카넬리안이나 메르퀸트가 한 말이 있었는데, 마법주문이라는 건 보 통 사람의 귀에는 단지 중얼중얼거리는 읊조림 정도로 들릴 뿐이며 - 높은 정신력을 지닌 자들만이 그 주문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주문언 령(呪文言令)은 줄리탄의 귀에 어슴프레 하지만 들린 것이다. 게다가 그 잔혹한 문장은 절대 다른 인간 마법사들이 쓰는 그런 주문 같은게 아니었 다. 차라리 용이 인간의 심장을 발라먹기 전에 꺼내는, 그런 말 같았다. "T.A.C.O.P.H.O.B.I.A." 억양의 고저가 없는 기계적인 기운의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심판처럼 나 왔고 그 시동어는 힘을 가진 듯 찌지이잉 소리로 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금새 무형의 거미줄 같은 마력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드는 불화살들의 운동력을 빼앗아 하나도 빠짐 없이 바닷속으로 추락시켜 버렸다. "와아아! 역시 카넬리안 씨!" 범상한 마법사들은 꿈도 못꾸는 마법일 것이다. 일루미네이터에서 탄성이 터졌고 카넬리안은 고개를 홱 돌리며 자신의 주인을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 를 보였다. 요컨데 칭찬해 달라는 얼굴이다. "주인님. 나 잘했지?" "으, 응." 줄리탄은 난생처음 귀에 들린 주문 때문에 조금 멍해져선 고개를 끄덕였 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법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문에 대한 체계 를 갖추고 있는데 카넬리안이 가지고 있는 마법체계는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주인으로 받은 것이었다. 즉 용들이 사용하는 마법체계인 것이다 . 인간은 절대로 운용할 수 없는 그런 것. 그리고 줄리탄에 귀에 그 주문 이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이제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선을 넘어 버 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이. 노블리스 씨. 뭐하시나. 상륙명령 안 내리고. 그냥 돌아갈 꺼야?" 갑자기 딴 생각에 빠진 줄리탄을 시오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도 자기 씰 닮아 가는지 중요한 순간에 얼빠져 버리는 나쁜 버릇이 생긴 건가 . "아 미안. 속도를 절반으로 줄인다. 연막 투척!" "연막 투척! 전원 상륙 준비!" 시오가 명령을 전달하자 일루미네이터에선 심지에 불이 붙은 검은 상자들 을 항구로 던졌고 부둣가에 굴러 떨어진 그 상자들은 퍼어억하고 터지며 매캐한 검붉은빛 매연을 뿜어냈다. "이, 이건 또 무슨 마법이야!" 헤스팔콘 수비병들은 금새 부두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눈물나는 붉은색 연기에 놀라 우왕좌왕하며 이게 무슨 마법인지 몰라 겁을 집어 먹었지만 실은 그건 마법이 아니라 단순히 탄광에서 캐낸 광물가루혼합물을 태운 것 뿐이었다. 죄다 마법이다 검이다 하는 것에만 의지하던 전쟁미학 덕분에 이런 단순한 무기에도 항구를 지키던 수비병들은 금새 혼란에 빠져 버렸다 . "이건 분명히 즉사 마법이야!" "도, 도망치자! 죽기 싫어! 도망쳐!" 그게 즉사마법이라면 공포에 질릴 겨를도 없이 숨이 끊어졌을 것인데도 수비병들은 이게 순식간에 몸이 녹여버리는 끔찍한 마법이리라 굳게 믿으 며 검을 던지며 부두를 내주고 연기가 덮치는 반경에서 도망치기에 바빴다 . 리하르트의 말대로 정말 무서운 것은 마법의 힘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놓는 공포와 혼란이었던 것이다. 줄리탄은 선 상의 상륙병들을 돌아보며 짧게 외쳤다. "모두 작전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그리고 어떤 약탈행위도 용서하지 않고 군법으로 다스리겠습니다." "좋아! 모두 상륙한다!" 이미 상륙병들은 헤스팔콘 항구의 지리에 대해 충분히 익힌 뒤였다. 예전 메이가 노예상인을 가장해서 헤스팔콘에 왔을 때 헤스팔콘 수도 전역의 지 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일루미네이터의 선봉대들이 먼저 부두를 장악하기 시작하며 뒤를 따르던 메이 제독이 이끄는 수많은 상륙선들은 무너져버린 요새를 지나 속속 항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2. 일루미네이터는 부두의 구조물들을 부셔버리며 거칠게 접안했고 그와 동 시에 줄리탄을 태운 말이 배에서 뛰어 오르며 붉은 연기에 잠긴 아수라장 의 항구 속으로 떨어졌다. "주, 주인님 잠깐!" 줄리탄을 따라 그의 옆에 사뿐히 낙하한 카넬리안이 눈을 치켜올리며 외 쳤다. 연기 속에서도 그녀의 타오르는 듯한 눈빛은 확실하게 보인다. "뭐야! 왜 앞장서려는 거야!" "지휘관이 앞장서지 않으면 누가 목숨을 걸어 주겠어. 앞장서는 건 당연 히 내 몫이야." "엄청 위험하단 말야!" "알아. 이미 알고 있어." 줄리탄은 말고삐를 잡아 끌며 황궁과 통하는 항구의 대로관문을 장악하기 위해 연기 속으로 달렸고 그 뒤를 돌격대와 울상이 되어 버린 카넬리안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치밀한 계획 덕분에 적의 저항은 거의 없었지만 실수 로라도 적 특무대나 저격궁병 같은 것에 걸렸다간 줄리탄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관문에 도착할즈음 갑자기 카넬리안이 날카로운 목소 리로 외쳤다. "기사 일인접근! 주인님! 피해!" "크윽!" 그 말과 동시에 자욱한 연기 속에서 검날이 번뜩이며 말을 타고 달리던 줄리탄을 덮쳤다. 그 움직임은 분명히 기사였다. "주인님!" 날아드는 기사의 검을 황급히 피한 줄리탄은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 지만 순간적으로 검을 뽑으며 일어서 자세를 잡았다. 1년전이었다면 그대 로 뇌진탕에 실신해 버렸을 것이 분명한데, 참 엄청난 발전이었다. "큭큭큭. 리히트야거에 입단하지도 못하고 하급기사라는 멸시를 받으며 살아온 지 십년!" 뭔지 모르게 굉장한 대사를 읊으며 줄리탄을 말에서 떨어트린 기사가 적 색 연기 속에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굉장히 쇼맨쉽이 강 한 자로 보인다. 카넬리안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뭐야. 이 녀석은." 처음 보는 주제에 줄리탄의 라이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기사로 추정되는 녀석'은 칼에 베인 어깨를 지긋이 쥔 상태로 긴장한 줄리탄을 향 해 다가가고 있었다. "내 이름은 슈페른. 넌 내 숙적으로 손색이 없군. 대단한 실력이야. 그 순간에 단도로 이 몸을 찌르다니." 줄리탄의 왼손에는 작은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슈페른이 기습해 올 때 빠르게 단도를 꺼내며 그의 어깨를 베어버렸던 것이다. 반면 카넬리안은 '별 실없는 놈 다 보겠네.'라는 표정으로 미스트랄을 들며 말했다. "얼간아. 내 주인님은 평범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 칼에 찔린 기사 주제 에 뭐가 숙적이냐!" "평범하다고? 날 기만하지마라! 내 몸에 상처를 낸 녀석이 평범할 리가.. ...." "듣기 한심하니까 닥치고 길이나 비켜!" 결국 줄리탄을 낙마시킨 것에 대한 분노에 카넬리안이 슈페른이라는 자 에게 뛰어들며 미스트랄을 휘둘렀다. 갑자기 드레스 입은 곱상한 여자가 무식한 검을 자신에게 휘두르자 놀란 슈페른의 반응이 가관이다. "민간인은 빠져!" "누가 민간인이냐 이 멍청아!" 슈페른은 카넬리안이 씰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긴 드레스 입고 싸움터에 나서는 씰이라니 - 테이머가 변태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이전에 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슈페른은 카넬리안의 검을 힘들게 받아내며 그 녀가 무지막지하게 힘이 센데다가 검술 또한 뛰어나다는 걸 (늦은 감이 있 지만) 느끼게 되었다. "여기사였구나! 그런 옷으로 날 속이려 들다니!" "누가 여기사야!" 자기 정체를 자꾸 틀리자 화가 난 카넬리안에게 슈페른은 파고들며 검격 을 길게 그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슈페른의 검은 너무도 느릴 뿐. "헤엥. 이 정도 쯤이야!" 부욱! 그녀는 여유롭게 슈페른의 검을 뒤로 피했지만...... 불행하게도 펄럭거 리는 드레스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카넬리안의 옷섬이 찢겨져 나가며 살짝 가슴이 보이는 민망한 꼴이 되고야 말았다. 그녀는 멍하니 너 덜거리는 자기 옷을 바라보다가 결국 이번 전쟁 처음으로 살기를 보였다. "숙녀의 옷을 이꼴로 만드다니...... 그러고도 기사냐 너! 절대로 용서 못해! 이 치한기사 놈!" "치, 치한이라니!" 잘 생각해 보면 그런 옷 입고 싸운 카넬리안의 잘못이지만 그녀의 성격은 몇번이나 말했지만 뻔뻔한데다가 감정적이기 때문에 모조리 슈페른 잘못이 되어 버었다. 슈페른은 난데없이 터지는 그녀의 살벌한 살기에 뒤로 주춤 하며 침을 삼켰다. 슬슬 예전 카넬리안이 오크들을 피떡을 만들어 주었던 참상이 재현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짧은 검을 뽑아든 톨베인이 어느샌가 뛰어들며 슈페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어엇!" 슈페른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톨베인에게 검을 찌를 새도 없었다. 곧장 톨베인이 슈페른의 가슴을 베며 튀어 올랐고 슈페른을 뛰어 넘어 착지한 것이다. 뭔가 대단할 줄 알았던 슈페른은 허무하게 검을 떨어트리며 쓰러 지고 말았다. 톨베인은 흘낏 카넬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쟁터에서도 시끄러운 여자!" 그 말과 함께 톨베인은 다시 뛰어가며 뒤따라오던 다크엘프들과 함께 골 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분명 첨탑들을 점령하러 가는 것이리라. 톨베인을 따라가서 때려주겠다는 카넬리안을 뜯어 말린 줄리탄은 자기도 빨리 돌격 대를 끌고 관문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슈페른이 문제였다. "차,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패할 바에는 적의 손에 죽고 싶다!" 톨베인은 (의외로) 슈페른을 죽이지는 않은 것이었다. 결국 부상을 당해 쓰러진 슈페른은 끝도 없이 시끄럽게 소리쳤다. 줄리탄은 무시하고 가려다 가 슈페른을 내려보며 말했다. "슈페른 경. 전투에서 패하는 것이 꼭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 렇게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면 어쩔 수 없이 죽은 동료들에게 죄가 되니까 부디 이 전투에서 살아 남으시길. 상황이 진정되면 곧 치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잠깐! 날 동정하는 건가? 동정 따윈 필요 없어!" 정말이지 그의 말은 구구절절 허무한 멜로디였다. 카넬리안은 그렇게 떠 드는 슈페른의 목에 미스트랄을 겨누며 싸늘하게 내려보았다. "너 시끄러워. 그럼 소원대로 죽여줄까?" "허억!" 카넬리안의 경멸스런 눈빛에 소름이 돋은 슈페른은 '그래! 죽여라!'라고 절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3. "아아. 일일이 귀찮아. 예전같으면 이런 도시쯤 날려버리는데 십초도 안 걸렸는데....... 괴로운 인생이네요 정말." 관문까지 뛰어가며 카넬리안은 줄리탄 옆에서 연신 중얼중얼 거렸다. 그 녀가 과거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줄리탄으로선 알길이 없었 지만 - 도시를 통채로 날려버리는 그럼 끔찍한 힘 같은 건 사양하고 싶다.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의 목적이 말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앗!" 항구 끝의 관문까지 도착한 줄리탄과 돌격대는 난감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관문을 지키며 서 있는 것은 전에 레터의 마을에 나타났던 악몽같 은 특무대의 장갑패척병 40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뚫지 못하는 이상 황 궁으로는 갈 수가 없다. -Blind Talk 슬슬 카넬리안의 주문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카넬리안이 쓰는 마법은 테싱과 마찬가지로(위력에 차이가 있지만) PHOBIA 나 PHILIA 계열입니다.(본래 죄다 정신질환병명임...-_-) 그리고 그녀가 가볍게 썼던 TACOPHOBIA는 The fear of speed로 해당 목표 물의 운동에너지를 제로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기술.(라틴어 taco는 spe ed를 의미함.) 그렇게 따지면 미쉘의 운석낙하를 카넬리안의 마법주문체계로 말하자면 METEOROPHILIA 겠지요... 그녀에겐 뭐 나름대로의 다른 체계가 있겠지만. 메일 주신 분들 고마워요. 그럼 이만. E-MAIL : billiken@hananet.net 마릴린맨슨의 Sweet Dream을 들으며...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8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5/10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260 제 목:[ DRAGON LADY ] 14-08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6977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10 03:57 조회:507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8 : 당신과 함께 영원히 Fool's Choice 1. "그르르륵. 우리, 공격한다." 줄리탄이 이끌고 있던 돌격대는 남부의 오크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가죽 갑옷과 투박한 도끼등으로 무장한 오크 돌격대는 철벽처럼 관문을 지키고 있는 패척병들을 보자마자 송곳니를 들어내며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당장 이라도 치고 들어갈 투지. 그때 선두에 선 줄리탄이 갑자기 그들을 저지했 다. "잠깐! 침착하세요!" 줄리탄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오크들은 일단 줄리탄의 눈빛을 보며 발을 멈췄고 중장갑의 패척병들은 여전히 무지막지한 쇠몽둥이를 든 채 미동조차 없다. 줄리탄은 이미 패척병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리 싸움에 능한 오크들이라고 하더라도 난전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님. 어쩌지? 증원을 기다려야 하나?" 패척병들과 싸워봤던 카넬리안 역시 긴장한 눈초리로 말했다. 지금 시오 가 타워햄머(Tower-Hammer)를 들고 있는 무장오거들과 트롤 술사들을 이끌 고 오고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40인이나 되는 패척병들을 상대하 다간 절반 이상 죽을 각오를 해야한다. 줄리탄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들고 있던 자신의 세이버를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황궁을 접수해서 해. 다카란에서 우리의 승리만을 기다리며 싸우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미안해. 카넬리안." "뭐가? 앗! 설마 주인님!" 줄리탄의 결심을 눈치 챈 카넬리안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기가 무 섭게 줄리탄은 그대로 패척병들 속으로 뛰어 들었다. 단신으로 패척병들에 게 달려 들자 특무대는 흠찟 놀라며 패척병들을 움직였고 갑옷이 철컹거리 는 기계적인 음성과 함께 패척병들은 인형처럼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카넬리안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짜내는 듯 중얼거렸다. "주인님...... 돌아오면 그냥 안 둘꺼야." 미어지는 카넬리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날렵하게 달려가던 줄리탄은 주저없이 인피타르를 뽑았다. 그와 함께 달려가는 그의 온몸은 시린 아우라에 감기기 시작했다. 생명력의 거래가 시작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패척병들은 장기판의 말들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엄청난 속력으로 줄리탄에게 강철의 봉을 내리쳤고 동시에 기합소리 하나 없는 줄리탄의 인 피타르가 검의 궤적을 따라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을 뿜었다. 카캉! 카카앙! 카넬리안은 자신의 눈으로 줄리탄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 끼며 묘하게 분한 마음에 치를 떨었다. 그만큼 줄리탄의 움직임은 거의 동 시에 쏟아져 내려오는 적들의 공격을 흐르듯 피하며 패척병들 사이를 뚫고 있었고 패척병들이 내리치는 쇠몽둥이는 줄리탄이 이미 사라진 자리 - 포 장도로를 부셔버리며 불꽃과 돌가루를 터트릴 뿐이었다. "설마 저 자가 달라카트의 노블리스?" 특무대들의 입에서 줄리탄의 정체가 겨우 파악되었을 무렵 줄리탄은 이미 패척병들 사이를 뚫으며 포위망에서 벗어난 뒤였고 40인 패척병들의 무기 는 모두 두조각이 나서 바닥을 굴러 다녔다. 질풍처럼 패척병들을 휘감은 줄리탄은 정확하게 그들의 무기만을 노리며 무력화 시킨 것이었다. 줄리탄 은 가쁜 숨을 삼키며 인티파르를 봉인 같은 검집에 넣었고 그와 동시에 생 령같은 푸른 기운 역시 검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줄리탄이 외쳤다. "너희들은 졌다. 항복해라!" 단신으로 패척병들을 죽이지도 않고 전투력만 상실시킬 정도의 능력이라 면 특무대에게 승산 따윈 없었다. 특무대는 전투라기보다는 마치 평생 다 시 볼 수 없는 엄청난 공연을 목격한 기분에 기가 질려 버렸고 특무대 지 휘관은 검은 가죽 모자를 벗으며 침통한 얼굴로 소리쳤다. "특무대...... 전원 무장해제!" 그렇게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갈 줄 알았던 관문의 싸움은 줄리탄 한명의 활약으로 무혈승리로 끝나게 되었지만 카넬리안은 갑자기 줄리탄에게 성큼 성큼 걸어가며 확하고 멱살을 잡아 챘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 지금 무지 무지 화났어!'라고 쓰여 있었다. "주인님! 내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해 주는군요. 그렇게 자꾸 뽑아대면 전 쟁 끝나기도 전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단 말야 이 무신경한 남자! 이 전쟁에 목숨을 버릴 작정이야?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 달라고 이 매정한 주인아!" 진짜 화가 난 카넬리안의 모습이 줄리탄은 뭔지 모르게 사랑스러워서 난 감하게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처음 줄리탄을 만났을 때는 분명히 자신에게 말했었다. '네 놈 따위 어디서 죽어버리든지 난 상관 없으니까 귀찮게 하지마.' 그런데 어느샌가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기적으로 살아달라며 화를 내는 사 이가 되어 버린 것이 꽤나 기뻤다. 하지만 만약 인피타르를 뽑지 않았으면 대체 몇명의 동료가 죽어 나갔을지 모른다. 그런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기 생명력을 얼마 써버리는 것으로 끝낼 수 있다면 - 그 것만으로도 인피타르에게 감사한다. 줄리탄은 그런 마음이었지만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카넬리안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미안해. 다음부턴 절대 안 뽑을께." "거짓말! 이 신용 없는 남자! 이럴 바엔 그냥 요리사나 하라고!" 카넬리안은 이럴 때는 꼭 어린애 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녀는 결국 막간 을 이용한 줄리탄의 도둑키스에 좀 달래진 것 같았지만 '다음에 또 뽑으면 그땐 나 다시 가출할꺼야!'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줄리탄을 겁나게 만 들었다. 아무튼 여자있는 남자는 이래저래 신경쓸 것이 많은 것 같다. 2. 상륙군이 황궁으로 몰려온다는 보고에 하우프트만 3세는 순간 말더듬이 되어 버렸다. "뭐, 뭐, 뭐, 뭐야! 침입? 다, 달라카트 놈들이? 지금 짐을 놀리느냐!" "아, 아닙니다. 벌써 항구를 점령하고......."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해!" "그게, 그들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전시에 그것도 대낮부터 자신의 방에서 후궁들과 유희를 즐기던 하우프트 만 3세는 껴안고 있던 여자를 거칠게 내팽겨치며 벌떡 일어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가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은 요 새 방어 책임자였던 가르트 후작도 똑같이 생각한 것이니 생략하도록 하자 . "특무대는 뭐하고 있나! 짐의 군대는!" "특무대의 장갑패척병은....... 전원 항복한 상태입니다." "이런 쳐죽일! 내가 명하지도 않았는데 누구 맘대로 항복이야!" 황제에게 허가 받고 항복하는 바보는 이 세상에 기사 뿐일 것이다. 하우 프트만 3세는 자신의 변태성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애꿎은 첩들을 짖밟으 며 울분을 터트렸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불쾌하게 연발한다. "제길! 제길! 이 멍청한 놈들! 제기랄! 이 제도 헤스팔콘이 점령될 리가 없지 않은가! 수백년을 이어온 곳이야! 그럴 수는 없어!" "폐, 폐하. 어서 여기서 피하시는 편이. 적들은 지금 파죽지세로......" 사실 그렇게 간언하고 있는 신하도 하우프트만의 여성학대를 지켜볼 바에 는 한시라도 발리 이 황실을 뜨고 싶었다. 이미 다른 귀족들은 탁월한 상 황판단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마차에 실고 피난 가려는 상태. "리히트야거는! 짐의 종들에게 어서 회군 명령을 내려라! 돌아오라고 전 해!" "하지만. 리히트야거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이 점령될 것이 분명합니다." "뭐, 뭐야! 이 무례한 놈! 감히 네 놈이 뭔데 점령될 것이라고 말하느냐! 넌 달라카트의 첩자로구나! 바른대로 말해!" "어억! 폐하! 제발 고정을! 악!" 단 한번도 적군이 발끝하나 대지 못했던 제도가 점령당한 것에 반미쳐버 린 하우프트만 3세는 이성을 잃고 신하를 뺨을 때리다가 결국 예검을 뽑아 쓰러진 신하의 심장을 찔러버리고 말았다. "죽어! 죽어라! 이 첩자놈아!" 단숨에 절명해 버린 신하에게 황제가 몇번이나 발길질을 하는 모습을 세 라피스가 봤다면 분명 조용히 검을 꺼내 단숨에 살을 발라 주었을 것이다. 첩들은 모조리 비명을 지르며 권위가 사라져 버린 황제 곁을 공포에 질려 뛰어 도망쳤고 하우프트만은 모욕에 취해버린 듯 일그러진 얼굴로 비틀거 리다간 자신의 호화스러운 책상으로 걸어갔다. "큭. 이 편지가....... 그런 의미였던가." 하우프트만은 자신이 달라카트의 이중삼중의 함정에 걸려 하나씩 옷이 벗 겨져 이제는 완전히 알몸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닳았다. 세라피 스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유아왕 같이 노는 것 밖에 모르는 한량이라 고? 빌어먹을 거짓보고를 믿은 것이 실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르바 트에게도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 역시 깨닳았다. 그는 서랍을 열며 반쯤 구 겨져 있는 가르바트의 코머런트 대공으로부터의 밀서를 꺼내 보았다. 이것 은 몇달전쯤에 코머런트로부터 극비리에 도착한 짧은 서신이었던 것이다. 헤스팔콘 대제국을 현명히 통치하는 힌드렌스 하우프트만 3세 황제의 혜안에 항상 감동받고 있는 이 소인 코머런트 공작이 서신을 통하여 짧게 아뢰옵니다. 혹여 절대로 그럴리야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황제께 서 헤스팔콘을 떠나시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게 될지라면 이 코머런 트 공작, 미천한 힘이나마 폐하의 안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사옵 나이다. 처음 이 무례하기 그지 없는 서신이 도착했을 때 하우프트만 3세는 자신 을 놀리려는 괘씸한 수작이라 여길 뿐이었다. 대체 어떤 경우에 위대한 황 제인 자신이 헤스팔콘에서 떠나겠냔 말인가. 누구도 자신을 이곳에서 밀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틀렸다. 완전히 틀려 있 었다. "코머런트 놈. 처음부터 달라카트가 이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나만, 짐만이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나만 놀아나고 있었단 말이냐!" 사실 이 서신을 작성한 것은 스테온이었다. 달라카트의 첩자를 통해 상황 을 면밀히 검토한 스테온은 '전쟁은 달라카트의 승리다.'라는 결론을 내렸 고 곧장 코머런트에게 조언한 것이다. 즉, 헤스팔콘이 위험해지면 자신들 이 헤스팔콘 황제의 신변을 보호해 주며 헤스팔콘 제국의 황권도 위임 받 으려는 수작이었다. 하우프트만 3세가 코머런트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분명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고고하게 이어온 헤스팔콘 제국의 황권 역시 코머런트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지금 황제 하우프트만 3세는 순식간에 오갈데 없이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그걸 강요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짐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세상의 4분의 1을 좌지우지하던 하우프트만 3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 아 버렸다. 그에겐 두 가지의 길밖엔 남지 않았다. 코머런트 대공에게 달 려가 목숨을 부지하고 황권을 넘기거나, 아니면 이 자리에서 자결하여 한 조각 남은 권위를 지키고 헤스팔콘의 황권을 보호하거나. 둘 다 지옥의 끝 과 끝 같은 가혹한 결정들 뿐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목숨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법이다. 죽는 방법에 골몰하는 건 기사 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나 죽음 앞에 서면 구차한 삶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된다. 다 잃어버려도 좋으니까 조금 더, 조금만 더 살고 싶다. 누구 나 그렇게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뱉은 침을 삼키며 살더라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버린다. 하우프트만 3세의 마음 속에 굳어 있던 신념과 생 명의 저울대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흐으으윽. 주, 죽고 싶지 않아. 빌어먹을.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그는 스스로의 결정을 정당화 시키려는 듯 비참히 울먹거리며 텅 비어버 린 황실을 떠났다. 3. 한편 다카란에서 목숨을 내걸고 저항하는 달라카트 군대와 싸우던 힐데브 란트는 헤스팔콘 황실로부터의 마지막 서신을 전서구를 통해 받았다. 그것 은 황제가 아닌 힐데브란트와 친했던 귀족이 보낸 개인적인 전문이었고 그 짧은 전문에는 떨리는 글씨로 '헤스팔콘 제도가 함락되었다. 황제는 도주 했고 헤스팔콘 제국은 멸망했다'라는 심장이 멎을 짧은 문장과 그 귀족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우리가...... 졌군." 무표정한 얼굴로 그 전문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힐데브란트는 두 눈을 감 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손을 쥐어 쪽지를 구겨버렸다. 처음에는 이 전문 이 적의 간교한 혼란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 도착 한 이 전문에 찍힌 직인은 이게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공격을 멈추고 리히트야거의 자랑스런 기사들을 불러 들여라." "예엣?" 힐데브란트의 담담한 명령을 들으며 부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 하지만 반나절만 더 밀어부치면 다카란을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대 체 무슨 연유로 그런 명령을......." "이 전투는 의미를 잃었다." 힐데브란트는 그 말과 함께 굳게 입을 다물었다. 부관은 창백해진 얼굴로 부르르 입술을 떨었다. '정말입니까? 그게 정말입니까?'라고 재차 물어보 려 했지만 힐데브란트의 표정을 보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체스판의 킹이 쓰러지자 리히트야거는 일순간에 싸워야할 이유를 잃은 것이다. 4. "리히트야거가 퇴각하고 있습니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낭보(朗報)가 곳곳에서 파르낫소에게 전달되고 있 었다. 이미 젤리드와 그랜사이어, 키마인을 포함한 대부분 기사들이 깊은 상처를 입어 더이상의 전투수행이 불가능한데다가 이종족들 역시 싸울 수 있는 자들은 10%도 남지 않았다. 메르퀸트마저 과도한 소환술로 실신한 상 태. 정말 이대로는 반나절 아니 몇 시간만에 무너질 것을 극한의 의지로 버텨가던 파르낫소는 그 적군의 퇴각소식을 들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 알 수 있었다. '메이 제독이 성공했군. 감사합니다 모두들.' 파르낫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눈을 꽉 감았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 은 인생 최악의 도박에서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는 조용히 전장에 있는 군 대를 다카란으로 불러 들였다. 피와 살이 엉키는 잔인한 전쟁을 피해 모두 사라진 줄 알았던 사막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침묵하듯 고요해진 전쟁터 에 서글프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라피스 폐하. 우리는 이겼습니다. 부디 이 승리를 값지게 할 수 있도 록 어진 통치를 해주시길, 소인 파르낫소 이 목숨을 바쳐 기원하옵니다.' 파르낫소는 병사들이 죽어간 전쟁터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그들을 위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5. 리히트야거의 기사들과 씰들 역시 대부분 상처를 입거나 살아 남은 자들 이라 할지라도 한쪽 팔을 잃은 자들도 있었다. 헤스팔콘 최정예 기사집단 인 리히트야거를 이 정도로 만들 수 있는 자들도 아마 달라카트 뿐이었을 것이다. 힐데브란트는 그런 기사들 앞에서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전쟁에서는 졌지만....... 이 전투에서는 이겼다. 모두 리히트야 거의 긍지 높은 일원으로서 후회없이 싸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자부심을 영원히 잊지 말고 간직해라. 그것은 너희가 값진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증 명하는 최고의 작위가 될 것이다." 힐데브란트는 침통한 표정의 기사들 앞에서 잠시 입을 다물며 마음을 정 리하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이 순간 이후 황실근위엽병 리히트야거는 해체한다." "히, 힐데브란트 공!" "우리는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의 목숨을 다해 달라카트에 마지막까지 저항하겠습니다!" 기사들은 수치를 받을 바엔 차라리 적과 함께 죽겠다고 외쳤지만 힐데브 란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무의미한 희생을 하는 것은 기사의 의무가 아니라 유치한 낭만일 뿐이야 . 너희들은 살아 있어야 한다. 너희들이 바로 헤스팔콘 제국을 재건할 사 람들이니까. 절대로 죽지 마라. 그리고 너희의 남은 인생을 다시 헤스팔콘 을 일으키는데 쓰기를 부탁한다. 영광스런 헤스팔콘 제국은 멸망한 것이 아니다. 단지 황실이 사라졌을 뿐이다. 너희들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분 명히 너희들의 손으로 이 위대한 제국은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만 해산." 힐데브란트의 건조한 목소리는 기사들의 마음 속에 파고 들었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그를 따르는 기사들의 목소 리는 계속 이어졌다. "힐데브란트 공! 공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계속 우리를 지휘해 주십시오." "평생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힐데브란트는 발걸음을 멈춘 뒤에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달라카트로 가야 한다. 이 전투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러니 너희는 너희가 생 각하는 최선의 길로 가라. 지휘를 받지 마라. 그건 사냥개나 하는 짓이야. 스스로의 의지로 헤스팔콘을 일으키길 부탁한다." 그것이 기사들이 본 힐데브란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힐데브란트는 자신 의 마력을 위한 제물로 잡아 두었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고 홀로 다카란 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짧고도 격렬했던 전쟁은 달라카트의 승리로 막 을 내리는가 싶었지만 가르바트와 오칼란트의 움직임은 이제 시작되고 있 었다. -Blind Talk 헤스팔콘의 군지휘체계는 독일 나치군을 닮았습니다. 리히트야거 역시 총 통경호무장친위대인 라이프슈탄다르테와 일부분 비슷하고....... 힐데브란 트 역시 최후의 베를린 방어전을 지휘했던 독일의 한 야전지휘관과 비슷하 지요.(이름이 뭘까요? 혹시 이미 눈치채신 분이 계실지도...) 뭐 드래곤 레이디는 환타지 전쟁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꽤나 간략하게 쓰느라고 별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제멋대로 프로파일 통신판 ONLY Entry#7 메르퀸트 Mere-Quinte 1.지금 기분 어때요? :막...... 정신이 들어서 어지러워요. (실신한 상태에서 지금 깨어난 것 같다.) 2.으음. 말락은 죽었을까요? :아뇨. 죽지 않았어요. 곧 돌아올 꺼에요. (꽤 확신하고 있군...) 3.소환사라는 특이한 능력을 가졌는데 마법사하고 뭐가 다른가요? :이름이...... 다르죠. (썰렁해! 라고 소리치자 솔직히 불었다. 소환사는 자연력의 동의를 얻어 에너지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말락이나 이형들도 소환할 수 있지만 그건 말락이 그의 센티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력을 스스로 운용할 재 능이 없는 메르퀸트에게 테시오스가 가르쳐 준 방법. 사실 이 세상에 소환 사는 거의 메르퀸트 한명 뿐일 것이다. 피닉스나 드래곤 같은 것이 소환되 지 않아서 실망한 사람들께는 죄송.) 4.메르퀸트씨의 과거에 대해 좀 말해 주세요. :어느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가 인간들에게 잡혔어요. 백년도 더 전의 일인데...... 그 이후에 한 귀부인의 노예로 팔려갔고...... 그 이후는 드래곤 레이디 2권을 보시면 아실 거에요. 말씀드리리가 좀. (흐음. 고전적인 책선전 방법이군. 아무튼 그때는 꽤 미남 엘프였다고 한 다. 지금은 미녀 엘프가 되어 버렸지만...) 5.본래 그렇게 목소리가 가늘어요? :예에...... (소설이라 직접 들을 수가 없어서 그렇지 실제 들어보면 여자도 쉽게 낼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굉장히 가련하게 들린다.) 6.자라탄에서 목욕할 때는 남자들하고 같이 해요 여자들하고 같이 해요? :......혼자 해요. (메르퀸트가 자라탄에 온 이후로 담수호 목욕탕에 위기가 닥쳤다. 낮에는 여자, 밤에는 남자로 정해져 있건만 메르퀸트는 누구라고 할 수 없는 오묘 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다 당황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메르퀸트는 목욕하기 한시간 전부터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혼자 써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안해도 되지만...... 성격이 라서. 메르퀸트가 목욕할 때 접근했다간 말락의 대낫이 날아오기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7.남자들에게 프로포즈 몇번 받아보셨어요? :....... (그는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결국 세는 걸 포기해 버렸다. 모르긴 해도 백단위는 가볍게 넘을 것 같다. 실제 가스발 사략함대의 남자선원 중에선 동성이라는 걸 알면서도 팬클럽에 가까운 추종자들이 많았다. 아무튼 여러 모로 위험한 사람이다 메르퀸트는.....) 8.말락의 정체를 알고 계세요? :예. 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어요. (말락하고 약속했나 보다. 또 모르지...... 수백년전에는 어느 나라 왕자 였을지도. 이종족이라고 우기는 말락의 항변에 전혀 설득력이 없는 까닭은 그런 이종족은 말락 외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9.언제나 하는 질문이지만, 노래 잘 부르세요? :좋아하지만 잘 부르진 못해요. (거짓말쟁이! 메르퀸트보다 가창력이 좋은 자가 과연 있을까. 그는 세라피 스와 함께 가스발 사략함대의 공인된 악사이며 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심 금을 울리기 때문에 어쩌면 다카란에서 민메이 어택을 재현해도 좋을 뻔 했다......) 10.주량은 얼마 정도? :마지막 질문이....... 좀 이상하네요? (메르퀸트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권할 때 거부하지는 않는데 아직까지 누구도 메르퀸트가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모르긴 해도 엘프 는 알콜분해효소가 인간보다 월등히 많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참고로 등장인물 중 가장 술에 약한 자는 예상대로 줄리탄과 키마인. 둘은 겁 먹은 얼굴로 한잔씩 마신 뒤에 잠시 놔두면 그대로 픽 쓰러져 기절한 듯 잠들어 버린다. 뭐 가끔 오버하기도 하지만...) E-MAIL : billiken@hananet.net Kidrock의 American bad ass를 들으며... (펩시 CF에 나온 뒤에 더 유명해 진 듯.) 제 목 [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9 올 린 ID 다크네스 작 성 시 각 2001/5/15 이 름 김아름 조 회 수 278 제 목:[ DRAGON LADY ] 14-09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70275]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15 05:56 조회:621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09 : 당신과 함께 영원히 Everybody Hurts Each Other 1. 제국의 모든 영광과 승리는 나라의 주인인 황제의 것이다. 누구도 그 사 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지 황제가 자신의 승리를 밑의 사람들에게 조 금 나눠주는 것 뿐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라피스 폐하! 헤스팔콘 제국이 항복했습니다! 폐하께서 승리하셨사옵 니다! 이 진심을 바쳐 감축드리옵니다!" 시종 프란츠는 전선으로부터의 승전보를 들고 서재 책상에 기대어 살포시 잠들어 있던 세라피스에게 날랜 걸음으로 알현하며 외쳤다. 그 역시 레지 스탕스로 활동하며 헤스팔콘에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소년. 벅찬 감동을 참 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 프란츠의 격양된 알현에 가늘게 눈을 뜬 세라피스는 아무 말도 없다. 그 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책상위로 벌떡 올라가 춤이라도 추었을지도 모르지 만 - 세라피스의 씁쓸함이 눈 언저리에 뭉친 채 말없이 프란츠를 바라보자 에 프란츠는 당황하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의 오수를 깨운 불찰, 황송하기 그지 없사옵......" "아냐 됐어. 어린 나이에 그런 어려운 말 쓰면 머리 나빠져." 조금 웃음을 머금은 세라피스는 영롱히 흘러내리는 금발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는 미소를 곱씹으며 프란츠를 바라보며 말 했다. "프란츠. 내가 왜 방랑을 했는지 알아? 가스발 녀석들을 만나기 전까지 말야." 세라피스는 오래전 황실을 떠난 이후 서대륙 이실라트를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방랑했던 적이 있다. 줄리탄 일행도 그 덕분에 만나게 된 것이지만. "죄송합니다. 소인은 모르겠사옵니다." 어느새 황실예절이 몸에 밴 프란츠는 선문답같은 세라피스의 질문에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세라피스는 볕이 쪼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때 의 추억을 되세기는 듯 했다. "길거리에 밥을 구걸하고 걸인들 틈에서 잠들고 귀족들에게 천박한 놈이 라며 손가락질 당하곤 했어. 죽여버리고 싶은 놈들도 많았지만 상처 한번 입힌 적 없이 참았지. 검과 권위를 쓰지 않고 살아가자니 하루 하루가 허 기를 메우기도 버겁더라고." "왜...... 그런 일을 자청하셨사옵니까?" 프란츠는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누가 들으면 전혀 믿지 않을 말이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왕도 아닌 황제가 빈민촌 흙바닥에서 일부러 뒹굴었다 니. 세라피스는 '별로 오래 한 것도 아냐.' 라고 중얼거리며 다음 말을 이 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천한 것은 피하려고 하지. 천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고들 여기지. 하지만 나는 가장 천한 일을 겪어보지 않으 면 절대로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얼음 목욕이나 하며 정해진 사람들과 정해진 대화만 하는 귀족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겠어. 그렇기 때문에 가장 천하다고 생각한 방랑을 선택한 거야. 난 머리가 나빠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가 없을 것 같 았거든." 고귀한 척하는 건 아무나 한다. 멋진 집에 아름다운 애인과 진수성찬 산 해진미 속에 둘러 싸여 세상의 진리가 이거다 저거다 운운하는 짓거리는 사기꾼 살인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천한 수치를 경험하는 고행은 각오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다. 세라피스는 후자를 선택했다. 높 은 곳에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만 보다가 어느날 그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야 인간의 악한 마음까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틀렸어." 세라피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커튼을 걷어 승리 를 축복하는 듯 쪼이는 햇볕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우아한 황궁의 정원을 내려 보았다. 귀족의 아이들이 정원을 뛰어다니고 그 뒤를 시종들이 따라 가는 모습이 보인다. "가장 천한 것은 바로 황제였어. 걸인보다도 수치스럽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야." "폐하......" "짐을 위해 죽어 달라며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아 놓고 이제는 짐이 승리 했다고 기뻐해야 하다니 세상에 이것보다 수치스러운 일이 또 어딨겠어?" 프란츠는 '폐하! 그렇지 안사옵니다! 모든 공적과 승리는 폐하의 것임에 틀림이 없사옵니다!'라고 외쳐야 했지만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란츠 는 이상하게도 세라피스의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상의 빛이 싫으면 세상을 어둠으로 만들게 아니라 나 혼자 눈을 감아 버리면...... 그걸로 된 것인데, 책임지지도 못할 전쟁을 저질러 놓고 우 연히 이겼다고, 내가 어떻게 자랑스러울 수 있겠어. 단지 고마울 뿐이야. 죄스러울 뿐이지." 세라피스는 '하긴. 결국 이 말도 승리자의 오만일 뿐이겠지.'라고 고개를 떨군 뒤에 다시 커튼을 닫았다. 이제 20대 중반을 조금 넘어 황제의 관을 쓴 세라피스는 괴로운 승리의 무게를 느낀 것이다. 2. "카넬리안. 이해가 안가. 어떻게 우리가 승리한 거야?" 손쉽게 헤스팔콘 황실을 점령한 줄리탄은 이미 대부분의 고가품이 도망친 황실 귀족들의 손에 도난당해 곳곳이 공허한 황실 응접실에서 그렇게 말했 다. 찢어진 드레스에 계속 투덜거리던 카넬리안은 황당한 얼굴로 줄리탄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라니?" "우린 단순히 헤스팔콘의 제도를 점령했을 뿐이잖아? 황제 한명이 도주한 것 뿐인데....... 이게 어떻게 헤스팔콘 제국의 멸망이라는 거야?" "잉? 주인님. 그럼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싸웠단 말야?" "응. 솔직히 모르겠어." "단순한 사람이네요 정말....." 이제 카넬리안의 강의가 시작된다. "헤스팔콘은 각 왕국들과의 계약과 그들의 충성으로 지탱되던 제국이야. 그건 알지?" "응." 예전 리이가 있었던 리센버러 왕국 역시 헤스팔콘 제국 휘하의 왕국들 중 하나였다. 카넬리안은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 이렇게 황실이 사라져 버린 이상 그런 왕국들의 구심점 역시 사라 진 거야. 마치 선생이 나가버린 교실마냥 통제할 사람 없는 개판오분전의 상황이라고. 결국 각 군소왕국들이 지들 잘났다며 난립하겠지. 그걸 누가 말리겠어? 그렇게 황실이 사라진 헤스팔콘 제국은 힘이 분열되며 붕괴되어 버린 거야. 리히트야거 역시 모실 주인이 사라져 버렸으니 목숨걸고 싸울 이유가 없어진거지. 작위고 계약서고 모두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으니 회사 라면 부도, 제국이라면 멸망이라고. 이제 이해가 가세요? 나의 순진한 테 이머시여?" "그랬구나......." "그.래.서. 지금 도망친 황제와 황실 녀석들을 찾아야 해. 혹시라도 가르 바트에 붙는 날에는 골치아파 지잖아?" "맞아. 그게 문제야." 잠 한숨 못자고 각 집무실에서 수거해 온 헤스팔콘의 중요 문서들을 뒤적 이느라 피곤에 찌든 메이는 안녕 너머로 카넬리안을 흘낏 보며 말했다. "이 전쟁은 황위계승권을 가진 헤스팔콘 황제를 잡아 들일 때 완전히 끝 나게 되는 거야." "자, 잠깐. 그 말은?" "지금 즉시 추적대를 조직해서 도주한 헤스팔콘 황제를 뒤쫓아 가야 해." 카넬리안이 '제기랄! 쉬고 싶단 말이야!'라며 줄리탄에게 엉겨 붙을 찰나 긴 전투 덕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장교가 쪽지를 들고 들어오며 간결 한 군례와 함께 말했다. "리하르트 님으로부터 전문입니다!" 그의 긴장된 얼굴에 메이는 나쁜 예감이 들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읽어 보세요." "옛! 가르바트 제국 황실에서 북해 기사단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기사 단이 모일 때 까지의 시간은 일주일 정도이며......" 그 보고기 시작되며 사람들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오직 줄리탄만이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북해기사단이 뭐야?" "으이이이! 주인님! 싫더라도 군사지식에 관심 좀 가져!" 카넬리안은 이런 당연한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이 창피한지 줄리탄 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북해기사단은 오직 황제만이 소집할 수 있는 가르바트 최강의 기사집단 이얏!" "그, 그럼 리히트야거 같은?" "그래요. 각 영지의 기사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인다고 생각해 봐. 적어도 백명은 넘을 껄?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때의 이유는 단 하나. ..... 전쟁뿐이라고. 그리고 그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는 거지." "그, 그렇다면!"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셨나 보네." 카넬리안은 정색을 하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바트 제국이 참전한 거야." 북해기사단은 리히트야거와는 달리 제도에 상주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들 전원이 소집되었을 때의 힘이란 리히트야거를 능가하면 했지 절대로 약 하지 않았다. 물론 가르바트는 줄리탄이 태어난 제국이긴 하지만 워낙에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자기 제국의 군대가 어떤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 렇더라고 이것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3. 힐데브란트가 전범(戰犯)이 되어 달라카트 황궁으로 온 것은 다카란 전투 에서 승리한지 이틀 후의 일이었다. 그는 관례대로 황제 앞에서 죄를 물어 야 했고 황제 세라피스가 특별히 자비를 배풀지 않는 이상 사형을 면할 길 이 없었다. 알현실에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린 힐데브란트가 나타났고 그는 침묵을 지키며 곧 세라피스가 나타날 옥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세라피스 폐하의 어전이다! 무릎을 꿇어라!" 근위대가 윽박질렀지만 힐데브란트는 꼿꼿이 선 채 몸을 숙일 생각이 없 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황제는 세라피스 리그나이트가 아니다. 너라면 적국의 황제에게 무 릎을 꿇겠나!" "뭐, 뭐라고 이 놈이!" 힐데브란트의 태도에 화가 치민 근위대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렇게고 어 전에서 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그때 근엄한 음악이 울리며 황제만이 출입 할 수 있는 연단의 문으로부터 세라피스가 나타났고 힐데브란트를 제외한 전원은 무릎을 꿇었다. "모두 일어나시오." 세라피스는 옥좌에 몸을 묻으며 알현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둘러 보았 고 곧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힐데브란트에게 눈길을 주었다. 세라 피스는 나즈막이 말했다. "귀관이 바로 짐의 군대를 위기에 몰아 넣었던 리히트야거의 지휘관이로 군." "후회없는 싸움이었다." "후후. 그렇군. 그런데 귀관 정도의 실력자라면 다른 나라에서 얼마든지 받아주었을 텐데 왜 스스로 잡혔소? 짐은 그것이 궁금하오." "내겐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말의 경어조차 없는 쌀쌀한 힐데브란트의 말이 알현실을 차갑게 울렸다 . 세라피스는 별로 불쾌할 것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할 일? 할 일이라니?" "세라피스 황제. 당신은 분명 뛰어난 자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헤스팔콘의 재건에 방해되는 당신은 나와 함께 죽어줘야 겠어!" "저, 저 놈이 감히 폐하께!" 근위대가 그의 무례한 말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힐데브란트가 자신의 옷을 찢어 상반신을 들어냈다. 미이라처럼 바짝 마른 그의 몸에는 예전 자신의 제물들에게 세겨 놓은 것과 같은 기괴한 문신이 세겨져 있었 던 것이다. 힐데브란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곧 힐데브란트의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마력을 느낀 루스가 소리쳤다. "이, 이런! 자기 몸을 제물로 쓸 셈인가!" "달라카트의 황제여! 내 마법의 위력 정도는 익히 알고 있겠지!" 독기어린 눈으로 세라피스를 쏘아보는 힐데브란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알현실을 갈랐다. 그리고 신하들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파르낫소는 당했다 는 듯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자는....... 자폭할 생각이야." 파르낫소조차 눈치 못챘던 것이다. 망해버린 제국을 위해 죽을 것이라고 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어쨌든 상황은 독을 바른 검을 황제 앞까지 배달한 셈이 되어버렸다. 힐데브란트는 비장한 목소리로 주변을 향해 외 쳤다. "가까이 오지 마라! 누구라도 접근하면 내 몸에 쌓아 두었던 마력을 폭발 시키겠다. 이 황궁 정도는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어." 죽음을 결심한 자에겐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근위대마저도 힐데브란 트의 독살스러운 결의에 다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오직 세라피스만이 두려 운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할 뿐이었다. "짐과 함께 죽겠다고? 헤스팔콘 황제는 이미 도망쳤고 너의 제국은 망했 다. 너의 그런 행동에 기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흥. 나의 충성심은 황실이 아닌 헤스팔콘 제국을 향한 것이다! 너 같이 고귀한 놈이 어떻게 나의 마음을 이해하겠나!" "물론 이해하지 못하겠다." 세라피스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힐데브란트와 타협할 생각도 없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너 같은 황제는 죽어선 안되겠지만...... 헤스팔콘 을 위해 죽이는 점, 미리 사과한다." "귀찮군! 뭘 그렇게 떠들고 있나!" "뭐, 뭐라고?" 세라피스는 죽음을 앞두고도 고고하고도 차가운 눈초리로 힐데브란트를 내려 보며 소리칠 뿐이었다. "네 목적이 뚜렷하다면 타협 조차 필요 없겠지. 짐 역시 적국의 암살범에 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 따윈 없어. 날 죽이는 것이 너의 의지라면 어서 실 행에 옮겨라." "세라피스!" 루스는 세라피스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소리쳤지만 세라피스는 조 금도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으로 힐데브란트를 내려볼 뿐이었다. 잠시 세라피스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던 힐데브란트의 검은 문신에서 피안개 같 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마력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같이 훌륭한....... 황제를 모시고 싶었다. 너...... 너를 모셨다면.. ....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지도 몰라." 힐데브란트의 살을 찢으며 떨어지는 핏방울이 금새 바닥에 흥건하게 모이 고 있었다. 세라피스는 신념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버린 힐데브란트의 모습에 측은한 듯 나직하게 말했다. "속단하지 마라 리히트야거의 수장이여.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다. 내가 훌륭한 황제였다면...... 처음부터 전쟁 따위는 일으키지 않았을 거 다." "대 헤스팔콘 제국에 영광을!!" 피끓는 목소리가 검은 마력에 잠식 당한 힐데브란트의 입에 터져 나오며 황궁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힘이 뭉쳤다. 그리고 그때 고귀한 금빛의 바람 이 빛처럼 날아들며 알현실을 갈랐고 피를 뿜는 힐데브란트를 관통했다. 캬르르르르륵!! 사람들이 뒤로 넘어질 정도의 풍압이 몰아친 뒤에 힐데브란트에게 달려들 던 근위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수인을 맺은 힐데브란트 의 가슴을 찌른 세라피스의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든 세라피스 가 수십미터를 찰나에 날며 힐데브란트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힐데브란트. 너의 결의를 방해하여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슬퍼 할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세라피스는 이미 죽어버린 힐데브란트에게서 스스르 검을 뽑으며 그렇게 읊조렸고 의지를 잃은 힐데브란트의 몸은 말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집요했 던 리히트야거의 마지막 저항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폐, 폐하! 폐하의 안위를 지키지 못한 저희들을 죽여주시옵소서!" 근위대는 세라피스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지만 세라피스는 검을 다시 집어 넣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너무하네! 나는 당신들을 살리려고 이 난리를 피웠는데 죽여달라니! 제 발 부탁이니 좀 이 못난 황제의 마음 좀 헤아려 주세요." "세라피스 폐하." 파르낫소는 자신의 불찰을 느끼며 세라피스에게 다가갔지만 세라피스는 친한 친구 보듯 방긋 웃으며 파르낫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낭자 같은 몸으로 전쟁 치루느라 수고했어. 파르낫소.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죄송하옵니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아 이제 좀 자야겠어. 해 떨어지면 깨워줘." "......폐하." 세라피스는 '이런 젠장! 저런 놈하나 똑바로 막지 못하냐!'라고 소리치는 대신 장난스럽게 투정부린 뒤에 힐데브란트의 장례를 충실히 치루라는 말 과 함께 알현실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렇게 떠나는 세라피스의 뒷모습에서 그의 소리 없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 지만 황제란 끝없이 죄스러운 직업이라고, 세라피스는 그렇게 괴로움을 삼 켰다. -Blind Talk 히으으으. 다른 일에 며칠 빠져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늦었지요? 이를 가 는 소리가 들리네요.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본래 그런 놈이라고 생각하 시고 자비롭게 눈감아 주시길. 에 그리고....... 옆에서는 kiyu군이 게임제작 시뮬RPG(?) '세가가가'를 하고 있네요.-_-;;; (지금 새벽 5:37분인데 뭐하고 있는 거야 정말 ;;;;) 저도 게임 제작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지 보면서 상당히 눈물나는 게임. 뭐 물론 게임계의 건실하고 밝은 면만 보여주고 있어서 실제 제작보다는 낭만 적으로 보이지만...... 세가가가 정말 특이한 게임이네요 정말. 사실 이번편에서 힐데브란트는 폭사 성공이었습니다. 황궁 다 날아가고 마 지막 순간 루스가 최대한 힘을 모아 세라피스를 막아주고 루스는 죽는 연 출이었는데...... 다 써놓고 '이 놈의 소설에선 뻑하면 터지고 뻑하면 죽 잖아? 아아 이번엔 봐주자.'라는 생각에 보시는 바와 같이 내용이 바꿔 버 렸습니다. 슬슬 조금 있으면 클라이막스군요.(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냐!!) 마르켈라이쥬의 이야기를 좀 더 깊게 다루지 못해서 서운하지만 뭐 그런 아저씨풍의 이야기, 별로 좋아할 사람 없을 것 같으니까 눈물을 머금고 그 냥 PASS입니다.(제 성격상 어떤 캐릭터 이야기를 잡고 늘어지만 한도 끝도 없이 길게 끌 것이 뻔하기 때문에... 심플하게 가지치기를...) 솔직히 중간에 사라진 이벤트들이 굉장히 많아요. 메이 역시 처음에는 굉 장한 코믹 캐릭터였는데(수박만 자라는 괴로운 무인도에 살고 있는 망해버 린 해적집단의 여두목으로 카넬리안과 히스테리컬 수치가 비등비등했음.) 갑자기 '스엔을 멋지게 죽이고 싶다!'라는 생각에 궤도수정해서 비장한 가 스발 해적단의 여두목으로 변신. 키마인도 술에 취해서 (그 예절바른 청년 이) 카넬리안을 만나기 위해 카넬리안의 방에 갔다가 거기 있던 줄리탄을 덮치는 장면이라든지(이건 꽤 길게 써 놓고 중단했음.) 세이드와 레오폴트 의 썸씽이라든지... 중도하차한 프로젝트가 참말로 많습니다. 그래도 폐기 된 부분은 모아두고 있으니까, 나중에 짬이 나면 엮어서 통신판 ONLY로 올 릴 계획입니다.(바라는 사람 있을까 몰라.-_-;) 아 그리고 메일 보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출판만화쪽에 있을 때는 편집자와 대화하면 했지 읽는 분들과 직접 이어질 방법은 거의 없었거든요... 짜증나는 인간 들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순간 순간 읽는 분들의 생각을 전해 들을 수 있는 건 참 좋네요.) 에 그리고 카페의 2차 정모 마쳤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셔서 놀랐 고(물론 절 보러 오신 건 아니겠지만;;;) 새벽 5시까지 술과 함께 이런 저 런 대화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대신 정모 다음날은 완전 다운 되 었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Massive Attack의 Tear drop을 들으며... (트립합인가요 이거?) 『SF & FANTASY (go SF)』 24983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10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5/21 11:11 읽음:354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4-10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70794]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21 06:44 조회:232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10 : 당신과 함께 영원히 Wicked (지난 줄거리) 헤스팔콘과의 전쟁에서 이긴 달라카트. 그러나 헤스팔콘의 황제 하우프트 만 3세는 코머런트에게로 도망챘고 가르바트의 북해기사단은 출진을 시작 했다. 힐데브란트의 마지막 암살기도가 실패로 끝난 지금, 성공을 자축할 새도 없이 헤스팔콘 황제를 쫓기 위한 추격이 시작되었다. 1. "주인님! 왜 그런 일을 자청한 거야! 위험해! 엄청나게 위험해!" 헤스팔콘 황제를 뒤쫓을 추격대를 지휘하기로 자청한 줄리탄에게 카넬리 안은 강한 불만을 늘어 놓고 있었다. 쉴 틈도 없이 말 안장을 얹고 있던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히스테리컬한 목소리에 놀라 크르릉거리는 말을 쓰다 듬어주며 달래듯이 말했다.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야. 아무 문제 없어." "북해기사단이 내려오고 있단 말야! 지금 황제를 뒤쫓다간 그 놈들과 만 날 수도 있어. 북해기사단이 주인님을 보면 '아! 만나서 반가워요 줄리탄 씨!'라고 할 줄 알아?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것처럼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거야!" "알고 있어. 하지만 황제를 잡지 못하면 전쟁이 커질 꺼야. 대륙 전체가 전쟁터가 될 수도 있어." "그 전쟁의 책임을 주인님이 짊어질 의무는 없어! 주인님은 세상을 구할 의무를 타고난 용사도 검과 활이 비껴가는 영웅도 아냐. 운좋은 요리사일 뿐이지." 카넬리안은 빠르게 늘어놓던 말을 정리하듯 말했다. "나같은 씰이 이렇게 부탁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야. 그러니까 가지마." 맞는 말이다. 카넬리안 말대로 줄리탄은 영웅의 별을 타고나 용사의 검을 뽑아서 마왕을 퇴치해야 하는 세상에 둘도 없는 히어로가 아니다. 누구도 왜 세상을 구하지 않냐며 다그치지도 않고 그가 죽는다고 세상 모든 사람 들이 비통에 잠겨 슬퍼하지도 않는다. 줄리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영웅으로 알아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안 카넬리안. 사과는 돌아와서 할께." 줄리탄은 쓴웃음을 보인 뒤에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쯤에서 다른 멋진 히로인이었다면 '당신은 정말 냉정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 그 런 면까지 사랑합니다.'라며 눈물을 훔쳐야 했지만 - 카넬리안은 죽어라 말을 안듣는 구제불능 아들놈을 바라보듯 인상을 구겨며 소리쳤던 것이다. "뭘 돌아와서 한다는 거얏! 그런 설득력 없는 사과라면 사양하겠어! 나도 같이 갈꺼야!" "하, 하지만 카넬리안." 줄리탄은 '따라오면 위험해!'라고 외치려다가 자기가 한 말과 앞 뒤가 맞 질 않자 입을 다물었다. "정말 씰한테는 최악의 주인이야 당신은! 나처럼 사랑스러운 씰이 뜯어 말리는데도 가야겠다면 가세요. 나도 따라가서 같이 죽어버리지 뭐! 으이 구 지지리 운도 없는 내 인생." "카넬리안." 줄리탄은 말에 올라탄 자신에게 다가와 안장끈을 다시 묶어주며 구구절절 한 자기연민에 투덜거리는 카넬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 용서해 줘." "......" 카넬리안은 찡그린 눈썹으로 '내 전주인도 위험한 분이긴 했지만 그 분은 강하기나 했지. 정말이지 씰도 못해먹을 짓이라니까.'라고 중얼중얼 거리 며 아주 세심하게 끈을 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곧 도주한 황제를 쫓 을 추격대가 조직되어 헤스팔콘 제도를 떠났다. 줄리탄을 필두로 카넬리안 , 시오와 톨베인 그리고 소규모의 경기병들로 이뤄진 빠른 부대였다. 2. 한편 황성으로부터 도주한 헤스팔콘 황제 하우프트만 3세는 이미 알고 있 었다는 듯 미리 기다리고 있던 코머런트의 기사들에게 이끌려 변방의 성 이르에서 보호되고 있었다. 물론 그 대우가 '예전같지 않음'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봐라! 코머런트 공작은 언제 짐 앞에 나타나느냐. 이런 비좁고 냄새나 는 곳에서 짐을 기다리게 할 작정인가?" "거 참. 코머런트 대공께서는 오지 않으십니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성의 알현실이니 황궁의 것보다 좁고 냄새나는 것 은 당연하다. 황제의 짜증섞인 말에 코머런트의 기사들은 혀를 차며 대꾸 했다. 망해버린 제국의 황제를 위해 코머런트가 직접 올 이유가 없지 않은 가.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몸에 뿌릴 향수가 없다는 둥 꿀을 섞은 술을 가 져오라는 둥 자신의 입장도 모르고 천덕스런 불평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권력은 사라졌어도 그 권력의 잔재 같은 사치스런 성격은 금방 바뀌지 않 은 것이다. "아무튼 짐은 이런 더러운 곳에서는 일초도 있을 수가 없다! 당장 짐을 코머런트 대공에게 안내해라!" "쳇. 우리는 이런 더러운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네 군대를 막기 위 해서."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냔 말이냐?" "어쨌든지 명령이 오기 전까지 당신을 이곳에서 한발짝도 보낼 수 없습니 다. 우리가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기사들은 처음으로 황제라는 자를 보호하며 그의 무지함에 치를 떨었다. 황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이든 어린애 같은 꼴이지 않은가. 자신의 나라가 망했다는 것에 땅을 치며 괴로워 할 줄 알 았는데 - 역시 귀족들은 나쁜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 족속인 것 같다. "한센 경! 성 문 앞에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뭐? 누가 이곳을 찾아온단 말이야." 부하 기사의 보고에 황제를 보호하던 한센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 도 혼자서 이곳 이르 성채를 찾아온다니, 누군지 예상도 가질 않았다. "그게 헤스팔콘 황제를 만나러 왔다고......" "뭐? 어떤 얼빠진 자식이야 대체!" 헤스팔콘 황제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달라카트라 하더라도 할 수 있었다. 이르 성은 헤스팔콘 국경과의 최접경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더 라도 코머런트도 아닌 자가 대뜸 황제를 만나러 왔다니. 그런다고 만나게 해줄리가 없지 않나.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금발의 사내인데,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습 니다. 가르바트 군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떤 미친 놈이...... 여긴 유원지가 아니다. 죽여버려." 한센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당장 군법으로 즉결처분하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륵!! 알현실의 높은 창밖에서 붉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사방에서 공기가 타 버리는 듯한 화염의 소리가 엄습했다. 마치 성 전체를 불길이 포위해 버린 듯한 기분이다. 한센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소리쳤다. "적의 공격인가!" "적이라고! 당장 짐을 여기서 탈출시켜라! 어서!" 하우프트만 3세는 적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벌떡 일어섰다. 한센은 부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봐! 너희들은 이곳에서 헤스팔콘 황제를 보호해라! 절대로 이곳에서 나가게 하면 안돼!" "옛!" 그와 함께 한센은 검을 뽑아 들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대체 적이라니. 달라카트 군대가 벌써 쳐들어왔을리는 없는데...... 설마 이르 성 앞에 왔 다는 그 한명인가. 한센은 적의 정체조차 침작할 수 없었다. 3. 가르바트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를 받고 있는 하우프트만 3세는 계속 창밖이 불타오르며 끔찍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커지고 있자 다리를 부 들부들 떨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 무능한 가르바트 놈들. 지, 짐의 심기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다니... ... 코머런트 공작을 만나면 모두 참형을 시키라고 말할 것이다." "입 다무십시오!" 기사들은 황제의 성질긁는 말에 화를 내면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 다. 분명히 밖의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리고 조금씩 비명소리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마치 천천히 목이 졸려 죽 어가는 사람처럼, 성 밖은 그렇게 잠들어가고 있었다.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곳을 지키라고 명령 받았다. 절대 나가선 안돼." 젊은 기사들은 서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수근거렸다. 그때 알현 실의 입구 밖에서 뚜벅거리는 기계적 발소리가 들리며 횃불에 늘어진 긴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 누구지? 한센 경인가?" "그 분이 아닐지도 몰라! 모두 전투 태세!" 다섯 명의 기사들은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리며 허리를 조금 굽힌채 검을 들이댔다. 혹시 적일지도 모르지만, 한명의 적이라면 다섯의 기사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일말의 자신감과 함께. 그러나 그 자신감은 귀에 들리기 시작한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진동음과 함께 조금씩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뭐야 저 자는." 입구 앞에 모습을 들어낸 사내는 엷게 진동하는 기괴한 검을 든 채 멈춰 섰다. 어둑한 불빛 사이로 그림자 진 얼굴의 시퍼런 눈동자가 보였다. "서, 설마 네 놈이 혼자서 이곳을?" 음습한 미소를 보이는 그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켈라이쥬가 말해주지 않던나? 날 보면 피하라고." "세이드!" 이르 성을 단신으로 찾아온 자는 바로 '검은 추기경' 세이드였다. 사신이 방문한 것처럼 순식간에 성채 하나를 괴멸시켜 버린 세이드를 처음으로 알 아본 자는 바로 헤스팔콘 황제 하우프트만 3세였다. 헤스팔콘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세이드 공! 짐을 구해주려 왔구려! 짐은 공의 충성심에......" "나라를 버린 벌레새끼가 여기에 숨어 있었군. 큭큭. 거기서 기다리고 있 어." 세이드의 소름끼치는 말에 황제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절대로 자 신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너는 달라카트 쪽인가? 그래서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 "굳이 말하자면 오칼란트 쪽이겠지. 하지만 오펜하바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 개인적인 유희일 뿐이야." "뭐, 뭐야!" 기사들은 기사수업때 배운 대로 세이드를 포위하며 달려 들었지만 세이드 는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단지 첫번째로 날아드는 검을 자신의 마 력에 휩싸인 검으로 받아쳤을 뿐이다. "으아아아악!!" 세이드의 검과 부딧친 순간 상대 기사는 끔찍한 마력에 감염되어 내장이 터져 버리며 피를 뿜었고 - 무릎을 꿇은 기사의 목이 금새 세이드의 검에 잘려 나갔다. 아무리 기사라도 그의 검을 정면에서 받는 건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이런 이런. 너희들, 너무 약하군." 다른 검들은 세이드의 기계팔에 힘없이 튕겨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세이드의 검을 냉기서린 기운이 휘감는 듯 싶더니 악신의 손톱같은 검의 궤적이 기사들의 몸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파즈즈즈즈즉! 차라리 터져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반으로 갈라지며 일시에 피 한방울까지 얼어버린 기사들의 몸은 퍼버벅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깨 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싸움이라기 보다는 학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세이드는 바닥에 흩어진 기사들의 시체 조각을 밟으며 공포에 질려 움직 일 수 조차 없는 황제에게 걸어갔다. "세, 세이드 공. 살려주게! 응?" "큭큭큭. 널 살려주면 내게 뭘 줄 수 있지?" "지, 짐을 죽여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 그러니까." 세이드는 광기어린 표정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곧 주검이 될 황제를 향 해 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사형대의 칼날이 올라가고 있는 듯 하다. "왜 얻는 게 없어? 이렇게 즐거운데. 어렸을 때부터 황제를 죽일 때는 어 떤 기분일지가 몹시 궁금했었소이다." "히이이이익!" 세이드를 올려보는 황제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달라카트가 아닌 세이드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인가. "걱정하지마시오 황제. 아주 천천히 죽여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세이드의 눈빛에는 (황제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 부터 쌓아 왔던 살기어린 원한과 증오심이 담겨 있었다. 황제는 차라리, 이럴 줄 알았다면 달라카트 황제의 손에 고통없이 죽길 바랬지만 그 순간 세이드는 황제의 두 눈을 얼려 버렸고 한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극 한의 고통에 터져버린 두 눈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의 손에 팔이 잘리는 사람도 있어. 이 정도 고통에 울면 너무 싱겁잖아. 이제 시작이야." 세상을 좁게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다. 사실 세라 피스는 하우프트만 3세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고 도망치던 하우프트만 3세는 결국 '차라리 죽게 해줘!'라는 가장 비참한 유언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4. "대체 어떻게 된거야 이 성은......" 헤스팔콘 황제를 뒤쫓던 추적대는 결국 이틀이나 지나서 이르 성 앞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가르바트의 영역이라 추적을 포기하고 되돌아 가려 했지만 일행은 마치 불길의 뱀이 집어 삼킨 듯 시커멓게 타버린 이르 성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보며 발길을 멈췄다. 차라리 리히트야거와 싸웠 던 다카란이 더 원형에 가까울 것 같다. "설마 내전이라도 있었나?" 세이드가 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르 성의 참혹한 몰골에 당황하면서도 결국 이르 성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성문까지 불타버 려 입구가 무방비로 뚫러있는 이곳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사성(死城) 그 자체였던 것이다. 5. "주인님. 왠지 기분이 안좋아." 카넬리안은 줄리탄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며 찡그린 얼굴로 주변을 바라 보며 말했다. 첨탑등의 돌벽이 엄청난 열기가 휩쓸고 가서 부분 부분 녹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사람의 살갗에 염산을 부은 것 같은 그 끔찍한 모습은 도저히 일반적인 화력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건 마법이야. 그것도 보통 위력이 아니라고." 카넬리안은 이 정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이곳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줄리탄을 들쳐업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줄리탄은 성이 이 꼴이 된 이유를 알아내려는 듯 계속 성 내부로 들어갔다. 결국 추적대는 몇 조로 흩어지며 성을 조사했고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알현실로 항하게 되었다. "주인님 잠깐만." "응?" "절대자의 권능으로 명하건데, 불의 혓바닥을 잘라낼 수 있는 힘을. P.Y.R.O.P.H.O.B.I.A." 카넬리안은 조그맣게 말하며 줄리탄의 뺨과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고 금 새 줄리탄은 몸이 조금 뜨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불길에 대 한 정신과 육체의 저항력을 주는 마법이었다. "뭐한 거야? 지금?" "응. 좋은 거."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마법구사에 능한 카넬리안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전혀 안심이 되지 못했다. 성을 녹여버릴 마력이라면 자신이 시전한 마법 정도, 몇초 못견디고 무너져 버릴 것이 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더라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야 하니까 카넬리안은 알현실로 걸어 가는 와중에 계속 줄리탄의 뒷머리에 손을 얹으며 뭐라고 중얼중얼 잔뜩 마법을 시전해 주었다. 예전의 줄리탄이었다면 이런 과중한 마법의 중압감 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해 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주인님. 여기 누군가 있어." 알현실 어딘가에 있는 음습한 기운을 포착한 카넬리안은 미스트랄을 들며 속삭였고 줄리탄 역시 코를 찌르는 매케한 냄새를 느꼈다. 알현실을 바라 보며 줄리탄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그 냄새는 부패해 버린 시체들의 악취 였던 것이다. "붉은 눈의 씰. 그리고 그 테이머.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보게 되는군." 알현실 끝의 커다란 옥좌에서 들리는 메마른 목소리를 줄리탄도 카넬리안 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자신들의 목숨을 죽음 끝까지 위협했던 세이드의 것이었다. "세이드....... 왜 여기에." "별로 기대는 안하지만. 이제 나와 싸울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고 생각하 나? 말해봐." 죽음의 군주 같은 모습의 세이드는 옥좌에 앉은 채 줄리탄과 카넬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탄은 인피타르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이 성을 이렇게 만든게 너냐?" "그래. 너희가 찾는 황제도 이미 뒈졌다. 생각보다 빨리 죽어서 시시했어 ." 줄리탄은 눈 앞에선 어둑한 바닥에 팔다리가 모두 잘려진 시체가 보였다. 저게 황제의 모습일까? 고문의 고통 때문에 뒤틀린 채 벌어져 있는 입을 보자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 죽인 거야! 네 놈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놈이냐! 역겨워! 장난으로 남을 죽이고도 죄책감 하나 없는 거야!" 줄리탄은 당장이라도 인피타르를 뽑아들 기세였다. 사람을 학살한 것에 대해 정당성 따위는 없다. 그것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에 줄리탄은 구역질날 정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카넬리안은 그런 줄리 탄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세이드가 악하건 혐오스럽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이드 같은 자가 줄리탄의 말에 탄복하여 바르고 착하게 살 이유도 없는 것이다. 분명 싸움이 일어나면, 줄리탄의 목숨 전부를 써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자아. 내가 지금 너의 다리를 얼려버린 뒤에 너의 씰의 옷을 벗기고 마 음껏 능욕하고 배를 가르는 걸 보여주면...... 그때도 그렇게 소리칠 자신 이 있나? 아주 기대되는군."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세이드는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듯 즐 거운 조소를 띄우며 줄리탄을 바라보았고 카넬리안 역시 그런 세이드의 모 습에 미스트랄을 치켜 올리며 살기를 띄웠다. 반면 줄리탄은 차갑게 가라 앉은 얼굴로 세이드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똑바로 들어. 카넬리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킨다. 네 놈의 뜻대 로 되지 않아. 대신 그 더러운 말, 입에 담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 줄리탄의 눈을 보며 세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며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겁많은 소년이 아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세 이드는 오펜바하를 떠올리며 시험을 하는 듯 말했다. "지금 너의 그 말, 저 씰을 지키겠다는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무 슨 일이 닥쳐도 지키겠다는 그 달콤한 말의 대가를 짊어질 준비가 됐나?" "물론이다. 그게 나의 신념이니까! 너 같은 놈과는 달라!" "신념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 같은 놈도 신념이 있냐! 누가 말해도 바꾸지 않을 그런 소중한 것이 너 따위 놈에게도 있냔 말야!" "당연하지 않나? 난 나의 신념으로 살아간다. 그러는 너는 남의 말 한마 디에 네 생각을 쉽게 바꾸는 놈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상대의 말이 설 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니 인생이 그만큼 얄팍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싸구려 같은 인생을 살면서 남의 삶에 뭐라고 훈수를 두는 꼴이야 말로 정 말 역겨운 거야. 남이 나한테 뭐라고 하든 그건 상관 없어. 잘 들어둬라.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청년. 악마에게도 나름대로 자신의 길이 있는 거다. " 사성 이르에 홀로 남아 있는 '검은 추기경' 세이드는 자신의 검을 돌바닥 에 깊게 박아 버린 채로 피에 물든 옥좌에 기대어 그렇게 말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잔혹한 무리의 왕이 된 것처럼. 알현실 이곳저곳에서 조각난 채 로 부패하고 있는 시체들은 원망과 광기의 악취들을 뿜어내고 있었고 - 줄 리탄은 알현실 전체에 가득 차 있는 숨이 막히고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은 무언(無言)의 고통소리에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세이드의 차가운 채찍 같은 목소리가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것 같다. 그는 줄리탄의 표정을 감 상하는 것처럼 길게 머리를 가리는 금발 사이의 퀭한 파란 눈동자를 굴리 고 있었다. 악마의 길이라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의 길이 싫다면 날 죽이면 된다. 이리와라." 크르륵 소리가 나며 바닥에 박혀 있는 세이드의 검이 뽑혔다. 세이드가 바 라본 세상은 줄리탄이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이 선이다 악이다 소리치며 논리를 치장하지만 사실 현실은 간단명료하다. 세이드가 줄리탄의 목을 베어버리면 줄리탄이 선이라고 믿고 있던 신념은 패하는 것 이다. 세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Blind Talk 또 늦었습니다. 아아 역시 할 말도 별로 없네요. 세이드 같은 캐릭터는 다 루기 힘듭니다.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을 아무 꺼리낌없이 저지를 캐릭터라 면 그에 해당하는 과거와 가치관도 부여해 줘야 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 다...... 글을 꽤 칙칙하게 만든단 말이야 그 녀석은. 아. 이번 편은 다시 읽지 못하고 올립니다. 뭔가 어색한 부분이 많을 것 같아 걱정이네요. 메일 보내주신 분들, 언제나 감사합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림프 비즈킷의 rollin' 을 들으며... 『SF & FANTASY (go SF)』 25286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1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5/23 13:33 읽음:302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4-11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70974]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23 09:00 조회:239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11 : 당신과 함께 영원히 Protect Her From Harm 1. "널 죽일 생각은 없다." 검을 뽑아든 세이드에게 줄리탄은 나직하게 말했다. 죽이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해야 한다면 아마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이드는 자신을 앞에 두고 공포를 느끼지 않는 드문 존재인 줄리 탄의 말을 잠시 음미하다가 차갑게 뱉어냈다. "죽일 힘이 없는 거겠지." 그리고 그 순간 세이드의 검이 전광처럼 번뜩였고 단지 그 검풍만으로 엄 청난 굉음과 함께 알현실의 돌바닥이 모두 터져 나가며 바닥에 깊은 상처 를 그었다. 줄리탄이 검을 뽑을 겨를도 없었다. 줄리탄 앞에서 멈춰선 위협 이 아니었다면 몸이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주인님!" 카넬리안은 잠시 줄리탄의 몸에 베어졌다는 착각을 느끼며 줄리탄에게 뛰 어갔지만 줄리탄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똑바로 세이드를 바라볼 뿐이었 다. "세이드" "왜.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 게냐?" 줄리탄은 세이드의 조소를 차갑게 튕겨내며 감정이 사라져 버린 듯한 투 명한 눈빛으로 세이드의 마음을 찌르며 말했다. "난.널.언.제.라.도.죽.일.수.있.다." 줄리탄이 꺼낸 마음의 검에 세이드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공포심이 라기 보다는 경외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런 흥분 같은 것. 세이드 는 그런 기묘한 기분에 몸이 떨리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흡족해하며 줄리 탄에 대한 감상을 꺼냈다. "멋있어. 반해버릴 정도야." "뭐?" 세이드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드러내며 줄리탄의 모습에 반한 듯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걸어왔다. 물론 자기야말로 언제라도 줄리탄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히 몸에 배어 있었다. "부셔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군. 너를 지금 당장 토막내서 죽여버리고 싶어. 그래서 네 놈의 시체 조각을 네 씰에게 억지로 먹이고 싶어. 너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어. 정말 예전하곤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군 . 어떻게 몇 년만에 그런 멋진 모습이 될 수 있는 거지? 무슨 일을 겪은 거냐. 응?" 소름끼치는 감탄사였다. 세이드의 눈빛은 진심으로 당장이라도 줄리탄을 토막내는데 최선을 다할 것 같은 삐뚤어진 흥분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줄 리탄은 그런 세이드의 엽기적인 호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너의 망상적인 미학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어." 세이드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세이 드는 아쉬운 듯 자신의 검과 욕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뭐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널 죽일 자는 따로 있으니까. 너 같이 귀여운 장난감을 놔줘야 하는 건 아까운 일이야." "뭐? 날 죽일 자라니!" "설마......" 카넬리안의 어깨를 불안한 예상이 치고 지나갔다. 줄리탄을 죽일 자. 그 건 분명히. "오펜바하를 만났을 때도 그 모습, 지킬 수 있길 기대하마. 날 실망시키 지 마라." 세이드는 이 세상 최강의 절대자의 이름을 꺼내며 알현실을 걸어 나갔고 줄리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쏘아볼 뿐이었다. 세이드가 마음에 드는 먹이를 놔준 경우는 태어나 이번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 역시 성장한 줄리탄의 끝을 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들었던 것일까. '오펜바하라고...... 그 자는 분명히 지룡의 수장.' "주, 주인님." 카넬리안은 줄리탄에게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 한 감정까지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줄리탄은 목숨을 잃을지 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카넬리안은 당장이라도 줄리탄을 꽉 껴안고 미안하 다며 몇번이고 소리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바라 보며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을 뿐이었다. 멋진 말로 그녀의 마 음을 안심시킬 언변 같은 건 없으니까 그냥 진심으로 웃어주는 걸로 그녀 를 편하게 해주고 싶다. "카넬리안. 돌아가자." "......주인님" "가서 맛있는 거 만들어 줄께." 줄리탄은 자신은 괜찮다는 듯, 불길한 앞 일 따윈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카넬리안의 작은 손을 슬며시 잡으며 죽음의 냄새만이 가득찬 알현실을 빠 져 나가는 것이었다. 줄리탄의 팔에 이끌린 카넬리안은 초연한 미소를 머 금은 줄리탄을 올려보며 - 자신이 인간이었다면 분명히 지금 눈물을 흘렸 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나의 사랑스런 테이머시여.' 2. 아직 분열된 헤스팔콘 왕국들에 대한 외교 문제와 더불어 가르바트의 참 전 때문에 세라피스를 비롯한 황실 식구들은 여전히 쉴틈 없이 지내고 있 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과 이종족들은 완연한 승리감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이종족들의 경우에는 세라피스가 '놀랍게도' 자신들 의 땅과 광산을 약속대로 공여해 준 것에 몹시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왁자지껄! 달라카트 제도의 많은 술집들은 갑자기 몰려든 이종족들의 인파에 너무 놀라 피난갈 준비까지 할 정도였다. 이제 정당하게 돈을 쓸 수 있는 이종 족들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트롤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술집으로 몰려 가 전쟁의 긴장감을 풀고 있었다. 메르퀸트 역시 잠시 동안의 '휴가'에 오 크며 엘프들의 손에 이끌려 술집에 가게 되었지만. "......" 메르퀸트는 술집 이층의 객실에 혼자 앉아 말없이 일층에서 올라오는 소 란스런 이종족들의 언어(자그만치 다섯종의 언어가 동시에 들려온다.)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돌아 올 거라는 확신과 함께. 똑! 똑! 노크라는 것을 배운 흑발의 다크엘프 한명이 메르퀸트가 있는 곳으로 어 색하게 들어왔다. 다크엘프 답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는 조끼에 가득 담긴 맥주를 묵뚝뚝하게 메르퀸트에게 건내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조금 당황하며 갈색거품이 보글거리는 맥주조끼를 받은 메르퀸트를 물끄 럼히 바라보던 다크엘프는 갑자기 메르퀸트의 뺨을 쓰다듬은 뒤에 또 덤덤 하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멍하니 있다가 문을 향해 외치는 메르퀸트. "고, 고마워요." 감정 표현에 야박한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호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상대의 뺨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지. 인간들이 보기엔 '거 되게 멋대가리 없네.' 라고 말하겠지만 전혀 사이가 좋지 않은 엘프에게 다크엘프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메르퀸트를 매우 좋아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대단한 종족간의 '발전'인 것이다. '......많다.' 엘프들 중에서도 먹는 량이 적은 메르퀸트는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얼굴만 한 맥주조끼를 보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성격상 호의로 받은 건 남길수도 없고. '저녁 식사...... 인가.' 결국 메르퀸트는 그 엄청난 잔에 작은 입술을 가져다대고 천천히 쭈욱 마 셔버렸다. 순수맥주 타입의 보리주인 달라카트의 맥주는 도수가 조금 부담 스럽게 높은 편이다. 예를 들어 줄리탄 같은 사람이 지금처럼 마셨다간 단 번에 얼굴이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며 눈 앞의 카넬리안이 둘로 보이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메르퀸트의 경우에는...... '아. 의외로 맛있다.' 아무 문제 없었다. 참으로 재미없는 엘프였던 것이다. 그때 메르퀸트가 열어 두었던 나무틀 창문 사이로 저녁 공기에 섞인 모래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락?" 메르퀸트는 기대에 찬 얼굴로 황급히 창가로 뛰어 갔지만, 그것은 티브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밤의 비사(飛沙)일 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착각이었나." "착각이 아냐."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말락의 짧은 목소리. 그러나 놀란 표정의 메르 퀸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시간의 때가 묻은 회백의 벽 밖에는 없었다. "마, 말락? 어딨어? 지금 여기 있는 거야?" "미안. 아직 몸을 만들기엔 힘이 부족해. 솔직히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 들었어." 육체가 없이 일렁이는 말락의 목소리는 분명히 지쳐 있었다. 아마 인간으 로 치자면 큰 중상을 입은 격이리라. 그의 목소리를 전해 들은 메르퀸트의 가슴이 아파 왔다. 그는 말락을 매만지는 듯 하얗게 들어난 가녀린 두 팔 을 허공에 들어 올리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나, 분명히 말락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고 있었지 만...... 그래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까......" "이런 일로 울지마. 내가 미안해지니까." 메르퀸트의 은발이 찰랑거리며 말락의 기운이 그의 몸을 포옹하듯 휘감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메르퀸트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그의 따뜻한 기운을 받 아들였다. 3. 헤스팔콘 황제의 죽음을 확인한 줄리탄 일행은 이르 성 근처의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이의 배에 승선해 달라카트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세이드 와 만나 별일이 없었던 것은 천만 다행이었지만 무엇보다 북해기사단과 조 우하지 않은 것에 감사한 그들은 배에 타자마자 애써 참아왔던 피로가 터 지며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줄리탄이 천금과도 바꾸기 싫 은 단잠에서 깨어난 때는 물기 어린 별들이 촉촉이 하늘을 메우고 있는 완 연한 밤이었다. "이거 드세요 줄리탄 님. 제가 만들었어요." "응? 아, 고마워. 그레시다." 아직 잠에 취해 있던 줄리탄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앉아 있는 그레시다 가 건내주는 작은 잔을 조금 당황하며 받았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그 차 는 분명히 그레시다가 모아두었던 향엽(香葉)을 우려 만든 것이리라. 피로 가 풀어진다는 그런 약차였다. "너 설마...... 내가 자고 있을 때 계속 옆에 있었던 거야?" "예. 일어나시면 드리려고요." "그, 그랬구나. 미안하네." "아니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서." "아냐. 정말 고마워." 이렇듯 그레시다는 이미 줄리탄이 자신의 주인이 아님에도 이리도 헌신적 으로 감동 받을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는데 정작 줄리탄의 씰인 카넬리안 은 주인이 깨어났건 말건 선상에 서서 자기 고민에만 빠져 있었다. 선상에 나온 줄리탄은 마치 빨간 화초처럼 선미에 자리잡고 카넬리안의 모습을 보 았다. 어두운 밤에도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아서 - 확실히 숨어 있어도 발견하기는 쉬웠다. "카넬리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아? 주인님 일어났어? 돌아오면 맛있는 거 만들어 준다면서 오자마자 잠 들어 버리다니. 신용 없어 정말." "몸이 말을 안들을 정도로 피곤해서 그만 쓰러져 버렸네요. 미안하게 되 었습니다." 뻔뻔스런 그녀의 장난끼에 줄리탄은 피식 웃으며 그녀 옆에 섰다. 북해 근처라 드문드문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꽤나 쌀쌀해서 잠의 여운이 순식간 에 달아나 버린다. "아참. 이 옷 빌려 입었어." "응. 어울린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에겐 커 다란 것이라 셔츠소매 밖으로 손가락 끝만 간신히 나올 정도이고 깨끗한 옷깃 사이로 그녀의 가슴선이 살짝 보였다. 뭐 이런 모습도 나름대로 귀엽 긴 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카넬리안이 줄리탄의 헐렁한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흠칫 놀란 줄리탄. "왜, 왜 그래?" "추워서." "응. 그랬구나." "으이구!" "왜?" "쳇.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뭐가 서운한지 입을 오물거리며 줄리탄의 어깨에 폭하고 머리를 묻었다. 이 남자 잘 나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수룩할 때가 있단 말야. 둔감한 것도 정도 것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분위기 깰 까봐 애써 참고 있는 카넬리안에게 다가온 자는 톨베인이었다. 이 청년은 정말 잠이 적어 서 벌써 일어나서 선상에서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야 줄리탄." '제기랄!!' 카넬리안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사랑을 실현하기엔 방해요소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빨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카넬리안 덕에 의아한 얼굴이 된 톨베인은 자신이 온 목적을 말 해 주었다. "줄리탄. 침로 방향으로 전함 한척이 오고 있어. 처음 보는 배 형태인데, 엄청난 속력이야." "뭐!" 톨베인의 말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했지만 그 보고 내용은 줄리탄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지만 엄청난 시력을 가진 톨베인 이 확인한 것이니 틀릴 리가 없었다. "모두 깨우고 다른 배에도 알려! 혹시 모르니까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 "그런데 이상해." "뭐가." "단 한 척이란 말야. 한척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바보 해군이 있을까?" "......" 톨베인의 말마따나 한척으로 적 선단에 공격을 감행하는 해군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설마 어떤 다른 목적으로 접근하는 배일까. 그때 카넬리안은 굳은 얼굴로 선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분명 미스트랄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리라. "카, 카넬리안 왜 그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 익숙하지만 불안한 기운을 확실히 포착한 붉은 눈동자가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4. "대체! 누가 오고 있다는 거야!" 자신의 각도를 들고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선상으로 뛰어나 온 시오는 하늘에서 번뜩이는 섬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저건......" 별이 아니었다. 마치 낮게 날아드는 유성과 같은 모습. 그리고 그것은 곧 장 줄리탄의 배 위로 닥쳐오는 것이었다. "서, 설마 기사?" 검을 뽑아든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가운데 빛의 새처럼 날아들던 그 '유성 '은 중력을 무시한 듯 돛대와 팽팽히 연결된 외줄(fore gallant brace) 위 로 고고히 내려섰다. 갈색의 망토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어떻게 저런 짓이...... 가능한 거야."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이 높은 위치의 돛줄 위에 서있는 자는 바로 신창( 神創) 레오폴트 폰 매소크였다. 그녀의 청명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밤의 바다를 가르며 선상의 사람들에게 울렸다. 그 말은 삼킬 수 없는 괴로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배에 카넬리안이라는 씰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부터 오펜바하 황제 폐하의 칙령으로 그 씰을 가져가겠다. 방해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는다." 가느다란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길고 육중해 보이는 법창 알-파티아를 들 고 있는 레오폴트는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보다 가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위압적으로 밑을 향해 떨어졌다. "카넬리안이 물건이냐, 가져가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못 데려가 !" "그럼 죽어라!" 가장 먼저 떨어지는 레오폴트를 향해 도약한 것은 시오였다. 각도를 뽑아 들고 뛰어오른 시오를 향해 레오폴트는 가차없이 자신의 흑색 장창 알-파 티아를 휘둘렀다. 파각! 시오는 그 창과 부딪친 순간 오른쪽 어깨가 부서져 버린 것을 느꼈다. 세 이드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그녀였다. 압도적인 위력의 차이에 입술을 깨문 시오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빠르게 왼손으로 검을 옮겼고 자신의 가슴 을 향해 창을 겨누는 레오폴트를 향해 찔렀다. 거의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 이었다. "흥!" 그러나 레오폴트는 새하얀 검날을 가볍게 피하며 시오의 어깨에 창끝을 박았다. "으아아아아악!!" 그리고 둘은 바닥에 추락했다. 쿠쿠쿠쿵! 갑판이 부서져 버리며 시오는 레오폴트의 창에 관통된 채로 추락해 버렸 고 그 충격에 곧 정신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레오폴트는 시오의 몸에서 창을 뽑으며 차가운 눈매로 자신을 둘러싼 전투원들을 바라보았다. 세이드 앞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전쟁의 여신 같은 모습이었다. "난 절대 끌려가지 않아!" 그런 레오폴트 앞에서 외친 것은 붉은 빛을 흘리는 미스트랄을 들어 올린 카넬리안이었다. 레오폴트는 그런 그녀의 결의에도 조금도 눌리지 않으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순순히 가는 게 좋아.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여간한 기사와도 싸울 수 있는 시오를 단번에 쓰러트린 레오폴트라면 선 원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카넬리안은 레오폴트가 다가올 때마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그녀의 빈틈을 노렸다. 그때 검을 길 게 뽑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카넬리안에게 접근하지 마!" 레오폴트는 옆에서부터 닥쳐오는 살기 띈 빛무리에 놀라며 창을 재빠르게 돌려 검날을 막아냈다. 그리고 시퍼런 섬광이 선상에 터지며 혼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이 그녀의 몸을 때렸다. 오펜바하의 선풍(旋風) 같은 위력이다. "누, 누구냐 너는!" "카넬리안의 테이머, 사모예드 줄리탄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라!" 인피타르로 레오폴트의 창을 계속 누르고 있는 줄리탄은 창백한 아우라에 둘러싸인 채 강하게 말했다.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어쩌면 이 자는 세이드 만큼이나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줄리탄의 냉기같은 힘이 레오폴트의 목을 조르는 엄청난 위압감이 되어 전 해진다. "큭!" 아마 다른 기사였다면, 그리고 보통 창이었다면 단번에 두 조각이 나서 일격에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모든 기력을 모아 줄리 탄의 검을 밀쳐내며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일단 거리를 띄운 뒤에 긴 창 격으로 치고 들어갈 작정.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빠르다.' 줄리탄이 레오폴트를 쫓으며 비상하는 모습은 멀리서 보기엔 마치 레오폴 트를 집어삼키려는 시린 원한령(怨恨靈)같은 두려운 모습이었다. 레오폴트 는 처음으로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어떻게 방어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지켜보고 있자니 한심하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듯한 목소리가 끼어 들며 검은 폭풍 같은 태클이 줄 리탄의 몸을 강타했다. 몸이 산산이 깨져 버리는 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방어하지 못하고 퉁겨 나간 줄리탄은 후미의 돛대와 충돌하며 갑판으로 떨 어졌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돛대가 무너지며 선상을 덮쳤다. "안돼!!!" 갑작스런 습격에 추락한 줄리탄은 입가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카넬리안은 죽었을지도 모를 줄리탄을 향해 아수라장이 된 선상을 달려갔 지만 곧 그 앞을 줄리탄을 습격했던 근육질의 사내와 그를 따르는 두 남자 가 가로막았은 것이다. 카넬리안은 그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가랑." "하, 하켄!" "하핫! 너의 그런 얼굴 처음 보는데 그래. 예전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말야. 와하하하! 힘을 다 잃고 이제는 인간을 좋아하게 된 건 가? 정말 처량한 모습이야!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맞는 말이야! 크하하하!!" 하켄의 말에 다른 두 사내들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들은 가 이스트 라이히, 즉 지룡들이었던 것이다. 하켄을 빈사상태로 만들었던 예 전의 카넬리안을 떠올리며 - 어쩔 줄 몰라하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지 금의 모습에 그들은 아주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쓰러진 줄리탄을 가 로막고 있는 하켄 일행에게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비켜! 어서 비키란 말야!" "그건 안되지. 생각 같아선 이 기회에 예전의 빚을 몇 배로 갚아주고 싶 지만, 오펜바하 님의 명령이니까 널 죽일 수는 없어. 하지만 어떻게 괴롭 혀 줘야 네 마음이 아플까? 저 나약한 인간을 죽여줄까?" "주, 주인님을 건드리지마!" "인간에게 주인님이라? 너 정말 가랑이냐? 믿을 수가 없어. 이렇게 변하 다니." "난 카넬리안이다. 가랑이 아냐! 예전 이름으로 날 부르지마!" 하켄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예전처럼 고귀할 정도로 냉정하고 오직 테 싱의 명령만을 따르는 두려운 가랑의 모습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을 만큼 가냘픈 - 아주 인간을 닮은 모습이었다. 한심할 정도야! 라고 하켄은 소리쳤다. "나의 테이머를 그냥 놔둬...... 오펜바하에게 갈 테니까." 카넬리안은 죽음보다 가혹한 고통을 느끼며 짜내듯이 말했다. "부탁이야. 제발." "크하하핫! 멋져 지금 그 표정! 너한테서 그런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아주 멋...... 응?" 하켄은 수백년 동안 이렇게 기쁜 적은 없었다며 통쾌하게 웃어 젖혔지만 곧 잠잠하던 바다가 미친 듯 일렁이는 모습을 보며 말을 멈추고 주변을 돌 아보았다. 그리고 곧 바다의 분노처럼 배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 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설마...... 벌써 여기까지." 그 순간 빛이 터져 나오는 바닷 속에서부터 마치 융기(隆起)하는 산 같은 절대적 생명체가 솟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신성한 푸른 비 늘을 번뜩이는 해룡의 수장, 물키벨이었다. 하켄과 다른 두 지룡들은 다리 가 굳어버려 본래의 모습으로 변하지도 못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물키벨의 두려운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 물키벨." "난 분명히 경고했었다. 오펜바하의 졸개들아." 물키벨의 독기어린 전언은 지룡들의 마음 속을 두렵게 울렸다. 평소의 ' 인간적인'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위압적 절대자의 모습으로 물키 벨은 지룡들을 향해 격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키벨의 시선 속에 들어간 지룡들은 죽음을 느꼈다. 바다에서 물키벨과 대적해 이길 수 있는 자는 아 무도 없다. "도, 도망쳐야해......." "죽어버려!!" 물키벨의 커다란 목소리는 그대로 살의를 띈 힘이 되어 지룡들을 덮쳤고 그와 함께 하켄 뒤의 두 지룡들의 몸이 퍼억 소리와 함께 갈가리 찢어져 버렸다. 하켄 역시 피를 쏟으며 내상을 입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겨우 겨 우 즉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켄은 도망칠 길 조차 없는 물키벨의 심판대 앞에서 몸을 떨며 다음 일격을 운명처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물키벨은 으르렁거리며 곧장 하켄을 찢어죽여버릴 기세였지만 그때 물키벨 근처로 다가온 지룡들의 배에서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의 명령으로 저는 당신을 막아야 합니다." "너는 설마 미쉘?" 그 배의 선수에는 오칼란트의 섬세한 황실 예복을 곱게 입은 오펜바하의 씰, 미쉘이 서 있었다. 물키벨의 분노가 불러일으킨 광풍에 짧은 회색빛 머리칼이 흩날리는 미쉘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키벨 의 씰이었던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물키벨 님." 마법구사에 대해서는 씰 중 최강이라는 미쉘은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모 으기 시작했지만 물키벨은 그런 그녀를 공격할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도 좋아했고 그녀가 도망칠 정도로 껴안아 주곤 했던 그런 미쉘을 절대로 해 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펜바하도 그걸 알고 미쉘을 보낸 것이리라. -Blind Talk 한번에 읽으시기에 양이 좀 많죠? 두편자리 묶어서 올립니다. 나름대로 연 참 같은 거겠죠? 뭐 매일 올리지도 못하는 놈이 무슨 호기를 부려 두편을 묶어 올리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만. 우물우물 옆에선 kiyu군이...... 이번엔 '어드밴스드 대전략'을 하고 있습니다.-_-; (게임기획자인 만큼 '내게 게임은 공부다!'라고 주장하는 녀석. 쯧.)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대전략 시리즈를 좋아하곤 있지만... 이 게임은 한번 손을 대면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몇개월이고 패드를 놓을 수가 없는 괴작 이니... 몸 망치기 싫으니까 아주 조심조심 플레이하고 습니다. 앗! 앗! 아참 기쁘게도 제가 소속되어 있는 출판사에서 좋아하는 작가 윤 대녕 님의 싸인이 들어 있는 그 분의 신작소설책을 전해 주었네요. 아주 고마워서 혼났습니다. 역시 출판하면 좋은 일도 생기네요... 아. 그리고 아무래도 예전에 마스트(mast)나 세일(sail), 삭구(ragging)등 으로 표현되었던 범선의 용어들은 돛대나 돛줄 등으로 바꿔서 표현해 봤습 니다. 아무래도 후자쪽이 읽기 편하시겠지요? 자료를 긁어모아서 뭐가 뭔 지 알아내는 것 까진 좋지만 그렇다고 드래곤 레이디 같이 소프트한 소설 에서 대뜸 '병조장의 고함에 미젠 로어마스트와 연결된 미젠야드의 동삭이 감기자 라텐 세일이 곧 팽팽히 바람을 머금기 시작했다.' ...이라고 나와 버리면 재미 하나도 없을 뿐더라도 뭔소린지도 알 수 없 을 듯.(허먼 멜빌도 이런 짓은 안할 꺼다.-_-) 게다가 쓰는 저도 무지막지 한 주석을 달아야 하고 쓰기도 힘들어지니까 이런 건 편하게 패스하고 그 보다는... 현재 굳어있는 표현력을 업그레이드하는데 집중해야 겠습니다. 요리도 망치고 운동도 제대로 안되고 최근 우울함의 누적입니다 그려. (아. 먹이 주며 귀여워하던 도둑 고양이들은 드디어 자기 길을 찾아 떠나 가 버렸습니다. 갑자기 집이 텅빈 기분이 드는군...)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 주신분들께 항상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곧. E-MAIL : billiken@hananet.net 보니엠의 Sad Movies를 들으며... (예전 육각수의 어떤 노래 인트로에 잠깐 들어갔던 것 같던 기억이...-_-) 『SF & FANTASY (go SF)』 26396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4-1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5/30 20:24 읽음: 13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4-12 : 당신과 함께 영원히 관련자료:없음 [71496]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5-29 07:18 조회:764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4-12 : 당신과 함께 영원히 Without (지난 줄거리) 세이드에게 오펜바하를 곧 만나게 될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해 들은 뒤 얼마 안되어 달라카트로 돌아가는 줄리탄 일행은 지룡들의 습격을 받게 된 다. 카넬리안을 지키기 위해 인피타르를 휘두르는 줄리탄이었지만 하켄의 습격을 받고 줄리탄은 정신을 잃게 되고, 절대절명의 순간 물키벨이 나타 나게 되나 그녀 역시 자신의 예전 씰이었던 미쉘을 보며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게 된다. 1. 이 세계의 먹이사슬을 단순하게 풀어놓는다면, 응당 그 최종포식자는 용 이 될 것이다. 그러니 감히 누가 바다 한복판에서 해룡의 수장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오펜바하가 물키벨을 향해 꺼낸 카드는 단순히 강력한 힘만 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물키벨의 약점이었던 것이다. 마치 자식에게 칼을 쥐 어주고 그 부모를 찌르게 만드는 것처럼 자신을 공격하려는 미쉘 앞에서 물키벨은 아무 반격도 할 수 없었다. '미, 미쉘! 하지마! 나한테 그러지 마!' 물키벨은 자신을 향한 마력을 모으고 있는 미쉘을 향해 외쳤지만 미쉘은 죄스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조그맣게 말할 뿐이었다. 바람에 뒤섞인 그 녀의 목소리가 습하게 울린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테이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씰 입니 다." 크라켄과 레비아탄이 전속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의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도시를 단번에 소멸시켜 버릴 정도의 마력 을 몇십초만에 집중시킨 미쉘의 마주보는 두 손바닥에서 사람들 전체를 삼 켜버릴 것 같은 인공적인 빛무리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2. 줄리탄은 쓰라린 고통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침대의 시 트 감촉이 느껴진다. 눈앞에는 메이를 비롯한 동료들과 당장이라도 울어버 릴 것 같은 물키벨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 으키다가 숨이 멎을 듯한 통증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카넬리안은! 카넬리안은 어떻게 된 거야!" "이제 정신이 들어? 다행이야. 생각보다 일찍......" "카넬리안은 어딨냐고!" 메이의 말을 막으며 줄리탄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모두 아무 대답도 없 기에 줄리탄은 휘청거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에서 카넬리안의 행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길. 왜 언제나 헤어지는 건 바다에서일까. 줄리탄의 가슴이 찌르듯이 아파 오는 것은 단지 육체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리라. "줄리탄. 미안해...... 나 어쩔 수가 없어서. 나 때문이야." 부상을 당했는지 안색이 나쁜 물키벨이 줄리탄에게 다가와 울먹이며 말했 다. 그녀가 미쉘을 차마 처치하지 못한 틈을 타서 무인지경의 카넬리안을 납치한 하켄이 오펜바하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줄리탄은 스르르 고개를 숙 이자 제법 길어진 그의 진한 남청빛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엉망이 되어버 린 몸의 통증 때문에 금새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밑으로 툭툭 떨어진다. "줄리탄. 시오도 지금 위급해. 일단 달라카트도 돌아가서......." 물키벨은 정지해 버린 듯 초점 잃은 줄리탄의 눈빛을 보며 거의 애원하다 시피 그를 달래려고 했지만 줄리탄은 망연자실하며 침대 곁에 놓여 있는 미스트랄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줄리탄은 입을 꽉 다물며 인피타르 를 집어 들었다. "줄리탄!" 굳은 표정의 줄리탄은 당장 시트를 박차고 흔들거리는 몸을 추슬리며 일 어나려 했다. 미친 짓이다. 오펜바하에게 제 발로 가겠다는 것이다. 물키 벨은 그런 줄리탄의 결심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듯 그의 허리를 꽉 잡으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마! 오칼란트 제국에 가겠다고? 오펜바하와 싸 우겠단 말야? 그 몸으로!" "저 혼자 가는 거에요. 다른 분들은 빨리 시오를 달라카트로......" "그런 문제가 아니야! 오펜바하의 영역에서는 나도 널 도와줄 수가 없어! 그리고 그 몸으로 인피타르를 뽑았다간 살아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네 몸은 완전히 망가져 버릴 꺼야! 그러니까 용들의 싸움은 우리들에게 맡기고 좀 쉬란 말야!" "이건 용들의 싸움이 아니에요!" 줄리탄은 커다랗게 소리치다가 가슴이 아픈지 눈을 찌푸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물키벨을 향해 말했다. "이년전 카넬리안이 똑같이 이 바다 위에서 절 떠났을 때....... 내게 그 녀를 뒤쫓을 힘이 있었다면 다리가 부러지고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 하지만......" "이제는 힘이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카넬리안에게 가야할 이유는 충분 합니다 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물키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절대로 줄리탄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 을 느낀 것이다. 이 고집불통 바보 멍청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또 한 편 왠지 그들의 관계가 부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비난할 수도 화낼 수도 없 었다. 벽에 기대어 놀랍도록 침착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레비아탄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곳은 바다까지입니다. 오칼란트 대륙으로 당신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줄리탄 님." "레비야!" "물키벨 님께서 인간들을 도와준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레비아탄은 수려한 얼굴에 드문 미소를 보이며 물키벨을 바라보았다. 3. 의기양양한 하켄의 손에 이끌린 채 오펜바하가 있는 황성 오버암메르가우 로 잡혀 온 카넬리안은 대기실에서 옷이 갈아 입혀진 뒤 두꺼운 융단을 밟 으며 부채형 둥근 천장의 회랑을 지나 소접견실(小接見室)로 끌려 올 때까 지도 아무 말도 없었다. 하켄의 손에서 벗어나려던 가는 손목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찡그린 표정한번 없었던 것이다. 호사스런 청동의 이중격문(二重隔門)을 열고 들어간 소접견실에는 소년 같은 외모의 오펜바 하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야 가랑. 아니 이제 카넬리안인가? 여전히 위험할 정도로 아름 답네." 부드럽게 발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카넬리안의 몸은 영원히 조금 미성숙으로 남아 있는 매혹적인 굴곡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늑대 를 닮은 노란 눈동자의 오펜바하가 그런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돌렸다. 오펜바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높은 가죽 소파에서 내려와 카넬리안에게 걸 어갔다. "그때는 미안했어. 솔직히 인간들을 배신시켜서 널 잡지 않았다면...... 테싱을 묶어둘 수 없었을 테니까. 인간들 속에서 네가 더렵혀진 것, 나도 가슴 아프다고." "......" "화났나 보네? 그런 얼굴 하지마. 뭐 이번에도 결국 지룡의 수장이라고 하기에는 치졸한 짓거리로 널 잡았지만...... 그게 내 한계야. 이해해 주 길 바래." 오펜바하가 꺼내는 과거의 이야기에 카넬리안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절대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펜바하의 속삭임은 독약처럼 카 넬리안의 귓가로 흘러 들어가 겨우 치유되고 있었던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 았다. 새장 속의 새를 호기심만으로 죽일 수 있는 소년처럼 오펜바하는 감 정의 바닥이 긁혀버린 카넬리안을 올려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아. 너도 씰이니까 네 테이머를 죽이고 싶지는 않겠지? 나도 마찬가지 야. 내 손을 더럽혀 가면서 까지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그냥 너는 얌전히 내 씰이 되면 돼. 내 힘이라면 강제로 널 나의 씰로 만들 수 있으니까. 넌 단지 잠시만 참으면 되는 거야. 괜찮은 방법이지?" 오펜바하는 씰인 카넬리안의 입장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외로움을 잘 타 는 그녀가 줄리탄을 사랑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줄리탄이 죽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서 오펜바하는 마치 줄리탄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처럼 카넬리안이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다. 하지만 카넬리안은 오펜바하를 향해 고개를 들며 지금 입장에 어울리 지 않는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오펜바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 가랑? 뭐가 웃긴 거야?" "아직 나의 테이머를 잘 모르는군." 카넬리안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고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가 접견실의 공기 를 가늘게 울렸다.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빨간 눈동자로 오펜바 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바보야. 그래서 분명히 올 꺼야. 내가 오지 말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이곳으로 올 꺼야." 어떤 바보가 제 발로 오펜바하에게 오겠는가. 그것도 고작 씰 하나 때문 에? 하지만 카넬리안의 말은 진심이었고 오펜바하는 그런 그녀를 말 없이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죽일 수밖에 없군." 카넬리안은 조금은 의아했다. 인간이라면 수억명을 몰살시켜 버리는 것에 도 별 죄책감이 없을 것 같은 오펜바하가 줄리탄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주 저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브륜힐트와 함께 제이 미아가 들어왔다. 제이미아가 성 지하의 인공정원에서 넝쿨에 얽힌 나선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온 것은 어쩌면 이 황성이 만들어지고 처음일지 도 모른다. 놀란 얼굴에 카넬리안을 제이미아는 포근한 미소로 답례했다. "제이미아 님......." "네게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제이미아를 데려왔어. 둘 다 오랜만이지?" 어떤 목적인지 오펜바하는 카넬리안을 제이미아와 대면시켜준 것이었다. 천년수(千年樹)의 정령 같은 제이미아는 카넬리안을 향해 따뜻하게 말했다 . "계속 당신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외롭지 않은가요?" 씰들에게도 가족관계 같은 것이 있다면 제이미아는 모든 씰들의 부모와 비슷할 것이다. 카넬리안은 제이미아를 바라보며 계속 눌러두고 있던 마음 에 새겨진 말들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오펜바하가 바라보고 있어도 상관 없어. 예전의 자신과 - 가랑과 지금의 자신이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한심 하게 약해졌다고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제이미아 앞에서 씰인 자신 이 가진 불손하고 무모한 욕심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를 만나 처음으로......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의 그런 말에 제이미아의 별을 닮은 눈동자가 무언의 위로를 해주었 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사뿐히 카넬리안 앞에 다가서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촉촉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진다. "바보 같이...... 내가 씰인데, 내가 그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그 자, 그런 것 아무래도 좋다면서...... " 카넬리안은 괴롭게 흔들리는 눈을 감으며 몸을 떨었다. 소리내서 울고 싶 었다. 이번만큼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 하는 것처럼 절대로, 아무리 원해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당신은 행복한 씰이에요.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카넬리안은 아주 우습게도 이런 상황, 이런 곳에서 자신이 정말로 행복하 다는 것을 느끼며 인간 같은 온기가 흐르는 제이미아의 몸을 껴안았다. 줄 리탄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소한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왜 그렇 게 고마웠을까. 줄리탄을 놓쳐도 결국 잃어버리는 것은 사소한 기쁨과 추 억뿐인데...... 그 사소한 것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녀는 눈물 없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 주인님이...... 왔으면 좋겠어요. 정말 뻔뻔한 여자에요. 오면 위험 하다는 걸 알면서도......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녀는 절대로 잃고 싶지 않다며 '인간처럼' 제이미아에게 계속 외치는 것이었다. 모든 씰의 중심점이자 테이머 없이도 깨어있을 수 있는 제이미아였지만 그녀도 그런 카넬리안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 는 카넬리안을 품에 두고 말없이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카넬리안은 자신 을 바라보는 브륜힐트의 눈 속에 숨어 있는 질투와 분노의 미립자를 눈치 채지 못했다. 브륜힐트는 오직 궁룡 테싱만을 홀로 사랑했던 지룡의 여자 였던 것이다. 4. 오칼란트의 항구 라마르세예즈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들은 난데없는 해안 경계 훈련에 투덜거리면서도 전함에 승선하여 항구 근해를 순시(巡視)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이 밤중에 그것도 감히 오칼란트의 항구로 누가 들어 온단 말인가. 간혹 보이는 것은 무역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상선들 뿐. 게 다가 근해에 폭풍이라도 지나는 것인지 날씨는 차가운 비가 부슬부슬 내려 선상에 있는 사람들의 몸을 서럽게 떨게 만들었다. "제에에기라알! 이런 지랄 같은 날에는 부두 쪽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 는 술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그런 말하지마! 진짜 먹고 싶어지니까. 빌어먹을. 얼어죽을 것 같군. 날 이 대체 왜 이래?" 배 위에서 경계경비를 하고 있는 해군들은 저마다 짜증을 부리며 저 너머 보이는 항구 라마르세예즈의 오밀조밀한 불빛들을 부러운 듯 눈에 담았다. 그곳의 허름한 당골 술집에 가서 오칼란트 특산의 뜨거운 술을 들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 바다를 지키라는 갑작스런 명 령 덕에 비까지 오는 날, 꼴사납게 선상을 배회하는 처지라니. "젠장.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어? 어어?" 군인들은 동시에 균형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바다가 살아 있 는 듯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떨어지는 빗줄기도 급속도로 굵 어지며 따갑게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격동은 순 식간에 돛대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거세져서 군인들이 도저히 몸을 일으 키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현상'이다. "세상에! 대체 뭐야 이 진동은!" "바, 바다 속에 엄청난 물고기가 있는 것 같아!" "멍청아!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들이 저마다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려다 쓰러지고 있을 때 배 밑으로부 터 갑판이 부서지는 소리가 올라오는 것을 들었다. 거대한 군함은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격심하게 튀어오르고 있었다. "이 소리는 설마......"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 바로 앞에서 선상을 찢으며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물길의 칼날을 바라보곤 숨이 멎어 버리는 듯 했다. 이런 무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바다의 이빨이 들어 난 듯한 그 힘은 바로 레비이탄의 것 . 레비아탄의 위력은 물고기를 자르는 거대한 도살검(屠殺劍)처럼 배의 몸 통을 조각 내며 침몰시켜 버렸다. 5. 부두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당황한 외침이 들려기 시작했다. "이, 이봐! 저기 배들 좀 봐!" 부두에 있는 취객들은 처음에는 오늘따라 술에 과해서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다. 항구 앞바다에 떠 있던 군함들 위로 직각의 물길이 솟아올라 하나 씩 산산조각이 나며 침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거대한 파괴의 손길이 항구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며 자신들이 본 것은 절대로 헛것이 아니고 또한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뭐, 뭔가 항구로 오고 있어!" "도, 도망쳐!" 바다에서 레비아탄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항구를 막고 있는 오칼 란트 전함들을 밀어버리며 만들어 준 '길'로 적색기함 일루미네이터가 모 습을 들어냈다. 일루미네이터는 레비아탄이 일으킨 파도에 정박해 있던 크 고 작은 배들이 모조리 전복되어 버린 극도혼란의 선창에 안착했고 선수 (船首)에 인피타르를 들고 있는 줄리탄의 나타났다. "이봐. 줄리탄!" 톨베인이 주저없이 오펜바하의 땅에 뛰어 내리려는 줄리탄의 어깨를 잡으 며 말했다. "내가 따라가 봐야 방해만 될테니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절대로 죽 지 마라." 톨베인은 물키벨이 자신에게 했던 부탁을 줄리탄에게 그대로 전해주며 물 키벨이 품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줄리탄은 그런 톨베인에 게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일루미네이터에서 홀로 뛰어 내렸다. 죽게 된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은 카넬리안 을 포기하고 다음을 노린다는 변명 따위로 자위하며 달라카트로 돌아갈 때 - 바로 그 때 자신이라는 존재는 가치를 잃고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 라져 버린다. 그렇게 허무하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 문에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펜바하에게 가는 것이다. 줄리 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탄 님. 오펜바하가 있는 황궁까지는 이곳에서 약 일주일의 거리입니 다. 부디 카넬리안 님과 함께 돌아오시길.' "고마워요. 레비아탄 씨." 용의 입장이라 모습을 들어내지 않은 레비아탄의 목소리가 줄리탄의 마음 에 울렸고 줄리탄은 나직하게 대답하며 곧장 부두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 - 붉게 펄럭이는 망토를 지켜보는 선상의 동료들 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톨베인은 담배를 말아 피우며 하얗게 내뿜었다. "쳇. 정말 욕심도 많은 놈이야. 사람이 죽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는데...... 아마 저 녀석은 죽더라도 별처럼 죽겠지. 죽고 나서도 반짝거 리는......" 톨베인은 드물게 유행가 같은 말을 계속 되뇌며 담배를 입에 물고 두 손 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선실로 들어갔다. 왠지 줄리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잠들고 싶었다. "메이 제독. 이러다가 오칼란트와 전쟁이라도 나는 것이 아닐까요?" 불안한 목소리로 한 선원이 메이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항구를 부셔 버린 건 레비아탄의 짓이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달라카트가 오칼란트를 침 공한 것이라 말해도 변명할 구석은 없다. 게다가 이것은 세라피스의 칙령 없는 단독 행동. 메이는 대파(大破)된 선착장을 난감하게 돌아보다가 될대 로 되겠지, 라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세라피스 폐하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죽어라 말 안듣는 위 험한 부하들을 등용한 것은 황제인 내 책임이지 당신들 책임 아니니까 상 관하지 말고 밀어붙이시오. 라고." 세라피스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줄리탄을 막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뒷감당은 자기가 할 테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을지도 모른 다. 메이는 조용히 줄리탄이 사라진 부두를 내려보다가 소리쳤다. "일루미네이터, 전속 이탈한다! 우리도 줄리탄이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하니까 상대의 사정권 밖으로 빠져나가서 대기한다. 줄리탄이 돌아오기 전 에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테니까." 6. 도로가 잘 닦여 있는 오칼란트는 항구에서 벗어나는 대로를 따라가면 황 궁 오버암메르가우로 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줄리탄이 황궁까지 가 는 것을 조용히 놔 둘리는 없지만. 줄리탄 역시 그 사실은 각오하고 있었 다. 오펜바하를 만나기 전까지 몇 명의 적을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 고 그 첫 번째 상대는 줄리탄이 항구 시가지로 진입하자마자 만나게 되었 다.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던 큰 키의 사내는 줄리탄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인간 주제에 오펜바하 님을 귀찮게 만들다니. 해룡들의 도와준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보지?" "비켜라." "내 이름은 스컨드렐. 네 놈의 목을 가지고 황궁으로 돌아가야겠다." 스컨드렐은 가이스트 라이히의 일원인 지룡이었다. 즉, 육지에서는 기사 를 월등히 능가하는 최강, 최악의 상대. 아직 본모습을 들어내지는 않았지 만 지금 상태로도 위협적인 상대임에 분명했다. "비키라고 말했다!" 줄리탄이 튀어나가며 스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피타르를 뽑았다. 뛰어 가는 줄리탄의 몸을 점점 푸른 기운이 감싸기 시작하며 그의 모습은 마치 밤의 항구를 청색의 가시선(可視線)으로 갈라놓는 듯 빛났다. '흐읏! 인간? 저렇게 빠르다니!' 상대의 몸을 꿰뚫어 버리는 광선처럼 날아든 줄리탄에게 방심하던 스컨드 렐은 급히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며 막았지만 그와 함께 인피타르의 푸른 섬광이 터지며 스컨드렐의 검이 밀려나 버렸고 인피타르를 뒤로 잡아 끈 줄리탄의 다음 일격이 터졌다. "이, 이 놈이!" 곧장 인피타르가 금속을 찢듯 스파크를 내며 스컨드렐의 복부를 가르며 지나갔다. 몸이 타버리는 듯한 충격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 다. "크으아아악!" 스컨드렐은 자신의 배를 쥐며 검을 높이 들어 줄리탄의 목을 쳐버리려고 했지만 차가운 눈빛 그대로의 줄리탄은 인피타르로 스컨드렐의 가슴을 찔 렀다. 키이이이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뚫리며 시퍼런 빛이 스컨드렐 의 등뒤로 터져 나온다. "크르르륵!" 몸이 뚫리며 스컨드렐은 모든 힘을 빼앗겨 버린 듯 힘을 잃고 무릎을 꿇 었고 줄리탄은 그의 목에 차가운 입김을 뿜는 인피타르를 갖다 댔다. 그 들 주변에 미늘창을 든 채 서 있던 경비병들은 그 광경에 넋이 나가 있었 다. 공포심을 느끼기엔 너무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떤 싸움에서도 단 한번도 상처 한번 입은 적 없는 스컨드렐이 처음 보는 앳된 청년에게 몇 초만에 쓰러진 것이다. "급소를 찌르지는 않았으니까 빨리 치료하면 살 수 있을 거다." 줄리탄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고 수치심에 몸을 떠는 스컨드렐을 지 나쳤다. 스컨드렐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카넬리안 에게 가야 한다. 그때 송곳니를 들어낸 스컨드렐은 고개를 돌리며 괴기스 러운 눈빛으로 줄리탄을 노려보았다.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급소 따윈 없어......" 줄리탄은 등뒤에서 갑자기 커지는 힘을 느끼며 급히 몸을 돌렸지만 그러 나 그 순간 줄리탄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스컨드렐의 주먹에 얼굴을 맞으 며 몸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달빛을 등지며 뛰어오른 스컨드렐의 거대한 그림자는 공중에 떠 있는 줄리탄의 몸을 다시 한번 강타했고 그 엄 청난 힘에 줄리탄은 곧장 날아가며 붉은 사암(砂巖) 건물과 충돌했다. 폭 탄이 터지는 듯한 충돌음과 함께 이층의 건물은 단번에 무너져 내렸고 줄 리탄은 폐허 속에 묻혔다. "흥! 벌써 죽은 거냐!! 이 몸이 이렇게 본모습까지 보여줬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스컨드렐을 보며 경악에 찬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인간인 줄 알았던 스컨드렐이 갑자기 괴물로 변한 것이다. "요, 용이다......" "말도 안돼! 용이 존재한다니! 스컨드렐 님이 용이었다니!" 사람들은 절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수(幻想獸)를 용이라고 부르 긴 했지만 용 따위는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본모습 을 들어낸 스컨드렐은 10미터에 가까운 구부정한 키에 시체 같이 초점 없 는 돌출된 회색 눈동자, 염소다리 같은 역관절, 등에는 가시를 닮은 뻣뻣 한 털이 섬뜩하게 자란 상태였다. 그것만 봐도 누구도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이었고 그것은 분명히 어떤 이종족도 아닌 용. 용 외에는 스컨드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스컨드렐은 맹수처럼 크르르륵 거리며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젠장. 인간들에게 모습을 들어낸 걸 알면 오펜바하 님께서 화를 내실 텐 데. 뭐...... 날 본 놈들을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니까." 스컨드렐이 광기에 감염된 듯 기괴한 눈동자를 굴리며 경비병들을 바라보 자 그들은 무기를 집어 던지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속아 버린 것이다. 저런 말도 안되는 생물이 존재했다니. 게다가 용이라면 분명 히 자신들 모두를 아무렇지도 않게 찢어 죽일 것이라는 - 심연 같은 무의 식으로부터의 공포심이 머리끝까지 닥쳐 온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스컨드렐의 포효는 건물을 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 유리창을 깨고 도 망치는 사람들의 머릿속까지 부셔 버렸다. 그들 대부분은 일격에 즉사했지 만 몇 명은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스컨드렐 은 그런 인간들에게 쿵쿵 거리며 걸어갔다. "이 세계의 지배자이신 오펜바하 님은 인간을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 지만...... 좀 더 인간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내 모습을 본 너희들 은 죽어줘야겠다." 원치않는 이유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 스컨드렐은 쇠기둥 같은 다리를 들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은 짓밟으려고 했다. 그의 힘이라면 단번에 형체도 남지 않게 뭉개질 것이다. 그때 그 살육을 막는 살기 띈 목소리가 들렸다. "힘 밖에 쓸 줄 모르는 용이라면...... 잔인한 괴물과 다를 게 뭐가 있지 . 웃기지마. 뭐가 이 세계의 지배자라는 거야?" 줄리탄은 뺨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닦아내며 인피타르를 든 채 걸어 왔다. 저급한 힘자랑이나 하며 약하니까 짖밟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오래 사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잖아. 대체 어느 구석이 신성하다는 거야? 스컨드렐은 죽지 않고 계속 지껄이는 줄리탄의 그 말이 아주 기분 나쁜지 찡그린 표정으로 곱씹으며 줄리탄을 바라보곤 송곳니를 들어냈다. "감히 버러지 같은 인간 주제에 그런 쳐죽일 말을 해? 편하게 죽을 생각 은 포기해라!" "편하게 죽을 생각은 이미 버린지 오래야. 하지만 적어도 너한테는 죽지 않아!" 줄리탄의 몸은 순간적으로 스컨드렐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 찰나 의 순간에 뛰어오른 줄리탄의 검은 빛을 뿌리며 스컨드렐을 얼굴을 향해 떨어졌지만 스컨드렐은 자신의 굵은 팔을 휘두르며 줄리탄의 가슴을 때려 밀쳐냈다. 공중에서 회전하던 줄리탄은 힘들게 바닥에 착지하며 피를 쏟았 다. 늑골이 모조리 부서져 버린 듯한 충격이다. 인피타르는 계속 냉정히 줄리탄의 생명력을 삼키고 있는데다가 예전 하켄에게 당한 상처까지 있어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줄리탄은 끊어지려는 정신을 어렵게 붙잡았다 . "크하하핫! 어떠냐! 죽고 싶을 만큼 괴롭지! 이제야 이 몸의 위대함을 느 껴...... 응?" 스컨드렐은 유치한 위대함을 뽐내며 줄리탄의 목을 비틀어 버리려다가 인 피타르를 막았던 자기 팔을 보며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렸다. 이 세상 어떤 무기로도 실금하나 나지 않는 자신의 팔이 반쯤 잘려나가 피를 토하 며 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망각하고 있던 고통과 극도의 수치심이 몸 을 휘감았다. 어떻게 인간이. 빌어먹을 놈이! 라고 소리치며 스컨드렐은 그 잘난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줄리탄을 향해 핏발을 세우고 달려 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에 포장도로가 흉하게 패이고 땅이 쾅쾅거리며 울린다. "너 같은 놈에게 내게 당할 리가 없어어어!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 어!!" 해악(害惡)의 폭풍 같이 마구잡이로 달려오는 스컨드렐을 향해 줄리탄은 말 없이 인피타르를 대각으로 세워 고쳐 잡으며 싸늘한 눈동자로 쏘아보았 다. 그리고 공기를 가르는 스컨드렐의 팔이 줄리탄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 는 순간, 인피타르는 삼키고 있었던 시린 아우라를 뿜었다. 트드드드드득!! 스컨드렐의 탁한 쇳덩이 같은 몸 전체에 푸른빛의 곡선이 어지럽게 그어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최초로 인간이 용을 죽인 역사가 되었다. 스컨드렐의 몸은 조각나며 더 이상 생명체로서의 의미를 잃고 바닥에 흩어 져 역한 냄새의 피를 뿌렸다. 줄리탄은 육체적 한계점에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잡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추슬렀다. 남을 베어버린 것도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스컨드렐의 생명을 머금은 인피타르 가 파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설마 만족하고 있는 건가? 줄리탄 뒤에선 놀 란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뒤늦게 도착한 한무리의 증원부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폐허처럼 부서져 버린 건물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경비대를 비롯 해서, 대체 이 끔찍한 피비린내와 어떤 동물의 것인지 짐작도 못할 저 널 려 있는 살조각들은 뭐란 말인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설 마 창백한 빛무리에 휘감겨 있는 저 청년이 혼자 저지른 것일까? 줄리탄이 그들을 향해 걸어갈 때마다 오칼란트의 부대는 엄청난 위압감에 조금씩 뒤 로 물러섰다. 줄리탄이 핏방울을 떨구며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생명은 보장해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어서 비 켜라!" "히익!" 그들은 줄리탄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달빛에 그림자진 그의 표정은 접 근하면 정말로 죽여버릴 것 같은 기세다.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카넬리안.' Chapter#14 : 당신과 함께 영원히 / 끝 Next Chapter : 꿈의 미로 -Blind Talk 늦었습니다! 늦어져선 금방 흐름이 끊겨 버리는 부분인데 늦어버리고야 말 았습니다. 그 이유는...... 실수로 이번 편과 아이디어 노트를 날려버렸기 때문입니다. 벌써 이런 일이 네번째! 다시 쓰려면 피눈물이 흐릅니다 정말 . 저의 부주의함 때문이지만 이제는 PC 저장에 대한 불신감마저... 쯧. 아무튼. -_-)y-~~ 드래곤 레이디에서 용이라는 것은 꼭 여의주를 물고 네개 혹은 여섯개의 발톱을 가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63빌딩 크기의 뱀形 생명체거나 입에 서 화염을 뿜고 동대문 운동장만한 날개를 퍼덕이는 도마뱀形 생명체를 의 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스컨드렐(불량배라는 의미-_-)의 경우에는 그 모습이 다른 환타지 만화에서 '고레벨의 몬스터'라고 불리는 괴물을 닮았 습니다.(묘사는 잘 안했지만 스컨드렐의 역관절 다리는 스타크래프트의 질 롯과 붕어빵이죠. 해부학에 정통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인간보다 훨씬 빠 르고 오래 달릴 수 있는 구조라고.-_-) 말하자면 전에도 말했지만 드래곤 레이디의 사람들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괴물들'은 죄다 용이라고 부릅니다. '용'이라는 단어는 지금 저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것이겠죠. 물키벨 역시 날개는 없는 이무기의 모습이고 레비아탄은 상어인데다가 크라켄은 문어(! ), 테싱은 육익천사(六翼天使)의 모습이고... 앞으로 나올 놈들 중에 과연 누가 '드래곤'과 가까울지는 모를 일입니다.(오펜바하라면 비슷할지도.) 또 용들이라고 모두 똑같이 강한 건 아닙니다. 레비아탄 급이라면 용들 중에서도 거의 최상이지요. 스컨드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줄리탄이 실수로라도 레비아탄과 싸우겠다는 생각은 피하는 편이... 또 아무튼. -_-)y-ooo 레비아탄의 등장씬과 스컨드렐의 변신씬은 거의 B급 호러무비를 닮았습니 다. 사실 뭔가 더 고급스런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었는데 '아냐! 이번에 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연출 할꺼야!'라고 생각해서 즐거운 마음에 쓰 긴 했지만 다 써 놓고 보니까 '어쩐지 우스운데?'라는 생각도 들어서 걱정 . 사람들이 B급영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좀 좋아합니다.(그렇다고 부르스 켐벨의 팬은 아님.>_<) 목을 썩둑썩둑 잘라버리는 아주 잔인한 영화를 좋 아하기도 하고 창피할 정도로 가짜피를 뿜어내며 '으아아아! 나는 곧 부활 한다!'라고 외치며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보스악마가 나오는 영화도 좋습니 다.(역시 이런 역에는 크리스토퍼 워큰이...-_-) 인디영화도 좋아합니다. 피터 잭슨도 좋고(이번에 반지전쟁 감독이라죠? 왠지 영화가 무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 셈 레이미도 좋도 팀 버튼의 단편 영화들도 정말 좋습니다. 뭔가 돈이 아니고 인기가 아니고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싶 은 열정이 있어서 만드는 것이니까 보면서 즐겁게 동참할 수 있습니다. (만화그리는 후배 중에는 이쪽에 엄청난 매니아가 있는데... 같이 찻집이 라도 갈지라면 몇시간동안 지치지도 않고 그 쪽 얘기만.) 어쨌든 그래서 이번 편은 그런 분위기를 좀 깔았습니다. 이번에 '15분'이라는 영화 나오지요? 꼭 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개인적 으로 로버트 드 니로를 끔찍히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나온 영화라면 일단 보지만 그 영화의 내용도, 연출도 너무나 맘에 듭니다.(한니발도 봐야 하 는데... 삭제되었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 전번 글라디에이터에서 리들리 스콧에게 배신감 느끼고 한니발에 조마조마하고 있습니다.) 요즘 위가 너무 안좋아져서(과도한 업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 에는 술 때문에-_-) 며칠 째 고기를 안먹고 있습니다. 전 자랑스런 산성체 질이라서 고기를 먹지 않으면 폭주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살짝익힌 최 고급 꽃등심이라도 소화가 되질 않더군요. 그런데 저희 집에는 굉장한 것 이 있어서 위로를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장독에서 꺼낸 반년 동안 절인 무우!(저희집은 마당에 김장독을 묻습니다. 보통 노동이 아니지만 일 년 동안 최상의 김치를 먹을 수 있지요. 부럽죠?) 일본에 우메보시가 있다 면 한국에는 절인 무우가 있듯이(대체 무슨 비유람.) 최근 그것 먹으며 행 복하게 식이요법 하고 있습니다. 아... 이게 뭐람. 역시 방심하다보니 잡담이 길어졌군. 그럼 이만. 아참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메일 보내주신 분들이 있어서 아주 기쁩니다. 살아있길 잘했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제멋대로 프로파일>> Entry#9 톨베인(Tollbein) 1.왜 그렇게 어두워요? :어두워지려고 노력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말하니까 어둡다는 소리 듣는 겁니다.) 2.씰을 가져볼 생각은? :없습니다.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보통 이런 자들에게 씰이 생기면 내심 애지중지할지도 모른다.) 3.지금까지 몇명 죽였어요? :프라이버시 (톨베인이 살인청부를 할 때는 무방비의 여자도 죽여야 했기 때문에 지금 은 절대로 기억하기 싫은 부분이다. 사실 그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 때 문에 악몽을 꾼다.) 4.15살 때 눈을 떴잖아요? 장님일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요? :한번도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빛을 그리워하지 않겠죠. 불편한 건 없었 어요. (제길 싫었던 건 어렸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야아! 귀엽게 생겼다!' 라고 말하곤 했을 때. 눈이 안보이니 귀여운 게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5.동료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10대의 좋은 추억 (이 사람, 20세가 되면 떠날 생각인가.-_-) 6.물키벨 씨와는 사귈 생각입니까? :용과 연애할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라서. (그러면서도 같이 시가지를 돌아다니는 둘의 모습이 가끔 목격되곤 한다.) 7.카넬리안과는 왜 그렇게 싸웁니까? :싸움은 그 여자가 먼저 거니까. (양보를 모르는 두 명이니 둘 사이에 발전이 있을리가 없지.) 8.요즘 제가 속이 안좋아서 물어보는데 혹시 고기 좋아해요? :육류는 별로... (의외로 채식주의자였다.) 9.꿈이 있다면? :내 검을 좀 더 잘 길들이는 것. (소박한 남자로군...) 10.노래는... 잘 부릅니까? :...... (결국 마지막 질문은 또 이 모양. 아무도 톨베인이 노래하는 걸 봤다는 사 람은 없다. 시켜보고 싶긴 하지만, 묶어놓고 고문해도 죽어도 안부를 녀석 인 것이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Helloween의 Future World를 들으며... (시간이 지나도 좋은 노래는 여전히 좋습니다.) 『SF & FANTASY (go SF)』 27275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5-1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6/04 23:50 읽음: 81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5-01 : 꿈의 미로 관련자료:없음 [7199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6-03 21:05 조회:538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1 : 꿈의 미로 Sad but True 1. 항구에서부터 황궁까지의 거리는 쉬지 않고 뛰어간다고 해도 일주일이 소요되는 긴 거리였다.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카넬리안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줄리탄은 인피타르와 다시 한번 생명의 거래를 했다. '나는 육일하고도 이십일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내 얼마의 생명력을 소비했을까. 하지만 상관없어. 후회하지 않는다.' 생명을 담보로 인피타르가 건내 준 힘을 머금은 줄리탄은 전력(全力)의 바람처럼 황궁으로 향했다. 거의 무너져 가는 지금의 몸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그것 은 줄리탄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 그래도 주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결심은 단지 세시간만에 그를 황궁 앞에 도착하게 만들어 주었다. 줄리탄 이 서 있는 로열 게이트 양변의 고딕형 검은 첨탑에선 마치 거대한 짐승이 갇혀 있는 것처럼 음울한 울음소리 같은 호른의 경계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곧 줄리탄 을 기다리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어. 너 같은 놈에게 스컨드렐이 죽었다니." "넌....." 줄리탄은 황궁의 로열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자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하켄. 자 신을 기습했던 지룡이다. 그 자는 이미 줄리탄 쯤은 목을 비틀어 버린 듯한 자신 감에 소리 쳤다. "난 네 놈이 가랑의 테이머라고 해서 조금은 특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싸 우기도 전에 지쳐 있는 꼴이 말이 아니야. 그런 몸으로 서 있을 수나 있겠냐!" "......" 하켄의 말대로였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줄리탄의 몸은 대답할 힘도 없을 정 도로 곳곳이 만신창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줄리탄은 힘든 숨을 삼키며 인피타르 를 다시 들 수밖에 없었다. 눈앞이 휘청거리고 몸에는 감각조차 희미했지만 줄리 탄은 차가운 바닥을 밟으며 비웃음을 머금은 하켄을 향해 걸어갔다. 하켄의 목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큭큭. 필사적이군.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줄리탄은 하켄의 몸이 검고 거대한 탄환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부분 부분이 아주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바닥이 패어 지고 그 풍압을 받아내는 몸이 진동하며 공기의 질서가 뛰어드는 하켄에 의해 흐 트러지고 쓰러져 비명을 지른다. 줄리탄은 파르르 떨리는 인피타르를 그 재앙과 같이 닥쳐오는 하켄을 향해 내리쳤다. 카아아아아앙!! 그러나 인피타르는 시커먼 기력에 둘러싸인 하켄의 몸을 자르지 못한 채 힘에 밀려 퉁겨 나갔다. 검에게도 목숨이 있던가? 인피타르의 푸른 기운이 죽어가듯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더 이상 줄리탄의 힘을 삼키지 않은 것이다. 줄리 탄은 자신의 몸 일부와 같이 느껴졌던 인피타르가 몸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듯한 - 한쪽 팔이 사라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크하하핫! 별 거 아니잖아! 죽엇!" 힘을 잃은 인피타르를 밀어낸 하켄은 무방비의 줄리탄 앞에서 섬뜩한 조소를 드러내며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윽!" 잔인한 기력이 줄리탄의 몸을 관통하며 지나갔고 마음까지 물어 뜯겨 버린 듯한 아찔함에 줄리탄은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믿음과 신념이 그 숭고한 만큼 절대로 깨지지 않고 지켜지는 그런 세상이라면 그 세상의 구성원들은 얼마나 행 복할까. 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못했다. 줄리탄은 순간 검을 놓칠 수 밖에 없었다. 2. "가랑의 테이머가 황궁 앞까지 왔습니다." "헤에. 정말로 왔구나. 가랑, 네 말이 맞았어. 네 테이머는 진짜 바보로군." "현재 하켄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접견실에서 카넬리안과 함께 있던 오펜바하는 그런 보고를 듣다가 가만히 카넬 리안을 바라보며 지독히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랑. 네 테이머...... 어쩌면 날 볼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느껴져. 네 테이머 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 카넬리안은 뭔가 대답을 기대하는 오펜바하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절대로 죽지 않아.' 라고 조그맣게 기원할 뿐이었다. 지금은 미스트랄도 없을 뿐더러, 테싱 과 함께 있을 때의 힘은 발현되지 못해 - 오펜바하 앞에서는 보통 여자나 다름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줄리탄을 믿는 것. 의심 없이 믿고 싶었다. 꼭 살아서 자신을 찾아 올 거라고. 조금이라도 그것을 의심하면 그 불안감에 순식 간에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진심으로 믿었 다. 누군가를 정말로 믿고 싶었던 적이 대체 얼마만일까. '믿음은 언제나는 배 신당하기 마련이야.'라고 생각해 왔던 그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믿는 것 외 에는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운 보 고는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잔인하게 시험했다. "하켄이 승리했습니다. 가랑의 테이머를 죽일까요?" "......" 믿음을 잔혹하게 찢어버리는 목소리. 하지만 카넬리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런 그녀의 태도에 오펜바하는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어봤다. "화나지도 않아? 네 테이머가 졌단 말야! 정말 냉정한 여자네. 어때? 지금이라 도 순순히 내 말을 들으면 네 테이머를 죽이지는 않을게." 하지만 카넬리안은 그런 오펜바하를 보며 단호하게 말할 뿐이었다. "나의 주인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올 꺼야." "너답지 않아.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믿고 있으니까." 그녀는 숭고한 보석같이 차갑게 빛나는 빨간 눈동자로 오펜바하를 바라보며 흔 들림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카넬리안의 아무런 논리도 없는 단순한 신념은 오펜 바하의 마음을 건드렸다. 너무 유치해서 화가 날 정도의 믿음. '믿음'이니 '희 망'이니 하는 단어는 감정의 편식이 심한 오펜바하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카넬리안은 오펜바하가 건내준 '타협'이라는 먹이를 뱉어내며 나약하기 그지 없는 자신의 테이머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고 오펜바하는 그런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부셔버리고 싶은 가학적 충동질을 느꼈다. "너도 네 테이머만큼이나 바보야! 그렇게 인간에게 배신 당하고 또 믿을 생각이 드는 거야? 또 깨져버릴 그럴 희망 따위! 씰이면 씰답게 부속품처럼 살라고!" "절반짜리 생명체에게도 꿈꿀 권리는 있어." 카넬리안의 쓸쓸하지만 숨김없는 그 말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 지막 소망이 매달려 있었다. 해변가 자갈밭에 널려 있는 작은 돌덩이라도 생각 할 수만 있는 존재라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행복을 꿈꿀 수 있다. 그게 살아가는 힘이니까. 그리고 그건 스스로 포기하기 전에는 누구도 가져갈 수 없 는 것이다. 오펜바하는 그녀의 그러한 논리에 치를 떨며 독살스런 말을 뱉었다. "실연 당할 준비나 해. 가랑. 항상 너의 테이머를 죽이는 역할은 내가 맡게 되는군." 3. 하켄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가늘게 숨이 붙어있을 뿐인 쓰러진 줄리탄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몸이 공중으로 올라가며 입가 에 핏줄기가 그어진다. 하켄의 일격에 줄리탄은 절명한 것 같았다. "이런 실력으로 오펜바하님 앞에 서려고 했단 말이야? 하긴 인간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흐윽......" 줄리탄은 피에 엉킨 눈을 가늘게 떴다. 하켄의 커다란 손에 인형 같이 잡혀 흔들 리는 시선에 자신의 핏방울을 비처럼 떨궈지는 돌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오페바하 님과 대등하게 싸운 자는 궁룡의 수장 테싱 뿐이었지. 그 래. 솔직히 테싱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존재였어. 나는 네가 가랑의 새로운 테이머라고 해서 조금은 테싱과 비슷한 힘을 가졌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 다면 가랑이 너와 계약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않다. 카넬리안은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는 요리사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도시를 날려버리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그런 힘을 보고 자신 과 계약한 것이 아니란 말야. 하켄의 말은 이어졌다. "넌 가랑이 어떤 씰인지 몰라. 그걸 알았다면 넌 네 발로 가랑에게서 도망쳤을 걸? 너희 인간들을 테싱의 손으로부터 지켜준 분도 오펜바하 님이야. 그것도 모 르고 이렇게 덤벼들다니 정말 무지한 존재야 인간들은!" 줄리탄은 하켄의 말이 듣기 싫었다. 카넬리안이 과거에 어쨌든지 그건 상관없어 . 오펜바하가 인간들을 지켜줬든지 아니든지 그래서 어쩌란 말야. 사랑하는 여 자가 잡혀 있는데 목숨을 잃더라도 구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하켄의 말이 진실이든 진리든 줄리탄은 그런 말에 카넬리안을 알게 된 것을 후회하고 지금 목숨을 건 것을 후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사 카넬리안을 구하는 것이 악한 일이라 하더라도 좋다. '그럼 나는 악인이 되겠다.' 그렇게 결심했으 니까. 정의를 수호하는 용사 같은 건 자기와는 상관없어. 그냥 카넬리안과 함께 있을 수 있으면 되니까. 그것 뿐이야. "대답할 힘도 없나 보군. 큭큭. 이 하켄 님의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하켄의 굵직한 손가락이 줄리탄의 반듯한 이마를 뚫어버릴 양으로 다가가고 있 을때 피에 엉킨 줄리탄의 입술이 조금씩 열렸다. "어떻게...... 죽는 걸......" "뭐? 뭐라고?" "죽는 걸 어떻게 영광으로 생각하란 말이냐!" 줄리탄의 고함소리에 하켄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도저히 죽어가는 자가 꺼 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한 줄리탄의 기력에 눌려 하켄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인피타르가 빛을 발하며 줄리탄의 손으로 - 몸의 일부처럼 돌아와서는 빠르게 짙푸른 궤적을 그었다. "우아아악!" 인피타르가 차가운 이빨을 들어내며 줄리탄의 몸을 잡고 있던 하켄의 오른팔을 잘라 버려 바닥을 떨구었고 부활한 것만 같은 줄리탄은 현란하게 몸을 휘감기 시작한 푸른 아우라의 보호를 받으며 하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이번만큼은, 그럴리야 없겠지만' 어쩌면 이번만은 인피타르가 도리어 품고 있던 생명력을 줄리탄의 신념을 향해 불어넣어 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될 모습이었다. "크르르르르륵!!" 줄리탄이 드러낸 살기에 놀란 하켄은 뒤로 물러서며 동시에 본래의 모습을 들어 냈다. 근육이 툭툭 끊어지는 기분 나쁜 소리가 연이어지며 하켄의 몸은 부풀어오 르듯 줄리탄 앞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네 발의 공포스런 환상수로 솟아올랐 다. 짙은 황토빛의 거친 피부에 둘러싸인 하켄의 본래 모습은 악몽 속의 동물이 현실화된 것 같다. "이 몸을 정말 화나게 만들다니 건방진 놈!" 깊은 호수 밑에 잠들어 있을 법한 육식동물을 닮은 하켄의 아가리가 크게 벌어 지며 그 속에서 광점이 빛났다. 그 광점을 중심으로 힘이 모이고 있었다. 그리 고 곧 그 빛덩이가 커지며 고열의 플라즈마가 줄리탄에게 쏟아졌다. 줄리탄 주 변의 모든 것의 형채가 뭉개지며 녹고 우그러들며 금속과 돌, 흙과 풀까지 단번 에 증발해 버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마법의 수준이 아니었다. '모, 몸이 타버릴 것 같아!' 줄리탄의 통각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새하얀 화염을 인피타르로 힘들게 막아 내던 줄리탄은 푸른 새처럼 몸을 둘러싼 차가운 잔광을 흩뿌리며 하늘로 날아 올 랐다. 자신의 생명이 끝나기 전에 일격을 노리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하켄의 고개를 들어 올렸고 뿜어내고 있던 플라즈마의 불길이 줄리탄을 추적하듯 따라 올라가 하늘을 찔렀다. 4. 오펜바하는 이미 하켄과 줄리탄이 어떤 상황으로 엉켜 있는지는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이고는 중얼거렸 다. "목소리만 큰 바보 놈. 똑바로 하는 것 하나도 없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색 정장을 입고 있던 브륜힐트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녀 역시 오펜바 하가 무슨 의미를 담아 그런 말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오펜바하는 머리 를 긁적이며 카넬리안에게 말했다. "네 테이머. 여기까지 올 것 같아. 한심해 정말." 카넬리안의 얼굴에는 슬몃 안도의 빛이 감돌았을 뿐 역시 입술을 다물고 있었 다. "이쯤 되면 내가 맞이해 주는 게 예의겠지? 힐트. 가랑을 감시하고 있어. 그리 고 제이미아는 나와 함께 가. 너도 그 녀석에게 할 말이 있겠지?" "......" 제이미아는 말없이 오펜바하를 뒤따르며 접견실을 빠져나갔고 방에는 브륜힐트 가 카넬리안 만이 남게 되었다. 브륜힐트는 닫힌 문을 보라색의 고혹적 눈동자 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가랑.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여자에요. 씰 주제에...... 하늘의 주인에게 사랑 받고 이번에도 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브륜힐트의 목소리는 질투와 증오를 애써 숨기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카넬 리안의 태도는 변함 없었다. 그녀들은 과거에 하늘을 불태우고 대지를 가르며 싸웠던 '전설' 이었건만 결국 이제와서까지 화두에 남는 것은 한 남자에 대한 감정 같은 것이었다. 카넬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내가 본래 감정이 헤픈 여자니까." "잘 들어요. 가랑. 아니 카넬리안." 브륜힐트는 고압적인 눈빛으로 자신보다 20센티미터는 작은 카넬리안을 내려보 며 다가왔고 죽음이든 고문이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카넬리안으로서는 물러서 지 않고 그녀를 올려보았다. 카넬리안도 알고 있었다. 브륜힐트가 테싱을 너무 도 사랑했고 그래서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한다는 것을. 두꺼운 마음 의 장벽이 브륜힐트의 그런 타오르는 감정을 숨겨주고 있는 있었지만 보이지는 않아도 그 증오의 열기를 느낄 수 는 있었다. 카넬리안은 그런 그녀의 감정을 밀쳐내며 말했다. "내 전 테이머는 이미 오펜바하에게 죽었잖아! 이제 와서 남자 잃은 두 여자가 모여 뭐 할 말이 남은 거지?" "테싱 님이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나요?" "뭐?" 카넬리안은 붉은 눈동자가 커지며 브륜힐트를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라는 표정으로 카넬리안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테싱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짓거리라면 그냥 두지 않겠어. 카넬리안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테싱의 자리는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대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오펜바하 님은 테싱 님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의 힘으로도 테싱 님을 죽 일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오펜바하 님은 테싱 님을 이공간의 미로 속에 가둬 버렸습니다." "거,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물키벨조차도 테싱이 살아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숨 긴 것인가? 카넬리안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엉 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엉뚱한 말을 들어 버렸다. "카넬리안. 당신이 오펜바하 님에게 인질로 잡혀서 테싱 님은 싸움을 멈출 수밖 에 없었지요. 그리고 당신은 테싱 님이 이공간에 갇히게 되면서 강제로 계약이 끊어져 정신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테싱 님이 소멸된 건 아니지요. 지 금도 이공간의 미로 속을 방황하고 계실 겁니다." 카넬리안은 미친 듯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브륜힐트를 바라보았다. 테싱은 분명히 자신 때문에 죽어서 계약이 끊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시는 깨어나고 싶 지 않아!'라는 절규를 모든 씰들의 마음 속에 울리며 자신은 잠들었다. 그런데... ... 이제와서 테싱이 살아 있다니. 믿을 수 없다는 부정과 동시에 그가 살아있길 바라는 기대감이 동시에 몰려들어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아직 당신과 테싱님의 계약은 파기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서로 존재하는 공간 이 달라지며 잠시 계약이 끊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이공간에 갇 혀 있는 테싱님과의 공명에 성공한다면...... 테싱님은 당신과 연결된 그 공명 의 선을 타고 미로를 뚫으며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펜바하 님이 당신 을 완벽한 자신의 씰로 만들려는 이유도 테싱님을 영원히 이공간에 가둬두기 위해서 입니다. 당신 외엔 누구도 테싱님을 이공간에서 꺼낼 수 없으니까요." 브륜힐트의 말은 마치 자기도 모르던 자기 몸의 질병을 설명해 주는 의사의 선 고와 같았다. 오직 줄리탄만을 바라볼 것을 결심하고 그것에 어떤 의심도 없으 리라 믿었던 카넬리안의 마음이 과거에 대한 집착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카넬리안 씨.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브륜힐트의 차가운 폭언이 냉담한 단도처럼 카넬리안의 가슴을 후벼팠다. 카넬 리안은 메마른 입술을 꽈악 깨물며 빨리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할지도 모를 지금 상황에서 벗어 나고 싶은 마음에 몸부림쳤지만 브륜힐트는 그런 카넬리안을 통 해 어떻게든 테싱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자아. 당신이 테싱 님과 공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뭐, 뭐? 꺄아아악!!" 브륜힐트는 눈빛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카넬리안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던져 버렸고 부우욱 소리와 함께 카넬리안이 검은 드레스가 찢겨지며 벽과 충돌해 접견실을 둔탁하게 울렸다. 금이간 벽면에 장식된 고귀한 금장자기와 고딕풍 의 조각상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져 산산조각이 난다. 브륜힐트는 또깍거리는 발걸음으로 바닥에서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카넬리안에게 걸어갔다. "전 당신의 연적(戀敵)이 되질 못합니다. 저는 지룡이고 테싱 님은 그런 저에 게 어떤 관심도 없으니까. 테싱 님이라면 분명히 당신을 이런 꼴로 만든 저를 단번에 주저 없이 죽일 테지요.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전 테싱님 이 이곳에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 그런......" 카넬리안은 입가의 핏줄기를 바닥에 흘리며 떨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소름 끼치는 짝사랑 같은 것이다. 자기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죽여도 상관없으니 까 이 세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 브륜힐트는 그런 생각 을 수백년동안 숨겨 품으며 오펜바하 곁에서 카넬리안이 잡혀오기만을 기다렸 던 것일까. 지금 이 순간을 수백년간 기다렸단 말인가. 브륜힐트는 카넬리안의 붉은 머리채를 쥐며 끌어 올렸다. 카넬리안의 고통 섞인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카넬리안 씨. 지금부터 그 때의 과거를 기억하세요. 테싱 님을 떠올리세요. 공명이 가능하도록." "시, 싫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당신의 기분 따윈 관심 없습니다." "아아아아악!!" 브륜힐트는 카넬리안의 목을 뒤로 꺾으며 자신의 마력을 뿜어 카넬리안의 마음 속을 헤집어 놓았다. 애써 숨겨두었던 그때의 기억들이 - 카넬리안이 처음부터 인간들을 멸시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궁룡들 쪽에서는 드물게 인간에 게 관대할 정도였건만 자신을 따르는 척하다가 오펜바하의 유혹에 배신한 인간 들이 자신을 함정에 빠트려 강제로 묶고 몸과 마음을 더럽히고 테싱을 잡을 미 끼로 썼던 그때의 기억들이 머리속에 섬광처럼 괴롭게 터졌다.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해. 줄리탄에겐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자 카넬 리안은 브륜힐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날카로운 비명을 계속 내 질렀다. 하지만 주박(呪縛)같은 브륜힐트의 힘은 카넬리안의 온 몸을 지독하게 묶어두며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길 강요했다. "당신은 정말 나쁜 여자에요. 테싱님은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위해 서 모든 일을 했는데...... 어떻게 새로운 주인을 모실 수 있는 거죠? 어떻게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테싱님은 이곳에 돌아오 시면 또 당신만을 사랑하겠지요. 죽여버리고 싶어요 당신 따윈!" 브륜힐트의 증오 섞인 말은 카넬리안의 마음을 잔인하게 토막내고 있었다. 오 펜바하 조차 그녀가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이것 놔! 멋대로...... 멋대로 생각하지 말란 말야!!" "어서 테싱님과 공명하세요!" "꺄아악!!" 소중하게 아끼고 있던 소망이 깨지고 행복의 기대감도 불 타 버리는 것 같다. 브륜힐트는 다시 쓰러진 카넬리안의 머리를 짓밟으며 계속 그녀가 가진 것들을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아무리 모든 것이 자기의 죄업(罪業) 때문이라고 해도 카넬리안은 힘을 잃어도 좋으니까 그냥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끼며 절규했다. 5. "하아. 하아......" 줄리탄은 힘이 바닥 나며 떨어트릴 뻔한 인피타르를 애써서 꽉 쥐고는 죽은 듯 쓰러진 하켄을 바라보았다. 산더미 같은 하켄의 시체가 널부러져 곳곳이 베어진 채 시커먼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결국 하켄을 이긴 것이다. 줄리탄의 몸 역시 정 신력만으로 버티고 있는 극한의 상태이긴 했지만. 게다가 아직 오펜바하를 만나 지도 못했다. "카넬리안.......? 카넬리안! 어디 있는 거야!!" 줄리탄은 갑자기 카넬리안이 자신을 애절하게 부르는 것 같은 기분에 커다랗게 소리치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황궁의 본당으로 향했다. 본당 고창층(高窓層) 의 엄숙한 스테인드 글래스에 걸러진 보랏빛 태양의 파편이 핏방울을 떨구는 줄 리탄의 머리 위로 쏟아지며 일그러진 그림자를 길게 잡아끌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놈! 같이 죽는 거다!! 절대로 오펜바하 님께 갈 수 없어!!" 그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하켄의 몸이 들썩이며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채 긴 목을 들어 뱀처럼 줄리탄에게 달려들었다. 멈칫한 줄리탄. 피할 시간이 없었 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데! 줄리탄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 크르르르르르르륵!! 줄리탄을 통 채로 삼켜버릴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던 하켄은 줄리탄 바로 앞에서 목이 잘리며 뜨거운 피를 뿜었다. 줄리탄은 인피타르를 휘두르 지 못했다. 누군가 막강한 검기로 하켄의 목을 날려버린 것이다. "너, 너는!" "다음부터는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두는 게 좋아." "세이드......" 줄리탄 근처에는 음울하게 울고 있는 검을 뽑고 있는 세이드와 그 뒤에 다소 곳이 서 있는 레오폴트가 있었다. 세이드는 검을 집어넣으며 줄리탄에게 다가 왔다. "왜 나를 도와준 거지......" 줄리탄의 말에 세이드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드러났다. "널 도와줄 생각 같은 건 없어. 단지 이 따위 뭔지 모를 괴물들에게 인간들이 휘둘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을 뿐이다. 나는 좋은 인간도 훌륭한 인간 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좋든 싫든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해 본 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넌 오펜바하의 부하가 아니었던가?" "웃기지 마라. 난 누구를 지배하지도 누구에게 지배받지도 않아." 줄리탄은 그런 세이드의 말에 적잖게 놀랐다. 그가 말했던 자신만의 신념이라 는 것, 인정할 수는 없지만 조금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보고 싶기도 하고...... 네 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디까지?" "말이 더 필요한가? 자 너의 길로 가라. 난 지켜보며 비웃어 줄 테니." 세이드는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하얀 옷을 펄럭이며 레오폴트와 함께 사라 졌고 줄리탄과 일합을 겨룬 적이 있던 레오폴트는 줄리탄에게 경의를 닮은 눈 빛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누구든 살아가는 목적은 있다. 찾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빼앗기 위해서 ......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것에 충실하냐는 것이겠지.' 줄리탄은 목숨을 건다는 비장함조차 초연하게 받아들이며 본당의 입구로 발걸 음을 옮겼다. 자신의 목적은 오페바하를 죽이는 것도, 목숨을 버리는 것도 아 니고 단지 카넬리안과 함께 달라카트로 돌아가는 거다. 그러니까 죽지 않는 다. -Blind Talk 현재 집을 나온지 3일 째. 2달 후에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덕분에 지금 이것은 노트북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노트북 자판에 익숙하지 못해서 영 진 도가 안나가네요. 아 그리고 정말 죄송하게도... 앞으로 2달동안 billiken@han anet.net은 검색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혹시 이곳으로 메일 보내주신 분들은 답장 못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아래의 곳으로 메일 주세요. 가끔 글 올리러 PC방 들릴 때마다 확인하겠습니다. 에에 그리고 그동안 갈무해 두었던 환타지 소설들도 CD 한장에 담아 틈날 때 마다 읽고 있습니다. 자아. 2달 동안 10 타이틀 이상은 완독할 예정이랍니다. (그러나 현재는 2001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을 읽고 있는 중... -_-) E-MAIL : halfwild@hanmail.net Mr. Children의 Tomorrow never know 를 들으며... (노트북을 통해 듣는 맛도 새롭군요. mp3는 3기가 분량을 가져가니까 2달 동 안 충분할 듯 합니다.) Copyright by Daum Communications Corp. 『SF & FANTASY (go SF)』 27837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5-2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6/09 02:43 읽음: 4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5-02 : 꿈의 미로 관련자료:없음 [72460]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6-08 22:54 조회:317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2 : 꿈의 미로 Protect Your Mind 1. 하늘을 찌르는 황궁 오버암메르가우는 지금만큼은 줄리탄과 제일황제 오 펜바하의 격돌을 위한 장이었다. 줄리탄이 본당 입구를 통해 아케이드 - 공룡의 늑골을 닮은 반아치형 공중부벽(空中扶壁) 밑을 지나서 대알현실까 지 날랜 걸음으로 향하고 있는 적잖은 시간 동안에 그의 앞에는 누구도 나 타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지나간 상아빛 대리석 바닥에만 그가 흘린 핏방 울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묵직하며 주저 없는 발걸음 소리만이 뚜벅뚜벅 불규칙한 회랑의 천정에 부딪쳐 사방에 울릴 뿐이었다. 지옥의 입구로 향 하는 이런 숨막히는 중압감에도 줄리탄의 눈빛은 점점 빛을 발했다. 손과 발과 심장을 흐르는 혈류(血流)의 소리가 자신이 지금 분명히 살아 있다는 의미를 담아 뚜렷이 들려온다. "오펜바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줄리탄은 대회랑의 끝에 서 있는 미쉘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마치 고저 택(古邸宅)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어린 시녀와 같은 모습으로 눈빛도 표정도 담담했고 그것에서 줄리탄은 그녀가 씰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쇼트의 회색 머리칼이 하늘거리며 발걸음이 옮겨 진다. 굽이 없어 흡사 토 슈즈로 착각할 만한 갈색 신발을 신고 있는 그녀 의 다리는 발목까지 가련할 정도로 가늘었다. "절 따라오세요." "잠깐. 혹시 네가 미쉘이라는 오펜바하의 씰인가?" "......예." 미쉘은 목소리가 큰 법이 없었다. 줄리탄의 귀를 간질거리며 조그맣게 말 한 그녀는 묘한 감정에 흔들리기 시작한 눈빛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이고 앞장섰다. 이상한 남자였다.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면 분명 저 남자 와 계약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며 이해할 수 없는 격한 기분을 통제 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말을 꺼냈다. "카넬리안을...... 구해......" 그러다가 스스로 꺼낸 말에 깜짝 놀란 미쉘은 입을 꽉 닫으며 앞으로 발 걸음을 재촉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그들은 거대하고 두꺼워 보이는 청 동문이 닫혀 있는 알현실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 리지만 애처로운 눈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문을 열면 더 이상 돌아갈 기회는 없어요. 선택하세요." "문을 열어 줘." 거꾸로 떨어지고 있는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이 음(陰)으로 새겨져 있는 청동의 문 뒤편에는 분명 지룡의 수장 오펜바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몇 초도 안되어 죽을지도 몰라. 장난처럼 그랜사이어의 눈을 잃 게 만들었던 극강(極强)의 힘을 지닌 자니까. 스스로 지옥불로 떨어지는 꼴일지도. 주저하고 있는 미쉘을 달래듯이 줄리탄은 힘들게 미소지으며 다 시 말했다. "잠시 비켜 줄래?" 2. 줄리탄을 기다리며 웅장한 대알현실의 끝에 앉아 있는 오펜바하는 한편에 서 차가운 이슬 같은 눈동자를 내리고 있는 제이미아를 감상하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키의 제이미아는 일면 귀여워 보이고 또 일면 요염 해 보이기도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자세히 보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환 상을 닮은 여자였다. 그런데 오펜바하의 양옆에 서 있는 지룡들은 지금의 상황이 몹시 맘에 안 들었나 보다. "오펜바하 님! 왜 그런 하찮은 인간을 직접 상대하려 하십니까?" "아 그래? 그런 하찮은 인간이 이곳까지 오는 걸 막지 못한 너희들은 훨 씬 더 하찮은 놈들 같은데?" "그, 그건......" 지룡들은 자신들의 수장인 오펜바하가 직접 '별 것도 아닌' 인간을 상대 하려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며 서로 나서겠다 외쳤지만 오펜바하는 그런 그들을 빈정거릴 뿐이었다. 그때 알현실의 거대한 청동문이 푸른빛에 휘감 기기 시작했다. "왔군." 오펜바하는 문을 이루는 두꺼운 금속이 잘려나가며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폭발하듯 터지는 금속의 조각들 사이로 파르스름한 잔광에 둘러싸인 줄리탄이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오펜바하를 쏘아보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카넬리안을 데리러 왔다." 극한의 한계점을 이미 넘어선 몸이지만 줄리탄은 숨소리 하나 흐리지 않 고 오펜바하를 향해 인피타르를 치켜올리며 말했고 그가 검을 올리는 궤적 을 따라 푸른 빛덩어리들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마음 속을 찌르는 소리 없는 찰나의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카넬리안을 잡아온 건 너희 인간들을 위해서야.' '그딴 것 관심 없어! 너한테는 카넬리안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나 한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애인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가겠어!' '무지한 인간이 어떻게 내 뜻을 알겠어? 마지막 경고다. 죽고 싶지 않으 면 돌아가라.' '무지한 인간이라고? 너희 용들이 그렇게 대단하면 왜 인간의 모습을 하 고 있는 거냐! 왜 무지하고 하찮은 우리들의 모습을 하고 있냔 말야!'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군. 우리가 너희의 모습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 오펜바하는 늑대 같은 눈동자로 줄리탄을 찍어누르며 음울한 목소리로 말 했다. "너희가 우리의 모습을 흉내낸 거야." "뭐라고!" "이제 살아 돌아갈 기회는 지났다." 오펜바하의 그 말이 공기를 울리며 줄리탄의 귀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펜 바하는 줄리탄의 뒤에 있었다. '어, 어떻게!' 순간 오싹함을 느낀 줄리탄은 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몸을 돌렸고 인피타 르는 화르르르륵 소리와 함께 공기를 불태우며 오펜바하의 목을 물어버리 려 했지만 그는 피하지않았다. 대신. 파즈즉! "......!" "한가지 말해주지. 이 검의 주인은 네가 아냐." 오펜바하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펼친 손바닥만으로 인피타르의 칼날 을 막고 있었고 그 접점에서 터져 나오는 눈부신 스파크가 용의 불길 같은 열기를 뿜어내며 검의 비명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인피타르의 주인이라고? '인피타르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던 비극의 영웅이 썼던 검이지.'라는 테시오스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결국 너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잖아. 약한 자는 빼앗기고 고통받고 잃 어버리기 마련이야." 비릿한 조소와 함께 서서히 본래의 힘을 드러내는 오펜바하를 바라보며 줄리탄은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과도한 힘을 쏟아 내는 인피타르의 '과부하'에 줄리탄의 몸을 흐르던 핏방울이 치이익 증발 하며 알현실 전체의 황금조각들마저 물처럼 녹아내려 순식간에 알현실은 지옥의 공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3. 카넬리안에게 영웅전설 같은 건 이제 지겨웠다. 그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 는 항상 억울하게 고통받고 희생당하는 여자가 있고 그걸 구해주는 용사가 있고 또 그걸 막는 절대악의 괴물이 있고..... '질색이야 그런 이야기는!'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희생의 의미도 구해준다는 정당성도 또 그걸 막 는 절대악도 그 역할과 경계가 모호해지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건 그 전설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앙금처럼 남는 증오와 위선 뿐. 카넬리안은 자신이 그런 되먹지 못한 '전설' 속의 한 명이라는 사실에 치를 떨며 피가 베어 나올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브륜힐트가 헤집어 놓은 감정은 이제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도 모를 만큼 어지럽혀져 있었다. 용들이 하늘을 뒤덮고 용사가 검을 뽑으며 그 하늘로 달려드는 영웅전설은 그 후일담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잔인하 고 또 무책임한 사기극일 뿐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어서 테싱님과 공명하세요! 당신도 그 분이 이공간 속에 영원히 갇히길 바라는 건 아닐테죠!" "아아아악!" 상처를 헤쳐놓는 듯한 브륜힐트의 힘이 무너져 가는 카넬리안의 마음을 다시 한번 깨트려 놓았고 카넬리안은 온 몸을 찌르는 마음의 고통에 동공 이 풀린 눈동자로 천정을 올려보며 눈물 없이 울부짖었다. "싫어! 싫어! 싫어! 흐으윽!" 줄리탄을 좋아한다. 세상을 뒤집는 힘 따위는 없어도 좋으니까 자신을 외 롭지 않게 해주고 힘들고 쓸쓸할 때 말없이 껴안아 줄 수 있는 그런 남자 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싱을 다시 보고 싶 은, 다시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 역시 마음 한켠에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카넬리안은 생명을 아낌없이 흘리며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온 줄리 탄에게 테싱과 공명하는 자신의 못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만해! 날 괴롭히지마!" 카넬리안의 자아는 둘로 갈라져 서로 피를 튀기며 격심하게 충돌하길 반 복했고 곧 두개 모두 부서지며 지독한 공허만이 그녀의 마음 속에 남았다. 마치 존재적 진공상태처럼 숨쉴 공기조차 남지 않은 허무함만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소중한 자아의 파편들은 무의미한 미립자로 흩어져 재색 먼지처 럼 마음의 바닥끝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곧 악몽에게 초대받은 꿈처 럼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브륜힐트는 그런 카넬리안에게 잔인한 강요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씰 주제에! 똑같은 짓만 반복하는 기계 주제에!" 아마 그런 기분인 것 같다. 누군가가 위탁한 행복을 자신의 것인냥 품고 있다가 빼앗길 때의 기분. 너는 씰이야. 잊고 있었어? 라는 자명하지만 줄 리탄 때문에 잠시 잊을 수 있었던 비참한 현실이 다시금 그녀의 마음 속의 각인되고 있었다. 가끔 동정 받으며 적당히 살아가야 하는 일말의 권리에 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씰이 바로 자신이라는 우울한 대전제가 다시 그녀의 머리 위로 돌아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샅샅이 유린했다. 4. 오펜바하는 줄리탄에게 마법을 쓰는 것도 주먹을 내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 단지 인피타르를 천천히 밀어낸 뒤에 불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가 울 렸고 별의 무게와 같은 엄청난 중력장이 줄리탄 위에 쏟아지며 그를 바닥 에 처박게 만들었다. "이건 장난이야. 용이 가진 힘은 자연력 그 자체니까. 이제 그걸 느끼나? " "크으으윽!" 줄리탄은 비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내리까는 오펜바하를 올려볼 힘조차 없 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육체가 형체를 잃고 뭉개질 것 같은 끔찍한 불가 항력이 온 몸을 휘감았고 바닥에서 머리를 땔 수가 없었다. 줄리탄이 옷이 찢겨지며 작은 상처들이 압력을 받아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펜바하는 줄리탄과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형벌을 내리는 것 같았다. "하긴 뭐 인간도 씰도 용도 세상이 억지로 건내 준 몰약에 취한 한떼의 모르모트. 강한 놈이든 약한 놈이든 적당히 뽐내고 적당히 죽어주며 숨죽 이며 살고 있는 것뿐이지. 맥빠지는 소리지? 하지만 그게 세상의 진실이야 ." 쓰러진 줄리탄의 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오펜바하의 그 말이 환청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인피타르를 어렵게 잡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린다. 손 마디마디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다. 금단에 대한 저항처럼 지금 당장 죽어 도 좋으니까 당장 카넬리안을 마구 껴안고 싶다는 무모한 욕구가 그의 마 음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머, 멋대로......" 줄리탄은 별을 짊어진 사내처럼 피를 쏟고 비틀거리면서도 오펜바하를 노 려보며 일어서고 있었다. 짐짓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는 오펜바하의 얼굴에 살짝 두려움이 스쳤다. 아마도 그것은 줄리탄을 아주 닮았던 누군가를 기 억하며 생긴 두려움이리라. "멋대로 세상을 단정짓지 마!!" 중력의 벽이 깨져버리며 소리친 줄리탄은 끊어질 듯이 옥죄는 팔이 잘려 나가도 상관 없다는 집념으로 검을 뻗었고 "으아아아아아!" 인피타르는 오펜바하의 가슴을 뚫으며 깊게 박혔다. 오펜바하는 그 위압 에 조금 뒤로 물러서며 창백해졌다. 오펜바하의 소년을 닮은 몸뒷전에 얼 음같은 인피타르의 검신이 길게 나와 있었고 인간을 닮은 붉은 피가 검날 을 타고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줄리탄이 소리쳤다. "세상의 진실이라고! 어린애처럼 칭얼대지마! 너한테는 지겨워지면 맘대 로 바꿀 수있는 게 이 세상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사랑하는 사람과 껴안기 위해 항상 목숨을 걸야 하는 세상이야! 하지만 난 이 세상에 고맙게 생각 하고 있다고! 카넬리안을 만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게 생각한단 말야!" "넌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오펜바하는 엉뚱한 순간에 처음으로 인간다운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달려들려는 지룡들을 손을 들어 막은 뒤에 가볍게 몸에 박힌 인 피타르를 뽑으며 쓸쓸하게 읊조렸다. "이 정도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뭐?" 카넬리안에게서 가끔씩 들었던 가슴 아픈 푸념이 오펜바하의 입에서 똑같 이 나올 줄은 몰랐다. 오펜바하가 짧게 말했다. "죽어라." 오펜바하의 낮은 목소리에 줄리탄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마치 십자가 의 형틀에 매달린 듯 사지가 무형의 형틀에 구속당했다. 바닥난 줄 알았던 고통이 또 다시 줄리탄의 머릿속을 요동치기 시작했고 줄리탄은 반쯤 혼절 하며 인피타르를 떨궜다. "으아아아악!" "정말 널 죽이기 싫어.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넌 포기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오펜바하는 바닥에서 희미한 빛을 점멸하는 인피타르를 집어 들었다. 그 리고 순간 빛의 촉수들이 솟아나며 오펜바하를 덮치려 했지만 곧 오펜바하 힘에 밀려났고 검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차르르르륵 소리를 내며 심하게 요동쳤다. "이 검 인피타르에 죽은 자는 영원히 이 검 속에 영혼이 갇히게 돼. 말하 자면....... 영혼의 감옥 같은 것이지." 오펜바하는 전설 같은 말을 입에 담으며 줄리탄에게 걸어갔다. 그는 검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검의 본래 주인도 지금 이 검 속에 갇혀 있지. 너무 괴로운 사랑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자신을 찔렀거든. 자살한 거지." "......!" "난 너도 가랑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지. 널 생 각해서 이 검으로 너를 죽이고 가랑도 이걸로 죽여줄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 검 속에서 서로 영원히 사랑할 수 있도록." 오펜바하는 그렇게 말하며 줄리탄의 심장을 겨냥했다. 인간인 줄리탄은 인피타르에 몸이 뚫리는 순간 그대로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때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은 제이미아였다. 그녀는 몽환적인 표정 그대 로 오펜바하를 바라보며 줄리탄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초록색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렸다. "또 균형을 깰 건가요?" "균형? 처음부터 균형 같은 건 없었어. 단지 똑같은 행복을 배당 받는 유 토피아만이 사람들의 공상 속에 존재했을 뿐이지." 유토피아(Utopia)라는 조어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절대로 균형이 유지되는 세상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며 소리치는 오펜바하의 시선 은 까마득한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의 사건들, 그때의 기억들, 신의 손길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그때의 일들은 지금까지도 매듭지어지지 않고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마치 물키벨이나 오펜바하처럼 마음으로 파고드는 새로운 목소리가 줄리탄의 머리를 울렸다. 잠.시.힘.을.빌.려.주.겠.다.나.의.육.체.가.도.달.하.기.전.까.지. 줄리탄은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고귀하지만 차가운 미성의 목소리를 들었 다. 그것은 마치 아주 멀고도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무전같이 아련하고 또 기계적이었다. '누, 누구?' 순간 줄리탄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신성한 힘이 자신의 몸을 침범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이 핏줄로 파고들어 세포 하나 하나에 스 며드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 그리고 오펜바하가 묶어둔 무형의 형틀이 그 힘에 깨져버리기 시작했다. ".......설마." 오펜바하는 자신의 주박을 끊고 바닥에 떨어진 줄리탄을 보며 노란색 두 눈이 커졌다. 절대로 줄리탄의 힘으로는 풀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펜바하 의 힘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자라면 단 한 명. "브륜힐트. 무슨 짓을 한 거야!!" 오펜바하는 분노에 몸을 떨며 소리쳤고 제이미아는 측은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 줄리탄을 지켜보았다. 5. 브륜힐트는 엉망이 되어버린 접견실에서 실신한 카넬리안을 싸늘한 눈초 리로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공명이 된 건가. 지금쯤...... 오펜바하님도 느꼈겠지." 브륜힐트는 자신의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듯 문을 향해 걸어갔지만 순간 등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카, 카넬리안...... 크윽!" 새빨간 두 눈에 매몰찬 광채를 번뜩이는 카넬리안은 뱀처럼 팔을 뻗어 몸을 돌린 브륜힐트의 목을 잡았다. 방금 전의 카넬리안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냉혹한 표정이었다. "테, 테싱님 돌아오셨군요." 브륜힐트는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그 힘이 테싱의 것이라는 것을 단 박에 알 수 있었다. 공명은 이루어졌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육체가 이공간을 빠져나오기 전 먼저 이곳에 도착한 그의 힘의 일부가 카넬리안의 육체를 잠시 빌린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죽일 듯 죄어 오는 테싱 의 힘을 향해서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역시 가랑에게 고통을 준 것에 화를 내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상관없습 니다. 저는 테싱님이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그녀는 몸이 깨져버릴 것 같은 고통에서 소리없이 웃으며 힘들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저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요. 테싱님의 손에 죽는 것으로도 전 몹시 행복합니다." 카넬리안의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테싱의 힘을 뒤집어 쓴 그녀는 말없이 브륜힐트를 바라보다가 팔을 들며 손날로 그녀의 가슴을 꿰뚫어 버 렸다. 퍼억 소리가 나며 브륜힐트의 핏덩이가 바닥에 쏟아졌다. "용서하세요...... 지룡인 저는...... 이 방법 외엔...... 당신을 사랑할 길이..... 없으니까요." 감정의 일부가 결핍된 여자의 방식이란 항상 희생이 따르는가 보다. 브륜 힐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꺾었다. 지룡 중에 수장을 제외하곤 가장 강 력했고 또 유일하게 날개가 달렸고 또 항상 테싱만을 향했던 브륜힐트는 그렇게 증오했던 카넬리안을 통해 테싱을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오는 것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그렇게 죽어갔다. 6. 오펜바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줄리탄에게 인피타르를 던져 전했다. 위험 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오펜바하를 지키려는 미쉘과 지룡들에게 조차 그 는 그만두라고 손짓했다. "받아라. 어차피 테싱의 힘이라면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브륜힐 트의 테싱에 대한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내 실수로군." 그는 도리어 실웃음을 보이곤 코끝을 긁적이며 인피타르를 쥐고 다가오는 줄리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줄리탄은 팍 사라지며 오펜바하 앞에 어느 때 보다도 광염(狂炎)을 불태우는 인피타르를 치켜든 채로 나타났다. 테싱의 힘은 인피타르의 광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 같았다. 그리고 새하얗게 빛나는 빛줄기가 오펜바하에게 내리쳤다. "큭큭. 난 테싱의 손에 죽는 셈이 되는 건가?" 그러나 인피타르는 오펜바하의 머리끝에서 멈춰 섰다. 인피타르가 무언가 에 저항하듯이 바르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것을 보며 지금까지 초연하던 오 펜바하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너....... 테싱의 힘을 거부하고 있는 거야?" "이건, 이건 내 의지가 아냐! 내 힘이 아냐!" 줄리탄이 괴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소리치자 줄리탄의 몸에서 테싱의 힘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리탄은 스스르 바닥에 쓰러졌 다. 죽은 듯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희미하게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펜바하는 그렇게 쓰러진 줄리탄을 바라보며 씁쓸한 얼 굴로 말했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편했을 텐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녀석은 정말 포기라는 걸 모르는 놈이로군." 걱정스러운 표정의 미쉘이 오펜바하 곁으로 다가왔지만 오펜바하는 가면 같이 싱글거리며 말할 뿐이었다. "미쉘. 밥 해줘. 이렇게 배고픈 것은 오랜만이야." 제이미아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 줄리탄을 내려보며 자신의 미색의 옷소매 로 얼굴의 피를 닦아주었다. 줄리탄도 인피타르도 잠들어 있었다. -Blind Talk 병원의 밤은 참 묘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한밤중 병원 일층의 공원에 노트북을 들고 나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고 저는 담배한대를 물고 몰래 사 온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있네요. 언제 퇴원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묘한 기분 덕에 글이 pace를 잃고 감정이 잘 표현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세번이나 다시 읽어 봤지 만 도무지 머리속이 안개 같은게 더 떠오르질 않네요. 아무튼 그래도 피 터지는 부분은 지났으니 이제 또 즐거운 부분이 나오지 만... 이런 기분으로 과연 앞으로 나올 부분을 '즐겁게' 쓸 수 있을지 모 르겠네요. 클라이막스는... 아직입니다. 에 그리고 노트북을 핸드폰에 연결해서 어떻게든 통신에 성공했습니다. 속도가 극악이라 게시물 남기는 것조차 식은땀나게 힘들지만 그대로 메일 검색은 할 수 있으니까 예전 이메일(밑에 써 놓은 것)로 메일 부탁합니다. 답장은 늦더라도 갑니다.-_-v 하지만 오탈자는 퇴원 후에 집에 가서 일괄로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아 지금쯤 간호사들이 이 제멋대로 환자를 찾고 있겠네요. 이만 다시 병실로 터덜터덜 들어갑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낱 은유와 환유와 의인화의 이동부대가 아니던가. 닳고 닳아서 지금은 피부에 와 닿지 않게 된 바로 그 은유 가 아니던가. -프리드리히 니체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노우에 요스이의 少年時代를 들으며... 『SF & FANTASY (go SF)』 28202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5-3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6/12 07:34 읽음: 8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5-03 : 꿈의 미로 관련자료:없음 [7268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6-11 19:38 조회:590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3 : 꿈의 미로 Dreams In My Dream 1. 달라카트 황궁의 드넓은 장원(莊園)에선 잘 가꿔진 들판을 수련실 삼아 세라피스와 그랜사이어의 즉흥대련이 벌어지고 있었다. 격식도 없이 상의 를 벗어 던진 세라피스는 오랜만에 검을 쥔만큼 한나절 내내 그랜사이어와 끝도 없이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오오오!" 그런 그들을 멀찌감치서 구경하던 황궁의 식구들 모두는 찌는 듯한 날의 더위도 잊은 채 오히려 세라피스와 그랜사이어가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섬 뜩한 투기(鬪氣)에 서늘해하며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차아앙! 차앙! 세라피스는 한 곳에 단 일초도 서 있지 않고 바람처럼 몸을 움직이며 그 랜사이어의 몸을 진짜로 찔러버릴 기세로 뛰어들었다간 빠져 나오고 있었 고 또한 그랜사이어 역시 거대한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며 그런 세라피스 를 몰아치고 있었지만 - 사람들의 눈에는 단지 세라피스의 금발이 길게 늘 어지며 금빛 환영(幻影)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 그들이 검을 휘두르는 반경 내의 수풀들은 이미 날카롭게 잘려나가 사방 으로 흩어져 있어서 정원사가 본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정도였. 그 러니까 이건 귀하신 황제가 하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친 수련 이었던 것이다. 파스슥! 검신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세라피스와 그랜사이어는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투둑 소리가 나며 저항을 견뎌내지 못한 세라피스의 검이 조각나 서는 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이거. 굉장한 장인이 만든 보검이라면서...... 모양만 그럴 듯 했 지 너무 허약하잖아." 세라피스는 쯧쯧거리며 박살난 검을 바닥에 떨궜다. 사실 그 이름 모를 장인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새벽부터 시종들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며 죽어라 검을 부딪쳤던 세라피스의 내구력 테스트를 통과할 검이 세상에 몇 자루나 될까. 그랜사이어는 껄껄 웃으며 쪼르르 달려온 세 명의 씰에게 자 신의 두자루의 흑색의 검을 맡겼다. 그의 검 역시 지금까지 한번도 갈라지 지 않은 대단한 검이지만 세라피스의 대련 덕에 검니가 듬성듬성 나가 버 려 또 대장간 신세를 져야할 상황이었다. 그랜사이어는 내리쬐는 빛에 자 신의 외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세라피스야. 가르바트 쪽은 어쩔 셈이냐. 북해 기사단이 현재 무인지경 의 헤스팔콘 왕국들을 공략하며 남진하고 있다는데 달라카트와 전면전을 벌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인 입장도 아닌 것 같더구나. 그 놈들의 본심을 모르겠어. 북해의 마신이라는 마르켈라이쥬 경을 보냈다면 이유가 있을 법한데 말야." "아아 그거요." 그랜사이어는 세라피스에게 별 다른 존칭도 없이 - 마치 아버지가 말하듯 했고 세라피스는 잊었던 두통거리가 다시 찾아온 냥 그 훤칠한 얼굴을 조 금 찡그리며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올린 수건에 몸의 땀을 찍어내고 있 었다. 잔뜩 흐르는 땀 덕분에 세라피스의 긴 머리칼은 매끈한 등에 달라붙 어 있었다. 그는 핏자국이 점점이 묻어난 하얀 수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 다. "뭔가... 가르바트 내부에서 무슨 일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북해 기사단이 움직였으면서도 가르바트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칙사도 칙 서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고..." "흐음." "몇가지 추측은 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뭐 가르바트 에 잠입한 리하르트가 보고를 해올테지만. 하지만 이번 전쟁에 대한 가르 바트의 입장은 뭔가...... 일전의 가르바트 답지 않아요. 아직은 그쪽 여 황제의 성격을 잘 모르겠지만. 흐음. 언제 가르바트 놀러가서 그 여자하고 차나 한잔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나 좋아하게 만들 자신 있는데. 헤헤 ." "이 놈. 황제가 그런 실없는 농담하는 거 아니다. 그보다 그 상처는 괜찮 겠냐?" 세라피스의 가슴에는 그랜사이어의 검날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 었다. 큰 상처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마 다른 황제였다면 자신의 옥체에 감 히 상처를 낸 그랜사이어를 당장 참형시키라고 외쳤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시녀들과 귀부인들이 궁중의(宮中醫)를 불러오라고 호들갑 떠는 이 판국 에 세라피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수건으로 상처를 지긋이 누르며 귀 엽게 히죽 웃었다. "헤에. 황제의 금박을 이렇게 벗겨내시다니 삼족을 멸할 불경죄를 저지르 셨네요?" "그것 또한 황제가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로군. 금박이라." 세라피스는 큭큭 웃으며 결국 황제라는 것도 인간, 단지 온몸에 곱게 금 박이 입혀져 반짝거리는 그런 비싸 보이는 인간일 뿐이라고 말했다. 비웃 음이라기 보다는 달관했다고나 할까. 황제가 다른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는 걸 알면서도 통치를 위해 금박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는 세라피스였다. 인간은 혼자서는 약해서 기댈 수 있는 멋진 우상을 바라고 있으니까. 세라피스는 벌써 붉게 물든 수건으로 상처를 지혈하며 황궁으로 느긋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시처럼 노래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상처입고 싶지 않다면 검을 쥐지 않으면 되는 거지만......" 세라피스가 흘리는 말에 뒤따르던 그랜사이어가 흘낏 고개를 들었다. 귀 에 익은 말이다. "일단 검을 잡았으면 상처받는 것도 두려워해선 안되겠죠." 그랜사이어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찾아온 세라피스에게 처음 대련하며 해줬던 말을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것은 세라피스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지침 중에 하나가 아닐까. 아지 랑이가 길게 깔린 장원 위로 갑작스런 소낙비가 후두드득 쏟아지기 시작했 다. 2. "다, 당신은......" 사방이 싱그러운 수풀로 가득 찬 곳에서 줄리탄은 키 작은 소철(蘇鐵)같 은 제이미아를 앞에 두고 왠지 오래 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는 착각 같 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구차하게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직 깨끗한 물만을 머금고 엷은 태양빛을 삼키며 살아갈 것 같은 그녀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줄리탄을 향해 고고한 향기처럼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씰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제이미아의 녹색의 눈동자는 한동안 말없이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시간의 감각이 무뎌진 줄리탄의 귀에 제이미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카넬리안을 이해해 주셔야 해요." "물론 지금도 그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 제이미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돌았다.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씰로서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씨, 씰로서?" "예. 그 아이는 씰이니까요." 그리고 한동안 꽃내음을 담은 공기가 몸 이곳 저곳을 훑으며 지나갈 때까 지 침묵이 계속되었다. 제이미아는 발소리도 없이 수풀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말을 흘렸다. 작은 인목(人木)같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줄리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 해해 줄 수 있나요?" 대답을 바라지 않고 눈물처럼 꺼낸 그녀의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줄리탄 의 마음을 사슬로 옭아매는 듯 했다. 절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지독한 질문은 대답할 수도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그리고 줄리탄이 눈을 떴을 때 촛불 빛이 방을 채운 선실의 나무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청각을 되찾기 시작한 귓가에 바닷물이 이리저리 출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 기분 탓일까? 꿈속에서의 파릇한 풀냄새의 잔 재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꿈...... 꿈인가. 그럼 여긴?' 줄리탄은 이곳이 일루미네이터의 선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펜바하 앞에서 정신을 잃은 뒤에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 후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 관없이 줄리탄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 옆의 의자에 기대어 살포시 잠들어 있는 카넬리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눈을 꼬옥 감고 두 팔을 모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잠든 모습을 모습을 보 는 건 또 오랫만이다. "다행이야......" 줄리탄은 자꾸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다시 곁에 돌아온 거다. 당장 카넬리안을 꽉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아주 오랜만의 수면을 방 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맞아. 그때 카넬리안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지.'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을까? 줄리탄은 빨리 카넬리안에게 멋진 음식 을 만들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몸에 온통 힘이 없었고 이곳 저곳에 붕대도 감겨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움직이는데는 큰 무 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셔츠를 입고 문을 열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갑판에 나오니 차갑고 상쾌한 밤의 바닷바 람이 몸 속에 가득 들어와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때 줄리 탄의 눈에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어......?"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줄리탄은 날랜 걸음으로 횃불 근처에 있는 수통에 가서 그 수면 위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 흔들리는 수면 위에는 불빛에 반사된 줄리탄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흔들거렸다. '이런.....' 백발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금 긴 머리칼을 잡아 이마 아래로 내리며 재 차 확인해 보았지만 수면 위의 모습 그대로였다. 새하얀 머리칼. 진한 남 색이던 자신의 머리칼이 눈처럼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분 명 목숨의 끝까지 사용한 인피타르 때문이리라. 그리고 씁쓸해진 표정이 수면 위에 또 나타났다. "괜찮아......." 줄리탄은 스스로를 달래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목 숨의 절반 아니 거의 전부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귀여운 아이들 앞에 앉아 젊은 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소일거리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카넬리안과 이 세상을 여행하려던 꿈은 이룰 시간이 남아 있을까 ? "아하하. 염색이라도 할까?" 줄리탄은 애써 태연한 척 실소를 지으며 하얀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모습 이 그려진 수면 위로 손을 뻗어 얼굴을 적셨다. 미약한 인간인 자신의 목 숨의 가치가이렇게 값진 줄 몰랐다. 단지 생명의 대부분을 잃는 것 정도로 그 절대적인 '용의 굴'에 들어가서 카넬리안을 구해왔으니까. 그 정도면 절대로 손해본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참 운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서도 줄리탄은 갑자기 고이기 시작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툭 툭 툭 툭 방울진 눈물이 수면 위에 계속 떨어지며 수면 위의 얼굴이 자꾸만 흐려졌 고 엷은 흐느낌이 세어 나왔다. 이제 고작 18세를 지나는 줄리탄이 겪어내 긴 너무 힘든 사랑이었던 것이다. 겨우...... 겨우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카넬리안을 구해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리쳐 울고 싶을 만큼 억울했다. 자신보다는 이런 나 약한 주인만을 바라보고 있는 카넬리안이 너무 불쌍하고 미안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수통을 꽉 잡으며 그는 한동안 새처럼 흐느꼈다. 3. 카넬리안은 잠결에 슬쩍 눈을 뜨다가 침대에 있어야 할 남자가 사라져 있 는 걸 확인하며 벌떡 일어서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대체 어디로 또 내 뺀 거야 환자 주제에!'라며 성질을 부렸을지도 모르지만 카 넬리안은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얼굴로 당황하며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때마침 줄리탄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줄리탄의 이름을 부르며 일루미네이터 구석구석을 뛰어다녔을 것이 분명했 다. "주, 주인님!!" "아 일어났어? 자 약속대로 음식 만들어 왔어. 맛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 지만." 줄리탄은 일상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손에 들고 있는 접시에는 빨갛고 노란 과일 조각과 야채들이 담긴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평 소와 다름없었지만......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순백에 가까운 머리칼을 보 며 죄를 지은 아이처럼 제대로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개 숙인 그 녀의 작은 입에서는 가슴 아픈 말이 세어 나왔다. "바보. 씰 때문에...... 그런 꼴이 되는 멍청이가 어딨어." "바, 바보라니. 그래도 최선을 다했는데 너무 하잖아." 어색하게 웃는 줄리탄은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지만 카 넬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짜내듯 말할 뿐이었다. "역시 당신 같은 사람과 계약하는 게 아니었어. 마음만 아파......" 절대로 줄리탄에게 자신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 을 꺼내기엔 너무도 미안해서, 이제 생명의 얼마가 남았는지 짐작조차 하 기 두려운 그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괴로워서...... 그때 줄리탄의 두 팔 이 작은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용서해 줘. 네 말대로 나 바보라서 이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카넬리안은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이라고 울먹이듯 칭얼거리 며 흔들리는 빨간 눈동자로 천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리어 미안하는 말 을 듣게 되다니. 정말로 울고 싶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꽉 감았다. 줄리탄은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떠나지마. 또 떠나면 또 그렇게 구하러 갈 테니까." "고마워요. 울고 싶을 만큼 고마워요 나의 사랑스런 테이머시여."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살아와서 지겨운 세상의 시간 따위는 빨리 지나가 버 렸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카넬리안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줄리탄의 가슴속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그냥 이대로 멈춰버리길 절실히 기 도했다. 이상해. 이렇게 기쁜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4. 그리고 잠시동안의 키스. 소박한 전희(前喜)와 함께 줄리탄이 카넬리안을 침대에 눕히며 총총히 방을 밝히던 촛불을 껐다. 금새 숨어 있던 희미한 달빛무리가 향기처럼 방안에 들어찼고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어......?" "으응." 어둑한 방안에서도 그녀의 빨간 눈은 유독 빛을 발했다. 그런 눈을 깜빡 이며 줄리탄을 올려보던 카넬리안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웃은 줄리탄은 하얀 머리칼을 추륵 흘러내리며 카넬리안의 얼굴로 다가갔고 곧 부드럽게 입술이 포개어 지며 물 속에 풀어지는 잉크처럼 녹아들 듯 서로 의 혀가 감겼다.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무게와 살결을 느끼며 몸을 바르르 떨었고 서로의 손바닥을 포개며 엉키는 넝쿨처럼 손가락 사이사이로 꽉 잡 은 채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에 대한 두려움처럼 카넬 리안이 조그맣게 말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상관없어." 그는 언제나 카넬리안이 인간으로 있기에 결핍된 부분들에 대해선 상관없 다고 말하곤 했다. 작은 창 밖을 통해 느릿한 물줄기처럼 들어오는 창백한 달빛에 카넬리안의 여린 어깨며 조금은 미성숙의 가슴이 조금씩 들어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흑백사진처럼 순결한 그녀의 나신 뒤에는 애써 감추고 있는 깊은 상처가 너무도 많다는 걸 줄리탄은 알고 있었다. 치료해 주고 싶어서, 감싸주고 싶어서 줄리탄은 그런 그녀의 몸을 쓰다듬으며 엷은 미 소를 보였다. "아아......" 줄리탄의 따뜻한 손길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녀의 조그맣게 벌린 입에 서 신음이 세어 나왔다. 청초한 은빛의 등을 가진 유선(流線)의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처럼 그녀는 그런 줄리탄의 몸에 꼬옥 달라붙으며 작은 손으 로 목을 감싸고 등을 매만지며 행복의 실체를 확인하려 애쓰고 있었다. 왠 지 줄리탄은 조심스럽게 벌어지는 자신들의 성애(性愛)를 생각하며 그녀나 자신이나 모두 미성년(未成年)이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묻어나고 있었다. 자기 나이를 모를 만큼 많은 시간을 살아온 그녀는 여전히 성인의 문턱 앞 에서 멈춰버린 미성년의 소녀였다. 소중한 미성년의 추억처럼 그들은 밤의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주인님.......' 그런 호칭을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녀는 지금만큼은 줄리 탄이라는 남자와 동등하게 있고 싶다는 욕심을 품고 싶어서 조용히 얼굴 위로 다가오는 그의 맥박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얇고 매끈한 다리 가 줄리탄의 허벅지를 감으며 소곤거리듯 움직였고 줄리탄의 백발이 그녀 의 가슴 부근에 엉킬 때마다 카넬리안의 두 손은 그의 귀를, 부드러운 몸 을 쓰다듬듯 흐르고 지나갔다. 푸른 달빛의 반짝이는 입자들이 땀방울이 맺힌 줄리탄의 등위에 소리 없이 뿌려지고 있었다. "좋은 냄새야." "응?" 오늘 안 사실인데 카넬리안의 몸에선 풀냄새를 닮은 향기가 났다. 마치 친절한 수풀 속에 몸을 담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서 줄리탄은 그녀를 꽉 껴안으며 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두 눈을 꼬옥 감은 카넬리안은 좋은 꿈 은 꾸는 듯 현실의 무게를 상실해 버렸다. 몸에 힘이 풀어지고 또 막 눈물 이 쏟아질 것처럼 행복한 기분. 자신을 이렇게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 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스르르 둘의 마음이 물처럼 공기 처럼 자연스레 뭉치며 완벽한 공명이 시작되었다. '아!' 줄리탄은 자신의 몸이, 마음이 카넬리안의 마음의 벽 뒤편으로 빨려 들어 가는 것 같은 현기증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씁쓸함에서 괴로 운 연민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카넬리안 마음 저편에 지하실처럼 숨겨둔 이면(異面)은 화원(花園)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이었다 면 이런 마음을 담고 살기 괴로워 분명히 자살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괴로움을 참고 살았던 거야? 수백년전의 그녀가 보고 듣고 느낀 괴로움들 이 잔광처럼 줄리탄 앞을 쓰라리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울고 있는 거야?" "계속 곁에 있어 줄게." 줄리탄을 얼굴을 매만지던 카넬리안은 촉촉한 물기를 느끼며 줄리탄이 만 들어 준 따뜻한 꿈에 취한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카넬리안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며 다시 한번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그때. '누, 누구지?'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마음 끝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바라보며 소름이 끼 쳤다. 여섯장의 순백의 날개로 몸을 감싼 채 길고 얇은 장검을 들고 서 있 는 자의 모습.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내리고 너무 성스러워서 감정 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줄리탄은 숨이 막히 는 듯한 중압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비정천사(非情天使)의 모습을 한 궁룡의 수장 테싱. 그걸 느낀 순간 카넬리안이 갑자기 줄리탄을 밀쳐내며 자기도 모르게 찢어지게 소리쳤다. "내 마음을 훔쳐보지마!!" 그 순간 허물어졌던 마음의 벽이 차갑게 솟아오르며 카넬리안의 마음을 겹겹이 둘렀고 공명의 끈은 비명을 지르며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카넬리 안은 자신이 한 일에 당황하며 줄리탄을 향해 뭐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창피함과 미안함에 창백해진 그녀가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몸의 흉터를 들킨 소녀처럼. '보, 보면 안돼 주인님...... 내 마음을 보면 안돼.' 아직까지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며 마음 속에 낙인처럼 남아 있는 테싱 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분명히 사랑하는 줄리탄에게 자 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진정으로 줄리탄을 사랑한다. 하지 만 그러면서도 이제는 테싱을 정말로 잊었다고, 자.신.을.위.해.목.숨.을. 버.렸.던. 또 다른 남자, 자신의 전 테이머 테싱을 잊어버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고 같이 늙 어갈 수조차 없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백발이 되어 버린 남자가 여기 있는 데 어떻게 전 주인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걸까. 죄악 같은 것이었다 그건 . 그래서 들키고 싶지 않았다. 테싱이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 면서도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자해하며 너무 괴로 워서 미친 듯이 외치고 싶은 비명을 억지로 삼키고 있었다. "괜찮아? 안색이 안좋아! 정말 괜찮은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카넬리안!"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카 넬리안은 그런 줄리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흘릴 수 없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마치 출구가 없는 꿈의 미로 속을 영원히 방황 하는 것 같은 기분. 차가운 밤의 바다는 끝도 없이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Blind Talk 정말이지 여자는 남자 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동물이라고 새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묘사가 부족해서 잘 표현하지 못한 듯 하지만 위의 남녀 의 관계는 정말로 절실하답니다. 에 그리고... 제게 메일 보내신 분들... 아마 답장 안갔을 겁니다. 괴이하게 노트북 통신으로 메일 계정 설정해서 OUTLOOK으로 받고는 있는데 그러면 서버에서 거부한다면서 답장이 안보내지네요. 끄응.그렇다고 답장 을 이 잡담에다 올릴 수는 없고... 어쨌든 프라이버시니까... 그래서 제가 잠시라도 병원에서 나와 집에 들릴 수 있게 될 때 답장 한번에 보내드립니 다. 그러니까 메일 보내주세요^_^a 그리고 하는 김에 추천도 좀...-_-; 병원에 있으니까 별로 할 게 없어서 더욱 메일함을 기웃거리게 되네요. 사 람 참 간사하죠? 헤유웅. 다음 편은 또 언제 쓰나... 나는 이제 대도시에 홀로 내버려진 빈캔 같아. 서로의 전부를 알게 되기까지가... 사랑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잠들까... 세상이 끝날 때까지 헤어지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바라던 긴 세월의 밤과 돌아오지 않는 시간만이 왜 빛나고서는... 수척해진 마음까지도 부셔 버리는가... 끝없는 생각만이... 이 슬픈 맘에... 그리고 사람은 대답을 찾으며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는다 욕망투성이의 거리 밤하늘의 별들도 우리들을 밝힐 수 없어 세상이 끝나기전에 알려줘요 활짝 핀 꽃이 어울리는 대단원을. 누구나가 바라면서 영원을 믿진 않지만... 그런데도 분명히 내일을 보고있지 끝없는 날들과 이 비극의 밤... ...슬램덩크 엔딩곡이죠 이거... 왠지 이번 편과 비슷한 느낌의 가사... E-MAIL : billiken@hananet.net 『SF & FANTASY (go SF)』 30189번 제 목:[하/퍼옴] 드래곤 레이디 15-4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6/25 20:55 읽음:345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5-04 : 꿈의 미로 관련자료:없음 [73763]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6-24 21:24 조회:603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4 : 꿈의 미로 Hind Mind 1. 불을 짚인 벽난로의 뜨거운 기운에도 불구하고 창가의 손님들 입에서 하 얀 입김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날씨의 가르바트의 한 주점에선 긴 흑발의 사내가 눈발이 흩날리는 창가를 바라보며 작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 편에 앉아 그를 바라보던 포니테일의 소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젤리드...... 외로워 보여." 하지만 젤리드는 대답도 없이 창 밖을 하얗게 채우는 눈의 장막에 계속 시선을 담으며 또 한잔 맑은 술을 머금을 뿐이었다. 적잖게 주점에 들어차 있는 취객들의 화제는 헤스팔콘 제국의 붕괴와 달라카트의 승리, 북해기사 단의 소집 등등이었는데 간간이 용이 봤다는 이야기도 끼어 들고 있었다. 투박한 자기병에 들어 있던 도수 높은 증류주를 모두 비워버리고 나서야 젤리드는 얼굴색하나 안 변한 모습으로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위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군. 이 가르바트도 그렇고. 참 으로 마음이 변색되기 쉬운 시대야." 젤리드는 마음만큼은 취해 있는지 얼얼한 공기에 차가워진 말을 시처럼 읊조리는 것이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젤리드?" "아니 아무 것도. 그냥 나온 말이야." "피이. 재미없다!" 카리나는 두 손으로 갸름한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벽난로 근처의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눈먼 음유시인의 입에선 노래를 닮은 영웅시가 공허 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때 주점의 여급이 젤리드에게 다가오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술 더 드릴까요?" 젤리드가 풍기는 위험하고 차가운 기운에 불구하고 그것에 반한 듯한 표 정의 어린 여자는 창가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하는 듯 했지만 젤리드는 말없이 비어 있는 술병을 집어 들어 전해 줄뿐이었다. 창 밖은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눈을 품은 구름떼에 가려 회색 빛으로 어둑했 다. 2. 마르켈라이쥬가 이끄는 북해 기사단은 무인지경이 되어버린 헤스팔콘을 휘저으며 군소왕국들에게 가르바트에 대한 우호문서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누가 봐도 가르바트의 정수인 북해 기사단이 나설 이유 가 없는 '하찮은' 일. 타국에서 보기에도 의심스럽고 위험한 속냄새가 풀 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의 눈길에 꿈쩍도 하지 않는 곰 같은 사내 마르켈라이쥬는 묵묵히 그 가당찮은 의무를 수행하며 남진하 여 다카란 요새 앞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가 공교롭게도 줄리 탄 일행이 다카란으로 복귀할 때였다. 마르켈라이쥬는 절대자의 땅인 오칼 란트로 혼자 들어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의 주인공 줄리탄이 자신 앞의 성채에 있다는 말에 드물게 귀가 솔깃했다. 평소 그런 풍문에 신경쓰지 않 는 그였지만 해룡의 비호를 받으며 오펜바하의 황궁에 서슴치 않고 들어갔 다는 말에는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봐! 그 말 들었어? 북해 기사단의 마르켈라이쥬가 이곳으로 온데!" "뭐! 그럼 설마 북해 기사단이 공격해 온다는 거야?" "아니 혼자서 온다는데?" "설마! 가르바트의 프리셉터가 혼자 타국의 진지로 올 리가 없지!" "사모예드 경을 만나러 온다는데?" "사모예드라면...... 노블리스?" "오오! 볼만하겠는데!" 마르켈라이쥬는 아직은 적진이 아닌 다카란과 간단한 대담(對談)을 요청 한 것이었다. 그 소식에 군인들은 줄리탄과 마르켈라이쥬가 싸우면 누가이 기겠냐며 불손한 내기를 벌일 정도였으니 북해의 마신 마르켈라이쥬가 드 물게 비공식적인 만남을 자청했다는 것 자체가 헤스페리아 사람들로선 흥 분할만한 빅뉴스였던 것이다. 마르켈라이쥬의 요청을 받고 잠시 생각하던 파르낫소는 북해 기사단의 의중도 떠 보고 그들에 대한 달라카트의 태도가 우호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겸해서 선선히 수락했다. 물론 마르켈라이쥬를 맞이할 대상은 줄리탄이었지만. 3. '왜 나냐고......' 줄리탄은 다카란으로 오자마자 마르켈라이쥬를 맞이하라는 파르낫소의 명 령 아닌 부탁을 받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마르켈라이쥬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북해 기사단이 초기의 예상과는 달리 당장이라 도 쳐들어 올 분위기는 아닌 중립적인 입장인데다가 현재의 자리가 황제의 윤허와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양국 무장의 상견례'쯤 되는 것이어서 마음 이 크게 무겁지는 않았지만 - 마르켈라이쥬와 상대할 만한 자는 줄리탄이 다, 라는 이상스런 기대감과 설득력이 양쪽 군인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줄리탄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줄리탄은 카넬리 안이라는 '목적'이 없는 이상 여전히 쉽게 놀라고 언변이 단순한 미성년자 였던 것이다. "노블리스 님! 달라카트의 힘을 보여줘야 해요!" "당신에게 북해 기사단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세요!" 줄리탄의 찢어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접견실로 가는 곳곳마다 그를 발견하는 군인들이 차력사도 아닌데 힘을 보여주라며 난리도 아니었고 줄 리탄은 그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펜바하에게 당당히 걸어갈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랄까나. 4. 마르켈라이쥬는 호걸답게 테이블을 꽉 채우는 덩치로 근엄히 접견실에 앉 아 다카란 측에서 대접한 벌꿀을 섞은 따뜻한 양젖을 마시고 있었다. 그 주변의 병사들은 마르켈라이쥬가 뿜어내는 강인하고 엄숙한 기운에 벌써부 터 주눅이 들어 한시라도 빨리 줄리탄이 도착하길 기도하고 있는 상태. 그 때 도료가 반쯤 벗겨진 오래된 나무문이 삐꺽 열리며 백발의 사내가 멋쩍 게 고개를 쑥 내미는 것이었다. 마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라는 좀 멍 청한 표정. 마르켈라이쥬는 의심스런 얼굴을 애써 숨기며 줄리탄을 바라보 았다. '뭐야...... 설마 저 자가 줄리탄? 생각보다 너무......' 너무 평범했다. 단지 귀를 덮는 머리칼이 백발이라는 걸 제외하면 오펜바 하와 결투를 벌이기는커녕 식당에 밥 얻으러 갔다가도 쫓겨날 것 같은 무 른 인상이다. 하지만 그런 외모 이면에 뭔가 다른 사람에서는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기운이 느껴져 마르켈라이쥬는 일단 그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당신이 해룡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모예드 줄리탄? 소문만 들어 왔던 당신의 실력을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외다." 줄리탄은 접견실에 들어오자마자 엄청난 덩치의 사내가 산처럼 일어서며 방을 다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고개를 잔뜩 들어 오렸다. 사람 기를 죽이는데 일가견이 있는 남자 같다. 게다가 실력 을 보다니...... 뭐야 이 사람 갑자기. 아무튼 이런 자가 지휘하는 군대와 싸워야 한다는 건 왠지 반칙 같다. "저야말로 당신과 이렇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줄리탄은 애써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힌 속마음은, 이 사람들! 왜 이런 무시무시한 자리에 나를 밀어 넣은 거야. 돌아가면 잔뜩 욕을 해 줄테다! 였다. "해룡의 수장이 인정한 당신이 그런 겸손이라니......의외로군요." 소문이라는 건 정말로 빠르고 과장되기 마련이다. 마르켈라이쥬 역시 줄 리탄이 해룡의 수장의 시험을 통과한 세상에 둘도 없는 진정한 바다의 용 사라는 창피한 수식어가 잔뜩 들어붙은 소문을 적잖게 들어왔던 것이다. 하긴 이미 줄리탄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어 먹고 사는 음유시인들도 심심찮 게 찾아볼 수 있다. 살아있는 전설이랄까....... 그러나 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두 '살아있는 전설'이 만난 이 자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줄리 탄이 자리에 앉으며 뭔소리를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다가 기껏 꺼낸 화 제가...... "그 양젖은 맛있게 드셨어요?" "으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르켈라이쥬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역시 당황하며 되물었다. 대뜸 양젖이라니? 뭔가 깊은 뜻이 있는 선문답일까? 줄리탄은 하얀 머리칼 을 긁적이며 히죽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하하. 그거 제가 만든 거라서요." "으음......" 참으로 맥빠지는 자문자답이지 않은가. 마르켈라이쥬는 지금까지 별의 별 사람들과 노련하게 대담을 한 적이 있었다. 최악의 상대 세이드와 전쟁터 한복판에서 휴전을 위해 만나 대화했을 때도 흔들림 없이 세이드의 광기에 휘둘리지 않은 적이 있건만 대체 이 남자는...... 어깨 힘이 다 빠지는 목 소리로 '양젖은 내가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게 기껏 꺼낸 화두란 말인가. 마르켈라이쥬는 '알 수 없는 녀석이다!'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줄리탄을 바 라볼 뿐이었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은 일종의 예의건만 줄리탄의 쓴 웃음을 담은 표정은 '맛이 없었나.......' 였다. 결국 질문을 던진 쪽은 마르켈라이쥬였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하시렵니까?" "예?" "우테 황제 폐하의 칙령이 떨어진다면 저희 북해 기사단은 당장이라도 당 신들을 칠 수 있습니다. 아니 쳐야만 합니다. 당신들의 영토를 짓밟고 당 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죽일 수도 있겠지요. 곡해하지 마시길. 하지만 본인 과 북해 기사단은 절대로 당신들에게 패배하지 않으리라 자신합니다." 주변 병사들이 잔뜩 긴장할만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갑작스런 무례함. 하지만 줄리탄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전혀 화가 나지 도 겁을 먹지도 않고 되물을 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하하. 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켈라이쥬가 웃음을 섞으며 말했지만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담겨 있었 다 농담쪼가리 정도가 아니라 공격명령이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다카란을 초토화시켜 버릴 수 있다는 섬뜻한 협박의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줄리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기분이 상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 다. "당신과 전쟁터에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기사답지 않은 말이로군요. 겁이 나는 겁니까?" 마르켈라이쥬는 자신의 충실한 부관 가이브러쉬의 말투를 빌려 줄리탄이 라는 사내의 깊이를 시험해 보려는 듯 했다. 그의 '정중한' 조롱에 줄리탄 은 입꼬리를 올려 씁쓸하게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예. 겁납니다. 당신들과 싸우는 것 따위에 제 소중한 것을 잃을까봐 겁 이 납니다." 마르켈라이쥬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움찔했다. 차마 생각지 못했던 반 격이었다. 겁이 난다니...... 게다가 그 따위라니...... 줄리탄은 마르켈 라이쥬를 똑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당신과 싸우게 된다면 싸웁니다. 겁 이 나도 피하지 않을 겁니다." "......" 순진하고 명쾌하며 무서운 대답이었다. 돈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 니고 황제에 대한 충성 때문도 아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 마르켈 라이쥬는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자라는 턱을 몇 번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펜바하 제일황제와 담판을 지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예. 그리고 지켰습니다. 당신을 상대로 할 때도 저는 반드시 지킵니다." 줄리탄의 목을 박는 듯한 단호함에 마르켈라이쥬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왜 저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 사람들의 입에 화자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다른 누가 만든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만든 신념을 지키 는 자다. 마르켈라이쥬는 그 강인한 표정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사모예드 경. 소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무례라뇨...... 오히려 제가 이런 자리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엉 뚱한 말을 해버렸네요." 줄리탄은 슬그머니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마르켈라이쥬는 이 단순한 사내에게 적잖게 호감이 갔다. 뭐랄까, 복잡한 도심을 오랜만에 벗어나 편 안하게 초원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즐거운 대화가 오가기 시 작할 찰나 그 풍요로운 기분을 깨버리려는 듯 마르켈라이쥬의 부관 가이브 러쉬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그것은 분명히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마르켈라이쥬는 굳어 있는 부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도 그가 들고 온 소 식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켈라이쥬의 낮은 목소리가 소박한 접견실을 울렸다. "제도로부터 온 소식이겠지?" "그렇습니다......" 마르켈라이쥬는 거체를 자리에서 일으키며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이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사모예드 경." "예? 무슨 일로......" "다음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주좌(酒座)에서 속 편하게 봤으면 좋겠군요. 아마도 당신과 전쟁터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 길." 마르켈라이쥬는 곧 비장한 표정으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즉시 북 기사단은 가르바트로 방향을 바꾸며 회군(回軍)하기 시작했다. 가르바트로 부터 코머런트 대공의 황위찬탈 급보가 도착했던 것이다. 가이브러쉬도 마 르켈라이쥬도 운명처럼 예상하고 있던 소식이었다. 5. 베오폴트는 승리를 자축하는 완연한 승리의 분위기였다. 도시 곳곳에서 빵과 고기를 굽는 냄새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대낮부터 와인 병을 들고 서로 뒤섞여 엉망진창인 노래를 멋대로 부르고 있었다. 또한 그 런 사람들 사이에 적잖게 이종족들이 끼어 있다는 것도 대 헤스팔콘 전 승 리의 부산물이리라. 베오폴트로 돌아온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끌고 베오폴 트 최고급의 레스토랑으로 가기로 했다. 그 멋진 레스토랑은 베오폴트 해 안가에 위치한 햐안 반노천 식당이었는데 그곳 식구들은 아침 일찍부터 줄 리탄이 온다는 소식에 들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예드 경과 카넬리안 님. 이렇게 저희 가게를 찾아주 시다니 대대로 깊은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아하하...... 식사하러 온 것 뿐인데 영광이라뇨." 말끔하게 차려 입은 레스토랑의 지배인은 '유명인' 줄리탄을 맞이하기 위 해 푸른 해안가를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자리까지 비워 놓은 채 문 앞에서 부터 커플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여간해선 이런 고급스러운 곳은 찾지 않 는 줄리탄인데다가 요리에 아주 정통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식당의 지 배인으로서는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잖은가. 엷은 초록빛의 봄풀 같이 파릇한 원피스를 입은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쿡쿡 찌르며 소곤거렸다. 그녀 의 빨간 눈동자는 회백색의 벽들 사이로 넝쿨이 어지럽게 엉켜 있는 레스 토랑의 멋진 외관을 담고 있었다. "주인님. 여기 예쁜 곳이네?" "응. 저번부터 꼭 한번 와보려고 했거든." "아아! 정말 대단한 영광입니다! 자 여기로." 줄리탄은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 도시 내의 인기인 영순위는 세 라피스도 메이도 물키벨도 도렌 남작도 아닌 줄리탄이었다. 본래 그가 노 블리스라는 별명으로 항구도시 베오폴트의 자랑거리이긴 했지만 오펜바하 와 일합을 겨루고 카넬리안을 구출해 왔다는 낭만적인 입소문들이 (과장까 지 돼서) 파다하게 깔리고 그 증거로 머리까지 백발이 되었으니 남녀노소 죄다 줄리탄을 칭송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무튼 엉성한 시골청년에서 제국의 구국영웅이 될 줄은 세상 누구도 몰랐을 거다. 카넬리안이 시킨 것 은 신선한 은대구를 향긋한 기름이 튀긴 담백한 요리였고 줄리탄은 야채 퓨레 소스에 여러 물고기살을 조심스레 넣어 약한 불에 오래 찐 것이었다. 요리사가 직접 나와 달라카트인 특유의 과장된 몸집으로 자신의 요리 장 점에 해주며 일일이 음식을 전해 주었다. "주인님. 앞으로 뭐할 꺼야?" "글쎄......" 줄리탄은 열려 있는 흙벽 창문을 통해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투명한 태양 빛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따뜻한 볕이 두 사람의 뺨을 발갛게 데워 주고 있었다. 내일 무엇을 해야할지 궁리하지 않아도 충분한 편안하고 나 른한 날이 계속 될 것 같은 좋은 기분. 카넬리안은 커다란 은대구의 살을 발라내는데 조금 서툰 것 같았다. 줄리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녀의 뒤편으로 다가가 그녀의 두 팔목을 살며시 잡았다. "이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와아!" 줄리탄은 스푼으로 물고기의 머리부분을 누르며 포크로 노련하게 살을 발 라내기 시작했다. 카넬리안은 그의 손재주가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나 주인님에게 처음으로 뭘 배운 것 같아." "하하. 그, 그래?" 그러나 줄리탄의 시범을 한번 보자마자 카넬리안은 완벽하게 줄리탄의 동 작을 따라할 수 있었다. 아무튼 재미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의 미래에 대해서, 같이 살아갈 집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줄 리탄이 하는 말에 그녀는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묘하게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라고 연산 대답할 뿐이었다. 줄리탄은 그 것이 그녀의 입에 배어있는 부정적인 말버릇 때문이라고 넘겨 생각했지만 - 틀렸다. 그녀가 숨기는 것을 줄리탄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부지런히 포크질을 해서 하얀 물고기 살을 발라내며 재잘거렸다. "헤헤. 이런 기름진 요리를 먹어도 절대로 살찌지 않는다는 건 행복한 일 이야. 가끔은 씰인게 좋을 때도 있어. 에헤헤." "카넬리안." 빨개진 얼굴로 자신들의 미래계획을 동화처럼 들려주고 있던 줄리탄은 갑 자기 정색을 하며 그녀를 한참동안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에 뭐라도 묻 은 건가? 그녀는 깨끗한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며 동그란 눈동자로 줄리 탄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이야? "결혼하자." "......주인님." "미안. 강요하고 있는 거야." 초조한 줄리탄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 진심으로 줄리탄은 자신의 씰과 결혼하고 싶었다. 아이를 낳지 못해도 늙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다른 때라면 '바보같은 말 좀 하지마! 무 슨 씰하고 결혼을 한다는 거야!'라고 외쳤겠지만 이번에는 그 아름다운 얼 굴에 창백한 미소가 번지다간 곧 그 미소가 녹아버리며 조금 고개를 기울 일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어." "......" 줄리탄은 순간 그녀의 표정이 너무 가엾어서 눈물이 흐를 뻔했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는 이런데서 하는 게 아냐.'라며 곧 헤죽 웃어 넘겼지만 순간 적으로 숨김없이 드러났던 그녀의 얼굴빛은 서글픈 공명을 일으키며 불길 한 미래를 뿌옇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앞날. "와아! 카넬리안아!" 그때 물키벨이 뒤에서 달려들며 카넬리안을 꽉 껴안았기 때문에 갑자기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물키벨은 카넬리안과 뺨을 비벼대며 '여 기서 뭐해에에에?'라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카넬리안은 '이것 좀 놔요!'라 며 기겁을 하고 있었고. 그때 멋대로 소매를 말아올린 정장을 입은 톨베인 이 뒤에서 나타나며 물키벨의 뒷덜미를 애완동물처럼 잡아 올렸다. "한시도 가만있질 못하는 겁니까?" "우아아앙! 놔아! 이것 놔아아아!" 톨베인은 바둥거리는 물키벨을 무시하며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아 줄리탄. 항구로 가봐. 너한테 소포 도착했어." "소포?" "오카란트로부터 온 거야." "오, 오칼란트?"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톨베인은 물키벨을 들어 올린 채 조용히 예약된 테이블로 걸어가 버렸고 물키벨이 '상어지느러미 요리하고 문어회 사줘!' 라며 칭얼거리는 통에 더 이상 진지한 분위기 끌어가긴 글러 먹은 것 같았 다. 카넬리안이 피하듯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주인님. 가서 소포 뜯어보자. 혹시 모르잖아? 주인님을 흠모하는 여자가 보내 걸지도?" 그렇게 꺄르르 웃는 그녀의 표정은 확실히 공허했다. 인생은 결과가 결정 되어 있는 인형극이 아니라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줄리탄이었지만 가끔 은 자신과 그녀의 몸에 걸려 있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느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Blind Talk 제 글에 실망했다는 게시물을 읽어보며 많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게다가 갈수록 제 글이 '전형적'이 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해줘서, 따끔한 지적 고 맙게 참고하긴 했지만 했지만 며칠 동안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한 것은 어 쩔 수 없는 제 성격이네요. 하지만 한가지 꼭 확실히 집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그 분의 글에서 예상한 것처럼 출판사가 제게 '전형적인 글'을 쓰라 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자모 출판사에 상당히 만족하 고 있으며 절대 제 글에 터치하는 일은 없습니다.(편집 때문에 어쩔 수 없 이 상의할 때는 있지만.) 만약 글이 전형적이 되고 특징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면 그건 100% 제가 게으르고 타성에 젖은 탓입니다. 자아. 뭐 어쩌겠습니다. 제가 구제불능인걸. 그럼 my pace로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더 이상의 인터넷 연재 장소를 늘리지 않겠 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퍼가겠다는 메일 보내지 말아 주세요. 이제 엔딩까 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와중에 얼마 남지도 않은 부분, 새로운 곳에 연 재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뿐더러 지금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SKID ROW의 WASTED TIME을 들으며... 덧말:죄송. 이번 편은 다시 훑어보지 못한 채 올립니다. 그리고 이곳은 여 전히 병원입니다.:-) 『SF & FANTASY (go SF)』 30465번 제 목:[히/퍼옴] 드래곤 레이디 15-5 올린이:다크네스(김아름 ) 01/06/27 23:44 읽음: 67 관련자료 없음 -------------------------------------------------------------------------- --- 제 목:[ DRAGON LADY ] 15-05 : 꿈의 미로 관련자료:없음 [7399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06-27 22:23 조회:178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5 : 꿈의 미로 Postage Message 1. 시오는 레오폴트가 만든 깊은 상처 때문에 가슴에 잔뜩 붕대를 감고 있었 지만 (톨베인의 말을 빌리자면) 잡초 같은 소생력 덕에 벌써부터 쾌활하게 웃으며 배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오는 카넬리안과 함께 승선한 줄리 탄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줄리탄 부럽다 정말. 엄청나게 큰 소포까지 받고. 누구한테서 온 거야?" "오칼란트에서 나한테 소포 보낼 사람이 어딨냐." 줄리탄은 선상에 놓여 있는 직육면체의 새하얀 금속성 상자를 보며 여전 히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모양이라면 농담이라도 여성 팬이 보낸 선물이라고는 못하겠다. 게다가 소포라니. 정보매매소나 대상(隊商) 등을 통해 전달되는 소포는 보편화 된 것이 아닐뿐더러 운송비도 상당할텐데 - 대체 누가 오칼란트에서 소포를 보내온단 말인가. 메이는 도수 높은 안경 낀 눈으로 서류 더미를 훑어보며 지나가다가 그 문제의 소포를 흘낏 보며 말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이거 꼭 관짝 같다?" "......" "미안." 갑자기 분위기 썰렁하게 만든 메이는 또다시 서류를 중얼중얼 읽으며 함 교로 들어갔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넬 리안이 뭔가가 떠오르는 듯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 "왜?" "이거 바다에 던져 버리자. 위험해 보여." "......카넬리안." 관에 이어서 이번에는 위험물이라. 줄리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열어볼래!" "주인님!" "아무 것도 아닐 꺼야. 그런데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줄리탄이 그렇게 말하며 이상한 재질의 그 소포에 손을 대자 손잡이도 없 던 그 '소포'에서 엷은 빛이 감돌며 덜컥 열리는 것이었다. '내용물'이 들 어나며 줄리탄을 포함한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바꿨다. "뭐, 뭐야 이건!" "설마 시, 시, 시, 시체?"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관을 닮은 금속 상자 속에는 얼음처럼 창 백해 보이는 수려한 청년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염색하기 전의 카넬리안을 닮은 흑단같이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칼과 파르스름하지 만 도톰한 입술, 그린듯한 얇은 눈썹, 갸름한 턱 선이 차가운 용모의 미녀 로 오해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카넬리안은 복잡한 표정으 로 조그맣게 말했다. "카르시온이잖아......" 2. 오펜바하는 (항상 찾는) 황궁 상층부의 발코니에 털썩 주저앉아 시가지를 내려보며 일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테싱이 돌아오는 것을 막지 못한 이상 카넬리안을 자신의 씰로 만들 이유도 줄리탄을 죽일 이유도 사라져 버린 탓에 그의 표정은 분통함보다는 허망함에 가까웠다. "결국 막지 못했어. 이제 파국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 미쉘은 조금 의외였다. 브륜힐트 때문에 목적은 상실했지만 분풀이로 줄 리탄과 카넬리안을 죽여버릴 것 같았던 오펜바하가 의외로 그들을 놔주고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의외였던 것이다. 아마도 엉 켜있는 실타래 같은 그의 과거 때문이리라. 오펜바하가 대뜸 말했다. "지금쯤 내가 그 녀석에 보낸 '물건'이 도착했겠군." "물건이라면......" "카르시온. 내 씰." 오펜바하는 짧게 대답했다. 카르시온은 카넬리안, 미쉘과 함께 각 용들의 수장이 선택한 씰 중에 하나였건만 테싱과의 싸움 이후 봉인 상태였다. 게 다가. "제이미아 덕분에 나는 깨울 수 없으니까 그 녀석에게 물려주는 게 좋겠 지. 앞으로 필요하게 될 꺼야." 모든 씰들을 조율하는 중심체(中心體) 제이미아는 오펜바하가 테싱을 이 공간에 가둬 버리며 균형을 깼을 때 그의 씰을 잠재워 버리고 그가 더 이 상 어떤 씰도 깨울 수 없도록 막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효력은 지금 도 이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씰을 깨울 수 없었던 오펜바 하가 물키벨의 씰 미쉘을 반강제로 이적 받았던 것이었지만 본래 그의 씰 이던 카르시온은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 녀석이라면 내 씰을 깨울 수 있을 꺼야." "어떻게 그걸 확신하는 거죠?" "그 녀석은 특별하니까." 한숨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오펜바하는 주저앉은 상태에서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메마른 바람이 불어와 누워 있는 그의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노 란 두 눈으로 미쉘의 주름진 치마를 올려보며 킥킥거리던 오펜바하가 말했 다. "참 웃기는 일이야. 죽여버리려다가 이제는 도와주려 한다니. 인간이나 용이나 변덕스럽기는 매한가지라니까." 3. "카르시온이라니? 설마......" 줄리탄은 카넬리안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카르시온이라는 자가 눈을 뜨며 줄리탄을 바라본 것이다. 이 분위기! 이 전개는! 줄리탄은 몇 번의 경험을 토대로 카르시온이 씰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카넬리안이 다 포기했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녀석은 오펜바하의 씰이야. 주인님." "오펜바하한테 씰이 있단 말 한 적 없잖아!" "물어본 적 없으니까." "오펜바하가...... 대체 왜 나한테 자기 씰을 보낸 거야!" 그런 대화가 진행 중에 있을 때도 카르시온은 스르르 몸을 일으키며 줄리 탄을 향해 물기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냉기 서린 피부에도 불구하고 카르시온에겐 분명히 고풍스런 미모가 있었다...... 라는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선 그다지 중요한 사항이 아닐 것 이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미치겠군." "미치겠군...... 입니까?" "아냐! 줄리탄이야!" "줄리탄 입니까? 잘 알겠습니다." 엉뚱하게 이름이 '들통나' 버리자 줄리탄은 할 말을 잃었고 시오는 고개 를 절래 절래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넬리안이 고개를 팍 꺾으며 중얼 거렸다. "자알 한다. 순진한 주인님 같으니라고." 사람들의 난감한 사정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카르시온의 '절차'는 계속 되 었다. "이제 저의 이름을 말해 주세요." "싫어!" "싫어...... 인가요?" "아, 아냐! 잠깐만!" "......?"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전(前) 오펜바하의 씰을 놔두 고 줄리탄 일행은 갑판 구석으로 몰려가 '긴급대책회의'를 시작했다. 점점 선상의 구경꾼들이 늘어나며 일부는 카르시온을 만지작거리고 또 일부는 ' 이거 황제 폐하께 아뢰야 하는 거 아냐?'라는 둥 웅성웅성 거리는 뭔지 모 르게 굉장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오펜바하...... 끝까지 사람 못살게 구는군!" 지룡의 깊은 뜻을 알 리가 없는 줄리탄은 백발이 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의 팔자는 '씰 복'을 넘어서서 '씰 수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카넬리안이 내놓은 묘안은 다음과 같았다. "주인님. 카르시온을 바다에 던져 버리자." "......카넬리안" 이 여자는 뭔지 골치 아픈 것은 죄다 바다로 던져 버리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지만 엑퀼라인이라면 모를까 줄리탄 성격상 그럴 수는 없었다. 시 오는 '그냥 나 주지......'라며 없는 자의 서러움을 피력하고 있었다. 갑 자기 끼어든 그레시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줄리탄 님. 저 씰이 불쌍해요. 받아주세요." "으응. 그렇긴 하지만...... " 그레시다의 자애로운 마음은 알지만 저 씰을 받아들이면 이번에는 줄리탄 이 불쌍해져 버릴 것 같았다. 아마도 저 씰도 공명이 제대로 안되겠지. 가 만히 생각에 잠겼던 줄리탄은 '에라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카르시온 에게 다가갔다. "저 씰 이름, 카르시온이라고 했지?" "주, 주인님! 설마 받아들일 꺼야?" "응. 별달리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펜바하가 보낸 것에는 이 유가 있는 것 같아." "오펜바하 같은 놈이 주인님을 챙겨줄 리가 없잖아!" "그럴 것도 같지만 결국 그 사람, 우리를 죽이지 않았잖아? 뭔가 생각하 는게 있는 것 같아." 카넬리안은 줄리탄의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펜바하가 쓰러진 줄리 탄을 치료해 주고 카넬리안과 함께 항구로 보내주면서 그가 했던 말 '테싱 이 돌아와도 네가 이 남자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 두려운 말이 다 시 떠올랐다. 줄리탄 곁에 있으면 금방 행복해져서 마치 잊어버릴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었지만 씰인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스스로도 짐작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줄리탄에게 '영원히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불안한 기우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연상을 일 으키며 카넬리안의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카넬리안. 왜 그런 얼굴이야?" "주인님. 역시 생각해 보니까 카르시온을 받아들이는게 좋을 것 같아." "갑자기 왜 그래?" '내가 없어져도 당신을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라고 카넬리안은 그 말을 마음 속으로 삼키며 피하듯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시오가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저 여자...... 답지 않게 왜 저래? 다른 씰이 나타났다고 질투하나?" "설마......"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뒤따라 가려다가 카르시온에게 덜미가 잡혀 버렸다. "제 이름을 말해 주세요!" "아, 알았어. 시온. 카르시온은 너무 긴 것 같으니까 시온이라고 할께." '게다가 카르시온이라고 하면 또 '카'로 시작한다면서 카넬리안이 화낼 것 같으니까......' 줄리탄은 오펜바하의 씰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고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다가 미성이지만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제 이름은 이제부터 시온. 줄리탄 님을 테이머로 모시겠 습니다." -Blind Talk 으음. 또 깨워버렸습니다. 아직 계약 후의 시온의 성격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카넬리안 정도는 아닐 것 같네요.-_- 시온을 남자로 할까 여자로 할까에서는 많이 생각했습니다. 본래는 여자였 습니다만... 다른 분들이 '왜 여성형 씰들이 절대다수냐!'라는 말에 이번 엔 남자로 했습니다. 분류는 창백한 미남입니다.;;; 이번 편은 양이 적지만... 그래도 다음 편부터는 또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올립니다. 아아 메일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항상 감사 를... 6권 나왔습니다. 한번 읽어주세요^_^; 좀 쫓기는 듯이 글을 쓰게 되는 것이 저 스스로도 거북하네요. 마음을 편 하게 먹고 쓰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승철의 떠나야 할 때 를 들으며...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5-06 : 꿈의 미로 .. 번호:85 글쓴이:billiken 조회:63 날짜:2001/07/03 14:42 .. ..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6 : 꿈의 미로 Castaway ** 본래 서두에는 이런 말을 안 쓰는 편이지만 뻔뻔스럽게 내용이 좀 바뀐 부 분이 있어서요. 줄리탄의 씰이 된 '시온'의 이름이 '시링크스'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분께 서 그런 분위기의 '시온'이라는 캐릭터가 있다고 해서 좀 찜찜해서....... 아무튼 15-04의 '시온'이라는 이름은 '시링크스'로 바뀝니다. 1. 한편 세라피스 앞에는 두 통의 서신이 도착해 있었다. 하나는 리하르트로 부터 또 하나는 코머런트 대공으로부터의 것이었다. 세라피스는 리하르트 가 보낸 밀서부터 밀납봉인을 조각낸 뒤에 읽어 내려갔다. 가르바트 우테 여황제는 자신의 모든 군사정치권력을 코머런트 공작에게 위임했음. 보나마나 코머런트의 '합법적' 황위찬탈과 다를 바가 없음. 또 한 북해 기사단은 해체되었으며 마르켈라이쥬는 프리셉터로의 자격을 잃었 음. 하지만 무력 반란의 조짐은 보이지 않음. 곧 귀국하려 함. 이상. "......존칭어 좀 쓰면 덧나나." 리하르트로부터의 밀서는 언제나처럼 '부모위독. 귀향바람.'이라는 전보 마냥 황제를 향하는데도 지나치게 간결하고 무례할 정도로 제멋대로이기 그지 없었다. 세라피스는 어린애처럼 입을 삐죽 내밀고 '돌아오면 때려 줄 테다.'라고 중얼거리며 리하르트의 문서를 휘익하고 의자 뒤로 내던졌다. 어쨌든 리하르트의 보고는 놀라운 것이었다. 북해 기사단의 이상한 움직임 으로 뭔가 터질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코머런트가 쉽게 말 해 가르바트를 낼름 먹어 버린 것이었다. 우테 여황제는 마르켈라이쥬를 제외하고는 지지세력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마르켈라이쥬만 묶어버린 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세라피스는 이번에는 코머런트 대공으로부터의 서신을 뜯어보았다. 그것 은 실은 스테온이 작성한 것이었다. '친애하는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달라카트 황제께 소인 코머런트 공작이 변치 않는 우호의 증거로서 이 서신을 보내옵니다. 먼저 대 헤스팔콘 전에 서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신 것에 대해 끝없는 감탄과 더불어 감축을 드리 오며....... (중략) .......소인은 가르바트의 총통으로서 지고하신 우테 여황 폐하의 손과 발이 되어...... (중략) ......앞으로도 영원히 양 제국 이 변함없이 친밀한 관계로 남길 기원하는 황송한 마음으로 이 부족한 서 신을 접겠사옵나이다.' "무슨 정육점 신장개업광고문 같네. 앞으로도 싸고 맛있는 고기를 팔겠습 니다...... 인가." 세라피스는 이런 종이쪼가리에 쓰여진 달콤한 미사어구 따위 목언저리를 간질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며 역시 문서를 의자 뒤로 던 져 버렸다. "폐, 폐하. 제발!" 세라피스의 의자 뒤에서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는 문서들을 정리하던 프란 츠는 자기 머리 위로 또 하나의 문서가 툭 떨어지자 발칙하게스리 화딱지 를 내는 것이었다. 확실히 세라피스가 편하고 격식 없는 멋진 황제이긴 했 지만 문서정리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것에는 정말 프란츠도 질려 버릴 일이 었다. 제국의 기밀문서를 멋대로 밟은 채 잠옷차림으로 멍하니 차를 마시 는 모습을 보는 것에도 이젠 익숙해지긴 했지만. 프란츠가 없었다면 세라 피스의 집무실은 며칠만에 서류 양탄자가 깔린 엉망진창 문자들의 숲이 되 어 버릴 것이 뻔했다. "폐하. 소인 파르낫소 아뢰옵니다." "옷 갈아입는 중 아니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세라피스가 간질거리는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문 밖으로 말했고 곧 '그 런 실없는 농담 질리지도 않습니까?'라는 얼굴의 파르낫소가 떨떠름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금새 둘은 정색을 하며 지금 가르바트의 상황에 대해 말 을 나누기 시작했다. 세라피스의 입장은 이랬다. "장사치 같은 말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헤스팔콘 휘하였던 왕 국들을 우리의 밑으로 끌어들이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가르바트가 혼란스 러울수록 우리는 좋은 거지." 2. 시링크스가 줄리탄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게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건 만 시링크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쥐었다 폈다하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첫마디를 기대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시링 크스는 슬며시 줄리탄을 살펴보며 말을 꺼냈다. "왠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지켜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아아 그게 정상이야." 줄리탄은 '그 말 나올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말했다. 카넬리안을 처음 깨웠을 때 마냥 멱살 잡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양호한 편 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시링크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정상이라고? 내 힘이 절반도 안 돌아온 것 같아. 게다가 당신과 공명도 일어나지 않고.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은 누구야. 말해봐. 나의 테이 머." 마치 교도소에서 막 출감한 장기수(長期囚)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줄리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안. 나, 약한 주인이라서 공명도 엉망진창이고 네 힘도 제대로 쓸 수 없을 꺼야. 하지만 말야. 그래도 자유롭잖아?" "자유?" "그래. 난 네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을 테니까." "자유라...... 당신은 내게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건가?" "아냐. 그건 명령 같은 것이 아냐. 명령받은 자유라면 의미가 없잖아." 시링크스는 그 말을 곱씹는 듯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내가 자유롭다면...... 내가 당신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 아마도 시링크스는 지금까지 오펜바하 밑에 있으면서 숱한 살인을 저질렀 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일은 없었을 거다. 시링크스는 마치 어린애가 병아리의 목을 비틀며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도 모르는 것처럼 섬뜩한 말을 줄리탄에게 꺼낸 것이었다. 시링크스의 말 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황망함에 휘청거렸지만 줄리탄은 애써 침착하게 답 해 주었다. "자유를 악용하라는 의미가 아냐." "시시하군. 당신이 말한 자유라는 것 엄청나게 유치하고 시시해." 딱 부러지는 부정적인 말투. 시링크스는 카넬리안과 쌍벽을 이룰 만큼 비 협조적인 씰인 것 같았다. 게다가 시링크스가 품고 있는 적대적인 기운의 여파로 그레시다는 어깨를 움츠리며 시오 뒤로 숨을 정도였다. 시링크스의 차가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당신을 만나 아주 잠시 동안 느낄 수 있는 그런 사소한 자유라는 것이 과연 내게 의미가 있을까? 결국 당신과의 계약이 끝나면 그 자유 역 시 빼앗겨 버리는 건데...... 멋대로 줬다가 멋대로 빼앗아가는 자유 따위 , 사양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시시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 둬. 사람들이 그 짧은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절대로 그 사람들의 인생이 시시해서야 아냐." "그건 약한 인간들의 얘기겠지." "아냐. 모두 똑같아. 단지 넌 아직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뿐이 야." "......." 줄리탄의 말에 시링크스는 또 잠깐 입을 다물었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 고 느껴본 적도 없는 '자유'라는 단어에 그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줄리탄이 말했다. "본래 자유니 사랑이니 하는 것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묻어나는 거지만 꽤 겪어 볼만 할 꺼야.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키워나가는 화초 같은 거라서 말야." 시링크스는 더 이상 언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새하얀 피부위에 흑옥(黑 玉)처럼 도드라지는 눈동자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한...... 주인이군. 씰의 자유 같은 것이나 얘기하고." "하하. 카넬리안도 비슷한 말을 했지." "카넬리안?" "응. 예전의 이름은 가랑이었지." 순간 시링크스의 수려한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가 복잡한 심경을 줄이고 줄이며 짧게 말했다. "당신, 정말 이상한 주인이야. 그 여자를 데리고 있을 수 있다니." "이상하다기 보다는 좀 순진한 녀석이지!" 시오가 깔깔 웃으며 커다랗게 말하자 줄리탄이 그의 뒷머리를 툭하고 때 렸다. 시링크스는 또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남자하고 대 화하고 있는 것 자체가 왠지 바보 같았다. 몇 초만에 성을 부셔버릴 수 있 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남자다. 자신의 '성능'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 시링크스는 그런 줄리탄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좋아. 어쨌든 나는 당신의 씰이니까 명령이라면 언제라도 받아주지. 그 리고 자유로워도 괜찮은 거라면 먼저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 이런 옷은 창피하니까." 시링크스는 자신의 몸을 가리는 제봉선이 없는 얇은 천 옷을 훑어보며 말 했다. 그의 티끌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에 비춰볼 때 꼭 환자복 같은 옷이 었다. 3. 시링크스가 줄리탄과 계약한 뒤에 스스로 놀란 사실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감정이 부담스러울 만큼 자유로워 졌다는 것이고 두 번 째 이상스럽게 친절한 줄리탄의 성격 그리고 세 번째가 카넬리안이었다. 대체 줄리탄의 정체가 뭐길래 '궁룡의 여자'와 계약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번 이름은 시링크스라고? '카'로 시작하지 않으니까 다행이네." 계약한지 삼일 후, 무더운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검고 두꺼운 코트를 입 은 채 자라탄의 백사장에 앉아 생각에 빠져 있던 시링크스에게 단추 없는 얇은 셔츠를 입은 카넬리안이 다가왔다. 사실 시링크스는 삼일 동안 카넬 리안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카넬리안......" 시링크스는 그렇게 말하며 올려보면서도 검은 눈동자에 슬쩍 경계의 눈초 리를 보였다. 그들의 과거는 별로 친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카넬리안은 그의 옆에 털썩 앉으며 가슴이 탁 트일 듯이 광활한 수평선을 눈에 담았다 . "뭐 그런 표정 하지마. 너나 나나 이제는 주인 잘못 만나서 힘없는 남녀 가 되어 버렸으니까. 같이 고생하며 살아야 하잖아?" "지금 농담한 거야?" "하나도 안 웃겨서 미안하네. 농담 같은 것엔 재능이 없는 여자라서." "......." 시링크스가 놀라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카넬리안은 절대로 농담 따위 입에 담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뀐 것은 설마 줄리탄 때문일 까? 카넬리안이 대뜸 말했다. "오펜바하가 왜 널 주인님에게 보냈다고 생각해?" "글세. 무슨 이유이든 나하고는 상관없잖아." "그런가......." 카넬리안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연하게 날고 있는 하얀 새 한 마리를 눈에 계속 담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시링크스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대는 것이었다. "시링크스야." "왜, 왜 이러는 거야!" 시링크스는 그녀의 깜빡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바짝 다가오자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뺐다. 도무지 이럴 여자가 아닌데 수 백년 만에 보니까 사람 완전히 바꿔 있었던 것이다. "너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지만 씰 대 씰로서 하나만 약속해 줘." "씨, 씰 대 씰?" "응!" 그녀는 꼭 부탁한다는 듯이 부담스런 미소까지 머금으며 최대한 귀엽게 시링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내가 없어도 주인님을 지켜줘야 해!" "......그게 무슨 의미야." "부탁해. 너 내가 부탁하는 거 처음 봤지? 다시는 부탁하는 일, 없을 꺼 야. 그러니까 꼭 부탁해." 전과 달리 수다스럽기까지 했다. 시링크스는 드물게 당황하며 그녀의 초 롱초롱한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씰이니까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얼굴 좀 치워. 너 대체 왜 이 러는 거야." "자, 그럼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용건이 끝난 듯이 시링크스의 어깨를 툭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시링크스는 붉은 머리칼 을 찰랑이며 사라지는 카넬리안을 보며 다시금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줄 리탄이란 사내가 지켜준 자유라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예전 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도움 받지 않고 살고 싶으니까 도움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려 했던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4. "마르켈라이쥬 경. 경은 왜 짐의 곁을 떠나지 않는 거지?" 눈보라를 뚫으며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물은 젖은 새처럼 움츠린 채 고개를 꺾고 있는 우테는 황위를 포기하고 달라카트로 가고 싶다는 '최악 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정말로 우테는 황제라는 자리가 싫었다. 항상 사 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고 아주 대단한 것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의 기 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황제란 어린 소녀 우테가 인간적으로 견뎌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말했듯 처음부터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아 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황위를 포기한 지금에 와서 그런 그녀 곁에 남아 있어준 자는 마르켈라이쥬 뿐이었다. 마르켈라이쥬가 말했다. "폐하. 저는 영원히 폐하를 지키겠다고 폐하의 아버지이신 선황제의 어전 에서 맹세했습니다. 저는 폐하 한 분만을 위한 기사입니다. 그런 제가 어 찌 폐하의 곁을 떠나겠습니까." 달라카트로 도주하듯 내려가는 우테의 마차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시종 하나 없이 가이브러쉬가 마차를 몰고 단 한 명의 기사, 마르켈라이쥬만이 그녀를 지켜주고 있는 믿을 수 없이 쓸쓸한 망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헤 스팔콘 황제 때와는 달리 어떤 권력도 없는 우테는 그 '이용가치'도 없었 다. 도리어 받아주면 골치아파 질 것을 우려해서 달라카트에서 망명을 거 절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도망쳐서 미안해. 마르켈라이쥬 경. 하지만 코머런트 대공이 날 그냥 두 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두려워. 결국 자신이 황제가 되지 않으면 욕심이 풀리지 않을 자니까. 그런 늑대 같은 자와 싸워야 하는 것이 황제 인데 이렇게 도망쳐서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 우테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코머런트에게 빼앗기듯 권력을 강탈당한 이후 모든 신하들은 코머런트 쪽으로 기울었고 북해 기사단마저 해체된 이상 마 르켈라이쥬의 힘도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테는 두려움에 마르켈 라이쥬에게 부탁한 것이다. 모든 걸 버리고 달라카트로 도망치고 싶다고. 마르켈라이쥬는 파문 당할 것을 각오하고 그런 가엾은 황제와 함께 달라카 트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코머런트는 이 사실을 '마르켈라이쥬가 황제 폐 하를 납치했다.'라고 발표했다. "황제도...... 인간이니까요. 두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최고의 인간만이 황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폐하도 사람들 모두다 항상 번민하고 괴 로운 것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는 도망쳐도 상관없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으윽.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너무 근엄하고 단단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철인(鐵人) 마 르켈라이쥬가 자신을 이해해주자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마르켈라이쥬의 품 속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부터 이렇게 막 울면서 누군가의 품에 묻히고 싶 었다. 그녀에게 황제란 황무지 위해 항상 혼자 서 있는 죽어가는 나무. 쓸 쓸하고 힘들고 괴롭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자신의 의지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던 것이 싫었다. "누구냐!" 가이브러쉬의 마차가 급하게 멈추며 마르켈라이쥬는 우테를 급히 감쌌다. 금새 마차는 검은 갑옷을 입은 수십명 기사들의 살진(殺陳)에 둘러싸인 상 태였다. 눈발이 미친 듯이 날리는 음침한 하늘. 그 거칠고 차가운 공기를 울리며 그들이 외쳤다. "놀센 기사단으로 황제 폐하를 납치한 네 놈들을 즉결처분하겠다!" "놀센 기사단? 코머런트의 사냥개들이 감히!" 놀센 기사단은 코머런트의 사병 집단과 같은 것으로 북해 기사단이 해체 되자 정식 기사단으로 승격된 집단이었다. 물론 북해 기사단에 입단하지 못한 별의 별 시정잡배(市井雜輩)들을 긁어모아 만든 아류기사집단이라서 그 품격은 전혀 기대할 것이 못되었다. 가이브러쉬가 숫적열세에 전혀 꿀 리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마차에는 폐하가 타고 있다! 무릎조차 꿇지 않는 그 무례는 참형감이 다!" "코머런트 전하의 명령이다! 모두 마차에서 내려!" 그리고 그들 중에 하나가 성큼성큼 화려한 이륜마차의 문으로 걸어가며 억지로 문을 열려고 있다. "끄아아아악!!" 순간 자주빛 도료의 문이 박살나며 엄청나게 거대한 칼날이 단숨에 기사 의 갑옷과 몸을 조각내 버렸다. 엄청난 힘과 속도였다. "마, 마르켈라이쥬!" 놀센 기사단이 긴장하며 포위망을 좁혀 오는 가운데 마차에서는 장검을 든 마르켈라이쥬가 나오고 있었다. 눈보라에 불투명한 시야에 그의 거체가 들어났고 그 모습에 놀센 기사단은 두려움을 느꼈다. 북해의 마신, 명성만 으로도 바짝 긴장하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에잇!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나! 저쪽은 두명뿐이야! 우리가 우세하다 !" "마르켈라이쥬의 수급을 가져오는 자에겐 공작의 작위를 준다고 했어!" 포상과 권력은 그 아류 기사단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마르켈라이쥬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와 함께 마르켈라이쥬가 왼발을 앞으로 내밀며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르륵! 마르켈라이쥬의 검기는 휘몰아치는 있는 눈보라를 단숨에 녹여버리며 주 변의 나무들 마저 뿌리채 뽑아 날려 버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세 명 기사의 몸이 그 '폭풍'에 휘말리며 부서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뛰 어들던 기사들은 그 모습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 다. 설마 마르켈라이쥬가 소문만큼 강하겠냐고 안심하고 있었지만 지금 모 습은 소문 이상이었던 것이다. 세이드와 호각으로 싸웠다는 말은 절대 허 언(虛言)이 아니었다. "폐하. 지금부터 일분 동안만 눈을 감고 귀를 막아주십시오." 마르켈라이쥬가 검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Blind Talk 확실히 병원에 있으니까 연재 속도가 늦는 군요... 게다가 이번에는 캐릭터 이름을 바꾸는 불상사까지.... 자아. 이제 2부도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J-WALK의 Soul Vibration을 들으며... 덧말:아아. 이번 편도 다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죄송 죄송.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5-07 : 꿈의 미로 .. 번호:86 글쓴이:billiken 조회:85 날짜:2001/07/07 13:02 .. ..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7 : 꿈의 미로 Before the storm 1. 줄리탄, 카넬리안은 확실히 눈에 띄는 커플이었다. 앳된 외모에 언밸런스 한 백발을 가진 남자와 투명한 빨간 눈동자에 빨간 머리칼의 여자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란 원색의 물감을 풀어 그려낸 유화처럼 시선을 끌게 만들어 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시가지에서도 한눈에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 다가. "어머! 저 미남 청년은 누구야!" "이번에 노블리스 씨가 새로 깨운 씰이래." "대단해! 이름은? 이름은 뭐야?" "시링크스라는데?" 등등...... 경호원 마냥 무표정한 얼굴로 줄리탄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시링크스의 존재는 역시나 며칠만에 베오폴트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햇빛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창백한 피부와 완벽한 흑색 눈동자, 매끈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이 더위에 끄떡없이 겨울 옷 같이 검고 치렁치렁한 코트를 입고 다니는 시링크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보는 사람 땀나게 만드는 미남이었던 것이다. 그런 시링크스에게 줄리탄이 말했 다. "시링크스......" "왜 주인님." "따라오지마." "나한테 명령하지 않는다며?"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지금은 카넬리안하고만 같이 있고 싶단 말야." "그건 주인님 사정이지." "그러니까 내 사정 좀 봐달라고!" "왜? 내 맘대로 행동하라며?" "윽." 오펜바하가 시링크스를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름대로 논리정연한 데다가 성격이 카넬리안 만큼이나 제멋대로인 씰이었던 것이다. 카넬리안 은 헛기침을 한번 한 뒤에 시링크스에게 다가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시링크스를 올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귀.찮.으.니.까.따.라.오.지.말.라.면.따.라.오.지.맛!" "......그러지." 카넬리안은 참을성과 논리하고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결국 시링크스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방향을 돌려 근처의 노천 테라스 카페로 갔다. 보나 마나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돌아올 때까지 햇빛을 쪼이며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재미없는 일상의 대표주자 시링크스였다. 2. 코머런트에게 있어서 가르바트 여황제 우테의 존재란 싫어도 없어서는 안 될 성가신 존재였다. 황가의 혈통이 아니라 황제가 될 수 없는 코머런트에 게 황제 우테가 사라져 버린다면 섭정(攝政)이고 뭐고 황제가 공석으로 남 는 골치아픈 상황이 되어 버리는데다가 그 황제가 달라카트로 망명까지 해 버린다면 가르바트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코머런 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치는' 우테를 다시 잡아 오려했던 것이다. "뭐야! 우테 그 년을 잡는데 실패했다고!" "도리어 놀센 기사단 이십여명이 전멸했습니다." 코머런트는 스테온의 보고에 미치겠다는 듯이 금실로 만든 가발을 벗어던 지고 가르바트에선 귀한 열대 과일을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여황제에게 존 칭조차 붙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누가 봐도 황위찬탈자의 모습이었다. 스 테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르켈라이쥬 경이 우테 폐하를 지키고 있 는 이상....... 놀센 기사단 전원이 달려들어도 우테 폐하를 잡을 수는 없 을 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짐의 정예 기사단이 그 곰 같은 놈 하나 못 죽인다고 !" "......" 놀센 기사단은 북해 기사단에 비하면 불량배 집단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자들이 마르켈라이쥬를 상대한다고? 가르바트에서 그걸 믿는 사람은 코머런트 한명 뿐일 것이다. 스테온은 다른 제안을 냈다. "우테 폐하가 망명할 곳은 달라카트 한 곳 뿐입니다." "그래서?" 코머런트는 신경질 적으로 대답했지만 스테온은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달라카트가 폐하의 망명을 받아준다면...... 그걸 빌미로 우테 폐 하를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내면 됩니다." "몰아내면 뭐하나! 우테 그 계집애 외에는 황실의 피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잖은가!" 그건 사실이었다. 선황제의 후사(後嗣)는 우테 한 명뿐. 직통 황가의 일 원이 아니면 황제가 될 수 없는 가르바트의 불문율에 의해 우테는 코머런 트가 빼앗을 수 없는 황위의 권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현실주의자 인 스테온에게 그런 말은 코웃음칠 얘기였나 보다. "만들면 됩니다." "뭐?" "선황제의 숨겨진 아들을 만들면 됩니다. 지금 코머런트 폐하가 선황제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고 주장하시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테 폐하보다도 황위 계승권이 위에 있는 선황제의 아들을 만들면 되는 겁니다 ." "만든다...... 라고.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그건 그 역시 제국의 전통에 얽매여 있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우테를 대 신해서 황위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우테가 달라카트로 망명하든 말든 새로운 황제를 세우면 모두가 그게 꾸민 일인줄 알겠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공공연한 연극이라고나 할까. "좋은 생각이다 스테온! 빨리 준비하도록 해라!" "이미 유아왕으로 삼을 아이와 그 주변의 과거까지 철저하게 준비해 놨습 니다." 스테온은 계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3. 줄리탄이 카넬리안과 같이 찾은 곳은 베오폴트의 신전 건너편의 절벽 위 였다. 항구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도시의 크고 작은 도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 시가지 전체가 내려다보여 보통 사람들이 가슴이 탁 트이는 장소라고 말하는 곳이었다. 그 흔한 벤치나 노점 하나 없는 그런 곳. "헤에. 베오폴트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 주인님." "응. 나도 처음 와봐. 역시 예상대로 멋진 곳이야."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상쾌한 바람을 한껏 들이키며 줄리탄은 풀밭 위에 앉았다. "베오폴트는 곳곳에 사람들의 손이 닿아서 이런 곳이 남아 있을 줄은 몰 랐는데...... 이렇게 도시를 내려보면 이곳은 더 이상 발달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손길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헤헤. 그럴까." 카넬리안은 히죽 코웃음을 치며 옆에 앉았다. 하긴 줄리탄의 눈에는 베오 폴트가 '최고로 발달된 상태'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발전의 진도라는 것은 항상 인간의 예상을 뛰어 넘는 법이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그거 알아?" 그리고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근래 물키벨이 머리에 커다 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에 재미가 붙었다든지 키마인이 검술 수련을 하 다가 또 팔이 부러졌다든지 메르퀸트의 노래를 듣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든지 하는 주변이야기들이 느긋하게 화제에 올랐고 이야기가 조금씩 느려 지다가 줄리탄은 결국 카넬리안의 무릎 위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내색 하진 않았지만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 카넬리안은 애써서 얼굴에 달고 있던 미소의 가면을 벗어버리며 손갈퀴로 잠든 줄리탄의 하얀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줄리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빨간 빛무리가 눈물처럼 떨어질 것 같 이 투명하고 슬퍼 보였다. '제발 날 미워하지 말아요. 나의 테이머시여.' 그녀는 그런 표정으로 노을이 깔릴 때까지 자신을 위해 머리가 하얗게 세 어 버린 줄리탄을 지켜봐 주었다. "아......이런 잠이 들었나. 미안 카넬리안." 줄리탄은 목언저리에 다가온 카넬리안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슬며시 눈을 떴다. 노을빛에 물든 카넬리안의 얼굴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아. 데이트 중에 잠들어 버리다니 참 무심한 주인님이야 정말!" 4. 달라카트 황실에 도착한 우테와 마르켈라이쥬, 가이브러쉬는 분명히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황제망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까다로운 시안인데다가 우테쪽에서 제시할 수 있는 이익꺼리는 아무 것도 없다. 세라피스가 일언 지하에 거절해도 아무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 정중하게 중 앙 응접실로 안내된 우테는 마르켈라이쥬와 떨어져 혼자 있게 되자 몹시 긴장하며 부모 잃은 작은 짐승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까지 잔 뜩 머금고 있었다. "눈물 닦으세요 이걸로." 그때 긴 금발을 세심하게 묶은 사내가 불쑥 들어와서는 손수건을 건내는 것이었다. 우테는 누군지 모를 그를 멍하니 올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 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쳐냈다. 그 사내는 여유 있는 태도로 근처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건냈다. "여행 때문에 오셨나요? 역시 여행지라면 달라카트가 최고죠." ".......당신은 누구?" 우테는 이 자를 황실 식객쯤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요? 황젠데요?" "거짓말......" "어 진짠데." "에헤헤." 우테는 이 자를 궁중광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튼 왠지 편한 사람이 었다. 잠시 그의 말투와 표정에 웃음짓던 우테는 다시 자신의 처지를 떠올 리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왜 그래요? 귀여운 아가씨?" "짐 역시 황제야...... 가르바트의 황제. 이런 곳까지 도망쳐 온 수치스 런 황제지만." "이야아. 이 방에는 황제가 둘씩이나 있군요." 라고 입을 열기 시작한 세라피스의 입담은 대단했다. 정말 우테가 이 자 를 광대나 재담가(才談家)라고 믿을 정도로 우테가 한참동안 그의 이런 저 런 말들에 잠시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도 잊고 웃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아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정말 당신 뭐하는 사람이지?" "말했잖아요. 황제라고." "저, 정말?" "응." 우테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자는 황제인 자신 앞에서 발칙한 거짓말을 반 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 자가 황제라면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꼴 사납게 망명 온 타국의 황제를 직접 접견하는 마음씨 좋은 황제가 어딨냔 말인가. 세라피스는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달라카트도 지내볼 만한 곳일 거에요. 우테 황제." -Blind Talk 아아 슬슬 2부가 끝나가는군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부활의 안녕을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5-08 : 꿈의 미로 .. 번호:87 글쓴이:billiken 조회:152 날짜:2001/07/08 22:08 .. ..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在來) 15-08 : 꿈의 미로 Careless Whipster 1. 오칼란트 제도의 상인들은 땅거미가 질 무렵 가게를 닫고 가족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두터운 가죽 외투들을 입고 있던 그들은 하루의 매상에 대 해서 혹은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들에 대해서 서로 주거나 받거니 했다. 저 무는 태양빛이 가물가물 하늘에 걸쳐 있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 저녁 이었다. "이봐. 그 얘기 들었어? 바다며 땅에 용이 나타났다는 말이 있어." "자네 아직도 그 낭설을 믿나? 세상에 용이 어딨어. 그런게 있다면 지금 까지 뭐하러 인간들을 피해 있었겠냐고!" "그래도 말야. 이건 꽤 믿을 만한......." "그만두게. 다 말하길 좋아하는 놈들이 지어낸 헛소리라......." 푸욱! 순간 말을 늘어놓던 남자의 배가 뚫렸다. 동시에 그는 핏덩이를 좌 르륵 쏟아내며 뭐에 매달린 듯 하늘로 끌려 올라가는 것이었다. 피를 뒤집 어 쓴 맞은 편의 동료는 무슨 일인지 실감하지도 못한 채 멍한 얼굴로 방 금까지 대화하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올려 보였다. "맙소사. 저게 뭐야......." 하늘에는 어느 틈인가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인간 모습의 괴물들로 가 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가지로 독수리처럼 떨어지며 들고 있던 창 으로 사람들의 등을 꿰뚫어 잡아채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듯, 인간 을 심판하듯. 지독한 비명소리가 하늘에서 땅에서 들려왔고 사냥 당한 인 간들의 피가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졌다. "저, 정말 용이......용이......" 눈앞의 지옥과 같은 광경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던 그도 곧 등뒤로 날 아온 '천사'의 창에 뚫려 공중으로 끌려 올라갔다. 핏줄기가 길게 선을 그 리며 사방에서 인간들이 창에 뚫려 하늘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고 고통과 공포의 비명이 핏빛에 물든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2. 살육의 축제가 되어 버린 오펜바하의 세력권을 언덕 위에서 무표정하게 내려보는 사내가 있었다. 고고한 긴 흑발에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같은 푸 른 눈동자는 인간들이 사냥 당하는 모습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가지런히 접혀 몸을 감싸고 있는 여섯장의 날개, 그의 손등과 목 언저리에 들어난 은빛의 역린이 그가 궁룡들의 군주 테싱임을 증명해 주었 다. 이공간의 미로 속을 뚫고 도착한 용들의 수장. "테싱 님.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십여미터의 두 장, 검은 날개를 펼친 자가 나타나며 충 성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그을린 듯한 구리빛 피부에 밝은 금발을 가진 자 . 테싱은 그를 돌아보았다. "루시퍼." "이대로 오펜바하의 심장을 가져올까요?" "아니......" 감정이 결핍된 고저 없는 음성이 테싱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단지 인사하러 온 거니까. 내게 중요한 건 가랑, 그 아이 뿐이다 ." 그와 함께 테싱이 파드득 소리함께 여섯장의 날개를 펼치며 천천히 검을 뽑았고 검 끝에서 은빛의 시린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선물을 주도록 하지." 테싱이 마치 도시를 반으로 갈라버리는 듯 검을 내리치자 순간 황성을 포 함한 도시에는 길고 눈부신 빛의 궤적이 그어졌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이 잔혹한 열기에 모든 생명체들이 형체를 잃고 증발해 버렸고 모든 공기가 균형을 잃고 휘몰아치며 곧 눈이 타버릴 듯한 빛의 의 기둥이 하늘에서부 터 도시를 짓누르듯 내리 꽂았다. 단지 수초만에 헤스페리아 최대의 제도 오칼란트는 '정화'(淨火)되었다. 3. 침대 위에 누워있던 줄리탄은 곁에 있는 카넬리안의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어둑한 방에서 둘은 서로의 체취를 느끼며 공용(共 用)의 감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카넬리안. 우리 내일 다카란으로 가자. 멋대가리 없는 곳이긴 하지만 해 야할 일도 있고......" 그렇게 말하는 줄리탄의 숨김없는 표정을 카넬리안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 었다. "왜? 가기 싫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줄리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 두운 방을 우울하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 "남자는 사랑의 감정이 없어진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여자는 사랑하기 시작한 남자에게 거짓말을 한다지......" "아하하. 우스운 말이네." 줄리탄은 일부러 실없는 목소리를 내며 그녀의 표정을 되돌리려 애썼지만 . "나 있잖아. 서로 거짓말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게 마음이 편해 ." 줄리탄이 그녀에게 가까워지며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볼 수 없는 더욱 더 깊은 곳에 감춰 두려 한다. 줄리탄은 그게 싫었다. 거짓말하 는 관계라니 그런 건 상상 만으로도허무했다. 하지만 그런 줄리탄의 바램 과 달리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날 완벽하게 속여 줘.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우리는 영원히 행 복할 거라고 냉정하게 속여 줘. 속아 줄게. 지금까지는 잘도 운명을 따돌 리는데 성공했지만...... 내일 혹은 일년 후, 언젠가는 그 운명이 날 찾아 내서 당신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날 끌고 갈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는......" "그런 말하지 마!" "그때까지는 날 완벽하게 속여 줘. 부탁이야. 그게 행복하니까." 이런 말이 있고 얼마 후 그녀가 말했던 '운명'이 찾아왔다. 칼로도 마법 으로도 성벽으로도 이 세상 모든 보물과 지혜를 모아도 막을 수도 피할 수 도 조금 늦추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 그러니까 운명이겠지. '당신이 만들어 준 꿈의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야. 그냥 그 미로 속에 갇혀 죽고 싶은데...... 그런 기대조차 내겐 너무 주제넘은 것이었나 봐.' Chapter#15 : 꿈의 미로 - 끝 Next : 2부 재래(在來) 종장 -Blind Talk 자 이제 한편만 더 쓰면 2부가 끝나는 군요. e-mail : billiken@hananet.net 조관우의 '님은 먼 곳에'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2부 재래 종장 .. 번호:88 글쓴이:billiken 조회:194 날짜:2001/07/11 19:05 .. ..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 종장 二部 在來 終章 LOVE, Lack Of VErite 1. 가혹한 신성(神性)으로 단 하나의 인간도 남지 못한 오칼란트의 제도에 테싱은 자리를 잡기로 했다. 새가 날지 않는 천국과도 같은 그 황폐의 대 지 위에 테싱의 힘은 순식간에 회색빛 공중정원을 만들어 냈다. "테싱, 저희들의 주군이시여. 오펜바하는 이미 사라진 듯 합니다. 그리고 제이미아의 행방도 모호합니다. 추적할까요?" 테싱의 강림(降臨) 이후 나타난 미카엘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궁룡의 권좌 에 서 있는 테싱을 향했다. 빛의 날개가 일렁이는 천사장(天使將)에게 테 싱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펜바하는 그리 쉽게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지. 그리고 제이미아는 어차피 잡아둘 수 없는 새. 그냥 놔두겠다." "그럼 가랑님을 불러들이실 겁니까?" 작은 날개가 등에 돋아 있는 천사가 생긋 웃는 얼굴로 테싱에게 다가오며 말하는 것이었다. 세르난. 귀여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테싱의 위력적인 부하였다. "지금 가랑의 테이머는 누구지?" "그냥 평범한 인간입니다." 세르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니.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지.......' "테싱님! 또 다시 가랑님 때문에 위험에 처하실 셈입니까!" 금발의 머리칼 아래로 눈을 치켜올린 루시퍼는 심히 불만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테싱의 약점은 가랑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약점 을 다시 불러온다니. 세르난이 쯧쯧 거리며 그런 루시퍼를 막아섰다. "루시퍼 씨는 아직도 테싱님을 모르시는군요. 가랑님이 없이는 테싱님에 겐 어떤 의미도 없는 거라니까요. 그게 설사 치명적인 약점이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소리지르지 마세요." "크윽. 세르난." "화내지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루시퍼 씨." 세르난이 싱글거리며 루시퍼를 말리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검 은 날개를 펼치며 궁전 밖으로 날아 올랐다. 팔짱을 끼고 있던 미카엘이 조용히 말했다. "루시퍼 님은 항상 무례하군요. 주의를 줄까요?" "됐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피조물이니까." 테싱은 인육을 뜯어먹으며 하늘을 날고 있는 가면의 천사들을 바라보다 지긋이 눈을 감았다. 2. 오칼란트에 불어닥친 테싱의 힘이 다른 제국에 제대로 알려지기 전이었다 . 카넬리안과 함께 다카란을 찾은 줄리탄은 벌어질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어 떤 예상도 못한 채 다카란 성채를 돌아보고 있었다. 달의 모습마저 그림자 에 가려진 어둑한 밤이었다. "여긴 정말 굉장히 적막하다. 그치?" 줄리탄은 희망에 배신당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희망이 이뤄지고 노력이 가치를 지니는 세상.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랬다. 하지만. 카넬리안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의 그런 시선또한 변색되기 시작했다. "으으......" "카넬리안. 왜 그래?" 카넬리안은 갑자기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갑작스런,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다. "공명이....... 느껴져......" "무, 무슨 소리야? 공명이라니!" 카넬리안은 둘로 나뉘어져 격렬하게 충돌하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가슴을 꽉 누르며 짜내듯 말했다. "그 분이...... 돌아왔어. 나의 테이머가...... 나를 부르고 있어." "테이머라면 설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먼저...... 떠났어야 했어. 당신의 곁을...... 그래야 했는데......." 카넬리안은 테싱이 돌아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치병을 숨 기는 환자처럼 줄리탄 앞에선 그 사실을 숨기고 계속 웃어주며 하루라도 더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남자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속된 바램을 지니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 마음 속의 아름다운 추억이 모조리 괴로움으로 고통스럽게 바꿔가고 있었다. "주인님. 날 용서해 줘. 나는 씰이야...... 아무리 저주해도 어쩔 수 없 어......." "카넬리안. 왜 그러는 거야!" 줄리탄은 마음 속이 불 타 버리는 것 같은 불안감에 카넬리안에게 소리쳤 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줄리탄은 마음의 일부가 사라지는 상실감을 참을 수 없었다. 강력한 강제력이 카넬리안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완벽하게 테싱과 공명이 이뤄진 카넬리안의 모습을 줄리탄은 똑똑히 보 았다. 감정이 증발해 버린 차가운 눈동자 그리고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아 름답지만 공허한 목소리. 카넬리안이 말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말을. "지금 이 순간 이후 당신과의 모든 계약을 파기합니다...... 줄리탄 씨." "뭐....... ?" 줄리탄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카넬리안이 들고 있던 미스트랄을 감은 천이 불타 오르며 은빛을 발하는 미스트랄의 검신이 드러났고 곧 뜨거운 통증이 가슴에 몰려왔다. 카넬리안이 줄리탄을 찌른 것이다. 분명히 테 싱의 명령일 것이지만 그녀의 표정 역시 두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카넬리안......"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스르르 몸에서 미스트랄이 뽑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줄리탄은 마음의 균 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통 이상의 괴로움. 눈물이 뭉칠 시간도 없이 카넬리안은 줄리탄을 떠나가고 있었다. 힘을 잃은 몸을 일으키려는 줄리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했잖아! 계속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카넬리 안!" "......다 거짓말이었어요. 그러니까......." 카넬리안은 눈물이 흐르지 않는 자신의 눈동자를 낮게 깔며 말했다. "......잊어주세요." 줄리탄은 그렇게 쓰라린 말을 흘리며 다카란 밖으로 사라지는 카넬리안을 부르며 몇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피를 흘리는 몸은 계 속 바닥에 주저앉았다. 줄리탄이 카넬리안과 계약을 한지 2년여만에 그들 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3. 그녀는 이제 없다. 며칠째 그가 눈에 담고 있는 것은 병실의 공허한 천장 뿐, 집요한 악령처럼 그의 몸을 떠나지 않은 채 욱신거리는 고통의 사슬뿐 이다.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줄리탄. 지금 눈물 흘리는 거야? 붕대 갈아줄까?" "......." 물키벨은 줄리탄 곁에서 손수건을 든 그 작은 손으로 줄리탄의 눈물을 닦 아주었다. 주르륵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마음 속의 모든 추억이 눈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 줄리탄의 하얀 머리칼에 덮인 눈동자 는 초점을 잃은 채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1개월 후 4. "따라오지마." "난 너의 씰이야. 당신이 싫든 좋든 따라가야 해." "......맘대로 해." 어두운 밤 베오폴트를 떠나는 줄리탄의 뒤를 쫓는 자는 시링크스 뿐이었 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줄리탄은 테싱 곁으로 가버린 카넬리안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완치되지도 않은 그녀로부터의 상처를 쥐고. "가랑은 당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 가는 건가?" "아니야. 카넬리안은 분명히 내게 돌아와." "바보로군. 카넬리안라는 여자는 이제 없어. 그녀는 과거로 돌아갔고 궁 룡의 여자 가랑이 되어 버린 거야. 그녀가 씰이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 시링크스의 냉정한 말에 줄리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테싱도 당신도 웃기는군. 남자의 집착이라는 것도 참 묘하단 말야." 2부 재래(在來) 끝 -Blind Talk 2부가 끝났습니다. 결국 이번 종장에서도 둘은 헤어졌습니다. 좀 더 극적 으로 표현할 수 있었는데 병원에서 쓰다보니까 집중하기가 힘드네요. 출판 본에서는 꽤 많이 수정될 듯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3주일간 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에반게리온 극장판 OST 중 'komm, susser tod'를 들으며... (이번 편과 잘 어울리는 노래네요...) .. 2부 끝까쥐..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2부 재래 종장 수정판 .. 번호:89 글쓴이:billiken 조회:590 날짜:2001/08/07 06:35 .. .. **** 이것은 예전 2부 재래 종장의 수정판입니다. 예전 것이 너무 대충 쓴 듯 해서 출판본에서는 바꾸려 했지만 이미 써 놓고 출판본에서만 바꾼다는 것 도 우스운 짓 같아서 중복이지만 2부 재래 종장을 다시 올립니다. 읽어주 세요. 많은 부분이 바꿨습니다. D R A G O N L A D Y 2부 재래 종장 수정판 二部 在來 終章 修正版 LOVE, Lack Of VErite 1. 천사 - 테싱의 피조물들이 휩쓸고 지나간 오칼란트에 남은 것은 신의 입 김을 피한 소수의 인간들과 전에 없던 가혹한 공포뿐이었다. 그리고 그 신 성(神性)의 중심에 여섯장의 날개를 펴며 나타난 테싱은 단 한번의 손길로 천상(天上)에 회색빛 공중궁전을 만들었다. 마치 모든 것이 환상처럼. 긴 머리칼 사이로 천천히 눈을 뜬 테싱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기질의 천사 들만이 하늘을 비행하는 비인간적인 신성함의 대지였다. "테싱, 저희들의 주군이시여. 오펜바하는 싸움을 피했습니다. 그와 지룡 들은 이미 사라진 듯 합니다. 그리고 제이미아의 행방도 모호합니다. 추적 할까요?" 테싱의 강림(降臨) 이후 나타난 궁룡 미카엘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궁룡의 권좌에 서 있는 테싱을 향했다. 빛의 날개가 일렁이는 천사장(天使將)에게 테싱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펜바하는 그리 쉽게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지. 언젠가는 어떤 방법으 로든 싸움을 걸어올 것이니 나는 기다리겠다. 그리고 제이미아는 어차피 잡아둘 수 없는 새. 그냥 놔두겠다." 현실감을 잃은 궁룡들의 그림자가 무채색 궁전의 바닥에 일렁거린다. 차 가운 테싱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궁룡이 날 듯이 테싱에게 다가왔다. "그럼 가랑 님을 불러들이실 겁니까?" 새하얀 작은 날개가 등에 돋아 있는 천사가 생긋 웃는 얼굴로 테싱에게 다가오며 말하는 것이었다. 세르난. 귀여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다 가 감정이 가득 담긴 웃음 띈 얼굴은 미카엘과 비교할 때 묘한 부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금 가랑의 테이머는 누구지?" "그냥 평범한 인간일 걸요?" 세르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지만 테싱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 '아니.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지.......' "테싱님! 또 다시 가랑 때문에 위험에 처하실 셈입니까!" 거친 기운을 뿜으며 금발의 머리칼 아래로 눈을 치켜올린 루시퍼는 심히 불만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오펜바하조차도 죽일 수 없었던 테싱이다. 그 가 생각하기에 그런 테싱의 약점은 가랑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약점을 다 시 불러온다니. 세르난이 쯧쯧 거리며 그런 루시퍼의 앞을 막아섰다. "이런 이런. 루시퍼 씨는 아직도 테싱 님을 모르시는군요. 테싱 님에겐 가랑 님이 없다면 어떤 의미도 없는 거라니까요. 그게 설사 치명적인 약 점이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이해해 주셔야 지요? 네?" "크윽. 세르난." "화내지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루시퍼 씨." 세르난이 싱글거리며 루시퍼를 말리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검 은 날개를 펼치며 궁전 밖으로 날아 올랐다. 팔짱을 끼고 있던 미카엘이 조용히 말했다. "루시퍼 님은 항상 무례하군요. 주의를 줄까요?" "됐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피조물이니까. 세르난. 가랑을 불러들 어라." "예에. 예에. 테싱 님." 시리도록 푸른 옷에 감싸인 비정천사 테싱은 길게 늘어트린 백익(白翼)을 접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2. 오칼란트에 불어닥친 테싱의 힘이 다른 제국에 제대로 알려지기 전이었다 . 카넬리안과 함께 다카란을 찾은 줄리탄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어떤 예상도 못한 채 단 둘이서 다카란 성채를 돌아보고 있었다. 달의 모습 마 저 그림자에 가려진 어둑한 밤이었다. 줄리탄은 성벽 안으로 불어오는 메 마른 모래바람에 고개를 조금 돌리며 말했다. "여긴 여전히 적막하다. 그치?" "응. 그러네." 카넬리안이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입을 다문 잠시간의 침묵이 둘을 갈랐고 줄리탄이 백발의 머리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음 띌 때 카넬리안이 불현 듯 말했다. "주인님. 나 여기 오기 전에 책을 한 권 읽었어." "책?" "응. 금기에 대한 책이야." "금기?" "응." "그게...... 뭐야?" 금기(禁忌). 줄리탄은 그런 단어에서 느끼는 생소함에 되물었지만 카넬리 안은 더 이상 말없이 슬픔이 가득히 녹아든 미소를 보일 뿐이었고 줄리탄 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지막 미소였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금기는 허용되지 않은 것,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에요. 주인님.' 줄리탄은 희망에 배신당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희망이 이뤄지고 노력이 가치를 지니는 그런 세상.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랬다. 하지만 내성(內 城)으로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성벽에 가려진 황무지로 고개를 돌리는 카 넬리안의 표정이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의 그런 믿음 또한 변색되기 시 작했다. "설마 지금........" "카넬리안. 왜 그래?" 카넬리안은 갑자기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갑작스런,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다. "공명이....... 느껴져......" "무, 무슨 소리야? 공명이라니!" 카넬리안은 둘로 나뉘어져 격렬하게 충돌하는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가슴을 꽉 누르며 짜내듯 말했다. "지금 그 분이...... 돌아왔어. 나의 테이머가...... 나를 부르고 있어." "테이머라면 설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먼저...... 떠났어야 했어. 당신의 곁을...... 그래야 했는데......." 카넬리안은 테싱이 돌아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치병을 숨 기는 환자처럼 줄리탄 앞에선 그 사실을 숨기고 계속 웃어주며 하루라도 더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그게 솔직한 본심이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남자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속 된 바램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 마음 속 의 아름다운 추억이 모조리 괴로움으로 고통스럽게 뒤바꿔가기 시작했다. "주인님. 날 용서해 줘. 나는 씰이야...... 아무리 저주해도 어쩔 수 없 어......." "카넬리안. 왜 그러는 거야!" 줄리탄은 마음 속이 불 타 버리는 것 같은 불안감에 카넬리안에게 소리쳤 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줄리탄은 마음의 일부가 사라지는 상실감을 참을 수 없었다. 감정에 칼을 댄 것처럼 처음 느끼는 단절감. 강력한 강제력이 카 넬리안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테싱과 공명이 이뤄진 카 넬리안의 모습을 줄리탄은 똑똑히 보았다. 아니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카넬 리안이 아닌 가랑이었다. 아무리 저주해도 그건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운 명 같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가랑이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이후 당신과의 모든 계약을 파기합니다...... 줄리탄 씨." "뭐....... ?" 줄리탄의 귓가에 가랑의 말이 겉돌았다. 계약을 파기합니다. 상상조차 못 해봤던 그 차가운 말이 줄리탄의 마음을 후벼파며 각인되었다. 실감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어지러움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랑이 들고 있던 미스트랄이 불타 오르며 불길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카넬리...... 안." 그리고 줄리탄은 천천히 자신의 배를 내려보았다. 자신의 몸을 찌른 미스 트랄을 바라보며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고통을 인정할 수 없었다. 카넬 리안이 자신을 찌른 것인가. 그렇게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현실의 무게 가 사라져 버린 듯한 공황(恐惶)만이 목을 죄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감정이 증발해 버린 듯한 가랑이 타인처럼 말했다.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다시 테이머가 된 테싱의 첫 번째 명령은 줄리탄을 찌르라는 것이었을까. 스르르 줄리탄의 몸에서 미스트랄이 뽑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줄리탄은 마 음의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와 함께 터져 나온 사랑의 잔재들 이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힘과 마음을 잃은 몸을 일으키려는 줄리탄이 떨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카넬리안...... 어딜 가는 거야......" "......" 그녀는 줄리탄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치듯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줄리탄 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애원처럼 정적의 황무지를 갈랐다.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했잖아! 계속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카넬리 안!" "......다 거짓말이었어요. 그러니까......." 가랑은 돌아보지 않은 채 눈물이 흐르지 않는 자신의 눈동자를 낮게 깔며 말했다. "......이제 잊어주세요." 검으로도 힘으로도 용기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줄리탄은 마음을 난도질당한 채 다카란 밖으로 사라지는 가랑을 몇 번이나 부르며 몸을 일 으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피를 흘리는 몸은 계속 말을 듣지 않았다. 현실 은 줄리탄이 카넬리안의 계약을 2년여만에 파기시켰고 그들은 타인이 되었 다. 카넬리안을 이해해 주셔야 해요. 그 아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해해 주 실 수 있나요? 조금 마른 듯한 작은 체구, 붉게 염색한 단발의 머리칼. 속을 알기 힘든 동그란 붉은 눈동자. 적어도 줄리탄을 향해서는 항상 웃음을 띄려고 노력 했던 얼굴. 줄리탄의 머릿속에 그녀와의 추억이 회한(悔恨)처럼 끝도 없이 돌고 또 돌았다. 3. "헤헤. 가랑 님. 오랜만이에요." 다카란 넘어 황무지에선 땅 위에 떠 있는 세르난이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가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랑은 수 백년만에 만난 그를 향해 미소 없는 얼굴로 말했다. 소란스럽게 웃으며 짓궂은 농담이라도 한번 꺼냈을 카넬리안은 사라져 있었다. "나의 주인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요?" "가랑 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그렇군요. 가지요." "예. 그런데......" 세르난은 가랑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었다. 마치 그녀가 미처 지 우지 못한 줄리탄의 흔적을 훑어보는 것처럼. 세르난이 대뜸 말했다. "그 남자 불쌍하네요." "그 남자?" "당신과 계약이 파기된 인간이요." "아...... 줄리탄 씨." 가랑은 오랜만에 생각난 타인을 말하는 것처럼 조금 숙인 채 혼잣말로 중 얼거렸다. "나쁜 여자니까 나는......" "예? 뭐라고 하셨어요?" "카넬리안은 죽었어요." "......?" 두둥실 떠서 가랑의 뒤를 쫓는 세르난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가랑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 샌가 화장처럼 익숙한 외로움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었다. 4. 병실에 누워 있는 줄리탄은 마음의 고통에 잠들지 못하며 멍한 시선으로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인님은 약하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무리하지마. 그러다가 죽어버리면 곤란해 지는 건 나라고.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야? 응?" '분명 그녀라면 지금의 내게 그런 말을 해주었을 꺼다. 그녀가 있었다면 - 내 옆에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날 위로해 줬을 꺼다. 하지만 이제 없다. 며칠 째 내 눈에 담고 있는 것이란 병실의 공허한 천장뿐, 집요한 악령처 럼 내 몸을 떠나지 않고 욱신거리는 고통의 사슬뿐이다.'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 다시는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줄리탄. 지금 눈물 흘리는 거야? 붕대 갈아줄까?" "......" 물키벨은 줄리탄 곁에서 손수건을 든 그 작은 손으로 줄리탄의 눈물을 닦 아 주었다. 주르륵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러내렸다. 마음 속의 모 든 추억이 눈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 줄리탄의 하얀 머리칼에 덮인 눈동 자는 초점을 잃은 채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키벨이 애원하듯 며칠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줄리탄. 일단 조금이라도 자. 부탁이야. 응?" "......잠이 오지 않아요." "줄리탄......"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 녀 없이 잠들고 싶지 않았다. 왜 항상 사랑은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아무 런 걱정 없이 서로 웃으며 감싸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랑 따위는 처음부 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5. "줄리탄은 좀 어때." "아. 세라피스 씨. 아니 폐하." 줄리탄을 찾아온 자는 곱슬거리는 긴 금발을 내린 세라피스였다. 조금 구 겨진 고급스런 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세라피스는 병실 근처의 소 파에 걸터앉아 있는 톨베인에게 다가왔다. 말하자면 황제가 친히 병문안을 온 것이었지만 장엄한 음악도 수많은 수행원도 없었다. 마치 친구를 찾아 온 것처럼. 하지만 세라피스는 줄리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진 않고 톨베 인 옆에 앉았다. "담배 한 대 주겠어?" "피우셨습니까?" "아니 피워볼까...... 해서." 둘은 한동안 담배를 물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벽의 촛불들이 어둠을 몰 아내고 있는 저녁 무렵이었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정말 씰과 계약하지 않길 잘한 것 같아. 도저 히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이 세상에 줄리탄 녀석 밖에 없을 꺼에요." "뭐가?" "씰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하는 놈은." "그럴지도." 세라피스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마시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자리 에서 일어섰다. "가볼께." "만나보지 않을 겁니까?" "미안. 나 이번만큼은 뭐라고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세라피스는 느릿느릿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두 달이 흘렀다. 줄 리탄은 병상에서 일어났지만 마음의 상처는 피투성이로 벌어진 그대로 조 금도 치료되지 않은 채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방법 조차 모른 채로. 4. 사람이 사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평생 희미한 불안감을 암처럼 달고 사는 사람, 미지근한 오늘에 불만스러워 하면서 항상 눈은 과거를 향 해 있는 사람, 때로는 지독한 현실에서도 미래를 꿈꾸며 웃을 수 있는 사 람. 모두 방식은 다르지만 자유롭기를 선고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길 중에 하나는 선택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줄리탄이 선택한 길은 '현실 에 대한 부정'이었다. 카넬리안이 사라지고 가랑이 남아버렸다는 지극한 현실을 줄리탄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오지마." "난 너의 씰이야. 당신이 싫든 좋든 따라가야 해." "......맘대로 해." 어두운 밤 몰래 베오폴트를 떠나는 줄리탄의 뒤를 쫓는 자는 시링크스 뿐 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줄리탄은 테싱 곁으로 가버린 카넬리 안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완치되지도 않은 그녀로부터의 상처를 쥐 고. 어떻게 잊어버리고 끝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어. 하지만 차가운 단순 한 진리를 재확인시켜 주듯 시링크스가 말했다. "지금 가랑에게 가고 있는 건가?" "가랑이 아냐. 내겐 카넬리안이야." "가랑은 당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 가는 거야?" "아니야. 카넬리안은 분명히 내게 돌아올 꺼야." "바보로군. 카넬리안라는 여자는 이제 없어. 그녀는 과거로 돌아갔고 궁 룡의 여자 가랑이 되어 버린 거야. 그녀가 씰이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 시링크스의 냉정한 말에 줄리탄은 긍정하지도 윽박지르며 부정하지도 않 았다. 단지 밤거리를 가르며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간다면 너는 신과 싸워야 해." "......신?" "궁룡의 수장 테싱 앞에 선다면 너는 순식간에 입자가 되어 소멸해 버릴 꺼야. 그리고 그건 내게도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닐 것 같은데." "카넬리안이 돌아오지 않는 다면 소멸되어도 상관없어!" 줄리탄의 단호한 결심에 시링크스는 냉소적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테싱도 당신도 웃기는군. 남자의 집착이라는 것도 참 묘하단 말야." 줄리탄의 백발이 밤의 바람에 흐느끼듯 날리고 있었다. 2부 재래(在來) 끝 -Blind Talk 퇴원했습니다. 나름대로 긴 투병생활이었는데 문명의 이기 노트북 덕분에 6권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만...... 역시 병원에서는 제대로 글이 써지질 않더군요. 집이라도 뭐 굉장히 잘 써지는 건 아니지만. 결국 퇴원 후에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2부 재래 종장을 다시 쓰는 것이 되 어 버렸습니다. 역시 대단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마음이 놓이네요. 병원생활 덕에 바뀐 거라면 천도복숭아가 좋아졌다는 것과 담배가 늘었다 는 것, 두통약과 술이 줄었다는 것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정도로 병원 생 활에 대한 보고는 줄이고. 아아 글이 늦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변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3부는 여전히 머리속에 뿌옇습니다. 좀 더 생각을 해야 하는데 ...... 비가 오네요. 더위가 조금 가셔서 좋습니다. 병원 생활할 때 게시판에 관 련 글 남겨 주시고 메일 보내주신 분들 덕에 많이 기운이 났습니다. 고마 워요. 그럼 다음 글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B'z의 Be There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1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0 글쓴이:billiken 조회:296 날짜:2001/08/23 03:53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1 life less than ordinary 1. 테싱이 강림한 젤밴더 대륙은 궁룡들의 인간사냥터가 되어 있었다. 하늘 에는 무기질의 천사들이 독수리처럼 날아다니며 인간들은 잡아채고 있었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낮에는 천사들의 눈을 피해 지하나 지붕 밑에 숨어서 공포에 떨었고 천사들이 사라지는 밤이 되어서야 땅 위로 나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다. 모든 인간들의 질서와 사회가 붕괴되고 무시되어 버린 젤 밴더 대륙에 남은 것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절망뿐이 었다. "얘야! 돌아와! 나가면 안 돼!" 하늘에는 천사들이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집 밖으로 뛰어나간 강아지를 뒤따라 작은 아이가 뛰쳐나가자 집 안에서는 부모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냥감을 발견한 세 명의 천사들이 소름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급강하하며 아이의 머리 위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도, 돌아와! 빨리!" 강아지를 쫓아가던 아이는 자신을 향해 새하얗게 내려오는 천사들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긴 창을 들고 있 는 가면의 천사들은 작은 아이의 몸을 꿰뚫어버릴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지 만 아이는 커다란 두 눈이 흔들리고 있을 뿐 움직이지 못했다. "꺄아아악!" 악몽 같은 장면을 지켜보던 부모는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두 눈을 감아버 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눈앞까지 내려온 천사들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금 새 새하얀 날개가 불타올랐고 천사들은 몸부림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다가 먼지처럼 산산이 흩어지며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리는 것이었다. "누...... 누구세요." 불의 마력이 남아 있는 손바닥을 내리며 아이의 앞으로 걸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일격에 천사들을 불태워 버린 자. 그들은 더러워진 하얀 코트를 입은 금발의 사내와 얇고 검은 망토를 두른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리! 기사 나리! 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의 부모는 천사들이 사라지자 헐레벌떡 뛰어오며 그들 앞에 절했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단번에 재앙과 같던 천사들을 물리친 자들 앞 에 무릎을 꿇었지만 큰 키의 사내는 삐뚤어진 입술 끝을 올리며 냉소를 보 일 뿐이었다. "큭큭큭. 내게 감사하다고? 내가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정말 확실 히 세상이 잘못되었군. 큭큭. 정상이 아냐." "세이드 님......" 세이드의 음울한 웃음소리에 레오폴트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세이 드 덕에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세이드 자신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아이러니였던 것일까. 세이드는 광인의 눈동자에 조소를 담으며 낮 게 웃는 것이었다. "웃기는 세상. 충실한 악인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빌어먹을 세상이야." "또, 또 용들이 온다!" 갑작스레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마치 맹수를 만난 작은 토끼 떼들 처럼 사람들은 다시 집안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세이드가 바라본 하늘 끝에선 수백 명의 천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벌판에 남은 자는 또 다시 세이드와 레오폴트 뿐. 사냥 당하길 거부한 세이드는 검을 뽑으며 비웃음 을 삼켰다. "피하는 방법 같은 건 몰라. 이곳에서 죽든지 아니면 저 놈들을 죽이든지 ......" "세이드 님. 제가 지켜드릴께요." "너도 정말 끈질긴 여자구나......" 천사들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찢어놓기 시작했고 사냥감을 찾은 수백의 무 리들이 금새 세이드와 레오폴트에게 날아들었다. 2. 가랑과 카넬리안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가랑은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을 과거형으로만 말하며 세상에 대한 집착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그런 차가운 기계 같은 씰. 자신의 삶이라 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테싱에 대한 순종만이 생존하는 목적 같은 - 공허함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여자였다. 줄리탄이 만들어 준 소중한 가 치들 마저 차갑게 태워버리고 가랑은 테싱 앞으로 돌아왔다. 길고 검은 머 리칼을 늘어트린 수백 년 전의 모습을 한 채로 두 손에는 더 이상 천에 감 기지 않은 은빛의 미스트랄을 껴안고. "돌아왔습니다. 저의 테이머시여."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테싱 앞에서도 미소조차 없었다. 줄 리탄을 대할 때와는 달리 자신이 테싱을 사랑한다는 것에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기쁠 일도 슬플 일도 고민할 일도 없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사랑이란 맹목적이고 메마를 수밖에 없다. 자기도 모르게 웃을 일도 없고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낼 일도 마음을 졸일 일도 없었다. 그냥 절대 적인 사랑을 맹신하며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비인간적인 사 랑의 감정을 담은 가랑의 눈동자가 말없이 테싱을 향하고 있었다. "가랑. 돌아와 줘서...... 고맙다." 가랑 앞으로 다가온 테싱은 작은 그녀를 감싸안으며 눈을 감았다. 브륜힐 트가 그렇게도 질투했던 테싱의 품속의 가랑은 가만히 테싱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줄리탄도 테싱도 목숨을 내놓으며 고작 씰일 뿐인 그녀를 그렇 게도 감싸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독하게도 행복한 여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의 마음이 계속 말라가고 있는 것은 왜 일까. "이제 어쩌실 생각인가요?"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가랑은 테싱을 향해 말했다. 테싱은 짙푸른 눈 동자로 가랑을 내려보며 침묵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실패작이야.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 "모두 소멸시켜 버릴꺼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처음처럼." "......소멸?" "그리고 우리도 사라진다. 모두 지워버린 뒤에 우리도 함께 죽는 거야." 테싱은 오펜바하와 달랐다. 유지시킬 생각도 지배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 의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한 것이다. 테싱은 이 세상을 바라보며 대 체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의 과거에 얽혀있는 무엇이 그런 결정을 내 리게 만든 것일까. "가랑. 나와 함께 죽어줄 거지?" "예. 저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입니다. 저의 테이머시여." 테싱이 건내 준 죽음을 아무런 놀라움도 주저도 없이 받아들인 가랑의 모 습은 정말로 씰을 닮아 있었다. 3. 달라카트를 떠난 줄리탄과 시링크스가 도착한 곳은 헤스팔콘 령에 있는 항구도시 게른이었다. 베오폴트를 밤이 없는 빛의 도시라 말한다면 게른은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스팔콘 제국 멸망 후 에 찾아온 무질서는 게른을 혼란이 들어 찬 해적과 도적들의 항구로 만들 어 버렸다. 뒷골목에선 시체들이 썩는 악취가 가득했고 가게 주인들마저 칼을 차고 다니는 그런 곳. 그런 게른의 술비린내 가득한 조잡한 여관에서 줄리탄은 한 해적집단의 선장과 협상 중에 있었다. "뭐? 우리 배에 타고 싶다고?" 덥수룩한 수염이 가득한 얼굴에 지저분한 두건을 쓰고 있는 선장은 호리 호리한 백발의 청년이 젤밴더 대륙으로 가는 자신의 해적선에 타고 싶다고 말하자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봐. 우리는 해적이야. 해적선을 타겠다고? 웃기는 친구로구만." "상관없어. 날 젤밴더 대륙으로 데려다주면 그걸로 된 거니까." 선장은 눈앞의 줄리탄이 그 유명한 노블리스라는 걸 모르고 있었지만 그 의 눈매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 와는 달리 뭔지 모르게 강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뭐 지금 그 위험한 젤밴더 대륙으로 가려는 놈들은 우리 같은 도적들 외 에는 없긴 하지만..... 그래. 넌 뭘 해줄 수 있지?" 줄리탄은 말없이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뭐야 이건?" 주머니를 펼쳐 보이던 선장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액수의 달라카트 금화 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선장은 잽싸게 그것을 품속에 넣은 뒤에 말을 이었다. "이 정도 돈을 써가면서까지 용들이 설친다는 젤밴더 대륙으로 가려는 이 유가 뭐지? 지금 그곳에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만날 사람이 있어서......" "뭐?" 엉뚱하게 들리는 줄리탄의 말에 선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누굴 만나려는 지는 몰라도 금화를 그렇게 써가면서 해적선을 타고 전쟁터나 다름없는 젤 밴더 대륙으로 간다니 정신 나간 놈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줄리 탄이 물었다. "그러는 당신들은 왜 젤밴더 대륙으로 가려는 거지?" "뭐? 우리들? 와하하. 당연하잖아." 줄리탄의 반문에 선장은 뭐 뻔한 걸 물어보냐는 투로 대답했다. "오칼란트 제국이 멸망했단 말씀이야. 지금 그곳에 가서 도적질을 해도 막을 놈 하나 없단 거지. 어때. 차려 놓은 밥상 아닌가? 후후." "용들이...... 두렵지 않나?" "쳇. 제아무리 용들이라고 우리들을 하나 하나 찾아서 죽이겠어? 잘만 피 해 다니면 된다고." 항상 욕심이라는 것은 죽음의 공포조차 넘어가 버리는가 보다. 해적들은 한몫 잡기 위해 젤밴더 대륙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바뀐 건 없군." 줄리탄이 여관의 중앙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자조적인 목 소리였다. "여전히 엘프들은 여관에 잡혀 노래를 부르고...... 여전히 사람들은 손 쉽게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나는 또 오칼란트로 가게 되 는군. 카넬리안. 우리가 한 건 무엇이었을까."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 그의 시선은 예전 메르퀸트처럼 쇠사슬에 다리가 감긴 채 새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금발의 엘프를 향해 있었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슬프고 가느다란 노랫소리와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엘프어. 선장은 뭔지 모르게 음울한 이 청년 덕에 술맛이 떨어졌다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출발은 내일 오후야. 오지 않으면 그냥 갈 테니까 시간 맞춰 오라고." 계속 지켜보고 있던 시링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 다. "이봐 주인님. 그냥 일루미네이터를 몰고 가면 될텐데 뭐하러 저런 얼치 기 해적들의 배를 빌리려는 거지? 그것도 고집인가?" "목숨 거는 건 나 혼자로 족하니까. 가스발 선원들을 끌어들이고 싶진 않 아." "이래저래 복잡한 인간이로군 정말." "도, 돌려주세요!" 갑자기 앳된 소년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줄리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고 개를 돌린 곳에선 감색의 로브를 입고 있는 소년이 선원들에게 빼앗긴 자 신의 두꺼운 책을 돌려 받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야. 꼬마. 이거 비싸 보이는데?" "제발 돌려주세요." 손때가 가득하고 너덜너덜하지만 상당히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가죽커버 로 제본된 책이라 무식한 선원들이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가 보였나보다. 선 원들이 높이 들어올린 책을 되찾기 위해 울상이 되어서 팔짝팔짝 뛰고 있 는 소년의 모습은 너무도 필사적으로 보였다. 시링크스가 조용히 그 두터 운 책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 만든 마법이론서로군." "마법책?" "확실히 저런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기에는 상당히 귀한 책인 건 사실이 야. 이해나 할 수 있을지 몰라." 단 한번도 줄리탄 앞에서 마법을 쓴 적은 없지만 분명히 카넬리안 만큼 마법에 정통할 시링크스는 냉기 서린 무관심한 시선에 작은 아이를 담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달려드는 소년을 걷어찬 뒤에 자기들끼리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야. 이 빽빽한 글씨들은...... 그림이 한 장도 없잖아!" 마법이론서 같은 것을 뱃사람들이 이해할 리가 없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아이는 울먹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정말로 그에게 중요한 것이 었는지 포기하지 않고 그 무리들에게 다시 다가가는 것이었다. "도...... 돌려주세요. 제발." "이 애송이가 시끄럽게!" 상당히 짜증나는 광경을 바라보던 줄리탄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 기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끈적거리는 여관 1층을 갈랐다. "당신들! 어린애를 상대로 뭐하는 짓꺼리야!" 굉장한 고함소리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으 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의외로 작은 키에 가느다란 다리가 하얀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그녀는 좀 기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엘프라는 것을 증명하는 연녹색의 눈동자를 가졌지만 엘프치고는 상당히 큰 가슴에 눈썹 도 눈매도 날카로웠고 무엇보다 엘프 중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검은 머 리칼을 두 갈래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카밀. 또 너냐? 엘프 주제에." "날 카밀이라고 부르지마! 이 냄새나는 덩어리들아!" 카밀이라고 불리길 상당히 싫어하는 여자 엘프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성 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서서 당황하고 있는 꼬마애를 확 껴안는 것이었다. "누, 누나....." "어서 그 책 돌려줘!" "가슴 만지게 하면 돌려주지. 어때?" "웃기고 있네. 돈내기 전엔 어림도 없어!" 굉장한 배짱의 엘프였다. 단번에 찍어 눌릴 것 같은 왜소한 체구인데도 조금도 꿀림 없이 남정네들을 향해서 쏘아대는 모습이...... 꼭 카넬리안 을 닮은 여자였다. 물론 카넬리안 만큼 강한지는 모를 일이지만. 선원들의 얼굴이 슬슬 일그러질 차례였다. "카밀. 또 맞고 싶은 거냐? 천박한 엘프 주제에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냐! 앙!" "흥. 엘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고통은 순간이지만 수치는 영원하다. 그래. 힘도 없고 천한 여자 엘프를 때릴 테면 때려 보시지 쪼.잔.한.인.간 들.아!" "이 씹어먹을 년이! 좋아. 네 주인에게 돈 내고 널 밤새도록 패줄까? 다 시는 이 몸한테 그런 말을 씨부릴 수 없도록......" "맘대로 해. 대신 그 책 돌려줘." "그런데 정말 이 년이 짜증나게......" 폭력과 협박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카밀은 한 눈에 보기에도 이 바닥을 지치도록 겪어왔던 여자였다. 다른 사람들 마저 이 상황을 말리기보다는 안주 삼아서 바라보고 있을 때 줄리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 하시죠." 그 말 덕분에 무대의 주인공은 줄리탄으로 바뀌고 말았다. 선원들과 카밀 마저도 놀란 눈으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카넬리안이 있었다면 이 쯤에서 이른바 '싹쓸이'를 해버렸겠지만 이제 카넬리안은 없는 상황. 물론 줄리탄 이 인피타르를 뽑지 않더라도 그다지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넌 또 뭐냐! 애송아!" '애송이'의 정체가 노블리스라는 걸 알았다면 분위기가 뒤바꿔 버렸을 테 지만 줄리탄은 '내가 누군 줄 알아!'라고 소리치지 않고 단지 한숨을 내쉬 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엘프는 물건이 아닙니다." "너 카밀의 서방이라도 되냐?" "모르는 남자야!" 이번엔 카밀이 빽소리를 질렀다. 서너명의 선원들은 슬슬 줄리탄에게 다 가오며 팔뚝을 걷어붙였다. 팔뚝에 큼지막한 문신이 드러났고 곧 그 문신 주먹이 줄리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 분위기. 끼어 든 것은 카밀이었다. "볼일은 나한테 있을 텐데 괜히 엄한 사람에게 시비 걸지마!" 라고 외치긴 했지만 선원들은 제 발로 끼어 든 줄리탄에게 돈을 뜯어낼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줄리탄에게 어슬렁 걸어 온 선원의 주먹이 냉큼 날아들었다. 이것은 여관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벌어지는 일상적인 다툼으로 보였지만...... "내 주인을 건드리면 안되는데......" 라는 시링크스의 말을 시작으로 '일상적인 다툼'은 끝나버렸다. "뭐?" 순간적으로 시링크스의 창백한 손바닥이 선원의 커다란 얼굴을 향해 날아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금새 목이 꺾여 버린 선원의 몸이 공중에 붕 뜨면 서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여관을 날아가는 선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쿠콰쾅! 결국 시링크스의 손짓 한번으로 선원의 몸은 짐짝처럼 하늘을 날아 테이 블을 박살내며 추락해 버린 것이다. 엄청난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고 멍하 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 시링크스가 조금 헝클어진 자신의 두꺼운 코트를 여미며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카넬리안이었다면 죽였을 거야." "......죽이지 마." 줄리탄이 피곤한 눈빛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테이머 를 건드렸으니 씰인 시링크스로서는 선원을 즉사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매우 너그럽게 봐준 셈이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시무시하게 강하고 냉혹한 천하장사 미청년'이라는 시선으로 시링크스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밀이 조금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우, 우리 여관에서 살인은 안돼요." "......정말 죽이면 안돼?" "죽이지 말라니까 제발 좀!" 줄리탄이 조금 언성을 높인 뒤에야 시링크스는 남은 선원들마저 다듬어 주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 같았다. 카넬리안보다는 비교적 자애로운 씰이 었다. "너, 너희들...... 조금만 기다려랏!" 시링크스가 씰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괴력에 기 겁을 한 선원들이 '복수해 줄 테다!'라는 유치한 말을 남기며 여관을 빠져 나가자마자 시링크스는 소중하게 자신의 책을 집어드는 예의 소년을 향해 말했다. "거기 너." "예? 저, 저요?" "그래. 이름이 뭐지?" "쿄...... 쿄쿠로...... 인데요." "이상한 이름이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미안할 건 없어. 이리와 볼래?" 쿄쿠로라는 소년은 마르켈라이쥬 혼과 마찬가지로 가르바트 소수 부족 출 신이었다. 마르켈라이쥬 역시 황제가 이름을 하사하기 전까지의 이름은 혼 이었고 줄리탄도 마찬가지였으니 가르바트 인이 아니라면 이름이 이국적으 로 들리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쿄쿠로는 겁먹은 걸음거리로 시링크스에게 다가왔다. 시링크스는 가느다란 눈으로 그 소년을 내려보며 말하는 것이었 다. "하나 묻자. 쿄쿠로." "예......" "왜 마법을 쓰지 않은 거지?" 라고 말하며 시링크스는 쿄쿠로의 손을 잡아 올려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은 어린 소년의 것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상처들과 화 상 자국들이 가득했다. "이 정도로 연습했으면 얼마든지 저런 약한 인간들은 죽일 수 있었을 텐 데......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이런 것도 인간의...... 고집인가?" 시링크스는 정말 궁금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쿄쿠로의 상처투성이 손 바닥을 훑어보았다. 그가 보기에 쿄쿠로는 나이에 비해 상당한 마법을 구 사할 수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때 카밀이 쿄쿠로를 확 잡아채며 시링크스 를 노려보았다. "도와줘서 고맙긴 해요! 하지만 쿄쿠로를 괴롭히지 말아요!" "괴롭히는 거 아닌데......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당신 강하긴 한데, 이상한 남자야." 그리고 잠시 후, 카밀은 술병과 과일 몇 개가 담긴 술병을 들고 있는 쿄 쿠로와 함께 줄리탄의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새 옷을 갈아입어 속살이 비 칠 정도로 엷은 레이스 달린 원피스였다. "이건?" "흐응. 내가 사는 거에요. 이걸 바란 거 아니었어요?" "바란 적 없는데...... 당신에겐 이상하게 자주 오해를 사는군." 시링크스가 멀뚱히 회색빛 밀납 술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둑하고 흥청거리는 여관의 횃불 속에서 금속 때에 찌든 회백밀납의 표면은 일그러 진 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줄리탄이 말했다. "엘프입니까? 이름이 뭐죠?" "카밀리아 시넨시스. 어렵죠? 그냥 카밀이라고 부르세요." "그렇게 불리는 것 싫어하잖아요?" "아아. 날 샀을 때는 상관없어요." 시링크스가 과일에 달라붙은 파리를 쫓아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이 엘프 언제 샀어?" "산 적 없어." "그냥 하루 드리는 거에요. 당신들 같은 왕자님도 드무니까. 킥킥." 소곤거리듯이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꽤 목소리의 톤이 높은 여자였다. 줄 리탄이 궁금한 것은 하나 뿐이었다. "엘프치고는 꽤 인간을 닮았군요 카밀 씨." "절반만 엘프에요. 아버지가 인간이죠. 본 적도 없지만......" 굵은 눈썹을 찡그리며 카밀이 말했다. 그녀는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 난 하프엘프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엘프들을 노예로 쓰다보니까 하프엘프 들도 적잖게 태어나고 있긴 했는데 그들의 인생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비참 하게 결정되기 마련. 카밀리아 시센시스라는 긴 이름의 여자 역시 마찬가 지의 괴로운 인생을 억지로 건내 받았을 것이다. "아하하. 그런 것 물어본 사람은 처음이네요. 술 따라 드릴께요?" 목소리에서 베어 나오는 뭔지 모를 쓸쓸함이 왠지 카넬리안을 닮은 여자 라고 줄리탄이 생각했다면 상처 입은 줄리탄의 마음의 보상작용일까. 시링 크스는 좀 어색한 듯이 카밀이 능숙하게 따르는 탁한 술을 받으며 말했다. "엘프들은 인간에 비해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들었어. 한 열다섯 정도 로 보이는데 몇 살이지?"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알았다니?" "나 열다섯 살이에요." "......" "왜요. 열다섯살짜리 엘프 처음 봐요?" 카밀은 도리어 당당하게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지만 시링크스는 고개를 또 갸우뚱거리며 대답할 뿐이었다. "처음 봐." "으으. 재미없는 인간." "나 인간 아냐." "에에?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줄리탄은 갑자기 시링크스와 카밀의 대화가 길어지자 또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이켰고 비어있는 술잔을 잽싸게 쿄쿠로가 채워주었다. 그러나 줄 리탄은 화끈한 것이 목에 걸리자 눈을 찡그리며 콜록거리고야 말았다. 깔 깔거리는 카밀. "에헤헤. 보기보다 술에 약하네요? 근데 이름이 뭐에요?" "콜록. 주, 줄리탄. 콜록. 콜록." 덕분에 꼴사납게 통성명을 해버린 줄리탄에게 주방으로 쪼르르 뛰어간 쿄 쿠로가 물잔을 가지고 나타났다. 하여튼 술과는 조금도 친하지 않은 줄리 탄이었다. 줄리탄은 정체불명의 기름기가 떠 있는 물잔을 받으려고 했다. "고, 고마.... 으응?" 짜아앙! 여관으로 들어오는 자를 바라본 쿄쿠로는 물잔을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쿄쿠로의 겁먹은 표정이 얼굴에 번지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내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새끼야! 내 동생들을 건드린 놈이!" 소위 깡패 두목쯤의 등장이었다. 수많은 깡패 살인마들이 다 그렇듯이 역 시 꽤 혐오스런 외모를 자랑하는 그가 여관에 들어오자 다른 손님들이 잽 싸게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모르긴 해도 이 도시 게른에서 꽤나 악명 높은 놈인가보다. 카밀이 불안한 표정으로 재빠르게 속삭였다. "당신들 빨리 도망쳐요." "왜?" "왜라뇨! 저 미친곰 베시컨트가 왔다면 팔다리 부러지는 정도로는 끝내지 않을 꺼에요!" 그러나 시링크스는 과일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주인님." "응?" "미친곰이라는 인간, 죽여도 돼?" "......죽이지 마." 카넬리안이었다면 일단 미스트랄로 두동강 낸 뒤에 '주인님. 나 잘했지?' 라고 말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시링크스는 그에 비하면 (다시 말하지 만) 상당히 충성스런 씰이었다. 그러나 애써 싸움을 피하려는 줄리탄의 마 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거한 베시컨트는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와 시링크스 의 옷깃을 잡으며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너냐! 앙!" 시링크스의 답변은 명쾌했다. "죽이지는 않을게." "뭐야!" 이런 황당한 놈은 처음본다는 얼굴로 베시컨트가 시링크스를 집어 던졌고 베시컨트의 힘에 몸이 가벼운 시링크스는 그대로 던져지며 바닥에 내리 찍 혔다. 깜짝 놀란 카밀이 벌떡 일어날 정도의 엄청난 충격음이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 응?" 베시컨트가 자신 있게 소리쳤지만 시링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스스 일 어서며 찟겨진 자신의 검은 코트를 내려보는 것이었다. "옷이...... 찢어졌어. 한 벌 밖에 없는데." "이 새끼!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번엔 베시컨트의 주먹이 시링크스의 배로 날아들었다. 무시무시한 주먹 에 밀포대가 터지는 듯한 퍽하는 소리가 들리며 시링크스가 밀려났지만 시 링크스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시링크스가 조용히 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끝난 거야?" "어...... 어...... 뭐야......" 그리고 일분 후. "죄송합니다! 자, 잘못했어요! 어르신들을 못 알아 뵙고 제가 그만...... " 바닥에 쓰러진 미친곰 베시컨트의 입에서 절절한 애원의 목소리가 들려왔 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마법도 검술도 없이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패기만 했던 시링크스의 입에서 차가운 절망의 목소리가 나왔다. "죽이지는 않을게." 그리고 또 오분 후. 안 그래도 비대한 몸이 퉁퉁 부어 버린 데다가 팔 다 리가 다 꺾인 채로 바닥에 드러누운 깡패 두목 베시컨트는 반쯤 정신이 나 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횡설수설거릴 뿐이었다. 시링크스는 조금 자랑스 러운 듯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봐아. 안 죽였잖아." "......" 줄리탄은 심히 괴로운 눈빛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고 카밀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갑자기 독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 고 걸레처럼 구겨진 베시컨트가 부하들의 손에 이끌려 질질 여관 밖으로 끌려나가는 것으로 '사소한' 소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시링크스는 다시 코트를 입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 주인과 있을 때는 이런 경험 해 본 적 없어." 4. 세이드와 레오폴트는 하늘을 매우는 천사들을 상대로 몇시간이고 싸웠다. 마치 피할 곳이 없는 자들의 절대자를 향한 발악처럼 그들은 눈앞으로 날 아드는 감정 없는 천사들을 끝없이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숨어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격렬한 제사를 지켜보는 것 같은 경외감과 서 글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죽어버린 천사들의 육체는 시체를 남기지 않고 먼지처럼 사라져가고 있었고 석양이 깔리기 시작한 해 저무는 대지 위에 그 미립자들은 반짝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캬아아아악! 세이드의 검에 잘려나간 마지막 천사가 파드드득 소리를 내며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자 세이드는 그제야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가누며 검을 접을 수 있었다. 울음을 멈춘 검을 바닥에 꼽으며 세이드는 차갑게 웃었다. "또..... 죽지 않았군. 이런 것도 저주인가. 큭큭." "세, 세이드 님......" 배를 꽉 쥐고 있는 레오폴트가 힘겹게 창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는 세이드와 함께 천사들과 싸우던 중에 심한 창상을 입은 것이었다. 붉은 피가 바닥에 계속 떨어지고 있는 중상이었다. 세이드가 매몰차게 대답했다 . "여기서 죽을 거야 너?" "이, 이 정도로는......" 레오폴트는 힘들게 대답하다가 땅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에 젖은 긴 머리 칼이 목덜미며 뺨에 엉켜있었다. 헤스팔콘 최강의 기사 중에 하나인 그녀 로서도 테싱의 피조물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힘겨웠던 것이다. 가쁜 숨 을 내쉬는 레오폴트에게 검을 뽑아 다가온 세이드는 그녀의 하얀 목에 검 을 들이대며 말했다. "고통스럽다면 내가 죽여줄까?" "이..... 이곳에서 죽지 않겠어요...... 계속 당신과 함께 있......" 피를 너무 많이 쏟아낸 레오폴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때였 다. "기, 기사 나리. 저희들이 치료해 드릴게요." 천사들이 사라지자 집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간절히 말했다. 세이드를 앞 에 두고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도와주겠다고 말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 일 것이다. 세이드는 검집에 검을 넣으며 조롱하듯이 말했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에 익숙해 지는 과정이지...... 아 쉽게도 이번에는 죽지 못할 것 같군. 레오폴트." 5. 원하든 원치 않든 악랄한 항구의 소란스런 여관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 은 줄리탄과 시링크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여관 2층으로 돌아갔다. 물 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줄리탄은 시링크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죽 이지 말 것. 때리지 말 것. 싸우지 말 것. 시링크스가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에서는 카넬리안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깊은 밤이 되어도 잠들지 못하는 기분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줄리탄에게 소란스럽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술에 잔뜩 취한 카밀의 목소리가 문 밖 에서 들렸다. "문 열어요! 어서 이 문 열라니까!" "카, 카밀?" 카밀은 문을 부서져라 두들기고 있었고 시링크스가 문을 열어주자 문에 기대어 있던 카밀은 비틀거리며 쏟아지듯 시링크스에게 안겼다. 독한 술냄 새가 확 풍겨온다. "아아. 오늘...... 당신들 멋있었어요." "그 말 하려고 이 시간에 왔어?" "나. 당신들하고 같이 갈래요. 나하고 쿄쿠로를 받아줘요. 예?" 지겨움에 지쳐버린 듯한 취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리탄은 즉시 고개 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돼요. 이곳보다도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거니까." "싫어! 같이 갈 꺼야!" 카밀은 줄리탄 앞으로 다가오면서 말 그대로 떼를 쓰는 것이었다. 참아왔 던 괴로움을 터트려 버리는 것 같았다. 카밀은 비틀거리며 살랑거리는 웃 옷을 벗으며 술에 취해 싱글거렸다. "어때요? 같이 가주면 날 계속 드릴 테니까." "제발 그만 둬요! 그렇게 자기 몸을 헤프게 여기면서 뭘 어쩌겠다는 거에 요! 무턱대고 도망치겠다는 건가요!" 줄리탄은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상흔이 드문드문 보이 는 갸름한 카밀의 나신이 어두운 방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카밀이 분을 못 이기며 소리쳤다. "아무려면 어때요! 어차피 나는 반쪽짜리 엘프인데!" 울먹이는 목소리가 줄리탄의 귓가를 아프게 찔렀다. "그거 알아요? 우리들은 오래 살지 못해요. 꼭 어떤 병이든 걸려서 죽게 된다고요. 나도 분명히 곧 죽게 되겠죠. 아이도 낳을 수도 없는...... 엘 프도 인간도 아닌 그런 존재란 말이에요." 카밀의 말대로 하프엘프들은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타고나서 거의 모두 3 0살도 되기 전에 병으로 죽는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 야 할 생명이었기 때문에 우연히 태어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어 진 인생은 가혹했던 것이다. 생식능력도 없고 병약한 하프엘프들은 병에 걸리게 되면 인간들에게서 버림받아 외롭게 죽어가곤 했다. "그럴 바에는..... 어차피 그렇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당신들과 함께 있 으면서 하루라도 통쾌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안되나요! 그것마저 도 안되나고요!" 카밀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곧 죽어버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 리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몸을 팔며 물건처럼 취급당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그래서 줄리탄과 시링크스를 보며 지금까지 쌓여 있던 울분이 터져 버린 것일 거다. 계속 울음을 삼키며 카밀은 자신의 옷을 주웠다. "미안해요." 줄리탄은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카밀은 부축하며 뭐라고 위로해 줄 수 없는 괴로움에 가슴이 아팠다. 여름꽃처럼 금방 죽어버리는 카밀과 원치 않아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카넬리안. 줄리탄은 서로 다른 두 여자 사이에 서 뭔지 모를 공통점을 느꼈던 것이다. -Blind Talk 자아. 오랜만에 올리게 되네요.-_-a 으음... 지금도 그렇지만 계속되는 복통에 시달립니다. 도무지 몸도 마음 도 얼얼해서 제대로 글을 쓸 수가 없더군요. 어렵게 어렵게 짜내서 이번 편을 쓰긴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이게 아냐!'라고 고함치고 있 습니다. 뭐 아주 마음에 안드는 것도 아니지만... 몸이 좋았으면 훨씬 더 멋지게 쓸 수 있었을 텐데.....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쿄쿠로는 녹차왕자입니다. ^_^; 야마다 난페이의 홍차왕자를 보면서... 흐음 그렇다면 나는 녹차왕자다! 라는 생각에 세계 최고가이며 최고급의 녹차인 쿄쿠로(玉露)라는 이름을 넣어 버렸습니다. 단순하죠? 쿄쿠로는 한번 먹어 보고 싶은 말차이긴 한데 ... 솔직히 이건 비싸서 죽을 때까지 먹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고 평소에는 다즐링에 베르가못 향을 넣은 얼그레이 홍차를 좋아합니다. 뭐 아삼도 좋 고 실론도 좋긴 하지만... 역시 얼그레이 가향차가 개인적인 취향에는 가 장 잘 맞는 듯. 참고로 카밀, 즉 카밀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는 차나무의 학명입니다... 아아 또 '카'로 시작하는 이름을 써 버렸군. 대체 적으로 '카'로 시작하는 여자들은 성질이 있는 편인 것 같네요... 아아. 투니버스에서 그렇게 보고 싶던 파워퍼프걸을 해주더니 이번에는 OC N에서 컬트 영화의 진수 핑크 플라밍고를 해주는 군요. 감동입니다... T_T 에 그리고... 엄청난 비극이 생겼습니다. 저는 각 통신망 게시판에서 저 와 관련된 글들은 모조리 갈무리해서 파일로 보관해 두는데(소중한 조각들 이니까...) 이번에 윈도우 다시 깔다가 실수로 그 파일을 백업해 놓지 못 했군요. 정말이지 손실이 큽니다... 빨리 다시 찾아서 갈무리해 둬야지... 그럼 긴 공백 동안 메일 보내주시고 게시판에 글 올려주신 분들, 그리고 드래곤 레이디 카페 분들, 감사 드립니다. 메일은 답장 다 보냈습니다... 만약 도착하지 않았다면 제 메일서버 문제겠네요.-_- 약 먹고 자야 겠네요.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테마 love idea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2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1 글쓴이:billiken 조회:206 날짜:2001/08/24 07:49 .. .. "용 따위는 없다. 조물주는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생명체 같은 건 만들지 않는다. 단지 신의 손길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친 상처투성 이의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야." 여섯장의 날개를 내린 채 가라앉는 목소리로 말하는 테싱 앞에서 나는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화장을 지우고 무대 밖으로 내려온 배우처럼 .....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가 인간을 닮았고 또 매우 슬퍼 보인다는 생각 이 들었다.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2 HalfElf Memorial 1. 여명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새벽녘이었다. 결국 밤 새 잠들지 못한 줄리탄은 푸석푸석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두운 방안에서도 또렷하게 책을 읽고 있는 시링크스를 향해 말했다. "가자." "뭐?" 시링크스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책을 덮으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그 의 짙푸른 눈동자가 도드라진다. "해적선에 타는 건 오후로 알고 있는데. 새벽부터 갈 거야?" "응." "이 여자 때문에?" 시링크스가 흘낏 바라본 침대에선 잔뜩 헝클어져 있는 카밀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결국 이 여자는 한밤중에 난입해 들어와서는 일방적으로 한탄을 늘어놓은 뒤에 결국 침대를 차지하고 쓰러져 잠들어 버린 것이다. 확실히 불행한 여자지만 카넬리안처럼 멋대로였다. "카밀과 같이 가줄 여유는 없어. 도와주고 싶지만 방법도 모르겠고....." 꽤 서늘한 새벽공기를 울리며 읊조리는 줄리탄의 말에 시링크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코트를 입고 작은 책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줄리탄은 그 책을 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인간들의 시집인 것 같았다. 시링크스가 어깨 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책에 이런 소화(小話)가 하나 있더군. 오늘 밤 백송이 꽃이 핀다면, 내일 아침 눈뜨지 않으리." "....." "이 여자 불쌍해. 당신도 불쌍하고." 무감하게 말하는 시링크스의 눈동자는 눈물자국이 있는 카밀의 얼굴을 향 해 있었다. 2. 리이가 죽고 젤리드가 떠난 이후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와인 하우스 '낙원 의 오후'는 메이가 사들였다. 그리고 전 가스발 사략함대의 사람들은 간간 이 그곳으로 가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니까 해군 들의 휴식처가 된 셈이랄까. 오늘 그곳에선 업무를 하루쯤 내팽개치고 찾 아온 메이가 둥근 와인잔을 든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으이구. 줄리탄.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붉은 와인이 들어 있는 투명한 와인잔을 흔들었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봐도 도무지 찾을 길이 없는 줄리탄의 행방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신경이 쓰이는 건 비단 메이 만이 아닐 것이다. 곁에 있는 그레시다 역시 주인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좋아하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도 우물쭈물하며 메이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아...... 여기 계셨네요 메이 제독 님?" 메이 혼자 있는 와인 하우스의 문이 삐죽 열리며 고개를 슬며시 내민 자 는 메르퀸트였다. 옆으로 고개를 내민 그의 긴 은발이 좌르르 쏟아졌고 곧 하늘하늘 거리는 발걸음으로 베시시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는 그를 볼 때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진짜 남자로 돌아갈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의 문이었다. "얼레? 아침부터 술 마셔도 되는 거야 메이?" "아 물키벨 님......" 메르퀸트를 뒤따라 들어온 작은 키의 여자는 물키벨이었다. 머리칼이 잔 뜩 젖어있는 것으로 봐도 또 밤새도록 물 속에 들어가 줄리탄이 바다를 지 나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육지로 돌아온 듯 싶었다. 그리고 결국 아 침부터 한 사람과 한 엘프와 한 해룡과 한 씰은 와인을 홀짝거리며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30분 후에...... 결국 가장 빨리 취해 버린 건 물 키벨이었다. "이이이이익! 줄리탄 그 녀석 분명히 카넬리안 있는 곳으로 가고 있을 꺼 얏!" 안 그래도 최근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다가 와인까지 두 잔이나 비워버린 물키벨은 작은 손으로 꽝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덕분에 피할 수 없는 유혹인 케이크를 한 입 먹으려던 그레시다는 깜짝 놀라며 티스푼 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른 아침부터 주정이라니...... 메이가 겸연쩍은 미소를 띄우는 가운데 물키벨은 더욱 격양된 어조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 는 것이었다. "안 도와 줄 꺼야! 절대에에 안 도와 줄 꺼라고! 누가 도와줄 줄 알아? 으이이이이 나쁜 녀석!" 물론 도와달라고 협박하는 사람도 없긴 했지만...... 물키벨의 마음고생 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가 보다. 물키벨의 목소리는 식을 줄을 몰랐다. "대체 왜 남자들은 그렇게 죄다 제멋대로냐고옷!" "......" 어쨌든 남자인 메르퀸트가 뭐가 미안한지 고개를 폭 숙였다. 스스로 감정 을 폭발시켜 버려 이 상태로 물키벨을 바다로 밀어 넣으면 용으로 변해 항 구 앞바다에서 난동을 부릴 것만 같은 상황. 메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키 벨을 달랬다. "그래도 도와주셔야 되요. 지금 그 녀석을 도와줄 수 있는 건 물키벨 님 뿐......." "싫어엇!" 물키벨은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걱정해 줬는데 말 한마디 없이 매몰차게 떠난 사람을 자애롭게 대할 정도로 마음씨 넉넉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결국 한시간이 지난 이후 물키벨은 흐느적거리고 웅얼 거리며 메르퀸트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면서 중얼중얼거리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해룡의 수장이라도 때 이른 술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그 녀석 불쌍해 죽겠어어......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고. 으으. 그런 데 뭐야 대체! 또 사라져 버리다니! 왜 그 녀석은 항상 포기라는 걸 모르 는 거야.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왜 가버린 거냐고. 끔찍하게 불쌍해! 줄리탄도 불쌍하고 카넬리안도 불쌍하고 죄다 너무 불행해 미치겠단 말이 야아아아." 라고 말을 길게 늘리며 물키벨은 잠들어 버렸다. 아무리 용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생명일 것이다. 낙천적이고 쉽게 웃던 평범한 시골 요리사가 지금은 궁룡의 품에 있는 차가운 연인을 되찾기 위 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을 이끌고 해적선에 타야 한다는 우스꽝스러 운 운명은 단지 바보 같은 남자의 고집이라고 단정해 버릴 수는 없었다. 세상은 항상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물키벨은 그런 줄리탄 이 너무 불쌍해서 그에게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 동이 틀 무렵 정박중이던 젤밴더 대륙행 해적선에 나타난 줄리탄과 시링 크스를 보며 선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막 일어난 선장은 속옷차림 으로 갑판에서 세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야아. 당신들 나를 그렇게 못 믿나? 오후에 출항한다고 분명히 말했는 데 꼭두새벽부터 와서 지키고 있다니 말야." "아니.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말야...... 여기서 쉬어도 괜찮겠지?" "맘대로 하쇼." 줄리탄이 돌아본 해적선은 일루미네이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주먹구 구인데다가 엉망친창이었다. 해적이라는 것 자체가 정규군과는 달리 대부 분 돈이 없는 부랑자나 은퇴한 선원들, 범죄자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기 강을 잡는다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배는 너무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직순번조차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적 재되고 있는 술이나 음료수, 음식 등의 항해물자들도 정확한 계산으로 이 뤄진 것 같지 않았다. 여분의 돛이나 땜질용 밀납은 있을까? 양각기를 제 대로 써서 항로설정이나 확실히 할 수 있을까? 해도가 그려져 있을 염소 가죽은 대체 함교 어디에 처박혀 있을까? 줄리탄은 직업병이랄까..... 심 란한 시선으로 배를 훑어보며 갑판의 좌현쪽으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궁룡은 커녕 항해 중에 침몰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시링크스는 헤스팔콘 제국의 멸망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해적선들 중에 하나일 이 배에 대한 감상을 짧게 평했다. 줄리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제대로 걸레질을 안해서 끔찍하게 지저분한 갑판에 앉아서 인피타르를 무 릎에 놓았다. 갑판의 이음매 사이에서 시커먼 바다벌레가 기어다니는 모습 이 눈에 들어온다. "먹어." 시링크스는 코트 속에서 예의 저녁에 챙겨 두었던 작은 과일 하나를 꺼내 며 줄리탄에게 건냈다. 줄리탄은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줄리탄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살짝 씹어 물었다. 풋과일의 시큼한 향내가 입과 코에 번진다. "조금 자. 지켜줄 테니까." "......하하. 꼭 카넬리안 같군." 줄리탄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피타르를 무릎 사이에 세우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꽤 쌀쌀한 데다가 삐걱거리는 갑판소리가 거슬리는 곳이었지만 줄 리탄은 그간의 피로가 밀려오며 시링크스 옆에서 살포시 잠이 들었다. 그 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따가운 햇빛이 희미하게 느껴질 때 줄리탄 의 귓가에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콧노래 같은 목소리. 그리고 두 뺨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줄리탄은 익숙하고 나른한 기분에 눈을 뜨며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카, 카넬리안?" "땡. 카밀입니다." "......" 줄리탄 앞에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카밀과 예의 커다란 마법서를 들고 있 는 쿄쿠로가 서 있었다.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줄리탄. 지켜주겠다 던 시링크스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몸을 돌린 채 책을 훑어보고 있었고. "당신......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머. 난 여기에 있으면 안되나요?" "그, 그게 아니고!" 줄리탄이 일어나보니 이미 항구 게른이 바다 끝에 보인다. 벌써 배가 출 항한 것이다. 대체 이 여자..... 어떻게, 왜 이 배에 탄 거지. "당신들이 날 받아주든 안받아주든 좋아요. 난 그 여관에서 도망치기로 했으니까. 지금쯤 내 대머리 주인은 나 사라졌다고 난리가 났을 꺼야. 킥 킥킥." 카밀은 뭐가 개운한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마구 웃고 있었다. 게다가 줄 리탄의 어깨를 톡톡 치면서. 줄리탄은 황망하다는 듯이 카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배 선장이 당신들을 그냥 태워줬을 리가 없는데." 당연하다. 돈에 환장한 해적선장이 별 가치도 없는 하프엘프와 내성적인 마법꼬마를 너그럽게 받아줄 리가 없지 않나. 카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 했다. "뭐 그거야 여자의 무기를 썼으니까. 항해 중에 계속 봉사해 주겠다는 약 속도 했고." "......" 발랑까진 열다섯짜리 하프엘프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줄리탄은 손바닥으 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될 대로 되겠지.'라며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배를 돌려 카밀과 쿄쿠로를 다시 게른에 내려놓을 수도 없는 노 릇이고. "그런데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의 여자. 줄리탄 씨의 애인?" 카밀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 듯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줄리탄을 바라 보며 몸을 굽히는 것이었다. 덕분에 가슴이 다 드러나 보이는 통에 줄리탄 은 이 부담스러운 하프엘프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그, 그래." "흐응. 그럼 내가 선심 쓸께요. 앞으로 날 카넬리안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 "싫어!!!"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심심하지 않아요? 나도 심심한데 우리 얘기나 해요." "무슨 얘기?" "아무거나." 카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히히히 하고 웃는 것이었다. 앞일이 어떨 지는 몰라도 당장 그 어두컴컴한 게른을 빠져나왔다는 것에 굉장히 신나는 모양이었다. 뭐랄까...... 메르퀸트와는 정반대의 엘프라고나 할까. 결국 줄리탄과 카밀은 진한 뙤약볕을 맞으며 몇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게 되어 버 렸다. 물론 거의 카밀이 수다를 떠는 입장이었지만. "나한테도 꿈이라는 것이 있긴 있어요." "......꿈?" 카밀은 반쯤 땀에 젖은 몸으로 갑판을 빙글빙글 굴러다니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멋진 엘프가 되고 싶어요." "멋진?" "혹시 메르퀸트라는 엘프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 카밀의 말은 의외였다. 그녀가 메르퀸트를 알고 있다니. 메르퀸트가 그렇 게 유명한 엘프였단 말인가. 줄리탄은 별 다른 말 없이 그녀의 수다를 들 어주기로 했다. "메르퀸트도 나 같은 여관 출신의 노예였데요. 그런데! 헤스팔콘과 달라 카트 전쟁 때 달라카트의 선봉에 서면서 이종족들을 위해 싸웠데요! 멋지 지 않아요?" 카밀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실제 그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줄리 탄의 입장으로서는 멋지다기 보다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절했 었다. "그런 엘프가 되고 싶어요. 뭔가 자기 신념을 위해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그런 멋진 존재가. 그렇다면 죽는다고 하더라도 뿌듯할 것 같아요. 줄리탄 씨는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진짜로 ." 카밀은 한번도 보지 못한 메르퀸트에게 상당히 낭만적인 상상을 하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도취된 목소리로 말하다가 풀이 죽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아. 하지만 역시 무리겠죠. 메르퀸트는 굉장한 마법의 달인인데다가 나와는 달리 순혈이고 또 엄청난 미녀라니까." "엄청난 미남이겠지......" 시링크스가 책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카밀은 '이 사람 뭔소릴 하는 거야. '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링크스를 바라보다가 멀뚱히 곁에 있던 쿄쿠로 를 인형 쥐듯이 확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다 대신에 이 녀석이 대단한 마법사가 될 꺼에요." "누, 누나." "헤스팔콘 마법수련원의 신동이었다고요. 비록 헤스팔콘 제국이 망하는 바람에 마법수련원이 사라져서 지금은 나 같은 불량엘프와 함께 있는 신세 가 되어버렸지만." "저,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넌 빨리 달라카트에 내려가서 계속 마법을 배워야 한단 말 야!" 동병상련이랄까. 카밀은 갈 곳 잃은 소년 쿄쿠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 같았다. 반면 그 이야기에 줄리탄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들의 손으 로 멸망시킨 헤스팔콘 때문에 갈 곳을 잃은 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분 명히 헤스팔콘 제국이 멸망하면서 쌓아왔던 인생의 길이 막혀 버린 자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상대를 무너트리고 적을 죽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계속 상처받는다. 아마 세라피스도 그것 때문에 계속 괴로워했던 것 일테지. 줄리탄이 쿄쿠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예에?" 이해 못할 말에 동그랗게 두 눈을 뜨는 쿄쿠로. 정말 알지 못할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레? 줄리탄 씨가 뭘 미안해하는 거에요?" "카밀 씨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신념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에요." "아아. 무리라니까요. 그렇게 살기도 전에 죽어버릴게 분명하니까." 그 말에 줄리탄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카밀이 줄리탄 을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신념을 지키는 것과 목숨의 길이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에요." 카밀은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건 망상이라며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한 백발의 청년에 게 뭔지 모르는 고마움이 느껴졌다. 배를 타길 잘한 것 같아. 포기하지 않 고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상쾌한 바닷바람이 연신 갑판을 핥고 지나 가고 있었다. -Blind Talk 배, 배가... 배가... 풀썩. 최근 복통 때문에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바 람에 줄리탄에게도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_-v 에... 간만에 등장한 인터메조에서 테싱이 한 말은 제가 가장 맘에 들어하 는 드래곤 레이디의 대사 중에 하나 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존재하는 얼 토당토 않은 존재 용에 대해서 예전부터 많은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용은 상징으로 끝나는 것이 좋다고... 에에 결국 환타지라서 그런지 당연하다는 듯이 용이 나와버리긴 했지만 뭔가 그 근원을 까발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 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제 성격입니다만. 뭔가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도 생기고 있는 요즘입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를 보았습니다. 이 감독의 작품들 중 디어 헌터 외에 본 것이라고는 선 체이서 뿐인데('천국의 문'은 아쉽게도 구해 보지 못했음.) 일단 이 감독의 스타일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 버트 드 니로와 크리스토퍼 워큰이 나오다는 이유만으로 꼭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싼 값으로 테잎을 구입해 버리고야 말았는데. 아아 역시 러시안 룰렛 장면은 다시 보고 다시 봐도 감동 그 자체 입니다.T_T 아무튼... 병원에 있을 때 계속 헬스를 해서 체격은 예전처럼 돌아왔는데 지속되는 복통과 장기의 병원생활로 스테미너가 제로가 되어서 금방 드러 누워버리는 비참한 일상입니다. 현재 식이요법으로 몸을 추스려가고 있긴 하지만... (다시 수영이나 해볼까나.) 메일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_^ <<제멋대로 프로파일 통신판 ONLY>> Entry#9 세라피스 리그나이트(Serapis Rignite) 편 1.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아아 황제는 너무 힘든 직업이에요. 세상 최고의 죽노동이랍니다. (실은 폐하께선 최근 무척 한가한 편이시다...) 2.왜 연습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검술이 뛰어난 거죠? :타고 났으니까... 가 아닐까요? (연습을 자주 안한다 뿐인지 한번 한번 말그대로 뽕을 뽑는 스타일이다..) 3.가장 아끼는 것은? :물론 나의 사랑스런 백성들 (사실 그는 황궁 내에 있는 자신의 개인 BAR를 가장 아끼고 있다.-_-) 4.왜 씰과 계약하지 않습니까? :최근 황궁에 눌러살게 된 마르켈라이쥬 씨와 그것에 대해 깊은 토론을 나 눠본 적이 있어요. 결론은 비싼 장신구를 달고 있는 것처럼 부담스러 미치 겠다는 거죠. 게다가 황제에게 씰이 무슨 필요겠습니까. 지금 있는 후궁들 만으로도 충분한데요? (이봐. 씰을 무슨 용도로 쓰려는 거냐.) 5.옷은 몇벌이나? :세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그렇다. 사치스런 황제였던 것이다...) 6.결혼은 언제 할 겁니까? :으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황제실격이야!) 7.최근 용들이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용들은 싸워서 물리쳐야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자연재해와 같은 재앙에 가 까워요. 어떻게 물리치냐 보다는 어떻게 막아야 하냐를 궁리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도 용들에게 군대를 보내며 '짐을 위해 죽어라!'라고 외치는 앞 뒤 안가리는 황제는 아니로군요.) 8.카넬리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격만 고치면 사랑스런 여잔데 말야... (실은 줄리탄과 카넬리안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하시고 계시답니다.) 9.앞으로 통치 계획은? :신하들에게 물어봐요. (무책임...) 10.노래는 잘 부르나요? :......매너리즘에 빠진 질문이군. (세라피스의 노래 실력은 황궁의 톱이며 제국의 톱이다. 그가 방랑할 때도 노래와 연극으로 먹고 살았으니까...) E-MAIL : billiken@hananet.net Bjork의 Hyper-Ballad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3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2 글쓴이:billiken 조회:34 날짜:2001/09/01 14:06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3 The Angel from hell 1. 웃기는 이야기지만 줄리탄은 카넬리안을 만나 ‘요즘 나 너무 힘들어.’ 라고 털어놓고 싶었다. 해적선 한편에서 설익은 잠에 들었다 깨어날 때마 다 그런 말이 입언저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만 나 지쳐버릴 것 같다는 말을 늘어놓으면 ‘나도 힘들어 주인님!’이라고 투정부리다가도 금새 자신을 위로해 줄 것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 각하곤 했다. "자네는 하루종일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구만?" 항해 일주일 째. 마치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처럼 갑판에 기대어 수평선 과 별들만 바라보길 반복하던 줄리탄에게 나이든 반백의 해적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대낮부터 뿌연 야자술이 들어 있는 나 무병을 든 채로. "마실텐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늙었지만 뱃사람답게 다부진 체구의 그 노인은 줄리탄 옆에 앉으며 또 한 모금 독한 술을 빨았다. "자네 같은 젊은이가 이런 배에 타는 건 드문 일이지. 안 그런가?" "몇 번 타보긴 했습니다." 노블리스이다 보니까 몇 년 동안 사략선을 밥먹듯이 타고 다니긴 했지만 척 봐도 반평생 이상을 바다에서 보냈을 노익장 앞에서 자신의 깜냥을 자 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네는 돈 때문에 이 배에 탄 것은 아닌 것 같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검, 보여줄 수 있나?" 그 해적이 가리킨 검은 줄리탄의 두 자루의 검 중에서 인피타르가 아닌 다른 검이었다.몹시 화려한 검집이 황홀한 빛을 발하는 그럼 보검. 줄리탄 은 선뜻 자신의 그 검을 해적에게 건내 주었다. "이건 달라카트 황실의 문장이야. 이런 검을 가지고 다니는 자가 돈이 궁 할 리가 없지." 노인은 부러운 듯한 눈길로 짙푸른 검집에 양각으로 수놓아져 있는 금빛 의 달라카트 황실 문장, 황금넝쿨문양을 훑어보며 낮은 탄성을 질렀다. 설 마 했는데 정말로 황실 문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검을 반 쯤 뽑아 검신을 바라보다가 놀란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이, 이거 엄청난 물결무늬로군! 이런 멋진 검은 처음 봐. 이건 정말 아 주 심혈을 기울여 가공한 검이야!" 그는 적잖게 흥분한 것 같이 빠르게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다마스커스 강처럼 화려한 물결무늬를 지닌 희귀한 검을 이런 남루한 해적선 위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금속의 가공비용만 치더 라도 들으면 졸도해 버릴 액수가 들어갈 명검이었다. 어떻게 성인도 안된 청년이 이런 검을 가지고 있게 된 걸까. 줄리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그런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줄리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아...... 그건 세라피스 폐하가 하사한 검이거든요." "세, 세라피스?" "예. 세라피스 리그나이트 달라카트 황제." 노인에게 보여준 검은 줄리탄이 사모예드라는 이름과 작위를 하사 받은 이후 세라피스가 만들어 준 검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공하기 힘든 물결 무늬 금속을 거의 반년 동안 다듬어서 만들어 낸 명검. 아마 이런 해적선 몇 대를 팔아도 그런 검을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인은 이 청년이 다른 사람도 아닌 달라카트 황제를 알고 있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달라카트 황제로부터 엄청난 칙령이라도 받고 젤밴더 대륙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황당한 추측까지 들게 만든다. "자네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아니...... 혹시 귀족 나리십니까?" "귀족은요 무슨. 아 그것보다......" 줄리탄은 피식 웃으며 노인에게 되물었다. 줄리탄이 궁금한 것은 따로 있 었다. 그의 검이 아무리 명검이라고는 하지만 거친 뱃사람이(그것도 해적 이) 어떻게 그 검의 가치를 알아 볼 수 있었을까? "영감님께서는 뱃사람 출신이 아닌 것 같네요. 꽤 검에 대해 해박하신 것 같아요." "아아. 난 대장장이였으니까. 이래봬도 실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대장장이? 장인이셨군요. 그런데 왜 해적선에......" 그 나이까지 기술을 쌓아 온 장인이라면 적어도 돈이 궁해서 늙은 나이에 해적선에 탈 만큼 궁핍하게 살지는 않는 법이다. 줄리탄의 그 말에 노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오른쪽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소매에 가려져 있어서 방금 전까지는 몰랐지만 그의 오른손 손가락은 두 개뿐. 엄지부터 세 개의 손가 락은 흉측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이렇게 병신이 되어 버린 대장장이에게 검을 맡길 바보는 없지." "왜 손가락이 그렇게......" 줄리탄이 보기에도 기괴하게 잘려나가 있는 그 손가락은 사고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도박 때문이지. 흐흐흐." 그 노인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뿌연 눈동자로 줄리탄을 바라보았 다. "도박 때문에 손가락은 사라지만 빚은 사라지지 않더군." 괜한 말을 했다며 입맛을 다시던 그는 갑자기 낄낄 조소를 머금으며 줄리 탄을 향해 서글픈 술주정처럼 말했다.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해적이라고 멋지고 용맹하고 거칠 것 없을 거라는 낭만적인 상상은 현실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자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범법(犯法)의 길이 해적인 것이다. 직업을 잃은 그 노인이 갈 곳도 이곳 뿐이었다. "이번에 돈을 벌지 못하면 손가락이 하나 더 잘려나갈 거야. 하긴...... 이제는 어찌되어도 상관없지만. 우리 둘 다 목숨을 걸고 젤밴더 대륙으로 가고 있지만 서로 살고 있는 세계는 다른 것 같구만. 황제가 하사한 검이 라...... 정말 멋진 인생이야 자네는." "......" "하핫! 지금 동정하는 건가? 그런 눈빛이구만. 상관 말게나. 세상 행복하 게 사는 놈이 대체 몇이나 되겠나. 자네도 나름대로 괴로운 일들 투성이겠 지. 아무렴. 사는 게 다 그렇잖나?" 이 세상의 질려버린 체념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귓가에 돌았다. '제기랄' 이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그 늙은 해적은 갑자기 줄리탄의 무릎 사이 에 있던 인피타르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보는 희한한 양식인데 다가 황제가 하사한 예의 명검과는 정 반대로 침묵 같은 어두운 기운을 뿜 어내고 있는 기묘한 신월도였던 것이다. 뭐랄까. 잠들어 있는 야수랄까. "그 곡도는......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군.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아. 내게 보여줄 수 있나?" "죄송합니다. 이 검만은 곤란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건가?" "예. 게다가 살아 있는 검이니까요." "......?" 살아 있는 검이라니, 비유적인 표현인가? 그는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모금 더 야자술을 들 이키며 선미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인생의 끝자락에 서 궁지에 몰려 있는 그 노인의 등을 보며 줄리탄은 형용할 수 없는 서글 픔을 느꼈다. 카넬리안도 그렇고 카밀도 그렇고 줄리탄이 알고 관계를 맺 게 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때 '정말 사는 건 힘들구나.'라는 지당한 사 실이 새삼 다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 걱정도 생각도 없이 검이며 마법을 펑펑 써대며 속 편하게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캬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린 쪽에선 카밀이 해적들 앞에서 나 이에 어울리지 않는 요염한 춤을 능숙하게 추며 꺄르르르 웃고 있었다. 하 프엘프인 탓인지, 카밀은 엘프로선 드물게 음치인데다가 목소리가 컸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지금도 어리지만) 그녀는 팔아 먹기 위한 춤을 배웠 는데, 그게 꽤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이다.(반면 메르퀸트는 춤이라면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한다.) 아닌게 아니라 카밀의 춤을 지켜보는 해적들은 멍 하니 넋이 나가 있었다. '이래뵈도 돈을 내야만 볼 수 있는 춤이란 말야.' 라는 카밀의 자부심 가득한 미소가 보인다. '즐거워하는 건가...... 저 여자.' 카밀은 분명 이 별 볼일 없는 해적선 갑판 위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듯 싶 었다. 지겹게 자신을 묶어두던 게른을 빠져나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 주 기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낙천적인 소녀가 아닐까. 그리고 한편에선 공부할 시간이 늘어난 쿄쿠로가 쪼그리고 앉아서 아침부터 자신 의 너덜너덜해진 책을 훑어보며 중얼거리고 있었고 또 한편에선...... 시 링크스가 해적들과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저 녀석......' 시링크스의 괴력은 항해 하루만에 들통나 버렸다. 잘못 박혀 있는 쇠못을 가느다란 두 손가락만으로 뽑아낸 것을 지켜본 해적들의 눈이 휘둥그레져 버렸고 덕분에 그때부터 힘에서 한가닥 한다는 해적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 다. 그리고 현재 시링크스는 쉬지도 않고 단숨에 20여명의 해적들을 눌러 버린 상태. 씰이니까 당연하지만. 게다가 전 오펜바하의 씰이 해적들과 팔 씨름이라니...... 이건 소박하다 못해서 바보스러울 정도였지만 시링크스 는 나름대로 무료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22명째 상대의 팔을 넘겨 버린 시링크스가 마치 고양이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을 때의 모습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듯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탄에게 걸 어오는 것이었다. "이봐 주인님. 뭔가 다가오고 있어......" "나도 느꼈어." 줄리탄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경험의 반복으로 줄리탄 역시 주변 에서 닥쳐오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는 법은 어느정도 터득한 뒤였다. 게 다가 분명히 적대적인 기운이다 이것은. 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는 망망대해 뿐이었지만 확실히 몸으로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이 이봐! 벌써 젤밴더에 가까워진 거야? 새들이 보이는데?" 높은 망루에 있던 해적이 밑을 향해 소리쳤다. 줄리탄이 보기에도 수평 넘어서 무언가 새하얀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들일 리가 없다. "어서 그곳에서 내려와!" 위기를 느낀 줄리탄이 망루에 대고 소리쳤지만 아직 해적들은 앞으로 닥 칠 상황이 어떤건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줄리탄이 긴장하 기 시작하자 의아한 카밀이 여전히 헤헤 웃으며 다가왔다. "왜 그래요? 갑자기 그렇게 얼굴이 굳어서?" "카밀. 피해 있어." "......왜?" 엄청난 속도로 해적선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무리의 존재들은 절대로 바닷 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저렇게 커다란 새는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또 저렇 게 빨리 날 수 있는 새 또한 이 세상엔 없었다. 게다가 저 소름끼치는 울 음소리는 분명히 저것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그 실체가 들어나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뭐, 뭐야 저것들은!" 캬아아아아아악! 순식간이었다. 강궁에서 발사된 활처럼 금새 배 앞으로 날아드는 천사들 은 창으로 망루에 있던 해적을 꿰뚫어 공중으로 끌고 올라갔다. 그 충격으 로 망루가 박살나며 부서진 나무조각과 몸이 뚫린 해적의 핏덩이가 비처럼 갑판으로 쏟아졌다. 갑자기 배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 비명과 혼란 속에서 다른 천사들 역시 급강하하며 갑판에서 우왕좌왕하는 해적들의 몸을 찍어 하늘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대처할 방법조차 떠오르 지 않는 끔찍한 공습(攻襲)이 시작되었다. "피해! 어, 어서 갑판 밑으로 들어가라!" 선장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해적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씩 공중으로 끌려 올라갔고 순식간에 해적 선은 새하얗게 몰려든 천사들에 의해 뜯어 먹히는 커다란 물고기 꼴이 되 어 버렸다. 카밀은 난생처음보는 광경에 부들부들 떨며 줄리탄의 몸을 꽉 잡으며 소리쳤다. "뭐...... 뭐야 이건..... 싫어!!" "카밀! 진정해! 빨리 쿄쿠로와 함께 선실로......" 그때 줄리탄을 향해 날아드는 천사가 보였다. 날카로운 은빛의 창을 들이 댄 채로. "크윽! 제길!" 줄리탄은 반쯤 정신이 나간 카밀을 밀쳐내려 했지만 돛 사이로 유령처럼 치고 들어오는 천사는 이미 엄청난 속력으로 줄리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줄리탄을 찌르려던 천사의 창 끝을 잡아 챈 자는 시링크스 였다. 아무런 두려움도 주저도 없이 시링크스의 차가운 손은 소름끼치는 속도로 날아들던 천사를 일시에 멈추게 만들었다. "사라져라. 테싱의 피조물." 시링크스의 주문 같은 냉정한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연기 같은 기력이 피어올랐고 그 힘이 창을 통하자 천사의 몸 속에서부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일그러진 천사의 육체는 곧 폭발하며 분진(粉塵)같은 입자 로 변해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것이었다. 기겁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본 카밀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 당신, 마법 쓸 줄 알았어?" 시링크스는 그 빛무리 속에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 다. "이봐. 주인님. 이런 식으로 죽이다간 끝도 없겠어." "카밀! 피해 있어!" 또 다시 날아드는 두 명의 천사들을 보며 줄리탄은 카밀을 밀쳐내고 예의 물결무늬의 검을 뽑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곧장 그들에게 뛰어 들 었다. 카밀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위험해요!" '이것이 궁룡들인가.' 줄리탄이 궁룡들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듣도 보 도 못한 모습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곳에서 더 이상 피할 장소는 없다. 검을 높이 치켜든 줄리탄은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내리치며 정면으로 날아드는 천사의 몸을 세로로 갈랐다. "키아아아악!" 일도양단(一刀兩斷)이 되버린 천사의 몸이 깨지며 먼지처럼 흩어졌지만 그것을 뚫고 두 번째 천사가 날아들었다. 재빠르게 검을 뒤로 접은 줄리탄 은 검을 날카롭게 휘두르며 다음 상대의 옆구리를 베었고 유리조각이 깨지 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천사 역시 소멸되었다. 일순간이라도 흐트러 지면 천사의 창에 몸이 뚫려버릴 것이 분명했던 순간이었지만 줄리탄은 침 착하게 그들은 베어나간 것이다. 카밀은 이제 공포심보다는 믿을 수 없다 는 기분에 중얼거렸다. "당신들 정말...... 대단해." "카밀. 쿄쿠로와 함께 들어가 있어." 줄리탄은 시링크스와 함께 천사들 속으로 앞장서며 그렇게 말했다. 한편 해적들 중에서는 몇몇 칼을 빼들고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갑판 밑으로 황급히 도망치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 처음 보는 악몽 같은 자들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용기는 쉽게 생겨나지 않을 것 이다. 시체에 달려드는 독수리 떼들처럼 순식간에 해적들을 찢어발기던 천 사들은 갑작스레 하늘로 솟아오르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저 놈들, 돌아가고 있어!" 그러나 천사들은 명령을 받은 듯 하늘에 모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절대로 인간들을 살려줄 자들은 아니었다. 불길한 기분에 시 링크스가 피에 엉킨 창백한 얼굴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 놈이 나타나겠지." 그의 예감과 함께 하늘엔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빛줄기가 내렸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배 위에서 곧 하나의 형체가 만들어 졌다. 그것은 수미터 에 달하는 검은 날개를 펼치고 길고 검은 창을 들고 있는 루시퍼의 모습이 었다. 커피색에 가까운 피부에 날카로운 눈길을 치켜올린 그는 경멸어린 시선으로 해적선을 쏘아보고 있었다. '루시퍼...... 살아 돌아가긴 들러 먹은 건가.' 시링크스는 루시퍼가 뿜고 있는 막강한 기력에 중압감을 느끼며 얼굴이 굳어 있는 줄리탄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펜바하의 씰이었을 때는 싸워볼 만 했겠지만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지금 자신이 루시퍼 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루시퍼가 눈썹을 찡그 리며 말했다. "이곳은 너희 같은 버러지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그리고 사형선고 같은 그 말이 끝나며 루시퍼가 들어 올린 창 끝에서 빛 을 삼키는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피해야 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는 가 운데 줄리탄은 입술을 깨물며 인피타르로 손을 옮기기 시작했다. 측정할 수도 없을 궁룡 루시퍼의 마력을 받아치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자아. 바닷속으로 사라져라." 항해 일주일 째. 그들은 천사를 만났다. -Blind Talk 아아... 글이 늦고 있습니다. 인기만땅의 글도 아닌데 뭘 믿고 이렇게 늦 장을 부리나며 짜증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슬럼프 때문이 아니랍니 다. 실은 사정이 있어서 알고 지내던 게임 제작사에 입사를 해버렸습니다. 거의 2년만의 입사인데다가 '다시는 회사원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입사는 저에게도 꽤 놀라운 충격입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덕분에 본래 야행성인 제 생활패턴이 바꿔 버렸고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던 거랍니다. 음... 변명입니다. 게다가 최근 뭔가 '글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라는 불안감도 있고... 새로운 소설도 끄적이고 있는데다가 담당하고 있는 만화쪽이 연속마감콤보 라서... 뭔가 집중해서 글을 쓰기가 힘들긴 하네요.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광란의 일상을 보내는 녀석 같군.-_-) 복통은 지속적인 약복용과 식이요법과 금주강행으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스테미너만 올리면 되는데 그러려면 vital에 포인트를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수영이나 헬스를 다녀야 겠지요.-_- 에 그건 그렇고... 에 그리고... 천사들이 해적선을 습격하던 모습은... 2차대전중 나치 독일 의 급강하 폭격기 공습을 생각하며 그려보았습니다. 스투카인 융커스87 시 리즈는 정말 멋지죠. '제리코의 종소리'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사이렌 소 리를 울리며 거의 90도로 수직낙하해 목표물을 박살내는 융커스87 폭격기 는 보는 것 만으로도 소름끼치게 만들고(장 자크 아노 감독의 'The enemy at the gate'에 기가막히게 나옴. 에드 해리스가 독일 스나이퍼로 나옵니 다.>_<) 실제로도 융커스87는 연합군에게 악몽의 대상이었지요.(물론 나중 에는 스핏파이어의 밥이 되긴 했지만...) DC용 어드밴스트 대전략을 하면서도 융커스87을 아주 좋아했는데(사실 이 비행기 없으면 독일군은 끝장남-_-) 이건 밀리터리 소설이 아니니까 그대 로 쓸 수는 없고... 천사들의 공격방식을 떠올리다가 어쨌든 써먹어 보고 싶어서 급강하 공습으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융커스는 900Kg폭탄을 투하하 지만...-_- 에... 하지만 사실 가장 좋아하는 나치 독일 전투기는 공포의 기관포 슈레 게무지크를 탑재한 '트론의 유령'의 애기(愛機), 메사슈미트 bf-110과 독 일군 최강의 폭격기 융커스88입니다... 흐음. 말이 길어지니까 이 쯤에 비행기 얘기는 끝내고... 아참. 줄리탄이 세라피스로부터 받은 검은 시리아의 장미, 다마스커스강 으로 만든 검입니다. 드래곤 레이디의 세계에 다마스커스강이 존재하는지 는 모르겠지만 도검류 전시장인 나이프 갤러리에서 다마스커스 단도를 본 뒤에 너무 멋져서 그냥 써버렸습니다... 그러나 실제 다마스커스강으로 장 검을 만드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일단 가공도 매우 어렵고 큰 실용성이 없기 때문에 단도, 소도류가 다마스커스 검의 주종이었다고 합니다. 에 그 리고 아무리 다마스커스강이지만 가공에 반년이나 걸리지는 않습니다.(무 슨 무협지에 나오는 검도 아니고 말야...) 아... 마음이 우울하다보니까 역시 잡설이 길어 졌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 고 다음 글에서. 메일은 최근 야근 때문에 거의 집에 들어가질 못해서 답 장을 못 보내고 있습니다... 곧 보내드립니다.^_^; E-MAIL : billiken@hananet.net 게이트 키퍼의 오프닝 '오늘로부터 내일로'를 들으며... (회사에 있으면서 귀에 익은 노래. 가끔은 이런 노래도 좋네요...)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4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3 글쓴이:billiken 조회:152 날짜:2001/09/05 18:38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4 Point of No Return 1. 좀처럼 긴장하는 법이 없는 시링크스 조차도 힘을 모으고 있는 루시퍼 앞 에선 절망의 빛이 드러나는 얼굴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인피타르를 뽑으려 는 줄리탄에게 그가 말했다. "주인님. 이길 수 없어. 피해야 해."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어." "내가 저 녀석의 공격을 막을 테니까 그때 도망쳐. 물속이든 어디든지... ... 한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 상태로 루시퍼의 일격을 받아냈다간 분명히 즉사한다. 시링크스는 자 신의 몸을 방패로 쓰며 테이머를 살리겠다는 말을 주저 없이 꺼냈지만 줄 리탄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루시퍼를 향해 눈길을 치켜올리며 나직하 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냐." "바보...... 모두 죽을 꺼야." 모든 힘을 집중시킨 루시퍼는 날개를 퍼득이며 높이 날아 올라 해적선을 한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지옥에서 가져온 것 같은 검은 창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권능의 이름으로 말한다! 절대력 속에서 사라져라!" 그리고 빛을 태워버리는 흑의 전광이 루시퍼의 창 끝에서 쏟아지며 재앙 처럼 해적선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새 바닷물이 끓어오르며 증발해 올랐고 모든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마치 이 세상 의 것이 아닌 듯한 막강한 힘이 해적선을 삼켜 버린 것이다. "흥! 내가 나설 필요도 없는 하찮은...... 응?" 해적선을 완전히 덮어 버린 자신의 힘에 만족한 루시퍼였지만 곧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검기가 자신의 힘을 갈라버리며 그 푸른 자태를 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루시퍼로서도 전에 는 볼 수 없었던 시린 빛의 칼날이었다. "......!" 크르르르르르르륵! 루시퍼의 검은 장막을 찢어버린 차가운 인피타르의 검기는 늑대같은 이빨 을 들어내며 그대로 루시퍼를 향해 날아들었고 루시퍼는 황급히 자신의 창 을 휘둘러 그 검기를 밀쳐냈다. 창과 검기가 충돌한 부분에서 시퍼런 빛이 터져 나왔고 그 충격에 수백미터를 밀려나간 루시퍼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 러졌다. 바다 위로 루시퍼의 날개가 떨궈낸 검은 깃털들이 흩날리고 있었 다. "어떤 놈이냐! 날 막은 건!" 분노한 루시퍼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찢어버릴 듯 공기를 갈랐고 피가 흐 르는 손으로 검집에서 풀려난 인피타르를 쥐고 있는 줄리탄은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두 다리를 힘겹게 지탱하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루시퍼의 힘은 자연력을 역행하는 힘이다. 지금 줄리탄의 몸으로는 한번 막아낸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인간이...... 나를 막은 건가." 루시퍼는 처음으로 배 위의 '하찮은' 존재들을 바라보았고 줄리탄과 시링 크스를 발견했다. 그의 입에 잔인한 냉소가 퍼진다. "호오. 오펜바하의 씰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루시퍼." "너의 새로운 주인인가? 내 힘을 막은 건방진 놈이!" "......" 루시퍼는 꽤 즐겁다는 듯이 다시 창을 들었다. 인피타르의 위력으로도 루 시퍼를 죽일 수가 없었다. 아니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한번의 공격 을 막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루시퍼는 다시 힘을 모았다. "어디 또 막아 보시지. 아까보다 몇 배는 강하게 내리쳐 줄 테니까."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시링크스는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손가죽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떨리는 팔이지만 다시 인피타르 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또 루시퍼의 공격을 받아칠 생각이다. 이번엔 분명 히 죽는다. 시링크스는 그렇게 느끼며 줄리탄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테이머가 죽어버린 씰은 비참해. 그러니까 먼저 죽으려는 것 뿐이야." 시링크스는 카넬리안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존재였다. 그의 차갑지만 쓸쓸한 말에 줄리탄이 반박하듯 대답했다. "난 죽지 않아. 카넬리안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말에 시링크스는 붓으로 그린 듯한 수려한 눈썹을 찡그리고야 말았다. "당신에겐 화가 나! 그 무모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대체!" 시링크스가 화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절대로 흥분하지도 기분 상 하지도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이 소리를 친 것에 스스로 놀란 시링크스는 고 개를 꺽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당신 말야...... 씰에게는 너무 부담스런 주인이야. 씰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존재야. 이렇게 목숨 걸고 찾아갈 그런 소중한 존재가 아니란 말야." 대체 몇 명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가. 줄리탄은 이런 상황에서 도리어 씁 쓸한 미소를 보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세상에 내버려둬도 상관없는 존재 따윈 없어." 그리고 시링크스는 입을 다물었다. 오펜바하와 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하고 또 너무 따뜻해서 부담스러운 그런 기분. 어쩌면 카넬리안도 이런 기분에 휩싸여 항상 줄리탄을 껴안아주며 가랑으 로 돌아가기 전 자신에게 줄리탄을 지켜달라는 말을 남겼던 것일까. 전혀 '씰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리고 바다를 울리는 거대한 힘을 모은 루시퍼의 마력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시링크스는 눈 앞을 가리는 그 힘을 바라보며 바램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조그만 목소리는 해적선을 뒤엎 는 굉음 속에서도 왠지 또렷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당신은 용으로 태어났어야 했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빛과 마음을 삼켜버리는 절망적인 검은 마력이 해적선을 삼켜 버 렸다. 세상은 너무도 퉁명스러워서 최선을 다하려는 누군가의 노력에 대해 절대로 쉽사리 호응해 주지 않는다. 그냥 이쯤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 으면 하는 바램마저도 세상은 허락하지 않은 채 냉정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 그걸 알면서도 줄리탄은 단번에 자신의 모든 것을 휩쓸어 갈 것 같은 절 대적인 힘 앞에서 검을 들었다. 마지막 생명을 태울지라도 절대로 포기하 지 않겠다. 어렵게 발견한 희망을 스스로 꺾어버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 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당신과 있어서 꽤 즐거웠던 것 같아." 줄리탄의 곁에 서며 그를 지켜주는 시링크스의 그 말과 함께 줄리탄은 들 고 있는 검을 다시금 꽉 쥐고 마음 속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을 질렀다. 검 자루를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며 인피타르에서 터져 나오는 생령같은 시퍼 런 기운이 줄리탄의 몸에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타아아아아아!!" 그러나 줄리탄의 그 작은 저항을 부셔버리듯이 루시퍼의 검은 장막은 악 마적인 이빨을 들어내며 밀려 들어왔다. 숨조차 쉴 수 없고 온몸이 갈가리 끊어져 버릴 듯한 고통이 몸 속으로 침범한다. 피를 빨아먹는 식인나무의 뿌리가 살갗을 뚫고 들어와 쥐어짜는 듯한 공포와 괴로움. 그럼에도 줄리 탄과 시링크스는 죽음의 끝자락에 선 그 순간까지도 계속 힘을 쏟으며 저 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새 쓰러져 버릴 듯한 그 때 새로운 힘이 바닷속 에서부터 끼어 들기 시작했다. "설마......" 루시퍼는 해적선을 감싸기 시작한 또 다른 막강한 에너지를 확인하며 눈 이 커졌다. 자신의 힘을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 는다. 그러나 분명히 바닷속에서 올라오는 신성한 물길은 루시퍼의 힘을 가두며 줄리탄을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루시퍼의 얼굴이 단번에 일 그러졌다. "해룡놈들인가." 가끔 기적이라는 것도 존재하는가 보다. 자애의 신이 뿜어준 입김처럼 루 시퍼의 힘을 완벽하게 막아낸 후에 해적선의 선상에는 심연처럼 깊은 눈동 자를 가진 큰 키의 사내가 물보라와 함께 나타났다. 없는 듯한 엷은 미소 와 귀를 살짝 덮는 매력적인 머리칼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해룡 레비아탄이었다. 그가 화가 치밀어 오른 루시퍼를 올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을 상대로 그런 힘을 쓰다니 용으로서 부끄럽지 않은가요?" -Blind Talk 우우... 이번 편을 짧습니다. 그래도 이쯤에서 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올리긴 합니다만. 결국 1년 반 동안 쓰던 MD 샤프722가 얼마전 운명을 달리해서 홧김에 아이 리버2를 구입하고야 말았습니다. 아아... 뭐 mp3음질도 황송하게 듣는 막 귀라서 현재로서는 상당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복통도 꽤 나았나 보네요. 슬슬 제 혀와 위장을 기쁘게 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 다. 아아... 그리고 전편에 나왔던 다마스커스 강에 대해서는 뭔가 읽으시면서 오해가 있으실 것 같아서 꼬리말을 다는데 다마스커스 강은 철괴의 품질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제련 법의 특징에 의해서 그 특징이 탄생하는 거랍니다. 음... 이슬람의 수장이었던 살라딘이 차고 다니던 신월도가 다마스커스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자료에 의하면 다마스커스강으로 만든 갑옷도 있긴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그 정확한 제련법은 소실되어 아직도 밝혀지지 않 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U2의 Beautiful day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5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4 글쓴이:billiken 조회:26 날짜:2001/09/08 04:38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5 Sea of HeartBreak 1. "레, 레비아탄 씨......" 이미 엄청난 기력을 소진한 줄리탄은 심하게 거친 숨을 내쉬며 앞을 막아 주고 있는 해룡을 바라보았다. 레비아탄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항상 무리하고 계시는군요 줄리탄 씨." 한편 루시퍼는 송곳니를 들어내며 눈길을 치켜올렸다. 아무리 바다 위라 지만 루시퍼는 레비아탄을 상대로 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제야 싸울만한 놈이 나타났군.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레비 아탄!" 당장이라도 암흑 같은 날개를 펼치며 공격해 들어올 것 같이 으르렁거리 는 루시퍼에 비해 레비아탄은 손가락으로 뺨을 살짝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 거릴 뿐이었다. "당신과의 대화는 재미없어요. 예전부터 항상 싸우겠다든지 이기겠다든지 하는 말만 하니까요. 저도 최근에 느낀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 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들이......" "에잇! 그만 해! 너야말로 용으로서 자각이 있기나 한 거냐! 용이 그런 하찮은 인간들이나 도와주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불쾌해!" "인간들을 하찮게 보는 것이 용으로서의 자각이라면...... 그런 것 사양 하고 싶군요." 힘이야 어찌되었든 말싸움에서는 아무래도 레비아탄이 한 수 위가 아닐까 . 레비아탄이 갑자기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하찮은 인간을 도와주려는 용은 저 말고도 또 있는 것 같은데요?" "뭐?" 루시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띈 레비아탄의 표정에 의아해 했지만 그때 바닷속에서 어떤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기분에 가슴이 얼 어버릴 듯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폭발하듯 바닷물이 솟아오르며 푸른 역린을 가진 청룡이 직각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냉기서린 이빨을 들어낸 채로. "해, 해룡의 수장!" 위기를 느낀 루시퍼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며 황급히 자신의 집어 삼키 려는 물키벨을 피했지만 본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위압적인 힘은 그대로 루시퍼의 날개를 물어뜯어 버렸고 와드득 소리와 함께 날개가 찢겨 나갔다 . 그리고 물키벨은 바다 위에 차갑게 빛나는 그 거대한 모습을 들어냈다. 줄리탄 역시 그녀의 전신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늘을 가득 매울 것 같은 엄청난 크기와 단번에 몸이 굳어버리는 중압감. 날개의 절반이 잘 려나가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루시퍼 역시 불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물키벨 앞에서 쉽사리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흐이이이. 뭐...... 뭐야 저건." 갑판 위로 고개를 내민 카밀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치 구름처럼 하늘 위에 자리잡고 있는 물키벨의 모습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물키벨의 몸 이 차르르르 소리를 내며 움직일 때마다 역린에 맺힌 물방울이 반짝이며 흩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꿈을 삼켜버린 것 같은 멍한 기분에 카밀은 자신 의 몸이 쉼없이 떨리고 있는 것조차 의식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다. 한편 루시퍼 주변에 몰려 있던 천사들은 물키벨을 향 해 창을 들고 날아들었다. "감히!" 그러나 물키벨의 포효가 파장이 되어 퍼져나가며 그것에 말려든 천사들의 몸이 산산이 깨져 하늘 위에 흩뿌렸다. 단번에 수백의 천사들이 소멸된 것 이다. 레비아탄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줄리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물키벨 님이 화가 나셨나 보네요." "나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는데......" "줄리탄 씨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줄리탄 씨에게 화가 난 거에요." "이런......" 어쨌든 상황역전. 루시퍼는 흙빛이 된 표정으로 분한 듯 창을 들고 있는 팔을 부르르 떨며 물키벨을 향해 소리쳤다. "대체 당신이 왜 저 인간을 도와주는 거지! 당신은 예전에도 언제나 중립 이었잖아!" 반면 물키벨은 당장이라도 집어 삼켜 버릴 듯 루시퍼를 노려보며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누가 듣기에도 무지하게 화가 나서 해일이라도 일으킬 듯한 목소리였다. "사라져라 루시퍼. 그리고 테싱에게 전해라. 궁룡이든 지룡이든 이번에는 방관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와 싸우겠다고? 웃기는군. 테싱 님이 원한다면 너 따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그 전에 네 놈부터 죽여줄까?" 서서히 치켜올리는 새파란 물키벨의 눈동자를 보며 루시퍼는 움찔했다. 이 여자는 정말 해적선 위의 저 인간 때문에 싸울 기세다. 수백년 수천년 동안 침묵을 지켰던 해룡이 고작 한명의 인간 때문에? 그때 루시퍼의 뒤에 나타난 것은 상황에 걸맞지 않게 웃는 낯을 하고 있는 세르난이었다. "루시퍼 씨. 테싱 님이 돌아오래요." "세르난!" "앗! 물키벨 님! 오랜만이에요. 헤헤." "세르난. 저 자와 함께 당장 사라지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라."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본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와는 완벽하게 달 라진 물키벨의 서릿발 날리는 목소리에 세르난이 불안한 웃음을 띈 얼굴로 두 손을 휘저었다. "으아아 무서워요. 화내지 마세요. 안 그래도 끌고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 "세르난! 이 놈들을 그냥 놔주겠단 말야!" "헤유 루시퍼 씨. 전 바다 위에서 물키벨 님과 싸울 정도로 바보가 아니 랍니다. 게다가 테싱 님이 그냥 돌아오라고 하시잖아요." "큭. 테싱 님도 무슨 생각이신지......" 불가항력의 퇴각이니 작전상 후퇴니 하는 말은 상상도 하지 않고 살던 루 시퍼로서는 치욕적이었지만 세르난의 말대로 테싱의 명령을 어겨가며 이곳 에서 물키벨을 상대로 싸워봐야 결과는 뻔했던 것이다. 루시퍼가 이를 갈 며 외쳤다. "땅으로는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그 말과 함께 세르난과 루시퍼는 구름 속으로 날아들며 사라졌다. 레비아 탄과 물키벨의 도움으로 절망적인 장애물이 잠시나마 사라지자 갑판으로 기어올라온 해적들은 침울하게 생각에 잠긴 채 하늘 위에 떠 있는 물키벨 을 바라보며 모두 기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마치 청색의 구름이 낮은 하늘에 엉켜 있는 듯한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신성한 존재'는 순식간에 키 작은 여자의 모습으로 변하며 해적선 위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몹시 심란한 표정의 물키벨은 힘을 잃어 반쯤 주저앉 아 있는 줄리탄에게 다가왔다. "대체 이 꼴이 뭐야. 응?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물키벨은 자신의 하얀 소매로 줄리탄의 몸에 엉킨 피를 닦아주며 잔뜩 칭 얼거리고 있었다. 줄리탄이 마치 자신의 동생이라도 되는 듯이. 덕분에 주 변 사람들은 물키벨의 존재와 더불어 줄리탄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져 버렸 다. 정말 뭔가 엄청난 녀석을 배에 태운 것이 아닐까. 줄리탄은 물키벨의 웅얼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로 대답했다. "미안해요." 줄리탄의 얼굴을 닦아주던 물키벨은 그를 동그란 눈으로 올려보며 간청어 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가 말려도 갈꺼지?" "......" "그럴꺼지?" "......미안해요." 줄리탄의 조그만 대답에 물키벨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갑자기 부들부 들 떨리는 몸으로 벌떡 일어서며 찢어져라 소리치는 것이었다. "줄리탄 야! 이 바보 녀석아아아앗!!!" "물키벨 님......." "이 바보! 멍청이! 남의 생각은 하지도 않는 고집쟁이! 싫어! 정말 싫어!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야 하는 거냐고 정말!" 마구잡이로 화를 내고 있는 물키벨은 너무 몸을 떨며 소리를 쳐서 흔들리 는 배 위에서 넘어져 버릴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참을 수 없는 듯이 소리를 치던 그녀는 분을 참지 못해 줄리탄의 따귀를 때릴 것처럼 작은 손 바닥을 번쩍 올렸다가 울상이 되어 버린 얼굴로 스르르 손을 내리며 중얼 거리는 것이었다. "우리......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전에 도 이 무렵 내가 널 구해줬고 넌 카넬리안을 구하러 떠났고...... 이번에 도 또 구해주고 넌 또 떠날테고...... 우리 뭔가 굉장히 한심하지 않아? 응? 그렇지 않냐고." 울먹이는 물키벨의 말에 줄리탄은 인피타르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켰다. 생명을 뽑아낸 후유증처럼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꼭 돌아올 께요. 카넬리안과 함께." "정말로 꼭 돌아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 마치 먼 세계로 떠나버리는 동료를 앞에 둔 것처럼 물키벨은 줄리탄의 옷 소매를 잡으며 계속 눈물을 흘렸고 그녀가 울먹이는 말은 더 이상 알아 들 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모두 달라카트든 자라탄 이든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하고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2. 물키벨과 레비아탄이 떠나 버린 뒤 쏟아질 것 같은 별들 아래에서 줄리탄 은 상처 입은 자신의 팔에 묵묵히 붕대를 감고 있었다. 기겁을 해서 다시 게른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장에게 젤밴더 대륙의 해안가까지만 데려다 달라 는 설득을 한 뒤였다. "아까 그 미남오빠는 누구에요?" "......" 놀랍도록 침착한 얼굴로 붕대를 감고 있는 줄리탄을 빤히 바라보던 카밀 의 말이었다. 레비아탄을 말하는 것이겠지. 확실히 레비아탄의 외모라면 하프엘프라도 반해버릴 것이지만 '실은 원래 상어에요.'라고 대답해 줘봐 야 고개만 갸웃거릴 게 분명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카밀은 줄리탄이 아무런 말이 없자 쭈그려 앉은 채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귀를 탁탁 털다가 중얼거렸다. "우웅. 이해가 안가요." "......" "정말로 이해가 안가. 사랑하는 여자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마음은 알겠지 만, 당신이 죽어버리면 그걸로 끝인데...... 이건 아무리 봐도 죽으러 가 는 거잖아요? 죽는 게 확실한데 왜 가는 거죠?" "......" 줄리탄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Blind Talk 늘 너의 숨소리가 보여 감은 나의 두 눈에 항상 널 욕하고 미워하지만 생각의 끝은 너야 네 사랑은 언제나 나를 아프게만 해 곁에서도 멀리서도 늘 이렇게 나를 울려 늘 너의 목소리가 들려 잠든 나의 귓가에 매일 밤 다신 널 찾지 않겠다고 내게 거짓을 말해 네 사랑은 언제나 나를 힘들게만 해 곁에서도 멀리서도 늘 이렇게 나를 울려 에 그러니까 뜬금 없는 말이지만 제 아는 사람의 친구 중에 엄청난 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얘긴데... 보통 주관식 답을 쓸 때 장난치는 녀석들이 심심찮게 있잖아요? 가령 화살 표를 그려넣고 '이걸 따라가시면 답이 있습니다.'라고 적어 놓는 한심한 녀석이 있질 않나... 그런데 그 녀석은 좀 수준이 달랐습니다. 답 위에 화이트로 덧칠을 해 놓았던 겁니다. 그리고 옆에 '동전으로 긁으면 답이 나옵니다.'라고 적어 놨더랍니다.-_- 학생들 앞에서 답안을 확인하던 선생은 그걸 보고 동전으로 그 화이트를 긁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꽝! 다음 기회에!'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_-;;;; 물론 그 친구는 그 즉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선생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 드려 맞았습니다. 아마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되었겠지요... 저도 학교 다닐 때 별의 별 방법으로 적잖게 장난을 쳐봤지만 이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아 졌다 졌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역시 아이디어 로 승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런 부비트랩을 만들어 놓는 학생도 학생이지만 또 그걸 동 전으로 긁고 있는 선생은 대체... 에... 잡담이 길어졌네요. 그럼 다음 글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권인하의 '사랑이 사랑을'을 들으며... (오늘 노래방에 가서 부르다가 멋지게 망쳤죠.)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6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5 글쓴이:billiken 조회:326 날짜:2001/09/11 21:29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6 Melancholy of Emperor 1. "뭐해요?" "앗!" 우테 뒤에서 갑자기 얼굴을 들이댄 자는 세라피스였다. 황궁 내실의 '새 로운 방' 즉 황실 소장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전시실'에서 높게 걸린 회화 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우테는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세라피스 덕에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수레국화 무늬 찻잔을 놓쳤다. "이런." 세라피스의 팔이 빠르게 움직이며 홍차가 반쯤 담긴 찻잔을 능숙하게 잡 아챘다. 마치 뱀이 우테의 다리 밑을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바람 같은 속 도. 얼떨떨한 얼굴의 우테가 세라피스로부터 찻잔을 전해 받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이곳에 오는 사람은 드물어요. 황가의 묘지 다음으로 인적이 없는 곳이 라고나 할까." 세라피스는 자신을 위한 전시실을 낯선 곳인냥 훑어보며 말했다. 그는 부 유한 예술가들이 황제에게 바친 예술품들을 모아 놓은 이 곳을 그다지 좋 아하지 않았다. 그의 말버릇처럼 '죽은 곳'이라고나 할까. 그의 지론에 의 하면 자고로 진짜 걸작이란 이런 곳에 꽁꽁 숨겨 놓듯 모아두는 것이 아니 었다. "달라카트의 황궁은 참 넓네요." 우테는 감탄스러운 듯이 조심스레 찻잔을 들고 말했다. 반면 세라피스는 여전히 시큰둥. "뭐...... 오래 전부터 계속 증축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황실의 크기가 곧 국력을 말하는 건 아니죠." "그런가요." 우테는 아직도 세라피스라는 남자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황제치고는 새처럼 날아다녔고 보통 사람치고는 너무 반짝거렸던 것이다. 어느 장군이 모델인 것 같은 대머리 흉상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던 세라피스가 씨 익 웃으며 말했다. "이런 것 보다 훨씬 재미있는 거 할래요?" "뭔데요?" "황.궁.탈.출." 아주 커다란 계획이라도 말하는 듯 속삭이는 세라피스에게 우테는 커다랗 게 놀란 눈을 깜빡깜빡 거릴 뿐이었다. 황궁탈출이라니? 지금까지 황궁에 서 살아왔던 우테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2. "소감은?" "겁나요...." 황궁 근처 한시간 거리에는 작은 도시가 하나 있었다. 길거리 곳곳에서 빵 굽는 냄새, 망치질 소리, 시끄러운 호객소리가 가득한 그런 도시. 그곳 을 황제 전용의 화려한 은빛 갈기가 돋보이는 명마가 아닌 작은 나트 두 마리를 나눠 타고 다니던 세라피스와 우테는 말 그대로 '황궁탈출'에 성공 한 것이었다. 우테가 이런 융단이 깔리 않은 곳에 와본 것은 처음. 나트를 타본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세라피스 씨." "예에?" 입장 상 세라피스를 폐하라 부르지 않는 우테는 부담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간드러진 목소리로 깜찍하게 대답하는 세라피스는 화장을 마 치고 치마까지 두른 완벽한 평민 여자의 모습. 아무리 사람들의 눈을 피하 고 싶다고는 해도 대체 황제나 되는 작자가 여장이라니...... 우테는 이 사실이 밝혀질까봐 막 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세라피스는 농염한 미소까지 지으며 우테보다도 더 여자답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낭만을 위해서 여장 정도야 감수해야 하지요. 호호홋." "......" 세라피스가 우테를 끌고 황실을 탈출한 방법은 간단했다. 중정의 내실을 통해서 근엄하게 황실 시종원까지 간 다음에(이곳에서 몸소 시찰하러 왔다 면서 시종원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 그곳의 창고에서 변 장을 한 뒤에 마치 시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건을 들고 운반하는 척 하 면서 바깥 건물로 나가 황실 밖으로 빠져 나온다. 황궁의 근위병들도 시녀 들이 돌아다니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흐음. 이런 방법을 역이용하면 황제 암살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 꽤 섬뜩한 말을 세라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바람에 우테는 놀란 얼 굴로 여장을 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남자야...... 하지만 예 뻤다 솔직히. "자아. 이제부터 달라카트 최고의 차를 맛보여 드리지요. 우테 씨." "최고의 차? 최고의 차라면 황실에 있는 차가 아닌가요?" 우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최고급의 찻잎을 쓰는 황실의 차가 최고라는 것이 당연한 속설. 그러나 세라피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 차를 맛보시면 지금까지 황실에서 맛없는 차만 먹으며 속아 살았다는 사실이 분해서 시종원 녀석들을 모조리 때려주고 싶을 정도일 겁니다." "......" 세상에 그런 차가 있었던가? 우테는 여전히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세라피 스의 뒤를 따라 인파 속을 파고 들었다. 나트의 발길이 따각따각 움직이며 몸이 들썩일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뭔가 살아 있는 생물을 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3. 세라피스가 우테를 끌고 간 곳은 도시 구석에 있는 작은 찻집이었다. 삐 걱거리는 문에다가 약간은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목소리, 절대로 양탄자가 깔려 있지 않은 바닥, 게다가 오래된 나무 테이블까지...... 우테는 아무 리 봐도 '최고의 차'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이런 곳은 완전히 처음이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라피스 는 아주 여유롭게 우테의 손을 끌고 찻집에 들어가선 그곳의 주인을 향해 귀엽게 웃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천연덕스럽기로는 카넬리안도 혀를 내두 를 자였다. "아저씨. 오랜마안." "오오 세라 양!" '세, 세, 세라 양?' 우테는 기가 질려 버렸다. 그렇다. 세라피스는 이곳의 당골이었던 것이다 . 그것도 늘씬한 시골처녀 세라라는 신분으로. 힐데브란트가 하늘에 이 꼴 을 봤다면 땅을 치며 통곡했을지도. 세라피스는 한쪽 테이블에 앉아서는 싱긋 웃으며 우테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와 옷에 먼 지라도 묻을까 조심스레 앉은 우테에게 기대하라며 말하는 것이었다. "기다리시던 최고의 차입니다!" "이것이?" 우테는 테이블 앞에 도착한 오래된 찻주전자와 흔해빠진 자기로 이뤄진 찻잔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라피스는 그런 그녀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은은한 향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셔봐요." 대다수 황족들이 그렇듯이 우테 역시 차에 대해서는 꽤 정통한 편. 그녀 는 살짝 향을 음미한 뒤에 찻잔에 작은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솔직히 기대 보다는 불안감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때요?" ".....특이해요. 아, 아니. 정말 맛있어요.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그녀는 깜짝 놀라서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다시 차를 마셔보았다. 정말 매력적인 맛이었다. 시장바닥에서 파는 차에 이런 맛이 숨어 있는 줄 은 정말로 몰랐다. 세라피스는 길게 내린 가느다란 금발을 쓸어 올리며 대 답했다. 꼭 우테의 친언니 같은 모습이다. "이 차는 살아 있어요." "예?" "대신 황실의 차는 죽어 있어요."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황실의 차가 최고급의 찻잎을 이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차 맛 은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멈춰있는 거죠." 세라피스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차는 값비싼 황금 같은 찻잎을 쓰는 건 아니겠지만 사람 들의 입맛에 맞춰 계속 변해 왔던 거죠. 조금이라도 차 맛이 구닥다리면 금새 사람들의 원성을 듣고 가게문을 닫아야 하니까. 계속 연구를 한다고 요." "......" "이렇게 발전하는 차를 정지해 있는 황실의 차는 이길 수가 없어요. 황실 의 차는 황제 한 사람의 말 밖에는 안 듣는 융통성이 없는 놈이니까. 그러 니까 내가, 짐이 명령하건데 오늘부터 황실의 모든 차에는 말린사과조각을 넣어라! 라고 말하는 순간 순식간의 황실의 모든 차가 과실차가 되어 버리 는 거에요. 그거 얼마나 바보 같아 보여요?" 세라피스가 능숙한 여자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는 그 말은 우테로서는 깜 짝 놀랄 만한 소리였다. 자기 황실을 바보 같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평민 의 것이 더 좋다고 말하다니...... 그런 말 꺼냈다간 신하나 귀족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까. 하지만 세라피스는 그런 눈치 따위야 어쨌든 상관 없다는 투였다. "이 훌륭한 차 역시 황실로 가져가면 죽어버리죠. 아아 정말이지 황실이 야말로 황제의 무덤이라니까. 안 그래요 우테 씨?" "에헤헤헤헤." 꼭 셀러리맨의 푸념 같아서 우테는 푸훗 하고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이상 하지만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다. 황제로서도 남자로서도 훌륭하다고 생각 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는데 황실 의 누구도 그를 가볍게 보거나 무례한 수작을 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그가 포악해서 상대를 겁줬기 때문도 아니었고 일말의 실수도 용납하 지 않는 완벽주의자이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계략으로 신하들을 이 용하고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닮고 싶다, 우테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그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기대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 옆자리에서 어려워 보이는 문서를 읽고 있던 한 사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무덤이라...... 멋진 비유였습니다. 세라피스 폐하." "으아악!" 세라피스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냉정해 보이는 눈동자로 세 라피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는 바로 리하르트였던 것이다. 세라피스는 '제기랄. 눈치채지 못하다니.'라는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폐하. 참 잘 어울리시는군요." 단번에 세라피스의 분장을 눈치챈 리하르트는 한심한 표정으로 세라피스 를 바라보고 있었고 고개를 돌린 세라피스는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고 있을 뿐 대답을 회피하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 녀석에게 들키다니...... 라 는 얼굴이다.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지?" "이런 곳에서 우테 씨와 함께 있을 분이 폐하 밖에 더 있습니까?" "예, 예리하군." "가끔 폐하는 상당히 한심할 때가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럴 때로군요." 리하르트는 목 날아갈 불경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황제 직속의 방첩 대(防諜隊)의 총감(摠監)인 리하르트는 황실에서 황제가 감쪽같이 사라졌 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괜히 귀신 속도 캐낸다 는 방첩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세라피스가 우물쭈물 거리다가 말했다 . "리하르트. 눈감아 줘." "지금 저와 거래하시자는 겁니까?" "......칙령이야." "불리할 때만 황제입니까?" 우테의 머릿속에는 또 하나의 생각이 추가되었다. 이 남자 멋지긴 한데 가끔씩 굉장히 구차한 면이 있다. "폐하. 이곳에 계셨군요." 한숨소리와 함께 낭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파르낫소였다 . 사정없이 추락하는 황제의 권위. 세라피스가 어깨를 푹 늘어트리고는 말 했다. "......파르낫소. 넌 어떻게 알았냐." "폐하가 숨을 곳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제발 몰래 나가지 좀 마세요. 프 란츠가 지금 울상입니다." 파르낫소는 이미 반쯤 포기했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몇 장에 달하는 보고 서를 건내 주었다. "응? 이건?" "폐하께서 명하신 사모예드 경의 조사 보고서입니다." "아 줄리탄!" 세라피스는 냉큼 그 문서를 받으며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며 마지막 줄을 읽을 때에는 우테가 봐도 놀랄 만큼 표정이 바꿔 버렸다. 완벽하게 웃음끼가 사라진 얼굴이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세라피 스는 보고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여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바보 같은 놈. 결국 도와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군." 세라피스는 줄리탄이 사라진 이후 황실의 정보망을 동원해서 그의 뒤를 밟고 있었다. 그가 젤밴더 대륙으로 갈 거라면 직접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말리고 싶었는데 이미 보고서의 끝에는 젤밴더 대륙으로 가는 해적선을 탔 다는 문장이 적혀져 있었던 것이다. 우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줄리탄 씨가...... 누구에요?" "사람 속을 찢어놓는 녀석이죠. 돌아오면 지하감옥에 처넣어 버릴 꺼에요 ." "헤에?" 세라피스는 괴로워하는 것도 같았고 슬퍼하는 것도 같았고 화를 내고 있 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세라피스가 힘없이 자 리에서 일어서며 탄식처럼 말했다. "오늘은 차보다는 술이 좋을 것 같군요. 우테 씨." -Blind Talk 마노 님의 패러디를 읽으며.... '그렇군. 세라피스와 우테를 잊어버리고 있었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편 정도 빌려서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넣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에는 줄리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지금쯤 젤 밴더에 도착했을텐데...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네요. 게다가 옆에 항상 있던 두통약이 없어져서 하 루종일 무지하게 불안했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아... 듣고 있는 것이 없네요.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7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6 글쓴이:billiken 조회:239 날짜:2001/09/19 21:27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7 Everything is about to change 1. 카밀과 쿄쿠로가 따라온 것은 의외였다. 젤밴더 대륙에 도착한 뒤에 해적 선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돌아가 버렸지만 그들은 줄리탄 일행을 따라가기 로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줄리탄은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꺾을 카 밀이 아니었다. 어쨌든 반은 엘프니까 길잡이에는 자신 있다면서 부득부득 그들을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어.'라고 입버릇처 럼 중얼거리면서.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을 해야겠군." 카밀의 말마따나 그녀는 길잡이로서 훌륭했다. 눈에 띄지 않는 길을 감지 해 냈기 때문에 테싱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음에도 천사들과 조우한 적은 거의 없었고 덕분에 부상당한 줄리탄에게 체력을 회복할 시간도 주어졌다. 그리고 6일째. 시링크스는 젤밴더 특유의 건조한 공기가 들어 찬 차갑고 음산한 숲을 걷던 중 야영을 결정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고 싶은 줄 리탄이었지만 시링크스는 침착하게 해적선에서 가져온 여행자 가방을 풀며 말했다. "주인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어쨌든 그 상태로 계속 가다간 탈진해서 가랑을 만나기도 전에 꼴 사납게 죽게 돼." "그래. 조금 쉴까." 줄리탄 역시 다친 팔의 붕대를 갈아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앉았고 곧 땔 감이 모아졌다. 시링크스가 가벼운 마법으로 금새 모닥불을 짚일 수 있었 던 것이 카밀에겐 몇 번 봐도 무척이나 신기해 보였는지 그녀는 시링크스 옆에 착 달라붙으며 다시 보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물론 시링크스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고 대신 그가 보여준 것은 다른 마법이었다. "L.U.R.E." 이질적이고 짧은 단어를 시링크스가 중얼거리자 모여 있는 그의 두 손바 닥 사이에 광원(光源)이라도 있는 듯 은은한 빛이 나오며 그 빛무리가 사 방으로 바람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쿄쿠로 역시 아카데미에서도 볼 수 없 던 그런 마법체계에 깜짝 놀라서는 모포를 깔 던 일을 멈추고 굳어버린 듯 시링크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히야아아. 이건 또 뭐에요?" "오늘은 사냥할 힘도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이지." "사냥?" 그때 곧 주변이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깜짝 놀란 카밀이 동그래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수풀 속 에서 작은 산짐승들이 자신들에게 몰려드는 것이었다. 마치 홀린 듯이 그 동물들은 시링크스에게 다가갔다. 아마도 시링크스의 예의 마법은 동물들 을 현혹시켜 끌어들이는 것인 듯 하다. "헤에에! 숲토끼잖아?" 회색빛의 빨간 눈을 가진 귀여운 토끼들이 경계심도 없이 다가오자 카밀 은 반짝반짝거리는 눈이 되어서는 껴안아주고 싶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 었다. 하여튼 귀여운 것에 꼼짝 못하는 건 인간 여자나 엘프 여자나 마찬 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파즈즈즉! "꺄아아아악!!" 시링크스가 그 토끼들에게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손끝에서 스파 크가 터지며 토끼들이 푹푹 쓰러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밀이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하지만 시링크스는 무덤덤하게 죽어버린 토끼를 집어 들 어 줄리탄에게 건내 주었다. "주인님. 이걸로 요리해. 마법으로 요리는 무리더라고." 반면 울상이 되어 버린 카밀은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조차 잊고 찢어 져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야! 이 잔인한 남자야!" "무슨 짓? 식사 재료 만들었잖아." "너무해! 너무한다고! 이 귀여운 산짐승들을 그런 무지막지한 마법으로 죽이다니! 당신 그렇게 차가운 인간인 줄 몰랐어!" "일단 난 인간이 아니라 씰이야. 그리고 마법으로 죽이나 사냥으로 죽이 나 그게 그거 아냐?" "그래도 그렇지! 끔찍하단 말이얏!" 역시 아무리 반쪽이라도 엘프는 엘프인지 숲의 생물에 대한 자비심이 넘 치는 카밀이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고기가 구워지고 음식 을 나눠 먹기 시작하자 시링크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너처럼 많이 먹는 엘프는 처음 본다." "아우우웅 우웅 아우우." 카밀은 입에 잔뜩 고기를 물고 씹느라고 발음이 엉망이었다. 아마 '밥 먹 을 때는 말시키지 마'라는 의미인 것 같지만. 참고로 메르퀸트가 저녁 식 사로 먹는 것은 작은 과일 한 개와 간단한 샐러드나 가금류의 담백한 가슴 살 정도가 끝이다. 그러나 지금 카밀의 뱃속에는 토끼가 두 마리 째 들어 가고 있었다. 인간이라 하기에도 참으로 왕성한 식욕이다. 그 모습에 눈썹 을 찡그리며 말하는 시링크스. 도무지 이 여자, 알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귀여운 토끼를 마법으로 죽여서 슬프다며?" "아우웅! 우우우움!" "알았어. 먹을 때는 말 시키지 않을게." 한편 쿄쿠로는 작은 고기 조각을 두 손에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조심조심 먹고 있었다. 이런 말은 실례겠지만 모닥불에 홍조를 띈 앳된 뺨이나 쪼그 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무슨 귀여운 애완동물 같다. 아마도 카밀이 끔찍하게 예뻐해 주는 이유도 그 아이의 마법이나 불운한 사정 때문이 아 니라 귀족들도 눈독을 들일 법한 외모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한동안 말없 는 식사가 계속되었다. 특별한 조미료도 향료도 없이 단지 털과 내장을 손 질해 낸 토끼를 직화로 구웠을 뿐이지만 허기와 줄리탄의 요리 솜씨 덕분 에 푸짐한 만찬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했다.(물론 시링크스는 아무 것도 먹 지 않았다.) "후아아! 배부르다!" 불쌍한 토끼들로 포식을 해버린 뒤에 쯥쯥 입맛까지 다시는 카밀이 자신 의 수통이 비어버린 것을 알고 투덜대기 시작할 때 웃음 띈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헤헤. 물 드릴까요?" "응. 고마워."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카밀은 갑자기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듣는 목 소리였던 것이다. "와아아아아앗!! 누, 누구야 당신은!!" 카밀은 언제부터인가 뒤에 다가와 있던 자를 돌아보곤 죽을 듯이 놀라며 넘어져 버렸다. 카밀의 뒤에는 작은 날개가 돋은 궁룡이 쪼그리고 앉아 가 는 실눈으로 웃고 있었다. "세, 세르난!"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던 시링크스 역시 세르난을 보며 표정이 굳었지만 줄리탄이 재빠르게 인피타르로 손을 가져가자 시링크스는 황급히 줄리탄의 팔을 잡았다. "시링크스......" "주인님. 저 녀석 싸우려고 온 것이 아냐." 시링크스는 단번에 세르난이 자신들을 해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줄리탄과 시링크스마저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일 말의 인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만약 줄리탄 일행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무엇에 당했는지 느끼기도 전에 목숨을 빼앗아 갔을 실력이다. "헤헤 맞아요. 아무 짓도 안할 테니까 끼워주세요." 아무 생각 없는 녀석처럼 헤헤 웃고 있는 세르난이었지만 시링크스는 목 끝까지 치닫는 긴장감을 풀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자신이 오펜바하의 씰이 었을 때 몇 번이나 세르난과 싸웠지만 한번도 승부가 나질 않았을 만큼 강 하다. 모르긴 해도 루시퍼보다 강하면 강했지만 절대로 지금 상황에서 이 길 수 있는 자가 아닌 것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보다 많아서 그때나 지금이 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궁룡이긴 하지만. "우선 이것부터 하나 줄 수 있어요? 예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 이거요?" 세르난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닥불 근처에서 기름을 떨구고 있는 토끼 고기였다. 카밀이 그걸 가리키자 세르난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들 역시 씰들처럼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고 대다수가 식욕 같은 것 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토끼고기에 흥미를 느끼는 궁룡이라니.... .. 뭔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카밀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뭇가지에 꿰인 고기조각을 건내주자 세르난은 '고마워요'라며 받아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 입을 덥석 물었다. 난데없이 그 모습에 감동받아 버린 카밀. '귀엽다아!' 세르난이 고기를 먹으며 기분이 좋은 듯 등에 돋아 있는 작은 날개를 쫑 긋쫑긋 거리자 그하얀 날개를 바라보는 카밀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마, 만져보고 싶어!' 아무튼 귀여운 것이라면 참지 못하는 여자다. 하지만 어쨌든 궁룡이니 그 걸 만졌다가 무슨 험한 꼴 당할 지 몰라 카밀은 고개를 돌리며 주먹을 꼬 옥 쥐고 힘들게 참아내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팔자 좋은 자는 카밀 혼자 였지만. 세르난은 여전히 고기에 집중하며 지나가는 듯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궁금해서 보러 왔어요." "내가......?" 줄리탄은 아무런 살기도 느낄 수 없는 세르난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세르 난은 조금 수다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당신은 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에 죽었을 거에요. 테싱님 은 당신들이 뭘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테싱님이 그냥 놔두라지 뭐에요? 당신을 죽이지도 막지도 말고 놔두랬어요 분명히. 희한한 일이에요. 테싱님이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 "......" "당신도 참 대단해요. 테싱님과 정면으로 상대하겠다니. 그것도 인간이 면서....... 그 마음만으로도 대단하네요." "테싱이라는 자와 싸울 생각은 없어." "싸움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들도 이 고생 안하죠." 세르난은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줄리탄을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뭔가 그 의 마음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줄리탄이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 "카넬리안은..... 잘 지내고 있어?" "카넬리안? 아아 가랑님 말이로군요. 이상한 말이네요. 씰에게 잘 지내고 있냐니. 헤헤. 이상해요." 슬며시 웃으며 고기조각을 내려놓은 세르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씰은 언제나 똑같아요. 이 세상 모든 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다고요. 테이머를 위해 테이머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잠시 자신을 바꿔 주긴 하지만 결국 그건 봉사하는 것일 뿐, 감정 같은 건 없는 존재에요." "그렇지 않아." "당신도 씰에게 홀려 있군요. 그러다가 상처받을 텐데. 그렇죠 시링크스 씨?" "......" 시링크스는 세르난이 슬며시 건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 고 세르난이 웃는 낯으로 내뱉는 차가운 말은 불에 달군 송곳처럼 줄리탄 의 마음을 찌르기 시작했다. 카넬리안은 몇 번이나 자신에게 화를 냈고 또 즐거워했고 같이 고민했고 또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했었는데...... 결국 그건 모두 씰로서 테이머에게 행하는 봉사였을 뿐일까. 죄다 거짓말이었고 모두 다 그녀가 만들어 낸 기분 좋은 환상이었을 뿐이었을까. 그런 환상을 뒤쫓아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세르난의 말대로 씰은 결국 그런 존재 - 아 주 잘 만들어진 인형일 뿐일까. 줄리탄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습격하는 그 차가운 논리를 부정하려 노력했지만 세르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와서 가랑님이 당신에게 봉사할 이유는 없지요. 계약은 끝나버렸으 니까." 세르난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말은 잔인한 설 득력으로 줄리탄을 압박해 왔다. 세르난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넬리안은 계 약대상을 만족시켜주는 무감정한 기계덩어리일 뿐이다. 줄리탄이 원했으니 까 '사랑'해 준 것 뿐이다. 줄리탄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며 처음으로 두려 움이라는 것이 그 마음의 틈새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씰들이 주인 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장치일 뿐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어." 테싱을 죽이고 다시 가랑과 계약을 맺어 그녀가 카넬리안으로 돌아온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아무런 감정도 없이 계약되 주인에서 봉.사.해. 주.는.것. 뿐인데. 차가운 금속덩어리를 껴안고 죽어라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일 뿐이잖아.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벌레들이 온몸을 갉아먹고 있는 기분 이었다.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이 실은 자기 혼자만의 환 상일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 "웃기지마! 봉사라고? 헛소리 하지마!!"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처럼 외치며 인피타르를 들었다. 독약 같은 말을 귀속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세르난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카넬리안이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남아준 이유가 '단지 씰이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미칠 듯한 두려움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인피타르가 푸른 잔광을 뿌리며 검집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것이 가 른 것은 허공 뿐이었다. 인피타르의 차가운 검광이 날아들며 주변의 나무 들을 푸른 불길로 태워버렸지만 세르난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우아아아아악! 다, 당신 왜 그러는 거야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남은 고기조각을 먹고 있던 카밀은 갑자기 벌떡 일어선 줄리탄이 자신의 머리 위로 무시무시한 검광을 날려 버리자 토끼고기를 집 어 던지며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난데없는 위기. 저 남자 왜 갑자기 발작 을 일으키냔 말이야! 시링크스와 쿄쿠로 역시 놀란 얼굴로 인피타르를 뽑 아든 줄리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 대체 어디서부터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줄리탄은 차가운 입김을 내쉬며 인피타르를 다시 집어넣었다. 식은땀이 투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지 하게 위험한 남자였잖아!'라는 얼굴로 슬슬 뒤로 물러서는 카밀. "당신 말야, 원래 그렇게 잠버릇이 험해? 에이잇! 죽을 뻔했잖아!" 시링크스는 한숨을 내쉬며 초점 잃은 눈빛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줄리탄에 게 수통을 건내 주었다. 어쩌면 피로와 강박감의 극한에 몰린 줄리탄이 만 들어 낸 악몽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세르난이 꿈을 빌려 다녀간 것 일지도 모르지. 줄리탄의 나직한 목소리가 야영지를 울렸다. "......그럴리가 없어." 사랑은 맛이 없다. 베어 물기에는 너무 크고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질 않 는다. 하지만 그렇게 끝없는 공복감에 쓰라려 하면서도 줄리탄은 그 지독 한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길 포기하지 않았다. '멋진 정신력이로군요. 당신,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일수록 믿고 있던 소중한 것이 부서져 버릴 때 망가지기 쉽지요. 다시 는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떨어져 버릴 겁니다.' 환상을 닮은 세르난의 목소리가 집착처럼 줄리탄의 귓가에 달라붙어 있었 다. -Blind Talk 세상에... 리차드 게리엇이 NC소프트로 가서 날 놀라게 하더니 피터 몰리 뉴는 콘솔게임계로의 진출을 밝혀서 긴장시켰고 이번에는 결국 세계 최고 의 게임제작자 중에 하나인 시드 마이어가 그 침묵을 깨고 역시 최강의 제 작자 윌 라이트(!)와 파트너쉽을 했습니다!!!! 아아 이번에 만드는 것이 S IMGOLF라는데 '시드 마이어의 심골프'라는 타이틀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 되는군요. 게다가 지금까지 윌 라이트가 만들어 오던 SIM 스타일과 시드 마이어의 전매특허인 TYCOON 스타일이 합쳐진다니까... 이건 정말 엄청난 기대작!(이미 시드 마이어의 맹렬한 추종자인 kiyu군은 시드 마이어의 문 명3 한정판을 구입하겠다고 난리입니다.-_-) 이번 편은 늦었습니다. 아아... 이틀전에 핸드폰을 분실하더니만 인터넷까 지 먹통이 되서 도무지 다 써놓고도 올릴 수가 없었네요. 재난의 연속. 돈 도 없고 말야... 읽는 사람 부담스럽게 만드는 한편이었군요. 역시 주인공은 육체도 정신 도 강한 것이 읽는 사람에게도 편하겠지요. 그럼 메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 리며... 이만. E-MAIL : billiken@hananet.net 퍼니파우더의 OFF-SIDE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9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7 글쓴이:billiken 조회:53 날짜:2001/09/24 03:29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8 Dark Pilgrim 1. 젤리드도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뭔가 이 세상의 뒤틀린 존재들을 부셔버리겠다는 줄리탄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까...... 검밖에 쓰지 못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꽤나 한정되어 있었 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권세를 등에 업고 각종 세금을 죽어라 뜯어먹고 있는 놀센 기사단의 패거리 한무리를 아무 생각 없이 박살내 버렸던 것이 다. 북해 기사단이라면 모를까 허접아류기사집단인 놀센 패거리들은 단박 에 젤리드에게 요절이 나 버렸고 덕분에 젤리드는 가르바트 사람들의 입에 의적(義賊)이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으며 그리고 또...... 가르바트 의 대형 기생집 '룸바르트'의 서방님이 되어 버렸다. "......이게 아닌데." 젤리드는 여자냄새가 잔뜩 묻어있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서며 중얼거렸 다. 목표는 방랑이었고 가는 길에 걸리는 '악당'들은 무료로 죽여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어느새 이곳에 정착해 버린 것인가. 젤리드가 자기 정체성에 심란해 하고 있을 때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젊은 아가씨 한 명이 달콤한 가향차를 들고 널찍한 젤리드 전용 객실로 들어왔다. "어머. 오빠 벌써 일어났네요?" "오빠라고 부르지 말랬지." "내려가서 진지 드세요. 젤리드 오빠." "......알았어." 그 여자는 놀센 기사단 소속의 떨거지 중 하나에게 시달리고 있었는데 젤 리드가 단칼에 줄행랑치게 만든 뒤부터 젤리드에게 꽤나 헌신적이었다. 아 무튼 젤리드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이는 삼대 인물 중에 하나이긴 했 지만 이대로 진행되었다간 리이가 하늘에서 벼락을 떨굴지도 모를 일이다. "젤리드 옷 입어!" '자알 논다.'라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있던 카리나가 젤리드 를 향해 검은 셔츠를 집어 던지며 아침부터 심통이었다. 암고양이가 캬르 릉거리는 것 같은 카리나의 살벌한 눈빛에 여자는 아쉬운 얼굴이지만 재빠 르게 문 밖으로 나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젤리드가 피식 웃으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 이리 와봐." "치잇." 화가 풀리지 않은 카리나는 젤리드에게 고개를 반쯤 돌린 채 불량스런 걸 음걸이로 투덜거리기까지 하면서 걸어갔다. 삐죽 내민 입술이며 치켜 올라 간 눈동자가 자존심 강한 고양이처럼 보인다. 젤리드는 그런 카리나의 머 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우리 여기 떠날까?" "......또 어디로 가려고." 가는 곳마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도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젤리드가 허구한날 야영과 노숙만 하면서 사는 것도 카리나는 원치 않았다. 아무튼 불만 하나 만큼은 카넬리안 급인 여자다. "젤밴더 대륙이라도 갈까? 용들과 한판 붙는 것도 나쁘지는......" "미쳤어!" 카리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 역시 궁룡의 힘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인간 중에선 당할 자가 없는 흉몽 젤리드지만 그렇다고 궁룡에게 검을 들 이대는 짓은 자살행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게다가 테싱이 돌아왔다면 가랑 역시 그의 곁에 있다. 가랑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는 카리나로서는 절대로 가랑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일 층에서 거칠게 문이 열리며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바닥을 울리며 들려왔 다. 아직 개점 전의 시간이었다. "저 녀석들. 지치지도 않는 건가......" 젤리드가 셔츠를 입으며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놀센 녀석들이겠지. 주제 에 기사집단이라고 젤리드에게 당한 뒤부터 복수하겠다며 단골처럼 이 곳 에 자주 몰려들곤 했다. 단세포 같은 놈들. 젤리드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 던 참이었다. 그때 카리나가 팔짝 팔짝 뛰기 시작했다. "젤리드. 내가 처리해도 되지? 내가 할게! 응?" 카리나가 자기에게 맡겨 달라며 보채기 시작하자 젤리드는 단추를 잠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화풀이 대상으로 딱 어울릴 것이다. 2.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이거 놔앗! 비겁한 놈들! 죽여버릴 테야!" "흥. 입이 거친 씰이로군." 바닥에 눌린 채 서너 명의 기사들에게 밟혀 있는 카리나는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방금 전에 마법에 기습당한 덕에 제대로 몸이 움 직이질 않는다. 두 팔찌에 힘을 모아 봤지만 금새 하얀 빛이 힘없이 사그 러 들었다. 그리고 검은 옷이 날카롭게 찢겨져 있는 두 팔목에는 붉은 칼 자국이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다. 분명히 기사들의 검을 막다가 생긴 상처 이리라. "흉몽 녀석의 미끼로 쓴 다음에 우리들이 귀여워 해주지! 크하하하!" 비대한 마법사의 전력체(電力體)가 카리나의 등을 때리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치켜 올라간 눈은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가에 핏줄기가 흘러나온다. "오늘에야말로 빌어먹을 파문기사놈을 죽여 버릴 테다!" 카리나는 분명히 강한 씰이지만 성격이나 싸우는 방법까지 직선적인 것이 문제였다. 목표를 보자마자 당장 뛰어 들었지만 그때 기다리고 있던 마법 사에게 일격을 당했고 부상을 입고도 도망치지 않는 바람에 금새 생포 당 해 버린 것이다. 카리나는 힘을 잃고 정신을 잃기 일보직전이었다. "젤리드......" 그때 이층에서 흉수를 든 채 내려오는 차가운 눈빛의 젤리드를 보며 카리 나가 반가운 얼굴이지만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젤리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자신만만한 표정들로 검을 치켜든 기사들. "크핫! 이제야 행차하시는군! 어떠냐? 네 놈의 씰이 이 꼴이 된 모습이?" "그게 어쨌다는 거냐." 젤리드는 일층까지 내려오면서 카리나를 흘낏 바라보았을 뿐 냉정한 표정 그대로였다. 카리나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표정이 굳어버 린 카리나. 그리고 기사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아끼는 씰을 잡고 있는데 검을 들 이댈 생각이냐! 검을 버려!" "바보냐 너희들?" 젤리드는 몹시 짜증난다는 듯이 인상을 조금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씰 따위는 다시 구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저런 소모품 때문에 내 목숨 을 걸란 말이냐. 너희들은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놈들이로군." "뭐?" "안 그래도 저 조그만 계집애에겐 질려버린 상태였다. 잘 됐군. 그 씰을 죽여라." "제, 젤리드!" 카리나가 떨리는 눈동자로 젤리드를 올려봤지만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 다. 단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볼 뿐이었다. 젤리드가 비웃음 가득 한 얼굴로 카리나를 눈에 담으며 주저없이 말했다. "물건이나 다름 없는 씰을 인질로 쓰다니 역사에 남을 우스개로군. 안 그 래?" 그의 말에 카리나의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농담하고 있는 것 같 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들 역시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 그렇네."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잘못 짚었다. 잔인한 파문기사가 자신의 씰 을 위해 무기를 버릴 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 역시 씰 따위를 위해 목숨을 걸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이 제 어쩌지?'라는 눈빛을 교환할 뿐이었다. 그때 젤리드가 못 참겠다는 듯 이 다시 웃기 시작했다. "왜, 왜 또 웃는 거냐 이 놈!" "하하하핫. 놀센 기사단이라고 했나? 네 놈들 진짜 바보로군. 적의 말에 수긍해서 어쩌자는 거냐?" "뭐?" 라고 그들이 놀라는 순간 파각 소리를 내며 한 명의 머리가 잘려나가 바 닥을 뒹굴었다. 젤리드의 검기가 날아들며 사형대의 칼날이 내리찍듯 깨끗 하게 머리를 베어버린 것이다. "내 씰을 건드린 대가는 죽음이다." 마수(魔獸)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은 젤리드의 목소리가 놀센 패거리들 의 귀에 들어갔을 때 젤리드의 흉수도 그들의 몸을 파고든 뒤였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들을 덥친 것 같았고 그들의 검이 움직이기도 전에 마치 악몽의 한 장면처럼 놀센 기사단의 몸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피를 뿌렸 다. 카리나마저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사, 살려줘!" 두 팔이 잘려나간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지만 젤리드는 듣 기 싫다는 듯 그의 심장에 흉수를 박아버린 뒤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팔도 없는 기사가 살아서 뭐해." 그리고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된 뒤에 젤리드는 비틀거리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살이 보일 정도로 옷도 찢겨져 나갔고 상처에 흐르는 피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지만 카리나는 떨리는 눈 동자를 돌리며 젤리드로부터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젤리드가 아무렇지 도 않게 말했다. "뭐해. 빨리 치료받아야지." "젤리드......" "왜?" "아, 아까 했던 말...... 진심이야?" 카리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젤리드가 속으로는 정말로 자기를 아껴주 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금방 자길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으면서도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어 주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그게 당연한 거였는데도 전 주인 때처럼 이번에 도 상처받을 것 같았다. 젤리드가 카리나에게 걸어오자 그녀는 몸을 움찔 거리며 조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런 카리나에게 젤리드는 무릎을 굽 히며 눈을 맞추고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넌 정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 어린애 인 것 같군. 신기해. 하하." "젤리드." "언젠가는 너와 헤어져야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냐." 젤리드는 눈을 꼭 감은 카리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슬슬 가게를 가득 메우는 피비린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때 젤리드의 뒤로 다가온 자는 이 가게 '룸바르트'의 주인이었다. 보기 미안할 정도로 겁을 먹은 모습이 불쌍해 보일 정도다. "저어 젤리드 님......." "미안. 아침부터 가게를 이 꼴로 만들어서. 오늘 영업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저 그러니까......" "죽일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갑자기 화가 나서 말야." 사실 젤리드가 가르바트에 온 뒤에 누굴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리이를 보낸 뒤에 조금은 그녀를 닮아볼까 하는 생각에서 무례하고 건방진 데다가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놀센 기사단의 패거리들도 죽이는 짓만은 하 지 않았지만 그 기록도 오늘로서 끝이었다. 젤리드는 말하길 주저하고 있 는 주인장을 내려다보며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알았어. 나가주지." "죄, 죄송합......" "아니. 안 그래도 공짜로 처리해 주는 것에 슬슬 질려 있었으니까. 그렇 지 카리나?" "응!" 놀센 기사단은 본대(本隊)와 파견대(派遣隊) 둘로 나눠져 있다. 황궁에서 코머런트를 근위하는 본대와 함께 각 지역에 파견되어 (어쨌든 공식적으로 는) 치안을 담당하는 파견대로 나눠져 있는 것인데 젤리드가 몰살시켜 버 린 자들은 바로 파견대의 일부였다. 지금까지는 파견대와 젤리드의 소규모 복수전 정도였지만 이 지역 파견대가 파문가사 한 명에게 전멸해 버린 지 금에 와서는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본대가 젤리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도 높았고 그렇게 된다면 젤리드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쟁 터를 방불케 될 것이 분명했다. 젤리드에게 목숨 거는 이 가게 아가씨들이 야 떠나는 걸 말릴지 몰라도 다른 어느 누가 가르바트의 공적(公敵)이 되 버린 젤리드 곁에 있길 원하겠냔 말인가. "올라와라 카리나. 붕대 감아 줄게." "내, 내가 할 수 있어!" 시체에 박혀 있는 흉수를 뽑아들고 이층으로 슬슬 올라가는 젤리드를 카 리나가 빠른 걸음으로 뒤쫓았다. 엄청난 사고뭉치인데다가 화가 나면 참질 못하고 이제는 돈도 못 별로 못 버는 주인님이었지만 카리나는 그런 젤리 드가 어느 때보다 좋고 또 아주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3. 가르바트의 몇 안되는 부동항(不凍港)에 얼어버릴 것 같은 몸을 덜덜 떨 고 있는 난민들을 가득 실은 배가 도착했다. 그 배는 바로 젤밴더 대륙에 서부터 온 것. 궁룡들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을 싣고 죽을 듯이 차가운 북 해 레오노라를 견디며 가르바트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나마 안도감 에 젖었던 그 난민들은 또 다시 공포에 휩싸여야 했다. "뭐야 너희들은! 이런 허가받지 않은 배는 착함 시킬 수 없어! 네 놈들도 입국할 수 없단 말이다!" "나, 나으리. 저희들은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젤밴더로 돌아가면 죽어요 . 제발 자비를!" 난민선에서 내리려는 멸망한 오칼란트 제국의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것은 가르바트 병사들의 검과 창이었다. 예전 오펜바하가 있을 때의 오칼란트 제국 사람들이었다면 어느 제국이나 무사 통과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 의 그들을 대하는 가르바트의 태도는 마치 가치 없는 더러운 물건을 다루 는 것 같이 잔인했다. 두꺼운 털옷을 겹겹이 입은 장교는 삐죽한 수염을 손끝으로 다듬으며 몸을 떨고 있는 난민들에게 말했다. "흐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우리 영광스런 가르바트 제국은 너희 같이 불결한 인종들에게도 관대하다. 자아. 이 몸에게 성의를 보여라." "서, 성의라뇨?" "에이이! 그럼 공짜로 이 가르바트 땅을 밟게 해주리라 생각했나!" 그는 마치 가르바트가 자기 땅이라도 되는 냥 배를 내밀며 거드름을 피웠 지만 난민들이 값나가는 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기껏 그들이 모은 것은 생명처럼 아끼는 몇 줌의 식량과 오래된 목걸이, 너덜너덜해진 가죽 옷 정도가 전부였다. 아마 그 모든 것을 모아도 그 장교가 끼고 있는 굵은 반지 하나의 값어치도 안될 것이다. 그들이 모은 '가치'를 확인한 장교는 더 이상 할 말도 없다는 듯이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 거지 같은 놈들을 돌려보내! 그리고 저항하면 배까지 태워버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이 자꾸 들어오면 이 가르바트 제국이 더러워진단 말이야. 쳇. 보나마나 범죄자가 될께 뻔해." "나, 나으리 제발! 여기에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의 창 끝은 그들을 찌를 듯이 위협하며 다시 배 안으로 밀 어 넣고 있었다. 그때 난민들 사이에서 검을 들고 있는 자가 걸어 나왔고 병사들은 놀라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누구냐! 네 놈은!" "감히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니! 신분을 밝혀!" 병사들은 뭐라고 외치고는 있었지만 몸은 그의 소름끼치는 눈빛이 질려버 려 그가 걸어나올 때마다 뒤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항구로 걸 어나오며 어두운 선박 안에서 가려져 있는 그의 얼굴이 들어났다. "한번만 말하겠다. 비켜라." 그리고 불안감을 청각화시킨 듯한 검의 울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는 세이드였다. 장교는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자 화가 치밀어 오른 얼굴로 다시 배로 걸어오기 시작했고 주변의 병사들도 경계를 울리며 몰려들었다. 단신으로 가르바트 병사에게 검을 들이댄 '미친놈'이 나타난 것이다. "야 이 새끼야! 넌 뭐야! 죽고 싶나! 그 검 안 버려!" 더럽게 추운 아침부터 사람 오가게 만드는 통에 성질이 머리끝까지 나버 린 장교는 자신의 장검을 뽑으며 세이드에게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세이드의 불쾌지수 역시 급상승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쇳소리 같은 세이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넌 뭐냐." "너? 이런 비렁뱅이 놈이 감히 놀센 기사단의 일원인 이 몸께 너라고!" "놀센 기사단?" 세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기억 속에 그런 이름 따윈 없었다. "북해 기사단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북해라니! 그 가르바트의 치욕스런 기사단은 해체 된지 오래야!" "해체되었다고...... 가르바트도 끝장이군." 그 말에 완전히 돌아버린 장교가 번쩍번쩍 거리는 장검을 치켜올리며 세 이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이드는 검을 휘두를 것도 없이 자신의 기 계팔로 그 검을 잡아 챈 것이다. 장교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바뀔 때 입꼬 리가 차갑게 올라간 세이드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새하얀 입김과 함께 저 주 같이 두려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놀센이라고 했나. 그런 쓰레기 같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와 함께 세이드가 가볍게 증폭시킨 마법이 장교의 검을 통했고 전구가 폭발한 것 같은 퍽 소리와 함께 장교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그리고 그의 귀와 코와 입에서 시커멓게 죽어버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 세이드 님! 가르바트에 오자마자 또!" '늦었다!'라는 표정의 레오폴트가 뒤따라오며 당황하고 있었지만 세이드 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이없이 죽어버린 장교의 시체를 집어 던지며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로서 그 역시 젤리드의 뒤를 이어 단숨에 가르바트 의 공적이 되어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저 놈을 잡아라!!" 병사들이 세이드 주변에 몰려들며 그를 에워쌌지만 어느 누구도 달려들지 는 못했다. 아무도 장교 꼴로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때 병사들 사 이에 있던 놀센의 파견대의 표정이 하얗게 변하며 자기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으아아아. 검은 추기경...... 세이드다." 예전 헤스팔콘과의 공방전에 참가한 적이 있었던 그는 다행히도 세이드를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아군 진지를 뚫고 들어오며 순식간에 한 부대를 전 멸시키던 그 악마 같던 모습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놀센 기사단 으로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었지만 그를 상대할 자는 마르켈라이쥬 뿐이라 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앞장서서 도망치며 외쳤다. "저, 저 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무튼 피해라! 항구에서 철수해! 그 리고 세이드가 나타났다고 황실에 알려!" 그의 명령이 방아쇠가 되며 병사들도 그를 따라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 고 마치 항구에 거대괴수라도 나타난 것 같은 분위기는 우습기까지 했다. 그리고 항구는 순식간에 빗자루로 쓸어낸 듯이 말 그대로 고요해져 버렸다 . "......" 세이드는 허탈한 듯이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도 꽤나 발전했다. 예전 같으면 항구가 불바다가 될 차례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항구의 거 리로 발걸음을 옮기는 세이드를 뒤따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젤밴더 대륙의 난민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뒤틀린 성자와 그의 추종자들 같은 분위기를 세이드가좋아할 리가 없었다. 세이드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따라오면 죽여버린다." "하, 하지만 저희는 세이드 님을 따르는 것이......" "잘 들어. 어딜 가서 어떻게 살든 죽든 그건 너희들이 결정할 일이다. 당 장 잠시 내가 도와줬다는 이유로 나한테 모든 권리를 넘기겠다고? 그렇게 쉽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놈들이 뭐 하러 이곳까지 온 거냐. 차라리 젤 밴더에서 용들에게 먹히지 그랬나." "......" 세이드의 차가운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선 절대악 만큼 이나 절대선이 뭔지도 알 수가 없다. 잠깐이라도 누굴 도와주면 금새 성인 (聖人)이 되어버리는 웃기는 세상이다. 속마음 따위는 관심 없고 오직 결 과만을 보고 자기 편한 데로 판단한다. 결과가 좋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상대가 누구든지 '오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해버리 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거추장스러운 가치관 다 포기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권리 마저 포기해 버리면 그때는 이미 죽어버린 인생이 되어 버리는 거라고 세 이드는 생각했다. 4. 공중에 부유해 있는 테싱의 궁전을 올려보며 카밀이 기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여자...... 저런 곳에 살고 있었던 거였어?" 뭔가 이 세상이 아닌 땅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저런 곳에 살고 있는 여 자라면 줄리탄이 누구든지 절대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줄리탄 은 말없이 그 궁전 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가랑을 만나기 전에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군." 시링크스가 한숨을 내쉬며 줄리탄의 뒤를 따랐다. 하늘 높은 곳에 중력을 무시한 채 존재하는 저 궁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로 위압적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궁전에서부터 새하얀 눈가루를 뿜어내듯이 천사 들이 쏟아져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엄청난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궁전에 서 끝도 없이 날아오르는 그들은 창을 든 채 줄리탄이 있는 곳으로 낙하해 오기 시작했다. "온다! 모두 조심해!" 줄리탄이 먼저 세라피스로부터 하사받은 장검을 뽑으며 뛰어나갔고 시링 크스가 두 손에 마력을 모으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법책을 내려 놓은 쿄쿠로가 카밀의 앞을 막으며 앳된 목소리로 용기를 내서 외치는 것이었다 . "누나. 제가 지켜 드릴께요." "쿄, 쿄쿠로!" "우리...... 죽지 않을 꺼에요." 그와 함께 쿄쿠로의 주문이 들리며 곧 그의 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반 투명의 기운이 하늘에 그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쿄쿠로가 카밀 앞에서 마법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Blind Talk 언제부터인가 환타지 소설과 관련된 게시물을 읽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 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아무런 대안도 없이 단지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내뱉는 '공해'같은 글 들을 읽을 때마다 저 역시 '한마디 해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자꾸 하기 때문에 차라리 읽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저도 그다지 의연하거나 논리정연한 성격이 되지 못할뿐더러 오프라인이었 다면 그런 말을 하는 상대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욕과 주먹부터 튀어나오는 다혈질이라서 '아 그래. 사람마다 서로 생각이 다른 거지.'라 는 생각을 갖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리고 제 단점 제가 제일 잘 아니까 남의 것 깎아 내릴 시간에 자기 문제 점이나 고치는 것이 몸에도 마음에도 이로울 듯 합니다. 아무튼 자기가 나 서지 않으면 이 바닥은 망해버린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어설픈 이순신병 은 질색입니다. "누군가 '당신은 독자들에게 책을 사라고 꼬드기려고 이런 쓰레기를 끝도 없이 쓰고 있구려'라고 말할 경우 난폭한 성격의 작가라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릴 것이며, 나처럼 교양 있고 부드러운 성격이라면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E-MAIL : billiken@hananet.net 권인하의 갈테면 가라지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6-09 : 비탄의 대지 위에... .. 번호:98 글쓴이:billiken 조회:268 날짜:2001/09/26 03:24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 9 HeartBreak Island 1. 줄리탄 일행을 덮쳐오는 천사들은 마치 하늘을 새하얗게 가리는 듯이 말 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였지만 최소한의 다행인지 미카엘이나 루시 퍼, 세르난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줄리탄을 지켜보고 있 는 듯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테싱의 명령이겠지. 천사들의 귀를 찢는 울 음소리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울리고 있었다. "비켜라! 네 놈들을 상대할 시간은 없어!" 줄리탄은 몸 곳곳에 상처가 났음에도 아직 인피타르는 뽑지 않은 채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그 역시 다시한번 인피타르를 뽑으면 위험하다는 걸 느 끼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탄을 보호해주며 뒤를 따르던 시링크스는 끝도 없이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달려드는 천사들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언령주문(言令呪文)을 외쳤다. 하나 하나 죽이다간 이쪽이 먼저 지쳐 쓰러질 노릇이다. "S.I.N.G.U.L.A.R.I.T.Y." 시링크스의 입에서부터 심판을 내리는 듯한 주문어가 완성되자 그의 몸에 서 붉은 광선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체 처럼 창공에 폐곡선(閉曲線)을 그리며 또 수천개의 줄기로 갈라지며 천사 들의 몸을 꿰뚫었다. 강력한 힘이 급속히 가속되는 듯한 고고한 구동음(驅 動音)이 시링크스의 주변에 몰아치고 있었다. 그 마법의 효과는 실로 광대 해서 시링크스는 주변의 천사들을 단번에 일소(一掃)시켜나갔다. 마치 하 늘 위에 천사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시링크스......" 줄리탄은 주변의 적들이 일시에 하늘 끝까지 밀려나가자 놀란 얼굴로 시 링크스를 뒤돌아 보았다. 뽑아낼 수 있는 극도의 마력을 운용하고 있는 시링크스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줄리탄 보기에도 일개인이 시전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던 것이다. 시링크스 가 힘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나, 이 주문 오래 쓸 수 없어. 오펜바하님의 것이니까......" 오펜바하의 마법체계를 계승받은 시링크스이긴 했지만 예전의 힘을 되찾 지 못한 상태로 그런 강대한 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엄청난 무리였던 것이 다. 시링크스가 식은땀을 떨구며 어렵게 외쳤다.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거야! 어서 가란 말야!" 수백의 천사들을 동시에 요격하는 것에 모든 정신과 마력을 집중하고 있 는 시링크스는 움직일 수도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자기 몸 자체를 요새화 시킨 것과 같이. 만약 이대로 시링크스가 모든 힘을 다 써버릴 때까지 천 사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면 힘이 바닥난 시링크스는 그대로 천사들의 먹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줄리탄이 쿄쿠로에게 말했다. "여기 남아서 시링크스를 지켜 줘." "예? 하지만......" 치를 떠는 시링크스. 테이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가 그런 말 에 감동 받을 리가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마! 나 혼자 이곳에 남아도 된단 말야! 어떤 멍 청이가 씰을 지켜!" "그럼, 부탁해." 그리고 줄리탄은 홀로 성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천 사의 조각들이 차가운 유리파편처럼 흐느끼며 내리고 있었다. 2. 카넬리안의 취한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빨간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서 흡사 울먹이는 것 같아 보였던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술김에 껴안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품게 만들 정도였다. 갑자기 시내로 나가서 술을 마시자던 그녀가 반쯤 억지로 줄리 탄을 끌고 온 살롱 '요람'에서 그녀는 그렇게 취해 버렸다. "주인님. 오늘은 말야, 취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녀는 정말로 취해버렸는지 그 말을 열세번째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실 카넬리안은 알코올 흡수 능력을 상실했는지 밤새도록 주점 건달들과 술내 기를 해도 절대로 꿀리지 않을 무시무시한 여자였지만 그 날은 갑자기 '나 오늘은 취할 테니까 잘 받아 줘.'라고 선언한 다음부터 딱 세잔 만에 뺨에 붉은 홍조가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물키벨이 오펜바하를 만 나고 돌아온 더운 여름의 밤이었다. "노블리스 님. 오늘은 이곳에서 같이 주무실 계획이신지요. 그렇다면 저 희가 미리 객실을 준비......" "아, 아, 아뇨! 그,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정장을 입은 지배인이 정중하게 '편의'를 봐주려고 하자 도리어 얼굴이 빨개진 사람은 줄리탄이었다. 어쨌든 미성년자란 말이다! 게다가 이런 곳 에서 하루를 보내고 자라탄에 돌아갔다간 사람들로부터 무슨 무흐흐한 소 리를 들을지 모른다. 한편 카넬리안은 그런 줄리탄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뭐가 재밌는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투명하고 차가운 술이 담긴 유백잔을 소종(小鐘)처럼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늦을 대로 늦어버린 시각. 망연자실해진 줄리탄이 중얼거렸다. "카넬리안...... 오늘따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취해도 상관없다니까아?" "......" 반쯤 놀리는 듯한 그녀의 콧소리에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취하고 말고 도 제멋대로인 여자다. 이미 살롱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어서 마치 이 거대 한 곳을 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악사들이 켜는 현악기의 정적인 음악 소리만이 살롱을 조용히 감돌고 있는....... 뭐 그러니까 꽤 분위기가 넘 쳐 흘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십여잔 째 증류주(蒸溜酒)를 비운 그녀가 어지러운지 차가운 테이블 위에 달아오른 얼굴을 묻으며 느릿느릿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붉은 단발의 머리칼이 은은한 목조 테이블 위로 흘러내린 다. "주인님. 씰들은 말야..... 아주 오래 살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줄리탄은 모르는 전설은 알려 주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씁쓸한 눈웃음을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 쯤인가의 과거를 향해 있는 듯 했고. 능숙하게 웃고 있는 얼굴 너머로 항 상 몇 겹의 벽을 쳐놓고 사는 그녀가 이런 감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울어버릴 것 같은 무방비의 모습. 줄리탄은 시큼한 포도 내음의 와인을 머금으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 기로 했다. "이제는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소용없이 씰들은 끝도 없이 살아가지.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주인 없이는 깨어있지도 못하는 주제에 계속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누가 죽여줄 때까지 계속 살아가는 거야. 마치 누가 처음부터 그렇게 살라고 명령했던 것 같아 . 때로는 저주 같고 또 때로는 운명 같지. 그래서 씰들은 최대한 자신이 사는 이유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 그냥 물처럼 바위처럼 왜 자신이 숨쉬고 있는지도 모르며 살아가지. 아이도 낳지 못해서 점점 우리 들의 수가 줄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 같지? 우리들 정말 바보 같지?" 취기에 휘청거리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그런 주정은 서글픈 노랫소리 같 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마구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빈정 거리는 것도 아닌 몹시 지쳐서 반쯤 체념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 그러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얼굴을 갸웃 기울이며 줄리탄을 올려보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안개 같은 미소가 짜릿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주인님. 나, 솔직히 말해도 돼?" "뭐, 뭔데?" "그러니까 주인님은 말야......" 줄리탄은 침을 삼켰다. 술김에 굉장한 프로포즈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 다. 어쩌면 '실은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어요.'라는 말을 해줄 것 같은 기분에 줄리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짜 멍청해. 아주우우우 한심한 주인님이라고." '얼레?' 아무튼 이 여자에게 쉽게 기대했다간 금방 당해 버린다. 멍청하다는 말을 해주려고 그 분위기를 다 잡았단 말이냐.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지 기 시작했다. "그냥 이쯤에서 '그런 소리한다고 바뀌는 건 하나도 없어!'라고 쏘아 붙 여도 상관없을 텐데...... 한심하게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있는 거야? 아 아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한 남자네요." '으이구!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줄리탄은 사춘기 소녀의 고민상담이라도 들어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 도 영원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십대 여자란 말이다. "그래도 말이지, 그렇게 대책 없는 당신이지만...... 항상 좋아하고 있어 요 주인님." 이라는 말을 한숨과 함께 중얼중얼 흘리며 그녀는 다시 테이블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확실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줄리탄은 귀 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고 가슴이 뛰었다. 카넬리안에게 (진지하게) 좋아한 다는 말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줄리탄도 남자라면 이쯤 에서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가 기회다! 라는 생 각이 머리를 스치며 줄리탄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카, 카넬리안. 나도 사실은 너를......" "......" "카넬리안?" "......" "어이 이봐......" 잠들어 버렸다. 또 당했다. 멋대로 자기 얘기만 늘어놔 버리고 잠들어 버 린 것이다. 그녀의 숨소리만이 허망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어이없고 허탈 하며 아쉬운 기분에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쿡쿡 찔러봤지만 그녀는 뭐 라고 웅얼웅얼 거릴 뿐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지하게 맥빠지는 순간이다. "나도 정말 좋아해.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단 말 야...... 좀 들어라! 제기랄!" 들어주지 않는 여자를 향해 투덜거리며 프로포즈를 해버린 줄리탄은 결국 잔뜩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그녀를 업고 일루미네이터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물론 그녀는 일주일 동안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부스스 일어난 다음 에 '숙취해소용 맑은 스프'를 끌여 달라고 잠든 줄리탄을 들들 볶는 '본래 모습'으로 변신해 버렸다. 3. 꽤 행복한 회상에 잠시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줄리탄은 눈앞을 찌르며 들 어오는 천사의 몸을 베어버리며 환상 같은 꿈 속에서 깨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몇 명의 천사들을 죽였을까. 천사들의 시체가 가루가 되어 안개처럼 대지를 가득 메워가고 있었다. 적대적인 울음소리들이 하늘을 울리고 있는 전장의 한복판을 뛰어가는 줄리탄은 자신의 다리가 창에 찔려 절룩거리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시링크스도 쿄쿠로도 카밀도 떨어트려 놓고 혼자서 달려온 이곳. 개수렁 같이 푹푹 꺼지는 바닥을 밟으며 앞을 향할 때마다 줄리탄의 뒤로 긴 핏자국이 붉은 점선을 만들며 이어나가고 있었다 . "카넬리안! 카넬리안! 어디 있어!" 피와 엉킨 머리칼에 감기는 눈을 힘들게 뜨면서 어디엔가 있을 그녀에게 소리쳐 봤지만 그녀의 이름은 청각을 마비시키는 천사들의 울음 속에 묻혀 버렸고 앞으로 걸어가면 갈수록 악독한 유사(流砂)가 발목을 잡아당기며 땅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온 몸의 피를 모조리 빨리는 것 같은 기분. 줄리탄은 희미해지는 정신에 검을 놓쳤다가 다시 그 검을 집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가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런 모습으로 이곳까지 온 이유는 분명히 나의 씰 때문이겠지?" 오른쪽 눈을 괴롭히며 흘러내리는 피를 연신 닦아 내면서 전진하던 줄리 탄에게 나직하지만 차가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천 사들의 공격도 일시에 멈췄고 울음소리 역시 동시에 끊어져 버렸다. 마치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 같다. 줄리탄은 고개를 들어 궁전으로부터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수 미터에 달하는 여섯 장의 날개를 등 뒤로 펼친 채. 빛의 무게를 느끼는 듯한 중압감에도 줄리탄은 그에게서 시 선을 피하지 않았다. "줄리탄이라고 했지? 가랑에게 들었다. 뭐, 내가 없는 동안 그녀를 보호 해 주고 있었던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타이프를 치는 듯한 감정도 고저도 없는 목소리가 계속 줄리탄의 마음 속 에 울렸다. "......테싱" 그는 땅에 내려오며 천천히 날개를 접었다. 어떤 감정도 접근하지 못할 듯한 표정과 흑수선 같은 긴 머리칼, 하얀 옷 밖으로 들어난 목 언저리와 손등의 역린은 그가 궁룡의 수장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증명해 주고 있었 다. 카넬리안의 마음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자다. 테싱은 마치 석상처럼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고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기회를 주지. 나의 종이 되겠나." 이길 수 없다. 줄리탄도 예전보다는 훨씬 강해졌지만 오펜바하조차도 정 면에서 싸우는 것만은 피했던 테싱을 상대로는 일말의 승산도 없었다. 게 다가 하늘 꼭대기에 존재하는 궁룡을 설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반면 그는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줄리탄의 목숨을 가 져갈 수 있었다. 지금 이 테싱의 제안을 거절하는 짓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자기 손으로 부셔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줄 리탄이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하지만 카넬리안이 말했듯이 가끔은 '목숨을 버리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머리칼 끝에 뭉쳐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 보며 줄리탄은 결심했다. "난 그녀와 약속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그리고 곁에 있겠 다고." "너 인간치고는 꽤 그럴듯한 놈이로군. 그래서?" 테싱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죽음이 등 뒤까지 다가 온 것이 느껴진다.하지만 줄리탄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녀를 데려가겠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지만 줄리탄은 테싱을 쏘아보며 정확하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잿더미가 되어 죽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절대로 피하지 않겠다. 그게 미천한 인간으로서의 의지이며 그녀를 쉼없이 사랑했다는 증거니까. 테싱은 그의 말에 눈을 감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상한 일이었다. 원한다면 1초도 소비하지 않고 죽여버릴 수도 있었을 텐 데.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절대 꺾이지 않을 신념을 증명한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원한다면...... 만나게 해주지." 4. 지겹도록 몰아치던 천사들의 공습이 일시에 멈추자 의아해 진 시링크스와 쿄쿠로, 카밀이 줄리탄 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줄리탄은 붉은 눈을 가진 길고 검은 머리칼의 여자와 대면하고 있었다. 아직 곳곳에 소녀 티가 적잖이 남아 있는 테싱의 씰. 가랑이었다. '뭐야 저 여자는......' 카밀은 가랑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저런 미녀는 본 적 도 없다. 미묘하게 꺾어져 있는 가는 눈썹과 질투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 벽하게 하얀 피부. 하얀 스커트 밑으로 가늘지만 유연하게 들어난 다리. 다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신비로운 붉은 눈동자까지, 보기 전에는 상상조 차 할 수 없을 완벽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녀를 향 해 아름답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조금은 세상의 흔적 이 묻어있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그래서 텅 비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카밀은 절대로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도리어...... 두려웠다. "카넬리안......" 줄리탄은 공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랑을 향해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 앞에 있는데도, 그렇게 만나고 싶었 는데도 세상의 정 반대에 서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잡히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미 카넬리안이 아니었다. 카넬리안의 한조각도 찾을 수가 없었 다. 눈물이 솟았다. 어떻게 저런 모습이 되어 있을 수 있는 거야! 카넬리 안은 줄리탄을 떠나며 자살해 버린 것일까. '같이 돌아가자.'...... 결국 줄리탄은 그렇게 마음 속에 담고 있던 그 짧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줄리 탄이 목숨을 걸고 찾은 그녀는 이미 죽은 뒤였던 것이다. 평생을 찾아 헤 매던 여자를 생명의 끝자락에서 만났지만 결국 보게 된 것은 그녀의 시체 뿐.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런 기분이었다. 가랑이 말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여기서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줄리탄 씨."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줄리탄을 몇 번이나 죽였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와서 그가 본 것은 이 세상의 절망. 죽음보다 더 지독한 현 실이었나. 사랑 따위는 쓸모 없지. 이렇게 끝날 줄 정말 몰랐던 거야? 아 무리 원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아. 이제 행복해져도 괜찮지 않겠냐고 찢어 져라 소리치고 싶어. 하지만 가혹한 현실은 그대로였고 가랑은 미스트랄을 들었다. "당신은 그냥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최근 들어 불가능한 소망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마음의 바탕 이 하얀 것이라면 그 마음을 새하얗게 지워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 면 다시 애써서 그곳에 무언가 써넣을 노력 따윈 하지 않겠다. 행복한 것 을 채울 수 없다면 그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차가운 비웃음 소리뿐.' "주인님! 피해! 피하란 말야!" 시링크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줄리탄을 향해 뛰어들었지만 줄리탄은 미동 조차 없었다. 세상의 끝까지 와버렸다. 그 끝에는 행복한 결말이 있을 것 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그곳에는 공허함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는데 - 이제 또 어디로 가라는 거야. 줄리탄의 모든 것을 지탱하던 믿음이 산산히 부서져 버린 이 자리에서 그는 움직이 지 않았다. "예전에 제가 말했지요. 우리 모두 상처받을 거라고." 가랑의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미스트랄이 개방되었다. 모든 힘을 되찾은 가랑은 미스트랄을 깨운 것이다. 투두둑소리와 함께 미스트랄의 전면에 금 이 가는가 싶더니 곧 그 '껍질'은 빛의 조각이 되어 산산이 깨져 버렸고 그녀 역시 그 창백한 빛의 물길 속에 잠기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 칼 에 죽.고.싶.다. 세상 끝의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게 나아. 너무도 허무하 게 다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검을 세웠고 시링크스는 줄리탄의 앞을 가로막으며 남아 있는 힘을 모았다. 하지만 가랑의 힘이라면 단번에 줄리탄과 시링크스를 휩쓸어 버릴 것이다. "......!" 그때 가랑이 멈칫하며 미스트랄을 내렸다. 시링크스 때문이 아니었다. 무 언가 엄청난 힘이 접근하는 걸 느낀 것이다. 가랑은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 하늘은 미쳐버린 듯 먹구름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붉은 빛으 로 변해가고 있었다. 테싱의 중얼거렸다. "그 녀석인가......" 그와 함께 구름이 찢겨져 나간 하늘이 갈라져 열리며 거대한 불덩어리가 그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태양이 추락하는 것처럼 것은 땅을 울 리고 공기를 불태워버리며 대지를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쿄쿠로가 급히 카밀을 감싸며 보호벽을 만들었다. "누나! 눈을 감으세요!" 시링크스 역시 줄리탄을 껴안으며 할 수 있는 최대의 보호주문을 시전하 기 시작한 가운데 세상을 삼킬 듯한 불덩어리는 엄청난 속력으로 바닥에 추락했고 대지를 산산조각 내는 믿을 수 없는 힘이 터졌다. 산맥이 뒤틀리 고 강이 증발해 버렸으며 바위가 물처럼 녹아 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천사 들이 젤밴더 대륙을 울리는 그 충격파에 휩싸이며 깨져버렸고 몸을 보호한 자들은 땅을 깊게 패며 떨어진 그 검은 불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시링크스 의 눈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설마......" 그것은 단순한 운석이 아니었다. 웅크려있던 그 위압적인 크기의 불덩어 리는 곧 몸을 감싸던 두 장의 거대한 날개를 펴며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모습은 너무도 거대해서 사람들 모두를 그것의 그림자 속에 가둬버릴 정도였다. 불길에 휩싸인 수백미터에 달하는 날개와 하늘 끝에 닿을 듯한 뱀처럼 길고 굵은 목. 그리고 그 속에 자색의 공포스런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충돌이 가져온 시커먼 분진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그 존재는 테 싱의 궁전과 같은 크기를 가진 거대한 흑룡이었다. "꿈속에서도...... 저런 건 본 적이 없어." 결국 카밀은 그 흑룡을 올려보다가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크르르륵 거리 는 공포스런 울음소리와 함께 불길로 몸을 감싼 그 흑룡이 발을 옮길때마 다 땅은 미친 듯이 진동했다. 줄리탄을 껴안으며 보호하고 있던 시링크스 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오펜바하님!" "너희들, 여기서 죽으면 곤란하지." 악마적인 본 모습을 들어낸 오펜바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함께 테 싱의 뒤에 미카엘과 루시퍼, 세르난이 나타났다. 제16장 : 비탄의 대지 위에... 끝 다음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Blind Talk : 비탄의 섬(HeartBreak Island) 제가 비탄(HeartBreak)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슈 샤오밍 감독의 '비탄의 섬'(HeartBreak Island)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들었을 때부터입니 다.(얼마전 EBS에서 방영 했지요.) 대만을 빗대어 지은 그 제목 자체가 가 져오는 비장미와 서글픔은 단번에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마음이 부서 져 버린다는 의미의 비탄은...... 지금도 제 감정의 모티브로서 자주 쓰이 곤 합니다. "자신의 이상에서 등을 돌린 사람처럼 혐오스런 사람은 없다" -비탄의 섬 中 에 그건 그렇고... 자 생각해 봅시다. 오펜바하급(-_-)의 혜성이 젤밴더든지 어디든지 지상에 낙하했을 경우 대 략 그 속도는 시속 5만6천 킬로미터, 초속으로는 16킬로미터/s 입니다. 그 러니까... 음속의 47배 정도라고 합니다. ;;;; 그 이후 혜성 '오펜바하'는 수천 세제곱마일의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찢고 그것을 불태우며 뉴욕보다 거대한 둘레의 불기둥이 되어서 15초 후에 지 상을 덮칩니다. 그와 함께 지상 전체가 진동하며(오펜바하 낙하 몇 분 후에 달라카트 황성 에서 식사하던 세라피스가 포크를 떨어트리며 넘어지는 것 이상으로!) 그 공기의 충격파는 젤밴더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구조물은 물론 바다 를 건너 이실라트의 사람들마저 장파열등으로 죽여버릴 것이고 '오펜바하 '가 낙하한 지점, 즉 그라운드-제로는 죄다 녹아버려 높고 둥근 뜨거운 액 체의 산 모양으로 솟아오를 겁니다. 그와 함께 수억 톤이 넘는 암석이 증발하고 일부는 이실라트 대륙으로 튀 어 날아가 겨우 겨우 살아난 일부의 사람들 마저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바다 역시 엄청난 해일을 일으키며(물키벨 역시 그것에 휩쓸려 해 안가에 떨어져 버릴지도...) 결국 분진과 함께 엄청난 먼지의 기둥이 대기 위로 솟아 오르며 모든 하늘을 검게 가려 버립니다. 전 지상의 온도는 영하권으로 내려갈 것이며 살아 남은 아주 극소수의 생 명체들마저 확인사살해 버릴 것입니다. ...뭐 이정도보다는 약간 덜 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2126년 질량 1조 톤 의 스위프트터틀 혜성이 지구에 충돌했을 때의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그건 운석이 아니라 혜성이니까 거의 얼음일테고 말야... 아무튼 오펜바하가 줄리탄을 구해주겠다는 건 알겠는데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간 줄리탄이고 뭐고 세계파멸의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오펜바하는 테싱 보다 먼저 세상을 멸망시키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겠지요.-_- 하지만 소설이니까... 그런 리얼한 진행을 안해도 뭐 괜찮겠지요? 이렇게 길게 변명을 늘어 놓았으니 '이 Global-Killer 오펜바하 놈아!'라는 메일 은 보내지 마시길.-_- (이상의 자료는 폴 데이비스의 유명한 저서인 '마지막 3분'에서 가져왔습 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환타지 소설에서는 '메테오'라고 해서 운석을 다 량으로 낙하시키는 마법이 있다고 하네요. '이야! 그거 멋지겠다!'라는 생 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거 열번만 쓰면 행성멸망도 시간문제겠군.' 이라는 쓸데없는 걱정도 생깁니다. 덕분에 이것저것 잔걱정이 많은 저는 화끈하게 대량낙하도 못하고 딱 하나만 조심스레 떨어트려 버렸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도시 케센의 멸망. 생존자 카넬리안 한명이 되어버렸만.) <<심심해서 끄적이는 인터넷 사이트 소개>> 인터넷을 돌다보면 웃기는 사이트가 꽤나 많더군요. 가끔 혼자보기는 아까 운 사이트들을 앞으로 비정기적으로 소개할까 합니다. 하지만 이미 유명한 곳들이라서 웹서핑 매니아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http://www.edeniaz.com 딴지일보의 기자로 유명한 이드니아 콘체른(물론 필명-_-)님이 만든 플래 쉬 애니메이션 사이트로 요즘 떠들썩한 '달묘전설' 사이트입니다. 01년 유행코드인 허무, 엽기, 패러디로 첨철된 사이트로... 아무 생각없이 보시길.-_-;;; (저 같은 자이언트 로보 팬이나 카운터 스크라이크 팬들은 보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특히 달묘전설#2가 가장...) 그럼 길고 긴 잡담은 이만 줄입니다. 메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E-MAIL : billiken@hananet.net 안치환의 위하여 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7-01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0 글쓴이:billiken 조회:279 날짜:2001/10/18 02:43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1 Fragile Hearts (전편까지의 줄거리) 자신과의 계약이 끊어진 카넬리안을 되찾기 위해 젤밴더 대륙으로 향한 줄 리탄과 시링크스. 그러나 줄리탄이 그곳에서 본 것은 더 이상 카넬리안의 무엇도 남아있지 않는 씰 가랑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찾아왔다. 1.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 름답기 때문이라고. 실은 세상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으며 단지 존재할 뿐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세상의 색깔이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줄리탄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양은 처음으로 빛을 잃어가며 어둡게 변해가고 있었다. "주인님! 도망쳐야 해! 지금 밖에 기회가 없다고! 정신 차려!" 의지를 잃은 줄리탄의 어깨를 흔들며 시링크스가 소리쳤다. 무슨 의도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펜바하가 나타나 주었으니 당장 목숨을 구할 기회라도 생긴 것이지만 줄리탄은 마치 인형처럼 초점 잃은 눈동자로 가랑 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펜바하가 뿜어내는 열기에 하늘이 타오르고 땅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모든 공기가 살을 태울 듯이 달아오르는 지옥 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오펜바하의 주변에도 지룡들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요. 지룡의 수장이 테싱님 앞에 저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 습니다." 테싱 뒤에 나타난 미카엘이 빛이 일렁이는 날개로 몸을 감싼 채 의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오펜바하역시 테싱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전에도 정면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면서도 모습을 들어낸 것이다. 미카엘은 그 사실이 자신의 군주 테싱이 말 하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르난은 이런 극도의 소동 속에서도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띈 채로 갸웃거리며 말했다. "오펜바하가 나서서 도와줄 정도라니. 저 줄리탄이라는 인간 때문이겠죠? " "상관없잖아!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잖아! 이곳을 저 놈들의 무덤으로 만 들어 주지." 드디어 나설 기회가 생긴 루시퍼가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이 섬뜩한 미소 를 지으며 날아 올랐다. 2. 마치 무한히 생성되는 것 같은 천사들은 검은 산처럼 서 있는 흑룡 오펜 바하를 향해 메뚜기 때처럼 날아들었지만 오펜바하는 계속 테싱이 있는 곳 으로 그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며 마법을 시전했다. "F.E.A.R." 그와 함께 숨이 멈추는 듯한 중압감이 대지를 덮었고 천사들은 비명을 지 르며 바닥에 투두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력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신성 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법 에 천사들은 땅을 뒹굴다가 온 몸이 일그러지며 빛이 되어 폭발해 버렸다. "나에 대한 대접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 테싱?"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테싱을 향한 오펜바하의 목소리가 들리 며 곧 오펜바하의 입에서 새하얀 플라즈마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 은 극열(極熱)의 불기둥이 되어 테싱을 덮치며 수킬로미터를 뻗어나가는 것이었다. 땅에 넓게 퍼지기 시작한 고열의 플라즈마가 주변의 모든 자연 물을 삼켜가고 있었다. 그것은 한 나라를 단숨에 멸망시킬 만한 힘이었지 만 바위를 증발시켜 버리는 그 끔찍한 불길마저도 가만히 서 있는 테싱의 근처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오펜바하의 일격에 용암 처럼 바꿔는 대지 위에 서 있던 테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마." 3. 한편 보호마법이 없이는 숨조차 들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버린 줄리탄 일행은 어떻게든 이 곳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줄리탄을 끌고 가려는 시 링크스 앞에 나타난 자는 루시퍼였다. 물키벨에게 반쯤 잘려나간 한쪽 날 개가 흉측하게 들어나 있는 루시퍼는 가학적인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말했었지. 이 땅에 오게 되면 죽여버리겠다고." '제, 제길.' 줄리탄을 부축하듯 붙잡고 있던 시링크스는 루시퍼가 앞을 가로막자 난색 이 되면서도 한쪽 손에 마력을 모았다. 다른 방법은 없다. 죽을 힘을 다해 루시퍼와 싸우는 것 외에는. 그러나 루시퍼는 그런 몸부림이 도리어 재미 있는지 잔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창을 들었다. "그래. 그렇게 발버둥쳐 봐."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루시퍼의 창 끝에서 암흑 같은 마력이 쏟아졌고 시 링크스 역시 손바닥을 펼치며 자신의 힘을 뽑아냈다. 파즈즈즉! 그것은 대결이라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힘을 소진한 시링크스의 공격 은 루시퍼의 마력과 충돌하게 무력하게 밀려나 버렸고 그대로 잔혹한 루시 퍼의 화살이 시링크스의 가슴을 관통했다. 시링크스는 줄리탄을 놓치며 바 닥에 쓰러졌다. 직격으로 당한 것이다. "씰이라는 건 정말 허무한 인형이야. 주인이 바뀌니까 능력도 사라진 건 가?" 루시퍼는 큭큭 웃는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쓰러진 시링크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시링크스는 피를 쏟으며 계속 몸을 일으키려고 했고 인간을 닮은 그의 붉은 피가 땅에 흐르자마자 불처럼 달구어진 대지는 그것을 태워버 리고 있었다. 몸을 잘게 끊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시링크 스가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날 희생해서 루시퍼를 잠시라도 묶어둔다면 주인님이 도망칠 수 있겠지. ' "이봐. 여길 잘 봐." 그러나 시링크스의 일말의 희망마저도 깨어버리는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 렸다. 공중에 떠 있는 루시퍼는 자신의 창 끝을 줄리탄의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 그만둬!" 항상 얄미울 정도로 냉정한 시링크스였지만 그런 그가 방법을 잃고 겁을 먹을 때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의 주인이 위험할 때일 것이다. 그도 역시 씰인 것이다. "맘에 안 드는 인간이야." 루시퍼는 시링크스에게 최악의 고통을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 었다. 그건 바로 눈앞에서 테이머를 죽이는 것. 하지만 줄리탄은 바로 앞 까지 다가온 루시퍼를 향해 인피타르를 뽑지 않았다. 단지 어떤 반격의지 조차 사라진 연약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강해져야 할 이유도 싸워 야 할 이유도 살아갈 이유마저 잃어버린 것일까. 시링크스가 칼을 뽑으라 고 몇 번이나 소리쳤지만 줄리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런 한심한 인간이 감히 테싱님의 씰을 훔쳤다는 건가?" "제발 그만둬! 주인님을 건드리지 말란 말야!" "가랑도 멍청한 여자로군. 이 따위 놈을 선택하다니." 루시퍼는 그렇게 말하며 줄리탄의 목을 찌르려 했다. 이제 죽는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또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신념 을 땅을 떨군 채로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만두세요." "누구야!"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에 루시퍼가 돌아봤을 때는 루시퍼를 향해 날카로운 마법의 칼날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크윽!" 루시퍼가 당황할 정도의 막강한 기습이었다. 루시퍼는 창으로 재빠르게 그 공격들을 막아냈지만 몇 개는 그의 몸을 스치며 상처를 만들어냈다. 검 은 깃털을 떨구며 일단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는 자신을 공격한 여자를 바 라보며 일순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넌 해룡의 씰! 왜 여기에 나타난 거냐!" "지금은 오펜바하님의 씰입니다." 단발의 회색머리칼에 이지적인 얼굴을 가진 그녀는 바로 미쉘이었다. 완 벽하게 자신의 힘을 쓸 수 있는 상태의 미쉘은 루시퍼에게도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루시퍼는 쉽사리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미 쉘은 그런 루시퍼를 바라보며 줄리탄에게 걸어갔다. "저의 주인님께서 당신들을 안전한 곳까지 대피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뭐야 또 저 여자는......" 쿄쿠로가 힘겹게 만들어 낸 보호벽 속에서 깨어난 카밀은 점점 엄청난 자 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다시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반면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미쉘은 차분함 그 자체였다. "이 대륙의 해안가에서 물키벨님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곳까지 보내 드 리겠습니다." "조심해!" 그때 미쉘을 향해 미스트랄을 든 가랑이 차가운 붉은 눈빛을 흘리며 뛰어 들자 시링크스가 소리쳤다. 가랑의 움직임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미쉘 조차 당황할 정도의 소름끼치는 빠르기. 가랑이 바로 앞에 나타나자 미쉘 은 본능처럼 얇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마치 수많은 얼음의 보주(寶珠)를 엮 어나가듯 완벽한 마력의 방벽을 눈앞에 만들어 냈지만 그와 함께 가랑의 미스트랄이 폭발하듯 빛을 뿜으며 그 벽을 내리쳤다. 가랑의 힘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떤 힘에도 버틸 것 같았던 미쉘의 마력을 찢어버리 며 미스트랄의 검날이 그대로 그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미쉘의 푸른 블라우스가 찢겨지며 핏방울이 튀긴다. "......!" 아무리 마법에 가장 뛰어난 씰인 미쉘이었지만 근접전에서는 용조차 베어 버리는 가랑의 힘에 대항하기에 벅찼다. 그럼에도 꽉 다문 입술로 비명소 리조차 지르지 않는 미쉘은 쓰러질 듯한 몸을 애써서 추스르며 재빠르게 다시 치고 들어오는 가랑 앞에서 또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완성되기도 전에 미스트랄에게 무너지며 그녀의 몸에 또 하나의 상처 를 남겼다. 잔인한 싸움이었다. 미쉘도 가랑도 전혀 서로를 모르는 자들처 럼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냉혹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누가 봐도 전세는 가랑에게 기울고 있었고 이런 상태라면 가랑이 미 쉘을 죽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루시퍼가 미쉘의 등을 노리며 그녀 의 뒤로 날아들고 있는 상황. 계속 밀리고 있는 미쉘의 등을 향해 루시퍼 가 창을 던질 듯이 들어 올렸다. '흥. 씰 따위에게 사냥감을 빼앗길 수야 없지.' 미쉘의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대지 전체를 차갑게 울리는 테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놔줘라." 짧은 그의 명령과 함께 마치 이 전쟁터가 일순간에 정지해 버린 것 같았 고 가랑은 그 즉시 검을 접으며 물러섰지만 루시퍼는 멈칫하며 놀란 얼굴 로 테싱을 바라보았다. 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살려 주라고? 믿을 수 없 다. 하늘의 군주가 저 따위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관심을 가진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테, 테싱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그런!" "놔주라고 말했다." 테싱의 말에 루시퍼는 움찔하며 두려운 듯 미쉘에게서 멀리 물러섰다. 테 싱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더 이상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돌아 오는 건 죽음뿐이라는 걸 루시퍼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줄리 탄도 미쉘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대륙을 울리는 발걸음을 멈춘 오펜바하 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싱, 독선(獨善)의 천사여. 네 놈에게도 죄책감이란 것이 아직 남아 있 었나?" "죄책감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업과 같은 것이지." "업? 업이라고? 더러운 우리들의 원죄(原罪)를 아주 멋지게 포장하셨군!" 그들의 말은 그들 외의 어느 누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줄리탄이 그 들이 말하는 너무 오래 묵은 죄악 속에 한 사람으로 끼어 있다는 것은 느 낄 수 있었다. 불길에 휩싸여 있는 거대한 칠흑의 화룡(火龍) 오펜바하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그래. 이제 저 친구는 빼놓고 죄악의 탑을 쌓은 우리끼리 그 잘난 업이 라는 것의 종지부를 찍어 볼까!" 심장이 멎어버릴 듯한 오펜바하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업 화(業火)의 중심에 서 있던 테싱은 눈을 낮게 내리깔며 말했다. "지금은 싸울 기분이 아니다. 오늘은 살려주마." 테싱은 줄리탄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선인지 또 누가 악인 지 짐작조차 없다. 정말이지 불친절한 세상이다. 처음부터 선이니 악이니 하는 건 없는 것인지도 몰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 죄지은 자들만 이 세상 에 득실거릴 뿐일지도 모른다. 테싱은 이 세상 어떤 것도 베어버릴 수 있 는 자신의 검을 뽑지 않은 채 오펜바하와의 싸움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갑자기 정적만이 남아버린 이곳에서 미쉘은 상처 입은 자신의 팔을 지긋이 누른 채 힘든 발걸음으로 줄리탄에게 다가와선 말했다. "이제 돌아가세요." "......" "그리고...... 죽지 마세요." 꽉 닫혀 있는 그녀의 마음의 문 틈새로 살짝 희미한 감정이 보이는 것 같 았다. 줄리탄은 이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장난 인지 죽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아직 살아 있으라는 처분 을 받아 버린 것이다. 줄리탄은 지친 시선으로 테싱의 곁을 따라 그와 함 께 멀어져가고 있는 가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와 만들었 던 모든 것이 쓸쓸한 환상처럼 느껴지는 끝없이 가라앉고 있는 기분. 시링 크스도 미쉘도 그리고 가랑도 그냥 명령에 따라서 깨어나고 움직이고 죽어 버리는 없이 메마른 현실. 줄리탄의 몸 속에 죽음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듯한 갈증만이 목 끝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그리 고 한 달이 흘렀다. -Blind Talk 그러니까 잡담은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기찬의 또 한번 사랑은 가고 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7-02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1 글쓴이:billiken 조회:260 날짜:2001/10/18 07:50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2 Human Stage 1. 가르바트의 황궁에선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코머런트가 대낮 부터 국민들이 봤다면 자신의 밀밭에 불을 싸질러 버릴 정도로 호사스런 연회에 빠져 취해 있었다. 그는 여황제 우테만이 앉을 수 있었던 벨벳에 감긴 옥좌에 앉아 지방 남작들이 보내온 최고급의 술을 연신 들이켰다. 물 론 이 모든 연회비가 황궁의 국고로 충당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짜 증나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장소는 신하들과 귀족들을 모아놓고 대연회를 벌이고 있는 황궁의 연회실이었다. "코머런트 각하. 젤밴더 대륙의 움직임에 대해서 대응해야 할 시기입니다 . 그들은 유례를 찾을 수가 없이 위험한......" "이보게 스테온! 자네는 짐이 이렇게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소중한 자리에서도 그런 말을 하는가? 일벌레로군 정말." 근처의 상석에 술 한 모금을 마시지 않은 채로 표정이 굳어 있는 스테온 은 몇 번이나 코머런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수십명의 여자들 속에 빠 져 있는 코머런트는 귀찮다는 듯이 짜증을 부리는 것이었다. 물론 '황제의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휴식이 일주일 째 계속되고 있으면 답답함을 넘어서서 불안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술에 취한 귀족들 역시 스테온을 향해 '역시 천민 출신이라서 귀족적인 풍류를 모른다.'라며 혀를 차고 있었고 자신의 집무실에 먼지가 쌓이는 것도모르 는 신하들도 연회실까지 데려온 자신의 몸종(물론 유행대로 죄다 10대 중 초반의 미소녀, 미소년들이다.)들을 끼고 낄낄거리느라 스테온의 말에 귀 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테온이 코머런트의 능력을 높게 평가 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황권을 쥐자마자 이리도 적극적이 고 신속하게 타락해 버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스테온은 울컥 솟구치는 울분을 삼키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코머런트에게 재차 말했 다. "각하. 용들의 손에 오칼란트 제국의 순식간에 멸망했습니다. 오펜바하 제일황제는 가르바트, 헤스팔콘, 달라카트 삼국을 합쳐도 밀어낼 수 없었 던 절대황제였지만 그런 그의 제국이 하루만에 사라진 겁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않나? 그 말야...... 더 이상 오펜바하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어." "그,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차라리 오펜하바의 제국과 불평등 무역을 할 때가 좋았다. 스테온은 궁룡 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는 어불성설의 존재에 게 인간의 제국 하나가 거짓말처럼 괴멸당해 버렸다. 식민지가 된 것도 협 정을 맺은 것도 아니라 어느 날 그냥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언어도단 같은 상황에서 조공이 사라졌다고 기뻐하는 건 터무니없는 낙관 론이었다. 코머런트는 귀찮다는 듯이 혀가 반쯤 꼬인 목소리로 그 잘난 칙 령을 내렸다. "정 그렇다면 짐의 이름으로 젤밴더 대륙에 칙사를 보내게. 그 용들을 만 족시켜 줄만한 선물을 보내고 짐이 친히 그들이 오칼란트 제국을 멸망시킨 것에 감격했다고 전해. 그럼 될 것 아닌가!" "......" 코머런트는 미친 것이 아닐까. 스테온은 할 말이 없었다. 술이 들어간 코 머런트의 머리는 일말의 이성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일년전 만에도 오래된 설화집에서나 언급되었던 용이다. 그런 그들을 만족시켜 줄만한 인 간의 선물이 대체 뭐가 있냔 말인가. 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용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라니...... 이건 농담이라 해도 너무 황당해서 쓴웃음만 나올 소리였다. 코머런트는 아마도 지금 자신의 위치가 하늘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오칼란트 제국을 하루만에 쓸어 버릴 힘이라면 가르바트라고 하더라도 한나절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 고 그런 궁룡들이 언제 가르바트로 침공해 들어올지 그건 어떤 군사전문가 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가르바트 제국의 위기상황이었던 것이다. 코머런트는 다른 생각이 났는지 술을 꿀떡꿀떡 넘긴 뒤에 소리쳤 다. "그보다 말야! 그 애송이 세라피스 놈의 코를 뭉개버릴 묘책을 내보게! 감히 이 몸에게 사절단도 보내질 않고 그 우테 계집년까지 숨겨준 그 놈의 꼴이 영 맘에 안들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각하! 그 세라피스라는 놈은 빼어난 미남이라는 데 이 기회에 달라카트에게 선전포고를 하옵시면 그 놈이 겁을 먹고 폐하 에게 달려와 고개를 조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놈을 몸종으로 쓰시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와하하하!" "크하핫! 통쾌한 말이오! 달라카트의 황제를 노예로 쓴다라! 하긴 달라카 트 놈들은 바탕이 천해서 몸종으로나 어울리겠지!" 스테온은 내무대신쯤 되는 신하의 그런 조잡한 아부에 '네 머리통은 엉덩 이에 달려 있냐 이 무능한 간신배 놈아!'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꾹 참 았다. 코머런트는 세라피스에게 일말의 예우도 갖추지 않은 채 '유약한 몸 종'이라고 비웃었지만 스테온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헤스팔콘을 멸망시킨 세라피스는 절대로 멍청한 사람도 순진한 사람도 그렇다고 착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세라피스의 천재 책사인 리하르트가 가르바트 내에 거미줄처럼 뿌려 놓은 첩자들을 통해 가르바트의 기밀들이 세어나가고 있 다는 사실도 스테온은 알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수뇌부가 헤매고 있는 상 황에선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달라카트를 치겠다는 호언장담을 늘어놔? 북해기사단도 해체되어 그 뛰어난 기사들도 모두 근신 처분을 받거나 은둔해 버렸으니 이대로는 가르바트의 강대한 군사력도 십 년을 못 버틴다. 스테온은 숨이 막혀버릴 지경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제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마 치 애시 당초 답이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괴로워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5. "저 주인님.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려주세요." "......응." 여전히 줄리탄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그레시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줄 리탄의 머리칼을 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가위질 을 할 때마다 탈색된 듯이 새하얀 줄리탄의 머리카락이 천을 두른 그의 어 깨 위로 톡 톡 떨어지고 있었고 한달 동안 길게도 자란 머리칼에 덮여 있 던 이마와 귀가 드러나고 있었다. 너무 작은 키라서 신발을 벗고 침대 위 에 올라가 있는 그레시다의 긴 은발과 줄리탄의 눈송이 같은 백발의 모습 은 마치 오빠와 동생을 그려 놓은 그림 같았다. 오직 둘 만이 있는 줄리탄 의 방에서 한동안 말없이 그의 머리를 다듬어 주다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주저하던 그레시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죄송해요." "응?"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서......" 어떤 대단한 능력도 없는 그레시다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줄리탄에 게 배운 요리와 청소 그리고 이런 사소한 일들 뿐. 그래서 그레시다는 항 상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꼭 거창한 무언가가 있어야 훌륭한 건 아니다. 사람들이 그레시다를 좋아하고 귀여워해주는 이유가 그녀에게 전 쟁을 뒤집을 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야말로 너한테 해준 게 없지." 줄리탄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올려 그레시다의 뽀얀 목덜미를 쓰 다듬어 주자 그녀는 눈을 꼬옥 감으며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부 드러운 감촉이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단숨에 팔을 타고 느껴진다. 이렇게 인간 같은데...... 살아서 숨쉬고 있는데도 절대로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 또 다시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삼키려 눈을 감은 줄리탄은 그 사실을 아직 도 실감할 수 없었다. 카넬리안 아니 가랑의 허무한 눈동자가 미망(迷妄) 처럼 계속 떠오를 때마다 줄리탄은 몸을 떨었다. 그리고 또 한줌의 머리칼 이 툭하고 떨어지고 있었다. "줄리탄 뭐 하냐?" 그때 문이 삐꺽 열리며 시오가 장난스레 들어왔다. 계속 머리를 길러서 이제는 줄리탄보다 훨씬 길게 자란 염색된 머리칼이 멋대로 삐죽거리고 있 었다. 한달 사이에 눈에 띄게 야위어 있는 줄리탄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 라보던 시오는 애써서 싱글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찾아왔는데?" "누구?" "아...... 좀 특별한 손님이야." "......?" 줄리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얇은 미색 셔츠의 단추를 잠그 기 시작했지만 눈앞이 흐릿해지며 단추를 놓쳤다. 마음의 불안감을 증명이 라도 해 주듯이 몸이 일부가 순간 순간 마비되어 가는 그런 모습을 그레 시다는 울어버릴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1년 정도 남은 걸까.' 줄리탄도 남아 있는 자신의 생명의 길이를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빨리 죽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 고 싶었지만 예전처럼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Blind Talk 오랜만... 이네요. 7권은 말이죠. 이번 주말에 나올 듯 합니다. 그리고 앞 으로 얼마 동안은 일일 연재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배신하지 않을 테니 지켜봐 주시길. 사실 그게 당연한게 비축분을 잔뜩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 -_-)y-~~~ 차가운 바람이 창을 때리는 쓸쓸한 밤. 얼어붙은 가슴 녹이고싶어서 그 여름을 REPLY 파도치는 해변에서 익살떠는 당신의 모습 즐거워 보이네요. 둘만의 추억의 비디오 혼자서 바라보고 있어요. 겸연쩍어하며 '좋아해'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짓말쟁이 당신의 얼굴 눈물에 번져 흐려지고 있어요. 당신... 안타까워요. 미안해요. 이렇게 지금도 미련을 남기고 있어요. 둘의 모든것은 이 비디오 화면속에 있는데... 그렇다면 아직 되돌릴수 있는건가요? 그날로... 두손으로 다 셀수없을만큼의 추억이 있다고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되풀이해서 세어봐도 하나 이상은 셀수가 없군요. 당신... 곁에있어줘요. 그리고 '거짓말이야'라고 말하고 마음을 감싸안아주세요. 둘의 모든것이 사라져버린다면 지금 곧 되감고 싶어요. 그날로... ...으음. 7권마감 작업을 하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오래전의 애니음악들을 꺼내 들었습니다. 뭐 제 고등학교 때에는 시티 헌터다 오렌 지 로드다 전영 소녀다 마크로스다 패트레이버다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들 이며 그 OST들이 밀려들어와 저처럼 종로 상가 쪽을 전전하며 애니를 복사 하던 녀석들은 마치 유행처럼 뭔 소린지 알 수도 없는 그 음악들에 열중했 지요.(지금도 창고에는 그때의 부산물들이 잔뜩입니다만..-_-) 그러다가 취미가 일이 되버리고 뭔가... 더 이상 쉽게 감동 받지 못하는 슬픈 20대가 되어 버린 뒤에는 애니 음악 듣는 일도 많이 사라졌는데 지금 에 와서 일본어 연습 겸 해서 조금씩 듣다보니 뭔가 색다른 감동이 간만에 밀려오더군요. 이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서 들었던 때가 좋았습니다. 그럼 공백 중에 메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께 는 미안합니다. 이제 자주 연재하도록... 노력을... (흐지부지)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뭐... 아시는 분들은 다 아는 엽기 사이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소프한 '엽기' 가 아니라 말 그대로 기괴함의 미학... 혹자는 멋지다고도 하지만. 본사이 키튼 입니다. 쿠궁! -_- http://www.bonsaikitten.com/bkintro.html 오래된 사이트죠. 고양이를 분재화 시키는 매니악한 발상... 그러나 들은 말에 의하면 사실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국내에서도 이 세트를 구입한 분이 있으신지 궁금... 하다기 보다는 저도 기괴한 것 좋아하지만 고양이를 이런 용도로 쓰는 건 영... 쓰쓰이 야스타카의 sf단편 '멈추어 선 사람들'이 떠오르는 건 무 슨 이유일까... E-MAIL : billiken@hananet.net 타쿠 이와사키의 QUIET LIFE를 들으며... (루로우니 켄신 극장판의 OST에 있던 경음악인데 추천받아 듣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만큼이나 멋지네요... 짧지만...) .. 드래곤 레이디 17-03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2 글쓴이:billiken 조회:89 날짜:2001/10/19 01:27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3 Double Edge 1. 마르켈라이쥬는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응접실에 나타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옷과 그레시다가 목에 둘러 준 하얀 삼베 천 때문에 더욱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줄리탄에게 놀란 이유는 백발로 변해 버린 그의 머리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전 전쟁터에서 만났을 때의 강렬 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누구도 절대로 부셔버 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 믿음이 만들어낸 의지다. 그건 스 스로 놔버리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런 의지를 제 손으로 놔버린 줄리탄의 모습은 마르켈라이쥬에게도 아주 작 은 충격에도 금방 겁을 먹을 것 같은 피한객(避寒客)으로 보였다. 마르켈 라이쥬는 예전 다카란에서 줄리탄을 만난 이후 그를 잊지 못하고 그와 다 시 대화하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왔건만 - 대체 뭐가 저 남자를 저렇게 바 꿔 놓은 것일까. 마르켈라이쥬 옆에 앉아 있던 그랜사이어 역시 그의 죽어 가는 모습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의외네요.” 줄리탄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의자에 앉았지만 여전히 예전의 빛은 돌아오 지 않았다. 그랜사이어 근처에서 모여 있던 그의 세 씰들은 고개를 갸웃거 리며 동그란 눈으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분명 카넬리안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줄리탄 옆에 당연히 있어야 할 성격 사나운 그녀가 없자 이상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줄리탄을 뒤따라 들어온 시링크스가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들을 훑어보자 깜짝 놀라며 그랜사이어 뒤로 숨어 버 렸다. 아마도 카넬리안이나 시링크스나 다른 씰들에겐 적잖은 긴장감을 주 고 있는 것이리라. “자네…… 많이 다쳤군.” 잠시의 침묵 이후 결국 그랜사이어가 꺼낸 말은 마치 환자를 향한 문병인 사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줄리탄은 여전히 그 말에 아무 대답 도 하지 못하고 쓴웃음을 보일 뿐. 그때 갑자기 줄리탄의 뒤에서 쓰윽 올 라온 그림자가 줄리탄을 꽉 껴안는 것이었다. “이 녀석아!” “세, 세라피스 폐하!” 깜짝 출현을 해버린 세라피스는 남세스레 줄리탄을 덮쳐 놓고는 죽어라 놔주질 않는 게 아닌가. 얼굴이 빨개져선 바둥바둥 거리는 줄리탄. 마르켈 라이쥬와 그랜사이어 그리고 세라피스가 모인, 말하자면 달라카트 최강 무 사들의 엄청난 자리였건만 세라피스 덕분에 분위기는 역시나 어수선해져 버렸다. “보고 싶었어요. 줄리탄씨.” 난리도 아니었다. 카넬리안이 있었다면 주인님의 순결을 위해서라도 미스 트랄을 뽑아들었을 그런 상황. “너, 돌아오면 엄청나게 화내려고 했는데……. 그래도 살아 돌아온 모습 을 보니까 다행이야. 짐의 명령이다. 다시는 허락 없이 달라카트를 떠나지 마. 외로웠다고.” 황제가 친히 위로해 주는 아주 감동 깊은 순간이었지만 문제는 그 말을 몹시 감미롭게 속삭여주었기 때문에 마르켈라이쥬와 그랜사이어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문을 열고 들어오던 파르낫소 역시 사색이 되어선 소리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그만 하세요 폐하!” 달라카트 백성들이 이 꼴을 봤다면 당장이라도 가르바트로의 이민을 결정 하지 않았을까. 벗어나려는 줄리탄을 껴안고 지나치게 애정 어린 자태를 보이는 황제를 향해 파르낫소가 일침을 날렸지만 그런 만류에 기가 죽을 세라피스가 아니었다. 줄리탄을 풀어준 세라피스의 눈은 이번에는 파르낫 소를 향했다. “호호홋. 파르낫소 군. 질투하고 있군. 그럼 자네에게도 짐의 사랑을 나 눠줄까?” 파르낫소는 질려버린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렸다. “사, 사양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아아.” “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왜 맨날 저만 가지고!” 어수선. 결국 방실방실 거리는 발걸음으로 뛰어드는 세라피스를 피하며 파르낫소가 도망치기 시작하는 일대 난리가 벌어지며 사람들이 실없이 웃 어버리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지만 세라피스는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는 줄 리탄을 흘낏 보고는 흔들의자에 털썩 몸을 묻었다. “매정하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세라피스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리고 곧 찻 잔들이 담긴 은쟁반을 두 손에 든 톨베인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 는 것까진 좋은데 문을 발로 걷어차며 들어온 데다가 입에 담배까지 물고 있어서 무척이나 박력 있는 등장이었던 것이다. “여어 톨베인. 앞치마만 둘렀으면 훨씬 더 어울렸을 텐데.” 세라피스가 키득거리며 찻잔을 내려놓는 톨베인의 손을 살포시 잡으려 하 자 눈썹을 꿈틀거린 톨베인이 세라피스의 손등을 후려치며 살기 어린 눈빛 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절대로 좋아서 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 “예, 예민한 녀석……” 손등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세라피스를 뒤로하고 담배연기를 내뿜는 톨베 인은 매몰차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는 식객들. 아무튼 이곳에선 정상적인 사람 만나기가 힘들었다. 상당히 김 빠졌다는 세라피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찻잔을 들었다. “황제 대우가 뭐 이래. 확 그냥 돌아가서 세금을 두 배로 올려버릴까 보 다.” 아무튼 이쪽도 거의 폭군 수준이었다. 마르켈라이쥬 역시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감긴 작은 찻잔이 마치 장난감 같아 보일 정도다. “사모예드 경. 이번에는 양젖이 아니로군요. 다카란에서 대접받은 차는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만.” “…….” “당신과는 드물게도 꼭 한번 실력을 겨뤄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다 른 어떤 이유도 없이 순수하게 조금 더 당신을 알고 싶다는 이유로…… 싸 워보고 싶었지만.” 마르켈라이쥬의 그 말은 부관 가이브러쉬가 들었다면 너무 놀라서 ‘이 이중인격자!’라고 소리칠지도 모를 정도였다. 단 한번도 싸움을 즐긴 적 도 먼저 겨뤄보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바위 같던 그가 줄리탄을 향해 서만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줄리탄은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줄리탄은 마르켈라이쥬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줄리탄의 무엇에 대 해 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때처럼 무엇도 두렵 지 않은 자신의 모습은 이제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안타까워하는 마르켈라 이쥬의 눈을 피하며 조용히 찻잔을 집을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랜 사이어가 공허한 눈동자로 차를 마시고 있는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지쳐있다면 요양이라도 할 겸 황궁으로 오지 않겠나? 사람들과 가벼이 검술 연습이라도 하면서 몸을 추스르는 것도 좋을 듯 한데.” 그랜사이어의 권유에 줄리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짜내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검을 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냥 차 라리……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서글픈 읊조림 같은 그의 말이 응접실을 울렸다. 줄리탄의 시선은 무언가 에 주저하며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테이블 위를 맴돌고 있었 기에 줄리탄을 바라보는 세라피스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져가고 있음을 볼 수 없었다. 그때 바람이 몰아치는 기분과 함께 날카로운 살기가 줄리탄을 찔렀다. 카르르륵! 갑작스레 닥쳐오는 섬뜩한 기운에 줄리탄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세라피스 가 뽑은 칼날의 끝이 줄리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 뒤였다. 멈춰버린 듯한 줄리탄의 얼굴에 핏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주인님!” 순간적이었다. 세라피스가 줄리탄을 향해 검을 뽑은 것을 본 시링크스가 자신의 두 손에 마력을 모았지만 세라피스의 두렵게 치켜 올라간 눈빛은 줄리탄을 향해 고정된 채 그의 목에 가져다 댄 검을 거두지 않았다. “세라피스야!” 그랜사이어가 난색이 되어선 외쳤다. 아마 전 대륙에서 세라피스보다 발 검(發劍)이 빠른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랜사이어와 마르켈라이쥬 마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뽑은 세라피스의 검은 마치 그의 울분처럼 일말의 떨림도 없이 줄리탄을 향하고 있었다. 파르낫소 역시 하 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라피스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계속 곁에 있던 그로서도 겨우 두 번째. 오래 전 황궁에서 나와 방랑 을 선택했을 때 마약에 취해 있던 자신의 형, 황제를 죽이려 했던 그때를 제외하면 그의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몇 분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세라피스의 낮은 목소리가 줄리탄을 찔렀다. “왜 그런 꼴이 되어 버린 거냐 줄리탄. 죽었어야 했다고? 젤벤더에서 죽 는 게 좋았다고 말한 거냐. 나는 네가 그곳에 가서 뭘 봤는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겨우 겨우 살아 돌아와서 고작 그 따위 말을 해 버리면 그토록 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야! 항상 널 지켜 보며 ‘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던 나는 뭐가 되는 거냐고!” 세라피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줄리탄을 찌를 것처럼 이어지 고 있었다. “말해라. 지금까지 장난친 거라고. 내일 죽어도 좋아! 하지만 그 때까지 는 절대로 그런 꼴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해! 그렇지 않으면 …… 너는 지금 이 칼에 죽는다. 스스로 완벽하게 체념한 사람이라면 네 말대로 차라리 죽는 게 나으니까.” 안전한 자리에 숨어서 자신의 신념이랍시고 상대를 무시하는 고집을 외쳐 대는 짓거리는 바보도 한다. 하지만 줄리탄은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에서도 자신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음을 주저 없이 증명했기 때문에 사 람들이 그를 기억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져 버린 줄리탄을 바라보는 세라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죽어버린’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탄은 목언저리에 다가온 차가 운 칼날에도 불구하고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포기하 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다시는 그녀의 그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볼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줄리탄의 모습에 세 라피스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거두었다. “넌 씰이 되어 버린 거냐…….” “……!” “카넬리안 없인 살아가는 방법도 모르는 그 모습이 씰과 다를 게 뭐야. ” 확실히 지금 줄리탄의 눈동자는 씰을 닮았다. 모든 것에 권태롭고 도전이 니 변화니 하는 몸부림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그런 눈빛. 카넬리안이 보여줬던 그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넌 카넬리안을 진심으로 사랑하긴 한 거냐.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 는 건 상대의 단점까지 사랑한다는 거야. 그런데 너는 더 이상 카넬리안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겁에 질려서는 죄다 포기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도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 냔 말야!” 줄리탄은 카넬리안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찾는 ‘그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포기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 실일까? 정말로 카넬리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어쩌면 어딘 가 깊은 곳에 유폐(幽閉)되어 여전히 줄리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넌 단지 네 마음에 들었던 여자가 변해버린 것이 억울해서 희망을 포기 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뿐이야. 그런 유리 같은 신념이라면 차라리 없 는 편이 나아. 그런 신념은 금방 깨져버려 그 조각들이 주변 사람들을 다 치게 만드니까.” “…….” “너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수백 수천년 동안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았던 여자를 도와줄 수 있겠어. 넌 단지 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카넬리안 ’이라는 허상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그 허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있었을 뿐이야. 잘 들어라. 희망은 절대로 너를 배신하지 않았어. 단 지 네가 희망을 배신한 거지.” 사랑의 의미가 항상 낭만적이고 달콤한 것이었다면 아마 세상 모두가 포 기하지 않고 그것을 ‘즐기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사랑은 금새 지쳐버리는 것이고 자주 지겨워지는 것이고 돌아보면 언제나 후회되 는 것이고 너무 쉽게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참을 수 없이 황홀해서 끊을 수가 없는 마약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길고 지루한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무도 두껍고 재미없어서 금방이라도 덮어버리고 싶은 그런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기까지의 끈질긴 과정. 세라피스 역시 몇 번이나 사 랑을 가장한 멋들어진 미망(迷妄)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사랑의 모양이 끝 없이 가꿔져야 하는 볼품 없는 난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줄리탄의 눈물이 물을 머금은 별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대답할 수 없었다. 세라피스를 향해서 ‘멋대로 생각하지마!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라고 이제는 대답할 수 없었다. 2. 한편 줄리탄을 따라온 카밀과 쿄쿠로는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메르퀸트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에 한달 내내 감동에 휩싸여 있는 중이었다. 의외 로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은 소박한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지 만 특히 카밀은 메르퀸트의 제자라도 되려는 듯이 그녀를 졸졸 따라 다녔 다. “언니는 정말 정말 정말 우리 엘프들의 희망이에요! 이미 이실라트 대륙 의 엘프들 중에서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꺼에요!” 카밀은 아이돌 스타를 쫓아다니는 팬들처럼 꺄악 꺄악 거리며 메르퀸트에 게 착 달라붙어 있었지만 메르퀸트는 ‘언니’라는 호칭에 무척이나 괴로 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난 남자라니까!’라고 화를 낼 ‘성깔’도 없 었으니까 그냥 몹시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뿐이었 지만. 훤칠한 남자 엘프로 시작해서 백여년간 인간들 손에서 팔려 다니던 메르퀸트가 ‘엘프의 빛’까지 오게 될 줄은 자신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거다. 카밀은 같은 엘프들 사이에서도 뭔지 모르게 매력적이고 이국적인 메르퀸트의 외모에도 푹 빠져 있었다.(하긴, 이것에 대해서는 줄리탄마저 당해 버린 적이 있었지만.) “언니는 아무리 봐도 정말 대단한 미녀에요! 같은 여자인 저도 반할 만 큼…….” “미, 미녀 아니에요!” 메르퀸트가 결국 얼굴이 빨개져선 울상이 된 목소리로 말한 뒤에 도망쳐 버렸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카밀. “굉장히…… 겸손한 분이야 정말.” 카밀은 아직도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Blind Talk 이만 자야 겠습니다. 전혀 졸립지는 않지만 마감도 끝났으니 다시 생활 사이클을 바꾸기 위해 잠들어야 겠네요. 그럼 이만~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뭐 그래도 소개는 이어집니다.-_- 저는 애연가인 만큼 라이터 수집가 입니다. 지포나 윈드밀, 듀퐁 같은 브 렌드들의 라이터들을 수집하고 있는데 특히 지포쪽은 Giger collection이 나 그외 이것 저것들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가장 모으고 싶은 것은 킹기도라 은장지포였지만... 결국 일본 에 가서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지포 한정판은 꼭 나왔을 때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웃돈을 줘도 구하기가 힘드니까요.) www.zippotricks.com 술자리 같은 곳에 가면 꼭 지포라이터 가지고 희안하게 불을 켜는 녀석들 이 있죠. 이 사이트는 지포를 가지고 얼마나 '쌩쇼'를 할 수 있는지를 알 려주는 곳이랍니다.(저도 이 사이트에서 보고 연습하고 있음.-_-) 특히 Submitted Tricks란에 가셔서 Hard Tricks에 있는 Fresh Touch는 꼭 보시길... 언젠가는 그 기술을 하고야 말겁니다!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리엔 라임즈의 Blue를 들으며... (국내에선 코요테 어글리의 OST를 장식한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어 린 나이로 컨츄리 음악을 불렀을 때부터 좋았습니다...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7-04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3 글쓴이:billiken 조회:12 날짜:2001/10/20 09:30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4 Color of The Soul 1. 물키벨이 다른 해룡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채 바다를 건너 찾아간 곳은 헤스팔콘 해안가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하지만 말이 카페지 헤스팔콘 황 실의 붕괴와 계속되는 내전 때문에 주인마저 떠나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있 는 그곳을 물키벨이 찾았을 때는 이미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포장되어 있 는 초저녁이었다. “오느라고 수고했어.” 쓰러질 듯한 나무문을 열고 물키벨이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구석의 먼지 쌓인 테이블 곁에 앉아 있는 자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둑한 실내에 들어찬 그림자의 베일 속에서 그의 모습은 실루엣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물키벨은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삐죽거리 며 말했다. “저번에 줄리탄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오펜바 하.” 다가가는 물키벨의 시선 속에서 희미한 저녁 빛에 오펜바하의 모습이 드 러나고 있었다. 늑대 같은 노란 눈동자를 오만하게 치켜올린 모습. 오펜바 하는 그런 물키벨을 향해 흥얼거리듯 대답했다. “구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마치 그 녀석의 누나쯤 되는 듯한 말투로 군. 하긴…… 예전에도 넌 그 놈을 좋아했잖아? 여전히 마음이 있나 보네? ” “맘대로 생각해.” 오펜바하의 눈빛을 피한 물키벨은 퉁명스런 얼굴로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마치 시녀처럼 오펜바하 뒤에 서 있던 미쉘은 전 주인이었던 물키 벨이 나타나자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며 불빛 하나 없는 주방을 향해 걸어 갔다. “저…… 차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내 것도 한잔 더.” 미쉘은 카페에 남아 있는 재료들로 차를 만들고 있었다. 어설픈 손놀림은 여전했지만 오펜바하 역시 여전히 그녀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고 있었다. 오펜바하가 고개를 돌린 채 앉아 있는 물키벨을 향해 말했다. “테싱이 이제부터 뭘 할지는 너도 짐작할 수 있겠지?” “…….” 물키벨 역시 오펜바하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어두운 주 방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미쉘의 희미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창틀이 바람에 덜걱이는 소리와 멀리서 파도가 흐느끼는 소리만이 주인 없는 카페 안을 맴돌 뿐이었다. 먼저 힘없이 말을 꺼낸 쪽은 물키벨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간단해. 내가 가랑을 죽이겠어.” “……!” “그리고 너는 그 녀석에게 가서 테싱이 가랑을 죽였다고 말하면 되는 거 야.” 물키벨은 오펜바하가 그 말을 꺼내리라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가랑을 죽 인다.’는 말에 흠칫 놀라며 작은 어깨를 떨었다. 물키벨의 원망스런 눈빛 을 똑바로 바라보는 오펜바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그 말을 들으면 미쳐서 테싱을 죽이러 가겠지.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테싱은 그 녀석을 죽이지 못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결국 물키벨은 오펜바하의 말을 끊으며 찢어져라 소리쳤다. “줄리탄을 이용하자는 거야? 우리 모두 그렇게 그 녀석에게 죄를 지어 놓고 이번에도 또 이용하자는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있어! 그들은 이제 겨 우 만났어. 그런데 죽이자고? 너야말로 미쳐있어!” “난 미치지 않았어. 수십만 년을 살았지만 아직은 미치지 않았어. 네 말 대로 또 이용하지 않으면 모두 죽으니까 이용하려는 것 뿐이야. 지금은 감 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물키벨은 단순하지만 차가운 논리를 말하는 오펜바하를 쏘아보았다. 그녀 는 ‘죄다 미쳐있어.’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다가 작은 주먹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정을 빼면 우리에게 뭐가 남지? 넌 정말로 자신이 용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난 이제 지쳤어. 또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아! 그런 짓을 해서 또 지겹게 살아남을 바에는…… 차라리 죽고 싶단 말야!” 괴롭게 소리치던 물키벨은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보 같은 여자’라며 차갑게 내뱉은 오펜바하가 처음으로 물키벨을 죽여버릴 듯이 소리쳤다. “물키벨!!” 그리고 그와 함께 물키벨 앞에 나타난 오펜바하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쥐며 살기를 뿜었다. 낡은 카페 전체가 무너질 듯 울릴 정도의 무서운 기 운이었다. “고상한 척 하지마! 빛 바랜 추억에나 집착하고 있는 주제에!” “이…… 이것 놔!” “죽고 싶다고 말했지? 그럼 죽여주지. 어차피 테싱이 죽일 테니까 그 전 에 내가 죽여도 상관없겠지!” “으윽! 놔! 노, 놓으란 말얏!” 잔인한 살기를 드러내는 오펜바하가 들어 올린 물키벨은 허공에 떠 있는 발을 흔들며 괴롭게 소리치다 오펜바하의 뺨을 때렸다. 지상에서는 키 작 은 인간여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그녀의 손바닥은 단지 서럽게 오펜바 하를 때렸을 뿐이었지만 그는 물키벨을 잡았던 손을 풀며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물키벨이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오펜바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펜바하가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농담이었어. 하지만…….” 물키벨은 몸을 일으키며 오펜바하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문을 박차고 밖으 로 나가버렸다. 오펜바하는 어둑한 해변가로 긴 머리칼을 흔들며 사라지는 물키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테싱은 나처럼 농담으로 끝내지는 않을 꺼야. 정말 이제 죽 을 셈이냐 뮬렌 키에르 벨?” 터벅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테이블 위로 돌아온 오펜바하는 자리에 앉으 며 을씨년스런 카페를 새삼 다시 둘러보았다. “용의 둥지라고 하기엔…… 참 초라한 모습이군. 하긴 현실은 동화가 아 니니까.” 두 잔의 차를 가지고 온 미쉘은 반쯤 열려 삐걱거리는 문을 바라보고 있 는 오펜바하에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줄리탄님은 어떤 분이시죠?” 그 녀석을 생각하면 자꾸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잠긴다. 오펜바하는 약해 지는 눈빛을 숨기려 조용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인간일 뿐이야.” 미쉘이 아무리 오펜바하의 테이머지만 두려울 정도로 강한 그에게서 감상 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쓸쓸함이 희미하지만 쓰디쓴 향기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때. “주, 주인님?” “얼레?” 미쉘과 오펜바하는 창 밖에서 해안가를 덮치며 다가오는 엄청난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라리 해일(海溢)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정도의 굉장한 규모. '감히 누구 목을 조르는 거야!'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물 길이었다. “무, 물키벨! 너!” 오펜바하가 당황스런 목소리가 그 파도 속에 묻혀 버리며 카페는 폭격 같 은 물길 속에 삽시간에 박살나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펜바하와 미쉘 외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던 게 다행이지 도시 한 두개쯤은 단숨에 삼켜버렸을 무시무시한 파도. 물키벨의 분노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거 창하게 바닷물이 휩쓸고 지나간 초토화된 해안가에서 반쯤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오펜바하는 황망한 표정으로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히스테리 컬한 성격에 치를 떨었다. 물에 흠뻑 젖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지룡의 수장이라니, 무섭다기 보다는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자, 자, 자기야말로 멋대로 용의 힘을 쓰면서 뭐가 추억이고 감정이냐!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질 않는 거냐 이 발육 부진 여자야!! 제기랄! 그냥 너 같은 여자는 아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무지하게 억울했다. 자기 혼자 인정 넘치는 대사를 읊어놓고 물벼락까지 먹이다니 도무지 용서 못할 여자였다. 대답 없는 바다를 향해 죽어라 포효 하는 오펜바하였지만 쓸쓸히 파도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얄밉게 혼자서 방벽을 만들어 몸을 보호한 미쉘이 그 모습에 드물게 쓴웃음을 지으며 지 켜보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주인이지만 아주 가끔씩귀엽게 웃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이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Blind Talk 짧죠? -_- 짤습니다... -_- 아무리 비축분이라고 물쓰듯이 써버렸다간... 3,4회 가서 결국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흐음. 현재 시가에 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건지 미처 몰 랐는데... 예전 어떤 분의 담배와 관련된 메일을 받고 궁금증이 생겨서 결 국 책을 충동구매. 이걸 일찍 읽었다면 톨베인과 헤스페리아의 담배 산업 에 얽혀 있는 기묘한 관계에 대해 재미있게 묘사할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쿠바산 아바나 시가 같은 굵직하고 긴 시가들은 잘 피우지 않 습니다.(왜냐면 비싸게 때문-_-) 그래서 단단하고 얇고 긴 미국풍 시가들 을 피우는 편인데(물론 한달에 중저가 브렌드 한두개 정도 사는 편) 역시 특별한 당골이 없는 이상 시가 구입에는 백화점이 좋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일산 롯데 백화점에 가끔 들려서 새로 나온 담배가 없나... 기 웃기웃 거리고 있는데 의외로 아주 극소량으로 스페인산이나 쿠바산 시가 레트(시가 아님)가 들어오는데 그때는 언제 또 다시 들어올지 아무도 모르 니 잽싸게 구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라는 말은 예전에 했던가.-_-a 아무튼 마지막으로 구입한 것이 쿠바산 필터담배인 로미오와 줄리엣(!)입 니다만...(케이스에는 로메오요 줄리에타라고 쓰여 있음.-_-) 쿠바산 필터 담배라니 생각도 못했어! 라는 기쁨을 안고 물경 세개나 돈 탈탈 털어 구 입해 와서 불을 당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가레트의 탈을 쓴 시가더군 요... 어떻게 블렌딩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 풍만하고 굉장하며 독한 향 기는 정말이지... 결국 시가 피우듯이 연기를 삼키지 않으며 감상했습니다 .(역시 애연가인 kiyu군이 피워보고는 '이것은 상등품이 아닌가!'라며 감 동을... 확인해 보니 쿠바의 영국 수출 담배더군요. 게다가 하바나산. 쿠 바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최상등품은 전량 수출하고 있음...) 에... 또 시시한 얘기로 잡담을 장식해 버렸습니다.-_-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사실 이건 평범한 영화배우 팬 사이트입니다.(단 이 배우의 팬 사이트를 전 세계에서 이것 하나 밖에 못찾긴 했지만.-_-) 만약 이 사이트에 들어가 셔서 화면에 나오는 얼굴을 영화에서 보셨다면 적잖게 헐리우드 영화를 본 분이시고 이 배우가 나오는 영화들을 5개 이상 말하실 수 있다면 헐리우드 영화 매니아시고 만약 이 배우의 이름까지 알고 계시다면... 제게 연락주 시길. 술이나 한잔 하죠.-_- http://members.aol.com/Skycolors/Tagawa/tagawa.htm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브레드 피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이완 맥그 리거다... 좋아할 때 저는 스티브 부세미 좋아했고 데니 트레죠 좋아했고 하비 케이틀 좋아했고 이 배우 캐리-카타와 히로유키가 나오는 영화라면 영화가 ULTRA R등급이든 표절이든 3류든 상관 없이 좋아했습니다.(비슷한 배우로 스티븐 시걸이 있습니다.-_- 그 양반이 상대방 관절 우드득 우드득 박살내는 광경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노라면... 니르바나의 상태가 되는 것 같다는... 그래서 시걸 영화는 일단 봅니다. 그리고 화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상하게 브루스 켐벨은 별로 더군요. 제 주변의 많고 많은 B급영화 매니아(피터 잭슨 추종자, 샘 레이미 추종자, 로드리게스 추 종자 등등... 저는 굳이 말하자면 마이클 만의 영화나 드라마라면 일단 열 광합니다.)들은 브루스 켐벨의 등장 영화 꾀고 다니고 대사나 목소리까지 따라하면서 술자리 분위기 우중충하게 만들던데... 브루스 켐벨은 로버트 듀발과 함께 생리적으로 거부감 생기는 배우 중에 하나.(감독 중에서는 닐 조던 감독의 연출이라면 질색. 잘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보면 마구 화가 남!) 아무튼 세상에 하나 뿐인 캐리-카타와 히로유키의 팬 사이트를 감상하시지 요.-_-(혹시... 이 사람의 다른 팬사이트 찾는다면 귀뜸좀...) 이번 팀 버튼의 혹성탈출REMAKE에 독립영화의 악동 팀 로스(!)와 더불어 캐리-타카와 히로유키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영화관으로 직행.(그런데 컨 추리 가수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왜 나온 거냐.-_-) 그러나 끝까지 나 의 히로유키 씨는 대체 어디에 나온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좌설감.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오피셜 사이트를 뒤졌고 결국 히로인 원숭이의 보디 가드였던 고릴라가 그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_- 그 엄청난 분장! 크아아아악! 그 양반이 혹성탈출에서 유일하게 동양풍의 검을 들고 적들을 베어버릴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훗훗. 고릴라가 검술을 하던 광경 은 정말이지 생각만 하면... 헉!(삼천포로 빠지다가 정신차렸음.) 아무튼 이만 물러갑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윤정의 Seduce를 들으며... (나이트에 가서 몇번이나 들은 뒤에 돌아와서는 제목도 모르고 흥얼 흥얼. 별로 가요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역시 삐삐밴드 때 목소리가 상당히 남 아 있어서 기쁘군요.)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17-05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4 글쓴이:billiken 조회:206 날짜:2001/10/21 17:52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5 Helpless 1.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빼놓지 않고 벌어지는 잔인한 축제가 하나 있다면 그 건 바로 ‘피의 숙청’일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권력을 잡았음을 만방에 알리고 또한 무자비한 군주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감정적인 쇼맨십이 또 있을까. 물론 숙청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념에 의한 숙청, 공익에 의한 숙청, 사익에 의한 숙청…… 그 중에서도 가르바트의 대공, 코머런트 가 실행한 것은 ‘과시욕에 의한 숙청’이었다. “아아아악!” 전 북해 기사단의 용맹스런 여기사 중 하나였던 레이샤는 대(大)콜로세움 의 돌바닥 위에 피를 뿌리며 몇 번이나 쓰러졌지만 조작된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코머런트가 친히 참관한 이 투기장(鬪技場)에 가득 차 있는 관객 들은 도무지 정상적인 경기라고 말할 길이 없는 이 잔인한 조작극에 새하 얗게 얼굴이 질린 상태였지만 만신창이가 된 레이샤를 유린하듯 검을 휘두 르던 놀센 기사단의 일원은 여유만만한 미소까지 지으며 쓰러진 북해 기사 단원의 머리칼을 쥐어 일으키는 것이었다. “자 말해라 고집 센 계집애! 코머런트 각하께 충성을 다짐하겠다고. 그 럼 각하께서 목숨을 살려주고 말단 직위라도 주는 자비를 베풀 것이다. 하 지만 거절한다면…… 기사로서 가장 굴욕적인 죽음을 선사해 주지.” “꼬리를 쳐서 작위를 얻은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기사로서 최악의 불명예는 바로 사욕을 위해 주군을 바꾸는 거다. 나의 주군은 우테 여황 폐하 뿐, 너희들의 작당에 놀아날 생각은 없어! 네 놈 같은 코머런트의 개 는 그걸 이해조차 못하겠지만…… 아악!” 중상을 입은 몸을 떨며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레이샤였지만 그녀의 입에 서 나온 표독스러운 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인상이 일그러진 사내가 그 런 레이샤의 뺨을 때리며 다시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한 모습이다. “웃기고 있네. 네 년이 믿는 그 잘난 우테와 마르켈라이쥬는 이미 겁을 처먹고 달라카트로 도망쳤어! 주인 잃은 들개는 바로 너희들이란 말이다. ” 약점을 찔린 것에 화가 난 놀센의 기사가 반쯤 실신한 레이샤의 복부를 걷어차며 소리쳤지만 레이샤는 떨리는 눈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놓친 자 신의 검을 찾길 멈추지 않았다. “마르켈라이쥬 경은 도망친 것이 아냐. 우테 폐하를 지키고 너희 같은 이리떼들과 결탁하지 않기 위해서 이 제국을 떠난 거란 말이야!” 레이샤가 혼신의 힘을 다하며 눈물을 뿌리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마치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의사(義士)의 울부짖음 같아서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코머런트 패거리의 ‘폭행 ’은 끝나지 않은 채 코방귀만 낄 뿐이었다. 숭고한 기사도 따위는 멋진 성도 엄청난 부도 권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년. 이미 대세는 각하에게 기울었다!” “그래? 그럼 코머런트가 권력을 잃으면 네 놈들은 또 주인을 바꾸겠군. 그리고도 기사냐!!” “이, 이게!” 더 이상 기사들의 대결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센의 기사는 쓰러진 레이샤를 마구잡이로 짓밟고 있었다. 검을 쥔 레이샤의 손목을 피묻은 군 화발로 밟고 있는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가학적으로 소리쳤다. “그 잘난 기사도를 죽도록 후회할 때까지 고통 받아 봐라!” “으아아악!” 정상적인 결투였다면 마르켈라이쥬의 휘하에서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아온 북해 기사단을 급조된 코머런트의 사병집단인 놀센 기사단이 이길 가능성 은 제로였다. 하지만 코머런트가 주최한 이 경기는 처음부터 가르바트에서 은거하고 있던 북해 기사단들을 공개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처형’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형대였기 때문에 경기장 주변에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배 치되어 있었고 북해 기사단 쪽에서 조금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사방에서 마 법세례를 당했던 것이다. 마르켈라이쥬의 눈에 들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해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던 레이샤 역시 이런 함정에선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미 십여명의 북해의 기들 역시 이 자리에서 죽어간 뒤였다. 2. “크하하핫! 저 꼴을 보라고 스테온. 저런 몰골로 죽을지 뻔히 알면서 여 기까지 오다니! 기사라는 놈들, 정말 우둔하고 단순한 작자들 아닌가? 그 건 그렇고, 에잇! 술! 술이 떨어졌다!" 코머런트는 경기장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레이샤가 항복도 투항도 없이 바보처럼 계속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을 지켜보며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 다. 스테온은 어두운 표정으로 마치 재미있는 희극을 감상하는 듯 희죽희 죽 거리는 코머런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기사는 단순한 존재입니다. 이곳이 뻔히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타나지 않으면 불명예라 생각하며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 찾아왔을 만큼 기사들은 하나만 바라보는 단순한 존재가 맞습니 다. 하지만 사람들은 역시 그들의 단순하지만 강렬한 의지를 존경하고 그 것에 감동 받는 것입니다. 저들을 저런 식으로 처형하는 것은 일순간 각하 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저들의 확고한 의지를 제국의 시민 들에게 뚜렷이 알리는 결과가 됩니다. 저들은 단순한 만큼 피를 흘리지 말 고 회유했어야 했어야 합니다. 왜 그것을 모르십니까 코머런트 각하.’ 코머런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북해 기사단을 자신의 손아귀로 맘 대로 가지고 놀고 있는 경기장의 광경에 무척이나 흡족해하는 모양이었지 만 스테온의 예상대로 이미 관중들은 그 잔인하고 기괴한 악취미에 질려가 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들만큼이나 민중들 역시 우중(愚衆)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한 만큼 한번 고개를 돌리면 더 이상 돌 아오지 않을 자들인 것이다. 민중의 지지를 잃은 제국은 사상누각일 뿐. 스테온은 쉽게 먹은 가르바트가 그만큼 쉽게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관중석에선 스테온과 같은 시선으로 콜로세움의 '유혈의 유희’를 지켜보던 자가 있었다. 3. “저런 식으로 다 죽여 버리면 나중에는 뭐가 남을까. 코머런트라는 작자 는 시체들의 왕이 되고 싶은가 보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세련된 안경을 낀 섬세한 외모의 사내가 냉소를 보 이며 레이샤가 비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북해 기사단을 저런 식으로 욕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곁에 있던 연상으로 보이는 여자는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며 치를 떨 고 있었지만 그 청년은 여전히 비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권력에 맛이 들린 자들은 자신들이 하늘 위에 떠 있는 줄 알고 평소에 는 상상도 못하던 짓거리를 서슴없이 저지르지. 그럴수록 추락할 때 더 고 통스럽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야.” 분노도 동정심도 없이 마치 당연한 사실을 얘기하듯 차갑게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리하르트였다. 그는 대범하게도 가르바트의 중심인 이곳까지 간 단한 변장만을 한 채로 로즈마이어와 함께 와서는 직접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이나 가르바트의 치안 수준이 형편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실제 리하르트가 이곳까지 침 투해 오는데는 몇몇 군인들과 관리들을 매수하는 금화 몇 십 닢만으로 충 분했던 것이다. 갑옷조차 허용되지 않은 레이샤는 이미 옷이 찢겨진 반라 가 된 채 죽을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긴 모습인데도 그것을 바라보는 리하 르트의 지나치게 태연하고 냉정한 태도에 로즈마이어가 내심 화가 난 듯 그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제가 저렇게 될 수도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그럼 네가 내려가서 도와주려고?” “그건 아니지만요!” “저건 차라리 행복한 거야.” “예?” “내가 살던 빈민촌에서는 수년마다 한번씩 사신처럼 역병이 돌았지.” 레이샤가 그나마 행복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리하르트의 눈이 차갑게 빛나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런 죄도 없고 저 기사처럼 숭고한 신념조차 없는 빈민들이 너무도 목이 말라 더러운 물을 마셨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전염병에 걸려 강제로 창고 속에 격리되게 된다고.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비극도 아니야. 낭만적인 투쟁도 아니지. 단지 고통만 존재해.” 리하르트가 아주 가끔씩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말할 때면 그의 눈빛 은 어느 때보다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마치 이 세상의 소위 높은 것들을 향한 무언의 분노처럼. 억양도 높이지 않고 풀어놓는 리하트르의 말은 조 용히 하지만 서늘하게 이어졌다. “창고에 격리된 병자들은 먹을 것조차 지급되지도 않아. 피를 토하며 죽 은 뒤에도 가족조차 묻어줄 수 없어. 그 잘난 헤스팔콘 황실에선 빨리 전 염병에 걸린 자들을 죽이라고 으름장만 놓을 뿐이지. 그래서 병자들로 창 고가 가득 차면 그냥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직접 태워버리는 거야. 불길에 휩싸인 자들의 비명에 귀를 막으면서. 그렇게 죽은 자들을 누가 기억이나 해 줄까? 잿더미가 된 시체들을 긁어서 밀밭에 뿌릴 뿐이야.” “……리하르트님.” “사실 여섯 살 때인가, 나도 그 병에 한번 걸렸어. 하지만 창고에 갇히 게 되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멀어가고 얼음 속에 묻힌 것처럼 몸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산 속으로 도망쳤지. 그리고 그 산 속 에 숨어서 머리가 깨져버리는 고통 속에서 며칠이고 견뎠던 거야. 어느 누 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을로 돌아갔 더니……. 하하, 부모가 모두 병으로 죽어 있더군. 저 기사는 죽은 뒤에 시간이 흐르면 순교자로 칭송되겠지. 내 부모는 똑같이 고통스럽게 죽었는 데도 비료가 되었지만.” 경기장의 유린극 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이야기였지만 그건 사실 빈민촌 어 디서나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리하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억지로 미소지으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투정부린 거야. 재미없지 이런 얘기?” 로즈마이어는 아무 말 없이 리하르트의 차가운 손을 꼬옥 쥐며 불안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정말이지 세상 이곳저곳이 지독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잔 인하다. 그것도 차별적으로. 리하르트의 손을 놓으면 그대로 그가 다시 그 잔인한 땅에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로즈마이어는 리하르트의 얼굴 이 빨개졌는데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어어! 누구야 저 자들은!!” 갑자기 관중들 사이에서 커다랗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리하르트 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중석으로 눈을 돌렸다. 그 의외의 사람들은 레이 샤가 죽어가고 있는 경기장 한복판으로 조금의 주저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 던 것이다. -Blind Talk 이번 편 잡담은 쉽니다... 팔자에도 없는 집회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E-MAIL : billiken@hananet.net 듣고 있는 음악이 없습니다.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 17-06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5 글쓴이:billiken 조회:65 날짜:2001/10/23 01:47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6 Never Heart 1. “어떠냐? 이제 좀 후회되지 않냐?” “죽여라!!” 단정하던 옷이 모두 찢겨나간 채 일어설 힘도 없이 죽음의 끝에 와 있는 레이샤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사자의 그것처럼 불타며 오열에 가득 차 울부 짖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혀를 찬 놀센의 기사는 슬슬 끝내야겠다 는 생각에 그녀의 가슴을 짓밟으며 장검을 들어 올렸다. 이런 고집불통 여 자가 아니라도 아직 ‘사형대’에 오를 북해 기사단들은 넘쳐흐르니까. 그 때 관중들의 커다란 술렁거림이 경기장을 덮었고 당황하던 그는 등뒤에서 들리는 기괴한 진동음에게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코머런트의 놀이터에 단신으로 들어올 자는 아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미친놈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미친놈도 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기사고 권력이고 모두 권태로움에 내팽개친 자니까 이런 곳에 난입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그런 자였다. “너, 너희들은 세이드와 레오폴트!” “날 알고 있나 보군.” 가르바트에 들어왔다던 ‘검은 추기경’ 세이드와 ‘신창’ 레오폴트가 자신의 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나자 사색이 되어선 조금 전까지의 저질스런 승리감을 집어던지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세이드야 말로 위협도 회유도 안 통하는 최악의 기사인데 ‘이 놈! 놀센 기사단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외쳐봐야 돌아오는 건 칼날뿐이었던 것이다. “미, 미친놈! 왜 이곳에 온 거냐!” “이렇게 피 냄새가 나는 곳에 나쁜 벌레가 몰려들기 마련이지.” “마법사들! 뭐하고 있나! 리히트야거의 잔존병이다! 제국의 이름으로 척 살 해라!” “리히트야거라…… 그 이름 지겹게 따라다니는군.” 세이드의 등장에 체면을 구긴 코머런트가 술잔을 경기장으로 집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금새 레이샤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마법사들이 두 팔을 뻗으며 마력을 뭉쳤다. 개개인은 그리 대단찮은 수준일지 몰라도 수십 명 이상이 동시에 공격한다면 세이드라고 해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 도 세이드는 자신을 노리는 마법사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따위 것을 시전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날 죽이겠다고?” 세이드는 상대의 마법을 방어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이 다. 미동조차 하지 않은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 니 그것은 단숨에 경기장 주변에 아무런 경호도 없이 서 있던 마법사들을 감염’시켰고 십여명 마법사들의 몸이 풍선처럼 퍽퍽 터지기 시작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로브를 시뻘겋게 물들이면서 마법사들이 쓰러지고 있었고 제대로 발사된 다른 마법들 역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 고 세이드를 보호해 주던 레오폴트의 기력에 튕겨나가버렸다. 세이드는 쓰 러진 레이샤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허약한 마법사들은 반격 당하지 않을 곳에서 보호받고 있어야 하는 게 싸움의 기본이야. 이런 시시한 경기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지켜야 할 것 아닌가.” 한편 레이샤는 수치스럽게 드러난 자신의 반라의 몸을 가리며 심하게 휘 청이는 몸을 일으키다가 굳어버린 얼굴로 세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세이드를 알고 있었고 단 한번 전쟁터에서 그와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 를 향해 검을 날렸지만 일합에 완패하고 몇 개월이나 병상에 누워야 했던 기억이 난다. 북해 기사단 최악의 악몽이었던 세이드가 이곳에는 왜. “세……세이드…… 폰 러셀.” “기사의 막장이라는 것이 항상 거룩한 건 아니로구만. 날 항상 귀찮게 했던 북해 기사단의 꼴이라니...... 자결하는 법을 잊어버린 건가?” 세이드가 레이샤에게 검을 들이대며 비아냥거렸지만 레이샤는 그의 말뜻 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를 구해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 다고 자신에게 치욕을 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가르바트가 이 꼴이 된 것을 지켜보며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짧은 생명이야. 그래도 내 손에 죽으면 최소한 전사가 되는 건가?” 그리고 세이드의 검이 울리며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단번에 심장이 뚫린 레이샤는 바닥에 쓰러졌다. 한편 레이샤라는 고문 대상을 놓친 놀센의 기 사는 세이드의 검이 이번에는 자신을 향하자 얼굴이 죽을 빛으로 굳어 버 렸다. 그래도 코머런트가 보는 앞에서 어쨌든 기사로서 검을 내던지고 도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고 내 뒤의 멍청한 여자는 같이 죽어도 좋다 면서 쫓아온 거니까 우리에겐 아무 말도 안 통해. 그러니 헛소리 읊을 생 각은 집어치우고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들어라.” “……미친 놈.” “왜? 여자밖엔 못 죽이나?” 세이드의 자기 파멸적인 기백에 눌려 아무 말 못하는 기사였지만 그렇다 고 상황이 세이드에게 유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순식간에 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유흥’을 즐기고 있던 백여명의 놀센 기사단 본대 가 완전무장을 한 채 몰려들었고 금새 세이드와 레오폴트의 주변을 포위하 듯 둘러쌌다. 세이드가 악마적인 화력을 가진 최강최악의 기사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런 절대적 수적 열세에서는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 분 명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코머런트는 도리어 잘되었다며 ‘안전한 곳’에 서 얼굴이 벌개져선 소리치고 있었다. “저 헤스팔콘의 망령들을 짐의 이름으로 처단해라! 가르바트의 힘을 보 여 주는 거야!” “으하핫! 세이드! 꼴 좋다! 이래도 설칠 수 있겠나? 어디 날 찔러…….” 주변에 몰려든 동료들을 보며 ‘용기’를 얻은 예의 기사가 세이드를 향 해 소리쳤지만 그와 함께 날아든 세이드의 검기는 그의 말을 끊으며 목을 잘라버렸다. 몰려 있던 기사단은 입이 쩍 벌어져선 수백 미터나 날아가고 있는 동료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베어 버리다니. 세이드는 자 신의 검신에 흐르는 피를 떨구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 죽으러 왔다고. 농담으로 들렸나?” 스테온 역시 세이드와 레오폴트가 나타난 것은 의외였지만 그렇다고 위험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 지쳐버린 세이드가 자신의 무덤을 이곳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이드는 이런 고립무원의 상황 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아주 즐거운 듯이 잔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 를 기울였다. 마치 죽음 외엔 벗어날 길이 없는 지루한 게임의 끝까지 와 버린 기분.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호밀 밭의 허수아비가 되고 싶어. 넓은 금색의 밭에 홀로 서 있는 헝겊인형. 새들에게 뜯어 먹혀도 지금보다는 가치가 있 겠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레오폴트. 내기할까? 우리 몇 명까지 죽이고 죽을지.” “…….” 레오폴트는 슬픈 표정으로 자신의 애창 알-파티아를 들며 세이드의 옆에 섰다. 그녀가 바랬던 것은 이런 것은 아니었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세이 드와 함께 이 끝없는 허무함 속에서 구출될 수 있는 ‘구원’을 기다렸다. 그녀는 허튼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랬다. 그렇지만 아무리 황야를 방황해도 구원도 고해(叩解)도 없었고 오직 텅 비어있는 공허함만 이 숨막히게 차 오르는 이 세상에서 세이드는 세례(洗禮)도 속죄(贖罪)도 없이 죽음이라는 휴식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오폴트도 그런 세 이드의 휴식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씁쓸한 과일을 베어 문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늑대가 자신의 인생을 끝마치는 방법인가……. ” 그리고 그런 것을 안식(安息)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3. 세이드와 레오폴트를 조여오는 놀센 기사단의 포위망 속에서도 세이드의 세상과 자신을 싸잡아 조롱하는 특유의 눈빛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도 리어 그것을 즐기며 죽음을 장식해 줄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세이드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지며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 렸다. 레오폴트도 마찬가지로 그 ‘기운’을 감지하며 세이드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싸움을 즐기던 자들은 상대가 뿜어내는 살기 나 투기(鬪氣)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느낀다. 그리고 세이드와 레오폴 트가 느낀 기운은 조금도 인간다운 모양을 찾을 수 없이 차갑지만 숨이 막 힐 정도로 강력한 이질적인 것이었다. “응? 저거 여자 아냐?” 관중들과 놀센 기사단도 어느 샌가 경기장 끝에 서 있는 긴 흑발의 여자 를 바라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혹적인 외모에 불구하고 너무도 건조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바로 가랑이었다. 가랑이 이곳에 왔다면 그것은 분명 테싱이 보낸 것이리라. 그리고 가랑을 보낸 목적은 아무리 예상해 봐도 하나밖에 없었다. 가랑의 미성의 목소리가 마 력이 되어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는 듯 울려 퍼졌다. “궁룡의 수장 테싱님의 명령으로 이곳을 접수하겠습니다.” 가랑은 천천히 미스트랄을 들며 심홍색 눈동자로 테싱이 만들어 준 자신 의 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빛이 파편이 깨져버리는 듯한 황홀한 모습 과 함께 붉은 용이 눈을 뜨는 것처럼 미스트랄이 깨어나고 있었다. “구, 궁룡?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죽음의 장막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눈치채지도 못한 사람들이 웅성 거리는 가운데 가랑의 작은 몸이 등뒤로 빛을 길게 끌며 튀어 나가기 시작 했고 그 속도는 순식간에 음속을 추월했다. “……!” 인간의 시선으론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가랑이 공기의 벽을 깨며 움 직이자 엄청난 충격파가 몰아치며 벽과 바닥에 균열을 만들었고 고막을 찢 어버리는 파동이 콜로세움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 충격이 사람들을 때리 기도 전에 이미 놀센 기사단 앞에 나타나 있는 가랑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가랑의 움직임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녀가 있던 자리만을 바라 보던 기사단 무리를 내려보며 붉은 검기를 길게 내질렀다. 마치 멈춰버린 세상에서 그녀 혼자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뒤따라 온 충격파와 함께 가랑이 뿌린 검기에 자신도 모르는 새 잘려나간 기사들 의 팔과 다리가 폭풍에 휘말려 경기장을 날아다녔다. “어, 어떻게 된 거냐!!” 가랑이 바닥에 착지하면서 진짜 피의 유희는 시작되었다. 팔을 잃은 것을 확인하며 바닥을 뒹구는 기사들의 짐승 같은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밀치고 깔 아뭉개며 유혈지옥이 되어 버린 콜로세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로즈마이 어가 가랑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리하르트 님. 저 여자는 분명히 카넬리안…….” “드디어 궁룡들이 가르바트를 덮쳤군. 빨리 폐하께 보고해야겠어.” 여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리하르트였지만 그런 그 역시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룡들이 움직이기 시작했 다. 그의 판단으로 가르바트 황실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었다. “사, 살려줘!!” 놀센의 기사들은 기사도고 뭐고 본능적인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이 조각나고 있다는 실감조차 하지 못한 채 단 한 명의 여자에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눈을 뜬 가랑의 미스트랄 앞에서는 어떤 상식적인 검술도 마력도 의미가 없었다. 마치 불가항력의 압착기(壓搾機)가 찍어누르는 것 처럼 가랑은 기계처럼 놀센 기사단을 도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왠지 슬픈 무언극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이제 그 녀석과는 헤어진 건가?” 그런 가랑에게 검을 내리치며 제동을 건 자는 바로 세이드였다. 가랑에게 끼어 든 세이드는 그녀를 마력에 휘감긴 검으로 찍어눌렀지만 가랑은 빠 르게 그의 검을 막으며 세이드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카넬리안이었다면 세 이드의 마력에 눌려 검을 놓치며 정신을 잃었겠지만 지금의 가랑은 일말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세이드는 그녀가 말하던 ‘본래 힘’을 되찾았음을 느꼈다. “몇 년 전 피크 산맥에서의 일이 떠오르는군. 그때 너는 분명히 내게… … 힘을 되찾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말했었지?” “…….” 가랑은 세이드의 검을 막은 채 어떤 말도 어떤 표정도 없었다. 세이드가 최대의 마력을 뽑아내며 가랑의 몸 속을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 에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가랑이 혼잣 말처럼 말했다. “그런 말은 이제는 의미가 없어요.” “……뭐라고.” 세이드가 눈을 얇게 뜨며 그녀의 말을 의심했다. 뭐야 이 여자. 이제 의 미가 없다고? 자신의 주인을 죽이려고 했던 세이드를 대하면서도 아무런 원한도 감정도 없다는 것이었다. 세이드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게 자신을 증오해 놓고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니! 자신이 줄리탄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자신을 납치하려 했던 것도 그녀의 주변 사 람들을 죽였던 것도 이제는 그런 것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냐? 그의 얼 굴이 일그러지며 처음으로 커다랗게 윽박을 질렀다. 그리고는 검을 빼며 다시 그녀를 향해 내리쳤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빌어먹을 여자!” 갑자기 감정적으로 공격해 오는 세이드를 향해 가랑이 알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화를 내는 거죠?” “내가 줄리탄이라는 애송이를 살려둔 이유가 이런 꼴을 보기 위해서는 아냐! 어째서 그렇게 죽어버린 거냐!” 레오폴트는 세이드의 불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숨 길 수 없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허무감을 느끼고 또 지독한 권태의 수렁 속에 잠겨 있던 그를 화나게 만드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그는 자신과 똑같은 공허와 허무를 바라보며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것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아무런 기대도 담을 구석 이 없었던 세이드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보며 그 기대를 만들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에겐 없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던 그들에 대한 기대조차 사실은 자신의 허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처 음으로 미칠 것 같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가랑은 그렇게 달려 드는 세이드에게 미스트랄을 크게 휘둘렀고 그 순간 그걸 막아내는 세이드 의 기계팔이 종이처럼 잘려나가면서 그의 가슴을 일자로 갈랐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를 뿜는 세이드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는 표독스런 눈빛으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랑이 말했다. “이해가 안가는 군요. 죽을 줄 알면서 왜 나와 싸우는 거죠?” “너 역시 죽을 줄 알면서도 날 막고 그 놈을 지켰지 않나. 이제는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 버린건가. 아하하하!” 세이드는 미스트랄의 충격이 준 내상(內傷)에 피를 쏟으며 쿨럭거리면서 도 계속 가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Blind Talk 사실 이 가르바트 콜롯세움 부분은... 써 놓고도 별로 맘에 들지 않습니다 . '이 감정이 아니야!'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다 지워 버리자니 또 복구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고 해서... 올립니다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역시 입에 입을 물고 알게 된 유명한 곳입니다만...-_- http://3cf.teamcscw.com/3CF.htm 이곳의 만화들을 훑어보시길. 단! 귀여운 팬시(가령 쿠우 같은...) 좋아하 시는 분들은 접근 금지. 그리고 나름대로 18금. '왜 이딴 거 소개했냐!'는 욕메일 사절. 전 책임 없슴. 그리고 전 나름대로 재미있었슴...( -_-)y-~~ E-MAIL : billiken@hananet.net Marc Anthony의 I need to know 를 들으며... .. [[소설자료]]드래곤 레이디 : 17-07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번호:106 글쓴이:billiken 조회:56 날짜:2001/10/23 01:48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7 Isolation 1. 한편 코머런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리에서 대피하 려 하고 있었다. 가랑 한 명만 와도 이 지경인데 본격적인 궁룡들의 공습 이 시작된다면 더 이상 피할 곳조차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코머런트는 이제야 궁룡들의 힘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너무 늦어버렸지만. “스, 스테온! 대책을 세우게! 자네는 짐의 책사(策士)가 아닌가! 어떻게 든 대책을!” 하지만 스테온은 멍한 얼굴로 세이드와 대치하고 있는 가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을 경멸하 고 죽이려 했던 카넬리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 여자가 궁룡의 씰?’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대체 카넬리안과 줄리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콜로세움 밖으로 도망치려 는 코머런트와 신하 들 앞에 빛무리가 뭉치며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천상의 존재가 소환되고 있는 듯. 그것은 궁룡 미카엘이었 다. “허어억! 누, 누구냐 너는!” 코머런트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의 존재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고 공중에 떠 있는 미카엘은 천천히 눈을 뜨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뒤 로 일렁거리는 빛의 날개가 음란해 보이는 어둑한 귀빈석을 태워버릴 듯이 밝히고 있었다. “나는 미카엘. 테싱님의 사자(使者)다. 네가 이 땅 인간들의 우두머리인 가.” 싸늘한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렸고 코머런트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듯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는 미카엘이 궁룡의 대표로서 자신과 ‘외교’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짐이야말로 이 제국을 통치하는 코머…….” 코머런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카엘의 손가락이 코머런트의 기름 낀 이 마를 향했고 곳 빛의 송곳이 그의 머리를 꿰뚫어 버린 것이다. 협상도 수 교도 거래도 아니었다. 다른 신하들은 코머런트의 머리가 뚫려버리자 그 모습에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으며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약하군. 이렇게 약한 녀석이 어떻게 지배자란 말인가.” 그 말과 함께 미카엘이 신하들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곧 둔탁한 소리가 기 계적으로 반복되며 겁에 질린 신하들의 머리가 차례로 뚫리기 시작했다. 혼이 빠져버릴 정도의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스테온은 재빠르게 생각했다. 살아남을 방법을 죽을힘을 다해 궁리해야 했다. 스테온은 미카엘 앞으로 걸어가며 무릎을 꿇었다. “구, 궁룡 미카엘님이시여.” “…….” “소인은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스테온이라 하옵니다.” “인간이라면 죽어라.” 미카엘은 눈앞에서 거치적거리는 스테온이라는 자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이 그를 향해 얼음 같은 손가락을 들이댔지만 스테온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또박또박 외쳤다. “제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미카엘님은 위대하신 궁룡이시지만 일일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을 관리하시기엔 너무도 번거로우실 듯 하옵니다! 그 래서…….” 미카엘은 스테온의 말이 끝날 때까지만 살려두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손을 거두었다. “그러니 소인처럼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관리하시기가 훨씬 편하실 겁니다.” “재미있군. 네 말은 네가 나의 노예가 되어 인간들을 관리하겠다는 의미 인가?” “그, 그렇습니다. 맡겨만 주신다면 미카엘님께서 흡족해 하시도록……” “그렇게 살아 남고 싶나?” 스테온의 말을 끊는 미카엘이 웃음 섞인 목소리가 소름끼치게 그의 몸 속 에 파고들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배신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잔인한 신의 종이 되어 인간을 대리 심판하겠다는 말인가. 그렇게까지 해 서라도 살고 싶은 건가. 스테온이 두려움에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고 싶습니다. 미카엘님.” “그럼 넌 당분간 살아라.” 미카엘은 그렇게 말하며 죽어버린 시체들 위를 지나 가랑과 세이드가 있 는 쪽으로 날아갔다. 스테온은 미카엘이 사라졌는데도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스스로 치욕을 자초했다. 빌어먹을 목숨이지만 굴욕을 처먹으면서라도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줄리탄…… 미안하다. 그때도 살고 싶어서……. 지금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에…….’ 뭐가 지식인이란 말인가. 또 뭐가 제국을 삼킨 희대의 책략가지. 단지 말 잘하는 겁쟁이일 뿐이잖아. 자신을 학대하는 마음의 목소리에 스테온은 귀를 막으려 발버둥쳤다. 2. 미카엘이 보기에는 단번에 세이드를 죽이지 않는 가랑이 한심했고 도망치 지 않고 미친개처럼 가랑에게 달려드는 세이드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것 은 궁룡의 눈에는 조금도 의미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 미카엘은 손가락 끝에 빛으로 형상화 된 힘을 모으며 세이드의 등을 가리켰다. 인간은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빛의 흉기가 세이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향해 뛰어든 자는 레오폴트였다. “안돼!!” 미카엘의 공격은 혼신을 다해 끼어 든 레오폴트의 가슴을 뚫고 그녀의 폐 혈관을 산산이 찢어버리며 멈췄다. 절명의 타격을 입은 레오폴트는 창을 놓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레오폴트?” 그제야 레오폴트가 자신을 막은 것을 눈치 세이드는 싸움을 멈추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랑 역시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는 듯 미스트랄을 내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 닥에 흘러내리는 그녀의 살아있는 피가 세이드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조금은 더 행복하게 죽고 싶었지만…… 당신을 지킨 것으로 만족하겠습 니다.’ 숨이 끊어지기 전 레오폴트의 짧은 생각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슬픈 미소만을 보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이드는 잠든 것처 럼 죽어 있는 레오폴트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항상 가해하 던 자신의 입장이 처음으로 뒤바꿔 버렸다. 누가 자신을 위해 죽어주다니, 이상한 죄책감. 죽음의 끝에 선 지금, 마치 자신이 했던 죄업에 대해 심판 받고 있는 기분이다. 미카엘의 손가락 끝에 다시 빛이 뭉치고 있었다. “이제 너도 죽어라.” 세이드는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악인이었다.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 했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막은 씰도 가차없이 죽였다. 그래도 놓고 악행에 죄책감을 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뻔뻔스런 악인. 이제 와 서 수만 명을 구한다고 해도 그 죗값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렇다 고 구차하게 그것을 속죄할 생각조차 없는 변명할 길이 없는 악인. 지금 여기서 자신이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할 사람 없다. 하지만 세이드는 처음 으로 자기 얼굴을 느꼈다. 방패처럼 만들었던 비웃음도 냉소도 가학도 없 는 자기 본래의 얼굴. 그리고 그런 인간의 얼굴로서 세이드는 미카엘을 바 라보았다. “지금은 죽지 않겠다.” 미카엘이 보기에는 불쾌하다 못한 괴상한 인간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자 는 자신을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기에 미카엘은 그를 내려보며 되물었다. “왜 너는 나약한 인간이면서 내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태연한 거지?” “당연하잖아. 어차피 네 놈들은 괴물이니까 그런 괴물다운 모습인 것이 당연한 거잖아. 차라리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놀랐을 꺼다.” “괴물?” 자신을 조롱하는 세이드의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말에 미카엘의 인상이 조금 굳었다. 어차피 미카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세이드를 죽이거나 죽고 싶을 만큼 고통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세이드는 그 두 가지 모두 두 렵지 않았다. “이 바보 같은 여자 덕에 내가 처음으로 뭘 해야 하는지가 떠올랐다. 그 걸 끝내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겠다.” “…….” “네 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 “건방진 놈.” 세이드의 말은 미카엘이 듣기에는 코웃음치기에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궁룡인 자신을 죽이겠다고? 그런 황당한 말을 지껄이는 세이드를 죽여 버 리려던 미카엘은 갑작스레 세이드가 몰아친 냉기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 다. 물론 그 힘은 미카엘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채 얼어붙은 공기 가 되어 퉁겨 나가버렸지만 미카엘이 팔을 내렸을 때 세이드는 이미 사라 지고 없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가랑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힐난하듯 말했다 . “가랑. 너는 왜 그 자를 죽이지 않은 거지?” “…….” 그녀는 다시 봉인시킨 미스트랄을 내리며 목언저리를 만졌다. 얇지만 깊 게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세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다친 건가.’ 아까 세이드의 싸움에서 그가 남긴 사소한 상처. 그런데 이상하다. 피가 흐르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무언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을 상실해버린 기분이다. “인간에게 그런 상처를 입은 거냐. 창피하군.” 가랑은 손가락 끝에 엉켜 있는 자신의 피를 꿈에 젖은 눈으로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슴 한켠에 차가운 바늘이 파고 들어 온 듯한 통증이 느껴져 눈썹을 찡그렸다. 묘한 아픔이었지만 전 주인과 있 었을 때는 이런 통증을 자주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남자와의 계약이 파기 된지 얼마나 지난 거지? 일년, 아니면 백년 전에? 수천 년이라도 지 나버린 듯이 아무 것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설마 네 전 주인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건가. 하긴 이미 너는 인간 의 손에 더럽혀진 불결한 여자니까. 테싱님께서 널 지켜주는 이유를 모르 겠군.” 미카엘의 말이 겉돌고 있었다. 지금 이 현실이 모조리 환상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 왠지 줄리탄이라는 남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잊혀지질 않 아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그러면 ‘내가 지금 무엇을 잊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그렇게 죽어버린…… 거냐고?” 가랑은 세이드가 자신을 향해 소리쳤던 그 말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피묻은 손으로 조금씩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다. 갑자기 끝없이 낯설고 불안했다.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잡음이 전생(前生)의 희미 한 파편처럼 머리 속을 찔러 마음이 따끔거렸다. “혼란스러워 하는 건가. 나약하군.” “……누구나 나약해.” “뭐?” “하지만 혼자서는 나약하기 때문에 같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있는 거 야.” 가랑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기억의 바닥 속에서 솟아 오 른 그 말은 오래 전 줄리탄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너무도 완벽해서 더 이상 변할 것도 없는 존재라면 하루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거라 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같이 살아 남자!’면서 자신을 위로했었다. 가랑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오래된 사진첩을 집구석에서 우연히 발견 한 뒤에 하던 일도 잊어버리고 그것을 펼쳐 보는 것에 열중하는 것처럼 그 날들을 떠올리며 어색하고 슬픈 미소를 보였다. -Blind Talk 제가 일 때문에 12시를 넘기고 지금 들어와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래 서 본의 아니게 일일연재가 깨져 버렸습니다만...(그럴 줄 알았다고요?) 아무튼 제 게으름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연참' 합니다. (뭐 게다가... 이번 편은 빨리 넘어가고 싶었으니까.-_-) 다시 일 때문에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잡담은 다음 편으로...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그래도 이건 이어집니다! http://members.tripod.lycos.co.kr/mutals3/mat.gif 뭐 이건 사실 사이트 소개는 아닌데... 어쨌든 만창동에서 알게 되서 올립 니다. 저예산 매트릭스.-_- E-MAIL : billiken@hananet.net 다시 나가봐야 합니다. 음악을 듣고 있을리가... 17-07까지..........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8 Wicked Revenge 1. 톨베인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일어나는 경우는 그의 방을 덮친 물키벨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거의 납치극을 방불케 하는 실랑이를 벌이다가 시내로 끌려갈 때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뿐이었다. 사실 전자는 일어났기보다는 ‘ 일으킴을 당했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겠지만. 그런 톨베인이었지만 줄 리탄이 다시 돌아온 뒤부터는 항상 점심식사 전에는 일어나는 이변이 발생 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세상이 망할 징조’라며 수군거릴 정도. 뭐 그렇다고 그 삐딱한 청년이 메이를 도와 서류 작업을 돕거나 키마인 등과 함께 검술을 수련하거나 시오를 도와 항해를 준비하는 건설적이고 협동적 인 일을 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었고 단지 말없이 혼자 검술을 연습하는 시 간이 밤에서 낮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베오폴트로 산책 나온 줄리탄과 함께 있어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뎌 진 검을 맡기는 김에’였다. “톨베인. 물키벨 님과 같이 있지 않아도 돼? 아까 너 찾고 있던데.” “사, 상관없어. 그런 여자…….” 솜씨 좋은 대장간을 향해 말없이 시내를 걸어가던 두 사람 중에서 줄리탄 이 먼저 말을 꺼내자 톨베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물 키벨은 이번에도 톨베인을 끌고 베오폴트로 나가려다가 필사적으로 톨베인 이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심통이 잔뜩 나선 그레시다와 함께 가버린 것이었 다. 톨베인은 혹시 물키벨과 마주칠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야말로 이젠 검술 연습 안 해도 좋은 거냐?” “글쎄…….” 버릇처럼 인피타르와 세라피스가 하사한 검, 두 자루를 차고는 있었지만 달라카트에 돌아온 뒤부터 줄리탄이 연습을 위해서라도 검을 뽑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수련할 이유를 잊어버린 듯이. 톨베인은 작은 주머니를 꺼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말았다. 구름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오 후 볕에 조금 눈을 찌푸린 채로. “와앗! 톨베인 님과 노블리스 님이잖아!” “아 너는…….” 갑자기 그들의 앞을 막으며 실눈을 뜨고 웃는 여자를 바라보며 톨베인은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대려던 손을 멈췄다. 리스? 아니면 라일리였던가? 분명히 살롱 ‘요람’의 아가씨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 6개월 전 쯤에 마지막으로 본 것 같은데. 롤빵처럼 둥글게 만 머리에 단색의 원피스 를 입고 있던 그녀는 뭔가 굉장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꺾으며 중얼거렸 다. “리나예요…… 또 잊어버렸군요. 특색 없는 흔한 이름이긴 하지만 어떻 게 만날 때마다 잊어버리나요.” 톨베인은 그게 뭐 대단하냐는 얼굴로 ‘미안’이라고 중얼거렸고 그 리나 라는 여자는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아주듯이 몇 번이나 자기 이름을 말한 뒤에 다시 생글거렸다. “누가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요!” 줄리탄은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또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자신이 만들어준 이름이지만 이제는 사용되지 않고 어색 해져 가는 이름. 그녀가 사용하지 않는 그 이름을 지금은 그 마음 어디에 묻어두고 있을까, 하는 씁쓸함이 스쳤다. “우리 가요! 아직 개점은 안 했지만 두 분이 오신 걸 알면 다른 언니들 도 좋아할 게 분명하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물키벨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대책 없는 여자였다. 자신의 고 집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갑자기 시내 한복판에서 톨베인의 팔을 꽉 껴안자 귀찮다는 듯이 팔을 내저었지만 그녀는 도무지 놓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었다. 세상에 백주 대낮에 이런 식으로 고객을 끌고 가려 하다니 이건 호 객 행위가 아니라 납치잖아! “바, 바보. 지금은 낮이야!” “헤에, 그러면 밤에 와 줄래요?” “알았어. 다음에 갈 테니까 이것 좀 놔!” 물키벨을 만난 이후 누가 갑자기 껴안는 것에는 신경쇠약이 걸려버린 톨 베인이었다. 리나는 피식 웃으며 톨베인을 놓았다. “거짓말. 안 올 거면서.” “멍청이. 그렇게 믿지도 않을 거면 왜 물어봐?” “앗! 그럼 정말 올 거예요?” “다음에.” 톨베인은 딱 부러지게 대답하면서 다시 담배를 물었다. 울상이 되어버리 는 리나. 일단 노블리스나 톨베인, 시오 등과 사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베오폴트 내에서 굉장한 자랑거리가 되는데다가 그 사람들 자체도 멋있으 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본격적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이 남자들, 요리조 리 피하는 통에 도무지 관계가 진척되질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기 싫었던 리나는 대체 그 ‘다음에’가 정확히 언제냐며 확실히 해두려고 할 때 갑 자기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놀란 얼굴로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비명이 들려오는 곳에서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뛰어오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심에 휩싸인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요, 용이 나타났다!!” 줄리탄과 톨베인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아마도 궁룡일 것이다. 궁룡이 베오폴트에 직접 나타나다니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그리고 궁룡 이 나타난 이유는 설마…… 그때 줄리탄과 톨베인을 발견한 그레시다가 필 사적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레시다!” “주인님. 큰일이에요! 지금, 지금…….” “침착해!” “물키벨 님이 위험해요!” “……!” 불안한 예상은 행복한 기대보다 훨씬 잘 들어맞는다. 그레시다는 씰이 아 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톨베인이 주저 없이 용이 나타난 곳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줄리탄! 가자!” 그리고 톨베인과 줄리탄은 물키벨을 구하기 위해 궁룡을 향해 검을 뽑았 어야 했다. 그러나 줄리탄은 이번에는 움직이지 못했다. 톨베인이 놀란 얼 굴로 뒤돌아보았을 때 줄리탄은 겁을 먹은 눈빛으로 톨베인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본다. “미, 미안…… 하지만…….” “너…….” 이제는 겁이 났다. 용들 앞에 서는 것이 무서웠다. 물키벨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또 자기 눈앞에서 소중한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부정적 선입 관이 두려움이 되어 줄리탄의 마음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2. “헤유우우우. 오늘은 별로 맘에 드는 게 없네.” 단골 옷가게들의 순례를 끝낸 물키벨은 마지막 명품점에서 걸어나오며 길 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뒤따라나오는 그레시다는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층층이 종이 상자들을 들 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기분 좋은 날에는 수레 몇 대로 구입한 물 건들을 배달해야 할 정도로 충동 구매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물키벨 님. 별로 기운이 없어 보여요.” 축 늘어져 있는 물키벨을 바라보는 그레시다의 말에 그녀가 작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죄다 톨베인 녀석이 반항했기 때문이얏! 감히 나한테서 도망치다니! 돌 아가면 거기 있는 옷을 죄다 입혀줄 테다!” 뭐랄까…… 그녀는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톨베인이 들었다면 휘청거릴 무시무시한 말을 서슴없이 꺼내며 항구로 돌아가려던 물키벨은 누군가 자 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오싹한 기분에 발걸음을 멈췄다. “누구야!” 눈을 치켜올린 물키벨이 두리번거리는 주변은 많은 사람들이 시끌거리며 돌아다니는 시가지 한복판일 뿐.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히 살기를 느꼈는데. ‘우웅. 착각인가.’ “물키벨 님!” 그때 그레시다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상자를 놓쳤고 색색의 상 자들이 길거리에 쏟아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경악에 찬 그레시 다의 눈은 물키벨의 뒤를 향해 있었다. “오랜만이오. 성스러운 해룡의 수장.” 등뒤에서 들려오는 빈정거리는 목소리. 어느새 물키벨의 뒤에 나타난 사 내에게 몸을 돌리며 물키벨은 떨리는 눈빛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루, 루시퍼.” 눈을 낮게 깔고 있는 루시퍼의 그림자 속에 작은 물키벨의 몸이 갇혀 있 었다. 루시퍼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조금씩 물키벨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불 길한 검은 양복을 입은 그의 등뒤에서 흑빛의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물키벨에게 찢겨나간 한쪽 날개는 여전히 흉물스런 모습 그대로 반쯤 잘려 져 있었다. “당신에게 당한 이 치욕을 돌려주려고 왔지. 후후.” 그 말과 함께 루시퍼의 손에 빛이 모이며 길고 검은 창의 형체가 만들어 졌다. 그리고 그 창 끝은 물키벨의 목을 향해 있었다. “역시 지상에서는 아무 힘도 못 쓰는가 보군.” “그레시다. 도망쳐!” “하, 하지만…….” 물키벨은 가엾게 떨고 있는 그레시다를 향해 외쳤지만 그녀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물키벨이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빨리 사람들에게 알리란 말야!” “제, 제발 무사하세요.” 그리고 그레시다는 근처에 누구라도 있길 바라며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거리를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레시다에겐 조금의 관 심도 없는 루시퍼는 계속 창으로 위협하며 물키벨을 벽 쪽으로 밀고 있었 다. “인간들의 도움이라도 받을 생각이신가? 지금 누가 와도 날 막지는 못해 .” “……테싱이 보냈나?” 물키벨은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루시퍼를 노려 보았다. 루시퍼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테싱 님은 널 죽일 생각이 없으신 것 같더군. 하지만 난 말 야…… 이 상처가 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널 죽이지 않으면 고 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집요한 놈이로군. 그때 네놈을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큭큭. 네 말대로야." 그 목소리가 물키벨의 귀를 때리며 그녀는 다리가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아악!” 루시퍼의 창이 물키벨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었다. 균형을 잃은 물키벨은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퍼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에 터져나오 는 비명을 참고 있는 물키벨의 다른 쪽 다리마저 가학적으로 찌르며 비틀 기 시작했다. ‘……!’ 하늘이 곤두박질치는 듯한 괴로움. 몇 번이나 비명을 삼키는 물키벨의 초 점이 풀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절대로 이런 녀석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눈 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새하얀 드레스가 순식간에 붉게 염색되어 있었 고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바다의 여왕이 죽어가는 모습치고는 너무도 가엾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루시퍼는 물키벨의 모습을 감상하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가슴에 창을 들이댔다. 3. “아아아. 뭐예요 루시퍼 씨. 정말 악취미라고요.” 한편 경사진 건물 옥상에 앉아 있던 세르난은 루시퍼의 일에 조금도 관여 하지 않은 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루시퍼가 복수를 하든 말 든 상관없었지만 저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궁룡으로서 꽤 쩨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물키벨 님을 죽여버리면 테싱 님이 좋아할 리가 없는데. 루시퍼 씨는 아직도 테싱 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군. 단순하다니까 정말 .’ 그렇다고 그가 물키벨을 구해 줄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던 중 세르난이 조금 놀란 얼굴로 루시퍼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청년을 바라 보았다. “인간? 헤에, 재미있게 돌아가네.” 세르난은 인간들도 꽤나 끈질긴 존재라고 생각하며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계속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4. 물키벨을 죽이기 전 루시퍼는 놀리듯이 쓰러진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죽게 되다니 네년도 참 불쌍하군.” “그나마 다행이군. 적어도 내 본래 모습으로 죽을 수 있어서…….” 죽어가는 물키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헝클어져 얼굴을 반쯤 가 린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서글픈 미소가 보이자 루시퍼가 눈을 찡그렸다. “무슨 헛소리냐. 실성했군.” 그리고 루시퍼의 창 끝이 금속을 깎아내는 듯한 굉음과 함께 검은 마력으 로 뭉쳐가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해룡의 수장을 죽인다는 것에 만족스 러워하는 루시퍼의 얼굴을 물키벨은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응?” 루시퍼를 향해 날카로운 단도가 날아들고 있었다. 루시퍼는 자신을 향하 는 단도를 느끼며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날아오는 곳을 향해 손바닥을 펼 쳤다. 그리고 쏜살같이 날아들던 그 단도는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부딪친 듯이 멈춰버리며 공중에서 시뻘겋게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런 단도 따위 로는 루시퍼에게 흠집조차 낼 수 없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누군가 자신을 방해한 것에 화가 난 루시퍼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감히 자신을 공격한 건방진 놈’을 바라보았다. “죽고 싶은 거냐. 인간!” “톨베인!” 놀란 사람은 물키벨이었다. 단도를 던진 톨베인은 루시퍼를 향해 평소에 는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살기를 보이며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 “그 검은?” 루시퍼는 톨베인이 들고 있는 검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분 명히 일전에 죽이지 못했던 불쾌한 인간 녀석이 가지고 있던 신월도. 루시 퍼로서도 알 수 없는 힘을 쓰던 검이었다. 식은땀에 젖은 물키벨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리며 톨베인을 향해 외쳤다. “바, 바보! 그 검 뽑으면 안 돼!” 톨베인은 움직이지 못하는 줄리탄의 인피타르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지금 당장 자신 외에는 루시퍼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주저했 다간 물키벨이 죽는다. 그리고 인피타르가 아니라면 궁룡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피타르는 자신을 뽑는 자의 생명 력을 집어삼킨다. 하물며 단 한 번도 인피타르를 써본 적이 없는 톨베인이 그 검을 뽑았을 때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물키벨도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 “제발 쓰지 말란 말야! 톨베인 이 멍청아!” 톨베인은 언제나 짜증을 내면서도 물키벨의 엉뚱한 고집에 넘어가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으로 물키벨의 애원을 듣지 않았다. 톨베인이 인 피타르를 들며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고 오래오래 살 바에는…… 차라리 네 놈하고 같이 죽는 게 낫겠지." “웃기는군. 그 따위 검으로 용인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확인해 보면 알 거 아냐.” 으르렁거리는 루시퍼 앞으로 뛰어든 톨베인은 주저 없이 인피타르를 검집 에서 꺼내며 개방했다. 그리고 인피타르가 시린 광채를 뿜으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Blind Talk '왜 자꾸 여자를 괴롭히냐?'라는 질문에는 '따로 따로 써놓고 붙이다 보니 까 그렇게 겹치게 되었음.'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는. 나중에 다 써놓고 알게 되었습니다. 모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제 글은 '술'입니다. '질이 좋은 술'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밥'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밥이 되는 작품도 있고 술이 되 는 작품도 있습니다만 - 저는 드래곤 레이디를 후자라고 생각하고 쓰고 있 습니다. 죄다 인생의 자양분이 되는 그런 글을 썼다가는 정말 세상 지루할 겁니다.(그렇다고 죄다 술이라면 그것도 또한 취하는 인생이겠지만.) 그래 서 굳이 저의 목표라면 '가장 맛있는 술'을 빚는 것이랄까요. 아직은 너무 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괜히 어설프게 밥 지을 생각은 안하렵니다. 그건 그렇고... 7권 나왔나요? 목요일쯤 서점에 풀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 최근 글이 제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괴롭네요. 반쯤은 남의 글이 되어 타성적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뭐 그러니까 더 정 신차라고 다시 My Pace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겠지만. 이제 7권 비축분도 다 끝나가고... 엔딩까지 한권 남았군요. 어느새... 여 기까지 와버린 건가. 연재 시작부터 1년6개월 가량 지났군요.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말하자면 아트 사이트이긴 한데...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문신 집단인 시 류 패밀리의 한국 사이트 입니다.-_- http://www.shiryufamily.com/ 전 문신을 할 생각은 없지만(일단 비싸니까...) 보는 것 만으로도 정말 멋 지죠. 관심있는 분들은 skin art를 한번 감상해 보시길... E-MAIL : billiken@hananet.net Shivaree의 Goodnight Moon을 들으며... (경오형의 추천으로 알게 된 노래. 아아 훌륭한 목소리야.) -------------------------------------------------------------------------------- Back : 9 : 17-09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written by 부우녕자1호) Next : 7 : 17-07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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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address : 211.204.199.11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6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9 Deadend 1. 톨베인은 인피타르를 통해 느끼는 아득한 고통에 일순간 정신의 끈이 끊어 져버리는 것 같았다. 육체의 고통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괴로움.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짧은 순간 끝도 없이 발버둥쳐야 했고 찰나가 길게 늘어지 며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지독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수룩해 보이는 줄리탄이 이런 기분을 수없이 맛보며 카넬리안을 지키려고 스스로 이 검을 뽑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만큼 내 생명을 가져가! 그것으로 저 악룡을 죽일 수 있다면 그 걸로 충분하니까.’ 그리고 톨베인은 사력을 다해 루시퍼의 몸을 향해 인피타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생령을 닮은 푸른 아우라가 불길처럼 따라가며 루 시퍼를 덮쳤다. “크아아아악!” 루시퍼는 그런 정체 모를 힘 따위는 자신의 창에 단번에 막혀버릴 것이라 고 자신했다. 그러나 바닥을 깨트리고 그 파편을 하늘로 치솟게 만들며 우 레처럼 몰려든 그 힘은 물키벨을 지키겠다는 톨베인의 집념이 되어 루시퍼 의 창을 밀어내며 그의 배를 꿰뚫어버린 것이다. 그 인정할 수 없는 힘에 당황한 루시퍼는 필사적으로 창을 휘둘러 톨베인을 날려버린 뒤에 뒤로 물 러섰다. “제기랄! 이런 일이!” 뚫려버린 배에서 음산한 빛이 피처럼 흘러나오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 다. 그리고 마치 톨베인과 인피타르의 원한이 달라붙은 듯이 치유조차 되 지 않는다. 루시퍼는 극심한 통증에 비틀거리며 질려버린 얼굴로 톨베인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힘에 땅에 떨궈지면서도 검을 놓치지 않은 톨베인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 봐. 효과가 있지.” 피에 엉킨 머리칼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톨베인은 계속 루시퍼를 노 려보며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물키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 행복한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물키벨은 지금 톨베인의 모습에 가슴이 찢겨 져나갈 듯 아파왔다. 제발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세르난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인간도 경우에 따라서는 꽤 강해지는구나.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저 아 이…… 이제 한계인 것 같네.” 톨베인은 바닥이 일렁거리며 균형이 사라지는 현기증에 휩싸였다. 숨이 막히며 피가 역류했다. 인피타르가 빼앗아간 생명력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빛이 사라지며 루시퍼와의 거리 가 끝도 없이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코피가 뚝뚝 떨어지며 온몸 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제길. 한 번만 더……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한 번만 더 움직여 달란 말 야!’ 톨베인은 지금까지 기합 소리 같은 것은 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암살 자로 실격이었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 지만 그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루시퍼에게 다시 뛰어들었다. “큭! 지독한 놈!” 그러나 루시퍼는 사력을 다해서 자신을 찌르는 인피타르를 간신히 피했다 . 무서운 충격과 함께 루시퍼의 뒤에 있던 건물들이 일시에 무너져내렸지 만 루시퍼를 죽이지는 못했다. 톨베인의 필사적인 일격에서 겨우 도망친 루시퍼는 그와 함께 톨베인에게 마력을 뿜었고 그는 그대로 인피타르를 놓 치며 수십 미터나 밀려나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뒹구는 인피타 르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톨베인!!” “꽤나 애먹이는 인간이잖아.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 지만 결국 내가 이겼다.” 루시퍼는 상처 입은 배를 쥐고 다시 물키벨에게 다가왔다. 물키벨은 죽은 듯이 쓰러진 톨베인을 바라보며 작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죽은 걸까. 정말로 나 때문에 죽은 걸까. 루시퍼가 비아냥거 리며 말했다. “저런 인간 따위에게 눈물을 흘리는 거냐? 같은 용으로서 정말 창피하군. ” “……죽여버릴 거야.” 물키벨이 격한 감정에 몸을 떨며 말했다. 물키벨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섬뜩한 눈빛. 하지만 루시퍼에게 아무 힘도 없는 물키벨의 살기는 즐거울 뿐이었다. “이제야 죽일 맛이 생기는 얼굴이 되었군.”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야! 비열한 놈!” “이제 널 도와줄 놈은 없어. 죽는 건 네년이다.” 물키벨을 죽인다는 황홀한 만족감에 휩싸인 루시퍼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 었다. 눈물에 얼룩직 물키벨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주문처럼 말했다. “죽.어.버.려.” “으아악!” 루시퍼는 인피타르의 칼날이 밑에서부터 솟구치며 창을 들고 있던 자신의 팔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물키벨을 위협하던 검은 창이 떨어져 바닥 을 굴렀고 잘려나간 팔은 바닥에 툭 떨어지자마자 불타오르며 먼지처럼 산 화해 버리는 것이었다. 루시퍼는 고개를 돌려 어느 틈인가 떨어진 인피타 르를 들어 자신의 팔을 잘라버린 사내를 바라보며 몸이 굳어버렸다. “너, 너는…….”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자는 바로 줄리탄이었다. 줄리탄에게 남은 생명이 이제 1년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으로 그 1년마저 모두 써버린 것이다. 하지만 줄리탄은 그런 것, 개의치 않는다며 소리 없 이 울고 있는 인피타르의 검 끝을 루시퍼에게 들이댔다. “설마 인간 주제에 궁룡인 나를 죽이겠다는 거냐. 그,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의 허세와는 달리 그의 몸은 계속 두려움에 움츠러들고 있었다. “살려주면 더 이상 해치지 않을게. 궁룡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어. 절대 아 무도 손대지 않을 테니까…….” “죽기 전에 할 말은 그걸로 끝이냐.” 나직한 줄리탄의 목소리에 루시퍼는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런 인 간 따위에게 겁을 먹다니. 고작 인간에게 죽어야 한다니. 인정할 수 없었 지만 그런 헛된 자존심과는 상관없이 죽음의 공포가 몸을 마비시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줄리탄의 분노와 울분은 그대로 인피타르를 통해 가시화된 듯 인피타르의 시퍼런 기운이 당장이라도 루시퍼를 삼켜버릴 듯이 검신에 흐르고 있었다. “제발 살려줘…….” 줄리탄이 정말로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살기를 품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힘을 다해 루시퍼에게 인피타르를 내리쳤고 반격조 차 못하는 루시퍼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향하는 인간의 분노를 바라보 았다. “정말 훌륭해요. 줄리탄 씨.” 그러나 일순간 줄리탄 앞에 번뜩이며 나타난 세르난이 맨손으로 인피타르 의 칼날을 잡았다. 인피타르가 울부짖으며 도시가 잠겨버릴 것 같은 청색 의 기력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세르난은 자신의 손에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퍼 씨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죽어버리면 골치 아파지거든요. 그러니 용서해 주시겠어요?”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말하는 세르난은 그 모습과는 달리 누가 보기에 도엄청난 위력을 가진 자였다. 인피타르를 손으로 막을 정도라면 루시퍼와 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이다. 하지만 세르난이 줄리탄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세르난! 잘 왔어! 이제 이놈들을 모조리…….” “이제 그만 하세요 루시퍼 씨!” 끈덕지게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루시퍼를 향해 조금 인상을 쓰며 소리친 세르난이 줄리탄을 향해 말했다. “해룡의 수장이신 물키벨 님과 여러분들에게 추한 짓을 저지른 사과의 의 미로 제가 줄리탄 씨에게 좋은 정보 하나 알려드릴게요.” 세르난은 줄리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줄리탄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듯한 말을 꺼냈다. “지금 가랑 님은 가르바트에 계시답니다.” 세르난은 줄리탄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그런 말을 남기며 인피 타르를 놔주고 루시퍼와 함께 사라졌다. 줄리탄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실타 래처럼 엉켜 있는 마음을 쥐고 눈물을 쏟았다. 당장이라도 카넬리안을 만 나서 껴안고 싶었다.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물키벨은 그렇게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너무도 안타까워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줄 리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카넬리안을 한번 만나고 싶어요. 그녀를 구해 주고 싶으니까, 감싸 주고 싶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줄리탄은 인피타르를 떨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이제 자 신의 목숨이 끝났음을 느꼈다. 인간으로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 기적 일지도 모른다. 물키벨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인피타르를 쓴 것을 후 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서 끝나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제17장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끝. 제18장 : 미정(두둥...) -Blind Talk 멍하니 케이블 TV를 보고 있다가 BS2에서 출연진이 죄다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 일본연극 타카라스카를 하길래 신기한 마음에 잠시 보았습니다... 타 카라스카에 대해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본 것은 이번이 처음. 그것도 베르 사유의 장미... 였기 때문에 화장층 1Cm는 되어 보이는 나이스 누님들이 대거 출현하며 끝도 없이 '오스카루 사마아아~~'라고 외치는 장미꽃 날리 는 분위기... 알 수 없는 샤방방한 분위기 속에 10여분을 보다가 '도무지 모르겠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채널을 돌렸습니다. 하이쿠는 좋아합니다. 분라쿠나 노오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하이쿠 는 제대로 일본어를 배워서 독음음절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지 못하면 제대 로 읽고 감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지만... 하이쿠 자체가 가지는 너무도 일본적인 관조적이고 상징적인 느낌을 좋아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에 앉은 파리를 쫓아 보냈네' 라는 임종 직전의 아버지를 대상으로 쓴 하이쿠 같은 것은(이싸의 하이쿠 라고 하네요.) 커피를 음미하듯이 두고 두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본래 시 링크스도 하이쿠풍의 소화를 읊게 하려고 했지만 '뭐야.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라는 생각에 그만두었습니다만... 그런데 아무리 현대연극이라지만 타카라스카는 도무지 모르겠음...-_- 갑자기 카뱌레를 방불케하는 현란한 뮤직 스테이지가 되질 않나... 뮤지컬 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고 대체...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 가 있을텐데 현재 '대체 무슨 이유일까?'라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의 감성 전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부담스럽 고 가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흔히 E-FRIEND라고 불리는 E-MAIL 외국 친구들 중에 일본인도 있는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 상해하거나 미안해하더군요. 일본 인들이 저와 자료 같은 것을 교환할 때는 제 쪽에서 미안할 정도로 상당히 출혈을 해 주는데 제 쪽에서 똑같은 것을 해 주려고 할 때 아주 조심스럽 게 말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은 상당히 당황하더랍니다. 물론 오사카 출신은 그런 것에 꽤 느긋한 편이지만...(사회인류학도 kiyu군은 국화와 칼에 의 해 이것을 '하지'라고 말하며 일본인 특유의 성격이라고 말하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 미국인들은 대부분 뭘 말해도 건방질 정도로 기운차 고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데... 자료 교환할 때는 무지하게 원칙을 따집니 다.-_- (유럽인들? ...알고 지내는 프랑스인은 입에 칭찬을 달고 사면서도 '뭣 좀 보내 줘.'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던데... 속 편한 건지 집시근성인지.-_-) 뭐 고작 몇십명과의 경험 가지고 그 나라의 국민성을 운운하는 것은 되먹 지 못한 짓거리긴 하지만 선입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이번 동진호 침몰 사건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일본에 대해 악감정이 생겨 버렸지만(이거 동영상 꼭 받아 보시길. 정말 혈압 오릅니다.) 그래도 일본 인과 대화해 보는 것은 꽤 색다른 맛이 있기 때문에(캐릭터 메이킹할 때도 많이 참고할 수 있음.) 한번 쯤 인터넷을 통해 사궈보시는 것도...(편하잖 아요. 편지써서 해외우편 보낼 것도 없고... 이젠 ICQ같은 것도 있으니까) 역시 잡담이 길어졌군요. 다음에 기회되면 예전 일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물론 거의 놀았지만-_-) 겪었던 이상한 일들(몇개는 지금까지도 미스테 리...)을 늘어 놓아볼까 합니다. 그러나 대체 언제!!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 ZEROMOTION... 역시 소개하기에는 너무도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http://www.zeromotion.com/ 웃기는 광고나 독특한 홈비디오촬영등을 모아 놓은 곳으로 사실 우리나라 에 돌고 있는 대부분의 소위 '엽기동영상'들은 이곳에서 가져온 것이 많죠 (당연히 스너프는 없습니다.-_-) 하지만 어떤 것들은 아무리 봐도 도무지 '이게 왜 웃기지?'라는 생각이 드는 썰렁한 것들도 많은... 아메리칸만의 조크들도 상당수니까 잘 골라서 감상하세요. 특히 페이지7에 있는 HANDS라 는 동영상은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꼭 보시길... E-MAIL : billiken@hananet.net 김성호의 회상을 들으며... (언제 들어도 멋진 가사입니다. 올디스벗굿디스...) ps:아 그리고 이제 비축분은 끝입니다. 즉 일일연재도 끝이랍니다. -_-; 대신 마지막 날이니까 연참을... -------------------------------------------------------------------------------- Back : 10 : [ DRAGON LADY ] 18-01 : 수호성(守護星) (written by ..;;;;) Next : 8 : 17-08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written by 부우녕자1호) -------------------------------------------------------------------------------- -------------------------------------------------------------------------------- Total access : 28401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4th November 2001 16:27:1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Name : ..;;;; Date : 02-11-2001 18:24 Line : 579 Read : 269 [10] [ DRAGON LADY ] 18-01 : 수호성(守護星) -------------------------------------------------------------------------------- -------------------------------------------------------------------------------- Ip address : 211.212.201.2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제 목:[ DRAGON LADY ] 18-01 : 수호성(守護星) 관련자료:없음 [43537] 보낸이:김철곤 (PULSATOR) 2001-11-02 05:03 조회:564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Save Soul Star 1. 루시퍼를 물리쳤다. 궁룡이 목숨까지 구걸하며 도망쳐버린 통쾌한 승리였 건만 사람들의 기분은 어둡기만 했다. 즐거워하기엔 그 희생도 너무 컸던 것이다. 베오폴트의 시립치료원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리던 시오 는 며칠이나 잠을 걸러서 초췌해진 메이가 걸어나오자 황급히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별 일 없는 거지?" "물키벨님은 다리를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 질 꺼야. 톨베인도 지금까지 정신이 희미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씩 안정되고 있고....... 하지만." "하지만...... 이라니." "줄리탄은 치료할 방법이 없어." 시오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실감하지 못한 채 귓속으로 흘러 들어온 메 이의 목소리. 눈빛을 내린 그녀의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병이나 부상이 아니니까...... 그냥 죽어가고 있는 거야." "말도 안돼. 그런게 어딨어." 시오가 어이가 없어서 공허한 웃음을 뱉는 그 순간에도 그의 떨리는 눈동 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웃기는 소리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죽어가고 있다니. 세상에 그 따위 말도 안되는 죽음이 어디있냔 말야. 시오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멍청한 자식. 이렇게 될 줄 알면서 그 따위 검을 휘둘렀단 말야. 이렇게 죽는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시오가 눈물을 흘리며 계속 벽을 내리쳤다. 주먹에 피가 맺히고 있었지만 서럽고 억울할 뿐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믿고 있었다. 줄리탄이 젊어서 죽게 되더라도 결국 죽을 때 그의 곁엔 카넬리안 이 있을 꺼라고. 인피타르가 삼켜버린 생명은 돌아오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 의지와 마음은 보상받을 게 분명하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적어도 그 정도의 결말은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엉뚱한 곳에 서 길이 끝나 버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막다른 길에 와버린 것 이다. "뭐야. 뭐냔 말야 대체......" 숨이 막히는 괴로움에 시오가 울먹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줄리탄이 바 란 것은 카넬리안 뿐이었다. 창피할 정도로 그렇게 살아왔다. 세계를 지키 지 않아도 상관없고 심지어는 악인이라 불려도 상관없다면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 하나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는데 - 이제는 카넬리안도 없다. 그녀가 줄리탄을 기억해 줄지, 그것조차 모른다. 모든 걸 다 빼앗겨 버리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그럼 대체 줄리탄이 한 것은 무엇이었 을까. 그냥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버리는 일이었을까. 사용하면 죽어 가는 잔인한 검을 썼기 때문에 죽는 거다...... 그 당연한 귀결이 시오는 너무나 억울했다. 이 따위 세상에 희망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고 시오 는 서럽게 울었다. 2. 그리고 물키벨이 소리 없이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었다. 깨끗하고 차가운 공기의 병실. 촛불조차 없는 어둑한 이곳에 파르스름한 달빛만이 둥근 꽃 병의 표면에 반사되어 뭉쳐있었다. 흔한 날벌레 소리 하나 없는 커다란 병 실에 자신 외엔 아무도 없다. "......" 그녀는 입을 꽉 물면서 침대의 기둥을 잡고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두 달 정도는 걸어다니는 걸 포기해야할 부상을 입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반쯤 닫혀진 커튼 사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며 명멸하는 별이 보이고 북쪽 끝에는 희미한 빛을 흘리는 쌍성도 보인다. 그것들은 너무 멀 리 있어서 그렇지 가까이 다가가면 분명히 간지럽게 재잘거릴 듯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영원히 기억해 두려는 듯 하늘을 바 라보았다. '인간들이 모두 죽어도 별들은 살아 있겠지. 하지만 별들이 죽어버리면 그때는 인간들도 죽어. 나는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 아주 오래 전 자신이 등뒤에서 좋아했던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되뇌며 그 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는 것 같네.'라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힘들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는 몇 번이나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벽 을 잡고 테이블을 꽉 작으며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3. 1층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답이 없는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였기에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헤스 팔콘을 무너트린 기적을 만들어낸 자들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메르퀸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테시오스 님을 찾아봐야 겠어요. 그 분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지도... ..." 하지만 그는 결국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테시오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실히 알 수조차 없을뿐더러 그가 자신에게 항상 말해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며 또 죽어있는 존재도 언젠가는 살게 된다. 누구도 그걸 거스를 수는 없어.'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줄리탄씨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기사라 는 이름을 달고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니 정말 창피한 노릇이야."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주인님." 심하게 자책하고 있는 키마인에게 호이젠이 위로했지만 키마인의 어두운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어렸을 때는 기사라는 것이 뭔가 특별한 위치며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많은 것을 도와줘서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 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도 한정되어 있으며 결국 누구나 다 똑같은 한계를 가지고 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키마인은 느 끼기 시작했다. 그때 계속 아무 말도 어떤 표정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조용히 레비아탄이 몸을 일으켰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레비아탄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물키벨이 있는 2층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4. 벽에 몸을 지탱하며 걸어가고 있는 물키벨의 이마와 하얀 환자복은 식은 땀에 젖어 있었고 길게 풀려 있는 머리칼 역시 한쪽 눈을 가리며 내려와 있을 정도로 헝클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 다. 다시 벌어진 상처에서 스며 나오는 피가 옷에 베일 때마다 그녀는 눈 을 찔끔 감았지만 신음소리조차 없었다. "물키벨님. 어딜 가시는 거죠." "레, 레비야." 어두운 복도를 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에 물키벨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 었다. 레비아탄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부축해 주었다. "으응. 그냥...... 할 일이 있어서." 파랗게 질린 입술. 차가운 땀에 젖은 그녀는 힘들게 헤헤 웃으면서 레비 아탄을 바라보았고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벽을 집으며 말했다. "미안. 나...... 가야 돼.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니까." 다시 몸을 움직이는 물키벨을 바라보던 레비아탄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어딜가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가서 무엇을 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씁쓸하고 슬프고 가슴 아픈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만들어 지고 있음을 느꼈다.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용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아픈 감정들이 몸 속에서 터지며 퍼져나가 마음을 제어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물키벨이 문득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려 레비아탄을 불렀다. "레비야." "예. 영원한 저의 주군이시여." 눈물이 맺혀있는 그녀는 슬프지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 오랫동안 같 이 있어주었던 레비아탄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까지 너무 고마웠어." "......저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태연한 작별 인사. 하지만 레비아탄은 뜨거운 것에 목이 매여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끼는 기분이 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잡아서도 안된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수천년 동안 모셨고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수 장 물키벨을 보내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당신이 용이었든 인간이었든 정말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5. 물키벨이 문을 열고 줄리탄의 병실로 들어왔을 때 줄리탄은 잠든 듯이 죽 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대로는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물키벨은 슬 픈 눈빛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줄리탄. 나 왔어. 헤헤." 절룩거리는 다리로 줄리탄의 침대까지 다가온 그녀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서도 물키벨이 봤던 것과 똑같은 별들이 창문을 동해 그들 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희들이 다시 만나는데 얼마나 걸린 걸까...... 십만년쯤? 참 터무니없 는 숫자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줄리탄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그녀의 상처입은 두 다리가 인간과 똑같은 붉은 핏방울을 떨구고 있었지만 물키벨 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주문 같은 말을 속삭일 뿐이었다. "알고 있어. 나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또 언젠가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 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때도 이런 식으로 바라만 보다가 끝나버리는 건 사양이야. 헤헤. 좀 더 적극적이 되고 싶었는데...... 아마 다음에 만날 때도 그 아이는 네 곁에 있겠지 너의 수호성처럼. 영화 같은 세상이야. 마 지막 음악이 흐르고 커튼이 드리워지며 영화가 끝나도 또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관객이 들어오고 또 같은 포옹과 키스를 하고 헤어지는 그런 슬프고 기쁜 일들의 반복.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거 같아 우리들은." 그리고 물키벨은 줄리탄의 손을 잡으며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로 조금씩 다가갔다. "미안. 나 형편없는 용이라서 간단하게 널 살려줄 능력이 없어. 고작 내 남아 있는 생명을 넣어주는 것 밖에...... 그때하고 비슷한 상황 같아. 그 때 네가 선택한 것처럼 나도 지금 선택하는 거니까 멋대로 살려줬다고 나 사라진 뒤에 화내지 마아? 나도 지금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헤어져 도 괜찮은 시간 같은 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물키벨의 몸에서 하얀 빛의 가루들이 솟 아올라 방을 눈부시게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같은 그것들 은 서글픈 곡선을 그리며 줄리탄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마 지막 결심이었다. 용이기 때문도 아니고 수장이기 때문도 아니라 그녀이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서 줄리탄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에 내린 결심. 그녀 는 작은 입술을 줄리탄과 포개며 처음이자 마지막의 키스를 마쳤다. '안녕. 다음에 다시 만나.' 물키벨은 싱긋 웃으며 의자에 앉은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자는 항 상 남자를 위해 희생하고 남자는 항상 그런 여자를 지켜주는 세상이라면.. .... 이 세상도 참 낭만적일 거라고, 그녀의 그 입버릇 같은 그 말이 줄리 탄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6. 세라피스는 바보 같은 겉치레는 벌이지 않았다. 물키벨의 장례식을 성대 한 국장(國葬)으로 진행하지 않은 것이다. 수만명이 모여 있는 화려한 집 회 따위가 그녀의 무엇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는 단지 아는 사람들이 모 인 조촐한 장례식에 검은 양복을 입은 채로 홀로 찾아온 것이었다. 길고 치렁한 머리칼을 흑색 실크밴드로 묶은 세라피스는 문을 열고 들어오며 관 례대로 들고 있던 향주머니를 문 곁의 탁자에 놓았다. 이미 은은한 향내가 장례식이 치러지는 '낙원의 오후' 내부를 감돌고 있었다. 아마 이 향기는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이 곳에 머물러 있을테고 이 향기를 맡을 때마다 그녀를 기억해 낼 것이다. 제복을 입은 메이가 세라피스를 맞이했 다. "폐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인 한 잔 줄래요?" 잠도 자지 않고 며칠 동안 달려온 세라피스는 피로한 기색도 없이 탁자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 국경에도 속하지 않는 물키벨이었지만 그녀의 장례식은 달라카트 식이었다. 달라카트 식이라는 것은 헤스팔콘처럼 화려 하지도 가르바트처럼 웅장하지도 않은 채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망인 (亡人)을 기억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울고 싶은 사람들은 울고 생각 에 잠기고 싶은 사람들은 한없이 생각하며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면 그것으 로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면 되는 추모의 회합. 아주 오랜만에 하프를 든 메르퀸트의 슬픈 음색이 홀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세라피스는 그레시다가 쟁반에 들고 온 아이보리빛의 와인잔을 집어 들며 구석에 앉아 있는 톨베 인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이마에도 팔에도 붕대를 감은 채로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물고 있던 그는 세라피스가 앞에 다가오자 조용히 얼굴을 들었 다. 슬픈 표정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쌀쌀맞아 보이는 외 모로 말없이 세라피스를 올려보고 있을 뿐. "줄리탄은?" "아마...... 바닷가에 있겠죠." 그렇게 중얼거리는 톨베인은 조용히 담배 연기를 흘렸다. 그의 말대로 줄 리탄은 시링크스와 함께 바닷가에 있었다. 계속 다른 모습으로 부딪치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곁에 앉아 희미 한 미소를 띈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물키벨을 바라보며 단번에 그녀가 잠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그녀를 들어 침대에 눕힌 뒤 꽉 막혀오는 숨에 괴로워하다가 몇 시간이고 혼자서 울었던 것이다. 그런 줄리탄을 바라보며 톨베인은 할 말이 없었다. 이상하 게 눈물도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눈물샘에 딱딱한 무언가가 들어앉아 감정이 터지는 것을 막고 있는 듯이 톨베인은 아침부터 계속 담배만 물었 다. 톨베인이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실연을 당했어요. 떠난 여자에게 화도 낼 수 없 는 실연이니까......" "실연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세라피스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앉는 것이었다. 모두의 가슴이 찢어질 듯한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 차라리 그런 것이었 다면 아무 생각 없이 소리쳐 우는 짓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조차 아니다. 그 여자는 그냥 마치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선뜻 자 기 것을 다 줘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수천년을 넘게 살았다면서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던 것처럼. 정말 그런 여자였던가. 밤낮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며 말도 안 되는 고집만 부리다가 결국 때가 되니까 혼자서 죄다 짊어지고 작별해 버린 거다. 말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속았다는 생각마 저 드는 화가 나고 씁쓸한 기분. 슬퍼할 여력조차 없었다. '멋대로 사라져 서 정말 미안해'라는 말 정도는 남겨줘도 괜찮잖아. "원래 행복과 여자라는 것이 사라진 뒤에 더 존재감을 발휘하거든. 자기 가 있었던 빈자리를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지. 같이 있을 때는 몰라. 그냥 당연하고 일부 같으니까. 하지만 사라져 버리면 자기 마음의 이 부분도 저 부분도 그 여자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한 순간에 느끼게 되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슬프지 않아요...... " 사실 톨베인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의 문턱이다. 그래서 사실은 그녀가 살 아있을 거라고 침울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톨베인은 담 담하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누워 있으려고요." "응?" "이상하게 지쳐버린 것 같으니까." 쓸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톨베인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향냄새 가 가득한 와인 하우스의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갔다. 약이 오를 정도로 따 가운 햇살이 단번에 뺨을 간지럽혔다. 7. 레비아탄은 아직은 베오폴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례식에 참여한 것도 아니지만. 장례식장 근처에서 그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크라켄 과 대화 중에 있었다. 크라켄은 몸을 떨며 아까부터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간들과 함께 있다가 결국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역시 인간들 따 위와 가까이 하시면 안됐던 거야! 제기랄!" "하지만 그 분이 스스로 원한 일이니까요." "왜 그렇게 냉정한 거야!" "냉정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물키벨님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을 뿐이에 요." 레비아탄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큰 키의 마른 몸을 가 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어린아이처럼 어색해 보였다. "오랜만이야. 자라탄." "이제 어쩔꺼지? 물키벨님이 사라졌어. 우리들의 앞일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레비아탄도 크라켄도 자라탄의 인간모습을 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들어냈다는 것은 그만큼 수장이 사라진 것이 중대한 문제였 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비아탄 만큼이나 침착하게 말하고 있는 그녀는 항상 물키벨의 조언역할을 했던 레비아탄을 향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물 어봤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앞일이라...... 결국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복수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용의 수장이라는 것은 수장이 죽으면 다음 용이 이어받는 그런 계승의 문 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길고 긴 역사동안 단 한번도 수장이 죽은 적이 없을 뿐더러 수장을 계승받는다는 자체가 그들에겐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수많은 선택의 자유'위에 놓여 버 린 것이랄까. 자라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인간들과는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할 꺼야?" 물키벨의 부탁으로 레비아탄도 자라탄도 크라켄도 인간들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주고 있었지만 이제 그럴 이유는 사라졌다. 이쯤에서 모두 퇴장해 줘 도 상관없는 것이다. 레비아탄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슬며 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겐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너 설마 또 사라지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이 모습 그대로 인간들 속에서 살아보고 싶어." "......세상에." 크라켄이 혀를 차는 것도 당연한 게 바다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존재가 굳 이 불편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채 인간 들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뒷골목 에서 강도를 당해 죽을 수도 있고 살기 위해서는 끝도 없이 돈을 벌고 다 른 자들을 설득하고 속여야 하는 그런 세상에 뭐 하러 일부러 끼어들려고 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내가 용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 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보고 싶은 거야. 수백년 정도 그렇게 살다보면 ...... 답이 나올지도 모르지. 죽을 수도 있겠지. 더 이상 해일을 일으킬 수도 없고 단숨에 바다를 가로지를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그냥 안전한 곳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이 육체만을 가둬두고 있으 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할 것 같아 . 그래서 나도 물키벨님처럼 나를 소비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고 싶은 거야. 물론 궁룡의 수장이 이 세상을 불태워버리면 그것도 끝이겠지만.... .." "넌 항상 방관하는구나." 레비아탄은 자라탄의 말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안녕. 이 세상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지금 떠날 생각이야?" "일단 이 도시부터 떠나볼까 해. 일자리도 얻고, 가능하면...... 여자도 사귀고." "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엉뚱한 용이야." "이미 물키벨님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나는 아마 두 번째로 엉뚱한 용 이 되겠지." 레비아탄은 그렇게 말하며 할 말을 잃어서 입이 쩍 벌어진 크라켄과 팔짱 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라탄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몸을 돌려 거리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 어디로 가도 상관 없다. 용이라는 것을 버리고 그냥 이 세상의 한 명이 된 채로 레비아탄은 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러던 중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톨베인을 흘깃 바라본 뒤에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영원히 늙지 않고 인간 세계를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물키벨이 한 말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레비아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8. 아무도 없는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 톨베인은 뚜벅거리는 자신의 발소 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한 채 물키벨과 있었던 사소한 추억들을 떠올리길 반복할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 하지 못하겠다. 그녀가 사라진 것이 자신에게 어떤 것인지 실감조차 못하 겠다. 톨베인은 하나도 정리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심란해하며 병실 문 을 열었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잠들 때까지 눈을 감고 싶었다. "......?" 문을 열고 들어오던 톨베인은 순간적으로 문가에 웅크리고 앉은 물키벨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왜 아까 전에는 발견하지 못 했을까. 문 근처 바닥한켠에는 예전 자신이 물키벨에게 주었던 청록색의 반지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저 반지 안 사주면 잡아먹어 버 릴 테다!'라는 고집을 부려 산 것이었지만. 그 반지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 었던 것일까. 톨베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 반지를 집어 들었다. "어!" 톨베인은 그 반지가 반응하며 빛을 뿜자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반지 에는 물키벨의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 에헤헤. 시, 시작됐잖아? 아 미안. 혼자서 당황해 버려서." 반지를 통해 엉뚱하게 서둘고 있는 흐릿한 물키벨의 모습이 투영되기 시 작했다. 그것은 마치 낡은 필름이 영사되는 것 같아서 그때 그녀가 온통 식은땀에 젖어있다는 것은 알아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 록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톨베인은 표정을 잃은 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가 이걸 볼 때 아마 나는 다른 곳에 가 있을 꺼야. 미안해. 이런 식으로 분위기 없게 작별인사를 해버려서. 그리고 또 미안해. 좋아한다는 말에 대답해 주지 못해서." 그리고 어느 때보다 빠른 그녀의 말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마치 아주 짧 은 시간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최대한 담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말해주듯이. 대단한 말들은 아니었다. '그때 그런 말을 해줘서 정말 고마 웠어.'라든지 '사실 난 너하고 꼭 가보고 싶은데가 있었어.'라든지. 마지 막 고백치고는 너무 사소해서 한심할 정도의 이야기들을 물키벨은 두서 없 이 마구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떨 려오며 힘이 드는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일부러 커다랗게 내면서 마지 막 말을 꺼냈다. "응? 알겠지? 앞으로는 일찍 일어나고 옷도 제대로 입고 담배도 끊고 그 리고...... 날 기억해 주고. 나도 계속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화가 나더 라도 날 잊어버리지마. 부탁할게. 계속 부탁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것 같지 만...... 나, 이번에도 부탁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갑자기 멈춰버렸다. 울먹임이 심해지던 물키벨의 어린애 같은 목 소리가 필름이 끊어져 버린 듯이 갑자기 끝나 버렸다. 이대로는 울음을 참 을 수가 없어서 잠들어 있는 톨베인을 깨울지도 몰라 그녀는 자신의 소중 한 마지막 고백을 멈추고 조용히 문을 열어 반지를 놓은 뒤 떠난 것이리라 . 톨베인은 그리고도 한참 동안을 더 이상 빛도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 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병실. 이제 그 녀의 마지막 말도 끝났다.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여자는 이제 어디 에도 없다. 톨베인은 이제와서야 처음으로 물키벨이 죽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서 있던 빈자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보잖아...... 그런 말...... 죽고 나서 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 는 거잖아." 떨리는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반지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위로해 줬어야 하는데, 항상 실수 투성이인데다가 고집만 센 그런 여자는 내가 위로해 줬어야 하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위로 받은 쪽은 나였다.' 막혀 있던 감정들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참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실연 당했는데 이상하게 용서받고 싶은 쪽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좀 더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그때 톨베인은 처음으로 눈물이라는 것이 어떤 의 미를 가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것이 어떤 기분 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Blind Talk 이제 슬슬 끝으로 향하고 있군요. 아 그런데 지상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물키벨이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반지에 자신의 동영상을 담을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면 '그건 사랑의 힘이오.'라고 변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본래는 편지였습니다. 그런데 편지는 이미 리이가 써먹으니까... 그리고 뭔가 환타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으니까 '기록마법'이라는 것을 썼습니다. 애인이라... 물키벨과 톨베인이 공식적인 커플이 된 적은 한번도 없습니 다. 하지만 공인커플이었다고 했더라도 물키벨은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게 분명하죠. 아마릴리스나 리이나 물키벨이나 굉장한 결단력을 지닌 여자들 인 것만은 분명하네요.(처음부터 줄리탄,시오,톨베인은 똑같은 상황을 거 치게 만드려고 계획했었기 때문에... '왜 또 죽인 거냐 이 살인마야!'라고 메일 보내봐야 소용 없습니다.) 아주 예전 일인데... 제 곁에 재미있는 여자가 한명 있었습니다. 우연히 모임 같은 곳에서 만나 항상 그렇듯이 참 시시한 얘기들 엄청 웃 으면서 주고 받아 놓고는 명함 주고 헤어졌는데... 한달 쯤 후에 뜬금없이 전화가 오는 게 아니겠습니다. 그냥 심심한데 만나자고. 그럼 만나지 뭐. 그래서 눈 내리는 한겨울에 대책없이 만났습니다. 결국 거기서도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우스운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근처에 일 때문에 약속이 있어서 그만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선뜻 알았 다고 말했고 '그 일 끝나는데 얼마 걸려?'라고 물어보길래 대충 '20분쯤?' 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리고 바로 한블럭 옆에 있는 카페에 가서 사람들 과 회의를 했는데 불행하게도 회의가 1시간이 넘게 길어졌습니다. 이런 일 은 제 쪽에서는 다반사로 벌어지는 일인데... 아무튼 그 여자에 대한 생각 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카페문을 나오는데 벌써 어둑한 밤. 그런데 갑자기 근처 계단에서 쪼그려 앉아 캔커피를 마시던 '무언가'가 날 발견하더니 엄 청 놀란 듯이 캔을 집어던지고 두다다다다 달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_- "놀랐지!"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로 그 여자.-_-;;; 그런 것 에 놀라는 사람는 장님이거나 여자접촉기피증 환자 밖에는 없겠지만... 그 여자는 자기도 무안한지 다시 돌아가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캔커피를 쓰레 기통에 집어 넣더군요. ;;;; '뭐야 이 여자. 1시간 동안 기다린 거냐.' 그 여자는 날 멋대로 '엄동설한에 여자를 한시간동안 기다리게 만든 못된 놈'으로 만들어 버렸고 뭔가 굉장히 미안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게 해 줬습니다. 그 이후 추운 몸을 풀기 위해 근처 술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습 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뭐가 재 미있는지 막차가 끊길 때까지 늘어놨습니다. 그리고 지갑을털어서 택시태 워 보내주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계속 만나는 것 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음에는 이쪽에서 전화질을 해서 만나고... 만 나주고... 그런데 말이죠(우물우물) 그렇게 여러 에피소드들로 사이를 다 져와서 아주 거창한 결별의식이 없이는 헤어지지 못할 것 같던 우리둘은 그냥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졌답니다. 갑자기 내 핸드폰을 열더니 자기 전화번호를 지워버리고 '미안해.'라고 말했고 내 쪽에서도 '괜찮아.' 라고 대답하고 끝. 멍하니 돌아와서 샤워하고 이불속에 들어가 한시간 동 안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잠들었습니다. 시시하죠? -_-;; 하아. 지금까지 참으로 씁쓸한 농담이었습니다. -_-)y-~~~ 아무튼 그건 그렇고... 장시간 글을 올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나마 하나 올린 것이 두리뭉실하고 어두침침해서 더욱 죄송. 아... 카페에 많은 분들이 가입하셨더군요. 제가 만든 카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야 대단해.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괴상망측 사이트 소개'는 절대로 제가 돈을 받고 소개하는 것 이 아닙니다.(어떤 멍청한 스폰서가 저 같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광고를 부탁하겠습니까.-_-) 그냥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사이트들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것도 접어야 겠네요. 18금 사이트 빼고 매우 매니악 해서 저 같은 사람만 웃을 수 있는 사이트도 빼고 너무 강도 높은 사이트 들도 빼니까... 뭐 별로 남지 않는다는.-_- 잡담이 길었습니다. 춥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 주 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조규찬의 Baby Baby를 들으며... (제목이 괴이해서 안들으려고 했는데 들어보니까 참 좋네요.) -------------------------------------------------------------------------------- Next : 9 : 17-09 :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written by 부우녕자1호) -------------------------------------------------------------------------------- -------------------------------------------------------------------------------- Name : 부우녕자1호 Date : 11-11-2001 12:24 Line : 429 Read : 339 [11] 수호성-2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2 Slayer Child 1. "시키지도 않은 일이다. 오히려 난 물키벨을 죽이지 말라고 말했던 것으 로 기억하는데." 테싱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루시퍼가 목 에 칼이 다가온 듯 움찔거렸다. 세르난 덕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건 처음 겪는 수치였다. 자신의 날개를 찢은 해룡의 수장을 죽이기는커녕 인간들에 게 팔을 잃고 이제는 다른 궁룡들 사이에 서서 또 다시 변명을 늘어놓는 꼴이라니. 무엇보다 그는 비웃음조차 없는 인형 같은 얼굴로 진땀을 흘리 는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가랑이 싫었다. 테싱의 씰 외에는 아무 것도 아 닌 주제에 테싱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속으로는 자신을 비웃고 있겠지. 루시퍼는 이를 꽉 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저는 테싱님을 위해서 해룡의 수장을......" "네가 나를 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는 단지 내 명령대로 움직이면 되는 손가락일 뿐이야. 멋대로 움직이는 손가락 따위는 잘라버리 겠다." "......!" 얼음 같은 목소리가 몸을 숙인 루시퍼의 등을 덮치며 그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테싱의 목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루시퍼는 그가 적잖게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 왜! 인간들 따위와 어울리는 해룡과 싸웠다고? 그를 이공간에 억겁의 시간동안 가둬놓은 오펜바하에게도 분노 하지 않으면서 고작 그런 일을 가지고 화가 난 것이란 말인가. 루시퍼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테싱이 자신 을 죽이는 결론만은 나오지 않도록 바라는 것뿐이었다.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널 소멸시키겠다." 테싱의 말이 들리자 루시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테싱에게는 누구도 필요 없다. 그 자신은 어떤 허점도 없을뿐더러 마음만 먹으면 단 혼자의 힘으로도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노 력도 어떤 고민도 필요 없는 필요 이상으로 절대적인 전능신. 모든 것이 하찮은 그런 그가 소중히 하는 유일한 존재는 가랑 뿐이었다. 루시퍼는 그 것이 너무도 싫었다. 솔직히 가랑에게 심한 질투를 느꼈다. 테싱의 곁에 서 있는 자는 바로 자신이고 싶었지만 어떤 일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테싱 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하지만 말이죠 물키벨님은 결국 죽지 않았잖아요? 아주 많이 다쳤을 테 지만." 세르난의 말에 테싱이 몸을 돌려 가랑의 손을 잡으면서 대답했다. "돌아가라. 다시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어라? 물키벨님, 죽었어요? 어쩌다 죽은 거지?" 눈치가 빠른 세르난이 놀란 얼굴로 대답했지만 테싱은 가랑과 함께 회색 빛 왕좌(王座)의 뒤편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테싱이 사라지자 미카엘은 어 두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는 루시퍼를 향해 툭하고 비웃음 섞인 말을 던 졌다. "나도 테싱님이 약해 빠진 가랑을 아끼는 것을 싫지만 너야말로 인간들에 게 그런 꼴이 되는 주제에 어떻게 테싱님을 모시겠다는 거냐. 그런 꼴로 돌아올 바엔 차라리 죽지 그랬나." "뭐라고! 이 자식이!" "나와 싸우겠다는 건가. 잘됐군. 너 같은 약자 하나 죽인다고 테싱님께 피해가 할 것은 하나도 없겠지." 발끈한 루시퍼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미카엘에게 뛰어들 기세였고 엷은 조소를 보이는 미카엘도 파랗게 빛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또 다시 세르난 이 말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루시퍼는 창을 들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헤헤. 그만 좀 하세요들. 이러다가 저까지 혼나기는 싫으니까." 신성함이니 고결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심한 신경전이 싫었 는지 세르난은 싱글거리며 두 궁룡 사이를 막아섰다. 미카엘은 루시퍼에게 서 천천히 눈길을 돌리며 '한심한 녀석이다.'라며 사라졌고 루시퍼는 분에 못 이겨 몸을 떨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세요. 참으세요. 루시퍼씨. 네?" "세르난......" "왜요?" "왜 항상 그러는 거지. 너야말로 네 힘이면 나도 미카엘도 죽이고 테싱님 의 유일한 궁룡이 될 수 있을 텐데...... 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맨날!" 루시퍼가 세르난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 전 주작(朱雀) 브륜힐트나 대해수(大海獸) 레비아탄과 불리한 곳에서 싸웠 을 때도 밀리지 않았던 힘을 가졌는데 궁룡들 사이에서는 싸움을 뜯어말리 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자신이었다면 당장 주 변의 다른 궁룡들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세르난은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라 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당신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요. 또 그것에 대해 테싱님이 별 말씀 안 하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제가 테싱님의 유일한 부하가 되는 영광을 누린다고 해도 테싱님은 결국 가랑님만을 바라볼 거니 까요. 그러니까 뭐하러 귀찮게 당신을 죽여야 하나요." 그런 얼굴 그런 목소리로 하는 말치고는 몹시 소름끼치는 말이어서 루시 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필요 없으니까 죽이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세르난은 '그것보다는 재미있는 구경이 훨씬 많거든요.'라고 말하 며 역시 성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2. 궁룡들이 가르바트에 강림한 이후에도 가르바트의 숨통은 단번에 끊어지 지 않았다. 물론 궁룡들은 인간들을 전혀 지배하지도 통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제국 대부분이 무법의 치안공백지대가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도를 중심으로 몰려 있는 천사들을 피해 사방으로 피난한 사람들이 변방의 소규모 병영도시나 관문, 사창가등으로 몰려들었 고 가르바트는 새로운 인간의 군락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며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화폐도 작위도 통하지 않는다. 만 물의 척도로 여겨졌던 금화조차도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직 식료 품과 의료품, 무기만이 그 가치를 가지며 살인마저도 죄 값을 물을 수 없 는 부정적 자연상태(自然常態). 버림받은 인간들만이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우리도 이 참에 헤스팔콘 땅으로 가는 게 어떨까? 아니면 먼 길 이지만 달라카트라도......." "바보 같은 소리. 헤스팔콘은 아직도 내전 중이야. 거기 갔다간 정말 개 죽음 당한다고. 그 왕국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줄 것 같아? 간첩이 라면서 당장 죽일 걸? 그렇다고 헤스팔콘을 뚫고 티브 사막을 넘어 달라카 트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그 제국이 가르바트 난민들을 조용히 받아 줄 리가 없지. 그냥 용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 숨어 있는 편이 나아." "용들이 사라진다라...... 도무지 모르겠어! 그런 말도 안되는 놈들이 대 체 지금까지 이 세상 어디에 처박혀 있던 거야!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가 게를 여는 그 날에 쳐들어 올 건 또 뭐란 말야! 또 그 잘난 황실은 뭐하고 있던 거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추워 죽겠는데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땔감이나 가져와 좀!" 피난민들이 유입되어 한 달만에 몇 배나 인구가 불어난 변방의 소도시 앙 헬은 많고 많은 피한도시(避寒都市)중에 하나였다. 천사들이 나타나지 않 는 밤이 되어서야 슬금슬금 황폐해진 도시의 중앙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눈물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모닥불로 어렵게 몰아내며 어제도 했던 투정 을 똑같이 늘어놓았다. 이제 겨울이 온다. 어떻게든 먹을 것들을 구해놓지 않으면 궁룡들에게 먹히기 전에 아사해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들은 두터운 옷과 급조한 창 따위를 들고 먹을 것을 찾아 도시를 돌아다니곤했 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독한 세상이 겨울과 함께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슬슬 움직이려 고 할 때 가로등이 죽어 있는 거리 저편에서 피빛의 낡은 망토로 몸을 감 싼 백발의 청년과 길고 검은 코트를 입은 차가운 눈빛의 사내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응? 뭐야 저 녀석들은...... 설마 또 강도들!" "아, 아냐. 두 명뿐인걸?" "그런데 칼을 차고 있어! 설마...... 기사 아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창과 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그들에게 천사보다 더 지독한 존재는 제대로 된 난방 없이 보내야 하는 배고픈 겨울 이었으며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밤이면 출몰하는 도적들이었던 것이 다. 이 부조리한 현실은 불신과 의심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 보는 자들을 향해 조금도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거기 멈춰! 왜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일단...... 그 칼 버려." "미안하지만 버릴 수가 없는 검이야." 싸늘한 밤바람에 줄리탄의 백발이 흩날리며 망토가 나부끼는 소리에 섞여 그의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하 려는 듯 인피타르를 거꾸로 쥐며 다가왔다. 날개를 접은 새처럼 적막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모닥불에 비춰지는 하얀 입김과 함께 그의 다음 말이 들 려왔다. "용들이 있는 곳,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나?" 3. 사람들의 눈에는 기묘한 백발을 지닌 줄리탄과 이 추위에도 조금도 표정 이 변하지 않는 그의 씰 시링크스가 몹시 이상하고 불안하게 보였을 것이 다. 자기들은 용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용굴로 들어가겠니. 줄리탄 은 사실 이번이 세 번째였지만 사람들이 '용들에게 여동생이 죽어버린 뒤 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형제들'이라고 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도 당 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하루만 신세지고 가겠다면서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으니 더욱 불안한 노릇. 솔직히 생판 모르는 녀석들인 데다가 굉장히 위 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칼까지 차고 옆에 있는데 마음 편할 사람 누가 있겠 는가. 그런데도 줄리탄은 두 자루의 검을 조용히 곁에 놓으며 눈을 감았고 시링크스는 자기 코트를 벗으며 줄리탄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나. 형, 어디서 본 것 같아!" 사람들의 만류에도 줄리탄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간 꼬마가 그를 보며 의 아한 듯이 말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달라카트에 있을 때 분명히 봤던 사람이다. 줄리탄은 슬며시 눈을 뜨며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슬픈 외로움에 그 아이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런데 그때와는 눈이 달라......" "......그렇게 보이니?" "응. 다른 사람 같아." 줄리탄은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그 꼬마를 고요하지만 쓸쓸한 눈동 자로 바라보았다. 물키벨로부터 생명을 수혈 받았을 때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라고 생각했다. 점점 이 세상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는 느낌.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어버릴 것 같은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카넬리안 한 명뿐이다. 그녀를 껴안기 이전에는 참회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악랄한 기분이 온 몸을 덮고 있었다. 그래도 알고 있다. 누구도 자기 인생의 대리 인이 되어 줄 수 없다는 것을. "도적떼다!" 그때 말을 타고 있는 한떼의 무리들이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고 있었다. 밤이면 도적들의 출몰에 몸을 떠는 자들은 비단 이 도시 앙헬의 난민들만 은 아닐 것이다. 4.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세금을 내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법 의 울타리마저 지금은 무너져 내린지 오래다. 인적가치경시라는 전염병이 마치 악취처럼 가르바트에 창궐하며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정점에 내몰려 버린 셈이랄까. 미처 약자들이 도망치기도 전에 몰려든 도적들은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뻔하다. 먹을 것과 젊은 여자. "여기에 우리가 만족할만한 것들을 모두 담아. 없으면 집에 가서 가져와. " 커다란 포대를 바닥에 던진 도적들은 살벌하게 눈알을 굴려대며 목숨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 자루가 가득 차지 않으면 네 놈들 모두 죽는다. 하긴, 이 따위 세상에선 죽여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 안 그래?" 자루를 채우지 못하면 죽는다. 그 자루가 바로 목숨의 무게라는 것을 이 해 못하는 바보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탄 도적들에게 저항할 용 기도 추위에 얼어붙은지 오래였기 때문에 몇 명은 겨우 겨우 모아두었던 식료품을 가져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 몇몇은 눈물을 흘리며 주머 니에서 말린 소시지나 딱딱한 빵을 꺼내기 시작했다. 결국 인간을 공격하 는 가장 무서운 대상은 같은 인간이라는 진리를 재확인하면서 말이다. "야! 너희들은 뭐야? 어럽쇼? 칼을 가지고 있잖아." 5. 도적들이 도끼며 몽둥이를 들고 줄리탄에게 다가올 때까지 그는 말없이 가끔 불꽃을 뱉는 모닥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링크스가 조그맣게 투덜 거리며 줄리탄을 감싸고 있었던 코트를 다시 벗긴 것은 아마도 아끼는 옷 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 검 좋아 보이는데." 도적두목 쯤으로 보이는 녀석이 줄리탄의 머리에 장전된 석궁을 들이대며 말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갑옷도 뚫어버리는 석궁의 화살이 몸을 관 통할 것이지만 시링크스는 아직까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두목이 기분이 상한 것도 당연하다. 새파란 애송이 두 녀석이 귀머거리인지 잽싸게 검을 상납하지는 못할지언정 자기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는 줄리탄의 머리를 석궁의 끝으로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뭐야. 영웅 흉내라도 내겠다는 건가? 난 너 같은 놈들이 가장 싫어! 뭔 가 있어 보이는 척하면서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위선자." "맞는 말이야. 지킨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줄리탄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말이었다. 카넬리안이 있었다면 지금쯤 석 궁을 잡아채서 저 하늘로 던져버린 다음에 평생 틀니를 껴야할 정도로 강 렬한 따귀를 때려주고 있겠지. '너야말로 도적이면 도적답게 굴어. 번드르 르한 헛소리 늘어놓지 말고. 알아들었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럼 또 깜짝 놀란 줄리탄이 황급히 뜯어말리고...... "미친 놈. 나도 한 때는 잘 나가던 용병이었어. 이상한 새끼들이 나타나 서 이 꼴이 되었지만.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그 따위로 분위기 잡을 거 면 저 세상 가서 마저 해라. 빌어먹을...... 내 재산! 내 애인들! 죄다 끝 장나 버리고 이 추운 날 도적질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나만큼 불행한 놈 도 이 세상에......" 침을 튀겨가며 마구잡이로 늘어놓기 시작한 도적의 한탄사가 끝나가며 석 궁의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그의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팔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석궁은 멋대로 발사되어 곁에 있던 동료의 다리를 뚫어버렸고 비명이 차오르기도 전에 시뻘건 피가 바닥에 깔 리기 시작했다. "......기, 기사?" 자신의 팔이 사라진 것을 안 도적은 검을 쥔 채로 천천히 일어서는 줄리 탄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쳤다. 줄리탄이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네 놈만 비극의 주인공은 아냐." "기사였어....... 제기랄!" "이 세상엔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놓고도 기뻐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단 말 야." 줄리탄의 눈가에 서려있는 섬뜩한 기운을 뒤늦게 확인하면서 두목은 '내 가 왜 대체 이 놈이 기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지!'라며 미친 듯이 후회하 고 있었다. 벌써 땅에 깔린 핏무리에 살얼음이 끼고 있을 정도의 혹한이다 . 치료받지 않으면 십 여분 내로 죽게 되는데 병원이 있을 리가 없고 팔이 잘린 두목 따위 도와줄 부하들도 아니다. 덕분에 그는 조금 더 불행해 졌 다, 라고 말하면 참 잔인한 말이겠지. "주인님. 너무 예민하다." 시링크스가 번식하듯 바닥에 깔려오는 핏줄기를 슬슬 피하며 줄리탄에게 다시 코트를 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듯이 속삭였다. "당신 참 요령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항상 긴장하고 있으면 가랑을 만나 기도 전에 지쳐 버린단 말야. 이런 녀석들은 나한테 맡기고 가서 눈 좀 붙 이라고." 줄리탄은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자신의 행동에 자책하고 있었다. 팔을 잘 라버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자기 도 모르게 저질러 버린 창피한 일. 그렇다고 잘려나간 팔이 다시 붙는 것 도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파악한 사람들은 슬슬 다시 예의 자루에서 자기 음식들을 꺼내고 있었고 도적들은 '마치 용을 만난 듯' 하얗게 질려서는 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물론 힘을 잃은 두목은 어찌되든 그들 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콰르르르르릉! 그때 마치 벼락이 떨어진다는 착각을 했다. 시력을 앗아가는 듯한 빛의 기둥이 연속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며 몸이 짓이겨지는 끔찍스런 소리와 함께 도적들의 몸이 분해되어 버린 것이다. "시링크스!" "내가 한 거 아냐. 내가 지금 저런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시링크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학살의 빛 사이로 세르난이 나타났다. 무척 반갑다는 얼굴로 싱글거리고 있는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웃음을 띈 채 줄리탄에게 날아왔다. "오랜만이네요 인간을 직접 죽여본 건. 나쁜 녀석들이니까 죽여도 괜찮았 던 거죠? 헤헤." 괜찮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말 자체가 어이가 없을뿐더러 왜 또 줄리탄에게 나타난 것일까. 세르난은 자신의 말을 듣고 이곳까지 온 것이 몹시 기쁘다며 수다를 늘어놓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난민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아아! 주, 죽이지 마세요 제발!" 벼락을 내리는 궁룡이 자신을 쳐다봤다. 죽을 정도로 놀란 사람들이 무릎 을 꿇으며 덜덜 떨자 세르난은 헤에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죽이지 않을게요. 어차피 제가 아니라도 조만간 다른 녀석 들이 죽일 테니까요. 아? 그런데 물키벨 님 죽었다죠?" 들어주기 힘든 난폭한 말을 웃는 낯으로 흘리는 세르난을 보는 순간 줄리 탄은 그의 멱살을 잡으며 노려보았다. 깜짝 놀란 세르난의 얼굴에서 단번 에 웃음기가 가신다. 그리고 거칠게 타오르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네 놈의 눈엔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하찮게 보이는 거냐!! 다 시시한 장 난으로 보이는 거냐!!" ".......이 손 놓으세요." "똑바로 들어. 난 네 녀석의 장난질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 !" 시링크스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가며 두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세 르난의 표정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Blind Talk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위의 대사 중에 '네 놈만 비극의 주인공은 아냐 .'라는 줄리탄의 대사는 무한의 주인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사무라 히데 아키의 팬들께는 죄송합니다만(저도 팬입니다.) 너무 좋아하는 대사라서 '패러디라고 우기면서'라도 써 봤습니다. 음... 출판본에서는 바뀌겠죠.( 에 그 외에도 찾아보시면 블레이드 런너의 대사나 지뢰진의 대사, 아스피 린의 대사 같은 것들이 나오지요. 알고 보면 이 글은 잡탕입니다.-_-;) 그리고 '왜 자꾸 깡패나 도적들이 나와서 제물이 됩니까?'라는 질문에는.. . 일단 잘 보시면 처음 줄리탄이 깡패들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을 대처하는 방법이나 그 때의 심경이 꽤 다릅니다. 당황했다가(1부) 의연하 게 대처했다가(2부) 무시했다가(3부) 지금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았지요 ...... 그러니까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이런 같은 상황을 다르게 대처하는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캐릭터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겠다... 였지만 역시 계속 같은 상황을 남발하는 것은 빈약한 상상력의 부산물이라고 밖에 는...-_-;;; 에 그리고 이번 편의 소제목인 Slayer Child는... 혹시 이 단어, 무슨 락 그룹 이름인가요? 예전 ICQ로 알게 되었던 여자 락매니아의 닉네임인데(캘 리포니아에 살던 조숙한 소녀-_-) 꽤 멋있어서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에 큰 의미없이 썼지만.... 아직까지도 대체 이게 어디서 가져온 이름인지는 모 르겠네요.-_- (서치엔진 뒤져봐도 안나오는 것을 보니까... 하지만 분명 어디서 가져온 이름이라고 했었는데. 물어봐도 대답 안해주고 사라졌음... ) 아 그리고 그 도둑놈 녀석이 포대자루 던지면서 '먹을 것을 채워라!'라고 소리치는 치졸한 협박극을 벌이는 부분은... 제가 써 놓고도 '이거, 어디 선가 들어던 내용 같은데... 십자군 원정 때 이야기 였나?'라고 생각했습 니다. 혹시 이거 다른 곳에서 써먹었던 부분이라면 좀 알려 주세요.-_-; 흐음 마지막으로(많기도 하지...) '왜 용이 그렇게 인간스러워요? 전혀 성 스럽지도 않고... 가끔 바보짓도 하고.'라는 질문들을 받았는데... 저는 되도록 용을 용답지 않게 써보려고 했으니까요.(아니라고요?-_-) 나중에 밝혀지는 이야기 보시면 왜 그 모양인지 알게 되시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용들을 뭔가 좀 나사풀린 인간처럼 혹은 너무 극단적으로 치닳은 인간처럼 쓰려고 했습니다. 에 그러니까 이번 편에서도 신경질도 내고 막싸움도 하 고(-_-;) 멱살도 잡히지요.(-_-;;;) 뭐 정말 용다운 멋진 용은 다른 글에 서도 충분히 볼 수 있잖아요? (아...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그 동안 메일 보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만.... 사실 물키벨이 죽고 굉 장한 량의 메일이 왔습니다. 대부분 고맙게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이었지 만 어떤 분은 '그 편 지우고 물키벨 다시 살려내세요!'라든지 '그럼 톨베 인은 뭐가 됩니까!'라든지... 아아 과분한 관심에 정말 감사 드립니다. 에 그런데 메일에 답장을 보내려면 정말 마음 잡고 써야 할 분량이라서 답장 은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어떤 질문에 대한 답변... 톨베인이 인피타르를 뽑고 줄어든 생명은 아마 자기 인생의 절반 정도가 아닐까요.... 저는 그 정도 손해 봤 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KHEOPS의 SO FAR THE WAY EAST를 들으며... (CF송으로도 유명한 음악이죠. 발칸 반도 쪽의 리듬이라는데... 가사가 무 슨 욕하는 것 같다는 것만 빼면 멋진 노래. 뭔가 환타지스럽죠.-_-) -------------------------------------------------------------------------------- Back : 12 : [ DRAGON LADY ] 18-03 : 수호성 (written by 운영자) Next : 10 : [ DRAGON LADY ] 18-01 : 수호성(守護星) (written by ..;;;;)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3 There's Always One, You Can't Forget 1. 아침을 알리는 엷은 빛줄기에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 깨끗한 향기가 감도는 침대시트의 보드라운 감촉이 기분 좋게 느껴 져 새하얀 시트에 볼을 비비다가 눈 앞에 무엇을 발견하고는 눈동자가 덜 컥 커져 버렸다. 곁에 보이는 뽀얀 살결의 어깨. '앗! 앗!' 우테는 아직 잠들어 있는 세라피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 작했다. 아 그래. 어제 밤늦게 창문에서 고개를 불쑥 내민 세라피스가 들 어왔었다. 무지하게 놀랐지만 너무 반갑고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아 미안 . 방을 잘못 찾았네.'라고 장난스럽게 웃는 세라피스의 팔을 자기도 모르 게 꽉 잡았던 기억이 난다. 같이 있고 싶었다. 황제가 벽에 착 달라붙어 자그만치 17층까지 기어올라온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우테는 긴 밤의 시간 동안 세라피스와 함께 했다. '......는 것까진 좋은데.' 우테는 걱정스런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쿠션들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잠 들어 있는 세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정말로 검술의 달인일까? 라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릿한 곡선을 가진 매끈한 어깨와 투명할 정도의 하 얀 살결,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눈썹을 반쯤 덮은 풍성한 금발이 이른볕에 반짝거리고 있다. 검의 대가는 곁에 누가 있으면 자다가도 눈을 뜬다는데 누구보다 빠른 검술을 가진 주제에 조금의 긴장감도 없이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마치 하린(河鱗) 처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우테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 남자는 망국의 순진한 여황제 따위 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값싼 자비를 베풀며 자신의 몸을 가져간 것이 아 니었다. 도리어 외롭고 지쳐서 기대고 싶다며 이 사람 쪽에서 찾아왔다. 의외로 약한 사람...... 그리고 그런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준 것이 고마웠 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우테는 얼굴이 빨개지며 얼굴 끝까지 얇은 담요를 끌어 올렸다. 후궁도 아니고 약혼조차 하지 않은 자신과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것이 알려져 버리 면 손해보는 쪽은 세라피스였던 것이다. 미혼의 젊은 달라카트 황제가 가 르바트의 어린 망명여황제의 침소에 들었다는 것을 순수하게 바라볼 사람 이 어디 있을까.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일이었다. 게다가 우테 역시 '식객으로 들어 온 주제에 황제를 유혹해서 한몫 잡으려는 요녀 '라는 소릴 들을 수도 있다. 혹시라도 세라피스가 나 몰라라 해버리면 모 든 원흉은 우테가 지는 것이고 달라카트에서 추방되어도 할 말이 없어진다 . 그럴 리가 없어, 라고 부정하면서도 우테의 불안한 상상이 가지에 가지 를 치며 커져가고 있을 때 문 밖에서 짧은 종소리와 함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테 여황님. 조반을 준비하셨사옵니다." "아아앗!" 우테의 머리 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여느 때처럼 아침식사 시간이 다가와 버린 것. 달라카트 황궁에서 조반은 직속황가를 제외하면 특별한 일이 없 는 이상 거처에서 해결하게 된다. 그것 것까진 좋은데 이대로는 들.켜.버. 린.다. 그냥 자는 척 해야 하나. 당당하게 문열고 나가서 조반을 들이다가 는 세라피스를 난감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아니 어쩌면 이미 세라피 스가 자기 침실에 없는 것이 밝혀져서 황실에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이 불을 뒤집어 쓴 우테는 패닉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때 멍한 얼굴로 눈을 반쯤 뜬 세라피스가 부스스 일어서며 대충대충 옷을 줏어 입기 시작했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멍청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바지를 입다가 꽈 당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을 정도. 사실 세라피스는 프란츠가 아침마다 전쟁을 치러야 할 정도로, 황제 폐하의 기침(起寢)에는 서녀명의 시녀가 달라붙어야 하는 끝내주는 아침게으름뱅이였다..... 는 것까지는 좋은데 남의 방에 와서도 저 모양이란 말인가. 우테는 세라피스가 다시 17층 창문 밖으로 도망치려는 줄로만 알았다. "지금 뭐 하세요. 세라피스 님......."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지 우테의 조그만 목소리를 듣지 못한 세라피스는 계속 종소리가 울리고 있는 문으로 하품을 하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 고는 머리칼이 산지사방으로 뻗어 있는데다가 웃옷은 입지도 못한 전혀 권 위적이지 못한 상태로 덜컥 문을 열어 버렸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야 말 았다. "......!!!" 조반이 실려 있는 손수레를 잡고 있던 시녀는 난데없이 훤칠한 키를 가진 (게다가 가슴이 다 보이는) 사내의 그림자가 자신의 얼굴을 덮자 넋이 나 간 얼굴로 흔들고 있던 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세라 피스 황제다. 마음 속으로나마 연모하는 폐하가 역시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지게 생겼다는 건 둘째치고 대체 왜 여기서 나타나냔 말인가. 황제를 이 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릎을 꿇어야 한 다는 것도 모르고 비명을 터트릴 뻔했지만 세라피스는 계속 졸린 눈으로 문가에 기대어 그녀를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오늘은 아침 안 먹을래.'였다. "화, 화, 황제 폐...... 하." "얼레...... 프란츠는 어디 가고 네가 온 거야?" "예? 예?" "얼렐레? 이런......" 세라피스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하얗게 질린 시녀와 경악에 찬 우테를 둘러보고 헤에 웃으며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내 방이 아니었네." 우테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남자, 바보야! 세라피스는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바삭한 빵과 물이 오른 과일, 향긋한 차가 담겨져 있는 손수레를 끌고 방 으로 들어온 뒤에 문을 닫아 버렸다. 이불 속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우테 가 앙하고 빵을 물고 있는 세라피스에게 속삭였다. "어, 어쩌실 꺼에요 이제." "뭘?" "뭐, 뭐라니요. 그러니까......" 빵을 물고 어린애처럼 눈을 비비던 세라피스는 우테 곁에 털썩 앉으며 중 얼거렸다. "숨기지 않으면 그건 비밀이 아니야." "예?"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고상하고 모범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 해도 괜찮은 거잖아." 그러면서 세라피스는 우테의 가는 팔을 잡고 끌어 올려 주었고 우테는 넋 이 나간 얼굴로 잡혀 있는 팔을 통해 온기가 느껴지는 그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자신을 버림받은 하찮은 여자 정도로 본 것이 아니었다. 막 대하고 버려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여자로 본 것이 아니었다. 눈의 나 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찾아온 이 곳. 이런 곳에서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의 팔을 잡아 줄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기분에 몸이 떨려왔다. "아 그래도...... 열 살이나 연하와 사귀고 있다는 건 정말 범죄에 가까 운 일이로군. 호호홋 신도 질투할 중범죄라고나 할까. 아아 나도 참 죄많 은 남자야아." "누가 내 팔을 잡아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우테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바트 황궁에서 차갑게 얼었던 마 음이 이제서야 조금씩 풀어지며 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 날 잡아줬으면 했지만....... 황제의 팔은 아무도 잡지 못 하는 거니까요. 사람들은 언제나 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려 놓고 밑에서 나를 바라보았어요. 주변에는 언제나 아무도 없었어요. 마르 켈라이쥬조차 내가 믿고있는 유일한 신하일 뿐, 내 친구는 될 수 없으니까 . 그런데 당신이......" 그녀는 계속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그게 꼭 사랑스런 고백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냥 위로해주기만 해도 고 마웠다.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 손을 내미는 대신 무릎을 꿇 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을 말하며 그녀가 그것에 동의해 주기만을 바라 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주면 '우테 여황폐하 만세!'라는 공허한 의태를 해줄 뿐, 그들이 원한 것은 말을 잘 듣는 황제였지 16세의 소녀 우테가 아 니었다. 주변에는 누구도 없었고 누가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세라피스가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종류는 참 다양했다. '이제는 계속 내 곁에 있어 줄게.'라던가 '그런 외로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잘 참아 왔어.'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위로해 줄 대사는 많았다. 하지만 세라피스는 흐르는 눈물을 긴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울면 결국 눈이 퉁퉁 부어서 오후에 나하고 놀러나가지 못할 꺼야. 모처럼 맑은 날인데 망쳐 버릴 생각이야?" 그리고는 바닥에 놓여 있는 어제의 셔츠를 집어 들었다. 달콤한 동정의 말 같은 것 전혀 해주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너무 고마워서 가슴이 꽉꽉 메어왔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상하 고 세심한 사람. 그리고 어쩌면 실은 이 남자도 자기만큼이나 많이 상처 입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쪽에서도 껴안아주고 싶었다. 세라피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선한 마음이라는 거, 세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마음이고 또 가장 변질 되기 쉬운 저녁만찬의 전채(前菜)요리 같은 거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니까. 선한 사람은 언젠가는 복을 받는다는 말만큼이나 실없는 농담 도 없고 말야. 솔직히 나도 별로 선한 녀석은 되지 못해." 입고 있는 셔츠의 소매 사이로 그의 부드럽고 하얀 팔이 드러난다. 조각 이 완성되는 듯 단추를 잠그고 물결 같은 머리칼을 다듬으며 뒤로 넘기는 와중에도 그의 말을 계속되었다. "하지만 난 선한 사람이 전혀 복을 못 받을 수도 있는 이런 세상이기 때 문에 도리어 선한 것이 용기이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심에서 상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게 이 세상의 선이라고 생각 하니까. 선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시당할 수도 있고 오해받을 수도 있고 거 부당할 수도 있는 약점 투성이의 마음이지만...... 요령 없는 놈, 야무지 지 못한 녀석이라는 말을 들어도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 마음을 지켜간다면, 자기가 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인류 최대의 의문 하 나 정도는 풀 수 있겠지. 설령 평생 복을 받지 못한다 해도, 아주 슬픈 추 억들만 잔뜩 남게 되더라도...... 자신이 숨쉬고 있는 이유를 느낄 수 있 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것만은 믿고 싶어 우 테." "세라피스...... 씨." 그는 자기가 말해 놓고 좀 창피한지 손가락 끝으로 뺨을 긁적이며 사족을 덧붙여 버렸다. "차암...... 정말이지 어떤 시대와도 어울리지 않는 생활력 없는 이야기 야. 한심하지? 전쟁을 일으킨 황제 주제에 잘도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니. 리하르트가 들었다면 제발 그런 웃기지도 않는 농담 좀 하지 마세요, 라고 짜증을 냈을 거야. 하지만 말야, 나한텐 힘이 된다고. 내겐 그 마음이 이 세상에서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되었으니까...... 너도 들어줬으 면 하는 거야." 세라피스는 독백 같은 말을 마치며 우테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의 진심 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오해받고 무시당하고 상처 입을 수 도 있는데도 그는 볼품 없는 자기 진심의 일부를 우테에게 선물해 주었고 그녀는 자신의 땅에 그것을 소중하게 심어 놓았다. 물론 그 이후 머리끝까 지 화가 나서 우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세라피스에게 검을 들이 댄 마르켈라이쥬의 오해를 풀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한 것과 '지금이 연애할 땝니까!'라고 소리치며 드물게 성질을 내는 리하르트의 화를 풀어주기 위 해 비참하게 애교를 떨었던 것, 황궁의 예법에 대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쳐 주겠다며 중정의 수도원으로 끌려가서 열시간 동안 설교를 들은 것만 제외 하면 꽤 좋은 출발이었던 것 같다. 사랑할 시간 같은 것이 아직 남아있으 면 좋겠지만. 2. "좋아. 그럼 당신을 죽이고 돌아가서 가랑도 죽여버리겠어. 꼴 좋게 되었 군." 차가운 미소를 보이는 세르난의 눈길에 살기가 도는 것을 보면서도 줄리 탄은 세르난의 옷을 움켜진 손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세르난을 죽여버릴 듯한 기세는 더 커져가고 있었다. "웃기지마. 네 놈 따위가 카넬리안을 해치도록 놔둘 것 같아? 노력하지도 않고 얻은 힘으로 협박이나 하는 주제에. 자기 힘을 어디다 써야 할지조차 모르는 어린애 주제에 남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란 말야!" "한심한 인간. 가랑은 절대로 널 다시 바라보지도 않을텐데 지켜주겠다고 ? 너야말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곳에 힘을 낭비하는 놈이야. 아무도 봐주 지 않는 춤을 혼자서 열심히 추고 있는 꼴이라고!" 세르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가랑은 분명히 테싱의 씰. 누구도 접근 할 수 없는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혼자 서 있는 여자다. 줄리탄이 그 탑 을 향해 손을 뻗어도 그녀는 잡히지 않는다. 그래, 그런 것쯤 알고 있다. 결국 자신을 위해 그 탑을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줄 리탄이 말했다. "......날 다시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 "뭐?" 세르난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는 사 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목숨을 불 태우며 지켜줘도 자신을 위해서 울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상관없단 말야! 넌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을 테 니까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 줄 알아. 다시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아. 날 기억조차 못한다해도...... 견딜 수 있어. 내가 사라지기 전에 죽어가는 그녀를 구해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할 꺼야." 세르난에겐 몹시도 낯선 말이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해도 상관 없다는 말 인가. 그러면서 자기 것을 전부 주겠다고?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몹시 낯선 소리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과일를 씹은 듯 그 작은 궁룡은 그 말을 몇 번이나 음미하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조금씩 살기가 사라져가며 예 전의 말투로 돌아와 버렸다. "헤헤헤.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 손 풀어줘요. 네?" 줄리탄은 그제야 여전히 굳어 있는 얼굴로 세르난을 놓아주었다. 단번에 줄리탄을 부셔버릴 줄 알았던(그리고 능히 그럴 힘이 있었던) 세르난은 구 겨진 엷은 보랏빛의 옷을 다듬으며 정말로 어린아이처럼 베시시 웃는 얼굴 로 그를 바라보았다. "잡을 수 없는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건가요 줄리탄 씨?" "......" "분명 별을 잡을 수는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 별빛을 마음 속에 담아둘 수는 있겠지요. 그 별빛 아래서 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다면...... 그래요 , 가랑님을 지켜주세요." 그 말을 슬픈 시구(詩句)처럼 흘리며 세르난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 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난감한 듯한 미소와 함께 소리쳤다. "그리고 말이죠 겁을 먹지 않는 인간이라니...... 헤헤. 그건 솔직히 좀 무서웠습니다. 약속하죠. 테싱님의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당신을 죽이 지 않겠어요." 세르난은 마치 굉장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얼굴로 '음. 그래. 그것도 좋겠어.'라고 중얼거리며 한기(寒氣)가 내리는 밤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이제부터 화를 내기 시작한 시링크스가 이번에는 줄리탄의 멱살을 잡으며 드물게 소리쳤다. "주, 주인님! 더 이상 날 놀라게 만들지 마! 죽을 뻔 했잖아! 이기지도 못할 녀석을 협박해서 어쩌자는 거야! 제길, 카넬리안이겪었던 고충을 이 제야 알수 있을 것 같아." "하하. 너 처음으로 카넬리안이라고 말했네." "아? 아...... 아무튼!" 시링크스는 자기도 놀랐는지 입을 다물며 아주 오랫만에 웃고 있는 줄리 탄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정말 용들하고 다른 면이 있다. 쉽게 쉽게 처리 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용들과는 달리 인간들은 어떤 것이라도 정말 원하 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굉장히 힘을 내야하고 바보같을 정도로 결심을 해 야 한다. 한걸음 한걸음이 고생의 연속인 셈이다. 아마 카넬리안도 그런 인간의 대표적인 인물과 계약해 버리는 바람에 놀랄 정도로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닐까. 화도 내고 위로도 해주고 가끔은 커다랗 게 실망도 하는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아무튼 시링크스 역시 줄리 탄의 생각이나 행동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방금 전 세르난을 상 대로 겁을 먹었거나 자기 생각을 꺾었다면 세르난은 분명 줄리탄을 죽였을 것이다. -Blind Talk 아 물키벨의 죽음에 대해 쓰고나서 문득 떠오르는 옛일인데... 그러니까 전 여러개의 회사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어디는 국내 게임계.. . 어디는 미국 만화계... 또 어디는 일본 만화계 라는 식으로 나눠져 있는 데... 그러다 보니까 워너나 토에이같은 유명한 회사의 컨텐츠들도 다루고 는 합니요.(물론 그렇다고 제가 대단한 파워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_-) 그런데 회의중에 갑자기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간부A : "토리야마 아키라가 죽었다며?" (다 아시겠지만 드래곤볼의 원작자) 나 : 푸후후훅!(커피를 마시다가 뿜어버렸음) "그, 금시초문인데요?"(어이가 없었음..) 간부A : "확실히 죽었데. 드래곤볼이 그래서 끝났다는데?" 나 : "그럴리가......;;;;;;" 결국 확인해 보니까 영화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였습니다.-_- 의외로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는 이런 업계에는 이런 이상스런 오보나 낭설 , 루머등이 괴담처럼 많이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워너가 DC를 인수할 꺼라 는 정보도 '낭설이겠군.'이라고 생각하고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다가 나중 에 발표된 것을 보고 '진짜잖아!!!!'라고 소리질렀습니다.-_- 또 그림이나 글이나 만화나 게임... 그런 쪽에서 일하는 녀석들끼리 술자 리를 갖다보면 별의 별 얘기가 다 오갑니다. 'XX사가 곧 주식 공개한데!' 라는 작전정보(-_-)부터 시작해서 '그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OO가 회사를 어디로 옮길 계획이라는데? 지금 몇군데서 얼마얼마에 연봉협상중이야.'라 는 루머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그 게임 실은 전혀 개발되지 않고 있어.'라 는 유출되면 몹시 곤란한 말까지 심심찮게 쑥떡거리는데... 결국 여기서도 부고(訃告)루머가 터졌습니다.-_- "베르세르크 작가가 죽었데!" 커어어억! (일동 경악. 전 닭 뜯어 먹다가 목에 걸렸음.-_-) "그, 그 사람이라면 미우라 겐타로? 죽긴 왜 죽냐 이 멍청아!" "어? 정말 죽었다는데? 그래서 책이 안나온데." 결국 확인해 보니까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였습니다.-_- 크아악! 아야코씨가 죽어서 더 이상 그 분의 수필을 읽을 수 없다! 는 것은 나도 괴롭지만 베르세르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단 말이다! 아무튼 유명한 작가의 책이 안나오면 '죽었다!'라는 루머가 돌긴 하지만 대체 이 허탈감은... 소위 업계사람들은 의외로 낭설에 귀가 얇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그런 말까지는 들어본 적은 없지만... 몇몇 통신작가분들 에 대한 루머도 들은 바로는 만만찮은듯.-_-;) ...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내일의 조'의 원작자인 카지와라 이치키가 오래전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책에서 분명히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읽어 놓고도 저는 한동안 '루머야. 낭설이라니까.'라고 생각 하며 믿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86년도에 정말로 죽었더군요.(콘도 요시후미 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 사람, 죽을리가 없잖아?'라며 일주일이나 안 믿고 있었다...) 반면 찰스 슐츠의 타계 소식은 이상하게 단번에 믿어버렸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재한 만화를 보면서 '이 사람은 참 큰 집을 만들고 떠 나는구나.'라는 생각에 찡한 감동을... 길창덕 선생님의 꺼벙이 마지막 회 를 보면서도 어린마음에 눈물이 글썽거렸건만... 멋진 결말이라는 것은 여 전히 제게 감동을 줍니다.(얼레? 낭설로 시작해서 왜 이런 결말이...-_-) 그건 그렇고... 이번 편 닭살이죠? 예 그렇습니다. 몇번을 고쳤지만 처음 부터 '이번 편은 닭살로 나가자!'였기 때문에 닭살이라면 닭살 오버라면 오버입니다. 사실 저는 '저 감동받았어요.'라는 고백씬 같은 것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데다가 취향도 아니라서(오히려 쓸쓸하고 허전한 것을 좋아함) 피하고 있었지만... 읽는 분들에게 '미적지근합니다. 확실하지 못한 남자 들 투성이로군요.'라는 투정을 들을 때마다 '가끔은 닭살을...'이라는 생 각을 하고 있다가 이번에 좀...(솔직히 성격 탓에 진정한 닭살도 되지 못 했지만.)'착한 사람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까 착해자자!' 라는 말은 제 신조 중에 하나 입니다만...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슬슬 난로 꺼내시 길. E-MAIL : billiken@hananet.net 서편제OST중 소리길(대금버전)을 들으며... (국악인이 된 '작은 거인' 김수철씨의 굉장한 음악입니다. 그 영화를 두번 이나 봤으면서 BGM에 집중하지 않았던 것이 정말 후회될 정도로... 불행하 게도 서편제OST는 소량이 풀린 뒤에 이제는 절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김수철씨의 작품전집CD에 들어있다니까 희망을...)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4 Grounds Of The Life 1. 깨진 색유리의 조각들과 바람이 쌓아 놓은 흙먼지들이 들어 찬 가르바트 의 황궁은 정적을 넘어서 음침하기까지 했다. 황실이 몰락한 이후 미친 듯 이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부서진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쌓여가며 흙과 뒤 섞여 질척거렸다. 덕분에 황실의 대회랑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싸늘한 통로 의 모습으로 젤리드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젤리드. 나, 싫어. 우리 나가자.” 카리나가 젤리드의 팔을 잡아끌며 절대 이런 곳에서 밤을 지내고 싶지 않 다는 얼굴로 칭얼거렸지만 젤리드는 궁룡이 할퀴고 지나간 이곳을 훑어보 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럼 밖에서 야영할 생각이야? 저런 눈보라 속에서 밤을 보냈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차라리 눈보라가 나아!” 카리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두운 대회랑을 갈랐다. 궁룡이 언제 나타 날지도 모를 이런 위험한 장소에 젤리드가 있는 것은 정말로 싫었다. 비겁 해도 좋으니까 당장이라도 이런 곳에서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젤리드 는 못 마땅해서 죽겠다는 카리나의 표정이 도리어 귀여운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녀석이 이곳으로 올 테니까 그때까지는 기다리고 있자고.” “나도 줄리탄 님을 만나고는 싶지만......” 카리나는 말을 흐렸다. 그들이 줄리탄에 대해 우연히 들은 것은 며칠 전 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가진 백발의 사내와 그의 충실하고 냉정한 경호원 이 황궁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난민들에게 들었고 젤리드가 생각하기에 그럴 녀석은 줄리탄 한 명뿐이라고 판단하며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 카리나도 줄리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위험천만의 장소에 젤리드가 오는 것만은 절대 반대였다. “줄리탄 녀석,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런 엉뚱한 곳에서 죽어버리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역시 귀찮더라도 내가 도와주는 편이......” “거.짓.말.” “어?” “주인님은 단지 용들과 치고 박고 싸우고 싶을 뿐이잖아!” “그럴 리가. 네가 있는데...... 내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할 리가 없..... .” “신용 없는 목소리야 젤리드.” 카리나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당장 궁룡이 나타나도 이 상할 것이 없는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또 전주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가랑이라는 존재는 인간으로 치자면 유년기 깊숙한 기억 속에 남 아 있는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난 그때도 인간의 편이었지.’ 테싱이 잠들기 전, 인간들 위에 항상 궁룡이 있었고 물키벨은 모든 것에 방관하고 있었으며 오펜바하가 인간들의 뒤를 조종하던 그때. 자신을 깨운 자는 목석 같던 남자였다. 인간들 사이에서 용사라고, 영웅이라고 불리던 사람. 몇 번이나 궁룡들에게 저항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아름다운 여 자를 만나서는 얼굴을 붉히며 결혼해 버린 그런 ‘평범한 영웅’이었다. 자식을 낳고 가족과 함께 은둔했을 때 카리나는 그의 곁에서 아이들을 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었다. ‘저 여자에게 주인님을 뺏겼다!’라는 질투심 도 들었지만 자신은 절대로 낳을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 며 그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했고 가끔 테이머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이 좋아서 ‘나는 내가 씰이라는 것이 좋다. 영원히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다시 가랑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런 소중한 장소로 찾아온 자가 바로 가랑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 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랑의 힘을 카리나의 주인은 단번에 느꼈지만 - 평소처럼 도망칠 수 없었다.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검을 들고 가랑과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승부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했 다. 카리나는 자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주인의 두 팔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았고 그러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랑에게 뛰어드는 모습도 보았다. 그렇게 카리나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일방적인 싸움은 끝났다. 마지막으 로 기억나는 주인의 얼굴은 자신을 미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공명을 시 도하려는 피투성이의 모습. 그러나 공명이 이뤄지기도 전에 가랑의 검은 주저 없이 테이머의 목을 베어버렸고 마음이 찢겨나가는 듯한 괴로움과 함 께 가랑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가랑의 인형 같은 눈동자를 보며 전 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힘이 모이지도, 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을 죽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랑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붉은 눈빛을 흘리며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카리나는 가랑이 그렇게 사라질 때까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젤리드. 그럼 이곳에 있을 테니까 한가지만 약속해 줘.” “응? 뭐." 그리고 실연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 테이머 가족들의 피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낀 것은 극도의 두려움이었다. 망각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책감과 공포. 그걸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또 다시 그녀의 그런 눈동자를 봤을 때, 이번에는 겁을 먹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젤리드를 지켜낼 수 있을까. “만약에 용들을 만난다면 도망쳐야 해.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도망쳐야 해?"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런 강적과 마주친다면 도망치는 것보다 차라리 허점을 노리는 편이 훨씬......” “도망치란 말야!!” 카리나가 두 눈을 꽉 감으며 소리지르자 젤리드는 ‘대체 이 녀석 왜 이 래?’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으로 그런 카리나의 뺨을 살짝 물며 말했다. “테이머에게 명령하는 건방진 씰이로군. 하지만 알았어. 아쉽긴 하지만 그럴 때가 오면 도망치자고. 죽을 힘을 다해서 말야.” “저, 정말? 약속한 거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렇게 건성건성 말하던 젤리드의 눈빛이 갑작스레 날카롭게 변하며 흉수 를 꺼냈다. 카리나 역시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눈보라의 소음을 뚫고 조금씩 커져 오는 발걸음 소리. 젤리드가 차갑게 굳 은 시선으로 발소리가 들려오는 통로의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줄리탄?” 하지만 줄리탄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늑대가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 . 그리고 그쪽에서도 젤리드를 느꼈는지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잠 시 후 어둠 속에서 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은 아니로군......” 그 목소리와 함께 벽면을 가득 메운 초상화들이 비명을 지르듯 일시에 불 타오르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그 자와 젤리드를 이어주는 불길의 통로가 만 들어졌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피에 엉킨 하얀 코트를 입은 자의 모습 이 드러났다. "......흉몽?" “세이드. 기분 나쁜 장소에서 기분 나쁜 녀석을 만나 버렸군.” 젤리드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싸늘한 미소가 뭉치기 시작했다. 젤리드의 눈빛은 보통 사람이 보면 당장에 고개를 돌릴 정도로 섬뜩하다. 그런 고압 적인 눈동자에 살기가 들어차며 당장이라도 세이드를 베어버릴 기세로 불 길 속에서 번뜩이는 흉수를 들어 올렸다. 카리나가 말했다. “제, 젤리드. 도망치기로 했잖아!” “저 놈은...... 용이 아니야." 흉몽의 모습으로 돌아온 젤리드가 불길 속의 세이드에게 걸어가며 도리어 만나서 아주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뭐하고 있어. 우린 아직 끝낼 일이 남아 있잖아." “나는 지금 할 일이 남아 있다. 그게 끝나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세이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싸늘했지만 젤리드는 예전에 봤던 모습과 는 전혀 달라 보이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눈에 걸리는 녀석이나 방해하 는 녀석은 당장에 모조리 죽여버리는 새디스트 미치광이였는데, 그런 세 이드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봤던 것이다. 황제의 칙령을 받았어도 싸움을 주 저할 녀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상관할 젤리드가 아니었다. “개소리하고 있군. 넌 지금까지 남의 사정 봐주면서 싸웠냐. 무방비의 민간인들도 학살한 주제에 할 일은 무슨 할 일. 악당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장식해 줄 테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검이나 뽑아.” “......그렇게 죽고 싶나.” “틀렸어. 죽이고 싶다.” 마력의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간 스테인드 글래스가 바닥에 떨어지 며 음산한 빛과 함께 산산이 깨지고 있었다. 세이드가 아무도 없는 이 황 궁 속에서 물 한 모금도 없이 미카엘을 기다린지 삼일 째. 그러나 아직까 지 미카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좋아. 죽여주지." 세이드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난생처음 싸우고 싶지 않은 결투였지만 지 금까지의 원한을 생각할 때 절대로 물러설 젤리드가 아니었다. 아무나 닥 치는 데로 죽여온 악당 주제에 이제 와서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 다. 리센버러에서의 사투가 마무리될 것 같은 상황. 그때 카리나가 소리쳤 다. "젤리드 조심해!" "누구냐!" 젤리드는 등 뒤에서 강렬한 기운이 뭉치고 있음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몸 을 피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젤리드가 있던 자리를 시퍼런 빛줄기가 관통하며 지나갔다. “피한 건가. 인간.” 온기 없는 빛의 날개를 펼치는 미카엘의 모습이 형성되며 천천히 눈을 뜨 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인 것조차 아니고 공간과 시간을 무시하고 일순간 에 강림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모습에 젤리드는 저 반인(半人)의 존재가 용 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카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 렸다. “제, 젤리드...... 도망칠 시간이야.” 그 순간 미카엘에게 날아드는 존재가 있었다. 세이드는 할 수 있는 최대 한의 마력을 모으며 젤리드를 지나쳐 미카엘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검이 야수처럼 포효하며 미카엘의 가슴을 찔렀다. 콰르르르릉! 두 힘이 충돌하고 검날이 갈리며 엄청난 스파크가 터졌고 서로의 세력을 빼앗으려는 두 마력이 엉키고 휘몰아치며 대회랑 전체가 무너질 듯이 울리 기 시작했다. “하찮은 힘이다.” 어느 때보다도 혼신을 다한 세이드의 일격이었지만 결국 미카엘의 빛이 세이드의 등을 뚫으며 관통했고 세이드는 압도적인 힘에 밀려난 세이드는 멀리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검을 놓치지 않은 세 이드는 자신의 검에 몸을 의지하며 다시 일어서는 것이었다. 젤리드가 복 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이드. 네 놈이 말한 볼 일이라는 것이 저 용이냐?” “방해하지 마라. 네 녀석은 저 놈을 죽인 후에 상대해 줄 테니까.” 세이드는 탁한 목소리로 미카엘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젤리드는 그의 그 런 모습에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봐도 저 궁룡은 기적 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싸우 다가 멋대로 죽어버리겠다고? 최악의 패를 들고 전재산을 걸어버리는 꼴이 었다. 젤리드가 말했다. “이봐. 이건 내가 본 네 놈의 미친 짓 중에 최악의 변태 짓이야. 자기보 다 월등히 강한 놈에게 치욕적으로 죽는 것이 네 마지막 소원인 줄은 몰랐 다.” “늑대에게 물려죽나 사자에게 물려죽나 죽음 그 자체는 똑같아.” 세이드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미카엘에게 다가가며 읊조렸다. 미카엘은 귀 찮은 듯 그들을 바라볼 뿐 공격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 기사로서, 싸움 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치욕이라면 최고의 치욕이다. 세이드가 검에 다시 마력을 휘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지금 죽음을 탐닉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단지 속죄할 수도 회개할 수도 없는 내가...... 그 멍청한 여자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있 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그리고 그는 다시 뛰어 오르며 차가운 광원이 되어 공중에 떠 있는 미카 엘에게 다시 검을 휘둘렀고 또 똑같이 미카엘의 방벽을 뚫지 못하며 막혀 버렸다. 미카엘이 소리 없이 비웃었다. “불결한 감정만 잔뜩 가지고 있는 인간이로군. 정화시켜주지.” 그리고 미카엘의 손가락이 마력에 묶여 버린 세이드의 이마로 다가왔지만 세이드는 피하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두 눈으로 미카엘을 노려보며 그의 힘에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 그 순간에 미카엘에게 끼어든 것은 흉 수였다. 젤리드의 검기가 미카엘의 벽을 찢어버릴 기세로 충돌하자 미카엘 은 팔을 거두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으르렁거린 쪽은 세이드였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젤리드는 미카엘을 올려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나지막히 말했다. “맘에 안들어. 네 놈도 저 놈도." “......” “도망치기로 했잖아! 바보 젤리드!” “미안 카리나. 주인 잘못 났다고 생각해. 하지만 걱정하지마. 난 죽지 않으니까.” “누, 누가 죽도록 내버려둔데!” 카리나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카리나는 자기와의 약 속을 대번에 내팽개치고 미카엘에게 다가가는 젤리드에게 화가 치밀어 올 랐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겁이 나진 않았다. 두 팔에 새하얀 힘이 감기고 있었다. 생각 같았던 젤리드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그가 위험하다면 당장 이라도 뛰어들 수 있었다. 씰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 러고 싶었다. 그런데 미카엘은 이런 상황이 몹시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 다. 불길 속에서 석고의 가면 같던 그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며 창백한 빛이 모이는 팔을 들어 올렸다. ‘온다!’ 미카엘의 팔에서 가공할 파동과 함께 굵은 빛이 터져 나왔고 젤리드와 카 리나, 세이드는 그 궤적을 읽으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제길!’ 직진하리라 예상했던 그 빛줄기는 급속히 꺾이며 세이드의 몸을 다시 한 번 뚫고 나왔고 그 끔찍한 속도를 유지하며 젤리드를 덮치려 했다. 그는 저렇게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는 광선 앞에서는 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방법은 막아 세우는 것뿐이다. 젤리드는 기 력을 쏟으며 흉수의 검신을 넓게 세웠다. “크윽!” 그 빛줄기가 흉수와 충돌하며 젤리드의 몸이 밀려나기 시작했고 마치 용 접이라도 당하는 듯이 흉수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녹아들고 있었다. 하지 만 젤리드는 온몸이 새파란 불길에 휩싸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피하거나 주저하는 순간 죽게 된다. 몇시간 같았던 10여초의 폭풍 끝에 미카엘의 빛 줄기는 멈췄고 반쯤 녹아내려 시커멓게 그을린 흉수를 들고 있던 젤리드는 입술을 깨물며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추슬렀다. 저 빌어먹을 궁룡 놈이 지 친 기색조차 안 보이는 것에 치를 떨면서. 그러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 니었다. ‘사라졌다!’ 눈 앞에서 흔들거리던 미카엘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젤리드의 등뒤에 나타나며 미카엘은 새하얀 손바닥으로 젤리드의 어깨를 잡아 들어 올렸다. 인간으로서 방어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으아아악!!” 젤리드는 정신이 마비되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미카엘의 손은 마치 젤리드와 이어진 듯이 떨어지질 않았다. 온몸 에 쇳물이 쏫아지는 것 같는 격통. 미카엘의 손가락이 어깨 속으로 파고 들며 흘러나오는 피가 증발하고 있었지만 그는 흉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떨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고통을 억누르려 했다. 미카엘은 이미 핏기가 사 라진 상태인데도 냉소로 자신을 노려 보는 젤리드의 표정에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조용히 죽지 못하고 무모한 저항을 하는 건가.” “그게 바로 인간의 의지니까. 네 놈이 말하는 불결한 감정이라는 거다! ” 전혀 자비를 원치 않는 불손한 대답에 미카엘은 팔을 끊어버릴 생각으로 힘을 주었다. 그 의지라는 것의 무력함을 느끼게 한 뒤에 죽일 생각이었는 데...... 갑자기 매서운 발차기가 얼굴을 강타하며 미카엘의 표정이 뭉개 져 버렸다. 카리나였다. “주인님을 놔 줘 이 괴물놈아!” “씰...... 인형 같은 씰 따위가 감히!”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카리나의 발차기 따위는 간지러울 뿐이었지만 얼굴을 맞은 것은 모욕에 미카엘의 표정이 극도로 험악해졌다. 미카엘은 그대로 카리나의 가는 발목을 잡으며 엄청난 힘으로 벽으로 내던져 버렸고 불길에 휩싸인 벽으로 내던져진 카리나는 벽을 부수며 날아가 뒹굴었다. 젤리드가 말했다. “이봐.” “이 건방진 놈들이!” “네 씰을 건드리지 마라.” 젤리드가 흉수를 던지며 빠르게 다른 손으로 옮긴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 고 부웅 소리와 함께 마력의 방벽도 없이 냉정함을 잃고 소리치는 미카엘 의 팔이 잘려 나갔다. 젤리드의 어깨를 짓누르던 미카엘의 팔은 마치나뭇 가지가 부셔지듯이 너무도 간단하게 끊어졌고 젤리드의 어깨에 파고든 손 은 마치 도자기가 깨져버리는 것처럼 금이 가며 빛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죽은 나무를 잘라버린 기분이야. 네 놈이야 말로 인형 아니냐?” 젤리드는 조롱과 함께 미카엘에게서 빠져나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머 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미카엘이 젤리드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젤리드 의 뒤에서 튀어나온 세이드의 검이 미카엘의 겨드랑이에 깊게 박혔다. “이 놈...... 죽은 게 아니었냐.” “말했다. 널 죽인다고.” 섬뜩하게 뚫린 세이드의 가슴만 보더라도 그는 이미 죽었어야 했다. 남을 헤치기만 했던 무가치한 생명. 여기서 끊어져 버린다고 슬퍼할 사람 한 명 도 없지만 그래도 절대도 지금 만큼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집착이라는 마법이 심장이 돼서 그의 숨을 악귀처럼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세이드 의 마력이 단말마처럼 검을 울리며 미카엘의 몸을 끊어버리기 시작했고 그 의 몸에서 피와 같은 광체들이 뿜어져 나왔다. “네 놈이...... 인간 따위가.......” 미카엘은 감히 자신의 몸을 찢어버리려는 세이드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 지만 그런 그의 손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고 곧 수갈레로 금이 가기 시작하 며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 균열의 선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목 을 타고 올라와 얼굴 전체를 뒤덮은 균열의 틈에서 차가운 빛이 세어 나왔 다. “쳇. 역시 도자기 인형이었군.” 젤리드는 증오에 가득 찬 미카엘을 바라보며 흉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공기를 찢어버리며 날아든 흉수는 붕괴되는 미카엘의 몸을 강타했고 빛의 폭발과 함께 미카엘의 몸이 산산조각나며 새하얀 몸조각이 사방으로 터져 버렸다. 천천히 빛을 잃으며 산화되고 있는 미카엘의 시체를 보며 세이드 는 그제서야 바닥에 쓰러졌다. 젤리드 역시 쓰러지려는 몸을 엉망으로 녹 아버린 흉수로 지탱하며 계속 흘러내리는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미카엘은 소멸했다. 전 제국의 군대를 죄다 동원해도 죽일 수 없을 것 같았던 궁룡 미카엘이 무너진 것은 후대 음유시인들이 빼놓지 않고 찬양하게 될 기적인 것이다. 물론 일단 이들이 이곳에서 살아나갈 힘이 남아 있어야 겠지만. 다리가 부러진 듯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카리나가 살아있는 젤리드를 보며 너무도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그 꼴이 뭐야! 바보 젤리드! 역시 도망치는 편이 좋았잖아!” "아아. 나도 후회하고 있어. 어쨌든 이런 꼴로 줄리탄을 기다리는 건 무 리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당장 치료 받아야 한단 말야!" 젤리드는 깊은 상처가 난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아마 왼 팔은 평생 쓰지 못할 것 같다. 어차피 흉수하고도 이제 작별해야 겠지만, 젤리드는그 런 생각을 하며 낮게 웃었다. '검을 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로군.' 카리나는 그래도 젤리드가 살아 있다는 것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젤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눈치채지 못한 힘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흉수를 꽉 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언제 뒤에 다가온 거지.” 아무리 큰 부상을 입었지만 바로 등 뒤까지 나타난 자에 대한 기색을 느 끼지 못한 경우는 전에는 없었다. 카리나 역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젤리드 의 뒤로 다가오고 있는 존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잊어버릴 수 없는, 그래서 너무도 두려운 붉은 눈빛. “......가랑.” 아직은 잠들어 있는 미스트랄을 들고 있는 가랑은 감정이 지워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 유령 같은 모습. 카리 나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두려움이 다시금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 다. 몇백년전의 악몽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Blind Talk 사실 이번 편은 두개로 나눠서 올리려고 했지만...... 그러면 사람들에게 칭찬받는다고 해도 조삼모사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에 한번에 올립니다. 사실 이번 편에서 미카엘은 2차변신(-_-)을 하려고 했습니다. 본모습을 들 어냈다고나 할까? 유령 같은 모습으로 부활해서 또 죽어라 싸우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드래곤볼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잖아?'라는 생각에 지워버리고 그냥 도자기 깨지듯이 산산조각나는 최후로 장식. 그래 도 역시 전형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게다가 마법도 전혀 화려하지 않고 뭐 색다른 싸움스킬이라는 것도 지양하는 소설이라서 액션 이 화려할리도 없지요. 그냥 적당히 하드고어할 뿐.-_-; 뭐 이번 편은 카사블랑카도 아니고 죄다 가르바트 황성으로 모여드는 난장 판 분위기. 세이드에 젤리드에 카리나에 미카엘에 가랑에 어쩌면 줄리탄까 지? 이런 분위기에서는 코믹한 것이 쓰기에 더 편하지만... 도저히 농담이 라도 웃기게 쓸 분위기가 아니라서.-_- 아 그리고 며칠전 NIGHTMARE라는 닉네임으로 제게 메일 보내신 분이요. 제가 글을 쓰게 된 동기 같은 것에 대해 물어보신 분인데... 답장을 보내 도 되돌아 오네요. 그렇다고 이곳에 답장을 올릴 수는 없으니까 답장 필요 하시다면 회신 가능한 메일조소로 다시 한번 보내주시길.^_^ 최근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영화 '브라더'를 봤습니다. 다행이도 영어자막 이라도 들어가서 어줍잖게 해석하며 즐겁게 관람했는데... 이번에는 확실 히 기타노 씨가 일본풍의 느와르 스타일이라는 것을 정립하려 했음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시나리오가 좀 빈약한 맛이 나고 간 씬 들도 끊어지는 느낌이 나는데다가(의도한 것 같기도 하지만...) 부분 부분 스타일 과잉으로 확실히 허무감과 허탈감이 영화를 지배하기는 하지만 진 정한 필름느와르라고 하기에는 좀 어정쩡해서 일본 전통적 야쿠자 영화와 네오 느와르, 홍콩 느와르를 섞어 놓은 듯한 인상이었습니다.(그리고 팜므 파탈도 안나오고요. ^_^a) 그래도 기타노 스타일이라면 일단 좋아하기 때문에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보고 나서 '그래 역시 세이드는 좀 더 느와르틱해야 했어!'라고 새삼느끼 기도... 그리고 영화의 코스츔 디자이너가 그 유명한 야마모토 요지라는 것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언제나처럼 멋졌구요 . 일본영화에 자주 실망하곤 하는데 기타노는 어쨌든 자기만의 방법으로 절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일단 어둡고 허무하며 비장하고 쓸쓸하며 잔인하 고 절망적이며 반영웅적인 스타일이라면 다 좋아하긴 하지만.(이런, 그러 고보니까 죄다 전혀 돈이 안되는 이미지들이로군. 한편 애니메이션 느와르 는 제목 때문에 봤지만 조금도 어둡지 않은데다가 제게는 지나치게 달콤해 서 큰 감흥이 없었습니다. 음악은 괜찮았지만... ) 뭐랄까 국내에서 필름느와르 영화라면 사람들은 킬리만자로를 말하지만 저는 공동경비구역JSA의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가 느와르로서도 장르영화 로서도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뭐, 흥행은 실패했지만.-_-) 지금까지 다 섯번인가 봤는데... 가끔 TV에서도 하니까 기회되시면 한번 보세요. 일단 웃기기도 하고요 김민종 연기가 괜찮다는 것 그 영화에서 처음 알았지요.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장 피엘 멜빌의 '사무라이'와(예전 이것인 줄 알고 속아서 '6현의 사무라이'라는 컬트 영화를 샀던 기억이...-_-)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레베이터'로군요. 특히 후자는 국내에 비디오로 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지금도 방황중입니다. 느와르와 함께 감각적이고 거칠고 네러티브를 파괴하는 누벨바그 스타일도 좋아하기 때문에 사형대의 엘레베이터에서 살인자가 엘레베이터 속에 갖힌 채 공포 와 두려움, 자책감등에 빠져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을 꼭 보고 싶은 부분입 니다.(쇼치쿠 누벨바그계 감독의 작품들도 좋아합니다만... 오시마 나기사 의 사무라이 동성애물(-_-) '고핫토'는 아직도 3류대작이라고 생각. 결국 쇼치쿠 누벨바그로서는 힘이 없었고 흥행영화로서는 재미가 없었고 나기사 의 영화로서는 너무도 전형적이었습니다. 단지 마지막에 느낀 것은 여자 같으면서도 요사스러운 사무라이로 나온 미소년 마츠다 류헤이가 상당히 잘 생겼고 또 연기 참 못핬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집안은 부자 가 모두 미남자.-_- 기타노와 최양일이 배우로 나온 건 의외였지만...) 에에 지금까지 밑도 끝도 없는 잡담을 늘어놨습니다. 그럼 읽어주시고 메 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을 빨리 올리도록 노력을... E-MAIL :billiken@hananet.net RATM의 killing in the name을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5 Everybody doesn't know what life is 1. “죽음의 여신의 행차신가.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세이드가 피를 쏟으며 일어나선 가랑을 바라보았다. 마치 구속복(拘束服) 을 닮은 티클 하나 없이 새하얀 그녀의 옷은 타이트하게 몸에 달라붙어 성 숙이 멈춘 체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뽀얀 살결이 드러난 어깨며 얇 은 두 팔이 메마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위체(僞體)처럼 느 껴지는 얼어붙은 별. "......카넬리안?“ 젤리드는 눈앞에 나타난 여자가 카넬리안이라는 것에 의아해 했다. 의외 의 장소에 나타났다는 것보다도 마치 줄리탄과의 모든 추억이 소거(消去) 되어 버린듯한 그 모습이 더 이상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카넬리안은 항상 표정이 멈추질 않고 틈만 나면 불평을 늘어놓는 지독하게 시끄러운 씰인데 ...... 지금의 모습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혀 버린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이름은 가랑입니다.” “설마 너 줄리탄하고......” “저는 궁룡의 씰입니다.” 줄리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가랑이 황급히 대답했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두 팔찌에 힘을 모은 카리나가 바닥을 깊게 패며 튀어 올라 가 랑에게 날아들었다. “카리나!” “이번에는 절대로 잃지 않을 꺼야!!” 두려움을 떨춰내려는 외침과 함께 그녀의 주먹이 가랑을 찔렀지만 그것은 단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다른 씰들을 월등히 상회하는 가랑 의 움직임은 다리를 다친 카리나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어버려! 너 따위는 죽어버리란 말야!” 카리나의 격렬한 공격을 말없이 피하던 가랑은 자신을 증오하며 소리치고 있는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반격조차 없었다. 도리어 몇 번이나 카리 나를 죽일 수 있었던 쪽은 가랑이었지만 그녀는 미스트랄을 깨우지 않은 채 카리나의 손과 발을 피하다가 그녀의 오른 팔목을 잡아챘다. 단번에 공 격을 봉쇄당한 카리나가 치켜 올라간 눈동자로 가랑을 쏘아보며 외쳤다. “죽여! 또 그런 꼴을 당할 바엔 차라리 죽고 싶으니까!” “테싱님은 당신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요.” 가랑이 카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라 는 걸 알고 있지만 전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눈물이 흐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가랑을 카리나는 굳 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주인을 죽인 것도 가랑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만약 명령을 받 았다면 다른 씰의 테이머를 죽였을 거라는 것을. 단지 가랑에게 당한 그 두려움이 너무도 싫어서 무조건 가랑을, 카넬리안을 증오하는 것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려 했던 것이다. 가랑의 여신(餘燼)같은 눈동자는 제발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냥 벙어리처럼 그녀의 팔을 잡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랬군. 줄리탄과의 계약이 끊어진 거였군. 그래서 줄리탄이 널 찾아서 헤매고 있는 거였어. 그리고도 남을 녀석이지.” 젤리드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자 가랑은 카리나의 팔을 놔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근원을 알 수가 없는 이상한 죄책감과 슬픔이 또 다시 열병처 럼 몸에 퍼진다. “아마 이곳으로 줄리탄이 오게 될 꺼야. 기다리지 않겠나.” 오고 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랑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흔들리며 모순된 감정들이 격렬하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 다. 만나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떨리는 눈빛을 꽉 감으며 몸을 돌려 도망 치 듯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신의 기분이 어떻든 상관없 었다. 분명히 자신은 테싱을 사랑하고 그의 일부가 되어 영원한 시간 속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줄리탄을 만나고 언제부터인가 그 확신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다. 좀 더 행복해 지고 싶다, 이 시간을 간직하고 싶다, 훔친 것이라도 좋으니까 행복을 가지고 싶다, 공유하고 싶다! 공생하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다시 테싱 곁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달라붙어 주사약처럼 혈관 속을 돌고 있었다. 실현될리가 없는 바램들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도망치는 거냐! 왜 겁을 내는 거야!” ‘저는 테싱님의 씰이에요. 그 분이 명령하면 줄리탄씨를 죽여야 하니까. ..... 그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아요. 만나게 되면 더 괴로운 일만 벌어질 것 같으니까, 만날 수 없어요 . 만나고 싶지 않아요.’ 슬픔이라는 감정은 너무도 투명해서 가득 차 있어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마치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해주기 전까지는 여간해선 눈치 채기 힘든 감정이랄까. 그것은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음 을 증명하지만 가랑은 자신의 눈동자 속에 숨 막힐 듯 들어 찬 그 감정을 뽑아낼 방법을 몰랐다. 비울 수도 표현할 수도 없으니까 단지 영원히 품고 있을 뿐. 오직 줄리탄만이 항상 그것을 머금어주었지만 이제 그는 곁에 있 어선 안된다. 가랑은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을 움켜잡으며 황성 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혹시라도 테싱의 명령이 도착하면 주저 없이 모두 를 죽여야 하는 자신이 두려워서 줄리탄으로부터 먼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 다. 차라리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아무도 헤칠 수 없는 누구도 없는 곳에 갇혀 혼자 있고 싶었다. 누구에게 도와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쓰디 쓴 괴로움은 계속 입 속에 뭉쳐가며 떠나갈 줄 몰랐다. “......” 그렇게 사라져 버린 가랑이 있던 자리를 젤리드는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잡아 세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단지 아직 만나지도 못한 줄리탄 을 위로해 줄 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젤리드는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세이 드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네 놈의 할 일이라는 것은 끝났겠지?” “큭큭. 물론이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제, 젤리드!” 카리나의 눈이 커지며 세이드를 향해 검을 드는 젤리드를 말리려고 했다. 이제 다 끝났잖아. 이만하면 그만둬도 되는 거잖아. 뭐 하러 싸우려는 거 야, 카리나가 아무리 막아도 소용없었다. “젤리드. 이러지 말고 그냥 치료 받자. 겨, 겨우 살아나 놓고! 이러다가 죽는단 말야!!” “난 안 죽어. 그러니까 비켜 있어.” 싸늘하게 대답한 젤리드가 맞은편의 세이드를 향해 걸어갔다. 팔을 타고 손등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가 녹아내린 흉수의 검신으로 흘러내리고 있었 고 세이드 역시 자신의 검에 다시 한번 마력을 모으자 몸에서 떨어지는 핏 방울이 증발하며 붉은 연무(煙舞)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을 마주하 기 전 젤리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놈에게 딱 한 가지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다.” “나 같은 놈에게도 고마운 게 있었나? 난 기억에 없는데.” “리센버러에서 리이를 살려준 것...... 그건 고마웠다.” “아아 그 고집 센 여자말이로군.” 리이가 뛰어난 기사였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헤스팔콘 최강최악의 기사인 세이드에겐 애당초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일방적인 싸움이었고 처 참할 정도의 중상을 입고 몇 번이나 쓰러졌지만 그녀는 계속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세이드의 비웃음에도 그녀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리이 고집 센 건 내가 보증한다.” 젤리드는 그때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날 내버려둬 젤리드. 지금이 아 니면 영원히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도와주려는 자신을 막으며 힘들게 일어서는 그녀의 짜내는 듯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 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허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싸 움. 결국 젤리드는 검을 놓치며 또 다시 쓰러진 그녀를 세이드가 짓밟으며 목에 검을 들이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다. 가장 가혹한 마 음의 치유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 여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인데도 포기할 생각을 안하 더군. 그렇게 치욕을 당하고 목에 칼이 다가왔는데도 계속 떨어진 검을 잡 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는 거야. 다른 기사라면 명예롭게 죽여 달라는 개소 리를 지껄이며 자기 생명을 시시하게 내놓는 법인데 ...... 그 여자는 사 육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어.” “......” “솔직히 말해서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없었던 거다. 난생처 음으로 살아있는 것을 죽인다는 죄책감이 들었거든.” 그때 세이드는 한동안 리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검을 거두며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냥감을 놔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을 것이다. 동정이나 자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느꼈던 것은 질투였으리라. 젤리드는 ‘뭐 어쨌든 상관없지. 중요한 건 죽지 않았 다는 거니까.’라고 혼잣말을 하며 세이드를 향해 흉수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국 네 놈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감히 내 마누라를 때려?” “......결혼했군. 너 같은 놈에겐 아까운 여자다.” “그 말에는 동감이야.” 대화가 끝나며 젤리드가 믿을 수 없는 힘으로 흉수를 내리쳤고 세이드 역 시 귀가 멀어버릴 정도로 검을 울리며 그를 몰아쳤다. 둘 다 단 일합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번에 모든 힘을 걸고 충돌한 두 검은 섬뜩한 금속음 을 울리며 불꽃을 뿜었고 세이드의 마력이 젤리드의 온 몸으로 휘몰아치며 상처가 벌어지고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세이드의 퀭한 두 눈 동자가 피를 토하는 젤리드를 바라보며 광기에 요동치고 있었다. “하하핫! 훌륭해! 내 마지막 결투로 손색이 없어!” “그래. 잘 알고 있군. 이게 네 놈의 마지막이다.” 젤리드의 피가 죽어가며 검을 들고 있는 오른 팔에 시커멓게 죽어버린 혈 관들이 돋아나고 있었지만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곧 세이드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폭주하는 진동음이 비명을 내질렀고 황궁의 유리 창들이 깨져갔다. 두 힘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극도의 파동이 황궁 전체 를 뒤덮었고 벽의 균열과 함께 대회랑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둘 중 누구 도 물러서지 앟는 것이었다. 크르르륵! 그리고 저항을 이기지 못한 세이드의 검신이 깨져버리며 구심점을 잃은 마력이 세이드의 몸속으로 역류했고 퍼억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세 이드는 피를 쏟으며 검을 놓쳤다. 그와 함께 곧바로 밀려오는 흉수가 세이 드의 팔을 잘라버리며 흉수 역시 젤리드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 두 팔을 모두 잃은 세이드는 차가운 미소로 비틀거리며 벽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 최초의 패배가 최후의 패배가 되는 셈인가...... 재미있군.” 벽에 기댄 세이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벽에 굵은 혈선을 그으며 바닥으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젤리드 역시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었지만 싸늘한 눈 빛만은 계속 세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젤리드! 저, 정신차려! 제발 죽지마!” 카리나가 뛰어오며 젤리드를 부축했지만 그의 몸은 너무도 차가웠다. 젤 리드는 떨리는 팔로 카리나를 감싸주며 속삭였다. “인간이니까, 언젠가는 죽을테고 너와도 헤어져야 할 때가 오겠지. 하지 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그런 말 하지마! 헤어지고 싶지 않아, 계속 나하고 있어줘!” 카리나가 젤리드를 껴안으며 몇 번이고 소리쳤다. 무모하고 무서울 정도 로 강한데다가 비겁하게 사는 방법도 모르는 주인이지만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를 꽉 껴안았다. 젤리드의 피가 옷을 잔뜩 적시고 있어도 상관없이 ‘영원히 같이 있을 꺼에요!’라는 말도 안되는 고집을 외쳤다. '모두가 영원히 사는 그런 세상이라면 아무도 고백 같은 건 하지 않겠지.’라며 젤리드가 실웃음을 보였지만 카리나는 헤어질 언젠가를 벌 써부터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젤리드는 두 팔을 잃은 채 죽어가고 있는 세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이드가 쿨럭 거리며 말했다. “역시...... 나 같은 놈에겐 너무 호사스런 마지막이야. 레오폴트에게 미안하군. 나만 이렇게 편하게 죽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낙원의 섬을 찾기 위해 배를 타는 것과 같을 지 도 몰라. 그 섬을 차지하기 위해서 친구도 죽이고 가족도 죽이고...... 결 국에는 외로움에 지쳐서 자기 자신도 죽이는 거야. 그런 섬 따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희망도 버리고 꿈 도 버리고 결국 자신이 왜 그 섬에 가야 하는지 조차 망각해 버리고 끝도 없이 배를 저어가는 거야. 레오폴트, 그 섬에 가는 건 포기했어. 가봐야.. .... 시시할 것 같으니까. 세이드는 레오폴트가 자신을 치료해 주고 있다는 환상을 바라보며 예전 그녀에게 했던 말을 희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계속 되뇌고 있었다. 나 같은 미친놈을 좋아한다니, 너도 미친 여자로군. 벙어리 남자에게 필요한 여자가 꼭 벙어리일 필요는 없잖아요. 세이드의 목이 스르르 기울어져가며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Blind Talk 이번 편은 스스로 스타일 과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꼭 한번 홍콩 느와르 분위기를 흉내 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냥 갈 때까지 갔습니다. -_)y-~~~~ 사실 이건 2번 지우고 다시 쓴 것인데... 원래는 대사도 없었고 그냥 서로 의 여자에 대한 추억에 잠긴 채 팔 다리 잘라가며 살벌하게 싸우다가 동시 에 검이 깨지고 쓰러져 서로를 노려보며 눈을 감는... 참으로 코어한 연출 이었는데(본래 성격이랄까...) 다 써놓고 읽어보니까 ‘읽는 사람 경기 일 으킬’ 분위기라서 다 지워버리고 꽤 달콤하게 다시 썼습니다. 잘 한건지 모르겠지만... 이번 편만큼 나올만한 대사를 쭉 늘어놓고 정리해 가며 써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결국 마지막까지 세이드의 생각을 알기 쉽게 풀어서 묘사하려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놈 대체 왜 이래?’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듯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지치긴 지쳤는지 계속 같은 묘사와 단어와 문형이 떠올라 서 괴롭습니다. 뭔가, 정해진 스토리를 끌어가는데 치여서 좀 더 절실하고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 것 같아서 씁쓸. 그래도 뭐... 앉아서 술 퍼먹고 고 민한다고 해결될 것은 아니니까. 이번에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두더지’를 봤습니다. 역시 그 사람의 만 화는 ‘레츠고 이나중탁구부’부터 ‘크레이지 군단’, ‘그린힐’ 그리고 이번 ‘두더지’에 이르기까지 정말 감동적이더군요. 질투가 날 정도로 멋집니다. 특히 ‘두더지’는 마치 예전 아다치 테츠의 ‘세븐틴러브!’( 원제:키라키라)를 볼 때와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뭐... 그렇다는 겁니 다. 아무튼... 이번 편은 빨리 올렸죠?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E-MAIL :billiken@hananet.net 차진영의 나 혼자만의 사랑을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6 Suicidal Wish 1. 눈에 묻힌 길고 긴 장원(莊園)을 지나 줄리탄과 시링크스가 가르바트의 황성에 도착한 것은 세이드가 죽은 지 이틀 후의 오후였다. 추위에 얼어붙 는 눈동자를 풀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경비병 하나 없이 홀로 웅장한 황궁 의 천장을 바라보던 줄리탄은 자신의 어깨에 쌓인 눈송이들을 털어 주던 시링크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부터 나 혼자 들어갈게.” “싫어.” 시링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며 자신의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 손가락에 엉키며 인간의 체온을 닮은 온기에 녹아드는 눈이 시링크스의 얇은 손가락 끝에 뭉쳐 있었다. 주인 잃은 입구의 깃발들이 펄럭이는 소리 만이 을씨년스러운 회색빛 겨울의 오후. 2. 황궁은 지독히도 넓었다 하루안에 다 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본당으로 향하는 줄리탄이 세이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심하 게 화상 입은 대회랑의 중간쯤에 와서, 잠들어 있는 듯한 그의 시신 앞에 줄리탄이 멈춰 섰다. “......세이드.” “아직도 마력의 잔재가 남아 있군.” 이틀이 지난 후에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채 몸을 맴돌고 있는 그의 마력 때문일까. 외로운 풍장(風葬)을 치루던 세이드의 시신은 이런 추위 속에서 얼어붙지도 부패하지도 않았다. 영원한 수면 속에 들어간 것처럼 - 어쩌면 이것이 그가 바라던 입적(入寂)은 아니었을까? 이 거대한 얼음 속 에서 잠들어 버린 늑대의 주변은 얼어붙은 피투성이 였다. “누군가 이곳에 더 있었던 것 같아.” “결투가 있었군. 상대도 만만찮게 부상당한 것 같네.” 줄리탄과 시링크스는 주변을 돌아보며 추리를 했다. 검게 타오른 실내와 거의 무너져 내린 통로, 흥건한 핏무리. 검과 검이 부딪치던 굉음이 들리 는 듯 하다. 몹시도 격렬한 싸움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세이드를 잠재운 자라면 누구일까. 대체 어떤 자가. “......그랬군.” 줄리탄의 시선이 어둑한 곳에 고정되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남겨 놓은 듯, 얼어붙은 피의 바다 중간에는 녹아내린 젤리드의 흉수가 땅에 박힌 채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젤리드다운 안부 인사랄까. “죽지 않았어 그 사람.” 줄리탄은 희미하게 웃으며 젤리드가 지금쯤 어디선가 붕대로 온 몸을 감 은 채 또 술이라도 머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흉수는 숙명 같 이 짊어지고 다니던 그의 과오(過誤)같던 것. 제국에게 이용당하고 가족에 게 배신당하고 일족(一族)에게 속아 자신과 피를 나눈 모든 자들과 싸우며 작위를 불태운 그 땅에서 그는 자신의 검에 기괴한 음각을 세겼고 스스로 세상의 악역을 자청했다. 그런 흉수를 이제는 이곳에 버리고 사라졌다는 것을 과거를 잊겠다는 그의 의지라고 판단한다면 그건 달콤한 억측이 될까 . 그때 뚜벅거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싫은 표정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걸어오는 앳된 청년과 그의 씰이 보였다. 줄리탄의 눈이 커졌다. 오펜바하와 미쉘이었다. “으으 춥다. 역시 오버암메르가우를 가르바트에 만들지 않길 잘했지. 용 도 얼어죽을 추위야 정말.” “엄살 부리지 마세요.” 오펜바하는 뭐라고 계속 웅얼거리며 줄리탄 앞에 다가와선 싱긋 웃는 것 이었다. 권력을 빼앗긴 지룡의 수장 주제에 궁룡의 지배권이 된 가르바트 의 중심지에 멋대로 나타나다니, 대단하다기보다는 참 느긋한 모습이 아닌 가. 하긴 발각된다고 쉽게 죽일 수 있는 자도 아니지만. 전혀 지룡답지 않 게 훌쩍거리기까지 하며 떨고 있는 오펜바하를 바라보며 줄리탄이 조금 복 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편할 때만 인간 같은 거냐. 이상하게 요란 떨며 투덜거리는 오펜바하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기 걸려 버렸어. 하지만 역시 인간의 감기약 같은 거 듣지 않겠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그 태도는 뭐야! 저번에 목숨 걸고 살려 줬는데 고작 몇 달 만에 만나 서 한다는 말이!” “오, 오펜바하님.” 시링크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자신의 전 주인이고 일전에 자신 들을 구해주기까지 했지만 절대로 동료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다가 언제라 도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아무튼 ‘날 좀 대우해 줘.’라는 식으로 어린애처럼 으쓱거리는 그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짜증을 유발시키기에 충 분했다. 대체 지금이 그럴 때냐, 말이다. 오펜바하가 놀리는 듯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가랑 찾으러 온 거지? 안됐지만 지금 그 여자 여기 없어.” 줄리탄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냉큼 소리쳤다. “카넬리안을 건들지 마!!” 갑자기 줄리탄이 커다랗게 소리 지르자 오펜바하는 찡그린 얼굴로 귀를 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링크스의 가슴이 또 덜컥 내려앉은 것은 절대 로 참아주는 성격이 아닌 오펜바하가 갑자기 적대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것 이 아닐까하는 걱정 때문이었지만 - 오펜바하는 도리어 맥 빠지는 조소를 보이며 중얼거렸던 것이다. ‘도무지 현실을 모르는 녀석’이라는 표정으 로. “너 테싱 앞에서 그런 말 할 생각이냐?” “뭐?” “테싱 앞에서도 건들지 말라는 둥, 이용하지 말라는 둥 소리칠 생각이냐 고. 만약 테싱이 ‘싫어’라고 대답하면 그땐 어쩔 테야? 진심이면 뭐든 게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진심으로 외치면 그게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 는 양 모두 네 생각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오펜바하는 줄리탄의 태도에 적잖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결국 이 세상은 투쟁의 연속이다. 실력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누구도 탄복(歎服) 따위 하지 않아!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지 않는 건 미덕이지 만 약자가 강자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오직 투쟁에 의해서 뿐이야. 테싱 앞에서도 그런 말로 어떻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작전을 다시 세우는 편이 좋아. 알아들었나. 이상주의자 씨.” 시린 미소를 짓는 오펜바하를 잠시 내려보던 줄리탄이 말했다. “너처럼 불을 뿜고 납치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만이 투쟁의 전부라 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줄리탄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몸을 돌려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철컥거리며 흔들리는 인피타르의 소리와 함께 그의 나직한 읊조림이 들렸 다. “난 내 나름대로의 투쟁을 하고 있어.” 오펜바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정말 말이 통하질 않는구만.’이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때 줄리탄이 멈춰서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너의 실력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겠나. 강자의 미덕이라는 거 말야.” “뭐? 또 뭔 소리야?” “네가 정말 강자라면, 인간들을...... 내 친구들을 지켜줘.” “내가 왜!” 오펜바하의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감히 이 몸에게 명령질이냐! 라는 얼 굴로 오펜바하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지만 줄리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인간들을 지배하고 싶은 용이라며? 그런데 그것도 못해? 그것 밖에 안 되는 것이 너의 투쟁이라면 다음부턴 남에게 설교할 생각 하지마.” 세이드에게 배운 말투랄까. 오펜바하의 기분이 추락해 버리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그, 그게 남에게 부탁하는 놈의 태도냐!” “부탁이 아냐. 네 말을 증명해 보라는 거지." “그 태도도 틀렸어!!” 시링크스가 휘청거렸다. 또 조용히 끝날 일이 재난급으로 커져갈 것 같다 는 불안감. 자기는 주인 잘못 만나도 한참 잘못 만난 것이 아닐까 하는 참 으로 ‘씰 다운’ 고민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줄리탄이 다시 걸어가기 시작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네 녀석의 힘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면 적어도 너보다는 가치 있게 썼을 거다. 필요할 때 도와주지도 못하는 힘이라면 뭐하러 무겁게 가지고 있는 거냐.” “뭐, 뭐, 뭐라고오오!!” 분노 폭발의 오펜바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줄리탄에게 달려가려 하자 미 쉘이 그런 자기 주인을 들어 올렸다. 키 175Cm 미쉘의 품에 안겨 바동거리 는 오펜바하라면 좀 창피한 꼴이긴 하다. “미쉘, 이거 놔! 뭐야 저거!” “가만히 좀 있으세요. 이제 와서 줄리탄 씨와 싸워서 어쩌시게요.” “그래! 내 힘 줄 테니까 어디 가치 있게 써 봐라! 써 보라고! 우악!” 그때 미쉘이 오펜바하를 놓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고 내동댕이쳐진 테이 머가 멍한 얼굴로 미쉘을 올려 보았다. 권력을 잃었다고 괄시하는 거냐, 테이머를 짐짝 다루듯이 하다니...... 이 놈의 씰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라는 얼굴이다. “너, 최근 들어...... 많이 과격해 진 것 같아.” “정말 주인님의 힘을 줄리탄씨에게 전이(轉移)시킬 수 있는 건가요?” “너 대체 누구 씰이야.” “물어보고 있는 건 제 쪽입니다. 대답해 주세요.” 심문하는 듯한 미쉘의 눈동자. 의외로 본색을 드러내면 카넬리안만큼 무 서운 여자였다. 오펜바하가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그런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역시.” “뭐가 ‘역시’야!” 오펜바하는 투덜투덜거리는 얼굴로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렇게 간단하게 상대에게 힘을 뚝 잘라 줄 수만 있었다면 애당초 이 고생 할 일도 없었다. ‘차라리 내 가죽 벗겨서 갑옷 만들어 주는 게 편하지.’ 라고 중얼중얼거리는 오펜바하는 온천이라도 찾아가자며 미쉘의 치맛자락 을 끌고 걸어 나갔다. 점점 오펜바하가 물키벨화가 되어 가는 것이 불안하 긴 했지만 물키벨이 죽은 이후 오펜바하의 생각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 기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3. 세상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의 천지다. “스테온...... 형?” “줄리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도 조만간 해결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적게는 몇가지부터 많게는 몇십가지 이상 존재할 것이 분명하 다. 다 읽고 화장실을 가야지. 이쯤에서 그만 읽을까? 저녁거리를 사와야 하는데. 내일은 어떻게 시간을 내서라도 꼭 애인을 만나야겠어. 그 놈이 낮에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 그 여자를 찾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야 겠군. 내 씰에게 옷을 한 벌 사줘야 할 텐데. 이제 더 이상 검을 쓰고 싶 지 않아. 그리고 그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스튜처럼 뒤섞여 버리며 하루를 복잡하게 만들다보니까 아직 미결(未決)된 일이라도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면 잊어버리고는 한다. 줄리탄은 스테온을 잊고 있었다. 황궁 대성 소(大聖所)의 문을 열기 전까지는. “오랜만이야 줄리탄. 하지만,..... 반갑다고 웃어줄 수 없는 상태라서 미안해.”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대체.” 먼지 쌓인 성소의 넓은 회백벽에는 마치 거미가 둥지를 튼 듯 뿌연 혈관 들이 달라붙어 엉킨 실타레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혈관’들은 중앙에 메달려 있는 스테온의 온 몸을 관통하며 피를 머금고 또 뱉어내길 반복하 고 있었다. 마치 몸속의 수많은 핏줄들을 길게 늘어놓은 것 같은 괴기스런 모습. 공중에 메달린 채 마른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스테 온의 얼굴조차 기괴했다. “미카엘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 자업자득이랄까. 살려달라고 빌었더니 '죽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거지.” 스테온의 갈린 목소리가 공허하게 성소를 울리며 줄리탄에게 달라붙었다. 인간들을 감시하는 역할이 되어 궁룡들의 종으로라도 살고 싶다던 스테온 의 소원은 참으로 엉뚱하게 실현된 셈이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 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된 흉물(凶物)이 되어 버린채 - 대체 그는 무 슨 생각에 빠져 있었을까. “형. 기다리세요. 그곳에서 내려 줄께요!” “주인님 하지마.” 솔직히 이제는 예전 키오네에서 스테온이 자신을 배신했던 일 같은 것은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줄리탄은 걱정스런 얼굴로 스테온에 게 다가가려 했지만 시링크스가 그의 앞으로 팔을 뻗으며 막아섰다. “떼어내면 죽게 돼. 그리고 난 저 사람 믿을 수가 없으니까 가까이 가지 마.” “너의 새로운 씰인가? 그 말 대로야. 날 이곳에서 떼어낼 방법 같은 건 없어.” 스테온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며 다시 한번 끈적거리는 호스 속에 피가 돌았다. 마치 이 쇠락한 성소 전체가 그의 몸이 되어 버린 듯 하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시링크스.” “어떻게 하다니. 저 자가 당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저런 불길한 것 근처에 있어서 좋을 것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자고. 도와줄 방법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시링크스는 머뭇거리고 있는 줄리탄의 얼굴을 보며 사족을 달았다 . “카넬리안도 이렇게 말했을 거야.” “......줄리탄.” 스테온이 서너 개의 호스가 박혀 있는 목을 힘들어 움직이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거품이 끓어오르는 듯한 그르르륵 거리는 기괴한 소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미안하다. 변명 같지만...... 항상 너와 카넬리안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어. 그 때 너희들과 함께 모험을 떠났으 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도 계속 해 왔었고. 하지만 이 제는 다 끝난 거지. 이런 꼴로는...... 네 앞에 무릎조차 꿇을 수가 없으 니까.” 스테온은 회한의 미소라도 지으려다가 포기했다. 얼굴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날 죽여줘.” “형!” “항상 부탁만 하고 배신만 하는구나. 하지만 이게 마지막 부탁이야. 난 스스로 죽을 수가 없어. 네가 떠나면 또 언제 누가 이곳에 올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날 죽여 줘. 날 죽일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이제 지쳤으니 까.” 스테온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가 카넬리안이 몇 년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이해한 것은 최근이었다. 죽고 싶을 때 죽을 수조차 없는 기생생물의 괴로움이 뭔지나 알아? 냉소에 가득 찬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살 수 있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 고 또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 인생이라면 대체 살고 있다고나 말할 수 있을까. “부탁이야. 한번만 더 날 위해서 속아 줘. 네 손을 더럽혀 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줄리탄이 도망치듯 소리쳤다. 이런 해후(邂逅) 따위 원치 않았다. 이 성 소에 들어오지 않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차라리 또 다시 배신당하 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너무도 오랜만에 만났 는데, 이제는 죽여달라고? 그 따위 말이 어딨어. 그렇게 끝나는 인간관계 따위라니 치가 떨려, 줄리탄은 스테온의 희뿌연 눈동자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시링크스. 돌아가자.” 줄리탄은 외면하듯이 몸을 돌리며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숨이 막 혀왔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여달라고? 죽여달라고? 죽여달라고? 정말 너 무 하잖아. 하지만 스테온의 애원하는 목소리는 계속 줄리탄을 따라왔다. “부탁이야. 죽여 줘.” 검은 원목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줄리탄의 등 뒤로 유령이 따라와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떨며 발걸음을 멈췄다. 항상 자신에게 잘난 듯 이 요리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지식들을 늘어놓던 스테온의 얼굴이 떠올 랐다.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은 뒤에 혼자 남은 자신의 방에 찾아와 위로해 주던 일도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냥 성공하고 싶었고 머리가 좋았고 겁이 많았던 많고 많은 인간 중에 하나였을 뿐이지. 저런 끔찍한 꼴을 당해도 싸다,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줄리탄은 버릇처 럼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악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괴로워서 몸이 떨려왔다. “......미안해 형.” 그리고 인피타르의 은빛의 검신이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너무도 슬픈 푸른빛만이 파도처럼 성소를 뒤덮었다. 4. 이상적인 해결책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살아야 해요!’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만취한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아들을 때리며 ‘넌 나처럼 살지 말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후회로 점철(點 綴)된 인생. 후회를 후회하고 또 그렇게 후회한 것을 후회하며 종당에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후회를 시작했는지조차 희미해지는 실패작을 빚어버린 것일까 스테온은. 아니면 단순히 재수 없게 함정에 빠져버려 단번에 인생 에 걸 모든 판돈을 잃어버린 것일까. ‘결국 오펜바하의 말대로 세상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모양의 투쟁인지도 몰라.’ 젓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와 투쟁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 투쟁하 고 친구를 돕기 위해 다른 친구와 투쟁한다. 연인을 위해 사랑이라는 투쟁 을 하고 자신을 위해 노력이라는 투쟁을 한다.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안전하게 투쟁하는 방법’에 골몰하며 안전해지기 위해서 위험해지는 것 을 피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 속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시간을 연소( 燃燒)하며 끝도 없이 싸운다. 그러다가 스테온처럼 더 이상 싸울 방법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리면 스스로 자기 인생의 평가를 제로라고 채점한 뒤 에 제발 죽여 달라고, 나는 실패했다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자기 인생의 스위치를 내려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나도 싸우고 있는 거야. 싸움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을.’ 슬프지 않은데도,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하겠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눈물 이 흘러 차갑게 식어갔다. -Blind Talk 뭐 좀 말이 많아죠 이번 편은. 술자리에서 들어도 별로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 그런 진부한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주절거려 버렸습니다만 역시 그 런 부분 넣어 버리면 분위기 우중충하게 만들죠. 게다가 말이 길면 도리어 논점이 흐트러진다는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일단 입을 열면 멈춰지질 않아 서. 잡담왕이랄까. 게다가 최근 심경이 복잡해서.( -_)y-~~~~~ (아 그래도 솔직히... 이번 편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 겠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최근 통신 상의 어떤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고 솔직히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제 글을 기다리는 고마운 분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한편을 올리긴 하지만 항상 ‘이런 수 준이라면 올리는 쪽이 더 실망하는 거잖아.’라고 걱정하기도 합니다.(무 엇보다 그래도 명색이 국문과인데 자꾸 외국어 번역체 같은 문장이 튀어오 는 것은 빨리 고쳐야 한단 말야...) 뒷북이지만 전편에서 젤리드가 죽어가는 세이드의 ‘무가치한 인생이야’ 라는 말에 반박하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아둬라 세이드. 네 놈의 그 무가치한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내일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난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하고 멋진 말이죠. 코카콜라 다이슨 회상이 대학졸업식 축사 중에 했 던 말을 조금 변형한 것입니다. 사실 그 명언에 저작권은 없고 이미 국내 에서도 가시고기 같은 책에서 썼기 때문에 제가 써도 상관은 없었지만.... .. 써놓고 멋있긴 해도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는 말이라서 삭제했습니다. 참 잔인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해요. 왜 어제 죽은 타인의 집착 같은 바램까 지 짊어지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거지? 싫어. 나쁜 짓하면 지옥가기 때 문에 착해져야 한다는 거야? 차라리 일을 안 하면 굶어죽기 때문에 노력 한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아! 라는 짜증이 생긴데다가 역시 젤리드가 그런 ‘교훈적인 말’을 한다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그만 두었습니다. 전 아무리 생각해도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그래도 난 행복한 거다!’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싫더군요. 물론 그렇다고 남에게 이 생각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지만. 이제 슬슬 클라이막스로군요. 와아 여기까지 오다니 스스로 놀랍습니다. 다음 편도 마냥 밝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 더 기운차게 쓰려고 합니다. 그럼 읽어주시고 메일 주신 분들께 항상 감사드리며... 빈정대기 잘 하는 사람이란? 모든 것의 값을 알고 있으나, 한 가지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스카 와일드 E-MAIL :billiken@hananet.net DA PUMP의 Rhapsody in blue를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7 Bird In Space 1. 가르바트의 태양은 사물 본래의 색을 하얗게 왜곡시킬 만큼 차갑고 강렬 하다. 아무도 남지 않은 어느 남작의 폐성(廢城)의 한복판, 청동빛 조각상 근처에 앉아 있는 가랑의 얼굴도 그 태양빛에 창백하여 유난히 반짝거리는 붉은 두 눈동자만이 새하얀 얼굴에 도드라져 있었다. 겨울을 몰고 오는 쌀 쌀한 바람이 가끔 불어올 때마다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지만 차갑기 식은 미스트랄을 안고 있는 가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지독한 날 씨에 어울리지 않게 드러난 그녀의 매끄러운 두 다리가 마치 얼음 같다. “......” 부모에게 버림 받은 듯한 어린 새 한 마리가 가랑의 작은 발밑으로 날아 들어 푸드덕 거렸다. 철새가 되지 못한 그 새는 찢겨진 날개를 퍼덕이며 잔걸음으로 가랑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을 견딜 수 있는 먹 이를 바라고 있는 것이리라. 가랑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구구거리고 있는 그 새를 투명한 두 눈에 담았다. 슬픈 표정조차 지을 수 없는 그 새의 유 리알 같은 눈동자엔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 새는 한참 동안을 가랑의 발 등에 올라가 울기 시작하며 버릇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너도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거야?” 자신의 발등을 콕콕 찌르는 부리를 느끼며 가랑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줄 리탄에게도 테싱에게도 갈 수 없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딜레마가 서 있 을 수 있는 땅을 점점 잡아먹어 이제는 어디로도 갈 수 없을 만큼 작아져 버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바닥없는 나락(奈落)으로 단말마의 사혈(死穴) 속으로 영원히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절망적인 표정조차 만들 어지지 않는다 마치 새처럼. 푸드드득...... 그때 새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힘들게 첨탑의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천천히 고개를 든 가랑의 시선에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는 루시퍼가 다가 오고 있었다. 줄리탄에게 잘려버린 팔 때문에 상의의 한쪽 팔이 펄럭이는 모습이 섬뜩한 그의 얼굴은 기묘한 강박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가랑은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첨탑 위로 올라간 하얀 새에게로 고개를 들었 다. 가랑 앞에 선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격한 감정을 숨기고 있는 듯한. “너는 테싱님이 자신만을 아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나는 테싱님의 씰. 그를...... 위한 존재에요.” 가랑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테싱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의심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원치 않던 부정할 수도 거 부할 수도 없는 테이머니까 처음부터 ‘아껴준다‘, ’좋아한다.‘라는 말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동전을 넣으면 흘러나오는 기계장 치의 음악처럼 항상 똑같은 대답만이 차가운 입김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며 왠지 가슴이 아려 눈썹을 찡그렸다. 마음을 어지럽 히는 루시퍼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차갑게 식은 마음은 분노조차 만들지 못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가랑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눈 앞의 루시퍼를 죽이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테싱의 명령이 아닌 이상 이제는 누구와도 싸 우고 싶지 않았다. 가랑은 미스트랄을 껴안으며 날개가 찢어진 철새처럼 부자유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어딜 가는 거야!!” 그때였다. 가랑은 등 뒤로부터 루시퍼의 적의(敵意)를 감지하며 미스트랄 을 고쳐 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기습적인 힘이 작렬했고 가랑은 미스 트랄을 놓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가랑은 반사적으로 근처에 떨어진 미스트 랄을 집어 들며 일어섰지만 루시퍼가 휘두른 창에 미스트랄은 다시 손에서 벗어나 바닥을 굴렀다. “왜 그러는 거죠?” 생각지도 못한 습격이었다. 가랑은 비틀거리며 루시퍼를 바라보았지만 루 시퍼는 검은 창을 가랑의 가슴이 들이대며 일그러진 얼굴로 조롱하듯 말했 다. “테싱님께 증명해 보이겠어. 네 년의 무가치함을.” “......!” 물키벨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고 인간에게 부상까지 당한데다가 테싱도 다 른 궁룡들도 자신을 멸시하고 있다. 수치심과 질투심에 파묻힌 루시퍼에 남은 것은 악의(惡意)라는 집념뿐이었다. 죄다 가랑의 탓이라고 돌리고 싶 은 브륜힐트와는 또 다른 순수한 악의가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짓을 해도 테싱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가랑이 아무 짓도 안해도 그녀는 테싱의 전부라는 사실도 깨달은 것이다. “꺄아아악!” 루시퍼가 만들어 낸 마력의 탄환이 다시 한번 가랑의 가슴에 직격하며 가 느다란 비명소리와 함께 성벽의 끝까지 밀려나가 쓰러졌다. 새하얀 옷을 흙먼지가 덮으며 붉은 혈흔이 번지기 시작했다. 자포자기적인 광기가 곰팡 이처럼 피어오른 얼굴로 루시퍼는 쓰러진 가랑에게 다가왔다. “이런 이런. 절대신께서 애지중지하는 귀중품이 망가져 버렸군.” 순간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귀중품이라고? 가랑은 핏빛의 눈으로 고개를 들며 루시퍼를 노려보았다. 죽.고.싶.은.거.냐. 라고 위협하는 듯 한 가랑의 모습에 당황한 루시퍼가 거블 먹었지만 곧 그녀의 그런 충동조 차 스스로가 만들어 낸 딜레마 속에서 사그라졌다. 결론지을 수 없는 독한 상념들이 머리 속에서 끝없이 에러를 뱉어내고 있었고 그녀는 쓰디 쓴 얼 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냥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라며 다시 한번 첨탑의 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기회를 노린 루시퍼의 다음 공격이 온 몸을 뒤덮었다. 이미 그 자리에 새는 없었다. 2. 황궁에서 벗어난 줄리탄과 시링크스는 어느 도시의 목로주점(木爐酒店) 노천주좌(露天酒座)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었다. “불이라도 짚일까?” 스테온과의 절망적 해후 이후부터 줄리탄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가느다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줄리탄을 바라보던 시링크스가 반쯤 식어버린 화로에 손바닥을 내밀자 화르륵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솟으며 검은 재가 퍽하 고 날렸다. 그리고는 뜨거운 열기에 근처에 쌓여 있던 눈더미들이 녹아내 리기 시작했다. “......다 떠나버린 건가.” 순식간에 마력로(魔力爐)가 되어 버린 화롯불의 열기에 발그스레 뺨이 달 궈진 줄리탄은 쓸쓸한 시선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목숨처 럼 아끼던 가게와 집을 놔두고 모두 떠나버린 제도의 시가지에는 쌓여만가 는 하얀 눈만이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 “효오오. 춥네요. 안녕하세요?” 또 언제 가까이 나타났는지 모를 세르난이 겨울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속 살이 살짝 비칠 정도로 얇은 천옷만 질질 끌면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뭐 이제는 낮도깨비 같은 그의 엉뚱한 등장에도 익숙해지긴 했다. 나타날 때 마다 무언가 불안한 소식을 물고 오긴 하지만 말이다. “춥다아. 정말 춥네요. 역시 인간들은 빨리 겨울이 지나가 버리길 바라 고 있겠죠?” 사실 추위로부터의 절박함 같은 것을 느낄 리가 없는 세르난은 쪼그리고 앉아 화롯불을 쬐며 싱글 싱글 거렸다. 정말이지 뒷통수를 한 대 후리 갈 기고 싶을 정도의 여유로움이다. 줄리탄은 세르난에게 다가오며 굳은 표정 으로 물어보았다. 세르난이 실없는 성격일지는 몰라도 안부 인사 따위나 하러 나타나는 자는 절대 아니라는 걸 줄리탄은 알고 있었다. “설마 카넬리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구하러 가시게요?”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루시퍼씨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네요. 하긴 루시퍼씨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당신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이 대로는 가랑님이 죽을 지도 모르니까.” 세르난은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세르난의 속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 굳어버린 줄리탄의 표정이 어른 거리고 있었다. “테싱은...... 카넬리안이 위험하다면 테싱이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솔직히 테싱이라도 좋았다. 당장 카넬리안이 위험하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까 빨리 구해야 할 것 아닌가. “아마도 테싱님은 지켜보고 계신 거겠죠.” “지켜보다니...... 뭘 말야!” “당신을요.” 세르난은 계속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테싱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지켜보는지는 관심 없다. 하지만 정말 카넬리안을 사랑한다면 그녀가 위험 해 빠졌을 때 지켜볼 이유 따위가 있어선 안되는 거다. 세르난이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도 구하러 갈건가요? 타인의 씰을?” “안내해 줘.” 줄리탄이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 놓아둔 인피타르를 집어 들었고 시링크 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화로에서 이글거리는 자신의 마력을 거두었다. 세르 난이 가랑이 있는 곳으로 떠나려는 줄리탄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사실 테싱님은 주인으로서는 실격이에요. 강하다는 것은 본래 상대적이 어야 하지요. 하지만 테싱님의 힘은 절대적입니다. 너무도 강하고 완벽해 서 마치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괴리(乖離)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도 재미없어요. 차라리 당신 같이 약한 사람이 내 주인이었다면 하루 하루가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죠.“ 무언가 예전에 카넬리안이 했던 말과 비슷한 것 같았다. ‘당신과 있어서 하루 종일 무지하게 힘들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어.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 은 것 같아.’ 줄리탄은 그런 세르난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이 마에 갈기진 하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그의 짙은 청색의 눈동자는 - 세 르난이 보기에는 어느 때보다 슬퍼 보였다. “주인 없이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세르난은 몹시 어려운 문제를 받은 듯이 웃는 낮으로 눈썹을 찡그리다 말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무서워요.” 세르난의 진심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도 생각하도록 하자. 단숨에 도시 서너 개쯤은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녔어도 세르난에게 자립( 自立)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두려움이었던 것이었다. 레비아탄이 했던 말 들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내일 죽을 수 있을 텐데도 그 내일을 위해 죽어 라고 살아가는 것이 용들에겐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를 일이리라. 그리고 한편, 그게 부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에서 항상 영웅들 의 장애물로 등장하며 결국에는 영웅의 칼에 죽기 위해 태어난 괴물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주어진 역할만 맡아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진저리나게 지루해서 영웅이 자신을 죽여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카넬리안 역시 테싱의 씰로서 잘 정돈된 영웅 전설의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가다가 도무지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줄리탄 에게 붙잡히며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이리라. 삐딱하게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앞 뒤 안 가리고 누굴 좋아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자신이 자 신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도 괜찮다는 해방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아쉽네요. 정말 당신이 용이었다면, 수장이었다면 우리도 좀 더 자유로웠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죠.” 곰곰이 생각하던 세르난의 그 말에 시링크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인가. 확실히 줄리탄에 대한 세르난의 호감은 흥 미를 넘어선 것이었다. 줄리탄이 걸어 나가며 말했다. “그 말 두 번째로 듣는군. 하지만 난 내가 용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 이라고 생각해.” “예?” “내가 용이었다면 지금처럼 카넬리안을 사랑하지 못했을 테니까. 인간은 항상 유혹받고 시험받는 존재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을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기쁜 거야. 이기적인 말이지만 황야의 한복판에서 목마름에 쓰러질지언정 용이 되고 싶지는 않아.” 세르난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끄응하고 갸웃거리며 줄리탄의 안내를 위 해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Blind Talk 카넬리안 : 어쭈. 뭐야 이거. 가면 갈 수록.... 줄리탄 : 왜 그래 또. 카넬리안 : 주인님은 화 안나? 저거 보라고 나 또 두들겨 맞고 있잖아!! 날 조금이라도 아낀다면 그런 느슨한 얼굴 하지 좀 말라고! 줄리탄 : 아니 그러니까 지금 구하러 가고 있잖아! 게다가 넌 가랑이 아니잖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좀 마! 가랑 : 그래요. 아픈 건 나에요. 카넬리안 : 시끄러워 이 계집애야! 나 였다면 루시퍼 같은 까마귀는 냉큼 지옥행이었다고! 그걸 그냥 맞고 있냐 바보 여자! 가랑 : 당신은 참 좋겠군요. 카넬리안 : 뭐가. 가랑 : (싱긋)무식해서. 카넬리안 : (발끈)지, 지금 비웃었지? 죽일테닷! 주인님 어서 처리해! 줄리탄 : (지끈지끈) 테이머에게 그런 거 명령하지마... 그리고 혼자 두 목소리 내면서 연기하지 좀 마! 정신 사납단 말야! 카넬리안 : 왜에. 재미있잖아.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하니까 심심하단 말야. 줄리탄 : 기다려 봐. 그 녀석이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등장시키겠지. 카넬리안 : 그 녀석... 이 누구야? 이번 편은 전투도 없고 계속 중얼중얼거리는 대화와 묘사의 연속이네요.( 뭐 기습장면이 있긴 했지만.) 사실 그래도 이번 편은 참 마음에 듭니다. 다른 부분은 별로라도 세르난의 '하지만 그건 너무 무서워요.'라는 대사만 큼은 '아 그래 맞아.'라고 동감했기 때문에 그것만은 만족.^_)y-~~~~ 몇 편쯤 지나면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이 시작하겠군요. 망쳐버리지 않을까 봐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겠고 읽는 분에 대한 본격적인 배신이라면 배신이겠죠. 그래도 절대로 시시하지는 않도록... 노 력을... 최고는 불가능해도 어떻게든 최선의 결과를... 읽어주시고 메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billiken@hananet.net 글라디에이터OST 중 NOW WE ARE FREE 를 들으며... (한스 짐머의 스코어들은 역시 멋집니다. 소개해 준 경오형께 감사를~)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8장 : 수호성(守護星) - 8 Electric Lady Land (지난 줄거리) 궁룡들이 가르바트를 폐허로 만들어가는 가운데 가랑을 찾아 가르바트로 올라온 줄리탄은 제도에서 그녀를 만나는데 실패하지만 세르난으로부터 루 시퍼가 가랑을 납치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줄 리탄과 시링크스. 아직 테싱은 나타나지 않았다. 1. 황야의 한복판에서 가랑은 마력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 길고 뽀얀 손가락 끝을 타고 빨간 핏방울이 톡톡 떨어지고 있었고 자멸적인 투지(鬪志)를 드 러낸 루시퍼의 검은 창끝이 그녀의 하얀 목을 향하고 있었지만 가랑의 자 폐적인 눈동자는 애원도 동요도 없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야. 테싱님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건가? 널 구해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거냐고!”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아요.”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자주 화를 냈던 것 같았는데. 가랑의 목소리는 흡사 자조를 닮았다. 루시퍼는 가랑의 목에 가져간 창을 떨고 있었다. 사실 이런 추한 모습으로 주군 테싱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도 핑계이고 변명이다. 단지 테싱이 자신을 한번이라도 바라보길 바라며 몸부림친 뒤에 분노한 그의 손에 죽고 싶었던 자살을 닮은 욕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이라는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테싱은 오지 않았고 루시퍼는 또 한번 버림받았다. 가랑 의 눈빛이 루시퍼를 향하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쯤은 자신을 향한 목소리. “용들조차 극복하기 힘든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인 것 같군요.” “시끄러워! 시끄러워!” 루시퍼가 가랑을 찔러 버릴 듯 창을 든 외팔에 힘을 줬지만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도 테싱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행복해하고 있 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존재. 자기가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도 대답할 수 없는 한심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그런 하찮은 여자인데...... 죽여서 어쩌자는 거야, 루시퍼는 막다른 길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막다른 길에 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테싱님이 제게 당신을 죽이라고 명령하신다면 전 이 사슬을 끊고 당신을 죽인 뒤에 돌아가겠지요.” “......” “그리고 테싱님의 품에 안겨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채로 또 영원한 시간을 보내겠죠. 당신은 그런 내가 부러웠던 겁니까.” 가랑은 살아 있는 생물을 먹지 아니하고 살아 있는 풀을 밟지 아니하는 기린(麒麟)을 닮았다. 그리고 그런 상서로운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생존력이 없는 것이다. 생존력이란 욕심이고 집착이며 왜 살 아야 하는지 목적을 알고 있다는 거다. 너무도 깨끗해서 다른 존재와는 어 울릴 길을 찾지 못하는 그런 생물은 영원을 살아도 일초에 미치지 못했다. 가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테싱님이 제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세상은 하나도 슬프지 않 아, 그래서 비극이야...... 라고. 그래요. 지금 이 순간도 조금도 슬프지 않은 비극인거죠?” 가랑을 서글프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세상 끝에 버려진 지금 같은 기분인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눈에서 는 작은 이미테이션 보석들이 물기 없이 쏟아내 내릴 것 같은 - 세상은 온 통 슬프지 않은 비극의 천지. “......!” 그녀의 마음이 털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새하얀 산의 능선을 넘으며 천 사들이 날아올라 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루시퍼가 창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누군가 오고 있군. 테싱님은 아닐 테지만 아마도 널 찾고 있던 그 인간 이겠지.” “줄리탄 씨......?” “내 팔을 잘라버린 그 놈이겠지?” 이를 갈고 있는 루시퍼의 말이 가랑의 귓가에 겉돌았다. 그녀의 시선은 수백의 천사들이 달려들고 있는 줄리탄을 향해 있었다. 마치 먹이감을 발 견한 독수리 떼에 묻혀 버린 듯한 끔찍한 모습. 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도 않을 정도로 천사들 속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거야!’ 가랑의 눈이 떨리는 가운데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저런 꼴이면 날 상대하기도 전에 찢겨져 버리겠군. 하긴 그게 인 간의 한계지.” “흐음. 그 ‘한계’라는 것에 대해 최근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루시퍼 씨.” “세르난!” 어느 덧 루시퍼에게 다가온 세르난을 보며 루시퍼가 흠칫 놀랐다. 세르난 은 히죽 웃는 얼굴로 창백한 가랑과 루시퍼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아니, 끼어들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뭐?” 세르난이 실눈을 뜨며 천사들 속에 묻힌 줄리탄을 돌아보았다. 눈덩이 같 은 그 모습 속에서 조금씩 시퍼런 빛줄기들이 세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 다. 마치 달라붙은 천사들에게 균열이 생기는 것처럼 계속 비집고 나오던 그 빛의 무리는 점점 줄리탄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 칼날처럼 시리게 변해 가고 있었다. 가랑이 중얼거렸다. “죽지 말아요......” 파르르르르르륵!! 순간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단지 줄리탄을 중심으로 푸른 불길에 몰 아치며 줄리탄을 겹겹이 둘러싸던 천사들의 몸이 불타올랐고 그 충격파가 루시퍼에게까지 밀려들어오는 막강한 힘이 대지를 울렸다. 마치 소리 없는 포효처럼 푸른 마력의 파도가 대지 위에서 울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인 피타르를 뽑아든 채 눈길을 내리고 있는 줄리탄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생 령 같은 아우라가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카넬리안......”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깔리는 마력을 타고 줄리탄의 속삭임이 전해지고 있 었다. 가랑은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비장하게 깔린 인피타르의 기운 을 끌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줄리탄을 바라보며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떨리 고 있었다. 절대로 공포를 느낄 것 같지 않던 천사들마저 경직된 몸으로 줄리탄에게서 물러서며 단지 눈물처럼 퍼지는 푸른 마력만이 이미 카넬리 안의 목덜미를 감싸며 그녀를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 “카넬리안!!!” 수호성은 한낮이라도 그 별이 지켜주는 사람에겐 보인다고 한다. 아우라 에 감긴 줄리탄의 모습이 그 별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상을 찢어버리 는 그의 외침과 함께 자신의 창에 검은 마력을 휘감은 루시퍼가 그에게 날 아들었다. Chapter#18 : 수호성 끝 Next Chanpter : 기적이 머무는 곳 -Blind Talk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늦었습니다. 개인적인 일도 있었지만 다음 작품도 준비하고 있었고 그보다 복잡한 생각에 싸여 슬럼프인데다가 글 쓰는 녀석 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큰 실수를 한 죄책감에 도저히 계속 글 을 쓸 염치가 없어서 연재 중단을 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게 운이 남아 있는지 용서를 받았고 이제 와서야 다시 써서 올리게 됩니다. 그럼 이하는 서비스랄까... 이번에 쓰다가 지운 부분 중에 극히 일부지만 어쨌든 삭제된 부분을 올립니다. (삭제부분) 세라피스는 작은 테이블을 놓고 마주보고 있는 우테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낮이었다. 어전회의 중에 뛰쳐 나와 찾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선생과 함께 공부 중이던 우테의 방에 쳐들 어가서 수업을 멋대로 끝내고 별다른 말도 없이 어리광만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테는 단번에 그가 지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외로 가까운 사람에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니까. “왜 그래?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어?” “우테야. 만약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집 밖에서 살려달라고 울고 있는 부상자들을 모른 채 해야 한다면......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무슨 말이야 갑자기.” 세라피스가 엉뚱한 말로 사람을 웃기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 는 달랐다. 세라피스는 우테의 목덜미를 감아주고 있던 두 팔을 풀며 천천 히 말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치는 테이블을 향해 있 었다. “나, 가르바트의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왜!” 우테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절대로 유능한 황제는 아니었지만 그래 도 그녀의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용에 대한 공포심만이 남은 채 오 갈 데가 없이 달라카트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 내심 세라피 스가 그런 가르바트 사람들을 받아주길 기대했었다. 세라피스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의무가 없는데도) 우테의 동의를 받고 싶었던 것이 리라. “그들에겐 아무 것도 없으니까. 잔인한 말이지만 자립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는 자들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 우리는.” “저장해 둔 식량이 있잖아! 그걸 풀면 당장 굶어죽진 않을 거잖아.” “그건 안돼.” “어째서.” “그건 용들이 공격해 왔을 때 견디기 위한 달라카트의 생명줄이니까. 만 약 그걸 난민들에게 모두 써버린 상태에서 용들이 들어오면 견딜 물자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해!” “미안해! 멍청하고 잔인한 황제라서 정말 미안하다고!” 우테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라피스가 소리 지른 것은 처음이었다 .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장난으로라도 화를 내는 적은 없었는데 지금의 그 는 정말로 어린애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우테의 표정에 당황하며 곧 입을 다문 세라피스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 미안. 너 힘들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단지......” “아니야. 내가 미안해. 당신이야말로 힘들어서 나한테 왔을 텐데.” 우테가 세라피스의 손가락들을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세라피스는 달변가 답지 않게 미안하다는 말들만 난무하고 있었다. 다른 변명 따위는 없다. 결국 황제도 인간, 하늘에서 먹을 것을 쏟아지게 만드 는 능력 따윈 없는, 단지 선택된 인간일 뿐이다. 어렵게 웃으며 자신을 배 려하는 우테를 바라보며 세라피스는 피식 미소 지으면서 그녀의 콧방울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그것만으로 고마웠다. 어차피 그녀가 동의해 준다 고 죄책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싫은 기분이 조금은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세라피스가 울음을 닦은 듯한 방 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테. 우리 별장으로 갈까?” “별장?” “응. 네가 먼저 가 있어. 나도 곧 준비하고 갈게.” “갑자기 웬 별장이야? 난 여기도 좋은데......” “헤헤. 나 별장이 세 개나 있거든. 안전한 곳이야. 그리고 겨울을 지내 기 좋기도 하고.” 세라피스가 싱글거리며 말했지만 우테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 며 작은 손으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의외의 반응에 멍한 세라피 스. “어머? 정말로 세 개야?” “왜?” “내가 가르바트에 있을 때...... 신하들이 말하기로는 내 별장이 백여 채 정도는 있다고 하던데. 정말 황제가 세 개 밖에 안돼?” 당연하다. 일반적인 귀족들도 자신의 장원이나 별장은 10여 채 이상 가지 고 있는데다가 가르바트는 달라카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대제국이었다. 우테가 불쌍한 얼굴로 세라피스를 바라보는 바람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 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 아껴야 잘 살지.” 사실 세라피스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 이미 있던 황족 휴양용의 오십여 채 이상의 별장이나 성들은 거의 모두 공공기관의 사무실 같은 것으로 용도 를 바꿔 버렸기 때문에 세 채나 남아 있어도 대단한 것이었다. 세라피스의 지론에 의하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별채를 수백 개 가지고 있어 봐야 그건 하늘의 별을 보며 저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였지만 그래도 같은 황제끼리 창피한 건 창피한 거였다. 묘한 패배함에 ‘열 채 정도는 남겨둘 걸.’이라고 중얼거리던 세라피스는 말 을 돌리며 별장 휴가에 대해 말했다. “아무튼...... 먼저 가 있어. 산 속에 있는 고성이지만 볼거리도 많고 필요하면 네 선생도 데려가면 되니까.” “알겠어. 그럼 세라피스는 언제 올 거야.” “곧 갈게.” 세라피스가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경우라면 보통은 ‘후 궁에게 흥미를 잃은 황제가 후궁을 멀리 보내 버렸다.’라는 식의 구설수 에 오를 수가 있었지만 우테는 세라피스라는 남자를 믿고 있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고. 세라피스는 문 밖으로 나가며 굳은 표정으로 방금 전 어전난상회의에서 리하르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만약 궁룡들이 공격해 온다면 짐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피시킨다고 하더라도 최소 절반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건 폐하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벼락이나 지진 같은 자 연재해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이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 그게 안된다면 사랑하 는 사람 한 명이라도 지켜주는 것. 그것뿐이겠지.’ 세라피스는 힘든 발걸음으로 다시 회의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삭제 부분 끝)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billiken@hananet.net (저는 보통 메일은 한 편 올릴 때마다 밀린 것을 일괄적으로 보냅니다.) B'z의 우부를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1 Recurrent line 1. 가랑을 향해 걸어가던 줄리탄이 곁에 있던 시링크스에게 말했다. “시링크스. 끼어들지 마.” “무슨 소리야!” “명령이야.” 그의 말이 시링크스의 몸을 찌릿하게 울렸다. 줄리탄의 짧은 말은 공명 같은 것이었다. 주저없이 인피타르를 뽑으며 걸어가는 줄리탄을 바라보던 시링크스는 눈을 질끈 감고 ‘맘대로 하라지. 바보 주인.’이라고 중얼거 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줄리탄의 마음을 느끼고는 있었지 만 항상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는 자신의 테이머에게는 너무도 섭섭했다 . “너! 이번에는 절대로 봐주지 않겠어!” 찢겨진 날개를 편 채 흙먼지와 함께 줄리탄에게 달려들던 루시퍼는 마력 에 휘감긴 창을 들고 줄리탄의 몸을 관통시키려 했지만. 그 순간이었다. “비켜라!!” 가슴을 뚫어버리는 듯한 줄리탄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고 그와 함께 자 기도 모르게 투지가 위축되었다. 순식간에 다가선 줄리탄, 그의 백발이 흩 날렸고 그와 함께 칼날이 창과 격돌했다. 콰르르르릉! 강렬한 뇌격(雷擊)과 같이 시퍼렇게 퍼지는 기운이 루시퍼의 몸을 삼켜 버리며 줄리탄의 일격은 단번에 루시퍼를 날려 버렸다. ‘뭐, 뭐야 이 힘은!’ 루시퍼는 날개를 퍼덕이며 바닥을 구르는 것은 피했지만 충격이 가져온 창의 진동이 아직도 강하게 몸을 울리고 있을 정도였다. 인간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힘. 어쩌면 자신을 상회할 수도 있다. 온 몸에 퍼지는 긴 장괌 함께 흩어지는 마력을 추스르던 루시퍼는 두 손으로 검을 들고 있는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크윽! 이놈!’ 루시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줄리탄에게 다시 창을 겨눴지만 푸른 기운에 휩싸인 채 걸어오는 줄리탄의 눈빛은 적대감도 격렬한 분노도 아니었다. 줄리탄이 말했다. “너와 싸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러니까 물러서라.” “닥쳐! 내 팔을 끊어 놓은 놈을 그냥 놔줄 것 같아!” “부탁이야. 내게 싸움을 강요하지 말아 줘.” 묘한 미성으로 울리는 애원의 목소리에 루시퍼가 멈칫했다. 가느다란 숨 소리에 섞여 나온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그는 지금 또 한번 자신의 생명을 얼마를 썼을까. 싸움이 지겹다. 누군가를 죽여야하는 싸움 따윈 이제 지겨 워. 카넬리안의 말대로 자신의 검술은 너무 솔직해서 상대를 다치게 하면 자기도 다치게 된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인피타르가 주는 고통에 익숙 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루시퍼는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부득 이를 갈 며 중얼거렸다. “싸우지 않겠다고? 내가 목숨을 구걸했던 용이라고 조롱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야!” “싫어. 그 따위 것 싫다고.” 루시퍼의 짜내는 듯한 목소리는 지독한 투정에 가까웠다. 그는 위협적으 로 검은 날개를 펼치고 또 다시 줄리탄에게 달려들었다. 격양되어 달구어 진 강렬한 기운은 미친 듯이 모래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간단하잖아! 원하는 것을 얻고 싶으면 날 죽이면 되는 거잖아!!” 절규에 가까운 루시퍼의 고함소리와 함께 창끝에 휘감긴 마력이 줄리탄에 게 밀어 닥쳤다. 눈을 찡그린 줄리탄은 폭풍 같은 흙먼지 속에서 비상하는 루시퍼의 모습을 주시하며 어쩔 수 없이 인피타르의 검신을 세웠다. 전력 을 다하는 루시퍼의 힘이란 다른 궁룡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동시에 쏟아지는 듯한 창격이 어지럽게 눈앞을 위협했고 줄리탄은 인피 타르의 힘에도 불구하고 반격하기에도 벅찼다. 파르륵 거리며 땅을 깊게 패는 섬뜩한 소리가 연속으로 들려왔고 격한 충돌의 스파크 속에서 창을 피하는 줄리탄의 움직임을 따라 푸른 기운이 잔상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줄리탄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그런 그의 시선이 루시퍼를 놓친 것은 찰나였다. ‘크윽!’ 격한 숨소리를 쏟던 줄리탄은 루시퍼를 놓쳤다. 황무지를 뒤집어 놓는 흙 먼지 속에서 루시퍼의 살기어린 눈동자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독이 오른 뱀처럼 집요한 창끝이 줄리탄의 사각(死角)을 노리며 옆구리로 찔러 왔다. 건물 몇 채 정도는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렬한 힘의 응축, 루 시퍼는 승리를 직감했다. ‘죽어! 죽어라!’ 줄리탄은 몸을 크게 돌렸지만 막을 수 없었다. 인피타르의 푸른 힘이 본 능처럼그 창을 감싸며 저항했지만 몸 앞에서 폭발하듯 검은 이빨을 드러낸 치명적 일격에 줄리탄의 균형을 잃고 쓰러져 무방비로 밀려나갔다. “아악!” 땅과 극심하게 마찰하며 바닥을 뒹구는 줄리탄의 입에서 피가 터졌지만 루시퍼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악귀를 닮은 표정으로 창을 치켜세우 고 쓰러진 줄리탄 위로 날아들었다. 사색이 된 시링크스가 입술을 깨물며 마력을 전개하려 했지만 지금의 위기를 막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크하하핫!” 광기어린 비웃음소리와 함께 루시퍼는 쓰러진 줄리탄을 덮쳤고 그의 흑빛 깃털들이 허공에 뿌려지며 창을 내리 찔렀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마치 짐승에게 목덜미가 물어뜯긴 산양처럼 줄리탄은 바닥에 축 늘어진 손가락 마저 미동도 없었다. 싸움은 끝났다. 묶여 있던 가랑은 그들을 바라보는 괴로운 시선을 떨구며 읊조렸다. “당신은 왜......” 루시퍼에게 목을 눌린 줄리탄은 떨리는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보 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의 창끝은 그대로 멈춰 있 었고 루시퍼의 등 뒤로는 인피타르의 칼날이 솟아 나와 있었다. 루시퍼는 그렇게도 죽이려던 줄리탄을 찌르지 않았던 것이다. 줄리탄이 나직하게 물 었다. “어째서 나를 찌르지 않은 거지.” “내가 널 이겼다. 그걸로...... 된 거야.” 흔들리는 줄리탄의 얼굴 위로 검은 눈송이처럼 루시퍼의 깃털들이 내리고 있었다. 뿌연 흙먼지 속에서 루시퍼의 전부 같았던 투지가 사라진 그의 얼 굴이 보였다. 고통에 찡그린 표정 속에서도 분명 엷은 웃음이 섞여 있는. 비틀거리며 일어선 루시퍼는 혈액과 같은 흑색의 기운을 흘리며 중얼거렸 다. “난 널 이기면 되는 거고 넌 원하는 걸 얻으면 되는 거고...... 간단한 거잖아.” “루시퍼” “궁룡인 이 몸이...... 너 따위 인간을 죽여 봐야...... 뭐하겠어.” 어쩌면 루시퍼는 가랑을 구하러 온 줄리탄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 는지도 모른다. 단지 남아 있는 것이 투지 뿐인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일까. 팔짱을 낀 세르난은 인피타르에 관 통된 커다란 상처에서 계속 ‘피’를 쏟아내며 아무 것도 없는 황야의 끝 으로 걸어가고 있는 루시퍼를 심란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곧 표정이 굳어버 렸다. 환영(幻影)처럼 내리는 빛과 함께 루시퍼 앞에 강림한 자는 바로 궁 룡의 수장, 테싱이었던 것이다. “루시퍼. 한번만 더 멋대로 행동하면 널 소멸시키겠다고 했다.” 테싱은 손바닥으로 루시퍼의 머리를 잡으며 슬프도록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퍼는 떨리는 모습이었지만 뭐가 기쁜지 희죽거리며 대답했다. “테싱님. 그걸 아십니까? 이것이 당신이 내게 보여준 최초의 관심이라는 걸.” 고백이라면 고백. 루시퍼는 수백년에 걸쳐 그에게 하고 싶었던 유일한 말 을, 감히 꺼낼 수조차 없었던 그 말을 유언처럼 마치며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루시퍼." 그리고 그와 함께 루시퍼의 머리를 누른 테싱의 손바닥에서 차가운 빛이 내리며 어둠으로 이뤄진 루시퍼의 몸이 무너져 내렸고 그의 몸 모든 것이 환상을 닮은 검은 연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흩어져 갔다.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루시퍼는 마지막 이 순간에 와서야 처음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주인님.” 가랑이 굳은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 비극이라는 것 이 애원해도 소용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무표정한 모습 그대로인 테싱의 눈빛에서 가랑은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처럼 슬픔을 도려낸 마 음의 언저리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테싱이 가랑을 바라보자 가랑을 묶 던 사슬들이 단숨에 증발했고 그는 날개를 접은 채 아무 말도 없이 가랑에 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테싱!!” 가녀리지만 격한 감정을 담은 줄리탄의 외침이 테싱을 잡았다. 테싱은 발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그의 눈빛이 인피타 르를 뽑고 있는 줄리탄을 향했다. “날 죽이러 온 건가.” “아니. 카넬리안을 구하러 온 거다.” 루시퍼와의 싸움으로 옷이 찢겨져 어깨가 드러났고 살결을 타는 핏줄기가 끊어지지 않았지만 줄리탄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양을 가려버릴 듯 이 거대한 테싱의 여섯 장 날개가 천천히 접힌 몸을 일으켰고 그의 얼음 같은 검 역시 소리도 없이 뽑혀지기 시작했다. 정 반대의 두 남자, 테싱과 줄리탄에겐 이상하게도 닮은꼴이 있었다. 슬픈 눈동자를 괴롭게 감은 줄리 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강렬한 의지에 뒤덮여 있었다. 단 한 여자를 위해 검을 들고 절대신 앞에 선 요리사인 자신이 힘들지만 절대로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 곧 지독한 위압감이 줄리탄을 덮쳤고 가랑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Blind Talk 역시 짧지만 그래도 자주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올립니다. 에 그리 고 역시 이쯤에서 끊는 것이 좋다고도 생각했고... 좀 손보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항상 전 그러니까 뭐. 아니 왜 목숨을 구걸했던 루시퍼가 왜 저러냐! 라고 말한다면 그의 심경을 미숙하게 표현했던 제 탓입니다만 그래도 용의 자부심이고 주인의 관심이 고 하는 것들을 모두 잃고 싸움 밖에 남지 않은 녀석의 자부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결국 좀 감상적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주인공 발목이나 잡는 겁쟁이로 그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아아 일요일에도 죽어라고 일하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와 빨리 정리해서 이 글을 올리긴 하지만 1시간 후에는 다시 일산의 개발실로 가서 회의하고 일 하다가 또 병원들려 약을 받고 또 유통사 가서 회의하고... 돌아오면 또 일이. Oh shit. 다 스케쥴 제대로 못 잡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이게 연말 이라니... 소중한 사람에게 전화도 길게 못해줘서 마냥 씁쓸하기만 한 새 벽입니다. 그래도 슬럼프는 꽤 벗어났으니 당분간은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billiken@hananet.net 이런. 정신이 없어서 음악을 켜지 못했습니다.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2 Subvocal 1. 메이를 비롯한 전 가스발 사략함대의 상당수는 명령에 따라 최전방 다카 란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물론 해군이긴 했지만 현재 다카란에 주둔중인 육군을 보좌하고도 남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고 해상으로의 위협은 비교적 적은 편이기 때문에 황실 수뇌부에서 결정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헤스 팔콘을 멸망시킨 주역인 그들의 인기 역시 메이들을 최전방에 보내는데 한 몫 하고 있었지만. “메이 제독 아니 부사령관. 근처 마을에 좋은 술집이 있는데 오늘 밤 어 떨까.” “......” 그런데 이런 위기 상황에 걸맞지 않는 난데없는 치졸한 구애 분위기에 집 무실에 앉아 있던 메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펜을 놓았다. 펜 끝에서 떨어지 는 검은 잉크가 테이블에 스며들 때 그녀는 한심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령 관을 올려보았다. 다카란 주둔군의 사령관은 디벨스라는 중년의 사내였다. 디벨스는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현재 음주는 금지라고 알고 있는데요? 사령관 각하가 내리신 군령이 아 니었습니까?” “아 뭐 그렇긴 하지만...... 아하하 이거 쌀쌀맞은 부사령관이구만.” 무안한 표정이 디벨스가 느물느물 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여전히 메 이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꽤 의지의 남자라면 남자다. 전 쟁터에서 여자를 보기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이 남자는 구국의 영웅 중에 하나인 메이를 손에 넣으려는 의지를 불태우며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치근 덕거렸다. “어때. 이번 일이 끝나면 내 저택으로 오는 게. 내 정원과 와인 창고도 구경시켜 줄 테니까.” “많이 해 본 솜씨로군요.” 다시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 메이의 딱 부러지는 거절의사를 칭찬으 로 들었는지 디벨스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라고 웃어재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느 시대에나 여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치품이 존재했고 지 금은 보통 정원이나 와인 하우스, 거대한 저택 따위 였지만 메이는 그 어 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서재를 가득 메우는 병법서들이 있다! '라고 말했다면 솔깃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디벨스라는 남자의 서재에는 아 마 곰팡이가 점령하고 있을 것이다. 디벨스가 제복을 입은 메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안경 위로 보이는 그녀의 눈썹이 움찔 거렸다. “이봐. 나는 잘 해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여자에게 전쟁은 무리야.” “지금 절 유혹하고 있는 겁니까.” 몹시 귀찮은 듯 메이가 계속 펜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배 나온 중년에게 사랑 받아봐야 하나도 기쁘지 않은 그녀였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전쟁터.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에 황실에서도 자신을 이곳에 보낸 터였단 말이다. 며칠이 넘게 이렇게 들러붙는 디벨스인지 뭔지 하는 남자에 대해 메이의 기분은 짜증을 넘어서서 슬슬 분노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남자에게 이런 유혹 받아 본 적 없나 보지?” “사령관 각하의 말씀대로 지금은 전쟁터로군요.”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는 놈팡이들을 죽일 듯이 싫어한다는 면에서 메이는 리하르트와 닮은 사람이었다. 메이는 슬슬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려는 피둥 피둥한 팔목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 “전쟁터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한심한 남자와는 단 일초도 가까이 있고 싶지 않습니다만 디벨스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뭐?” “그리고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는 순진한 시골 처녀도 속이지 못해요.” 디벨스는 둔한 남자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을 최악으로 봤다는 사실 을 이제야 깨달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히 상관에게 그런 말을 하다 니!‘라는 지상최악의 억지를 꺼낼 찰나 안절부절 못하는 그레시다 옆 소 파에 앉아 자신의 검을 손보고 있던 톨베인이 툭하고 말을 던졌다. “달라카트도 의외로 빨리 타락하는군. 저런 놈이 지휘관이라니 말이야. ” “뭐라고 이 애송이가!” 디벨스는 길게 윽박을 이어나갈 생각이었지만 안 그래도 눈빛이 서늘한 톨베인이 그를 쏘아보자 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 아 니라 정말 죽이고도 남을 눈빛이었다. “너,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너? 다카란 주둔군 지휘관. 그리고 난 군인이 아냐. 그러니까 네가 어 디의 누구든지 난 네 놈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둬.” 논리정연한 톨베인이었다. 디벨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무언가 계속 쓰고 있는 메이와 ‘해볼테냐?’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톨베인을 번갈 아 바라보다가 문가로 걸어갔다. 지휘관이고 뭐고 이곳에 이대로 있다가는 연병장 한구석에 묻혀 버릴 분위기였던 것이다. “이런 군대를 엉망으로 만드는 놈들 같으니!”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시오와 부딪치며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 디벨스 를 미치게 만들었다. 벌떡 일어선 디벨스는 그의 뱃살과 충돌한 것을 무척 불쾌하게 생각하는 시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 놈도 군인 아니지!” “뭐요?” “제길! 왜 민간인들이 성채에 잔뜩 있는 거야! 비켜!” 디벨스는 씩씩거리며 복도 넘어로 사라졌고 머리를 긁적거리는 시오는 멍 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저 아저씨 왜 저렇게 광분해? 아하! 그렇구나. 톨베인 너 또 저 사람 겁 줬지!” “난 용들이 이 다카란으로는 안 들어오길 기도할 뿐이야. 저런 놈이 지 휘하는 군대라면 십만이라도 의미가 없지.” 톨베인이 퍼렇게 날이 선 검을 검집에 넣으며 중얼거렸고 메이가 짧게 ‘ 동감’이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시오는 지금 이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병사들을 둘러보고 온 듯한 시오는 의자에 걸터앉으 며 계속 펜을 놀리고 있는 메이를 흘낏 바라보았다. “메이 누나. 뭐 쓰고 거에요?” “다카란 주둔 사령관 직위 박탈 요청서.” “헤에. 상관을 그렇게 찔러도 돼요?” “취미야.” “하아. 곧 있으면 사령관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겠군. 불쌍하기도 하 지.” 시오가 쯧쯧 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벨스를 그냥 두지 말아야 할 이유가 너무도 자명한 나머지 메이는 쌀쌀맞은 농담으로 그 이유를 대신했 지만 그녀가 보내는 요청서는 방첩대의 총감이자 전군의 통솔자인 리하르 트에게 직통으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와 친분이 있는 메이가 발동 할 수 있는 월권행위라고나 할까. 아무튼 리하르트의 성격대로라면 디벨스 의 지휘권 박탈과 재산 몰수 정도는 가벼운 편이 될 테고 아마도 지하감옥 행 혹은 참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리라. 무능한 지휘관 한명이 유능한 병사 만명을 죽인다, 라는 것이 리하르트와 메이의 공동된 지론이었다. “줄리탄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시오가 문 밖으로 다시 나서려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흘낏 톨베인을 바라 보며 말했다. 역시 톨베인의 대답 정도는 듣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지만 . “궁금하지도 않아 그런 녀석 따위.” “참말로 솔직하지 못하네요. 혹시 알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구 하고 있을 지도.” “쳇.” 톨베인이 고개를 돌리며 치를 떨었다. 사실 줄리탄 주변의 누구라도 그가 원했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나눠줄 수 있었지만 줄리탄은 그게 싫었는지 또 혼자 떠나 버렸다. 결국 사람들이 줄리탄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요청서를 마친 메이가 그걸 겉봉에 넣어 붉은 밀랍과 함께 인장을 찍으며 말했다. “우리도 그 녀석을 도와주고 있는 거야.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법으로. ” 2. 달라카트의 남부 우림지대에는 큐라레라고 불리는 얇은 녹색의 독사가 살 고 있다. 사람들은 그 큐라레의 독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독이 상대를 즉사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천 천히 죽이는데 있었다. 큐라레의 이빨에 물려 독이 돌기 시작하면 처음에 는 따끔거리며 환부가 부어오를 뿐이지만 곧 가장 흉측한 악몽에 빠진 채 장기가 파열되고 피를 뽑고 오감(五感)이 비명을 지르며 아주 느릿느릿 고 문 받듯 죽어간다.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저주스러운 말할 수 없는 고통인 것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인 그 독에 물린 적이 있는가? 그런데 아주 우습게도 큐라레라는 독사는‘지옥의 보주’라고 불리는 진 주를 닮은 커다란 보석을 뱃속에 품고 있어서 사람들은 끝없이 그 독사를 잡으러 밀림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두꺼운 가죽 옷이나 날카로운 칼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즉사약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 이다. 해독제가 없는 큐라레의 독에 물렸을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은 그 독 효(毒效)가 몸을 돌기 전에 즉사약을 삼켜 자살하는 것뿐이다. 일단 그 독 이 악몽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자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 주저 없이 자살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이상은 없는 것이다. “자살해라.” 테싱이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장이 찢겨지는 듯한 존재감. 그럼에 도 악의도 적대감도 없이 나온 테싱의 그 말은 도리어 세상 괴로움의 끝에 치달은 줄리탄을 향한 차가운 동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줄리탄은 테싱이 건낸 즉사약을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포기하지 않아. 아무 것도.” ‘지옥의 보주’를 얻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결국 차가운 독니에 물려 버 렸다. 곧 있으면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들을 몇 곱절 시킨 괴로움이 온 몸을 돌겠지. 테싱이 꺼낸 검은 미스트랄처럼 검 날이 없는 장식검처럼 새하얀 냉기를 뿌리고 있었다. 어떤 위력인지 실감조차 할 수 없는 절대력 앞으로 줄리탄을 다다갈 생각이었다. “그 인피타르라는 검을 믿고 있는 거냐. 그것이면 날 죽일 수 있다고 생 각하는 건가.” “하나 확실히 해두지 테싱.” 줄리탄은 가랑을 바라보며 똑바로 말했다. “이 검이 없어도, 단지 낡은 목검 하나만 가지고 있었어도 지금과 똑같 이 행동했을 거다.” “왜 타협하지 않나.” “나도 항상 타협하면서 살고 있어. 하지만 이것만은 절대 타협할 수 없 는 일이니까. 그걸 느끼지 못하는 거냐?” “......” “두렵다고, 힘들다고 가장 소중한 것마저 타협해 버리면 그땐 너처럼 아 무 것도 남지 않게 돼!!” 북받치는 외침과 함께 줄리탄은 테싱에게 뛰어 들었다. 차라리 구름 위에 서 추락하는 편이 더 안전한 짓이었지만 주저없는 기합소리와 함께 인피타 르를 세운 줄리탄의 일격은 그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 테싱을 내리쳤고 그 접점을 중심으로 대지 위에 시린 기운이 바다처럼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인피타르가 내리친 테싱의 어깨에선 인간의 것과 같은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테싱은 미동도 없었고 줄리탄은 밀려났다. 테싱이 시전을 시작 했다. “D.R.A.C.O.P.H.O.B.I.A." 테싱의 힘이라는 것은 강하다, 무적이다 라는 식의 상대적 개념으로는 설 명할 수가 없는 이 세상의 절대력이다. 인간을 상대로는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사실 지룡들과 싸울 때도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줄리탄과 의 결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곧 인피타르가 힘을 감췄다. 푸른 기운들이 겁을 먹은 듯 인피타르 속으로 되돌아 들어가며 요도(妖刀) 인피타르는 순식간에 낡은 검이 되어 버렸다. 공격력을 상실했는데도 계속 자신을 노려보는 줄리탄을 향해 테싱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 자살해라.” “나도 말했을 텐데! 이 검이 없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고.” “그럼 너의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어. 가랑과 얽힌 모든 일에 대한 기억 을 지워주지.” “......!” 줄리탄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가 깔렸다. 카넬리안에 대한 모든 추억이 말소되어 버린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테싱은 줄리탄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걸 소멸시킬 힘도 없었다. “선택해라. 그녀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던지 아니 면 모든 것을 잃고 죽는 그 날까지 공허 속에서 번민하던지.” 줄리탄에게 있어 이보다 더 잔인한 선택이 있을까. 줄리탄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인피타르의 불꽃마저 단번에 꺼트린 자. 테싱을 이길 수 있는 가 능성은 제로다. 그리고 이번에는 카넬리안과의 추억마저 지워질 수 있다.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할 수도 없고 그녀가 누군지조차 생각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 대해 물어도 ‘그녀는 대체 누구지?’라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겠지. 절대로 그 추억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인피타르를 들어 올리는 줄리탄이 말했다. “싫어. 그런 비겁한 추억은...... 그녀를 구하고 싶어. 피하지 않고 도 와주고 싶어. 그것을 위해서는 더 이상 그녀를 기억하지 못해도 참을 수 있어.“ 줄리탄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르며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자신의 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지 않고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혹시 성공하지 못하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비극으로 끝나더 라도 참을 수 있었다. 그것을 포기하며 대가로 얻은 비겁한 추억 따위 -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추억이 아니었다. 사랑은 추억의 무게로 설명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가. 그럼 기억을 지워주지.” 테싱의 말이 차갑게 울리며 가랑은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질 것 같은 마 음의 격통에 눈을 꽉 감았다. 이제야 알았다. 줄리탄과의 공명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주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가슴 속에 살아 있었던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은 씰이기 때문에 받은 공명이 아니라 그를 정말로 사랑 하기 때문에 버릴 수 없었던 미련스러운 감정. 그래서 괴로웠다. 두 남자 의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는 가랑은 제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신 만 괴롭다면 그것이 영원하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으니까 싸움 을 그만 둬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버린 인피타르를 든 줄리탄을 테싱을 걸어가기 시작했고 테싱이 입을 열었다. “M.E.M.O.R.I.A.P.H.O.B.I.A." 그리고 줄리탄의 머릿속으로 기억을 뜯어먹는 무형(無形)의 악귀들이 들 이닥치기 시작했다. 큐라레의 독니가 줄리탄을 깨물었다. 2. “주, 주인님!” 시링크스는 자기도 모르게 마력을 모으며 줄리탄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주인이라도 좋다. 씰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죽어 도 좋으니까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줄리탄을 향했다. 그때 그 앞에 나타난 자는 세르난이었다. “에구 에구 시링크스 씨. 지금 가면 죽게 돼요.” “비켜 세르난!”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시링크스는 세르난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작 은 궁룡 세르난은 고개를 기울이며 이제야 뭔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헤에. 당신도 타협하지 않는군요. 씰도 우리들처럼 소중한 것 따윈 없 는 존재인줄 알았는데 말이죠.” 지금의 시링크스는 세르난을 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아 무래도 좋았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시링크스는 느끼고 있었 고 그런 기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싫고 좋고 가 아니라 통제할 수가 없는 자기 마음이었던 것이다. 비록 유치하고 미숙해도 시링크스는 자신의 이 런 아픈 감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3. 줄리탄을 지켜보고 있던 자는 또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능선 위에 주저앉아 있는 오펜바하는 찡그린 눈초리로 테싱과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불만이라던가 화를 내고 있던가 하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외로움과 연민, 자책과 갈등 같은 여 러 복잡한 감정들을 짧게 줄여 단지 찡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지 켜보고 있던 그였지만 테싱이 나타난 이후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드 물게 안절부절하던 미쉘이 답답한 듯 오펜바하의 귀에 대고 말했다. “오펜바하님! 뭐하세요!” “구경해.” “농담하지 마세요. 구해야 하잖아요.” “구하다니 누구?” “줄리탄씨요!” “어떻게 하면 저 슬픈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거지? 저번처럼 끼어들어 또 도망치게 만들면 구하게 되는 건가? 그렇게 간단할까?” “하, 하지만 저번에는!” 당황하는 미쉘의 회색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오펜바하는 그 커다란 노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듯이 착잡하게 미쉘의 긴 치마 를 잡아 당겼다. 그만 재촉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비극의 리플레이. 참 잔인한 해후야. 뮬렌이 여기에 있었다면 그 여자, 또 울어 버렸겠지. 저 놈은 오래 전부터 여자 울리는 재능 하나는 뛰어난 놈이었으니까.” “오펜바하님.” 미쉘도 이제 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권력을 위해 적을 누르고 강하니까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단순한 논리가 아 니라는 것을. “한 가지 비겁하게 바라는 게 있다면 차라리 저 녀석이 과거를 모른 채 그냥 죽었으면 하는 거지만 우습게도 테싱도 나도 저 녀석을 죽일 수는 없 으니까. 과거는 잊혀질 수 있겠지만 죄와 감정은 사라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아.” 오펜바하는 두 손바닥을 꽉 쥐며 짜내듯이 말했다. -Blind Talk 첫번째 이번편은 부자유스러운 문장이나 오탈자가 특히 많을 듯 합니다. 다시 읽고 싶은 한 편이라서 죄송스럽게도 수정보지 못하고 올리니까요. 두번째로 그래도 이번 편은 양이 좀 많은 편이죠? ^_^a 이번 편에서 독사의 이름으로 나오는 큐라레(curare)는 사실 근육을 이완 시키는 신경독소의 이름으로 남미 인디안들이 사냥등에 사용했지요. 뭐 실 제 큐라레는 이 글에 나오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독소는 아니고 단지 몸을 마비시켜 버릴 뿐이랍니다. 뱀독도 아니고요 치료에 쓰이기도 합니다. 글에서 나온 증상은 차라리 독이 있는 타란튤라에게 물리거나 미치광이 버섯을 먹고 무도병에 걸렸을 때에 가깝겠죠. 큐라레에 중독되었을 때도 몸이 안 움직일 뿐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마 치 사고력을 가진 인형처럼. 도리어 큐라레에 중독된 자는 가랑이었다는 분위기를 슬며시 보여주려고 했지만 결국 큐라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만이 살짝 느낄 수 있는 것이니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_- 아 그리고 이번 챕터 제목인 '기적이 머무는 곳'은 (이미 눈치채신 분들 도 있겠지만) 마이클 크라이튼이 각본을 쓴 드라마 ER의 에피소드 제목입 니다. 스필버그에 의해서 빛을 발한 드라마라고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 고 봤지만 참 재미있게 봐서 그 제목이 기억에 남더군요. 어쨌든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나날이 추워지는데 옷 두껍게 입으시 길.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billiken@hananet.net Night Wish의 Stargazers를 들으며... 69 23  1/2 지름길 님께서 남기신 글 [ DRAGON LADY ] 19-03 : 기적이 머무는 곳 1. 고통은 없었다. 두려움마저 잊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취된 줄리탄의 마 음에 망각이라는 이름의 서슬 퍼런 칼날이 다가와 추억을 도려내는 것이었 다. 추.억.을.해.부.당.하.고.있.었.다. 그리고 뒤엉켜가는 줄리탄의 머릿 속에서 그녀와의 추억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별처럼 많은 추억 중의 하나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서 항상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 다.’ 줄리탄의 고향 키오네에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씰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 던 카넬리안은 싸움이 끝난 이후 홀로 그 씰들의 시신을 묻어주고 있었다. 카넬리안의 섬뜩한 싸움에 질려버린 마을 사람들이 슬슬 그녀를 피하고 있 을 때 줄리탄은 용기를 내며 그녀의 등 뒤에 섰다. 말없이 씰들을 묻어주 고 있는 그녀의 등을 보며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저 카넬리안.......” “가까이 오지 마!” 찢어지는 그녀는 목소리에 줄리탄은 흠칫 놀라며 주저앉을 뻔 했다. 차라 리 그녀가 씰들의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면 위로라도 해주었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동정 받는 것조차 멸시하고 있었기에 이제 겨우 소년티를 벗은 줄리탄으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카넬리안의 뒤편에 서 있을 수밖 에 없었다. 카넬리안은 결국 혼자서 매장을 다 마치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으며 줄리탄을 돌아보곤 말했다. “이봐 주인님. 그런 얼굴 하고 있어도 난 하나도 안 기뻐. 그보다 뭐 어 차피 당신의 씰이 되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여자를 연기해 줄게. 그 정도 서비스야 어렵지 않아. 어때? 어떤 스타일을 원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어떤 모습의 여자가 좋으냐고. 서로 귀찮게 신경 쓸 것 없이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주문만 해.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가면 같은 눈웃음을 보이며 줄리탄을 바라보았다. 줄리탄이 고개 를 돌리며 당황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돼, 됐어 그런 거.” “얼레? 당신 내 연기력을 믿지 못하는 거야? 이래 뵈도 난 말이야 소녀 부터 누님까지 다 소화할 수......” “그만 하라니까!!” 느닷없는 고함소리에 카넬리안은 깜짝 놀라다간 눈썹을 찡그리며 조그맣 게 중얼거렸다. “으이 씨! 왜 화를 내고 그래.” “필요 없어 그런 거. 진심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테이머에 대 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거야?” 퉁명스런 줄리탄을 보며 그녀는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물 끄러미 올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뺨을 긁적거렸다. 도무 지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다는 조소를 보이며. “히히. 역시 당신 어린애네요. 그런 태도 귀엽긴 하지만 역시....... 진 심이라는 건 골치만 아파. 그리고 난 주인님의 진심 같은 거 필요 없어. 안전할 때는 누구나 멋진 말을 늘어놓지만 조금만 위험해지면 진심도 바뀌 니까.” 쌀쌀 맞은 말을 카넬리안은 웃는 낮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흙먼지가 묻은 손을 탁탁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긴 애당초 나 같은 씰에게 본 모습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 진심이 니 본심이니 하는 단어 따위가 내게 안 어울린단 말씀이야. 헤헤.” “하지만 방금 전....... 저 씰들을 묻으며 봤던 네 표정, 그게 너의 진 심이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너를 도와주고 싶은 거야.” “어떻게?” “바,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아. 걱정이네요. 당신 같은 사람과 여행을 떠나야 한다니. 고생할 것 같아.” 한심할 정도로 순진한 줄리탄을 그녀는 이리 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 다가 줄리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서 싱긋 웃는 것이었다. “주인님. 나의 진짜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 만 그래도 참 고마워. 그런 말 들어본 건 처음이니까.” “........” “하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도망쳐도 돼. 난 당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도망치고 날 속이고 배신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힘들 면 도망쳐.” 나긋하게 말하는 그녀의 줄리탄을 향해 첫 태도는 차가운 거절이었다. 그 리고 지금까지 3년간 그녀와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 줄리탄도 카넬 리안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이 곳에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시험받고 있으리라고. 희미한 반추(反芻)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이 몰약( 沒藥)처럼 뿌려지며 월하(月下)의 대지 위에선 오직 줄리탄만이 미동도 없 이 의식하지 못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추억은 모두 소거(消去)된 것일 까. 마치 동상처럼 굳어버린 채로 기억의 뿌리까지 뽑혀진 듯 줄리탄은 아 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가랑. 돌아가자.” 테싱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몸을 돌리며 가랑을 향해 말했지만 그녀는 마 음이 헤집어진 채 멈춰 선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밤이 눈물을 떨어내고 있었다. “.......가랑. 가자.” “당신은 잔인합니다.” 가랑이 두 눈을 꽉 감으며 짜내듯이 말했다. 원망을 토해내듯 비애를 삼 키듯. 테싱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 ‘죽은’ 줄 알았던 줄리탄의 입가가 떨리며 조금씩 목소리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마치 기적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테싱은 황급히 줄리탄을 돌아보았다. “난 테이머로서는 실격일지도 몰라. 그런 우스꽝스러운 규칙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으니까. 단 한번도 카넬리안을 나의 부속품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단지 계약했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서 희생해도 좋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어.” 그리고 죽어 있던 인피타르의 푸른 기운이 다시 터져 나오며 어둠을 삼켜 가기 시작했다. 세상 어떤 것도 부셔 버릴 수 있는 테싱의 마력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거야. 안전한 곳에서 안 전한 힘에 둘러싸인 채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배척할 뿐이잖아. 이 세상 모든 것을 감싸줄 수는 없더라도 단 한 사람을 솔직하게 사랑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면서...... 대체 너의 어디가 절대자라는 거냐. 그녀의 마음 어 느 구석을 이해하고 있다는 거야.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줄리탄의 읊조림은 얼어붙은 테싱의 마음을 찔렀고 처음으로 테싱의 눈에 적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네 놈이 실패한 실험 속에서 수만 년을 살아온 자의 마음을 알아?” “그렇다면...... 그렇게 끝없는 시간을 살아왔다면서 왜 작은 것 하나도 바꾸지 못했던 거냐!! 어째서 한 사람의 마음조차 감싸주지 못하는 거야!! ” 생명을 산화시키는 시린 빛 무리가 줄리탄을 감싸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2. “줄리탄씨가 테싱님의 힘을 깬 건가? 어, 어떻게.” 줄리탄을 바라보는 세르난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등 뒤에는 세르난의 일격에 무너진 시링크스가 쓰러져 힘든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세르난은 시링크스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절대로 자신을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시링크스의 숨 소리가 멈추며 붉은 빛의 칼날이 세르난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윽! 뭐, 뭐야!” 세르난이 붉은 피가 터지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등 뒤에는 강렬한 마력을 응축시키고 있는 시링크스가 일어나 있었다. “힘이 돌아왔다.” “......!” 시링크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세르난을 쏘아보고 있었다. 시링크스가 완벽 한 자신의 힘을 운용하게 된 것은 줄리탄과 계약한 이후 처음이었고 그의 본래 힘이라면 세르난이라고 할지라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검 은 흑발 사이로 보이는 얼음 같은 눈동자로 시링크스는 세르난을 위협했다 . 시뻘건 피가 세르난의 하얀 옷에 퍼져가고 있었다. “세르난. 비켜라.” “말했잖아요. 당신을 보내줄 수는 없다고.” “H.A.T.E." 시링크스의 몸이 보랏빛의 마력에 감싸이며 그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 했다. 3. 어둠을 찢어버리는 푸른 빛줄기가 창룡(蒼龍)처럼 솟아오르며 줄리탄의 몸이 비상(飛翔)했고 그것은 곧 테싱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테싱이 인 간을 향해 검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리라. 그리고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 거대한 힘이 줄리탄을 내리찍었다. “으아아아아악!” 대기를 일그러트리는 악의적인 중력의 철퇴에 줄리탄은 날개가 꺾인 새처 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핏방울마저 산산이 분해 되는 고압의 중력장 속에 서 몸을 떨면서도 줄리탄은 괴롭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세계 전체가 적으로 돌아선 것 같은 기분. 그래도 포기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트드드...... 트륵 그때 이상한 균열음에 멈칫한 줄리탄은 굳은 얼굴로 인피타르를 바라보았 다. 검이 울고 있었다. 검이 깨지고 있었다. 인피타르의 검신에 균열이 가 기 시작한 것이다. 살갗이 갈라지는 듯 균열의 줄기가 이어지기 시작하며 그것은 마치 상처 입은 생명체처럼 떨기 시작했다. “거, 검이.......” 줄리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의 틈에서 비명과 함께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닮은 영혼들. 수만 명 혹은 수십만일까. 검의 진동은 대지의 서러운 울음으로 이어지며 지옥도(地獄圖 )를 만들어 냈고 고통에 일그러진 생령(生靈)들이 하늘 위에 거대한 원한 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4. "주, 주인님. 저건.......“ 미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인피타르의 ‘본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지적이고 박식한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마법도 아 니고 새로운 무기도 아닌 오직 비애와 공포의 광경. 마치 자신이 환시자( 幻視者)라도 되어 버린 듯한 두려움이 그녀의 온 몸을 휘감았다. 오펜바하 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미쉘.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예?” “내가 테싱을 가뒀던 ‘이공간’은 바로 저 인피타르의 검속이었어. 지 구에서부터 사라지지 않고 따라온 죄업의 유물이지.” 알-인피타르. 코란에서 찾을 수 있는 이 단어의 의미는 ‘신의 분노’이 다. 그리고 그것에서 신이 빠져버린 인피타르는 단지 분노와 징벌일 뿐. 속박(束縛)에서 풀려난 영혼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락(奈落)의 끝에 서 있는 기분이야. 거짓말. 나락에는 끝이 없어. -Blind Talk 카넬리안 : 얼라리? 뭐야 이거! 왜 갑자기 악령들이 튀어 나와! 이 소설 퇴마물이었어? 물키벨 : 으이구 악령 아냐! 테싱 : 싫은 것들이 밝혀져 버렸군. 오펜바하 : 뭐어 자업자득이지. 줄리탄 : 참말로 사는 게 힘들 구만. 다음 편에선 또 내가 무슨 꼴을 당 해야 하는 거야. 그간 힘들었습니다. 감기에도 시달리고 술에 절어 있을 때도 있었고 빙판 에 엎어져서 전신타박상을 입기도...... 이번 편은 후반 분위기가 꼭 Cosmic horror 스타일 같은데.... 좀 책임지지 못할 말들이 많아 나온 것 같아 신경 쓰이지만 일단 올리고 봅니다. 어이구. 제가 봐도 줄리탄은 고생 죽어라 하는군요. 뭐... 진짜 고생은 아직 기다리고 있지만. 사실 뭐 진짜 고생하는 건 카넬리안이죠. 이번 챕 터가 끝나면 두 챕터 남는군요. 아아 과연 8권내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나..... ZIGGY의 without을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4 DO NOT 1. 마지막 일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싱은 하얀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가 리며 자신의 착잡한 표정을 감추고 있었고 그의 하늘은 방황하는 영혼의 물결에게 빼앗겨 있었다. 줄리탄은 울고 있는 검을 들며 테싱을 노려보았 다. 검의 눈물이 푸른 물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과거에 대해 알고 싶지 않나? 네가 누구였는지 왜 씰들이,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네가 가랑을 사랑하고 있는지." “사양하겠어.” “......그런가” “나는 지금의 나로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니까. 과거에 내가 무엇이 었든 나도 모르는 나의 정체 따위 알고 싶지 않아.” 사이렌의 유혹 같은 목소리에 귀를 막으며 줄리탄은 테싱을 향해 한발자 국씩 발을 옮기기 시작했고 하늘을 장식하는 영혼의 무리들이 파도처럼 연 기처럼 변해가며 뭉쳤다간 흩어지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던 줄리탄의 발걸 음이 주저 없이 가속되었다. 그의 하얀 머리칼이 마치 설표(雪豹)의 갈기 처럼 흩날리며 인피타르의 끝이 세워지고 영혼들의 비명 소리를 관통하는 미성의 기합소리가 테싱을 향해 포효했다. “용은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 오래 전 부터 느끼고 있었어. 인간에게 용의 가죽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테싱의 나직한 목소리가 유언처럼 흩어졌고 줄리탄이 품은 의지가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줄리탄의 검 끝이 테싱을 향했을 때 작은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곧 줄리탄의 검을 쥔 두 손에 불안한 감촉이 전달되었다. "카, 카넬리안?" “그거 알아요 줄리탄씨? 당신은....... 항상 날 힘들게 합니다.” 너무도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공이 열려버린 줄리탄의 눈 이 미친 듯이 떨려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장 잔혹한 결말. 자신의 검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너무도 붉은 핏물이 거짓 말처럼 바닥에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역시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그 누구보다도 항상 고 마워하며......” “어째서...... 어째서......” 테싱과 줄리탄의 사이를 가로막은 가랑은 줄리탄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저는 궁룡의 수장과 계약한 씰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에게 저는 서글픈 환상일 뿐이에요. 이렇게 당신의 온기를 느끼고 있어도 우리 는 결코 같은 곳에 공존할 수 없는 환상입니다.” “환상...... 이라고? 그렇지 않아! 너는!” “이제 저를 잊어 주실 거죠?” 가랑은 떨리는 손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줄리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인피타르가 바닥에 떨어졌고 검의 울음도 영 혼들의 비명소리도 모두 날아가 버린 상실의 공간 속에서 줄리탄은 정지해 버렸다. 2. 하필이면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제법 쌀쌀한 다카란 성채의 내 성(內城)에서 검술을 수련하던 톨베인은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 보던 시오가 신경 쓰였는지 땀방울을 훔치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 “잠이 안 와.” “그럼 들어가서 청소라도 하던지.” “그레시다가 다 해버렸어.” 턱을 괘고 주저앉아 있는 시오의 맹한 목소리가 결국 톨베인의 신경을 긁 어 버렸다. “으윽. 아무튼 여기서 사라지란 말야!” “히히.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남자끼리.” “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난 누가 보고 있는 거 싫어해! 어서 사라져 버 리......” “톨베인.” 무언가를 느낀 시오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고 그의 눈빛을 본 톨베인은 그 유연한 몸을 꺾어 그대로 붕 떠오르며 공중 회전을 했다. 순간의 일이었다 . 간발의 차로 톨베인이 있던 자리를 찌르고 지나간 것은 급강하하던 천사 의 창부리였던 것이다. 재빠르게 착지한 톨베인은 순간적으로 허리춤의 단 도를 뿌렸고 등에 단도가 박힌 천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시오에게 달 려들었다. “조심해 시오!” “뭐, 뭐야 이것들은!” 스르르르릉! 시오가 새하얀 각도를 뽑으며 정면에서 날아오는 천사를 향해 검을 끌어 올렸고 완벽하게 정제된 검의 일격이 천사의 몸을 머리부터 갈라버리며 마 치 검 날을 향해 달려든 짐승처럼 - 두 조각난 천사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 “설마 이게 용?” 기괴하게 떨던 천사의 몸조각은 곧 퍽 소리를 내며 차가운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시오는 손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곧 하늘 을 바라보며 숨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세상에. 별들이....... 추락하는 것 같아.” 톨베인의 등 뒤로 펼쳐진 검은 하늘을 뚫으며 엄청난 수의 천사들이 나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공포스러운 천사들의 고함소리가 다카란을 뒤덮으 며 궁룡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Blind Talk '나락'이라는 단어. 산스크리트어 나라카에서부터 온 그 단어의 의미는 '구제할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입니다. 아마 이번 챕터를 지배하는 단어가 그것이 아닐까 하네요. 인피타르로부터 살아진 영혼의 정체가 그것의 중요 성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서 밝혀질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힘들지만 그래도 힘차게 1월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럼. 아 너무 늦은 인사지만 축성탄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50 27  1/2 부여창 님께서 남기신 글 [ DRAGON LADY ] 19-05 : 기적이 머무는 곳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5 Day of The Dragon 1. 천사들은 다카란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려는 듯 했다. 물론 천사들에게 ‘함락’은 다카란의 모든 생명체를 살상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다카란 성채는 말 그대로 흰개미 떼에 둘 러싸인 저택의 꼴이 되어 붕괴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헤에. 의외네. 이쯤이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끝도 없이 천사들의 몸이 소멸하고 핏덩이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천사들 을 상대로 인간들과 이종족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살육의 전장을 조망( 眺望)하듯 내려보는 세르난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시링크스와 싸웠을 때의 상처는 이미 완치되어 있었다. 이제 남아 있는 궁룡은 테싱을 제외하면 세르난이 전부였지만 그는 성격대로 별로 이 싸움에 관여하지 않 은 채로 관망할 뿐이었다. 사실 세르난이 본래 힘을 발휘한다면 저항하는 다카란 방어군 정도 일순간에 멸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목숨 을 걸고 싸우고 있는 저항군에게 가 있었다. 마치 아주 실감나는 명화를 감상하듯이. “크르르르르르르!” 강습하는 천사들을 막기 위해 마치 방파제처럼 전면에 나선 수백 명의 오 거들은 3미터에 달하는 철제 방패를 든 채로 천사들의 창을 밀어내고 있었 다. 그 방패에 창이 충돌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엄청난 불꽃이 튀었고 오거들은 들고 있던 거대한 망치로 균형을 잃은 천사들의 머리를 내리쳐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반격도 엄청난 수적 열세를 견디지 못 하며 조금씩 밀려나고 있던 중 한명이 방패를 놓치며 끔찍한 속도로 날아 드는 천사의 창에 그 두꺼운 배가 찔리며 연녹색의 피를 토했다. “우아아아악!!” 배를 찔린 오거는 포효를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 는 천사를 움켜잡아 몸을 찢어버리고 했고 그 육중한 팔뚝이 뿜는 힘이 천 사의 머리를 잡아 뜯어내는 것에 성공 했지만 순식간에 날아드는 수십 천 사들의 창에 오거의 온 몸이 깊게 뚫리며 공중으로 들어올려져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다카란 곳곳에서 천사들에게 낚인 다른 종족들의 몸도 하늘 로 끌려가며 전쟁터 전체에 모든 종족들의 피의 소나기가 뿌려지고 있었다 . 그 모습만으로도 소름끼치고 너무도 잔혹해서 욕지기가 나오는 극도의 아수라장. 피를 머금은 땅의 흙이 검붉은 진흙탕으로 변하며 병사들의 발 을 휘감고 쓰러진 자들의 시신을 잡아먹고 있었다. “종족의 명예를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서!” 자신들의 언어로 커다랗게 소리치며 공포를 몰아내는 오크들의 돌격대도 투척 도끼를 던져 날아오는 천사들을 떨어트렸고 조직적으로 바닥을 뒹구 는 천사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의 몸을 찔러 목숨을 끊어 버렸다. 퍼억 소리 를 내면서 천사들의 몸이 빛먼지로 변해 버렸고 그것 만큼이나 오크들의 몸도 꿰뚫린 채로 공중에 끌려 올라가는 필사의 사투. “아아악!” 인간 창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천사들을 저격하고 있는 엘프 궁술사들은 옆에 있던 동료가 창에 꿰뚫려 피를 뿌리며 끌려 올라가자 비명을 지르면 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상으로 강습할 때마다 지르는 천사들의 공 포스런 울음소리에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지만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를 악물고 자신의 활통에 있는 활을 모두 써버릴 때까지라도 살아서 동료들을 도울 수 있길 기원하며 활 시위를 당겼다. 마법 장벽을 펼치고 있는 트롤들과 함께 선두에 나선 메르퀸트의 위력은 실로 막강해서 그가 소멸시킨 천사의 수도 이미 수백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죽여도 죽여도 도리어 늘어만 가는 천사들의 모습에 메르퀸트도 두 려움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그때 마력의 장벽을 뚫은 천사가 메르퀸트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이, 이런!” 창백해진 메르퀸트가 반격할 사이도 없이 천사의 창끝이 그의 얼굴을 향 해 화살처럼 치고 들어왔지만 그 순간 거대한 낫이 엄청난 힘으로 천사를 찍어 버리며 들어 올렸다. “조심해. 자기 안전부터 생각하라고. 어차피 다 살아남자고 하는 싸움이 니까.” 휘몰아치는 흙먼지로 이뤄진 말락이 웅웅거리며 말했다. 그는 천사가 찍 혀 있는 대낫을 들어 올려 가볍게 휘둘렀고 빠져나간 천사의 시체가 산산 이 부서지며 터져버렸고 메르퀸트는 땀을 닦아내며 그를 고마운 미소로 올 려다보았다. “타앗!” 공중으로 도약한 키마인의 검기가 번뜩였고 순식간에 서넛의 천사들을 베 어버리며 다시 착지했고 그 순간 키마인의 등 뒤로 수십명의 천사들이 살 기를 뿜으면서 따라붙기 시작했다. “호이젠! 가자!” 그를 보호하는 호이젠과 함께 엄청난 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그들의 등 뒤에는 금세 백여명 이상으로 불어난 천사들이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며 뒤쫓고 있었고 곧 그렇게 모인 천사들의 앞에는 기다리고 있던 연사궁(連 射弓)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맹수를 유인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파르르르르르륵! 태엽이 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파르낫소가 고안한 그 기계궁은 동시에 수백발의 화살을 쏟아냈고 마법사들이 걸어 놓은 마력을 머금은 그 화살들 은 생명체처럼 곡선을 그리며 흩어지는 천사들에게 따라붙어 몸을 관통시 켰다. 그리고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새하얀 빛의 폭발들이 하늘을 장식했 다. 키마인은 그것을 돌아보며 크고 작은 상처로 이미 피가 물든 자신의 옷을 다듬었다. 피에 엉켜 움직임이 불편할 지경이었건만 천사들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아무리 봐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도무지 끝이 없어. 이 싸움, 이길 수 있을까 호이젠?” “지금은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엔 방도가 없습니다.” 수려한 얼굴에 흐르는 핏줄기를 안타깝게 닦아내는 호이젠은 자신의 젊은 테이머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웃어보이며 다시 사지를 향해 달려갔다. 2. “끝이 없군.” 검을 뽑은 채 군대를 지휘하던 메이는 더러워진 제복에도 아랑곳하지 않 고 하늘을 올려보며 치를 떨었다. 이미 전 지휘관이었던 디벨스는 리하르 트의 명령으로 제도로 압송(押送)되어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디벨스가 본다면 차라리 자신이 이곳에 없다는 것에 감사 할 것이 분명했다. 리히트야거와 싸울 때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로 어떤 전쟁사를 뒤져봐도 찾아볼 길이 없는 이 비상식적인 적들에게 지금까지는 목숨을 걸고 버티고 있지만 점점 사상자가 늘어가고 피로가 누적되어 이 공습이 몇 시간을 넘긴다면 다카란은 무너질 것이 자명했던 것이다. 그리 고 최전방의 거점인 다카란이 함락된다면 그 이후는 민간인이 그대로 노출 되는 무인지경(無人之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항복을 받아줄 상대 도 아니라는 것이 두려움을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그때 메이 는 다카란 후문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수천기의 기마대를 바 라보며 놀란 얼굴로 신음소리를 냈다. “설마 저건......” 메이의 예상대로 그 기마대는 기사와 씰들을 포함한 세라피스 직속의 근 위부대였으며 그 선두에서 긴 금발을 흩날리는 자는 바로 세라피스였다. 그의 양 옆에는 그랜사이어와 마르켈라이쥬까지 함께한 채로 그들은 전쟁 터로 들어오며 말에서 내렸다. “폐, 폐하!” 메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에서 내리는 세라피스 앞에 가며 무릎을 꿇 었고 세라피스는 질려 버린 얼굴로 하늘을 장악한 천사들을 바라보다가 메 이를 향해 방긋 웃었다. “도와주러 왔어요오.” “폐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폐하의 안위를 지켜드릴 수가.......” 그때 후방까지 날아온 천사가 사람들을 덮치려고 했고 세라피스는 순간적 으로 발검(拔劍)하며 그것을 조각내 버린 뒤에 말했다. 여전히 황제답지 못한 말투였지만. “확실히 위험하긴 하군요. 하지만 리이 경에게 했던 실수는 반복하지 않 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예?” “내 유언은 이미 리하르트에게 전해 주었고 죽으면 알아서 집행해 줄 테 니까 걱정할 것은 없어요.”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 세라피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전쟁터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바꿔가는 얼굴 로 조용히 말했다. “이런 건 전쟁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 전쟁이란 목적이 아닌 수단이며 치는 쪽도 막는 쪽도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이건 차라리 괴물에게 먹히느 냐 살아남느냐를 결정하는 생존의 싸움이에요.” “......” “그렇다보니까 용맹스런 장군들조차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 이런 상황이야 말로 황제가 직접 앞에 서야 조금이라도 더 기운을 내 고 싸워야 할 이유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광대에요. 광대가 무대에 서지 않는다면....... 설사 그것이 마지막 무대 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서야 할 무대를 피한다면, 짐은 죽어서도 후회할 겁 니다.” 세라피스는 씁쓸하게 웃는 얼굴로 ‘역시 황제 따위는 되는 게 아니었어. ’라고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고 그의 뒤를 근위대의 기사들이 따라 가기 시작했다. 3. 세라피스의 참전은 다카란 군의 사기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 지 모든 제국의 역사상 황제가 전쟁의 전면의 서는 경우는 없었을 뿐더러 사람들이 세라피스에게 가지고 있던 믿음과 외경의 감정마저 다시 한번 터 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라피스 폐하께서 오셨다! 이, 이건 어전 전투야!" “주, 죽기 전에 폐하를 직접 뵙게 되다니! 게다가 같은 전쟁터에서!” “싸우자! 이 싸움을 이긴다!” 노병들마저 눈물을 글썽였고 거대한 전의의 고함소리가 전쟁터를 뒤덮으 며 세라피스는 그 속을 가르며 뛰어가기 시작했고 이종족들마저 자신들과 의 약속을 지킨 세라피스를 향해 경애를 표하며 사기를 드높였다. 계속 공 중에서 내려보고 있던 세르난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호오. 인간들에겐 저런 면이 있었군. 질투나네....... ” 한편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천사들에게 밀려나고 있는 병사들 앞에 거대 한 검을 들고 나타난 자는 바로 마르켈라이쥬 혼이었다. 자신들보다 머리 두개 정도는 더 커 보이는 엄청난 거한의 등장에 수군거리던 병사들은 날 아오는 수십의 천사들에게 걸어가고 있는 마르켈라이쥬를 멍한 얼굴로 바 라보았다. “요사스러운 것들이야.” 천사들의 울음소리도 마르켈라이쥬의 강맹한 기력을 꺾지는 못했다. 천사 들을 향해 검을 들어올린 마르켈라이쥬는 공기를 찢어버리며 검을 휘둘렀 고 그와 함께 땅이 일어나는 듯이 파헤쳐지며 눈앞의 천사들 모두가 검기 의 폭풍에 말려버린 듯이 찢겨지고 구겨져 소멸해 버렸다. 단 한번의 검격 으로 한 떼의 천사들을 일소시켜 버린 것이다. “누, 누구야 저 자는!” 마르켈라이쥬의 검이 부른 풍압(風壓)에 밀려 쓰러진 병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일어서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전 북해 기사단의 프리셉터를 바라보았다. 부관 가이브러쉬는 마르켈라이쥬 옆에 서며 이런 전쟁터가 주는 극도의 긴장감이 도리어 짜릿한지 고향이라도 온 듯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강하시군요. 이런 막강한 적들 앞에 서니까 정말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난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마르켈라이쥬는 다시 눈앞에 가득 차기 시작한 천사들을 향해 걸어가며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4. “빨리 끝내줄 수 있겠니?” 반백의 머리칼에 외안을 한 검객 그랜사이어는 양수검에 필적하는 자신의 두 자루 검에 부여마법을 걸고 있는 자신들의 세 씰을 향해 말했고 잠시 후에 그 중 하나가 그랜사이어를 올려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검은 화로 속에서 달아오른 듯이 붉은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그랜사이어는 두 자루의 검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 “피해 있어라. 여긴 먼지가 많은 곳이야. 돌아와서 목욕이라도 시켜줄 테니까. 아참 그리고....... 내가 죽으면 좋은 주인을 만나라. 알았지?” 그랜사이어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말하듯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올 려보는 작은 세 소녀에게 부드럽게 공명하며 몸을 돌렸고 십 여분 만에 백 여 명의 천사들을 베어버렸다. 하지만 상처하나 없이 천사들을 몰아붙이던 그의 앞에 나타난 자는 바로 세르난이었다. 계속 관망하던 세르난이었지만 지루해서였을까? 질투가 나서였을까, 그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응? 이상하게 생긴 꼬마로군.” “당신 참 강하네요. 죽여서 미안해요.” “이 놈!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불쾌한 듯이 그랜사이어가 외치며 세르난을 향해 거의 동시에 두 번의 검 격을 내리쳤지만 놀랍게도 세르난은 뒷짐을 진 채로 그의 공격을 손쉽게 피한 것이었다.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랜사이어는 순간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넌 다른 놈들과는 다르군.” “헤헤. 그래도 말이죠 이래보여도 궁룡이니까요.” “흥! 나도 쉽게 죽진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막기 힘들 그랜사이어의 막강한 검술이 불길을 뿌리며 양쪽에서 세르난을 덮쳤지만 세르난은 가볍게 두 손으로 그의 검을 쥐며 공격을 봉쇄했다. 이쯤이면 상식이고 뭐고 없는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그 랜사이어가 잡혀 있는 자신의 검을 빼려고 했지만 세르난의 작은 손이 잡 고 있는 두 검은 뿌리를 박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세르난이 씨익 웃으 며 말했다. “씰들에게 작별 인사는 하셨겠죠?” “.......!” 그랜사이어의 눈빛이 굳어버렸다. 검객으로서 항상 죽는 것을 기다려왔고 이런 강한 자에게 죽는다는 것에 후회는 없지만 인간의 검술이 통하지 않 는 상위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예전 자신의 눈을 빼앗 은 오펜바하의 모습이 떠오르며 눈을 감았다. ‘세라피스 녀석에게 미안하군. 이 늙은 몸이 힘이 되어주는 것도 여기까 지다.’ “이런. 살려달라고 빌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멋진 모습입니다. 줄 리탄 님과 인간을 죽이기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테싱님의 명령이라서 말이 죠.” “줄리탄이라고 했나?” 그랜사이어가 놀란 얼굴로 눈을 뜨며 세르난을 바라보았다. 그랜사이어를 죽이려던 세르난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얼레? 당신도 줄리탄 님을 알아요? 유명한 사람이었군요.” “줄리탄은 지금 어딨나! 그 녀석, 살아 있는 거냐!” “글쎄요....... 그걸 살아 있다고 말해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확실히 숨은 쉬고 있어요.” “무, 무슨 의미냐! 대체 어떻게 된거야!” 모든 것을 접은 줄 알았던 그랜사이어의 다급한 물음에 세르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인한 것일수록 한번 부러지면 다시 붙이기 힘든 거니까요. 아마도 줄 리탄 님이 있는 곳은....... 절망 속이 아닐까요?” “뭐, 뭐라고?” “말이 길어졌네요. 그럼 상대할 사람도 많으니까 이만 작별하죠?” 세르난의 몸이 하얗게 빛나며 그랜사이어를 향해 즉사의 빛을 쪼이려 했 다. 그랜사이어는 눈이 하얗게 멀어버리는 모습에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 만 그 순간 느껴지는 강대한 살기에 세르난은 황급히 뿜으려던 빛을 머금 으며 뒤로 물러섰다. ‘뭐, 뭐지. 이 기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던 세르난의 몸을 무형의 살기가 덮치는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용의 아가리 속에 갇혀버린 기분. 자신도 궁룡의 일 족이긴 하지만 정말이지 머리가 깨져 버릴 듯한 위압감을 참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테싱을 제외하고 기력만으로 자신을 이토록 위압할 수 있는 존 재는 흔치 않았다. 그는 분명히...... ‘설마 오펜바하!’ 세르난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떤 마법이라 정의내릴 수조차 없는 광대한 기운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틀기 시작했고 그 것은 마치 하늘에 시퍼런 광염(狂炎)의 해일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재앙 과 같은 그 힘은 수십만의 천사들을 주살(誅殺)시키며 토막 내어 버렸다. 그리고 밤의 하늘은 폭발하듯이 소멸되어 가는 천사들의 시체로 눈을 태워 버릴 듯한 백린(白燐)이 불타올랐다. 병사들 모조리 싸움을 멈추며 넋을 잃고 신의 손길과 같은 그 광경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이런. 테싱 놈은 오지 않았나 보군.” 궁룡의 수장 테싱이 모습을 보이는 것을 전능신의 강림에 비유할 수 있다 면 오펜바하가 나타난 것은 여타 종족들의 눈에는 아마도 악마들의 우두머 리가 지상으로 올라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악마’가 사 람들을 도와줬다는 것이지만. 전투를 일시에 끝내버린 언어도단(言語道斷) 같은 마력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느릿느릿 세르난 앞에 모습 을 드러낸 오펜바하의 곱상한 얼굴에는 소년의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싸 움을 멈춘 사람들 모두 난데없는 오펜바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 지만 그랜사이어는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오펜바하를 기억해 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단번에 자신의 눈을 빼앗아 간 난신(亂神 ) 오펜바하를. “오, 오펜바하 제일황제.” “호오. 아직까지 날 황제라고 불러주는 녀석이 있었네.” 오펜바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세르난에게 다가갔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 서는 세르난이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왜 인간들을 도와주는 겁니까. 당신의 목표는 테싱님을 죽이는 것이 아 니었습니까?” “아아 그게 말이지......” 오펜바하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투덜거렸다. 일전 줄리 탄이 자신의 친구들을 지켜달라던 부탁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 주 오래 전 그와의 관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요소가 그의 심경을 바꿨기 때문일까. 오펜바하는 진심 같은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 귀 찮다는 듯이 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죄다 그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싫어 죽겠어!” 갑자기 터져버린 오펜바하의 짜증에 곁에 있던 미쉘이 난감한 미소를 보 였다. 그래도 예전보다 조금은 마음을 연 듯한 테이머의 모습이 좋았다. 오펜바하가 어린 늑대 같은 노란 눈동자로 세르난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내 부하들과 같이 왔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저는 후퇴해도 좋다는 명령은 받지 않았습니다.” 세르난은 오펜바하가 인간을 지켜주기로 결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 실 브륜힐트가 없는 지룡들이라면 십여명 정도라도 혼자서 싸워볼 수 있었 지만 상대가 수장 오펜바하라면 저항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세르난은 물러서지 않았고 잠시 그를 지켜보던 오펜바하가 나직하게 말했다. “잘 들어라. 세르난. 너는 오늘 이곳에서 내게 죽는다.” 마치 단정처럼 내린 오펜바하의 목소리에 세르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마를 덮는 세르난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정지된 전쟁터의 중앙에서 오펜바하는 유 언을 받아내려는 것처럼 너무도 차분히 물었다. “넌 테싱의 명령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수없는 시간을 살아 왔어. 가족도 친구도 아무런 생존의 의미도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뿐이겠 지. 하지만 지금 너의 기분은 다를 거다.” 묘하게 고귀해 보이는 오펜바하의 눈빛이 세르난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 했다. “내가 들어주마. 이 순간 너의 생각을.” “저는 지금......” 세르난이 떨리는 입술을 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와서 지룡의 수장에 게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는 자신 의 공허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웠다. 세르난은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짧게 줄이며 희미한 미소로 이 죽음의 순간을 표현했다. “......가슴이 뛰고 있는 것 같아요.” “P.I.E.R.C.E." 세르난은 저항하지 않았다. 마력의 송곳니가 세르난의 마음을 꿰뚫었고 마치 영혼을 물려간 듯 그의 육체가 살짝 경련을 일으키며 - 공중에 떠 있 던 세르난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펜바하 님.” “아아. 죽인 건 아니야.” 부드러워 보이는 앳된 볼과 살짝 감겨 있는 두 눈, 작은 숨을 내쉬며 바 닥에 쓰러져 있는 궁룡 세르난의 모습은 왠지 아주 길고 긴 잠 속에 빠져 버린 소년처럼 보였다. 너무 오랫동안 소년으로 있었다. 한번도 잠들지도 못한 채로. “어쩌면 수백 년 정도 지난 뒤에는 다시 눈을 뜰지도 모르지.” “.......”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있을 때 얘기지만.” 마지막으로 잠들어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오펜바하는 자 신 역시 지쳐버린 듯 씁쓸한 얼굴로 키득 웃으며 별들이 쏟아질 듯한 하늘 을 바라보았다. 슬슬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5.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주고자 했던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 그러나 그 노력 이 결국에는 상대를 가장 아프게 만들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만큼 자신 의 마음을 산산이 부셔버리는 것이 또 있을까. 가랑은 죽어가고 있었다. “흐윽.” 마치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엷은 신음소리를 내며 감은 눈을 떨고 있는 가랑은 테싱의 품속에 있었다. 잔인한 충격 속에서 무너져 내린 줄리 탄을 시링크스가 감싸며 사라져 버린 이후, 인간들에게 세르난을 보낸 테 싱은 가랑을 품고 부유성(浮游城)으로 돌아가 죽어가는 그녀의 곁에 있었 다. “.......” 혼미한 정신 속에서 테싱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가랑의 입가에서 괴로운 숨소리가 세어 나오고 있었다. 피에 젖은 환부 위로 땀에 젖은 뭉클한 가 슴. 새하얀 뺨을 타고 어깨로 떨어지고 있는 식은 땀방울이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이 소멸하길 바라고 있었던가.’ 테싱은 가랑을 바라보며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해서 상념했다. 자신도 가랑 도 이 세상마저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소멸의 상태가 되어 버리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 왜 지금 소멸되어가는 가랑의 이런 모습이 두려운 것 일까. 어쩌면 단지 더 이상 고독 속에서 번뇌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공 허의 도피처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뿐일까, 테싱은 그런 모슨 속에서 자신 의 마음 어디 한 구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인간의 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아무 것도 갖지 않으려는 것도 모든 걸 다 가지려는 것과 똑같은 탐욕 일 거야.’ 지구가 떠올랐다. 일그러진 영혼들이 끝없이 엉켜 있던 그 마지막 모습이 기억났고 지금과 변한 것 하나 없는 그때 가랑의 모습도, 그 밝은 목소리 도 기억의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되요. 괜찮아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 는 거잖아요? 그걸로 충분한 거잖아요 오빠. “미안하다. 내 동생.” 여동생의 손을 끌고 집을 떠나 너무도 먼 곳까지 와버렸다. 이제는 돌아 갈 방법도 찾지 못한 채로 누구도 없는 숲 속에서 영원히 잠들기로 결심했 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는 괴로운 듯 눈을 감으며 죽 어가는 가랑을 말없이 껴안았다. 그리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절대신의 두려움이 짧은 주문이 되어 울리기 시작했다. 눈물 없는 울음소리처럼. “N.E.C.R.O.P.H.O.B.I.A." -Blind Talk 흐음. 지금 제 옆에는...... 담배꽁초가 가득 쌓인 재떨이, 옆에는 빈 커 피캔(항상 애용하는 테이스터스초이스)이 있고 그 옆에는 지포 라이터, 또 그 옆에는 두통약이 차 있는 약병, 그 옆에는 일 때문에 가져온 만화책들 과 원고샘플들, 그 옆에는 몇년 째 손대지 못하고 있는 에반게리온 1000피 스 퍼즐, 그 옆에는 알텍렌싱 스피커, 접혀져 있는 건담 포스터...... 그 리고 그 옆에는 창고에서 꺼낸 세가새턴으로 여신전생 소울해커즈를 즐기 고 있는 kiyu군이 앉아 있군요.-_- 마감 중 입니다. 방이 정말 엉망이네요. 마감이 끝나기 전에는 방을 치우지 않기 때문에...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잡지들과 옷가지들,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사실 지금 쓰는 것들도 거의 초고의 상태인데 일단 너무 연재가 지연되고 있어서 올리기는 하지만...... 출판본에서는 내용이 좀 바뀌지 않을까요. 게다가 정신없는 상태라서 오탈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냥 올리는 터라 죄송스럽습니다. 후우. 이래저래 피곤한 1월이로군요. 년초라서 그런지 여기 저기 일이 참 많습니다. 아참 이번 편 소제목은 어디서 따온 것인지 아시겠죠? 그냥 참 멋진 제목이라서 붙여봤습니다만.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6 Aesthetic memory of SEAL 1. 세르난이 잠들고 천사들이 서대륙 이실라트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 이후 에도 줄리탄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르난에 남겼던 말에 비춰볼 때 사람들 은 아직 그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베오폴트로 돌아올 것 같았던 그를 봤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아무도 그가 티브 사막을 지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막으로 가자.” 헤스팔콘을 지나는 그 긴 시간 동안 목소리를 잃은 듯 입을 다문 줄리탄 이 시링크스에게 던진 한 마디는 그것뿐이었다. 더 이상 줄리탄의 따뜻한 공명은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줄리탄을 끌고 가던 시링크스가 자신 의 주인이 사라진 듯한 섬뜩한 기분에 뒤따라오는 줄리탄을 돌아볼 때마다 빛을 잃은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추락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금이 간 인피타르를 미련처럼 들고 있는 줄리탄은 안타까울 정도로 쇠약 해진 모습으로 말없이 발을 끌며 시링크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멈춰 선 시링크스가 이틀 만에 입을 열었다. “주인님. 배 안고파? 지금 목마르지 않아?” 하지만 물기 없는 눈동자가 시링크스를 올려볼 뿐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 계속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던 시링크스가 몸을 떨며 소리치고 말았다. “제길! 말을 하란 말이야!! 화가 나고 서러우면 울기라도 하란 말이야! 항상 그래왔잖아! 우는 방법 까지 잊어버린 거야?!” 하지만 시링크스의 미성의 목소리는 우우웅 거리며 울리는 사막의 바람 속에 섞여 흩어졌고 줄리탄은 ‘상관하지마!’라는 어리광조차 부리지 못 했다.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말라니까.’라는 허세마저 부릴 재주가 없 는 너무도 순진한 사람이다. 상처주는 것에도 상처받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한 주제에 물키벨의 목숨까지 받으며 오직 하나만 바라보다가 마음 끝까 지 베였다. 혼란에 빠질 여지조차 남지 않은 지금 흐릿한 눈으로 시링크스 를 바라보던 줄리탄의 눈이 감기며 스스르 쓰러졌다. “주, 주인님!” 정신을 잃은 줄리탄을 급히 부축한 시링크스가 그를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사실 겨우 요리사의 티를 벗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10대일 뿐. 갈기갈기 찢어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시링크스가 구해온 음식들로 겨우 겨우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니 정신의 끈이 끊어져 버린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내려오는 머리칼을 쓸어 올린 시링크스는 줄리탄을 업고 한참을 더 걸어갔다. 방향을 잃을 것 같은 똑같은 황무지와 고목들과 모래언덕만 이 시링크스의 옆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마을?” 따가운 모래바람과 뜨겁게 달궈진 열사의 자갈사막 위를 걸어가던 시링크 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곳은 열사의 신이 뿜는 입김에 하루에도 수 어 번 지형이 바뀌는 곳이다. 게다가 대륙 전체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든 사막, 그 한가운데 작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아시스 도 아닌 곳에 터를 잡고 있는 마을의 모습은 분명 신기루가 아니었다. 시 링크스는 일단 그곳으로 향했다. 2. 마치 그 마을은 영화의 세트장과도 같았다. 시링크스가 보기에도 토담집 들과 목조건물들로 이뤄진 그 마을의 모습은 믿을 수 없이 괴이했던 것이 다.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건만 폐촌(廢村)이라고 하기에는 마치 어제 만 든 것처럼 시간의 떼를 타지 않은 모습. 왠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곳 같은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줄리탄을 빨리 눕히고 싶었던 시링크스는 여관 으로 보이는 이층 목조 건물로 들어갔다. 사막의 지평선 위에 걸쳐있는 울 먹이는 태양의 잔재, 마을이 진홍색 빛의 바다 속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확실히 시링크스와 줄리탄은 이 마을만큼이나 이상한 일행이었다. 사막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은 백발의 남자를 업고 있는 곱상한 청년이 다급한 표정으로 여관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다른 여관주인이라면 몹시 의심스러 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관 1층 주방에서 앞치마 를 두른 채로 접시를 닦고 있던 주인(정도로 보이는 자)의 모습은 그들보 다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이런 엉뚱한 마을에 어울리는 여관주인답 게 조금도 여관주인처럼 생기지 않은 훤칠한 외모의 30대 초반 쯤으로 보 이는 사내인데다가 시링크스 같은 경우를 빼면 손님들이 있을 리가 없는 이런 적막한 여관에서 혼자 태연하게 접시를 닦고 있다니. 게다가 아무렇 지도 않게 시링크스를 향해 인사까지 할 정도니까 시링크스는 멍한 기분에 슬며시 웃고 있는 그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식사하러 오신 거라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만.” “아니, 저희는 일단 쉴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아아 예. 그런 것이라면 이층에 올라가셔서 아무 방이나 쓰시면 됩니다 .”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저희는 돈이......”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너무도 일상적인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들였다. 그리고 그 주인은 접시를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어차피 이 마을은 당신들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요.” “......”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시링크스였지만 당장은 정중히 고맙다 는 인사를 하며 줄리탄을 업은 채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일단 자신의 주인 을 눕힌 뒤에 조사해 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3. 예상대로 객실조차 너무도 깨끗했다. 반듯하게 놓여 있는 침대 위의 시트 를 비롯해서 방금 따 놓은 듯이 신선한 테이블 위의 과일들. 한번도 심지 에 불을 붙인 적이 없는 듯한 촛불들. 바닥에는 모래 먼지 하나 없었다. 이 정도라면 하루에도 몇 차례라도 관리해야 할 것이다. 누구도 들리지 않 을 객실들을 말이다. 줄리탄을 침대에 눕힌 뒤에 웃옷을 벗기자 아직 아물 지 않은 생채기들이 어지럽게 그어진 미성숙의 몸이 드러났다. 다행이도 큰 출혈은 없었지만 마치 세상의 학대를 받은 듯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마 음은 더욱 엉망이겠지. “누구냣!” 복잡한 심경으로 앉아있던 시링크스는 문고리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 께 날카로운 눈초리를 품으며 반사적으로 몸을 튕겼다. “아, 죄송합니다. 이것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요.” “......” 문을 열고 들어온 주인의 손에는 항아리에 담긴 따뜻한 물과 수건이 들려 있었고 살기를 머금은 시링크스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마력이 뭉쳐 있는 손바닥을 그의 얼굴 바로 앞까지 뻗은 상태였다. 신경이 예민해 진 탓이다. 시링크스는 천천히 마력을 풀며 손을 내렸다.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니. 감사합니다.” 시링크스는 좀 머쓱한 얼굴로 인사하며 항아리와 수건을 건네받았다. 이 상한 주인이다. 이 정도 마을은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마력이 눈앞에서 위협하고 있는데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강력한 기운을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다 시 문을 닫은 시링크스는 당장은 줄리탄을 간호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따가워도 조금만 참고 있어.” 티 하나 없는 깨끗한 수건을 미지근한 물에 담근 시링크스는 불규칙한 숨 소리만이 들려오는 자신의 주인의 얼굴과 몸을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이 줄리탄의 어깨와 목덜미에 물수건이 지날 때마다 하얀 수건에 붉은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이 작은 몸으로 그는 대체 뭘 하고자 했던 것일까 . 그냥 자신처럼 정해진 명령을 받고 정해진 일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상 처 받는 일 없이 지내도 상관없을 텐데 어쩌서 이런 모습이 될 때까지 스 스로를 이끌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은 씰처럼 영원히 살지 못하 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기 때 문에 소중함, 아쉬움, 기쁨, 슬픔 같은 감정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시링크스는 가슴 한 편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카넬리안도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일까.’ 무의식적으로 팔을 움직이며 시링크스는 처음으로 예전에 없던 생각이 들 었다. 지금 나는 왜 이곳에서 있으며 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 한 것에 대한 의문. 씰답지 않은 의문이었다. 이제 줄리탄에겐 아무런 명 령조차 없다. 어쩌면 앞으로는 다시는 명령을 내릴 힘조차 없을지도 모른 다. 강한 자에게 반응해서 그와 계약한 뒤에 그의 명령을 따라주다가 그가 죽으면 받았던 이름을 버리고 다시 잠들어 버리면 그만인 자신이 왜 이 눈 앞의 어리고 약해빠진 줄리탄이라는 인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까. ‘왜 나는 일부러 상처 받으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지금 죽는 편이 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링크스가 자기도 모르게 줄리탄의 목에 가져다 댄 손가락에는 칼날을 닮은 자색 마력이 감겨 있었다. 살짝만 그어도 자신의 주인을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곧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접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라지지 않은 마력이 주먹 속에서 요동치며 빨간 핏줄기가 새하 얀 팔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죽겠지. 우리와는 다르니까.” 자신은 무한히 살 수 있지만 줄리탄과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분명히 유한 하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실감하며 카넬리안이 느꼈던 감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들과는 달리 인간들에게는 끝이 있다는 것이 있으며 또 그것 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카넬리안이 줄리탄과 있으 면서 무엇에 행복해하고 또 무엇에 아파했는지 조금씩 느껴졌다. “잠깐 나갔다 올게.” 들을 리가 없는 줄리탄을 향해 조그맣게 말한 시링크스는 뜨거운 물이 가 득 찬 듯한 마음을 움켜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넬리안이 했던 말이 또 다시 기억났다. ‘가장 골치 아픈 게 뭘 줄 알아? 씰들은 테이머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줘 야 하지만 난 그를 위해서는 죽을 수가 없다는 거야. 절대로 내가 죽는 것 을 바라지 않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명령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편한 것 중 에 하나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건데 그 사람은 그걸 허락하질 않아. 씰 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지키기 힘든 명령인 셈이지. 씰에게 그런 말도 안되는 걸 바라다니 정말이지 피곤한 주인이라니까. 안 그래 시링크스?’ 그러면서도 그녀는 카넬리안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 었다. 마치 평생 동안 버리지 않을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도 되는 것처 럼. 씰에게 그런 건 없는데도 말이다. 문가로 걸어가는 시링크스의 머리 속에 불현 듯 예전에 시집에서 읽었던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는 진공의 낙원 속을 날아오르는 새.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시링크스는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줄리탄과 함께 있었던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Blind Talk 제가 사실 해오던 일이 일인지라 상당히 액션을 좋아하고 확실한 것을 좋 아하고 생각보다는 행동, 감정보다는 표현을 즐겼지만(물론 쓰는 내용들이 그랬다는 거지만) 드래곤 레이디를 쓰면서 꽤나 탐미적인 성향에 길들여 지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부정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흐음. 유미주의, 탐미주의도 본래 좋아합니다.(에드가 앨런 포우 덕분이랄 까.-_-) 악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하고 광기어리고 강박적이고 기형적이 고 하여튼 abnormal한 것들을 통해 느껴지는 삐뚤어진 탐미에도 상당히 감 동하는 편이긴 하지만(물론 이것도 쓰는 글들이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무 언가 다른것을 느껴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는... 말하자면 똑같은 빙어를 잡아 먹는데 이번에는 날로 먹어봤다고나 할까요. 뭐 문제는 어쨌 든 미숙한 거니까 스스로도 운전하는데 불안하다는 거지만. 아무튼 드래곤 레이디에서 할 만큼 풀어보고 다음 작품에선(언제 연재 할 지 모르지만-_-) 또 다른 걸 해보면 되니까... 마음 편하게 써나가려고 합 니다. 그건 그렇고... 시링크스는 본래 설정상 여자 였습니다. 설정집에도(물론 제멋대로 갈겨 쓴 것이니 비공개) '시링크스 => 차가운 외모의 여성'으로 메모가 되어 있었건만... 그렇게 되면 줄리탄-시링크스-카넬리안의 연애 삼각구도와 동시에 줄리탄-카넬리안(혹은 가랑)-테싱의 역삼각구도와 엉켜 버리므로 TV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본격 연애물로 갈 생각이 없었던 저 로서는 (게다가 그러면 분량이 왕창 길어짐) 방황하던 중 '새로운 씰이 등 장하면 남자로 해주세요.'라는 메일을 받고 괜찮은 생각이다 싶어서 수정 한 것입죠 네. 뭐... 그런 겁니다. 그냥 가끔 '에이 여자로 할걸...'이라 는 생각도 들어서 이제 시링크스의 출연이 끝나가는 시점을 즈음하여 잡담 을 늘어놔 본 겁니다. 음. 최근에는 새로운 소설 구상 차(죄송스럽게도 또 환타지 입니다!) 기사 단에 대한 자료들을 뒤져 보고 있는데 일단은 가장 유명하고 기본적인 중 세 십자군 3대 성기사단에 대해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 튜튼기 사단과 몰타 호스피탈레기사단, 신전기사수도회 정도인데... 확실히 이것 에 대한 자료들은 책으로도 많은 편이고 이미 어느 정도 소장하고도 있었 지만 - 역시 인터넷이 좋더군요. 정말이지 새삼 감탄하고 있는 것이 인터 넷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정보량입니다. 없는 것은 없다. 단지 찾지 못할 뿐이다, 라는 웹서핑 명언이 생각날 만큼 너무 수월하게 이런 저런 자료들 을 찾아볼 수 있으니... 정말 편하다, 라는 생각을 연신하게 됩니다. 10년전만 해도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대형서점들과 도서관들을 뛰어다녀야 했는데(물론 지금도 자료에 따라서는 도서관을 가야 하지만) 확실히 지금 은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서도 대부분의 원하는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 습니다. 즉 찾고자하는 의지만 있으면 아주 손쉽고 빠른 시간 내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이지 정보의 홍수! 같은 정보 내에서도 그 수준 을 골라가며 찾아봐도 될 정도입니다. 아니 이런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그냥 새삼 기뻐서 입니다. 뭐 이 글도 통신 상에 올리는 순간 엄 청난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볼 기회가 생긴다는 것도 이런 정보의 범람에 일조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 글은 그리 영양가 있는 정보는 못되지만. 역사든 시간이든 추억이든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요. 그게 한편 무섭 기도 합니다만... 아 그리고... 이번 편도 다시 읽어보지 못하고 올립니다. 즉 오탈자가 잔 뜩 발견될 수 있습니다.(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이미 발견하셨겠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제멋대로 프로파일>> Enrty#? 헤르만 오펜바하 / Hermann Offenbach 1.아주 오랜만에 시작합니다! 복귀 첫타자로 지명되신 기분이 어떠세요? 미쉘 : 주인님은 바쁘신 관계로 제가 대신 대답하겠습니다. 주인님께서 이런 것 귀찮다고 하십니다. ...어쭈. 2.황제 자리에서 밀려난 이후 끝없는 방랑의 연속인데 잘난 오펜바하씨께 서 그 호사스런 생활을 접고 어떻게 비참한 은둔생활을 견디고 계신지 궁 금하네요. 미쉘 : 주인님은 제가 해드린 음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드십니다. 제가 가 끔 조리에 실패해서 태워버리거나 너무 짜거나 퉁퉁 불어버릴 때도 있지만 주인님은 남기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옷이 더러워지는 건 참지 못하시 기 때문에 그 분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하루에도 몇번씩 찾아다닙니다. 그렇다. 미쉘은 요리를 못한다. 아니 아니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스러 울 정도로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해도 힘들 정도로) 망쳐버릴 때가 대부 분이다.(리이보다 못한다고 하면 말 다한 거다.) 그래도 미쉘이 만든 것만 먹는 오펜바하의 정신구조가 궁금할 정도다. 그런 무서운 것을 자꾸 먹으 니까 그렇게 신경질적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펜바하의 코디네이터 역시 미쉘이다. 황궁에 있을 때도 다른 시종들은 심장이 떨려서 까다로운 오펜바하의 옷을 준비할 수 없었다. 3.다른 용들과의 과거는, 그리고 줄리탄과의 과거는 뭐였죠? 왜 그렇게 변 덕이 죽 끓듯 하는 겁니까. 미쉘 :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럼 그 양반이 직접 와서 말하면 되잖아요! 미쉘 : 싫다고 하십니다. ...쯧 4.미쉘은 본래 해룡의 수장 물키벨의 씰이었는데 강제로 오펜바하가 자신 에게 이적하지 않았습니까? 미쉘 : 저는 이제는 괜찮습니다. 질문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놔둬도 될 미쉘을 왜 물키벨로부 터 빼앗은 건가요? 미쉘이 없어도 오펜바하는 충분히 강한데요? 미쉘 : 그건 아마도... 시링크스가 잠든 이후 쓸쓸해서 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쓸쓸함을 달래주고 있나요? 미쉘 : 여전히 쓸쓸해 하십니다. ...까다로운 남자와 재미없는 여자로군. 5.테싱과 줄리탄이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왜 오펜바하는 줄리탄을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미쉘 : 자신은 줄리탄의 영혼을 구해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 하고 있습니다. 그냥 귀찮아서가... 아니었을까. 6.물키벨과는 의외로 죽이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만 본래 친한 사이 아니 었나요? :아냐! 내가 왜 그 푼수 같은 여자와! 어? 이제와 나왔군요. 미쉘 :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우씨. 7.오펜바하의 마법은 모두 단일의 영어 단어 같은 것으로 이뤄져 있던데요 , 한번도 같은 마법을 쓴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사실 마법 자체를 많이 쓴 것도 아니지만.) 어떤 체계로 이뤄진 마법이길래 그런가요? 미쉘 : 저는 그 분의 강대한 마력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그 건... 주인님께서 기분 내키는데로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허탈하구만. 그럼 자신의 어휘력이 10만단어라면 10만개의 마법이 있다 는 거냐 대체. 8.오펜바하는 술을 잘 마십니까? 미쉘 : 그 분은 술에 약합니다. 얼마나 약하냐면 가끔 도시에 나갔다가 술 냄새를 맡으면 '저 양조장을 불태워 버려라.'라는 칙령을 내리시니까요. 그건 술을 잘 마시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9.오펜바하도 패한 적이 있습니까? 테싱과 정면으로 싸운 적도 없었던 것 같고 그 외의 존재에게 패하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요? 미쉘 : 저와 장기를 두면 항상 패합니다.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건가. 10.마지막 질문입니다. 노래 잘 부르세요? 미쉘 : 저요? 아 뭐, 아무나. 당신이나 그 귀하신 오펜바하씨나. 미쉘 : 아주 오래 전에 그 분께서 제 노래를 듣고 싶다고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한번 부른 이후 더 이상 그런 명령 들은 적이 없습 니다. ...... 미쉘 : 그리고 오펜바하님은 콧노래를 즐기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시 원찮습니다. 차, 참 솔직한 씰이시군요.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7 The Lonliest Of Creatures In The Universe 1. 긴 속눈썹이 내려앉은 붉은 눈을 천천히 뜨는 가랑의 흐릿한 시선에 들어 온 것은 고개 숙인 테싱의 옆모습이었다. 줄리탄과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 았다. 테싱은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던 인피타르의 독도 몸에서 뽑혀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정신을 잃 었을 때 테싱은 죽어가는 그녀의 영혼을 잡아 다시 지상으로 끌어 올린 것 이리라. 땀에 젖은 가랑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날개를 접은 채로 곁에 앉아 있는 테싱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가랑의 목소리는 마치 새처럼 가늘고 메말라 있었다. 표정 없는 테싱의 흑빛 눈동자는 아무 것도 없는 바닥 어딘가로 향한 채로 아무 말도 없었다 . 이제 와서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말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겠지. 그건 고해도 동정도 연민도 위로도 될 자격이 없으리라. 속이고 살아오면서 지켜주고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져도 톡 소 리조차 들리지 않을 듯한 비현실적인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테싱이 고개 를 들며 말했다. “네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마지막?” “너와의 계약을 파기한다.” 테싱은 처연(凄然)히 닫혀있던 새장의 문을 열었고 가랑은 그와 이어진 인연의 사슬이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수만년 이상을 이어졌던 그 사슬 은 사실은 너무도 얇고 약한 것이었다. 초췌해진 그의 모습은 마치 죽어가 는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자신이 거의 모든 마력을 소진했기 때문 만은 아니리라. “......테싱님.” “떠나라.” 그리고 테싱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괴로운 시 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숙여 마지막 예를 올렸다. 카넬리안이 너무 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의 지배자시여.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입니다.” 비누방울 같은 것이다. 잔뜩 만들어 놓아도 잠시 다른 곳을 보는 사이 모 두 다 사라져 버린다. 하긴, 세상 어떤 것이 안 그럴까. 이 세상은 처음부 터 유한에 어울리게 창조되어 있었는데 무한을 바랬던 테싱에게 세상은 아 무 것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수만년을 넘는 긴 시간을 끝내며 카넬리안은 오늘 테싱을 떠났다. 2. 줄리탄은 상의가 벗겨진 채로 자리에서 눈을 떴다. 세심하게 소독된 자신 의 상처들과 그리고 카넬리안에게 찔렸던 곳의 깊은 상흔이 보였다. “......” 촛불마저 말라 있는 이 방에는 온통 달빛으로 가득했다. 모두 다 잊어버 린 것처럼 이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테싱을 막아 선 그녀를 찔렀 을 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손의 감촉만이 악령처럼 달라붙어 목을 조여 왔 다. 불어오는 모래 바람들이 문을 열어달라는 듯 창문을 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고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창문을 관통하며 들어와선 가슴 속에 스 며들어 - 줄리탄은 인피타르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이 기억이 나질 않아.” 줄리탄은 괴로움을 뱉어내고 또 뱉어냈지만 금 새 입 속에는 새로운 고통 이 가득 차 올라 목을 메어왔다. 구해주긴 커녕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녀 를 죽였다는 끔찍한 죄책감이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상상하 는 것조차 차단시키고 있었다. 항상 숨쉬듯이 그녀를 추억했는데 이제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 스르르릉 금이 간 인피타르가 천천히 뽑히고 있었고 그와 함께 금이 간 인피타르의 검신 사이로 시린 빛무리가 눈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체화된 생명이 무거운 안개처럼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깔리고 있었다. ‘나에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나는 그 권리를 포기 하고 싶어. 미안해. 하지만 괴로움밖에 남지 않는 사랑이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 미 안해 카넬리안. 지켜주지 못해서, 감싸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 달빛에 창백하게 빛나는 검의 끝이 상처투성이 줄리탄의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중했던 목숨의 무게가 제로가 되어 버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 느낄 수 없는 극단적인 절망감만이 줄리탄의 남색의 눈동자 속에 들어와 앉았다. 그 순간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죽을 거면 그전에 내 말을 듣고 죽어도 늦지 않을 거야. 줄리탄 군?” 3. ‘정말 이상한 곳이야. 함정일까. 하지만 누가?’ 시링크스는 자신의 불안한 의문에 답을 내지 못하며 밤이 내려온 사막의 마을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차라리 악의에 가득 찬 대마법사의 함정이라 면 격한 마력의 기운이라도 느껴져야 할 텐데 마을은 단지 현실과 똑같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사거리의 중앙에는 작은 분수가 있었고 사자모 양의 그 분수상에서 투명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 도 없다. 어느 덧 마을 전체의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인간의 흔 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은...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시링크스는 쭉 뻗어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착시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똑 같은 모양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같은 사람이 동시에 만들었다고 가정 해도 조금씩은 달라야 하는데 마치 거대한 두 거울 사이에 놓여진 것처럼 구분할 수 없이 똑같은 집들이 마을 끝까지 이어져 있던 것이었다. 시링크 스는 그 집중에 하나로 걸어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올 것처럼 불이 붙어 있는 화로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은 깨끗한 나 무 테이블과 의자들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눈에 들어왔다. 시링크스는 창 문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동안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이상한 것이 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상한 것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단지 누군가의 악취미인가. 말도 안돼.’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걸어가던 시링크스는 똑 같이 생긴 다음 집을 지나치다가 무언가를 흘낏 바라보며 놀란 눈으로 고 개를 돌렸다. “서, 설마!” 다음 집의 창문에도 자신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그 다음 집에도 또 다음 집에도. 이런 건 마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설 마 자신이 지금 어떤 강대한 마법에 현혹되어 있는 것일까. 긴장된 표정의 시링크스가 떨리는 손으로 집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그리고 그와 함께 마을의 수많은 집들의 문이 똑같은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이었다. 문이 열리는 마찰음이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주인님!’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험을 느낀 시링크스가 몸을 돌려 여 관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그는 곳 창백해진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이어진 집들이 이어져 있었 던 것이다. 4, “그 동안 잘 있었나. 줄리탄 군.” 어느 샌가 방에 들어와 싱긋 웃는 얼굴로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자는 바 로 예의 여관 주인이었다.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지만 사막의 여관 을 경영한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 티끌 하나 없는 아름다운 미남자. 줄리 탄이 그를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테시오스 님.” “어, 얼레? 단번에 맞추찮아? 하긴 이런 짓 할 놈이 나 말고 또 있을까. ” 테시오스가 난감하게 웃으며 자신의 옷을 훑어봤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건만 그가 자신에게 인피타르를 건네주었던 테시오스라는 사실을 줄리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를 말하는데 외향 따위는 전혀 중 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의 잡초가 되어 지금까지 그를 지켜봤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테시오스가 그에게 걸어와서 의자에 앉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고개를 숙인 채 괴로움에 몸을 떨고 있는 줄리탄을 향해 있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지. 목숨의 가치라는 것을 시험받게 될 거라고. 그래 어떻게 결론이 나왔나?” “저는......” 의자에 걸터앉아 턱을 괸 테시오스의 자색 눈동자가 줄리탄을 내려보고 있었다. 줄리탄이 말했다. “저는 아무 것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랬을 수도 있지. 그래서 네 목숨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거 냐?” 테시오스가 턱을 치켜들며 줄리탄을 바라봤다. 두 눈을 꽉 감은 줄리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어?” “......예” 차라리 처음에는 모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알 수가 없 었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던 목숨의 무게가 단번에 무의미하게 산화 되는 듯 했고 거대하게 자신을 짓누르다가도 때로는 깃털보다 가벼웠다. 테시오스의 눈빛이 그를 꿰뚫어 보는 듯 훑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숨에 무게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이 마을처럼 아주 실 감나는 허상일 뿐이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일 거다. 용의 목숨이 오크의 목숨보다 값지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늘을 날 수 있으니까? 강하니까? 오래 사니까 ? 현명하니까? 웃기는 소리다. 자기에게 소중하니까 모두에게 소중하다고 착각하는 자기 좋은 데로의 해석. 괴변 덩어리. 그 말은 마치 처음부터 저 놈을 악역이라고 정해놓고 ‘저 놈은 악역이라서 악한 거야.’라고 생각하 는 것과 똑같은 거다. 하지만 줄리탄도 착각하고 있었다. 이 세상과 부딪 기며 느끼는 괴로움을 목숨의 무게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세상 에서 가장 값어치가 없는 생명체. 잊지도 않은 무게를 짊어지는 것에 지쳐 서 이제는 목숨을 끊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두는데 목숨의 무게 같은 건 없다. 그런 경중(輕重)을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세상과 계약한 타 협의 무게일 것이다. “아 그건 그렇고, 그 아이 정말 좋아하냐? 사랑 하냐고.” “......!” 수없이 들어왔지만 너무 당연해서 항상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그 원론적인 질문이 지금 이 순간 테시오스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마치 공기처럼 폐부로 스며들어와 온몸을 돌았다. ‘궁룡의 씰인 데도 사랑한다는 거냐?’, ‘인생을 버리고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로 사랑 하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랑하냐’고. 멈춰버린 줄 알았던 줄리탄 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줄리탄이 말했다. “사랑합니다.” 5. 이제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비어 있는 침실에 앉아 있는 테싱은 가랑이 돌려 준 미스트랄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테싱의 역 린(逆鱗). 자신의 용린(龍鱗)으로 만든 미스트랄의 실루엣은 어둑한 방 안 에서 미미한 빛을 머금으며 뭉클거리고 있었다. “영원히 그러고 있을 작정이야?” 방을 울리는 갈라진 목소리에 테싱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어 대꾸했다. “뭐 하러 온 거냐. 테시오스.” 반대머리의 고집 센 노인네의 모습으로 테시오스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런 향기도 느껴지지 않는 방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안든다는 듯 테시 오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가랑의 땀이 메말라버린 침대에 걸터앉으며 테싱 을 바라보았다. “이제 외로움을 느끼는 건가? 이제 자신이 외로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가.” “......” 천천히 고개를 든 테싱은 눈앞의 노인을 태워 죽여 버릴 듯이 살기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테시오스는 여전히 측은한 듯 목적을 잃은 궁룡의 수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넌 항상 분노하고 있었지. 그게 너무 강해서 표현할 수 없었을 뿐.” “......오랜만에 인간이 된 기분이로군.” “넌 처음부터 인간이었다.” 테시오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막 생각이 난 듯이 말을 꺼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야...... 넌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나? 그래서 수만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를 용서할 수가 없는 건가? 그 아이가 널 떠났고 다시 되찾을 방법이 얺는데도 넌 잊을 수가 없는 건가. ” “그렇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테싱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줄리탄과 테싱을 바라 보던 테시오스가 줄리탄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죽으려고 하나?” 그리고 테싱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살려고 하나?” 똑같은 두 질문이 두 명에게 던져졌다. 6. 줄리탄은 말없이 테시오스를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인피타르를 검집에 넣으며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 동안 이 과분한 검을 쓰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돌려드리겠 습니다.” “뭐야아. 다 깨져버린 검을 돌려주는 거냐? 너무하다 야.” “그, 그건 죄송합니다.” “하긴 본래 깨지라고 있는 검이지.” 줄리탄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들어올린 그 검을 받은 테시오스는 천천 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 검과 시링크스는 네가 잠시 맡아두도록 하지.” “예. 그에게 항상 고마웠고 언제나 믿고 있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하하. 그 녀석이 그런 말 들으면 무지하게 화를 낼 걸.” 테시오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문을 열고 방을 나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대신해서 말했다. “방황해라. 방황이 지금 네게 남은 것이라면 마음껏 즐겨라. 그것도 축 복일 거다.” 그리고 물 속으로 스며드는 투명한 가루처럼 마을의 형체는 사막의 모래 들과 구분할 수 없이 뒤섞이며 그 모습을 잃어갔다. 줄리탄은 고개를 들었 다. 항상 찾아오는 사막의 별들이 눈에 들어오고 모래를 머금은 차가운 바 람이 온몸을 때렸다. 아무 것도 없이 줄리탄은 첫발을 내디뎠다. 7. 테싱은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테시오스가 고개를 기울이 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알 것 없어. 넌 그 아이나 잘 관리해라.” 소리 없이 날아오르며 궁전을 떠난 테싱을 바라보면서 테시오스가 짜증스 럽게 인상을 썼다. “으이구 성질하고는! 결국 그 지겹게 긴 시간 동안 바뀐 놈은 하나도 없 군.” 테시오스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이미아가 아주 오랜만에 쓴웃음을 지었 다. -Blind Talk 솔직히 테시오스가 말한 가치관이라는 것이....... 제가 터득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사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불교의 어 떤 선문답을 읽고 감동 받아서 제멋대로 변형해서 쓰는 것이지요.(똑같은 대사와 상황을 베껴 쓸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지만.) 뭐 제가 확실히 모르 는 것이라서 너무 미숙하고 어색하게 설명되었지만 부디 읽는분들께 왜곡 해서 들리게 될까봐 걱정되네요. 전 이런 것에 약하긴 하지만 안하던 것들 도 가끔씩은 해봐야... 아무튼 재미없어서 죄송합니다.-_-; 하긴 항상 재 미있는 부분만 있겠습니까만은... 이런 저런 면에서 저의 미숙함이 한없이 한탄스러운 1월입니다. 기운 빠지게 하는 일들이나 말들이나 글들도 많아서 제 정신 차리려고 노력하는 중. 아 그리고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번 편도 여전히 수정보지 못했습니다. 그 럼 다음 편에서... E-MAIL :billiken@hananet.net 샤데이의 By Your Side를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19장 : 기적이 머무는 곳 - last Somewhere Where Dreams Never Die 1. 티브 사막....... 자연이 만들어 놓은 최대의 수렁 중에 하나일 것이다. 강줄기 하나 관통하지 않는 그 가혹한 열사의 땅에 발을 들여놓는 자는 세 상을 등진 은둔자이거나 혹은 자청해서 방황을 선택한 자 뿐. 그런 의미에 서 아마 줄리탄은 후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을까. ‘......’ 귓가를 때리는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오 고 있었다. 살갗을 태워버릴 듯한 고열의 태양과 폐혈관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밤의 냉기가 밤낮을 지배하는 사막의 한복판을 변변한 옷도 식량도 없이 걸어가며 줄리탄은 끝없는 번민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죄책감, 연민 , 그리움, 절망, 슬픔....... 자신이 창조해 낸 감정들이 악령이 되어 집 요하게 줄리탄의 온 몸을 나락으로 내려 끌고 있었고 그것들을 떨쳐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또 다른 감정들이 앞을 막아섰다. 눈이 멀 어가고 벗겨진 발에서 감각이 사라져가도 그런 감정들이 자신의 마음을 찌 르는 고통만은 더욱 더 확연하게 느껴질 뿐. 강제로 자해 당하는 굴욕적인 괴로움에 줄리탄은 아픈 눈동자를 질끈 감았다. ‘고통을 받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야. 그리고 고통을 받는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단지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통 해 어떤 것이라도 느끼고 깨달을 수만 있자면 그 고통의 시간이 가치를 갖 는다는 것뿐일 거야. 모든 것을 포기한 자에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아. 하 지만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 곳엔 행복도 오지 않지.’ 예전 자신을 지키다가 부상을 당한 카넬리안이 자신에게 했던 위로의 말 이 두려움과 싸우는 부적이 되어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고통을 피하는 것도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은 결국 피할 방도가 없다. 고통은 형태를 바꿔 서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들을 공격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에 가 치가 있다고 - 카넬리안은 ‘나도 사실 잘 모르겠어.’라며 웃으며 말하곤 했다. 캬아아악!! 반복되는 상념을 뚫으며 날카로운 짐승의 경계음이 들려왔다. 하늘을 올 려다 본 줄리탄의 눈앞으로 거대한 사막조(沙漠鳥)가 발톱을 들이대며 날 아들고 있었다. 사막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새삼 증명이라도 하듯 그 사 막토착동물은 자신의 사냥권 안으로 들어온 줄리탄을 공격하기 위해 살기 를 드러냈고 줄리탄은 황급히 몸을 돌려 그 날카로운 발톱을 피하려 했다. “아악!” 뜨끔하며 통각이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잡아채려는 발톱을 피하려 했지 만 피곤에 질린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오른쪽 눈가를 심하게 긁혔 다. 핏물이 금세 눈에 스미며 시뻘건 세 줄의 상처가 그어졌지만 줄리탄은 더듬거리며 항상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찾았다. 그러나 인피타르도 세라 피스가 준 검도 이제는 없었다.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던 사막의 새가 다 시 줄리탄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윽!” 고작 새 한 마리가 지금은 목숨의 위기를 만들었다. 카넬리안도 시링크스 도 인피타르도 없는 순간, 줄리탄은 뺨을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날아오는 새의 발톱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숨을 곳 하나 없는 사막의 한복판에서 피 할 곳도 없고 피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푸드드드드득! 줄리탄은 혼신의 힘을 모으며 자신의 머리로 닥쳐오는 새의 다리를 잡아 챘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찍으려는 새의 회색빛 부리를 잡아 봉쇄시 켰다. 자신의 상반신만한 거대한 새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줄리탄은 놔주지 않았고 잠시 후 그 새는 겁을 먹은 듯이 몸을 축 늘어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 배가 고프겠지만 말야.” 허탈하게도 이 긴 방황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말을 건 상대는 흉측하게 생긴 새가 되어 버렸다. 줄리탄은 몸을 떨고 있는 새를 날려두었고 사냥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확인한 새는 높이 날아오르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줄리탄의 머리 위를 몇 차례 돌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붉은 피를 흘리 는 상처 속으로 모래 바람이 들어가자 손바닥으로 꾸욱 누르며 오른쪽 눈 을 감았다. 2. 군소 왕국들이 지배하는 헤스팔콘의 땅은 나름대로 자정작용(自淨作用)끝 에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사람들의 시장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소금을 구하 기 위한 우유를 항아리에 담아 들고 다니는 여인들을 비롯해서 엉성한 돗 자리지만 먹을 것과 바꿔보려고 등에 짊어진 채로 사람들을 모으려는 소년 들, 전후(戰後) 급조되어 지어진 빵집과 옷가게들 사이로 사람들이 북적거 리고 있었다. “저, 저 여자, 엄청난데!” “설마 귀족인가?” 그런 소란통의 거리를 뚫고 말없이 걸어가는 여자가 유독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뽀얀 색유리 같은 새하얀 피부에 투명한 붉은 눈 동자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옷과 치마를 입고 있는 소름끼칠 정도의 미녀가 발소리도 없이 자신들 옆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란 보는 순간 하던 일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말을 붙일 수도 없는 그녀의 분 위기 덕분에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떠들썩한 소음이 일시에 사라지며 모 두 소리죽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막 인간계로 내려온 요정 이라고 소개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그녀의 뒤를 쫓던 말을 탄 청년이 결국 말을 급히 몰아 그녀 앞을 막아서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나, 나는 이 지역을 관리하는 왕국의 둘째왕자인 세라단이라고 하오.” “그래서요?” 카넬리안이 고개를 들며 슬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알았으니까 빨리 비키 라는 눈빛으로 감히 왕족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수줍어하는 건 세라 단이라는 긴 머리를 땋은 왕자였다. 한참 헛기침을 한 뒤에 세라단이 애써 정중하게 말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그대를 왕성으로 초대하고 싶소만.” 주변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터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먹고 자는 것 전혀 걱정 없이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보내는데 왕족만한 자들이 또 없으리라. 그런 왕족이 초대한다는 의미는 곧 왕자의 후궁이 되어 인생 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의미. 카넬리안 정도의 외모라면 어느 왕자가 그런 제의를 안했겠냐만 사람들의 부러운 탄식에도 불구하고 카넬리안은 싱긋 웃으며 곧장 대답했다. “비키세요.” 세라단이 성격이 더러워 보이는 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생처음 보는 여자의 매몰찬 거절에 당황했는지 말고삐를 꽉 잡으며 눈썹을 찡그렸고 사 람들이 불안한 듯이 슬슬 물러섰다. 자신들을 지배하는 왕족들이 특별히 포악한 자들은 아니었지만 왕족 앞에서 무릎을 꿇지도 않고 단번에 말대꾸 한 죄는 참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난 그대를 감옥에 가둬서라도 곁에 두고 싶소.” 카넬리안은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예전 같 으면 일단 세라단인지 뭔지를 흠씬 두들겨 팬 이후에 왕성까지 달려가서 간판 내리게 만들었겠지만 그녀는 그런 세라단 왕자가 귀엽다는 얼굴로 바 라보며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여자를 잡는다면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여자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답니다. 이름 모를 왕국의 왕자님이시여.” 그녀는 정중하게 무례한 조언을 해주며 말을 탄 세라단의 옆을 지나갔다. 세라단은 창피함으로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고개를 돌려서 그녀에게 외쳤다 . “지, 지금 어디 가는 거요!” “티브 사막.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죠?” “당신, 미친 거요! 여자 혼자서 사막을 가겠다고?” “찾아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사, 사막 한복판에서 사람을 찾겠다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돼는!” “이상한가요? 그럼 따라오시겠습니까?” 그녀는 슬쩍 뒤돌아보며 그렇게 속삭였고 그녀의 짜릿한 표정에 세라단은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왠지 다가가도 절대로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여자였 다. 3. ‘얼마나 헤매었을까. 밟히는 것은 오직 모래와 자갈의 치근덕거리는 소 리뿐. 지상이 아닌 곳의 영토를 밟으며 열사의 잔혹한 태양 빛 속에서 내 몸의 모든 추억까지 증발해 버리는 것 같다.’ 줄리탄은 가끔씩 보이는 사막식물들의 수액으로 시들어가는 생명을 연명( 延命)하며 애써서 마음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감싼 채로 걷고 있었 다. 이곳을 미로라고 말한다면 특별히 출구를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닌 채 -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를 잡고 그냥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압사해 버렸다. 외로움이라는 동물이 바늘 투성이 혓바닥을 내민 채로 자신의 온 몸을 핥고 있는 쓰라림. 아무리 갈구(渴求)해도 그 고통에 대한 또렷한 해 답은 나오지 않은 채로 자신을 팔뚝으로 쿡쿡 찌르던 장난스런 그녀의 촉 감만이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싫은 일에, 슬픈 일에, 화가 나는 일에 금방 터져 버릴 것 같았던 나의 새가슴이 아직까지 잘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랍게 생각하고 있 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 그냥 지금에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 그때 그녀를 더 세게 껴안아 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뿐.’ 단순해져 버렸다. 다른 생각 다 사라지고 깊게 사귈수록 당연히 서로 상 처를 주고받게 된다는 단순한 연애 공식이 남아 버렸다. 막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친 줄리탄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스르 르 쓰러져갔고 그런 그를 삼켜버리듯 모래 바람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지된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통도 감각도 없는 시간이 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줄리탄 씨?” 익숙한, 너무도 익숙하지만 항상 가슴을 뛰게 만드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마른 손끝이 조금씩 움직이며 두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 고 줄리탄은 기적처럼 고개를 들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상처 입은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올려다본 오후 사막에는 모래 폭풍 을 배경으로 삼은 카넬리안의 빨간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안 타까운 얼굴로 미소 짓고 있던 카넬리안은 자신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표정을 잃은 줄리탄을 일으키며 자신의 옷을 찢어 그의 얼굴에 그어진 상처를 감싸 주는 것이었다. “카넬리안.......” “예.” 카넬리안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하 얀 머리칼에 잔뜩 달라붙은 모래들을 털어주었다. 언제나처럼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얼굴과 몸짓으로. 줄리탄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얇은 손 목을 잡으며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카넬리안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녀가 서글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제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없어요.” “괜찮아. 아니 더 좋아! 고마워! 고마워!” 계약의 끈을 끊고 궤도를 이탈한 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는 ‘고마워’라는 말 뿐이었지만 줄리탄은 막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아주 세게 껴안았다. 몸 안에 모든 수분 같은 것은 죄다 증 발해 버렸는지 알았는데 끝도 없이 쏟아지는 눈물방울이 모래 위에 떨어지 고 있었고 그녀는 말없이 그의 등을 감싸며 조용히 몸을 떨었다. 기적이라 는 것이 본래 끝없이 이뤄지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줄리탄도 참 많은 기적 을 겪었다. 인간으로서 용을 만나서 살아 돌아왔고 죽음의 순간마다 번번 이 구원을 받았으며 또 이 사막 한가운데서 유일하게 안고 싶던 여자를 찾 았다. 그 모든 것이 기적이리라. 하지만 가장 큰 기적은 수많은 시련을 빗 방울처럼 받으면서도 절대 포기 않았던 마음일 것이다. 그게 가장 놀라운, 스스로 이뤄 낸 기적일 것이다. 4. 카넬리안의 인도를 받으며 그들이 얼마를 걸어간 끝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샘 오아시스와 사막수(沙漠樹)들 사이로 보이는 폐촌이었다. 어 떤 이유인지 사람들이 떠난 지 몇십년은 되어 보이는 곳. 옷을 입은 채로 천지(泉地)에 뛰어들어 먼지와 마음의 찌꺼기들을 씻어버린 둘은 몸을 말 리기 위해 높다란 나무 옆, 버려진 집의 벽에 기대어 앉아 사막의 노을을 지켜보았다. 검은 머리칼의 끝에 뭉친 투명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 는 카넬리안은 갸웃거리는 얼굴로 줄리탄을 옆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줄리탄은 기쁜 듯이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늦은 태양 이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우리들?” 줄리탄이 짙은 농도로 채색되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물에 홀딱 젖은 채로 나란히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지금 그들의 모습이 라는 것이 꼭 어느 시골 역 의자에 앉아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 10대의 남 녀를 닮았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마차가 언제 올지도 모르지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카넬리안이 샘에서 일고 있는 잔잔한 파문(波文)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있는 곳은....... 테싱님이 알려주셨어요.” “고맙군.” 줄리탄이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목 언저리에 부드러이 키스해 주었다. 물을 머금은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 자 자잘한 물방울들이 소리 없이 튀겼다. 그리고 하늘에는 슬슬 이른 별들 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5.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의 숨결이 반쯤 열린 문을 느릿하게 흔 들고 있었고 오아시스의 수면을 핥고 지나갈 때마다 물 위에 반사된 별빛 들이 일렁거렸다. 이제는 인피타르도 미스트랄도 없다. 이제 서로에게 필 요 없는 것이니까. 오늘이라는 시간이 또 사라져가고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런 것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들은 서로의 온기 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증명하 려고 그들은 두근거리는 서로의 가슴을 확인하며 서로의 상처를 껴안아 주 었다. "당신은 항상 내 앞에 있었어요. 내가 당신을 떠나도, 내가 어떤 모습이 되었던 당신은 계속 웃어주며 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미안해요. 씰 주제 에...... 그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죽더라도, 내일 죽게 되더라 도 그 손을 잡은 채로 죽고 싶었습니다." "넌 죽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내가 죽게 만들지 않아!" “헤헤. 만나자마자 또 낯 뜨거운 말들만 하네.” 결국 이번에도 울먹인 쪽은 줄리탄이었고 그의 마음을 감싸준 준 쪽은 카 넬리안이었다. 그녀의 마른 나신을 감싸주자 카넬리안은 귀를 덮는 그의 하얀 머리칼을 살짝 쥐며 눈을 감았다. "돌아와 줘서,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마워."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그래서 껴안게 된다면 그때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이제는 죽는 것이 두렵다. 그들을 담은 토벽집 위로 창백한 달의 조각들이 지상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깨지고 있었 다. 그 얇고 투명한 것들이 소리 없이 깨져가는 모습만이 가득한 무언(無 言)의 축제. 능숙한 테이머로서는 실격인 그와 이제는 더 이상 주인님이라 고 부르지 않는 그녀는 계약이 끊어진 채로 만난 지금에 와서야 완전히 서 로의 마음을 열어 줄 수 있었다. 공명도 없고 강력한 마력도 필요 없는 인 간으로서 사랑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고 있는 교감(交感). ‘인간이 죽음에 대해 그렇게 자주 읊어대는 이유는 그만큼 삶에 대한 집 착이 강하기 때문이라지. 언젠가는 누구나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에 신경 쓰는 이유는 그만큼 정해진 삶의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라지 ....... 흘러간 삶의 시간에 대해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인간을 닮은 그녀의 체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너무 희미해서 다른 사람들은 느끼기가 힘들었을 뿐. 자신은 인형이 아니고 환상도 아닌 그녀 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수없이 확인하며 천천히 흐르는 밤의 시 간에 몸을 담았다. 6. 포근한 기분에 줄리탄이 눈을 떴을 때 길고 검은 머리칼을 자신의 가슴에 부비며 잠들어 있는 카넬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랜만에 편 안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방해하기 싫었던 줄리탄은 자신의 몸을 감싸던 그녀의 얇은 팔을 바닥에 내리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대 충 챙겨 입은 그는 세수라도 할 요량으로 살짝 살짝 올리는 발걸음으로 집 밖으로 나갔다. 엄청난 빛줄기에 눈부셔하면서도 그는 좀 부스스한 하얀 머리칼을 긁적거리며 샘으로 걸어갔다. “결국 그 아이는 또 너를 선택했어.” 차가운 목소리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린 줄리탄의 앞에는 어느 순간 빛 을 가리며 서 있는 큰 키의 사내가 있었다. “테싱.” “정확히는 마르크 테싱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테싱은 말없이 손바닥을 펼쳤고 파즈즉 거리는 마력이 모인 자리에는 작 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테싱은 지금까지 그걸 품고 있었던 것일까. 그림 자에 가려진 그 사진의 모습은 흐릿하게 보였다. “.......그건?” “사라지기 전에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뭘 말이야.” “우리에게 얽힌 과거.” 열매를 쪼던 원색의 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주문처럼 그렇게 말한 테싱 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너무도 또렷한 추억을 더듬으며 그 첫마디를 열었다. “실라칸스라는 물고기가 생각나는군. 다른 생물들이 모두 환생과 진화를 거듭하며 바꿔가고 있을 때 그 이상한 물고기만은 3억5천만년 동안 조금 도 변하지 않은 채로 세상을 살고 있었지. 그건 신의 저주일까? 아니면 축 복일까?” 줄리탄은 마치 불길한 잠언(箴言)같은 그의 말에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 다. 그리고 테싱은 죽어가는 나무의 이파리 같은 자신의 날개를 조용히 내 리며 이 별에서 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파멸과 재생의 실험에 대해 말 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이었지. 어디로도 도망칠 길이 없는 신의 살의(殺意)가 인간들의 목을 아주 천천히 조르고 있었어.” 약 15만 2천년 전 Chapter#19 : 기적이 머무는 곳 - 끝 Next Chapter : 공극어(工棘魚) -Blind Talk 카넬리안 : 오 예. 나 돌아왔어요! 가랑 : ........ 카넬리안 : 오호홋. 넌 이제 내가 앉아 있던 벤치로 가서 쓸쓸히 우리들을 지켜보기나 하시지! 가랑 : 하지만 이제 곧 제가 다시 나올 거에요. 카넬리안 : 뭐? 또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기서!! 아무도 모르는 새벽이 밝아올 때에... 거리 한구석에서 멋진 버스가 나오네... 젊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중할 수 있기에 비좁은 시트에 꼭 파묻혀 여행을 떠나네... 낮 동안 몇 번이나 키스를 하고, 갈 곳을 찾는 것에 너무도 지쳐서, 해질 무렵에 버스도 타이어를 닳아 없애고 거기서 두 사람은 네온글씨를 보았지... 호텔은 리버사이드 강가의 리버사이드 식사도 리버 사이드 리버사이드 체크인은 졸린 얼굴로 있고, 방문은 철판으로 되어 있고, 멋진 텔레비젼은 플러그가 뽑혀 있고, 두 사람만이 서로의 기분을 나누네. 침대 속에서 물고기가 된 다음, 강에 떠오른 풀장에서 홀로 헤엄쳤지. 어차피 두 사람은 도중에 그만둘 테니까, 이 길고 긴 밤을 몇 번이고 맛볼 수 있네. .........챕터 끝났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수요일 경에 전체 분량 삭제합니다. 으그그그그. 어깨까지 쑤셔오네요. 15만2천년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어찔어찔한 과거입니다만 본래는 1만2 천년 전으로 하려고 했습니다.(나름대로 패러디 같은 건데... 아시는 분이 계실까.) 감성적이고 터무니없는 숫자이고 특별히 과학적인 고찰 없이 나 왔습니다.(나름대로 계산하긴 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과학 적인 이론에 충실하신 분들이 앞으로 나올 챕터20을 읽으시면서 화를 내신 다면 ‘소프트한 소설이니까.’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편도... 다시 읽지 못하고 올립니다. 풀썩. 오탈자에 대한 메일 보 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현재 마감 중이라 정신이 없는데 출판본에서는 꼭 수정하겠습니다. billiken@hananet.net Secret Garden의 The MoonGate를 들으며....... 서기 2009년, 영혼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1 Traumnovelle, Stories just like dream 1. 실험실 내부에 자리 잡은 투박한 기계 장치들은 마치 강철의 야수를 닮았 다. 결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없을 듯한 기괴한 모습. “칠백사십오 번째 채집 실험 시작합니다.” 그리고 벽면에 붉은 램프가 점멸하기 시작하면서 그 기계 장치들이 차가 운 울음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고 거대한 실험실의 내부는 이내 불길 한 진동에 휩싸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식어버린 커피가 부활하는 듯 흔들렸다. 하얀 연구복의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향해 있었다. 지 겹게 반복되고 또 실패하는 실험에 지쳐버린 그들의 시선은 오직 실험실 중앙에 구렁이처럼 얽혀 있는 굵은 투명관(管)에 집중되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는 대체 어디에 쓰는지 알 수가 없는 괴이한 형태의 실험 도구. 사람들은 그것을 채집기(採集器)라고 불렀다. “유도전력(誘導電力) 증폭!” 기계장치들의 표피에 무수한 돌기처럼 두드러진 진공관들이 터질 듯이 빛 을 발하며 열기를 뿜어냈고 냉각기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미세한 플라즈마 의 구체(球體)들이 투명관 속으로 쏟아지며 현란하게 충돌하는 모습이란 이것이 철저히 과학적인 실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마법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745번째의 그 실험에서 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이뤄지기 시작 했다. “자, 잠깐. 반응이...... 반응하고 있어!” “계속 증폭시켜! 한계선까지 증폭해!” “녹화! 지금 제대로 녹화되고 있겠지!” 화면 속에서 솟아오르던 그래프들을 본 연구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리 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물고기가 낚싯대에 걸린 듯 한 엄청난 반응. 분명히 ‘그것’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모니 터들이 저마다 계산된 숫자를 끝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자, 잡혔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반백의 연구원은 떨리는 손으로 코트 속에 있던 안경을 끼며 채집기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 에 없었다. 저항의 극한에 달한 기계들의 진동이 실험실을 뒤덮은 가운데 수은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반투명한 무언가가 투명관 속으로 들어와 요동 치는 것이었다. “......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형체를 이루어가며 곧 흐릿한 여성의 모습을 만들 어 냈다. 엄청난 고 에너지 속에서 뒤틀린 형체를 만들어내는 ‘그것’의 목소리는 곧장 증폭되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었다. “...... 나는....... 1월....... 14일....... 살해...... 당했다.” 2009년 3월 11일, 인류는 최초로 영혼의 목소리를 들었다. 2. 2009년 3월 11일 새벽 2시 37분, 중국 베이징 소재 국립과학연구원에서는 자신을 펜실베이니아 주(洲) 필라델피아에서 1월 14일 밤에 살해당한 21세 의 여성, 린 콜린스라고 주장하는 영혼을 1분 47초간 채집하는데 성공했다 . 그리고 그 영혼의 증언에 따라 실제로 그녀의 시체가 필라델피아 남부 델 라웨어 만(灣)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그 이후 수백차례의 영혼채집실험(靈 魂採集實驗)을 통해 영혼이 실존한다는 오래전부터의 가설은 모순이 없음 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실험에 관여한 십여국(國)의 기관에 전달된 ‘영 혼실존에 대한 보고서’는 극비에 붙여졌다. 3. 영혼이 실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육체를 숙주로 기생하는 바이러스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좀 더 확실하 고 자세하게 금단의 영역으로 접근하고 싶었던 그들의 실험은 계속되었고 결국 ‘영혼실존에 대한 보고서’를 공유하는 강대국들은 전대미문의 다국 적 연구기관인 MSI(Metaphysical Science Institute)를 마드리드에 설립했 다. 2011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을 거야. 이 지경이 되리라고는.” 강대국들로부터 엄청난 비밀 예산을 지원 받은 MSI가 밝혀낸 ‘영혼의 메 커니즘’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A.육체의 사망 이후 영혼은 즉각 육체를 이탈한다. :여기서 영혼은 어떠한 무게도 형체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 상태지만 그 에 너지의 형태는 지금까지의 어떤 에너지와도 비교 측정할 수 없고 다른 에 너지와 간섭하지 않으며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지도 않는 완전히 새 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메타 에너지’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B.육체를 이탈한 영혼은 육체에 있을 때의 기억과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다시 육체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반복적인 실험결과에 의해 얻은 결론이며 그 이유에 대 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이탈한 이 상태를 ‘ 불안한 상태’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C.육체를 이탈한 영혼들은 모두 시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어느 한 지점으 로 향한다. :마치 본능처럼 영혼들은 모두 하나의 점으로 향하며 그때까지 영혼들이 ‘불안한 상태’로 물질계(物質界)에 남아 있는 시간은 약 0.1ns(나노초) 이하로, 극도로 짧다. 그리고 영혼들이 향하는 그 지점 즉, 특이점(特異點 )은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Schwarzschild's radius)을 갖지 않으며 영혼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 점을 ‘천공의 문’(heav en's Door)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D.‘천공의 문’을 통과한 영혼들은 물질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가설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영혼들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넘어선 물질처럼 그 특이점 에 도달하는 순간 완벽하게 물질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물리법칙으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또한 그 ‘천공의 문’ 뒤에 있는 차 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지만 편의상 ‘낯선 땅’(Strange Terra) 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E.‘낯선 땅’에 들어간 영혼은 ‘천공의 문’으로 다시 나와 물질계로 돌아온다. :마치 블랙홀-웜홀 이론과 같이 ‘낯선 땅’으로 빨려 들어간 영혼들은 알 수 없는 절차를 걸쳐 다시 같은 곳을 통해 물질계로 돌아오며 그때 ‘낯선 땅’을 거쳐 온 영혼은 기억과 성격을 잃은 ‘깨끗한 상태’이다. F.물질계로 돌아온 영혼은 잉태된 태아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 :태아기의 어떤 기간 중에 영혼이 태아 속으로 스며드는지는 밝혀지지 않 았지만 마치 태아의 존재에 반응한 것처럼 영혼은 극도로 짧은 시간 안에 육체에 자리 잡게 된다. 이 놀라운 영혼순환의 메커니즘을 어설픈 그림으로나마 정리하자면 다음 과 같다. (이 부분의 그림은 8권 출판본에서 수록되어 있으며 cafe.daum.net/dragonlady 드래곤 레이디 자료실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4. 알베르트 테싱이 발견한 천공의 문은 인류 최후의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 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영혼순환 이론(Soul Re cycling Theory)의 중심이 되는 키(key)와 같은 그것은 마치 신의 정원으 로 가는 문을 발견한 것처럼 사람들을 자극했고 결국 MSI는 천공의 문에 얽힌 의문을 풀기 위한 실험에 착수했다. 그러나 어느 날, 천공의 문이 닫혔다. MSI 연구팀을 이끌던 알베르트 테싱은 천공의 문에 광적으로 집착하던 중 분명히 무언가를 발견한 듯 했지만, 아무런 보고서도 남겨놓지 않은 채 부 인을 살해한 뒤 의문의 자살을 했고 그의 자살과 함께 서기 2019년 11월 천공의 문이 닫혔다. 숱한 의혹과 두 아들만을 남겨둔 채로 알베르트는 영 원히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그 문은 처음부터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어. 그 미친 과학자가 그걸 연 구하다가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완전히 미쳐서 자살해 버렸으 니까. 혹시 모르지. 천공의 문을 닫아버린 자가 그 알베르트 선생이었는지 도.” 그 문이 닫혔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영혼순환의 고리가 끊어졌 다는 것. 즉 천공의 문이 닫힌 이후로는 육체를 떠난 어떠한 영혼도 ‘낯 선 땅’으로 가지 못하고 이 세계, 즉 물질계를 맴돌게 되었다는 것과 또 어떤 영혼도 ‘낯선 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물질계로 돌아오지 못한 다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어떤 끔찍한 사실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천공의 문이 닫힌 이후 이 세계에는 육체를 잃고 방황하는 불안한 영혼들 이 마치 호수 밑에 퇴적층이 쌓여가듯 누적되기 시작했고 깨끗한 영혼이 물질계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단 한명의 태아도 생명을 가지고 태어날 수 없었다. 사산율 100% 아무도 태어나지 못하고 또 아무도 죽지 못한다.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방황하게 되며 태아들은 영혼을 얻지 못한 채 심장만 뛰고 있는 단백질 덩어리로 출산될 뿐이었다. 차라리 세계 멸망의 전쟁이 일어났거나 거대한 글로벌 킬러(Global-Killer) 운석이 지 구를 덮쳤다고 하더라도 이보다는 덜 잔인할 것이다. 종족을 번식할 수 없 다. 더 이상 누구도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인간만이 멸종되어 간다. 인류는 누구도 출산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했고 모든 인간들이 육체 를 잃고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굳이 MSI가 계산하지 않아도 나올 수 있었다. 인류 멸종까지 남은 시간은 약 70년.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다. 사회는 급속히 붕괴되어 갔다. 더 이상 자신을 비롯한 세상의 누구도 아 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공포는 이미 과학 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와 혼란은 곧 대상을 찾을 수가 없는 증오와 허무로 변해갔고 국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열심 히 일해서 종족을 유지할 이유 따위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유사 이래 이 어져 오던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단번에 가치를 잃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서 도리어 자기 목숨을 가볍게 느끼는 것이 인간이야. 하긴 총 맞아 죽어도 영혼은 빠져나와서 세상을 맴돌 테니까 엄밀히 말해서 우 리들은 죽을 수조차 없는 거잖아?” “알았으니까 입 다물고 체스에나 집중해. 너 지금 지고 있어!” 모든 인류의 막연한 희망은 단 하나 뿐이었다. 막혀 있는 천공의 문을 다 시 여는 것. 그것만이 인류가 멸종하지 않을 길이라고 믿으며 마드리드 연 구소 MSI는 천공의 문을 다시 열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 ‘Theseus'에 착수 했다. 테시오스,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사람들을 구한 아테 네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이름을 딴 그 프로젝트는 2031년에 착수되었으며 그 프로젝트를 이끄는 자는 알베르트 테싱의 작은 아들, 마르크 테싱이었 다. 5. “들어봐 물키벨. 지금 체스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우리가 3년 동안 천공의 문인지 뭔지를 열기 위해 별 별 궁리를 다 해 봤지만 설득력 있는 방법조차 찾지 못했어. 이제는 다른 차선책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 “차선책을 찾는 건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나한테는 지금 이 체스가 가장 중요해. 그리고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주제에 반말하지 말란 말야아아 ! 자아. 체크 메이트.” 물키벨은 감기에 걸렸는지 노란 손수건으로 코를 가린 채 연신 훌쩍거리 면서 나이트(Knight)를 움직였다. 올해로 24세가 되는 그녀의 본명은 뮬렌 키에르 벨이었지만 연구소의 누구나 그녀를 물키벨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몸집에 어린애 같은 목소리까지 가진 그녀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고에너지물리학과 분자생물 학, 인과역학(因果力學)을 비롯해 수많은 분야에서 혁신적인 논문을 발표 한 전대미문의 천재. 그 능력을 인정받아 테시오스 프로젝트의 중추 인원 중에 한명으로 MSI에 들어오게 된 여성이었다. 비록 감정이 불안하고 유아 적이며 심약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물키벨의 나이트가 자신의 킹을 궁지 에 몬 것을 십여 초간 지켜보던 금발의 소년이 커다랗게 외쳤다. “뭐야. 이 수는! 카스파로프가 천구백구십이 년에 써먹었던 기보잖아! 표절이야 이거!” “체스에 표절이 어딨어!! 카스파로픈지 파스타소스인지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막아 봐!” “쳇. 소용없다고 이런 건. 비겁해 체스황제의 기보를 표절하다니.” “으이구!” 물키벨이 눈앞의 소년에게 코 막힌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연구복을 걸쳐 입은 그 소년의 이름은 오펜바하. 어렸 을 때부터 MSI의 연구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자로 물키벨과는 다른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 중의 천재였지만 시건방지기 이를 데 가 없는데다가 곱상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설을 퍼붓고 다녔다 . 게다가 절대로 지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성격 때문에 물키벨 과는 미운 정만 나날이 쌓고 있는 연구 파트너였다. 참고로 한번도 물키벨 에게 체스를 이긴 적이 없기도 했다.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체스판을 노려 보며 난관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오펜바하에게 커다란 잔에 채워진 코코아를 마시던 물키벨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 새로 들어올 남자.” “새로 충원되는 연구원 말이로군. 본명인지 모르겠지만 이름은 ‘비령’ . 나이 23세. 키 182Cm. 몸무게 71Kg. 동양계. 프로젝트의 생체 아키텍쳐 담당. 이상이야.” 계속 체스판에 시선을 두고 있던 오펜바하가 마치 기계에서 뽑아낸 듯 물 키벨이 말한 남자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던 물키 벨은 코코아를 후루룩거리며 마시다가 안경에 잔뜩 김이 서리자 안경을 스 웨터에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시력이 나쁜 그녀에겐 수술 공 포증이 있어서 간단한 시력회복 수술조차 거부한 채 매년마다 도수가 높아 지는 안경을 끼고 다녔다. 그녀가 안경을 다시 쓰며 말했다. “비령? 참 이상한 이름이다.” “본명은 아닐 거야.” “왜에?” “어떤 멍청한 부모가 자식 이름을 비령(悲靈)이라고 지었겠어.” 한문이든 뭐든 암기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외워버리는 오펜바하는 그 ‘ 비령’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여전히 체스판 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하긴 어떤 무정한 부모가 자식의 이름 을 비탄의 영혼(distressed soul)이라고 정하겠는가. 그 비령이라는 자의 얼굴을 모르는 물키벨이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뭔가 상상하는 것 같았다. 오펜바하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씨익 웃었다. “에에. 그 남자, 상상하는 거지? 미남이면 좋겠다고.” “누, 누가 그랬다고 그래!” “뭐 이런 답답한 곳에 처박혀 함수 덩어리나 보고 있으면 남자가 그리워 지는 것도 여자라면 당연한 거지.” “뭐야 이 건방진 꼬맹이! 네 녀석에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넌 남자로도 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얼굴이 빨개진 물키벨이 손수건을 집어던지며 빽빽 거렸지만 오펜바하는 놀려먹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여전히 능글맞게 대답했다. “당신도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아. 목소리만 큰 난쟁이 주제에. 인간 맞 아? 무슨 성질 더러운 드워프 같잖아. 다 큰 여자가 키가 뭐야 그게.” “나, 남의 콤플렉스 건들지 마!! 그리고 반말하지 말라고 했지!!” 폭발직전. 물키벨의 두 눈에 눈물이 뭉치면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오펜 바하는 슬슬 그녀의 약을 올리며 언제나처럼 폭발한 그녀가 체스판을 뒤집 어엎고 우아아앙! 거리며 울면서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이번 체스도 무승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 둘 사이에 미성 의 목소리가 끼어든 것이다. “나이트를 퀸으로 막고 그걸 희생시킨 뒤에 비숍을 움직여.” 물키벨과 오펜바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어느 순간인가 다가와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물키벨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쳤다. “치, 치, 침입자다아아아!!” 쓸쓸하고 그늘진 표정이 도리어 매력적인 사내였지만 그건 둘째 치고 난 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곳 MSI는 완벽한 보안시설이며 특히 자신들이 있는 곳은 특별허가를 받지 못한 자는 구경도 못하는 기밀에어리 어,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태연하게 훈수를 두고 있으니 그녀가 놀란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놀라서 벌떡 일어서려는 물키벨의 어깨를 잡 은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르크 테싱이 있는 곳이 어디지.” 차분하지만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그가 노려보며 소리친 것도 아닌데 물 키벨은 그를 바라보며 뭔지 모를 기분에 몸이 굳어버려 입이 벌어지지 않 았다. “다음 블록. 오른쪽 문으로 가면 돼.” 대답한 사람은 오펜바하였다. 그의 표정은 벌써부터 제멋대로의 라이벌 의식에 불타오르며 상대를 우스울 정도로 심각하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 다. “당신이 비령이란 사람이지?” “그런 셈이지.” 모호한 대답을 흘리며 오펜바하가 말한 문으로 걸어가는 비령의 뒷모습을 물키벨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펜바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짓궂은 노래가사처럼 흥얼거렸다. “아아 반하셨군. 이럴 줄 알았어. 쉽게 사랑하는 여자가 사교성 없는 남 자에게 반해 버리셨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여자에게 맞는 웨딩드레스 는 없을 텐데 말이에요.” “이상한....... 사람이야.” 평소 같으면 오펜바하의 말싸움에 말려들었을 물키벨이 스르르 다시 자리 에 앉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요즘 같이 애 못 낳는 세상에 정상이라면 더 이상한 거지.” “오프. 저 남자 어느 나라에서 온 거야?” “모올라. 신상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 어느 연구소에서 뭔가를 연구하 던 녀석인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도 자세한 사항은 찾을 수가 없다네.” 물키벨의 머릿속은 계속 비령이라는 남자를 상상하고 있었다. 차분한 검 은 머리에 유리알 같은 남색 눈동자, 그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 지 말라는 경고의 송곳이 마음을 쑤신 것 같았다. 오펜바하가 심드렁한 얼 굴로 또 혼란에 빠진 물키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남자에게 숨겨진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어렵게 알아냈어. 들어 볼래 ?” “말해 봐!” “너만 알고 있어. 마르크 대장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서 알아 낸 거니 까. 이거 들키면 날 분명히 독방에 보내버릴 껄?" “뭐, 뭔데?” “저 남자는 지금까지 다섯 명이나 죽였어.” “뭐?” 허탈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자 물키벨이 눈썹을 묘하게 찡그렸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 “장난치지 마! 새로 들어온 연구원이 살인마라는 거야 뭐야!” “진짜야. 기록에 있다니까.” “정말?” “위험한 남자를 좋아하면 다쳐. 불변의 진리지.” 오펜바하가 싱긋 웃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말이 강하게 뒷머리를 강타한 듯 물키벨은 표정을 잃은 채로 눈을 깜 빡거렸다. 다섯 명을 죽였다고?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 저, 정말이잖아!” 오펜바하가 체스판으로 급히 얼굴을 대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까 비령이 말했던 방법은 정말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령의 말대로 퀸을 움직이 며 자존심이 상한 듯 눈가를 떨었지만 물키벨은 그가 사라진 문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Blind Talk '아니 대체 이게 뭐야!'라며 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 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난삽해도 좋으니까 이번 챕터는 하고 싶은데로 해 보겠다는 생각이라서 좀 정신없고 재미없어도 한번 읽어주시길 부탁드리며 . 사실 이 영혼순환구조는 3년 전 쯤에 노트에 갈겨두었던 것이고 다른 스 토리에 넣었던 것이지만 어떻게 뜯어와서 개조한 후에 붙였습니다. kiyu군 이 설정의 상당부분을 담당해 주었긴 하지만 제가 보아도 빈틈이 많습니다 . 게다가 크게 독창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시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네요. 인기는 없겠지만... 하하. E-MAIL :billiken@hananet.net 오지 오스본의 Mr. Crowley(맞나?)를 들으며... (오지 오스본의 노래는 항상 멋집니다. 랜디 로즈때가 가장 좋긴 했지만. 한때는 비싼 수입앨범을 죄다 구입했을 정도로 좋아했지만 1년 후에 새로 운 방식으로 녹음된 값싸고 질 좋은 라이센스 앨범들이 나와서 좌절했다는 ... 물론 이 노래 미스터 크라울리도 좋지요. 가사도 멋지지만 영국의 교 주님 크라울리씨와 큰 연관이 느껴지지는 않아 보이는데... 둔해서 그런가 .)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2 Lord, Have Mercy Upon Us 1. 영격사(靈擊師)라는 자들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영혼을 퇴치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단어. 지상을 방황하던 영혼들 이 인간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난 사실 그 영혼들의 메타 에너지가 인간의 감정에 반응한다고 생각 해. 내가 악령들을 쏴 죽일 때마다 그걸 느끼니까. 맹수가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오듯이 악령들도 인간의 공포심에 반응하지. 증오에 반응하고 허무에 반응하고 기쁨에 반응하고 슬픔에 반응해. 그렇게 말하면 감정이 야말로 가장 메타 에너지에 가까운 에너지라고 할 수 있겠지.” 2019년 ‘천공의 문’이 닫힌 이후 ‘낯선 땅’에 가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들은 계속 지상을 방황하며 누적되게 되었고 결국 극도로 예민해진 그들은 ‘변화’를 일으켰다. 절대로 물질계의 어떤 에너지로도 변환되 거나 간섭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영혼의 메타 에너지가 영혼의 의지에 의 해 광(光)에너지나 열에너지, 전자기적에너지 그 외 여러 물리적 에너지 들로 뒤바뀌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영혼이 인간들을 공격할 수 있는 존 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증유(未曾有)의 공포가 시작된 거지.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가 없고 어디에 숨어도 피할 수가 없는 악령들이 생겨나게 된 거야. 심지어 는 악령이 자기 바로 옆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도 물어뜯기는 그 순 간까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강박적인 극한의 공포가 전 세계에 창궐한 거다.” 가장 최초로 발생한 악령의 습격은 2022년 7월에 일어났다. 부모와 함 께 시가지를 걷던 7살의 소년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소년 의 등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깊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던 것이다. 주 변의 목격자들은 흙먼지가 일어나며 만들어진 흐릿한 젊은 여인의 형체 가 소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고 증언했고 소년을 공격한 뒤에 곧장 그 형체가 사라져가며 빌딩 사이로 날아갔다고 말했다. 그것이 MSI에 보 고 된 최초의 악령이었고 그 이후 악령 출현 현상은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에서 발생하며 점점 강력하고 광폭하게 인간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오직 인간들만을 공격한다는 통계론적인 결론에 비춰볼 때 - 악령들은 의지를 가지고 인간들을 노리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사람들은 언제 덮칠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맹수들과 함께 살고 있는 꼴이 된거지. 집에 숨어 혼자서 떨고 있어도 바로 옆에 악령 이 서 있을지 모른다는 절망적인 공포심을 느끼면서. 철문을 닫고 총으 로 무장해도 악령들은 무시하고 들어와서는 심장을 뜯어버리니까. 그래 서 생겨난 직업이 그런 악령들과 싸울 수 있는 우리, 영격사들이지. 큭 큭큭. 말하자면 영혼 사냥꾼, 인류 최후의 직업이라고나 할까.” 어떤 통상병기도, 심지어는 핵무기조차 악령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 는 상황. 논리적인 과학이 그 지배력을 잃고 신비주의가 종교적인 맹신 의 우상으로 떠오른 이 뒤틀린 세상이 만들어 낸 자들이 바로 영격사였 다. 검증되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악령들을 퇴치하는 그들은 불가항력의 공포심을 억제시킬 수 있는 유일 한 능력자로 사람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었으며 그들이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말하자면 악령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패인 셈이었다. “영격사라는 것에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 는 것도 아니야. 그러다보니까 영격사라고 자칭하는 대부분의 놈들은 사 실 악령을 퇴치하기는커녕 그 모습만 봐도 도망치기 바쁜 사기꾼들이지. 크하핫. 무능력한 인간들은 이 절망 속에서도 배신을 당해야 하는 거야 . 정말이지 신은 절대로 인류를 편하게 죽여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아. 그 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영격사는 줄리탄이 살고 있는 헤스페리아의 기사와 비슷한 존재 들이 아닐까. 월등히 강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반신 (半神)과 같은 인간들. 두려움과 존경을 같이 받는 돌연변이들. 그리고 그런 영격사들이 늘어가다 보니까 그들 사이에서도 명성과 수준의 차이 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서열과 같은 것이 생겼다. 영격사들 사 이에서 인정하는 가장 뛰어나며 또 가장 위험한 영격사는 전 세계를 통 틀어 단 두 명이었다. 그 중 한명은 영혼봉인검(靈魂封印劍) 인피타르를 사용하는 시그 스파이어라는 자였고 나머지 한명은 영혼살해총(靈魂殺 害銃) 헬카이트를 쓰는 라파엘 테싱, 그는 ‘천공의 문’을 연구했던 알 베르트 테싱의 아들이자 MSI 연구소장 마르크 테싱의 형이었다. 라파엘 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날 부른 이유가 뭔지 들어볼까?” 짧은 머리칼에 시종일관 광기 서린 눈매를 가진 라파엘이 테이블 넘어 동생을 바라보았다. 목소리 하나하나가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를 닮은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영혼살해총을 꺼내 동생의 머리를 겨눈다 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광적인 인상이었다. 반면 긴 머리 칼에 반쯤 가린 공허의 눈동자를 가진 동생 마르크 테싱은 그런 형의 위 압에 개의치 않으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인피타르라는 검...... 구해 줄 수 있을까.” “뭐? 하하핫. 인류의 메시아이신 내 동생께서 내게 부탁을 한 건가 지 금?” 라파엘은 조소 가득한 웃음을 뱉다가 그 검이 생각났는지 조금 눈썹을 찡그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영혼을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총 헬 카이트를 쓸 수 있는 라파엘이었고 반쯤 미쳐버린 듯한 성격 때문에 영 격사들 사이에서도 악마적인 존재로 불리고 있지만 요도 인피타르를 다 루는 시그라는 사내와는 서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었던 것이다. 실제 의뢰를 받고 악령을 퇴치하던 중 몇 번이나 사투를 벌였지만 결판은 나지 않은 상태. 그들이 영격사들 중 서열 1,2위를 다 투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천박한 표현이 될까. 마르크가 인피타르 를 들고 있는 시그를 찍은 위성사진을 지켜보며 말했다. 길게 내린 곱슬 머리에 근육질이지만 가벼워 보이는 몸 냉정하고 단호한 인상, 검은 천 옷....... 페르시아 인을 닮은 외모가 매력적인 자였다. “그 검에 베인 자는 영혼이 검속에 갇혀 버린다는데, 어떤 원리인지 연구하고 싶어.” “영혼을 완벽하게 잡아둘 수 있는 원리라....... 혹시 코란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이슬람 성전? 읽어본 적은 없는데.” “그럼 네크로노미콘은 알고 있어?” “그게 뭐지.” 마르크가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라파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실존하는 문서야. 시그란 놈이 그걸 가 지고 있지. 정확히 말하면 사본이지만.” “그 비전(秘傳)이 인피타르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동생의 물음에 라파엘은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잘 들어둬. 요즘 같이 미쳐버린 시대에는 네가 믿는 과학이라는 것 보다 그런 신비주의가 더 설득력을 가지니까.” “......” 마르크는 라파엘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입을 다물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던 세계의 여러 신비와 공포, 환상을 담은 문서들의 기록이 두려 울 정도로 실체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인 알베르트도 흑마법에 파고들던 중 ‘천공의 문’과 관련된 무언가를 찾아냈었다는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코란과 네크로노미콘. 둘 다 아랍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과 둘 다 낙 타의 골편(骨片)에 기록되었다는 것, 또 둘 다 성스러운 미치광이 예언 자가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했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사탄의 긴 혓바닥처럼 음란하고 은밀하게 동생의 귓가를 유혹하는 형의 이름은 기묘하게도 대천사 라파엘이었다. 훗날 여섯 장을 날개를 짊어 진 채 고독이라는 나락에 빠져버리게 되는 마르크는 혼란스러운 듯이 눈 을 감으며 입을 다물었다. “신과 악마는 본래 하나이며 선과 악도 본래 하나이고 빛을 말한다는 것은 곧 어둠을 말하는 것이다.” 단정하듯 말한 라파엘이 자신의 자주색 코트 속에서 불길한 빛을 발하 는 영혼살해총 헬카이트를 꺼내며 테이블 위에 쾅하고 내려놓았다. 어두 운 회색빛의 금속으로 이뤄진 그 길고 거대한 권총의 슬라이드에는 역십 자가의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잘난 우리의 아버지께서 내게 남긴 이 선물. 영혼을 완벽하게 소멸시 켜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총. 그 미치광이가 이걸 왜 남겨 놓고 자살했다 고 생각해? 이걸 만든 목적이 뭐였을까? 또 왜 내게 이걸 주었을까?” 라파엘이 쓰는 총 헬카이트는 영격사들 사이에서도 두려움의 무기였다. 다른 영격사들은 기껏 해봐야 악령들을 쫓아버리던지 아니면 공격성을 상실시키는 정도가 끝인데 - 영혼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릴 수 있는 자는 라파엘 한명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총 헬카이트는 라파엘이 쓸 때 외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걸 만든 알베르트가 무 언가를 계획하고 조종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인위적인 힘. “내가 찾는 건 단 하나 뿐이야. 이 세상에 악랄한 퀴즈를 남기고 뒈져 버린 아버지의 영혼. 그의 영혼도 ‘천공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 상 이 지구 어딘가에 있겠지. 그 자식을 찾아서 이 총을 들이대고 물어 볼 생각이야. 왜 나에게 이 총을 줬냐고. 그리고 왜 어머니를 죽였냐고. 어떤 대답이 나오던 죽여 버리겠지만.” 라파엘의 광기가 들어 찬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소름끼치게 사무실 안을 울리고 있었다. “네 녀석이 해봐서 알겠지만 이 총은 해체할 수도 없고 투시도 안돼. 네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는 거지. 아마 인피타르 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럴지도.” 마르크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인피타르를 가져오려면 그 시그라는 놈을 죽여야 해. 죽 기 전까지 그 검을 놓을 놈이 아니니까. 뭐 어차피 언젠가는 죽일 테지 만 까다로운 놈이라서 공짜로는 싸우고 싶지 않아.” “뭘 준비하면 되는 거지.” 라파엘 같은 영격사들이 무료로 악령들을 퇴치해 주는 일은 거의 없었 다. 영격사들마다 원하는 것이 달랐지만 라파엘의 경우에는 상당히 특이 해서 대가로 미술품만을 받았던 것이다. 현급도 황금조차 그 가치를 크 게 잃은 지금 같은 세상에서 그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 라파엘이 짧게 말했다. “고야. 1808년 5월 3일.” “악취미로군.” 그 그림에 대해 기억한 마르크가 질린 듯이 내뱉었다. 고야의 명화 중 하나인 ‘1808년 5월 3일’은 지금 이 연구소가 있는 곳, 마드리드를 배 경으로 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내용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양 민들을 잔인하게 죽이며 처형하는 장면. 너무도 현실적인 그 그림은 이 세계의 상황, 그리고 마드리드의 MSI 연구소의 모습과 기분 나쁜 일치점 을 갖고 있었다. “관심은 렘브란트가 아니었나?” “다 모았어. 그리고 태워버렸지. 이번에는 고야 쪽을 태워볼까 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큭큭 웃던 라파엘의 그림자 사이로 잔혹한 미소 가 비춰졌다. 용굴과 같은 거대한 폐선 속에서 살고 있는 라파엘이 의뢰 를 수락할 때마다 받은 명화들은 악령을 소멸시킨 뒤에 항상 불태워졌다 . 불길에 휩싸여 일그러지는 모나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라파엘은 무언 가를 극심하게 증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르크가 쪽지에 메모하며 말했다. “구해보지.” 그때 문이 열리며 젊은 청년이 말없이 들어왔다. 라파엘은 뒤돌아보지 도 않고 있었고 마르크는 흘낏 눈을 들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모니터에 비령에 대한 신상자료가 나타났다. “특별히 할말은 없는데....... 이곳으로 가라서 해서.” 비령이 들어오며 귀찮은 듯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등을 돌 리고 있는 라파엘에게 향해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괴기스러울 정도의 기운이 순간 자신의 목을 조른 것 같아 눈을 조금 찡그렸다. 인간이 아 닌 것 같았다. “비령. 약속대로 본명은 부르지 않기로 하지.” 마르크가 딱딱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지만 비령은 남 청색의 눈을 굴리며 차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숙소는 이미 준비되었고 그곳에 가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자료가 준 비되어 있을 거야.” “혼자 있는 곳이겠죠?” “물론. 단 연구 결과를 숨기거나 공유하지 않는다면 처벌하겠다.” 비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이 MSI 입소보고의 전부였다. 그때 라파엘이 의자를 빙글 돌리며 앉아 있는 채로 비령을 올려보았다. 자신 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비령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 만 라파엘의 기운이 마치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여어.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 놈은 또 오랜만인데.” 라파엘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 영혼을 소멸시키는 힘을 지닌 라파엘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선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반응하며 두려워 하기 마련이다. 마치 천적이 앞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는 초식동물처럼, 보통 사람들은 영격사 중 최강최악이라는 라파엘의 근처에도 가기만 두 려움에 휩싸였다. 자신을 겁탈하려는 자에게서 피하려는 듯 비령은 주먹 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한 대여섯 명 정도 죽인 것 같군. 넌 나하고 비슷한 종류야 . 멋진데?” 라파엘이 박수를 치며 농락하듯 환호했다. 그는 비령의 근처를 맴돌고 있는 영혼들이 라파엘을 보고 도망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인한 맹수의 영역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라파엘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는 MSI 내부에서 악령에게 피해를 입은 자는 아직까진 없었다. 라파엘이 의외의 말을 던졌다. “악인이라는 게 뭘까. 상대를 해치면 악인인가? 어쩔 수 없이 해쳤어 도 그건 악인인가? 아니면 상대에게 악의가 있지만 해치지는 못한 자를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악의가 있어서 상대를 해친 자만을 악인으로 분류해야 할까? 그런데 그걸 뉘우치면 더 이상 악인이 아닌 걸까? 그 손의 피를 닦아내고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린다고 이제 악 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비령은 그 말이 자신의 마음을 절개한 뒤에 후벼 파는 듯한 것이기에 역한 것을 억지로 먹은 것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황무지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자는 절대로 악인이 될 수 없어. 악해 지고 싶어도 기회가 없으니까. 사회 속에서 공존하고 있을 때 악해질 수 있는 유혹의 기회도 찾아오는 거야.” 라파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일 수도 있는. 그것도 아 니면 미래의 그들을 향한 악마의 조언일지도.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 뿐. 다 소멸시켜 버리고 황 무지에 홀로 남은 신이 되어 허무 속에서 방황하던지 아니면 인간들에게 다시 악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던지.” “하지만........ 그건 선해질 수 있는 기회도 되는 거잖아요.”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려있는 문으로 세 잔의 커피를 들고 들어 온 그녀는 교복을 입은 채였기 때문에 막 학교에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번 라파엘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두려운 듯이 어깨를 떨고 있어서 들고 있는 잔들이 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가랑” 마르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일어섰지만 그녀를 보고 싱긋 웃 은 라파엘은 갑자기 헬카이트를 꺼내며 그녀의 이마에 겨누었다. 갑작스 런 일이었다. 들고 있던 쟁반이 떨어지며 정성스럽게 닦여 있는 하얀 커 피잔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형!!” “잘 들어. 마르크의 애완동물.” “입 닥쳐!!” 시종일관 차가운 마르크가 화를 내는 건 가랑과 관련이 있을 때, 그때 뿐일 것이다. 몹시 특이하게도 투명한 붉은 눈을 가진 가랑이 이 연구소 에 온 것은 3년 전. 마드리드의 뒷골목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그녀 를 구했을 때였다. 그녀의 가족이 모두 강도들에게 살해당한 일은 사실 최근에는 대단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일이었지만 그녀를 치료해 준 마 르크는 그녀를 계속 연구소에서 보호해줬던 것이다. 가랑의 정신적인 상 처가 치료된 것은 1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 마르크는 그녀를 자신의 여동 생으로 입적시켰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 중에 하나 인 마르크로서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리라. 라파엘이 몸을 떨고 있 는 그녀를 내려보며 말했다. “애완동물 주제에 선해질 수 있다고 말했나? 그럼 물어보지. 그렇게 말하는 넌 선한가! 가족들이 죄다 몰살 된 주제에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 리고 내 동생를 헤헤거리며 따라다니는 네가 선한 년인가! 선해지려고 노력이나 하고 있는 거냐!” 어떻게든 밝고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던 가랑에게 던져진 끔찍한 폭언. 야수에게 물어뜯긴 기분이었다. 가랑이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 괴롭게 몸을 떨었지만 그녀는 떨리는 입을 열면서 말했다. “누구나 선해지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틀렸어!!!” 라파엘이 선고를 내리듯이 소리쳤고 움찔한 가랑은 떨리는 붉은 눈가에 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르크가 다가오자 라파엘이 기 분 좋은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네 애완동물의 머리가 날아간다.” 파멸적인 광기에 휩싸여 있어 있는 라파엘은 가랑을 쏴 버리고도 남을 자였다. 아버지 알베르트에게 지독한 학대 받으며 동생이 보는 앞에서 등에 역십자가의 문신이 새겨진 라파엘. 아마 그를 지탱하는 힘은 그때 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전 지구적인 증오일 것이다. “다음 질문도 틀리면 방아쇠를 당기겠다. 여기서 널 죽이면 내 동생의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완전히 미쳐버려 허무 속에 허우적거리는 폐인이 될까? 아니면 내일이면 잊어버리고 다시 자기 일에 빠지게 될까? 널 지 키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고 자책하게 될까!” 그 강박적인 질문이 수십만 년 동안 이어져 오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 을 것이다. 가랑은 대답하지 못한 채로 라파엘이 뿜어내는 광기에 질려 눈을 감았고 꽉 감은 눈 사이로 계속 눈물이 세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적당히 해.” 라파엘의 총을 잡은 자는 비령이었다. 지금 가랑의 모습은 비령의 과거 를 자극했던 것 같다. 절대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던 지난 악몽들이 그의 머리 속을 메웠고 그것이 라파엘의 악기(惡氣)에 저항하며 그의 총 을 잡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는 떨리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파엘이 그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럼 네 놈이 대신 대답해 줄 거냐?” “관심 없어. 네 놈이 뭘 기대하고 뭘 생각하든 그리고 네 동생이 어떤 기분일지도 난 모르겠고 생각하기도 싫어. 하지만 이 여자가 두려워하 는 건 확실한 거 같군. 이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죽는 모습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호오. 그럼 네 놈이 대신 죽어 줄 거냐?” 라파엘이 고압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쳐버린 대천사의 심판 대에 오른 기분. 그를 바라보던 비령이 라파엘의 총을 잡은 손을 끌면서 자신의 이마로 향했다. 그 총, 헬카이트에 관통당하는 순간 육체는 물 론 영혼까지도 소멸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완벽한 무(無)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총을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 비령이 입을 열었다. “......맘대로 해.” 라파엘은 그런 비령의 모습을 내려보다가 그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 이듯이 말했다. 소름끼치도록 일그러진 광기. 온 몸을 난자(亂刺)당하는 듯한 두려움이 비령을 덮쳤다. “자아. 그럼 맘대로 해볼까?” 라파엘은 음미하듯이 천천히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지만 비령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 총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마르 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이로군. 형.” “......” “가랑을 건드리면 널 죽여 버리겠어.” 야수 같은 눈빛으로 라파엘은 동생 마르크를 돌아보았다. 한동안 두 형 제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숨 막히는 정적이 실내를 장악했다. 라 파엘이 자신의 총을 거두며 비령을 다시 본 것은 수십초가 지난 뒤의 일 이었다. “너도 나만큼이나 재미있는 과거를 지냈나 보군. 미치도록 즐거워서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는 과거를 말이야.” 라파엘의 광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고, 그는 옷깃을 여미며 태연한 목소리로 비령에게 물었다. “목숨을 살려줬으니 한 가지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겠지?” “......” “너도 아버지를 증오하나?” “아니. 몹시 사랑했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비령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 답했고 라파엘의 눈가에 묘한 감정이 지나쳤다. 그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깨진 잔들을 치우려는 가랑을 지나치며 밖으로 나가려다 자신을 쏘아보 고 있는 마르크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아까 내가 꺼낸 말. 나라면 이렇게 생각하겠어. 빛의 성 전 코란과 어둠의 기록 네크로노미콘을 쓴 자는....... 동일인물일 거라 고. 고야의 그림 준비해 둬라. 조만간 시그라는 놈을 죽이고 인피타르를 가져오도록 해보지. 흐흐. 어쩌면 죽는 건 내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라파엘은 떠났다. 또 다시 서글픈 사연을 가진 어떤 악령을 소 멸시키겠지. 비령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 주저앉았다 . 라파엘의 말 때문인지, 잊어버리려 노력했던 자신의 끔찍한 과거가 뒤 죽박죽이 되어 계속 떠올라 벌레처럼 몸을 기어 다니며 온몸을 물어뜯었 다. 눈앞에서 자신의 누나가 산산조각이 나 그 살조각들이 실험실 벽에 달라붙었던 그때의 기억이 마음의 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몸이 바르르 떨 려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저....... 고마워요.” 비령은 이상한 통증에 계속 찡그리는 자신의 표정을 손으로 숨기며 가 랑을 올려보았다. 그녀는 애써 웃으려고 하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너무도 가녀리고 아름다워서 이 세상에 무방비로 던져진 것 같은 모습이 었다. 그가 너무나 오랜만에 본 인간다운 표정이랄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하얀 다리에 묻은 커피를 소매로 닦아내며 계속 웃으려 고 노력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세상에서 그래도 웃어보려는 쓸모 없는 따위는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마르크도 라파엘도 어떻게 보면 똑같다. 똑같이 이런 세상을 견디지 못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미쳐버린 것이리라.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구원, 이런 세 상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작은 구원이었는데 ....... 본명조차 잊어버리길 원했던 비령은 ‘살아남는다는 것은 선해 질 기회도 되는 거잖아요?’라는 비웃음이 날 정도로 현실성 없는 말을 진심으로 꺼냈던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그 둘의 첫 번 째 만남이었다. -Blind Talk 좀 후회가 많은 편이긴 합니다만 이미 출판된 분량인데다가 그렇다고 뾰 족한 대안이 떠오른 것이 아니니 일단 그냥 올립니다. 아아 퇴마물이 되어 버렸습니다.(본래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지만-_-;) 그리고 코란과 네크로노미콘을 설정에 넣고 둘을 어떻게 공통적으로 묶 어보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나이 어린 얼치기 글쟁이의 객기라고 생각해 주세요. 사실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시스나 밀튼의 실낙원이나 러프크 래프트의 코스믹호러 소설들도 그렇고... 선대의 기록들을 자신의 글에 사랑방을 둬 자리 잡게 하고 합쳐 보려는 시도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번 노려봄직한 도전이긴 합니다만(톨킨의 설정들을 재해석하려는 많은 소설들 역시 같은 의지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확실히 저는 학식과 자료와 시간과 자세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래도 해 보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했던 것이니 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둬 볼까 합니다... 라는 말 조차 시건방진 걸. 으음. 실제 네크로노미콘에 대한 자료들은 조금 시간을 들여 국내외 사이트들 을 찾아보고 몇몇 서적들을 뒤져봤지만 아아 도무지 저마다 말이 다르고 해석이 달라서 모르겠더군요. 그렇다고 원본을 구하기는 커녕 원본이 존 재하는가 대한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니... 역시 이것에 대해서도 '소프트한 소설이니까'라는 방패 뒤에 숨을 수 밖에.-_)y-~~~~~~~~~~~ 만약 (그럴리는 없겠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분께서 제 글을 읽으시고 '아니 어떻게 마호메트가 네크로노미콘의 저자라는 거냐!!'라고 분노하 셨다면 죄송하다는 사과를 먼저 올립니다.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단 지 시기 상이나 문화권 상의 유사점이 있었던 것이고 빛과 어둠이 하나 의 존재로부터 나왔다는 위험한 매력에 끌렸던 것 뿐이니까요. 고야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평소부터 감탄하던 바가 있어 써먹었습니다. 이러다가 계속 유미주의 악마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다음 번에는 보들레르와 바이런을 써 먹어 볼까 하는... 중얼. 이번 편 소 제목 lord have mercy upon us(LorD haVe MerCIe Vpon Vs) 역시 테트라그라마톤 비스끄무리한 크로노그램(기년명) 중에 가장 유명 한 것이니까(런던 페스트를 막는 부적으로 성당에 기록되어 있는 문장. 그 자음을 로마자로 합치면 그해 년도였던 1666이 나옵니다.) 다음 번에 는 런던 악몽의 해인 1666년에 얽힌 수많은 악마적인 비화들을 어떻게 설정과 한번 연결시켜 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긴 하지만 이렇게 멋대 로 했다간 곤란. 일단 나 스스로 책임지지 못할 곳까지 가버리는 데다가 그런 음울한 음모론 따위 아무도 봐주지 않을꺼야.-_-;;; 언제나 말했지만 드래곤 레이디의 포인트는 연인의 인연 관계니까... 이미 그거 물 건너 갔다고요? 아하하. 아무튼... 지금 읽으시기엔 뒤죽박죽이지만 점 점 하나의 점으로 좁혀질 것이니까 쭈욱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해저문 어느 오후 집으로 향한 걸음뒤에 서툴게 살아왔던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그리 좋진 않지만 그리 나쁜것만도 아녔어 석양도 없는 저녁 내일 하루도 흐리겠지 힘든 일도 있지 드넓은 세상 살다보면 하지만 앞으로 나가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브라보 브라보 마이라이프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브라보 브라보 마이라이프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내일은 더 낫겠지 그런 작은 희망 하나로 사랑할 수 있다면 힘든 일년도 버틸 거야 일어나 앞으로 나가 니가 가는곳이 길이다 E-MAIL :billiken@hananet.net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 를 들으며... (아아 멋지네요 이 노래.)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3 Immortal Game 1. 자신의 숙소 앞에 도착한 비령은 눈앞의 철문에 키 카드를 넣었다. 그 리고는 짧은 비프음과 함께 작은 터치스크린에 엷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 다. 연구원들의 개인 숙소가 밀집되어 있는 정적의 복도. [2차 보안 절차를 진행합니다. 스크린에 오른손을 올려 주세요.] 라는 기계음이 영어로 흘렀다. 엉망으로 뒤엉킨 이 세상에서 아직까지 도 영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치졸한 인간 문명의 아집( 我執)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비령이 손을 놓자 곧장 그의 존재를 인식 한 기계장치가 가동되며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세 개의 실 내 램프가 자동적으로 켜지며 스프링클러처럼 미지근한 빛을 뿌렸다. 척 보기에도 60여평이 넘어 혼자 지내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런 원 룸이었다. 갈색 가죽 소파와 굉장한 규모의 전용 컴퓨터 시설, 2층 침실 로 올라가는 철제 곡선 계단, 방 구석구석을 장악한 AV시스템, 한켠에 자리 잡은 미니 바 등의 내부가 눈앞에 드러난다. 마치 특색 없는 특급 호텔의 가장 부유한 객실에 들어가는 듯한 낯설음이 느껴졌다. 감금. 이 원치 않는 호사스러움이 주는 대가는 현실로부터의 감금이리라. 사박사박 바닥에 깔려 있는 신품 카페트를 밟을 때마다 마치 서리 밭을 지나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비령은 겉옷을 벗어 소파에 던진 뒤에 미니바의 냉 동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비틀었다. 이런 분위기, 왠지 갈증을 일으킨다 . 천천히 물을 머금던 비령의 시선은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알루 미늄 케이스를 향해 있었다. ‘수석연구원 260354 전용’이라는 레터링 이 새겨져 있었다. ‘260354라....... 수인번호 같군. 호화스런 감옥에 갇힌 걸까.’ 반쯤 남은 생수 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금속 케이스를 열자 금속밴 드로 이뤄진 스위스제 태그 호이어 시계와 고급스럽지만 날카로워 보이 는 만년필 한 자루가 압축 스티로폼 속에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것들에 는 고감도 GPS(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 칩이 장착되어 있을 것이다. 사 실 그 칩을 몸속에 심어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 거다. 비령이 소 매를 걷자 하얀 팔목이 드러났고 곧 차가운 시곗줄이 뱀처럼 감겼다. 그 리고는 만년필 뚜껑을 열자 아직 한번도 잉크를 머금지 않은 펜촉이 반 짝거렸다. 크롬 빛 이리듐 펜촉의 모습은 흡사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 만 들어진 메마른 창끝을 닮았다. 비령은 위험한 의태(意態)처럼 자신의 손 가락 끝에 그것을 콕콕 찔러보다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던졌다. 감 시용 GPS 따위는 필요 없다. 어차피 이제는 자살하고 싶어도 떨어져 죽 을 절벽조차 없으니까. 과거가 항시 현재로 범람(氾濫)하여 자살조차 죄 스럽다. “안녕하세요오. 이웃집에서 왔어요.” 열려 있는 문 앞에 서 있던 물키벨이 깜빡거리는 눈으로 방 안을 바라 보며 휘파람처럼 말했다. 그녀의 숙소는 옆방이었다. ‘오프 출입금지! ’라고 휘갈겨져 있는 문이 그녀의 방문이다. 그 문을 열면 수많은 인형 들이 산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아까.” 비령은 멋쩍게 웃고 있는 물키벨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시끄러운 여자 . 인사를 받아주고 싶지만 적당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었 다. 물키벨은 머뭇거리던 비령이 곧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냥 등을 돌 린 채 자기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되요 당신?” “비령. 아니면 260354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헤헤. 난 숫자는 잘 기억하지 못해서. 비령이라고 부르죠.” 오펜바하와나 마르크와는 다른 이유로 가까워지기 힘든 남자라고 생각 하며 물키벨은 좀 떨떠름한 듯 어정쩡히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벽면 에 도드라진 간접조명램프들을 눈에 담았다. 꼭 거대한 곤충의 발광돌기 (發光突起)처럼 생긴 그 것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 다. 비령이 5분이 넘게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본 뒤였다. “내 이름은 뮬렌 키에르 벨이에요. 이상하죠?” “뮬렌....... 키에르 벨? 내 숫자만큼이나 어려운 이름이로군.” “물키벨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별명도 이상하죠?” “그런데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비령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처음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약 간은 권태로운 듯 또 약간은 경계하는 듯한 눈매가 수사슴의 모습 같았 다. “심심해서 그래요. 심심해서.” 물키벨은 바닥에 쪼그려 앉으며 꼭 호기심 많은 작은 동물처럼 비령을 물끄러미 올려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보통 끔찍할 정도로 심심하면 수 면제를 먹고 잠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버릇에 길들여진 여자이긴 했지 만 지금처럼 30분 후에 미팅이 기다리고 있을 경우에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 비령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 색의 옷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물키벨의 커다란 눈동자가 또르르 구르며 그런 그의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옷장문을 연 비령은 ‘필요하신 옷가지는 품목을 적어 서포터룸으로 보내주시면 이틀 내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발견하고는 다시 문을 닫은 뒤 물키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뭐라고 바 라고 있는 듯 그 자리에 계속 쪼그려 앉아 있었다. “1 e4 e5" 비령이 짧게 말했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물키벨이 아예 털썩 주저 앉으며 대답했다. “2 f4 exf4” “3 Bc4 Qh4+" 비령은 즉각 응수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을 - 비령은 자기 일을 하며 물키벨을 바닥 카펫에 새겨진 무늬들을 세어보며 권태롭게 주거니 받거 니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눈 메마른 대화의 나열을 기록하자면 다음 과 같다. 4 Kf1 b5 5 Bxb5 Nf6 6 Nf3 Qh6 7 d3 Nh5 8 Nh4 Qg5 9 Nf5 c6 10 Rg1 cx b5 11 g4 Nf6 12 h4 Qg6 13 h5 Qg5 14 Qf3 Ng8 15 Bxf4 Qf6 16 Nc3 Bc5 17 Nd5 Qxb2 18 Bd6 Qxa1+ 19 Ke2 Bxg1 20 e5 Na6 21 Nxg7+Kd8 22 Qf6+ Nxf6 23 Be7 그리고 프로포즈를 기다리는 듯 생긋생긋 웃으며 카펫을 쓰다듬던 물키 벨에게 비령이 마침표를 찍었다. “체크 메이트” 물키벨은 길고 격렬한 연극을 마쳤을 때처럼 얼굴에 홍조가 올라 있었 다. 비령이 키보드를 두드려 와이셔츠 세벌을 주문하면서 다시 입을 열 었다. “임모탈 게임. 1851년.” “한 수도 틀리지 않았군요. 체스 좋아해요?” 물키벨이 조금 바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말했다. 그들이 체스판 도 없이 나눈 체스 대결은 사실은 1851년에 런던에서 있었던 명대결을 복기(復棋)한 것. 사람들은 그 대결을 ‘불멸의 게임’(Immortal Game)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체스라. 한번도 해본 적 없어.” “에에! 거짓말!” “심심해서 암기해 뒀을 뿐이야. 실제로 둔다면 난 한 수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 혀를 내밀며 놀리려던 물키벨은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그럴 듯 했다. 정말 체스판 앞에 서면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 ‘폰’하 나 조차 움직일 용기가 없을 것 같았다. 마치 희망도 절망도 모조리 포 기해 버린 듯한 음성. 하지만 절대로 과거를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에 물키벨은 좀 더 대화해 보려던 시도를 뒤로 미루고 나가려고 했다. “연구미팅 27분 남았어요. 그럼 회의실에서 봐요. 응?” 물키벨은 문 앞에 붉은 눈의 소녀가 과일 접시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바 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직도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비령을 만 난 뒤에 바로 과일을 깎기 시작해나 보다. “안녀여여엉! 가랑!” “아. 언니. 안녕하세요?” 물키벨은 가랑이 들고 있는 과일 접시를 바라보며 와아아! 하면서 감탄 하는 것이었다. 웅크린 토끼모양으로 깎아놓은 사과들이나 아셰오아테(A chiote) 즙으로 색을 낸 수제 쇼콜라 케이크들. 그녀의 눈동자처럼 투명 하고 붉은 논알콜 산글리아 주스등. 가랑의 요리솜씨는 뛰어나고 또 정 성스럽기로 MSI내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물키벨이 사과 하나를 집어 입 에 물며 말했다. “비령 씨 주려고?” “예. 아까 도와주셔서.......” “흐음. 당신 이런 요리들도 암기 했어요?” 물키벨이 뭐가 떠오른 듯 계속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비령을 향해 말 했다. 비령은 고개를 저으며 엔터를 치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요리는 별로야. 만드는 것에도 먹는 것에도 취미가 없어.” “삭막하네에에.” 물키벨이 길게 말하다가 사과조각이 목에 걸린 듯 콜록 콜록 거렸다. 비령의 말에 기운이 빠진 가랑은 축 쳐진 표정으로 다시 이걸 가지고 돌 아갈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뚜벅 뚜벅 걸어오며 자신을 바라보자 접 시를 올리며 조그맣게 말하는 것이었다. “배가 고플 것 같아서요.” “삼일만이 처음으로 먹게 되는 게 케이크로군.” “아. 싫어하세요?” “모르겠어. 맛이 기억나지 않아.” 말끝마다 을씨년스러운 그는 그러면서도 접시를 건내 받아 테이블로 옮 겼다. 그는 한참동안 쑥스러운 듯이 머뭇거리다가 짧게 대답했다. “......고마워.” “헤헤.” 가랑은 귀엽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복도로 사라졌다. 아 마도 이번에는 마르크를 위한 간식을 준비하려는 것이리라. 물키벨은 여 전히 비령의 태도를 연구하듯 지켜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요리라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비령은 가랑의 과일장식을 어려운 미술품 감상하듯 바라보며 중얼 거렸 다. “왜?” “왜 이렇게 시간을 들여 만드는 걸까. 이제는 알약과 분말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는데. 이런 요리라는 것에 과연 존재 가치가 있을까.” “하지만 알약이나 분말에는 감정이 없잖아?” “감정?” 물키벨은 자신이야말로 알약광이라는 사실에 요리를 변호하는 자기 태 도가 좀 아이러니컬하긴 했지만 재미없는 남자 비령에게는 확실히 좀 말 해두고 싶었나 보다. “알약 같은 건 누가 만들어도 또 누가 먹어도 그만이야. 하지만 그 요 리는 가랑이 비령 씨를 위해서 만든 거잖아? 그러니까 말하자면 원격 커 뮤니케이션 같은 것이랄까나. 고마워요, 앞으로 잘 지내요, 라는 감정을 알약이나 냉동식품으로 전달해 줄 주는 없는 거니까 말이야.” 슬슬 말을 놓은 물키벨이 ‘조리 행위에 의한 감정 표현 이론’이라도 읊는 냥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비령이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마치 감정 따위는 전혀 모르는 기계라도 된 듯이 스스로를 연기하며. “뭐 하러 그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간단한 감정을 전달하려는 거야. 그 런 것, 오해만 생긴다고.” “헤헷. 그건 아마도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증거일 테니까. 아 늦었지 만 그럼 내쪽도 잘 부탁해. 음식 같은 건 도통 못 만드니까 말로 대신해 도 되겠지? 그리고 오프는 조심하는 게 좋아. 그 녀석,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니까. 여길 무슨 입시생 기숙사로 아나봐. 아무튼 미팅까지 25분 남았네. 그럼 바이 바이. ”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증거’, 물키벨은 어느 철학책에서 얼핏 들은 듯한 말을 남기며 슬슬 문 밖으로 나섰고 비령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광장히 정신없는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비령이 그렇게 길고 사적인 대화를 나눈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리라. '음식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확실히 지금 이 세상엔 어울리지 않는군.' 사실 가랑이 만든 요리들은 절대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펜바 하마저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당연하고 진부한 것에 대해 모두가 안 심하고 좋아한다는 것. 이런 벼랑 끝의 세상에서 예쁘게 케이크를 만드 는데 최선을 다하는 가랑의 모습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고 '안심'시키는 힘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감동이니 포근함이니 하는 것들은 만들려고도 찾으려고도 노력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럴 겨를이 없으니까.' 영혼의 문이 막혀 버린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목졸림을 당한다. 배려 니 희망이니 하는 감정같은 것은 이미 바닥나 버린지 오래. 그러니까 우 스꽝스럽게도 가랑이라는 독창성 없고 단지 헌신적인 도움 밖에는 주지 못하는 요령 없는 여자가 도리어 특이해 보이고 호감을 주는 것이리라. 그녀의 요리가, 그녀의 마음이 '구원'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평 안'은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모두가 사라지자 그는 슬쩍 케이크 위 에 놓여진 반쪽짜리 블루베리를 손가락으로 잡아 입 속에 넣었다. 3일 만에 기지개를 편 미각이 머리를 울린다. ‘허기는 육체적 습관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공허함이며 무지는 정신 적 습관의 부재에서 공허함이리라. 틀렸어. 허기를 메우는 행위를 습관 이라 말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 혹은 기계겠지.’ 비령이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나오는 구절을 멋대로 평가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습관으로 허기를 메우는 인간이라면 설혹 철인(鐵人)일 수 는 있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정말 삭막하겠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영양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서글픈 짓이리라. 인간으 로 태어난 주제에 짐승흉내를 내는 셈이니까. 비령은 손가락에 묻은 크 림을 혀로 감으며 몇 번 눈을 깜빡 거렸다. 맛있다는 기분을 느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Blind Talk 새해 복 많이 받으셨는지요. 활기찬! 세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한 편이었습니다. 온통 블레이드 런너 패러디로군요 이번 편... 임모탈 게임은 이름부터가 멋진 명체스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 고 블레이드 런너에서 세바스찬과 타이렐 회장이 두던 체스 대결도 잘 살펴보면 임모탈 게임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습니다.(물론 영화 속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60354라는 엉뚱한 번호 역시 데커드의 라이센스 번호이기도 하고. (단 노르웨이 자막판에선 26354로 나왔다고 하네요.) 그냥 잔재미입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공극어 편에서의 가랑이라는 존재는 꽤나 복고적이고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그런 전형성이 특이해 보이는 이상 한 세상 속에 그 여자를 던져 놓고 싶었던 거지만... 지금은 초반이라서 별로 느낌이 터지지 못하는 듯 하네요. 좀 더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하긴 카넬리안이라는 캐릭터가 워낙에 정신이 없고 제멋대로라서 이번에 는 조용하게...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한 캐릭터에게 다양한 인격을 심 어 놓는 것 만큼이나 악취미도 없는 것 같지만. 이번편 몇번이나 수정했습니다. 본래는 좀 심하게 오버했는데 역시 그런 건 제 스타일이 아니겠다 싶어서 수정에 수정을. 덕분에 지쳐버려서 마 지막으로 수정한 뒤에는 다시 읽을 힘이 없네요. 오탈자 있거나 문맥이 거칠어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저희 집안은 설날에 모이지 않습니다. 세배도 없고 친적도 안 모이고 그 냥 가족끼리 어디라도 가서 식사를 좀 하는 편. 제가 세뱃돈 받을 때는 모이다가 슬슬 세뱃돈 줘야 하는 나이가 되니까 안 모이는 군요. 이 점 은 좋지만... 다들 사는데 지쳐서 명절 때 모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듯 해서 쓸쓸하긴 합니다. 이제는 대단히 쓸쓸할 것도 없고 그냥 조금 쓸쓸... 아 그리고 '공극어'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대답해 드리자면 공극어는 화석 물고기 실라칸스입니다. 몇십억년 동안 진화하 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전대미문의 물고기... 그 물고 기에 대한 자료를 읽고 있으면 뭔지 모르게 서글퍼 지더군요.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billiken@hananet.net 마릴린 멘슨&메탈리카의 SPAWN을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4 So Sad Alone 1. 비령이 MSI에 들어온 뒤부터 프로젝트 테시오스의 진행 방향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는 것은 오펜바하 조차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물론 비령이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 던 가능성을 모색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그가 연구소에 온지 며칠만에 MSI는 생체 아키텍쳐와 관련된 그의 재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 었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정기 회의를 마치고 아이디어들을 휘갈긴 메모지들을 잔뜩 손에 든 채 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비령은 문을 열자마자 방 안 한가운데 서너 개 의 큰 상자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포터룸으로부터 물품들 을 물건을 주문하지 이틀 후의 일이었다. 상자들 앞으로 걸어간 그는 하 얀 연구 가운을 벗어 소파 위에 던진 뒤에 상자들 위에 놓여 있는 문서 를 집어 들었다. 문서의 내용은 이하와 같다. [주문서 내역] 1.L사이즈 백색 셔츠 3벌 2.아르마니 다크 그레이 슈트 3세트 동 회사의 네이비블루 셔츠와 블랙 실크 넥타이 포함 3.페라가모 블랙 슈즈 5켤레 4.연구 가운 10벌 5.아스피린 500mg 1000정 6.듀퐁 18590 라이터 1개 7.다비도프 클래식 시가레트 100갑 9.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낭송 디스크 10.스페인 요리 관련 영문 서적 40권 끝 이상 주문 물품에 대한 전달을 완료했음을 알림 “.......정말 올지는 몰랐는데.” 비령은 쪽지를 테이블에 놓고는 엉뚱한 연구 리포트라도 감상한 듯 머 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그는 요청문에 ‘하얀 셔츠 세벌과 담배를 포함 한 연구소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들 그리고 요리책 몇권’이라 는 참으로 무성의하고 모호한 문장을 기록해서 보냈건만 서포터룸에서 '알아서’ 준비해서 보내준 것. 사실 요청물품은 그것이 금지품목이 아 닌 이상 어떻게든 구해줘야 하는 서포터룸으로서는 이 세상에 남아있을 지도 모를 희귀품들만 골라서 주문하는 악취미 오펜바하에게 질려 있었 기 때문에 비령의 이런 주문에 대해서는 너무 고마워서 감격할 정도로 구하기 쉬웠던 것이다. 비령은 무료한 손짓으로 뜯기 좋게 포장된 상자 들을 개봉하며 내용물들을 차례차례 늘어놓았다. 셔츠, 양복, 담배, 책 가지들....... 마치 거대한 지그소우 퍼즐들을 늘어놓는 듯 하다. '어쩐다.' 비령은 심란한 시선으로 적막한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정리정돈이라는 습관에서 멀어져 버린 것 같다. 이 곳에 와서 단 한번도 청소하지 않은 이 거대한 방은 이미 비령이 휘갈긴 쪽지들과 연구 자료 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이번에 도착한 물품들이 그 혼란의 도가니 에 일조한 셈이었다. 이대로 한달 쯤 가면 이 60여평의 방 전체가 음산 한 연금술사의 밀실 비슷하게 변해버리지나 않을까. 청소를 해야하나 말 아야 하나 한참동안 궁리하던 비령은 결국 양복 세트를 들고 욕실로 들 어가 버렸다. '다음에 하지 뭐.' 양복은 질색이다. 연구소 밖으로 나갈 일도 별로 없는데 양복을 준다는 것도 악취미고 또 이런 호사스러운 옷을 입는다고 연구가 더 잘 될 이유 도 없다. 단지 MSI를 지원하는 강대국들의 고위 관료들 앞에서 보고를 해야 할 때는 꼭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유치찬란한 규칙 덕분에 모든 연 구원들에게는 해당 슈트가 제공되는 것뿐이다. 특히 오펜바하에게는 꼭 교복 같은 남색 상의와 반바지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한동안 연구의지를 잃어버렸을 정도. 광대복 같아, 라고 비령이 중얼거리며 입 고 있던 얇은 티셔츠를 벗었다. 사실 지금 당장 양복을 입어야 할 이유 따윈 없지만 한편으로는 '양복입어 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라는 요상한 결론이 도출되어 버렸다. 청소하기 싫다는 투정이라고나 할까. 흐음. 욕실의 커다란 거울 속에 비춰진 조금은 여린 나신에는 느릿한 고문을 당한 듯한 엷고 창백한 상흔이 물결처럼 퍼져 있었다. 비령에게는 과거 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낙인과 같은 상처. 사람들은 그것을 '악령이 스 쳐간 자리'라고 부르며 악령화 된 영혼이 인간의 몸을 관통해 지나갔을 때 생기는 상처라고들 말한다.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비령은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보는 듯한 얼굴로 거울 속의 자신을 지긋 이 바라보았다. 눈 그림자에 가려 있는 동그란 남청의 눈동자와 항상 조 금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그리고 얇은 턱 선을 타고 내려오는 뽀얀 목덜 미에는 누군가가 목을 졸랐던 흔적 같은 창백한 상흔들이 흐릿한 문신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비령의 무의식 적인 손짓이 독한 화장을 지우려는 의지처럼 그 상흔들을 몇 번이고 문질렀지만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도 사 라지지 않는다 죄인이라는 낙인처럼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뭐하고 있는 거지 나?’ 순간 표정에 금이 갔다. 그리고 아련했던 공포심이 시귀(屍鬼)가 되어 바닥에서 솟아 오르며 그 썩어 문드러진 손으로 비령의 발목을 잡아챘다 . 왜 아직 살아있냐고 외치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고속으로 머리 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고 - 타는 듯한 마음의 격통. 짧은 비명을 뱉으며 비령 은 떨리는 손을 뻗어 욕실의 불을 껐다. 시체들의 악취가 밀려든 듯한 욕실은 순식간에 뿌려진 어둠과 정적으로 정화되었다. “하아, 하아.” 고막을 도려내는 영혼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던 욕실에는 이제, 스르르 주저앉는 육신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때 찢겨진 자신 의 마음이 조금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지겹도록 반복해서 느꼈 다. 2. 무릎까지 살짝 가리는 반바지에 헐렁한 셔츠까지 입은 통에 안 그래도 동안의 모습이 아예 연구소 견학 온 소년쯤으로 보이는 오펜바하는 빠른 걸음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연구소 내부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예 의 회의에서 완성시키지 못한 자신의 보고서 덕분에 비령의 이견에 반박 하지 못했던 것이 참을 수 없이 분했는지 그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신 의 방에 틀어 박혀 완성시킨 보고서 뭉치를 손에 들고 비령을 찾아다니 고 있었다. 비령을 보자마자 ‘승부다!’라고 외칠 듯한 얼굴. 결국 오 펜바하는 비령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곳으로 뛰어 들었다 . “흥! 여기 숨어 있었나 동양청년! 냉큼 이리와서 오펜바하님의 이 완 벽한 보고서를 찬양할 준비나....... 얼레?” 자랑스럽게 보고서를 들이대며 외치던 오펜바하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 진 광경을 보자마자 황당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뒤죽박죽으로 옷가지와 서류들이 널려 있는 방 가운 데의 상자 위에 주저앉아 있는 슈트 차림의 비령이 재떨이도 없이 담배 를 물어 피우고 손에는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정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는 낭랑한 목소리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중 전생(前生 La Vie Anterieure) 편을 원어로 낭송하고 있었다. 즉 이 건 도저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그런데도 비령이란 녀석이 자 신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책만 바라보고 있자 오펜바하가 결국 솜털 같은 눈썹 밑에 자리 잡은 커다란 노란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다 들으 라는 듯 퉁명스레 소리쳤다. “쳇! 양복 입고 악마주의 시를 들으며 요리책을 보시다니 요상한 취미 시기도 하셔라!” 비령은 그때서야 책을 덮으며 흘낏 오펜바하를 바라보았다. ‘남이사’ 라는 조금은 뻔뻔스러운 표정. 사실 그로서는 퍼즐 박스 같은 상자를 열 어 나름대로 퍼즐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식도 끝에 걸려 있는 바늘처럼 계속 자신을 찔러오는 과거를 잠시나마 잊어버리려는데 모습이 좀 엉뚱 하고 흉하면 또 어떤가. 보들레르의 음산하지만 아름다운 ‘전생’의 시 구들이 비령이 다음 책을 집어 드는 그 순간에도 계속 낭송되고 있었다. 햇빛이 바다를 수천의 불꽃들로 물들이던 널따란 회랑들 아래서 나는 오래 살아왔다, 저녁이면 그 곧고 으리으리한 큰 기둥들이, 현무암 동굴을 방불케 하던 그 곳에서. “에이이! 뭐야 이 궁상맞은 시는!” 오펜바하는 웅얼웅얼 머릿속을 울리는 프랑스어에 짜증을 부리며 비령 앞에 성큼 성큼 다가와서는 장문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아마 연구소 내 에서 가장 열심히 연구에 임하는 자세만으로는 오펜바하를 이길 자가 없 을 것이다. “자아! 어서 보고 감탄하시라!” “너...... 이거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냐?” 비령이 떨떠름한 얼굴로 콧대 센 독일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 시 스페인 요리들이 담겨 있는 요리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채점은 직접 해라.” “뭣이이이!!” 이것으로 비령이 오펜바하의 천적이 된 셈일까. 오펜바하가 물키벨의 천적인 것 마냥. 오펜바하는 절대로 승부를 포기할 수 없다며 독일어로 잔뜩 휘갈겨져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골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자신 의 보고서를 계속 들이대고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흥! 반박할 구석이 없으니까 피하는 거겠지? 비겁자!” 꼭 남의 도장 찾아와서 ‘여기 관장 나와라!’라는 식으로 도발하는 꼴 이었지만 비령은 그 도장 깨기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보들레 르의 시를 들으며 영혼 순환 메커니즘에 대한 논쟁을 할 만큼 유머감각 이 풍부한 자도 아니었다. 비령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반쯤 타버린 담배를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탄산수 캔 속으로 집어넣었다. 치이익 소 리가 들려왔다. 그는 책을 탁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들어. 오펜바하. 첫 번째로 나는 지금 앞으론 내 방 문을 잠가두 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어. 시끄러운 독일 꼬마가 멋대로 쳐들어와서 내 독서를 방해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 “꼬마 아냐!! 난 이미 16살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난 독일어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라. 읽지도 못하는 보고서 같은 거, 나한테는 문서가 아니라 그림이니까 나하고 대화하고 싶으면 번역해서 다시 와." “쳇. 뭐야. 독일어도 모르다니 무식하잖아.” 오펜바하가 좀 치졸한 승리감에 젖어서는 빈정빈정 거렸다. 뭐라 생각 하든 관심 없다는 투로 눈가를 찌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린 비령이 문득 생각난 듯 묻는 것이었다. “혹시 한국어 알아?” “몰라!!” “무식하군.” 승패 역전. 비령은 정확한 독일어 발음으로 ‘무식해’라고 대답해 줬 기 때문에 오펜바하의 분노는 두 배로 증폭되어 버렸다. 역시 공격에 강 한 자는 방어에 약한 법이다. 오펜바하의 얼굴이 처음으로 빨개지며 당 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오도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이 자식, 놀렸겠다!!!”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야. 써먹지 못하는 지식 따위, 자신을 가두는 감옥만 될 뿐이지. 차라리 무지한 자는 좁은 공간 내에서라도 자 유로롭지만 지식으로 우월성을 느끼려는 짓은 답답하고 천박할 뿐이야.” “자, 잘났다!!” 비령이 좀 복잡한 듯이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이 녀석은 이곳을 대입 기숙사쯤으로 알고 있다고 했지? 가랑, 물키벨과는 또 다른 의미로 만나 면 말이 길어지는 녀석이다, 라는 판단이 빠르게 스쳤다. 긴 대화에는 취미도 재능도 없는 그는 심란하게 어지러운 자신의 방 한 구석에 오펜바 하를 버려두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회사원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근무시간과 퇴근시간 같은 것이 정해져 있지는 않 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기습적으로 연구 과제를 논박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비령과 오펜바하는 서로 분야가 달라서 서로 꺼내는 말의 반의반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부터 건전한 논박의 대전제 가 성립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논쟁을 하겠다는 건 이미 학문적인 열의 가 흘러넘친다며 다독거려주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령 은 그것을 난데없는 광기라고 단호히 정의해 버리고는 문 밖으로 뛰쳐나 갔다. “어딜 가는 거야!” “네가 없는 아무데나.” “기, 기다려!” 비령은 이 방을 떠나기 전에 상자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아스피린을 가 지고 갈까 하다가 그냥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팍 찔러 넣은 채로 방을 나섰다. 그러나 의외로 끈질긴 오펜바하의 표적이 되어버린지라 오펜바 하 역시 쪼르르 그를 따라 나서며 알아들을 수가 없는 독일어로 뭐라고 잔뜩 시끌 시끌 거리는 것이었다. 덕분에 허망하게 비어 버린 비령의 방 에서는 보들레르의 ‘전생’만이 마지막 구절을 낭독하고 있었다. 나를 여위게 만들던 그 괴로운 비밀을 파고드는 행위만이 단 하나의 정성이었던, 향내 온통 스며든 벌거숭이 종들의 한 복판에서. -Blind Talk 아르마니라... 예전 회사일 때문에 우연히 굉장히 비싼 자동차를 타고 굉장히 비싼 동네인 압구정 로데오에 가서 또 굉장히 비싼 술집에 간 적 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는 분 중에 하나가 양복을 입고 와서 '이게 아르 마니야.'라고 하더군요.(뭐 결국 아르마니 익스체인지였지만...) 무지하게 웃겼던 것이 하필이면 그 술집이 힙합 분위기 술집였는데 양복 이라... 덕분에 '아르마니 = 뭔가 알 수 없는 옷'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버렸습니다. 물론 그 힙합 술집 역시 hiphop bar라는 굉장히 괴상한 테 마 주점이었는데 사회를 비판하는 강렬한 힙합음악들이 흘러나오면서 스 테이지도 없고 모조리 값비싼 인테리어들에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온 사 람들 역시 고급 소파에 앉아 무지하게 비싼 양주들을 마시고 있는 알 수 가 없는 곳. 그곳에 있으면서 계속 '부루조아 힙합이라, 대단한 악취미 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색없는 무국적을 이국적이라고 주 장하는 바보들은 질색이라서요. 그때의 이미지 덕분에 비령에게 아르마 니와 페라가모 같은 잘난 명품들을 던져주게 된 것인지도... 아르마니 팬들이 계시다면 미안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니까요. 듀퐁 18590 라이터는 그 비싼 듀퐁 라이터 중에서도 굉장한 고급축에 들 어가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라이터 수집이 취미지만 도저히 그걸 살 배짱은 없어서 그냥 소설에서 소원 풀어 봅니다. 그리고 듀퐁은 딱 한개 가지고 있지만 역시 콜렉션으로는 좀 어울리지 않아요. 차라리 예물이나 귀중품에 어울리지.-_-; 다비도프 클래식 담배는 몇년전까지 국내에 소량씩 들어오고는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담배 맛은 그저 그랬지만 일단 다비도프 답게 케이스가 예쁘고 특히 다비도프 매그넘이라는 괴물 담배는 97년도 쯤에도 한갑에 물경 3천원이라는 살인적인 가격으로 유명했죠. 앞으로는 한갑에 몇만원짜리 영국제 수제 시가레트 같은 것이 들어온다 는데 런던 담배 거리에 대한 자료를 읽은 뒤부터 궁금해지긴 했지만 역 시 그 돈 담배쪽에 쓰고 싶으면 차라리 아바나 시가 같은 것을 사서 경 험해 보는게 이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같은 난항 때 도 리어 명품이나 한정품이나 고가품하는 것들이 더욱 많이 팔리고 있는 현 상이 웃기기도 하고. 보들레르의 시는 최근 좋아하게는 되었지만 당연히 저는 불어 모르기 때 문에 본래의 뉘앙스는 알 리가 없고 위의 번역문들도 웹사이트에서 어떤 분이 번역하신 것을 제가 조금 손을 봐서 올린 것입니다. 그 분께 고맙 다는 메일을 보내긴 했지만 좀 뻔뻔한 것 같기도... 저는 외국시에는 거 의 문외한입니다. 아무튼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MAIL : billiken@hananet.net 이현우의 후회 를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5 Germanic Goblin 1. 뒤늦게 말하는 설정이지만 마드리드 연구소 MSI는 사실 마드리드 내부 에 있는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니었다. 메세타 고원에 위치한 마드리드 자체의 해발이 646 미터로 유럽 수도 중 최고(最高)라서 연구소가 자리 잡기에 여러모로 불합리한 점도 있었고 1942평방미터 밖에 안되는 시가 지에 건축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MS I는 외각 마드리드 자치주 너머에 자리 잡게 되었고 마드리드 중심부와 는 긴 도로가 연결 되었다. 물론 연구소 주변에 전용 비행장들과 엄중한 경계태세의 다국적군의 주군기지가 밀집되어 있는 것도 말할 나위도 없 다. 중세로 말하자면 거대 요새 도시와 비슷한 조감도(鳥瞰圖)를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전대미문의 천문학적 연구비용을 지원해야 하는 통에 정부요인들은 MSI를 ‘황금을 태우는 소각장’이라고 부르며 혀를 내둘 렀지만 그래도 MSI에 투입되는 모든 인력과 물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공개로 이뤄지는데다가 오직 MSI에 관여하는 10여개 강대국의 기관총 책임자들만이 MSI 관련 예산을 조율할 수 있다는 초법적인 철칙이 지배 하는 무소불위의 연구기관이었던 것이다. “흥. 그렇다고 그 비굴한 돼지들이 우리를 믿고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 야. 우리 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믿어주는 척 하고 있는 것 뿐이지 .” 비령의 뒤를 벌써 두 블록 째 따라다니고 있는 오펜바하의 독설은 어느 새 이 연구소 MSI를 설립한 자들을 향해 있었다. 그는 강대국들의 지도 자를 서슴없이 ‘돼지들’이라고 빗대며 적대감을 들어냈다. 연구소의 직원들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는 동양계 청년 과 그의 뒤를 계속 쫓으며 사나운 독일어조로 정신 사납게 떠드는 금발 의 소년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엄숙한 연구소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다음 블록으로 가는 문을 열던 비령이 죽 어라도 떨어지지 않는 오펜바하에게 결국 짜증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 말이야!” 기가 막혔다. 아무리 과묵한 비령이라지만 예수 부처도 아니고 거의 이 십여분을 넘어가는 일방적 언어 공격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펜 바하는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린 비령을 보고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 비령이 마음에 든 것일까. 빙글 웃으며 계속 입을 여 는 오펜바하의 입에서는 친절하시게도 영어가 흘러나왔다. “이 연구소 주변에 진치고 있는 군부대들 본 적 있어?” “이곳에서 들어오면서 본 적 있는데 그건 왜.” 비령은 이 연구소로 ‘잡혀오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거대한 군 시 설들을 봤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저마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독일 등등의 국기들이 걸려 있어 꼭 만국 박람회장 같았던 것으로 기억 한다. 그것들은 당연히 이 연구소를 보호하는 군대들일 것이리라 느끼며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펜바하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없는 무기가 없는 전 세계 병기 집합소 같다고. 모르긴 해도 핵무기 도 있을지 몰라. 연구소 하나 지키는 것 치고는 너무 엄청나다고 생각하 지 않아?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믿을 거야.” “그런가.” 군사에는 관심이 없던 비령이었지만 오펜바하가 괜히 불안심리 조성하 려는 건 아닌 듯해서 계속 들어주기로 했다. 오펜바하가 조심스럽게 말 했다. “이 연구소, 나는 만마전(漫魔殿)이라고 생각해.” “판데모니움(pandemonium)?" 오펜바하가 꺼낸 그 비유는 아마 MSI에게 붙었던 별명 중 가장 악랄한 것이리라. 지옥의 수라장(修羅場)이라는 의미의 판데모니움에 살고 있는 자들은 서로를 증오하는 악마들뿐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MSI는 강대국들이 어쩔 수 없는 공동의 목적으로 뭉쳐서 만들어 낸 바빌론의 성탑이야. 신을 찌르기 위해 세워진 죄업의 지구라 트(ziggurat)랄까.” 사실 이런 말은 농담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처벌감이었기 때문에 비령 은 슬쩍 주변을 훑어보았다. 오펜바하는 그런 것 상관없다는 듯이 마치 불길한 예언자처럼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구소 밖의 군부대가 사실은 이 연구소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겠지?” “뭐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어.” “순진하시군. 우리가 자신들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한다면 그들의 총 구는 당장 우리를 향해 돌아가게 될 꺼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만이 아니지.” “.......” “결국 이 MSI도 그 자체로 위험하고 강대한 힘이야. 지금의 연구만으 로도 사상 최악의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또 모두다 이 힘을 독식하 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누가 먹는 것도 원치 않는 거야. 그건 이해하겠 지?” “그래서?” “결국 강대국들의 공통 목적이 사라지는 순간 지금의 이 불안한 균형 이 깨지며 전쟁이 일어날 거야. 당장 연구소 주변의 대규모 부대들 역시 결국 서로를 감시하는 목적이니까. 책임지지도 못할 힘을 서로 차지하려 고 서로를 찔러 죽일 것이 뻔 해. 인간의 악날한 욕망이 응축된 중심지 가 바로 여기야. 내가 신이라면 바빌론에 했던 것처럼 똑같이 징벌을 내 려 마땅한 곳이지.” 확실히 좀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가설이긴 했지만 비령에겐 꽤 그럴 듯 하게 들렸다. 결국 인류 전체가 궁지에 몰려 버린 지금에 와서도 결국 누구도 총을 놓지 않고 있으니까. 말세다 말법의 시대다 신의 징벌이다 소리치면서도 결국에는 인간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오펜바하 역시 그 광 기의 중심에서 살아오면서 견딜 수 없이 불안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그 역시 천재든 뭐든 간에 아직은 성인보다는 소년에 가깝다. 미쳐버린 현 실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서 오펜바하는 항상 모든 것에 투정을 부리며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어느새 다가온 광기에 먹 혀 버리니까. 오펜바하는 그 앳된 얼굴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알아들 을 수 없는 독일어로 뭐라고 혼잣말을 읊다가 갑자기 정말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눈을 번쩍 뜨며 비령의 팔을 잡아챘다. “앗! 잊고 있었다! 내 보고서 보라니까!” “크윽!” 그리고 다시 한번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역시 아직은 어린애에 가깝다. 4. 오펜바하가 불평불만을 달고 살았다면 물키벨의 전매특허는 지독한 불 면증이었다. 오펜바하의 말을 빌리자면 '못생긴 인형들의 숲'이라고 불 리는 물키벨의 방에서도 그녀는 하루고 이틀이고 자주 잠들지 못하곤 했 다. 결국 지금도 이틀 동안 한숨도 못자다가 회의를 끝내자마자 수면제 를 잔뜩 삼켜 버리고는 휴게실 소파에 웅크린 채 두꺼운 책을 껴안고 잠 든 상태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도주하던 비령이 도착한 곳이 휴게실. 물 론 집념의 화신 오펜바하가 그의 뒤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었다, 라고 묘사하자니 꼭 마라톤 경기 중계 같다. 아무튼 지치지도 않고 비령을 뒤 쫓던 오펜바하가 잠들어 있는 물키벨을 발견하더니 걸음을 멈추고 특이 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라고 묘사하자니 이건 또 동물 다큐멘타리 같다. 어쨌든 지금 잠들어 있는 물키벨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동화책을 읽다가 살포시 잠이 든 귀여운 공주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 지만 실은 24세의 키 작은 천재 처녀가 뇌세포를 태워버릴 정도로 어려 운 물리학 서적을 읽다가 약에 취해 이틀 만에 잠들어 버렸다, 라는 것 이 쓸쓸한 현실이다. 오펜바하는 그런 그녀의 얼굴로 손가락을 옮기며 느닷없는 모닝콜을 시작했다. “후딱 일어나세요 뮬렌 양.” “뭐, 뭐하는 거야 너?”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비령. “휴우. 대체 이 여인네는 어쩌자고 몸도 허약한 주제에 자꾸 여기서 자는 거냐고.” 악취미 소년의 일면 자상한 부분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비령이 보기에 는 그 자상함의 표현방법이 글러 먹은 것 같았다. “으음......... 으응.” 오펜바하가 그녀의 코를 쥐고 놓지 않자 잠에 빠진 그녀는 눈썹을 찡그 리며 괴로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도 오펜바하는 태연하게 오똑한 코를 잡은 손가락을 놓치 않고 있었고 결국 물키벨은 물에 빠진 듯 두 팔을 버둥거리며 처절하게 몸부림칠 정도가 된 것이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냐, 라고 비령이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오펜바하가 말하는 그 돼지’들이 지금 이런 꼴을 봤다면 당장 지원 끊어버리고 감방에 쳐 넣 어 버렸을 거다. “꺄아아아악!” 결국 숨이 막혀 발버둥치던 물키벨이 소파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는 불 상사까지 이어져 버렸다. 악날한 장난에 말려들어 굴러 떨어진 물키벨도 우습지만 그걸 보고 자지러지게 웃는 오펜바하나 허탈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비령도 죄다 끈끈한 팀워크를 자랑하는 모범적인 연구원들의 표본 하고는 태양계의 끝에서 끝만큼이나 거리가 있어 보인다. 차라리 괴짜들 의 기숙사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정도. “으응? 어? 얼레?” 여전히 반쯤 잠에 빠져 있는 물키벨이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주변 을 두리번 거렸다. 오펜바하에게 잡혔던 코가 빨개진 상태로 뭐가 뭔지 정신을 못 차리며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다면 귀여운 것이겠지만 슬슬 비 령과 오펜바하를 번갈아가며 바라본 그녀의 표정이 굳어져가기 시작했다 . 모른 척 하며 고개를 돌린 오펜바하를 향해 곧 찢어지는 물키벨의 고 함소리가 작렬했다. “오, 오프!! 또 이런 짓을!! 나 이틀 만에 겨우 잠든 거란 말이야앗!” “또 배터질 정도로 수면제 삼켰겠지. 그건 수면이 아니라 마취야.” “잠 다 깨버렸잖아! 우아아아아악!” “자자 그만 뚝 끊치시고 여기 여기.” “뭐, 뭐야 이건.” 오펜바하가 건낸 의문의 종이 뭉치를 건내 받은 물키벨은 의아한 얼굴 로 안경을 꺼내 썼다. 오펜바하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쫙 펴며 말했다. “그건 바로 이 세계를 위기에서 구할 이 오펜바하님의 보고서다. 어서 날 숭배하도록!” “......” 보고서를 바닥에 떨군 물키벨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동시에 입가를 씰룩 였다. 이 따위 거 때문에, 이틀 만에 겨우 겨우 만들어 낸 자신의 단잠 을 방해한 이유가 결국 이딴걸 자랑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천재 처녀의 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고했다. “다,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흥! 너도 독일어는 모른다는 어설픈 변명으로 피할 셈이냐!” “너 때문에 독일어 싫어진지 오래야! 그러니까 냉큼 사라져엇!!” 물키벨은 빽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가 필사적으로 잠들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오펜바하를 향해 체스 말들이 비수 처럼 날아들었겠지만 이번에는 비령에게 이런 모습 들킨 것이 창피했는 지 얼굴부터 목까지 붉게 달아올라서는 소파에 얼굴을 팍 묻어 버린 상 태. 그러나 오펜바하는 홈리스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수면습관이 영 맘 에 안 들었나 보다. “에이. 여기서 자지 말라니까. 다 큰 처녀가 민망하게스리." “방해하지마! 방해하지마! 제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라고 이 독일 고 블린아!” “뭐라고 이 핀란드 드워프가!” “닥쳐! 베를린 꼬맹이!” “시끄러워! 헬싱키 난쟁이!” 훗날 대지와 바다를 지배하는 절대적 용이 되는 두 남녀는....... 아무 튼 무지하게 치졸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할 말을 잃은 비령은 한시 라도 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아스피린을 꺼내 먹고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한창 전쟁에 가까운 독일 소년과 핀란드 처녀의 언쟁이 극에 달 하고 있을 때 큰 키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뮬렌 키에르 벨. 네 몸은 연구소의 재산이다.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처벌하겠다.” 서늘한 어조의 명령이 들려오자 물키벨은 조금 겁을 먹은 얼굴로 비틀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굉장한 직위의 누군가를 만나고 왔는지 아니 면 장례식장에 갖다온 건지 검은 슈트로 몸을 감싸고 있는 마르크 테싱 이었다. 오펜바하 역시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아마 이 연구소 내에서 그가 피하고 싶은 유일한 자는 연구소장 마르크뿐일 것이다. 항상 얼음 같은 눈동자 뒤에는 분명 깊이를 알 수 없는 광기가 숨어 있다고 오펜바하는 그를 평가하곤 했다. 아무런 감정도 잡히지 않 는 메마른 시선으로 비령을 바라보던 마르크가 다가와 얇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우겠나?” “연구소의 재산인 내 몸을 생각해서 사양하겠어." 가벼운 빈정거림. 오펜바하와 물키벨이 묘한 표정으로 비령을 바라보았 지만 마르크는 조용히 불을 붙일 뿐 별 반응이 없다. 엷게 연기를 들이 마시던 마르크가 그 시리도록 공허한 눈동자로 비령을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Blind Talk 사실 이삼일 동안 잠을 못 이루는 병은 차라리 신경쇠약이라면 모를까 불면증과는 거리가 먼 것 같네요. 저도 좀 불면증이 있는데 확실히 밤에 는 잠이 잘 안 옵니다. 단 낮에는 누우면 자요. 버스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다가도 잠들어 버림... 어? 이 정도면 불면증이 아니라 수면증, 그것도 아프리카 수면증이 아닐까!!(그럴리가 없겠지...) 아무튼 물키벨은 수많은 정신장애들의 온실인데 이번 병은 불면증이라기 보다는 수면장애라고 말하는 편이... 흐음 모르겠군.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hananet.net 카펜터즈의 We've only just begun을 들으며... [ 드래곤 레이디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6 a Lie Of a Liar 1. 극소수의 수석 연구원들을 위한 휴게실은 마치 특급호텔의 귀빈 전용 라운지마냥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오펜바하는 ‘아무리 화려한 비단으로 숨기려 해도 도살장은 도살장일 뿐!’이라며 특유의 성격을 드 러내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베르사유 궁을 재현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연구시설의 휴게실치고는 입 벌어지는 수준을 자랑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르크가 비령에게 할 말이 있다며 데리고 간 곳은 하필이면 아 늑한 휴게실이 아닌 MSI의 중심부, 기밀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 던 것이다. “여기는 무슨 볼일이지?” 거대한 실험실 전체를 장악한 수많은 회색빛의 기계장치들. 밀림 속의 야수들처럼 어둑한 실내 곳곳에서 창백한 빛들이 점멸하며 비령과 마르 크를 노려보는 듯 하다. 이곳이 위험지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적색 램프 의 광린(光鱗)이 흘러나와 비령의 얼굴을 감쌌다. 괴이한 기계적 퇴폐성 이 웅웅거리는 낮은 소음에 묻어나 귓가를 괴롭힌다. 모니터 속에서 어 지러이 휘청거리는 알 수 없는 그래프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숫자 들의 무리가 사람들에게 ‘거짓된 진리를 믿어라’라며 강요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편집증적 억측일 뿐일까. 마르크가 말했다. “LX063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싫은 말을 꺼내는군.” "이 연구소에서 쓰이는 소모품 LX063의 하루 사용량은 약 1천개야. 일 주일에 한번씩 후원국들로부터 공급받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비령이 수려한 외모를 찡그리고는 거대한 용광로를 닮은 기계장치를 바 라보았다. MSI에서 사용하는 물품 기호 중에 LX063는 프로젝트 테시오스 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소모품 중 하나지만 모두 다 언급하 길 꺼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LX063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인 간’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나 담담하게 말했다. “싫지만 현실이야.” “광기를 현실로 포장하지마.” ‘살아 있는 인간’ LX063 중 남성은 LX063g이고 여성은 LX063a로 분류 된다. 국가나 나이, 신체 상체에 대한 세부 분류는 좀 더 복잡한 기호를 요구하지만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LX063이 어떠한 실험에 어떤 방 법으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확실한 건 LX063라 는 딱지가 붙어 MSI에 온 인간 중 다시 이 연구소 밖으로 나갈 수 있었 던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이 소모품으로 쓰 인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한 적은 없고 동의 받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다. 마르크가 말했다. “결국 너도 이 광기에 동참하고 있는 거잖아. 예전에 네가 있던 곳에 서도 그랬듯이.” “내 과거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기로 했을 텐데. 그리고 내 앞에서 어 줍잖은 고해성사를 할 생각이라면 난 이만 가겠어.” 눈가를 떨고 있는 비령이 차갑게 말했다. 이곳은 24시간 거대 냉각기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슈츠 차림으로 서 있기에는 지독하게 추운 곳이다 . 누가 그랬지? 지옥의 끝에 존재하는 것은 불구덩이가 아니라 모든 걸 얼려버리는 얼음산일 것이라고. 비령을 바라보는 마르크의 숨결이 하얗 게 퍼지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가랑 때문이다.” “그 여자?”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어떤 경우라도 가랑에게 LX063에 대 해 말하지 마라. 죄업의 기름을 뒤집어쓰는 건 우리들만으로 족하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면죄부를 사고 싶은 거냐.” “맘대로 생각해.” “흥. 걱정하지마라. 난 그런 악취미 없어.” 비령은 혀를 찼다. 말하라고 강요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살인마이고 여기는 도살장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어. 미안해.’라고 밝힐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고 또 그런 역겨운 정당화를 이해해 주길 바라지도 않고 그런 짓을 한다고 자신의 괴로움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 붉은 눈의 소녀를 지탱하는 힘이 기분 좋은 환상이더 라도 좋다. 잔인한 현실의 벌판 위에서 벌벌 떨고 있을 바에는 죽는 순 간까지 따뜻한 환상 속에서 착각하고 있는 편이 낫다. 괴로움을 의무라 며 강요받을 필요는 없는 거다. 추위 속에 굳어오는 몸을 풀며 밖으로 나가는 비령이 자조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체를 쌓아 그것으로 탑을 만들어....... 그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 신을 찔러 죽일 셈이면, 나는 차라리 그 시체들 속에 있겠다.” 비령이 빠져나간 거대한 중심부에 홀로 서 있는 마르크는 한참 동안 자 신이 만든 이 연구소의 심장을 둘러보며 서 있었다. 지옥좌(地獄座)의 가시왕관 따위 원치 않았다. 아버지 알베르트가 쌓아 놓은 이 잔인한 왕 국의 권좌를 이어받았을 뿐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 망치고 싶어도, 그 시체들 속에 남고 싶어도 자신은 이미 바벨탑의 우두 머리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마르크는 알고 있었다. “세상 어떤 누구는 LX063이 아닐까." 누구는 예외가 아닐까. 마르크의 말대로 인간이 소모품이 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의 일일지도 모른다. 고문기구처럼 조여 오는 양복의 단추들 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2. 마르크와의 대화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비령이 휴게실에 혼자 앉아 있는 가랑을 만나게 된 것은 불편한 우연이었다. 커다란 휴게실에는 감 색의 교복을 입고 있는 가랑이 홀로 앉아 있었다. 비령의 눈에 얇은 목 덜미를 감싼 하얀 교복 셔츠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와아! 양복 멋지네요?” 가랑은 노트를 펼쳐 놓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 나치는 비령을 보고는 굉장히 반가워하며 손을 살짝 흔들어 인사했지만 비령은 모른 척 지나가려 했다. 뭔지 모를 부담감을 주는 여자다. 가까 이 있으면 자신마저 현실감각을 망각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러니까 말하자면, 어두운 독방 속에 한참 동안 있다가 갑자기 밝은 빛을 쪼인 기분 이랄까? 자꾸 빛이 들어오니까 눈이 아프고 보기 싫은 것까지 비춰 버린다. “저......” 의외로 적극적인 여자였다. 시선을 피하며 지나가는 비령의 옷을 잡으 며 올려보는 통에 비령은 떨떠름한 얼굴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좀 도와주세요.” “......?” 가랑이 좀 부끄러운 듯이 웃으면서 가리킨 것은 자신의 노트였다. 그러 니까 그건 그녀가 학교에서 가져온 수학 문제들이다. 의무교육이라는 것 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런 시대에 학교나 숙제 같은 전 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에 몰두하고 있었다. 전쟁바닥에서 혼자 밭을 가 는 셈이다. 비령은 엉뚱한 그녀의 부탁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노트를 바 라보았다. 하얀 노트에 빼곡하게 기록된 그녀의 필기들 - 아직까지도 종이 노트와 펜을 쓴다는 것이 귀엽긴 하지만 비령의 첫마디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이런 것도 모르는 거야?” “앗! 비령씨는 쉬워요 이게?” “쉽다기 보다는.......” 쉽다 어렵다의 문제가 아니라 중학교 수준의 이런 수학 문제들은 비령 에겐 지나칠 정도로 기초적이라서 도리어 한참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대체 왜 이런 방정식 같은 걸 풀려고 하는 걸까. 두려움에 떨 시간조차 부족한 이런 세상에서. 비령이 집어든 펜이 노트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던 것처럼 답란 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아앗! 앗!” 가랑이 놀라는 사이에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문제들이 순식간에 해 결되어 버렸다. 비령은 마지막 문제의 답 12.075를 빠르게 적으며 펜을 놓았다. “틀린 부분은 없을 거야. 그럼 이만.” 비령이 내려놓은 푸른색 펜이 또르르 테이블 위를 구르고 있었다. 가랑 은 당황하며 다시 비령의 옷을 잡아 끌었다. 더 당황한 쪽은 비령이었다 . “왜,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미안해요. 하지만 제가 바란 건 이게 아니라.......” “답을 알려달라는 거 아니었어?” “푸는 방법이요. 어떻게 이런 답이 나올 수 있는지 가르쳐 줬으면.... ....” 가랑은 자꾸 비령의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 미안한지 말꼬리를 흘렸다. 그는 좀 난감한 듯이 다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 변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좋은 결과’다. 과정은 묻지 않았고 관심도 없다. 이번 프로젝트도 후원국들로서는 결과가 중요한 거지 과정이야 어 떻든 좋았다. LX063을 하루에 천개를 소비하든 만개를 소비하든 소위 ‘좋은 결과’만을 필요할 뿐 과정 같은 건 아무도 관심 같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과정에 대해 궁금해 한 것은 MSI에 들어와 서 처음이었다. 사소한 것으로도 그녀는 사람을 좀 놀라게 한다. 그런데 도 비령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미안. 나는 남을 가르치는 데는 재능이 없어.” 비령이 꽤 매몰차게 말하자 가랑의 얼굴에 좀 안타까움의 빛이 돌았지 만 곧 생긋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아! 저도 뭘 도와드릴게 없을까요?” “없을 거야.” 비령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가랑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안타까운 것 같았다. 비령이 돌아서서 말을 꺼낸 것은 가 랑이 자신의 노트를 접어 가방에 넣기 시작했을 때였다. 비령은 헛기침 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케이크.” “예?” “달지 않은 것이라면 만들어 줘.” 그녀의 얼굴에는 웃는 것이 어울린다고 느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3. 비령의 방에 들어온 가랑이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방안을 둘러 보았다. 바닥에 잔뜩 깔린 쪽지들하며 여기 저기 널린 옷가지들. 일부러 이렇게 하라도 해도 어려울 정도로 며칠 만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마나 보들레스의 시 낭독이 끝났으니 다행이지 그것마저 아직 돌아가 고 있었다면 정말 방 분위기 암울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무드 빵점의 방 구석이라고나 할까. “으아아. 한번도 정리하지 않았나 봐요 이 방.” “정리하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청소하는 분을 부르면 되잖아요.” “누가 내 방 들어오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 미안해요.” “아니 너한테 한 말은 아냐.” 피곤한지 작은 하품을 손으로 가린 비령은 소파 위에 쌓여 있는 책들과 가운 같은 것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려 가랑이 앉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가랑은 주방에서 들고 온 케이크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은 뒤에 발끝을 들어 바닥에 널린 쪽지들을 살짝 살짝 피해 소파로 다가가서는 살짝 치 마를 쓸어내린 뒤에 소파 위에 앉았다. 비령의 관심은 테이블 위의 케이 크를 향해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슨 연상 퀴즈를 하는 사람 같았다. 그 녀가 준비해 온 그 플레인 케이크 조각들을 한참 동안 심각하게 바라보 던 그가 답을 알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마데이라 케이크?” “헤헤. 맞아요. 잘 아네요?” “먹어본 적은 없어.” 포르투갈 특산 와인 마데이라주(酒)를 이용해서 만든 케이크. 비령이 읽었던 요리책에 실려 있던 내용이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또 어 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기억하지만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실감나 지 않는 허전한 지식의 나열일 뿐이다. “달지 않을 거에요. 오빠도 단 것을 싫어하거든요.” 사실 케이크라는 것은 지금 세상에선 몹시 귀한 음식이다. 악령들이 싸 돌아 다니는 판에 어느 나라도 케이크 같은 것을 만드는데 열중하지 않 으니까. 현실과 괴리되어 버린 요새인 이 MSI에서도 가랑이 아니라면 특 별히 마데이라 케이크를 맛있게 만드는데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가랑이 궁금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직접 요리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글쎄. 아직까지는.” “에 재미있는데.” 비령은 그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언젠가는....... 요리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비령이 좀 쓸쓸하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닫았다. 아마도 살아 생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랑은 툭하면 어색해지는 비령의 분위기에 전혀 게의치 않으며 밝은 목소리로 다음 화제를 꺼냈다. “아! 오늘은 학교에서 바다거북에 대해 들었어요.” “바다거북?” 갑자기 꺼낸 엉뚱한 단어다. 바다거북이라니, 비령은 의아한 얼굴로 가 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좀 빠른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희망이 바다거북과 같다고 생각해요.” “희망?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새끼 바다거북들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거의 대부분 천적 들에게 잡아먹히며 너무도 쉽게 죽어가잖아요. 하지만 드넓은 바다로 나 가는데 성공한 극소수의 새끼들은 아주아주 오래 산데요. 수백 년 이상 바다 속을 헤엄치며 또 많은 알들을 낳는데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비령은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가랑을 바라보았다. 그 단순한 생존원리가 희망이라는 낯선 단어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희망도 똑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품은 희망 역시 쉽게 부서지고 쉽 게 잊혀지고 쉽게 배신당하지만 그래도 그 무수한 희망들 중에 적어도 몇 개는 실현되어 아주 오래 오래 살면서 그것을 소망한 사람들에게 힘 을 발휘할 거라고. 그리고 또 수많은 희망의 씨앗들을 잉태할 거라고 생 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은 희망이라도 품는 것을 포 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희망을 비웃거나 창피하게 생각해선 안된 다고........ 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세상 누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아 희망 따 위 의미 없어’라는 자포자기의 말버릇을 달고 다니는 자도 결국에는 자 기가 이루고 싶은 것은 그게 선한 것이 아니라도 꼭 생기기 마련이며 그 걸 희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력서 한 귀퉁이에 희망연봉이라고 쓰는 것 마냥 사람들은 저마다 세속적인 희망들을 의식 무의식적으로 흘리고 다닌다. 단 너무 이루기가 힘든 꿈을 희망하는 짓은 시간 낭비 혹은 주 제파악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아서 ‘적당히 희망한 다.’ 엄청난 희망을 위해 노력하는 짓은 힘들고 창피하고 바보스럽다고 생각해 버린다. 돌려 말하자면 ‘지금 산 복권이 100억원에 당첨되었으 면 좋겠어!’라고 희망하는 사람도 ‘올해는 꼭 100억원을 벌겠어!’라 는 희망은 바보 같아서 안하게 되는 것이다. 노력해서 그 희망을 쟁취하 겠다는 노력은 애당초 도전부터 창피하니까, 그런 거창한 희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혼자 판단해 버리고 스스로를 ‘별 것 아닌 사람’이라고 정해 버린 뒤 주제파악을 했다며 정당화를 해버린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손쉽게 희망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렇게 양산된 희망들을 죽여 버리는 것에도 익숙하다. 사랑해! 진심으 로 사랑해! 라고 죽어라고 외쳐놓고 며칠이면 지쳐서 그만둬 버린다. 희 망이란 앞마당에 나뒹구는 돌조각과 같다. 긁어다 모으면 훌륭한 돌담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게 귀찮아서 방치해 놓으면 지나갈 때마다 걸리는 장 애물 밖에 안 되는 거다. 그래서 그 돌조각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는 ‘이제는 어른이야’라고 우쭐대기나 하는 거다. 비령 역시 도저히 가꿀 수가 없는 희망이라는 돌멩이들을 내다 버리던 중에 가랑의 말을 듣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마당에는 정말 끔찍하게 무수한 돌조각들 이 널려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가랑의 희망은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 하지 않길 바라는’ 희망이니까. 100억원이니 1조원이니 버는 것과는 비 교도 안되는 참 우주적인 희망. 그런 말 하고도 창피하지 않아? 라고 물 어봐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생존 확률 억만분의 일의 희망이었다. 비령은 그녀가 했던 말을 잘 듣고는 조용히 말했다.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이로군.” 비령은 순간 궁금해 졌다. 그녀가 과연 LX063에 대해 알고도, 자신이 좋아하는 오빠 - 마르크 테싱이 그 LX063을 하루에 천개씩 소비하는 연 구를 총책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래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아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연구소가 사실은 인류의 성스러운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신전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을 얼마든지 죽여서라도 살아 남고 싶은 뻔뻔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무법소굴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자 신이 희망했던 것들을 죽도록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령이 바라보 는 그녀는 순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하나....... 부탁해도 되요?” “나보고도 너의 희망에 동의해 달라는 부탁이라면 사양이야." “아하하. 그게 아니고요.” 그녀가 좀 주저하는 듯 고민하다가 결국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같이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뭐?“ “마드리드에 있는 학교에요. 혼자 돌아오기가 좀 싫어서. 헤헤.”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경호원들이 동행할 텐데?” 연구소 밖의 세상이라는 것은 사실 무법천지에 가깝다. 심지어 살인이 일어나더라도 예전처럼 열심히 살인범을 찾아 체포해고 재판해서 처벌하 는 절차 따위는 없다. 돈이 가치를 잃었으니까 법도 가치를 잃는 것이다 .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이 쓰러져 있어도 슬쩍 지나가버 리면 그만이 되어 버린 참 편리한 세상. 그래서 MSI 사람들이 연구소 밖 에 나갈때면 군부대가 꽤 엄중하게 경호를 해주고 있다. 아직 죽으면 곤 란한 사람들이니까. 아마 가랑 역시 마르크의 명령으로 중무장한 군인들 이 따라붙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가랑은 비령을 보디가드로 고용하려 는 건 아니었다. “쓸쓸해서요.” “그럼 네 오빠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하지만 오빠는 항상 바빠서요.” “나도 바빠.” 비령이 기분 상한 듯 툭하고 말을 던지자 가랑이 금방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연구소 내에서 3명밖에 없는 수석연구원들 중 하나에 게 하교 에스코트 같은 걸 부탁한 것이 무리한 요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미안해지는 건 비령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혼자 들떠서 말도 안 되는 고집 부려서 미안해요.” 가랑은 케이크 맛있게 먹어 달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 갔다. 비령은 묵묵히 케이크를 다 먹고는 한참 동안 궁리하다가 결국 담 배를 몇 대나 피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 뚜벅 서포터룸과 연결 된 자신의 터미널로 걸어간 그는 키보드를 두드려 서포터룸에 주문서를 보냈다.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거리 이동에 어울리는 2인승 자동차 한 대’ 이틀 후 MSI에는 적색 포르쉐 911 Carrera 4s가 공수되어 왔다. 최고속 도 시속 275Km의 4륜구동 슈퍼카가 대체 근거리 이동에 어울리는지 어떤 지는 비령으로도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큰맘 먹고 결정한 가랑 의 하교 에스코트 계획은 비령의 방에 외출허가서류와 함께 도착한 차 열쇠로부터 시작되었다. -Blind Talk 힘드네요. 솔직히 저는 현재 몹시 중요하고 골치아픈 갈림길에 놓여 있 고 덕분에 한 글자도 글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자세하게 푸념을 늘어놓지는 않겟지만... 그래도 계속 글을 쓰고는 있지만 아무리 해도 글의 리듬을 타지 못해서 답답하군요. 하긴 확실히 글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저의 신은 유달리 인자해서 제게 참 많은 시련을 던져 주나 봅니다. 글이 좀 늦어지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이제 슬슬 좀 한산한 전개단계를 끝내고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기 때문 에 그 부분들 멋지게 쓰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역시 비령에게 또 엉뚱한 것이 도착해 버렸습니다. 서포터 룸이라는 곳이 대체 MSI 어디에 박혀 있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막강한 권 력을 지닌 부서인 듯. 생각 같아서는 재규어 XJ220같은 괴물차를 줘서 (최고속도 시속 341Km -_-;) 달나라 끝까지 날려보내고 싶었지만 역시 아르마니 마냥 멋진 차! 하면 보통 포르쉐들 떠오르니까...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저로서는 만만한게 포르쉐 카레라 시리즈 군요.-_- 하지만 911 4s는 국내판매가가 2억을 넘는다는군요. 평생 글을 써서 한 푼도 쓰지 않고 죽도록 모으면 나이 70쯤 되어서는 그걸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포르쉐 타는 구두쇠 노인네라... 끔찍하구만.-_-;) 하지만 덤벙거리고 감정적인 성격상 평생 운전면허 딸 생각은 없으니까 만약 책이 100백만부가 팔리는 '우주적 희망'이 달성된다면 라라 크로포 트나 배트맨 마냥 컬렉션으로 사서 창고에 전시해 놓을지도? 물론 자전 거 밖에 못타는 주제에 페라리 사서 모셔놔 봐야 바보소리 듣겠지만. 그리고 이번 동계올림픽인지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나치가 게르만인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철저하게 조작 한 베를린 올림픽과 다를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더 웃기는 건 부 시가 말했던 악의 축(AXIS)라는 것의 대명사가 바로 2차대전의 나치, 이 탈리아, 일본을 의미하는 추축국(The Axis)인데 자신들의 타도 대상을 자신이 답습하다니 참 재미있네요. 역시 악마는 항상 신의 가면을 쓰고 있는 법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차피 올림픽이라는 것이 이제는 쿠베르텡이 무덤에서 일어날 국가들의 힘과시용 라이브쇼로 전락해 가고는 있지만 최소한 쇼도 관객이 인정할 때 쇼가 아닐까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걸프전 때도 딱 6주만에 미국인 사상자 600여 명에 이라크군은 사망 10만명 실종자 15만명이었습니다. 하지만 CNN은 미군의 죽음은 '순교'로 이라크군의 죽음은 '숫자'로 발표했지요. 그 이후에도 미국이 압력을 넣은 유엔의 경제봉쇄 덕분에 이라크의 아이 들은 하루에도 6천여명씩 죽고 있습니다.10년이 넘게 그렇게 죽어오면서 현재까지 5살 미만의 아이들의 사망자는 70만명을 넘고 있고 이라크 전 연령의 전쟁이후 사망자 수는 300만명이 넘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악마의 자식이라서 그렇게 죽도록 목을 졸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와서 또 이라크를 그냥두 지 않겠다는 둥 잘난 '정의'를 짖어대고 있는 부시 행정부를 보고 있노 라면 역시 광기는 신념으로 포장되었을 때 가장 두렵다는 것을 새삼 느 낍니다. 증오를 양산해 내는 기계랄까. 하긴 이 세상 어느 누가 소모품이 아니겠습니까. 걸프전 때 미국이 비밀리에 사용한 우라늄탄(뭐 이제 밝혀졌으니 비밀도 아니지만) 70만발 덕분에 걸프전 참전미국군 70만명 중 30만명이 병에 걸렸고 26%가 장애판정을 받았으며 후유증 사망자가 4백명이었다고 합니 다. 전사자보다 아군 무기 덕분에 죽은 자가 더 많다는 웃기는 결론. 결국에는 미국만세를 외치는 그들도 소모품일 뿐. E-MAIL : billiken@hananet.net 어스의 자유 를 들으며... 나이키를 사라! 나이키를 사라! 나이키를 사라! 나이키를 사라! 당신은 멋진 운동화 때문에 목졸림을 당하거나 살해될 수 있다. 1985년 디트로이트에서 13세의 숀 조운즈가 운동화 때문에 총에 맞았다 1988년 휴스턴에서 테니스화 한 켤레 때문에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다 1989년 디트로이트와 1990년 필라델피아에서 두 명의 학생이 운동화 때문에 살해당했다. 나이키를 사라! 사라!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6 No Me Ames 1. 누가 그랬지. 정부는 사라져도 코카콜라는 남아 있을 거라고. 헛소리로 증명되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심히 가치를 잃어버렸는데 뭐하러 욕 먹 어가면서 카라멜 희석수 같은 것을 팔겠는가. 덕분에 이제는 사라진 대기 업들의 빛바랜 광고판들만이 공룡들의 시체처럼 마드리드 시내 이곳 저곳 에쌓여 있었다. 이제 시가지를 장악한 것은 소음과 매연이 아니라 마른 바 람 속에 간간히 섞여오는 시체들의 희미한 악취 뿐이다. 이쯤이면 이미 멸 망했다고 말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신은 충분히 두려워하 며 느린 죽음을 음미할 수 잇는 시간을 내려 주었다. 아주 기발한 방법으 로 천천히 교사(絞死)시킨다. 차 안에 앉아 있던 비령은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을 이제 와서 구한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불손한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여전히 빠르게 펜을 굴리며 쪽지에 아이디어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마치 자유기술법처럼, 초점이 없는 그의 눈빛은 모호한 생각들이 문자화 되어 나열되고 있는 쪽지를 향해 있었다. 생명과 죽음 -> 샴쌍둥이? 심장이 하나인 두개의 육체. 문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 -> 알베르트의 의도? 靈魂剝離術 -> 실패의 이유는... 생명존속기간 0.473 부작용. 부작용. 또 죽일 거야? 야릇한 문장들로 갈겨진 쪽지는 그의 기분을 대행하려는 듯 채워져 가고 있었다. 연구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카프카의 메모장에 가까운 그 쪽 지가 만년필의 잉크들에게 문신 당하고 있을 때 차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 리가 들려 비령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에서는 방긋 웃고 있는 가랑이 허리를 굽혀 비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끈적거리는 선잠의 악 몽 속에서 깨어난 듯 하다. 엷은 청색의 차창이 스르르 내려왔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던 거에요?” “1시부터” “정말요? 그럼 3시간이나! 별로 바쁘지 않은가 봐요?” “......” “노, 농담이에요." 그녀는 엷은 웃음을 보이며 조그맣게 웃고 난리였다. 사실 그녀로서도 비 령이 학교 앞으로 와줄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 그녀는 그가 의외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아 버렸다.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타.” “아 예." 그녀가 이상할 정도로 긴장해서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황급히 차 문을 열자 그가 황당한 표정으로 가랑을 바라보았다. 긴장도 유분수지 그 녀가 씩씩하게 열어버린 문은 비령 쪽이었던 것이다. “네가....... 운전하게?” “앗! 앗!” 번개에 맞아버린 듯한 표정으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엄청나게 당황한 그녀가 쪼르르 뛰어가서는 반대편 문을 열어서 겨우 겨우 탑승할 수 있었 다. 마르크가 무지하게 매정한 놈이라서 그런지 경호대를 보내줄 뿐 한번 도 학교 앞으로 와준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비령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긴 어떤 여자가 우락부락한 중무장 군인들에게 둘러 싸여 장갑차 타고 하교해야 하는 상황을 좋아할까. 그럼에도 그녀가 학교 를 다니길 고집하는 이유를 비령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학교 다니는 사람은 몇 명이야?” “예?” “그러니까 학생이 몇 명이냐고.” “아! 열다섯명이에요. 저까지.” “그것 밖에 안돼?” “어제까지는 열여섯이었어요.” 비령은 출발하기 전 고풍스런 삼층짜리 학교를 흘낏 올려보았다. 한 종교 인이 수녀원을 개조해서 만든 학교라고 하는데 가랑이 다니게 된 이후부터 마르크의 지원을 받아 안전이나 시설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 라니. 이제는 빈민들의 집단 수용소로 바꿔버린 지하철역을 바라보면서 ‘ 어울리지 않아’라고 중얼거리고는 시동을 걸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 한 포르쉐의 엔진음이 차안에 울렸다. “학교는 왜 다는 거야.” “예?” “써먹지도 못할 지식을 뭐 하러 열심히 익히는 거냐고." “그렇지 않아요.” 가랑이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은 검은 가죽 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천공의 문이 막히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어요. 이 세상이 혼란스 럽지 않을 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오빠나 비령씨가 계속 연구하는 것도 결국 지금 이 세상을 예전처럼 돌려 놓기 위해서잖아요. 그러니까 믿고 있는 거에요.” “믿다니?” “분명히 예전처럼 돌아갈 테니까 저도 그걸 믿고 포기하지 않고 제가 해 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사람들이 다 포기해 버린다면 천공의 문이 다시 열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너와 한 가지는 동의할 수 있군.” “뭔데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차가 코너를 돌자 가랑이 기우뚱거리며 비령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들어찬 하늘 덕에 시가지는 초저녁처럼 어둑했고 간간히 불이 들어온 가로 등만이 힘겹게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비령은 똑같은 표정들로 자신의 차를 바라보는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시민들은 그런 차를 탈 수 있는 자들이 MSI 사람들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부러움과 두려움 같은 것이 동시에 얼룩진 얼굴들로 비령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령은 그런 시선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라푸에르타델솔이라 불리는 ‘태양의 문’ 광장을 북으로 빠져나와 활처럼 뻗어 있는 호세안토니오가(街)를 향해 아무리 달려도 쇠 락한 상점가의 폐허들의 원망스런 시선은 끊이질 않았다. 야채들의 풀냄새 와 북적이는 활기로 가득했던 세바타 광장도 이제는 빈사에 빠져 간혹 술 냄새와 또 간혹 비명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회색빛으로 이지러진 마드리드 시가지는 그야말로 우울한 ‘게르니카’였다. 그녀가 쓸쓸한 듯 노란 빛을 흘리며 빠르게 지나치는 가로등 광구(光球)를 지켜보다가 말을 흘렸다. “저, 졸업까지 일년 정도 남았어요.” “그래? 미리 축하할게.” 공허한 말투가 곧바로 나왔다. 때 이른 축하카드를 받은 가랑은 입가에 허전한 미소를 담으며 소박한 말을 이었다. “줄업식 날 같이 사진 찍어요.” “......” “사진....... 싫어해요?” “사진이라, 그것도 이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군.” "하, 하지만." 학교, 숙제, 요리, 희망, 행복, 사진....... 죄다 이 세상에선 불합격이 다. 그런 것을 지키려고 했다가는 금세 배신당해 버리기 십상이다. 흔적도 남지 않고 쓸려가 완전히 잊혀지는 것이다. 차라리 냉소적이고 비겁한 것 이 타인에게도 피해를 덜 준다. 그때. “조심해!!” 순간 코너를 돌며 속도를 줄이던 줄인 비령의 차 앞으로 무언가가 뛰어 들었다. 급히 브레이크가 밟히자 타이어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 었고 안전벨트에 감싸인 둘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가랑의 검은 가방 이 붕 떠올라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녀의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비령이 놀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차 앞에는 한쪽 팔이 없는 청 년이 차를 막아서려는 듯이 남은 하나의 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공포에 질린 퀭한 눈동자를 꽉 감고 있었고 바싹 메마른 두 뺨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살이라도 하려던 참이었던가. “왜 이런 짓을........” 다급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나가려던 가랑의 어깨를 비령이 잡아 막았 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때 비령을 돌아본 그녀가 창밖을 보며 창백해져선 소리쳤다. “위험해요!” 시커먼 쇠망치가 차창을 부셔버리며 뚫고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가랑의 몸을 감싼 비령의 등 뒤로 산산이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쏟아졌고 곧 부서 진 차창 안으로 뱀처럼 들어오는 것은 섬뜩하게 빛나는 칼이었다. ‘크윽!’ 거친 손이 비령의 머리칼을 잡아챘고 그의 목이 꺾이며 목언저리에 칼날 이 다가왔다. 만약 어설프게 뿌리치려고 했다면 당장 그 칼날이 목구멍 깊 숙이 들어왔을 것이다. 상대는 소년이었다. 게다가 덜덜 떨고 있는 마른 팔은 그가 이런 일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려주었다. “우, 우리는 MSI 저항조직 디아메스다! 움직이지마!!” 그 소년은 너무도 떨려서 제대로 알아듣기조차 힘든 스페인어로 빠르게 위협하고 있었고 그 순간 골목길에 숨어 있던 낡은 군복차림의 조직원들 십여명이 자동소총을 든 채 뛰어나와 차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저항 조직 이라고? 기가 찬다. 고작 어린애를 선봉으로 내세우는 주제에 뭐가 저항이 라는 거지. 이유도 없이 인류 멸망을 바라는 광신도 집단 혹은 결국 강대 국들의 텃세에서 밀려나 밥그릇을 놓쳐버린 낙오자 집단일 뿐이겠지. 그러 니까 노아의 방주 승선 티켓을 구하지 못해 말라 죽어버리는 게 두려웠던 게지, 비령의 얼굴에는 그렇게 공포보다는 조소가 앞섰다. 칼날 덕분에 목 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그가 가랑을 향해 묘한 미소를 보이 며 입을 열었다. “지금도 믿고 있어? 희망이라는 것을?” “......!” 믿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믿을 도리가 없다. 소년의 갈라진 고함소리가 커져가고 있었고 저항조직의 총부리가 절벽 끝으로 떠밀 듯이 사방에서 다 가오고 있었다. ‘제발 그만둬요.’라는 가랑의 애절한 목소리가 작은 두 손에 가려진 입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지만 소년은 계속 고함치고 있었고 비령은 쓰린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기차에 무임승차해버린 것일까. 좋은 곳에 도착할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하 는 것마저도 이제는 너무나 바보스러워서 그냥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타 락의 밀어(密語)라고 귀띔해 달라고 자기 자신에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하 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유혹은 들려오지 않았다. 2. “허가한다.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긴급 상황을 전해들은 마르크는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명령을 내 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놓았던 만년필을 들고 쌓여있는 서류 들에 사인을 하려던 마르크는 지금까지 수천, 수만 번은 반복했을 자신의 사인을 잇지 못한 채로 눈을 찡그리며 서명란에 금속의 촉을 꾸욱 누르는 것이었다. 두꺼운 서류지는 마치 총상을 당한 듯 검은 피가 번져가고 있었 다. 개성 없는 타이프 문장들로 창궐(猖獗)된 서류들이 널려 있다. 상부에 올리는 그 서류들에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길이 없는 숫자, 생명 을 사고파는 숫자들만이 나열되고 있었고 - 과연 그런 숫자들이 머리털 한 올의 구원이라도 줄 수 있을까, 마르크는 만년필의 축(軸)이 부러져 자신 의 오른손이 잉크에 검게 물들어 갈 때까지도 차가운 표정으로 계속 펜을 짓누르고 있었다. 3. 비령의 목에 칼을 들이댄 그 소년은 비령을 향해서 빨리 내리라고 위협하 고 있었지만 비령은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목을 타고 셔츠 속으로 주르륵 흐르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MSI에도 잡혀온 것인데 이제 또 어디로 끌려가는 신세 따위는 신물이 나. 그의 입에서는 놀랍도록 체념적인 스목 소리가 나왔다. “날 데려가서 이번에는 인류 멸망을 촉진시키는 연구라도 시킬 거냐? 아 니면 날 인질로 잡아 한몫 잡아보려는 거냐. 무슨 이유로 날 납치하는지는 물어봐도 되겠지?” “모, 몰라! 그건 윗분들이 결정할 문제야! 어서 나오기나 해!!” “자신의 신념까지 상관이 대신해 주는 거냐. 편리하구나.” 자신도 이 소년과 마찬가질 것이라고 스치는 기분에 생각했다. 왜 세상을 구해야 하는지 관심도 없이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가장 무책임 한 영웅이랄까. 그런 영웅에게 어울리는 상대 역시 ‘무책임한 괴물’이겠 지. 왜 영웅을 잡아 죽여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괴물에게 목이 뜯겨 죽 는 것도 꽤 어울리는 최후이리라. 그때 공기를 찢는 총성과 함께 살을 울 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푸드득! 순간 머리가 날아가 버린 소년의 몸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이 당황하며 비령의 차를 향해 총을 쏘려 했지만 레 이저스코프의 붉은 광점들이 수없이 그들에게 모여들었고 귀가 멀어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십여명의 몸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버렸다. 경호하고 있던 군부대가 발포한 것이었다. “흐윽!” 가랑은 이를 꽉 물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해’라는 울음 섞인 목소리가 반복되고 작은 어깨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납치되어 위협 당하 다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눈앞에서 자신을 위협하던 사람들이 단숨에 벌 집이 되어 버리는 걸 봤으니 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소년의 핏덩이 가 흘러내리는 백미러에는 비령의 차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보였 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비령은 순간 가속 페달을 깊 게 밟았다.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한 타이어가 바닥을 긁으며 시커멓게 타 오른다. 4. “어, 어디로 가는 거에요.” 엄청난 속도였다. 시가지를 세로로 찢으며 내달리는 시뻘건 야수와 같았 다. 극도로 달아오른 320마력의 엔진이 요동치며 도시를 울리고 있었고 영 원히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비령은 도시 밖으로 계속 차를 몰아갔다. 옆 좌 석에 앉아 있는 가랑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만두세요.” “싫으면 내려줄게.” 핸들을 잡고 있는 비령의 입에서 엉뚱한 투정이 나왔다. 그들의 뒤를 군 용 차량들이 뒤쫓고 있었고 하늘에는 헬기들까지 뜨며 당장 멈추라며 외치 고 있었다. MSI의 가장 깊은 비밀에 관여하는 수석 연구원이 ‘탈주’해 버린 셈이다. 이 경우 비밀보안 원칙에 따라서 마르크 테싱은 사살명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침묵이었다. ‘죽일 테면 죽여. 어차피 지금 도 별로 살아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라고 말하는 비령에게 사살 위협 같은 것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하리라. 소중한 것이 별로 없으니까 살고 있다는 것도 단지 숨쉬고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겠지. “이제 그만해요 그런 어리광!” “......” 가랑이 커다랗게 소리친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화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지 잔뜩 힘을 주며 소리친 뒤 붉은 눈동자를 들어 비령 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총알처럼 달아오른 스포츠카는 슬슬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도시 밖 관문에선 바리케이트가 설치되고 있었다. 수많 은 총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비령은 “미안하군. 변변치 못한 어 른이라서.”라고 대꾸하면서 백미러를 슬며시 바라볼 뿐이었다. 시커먼 군 용차량들이 그들의 뒤를 사냥개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정말 죽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쯤에서 내려줄게.” “오빠에게 들었어요.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 다섯 명을 죽였다고.” “MSI의 보안도 한심하군. 비밀로 남겨두기로 해놓고 자기 입으로 말하다 니.” 비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지만 - 가랑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가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사실이라는 것을. 아마도 돈이나 먹을 것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다섯 명을 죽인 건 아니었으리라. 시속 250 Km를 넘어버린 차 안은 도리어 지독하게 차가웠다. 가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차갑고 적막했다. 비령이 말했다. “그 사실을 알고도 내 차를 타다니 너도 참 취미가 특이하군.” “당신...... 불쌍해요.” “동정하는 거야?” “그래요.” “집어치워. 고맙지도 않으니까.” “혼자서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척 하지 말아요! 힘들면 동정 받아도 상관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또 그는 한참 입을 다물었다. 내달리고 있는 차가 저지선(沮止線) 에 도착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약 3분정도. 말하자면 남아 있는 생명의 시 간인 셈이랄까. 더 이상 보수가 되지 않아 엉망으로 깨져 있는 도로를 지 날 때마다 차체가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비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 다. “내가 죽인 게 아냐.” “연구소로 돌아가요.” “내가 죽이지 않았어.” “무서워도 돌아가요.” 엉뚱하게 이어지는 대사들이 몇번 나열되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 는 야릇할 정도로 침착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러웠다. 신비로울 정도로 속이 너무 훤하게 보이니까 도리어 속을 짐작할 수가 없는 그녀의 모습. 매혹적 인 파멸을 닮은 엔진음이 피거품을 물며 웅성이고 있었다. 반쯤 무너져버 린 건물들도 나무도 사람도 확인조차 하기 전에 차창 뒤로 밀려나 사라져 버리고 그냥 점이 되어 버렸다. 차 바닥에 구겨져 널브러진 쪽지들이 이리 저리 줏대 없이 휩쓸리며 가랑의 갈색 구두에, 비령이 밟고 있는 페달 사 이에 부딪치곤 다시 저쪽으로 밀려났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요.” 그녀는 확실히 동정하고 있었다. 이 따위 남이 준 멋진 옷에 남이 준 멋 진 차 따위 죄다 불살라버리고 의무도 권리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며 울 먹거리는 그를 진심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숙 한 마음이 몇번이나 정성스럽게 그를 어루만졌다. "계속 동정해 줘." 비령은 동정이라는 것도 받아보니까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고 참 창피하지만 자주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그랬다. 그리 고 이 여자라면 귀찮을 정도로 자신을 감싸줄 것 같다는 무리한 기대도 참 지 못하고 커져갔다. 그렇다면 더 큰 것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 비령이 갑자기 핸들을 놓은 그 순간 그의 손은 가랑의 팔을 잡아끌고 있 었다. 그리고 놀란 가랑의 얼굴에 멋대로 입맞춤해 버렸다. 너무 변변찮아 서 여고생의 동정도 거절하지 못하는 어른이니까 이 정도 쯤 해버려도 괜 찮은 거잖아? 그녀는 괴로운 듯이 비령의 등을 가끔씩 두드리고 있었고 고 삐 플린 차는 제멋대로 내달리며 가로수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품던 비령이 말을 꺼냈다. “No me dejes” 그리고 그를 올려보던 그녀가 말했다. “......No me ames para asi olvidarte de tus dias grises.” 당연한 대답. 예상 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쯤. 단지 하교길에 같이 해줘서 고맙다는 감정을 가진 정도이리라. 단박에 반해서 목숨까지 버려줄 수 있는 여자 같은 건 현실에는 없고 이제는 소설에서도 없으니까. 몇 번 보고 몇 번 대화한 것만으로 첫눈에 반해버리는 것을 허 락할 만큼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 쯤 알고 있다. 하 지만 그냥 혼자서 좋아하게 되어 버린 탓에 멋대로 굴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15만년 정도가 걸린다고 하더 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혼자서라도 의심없이 좋아할 수 있는 대 상이 생긴 것이 기쁠 뿐이었다. 그녀를 사랑해도 좋다고 자신에게 우기고 싶었다. 사랑할 자격 같은 건 이미 미달이지만 그녀라면 이런 자신이라도 감싸주고 받아주지 않을까 칭얼거리고 싶었다. 지금쯤 그라나다는 시에스타에 잠겨 있겠지. 내 당장 그곳으로 발을 옮겨 깨어나지 않는 꿈속에서 영원히 잠들리라. 탐미로 빛나는 알람브라 궁전 어느 객실(客室)에 몸을 뉘어 영원히 홀로. 그가 차를 멈추며 ‘칭얼’거렸다. -Blind Talk 주인공이 이래도 되냐고 물어도 상관없어.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어설픈 캐릭터성을 덕지덕지 발라주다가 어느 날 일어나니까 도무지 한심해서 이 리 저리 충돌하는 감정을 그대로 기록해 버렸다. 멋들어진 캐릭터가 아니 라도 상관없지. 뭔가 대단한 주제의식이 없어도 상관없어. 지금만큼은 아 무 것도 없어도 상관없어. 단지 내 글이 내 글이기만 하면 되니까. ...라고 어느날 일어나서 중얼거리며 평소 혼자서 습작하던 스타일 그대로 써버려서 올립니다만 결국 이런 '스트레스 대폭발'이라는 것이 어떻게든 오버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데다가 또 이런 쪽으로 마구 궁상 떨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면'아아 역시 멋진 캐릭터가 좋아.'라고 생각해 버 릴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이번 편을 또 뜯어 고칠지도... 사람 기분이라 는 것이 스스로 배신감 느낄 정도로 변하는 것이고 또 저는 그런 기분을 제어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아무튼 너무 오랜만이네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괴로운 일들이 많았고 덕분에 많은 것을 느꼈지만 절대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 그리고 나이키에 대한 서두의 문구는... 실제 선전 문구의 일부로 알고 있습니다. 하긴 사실 나이키 선전이라는 것이 몹시 과격해서(어떤 의미로는 베네통 보다 더) 투우를 하다가 황소에게 들이받혀 얼굴이 다 찢어진 사람 사진 덩그러니 올려 놓고 밑에 JUST DO IT! 이라고 써놓는 녀석들... 그러니까 한시대를 풍미했던 악취미 광고의 한 축이었는데 한가지 확실한 건 기억에 는 잘 남더군요. 그런데 선전문구 같은 걸 넣어도 상관 없나? 어차피 저것 도 포스트모던풍의 작품에 들어 있던 문구긴 하지만... 뭐 어떻게 되겠죠. 그리고 후미의 어설픈 시 비스끄무리한 것은 제가 기분내키는데로 써갈겨 본 것인데 역시 탐미스럽습니다. 아아 정말 시에는 재능이 없습니다. 아 참 그리고 저는 스페인어 모릅니다... 결국 제니퍼 로페즈죠.-_-; 그럼 또 잠시 사라지겠습니다. 이제 집중해서 잔뜩 써 놓고 다음에 돌아 올 때는 일일연재에 도전해봐야 겠네요. 1. “확실히 말해두겠다.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사살명령을 내린다.” 비령을 바라보던 마르크가 단정하듯 말했다. 조물주가 애써 세심하게 깎 아낸 그의 외모는 항상 조금 찡그린 표정 덕에 조화(造花)처럼 차가웠다. 비령은 그의 표정을 감상하며 대체 저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할 때도 저런 위압적인 모습으로 ‘예전부터 좋아했어.’라고 말할까? 그러면 여자 쪽에서 굉장히 겁을 먹지 않을까? 하긴 자신도 결국 멋지게 고백하는 건 포기해야 할 성격이 아닌가? 라는 둥의 현실도피성 공상을 가지치고 있 었다. “돌아가.” 기분 나쁘게 자기 얼굴이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는 비령에게 좀 지 쳐버렸는지 마르크는 모니터로 다시 눈을 돌리며 짧게 던졌다. 자신을 사 살하겠다는 경고를 받는 순간에도 남의 외모 가지고 공상을 할 정도로 쓸 쓸한 여유나마 갖게 된 비령은 ‘다음에는 방탄차를 보내줘.’라고 말을 흘리며 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 “뭐야. 또 위협할 꺼리가 남았나?” “가랑에겐....... 지금 이대로가 좋아. 바꿀 생각 하지마.” 비령은 멈칫하며 곁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마르크의 눈 에 감정이 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또 아주 오랜만에 등언저리를 찔린 듯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거의 반사신경에 가까운 말투가 의식하기도 전에 튀어나와 버렸다. “그건 당신 생각이지.” 비령은 ‘나 같은 놈에게 바뀔 여자도 아니야.’이라고 피식 읊조리며 밖 으로 나갔다.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 이 양복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가랑아 괜찮아? 응?” 물키벨이 돌아온 가랑의 뺨을 매만지며 난리도 아니었다. MSI 내부에서 비령의 ‘깜짝 탈주’는 기밀이었지만 연구소에서 지겹도록 살아온 물키벨 로서는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도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가랑은 난감한 표정으로 헤헤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도리어 겁먹은 물키벨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가랑보다도 키가 작은 물키벨은 안경 너머의 큰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정말? 정말?’이라고 올 려다보고는 ‘다행이다’라면서 호들갑 떨던 자신을 추슬렀다. 그리고 조 금 간격을 두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비령씨도 괜찮아?” 가랑은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좀 당황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대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나. '아 마구 도망치길래 진심으로 동정해 줬더니만 어처구니없는 도둑키스를 당했어요.'라고 설명해줬다간 박식한 물키벨이라 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게 뻔하다. 그리고 그때 생각을 하 면 아직까지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결국 조금 궁리하던 그녀는 생글 거리는 얼굴을 반짝 만들면서 짧게 대답했다. “예. 괜찮아요.” “뭐, 뭐야. 방금 전의 그 침묵은.”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잉?” '절대 말할 수 없어.'라는 얼굴을 한 채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리는 가 랑의 뒷모습을 보면서 물키벨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물키벨의 얼굴 이 조금 구겨졌다. 금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오프 놈 치과 간다더니 왜 안나타나지? 슬슬 출몰할 때가 되었는데.’ 오펜바하가 물키벨을 괴롭히는 건 그에겐 마치 식후 흡연 같은 습관이었 다. 이런 맛있는 유혹을 거를 녀석이 아닌데 아까부터 잠잠하게 도리어 불 안하다. 물키벨이 긴장한 표정으로 눈을 얇게 뜨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3. “건방진 태도로군. 국가의 변절자가 되고 싶은 거냐!” “다급해지면 항상 그 소리이야?” “그 말은 더 이상 연구 결과를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진전이 없으니 말할 것도 없어.” “그 비령이라는 놈은 누구야! 어느 기관 밑에 있지?” “몰라. 국적도 몰라.” “앞으로 똑바로 감시해! 어쩌면 우리나라의 적일 수도 있으니까!” “흥. 애국자셔.” “내가 얘기할 때 그 따위로 대꾸하지 말랬지!” 뺨을 때리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오펜바하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 졌다. 거대한 연구시설 MSI에 대체 어떤 방들이 존재하는지 모두 아는 사 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오펜바하도 MSI 내에 이런 ‘불필요한 시설’이 존재하는 줄은 몰랐다. 이곳까지 끌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눈을 똑바로 봐! 이 은혜도 모르는 놈!” 의자에 앉아 있는 오펜바하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을 돌린 채 피가 스 며 나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완전한 방음 시설을 갖춘 이 곳은 아주 건 조하고 또 몰개성한 의자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MSI 중에서도 후미 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방이었다. 꼭 취조실을 닮은데다가 자신들 외에는 영원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은 이 방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을 학대하기 위 해 만들어진 공간처럼 느껴졌다. 회색의 작업복을 입고 있는 독일 사내가 오펜바하의 금발을 잡아채며 억지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널 교육시킨 우리들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감사히 여겼다면 지금보다는 많은 정보를 찾아냈을 거야!” MSI가 강대국의 기관들 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조직이긴 했지만 그것을 돌려 말하면 그 기관들은 MSI를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MSI 내부에 MSI를 후원하는 국가들의 스파이가 잠입해 있다 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들이 연구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 라울 것도 없는 비밀이었다. 오펜바하 역시 한달에 한번 정도 이곳으로 끌 려와 ‘보고’를 해야 하는데 - 그 꼴이 꼭 양부(養父)에게 학대 받는 소 년이라서 오펜바하는 다른 사람에겐 '치과가야 해'라면서 이곳에 오곤 했 다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가전제품을 바라보듯 못마땅한 얼굴로 오펜 바하를 내려보던 사내는 슬쩍 시계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보고서조차 준 비해 오지 않은 건방진 천재 꼬마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더 이상 때리는 것 도 창피한 노릇이었다. “이주일 후에 다시 부르겠어. 그때도 알아낸 것이 없다면 정말 그냥 두 지 않을 줄 알아!” 오펜바하는 처음부터 MSI에 들어오기 위해 '만들어진' 소년이었다. 태어 나면서부터 교육기관에 넘겨져서 MSI에 들어오기 위한 교육을 받은 1만여 명 중에 가장 우수한 능력자로 뽑힌 셈이다. 그리고 그는 그딴 것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독일이 배출한 최고의 연구원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모두 다 윽박질렀지만 어째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자신을 설득 해 준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욱신거리는 두통에 오펜바하가 소매로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펭귄이 있어.” “뭐?” “평방 이십미터밖에 안 되는 곳에서 태어났고 또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 야 할 그런 펭귄에게 ‘넌 남극에서 사는 놈이니까 어서 남극이 어떻게 생 겼는지 말해!’라고 아무리 소리쳐 봐야.......” 오펜바하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그 펭귄은 눈물만 흘릴 뿐이잖아. 안 그래?”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금 휘청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부모? 자신 을 팔아버리고 처음부터 누군지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 따위 어찌되든 관심 도 없다. 국가? 억지로 가둬놓고 사료를 먹여 키운 주제에 이제는 배를 가 르고 간을 내 놓으라는 거냐. 자랑스럽게 기꺼이? 오직 투정만 부리게 만 드는 이런 세상 따위도 당장 망해버려도 그러려니 할거야. 도저히 어른으 로 만들어주질 않는 세상이라서 그런지 도통 키도 크지 않고 아직도 단것 을 좋아한다. 찢어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 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는 것 정도는 하게 해 달라고.’ 비령이 가랑을 차에 태운 체 탈주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그곳,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정말 아무리 궁리해 봐도 비령처 럼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4. “.......” 오펜바하가 뚱한 표정으로 휴게실로 돌아왔을 때 휑한 그 곳에는 담요로 몸을 돌돌 만 채로 꾸벅꾸벅 잠들어 있는 물키벨만이 있었다. 꽤나 쾌적한 자신의 방에서 자지 않고 꼭 휴게실 한구석에서 잠들곤 하는 그녀의 마음 은 어쩌면 시린 외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그것도 소파에 쭈그려 앉은 채 로. 오펜바하가 잠들어 있는 그녀 앞에 다가가서는 팔짱을 낀 채로 감상하 듯 바라보다 말했다. “아아 당신 꼭....... 동물원 펭귄 같습니다.” 파핫 웃기 시작한 그는 꾸벅거리고 있는 그녀의 넓은 이마에다 뭐라고 한 마디 써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결국 좀 불안하게 걸쳐 있는 그녀의 안 경을 벗겨서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이런 곳에서 자지 말라니까 정말 말 안 듣네.” 멈추지 않는 핏물을 계속 닦아내는 통에 소매가 잔뜩 얼룩져 있었다. -Blind Talk 본래 공극어 편을 다 쓰고 올리려고 했지만(아닌게 아니라 이미 적잖게 써두긴 했지만) '당신 죽었습니까?'라는 메일들도 심심찮이 받고 있고 제 생각에도 너무 공백이 큰 것 같아 한 편 올립니다. '대체 테싱은 가랑을 사랑하긴 하는 거냐?'라는 메일을 좀 받았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왜 그녀를 그렇게 '방치'해 두느냐... 라는 것인데. 아아 정말 그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의 몸도 정신도 아버지가 물려준 사슬 같은 것에 묶여서 아무리 노력해도 움직여주질 않고 가랑 에게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저와 사귀던 여자 분의 경우에도 좀 비슷비슷 했습니다. 저는 굉장히 괴롭지만 절대로 도망치거나 처리할 수 없는 일들에 묶여 있었고 그렇다보니까 마음과는 상관 없이 도저히 만날 시간도 여유도 없 었습니다. 거창하게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자니까 만난다, 가 아니라 이 여자라서 만난 다.'는 성립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테싱도 저도 '주제넘은 짓'을 한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그 분에게 '미안한데 일년에 한번 정도 만나고 한달에 한번 정도 통화하는 관계가 좋겠는데?'라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 무너져 내리기 전에 스스로 막을 내려버린 격입니다만... 분명 테싱도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사나이고(별로 괴로워보이지 않았다면 그건 제 필력이 부족한 탓이겠죠.) 가랑도 놓치기는 싫었고 세상은 자신을 악인으 로 만들고... 그런 찌뿌둥한 관계가 한 15만년쯤 이어지면 다들 그런 꼴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하지 못한 남자고 보편적이지 못한 캐릭터라서 죄송합니다만 나름대로 그런 캐릭터들을 그리면서 느낀 바도 많았습니다.(엇. 소설이 끝난 듯한 말투로군... 아직 좀 남았습니다.;;) 물키벨도 오펜바하도 비령도 테싱도 줄리탄도 카넬리안도 가랑도 죄다 공 통점이 있다면 '좀 불쌍한 녀석들'이라는 거겠지요. 동정을 거절하지 못하 는 캐릭터들입니다. 아무튼 다음 편에 돌아올 때는 정말 일일연재를 목표로... 어디쯤 왔을까... 얼만큼 걸었을까 옮겨진 발걸음을 또 다시 옮길까 서러움 애써 달래 보려고 이만큼 걸었건만 이제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다음 처음이라오 뜬금없는 궁상이지만 마음에 닿는 가사라서 슬쩍. (궁상의 첨단을 달리는 내 노래방 18번이기도 하고 말야) E-MAIL : billiken@hananet.net 015B의 슬픈인연을 들으며... PS: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봤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영화였지만... 대사는 멋졌습니다. "네가 착한 사람인 거 알아.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할 수 있지? 그렇지?" 엔딩만 빼곤 재미있게 봤습니다...-_-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0장 : 공극어(工棘魚) - 9 HATE MACHINE 1. 라파엘 테싱이 살고 있는 곳은 홍콩 주룽반도(九龍半島)의 버려진 항구 앞에 시체처럼 떠 있는 거대한 폐선 속이었다. 그리고 음산함이 지나쳐 도 리어 엄숙해 보이는 그 ‘악룡의 동굴’에 찾아오는 자는 다른 누구도 퇴 치할 길이 없는 최악의 악령들을 소멸시켜주길 바라는 의뢰인들뿐이었다. 누가 그랬지. 짐승들은 도살자 앞에서 직감적으로 겁을 먹는다고. “라, 라파엘 씨....... 준비해 왔습니다.” 입고 있는 청색 양복이 팽팽해 질 정도로 비대한 몸을 가진 사내의 턱을 타고 식은땀이 뚝뚝 무릎에 떨어지고 있었다. 라파엘의 시선을 피하는 그 의 눈빛은 눈앞에 내 놓은 유화 한점을 향해 있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의 악령들을 소멸시킨 라파엘을 앞에 두고 본능적으로 영혼이 겁을 집어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악령 중에 여자가 많다는 것은 억울하게 죽는 여자가 많다는 의미일까 ? 어떻게 생각해?" 검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소파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던 라파엘은 앞에서 떨고 있는 의뢰인이 가져온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벌써 수십 명 이상의 심장을 뜯어 먹은 채로 런던 하이드공원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한 여 자 악령을 처리해 달라는 의뢰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역시 미술품. 꽤 커 다란 그 유채화는 르누아르의 ‘뱃놀이 점심’이었다, 화폭 속에선 배 위 에서 재잘거리며 식사를 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들이 멈춰 서 있었다. 얄미 울 정도로 행복한 그 광경이 이제는 너무도 비현실적이라서 짜증이 일 정 도다. 라파엘이 무료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고 있겠지?” “......모르겠습니다만.” “르누아르야. 바보 놈.” “그, 그렇군요.” “그럼 이것도 알려 줄까?” “예?” “난 이미 르누아르의 그림을 모두 가지고 있어.” “......!” 어느새 라파엘이 뽑은 검푸른 헬카이트가 그 중년의 남자를 향해 있었다. 라파엘의 얼굴은 살기가 아닌 비웃음이었다. “멍청한 외모만큼이나 한심한 저능아로군. 적어도 날 속이려면 내가 뭘 수집하고 있는지는 알고 준비해야 하는 것 아냐?” 그는 헬카이트의 총구로 그의 이마를 겨눈 채로 다른 한손으로는 능숙하 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퉁퉁한 얼굴에 뭉치기 시작한 사내의 식은땀 이 뭉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서, 설마. 진짜 쏘려는 건 아니겠죠?” “아. 불붙이고 쏠게.” 태연한 말과 함께 은빛의 라이터가 탈칵 소리를 냈고 불길이 솟았다. 그 리고 금세 담배 끝에 화점이 달아오르며 엷은 숨소리와 함께 연기가 흘렀 다. 사형대의 초침이 정시를 때린 기분이다. 라파엘이 싱긋 웃으며 공이를 당기자 찰칵거리는 금속음이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터졌다. “자, 잠깐만!” “무서워하지마.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헬카이트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뭐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샹들리 에의 얇은 유리조각들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고 슬라이드가 격하게 젖혀 지며 창백한 아우라를 머금은 탄환이 늑대의 이빨처럼 솟구쳐 나왔다. 사 내의 불쑥 튀어나온 배를 뚫고 들어간 소멸의 탄환은 그의 영혼을 물고 등 뒤로 관통되어 튀어 나왔고 그와 함께 퍽하고 터진 핏덩이가 이미테이 션 유채화 위를 뒤덮었다. 엄청난 반동과 함께 헬카이트가 들어 올려졌고 소파가 뒤로 넘어가며 영혼이 찢겨진 사내의 시체가 뒤집혀 흉하게 바닥 을 굴렀다. 육체 밖으로 흘러나온 영혼의 모습이 끔찍하게 일그러져 소리 가 나질 않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요동치다 이내 소멸되어 버렸다. 그리고 또르르 바닥을 구르던 탄피가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에 묻혀 정지했 고 화약내를 대신하는 마력의 빛먼지들만이 헬카이트에서 피어오르며 담배 연기와 뒤섞여 천천히 흩어졌다. 라파엘이 담배를 조용히 재떨이에 비벼 끄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좀 성급했나. 어쩌면 내가 가진 것이 리플리카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 자는 영국의 상급 공무원이야.”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큰 키의 여자가 다가오며 짜증 섞인 목소리 로 말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 린다. 멋진 몸의 굴곡을 감싼 회색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는 비서라고 불 리고는 있었지만 말투나 표정이나 차라리 적에 가까울 정도였다. 라파엘이 헬카이트를 넣으며 말했다. “아아. 그래서 이렇게 멍청했군.” “공무원이라서? 아니면 영국인이라서?” “둘 다” “아무튼 축하해. 이것으로 확실한 영국의 적이 되어 버렸네.” “전에도 내 편은 아니었잖아. 애매모호할 바엔 확실한 것이 좋지 않아? ” “웃기고 있네.” 그녀가 조소를 띈 얼굴로 라파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녀는 라파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도리어 그에 대한 적 의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통에 매력적인 얼굴은 항상 히스테릭한 모습이었 다. 라파엘이 다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빈정거릴 힘이 있으면 이 시체나 치워.” “그렇게 부려먹고 싶으면 이 사슬부터 풀어주는 게 어때?” 그녀가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두터운 목걸이를 가리키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에는 아주 긴 사슬이 이어져 있었으며 또 그 사슬은 배 중앙쯤에 있는 굵은 기둥에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녀는 배안 에 묶여 있는 꼴이다. 사슬의 길이는 배안의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댄 라파엘이 그녀를 올려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길들여지기 전까지는 곤란해.” “언젠가는 널 죽여 버릴 거야.” “시체 좀 치워.” “너 따위 놈은 죽어버려!” “증오하는 남자에게 사육 당하는 것도 꽤 즐거운가 보지?” “큭! 빌어먹을 놈!” 그녀가 얇은 눈썹을 찡그리며 라파엘에게 다가가자 뱀 같은 사슬이 차르 륵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라파엘이 말했다. “영혼까지 소멸당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말해. 공짜로 서비스 해줄 테니 까.” “네 놈이 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않아!” “여자의 증오라는 것은 참으로 나약하군. 맘대로 하도록.” 라파엘이 드물게 깔깔 웃었고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가 그의 뒷머리를 세 게 때렸지만 라파엘은 아프다며 소리칠 뿐 헬카이트로 그녀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평소의 행동’은 없었다. “살아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야. 증오하는 자의 죽음도 볼 수 있 고. 안 그래?” “개소리” “그런 말도 살아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지.” 그녀는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며 소름이 돋았다. 무섭고 일그러졌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서글프고 불쌍해 보이는 이상야릇 한 기분. 그녀는 자신의 과거, 정확하게 말하자면 3년하고 2개월 이전의 일들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 폐선 과 사슬로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이건 무슨 이 폐선의 정 령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이 태어난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라파엘은 자신 이 대체 누구였냐고 물어볼 때마다 ‘넌 내 애인이었어’라는 헛소리나 하 며 더 이상 말하길 피할 뿐이었다. 자신의 등에 나 있는 긴 봉합자국에 대 해서 물어봐도 ‘그곳에 네 영혼을 우겨 넣고 닫아 버린 거야. 말하자면 영혼이식수술이랄까.’라는 알 수 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그녀는 이 제 지쳐버려 3년이나 지나버린 지금에 와서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걸 포 기해 버렸다. 단지 처음 이 폐선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쭉 느끼고 있는 근 원을 알 수가 없는 증오심만이 집착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왜 그를 죽도 록 싫어하는지 명확한 이유 따위는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라고 뇌 속에 누군가가 각인시켜 버린 것 같다고, 그녀는 변명하곤 했다. “증오가 너를 지탱하는 힘이라면 버리지 마. 그리고 나보다 오래 살아.” “네 놈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내가 죽을 때 꼭 내 옆에 있어라. 그럼 그때 네가 누구였는지 말해주지 .” “.......” 같은 말을 좀처럼 반복하지 않는 라파엘이 항상 읊조리는 말이었다. 죽음 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아마 이 남자를 지독히 총애하거나 혹은 죽여 버 리고 싶을 만큼 경멸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다문 라파엘의 눈이 잠시 동안 핏물이 뒤덮인 ‘뱃놀이 점심’을 향해 있 었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히죽 웃으며 전화기를 드는 것이었다. “너 만큼이나 웃기는 녀석이 또 있지.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또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그래?” “섭섭한 말이군. 그 놈은 내가 망쳐버리기엔 이미 너무 망가져 있는 녀 석이야.” 그가 전화기에 도드라진 숫자버튼을 꾹 꾹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Blind Talk : 공포의 티벳버섯 편! 어느날 아버지가 가지고 온 꼭 팽이버섯을 닮은 의문의 생명체... 이름은 '티벳버섯'이랬다. 그 놈과의 악연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아무튼 이 놈은 굉장한게 우유에 담궈두면 자기증식(!)을 하면서 우유를 건강 요구르트화 시킨다고 하며 그걸 마시면... 불로장생한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균사체의 배설물 농축액 같은 걸 마시는 건 굉장히 껄끄러웠기 때문에 가족들이 신들린 듯 아침 저녁으로 죽어라 마시기 시작했지만 난 전 혀 바라보지도 않았고 덕분에 나는 가족과의 묘한 소외감을 겪어야 했다. 그 놈의 티벳버섯 덕분에. 그리고 며칠 후 무언가에 홀려 있는 눈빛으로 티벳버섯의 우수성에 대해 간 증하는 어머니 덕분에(간증 제목 : '내 위장은 이렇게 튼튼해 졌네.') 결국 두려운 마음으로 티벳 버섯이 서식하고 있는 플라스틱 통을 열었고 나는 그 순간 떨리는 두 눈을 주체하지 못한 채 마른 침을 삼킬 수 밖에 없 었다. 가져올 때만 해도 한주먹도 안되던 그 놈이 이제는 그 통의 절반 이상 을 차지하며 번식하고 있었으며 그 놈이 잠겨 있는 우유에서 정체불명의 기 포가 부글 부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분명히 지구를 자신들의 노예 화시키려는 우주인의 무기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되는 기괴한 그 모습에 기가 질려서 이, 이따위 것은 먹을 것 같아! 지구 만세! 라며 도망치는 나를 가족 들이 붙잡고 결국 내 입에 티벳버섯 농축액을 흘려 넣었고 그 이루형용할 수 없이 시큼털털한 그 맛이 대뇌피질을 쥐어뜯었다.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는 다. 그리고 지금은? 난... 티벳버섯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한다. 결국 나도 무섭게 증식해 가는 그 두려운 버섯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는 우리 농네 사람들에게 그 버섯을 조금씩 잘라 분양해 주고 있다. 이 동네도 티벳버섯의 노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 하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_)y-~~~~~~~~~~ 제 동생이 또 어느날 참 유치찬란하게 생긴 작은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는 데... 노브레인 멤버가 동생에게 선물로 준 게 어떻게 제 손까지 오게 되었 네요. 제 동생 왈 '아주 비싼 중국차'라고 하는데... 일단 예전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오며(회사 공장이 중국에 있음) 사가지고 온 의문의 차를 마시고 죽을 정 도로 맛이 없어 몸부림쳤던(예컨대 어시장 폐수 속에 몇번이나 담궈진 기분이 었음) 기억이 나서 두려운 마음부터 앞서더군요. 그래서 받아 놓고 책상위에 놓은 채로 방치해 뒀는데... 어느날 그래도 먹어봐야 겠다는 생각에 뜯어서 찻잎을 본 순간 엄청나게 놀 라고 말았습니다. 그 찻잎이 정말이지 '굉장한 고급이잖아!' 게다가 반발효 차! 뭔가 기대를 왕창하게 되며 적정양을 덜어서 75도의 깨끗한 물에 넣어 조금 우려낸 후에 음미해 본 결과... 맛있다아아아아!!!!!!!!!!!!!!!!!! 갑자기 그 종류가 몹시 궁금해 졌고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져 알아본 결과 이것이 그 유명한 철관음(해석하자면 강철의 관음보살인가 ;;;) 중국어로 는 테관윙. 깊고 풍부한 향기를 가진 최상급의 녹차로 오후에 마신다... 라고 쓰여 있더군요. 뜻하지도 않게 철관음을 손에 넣었다는(뭐 그리 구하기 힘든 것도 아니지만) 기분에 광분하며 지금은 오후 작업 후에는 꼭 한잔씩 마시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티벳버섯우유도 먹지만.-_-) 아무튼 그건 타이완 녹차인데 어째서 중국본토 것으로 명시되어 있는지가 아직도 의문이긴 하지만 그 맛이 굉장하다는 것은 정말 몇번을 마셔봐도 변 치가 않습니다. 가끔은 이런 명차를 마셔보는 것도 살면서 느끼는 행복일 듯. 뭐 그것도 그렇다 치고... 방금 전에 수산시장에 다녀 왔습니다. 멍한 얼굴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 기 배가 터질 정도로 게찜을 먹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같이 노량진 수산시장 으로 직행.(마감 중에는 괜히 딴 짓을 하고 싶어서 미칩니다.) 본래의 목적은 영덕대게를 사가는 것이었지만 역시 수산시장! 가서 보니까 이것 저것 사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고(동생도 나도 시장 분위기 좋아함) 결국 집에 돌아올 때는 1.바닷가재 2.거대 영덕대게 3.괴수급 초대형 털게(!) 4.해삼 한근 5.소라 반근 6.생태 뭐... 이렇게 잔뜩 사버렸습니다. 결국 지갑이 텅텅-_-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놈들이 죄다 살아 있다는 것이고(바닷가재는 거 대한 가위손이 고무줄로 묶여 있음.) 집에 와서 시험삼아 물에 담궈 봤더 니 미친 듯이 광분하더군요.(바다에 사는 놈을 수돗물에 담궜으니 성질내 는 것도 당연하지...) 지금 현재 고민하고 있는 것은 과연 그 놈들을 어떻게 기절시킬까 하는 것 인데 가족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뜨거운 수증기로 하는 것이 가 장 좋다고 주장하는 어머니부터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이 확실하다! 라고 주 장하는 동생의 대립과 그 사이에서 '그냥... 키워보면 안될까'라고 말하는 저까지 혼전의 양상인데... 다른 놈들은 그렇다치고 바닷가재 기절시키는 법은 저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 글을 마치면 곧 인터넷을 돌아다녀봐야 겠습니다.(키워드 : 바닷가재 기절시키는 기술) 그런 거대 갑각류들은 꼭 기절시킨 뒤에 찜을 하시길. 그렇지 않으면 고통 도 고통이고 찜도 망칩니다. 그리고 절대로 중간에 열지 마시길. 김이 팍 빠져 버리면서 게살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오늘 저녁은 물체X를 닮은 녀석들이 밥상을 장식하겠군요... 가끔 마감 때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사오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 곤 합니다. 남들은 쇼핑중독이지만 저는 식재료중독... 그렇다고 뭐 요리 에 대단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특이한게 좋을 뿐. 아... 주절 주절 늘어놓다보니까 엄청나게 잡담이 길어졌군요. 이미 적잖에 써두긴 했지만 좀 더 비축분이 모아지만 자주 연재를 하려고 합니다.(대체 이 말만 몇번을 한거지...) e-mail : billiken@hananet.net 바닷가재 기절시키는 법 궁리중... 1. 물키벨이 슬며시 비령의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담배를 문 채 책들을 들 어 옮기는 중이었다. 불성실한 태도긴 하지만 어쨌든 MSI에 와서 처음으로 청소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가 자신의 방을 정리 하는 모습이 신기한지 물키벨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비령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둔한 남자’ 물키벨은 좀 김이 샜는지 뭐라고 끄응 한 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몹시도 어설픈 몸놀림으로 어지러운 방구석과 싸워 나가 는 비령의 모습을 엷은 미소로 감상해 주었다. 가끔 손까지 흔들었지만 도 무지 눈치 챌 생각을 못한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방 한구석에 있다는 것 을 기어코 비령이 알게 된 것은 결국 20분이 넘게 지난 후. 마지막 책을 옮긴 그가 황망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하곤 다가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왜 남에 방에서 자고 있는 거야.” 2. 후루룩 커다란 잔에 담긴 코코아를 마시던 물키벨은 비령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 고 있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우뚱 거렸다. 손바닥으로 턱을 궨 채 그녀를 쳐다보던 비령이 잠들어 버린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실웃음을 보였다. “아아 굉장해 당신. 이런 곳에서 잠들 수 있다니.” “당신이야말로 굉장해에.” 물키벨이 좀 쀼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자기 방에서 잠들어 쓰러진 여자 발견하는데 십분이나 걸리다니.” “......뭐 하러 온 거야 여기.” “아? 아하하하.” 그녀는 아차 하는 얼굴로 컵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버릇이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는 깨워줄 사람이 없어서 한번 자면 12시간을 거뜬 히 넘겨버린다는 푸념에서 시작해서 오펜바하와는 미운정이 붙긴 했지만 진지하게 사귀기엔 역시 너무 어리다는 시시콜콜한 넋두리를 비롯해 자신 의 고향에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호수가 아직까지도 많 다는 실감할 수 없는 자랑까지, 좀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참 끝도 없는 메 들리를 잇고 있었고 비령은 (역시 언제나 그렇지만) 계속 고개를 끄덕여 주거나 짧게 대답해 주는 쪽이었다. 그의 말을 계속 듣던 비령이 세대 째 담배를 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물키벨은 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시선을 이리 저리 피하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벗었던 안경을 다시 끼며 한숨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당신 되게 둔하다고.” “뭐?” “그리고 나도 차암 확실하지 못한 여자라고오.” 비령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무안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커피 먹을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엷은 바람이 불어오는 에어컨디셔너를 바 라보며 씁쓸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금 사귀고 있는 커플들이 지구상에 몇 명이나 될지 몰라. 확실히 예 전보다는 훨씬 줄었겠지? 이제는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최후의 인류일 수도 있다고. 그런데도 여전히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며 공허감을 느끼는 건 왜일까. 한 사람에게만은 특별한 존 재이고 싶다는 기분을 이제 와서 뭣 하러 느끼는 걸까. 평생을 혼자 살아 온 독신녀의 푸념 같은 거야. 그런데 이런 기분도 이런 시대엔 사친가?” “적어도....... 자격이 없는 남자가 누굴 좋아한다는 건 마음만으로도 사치겠지. 자기 마음도 보호하지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좋아하고 지켜 주겠다는 거야.” 비령의 말을 음미하던 물키벨이 헤헤 웃으며 반응했다. 가끔 그녀는 외모 에 어울리지않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나이 이상으로 성숙하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성숙한 부분 같은 것이 가끔 만져졌다. 그런 부 분이 입을 열었다. “여자....... 그렇게 약하지 않아.” “......?” “보호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결심할 때도 있어, 여자는.” “미안. 내가 이기적이라서.” 엉뚱한 곳으로 서로의 화살이 지나가 버렸다. 비령은 그녀가 자신에게 무 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 말은 정 중한 거절일 수도 있다. “메커니즘에 의하면 영혼도 리사이클링되면서 돌고 도는 거잖아? 그러니 까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선택이 온다면 다시 시작할 거야 ?” “싫어” 뭐하나 쉽게 확신하지 못하는 비령의 대답은 의외로 빨랐다. 그녀도 예상 했다는 듯 - 하지만 고개를 기울이며 사족처럼 되물었다. “지금이 좋아?” “아니. 하지만 다시 시작해도 결국 내 나이 쯤 되면 또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할 것 같으니까. 처음으로 돌아가 봐야 싫었던 일들 다시 겪을 것 같애, 그러니까 리셋하는 것도 무서워.” “처량하네에.” 천추(千秋)의 세월이 흘러간 뒤에는 그의 생각도 바뀌지 않을까. 그때는 절망적으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이 아무리 힘들더라 도 리셋 같은 건 거절하겠다고 외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무서 웠다 그도 그녀도.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비령은 느린 손놀림으로 수화기 를 들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의외의 상대였다. 말하자면 저 깊은 동굴 끝에서 울려오는 듯한 목소리. 라파엘이다. “오랜만이야. 그 아이와는 잘 되어 가나?” “당신은.......” 잊어버릴 수가 없는 목소리다. 특별히 무섭거나 불쾌한 음성이 아닌데도 어깨 근처를 짓누르는 듯한 음성. 자신의 약점을 꿰뚫어 보고는 인정사정 없이 그걸 후벼 팔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수화기 너머 저 편은 꼭 지옥의 옥좌 같았다. “겁먹지마. 잡아먹지 않아.” “무슨 용건이지.” 비령의 방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전부 MSI 내부 인원만이 가능하며 또한 모조리 감청되고 있다. 그런데도 라파엘이 통화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MS I에서 적잖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초대 연구소장 알 베르트의 아들이자 최악의 영격사인 그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여기까지 들려는군. 네 주변에 달라붙어 있는 영혼들 뭐라고 속삭이고 있는지.” “전화, 끊겠어.” “잠깐만. 난 널 도와주려는 거야.” “뭘 도와준다는 거야!” “네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탈칵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 쪽에서 전화를 끊은 것이다. 비령은 라파엘이 대체 어떤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고 또한 그가 부리는 막강한 힘 역시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통화 중에 아주 은밀하고 위험한 기운을 화를 통해 불어 넣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키벨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는 비령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비령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이유를 알 수가 없는 불편한 기분에 시달리 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물키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누구라도 처음에 는 의심했을 것이다. 비령의 등 뒤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모습을 만들어 내 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통에 질린 눈동자 같은 검은 빛덩어리가 허공 속에 서 뭉쳐지고 있었고, 머리카락을 닮은 긴 광선들이 추욱 바닥에 쏟아지며 무언가가 이 세계로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것을 ‘ 악령화 현상’이라 불렀다. 1. 비령의 근처에서 나타난 악령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느낀 건 물키벨의 착 각이 아니었다. 마치 촉수를 닮은 창백한 손길이 물키벨을 향해 달려들었 고 그녀는 몸이 굳어버린 채로 그것이 자신의 심장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아아악!” 물키벨의 비명소리에 비령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그녀의 심장을 뜯어 삼키려는 악령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또 다 시 재현되었다. 그가 물키벨에게 뛰어가며 소리쳤다. “하지마! 그만둬!”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거짓말처럼 반복되었다. 가슴이 찢겨질 것 같은 기 분. 쓰러질 듯 넋이 나간 얼굴로 소리치며 비령이 달려가자 푸르스름한 악 령의 몸이 길게 늘어나 큰 곡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 간 벽을 따라 시퍼런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민감한 센서가 즉시 반응하 며 사이렌을 울렸고 스프링클러가 방 전체에 물을 뿌렸지만 악령이 만들어 낸 집착의 귀화(鬼火)는 꺼질 줄을 몰랐다. “고통스럽겠지....... 미안해.” 차가운 비처럼 쏟아지는 물길을 맞으며, 비령의 젖은 머리칼 사이로 흔들 리는 시선은 천정을 올려보고 있었다. 천정을 장악한 악령이 스멀스멀 모 습을 바꿔가며 일그러진 눈동자로 비령을 내려보고 있었다. 2. 안 그래도 유리조각 같은 정신을 가진 심약한 물키벨이었다. 심한 충격을 입고 정신을 잃은 그녀의 심장은 정지해 버렸고 응급실로 급히 옮겨져 극 단적인 소생술을 벌인 끝에야 겨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키 벨을 옮긴 비령은 그 이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악령을 뒤쫓았다. 그리고 라파엘이 MSI에 온 것은 비령이 악령의 뒤를 밟으며 MSI의 깊은 곳으로 들 어가 버린 지 3일 후였다. “하아. 하아.” 며칠 째 MSI 내부를 헤매고 있는 비령은 죄책감이라는 벌레가 계속 몸속 에서 증식하는 것을 느끼며 순례자처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하 수 십 층으로 이뤄져 있는 MSI의 깊은 곳은 말 그대로 무인지대(無人地帶)였 다. 미처 완성되지 않아 앙상한 철골들과 죽은 여자의 머리칼처럼 엉켜 있 는 피복전선들이 끝없이 벽면을 타고 있었으며 그 미로 같은 구역들은 전 기를 머금고 있는 기괴한 생물을 닮았다. 가끔 지이잉 거리는 얕은 구동음 과 함께 감시 카메라들이 자신을 향해 촛점을 맞추는 것을 볼 때마다 비령 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테싱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예 이 곳에서 ‘미아’(迷兒)가 되어 죽어버리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표지문 조차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은 미완성구역 속에서 그는 돌아갈 방법도 궁리하지 않았다. ‘결국 난 또 도망친 건가.’ 악령의 뒤를 밟겠다는 의지조차 변명이었을지 모른다. 몇억번을 반복되었 을지 모를 흐릿한 비상등의 점멸을 눈에 담으며 그는 이미 지상과 이별했 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곳이 대체 어떤 목적으로 만들다가 이제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버려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승과 지옥을 연결해 주는 아주 긴 통로 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만 싶었다. 시궁쥐라도 돌아다녔다면 차라리 친숙했겠지만 - 이곳에는 오직 목구멍을 부식시키는 탁한 공기와 어딘가에서 계속 들리는 기계적인 반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두 눈이 퇴화되어 버릴 듯한 어둑한 공간 어디에 악령 이 숨어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바램이지만.......’ 지쳐버려 차가운 벽에 기대어 앉은 비령은 갑자기 가랑을 보고 싶다는 기 분이 들었다. 그녀는 또 돌아가자고 말하겠지. 그리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걱정해 줄 것 같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잠시 그녀와 시시콜콜한 말싸 움을 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탁한 공기 와 비상등의 붉은 불빛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해 보이는군. MSI의 진짜 모습을 감상한 기분이 어때.” 조롱 섞인 목소리. 며칠만에 처음으로 들은 사람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 이 두려웠다. 비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을 때 그 앞으로는 용케도 자신 이 있는 곳을 알아낸 라파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 “요정을 찾아 숲에 들어간 소년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지. 사람들은 그 가 요정의 나라에서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모르고 축제를 벌이느라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맹수에게 물려 죽어 버린 거야. 현실적인 이 야기는 시시한 법이지.” “이 자식!!” 지쳐버린 자신에게 이런 힘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비령이 그에게 달려 가며 주먹을날렸다. MSI에 악령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이곳에 라파엘의 영향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타난 악령 역시 라파엘이 변이시 킨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악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약하군. 몸도 마음도.” 라파엘은 날아드는 비령의 팔을 손쉽게 잡아챘다. 그리고 엄청난 힘으로 비령을 들어올린 라파엘은 그를 바닥에 내던지며 위압적인 시선으로 내리 깔았다. 수없이 영혼들을 소멸시킨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악마 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야! 왜 내게!” “화내고 겁먹는 짓 밖에 못하는 거냐.”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라파엘의 목소리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부드러울 정도로 그에게 이곳에 대해 다시 상상해 볼 기회를 주며 앞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알베르트가 죽기 전 그는 내 어머니를 살해했다. 기록에는 없지 만 살해 직전 그는 몇 달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긴 혼수상태에 빠져 있 었지. 그가 그 무의식 속에서 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왔는지 대강 짐작은 가지만 그를 간호하던 어머니를 참혹하게 죽인 후 그것을 제물로 해서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건 분명 실험이 아니라 제사였어.” “......” “사람들은 알베르트가 미쳐버려 자살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난 그가 제사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곳은 내 동생의 명령으로 폐쇄되었지 말하자면 이곳은 MSI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악마의 무덤이야.” “그게....... 네 놈이 내 누나의 영혼을 악령으로 바꿔버린 것과 무슨 상관이야. 네 놈의 저주받을 가족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너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내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개 같은 퍼즐을 풀 수 있는 놈은 너 뿐이니까.” “웃기지마. 그걸 왜 내가 해야 해? 나 말이야....... 도망치는 것만으로 도 바쁘다고.” 비령이 자멸적인 자조를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지겹다 그런 건. 그냥 ‘ 쓸모없는 비겁자’라고 욕하고 경멸하는 것 정도로 끝내줬으면 좋겠다. 하 지만 라파엘은 헬카이트를 꺼내며 묘한 웃음을 보였다. “널 만나기 몇 시간 전에 한발 쏴 버렸어.” “......!” “자신을 소멸시켜 달라고 외치던데? 그리고 널 지켜달라고 부탁하던데? 그래서 널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널 동정해 줄 여유는 없지만 죽게 만들지 는 않겠어. 과거는 여기서 끝이다 멍청아. 이제 도망칠 이유도 없지?” “어떻게 그런 짓을.......” “이봐. 힘들어하는 네 누나를 내가 죽여줬다고. 고맙지 않아?” 몸을 떨고 있는 비령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얼마나 ‘결심’이라는 것을 해봤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누구나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어!’라는 결심은 의외로 자주 하고 또 의외로 자주 망각하거나 번복해 버린다. 그러나 정말 중대한 결심 , 일생에 한번 할까 말까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결심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따라간다. 비령 역시 '평생의 결심'을 지키지 못했고 그 이후 그는 사소한 결심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 죄책감의 근원마저 소멸되어 버렸다. 한심할 정도의 결말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저 질러져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이상 라파엘에게 화가 나질 않는다. 그냥 막 눈물만 날 뿐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그런 그를 끌고 지상으로 올 라왔다. 지상은 또 다른 사건으로 거대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3. “대체 어디 있다 이제야 온 거야! 큰일이야! 물키벨 그 바보 같은 여자 가!” 탈진 상태에 빠져 입술마저 바짝 메말라 있는 비령에게 오펜바하가 뛰어 오며 화부터 냈다. 그의 표정이 전에 없이 다급했기에 비령은 이것이 심상 찮은 일이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죽었어?” “그게 아냐! 그 여자, 지금 중심부를 폭발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뭐?” 물키벨이 깨어난 것은 반나절 전이었다. 악령에게 물린 자들이 다 그렇듯 이 그녀 역시 깨어나자마자 이성이 감당할 수가 없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 였고 그것이 그녀의 판단을 마비시킨 것이다. 중심부를 폭주시키는 건 물 키벨로서는 간단하다. 그곳에 가서 몇 번의 조작만 한다면 MSI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오르다가 터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말 그대로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죽어버린다. 현재 물키벨은 중심부에 틀어박혀 다가오면 폭파시켜 버리겠다는 위협을 하며 연구원들과 대치 중 이었다. 악령들에게 당한 적이 있던 비령은 그녀의 지금 기분을 알 수가 있었다. 자살 정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고 대부분 이성이 모조리 엉켜 버린 폐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이 말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이로군. 죽여 버릴까?” “뭐, 뭐야 당신은!” 오펜바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 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 렸다. “어차피 곧 군인들이 들이닥칠 거야. MSI가 위험한 것을 조용히 바라보 고 있을 놈들이 아니니까 뻔한 일이지. 누군가 구하지 않으면 MSI가 잿더 미가 되거나 물키벨이 죽어.” “라파엘” 비령이 말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 영웅 행세하고 싶은 생각 없지만 이번 에는 과거의 그런 후회만 가득한 결과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물키벨과 얘기해 보겠어. 그러니까 십분만 벌어줘.” “중무장한 군인들을 막아달라고?” 라파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킥킥 웃었다. “부탁이야.” “공짜로는 곤란하겠는데.” “원하는 게 뭐야.” “미술품 같은 건 없을 테고....... 네 과거를 들려 줘. 뭐가 널 그렇게 망쳐 버렸는지.” 비령이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비령에게 있어 그의 과거는 절 대로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곪아버린 자신의 마음처럼 어디다 버 릴 수가 없는 쓰레기 같은 것. 그래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 만 잠시 후 비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심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좋아. 알려주지.” 4. 물키벨이 중심부를 점거하자마자 각 기관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즉시 마르 크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들의 명령은 모두 하나였다. “사살해라.” “그럴 수 없습니다.” “마르크 군. 지금 명령에 불복하는 건가?” “그녀는 프로젝트 테시오스의 핵심 멤버입니다. 그녀가 없으면 연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연구가 다소 늦어지더라도 상관없어! MSI가 붕괴되어 버리는 것 보단 낫지 않나!” MSI의 붕괴라는 것은 강대국들로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였다. 신경쇠 약에 걸려 버린 계집애 때문에 연구기관이 폭발해 버리는 어이없는 결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르크는 단호했 다. “이곳의 총책임자는 접니다. 그리고 모든 연구원들도 제가 관리합니다. 절대로 사살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화를 통해 말하고 있는 마르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간부들이 말했다. “이번 사태에 한해 자네의 지휘권을 박탈한다. 즉시 진압부대를 파견하 겠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곡들이 꽤나 늘었던데 헉! 크림슨 글로리의 DRAGON LADY가 나왔더군요.;;; 결국 부를까 말까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랩소디의 에메랄드 소드가 나왔길 1. 물키벨이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난 것은 3일 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보통 때라면 별로 의식하지 않고 낭비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리라. 그러나 그 시간 동안에 바꿔 버린 그녀의 모습은 두려울 정도였다. 제어실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던 비령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제어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그녀가 비령에게만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물키벨.” “처음이네. 날 그 이름으로 불러준 건.” 비령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의 뒤에 있는 모니터의 그래프들을 흘낏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녀는 MSI의 심장을 폭주시킨 것이다. 분명히 해제암호도 바꿔 놨을 것이 분명하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10분 안에 임계 점을 넘는 순간 MSI 전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게다가 이곳에서 해제암호를 넣기 전에는 누구도 멈출 수가 없다. 많고 많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곤 했던 장면이긴 한데 몇 가지 차이가 있다면 사건의 장본인이 잔인한 악의 화신이 아니라 단지 심하게 지치고 상처 입은 여자라는 것이었고 또 비령 역시 투철한 신념을 가진 영웅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그녀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는 남자일 뿐이라는 것이리라. 영화처럼 간발의 차이로 멈추게 만 들 편안한 보장도 없이 메마른 시간이 흐를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기뻐. 네가 와줘서.” 희미하게 웃는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 이면에는 뒤틀린 그녀의 마음이 나 락으로 추락해가고 있었다. 비령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러니 까.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게 사려고 발악하는 사이에 육신도 영혼 도 병들어 버렸다. 비령이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자, 약하지 않다며?” “실망시켜서 미안.” 그녀가 조금 울먹거렸다. 2. 거친 발소리가 순식간에 MSI를 뒤덮었다. 연구소로 들이닥친 군부대는 방 위여단 예하의 특수부대로 그 숫자는 거의 대대규모에 달했다. 아무리 최 상부의 명령으로 위협행위를 하고 있는 한 연구원를 사살하기 위해 투입된 병력이라고는 해도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MSI의 모든 시설을 장악하며 모든 연구소 직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누가 봐도 처음부터 MSI 진압을 위한 훈련을 받을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MSI가 강대국들에게 등을돌렸 을 때는 순식간에 전원을 몰살하고 연구소를 ‘점령’하리라는 걸 충분히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말하자면 오펜바하가 말했던 ‘양날의 칼’이 예행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꼴이었다. “어떤 저항도 금한다.” 비무장의 MSI가 중화기로 무장한 다국적군을 상대로 저항하는 것은 아무 런 의미도 없었기에 마르크는 즉시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군대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제어실을 향해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런 마르크의 명령 을 따르지 않은 자는 단 한명뿐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당장! 불복 시엔 발포 한다!” 주제어실로 통하는 통로는 단 하나. 그곳으로 진입하던 선두는 통로 중앙 쯤을 지날 때 벽에 기대어 있는 큰 키의 남자를 보고는 정지하며 소리쳤다 . 모든 총구가 겨냥되어 있는데도 그는 흘낏 눈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태연히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굉장하군. 계집애 하나 죽이는데 그런 무기가 필요한가? 나보다 더 한 데.” “경고한다! 바닥에 엎드려!” 하지만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군인들의 목소리도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라파엘의 모습으로 봐선 분명히 MSI의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군인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런 정체불명의 방해자에게 평소 같으면 방아쇠를 당겨야 했지만 차가운 독침이 몸속에 파고드는 듯한 섬뜩한 살기가 확 뿜어지자 도리어 뒤로 주춤하는 것은 군인들 쪽이었다. 라파엘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나도 경고하나 할까?” “뭐, 뭐라고?” “이걸 다 피우고 나서도 내 눈앞에 보이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 영혼까지.” 라이터에 불이 오르며 연기를 삼켰다. 사실 라파엘로서는 그들과 일일이 싸우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악마적인 살기로 움직임을 묶어두고는 있지만 너무 공포심을 자극해서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게 만드는 것 도 사양이다. 수십 명쯤은 눈 깜짝할 시간에 죽일 수 있어도 날아드는 총 탄을 피할 곳도 없는 이런 곳에서 혈투를 벌이는 건 질색이기 때문에 라파 엘로서는 적당히 그들을 옭아매며 10분 동안 제압하기만 하는 되는 것이었 다. ‘......그게 말이 쉽지.’ 훈련받은 군인들을 10분 동안 제압한다는 것은 라파엘로서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라파엘은 떨리고 있는 그들의 총구를 좀 심란한 시선으로 훑어보며 천천히 연기를 뿜었다. 3. “지금 즉시 연구소 밖으로 나가. 아직은 시간이 있어.” “무슨 말이에요 오빠.” 마르크의 말에 가랑이 당황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마르크는 계속 치솟고 있는 모니터의 숫자들을 바라보다가 단호히 말했다. “너만 살면 돼.” “그런 말이 어딨어요!” “고집부리지마. 마음만으로 기도할 단계는 이미 지났으니까.” 마르크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결론이 간단하다. 비령이 10분안 에 막지 못할 경우 MSI 내부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죽는다. 만약 군대가 물키벨을 사살할 경우에도 그녀가 바꿔놓은 해제암호를 찾지 못한다면 역 시 죽는다.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가랑이 괴 로운 표정을 품은 채 움직이지 않자 마르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절 박한 순간이라면 표정을 풀고 간절한 목소리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본심을 꺼내도 괜찮을 텐데 마르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씁쓸하고 또 사무적이었다. “결국 우리는 죽어도 죽지 못해. 육체가 죽어도 정화되지 못한 채로 유 령이 되어 이 지상을 떠돌게 될 테니까. 천국도 지옥도 없이 단지 비참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 도록 해주는 것뿐이야.” “이곳이 무너져 버리면 다 끝나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쌓아왔던 노력이! ” “어차피 이곳은 목적지도 없이 표류하는 배. 이쯤에서 침몰해도 이상할 것 없잖아.”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래도 사람들은 오직 이곳만을 희망으로 생각 하고 있다고요!” “사람들이.......” 마르크가 입속에서 말을 굴리다가 자멸적으로 내뱉었다. “속은 거야.” 4. 7분이 흘렀고 8분을 향해간다. 그러나 물키벨을 바라보고 있는 비령은 아 무 말도 없었고 물키벨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붉은빛 으로 뒤바꿔 버린 모니터의 그래프만이 임계점을 향해서 치솟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비령 단 한명에게 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걸려 있는 셈이 되어 버렸다. 절대 원치 않던 일이었지만. 비령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용 히 입을 열었다. “예전 마르크와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어.” “......” “그때 느꼈어.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왜?” “엉터리 칵테일을 파는 클럽 같거든.” “헤헤. 재미있는 비유네.” 벽에 몸을 기댄 채 쭈그려 앉아 있던 물키벨이 피식 웃으며 위를 올려보 고는 모니터를 체크했다. 한 2분쯤 남은 걸까.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칼에 한쪽 눈이 가려져 있는 처연한 얼굴로 비령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표정 잘 알고 있다. 비령은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같이 죽으면 영혼이 되서 만나겠지?” “그렇겠지.” “그때도 서로 이런 대화하게 될까?” “그럴 필요도 없겠지.” 그때 저 너머의 통로에서 거친 총소리가 들렸다. 양철판을 커다랗게 두드 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비명도 뒤섞여 이곳으로 몰아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물키벨이 귀를 막으며 얼굴을 무릎 속에 파묻고 몸을 떨었다. 결국 그녀도 자꾸 상처 입어서 겁을 먹고 있는 것뿐이리라. 그녀가 소리치 듯 혼잣말을 했다. 마치 누군가를 심하게 원망하는 것처럼. “살기가 힘들어. 못된 짓을 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들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이 그것이라면 무척이나 서글픈 일 일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비령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 전체에 악 의가 들어차서 숨이 막혀버리는 것 같았고 그래서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 어 올랐다. 비령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 왔다. 벽에 달라붙은 그녀의 표정이 창백해져선 찢어져라 소리쳤다. “다가오지마!!” “자살하려면 혼자 해.” “오지 말라니까!”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확 깔리며 꽉 감추고 있던 공포심이 드러나 버렸 지만 비령은 상관없다는 듯이 제어콘솔을 향해 걸어가며 대답했다. “나도 별로 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남의 히스테리에 휘말려서 동반 자살하긴 싫어. 자살 정도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 방식으로 하고 싶으니 까 죽으려면 혼자 죽어.” “......너무해” “죄다 힘들어! 힘들어 죽겠다고! 그러니까 도저히 살 기운이 없다면 아 무도 모르게 혼자 사라져 버리면 되잖아! 자살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거야! ” 반쯤은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이 탔던 그 차에 탄 것이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말려주지 않으면 절벽 끝을 향해 내달려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비령은 이제야 자신의 옆에 앉았던 가 랑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령이 다가간 곳은 그녀가 아니라 제어콘솔 쪽이었다. 그가 제어기를 만지기 시작하자 물키벨이 당황하며 말 했다. “뭐, 뭐하는 거야.” “막아봐야지. 그러려고 왔으니까.” “소용없어.” “알아.” “알면서 왜 하는 거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비령이 제어기를 내리치며 소리쳤고 물키벨이 울먹거리는 얼굴로 그를 바 라보았다. 문 밖에선 계속 끊이지 않는 총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라비테이션의 삽입곡 RAGE BEAT를 들으며... 1. "뭐, 뭐야 저 놈은!“ 군인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무전기에서는 계속 작전을 수행하 라는 소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도무지 앞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 다. 그들 앞에 서 있는 라파엘에게 조금이라도 다가선다면 그 즉시 지옥 속으로 추락해 버릴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이다. “뒈지고 싶으면 또 총 쏴 봐.” 라파엘이 그들을 바라보며 어둑하게 웃었다. 사실 그의 입에서 조금씩 피 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다섯 발이나 관통되었다. 입고 있는 코드는 피투 성이가 되었고 들고 있는 헬카이드 역시 흐르는 피에 엉켜 있었지만 군인 들 역시 충분히 두려움을 느낀 상태였던 것이다. 라파엘이 쏜 소멸의 탄환 이 서 있던 군인들의 몸을 몇 명이나 관통하며 영혼까지 뒤틀려 사그라지 는 모습을 바라본 군인들로서는 더 이상 총구를 겨눌 정신이 없었다. 몇 명은 이미 이성을 잃고 눈이 풀린 채 몸을 떨고 있을 지경. 현실의 한복판 에서 나이트메어를 만났다면 이런 상황일까. 그때 새로운 명령이 무전으로 떨어졌다. 작전종료명령이었다. “처, 철수한다!” 군인들은 도리어 안도의 표정으로 사망한 시신과 정신이 나간 동료들을 끌고 뒤돌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때서야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며 벽에 등을 기댔다. 몸에 구멍이 난 기분이라는 것이 영 불쾌하기도 했고 9분을 넘어가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는 비령에게 걱정보다는 짜증이 나기도 했 다. 사는 것 자체가 헛고생이긴 하지만 기껏 이런 난리를 피워 놓고 MSI가 폭발해 버리면 유령이 된 뒤에도 화를 삭일 수 없을게 분명하지 않은가. “라파엘” 그때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비령을 라파엘이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비 령 보다는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오는 물키벨을 향해 있었다. “너냐? 한방에 세상을 말아먹으려 한 계집애가?” “다, 당신 뭐야.” “꼴상 사납긴 해도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벌집이 되어 있을 거다.” 라파엘이 쿨럭 거리며 얘기는 집어치우자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물키벨의 라파엘에 대한 첫인상은 ‘유황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고 또 외모만으로 도 단번에 그가 마르크의 형 라파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궁 금한 건 어떻게 그 악명이 자자한 영격사가 비령을 도와줬냐는 것이다. 물 론 라파엘로서도 비령이 어떻게 물키벨을 진정시켰는지가 조금 궁금하긴 했다. 비령이 피투성이가 된 라파엘의 모습에 조금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막아줘서 고맙군.” “인사는 집어치워.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라파엘이 피에 젖은 손으로 새 담배를 물어 피웠다. “치료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걱정도 집어치우시지. 익숙하니까.” “투정이 심하군.” 비령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태연하게 담 배나 피우고 있는 꼴이 나름대로 참 투정어려 보였고 한편 이번만큼은 그 리 무서워 보이지도 않았다. 물키벨이 비령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나 숲에 가고 싶어.” 뚱딴지가 같은 말이다. 사선을 넘어선 뒤에 처음으로 하는 말이 숲이라니 . 비령은 갑작스런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도 찾지 못했다. “어디라도 좋아. 숲 속에서 공기라도 마음껏 마시고 싶으니까.” “가면 실망할 거야.” 비령이 비관적인 말을 꺼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요정들이 뛰노는 그런 아리따운 숲이라는 건 어린애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지 이 시대의 숲이라는 건 부랑자들의 은신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물키벨이 말했다. “실망해도 좋아.” 비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내려보았다. 의외로 속내 가 깊은 여자라 가끔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가 없을 때가 있 어서 자꾸 사람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또박또 박 말했다. “마지막에 해줬던 말, 고마워.” “아, 거짓말이었어.” 비령이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물키벨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의 등을 톡 건드렸다. “언젠가는 나도 널 지켜줄 거야. 기회가 오면 꼭 지켜줄게. 약속이야.” 그리고 그녀는 15만년 동안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2. 비령과 함께 나타난 물키벨이 가장 먼저 만난 자는 바로 마르크였다. 엄 청난 처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마르크 가 물키벨의 사살 명령을 거부한 것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마르크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상부 기관에 넘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솔직히 굉장히 겁을 먹은 상태였다. 어쩌면 로봇처럼 움 직이도록 세뇌를 당할지도 모른다. 마르크가 항상 피우는 길고 얇은 담배 를 재떨이에 놓은 뒤에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까지 인류멸망에 대해 염세적으로 평가했던 자라고는 생각도 못할 얼굴이 다. “삼일이면 되겠지?” “예?” “삼일이면 될 거야. 나가봐.” 이상한 말에 어리둥절한 물키벨이었지만 그 ‘3일’이라는 것은 그녀의 요양기간이었다. 사실 요양치고는 턱없이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물키벨로 서는 의외의 ‘선물’이었고 생전 처음 마르크가 너그럽게 넘어가준 것이 기 때문에 얼떨떨한 얼굴로 휴가를 받아들였다. 휴가라고 해봐야 결국 특 별히 갈 곳도 없이 방안에서 뒹굴 뿐이겠지만 다른 어떤 처벌도 없었다는 것이 도리어 두려울 지경이다. 사실 상부에서는 물키벨의 연구원 자격 박 탈을 요청했지만 마르크는 그것을 묵살했다. 그것이 프로젝트의 중추에 있 는 물키벨의 능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상부에 대한 무언의 반항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물키벨을 지켜주려는 의도였는지 그것은 마르크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진짜 화가 난 사람은 오 펜바하라서 그는 앞으로는 ‘장난’의 강도를 높여주겠다며 무시무시한 으 름장을 놓았다. “언니를 도와줘서 고마워요.” 사실 참 조촐한 환영이다. 방으로 돌아온 비령에게 다가온 가랑의 손에는 귀엽게 장식되어 있는 수제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미친 듯이 환호하는 인파도 없고 정부의 표창도 없고 상금은 더더욱 없다. 무뚝뚝한 연구소장 의 ‘원위치’ 명령과 그 여동생의 케이크가 인류를 구해낸 대가의 전부랄 까. 비령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케이크를 바라보던 그가 웃음을 참으며 가 랑을 올려다보았다. “이것도 동정이야?” “헤헤. 아니에요.” “그런데 너.” “예?” “숲에 가지 않을래?” “숲이요?” “하아. 역시 엉뚱하지?” 비령이 케이크 접시를 받으며 좀 부끄러운 듯이 자그맣게 대답했다. 케이 크를 보며 ‘달콤하겠군.’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자신 에게 의외였다. 가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한명 더 있었다.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너?” 라파엘이었다. 몸에 피에 젖은 붕대가 감겨 있는 그의 모습은 사지를 뚫 고 돌아온 늑대를 닮았고 보통 사람이었다면 가까이 있는 것조차 굉장히 불편해 할 모습이다. 하지만 가랑은 그를 향해 애써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 다. “고마워요. 도와주셔서.” “네 머리에 내 총이 다가왔던 일이 기억 안나? 기억력이 나쁜 여자로군. ” 라파엘은 이 붉은 눈의 소녀가 지독하게 순진한 멍청이거나 혹은 성모 마 리아를 꿈꾸는 로맨티스트 따위가 아닐까 하며 냉소를 품었다. 자신이라면 한번이라도 자기를 위협한 자를 향해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얼빠진 짓 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가랑의 성격은 전혀 달랐나 보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착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라파엘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고 라파엘은 말이 없었다. 잠시 그녀를 올려보던 라파엘은 비령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예전처럼 으르렁거리며 난폭한 협박을 하는 일은 없었고 단지 마음에도 없는 빈정거림이 방패처럼 입에서 나왔다. “애완동물이 말도 하는군.” “당신은 오빠와 참 많이 닮았어요.” 가랑이 왜 마르크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또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라파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 게 말하고 나서 방을 나갔다. 비령은 그런 뭔가 숨막히는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아 라파엘에게 말했다. “넌 인간이 맞긴 하나?”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한 것이 아무리 치명상이 아니더라도 몸에 5발의 총 상을 입어 놓고 이런 곳에서 태연하게 빈정거릴 힘이 남아 있는 모습이 도 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이건 체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마법으로 나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라파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 “몰라 나도. 잘난 아버지가 내 몸을 어떻게 헤집어 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지간해선 죽지도 못해. 대신 고통만 똑같지. 지금도 빌어먹을 정 도로 아프다고.” “축복 혹은 저주 겠군.” “난 후자가 아닐까 한다.” 좀 시시한 얘기가 오간 뒤에 비령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끔찍한 과거 에 대해 꺼내기 전 마음을 굳게 먹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라파엘은 그런 그의 모습을 감상하듯이 훑어보았고 잠시 후에 비령이 입을 열었다. “벌서 사 년 전인가....... 누나가 죽었을 때가.” 그의 가라앉은 눈빛은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1. 비령이 잠시 말을 멈추며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한가지...... 먼저 물어볼 것이 있어.” “......?” “왜 나의 과거에 관심을 갖는 거지?” 비령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라 파엘이 관심을 갖는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 신의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대체 어쩌새 라파엘이 생각하는 미래와 관련 이 있는 것인지도 연결지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말했다. “영격사라는 것이 뭐라고 생각해.” “악령을 퇴치하는 자들이 아닌가?” “퇴치라. 결국 악령도 인간의 다른 모습이야. 악인이라서 악령이 되는 건 아니지. 악령이라는 말도 결국 인간이 편한 데로 붙인 천박한 표현일 뿐이고 단지 그들은 오갈 곳이 없는 생령들일 뿐이야.”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비령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그의 말을 듣기 로 했다. “영격사들은 고통에 미쳐가는 영혼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자들이야 .” “내 누나도....... 미쳐가고 있던가?” “물론이지. 처음 널 봤을 때부터 네 뒤를 따라다니더군. 날 두려워하면 서도 네 주변을 떠나려 하지 않았어.” 비령이 식은땀이 흐르는 손바닥을 꽉 쥐며 눈을 감았다. 결국 계속 자신 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쳐버린 영혼들은 집착이 없어. 이성도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 냥 증오만이 남아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인간들을 헤치니까. 나는 그 것이 불안한 영혼들이 육체를 얻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라고 생각해.” “내 누나도 내 몸을 갖고 싶어 하던가?” “그게 좀 기묘해. 솔직히 처음 봤어. 미쳐버렸는데도 널 지켜주려고 하 는 모습은. 계속 그를 지켜달라고 나에게 소리치며 널 껴안고 있는 바람에 귀가 아플 지경이더군. 네 육체를 탐했다면 얼마든지 널 죽였을 거야.” 비령은 죄책감에 숨이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두 번이나 죽 어 놓고 죽은 뒤에 도 계속 자신을 지켜주려고 했던 것인가. 그런 사람 앞 에서 자신은 계속 도망치려고만 했던 것일까. 자신이 혐오스럽다. “아까 말했었지. 네 누나와 약속을 했다고. 널 지켜주겠다고 말이야. 솔 직히 난 가족의 사랑이고 어쩌고 하는 것도 실감하지 못하겠고 네가 무슨 생각이 있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그것도 관심 없어. 하지만 너의 능력과 그 기묘한 현상을 보고 있으면 내가 골몰하는 있는 퍼즐을 네가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야. 널 지켜주는 것도, 네 과거를 들어보려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해 네 과거를.” 비령이 힘들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은 항상 느끼고 있다 . 그리고 그런 나약함을 라파엘이 뒤흔들어 놓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결국 자신도 라파엘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는 별 흥미가 없지만 - 말하자면 속죄랄까. 비령이 입을 열었다. “강도가 들어왔었어. 그 어두운 집안에서 거친 고함소리와 발소리가 들 렸고....... 누나가 잡혔어. 난 총을 들고 강도를 겨냥했고 강도들은 누나 를 잡고 날 위협했지. 사실 그 놈들은 강도로 위장했지만 날 죽이려고 들 어왔던 자들이야. 난 정부의 명령으로 불법적인 실험을 하고 있었고 그걸 그만두고 사람들에게 밝혀야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래서 정부가 내 입을 막으려고 했던 거야.” “미숙한 영웅은 항상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지.” 총상에서 흐르는 피에 붕대의 절반이상이 붉게 젖어버린 라파엘이 욱신거 리는 고통에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사실 난 한번도 총을 쏴 본적이 없었어. 그런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꼭 명중할 것 같았거든. 상대는 네 명. 순간 세 발을 쏴서 머리에 맞췄어. 놀 랄 정도로 빠르게.” “사격에 소질이 있군.” “하지만 마지막 한명에게는 빗나갔어. 그리고 그쪽에서 총을 꺼냈고 내 게 겨눴지. 타앙 소리와 함께 어득한 집안에 파란 빛이 번뜩였고 그 짧은 섬광 속에서 나는 그 놈 앞을 가로 막은 누나의 모습과 총알이 누나의 등 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봤어.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잊혀지질 않아. 시 간이 정지해 버린 것 같았어.” “그래서 죽었군.” “그 이후는 기억이 잘 안나. 당황하는 그 강도에게 몇 발이나 쐈는지 기 억도 안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나의 시체를 차에 태우고 연구소로 향하 고 있었지.” 라파엘은 진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되리라 생각하며 흐 릿한 시선으로 계속 말하고 있는 비령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남자처럼 그는 자신의 지난 일을 하나하나 훑어내고 있었다. “내가 담당하던 실험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말하자면 영혼 채집해서 시체 속에 넣는 과정이야. 우리는 그것을 재생인간이라고 불렀지.” MSI 외에도 영혼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연구소들은 많았다. 물론 그 장비 나 수준이 조악하긴 했지만 거의 광기에 가까운 비상식적인 실험들 - 실험 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술에 가까운 시도들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비령 역시 그것에 손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 비령’이라는 가명을 쓰기 전의 일이지만. “하지만 그건 그냥 이론 단계였고 그전까지는 단 한번도 인간을 실험체 로 한 임상실험은 해 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난 누나의 영혼을 채집했고 시체에 주입하려고 했어. 길고 지독하게 얇은 주사바늘 같은 것을 통해 주 입하는데....... 그게 꼭 강령술(降靈術)같지." 네크로맨시(necromancy)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과학이 초과학에 어쭙 잖게 접근하면서 만들어낸 기계장치들이 그녀의 시체에 연결되었고 비령은 연구실의 문을 잠가버린 채로 홀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 치 잔혹한 파리의 연극 그랑기뇰(Grand Guignol)의 클라이막스를 연상시켰 다. “가능할 거라고 믿었어. 제발 누나만 되살려준다면 연구시설을 모조리 부셔버리고 평생 속죄를 하겠다고 신에게 처음으로 기도했어. 부활한 누나 가 날 죽이더라도 생관 없다고.” “희생이 과하면 광기가 되어 버리지.” 프랑켄슈타인의 M.W. 셀리나 그것에 영감을 준 바이런이나 애너밸리의 에 드가 앨런 포우나 그의 세계에 동참한 보들레르나 실상 모두 같은 선을 넘 어서 광기 속에 몸을 담군 것이라 말한다면 비령 역시 예상치도 못한 순간 그 선을 넘어가 광기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버린 것이었다. 돌 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누나의 시체를 끌고 가버렸다. 오르페우스가 악마와 계약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나의 시체에는 하나의 영혼. 알베르트의 이론에 의하면 그것이 지켜 져야 해. 난 그래서 누나의 시체가 영혼을 받아들일 수는 상태로 끌어 올 린 뒤에 채집한 영혼을 주입하려고 했어.” “나와 비슷한 시도를 해봤군. 그래서?” “0.1 나노초 라고들 하지. 영혼이 육체와 융합하는 순간이.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짧은 그 순간 대체 몇 명의 영혼들이 누나의 육체 속으로 들어 왔는지 알아? 모니터에 표시된 기록에 의하면 1735402명이야. 그 작은 몸 속에 믿을 수 없는 숫자의 영혼들이 달려든 거야.” 라파엘은 그 처연한 말에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했다. 자신이 의문을 갖고 있던 무언가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 듯 했다. “그리고 난 173만의 영혼을 가진 누나를 볼 수 있었어. 한 2초 정도 유 지할 수 있었을 거야. 폭주하는 에너지 때문에 기계는 폭발했고 누나의 몸도 산산조각이 났지. 그리고 그렇게 터져 나온 영혼들이 악령으로 변해 서 내게 달려든 거야.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감옥 안이었어. 몇 달 동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지. 자살할 힘도 없이 계속 눈물만 흘렸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군. 아마 네 누나가 지켜줬기 때문일 거다. ” 비령은 더 이상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냥 감겨 있는 태엽이 단번에 확 풀려버린 듯한 기분에 가라앉은 눈빛으로 담배를 물었을 뿐이다. 라파 엘이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을 묻기 시작했다. 비령의 본명이 누구이고 그 가 어느 나라의 사람이었으며 어떤 기관 밑에 있었고 지금은 누굴 위해 일 하는지는 조금도 관심 없다. 그가 비령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래서 네가 얻은 결론이 뭐야.” “알베르트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 라파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 붕대에 뭉쳐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핏방울 이 소파 위를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오직 비령의 그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 그렇게 찾고 있던 잃어버린 퍼즐의 조각을 발견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모두 다 맹신하고 있던 알베르트의 영혼순환이론 이 사실은 틀린 것이라고 비령은 말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다. 알베르트는 처음부터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단지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이한 상념 속에 빠 진 채 자신의 부인과 가족 그리고 인류 전체마저 하나의 실험재료로 쓰려 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런 그가 친절하게 정리해 놓은 이론 따위 대체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 라파엘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시그 스파이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너와 같은 영격사잖아.” “너와 그 놈과 나의 유일한 공통점이 하나 있군.” “......?” “알베르트의 이론을 믿지 않는다는 것.” 라파엘이 자신의 아버지 알베르트를 증오하고 있다는 건 그를 아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왜 증오하느냐는 것에 대 해서는 의문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이 증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힌트조차 없는 퍼즐의 일부를 던져주고 자신을 실험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더 클 것이다. 어쩌면 그 증오조차 알베르트의 계획대로인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자신이 아버지 의 실험의 어떤 부속품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비령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자신의 가설을 말하기 시작했다. “MSI가 몰두하는 것은 단 하나지. 막혀 있는 천공의 문을 다시 연다는 것. 그건 누구나 알고 있잖아?” “그게 이상한가?” “하지만 생각해 봐. 결국 지금 상태는 말하자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 는 두 방 사이의 통로가 막혀 있는 거잖아.” “......” “그러니까 문을 통과하지 못한 영혼들이 잔뜩 쌓여 있는 이 물질계는 과 포화 상태로 가득 차 있는 것이고 영혼들이 들어오지 못한 채로 텅텅 비어 있는 천공의 문 너머의 낯선땅은 진공의 상태인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그 문이 열리면 어떻게 될까.” “......!” 라파엘이 얼굴이 굳어졌다. 알베르트가 감춰둔 함정의 실루엣이 조금 보 이는 것 같았다. 비령이 말했다. “물이 가득 차 있는 상자와 완전히 비어 버린 상자가 연결되면 당연히 순식간에 비어 있는 상자로 물이 몰려들면서 균형이 맞춰질 테지. 이론상 으로는 오십 대 오십으로.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 ” “그 말은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들까지 빨려 들어간다는 건가?” “그래. 난 문이 열린다면 0.1 나노초 이내에 지상에 남아 있는 영혼들이 문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그 여파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들마저 쓸려나 가 빨려 들어가게 될 거야. 혼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적이 있어. 결론은 100% 인간들의 영혼이 모두 끌려간다는 것이고 그걸 실제로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뿐이겠지.” “결국 인류의 구원이라 생각했던 방법이 사실은 한순간에 인류를 싹 쓸 어버릴 수 있는 함정이었다는 것이군. 천공의 문을 막은 것도 그걸 열기 위한 MSI의 연구도 그의 계산대로였다는 거야. 하하핫! 역시 아버지다워. 살아남기 위한 연구가 사실은 거대한 자살폭탄을 폭발시키려는 짓거리였다 니. 멋져. 아주 확실한 방법이야.” 거대한 폭풍우 속에 서 있으면 당연히 그것에 휘말리기 마련이다. 이 세 계를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수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영혼 하나하나 는 고작 그 속을 떠다니는 아주 작은 미립자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물이 빨려나갈 때 과연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비령 의 가설대로라면 천공의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인간은 육체를 잃고 영혼 이 되어 단번에 낯선 땅으로 쓸려 들어가며 인류는 0.1 나노 초 만에 멸종 해 버린다. 우주로 도망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걸 막을 수 있는 대안은 있어?” “영혼을 봉인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어. 0.1 나노 초의 폭풍 동안 빨려나가지 않도록 영혼을 육체 속에 가둬두는 거야.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도록.” “말하자면 씰(SEAL)이로군.” 육체 자체를 영혼을 가둬두는 봉인체로 만든다는 발상은 좋게 말하면 혁 신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몽상주의자나 낼 법한 아이디어에 가까웠다. 어떻 게 만들어야 할지 그리고 제대로 ‘작동’이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하지만 방법은 아직 모르겠어. 영혼을 봉인한다는 것이 개념조차 모호 하니까.” 비령의 말을 가만히 듣던 라파엘이 커다란 판돈이라도 거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생각이 바꿨다. 역시 그건 마르크가 아닌 네게 갖다 줘야겠어.” “그거라니.” “인피타르. 영혼을 봉인하는 검이야. 시그가 가지고 있는 저주의 무기지 .” “영혼봉인이라....... 어떤 원리인지 짐작도 못하겠군.” “과학이 아니야. 그보다는 훨씬 기괴한 거라고. 내 헬카이트 역시 짐작 할 수 없긴 마찬가지 아닌가?” 라파엘은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영혼소멸총 헬카이트가 시그의 인 피타르와 분명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 에는 분명히 과학이 아닌 것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문제는 어떻게 가져오냐였다. “곧 갖다 주지. 하지만 그걸 가지고 오려면 그 놈을 죽이는 수밖에는 없 겠군.” “왜 죽여야 하는 거지?” “너는 심장을 가져오면서 목숨은 살려둘 수 있겠나? 내가 죽던지 아니면 그 놈을 죽이고 그 검을 가져오던지 둘 중 하나야.” “알았어. 기다리고 있겠다.” 그리고 대화는 끝났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선 곧장 자신의 폐선으 로 향했고 비령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는 가랑이 남기고 간 케이크를 저녁을 대신해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허기가 느꼈다. 2. 라파엘이 폐선에 돌아왔을 때 구석에 웅크려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미동도 없이 구석에 앉아 잠들어 있는 듯한 모습.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슬픈 표정은 아무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라파엘이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그녀는 인형처럼 늘어져 숨이 멎어 있는 상태였다. 라파엘이 그런 그녀의 시체를 업고 폐선 지하에 있는 자신의 실험실로 내 려갈 때 문득 그는 비령이 한 말들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사실 그는 비령의 기분을 싫을 정도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무게 때 문에 다시 상처가 벌어져 어둑한 곳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마다 붉은 핏방 울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또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린 여자라고 생각하며 깨어나겠지. 그리고 본능처럼 또 나를 증오할 테지. 어제도 내일도 없고 오늘만을 살아 가는 불쌍한 여자야. 하지만 이 짓도 슬슬 끝날 때가 온 것 같다 라이지아 .’ 하루 이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불안한 상태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도 절망적인 저주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도 진전시킬 수가 없다.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또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죽 을 테니까. 하지만 라파엘은 5년이 넘게 그걸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 혼이 눈을 감은 그녀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라파엘은 말없이 피에 묻은 그녀의 슈트 단추를 풀다가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깨지는 듯한 고통에 서글프게 울리는 고함을 질렀다. 1. 라파엘이 살고 있는 곳이 주룽(九龍)의 폐선 속이라면 시그가 살고 있는 곳은 이란의 파르스주(州)에 있는 도시 시라즈의 바킬 사원이었다. 세상 몇 개 도시가 그마나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겠냐만 ‘장미의 도시’라 일 컬었던 시라즈의 아름다운 자태는 이미 을씨년스레 몰아치는 모래바람으로 퇴락해 버린 - 이제는 곡물 한 톨 찾아볼 길 없는 무인도시(無人都市). 수 십 년 전 북적대던 관광객들 대신 방황하는 영혼들만이 고통에 밤을 지세 는 소리 없는 비명의 고원 속을 라파엘이 걸아가고 있었다. 영광스런 페르 시아의 기록은 이제 어디 하나 찾을 길이 없이 흉하게 칠이 벗겨진 건물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산짐승들의 겁에 질린 눈초리만이 어디론가 향하는 라파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망할. 정말 지랄 같은 곳에 사는군.’ 라파엘은 숨이 막혀올 정도로 건조한 기운에 짜증을 내며 자기 이름에 전 혀 걸맞지 않는 험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음습한 라파엘의 거처와는 사는 곳 자체부터가 극과 극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 로 절대로 오고 싶지 않은 이곳을 한참 동안 걸어가던 라파엘은 쇠락한 사 원 앞에서 멈춰 섰다. 빠르게 침몰하는 고원의 태양이 시뻘건 피를 대지에 흩뿌리고 있었고 적막한 시가지에 홀로 선 라파엘은 품속에서 헬카이트를 꺼내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모순(矛盾)과 비슷한 것이리라. 자신이 먼저 명중시킨다면 시그의 영혼을 소멸시키겠지만 그의 인피타르에 실수라도 베 인다면 그대로 영혼의 감옥 속에 유폐(幽閉)되어 버린다. ‘그 놈하고는 이년 만에 만나게 되는군. 잠시 후면 한명은 사라지겠지만 .’ 라파엘인 그와 만났던 2년 전을 기억하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시그는 자신이 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2. 시그 스파이어의 몸과 얼굴은 마치 얇은 붓으로 세심하게 그려낸 것 같았 다. 아후라 마즈다의 혈통임을 증명하는 투명한 청색의 눈동자가 조금 날 카로운 눈매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고 빛을 머금지 못하는 듯한 새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꼭 백색의 비단 위에 피로 새겨진 그림 같아서 얼핏 보면 야수를 닮은 라파엘의 숙적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연약해 보였지만 잠시만 그와 같이 있게 된다면 금세 이유 모를 위압감에 조금도 입을 열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단순히 미 남자라고 칭하기에는 어딘가 가까이 가기 부담스런 구석이 있어서 마치 요 기(妖氣)가 서린 명검처럼 지켜보기에는 한없이 아름답지만 집어 들기는 두려운 그런 기운이 분명히 있었다. 외모나 표정이나 풍기는 인상은 그가 살아온 발자취라고들 한다. 시그 역시 자신의 그런 과거를 대변하듯이 검 은 천 옷에 몸을 감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자신의 건 인피타르를 말없이 지 켜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없는 사원 속 서재에 홀로. 라파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어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백한 검 날을 훑을 뿐이었다. 라파엘이 담배를 문 채로 헬카이트를 꺼냈다. “서로 말장난은 집어치우지. 자 여기서 할까?” “담배, 꺼 주겠어?” 시그의 미성이 사재 속을 울렸지만 그는 여전히 인피타르를 지켜보며 무 언가를 결심하려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변한 게 없다, 라는 얼굴로 인상 을 조금 찡그린 라파엘이 그에게 다가오자 서로의 기운이 충돌하는 듯 테 이블 위의 펜들과 촛대들이 엷게 진동하며 몸을 떨었다. 인피타르의 반경 밖에서 걸음을 멈춘 라파엘이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기분 나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계집애 같은 놈. 이젠 싸울 생각조차 없는 거냐?” 라파엘의 폭언에도 시그는 차분하게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이 검을 가져가기 위해 온 거지?” “그 이유 외에 뭐가 있겠냐.” “어차피 네가 찾아오면 죽을 생각이었어. 그러니 잠시만 지켜봐 줘.” “뭐? 지금 자살하겠다는 소리냐.” “내가 왼손을 쓸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야. 그건 바로 내가 왼손 으로 인피타르의 검속에 네크로노미콘의 신성어(神聖語)를 새겼기 때문이 지. 알베르트의 역시 헬카이트를 만들면서 그 총 안에 소멸의 신성어를 새 겨놨듯이. 신의 권능을 도둑질한 대가로 저주받은 건 당연하지. 이걸 연구 하게 될 사람도 그 저주를 받게 될 거야.” 시그의 심연 같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춤을 추는 촛불을 향해 있었다. “네크로노미콘을 읽으면 단 한 가지의 진실을 알게 돼. 그건 바로 신과 악마가 동일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진실의 대가는 죽음이야.” 시그의 말에 라파엘이 입을 다물며 조용히 헬카이트를 거두었다. 빈틈이 나 노리는 유치한 잔재주를 부릴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라파 엘은 시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오래전 알베르트가 날 찾아온 적이 있었어.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 이지.” “역시 너와 관련이 있었군.” “자신의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거라고 했어.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라파엘이라고 짓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열쇠를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어. 또 그 아이가 자물쇠를 찾아 날 찾아온다면 그때 이걸 전해 달라 는 부탁도 했어. 그것으로 실험이 시작된다고 하면서.” 유언에 가까운 시그의 목소리는 두려울 정도로 차분했다. 게다가 시그의 외모는 잘해봐야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라파엘은 양미간을 좁히며 되물 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알베르트를 만났다고? 너 대체 몇 살이냐.” “글쎄. 천년을 넘게 살다보면 나이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쳇. 어째서 내 주변엔 정상적인 놈들이 하나도 없는 거지.” 라파엘 자신도 조금도 ‘정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주제 에 뻔뻔하게 천년을 넘게 산 녀석이나 죽은 뒤에도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미치광이 과학자 보다는 양호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시그는 하얗게 드러난 자신의 목덜미를 천천히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베르트가 이걸 전해달라고 하더군.” “잘난 아버지, 많이도 준비했군.” “자신이 죽은 뒤에 어디에 있을지 말이야.” “......!” 라파엘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렇게 찾던 알베르트의 영혼이 있 는 곳을 자기 입으로 알려주겠다는 건가. 죽고 십수 년이나 지난 뒤에 시 그의 입을 통해서? 시그의 고요한 눈빛이 라파엘을 향했고 곧 그의 입술이 열렸다. 너무도 허무하게 가장 절실히 찾던 장소를 알아 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차마 예상치 못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라파엘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시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라파엘의 인상이 한번에 팍 구겨지며 손 을 뻗어 시그의 멱살을 잡은 채로 들어 올렸다. 가녀린 여자처럼 가벼운 시그의 몸이 들어 올려졌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라파엘 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개소리 집어 치워.” “알베르트는 스스로 영혼이 되어 천공의 문을 막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알베르트가 있는 곳이 곧 천공의 문이 있는 곳이지.” 라파엘도 알고 있었다. 알베르트가 그런 것으로 거짓말할 위인이 아니라 는 것을. 하지만 미쳐도 너무 미쳐 버렸기 때문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물론 자신의 영혼마저 그 잘난 실험의 일부로 걸어버리다니 정말 치가 떨린다, 라파엘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가 확실했지만 그 행 동마저 어쩔 수 없이 알베르트의 의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할 수 밖에 없다. 라파엘이 시그를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그 자식을 증오하는 것마저도 의도적이었다는 것이로군. 좋아 뜻 대로 해주지.” 말하자면 모든 것이 단 하나만을 위해서 조작된 연극이었다. 라파엘 역시 알베르트가 기획한 그 잔혹한 코메디의 배우였고 시그는 이제 슬슬 무대에 서 내려올 차례였다. 라파엘이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알베르트의 뜻대로 움직인 거야.” “내 손에 이 검이 쥐어졌을 때부터 내 운명은 결정된 거니까.” 시그가 처음으로 엷게 웃었다. 그리고는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곧 매끈 한 그의 가슴과 어깨가 드러났다. 검고 긴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시그의 모 습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신성했다. 그가 인피타르를 목언저리 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밤마다 악몽의 생물들이 찾아와 나를 다흐나, 그 공허한 진홍빛의 사막 으로 끌고 가려 해. 알베르트를 데려 간 것처럼. 그런 그 놈들과 천년을 싸워왔지만 하나도 지킨 게 없어.” “유언인가.” “그래서 이 검으로 나의 유일한 여자인 제이미아를 베어버렸을 때 언젠 가는 나도 자결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름대로 그 여자를 구한 거 아니냐. 그 검속에서 살아 있으니까.” “그래. 나도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려고 한다. 비록 연옥(煉獄)이지만. ” 시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푸른 아우라가 감돌기 시작한 인피타 르의 차가운 칼날이 하얀 살결를 물며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붉은 핏줄기 가 검을 타고 흘러서는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청록색의 기운이 된 시그 의 영혼이 연기처럼 흐르다가 곧 고요하게 인피타르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연옥으로 걸어 들어간 시그의 육체가 힘을 잃고 들고 있던 인피타르가 바 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어쩌면 영원히 봉인되었지만 시 그의 단아(端雅)한 표정은 석상처럼 굳어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마 라 파엘이 이곳을 떠난 뒤에도 홀로 이곳에 그 모습 그대로 이곳을 지키고 있 으리라. ‘나도 미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라파엘이 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2년 전 그가 자신에게 했 던 말을 읊조렸다. “이제....... 담배 피워도 되겠지?” 고개를 조금 주억거리던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는 의자에 앉아 쓸쓸한 눈 빛으로 시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어쩌면 천년이 넘도록 지금 이 순 간을 위해 악몽과 싸우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베르트에게도 자 신에게도 혹은 비령 역시 그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 국 라파엘이 시그에게 적의를 품었던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라파엘은 바닥에 떨어진 인피타르를 조심스럽게 천으로 싸서 검집 에 넣고는 촛불을 끈 뒤 사원을 빠져나왔다. 걸어가는 네 뒷모습만 바라보며 따라가도 난 좋으니까. 그냥 가끔 돌아봐 줘. 그럼 언제나 뒤에서 웃고 있을게. "헤헤. 이상해요 그런 것.“ "그런 사랑도 있어." 내가 말했다,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1. 그리고 1년이 흘렀다. 비령의 손에 도착한 인피타르는 곧 인류 역사상 가 장 기괴한 연구재가 되었고 마르크는 의외로 ‘연구공개의 원칙’을 깨고 비령이 전력을 다해 파고든 연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크 와 물키벨, 오펜바하 모두 그 연구를 돕고 있었지만 가장 깊은 부분에 대 해서 비령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홀로 간직하고 있었고 인피 타르를 기초로 해서 전환된 프로젝트 테시오스는 어떤 상부 기관에도 보고 되지 않은 채로 기밀리에 진행되었다. “기분은 좀 어때요?” “여전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눈물이 흐르지 않아요.” 비령 앞에 선 회색 머리칼의 여자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 이지적으로 보이는 여자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 지 못한 채로 MSI의 ‘C구역’이라는 곳에서 자신과 같은 ‘질병’을 가진 천여명의 환자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제 곧 치료가 끝나요. 그러면 다 해결될 거에요.” 1년 전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수척해진 비령이 길게 자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자그맣게 웃어 주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가랑이었다. 그녀의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휴대전화를 통해 울렸다. “곧 졸업식이에요. 와줄 거죠?” “아. 곧 갈게.” 비령이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앞에 펼쳐진 환자복의 사람들 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불안한 표정들. 비령은 그것에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 이 영혼의 치료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비령으로선 아무 것도 밝힐 수가 없었다. C구역을 빠져나오는 문 옆에는 아무런 다른 설명도 없 이 SEAL이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었다. 2. “졸업식이라기보다는....... 이거 무슨 장례식 같잖아.” 작은 몸집 덕분에 양복을 입은 모습이 차라리 귀여워 보이는 오펜바하가 가랑의 졸업식 풍경을 둘러보며 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풍경이랄 것도 없었다. 졸업까지 무사히 골인한 학생은 가랑을 포함해 고작 4명. 그 나마 졸업식에 참가한 사람은 3명뿐이다. 그리고 축하객이 참석해 준 사람 은 단 2명뿐이었다. 인형 같은 드레스를 입어 아무도 연구원이라고 짐작조 차 못하게 ‘변장’한 물키벨이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졸업식에 참석한 한 학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말했다. “그래도 행복하려고 다들 노력하고 있잖아?” “칫. 행복은 무슨.” MSI의 연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오펜바하는 인자하게 웃는 어머니의 손 을 꼭 잡고 있는 졸업생을 보며 뭐가 그렇게 짜증스러운지 금발의 머리칼 을 긁적여 잔뜩 헝클어트렸다. 감색의 발랄해 보이는 교복을 입고 있는 가 랑이 아까부터 계속 웃음을 띤 얼굴로 다가와서는 물키벨에게 물었다. “비령씨는 언제와요?” “글쎄?” “흐응. 졸업식 시작하기 전에 와야 할 텐데.” 물키벨은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자신의 검고 긴 머리칼을 몇 시간이고 애써서 다 듬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비령과 가랑의 관계가 급 속도로 가까워지는 것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비령이 구해준 뒤부터 서로가 서로를 좋아해야겠다고 결심한 듯 하다. 물키벨은 비령이 그녀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고 곧 그들의 사이도 끝낼 때가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가랑의 옷소매를 다시 다듬어 주었다. 말 그대로 이제 ‘졸업’이다. 3. 작은 강당에서 열린 졸업식은 너무도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거창한 축사 도 없었고 이제 졸업을 한 뒤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교도 없었으 며 그 흔한 졸업장조차 없었다. 간단한 기도로 끝낸 자그마한 졸업식 뒤에 는 그냥 한없이 반짝거리는 오후 볕과 더 이상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은 학 교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인류의 끝자락에는 거대한 혼란이 아니라 도리어 쓸쓸하게 정리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훨씬 많이 눈에 띄었다. “같이 사진 찍어요.” 학교 앞 정원에는 큰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인간 누구도 그것을 가 꾸지 않는데도 어김없이 해마다 빨간 과실이 열리며 종족을 보존해 나간다 . 분명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계속 열매를 맺겠지. 많이들 착각하 고 있지만 사과나무가 사과를 만드는 이유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가 아 니야, 라고 중얼거리며 오펜바하가 나무 곁에 기대었다. 가랑은 자신의 가 방 속에서 준비해 온 구식 카메라를 꺼낸 뒤에 비령의 팔을 잡아 당겼다. “모두 같이 찍어요.” “벼, 별로. 난 사진은 질색이라서.” “약속했잖아요.” “그, 그렇지만.” 뒤늦게 참석한 비령은 정말로 사진 찍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예전 가 랑에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내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 무 서워’라며 이상한 공포심을 고백한 적이 있지만 가랑은 이런 일에 대해서 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도리어 죽은 뒤에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는 것이 무서웠는지 모른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가랑을 중심 으로 비령과 마르크, 물키벨과 오펜바하가 섰고 학교를 관리했던 수녀가 카메라를 들었다. “자 찍겠어요.” 어쩌면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는 8월의 태양이 정원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4. 어떻게든 사과를 따겠다며 모처럼의 정장이 다 찢어질 정도로 나무에 올 라탄 오펜바하와 그 키로는 무리라며 핀잔을 주는 키 작은 물키벨 그리고 헤헤 웃으면서 그걸 바라보고 있는 가랑이 텅 비어버린 졸업 학교 전경이 었다. 그리고 마르크는 고해성사실로 사용되던 좁은 방안에 비령을 끌고 와 차갑게 말했다. “월면기지에 있는 세대간 우주선의 건조가 끝났다. 그런 큰 몸집을 언제 까지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르크의 말은 간단명료했지만 그것이 밝혀진다면 MSI가 다시 군인들에게 점령당할 정도로 큰 기밀이었다. MSI 내부에서도 마르크와 비령, 물키벨과 오펜바하만이 알고 있는 그것은 바로 월면 우주항에서 개발이 중단되어 방 치 중이던 세대간 우주선의 건조를 완료하는 일이었다. 세대간 우주선이란 아주 멀고 먼 우주로 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순양우주함으로 콜드슬립(cold -sleep)을 통해 목적지까지 수백 수천 년이 걸리더라도 승무원을 동면 상 태에서 이동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NASA에서 개발하던 그 우주선은 천 공의 문이 닫힌 이후 개발이 중단되었지만 마르크가 제작을 완료하게 만들 었던 것이다. 물론 상부 기관에서는 단순히 ‘우주상에 존재하는 영혼 채 집을 위한 목적’으로 보고 되었다. 비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의 목소리는 좁은 고해성사실의 목조 벽을 쓸쓸하게 울리고 있었다. “곧 끝날 거야. 이제 너와 뮬렌과 오펜바하만 조작해 놓으면 준비는 끝 이니까. 그래, 기왕 바꾸는 것 드래곤이라고 부르는 게 어때?” 왜 하필 드래곤이라는 공포스런 죄악의 상징체를 자신의 연구물에 이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비령은 그렇게 말하며 벽면의 십자가를 바라보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마르크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너는 어쩌겠다는 거야.” “잘 알잖아. 드래곤과 씰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인피타르를 연구한 건 나니까. 날 드래곤으로 만들어 줄 수는 있는 사람은 없어.” “지금이라도 네 연구결과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면......”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비령이 짧게 말했다. 인피타르를 연구한다는 것은 저주를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과학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실을 만드는 원리는 간단하다 . 부패하지 않은 시체를 가져와서 인피타르에 봉인되어 있는 영혼을 뽑아 내서 주입하면 그 영혼은 봉인된 상태 그대로 시체 속에 머물게 되며 다른 영혼이 끼어드는 간섭효과도 없다. 거기에 그 영혼을 오랫동안 담아둘 수 있도록 육체를 강인하게 조작해 놓으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 들어진 씰은 영혼이 봉인되어 있어 늙지도 못하고 잠을 잘 수도 없으며 아 이를 낳을 수도 없고 과거를 기억하지도 못한다. 비령이 알아낸 것은 그 인피타르 속의 영혼을 어떻게 추출해서 시체에 주입하냐는 것이었고 그것 은 체계도 원리도 규정할 수가 없는 뿌연 흑마술과 같았다. 알려주고 싶어 도 알려줄 방법조차 모르는 그런 것. “그리고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가 없을 거야.” 비령 역시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생물 같은 인피타르에 손을 댄 뒤부터 밤 마다 끔찍한 생물들이 악몽을 빌려 찾아오곤 했다. 잠자리 근처에서 고개 를 들고 그 끔찍하고 축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는 귓가에 저주의 시구를 흘려 넣곤 했다. 차라리 혀를 물어 버리고 싶은 고통이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그런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마다 도리어 살아 있다는 기분을 지독하게 느끼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더욱 더 가랑에게 매달렸다. 솔직히 매달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예전에 네가 한 말이 있지? 악역은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비령의 남색 눈동자가 마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크는 이상한 기분 이 들었다. 확실히 비령은 무언가를 결심한 뒤부터 자신은 살아남지 못하 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일에 파고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인류의 미 래 같은 걸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상부 기관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 일에 광적이라고 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이유 는 무엇일까. 마르크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뭐 별로.” 시선을 피하는 비령을 마르크가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연구 의 열솨를 비령에게 넘기긴 했다. 처음부터 감옥에서 사형날짜를 기다리는 비령을 MSI로 빼온 것도 마르크였고 그의 실력과 성과를 무시하는 것도 아 니다. 알베르트가 뿌려 놓은 저주스런 늪에 스스로 발을 담구겠다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 마르크의 목소리가 고해성사실을 나직하게 울렸다. “넌 가랑을 씰로 만들려는 거냐.” 마르크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던 비령은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그러 던 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는 것 보단 낫잖아.” 동시에 마르크의 날카로운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마 누구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세상 최강의 기관의 총책임자이자 항상 얼음장 같은 태도로만 사 무를 처리하던 마르크가 주먹을 날리는 모습은. 마르크의 주먹이 비령의 얼굴을 때렸고 비령은 좁은 방의 벽에 부딪치곤 바닥에 쓰러졌다. 아마 총 이 있었다면 당장 쏴 버렸을 듯이 마르크가 비령을 두렵게 노려보고 있었 다. 하지만 비령은 오히려 피식 웃으면서 일어났다. “너도 화낼 줄 아는 녀석이었군.” “똑바로 들어. 그런 짓을 하면 널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죽일 생각이야! 천공의 문이 열리면 보통 인간들은 모두 죽어. 영 혼이 빨려나가 버린단 말이야! 네 동생이라면서 죽이겠다는 거야!” 갑자기 팍 손을 뻗은 비령이 마르크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팔을 뿌리친 마르크의 항변은 어느 때보다 격했다. “씰 따위로....... 수천 수만 년을 살아가는 것 보단 나아!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 채 평범한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이 행복해!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거냐!” 씰이라는 것이 새로운 인류를 이끌어 갈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 쩌면 그런 불안한 상태로 수만 년을 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직하나 의 목적만을 품은 채로 환생을 할 수도 없고 늙을 수도 없으며 누가 죽이 기 전까지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슬픈 유사인간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 는 긴 시간의 여행을 떠나야 하는 씰 같은 건 절대로 가랑에게 부여해 주 고 싶지 않았다. 이 긴 실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원히 살아야 하는 저주 를 받는 건 자신들로 족하다. 아무런 죄도 없고 목숨 따윈 얼마든지 내주 고 싶을 정도로 간절히 지켜주고 싶은 가랑은 천공의 문이 열리며 편안히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고 마르크는 생각했다. 아주 차가운 방 정식과 같다.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편히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 는 것이다. 그러나 비령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씰이 되어 더 이상 날 기억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 그래도 난 그녀를 씰로 만들 거야. 죽음 따위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너의 생각 같은 것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날 방해하면 지금까지 진행하 던 프로젝트 모두를 지워버리겠어. 난 솔직히 인류가 어떻게 되던 알베르 트가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던 관심 없으니까. 내가 지켜주 고 싶은 건 가랑뿐이고 그 외엔 어떻게 되도 내가 알 바 아니야.”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마르크가 죽여 버릴 듯한 눈빛으로 비령을 노려보며 말했지만 비령은 잠 시 입 속에 머물던 말을 뱉었다. “집착이라도 상관없어.” 자신이 반쯤 마성(魔性)에 젖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유를 가지 고 서로 좋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 사귀고 또 서로 적당히 상처 받으 며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인 사랑 같은 건 애당초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방법 외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나의 죽음 이후 미쳐버린 악인이라고 비웃더라도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가 괴 로운 표정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누군....... 영원히 사랑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 “고집 부려 미안하군. 하지만 너의 분노라면 환생한 뒤에도 계속 받아줄 테니까.” 비령은 그렇게 말하며 고해성사실을 나갔다.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인지, 그런 걸 생각해 볼 겨를 같은 건 없다. 누가 옳고 그른지, 그것도 모를 일 이다. 단지 자신의 결정이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 거라는 의심을 하지 않게 끝없이 다짐할 뿐이었다. 1. “뭐해? 비령 씨?”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비령의 뒤로 다가온 가랑이 얇은 두 팔을 그의 어 깨에 얹어놓으며 나른한 미소를 보였다. 모니터에 흐릿하게 반사되는 그녀 의 붉은 눈동자를 지켜보며 비령은 피우던 담배를 껐다. 왜 그녀에게 ‘집 착’하고 있는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 자신의 누나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 한 무의미한 보상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삼켜버리려는 알베르트 에 대한 반항심리인지 그것도 아니면 네크로노미콘에게 오염된 자신이 의 식하지도 못한 채 정말로 미쳐버린 것인지 모든 것이 뿌옇지만 확실한 건 이제는 신의 의도를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 겠다는 결심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리고 보니까 지금까지 좋아한다는 말도 못했어.’ 비령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고 뺨에 가져다대며 생각했다. 1년은 서로를 알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다. 좀 더 긴 시간을 준다면 좋겠지만 - 다음에 태어날 때도 그런 생각을 하겠지. 그녀가 웃는 얼굴로 그의 귓가 에 다가서며 조그맣게 말했다. 항상 그녀의 목소리에는 듣기 좋은 웃음이 섞어있었다. “C구역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왔어. 나, 많이 친해졌다?” “아 그래?” 씰들이 있는 곳, 인피타르를 통해 만들어진 봉인인간이 자신들이 왜 존재 하는지도 모르는 채 모여 있는 그곳은 비령의 창조물이었지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 속으로 가랑을 넣으려는 자신의 의 도에 대한 괴로움이 또 다시 폐부를 훑고 지나갔다. 그걸 알게 된다면 그 녀는 무척이나 화를 내겠지. 자신의 뺨을 때리며 실망했다고 외칠지도 모 른다. 그렇더라도 곧 천공의 문이 열린다는 것도 모르는 그녀의 품속에 몰 래 긴 여행으로 떠나는 티켓을 넣어 주겠다고 그는 다시 결심하며 말했다. “내가 만든 요리, 먹어볼래?” “아 정말?” “응. 어렵게 결심해서 만드는 거니까.” 비령의 웃음은 이번에도 쓸쓸해 보였다. 2. “얼레? 이 사진 왜 이래에?” 휴게실에서 주스를 마시고 있던 물키벨이 딱 한 장 찍은 졸업식 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진에 찍힌 날짜는 2497년 11월이었던 것이다 . 개월은커녕 년도마저 지금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것을 보고 눈썹을 찡그리며 한참을 훑어보던 물키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령....... 때문이군.” 그녀는 1년 전부터 비령 주변의 시공간이 엉켜가는 이해 못할 현상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의 방에 있던 시계들이 느리게 흐른다던지 근처에 있 던 연구시설들이 오작동을 한다던지, 한 시간도 자지 않았는데 자신은 며 칠이나 지난 것처럼 느낀다던지....... 신경과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기이 한 일들이 비령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었고 정작 비령은 그것에 대해 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모두들 그것이 인피타르에 대해 파고든 뒤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조금씩 다른 세상으로 끌려 가고 있는 것처럼 상상 속에 기생하는 악몽의 생물들이 실체화되어 그를 알베르트가 끌려간 저주받을 땅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물키벨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령의 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3. 씰은 말하자면 인피타르에 갇혀 있던 영혼들로 이뤄진 존재였다. 시그가 자신의 왼팔을 잃어가며 그것을 대체 언제 만들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수백 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씰들 역시 수백 년 전 부터 지금까지 인피타르에 혼을 빼앗긴 영혼들의 집합인 셈이었다. 지금은 그 검의 주인인 시그 역시 자신이 배었던 제이미아와 함께 그 검속으로 들 어갔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지금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며 그 검 을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시그 역시 그토록 사랑하던 제이미아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어 검속에 가둬둔 뒤에 자신도 그녀를 따 라갔던 것일지도. 며칠 후 비령이 가랑을 불렀을 때 그는 난생처음 만든 요리를 테이블 위에 내놓은 뒤였다. 닭고기와 함께 쌀을 익혀낸 무척이나 소박한 요리. 태양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8월의 마지막 날 이었다. “와아. 알로스 콘 포로.” 방에 들어온 가랑은 향기만으로도 그 요리의 정체를 단번에 맞춰 버렸다. 그녀는 의자에 앉으면서도 계속 키득 웃고 있었다. 비령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며 당황했다. “왜, 왜 웃어?” “기뻐서.” 그녀가 방긋 웃은 뒤에 다시 꽤나 고심해서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에스파 냐의 대표적 요리를 바라보다가 뭐가 생각난 듯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하나 밖에 없어?” “아. 난 됐어.” “흐응. 같이 먹지.” “괜찮아. 지켜보고 있을게.” “헤에. 이상한 취미네.” 비령은 어깨를 으쓱하며 맞은 편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은 채로 조금 물고 있다가 휴지통에 버릴 뿐이었다. 4. “아. 이거 맛있어.” “......” “무슨 생각해?” 가만히 하얀 밥알들을 떠먹고 있던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비령이 아무 말 도 없자 가랑이 스푼을 문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상해 오늘.”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이 나서.” 비령이 눈을 살짝 비비며 물을 떠왔다. 테이블 앞에 놓인 유리잔에는 투 명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좀 짤 거야.” “아 조금 그래. 다음에는 더 잘 만들 수 있을 거야.” “다음에는 그렇겠지.” “자주 만들어 줘. 내가 많이 가르쳐 줄게. 응?” “아.......” 유달리 빨간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비령은 말을 흐렸다. 시 간이.......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럼 솔직해 질 수 있을 거 라고 자신에게 변명을 외쳤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 변명과는 다른 것이었다. “네가 왜 요리를 좋아하는지 알았어.” “응?” “상대를 기쁘게 하니까.” 가랑이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동그란 두 눈동자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기쁜 표정을 가득 담은 채로 입을 열었다. “맞아.” “저 있잖아.” 식사를 마친 뒤 컵에 담긴 물을 마시던 가랑에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자신을 계속 바라보는 그를 의아한 듯이 쳐다봤다. “사랑해.” “나도.” 그녀의 의외로 빨랐지만 비령의 얼굴에 지나간 곤혹스런 표정은 아마 후 회일 것이다. 이제 곧 그녀의 기억이, 지금 나눴던 말 하나 조차 모두 사 라져 버릴 텐데 뭐하러 ‘나는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두근거리 는 마음으로 말했다. “나, 아주 오랫동안 당신 곁에 있고 싶어. 노력할게.” “미안....... 난 사랑받는 것에 서툴러. 그래서 이렇게 밖엔 못해. 그러 니까 용서해주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하는 가라앉은 비령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의 귀에 들 리는 목소리가 뿌옇게 들려왔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감겨 왔다. 비령 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 았다. 저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자신이 누구라는 것도 잊겠지, 그리고 자주 울음을 터트리던 저 눈에서도 다시는 눈물이 흐르지 않겠지, 오늘이 지나면 기억을 잃고 ‘희망’이라는 단어 조차 잊어버려 마음마저 바뀐 채로 지금과는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텐데 - 남아 있는 것은 지금의 그 붉은 눈동자 하나뿐인데, 그 런데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자신의 마음은 미련(尾聯)일까.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읊조리며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착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나쁜 짓을 해야 한다는 건....... 이제는 닳 고 닳은 남자의 변명일 뿐일까.’ 내게 도움을 줄 자는 적어도 천사는 아니리라. 차라리 내 목숨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악마에게 달려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계약을 맺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럼 적어도 타락의 쾌감은 느낄 수 있을 테니. 1. 여름이 고개를 꺾기 시작한 두달후. 마르크와 오펜바하, 물키벨 앞에서 비령이 입을 열었다. “말하자면 드래곤은 빠르게 진화하는 생물이야.” 아마도 이것이 MSI의 마지막 회의가 될 것이다. 모든 씰들은 기억이 완벽 하게 소거된 채로 달기지로 옮겨졌고 가랑 역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령을 제외한 수석연구원들도 모두 드래곤으로의 변이(이렇게 부 르도록 하자.)를 마친 상태. 이제 라파엘에게 연락을 해서 닫혀 있던 천공 의 문을 열어달라고 말한다면 모든 것은 끝이 난다. 지구의 모든 인간은 문이 열릴 때 생기는 영혼의 폭풍에 휘말려 육체를 잃게 되고 그 속으로 모든 기억과 감정들, 아직 하지 못한 일들, 죽일 듯한 증오와 후회스러운 마음까지 빨려 들어가 버리고 인류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작생명 체(造作生命體)인 드래곤도 말하자면 씰에 가깝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시 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마음이 가는 데로 그 몸도 바꿔가는 것이다. 타락한 천사를 생각한다면 날개가 돋을 것이고 방관하고 싶다면 심해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은거할 수 있도록 변할 것이다. 네크로노미콘이 인도하는 그 기 괴한 상상의 동물들로 천천히 바꿔가며 늙지 못한 채로 아주 오랫동안 살 게 될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인류를 돕는 절대자의 역할을 하며. 그것 이 그들이 ‘실험’이라고 명명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목적이었고 신의 손 길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였다. 물키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드래곤이 되서 좋은 건 하나 뿐이네. 더 이상 안경을 끼지 않아도 잘 보인다는 거.” 그리고는 비령을 바라보며 절실한 기원의 주문처럼 말했다. “그래도 너도 언젠가는 새로운 육체에 들어가 우리를 만날 수 있겠지? 그때가 오겠지?” “글쎄. 다시 만날 가능성이 몇 퍼센트일까? 아마 불가능할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때의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의 나는 아니겠지. 아주 긴 시간이 흐르고 그때까지 우리의 실험이 진행 중이 라면 서로를 모른 채로 스쳐 지나가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회의는 끝났다. 2. 억만 분의 일. 통계학적으로는 제로를 의미한다. 어두운 연구실 속에서 비령은 끊임없이 0을 뱉어 내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이 거대한 연산장치에게 이런 확률의 계산을 맡긴 자신이 우스워서 슬픈 미소 를 짓고 있었다. 굳이 기계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영혼이 다시 환생하여 가랑과 재회하게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 물어도 제로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거대한 우주를 방황할 자신의 영혼이 아주 우연히 우주 속의 한 점과 같은 그녀를 지나칠 확률, 그리고 또 서로를 모르는 둘 이 다시 사랑하게 될 확률, 지금과는 달리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확률....... 거창한 과학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제로 외에 다른 대답은 없다. 말하자면 절망적인 승률을 가진 도박이랄까. 그렇지만 그는 그 끝도 없이 제로를 선고하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되고 바보 같지 만 그녀 말대로 ‘희망을 갖자.’라고 말한다면 뻔뻔한 생각일지도. ‘결국 난 죽어서도 그녀를 사랑하고 싶은 건가.’ 이제 모니터의 제로는 연산범위를 넘어서서 무의미하게 이어지고 있을 뿐 이었고 아무도 돈을 걸지 않을 그 확률에도 비령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버렸다. 달기지의 우주항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마르크가 그의 뒤로 다가 왔다. 이제 아주 길고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 그는 엷은 울분으로 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그건 왠지 진리 혹은 궤변을 닮았다. “가끔은 죽음이 가장 편한 길일 때도 있는 거야.” “그래도 난 알고 있어.” 비령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대답했다. “너도 결국 그녀를 소멸시키지 못할 거잖아? 알고 있어. 너야말로 영원 히 그녀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가랑에 대한 마르크의 마음을 비령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자 신보다 훨씬 절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불처럼 번져 오르지 않기 때문에 쉽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섬뜩한 독점욕에 자신들의 마음은 알고 있다. 그 정도 쯤, 이미 알고 있다. “....... 한 가지 부탁할게.” 비령이 마르크에게 진심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유언과 같은 말을 시작했다. 화면을 끝도 없이 잇고 있는 제로의 나열들을 지켜보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된 다면, 그때의 나에게 전해 줘. 절대로 그녀를 놓지 말라고, 무슨 일이 있 더라도 그녀를 잡은 손을 놓으면 안 된다고. 과거의 내가 그렇게 부탁한다 고 전해 줘.” 아마도 오늘이 그녀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날일 것이다. 내일 이면 우주 속을 방황하는 영혼이 되어 억만 분의 일의 확률만을 품은 채로 다시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하겠지. 사막 속에 묻혀 있는 씨앗처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되겠지. 하나의 빗방울이 되어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질 확률보다도 낮은 그런 희망을 품어봤다. 이제는 자신도 그녀도 서로를 조금도 기억할 수가 없을 텐데도,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 다며 죄악을 뒤집어쓰고 그녀를 까마득한 억겁(億劫) 시간 후로 보내 버렸 다. 그는 처음으로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3. 라파엘이 전화를 받은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천공의 문을 열어달라는 비 령의 전화. 그는 그렇게 짧게 말한 뒤에 전화를 끊었고 라파엘은 마시던 와인을 마저 음미했다. 라파엘 근처에 앉아 있던 여인이 특유의 조금 찡그 린 표정 그대로 물었다. “무슨 전화야?” “별 거 아냐.” 라파엘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적잖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별다른 말이 없다. 너무 조용해서 도리어 불안한 그런 기분. 라파엘이 와인잔을 내려 놓자 그녀가 말했다. “더 마실 거야?” “따라주지도 않을 거면서.” “당연하지!” 평소 같았으면 ‘그럼 청소나 해. 쓸모없는 여자.’라면서 사람 신경 툭 툭 건드렸을 그가 ‘그럼 이게 내 마지막 술이었군’이라며 자리에서 일어 나는 바람에 그녀는 정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그런 그녀의 두 뺨을 확 잡으며 자신을 바라보게 돌렸다. “무, 무슨 짓이야!” “너 밖에 나가본 적 없지.” “다, 당연하잖아! 네 놈이 묶어 놓은 이 망할 사슬 때문....... 앗!” 찰칵! 그녀의 목 뒤를 감은 라파엘의 손길이 간단하게 사슬을 풀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라파엘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가 풀려진 사슬을 바닥에 던지 며 말했다. “바보 같은 여자. 이 사슬,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어. 그냥 레버를 돌 려면 열린다고.” “......” 그녀는 놀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사슬을 풀어보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백치’라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이곳을 나가는 것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이 사슬에 잡혀 있다는 것에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슬을 지금 풀어 버렸 다. 왜, 이제 와서 무슨 이우로.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가 없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자. 밖을 보여줄게.” 라파엘은 그녀의 손을 끌고 배 밖으로 나섰다. 사슬의 길이 때문에 항상 멈춰야 했던 문 앞을 넘어서 그녀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밖의 모습은. “만약 기대했다면 지금 실망하고 있을 거야.” 어둑한 하늘과 뒤섞여 버린 정적의 바다에 메마른 바닷소리만 들리고 있 었다. 불빛 하나 찾기 힘든 죽어버린 항구가 홍콩의 폐허 끝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근처엔 빈민들의 낡은 정크선들이 다닥다닥 모여 겨우 겨우 살 아가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직접 본 세상의 모습이 그것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다시 살려볼 길이 없을 것 같은 죽음 직전의 모습. 사실 라 파엘은 이런 ‘사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녀는 이상 하게 눈물이 흘렀다. 뭐가 슬픈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공허한 기분 속에 눈물이 채워졌다. “그 놈, 지금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라파엘이 울고 있는 그녀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시그가 남겼 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알베르트의 영혼도 천공의 문도 네 몸속에 있어. 그는 천공의 문을 막 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자신의 몸속에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설마 그렇게 가까운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자신 이 무엇을 해야 할지, 헬카이트를 왜 자신에게 줬는지, 그걸 왜 ‘열쇠’ 라고 불렀는지,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왜 처음부터 이런 일을 계획했냐는 것이다. 그냥 그대로 놔둬도 괜찮을 세상을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만든 것인가. 인류의 목을 조르고 아내를 죽 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얻고 싶은 것이 대체 뭐였던 것일까. ‘말해봐. 아버지. 당신이 바라는 게 뭐였는지. 이제 우리는 곧 끝날 테 니까 알려줘도 상관없잖아?’ 라파엘이 헬카이트를 꺼내며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처음으로 자신 안 에 들어 있던 알베르트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광기와 악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노쇠하고 쓸쓸해서 이제는 도저히 적의조차 생기지 않는 그런 목소리였다. ‘난....... 세상을 리셋하고 싶었다.’ 결국 모든 것은 우주를 뒤흔들 악의가 아니었다. 단지 지독하게 겁에 질 린 자의 끔찍한 소원이 신의 힘을 통해 이뤄진 것뿐이었다. 차라리 생명체 전체를 지옥에 빠트려 버릴 악의 때문이었다면 지금까지 가져왔던 증오심 이 아깝지나 않았겠지만, 아들의 몸속에 숨어 있던 알베르트는 그냥 초라 한 인간일 뿐이었다. “역시, 결과를 알아버리면 뭐든 것이 다 시시한 법이로군.” 라파엘은 영혼살해총 헬카이트의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했다. 그리고는 자 신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헬카이트에 맞은 자는 말 그대로 소멸된다. 지옥으로 가지도 않고 천국으로 가지도 않는다. 그냥 영혼마저 사라져 처 음부터 없었던 존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엘의 몸을 뚫은 헬카이트의 총알은 알베르트의 영혼마저 소멸시켜 버릴 것이고 그와 함께 그가 막고 있던 천공의 문도 열린다. 그러면 엄청난 영혼의 폭풍과 함께 전 우주의 인간들 모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겠지. 오직 드래곤과 씰만이 그 폭풍을 견딘 채 저 멀고 먼 우주의 어딘가로 날아가 새로운 인 류를 다시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 앞으로 억겁의 시간이 지나 갈 것이다. “이제 이별할 시간이다. 라이지아.” 라파엘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는 뿌연 구름에 갇혀 있 는 하늘을 응시하다가 방아쇠로 손을 옮기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외쳤다. “자, 잠깐! 이 멍청아!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지금!” “아 참. 네가 누구였는지 말해주지 않았군.” “그게 중요해 지금? 당장 그 총 내려!” “넌 내 애인이었어.” 그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라이지아는 그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찰나(刹那)의 순간 수십 년간 닫혀 있던 천공의 문이 열리며 영혼의 폭풍 이 일어났고 육체를 이탈한 그녀의 영혼 역시 천공의 문으로 들어가 정화 되며 자신이 라파엘의 애인이었다는 기억도, 자신의 이름이 라이지아였다 는 기억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비령의 영혼도, 지구를 방황하 고 있던 수많은 악령들도, 지금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마저 믿 을 수 없이 빠른 시간 사이에 천공의 문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2033년 10 월 인류는 리셋 되었다. 1. 줄리탄의 하얀 머리칼이 모래 섞인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테싱이 마력 에 담아 보여준 과거는 1초도 안되는 순간 줄리탄의 온 몸을 휘감았지만 줄리탄에게는 마치 수년이 흘러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전생이 느꼈던 끔 찍한 괴로움마저 전이되어 떨리는 눈길로 테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여섯 장의 날개로 불멸의 육체를 감싸고 있는 절대신 테싱은 고개를 조금 숙이 며 입을 열었다. “가랑은 지구를 기억하지 못해. 우주선에서 깨어났을 때는 아무 것도 기 억하지 못했으니까. 단지 우주선 속에서 받아들인 지구에 대한 정보만으로 그 별을 막연히 떠올리고 있을 뿐이야. 그곳은 무언가 자신에게 매우 소중 한 것이 있었던 곳이라고 믿으며 십만 년을 넘게 살아왔어.” 카넬리안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캔맥주, 초콜렛, 샤워, 수영복....... 그녀는 결국 하나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우주선 속에서 모니 터를 통해 그런 것들을 몇 번이고 다시 보며 그것들이 자신의 추억이라고 여기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 고향과 같은 곳.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자 기를 따뜻하게 만들어 준 어떤 것이 있었다고 그녀는 수만 년을 넘게 믿어 오고 있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이 사라진 빈공간이 너무도 커서 그녀는 그 공허감에 항상 쓰라려 했다. “이걸로 이야기는 끝이다. 결국 난 네 말대로 가랑을 소멸시키지 못했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했어.” “카넬리안이 지금까지 견뎌온 건 네 덕분이야. 그녀를 지켜줘서 고마워. ” “비령으로서 하는 말인가?” “아니. 나는 그가 아냐. 결국 영혼이라는 것도 환생을 하면 모든 것을 잊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른 곳, 다른 시간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 시 작하는 거잖아. 내가 비령이라는 자와 같은 영혼을 공유하고는 있어. 하지 만 나는 그와 다른 삶을 살았고 그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내가 나 이기 때문에 카넬리안을 포기하기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비령이 아니야. 운 명 따위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뿐 이야.” 비령의 바램은 이뤄졌지만 결국 비령은 줄리탄이 아닌 것이다. 하긴 고작 전생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녀와 다시 맺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맥 빠지는 낭만 같은 것은 보기 예쁠 수는 있어도 얼마나 허전할까. 줄리탄은 스스로 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향해 달려갔기 때문에 그녀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 다. 과거가 뭐였던지 상관없다. 그것이 모조리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혹 은 그녀의 과거가 실은 너무도 추악했을지라도 지금의 자신은 변함없이 카 넬리안을 안아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줄리탄은 무엇을 들었어도 상관없었다 . 자신도 모르는 과거 따위, 그게 뭐였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 때문에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테싱 역시 그가 그렇게 생각하 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주선 속에서 새로운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지. 최초의 인간인 테시오스를 비롯해서 수많은 종류의 인간들과 종족들을 만들어 씨앗을 퍼 트렸다. 방황하는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만들고 과연 그것이 살 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실험하기로 했어. 예전의 인류보다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제....... 실험은 끝났다. 결국 세상 어떤 것도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갈 자격이 있는 건 아닌 거지 . 그냥 서로 만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사랑하거나 증오하며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세상 어떤 생명체가 그렇지 않을까. ” 용의 모습이 되어 수십 만년동안 새로 태어난 인간들을 지켜보았다. 예전 과 똑같은 실수를 하고 똑같은 욕심을 갖고 똑같이 사랑하며 살아갔다. 밭 을 갈고 집을 짓고 전쟁을 하고 화해도 하며 예전과 다름없이 살아가기 시 작했다. 마법이 있고 엘프가 있고 하늘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기사가 있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숲 속을 어슬렁거리는 오크들도 있지만 결국 조금 씩 모습만 바꿨을 뿐이지 2000년대의 인간의 세상과 다를 것 하나 없다. 참으로 조잡한 세계, 테싱은 자신들이 창조한 그런 세계가 실패작이며 아 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모두 지워버리려고 했고 오펜바하는 그 인간 들 속에 끼어들며 좀 더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골몰했 고 물키벨은 자신들이 끼어들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며 방관을 했다. 그리 고 이제는 잣대도 없는 ‘가치’를 가지고 십수만년을 고민하다가 결국 쓸 모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그만둬 버렸다. 결국 자신들도 용의 모습을 하 지만 그런 조잡한 세계의 일원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테싱이 줄리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 따위는 없다. 조물주는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생명 체 같은 건 만들지 않는다. 단지 신의 손길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친 상처 투성이의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야.” 테싱의 목소리가 인간의 것처럼 들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참 회(慙悔)를 닮은 그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등에 돋아 있던 새하얀 날개들 이 사막의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4월의 바람 속에 흩날리 는 벚나무의 잎새처럼. 화장이 지워지듯 오후의 잔설(殘雪)이 되어 사라져 가는 테싱의 모습에서 줄리탄은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십오만년동안 한번도 잠들어 본 적이 없어. 이제는 쉬어도 되겠지.” “......테싱.” “내 여동생을 잘 부탁해.” 그가 미소를 보였던 것일까. 용의 비늘을 벗고 이제는 너무도 평범한 마 지막 말을 남긴 채로 테싱은 빛의 미립자가 되어 순백의 깃털 속으로 퍼져 나갔다. 용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진화한다고 한다. 이젠 작고 하찮은 입자들로 변해 이 세계 곳곳으로 퍼지며 어디에라도 앉을 수 있고 무엇과 도 섞일 수 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진정 용을 닮았다. “누가....... 왔어?” 잠에서 깬 카넬리안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줄리탄을 보고는 살포 시 웃음을 보였다. 막 잠에서 깨어나 조금 부스스한 검은 머리에 성긴 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어깨선이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 기억나지 않 는 희망을 품은 채로 15만년을 살아왔다는 것인가 그녀는. 줄리탄이 조금 당황하며 ‘아무것도 아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벌써 바 꿔 있었다.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테싱이 지나간 흔적이 그녀 에겐 보였던 것이다. “테, 테싱님이?” “으응”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공포에 질 린 얼굴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걱정에 가득 찬 그런 표정. 그녀는 테 싱을 줄리탄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자신과의 계약을 스스로 끊은 뒤에도 미련 때문에 다시 찾아올 자가 아니었다. 그가 찾아왔다면 분명 그건 마지 막 말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한 시선은 이내 줄리탄이 들고 있던 사진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그 사진 속에서는 슬쩍 자신의 모습이 스친 것 같았다. 자신인 것 같기도 하 지만 전혀 다른 여자 같기도 한 모습. “그건 뭐야?” 카넬리안은 빼앗듯이 줄리탄의 손에 있는 사진을 집어 들어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기억의 빈공간이 요동치는 듯 했다.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한 사 막풍의 소음도 전혀 들려오지 않는 채로 그녀의 붉은 두 눈동자는 멈춰버 린 듯 사진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줄리탄을 닮은 어두운 남자의 모습, 테싱, 물키벨, 오펜바하 ....... 그녀는 괴로움에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두 눈을 하얀 손바닥으로 가리며 힘들게 말했다. “뭐야. 뭐야 이건....... 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말해 줘. 말 해 줘! 테싱 님이 무슨 말을 남긴 거야! 난 무엇을 잊고 있었던 건 거야! 난 누구였어! 당신은 누구였어!” 그녀는 줄리탄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쳐 애원했지만 줄리탄은 슬픈 표정으 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런 까마득한 과거가 아니니까. 힘들고 지친 그녀의 과거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슬픈 전생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는 아주 한참 동안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세게 껴안아 주었다. 오아시스의 수면위로 쏟아진 모래 알갱이들이 작은 동심원을 어지러이 만들다간 곧 사라졌다. 1. "카넬리안.“ “응?” “예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빙해 속에 잠들어 있는 페세테르들의 모습. ” “응. 기억나.” “네게 보여주고 싶어! 같이 보고 싶어.” “아하하.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세상의 많은 곳을 다니다보니까 이제 느낄 것 같아. 나의 고향 키오네 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그곳에서 너와 함께 살고 싶다고.” “으, 응.” 줄리탄이 카넬리안과 함께 가기로 한 곳은 바로 키오네였다. 기다려주는 사람 없는 고향이지만 둘이 함께 그곳에 도착해 비어있을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는다면 아주 길고 긴 여행을 충실히 마친 푸근한 기 분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와 평생 다시 검 을 쓰는 일이 없이 살고 싶었다. 사실 그건 달라카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이 듣는다면 쳐 죽일 배신이었지만 줄리탄은 더 늦기 전에 그 녀와 함께 키오네의 해변가를 걷고 싶었다.하지만 카넬리안은 동의도 부정 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의 곁을 걸어갈 뿐이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뿌 옇고 어두운 의문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자기 이제 곧 성인이야.” “아? 그런가?” 카넬리안의 말에 줄리탄이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좀 한심하다는 듯이 난감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남의 일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거야 정말.” “별로 성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바뀔 건 없을 것 같아.” “내가 봐도 그래.” 그녀의 좀 얄미운 말투는 별로 바뀐 게 없다. 줄리탄의 얼굴을 훑어보던 그녀는 그의 머리칼을 좀 다듬어주며 딱 잘라 말해 버렸다. 그렇게 나른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걸어가는 곳은 구 헤스팔콘 제국 내의 이름 모 를 왕국에 있는 도시였다. 인간들의 생존능력이라는 건 정말 무서울 지경 이다. 벌써부터 나름대로의 체계가 잡혀가는 이 도시에는 예전처럼 빵 굽 는 냄새가 흐르고 있었고 짐을 실은 마차들이 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 마차들이 튀겨내는 흙탕물에 고래고래 소리치는 노점상들의 표 정도 활기찬 모습이었다. 왕국에서 찍어 낸 동전들이 통용되어 조잡하긴 하지만 노천식당들도 여기 저기에서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관도 있겠지?” 줄리탄이 혼잡한 시가지를 두리번두리번 거리자 카넬리안이 예전에 겪었 던 빈티나는 생활이 떠오르는 듯 눈썹을 가늘게 떨며 물었다. “그런데 돈은 있으세요 줄리탄씨?” “아 그리고 보니 그렇네.” 그렇다. 죽어라고 궁룡하고 싸우다가 사막 한가운데 내던져진 줄리탄에게 돈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세라피스가 하사했던 ‘삐까번쩍’ 명검마 저 테시오스가 가지고 튀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맨주먹과 뜨거 운 가슴 뿐. 궁상맞은 청춘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녀가 ‘이건 아니야.. .....’라고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머, 머리칼이라도 잘라 팔아야 하나. 이 놈의 가난은 지겹게 따라오네. ” “뭐 방법이 있을 거야.” “에잇! 그럼 빨리 방법을 마련하라고! 난 이제 자기 씰도 아니니까 당신 을 위해 몸 바쳐 충성할 이유도 없으니까 말이야. 어서 돈을 벌엇! 능력 없는 남자 따위는 냉큼 차버리는 보통 여자의 자유를 만끽하기 전에!” “성격....... 하나도 안변했군.” 줄리탄은 그녀의 그런 모습도 귀여운 듯이 웃어주었지만 그녀가 ‘달라카 트로 돌아가서 세라피스에게 빌붙어 살자니까! 그 잘난 페세테르 보기 전 에 아사하게 생겼어 이 궁핍청년아!’라고 완전 ‘땡깡’을 부릴 때쯤에는 그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진 역경을 다 이겨내고 여기서 파탄 나 게 생긴 이 마당에 그들을 가로 막는 자들이 있었으니. “어이 예쁜 언니.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환타지 소설의 당골 손님 ‘별 볼일 없는 불량배’들이었던 것이다. 그들 은 카넬리안의 어깨를 잡으며 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추파를 던졌고 그와 함께 줄리탄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런 것일 것이다. 예전처럼 이런 돌발상황에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빛 만으로도 사태를 평정할 수 있는 연륜이 줄리탄에게 쌓인 것이 달라진 점 이었다.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 손 치웟! 인간!” 보통 다른 히로인이라면 일단 자신의 파트너에게 상대를 제압할 기회를 줘야겠지만 그녀의 거의 본능적인 전투본능은 씰이든 씰이 아니든 정말로 카넬리안이기 때문에 살아 숨쉬는 거였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가열 찬 펀치 가 날아들며 불량배1의 면상에 꽂혔다. 쿠어어어억! 몸이 붕 떠오르며 날아오른 불량배1의 거구가 바닥에 낙하하기 전에 정확 하게 세 번의 주먹이 바람과 같은 속도로 번뜩였고 결국 불량배1,2,3,4는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흙바닥을 뒹굴었다. 그녀가 그제 서야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떠는 불량배들을 내 려보았다. “당신들 뭐야?” “다, 다, 당신이야 말로 뭐야!!!” 사실 피해자는 불량배 쪽이었다. 본격적인 시비가 붙기도 전에 상황을 종 료시켜 버린 그녀의 무공도 지존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했지만 불량배로 서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두들겨 맞은 것이 무척이나 억울한지 박살난 잇 몸을 어루만지며 소리쳤다. “이, 이 무식한 여자! 어떻게 보상 할 거야! 이빨에 세 개는 나간 것... .... 헉!” “그게 그렇게 서운하면 나머지 이빨도 좀 뽑아줄까?” 그녀가 싱긋 웃으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모조리 입을 다물며 동시에 고개 를 저었다. 이미 저 붉은 눈의 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관심 밖이었고 한시 빨리 지옥의 대리인 같은 저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존 욕구만이 앞서고 있었다.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철주먹 펀치 맛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미스트랄이 없어도 그녀는 충분히 강했다. “......카넬리안. 넌 대체 왜 모든 일을!” 결국 줄리탄의 마음이 또 다시 나락을 추락해 버렸다.. 변했으면 하는 것 도 있는데 전혀 바뀐 게 없잖아! 그러나 집요함의 상징인 그녀는 슬슬 그 놈들의 쌈짓돈마저 뜯어내서 줄리탄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손길에 옷깃을 움켜잡으며 앙탈을 부리는 꼴이 남들이 본다면 굉장히 민망하겠지만 불량배들은 난데없는 수난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너희들. 내 부하들에게 뭣 하는 짓이냐!” 그때 아주 빠르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지방 70%에 육박하는 비대한 몸집의 그 주인공은 등이 휠 정도로 헉헉거리는 낙타를 탄 채로 수행원(을 가장한 건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딱 봐도 이 시답잖은 녀 석들의 두목 격이 되는 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불량집단의 우두머리답게 카넬리안의 곱디 고운 외모를 보자마자 만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호오오. 이곳에서는 보기 드물게 맛있어 보이는 여자로....... 앗!” 그 (좋게 말하면) 풍만한 비만남자는 카넬리안을 향해 참으로 너저분한 수식어를 붙인 채로 감상하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무 는 것이었다. 줄리탄 역시 그를 보며 무언가 떠오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저 얼굴에 저 목소리에 저 말투라면 분명히 어디선가....... “카넬리안. 저 사람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아?” 물론 카넬리안의 기억력은 인간을 초월하고 특히 불쾌한 일들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거.상. 쿠.드.로.님.” “흐이이이익!” 쿠드로는 재빠르게 고삐를 돌려 이 악몽 같은 여자에게서 벗어나려 했지 만 너무 당황하던 나머지 안장에서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버리는 개 망신까지 연출해 버렸다. 줄리탄이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이 머리를 굴리 며 중얼거렸다. “쿠드로?” “왜 있잖아. 벨레시마에서 기.사.인 자기에게 평.생.값.을.수.없.는. 무 례를 범했던 장사치. 나 저 인간 덕분에 삼류 무투대회까지 나갔다고.” “아 맞아!” 줄리탄이 손뼉을 치며 기억해 냈다. 줄리탄으로서는 그마저도 반가웠다. 좋은 사람은 분명히 아니지만 수많은 역경을 겪고 아는 사람을 다시 만났 으니 어찌 반갑지 아니하겠는가. 하지만 카넬리안은 좀 다른 쪽으로 반가 운 것 같았다. “어머나. 이렇게 여행비가 생길 줄은 몰랐네에?” 그녀가 몹시도 반가운 미소와 함께 폴짝 폴짝 뛰며 쿠드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쿠드로는 그녀의 뒤에서 솟구쳐 오르는 죽음의 아우라를 볼 수 있 었다. 그녀의 해맑은 표정은 말하자면 ‘죽고 싶으면 도망쳐 보시지.’였 던 것이다. 역시 역사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반복되기 마련인가 보다.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1장 : 기억의 끝에서 - 03 ANYWERE CRISIS 1. 욕실에서 나온 줄리탄이 은백색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카넬리안. 이래도 될까?“ “응 뭐가?” 그녀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 놓은 진수성찬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줄 리탄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바로 쿠드로가 사들인 궁전의 가장 호화로운 객실. 물론 이 진수성찬들도 쿠드로가 ‘솔선수범해서’ 대접한 것이고 그 는 굉장한 액수의 금화마저 ‘알아서’ 기부해 주었다. 지금은 혹시 독을 넣었을지 모른다는 카넬리안의 치밀함으로 식독(食毒) 검사를 하는 중. 맹 독을 사발로 들이켜도 끄떡없는 카넬리안이니 그녀 앞에서는 독살도 무용 지물이었다. “이, 이건 강탈이라고.” “어머나 무슨 말씀.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그, 그게 더 무섭다.” 줄리탄은 될 대로 되겠지, 라는 얼굴로 테이블에 앉은 줄리탄은 혼자 먹 으려면 족히 일주일은 걸릴 듯이 널려 있는 요리들을 바라보며 기가 질려 버렸고 그녀는 생긋 웃으며 하얀 냅킨을 그의 목에 둘러 주었다. “예전에 내가 말한 적이 있었지? 살아남는 방법, 가르쳐 주겠다고.” “응.”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자기야. 당신이라고.” 그녀는 갑작스럽게 진심을 꺼내곤 한다. 그녀의 말끝이 떨리는 걸 들으며 줄리탄은 몸을 돌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싸 주었다. 솔직히 백주대낮에 밥상머리에서 실시하기엔 좀 무안한 행동이긴 했지만, 뭐 아무 려면 어떤가. 기분이 몹시 포근했다. 그가 어린애처럼 그녀의 몸에 뺨을 비비며 속삭이듯 말했다.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일거야.” 하지만 줄리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분명히 인간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버릇처럼 헝클어진 그 의 머리칼을 갈퀴손으로 다듬어 주던 그녀의 표정은 몇 번이고 눈물을 삼 키는 것처럼 슬퍼 보였다. “나 조금, 잘게.” “아? 또?” 줄리탄이 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녀는 ‘왕창 늙은 여자라 서 금방 피곤해 진단 말이야.’라는 맥 빠지는 농담을 웅얼거리며 소파에 누운 그녀는 곧바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최근 들어 그녀는 고양이처 럼 많이 잔다. 자고 싶어서 라기 보다는 잠깐 잠깐 기능이 정지되어 버린 다는 표현이 (싫지만) 어울릴 정도로 그녀는 자주 쓰러지곤 했다. 줄리탄 은 냅킨을 풀며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 곁에 앉았다. 뭐 이 엄청난 음식들 덕에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달아나 버린 탓도 있지만 최근에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창밖으로 태 양의 시선이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고 잠든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던 줄리탄 도 이내 스스르 잠이 들었다. 2. 쿠드로를 달달 볶아 여행노자를 뜯어낸 카넬리안의 행동은 모범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합리적인 사고였다. 돈버는 재주와는 우주의 끝에서 끝만큼 이나 거리가 있는 줄리탄을 대신해서 뭐라도 풀칠할 거리를 마련하기 위한 그녀 성격대로의 재치리라.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뭐? 달라카트의 노블리스가 이곳에 있다고!” 헤스팔콘 제국의 멸망 이후 헤스팔콘 곳곳으로 퍼진 자들은 리히트야거의 잔당들이었다. 그들은 지휘관이었던 힐데브란트의 뜻을 이어 헤스팔콘 재 건을 위해 힘쓰고 있었는데 상당수는 명예로운 기사의 의무를 지키며 건설 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지만 한편 노골적으로 반(反) 달라카트를 외치는 극 우파들도 소수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헤스팔콘 멸망의 주축 중 하나였던 노블리스, 즉 사모예드 줄리탄은 척결 1순위였던 것이다 . 카넬리안이 그 난리를 피워 났으니 그들의 귀에 까지 그 사실이 전해진 것도 당연하다. 물론 재보자는 쿠드로였다. “그렇다니까! 지금 내 집에 있으니까 기습해서 처리하라고!” “흐음. 너 같은 장사꾼이 왜 우리를 돕는 거지.” 쥐새끼들 마냥 어두운 곳에 모여 사는 극우파들로서는 철저한 장사꾼인 쿠드로가 뭣 때문에 자신들을 돕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헤스팔콘의 재 건을 돕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는 극우파들로서도 코웃음 칠 허탈한 변명이고, 쿠드로의 목적은 당연히 다른 곳에 있었다. “대신 노블리스와 함께 있는 그 씰만 나에게 넘겨.” “씰?” “예전부터 갖고 싶었으니까. 크흐흐흐흐.” 뭐 동상이몽, 오월동주, 동병상련이랄까. 쿠드로야 헤스팔콘이 어찌되든 알바 아니었지만 그가 그토록 원하는 건 카넬리안이었고 덕분에 ‘계약’ 은 성사되었다. 근처 도시에 거점을 둔 극우파들로서는 실력 좋은 싸움꾼 다섯명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쿠드로가 사색이 되 어선 외쳤다. “이, 이봐 잠깐. 그 쪽수로는 안돼.”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 “다섯 명으로는 택도 없다니까! 오십명은 가줘야!” “에이 시끄럽군! 우리 조직원들은 일당백이야. 무방비의 기사 한 놈과 계집애 하나 잡는데 다섯이면 충분해! 넌 지켜보고나 있어!” 그리고 극우파 출동이었다. 3. 식객 흉내를 내며 쿠드로의 궁성에 잠입한 다섯 명의 자객들은 일단 노블 리스가 궁성을 나가길 기다렸다. 쿠드로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붉은 눈의 씰을 끔찍이도 아끼기 때문에 명성이 자자한 기사 노블리스와 정면에서 싸 울 바엔 그의 씰을 인질로 잡고 손쉽게 그를 굴복시키려는 치밀한 계략. 참 이해가 안가는 게 어째서 항상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으면 여자를 인질 로 삼은 뒤에 남자를 무력화시킨다, 라는 전근대적인 발상을 직관적으로 떠올리냐는 거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세상은 그리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다 . 사실 그들은 카넬리안이 나간 틈을 타서 줄리탄을 덮치는 게 백번 현명 했던 것이다. 상대가 줄리탄이라면 최소한 실패해도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 만 분노의 화신이자 연기의 달인인 카넬리안을 상대했다가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무척이나 참혹할 것이다. 그리고 줄리탄이 요리책을 구해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지금이다.’ 줄리탄이 칼 한자루 차지 않고 설레설레 궁성 밖으로 나가자 다섯 자객들 은 서로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옷 속에 숨긴 검을 꺼내며 카넬리안이 혼자 있을 방으로 접근했다. 검을 뽑아든 채로 소리도 없이 문을 살며시 열었을 때 방 안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카넬리안은 하필이면 목욕중이었다. “아. 자기야?” ‘어, 어떻게 알았지?’ 욕실에서 들리는 카넬리안의 목소리에 자객들이 당황한 듯이 서로를 바라 보았다. 자신들도 이 짓으로 밥 먹고 산지 십수 년이 되어 가는 베테랑인 데 발소리 하나 없는 자신들의 인기척을 그녀가 어떻게 느낀 것인가! 라고 당황했지만 사실 카넬리안은 궁성 밖에 돌아다니는 어린애 심장소리도 집 중만 하면들을 수 있는 가공할 청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숨을 막 고 별 짓을 다해도 그녀는 다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당신이 보고 싶어서.” 자객 중 한명이 즉흥 성대 묘사를 하며 참으로 낯 뜨거운 대사를 던져 버 렸고 카넬리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목소리와 함께 곧 나가겠다고 대답 했다. 자객들은 일이 너무 손쉽게 풀리자 한술 더 떠서 그녀의 나신을 감 상해야겠다는 당돌한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다. 계속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 고 어디가 베테랑인지 모를 자객들은 침을 삼키며 검을 뽑은 채로 욕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퍼어어억! 얇고 새하얀 팔이 두꺼운 욕실 문을 뚫고는 그대로 나와 자객 중 하나의 멱살을 잡았고 그대로 잡아 당겼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문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 안에서 벌써 옷을 챙겨 입은 카넬리안의 붉은 눈 동자가 드러났다. 그녀가 그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줄리탄 씨는 그런 말 안 해.” “허억!” “막 목욕을 끝냈어. 개운하고 싶었는데 너희들 덕분에 망쳐 버렸다. 누 가 보냈는지 말해.”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잡혀 늑골이 산산 조각난 채로 혼절해 버린 자객을 바닥에 던지며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섬뜩한 ‘차력’ 을 지켜본 자객들은 순간 망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그녀의 눈빛은 정말이지 자신들이 누구건 간에 극한의 고통을 맛보여준 뒤에 창밖으로 던 져 버릴 것 같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첫 번째 발걸음을 옮 겼다. “자, 잠깐!!!” “유언이라도 떠올랐냐?” “흥. 네, 네 년의 주인이 이미 우리 손아귀에 있다. 씰은 주인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며! 네 주인 노블리스가 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움직 이지 마!” “뭐?” 그녀의 놀란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 사실 이제는 줄리탄이 자신의 테이 머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위험에 빠지더라도 공명 같은 건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안전을 책임지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건드리면 너희는 모두 죽는다.” 그리고 그녀는 두 팔의 힘을 풀며 그 자리에 멈췄다. 의외로 간단한 속임 수에 당해 버린 그녀지만 그녀로서는 줄리탄이 잡혀 있다는 걸 들은 이상 그 사실을 확인해 볼 도박은 하기 싫었다. 분한 표정으로 저항하지 않는 카넬리안의 모습도 꽤나 매력적이었는지 자객 중 하나가 참으로 너저분한 표정으로 그녀의 하얀 셔츠를 벗기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다음에 꼭 되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를 저지한 건 동료였다. “이봐 쓸데없는 짓 하지마 이 여자는 쿠드로에게 넘길 상품이니까. 나중 에 더럽혀 졌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흥. 그래. 쿠드로의 여자라면 갈 길은 뻔하지.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까. 유곽에서 다시 보자고. 크하하.” ‘망할 놈의 쿠드로....... 그 자식이었군.’ 카넬리안이 이를 부득 갈며 생각했다. 이 얼빠진 자객들은 자신들의 ‘스 폰서’가 누군지를 불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철제사슬에 묶인 채 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슬슬 궁전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곰곰이 생각하 던 그녀가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아주 고분고분하고 협조적인 목 소리는 상대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멋진 오빠들, 왜 저를 잡아가시는 건가요?” “크하핫! 그거야 네 년을 인질로 잡고 노블리스를 끌어 들이려는....... 헙!” 바보들이었다. 그는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들을 것 다 들었다. 진실 을 알아버린 이상 주저할 그녀도 아니었다. 일단 억누르고 있던 그녀의 분 노 게이지가 급상승하기 시작하며 감히 전 궁룡의 씰이자 궁룡의 수장을 압도한 남자의 애인인 자신을 이 따위 얼치기 같은 사슬로 묶어 버린 그들 의 발칙한 행동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노기를 터트리는데 딱 0.2초 걸렸다. “네 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아아아아!!!!” 그녀는 귀가 멀어버릴 듯이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의 포효와 함께 그대로 쇠사슬을 끊어 버렸다. 고오오오오오오. 그녀는 광분하고 있었다. 많이 봐 서 아는 사실이겠지만 이쯤 되면 줄리탄이고 뭐고 말릴 길이 없어진다. 일 초에 천발을 뿜어대는 공포의 발칸 펀치가 자객들에게 작렬했고 자객들이 자신들이 어디를 맞는지도 모른 채로 저 하늘 높이 날아갔다간 다시 추락 하고 또 다시 날아가 버렸다. 자신이 목욕할 때 들어온 것도 싫고! 자신의 나신을 보겠다는 맹랑한 시도 역시 그 자체로 참형감이고! 줄리탄을 소재 로 자신을 속이려는 알량한 계획도 치가 떨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쉽게 들 켜버린 저능아 자객들의 지적수준에 미쳐버릴 것 같은 짜증이 밀려왔던 것 이다. “사, 살려 주세! 우억!” 그녀는 그들에게 두 마디 이상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백주대로 한복판 에서 벌어진 이 린치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그녀는 빠른 속도로 그녀를 둘러싼 사내들을 바라보며 한 30분은 더 할 것 같았던 구타를 멈췄다. 그 녀의 살기어린 시선은 낙타를 타고 있는 쿠드로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이 른바 피떡이 되서 자신의 다리를 잡고 애원하는 자객을 걷어차 버리며 소 리쳤다. “내 꿈같은 휴식을 방해한 놈이 너로구나. 이번엔 진짜 죽여 버릴 테다. ” 줄리탄 앞에서 특유의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른하게 몸을 움직이던 모습 과는 180도 다른 살기 충만한 모습이었지만 쿠드로는 이번에는 자신 있다 며 불룩 나온 배를 내밀며 소리쳤다. “역시 네 년을 잡는 데는 쪽수가 부족한 것 같아 이 몸이 용병들을 잔뜩 사왔지! 에이이! 이 녀석들을 사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그 돈 을 뽑을 때까지 즐겨줄 테다!” “너....... 지겹지도 않냐 이제.” 카넬리안이 그의 말에 이제는 맥 빠진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을 갖겠다는 시도만으로도 징그러워 죽겠는데 저 비만중년은 세월이 지나도 도무지 포 기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오십 명에 달하는 극우파들(가난한 그들은 용병도 겸직한다.)이 ‘헤스팔콘 만세!’를 허망하게 외치며 우르 르 몰려들었다. “내 몸에 손대는 놈은 죽는다!!!” 듣는 사람의 피가 말라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고음이 카넬리안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그 순간 용병들 역시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화장내 를 대신해서 확 번져 나오는 그녀의 살기가 정말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아무리 공갈 협박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이라고 할지라도 오금이 다 저려오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삼켜 버렸던 것이다. 일순간 도시 한 복판에 몰려든 싸움꾼들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때 그런 그녀의 일갈 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상급기사, 진짜 리히트야거의 일원 이었던 것이다. 예전 가랑이었을 때는 리히트야거 전원이 덤벼들어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실 그녀는 이제 상급기사 와 싸울 만큼의 힘이 없었다. “꽤 재미있는 씰이로군. 큭큭.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죽여주지.” 그가 스스렁 거리며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고 쿠드로가 사색이 되어선 소 리쳤다. “사, 상처내면 안됩니다! 비싸게 팔 수 있는 여자에요!” “어이 너, 뚱뗑이. 끼어들지 마라. 난 이런 걸 즐기니까.” ‘게다가 변태!’ 카넬리안이 치를 떨며 뒷걸음질쳤다. 기사 중에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칼 질하는 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감으로 여기는 족속들이 있다는데 하필이면 이 놈이 그랬다. 쿠드로도 찍소리 못하는 것으로 봐서 꽤 악명 높은 기사임에 틀림없었고, 미스트랄조차 없는 카넬리안은 일단 도망칠 방 법을 궁리했다. “후후. 도망치려는 거냐. 그래 저항해봐. 그 편이 더 재밌다.” 착실한 변태기사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검으로 겁에 질린 그녀를 위협하 며 다가섰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겁먹은 표정조차도 연기며 전술이었다. “꺼져! 이 조물주의 실패작아!” 위기는 곧 기회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자신의 험악한 분위기에 전의를 상실한 준 알았던 그녀가 산양처럼 재빠르게 튀어 오르며 돌려차기를 먹이 자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긴 다리를 뻗은 그녀의 몸이 바람처럼 회전하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그녀의 발뒤축이 기사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 그녀는 검술의 달인이었지만 도리어 검이 없는 상태로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그 허점을 노리는 방식도 일품이었다. “으아아악!” 흉하기 그지없게 코에서 피를 팍 뿜으며 비틀거리는 변태기사의 턱에 카 넬리안의 쉴 틈 없는 무릎이 솟아오르며 작렬했고 그는 거목이 넘어지는 것 마냥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으이구 아파라.” 그녀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빨갛게 부은 무릎을 매만졌다. 그녀가 그 정도 였으니 아마 상대의 턱뼈는 가루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더라도 틀린 짐작 이 아니리라. 그러나 움찔거리던 그 기사는 변태긴 하지만 역시 상급기사, 리히트야거의 명성을 이런 상황에서 들먹이긴 우습지만 아무튼 헤스팔콘 최강 기사 집단의 일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몸을 일으켰다. “비, 빌어먹을 년. 발가벗긴 뒤에 이 거리 한가운데서 욕보여 주마.” 왜 불량한 남정네들은 꼭 그런 쪽으로만 복수의 방향을 떠올리는 걸까. 그는 피가 흐르는 귀를 잡고는 몸을 일으켰고 카넬리안은 정말로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이 돌아가 버린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괜히 맹수의 엉덩 이를 찌른 격이 되어 버렸다. 줄리탄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이 도시에서 그냥 도망쳐 버리는 것도 난감한 상황에서 그 기사가 한발자국 다가올 때 마다 그녀는 한걸음씩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지러이 검끝 을 돌리던 중 독니처럼 날아든 예리한 검결이 카넬리안의 팔을 스치며 피 를 튀겼다.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1장 : 기억의 끝에서 - 04 Dragon Prince 1. 카넬리안은 어째서 역린검(逆鱗劍)까지 버린 자신이 이제 와서 이런 곳에 서 이런 놈하고 싸워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솟구쳤지만 당장은 이 미친 기사 놈의 우악스런 손길을 피하는 것도 버거웠다. 이 놈은 정말 로 그녀의 몸 곳곳에 상처를 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치명상을 입혀 싸움을 끝내는 짓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숨이 달리는 그녀를 몰아붙였다. 솔직히 성격이 뭐 같아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어디가도 대접받을 위험천만의 기사. 게다가 맨손인 그녀로서는 집요하게 날아드는 검 날을 가까스로 피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러다가 저 손에 잡히기라도 한다면 검도 없는 자 신은 도저히 반격할 길조차 없어져 버리므로 그녀는 계속 뛰어 오르며 간 격을 두려고 했지만 상대는 검기를 날려 계속 움직임을 봉쇄시키며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게다가 계속 옷이 피에 젖고 있어 움직임도 부자연스 럽고....... 아무튼 만사가 짜증났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이 사람!!’ 이런 저질스런 놈에게 당황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싫은지 그녀는 애꿎은 줄리탄에게 화를 냈다. 그 순간이었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용병들의 대열이 억소리를 내며 무너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들의 검 하나를 빼앗 은 백발의 청년 한명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며 상급기사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고함소리조차 없는 절제된 동작이지만 분명히 기사의 목을 잘라버 릴 정도로 노기에 찬 일격이었고 지쳐 있는 카넬리안에게 다가서던 그 기 사는 겨우 겨우 검을 들어 갑작스런 검격을 막아냈지만 시퍼런 불꽃과 함 께 몸이 크게 휘청거릴 정도로 강력했다. 바닥에 착지한 줄리탄은 금이 간 자신의 검을 던져 버리고 근처에 있던 다른 검을 집어 들며 상대를 차가 운 눈매로 노려봤다. “카넬리안에게서 떨어져. 당장.” “호오. 네 놈이로군. 노블리스가.” 그가 욱신거리는 자신의 팔목을 매만지며 기쁜 듯이 중얼거렸다. 노블리 스의 목에 걸린 값어치는 극우파들에게는 세라피스 황제의 목만큼이나 대 단한 것이었고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더욱 더 행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를 기쁘게 하는 건 또 있었다. “예쁜 몸이야. 난 남자라도 상관없거든.” ‘내 조만간 저 놈의 입을 꿰매 줄 테다!’ 카넬리안이 눈썹을 떨며 청산유수로 던지는 말마다 사람 소름 돋게 만드 는 그 기사를 노려보았다. 줄리탄은 그런 기분 더러운 호감이야 어찌되었 든 상관없다는 듯이 눈빛 하나 안 변한채로 그를 향해 검을 치켜 올렸다. “결투다.” “바라는 바다!” 그리고 상황은 순식간에 전 리히트야거의 출신의 악랄한 기사와 전 가스 발 사략함대의 지휘관이자 대 헤스팔콘 전의 선봉에 섰던 청년과의 일대 대결이 되어 버렸고 용병들은 실수로라도 그들의 검에 베이고 싶지 않아 슬슬 물러나면서도 싸움을 지켜보았다. 물론 몇몇은 만일을 대비해 석궁을 준비하는 착실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타아아아앗!”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상단으로 휘두른 기사의 검은 파열음을 내며 공기 를 찢었지만 그만큼 빈틈도 컸다. 줄리탄이 그의 가슴팍까지 파고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아!”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줄리탄의 검이 그대로 기사의 가슴을 베어버리고 지나갔고 그건 그냥 싸구려 검에 불과했지만 줄리탄 그 자신이 가진 잘 정 련된 손길에 의해 용의 혓바닥처럼 변하며 가슴을 깊게 베었다. 아무리 기 사라지만 그런 치명적 일격은 견뎌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슴 을 쓸어버린 검을 접는 줄리탄의 눈에는 상대의 가슴팍에서 튀겨 나오는 불꽃을 보았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하하핫! 걸렸구나!” 옷 속에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 방검대(防劍帶)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물 론 그건 기사들끼리의 싸움에선 얄팍한 수법이었고 만약 줄리탄이 들고 있 던 검이 인피타르였거나 세라피스로부터 받은 명검이었다면 그 합금판자 조차 종잇장처럼 찢어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줄리탄의 검 날은 일부러 우툴두툴하게 만든 합금에 긁혀 흉하게 나가 버렸고 그 순간 을 노린 기사의 손아귀에 검을 들고 있는 줄리탄의 오른 팔목이 잡혀 버렸 다. “죽을 뻔 했다! 이 자식!” 기사의 예의 같은 건 찾아볼 길이 없는 험한 욕설과 함께 줄리탄의 복부 에 몇 차례나 주먹이 날아들었고 팔목을 잡힌 줄리탄으로서는 그대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얼굴만한 크기의 주먹이 배에 날아들 때마다 몸이 붕 떠 올랐고 그는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다. “계집애 같은 완력이군!! 크핫! 소용없을 거다!” 슬슬 곧 혼절해서 축 늘어질 줄리탄을 던져 버리고 다시 카넬리안에게 가 려던 기사는 사실 줄리탄은 조금도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의외의 계략에 당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젤리드와, 세이드 와 그리고 용들과 싸워 오면서 이것보다 훨씬 더 한 상황도 지겨울 정도로 겪어왔기 때문에 이 정도 위기로 무너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피 타르의 요사스러운 힘까지 컨트롤했던 줄리탄의 대처방법은 참으로 심플했 다. 마치 용수철처럼 몸을 떠올리며 그대로 상대의 턱에 머리를 날린 것이 다. 고전적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키가 큰 자에게 몸이 잡혔을 때는 의외로 효과적인 방법이다. 상대가 기사라도 말이다. “으아아아악!!!” 아까전 카넬리안의 매운 무릎 올려치기에 이미 턱이 반쯤 부서진 기사는 줄리탄의 머리맛을 보며 졸도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줄리탄의 팔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싸움은 끝이었다. 상대를 걷어차 넘어트린 줄 리탄은 냉기 서린 눈초리로 쓰러져 있는 기사를 향해서 검을 날카로이 휘 둘렀다. “사, 살려줘!” 모두는 줄리탄이 그의 목을 잘라 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카넬리안마저 도 줄리탄의 섬뜩한 표정을 보며 상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만 줄리탄의 검이 스쳐간 것은 상대의 이마였다. 쓰러진 기사의 넓은 이마 에는 일자의 붉은 상처가 그어졌고 그것은 더 이상 저항하지 말라는 위협 의 표식이었다. 물론 이미 저항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지만. 줄리탄이 스며 나오는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너 같은 놈에게 당했다간 그녀를 내게 맡긴 테싱을 볼 낯이 없어.” “이봐요 자기. 나 좀 봐.” “기사인 것 같은데, 이런 짓을 하고도 수치스럽지 않은가!” “날 좀 보라니까 줄리탄 이 양반아!!” “응?” 갑작스런 빽 소리에 줄리탄이 갑자기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본 카넬리안은 그새 극우파에게 잡혀 있었다. 이제 저 무시무시한 노블리스의 손아귀에서 살아남는 길은 카넬리안 납치를 재시도하는 것 밖에 없다고 판단한 무리 들이 지친 카넬리안을 잽싸게 잡은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목에 단도가 다 가와 있고 등에 대검이 다가와 있고 머리에는 석궁이 다가와 있는 삼중 사 중의 경계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도리어 겁먹고 있는 건 극우파들 쪽이었다. “우, 우리는 너희를 잡을 생각이 더 이상 없어!” 그들의 목숨 걸았다는 극우정신은 살벌한 커플 앞에서 놀랍도록 빠르게 꼬리를 내려 버렸다. “그렇다면 그녀를 풀어줘라.” “그, 그럼 우릴 모두 죽일 거지!” “이 바보들이!” 줄리탄이 화가 나선 소리치려다가 아까 전 헤딩의 충격 덕분에 머리가 지 끈거리는지 말을 끊으며 옆머리를 꽈악 누르고는 인상을 구겼고 그건 자신 을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위협의 신호로 오인되어 더욱 상대를 긴장 시키게 만들었다. 상황은 꼬일데로 꼬여가고 있었다. 그때. “무슨 일들이냐.” 더 이상 꼬일 것도 없을 것 같은 이 순간 거리를 지나가는 한 떼의 수행 원들과 무려 호화찬란한 꽃가마가 등장한 것이다. 정말 8명의 가마꾼들이 들고 있는 호화찬란한 꽃가마의 모습에 줄리탄의 두통에 극에 달해 버렸지 만 극우파고 쿠드로고 사람들 모두 그걸 보며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대체 저 꽃가마는 뭐 킹 오브 킹도 아니고 왜들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지 만 줄리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카넬리안과 가마전체를 전체를 고급스럽게 옻칠한 한대에 저택 한 채쯤을 할 것 같은 호화 자가용 가마를 번갈아 바 라보았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 가마 속에서 고개를 들이민 사 람이었다. 카넬리안과 줄리탄이 그 자를 보고는 동시에 소리치고 말았다. “레비아탄!!!!” “아!”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더할 나위 없이 이지적이지만 인간사를 모르는 탓에 약간 어수룩한 구석이 다분한 레비아탄의 모습이....... 이건 완전히 화류계의 정점에 올라 있는 아름다운 귀공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략 함대 사람들 누가 봤더라도 다리 힘이 풀려버릴 정도로 충격 변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지만) 너무도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상처투 성이 줄리탄과 카넬리안을 바라보며 안개 같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하지 만 지금이 그럴 때냔 말이다. “여전하시군요. 줄리탄 님, 카넬리안 님.”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멍한 눈으로 인간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해 버린 레 비아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1장 : 기억의 끝에서 - 05 Divine Game 1. 아마도 레비아탄은 이 도시에서 알아주는 고관대작이라도 된 것 같았다. 죄다 그를 보고 무릎을 꿇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비아탄의 다음 행동은 더 욱 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훌쩍 그 꽃가마에서 뛰어 내리며 하늘하늘 거리는 매력만점의 옷을 입은 채로 그들 앞에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허엇! 레비님께서!” “대체 어떻게 된거야!” 싸움은 당장에 종결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찬 얼굴로 수군거리기 시작했 다. 자신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헤스팔콘 재건에 엄청난 힘이 되어주고 있 는 오프 상회의 서열3위가 헤스팔콘 제국을 때려 부순 줄리탄과 카넬리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더우기 알현 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레비아탄의 입에서 나오는 미성의 목소리는 더 욱 충격적인 말을 전해 주었다. “소인이 유일하게 목숨을 다해 보필했던 주군의 친구분들께 미천한 저, 늦게 마나 인사 올립니다.” 부담이 목까지 차오를 정도의 인사라는 것이 문제였다. 뭐가 어찌되었든 카넬리안은 대세가 자신들에게 기울어 버렸다는 걸 인식하고는 자신을 잡 고 있는 주변 녀석들에게 기분 나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야. 이거 후딱 풀어.” 극우파고 뭐고 고개를 조아릴 분위기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 ‘사실은 노 블리스를 암살하려고 했습니다.’라는 보고 따위는 참수당하고 싶지 않다 면 저 하늘 멀리 숨겨 버려야 했고 레비아탄은 친히 그들을 꽃가마에 태워 자신의 저택까지 데리고 가는 민망한 호의를 스스럼없이 연출해 버렸다. 그리고 줄리탄은 뭐에 홀린 듯이 아무 말 없이 웃고 있는 레비아탄을 바라 보았다. 2. “그래서....... 네가 상회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었다고?” 이곳저곳 다친 탓에 간편한 옷 속에 잔뜩 붕대를 감고 있는 카넬리안이 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레이아탄은 꽤 순진해 보이는(실은 속을 알 수가 없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해일을 일으키던 저 바다의 왕자님이 이제는 갑자기 헤스팔콘 절반의 무역의 책임지는 거대 상회의 서열3위라니....... 아무리 환타지니까 상관없다고 쳐도 카넬리안은 뭔가 자신들이 겪은 일보 다도 더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황당한 표정으로 계속 레비아탄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줄리탄은 정중한 목소리로 레비아탄에게 고개를 숙 였다. “아무튼 고마워요. 레비아탄 님이 아니었다면.” “아니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예?” “두 분이 이 도시에 왔다는 것과 위험에 처했다는 것도 이미 보는 것처 럼 느낄 수 있었어요.” 레비아탄이 아주 태연한 얼굴에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카넬리안 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거 생각해 보니까! “야 이 상어 놈아! 알았으면 빨랑 도와줬어야 할 것 아냐! 어이없이 죽 을 뻔 했단 말이야!” 마시던 찻잔을 집어던지며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슬쩍 찻잔을 피한 레비아탄은 고정하시라는 듯한 난감한 미소만 지었다. 아무튼 수많은 종류 의 미소를 연출할 수 있는 녀석이고 또 그걸로 모든 걸 해결하는 녀석이었 다. 씩씩거리는 그녀를 말린 줄리탄이 되물었다. “왜 지켜보고 있었던 거죠?” “지켜봤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또 재확인 할 수 있었잖아요?” 그가 참으로 살 떨리는 말을 농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졌다. 사실 그런 식으로 죽음의 위기마다 사랑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 게 하다가는 확인할 때마다 명이 십년씩을 줄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줄 리탄은 그런 확인, 이제는 사양한다며 하하하 웃어버렸고 카넬리안이 슬며 시 그의 뒷머리를 때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줄리탄이 화제를 빨리 전환 하며 말을 꺼냈다. “아무튼, 대단하군요. 이렇게 빠르게 인간들의 세상에 적응하셨다니.” 사실 이건 적응이라기보다는 인간들 사회에서 우뚝 서 버린 꼴이었지만 레비아탄은 과분한 칭찬이라는 듯이 또 그에 걸맞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돈을 버는 건 쉬워요. 남을 도와주는 것도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쉽습 니다. 글쎄요. 저는 아직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는 못했어요. 단지 제 능력을 조금 사람들에게 빌려줘 좀 더 편히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뿐입니 다.” 레비아탄이 말하는 능력이 ‘해일 일으키기’라든지 ‘함선 침몰시키기’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의 이지적인 재능과 혜안만으로도 상회를 번창시 키기에는 충분했고 본래 물욕이 없는 레비아탄으로서는 더러운 짓을 해가 며 돈을 긁어모을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이유도 당연 했던 것이다. 빵과 술을 공짜로 나눠주는 자에게 인간들은 친절한 법이니 까 말이다. 줄리탄이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는 거죠 그럼?” “느낌” “느낌?” “지금 여러분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그 기분. 그걸 얻으려면 어떻게 해 야지요?” 레비아탄은 사실 예전부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 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항상 생각해 왔고 그걸 느끼고 싶어서 인 간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자신은 용이라서 시간은 많을 테니까 조급 해하지 말고 많은 것을 느껴보며 살다보면 그런 느낌도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줄리탄은 레비아탄의 질문에 대답 하지 못한 채로 멋쩍은 웃음만 보였지만 카넬리안은 퉁명스런 얼굴로 빠르 게 답을 냈다. “일단 옷을 사줘.” “그럼 그 기분을 얻을 수가 있나요?” “물론이지.” “그럴 리가 없잖아.” 줄리탄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고 역시 새로운 화제로 전환시켰다. 그녀 의 옷에 대한 욕심은 어딜가도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상회 이름이 뭐라고 했죠?” “오.프.상.회.” 레비아탄이 제법 귀엽게 웃으며 톡톡 튀는 목소리로 말해 주었고 줄리탄 과 카넬리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불길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아니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제 정신이라면 상 회를 만드는 짓을 왜.......’ “곧 오프 상회 총수님께서 오실 겁니다. 이런 벌써 문 밖이로군요.” 그 말과 함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아름답게 꾸며진 응접실 안으로 오 프 상회 총수와 서열2위가 들어온 것이다. 한 명은 삐딱한 노란 눈의 남자 , 또 한 명은 큰 키의 회색 쇼트머리를 내린 우아한 여인.......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왜, 왜, 왜, 왜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거야아아아!!!” 소스라치게 놀란 카넬리안이 특유의 시건방진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 는 오펜바하를 향해 찻잔을 집어 던지려다가 이미 하나 던졌다는 걸 알고 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을 납치했고! 자신의 전 주인을 죽이려 고 했고! 가는 곳곳마다 방해를 늘어놓은 지룡의 수장이 어째서 오프 상회 라는 발랄한 이름의 가게 주인이 되어 있는 거냐고! 그녀는 머릿속이 웅웅 울릴 정도로 심각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은거하는 주제에 상회라니! 당신 너무 거창해! “악연이군.” 오펜바하가 긴 한숨을 내쉬며 근처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줄리탄이 떨떠름한 얼굴로 코끝을 긁적거리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펜바하와 미쉘과 함께 상회를 만드신 건가요?” “그런 셈이죠.” 레비아탄이 생긋 생긋 웃으며 동의했지만 사실 어이가 없는 게 무슨 상회 가 갈 곳 없는 용과 씰의 구제기관도 아니고 무엇보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그런 막강한 능력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건 반칙이었다. 오펜바하가 귀찮은 듯 말했다. “황제도 슬슬 질리기도 했고 뭐 앞으로도 인간들에게 크게 관여할 생각 은 없으니까. 무엇보다 검과 마법으로 사는 시대는 이제 끝났어.” “호오. 당신 같은 독재폭군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데?” 카넬리안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지만 오펜바하의 답은 역시나 였다. “이제는 화약과 전차의 시대지.” “달라진 게 없잖아!!!” 물론 카넬리안이 그렇게 소리치긴 했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펜바하 도 줄리탄을 만나고 달라졌다고. 그에게 큰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힘과 지혜를 전수해 준 것도 아니지만 과거의 족쇄에 얽매여 감당할 수 없는 힘 을 품고 괴로워하던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긴 마음만 먹 으면 테싱처럼 대륙 전체를 도탄에 빠트릴 수도, 쑥대밭을 만들 수도, 배 후에서 인간들을 조종하며 얼마든지 공포의 군주로 자리 잡을 능력이 있는 흑룡 오펜바하가 ‘고작’ 상회 하나를 운영하며 좀 더 낮은 곳에서 인간 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로서는 놀라운 변화가 아닐까. 그도 이 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지도 모른다. 좀 더 이 세계와 융화할 수 있는 그 런 모습을 찾아서 말이다. “이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같군요.” 문에서 걸어 나오는 연한 녹색 머리칼의 여자는 카넬리안에게 더 없이 놀 라운 존재였다. 제이미아. 그녀는 테시오스가 다시 인간들에게 보낸 씰들 의 어머니였다. 카넬리안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선 그녀를 바라보다가 울어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이미아는 이번에도 그녀의 숨은 상처 를 감싸주고 있었다.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1장 : 기억의 끝에서 - 06 Hidden Sorrow 1. 이 도시에서의 밤은 레비아탄의 푸른 빛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 카넬리안은 생각할 것이 있다며 잠시 정원으로 나 갔고 혼자 남게 된 줄리탄에게 찾아온 자는 레비였다. “아. 무슨 일로.” 레비아탄의 집에는 그의 취향 때문인지 엄청나게 거대한 서재가 있었고 그가 꼭 보고 싶었던 다른 책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 식재료 조리법이 적혀 있는 책들도 있었기 때문에 줄리탄은 마침 그것을 읽던 중이었다. 여전히 하늘거리는 실내복에 은제 저녁차 세트를 들고 있는 레비아탄은 줄리탄이 들고 있던 책을 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제가 좀 도움이 되었나요?” “상당히요.” 줄리탄이 웃으며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바로 들고 있던 책에 정성스럽게 첨삭되어 있는 문장들 때문이었다. 용의 지혜를 조금 빌려준 것이랄까. 레 비아탄은 그 책 구석구석에 용으로서 알고 있는 식재료에 대한 아주 진귀 한 사실(상식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는 비전들)들을 이미 기록해 둔 상태였고 그것만으로도 요리사인 줄리탄에겐 마치 전설의 마법책 마냥 가 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레비아탄은 줄리탄이 오면 대접하려고 미리 적어서 서재에 넣어 둔 것이리라. 왕년에 발휘했던 천지가 진동할 힘만큼이나 상냥한 용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말수가 적은 레비아탄이 의외로 많은 것을 물어보 고 또 많은 의견을 나눴다는 것을 자신들이 다시는 만날 수가 없는 알고 있는 레비아탄의 드문 조급함이라고 짐작한다면 억측이려나. 꽤나 긴 시간 의 대화 끝에도 카넬리안은 돌아오지 않았고 레비아탄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인피타르를 이제 쓰지 않으시는군요.” “아 예. 이제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았나요?” “글쎄요. 그녀와 같이 있기에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길 기도하고 있어요 .” 줄리탄은 슬픈 표정을 애써 지우며 환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고향으로 갈 거에요. 카넬리안과 함께.” “......” 하지만 레비아탄은 그 말에 대해 처음으로 아무런 동의도, 항상 보이던 미소도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2. 한편 오밀조밀하게 꾸며져 있는 정원을 걷고 있던 카넬리안 앞에 다가온 여인은 제이미아였다. 밤의 정원과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그녀 는 카넬리안의 손을 잡으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 무언가 지상의 것들과는 다른 그런 기운이 그녀에게 풍겨왔 고 카넬리안의 검은 머리칼도 밤이 몰고 온 바람에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 었다. “이제 시간이 곧 다가오겠군요. 나의 사랑스런 아이.” “말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에게. 저렇게 행복해하고 있는데........” “후회하지 말아요.” “후회는 하지 않아요. 단지 그의 마음이 아플 것을 생각하면 슬플 뿐이 에요.” 최근 카넬리안은 일부러 기운을 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해서 애써서 씩씩하게 행동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줄리탄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 그녀는 15만년전의 가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이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잠들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카넬리안은 투명한 슬픔이 눈물을 대신해 흐르는 붉은 두 눈동자를 꽉 감 으며 몸을 떨었고 제이미아는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껴안고 온기를 나눠 주었다. 밤의 정원 위에 걸려 있는 조각난 달의 빛무리가 그들을 쓸고 지 나갔고 슬프게 울리는 봄의 풀벌레 소리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몇 번이 고 말해 주었다. 3. 빨리 키오네로 가자고 재촉하는 카넬리안 덕분에 아침부터 짐을 꾸리게 되었다. 그래도 마음씨 좋은 레비아탄으로부터 두 필의 말과 충분한 식량 과 세계여행을 해도 부족함이 없을 돈을 받았으니, 이 돈 모아 고향에 가 서 배를 사도되겠다며 줄리탄이 웃을 정도였다. 줄리탄은 저택 앞에서 그 파란 저택을 다시 올려보며 배웅 나오지 않은 오펜바하가 있을 곳을 지켜 보았다. ‘테싱을 만났다면 비령을 보고 왔겠군.’ 그는 이미 불만 많은 천재소년이 아닌 지룡의 수장이었지만 15만년의 전 의 일들을 테싱 만큼이나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 말대로 넌 비령이 아니야. 하지만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운명이라는 저주는 너에게 까지 손을 뻗을지도 몰라. 비령은 가랑을 씰로 바꾸면서 자 신의 후생, 즉 네게 조차 자신을 원망해 달라고 말했지만, 그를 원망하지 마. 그 역시 너처럼 붉은 눈의 여자를 죽을 만큼 사랑해서 스스로 저주를 받은 녀석이니까.’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과 닮은 듯 하면서도 빛과 어둠이 정반대로 바 꿔 있는 비령이라는 자의 슬픔은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마저 반복된다면 정말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원망해야만 하는 것일까. 오펜바하는 또 다른 말도 남겼다. ‘이 세계를 만들며 테싱이 연구하던 것이 또 하나 있었어. 그건 씰들의 봉인된 영혼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궁리했지. 십오만년 동안 어떤 답을 찾 지도 못한 숙제지만 만약 이 세상과 융합한 테싱이 그걸 찾아낸다면...... . 또 모르지. 자그마치 십오만년 만에 씰들이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도. 나도 그걸 찾고는 있어. 내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 참. 그리고 나, 미쉘과 결혼할까 해. 뭐 그 여자도 나도 아주 오래 사니까 천 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만.’ 줄리탄은 성인이 되지 못한 채로 아주 오랜 시간동안 살아온 오펜바하의 쓸쓸한 음색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어쨌든 스스로 기둥이 되어 이 세상을 지탱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미 15만 년 전에 멸망한 인간 들을 생존시키기 위해 잠들지도 못한 채. 그리고 비령과 가랑도 세상의 끝 에서 만나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휘말려버린 사람들이리라. 절대로 그녀를 손을 놓지 말아줘. 줄리탄은 비령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그 말이 또 다시 마음속에 울렸다.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1장 : 기억의 끝에서 - 07 Point of No Reuturn 1. 세라피스를 필두로 한 달라카트의 ‘주요 멤버’들이 레비아탄의 저택에 들이닥친 건 줄리탄과 카넬리안이 떠나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문 이라는 건 때론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들보다도 빠르다. ‘행방불명이던 노 블리스가 나타났다!’라는 입소문은 삽시간에 달라카트까지 퍼졌고 누구보 다 먼저 방첩대 총감 리하르트의 귀에 들어갔으며, ‘줄리탄에 대한 어떤 소식이라도 들어온다면 시간, 장소 불문하고 내게 알려줘.’라며 이른바 칙령을 내린 세라피스에게 즉시 보고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세라피스 와 베오폴트에 있던 가스발 사략함대 출신 사람들까지, 말 그대로 부리나 케 줄리탄이 머물러 있다는 레비아탄의 저택으로 총출동 해버린 것이었다. 물론 일개 방랑 기사 한명 만나려고 직접 옥체를 움직이는 황제라는 것 자 체가 믿을 수 없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멸망시켜 실상 반쯤은 ‘적지’나 다름없는 헤스팔콘 령으로 근위대를 대동하지도 않고 게다가 비공식으로 간다는 것마저도 상식 밖의 행동이긴 하지만 세라피스 는 ‘잠시 황제는 여기다 두고 간다.’라며 황제임을 상징하는 자신의 관( 冠) 위에 쪽지 한 장 달랑 써 놓고 메이 제독 쪽의 일원들과 함께 후다닥 황실을 떠나버린 것이다. 무심한 애인 덕에 우테가 울상이 되어 버린 건 말할 것도 없고 신경질이 나버린 리하르트가 국경봉쇄령을 내려 이 제멋대 로 황제를 잡아끌고 올 생각까지 했지만 결국 자신의 심복들에게 그를 비 밀리에 경호하라는 밀령(密令)을 내린 채 돌아오면 그냥두지 않겠다며 험 한 불평과 푸념을 로즈마이어에게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덕분에 레비아탄 의 저택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 져서 그 집 시녀들은 초고속으로 차를 준 비하느라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줄리탄, 그 녀석이 벌써 떠났다고?” 세라피스는 가지런히 예를 올리는 레비아탄 앞에서 그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황제를 몸소 방문케 만든 것만으로도 발 칙해 죽겠는데 며칠이나 잠도 안자고 말을 달려 달려왔더니 이미 떠났다니 ....... 세라피스는 맥이 풀려서 소파에 털썩 쓰러지고는 쓰고 있던 여성 용 가발을 스르르 벗었다. 아무래도 본 모습을 노출시킨 채 ‘행차’할 수 는 없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라 낭자’로 변신까지 했더니만 휑하 니 떠나버렸다니! 가발 덕에 말아 올린 자신의 긴 곱슬머리를 풀어 내리며 세라피스는 미워 죽겠다며 끝도 없이 궁시랑 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의 뒤 에서 다리 힘이 다 풀린 모습으로 서 있는 시오, 톨베인, 메르퀸트, 메이, 그레시다, 키마인, 호이젠, 카밀, 쿄쿠로 등을 필두로 한 방문객들의 표 정들도 죽을 맛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야박한 것도 정 도가 있지....... 아니나 다를까 먼저 터트려 버린 자는 톨베인이었다. 그 날카로운 눈동자의 청년은 정말 화가 났는지 문을 확 밀치고 밖으로 나가 버리며 이를 갈았다. “돌아갈 거야. 그 놈 돌아오면....... 정말 그냥두지 않겠어!”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라는 불안감이 톨베인의 가슴 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는 괜히 화를 내는 것으로 애써 그 불안을 잊어버리려 했다. “어째서 그렇게 빨리 가버리신 건가요.” 그레시다가 몹시도 아쉬운 목소리로 메이를 올려보며 말했지만 제복을 입 고 있던 메이 역시 그레시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측은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었다. 불안한 분위기가 계속 마음속을 장악해가자 시오가 일부러 확 웃는 표정을 보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구에게 말했다고 할 것도 없 이 주변사람들을 이리 저리 바라보면서. “그 녀석, 돌아오겠지? 그렇지? 그 헤헤 웃는 얼굴을 한 채 금방 돌아올 게 뻔하잖아?” “당연하지!” 걱정스러워하는 쿄쿠로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카밀이 쀼루퉁한 얼굴로 또 일부러 커다랗게 대답했지만 그들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레비아탄은 아 무 말도 없이 방문객들의 찻잔 앞에 직접 작은 은수저들을 놓고 있을 뿐이 었다. 녹색의 눈동자에 시린 여운을 담은 메르퀸트도, 표정을 숨기려 정원 으로 자리를 피한 키마인과 호이젠도 실상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마 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짧게 남았을 자신의 남은 시간을, 그가 유일하 게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보내고 다른 누구도 슬프지 않도록 처음에 조용 히 만났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질 거라고. 그가 목숨을 바쳐 원했던 것은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영웅이 아니었고 검술의 달인도 아니었고 사실 최고의 요리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테싱에게 돌아간 카넬리안 을 다시 만나기 위해 달라카트를 떠날 때부터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 기해도 좋다고 결심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차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레비아탄이 고고한 초연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차분히 알렸다. 용인 그에 게 이런 인간들의 삶은 어떻게 보일까. 만난다면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하 고 그 시간이 너무도 짧아서, 같이 있던 순간순간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그런 존재들. 모든 것에 너무나 미숙하고 바보스럽고 고집스럽고 욕 심 많고 또 약해서 작은 것 하나를 지키려고 해도 끝없이 힘을 내고 싸우 고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에는 금세 죽어 버리는 그런 작은 미물들. 하지만 레비아탄이 절실히 느끼고 싶었다는 그 기분은 아마도 그런 인간들의 기분 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물키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 을 때 잠시 그의 마음속을 스쳐갔던 그 뜨거운 감정의 모습은, 어쩌면 인 간들이 품고 있는 마음의 모양이 아니었을까, 레비아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 “그 녀석....... 괜찮겠지?” 세라피스가 다시 달라카트로 돌아가기로 한 건 입가에 댄 찻잔을 다시 내 려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황제로서의 자신의 임무에 파고들고 싶다는 기분 이 울컥 들었던 탓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시녀들이 들고 온 자주 빛 의 얇은 코트를 직접 입으며 레비아탄에게 물었다. 매끄러운 턱 선과 부드 러운 자주색 옷깃은 묘한 탐미의 조화를 자아냈고 그의 상아빛 손가락이 움직여 단추들을 잠그고 있을 때도 레비아탄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을 마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편하지는 않겠지요. 앞으로도 많이 고통스럽겠지요. 그 분도 그 모습을 여러분께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 세라피스는 계속 단추들을 잠가가며 쓸쓸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레비아탄이 말했다. “하지만 그 분은 제게 몹시도 부러운 분입니다. 제게 닮을 용기가 있다 면 좋겠군요.” 누구라도 남을 위해 선선히 희생해 줄 수 있다면 그는 성직자이며 어떻게 살더라도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다면 그는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리라. 괴로울 게 분명하고 누추하고 오해받고 아프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 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히 인생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방문객들은 달라카트로 돌아갔다. [ DRAGON LADY ] 3부 재래(齎來) 21장 : 기억의 끝에서 - 08 Vanishing Point 1. 가르바트 국경선에 걸쳐 있는 작은 여관이었다. 이미 제법 쌀쌀해진 날씨 가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리고 있었고 그녀가 잠드는 횟수도 늘 어나고 있었다. 늦은 눈발이 간간이 창문을 두드리는 여관 이층의 어느 객 실에서 카넬리안은 갑자기 줄리탄에게 목욕을 시켜 주겠다며 고집을 부렸 다. 이 추운 날, 따뜻한 물도 없을 이런 여관에서 말이다. 하지만 줄리탄 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이번에는 오른 팔을 내미세요.” 비좁은 욕실에 둘이나 들어가 있었다. 줄리탄은 좀 쑥스러운 얼굴로 오른 팔을 내밀었고 그녀의 곧 따뜻한 손길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씻어준 다기 보다는 새삼 그의 몸을 자세히 매만지며 하나하나를 다 기억에 담아 두고 싶은 것처럼 그녀는 헤헤 웃으면서 그의 목덜미를 세심하게 쓰다듬어 주 었다. 차가운 물방울에 닿아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머리칼을 몇 번이나 감 아주고 이미 깨끗한 그의 뺨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초라한 욕실 안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 때문에 김이 서렸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따 뜻하다고, 그녀의 온기가 참 인간 같다는 기분이 너무 포근해서 줄리탄은 바보마냥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목욕을 마친 뒤에 그녀는 의자에 앉은 줄 리탄의 머리를 계속 다듬어 주었다. 역시 이런 스타일은 안 되겠어, 라는 둥 계속 말을 바꾸며 몇 시간 동안 그의 머리를 이리 저리 쓰다듬어주며 지금까지 자신들이 겪었던 슬프고 기쁘고 웃기고 또 화가 나는 추억들에 대해 짧게, 때로는 길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항상 인간으로 생각해 줘서 너무나 고마워.” “하하.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씰들은 망각을 하지 않아. 나쁜 일도 기억하지만 좋은 일도 영원히 잊 지 않아. 그러니까....... 난 지금 기뻐. 내가 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기뻐.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어서 난 너무나 기뻐.” 그리고 그녀는 밤이 다 되어서야 아쉬운 얼굴로 줄리탄의 머리에서 손을 땠다. 결국 그 머리 모양은 처음과 같았다. 2. “정말 훌륭한 기사가 되셨군요. 이제는 저........ 당신을 느낄 수 있 습니다.” 그녀는 힘들게 미소 지으며 줄리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하지 도 않은 채 흐르는 그의 눈물이 그녀의 서글픈 웃음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 “뭐야. 이런 게 어딨어.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난 기사 같은 거 되지 않았을 거야. 그냥........ 그냥 요리사로 남아 있었을 거라고!!” 줄리탄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잡으며 끝내 소리치고 말았다. 그녀의 온 기와 표정, 모두 그대로인데 점점 자신에게 멀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목 이 메어온다. “이제야 왜 당신이 절 깨울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 말 하지마. 멋대로 나타나 놓곤 이렇게 멋대로 끝낼 걸 알고 있었 으면서........ 제발....... 제발! 내게 그런 말 하지마!” “당신이 죽어도, 그래서 세상 모든 존재가 당신을 잊어버려도....... 전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15만년간 한번도 흐르지 못 한 그 눈물이 그의 눈앞에서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는 줄리탄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카넬리안!!!” 줄리탄이 찢어질 듯 소리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온 몸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슬픈 악몽이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그녀가 흘린 눈 물의 온기가 두 손에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어제 처럼 새하얀 눈발이 창밖을 흐르고 있었고, 그녀는 옆에 없었다. “.......카넬리안?” 욕실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또 일찍 일어나 부근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까. 줄리탄은 그런 일상적인 가능성들을 절실히 바랬지만 그녀의 자리에 놓여 있던 편지는 그 추측을 잔인하게 밟고 있었다. 편지위에 얼룩진 그녀 의 글씨가 어른어른 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 편지에 쓰여 있는 그녀의 목 소리는 얄밉게도 꿈과 같아 있었다. 너무도 닮아 있었다. 미안해. 멋대로 끝내버려서. 그리고 날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생각해 줘서 너무도 고마워. 당신이 날 깨웠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왠지 아주 슬픈 일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내가 지내온 길고 긴 시간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었어. 하지만 이제 여행을 끝낼 시간인 것 같아. 난 이제 모든 씰들이 갈망했고 또 씰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고 또 영원히 잠들기 위해 떠나야 해. 후회하지 않아. 테싱 님의 곁을 떠날 때부터 결심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바보라서 죽을 때 까지 날 잊지 못하겠지. 이 편지를 닳도록 읽으면서 평생 울 거잖아? 남은 인생 모두를 슬픈 추억만 떠올리며 써버릴 거잖아. 난 싫어 당신의 그런 모습. 미안해. 당신이 잠든 사이 마법을 걸었어. 나를 잊어버릴 수 있도록. 슬프기만 우리의 끝은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도록 나와의 모든 추억을 지워지도록 마법을 걸었어. 하루 쯤 지나면 난 당신의 추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겠지. 나도 영원히 당신의 추억 속에 남아, 그 속에서나마 웃고 싶지만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용서해 줘. 아니 용서하지 않아도 돼. 그냥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다시는 씰 같은 거 깨우지 말고 당신의 그 마음 그대로 지켜가며 마지막까지 자유롭고 행복해야 해. 눈이 오네. 가르바트는 추운 곳이야. 이렇게 이별하기엔 슬픈 장소지만 헤어져도 좋은 장소 같은 건 이 세상엔 없을 테니까. 당신이 해줬던 말 하나 하나, 영원히 그리고 소중히 간직할 거야. 안녕. 나의 사랑스런 테이머시여.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계속 깜빡거리는 두 눈에서 쉼 없이 투명한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그걸 훔칠 생각도 못한 채로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읽어도 그대로였다. 그녀는 항상 머물다 가는 바 람처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세 번째로 그 를 떠났다. 첫 번째는 지켜주고 싶어서 두 번째는 규칙에 의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씰이라는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서. 그가 늙어서 편안히 눈을 감을 때 그의 곁에 정말 있고 싶었던 자는 카넬리안이었다. 변치 않는 아 름다운 모습 그대로, 그와 마지막까지 사랑했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편안 한 얼굴 위에 입을 맞추고 자신도 그 옆에 잠들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만 있기를 몇 번이나 애원했다. 하지만 괴롭게 이어졌던 그녀의 끝없는 시간이 지금 만 큼은, 이상하게도 지금 만큼은 너무도 부족했던 것이다. ‘왜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왜!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줄리탄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서러움이 끝없이 몰아닥쳤다. 인간이니까, 한번도 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다시 만난 그녀와 이제 는 행복하게,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만, 그녀는 씰이었다. 계약을 하지 못하면 새로운 주인을 찾을 때까지 잠 들어야 하는 씰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사실 인간과 다른 것 하나도 없는 평범한 여자였지만 그 지독한 운명의 사슬이 15만년을 따라와 그녀의 발목에 감겨 버렸다. 더 이상 줄리탄과 계약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꼈을 때, 카넬리안은 잠들기 직전 그의 곁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는 지도 모른다. 주인과 씰로서만 살아갈 수 있는 지독한 자신의 운명에 괴로 워하면서도 그녀는 한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목욕을 시켜주고 머리를 다듬어 주고 그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잠든 그의 표정을 계속 지켜보다가 ‘헤어질 시간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났다. 괴로움을 수백 수천번을 되삼키며 3년간의 자신과의 모든 추 억을 지워버리면서. “그렇지 않아. 너를 잊는 게 행복할 리가 없잖아! 그런 게 날 위하는 길 일 리가 없잖아!!” 줄리탄은 신발도 신지 않고 얇은 옷만 입은 채로 여관을 뛰쳐나갔다. 그 녀를 뒤쫓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 는 절대로 떠나게 만들지 않으리라고 외쳤다. 떨리는 눈동자를 한 채 눈 덮인 거리를 절망적으로 뛰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가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는 비탄의 마음만이 낱선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하루가, 이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었 지만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스며 놓은 망각의 마법은 슬프게 울며 마음 전 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3. 그리고 나의 조금은 긴 추억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해가 떨어지고 차가 운 달무리가 자위를 넘는 지금도 터질 것 같은 나의 심장과 나의 찢겨나간 발은 그녀가 있을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도시를 벗어나고 숲길을 아무리 달려도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이 길을 벗어나면 아무렇지 도 않게 앉아 있을 그녀의 모습이 나타날 것 같았지만 어두운 숲 속을 아 무리 헤매도, 목이 찢어질 정도로 아무리 소리쳐도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 고 냉기 서린 밤의 장막만이 내 어깨를 짓누르며 사랑 따위 쓸모없다고 절 망스런 조롱을 속삭이고 있었다. 이제 곧 하루가 지나고 나의 전부인 그녀 도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 마법의 약물이 너울처럼 몸에 퍼져 지금까 지 몇 번이고 되새겼던 이 삼년간의 추억도 차가운 바람 속으로 쓸려 사라 져 버리겠지.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슬어버린 내 마음 속에서 앗아가 버리겠지. 잊고 싶지 않아. 남은 평생이 슬픈 추억으로만 남더라도 사소한 것 하나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아.’ 돌부리에 걸린 듯이 내 몸이 붕 떠올라 아무도 없는 흙길에 쓰러져 버렸 다. 들풀들이 추위에 몸을 사리는 이름모를 숲의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송 곳 같은 나뭇가지들에 찢겨 피가 나고 온 몸이 흙먼지에 뒤집혀 눈조차 뜨 기 힘들었지만 난 나도 모르게 다시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그녀와가 내 마음 속에서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단 한번 그녀를 다시 껴안는 것만으로도 죽어도 상관없다고, 비령처럼 테싱처럼 영원한 저주에 얽매여 버리더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끝없이 소리치며 계속 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인가 그녀의 웃음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듣고 있으면 같이 웃음이 번질 정도로 친숙하고 귀여운 목소리였 는데 그 목소리가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떤 목소리였는지, 그 당연한 것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입을 막으며 괴로 움을 삼켰지만 그 순간, 이상한 바람이 또 내 몸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오 며 그녀의 표정마저 빼앗아 가 버렸다. 벨레시마에서 화를 내던 그녀의 모 습이 지워져 버렸고, 피크 산맥 어느 산길에서 자신에게 장난치며 환하게 웃던 그 표정도 그 말투도 지워졌고, 달라카트에서 다시 만난 뒤에 자신의 품속에서 두근거리던 그녀의 부끄러운 얼굴도, 자라탄 툇마루에 앉아 살 포시 잠들어 있던 모습도, 티브 사막에서 그녀를 껴안았을 때 느꼈던 아릿 한 촉감마저 어른이 타오르며 재가 되어 망각의 바람 속으로 떠나갔다. 그 리고 이제는 눈물만이 흐른다. 왜 눈물을 흘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떠나가 버렸다는 슬픈 기분에 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었던 누군가와의 아주 서글픈 추억이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기억해 보려고 애써 도 마음속을 가득 채우던 포근한 누군가가 내 마음 속에서 이별을 말했다 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Next chapter : 3부제래종장 [ DRAGON LADY ] 삼부재래종장(三部齎來終章) Tears was Standing in Her Eyes 1. 차가운 새벽 공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해가....... 맑다.” 수평선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빙해의 여름해가 부지런히 바다를 간질 이고 있었다. 고향에서 온 지 벌써 3년이나 지났지만 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도 꽤 슬쓸한 일인 것 같다. 모두다 어디로 간 것일까. 마을 사 람들은, 스테온 형은 또 어디로 간 거지. 다시 돌아온 고향에는 다행이도 자신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십여 명의 낯선 사람들만이 예전 키오 네 사람들을 대신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용들이 한 때 이 세계 를 뒤덮었을 때 피난을 갔다고 하는데, 답답하게도 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 역시 내가 까맣게 잊어버린 삼년간의 기간 동안 생 겼던 일이리라. “왜 이러지.”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지는 걸 또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비 어버린 삼년을 생각하면 찢겨나간 책의 한 부분처럼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가 그 비어버린 추억 속에 서 있 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그 정도 라면 나와 굉장히 가까웠던 사람 같은데 어째서 기억나지 않는 걸까. 몇 년 전에 페세테르의 배를 가르는 의식을 치룬 것 같았고 그 속에서 뭘 발 견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속에 내 가 봤던 그 무언가가 떠오를 듯하면서도 금세 사라져 버렸고 생각 하려고 하면 할수록 눈물이 흘러내려 가슴만 아려왔다. 덕분에 난 아무 때나 눈물 을 흘릴 수 있는 진귀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라는 것이 유일한 위 안이 되나. 이것 참. ‘쯧. 아침부터 무슨 궁상이람.’ 한달에 한번 오는 장사꾼이 오늘 부탁했던 달라카트 식 요리법이 쓰여진 책을 가지고 올 테니까 슬슬 준비를 해야겠다. 이상하게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달라카트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가보면 내가 잃은 추억이 조금은 돌아와 줄 것도 같았지만, 그 먼 곳까지 무작정 간다는 것도 우스 워서 - 뭐 오늘은 해도 맑을 테니 생각 좀 하면서 낚시나 하자. 그리고 나 는 벽에 걸쳐 놓았던 낚싯대를 들고 낡았지만 두툼한 옷도 입고 눈물을 닦 아내며 밖으로 나섰다. 아침부터 울음이 나온다는 것도 참 우울한 일이다 정말이지. “여어 줄리탄. 오늘도 낚시야? 배 태워줄까?” “하하. 괜찮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새파랗게 젊은 주제에 낚시만 하는 내 가 별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뭐 어떻게 해. 이상하게 금방 숨이 차고 힘들어서 만만한게 낚시인 걸. 뭐 이걸로도 나 하나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이 없고 말이야, 그런데 대체 내 머리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모 르겠지만 사람들이 ‘은발청년’이라고 부를 때 마다도 뭔가 가슴이 쿡쿡 찔리곤 했다. 아무튼 몸도 마음도 이래저래 피곤하다 정말. “아름답다.” 수평선을 넘기 시작한 태양의 광체가 새하얀 빙하가 점점이 유영(遊泳)하 는 바다 위를 단번에 확 뒤덮는 모습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바다 속에 잠들어 있는 페세테르 무리가 기묘한 잠꼬대를 하며 수직으 로 누워 있는 모습도 수없이 봐도 아름답고 또 슬펐다. 예전에는 솔직히 지겹기 그지없었는데 대체 나의 무엇이 바꿔서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 일까. 내 단조로운 하루 일과를 따라다니는 그 의문과 함께 나는 며칠 전 발견한 멋진 낚시터에 걸터앉아 바늘에 미끼를 걸고 줄을 드리웠다. 사실 그다지 고기가 많이 잡히지는 않는 곳이었지만 잘 들어보면 해안을 핥고 지나가는 파도소리가 키오네 어디보다도 살아 들려오는 곳이라서 나는 이 곳이 좋아져 버렸다. 그런데 솔직히 고기는 하루가 다 지나도 몇 마리 없 을 정도라서 먹고 사는 것과는 인연이 없는 곳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키오네를 내려보는 해가 머리 위에 뜰 때까지 바다소리를 들으며 생 각에 잠길 수 있었다. 물론 고기는 한 마리도 안 잡혔지만. 몇 달 후 철이 되면 끌고 나갈 어선을 보수하던 이웃 어부가 근처를 지나가며 말을 툭 던졌다. “어이 줄리탄. 자네 집에 누가 찾아 온 것 같던데? 멀리서 봐서 잘 모르 겠지만.” “아 예.” 장사꾼 아저씨가 빨리도 오는 군. 오늘은 오는 길이 좀 수월했나 보지? 그 사람은 다 좋은데 만나면 몇 시간이고 날 붙잡고 살기 힘들어 죽겠다는 말만 반복하니 듣고 있으면 정말 사는 것이 힘든 기분이 들어 버려서 좀 있다가 만나야겠다. 아니 뭐....... 안가면 방에 요리책 놓고 가겠지. 요 리책 같은 거 가져갈 사람도 없고 문 앞에 대가로 전해 줄 어포뭉치들도 쌓아 뒀으니까 말이야.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혼자 변명을 중얼거리고 있을 대.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난 갑자기 가슴이 아파와 눈을 꽉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순간 낚싯대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 참 오늘 개시는 늦기 도 한다. 잡아 버리고 말테다! 난 씁쓸한 통증을 잊기 위해 괜히 낚시에 열중했다. 2. 세상 일이 참 맘대로 안 되는가 보다. 민망하게스리 죄다 놓쳐버리고 기 분까지 잡쳐서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슬슬 배가 고프 기도 하고 말이야. 오늘은 잔뜩 요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줘 볼까 나. 소금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 짓을 했다간 큰 출혈이긴 하지만..... ..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페세테르 스튜를 만들 테다. 응? “문이 열려있다?” 난 내 집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도둑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시골 사람만의 특권이었지만 그래도 설마 아직까지 그 아저씨, 안가고 버티고 있는 거 아닌가? 으으 그 설교 아닌 설교를 점심 식사 대신 들어야 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야. 나는 내 집 앞으로 살며시 다가서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야 했지만 창문 안을 배 꼼이 바라봤을 때는 다행이도 아무도 없었다. “훗훗훗. 갔군.” 잉? 그런데 요리책도 없다. 그리고 보니 문 앞의 어포뭉치도 그대로 이고 . 아니 이 사람! 나 없다고 전해주지도 않고 그냥 갔단 말이야! 다시 오려 면 또 한달을 기다려야 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끔찍한 만행을! 너무해 ! 너무한다고! 어? “누구....... 세요?” 이상한 여자가 어느 샌가 내 뒤에 다가와 미소 짓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이상하다는 말은 실례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새하얀 살결과 난초처럼 가 녀린 몸, 무엇보다 어떤 그림으로도 표현조차 못할 것 같은 투명하고 붉은 눈동자는 이상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너무 진부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짜 릿할 정도로 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 있었다. 착각이겠지만 정말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았다. 가슴이 꽉 막혀 올 정도로 아름답다. 감히 말을 붙이기도 힘들고 계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실례가 될 것 같 은 그런 여자가 왜 여기에. 왜 내 앞에. 하지만 ‘아 죄송해요. 제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요.’라고 말하며 지나갈 것 같았던 그녀는 계속 내 앞 에 서 있었다. 바닷바람에 깃발처럼 날리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그 머 리칼이 슬쩍 가린 그 표정이 이상하게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봤다면 절대 로 잊어버릴 리가 없는 그런 여자인데, 전혀 기억에 없는데도 창피하지만 정말로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그런 여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꼭 오 랫동안 찾던 사람과 재회 했을 때처럼, 분명히 그런 분위기의 얼굴로 날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예상대로 고운 미성이었고 또 많 이 귓가에 맴돌았던 것처럼 친근했다. “잠이 안와요. 잠이 오지 않아서 돌아 왔어요.” 여, 역시 이상한 여자다. 뜬금없이 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 겠고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느 때보다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나는 그녀가 이상하게 볼까봐 몇 번이나 눈가를 훔쳐 냈지만 금방 목이 메어왔고 숨이 막혀 와서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런 이상한 나한테서 도망치지도 않고 도리어 내 게 다가와 눈물에 얼룩진 내 뺨을 어루만졌다. “변하지 않았어요. 당신.” 막혔던 마음속의 무언가 딱딱한 것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깨져버리는 것 같았다. 정말 뻔뻔하지만 내가 모르는 그녀가 정말로 날 찾아서 돌아온 것 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난 정말 지금까지 누군가를 간곡히 기다리며 , 그 시린 외로움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거였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에 슬 퍼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지난 삼년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 그녀는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만난 적이 있죠?” 그녀는 나의 질문에 내 가슴에 조용히 기대어 주는 것으로 대신해 주었다 . 언 몸을 녹이는 그녀의 온기가 감미로운 향기처럼 전해져 몸속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새벽녘에 개화하는 꽃의 소리처럼,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절대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 에요. 당신이 내게 해줬던 것처 럼....... 이제는 내가 당신 곁에 있을게요. 돌아왔어요. 나의 영원한 사 람이여.” 나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투명한 눈물의 수선이 흐르고 있었고 그녀는 한참 동안을 나를 껴안은 채 말없이 눈물만을 흘렸다. 마치 지금까지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여자처럼 그녀는 계속 울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세게 안아 주었다. 내 머리는 여전히 아무 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녀는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내 머리는 잊었는지 몰 라도 내 마음은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떠났던 따뜻 한 감정이 다시 돌아왔다고,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했다. 자신의 이름을 카넬리안이라고 말한 그녀는 많은 표정을 가진 반면 말수 가 적었고 놀라울 정도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지워진 삼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해주지 않았다.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병약한 내가 조금만 아파도 그녀는 금방 울어버리는 통에 때로는 전혀 아프지 않다며 허세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럴 때마다 슬픈 미소로 위로해 줄 뿐 이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검도 마법도 쓸 수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 뿐이며 할줄 아는 것이라고는 요리 뿐인, 아무 것도 해주 지 못한 나의 곁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떠나지 않고 나의 마지막 5년 동안 계속 내 손을 놓지 않은 그녀를 진정으로 나는 사랑한다. 다시 태어나 어 떤 곳에서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대가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그대를 놓지 않으리라. 아무리 슬프고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더라 도 절대로 너에게 ‘이별’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으리라. 단 한 번만 용기를 내서 당신을 보기 위해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늘 아래 내 눈은 다른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잠은 밤에 내 눈을 헛되이 감기고 밤은 나에게 낮이 되어 꿈 밖에 아닌 것을 공연히 꾸게 하였다. 그것은 비운의 꿈으로, 수없는 훼방이 당신과 나의 운명을 갈라놓고 있었다 눈뜨고 있는 나의 가슴은 지금도 세차게 싸우지만 당신 가슴은 언제까지나 안온하도록 어린 사슴처럼 민첩한 그대 눈동자에 맹세코 '나의 생명인 그대,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닿고 싶은 생각 간절한 그 입술에 맹세코 처녀의 띠 두른 그 허리에 맹세코 말로써 할 수 없는 가지가지를 능란하게 말하는 꽃말에 맹세코 '나의 생명인 그대,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아테네의 소녀여 나는 가리라 아름다운 그대여 그대 혼자 있을 때 나를 생각하라 나는 이스탄불에 가지만 아테네는 나의 가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내가 그대 사랑하기를 그칠 줄 아느냐? 아니 영원히 그치지 않으리라 '나의 생명인 그대,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바이런 ‘어떤 사람에게’ Next : 에필로그 [ DRAGON LADY ] 에필로그 The End of Dragon Lady 1. 세라피스는 그 이후 우테와의 결혼식을 올렸고 그때 그들의 나이는 27세, 17세였다. 1년 후 우테의 요청에 의해 우테 크룬세스는 가르바트의 여황제 로 다시 추대되었으며 마르켈라이쥬 혼을 프리셉터로 한 북해 기사단이 재 결성되어 가르바트는 다시 제국으로서의 체제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리 고 세라피스는 달라카트의 황제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38세 헤스팔 콘의 극우파들에게 암살되었고 그의 유언에 따라 파르낫소가 차기 황제로 즉위했다. 헤스팔콘은 세라피스의 보호정책으로 빠르게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고 달 라카트로부터 파견되어 헤스팔콘 재건에 전력을 다한 자는 리하르트 막시 밀리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 달라카트로 돌아오지 않은 채 그의 노 년에 이르러 헤스팔콘 왕국들을 연방(聯邦)화시켜 초대 통령이 되었다. 그 는 로즈마이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녀와 결혼하지는 않 은 채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시오와 톨베인은 성인이 되던 해 베오폴트를 떠났으며 그이후 시오는 자 신의 아버지 레터가 있는 피크 산맥에서 수련을 하며 가끔 자신의 친구들 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향 상트로 돌아간 톨베인은 불치병에 걸린 셜린이 7년 후 눈을 감을 때 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었고 그 이후 젤리드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삼고 전세계를 방랑하며 그와 함께 수많은 야사를 남겼다. 메이트리아크 가스발은 6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채 달라카트 해군의 제독이자 달라카트 황실의 가장 유능한 군인으로 보냈 으며 병에 걸려 은퇴한 후에는 달라카트 남부의 작은 별장에서 그레시다의 간호를 받으며 전쟁사를 쓰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키마인 이젠그람과 호이젠은 리하르트와 함께 헤스팔콘으로 건너 가 그곳 에서 수 많은 기사들의 모범이 되어 뛰어난 기사들을 배출했고 리히트야거 를 재결합하여 평생을 기사도의 맥을 잇는 것에 주력했다. 그리고 키마인 은 헤스팔콘 왕국의 한 맹인 공녀와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그녀 역시 헤스 팔콘의 가장 뛰어난 기사 중 하나로 리히트야거의 일원이 되었다. 메르퀸트는 엘프로서는 드물게 말락과 함께 다시 엘프들의 땅으로 돌아갔 으며 그곳에서 말락과 결혼식을 올렸고 그 이후 단 한번도 마법을 사용하 지 않은 채 엘프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긴 인생을 보냈다. 오펜바하는 미쉘과 결혼한 이후 모습을 감춰 어느 누구도 그들의 모습을 봤다는 자가 없었다. 오프 상회는 레비아탄이 뒤를 이었으며 레비아탄은 한 인간 여자와 결혼해 세 명의 자식을 낳았다. 하프엘프로 병약한 카밀은 19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쿄쿠로의 곁에 있었 으며 그녀의 유언에 따라 쿄쿠로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서 수많은 명저를 남기고 이름을 날렸다. 젤리드 빙크리스틴은 톨베인과 함께 전 세계를 방랑하는 동안 단 한번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었고 재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흉몽'이라는 별칭 역 시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파문기사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에 대한 일 화는 동대륙 젤벤더와 서대륙 이실라트에 걸쳐 어디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 을 만큼 유명하지만 정작 그는 한 군데에서도 정착하지 않았다. 테싱이 사라진 이후 용은 인간들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수백년 후에 세 르난이 깨어나 인기 높은 연극배우로 인간들 속에서 유명해 졌을 때에도그 는 자신이 용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크라켄과 자라탄은 다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로 바다에서 살았으며 그 이후 수백년이 넘게 전설의 생물들을 봤다는 뱃사람들의 소문 들이 가끔 그들의 소식을 들려줄 뿐이었다. 그랜사이어 스탈리온은 계속 세라피스의 검술 상대로 황실의 식객으로 남 아 있다가 세라피스의 서거 이후 황실을 떠나 티브 사막으로 돌아갔다. 그 리고 검객들의 스승이자 세 자매의 아버지 역할로서 오래 오래 살았다고 한다. 테시오스는 그 이후 수천년 동안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의 곁에는 녹색의 머리칼을 가진 신비로운 여인과 하얀 피부에 항상 검고 긴 코트를 입은 청년이 같이 있었다고 한다. 2. 줄리탄과 카넬리안은 고향 키오네에서 재회한 이후 단 한번도 역사 속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단지 가르바트 북부의 작은 시장에서 향신료를 고르 고 있는 하얀 머리칼의 청년과 그의 곁에 서 있는 붉은 눈을 가진 아름다 운 여자의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말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귀여운 남자 아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다시 천년 이상이 지나 금속의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사람들의 생활권이 우주까지 넓어진 시대가 올 때까지도 붉은 눈의 여자를 봤다는 말은 긴 시대를 걸쳐 드물게 들려오고 있었다. 몹시도 매력적인 미소를 항 상 머금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그녀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표정으 로 세계의 여러 곳에서 가끔씩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드래곤 레이디 완결 ** 본 '에필로그'는 출판본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출판본에는 '스쳐간 이야 기'가 외전 형식을 빌려 에필로그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Blind Talk : 마지막 블라인드 토크 편 카넬리안 : 하아... 끝났네. 줄리탄 : 이런 날이 오긴 오는 구나. 카넬리안 : 그런데 말야... 저 마지막 문장! 대체 날 몇천년 동안 더 살려 둘 생각인 거냐! 그만 좀 쉬게 해 달라고! 줄리탄 : 후, 후속작을 내기 위한 계략이 아닐까. 카넬리안 : 얼씨구. 아주 뽕을 뽑으려고 하시는군. 줄리탄 : 뭐 그때는 그때고 이제는 슬슬 인사하고 헤어지자고. 카넬리안 : 캬하하핫. 돌아가서 맛나는 것 만들어 먹자아. 줄리탄 : 안녕히 계세요. 그 동안 저희를 지켜봐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카넬리안 : 뭐야아. 마지막까지 전형적인 인사말이야? 성의가 없어! 줄리탄 : 미안하다 뭐.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 카넬리안 : 그럼 안녕히 게세요. 그 동안 저희들을 지켜봐주신 독자님들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줄리탄 : ......이봐 카넬리안 : 자아, 갑시다. 바이 바이. ...걱정하지 마라. 후속편은 안나오니까. 그럼 안녕. 자! 2년 2개월에 걸쳐 길고 길게 연재되었던 드래곤 레이디가 지금 막 완 결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실감이 나진 않습니다. 아마도 며칠 쯤 지난 뒤에 갑자기 가슴이 콩딱거리면서 '아! 내가 끝냈구나!'라고 형광 등처럼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드래곤 레이디는 그 자체를 거대한 엔딩이라고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전대 미문으로 길고 긴 엔딩이랄까요. 처음 줄리탄이 입을 열고 독백을 시작했 을 때부터 엔딩이니까요... 그런 기분이다보니까 전체적으로 좀 쓸쓸하고 감상적인 기운이 흘렀던 것 같네요. 실은 저는 무척이나 어둡고 뒤틀린 이야기거나 드래곤볼마냥 사이 좋게 장 풍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워나가는 폭력물을 자주 써왔고 그쪽을 좋아합 니다. 아아 사랑이라던지 연애 같은 멜로물은 전혀 보지도 않았고 사실 이 전까지는 단 한번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초기 잡담에서 밝히 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좀 더 밝고 희망이 통하고 가볍고 사랑의 열기가 팍팍 퍼지는 그런 걸 써보겠다!'라는 결심으로 드래곤 레이디를 쓰기 시작 한 것입죠 네. 플라나리아처럼 단순무식한 제가 이런 감상적인 글을 쓴 이 유랄까요.(전혀 밝지도 가볍지도 않다고 느끼신다면 그건 당신의 마음이 쓸쓸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변명으로 스리 슬쩍 넘어갑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전 뭐... 환타지를 잘 모르고 큰 관심도 없 었기 때문에 아주 능수능란하게 이 장르문학쪽에 파고 들며 일획을 장식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애당초 없습니다. 아아 그렇다보니까 참 이것 저것 아무 생각 없이 잘 넣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무식해서 좋습니다 . 그냥 읽는 분들이 재미있고 뭔가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느낄 수 있 다면 그걸로 OK 하는 심정으로 쓰면서 많은 연습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어떻게 보면 습작과도 같은 드래곤 레이디가 출판했다는 것이 뭔가 이 쪽 출판계의 큰 독버섯이 되어... 그럴 리가... 없으리라...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전 도무지 구제불능이라 뭔가 고상한 것을 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드래곤 레이디와는 좀 다른 스타일로 생각해요. 여전히 뭔가 좀 나사풀린 진행이겠지만... 제목은 현재로서는 '백랑전설'(白狼傳說)입니다.(아랑전설아닙니다.-_-+) 알세스트 나탄과 시륜 나탄이라는 흑묘백묘 같은 형제 놈의 이야기로... 형 알세스트는 대륙최강의 검술사... 동생 시륜은 수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노더(NODER가 뭔지는 그때 나옵니다 ;;)... 외모도 성격도 극대극 이고 서로 친할리도 없지만 어쨌든! 둘 다 황제의 아들... 그러니까 몸 전 체를 '최강'이라는 말로 도배해도 무방할 듯한 녀석들이지만, 단... 편하 게 살 생각은 꿈도 못꾸게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쳇. 최강 따위가 어딨겠 습니까.(어째서 또 이름이 '탄'으로 끝나냐는 질문에는... 베시시 웃는 것 으로 대신할 수 밖에요.) 꽤 구상을 마치고 써놓기도 했지만... 드래곤 레이디와는 꽤나 다른 분위 기라서 나름대로 셀프 트레이닝 중. 그리고 저의 유사인간에 대한 컴플렉 스는 단편을 통해 계속 써나갈 계획입니다. 이상 2002년 2/4분기 저의 포 부 발표 끝. 자아 어쨌든 그건 그거고... 드래곤 레이디는 이쯤에서 작별 인사를 드립 니다. 힘든 일도 화가 나는 일도 많았지만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 었습니다. 블라인드 토크도 당분간 휴업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늘 저녁에는 혼자 터벅 터벅 단골 BAR에 들려 좋아하는 버본이나 한잔 시켜 놓고 자축을 해야 겠습니다. 자아 축하해 주세요. 축하해 주세요. 축하해 주세요. 축하해... 풀썩. 여름이 지난 후에도 지지않은 엉겅퀴는 그리움을 향한 누군가의 방황 푸른하늘에 남겨진 나의 마음은 여름의 모양 꿈을 떠올리는 밤에 헤엄치는 겨울이 창을 닫는다 소리쳐 부르던 채로 꿈은 결국 추억의 앞과 뒤 여름축제의 초저녁 화툿불은 가슴속의 울림으로 합쳐져 팔월은 꿈의 불꽃놀이, 나의 마음은 여름의 모양 눈을 뜨고 꿈에서 깬 후, 꿈의 긴 그림자가 밤이 되어 더욱 늘어난 별무리의 하늘로 꿈은 결국 추억의 앞과 뒤 여름이 지난 뒤에도 지지않은 엉겅퀴는 그리움을 향한 누군가의 방황 푸른하늘에 남겨진 나의 마음은 여름의 모양 '소년시대'의 가사입니다. ...줄리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노랫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중얼거릴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그럼 정말로 안녕히 계세요. Bye bye. C U l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