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 …따라서 이상의 예에서처럼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의 관계 는 인간의 주종의 계약으로 이해되기 곤란한 점이 많다. 드 래곤 라자가 드래곤을 가리켜 '나의 충직한 친구여.'라고 말 했을 때 이를 국왕이 가신을 향해 하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 라자가 보여주 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착각하고 있다. 이 드래곤 라자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훗날 그들의 재앙이자 바이서스의 재앙 인…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 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3 권. PP. 527 (770년 돌로메네 作) "드래곤이야! 화이트 드래곤이다! 우와, 멋있어!" "흥, 달밤에 뱀 밟았을 때의 네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군 그래?" "후치 네드발! 너! 그 말 하지 말라고 그랬지?" 나는 피식 웃었다. 제미니는 펄쩍 뛰면서 누가 들었을 새라 주위를 둘 러보고 있다. 계집애. 뱀을 밟았으면 밟았지 왜 그렇게 덥석 안겨? 그렇 게 안겨들면서 설마 키스 한 번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 지? 나는 그 때를 떠올리고는 조금 전과 좀 다른 의미로 웃었다. 제미 니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고 나는 딴청을 피웠다. "저것 봐! 후치, 저기, 저 애가 드래곤 라자인가 봐!" 제미니는 어느새 다시 그 화이트 드래곤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모습이니까. 나는 제미니가 가리킨 방 향을 보았다. 화이트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역시 하얀 말을 타고 걷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고상한 취미군. 흰 드래곤 옆에 백마라. 게다가 어울리게도 소 년은 흰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나는 코방귀를 뀌었다. "드래곤 라자야 드래곤에게 잡혀 먹힐 염려는 없겠지만 저 말은 정말 불쌍하군." "응?"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드래곤 옆에서 저렇게 나란히 걷기 힘들걸." "어머? 그렇구나." "어쩌겠어. 자기가 하얗게 태어난 잘못이지. 그러니까 화이트 드래곤 옆에서 혹시 절 잡아드시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라고 묻는 눈으로 걸어 야 되는 것이고." "하하. 후치.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네." "하하하! 이 놈, 정말 그럴듯하게 말하는군?" 내 말을 들은 주위의 어른들과 제미니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고 나는 침을 퇘 뱉었다. 화이트 드래곤을 귀족으로 바꾸고 백마를 평민으로 바꾸면 바로 우리 신세를 표현하게 되는 은유였지만 우리 마을의 단순한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제기랄. 내가 이상한 것인가? 사실 우리 영주님은 마 음씨도 좋고 평민들을 괴롭히는 이야기 속의 영주들과는 아무런 유사점 도 없다. 제미니는 웃다가 다시 발돋움을 했다. 주위에 몰려선 사람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계집애, 도대체 남들 클 때 뭐한 거야? 난 입맛을 다신 다음 제미니의 허리를 잡았다. 제미니는 눈을 흡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제미니." 그리고 제미니를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 주위의 어른들 틈에서도 좀 더 잘 보이게 해주었다. 제미니는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지 만 그래도 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좀 잘 보이냐?" "으응. 그러고보니 저 드래곤 라자는 10살도 안되어보이네?" "쳇. 드래곤 라자는 나이와 상관없어. 드래곤이 보기엔 5살 꼬마든 80 살 현자든 모두 어린애로 보이니까." 주위의 어른들이 나에게 놀란 눈길을 보내었고, 갑자기 시선을 받게 된 제미니는 어쩔 줄 몰라하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워서 몸을 꿈틀거리 는 것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여러가지 하네. 나는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앞의 광경만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장관이었다.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300 큐빗은 넘을듯했다. 간단히 머리와 목 부분이 100 큐빗, 몸통 100 큐빗, 꼬리가 100 큐빗이 었다. 걷고 있느라 날개는 접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 날개는 몸의 길 이와 황금비율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먼 길을 여행해왔을텐데도 불구 하고 그 거대한 머리는 꼿꼿이 곤두서 당당하게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저토록 거대한 생물이 어쩌면 저렇게 우아하게 걸을 수 있을까. 소나 말도 가끔 자기 목을 무거워하는데 드래곤은 훨씬 무거울 저 목을 늘어 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람도 간혹 다리를 끌지만 드래곤은 사슴처 럼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창공을 질주하는 가벼움으로 화이트 드래 곤은 인간들의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면 1,000 셀을 준다고 해도 서고 싶지 않을 자리, 즉 드래 곤의 바로 옆에는 말을 탄 어린 소년이 걷고 있었다. 말도, 망토도, 입 고 있는 옷도 그 소년에겐 죄다 너무 컸다. 소년은 긴 여행에 지친듯 자기를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에게도 별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수줍어하고 있는듯했다. 그리고 그보다 멀리 뒤쳐져서는 기사 약간 명과 보병들이 뒤따르고 있 었다. 수도에서부터 화이트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를 호위해온 병사들인 모양이다. 내가 조금 전 말했듯이, 소년이 타고 있는 말이야 어쩔 수 없 이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걸어야 했지만 그 병사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 다. 그래서 그들은 간신히 일행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뒤쳐져서 걷 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래곤 라자 할슈타일 만세!" "할슈타일 만세!" 소년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더욱 고개를 숙여 머리 전체 를 옷깃 속에 파묻어버릴 태세였다. 만세라고? 10살도 안된 꼬마에게 만세라니 정말 웃기는군. 차라리 무병장수하소서! 라고 말하지. "위대한 드래곤 캇셀프라임 만세!" "캇셀프라임 만세!" 저 허연 드래곤은 인간들이 외치는 만세라는 의미를 알면 얼마나 웃을 까? 어쨌든 저 드래곤의 이름은 캇셀프라임이고 그 옆의 드래곤 라자 꼬마의 이름은 할슈타일인 모양이다. 가난한 우리 마을의 촌사람들이 그렇게 세상물정에 해박할 리야 없다. 영주의 성에서 나온 사람들이 먼 저 고함을 지르면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따라서 고함을 지 르는 것이다. 아마 오늘이 가기 전에 그 이름을 까먹을지도 모르지. "아무르타트들 반드시 무찌르십시오!" "아무르타트를 무찔러요!" 나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아무르타트. 그 이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적어도 이 때만큼 은 마을 사람들의 외침에도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나 역시 팔을 휘두르며 외치고 있었을 정도니까. "빌어먹을, 아무르타트를 죽여버려요! 그 새끼를 박살내!" 내가 흥분하는 바람에 제미니는 하마트면 떨어질 뻔 한 모양이다. 제 미니는 기겁해서 내 머리칼을 쥐어뜯었고,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서 제 미니를 붙잡았다. "어, 미안해. 제미니." "내려줘!" 제미니는 화난 목소리로 내려달라고 외쳤고 난 순순히 내려주었다. 제 미니는 잉잉거리며 내 팔을 꼬집었다. "일부러 그랬지! 응응?" 난 정신없이 꼬집히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나는 제미니의 입을 틀어막으며 귓속말을 했다. "쉬잇! 쉿! 제미니, 조용히 해! 드래곤은 계집애를 무척 좋아한단 말이 야. 시선 끌 짓 하지마!" 제미니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잔인하게 말했다. "씹기가 좋아서 그런대… 그러니까 말이야, 다른 때는 한 번에 꿀떡 삼키지만 너 정도의 계집애는 저 이빨로 꼭꼭 씹어서 얌얌 먹는다구! 특히 빨강머리 계집애는…" 예상대로 제미니는 발발 떨면서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등 뒤로 숨는 바람에 내가 빙긋 웃는 것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명을 뒤집어쓴 줄도 모르고 화이트 드래곤은 점잖게 걸어가고 있었다. 과연 멋있는 놈이었다. 저렇게 강력해 보이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 그 옆에 있는 조그만 꼬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는 것은,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 들 정도로 멋있는 놈이었다. 이윽고 길다란 행렬은 영주의 성이 있는 언덕배기로 사라졌다. 사람들 은 서서히 흩어지거나 몇 사람씩 모여서 잡담을 나누었다. "우리 영주님, 오늘 잠은 다 잤겠는걸?" "그러게 말이야. 허허. 저런 드래곤이 안뜰에 있는데 곤히 잠들 수 있 겠나." 난 어른들의 그 말에 빙긋 웃었다. 그런데 그 때 내 귀를 자극하는 소 리가 들려왔다. "정말 근사하더군. 저 정도면 아무르타트도 끝장이야." "글쎄. 아무르타트란 놈, 워낙히 괴물이라서."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온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든다. 동시에 머릿속은 불타듯이 뜨거워진다. 아무르타트, 빌어먹을, 뒈져버릴, 칵! 썩은 두엄 더미에 쳐박고 똥물을 뒤집어쒸우고 석달 열흘 동안만 두들겨 주고… 에잇! 내가 구사하는 말은 왜 항상 이 모양이지?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욕설이라고는 이 마을의 어른들이 자녀교육에 대한 아무런 생각없 이 그 앞에서 뱉어내는 욕설들 뿐이다. 내 눈에 불꽃이 튀긴 모양이다. 제미니가 놀라서 내 팔을 붙잡았으니 까. "후치?" "아, 제미니. 가자. 해가 저물겠는걸." "응. 그래. 후아! 멋있었어." 제미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난 갑자기 짓궂어지고 싶 어졌다. 나는 제미니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런데 말이야. 드래곤은 너같은 빨강머리 계집애를 몸살나게 좋아 한다고 말했지? 아까 네가 내 등 뒤에 숨었을 때 말이야, 저 놈이 입맛 을 다시며 널 봤는데, 넌 못봤지?" 제미니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아마 오늘밤에 제대로 못자는건 우리 영 주님 말고 한 사람 더 있을 것이다. 난 제미니를 너무 겁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제미니는 자기 혼자서는 죽어도 못가겠다고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고, 그래서 난 어줍잖게도 기사 흉내를 내며 제미니를 에스코트해야 되었 다. 제미니의 집은 숲지기 집안이었고, 그래서 제미니의 집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숲속인데, 내가 정말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숲속에 서 태어나고 자란 제미니가 해만 지면 숲속에 못들어가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고 그래서 제미니는 도중에 해가 지 면 어쩌나 하며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야이, 계집애야! 도대체 나이가 17살인데 집에도 못돌아간단 말이야!" "그러게 누가 그렇게 겁주랬어?" 난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바삐 걸었고 제미니는 행여나 떨어질새라 바 싹 따라왔다. 제미니의 집으로 가던 도중, 난 갑자기 카알의 집의 들를까 생각했다. 카알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고, 왜 카알이 구경나오지 않 은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갑자기 발걸음을 바꾸자 제미니는 놀라서 날 붙잡았다. "어, 어디가?" "조금만 더 가면 되잖아. 혼자 가." "카알에게 가는 거야?" "응." "그럼 같이 가. 그리고 돌아올 때 끝까지 데려다줘."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어쩌자고 이 소녀에게 이렇게 앞뒤없는 억지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었습니까. 흠, 난 카알에게 배운 말투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습득한 말투 두 가지 를 쓰며 때론 나 스스로도 내 말에 놀랄 때가 있다. 지금같은 경우가 그렇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어갔고 제미니는 승낙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는듯이 날 따라왔다. 카알의 집은 숲속 조금 언저리의 공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밭을 갈지도, 가축을 키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뭘 만들어 파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금도 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일년 중 며칠 동안 영주에게 바쳐야되는 부역의 의무를 행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는 술을 빚고, 빵을 사며,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것 은 제미니에게는 도저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고, 그래서 제미니는 카 알을 조금 어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카알에게 이것저것 배워서 사 정을 안다. 때론 그것이 나를 뿌듯한 느낌에 젖게 만든다. 카알의 집쪽으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탁- 탁- 하는 도끼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눈 앞에 공터가 나왔다. 적당한 몸집에 갈색머리, 사람좋게 생긴 중년의 얼굴. 거리에서 만났다 면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평범하게 생긴 사나이가 나무를 쪼개고 있 었다. "네드발군 왔는가?" 카알은 도끼를 내려놓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저것 또한 제미니에 겐 불가사의한 일이다. 영주의 숲지기의 딸인 제미니로서는 숲지기인 자기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땔감을 해 쓸 수 있는 카알 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다. 제미니는 경계하는 눈빛을 띄면서도 다리 를 살짝 구부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알." 나도 인사했다. "참 게으르군요. 카알. 해가 질 때 밤에 쓸 장작을 쪼개다니." "하하하, 네드발군. 진짜 게으른 건 그게 아니지. 장작 쪼개기도 귀찮 아서 그냥 떨면서 자는게 정말 게으른거라네. 오래간만이군요. 스마인타 그양."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미니가 카알을 어려워하면서도 이렇게 찾아올 수 있는 이유이다. 스마인타그양이라고? 카알은 제미니의 부모나 마을 사람 대부분이 제미니, 아니면 젬이라고 불러서 나도 가끔 잊어먹는 제 미니의 성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며 제미니를 이렇게 불러준다. 제미니 는 배시시 웃었다. 어이구, 징그러워. "말이 되는 말을 해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냐, 네드발군. 내 친구 중에는 그런 녀석이 있어요. 나무 쪼개기 싫 다고 벌벌 떨면서 자다가 감기에 걸려서 죽을 뻔한 친구지." "아니, 감기에 걸린다고 누가 죽어요? 점점 허풍만 느는군요." "이런이런. 도무지 연장자의 말이 통하지 않는 괘씸할 정도로 씩씩한 청년이로고. 허허. 들어오게나. 스마인타그양? 들어오세요. 아름다우신 숙녀께서 내방하셨는데 이렇게 세워둬서야 예의가 아니죠." "그럼 삼가 실례하겠습니다." 제미니는 우아하고도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악! 지상 최대의 닭살! 우리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그나마 남아있던 해가 꼴까닥 넘어갔 다. 그래서 카알은 방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초를 밝혔다. 제미니는 눈이 부시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하긴 영주의 성이나 초장이(초 만드 는 사람)인 우리 집 아니면 어디서 촛불을 구경할까. 카알은 우리를 앉힌 다음, 먼저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는 책보다는 술 병이 더 많은 책장으로 걸어갔다. 책장에 있어야할 책들은 모조리 바닥 이나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는 술병과 잔을 들고와 우리 앞에 놓고는 술을 따랐다. "들게나. 네드발군. 사과주라네. 잘 익었을 겁니다. 스마인타그양." 아마 제미니의 집에서 보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 집도 별로 다를 바는 없다. 하지만 우리 둘은 능청스럽게도 아주 익숙하다는듯이 술잔 을 들어올렸다. 나야 양조장 막내 미티 녀석에게 간혹 술찌기를 얻어다 먹기도 하지만, 제미니는 술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텐데도 앙큼스럽게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카알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는 잠시 어떤 말로 건배할지 생각했 다. "어디 보자… 음, 그렇지 두 청춘 남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카알!" 내 비명소리가 조금 처절했나보다. 카알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어? 싫은가? 그럼 그들의 용기와 미모를 타고날 그 2세를 위해…" 제미니는 온몸을 비비꼬고 있었다. 어찌 정숙한 요조숙녀인 자신을 나 같은 난봉꾼과 연결하여 생각하느냐는 격조 높은 비난이 섞인 눈길이었 다. 나로선 심히 억울무쌍한 일이다. 그 때 내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아무르타트의 파멸을 위해 건배하죠."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2. 카알은 갑자기 입을 꽉 다물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제미니는 분위 기가 갑작스럽게 변하자 당황했다. 카알은 잠시후 한숨을 쉬고는 다시 웃음을 띠었다. "그러세나. 음. 알았어. 자네가 그럴 결심인 줄은 몰랐군. 언제 출발할 건가? 그럼 용맹무비한 네드발군이 저 악명높은 아무르타트를 물리쳐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예를…" "예?" "어? 아냐? 그럼 스마인타그양께서?" "풋, 프흡, 프하하하하!" 제미니는 죽어라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도 헛웃음을 지었다. 카알은 빙긋빙긋 웃으며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어쨌든 더 이상 다른 건배의 말을 생각하다간 도저히 술을 마실 수 없을 것 같아 나도 술잔을 기울 였다. 삽시간이 귓볼과 목언저리가 뜨거워지고 숨결에서 단내가 났다. 나는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카알은 내 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지나가는 어투로 가볍게 물었다. "드래곤 라자가 왔다더군?" "예. 카알. 후우! 아무르타트 놈을 끝장내려고 왔지요." 제미니도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자연스럽게 술을 마셨다. 아니, 술잔 을 입가로 가져간 순간까지만 자연스러웠고 그 다음 곧 볼을 있는대로 부풀렸다. 틀림없이 간신히 삼킨게 뻔하다. "흠, 흠, 아흠! 큼. 아, 퍽 좋은 술이군요. 카알." "감사합니다. 스마인타그양." 난 빙긋 웃고는 다시 카알에게 말했다. "왜 구경나오지 않았지요?" "장작을 쪼개느라고 갈 수 없었다네. 어떻든가? 장관이었을테지?" "예. 드래곤 라자는 겨우 예닐곱살 정도던데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화 이트 드래곤이더군요." "화이트 드래곤이라면, 캇셀프라임이로군?" 제미니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난 태연할 수 있어서 기뻤다. 카알은 이보다 더 사람을 놀라게 만들 때가 많아서 난 이미 익숙한 일이다. 카 알은 푸근하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 꼬마는 설마 할슈타일은 아니었겠지?" 이건 틀렸다. 난 어리둥절한 눈으로 말했다. "할슈타일 맞는데요?" 카알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눈을 감은채로 술잔 을 정확하게 입에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더니 카알은 다시 눈을 뜨고 빙긋 웃었다. "청년 처녀가 연장자를 찾을 땐, 연장자는 그의 지나왔던 세월이 헛되 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그의 지혜의 두루마리를 펼쳐보 여야겠지." 나는 바짝 긴장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할슈타일가(家)의 후계자라. 그 집안에서는 아직 드래곤 라자의 혈 통이 내려왔단 말이지?" 카알은 혼잣말 비슷하게 말하더니 피식 웃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말이 안된다고요?" "어디서 드래곤 라자의 재능이 있는 꼬마 하나를 데려와서 할슈타일가 를 잇게 한거라네. 네드발군." 카알은 마치 자기 가문의 일처럼 자신있는 태도로 잘라 말했다. 어이 가 없었다. "그렇게 단정짓는 이유가 뭐지요?" 이렇게 말하니 나도 꼭 대륙의 일을 토론하는 현자의 한 사람이 된 듯 해서 기분이 뿌듯했다. 특히 제미니가 감히 끼어들 생각도 못하고 감탄 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카알은 촛불에 술잔을 비춰보면서 낮게 말했다. "할슈타일가에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허락된 시간은 300년. 그 마지막 300년은 벌써 15년 전에 지나갔다네. 네드발군. 그런데 그 꼬마는 예닐 곱살이라며? 따라서 그 아이가 할슈타일가의 혈통이라면 드래곤 라자일 수는 없지." "300년? 그게 뭔데요?" "아아, 네드발군. 네드발군! 제발 새집 뒤질 시간이 있다면 책 좀읽게 나!" 이로써 대륙의 일을 토론하는 현자의 한 사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 고 새집이나 뒤지는 개구장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제미니는 깔깔거리 며 웃었고 난 얼굴을 붉혔다. 카알은 계속 그 사람좋은 웃음을 벙긋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넨 우리나라의 역사도 모르는가. 300년, 아니 315년전은 우리나라의 개국기원년이 아닌가? 그리고 그 때 영광의 7주 전쟁 때 할슈타일공 (公)에게 드래곤 로드는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약속했다네. 그 가문에 300년 동안 드래곤의 우정이 함께 하여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지닌 후손 들이 태어나기로 했어요. 알았나?" 내가 좀 정신이 없었을 정도이니 제미니는 아예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 을 것이다. 카알은 두 명의 청중이 도대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 닫고는 좀 쉽게 말하기 시작했다. "음… 스마인타그양. 우리나라 바이서스가 언제 생겼지요?" "아, 저 대왕께서 영광의 7주 동안 암흑의 들판을 가로질러 드래곤 로 드를 물리치신 때입니다." "역시 기품에 어울리는 교양을 지니셨습니다. 스마인타그양." 제미니의 표정은… 차마 말하기 싫다.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개국왕이신 루트에리노 대왕께서는 그 영광의 7주의 마지막 날 드래 곤 로드를 물리치셨지만 그 스스로도 다시는 검을 쥐실 수 없을 만큼의 상처를 입으셨지요. 그 때 할슈타일공이 드래곤 로드를 구출했지요. 드 래곤 로드는 생명의 은인인 할슈타일공에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난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300년 동안 그 가문에 드래곤 라자가 태어날 것이라고요?" "그렇다네, 네드발군. 그리고 제 4 대 국왕이신 에리네드 전하께서 북 방 정벌을 하실 때 할슈타일 가문도 우리 전하께 복속되게 되었지. 에 리네드 전하께서는 개국왕 루트에리노 대왕에 반역한 할슈타일 가문을 멸망시키는 대신 주종의 서약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셨다네. 사실 드래곤 라자는 희귀한 것 아닌가? 그런데 대대로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 는 가문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 게다가 드래곤 라자를 잃 은 드래곤은 폭주하게 되니 그 또한 위험한 일이고." 카알이 풀어놓는 해박한 지식은 제미니를 반쯤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 는 질문했다. "그런데 그 300년이 다 지났고요?" "그렇다네. 따라서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해요." 나와 제미니는 바짝 긴장해서 몸을 기울였다. 카알도 마치 무슨 비밀 스러운 회의를 나누는 것처럼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낮게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은 다른 개국공신 가문에 비한다면 원래 반역자 가문이 지? 하지만 대대로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는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영화를 누려왔다네. 그런데 할슈타일 가문에서 더 이상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면?" "아항? 그래서 양자를?" "그렇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지닌 아이들 을 강제로 양자로 끌어들이는거지. 아니, 사들인다고 해야 정확할까? 어 쨌든 가난한 집안에서가 아니면 아이를 내놓지는 않겠지." "돈을 주고 양자로?" "그렇다네. 드래곤 로드의 약속의 시한은 이미 끝났지만, 드래곤 라자 들을 끌어모아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새로이 만들어내려는 것이라네. 마치 좋은 숫말과 암말을 끌어모아 종마를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카알의 어투는 신랄했다. 제미니는 겁도 없이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시 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추잡한 일이군요…." "네. 스마인타그양. 300년 동안 권세를 누리고도 모자라 그 권세를 더 연장시키고자 가난한 부모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그 가문에 입양시키 는 거지요. 물론 그 아이들로서는, 어쩌면 그 부모들도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요. 가난한 집안보다야 할슈타일가의 양자가 되는 것이 낫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어디에나 운이 튀는 녀석이 있어." 카알은 나를 바라보았다. "부러운가, 네드발군?" "솔직히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네드발군은 나이도 있고 이것저것 주위를 살필 줄도 알겠지. 하지만 예닐곱살 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을 그 부모에게서 떼어내 처음보는 사 람을 부모라 부르게 하는 것은 가엾은 일이야." "쳇, 그 자식들도 5년쯤 지나고 나서 다시 자기가 뒹굴던 오두막으로 돌아가라면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그럴걸요?" 내 말투가 격해졌다. 제미니는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었고 카알은 담 담하게 웃었다.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쩝, 오늘 여러 번 당 신을 불러서 저도 참 미안스럽게 생각합니다만, 도대체 어쩌자고 제 등 에 업혀있는 이 소녀에게 술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무모함을 주셨습 니까? 제미니를 업고 숲길을 돌아오며 나는 악을 쓰고 싶어졌다. 카알이 빚는 사과주는 맛은 좋았지만 진짜 독했다. 그런 걸 마치 사과 쥬스처럼 마셨으니 제미니는 그대로 기절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나 또한 그렇게 말짱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간신 히 제미니를 떨어트리지 않고 걸었다. 이미 해는 져서 숲속은 캄캄해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돌아다닌 숲 이라서 취한 정신에도 얼마든지 자신있게 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정 말 힘들었다. 특히 등에 업힌 제미니가 간혹 발작적으로 '잇힛히힛!' 하 고 귀신같은 웃음소리를 내서 나를 질겁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못견딜 노릇이었다. "이히히힛! 히힛!" "좀 그만 웃어!" "음냐, 거 참 우습네, 냠." "뭐가?" "몰라. 그냥 우스워. 까르르륵." 크아아악! 이 망할 계집애, 늑대가 물어가든말든 집어던져 버리고 튀어 버릴까? 풀뿌리에 걸려 거의 쓰러질 뻔 하면서 내가 떠올린 생각이다. 그 때 제미니가 내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려주우!" "넌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 찬물 뒤집어쓰고 자야 돼." "이대로 들어가면 나 맞아 죽어." 음. 그건 맞는 말이군. 아무래도 술이 좀 더 깬 다음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난 제미니를 내려놓고 그 옆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제미니 도 내 옆에 다가와 우리 둘은 나무를 기대고 나란히 앉았다. "후와! 넌 10살 이후로 키는 안크고 몸무게만 불렸냐?" 온 몸에 땀이 끈적거렸다. 얼굴에 가랑잎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나는 그것을 떼어내었다. 제미니는 꿈틀거리며 내게 다가와 내 팔을 들어올 리더니 자연스럽게 자기 어깨에 척 얹었다. 즉, 내 겨드랑이에 파묻혔 다. "추워, 제미니?" "우키기기키긱!" "…." 내가 허공을 향해 소리없이 갖은 욕설을 퍼붇고 있을 때 제미니가 내 겨드랑이에 대고 말했다. "정말 우스워. 냠냠, 드래곤 라아자아." "뭐가 우습냐?" 물론 절대로 내 겨드랑이가 대답한 것은 아니다. "우습잖아." "그러니까 뭐가?" "우스운데." "…으악! 저게 뭐야?" "엄마야!" 제미니는 마을 대로에서 아장아장 걷다가 그녀 앞에서 영주님의 늙은 사냥개가 하품을 했을 때 이후로 항상 그래왔듯이 나에게 답싹 안겨들 었다. 난 껄껄 웃었고 제미니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사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듯이 얼떨덜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습다는 것은 이런 걸 말하는 거지." "후치 네드발! 너!" "술이 확 깨지?" 제미니는 사과 향기가 나는 한숨을 쉬며 내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조 금 후 숲속에서 우석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달려들었다. "저, 저게 뭐야?" "이런. 바람 소리야." "내가 바람 소리도 모를 것 같아?" 난 잠시 얼이 빠져서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밤만 되면 집 밖에도 못나오는 겁쟁이지만 분명히 제미니는 숲지기의 딸이며 숲에서 태어나 자라왔다. 제미니가 바람 소리가 아니라고 말한 다면 아닐 것이다. 그 추측은 정확했다. 잠시 후, 주위가 갑자기 밝아지는듯한 느낌이 들 며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 두런거리는 말소리, 그리고 절거 럭거리는 소리. 마지막은 검을 찬 사람이 걸을 때 나는 소리였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수였다. 눈 앞이 빙 돌면서 다리가 풀 렸다. 나는 나무를 짚으며 간신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제미니도 일어서 서는 내 등 뒤에 숨었다. 나는 제미니를 나와 나무 사이에 서게 만들고 앞을 살폈다. 숲속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분명 한 무리의 사람들 이 횃불을 들고 숲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사, 산적인가봐!" 나는 제미니의 상상력에 깊은 경의를 보내었다. "새로운 형태의 산적이군. 이름은 횃불단 정도 될까?" 횃불을 저렇게 밝히고 마음대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산적일 수는 없다. 제미니는 내 말 뜻을 알아듣고는 좀 밝은 표정이 되 었다. 흠. 여기는 영주의 숲이고 내 뒤에는 영주의 숲지기의 딸이 있으 니, 나로선 산적이 아니라면 별로 겁날 것은…. "아차, 들키면 끝장이다!" "응?" "우리 둘은 취했잖아? 네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히이익!" 제미니는 당장 나무를 타고 올라갈 자세를 취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발상이 가능한거지? 예상대로 제미니는 취해서는 도저히 나무를 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나무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는 소리높이 비명을 지른 다음에 깨달은 것이다. 아이고,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이젠 정말 지겹사옵니다. "누구냐!" 사람들의 다급한 걸음소리에 박자를 맞춰 그들이 차고 있을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에 사방에서 한손엔 횃불을 들 고 다른 손엔 롱소드(Long sword)를 뽑아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영주의 숲에 밤중에 돌아다니다니, 넌… 아니, 뭐야? 후치, 제미니?" 나와 제미니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적합한 태도를 취했다. "에헤헤헤…." 병사들은 모두 하드 리더(Hard Leather)를 입고 있는 영주의 병사들이 었다. 그들은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 아넣고 있었고 그들 중 우두머리인 샌슨 퍼시발이 피식거리며 다가왔 다. 그는 성의 대장장이의 아들로 성의 경비대 대장이다. 성에 초를 상 납하는 초장이 아들인 나와는 잘 아는 사이다. 나보다 10살이나 더 많 아서 롱소드도 차고 병사도 인솔하지만 속마음은 나와 별 다름없는 악 동이다. 그는 웃으며 내게 다가오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응? 뭐야, 이건? 너희들 술 마셨구나?" "에헤헤헤…." 샌슨은 나와 제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를 퍽 불안하게 만드는 웃 음을 지었다. "음. 후치. 드디어 네가 이 정도의 일을 벌이게 되었군. 돈이 어디서 나서 술을 샀냐? 하긴 사랑의 힘으로, 아니 욕망의 힘이랄까? 어쨌든 술을 구했군. 그리고 제미니를 잔뜩 취하게 했단 말이지. 의외로 소심하 군. 취하게 해놓지 않으면 자신이 없었나 보군?" "오해예요!" 제미니의 비명은 잘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위의 병사들의 웃음소 리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건 넘어가 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번엔 샌슨을 불안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조금 전 샌슨의 입가 에 있던 웃음을 이번엔 내가 지어보였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아소리 요란한데…" 샌슨은 당장 내 말을 잘라들어왔다. "위험한데 밤중에 돌아다니면 쓰겠냐? 크험! 흠. 빨리 집으로 돌아가도 록 해라!" "오늘도 웬 처녀 남의 눈길 피해 방아소리를 찾네." "후치!" 이번엔 주위의 병사들이 샌슨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일부는내게 다 가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해… 부탁이야." "달빛에 드러난 처녀, 눈에 익은 걸음걸이." 샌슨은 내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병사들이 재빨리 샌슨을 껴안았다. 샌 슨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세 명이나 되는 병사가 샌슨을 꽉 잡은채 껄 껄거리고 웃었다. "미풍에 스치는 처녀, 코에 익은 향기." "후치! 임마! 형님! 아버지! 할아버지!" 나는 샌슨의 애타는 외침을 못들은척 하며 계속 여유있게 노래를 했 다. 제미니마저 그런 샌슨을 보며 키들거렸고 병사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혀가 매끄러웠다. "부엌의 음식냄새? 빨래터의 잿물냄새? 저장고의 와인냄새?" 병사들은 손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바짝 긴장했다. '주방의 마가렛인 가? 빨래터라면 그 금발머리, 그래. 앤이다. 저장고라면 설마 그라디스 인가?' 병사들은 재빨리 의견을 교환했다. 확신하건대 루트에리노 대왕 이 영광의 7주 전쟁 때 가졌던 작전 회의도 이보다는 덜 진지했을 것이 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노래를 계속했다. "셋 중 하나 확실한데, 이 냄새는… 이 냄새애애애느으으은…." 병사들은 할딱거리며 날 응시했고 샌슨은 붉으락푸르락해지다가 못해 이제 눈물을 뽑을 지경이 되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한달은 샌슨 옆에 가까이 못가겠는걸. 그 때였다. "어랏? 이게 무슨 냄새야?"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분명 냄새, 독특한 듯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 때 제미니도 눈을 껌뻑거리 더니 말했다. "꽃향기 같은데… 무슨 꽃인지 모르겠네?" 병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 병사들 등 뒤의 숲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제게서 나는 향기일 거예요." 숲을 헤치고 예닐곱살 정도의 꼬마가 걸어나왔다. 난 취한 상태에서도 그 꼬마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는 제미니가 확실히 사람 을 잘 알아본다. "드래곤 라자!"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3. 숲을 걸어나온 드래곤 라자는 쑥스럽다는 투의 웃음을 지었다. 병사들 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임무를 깨달았다. 간신히 풀려난 샌슨이 말했다. "할슈타일공. 따라오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드래곤 라자는 어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저, 노랫소리도 들리고 웃음소리 들려서… 별로 위험할 것 같지는 않 더군요." 나는 그 꼬마를 바라보았다. 낮에는 거대한 백마 위에서 마치 떨어질 까 무섭다는듯이 앉아 있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단출한 평상복을 입고 있 어 대단할 것이 없는 보통 꼬마처럼 보였다. 아니, 보통 그 정도의 꼬마 에게 보이는 도발적인 눈빛도 보이지 않는 소심해보이는 꼬마였다. 나 라면 절대로 낮의 그 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제미니는 귀 신같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랬겠군요. 자자! 후치와 제미니는 어서 돌아가거라!" 나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돌렸고 나의 장대한 폭로를 듣지 못하게 된 병사들은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때 제미니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런데 이 밤 중에 여기서 뭐하세요?" 샌슨은 제미니를 보자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아참! 그렇지. 제미니, 네가 도와주면 되겠구나." "예?" "우린 민트(박하)를 찾고 있어. 밤중에 갑자기 찾으려니 너무 힘들구 나." "아니, 민트를 뭐하러… 아! 이 냄새는 민트향이었구나!" 제미니가 말한 순간 나도 깨달았다. 드래곤 라자에게서 나던 냄새는 민트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 몸에서 저런 냄새가 나지? 매일같이 민트를 접하 는 우리 영주님이라면 모르지만. 아, 우리 마을의 영주님은 맛없는 고기 를 먹기 위해 주로 민트를 향신료로 쓴다. 우리 영주님은 돈도 별로 없 고 성격도 까다롭지 않아서 계피나 정향 등의 고급 향신료 대신 흔한 민트를 쓰는 것이다. 어쨌든 냄새를 없애야 먹을 수 있는게 고기요리니 까. 드래곤 라자는 제미니의 말에 반가운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누나. 누나는 민트가 어디 있는지 잘 아세요?"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고 드래곤 라자도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물 론 놀랐다. 드래곤 라자께서 저렇게 평범하고 친근한 말투를 건네다니. 하지만 취해버린 제미니는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그럼, 잘 알지. 우리 아빠가 숲지기니까…요." 다행히 제미니도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드래곤 라자는 실수를 감추려는듯 시선을 외면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 병사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실 수 있겠군요." 샌슨이 재빨리 나섰다. "드래곤 캇셀프라임의 식사 때문이다. 성내에 있는 민트를 모조리 동 원했지만 그래도 모자라더구나. 그래서 급히 찾으러 나온 것이다." 아이고 맙소사! 그 드래곤은 주제에 민트향을 넣어야 밥을 먹는 모양이구나. 하긴 사 람이 싫어하는 냄새를 드래곤은 꼭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겠지. 하지만 드래곤이 먹어치우는 양이라면 정말 엄청난 민트가 필요할텐데. 성의 병사들은 이 밤중에 드래곤의 식사 때문에 향신료를 찾으려고 숲속에 들어온 모양이다. 퍽이나 웃기는 일이다. 제미니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저… 민트라면 사바인 계곡에 흐드러지게 나 있어요." "이야! 그래? 잘됐구나. 좀 안내해주렴." 제미니는 안절부절했다. 이 계집애는 아무리 병사들과 함께라도 절대 로 이 밤중에 사바인 계곡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반도 못가서 아무 거나 밟고는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되돌아봐 버리겠지. 할 수 없다. "내가 안내할께. 나도 그 위치를 아니까." 내가 나서자 샌슨도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오냐, 그럴래? 다행이구나. 그럼 제미니는 돌아가렴." 제미니는 울상이 되었다. 지금 술냄새 풀풀 풍기면서 집에 들어가면 제미니 엄마는 제미니를 꽤나 귀여워해주실 것이다. 엉덩이에 불이 나 겠지. 우리는 어두운 숲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난 차가운 숲속의 밤공기를 계속 쐬자 술기운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내 옆에는 샌슨이 함께 걷고 있었고 드래곤 라자는 병사들에게 둘러쌓 여 우리 조금 뒷쪽에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샌슨에게 방향을 지시하며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웃기는 드래곤이군. 냄새가 나서 고기를 못먹겠다고 그래?" 샌슨도 이 밤중에 고작 민트나 찾으러 출동해서 별로 기분은 좋지 않 은 듯했다. "항상 민트를 사용해서 먹는다고 그러던데. 수도에 있을 때는 항상 민 트를 가득 준비해놓는다더군." "쳇. 그래서 저 드래곤 라자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났었군. 그런데 저 드래곤 라자는 왜 따라왔지?" "드래곤이 식사를 하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나봐. 못기다리겠다고 부득 불 따라나오더군." "흐음.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의 우정이라. 발 조심해. 여긴 자갈밭이라 미끄러져." "알았어." 난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병사들에 가려서 드래곤 라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꼬마는 고생이 심할 것이다. 밤중에 산을 타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니까. "저 드래곤 라자의 이름은 뭐래?" "할슈타일공이잖아?" "그건 가문명이고, 이름은?" "너 미쳤니? 귀족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할슈타일공이지." 나는 괜히 기분이 지저분했다. 하긴, 우리같은 평민이 귀족의 이름을 알 필요야 없지. 언제 이름을 부를 기회가 있겠나? 하지만 카알의 말에 의하면 저 꼬마는 할슈타일 가문에 입양된 아이일 테고, 따라서 원래는 귀족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나처럼 다 쓰러져가 는 오두막에서 뒹굴다 어떻게 드래곤 라자의 재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알려져 분수에 없는 귀족이 되었겠지. 도대체 유피넬은 왜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재질을 내리지 않으신거지? 아냐, 유피넬이 제대로 알 아서 한거야. 내가 귀족이 되면 그건 정말 웃길거야. "우하하하하!" 나는 계곡을 한 달음에 달려내려갔다. 샌슨은 질겁했다. "임마! 후치, 위험해!" 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눈 앞에 바위, 펄쩍 뛴다, 바위를 차고, 그 앞에 풀밭.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춘다. 약간 미끄러지다가, 쓰 러지기 전 팔을 위로 휘두르며, 다시 뛰어오른다. 에라, 앉아버린다. 미 끄러진다. 주루루룩. 앞으로 미끄러지는 힘을 이용해, 허리를 튕겨세운 다. 그리고 다시 뛴다. 바위를 차면, 계곡의 바닥이다. 아직 남아있던 취기와 속도감이 섞여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 들었 다. 난 계곡의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흔들었지만 보이지 않 는 모양이다. "후치! 어디 있냐? 괜찮아?" 위에서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고함을 질렀다. "정말 느리네. 빨리 내려오지 않을거야?" "야! 뭐가 보여야 내려가지!" 할 수 없이 나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그러고보니 위에서 일렁거리 는 횃불과의 거리가 꽤 멀었다. 횃불이 내려오는 속도는 짜증스럽게 느 렸다. 이렇게 달이 밝은데 왜 안보인다는거야. 땀이 식으며 계곡의 밤바람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몸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상쾌했다. 달빛 정말 좋군. 이런 밤엔 노래가 어울리지.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아소리 요란한데…" "후치이이이! 으악!" 샌슨의 비명소리가 나더니 곧 횃불들 중에 하나가 이상한 동작을 취했 다. 그리고 뭐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주루룩 들렸다. 나는 놀라서 어두운 산비탈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후 샌슨의 숨막히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장가 다 갔군…." "…처녀는 눈물로 침대보를 적시겠지. 내 님의 거시기가 완전히 끝장 이래." 샌슨이 날 잡아먹으려드는 소동이 있었지만, 어쨌든 병사들과 드래곤 라자는 계곡 바닥까지 내려왔다. 병사들은 모두 땀을 닦으며 씩씩거리 고 있었다. 그들은 나처럼 간단한 옷이라 아니라 갑옷을 입고 사바인 계곡을 타고 내려와서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벼운 가죽갑옷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다른 갑옷에 비해 가볍다는 말일 뿐 보통의 옷보 다야 훨씬 무겁다. 그리고 하드 리더 쯤 되면 입고 뛰어다닐 만한 옷도 아니다. 특히 할슈타일공께서는 기절할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한 마디 건네보 았다. "힘드시죠. 드래곤 라자." "헉헉. 아, 예. 헉." "이제 다 온겁니다. 앉아서 쉬십시오. 바로 저 둔덕이거든요." 할슈타일공은 말도 못하고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물러나 병사 들을 재촉했다. "아, 뭐해요! 어서 일어나 민트를 향해 돌격!" 병사들은 숨을 푸푸 몰아쉬면서 일어났다. 병사들은 각자 준비해온 자 루를 꺼내어들었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그들을 둔덕으로 데려갔다. 둔덕에는 민트가 가득 나 있었다. 샌슨은 세 명으로 하여금 횃불을 들 고 서게 했고, 나머지 병사들은 민트를 채집했다. 난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감상했다. "임마, 후치! 너도 좀 도와라." "내 역할은 여기까지의 안내." "관두자, 관둬." "달빛좋은 밤, 우리의 용사들. 가슴에 품은 정렬, 민트에 내뿜는다." 병사들은 킬킬거렸다. 난 기세가 올라 더욱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밤하늘 동편에서 이제 서서히 하늘 중앙으로 떠오 르고 있는 셀레나의 보름달이 기가 막히도록 시원한 빛을 내뿜고 있었 다. "하늘엔 셀레나, 용사들의 롱소드를 서슬푸르게 비추니." "그 어떤 민트라도 용사들의 손길을 피할소냐." "보름달 아래 채집한 것들, 최상의 향기가 함께 하리니." "라이칸스롭(Lycanthrope)을 축복하는 보름달이여. 용사들을 축복하소 서." 샌슨이 고함을 꽥 질렀다. "임마! 우리보고 늑대로 변하라는거야? 이렇게 고함지르며? 아우우…" 우우우… 아우우우우…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너무도 시간을 잘 맞춰서 늑대가 울어젖힌 것 이다. 놀란 나머지 몸의 균형을 잃고 주저앉아 버리는 병사도 있었다. "우와, 하, 놀래라. 샌슨, 친구들이 부르네?" 샌슨도 굳어버린채 서 있었다가 내 말에 간신히 웃음을 띄었다. "깜짝이야. 원참 녀석들. 정말 타이밍 잘맞추네." 그 때였다. 우워어어… 크르르… 우워워워워! 아까보다 더 소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소 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이윽고 돌멩이를 걷어차는 좌르륵! 하는 소리까 지 들려왔다. 다가오고 있었다. 늑대가 횃불로 달려들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데 달려오다니. 보통 늑대가 아니다. 샌슨은 급히 롱소드를 뽑았다. "네 녀석의 그 노래대로라면 곤란한데." 병사들도 제각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난 파랗게 질려버렸고, 어떻게 달아나야될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래곤 라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꼬 마도 역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샌슨은 급히 지 시했다. "모두 할슈타트공과 후치를 둘러싸라. 그리고 자렌, 해리… 또 누가 코 팅된 검을 가졌지?" "나야." 양조장 장남 터너가 앞으로 나섰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샌슨과 세 명의 병사가 앞에 서고 나머지 병사들은 나와 드래곤 라 자를 둘러쌌다. 나는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발자국 소리는 그렇 게 많지 않았다. 한 놈인 것 같다. 하지만 엄청난 발자국 소리였다. "저, 저기!" 우리 앞쪽 약 70 큐빗 위쪽의 언덕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달빛을 등 뒤에 받고 있어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 몸은 5 큐빗은 되어 보였다. 늑대가 아니다. 두 발로 서 있었고 구부정한 허리 위로 머리를 한 두서너 개 더 올려도 충분히 여유가 남을만한 어깨가 보였다. 어깨 양쪽으로 늘어진 팔에는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대거(Dagger) 같은 발톱 들이 보였다. "웨어울프(Werewolf)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4. 샌슨은 롱소드를 앞으로 쭉 뻗어들었다. 보름달 아래 롱소드의 반사광은 엄청났다.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뜻이 롱소드의 날을 타고 그대로 언덕 위의 웨어울프에게 쏘아져 가는 듯했 다. 웨어울프는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씨 좋고 순진하긴 해도, 역시 성의 경비대 대장인 샌슨은 전혀 눈 싸움에서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눈싸움 말고 몸싸움은 어떨까. 웨어울프가 손을 휘두르면 황소의 머리가 박살난다. 4년전 어느 여름밤 웨어울프가 마을까지 내려와 난동을 부렸을 때 똑똑히 보았다. 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기랄. 우리의 민트 채집단께서는 아무도 활을 가져오지 않았다. 저렇 게 바보처럼 서 있을 때 한 방 날려야 되는데. 아니지. 웨어울프가 화살 에 맞아죽을까? 왠지 맞으면 그대로 튕겨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샌슨은 낮게 지시했다. "자렌, 왼쪽으로. 터너, 오른쪽으로. 해리는 내 뒤. 놈이 움직이면 자 렌과 터너는 양쪽에서 벤다. 해리는 머리를 찌르고." 지시를 마치고 샌슨은 그대로 T자를 이룬 대형으로 서서히 앞으로 걸 어갔다. 샌슨의 대단한 배짱 때문에 나머지 세 명도 두려움을 잊는 듯 했다. 샌슨은 아마 자기가 방패가 되어주는 동안 해리가 자신의 등 뒤 에서 안전하게 머리를 노리도록 하려는 모양이다. 해리는 키가 껑충하 고 완력이 좋으므로 충분히 샌슨의 등 뒤에서 웨어울프의 머리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피하면 자렌과 터너가 양쪽에서 베어들어간다. 웨어울프는 그런 샌슨의 작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가만히 서 있었 다. 아마 놈도 노랫소리에 달려왔다가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한 모양이다. 드래곤 식사용 민트 채집이라는 우습지 도 않은 작전으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 웨어울프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웨어울프는 뛰었다. "크아아악!" 웨어울프는 곧장 샌슨에게 달려들었다. 5 큐빗짜리 공격력이 돌진해오 는데도, 샌슨은 작전이 맞아들어가자 씩 웃으며 기다렸다.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웨어울프가 눈 앞까지 다가와 팔을 휘두를 때, 샌슨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그 다리를 베어들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샌슨의 등 위로 해리가 롱소드를 찔렀다. 둘은 정말 타이밍이 좋았다. 웨어울프는 샌슨이 다리를 베려하자 움찔하며 아래를 보았다. 그래서 샌슨의 등 뒤에서 갑자기 뻗어나온 해리의 롱소드를 보지 못했다. 롱소 드는 정확하게 웨어울프의 목을 찔렀다. "끄억!" "받아랏!" 동시에 세 개의 검광이 보름달빛에 번뜩였다. 웨어울프의 양쪽과 그 다리쪽. 샌슨은 도끼질하듯이 풀스윙으로 낮게 베느라 그대로 앞으로 굴러버렸다. 웨어울프는 목이 뚫리고 다리를 맞아서 무릎을 꿇으면서도 양쪽에서 날아드는 자렌과 터너의 롱소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퍽! 칼로 고기를 치는 지독한 소리, 뼈가 금속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웨어울프는 목의 롱소드와 양손으로 쥔 롱소드, 그리고 무릎을 꿇어버 리느라 행동이 봉쇄되었다. 그래서 발 옆으로 굴러지나간 샌슨이 일어 나 등 뒤를 찌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푸욱! 샌슨이 찌른 롱소드는 웨어울프를 꿰뚫어 배쪽으로 피가 터져나왔다. 정면에 서 있던 해리는 그 피를 뒤집어썼지만 물러나지 않고 목을 찌른 롱소드를 비틀면서 비스듬히 당겼다. 당장 웨어울프의 목이 건들건들했 다. 이윽고 웨어울프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 등으로 다시 네 개의 롱소 드가 날아들었다. 웨어울프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등에 롱소드가 박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샌슨은 롱소드를 뽑아들며 한숨을 쉬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롱 소드를 뽑아들고는 품에서 수건을 꺼내어 그 피를 닦았다. 특히 피를 완전히 뒤집어쓴 해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샌슨은 이윽고 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건 퍽 불 안했다. "너 이 자식! 말이 씨가 된다고…" "으악!" 나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빙긋 웃으며 내 어깨를 꽉 잡았다. 그래서 샌슨은 아무런 부담없이 내 정수리를 난 타할 수 있었다. 난 샌슨에게 목이 졸리면서 외쳤다. "끄억… 자, 잡았으니… 됐잖아? …켁!" 샌슨은 껄껄 웃으며 날 놓아주었다. 난 목을 쓰다듬으며 한참 캑캑거 렸다. 그 때 내 눈에 허옇게 질려버린 드래곤 라자의 얼굴이 보였다. 샌 슨도 그것을 본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할슈타일공. 안심하십시오." 할슈타일공께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저씨, 정말, 대, 대단하네요?" 드래곤 라자는 몹시 놀란듯 다시 평상어를 썼다. 원래 평민이었을테니 까. 샌슨은 기겁할듯이 놀랬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드래곤 라자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떻게 보통 롱소드로 웨어울프를?" 샌슨은 롱소드를 들어올려보였다. "제 것과 나머지 세 명의 검은 은으로 코팅되어 있지요. 빛이 예쁘지 요?" 드래곤 라자는 알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도 우리 영주님을 가난하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대륙 어디에서 병사들의 검에 은 도금을 해준단 말인가. 그러나 저건 미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오로지 실용성을 위해 은을 발라두었을 뿐이다. 물론 축복받은 은으로 통째로 만드는 것이 대(對)라이칸스롭 전용무기의 제조법이지만, 그랬다가는 한 자루도 못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임시방편 비슷하게 은도금을 한 것 이지만 우리 경비병들은 그 정도로도 잘 싸운다. 왜냐하면… "귀, 귀하들은 일개 병사인데… 수, 수도의 기사들보다 더 용맹해 보이 는군요." "글쎄요. 이곳의 병사들은 아무르타트라는 체에 걸러진 알짜배기들이 거든요." "예?" 샌슨은 빙긋 웃으며 멋진 동작으로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아넣었다. "아무르타트 때문에 이 주위에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지요. 그래서 몬 스터들과 싸우면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간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 사들은, 최고로 단련된 병사들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다음 번 싸움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걸 아니까 겁없이 싸울 수 있습니다." 롱소드가 검집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달빛에 반사되는 검광이 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잠시 내 눈엔 대장장이의 아들이자 내 노래 에 허둥대는 순진한 샌슨이 루트에리노 대왕보다 더 위대한 영웅으로 보였다. 보름달 아래의 마력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샌슨은 루트에리노 대왕만큼의 영웅일까? "자, 다들 빨리 움직이자. 내가 내려가서 한잔 사지." "와, 샌슨 대장 만세올시다." "이럴 때만 만세지?" 병사들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민트를 정성스럽게 모아 자루에 담았다. 샌슨은 자신의 자루를 들어올리다가 나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자, 후치? 노래값은 치뤄야지." "에엑?" 샌슨은 방긋방긋 웃으며 내 어깨에 자루를 턱 올려놓았다. 나는 다리 가 휘청한다는 시늉을 해보였고 모두들 왁자하게 웃었다. 그까짓 민트 한 자루 별로 무거울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내가 입 속으로 궁시렁거리자 샌슨은 말했다. "임마,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해. 뭘 궁시렁거리냐?" "…부엌의 음식냄새? 빨래터의 잿물냄새? 저장고의 와인냄새?" 샌슨은 처절하게 외쳤다. "야이, 자식아아아아!" 취소다. 절대로 샌슨은 루트에리노 대왕같은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샌슨과 친구로 남겠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아무 래도 놀려먹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숙취와 중노동, 흥분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꿈자리는 무시무시했 다. 난 바닥에서 일어나 앉아 멍하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자리는 끔찍스러웠는데, 너무 끔찍해서인지 아무 것도 기억나 지 않았다. 다만 어디에 짓눌리다 만 듯한 머리 때문에 나는 눈의 촛점 도 제대로 못맞추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일어났으면 치우고 씻어라."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려와도 그 뜻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퍽 걸릴 정도 였다. 당연히 아버지는 내 등을 걷어찼고, 나는 간신히 일어나다가 미끄 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버지. 다리가 완전히 풀렸어요!" "잘 한다. 어서 못 일어나?"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니까요?" "갈수록 태산이다. 했던 말 또 하고. 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그랬지."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날 치매환자로 몰아가셨다. 난 궁시렁거리며 일 어났다. 몸에 둘둘 말고 자던 모포를 집어 털고는 침대 위에 던져두었 다. 침대는 아버지 것이고 난 바닥에서 모포를 말고 잔다. "나도 침대 좀 만들어줘요. 뼈마디가 쑤신다니까요?" "그래? 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3년전부터 그런 증상이 있으셨 지." 이젠 날 신경통 환자로 몰아가신다. 난 포기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와 내가 사는 오두막 옆에는 아버지의 작업장이 바로 붙어있다. 작업장이라고 해봐야 오두막의 지붕을 길게 늘인 다음 기둥을 세워둔 정도지만. 나는 그 작업장의 물통에 머리를 쳐박았다. 어차피 윗옷은 벗 고 자니까 일어나서 그대로 머리만 물통에 박으면 세수다. "푸아!" 찬 물을 뒤집어쓰자 머릿 속에 끈적하게 굳어 있던 알콜 때문에 누군 가가 머리를 쾅쾅 때리듯이 아팠다. 나는 몇 번 발을 헛디디뎠다가 간 신히 중심을 잡고 가슴과 팔도 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 을 보며 측은하다는듯이 말했다. "잘 논다. 귀여워 미치겠구나. 걸음마를 다하고." "양초 주문량은 어제 다 만들었지요? 그럼 오늘은 일 없지요?" "없긴 왜 없냐, 이 자식아! 벌집 모으고 비계도 받아와야지!" "어? 더 만드실거에요?" "성에서 급한 주문이 나왔다.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사용될 양초야." 아무르타트 정벌군이라…. 그럼 이번이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인 가? 캇셀프라임이라는 그 수도에서 온 화이트 드래곤도 도착했으니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비된 것이다. 어차피 인 간들은 수백 명을 모아간다해도 아무르타트를 어떻게 할 수 없다. 회 색산맥의 공포이자 중부대로의 슬픔 아무르타트. 이 강대한 드래곤에게 인간의 만용을 부리려 들었다가는 뼛조각 하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 게 될 것이다. 깨끗이 태워지거나, 통째로 잡아먹힐테니까. 드래곤에게는 드래곤으로 맞서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주님의 간곡한 부탁과 정성(카알과 나의 추측이지만 틀림없이 많은 뇌물이 오 갔을 것이다. 불쌍한 우리 영주님. 돈도 별로 없으면서.)으로 마침내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황송스럽게도 수도의 캇셀프라임을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난 마당의 테이블에 아침식사를 차리면서 말했다. "아버지." "왜?" "캇셀프라임은 아무르타트를 이기겠지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많이 보았던 싸움, 그러니까 너와 제미 니가 싸우는 거라면 누가 이길지 짐작할 수 있지만." "나와 제미니가 싸우면 어떻게 되는데요?" "전적을 말해주랴? 넌 제미니 덕분에 다리가 두 번 부러지고 팔을 한 번, 그리고 콧등이 왕창 벗겨진 적도 있었고 물구덩이에 빠져서 감기에 걸린 것은 셀 수도 없다." 그래. 어렸을 때 난 제미니에게 그토록 심하게 당했었지. 난 제미니에 대한 해묵은 적개심이 맹렬히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아버지 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제미니에게 네 고추를 보여주다가 제미 니가 그거 가짜가 아니냐고 의심한 끝에 그것을 잡아당겨…" "아버지!" "따라서 난 눈물을 좍좍 흘리며 제미니의 아버지에게 널 사위로 받아 들여 달라고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음. 고얀 놈. 왠지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되지 않아?" 이로써 난 여자에게 순결을 빼앗긴 등신 같은 아들네미가 되었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간 무슨 가공할 과거사가 폭로될지 몰랐기에 나는 서둘 러 아침준비를 마쳤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는 턱수염에 묻은 술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양초는 오늘부터 네가 만들어라." "예?" "난 좀 바빠질 것 같구나. 집사님께도 이미 말씀드렸다. 품질이 좀 떨 어질진 모르겠지만 네가 만들거라고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이번에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자원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말이 나오려고 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 온 말은 극히 평범했다. "아버진 창도 못쓰시잖아요?" "그래서 오늘부터 연습할 생각이다. 정벌군의 훈련에도 참가하고." "가면 살아돌아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 걱정은 하지 않는다. 제미니가 널 보살펴 줄거야. 부디 제미니에게 사랑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냉정할 수가 없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아버진 가면 돌아가실 거예요. 개죽음이라고요!" "군대에서 작전을 짤 땐 전체에서 사망자 비율이 30% 이하가 될 수 있을 때 작전을 추진한다. 따라서 내가 죽을 확률도 30%란다." 갑자기 너무 엄청난게 거리감 느껴지는 변명을 들어서 나는 정신이 없 었다. "그건 작전일 뿐이잖아요? 아무르타트에게 도전했던 군대는 무조건 100% 죽었어요!" "글쎄. 이번엔 캇셀프라임도 있으니 훨씬 나을 거야."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아버지는 너무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뭔데요? 이유가 뭐에요? 왜 자원하신 거예요?" "아무르타트가 쓰러지는 것을 볼 권리가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나도 그 중에 들어가기 때문이지." "아버지가 그러시면 어머니가 기뻐할 것 같아요?" 처음으로 아버지의 표정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는 테이블 위의 술병을 들어올려서 빈 잔에 다시 채웠다. 술병을 기울 리는 아버지의 손끝이 흔들렸다. 난 숨을 푸푸 몰아쉬며 그 모습을 바 라보았다. 갑자기 아버지께서는 내 물잔을 비우시더니 거기에 술을 채 웠다. "어제 보니 자면서 술주정까지 제법 하더구나." 난 내 앞에 있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꼭 아버지의 죽음을 위해 바치는 술잔 같았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올리면서 말씀하셨다. "잡아라." 난 술잔을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버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난 죽으려 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네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난 살아서 돌아오겠다."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정말입니까?" "여자에게 그토록 당하는 너같은 반편이 아들을 두고 죽기엔 내…" "믿을께요." "그럼, 내 생환을 위해 건배해다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건배하고는 술 잔을 말끔히 비웠다. "아버지…" "왜 부르느냐?" "돌아가시면 안돼요." 아버지께서는 깊은 한숨을 쉬셨다. 난 아버지를 애타는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나도 내 아내의 목숨을 가져간 녀석에게 내 목숨까지 주고 싶은 마음 은 없다. 술주정뱅이 아들의 목숨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난 눈초리를 확 바꿨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표정을 잘못 이해하신 것이다. "그래요! 제가 갈께요!" "멍청아. 군대징집 하한선도 모르냐? 넌 17살이야." 아버지는 아주 간단한 말씀으로 내 입이 다물어지게 만들었다. "…그거 상한선은 없어요?" "있지만 내 나이는 아니다. 약오르지?"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5. 마을 대로에도 이상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아무르타트 정벌군 소식 때문이었다. 흥분, 걱정, 희망, 불안 그 모든 것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통째로 절구에 넣고 갈아버린 다음 마을 대로 에 뿌린 것 같았다. 속삭임, 웃음소리, 한숨소리, 고함소리. 평소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소리들이 어쩐지 오늘은 매우 이상하게 들려왔 다. 난 성으로 걸어갔다. 성에서 버리는 동물의 지방은 유지양초의 원료로 쓰인다. 그외에 생선 기름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난 구경도 못해봤지만 고래기름으로 만드 는 양초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지방으로 만드는 유지양초는 좀 저급품 이지만 평민들에게는 굉장히 값진 것이다. 따라서 평민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의미로 우리 영주님은 영주의 성에서 나오는 비계나 동물 지방 등을 양초로 만들게 한 다음 필요로 하는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 게 한다. 하지만 밤에 책을 읽거나 하는 시민은 그렇게 많지 않으므로 수요는 높지 않다. 그리고 벌집으로 만드는 보다 고급품인 파라핀 양초 는 성에서 사들이며, 그것으로 우리는 먹고 산다. 즉 성에서는 음식찌거 기로 시민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파라핀 양초를 사들임으로써 우리 가족 을 먹여살린다. 마음씨 좋은 우리 영주님. 이야기에 나오는 못된 영주들 은 초장이들에게 음식찌꺼기도 팔아먹는다고 하던데. 숙취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대로 땅만 보면서 걸었다. 그래서 자칫 마을 대로에서 모여선 사람들과 부딪힐 뻔 했다. 사람들은 마을대로를 완전히 막고 모여서 있었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조장의 미티가 보였다. "미티? 뭐야? 무슨 일이야?" "후치냐? 저기 성을 봐." 그러고보니 사람들의 눈은 전부 언덕 윗쪽의 영주의 성을 향해 있었 다. 나는 고개를 뽑아들고 성쪽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로 거대한 하얀 목이 보였다. "캇셀프라임?"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뭔가 넓고 큼직한 하얀 것이 올라오며 그 목을 가려버렸다. 나는 잠시 후 그것이 다시 내려갔을 때에야 그것이 캇셀프 라임의 날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날개는 다시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이윽고, 캇셀프라임은 둥실 떠올랐다. 거짓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커다란 덩치가 하늘을 날려면, 산꼭대기 같은 곳에서 산비탈로 마구 내달려야 간신히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런데 캇셀프라임은 마치 참 새나 된 것처럼 제자리에서 우아하게 날아 올랐다. 참새라고? 아니 해오라기 같았다. 그 우아한 날개의 움직임. 느리면서 도 가벼운 몸놀림. 가공할 힘이 있음에 틀림없을텐데도 한없이 부드럽 게 움직이는 목과 꼬리. 캇셀프라임은 이윽고 완전히 날아올라 성의 위, 하늘에 떠올랐다. 그것 은 천천히 날개를 저어 우리가 서 있던 쪽을 향해 날아왔다. 너무 빨랐다. 날개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그렇게 빠르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캇셀프라임의 거대한 날개라면 다른 조그만 새들이 수백번은 휘 저어야 될 거리를 한 번에 휘젖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캇셀 프라임은 날개를 몇 번 퍼득이지도 않고 벌써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캇셀프라임 만세!" "만세!"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팔을 뻗어올리며 소리높여 환호를 보내었다. 나 또한 그 광경에 감동해서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르고 팔을 내둘 렀던 모양이다. 카알이 내 어깨를 잡았을 때 급히 팔을 내리다가 카알 의 콧잔등을 찍어버릴 뻔 했으니까. "이크, 조심하게나. 네드발군." "아, 카알?" "흠. 과연 장관이구만." "예. 어, 그런데 캇셀프라임은 어딜 가는 거지요?" "글쎄올시다. 날아간 방향으로보아 회색산맥이군. 정찰이 아닐까 하는 데." "정찰? 정찰이라면 우습네요. 저건 누구 눈에나 뜨일테고 당연히 아무 르타트에게도 보일텐데." "지금은 그렇구만." "예?" "오, 네드발군.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라는 마법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비밀스러운 일이었던가?" "아! 마법!" 난 머리를 딱 쳤다. 물론 그게 어떤 원리인지야 나로선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인비지빌리 티는 물체를 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 생각을 떠올 리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변명할 말은 있다.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법사라고 는 딱 세 번밖에 보지 못했다. 제 6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때 1명, 그리 고 제 8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때 2명을 봤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법사 라는 것만 알았지 그들이 마법을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러니 나에겐 마법이란 신비한 것, 알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법에 대해 바로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나란히 걸 었다. "하긴 마법사라는 것이 워낙히 희귀한 것이니, 우리의 네드발군이 그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야 있겠는가." "그런데 누가 캇셀프라임에게 인비지빌리티를 써주지요?" "응? 그야 캇셀프라임이 직접 쓰는 것 아닌가." "드래곤이 마법도 써요?" 카알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가장 적절한 대응, 즉 뻔뻔 스러운 얼굴로 그것쯤 모른다고 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히기라도 하느냐 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이지." 나와 카알은 동시에 말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 아니 청년, 아니 노인인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는데다가 머리엔 얼굴이 다 가려질 정도로 후드를 내려쓰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검은 색의 능직 로브(Robe). 여행자들 중 말을 타지 않 는 사람이라면 선택해 볼만한 옷이다. 두껍고 펑퍼짐한 옷으로 밤에 잘 때 특히 좋다. 하지만 활동이 많을 경우엔 대단히 거추장스럽다. 이불을 둘러쓰고 달리는 셈이니까. 등에는 가방을 메고 오른손엔 지팡이(Staff) 를 세워들고 있었는데, 오른손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흘러내려서 팔에 가득한 문신이 잘 보였다.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몇 개의 선인지 짐작할 수도 없이 복잡한 선들이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글자인가? 무늬인가? 어떻게 보면 글자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무늬인 것 같았다. 남자는 후드를 천천히 걷어올렸다. 마치 그 동작의 완성을 위해 몇 년 은 좋이 연습을 한 것처럼 완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동작. 이윽고 드러난 목에서 볼에 이르기까지 문신이 보였다. 오른팔과 그 볼을 볼 때, 아무 래도 상체 전체에, 어쩌면 온몸에 문신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타난 눈. 없다. 하얗다. 마지막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하얀 백발. 검은 옷에 검은 문신으로 검정색 일변도에 하얀 눈과 하얀 머리 카락이 이색적이었다. 대단히 주눅들게 만드는 위압적인 모습의 장님 노인이었다. "저, 누구시죠?" 내겐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야 할 이유도, 그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 도 없지만 먼저 마음대로 말을 건 쪽은 저 문신 장님이다. 문신 장님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타이번." "타이번이라. 드래곤에 대해 잘 아세요?" "아니, 몰라." "…이것 보세요. 무턱대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면 두 사 람 모두에게 조언을 건넬만한 지혜와 연륜이 있어야 될 거 아녜요?" 나도 이 정도는 말할 줄 안다. 카알의 덕분이지만. 타이번이라는 그 문신 장님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빙긋 웃었다. "질문이 잘못 됐어." "예?" "난 드래곤보다는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마법사에요?" "이런, 자네도? 반갑네. 장님 동지." 척 보면 마법사인 것을 모르겠느냐는 고상한 비난이다. 하지만 난 마 법사가 온몸에 문신을 하고 검정색 로브를 입고 다녀야 된다는 말은 들 어본 적이 없다. "카알. 내가 장님이 아니라고 좀 말해주겠어요?" "그러지. 이 청년은 장님이 아닙니다. 다만 눈을 뜨고 있어도 별 볼 일 이 없다는 것 정도지요." "그럼 장님보다 더 고약하군." 카알과 타이번의 합동작전으로 난 단숨에 눈 뜬 장님이 되어버렸다. 카알은 내 콧방귀를 보며 피식 웃고는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근처에서는 못 뵙던 분이시군요. 전 카알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겠지. 난 여생을 마칠 자리를 찾고 있는 늙은 이야." "여생을?" "그렇다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떠돌아다니는 것도 지겹고, 정착해서 내 무덤자리나 정해서 풀베며 가꿀 생각이네. 그래서 부탁인데, 이 마을 은 어떤 마을인가?" "영주님은 헬턴트 자작이시고, 썩 괜찮으신 분입니다. 노인장께서 대륙 을 주유하셨다면 영주님께서는 노인장을 초청하여 심원한 지혜, 혹은 머나먼 지방의 재미있는 풍습을 들으시겠지요. 하지만 시기가 안좋군 요."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들어오자마자 술렁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더군. 난 그대 로 떠나버릴까도 생각했다네. 하지만 이 나이가 되면 섣부른 판단은 피 하게 되지. 자네가 괜찮다면 주점에 좀 안내해주겠나? 난 자네 둘에게 술을, 자네 둘은 내게 조언을 줄 수 있겠지." 타이번은 위압적인 겉모습에 비해 온화한 사람인가보다. 우선 이치를 알고 예절있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게다가 자네 둘이라고 했으니 거기 엔 나도 포함되며, 난 백번 찬성이다. 카알은 날 바라보았지만 '혹시 바 쁘지 않은가?' 등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걸어 갔다. 마을의 광장에 있는 펍(Pub) '산트렐라의 노래'에 도착하는 동안 타이 번은 날 놀라게했다. 대로에는 강아지들과, 정열이라는 면에서는 강아 지와 결코 차이점을 찾을 수 없는 개구쟁이들, 그리고 가축과 마차 때 문에 생긴 흙구덩이와 진흙탕이 가득했지만 타이번은 마치 눈을 뜬 것 처럼 여유있게 걸어갔다. 롱부츠를 신고 있어서 무턱대고 걸어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타이번은 그냥 자연스럽게 그 런 것들을 피해가며 걸어갔다. 지팡이 쓰는 손이 정말 민감한 모양이군. 롱부츠? 그러고보니 고급품이다. 난 내 나막신에 들어오는 모래들을 느끼며 타이번의 롱부츠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우리는 '산트렐라 의 노래'에 도착했다. 펍 안에는 조금전 캇셀프라임의 비행을 구경하던 축들이 한 잔 하러 들어와 있었다. 요란한 소리. 그들은 서로 캇셀프라임이 1분에 날개를 몇 번 휘젓는가에 대해 대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현재 6번일거라는 주 장이 우세한 것 같았다. 그거야 그저 계산하기 편하게 10초에 한번씩이 라고 생각하는 것일테고, 캇셀프라임의 날개짓은 자기 마음대로일 것이 다. 카알은 친절하게 타이번을 의자에 앉혔다. 주점의 주인인 해너 아주머 니는 날 멀건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너, 숲속에서 몰래 술 마시고 취한채 계곡을 달리는 버릇이 있다더니 이젠 아주 당당하게 술집에 들어오는구나?" 어떻게 어제 처음 일어난 일이 내 버릇씩이나 되어 있는 것일까? 난 내 동료 두 사람을 턱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분들 따라온 거예요" "어련하겠냐. 두 분은 맥주고 넌 우유겠지?" "맥주 세 잔!" "아니, 한 잔은 와인이야. 뮤러카인 사보네 있는가?" 늙은 마법사 타이번의 말이었다. 주점 아주머니의 얼굴이 확 변했다. 그게 뭔데? 주점 아주머니는 놀란 눈으로 타이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있긴 있는데, 아, 저…" 타이번은 빙그레 웃고는 팔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빼서 동전을 튕 겼다. 주점 안에 스며들어오는 오전의 낮은 햇살을 되튕기며 허공을 날아가 는 것은 반짝반짝하는 금화였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감을 뻔 했다. 그 번쩍이는 빛에 캇셀프라임의 날개짓의 회수를 토론하던 축들도 놀라 서 바라보았다. 해너 아주머니는 황송스러운데다가 그것을 잡아낼 자신 이 없자 아예 치마로 받아내었다. 해너 아주머니의 떨리는 손이 치마폭 에서 두툼한 금화를 집어내었다. 해너 아주머니는 당황해서 말했다. "저, 선생님. 잘못 던지신 것 아닌가요?" "음? 모자란가? 이런, 100셀짜리 아닌가? 늙긴 늙었나보군. 손이 무뎌 졌어." 타이번은 다시 품을 뒤지려 들었고 해너 아주머니는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 맞습니다." "그래? 허허. 내 손은 그대로군. 다행이야. 자네들도 주문하게." 카알은 그냥 맥주를 주문했지만 난 17세였다. "무카라사네보!" 해너 아주머니는 내 뒷통수를 쥐어박았다. "뮤러카인 사보네야, 이 멍청한 녀석아." "…맥주." 해너 아주머니는 머리를 절절 흔들면서 바로 걸어갔다. "아이고, 큰 일이다. 7년만에 한 병이 작살나는구나. 이제 겨우 두 병 남았어." 이리하여 맥주 두 잔과 그… 포기하자. 어쨌든 괴상망측한 와인이 테 이블 위에 놓여졌다. 해너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사위 보면 주려고 했던 건데, 손자 보면 주려고 했던건데, 하면서 아쉬워했지만 그러면서도 창 가로 다가가 감탄하는 눈으로 그 100셀짜리 금화를 햇빛에 비쳐보았다. 주점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재빨리 해너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그 금화 를 함께 구경하며 감탄했다. "주점의 분위기는 썩 좋군." "훌륭한 척도가 되지요." "음. 좋은 마을이야. 영주의 인망이 괜찮군." "됨됨이가 약하다는게 정확할 겁니다." "나쁘지 않아. 그런데 캇셀프라임은?" "아무르타트 때문입니다." "중부대로 어딘가에 아무르타트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마을이 있다 는 말을 들었지." "여깁니다." "참, 거, 고약하군. 이런 아름다운 마을에 그런 고통이 있다니." "전후관계가 바뀌었습니다. 아무르타트가 있어 우리 마을이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 카알과 타이번은 나로서는 도저히이해못할 괴상한 문답을 주고받았 다. 그래서 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카알의 마지막 말에는 도저히 참 을 수 없었다. 난 흥분하여 무례하게 끼어들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카알은 대답했다. "우리 마을은 강력하지만 조용한 마을이지. 네드발군. 대륙 어디를 돌 아보아도 우리 마을같은 곳은 없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대도시에서 보 이는 소란스러움과 복잡한 인간관계는 없지. 모두 아무르타트 때문에 괴로와하지만, 그래서 사람들끼리는 참으로 살갑게 살아가는 마을이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카알과 자주 나누던 말 중에 하나다. "그건 전에도 들었어요." "그렇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생활이 고통스러워서 강하게 단련되었지 만 그만큼 다정하다네. 여기에서는 일개 병사도 오크(Orc) 대여섯 마리 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야. 자네 친구 샌슨 퍼시발, 난 그 청년 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청년이라면 어쩌면 오우거(Ogre)도 상대할 수 있을걸? 그런데도 여기서는 순박한 시골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지. 만일 수도같은 대도시라면 퍼시발군은 예전에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휘말려들어가 기사단 대장쯤 노리며 출세지향형 인간이 되었겠 지." 그 말에는 찬성이다.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정말 샌슨은 기 사단의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보검을 허리에 차고 어전에 서 있어도… 안어울리겠다. 쳇. 샌슨은 역시 물레방앗간에 숨어서 그 처녀나 초조하 게 기다리고 있어야 어울리겠다. "그래서?" "별 말은 아니야. 우리 마을은 모두가 강한 사람들이지만, 따스한 마을 이고, 조용한 마을이지. 우리는 아무르타트와 일종의 균형을 이루는 셈 이지. 하지만 이제 캇셀프라임이 왔다네." "캇셀프라임은…"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를 물리치면, 우리 마을은 원래 좋은 위치 때문에 크게 번영할 거라네. 우리 마을이 중부대로에서는 꽤 발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잘 알테지? 뮤러카인 사보네까지 구경할 수 있는 도시 아니겠는가." "그게 그렇게 희귀한 술이에요?" "뭐, 제법 희귀하지. 전하께서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술이니까." 난 입을 쫙 벌렸다. 아니, 임금님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술을 주문 하다니, 저 타이번은 도대체 뭐하던 작자야? 카알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쨌든 아무르타트가 없어지면,우리 마을은 지금 현재의 모습대로 있을 수는 없다네. 번영하게 되겠지." "좋은 일이잖아요?" "음. 하지만 우리 마을이 번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예?" "우리 마을을 노리는 자가 많아지겠지. 사람들은 이권과 경쟁을 배우 겠지. 사실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 좋은 분이지만, 우리 마을을 탐내는 무리들이 생기면 과연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지금이야 누가 아무 르타트의 앞마당 같은 이 마을을 노리겠는가. 그러니 우리 영주님처럼 소심한 분도 자리를 지키시는거지." 간신히, 아주 간신히 이해했다.그 이해를 위해 맥주 한 잔이 완전히 소모되었다. 카알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을이 이토록 좋은 위치와 비옥한 토지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는, 그래서 조용하고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마을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따지고보면 아무르타 트 덕분이라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6. "웃기는 소리!" 난 탁자를 꽝 내리쳤다. 카알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타이번만이 놀라 서 보이지도 않는 눈을 희번득거렸다. "그러면 아무르타트, 그 개자식한테 감사라도 할까요? 우리 마을이 낙 원처럼 아름다운 것이 모두 아무르타트 때문이라고? 아무르타트 때문에 더더욱 생존욕구가 부채질되어 모두가 근면성실한 사람들이 되어서 고 맙다고 할까요? 녀석 때문에 득시글거리는 몬스터들이 심심하면 마을에 서 약한 사람들을 죽여버리니까 점점 강한 사람만 남게 해줘서 고맙다 고 할까요?" 나는 아무래도 12시간 내에 연속으로 술을 마셔선 안되는 타입인가 보 다. 어제 이후로 반나절이 지났지만 당장 취기가 짜릿하게 올랐다. "그 자식 때문에 중부대로의 관문인 우리 마을이 발전도 되지 않고 목 가적인 마을인채로 있다고 고마워 하라고요? 혹시 타이번이 그렇게 말 하면 이해해요. 하지만! 하지만 카알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카알은 항상 봤잖아요? 한 달에 한 두명씩은 꼬박꼬박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봤 고, 그 가족들이 우는 것을 봤잖아요!" 주점의 다른 사람들, 즉 해너 아주머니와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카알만을 바라 보았다. 카알은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드발군." 그리고 카알은 맥주를 삼키고는 말했다. "자네 말이 다 옳아요." 그 때 타이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봐. 후치라고 했던가? 내가 보기에 이 옆의 카알은 너무 이른 나이 에 인간에게 실망해버렸어. 그러니 아직 인간을 사랑하는 나이인 자네 가 보기엔 이해할 수도 없는 말도 하는 것이고." "집어치워요! 당신이 뭘 안다고, 오늘 처음 만났잖아?" "그러나 이런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니까." 그 때 카알이 말했다. "타이번. 그만 하십시오. 네드발군. 내 잘못일세. 용서해주게." 카알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취해서 한 말이라네. 잊어요, 네드발군." 난 씩씩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드발군?" 카알이 불렀지만 난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나가 버렸다. 제기랄, 펍을 빠져나오자 오전의 햇살이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왔다. 미칠 것 같은 햇살이었다. "가아악, 퇘!" 성에서 음식찌꺼기를 받아나오는 길에 나는 성 뒷문에다 침을 뱉었다. 영주 저택의 집사 하멜은 쪼그만게 술냄새 풀풀 풍기면서 성에 들어오 다니 간덩이가 붓지 않았느냐고 내 건강상태에 대해 걱정했다. 정강이 를 걷어차고 머리를 쥐어박는 것도 걱정하는 태도라면 그럴 수도 있겠 지만. 내가 이용하는 것은 정문이 아니라서 아무 걱정이 없다. 공식적인 손 님들은 모두 정문을 이용할 뿐 이 뒷문은 영주의 저택에 물건을 납품하 는 나같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비병도 없 고 따라서 내가 침을 뱉든 어쩌든… "이 자식, 이 무슨 무례한!" 다시 뒷통수에 불이 번쩍했다. 맞은데 또 맞다니, 하지만 성에서는 내 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만 무의식중에…" "음, 잘못을 뉘우치느냐?" 잠깐. 이 목소리는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았고, 히죽히죽 바보처럼 웃고 있는 샌슨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샌슨! 이런, 간 떨어질뻔 했잖아!" "그러게 왜 놀랄 짓을 해, 임마. 뭐야? 고기 받아가는거야?" "고기는 무슨. 비계덩어리지. 그런데 경비대장이 뒷문에서 뭐하는거 지?" "아, 어젯밤에 술김에 여길 들어오다가 뭘 흘려서…" 샌슨은 마음 턱 놓고 말하다가 문득 자신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나라 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다. 샌슨의 얼굴이 굳어버렸고 난 그것을 놓치 지 않았다. "뭘 흘려서? 그런데 혼자서 살짝 찾으러 왔다는 것은…." "그, 그거야 경비 임무를 비워둘 순 없잖아?" "아니지, 아니지. 비번들이 있을텐데. 부탁하면 얼마든지 도와줄텐데. 즉, 그것은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되는 물건일 수도 있겠고…." "무, 무, 무슨 상상을 하는거야?" "으응? 어랏, 흥분하는데? 즉, 그것은 비밀스러운 것이며 흘릴 정도로 작은 물건. 흠. 하지만 꼭 되찾아야 되는 물건. 그것은…" 샌슨은 눈이 동그래졌지만 설마 네까짓게 보지도 못한 물건을 어떻게 정확하게 말하랴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주 먹음직스 러운 음식을 앞에 둔 표정으로 말했다. "반지군?" 샌슨은 기절할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너, 어, 어떻게…?" "그 아가씨의 손에서 반지가 없어진 걸 봤거든. 그 아가씨는 반지를 누구에게 줬을까? 뭐, 그 아가씨라고 말하는 것도 귀찮군. 그 아가씨의 이름은…" 턱! 샌슨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제발… 부탁이야." 샌슨의 표정은 가관이었고 난 그만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뭐? 오우거 를 상대할만한 전사라고? 잠시 후, 나와 샌슨은 같이 성의 뒷문 근처의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날씨는 가을이라 귀뚜라미들이 펄쩍 뛰는 일이 많았다. 샌슨은 풀밭을 뒤지면서도 몇 번이나 내게 아무에게 말하지 말 것을 맹세하라고 재촉 했고, 난 17세라서 맹세는 못한다고 잡아뗐다. 맹세는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 성년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약속해!" "약속이라. 그것 곤란한데. 내 입은 때론 나도 주체하지 못해서." 진실을 애기하고 싶어하는 내 입과는 달리 샌슨은 갖은 욕설이 터져나 오는 입을 가지고 있었다. 흠, 그러고보면 난 얼마나 고상한가. 잠시후 나는 조그만 구리반지를 찾아내었다. "샌슨, 찾았어!" 샌슨은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난 건네주며 말했다. "작아서 손가락엔 못끼겠군. 또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실에 꿰어 목에 걸어." "아, 그랬는데 끊어졌던거야. 이번엔 쇠사슬이라도 준비해야겠어." 샌슨은 날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시선은 모조리 그 구리반지에 쏠려 있 었고 혹시나 그것이 어디 상하지나 않았나 살피듯이 이리 돌려보고 저 리 뒤집어보고 쓰다듬어보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만 옆에 없다면 입 안 에 넣어 맛이라도 볼 듯한 태세다. 정말 닭살 돋아 못봐주겠다. 우리 둘은 잠시 땀을 식히기 위해 나무 아래에 앉았다. 샌슨은 그 때 까지도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번에 돌아오면 정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결혼식을 올릴거야." "돌아오면이라니?" "그야 아무르타트 정벌에서 돌아오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샌슨도 가? 샌슨은 성의 경비대잖아." "성의 경비대라기보다는 헬턴트 영주님의 경비대지. 성을 지키는 것은 곧 영주님을 지키는 것이잖아." "아, 그야 그렇긴 한데…." "이번엔 우리 영주님도 출진하신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정벌군에 자원했다는 것보다 더 웃긴다. 난 기가 막혀서 말했다. "영주님이? 말타는 법은 안잊어먹었어?" "응? 어떻게 알았냐? 그래서 전차로 나가시는데." 난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전차라니? 내 상상력으로는 전차같은 것은 저기 남쪽의 자이펀과의 국경에나 있어야 어울리지 우리 성에 그런 것 이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우리 성에 전차가 있었어?" "응. 영주님 명령으로 우리 아버지가 만드셨어. 짐수레를 개조해서." 난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짐수레도, 개조전차도 아니라 장의마차일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힌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순 간이었다. "영주님이 가서 뭐하신다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영주님, 전차에서 굴 러떨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일텐데 설마 포챠드(Fauchard)라도 휘두르시 겠어?" 샌슨도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죄송스럽지만 나도 별로 그러실 수 있을거라고 믿어지지는 않는 다." "그럼 왜 나가시는 건데?" "글쎄. 이번엔 수도에서도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가 왔잖아? 그런데 영 주가 안나갈 수는 없겠지." "그럼 할 수 없이 나가는 것이군?" "할 수 없어서…는 아니지. 이번엔 하멜 집사도 말릴 수 없다는거지." "응?" "제 6 차 정벌군 이후로 영주님은 계속 출진하시고 싶어했어. 하지만 그 동안은 하멜 집사가 계속 못 가도록 막아왔거든? 하지만 이번엔 수 도에서도 귀빈들이 왔으니까 하멜 집사도 막을 수 없지." 제 6 차 정벌군…. 아. 영주님의 외동아들인 젊은 영주님이 전사했을 때다. 기억이 난다. 젊은 영주 헬턴트 남작. 우리야 귀족의 이름엔 관심없고 우리 마을에 귀족이라고는 영주이신 헬턴트 자작 이외엔 없으니 헷갈릴 것도 없었다. 하지만 헬턴트 자작의 아들인 알반스 헬턴트가 수도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자이펀과의 전투에서 뭔가 공을 세운 다음, 헬턴 트 남작이 되어 우리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영지를 얻어 돌아왔을 때는 우리들도 좀 헷갈렸다. 그래서 우린 처음엔 헬턴트 자작, 헬턴트 남작, 이렇게 부르다가 그냥 귀찮아서 입에 익은대로 우리 영주님, 그리 고 젊은 영주님이라고 불렀다. 젊은 영주님도 그걸 좋아했던 것으로 기 억난다. 그러나 젊은 영주님은 자기 영지를 오래 다스리지는 못했다. 자기 아 버지의 영지를 괴롭히는 아무르라트에 대한 증오는 젊은 헬턴트 남작이 태어났을 때부터 키워왔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헬턴트 자작의 만류 에도 불구하고 6 차 정벌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삼주일 후, 비오는 마을 대로에서 젊은 영주님의 투구를 끌어 안고 통곡을 하던 젊은 영주님의 어머니 영주마님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 때 사정도 모르고 영주마님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었기에 덩달 아 울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영주마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전혀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는 것이다. 난 그 때를 떠올리며 낮게 말했다. "하긴… 젊은 영주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 영주님은 살아도 곧 그 곳이 지옥. 차마 아침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뜨며 아드님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고, 밤마다 감아지지 않는 눈을 감으며 아드님이 죽 는 악몽 속에 잠드셨겠지." 샌슨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야, 혹시머리에 열이 난다든가, 맥박이 좀 이상하다든가…." "됐어요, 됐어. 몰래 연애할 시간이 있으면 책 좀 읽어!" 이건 언젠가 카알이 나에게 했던 말을 좀 바꾼 것이다. 하지만 샌슨은 싱긋 웃을 뿐이다. "그럼, 돌아오면 축복 속에 결혼식?" "응. 축하해 줄거지? 너도 정식으로 초대할께." 혹시 살아서 못돌아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난 17세였다. 하지만 그런 나로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 다. 게다가 그렇게 질문해봤자 무슨 좋은 대답을 들을 것인가. 그 스스 로도 그런 생각, 엄청나게 떠올려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난 그 말을 꺼 내는 대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정답게 말했다. "정말… 정말 그 아가씨 불쌍해. 어디서 이런 오우거 같은 남자를… 오호, 물레방앗간이 웬수로다." "뭐야, 이 자식아!" "아니, 누구를 원망하랴. 그 밤에 물레방앗간으로 나오라는 말에 왜 아 무런 경계심 없이 나갔더냐. 그 날 이전까지 청년은 처녀의 것이었지만, 그 날 이후로는 처녀는 청년의 것 되었도다. 달빛도 붉게 물들일 청년 의 애타는 고백이여. 청년은 거부의 말도 못하도록 처녀의 입술에 감미 로운 자물쇠를 채웠으니, 아아, 애닯도다. 애처롭다. 그 입술을 도둑맞 음으로써 처녀의 자유는 이미 잃었으니, 새장에 갇힌 새요, 고삐채운 야 생마…" "임마! 후치! 서! 안 때릴테니까 서! 너 잡히면 죽어!" 샌슨은 눈물을 쫙쫙 뽑으며 경비대장의 임무도 망각한채 앞뒤 안맞는 말을 하며 날 추적했고 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마을대로를 달려갔다. 마을사람들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샌슨은 곳곳에서 이상하게 발이 걸 리고 요상하게 부딪혀서 나는 여유있게 노래를 할 수 있었고 마침내 마 을사람들의 열렬한 호응과 기대 속에 처녀의 이름이 공개될 뻔 했으나 … 불쌍해서 관뒀다. 다음에 또 써먹으려면 아껴둬야지.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7. 음식찌꺼기가 든 나무통을 둘러맨채 나는 숲속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 다. 휘파람이라도 불고싶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고, 샌슨이 쥐어박은 정 수리의 통증도 가실듯이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기름 비린내 때 문에 그 모든 것을 망치고 있었다. 난 그저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 때 오솔길 옆 나무 뒤에서 제미니가 팔짝 뛰어나왔다. "안녕!" 제미니는 두 손을 뒤로 돌린 채 나타났다.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는 것 이다. "꽤 맞았냐?" 제미니 어머니의 손바닥에 맞을 바에는 왠만한 남자의 주먹을 맞는 것 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17년 동안 단련된 제미니는 까딱없는 모양이다. "으응. 그런데 왠 기름통이야? 어제 일 끝났다고 했잖아." "주문이 더 들어왔어.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사용될 양초야." "그래? 얼마나 더 만들어야 되는데?" "그건 나도 몰라. 수도에서 온 기사들과 정벌군 지휘관들이 작전을 세 워야 소모량이 정해지는 거지.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별로 많이 쓰이지 는 않을 것 같아." "왜에?" 제미니는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야 기사들도 별로 없고 작전도 별로 없을테니까. 다른 때는 사람들 이 많아서 양초도 많이 필요했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아. 이번 싸움은 결국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임의 대결이야. 그러니 기사들이 밤을 세워 가며 작전을 짤 까닭은 없고… 10일 거리니까 오가는데 소모될 양을 다 따져봐도 100개 정도 되겠지." "흠. 그렇겠네." 제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어제 드래곤 라자 말이야, 싸움이 시작되면 그 아이가 캇셀프 라임에 타는거야?" "응? 왜? 타지 않아." "어? 캇셀프라임을 타고 지휘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 꼬마가 무슨 싸움을 안다고. 네가 말하는 건 드래곤 나이트야. 드 래곤의 허락으로 드래곤을 타게 되는 기사. 드래곤 라자는… 그러니까 드래곤과 인간의 매개물 정도지. 드래곤이 인간의 명령을 듣게 되는 계 약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물." 나는 장엄하게 설명했지만 제미니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고 골이야. 야이 계집애야! 그러니까 말이야, 네가 사는 곳은 어 디야? 영주의 숲이지?" "응." "그런데 영주의 숲지기는 영주님 자신이지? 그러니까 실제로 이 숲에 서 나무를 자르고, 과일을 따고, 버섯을 캐고, 사냥을 할 권리는 모두 영주님에게 있잖아." "어… 그렇지." "하지만 사실 숲지기는 네 아빠지. 알겠어? 이 숲에서 나무를 자르고 버섯을 캐려면 영주님께 허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네 아버지에게 허락 을 받아야 되잖아." 제미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알겠어? 드래곤 라자도 드래곤의 주인이지만 실제로 드래곤에게 뭘 부탁하려면 드래곤 라자에게 할 필요 없어. 드래곤에게 직접 부탁해야 돼. 캇셀프라임도 마찬가지야. 아무르타트를 무찔러주면 좋겠다고 인간 들이 말했고, 캇셀프라임은 그 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으니까 가서 싸 우는 거야." 제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는듯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응, 저,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캇셀프라임에게 날 태워주세요. 그러 면 캇셀프라임이 좋을 경우 날 태워주는 거야? 그러니까 드래곤 라자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어라? 정확해. 제법이군. 그러니까 이런거야. 드래곤과 인간이 직접 의사를 나누는거지. 드래곤 라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 하지만 드래 곤 라자가 없는 드래곤은 인간과 아예 아무런 의사도 나누지 않고 보는 족족 죽여버리려고만 하지." "아무르타트처럼?" "그래… 그 빌어먹을 새끼처럼!" 나는 돌멩이를 걷어차버렸다. 얄밉게도 돌멩이는 나무에 부딪혀 다시 내 발 앞으로 돌아왔고, 난 그걸 더 힘껏 걷어찼다. 돌멩이는 풀숲 속으 로 사라졌다. "화내지마." "제길, 난 그 이름이 싫어!" 제미니는 날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고 난 외면해버렸다. 그러자 제미니 도 시선을 돌려버렸다.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조금 걸었다. 갑자기제미 니가 말했다. "정말 그래볼까?" "응?" "캇셀프라임에게 날 태워달라고 부탁해볼까?" 내 분노는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이고, 그랑엘베르여! "…물론 캇셀프라임은 널 태워줄거야." "정말?" "응. 그리고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는 널 얌얌 씹어서 꿀꺽 삼키고는 시치미 뚝 떼고 내려오겠지. 아마 트림도 안할거야. 너 정도론 배가 별 로 부르지…" "후치! 끔찍한 말 자꾸 할래?" 제미니는 내 발을 콱 밟고는 달려가버렸다. 망할 계집애. 메고 있는 기 름통 때문에 달려가지 못해서 난 고함만 좀 질러주었다. 제미니는 멀리 서 나에게 감자를 먹였다. 망할, 망할, 망할! 저 예쁜 것! 응? 어라, 내가 미쳤나? 양초를 고으기 시작했다. 미리 잘 다듬은 동물지방을 물 속에 넣고 은근한 불에 끓인다. 잠시 후 물 위로 기름이 떠오르면 그것만 살짝 떠낸다. 이것은 꽤 덥고 냄새 도 고약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힘든 작업이다. 이렇게 기름만 걸러모 은 다음, 여기에 왁스 등의 고형제를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이걸 미리 가운데 심지를 묶어 둔 틀에 붓는다. 심지는 보통 갈대를 사용한다. 실 을 꼬아서 심지로 쓰면 불꽃이 곱지만 실은 비싸다. 그래서 갈대를 기 름에 적셨다가 잘 말려서 심지로 쓴다. 갈대 심지는 불꽃이 탁탁 튀고 광도도 약하지만, 재료가 공짜니까. 그리곤 응달에서 적당히 말린다. 그리고 틀을 떼어내면 양초가 완성된 다.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지만 직접 해보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름의 녹은 정도를 살피는 것이라든지, 고형제의 양을 정하는 것, 갈대 심지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기름을 붓는 것, 모두 손끝의 기술이 필요하다. 재수 없어서 심지를 끊어먹기라 도 하면 양초 한개분의 재료를 다 버려야 된다. 한 번에, 정확히 붓는 이 기술은 나도 익히는데 꽤 세월이 걸렸다. 그런 중요한 모든 업무가 전부 내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난 탁 트인 작업장 가운데 앉아 냄비의 기름을 부으며 아버지를 감상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좀 지시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아예 작업장 근처에도 안오신다. 어디서 나무작대기 하나 깍아와서는 마당에서 휘두르고 계신 다. 아마 창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기에 이름이나 붙이지 않았 다면 다행이겠다. 다 큰 어른이 나무작대기를 휘두르면서 아주 진지하 게 야! 하앗! 얍! 따위의 기합을 지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내 아버 지라 해도 정말 못봐드리겠다. "아버지." "다 했느냐?" "예. 틀은 다 채웠어요." 우리 집에는 양초틀이 모두 40개 정도 된다. 따라서 100개를 만드려면 세 번에 걸친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아무도 100개를 만들면 된다고 하 진 않았지만 내 예상으론 그 정도 될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 그 40개 의 양초틀을 다 채우고는 정확하게 냄비를 비웠다. 남는 건 무조건 버 려야 되는 것이니(두 번 끓이면 못쓴다.) 난 아주 정확하게 눈대중으로 재료를 맞췄던 것이다. 아버지도 그걸 보셨다. 내가 냄비를 들어올려 보였으니까.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다." "…감사합니다." 난 양초틀을 응달로 옮기고 냄비를 씻고 재료를 갈무리했다. 그 동안 에도 아버님은 계속해서 으랏차차! 어기여차! 으│으│! 어쩔씨구! 등의 창술과는 무관할듯한 기합을 동원하며 나무작대기를 휘두르고 계셨다. "보고 있기가 괴로워요." "겸허하게 존경해라. 질투는 곤란해." "제가 대무(對武)해 드릴까요?" "드디어 골육상쟁이로구나. 작대기 하나 준비해 오너라." 난 작업장 한켠의 막대기를 고르다가 아버지께서 들고 있는 것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는 월등히 길고 묵직한 놈으로 골랐다. 아버지의 눈썹이 올라갔다. "허허허.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 법." 난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른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 커다란 걸 집 어들었다. "…망할 놈." 난 그걸 머리 위로 들어올려 붕붕 돌렸다. 샌슨이나 그 부하들이 가끔 이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동작에 나만의 고유한 동작 을 끼워넣었다. 샌슨은 마지막에 창을 내려 허리 높이에 들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고 헐레벌떡 주으려고 달려갔으니까. 어쨌든 간신히 아버지와 나는 마당에서 나무 작대기를 든 채 노려보고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보기엔 도대체 들고있는 자세부터가 엉 성했다. 무슨 칼을 드는 것도 아닌데 가슴 앞에 세워들고 다리는 각각 제멋대로 가 있다. 이래서야 찌르면 피하지도 못하시겠다. "다리를 좀 좁혀 어깨넓이로 하세요." "작전이냐?" "…순수한 조언이예요." 아버지는 순순히 다리를 좁히셨다. 난 자세를 취해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창은 이렇게 드시고요. 무슨 도끼질 하세요? 넓고 헐겁게 잡 으세요." 역시 아버지는 내 말대로 하셨다. 그리곤 우리 둘은 약 30분에 걸쳐 정말 눈뜨고 못봐줄 광경을 연출했다. 난 내가 이런 놈인 줄은 몰랐다. 난 막대기를 뻗다가도 움찔해서 도로 물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네미를 개패듯이 두드리셨 다. 뭐, 피하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가만히 서 있 어도 엉뚱한 곳을 찌를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내가 피하려다가 아버지 의 막대기를 찾아가서 맞는 일이 잦았다. "흠, 더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보이세요?" "전혀. 일어나거라." 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 버지의 어깨에 기대어 오두막 앞의 테이블까지 걸어갔고 아버지는 몸소 물병을 가져오셨다. 주위는 온통 붉었고 아버지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따스해보였다. 난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말했다. "아버지. 정말 이래가지고 돌아오시겠어요?"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다. 지휘관이 내 솜씨에 반해서 그대로 수도 에 끌고가 임금님께 알현이라도 시키겠다면 어떻게 하지?" "…." 아버지는 내 머리를 헤집으면서 웃으셨다. "걱정마라. 나아지겠지. 앞으로 8일 남았으니." "8일 후가 출전이예요?" "응. 오늘 성에서 그렇게 들었다. 내일부터는 성의 훈련에도 참가할테 고." "고작 1주일 훈련해서…." "뭐, 작전지휘관들은 우리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어차 피 싸움은 거의 캇셀프라임이 맡게 될테니까." "캇셀프라임 뒤에 꼭 숨어 있으시고 혹시나 돌격! 어쩌고 하면 그대로 으악! 적의 화살에 맞아버렸나봐! 하고 쓰러져 버리세요." "…아무르타트가 활도 쏘느냐? 지휘관에게 그걸 알려줘야겠구나." "지휘관은 누군데요?" "드래곤 라자를 호위해온 수도의 기사다. 기사 휴리첼. 백작이라던데." "백작이면 우리 영주님보다 높네요? 그런데 백작쯤 되는 사람이 끌고 온 병사가 고작 그거예요?" "글쎄. 캇셀프라임을 가리켜 고작 그거라고 말하느냐?" "하긴 그렇군요." 난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 서쪽은 아무 르타트가 있는 곳이다. 갑자기 난 그 붉은 석양이 아무르타트가 토하는 불꽃처럼 느껴졌고, 그 따스한 붉은 빛 속에서 어처구니없게도 한기를 느꼈다. 난 몸을 부르르 떤 다음,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져 잠들어버렸 다. 대무가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다. 타오르는 붉은 불꽃. 집을 태우고, 마을을 태우고, 하늘과 땅을 태우고 있다. 보이는 건 불 꽃뿐이다. 어머니가 불타고 있다. 불의 신발, 불의 옷, 불의 머리카락. 팔에는 불의 팔찌가 타오른다. 어머니의 표정은 평온하여, 그 광경은 아름다와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난 어머니가 참 따스해보였다. 그 품에 안기면 저 불이 날 따스하게 해 줄 것 같다. 어머니께 달려간다. 어머니는 두 팔을 벌리신다. 어서 오렴, 어서 오렴. 어머니의 두 팔이 활짝 펼쳐진다. 어서 오렴. 계속 펼쳐진다. 어서 오 렴. 마침내 다 펼쳐진 그것은 검은 날개. 어머니의 어깨 위에, 엉뚱한 머리가 있다. 검고 번쩍이는 피부. 그래서 주위의 불꽃을 일그러진 모습으로 반사한다. 앞으로 휘우듬하게 돋은 뿔, 그대로 달려가면 저기에 찔려버리겠지. 그 머리는 입을 벌린다. 그 안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동굴, 절대, 암흑, 영원, 무한. 난 왜 계속 달려가고 있을까. "멍청아! 어딜 달려가는 거야!" 아버지에 의해 간신히 나는 벽난로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 다. 조금만 더 달려갔다간 그대로 머릿가죽을 홀랑 태워먹을 뻔 했다. "꿈꿨냐?" 그러고보니 난 모포에 둘둘 말린채 오두막 바닥에 있었고 아버지는 침 대에 걸터앉아 뭔가를 쓰고 계셨다. 아버지는 쓰고 계시던 것을 장 위 에 올려놓으시고는 나에게 다가와 이마를 짚으셨다. 그리곤 머리를 갸 우뚱하셨다. 내 이마엔 땀이 흠벅 돋아나 있었고 난 그 때까지도 멍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내 눈을 뒤집어보시기까지 하셨는데도 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버지는 결국 주먹을 불끈 쥐고 뒤로 당기 셨다. "거기서 멈추시죠." "다행이구나. 저녁도 먹지않고 자서 그런게냐? 하긴 네 나이에 그건 예삿일이 아니지. 저기 테이블 위에 빵 있으니 먹어라." 난 일어섰지만 빵을 먹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대로 오두막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땀 좀 식힐께요." "그래라." 모포 속에 있다가 밖에 나오니 무시무시하게 추웠다. 팔에 소름이 돋 을 정도였다. 하지만 땀을 흘린 이후라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내일 감기 로 쓰러지든말든, 난 작업장의 물통에 다가갔다. 물통에 머리를 박으려 는 순간, 나는 움찔했다. 물통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물이 들어있는 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머리를 갖다박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 리를 집어넣기만 하면 그대로 온 몸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난 치를 떨며 물통에서 물러나 오두막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엄마…." 어머니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겐 어머니라 부를 시기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오랜 기억이 시키는대로 그렇게 나왔다. 풋. 이게 무슨 감상어린 사춘기 꼬마의 말투냐. 그런데 왜 볼이 축축해지는거지?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8. 휘파람. 휘파람. 하멜 집사를 만나러 성에 가는 길이다. 양초는 이미 100개를 만들어두 었지만, 그건 내 예상이며 실제로 얼마나 쓰일지 알 수가 없다. 무조건 더 만들 수는 없었고, 그래서 하멜 집사를 만나거나 얼굴도 모르는 그 '작전 지휘관'씨라도 만나봐야겠다. 하지만 내가 언감생심 '작전 지휘 관'씨를 만날 수야 없을테고, 하멜 집사에게 물어보면 나대신 물어봐주 겠지. 휘파람. 휘파람. 그리고 그것 말고도 용무가 있다. 아버지는 창술 수련 이틀만에 몸져 누워버렸기 때문에 그것도 보고해야 한다. 절대로! 내가 때려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너무 열심히 휘두르시다가 몸살이 나신 것이 다. 뭐라고 위로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휘파람. 휘파람. 마을대로의 분위기가 올 때마다 바뀌는 듯하다. 이번엔 오가는 수레들 이 많이 보였다. 내가 초를 준비하는 것처럼 다른 여러가지 전쟁 준비 물품들이 많이 필요하겠지. 스푼과 나이프를 준비하지 않아서 굶어죽은 자이펀 군대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론 자이펀에서는 우리 바이서스 군대로 이름이 바뀐 채 그 이야기가 전해지겠지. 그렇게 멍청한 군대가 설마 있을까. 휘파람. 휘파람.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 캇셀프라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가장 힘 들 것 같다. 성안에서 번져나오는 소문에 의하면 캇셀프라임은 한끼 식 사로 황소 다섯 마리를 먹어치운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 영 주님이 가진 소가 겨우 열 마리인데. 정말 그렇게 먹는다면 벌써 우리 마을의 소란 소는 모조리 씨가 말랐을 것이다. 오가는 수레의 모습을 보아 고기를 많이 실어나르기는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고기에 들어 갈 민트도 무지 필요하겠지? 푸헤헤. 휘파람. 비명. "뭐, 뭐야?" 내 휘파람은 갑자기 들려온 비명으로 멈춰지고 말았다. 내 뒷쪽에서 들려온 비명이다.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부리나케 달려오 는 모습이 보였고, 그 뒷쪽으로 크게 상처입은 여자 하나가 남자들에게 부축되어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여자를 부축하던 남자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자 여자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고, 다른 세 남자들은 재빨리 뒤로 돌았다. 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들 중 하나가 날 봤다. "뭐야, 임마! 달아나!" "뭔데 그래요?" "노닥거릴 시간 없어, 어서 달아나! 그렇지, 병사들을 불러!" 그리고 그 남자는 다시 내게 등을 보였다. 순간, 난 사태를 짐작했고 이 남자들은 죽을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몸을 돌려 재빨리 옆 에 보이는 가게로 달려갔다. "제기랄! 이거 받아요!" 난 바로 옆에 있던 대장간에서 쇠스랑, 괭이 등을 꺼내어 집어던졌다. 듣기싫은 소리를 내며 농기구들이 튕겼다. 남자들은 싱긋 웃으며 그것 을 집어들었다. 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이럴 때 항상 외치는 말을 했 다. "남길 말은?" 내말에 내가 오싹해졌다. 사실 난 처음 그렇게 외쳐보았다. 남자들은 마치 내가 대견하다는듯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해뒀으니 상관없어! 아까 업혀간 여자가 내 아내야!" "소피아에게. 약속 못지켜 미안하다." "잭에게. 계약대로 어머니를 부탁한다." 남자들은 각각 빠르게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몬스터가 쳐들어온 것이다. 어떤 놈일까. 이런, 까먹는다! 소피아에게, 약속을 못지켜 미안함. 잭에게, 계약대로 어머니를 부탁함. 아마 그 남 자와 잭은 서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어머니를 맡기로 약속했나보군. 난 갑자기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상관없지. 사태가 끝 나면,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그 이름을 싫도록 듣게 될테 니. 목놓아 그 이름을 부르는 가족들의 모습도 이젠 지겨워. 제기랄! 아무르타트, 모든게 너 때문이야. 아무르타트, 모든게 너 때문이야. 뭐? 아무르타트 때문에 모두 강한 사람들만 남게 되지 않았냐고? 빌어 먹을, 웃기지마! 항상 뒈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서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게, 그런게 강한거야? 그런건 개나 줘버려! "끄아악!"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단말마에 나는 주저앉을 뻔 했다. 오금이 저려서 달리지도 못할 지경이다. 하지만 안돼. 달려야 산다. 난 거의 땅을 짚다 시피하면서 달려갔다. 그 때였다. "비켜, 후치!" 눈 앞에 뭐가 보였다. 모르겠다. 눈물 때문인가? 뭐지, 저건? "샌슨!" 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샌슨은 팔을 뒤로 당긴채 달려오다가 그대로 스피어(Spear)을 던졌다. 그 동작의 여운으로 휘청거리며 몇 발자국 더 뛰는 것이 잘 보였다. 창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소리. 뚫리는 소리. 살을 뚫는 스피어의 소리. "끼르르르!" 괴상한 비명. 사람이 아니다. 난 앉은채로 뒷걸음질치며 바라보았다. 거대한 덩치가 보였다. 그러나 곧 그것은 가려졌다. 샌슨이 그 몸에 뛰 어들며 배에 롱소드를 박아넣은 것이다. 샌슨의 어깨 위로는 딱 벌어진 어깨와 희안한 투구, 그리고 높이 들어올린 팔에는 엄청난 돌도끼가 보 였다. 트롤(Troll)이다. 트롤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들어올린 팔을 세차게 내려찍었다. 하지만 돌도끼로는 가슴에 달라붙은 샌슨을 어떻게 칠 도리가 없었고 트롤의 동작은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렸다. 아 마 그래서 저렇게껴안듯이 달라붙은 모양이다. 샌슨은 그대로 밀고나 갔다. "야야야야야야!" 샌슨은 롱소드를 트롤에 박아넣은채 달렸다. 트롤은 돌도끼를 놓치고 는 그대로 밀려갔다. 트롤을 검에 꿴 채 달려가는 샌슨은 정말 오우거 와 다름없었다. 약 20 큐빗 정도 밀고나가던 샌슨은 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달려가던 가속도 때문에 트롤은 롱소드에서 빠지며 그대로 뒤 로 나뒹굴어졌다. 샌슨은 트롤이 재생하지 못하도록 그 목을 몇 번이나 내리친 다음 재빨리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몇 놈이야?" "나도 몰라!" "그럼 재빨리 숨어!" 난 엉거주춤 일어나며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이미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혼자야? 부하들은 뭐하는거야? 그 때 내 앞으로 우루루 일 단의 사람들이 몰려갔다. 내 생각을 꾸짓기라도 하듯이 나타난 병사들 이었다. 여섯 명의 병사들은 일제히 샌슨의 주위에 섰다. 샌슨은 빠르게 말했다. "트롤이다. 아직 한 놈만… 제길! 더 있군." 저 앞쪽에서 다시 트롤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엔 돌도끼 이외에 다른 것을 들고 있는 놈도 있었다. 곡괭이, 삽, 쇠스랑. 저건 내가 그 남자들 에게 던져주었던 것아닌가? 빌어먹을! 난 눈을 거칠게 닦았다. 모두 9 마리의 트롤이 나타났다. 그들도 앞에 나타난 병사들을 보자 달려오던 걸음을 멈추고 죽 늘어섰다. 잠시 대치상태가 되자 샌슨은 고 민하는 듯했다. 난전으로 갈 것인가? 9 대 7. 숫자는 불리하지만 해볼만 은 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전원 후퇴!"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나 역시 재빨리 일어나 달렸다. 샌슨의 생각은 알 수 있었다. 이길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이 다친다. 그렇지 않아도 병사들의 숫자가 항상 부족한 곳이 우리 마을인데, 죽어버린 인원은 다시 보충하기가 쉽지 않다. 성의 병사들과 합류할 때까지 놈들을 유인하며 달아난다. 트롤들은 당황했지만 눈 앞에서 달아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자 본능 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르르르! 키악!" 난 그야말로 정신없이 달렸다.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의 걸음소리, 그 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트롤들의 고함소리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 다. 가슴이 타오르며 손끝에 감각이 없어졌다. 땅을 밟는 건지도 잘 느 껴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다리가 뻐근해지는 느낌은 왔다. "꺄악!" 난 뭣인가에 부딪혔고, 한참 나동그라졌다. 아니, 도대체 눈을 어디다 뒀길래 이런 상황에서 도망가지도 않고 있다가 나와 부딪히는 거야? 내 가 아는 사람 중에 그만큼 멍청한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제미니!" 제미니는 자기가 쓰러졌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 는 파랗게 질린채로 달려오는 트롤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딸꾹, 딸꾹. 뭐? 딸꾹질? 제미니는 딸꾹거리면서 망연히 앉아 있었다. 칵! "일어나! 야이, 계집애야, 정신차려!" 난 제미니를 강제로 일으켰다. 맙소사, 얘가 이렇게 무거웠나? 제미니 는 온 몸에 힘을 빼고 있었고, 축 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난 하마트면 앞으로 꼬꾸라질 뻔 했지만 간신히 제미니를 일으켰다. 그 순간 난 샌슨과 눈이 마주쳤다. 난 비장하게 말했다. "제미니를 부탁해. 남길 말은, 넌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날 괴롭혀 왔지만 그래도…" 딱! 아이고, 정수리야. 샌슨은 그대로 트롤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쬐그만게 무슨 흉내를 내는거야!" 딱!딱!딱!딱!딱!딱! 이러다 나 죽겠네… 여섯 명의 병사들이 차례로 정수리를 때리고 지나 간 것이다. 병사들은 그대로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들려면 그냥 달 려들지 왜 머리는 찍는거야? 두드려맞느라 내가 팔에서 힘을 빼자 제미니는 그대로 스르르 내려갔 다. 난 당황해서 다시 제미니를 들어올렸다. 아니 이 계집애는 눈 앞에 서 칼싸움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이런 횡포를 부리는거야? 이건 분명히 횡포다. 난 낑낑거리며 제미니를 들쳐업으려 했지만 혼자서 축 늘어진 17살짜리 계집애를 들춰업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누군가가 제미니를 들어올리더니 내 등을 더듬고나서는 정학하게 내 등에 업혀주 었다. "아, 감사합니… 아!" 우습지도 않게 제미니를 들어올린 사람은 검은 색 로브를 입고 온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 타이번이라는 그 마법사였다.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제미니를 들어올린 것일까? 아, 조금전 내 등을 더듬었지. 타이번은 그 허연 눈을 굴리면서 빠르게 말했다. "트롤이냐?" "예! 다, 당신 마법사죠? 그럼 한 방 날려버려요!" "이 목소리를 알지. 눈 뜬 장님 청년이었지? 이봐, 후치. 뭐가 보여야 날리든가 말든가 하지." "이, 이런 얼어죽을! 그럼 마법사가 무슨 소용이…" "자네가 내눈이 되어주게." 난 제미니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다시 추슬러 올리면서 말했다. "뭐라고요?" "거리와 방향. 빨리." 이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그런데 그 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윽!" 병사들 중에 하나가 다리에 쇠스랑을 맞아서 쓰러졌다. 양조장 4형제 의 장남인 터너였다. 그를 찌른 트롤은 쇠스랑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 자 그 옆에서 다른 트롤이 든 몽둥이에 롱소드를 맞대고 있던 샌슨이 그대로 롱소드를 미끄러트리며 쇠스랑을 들어올린 트롤을 어깨로 박아 버렸다. 트롤의 동작이 흐트러진 사이에 쓰러진 터너는 다시 일어섰다. 그는 다시 롱소드를 고쳐쥐며 외쳤다. "이 터너님의 목숨값으로 너희 놈들 셋은 필요해!" 난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 타이번이 말했다. "방향은 잡았다. 고함소리가 엉망이군. 거리는?" "3, 30큐빗 정도. 하지만 마구 뒤섞여서 싸우는데…" "됐어!" 타이번은 정확하게 트롤과 병사들이 엉겨 싸우는 방향을 향해 팔을 들 어올렸다. 순간 그의 팔에 있던 문신들이 일제히 빛을 뿜었다. 뭐야, 이 건? 점차 문신들의 빛이 강해지더니 이윽고 목과 볼에 있던 문신들까지 빛을 내었다. 타이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스펠(Spell)을 몸에 새겨서 몸을 마법서로 쓰는 수법이네. 자넨 진귀 한 것을 구경하는 거야." "예, 예?" 타이번은 대답하지 않고 대신 내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 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진짜 빠르다. 저러다 혀 깨물지 않겠 나? 갑자기 그는 앞으로 뻗고 있던 팔을 위로 쳐올리며 외쳤다. "디텍트 메탈(Detect Metal),프로텍트 프럼 매직(Protect from Magic),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우아아아!" "끼르르르?!" 난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덕분에 제미니를 떨어트렸다. 병사들도 당 황한 모습이니 직접 당한 트롤들은 얼마나 황당할까. 트롤들이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병사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 았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런데 트롤들 중에 세 마리가 떠오 르지 않았다. 그 트롤들은 당황한(아마 그랬을 것 같다. 난 트롤들의 표정을 정확히 말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표정으로 떠오른 자기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샌슨도 몹시 놀랐다는 표정이지만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겨진 트롤 세 마리에게 달려 들었다. 트롤들은 각자 손에 든 삽과 괭이로 샌 슨을 막아내려 했지만 그건 무기도 아니고 엄청나게 느린 것이다. 샌슨 의 롱소드가 절묘하게 삽을 튕겨내자 삽은 괭이를 방해하게 되었고 그 사이 샌슨은 괭이를 든 놈의 배를 베었다. 그리고 그 때 정신을 차린 다른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위로는 계속 트롤들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쇠스랑을 든 트롤 하나는 동시에 네 개의 롱소드를 맞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병사들은 악귀같은 몰골로 쓰러진 트롤들을 계속 내리쳤다. 피와 살점이 마구 튀어올라 병사들의 얼굴에 묻어났다. 감정 문제는 아 니리라. 재생을 하는 놈이니 숨이 끊어질 때까지 후려쳐야 된다. 그 때 타이번이 팔을 들어올린채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라? 실패인가? 왜 아직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난 주저앉은채 말했다. "아, 저, 다 떠올랐는데, 세 마리가 떠오르지 않았는데요." "세 마리가? 그 놈들 뭘 들고 있는데?" "예? 어, 괭이랑 쇠스랑, 삽을…" 그 때 나도 깨달았다. 금속제 무기를 가진 것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른 것들은 트롤의 무기인 돌도끼를 들고 있던 놈들이다. 그러고보니 병사들도 검과 갑옷 을 장비하고 있으니금속제 무기를 가진 셈이다. 타이번은 들고 있는 팔이 아닌 다른 손으로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아차, 그걸 생각 못했군! 이런, 트롤이라면 돌도끼밖에 떠올리지 못한 단 말이야. 어떻게 됐어? 세 마리는?" "다, 다 쓰러졌어요." "그럼 됐군. 병사들, 모두 물러나시오."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쳤다. 타이번은 팔을 도로 내렸다. 그 러자 까마득히 올라갔던 트롤들이 이제 정상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타이번이 잠시 말을 나누는 사이에 트롤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솟아올라 있었고, 따라서 떨어지는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끼르르르! 끽, 끼긱!" 퍽! 퍼버퍽, 퍽! 별로 묘사하고 싶지 않다. 난 당황한 와중에도 간신히 제미니의 눈을 가릴 수는 있었다. 그래서 내 눈은 못가렸다. 멍청하긴! 눈을 감으면 되 는데. 그 생각을 떠올린 건 트롤들의 분해된 몸들이 튕겨다니기를 이미 마친 후였다. 저래가지고선 재생의 권능도 소용없겠지. 타이번은 빙긋 웃었다. "굉장한 소리가 나는군. 허.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좋을 때가 있지."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9. 샌슨은 질린 표정으로 걸어와 인사했다. 타이번이 장님인 것을 보면서 도 고지식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새, 샌슨 퍼시발, 헬턴트성의 겨,경비대장입니다. 마법사님께서는…?" "타이번. 나그네. 이제 끝인가?" "예, 예?" "더 없냐고?" "아!" 샌슨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말했다. "침입한 트롤이 더 있는지 찾아봐! 식량창고일 거야! 마을 창고로 달 려가! 그리고 해리, 터너를 돌봐줘." 병사들은 뛰어갔고 해리는 다리에 상처를 입은 터너를 부축했다. 터너 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서야 신음성을 내었다. 타이번이 말했다. "다친 병사가 있나? 이리 데려와 보게."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터너를 데려왔다. 타이번은 터너를 앉히게 한 다음, 터너를 더듬었다. 재빠른 손놀림 끝에 터너의 다리의 상처에 손이 멈췄다. "여기군." 타이번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잠시후 타이번의 손에서 번쩍! 빛이 나더니 터너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멈췄다. 그리고 피를 닦아낸 터너의 다리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샌슨은 감탄 반, 두려움 반, 어쨌든 희안한 표정으로 타이번을 바라보 았다. "아, 감사, 감사합니다. 타이번." "됐어. 별거 아니니 잊어버려. 상처는 막았지만 며칠 동안 과격한 움직 임은 삼가해." "아, 예. 정말 이 고마움을…" "이런! 고쳐줬으면 자네들도 어서 뛰어가! 뭐하는거야? 트롤들이 시민 들을 다 죽일 때까지 여기 있을거야!" "옙!" 당황한 샌슨은 그만 경례를 붙여버렸다. 병사들은 재빨리 흩어져갔다. "자, 우리도 가볼까? 식량창고로 안내하게." 타이번은 병사들을 따라갈 태세였다. 난 타이번을 붙잡았다. "저, 타이번. 이 계집애가 이상해요." "응?" 난 내가 떨어트린 그대로 주저앉아 아직까지 멍한 표정으로 딸꾹질만 하고있는 제미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곧 나는 타이번은 보이지 않는다 는 것을 깨닫고 말로 설명해주었다. "조금전에 트롤이 달려오는 걸 보더니 그만 멍청하게 주저앉아서 딸꾹 질만 하는데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아요." 타이번은 피식 웃었다. "잘 알고 있구만? 그래. 정신이 나간거지." "어떻게 하면 좋죠?" 타이번은 손을 내밀어 제미니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그래도 제미니 는 아무 것도 못 느끼는지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난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타이번은 말했다. "애인이야?" "쓸데없는 것 묻지 마시고, 어떻게 해 주실 수 있어요?" "자네가 애인이라면 간단한데." "예?" "기절한 아가씨를 깨우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잖아?" "…잠든 아가씨 아니예요?" "기절이나 잠든거나." 나로 하여금 '제미니에게 입을 맞춰야 하나, 타이번은 장님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등등의 굉장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 놓고는, 타이번 은 히죽거리며 제미니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몇 번 튕겼다. 제미니는 딸국질을 멈추더니 신음소리를 내었다. "으음… 으악! 트롤이다!"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제미니는 바로 앞에 있는 타 이번을 절묘하게 피해 그 뒤에 있는 내게 안겨들었냐 하는 것이다. 식량창고로 들이닥친 놈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트롤들은 주제에 양동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강한 놈들은 공격조로서 병사들을 끌어들이고 그 사이에 약한 몇 놈이 식량을 갈취하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타이 번이 나서는 바람에 공격조는 몰살해버렸고, 병사들은 식량창고로 왔던 놈들을 간단히 쫓아낼 수 있었다. 사태가 진정되자, 늘상 있던 순서대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남자들이 부탁한대로 유가족들에게 말을 전했다. 소피아라는 아가 씨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펑펑 울고 있었지만 잭이라는 남자 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고맙다. 제법이구나." 사망자는 그 세 남자와 업혀갔던 여자였다. 여자는 상처가 너무 커서 업혀가는 도중에 죽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 여자는 미망인이 되어볼 기회는 없었고 두 사람은 하늘에서 다시 만났겠지. 하지만 그들의 아이 들은 이제… 씨팔! 병사들은 대로에 널버러져 있던 세 구의 시체를 정성껏 모았다. 트롤 들은 남자들의 몸을 아예 박살내놨던 것이다. 하지만 그 옆에도 역시 한 마리의 트롤이 쓰러져 있었다. 남자들의 반항은 철저했던 모양이고, 그 남자들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병사들이 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은 시체를 각자의 집으로 날라다 주었고 트롤들의 시체를 정리 했다. 난 살며시 그 자리를 빠져나와 샌슨과 함께 제미니에게 찾아갔다. 펍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타이번이 제미니를 데리고 기다리기로 했다. 샌슨과 내가 산트렐라의 노래에 들어가자마자 곧 심장이 써늘해지는 웃 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힛히히, 히힛!" 샌슨은 거의 롱소드를 뽑아들 뻔 했고 난 조금전 제미니의 상태와 똑 같은 상태가 되었다. 제미니는 날 발견하고는 춤추듯이 손을 들어올리 며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미소를 지어? "어머, 후치? 어서 오… 히히힛!" 난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간신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 갔다. 내가 의자에 주저앉는 소리를 들었는지 타이번은 피식피식 웃으 며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후치인가? 이토록 매력적인 미소의 애인이 있다니. 행복하겠군." "프흡! 마, 말도 안되는!" "파하하하!" 죽고싶다는 말이 뭔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조금전의 사태 때문에 마 음을 달래고자 주점에 와있던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면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샌슨은 입을 크게 벌리고 아주 과격하게 웃 었다. 그러자 제미니도 뭐가 좋은듯이 덩달아 웃었다. "히이… 이히힛!" 난 제미니를 노려보았다. 놀랍게도 그 뮤러카… 어쩌고 하는 술병이 놓여있었고 타이번의 앞에는 반쯤 채운 잔이, 그리고 제미니의 앞에는 완전히 비어버린 잔이 있었다. "아니, 무슨 작정으로 술을 먹인 거예요! 타이번!" "술은 만고의 영약일세. 근심, 걱정, 불안, 그 모든 것을 잊게 해주 지. 보게. 이 매력적인 미소의 아가씨에게는 내 마법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잖은가?" "취한 사람은 흔히 자기 입에서 옳은 말만 나온다고 생각하지요." 난 씨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해너 아줌마! 주문 받아요!" "뭐야, 임마?" "나 말고 샌슨!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예요? 너무 일찍 술맛을 알아버린 꼬마?" 해너 아주머니는 웃어버렸고 샌슨은 맥주를 주문했다. 그는 테이블에 앉으면서 타이번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영주님께서 는 틀림없이 마법사님께 크게 사례하실 겁니다." "사례? 관둬. 캇셀프라임 먹이기도 바쁘고 군자금도 달랑거릴텐데. 땅 을 줄건가? 허허허. 이 대륙에서 가장 싸구려인 이 땅을?" 타이번은 며칠새 우리 영주님에 대해 꽤 알아버린 모양이다. 사실 우리 영주님은 정말 눈뜨고 못봐줄 정도로 가난하다. 원래 영주 의 장원은 모조리 영주의 소유이며 마을 사람들은 그 땅의 소작인이었 던 것은 다른 장원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 영주님은 몬스터들에 의해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그 유가족들에게 토지를 줘서 호구지책을 마련하도록 했고, 유가족들은 그 토지를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즉 우 리 영주님께 도로 되팔고는 다시 그 소작인이 되었다. 난 때론 그냥 돈으로 주면 간단하지 않은가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카 알의 말에 의하면 토지는 원래 영주의 소유라 마음대로 줘도 되지만 화 폐는 국왕의 소유로 인정된 상태에서 유통된다고 한다. 화폐를 이루는 물질적인 쇠붙이는 모조리 국왕의 것이며 국민들은 화폐의 능력, 즉 가 치수단으로서의 능력만을 쓰는 것이다. 골치아픈 이야기지만 어쨌든 원 칙으로는 그렇다 하며, 따라서 고지식한 우리 영주님은 그 원칙을 지켜 돈을 주지 않는 대신 토지를 준 다음 그 땅을 되사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자기 땅을 줬다 되샀다 하다보니 돈이 어디 남아나겠는가. 그래서 우리 마을의 주민들도 이젠 영주가 토지를 내리면 그 크기가 얼마든지간에 무조건 1퍼셀(퍼셀은 셀의 100분의 1 단위이다.)에 영주님 께 되팔아버린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영주님은 오래전에 홀라당 망 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영주님은 노발대발하시지만 우리들은 자기 땅을 자기가 받고 싶은대로 받고 파는데 무슨 개짖는 소리를 하냐는 식이다. 그래서 대륙에서 가장 싸구려 땅이라는 농담이 나오는 것이다. 샌슨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말씀이 좀 과하시군요." "틀린 거 있나? 여보게. 난 아무런 감정 없이 말한거야. 자네 영주지 내 영주 아니잖아." "저, 영주님의 고문으로 받아들이실지도 모르고 게다가…" "관직? 필요없어. 이 나이엔 아침 문안 드리기도 힘들어." 샌슨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보고를드릴테고 영주님께서 정 당하고도 마법사님께서도 흡족해하실 사례를 생각해내시겠지요." "자네가 보고를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 보고 끄트머리에다가 난 아무 것도 바라는게 없다고도 전해주겠어?" "아, 예." "그럼 이제 내 차례군. 질문 몇 가지 하겠는데 괜찮겠나?" "아, 얼마든지." 타이번은 술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이 마을 분위기는 영주부터 시작해서 성의 경비대장, 그리고 눈뜬 장 님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날 당황하게 한단 말이야. 퍽 재미있어." "저, 무슨 말이신지?" "자네들은 비극을 꽤 빨리 잊는구만? 지금 이 펍의 분위기도 그렇고." "익숙하니까요." 대단히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그 간단한 샌슨의 대답에 들어있는 무게 는 엄청난 것이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한숨을 쉬어버렸다. 우리는 많이 당하고, 빨리 잊는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지도 모른 다. 우리는 농담을 좋아하고, 쾌활하다. 하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다. "그런가. 흠.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이 마을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단 말이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가?" "자주 일어납니다." 이건 좀 웃기는, 샌슨다운 대답이다. 타이번은 일년에 몇 번, 혹은 한 달에 몇 번 하는 식의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타이번은 빙긋 웃고는 질문을 바꿨다. "자넨 몇 번의 전투를 치뤘지?" "글쎄요… 어디 보자. 챨스가 죽고 내가 경비대장이 된 게 22번째 전 투였고, 음. 한 서른 대여섯 번쯤 되는 모양이군요." 난 문득 타이번이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35, 6회라고?"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허둥대며 말했다. "어,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검을 쥔 놈이 그런 것 신경쓰는 거 우습긴 하지만, 전투를 거치면 거칠수록 다음 번에 죽을 확률이 높 아진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세지를 않게 되더군요. 제 선임자 챨스 는 100번을 채우고 영주님께 치하를 받고는 그 다음에 죽었어요. 그런 걸 보고 있자니… 성의 사집관에게 물어보면 정확한 기록이 있을 겁니 다. 오늘 전투 보고할 때 물어보면 알 수는 있지만, 저…" "음. 이해하겠어. 바쁜 사람 붙잡아둬서 미안하군. 어서 가봐." "예. 그런데 마법사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난 카알의 집에 있어." 샌슨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예? 카알과 아는 분이셨습니까?" "아니. 그 친구가 혼자 산다며 머물 데가 정해질 때까지 있어도 좋다 고 하더군." "아, 예. 그럼." 샌슨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보이지도 않는 타이번에게 고개를 꾸 벅해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내겐 또다른 고민이 남았다. 제미니는 어느 새 테이블 위에 팔을 모으고 그 위에 얼굴을 박고는 잠 든듯 누워있었다. 어쨋든 제미니를 집에 데려다줘야겠는데, 과연 며칠전 에 술마시고는 치도곤을 당한 제미니가 오늘 또 이렇게 발그레한 얼굴 로 히죽거리며 들어가면 과연 그 엉덩짝이 무사할지 걱정이다. 밑도 끝도 없이 타이번이 불쑥 말했다. "35, 6회란 말이지?" "예?" "아, 아냐. 미안하군. 후치. 장님의 버릇이야. 평소에 말할 때 듣는 사 람을 못보니 혼잣말 같거든? 그래서 혼잣말을 아무 때나 하게 된다고." "피곤한 버릇이군요. 속마음을 그냥 말해버릴 수 있다는 뜻인가요?" "뭐, 자네 정도의 나이에 이런 버릇이 있다면 모르지만 이 나이엔 속 마음과 겉마음의 차이가 없어. 피곤할 일은 없지." "겉마음? 재미있는 말이네요. 그건 그렇고 타이번 어르신. 당신 덕택에 제미니가 완전히 취해버렸는데, 어떻게 해줄 수 없습니까?" 그 때 제미니가 고개를 팍 들어올렸다. "나 아아아안 취했어! 우히히키힛!" 우와, 정말 놀랐다. 망할 계집애! 사람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당연히 내 입에선 험악한 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고, 제미니는 코방귀 를 탕탕 뀌다가 시끄럽다는듯이 귀를 막고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버렸 다. 저걸 그냥! 아예 제미니 집에 뛰어가 그 어머니를 여기로 모셔와 버 릴까? 타이번은 말했다. "어떻게 해 주다니?" "그 마법으로 술을 깨게 할 순 없어요?" 타이번은 히죽거리며말했다. "술을 깨게 한다라… 내가 아는 어느 마법사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그 마법사는 술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도대체 마법 공부할 시간도, 정신 상태도 유지할 수 없었거든? 그래서 어느 날 작심하고 술을 딱 끊어버 렸지. 그리고는 전심전력으로 술 깨는 마법을 만들었어. 마법 이름도 근 사하게 지었지. 큐어 드렁큰(Cure Drunken)이라고. 이유를 알겠나? 술 을 마음껏 마시고는 그 큐어 드렁큰을 쓰고 공부를 할 셈이었다고." "똑똑하군요?" "뭐? 똑똑해? 웃기는 소리. 그 큐어 드렁큰도 마법은 마법이란 말이야. 취한 상태에서는 캐스트(Cast)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캐스트 하려면 술 이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러니 무슨 소용이 있겠어?" "에? 아이고 맙소사… 그런 바보같은!" 나는 낄낄 웃었다. 타이번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길다란 백발을 쓸 어넘겼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마법사, 결국 공부를 못했어요?" "아냐. 그 마법사는 자기 실수를 깨닫고는 자기 제자를 불러들여서 그 마법을 가르쳐줬어. 제자는 잘 익혀뒀지. 그리고 그 마법사는 마음놓고 술을 마시고는 제자에게 캐스트하게 했어. 어떻게 됐을 것 같애? 제자 의 정신이 말똥말똥해진거야. 처음부터 자기를 위해 만든 마법이라 캐 스터(Caster) 대상 마법이거든?" "푸하하하!" "그래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버린 마법사는 제자와 같이 며칠 밤을 새 우며 연구에 들어갔지. 그 큐어 드렁큰을 오브젝트(Object)용으로 바꾸 기 위해서. 결론은 짐작하겠지?" "어라, 어떻게 됐죠?" "간단하지. 술주정뱅이 스승과 며칠 밤을 같이 지내고나자 제자도 술 주정뱅이가 된 거야." "푸하하하, 으핫!"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0 마을 앞 들판에 도열한 병사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열병일까. 그저 창검을 가지런히 들고 줄을 맞춰 서 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흥분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저들의 긴장감이 우리까지 전염시 키고, 전염된 긴장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증폭되어 공명을 일으 키는 것일까? 부대들의 앞쪽에는 수도에서 온 기사들이 하프 플레이트(Half plate)를 입고 장검을 빗겨차고 말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깃발 달린 할버 드(Halberd)를 들고 있었으며 그 깃발로 각 부대의 표식을 삼고 있었다. 다섯 기사가 각자 하나씩의 부대를 담당했다. 첫번째는 기사들과 함께 수도에서 온 헤비 트루퍼(Heavy trooper 重裝 步兵隊)로서 체인 메일(Chain mail)을 입고 롱소드와 타워실드(Tower shield)로 무장하고 있었다. 두번째는 라이트 풋맨(Light footman 輕裝 步兵隊)으로서 원래 우리 성에 있던 경비대들이다. 그들은 각각 하드 리 더와 롱소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의 무장은 자유로운 편이다. 원래 우리 성의 경비대들의 무장은 별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세번째는 파이 커즈(Pikers 槍兵隊)로서 라이트 리더(Light leather)을 입고 포챠드를 들고 있다. 네번째는 아처리(Archery 弓兵隊)로서 라이트 리더와 숏보 우(Shotr bow)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보급대와 의무진, 공병대 등 기타 보조부대를 통괄한 백업(Backup 支援隊)들이다. 그리고 그 부대들 옆으로 가장 중요한 부대가 있었다. 부대원은 단 한 명과 두 마리였다(?). 할슈타일공이라는 그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 라자 가 탄 하얀 말, 그리고 드래곤 캇셀프라임이 나머지 부대의 위용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장관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머지 부대들은 아무르타트보다는 회색산맥에 득시글거리는 몬스터들 에 대한 대비일 뿐이므로 구성이 저렇게 간단한 것이다. 아무르타트는 캇셀프라임이 상대하고, 아무르타트의 부하라고도 할 수 있는 몬스터들 은 - 부하? 웃기는 표현이다. 그것들은 아무르타트에 잡아먹히는 먹이 에 가깝지만, 아무르타트의 그 지독한 마성(魔性)의 공포 때문에 회색산 맥을 떠나지 못하며 회색산맥에 접근하는 인간들을 공격한다. - 인간의 부대가 맡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작전 같은 거야 모르지만, 뭐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 임이 싸우게 될 때, 나머지 저 빈약한 부대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 을까. 그리고 그 부대들 앞에는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을 담당하게 될 작전사령관 휴리첼 백작이 근사한 플레이트 메일(Plate mail)을 입고 바 딩(Barding 馬甲着用)까지 갖춘 말을 타고 서 있었으며, 그 옆으로 우리 영주님 헬턴트공이 헬턴트가의 문장이 든 하프 플레이트를 입고 전차를 타고 있었다. 전차라… 아무리 봐도 건초수레가 생각나는 모양이지만, 군데군데 보강을 하고 창도 몇 개 세워져 있다. 전차라고 불러주는 것 은 그 위에 우리 영주님이 타고 있어서일 뿐, 다른 어디에 저 마차가 세워져 있으면 누구라도 조금 이상하게 생긴 건초수레라고 말할 것이다. 제미니가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찾았어! 저기 계셔!" 역시 제미니가 사람 찾는데는 나보다 훨씬 낫다. 난 제미니가 가르키 고 나서야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창병으로 파이커즈에 속해 있었다. 투구와 앞사람의 어깨 때문에 아버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어젯밤, 아버지는 평안한 얼굴로 보통 때처 럼 악담과 농담 사이의 말을 나와 나누셨다. 난 물려줄 재산이 있으면 공개하고 떠나라고 했고 아버지는 날 키운 값은 톡톡히 받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키워준 값? 나, 돈 없어요. 내가 무슨 돈 있다고?" "네가 어깨 위에 얹어둔게 머리라면, 물려줄 재산이 있을지 생각해봐 라." "퍼셀 한 닢 없겠지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내가 만일 유산으로 줄 것을 가지고 있다면 네놈은 내가 죽으라고 빌지 않겠느냐? 그런 점에서 이 시점까지 우리의 돈독한 부자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우리의 궁핍함에 고마워할 일이다." "가난해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는 평온한 얼굴로 집을 나서셨다. "잠시 다녀오겠다. 제미니 아버지께 나무 부탁해뒀으니 좀 있다 찾아 다 놓거라." 난 냄비를 닦으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녀오세요." 그리고 아버지는 가셨다. 우리 둘, 약속은 없었지만 이것은 아무런 위 험도 없는 일, 잠시 마을에 친구라도 만나러 가시는 것 정도의 일인 것 처럼 여기기로 했다. 내가 몸조심 하라고 말씀드리면아버지가 안전할 까? 아버지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까? 그런데 난 집안 일을 팽개쳐둔채 제미니에게 이끌려 정벌군의 출발 장 면을 보러 와 있는 것이다. 주위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있긴 했지만, 난 정말 이곳 에 오고싶지 않았다. 난 환송이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보낸다는 의미가 있는 어떤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쳇, 빨리 출발하지 않고 뭐하는거야? 아무르타트보다 일사병에 먼저 쓰러지겠군." 영주님의 연설을 들으며 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미니는 깔깔거렸다. "일사병? 가을에?" 우리 영주님은 아무르타트가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나쁜 놈이며, 캇셀프라임을 보내주신 임금님은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찬양받아야 된다는 내용을 대단히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 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감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7차, 8차 정벌군에는 따라가지 못하고 9차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벌군에 참여하게 된 영주님 은 분명히 흥분하고 있었다. 휴리첼 백작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영주님은 눈물 반 고함 반으로 연설의 대미 를 장식했고, 박수소리가 길게 이어졌으며, 이윽고 휴리첼 백작의 차례 가 되었다. 휴리첼 백작은 고개를 조금 숙여보인 다음 말했다.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올려 출발신호를 했다. 기사들의 구령과 복창으 로 제 1 부대부터 순서대로 출발했다. 마을 사람들은 휴리첼 백작에게 박수를 보낼 타이밍을 놓쳐 당황했지만 그 박수를 교묘하게 출발하는 병사들에게 돌렸다.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병사들은 출발했다. 난 계속 아버지의 모습만 바라보려 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 고 팔을 들어올리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난 두리번거리다 가 기어코 제미니가 뻗어올린 팔에 콧잔등을 맞고 말았다. 제미니는 그 것도 모른 채 계속 환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 두 그랬다. 지금까지 정벌군들이 떠날 때 내가 보곤 했던 침울한 분위 기, 슬프고 무거운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그것은 부대의 제일 마지막 에 걷고 있는 저 거대한 존재, 아름다운만큼 공포스럽고 거만한만큼 위 대한 캇셀프라임 때문일 것이다. "캇셀프라임 만세! 정벌군 만세! 그들에게 유피넬의 가호를!" "아무르타트에게 저주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저주를!" 시민들은 평소의 언행과 전혀 상관없이 신에게 제멋대로 저주와 가호 를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신이라도 별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안들겠 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난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 하자 아버지의 위치를 놓쳐버렸다. "제미니, 제미니!" 난 반 광란 상태인 제미니의 어깨를 붙잡아 아버지의 위치를 물어보았 다. 제미니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그 때 바로 제 4 부대가 내 앞으 로 지나가기 시작했고 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부를 것인가? 하지만 뭣때문에. 들리지도 않을텐데. "아버지! 돌아오셔야 돼요!" 나란 놈은 나도 못말리겠다. 젠장. 아버지는 역시 아무 것도 안들리는 모양이다. 그저 무뚝뚝하게 걸어가고 계셨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그 때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셨다. 이런 소란스러운 군중들 틈에 끼인 나를 정확하게 바라보셨다. 난 놀랐지만, 내 얼굴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기를 애타게 바랐다. 아버지는 시익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만 바라보시면서 걸어가셨다. 그리고 난 아버지의 눈가에 반짝인 것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 다. 이런 가을 날씨에 흘린 땀인가?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딱 한 방울 내려서 아버지의 눈가에 떨어졌나? 부대가 간단하다 보니까 행렬은 빠르게 끝났다. 마을 사람들은 캇셀프 라임의 거대한 몸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박수를 보내고는 천 천히 흩어졌다. "후치? 가야지." 제미니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려다가 내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난 방해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 이, 아무르타트고 캇셀프라임이고 다 상관없는 상태에서 난 아버지와 나만의 긴 이별을 나누고 있었다. 그것을 방해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니 제미니에게 화를 낼 수야 없다. "그래. 가자고." 난 몸을 돌렸다. 제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다 낮게 말했다. "어머, 카알이야." 난 제미니의 시선을 따라갔다. 들판 귀퉁이의 나무 아래에 카알과 타 이번이 서 있었다. 그들은 부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뭔가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난 그냥 이대로 돌아가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싶었지만제미니는 벌 써 뽀르르 달려가고 있었다. 난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안녕하세요, 카알? 일전의 융숭한 대접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스마인타그양. 왕림해주셔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아… 닭살, 닭살! 난 제미니와 카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눈 뜨고 못봐주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카알의 옆에 있던 타이번은 눈을 감 고 있지만 그래도 못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카알." "오, 네드발군. 이젠 내 실수를 용서해주는건가?" "용서는 무슨. 소리쳐서 내가 미안해요. 구경 나왔어요?" 며칠간의 감정은 깨끗이 정리됐다. 카알은 말했다. "사실은 타이번을 안내해 온거라네. 난 별로 구경할 의향이 없었거든." 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타이번, 당신이 무슨 '구경'을 한다는 말이죠?" 타이번은 히죽 웃었다. "나름대로 요령이 있지. 소리를 들으며 상상을 펼치는 것도 재미있어." "재미?" "응. 분위기가 꽤 좋더라구. 드래곤과 싸우러가는 병사들같진 않던데." 어째 타이번은 카알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면서도 - 내 생각엔 두 배 쯤 되는 것 같다. 카알은 40이 안되었고 타이번은 70이 넘어보였으니까. - 카알보다 훨씬 편한 말투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니 확실히 비교된 다. 카알이 좀 괴상한건가? "당신 근사한 마법사잖아요? 휴리첼 백작이 도와달라는 말 하지 않던 가요?" "상식이 있군. 뭐, 거절했네." "이유는?" 질문하는 내 얼굴 표정은 날카로왔다. 하지만 카알과 제미니만이 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타이번은 평온하게 말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 스승에게 덤비는 꼴이 되니까. 감정적으로 귀 찮아." "스승?" "말했잖아.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 따라서 드래곤에게 마법을 사용 한다는 거, 사조(師祖)에게 덤벼드는 꼴이지. 우스운 모양이 된다고."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자네가 고작이라고 해도 화는 내지 않겠어. 하지만 자네가 마법에 대 해 좀 알거나 하다못해 기사도에 대해서라도 좀 안다면 대가리를 박살 내놨을거야." 어조가 너무 평온해서 분노는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욱하려 했지만 잠자코 참았다. 갈갈이 부서지던 트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타이 번은 계속 귀찮다는듯한 어투로 말했다. "뭐, 그리고 이날 이 때까지 마법을 익혀왔으면서 할 줄 아는게 박살 내고 뒤틀고 죽여버리는 거라는 거, 그것도 찝찝한 일이고. 나 자신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 일이지. 자네가 이해할 간단한 이유를 말하라면, 죽기 싫으니까. 장님 마법사가 수백년 동안 마법을 갈고닦은 드래곤과 싸워주기를 바라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당신은 장님이면서도 트롤들을 간단히 처리했잖아요?" "야! 트롤이 마법 쓰는 놈이냐? 하하하. 캇셀프라임이 잘 상대할거야. 휴리첼 백작도 그런 생각이니 날 끌어들이는 일에 열성적이지 않았고. 내가 보기엔 이건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이 아니라 제 1 차 아무르타 트-캇셀프라임 대결이야. 나같은 인간 마법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하긴 그렇겠군요. 다른 병사들은 어차피 구경꾼이고."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다른 병사들은 무조건 구경꾼이 어야 한다. 난 우리 아버지께서 포챠드를 곧게 세워들고 아무르타트에 게 챠지(Charge)라도 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타이번은 웃으며 말했다. "음. 그대신 난 다른 일을 맡았지." "다른 일?"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조수를 선별할 권리도 받았고." "잠깐, 잠깐. 다른 일이라니요?" "아, 그렇지! 자네, 내 조수가 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복장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인데요오!" "헬턴트 영지의 경비. 경비대가 다 떠나고 나면 항상 그게 문제라며? 특히 이런 가을철에는 몬스터들이 눈 뒤집고 몰려들잖아." 아, 그래. 며칠전 나타난 트롤들도 겨울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식량창 고를 급습했다. 우리가 저희놈들을 위해 봄여름 뼈빠지게 농사를 짓는 줄 착각하는 놈들. 가을이 되면 마치 수금이라도 하겠다는듯이 찾아오 는 놈들. 제기랄, 게다가 경비대도 다 떠났으니 얼씨구 좋아라 달려들겠 지. 물론 마을 사람들은 이 시기 동안 자경대를 조직하지만 난 징집 하 한선에 걸린 나이라 자경대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이 타이번이 마을 경비를 맡는다고? 그리고 날 조수로? 내 어 조는 순식간에 사근사근해졌다. "거, 괜찮게 들리네. 조수 봉급이 어떻게 돼요?" "산트텔라의 노래에서 매일 술 한 잔 사지. 어떤가?" "술 말고 돈으로." "이 친구는 아직 세상에 돈보다 더 좋은게 있다는 걸 모르는군. 더더 욱 자넬 채용해서 인생공부 좀 가르쳐야겠군. 돈으로? 흠. 좋아." 황송하게도 타이번의 손끝에서 내게 날아온 것은 100셀짜리 금화였다! "다, 당신 100셀짜리 말고는 가진게 없어요?" 달려드는 제미니에게 금화를 뺏기고는 내가 말했다. "야이, 닭대가리야! 그건 준비금도 포함하는거야! 적당히 무장을 챙겨. 뭐, 한달 정도의 단기고용으로는 보수가 비싸지만, 좋은가?" "찬성! 두 말 없기!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좋군. 내 사무실은 산트렐라의 노래니까 아침마다 찾아오도록." 내게서 그 100셀짜리 금화를 빼앗아 침을 질질 흘리면서 구경하고 있 다가 다시 내게 빼앗긴 제미니가 끼어들었다. "저, 마법사님? 조수 하나 더 필요없으세요?" "없어." 제미니는 울상이 되었다. 타이번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걱정인가. 후치 돈이 아가씨 돈이고 아가씨 돈이 아가씨 돈 아 냐? 자못 훌륭한 연인관계에서 금전은 그렇게 취급되어야 해. 돈은 무 조건 여자 것으로. 여자가 더 알뜰하거든?" "타이번!" 나와 제미니가 동시에 악을 썼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1. 제미니는 끝까지 날 따라왔다.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구경이라도 해 야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런 거금을 손에 쥐고 있자 앞이 캄캄했다. 평소에는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막상 돈이 들어오니 이걸 어떻게 해야좋을지 모르겠다. "무장, 무장이라… 그렇지, 칼이다!" 난 평소부터 근사한 칼 한 자루 가지고 싶었다. (내 나이에 그런 욕망 이 없는 사내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정말 미치고 환장 할 일은, 갑자기 칼은 어디서 구하는지 생각이 안나는 것이다. "대장간으로 갈 거야?" 그랑엘베르여! 마침내 해내셨습니다! 당신이 돌보시던 순결한 소녀들 중 가장 대책이 없는 소녀가 정곡을 예리하게 찔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니. 주점으로 갈거야. 대장간에 주문하고 만드려면 시간이 너무 걸 리고…주점에 가면 술값 대신 맡아둔 검이 있겠지. 바로 구할 수 있어." 난 펍 '산트렐라의 노래'의 주인 해너 아주머니가 가지고 있는 근사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해너 아주 머니는 그 근사한 검을 천하에 몹쓸 물건 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아 니 어떻게! 그렇게 몸살나게 멋있는 검을 대장간에 줘서 술잔으로 만드 려는 생각을 한단 말이야! 다행히 샌슨의 아버지이자 대장간 주인인 조 이스는 바스타드 소드에 사용된 강철로는 술잔을 못만든다고 핀잔을 줬 고, 그래서 해너 아주머니는 이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검을 술값 대 신 받다니 내가 돌았구나 어쩌고 하며 그걸 어디 쳐박아두었다. 꽤 오 래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잘 기억한다. 그리고 그건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을테니 틀림없이 그대로있을 것이 다. 성의 경비대원들은 모두 멋진 무기가 넘치니까 -전사자들의 무기다. -그걸 가져가진 않았을테고, 그 외에 누가 그걸 가져갔겠는가? "뭐야?" 해너 아주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 말 못알아들었어요? 대금을 치를테니 그 검을 넘기라고요." 옆에선 제미니가 감탄한 눈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제미니는 자기 어머니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들 앞에서는 항상 주눅이 드는데,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해너 아주머니와 거래를 하자 내 가 무진장 존경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그거 있기는 한데… 네가 그걸 뭐에 쓰려고?" "아주머니는 돈만 받으면 되잖아요. 그걸 어떻게 쓸건지는 내 맘 아녜 요?" 봐라, 제미니. 난 이 정도의 사나이다. 난 이렇게 당당무쌍하고 차갑고 무서운 남자란 말이다. 네가 주제에 보는 눈은 있어 언감생심 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오르기엔 너무 높은 나무란 말이다. 네, 후치. 제가 어리석었어요. 철없는 소녀가 눈 앞에 있는 것이 땅에 내려온 태양인지 모르고 손을 데려 했으니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 저 의 마음 아프나 그것은 저의 어리석은 행동의 소치. 저를 용서해주세요. 흑흑. 아니다. 가련한 소녀야. 너 정도의 소녀들에게 난 항상 상처만 주는 운 명이구나.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겠느냐. 내가 너무 멋있는 놈이기 때문 이지. "너 입을 헤벌리고 뭐하니?" 욱, 이런. 상상이 길었구나. 해너 아주머니는 근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해너 아주머니의 가슴에 꼭 안겨 있는 바스타드 소드에 향해 있었다. 내가 손을 뻗자 해너 아주머니는 그 손을 찰싹 내리쳤다. "아야!" "욘석아! 원래 절대로 너같은 개구장이에게 이런 걸 줘선 안되지만, 이 젠 너도 자기 몸을 지킬 생각은 해둬야 할테고, 양초 만드는 걸로 먹고 살기 싫다며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팔거에요, 말거에요?" "팔 생각은 없어. 가져가. 어차피 너 줄까도 생각해봤지. 그런데 네가 직접 찾아와 달라는구나. 가져가렴." 그러면서 해너 아주머니는 그 바스타드 소드를 내 손에 턱 쥐어주었 다. 난 놀란 눈으로 해너 아주머니를 바라보다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무인은 자신의 무기에 정당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법, 따라서…" 딱! 아이고, 정수리야… 이것, 문제군. 바스타드 소드를 허리에 차려니, 내 혁대는 검을 차는 칼고리나 기타 등등은 없거니와 너무 빈약하다. 칼날이 빈번히 닿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끝장이기 때문에 칼집이 매달릴 혁대는 대단히 튼튼한 것을 써야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할 수 없군. 난 그냥 왼손 에 들고 다니기로 했다. 내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제미니는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날 바 라보고 있었다. 난 그 시선을 의식하며 허리를 쫙 편채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제미니는 함부로 내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약간 떨어져 걸으 며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보았다. "저, 저, 후치. 어디로 가는거니?" "날을 갈러." "저, 저, 그럼 대장간에 가는거야?" "당연하지." 제미니는 내 짧고 냉랭한 화법에 주눅이 들었나보다. 아이, 신나라. 난 턱을 치켜들고 제미니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걸어갔다. 턱을 너무 치 켜들었나 보다. 콰당! 아이고, 빌어먹을! 전사가 가는 길에 똥을 갈겨둔 말이 도대체 어느 녀석이야! 내 이놈을 보기만 하면 단번에 그 놈을… 에, 에, 먼저 그 놈 주인이 누군지 살펴보고나서 그 놈을… 제미니는 배를 잡고 웃으며 날 부축해주었다. 난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도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제미니는 방긋방긋 웃으며 건초를 들고와 내게 내밀었고 난 그걸로 바지를 닦았다. 이거 내가 검을 차게 된 역사 적인 날에 왜 이 모양이지?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껄껄거리며 웃 었다. 제미니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웃지들 말아요! 뭐가 우스워요?" 제미니가 날 변호해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에라, 결심했다. 제미니. 내가 희생하마. 널 데려갈 골빈 남자는 없을테고, 내가 일치감 치 부인을 맞이해야 세상의 남자들이 안심할테니, 너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마. …맙소사, 내가 미쳤나봐. 대장장이인 조이스는 17세짜리 사내아이가 찾아와 험상궂고 냉엄한 표 정으로 '검을 갈아주시오.' 라고 말하는 데에서 느낀 당혹감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누구 심부름이야?" "내 거에요!" "…네가 쓸거라면 이것보단 저게 어떠냐?" 난 샌슨의 막내동생이 들고 놀던 나무칼을 바라보았다가 길길이 날뛰 는 대신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조이스는 내가 건넨 100셀짜리 금 화를 바라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망할, 거스름돈 세려면 하루종일 걸리겠네." 아니, 어떻게 이 양반은 그 고귀하신 100셀짜리 금화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지? 난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옆의 나무통에 주저앉았다. 제미니는 불꽃이 튀고 소리가 요란하자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고 내 등 뒤에 서서 구경했다. 조이스는 투덜거리며 날을 살펴보았다. 순간 조이스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이거… 환상적인 검이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조이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검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검이면 새총은 공성병기겠군." 제미니는 자지러지듯이 웃으며 내 어깨를 내리쳤다. 난 울상 반, 분노 반으로 한심스럽다는듯이 말했다. "그렇게 엉망이예요?" "농담이야." "…." 그게 재미있냐? 조이스는 내게 눈을 찡긋 했고 제미니는 더욱 깔깔거 렸다. "해너가 가지고 있던 그 검이군? 길이 잘 들어있어. 이런게 손대긴 더 귀찮아. 뻣뻣하거든. 그리고 간수도 제대로 안하고 쳐박아 놓은 모양이 군. 검 제대로 오래 쓰려면 매일 손질해줘야 된다." 그리곤 두말없이 망치를 가져와 내 검의 손잡이에 있던 대갈못을 뽑아 내었다. 그리고는 검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으악! 그걸 그렇게 쑤 셔박더니 조이스는 당장 다른 일감을 잡아 뚝딱거리며 만들기 시작했 다. 어, 어, 저거 내 검 다 녹겠다! 난 조바심이 났지만 가만히 있었 다. 내 대신 고함을 질러줄 사람이 있으니까. 제미니가 놀라서 말했다.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거예요?" 제미니의 질문에 조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그렇게 낫 하나 만 들면서 내 간장을 오그라붙게 만들던 조이스는 흘끗 화덕을 보더니 천 천히 장갑을 끼고 집게로 내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었다. 난 놀라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바스타드 소드는 백열(白熱)되어 있었다. 마치 검 모양의 불꽃 같았다. 어두컴컴한 대장간 안에서 빛의 검을 들고 있는 조이스가 마치 전설 속 의 루트에리노 대왕처럼 보였다. 다른 대장장이들도 조이스와 그가 들 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조이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괜찮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못다루는 검이지." 이렇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조이스는 그 걸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띵깡, 탱! 띵깡, 탱! 아니, 뭐야? 저건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꼴이잖아? "너무 메져 있어. 표면도 시원찮고. 이도 좀 빠졌군." 적당히 두드려서 표면을 고르고 이가 빠진 부분을 뭉개던 조이스는 그 걸 물통에 쑤셔박았다. 담금질? 그러나 조이스는 보통의 담금질 횟수보 다 훨씬 적은 두 번으로 끝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담금질 할 필요가 없어." "예… 예?" 조이스는 숯돌을 꺼내어 검을 싸악싸악 갈면서 말했다. "원래 완성된 검은 다시는 불에 쳐박아선 안돼. 하지만 이건 너무 오 래 간수도 되지 않은 채 굴러다니던 검이라서 숯돌로 가는 정도로는 원 래의 칼날을 찾을 수가 없어. 그리고 검의 철도 너무 메져있고. 이 철은 자이펀에서 나는 강철이다. 자이펀에선 담금질을 약간 모자라게 해서 검이 휘어지는 성질은 없어. 하지만 그 때문에 많이 휘두르면 철이 메 져버리고 재수없으면 휘어지는 대신 깨져버려. 뼈를 친다든가 상대의 갑옷을 많이 치면 그렇게 되지. 담금질을 잘 해야 철이 질겨지는 거야." 싸악싸악하는 숯돌 소리에 맞춰 조이스의 설명은 리듬감있게 들렸다. 제미니는 뼈를 친다는 말에 놀라서 내 어깨를 꽉 잡았지만 난 그것보다 다른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럼, 이걸 쓰던 사람은 꽤 오랫동안 썼단 말이군요?" "응. 그러니 길이 잘들어 있지. 손질도 잘했군." 금새 장난치듯이 뚝딱뚝딱 내 검을 손질한 조이스는 다시 손잡이를 끼 워맞추고는 못으로 고정시켰다. 조이스는 그걸 검집에 탁 꽂아넣고는 내게 건넸다. "뽑아봐." 난 침을 삼키며 손잡이를 쥐었다. 스르릉! 우하, 우하하, 아이고 심장이야. 팔에 털이 쫙 곤두섰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냥 부드럽게 뽑히던 검이 조이스가 좀 손질을 하고나자 가슴을 도려내는 소리를 내며 뽑혀나왔다. 제미니는 아예 내 어깨에 달싹 붙어 서 눈만 어깨 너머로 내놓으며 쌕쌕거렸다. 그래서 내 목덜미를 간지럽 히며 동시에 내 발검동작을 방해했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조이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혹시 전사들처럼 엄지손가락으로 칼날 만져볼 생각은 하지마. 그건 지금 면도도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윽, 놀래라. 그렇지 않아도 난 엄지손가락을 칼날로 가져가고 있었다. 난 머쓱해져서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서슬퍼런 검광이 가슴을 서 늘하게 만들었다. 반짝거리는 검신은 정말 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조 이스는 수건 하나와 숯돌을 내게 건넸다. "네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뭐 누구나 검을 망쳐가며 배 우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칼을 갈아줘라. 그렇게 많이 갈아줄 필요는 없고 그저 한두번 해주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점 점 많이 해줘야 되지만." 그리곤 조이스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대장간 귀퉁이로 다가갔다. 그리 고는 자신의 돈주머니를 찾아내서 한참을 끙끙거리며 계산하기 시작했 다. 아마 100셀짜리 금화에 대한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다른 대장장이들도 합류했고 웃통을 벗어던지고 근육투성이인 상체에 땀을 번질거리는 거한들이 끙끙거리며 동전을 고르는 모습은 제미니를 퍽 재미있게 만드는 모양이다. "까르르르…" 하지만 난 그런데 시선 줄 여유가 없었다. 난 내 모든 신경을 바스타 드 소드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정말 멋있었다. 전투적 합목적성으로 제 작된 기능적인 바디(Body), 날렵하고 길고 매끈거린다. 그 둘레를 감싼 블레이드(Blade), 그 목적은 적의 육체에의 침범. 피를 부르듯이 앵앵 거리는 블레이드는 내 혼을 쏙 빼놓았다. 그리고 가드(Guard)와 그 아래 의 힐트(Hilt). 오래된 가죽으로 칭칭 감긴 손잡이는 내 손에 찰싹 달라 붙는 것 같았다. 이 가죽을 좀 바꿔줘야 될까? 아니, 아니다. 지금 뭐 하나라도 바꾸면 큰일날 것 같다. 폼멜(Pommel)은 둥그스름한 것이 절 굿공이로 쓰기 딱 좋겠다! 정말 기능적인데? 하지만 위에 칼이 달려 있 으니 절구가 꼭 필요하지 않으면 쓰지 말아야지. 위험해. 난 그걸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조금전과 달리 무지무지한 예리함으로 적의 피를 부르는 물건이 왼손에 있다고 생각하자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난 어깨를 조금 움츠린 다음 팔짱을 탁 끼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로 근사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피넬, 보라! 오늘 또 하나의 검사가 탄생하여 그대 아래에서 헬카네 스의 율법을 실천하려 한다. 내 손은 헬카네스의 율법을 실천하나 그 손은 내 정신의 노예.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은 그대에게 바치겠다. 잘봐 둬! 나다. 잊지마라, 유피넬! 으음…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후치, 숯돌이랑 수건 챙겨야지." 망할… 망할, 망할, 망할 계집애! 이 순간에 그런 걸! 난 투덜거렸지만 그래도그걸 챙겼다. 숯돌을 수건에 감싸서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 다. 그 때 조이스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모자라는데… 너 갑옷은 혹시 필요 없냐?" 욱. 까먹을 뻔 했던 것이다. 갑옷이라? 흠. 당연히 좋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이 웃으며 대장간 한귀퉁이를 뒤 적거렸다. 그리고는 하드 리더 중에 내 체격에 맞을 것을 하나 고르더 니 들고 왔다. 난 그 옆에 있는 체인메일이 더 탐났지만 그건 무지무지 비싼데다가 차마 그런 걸 입고 마을을 돌아다닐 용기는 없다. "너 초장이지? 기름 다루는 법 아냐?" "물론이죠!" 철로 된 갑옷은 습기가 가장 문제다. 하지만 철은 강인한 소재이다. 그 에 비해 가죽갑옷은 습기에도 괜찮지만 어지간히 무두질이 잘 되어 있다 고 해도 상하기 쉽다. 최소한 갑옷에 곰팡이가 핀다면 그것은 가죽갑옷 이다. 기름을 잘먹여둔 가죽갑옷은 꽤 오랫동안 부담없이 쓸 수 있다. 그리고 기름 다루는 것이라면 내가 누구냐? 동물기름이나 왁스로 초를 만들어내는 초장이 아니냐? 웬만한 칼은 미끄러져버릴 정도로 기름을 먹여줄 수 있다. 아예 빗방울에도 까딱없도록 초칠을해버릴까? 난 그 하드 리더를 뒤집어썼다. 하드 리더는 셔츠처럼 그냥 뒤집어쓸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다. 목 아랫부분에는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고 리 벳이 달린 구멍이 양쪽에 있었다. 물론 끈 꿰는 곳이다. 난 조이스에게 끈을 건네받아 그것을 서툴게 꿰기 시작했다. 제미니가 큭큭거렸다. "이리 줘봐. 그래서야 어디 풀기나 하겠니." 난 순순히 제미니에게 끈을 줬다. 제미니는 내 가슴에 달라붙더니 끈 을 꿰기 시작했다. "휘익! 휙휙!" 뭐야? 대장장이들이 우릴 보고 휘파람을 날리는 것이었다. 제미니는 볼이 발그레해졌다. 흠, 그러고 보니 나도 전설 속의 루트에리노 대왕처 럼 보이겠군. 난 당당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서 있었고 제미니 는 그 가슴에 달라붙어 손을 꼼지락거리며 끈을 꿰고 있는 것이다. 아 마 임금과 시녀쯤이겠지? 조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기 속의 레이디와 기사후보생 같군." 뭐, 뭐, 뭐라고! 어쨌든 난 롱부츠도 장만했고 장갑도 샀다.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았 고 그래서 난 무지 자상해지고 넉넉해져서 제미니에게 옷도 한 벌 선물 해버렸다. 아무래도 난 제정신이 아닌가봐. 100셀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이다. 어쨌든 제미니는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고 그걸 보고 있자니 기 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2. 며칠이 지났다. 내 일과는 재미있게 바뀌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무장 을 갖추고는 산트렐라의 노래로 달려간다. 타이번은 테이블에 앉아서 우유를 마시다가 내가 들어오면 인사를 보낸다. 정말 기가 막히다. 난 한 번은 지나가던 꼬마에게 부탁해 내 앞에 집어넣어 보았지만 타이번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내 발자국을 정확하게 알아맞힌다. 그리곤 타이번을 데리고 성으로 간다. 성에 남아있던 경비대원들은 어 젯밤의 보고를 하고 뭐 기타 등등말을 나누지만 난 그것과는 상관없으 므로 대부분 연병장에서 기다린다. 이 때 난 검을 뽑아들고 몸을 비틀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아 침 훈련을 마치고 식사까지 끝낸 경비대원들이 연병장 가장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내거나 조롱을 보내거나 한 다. 때론 조언도 보낸다. "손아귀에 힘을 빼! 제미니 손목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게 조언이냐! 앙! 전도유망한 청년 하나 매장시킬 일 있냐! 때론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가 막히다! 세 번씩 몸을 돌리 며 아홉 번을 치는 터너의 동작을 흉내내다가 난 몇 번이고 고꾸라졌 다. 터너는 트롤과의 싸움 때 부상을 입었기에 정벌군에 출전하지 않았 다. 타이번이 그걸 고쳐주긴 했지만 아직 원활하게 다리를 쓰지는 못하 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같은 동작으로 그런 묘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히죽거렸다. "터너 저 녀석, 다리 다치더니 영 무디군." "임마! 너도 쇠스랑에 다리 찍혀봐!" 병사들은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날 지도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어렵다. "욘석아, 집에 들어가거든 팔굽혀 펴기를 하든지 장작 패기를 하든지 해서 팔힘 좀 길러라. 이 녀석, 매일 양초만 고으다보니까 몸이 완전히 양초잖아?" 장작 패기라… 그거야 별로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불을 쓸 일이 많 아서 다른 집처럼 매일 장작을 쪼개지 않고 장작을 사서 쓴다. 그래서 나는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은 팔이 저려서 빵을 집어 먹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그렇게 성에서의 업무가 끝나면 타이번은 순찰을 나간다. 간혹 마을 주변에서 타이번은 나에게 지형을 자세히 물어보고는 고개를 끄덕 이며 멈춘다. "그렇다면 여기가 접근루트로 적절하겠군."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면 이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곤 날 시켜서 나무나 땅, 바위에 이상한 모양을 그리게 하고는 스펠을 캐스트한다. 그게 뭐냐 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제대로 그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타이번 은 항상 날 실험대상으로 쓰니까. 그래서 난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에 걸려 허공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눈 앞이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안보 이게 되어 콰당 쓰러지기도 하고, 불꽃에 머리를 거슬리게 되기도 했다. "타이번! 살려줘요!" 드래곤 다섯 마리가 날 앞에 두고 튀겨먹을지 삶아 먹을지 날로 먹을 지 의젓하게 의논하는 환상 속에서 내가 지른 고함소리다. 그건 정말 등골이 쭈볏 서는 경험이었는데 타이번은 야속하게도 낄낄거리며 좋아 했다. 칵! 저 장님을 그냥 절벽으로 인도해버릴까? 한 번 그렇게 손을 봐둔 장소는 내가 꼭 기억해 두어야 했다. 그걸 지 도로 작성해서 성의 경비병들에게 알려줘야 되기도 했거니와, 타이번은 매일 그 장소에 들려서 마법을 갱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연력은 한 곳에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집중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 이라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결국 그 마법의 부비트랩은 뭔가를 낚아올리는데 성공했다. 어느날 아 침, 우리는 부비 트랩을 설치한 장소로 다가가다가 그야말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타이번과 내가 겁에 질려서 오우거가 아닐까, 혹은 가고일(Gargoyle)일 지도 몰라, 저 소리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라미아(Lamia)일지도… 등등 의 의견을 교환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제미니가 죽어라고 도망다니 는 꼴이 보였다. 그런데 그 계집애는 10 큐빗 반경의 원을 그리면서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뛰고 있었다. 제미니는 구조되고 나자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우리 둘을 분해죽겠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제미니, 도대체 이 곳에는 왜 온거야?" "그냥 두 사람 뭐하는가 구경하려고…." '호기심은 발견의 첩경이지만 몸을 망치는 첩경이기도 하다' 는 괴상한 말을 씨부렁거린 타이번은 우리의 순찰행렬에 제미니를 동반시켰다. 오후가 되면 우리는 산트렐라의 노래로 돌아온다. 타이번은 한 번도 똑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모험담으로 벌써 마을 꼬마들 과 주당들의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후에는 꼬마들에 둘러싸 여 있고 저녁에는 주당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난 조수 업무가 끝났으므 로 오후에는 양초를 마을에 돌리는 등의 평소의 일을 하거나 검술연습 을 하거나 한다. 말이 좋아 검술연습씩이나 되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의 창술연습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 날도 그렇게 순찰을 마치고 오후의 임무로 돌아가려던 참이다. 천둥소리? 설마. 난 겁에 질려서 그 고함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 다. 마을 동편의 야산쪽이었다. 순간 그 장소에 설치해둔 마법이 기억났 다. 근처를 지나가면 불꽃이 날아들게되어 있는 곳이다. 타이번은 날카 롭게 말했다. "제미니는 여기 있나?" "…예." 제미니의 화난 대답. "그럼 제미니는 아니군. 드디어 뭐가 걸린 모양인데?" "정말 귀신 같군요. 그쪽으로 들어올거라는 걸 어떻게?" "말했잖아. 나라면 들어올 위치라고 생각되는 곳에 설치했어. 자, 가보 자. 제미니? 우리 둘이 먼저 가볼테니까 성으로 가서 경비대를 파견시 켜줘. 우리들을 지원하도록 말이야. 하지만 저것이 양동작전일지 모르니 까 마을 자경대는 지원하지 말고 마을을 잘 지키게 하라고 말하도록." "너무 길어요!" "경비대는 야산으로 오고, 마을 자경대는 꼼짝말고 마을에 있으라고 전해." "알았어요!" 곧 제미니는 치마가 뒤집어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함소리가 들 려오는 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타이번이 날 말렸다. "뭘 생각하는거야? 장님 마법사와 애송이 전사가 전설이라도 만들어보 겠다는 거야? 천천히 주의하면서 가자. 경비대들이 따라오도록." "하지만 놈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그건 어려울걸?" 뭔 소린가 싶어 되물어보려는데 곧 저 멀리 야산 쪽에서 불꽃이 튀겼 다. 아니, 섬광이다. 어쨌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력한 빛이 번쩍 거렸다. 난 눈을 감았지만 타이번은 보이지 않으므로 느긋하게 말했다. "뭔 놈들인지 모르지만 뒤로 돌아 줄헹랑을 치고 싶을걸? 내 특기는 마 법의 연결이야." "그게 무슨… 허억!" 맙소사! 하늘을 본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구름이 야산쪽으로 모여들 고 있었다. 설마 벼락이 치지는 않겠지? 콰광! …흠. 벼락이 치는군. "저긴 아마 쑥대밭이 될거야. 왠만한 놈들이라면 기절해버릴걸." 그런데 타이번도 이번엔 틀렸다. 거친 포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왠만한 놈들이 아니군. 빨리 가자, 후치!" "옙! 이거 잡아요!" 난 바스타드를 내밀었고 타이번은 그것을 쥐었다. 난 그대로 타이번을 인도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린다고 하기는 하지만 장님인 타이번이 얼마나 빨리 뛰겠는가. 우리는 구보 정도의 속도로 달려갔다. 마을을 벗어나자 포효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 동안 놈들도 달려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놈들은 아마 마을을 기습할 계획이었지만 타이번의 부비트랩에 걸려 기습하는데 실패하자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난 멀리서 달려오는 그것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다리가 안 움직 인다! "종류가 뭐야?" "황소 대가리에 몸은 사람 몸인데 7 큐빗도 넘겠는데요." "아이구 맙소사, 미노타우르스(Minotauros)잖아? 얼마야?" "열…둘! 열둘이요!" "우라질! 이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마을이야! 미노타우르스가 한 놈도 아니고 열둘이나 나타나다니!" 미노타우르스들은 우리들을 발견하자 거대한 배틀 액스(Battle axe)를 들고 포효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창피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사타구니 가 뜨뜻해질 것 같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저 배틀 액 스는 넓이가 내 가슴만하고 길이도 거의 내 키만큼은 되겠다. 사람이 쓴다면 그레이트 액스(Great axe)겠지만 미노타우르스가 들고 있으니 배틀 액스다. 저런걸 한손으로 휘두르고 달려오다니. 놈들은 타이번의 마법에 걸려 군데군데 상처를 입고 어떤 놈은 벼락에 맞았는지 검게 그 을려 있었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와 방향!" 난 재빨리 타이번의 오른손을 잡아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350큐빗, 아니, 330큐빗, 아니아니 300큐빗…" 제기랄! 달려오고 있으니 거리가 계속 바뀐다. 타이번은 씩씩거렸다. "제기, 눈이 안보이니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같은 초급 주문도 못쓰잖아." 타이번의 몸에 있는 문신들이 번쩍 빛을 내었다. 미노타우르스들은 놀 랐지만 더욱 발광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놈들도 아마 마법이 완성되 기 전에 우릴 후려칠 모양이다. 정말 타이번을 내버려두고 뒤로 돌아 달려가고 싶다. 보이지도 않는 타이번이 정말 부러웠다. 타이번은 스펠 을 읊조리다가 두 팔을 앞으로 쫙 뻗었다. "에라, 내 눈이 안보이면 다른 눈으로 하지 뭐!" 그 때였다.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던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가 도저히 시간 내에 달려오지 못할 것 같자 그 배틀 액스를 집어던졌다. 놀랍게 도 그 묵직한 배틀액스는 곧바로 타이번에게 날아왔다. "죽어보자!" 나는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바스타드 소드를 뽑으면서 칼 집은 던져버리며 바로 아래로 내리쳤다. 쾅! 아이고, 내 손목! 간신히 배틀액스의 궤도는 바꿔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정말 기적에 가깝 다. 하지만 그런 속도로 날아오던 그 엄청난 것을 치고나니까 팔이 통 째로 떨어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타이번은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뭐 가 보이냐!) 캐스팅을 마쳤다. "적을 분쇄해! 발록(Barlog)!" 뭐냐, 이건! 검은색으로 번쩍거리는 10 큐빗짜리 덩치가 앞에 나타났 다. 나는 주저앉아서 지독한 유황 냄새를 풍기는 검은빛 연기에 휩싸인 10 큐빗의 인간형 괴물을 바라보았다. 머리엔 미노타우르스가 형님이라 불 러야할 정도로 장대한 1큐빗짜리 뿔이 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놈이 쓰고 있는 투구의 뿔이었다. 온 몸은 그야말로 칠흑의 갑옷이다. 너무나 검어서 도대체 옷인지 살갗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발록이라 는 그 놈은 왼손에 거대한 클레이모어(Claymore)를 들고 있고 오른손엔 거대한 스커지(Scourge)를 들고 있었다. 스커지는 9 마디의 캣오나인테 일(Cat o'nine tail)인데 곳곳에 날카로운 금속 스파이크가 달려 있다. 저걸 한 번 후려치면 가죽이 깨끗이 날아가겠다. 그 발록이라는 놈이 등을 돌리고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찰라, 놈은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얼굴이 없었다! 투구 아래에 보이는 것은 검은 칠흑 뿐이다. 내가 간혹 악몽 속에서 보는 그 무한대의 칠흑이었 다. "적은?" 발록은 타이번에게 질문하는듯 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목소리가 나오 는 것일까? 난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질겁했다. 타이번은 악을 썼다. "야이, 머저리야! 저 미노타우르스 아니면 뭐겠어?" "형식은?" "멸절!" 발록은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 뭐? 날아? 놈은 날아 가고 있었다. 등에서 갑자기 칠흑의 날개가 펼쳐지고 그대로 날아오른 것이다. 그 날개는 적게 잡아도 12 큐빗. 뭐 저런 답도 없는 놈이 다 있 냐? 그 놈은 우아하게 약 4큐빗 정도로 날아올라 그대로 미노타우르스 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쐐애액 하는 공기 가르는 소리. "쿠우우웃!" 미노타우르스는 포효하면서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하지만 발록은 가 벼운 동작으로 땅에 내려앉자마자 스커지를 휘두르더니 미노타우르스의 배틀 액스를 쥔 팔을 잡아내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스커지를 당겼다. 크직! 퀘아갓! 미노타우르스의 팔은 깨끗이 절단되었다. 놈은 오른손의 스커지를 다 시 휘두르면서 왼팔은 반대쪽으로 휘둘렀다. 왼손의 클레이모어는 단숨 에 미노타우르스의 허리를 날려버렸고 오른손의 스커지는 또다른 미노 타우르스의 목에 감겼다. 발록은 스커지에 감긴 미노타우르스를 통째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쿠우엑!" 발록은 고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스커지에 매달린 미노타 우르스를 악동들이 개구리 휘두르듯이 휘둘렀고 곧 주위에 있는 미노타 우르스들이 퍽퍽 튕겨나갔다. 발록은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오른손의 미노타우르스를 모닝스타(Morningstar)처럼 휘둘러 미노타우르스를 쓰 러트리고 발로 쓰러진 미노타우르스를 밟고 왼손의 클레이모어로 지팡 이질을 하듯이 쿡쿡 찔렀다. 장관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무서운 광 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시원스럽게 싸우는데? "저게 뭐야…?" 내 목소리가 아니다. 어느 새 달려온 경비병들이 우리 뒤에까지 와 있 었다. 경비병들은 하도 기괴한 장면을 보자 함부로 달려들진 않았다. 그 래서 난 빠르게 설명했다. "저 시커먼 놈은 타이번이 불러낸 놈이에요! 우리 편이죠!" 경비병들 중에 터너가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 편이란 말이지? 정말 우리 편으로 삼고싶진 않은 놈인데. 저건 발록이잖아?" "어? 터너, 저걸 알아요?" 경비병들도 터너를 바라보았다. 터너는 타이번을 보면서 말했다. "마법사님. 제가 보기엔 발록인데요? 채찍만 봐도 알겠는데, 맞습니 까?" "맞아." "그런데 어떻게 아비스의 발록이 우리를 돕고 있습니까?" "내가 불러냈다고 후치가 그랬잖아?" 터너는 입을 쫙 벌렸다. 경비병들과 나는 궁금해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터너는 그런 우리들은 본체만체 하고는 타이번에게만 말했다. "아니, 저건 정령도 아니도 악마잖습니까?" "어랏? 제법이군. 정령술도 알아?" "상식 수준으로…. 그런데 어떻게 저걸? 저건 소환하고 어쩌고 할 그 런 게 아니잖습니까? 인간처럼 그냥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맞아. 잠깐 아비스의 미궁에서 내가 여기로 옮겨온 거야. 소환은 아니 지. 공간 이동이야." "그런데 옮겨왔다고 저 놈이 왜 싸워주는 겁니까?" "약속 때문이니까. 인간 이외에 약속을 어기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 그 많은 옛날 이야기에서 악마가 왜 인간에게 꼬리를 잡히나. 계약, 즉 약 속 때문이지." "무, 무슨 약속인데?" "내가 원하는 놈을 박살낸다는 약속. 바꿔말하면 난 놈에게 피를 제공 하는 거지. 지금 신나게 미노타우르스들의 피를 받아내고 있을텐데." 어느새 발록은 미노타우르스들을 깨끗이 물리쳤다. 달아나는 놈들도 있었지만 발록은 타이번의 말대로 끝까지 따라가 '멸절'시켰다. 사람이 라면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하나를 상대할까말까한 그 미노타우르스를 저렇게 간단하게 처리하는군. 마지막 미노타우르스가 처절한 비명(그 비명의 반은 피였다.)을 쏟아내 자 발록은 그대로 돌아섰다. 마치 자기가 한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투였다. 발록은 후드득 날개를 펼치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병사들은 기겁성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나 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발록은 타이번 앞에 내려서더니 뒤의 병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허공에서 말 소리가 들려왔다. "저 놈들도?" 그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파랗게 질려버렸지만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 했다. 타이번은 당황해서 말했다. "뭐? 이놈아. 아냐!" "그럼 돌려보내다오." "뭐야? 급한 일이라도?" "내 미궁에 들어온 모험자들이 있다. 그 놈들을 부수고 있었는데 네 놈이 날 부른 것이다." "그래? 흠… 갑자기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 스펠이 생각나지 않 는데." 갑자기 발록은 미노타우르스의 피로 젖어있는 그 스커지를 위로 확 쳐 들었다. 난 숨막히는 비명을질렀다. 발록은 그대로 타이번을 내려칠 자 세로 서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타이번은 계속 히죽거릴 뿐이었다. 발록은 팔을 들어올린채 그렇게 서 있었고 병사들은 죽을 각오로 달려 들 태세였다. 그러나 발록은 잠시 후 스커지를 다시 내렸다. "생각해내라." "네 목소리 듣자니 돌아가면 그 모험자들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인가 보군?" 발록은 잠시 말없이 타이번을 내려다보더니 침울하게 말했다. "잘 들어라, 타이번. 넌 옛날의 타이번이 아니다. 마법사가 눈이 보이 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어떻게 아직껏 살아남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발록의 말소리는 마치 형체를 지닌 것이 피부를 스치는 것처럼 나와 병사들을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타이번은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옛날의 너에게 약속했을 때는 어쩔 수 없어서였다. 피 대 폭력. 그렇게 나쁜 계약도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의 넌 내 손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죽일 수 있다." "그런데?" "날 돌려보내다오. 내가 아직껏 너에게 약속을 지키고 있으니, 너도 날 명예롭게 대해다오." 타이번은 싱글거리며 스펠을 외웠다. 그는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꺼져, 재수없는 악마 녀석. 그 모험자들 지금쯤 도망갔겠지." 발록은 나타났을 때처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사라졌다. 역시 지독한 유황냄새가 풍겼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3. 발록이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들이 있는 들판에 정상적으로 태양이 내 리쬐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록이 있는 동안에는 해가 비치고 있어도 마치 한밤 같았다. 어쨌든 난 놈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심하고 기절할 자세를 취했지만 타이번은 날 불렀다. "가자, 후치. 미노타우르스들의 시체를 정리해야지. 그리고 놈들이 터 뜨린 마법도 다시 걸어둬야하고." "타이번… 나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이지도 못하겠어요." "이런 불성실한 조수를 봤나. 확 갈아치워버릴까?" "뭐예요? 누구 때문에 당신이 살았는데!" "응? 무슨 이야기야?" "아까 당신이 캐스팅할 때 미노타우르스가 도끼를 던졌다고요! 그걸 내가 막아내지 않았으면 당신은 예전에 골로 갔어!" 타이번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이봐, 이 근처에 정말 배틀 액스가 있나?" "하나 있는데요." 터너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튕겨낸 배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그의 표 정이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굉장한 무겐데?" "팔 부러질 뻔했다니까." 타이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거, 후치가 내생명의 은인이군? 좋아! 원하는 걸 말해봐. 그럼 들 어주지." "정말요?" "하지만 황당한 소원을 말해버릴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우선 일을 하자고. 시체 더미에 모여드는 건 파리만이 아니지." 우리는 발록이 저질러둔 참극의 현장으로 다가가서 미노타우르스들의 시체를 모아 태워버리고 그 무기들을 수거해왔다. 미노타우르스의 배틀 액스는 인간이 쓰기엔 너무 거대했다. 아마 몇 개는 전리품 삼아 놔둘 테고 나머지는 용광로에 집어넣어 재생하여 쓸 것이다.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더미는 엄청나서 불은 꽤오랫동안 타올랐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 와서 구경한 다음에야 불길은 사그라들었다. 썩 괜찮은 일이었다. 나는 동네 소녀들의 영웅이 된 것이다. 도대체 말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난 스펠을 외우느라 완전 히 무방비상태였던 타이번을 목숨을 걸고 지켜낸 전사가 되어버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죽었다깨도 빗발처럼 날아드는 10개 의 배틀액스를 쳐낼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팔이 10개 냐?)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제미니는 갑자기 비상상태에 들어갔다. 소녀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접근하자 제미니는 완전히 울상이 되어 날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나 에겐 주위의 소녀들에게 별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뭐가 좋을까? 음, 자동 양초제조기를 만들어달라고 할까?" "후치… 그것, 너무 조야하잖아?" 제미니의 말이 맞다. 어, 이거 정말 문제네. 타이번은 내게 소원을 말 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소원을 말하면 좋을까? 제미니가 의견을 제 시했다. "그냥 간단하게 돈을 달라고 하면 어때?" "돈? 싫어. 폼이 안나. 세상에 공주를 구출한 용사가 돈을 달라는 것 봤어?" "그건 이야기잖아." "그래도 싫어. 어디 보자. 내 검에 마법을 걸어달라고 할까?" "그것도 옛날 이야기네. 마법검으로 뭐할건데?" "응? 그, 글쎄?" 그러고보니 내가 마법검을 가졌다고 해서 그걸로 뭐 뚜렷하게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야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고 아마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계속 영주님과 그 자손들에게 초나 상납하게 되겠지. 그리고 정말 재수가 없다면 제미니와 결혼하여 자식에게 초 만드는 거 나 가르치겠지. 어쨌든 그 어느 부분에 마법검이 들어갈 곳은 없다. "에이! 모르겠다. 힘이 세지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제미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힘이 세면 편하잖아. 무거운 것 드는 것에서부터 기름부대 나를 때도 편하고, 뭐 절대로 나쁠 건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팔굽혀펴기 하기 귀 찮았는데." "그래도… 너무 동물적이야." "그러냐? 그럼 어때." 난 더 이상 생각해내기 귀찮은 참에 정말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려서 기뻤다. 난 그 길로 제미니와 함께 산트렐라의 노래에 죽치고 있는 타 이번을 찾아갔다. 타이번은 내 소원을 듣더니먼저 한참 웃었다. "이유가 뭔데?" "짐 나를 때도 편하고, 일할 때도 편하고." 타이번은 내 이유를 듣더니 또 한참 웃었다. 뭐가 우스운 거야? 타이 번은 눈물을 좍좍 흘리며 웃더니 나에게 자기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타이번의 방에서 가방을 가져다주자 타이번은 직접 그걸 열고 뒤적거 리기 시작했다. 타이번은 손끝의 감각으로 찾으면서도 꽤 수월하게 자 기가 찾는 물건을 찾아내었다. "그거 너 가져."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올린 물건이 희안하게 생긴 장갑이었다. 이게 뭐야? 무슨 약이라도 주는 줄알았더니 왠 장갑이야? 그것은 검정 색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손등 윗부분과 손바닥 쪽으로는 작은 은 빛 쇠고리들이 연결되어 표면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쇠고리인데다가 손등과 손바닥 이외의 부분은 자유로워서 기사들의 건 틀렛(Gauntlet)처럼 손을 움직이는데 불편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주 위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 장갑 을 양손에 찼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지만 평 소보다 다른 이질감 이외엔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난 타이번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뭔데요? 별로 달라진게 없는데?" 타이번은 끼득거리더니 제미니에게 펍 한 귀퉁이에 있는 장작을 가져 오게 했다. 제미니가 하나 가져다주자 타이번은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양쪽으로 당겨봐." 뭔 말이야? 꺽는 것도 아니고 당겨보라니. 난 얼떨떨한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고 양쪽으로 당겼다. 장작은 두 개로 나눠졌다. "히이익?" 헤너 아주머니의 감탄사였다. 난 내가 한 일이 믿어지지 않아서 양손 에 든 장작개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뭐, 뭐야, 이거?" "흠, 이번엔 양손에 힘을 줘봐." 타이번은 그렇게 말했다. 난 얼떨결에 손에 힘을 주었다. 파직! 장작은 단숨에 갈라지며 이쑤시개처럼 되었다. 난 그 장작개비들 을 쥐어짜버린 것이다. "후에엑?" 이건 제미니의 감탄사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와 그 쪼개진 장작개비들을 바라보았다. 주당들 중에 하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가 들고 있던 청동 술잔을 내밀었다. "이봐, 후치. 이것 한번 양쪽으로 당겨봐." "안돼!" 해너 아주머니의 제지는 늦었다. 난 어느 새 그 술잔을 깨끗이 반으로 나누어 놓았다. 마치 무슨 사과 쪼개듯이 청동제 술잔을 쪼개버린 것이 다. 그 모양을 보던 주당들은 모두 질겁한 표정이 되더니 술잔을 잡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어림없다. 술잔이 무슨 천쪼가리도 아닌데 양쪽으 로 갈라질 일은 절대로 없다. 집어던지거나 망치로 후려쳐 우그러뜨리 는 거라면 몰라도 그걸 정확하게 반으로 쪼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한 것이다! "뭐, 이런 괴물딱지 같은 장갑이…?" "명심해. 그건 물리적인 힘만 좋아지게 만드는 거야. 건강이나 정력같 은 것과는 상관없는 거야. 그러니 아가씨들 기쁘게 해 줄 일은 없지." 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제미니에게 꼬집혀버렸다. 제미니 는 타이번에게 악을 썼다. "타이번!" "알았어, 알았어. 어쨌든 후치 네가 말한대로 짐 나르는 데는 썩 좋을 거야. 네 팔은 이제부터 살아있는 곰에게서 심장을 뽑아낼 정도의 힘을 낼테니, 잘해봐. 빵을 가루로 만들어버려 배를 굶게되는 멍청한 짓은 하 지 말고 먹을 땐 그거 벗어." "아, 예… 그런데 이거 꽤 귀한 것 아녜요?" "아무리 귀해도 내 목숨만큼 귀하진 않아. 부담없이 가져버려." "그럼 부담없이 가져버릴꺼예요? 돌려달라고 하기 없기?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됐지? 나원참. 소원을 들어준 일이 많지는 않지 만 이런 단순무식한 소원 들어주기는 또 처음이네." "제가 해드릴께요!" "맡겨줘!" "내가 해줄까?" "이리줘! 그 정도쯤이야!" 난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내 무지막지한 힘으로 마을 사람들을 돕 기 시작했다. 나뭇짐 들어날라 주는 일에서부터 공사장에서 기둥 세우 는 일, 우물가에서 두레박 끌어올리는 일까지. 그런데 힘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나뭇짐을 들어올리면 나뭇짐이 부스 러져버렸고 기둥을 땅에 꽂으면 기둥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 속 에 박아놓았다. 우물에서 두레박을 끌어올릴 때는 두레박이 튕겨지듯이 솟아올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벼락을 끼얹었다. "후치! 제발 부탁이니 그 장갑 좀 벗고 다닐 수 없겠냐?" 이건 너무 가혹한 부탁이다. 이런 기분좋은 일을 그만두라니. 하지만 나는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하늘에 살짝 집어던졌다가 100 큐빗 정도로 솟아오른 아기를 간신히 받아내고는, 노랗게 질린 그 어머니에게 살해당 할 뻔한 다음 그걸 벗을 수 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바로 그날 저녁 산트렐라의 노래에선 타이번이 껄껄 웃었다. 내가 풀 죽은 얼굴로 그 날 하루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한 상황보고를 했던 것이 다. 그 옆에 모여있던 주당들도 배를 잡으며 웃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겠다. 으헷, 으헤헤헤!" 타이번은 아예 데굴데굴 구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난 불퉁거리면서 말했다. "이거 어떻게 힘조절 하는 방법은 없어요?" "이 녀석아. 자기 힘을 다루는 방법은 자기가 터득해야지. 누구나 스스 로 훈련하면서 힘을 얻게 되고, 바로 그 훈련 과정이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힘에 대한 조절장치가 되는거야. 그런데 넌 아무런 훈련 없이 힘 을 얻었으니 그 고생을 하는 수 밖에." 흠. 상당히 옳은 말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하지만 좀 문제라고요. 이걸 조절하려면 계속 이 힘을 써 야되는데 힘을 쓸 때마다 사고가 일어난다고요." "이 녀석아, 그거야 네가 돌대가리니까 사고가 일어날 일에만 손을 대 니까 그렇지. 할 수 없군. 이 마을이 박살나면 안되니까 내일부터 내가 좀 도와주마." 다음 날,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산트렐라의 노래에 찾아갔다. 타이번은 분명 도와준다고 했으니 아마 날 지도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마법사의 제자라… 어감이 참 좋군. 그는 장님인데다가 마법사이긴 하 지만 그 무시무시한 악마 발록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이니 아마도 장 님검법의 달인일지도 모른다. 장님검법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 지만 옛이야기에 보면 흔히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난 무장을 완전히 갖춘채 산트렐라의 노래에 찾아갔다. 마을 대로를 걸어가는 동안 나를 보자마자 슬금슬금 달아나는 사람들 을 보며 한숨을 쉬어야했다. 쳇. 어쨌든 산트렐라의 노래에 들어가자 타 이번은항상 그랬듯이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타이번! 가죠!" "알았다. 원 참, 오늘은 왜 이렇게 신난거야?" 그리고 타이번과 나는 매일 그래왔듯이 먼저 성으로 갔다. 난 신난 표 정이었지만 타이번은 하품을 하면서 느릿하게 걸었다. 성에 도착하자 항상 그렇듯이 경비병들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를 쑤시면서 나오고 있 었다. 타이번은 말했다. "도와주기로 했었지? 터너. 이봐, 터너 있는가?" 터너가 달려왔다. 타이번은 발소리만 듣더니 터너가 말하기도 전에 말 했다. "부탁인데 연병장 좀 정리해주겠나?" "예? 무슨 일로…" 타이번은 터너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고 터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저 녀석 대가리로는 그렇게밖에 안돼. 자네도 어제 저 녀석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원참. 성격도 괴팍하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타이번은 그대로 팔짱을 낀 채 기다렸다. 난 멀뚱히 터너를 바 라봤고 터너는 그런 나를 안쓰럽다는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 수 없지. 이봐! 연병장에 있는 경비대원, 전부 4열 횡대로 연병장 왼편에 모여 앉아." "왜?" "마법사님께서끝내주는 거 구경시켜 주신댄다." 병사들은 기대섞인 표정으로 물러나 정렬해 앉았다. 터너는 말했다. "준비됐는데요." "그래? 후치. 연병장 한가운데 가서 서도록." 난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시키는대로 연병장 가운데 섰다. 와! 외로워 라. 상당히 주위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위치였다. 타이번은 보이지도 않 는 주제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두 손을 모으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뭐 하는 거지? "우와! 저것봐!" 병사들은 감탄한 표정이었다. 타이번이 스펠을 외자 곧 내 앞의 땅에 서 뭔가가 땅을 빠르게 긁고 지나가는 것처럼 흙이 파바박 튀고 돌멩이 가 날렸다. 난 놀라서 뒤로 몇발자국 물러났다. 이윽고 땅에는 도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도형은 거대한 원형이고 그 안에는 복잡한 도형 이 그려졌다. 도형이 완성되자 곧 그 도형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 고 유황냄새가 났다. 응? 이건 발록을 불러낼 때의 그 냄새인데. 설마 또 발록을 불러내는건가? 난 눈이 튀어나올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 보았다. 빛은 둥근 원형에서 그대로 둥글게 뻗어나오다가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사라져버렸고 빛이 사라지자 그 안에는 뭔가가 서 있었 다. 샌슨이다! 아, 아니, 오우거다! 무지막지하게 벌어진 어깨, 잘 빠진 허리, 내 허리통만한 허벅지. 정말 온 몸에 '파괴'라고 써붙인 것 같이 생겼다. 장대한 체구는 적게 잡아도 6큐빗. 그런데 어깨넓이는 거의 3 큐빗은 되어보였다. 추악하게 생긴 머 리통은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그 어깨 위에 있으니 작아보였다. 손에는 칼인지 도끼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희안하게 생긴 검을 들고 있다. 코 페쉬(Khopesh)처럼 보이는데. 보통 검과 손잡이는 따로 만들지만 저 코 페쉬는 검과 손잡이가 완전히 하나의 쇠붙이다. 날붙이라기보다는 그저 힘과 무게에 의한 파괴력을 살리는 무기. 정말 오우거에게 딱 어울리는 무기다. 난 참으로 짧은 순간에 이토록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타이번은 터너 에게 물었다. "나온 거 같은데, 맞아?" "마, 마, 맞는데요, 정말 저걸 불러낸 겁니까?" "됐군. 후치? 잘해봐." 뭐, 뭐, 뭐라고? 저게 무슨 말이냐? 오우거에게 뭘 잘해보란 말이지?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지?" "자, 잠깐만…" "참, 한 가지 말 안해준게 있는데 말이야, 그 장갑 OPG야." "OPG?" "오우거 파워 건틀렛(Ogre Power Gauntlet)" "히엑!" 맙소사!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카알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네드발군. 몬스터와 인간은 자기 정체성 구현에서조차 차이가 나요. 인간, 자네를 볼까? 어느날 자네가 대로를 걷는데 자네와 똑같이 생겼 고 똑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봤다고 생각해봐. 그리곤 자넬 보고는 놀라서 너 누구냐는 식으로 물어온다면, 기분이 어 떨까? 미쳐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탄력적이기 때문에 놀 람이 사라지면 먼저 이게 어떻게 해서 일어난 일인지 생각하게 될 거 야. 자네에게 자네도 모르는 쌍동이가 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몬스터는 정신이 인간만큼 탄력적이지 못해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 정 체성을 위협당하면 상대를 맹목적으로 죽이려들어. 그래서 몬스터의 능 력을 가진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야. '샐러맨더(Salamander)의 심장'을 가진 자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 속에 서도 안심이지만 샐러맨더를 만나면 위험하지. 그리고 '오우거 파워 건 틀렛'을 가진 자는 고렘과 힘을 겨룰 수도 있지만 오우거를 만났다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된다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4.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그 오우거는 놀란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노 려보았다. 순간 그 놈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크르르르… 그 건틀렛!" 돌려드릴께요, 미안해요, 난 이거 OPG인 줄 몰랐어요, 저 장님 마법사 가 준 거예요, 저 마법사 좀 보세요,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것처 럼 생기지 않았나요? 그에 비해 볼 때 난 어때요, 이처럼 순진무쌍한 얼굴을 보셨어요? 왜 말이 한 마디도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거지? 오우거는 두 말 할 필 요 없다는듯이 코페쉬를 들어올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쿠와아악!" "타이버어어언! 당신, 주우욱일거야아아아!" 오우거는 OPG를 가진 나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코페쉬를 휘두르기 시 작했다. 내가 사타구니를 적시지 않고 대신 바스타드를 뽑아낸 것은 내 가 생각해도 참 대견한 일이다. 코페쉬는 지독하게 느린 검이었기에 난 간신히 그걸 볼 수도, 막아낼 수도 있었다. 쾅! 이게 칼 부딪히는 소리 냐? 온몸의 관절이 부러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타이번은 뭐가 좋은지 킥킥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터너는 그저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모두 가만히 구경만 해라. 그리고 옆으로 전달." 터너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왼쪽의 병사에게 뭐라고 말했고 차례차례 전달되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놀란 표정이 되어서 한 마디씩 하기 시작 했다. "원래 마법사란 괴팍한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음. 죽으면 할 수 없고 살아나면 잘 가르친 셈이라는 거군?" "후치가 죽을 정도면 나서라고?" "음, 후치. 우리 편하도록 죽더라도 상처는 좀 입혀봐." 어처구니가 없어진 내 입에선 참으로 지독한 저주의 말이 쏟아져나왔 다. "당신들 모두 첫날밤에 불능에나 걸려버려어어어!" 병사들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런 개같은! 죽을 정도면 도와준 다고? 그럼 지금이잖아? 오우거는 잠시도 사정 봐주지 않고 내 몸을 가지고 몇 동강까지 낼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는듯이 달려들었고 난 정신없이 팔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내었다. 냉정한 관찰자가 본다면 상당히 멋진 장면이었겠지만 난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당하고 있는 당사자였다. 게다가 여전히 힘조절은 되지 않아서 힘껏 오른쪽으로 팔을 휘두르면 내 몸 전체가 오 른쪽으로 뱅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괴상한 동작을 취했 기에 오우거의 코페쉬는 엉뚱한 곳을 가르거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 바스타드에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 코페쉬를 막아낼 때의 느낌이란 … OPG가 아니었다면 내 팔은 예전에 부러져버렸겠지만 나와 오우거는 현재 힘은 똑같다. 응? 그래. 힘은 똑같잖아? "이 자식아! 너와 난 똑같은 힘이다! 그렇다면… 죽어보자!" "쿠앗!" 우하, 놀래라. 난 내가 저지른 일에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난 오우 거의 허리에 끔찍한 검흔을 선사했던 것이다. 피가 뿜어져 나오자 오우 거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내가 조금만 경험있는 전사였다면 그 순간 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겠지만 난 얼이 빠진채 그걸 보고만 있었다. "후치, 이 자식아! 지금 달려들어야지!"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이미 자세를 바로잡고는 코페쉬를 가슴 앞에 세워들고 날 겨냥하고 있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할 수 없이 나도 오우거와 똑같이 바스타드를 앞에 세워들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무지막지한 칼부림에 이어 싸움은 두번째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 와 오우거는 신중하게 발을 움직이며 둥글게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움 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신중한 건 오우거 쪽이었고 난 울상이 된 채로 그저 오우거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 표정만 빼놓으면 여전히 멋진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은 감탄했다. "어쭈! 제법이다, 멋진 발놀림인데?" "발을 땅에 더 바싹 붙인채 미끄러지듯이 움직여라!"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어! 당신들 모두 살인 공범이야!" "개가 짓나? 닭이우나?" "타이번 부탁이니까 우린 도와주지 못해. 네가 죽을 정도면 도와줄께." "야야, 우리 후치가 만일 재수 없어서 죽으면 누가 제미니에게 그 사 실을 알릴 것인지나 정할까? 제비뽑기 어때?" "앗! 난 싫어. 난 제비뽑기에 약하다고!" 저게 도대체 사람의 정신을 가진 놈들이냐? 내 헬카네스에게 맹세코 오우거에게 죽지 않는다면 저 병사들 가만 두지 않겠다. 아니, 지금 그 렇게 해버릴까? "이봐요, 오우거씨. 저 병사들 먼저 손 좀 보고 당신과 싸우면 안될까 요?"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하늘을 가를듯이 내리쳐진 코페쉬였다. 이잇! 그건 준비하고 있었어! 난 팔을 휘두르면 내 몸이 통째로 돈다는 것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치며 오우거의 코페쉬를 튕겨내며 그대로 상체를 한 바퀴 더 돌려 다시 아래 에서 위로 올려쳤다. 오우거는 턱 바로 아래에 지나가는 내 바스타드에 질겁하며 물러났다. 검이 왜 짧아진거야! "우와! 멋지다, 후치!" 나는 헉헉거리며 물러났다. 사실 내가 해놓고도 의심스러운 동작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했나? 그 증거는 곧 나타났다. 허리가 부러질듯이 아 파온 것이다. "우… 이거 장난이 아니다." 허리가 아릿해지니까 정말 온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우거도 턱이 쪼개질뻔 하자 씩씩거리면서도 달려들지는 않았다. 코페쉬가 워낙 느려 일격에 날 맞추지 못하면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 다. 오우거는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앗! 안돼! 저 놈은 나보다 팔이 훨 씬 길단 말이야! 적당한 거리를 주면 내가 더 불리하다. 그렇다면 내 거 리로 맞추자! "에에에랏!" 난 앞으로 달려들었다. 코페쉬보다 더 안쪽, 그러니까 오우거의 팔거리 안에서라면 저 놈은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샌슨이 트롤을 상대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을 봤다. 난 바스타드를 마구 휘저으며 돌격해갔다. 하지만 놈은 나보다는 훨씬 능숙했다. 다리가 날아온 것이다. 난 복부 에 성의 기둥만한 다리를 맞고는 뒤로 구겨지듯이 날아갔다. 땅에 뒹굴 던 내 눈에 하늘로 솟아오른 오우거의 그림자가 역광 속에 시커멓게 떠 올랐다. 그 놈은 그대로 코페쉬를 내리칠 모양이다. 하지만. "죽어보자!" 놈이 아무리 잘났다해도 공중에선 몸을 못움직인다. 그리고 두 점을 잇는 최단선은 직선이다. 난 허리를 튕기며 바스타드를 곧게 찔러올렸 다. "쿠우욱!" 코페쉬가 내 머리를 쪼개기 직전, 난 오우거가 떨어져내리는 힘까지 이용하여 그 놈의 복부를 관통시켜버렸다. 오우거는 입에서 피를 흘렸 다. 해냈구나! 그러나 오우거는 바스타드에 찔린채 다시 코페쉬를 들었다. 아악! 내 검은 오우거의 몸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뭐하는거야? 지금 도와줘야지! 엇, 시간이 없다! 오우거는 괴성을 지르며 코페쉬를 내리쳤다. "제미니이!" 안녕, 절친했다기보다는 웬수일 경우가 더 많았던 친구들이여. 안녕, 사랑했다기보다는 끔찍스러웠던 내 17년 인생이여. 안녕, 내 솥과 양초 냄비들아. 이젠 누가 너희들을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닦아주지? 초장이 는 초장이답게 살아야 했어. 마법사의 제자가 왠 말이냐. 에, 내가 죽어 본 사람으로서 죽음에 대해 설명하겠는데, 죽음이란… 낄낄거리는 병사 들의 웃음 속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것? 난 바스타드로 하늘을 찌른 모습 그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병장 에 앉아 있었다. 병사들은 이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터너가 헉헉 거리며 말했다. "헥, 우헥, 요 녀석아. 가짜다." 가짜란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고 진짜가 아니면 그건 가짜인데… "일루젼(Illusion)!" 난 땅바닥에 털썩 드러눕고 말았다. 타이번, 타이번! 이 망할 늙은이가 날 속였구나! 아이고 억울해, 억울해 미치겠다. 병사들은 본격적으로 날 놀리기 시작했다. "들었어? '제미니!' 정말 멋지더군." "맞아. 야야, 부럽다. 난 누구 이름 부르며 죽지? 어머니?" "이봐, 후치. 그 땐 그래선 안돼지. 나의 영혼의 열쇠를 가지신 고귀한 레이디 제미니여! 이렇게 말했어야지." 난 눈을 번뜩이며 일어났다. 병사들의 낄낄거림이 차츰 멎어갔다. 이윽 고 병사들은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후치?" 난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은 죽을 때 누구 이름 부를거지?" 돌격 앞으로! 병사들은 연병장을 마구 질주하기 시작했고 난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도망쳐 다니 면서 날 놀려댔다. "제미니! 네 나이트가 우리를 죽이려 들어. 도와줘!" "우아아아! 그만 두지 못해!" 왜 OPG는 다리 스피드는 올려주지 않는거야! 그날 아침, 난 매일같이 달리기로 단련된 병사들을 쫓는 것이 예사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앗!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네드발경이다!" "크아아앗!" 동네 꼬마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내 꼴이 너무 한심하다. 입이 문제야. 어쩌자고 그 때 그 이름을 불러버렸나. 아마 난 적어도 석 달은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가 될 것 같다. 서점에서 카알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로지 카알만이 그것을 서점 이라고 부르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잡화점이라고 부르지만. 잡화점 주 인 믹은 방랑자나 여행자들로부터 물건값 대신, 혹은 여행경비를 만드려 고 파는 책을 모은다. 그는 책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히 높은데, 왜냐하 면 글을 잘 못읽기 때문이다. 어쨌든 카알은 믹에게서 그런 책들을 다시 사모으며, 믹의 잡화점을 '서점'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불러주… "여, 네드발경!" …어쩌면 평생일지도 모른다. "카알! 그만 좀 해요!" "글쎄. 생명의 위기에서 외친 자신의 진심을 부정하지는 말게나." "그 때 난 돌았어요! 미쳤다고요! 아니, 나같이 머리가 나쁜 놈은 간혹 엉뚱한 말을 한다는 것도 잘 아시잖아요?" 꼭 이렇게 나 스스로를 비하해야 되나? 카알은 빙긋 웃으며 내 옆에 있던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타이번. 오늘도 그런 훈련입니까? 그럼 구경하고 싶은데 요?" "좋을대로. 우리 뒤의 이 굉장한 행렬이 보이지 않는가?" 사실 그렇다. 우리 뒤로는 일군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을걷이도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고 내 훈련은 아 주 멋진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나와 타이번이 산트렐라의 노래를 출발하면 곧 '야!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네드발경이다!' 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한 두명씩 그 뒤에 따라붙는다. 아 무리 그래도 피크닉 바구니까지 챙겨들고 나오는 것은 또 뭐냐? 카알도 책을 구하러 왔다가 그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기분좋 게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그러자 곧 양조장 막내인 미티가 끼어들었다. "이봐요, 카알? 어디 거시겠어요?" "걸다니?" "오늘은 후치가 누구 이름을 부르는지 말이에요. 내기예요. 현재 제미 니가 압도적으로 높으니까 다른 이름을 선택하면 배당이 높을텐데. 요 즘 계집애들이 후치에게 알랑거리면서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꼬리치 는 것 아세요?" 카알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고 난 미티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 다. 하지만 미티는 태연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야, 미티. 그런데 오늘 후치가 확실히 죽는 것 맞아?" "확실해요. 타이번은 오늘 키메라(Chimaera)를 불러낸다고 했거든요." 미치고 환장하여 팔짝팔짝 뛰다가 심장마비로 요절하시겠다. 타이번은 힘조절을 가르쳐준답시고 매일같이 몬스터가 많이 보이는 우리 마을에 서도 제대로 보기 힘든 괴물들의 일루젼을 불러냈다. 일루젼이니까 내 가 죽을 일은 없지만 싸우는 동안은 정말 실감나게 덤빈다. "좀 점잖게 코볼드(Kobold)같은 거나 불러내면 안되요?" "넌 OPG를 가졌잖아. 비슷하게 맞춰야지." "키메라가 나랑 비슷하기나 해요?" "죽는 일은 없는데 뭐가 불만이야?" "기분이 더럽단 말이에요!" 타이번은 히죽거릴 뿐이었다. 정말 죽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의 기분 은 더럽다. 가고일의 발톱에 맞아 나뒹굴다가 하늘을 덮으며 날아드는 가고일을 볼 때의 느낌이나, 휴리아(Furia)의 뱀꼬리에 칭칭 감겨서 내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내 얼굴을 스치는 휴리아의 숨결을 느낄 때의 그 끔찍스럽고 역겨운 느낌은 말로 표현이 안된다. 아, 여기 서 내 변호도 좀 해야겠다. 난 결국 그 가고일의 머리를 뎅겅 잘라버렸 고 휴리아의 여자 상체…는 좀 보기가 낯뜨거워서 등 뒤의 날개를 뜯어 버렸다. 일루젼인데 뭐가 겁나냐? 상처도 다 환각이라서 실제로는 아무 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타이번은 키메라의 일루젼을 불러낸다는 것이다. 맙소사. 그냥 죽여라. 품위있게 죽게 해달란 말이야! 하지만 이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은 단체로 소풍이나 가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어 내 참담함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너무 그렇게 기분나빠 하지마. 너 이제 썩 잘하잖아." 제미니가 날 다독거렸다. 하긴 이제 내 힘에 내가 휘말려들어가는 일 은 별로 없다. 난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대로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다. 하지만 난 양초 만드는 초장이야! 훈련받은 전사가 아니라고. 아무 리 OPG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키메라와 싸울 수는 없어. "응? 무슨 소리지?" 타이번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난 타이번을 보았다. "급한 발소리, 병사인데. 무슨 일이지?" 과연 잠시 후 저 앞쪽에서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 말 대단한 청각이다. 병사들은 마을 사람들과 그 앞에 있는 타이번을 보자 더욱 황급히 달려오며 외쳤다. "타이번님! 급합니다, 위급환자예요!" 어라? 위급환자라니? "타이번, 업혀요!" 난 두 말할 것 없이 타이번을 업어들었다. 타이번 정도의 몸무게는 전 혀 무겁지 않았고 나는 달려가면서 외쳤다. "성에 무슨 위급환자예요?" 마을 사람들도 놀라서 화급히 달렸다. 병사들은 내 옆에서 등에 업혀 있는 타이번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 정벌군의 병사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부상이 심합 니다! 하멜 집사께서는 마법사가 아니면 고치기 어렵겠다고 어서 타이 번님을 모셔오라고…" 뭐라고? 정벌군이라니, 아무르타트 정벌군 말이야? 그리고 부상이라니, 그리고 병사 하나라니. 다른 사람들은, 지휘관들은 어떻게 되고 병사 한 명만이 왔다는 거야? 타이번은 내 등 뒤에서 음울하게 말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군."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5. 성에 도착하자 하멜 집사는 저택 현관에서 초조하게 우리들을 기다리 고 있었다. 하멜 집사는 내 등에 업힌 타이번을 보자 곧 현관문을 열고 우리를 홀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하멜 집사는 다른 사람들은 들어 오지 못하도록 했다. "환자는 안정이 필요하오. 궁금하겠지만 참고 있으시오." "잠깐! 집사 나으리! 한 명만이 돌아왔다니오! 그게 어찌된 일이오?" "잠자코들 있으시오! 천천히 설명하겠소!" "이봐요! 돌아온 건 누굽니까? 그건 말해줘야죠?" 하멜은 묵묵히 고개를 흔들며 타이번만을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다. 타 이번을 업고 있는 나를 보자 하멜 집사는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현 재 나는 타이번의 눈 역할 이외에 다리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 멜은 나도 들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하멜은 말했다. "카알. 당신도 들어가십시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이 들어가고나자 하멜 집사는 문을 쾅 닫고는 밖의 주민들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셋은 그것을 들을 겨를도 없이 병사들에게 안내되어 이층 으로 안내되었다. 내가 없었으면 타이번은 이곳을 빠르게 올라오기가 힘 들었을 것이다. 난 긴장을 억누를 수 없었다. 혹시 아버지일까? 제발 아버지이기를! 부 상을 입었다고는 했지만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 층 침실의 침대에 눕혀져 있는 것은 젊은 병사였다. 그것도 이름도 모 르는 수도에서 온 헤비 트루퍼였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이 어떠 해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안색도 별로 이상하진 않았고 땀을 흘리 거나 신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성의 하녀들이 시 트를 들어올리자 곧 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타이번의 질문에도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사는 창백하지만 그런대 로 안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가슴에서 복부까지는 참혹한 상처가 나 있었다. 여러 번에 걸친 상처가 아니라 단 하나의 상처였는데 드러 난 갈비뼈가 보일 정도였다. 타이번을 내려놓고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카알이 타이번의 손을 잡고는 병사에게 데려갔다. 난 어지러운 가운데 도 그 옆에 다가갔다. 타이번은 손끝으로 상처를 더듬었다. 병사는 눈살 을 찌푸리렸지만 별로 통증을 호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집사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마법사입니까?" "그래.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아니, 말할 새가 없군. 후치!" "예, 예!" "뜨거운 물 쯤은 벌써 준비되어 있겠지?" "옆에 있는데요." 나는 수건을 적셔 타이번에게 건네려다가 내가 직접 병사의 상처를 닦 았다. 타이번은 그새 캐스팅에 들어갔다. 내가 며칠 함께 있으면서 느낀 건데, 타이번은 부비트랩을 설치할 때처럼 간단한 주문을 말할 때는 문 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주문도 별로 외우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 만 거대한 주문, 그러니까 발록을 불러낼 때라든지 주문을 몇 개씩 연 달아 말할 때는 그 문신에서 빛이 났다. 그런데 지금 타이번의 문신은 굉장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하긴, 몸이 저 지경이니 주문도 엄청난게 필요할 것 같다. 그는 문신에서 빛을 내며 두 손을 그대로 병사의 상처 속으로 집어넣었다. 병사는 무표정하게 자 신의 상처를 헤집는 타이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번은 보지 못했지 만 나와 카알은 그 병사의 인내력에 졸도하고 싶었다. "대단하군요. 휴리첼 백작의 부하다운데." 카알은 내장을 바로 맞추는데도 아무런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 병사를 칭찬했다. 놀랍게도 병사는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게 인간인가? 끊어 지고 갈기갈기 흩어진 내장들이 타이번의 손에 의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보고 있는 내가 다 질릴 정도였다. 나는 노랗게 된 얼굴로 물러 났다. 타이번은 그 작업을 계속하면서 카알에게 말했다. "동맥은 안다쳤지만 근육이 문제로군. 카알, 준비 좀 해주겠나?"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하녀들 에게 실, 바늘과 함께 몇 가지 약초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걸 빨리 가져 오라고 명령했다. 카알은 내가 알기로 의학 서적도 꽤 읽는 편이지만 (그러니까 하멜 집사가 들여보냈겠지.) 지금 불러주는 약초들은 나도 잘 아는 흔한 것이었다. 상처가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그만큼 단순하다보니 까 약초도 단순해지는 모양이다. 하녀들이 황급히 사라지자 카알은 그릇을 꺼내어 끓는 물에 삶기 시작 했다. 하녀들이 약초 무더기를 가져오자 카알은 그것을 빻으려다가 나 에게 말했다. "네드발경 힘 좀 빌릴까? 저걸 가루로 만들어주게나. 손 씻고." 난 손을 씻은 다음 두 손으로 그걸 문질러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장갑 에 약초 가루가 많이 묻었지만 어쨌든 가루를 만들자 카알은 그것들을 섞어서 통째로 물에 타버렸다. 처방마저 단순한 것인가? 카알은 타이번 에게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좋아, 실과 바늘을 삶아." 카알은 벌써 실과 바늘을 끓는 물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타이번의 몸 에서 번쩍이던 빛은 사라졌고 그는 상처 속에서 손을 끄집어냈다. 병사 의 얼굴을 흘끗 보니 그는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타이번의 솜씨를 재미있다는듯이 감상하고 있었다. 맙소사… 타이번은 혀를 찼다. "이상한 상처군. 어쨌든 난 눈이 안보여서 안돼. 카알?" 카알은 앞으로 나서더니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던 하녀들 의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내 얼굴도 그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살을 뚫 고 지나가는 바늘의 번쩍거리는 빛은 사람 졸도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알은 묵묵하게 상처를 꿰매었고 병사는 자신의 살을 지나가는 바늘을 보며 마치 자기 옷을 만드는 재단사를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 았다. 카알은 병사를 보면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오?" "별 말씀을." 카알이 바느질을 마치고나자 타이번은 하녀들에게 붕대를 감으라고 지 시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난 의자를 가져다가 그를 앉혔다. "이상한 상처라고요?" "저 병사는 벌써 죽었어야 정상이야. 상처 꼴을 보니 나흘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가 없어. 인간의 잠재능력에 감탄해야 하 나?" 타이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듯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병사는 그 말 을 들으며 히죽 웃었지만 카알이 조제한 약을 마시느라 대답하지는 않 았다. 난 대야를 들고가 타이번 앞에 섰고 타이번은 손을 씻으며 말했 다. "손을 봤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내장은 꽤 상했어. 원상태까지는 못돌 아가. 제대로 못먹어. 그리고 근육도. 다시 검을 잡을 수 있는 걸 바라 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상처 때문에 보통 일을 하는 것도 어려 워. 흔히 그렇듯이 제대군인 걸인이 되는 거겠지." 그 때 카알이 말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타이번은 못보셨지만 꽤 신분이 높은 분입니다. 문장이 든 반지를 하고 계시는군요." 병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타이번이 냉큼 말했 다. "그래? 귀족가의 골칫거리 환자가 되겠군." 병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타이번은 계속 앞뒤없이 말했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 나는 침을 삼켰다. "저런 상처는 무기에 의해 나는게 아냐. 아무르타트가 뭔가 전할 말이 있어서 저 병사 하나만을 반병신 만들어서 돌려보낸거야." 뎅그렁! 난 대야를 놓쳤다. 타이번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 았다. "그럼… 졌단 말이군요?" "안타깝게도." "다, 다른 병사들은? 저 병사 하나만이라니, 그럼 다른 병사는?" "알 수 없다. 후치. 휴리첼 백작과 영주님은 어쩌면 안전할꺼야. 저 병 사를 보낸 것을 보니 아마 몸값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 르타트의 목적이 몸값이라면 병사들 모두를 포로로 잡아두었을 수도 있 다. 포로가 많으면 더 많은 몸값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 그래요? 확실해요?" 그 때 병사가 대답했다. "그 분의 짐작이 맞다." 난 어쩔 줄을 몰랐다. 갑자기 내 입에선 폭언이 쏟아져나왔다. "그 등신 같은 드래곤이!" 그 허옇기만 하고 민트나 쳐먹는 화이트 드래곤이 결국 아무르타트에 게 진 것이구나. 병신 같은! 오만방자하게 머리나 쳐들 줄 알았지, 할 줄 아는 것은 주는 밥을 받아먹는 일밖에 없는 드래곤이! 왕가의 드래 곤이 어차피 그렇지. 차라리 아무르타트는 자신이 직접 사냥한다. 하지 만 그 놈은 인간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는다. 난 아무르타트보다 그 화 이트 드래곤 캇셀프라임에 더 화가 났다. 하멜 집사는 회의를 소집했다. 영주님이 안계시므로 하멜 집사가 영주 대리였고, 영주 부재시 치안을 담당하기로 했던 타이번이 참석했다. 그 리고 카알이 참석했다. 난 타이번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그의 조수 자격 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비대장 샌슨이 없었으므로 대리로서 터너가 참석했고 기타 영주의 보좌관들과 마을 촌장과 마을 어른들이 몇 명 참석했다. 이건 제대로 된 회의라고 할 수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 다. 회의의 목적은 스로이 마이어핸드의 진술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그 부상당한 헤비 트루퍼의 이름이 스로이 마이어핸드였다. 그는 상당히 몸이 불편했할텐데도 의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자제력이 강해도 그래도 수술을 받은지 1시간만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모포를 두르는 것도 사양하고 조용히 앉아서 상황 을 진술했다. 정벌군은 회색산맥까지 별 이상없이 진군할 수 있었다. 몇몇 몬스터들 의 습격을 받긴 했지만 그것은 대단치 않았다. 마침내 회색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 끝없는 계곡 입구에 진을 친 군대는 작전에 들어갔다. 앞선 정벌군들의 생존자의 이야기나 기타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아무르타트의 레어는 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골짜기는 부대를 운용하기에 좋은 위치는 아니었고, 어차피 부대가 별로 할 일은 없었지 만, 휴리첼 백작은 최대한 짜낼 수 있는 계략을 짜내기로 했다. 그는 캇셀프라임이 먼저 싸움을 걸면 사람들은 계곡 양쪽과 그 뒤에서 지원한다는 식의 작전을 세웠다. 성의 경비병으로 구성된 라이트 풋맨 들이 절벽 위 양쪽에서 아처리를 엄호하고 수도에서 온 헤비 트루퍼들 은 파이커즈와 함께 계곡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아무르타트를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이 작전은 전적으로 캇셀프라임의 패배를 염두에 둔 작전 이다. 즉,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와 싸워 이기면 그만이고 혹시 지더 라도 아무르타트는 꽤 부상을 입을테니 그 때 놓치지 않고 양쪽에서 화 살로 공격해서 아무르타트가 날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헤비 트루퍼와 파이커즈가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타이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멍청한 계획이군…." 스로이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풀었다. 타이번은 그 표정을 보지 않았지만 자기 말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부대를 세 개로 나누다니. 차라리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만 못해. 그리고 그 계획은 전적으로 아무르타트가 계곡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잖아." 스로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작전 개시일 아침, 캇셀프라임은 계곡에서 포효하며 아무르타트를 불 러내었다. 병사들은 각자 계곡 위와 계곡 아래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모 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캇셀프라임의 호출에 반응한 것은 아무르타 트가 아니었다. 계곡 위와 계곡 양쪽에서 트롤과 고블린(Goblin)의 군대 가 나타난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놓았고, 게다가 빠르게 합류 할 수도 없게 계곡 위아래로 나누어두었기 때문에 세 부대는 각자 고블 린들과 싸워야했다. 계곡 아래의 헤비 트루퍼와 파이커즈는 잘 싸웠다. 하지만 계곡 위의 라이트 풋맨과 아처리들은 고블린들에게 밀렸다. 게 다가 그들의 등 뒤는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고블린들과 트롤은 치열하 게 덤벼들었고, 갑옷이 부실한 라이트 풋맨은 자꾸 밀렸다. 특히 아처리 들은 적과 아군이 마구 뒤섞여 싸우는 그런 식의 싸움에서는 아무런 힘 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계곡 위의 부대는 고블린이 휘두르는 팔치 온(Falchion)에 맞아 죽거나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캇셀프라임 역시 그런 난전에서는 끼어들 수 없었다. 겨우 고블린들의 뒷쪽에다가 브레스를 뿜는 정도였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캇셀프라임은 포효하며 드래곤 피어(Dragon fear)를 사용해보려 했지만 고블린과 트롤들은 아무르타트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어서인지 캇셀프라임의 포효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계곡 위의 부대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며 간신히 계곡 아래로 도망친 다음에야, 캇셀프라임은 계곡 위쪽으로 제대로 브레스를 날려 고 블린과 트롤을 몰아내었다. 그리고 헤비 트루퍼와 파이커즈는 계곡 아 래쪽의 적 부대를 거의 몰살시켰다. 헤이 트루퍼의 접근공격력은 대단 한 것이었고 파이커즈는 그 긴 포챠드로 무난하게 고블린과 싸울 수 있 었다. 그런데 그 때 검은 그림자가 계곡을 뒤덮었다.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 트가 나타난 것이다. 아무르타트는 그대로 내려오지도 않은채 브레스를 뿜었다. 계곡에서 급히 날개를 펼 수 없었던 캇셀프라임은 일격에 커다 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아무르타트는 그대로 캇셀프라임을 내려찍은 다음 그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캇셀프라임도 반항하며 아무르 타트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두 드래곤의 싸움에 절벽이 무너질 지경이 었다. 날개가 절벽을 때릴 때마다, 그리고 드래곤이 엎치락뒤치락 할 때 마다 천둥소리가 났다. 돌이 튀고 나무가 뿌리채 나가떨어지고 바위가 굴렀다. 드래곤의 선혈이 비바람처럼 몰아쳤다. 아무르타트의 산성 브레 스에 맞은 절벽이 지독한 연기를 뿜으며 녹아내리다가 그대로 캇셀프라 임의 아이스 브레스에 맞아 얼어붙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끝없는 계곡에 는 지옥이 펼쳐졌다. 그 때 휴리첼 백작은 후퇴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모두 제각기 흩어 져서 달아났다. 계곡 근처는 숲지형이라 흩어져서 달아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스로이도 그 때 그렇게 달아났다. 그런데 한참을 달아나던 그 때 갑자 기 등 뒤에서 날개치는 소리와 광풍이 몰아졌다. 겁에 질린채 뒤로 도 는 그 순간, 아무르타트의 발톱이 그를 후려쳤다. 일격에 배가 찢어졌다. 스로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때 갑자기 고막을 찢는 공기의 흔들림이 들렸다. 스로이는 복부의 상처 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진동은 천천히 정렬되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뀌었다. "인간, 너의 상처는 앞으로 1주일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스로이는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르타트는 캇셀프라임의 싸 움에서 입은 상처인지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드러누운 채 올 려다보는 그 까마득한 높이는 스로이를 기절할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 리고 드래곤이 뭔가 마법을 건 모양인지 자신의 복부의 상처에서는 희 미한 빛이 번쩍였다. "1주일 동안은 피도 나지 않고 상처도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 간이 지나면 그 상처는 덧나기 시작하며 썩어들어갈 것이다. 빨리 의사 를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스로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르타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르타트는 피곤하다는듯이 어깨를추슬러보인 다음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 입은 꽉 다물린 그대로였다. "그래야 네놈의 그 빈약한 다리로 최대한의 속력을 내겠지. 가서 전하 라. 너희들의 지휘관과 그 멍청이 영주의 목숨을 되찾고 싶다면 100,000 셀에 달하는 보석을 가져오도록.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너희들이 늑장 을 부리면,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르타트는 천천히 날개치기 시작했다. 흙바람이 마구 얼굴을 할퀴 어 스로이는 얼굴을 가렸다. 아무르타트의 음성이 고막을 찢을듯한 굉 음으로 이어졌다. "1주일이다. 네 다리가 네 목숨의 담보다. 가라!" 스로이는 한참 후에야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는 아무르타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4일 동안 밤낮없이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흠… 그래서 그렇게 오래된 상처가 그대로였군. 자네가 이렇게 빨리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로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예. 끔찍스럽더군요. 찢어진 배에서 내장이 쏟아져나오지 않도록 붙잡 은 채 달리는 것, 상당한 경험이었습니다. 피도 배어나오지 않고 아무런 통증도 없는, 마치 다른 사람의 상처같은 느낌이 드는 상처가 더 무섭 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회의중이던 사람들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난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저, 그럼 다른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스로이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들었다. 아버지가 참전하고 있었다며? 미안하지만 다른 병사들 은 보지 못했다." 난 고개를 떨어트렸다. 카알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요. 네드발군. 돌아가신 것을 봤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파 이커즈는 마지막까지 별로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하셨잖아." 난 고개를 들며 밝게 말했다. "그래요. 우리 아버지는 돌아오기로 약속했어요. 흠. 지금쯤 집에 숨어 서 내가 돌아오면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난 될 수 있는대로 웃으며 말하려 했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의 표정 을 보자 내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다시 고개 를 떨어트렸다. 하멜 집사는 고개를 쩔쩔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께 연락해야 되겠군요." 타이번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그렇긴 한데… 이 작전은 국왕 소관이었소?" "그건 아닌데요. 전하께서는 지원을 해주셨을 뿐이고 작전 책임은 영 주님께 있습니다. 영주님은 전권 위임의 형식으로 휴리첼 백작에게 작 전지휘권을 넘겨주셨고요." "그럼 책임은 헬턴트 영지에 있군. 두 사람을 되찾아와야 할 책임도, 그 돈을 장만할 책임도. 왕은 자신이 지원한 화이트 드래곤이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화낼텐데 몸값을 좀 주십사 할 수 있겠나?" 하멜 집사는 다시 고개를 쩔쩔 흔들었다. "영주님의 재산을 다 처분한다 해도 10만 셀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게다가 그 재산은 대개 영지라서 누구 하나 살 수도 없는 것인데… 이 웃 영주들도 아무도 사려하지 않을텐데…" 그 때 스로이가 힘겹게 말했다. "휴리첼 백작가에 연락하면 지원해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흔 히 그렇듯이 전하께 요청하면 헬턴트 영지에 장기 무이자 대출을 해주 시겠지요. 그리고 이 영지를 판다면 꼭 이웃 영주가 아니더라도 수도에 서는 이런 장원을 구매할만한 귀족이 있을 겁니다." "알아봐야겠군요. 오늘이 며칠이지?" 터너가 말했다. "9월 25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여섯달 정도 남은 걸까요?" 하멜 집사의 질문에 타이번은 여전히 입맛이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우리나라에서야 루트에리노 대왕의 칙명으로 4월 2일부터 새로 운 해가 시작되도록 결정되어 있지만, 드래곤이 우리나라의 관례대로 햇수를 셀지야 알 수 없지. 안전하게 하려면, 12월 말일까지라고 생각해 두는 것이 낫겠지." "그, 그럼 석달 정도…!" 하멜 집사는 절망적인 표정이 되었다. 전설적인 집사가 아닌 가난한 우리 영주님의 집사 하멜로서는 석달만에 10만셀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제길!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6.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하멜 집사는 어떻게든 10만셀을 만들어 봄과 동시에 임금님께 보고를 하기로 했다. 마을 촌장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 성금을 거두어보겠다고 해서 하멜 집사를 감동하게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성의에 감동했다는 뜻이다. 타이번은 놀랍게도 엄청난 보석 하나를 내놓았다. 5,000셀은 될 거라는 그 말에 하멜 집사는 타이번의 발치에 무릎 꿇고 그 발등에 키스라도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타이번은 우리 마을과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치안도 담당하고 있는데다가 이런 거금까지 선뜻 내어 놓는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타이번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았다. "타이번, 당신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로 서원을 세웠어요?" "뭐야? 그건 나이트의 맹세잖아?" 그 때 카알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프리스트(Priest)의 맹세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어쨌든 마법사와는 상관없지." "그런데 왜 이렇게 보기에 예쁜 짓만 하세요?" 타이번은 내 머리를 치려고 했지만 내가 설마 장님의 주먹에 맞겠는가. "이놈 말버릇 정말 큰 일이다. 야, 임마! 내가 그런 보석 가지고 있어 봐야 뭐하겠어? 난 눈이 멀어서 제자 가르칠 일도 없으니 학원 세울 일 도 없어. 어차피 그건 성격에도 맞지 않고. 그리고 폼나게 마법 연구를 하려고 해도 글을 읽을 수 있나, 글씨를 쓸 수 있나. - 눈이 보였다면 다른 핑곗거리를 찾았겠지. - 그러니 탑 세울 일도 없고 던전 팔 일도 없어. 그러니 술 마시고 잠자리 구할 돈만 있으면 돼. 나머지는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주는 권리를 누릴거야." 카알은 존경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타이번은 보지 못했다. 그는내 뒷통수를 더듬더니 내 머리를 자기 머리로 가깝게 끌고 왔다. "곧 겨울이 된다. 네 아버지는 야생에서 사는 지혜가 있는 양반이냐?" "…있다면 좋겠지만." "길 찾는 것은?" "그건 다른 사람 정도는 되요." "그럼 조금 더 기다려보자구. 스로이는 목숨을 걸고 달려왔으니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일찍 온 것이다. 다른 패잔병들도 서서히 도착할 것이다. 나랑 나가서 함정들 치워버리자. 패잔병들이 거기 걸리면 곤란하니까." "대로에는 설치하지 않았잖아요?" "모른다. 지름길을 이용한답시고 산을 넘어올 수도 있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웃기겠지, 후치?"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기분상 그렇지는 않아요." "썩 마음에 드는 놈이로다." 타이번이 내 눈의 눈물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우리 아버지는 걸음 이 느리니까, 아마 내 간장을 홀라당 태워먹은 후에야 어기적어기적 나 타날 것이다. 틀림없다. 간장이 아니라 온몸이 타버려도 좋으니 돌아오기만 하세요. 그럼 내가 매일 아침 씻겨드리고 저녁에 잘 땐 노래 불러드리고 양초도 무조건 내 가 다 고을테니 아버지는 침대에 드러누워 낮잠만 자도록 해드릴께요. 아버지. 안 돌아오시면 가만 두지 않겠어요! 아버지가 안 돌아오시면 난 제미니에게 끌려가서 사랑 받는 남편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가야 된 다고욧! 농담을 해봐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내 우울한 기분과 더불어 부비 트랩을 해체하는 작업은 전반적으로 무 거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타이번은 워낙 나이가 있다보니 주위의 분위 기에 별로 휘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노인 앞에서 17세짜리 소년 이 어두운 분위기를 잡아봐야 얼마나 잡겠는가. 타이번은 분위기를 일 부러 밝게 만드려는 헛수고도 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이 어두워지지도 않았다. 그는 여상스럽게 행동했고, 나는 거기에 전염되었다. 그것은 나 의 원래 성격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돌덩어리 하나가 데굴거리는 느낌은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그 돌덩이는 마치 눈덩이처럼 굴러다닐수록 커졌다. 이름은 '불안'. 빌어먹을 상상력 때문에 나는 계속 아무르타트에게 절반 쯤 씹히고 있는 아버지라든지 아무르타트에 짓밟힌 아버지의 모습을 생 생히 떠올리며 땀을 뻘뻘 흘린채 서 있는 일이 잦았고 내 숨소리가 이 상해지는 것을 느꼈는지 타이번은 나를 불러서 내 정신을 차리게 만들 었다. "후치!" 해가 지고 있었고, 들판은 온통 검붉은 색이었다. "타이번, 나 술 한 잔 사줘요." "가자." 산트렐라의 노래에는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스로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타이번이 들어가자 곧 접근하 려고 했다. 타이번은 별 대답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사실만을 대답했다. 사실 그 회의에서 밝혀진 사실이 별로 있는가? 놀랍게도 몇 몇 사람들은 타이번의 말을 듣자 휴리첼 백작의 작전은 엉터리였다고 말했다. 나는 맥주만 마셔대고 있었다. 해너 아주머니는 내게 별 말 하지 않고 술잔에 꼬박꼬박 술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별 말 하지 않고 술 만 퍼마시고 있었다. 기분이 괴상망측해졌다. 침침한 펍 안은 왠지 드래 곤의 화덕 -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감은 그럴듯했다. -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그게 원래는 연금술사의 화덕이라 는 말이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 좋을 대로지 뭐. "천천히 맛을 보며 마셔라. 목젖 껄떡거리는 소리에 지붕 내려앉겠다." "참견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제대로 마셔보도록 널 개구리로 만들어 술잔 속에서 헤엄치게 만들 거야." "거 괜찮네." 그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다. "이봐요! 다른 병사들이 도착했답니다!" 그 순간 나는 의자를 박차고 테이블을 뛰어넘고는 창문으로 몸을 날려 서 주점 밖으로 나와 세바퀴 구르고 그대로 성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 려가려고 했다. "후치! 임마!" 이런, 바빠죽겠는데! 아차, 부상자가 있다면 타이번이 필요하지. 나는 도로 창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역시 세 바퀴를 구른 다음일어 서서 주위를 살폈다. 해너 아주머니가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타이번님은 문을 이용하셨는데?" "음. 역시 괴팍한 노인이군." 나는 이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 다음 문쪽으로 갔다. 타이번은 거 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그를 들춰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야, 야! 똑바로 달리는 거 맞아?" "소나무보다 곧게 달리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물론 나는 정말 곧게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번은 고함 질렀다. "야이, 주정뱅이 꼬마 녀석아! 좀 똑바로 달려!" 난 정말 곧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억울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욕을 하 려면 자꾸 구불텅거리는 길을 보고 욕을 하라고! 성문이 눈앞에 보이자 난 숨이 턱에 닿을 지경이었다. 술기운은 가슴 에서부터 입천장을 쾅쾅 때리고 있었고 다리는 얼얼한게 내 다리 같지 않았다. 취한채 무감각하게 달려오느라 몰랐는데 나는 다리 곳곳에 상 처를 입고 젖어있기까지 했다. 이상하게 길이 자꾸 구불텅거려 나는 어 쩔 수 없이 덤불숲이나 도랑에 들락날락해야 했던 것이다. 성문 앞에서는 경비병들이 횃불을 든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성 안의 홀로 우리를 안내했고 이번엔 이상하게 성이 흔들거렸다. 지진인가? 어쨌든 간신히 홀로 들어가자 급히 만든 듯한 자리가 보였다. 깨끗한 홀 바닥에는 짚이 가득 널려 있었고 그 위에는 시트가 깔려 있었다. 그 리고 그 위에는 곳곳에 부상을 입은 병사들 20여명이 드러누워 있었다.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홀에 급히 자리를 만든 모양이다. 각자 제 멋대로의 상처로 끙끙거리고 있는 그 모습은 끔찍했다. 성의 하녀들이 총동원되어 그들을 돌보고 있었고 하멜 집사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 었다. 카알도 부상병들을 돌보고 있다가 우리 모습을 보자 다가와서 말 했다. "타이번. 오셨습니까?" "어떤가?" "뭐, 걱정하시지는 않아도 됩니다. 이들은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정도의 상처니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들은채 만채 하고는 제일 끝으로 달려가서 부상 병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우 리 아버지는 없었다. 내가 거의 반대쪽 끝에 왔을 때, 왠 거대한 덩치 하나가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샌슨!" 샌슨은 무릎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 니 빙긋 웃었다. 그러다가 그는 내 복장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후치? 그 갑옷이랑 바스타드 소드는 어떻게 된거야? 얼씨구, 장 갑도 멋진 걸 꼈네? 성의 복장은 아닌데. 어떻게 된거지?" 나는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샌슨은 팔자좋은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혹시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됐는지 알아?" "미안하구나. 난 너희 아버지와 다른 부대여서. 그러니까 우리는 끝없 는 계곡에서 절벽 위에 있었고, 에, 그러니까 휴리첼 백작님의 작전에 따라서…" "그 멍청무쌍한 작전은 잘 알아! 먼저 온 사람이 다 말해줬어." "그래? 그럼 나와 너희 아버지는 떨어져 있었다는 것도 알겠구나." "그래서? 못봤어?" "응. 미안." "…미안해. 고함 질러서. 샌슨은 괜찮아?" "난 괜찮아.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을 뿐이야. 그런데 넌 요즘 취해 있 는 경우를 자주 보는구나. 아이고 술냄새. 부탁 하나 하겠는데 나도 너 마시던 술 좀 가져다 주겠니?" 나는 허허 웃어버렸다. 지금 마을까지 도로 내려갔다 오라고? 나는 자 리에서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는 하녀들에게 주방의 위치를 물어본 다음 간신히 주방을 찾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냉수 한 모금 마시고는 식 탁 위에 있던 술병을 찾았다. 주방에는 아무도 없어서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그걸 들고 돌아왔다. 홀 안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정신없는 분위기 였다. 하지만 샌슨은 아까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샌슨? 여기, 술." 샌슨은 고개를 들더니 고맙다는듯이 웃으며 술병을 통째로 입으로 가 져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샌슨은 조금씩 떨고 있었다. 술병이 몇 번 이나 이빨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샌슨은 많이 마시지도 못하고 술 병을 도로 내려놓았다. "목마르던 참인데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샌슨. 확실히 아무데도 안 다친거 맞아?" "굳이 말하라면… 마음을 다쳤다. 너무 끔찍했어. 해리도, 자렌도 모두 죽었어. 내가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샌슨은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뭐,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일이지만… 아무르타트의 브레스 에 맞아 녹아내리는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구나." "샌슨." 샌슨은 그저 혼잣말 하듯이 계속 말했다. "귀환길은 너무고통스러웠다. 부상으로 죽어가던 동료들의 신음소리 에 미치는 줄 알았어. 치료는커녕 굶어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상당한 인간들은 몬스터들의 좋은 목표였지. 계속되는 공격은 악몽 같았다. … 몇 명은 내 손으로 죽였어." 나는 취한 기분에도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살려면 그들을 버려야 했어.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차피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우리를 따라오던 몬스터들에게 죽임을 당할테니까. 그들도 납득했지. 고 통은 없었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내 손으로 동료들의 목을 치게 될 줄 은 몰랐다." "샌슨…"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왔어야 했는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하 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 샌슨은 다시 술병을 들이켰다. 술의 반은 입밖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영주님도 구출하지 못했어. 영주님의 경비대로서 면목이 없구나. 나 살자고 이렇게 성까지 달아나버리다니." "그건 걱정마. 영주님은 안전해." 샌슨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르타트가 몸값을 받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영주님은 안전할 거 라고." "그러냐? 어떻게 그걸…" "샌슨 앞에 온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그 사람이 다 말해줬어." 샌슨의 얼굴에서 비로소 수심 한 자락이 걷혔다. "그거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 몸값은 엄청나겠지?" "짐작해 보겠어? 10만셀." 샌슨의 머리로는 그 금액이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 머리로도 그 정도의 금액은 어림짐작도 안된다. 그는 입을 쫙 벌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맙소사." 피곤한 밤이다. 술 마시고 마을에서 성까지 뛰었더니 몸이 물에 젖은 솜같이 무겁다. 난 홀의 한쪽 구석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모두 환자, 혹은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난 환자도 아니고 환자를 돌보는 사람도 아니다. 난 카알처럼 많은 책을 읽어서 약학에 능숙한 것도 아니고, 타이번처럼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치료에 나서는 것은 아예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다. 또한 하멜 집사처 럼 모르는 것이 없어서 어느 분야에도 최고는 아니지만 항상 도움은 줄 수 있는 수완 좋은 사람도 아니다. 난, 아버지를 잃고, 어두운 성안의, 홀 구석에 앉아, 외로움에 치를 떠 는, 술취한 17세 소년이다. 난 두다리를 끌어 모으고 팔로 껴안은 다음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씩- 쌕- 호흡소리, 내 호흡소리. 난 살아있어. 아버지는 죽었어. 아니야! 빌어먹을, 누구냐! 우리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한게 누구냐고! 둔탁한 맥박소리. 난 살아있군, 그리고… 카알의 말을 떠올리자, 맥박이라, 그러니까, 카알이 말하길, 사람의 고 막에는 핏줄이 없다고 한다. 사람의 고막에 핏줄이 지난다면 사람은 맥 박 소리에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핏줄이 없다. 놀랍지 않은가? 아버지… 아버지는 무슨 꽃을 좋아하셨더라? 재수 좋다면 어쩌면 아버지의 무덤 은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때 난 무슨 꽃을 가져갈까? 집어치워! 제기랄, 집어치우라고! 뭐하는 거야? 확실해? 아버지가 죽은 게 확실하냐고! 확실해진다면, 그 땐 상관없어. 미친 놈처럼 하늘을 보 고 짖어대든지 땅을 뒹굴며 낑낑거리든지, 어쨌든 무슨 개새끼 흉내를 내어도 좋아.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말소리. 사람의 말소리가 다가온다. "저건 뭐야? 뭐가 저러고 있어?" "후치야. 마법사를 업고 와서 지쳤나봐." "아니, 아무리 지쳤대도 그렇지. 눈 앞에 이렇게 다친 사람이 많은데 저렇게 쳐박혀 있어? 철이 없군." "내버려둬. 걔 아버지도 정벌군에 참전했어." "응?" "괴로울 거야. 이미 패했다는 것은 아는데,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지 않 았거든. 아무리 덩치가 커도 겨우 17살이야." "쳇." 말소리. 사람의 말소리가 멀어진다. 무슨 말들을 했더라? 필요없어. 소 용없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야.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필요없 어. 그렇다면, 내가 말을 할까? 강물은 낮은 곳으로, 새는 높은 곳으로.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길쌈을 하지. 전사는 앞을 보고, 마법사는 위를 보지. 태어난 이상, 우린 매일 죽어가고 있다. 내 흥얼거림에 맞춰, 나는 잠이 들었다. "아버지! 쾅!" 잘 기억은 안나는데,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난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서 미친듯이 달려가다가 벽에 머리를 박고 졸도했다고 한다. 아침에 보 니 확실히 홀 한쪽 벽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물론 내 머리에도 자국이 남아있었고.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7. "예? 확실한거죠?" 그토록 노력했던 힘조절도 까먹고, 나는 펄쩍 뛰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이고 머리야. 어제 부딪힌 데 또 부딪히니까 정말 아프 네. 내게 이야기를 해주던 병사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고 카알은 당 황한듯이 웃었다. 병사는 천천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래. 네드발씨는 영주님과 휴리첼 백작과 함께 고블린의 부대에 잡 혀갔어. 난 죽은 척 하고 있어서 잡혀가지 않았지. 그 때 고블린 한 놈 이 확인사살하러 내게 오길래 죽을 힘을 다해 그 놈을 베고 달아났지." 난 너무 기뻐서 머리가 아픈 것도 잊어먹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그 병사에게 손대는 일마다 횡재하라는 둥, 절세미인 마누라를 얻으라는 둥, 자손이 번창하여 8대가 번영하라는 둥 온갖 축복을 다해주었다. 병 사는 히죽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야,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뛰냐?" "당신도 웬수 같은 여자에게 아양떨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면 그렇게 되 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 다음, 난 너무 기뻐서 그대로 괴성을 지 르며 홀을 빠져나왔다. 샌슨이 도착한 바로 그 다음날 도착한 패잔병들 중에서 그 소식을 듣 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쁠 때가! 아버지는 역시 요령이 있으시다. 나는 팔짝팔짝 뛰고 공중제비를 넘고 데굴데굴 구르고, 어쨌든 지나가는 사 람마다 저놈은 100% 순종 미친 놈이라는 판정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연병장 가운데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웃고 있을 때 샌슨이 다가 왔다. 샌슨은 먼지와 흙, 피로 엉망이 되어버린 갑옷 대신 말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샌슨에게 말하려 했지만 샌슨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들었다. 오면서 보니까 네가 하도 발광을 하길래 지나가던 사람 에게 물었어. 잘됐구나, 후치." "응! 역시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할 줄 아는게 없으니 죽을 줄도 모르 지!" "…그거 칭찬이냐?" "그런데 샌슨은 어디 가는 길이지? 좀 쉬지 않고. 게다가 완전 정복차 림이네?" "전사통지를 해야지. 내 임무니까." 난 순간 즐거워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전사자들의 집안은 잠시 후 울음바다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난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 랐다. 샌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미안해할 건 없어. 네가 기뻐하는 것은 전사자들의 가족들 이 슬퍼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도… 너무 내 생각만 한거 같네." "하긴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은 좀 보기 그렇겠지? 미안하다면 들어 가서 타이번이나 좀 도와라. 넌 그 분의 조수라며?" "응." 타이번은 홀 안에서 병사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카알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병사들은 대개 부상의 정도는 작았고 그것보다는 탈진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느라 지독하게 지쳐있는 것이다. 타이번은 이미 몇몇 위급환자들을 처리하고는 의자에 앉아서 주로 하 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타이번의 지시에 따라 가벼운 부 상병들을 자택으로 옮겨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샌슨은 마을로 가는 길에서 나와 만나게 되었고 그는 내 힘에 놀란 표 정을 지었다. 나는 부상병들로 가득 찬 수레를 가뿐하게 끌면서 샌슨을 따라잡았던 것이다. "우와! OPG라고? 정말 엄청난데?" "그래봐야 샌슨 정도지 뭐. 오우거의 힘이니까." "뭐야! 요 녀석, 입은 그대로군." 수레에 탄 부상병들도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모두 기쁜 표정이었다. 마을로 들어와서 한 명 한 명을 집 앞에 내려놓을 때마다 그들을 반기 며 눈물을 터뜨리는 가족을 보니까 나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내가 끄는 수레는 기쁨을 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내 수레를 보자 수레에 탄 사람들에게 환성을 보냈다. 여! 살아왔군. 걱정해주신 덕분 에. 크레이, 돌아왔군요! 오, 다이앤! 난 키스하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히죽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정말 신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간혹 샌슨이 전사자들의 집에 멈춰서 전사통지를 할 때는 정말 보고싶지 않았다. 남자들은 굳어버린 얼굴로 샌슨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악수했지만 여자들은 샌슨을 붙잡고 통곡했으며 그럴 때마다 샌슨은 꼼 짝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 고 나나 수레에 탄 병사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괜찮아!" "타라니까 그러네!" 마을 끝까지 돌면서 부상병들을 다 내려주고나서 나는 샌슨에게 수레 를 타라고 강요했다. 샌슨은 거절했지만 어차피 성까지 끌고갈 수레에 한 명 쯤 태운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니까 타라는 내 강요에 못이겨 샌 슨은 히죽 웃으며 수레에 탔다. "자! 달립니다!" "우앗!" 난 수레가 뒤집어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샌슨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수, 수레 부서지겠다! 임마, 나 여기서 죽고싶진 않아!" "그렇지? 너무 느려서 지루해 죽고 싶지? 어디!" "그아아아아!" 난 샌슨을 좀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샌슨은 어지간히 무서웠 나보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수레에서 굴러떨어지듯이 내려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으니까. 난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웃고난 나는 수레를 세워두고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갔다. 더 나를 부상병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홀 안에 앉아 있던 타이 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알도 없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멜 집 사에게 다가갔다. "저, 집사님? 타이번은 어디 갔지요?" "음, 후치 왔구나? 잘됐다. 따라오렴." "예?" "널 기다리던 참이다. 어서와." 부상병들을 실어나르고 온 나를 불러들인 하멜 집사는 놀랍게도 1층 끄트머리에 있는 영주 집무실로 날 데려갔다. 난생 처음 와보는 곳이다. 통로의 오른쪽에는 벽에 걸린 창검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고 왼쪽으로 빛이 안닿는 곳에는 영주님의 조상님으로 짐작되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 다. 아마 햇빛이 닿으면 초상화가 변색된다거나 하는 이유가 있겠지… 등의 생각을 하며 나는 걸어갔다. 거대한 나무문짝을 익숙하게 연 하멜 집사는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쭈 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실내를 둘러보았고 곧 한숨을 쉬었다. 휭뎅그레했다. 사방은 그저 밋밋한 석벽이었고 가구라곤 책상과 테이블, 의자 몇 개와 책장이 다였 다.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검과 방패가 유일한 장식물처럼 보였다. 우 리 영주님이 가난한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게 영주님의 집무 실인가? 거대한창문 옆으로 놓인 태이블에는 타이번과 샌슨, 그리고 카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지만 카알이 곧 나를 불러 앉혔다. "네드발군. 이리와 앉게나. 집사님?" 하멜 집사도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주위를 둘러싼 다섯 명 중에서 나 와 샌슨은 영문을 몰라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였고 하멜 집사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타이번과 카알은 별 표정이 없었다. 하멜 집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영주 대리로서 말하겠습니다만… 카알 도련님? 정말 대리를 맡 지 않으시겠습니까?" 샌슨은 기절초풍할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이 무슨 배짱으로 영주의 숲 속에서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살았겠 는가. 그가 카알 헬턴트. 바로 헬턴트 영주의 동생이니까 그렇지. 이건 마을 사람들 중 몇 명과 나만 아는 사실이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그럴 자격 없습니다. 형님을 도와드리지도 못했고 그저 숲속에서 게으름 부리며 살아왔을 뿐. 그리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형이 사라 진 지금 형의 자리를 노리고 달려든다는 식은 싫습니다." 하멜 집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샌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눈길을 거두 었다. 하멜 집사는 말했다. "그럼,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 "옙!" "현재 헬턴트 영지의 상황과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패배에 대 한 보고를 하고, 국왕전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므로 누군가 수도 바이 서스 임펠로 가야 한다. 이해하겠지?" "예!" "카알 헬턴트 도련님께서 수도로 가실 것이다. 여기에 대한 호위가 필 요한데, 알겠지만 지금 성의 병사들은 태반이 부상당해있고, 가을이 깊 어지는 것과 경비대 병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볼 때 몬스터들의 극심한 공격이 예상되므로 호위병력을 많이 차출할 수 없다. 그래서 카알 도련 님은 단신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말도 안된다. 이 계절에 혼자 수도까지 여행하신다니. 그래서 너와 또 한 사람이 도련님을 수행 해야겠다." 또 한 사람이라.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 있는 데… "후치 네드발군." "알겠어요." 내 대답에 하멜 집사는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했다. "나는 정규군이 아니니까 병력 차출은 아니고, 어차피 내 나이로는 자 경대에도 못들어가니까 쓸만하겠지요. 뭐 좋지요. 그리고 제 아버지 일 도 걸려 있어요. 미리 알았다면 내가 먼저 졸랐을 거예요. 집사님." 하멜 집사는 쓰게 웃었다. "넌 건방진 편이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난 타이번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가 같이 간다면 무서울게 없겠는데. 타이번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는듯이 말했다. "웬만하면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곳이 염려스러워. 후치? 조심하고 또 조심해. 너야 지금까지 가고일과도 싸워봤고 오우거 와도 싸워봤지만 그건 전부 일루젼이었으니까 현실과는 전혀 다른 거 야. 그걸 까먹으면 죽는다. 알겠지?" "알았어요." "제미니는 걱정 마라. 내가 다른 놈에게 눈길 보내지 않도록…" "그만!" 카알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특별히 준비할 것 있나? 없는가? 그럼 빨리 출발하도록 하 지요. 각자 준비하고 내일 새벽에 내 집으로 와요. 난 내 정체를 알리고 싶지는 않은데, 도와줄 수 있겠지?" 샌슨은 뭔 소린지도 모르면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말했다. "수도에서 전하를 알현한다든가 자금을 마련해본다든가 하는 일은 내 가 다 맡게 될거야. 두 사람은 서로 토의해서 여행 준비를 맡아주면 좋 겠군. 세 사람이 빠르게 수도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주게나, 퍼 시발군. 마을 사람들이 안심하도록 수도로 간다는 소문을 내는 것은 좋 지만 내 이름은 말하지 말아주게." "예! 염려 마십시오!" 하멜 집사는 몸을 일으키더니 책상으로 다가가 열쇠로 서랍을 열고는 상자 하나와 돈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그는 돈주머니를 샌슨에게 주며 준비물을 구입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상자는 카알에게 내밀었다. "도장과 임명장입니다. 그리고 기타 헬턴트 영지의 소유증서와 임산물, 농작물 등의 수취권 증서도 있습니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 되 시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샌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내가 앉아 있자 날 일으키며 말 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서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저, 저," "그냥 지금까지처럼 카알이라고 부르게." "예… 카알. 말을 타실 순 있으시겠지요?" 카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얼굴은 편치 못했다. 말이 라고? 나는 타이번에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잠깐! 타이번, 당신은 마법사잖아요? 우리를 수도까지 휙 날려줄 수 없어요? 그래, 공간이동. 전에 발록을 불러냈을 때 텔레포… 어쩌고 했 잖아요?" 타이번은 웃으며 말했다. "요 녀석아! 네가 발록이냐?" "예?" "설명하긴 어려운데, 난 장님이라서 정확하게 워프시킬 수가 없어. 하 지만 발록은 악마 중에서도 대단한 악마이기 때문에 내가 근사치 좌표 밖에 설정하지 못한다해도 나와 협력하에 올 수 있어. 사실 난 통로를 설정하고 문을 여는 것은 발록이지. 그것은 발록이 가지는 게이트(Gate) 능력과도 상관이 있고…" "더 말해도 못알아들어요. 그만하세요." 그 때 샌슨은 내가 뭐라고 더 말할 틈도 없이 날 끌고 집무실 바깥으 로 나왔다. 남은 세 사람은 뭔가 대단한 토론을 나누고 있겠지만 그건 나로선 알 수 없다. 샌슨은 다급하게 나에게 물었다. "야, 야. 후치. 넌 별로 놀라지 않던데, 카알이 도대체 누구야?" "카알이 카알이지. 누구긴 누구겠어?" "그러지 말고 후치야, 좀 말해줘." "아까 말했잖아? 형이 사라진 지금… 모르겠어?" 샌슨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영주님 동생이야?" "정확하게는 이복동생. 그래서 나이차가 많이나는거지." "아아!" 카알은 우리 영주님의 이복동생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의 하녀였고, 그 래서 카알은 일찌감치 자신의 배경에 관심을 버렸다. 그는 어렸을 때 이 마을을 떠났고 꽤 떠돌다가 장성하여 돌아왔다. 자상한 우리 영주님 은 그를 친동생처럼 맞이하려 했지만 카알은 사양하고 대신 숲 속에서 조용히 살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궁금증 속 에 카알은 그렇게 신비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내 차례인데. 말을타고 갈거야?" "당연하지. 그럼 그 먼 길을 걸어가려고? 갔다오면 대여섯달은 지나겠 다." "그러면 안되지만 그래도 안된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나 말 탈 줄 몰라." 샌슨은 벙긋 웃었다. "괜찮아. 처음부터 잘타는 사람 있냐? 천천히 익숙해질 거야." "흠…." "조언 하나 할께. 말은 자기 주인을 알아보게 만드는게 중요해." 내 눈에서 빛이 번뜩였지만 샌슨은 보지 못했다.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8. 샌슨과 나는 성 뒷편의 마굿간으로 향했다. 마굿간의 말지기 오넬은 내가 수도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야 된다는 사 실을 듣자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아, 내가 더 놀랄 지경이 야. 그는 머리를 휘두르더니 마굿간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샌슨은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 카알이 탈 말을 준비해야 되는데, 말지기 오넬은 훈련이 끝나고 아직 배정이 되지 않은 말이 몇 마리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보여준다고 해서 내가 고를 줄 아나? 난 승용마와 사역마의 차이도 모르고 중만마와 경 주마도 구별 못한다. 난 말지기 오넬에게 말했다. "이봐요. 내가 당신에게 순수 파라핀 양초하고 혼합양초를 보여주고 골라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오넬은 껄껄 웃더니 내 체격을 살펴보고는 직접 한 마리를 골라왔다. 밤색으로 잘 생긴 놈이었다. 샌슨이 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형마 '슈 팅스타(Shootingstar)'에 비해볼 땐 작아보였지만 난 저런 끔찍스럽게 큰 말은 싫다. 난 말을 가만히 노려보았고 그 놈도 날 가만히 노려보았 다. 말의 눈은 이상하다. 눈꺼풀이 동그란 그 모습은 뭐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심술돎고 사나워 보이기도 한다. 난 이번엔 약간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낀 채 째려보았다. 말은 투레질을 했다. "푸르릉." 어쭈? 내가 가소롭다 이거냐? 샌슨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후치. 넌 오늘 저 놈과 어울려라. 준비는 내가 할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자신의 말을 몰아 그대로 가버렸다. 오 넬은 싱긋 웃더니 안장과 마구 등속을 가져와 내 앞에 놓았다. 난 그것을 멀건히 바라보았고 오넬은 시범을 보였다. 재갈 물리고, 정 수리끈 당기고, 턱끈 매는 방법, 제킨(Zechin) 얹고 안장 올리는 법, 뱃 대끈 매고 가슴끈 묶는 법으로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보였다. 오넬은 천천히 동작을 보여준 다음 다시 다 풀어 내려놓더니 내게 직접 해보라 고 했다. 좋아. 해보지. 나는 재갈을 들고 말의 입에 넣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이야? 오 넬이 할 때는 순순히 입을 열던 말이 내가 다가가자 머리를 흔들며 물 러난 것이다. 난 의심스러운 눈으로 오넬을 바라보았지만 오넬은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난 손가락을 꺽었다. 주인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고 했지? "좋아, 어쨌든 난 널 좀 타야겠다. 네가 반항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 관계가 유쾌할 것이다. 알았냐?" 오넬은 내 근사한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다. 난 코방귀를 뀐 다음, 말 의 목을 휘어감았다. "으랏차!" 난 말의 목을 겨드랑이에 단단히 낀채 다른 손으로 강제로 재갈을 물 려넣었다. 오넬은 기절할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반항하려 했지만 내 가 끼고 있는 장갑이 뭐냐? OPG 아니냐? 나는 계속해서 재갈을 쑤셔 넣어 적당한 위치에 오게 한 다음 재갈 끈을 묶었다. 그리고 나는 물러나서 안장을 들어올려 보였다. "자, 이젠 이거다. 또 반항하면 무릎을 꿇려놓고 맨다. 알겠지?" 말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어이구, 돌겠네. 한참을 씨름한 끝에, 말은 나를 좀 알아모시는듯 했다.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의 고초는 말도 못한다. 난 말의 뒷다리에 여러 번 걷어차였고, 말도 나에게 여러 번 걷어차였다. 오넬은 머리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렇게 어울리는 말과 기수는 처음 보겠군." 어쨌든 놈은 이제 순순히 내가 매는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재갈을 물 리고 머리끈을 정리하고 턱끈을 맨다. 제킨을 얹은 다음 안장을 올린다. 그리고 뱃대끈과 가슴끈을 적당히 조인다. 이 적당히라는 부분이 어려 웠는데, 난 어느 정도로 조이면 되냐는 질문에 무조건 적당히 조이라고 대답하는 오넬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누가 나에게 양 초를 고을 때의 불의 양을 물어오면, 나 역시 적당히 하라고밖에 대답 못하겠다. "이제 타면 되요?" 마구 얹는 법 배우다가 벌써 오후가 되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 출발이 니 시간이 없다. 오넬은 내가 안장에 올라가는 법을 지도했다. 놈은 이 제 상당히 순해져서 오르는 법을 배우는 것은 간단했다. 오넬은 재갈에 기다란 밧줄을 매더니 나에게 달려보라고 했다. "아니, 밧줄을 매어놓고 어떻게 달리라는 겁니까?" "둥글게 달려." 나와 말은 오넬을 중심으로 둥글게 걷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나는 말 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타고 있는 셈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안떨어지는 법부터 배워." 그리고 갑자기 오넬은 무슨 지시어를 내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말은 좀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당장 흔들림이 좀 심해졌다. 나 는 더럭 겁이 나서 고삐를 놔버리고 말의 목을 껴안았다. 오넬은 혀를 찼다. "다리에 힘을 주고, 상체는 가볍게 흔들리도록 내버려둬." 다리에 힘을 줘? 상체는 흔들리도록 내버려두라고? 난 허리 위로는 축 늘어뜨리고 발은 등자를 꽉꽉 밟기 시작했다. 한결 편해졌지만 내 허수 아비 같은 몰골은 오넬을 퍽 우습게 만든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두어 번 떨어진 다음에 간신히 요령을 터득했다. 다리 아 래의 충격이 허리에서는 사라져야 되는 것이다. 등자를 밟고 있는 발과 무릎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리듬을타듯이, 부드럽게. "외다리 줄타기 하는 모습이다." 아니, 뭐야? 이 우아한 모습에 대한 감상으론 고약하기 짝이 없군. 이윽고 오넬은 고삐쓰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단순했다. 가고 싶 은 방향으로 살짝 당기며 다리로 살짝 신호를 주면 된다. 그리고 멈추고 싶으면 체중을 뒤로 실으며 고삐를 위로 당기고, 달리고 싶으면 체중 을 앞으로 실으며 등자로 배를 차고. 오넬은 속성으로 가르치기로 결심했는지 내가 한 시간쯤 그렇게 달리 고나자 곧 쉴 틈도 안주고 밧줄을 풀고 그냥 달리게 만들었다. 밧줄이 풀리자 이 놈은 심술이 되살아났는지 - 하긴 내가 그 위에 있으니 난 완전히 말 마음대로다. - 마구 반항하기 시작했다. 난 놈의 반항의 헛수 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놈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이힝힝힝힝!" 아이고! 갑자기 말이 미친듯이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걷어 차는 것은 출발이다! 멈추는 건 뭐더라? 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채 말을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말이 갑자기 멈추자 내 몸은 그대로 앞으로 휙 날았다. "으악!" 오후 늦게 내가 어쩌나 구경하러 온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하고 싸웠냐?" 난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오넬은 내가 타던 말을 보여주었다. 말은 온 몸에 거품같은 땀을 내뿜으며 씩씩거리고 있 었다.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저 놈 이름을 제미니로 짓겠어요." 말과 나는 서로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오넬과 샌슨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 앞 의자에 앉아 쉬던 마을 어른들의 눈이 휘둥그 레졌다. 동네 꼬마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고 소녀와 처녀들은 손을 모아쥐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아직도 몸이 결려서 말에 타고 있어도 온 몸이 아팠다. 하긴 그 사정은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샌슨과 나는 말을 몰아 마을대로로 내 려왔던 것이다. "우와!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네드발경께서 말을 탔네?" 난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서글픈 미소를 지어주었다. 온몸이 뻣뻣 해서 팔도 못들어주겠다. 그 때 마을 광장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채 꼬 마들과 어울려 깡총깡총 뛰면서 놀고 있는 제미니가 보였다. 정말 못말 리겠다. 제미니는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싶어 둘러보다가 나와 눈 이 마주쳤다. "어머,후치… 말?" "와아!" 마을 사람들은 모두 환성을 질렀다. 아마 옛날 이야기에서처럼 내가 제미니를 안아올린 다음 그대로 그녀를 안장에 앉히고 석양을 향해 달 려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 없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몸이 아파 죽겠는데! 제미니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곧 나에게 걸어왔다. 나와 제미 니 사이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얼씨구, 정말 행 동통일이 잘되는 사람들이다. 제미니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더니 말의 뺨 을 쓰다듬었다. "예쁘네… 이름이 뭐야?" "제미니." 제미니(사람이다.)는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마을사람들은 킥킥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고! 제미니는 발그레한 얼굴을 어떻게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머리를 만졌다. 그리고 는 자기 머리에 꽃이 꽂혀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이구, 철부지. 제미니는 그 꽃을 뽑더니 말의 귀에 꽂아주었다. 놀랍게도 제미니(말 이다.)는 얌전히 꽂아주는대로 있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있냐? 그 때 난 무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여자란 원할 때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까지 마 을 꼬마들과 깡총거리며 뛰어놀던 제미니가 무슨 성녀나 된 것처럼 가냘 프면서도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다. "내 이름을 가진 말아. 이 꽃을 너에게 주니 주인을 잘 모셔다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똑똑하게 말했다. 그리곤 제 미니는 뒤로 돌아서 달려가 버렸다. 마을사람들은 다시 환호성을 올렸 고 난 혼절하고만 싶었다. 난 그 즉시 산트렐라의 노래로 체포되어갈 뻔 했다. 샌슨이 아니었다 면 난 그날 밤이 새도록 술에 절어버렸을 것이다. 샌슨은 준비할게 많 다면서 점잖게 우리에게 몰려드는 마을 사람들을 물리쳤고 그래서 난 간신히 빠져나왔다. 샌슨은 잡화점에 들렀고 아까 사두었던 물건을 달라고 했다. 말에 다 는 가방과 밧줄, 램프, 그릇 몇 벌, 부싯돌과 발화장치, 바느질 도구, 칼과 쇠꼬챙이와 삼발이 등 요리에 쓰이는 도구 몇 개, 주전자, 물통 커 다란 것 세 개… 끝도 없다. 어쨌든 그 거창한 짐을 내 말과 샌슨의 말, 그리고 같이 데려온 카알의 말에 나누어 매고 샌슨은 자기 집으로 갔 다. 대장간의 조이스는 별 말도 없이 램프와 냄비, 칼붙이와 손도끼 등을 내주었고 고약과 약초도 내주었다. 그리고 샌슨의 어머니는 건포와 베 이컨, 밀가루, 옥수수가루, 소금, 후추… 내가 또 왜 이러지? 어쨌든 그 런 것들을 내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차례로 나누어 실었다. 샌슨의 어머니는 여기서 저녁을 먹고 자고 가는게 어떻겠냐고 말했지 만 나는 사양했다. 집안도 정리해두어야 되고 문도 못질하고 할 일이 많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우리 집에서 푹 자고 싶다. 그래서 난 제미니를 몰아 우리 집으로 향했다. 며칠 성에서 살다시피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는 집이니까 아마 냉랭하고 황량할 것이다. 어차피 오늘만 자고 내일 아침 다시 출발이니 치우기도 귀찮다. 그냥 저녁이나 대충 챙겨먹고 자야지. 그런데 우리 집에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우리 집에 불 이 켜져 있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아 무르타트에게 포로로 잡혀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말을 근처 나무에 묶어두고는 바스타드를 뽑아들고 우리 집으로 다가갔다. 혹시 아버지가 탈출하셨나? 믿을 순 없지만 만 일 그랬다면 아버지는 그래도 병사니까 먼저 성으로 왔을텐데. 도둑? 에이, 설마. 우리 집에는 뭐 훔쳐갈 것도 없거니와 사실 우리 마을에는 도둑 같은 것이 없다. 도둑이라도 우리 마을처럼 살벌한 곳에서는 영업 을 못할 것이다. 뭐, 훔쳐갈 것도 없거니와. 그렇다면 근처를 지나가던 떠돌이가 빈집인줄 알고 들어왔나? 그럴 수 는 있겠다. 우리 집은 외진 곳이고 내가 며칠을 비워두었으니까 빈집 냄새가 날 것이다. '넌 죽었다. 어디 두고 보자.' 난 살금살금 집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가로 다가섰다. 문을 박차고 들어갈 준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으어! 엇? 제미니? 푸아!" 아이고, 내 신세야! 제미니는 문을 열고는 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그 멍청한 계집애는 컴컴한 바깥에 서있는 나를 못보고 그대로 들고 있던 냄비를 비운 다음에야 날 알아보았다. "악! 후치? 거기서 뭐해!" "그건 내가 해야 어울릴 말이야." "그럼 해." "악! 제미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째 바보가 된 것 같다. 제미니는 까르르 웃더니 곧 집안에 걸려있던 수건을 찾아와 내게 내밀었다. 나는 낑낑거리며 하드 리더를 벗고는 몸 을 닦았다. 그리곤 갑옷을 닦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갑옷! 그런데 저 계집애는 남의 집에서 뭐하는 거야?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식사준비. 내일 수도로 간다며? 그래서 뭐 맛있는 거나 만들어주고 싶어서." "…날 잘 씻겼으니 이제 잘게 썰면 되냐?" "어머, 후치는. 가서 몸이나 제대로 씻고 와!" 난 투덜거리면서 일어났다. "고맙긴 하네." "나 아니면 누가 챙겨주겠니?" 난 빙긋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물벼락을 맞고 그대로 옷을 벗 은 다음 밖으로 나오니 몸이 와들거렸다. 허엇! 시원하네. 난 짐짓 팔을 휘두른 다음 물통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우에취!" 음, 춥군. 나는 대충 씻은 다음 숲속에 매어둔 또 하나의 제미니를 끌고 돌아왔 다. 돌아오고보니 우리 집에는 말을 매어둘만한 장소가 없었다. 나는 일 단 말의 등에서 짐을 내린 다음 긴 밧줄을 가져와 말의 고삐에 묶고는 놈을 작업장에 넣었다. 밧줄이 기니까 배가 고프면 나와서 풀을 뜯고, 목마르면 물 마실 수 있겠지. ================================================================== DRAGON RAJA 1.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19. 난 밖에 묶여있는 제미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예의를 아는지라 참 잘 먹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마을을 떠날 때 환송식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비록 그 사람의 요리 솜 씨가 좀 고약하다 할지라도 그 성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지 않은가. 제미니는 내게 물을 떠오게 하고는 달그락거리면서 설겆이까지 했다. 음, 괘씸하도록 예뻐보이네. 난 뱃속에 신경을 덜 쓰도록 하기 위해 숯 돌을 꺼내서 바스타드를 갈기 시작했다.대장장이 조이스가 워낙 잘 갈 아둔 것이라 별로 신경써서 갈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이렇게 해 줘야 녹이 슬지 않고 날의 수명이 길어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때 제미니는 생각났다는듯이 손뼉을 쳤다. "아? 후치 계속 그 칼 들고다니면 귀찮겠지?" "응?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행다니면서 그렇게 할 순 없잖아. 어디보자… 가죽끈이나 혁대 안 쓰는 것 있니?"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작업장에 있던 가죽끈을 하나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제미니는 바느질 도구를 꺼내더니 내 칼집에 묶을 가죽끈을 만 들기 시작했다. 몸살나겠군. 정말 예쁘네. 촛불빛 아래에서 내가 사용할 소드 벨트(Sword belt)를 정성껏 만들고 있는 저 애가 정말 제미니 맞나? 제미니는 바느질에만 정신을 파느라 얼굴의 근육이 모두 이완되어 그윽하고 편안해보이는 얼굴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꺼내고 말았다. "내 운명도… 참 괴상하구나. 여름만 해도 내가 설마 수도에 갈 거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을이 되니까…" 제미니는 바느질하면서 내 말에 대답했다. "가을이 되니까?" "그렇구나. 가을이 되면서 캇셀프라임이 나타나고, 마법사의 조수가 되 고,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난 수도로 달려가게 되 는군. 모든 가을은 마력을 지녔다고 하지만…" "무슨 말이야? 가을이 마력을 지녔다니." "가을은 그래. 봄여름 동안 지상의 것들은 자신의 생명력으로 불타오 르지. 하지만 가을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 생명력들은 스러지기 시작하 고 이윽고 겨울. 그건 죽음이야. 그래서 가을은 신비로워. 죽음 직전의 생명들. 다가오는 죽음.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생명력이 사그라들고 죽 음이 찾아오기 직전, 모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 짧은 시 기가 있으니 그게 가을 어느 중간쯤에 있는 마력의 시간이야." "아여의 이아(마력의 시간)?" 제미니는 이빨로 실을 끊느라 발음이 이상했다. 그냥 실을 끊고 나서 말하면 될 걸 저렇게 말하니 정말 귀엽군. 난 빙긋 웃으며 카알이 좋아 하는 마력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력의 시간이라는 것은 모든 장소에 각각 다르게 일어나. 분명 가을 어느 시기인 것은 확실해. 그런데 우연히 그 마력의 시간에 접어든 장 소에 사람이 들어가면 그에게는 온갖 희귀한 일이 일어나지. 그 짧은 가을 동안, 낙엽이 대지를 덮기 시작하고 마침내 첫눈이 오게 될 때까 지, 그 사람은 평생에 기억될 단 한 번의 가을을 가지게 되지. 때론 모 를 수도 있어. 그저 그 가을에 일어났던 일만 기억하다가 몇 년 후에나, 혹은 늙어버렸을 때 겨우 알아차리게 되지. 하지만 자신이 마력의 시간 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낙엽이 대지를 덮을 때부터 첫눈이 오기까지 놀라운 일을 이룩할 수 있지." "어머나…" "루트에리노 대왕께서 영광의 7주 전쟁을 시작한 것도 낙엽이 흩날리 기 시작한 때였지. 그리고 그 분께서 드래곤 로드를 물리칠 때의 이야 기는 알겠지? 장대한 싸움 끝에 드래곤 로드는 마침내 쓰러졌어. 그 때 하늘에서 흰 눈이 날리기 시작했지. 루트에리노 대왕은 끝내 검을 들지 못하고, 드래곤 로드는 달아났지. 그 이후로 다시는 루트에리노 대왕은 검을 들지 못했어." "그럼, 바로 그 때가…?" "루트에리노 대왕의 마법의 가을이었지. 다가온 겨울 직전, 생애 최대 의 일을 이룩하셨지만 그건 끝내 미완성이야." 카알은 왜 이 이야기를 좋아할까. 아마 이 미완성의 끝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난 이런 이야기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완성된 결말을 좋아한 다. 하지만 제미니는 꽤 취향에 맞는 이야기인가 보다. 제미니는 볼을 감싸면서 공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미니는 정신 이 든듯이 말했다. "다 됐어. 매어봐." 난 제미니가 만들어 준 소드 벨트를 보았다. 허리에 차는 정교한 것은 만들 수 없어서 그것은 그저 칼집에 연결하여 어깨에 매도록 되어 있었 다. 나는 바스타드를 어깨에 매었다. 제미니는 안쓰러운듯이 말했다. "허리에 차면 좋을텐데…" "아냐, 두 손도 자유롭고 걸을 때도 편하네, 뭐." 그것을 매고 바스타드를 뽑으니 간신히 뽑혔다. 뭐, 롱소드도 아니고 칼길이가 2큐빗은 되는 바스타드니까. 난 잠시 고민하다가 왼손을 뒤로 돌려 검집을 아래로 당기며 뽑아보았다. 잘 빠져나왔다. 방패가 없어서 다행이군. 난 제미니에게 부담없이 뽑아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말했다. "짠! 괜찮지? 내 팔에 딱 맞네. 고마워." 제미니는 배시시 웃었다. 난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고는 말했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야지. 가자. 내가 데려다줄께." 제미니는 침대 한켠에 치워둔 숄로 머리와 어깨를 감쌌다. 난 램프 하 나를 챙겨들고 나왔다. "말 태워줄까?" 제미니가 제미니에 탄다. 흠, 재미있군. 제미니는 조금 겁먹은 표정이 었지만 찬성했다. 난 말을 데려와서 세우고는 제미니를 흘깃 바라보았다. 제미니는 난처 한 표정이었다. 나도 그랬지. 난 제미니의 허리를 붙잡아 위로 들어올려 태웠다. 평소에도 간단히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정말 가볍군. 제 미니는 옆으로 앉은 자세가 되었다. 나는 제미니에게 램프를 들려주고 고삐를 붙잡은채 말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을밤은 바람 소리 속에서 희안하게 사각거리는 소리들이 이채롭다. 겨울이라면 이파리들이 떨어져나갈듯이 앵앵거릴 것이다. 하지만 가을 밤엔 그렇지 않다. 귀뚜라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숲속을 걸 어갔다. 말 위에 탄 제미니가 높이 들고 있는 램프의 불빛은 희뿌옇게 우리들만을 비추고 있었다. 주위의 숲은 그 빛을 그대로 빨아들이는 듯 했다. 하지만 쾌활하다. 이젠 내일이면 떠나는군. 뭐, 곧 돌아올 예정이지만, 잠시라도 떠난다고 생각하니 주위의 모습들이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난 한 손은 바지에 꽂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쥔 채 휘파람을 불면서 걸 어갔다. 말은 유순했다. 이 놈은 제미니와 자기 이름이 같다는 것을 알 고 있나? 왜 이렇게 얌전하지? 말 위의 제미니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내 휘파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간혹 손에 든 램프를 다른 손으로 가렸다가 그 그림자에 자기가 놀라서 다시 손을 치 우기도 했다. 그 때마다 제미니는 숨막힌 소리를 내었고 나는 낄낄거렸 다. 조이스는 견습기사와 레이디라고 했던가? 지금 장면은 확실히 그렇게 보이겠다. 별로 할 말은 없군. 난 의아해졌다. 벌써 저 앞쪽에 제미니의 집이 보인 것이다. 이상하다. 길이 짧아졌나?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세우고는 뒤로 돌아 팔을 내 밀었다. 제미니는 아무런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몸을 던졌다. 제미니의 허리를 붙잡는 순간, 난 어떤 계획을 떠올렸다. 난 제미니를 붙잡은채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참, 제미니?" "응?" "내가 조언 하나 할까?" "뭔데?"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제미니는 무슨 말인지 몰랐겠지만 난 내 계획을 진행시켰다. 제미니는 내가 들고 있으니 어디로 달아날까. 제미니의 눈망울이 커졌다… …잠시 후 나는 제미니를 내려놓고는 그녀가 떨어트린 램프를 붙잡아 들어올리면서 벼락같이 말에 올라타고는 달려갔다. 제미니는 그제서야 고함을 질렀다. "야아! 이이! 후치, 나쁜 놈아아아! 으아앙!" 왜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냐고, 그래. 그건 그렇고 나도 참 큰 일 이다. 아무래도 제미니가 이뻐보이는 걸로 봐서 평생 제미니의 나이트 로 남게될 가능성이 크군. 그게 내 서글픈 운명인가봐…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 희뿌연 여명 속에서 나는 우리집의 문에 못질 을 했다. 뭔가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문에 못질하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태어나 17년 동안 살던 집이 라는 점이 문제다. 우리 국왕님께는 개망나니 같은 형이 하나 있다고 한다. 원래는 그 형 님이 국왕이 되어야 하지만 워낙 성격이 엉망이고 행실이 개판이라 귀 족원에서 그 분의 목을 치고 그 동생을 태자로 앉혔다. 그런데 난 이 폐태자의 이야기 중에서 지금 내 상황에 썩 어울리는 이야기 하나를 떠 올렸다. 그 폐태자가 어느날 자기 방에 못질을 해버렸다. 궁내부원들이 보고 놀라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 미래가 밖에 있으니 밖으로 가겠다. 그러나 내 소중한 과거는 여 기에 있으니 죽기 전에는 돌아오겠다. 과거 없이는 미래도 없으니, 그 때까지는 이 방은 불침이다." 그리고는 궁궐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날로 귀족원에 의해 폐위되었다. 역시, 어떠한 방랑자에게도 돌아올 곳은 있는 법이다. 뛰쳐나온 집이라 든지, 고향이라든지, 설령 고아라 해도 그의 소중한 기억이 있는 장소는 있을 것이다. 그곳을 평생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으로 방랑을 계속할 힘 을 얻는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못질하는 것은 험난한 미래 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이상스레 흥분되는 마음에 손가락을 두 번이나 찧었다. 나는 손가락을 절절 흔들면서 작업장도 폐쇄하고는 말에 마구를 걸치 고는 카알의 집으로 향했다. 아침 안개가 가득 피어있었지만 그렇다고 길을 잃을 일은 없다. 카알은 나와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나 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오, 일찍 오시는군, 네드발군." 난 싱긋 웃고는 그에게서 망치와 못을 받아들고는 한 방에 하나씩 꽂아 넣었다. 카알은 머리를 흔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네, 그 힘에 꽤 익숙해졌군 그래. 자연스러운데?" "매일 그런 망측스러운 훈련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등에 그건?" 카알의 등엔 롱보우(Long bow)가 걸려 있었다. 카알은 어깨를 으쓱하면 서 말했다. "여행은 여행이니, 무장을 해야하지 않겠나. 활은 좀 쓸 줄 알거든." "그런데 샌슨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 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서 샌슨의 모습이 안개 사이로 나타났다. 그는 황급히 두 마리의 말을 세우고는 뛰어내렸다. "허엇, 헉.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냐, 아냐. 지금 막 나온 길이야." 난 샌슨의 얼굴을 보았고 곧 폭소를 터뜨릴 뻔 했다. 샌슨의 눈은 빨 갛게 되어 있었다. 아마 틀림없이 오늘 아침 집을 나오면서 통곡을 했 던 모양이다. 아니, 아니지. 흠. 설마 그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가 그런 꼴을 보일 리는 없고… 오오라! 난 샌슨에게 다가갔다. 샌슨은 갑자기 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 가가자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갑자기 샌슨의 가슴에 코를 박았고 샌슨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아… 향기로워라." 샌슨은 내가 던진 미끼뿐만이 아니라 아예 바늘까지 꼴까닥 삼켰다. "으헥! 설마, 후치, 어떻게, 그 냄새가 나?" "역시! 푸헤헤헤헤!" 샌슨은 보나마나 여기로 오는 도중에 그 처녀를 몰래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는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로 결혼하기로 했었지? 아마 속 뒤집어졌을게다. 나는 남녀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오자마자 다시 떠나시다니요!" "미안하오. 하지만 난 군인이라… 흑흑, 사실 나도 가기 싫소! 우앙!" "아아… 야속한 운명이어라! 우리, 사랑으로 이 형벌을 이겨내요!" 샌슨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난 싱긋 웃으며 말에 올랐다. 카알 도 자신의 말이 어느 것인지 물어보고는 자신의 짐을 얹고 익숙한 동작 으로 말을 탔다. 잘 타네. 부럽다. 샌슨만이 축 쳐져서 우울한 표정이었다. 카알은 샌슨이 하도 처량맞아 보이자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든 모양이다. "퍼시발군. 걱정 말아요. 이건 아무르타트와 싸우러가는 그런 일은 아 니지않나. 그리고 자네가 이 일을 훌륭히 수행해낸다면 그건 영주님께 대한 커다란 충성이라네." "무,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선도하겠습니다." "길은 아나?" "어제밤 늦도록 지리서를 읽어두었습니다. 모든 여정과 날짜 소모, 그 에 따른 필요한 보급지와 속도도 다 계산했습니다." "그럼 퍼시발군만 믿고 따라가지." 샌슨은 경례까지 붙이고는 우리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안개가 심한데 다 어차피 숲이라 달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 바깥까지 나오 는 동안 천천히 걸어갔다. 마을 바깥으로 나오자 비로소 샌슨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트롯 (Trot) 정도의 속도로 우리는 수도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해가 떠오르며 우리의 앞길을 황금빛으로 바꿔놓았다. 대단 히 기분좋은 출발이었다.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단숨에 캔터(Canter) 정도로 속도를 높였다. 난 어제의 고통이 되살아나 허리가 아파왔지만 샌슨과 카알은 여유있게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나 혼자 뒤쳐 질 수는 없었다. 눈에 와 부딪히는 햇살, 눈꺼풀에 부딪히는 바람. 뜨겁고 차갑군. 세 마리의 말은 태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 …그러나 전사들의 자부심과 흡사한 자존심은 몬스터들에 게도 있다. 흔히들 몬스터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선입관으 로서는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약삭빠르며 자부심이라고는 추 호도 갖지 못했다는 느낌일 것이다. 이것은 흡사 자부심이란 인간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드워프나 엘프도 몬스터 와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저 드워프의 강인하며 끝없는 당 당함과 엘프의 조용하지만 절대적인 자존심은 어떻게 설명 될 것인가. 따라서 자아(自我)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에게 자부심이란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관념이다. 흔히 인간들이 교활하다고밖에 여기지 않는 고블린에게도 자존심은 있고 수치를 느낄 줄도 안다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때로 몬스터에게도 있는 자존심을 가지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품위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있는 이야기] 제 2 권. PP. 334 (770년 돌로메네 作) "우와! 덥다! 무슨 가을밤 날씨가 이래?" "돈다, 돌아! 정말 김 난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날씨는 분명 가을밤이고, 우리가 위치하고 있 는 곳은 회색산맥 끄트머리의 휴다인 고개였다. 휴다인 고개는 우리 고 향인 헬턴트 영지가 있는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바이서스의 중심부 미드 그레이드 지역으로 넘어갈 때 사용되는 몇 개의 관문 중에 하나이다. 회색산맥의 끄트머리라고 하지만 그래도 무시못할 정도로 고지대이기 때문에 절대로 덥다고 말할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수리에서 김을 올릴 정도였다. 샌슨과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자서 짜증을 부리고 있는 것이 었다. 카알은 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고 우리 둘을 황당하게 보고 있는 것은 카알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은 모두 자신의 글레이브(Glaive)를 꼬나든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놈들은 도대체 포기라는 것을 모르나?샌슨은 짜증을 부리 다가 이젠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 그러길래 남김없이 죽이자고 했잖아!" "험한 말 좀 하지마! 그리고 누가 저렇게 질길 줄 알았어!" 며칠전 밤. 노숙을 하던 우리는 느닷없이 들려온 비명소리에 달려갔다 가 오크들의 잔치를 방해하게 되었다. 오크들은 아마도 상인으로 짐작 되는 여행자 하나를 살해해놓고는 그의 물건들을 꺼내보며 왁자하게 떠 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샌슨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고 그는 날래게 롱소 드를 뽑아들며 그대로 오크 하나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다른 오크들은 반항하려 했지만 카알이 롱보우로 지원해주고 키가 월등히 큰 샌슨이 난리를 피우자 놈들은 압도적으로 불리해졌다. 그러자 오크들은 가장 만만해보이는 내쪽으로 달려왔다. 난 실제의 몬스터와 싸우는 것은 처 음이라 당황했지만 꾹 참고 바스타드를 붙잡았다. "에라, 죽어보자! 일자무식(一字無識, Perfect Barbarity)!" 나의 화려한 일자무식! 음, 일자무식은 언젠가 오우거의 일루젼과 싸울 때 써먹었던 기술로 무식한 힘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그대로 몸이 한바퀴 더 돌아 다시 올려치게 되는 기술이다. 너무 강하게 올려쳐 허 리가 아파온다는게 단점이지만, OPG가 내는 괴력에 의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두 번 올려치게 된다. 내 취향에 딱 맞는 기술이지만 샌슨은 죽 기에 딱 알맞은 기술이라고 말한다. 실제의 오크들은 일루젼처럼 멍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장 앞에 오 던 놈은 옆으로 피하다가 귀를 잘렸다. 오크는 펄쩍 뛰었다. "취이이익!" 그런데… 하필이면 잘린 귓조각이 내 입에 들어오는 바람에, 난 왁왁거 리며 게워버리느라 귀를 움켜쥐고 달아나는 오크를 놓쳐버렸다. 샌슨은 달아나는 놈들을끝까지 추적하려 했지만 난 속도 메슥거리고 졸리기도 하는 참이라 상인의 신원이나 알아보고 매장이나 해주자고 말 했다. 샌슨은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카알도 내 의견에 찬성했으므로 우리는 상인의 신원을 조사해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체에 돌무더기를 쌓아 간단히 매장하고는 잠을 설친채 출발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오크들이 복수를 하겠다면서 이렇게 우리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들의 복수심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이 정 도일 줄은 몰랐다. 이번엔 아예 달아나지도못하게 완전 포위진형으로 나섰다. 그래서 우리는 절벽을 등진 채 이렇게 몰려 있는 것이다. 뒤로 는 켜켜이 쌓여있는 기암절벽이 까마득하게 솟아있었고 앞쪽으로는 넓 은 구릉지대, 곳곳에서 자작나무들이 서 있는 숲이다. 그리고 그 자작나 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오크의 모습. 모닥불 때문에 놈들은 달려들진 못 했지만 우리도 며칠밤을 시달리다보니까 눈에 핏발이 설 지경이다. "야! 너희들 우리 말 할 줄 알지?" 난 화가 나서 놈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크들 중 월등히 거대한 글레이 브를 든 놈이 앞으로 나섰다. 덩치도 다른 오크의 몇 배는 되겠다. 놈은 불기운이 마땅찮다는듯이 눈을 껌뻑거리면서 말했다. "취익! 유언이라도 남길텐가? 인간들은 간혹 그러더군. 취익!" "유언같은 소리 하네. 임마! 어떻게 하면 포기할거야, 응?" "취이익! 포기란 없다! 취익! 너희들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우리는 계 속한다!" "정말 귀여워 미치겠네. 아예 애교를 부리는구나." 오크는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취익! 말인가?" "인간 어린애가 너희들같이 군단 말이다!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지." 오크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진지 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봐, 잘 들어봐. 인간은 나이를 먹지?" "무슨 말을 하는가? 취익! 그건 어느 생물이나, 취익, 마찬가지다!" 좋아, 넘어온다, 넘어온다. "맞어맞어. 그런데 말이야,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난 어느새 그 놈 얼굴까지 바싹 다가가면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 오크 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나는 정답게 웃으며 설명했다. "점점 교활해지거든!" 나는 날쌔게 그놈을 겨드랑이에 끼며 목에 바스타드를 가져다대었다. 오크는 방항하려 했지만 난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오크는 숨막히는 소 리를 질렀다. "자! 더 이상 다가오면 이 녀석을 죽이겠다!" 난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카알과 샌슨을 바라보았다. 나 어때?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이상했다. 두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는 희귀한 것을 본다는듯이 나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 하나가 말했다. "취익, 그래서?" "다, 다가오면 죽인다니까!" "다가가고, 죽이고, 취익, 그래서?" "죽으면 안되잖아?" "도대체 무슨, 취이이익! 말을 하는건가, 취익! 죽으면 안된다니! 취치 치익! 죽인다고 했잖아?" "어, 어, 그렇긴 한데 말이야." 그 때 샌슨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후치, 안됐지만 오크는 인질 같은 것은 취급하지 않아." 뭐야? 아니, 그건 절대 말이 안된다. "그, 그게 무슨… 아니, 그럼 복수는 왜 하겠다는 거야? 동료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다면 복수같은 거…" "오크는 인질이 될 정도로 멍청한 놈을 동료로 여기지 않아. 그리고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동료의 복수가 아니라 그 상인의 물건을 훔치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복수일걸. 자기 일을 방해했다는 거지." 나는 입을딱 벌렸다. "이런 밥맛없는 놈들!" 난 하도 화가 나서 겨드랑이에 낀 놈의 모가지를 잡아 뱅뱅 돌렸다가 오크 무리로 집어던져버렸다. 오크들은 내 힘에 크게 놀라는 듯했으나, 그보다 먼저 자기 무리로 날아온 이방인(?)을 처리했다. 오크들의 글레 이브가 일제히 휘둘러졌고 내 겨드랑이에 끼었던 놈은 비명 지를 사이 도 없이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난 그 광경을 보면서 다시 구토를 느 꼈다. 동족을 저렇게 자기 손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우욱… 해도 너무한다." "저 놈들은 원래 그래. 숫놈들은 언제 죽을지모르는게 오크야." "암놈은?" 그 와중에도 호기심을 느끼는 것을 보면 난 인간이다. 카알이 설명했 다. "오크들은 암놈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요. 그리고 인간들도 암놈은 건 드려선 안된다네. 어차피 암놈들은 동굴에 틀어박혀 있으니 구경도 못 하지만, 만일 누군가 암놈을 건드린다면 그가 제아무리 루트에리노 대 왕만큼의 영웅이라도 죽었다고 봐야돼." "허, 그래요?" 오크들은 작업을 끝내고 이제 글레이브를 우리에게 돌렸다. 이런, 쓸데 없는 말을 나누다가 위험해질 뻔 했군. 어쨌든 저놈들이 하는 짓을 보 니 도저히 용서고 자비고 생각해줄 기분이 들지 않는다. "임마들아! 내가 누군줄 알아? 난 초장이다. 네놈들 기름으로 초를 만 들어주겠다!" 나의 다분히 직업정신이 넘치는 경고에 샌슨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데 오크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취익! 너, 초장이라고?" "그렇다. 대륙의 어디에서도 오크 기름으로 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보겠어! 거기에 내 이름을 붙이 지. 네드발식 오크 양초!" 오크들은 갑자기 서로 궁시렁거렸다. 그러더니 그 중 한 놈이 다시 말 했다. "그럼, 취익, 저 놈은 생포다." "뭐…야?"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샌 슨을 바라보았고 샌슨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때 카알이 끼어들었다. "여보게들… 오크들이 어떻게 저런 무기를 쓰고 갑옷을 입고 한다고 생각하나? 인간의 기술자들을 잡아서 부리기 때문이야. 그래서 저 놈들 은 기술자를 좋아해." "예?" "오크들은 머리가 나빠 배우지는 못해. 그래서 기술자를 잡아서 대신 일을 시키는거야. 대장장이를 특히 좋아하고 자네같은 초장이도 좋아하 지. 촛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잡아온 기술자들이 오크의 동굴 속 에서 일하려면 초가 필요하니까." 샌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봐, 난 대장장이 아들로 대장간 일이 특긴데. 어쩔 거야?" 오크들은 당황했다. 그 놈들은 다시 궁시렁거리더니 말했다. "취익! 그 뒤의 늙은 인간! 너는? 취익! 우릴 잘 아는 것 같은데, 취익 취익! 너도 지식이 많은가?" "나? 난 독서가고 작가 취향도 있지만 자네들에게는 일단 약사라고 해 두세나." 오크들은 완전히 당황했다. "그, 그럼, 취이이익! 취익! 모두 생포다!" 샌슨은 껄껄 웃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죽을 걱정 안하고 싸우겠네?" 나도 싸늘하게 말했다. "우린 좀 다른 의견이 있지. 우린 너희들 중 몇 놈만 생포할거야. 네놈 들 동굴에 갖혀있는 사람은 구해야겠어." 내 말을 듣자 샌슨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그렇군!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샌슨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달려들었다. 당황한 오크들이 글레이브를 내밀었지만 오크는 팔길이가 짧은지라 인간만큼의 글레이브는 쓰지 못 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 낮다는 것이 문제다. 샌슨은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들어오는 글레이브를 황급히 튕겨내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주 위를 둘러보았다. "에에에라!" 오크들의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난 크기가 거의 오크만한 바 위를 집어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린 다음 말했다. "공기놀이 할래?" "저, 저거 초장이 아니다! 취이익! 인간 아니다!" 난 사정없이 그걸 집어던졌다. 쾅쾅쾅! 오크들이 저렇게 날쌘가! 산토 끼 같군. 그러나 그 중 재수없는 놈이 하나 있어 바위 앞에 쓰러져 버 렸다. 난 좀 끔찍스러워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감고 있으니 순간 뒷통 수가 선뜻해서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똑똑히 봤다. "음, 잔인하군. 누구야, 이런 일을 한 놈이." 오크들은 발악을 하며 달려들었다. 샌슨은 상대가 너무 낮게 베어들어 오자 화를 내면서 상체를 앞으로 길게 숙이며 풀스윙으로 롱소드를 휘 둘렀다. 확실히 샌슨의 상체와 팔길이에 롱소드의 길이가 더해지자 오 크들의 글레이브보다 더 길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달려들었다. "일자무식! 옆으로!" 이번엔 일자무식을 옆으로 바꿔봤다. 옆으로 돌려보니까 간단하게 세 번을 돌았고 허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현기증이 나는 부작용이 있 었다. 그리고 오크들은 그 퍼런 얼굴이 더 퍼렇게 바뀌는 재미있는 모 습을 보여줬다. 놀랍게도 난 세 번이나 돌면서 하나도 맞추지 못했으며, 대신 옆에 있던 나무 몇 그루가 잘려버렸다. 난 샌슨의 비난섞인 눈초 리를 무시한 다음 잘려나간 나무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이걸 노린 거야!" "…그랬냐?" 나의 OPG와 샌슨의 검술을 놓고볼 때 우리는 오크들이 생포 운운할 정 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크들은 질린 표정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그건 절대로 안된다. 난 달려들어 한놈의 덜미를 잡아올렸다. 놈은 악을 쓰 면서 내 얼굴을 치려했지만 복부에 한 방 먹여주니 기절해버렸다. 입가 로 기분나쁜 침을 흘리면서. 오크들은 다 달아났고 우리는 밧줄을 꺼내어 생포한 오크를 묶었다. 샌슨은 말했다. "저, 카알. 이놈들이 인간을 납치한다면, 아무래도 그 동굴을 수색하여 그들을 구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만…." "나도 찬성일세. 먼저 시간이 충분한지 자네가 확신시켜 준다면." 흠, 그러고보니 벌써 10월이 되었군. 우리가 출발할 때는 9월말이었는 데. "시간은 충분합니다. 수도까지는 이제 17일 정도니까 돌아오는데 25일 정도 잡으면 왕복 42일입니다. 물론 며칠 차이는 나겠지만 대략 한달 보름 정도 남습니다." 카알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 참… 전하를 알현하고 휴리첼 백작가에도 들러보려면 시간이 좀 그렇군. 한달 보름이라." 샌슨과 나로서는 그저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달 보름이 왜 부 족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도의 사정이나 왕실 예법은 모르 므로 잠자코 있었다. 카알은 얼굴을 펴며 말했다. "깨우게. 내가 심문하지. 시간이 부족해지면 밤에도 달려야지." 카알은 자상한 표정이었고 샌슨도 기쁜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씩 웃으며 그 놈의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놈은 곧 눈을 뜨고는 자기 상황을 살펴본 다음 공포에 질렸다. 카알은 그 놈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아까 들었겠지만 난 너희들에 대해 조금 알아. 넌 이대로 돌아가면 족장에게 맞아죽겠지? 족장이 너의 머리를 잘라내어 가지고 놀다가 싫 증나면 집어던져버릴꺼야." 오크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별로 충격받지는 않았다. 대신 샌슨과 내가 충격을 받아 얼굴이 노래졌다. 카알은계속 말했다. "네 동굴의 위치를 말해주지 않으면 널 족장에게 데려갈 거야." 샌슨과 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게 말이 되냐? 우리는 카알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취익! 저쪽 봉우리 정상에서 아래로 300 큐빗 쯤, 취익! 덩굴로 가려 진 바위틈, 취익! 양쪽의 쓰러진 나무 두 개가 표시다. 취이익! 수효는 모두 150 쯤 된다!" "그런가? 고마워." 카알은 밧줄을 풀어주었고 그 놈은 곧 줄헹랑을 쳤다. 카알은 우리들 의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제군들. 저 놈들이 왜 인간 기술자를 납치하겠나." "그, 그래도 너무 심하군요." 샌슨은 볼을 실룩거리며 황당해하고 있었고 나는 낄낄거렸다. 카알은 턱을 쓸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150 마리라면 너무 많은데…. 도대체 그렇게 많은 놈들이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하군. 휴다인 고개의 산적질이 그렇게 수입이 좋은가? 음. 샌슨. 근처의 요새나 큰 마을이 있는가?" 샌슨은 두툼한 지리서를 꺼내더니 모닥불 가까이 가져와 위치를 짚어보 았다. "에, 좀 멀리 떨어진 곳에 포트 이룬다가 있습니다. 꽤 먼데요. 나흘 거리는 되겠습니다. 그 외에는 작은 영지들이 몇 개있을뿐입니다. 아마 그 작은 마을들을 노략질하며 살아가는 모양이지요." "하긴 요새나 대도시가 가까이 있으면 저렇게까지 대규모 집단을 이루 긴 어렵겠지." 카알을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샌슨이 보여준 지리서에 나타난 포트 이룬다는 우리들이 가려는 동쪽 방향과는 거의 직각으로 꺽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요새로 그 남쪽 의 자이펀과의 국경을 지키는 국경 수비대 요새였다. 거기로 가면 시간 을 많이 낭비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국경 요새에서 오크 정벌을 위해 군사를 파견해줄 것같지도 않다. 우리가 뭐 대단한 신분도 아니고 국 경수비대를 출동시켜 주십사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의견을 내놓았다. "저, 어, 으하아암. 쩝쩝. 그놈들은 낮에는 잘거 아니예요?" "그렇겠지." "그럼 낮에 동굴 안으로 살짝 들어가 사람들만 재빨리 찾아서 나온다 면?" "너무 위험해. 말도 안되요. 네드발군. 어두운 동굴 속에서 150 마리나 되는 오크들을 피해 사람만 찾아나온다니. 그리고 놈들도 아마 보초병 을 세울텐데." 그 때 숲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확실히 어리석은 계획이군요."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2. "어엇?" 샌슨과 난 당황해서 무기를 들어올렸다. 목소리는 인간,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였지만 여자 목소리를 내는 몬스터도 얼마든지 있다. 어쨌든 한 밤중이니 무조건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사람이라면 앞으로 나오시오!" 숲 속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말을 거절할 수도 있을텐데요?"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날 돌아보았다. 윽,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샌슨에게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지어주고는 숲속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나오지 않으면 넌 변비 걸린 고블린, 무좀 걸린 오크, 치질 걸린 놀 (Gnoll)이다!" 역시 난 통쾌한 남자다. 샌슨도 나처럼 통쾌한 놈은 처음 보겠다는듯 이 바라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숲속의 목소리는 잠시 후 말 했다. "…불쾌한 추측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나가야겠군요." 이윽고 불빛 속으로 나타난 것은 키가 훤칠하고 귀가 큰 여자였다. 귀 가 얼마나 큰지 꼭 엘프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샌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저 여자 꼭 엘프처럼 귀가 크네?" 샌슨은 날 이상하게 바라보더니 그 여자에게 말했다. "숲의 종족이시군요?" …엘프였군. 엘프는 샌슨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카알만큼은 훤칠한 키였다. 난 저렇 게 새카만 머릿결은 처음 봤다. 그 새카만 머리카락은 뒤로 묶여 있었 다. 그리고 백색의 얼굴 가운데 눈도 새카맣다. 옷은 하얀 블라우스에 고동색의 가죽 자켓을 걸치고 있는데 앞쪽을 잠그지 않고 그냥 풀어놓 아서 하얀 블라우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색의 가죽 바지를 입 고 있었는데 왼쪽 허리에는 가느다란 에스터크(Estoc)를 차고 있었고 그 아래 왼쪽 허벅지에는 망고슈(Main-Gauche)를 묶어놓았다. 같은 쪽 에 칼을 두 개 차고 있어? 오른쪽에는… 오른쪽 엉덩이 쪽에는 화살통 을 차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등에 맨 배낭에는 콤포짓 보우(Composit bow)가 꽂혀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엘프였다. 나는 그 용모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엘 프에 대한 옛이야기처럼 확실히 미인이었다. 하지만 내 취향대로라면 키가 좀 더 작았으면 좋겠다. 이 엘프 아가씨는 키도 훤칠하고 다리도 길어서 나무로 치자면 삼나무 같은 느낌이 든다. 난 좀더 소박한 전나 무가 좋다. 키도 좀 더 작고, 어깨도 좀 더 좁고, 목도 저렇게나 길 필 요는 없… 으윽. 제미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군. 망할. 내가 제멋대로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프 아가씨 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오크들의 소리가 들려 와봤습니다." "샌슨 퍼시발입니다. 반갑습니다." 카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카알입니다.' 라고 말했고 난 딴 생각을 하느라 당황해서 내 소개를 했다. 엘프 이루릴은 소개받을 때마다 살짝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가 끝나자 이루릴은 말했다. "인간 여러분은 여행자이십니까?" 카알이 말했다. "글쎄요. 세레니얼양께서 인간의 일을 잘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만, 저희들은 수도로 전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입니다만. 저희 고장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드리기 위해서지요." "그러신가요." "세레니얼양도 여행자이십니까?" "이루릴이라고 부르세요. 여행자입니다." 그 때 샌슨이 당황해서 말했다. "아, 저, 일단 앉으시지요. 야, 후치. 주전자에 물 얹어라." 흠, 좋지. 어차피 잠도 달아났으니 차라도 마시지. 이루릴은 감사의 말 을 한 다음 앉았다. 흠, 엘프란 좀 뻔뻔스러운데가 있나 보군. 컵을 꺼 내면서 내가 말했다. "이봐요, 아까부터 우릴 보고 있었어요?" "그렇습니다." "좀 도와주지 그랬어요? 그럼 차대접하는 기분도 썩 좋을텐데." "누굴 도우란 말씀이지요?" 응? 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상대는 엘프고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을 도와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내가 한 말은 자기중심적인 말 이었고 이루릴은 그것을 지적했나 보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뻗대보기로 했다. "비슷한 사람이요!" "비슷한… 네드발씨는 놀과 오크가 싸운다면 누굴 도울 건가요?" 어랏, 대답을 잘못하면 큰 코 다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둘 다 안 돕는다고 말하면 이루릴은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난 카 알이나 샌슨이 좀 도와줄까 해서 두 사람을 돌아봤지만 카알은 흥미롭 다는듯이 바라보고 있을뿐 도와주려는 기색은 없었고 샌슨은 이루릴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칵! 저 총각이 왜 저래? 고향의 그 아가씨와 질질 짜면서 헤어진지 며칠이나 됐다고! 난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는 컵을 헹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아이고! 나도 모르겠어요. 에, 나에겐 하나의 선이 있어 요. 그 선 안쪽이면 친구고, 그 선 바깥이면 타인이지요. 그리고 후치라 고 불러요." "그 선은 뭔가요? 후치." "나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오크나 놀은 둘 다 날 생각하지 않는 놈들이니까 둘 다 돕지 않겠어요." 이루릴은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그럼, 난 당신들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신의 타인인가요?" "현재로선… 그래요. 친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당신이 돕지 않았으니 까." 나는 컵을 내밀었다. 컵을 받아드는 이루릴의 손가락은 가느다랗다. 난 카알에게도 컵을 줬고 샌슨은 어깨를 친 다음에야 컵을 줄 수 있었다. 샌슨은 컵을 받아들더니 다시 이루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총각 큰일내겠군. 이루릴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온기를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싼채 거기에 입술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그럼 후치는 나에게 이 차를 줬으니, 그것은 당신이 날 생각하는 것 이겠죠. 그럼 난 당신을 친구로 여겨야 되나요?" 허억! 너무 어렵다. "세레니얼씨가 나와 같은 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이루릴이라 부르세요. 그럼 당신은 날 타인이라 여기면서도 나에게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가 보군요." "어, 그게 살아가는 방법 아닙니까?" "그럼 당신이 놀이나 오크에게 손을 내밀면 그들 중 하나와 친구가 될 수도 있을텐데요." "어, 어, 그건, 내가 손을 내민다고 그 놈들이 날 친구로 받아주겠 어요?" "당신이 나에게 차를 건넨다고 내가 당신을 친구로 받아들일까요?" "…모르겠어요." 이거 내가 해놓고도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난 내 기억 저장고에다가 엘프는 무지 황당하며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종족 이라고 써 둔 다음 차를 마셨다. 뱃속이 뜨뜻해지니까 곧 졸음이 왔다. 이루릴의 칠흑같은 머릿결 사이로 떠오른 하얀 얼굴은, 어두운 밤의 배경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 얼굴은 하얗고 투명해서 촛점을 맞춰 바라보기 어려웠다. 카알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듣고 있자니 퍽 인상적이었소." 아무래도 카알은 나와 이루릴이 인간과 엘프로서 이야기를 나눈 것으 로 보고 두 종족 사이의 대화를 관찰했나보다. 퍽도 재미있으셨겠어. 이 루릴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간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를 다 따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종족 중에 하 나니까요." 이루릴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전… 인간에 익숙하지 못해요. 지난 120년간 인간을 봐왔지만 아직 모 르겠어요. 그래서 아마 제 지위가 올라가지 않나 보지요." 으아, 120살! 엘프야 나이를 천천히 먹는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120년을 살았다면 슬라임(Slime)도 이해했겠다. '그대, 꿈틀거리는 슬라 임이여, 너의 매혹적인 꿈틀거림은…' 이상한가? 어쨌든 그렇게 오래 살 았다면서 왜 사람을 이해 못해. 난 차를 후루룩 마셔버리고 모포를 챙겼다. "으아함.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돼. 샌슨, 졸려?" "아, 아니. 난 괜찮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고. 나는 카알을 쳐다보았고 카알도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럼 먼저 잘테니 교대할 때 되면 깨워주… 아함." 나는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가버렸고 카알은 이루릴이라는 그 엘프 아 가씨와 계속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샌슨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루릴의 입만 보고 있었다. 정말 우리 마을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군! 카알이 말했다. "나로서도 엘프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자신 없습니다." "그러신가요." 카알의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난 잠이 들어버렸다. 아무래도 날이 밝은 것 같다. 눈썹에 부딪히는 햇살이 강렬하다. "으음?" 난 모포를 걷고 일어섰다. 샌슨과 카알 모두가 모포 속에 들어가 잠들 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불침번을 서지 않고 다 잠들어 있는 거지? 그런데 사그라드는 모닥불가에는 이루릴이 보였다. 이루릴은 가느다랗게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어났나요?" 이루릴은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은채 말했다. 난 당황해서 말했다. "어, 당신이 불침번을 서준 거예요, 이루릴?" "예." "아니, 왜?" "여러분들은 며칠 밤을 오크들에게 시달렸다고 하더군요." "어… 고마워요." "이제 난 당신의 친구인가요, 후치?" 난 무슨 말인가 싶어 머리를 긁다가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피 식 웃으며 모닥불가로 다가갔다. 이루릴의 앉은 키는 나보다 별로 크진 않았다. 다리가 꽤나 긴 모양이지. "예. 당신은 내 친구예요." "그럼 날 위해 행동할 수 있나요?" 어랏? 흠, 좋겠지. 난 주먹을 손바닥에 딱 부딪혀 보이며 말했다. "물론이죠. 당신이 날 생각한다면 나에게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킬 리는 없고, 내가 꼭 해줘야 되는 일일테니까 반드시 해 줄께요. 원래 친구가 그런 거잖아요?" 조금 교활한 말인가? 이루릴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럼 가서 세수하세요." "…예." 난 우리가 야영하던 절벽 아래쪽에 있는 작은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했 다. 꽤 고지대라 나무들은 적었고 고원의 평야 사이로 좁게 대지에 금 이 가듯 뻗어있는 얕은 물줄기라 계곡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가을 도 꽤 깊어져 시냇물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야영지로 돌아오니 차 례차례로 카알과 샌슨도 일어났다. 카알과 샌슨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이루릴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두었던 배낭을 다시 둘러메었다. 샌슨이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가시게요?" "예." "아니, 벌써… 아침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지 않고… 그리고 목적지가 어 딘지 모르지만 동행이라도 하면 좋을텐데…" 샌슨은 허둥지둥 일어나며 말했다. 이루릴은 별 감정없는 무표정한 그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동행이요? 글쎄요. 전 말이 없습니다." "아, 그럼 같이 타면 되지요!" 이루릴은 샌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샌슨은 자기 말에 혼절하는 표정 이었다. 난 고개를 돌리며 킬킬거렸다. "그렇게까지 여러분을 곤란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샌슨은 말을 실수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 이루 릴은 나와 카알에게 번갈아 고개를 조금씩 끄덕여 주고는 말했다. "그럼,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이루릴의 고풍스런 인삿말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카알뿐이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이루릴은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거기서 나무에 매어둔 우리들의 말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 다. 말들은 유순한 태도로 가만이 서 있었다. 이루릴은 그리고는 길이 아닌 나무숲으로 사라졌다. 덤불과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루릴의 검은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잠시 후, 멀리 보이는 구릉 앞 에 이루릴의 모습이 보이더니 이루릴은 그 구릉을 넘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 길로 다니지 않는 거지?" 이루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내가 한 말이다. 카알은 대답했다. "길은 인간의 것이야. 엘프는 길을 만들지 않아." "길을 안만든다고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지.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무가 된다.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인간이 별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엘프와 인간의 변화를 잘 나타내는 말이지." "변화?" "엘프는 닮아버려, 엘프 가까이 있는 것을. 인간을 닮아버려, 인간 가 까이 있는 것은." 목적어와 주어가 아주 희안하게 배치되는 문장이군. 흠. 나는 오래간만 에 푹 자서(불침번 교대 때깨는 것은 정말 고역스러웠다.) 활기찬 기분 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엘프와 인간이 만나면?" "그 어느 때보다 엘프는 심하게 인간화 되지. 그러니 퍼시발군. 자네의 말은 꽤 실례되는 말이었다네." 샌슨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말했다. "모, 몰랐어요. 거, 어, 후치와 내가 같이 타면 되는데…" 난 밀가루를 반죽한 다음 팬케익을 굽기 시작했다. 점심식사 때에도 먹을 수 있도록 밀가루를 가득 반죽했다. 여기에 우유나 계란을 좀 집 어넣으면 훨씬 맛이 부드러울텐데. 뭐, 야외니까 호강은 바라지 말자. 카알은 소식(小食)을 하지만 나는 지칠 때까지 먹는 타입이고 샌슨은 먹어도 먹어도 지치지 않는 타입이다. 내가 굽고 있는 동안에도 샌슨은 날름날름 잘도 주워먹었다. "나 먹을 건 남겨둬어!" "멍청아. 왜 다 굽고 먹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흠. 그렇군. 난 한 손으론 팬케익을 뒤집으며 다른 손으론 열심히 주워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곧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아무리 구워도 점심식사 때 먹을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샌슨과 나는 의아해했고 카알은 우리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샌슨은 아까 실수한 것을 아직도 아쉬워했다. "후치와 내가 함께 탄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됐어요, 응? 지나간 일을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야." 난 밀가루를 더 반죽하면서 물어보았다. "자, 어쩌지요? 그 오크들." "위치까지 알면서 모른척 지나치자니 양심이 찔리는데." "방법이 있어요? 아, 손 치워! 이건 점심 때 먹을 거야!" 샌슨은 기어코 한 장 더 입으로 가져가서 기쁜 표정이었지만 카알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법은 없구만. 우리에겐 임무도 있으니 우리 목숨을 함부로 굴리는 건용납이 안되고. 할 수 없지. 수도에 도착했을 때 국방장관이나 누구 힘있는 사람에게 보고하도록 하자." "그럼 그 사람들은…" "괴롭겠지만. 오크들은 기술자들을 함부로 괴롭히지는 않을거야. 기술 자들은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않을테니 오크들로서도 그런 사람들을 구 하기는 어렵거든. 어떻게 조금 더 견뎌보라고 할 수 밖에. 퍼시발군." "읍, 읍, 쩝쩝, 예!" "지리서에 위치와 그들이 말한 표시를 잘 기입해둬요. 수도에서 보고 할 때 도움이 되도록." "예!"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3.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오래간만에 푹 자서 아주 개운했다. 하지만 푹 잔데다가 팬케익을 두 번이나 굽다보니 시간이 많 이 늦었다. 내가 샌슨 때문에 늦었다고 투덜거리자 샌슨은 오후쯤이면 휴다인 고개를 넘을 수 있을 것이며 저녁에는 마을에 들러서 쉴 수 있을 테니 걱정말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또 궁시렁거렸다. "후치와 내가 함께 탄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만해!" 우리는 지난밤 수목한계선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저지대로 내려오 면서 점차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산 속의 길이지만 그래도 중부대로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에 길은 고르고 넓었다. 말을 달리게 하기에도 적당 했지만 그래도 경사가 있으니까 우리는 말이 지치지 않도록 트롯 정도 의 속도로 가볍게 달려갔다. 며칠 말을 타다보니 나도 말에 꽤 익숙해 졌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점점 급박한 계곡이 나타날듯한 높이에 이르렀다. 쿠쿠쿠쿠쿠릉! 난 이상한 소리에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말했다. "휴다인 강이야. 계곡의 급류라서 소리가 꽤 크지? 우리는 그걸 넘을 거야." "급류? 말을 타고 급류를 건너야 되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다리가 있어." "잠깐! 휴다인 고개에 휴다인 강이니 다리 이름은 휴다인 다리겠지?" "틀렸다. 12인의 다리인데?" "뭐? 12인? 그게 무슨 뜻이야?" "몰라. 지리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는데." 우리는 어리둥절해져서 그 12인의 다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 가갈수록 급류의 물소리가 거대해졌다. 보통 목소리로는 옆사람과 말을 나누기 조금 힘들 정도였다. 잠시후 길 양편에 늘어서 시야를 가리던 나무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저 멀리 앞편에는 거대한 절벽이 보였다. 우리는 절벽보다는 그 앞에 서 있는 것들을 보고 놀랐다. 히잇? 우리들은 당황하여 말을 멈춰세웠다. 샌슨은 손을 허리로 가져갔고 난 어깨로 가져갔다. 눈 앞에는 오크 아홉, 드워프 하나와 엘프 하나가 서 있었다. 어떻게 오크가 낮에 돌아다니지? 어쨌든 지금 오크들은 드워프를 노려 보고 있었고 드워프는 거대한 배틀액스를 얼굴 앞에 세워들고 그 날을 만지작거리며 오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미노타우르스가 쓰던 배틀엑 스를 떠올렸다. 그 거대한 길이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도낏날의 크기는 거의 맞먹겠다.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도끼를 쓴다 해도 혼자서 아홉이나 되는 적들에 게 맞서 주눅들지 않고 있다니 대단하다. 게다가 그 오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싸우던 놈들보다 훨씬 크고 사나워보였다. 그 오크들은 드워 프의 도발에 노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엘프는 그 중 누 구에게도 시선을 보내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서 떨어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엘프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루릴?" 물소리 때문에 말발굽 소리를 듣지 못하던 그 무리는 우리가 거의다 가가서야 겨우 우리를 알아보았다. 나와 샌슨은 당장 말에서 뛰어내렸 다. 샌슨은 이루릴에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이루릴은 계곡의 바람에 흩날리는 그 검은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말했 다. "헤어지자마자 만나는군요." "걱정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예?"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샌슨은 당황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이 상황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크들은 전혀 덤비지 않았다. 그리고 드워프도 전혀 겁먹은 태세가 아닌 당당한 자세로 오크들을 쏘 아보고 있었다. 마치 드워프 한 명이 무서워 오크들이 덤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루릴은 나를 보더니 말했다. "후치? 당신은 누굴 돕겠어요?" 허어… 이거 어려운 문제군. 내가 보기엔 믿기는 어렵지만 드워프 하 나가 나머지들을 모조리 위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일단은 찾아봐야겠군요. 도움이 필요한 게 누군지." 그 때 드워프는 배틀 액스를 내리며 말했다. "됐군. 세 명이면 14명이군." 그러자 오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크 중 하나가 외쳤다. "취이익! 그럼 누가 빠지는가?" 드워프는 이죽거리면서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 중 둘을 죽이면 어떨까?" "취이익! 너와 저 엘프를 죽여놓지!" 그 때 이루릴이 나섰다. "아무도 약속을 어기면 안됩니다." 그러자 오크와 드워프 모두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나와 샌슨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분명히 싸우고 있던 것은 아니 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카알은 침착하게 질 문했다. "세레니얼양.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여기, 초행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여기 12인의 다리에서는 어떠한 종족도 싸울 수 없답니다." "싸울 수 없다고요?"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이 다리를 만든 이의 소원. 그는 그래서 12명이 아니면 다리 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요." "예?" 이루릴은 손가락을 들어 계곡을 가리켰다.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두 절벽 사이의 거리는 약 60 큐빗. 그런데 그 중간의 허공에 작은 배 가 떠 있었다. 아니, 배라고까진 할 것까진 없고 넓적한 사각형 뗏목처 럼 생긴 것으로 그 주위로 울타리처럼 난간이 쳐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무런 밧줄이나 기타 장치 없이 그저 허공에 떠있 는 것이었다. 샌슨과 난 절벽 쪽으로 달려가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런데 그 뗏 목 바닥에는 동그란 원과 복잡한 도형들이 보였다. 저것은 마법원… 마 법이구나! 이루릴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어떤 종족이라도 12명이 구성되어야 다리를 건널 수 있지요. 날아서 건널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 여기 선 서로 싸울 수 없어요."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허어… 같은 종족 12명은 안됩니까?" "그건 상관없어요. 그래서 인간 상인들이나 오크들은 흔히 12명으로 짝을 짓더군요. 하지만 다른 종족은 12명이나 되는 많은 수가 함께 다 니는 일이 드물지요. 그래서 여기서 어떤 종족이든 기다린 다음, 이곳에 서만은 싸우지 않으며 함께 건너게 되는 겁니다." 우와.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흠. 대단한 곳이군. 카알은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그거… 뜻은 좋은데 좀 불편하군요. 12명이 안되면 절대로 건널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예. 하지만 이곳은 워낙 왕래가 잦은 곳이라 잠시만 기다리면 12명을 채우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저도 그래서 여러분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고요." 아하, 문제가 뭔지 알았다. 지금 오크와 드워프, 엘프까지 모두 11명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을 건너기 위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싸우지 않고 1명이 더 나타나기를 기다린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는 3명이다. 따라서 2명은 남아서 다시 10 명이 더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에도 드워프는 계속 으르렁거리며 상대편의 오크와 험담을 주 고받고 있었다. "더러운 놈들! 이곳이 12인의 다리라는 것을 고마워해라! 다른 장소라 면 너희들은 예전에 죽었어!" "취이이이익! 크앗! 이 지저분한 수염의 꼬마가 어디서!" 흠, 오크와 드워프가 서로 키를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하 지만 저 오크들은 오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크니 드워프를 가리켜 꼬마 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드워프는 눈 앞에 오크들을 두고도 공격하 지 못하니까 거의 돌아버릴 지경인 모양이다. 입에 거품을 물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그런데 저 놈들은 어떻게 낮에 돌아다니는 거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이루릴이 말했다. "저들은 우르크(Urc)라고 하지요." "우르크?" "오크의 일종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족의 이름이랄지… 체구가 꽤 크 지요? 저들도 다른 오크처럼 햇빛을 싫어하지만 저들은 그래도 견딜 수 는 있어요. 그래서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했지요. 낮에는 보통 오크들이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건널 수 있답니다. 그런데 하필 우르크가 나타난데다가 드워프까지 나타났군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르크에게서 충분한 거리를 둔 곳까지 걸 어간 다음 주저하면서 말했다. "저, 여러분. 우리들이 뒤에 왔으니 우리들 중 2명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드워프는 전혀 카알의 말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하도 거칠게 배틀 액스를 휘둘러서 카알은 잠시 물러나야 되었다. "무슨 소리! 이놈들! 너희들 중 두 놈이 빠져! 그 놈들은 살 수 있다. 내가 이 다리를 건너고나면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드워프의 말에 다시 나는 문제를 깨달았다. 다리를 건너고나서 종족비가 어떻게 되느냐. 이루릴은 분명 여기서는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고나면 과연 끝 까지 약속이 지켜질까? 그래서 저 드워프는 종족비율을 맞추려는 속셈 인 모양이다. 우르크들 중 2 마리가 빠지면 인간 셋, 엘프, 드워프 하나 씩으로 다섯이다. 그리고 우르크는 일곱. 싸움이 나도 해볼만 하다. 하 지만 우리들 중 1명이 같이 건너고 2명이 빠지면 숫자는 3 대 9로 압도 적으로 위험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드워프와 엘프, 인간이 한 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다. 샌슨도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카 알을 잡아당겼다. 그는 카알에게 귓속말을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나는 들릴 정도였다. "다리를 건너고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셋은 함께 건너야 됩 니다." "그러나… 여기선 아무도 싸워선 안된다며?" "오크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카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보세요, 드워프씨. 당신은 이 분들이 타고 있는 말을 생각하지 않는군 요?" 응? 말도 포함되나? 음. 그렇군. 당연하다. 어떤 종족이든이라고 했으 니. 그렇다면 인원은 모두 17인가? 드워프는 신나게 외쳤다. "그렇다면 너희들 다섯이 빠질 수 있군! 어느 놈이 빠질 거야?" "취이익! 헛소리! 인간, 너희들이 뒤에 오지 않았나! 취익! 그 냄새나 는 말을 데리고 여기서 기다려! 아니지. 말 한 마리는 내어줘야겠어!" 얼씨구. 전부 제멋대로 이야기 하는군. 이루릴은 말했다. "절대로 이곳에선 싸울 수 없어요. 그러면 아무도 이 다리를 이용할 수 없어요. 약속은 지켜져야 해요. 먼저 그것이 보장되고나서 누가 남을 지 결정되어야 해요." 백번 옳으신 말이다. 하지만 저 옳은 말도 흥분한 드워프와 우르크에 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골치 아프군. 우리들 중 누구 하나를 내어주면 그는 위험하다. 계곡 건 너편에서 마음이 바뀌어버린 우르크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여섯(말도 포함)이 다 건너야겠다고 주장하자니 뒤에 나타난 주제 에 너무 뻔뻔한 것 같다. 드워프는 마구 흥분해서 너희들 중 다섯은 깨끗이 잘라버리고 나머지 를 묶은채 다리를 건너겠다는 식으로 배짱 대단하게 퍼붇고 있었고 우 르크 또한 취익거리면서 우리에게 말을 한 마리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우르크들의 속셈은 뻔한 것 같다. 말 한 마리는 문제가 아니니 계곡만 건너고나면 드워프와 엘프 두 명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는 뜻 인가보다. 그렇게 퍼부어대면서도 섣불리 싸움을 시작하지는 못했다. 싸움이 시 작되면 어느 종족들이 이기더라도 계곡은 건너지 못하게 되니까. 어느 종족 하나만으로는 12를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다섯 종족 (말까지 포함하면)중 최소 두 종족은 모두 필요하다. 흠… 이 다리를 만 든 사람은 바로 이런 상황을 생각했나보군? 난 그 상황에서도 내 호기심은 충족시키기로 했다. "이런 골치아픈 다리를 만든게 누구지요?" 이루릴은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상하군요. 인간의 마법사의 일을 엘프에게 묻다니." "우리가 인간들 중에서 가장 무식한 세 명이라고 생각하세요. 누구지 요?" 이루릴은 빙긋 웃었다. 그러고보니 이루릴이 웃는 것은 처음 보는군. "타이번 하이시커라는 인간 마법사입니다." 순간 우리 세 명의 표정은 대단히 이상해져버렸다. 카알은 내게 물었 다. "이봐, 네드발군. 타이번씨 성이 어떻게 되지?" "어? 카알도 몰라요? 나도 모르는데?" 샌슨도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렸지만 잠시 후 그의 눈은 다시 이루릴에게 고정되고 있었다. 좀 그만해라, 그만해! 정강이를 걷어차줄 까보다. 이루릴은 그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 분을 아나요?" "우리가 아는 분 중에 타이번이라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성을 모르는데…."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다고 듣진 않았는데, 그 분이 이 다리를 만드신 건 200년 전입니다만." 200년? 이런, 아니군. 카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러면 다른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가요." 난 헛기침을 하며 아직도 욕설을 퍼붇고 있는 우르크와 드워프를 바라 보았다. 나는 카알에게 말했다. "저 드워프 말대로 하면 어때요? 우르크들을 공격한 다음 4마리만 포 로로 잡아서 다리를 건너는 거." 이루릴의 눈길에 수심이 피어올랐다. 난 멋쩍어졌고 카알도 고개를 가 로저었다. "글쎄… 이곳에서나마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저런 다리를 만드신 분 의 뜻을 거스르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싸움이 난다면 누가 다쳐도 다칠 텐데." "그렇다면 저 놈들 중 다섯이 빠지라고 권해볼 수 밖에. 저 놈들 아홉 과 함께 건너는 건 싫은데요."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속을 믿고 지키면 간단한 일을…" 이런, 누가 그걸 모르나. 난 이루릴에게 말했다. "오크놈들이 그 약속을 지켜줄지가 문젠데요, 이루릴?" "왜 그들이 지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후치?" "오크니까." "그런가요. 오크들은 인간이나 드워프, 엘프니까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요." 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런가? 난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요. 서로를 믿어야 되는군요. 그것이 이 다리의 건설 목적 인가 봅니다. 하지만 여기 이 장소에서나마 서로를 믿기엔 다른 장소에 서의 반목이 너무 크군요. 타이번 하이시커는 너무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군요." 그 때였다. 내 눈에 우르크들 중 한 놈이 갑자기 앞장서서 드워프와 욕짓거리를 나누던 우르크를 붙잡아들이는 것이 보였다. 그 놈들은 서로 수근거리 면서 우리를 가리켰다. 아니, 우리 말을 가리킨 것인가? 순간 나는 머리 가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세 명과 이루릴, 그리고 저 드워프가 다 죽어도 우리들의 말만 있으면 우르크 아홉 마리는 우리 말과 함께 다리를 건널 수 있는 것이 다. 멍청한! 그 작전은 성공할 수 없다. 우리 숫자가 훨씬 적으니 우르 크들이 이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려면 우르크는 하나도 죽 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저 놈들이 생각 외로 무모할 수도 있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해야 된다. 나는 허리 를 굽혀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고는 우르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우르크들은 의아해하며 날 바라보았다. "이봐. 혹시 우릴 다 죽이고 우리 말을 빼앗으면 열둘이 된다고 생각 하나 본데 그렇게는 안될걸." 난 싱긋 웃으며 그 돌을 엄지와 검지로 부스러트렸다. 돌은간단하게 가루가 되어 터져나갔다. 우르크들은 퍼렇게 질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놈들 중 하나가 외쳤다. "취익! 저, 저거 그 초장이다! 괴물 초장이다! 취이이익!" 어라, 내가 이 근처 오크들 사이에 꽤 유명해졌나 보군. 그런데 우르크 들이 일제히 무기를 앞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욕설을 뱉어내고 있던 드 워프도 우르크들의 글레이브에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글레이브는 다른 오크들의 글레이브보다 훨씬 커서 거의 인간의 글레이브와 맞먹었 다. 삽시간에 우르크들과 인간-엘프-드워프-말(?) 연합군의대치 상태 가 벌어졌다. "어? 야! 뭐하려는 거야?" 난 놀라서 외쳤다. 그러자 우르크들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잘 됐군. 취이익! 계곡을 건널 필요가 없어졌어! 취익, 너희들이 이미 계곡을, 취익, 건넜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취익취익!"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쫓고 있었던 거야?" 그 우르크는 가슴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우리는 우르크! 투사 우르크다! 취익! 너희들의 말살을 의뢰받았지! 취익! 그 허약한 오크들이 대단히 겁먹은 투로 말하길래, 취익! 설마 이 런 꼬마와 노인이 섞인, 취익, 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태를 눈치챈 샌슨의 입가에서 이빨이 번뜩였다. 우리를 쫓던던 오크들이 이 우르크들에게 의뢰를 했나보다. 그래서 놈들 은 우리를 쫓기 위해 이 계곡을 건너려 했고. 하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 늦게 출발해서 오히려 뒤쳐진 것이다. 샌슨은 나직하게 말했다. "좋게 될 것 같지는 않군."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4. 드워프는 우리 옆으로 다가와서 중얼거렸다. "말을 듣자니 대충 짐작은 가는군. 오크들에게 쫓기고 있군?" "예. 죄송합니다. 우리들의 일이니까 당신은 물러나세요." 카알이 롱보우를 뽑아들며 말했다. 드워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천만에. 이제야 싸울 수 있게 됐는데?" 난 이 배짱 풍부한 드워프를 내려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그 냥 오크도 아닌 우르크인데다가 저쪽은 아홉이고 우리는 다섯인데도 이 드워프는 전혀 겁먹은 태도가 아니다. 잠깐, 다섯인가? 나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때 이루릴도 나를 바라보았다. "후치." "예?" "아침에 우린 친구가 되었지요?" 난 미소를 지었다. 이루릴은 내 미소의 의미를 모르겠다는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허리 양쪽의 에스터크와 망고슈를 뽑아들었다. 나는 말 했다. "이봐요. 쫓기는거 우리니까 당신은 나서지 않아도 되요." "당신은 날 위해 행동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세수했잖아요." "나도 당신을 돕겠어요. 그러는 것 맞나요?"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엘프는 어쩌는 줄 모르겠지만.난 엘프는 정말 피곤하다고 다시 기억해두면서 앞으로 나섰다. 우르크들은 주춤하면서 글레이브를 꼬나들었다. 저건 좀 섬뜩한데. 저 놈들은 햇빛도 견딘다고 하던데 덩치도 예사롭지 않았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을 정도였고 어깨 는 나보다 더 넓었다. 어떻게 한다? "하아아앗!" 이런! 답도 없는! 샌슨이 돌격한 것이다. 아홉이나 되는 우르크들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어 어쩌겠다고! 그런데 그것은 정면이 아니었다. 가장 오른쪽 놈을 노리고 달렸다. 그렇다면? 나는 죽어보자는 심정으로 왼쪽 으로 달렸다. 우르크들은 재빨리 양쪽으로 모여섰다. 그리고 그 때 카알 이 롱보우를 튕기기 시작했다. 나는 바스타드를 아래로 내린채 달려들었다. 자연 상체는 완전히 비어 버렸다. 머리로 날아드는 글레이브. 자식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넌 속았어! "일자무식!" 우르크의 글레이브는 튕겨져 버렸고 그 반작용으로 우르크는 두 팔을 들어올린채 가슴을 완전히 노출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바퀴 돌 아 올라가는 나의 바스타드. 엉? 우르크는 뒤로 뛰며 공간을 비워버렸다. 이놈 봐라? 그제서야 난 일자 무식이 제자리에서 돌게 되므로 발생하는 약점을 알아차렸다. 이번엔 내가 팔을 들어올린채 가슴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우르 크의 글레이브가 날아들었다. 으악! 죽는다! "거꾸로!" 난 팔과 허리의 반동을 무시하며 위로 올린 바스타드를 아래로 쳐내렸 다.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지만 간신히 글레이브는 땅으로 튕겼다. 놈 은 그 충격으로 허리를 앞으로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 위 에서 다시 내려쳐지는 바스타드에 그 놈의 머리가 쪼개졌다. 하지만 내 허리도 쪼개지는 기분이다. 눈 앞에서 뭔가 아물거리면서 별들이 깜빡 거렸다. "우와, 이거, 심한데?" 난 일단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또다른 놈의 글레이브가 숨쉴 사이없 이 날아들었다. 이 자식이 정말 날 죽일 셈인가? 하긴 난 이미 한 놈을 죽였지. 난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취했다. "으랏차!" 난 오른발을 살짝 들며 바스타드의 끝을 빙빙 돌리면서 찔렀다. 기술 이름이 당장 떠올랐다. 난 역시 순발력이 넘친단 말이야. "기름 젓기!" 양초 고을 때 기름 젓는 것처럼 난 앞으로 빙빙 돌리며 찌른 것이다. 글레이브는 튕겨졌고 빙빙 돌던 바스타드의끝이 뭔가에 닿은 느낌이 들자 오른발을 강하게 밟으며 그대로 찔렀다. 뿌드득! 일자무식 때와는 달리 우르크의 몸을 파고드는 느낌이 그대로 칼자루를 통해 손끝에 느 껴졌다. 소름이 돋았다. "윽, 제기랄. 마구 젓기!" 난 팔로 거대한 8자를 그리면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워낙 빠르게 돌 리니까 그것도 훌륭한 방어가 되었다. 우르크들은 함부로 다가서지 못 했고 난 간신히 한숨 돌릴 정도의 거리까지 물러났다. 하지만 팔을 돌 리는 것을 멈추자마자 다시 글레이브가 다가왔다. 이걸 그냥! 응? 그 글레이브는 힘없이 땅에 떨어졌고 글레이브를 들고 있던 우르크의 등에는 화살이 꽂혀져 있었다. 카알이 화살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내 허리 옆으로 뭔가 작은 것이 지나갔다. "멋진 기술인데? 푸하하하!" 그 드워프였다. 배틀액스를 어깨에 걸친채 몸을 크게 숙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데 저러니 정말 작군. 우르크 두 마리가 동 시에 글레이브를 찔렀다. 그러나 그 드워프는 어깨에 맨 배틀 액스를 믿어지지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크게 휘둘러 두 개의 글레이브를 동시 에 쳐버렸다. 놀랍게도 두 개의 글레이브가 모두 부러져버렸다. 그 때 뭔가가 그 드워프의 등에 뛰어올랐다. "뭐야!"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은 그 드워프 바로 뒤로 달려가다가 드워프가 글 레이브를 튕긴 순간 드워프의 등을 밟으며 앞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무 방비 상태의 우르크들을 양쪽의 검으로 동시에 찔렀다. 우와, 대단한 합 동작전이군. 하지만 합동작전의 의사가 있었던 것은 이루릴 뿐인가 보 다. "어딜 밟아!" 이루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로 옆에 있던 우르크에게 달려들었 다. 우르크는 거친 동작으로 글레이브를 찔러들어왔지만 이루릴은 살짝 몸을 돌리며 오른발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오른손의 에스터크로 글레 이브를 쳐내리고 그대로 빙글 몸을 돌렸다. 마치 춤추듯이 우아한 동작 으로 이루릴과 그 우르크가 서로 등을 맞대었다고 느낀 순간, 그 놈은 숨막히는 비명을 질렀다. "취이엑!" 이루릴은 자신의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왼손의 망고슈를 찔러넣어 등 뒤의 우르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몸을 다시 반대쪽으로 돌려 망 고슈를 뽑으며 왼쪽 어깨로 우르크의 등을 쳤다. 그러자 우르크는 앞으 로 풀썩 쓰러졌다. 보자, 내가 둘, 카알이하나, 그리고 이루릴이 셋, 그러면 셋이 남아있 어야 되는데, 그 놈들은 어디로 갔지? 어느새 샌슨은 그 세 놈의 우르 크를 쓰러트려 놓고는 롱소드를 닦고 있었다. 드워프는 주위를 둘러보 더니 투덜거렸다. "뭐야? 자네들 괴물인가? 나는 한 놈도 못잡았군." 이루릴은 별 표정없이 수건을 꺼내어 검을 닦았다. 언젠가 발록이 그 랬던 것처럼 자신이 한 일에 아무런 감동이 없는 동작이었다. 싸움… 흥분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마치 매일 하는 식사나 세수라도 마친 것 처럼 별 감동이 없어보인다. 나는 이루릴이 대단히 많은 전투경험을 쌓 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나이가 120살이라니 1년에 한번씩만 싸워도 100번은 넘게 싸웠겠다. 그에 비해 나는 나무에 기댄채로 허리 의 통증을 참고 있느라 별로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어떠냐? 난 우연히 OPG를 가지게 된 초장이일 뿐이야. 샌슨은 참 보기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주무르는 날 바라보고 있 었다. "녀석아. 넌 다른 사람은 도저히 못하는 이상한 동작도 할 수 있지만 고통도 안느끼는 것은 아니야. 힘이 아무리 강해도 기본기를 써야지." "아, 내가 언제 검 쓰는 거 배웠어?" "검 쓰는 건 주먹 쓰는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네가 검이라는 것 을 너무 의식하고 그 날을 맞춰야 된다거나 그 끝을 찔러야 된다고 생 각하니까 이상한 동작을 만드는 거야. 네가 주먹 쓸 때 두 번이나 돌면 서 주먹을 쓰냐? 주먹을 빙빙 돌리다가 치냐?" "어, 그런가?" "어떤 병기든 병기는 모두 팔의 연장선이야. 그러니 검술 기술과 비슷 한 것이 창술에서도 보이고 그러는거지. 상식적으로 싸워라." 나는 샌슨의 말에 풀이 죽었다. 내가 그렇게 상식이 없단 말이지? 하 지만 나는 그 때 이루릴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기술이 떠올랐다. "어, 하지만 이루릴은 겨드랑이 사이로 뒤를 찌르던데. 주먹을 겨드랑 이 사이로 찌르는 사람은 없잖아?" "그거야 검 쓰는 기본은 익힌 다음 검 자체를 익히는 사람의 이야기 지. 그렇게 되면 두 번씩 끊어치는 것이나 너처럼 회전치기를 하거나 하는 거지." 흠. 그렇단 말이지? 어쨌든 허리는 이제 좀 괜찮은 것 같군. 나는 슬며 시 나무에서 등을 떼며 일어났다. 이루릴 쪽을 바라보니 이루릴은 배낭 을 뒤적거리고 있었고 그 드워프는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람! 꼴이 우습군! 내가 제일 열심히 싸우려고 해놓고선 한 놈 도 못잡았어."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그 드워프에게 다가갔다. "경황 중이라 인사도 못드렸군요. 저는 카알이라고 합니다." "엑셀핸드 아인델프." "아, 아인델프씨.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돕기는 뭘 도와! 한 놈도 못잡았는데." 카알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웃으며 다가가 각자 소개를 했 다. 그런데 그 때까지 배낭을 뒤적거리던 이루릴은 여전히 우리는 본체 만체하고 뭔가를 꺼내어 걸어갔다. 엑셀핸드는 버럭 화를 내었다. "이봐! 드워프와는 상종도 안할텐가!" 이루릴은 고개를 들어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예?" "왜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건네지 않는거야?" "제 이름은 그 분들이 아니까 말씀드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엑셀핸드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왜 직접 하지는 않고? 말도 하기 싫단 말인가!" "좀 바빠서요. 전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그리고는 이루릴은 빙글 돌아서 쓰러진 우르크에게 다가갔다. 엑셀핸 드는 노기를 띠고 이루릴에게 걸어갔고 우리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 녀에게 다가가 보았다. 이루릴은 작은 약병 같은 것을 우르크의 입에 가져가서 먹였다. 그러자 우르크는 긴 한숨을 토했다. 그 놈은 이루릴에 게 등을 찔린 놈이었는데, 이루릴은 등의 상처에도 약을 흘렸다. 놀랍게 도 등의 상처가 사라지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놀라서 말했다. "뭐, 뭐야? 왜 살려내는 거야!" "계곡을 건너지 않을 건가요?" 엑셀핸드는 입을 쩍 벌렸다. 그렇군. 12인의 다리니까 4명이 더 있어야 건널 수 있다. 그러면 이루릴은 4명을 치료하여 같이 건널 생각인가? 의외로 냉철한 데가 있군. 이루릴은 내게 말했다. "이들의 무기를 절벽 아래로 던져주세요. 샌슨은 절 도와주시고." 나는 글레이브를 모아 절벽 아래로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 진 글레이브는 급류에 휘말려 깨끗이 사라졌다. 돌아와보니 이루릴은 5 마리의 우르크를 치료해 놓았다. 어? 왜 다섯이지? 우르크들은 비무장 인데다가 바로 앞에서 샌슨이 롱소드를 뽑아들고 있었고 그 옆에선 엑 셀핸드가 '난 한 놈도 못잡았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해볼까?' 등의 말을 하고 있자 질려있는 상태였다. 이루릴은 말했다. "당신들과 저 인간들 사이의 일은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계곡 을 건너는 일. 지금 당신들을 치료했으니 건널 수 있지만 당신들이 거 절하면 그건 어렵겠지요." 우르크들에게 꽤 정중하게 말하네? 거의 우리에게 말하던 것처럼. 그 거 나쁠 것은 없지만 조금 전 그렇게 냉혹하고 차분하게 공격해놓고 여 전히 차분하게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인간과는 다르다 는 느낌이 온다. 감정이 없나? 아니면 우리와는 다르게 표현하나? "그래서 제의합니다. 인원을 맞추도록 도와주세요. 그럼 당신들에게 남 은 동료들을 치료할 약을 주겠습니다." 우르크들은 눈을 크게 떴다. "취이익! 저,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취익취익, 거, 건너가면 죽일 것 아닌가? 취치익!" 이루릴은 별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당신들은 어떻게든 내 말을 따르는 것이 이익일텐데요. 인원을 맞추 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필요 없으니 저 드워프분께 신병 을 넘기겠어요. 하지만 같이 건너주면 남은 동료들을 치료할 약도 주겠 다는 거예요.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있을 텐데요." 저렇게 말하면 차분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다. "취익! 그런데 건너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돌아와? 취익! 돌아오지 못 하면 약은 소용이 없다!" "당신들 다섯을 치료했잖아요. 하나는 남아요. 남은 분에게 약을 드리 고 건너지요. 그러면 남은 우르크가 다친 동료들을 치료할 수 있겠지 요." 우와… 졌다! 정말 머리가 잘 도는군. 엑셀핸드는 처음부터 입을 쫙 벌 린채 놀라고 있었다. 우르크들도 숫자를 세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취익! 좋아. 할 수 없군. 취이이이익!" 이루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우르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린 친구인가요?" 윽! 난 쓰러질뻔 했다. 나만이 저 말의 깊은 뜻을 조금 알지만 다른 사 람들이나 드워프, 우르크들은 완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우르크는 하도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온다는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거칠게 외쳤 다. "취치익! 천만에! 취익취익! 지금은 힘이 없어 말을 듣지만, 취익! 이 앙갚음은 반드시 할 것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당신과는 다르군요. 후치." "…그러네요."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5. 오크 네 마리와 우리 일행, 그리고 이루릴과 엑셀핸드는 절벽 가장자 리로 다가갔다. 이루릴은 12명이 나란히 서게 되자 나직히 말했다. "약속대로 여기 12명이 모였습니다. 계곡을 건너도록 해주세요." 나와 샌슨은 좀 더 앞에서 구경하려다가 떨어질 뻔 했다. 이루릴의 말 이 끝나자마자 공중에 떠 있던 그 뗏목이 우리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그 뗏목은 우리들이 서 있는 절벽에 조용히 닿 았고 나는 좀 겁이 나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엑셀핸드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올라탔다. 뗏목은 꼼짝도 하 지 않았다. 그리고 카알이 올라탔고 나는 조심스럽게 한발만 먼저 디딘 다음 천천히 다른 발을 얹었다. 이거 이대로 떨어지는 거 아닐까? 하지 만 그 뗏목은 흔들림 하나 없이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는대 로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하늘을 노려보았다. 샌슨도 좀 겁먹은 표정 으로 우리 말들을 끌고 올라탔다. 말들은 조금씩 반항하며 멈칫거렸지 만 샌슨이 살살 달래서 간신히 다 태웠다. 이루릴은 4마리의 우르크까지 다 오르고나자 남아있는하나의 우르크 에게 약병을 건네었다. "까다로울 것은 없고, 적당히 먹이면 되요. 상처가 심하면 상처에도 발 라야 하지만 상처가 가장 심한 분들은 제가 다 치료했으니 그냥 먹이기 만 하면 되요." 우르크는 별 대답도 하지 않고 약병을 나꿔채 들고는 쓰러진 우르크에 게 달려갔다. 이루릴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뗏목 위에 올라탔 다. 이루릴이 오름으로서 열둘이 차자마자 뗏목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 다. 나는 섬뜩해서 난간을 꽉 잡으며 하늘을 계속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들도 뗏목이 움직이자 크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히힝! 힝힝힝! 푸르르르!" 샌슨은 말을 달래었지만 쉽지 않았다. "어, 워이! 야, 지금은 좀 가만히 있어! 워워!" 말들이 발을 구르는데도 뗏목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보고있 는 다른 탑승자들로서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꼭 뒤집힐 것 같은 느낌 이 들었다. 이루릴이 말들에게 다가갔다. 이루릴은 뺨을 가운데 말의 얼굴에 대고 양손을 각자 다른 말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한꺼번에 세 마리의 말을 포옹하는 꼴이었다. "진정해요. 진정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놀랍게도 말들은 진정하기 시작했다. 카알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 광경 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좀 도가 지나친 흠모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도 꽤 놀랐지만, 오금이 저려서 뭐라고 칭찬해줄 기분도 안난다. 그 광경을 보다가 그만 아래의 광경을 봐버린 것이다. 우와, 살 떨리네! 까마득한 절벽. 그 절벽들 사이로 급류의 거친 흐름을 바로 위에서 보 고 있자니 눈이 빙빙 돌았다. 물결은 휘말려 들어오고 뿌리쳐 솟아오르 고 다시 사정없이 떨어지며 절벽을 할퀴었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시선 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그 때 나는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살짝 흩날렸다. 바람? 이루릴은 바람을 뺨으 로 느껴보듯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쏴아아아… 양쪽 절벽의 숲에서 낙엽이 흩날려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단풍잎, 노랗게 물든 은행잎도 날아올랐다. 마치 무엇에 놀란 새 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듯 낙엽들이 솟아 올랐다. 그리고 낙엽들은 계곡 사이로 부는 바람을 타고 비스듬히 떨어지며 춤을 추었다. 사방으로 눈 에 보이는 모든 곳에 낙엽이 휘날렸다. 우리들은 낙엽의 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떠가고, 날고, 돌고,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람과 더불어 춤을 출 수 있는데 떨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나에 겐 낙엽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라라라라. 사라라라라. 이윽고 공중에 마지막 한 잎이 길게 휘날렸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 은 저것뿐이다. 조금 전이 낙엽의 군무라면 저것은 독무. 그 낙엽은 작 았지만 선명한 붉은색으로 푸른 하늘 아래에서 춤추고 있었다. 떠가고, 날고, 돌고,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 내릴 거야?" 샌슨이 내 어깨를 툭 쳐서 나는 간신히 뗏목에서 내렸다. 이런, 또 노 래를 만들고 있었군. 조금 전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번 더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샌슨을 도와 말들을 모두 내렸다. 건너편에서는 약을 마신 우르크들이 일어나서는 우리를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욕설이라도 한바탕 하려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군. 아, 여기 인질이 될 우르크 넷이 있기 때문 인가? 그렇다면 저 놈들은 다른 오크들과 또다른 차이점이 있군. 동료 를 생각할 줄 아는 모양이다. 투사 우르크라고 했던가. 흠. 우리와 함께 절벽을 건넌 우르크들은뗏목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고 엑셀핸드 는 배틀엑스를 다시 얼굴 앞에 들어올려 그 날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 다. 비무장이고, 우리 요구를 들어준 우르크들을 과연 공격할 것인가? 가만히 관찰해봄직도 하지만 이루릴이 먼저 말했다.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리다가 다른 여행자들이 나타나면 동료와 합류 하세요. 그러려면 절대 약속을 지켜 싸우지 않아야 되겠지요?" "상관마! 엘프! 취이이칫!" 이 놈들이 다시 합류하려면 어렵겠군. 이 12인의 다리는 그 취지는 썩 좋지만 역시 불편한 다리로군. 그 불편함 때문에라도 이종족끼리 싸우 지 말라는 뜻인가보다. 그 때 난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봐? 저기 동료들과 합류해야지? 그리고 우리들도 너희들을 뒤통수 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진 않아." 우르크들은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건너가도록 해줄까?" "어, 어떻게 말인가? 취익!" 난 대답 없이 절벽 반대쪽에 고함을 질렀다. "이봐! 정신 똑똑히 차리고 잘 받아봐!" 우르크들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고는 의아한표정이었다. 난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우르크를 잡아들어올렸다. 내 머리 위로 들어올 려진 그 우르크는 비명을 질렀다. "뭐, 뭣, 취치익! 뮈하는 거냐!" "걱정마. 제일 처음이 어려워. 거기 그쪽! 정신 단단히 차려! 물러나면 안돼!" 그리고 난 우르크를 집어던졌다. 물론 그대로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식 으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난 신중히 겨냥해서 그 우르크들이 정확히 받을 수 있게 살짝 던졌다. 60 큐빗 거리고 우르크의 다리쪽을 앞으로 해서 될 수 있는대로 수평에 가깝게 던졌기 때문에 혹시 받아내지 못하 더라도 목이 부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난 살짝 던졌지만 우르크의 몸이 그렇게 작은 것은 아니다. 날아가는 우르크는 괴성을 지르며 허우적거리다가 내가 의도한대로 정확히 네 마 리의 우르크에게 나가떨어졌고 그대로 다섯 마리는 데굴데굴 굴러갔다. 혹시 다치지 않았나 살펴봤지만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 난 빙긋 웃으며 남아있는 네 마리의 우르크를 바라보았다. 그 놈들은 퍼렇게 질려 주춤거리고 있었다. 좀 안심시켜야겠군. "이봐. 조금 전에 봤잖아? 처음이 어려울 뿐이야. 갈수록 받아내는 인 원이 많아서 안전해진다고." 그러자 우르크들은 서로 나중에 던져지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어쨌든 마지막 한 놈까지 절벽 너머로 던져 주었다. 마지막 놈은 불안 을 상당히 털어내어 거의 즐기면서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 놈은 똑똑 히 볼 수 있도록 머리부터 던져달라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그건 아무래 도 위험해서 역시 다리를 앞으로 해서 던졌다. 그래야 못받아내더라도 엉덩이가 좀 까지고 말테니까. 다 던져주는 동안 내 주위의 일행들도 모두 긴장 속에 그 광경을 즐겼 다. 어어어… 됐어! 어어어… 좋았어! 뭐 이런 식이다. 이루릴도 두 손 을 모아쥐어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안전하게 넘어가면 한숨을 쉬고는 했다. 우르크들도 날려가고 받아내고 하는 동안 대단히 흥분해버려서 꽤 소란스러워졌다. 그 놈들은 이제 웃기까지 하면서 좋아했다. 그 놈들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 그 놈이 제일 마지막에 던져질 수 있었던 놈 이라서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뭐, 고맙다고 말은 해두겠다! 취익!" "도움이 됐다니 나도 기쁘군." "너 같은 괴물은 더 이상쫓지 않겠다! 취익! 우린 투사 우르크! 적에 게 더 이상 자비를, 취익! 구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래? 그럼 나도 고맙지. 그런데 오크들의 의뢰는?" "그깟 허약한 놈들, 취익! 의뢰라니, 부탁이지! 취익! 거절해버리면 돼!"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들 사이라면 저것은 몹시 불쾌한 말이겠지 만 오크들끼리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가 있나. 난 손을 저어주고 몸 을 돌렸다. 이루릴은 내게 말했다. "당신은 이 12인의 다리의 의미를 무시해버리는군요. 난 저들이 또다 른 종족과 협력을 해야 이 다리를 도로 건너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랬습 니다.그러면 저들은 협력과 화해의 의미를 배웠겠지요. 우리는 싸움 후 에야 건널 수 있었지만, 저들이라도 그것을 배운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 했어요." "그런가요?" 이루릴은 비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단조롭게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12인의 다리의 취지는 가장 적절하게 이행한 것 같군 요. 방금 싸웠던 우르크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어냈으니, 이 다리의 건설자라도 다리가 소용 없어졌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죠." "당신은 이제 저 우르크들의 친구인 것 같군요." 이 엘프 아가씨 좀 끈덕진 데가 있군. 내가 모든 종족과 친구가 되길 바라는 사람으로 보이나본데, 난 그런거 모른다. 난 헬턴트 영지의 초장 이 후보이자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네드발… 맙소사! 드디어 내가 나 스스로 이걸 인정해버리는구나! 난 이제 끝장이야! 엑셀핸드는 몹시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봐, 한 번쯤은 실수할 수도 있지 않았나?" 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다섯 번 모두 실수해서 안전하게 넘겨주었죠." "푸하하하! 덕택에 오늘은 정말 보기드문 거 보게 되었네. 고맙군. 자 네들의 여정에 카리스 누멘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네." 카리스 누멘… 난 간신히 카알에게서 드워프들이 섬기는 이 신의 이름 을 들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그런데 이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난 카알을 흘끔 바라봤고 역시 카알이 적절하게 대답했다. "그 모루와 망치의 불꽃의 정수가 그대에게." 엑셀핸드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자기 짐을 들어올렸다. 거창한 배낭을 매고 그 배틀 엑스의 도끼날에는 가죽 으로 된 커버를 씌우고나서 허리띠에 꽂았다. 꽤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 데 태연한모습이다. 그리고 이루릴은 우리 일행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 다. 이제 작별인사를 할 차례인가? 그런데 난 그 때 샌슨이 '난 지금 엄 청난 용기를 짜내고 있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샌슨은 주저하면서도 당당하게(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불가사의하군.) 말했다. "이루릴양의 여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어떤 필요라도?" 윽. 괴상한 답변이군. 내 여정을 당신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 문인 것 같은데, 그 뜻을 보자면 좀 불쾌할 것도 같지만 이루릴은 그저 궁금하다는듯이 물어왔다. "동행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말이 없군요." 샌슨은 기다렸다는듯이 대답했다. "저와 말이 함께 후치에 타면 됩니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나에게 어쩌겠다고? 카알도 당황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고 엑셀핸드는 벌써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샌슨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얼굴을 확 붉히면서 말 을 바꿨다. "아, 아니 저와 후치가 함께 말에 타면…." "푸하하하!" 난 데굴데굴 굴렀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여러분의 목적은 여러분들의 국왕님께 있지요. 급하실텐데요. 전 그렇게 급하지 않아요.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불쌍한 샌슨은 이번에도 말을 실수했고, 그래서 이루릴이 카알에게 인 사를 건넨 다음 숲 속으로 조용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한채 얼 굴이 벌개져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난 어느새 엑셀핸드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면서 웃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숨이 넘어갈듯이 말했다. "뭐, 뭐 말과 함께 너에게 타겠다고… 우헷헤헤헷!" "마, 말을 태우고 다, 달려야 되나? 으하하하핫!" 엑셀핸드는 우리와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웃고,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웃고 했다. 어쨌든 우린 말을 타고 있는지라 먼 저 달려오게 되었고, 우리 등 뒤로는 엑셀핸드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이 따금씩 들려왔다. 그 때마다 샌슨은 죽고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카알에게 말을 걸었다. 샌슨은 도저히 내 말을 받아줄 상태가 아니 었다. "카알! 12인의 다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좋은 취지라고 생각하지만 불편을 통해서 화해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친해지기 어려운 종족들에게는 어쩔 수없는 상황이라도 줘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보통 다리도 놓 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일부러 저런 다리를 놨다는 것은…" "맞네. 네드발군.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길. 좋은 의미 지. 하지만 그 협력이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보네. 진정한 애정이란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발생해야 된다고 보는데." 난 카알의 말을 세 번쯤 다시 생각해보고나서야 이해했다. "그건 너무 낭만적인데요." "그런가?" 우리 뒷편의 서녘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우리 앞쪽의 땅은 검푸 르게 밤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서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때, 우리는 휴다인 고개를 넘어 평야지대를 달려가고 있었다. 차 가운 저녁공기 속에 앞에서 반짝이는 불빛은 자연 말을 다그치게 만들 고 있었다. 이윽고 도시가 나타났다. 우리들의 고향인 헬턴트 영지보다는 훨씬 큰 도시로 도시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거대한 강이 특색이었다. 휴다인 강 이 크게 휘어지는 부분이었다. 강 주위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저녁 이 되어 돌아가는 소와 목동들의 모습이 보였다. 샌슨은 이 도시 이름 이 레너스시라고 말해줬다. 미드그레이드 가장 서쪽의 도시로 휴다인 고개의 관문도시로서 발전한 도시라고 한다. 황혼의 붉은 기운도 완전히 사라진 검은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레너스 시에 들어섰다. 휴다인 강을 넘어 레너스로 들어가게 되는 다리를 건너자 도시의 불빛 은 더욱 따스하게 우리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도시 중앙의 길을 따라 가던 우리는 곧 펍과 여관이 밀집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관문도시라서 그런지 여관이 꽤 많았다. 나는 주위를 휙 둘러보며 말했다. "선택의 기준은?" "보통은 물어보는 것이 좋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옆을 지나가는 중년 남자를 불렀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우리는 여행자인데, 이 도시가 자랑 할만한 여관이 있다면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중년 남자는 손을 들어 간판 하나를 가리켰다. 12인의 여관. "저기를 들러보면 대륙 어디에 가서도 이 도시에 대한 좋은 추억을 이 야기 해줄 수 있을게다." "아, 고맙습니다." 난 고개를 꾸벅 하고는 카알에게 말했다. "12인의 여관? 혹시 12명이 아니면 손님으로 받지 않겠다는 곳 아닐까 요?" "설마. 아마 12인의 다리에서 따온 이름일테지." 우리는 그 여관으로 향했다. 대로에서 조금 들어간 위치에 있는 여관 으로 꽤 넓은 뒷마당이 살짝 보였다. 전면에는 나무판으로 대어져 있고 아기자기한 창들이 뚫려있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여관 입구로 걸어들어갔다. 콰당! 뭐야? 놀란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넓은 여관 정문에서 왠 체구 좋은 남자 하나가 후다닥 달려내려왔다. 그런데 곧 여관에서 물통 이 하나 날아와 그 남자의 뒤통수를 맞추었다. 남자는 앞으로 꼬꾸라져 정문 앞에 있는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내렸다. 상당한 솜씬데? 이윽고 앙칼진 고함소리가 들렸다. "죽었으면 그대로 누워있고 살았어도 누워있어! 죽여 줄테니!" 그러나 그 남자는 그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는지 냅다 일어나 달아 났다. 우리는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샌슨이 먼저 입을 열 었다. "잘못 고른 것 같은데요?" 카알도 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곧 정문에서 또 다른 물통을 손에 든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물통을 휘두르 며 계단을 달려내려오다 자칫 샌슨과 부딪힐 뻔 했다. 샌슨은 놀라서 물러났고 그 여자는 샌슨을 흘끔 보더니 곧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나와 나이가 비슷할 것처럼 보이는 금발머리 아가씨였다. "식사와 침대가 필요해요?" "다른 것도 제공할 수 있습니까?" 내 대답에 그 여자는 물통을 들어올려 보이더니 말했다. "이걸로 한 대 먹여줄 수는 있지. 그런데 조금 전 누가 뛰쳐나오는 것 못봤니? 아니, 관둬. 벌써 멀리 달아났겠지. 말 셋과 사람 셋이예요? 들 어와요. 말은 여기 세워둬요. 휴! 임마, 튀어나와! 말들을 데리고 가 마 굿간에 묶어! 말 중에 편자를 갈거나 할 놈은 있어요? 없는 모양이군. 걸음걸이가 다 괜찮은데. 휴! 이 자식아, 빨리 튀어나오지 않으면 네 녀 석 머리를 다 밀어버릴테야! 들어오지 않고 뭐하는 거예요! 붉은 카펫 이라도 앞에 깔아드려야 들어올거예요? 휴! 이 자식, 동작이 그래서 뭐 에 써먹겠어! 어서 말들을 데리고 가! 말은 휴를, 사람은 날 따라와요." 말도 다 뺏겼으니 이젠 꼼짝없이 들어가야 되나? 샌슨과 나는 그 여자 의 말을 듣다가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카알도 좀 어 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따라왔다. 그 여자는 안의 홀로 들어서더니 당장 우리에게 질문했다. "술, 식사, 목욕, 침대, 화장실?" 이건 정말 수수께끼로군. 나는 간신히 다섯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제일 급하냐고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난 대답했다. "앞에 두 개."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6. 우리는 그 여자의 안내로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안은 어두워 잘 알아 보지 못했지만 어둠에 눈이 익고나자 꽤 넓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천장에는 램프가 매달려 있었고 램프 불빛 아래에서는 무관심한 시선들이 한 번씩 우리를 스쳐지나가고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꽤 시끄러웠다. 우리는 그 여자에게 떠밀리듯이 한 테이블에 앉았고 그 여자는 곧 다른 사람 몇 명에게 고함을 지르고는 사라졌다. 잠시 후 그 여자는 거대한 맥주잔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흑맥주였는데 맥주 거품이 램프 불빛 아래에 주황색으로 반짝였다. 그 여자는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싶게 맥주잔을 탁탁 내려놓았는데 놀랍 게도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뭘 드시겠어요? 당신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다 나오니까 설명 안해도 되겠지요?" 샌슨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닭요리 됩니까?" "뭐든 된다고 했잖아요? 닭 하나, 그리고?" "돼지고기 파이와 시드 케익." 카알의 주문이었다. 샌슨도 그 때즘에야 용기를 내어 더 주문하기 시 작했다. "어, 나도 돼지고기 파이, 그리고 미트볼, 팬케익 추가. 그런데 다 기 억해요?" "저 꼬마가 말해야 '다' 기억할 거예요. 꼬마는 주문이 뭐니?"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꼬마, 꼬마 그러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군. 뭐든 다 된다고 했지? 난 입술을 조금 삐죽거린 다음 말했다. "드래곤 파이." 그녀의 눈꼬리가 당장 올라갔다. 난 싱긋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가고일 날개찜, 난 날개를 특히 좋아해요. 오크 등심구이와 스 터지(Stirge) 스프. 후식으로는 워터 엘리멘탈(Water elemental) 쥬스와 블랙 푸딩(Black pudding). 푸딩 먹어본지 오래 됐어." 그녀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이봐, 꼬마야. 조금 전 그 사내가 왜 그렇게 달아난 줄 알아?" "왜 달아났죠?" "내 젖이 먹고싶다고 그랬거든." 샌슨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카알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 만 나는 매우 선량해 보이는 눈으로 그 아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나와요?" "죽을래!" 그 아가씨는 탁자를 쾅 내리쳤다. 주위의 손님들이 우리쪽을 돌아봤다. 꽤 키가 작은 손님 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 유스네는 5분도 못참는군. 또 싸움인가?" 난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키가 어찌나 작은지 샌슨의 8살짜리 막내동 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꽤 나이들어 보였다. 호오… 호 비트인가? 난 다시 고개를 돌려 씩씩거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이름이 유스네인가요?" "그래, 꼬마야! 그리고 여기선 유스네를 화나게 한 사람은 13번째 사람 이 되지!" "13번째 사람?" "이 여관은 12인의 여관이야. 13번째는 필요없지!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나게 된다고!" "당신 같은 꼬마가 주인이었나?" 유스네의 볼이 실룩거렸다. 이 아가씨와 오래 사귄 것은 아니지만 저 표정은 아무래도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인 것 같다. 그녀의 손에는 술잔 을 받쳐들고 온 소반이 있었다. 그리고 유스네는 그 소반을 확 들어올 렸다. 휙! 하품 나오겠군. 우르크의 글레이브도 그것보단 빨랐어. 난 내 머리로 날아오는 소반을 받아내며 살짝 당겼다. 당연히 유스네는 소반을 내게 빼앗겼고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당 안에 있던 다른 사 람들도 대화를 멈추고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꽤 조용해졌다. 난 그 나무 소반을 손가락 위에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이봐. 유스네. 나는 행인에게 추천할만한 여관을 물었거든? 이렇게 불 친절한 여관이 추천된데는 이유가 있을텐데 그 이유가 뭘까?" 카알은 빙긋 웃으며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 흑맥주를 마시기 시작했 다. 그리고 샌슨은 배고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욘석아! 네가 빨리 주문을 해야 나도 배를 채울 거 아냐?" "아, 글쎄 주문을 했더니 이 아가씨가 이걸로 날 치려고 하네?" "말이 되는 주문을 해야지!" 그 때 무기(?)를 빼앗기고 당황하고 있던 유스네가 말했다. "이 자식! 모험가냐? 재주가 있어서 내게 무례하게군단 말이지?" "무례한 건 그쪽이 먼저였던 것 같아." 유스네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리며 외쳤다. "오빠!" 아이고, 가지가지 하네. 차라리 아빠를 부르지. 내 예상대로라면 4 큐 빗짜리 근육덩어리가 나타나 험상궃은 얼굴을 내게 내밀 것 같다. 예상은 반만 정확했다. 부엌쪽에서 정말로 4 큐빗짜리 근육덩어리가 나타났다. 샌슨과 좋은 상대를 이루는군. 하지만 얼굴이 무성한 수염으로 가려져 있어 험상궃 은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단한 털보였다. 그 남자가 걸어오니 그 렇지 않아도 낮은 천장이 더 작아보였다. 천장에 걸린 램프가 아슬아슬 하게 그 남자의 머리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그 남자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왜 불렀어?" 어라? 목소리는 꽤 젊네? 수염 때문에 나이들어 보였지만 별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가 보다. 겨우 샌슨 정도? 하긴 이 아가씨의 오빠라니 그렇 게 나이가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스네는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우리 오빠 앞에서 다시 주문해봐." 못할 것도 없지. 난 팔짱을 끼고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드래곤 파이, 가고일 날개찜, 오크 등심구이, 스터지 스프. 후식으로 는 워터 엘리멘탈 쥬스와 블랙푸딩." 자, 이제 뭐가 날라올까? 처음에는 물통이 날아다녔고 조금전에는 소 반이 날아왔으니 다음 것이 몹시 기대된다. 그런데 나는 그 남자의 눈 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만 재료가 다 떨어졌군요. 다른 것은 안될까요?" 오… 이건 품위있는 대답이로군. 나 스스로 내 농담을 수습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인데? 품위에는 품위로 답해야겠지. "그렇다면 돼지고기 파이 3인분과 닭요리, 시드 케익에 미트볼과 팬케 익. 맥주를 마시고 있을테니 천천히 준비해도 상관없어요." "알겠습니다." 그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덕분에 꽤 꼴이 우스워져버린 유스네 는 놀라서 자기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 저런 헛소리나 지껄이는 꼬마를…." "네가 고함 지르는 것 다 들었어. 꼬마라니. 너랑 비슷해 보이는데." "무, 무슨!" 유스네와 그 오빠는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부엌으로 사라졌 다. 난 피식 웃으며 의자 등에 몸을 기대었다. 별 웃기는 오누이 다 보 겠네. 아니, 오빠는 괜찮은데 그 동생이 참 웃기는군. "이 여관이 뭐가 장점이라 추천될 걸까요?" 카알은 빙긋 웃었다. "난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래요? 이유가 뭔데요?" "자네 앞의 잔을 들어보게." 난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 커다란 잔을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왔다. 한 모금, 어라? 두 모금, 엥? 세 모금. 에라, 꿀꺽꿀꺽꿀꺽. "카! 우와, 아하하하하, 아우!" 배가 고파서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샌슨은 내 발작하는 모습 을 보더니 역시 그 흑맥주를 마셔보았다.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이거 정말 좋은데!" 샌슨과 나는 단숨에 그 커다란 2파인트짜리 술잔을 비웠다. 술에 대해 선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훌륭한 맛이었다. 난 샌슨의 의향을 물어 보고는 부엌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유스네, 여기 두 잔 더 갖다줘!" 부엌에서 나타난 유스네는 돌진하는 멧돼지처럼 달려왔다. 대단한 기 세야.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용맹무쌍한 레이디 유스네. 이 멋진 흑맥주 두 잔만 더 부탁해요." 물론 내 말은 칭찬이 아니며 유스네는 눈썹을 몹시 곤두세웠다. "어쭈, 농담을 걸어?" 슬슬 신경질이 나는군. 도대체 이 아가씨는 뭐가 불만이라 이렇게 목 을 곤두세운 뱀처럼 구는 거지? 왜이리 쉭쉭거려? 식당의 다른 손님들은 2차전을 기대하겠다는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봐. 유스네. 뭐 하나 물어보겠는데, 성심성의껏 대답해줘. 최근 애 인한테 걷어차였어?" 식당에서 웃음소리가 폭발처럼 터져나왔다. 유스네는 내 멱살을 쥐어 올렸다. 맙소사…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유스네를 바 라보았다. 우리 마을에선 완전히 내놓은 계집애, 그러니까 제미니라도 이렇게 거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예절이 빵점이군. 난 잠시 후에야 목에서 걸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이거 놓지 않으면 너 몹시 후회한다." "후회하게 해봐!" 어렵지 않지. 난 유스네의 허리를 붙잡아 위로 휙 들어올렸다. 제미니 와 많이 연습한데다가 OPG가 있으니 거의 맥주잔만큼의 무게도 느껴지 지 않는다. 나는 아기 다루듯이 유스네를 살짝 던졌다가(천장에 부딪히 지 않게 하려니 힘들었다.) 받아내었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탄성을 질 렀다. "엄마야!" 유스네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내게 안겨들었다. "내가 네 엄마냐? 좀 놓은 다음 내 말을 들어봐." 유스네는 당장 떨어졌지만 그 허리는 여전히 내게 잡힌채 공중에 떠 있었다. 유스네의 발이 내 가슴을 몇 번 찼지만 난 말의 뒷다리에 채여 도 까딱없다. 나는 무시하면서 유스네에게 경고했다. "얌전히 굴겠다면 나도 얌전히 내려줄께. 하지만 그렇지 않겠다면 난 좀 거칠게 내려놓겠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난 오크를 60 큐빗 정도 던져버린 경험도 있거든." "거, 거짓말!" 난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고 샌슨은 말해주었다. "아가씨. 그 말은 사실이야. 저 녀석은 오늘 낮 12인의 다리에서 오크 다섯 마리가 숫자가 모자라서 못건너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집어던져서 휴다인 계곡을 건너게 해 줬거든. 하지만 후치. 이제 좀 내려놔라. 그게 무슨 짓이냐." 난 순순히 유스네를 내려주었다. 유스네는 앙칼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 봤지만 내 힘을 알고서는 함부로 덤비진 않았다. 그래서 난 샌슨과 나 의 빈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얌전히 가서 맥주를 가져온다면 나도 감사히 여기며 얌전히 마시겠 어. 그런 정도로 화해하지. 어때?" 유스네는 그 잔을 받아들고는 냉큼 달려가버렸다. 난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원, 참 성격 거친 계집애네. 멱살을 잡다니." "흠, 나도 좀 놀랐다. 온갖 손님이 득실거리는 여관에서 일하다보니 그 렇게 된 거 아닐까?" "아니, 원래 성격일꺼야." 그 때 옆자리에 있던 그 호비트가 말을 걸어왔다. "여보시오. 아까 그 말 사실이요? 그러니까 오크를 집어던져서 휴다인 계곡을 건너게 해 주었다는 말." "예. 사실이예요. 그 오크들 덕분에 우리가 숫자를 맞춰서 다리를 건널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도로 돌려보내주었지요." 그 호비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야! 그거 정말 믿기 어려운데? 거인이 아니라면 휴다인 계곡을 넘 어갈 정도로 던져버릴 수는 없을텐데. 아, 내 이름은 듀칸 버터핑거요." "난 후치 네드발입니다. 버터핑거요? 독특한 성이네요. 버터를 만드는 집안이세요?" "성은 아니고 내 별명이지요." "그러세요?" 그 때 유스네가 돌아왔다. 그 커다란 맥주잔을 여전히 탕탕 내려놓았 는데 내 얼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마워." 유스네는 내 얼굴을 쏘아보고는 그대로 뒤로 돌아가버렸다. 참 성격 고약한 계집애네. "이 집 맥주맛은 모르지만 서비스는 정말 엉망이군. 저런 계집애를 데 리고 어떻게 장사를 하는거지?" 듀칸이라는 그호비트가 껄껄거리며 끼어들었다. "유스네는 사실 착한 애지요. 겉모습관 달라요. 자기를 다 큰 처녀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에 의해 그렇게 던져지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 "저 계집애가 먼저 내 성격을 건드린 거예요." 듀칸은 껄껄거리며 다시 몸을 돌려 식사를 계속했다. 난 이번에는 느 긋한 마음으로 흑맥주를 즐기기로 했다. 내 주량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유스네를 또 부르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샌슨은 가차없이 그 2 파인트 잔을 또 비워냈다. 확실히 오우거다. 샌슨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절대로 난 저 계집애 부르지 않을테니 샌슨이 주문해." 흑맥주맛 뿐만 아니라 식사도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우리에서 카알은 제외된다.) 걸신들린듯이 요리를 먹어치웠고 듀칸이라는 그 호비트는 우 리 핏줄에 혹시 드워프의 혈통이 흐르지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식사 후 우리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침대 4개짜리 커다란 방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3명이라 침대 하나가 남았다. 그래서 샌슨과 나는 그 침대 위에 배낭을 던져놓고는 배낭에게 푹 쉬라고 말해준 다음 홀로 내려왔 다. 그 멋진 흑맥주 맛이 아직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카알은 그냥 방에 누워있겠다고 말해서 우리 둘만 내려왔다. 홀은 넓고 식당처럼 낮은 천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건물의 1층 전체 가 낮다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목조건물로 다층건물을 만들 때는 성에 서처럼 높게 만들 수 없다. 기둥 부러지니까. 어쨌든 낮은 천장이 답답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밝은 색의 벽도제에 어울려 아늑하게 느껴졌다. 샌슨과 나는 좀 늦게 내려온지라 벽난로 가의 상석에는 앉을 수 없었 다. 하지만 별로 춥지 않았으므로 상관없다. 우리는 창가 자리를 차지하 고는 흑맥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조용한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듀칸이라는 호비트와 또 하나의 호비트 이외 에는 전부 인간이었다. 나는 호비트에 집중했다. 우리 마을은 아무르타 트가 설치는 앞마당같은 곳이라 호비트들이 안심하고 살 곳이 못된다. 인간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마을에 살아갈까. 그래서 나는 호비트를 보 지 못했다. 들었던 이야기대로 맨발에는 털이 수북하게 나있었다. 듀칸 버터핑거 는 그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동료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 다. "야, 투기장에서 오늘 그거 봤어? 제길. 난 녀석이 조금 더 버틸 줄 알 았단 말이야." "넌 도대체 그런 황당한 배팅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도 그런 녀석 에겐 걸지 않아." "그러니까 이겼을 땐 배당이 높잖아?" 무슨 이야기일까? 그런데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나는 감탄했다. 듀칸이 앉아있는 테이블은 인간용이라 그에게는 높았고, 그래서 듀칸은 어디서 물통을 가져와 의자 위에 엎어놓고 그 위에 앉아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로 발을 올린채 저렇게 균형을 잡고 자기 머리통만한 맥주잔 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맥주잔을 기울이다가 그대로 뒤로 쓰러질 것 같아서 보고 있는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유스네는 홀 한 귀퉁이의 테이블에서 양초를 세워두고는 주판을 튕기 며 뭔가를 적고 있었다. 장부정리인가? 유스네는 내 눈길을 알아차렸는 지 고개를 들었다가 발끈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거참, 별 상관은 없 는 애지만 이런 관계는 기분나쁘군. 그러다가 유스네는 다른 사람의 주 문을 듣고는 맥주잔을 받아들고 식당으로 달려가버렸다. "이 맥주맛 때문에 떠나기가 정말 싫어지는데." 샌슨의 말이었다. 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하루 푹 쉴 수 없어?" "안돼. 여정을 지켜야지. 우린 한가로운 여행자가 아니잖아." "음. 고향에선 우릴 기다리겠지. 이 일이 모두 잘 끝나면 나 다시 한 번 대륙을 돌아보고 싶어졌어." "여행의 맛을 느끼는가 보구나." "응. 이렇게 떠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12인의 다리라는 멋진 것이 있다 는 것도 몰랐을거야. 그런 것 말고도 내가 모르는 굉장한 것들이 많겠 지? 지금까지는 그런 것을 못 느꼈는데 갑자기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 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들을 못본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데." "모든 것을 다 해보기엔 우리 수명이 짧아. 내 생각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어. 자신이 겪는 일을 최대로 즐 기면 돼." "감사합니다! 맞아. 내가 겪는 일만 즐기지. 샌슨과 말이 나에게 탄다 든가…" "그만!" "도대체 어떻게 아침과 점심에 걸쳐 두 번이나 실수했지?" "몰라! 젠장, 내가 왜 그랬지? 한번만 더 이루릴을 만나면 난 돌아버릴 거야. 뭐, 이제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섣부른 판단이야." "응?" "홀 입구를 봐. 놀라운데. 아무런 약속도 없이 하루에 세 번을 만나는 사람에게라면… 뭐라더라?" 샌슨은 급히 허리를 틀다가 허리를 삐긋하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 렸다. 홀 안의 다른 손님들도 홀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루릴이 서 있었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7.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램프의 불빛을 반사하여 검붉은 폭포수가 되 어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 이루릴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다가 우리쪽 을 쳐다보았다. 이루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루릴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배낭을 테이블 옆에 내려놓고 앉으면서 말했다. "놀랍군요. 아무런 약속도 없이 하루에 세 번을 만나는 사람에게라면 목숨을 맡겨야 된다고 했는데." 맞다! 그런 말이었다. 약속이 없어도 그렇게 만나지는 사람이라면 대륙 양끝에 갈라놓더라도 만날 수 있으므로 절대로 원수로 삼아서는 안된 다. 그러므로 만일 원수가 된다면 어차피 도망칠 수 없으므로 목숨을 맡겨두어야 되는 셈이고, 친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나 도와줄 것 이므로 역시 목숨을 맡겨두어도 상관없는 셈이다. 이루릴은 나처럼 그 말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웃으며 물어보았다. "누구 말이었죠?" "후치는 항상 내게 인간의 말을 묻는군요. 루트에리노 대왕이 중부대 로를 지나면서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를 세 번 만났을 때 한 말이죠." "우리도 중부 대로에서 세 번 만난 셈이군요. 거참. 그런데 말도 없으 신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요?" "말은 인간의 길을 달리고 저는 숲을 달렸으니까요." 흠, 지하에서 드워프와 경주하지 말고 숲 속에서 엘프와 경주하지 말 라고 했던가? 그렇지만 진짜 빠르네? 샌슨은 꽤 조심하면서 말했다. "저, 반갑습니다. 유스네. 이 여관에 묵으실건가요?" "예. 간판이 마음에 들더군요. 낮에 여러분과 겪었던 일이 생각나서 들 어와 보았는데 뜻밖에도 여러분을 뵙게 되는군요." 그 때 유스네가 쭈볏거리며 다가왔다. "저, 아가씨는 이분들과 동행이신가요?" "아니, 그냥 아는 분이세요. 저도 여기에 묵을 생각입니다. 방 준비될 까요?" "물론이죠. 지금 올라가시겠어요?" "아뇨. 이 분들과 좀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가겠어요. 맥주나 좀 가져다 주겠어요?" 유스네는 알았다고 고개를 꾸벅이고는 물러갔다. 그녀는 이채롭다는듯 이 나를 바라봤는데, 마치 네가 뭐하는 녀석이길래 그렇게 힘이 센데다 가 엘프까지 아느냐는듯한 눈빛이었다. 그러고보니 다른 손님들도 느닷 없이 나타난 검은 머리의 미인 엘프가 우리를 아는 척 하니까 꽤 흥미 롭다는듯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을 충분히 즐기며 이루릴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디까지 가는데요? 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호기심 에서 묻는 겁니다." "델하파의 항구로 갑니다." 거기가 어디지? 난 샌슨을 돌아보았고 샌슨은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 다. "아! 그럼 수도를 지나치시겠군요?" "인간들의 수도를 지나치겠지요." "아, 예. 그럼 이게 세 번째 부탁인데, 동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자! 이제 세 번째다. 이루릴은 또 말이 없다고 말할텐데 과연 샌슨은 이번엔 뭐라고 대답할까?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이루릴은 말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저 오늘 오후 동안 숲속을 걸으면서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여러분 께는 뭔가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동행하는 것 도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어요." 이루릴은 갑자기 흠칫 하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후회라고 했나요?" "그런데요?" "후회… 벌써 많은 것을 배우는군요.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인데.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배웠어요. 마치 인간처럼 말했군 요." 난 이해가 안되어서 잠자코 있었다. 이루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두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다시 제의해주신다니 정말 고마워요. 샌슨. 여러분과 수도까지 동행하겠습니다. 말을 한 마리 구하도록 해야겠군 요." 샌슨의 얼굴 표정은… 말도 하기 싫다. 바람둥이! 고향에 돌아가기만 해봐라. 내 입은 진실을 단속하는데 있어서는 대단히 취약하단 말이야! 이루릴은 맥주 한 잔을 마시고는 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샌슨은 좋아 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제했다. 난 보기에 불쾌할듯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샌슨에게 말했다. "반한 거야, 아니면 반한 것처럼 구는 거야?" "무슨 소리야?" "오, 제 삼의 가능성. 반한 것도 아니고 반한 것처럼 구는 것도 아닌데 내 눈에만 반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지? 거 참 괴상하군." "후, 후치! 쓸데 없는 소리 하지마! 다 마셨으면 일어나자. 일찍 쉬고 내일도 일찍 나서야지. 식료품도 좀 사고 램프 기름에, 뭐, 보급품이 많 잖아. 내일 오전은 바쁘겠어." "괜찮아. 그건 나와 카알이 다 할께. 샌슨은 우리들 중 말에 대해 제일 잘 아니까 이루릴이 말 고르는 것이나 도와주지." "그럴까? 네가 다 할래?" 샌슨은 좋아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나의 유도심문에 넘어갔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헤, 제미니라도 이런 유도심문에는 안넘어가겠다. 샌슨 을 오우거라 부르면 오우거에 대한 모독이겠군. 이층에 올라와 우리 방에 돌아오니 카알은 침대 위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다. 오래간만에 침대도, 촛불도 있으니 책 읽기에는 딱 좋겠지만 보나마나 따분한 학술서적이겠지. 카알은 그런 책만 본다. 여행 중인데 소설이나 읽는게 어울리지 않나? "무슨 책이에요?" 카알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마법사의 열전같은 거야. 제목은 너무 기니까 생략하고… 12인의 다 리를 만들었다는 타이번 하이시커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름이 안 나오는군. 하긴 이 책은 인명록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일을 했 다면 꽤 유명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요? 참, 이루릴을 만났어요." 카알은 놀란 눈이 되었다. "이 여관에 들렀어?" "예." "놀랍군. 아무 약속없이 하루에 세 번 만나는 사람에겐 목숨도 맡긴다 고 했는데." "루트에리노 대왕. 맞지요? 이루릴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샌슨이 장장 세 번에 걸친 치열한 부탁 끝에 동행 허가도 받아내었지요." "동행하겠다든가, 퍼시발군?" 카알은 샌슨에게 물었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허허 웃었다.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동행이라면… 아니, 관두지. 우리 여행의 매니져는 퍼시발군이니까 퍼시발군이 정한대로 따르지." 카알이 별 이의없이 동의하자 샌슨도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나서 샌슨과 나는 오래간만에 침대에서 누워 뒹구는 기쁨을 만 끽했다. 배게를 집어던지고 시트를 뒤집어쓴채 펄쩍펄쩍 뛰었다. 카알의 점잖은 제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는 밤새도록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 겠다. 다음날 아침, 나는 대야를 앞에 두고 세수를 하며 눈물을 흘릴뻔했다. "대야가 이렇게나 소중한 것인지는 몰랐어!" 게다가 세면실에는 비누까지 있었다. 난 말로만 듣던 이 진귀한 물건 을 쓰느라 퍽 고생해야 했다. 도대체 손에 쥘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샌 슨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피식거렸지만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도 계속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퍽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스네는 우리가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못본 척하며 다른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야, 유스네! 그렇게 둔감하니 남자에게 걷어차였지?" "아침부터 저게!" 유스네는 발칵 화를 내었다. 나는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문이나 받아. 빵하고 스프면 어떤 종류라도 상관없어." 카알과 샌슨도 각자 주문했다. 샌슨은 초조하게 식당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고 카알은 짐짓 그런 샌슨을 못본체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른 테이블 위에 넓은 종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주워 읽기 시작 했다. "그게 뭐예요?" "잡지라네. 네드발군." "잡지?" "이건 주간잡지로군. 매주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종이야.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거지." "영주님 포고문 같은 거예요?" "아냐. 이건 시민이 발행하는 거야. 누구네 집의 암소가 실종되었다든 지 돌아오는 화요일이 누구 생일이라든지. 아니면 남쪽 자이펀과의 전 쟁소식이라든지. 이거 재미있군. 자이펀이 왜 해군력이 강한가…라는 사 설인데?" "헤에… 그건 나도 대답하겠네. 사막이 많으니까 바다로 진출할 수밖 에 없잖아요?" 내 대답에 카알은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하네, 네드발군. 어쨌든 여행자들에게 그런 소식을 받아서 잡지에 싣는 거라네. 그리고는 이 종이를 팔아서 돈을 받는거지." "허! 그걸 돈을 주고 사본다고요? 헤, 그냥 누구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예요?" "아니, 그렇게 비싸진 않아. 그리고 이 도시는 우리들의 고향보다는 훨 씬 크니까 모든 소문이 다 퍼지기는 어려워요. 어디 보자. 여기 이 광고 를 보게. 네드발군. 헤이즐 언덕의 그랑엘베르 신전의 소식이군. 그랑엘 베르 신전에서 동절기 교리연구가 있으니 관심 있는 시민들은 겨울 동안 수습신관이 되어 그랑엘베르 탐구에 동참해 보라는군. 가을걷이도 끝나 고 이제 신전에서도 농사일이 없으니까 교리연구에 들어가겠지?" "어, 그거야 그냥 알릴… 수가 없나?" "이 도시는 꽤 크다네. 그러니까 이렇게 알리고 싶은 소식이 있는 사 람은 잡지사에 돈을 주고 그 소식을 실어달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여 긴 영지가 아니라 도시니까, 시청 같은 곳에서 시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 다면 역시 이런 잡지사에 돈을 주고 싣기도 하고… 그래서 잡지료는 그 렇게 비싸지 않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종이값은 엄청 비싸잖아요?" "글쎄. 아마 잡지사에서는 신전과 계약하고는 신전에서 제공하는 종이 를 공급받겠지. 대신 신전에서는 싼 값에 잡지에 이런 소식을 싣든가 하겠지." 카알은 싱긋 웃었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끔찍스럽네. 이런 여행이라도 나오지 않았다면 잡지라는 것이 있다는 거 죽을 때까지 몰랐겠는데요?" 옆에서 테이블을 닦던 유스네는 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래, 나 무식하다. 너도 헬턴트 영지 같은 곳에서 살아봐, 어떻게 되는 가. 카알은 말했다. "여행은 항상 새 지식의 습득이라는 유쾌한 선물을 준다네." "흠. 아! 우리도 그럼 잡지사에 소식을 팔아먹어요." "응?"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패배하다. 어때요?" "좋은 생각이네만, 먼저 국왕께 알리고 생각해 보세. 순서라는게 있거 든. 왕의 드래곤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먼저 국왕께 보고해야 하지 않 겠는가?" 그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왕의 드래곤이 패했다고요?" 이야기에 빠져있느라 우리는 이루릴이 다가와 있다는 것도 못알아차렸 다. 이루릴은 우리들의 테이블에 앉으며 다시 물어왔다. "왕의 드래곤이라면, 누가 누구와 싸우다가 패했다는 거지요?" 누구? 흠. 어느 것이냐고 묻지 않고 누구냐고 물으니 조금 이상하네. 카알은 대답했다. "좋은 아침이외다. 세레니얼양. 우리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먼저 전하께 보고해야 되는데요." "그 분은 저의 국왕이 아니예요." 이루릴은 담담하게 카알의 실수를 지적했다. 카알은 미안한듯이 웃으 며 말했다. "미안해요. 세레니얼양.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에게 패했습니다." "캇셀프라임이라면 할슈타일가의 화이트 드래곤 말인가요?" "어, 잘 아시는군요?" 이루릴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르타트면… 석양의 감시자, 헬카네스의 검은 창인 그 블랙 드래 곤의 이름이군요. 그가 깨어났나요?" 어, 어? 무슨 말이야, 깨어나다니. 언제는 잠들어 있었나? 그러나 카알 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약 50년 전에 깨어났습니다." "그런가요." 윽. 관념을 뒤엎는군. 이 엘프 아가씨는 50년 동안이나 그 소식을 몰랐 단 말인가? 나는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때 유스네가 우리 식사 를 가져왔다. 유스네는 이루릴이 우리와 합석한 것을 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뭘 드시겠어요?" "빵과 우유." 유스네는 당장 가져왔다. 주문이 간단하다보니 퍽 빠르군. 난 엘프들에 게 식사하는 동안 말을 걸어도 되는 건지 몰라서 잠자코 있었고 샌슨은 이루릴이 먹는 모습을 감탄한듯이 바라보았다. 참 별게 다 구경거리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먹는 걸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다니. 난 테이블 아래로 샌슨의 다리를 차서 주의를 주었다. 샌슨은 당황하 여 다시 자신의 식사를 했지만 어느새 스푼을 든채 멀건히 이루릴을 바 라보았다. 스푼에서 스프가 떨어져 테이블을 적시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고! 못봐주겠다! 이루릴도 샌슨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놀라서 말했 다. "샌슨씨. 스프가 떨어지는데요?" "예? 아, 예.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거야… 정말 미치겠네. 이루릴도 의아해서 샌슨을 바 라보았고 샌슨은 스프 접시에 얼굴을 가져다 박듯이 하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유스네의 오빠인 그 털복숭이는 요리 솜씨가 정말 좋았다. 난 스프 접 시를 핥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유스네가 날 노려보고 있 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식사가 끝나자 유스네는 후식을 물어왔다. 전부 쥬스를 부탁했 지만 카알만은 커피라는 것을 주문했다. 커피가 뭐지? 잠시 후 유스네 는 시커멓고 뜨거운듯이 김이 펄펄 나는 것을 가져왔다. 찻잔에 담아온 것으로 보아 차 비슷한 것 같은데. 카알은 기쁜듯이 커피를 마셨다. "허, 오래간만이군." 저게 뭘까? 맛있나? 나는 쥬스를 홀라당 마셔버리고는 유스네에게 커 피 한 잔 더 가져오라고 말했다. 유스네는 가소롭다는듯이 날 바라보더 니 곧 커피를 가져와 지나치게 정중한 동작으로 내 앞에 내려놨다. 난 그것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옆에서 보고있던 샌슨이 궁금한듯이 물어 왔다. "야, 후치. 그거 맛있냐?" 내가 대답하지 않자 샌슨은 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주 불길한 추리를 하느라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처절한 눈빛으로 유스네를 바라보았다. "우… 유스네! 네, 네가 날 독살하려고!?"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8. 일대 소동 끝에 나는 카알의 설명으로 그게 약을 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스네의 눈빛은 더욱 차가와졌고 샌 슨은 숨이 넘어갈듯이 웃어대었다. 망신이다, 망신. 하지만 도대체 이걸 무슨 정신으로 마시는 거야? 어쨌든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샌슨과 이루릴은 말을 사러 가게 되었고 카알과 나는 시장을 보러 나섰다. 그러자 이루릴은 모두 함께 다니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자신도 살 물건들이 있 으니 같이 시장을 돌아다녀 보자고 했다. 나는 유스네에게 부탁해 손수레를 얻었다. 유스네는 내가 손수레를 부 숴먹을 거라는 듯이 툴툴거리면서 내주었다. "시장볼 거야?" "응." 유스네의 표정이 더 안좋아졌다.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는 표정이 되 더니 말했다. "쳇. 하필 내가 시장보러 나갈 때로군. 따라와." "어,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너 혼자 시장보려고? 이 큰 여관에서 사 용할 거라면 부피가 클텐데?" "흥! 촌뜨기. 주문만 하면 돼! 그럼 배달해주는 거야." "어? 그래?" 유스네가 인도해 주어서 시장을 찾는 것은 간단했다. 유스네는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와 헤어졌다. 밀가루, 건육, 베이컨, 오늘 저녁에 만들어 먹을 야채들 조금, 소금과 기타 등등. 물건값은 대단히 저렴했다. 우리 마을에서라면 상상할 수도 없이 싼 가격이다. 특히 종이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카 알을 졸라서 종이를 가득 샀다. 종이는 뭣에라도 쓸모가 있겠지. 최소한 뭘 적어둘 수 있는 거니까. 나는 내친 김에 펜과 잉크도 사서 짐수레에 담으며 기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싼 거죠?"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마을이 너무 비싼 거라네. 상인들이 잘 들락거리지 않으니까. 하 지만 이곳 레너스시는 휴다인강의 수로도 있고, 또 중부대로의 관문이 니까 물건들은 많지. 그러니 쌀 수 밖에." "우리도 아무르타트만 없어지면 중부대로의 관문도시예요. 그러면 우 리 마을도 물건이 많아지고 가격도 싸지겠지요." 카알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후치. 당신은 보다 즐겁고 풍족해지기 위해 아무르타트가 없어지길 바라는 건가요?" "보다 덜 비참하기 위해 아무르타트가 없어지길 바라는 거예요." 이루릴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운 쇼핑에서 아무르타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아마 고블린들의 동굴에 갇 혀서 입에도 댈 수 없을 것 같은 음식들을 먹고 계시겠지. 빌어먹을. 그 런데 나는 여기서 대단히 싼 물건들 사이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자식은 왜 이 모양이지요? 생각이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였다. "크아아악!" 비명소리. 여기가 헬턴트 영지인가? 시장의 분위기는 돌변했다. 사람들 은 마구 뛰고 있었는데 방향성이 없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하지만 샌슨은 날카롭게 비명의 진원지를 파악했다. "저기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가보세나." 카알이 앞장섰다. 그 동안에도 계속 비명소리와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에서 사람들이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뭘까? 이윽고 그 사람들 의 등 뒤에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젠장, 어디선가 한 번 겪었던 일이 로군. 트롤 세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트롤이잖아? 어떻게 도시 한가운데서?" 샌슨은 당황하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쪽에서 왠 건장한 사나이가 앞의 할머니를 밀쳐버 리는 장면이 보였다. 그 할머니는 땅으로 구르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발 목을 다쳤는지 비척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공포와 고통으 로 도저히 일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아니다, 이건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라면 저 정도의 사나이라면 죽어서 라도 버텼을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우리 마을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내 몸은 내 생각보다 빨랐다. 난 그 사나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나이는 거친 동작으로 그대로 날 밀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나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봐요! 저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요!" "이 새끼가! 이게 돌았나? 너 저 할마시 손자야?" "아니,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이럴 수는 없어요!" 그 사나이는 두 말 하지 않고 주먹을 날려왔다. 이게! 난 그 사나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힘껏 내어지른 팔이 갑자기 막히자 그 사나이는 어깨 가 부러지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난 그 사나이를 적당히 처리해주고 싶었지만 달려오는 트롤이 더 급했 다. 난 그 사나이를 집어던져 버리고는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사, 살려줘!" 그 할머니는 울면서 외치고 있었고 트롤들은 거칠게 달려오고 있었다. 트롤이 내려치는 돌도끼가 보였다. 할머니의 머리가 쪼개지기 직전, 난 급한 나머지 할머니의 다리를 잡아 당겼다. 간신히 할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뒤로 돌렸다. "달아나실 수 있겠어요?" 그 할머니는 절뚝거리며 달아났다. 그리고 나는 길을 막아선채 바스타 드를 뽑아들었다. 제기, 잘봐둬! 헬턴트 영지의 사나이라면 이렇게 한다 고! 내 목숨 하나가 얼마의 시간으로 바꿔질 수 있을까. 빌어먹을, 그런 데 누구에게 남길 말을 전하지? "야, 이 자식들아. 날 죽이는데 얼마 걸릴 것 같냐?" OPG가 있으니 조금은 버티겠지. 그 동안 저 할머니가 어디까지 달아나 려나. 하지만 나에게는 응원군이 있다. 또다른 헬턴트 토종 사나이 샌슨이 달려와 내 옆에 섰다. 샌슨은 별 말도 하지 않고 롱소드를 휘두르기 시 작했다. 돌도끼를 든 트롤의 팔이 삽시간에 뼈를 드러내는 커다란 상처 를 입었다. 샌슨은 낮게 외쳤다. "내 목숨은 한 개! 그래서 비싸지! 유니크하거든?" 좋아, 저거다! 빌어먹을 정도로 짜릿하군. "에라, 나는 끝까지 일자무식!" 내가 제일 잘하는 건 그것뿐이다. 트롤은 엉겁결에 돌도끼를 내려치다 가 내 바스타드에 두 번이나 맞고 팔이 뎅겅 잘려나갔다. "키륵!" 그 놈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샌슨이 상대하고 있던 놈 말고 도 한 놈이 더 있다. 그 놈은 내 옆구리에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그 때 날카로운 빛이 나와 그 트롤 사이를 지나쳤다.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의 망고슈가 아주 희안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 다. 이루릴은 내려떨어지는 트롤의 팔에 마치 사과 깍듯이 비스듬히 망 고슈를 들이대었다. 그러자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트롤의 팔 근육은 육 포 떠내듯이 들려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침착할 수 있으면 저런 기술을 쓸 수 있을까? "키르르르! 키륵키륵!" 그 놈은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제길, 트롤이지. 난 이루릴에게 일단 그 놈을 맡기고 내 앞의 팔이 날아간 놈 을 상대했다. 그 놈의 팔은 아직 재생이 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돌도 끼를 들지 않은 반대편 팔이 날아왔다. "우우욱!" 배에 한 방 맞았다. 내 몸은 부웅 떠올라 뒤로 나뒹굴었다. 죽지 않은 것은 OPG 덕분이겠지. 타이번, 고마워요.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 것은 죽음이다. 나는 구르다가 그대로 일어섰다. 날 바라보며 놀라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좀 도와줘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신호가 된듯이 다시 몸을 돌려 달아 나거나 옆의 건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아 버렸다. 이건 말도 안돼! 쾅쾅 거리며 문 닫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네드발군!" 카알의 목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그 트롤이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 다. 그 놈은 어느새 재생된 팔로 날 껴안듯이 후려치려고 했다. "죽어보자!" 난 한 손으로 바스타드의 검신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땅을 짚으며 앞으로 데굴 굴러버렸다. 트롤의 팔은 허공을 쳤고 난 트 롤의 다리 옆을 굴렀다. 그리고는 일어설 사이도 없이 그대로 뒤를 보 지도 않고 팔을 뒤로 돌려쳤다. 뭔가 닿았다. "키르륵!" 놈의 허벅지를 벤 모양이다. 나는 다시 앞으로 구른 다음 일어섰다. 트 롤은 다리를 절뚝 거리며 역시 뒤로 돌아 나와 마주섰다. 재생될 틈은 주지 않는다! "일자무식, 옆으로!" 나는 바스타드를 수평으로 든채 허리를 빙글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한 바퀴 돌고나서 무릎을 꿇어버렸다. 두번째는 아주 낮게 베었으며 허 리를 뒤로 젖히며 피하던 트롤은 다리를 맞았다. 못 움직이겠지. 지체없 이 세번째 돌 때 무릎과 허리를 폈다. 다리 관절이 부러지는 느낌이 들 었지만 나는 앞으로 뛰어오르며 세 번째 회전을 성공시켰다. "캐애애…큭!" 트롤의 목이 뎅겅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목이 없는 트롤의 몸에 그대 로 부딪혀버렸다. 트롤은 쓰러졌고 내 입엔 트롤의 피가 가득 들어왔다. 우웩! 현기증이 난다. 게다가 아무래도 발목이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나 는 발목의 고통을 참으며 그대로 트롤의 시체 위를 굴러 일어섰다. 주 위를 둘러보았다. 샌슨은 트롤의 정면에 서서 그 오우거같은 힘으로 상대의 몸에 계속 상처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그 상처는 왠만한 인간이라면 단번에 죽을 상처였다. 하지만 트롤은 돌도끼를 휘둘러 샌슨을 물러나게 하면서 계 속 상처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한편 이루릴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계속 트롤의 등 뒷쪽이나 옆에 서 있었으며 절대로 정면에 서지 않았다. 트 롤은 옆으로 공격해야 되었고, 그럴 때마다 이루릴은 그 팔에 비스듬히 망고슈를 들이대거나 비어버린 허리나 등에 에스터크를 꽂아넣었다. 하 지만 샌슨의 롱소드에 의한 상처도 재생해버리는 트롤에게 에스터크의 상처는 너무 작았다. 누굴 도와야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 중에 몸을 일으켰다. 발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져 자칫 쓰러질뻔했다. "우음…." 시장보러 온 길이라 롱보우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뒤에 있던 카알이 허둥지둥 나를 부축했다. 난 카알의 어깨를 붙잡고 이를 악물었다. 난 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커다란 도시. 우리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건물과 넓은 길.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명 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들자 이층이나 삼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얼굴들이 보 였다. 그러고보니 창문마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욕지기가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난 카알을 뿌리치며 앞으로 뛰었다. 내 앞에는 이루릴을 쫓느라 등을 보인 트롤이 있었다. 다리가 휘청거리자 나는 더 생각할 것 없이 한쪽 다리로 뛰어올랐다. 난 바스타드를 거꾸로 쥐고 그대로 그 놈의 등에 바스타드를 꽂아넣으며 매달렸다. "키르르켁!" "아아아아아!" 나는 있는 힘껏 바스타드를 밑으로 당겼다. 뭔가 계속 걸리는 느낌이 들다가 일순 바스타드를 쥔 손에 아무런 느낌도 없어지며 바스타드는 자유롭게 빠져나왔다. 놈의 허리 옆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 놈은 그대 로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그 놈의 등에 올라탄채 바스타드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으아! 으아! 으아아아!" 몇 번을 내리찍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놈의 등과목은 완전히 너덜너 덜해졌고 내 몸엔 그 놈의 피가 가득 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 놈의 머리를 잡았다. 머리카락이 없었지만 내 손가락은 그 놈의 머리를 뚫고 들어갔다. 나는 그 놈의 허리가 부러져라 상체를 끌어올린 다음 목 앞 에 바스타드를 대고는 그 놈의 머리를 밑으로 밀어버렸다. 목이 간단히 잘렸다. 나는 그 목을 팽개쳤다. 이루릴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침착한 그녀. 그녀는 벌써 샌슨을 돕고 있었다. 이루릴은 등 뒤에서 놈의 무릎 뒤를 찔렀고 트롤은 무릎을 꿇 었다. 그리고 샌슨이 그 놈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그리고 샌슨은 쓰러진 트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퍽! 퍼벅, 퍽!" 트롤은 들썩거리기만 했지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죽은 모양이다. 주위는 살점과 핏물로 가득했다. 샌슨이나 이루릴은 그런대로 깨끗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 하드 리더는 완전히 피에 젖어있었고 내 얼굴과 손도 피범벅이었다. 나는 그렇게 트롤의 몸 위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샌슨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 리가 휘청거려 다시 쓰러지려 했으나 샌슨이 재빨리 내 겨드랑이를 안 아올렸다. "다리 다쳤니?" "접질렸어. 괜찮을 거야." "다행이구나. 아무도 안 다쳤어." "그런데 이 빌어먹을 도시에는 경비대도 없나?" "출동이 좀 늦는구나." 나는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건물들의 문이 하나씩 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왔다. 나온단 말이지? 하! 도와주시려고? 그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흐르는 핏물이 자기 집쪽으로 흐르지 못 하도록 발로 비벼버렸다. 건물 벽과 문에 튄 피와 살점을 기분나빠하며 닦아내는 모습도 보였다. "샌슨. 빨리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여기 더 있다간 살인날 것 같아." 샌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샌슨의 부축을 받아 앞으로 걷 기 시작했다. 카알이 짐수레를 끌고 왔으며 이루릴은 내 옆에서 걸으며 손수건으로 내 얼굴의 피를 닦아 내었다. "괜찮아요. 이루릴. 어차피 그래가지고 닦이지도 않을텐데." "눈은 보여야 걷지 않겠어요? 자… 이제 얼굴은 대충 닦았어요." "고마와요. 꼭 손수건 하나 사줄께요." 이루릴은 대답없이 빙긋 웃었다. 여관까지 빌어먹을 정도로 머네. 거기 까지 이렇게 절뚝거리며 가야 된다니 앞이 노랗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군. 다리 하나가 말썽이라도 이렇게 불편한데 앞이 안보이는 타이번은 얼마나 불편할까. 타이번. 당신이 있었다면 깨끗하고 간단하게 트롤들을 처리했겠지요. 이런 역한 광경을 보지 않았어도 됐 고 말이야. "네드발씨?" 누구야? 이런 황당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난 피에 젖어 얼 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앞을 보았다. 아는 사람이군. "야, 용맹무쌍한 레이디!" 유스네는 시장 한모퉁이에서 질린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녀가 뭐라고 할지 짐작이 가서 먼저 말했다. "여관에 피 묻히진 않을께. 혹시 묻으면 내가 다 닦지." "아, 아냐, 후치. 저, 응…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지못할 말을 하더니 유스네는 달려가버렸다. 쳇, 그런데 이 모양으로 어떻게 피를 묻히지 않고 여관에 들어가지? 난 뒤를 잠깐 돌아보았고 대로에 남아있는 내 발자국을 보았다. 아주 멋진 붉은색 발자국으로, 능숙한 레인저가 아니라도 날 쫓는 것은 간단 할 것처럼 보인다. 점점이, 그러나 끝없이 이어진 피의 발자국. 내 발자국. 그렇군. 내 발자국이군. 어지럽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9. 여관에 무슨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도착하니 유스네 의 오빠인 그 털복숭이가 여관 현관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내 몰골 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스네 말대로군요, 손님. 잠깐…" "어?" 그 털복숭이는 그대로 날 번쩍 들어올렸다. 뭐야? "어어! 약간 접질린 거예요! 이거 부끄럽게 왜 이래요?" 그 털복숭이는 그대로 나를 안아 올린채 계단을 달려올라갔다. 카알과 샌슨, 이루릴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여관 안으로 들어오더니 식당 옆 에 있는 어느 방으로 날 데려갔다. 아무래도 이 사나이의 방인 것 같다. 그는 날 테이블에 앉히더니 내 다리를 살폈다. 그는 내 다리를 주무르 며 말했다. "아프지 않습니까?" "내, 내 표정 보면 모, 모르겠어요?" "붓고 있군요.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마 다리 뼈에 금 이 간 것 같군요." 그러자 이루릴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이루릴은 뭔가를 들고 왔다. 저건 본 적이 있는 건데? 아, 우르크에게 줬던 그 약병과 같은 것이군. "마셔요. 후치." "다리가 부러진 데도 들어요?" "칼에 찔린 상처도 낫는 것을 봤을텐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약병을 받아마셨다. 털보는 놀란 눈으로 나와 이루릴을 번갈아보았다. 잠시 후, 다리의 통증이 싹 가셨다. 나는 유쾌하게 테이블 아래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런, 테이블이 엉망이 됐군요." "그거야 닦으면 되니 상관마세요. 그런데 다리는 괜찮습니까?" "끄덕없어요. 그런데 좀 씻어야겠군요. 여관을 엉망으로 만들겠어요." "유스네가 목욕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따라오세요." 허. 먼저 달려오더니 그 준비를 한 건가? 제법이네. 고맙네. 기특하네. 갸륵하네. 잠시 후, 나는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고는 말쑥하게 홀에 앉아 있었 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모여 있었고 우리는 맥주 한 잔씩을 마시고 있 었다. 그리고 그 털보도 우리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 털보의 이 름은 쉐린이라고 했다. 나는 그 사나이가 여관 주인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털보 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아버지가 주인이셨습니다. 작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고는 제가 이 여관을 경여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시내 다른 곳의 집에서 살고 계십니다. 장사에는 관심이 없으시거든요. 전 아버지가 계실 때도 요리사였고 장부정리나 출납은 유스네가 정리하니까 그대로 요리사 일 을 하고 있지요." "유스네는 당찬가 보네요." 그 때 카알이 의문을 제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도시 한가운데서 트롤들이 갑자기 나타난 걸까요?" 쉐린은 곰곰히 생각하는 투였다.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투기장에서 달아난 놈들인 것 같 습니다. 여관의 하인들을 보내 알아보게 했습니다." "투기장이요?" "예. 이 도시에는 투기장이 있습니다. 거기에 트롤도 몇 마리 있다고 들었는데 그 놈들이 달아난 모양입니다." 투기장이 뭐냐? 어제 듀칸 버터핑거라는 그 호비트가 그 비슷한 이야 기를 하는 것을 듣긴 들었는데.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 지만 샌슨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쉐린에게 물어보았다. "투기장이 뭔데요?" "말 그대로 싸우는 곳입니다. 전사들과 전사들, 혹은 전사들과 몬스터 가 싸울 수도 있습니다." "왜요?" 쉐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구경거리죠. 도박도 하고요. 승패에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겁니다." "예에?" 우리들은 당황해버렸다. 구경거리라니. 내가 우리 고향에서 타이번이 불러낸 일루젼과 싸울 때처럼? 하지만 그것은 일루젼이니까 일종의 연극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까 트롤은 실제였는데? "실제의 몬스터와 싸우는 건가요? 그럼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습니다. 죽기도 하지요." 샌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누가 거기서 싸우는데 요?" "직업 검투사도 있고… 보통은 돈이 궁한 사람들이죠. 배당이 낮은 전 사가 이기면 막대한 돈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냐, 목숨을 걸고 돈을 번다?" "그런 셈이죠." 카알이 의아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까? 많으니까 투기장 영업이 되겠지만, 내 생각에 는 그렇게 묵숨을 내던질 정도로 돈이 궁한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직업 검투사라 해도 왠만한 검사라면 자기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승패는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텐데." 샌슨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카알은 마치 노련한 전사처럼 이야기했 다. 쉐린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지나쳤다. 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긴 했지만 그 눈은 분명 분노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쉐린은 괴로운 목소리 로 말했다. "여러분은 고리대금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리대금? 그거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게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그런데 카알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 다. "설마… 그 투기장 주인이 빚 대신 거기서 싸우게 만드는 겁니까?" "정확하시군요." "아니, 시청에선 그런 걸 가만 둡니까?" "그 사람은 대단히 힘이 세지요. 시청직원들은 모조리 매수했고 사실 시장도 내키면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쉬쉬하지만 다들 잘 알고 있습니 다. 그리고 우리 시의 경비대는 거의 그 사람의 사병이나 다름 없습니 다. 그리고 본인이 가진 사병도 대단하지요." "맙소사." 난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충 감은 잡힌다. 그러니까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준다. 그리고 엄청난 이자로 꼼짝을 못하게 하고선 투기장에서 싸우도 록 하는 것이다. 이겨도 돈을 줄 필요는 없겠지. 빌린 돈을 갚는 셈이니 까. 그리고 지면 그만이다. 도박을 이용해 돈을 벌테니까. 이성적으로는 대충 알아먹겠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빌린 돈 대신 목숨을 내놓고 싸우라고 말할 수 있는 그 투기장 주인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그 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곧 저벅거리며 복도를 걷 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완전무장을 갖춰입은 여덟 명의 전사들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체인메일을 입고 할버드를 들고 있었다. 대단한 무장이네. 그리고 그 뒤에선 유스네가 달려와 그들을 막아섰다. "이봐요! 손님들이 있는데 뭐하는 짓들이예요?" 하지만 그 병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시의 경비대인가? 하지 만 쉐린은 말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사람의 사병입니다." 에엑? 사병들이 저렇게 무장을 잘 갖춰입었어? 우리 영주님의 경비대 대장인 샌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하드 리더를 내려다 보았 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쉐린, 이 사람들인가?" 쉐린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는 말했다. "좋아. 우리는 실리키안 남작의 병사다. 당신들이 트롤들을 죽였지?" 실리키안 남작? 그 사람이 귀족이었나?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트롤 한 마리 당 200셀이니 모두 600셀이다. 보상금을 지불하도록." 나는 뭔가 잘못 들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잠깐 동안 샌슨도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병사를 올려다보았고 카알과 이 루릴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잠깐, 우리가 내놓으라고?" "그럼 누가 내놓는단 말인가?" "우리가 트롤들을 죽여준데 대해 고맙다고 상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보상금을 내라고?" "이 자식, 이거 돈 녀석 아니야?" 병사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보더니 당장 샌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샌슨은 헛바람을 삼키더니 곧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일어섰 다. 그리고 나도 동시에 일어섰다. "너 지금 뭐한 거냐?" "이것 좀 보게?" "이것? 난 헬턴트 자작의 부하로 헬턴트 본성의 경비대 대장 샌슨 퍼시 발이다. 너 지금 나에게 뭐한 거냐?" 병사들은 샌슨의 당당한 말투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띄었다. "자작이 뭐 어쨌다는거야? 어디서 굴러먹던 촌놈이 위아래도 모르고 덤비네?" "깡촌에서 방금 기어올라온 놈들은 정말 문제야. 도대체가 막혀서 뭘 모른단 말이야. 보면 정말 불쌍한 정도라고." "어느 산골에서 산적두목 비슷한 귀족 모시고 있던 모양이군… 퇘!" 이걸 가리켜 어이가 없다고 말하는가 보다. 난 하도 기가 막혀서 웃음 이 나올 지경이었다. 샌슨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화도 못내고 있었 다. 그 때 그 병사가 다시 샌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완전히 자기 부하 다루듯이 하네. 샌슨은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고 그 병사는 할버 드의 창끝으로 샌슨을 찍으려 했다.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할버드를 잡았으니까. 그 병사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이 꼬마는 또 뭐야?" 그는 할버드를 당기려 했다. 나는 그것을 한 손으로 쥐고 있었지만 그 는 양손으로도 빼앗지 못했다. 나는 할버드를 비틀며 당겼고 그는 할버 드를 놓쳤다. 그의 얼굴이 변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두 손을 쥐었다. "이건 얼마야?" "뭐, 뭐야?" 난 그 창대를 부러트렸다. 병사들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나 는 반으로 부러진 창대를 다시 모아쥐고는 그것을 부러트려 네 조각으 로 만들었다. 난 그 조각난 창대를 그 병사에게 던져주면서 말했다. "너희는 얼마야?" 병사들의 질린 표정에서 드디어 공포가 떠올랐다. 나는 매몰차게 말했 다. "너희를 죽이고 나면 얼마를 내놓아야 되지?" 할버드를 뺏긴 병사는 뒤로 물러섰고 나머지 병사들은 일제히 할버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바스타드를 뽑아들려 고 어깨로 손을 가져갔지만 씻고 갈아입느라 바스타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샌슨은 롱소드를 뽑으려들다가 참았다. "이봐. 밖으로 나가자." 샌슨은 쉐린의 입장을 생각한 모양이다.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 러났다. 그들로서도 할버드같은 무기로 실내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 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몇 발자국 물러나더니 곧 밖으로 달려나 갔다. 샌슨은 씩씩거리며 곧 그 뒤를 따라걸으려 했다. 카알이 불렀다. "여보게, 퍼시발군. 어쩔 생각인가?" "우리 영주님이 모욕당했습니다. 그것도 고작 남작의 부하에게. 아니, 남작이라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군. 쉐린? 그 실리키안인가 하는 사람, 정말로 남작입니까?" "귀족의 부하가 저 모양이겠습니까?" "생각대로군. 자칭 남작이란 말이지? 어디 두고 보자." "그래도 저 많은 인원과 싸울 생각입니까?" "죽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원하는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기 는 어렵지요.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샌슨은 앞뒤가 맞는듯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말을 해버리고는 그대로 걸어나갔다. 난 부리나케 이층으로 올라갔다. 갑옷은 입을 시간이 없어 나는 바스타드만 들고 아래로 내려왔다. 여관 밖에서는 이미 샌슨과 그 가짜남작의 부하 여덟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샌슨은 롱소드를 뽑지 않은채 말했다. "너희들은 나의 주인을 모멸했으니 내가 결투로서 상대해주겠다. 한 놈이 덤빌 거냐, 모두 덤빌 거냐?" 병사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많은 인원이 한 사람에게 덤 빈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들 중 아까 내게 할버드를 빼앗겼던 자가 다른 병사의 할버드를 받아들고는 앞으로 나섰 다. 그 자가 우두머리인 모양이다. 그 놈은 계단 위에 서 있는 날 힐끗 보더니 말했다. "야, 너도 싸울 거야?" "내가 왜? 아, 당신과 함께 싸워달라는 거야?" 그 놈은 콧방귀를 뀌더니 그대로 검도 뽑지 않은 샌슨에게 할버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샌슨은 상대의 발을 보고는 상대가 팔을 움직이기도 전에 벌써 움직임을 간파했다. 그는 뒤로 슬쩍 물러나더니 뒤로 뺀 발 로 그대로 땅을 차며 균형을 잃은 그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의 주먹이 뻗었다. 쾅! "아이고!"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그 놈은 눈 앞이 어지럽다는 시늉을 하며 물러 났다. 샌슨은 혀를 찼다. "눈을 감아? 이거 완전히 기본도 안된 놈일세?" 그리고 샌슨은 롱소드를 뽑았다. 우리 영주님이 재산을 탕진해가며 장 만해주신 검으로 라이칸스롭을 상대하기 위해 은으로 코팅까지 되어 있 는 멋진 롱소드다. 상대는 당황해서 할버드를 찔렀지만 샌슨은 롱소드 를 수평으로 든 채 비스듬히 할버드에 마주대면서 그대로 휘리릭 휘둘 렀다. 할버드와 롱소드가 뒤얽힌 채 마찰음을 내다가 그대로 튕겨났다. 무거운 할버드를 다시 똑바로 드는데는 시간이 걸렸고, 샌슨은 앞으로 한발자국 내밀며 슬쩍 찔렀다. 당장 그 놈의 손이 멎어버렸다. 샌슨은 그 놈의 목젖에 롱소드를 들이댄 것이다.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결판 이 났다. "아, 아." 놈은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목에 닿은 롱소드를 쳐다보았다. 샌슨은 롱소드를 좌우로 조금씩 흔들면서 말했다. "사과하면 안 죽인다. 죽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될지 알겠지?" "이 자식!" 옆에 있던 다른 놈이 할버드를 휘둘렀다. 샌슨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사이에 목을 찔릴 뻔 한 놈도 다시 할버드를 들어올리더니 덤벼들었 다. "이 새끼!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나머지 병사들도 모조리 달려들었다. 정말 더럽기 짝이 없군. 난 바스 타드를 든 채 앞으로 뛰어올랐다. 계단 위에 서 있어서 상당히 높이 뛸 수 있었다. 나는 공중에서 바스타드를 뽑아들고는 양손에 검과 검집을 들었다. "아하앗!" 뛰어내리는 힘까지 이용해서 할버드 두 개를 단숨에 박살내었다. 바스 타드로는 베어버렸고 검집으로는 부러트렸다. 그리고 땅에 발이 닿자마 자 곧 허리를 뒤틀었다. "일자무식!" 양손에 들고 있으니 원심력으로 훨 씬 쉽군. 다시 두 개의 할버드가 박살났다. 사람같지 않은 놈들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몸에 바스타드를 쑤셔박고 싶진 않았다. 놈들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 그래서 왼손의 검집으로 후려쳤다. "으아악!" 뺨을 호되게 맞은 병사는 곧 이빨을 튀기며 나가떨어졌다. 나는 다시 바스타드를 검집에 꽂아넣고는 검집채로 휘둘렀다. 다시 두 명의 병사 가 팔을 맞고는 자지러지면서 물러났다. 도끼찍듯이 팔을 내리쳤으니 아마 꽤 아플게다. 부러졌을까? 그럼 한 달은 좋은 교훈 속에 살겠지. 샌슨도 내 모습을 보더니 알았다는듯이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아넣고 는 통째로 휘둘렀다. 지금까지는 그 손에 매운 맛이 없었지만 검을 꽂 아넣고나자 당장 샌슨은 포악해졌다. 인정사정없이 목이나 명치 등의 급 소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검집을 씌웠다 해도 병사들은 숨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샌슨은 쓰러진 병사들이 걸리적거리자 걷어차거나 그대 로 밟고 지나가며 휘둘렀다. 우리 둘은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고 잠시 후 여관 앞 대로에는 몸 한 두 군데 부러지지 않은 병사가 없게 되었다. 여덟 명의 병사들이 모두 신음소리를 내며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나는 아까 샌슨을 기습했던 놈을 걷어차며 말했다. "이 자식들아. 난 오우거 슬레이어다. 어디서 함부로 덤벼?" 일루젼이긴 하지만 분명히 난 오우거나 가고일, 휴리아와 싸웠고 오크 나 우르크, 트롤과는 실전도 겪었던 사람이다. 기본이 엉망인 것은 이 병사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지만 내겐 그런 끔찍한 경험들이 있다. 아마 그 경험 덕택에 이렇게 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겠지. 난 기고만장해서 그 놈들을 다그쳤다. 샌슨은 그런 나를 말렸다. "그만해라, 후치. 이거, 좀 비슷하게 싸웠다면 상관없지만 너무 기본도 안된 녀석들이군. 때린 내가 가슴 아플 지경이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0. 쉐린은 멍청한 표정으로 계단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유스네 는 하인들을 다그쳐 그 사병들을 부축하게 했다. 유스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그것은 샌슨도 마찬가지였다. 샌슨은 찌 푸린 얼굴로 자신과 나의 위업의 증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야 떠나면 그만인 사람이지만, 쉐린과 유스네는 계속 여기서 장사 를 해나가야할 사람이죠. 마무리는 해야겠습니다. 모두 홀 안으로 데려 가 주십시오." 유스네는 고맙다는듯이 샌슨을 바라보았다. 하인들은 병사들을 부축하 여 안으로 옮겼다. 홀 안으로 들어오자 샌슨은 그 리더로 보이는 놈을 테이블에 앉혔다. 카알과 쉐린도 그쪽에 함께 앉았다. 다른 병사들은 좀 떨어진 테이블에 앉히고 나와 이루릴이 그들을 감시했다. "자, 목 마르죠? 쓸데없이 뛰니까 그렇지!" 유스네는 일단 맥주 한잔씩을 가져와 병사들과 우리들 모두에게 돌렸 다. 마치 그 싸움이 동네 청년들의 혈기에 의해 벌어진 단순한 것이며, 이제 원만하게 웃으며 끝나야 되는 것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사실 아무도 치명적으로 다치진 않았으므로 유스네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적절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당차고 요령이 있는 계집애네. 병사들은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맥주잔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카알과 샌슨은 그 리더(이름은 한스덱이라던가?)와 무슨 이야기를 나 누고 있었다. 그 한스덱은 처참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계속 화를 내고 있었고 샌슨도 무지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카알과 쉐린이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듯했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홀의 벽에 기대서서 병사들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 를 마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릴도 내 옆에 똑같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병사들은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았고, 아무리 적이라도 술잔 을 앞에 놓고 저런 표정 짓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두 손 모두 테이블에 얹고 일어서지만 않으면 간섭하지 않겠어요." 병사들은 내 말을 듣더니 미소 비슷한 것까지 지었다. 병사들은 복부 를 쓰다듬거나 뺨을 문지르거나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 중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야, 꼬마야." "왜? 그리고 후치라고 불러요." "후치라고? 웃긴 이름이군. 난 켈리다. 어쨌든 너 무슨 힘이 그렇게 좋 냐? 그리고 오우거 슬레이어라고? 그 말은 네가 오우거를 잡았다는 뜻 이야?" "오우거, 가고일, 휴리아, 흡고블린(Hobgoblin), 미노타우르스와 싸운 적도 있고, 우르크 아홉 마리와 싸우기도 했고, 트롤과는 아침에 싸웠었 지. 트롤이 제일 귀찮던데요. 자꾸 재생해서." 병사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켈리가 말했다. "새끼… 허풍치는 것 아냐?" "트롤 죽인 건 봤을텐데, 켈리. 다른 것도 다 사실이지요. 내가 뭐 얻 어먹을 것 있다고 거짓말을 해?" 켈리는 할 말이 없는 표정이다. 그들은 마치 내가 줄줄 불러대는 몬스 터들중에서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듯한 태도다. 나는 의아해졌다. "당신들은 사병이라며? 뭐 한가락 하는 게 있으니 사병으로 뽑힌 거 아녜요?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을텐데." 켈리는 기분 나쁜듯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새꺄, 너희같은 촌놈들이 아니라면 아무도 우리에게 덤비지 않아. 그 래서 우린 누가 감히 덤빌거라는 생각을 못한단 말이야. 그래서 방심했 지." "그러셔? 샌슨과 내가 충분히 주의를 주었을텐데 방심씩이나 하셨어 요?" "…너희들은 지금 기고만장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편이 모두 출동 하면 너희들은 곧 끝장난다. 좋아할 수 있을 때 좋아해둬." 나는 욱했다. 하지만 이루릴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그럼 하나 묻겠는데, 왜 트롤이 도망쳤을 때는 당신 편들이 모두 출 동하지 않은거지요?" "우린 자고 있었어! 이른 시간이었잖아?" 켈리는 불쾌하다는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기가 막혔다. 그 때는 해가 뜨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우리 마을의 경비대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영지를 구보하며 훈 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침 훈련(구릉뛰기, 벽오르기, 밧줄 타기 등 별 별 훈련을 갑옷까지 입은채 한다.)을 마치고 나서야 아침식사를 시작한 다. 그래서 내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타이번을 데리고 성으로 가면 항상 그들은 훈련을 마치고 날 지도해주거나 했었다. "아니, 초병은 있을거 아냐? 그리고 우리들이 싸웠던 것은 트롤들이 설치고나서도 한참 후였어요. 그리고도 또 한참 동안 싸웠고. 그 정도면 얼마든지 출동할 수 있었을텐데?" 켈리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막사는 시장에서 좀 멀다." 그 말에 유스네가 피식 웃었다. 병사들은 험악하게 유스네를 바라보았 지만 유스네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나에게다가와 말했다. "실리키안 저택은 시장 바로 옆에 있어. 꽤 멀지. 한 1분 거리." 말도 안나오는군. 난 맥주잔을 비워버렸다. "돈다, 돌아! 레이디 유스네. 한 잔 더 부탁해요." 유스네는 빙긋 웃으며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이루릴이 나를 말 렸다. "그만 마셔요. 당신은 아까도 많이 마셨고 지금도 많이 마셨어요. 6 파 인트는 마셨을 거예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스네가 먼저 말했다. "아니, 이 분이 드시고 싶다면 드시는거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예요?" 엥? 와, 대단한 상인정신일세. 그렇게 팔아먹고 싶나? "아니, 괜찮아. 유스네. 그만 마셔야지. 그리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상 인 정신을 드러내서야 쓰겠어?" 유스네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긴 왜 놀라. 갑자기 유스 네의 얼굴이 확 구겨지더니 외쳤다. "바보! 누가 팔아먹고 싶어선 그런 줄 알아!" 유스네는 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속셈을 들켰으면 얌전히 물러나지 바보라니. 정말 성격이 독오른 독사같은 계집애로다. 병사들은 히죽 웃었다. 뭘 웃는 거야? 나는 벽에 기대어서서 바스타드를 꺼내어 그 날을 살펴봤다. 트롤을 베고 할버드와 부딪히고 그 난리를 치느라 이가 빠진 부분이 없나 살펴 봤지만 날은 발랐다. 흠, 그러고보니 쇠붙이와 직접 부딪힌 적은 없었 지. 하지만 그 병사들은 내가 바스타드를 바라보고 있자 모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켈리가 다시 기분나쁜 소리로 말했다. "이 꼬마야, 너 잘난 힘이 있다고 까불지만, 네가 마법에도 눈 하나 깜 빡이지 않을 수 있겠어?" "당신 마법 쓰나?" "흥! 남작님은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을 고용하시고 계시단 말이야. 아프 나이델은 너희들 쯤은죽기도 전에 혼을 뽑아놓을걸? 네가 우리한테 한 짓을 안다면 아프나이델은 반드시 그럴 거다!" "어라, 마법사라… 좋지 않은 소식이네." 정말 좋지 않은데. 난 트롤들을 하늘로 날려버리고 악마 발록을 불러 내어 미노타우르스들을 박살내고 온갖 해괴한 몬스터들의 환상을 만들 어내던 타이번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작자들이 말하는 사람은 그냥 마 법사도 아니고 대마법사라고? 그 때 샌슨이 나를 불렀다. "어이, 후치! 가자." "어딜 가?" "그 남작을 만나봐야지. 부하들과는 이야기가 안돼." "어, 어? 적진으로 걸어들어가는거야?" 내 말에 샌슨은 빙긋 웃었다. "원 녀석도. 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탈출한 트롤을 처치해줬는데 병사를 보내다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 사례를 요청하고 싶은 생각 은 없지만 사리는 따져봐야겠어. 게다가 우리가 이 병사들을 조용히 돌 려보내주면 그쪽에서도 뭐라 못하겠지." "잠깐, 잠깐! 거긴 마법사가 있대! 아니, 대마법사!" 샌슨은 당황했지만 곧 평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저렇게 물어오면 할 말 없지. "빨리 가자고. 대마법사가 기다리잖아." 쉐린은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쉐린은 샌슨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꼭 거길 찾아가겠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이 찾아가면 그가 사과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바보같지 않습니 까? 그냥 이대로 떠나는 것이 나을텐데요. 우리 때문이라면… 그리고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은 잔혹한 사람입니다. 남작이 막강한 힘을 휘두르 는 것도 그 아프나이델 때문입니다." "위험할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이렇게 그 사람의 병사들을 데려다 주 면서 대화를 하자고 하면 그 사람도 우리를 심하게 몰아세우지는못하 겠지요." 쉐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간단할 것 같습니까?" 어떻게 갈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결국 우리는 말을 타고 가기로 결정했 다. 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샌슨은 그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와 카알은 지금 말을 타고 레너스시의 대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으며 우리들 사이로는 여덟 명의 사병들이 2열 종대로 걷고 있었다. 흠, 말에 앉은 채 이들과 함께 걷고 있으니 이 사병들을 묶은 것도 아 닌데 확실히 무슨 포로 인솔하는듯이 보이는군. 아마 샌슨은 그런 효과 를 노린 모양이다. 흘깃 쳐다보니 사병들도 얼굴을 붉히고는 주위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 하지만 레너스시의 시민들은 우리의 모 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말에 탄 우리들이 위엄이 있어 보였고, 상처입고 힘없이 걷고있는 사병들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은 확실했 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야, 저거 실리키안 남작의 사병들 아냐?" "그러네? 그런데 왜 저렇게 상한 거야?" "저기 말 탄 꼬마는 아침에 그 꼬마야! 트롤 목을 베어내던." 카알은 주위의 사람들이 쳐다보며 수근거리자 얼굴을붉히며 투덜거렸 다. "이거, 원. 포로교환이라도 하러가는 장군이나 된 것 같아." "헤? 맞아요! 카알. 좋은 지적이군요." 나 또한 위엄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면서 대답했다. 나는 제미니 가 무릎을 쭉쭉 들어올리면서 걸어가기를 바랬지만, 제미니는 그저 밭 가는 말처럼 털래털래 걸어서 날 언짢게 만들었다. 에라, 관둬라. 제미 니는 제미니지. 말이나 사람이나. 그리고 샌슨은 그 병사들 뒤에서 걷고 있었다. 자신의 말 슈팅스타에 는 이루릴을 태우고는 자신은 말고삐를 붙잡은 채 땅에서 걷고 있는 것 이다.이루릴은 걱정스러운 어투로 함께 타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샌 슨은 무조건적으로 이유붙일 필요없이 사양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쉐린이 여관의 하인들과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우 리는 사양했지만 쉐린은 자기 손님이므로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 다. "혹시 여러분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그 남작이 강짜를 부릴지 모릅 니다. 당신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울 걸요. 우리가 당신 들을 보호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면 남작도 함부로 당신들을 감금하거나 하지는 못할 겁니다." 쉐린은 그렇게 말하고 하인들과 함께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다. 대로에 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 중 하나가 고함을 질러왔다. "보쇼! 그 사람들은 왜 그 모양이오?" 그러자 그 사병들의 리더 한스덱이 고함을 질렀다. "돌대가리 같으니! 이 놈들이 트롤을 죽였으니까 그 보상금을 받아야 지. 그래서 남작님께 압송하는 것이다!" 나는 말에서 고꾸라질뻔 했고 카알과 샌슨, 이루릴은 웃어버렸다. 말을 건 그 남자는 침을 탁 뱉더니 머리를 좀 긁적이며 말했다. "퇘! 글쎄. 누가 누굴 압송한다고요?" 주위의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기 시작했다. 흠, 확실히 말을 타고 있으 니 여러 모로 좋군. 한스덱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었지만 맨손이라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들의 할버드는 내가 부러트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더럽게 불안하네. 나는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을 계속 생각 하고 있었다. 어떤 자일까? 타이번은 발록을 불러내었으니 그 대마법사 는 혹시 드래곤이라도 불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봐요, 한스덱. 아프나이델은 어떤 사람이지요?" 한스덱은 날 기분나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사람같지 않은 놈이야. 너무 무서워." "그렇게 무서워요?" "나라면 죽고싶어질 때만 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릴거야. 그 사람은…" 한스덱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나도 기분이 나빠졌 다. 그런 무서운 마법사의 부하들을 두드려 팬 다음 이렇게 데리고 가 고 있다고? 으으, 불안해. 실리키안 남작 저택이 보였다. 저택은 웅장했지만, 그것을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 저택보다 더 관심을 끄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택 앞의 정원에는 지금 차양이 쳐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붉은 카펫 을깔아두고 있었다. 그 카펫 위에는 화려한 의자를 가져다놓고 누군가 가 앉아 있었다. 남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전갈을 받았는지 기다리고 있는 모양 이다.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는데, 도대체 저런 옷을 입으면 음식 튈까 겁나서 밥도 못먹을 그런 옷을 입고 있다. 그는 옆에 있는 하인이 무릎 을 꿇은 채 들고 있는 사발에서 뭔가 과자같은 것을 계속 주워먹고 있 었다. 역겹군. 그리고 그 옆에는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젊은 남자가 서서 지루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로브를 본 순간 나는타이번의 로브를 떠올렸다. 타이번의 로 브는 밤에 잘 때 좋을 정도로만 기능적인 옷이었지만, 저 옷은 완전히 '나 마법사요.'하고 고함을 지르는듯한 옷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별 모 양의 장식과 불꽃 모양의 무늬를 넣어 두었겠는가. 아마 저 남자가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인가 보군.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라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 지만 예상외로 젊은 얼굴이었다. 대마법사라길래 아주 늙은 사람을 생각 했었는데. 그리고 좌우로는 역시 체인 메일을 걸치고 할버드를 든 사병들이 좍 펼 쳐져 있었다. 30명 가량이었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대로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뒤 로는 쉐린과 여관의 하인들, 그리고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시민들이 서 있었다. 시민들은 남작과 그 대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흥 분하기 시작했다. 수근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우리가 데려온 사병들에게 말했다. "자, 저기 당신 편 있어요. 가서 옆에 서는 것이 어때?" 하지만 그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어라? 이거 왜 이래? 리더인 한스덱은 울상이 되어 더듬더듬 말했다. "주, 죽었다!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이…" 그 때 의자에 앉아 있던 그 남작이 하인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 는 입을 열었다. "손님들, 내 집에 어서 오시게." 나는 카알과 마주본 다음 말에서 내렸다. 뒤쪽에서 이루릴도 말에서 내렸으며, 샌슨과 이루릴은 앞으로 나왔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셋, 엘프 하나. 맞군." "당신이 실리키안 남작이라는 그 투기장 주인이예요?" 나는 궁금해서 물었지만 남작은 관자놀이를 꿈틀거렸다. "투기장 주인? 그래, 내가 실리키안 남작이니라." "가짜라며?" 남작은 도저히 못참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워낙 입에서 진실밖에 나오지 않으니까, 기분 나쁘셔도 어쩔 수 없지. 실리키안 남작은 내게 고함을 지르는 대신 내 뒤를 쳐다보았다. "한스데엑!" 한스덱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앞으로 나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실리키 안 남작은 말했다. "보상금을 받아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 놈이 이렇게 오만방자한 것인게냐?" "기, 기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관에 도착하자 저들이 여관 주인 쉐린과 공모하여 우리를 덮쳤습니다! 그, 그래서 우린 무장을 해제 당 하고…"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대단하군. 거짓말도 어느 정도 통할 가능성이 있을 때 해야지, 저런 닭대가리가 있단 말인가? 의자에 앉아있던 실리 키안 남작은 볼을 씰룩거리며 한스덱을 내려다보았고 한스덱은 결국 못 견디게 되어 버렸다. 한스덱은 땅에 이마를 박았다. "날 속일 생각인가?" "주, 죽을 죄를…" "그럼 죽어야지." 한스덱은 눈을 들어 절망적인 표정으로 남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남 작은 한스덱에게서 눈을 돌려 옆에 있던 그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이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전율해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아프나이델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눈을 내려 한스덱을 내려보았다. 한스덱의 얼굴이 초죽음이 되었다. 그는 그만 뒤로 몸을 젖히고는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 살려 주십시오!" 아프나이델은 로브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근엄한 동작으로 꺼 낸 그의 손에는 검은 색의 밧줄이 들려 있었다. "살 가치를 보여주고 살려달라고 해라, 한스덱."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1. 아프나이델의 목소리를 차가웠다. 그는 밧줄을 그 한스덱에게 집어던 졌다. "으아아아!" 한스덱은 마치 같은 크기의 뱀이라도 날아온 것처럼 질겁을 하며 비명 을 지르고 팔을 휘둘렀다. 뭐야? 밧줄을 보고 기겁하다니? 아프나이델 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타이번처럼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다가 빠르게 말했다. "바인드(Bind)! 휘감아 얽혀라(Tie&Knot)!" 한스덱의 몸에 던져진 로프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한스 덱의 목을 감더니 목 뒤에서 한 번 엉키어서 묶였다. 한스덱은 목을 졸 리지 않기 위해 양쪽 끝을 있는대로 잡아당겼지만, 간신히 졸리는 것은 막았을 뿐 몸에서 떼어내지는 못했다. 한스덱의 얼굴은 시뻘겋게 되어 버렸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품 속에서 뭔가 가루를 꺼내어 한스덱에게 집어던지 더니 또 스펠을 캐스트했다. "로프 트릭(Rope Trick)!" 그러자 곧 한스덱의 목을 감고 있던 로프는 한쪽 끝이 하늘로 올라가고 다른 쪽 끝은 땅으로 꼿꼿하게 섰다. 그러자 그 중간에 목이 묶인 한 스덱은 당장 자신의 몸무게로 목이졸리게 되었다. "크억, 케ィ!" 이런, 죽겠어! 아무리 무서운 마법사라도 못 참겠다. "이익, 무슨 짓을!" 내가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먼저 이루릴이 움직였던 것 같다. 내 눈에 는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물결치는 것이 보였으니까. 이루릴은 한스덱에게 달려들더니 망고슈로 로프를 쳤다. "탱!" 뭐야? 예사 밧줄이 아닌가? 이루릴은 낭패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한스덱의 몸을 끌어올려 목이 졸리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하 지만 밧줄은 위아래로 잡아당겨지고 있는 것이라 한스덱의 몸을 들어올 린다고 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프나이델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건 보통 밧줄이 아냐. 어리석은 엘프. 그건…" 아프나이델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옆으로 일자무 식을 사용해서 그것을 잘라버렸으니까. 한스덱이 털썩 떨어지고나서 나는 일단 그 자의 숨이 붙어있는지 살폈 다. 다행히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바스타드를 옆으로 내리며 말했다. "이것 봐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실리키안 남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 델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고함을 질렀다. "이 놈! 감히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바뀌면서, 그는 다시 품 속을 뒤졌다. 이런, 또 뭐 하려는 거야? 그런데 타이번은 아무런 도구나 가루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저 친구는 뭐가 저렇게 복잡해? 대마법사라 그런가? 내가 생각을 정리할 사이도 없이 아프나이델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었다. 그것은 작고 하얀 이상하게 생긴… 뼈다귀? 그는 그 뼈다귀를 나 에게 집어던졌다. 이런! 기분 나쁘게? 하지만 이걸로 날 어쩌겠다고? 아 프나이델은 빠르게 캐스트했다. "스케어(Scare)!" 뭔가 끔찍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 다. 난 당황해서 아프나이델과 땅에 떨어져 뒹구는 그 뼈다귀를 한 번 씩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마법에 걸렸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던 한스덱이 갑자기 미칠듯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으아! 저, 저리가! 으웨엑!" 한스덱은 달려가다가 데굴데굴 구르며 땅에 꼬꾸라졌다. 그러더니 그 대로 머리를 싸매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눈물과 침과 땀 등 얼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다 흘리면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쪽 방향에 있던 병사들이 한스덱을 붙잡았으나 한스덱은 질겁하며 그 손들을 쳐내었다. 아프나이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꼬마, 너, 너 아무렇지도 않냐?" "글쎄, 기분이 좀 나쁘군. 뼈다귀를 맞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그런데 이거 무슨 뼈야? 당신이 아침식사 때 먹다가 감춰둔 닭뼈야?" 아프나이델은 나와 이루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에, 엘프야 사자(死者)의 공포를 느끼지 않지만, 너, 넌 사람인데?" 그 때 카알과 샌슨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카알이 침착하게 말한 다음 에야 나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악한 마법을 쓰는군요. 죽은 자의 뼈로 일으키는 마법.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로 무서운 공포를 주는 고약한 마법이지. 하지만 당신 앞에 있는 그 소년은 죽은 자에게 별로 공포를 느끼지 않아요. 워낙 죽은 사 람을 많이 봤거든. 그리고 그건 우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경향이지." 아프나이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지러지듯이 말했다. "너, 너도 마법사냐!" "아니, 독서가요." 이게 죽은 자의 뼈라고? 에이, 찝찝해. 나는 그 뼈를 걷어차버렸고 아 프나이델은 그런 나를 못믿겠다는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사람 뼈를 구하려면 틀림없이 무덤을 팠다는 말이겠지? 나는 아프나이 델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봤다. "하, 이거 구울(Ghoul) 같은 놈일세. 무덤을 파서 이걸 손에 넣은 거 야?" 카알이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그건 아닐세. 네드발군. 언데드 몬스터에게서 얻는 거라네." "그래요? 어, 흠. 어쨌든 괜히 겁먹었군. 그런데 이 사람 대마법사 맞 아요? 난 마법사라면 리버스 그래비티로 하늘과 땅을 뒤집고 공간이동 으로 발록을 불러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밧줄 가지고 장난치고 가루를 뿌리고 뼈다귀를 던지네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딱 벌렸다. "이, 이 놈! 날 모욕하느냐!" "어,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아는 마법사란 그런 것인데. 좀 시시하 네?" 아프나이델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허겁지겁 다시 품 안 에 손을 집어넣었다. 또 밧줄이네? 아프나이델은 곧장 밧줄을 집어던지 며 외쳤다. "바인드!" "엇, 위험해!" 나는 가까이 있던 이루릴과 카알을 밀어버리면서 앞으로 나섰고, 그러 자 밧줄은 나에게만 감겼다. 아프나이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우리 넷을 한꺼번에 잡을 생각이었나 보다. 어쨌든 아프나이델은 샌슨과 카 알을 노려보았다. "이 입이 더러운 꼬마는 천천히 처리하기로 하고, 이제 네 놈들 차례 군. 어떻게 해줄까?" 샌슨은 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나에게 말했 다. "그거 언제까지 감고 있을 생각이냐?" "그렇게 오래 감고 있을 생각은 없어." 난 팔에 힘을 주었고 곧 밧줄은 토막토막 끊어지면서 떨어져 나갔다.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이 탄성을 올렸고 아프나이델은 기겁했다. 그는 그제서야 나를 자세히 보더니 내 장갑을 보았다. "그, 그것은 OPG! 네놈이 뭔데 그런 보물을!" "선행에 대한 댓가로 선물 받았지." 실리키안 남작은 노호하기 시작했다. "아, 아프나이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신 마법이 통하지 않는 가?" "이, 이 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에잇, 병사들! 저 놈들을 붙잡 아라! 아니, 죽여라!" 아프나이델은 뒤로 물러났고 실리키안 남작도 당황하여 의자에서 일어 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30여명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할버드는 좀 끔찍스럽게 생겼군. 우르크의 글레이브보다 더 무서운데?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남작!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당신들이 놓친 트롤 들이 사고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잡아준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오?" 남작은 맞고함을 질렀다. "다, 닥쳐라! 네 놈이 감히 나의 트롤을 죽이고도 이렇게 뻔뻔하게 구 느냐?" 카알은 대답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내게 고함 쳤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희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군. 그건 내가 연 구용으로 쓰도록 바쳐야겠어. 병사들! 죽여도 좋다, 가라!" 이게 말인가? 이게 정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나는 욕설을 퍼부어주기 위해 나섰다. 그 때 이루릴이 나의 앞을 막았다. "어, 이루릴? 비켜요!"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후치, 우린 친구죠?" "몇 번 물어도 대답은 똑같아요!" "그럼 당신이 32명의 병사들을 상대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맞겠지요?" 32명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 맞긴 맞는데, 에,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요? 당신이 위험해지도 록…" "난 위험하지 않아요."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모았다. 병사들은 아름다운 엘프 가 앞을 막자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루릴은 뭐라고 중얼거리 기 시작했다. 어랏? 캐스트? "그리스(Grease)" "으악!" 사병들은 일제히 발이 미끄러지며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빠르게, 이루 릴은 또다시 캐스트했다. "피더 폴(Feather fall)." 곧 사병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병사들은 나가떨어지다가 그 대로 둥실 떠올랐다. 균형을 못잡고 쓰러지려고 하지만 느릿느릿하게 쓰러졌다.마치 물 속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병사들은 욕짓거리를 뱉어 내며 몸을 똑바로 세우려 애썼지만 자기 몸이 잘 조절이 안되는 모양이 다. 피더 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마법. 이루릴이 마법사였나! 하지 만 칼을 두 자루나 능숙하게 쓰는 모습은 마법사같지 않았는데. 그런데 마법을 쓴다면 왜 우르크들과 싸울 때는 쓰지 않은거지? 아! 메모라이즈(Memorize)다. 그렇군. 그 날은 이루릴이 우리 대신 불침번을 섰다. 그래서 아침 일찍 마법을 암기하는 메모라이즈를 못했기 때문이겠군. 카알에게 들었던 말 이 생각났다. "마법사가 마법을 쓸 때 그것은 목수가 못질을 하거나 나뭇꾼이 도끼 질을 하는 것과 달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쓰지만 마법사는 자 연의 힘을 쓰거든. 그런데 이 다르다는 점을 잘 봐야해요. 정말 능숙한 목수는 중력을 이용하며 못질을 하지. 그리고 못과 망치가 부딪힐 때의 반발력도 자연스럽게 처리해. 일반인은 몇 번만 휘둘러도 지쳐버리는 망치를 목수는 수백 번씩 휘두르는 것은 자신의 힘보다는 자연의 힘을 쓰기 때문이지. 결국 자신의 힘을 쓰는 사람들도 그 기술의 정점에서는 자연의 힘을 이용하게 되요. 하물며 원래부터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마 법사는 어떻겠어. 그 사람들은 매일매일 자연과 하나되기 위해 일부러 연습할 정도야. 그것이 메모라이즈의 목적이지. 네드발군. 물론,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냥 그 날 쓸 마법을 외우는 것이지만, 원래는 복잡 한 의미가 있어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이루릴은 숨쉴 사이 없이 계속 캐스트 를 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지금 이루릴이 하는 말은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춤을 춰요, 내가 바라보는 이 시간과 이 공간에." 쉐애애애액! 쏴아아아아… 까르르르르. 바람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 다. 허공 중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똑바로 바라보면 보이지가 않았다. 옆눈길로 바라볼 때만 흘깃흘깃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작은 사 람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똑똑히 볼 수가 없다. 균형을 못잡고 애쓰던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얼빠진 얼굴로 공중을 바라보았다. 카알이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걸 볼 줄이야! 실프(Sylph)로군." 실프가 공중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감성은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이성은 갑자기 마구 소용돌이치는 바람으로 느껴졌다.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이 흩날렸다. 꼭 보리밭 위에 바람이 불 때의 모 습 같다. 사라락거리며 흩날려도 어지럽지 않다. 부드럽게 물결칠 뿐이 다. 나는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앞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람을 맞으며 옷을 펄럭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피더 폴 때문에 몸무게가 가벼워진 그 사병들은 마치 종이 조각이 소용 돌이에 빨려올라가듯이 휘날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병들은 비명을 질 렀지만 실프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이상하게 들렸다. "으아아… 까르르… 꺄아아… 오호호호!" 시민들은 모두 얼이 빠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여관주인 쉐린은 자신의 하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다리가 풀리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 하인 도 몸의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대경실색한 모습으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다시 이를 악물 었다. 이루릴은 병사들은 실프에게 맡겨둔 채 가만히 서서 아프나이델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평온했고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서 나는 일단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고보니 실리키안 남작이라는 그 친 구는 이미 사라지고 정원에는 아프나이델만이 남아 있었다. 남작은 어 디로 간거지? 아프나이델은 고함을 질렀다. "이 더러운 엘프! 마법은 인간의 것이다! 인간에게 훔쳐 배운 주제에 감히?"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이죠." "닥쳐라! 대마법사 아프나이델의 지팡이를 걸고!" 허공에서는 병사들이 낙엽처럼 흩날리고 있었고 넓은 정원에는 소용돌 이치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의 한가운데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분노하 는 마법사와 침착한 엘프가 마주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내가 흥분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아프나이델은 다시 품속에 손을 넣었다. 도대체 저 안에는 얼마나 많 은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거지? 그는 이번엔 붉은 천을 꺼내었다. 얼씨 구. 그는 천을 들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서몬 스웜(Summon swarm)!" 그러면서 아프나이델은 붉은 천을 깃발 휘두르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그 천조각 뒤에서 갑자기 시커먼 것이 튀어나왔다. "찌르르르! 찌륵! 찍찍찍, 찌르르르!" 맙소사, 박쥐다! 박쥐가 수십 마리나 나왔다. 나는 질겁을 하며 물러났 다. 박쥐들은 곧장 이루릴에게 날아들었다. 끔찍스럽기 짝이 없는데, 이 루릴은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박쥐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서 있는 과녁인 이루릴에게 쉽게 접근했다. 그리고 박쥐들로 이루어진 검은 구름이 이루릴의 상체 를 휘감았다. 나는 악을 썼다. "이루리이일!" "왜 부르지요?" 이러면 너무 싱겁잖아. 난 의아해져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박쥐들은 이루릴을 감 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이루릴의 어깨에 앉거나 머리에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루릴은 두 팔을 앞으로 들어 박쥐들이 매달리기 좋게 해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낮에 나왔으니… 눈도 아플테고. 별로 괜찮지 않겠지요." "아, 아니, 당신이오!" "예? 전… 팔이 조금 무겁군요. 냄새도 나쁘고."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난 내가 평소에 이상한 성격의 소유 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비둘기나 꾀꼬리, 휘파람새같은 예쁜 새들이 아니라 시커먼 털이 빽빽히 난 박쥐들에 둘러쌓인 이루릴이 아 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쥐들중 어떤 놈은 이루릴의 검은 머릿결 사이로 파고들기까지 하고 있는데.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 시는 그랑엘베르여. 오래간만에 불러보는군요. 어쨌든 당신이 돌보시는 것들은 전부 왜 이렇습니까? 어쩌자고 저 엘프는 박쥐에 둘러쌓여도 아 름답습니까? 이루릴은 팔에 매달린 놈들 중 하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쌍해라… 낮에 나오다니, 햇빛은 너희들에게 너무 괴롭겠지. 가렴. 너희들의 동굴로 돌아가." 그러자 박쥐들은 일제히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잠시 정원에는 하 늘을 가린 박쥐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였고 시민들의 비명이 조금 시끄러웠지만 박쥐들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이루릴은 박쥐들이 사라지자 흐트러진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아프나이 델에게 말했다. "날 공격할 줄 알았는데, 왜 박쥐들을 불러내어 괴롭히죠?"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2. 나는 도저히 못참고 샌슨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샌슨도 어깨를 들썩거 리며 웃고 있었다. "큭, 크크크, 프흐흐흐. 우하하하하!" 우리는 서로 매달려서 킬킬거렸다. 이루릴은 멋지게 아프나이델의 마 법을 깨어버리고 뒷통수를 때리는 말까지 하고 있다. 불쌍한 아프나이 델은 덜덜 떨고 있었다. "아냐! 아냐! 이럴 수는 없어! 넌, 넌 바, 방어마법도 쓰지 않았고 현 혹마법도 쓰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내 박쥐들이…." "잠깐, 기다리죠." 이루릴은 아프나이델의 말을 끊더니 아직까지 멋지게 흩날리고 있는 공중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 다. "그들과의 춤은 재미있었나요? 이제 그들을 내려줘요." 병사들이 마치 낙엽 떨어지듯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천 천히 떨어지는 것이 더 공포스럽다는듯이 악을 쓰고 있었고 그래서 꽤 소란스러웠다. 뭐가 무서운거야? 천천히 떨어지는구만. "조심해요!" 샌슨의 고함소리, 뭐야? 이런, 저 죽일 놈! 이루릴이 공중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아프나이델이 뭔가 빠르게 캐스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다른 때보다 훨씬 캐스팅 타임이 길었다. 이루릴은 샌슨의 주의를 듣고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불안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더니 앞으로 나섰다. 난 고 향에서 저런 눈빛을 띤 채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우 리를 막아주기 위해서… "이루릴!" 이루릴도 아프나이델에 맞서 캐스트를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온 몸 으로 땀을 비오듯이 쏟고 있었다.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고 팔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앞의 장난 같은 마법이 아닌 모양이다. 샌슨과 나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캐스트를 끝내고는 품 속에서 시커멓고 작은 공 같은 것을 꺼내어 던졌 다. "받아라! 파이어볼(Fireball)!" 오, 맙소사! 아프나이델이 던진 시커먼 공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더니 거대한 불덩이 가 나타났다.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나타나더니 곧장 이루릴에게 날아들었다. 공기가 타오르는 무서운 소리가 들린다. 화르르르르. 열풍에 머리카락이 그을리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루릴도 그 때 캐스트를 끝내었다. "월 오브 아이스(Wall of ice)." 쫘작! 촤아아아악! 눈 앞에 거대한 얼음벽이 나타났다. 얼음벽 때문에 시야가 가렸지만 엄청난 폭음은 잘 들렸다. 콰아아앙! 얼음벽이 쪼개어지며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튕겼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려 눈은 다치지 않았지만 팔에는 마치 채찍으로 맞은듯한 느낌이 왔 다. "으으윽." 팔을 내려보니 두 팔에는 모두 날카로운 상처가 가득 생겼다. 그리고 눈앞의 얼음벽은 사라졌고 거기에는 굉장한 수증기의 구름이 만들어졌 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이루릴은 그 수증기의 구름 속 으로 뛰어들었다. 이루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이루릴을 불 렀다. "이, 이루릴?" 그리고 조금 후, 뭔가 둔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무엇이 땅으로 쓰러지 는 소리가 들렸다. 샌슨과 나는 눈 앞을 마구 저으며 구름을 헤치고 앞 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나는 뭔가 물컹하는 것을 밟았고 샌슨은 무엇과 부딪혀버렸다. 샌슨이 비명을 질렀다. "아앗! 죄, 죄송합니다!" 샌슨은 이루릴을 껴안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물러나며 코가 땅에 닿 을듯이 절을 했다. 그리고 내가 밟고있는 것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어, 어라?" "머리를 쳐서 기절시켰어요. 참 위험한 인간이군요."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그 자를 살펴봤다. 밟아도 모를 정도니 완전히 기절한 모양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망이었다. 저택의 꽃과 풀들은 얼음과 불의 충돌로 일어난 폭풍으로 산산이 흩어져 있었고 그 두 개가 충동한 지점에는 땅에 구덩이가 파여 있을 정도였다. 저 쪽에 있던 카알은 한숨을 쉬며 걸어오고 있었고 쉐 린과 마을 시민들도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아, 우리가 더 황당해. 조용히 대화로 해결하려고 포 로들까지 얌전히 데리고 왔는데 대접이 너무 과격하군. 카알은 우리를 둘러보고 다시 쓰러진 아프나이델을 보더니 말했다. "이래서야, 점잖은 대화를 바라는 것은 어렵겠군. 그래도 할 수 없지. 남작을 찾아보자. 이 피해에 대해 보상해달라고 하면 어쩌지?" "그 때는 사정 보지 않고 그 놈을 화장실에 처박아주죠." 카알은 빙긋 웃었다. "네드발군… 그 의견이 매력적으로 들리네만, 그래도 그래선 안되지." 그 때 뒤에 있던 시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저 놈들이다! 저 놈들이 내 하인들을 구타하고 내 고문인 아프나 이델을 살해했어!" 저 목소리를 안다. 그런데 저 내용은 참 기분 나쁘군. 우리는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실리키안 남작과 20여명의 병사들이 뛰어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때 공중으로 날려갔던 사병들도 다 땅에 내려온데다가 피더 폴이 풀려서 모두 정상 적으로 서 있었다. 달려온 병사들은 하더 리더와 포챠드를 들고 있었고 그 중 롱소드를 차고 있는 자가 우두머리로 보였다. 병사들이 일제히 좍 늘어서 우리를 포위하자 그 우두머리는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본관은 레너스시 경비대장 레넌 위스터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너희 들을 무단침입, 기물파손, 폭력행위 및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샌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댓구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죄명이 성립되지?" "레너스 시민 실리키안 남작의 저택에 무단 침입했고, 그 정원을 파손 했으며, 그 하인들을 구타하고 남작가의 고문인 아프나이델을 살해했 다." 샌슨은 입을 쫙 벌렸다. 나는 샌슨을 밀치며 말했다. "이봐요. 최소한 마지막 것은 빼자고요. 아프나이델이라는 이 마법사는 죽지 않았으니까." 레넌 위스터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는 그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했 다. "그렇군. 하지만 앞의 죄목은…" "그것도 순서대로 빼보지요. 폭력행위라, 그건 정당방어였지. 이 작자 들이 먼저 마구 마법을 쓰고 공격을 감행했거든요. 기물파손도 그 때문 에 일어난 것이고. 그리고 무단침입이라. 분명히 우리가 들어올 때 저 남작은 '손님들, 내 집에 어서 오시게.'라고 말했어요. 그러면무단침입 이 될 수 없죠?" 레넌은 당황한 얼굴로 실리키안을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실리키안 남작은 시뻘개진 얼굴로 말했다. "무슨 당치않은 수작을! 이봐, 레넌! 뭘 하는거야? 네가 어떻게 봉급을 받는지 까먹었나? 어서 저 놈들을 체포해!" 레넌은 다부진 표정으로 실리키안 남작을 노려보았다. "전 시청의 공복으로 시에서 봉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드리지요." "이 놈이!" "하지만 당신이 고발하신 이상 이들을 체포하기는 하겠습니다. 이봐. 고발이 들어왔으니 일단 조사해야 된다. 모두 무기를 내놓고 순순히 우 리를 따라오도록." 어, 사리에 맞게 말하는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이봐요. 저 작자는 정식으로 고발장을 제출한 겁니까?" 레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구두고발이다. 정식고발이라고는 할 수 없지. 따라서 당신들을 체포하는 것은 아니다. 동행조사다." "그러면 우리도 저 작자를 구두로 고발하지요. 죄명은 무고죄. 저 작자 도 우리와 함께 데려가요.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도 못가요." 카알은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샌슨은 감탄스럽다는듯이 쳐 다보았다. 흠, 나도 내 입에 대해서는 기특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레넌 이라는 그 경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실리키안 남작, 저와 함께 가실가요?" "뭐라고! 이 자식이 돌았나! 네놈이 날 체포하겠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체포가 아니라 동행조사입니다. 순순히 따라 주시면…" 쫙! 굉장한 소리. 실리키안 남작은 레넌 위스터의 뺨을 갈겼다. 우리들 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넌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부들부들 떨면서 실리키안 남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리키안 남작은 크게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이 버릇없는 놈! 감히 네가 날 체포하겠다고? 서푼짜리 경비대장 자 리에 기고만장해서 아래위도 모르고! 네녀석이 평소 하는 행실로 보아 오래 가지 못할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대체 예절도 모르고 인 사를 차릴 줄도 몰랐지! 내 이 놈을 그냥…" 실리키안 남작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쫙! 레넌이 멋지게 실리키안 남 작의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실리키안 남작은 나동그라졌다. "저 사람들은 동행조사이지만, 당신은 이제 체포하겠습니다. 공무원 폭 행과 공무원 모독,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실리키안 남작은 쓰러진채 그 말을 듣더니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 저, 저놈을 잡아!" 땅에 내려와 있던 실리키안의 사병들이 그제서야 할버드를 꼬나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레넌도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고 시의 경비대원 들은 포챠드를 앞으로 들어올렸다. 레너스는 낮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내려라! 감히 시 경비대에게 무기를 겨누느냐!" 사병들은 거칠게 쏘아붙였다. "시 경비대가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야? 우린 돈 받는 사람 말만 들으 면 돼!" 이런, 안되겠군. 20 대30으로 시 경비대쪽이 불리하다. 샌슨과 나는 눈길을 마주치고는 곧장 레넌 옆으로 다가섰다. 이루릴과 카알도 천천 히 레넌 옆으로 가서 섰다. 우리들이 앞으로 나서자 사병들은 주춤거렸다. 그들은 특히 이루릴에 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조금 전 공중에서 이루릴이 마법을 쓰는 장 면을 잘 목격했을테니까. 나는 이루릴에게 속삭였다. "뭔가 겁날 말을 하세요! 저들은 당신을 두려워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러자 사병들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좋아, 멋지군. 레넌은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 한 명이 30여명의 사병들을 위압하고 있는 것을 보자 입을 딱 벌렸다. 이루릴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사병들은 주춤거리며 마치 이루릴의 말에 밀린듯이 더 물러났다. 훌륭 하다! 그런데 이루릴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뒤로 다시 물 러나더니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하지요?" 으아아, 그랑엘베르여! 나는 머리를 내두르며 무조건 고함 질렀다. "어이! 이 아가씨가 당신들 몇 명을 죽일까 물어오는데, 뭐라고 대답할 까?" 사병들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 다가 입을 열었다. "왜 거짓말을?" 정말 손발 안 맞네! 나는 계속 무턱대고 외쳤다. "쳇, 그 끔찍한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고요!" 이루릴은 이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질문이 끔찍했던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사병들은 제각기 취향대로 이루릴의 '그 끔찍한 말'에 대해 상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이봐! 어차피 실리키안 남작은 체포된다! 그런데 너희들이 이 경비대 에 반항하면 실리키안 남작의 죄가 더 무거워진단 말이야! 남작은 시의 공적(公敵)이될테고 그러면 너희들도 시의 공적이 된다! 도망자로 살아 남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니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경비대에 협력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실리키안 남작의 죄가 가벼워진다!" 사병들은 급하게 서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그들은 곧 실리키안 남작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작은 악을 썼다. "이, 이 쳐죽일 놈들아!" "저, 남작님. 저 꼬마 말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반항하면 남작님 죄가 더 무거워져요. 그러니까 우린 남작님을 위해서라도 정중히 경비대에 체포되도록 해야겠습니다." "뭐, 뭐라고! 이 놈들이 찢어진 입이라고!" 그 광경을 보며 난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카알이 말했다. "네드발군. 자네가 이렇게 임기응변에 강할 줄은 미처 몰랐네." "나도 몰랐어요." "나도 몰랐다. 욘석아! 제법이네." 샌슨이 내 머리를 헤집으며 웃었다. 실리키안 남작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주로 사병들에 대한 욕짓거리와 레넌, 나, 기타 등등 주위의 모 든 사람들에게 욕짓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그러니 도저히 자기 편을 만 들 수가 없다. 사병들은 두 말 하지 않고 실리키안 남작을 시 경비대에 게 넘겨버렸다. 레넌은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조력에는 감사한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라…" "가죠, 뭐." 샌슨과 카알도 모두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그 때 쉐린이 앞으로 달 려나왔다. "제가 목격자로 따라가겠습니다!" 레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쉐린은 자기 말고도 하인과 몇 명의 시민들을 더 불러들였다. 그 다음 우리 일행은 모두 레너스시 경비대를 따라 시청으로 향했다. "이건 말도 안돼!"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쇠창살로 돌진했다. 쇠창살이 휘어지는 대신 내가 나동그라졌다. 제기, OPG가 없지. 샌슨은 날 보며 말했다. "탈옥을 하면 완전히 죄수가 된다. 후치." "지금은 죄수 취급 아냐?" 샌슨은 풀죽은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카알도 언짢은 표정으로 면회 를 온 쉐린에게 말했다. "그럼, 그 레넌이라는 경비대장은?" "직무태만으로 감봉처분 되었습니다." "맙소사. 직무태만이라고요?" "저도 어이가 없군요." 쉐린은 말을 전해주는 자신이 더 화가 나서 못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발악을 하며 쇠창살을 다시 쥐고 흔들었지만 샌슨이 엉덩이를 걷 어차는 바람에 또 나뒹굴었다. "이 자식아! 돼지새끼처럼 툴툴거리지 말고 얌전히 못 있어?" "이런 억울한 경우를 당했는데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그러자 쉐린을 따라온 유스네가 날 불렀다. "저, 후치… 이거 마셔. 나 다른 것은 해줄게 없고. 숨겨들어오기 힘들 었어. 그 고생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서 유스네는 품속에서 작은 수통을 꺼내어 주었다. 나는 내가 술주정뱅인 줄 아느냐, 누명을 뒤집어쓴채 생전 처음으로 감옥에 갇히 기는 했지만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등등으로 외치면서도 그 수통을 받아들었다. 유스네는 그런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수통 뚜껑을 여는 순간 현기증이 핑 올랐다. 장난이 아니게 도수가 셀 것 같다. 나는 한 모금 마시고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샌슨에 게 줘버렸다. 샌슨도 수통에 코를 가져다대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확확 달아오르는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마어마한 놈을 숨겨왔군. 고마워, 유스네." "화 푸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도움이 안될 것 같아.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말 이럴 수는 없다. 우리는 시청으로 오자마자 모든 무기를 빼앗기 고 나는 OPG도 빼앗기고 그대로 감옥에 처넣어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린 일단 구속하고 조사가 끝나면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생전 처음 감옥 구경한다고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대로 아무 소식도 없이 이렇게 이틀째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쉐린이 면회를 와서 한다는 말이, 실리키안이라는 그 가짜남작은 이미 풀려났으며 그를 체포한 레넌 경비대장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청에서는 우릴 조사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쉐린은 아마 실리키안 남작의 지시에 따라 우리의 처리 방식이 정해질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말했다. "잠깐, 이루릴은? 이루릴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루릴은 엘프니까 가둘 수 없잖아요?" 쉐린은 침울하게 말했다. "그 엘프분은 바이서스의 시민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갇혀있는 것은 아 니지만,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지요. 여러분들도 불명확한 죄목으로 갇 혀있는 셈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죄인 명부에 올라있지도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죄수인 셈이죠. 저희도 사실은 면회를 온게 아니고, 감 옥 답사를 온 시민입니다." "제에기…" "그 엘프분은 면회도 못하게 하더군요. 간수들에게 듣자니 그 분은 이 아랫층에 계시는 모양입니다. 처지는 더 안좋고요. 마법을 쓸까 무서워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장전한 석궁을 소지한 병사들이 24시간 교대 하며 계속 감시하고 있답니다." "맙소사? 아니, 그저 아침에 메모라이즈 못하게 하면 되는 것 아녜요!" "정령마법은 메모라이즈가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제길!" 난 돌벽을 걷어찼다. 당연히 내 발이 아파왔다. OPG만 있다면 이대로 벽을 뚫고 달려나가 다 때려부수고 싶다. 카알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 다. "쉐린. 아무래도 정식 재판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것참. 우린 여정이 바쁜데. 그리고 세레니얼양도 우리 때문에 자신 의 여정을 방해받게 된데다 고초까지 겪게 했으니… 몹쓸 노릇이군." 쉐린도 퍽이나 안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일단 시장에게 탄원서도 내어 보고 공개적으로 여론을 조성해 보겠다고 했지만 별로 자신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3. 쉐린과 유스네가 떠나고 나서 나는 끙끙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더 못참겠다. 탈옥, 탈옥이다! 한다, 반드시 한다! 그런데 어떻게 탈옥 하지? 나는 이곳에 단 하나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창문에는 돌격 자가 설치되어 있었고, 설사 그 돌격자가 없어진다 해도 너무 작아서 빠 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 그 틈 사이로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보였다. "제기, 그거 좀 줘봐. 샌슨." 샌슨에게 수통을 받아들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우와? 감옥 천장이 돈다! 감옥이 무너지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자유다, 자유! 우하하하! 젠장. 나는 달아오르는 볼을 차가운 돌벽에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이건 안돼. 우리가 여기 몇 달 갇혀있으면 모든게 끝장이야. 우리가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아무르타트는 영주님과 백작, 그리고 포로들을 전부 죽일거야. 하멜 집사가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하겠어." 내 투덜거리는 소리에 샌슨과 카알의 표정도 우울해졌다.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 감옥이 닳아버릴 때까지 볼을 비벼볼까? 감옥에 단 하나 있는 창문에 재미있게 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흠, 저 얼굴 정말 재미있군. 난 술에 너무 취하면 안되는 모양이야. 왜 머리에 풀이 난 중년 얼굴의 어린애가 보이는 거지? "버터핑거!" 난 간신히 목소리를 죽였다. 듀칸 버터핑거라는 그 호비트다. 듀칸은 입 앞에 손가락을 세우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샌슨은 재빨리 쇠창살에 붙어 밖을 감시했고 카알과 나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있는 감옥은 지하였고, 그래서 창은 바깥의 지면과 같은 높이 였다. 그래서 듀칸은 몸을 땅에 눕히고 등 위에 풀더미를 올려놓은 채 엎드려 있었다. 바깥은 시청의 정원이니 아마 이런 모양이면 아무도 알 아보지 못할 것이다. 듀칸은 낮게 말했다. "이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들키면 나도 끝장이야. 빠르고 간단하 게 하자고. 당신들을 구해줄테니 얼마를 내겠소?" 카알은 잠깐 당황하더니 대답했다. "낸다고? 어, 얼마나 원하시오?" 듀칸은 실쭉 웃었다. 그가 입을 헤벌레 벌리면서 말하려는 순간, 뭔가 가 내려오더니 듀칸의 정수리를 찍었다. "이 놈! 틀림없이 이럴 줄 알았다!" 들켰구나! 경비병에게 들켰어. 그런데 듀칸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당황하며 옆으로 손을 뻗어 누군가를 땅에 눕히는 모습이었 다. 이윽고 듀칸의 얼굴 옆으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이 나타났다. "엑셀핸드?" 12인의 다리에서 만난 그 드워프였다. 듀칸은 자신의 등 위에 있던 풀 더미를 재빨리 엑셀핸드의 등에도 덮어주며 목소리를 죽인채 엑셀핸드를 나무랐다. "아니,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거야! 여기가 드워 프의 광산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여긴 감옥이라고, 감옥!" "웃기는군. 의로운 자들은 감옥에, 악당은 바깥에. 그것이 인간의 방식 인가?" 엔셀핸드의 중얼거림에 카알은 인간 종족을 대표해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난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술 때문에 이미 얼굴이 벌개져 있었 으니까. 난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다, 당신이 여기 어쩐 일로?" "구해주러. 인간 방식은 어떤지 모르지만 드워프 방식으로는 의로운 자는 바깥에, 악당은 감옥에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요 소악당을 보냈 지. 하지만 틀림없이 요따위 수작을 할 것 같아서 쫓아왔지. 그런데 자 넨 감옥 안에서도 팔자가 편한 모양이군? 술냄새까지 풍기고." 난 뒤의 긴 말은 듣지 않았다. 중요한 건 맨처음의 한 마디 뿐이다. "구해준다고요? 탈옥?" "그렇지." "어떻게?" "그건 이 소악당이 알아서 할 일이야. 이놈아! 어서 계획을 뱉어라!" 듀칸은 이마를 짚으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정말 드워프란 족속은… 좀 조용히 못해?" 듀칸은 땅에 붙은 배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끙끙거리더니 곧 열쇠 꾸러 미를 하나 꺼내었다. "자, 이건 마법의 열쇠, 자유의 열쇠지. 하하. 이 감옥의 모든 문은 이 걸로 열리지 않는게 없지." 정말 그렇지 않을 수 없겠다. 열쇠가 자그마치 100개는 넘어보이니까! 제기, 100개를 일일이 맞춰보고도 들키지 않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다. 듀칸은 그런 우리 표정을 용케 알아채고(감옥 안은 어두웠으니까.) 부연 설명했다. "물론 그 많은 것을 일일이 맞춰볼 필요는 없어요. 그건 모두 103개라 고. 이건 말이야, 시장의 열쇠꾸러미를 복사한 것이거든? 103개를 복사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지. 아, 정말 그 때는 정말 사상최대의 작전이었어! 그 때 나는 시장이 목욕을 하는 사이에 세탁장이로 변장하 고 방에 불을 지른 다음…" "그만하지 못해?" 엑셀핸드가 팔꿈치로 찍자 간신히 듀칸은 헛소리를 멈춘 다음 설명했 다. "열쇠에는 모두 문자와 숫자가 있어. 당신들의 감방 쇠창살의 자물쇠 를 봐. 아래쪽에 작은 일련번호가 있을거야." 나는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재빨리 쇠창살 한쪽의 문에 있는 자물 쇠를 살폈다. 샌슨은 한참을 살피더니 말했다. "좋아. J-104이다. 감옥 104호라는 말인가 보군." 나는 재빨리 달빛에 비춰가며 열쇠들을 살폈다. 열쇠에 있는 작은 문 자들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간신히 J-104의 열쇠를 찾 아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감옥에 갇힐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보물 이겠는걸? 듀칸, 당신 도둑입니까?" "떽. 꼭 이 드워프처럼 말하네. 소유권 이전 전문가라고 불러. 어쨌든 지금 당장은 나오지 말아. 달을 잘 보다가 두번째 달 루미너스가 산 너 머로 나타날 때까지 정문으로 나와요. 그 때까지 어떻게든 당신들 말을 마굿간에서 빼내어 시청 정문 옆에서 기다리겠어. 그리고 이것." 듀칸은 대거를 세 개 들이밀었다. 듀칸은 계속 말했다. "조용히 처리하면서 나와요. 되도록 소란을 일으키면 안된다는 것쯤은 알겠지? 이 건물 안의 모든 자물쇠는 다 열 수 있으니까. 그럼." 듀칸은 벌떡 일어서는 엑셀핸드를 보며 혀를 차더니 엑셀핸드의 팔을 붙잡고 사라졌다. 나는 단숨에 기가 올라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시작하지요." 카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벌써? 그 호비트는 루미너스가…." "아니, 우리 물품도 되찾아야 되고 이루릴도 찾아보려면 바빠요." "그렇군. 이거 원, 도둑의 흉내까지 내야 되는군. 하지만 아무래도 정 당하게 나갈 방법은 없으니."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쇠창살 쪽으로 다가갔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 었다. 열쇠를 받아든 샌슨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애쓰면서(사실 그건 좀 어려운 일이었다. 열쇠가 너무 많았다.) J-104의 열쇠를 끼어넣었다. "찰칵!" 너무너무 듣기 좋은 음향이 들리며 자물쇠는 열렸다. 샌슨은 기름칠이 되지 않은 창살문을 되도록 조심스럽게 열고는 밖으 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입에 대거를 물고는 세 명의 암살자처 럼 복도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샌슨은 우리가 끌려올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밖으로 향했 다. 나는 샌슨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먼저 이루릴을 찾아보자. 아래쪽에 있다고 했어."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시청 지하의 이 감옥은 지하 이 층으로 구성된 모양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지하 일층이며, 일 층을 다 돌아보아도 감옥은 모두 비어 있었다. 대신 우리는 지하 이층 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래쪽에서 갑자기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황급 히 계단 입구 옆의 벽에 몸을 붙였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저쪽편 에 있는 샌슨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였다. 한 놈이란 말이지? 잠시 후,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지며 불빛이 환해지더니 손에 횃불을 든 병사가 계단을 올라왔다. 나는 OPG가 없어서 한 대 쥐어박는 대신 그의 어깨를 쳤다. "이봐. 말 좀 묻자." 그는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등 뒤에 있던 샌슨이 재빨리 그의 목을 틀어쥐며 목에 대거를 가져다대 었다. 손발 잘 맞아. "떠들면 죽인다." 샌슨의 낮은 협박에 병사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그 가 들고 있던 횃불을 빼앗고 그의 허리에 있던 롱소드도 빼어들고는 물 었다. "이 아래도 감옥이지? 아래에 엘프가 있나?" "그, 그렇다." "지키는 사람은?" "나와 두 명." 쉐린의 말대로 지키는 병사들이 있는 모양이군. "당신은 어디 가는 길이야?" "야, 야식을 가지러…" "거 안됐군. 몸을 돌려. 한 명을 불러." "부, 부르라고?" "아이고, 내 다리. 미끄러졌어. 야, 누구 불 좀 가져와봐. 이렇게 짜증 스럽게 불러. 알았지?" 병사는 이를 악물었지만 샌슨이 손에 힘을 주자 곧 내가 시킨대로 외 쳤다. "아, 아이고! 내 다리. 미끄러졌어! 야! 누구 불 좀 가져와봐!" 곧 아래쪽 멀리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 놈은 도대체 걷지도 못하나?" 샌슨은 재빨리 손에 잡고 있던 병사의 뒤통수를 대거 칼자루로 찍어버 렸다. 병사는 쓰러졌고, 나는 횃불을 껐다. 계단쪽에서 다시 발자국 소 리가 들려오고 횃불빛이 보였다. "야, 도대체 어디야?" 난 그 병사에게 말했다. "여기야." 아까와 똑같이 그 병사는 샌슨에게 잡혀버렸다. 참 재미있을 정도군. 그 병사도 내가 시킨대로 고함을 지르 게 되었다. "야! 이 녀석,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야! 혼자 못들겠어, 이리 와 봐!" 그리고 그 병사도 처리되었고, 마지막 병사도 투덜거리며 나타나서 똑 같이 처리되었다. 이거 원, 장난 같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히죽 웃은 다음 병사들을 내버려두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루릴은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테이블에 랜턴이 켜진 채 놓여 있었 고 그 위에는 카드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루릴은 바로 그 테이블 앞의 감옥에 있었다. "이루릴!" 이루릴은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어? 놀라지도 않아요?" "저 병사들은 듣지 못했지만 전 계단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었거든 요." "우와! 대단해." 샌슨은 재빨리 이루릴의 감옥 자물쇠를 조사하고는 감옥 문을 열었다. 이루릴이 밝은 바깥으로 나오자 곧 그 안쓰러운 모습이 잘 보였다. 항 상 깔끔하던 옷맵시가 감옥에 갇혀있느라 초췌해지고 얼굴이나 머리도 단정하지 못했다.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던데… 하지만 침착하고 단정한 몸놀림은 여전했다. 샌슨은 너무너무 슬퍼서 말도 안나온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를 다그쳤다. 테이블 옆에는 장전된 석궁이 세 개 있었다. 못된 놈들. 이루릴이 뭔가 마법을 쓰려 하면 당장 이것을 쏴버렸을 테지? 나는 그것을 쓸 줄 몰라 서 다른 세 사람이 하나씩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옆에는 밧줄이 있었 다. 그것을 들고 우린 다시 병사들이 쓰러져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병 사들을 다 묶은 다음, 샌슨은 물었다. "누굴 깨울까?" "마지막 녀석. 제일 위엣 놈이 마지막에 움직였을테지." 샌슨은 마지막 병사를 깨웠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듯이 인상을 찌푸 리더니 곧 공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샌슨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자, 내가 질문하고 넌 대답한다. 우물쭈물거리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그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따라서 헛소리는 열 번까지 할 수 있다." 보고 있던 카알과 내가 질릴 정도였다. 병사는 거의 눈물을 쏟을듯이 공포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은 우리 물건을 둔 곳, 바깥의 병 사들의 상황을 질문했다. 그 병사는 착해서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 다. 샌슨은 고맙다는 인사 대신 뒤통수를 다시 쥐어박아 기절시켰다. 병사의 말에 의하면 우리 물건은 모두 시청 비품실에 있다고 했다. 그 리고 이곳은 시청이라 건물 내에는 별로 병사가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 은 모두 바깥쪽의 경비대 건물에 있으며, 정문 옆의 초소에 숙직 병사 가 2명 앉아 있을 거라고 했다. 밤이라서 시청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으며 우리는 병사의 말에 따라 쉽 게 비품실을 찾아내었다. 듀칸의 말대로 그 열쇠는 진짜 마법의 열쇠였 다. 간단히 비품실 문을 연 우리는 각자의 갑옷과 샌슨의 은도금 롱소 드, 내 바스타드, 이루릴의 에스터크와 망고슈를 찾아내었다. 그런데 내 OPG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망할! 아마 그 아프나이델이란 녀석이 가져갔을 거야." "할 수 없지. 일단 나갈 준비를 하자." 우리는 시청 건물의 정문으로 갔다. 정문 옆의 창문으로 밖을 살펴보 니 고약했다. 하필이면 초소에 앉아 있던 2명 중 한 명이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건물을 빙 돌아 갔다. "지금 갈까? 아니면 돌아와서 앉을 때까지 기다릴까?" "기다려야지. 아직 루미너스가 안 떴어." 우리는 초조하게 창문 밖을 내다보며 루미너스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병사는 돌아왔고 그는 다시 초소에 앉아 동료와 잡담을 나누었 다. 자, 그런데 저 병사들과 싸우면 경비대 건물에 있다는 경비대원이 다 뛰어나올텐데. 경비대 건물은 본관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 었고 거리는 가까웠다. 샌슨은 그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나갈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하필 그 멍청한 호비트는 정 문으로 나오라고 했지? 이거, 조금 있으면 루미너스가 뜨겠는데 말이야. 쏠까?" 샌슨은 석궁을 들어올려보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말했 다. "그건 싫다. 그렇지? 우리의 자유와 저쪽의 생명. 함부로 바꿀 수는 없 지." 그러자 이루릴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캐스트에 들어갔다. "어? 메모라이즈를 했어요?" 카알이 대신 대답했다. "정령을 부르는 것이야. 그건 메모라이즈가 없어도 되지." 카알이 말한대로 이루릴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밤의 이슬 속에서도 젖지 않는 하나의 모래의 주인이며 휴식의 수호 자,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저들을 달래줘요." 뭔가가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역시 보이지는 않았다. 카알이 말했 다. "샌드맨(Sandman)이군." 샌슨과 나는 눈이 빠져라 초소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두 병사들은 하 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켜고 볼을 두드리면서 졸음을 잊기 위해 애썼다. "반항하지마! 잠들어, 이 녀석들아!" 샌슨과 나는 애가 타서 낮게 외쳤다. 하지만 별로 외칠 필요는 없었다. 병사들은 머리를 끄덕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 었다. "자, 가자." 우리는 본관을 나와 살금살금 걸어갔다. 정원이 엄청나게 길다는 느낌 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정문까지 나올 수 있었다. 정문으로 나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벌써 루미너스가 떴는데? 이 호비 트 녀석이 우릴 속였나? 그러나 바로 그 때 엑셀핸드의 목소리가 들렸 다. "허, 정확하군!" 이번에는 나도 정말 듀칸과 같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모두 엑셀핸드의 목소리에 10년은 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어둠 속 에서 빨간 빛이 보였다.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피워문 채 시청 담벼락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림자 속인데다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 이다. 그가 일어서자 곧 듀칸도 나타났다. 그는 손짓으로만 우리들을 불렀다. 듀칸을 따라가자 곧 나무에 매어둔 우리 말들이 보였다. 엑셀핸드는 여 전히 태평스럽게 말했다. "자, 잘들 가게. 이만하면 12인의 다리를 건네준 보상은 충분하겠지?" "아니, 그걸 갚으시려고 이렇게 위험한 일을…?" 드워프는 밤하늘로 멋진 담배연기 고리를 날려보냈다. 그의 눈은 우리 머리 위의 밤하늘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깊고 심원하게 번뜩였다. 검은 눈은 달빛에 번뜩이는군. 그는 대답했다. "자네들도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주지 않았나. 드워프는 함께 싸운 자 들을 영원한 친구로 생각하지. 흠, 흠. 설령 그게 암석의 아름다움을 모 르는 숲의 종족이라도." 마지막 부분은 목소리가 좀 낮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됐어! 잘들 가라고.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그리고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다시 물더니 두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방 금 세 명의 죄수를 탈옥시킨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밤 산책이라도 가는 태도다. 샌슨에게 열쇠를 돌려받은 듀칸도 우리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 더니 곧 몸을 돌렸다. 카알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댓가를 원하시는 것이…?" "천만에요. 저 능글맞은 드워프가 다 지불했어요. 언제라도 이 도시에 들르면, 그리고 만일 곤경을 당했다면, 날 기억해요. 듀칸 버터핑거! 소 유권 이전의 전문가이자 밤의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정한 로맨티 스트! 하하하." 듀칸은 상쾌한 웃음만 남겨놓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알 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엑셀핸드와 듀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맑은 달빛 속에는 우리들만이 남아있었다. "허, 이런. 저렇듯 고마운 사람들이 있나." "사람이 아니라 드워프와 호비트죠. 그리고 사람으로 말하자면, 난 지 금 당장 만나봐야 될 사람이 하나, 아니 두 명 있어요." 카알과 샌슨은 날 바라보았다. 나는 기세등등하게 대답했다. "시간은 오늘 밤뿐이죠.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탈옥했다는 것을 들킬 테니까. 그 가짜 남작과 사이비 마법사에게 오늘 밤은 잊혀지지 않는 밤이 될 겁니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4. 순종 헬턴트 사나이인 샌슨은 무조건 내 말에 찬성이었고, 좀 괴짜이 긴 해도 역시 핼턴트 남자인 카알은 주저하면서도 복수의 유혹을 뿌리 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허… 조용히 떠나는게 좋을텐데." "아니죠. 추격대가 따라올지도 몰라요. 확실히 매듭을 지어놓는게 좋겠 지요. 그리고 이곳 시청은 어차피 그 가짜 남작의 꼭두각시니까 결판을 지으려면 그 작자와 지어야죠." "위험하지 않겠나? 그 저택에는 사병들도 많고." "그 엉터리 사병들? 틀림없이 곯아떨어져 있을 거예요. 트롤이 설쳐도 잠이 덜깨서 출동 못했다는 놈들이예요. 그 자식들은 우리가 그 저택을 몽땅 불태우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걸요?" 나는 계속 이것은 우리의 불유쾌한 감금과 탈옥이 발생한데 대한 모종 의 해명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 복수도 포함되면 좋은 일이라는 식으로 설득했고 결국 카알은 결정을 내렸다. "한 번 가보기나 하세." "아뇨. 먼저 12인의 여관으로. 우리 짐은 다 챙겨와야죠." 우리는 말을 몰아 12인의 여관으로 달려갔다. 샌슨은 이루릴을 등 뒤 에 태우고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이루릴은 자연스럽게 샌슨의 허 리를 잡고 있는데 샌슨만 마치 음란한 일이나 벌이고 있는 것처럼 혼자 서 흥분하고 있다. 에이, 빨리 장가를 보내야지, 원. 12인의 여관에도 불이 다 꺼져 있었지만 1층의 홀에는 불이 켜져 있었 다. 우리는 살그머니 홀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홀 안에는 유스네가 혼자 테이블에 앉아서 장부 같은 것을 펼쳐놓고는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 었다. 나는 창문을 두드렸다. 유스네는 깜짝 놀라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더 놀라버렸다. "후, 후치?" "안녕? 멋진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밤이지?" "어, 어떻게 나온 거야?" "믿을 수 있겠어? 아까 그 독한 술을 뿌리니까 돌벽이 녹더라고." 유스네는 놀라 어쩔 줄을 몰라하더니 여관의 문으로 달려와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유스네는 우리들을 상하좌우로 정신 사납게 살펴보더니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이렇게 나오다니…" 카알이 손을 내저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우리 짐은 우리 방에 있나?" "아, 그건 제가 보관하고 있어요." 우리는 곧 유스네를 따라가 우리들의 배낭을 각자 들었다. 쉐린이나 다른 하인들은 모두 잠들어 있는지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샌슨이 물 통에 물을 채우는 동안, 나는 유스네에게 말했다. "자, 말할 테니까 중간에 끼어들지마. 우린 탈옥했어. 그리고 이대로 이 도시에서 달아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손 좀 봐줄 사람이 있어서 먼저 거기로 갈 거야. 여관비는 모두 얼마지?" 유스네는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떠난다고? 지금?" "따뜻한 봄이 올 때 출발할까?" "…넌 입이 참…" "참? 어떻단 말이야, 키스하기 좋다고?" 유스네는 볼이 불룩해서 샌슨에게 여관비를 받았다. 우리는 잽싸게 짐 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 때 유스네가 안에서 바구니를 가져오더 니 내밀었다. "급해서 줄 게 없네. 도시락이야. 가면서 먹어." "이거 정말 고맙네. 이 여관에 들리면 대륙 어디에 가서라도 좋은 추 억을 말할거라고 한 사람이 있었지. 고마워요, 레이디 유스네. 그리고 오빠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줘." "응, 알았어. 그런데…" 유스네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투였다. 급한데 참 시간 끄네. 에이, 아가씨들도 역시 헬턴트 아가씨가 최고야. 시원시원하거든. "유스네,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게 망설여진다면 해버리는게 나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욕설이라도 퍼붓는게 낫지. 자, 빨리 해. 나한 테 제대로 욕을 못해서 그런 거야?" 유스네의 입이 갑자기 뚫렸다. "야! 이 나쁜 놈아, 내 마음을 돌려줘!" "…뭐?" 뭐냐고 묻는 내 목소리는 밤의 미풍보다도 가늘고 낮았다. 카알과 샌 슨도 망치로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간신히 목을 가다듬어 이 번엔 조금 크게 물었다. "뭐라고 했니?" 유스네는 코를 훌쩍거리며 이야기했다. "흥, 훌쩍, 오래된 이야기대로야, 크응. 여관에서 일하는 처녀는, 훌 쩍, 방랑자에게 마음을 뺏기지. 하지만 방랑자는 떠나고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아. 처녀는 평생을 기다리지. 크응, 아마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겠지만, 훌쩍, 평생 그리움은 남아." 아악! 못말리겠다, 정말! 이 애는 자신과 날 소재로 삼아 이렇게 음침 하고 현실성이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 수 없는 상상을 마구 펼치고 있었 단 말이야? 정말 사춘기 취향에 딱 맞는 공상이다. 나는 유스네의 눈물 을 닦아주고는 물어보았다. "야, 야! 너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잖아?" "그 때부터 난 마음을 뺏긴 거지. 그걸 알았어야 했어. 내가 널 거칠게 대할 때, 난 이미 네가 내 마음을 뺏어갈 남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챘던 거야. 맞아. 그랬을거야. 난 내가 내 평생에 단 한 번 있을 마법의 가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지." 마법의 가을… 미치겠군. 야, 네가 날 거칠게 대한 거야 그 때 네가 주 정뱅이에게 화가 나있어서 그랬던 거지, 어디에 무엇을 짜맞추는 거야? "그리고 그날 아침,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 트롤과 싸우고도, 그 사람들에게는 냉대를 받는, 상처입은 전사를 봤을 때, 난, 난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 그랑엘베르여, 제발! 난 속으로 악악거린 다음 가까스로 조용히 말했 다. "유스네. 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넌 날 겨우 사흘 봤어. 그리고 그 중 에서도 이틀은 내가 감옥에 있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난 좋은 남자 가 아니야. 네가 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 중에 90% 이상은 너 스스로 만 들어낸 거야." "아냐, 이건 운명이야. 하지만 널 붙잡지 않겠어. 자신의 마음을 함부 로 방랑자에게 줬으니, 처녀에게 다가오는 징벌은 당연하지. 가. 붙잡지 않아.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이대로 영영 사라져 가겠지만, 원망 하지 않아." 아무래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유스네는 가을과 함께 떠나간 방랑자 에게 마음을 뺏기고 평생 그리움 속에 매년 가을을 맞이하는 처녀의 역 할을 하고 싶은 모양이야. 그렇다면 일부러 현실성을 머리에 집어넣어 주고 싶지는 않다. 유스네도 얼마 있지 않아 자기가 왜 그랬던가, 하고 생각하게 되겠지. 그 때까지는 조금 슬퍼서 오히려 아름다운 그런 공상 을 계속 유지하렴. 나는 두 말 하지 않고 제미니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말에 올랐다. 난 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봐, 유스네." "응?" "넌 좋은 남자를 만날거야. 아들을 낳는다면,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말 썽꾸러기가 될 것 같은 이마를 타고 난다면, 그 이름은 후치로 지어주 겠어?" 카알과 샌슨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 양반들아. 나도 이런 말 하려니 간지러워 미치겠어. 하지만 유스네가 좋아할 거란 말이야. 예상대로 유 스네는 볼이 발그레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헹, 웃기네. 아마 남편의 반대에 부딪힐 거다, 요 소녀야! 하지만 난 끝까지 진중한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스네는 갑자기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 날 위해 간직해줘. 잊지 말아줘." 목걸이… 돌아버리겠군. 유스네가 내민 것은 알록달록한 구슬들이 꿰어 져 있는 목걸이로 누가 볼까 무서워 목에 못걸고 다닐 물건이었다. '야! 내가 어떻게 이렇게 야하고 유치한 목걸이를 걸고 다니냐!' 라고 고함지르는 대신, 난 그것을 받아들어 목에 걸었다. 그리고 말없 이 말을 달려갔다. 말없이, 묵묵하게, 가을밤을 밟아가며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방랑자. 그러나 내 마음 한 조각 훔쳐간 남자. 그걸 원한 단 말이지? 해줄 수 있지. …하지만 간지러워 죽겠다! 한참 달려온 후, 샌슨은 말을 걸어왔다. "야, 후치." "그만! 나 저 계집애 원하는대로 해주기에도 지쳤어. 그러니 더 이상 그 일로 날 놀리지 마." "…순수한 소녀 마음 가지고 장난치면 못쓴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그 애는 날 좋아하는게 아냐. 사춘기 꿈 속에 나타나는 백마의 왕자님을 대충 나에게 끼워맞춘 것 뿐이라고. 그러니 어쩌겠어? 그 애가 원하는대로 멋진 말을 남기고 떠날 수 밖에.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끝까지 죄지은 기분이 들거야. 제기, 난 아무 감정도 없 고 아무 죄도 없는데 말이야."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 타고 있는 이 루릴은 우리가 한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 시 후 샌슨은 낮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지. 네 마음은 이미 고향에 있는, 아니 네가 타고 있는…" "아아악! 샌슨!" 우리는 남작 저택에 도착했다. 밤은 깊어 이미 캄캄했고 저택안은 고 요했다. 우리는 담벼락 옆에 말을 매어두고 내렸다. 모두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고 이루릴은 그 탐스러운 머리를 질끈 묶어서 옷 속에 집어 넣었다. 샌슨이 말했다. "저, 이루릴. 당신은 가지 않아도…" "저도 그 남작과 마법사에게는 따져볼 게 있어요." "애초에 동행을 요구한 제 잘못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태어난 게 잘못이라는 데까지 올라가겠 지요. 서두르지 않겠어요?" 서둘러야지. 샌슨이 받쳐주고나서 카알과 나는 담장을 넘었다. 담장은 허술해서 간단히 넘을 수 있었다. 이윽고 이루릴도 넘어왔고 샌슨은 좀 버둥거린 다음 넘어왔다. 카알은 저택 모양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모양을 보아하니 이층 중앙이 침실이겠다. 저 발코니도 그렇고. 그리 고 저 별관이 아마 사병들의 숙소일 것 같다. 그런데 마법사는 어디에 있을까?" "마법사의 실험실, 하면 보통 지하실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일단 조사해보자." 우리는 살금살금 걸어갔다. 루미너스가 떠오른지 이미 오래라 셀레나 와 루미너스 두 개가 다 떠올라 있어 무척 밝았다. 그래서 몰래 걷는 것은 쉽지 않아야 정상이겠지만, 어이없게도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별관쪽은 소란스러웠다. 살짝 다가가 보니 별관 안에서 사병들이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있었다. 잘들 논다. "저 놈들 도대체 어떻게 돈을 받는 거지?" 우리는 조용히 본관으로 걸어갔다. 문은 거창했다. 하지만 잠겨있었다. 안으로 빗장을 질러넣어 잠긴 것이 라 어떻게 열 방법은 없었다. 샌슨은 창문을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고개 를 저었다. "어딘가에 부엌이 있을거야. 부엌은 연기와 음식냄새가 빠지기 쉽도록 건물보다는 야외에 가깝게 있지. 뒤로 돌아가보자." 뒤로 돌아가보니 과연 본관 건물에 달려있는 혹처럼 생긴 부엌이 보였 다. 그 때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재빨리 옆의 나무 에 숨었다. 걸어온 사람은 평상복을 입고 있어 하인인지 사병인지 구분되지 않았 지만 생김새로 보아 사병인 것 같다. 그는 취해서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오더니 부엌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나와! 문 열어!" 잠시 후 부엌에서 불빛이 환해지는 것이 보이더니 곧 부엌문이 열렸 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램프를 들고 있는 하녀였다. 하녀는 눈을 비비 며 말했다. "뭐야? 왜 자는 사람 깨우는거야?" "술이 모자라다. 술병을 가지러 왔어." "네 놈들은 허구헌날 술마시는게 일이냐? 안돼! 더 이상은 못내줘!" "아이고, 그거 성질 독하네. 어디 보자…." "꺄악! 이 놈이 미쳤나!" 사병은 하녀를 끌어안으려다가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부엌문은 닫혔고 사병은 욕짓거리를 뱉으며 다시 돌아갔다. 우리는 다시 나무 뒤에서 나 왔다. "좋아, 들어가는 방법은 알았군."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기세좋게 문을 두 드렸다. "야! 미치겠다, 한 병만 내줘!" 당장 안에서 욕짓거리가 튀어나왔다. "내, 이놈을 그냥! 너 거기 가만 서 있어!" 표독스러운 하녀의 목소리에 이어 문이 활짝 열렸다. 하녀는 부지깽이 를 들고 돌격해 나왔다가 샌슨에게 팔을 잡혔다. 하녀의 눈이 커지고 고함을 지르려 하는 순간, 샌슨은 하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떠들면 가만 안두겠어." 두건 뒤에서 들리는 샌슨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했다. 하녀는 벌벌 떨면 서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은 하녀의 입을 막은채 말했다. "입을 놓겠어. 하지만 만일 비명을 지르거나 하면 큰일 날 줄 알아." 하녀는 입이 풀리자 당장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모기소리를 내 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샌슨은 좀 당황해서 말했다. "시키는대로 하면 다치지 않아요. 자, 안에 당신 말고 또 깨어있는 사 람이 있습니까?" "아뇨, 아무도 없어요. 저도 자고 있었는데 누가 불러서…" 그러자 샌슨은 하녀를 돌려세우고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좋아요. 안을 안내해주십시오. 당신 등에 단검이 있으니 서툰 짓은 말 고." 하녀는 너무 떠느라 걸음을 못옮길 지경이었다. 어쨌든 하녀를 다그쳐 서 우리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부엌건물과 본관이 연결된 문이 보였다. 그 안쪽은 홀이고, 대개 그렇듯이 홀에는 하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원래 하인방이 라는 것은 없으니까. 하녀방은 있는데 말이야. 나는 그 와중에도 이런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들어 있는 하인을 밟 을 뻔 했다. 간신히 그 손을 조금 차는 선에서 멈추었다. 하인은 몸을 뒤척이더니 다시 잠들었다. 그 짧은 순간 우리 넷은 식은 땀을 흘리며 굳어있었다. 샌슨은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후치, 임마!" "우하, 후! 내가 더 놀랐으니 그만해." 우리는 살금살금 홀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삐걱이는 소리에 질겁하며 올라갔지만 하인들은 낮의 고된 집안일 때문 인지 깨지 않았다. 이층에 다 올라오자 계단 좌우로 복도가 있었고 앞 으로도 복도가 있었다. 앞쪽 복도의 끝에는 화려한 문이 보였다. 하녀가 그 방을 가리키기도 전에 우리는 그 방이 남작의 방이라는 것을 눈치챘 다. 샌슨은 말했다. "마법사는 어디 있습니까?" "지, 지하에. 저기 복도 끝에 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요." "당신은 저 문을 열 수 있습니까?" "아, 아뇨. 열쇠는 남작님과 집사님만 가지셨어요." "그래요. 당신이 우릴 안내했다는 것을 들키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하 겠지요? 이렇게 합시다. 내가 당신을 기절시키지요. 당신은 우리들에게 반항하다가 맞았다고 하세요. 알겠죠?" 하녀는 허옇게 질렸지만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살살 해 주세요." "그럼 실례." 샌슨은 고개까지 꾸벅하고나서 하녀의 복부를 후려쳤다. 둔한 소리가 나고 하녀는 그대로 허물어졌지만 샌슨은 하녀를 받쳐들었다가 그대로 벽에 기대어 앉혔다. 샌슨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거, 여자를 때리다니 너무 미안하군." "하녀는 그래도 고마워할꺼야. 자, 지하로 내려가자." "왜?" "저 문을 열려면 하인들이 다 일어날테니까. 먼저 마법사를 붙잡은 다 음 마법사를 시켜 문을 열게 하자." 우리는 이층 끝에 있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층에 있는거지? 희안하군. 카알이 설명해주었다. "그렇다면 지하실은 원래 중요한 용도가 있을거야. 어떤 예법에 의하 면 일층은 하인들의 생활공간이고 이층은 주인 가족들의 생활공간이거 든. 그래서 중요한 지하와 이층을 연결해둔거야. 거기엔 하인들이 다가 가지 못하지." 그런가? 어쨌든 원래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층에서 지하까지 내려가는 길이라 그런지 계단은 가파르고 꽤 길었다. 다행히 돌계단이 라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 계단을 내려가자니 벽을 더 듬으며 꾸물거려야 했다. 그러자 이루릴이 말했다. "자신의 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령, 그를 감추는 어둠은 오히려 그의 먹이, 나와서 어둠을 삼켜요." 갑자기 환한 빛이 떠올라 기겁할 뻔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밝 은 것은 아니었지만 캄캄한 복도에서 갑자기 빛을 보아서 놀란 것이다. 빛의 중앙에는 그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하늘거리는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난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대답했다. "윌 오 위스프(Will o' wisp)로군. 듣던대로 아름다워. 빛의 정령이지 만, 오히려 어둠 속에서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윌 오 위스프 때문에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간단했다. 그 불빛은 붉은 색보다는 약간 푸르스름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바닥 까지 내려오니 문 하나가 보였다. 문은 나무판에 철제로 보강한 꽤 튼 튼해 보이는 것이었다. 자! 어떻게 열지? 이번에도 이루릴이 나섰다. 그녀는 나와 샌슨을 문 양쪽에 서게 하고 윌 오 위스프는 문 위쪽으로 날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또캐스트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여기서 그대의 권능 중 하나를 거두세요." 바람이 있을 리 없는 지하에 바람이 불었다. 잠시 이루릴은 우리가 내 려온 계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위쪽으로는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을 거예요. 이제 그 자로 하여 금 문을 열게 하지요." "예? 문을 어떻게?" "불이야라고 고함치세요." 오호라! 지하실에 있는 자라면 불이 났다는 소리에 질겁을 할게다. 샌 슨과 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5. 과연 문 안쪽에서는 잠시 후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뛰 어나온 것은 웃통을 벗은 남자였다. 문이 열리자 윌 오 위스프는 그 사 람의 눈에 다가들었고 그 남자는 다급하게 눈을 가렸다. 아프나이델이 었다. 샌슨은 눈을 가리고 있는 아프나이델의 뒤통수를 간단히 잡았다. 샌슨 은 그의 팔을 꺽어잡으며 목에 대거를 들이대었다. "안녕하시오? 싸구려 마법사." 그 자는 그제서야눈을 슬며시 뜨더니 우리를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 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뭐야… 불이 난게 아닌가?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가 고함친 거야. 자, 안으로 들어가실까?" 샌슨은 그 자를 밀어붙여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괴상한 냄새도 풍기 고 있었는데 썩는 냄새, 기름냄새, 유황냄새 등으로 코를 싸매야 될 지 경이었다.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들, 쇳가루, 금가루, 크리스탈볼, 유황, 동물의 내장이나 털 등의 일부분들, 동물의 대소변까지도 모여 있었다. 그리고 온갓 희안하게 생긴 도구들과 철사, 밧줄들이 벽에 가득 걸려 있었고 책장마다 요상한 병이 가득 차 있었다. 이루릴은 눈살을 찌푸리 더니 윌 오 위스프를 돌려보냈다. 샌슨은 그 자를 바닥에 무릎꿇게 한 다음 얼굴을 가린 두건을 풀었다. "너, 너는!" 아프나이델은 대경실색했다. 그리고 다른 우리들도 각자 두건을 풀었 다. 아프나이델은 숨이 막혀서 컥컥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샌슨은 능글 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죽이고 나서 괴롭혀줄까, 괴롭히고 나서 죽여줄까?"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초죽음이 되었다. 나는 먼저 내 물건을 돌려받기 로 했다. "이봐, 내 OPG부터 내놔. 어디 있지." "그건, 저, 저기 화로 위의 냄비에…" "으악! 냄비라고?" 난 놀라서 화로로 다가가보았다. 정말 냄비에는 물이 담겨 끓고 있었 고(뭔지 모를 것을 잔뜩 넣어 물의 색깔과 냄새는 엉망이었다.) 그 안에 내 OPG가 둥둥 떠있었다. 아이고 맙소사. 난 옆에 있던 쇠막대기를 사용 해 그것을 꺼내어들었다. 따끈따끈했다.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끌려올라 오고 있었고 집게손가락 부분에는 어떤 동물의 눈알까지 하나 딸려올라 왔다. 욕지기 나는군. "도대체 뭘 한거야?" "여, 연구를…" "삶아 먹으려고 했던 것 아냐? 돌겠네." 난 그것을 옆에 있는 물통에 집어넣어 씻고는 대충 턴 다음 수건으로 닦고 다시 손에 끼어보았다. 아무런 감각은 없었지만 이건 원래 그렇다. 알아보려면… 난 벽에 걸려있던 쇠몽둥이 하나를 꺼내어 휘어보았다. 예전처럼 부담없이 휘어졌다. "괜찮은데. 그런데 이걸 어쩌려는 생각이었어?" "오, 오우거 패밀리어(Familiar)를 불러내려고…." 패밀리어? 그 때 이루릴이 미소를 지었다. "우습군요. 어떻게 오우거를 패밀리어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당신 은 도대체 마법을 어디서 익혔나요?" 그러자 아프나이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다, 당신 파인드 패밀리어(Find familiar)를 아시오?" "제가 월 오브 아이스를 사용하는 것을 보셨잖아요. 그런 기초주문은 안답니다." "좀, 가, 가르쳐 줄 수…" "예. 불러내려는 패밀리어의 종류에 따라 밤낮의 시간이 달라지는데 원하는 동물의 활동시간을 골라 시작합니다. 놋쇠화로에 숯을 가득 채 우고 거기에 향을 가득 집어넣어요. 향의 양은 숯을 완전히 덮을 정도 면 충분하며, 주문이 완성될 때까지 몇 번 더 집어넣어야 해요. 그리고 이 때 알로에와…" 샌슨과 카알, 그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차분히 불러주는 이루릴과 열심히 받아적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화기애애하고 탐 구적인 분위기네? 우리는 그 동안 아프나이델의 해괴한 물건들을 가지 고 장난을 치면서 기다렸다. 이루릴은 설명해주고는 종이 위에 무언가를 써주기도 했다. 아프나이델은 다 받아적고는 그것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맞았어! 여, 역시 엘프는 인간과 달라서 마법을 잘 가르쳐주 는군!" 이루릴도 방긋 웃었다. "새로운 주문은 소중한 것이죠. 댓가는 목숨이예요." 아프나이델은 종이를 떨어트렸다. 그의 얼굴이 질리는 것이 우리를 퍽 유쾌하게 만들었다. 이루릴은 정말 침착하며 냉철한데. 이루릴은 싸늘하 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받았어요. 그러니 이젠 내가 댓가를 받지요. 불만은 없겠 지요?" 이루릴은 에스터크를 뽑아들었다. 아프나이델은 뒷걸음치다가 발이 걸 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말했다. "사, 사, 살려 주…" "당신은 그 싸구려 마법으로 그 남작을 보좌하며 이 시의 시민들을 농 락해왔겠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도 마음껏 채웠겠지요. 아마 퍽 즐 거웠을 거예요. 하지만 유피넬은 반드시 댓가가 치뤄지도록 세상을 규 정지었다는 것을 왜 몰랐나요. 유피넬이 저울을 만들고, 헬카네스는 추 를 만들지요. 당신의 저울대는 너무 기울었어요. 이제 평형을 맞춰야지 요. 당신의 목숨을 추로 삼아." 이루릴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마치 내일의 날씨에 대해 말하는 투였지만 아프나이델에게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소리로 들릴 것이다. 드래 곤의 포효보다도 더 효과적인 침착한 말이라. 아프나이델은 계속 뒷걸음 질치다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루릴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 다. 갑자기 아프나이델은 고함을 질렀다. "나, 내가 욕망을 채웠다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공 포로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매몰차게 외쳤다. "제기! 당신네 엘프와 달라서 인간 마법사는 마법을 선선히 가르쳐주 지 않아! 10년을 공부해도 겨우 클래스 2 마법밖에 배우지 못했어! 그 렇게 오랜 세월 봉사해주었는데!" "마법은 쉽게 배워 쉽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텐데요." "그래도 난 견딜 수 없었어! 젊은 시절을 모두 그 곰팡내 나는 늙은이 에게 바칠 수는 없어. 그래서 뛰쳐나온 거야! 하지만 클래스 2 마법 가 지고는 이런 싸구려 장삿꾼의 부하 노릇밖에 할 수 없었어!" 이루릴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인간은 마법을 익히기 위해 소모되는 기간이 너무 길겠지요." "그래! 우린 엘프가 아냐. 다른 젊음의 욕구를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마법만 갈고닦아도 쓸만한 마법사가 되려면 이미 중풍 맞을 나이가 된 단 말이야. 난 그게 싫었어. 그래서 뛰쳐나온 거야! 욕망? 허! 욕망 이라. 그래, 솔직히 생활은 편했지. 남작이 지정하는 사람들을 적당히 괴롭히면 그만이었어. 그래, 꼬마야! 네 말대로 그런 사람에게 밧줄이나 던지고 뼈다귀나 던지면서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항상 불안했어. 언 제 나보다 더 우수한 마법사가 여기 들이닥칠지 몰랐어. 그리고 사람들 이 내가 별 볼일 없는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무서웠어! 그래 서 스스로를 대마법사라 불렀고, 저런 욕지기나는 옷도 입었어! 하지만 나도 결국 못견디겠더라고. 나는 마법사야! 결국 마법 연구가 그리워 어 쩔 수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매일 연구하고, 알지도 못하는 주문을 스 스로 만들어내어 보려고 실험해보고…" 아프나이델은 내 OPG를 가지고 주문을 만들어내어 보려고 했던 것이군. 카알이 물어보았다. "왜 스승께 돌아가지 않았소?" "부끄러워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내 방종한 생활을 생각하 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요."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떨어트리며 울고 있었다. 이루릴은 그 모습을 보 더니 에스터크를 다시 집어넣었다. 에스터크를 집어넣는 소리에 아프나 이델은 고개를 들었다.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시간을 만들었지요." 아프나이델은 눈물을 닦으며 이루릴을 올려다보았다. 이루릴은 말했다. "시간은 절대적이며, 불변적인 것. 그러나 이용할 수는 있겠지요."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시간을 남겨두겠어요. 잘 이용해 보아요. 당신 스스로 당신의 기울어진 저울대를 바로 잡아요. 스스로의 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생 을 바꿔요." 아프나이델의 얼굴에 그제서야 희망이 돌아왔다. 그는 이마를 땅에 찧 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샌슨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이루릴이 다 해버려서 우린 더 할게 없군." "맞아. 나라면 가차없이 두드려팼을텐데. 저거 점잖긴 한데 내가 여기 까지 오면서 기대했던 것은 아니야." 이루릴은 내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후치." "아뇨, 천만에요! 썩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남작은 우리에게 남겨줘 요. 이봐!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은 그 때까지 계속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부르 고 나자 일어섰다. 난 그에게 말했다. "자, 당신은 이루릴이 처리했지만 남작은 좀 다를 거야. 우리와 함께 올라가지." 우리는 이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아프나이델은 죽었다 살아나자 퍽 얌 전해져서 사근거리며 우리를 안내했다. 이층 중앙의 남작의 방에 도착 한 후, 나는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남작을 불러요. 조용히." 아프나이델은 시키는대로 조용히 남작을 불렀다. 남작은 깊이 잠들어 있는지 깨어나지 않았다. "당신, 열쇠 없어요?" "없는데." "그럼 할 수 없지. 자, OPG를 되찾은 기념이다." 나는 주저없이 손바닥으로 문을 쳤다. 쾅! 문짝은 통째로 날아갔다. 나 는 빠르게 말했다. "자, 샌슨! 남작을 데리고 나와! 하인들은 내가 막지." 샌슨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나는 문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층을 올려다보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 지 않는 모양이다. 이윽고 그들은 양초와 램프들을 켜들었고, 우리의 모 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샌슨은 실리키안 남작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나왔다. "이 때려죽일 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남작은 그 외에도 다양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도대체 상황판단을 못하는군. 나는 그 작자의 다리를 잡아올렸다. 남작은 노호성을 질렀다. "이, 이놈! 감히 나를! 이것 놓지 못하냐!" "내가 당신 하인이면 당신 말을 듣겠지만." 그리고 나는 그대로 실리키안 남작을 들어올려 이층 난간 밖으로 내밀 었다. "으악!" 실리키안 남작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나는 팔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말했다. "당신 좀 무거운 편이군." "이 죽일 놈! 네가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살 것 같으냐?" "당신은 그 따위로 떠들고 살 것 같아?" 그제서야 남작은 정신을 좀 차리는 모양이다. 내가 손만 놓아버리면 그는 당장 고(故) 실리키안 남작이 될 것이다. 그는 아래를 향해 악을 썼다. "이, 이 녀석들! 어서 날 받아! 아, 아니 올라와 이 놈들을 죽여!" 하인들은 당황하여 우르르 달려와 남작 아래에서 팔을 들어올렸다. 나 는 조금 왼쪽으로 걸었으며, 그러자 하인들도 우르르 왼쪽으로 움직였 다. 그래서 난 오른쪽으로 걸어갔고, 그러자 하인들은 욕짓거리를 뱉으 면서 오른쪽으로 우르르 달려왔다. 재미 있다! 나는 몇 번 그렇게 왔다 갔다 했다. 남작은 거꾸로 들린채 여기저기로 휘둘리니까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 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더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날 저주하고 있었다. 보다못한 카알이 말했다. "여보게, 네드발군. 그만하게나. 내려놓게." 난 빙긋 웃고는 그를 내려놓았다. 실리키안 남작은 땅에 내려지자 곧 달아나려고 했으나 난 그 자의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그러자 그는 자 유로운 부분인 입을 마음껏 놀렸다. "발칙한 놈들! 시궁창의 쥐새끼들이 인간을 몰라보고 이따위 짓을! 죽 으려고 작정했단 말이냐! 네놈들이 감히 나에게 이런 무례한 짓을 해? 더러운 놈들!" 남작은 정말 입심이 좋았다. 머리가 어지러울텐데도 끝없이 욕설을 퍼 붓고 있었다. 카알은 뭐라고 말을 걸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아무래도 말이 안통할 것 같아. 놔두고 가자." "이 놈들! 너희들이 어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희들 쥐새끼의 소굴인 하수구로 달아나려는게냐? 어림없다. 너희들 사지를 찢어주겠어. 감히 나에게 이런 발칙한 짓을 하고도 살 수 있을거라고? 내가 아무리 자비로워도 그렇게는 못한다!" 난 카알에게 말했다. "그냥 던져버리죠. 짜증나요." "뭐라고? 이 어린 놈이!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인 줄 알아? 싹수노란 꼬맹이 같으니라고! 너희들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카알은 하마트면 그렇게 하라고 말할 뻔 했다. "그렇게 해 버…리지는 말고." 그 때 드디어 본관 정문이 왁살스럽게 열리며 사병들이 들이닥쳤다. 정말 출동 빠르네. 이제야 겨우 나타난거야? 그들은 이층을 올려다보더 니 남작이 인질로 있는 것을 보고는 고함을 질렀다. "이봐! 너희들, 딸꾹! 완전휘이 위포되어, 아, 아니 포위되었다!" 난 마주 고함질러주었다. "말이나 똑바로 해, 멍청아! 출동이나 한 게 용하다!" 사병들은 모두 취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고 갑옷을 거꾸로 입 은 자, 걸치다 만 자, 방패를 머리에 쓰고 투구를 손에 들고 온 자 등 각양각색이었다. 아무래도 무서울 수가 없는 몰골이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택을 지켜야 할 사병들이 저렇게 취해있는 걸까? 남작도 나 와 마찬가지 심정인 모양이다. 그는 나와 더불어 아래의 사병들에게 욕 설을 퍼부어대었다. 사병들은 남작의 욕설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허우 적거리고 있었고 그 중에는 바닥에 주저앉는 사병도 있었다. 대단하군. 처음부터 그냥 정문으로 들어올걸 그랬나? 카알은 그 사병들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좋아. 저 정도면 충분하겠군." 나와 샌슨은 의아해서 카알을 쳐다보았다. 카알은 정중한 태도로 실리 키안 남작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남작님. 저와 내기 하나 하실까요?" "내, 내기라니?" "남작님이 없어지면 저 병사들이 남작님의 재산을 완전히 절단낼까, 내지 않을까 내기 합시다. 어때요? 우리가 이대로 남작님을 데리고 사 라지면 저 병사들은 남작님의 보석, 옷가지, 중요 서류를 다 끝장낼 겁 니다. 전 거기에 걸겠습니다. 남작님은 그렇지 않다에 거시겠지요? 남작 님은 저 병사들의 충성을 믿으실테니까요." 남작의 얼굴에 드디어 공포가 떠올랐다. "이, 이, 이봐, 너, 너, 어떻게." "네드발군. 기절시켜."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작의 뒷통수를 내려찍었고 남작은 개구리처럼 쫙 뻗어버렸다. 카알은 아래를 굽어보더니 아프나이델에게 말했다. "아프나이델씨. 남작의 가족은?" "없습니다. 아내는 사별했고 딸은 이미 시집갔습니다." "그럼 거칠게 없군. 아프나이델 당신도 아마 적당히 챙기고 싶겠지 요?" 아프나이델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는 이루릴의 눈길을 보더니 고개 를 숙였다. 카알은 말했다. "양심이 허락하는 한 봉사의 댓가를 챙겨요." "어, 됐습니다. 내 짐만 챙기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미 충분한 것 을 얻었습니다. 새 주문을 얻었죠." 카알은 빙긋 웃었다. "당신은 역시 마법사군요. 난 생명을 얻었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가 보시오. 그리고 왠만하면 스승께 돌아가시오." 아프나이델은 고맙다고 말하며 지하실로 돌아갔다. 카알은 빠르게 지 시했다. "사병들이 분탕질을 치는 도중에 하인이나 하녀가 다쳐선 곤란하다. 퍼시발군, 네드발군, 가서 사병들의 무장을 제거하고 모두 기절시켜둬. 취한 놈들은 간단하겠지? 그리고 하인과 하녀 여러분, 이 작자는 우리 가 끌고갈테니 취향대로 골라가지시오!" "뭐, 뭐라고?" 카알은 능글스럽게 말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많이 못챙길 겁니다." 하인들은 그제서야 날카로운 눈빛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샌슨은 빙긋 웃으며 계단을 뛰어내렸다. "야호!" 때리고, 휘두르고, 집어던지고, 걷어차고…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6. 우리는 말을 몰아 남작가를 벗어났다. 이루릴은 놀랍게도 남작의 마굿 간에서 말을 하나 슬쩍 해왔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엘프도 그런 짓을 합니까?" "이건 합리적인 행동이죠. 어차피 이 말들은 주인을 잃고 마구 팔리거 나 사병들에게 끌려가거나 하겠지요. 주인이 없으니, 제게 봉사할 수도 있겠죠. 이름은 '레이셔널 셀렉션 (Rational selection)' 이라고 붙일까 요?" "좋군요. 합리적이라서." 나는 빙긋 웃었고 이루릴도 미소를 지었다. 다만 샌슨만이 뭐씹은 얼 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루릴 대신에 남작과 같이 말을 타고 있었 으니까. 나는 카알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대로 달아나면 납치가 아닌가요? 시청에서 쫓지 않 을까요?" 카알은 애초에 복수하자고 했던 것은 네가 아니냐 하는 얼굴로 날 보면 서 웃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작자가 시청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금력 때문이야. 이 자가 금 력을 잃으면 더 이상 시청은 이 자의 주구 노릇을 하지는 않을걸. 그리 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지." "그게 뭔데요?"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레너스 시의 시청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시청 근처의 골목길에서, 나는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었다. 사두길 잘 했어. 그리고 카알은 남작에게 투기장을 시청에 기증한다는 내용의 각 서를 쓰도록 명령했다. 물론 남작이 선선히 그런 각서를 쓸 리는 없다. "뭐? 뭐라고? 이런 말도 안되는!" 그러자 샌슨은 머리를 좀 가로저은 다음 남작의 귀에 대고 뭐라고 귓 속말을 했다. 잠시 후, 남작은 퍼렇게 질려서 각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 는 샌슨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어?" "안 듣는게 좋아. 나도 다시 하고 싶지않고." 남작은 투기장을 시청에 기증하는다는 각서를 다 썼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숫자가 딱 세 명이었다. 이루릴은 바이서스의 시민이 아니니까. 어 쨌든 남작의 서명 아래에 카알과 샌슨, 그리고 내가 서명했다. "난 성인이 아니라 공증인이 못되는데요?"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의 성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헬턴트 영주의 권한이야. 그리 고 난 현재 헬턴트의 전권 대리인이고. 그러니 내 이름 아래에 적힌 네 이름은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 하! 그것 참. 대단하군? 나는 서명을 끝내었다. 카알은 잉크가 마르도 록 종이를 살짝 휘저으며 말했다. "자, 시청에서도 이런 재산을 받으면 입 딱 씻을 수 있겠지. 그리고…" 카알은 다시 다른 종이를 꺼내어 뭐라고 휘갈겨 썼다. 다 쓰고나자 그 는 말했다. "레너스시에서는 우릴 쫓지 않을거야. 쉐린씨는 우리가 죄인명부에도 없다고 그랬지? 그러니 시에서는 우릴 꼭 쫓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 우 리 자유와 투기장을 교환하자고 썼다. 시장이 머리가 돌아간다면 내 제 의를 수락하겠지. 우리를 끝까지 죄수로 취급해서 뒤쫓는다면 남작의 각서는 효력이 없어지거든? 죄수는 공증인이 될 수 없어." "와!" 샌슨과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카알은 옛날 공갈범이나 사깃군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우리가 시청에서 충분히 멀어지고나서, 카알은 화살에 그 두 장의 종이를 묶어서 시청으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우리 는 질풍처럼 달려 레너스시를 빠져나왔다.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새벽녘에 레너스 시 외곽 적당한 곳에 남작을 떨어트려 주었 다. 남작은 이미 모든 용기를 잃고 완전히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태였 다. 레너스시에 돌아간다 해도 그는 이제 아무 재산도, 아무 힘도 없는 것이다. 우린 그를 격려하며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했지만 남작 은 아무런 친구가 없는 모양이다. 복수치고는 최고로 통쾌하게 복수한 셈이지만, 저렇게 기운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군. 왜 친구 하나도 없는 거야. 카알의 복수 방법이 대충은 이해가 간다. 그는 실리키안 남작의 인간 성에서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결과를 유도해낸 것이다. 실리키안 남 작이 인망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그가 사라지든 말든 그의 재산과 인망은 유지될 것이다. 카알의 복수 방법은 내재된 형벌을 끌어내는 것으로 선 한 이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될 수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실리키안 남작에겐 효과적이었다. 으음. 카알, 무서워요.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카알은 기꺼워하며 미소지었다. "그렇다네, 네드발군.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눈으로 보이는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법일세. 왜냐하면 죄에 대한 형 벌은 이미 그 사람 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일세. 형벌이라는 것은 다 른 곳에 있지 않네. 그리고 지혜로운 심판관이라면 죄인의 죄에 대한 가 장 적절한 형벌은 이미 그 죄인의 내부에 있음을 알고 있지. 내가 어줍 잖게 그 흉내를 좀 내어보았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레너스 시의 동쪽에 있는 산을 중간쯤 올라가 야 영하고 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 잠을 자려니 좀 이상했지만, 우 린 밤새도록 자지 않았으니 그냥 출발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침해를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레너스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너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많군요." "그건 어디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이 사는 곳이면." 카알의 대답이었다. 나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지긋이 감고 있었다. 마치 해바라기처럼 해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속눈썹에 부서지는 햇살이 아름답다. "이루릴? 인간의 도시와 엘프의 도시를 비교해 보겠어요?" 이루릴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말했다. "엘프에겐 도시가 없는데요." "그럼 엘프의 관점으로 인간 사회를 정의한다면? 나 사실 불안하고 좀 부끄러워요. 당신은 어떤 평가를 내리겠어요?" 내 질문에 카알과 샌슨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루릴은 말했다. "글쎄요… 실망스러운 점도, 놀라운 점도 많아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군요. 저 도시에 사흘 있었지만, 마치 30년은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인간들의 하루는 항상 이런가요?" "우리도 매일같이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가요. 난 혹시 인간이 단명한 이유가 너무 격렬하게 살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했거든요. 특히 어젯밤의 여러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 이…" "약삭빨랐죠?" 이루릴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날 돌아보 았다. "그래요. 약삭빨랐어요. 그 약삭빠른 행동에 대한 평가는 미루고 느낌 만 말하자면, 꽤 상쾌했어요. 속도감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인데, 꽤 상쾌 하고 시원했어요. 음. 인간의 말로는 잘 설명하기 어렵군요. 그것을 활 기차다고 하나요? 잘 모르겠네요." "아니, 그 설명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난 안심했다. 이루릴은 별로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난 이루릴이 혹시 인간이란 모두 실리키안 남작 같은 사람인줄 알까 두려웠다. 나 스스로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족과 함께 있으니 왠지 인간이 더 잘나고 고상한 생물이었으면 한다. 나도 결국 인간인가봐. 샌슨이 말했다. "자! 자자고. 이거 무지무지하게 피곤하군." 카알은 나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난 별로 한게 없으니 내가 불침번을 서겠네. 모두들 푹 쉬어요. 사흘 이나 허비했으니 빨리 가려면 더욱 잘 쉬어야 된다네." 난 제미니와 우리 고향 헬턴트 영지의 꿈을 꾸었다. 악몽인가? 우두두둑! "으아, 언제 또 침대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몸을 비틀며 혼잣말을 했다. 뼈가 모조리 부서져나갈듯한 소리가 들렸다. 카알은 나무에 기대어앉은 채 잠들어있었다. 흠, 퍽 안심시키는 불침번 이군. 샌슨은 내 혼잣말에 눈을 뜨더니 일어났다. 그는 카알을 보더니 싱긋 웃고는 카알을 깨웠다. 카알은 몹시 허둥지둥거리며 방금 잠든 거 라며 미안해했지만 샌슨은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모두 밤을 샜는데, 당연합니다. 누워서 주무세요. 야간을 달리는 것은 좋지도 않고, 그냥 오늘은 여기서 푹 쉬도록 하지요." "시간이 되겠는가?" "원래 여유일자가 한달 보름이었는데 레너스시에서 사흘을 허비해서 여유일자는 40일쯤 되겠군요. 그 정도면 전하를 알현하고 휴리첼 백작 가에 들르고, 영지매각에 대해 알아보는데 충분하지 않을까요?" "40일, 40일이라… 그것참. 퍼시발군. 궁성은 원래 1달 걸려서 중심부 까지 들어간다고 해요." "에엑? 그렇게 궁성이 큽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아랫관리에서부터 관리들을 차례로 거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려요. 다행히 나는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고 왕 의 드래곤에 대한 일을 보고하는 거니까 곧바로 전하를 알현할 수 있겠 지만." 내가 끼어들었다. "저, 그런데 꼭 임금님을 알현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아랫관리 아무 에게나 캇셀프라임은 패배했다는 이야기만 전하면 되는 것 아니예요?" "그건 곤란해. 다른일이라면 그렇게 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 하지만 드래곤에 대한 일은 달라. 드래곤은 어디까지나 왕의 드래곤이야. 그리 고 캇셀프라임은 전하께서 - 중요하네. - 전하께서 직접 헬턴트 영지에 보내준 것이야. 국왕이 보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전하께 보고해야 돼. 그 신하들에게 보고할 수가 없어." "그것 참! 귀찮네.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만일 국왕께서 진노하신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나니까. 다른 신하들은 자신의 목이 날아가기를 원하지는 않겠지." "엣? 목이 달아나다니, 사형?" 카알은 싱긋 웃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네. 하지만 원칙상 그럴 수 있다는 거니 너무 걱정 말게. 작전책임자는 헬턴트 영주로 되어있지만 헬턴트 영주께서는 휴리 첼 백작에게 전권위임했거든. 그러니 패전의 책임은 휴리첼 백작에게 있지." "그럼 카알은 안전한 것인가요?" "응. 캇셀프라임을 보내주신 데에도 불구하고 패해서 죄송하다는 말씀 을 올리면, 국왕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정도로 끝날 거야. 형식상 그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기록되는 것이지. 그리고 국왕께서는 인자한 분으로 알려져 있어. 그 분의 형님이 폐위되고 그 분이 태자가 되었을 때 기뻐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던데." "어휴, 놀랐네." 카알은 한숨을 쉬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다시 수심이 피어났다. "40일이라…. 패전보고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고, 정말 큰 문제는 몸값 을 마련하는 것이네. 내가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야. 하멜 집사가 어떤 재주를 부린다고 해도 그런 돈을 우리 영지 내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어 요. 그러니 그 몸값도 결국 우리 셋의 책임이지. 수도에서 왕가에 부탁 하던 귀족원에 부탁하던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돼. 난 헬턴트 영지의 여러 가지 수취권 증서도 가지고 왔다네. 여차하면 그것을 팔아야겠지." 카알이 걱정하자 샌슨이 끼어들었다. "저, 그럼 돌아올 때의 시간을 좀 짧게 잡겠습니다. 제가 이 길을 달려 본 적이 없어서 지리서로만 판단한 것이라 계획을 조정하기는 좀 그렇 군요. 하지만 돌아올 때는 익숙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군. 알겠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모포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고민하는 투였다. 샌슨은 자신의 짐을 뒤 적거리더니 지리서를 꺼내어 살피기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유스네가 준 바구니를 꺼내었다. ================================================================== 2.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17. 바구니 안에는 빵, 맥주병, 그리고 치즈와 과일이 들어있었다. 흠, 귀 여운 말을 하던 계집애. 뭐? 자기가 방랑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평생 그 리워하는 처녀라고? 하하하. 거대한 맥주병은 단단히 막혀 있었고 거기다가 양초로 봉해놓았다. 뚜 껑을 뜯어내자 당장 거품이 피어올랐다. 워낙 흔들리던 것이니까. 난 한 모금 마시고 샌슨에게 준 다음, 빵을 먹기 시작했다. 오후였다.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맑고 높았다. 새소리가 요란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낙엽이 떨어지고 메마른 가지 위로 새들이 앉아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빵조각을 뜯어 앞에 던졌다. 새들은 의심스럽다는듯이 날 바라보았고, 난 새들에게는 어떤 표정이 안심스러울까 생각하다가 관둬버렸다. 난 말의 표정도 읽을 줄 모른다. 그런데 새가 나의 표정을 읽을까. 음, 이건 잘못 생각한 것이군. 말은 표정을 지을 만큼의 얼굴 근육이 없다. 즉, 표정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엘프도 있군. 이루릴이 모포 속에서 옆으로 누워 팔로 턱을 고 이고 잠이 덜 깬듯한 나른한 표정으로 나와 빵조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루릴은 빙긋 웃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리리, 휘릭, 독독독, 휘릭." 곧 가지 끝에 있던 새 하나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 새는 빵조각을 쪼 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새들도 뛰어내리더니 빵조각을 쪼았다. 난 두 다리를 뻗고는 팔로 상체를 받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 다. 새들이 놀라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휘파람 잘 부시네요?" 이루릴은 새를 바라보다가 날 바라보았다. "나에게도 그걸 좀 주겠어요?" 난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어 주었다. 이루릴은 모포 속에 누운채 엎드 려서 빵을 먹었다. 자연스럽군. 누워서 음식을 먹다니. 제미니라도 저렇 게는 하지 않을텐데. 하지만 버릇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간이 아 니니 그런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숲 속에서 엘프가 낙 엽 위에 누워 빵을 먹는다고 누가 뭐라겠는가. "저, 일어나서 드시지요." 음, 역시 샌슨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예?" "누워서 드시면 저, 소화가 잘 안되실지도…." "대부분의 생물은 몸의 자세와 소화에는 크게 관계가 없어요." 그러자 샌슨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멋적게 웃으며 다시 지리서를 들여다 보았다. 나도 피식 웃고는 새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을 탁탁 털더니 머릿결을 다듬 었다. 저렇게 긴 머리니까 당연히 자다가 엉망이 되었다. 그런데 이루릴 은 마치 개들이 몸을 털듯이 머리를 앞뒤좌우로 사납게 흔들었다. 나는 보다가 깜짝 놀랐고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새들도 다 날아가버렸다. 이루릴은 그렇게 정신 사납게 머리를 휘두르더니 마지막에 머리를 뒤 로 크게 젖혀 머리가 모이도록 하고는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주 간단하 군. 이루릴은 옆에 벗어둔 자켓을 들어 뒤적거리더니 빗을 꺼내어 머리 카락을 빗어내리기 시작했다. "어, 여자들 머리손질 하는 것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거 참 대단히 간단하네요?" "인간 여자는 빗질을 어떻게 하나요?" "글쎄요. 먼저 감고, 빗질하고, 말리고, 틀어올리거나 땋거나…" "나도 좀 감았으면 좋겠군요." "어, 어쨌든 그렇게 몸을 흔들어 머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의외군요."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아, 그렇지요. 네, 머릿카락이 엉기지요. 저흰 머리카락이엉기지 않 아요. 그래서 흔들면 그냥 다 풀려버리거든요." "편하겠네요?" "글쎄요. 편하다? 땋기는 어렵지요. 머리카락들이 전부 가늘고 건조해 서. 그래서 저처럼 전부 머리를 산발하고 있지요. 보기 이상하죠?" "아, 아뇨." "저도 머리를 땋거나 틀어올리거나 해봤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 머 리카락으로는… 만져보겠어요?" 이루릴은 앉은 채로 다가오더니 머리카락을 한 줌 내밀었다. 나는 그 것을 그냥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이루릴은 물었다. "가늘죠?" 무슨 명주실 같다. "가늘어요. 하지만 숱은 참 많은 것 같네요." "예. 머리카락의 숱이 많아서 그걸 뽑아 활을 만들어도 충분하지요. 제 활의 활줄은 제 머리카락을 뽑아 만들었어요. 엘프들은 모두 활줄 길이 가 될만큼 머리가 길면 그렇게 활줄을 만들어 자신의 활을 갖지요." 그 때 샌슨이 말했다. "저, 활을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이루릴은 자신의 배낭에 꽂힌 콤포짓 보우를 뽑아들고 샌슨에 게 다가갔다. 나도 그에게 다가가 활을 구경했다. 샌슨은 활을 들더니 시위를 몇 번 튕겨보았다. 그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데요, 제 체구에는 맞지 않지만, 썩 좋군요." "체구? 아, 팔길이. 저와 팔길이 대어보실까요?" 이루릴은 팔을 쫙 펼치더니 가슴을 내밀었다. 샌슨은 뒤로 후다닥 물 러나다가 머리를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뒷통수를 움켜쥐고 신 음소리를 내었고 이루릴은 놀랐다. "어머, 왜 그러시죠?" 왜 그러시긴. 그렇게 팔길이를 대어보면 가슴이 맞닿잖아. 포옹하는 것 이나 다름없잖아. 어이구, 보는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지네. 샌슨은 간신 히 정신을 차려 말했다. "아, 그, 저, 그것보다, 이 활줄이 이루릴의 머리카락이라고요?" 이루릴은 고개를갸우뚱거리더니 선선히 대답했다. "여러 번 꼬았죠. 검은 색이죠? 다른 엘프들도 모두 자기 머리색깔과 같은 활을 가지고 다니죠. 그래서 자기 머리카락 색깔과 같지 않은 활 을 가진 엘프가 있다면 그 활에는 뭔가 사연이 있거나 중요한 물건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예? …예."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샌슨은 충격을 받아서 횡 설수설하고 있다. 이루릴은 다시 활을 받아들면서도 이상하다는듯이 샌 슨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자신의 자켓이 있는 곳으로돌아갔다. 어쨌 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가죽 바지는 정말 멋지 게 움직인다. …제미니에게도 가죽 바지를 하나 선물할까? 그런데 그 계집애가 가죽 바지를 입으면 뭐 볼 게 있을까? 흠, 흠. 이루릴은 자켓을 들어 입더니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엄청난 크기의 책이 나왔다. 방패라고 해도 믿어주겠다. 나와 샌슨이 탄복한 눈 으로 그 큰 책을 보고 있는 동안, 이루릴은 책을 펼치더니 거대한 책장 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장도 워낙 커서 이루릴은 손바닥 전체로 그것을 넘겼다. "저, 구경해도 돼요?" "읽을 줄 아세요?" 나와 샌슨은 가까이 가보았다. 음, 새로운 경험이군. 흰 건 확실히 종 이인데, 검은 건 글이 아니잖아. 나와 샌슨은 서로 쳐다보았다가 다시 책을 보았다. 이상한 도안과 무 늬들이 있었고 복잡하게 뭔가 글자같은 것이 있긴 있는데 도대체 무슨 글인지 모르겠다. "이건 엘프어인가요?" "마법의 언어, 룬(Rune)이지요. 이건 실제로 읽거나 할 수는 없어요." "예? 읽을 수 없다고요?" 이루릴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주위의 낙엽을 치우고 땅이 나오게 했다. 그녀는 돌멩이를 들더니 땅에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THM, OEW.' 이게 뭐람? "읽어보시겠어요?" 난 의아한 표정으로 그냥 그것을 하나씩 읽었다. 그러자 이루릴은 미 소를 지었다. "전 이렇게 읽겠어요. 3명의 인간 남자, 1명의 엘프 여자" (Three Human Man, One Elf Woman) "아!" 나와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루릴이 쓴 것은 읽을 수는 있잖아요." "예. 이 글자는 원래 읽을 수 있고 이름이 있으니까 그렇게 THM, OEW 하고 읽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룬어는 원래 읽을 수 없고, 이름도 없어 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쓴 것처럼 룬어도 그 의미는 있어요. 설명이 좀 이상하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하겠군요." "예… 그럼 마법사들이 외우는 주문은 어떻게 말소리가 있는 것이죠?" "그것은 룬어가 아니라 시동어지요. 룬어는 메모라이즈 할 때 필요한 말이지만 시동어는 그냥 자기 종족의 말로 만들 수 있어요. 룬어로 된 주문을 읽고 메모라이즈 하면 자연스럽게 시동어가 만들어져요. 제가 THM, OEW라고 써 두고 읽을 때는 3명의 인간 남자, 1명의 엘프 여자라고 읽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럼 룬어만 읽을 줄 알면 누구나 마법을…"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마력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해야지요." "마력이 움직이는 방식?" "저 아프나이델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은 분명 마법사로서 룬어를 읽을 줄 알아요. 제가 수단을 가르쳐주고 룬어도 정확하게 적어주었지 만, 그는 당장은 그 파인드 패밀리어의 주문을 쓰진 못할 거예요. 마력 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 한참 연구하고 연습한 다음에야 쓸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전 마력을 움직이는 요령까지 가르쳐줬으니 이해가 훨씬 쉽겠지만." 난 머리를 쩔쩔 흔들었다. "그러면… 마법사가 제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 난 지금 까지 그냥 주문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했는데." "마력을 다루는 기술, 그 기술을 증진시키는 연습 방법, 그리고 룬어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 마법을 가르치지요. 특정한 마법에 필요한 룬어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주문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마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죠. 그 룬어를 가 르쳐준 다음, 그 때 마력을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설명해주지요. 그 부 분이 훨씬 어려워요. 헤엄치는 것에 비교하자면, 어떤 마법의 룬어를 배 우는 것은 겨우 물 안에 들어가는 정도고, 마력을 움직이는 것을 실제 로 물 안에서 손발을 놀리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셈이죠." 나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렵군요. 샌슨, 내 머리에서 김 나?" "응.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샌슨은 농담을 했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루릴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게 무슨 뜻인가요? 머리에서 김이 나다니요." 어, 어? 이걸 설명까지 해야 되나? "아, 그건 농담이예요.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 김이 나지요?우리도 머 리가 열을 받으면 김이 난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냥 비유지요." "하지만 후치. 당신 머리에서는 김이 나지 않아요." 나와 샌슨은 한참 동안 얼이 빠져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나서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막상 설명하려니 우리도 주전자와 머리를 비교하 는 것이 우스운 이유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것이 왜 농담 이지? ================================================================== DRAGON RAJA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 …우리는 죽은 이를 그리워하며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 지 않는다. 자상한 어머니의 죽음에 아들은 오열하며, 연인 의 죽음에 처녀는 정신을 잃는다. 그러나 무릇 이 세상의 모 든 공포들 중에서, 죽은 자신의 부모, 친지, 친구가 돌아오 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음은 어떻게 설명하랴? 그토록 깊은 애정, 우정, 사랑이 죽음이라는 장벽에 부딪혀서 얼마 나 쉽게 부서지는가를 바라보면 놀라울 뿐이다. 이 글을 읽 는 독자 제위께서도 오늘 자정, 죽은 자신의 아버지나 친구 가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른다면, 과연 기뻐하며 돌아볼 것인 가? 바로 이것이 다른 어느 몬스터보다 언데드 몬스터가 무 서운 까닭이다. 노련한 전사마저도 언데드 몬스터의 약한 힘 보다는 그 죽음의 세계로부터 가져오는 초절적인 공포에 짓 눌려 검을 뽑지 못한다. [품위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있는 이야기] 제 4 권. PP. 126 (770년 돌로메네 作) "요즘 같은 날씨에 벌집 찾으면 벌집 따기 좋은데." 난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왠지 좋은 벌집이 있을 것 같다. 넓은 황야는 봄, 여름 동안 꽤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을 것 같다. 그리고 조금 크고 맑은 시냇물. 벌꿀도 당연히 물이 좋은 곳에서 좋다. 왜냐고? 꽃이 좋은 물을 빨아들여야 좋은 꿀을 만드니까. 약간 떨어져있는 아카시아 숲도 꽤 마음에 든다. 요즘은 겨울철을 대비해서최고로 꿀이 잘 저장 되어 있을 것이다. 평소에 내가 벌집을 찾는다면 그것을 밀납으로 초를 만드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 중에 약간의 별식 생각이 난 것이다. 꿀을 펜케익 에 뿌리면 우리 일행 모두 홀딱 반하겠지. 꿀과자를 만들어보면 어떨 까? "여보게, 네드발군. 우린 목적이 뚜렷하고, 시간은 적은 여행자라네. 한가한 방랑자가 아니야." 카알의 근엄한 목소리. 그건 그렇지. 우린 미친 척 달려가야 되는 사람 이지. 하지만 가을 벌판을 미친 척 달려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위의 풍경도 그렇거니와, 일단 좀 달리면 뼛속까지 춥다. 지속적으로 체온을 뺏기기 때문이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고, 재수없으 면 비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영지에서 큼직한 망토라도 하나씩 사야겠어." 샌슨의 말이었고 카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은… 별로 추운 기색이 없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다. "그 가죽옷 춥지 않아요? 이루릴?" "춥다? 아, 아뇨. 엘프는 모든 날씨와 조화를 이뤄요." 그렇겠지.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든가? 폭설이 내리는 허허벌판에서 도 이루릴은 까딱없을 모양이다. 그러니 사시사철 저렇게 멋진 가죽옷 을 입고 다닐 수 있겠지. "길 모양을 보아하니 영지나 마을이 나오겠는데?" 내 말에 샌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거야? 마을의 위치에 딱 맞춰 길을 정했다고." "술 생각이 날 때 쯤 마을이 나타나도록?" "비슷해." 흠. 오후 늦은 시간이고, 샌슨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영지가 나타나겠 지. 그렇지 않아도 슬슬 밭이나 과수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샌슨은 눈 앞의 언덕을 가리켰다. "저 언덕 뒤일꺼야." 우리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눈 앞에 영지의 모습이 보였다. 도시와 영 지의 차이? 그거야 영주의 저택이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면 되지. 마을 저쪽 끝에 근사한 저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영지일 가능성이 높 다. 저 저택은 분명 시장의 집이라기엔 너무 크니까. 거의 성에 가깝다. 우리는 잠시 언덕 위에서 아래의 영지를 바라보았다. 먹구름 아래에 영지는 대단히 낮고 차갑게 보인다. "저건 이상한 마을이군요." 이루릴이 말했다. 그건 나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모습이 하 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날이 흐리다면 사람들은 바깥출입 을 삼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샌 슨은 이루릴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이루릴?" "그림자가 없군요." "예?" 이상한 말을 하는군? 나는 다시 언덕 아래의 그 도시를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꽤 멀긴 했지만, 건물마다 그 옆쪽 건물에 드리우고 있어야 당 연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지 않은가? "지금은 해가 없잖아요." 이루릴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빛은 있어요. 그렇다면 그림자도 있어야 되지요. 하다못해 건 물 색깔의 짙고 엷음은 있어야하죠. 하지만 저 도시의 건물의 벽을 보 세요. 정면의 벽이든 측면의 벽이든 모두 같은 색깔이예요. 모든 건물들 이 다 어느 면에서든 비슷한 색깔을 내고 있어요."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렇다, 저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니, 어떻게 건물의 사면이 모두 같 은 색깔을 낼 수 있는가? 같은 회색이라도 빛 때문에 정면은 푸르스름 한 회색, 측면은 암회색, 뭐 이렇게 차이가 나야 한다. 하지만 저 건물 들은 마치 명암에 대해 배우지 못한 어린애가 마구 그린 그림처럼 상하 전후좌우의 색깔이 다 똑같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급히 세웠다. 다른 사람들도 말을 세우고 는 서로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다시 그 건물들을 바라보았 다. "새, 샌슨! 어떻게 된 거야?" 샌슨도 입술을 악물면서 대답했다. "모르겠어. 이 도시는 분명 칼라일 영지일텐데… 내 지리서에는 이곳 이 옥수수술로 유명한 곳이라고만 나와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는데." "하, 하지만 이건 사람의 도시 같은 느낌이 아니잖아?" 그 때 카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닐세. 네드발군. 사람의 도시야." 카알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대로 한가운데 처음으로 사람의 모습 이 보였다. 그 사람은 대로 가운데 서서 마을 입구 바깥에 서 있는 우 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었는데 그냥 펑퍼짐한 것이 무슨 자루같은 옷이다. 그 리고 허리에는 무엇으로 묶어서 간신히 그 허리가 가는 것을 보고 여자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는 검은 색, 붉은 기운이 많이 돌고 군데 군데 붉게 변색된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다. 이루릴의 검은색 머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 머리는 지금 얼굴의 양쪽을 거의 점령하여 우리는 간 신히 그 사람의 코와 입을 식별할 정도였다. 우리는 일단 그 여자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가 면서 점점 다가오는 주위의 건물들은 끔찍스러운 모습이었다. 모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지저분한 것도, 어디가 부서진 것도 아니다. 다만, 다만 사면의 색깔이 모두 같다! 법칙이 무너지는 마을이었다. 도대체 먹 구름 아래에 어떤 빛의 장난이 이루어지면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 까? 그 때였다. 여자는 앙칼지게 말했다. "돌아가! 돌아가!" 우리는 질겁했지만 그것보다는 우리의 말이 더 질겁했다. 말들은 마치 맹수의 울부짖음이라도 들은 것처럼 앞발을 치켜올리며 투레질을 했다. "이히히힝! 푸르르, 힝힝힝힝힝!" 우리는 모두 낙마하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말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 때 여자의 고함소리에 놀란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까아르르! 깍깍깍깍, 까아아아!" 하늘을 뒤덮는다는 느낌이 든다. 사방의 건물 지붕너머로 까마귀들이 마구 날아올랐다. 까마귀들의 검은 깃털이 마치 낙옆처럼 떨어져 휘날 렸다. 우리는 말의 비명소리와 까마귀의 울음소리, 그리고깃털과 우리 의 불안정한 자세 때문에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또다른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위해 날아요?" 이루릴이었다. 놀랍게도 이루릴과 그녀가 타고있는 '레이셔널 셀렉션' 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루릴은 하늘을 보며 외쳤다. "먹이를 찾나요? 잠자리를 찾나요? 잃어버린 새끼를 찾나요? 돌아가 요! 번쩍이는 물건에 매혹되는 순진한 성품의 날짐승들이여! 자신의 보 금자리로, 그 번쩍이는 물건들의 창고로 돌아가요!" 까마귀들은 다시 내려왔다. 하지만 그 놈들은 건물의 처마나 지붕의 끄트머리, 발코니의 끝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루릴은 그 모 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우리 말들도 그제서야 진정하기 시 작했다. 카알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당황한 눈으로 주위의 까 마귀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상하군, 이런 소란이 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앞쪽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보시오! 우린 여행자들이오. 그냥 여기서 하룻밤 유숙하고 싶을 따름 이오. 그런데 무턱대고 돌아가라니, 그 이유를 먼저 말해주겠소?" 그 여자는 머리카락을 뒤로 젖혔다. 그제서야 얼굴이 잘 보였다. 남루 한 옷차림에 걸맞게 얼굴에도 땟국물이 가득한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무슨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그 여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이루릴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루릴은 담담한 시선으로 여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여자는 이루릴에게 말했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 숲의 종족. 한없이 고상하신 그 분께 감히 까 마귀들이 소란을 피웠군, 히히힛! 과연, 과연 엘프야. 미천한 인간과 동 행해도 그 품격에 누가 되지 않을까?" 이루릴은 그 검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대로 자 신의 말을 돌리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물러나죠." "예?" "여기서 물러나죠. 이유는 천천히 설명할테니…"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듯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몸을 돌렸다. 뒷쪽에서 노려보고 있는 그 여자와 까마귀들의 시 선이 등에 따가웠다. 칼라일 영지 외각의 넓은 밭을 도로 가로질러 나오며 이루릴은 한 마 디도 하지 않았다. 샌슨은 조바심을 내고 있었고 그것은 나도 마차가지 였다. 카알은 가끔 뒤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침한 먹구름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거의 밤이 아닌가 싶었고, '횃 불이 필요할 지경인걸?' 이라고 말하는 샌슨의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밭을 지나 이 마을로 접어드는 고갯길이 있는 야산까지 돌아온 이루릴 은 말에서 내렸다. 우리도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루릴은 땅 에 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렇게 생각에 잠기던 이루 릴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봤다. "앉지 않으세요?" "아, 예." 우린 머쓱해져서 각자 땅에 앉았다. 이루릴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 여자, 사람이 아니더군요." "예?"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오크나 고블린처럼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는 뜻 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이더군요." "무슨 말씀이지요?" 이루릴은 마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 모두를 따를 수 있는 종 족입니다.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둘 다 인간들에게 관심이 깊어 양자는 끝없이 인간에게 개입하려 하지요. 반면 저 같은 엘프는 그랑엘베르를 따르므로 헬카네스는 우리에게 개입하기 어려워요. 드워프라면 카리스 누멘을 따르므로 반대로 유피넬이 드워프에게 간섭하지 힘들죠." 나와 샌슨은 그저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고 카알은 잘 알았다는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같이 고개를 끄덕여도 확실히 다르군. 이루릴은 무릎을 모아 안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그 여자, 오로지 헬카네스의 기운만을 가지고 있더군요." "예?" "그 여자뿐만이 아니예요. 그 영지의 건물들의 모든 벽면이 같은 색, 그건 조화가 무너지는 증거지요. 유피넬의 저울대가 무시되는 곳입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물러났습니다만…." 소름이 돋아오르지는 않았다. 샌슨이나 나나 둘다 신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난 카알 덕분에 머리에 쑤셔박은 지식은 있지만 지식은 그냥 지식일 뿐, 그것으로 감정까지 우러날 정도는 아니다. 내가 알기로 유피넬은 코스모스(Cosmos 조화)이며 헬카네스는 카오스 (Chaos 혼돈)이다. 그것은 신이라기보다는 어떤 법칙, 경향성을 나타낸 다. 하지만 보통은 하나의 인격신인 것처럼 이야기된다. 만물은 조화나 혼돈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혼돈이 없으면 조화도 없고, 조화가 없으면 혼돈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양자는 공생을 위해 시 간을 만들었다. 시간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양자는 공존할 수 있었고 그 래서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모두 만족했다 한다. 만물이 유전되기 시작 한 것이다. 혼돈이 되었다가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조화 속에서 다시 혼돈으로 치달을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보자.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 모두를 따를 수 있다. 유 피넬만이 인간을 다스린다면 세상은 정말 따분할 것이다. 일례로, 행운 이라 불리는 것은 대개 헬카네스의 선물이다. 만일 주사위를 6번 던져 모두 6이 나온다면 엄청난 행운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확률 법칙의 혼 돈, 즉 헬카네스의 은총이다. 헬카네스의 은총을 받았다면 도박사가 되 는 것이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관점에서 헬카네스는 말도 안되는 불운을 선물하기도 한다. 주사위를 6번 던져 몽땅 1이 나온다면 그것도 헬카네스의 힘이다. 그리고 헬카네스는 전사들의 신이기도 하다. 조화는 반드시 둘 이상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무엇과 무엇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혼자서 조화 를 이룬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전사들의 행동원칙은 적과 나, 둘 중 하나의 죽음이다. 그래서 헬카네스는 전사들을 비호한다. 그러나 전사들은 헬카네스를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청난 연습과 노력을 했는데도 약한 적에게 말도 안되게 쓰러져버린다면 그것은 헬카 네스의 장난이다. 그래서 노력하는 전사들은 유피넬의 가호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유피넬의 뜻에 어긋나게 적을 도륙해버린다. 노력하지 않는 전사라면? 당연히 헬카네스의 도움으로 행운으로 적을 이기길 바 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피넬의 뜻에 따라 조화롭게 도륙당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유피넬은 사실 둘 중 하나도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조화는 둘 이상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이 정도면 꽤 복잡하 지 않은가? 나는 이 정도의 이야기만 듣고나서 신학에는 정나미가 떨어 져 버렸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프리스트에게 물어보면 아마 죽을 때까지라도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되겠지만 나야 그런데 관심없으니 이 정도만 알 면 만족이다. 어쨌든 헬카네스와 유피넬은 너무 고차원적인 신이며 사 실 신이라 할 수도 없는 우주적인 법칙 같은 것이라 그들을 직접 신봉 하는 종교는 없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유피넬과 헬카네스를 인정하며 그 하위신들을 따른다. 물론 유피넬과 헬카네스에 대한 해석은 종교마다 다 다르다. 나는 이런 지식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 한다. 그래서 난 멍청한 얼굴로 이루릴의 얼굴을 보고 있는 반면, 카알 은 몹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게다. 카알은 정말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헬카네스만의 기운을 가진 인간이?"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가능성?" "헬카네스의 하위신이라면 누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그 역사함으로 헬카네스의 기운을 강하게 퍼뜨릴 수 있는 신이라면?" 카알은 눈을 끔뻑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라고 생각하시오?" "그럴 수 있어요." "오, 맙소사!" 카알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나와 샌슨은 멀건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샌 슨은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그게 뭐야?' '나도 몰라.'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2. 카알은 한참 동안 전율상태였다. 섣불리 질문도 못할 분위기였다. 그래 서 우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결국 내가 더 못참고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카알은 마치 10년만에 말하듯이 침중한 어투로 말했다. "세이크리드 랜드라면… 글세올시다. 헬카네스의 하위신일테니, 호비트 들과 갈림길의 테페리, 드워프와 불의 카리스 누멘, 오크와 복수의 화렌 차, 검과 파괴의 레티, 까마귀와 질병의…." 느릿하게 말하던 카알의 눈이 번뜩였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커다란 까마귀, 역병의 제일 원인자, 무덤만 지키는 무덤지기." "무슨 말이죠? 무덤만 지키다니." 내 질문에 이루릴은 대답했다. "무덤만 지킬 뿐 시체는 지키지 않아요. 파먹거나, 혹은 꺼내어 훼손한 다거나…" "우으윽. 그게 누구죠?" "게덴." 카알의 대답이었다. 게덴, 게덴이라. 내가 모르는 것을 보아 유명한 신 은 아닌가보다. 하긴 질병의 신이라면 별로 유명할 수가 없겠다. 나는 샌슨을 바라보았지만 샌슨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카알에게 물 어보았다. "게덴이라, 질병의 신이라고요? 그걸 믿는 사람도 있어요?" 카알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우리들이 사는 웨스트 그레이드 쪽에서는 별로 득세하지 못한 신이지 만, 사우스 그레이드쪽에서는 꽤 명성있는 신이라네. 특히 사우스 그레 이드의 이파실시에는 게덴의 화신이라 불리는 두 머리 까마귀 체로이가 살고 있지. 그 시의 시민들은 체로이에게 직접 공물을 바치기도 한다더 군." "엣? 머리가 두 개?" "그렇다네. 질병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을 상징한다 던데. 머리 한쪽이 잠들어도 다른 머리는 깨어있다더군." 샌슨과 나는 눈을 반짝거렸다. 정말 거기에 들러 한 번 구경하고 싶은 데. 하지만 사우스 그레이드라면 우리 여정에서는 벗어나므로 구경할 가능성은 없겠다. 샌슨이 말했다. "저, 그럼 저 도시에서 게덴이 뭔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의 프리스트일 가능성이 높겠지. 아니면 그의 권능이 깃든 어떠한 물건이 잘못 저 마을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그럼, 조사해보죠?" 내 제안에 이루릴과 카알은 둘 다 한숨을 쉬었다. 뭐야? 난 머쓱해져 서 머리를 긁었다. "왜요, 내 제안이 부당해요?" "부당한 게 아니라당연하지. 우리야 같은 인간이고, 세레니얼양께서도 유피넬의 법칙의 추종자이신만큼 저런 모습을 묵과할 순 없으시겠지 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위험하단 말이야. 신의 권능이 펼쳐지고 있는 땅에 우리가 들 어가서 어떻게 무엇을 할지…." 나는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거, 만일 그 게덴의 프리스트가 저기서 게덴의 율법을 실천하고 있는 거라면 그 작자를 두들겨 쫓아버리면 되는 것이고, 혹시 게덴의 물건이 있어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면 그 물건을 어디로 집어던져버 리거나 박살내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카알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여보게, 네드발군. 그 말은 맞네. 하지만 저 땅의 모든 것이 그 율법 을 따르고 있어. 하다못해 저 땅 위에 있는 공기들마저도 게덴의 율법 대로 움직일 것이야. 우리가 조용히 물러나는 데에는 별 위험이 없었지 만, 만일 우리가 저 땅 안에서 게덴의 율법에 반대하는 힘을 행사하려 하면, 순식간에 공기가 없어지거나 우리 발 밑의 땅이 없어져 버리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네. 아니지. 저 곳은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니까 우린 순식간에 수많은 질병에 걸려버릴 가능성이 가장 높겠군. 일사병 과 동상에 동시에 걸리면 기분이 어떻겠나?" "…농담이예요?" "농담이 아니네. 원래 세이크리드 랜드라는 것이 그래요." 난 진저리를 치면서 물었다. "세이크리드 랜드?" "신림지(神臨地), 신이 임한 땅. 무서운 것이네."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 어감상 그것은 신성하고 거룩한 느낌 이 든다. 하지만 카알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지상에 펼쳐진 지옥이다. 최소한 지상에 사는 생물에게라면 지옥보다 더 무서운 장소다. "세이크리드 랜드, 그곳에서는 하나의 신의 율법만이 지켜지지. 여보 게, 네드발군, 퍼시발군. 우린 사실 수많은 신들의 율법 속에 살아가는 것일세. 하나의 신의 율법만이 지켜지는 장소에서는 오히려 살 수가 없 어. 만약 드워프와 불의 카리스 누멘의 세이크리드 랜드라고 해보세. 그 곳에서는 드워프도 못살걸. 모든 것은 오로지 불일테니까. 모든 것이 타 버리기만 할테니까. 엘프와 순결의 그랑엘베르라면…" 카알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루릴은 별 표정없이 카알의 말을 이었다. "그곳은 숨막히는 순결만이 있겠지요. 모든 땅은 처녀지이어야 하니 이용될 수 없고, 모든 숲은 미답지로 남아있어야 하니 들어갈 수 없고, 모든 산은 처녀봉이어야 하니 올라갈 수 없고. 게다가 후손을 만들 수 없어요. 처녀는 애를 못 낳지요." 이루릴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그 마지막 말의 뉘앙스는 웃 겼고 그래서 샌슨과 나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루릴은 우리가 웃자 어떻게 이런 무서운 말에 웃을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샌슨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어흠. 그럼 저기 저 땅에는 질병만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걸세. 아마도 저렇게 된 것이 오래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면 벌써 소문이 파다할테니까." "반드시 손을 써야겠군요." "그래,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네. 하지만 이건 신의 역사함일세. 우리같은 필부가 근접할 수가 없다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질문했다. "무슨 방법이 없어요?" "모르겠네. 저런 현상 자체가 워낙 희귀한 것이라서. 어떤 신도 한 장 소에서 자신의 권능 이외의 다른 권능을 모조리 배제시키려면 커다란 댓가를 치뤄야 되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세." "하지만 저기에 그런 땅이 있잖아요." "아마 대단한 의식이 있었거나, 혹은 막강한 아티팩트(Artifact)가 있 을 거야. 거의 전설적인 무엇이겠지. 그게 뭔지를 알면 어떤 방법이 있 을지 모르겠네. 유피넬은 모든 것에 조화를 주기 위해 모든 것에 장점 과 함께 약점을 주네. 반드시 어떤 막강한 힘에도 약점이 있겠지. 하지 만 우리 중 신학에 밝은 이가… 세레니얼양?" "저도 신학에는 어둡습니다." "예… 그러니 어쩌겠는가. 할 수 없지. 가장 가까운 신전을 찾아보세. 퍼시발군?" "예." "신전에 조력을 구해야겠네. 주위 어디에 신전이 있는가?" 샌슨은 배낭에서 다시 지리서를 꺼내어 들었다. 그는 칼라일 영지와 그 근처 페이지를 뒤적거리는 듯하더니 곰곰히 살펴보다가 이윽고 지리 서에 코를 박고 살펴보았다. "젠장,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러고보니 먹구름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날이 어두워져 있었나보다. 이루릴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먹구름이 짙어서 빛이 부족하군요. 그것… 응?" 이루릴은 자리에서 벌쩍 일어섰다. 그녀는 갑자기 두 팔을 들어 머리 를 뒤로 쓸어념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왜 저러지? "왜 그러죠, 이루릴?" "먹구름, 구름이라, 이상해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구름이… 이상하다고요?" 나와 샌슨도 일어나서 구름을 살펴보았다. 구름이 뭐가 이상하다는 거 지? 흠, 비가 올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하지만 이루릴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라면 구름이 저렇게 낀다는 것은 이상 해요. 전 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식은 있어요. 병이라는 것은 보통 열이죠. 열이 나지 않는 병도 있긴 있지만 대개 병을 상징하는 것 은 타는듯한 고열이에요. 이곳이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라면, 찌는듯 한, 아에 메말라버릴듯한 공기가 있어야 해요." "…그렇네요? 그럼?" "저 구름은 누군가가 만들어 보내는 거예요! 가요!" 그녀는 날렵하게 몸을 날리더니 배낭을 집어듬과 동시에 레이셔널 셀 렉션 위로 뛰어올랐다. 어떻게 등자에 발을 얹지도, 안장을 잡지도 않고 저렇게 뛰어오르지? 난 갑옷이 없더라도 저렇게는 못하겠다. 아마 이루 릴은 안장이 없어도 별 무리없이 말을 탈 수 있지만 짐 때문에 안장이 필요한 모양이다. 우리가 꾸물거리며 각자의 말 위에 오르는 동안, 이루 릴은 말 위에서 캐스트에 들어갔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그대의 장난감을 요구하는 자에게로 날 안내해요." 실프를 불러낸 그녀는 잠시 집중하여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 녀는 우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됐어요. 절 따라와요." 그리고 이루릴은 달려갔다. 트롯 정도의 속도라 따라가는 것은 간단했 다. 우리는 한참을 이루릴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이루릴 은 실프에게 집중하기 위해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듯 했다. 우리는 칼라일 영지의 외곽을 따라 한참 우회했다. 야산의 낮은 구릉 을 따라 얼마쯤 달려갔을까, 갑자기 나무들이 없어지며 넓은 비탈이 나 타났다. 그리고 저쪽으로는 분홍색 반점이 보였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 덕였다. "코스모스와 폭풍의 에델브로이인 것 같군요. 썩 어울리게도 저기 코스 모스가 피어있는 산비탈이군요." 이루릴의 시각은 엄청나다. 우리는 분홍색으로 보이는 산능선이 그제서 야 코스모스 언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산비탈은 완만했지만 전망 이 좋아 칼라일 영지를 내려다보기 좋은 장소였다. 그리고 조금 더 달 려가자 비로소 우리 눈에도 코스모스 사이에 있는 어떤 형체가 보였다. 그 사람은 코스모스 속에 서 있었다. 그래서 상체 조금과 머리만이 간 신히 보였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 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짙은 먹구름 때문에 빛이 부족해서 로브 아래의 얼굴은 아직껏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코스모스는 분홍빛 파도로 하늘거렸다. 그는 몸을 일으켰 다. 잠깐, 몸을 일으킨다고? 그럼, 지금까지 무릎을 꿇고… 맙소사! 그 자는 키가 5큐빗은 확실히 넘었고 거의 6큐빗이라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저게 사람인가? 사람이 저렇게 키가 클 수가 있나? 그 는 쇠테를 두른 묵직한 스탭(Staff)을 들고 있었는데, 난 어디서 기둥을 뽑아온 줄 알았다. 그는 로브의 후드를 뒤로 넘겼다. 순간 나와 샌슨은 각자 검의 칼자루를 쥐며 이를 악물었다. 로브 아래 나타난 얼굴은 트롤이었다. 이루릴은 레이셔널 셀렉션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소스라쳐서 말했다. "이, 이루릴!위험해요!" 그러나 이루릴은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트롤에게 다가갔다. 트롤은 멀건히 자기 배에까지밖에 오지 않는 이루릴을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트롤이 한 번 후려치면 이루릴의 몸은 조각이 날텐데. 이루릴이 입은 거라곤 하얀 블라우스에 가죽 자켓과 가죽 바지. 보기엔 좋지만 그건 갑옷이 아냐. 그러나 이루릴은 별 불안감없이 말을 걸었다. "저는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코스모스와 폭풍의 프리스티스인가요?" 프리스티스(Priestess)? 그 트롤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에델린이라고 합니다." 이루릴은 우리쪽을 쳐다보았다. 왜 자기 소개를 하지 않느냐는 표정이 었지만, 이건, 좀, 그러니까, 에, 그렇지만… 우리는 멀건히 입을 벌린 채 바라보았다. 결국 이루릴은 포기하고 말했다. "왼쪽부터 샌슨 퍼시발, 카알, 후치 네드발입니다. 제 동행입니다." 트롤은 고개를 숙이더니 제법 점잖게 인사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카알이 더듬거리며 댓구했다. "컥, 포,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에, 영광을. 그러니까…" 침착한 카알마저도 이러니 샌슨과 난 오죽했겠는가. 우리는 검의 칼자 루를 놓기는 했지만 아직도 어이가 없어서 경계하는 눈으로 그 에델린 이라는 트롤 여자(?)를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미소(?)를 지었다. 송곳니 가 멋있군. "많이 놀라셨군요." 결국 카알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다, 당신은 트롤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저, 그, 그런데 어떻게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가 되었습니까?" "신앙을 가졌으니까요." 결국 나는 못참고 끼어들고 말았다. "저, 당신 성격에 그게 맞는 일입니까? 그리고 에델브로이의 신전에서 아무런 말 없이 받아들였습니까?" "제 성격에 맞는 것은 당연하고, 신전에서 받아들였으니 프리스티스가 된 것이죠. 당연하지 않아요?" 계속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하긴, 에델브로이에 대한 신앙을 가졌으니 그 교리를 따르고, 그 신전에서 받아들였으니 프 리스티스가 되었겠고, 그 모든 과정은 저 에델린의 성격에 맞았으니 수 행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트롤이잖은가? "저, 저, 당신들의 다른 종족은, 에,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못차리고 우왕좌왕하자 에델린은 미소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하게 댓구했지요. 예, 처음부터 무슨 질문인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트롤 프리스티스라니, 이상하다는 것이겠지요? 트롤이라면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인데 어울리지 않아서 이상하다는 질 문이시겠지요? 그런 질문은 절 슬프게 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무례하 게 댓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알은 그제서야 침착을 되찾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겠소. 미안하오. 무슨 사연이라도?" 에델린은 대답하는 대신 다시 고개를 칼라일 영지쪽으로 돌렸다. 그녀 (일단은 이렇게 불러야겠다.)가 잠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새에, 칼 라일 영지의 하늘 위의 구름이 엷어지며 햇살이 하나 둘씩 비춰졌다. 에델린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릉거렸다. (…트롤 이니까.) "태양은 헬카네스의 힘. 햇빛이 닿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군 요. 지금 저 구름 위쪽으로는 엄청난 태양열이 쏟아져내리고 있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햇빛을 가리기 위해 누군가가 구름을 보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에델린은 이루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왜 내겐 저 동 작마저도 위험하게 보이는 것일까. "저 영지에 대해 아십니까?" "조금 전 거기 들어가려다가 다시 돌아나왔습니다. 아무래도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인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에델린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에델린이 이루릴을 먹음직스럽게 바라 보는 줄 알고 소스라칠 뻔 했다. "역시 유피넬의 어린 자식답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젠…" 에델린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어느새 지고 있는지 구름을 가르며 내리쪼이는 빛은 붉은색 광선이었다. 회색의 도시에 붉은 광선 들이 하나 둘 쏟아지는 것은 보기에 퍽 아름다웠다. 하지만 저곳은 세 이크리드 랜드, 하나의 법칙만이 미쳐 날뛰는 곳이다. '모든 것은 병들 지어다.' "해가 지는군요. 오늘은 이만해도 되겠습니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우리에게 몸을 돌렸다. 젠장, 말에 타고 있는데 눈높이가 같으니 정말 무섭잖아. 에델린은 말했다. "제가 여러분을 저녁식사에 초대해도 될까요?" 소름이 돋았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3. 흠, 에델린의 말은 우리를 잡아먹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건 진짜 저 녁 초대였다.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 결국 여행자끼리 야외에서 동 석하게 되는 정도의 것이었지만. 에델린은 성심껏 가진 음식을 내놓았고 우리도 가지고 있는 음식을 내 어놓아 저녁 자리는 푸짐했다. 에델린이 가진 음식이라고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니, 몇 가지는 확실히 이상했다. 내 몸통만한 빵이라든지, 내 허벅지만한 소시지, 100 파인트짜리 물통에 4 파인트짜리 컵을 사용하는 데다가 웬만한 숏소드(Short sword)에 견줄만한 나이프를 써서 먹으니 확실히 이상했다. 나는 에델린이 권한 소시지를 안아들고는 식욕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 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 양이 너무 지나치면 입맛 떨어진다. 분명히 냄새도 좋았고 맛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끔찍스럽게 크 다. 하지만 샌슨은 천국에 와 있는 것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그 소시지 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어이구, 오우거. 모닥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우리가 있는 비탈에서는 아래의 평지에 있는 칼라일 영지가잘 보였 다. 달빛을 받아 괴괴한 은빛으로 반짝이는데, 이번에는 그 음영이 뚜렷 해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한 가지,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빼놓고. 이루릴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계속 구름을 부르고 계셨나요?" 에델린은 지친 표정으로 사과 세 개를 한꺼번에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 거리며 대답했다. "사흘째입니다. 사흘 전 이곳을 지나다가 저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지 요. 아니, 눈으로 보기 전에 벌써 게덴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손 을 쓸 도리가 없어, 그 세력이 강해지지 않도록 매일 구름을 불러 햇빛 이 비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루릴은 한숨을 쉬더니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나는 샌슨의 우걱거리는 소리에 방해를 받아가며 에델린의 이야기를 들었다. 에델린은 원래 미드 그레이드의 갈색산맥의 바위산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트롤에게는 특별히 부모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모두가 그저 가족이다.)들은 인근 마을을 노략질하거나 여행 객을 습격하며 살고 있었지만 결국 국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멸망당했 다. 당시 그녀는 작은 트롤이었으며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그녀를 붙잡은 병사들은 작은 트롤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게 생각하다 가, 어쩌면 마법사가 사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휘관 몰래 그녀를 잡아왔던 모양이다. 당시로선 그녀는 아직 고등한 지식단계는 아니었고 모호한 의식세계밖 에 가지지 못해서 트롤과 병사도 구별하지 못했고 병사들에 의해 물통 속에 가둬졌을 때도 세계의 모습이바뀌는 것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세 상이 갑자기 좁아졌다… 는 느낌이었다며 에델린은 웃었다. 이런 이야 기들은 그녀로선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며 수년이 더 흐른 다 음에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사는 그녀를 사들였던 모양이다. 그가 정확하게 그녀를 어떤 목적 에 사용했는지는 에델린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괴로운 기억은 없었 던 것으로 보아 마법사는 그녀를 그렇게 나쁘게 대하진 않았던 모양이 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서는, 까마득히 키가 큰 노인이 중얼거리며 이것 저것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며, 주위에 흩어진 종이조각을 씹거나 뼈 다귀 등을 우물거리거나 뭘 집어던지거나 하며 놀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제일 무서운 것은 그녀가 다가가면 갑자기 키가 커지며 포효하는 괴물이었다. 훗날 생각해보면 그것은 고양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또 그녀의 세계가 바뀌어버렸다. 항상 어두우면서도 따스하고 아늑했던 마법사의 연구실이 어느 순간부터 하얗고 약간 싸늘하게 바뀌 었다. 아마도 그 마법사가 그녀를 에델브로이의 신전에 넘겨버린 것 같 다. 정확한 이야기는 그녀도 모르며, 신전에서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마법사가 그녀에게 무슨 마법을 건 다음 신전에 넘겨 주었을 것 같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 때부터 갑자기 그녀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에델린은 마법사를 그렇게 불렀다. 그 말을 할 때의 에 델린의 얼굴에는 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트롤의 표정으로는 최상급의 표정일 거라고 확신한다.)는 나에게 말을 배우도록 마법을 걸 고는 내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신에게 맡긴다… 는 계획을 가지신 것 같 았어요. 마법사 옆에 있어봐야 원래의 포악한 성격이 드러나는 것을 앞 당길 뿐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에델브로이의 신전 사람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거리감을 두고 그녀를 대했던 것 같다. 하긴 나라도 무서워서 접근하지 못했겠다. 하지만 신전 의 프리스트들은 자신을 잘 절제하며 차차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던 것 같다. 에델린이라는 이름도 그곳에서 얻었다. 그것은 에델브로이의 딸이 라는 뜻이다.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녀는 에델브로이의 경전을 읽고 그 송가를 부 르며 자라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 때까지도 그녀는 어린 아기였고, 말을 하며 정신세계가 고등해졌을 때부터 주위의 사물을 정확히 인식하 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처음 인식한 것이 바로 신전의 모습 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에델린은 모태신앙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 닌 셈이다. 자라나면서 주위의 사람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 었다. 하지만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트들은 분명히 그녀는 토롤이며 자신 들은 인간이라는 차이점은 정확히 가르쳐 주었으나 그 때문에 그녀가 상 처를 입지는 않도록 배려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분명한 어조로 물었다. "넌 원래 사람을 잡아먹는 몬스터이다. 하지만 입맛은 바뀔 수 있는 것 이지. 너 사람이 먹고 싶으냐?" 그녀는 빵과 우유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라나며 수련사가 되었다. 결국 그녀가 에델브로이의 프리스 티스가 되려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며칠을 고민했 다. 수련사에 대해선 하이 프리스트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프리스 티스로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트롤을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이 프리스트마저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 다. 그는 고민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는 1세기 이상 없었던 프라임 미팅(Prime meeting)을 선포했다. 교 단의 모든 장로와 원로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이다. 대륙 곳곳의 에델 브로이의 신전 장로들이 초빙되었고 산 속에서 홀로 수행하는 원로들도 수십년만에 금기를 깨고 지상에 내려왔다. 몇몇 수련사들은 전설 상의 인물인 줄 알았던 원로들이 실제로 살아서 신전 정문을 들어서는 것을 보며 기겁하기도 했다 한다. 어쨌든 그것은 교단 역사를 통틀어 100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회 동(會同)이라 며칠 동안 신전은 너무 바빴고, 에델린도 식사수발을 한다 든지 시중을 든다든지 하며 너무 바빠서 자신에 관련된 회의이면서도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회의장에 불려갈 때는 창피스럽게도 음식국물로 얼룩이 가득한 치마에 손에는 밀가루를 가득 묻힌채 부들부 들 떨면서 들어갔던 모양이다. 회의장 가득히 도열한 기라성같은 장로들과 원로들은 그 모습을 재미있 게 보았다. 그들은 몇 가지를 질문했고 에델린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 태에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보다는 그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도저 히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녀는 에 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가 되었다. 국왕께서도 이 사건에 관심을 두었던 모양이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지 만, 그 신전이란 다름아닌 에델브로이의 총본산, 대폭풍의 신전 그랜드 스톰이었다. 그랜드스톰은 수도 바이서스 임펠에 소재한 신전 중에서도 꽤 위세높은 신전이었으며, 적절한 방법으로 왕의 버릇을 고쳐줄 수도 있는 몇 안되는 신전 중에 하나이다. 국왕께서 직접 내방하지는 않았지만 국왕께서는 '에델브로이의 대덕고 승들께서 내린 지혜로운 결정에 만족하겠다, 트롤 에델린이 원한다면 바이서스의 시민으로 받아들인다.' 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며, 공작과 몇몇 왕족은 직접 내방하여 에델린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도 사실 꽤 떨 렸으리라.) 갔다. 결국 그녀는 수도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포교활동을 하 거나 봉사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칙상으로는. 원칙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수도 시민들은 그녀를 멀리 했으며 그녀 의 봉사를 되도록 거부하려 했다. 그 때는 이미 상당히 지혜로워진 그 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괴로워했고, 수없이 기도하며 또 기도했다. 결국 지혜로운 하이 프리스트는 그녀를 쫓아내었다. "에델린, 인간을 보며 괴로워하지 말고, 세계를 보고 돌아오너라. 너같 은 미인을 홀로 세상에 보내려니 나도 썩 불안하다. 세상엔 미인이라면 프리스티스의 치마 자락이라도 들춰보고 싶어하는 못된 녀석들이 많거 든? 하하하, 어쨌든 세계 전체에 봉사하도록. 세상엔 발에 걸리는게 진 리라 할만큼 진리가 많이 있으니 돌아올 땐 그 중에 하나 훔쳐오너라. 그게 안된다면, 특산품 과자라도 몇 개 사오든가." 그래서 그녀는 순례자로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하이 프리스트의 처 방은 적절했다. 수도의 시민들은 그래도 그녀에 대해 알고나 있었지만,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영지나 마을 경비대에게 죽음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고초를 겪으며 그녀는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는, 그들을 이해시키는 방법들을 하나 둘 터득할 수 있 게 되었고, 사람들도 진심어린 그녀의 행동에 오해를 풀었다. 하지만 목 숨을 걸고 달아나야 했던 적도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근 2년 가까이 미드 그레이드를 떠돌다가, 이제 미드 그레이드를 떠나 웨스트 그레이드로 가볼까 생각했다고 한다. 웨스트 그레이드쪽은 중부대로의 슬픔 아무르타트 때문에 (이 대목에서 내 눈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에델린은 놀라는 모양이었다.) 포교활동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쪽에 목표를 두고 가고 있던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목적이 있다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녀에게 말을 가르치고 신전에 넣어준 마법사를. 하지만 신전측에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녀는 오로지 에델브로이의 딸일 뿐이며 그 외의 과거는 철저히 감추었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단서를 가지지 못한 채 추적하는 셈이다. 탁탁 소리를 내는 모닥불 옆에서, 앉은 키가 거의 3큐빗은 되는 에델 린의 모습이 불길에 아늑하게 보였다. 그녀의 번뜩이는 이빨도, 초록색 으로 번뜩이는 피부도, 노란 눈동자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마치 수줍은듯이 두 무릎을 모아쥐고 어깨를 움츠리며 이야기하는 트 롤. 무엇이 불안하겠는가? "고초가 심하셨겠어요?" "자신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답니다." "그런데, 궁금한게 있어요. 키가 얼마나 되세요?" "5.5 큐빗이지요." "역시, 그 정도 될거라고생각했어요. 헤에, 마을에 들릴 땐 그것도 꽤 불편했겠네요. 문턱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겠어요?" 에델린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난 에델린에게 꽤 가까이 다가가 있 었다. 가까이라고 해봐야 다른 사람 보기에 동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 지만, 처음에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나는 이루릴에게 물어보았다. "저, 그런데 이루릴은 어떻게 처음부터 아무런 불안 없이 접근할 수 있었죠?" "불안? 아, 네. 누군가 신성마법을 쓰고 있었고, 이 분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이 분은 프리스티스일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요. 그리고 프 리스티스라면, 그 신께 대적하지 않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건 이성적인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아무리 그 래도 겉모습은 트롤 아닌가. 이루릴은 그런 내 표정은 보지 않고 에델 린에게 질문했다. "에델린께서는 디바인 파워(Divine Power)가 대단히 높으신가 보군요. 트롤이면서도 그 정도의 디바인 파워를 획득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데요." "에델브로이의 은총이겠지요. 어릴 때부터 그랜드스톰의 선학들께서 저를 지도해주셨기 때문에 간신히 신의 지팡이 흉내를 낼 정도는 됩니 다." "아마도 에델린같이 특별한 존재를 그분의 지팡이로 쓰도록 결정하신 것은, 에델브로이께서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그런 높은 수준의 디바인 파워도 부여하신 것이겠지요." 난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이루릴의 말은 칭찬이었나 보다. 에 델린은 꽤 기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카알은 에델린의 이야기를 들 으며 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영지에 대한 일은…" "어떻게든 수단을 강구해봐야겠지요. 저, 그래서 말인데…" 에델린은 몹시 불편하다는듯이 말을 꺼냈다. 그녀는 한참 주저하더니 말했다. "저, 괜찮으시다면 여러분, 저를 좀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저건 아마도 게덴의 프리스트의 짓이든지, 아니면 게덴의 힘을 간직 한 아티팩트의 영향일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추측했지요." "예, 어느 경우이든 저 안에 들어가서 그 원인을 파괴해야 됩니다. 프 리스트라면 그를 억압해야 될 것이고, 아티팩트라면 파괴해야겠지요. 전 저 안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를 상대할 수는 없더군 요. 첫날, 저 영지에 들어갔다가 그 여자에게 쫓겨 간신히 도망나왔습니 다." "그 여자? 아, 검은 옷의 여자 말씀입니까?" "보셨습니까?" "예. 우리보고 나가라고 그러던데요?" "까마귀들과 늑대들을 부르는 여자. 아마도 뱀파이어(Vampire)가 아닐 까 하는데요." 그 커다란 소시지를 다 먹고 물을 마시고 있던 샌슨이 마시던 물을 토 했다. "푸뎬! 배, 뱀파이어?" "샌슨! 다 튀었잖아! 이런, 그런데 뱀파이어라고요? 무슨 뱀파이어가 낮에 나와요?" 에델린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 노란 눈동자를 껌뻑였다. 늘어진 볼가죽을 실룩거리며 에델린은 말했다. "저 때문이지요. 햇빛을 가려버렸으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를 가리지 않았다면 저 영지에 헬카네스의 기운이 더욱 집중될 것입 니다. 게덴의 힘이 더더욱 강화되겠지요." "뱀파이어라… 으우웃! 그런데, 그것도 게덴 때문인가요?" 나는 진저리를 치며 물어보았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는 질병입니다. 그것은 전염병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뱀파 이어에게 물린 자는 뱀파이어가 되고… 라이칸스롭과 더불어 질병 중의 질병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음, 그런가. 하긴 전염병이나 다름없군. 그러나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 다. "그런데 어떻게 프리스티스가 뱀파이어를 무서워하죠? 그러니까 양쪽이 바뀐 것 아닌가요?" 에델린은 한숨을 쉬었다. "저곳은 세이크리드 랜드입니다. 다른 신의 율볍이 대단히 약화되는 장소이지요. 저 영지에 들어간 첫날, 그녀가 뱀파이어임을 짐작하고는 몇 번이나 터닝(Turning)해보았지만 모조리 실패했습니다. 한두 번 성 공하긴 했지만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저하게 만드는 정도였습니다." 나와 샌슨은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이고 맙소사…" "저, 왜 그러시죠, 카알?" 카알은 고개를 절절 흔들면서 댓구했다. "뱀파이어가 프리스티스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니! 여보게, 퍼시발군, 네 드발군. 에델린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 날씨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강 력한 디바인 파워를 지니신 프리스티스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막강한 프 리스티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그런가? 샌슨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 마주 본 다음 새삼 감탄스 러운 표정으로 에델린을 바라보았고 에델린은 수줍다는듯이 시선을 외 면했다. 음, 수줍어하는 트롤이라. 보고 있기가 좀 그렇군. 이루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말했다. "정말 무서워하지 않는군요." 그녀는 바지를 툭툭 털더니 곧 에스터크의 검집이 달린 벨트를 풀어버 렸다. 뭐지? 우리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소드 벨트 를 풀어 에스터크에 둘둘 말더니 그것을 배낭에 꽂아놓았다. 그리고는 왼쪽 허벅지에 묶어둔 망고슈를 꺼내어 들었다. "여러분은 잘 보이지 않겠지요. 불붙은 장작개비를 하나씩 주워드세요. 초음파 때문에 귀가 멀 지경이군요." "초음파?" "박쥐입니다. 하지만 곤충을 잡아먹는 보통 박쥐는 아니군요."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4. 모두 긴장하여 일어났다. 우리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불을 등진채 섰다. 나는 말들이 걱정되었다. 말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 기 앞이 캄캄해졌다. "으아아!" 박쥐가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얼굴이 긁히는 느낌에 소름이 쫙 돋았 다. 황급히 그것을 잡아당겼는데 힘이 너무 세었던지 "찌직!" 하는 소리 를 내며 그대로 손 안에서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주위는 찍, 찌직 하는 박쥐 울음소리로 가득찼 다. "우, 우아아!" "찌이이익! 찍! 찍!" 박쥐가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마치 검은 종이조각을 가득 공중에 던져 둔 것 같았다. 찍! 찍! 하는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지? 나는 엉겁결에 바스타드를 뽑아 휘둘렀다. 하 지만 바스타드로 날짐승을 잡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 을뿐이다. 샌슨은 불붙은 장작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바스타드는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불붙은 장작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불붙은 박쥐들 이 주위를 정신사납게 날았다. 찍! 찌지직! 불똥이 날아다녀 온 몸이 데 일 것 같다. 그리고 노출된 팔의 피부엔 박쥐들의 날개가 닿았다. 끔찍 한 기분이었다. "눈을 가려! 목을 가려!" 카알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장작을 휘둘렀다. 나도 재빨리 장 작개비를 뽑아들었다. 한 손에 하나씩 들고 그대로 일자무식, 마치 깃발 춤을 추듯이 온 몸을 위아래 좌우로 뱅글뱅글 돌렸다. "다 타버려!" 곧 머리에서 발끝까지 불붙은 박쥐들이 부딪혀왔다. 통째로 구워지는 느낌이었다. 윽! 할퀴었어, 머리에 달라붙었어! 머리카락 아래의 피부를 긁어대는 박쥐의 발톱, 나는 미친듯이 머리를 터느라 장작을 다 집어던 지고 말았다. 그리고 장작을 놓치는 순간 박쥐들은 새카맣게 내 몸에 달라붙었다. "이이아아아!" 나는 땅에 누워 굴렀다. 박쥐들이 터져나가는 느낌이 그대로 온몸에 전달되어왔다. 팔에 화끈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난 내가 집어 던진 장작 위를 구르고 있었다. "앗, 뜨거!" 내 팔다리는 박쥐의 조각들과 그을음, 그리고 이끼들이 묻어 뭐라 할 수 없이 역겨운 모습이었다. 이루릴은 박쥐와 일행이 모두 섞여버리니 마법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긴 저렇게 날아다니니 가만히 서서 캐스트할 시간도 없다. 그녀는 손에 든 망고슈를 거꾸로 쥐고 온 몸을 날리며 박쥐들을 쳐내렸다. 어둠 속에서 저렇게 정신없이 움직이 는 박쥐들을 쳐내리는 것이다. 맙소사, 이루릴은 빗방울도 잡아내겠는 걸? 에델린 역시 가만히 서서 캐스트할 방법이 없자 망토를 벗어들더니 그 것을 휘둘렀다. 에델린의 거대한 몸에 어울리게 망토는 거의 천막같은 크기였다. 박쥐들은 그물에 부딪히는 물고기들처럼 망토에 맞아 휘감겼 다. 그 때였다. "그 여자!" 샌슨의 고함소리. 땅에서 뒹굴던 나는 화급히 눈을 떠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지저분한 여자. 낮에 우리를 막아 섰던 그 여자다. 그 여자는 우리에게서 약 40 큐빗쯤 떨어져 박쥐와 춤 추고 있는 우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여자는 두 손을 앞으로 뻗어올렸다. "캐스트한다!" 나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그리로 달려갔다. 박쥐가 후드득거리며 상체 전체에 부딪혀왔다. 눈을 가리고 뛰려니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 앞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돌, 돌이다. 나는 쓰러진 채 손에 잡히는 돌을 집어들어 무조건 집어던졌다. 정신없이 집어던진 것이라 돌멩이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 다. 하지만 돌멩이는 나무에 맞았고 굉장한 소리를 내며 나무가 부러졌 다. 콰지직! 짜작! 그 소리에 놀란 그 여자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그만 캐스트에 실패해 버린 듯했다. 그리고 그 때 이루릴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매직 미사일!" 돌아보니 이루릴은 박쥐들이 잠깐 뜸해진 사이에 간신히 캐스트를 끝내 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주위에는 새하얀 빛의 막대기가 5 개 떠올랐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어 검은 여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빛의 막대기는 곧장 그 여자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박쥐들이 날아들며 검은 여자를 보호했다. 매직 미사일 하나에 세, 네 마리의 박쥐들이 달라붙어서 몸으로 막아내었고, 결국 모두 소멸 시켜버렸다. 그 사이에 여자는 여유있게 캐스트를 시작했다. 이루릴은 어떻게 저지할 마법을 캐스트하려는 모습이었으나 박쥐들이 그녀를 가 만히 두지 않았다. 이루릴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박쥐를 모두 그 작은 망고슈 하나로 쳐내는 무서운 솜씨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도저히 캐스트할 상황이 아니었다. "난 안 보이냐! 기름 젓기!" 나는 바스타드를 8자로 뱅뱅 돌리면서 앞으로 뛰었다. 박쥐들이 마구 맞아 터지면서 핏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달릴 수 없다. 그 여자는 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가자 놀란 눈으로 날 바라 보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유리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s)!" "으아아아!" 그 여자 앞에서 갑자기 번갯불이 튀겼다. 그리고 쫙 뻗어온 번개는 내 가 마구 휘젓던 바스타드에 정확히 맞았고 나는 바스타드채로 뒤로 밀 렸다. 칼자루로부터 전해져오는 번개에 몸이 감전되었다. 눈 앞이 하얗 게 바뀌었고 온 몸의 감각이 없어졌다. 밤하늘이 이렇게 하얗다니. 발뒷축이 통째로 뭉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뒤로 밀려가다 가 발에 힘을 주었다. 나야 이미 맞았지만, 뒤의 사람들에게 맞게 할 수 는 없다! 나는 제자리에 멈춰선채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 번개를 다 맞았다. 내 몸을 밀어붙이는 번개는 마치 100년 동안 계속되는 것 같았다. 그리 고 그 작렬하는 번갯불 속의 100년이 끝나는 순간이 다가왔다. 이건 무슨 마법이지? 갑자기 땅이 일어서더니 내 얼굴을 때리네? "후치!" 샌슨의 고함소리인가? "으어어어아! 우아, 후아, 흐카악!" 이런 대답을 해서 미안해. 나는 온 몸을 경련시키느라 도대체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몸이 진정되지 않고 계속 마구 뒤틀려 떨렸으며 머릿 속엔 계속 불꽃이 튄다. 사방이 하얗게 변했다가 시커멓게 바뀌기를 반 복한다. 그리고 그런 불꽃 사이 사이로 나에게 다가오는 검은 옷의 여 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 여자는 내가 떨어트린 바스타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위로 쫙 들어올려 내 가슴을 겨냥했다. "꺄아아!" 갑자기 여자의 배에서 화살이돋아났다. 아니, 화살이 날아가 박힌 것 인가? 나는 침을 마구 튀기느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침을 흘리면서 머리를 계속 떠니 그럴 수 밖에. 힐끗힐끗 보이는 모습으로는 아무래도 카알이 한 방 쏘아붙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때쯤 내 경련도 조금씩 진 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련이 진정되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살이 다 익어버린 모양인데? "으허, 헉! 하아악! 으악!"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도 누울 수가 없다. 땅에 닿는 부분이 너무 아팠 다. 나는 덜덜 떨면서도 일어나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야 땅에닿는 부분이 적어지니까. 일어나는 동안 땅을 짚은 손바닥이 그대로 찢어지 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앉고나자 나는 두 손을 앞에 모아 덜덜 떨었 다. 누가 날 보면 알콜 중독이라고 하겠군. 나는 턱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빨이 부서져라 부딪혀서 웃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앉은 채로 앞에 있는 여자가 배에서 화살을 뽑아내려고 하는 모습 을 감상했다. 우습지도 않군. 이런 상황에서 이런 자세로 구경이라. 으 헉, 헉. 침은 계속 흘러내려 가슴이 차가웠다. 그 여자는 화살을 뽑아내어 땅에 집어던졌으나 그 사이에 옆구리에 다 시 한 방 맞고 말았다. 여자는 화살을 땅에 집어던지는 자세에서 그대 로 균형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앉은 채 그 모습을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은 계속 떨리고 미칠듯이 아파왔다. 여 자는 땅에 쓰러진 채 땅을 박박 긁었다. "됐다! 박쥐들이 물러간다!" 아, 아하, 저 여자가 쓰러지니까 박쥐들도? 발자국소리, 쾅쾅거리는 이 엄청난 발자국소리는 아마 에델린의 것이겠지. 에델린. 트롤 프리스티스 면 어때요. 저 여자 명복이나 빌어줍시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당신이 내 명복을 빌어줘도 화내지 않겠어. 아니지. 내가 어떻게 화낼까요. 당 신은 신도 흡족해할 경건한 트롤. 난 신학에는 관심없는 인간 개구쟁이. 이윽고 내 어깨에 닿는 손. "괜찮아, 후…" "크아아아아아!" 어깨가 찢어지는 느낌. 잡지마! 제, 제기랄, 나, 날 죽일 셈이야? 명복 어쩌고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곧장 죽이냐?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엄마 찌찌." "다 큰 녀석이 징그럽게." 나는 어머니에게 안겨있었다. 분명 17세의 나로서 커다란 덩치 때문에 어머니에게 안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안겨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유 방을 만지작거리며 칭얼거렸다. "난 죽을 뻔 했어, 엄마. 벼락을 맞았다고." "그러니? 그래도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싫어. 벼락하고는 같이 놀고 싶지 않아." 그러자 옆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도 그렇게 좋은 신세는 아니다, 아들아." 돌아보니, 아니,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냥 보였다. 어쨌든 아버지는 아 무르타트의 앞발에 깔린채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르타트는 우리 아버지를 밟은 채 크게 웃으며 외쳤다. "크하하하! 10만셀! 10만셀을 줄테니 이 놈을 데려가라!" 그러자 아버지는 왼손으로 턱을 옮기며 말씀하셨다. "뭐라고? 천만에. 내 주정뱅이 아들이 겨우 10만셀에 날 되찾아갈 것 같은가?" 물론 당연하다. 난 어머니에게 안겨있다. 잠시 동안은 아버지를 아무르 타트에게 맡겨둬도 무방하리라. 아무르타트는 더 크게 웃었다. "우하하하! 그렇다면 100만셀! 100만셀이다!" 귀찮아 죽겠네. 아무르타트는 너무 시끄럽다. 그러고보니 그 머리에는 제미니의 얼굴이 달려있다. 흠, 시끄러운 계집애. 항상 날 괴롭히는군. 제미니는 엉덩이에 착달라붙고 허벅지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멋진 가죽 바지를 입고 있다. 이루릴인가? 난 이루릴에게 안겨 있다. 나는 이 루릴의 유방을 만지고 있었다. 이루릴은 웃으며 룬어로 된 자장가를 불 렀다. "잘 자라, 잘 자라. 내 귀여운 아가. 처녀가 애를 낳을 때까지." 룬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곯아떨 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엄마의 유방은 기분좋게 내 볼을 누르고 있 다. 마치 바위처럼 단단한 유방…. "후치?" "으아아아!" 트롤의 얼굴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잠시 얼이 빠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이었다. 박명의 하늘에 검푸른 빛깔이 서서히 엷어지고 있었다. 높 고 굵은 침엽수들의 검은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조각들은 제각기 다른 색깔. 사그라들어가는 모닥불에서는 붉은 불똥만이 검은 잿더미 사 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카알은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다가 날 쳐다보았 고, 바로 옆에선 샌슨이 그 나무에 등을 기댄채 롱소드를 닦던 손을 멈 추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릴은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바닥의 이 끼들 사이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실루엣으로 보였다. 아마 메모 라이즈를 하는 듯했다. 아이고, 맙소사. 조금전의 꿈이 떠올라 이루릴을 바라볼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다시 트롤의 얼굴이 보였다. 에델린이었다. 에델린은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누 워있었던 장소는 아무래도 에델린의 무릎 위… 설마! "기분은 괜찮아요?" 에델린의 질문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설마 난 에델린의 유 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샌슨을 돌아보았고, 그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외면하면서, 입가에 치미 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저 얼굴. 유피넬에 맹세코! 난 이제 고향에 돌 아가면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트롤에게 안겨 그 찌찌를 만지작거렸다니! "어, 아, 예. 좋은 아침이죠?" 내 대답에 에델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휘휘 돌리며 어 떻게든 말을 이으려 애썼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나 벼락을 맞았는데," 그러고보니 온 몸이 말짱하다. 나는 손바닥을 살펴보고 팔을 살펴보고 얼굴을 만져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카알이 대답해주었다. "에델린양이 자넬 치료했네." 아, 그런가? 성직자의 신성치료. 카알이 어제 그렇게 설명하고 감탄했 지만, 난 솔직히 오늘 아침의 내 상태에 더 감탄했다. 에델린은 정말 엄 청난 성직자인가봐. 나는 감탄하는 표정으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아, 감사합니다. 에델린." "천만에요. 후치가 벼락을 막아준 덕분에 우리 모두가 살았는데요. 정 말 용감하시군요, 후치. 그 엄청난 벼락에 온 몸이 밀리면서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다니. 저기, 저 자취 보이세요?" 에델린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쟁기로 갈아엎은듯이 풀이 마구 헤쳐지 고 땅이 파인 자국이 두 줄로 나 있었다. 그 폭은 대략 내 어깨넓이 정 도. 라이트닝 볼트에 밀리면서 내 발이 남긴 자국인가? 길이는 약 10 큐 빗. 세상에, 내가 저렇게 밀렸었나? 내가 돌았나보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죠? 엄청난 고통이었을텐데 끝까지 다 막아내다니, 정말 놀라워요." "원래 번개하고 친하거든요." 내 대답에 에델린은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무서운 확인의 순간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질문했다. "저, 에델린.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뭔가 당신에게 실례를…." 에델린은 빙긋 웃었다. 삐죽삐죽한 이빨이 멋있군. "제가 엄마 같았나보죠?" "푸헥헤헤헥헤헤!" 샌슨은 포복절도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절절 흔들면서 미친듯이 웃 었다. 카알도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나는 땅을 파고 싶었다. 더도 말고 내 몸 하나 완전히 들어갈 정도로만. "실례…랄 건 없어요. 전 신의 지팡이고, 신께 순결을 맹세하지만, 저 와 당신은 다른 종족이잖아요. 당신이 고양이를 쓰다듬는다고 고양이가 당신을 치한으로 몰지야 않겠죠. 게다가 당신은 꿈 속이었고." "죄, 죄송합니다!" "아니, 말했잖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에델린은 그야말로 푸짐한 미소를 지으며 너그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래, 에델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난 아니다. 부끄러워 죽겠 다. 상대가 보통사람이라도 부끄러워 미칠 일인데, 트롤인데다가 프리스 티스 아닌가? 트롤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종족이니까 괜찮다고 하겠지 만, (사실 그것도 별로 괜찮은 일이 아니다.) 내가 성직자의 유방을 만 지작거렸다니! "그거? 그건 예지몽도 아니고, 신몽도 아니고, 한 마디로 개꿈이구먼." 나는 일행과 꽤 멀리 떨어진 위치까지 카알을 끌고가서 내 꿈에 대해 질문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카 알은 빙긋 웃으며 간단히 개꿈이라고 말했다. 내 얼굴을 살피던 카알은 좀 더 설명해야 될 필요를 느낀 모양이다. "흠, 그건 그저 자네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일 뿐이네. 아무르타트에 깔 린 아버지를 보면서 외면해버리는 아들, 맞나? 그건 자네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죄책감 때문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지. 자네 아버지 는 아무르타트의 포로로 고생하고 계시니, 자넨 이 여행을 도저히 즐길 마음이 없을거야. 하지만, 생전 처음 나온 여행이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스스로가 싫어지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그런 영상 을 그리는 것일밖에. 별 것 아닐세. 자네가 순수해서 그런 것일세." "그, 그럼 아버지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이죠?" "예끼! 그럼 자네가 샤먼(Shaman)이게?" 휴, 안심이군. 하긴 내가 무슨 재주로 미래를 예견하는 꿈을 꿀 것인 가. 하지만 카알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네가 세레니얼양에게 안겼다는 말은, 음. 그건 자네가 아직 그 정도로 성숙미를 풍기는 여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대단히 인 상적이었겠지." "카아알…." 혹시 중요한 꿈인가 싶어 속속들이 말한게 실수다. 카알은 유연하게 설명을 해나갔고 나는 다시 땅을 파고 싶어졌다. "세레니얼양의 매력이라는 것은 대단히 독특한 종류의 것이지. 인간에 게선 찾아보기 힘든 종류야. 사실 인간 여자에게서 그런 매력이 나온다 면 그 여자는 보통 드세다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되겠지. 세레니얼양은 당당하고, 침착하고, 몸매는 마치 잘 짜인 조각 같지. 자네 취향엔 맞지 않을 거야. 보통 우리는 여성을 고양이에게 비유하지 말에게는 비유하지 않네. 말은우아하고, 날렵하고, 어쨌든 상당히 아름답지만, 너무 탄탄 하고 당당해. 세레니얼양이 그러하지. 마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대 인의 모습이지. 그래서 자넨 무의식중에 그런 위압적인 매력을, 안겨서 가슴을 만지는 영상, 즉 친숙하고 다정한 느낌으로 바꿔보려 했던 것일 게고. 역시 별 것 아닐세. 자네가 워낙 저런 형태의 매력에 익숙치 않아 서 그럴 뿐이네." "카아알… 제발… 이루릴은 귀가 밝다고요." 카알과 내가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긴 하지만, 난 이루릴 의 무서운 청각을 잘 알고 있다. 레너스시의 감옥에서 이루릴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우리가 속삭이는 말도 들었고, 어젯밤에는 박쥐들이 내는 초음파도 들었다. 나는 이루릴쪽을 훔쳐보았다. 이루릴은 에델린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 고 있을 뿐 별로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카알도 내 눈길을 보더니 싱긋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뱀파이어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망친 것 같아." "흐음…."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5. "가요!"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자넨 너무 흥분하는 것 같은 데?" "갚아줄 게 있으니까! 그 뱀파이어, 내게 번개를 날렸어, 갚아주겠어 요!" 샌슨은 나에게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하지만 그 덕택에 아름다우신 프리스티스의 무릎에서 잠들 수 있지 않았냐?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세상에, 프리스티스의 그걸…" "죽일 거야!"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칼라일 영지로 들어가기로 했다. 에델린은 우리의 말에 대단히고마워했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카알 에 의하면 저런 현상, 하나의 신의 힘만이 지배하는 땅이 지상에 나타 나는 것은 절대로 안되는 일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것이 질병의 신 게 덴이라면 대륙 전체로 전염병이 퍼져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 개인으로서도 갚아줄 일이 있다. 그 벼락은 제법 뜨거웠어. 그리고 덕택 에 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스캔달을 일으켰다고. 에델린은 오늘 구름을 부르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나돌아다니지 못하 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작열하는 태양빛이 그대로 내리쬐 었다. 가을볕에 살갗 타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맙소사, 이건 숫제 쏟아지는 폭포처럼 만물을 녹일듯이 퍼부어지는 햇빛이다. "저거 아지랑이 같은데?" "아지랑이 맞아." "…." 이 가을 들판에 아지랑이라.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샌슨과 나는 갑옷 안에 받쳐입던 두꺼운 셔츠도 벗어버리고 얇은 속옷 위에 하드리더 를 입었다. 이루릴도 자켓을 벗어두고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올렸다. 새 하얀 팔이 내 눈을 붙잡으며 다시 오늘 새벽의 꿈이 떠올랐다. 잊자! 빨 리 잊어야 해! 하지만 나는 어느새 멍한 얼굴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세 개나 풀어버리 는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뽀얀 앙가슴이 내 시선을 붙잡아매었 다. 이런, 내가 샌슨을 닮아가나? 이루릴은 단추를 풀다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더, 덥지요? 이루릴?" "그렇군요." 나와 샌슨이 정면에 섰다. 말들을 천천히 걷게 하며 밭을 가로질러 칼 라일 영지의 입구쪽으로 다가갔다. 샌슨은 말없이 밭에 피어있는 작물을 가리켰다. 말라비틀어지고 썩어들어가는 작물들. 가을 들판의 풍요로움이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살. 무엇보다 끔 찍스러운 것은, 그림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난 그림자가 없는 얼굴을 보는 것이 이렇게 이상한 줄 몰랐다. 샌슨이 마치 샌슨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납작하고, 한결같은 색깔이다. 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괴로워 앞만 바라보았다. 영지 입구 양쪽에 가로수가 나타나다가 그 뒤로 차츰 마을의 건물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먼지가 지독하게 피어올랐고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에 그대로 먼지가 달라붙었다. "끔찍하게 덥군."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샌슨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마을 안으 로 들어섰다. 일행의 맨 뒤에서 걸어오던 에델린이 천천히 기도에 들어 갔다. "프로텍트 프럼 디바인 파워(Protect from Divine Power)." 에델린이 기도를 끝내자 곧 우리 주위의 어떤 막 같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직경 약 20큐빗의 반구형 막으로, 비누거품처럼 어떻게 보면 아 무것도 안 보였다가 어떻게 보면 그 표면을 흐르는 빛이 보였다. 에델린은 두 손을 다시 내리며 말했다. "이제 다른 신의 힘은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나는 당장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방어막이무슨 효과가 있는지 는 모르겠지만 일단 더위가 상당히 가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영이 전 혀 없어서 목과 얼굴 색깔이 똑같아서 괴이하게 보이던 샌슨의 얼굴이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카알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럼, 이 막을 벗어나면 우리는 위험해지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행동에 장애가 심할테니 안되겠지요. 이 건 다른 기도를 위한 준비입니다." 에델린은 다시 기도에 들어갔다. 그녀의 거대한 손이 빛으로 물들더니 그녀는 우리 각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흠, 땅에 선채로 간단히 말 위 에 있는 내 머리에 손을 얹는군. "에델브로이의 이름으로 그대를 축복합니다." 흠, 뭐가 달라졌지?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샌슨은 어깨를 조금 움츠리 며 축복을 받았고 카알은 경건하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에델린의 축복을 받았다. 에델린은 이루릴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루릴 은 축복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에델린은 말했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며 그랑엘베르의 총애를 받으시는 엘프께는 에델 브로이의 축복이 필요 없으시겠지요. 어쨌든 여러분은 이제 대략 3시간 가량은 게덴의마수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병에 걸리지는 않 을 겁니다." "아, 네." "그럼, 수색을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다시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말이 걸을 때마다 풀썩거리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건물의 색의 부조화는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 지경이다. 어디를 보아도 똑같은 색깔. 게다가 오늘은 건물 벽이 마치 백열하여 불타오르는 듯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그저 하얀 색으로 보였다. 우선 우리는 고함을 지르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 다. 그래서 건물마다 들어가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예상에 의하면 이곳엔 질병이 판치고 있을 것이다. 아픈 사람들이 집을 떠날 수가 있을까? 카알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 질병이라…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신전이나 성, 공회당 같은 건물 이겠지. 그런 곳에서 병자들을 수용했을 거야." 우리는 마을 중앙의 좀 커보이는 건물들이 모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 다. "까아옥! 까르르, 깍!" 까마귀 하나가 우리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나는 흠칫해서 그 까마귀 를 보았으나 한 마리 뿐이었다. 그 놈은 건물 처마 위에 앉더니, 작열하 는 태양빛 속에서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당당한 자세로 우리 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훠이! 꺼져!" 고함을 질러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분나쁜 시선을 한 번씩 보낸 다음 까마귀를 무시하며 걸어갔다. 건물들 중앙으로 공터가 보였고 거기에는 작은 가건물과 함께 우물이 있었다. "음?" 샌슨이 뭔가를 발견했다. "우물 뒤에, 꼬마인가?" 나도 그 때 우물 뒤에서 머리를 빠꼼 내밀었다가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 을 보았다. 왜 저러지? 나와 샌슨은 서로 마주 보았다. 나는 앞으로 향 해 말했다. "이봐, 거기 누구니? 우린 널 해치지 않아." 잠시 후, 다시 머리가 천천히 올라왔다. 원래는 금발이었을듯한 머리가 퇴색한채로 마구 흐트러져 흐르고 있는 계집아이였다. 나이는 대여섯살 이나 되었을까. 원래 귀여웠을 얼굴이지만, 음영이 하나도 없는 그 얼굴 은 하얀 가면 같았다. 소녀는 쭈볏거리며 우물 옆으로 돌아나왔지만 우리 쪽으로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 소녀는 여차하면 옆의 골목으로 뛰어들듯한 모습이었다. 그 때 카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애야, 안심하렴. 이 마을에 병이 돌고 있지? 우리는 그것을 고치러 온 사람이야." 그 말을 듣자 골목길과의 거리를 재던 소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카알은 말에서 내리더니 천천히 그 소녀에게 걸어가려고 했으나 카알이 다가가자 소녀는 물러났다. 그 때 나는 우물 옆에 놓인 두레박을 보았다. 두레박에는 물이 반도 안되게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물이 반도 안되게 담긴 물통이 보 였다. 아마 저 소녀의 힘으로는 이 정도밖에 끌어올리지 못했겠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두레박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녀는 마치 나와 검투시합이라도벌이듯이 내 움직임에 따라 둥글게 움직였다. 나는 느 린 동작으로 잘 보라는듯이 두레박을 들어올려 우물 속에 넣었다. 그리 고는 우물물을 길어 물통에 쏟아보여 주었다. 소녀의 얼굴에 불안이 조금 가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우물물 을 길어올려 유쾌하게 물을 쏟았다. 물통은 단번에 찼다. "내가 들어다줄께. 어디로 가면 되지?" "신전." "알았어. 난 후치야. 넌?" "슈." "슈? 좋은 이름이야. 예쁘구나. 예절도 밝고. 저기 잘 되지도 않는 미 소를 짓느라 애쓰는 아저씨는 카알이야. 그리고 저기 먹성좋게 생긴 입 을 가진 아저씨는 샌슨이야." 카알과 샌슨은 허허 웃어버렸고 슈도 덩달아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그 애의 눈이 카알과 샌슨을 따라 움직이다가 이윽고 이루릴 에게 머물렀다. 슈의 눈이 커졌다. 이루릴을 미소를 지으며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루릴." 슈의 얼굴이 대단히 환해졌다. 이루릴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다가왔지 만 카알의 경우와는 다르게 슈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두 발자국 걸어갔다. 이루릴은 허리를 굽혀 슈의 눈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슈? 내가 안아줄까?" 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루릴은 슈를 안아올렸다. 허, 아무리 낯을 가리지 않는 아이라도 조금 경계할 법한데 슈는 전혀 불안감없이 이루릴의 목을 감았다. 그 때 나는 갑자기 고민에 빠졌다. 일행의 맨 뒤, 앞으로 나서지 않고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는 에델린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이 아이, 트 롤의 모습을 보면 너무 놀라지 않을까? 아마 에델린도 그 때문에 앞에 나서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루릴은 슈를 안은채 그대로 에델린에게 걸어갔다. 아이고, 그건 안돼! "슈? 여기는 에델린." 슈는 에델린의 엄청난 덩치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슈는 엄지손가락을 빨며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후드를 그대로 눌러쓴채 말했다. "안녕, 슈. 반갑구나." 슈는 그 목소리에 더 놀라는 표정이었다. 입을 갑자기 벌리느라 길다 란 침이 입술과 엄지손가락을 이었다. 갑자기 슈는 고개를 돌리더니 후 드 아래의 얼굴을 보았다. 하긴 이루릴에게 안겼어도 여전히 에델린보 다는 한참 아래니까 간단히 그 얼굴을 볼 수 있다. "트롤?" 슈의 얼굴이 허옇게 바뀌며 그 애는 비명을 지를듯이 입을 벌렸다. 그 러나 그 때 에델린이 천천히 후드를 뒤로 당겼다. 슈는 겁에 질린 얼굴 로 에델린과 마주보고 있었고 에델린은 무표정하게 슈를 마주보았다. 차츰, 슈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이윽고 미소마저 떠올랐다. 그 때 에델 린이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루릴은 에델린에게 슈를 내밀었고, 슈는 에델린에게 안기자 아래를 보더니 황당한 눈이 되었다. 너무 높으니까. 슈는 에델린의 목을 꼭 껴안더니 그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에델린이 입 모양만으로 이루릴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말소리를 직접 내어 말했다. "뭐가요?" "이 아이, 절 보면 겁먹었을 거예요. 간신히 감화력을 사용해서 친숙해 지긴 했지만, 왜 그러신 거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이 우리의 동료라는 것은 저 아이도 척 보면 알텐데요?" 에델린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이루릴은 자신이 침착하 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모두 이성적인 줄 안다. 하긴, 어제 이루릴은 처음 보자마자 에델린에게 아무런 불안도 없이 다가갔다. 상 대가 프리스티스이니 뭐가 겁나랴 하는 태도지만, 인간이라면 그렇게 아무 불안없이 행동할 수 있을까? 불안이라는 것은 결국 경계, 자기보존 의 감각 중에 하나이다. 엘프는 자기보존의 감각이 없는 걸까? 엘프는 필요하다면 아무 불안도 없이 자살할까? 나는 골치아픈 생각을 관두고는 물통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슈? 안내해야지. 어디로 가지?" 슈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주위의 건물보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언덕 위로 조금 큰 건물이 보였다. 누구의 신전일까? 에델린은 신전의 벽에 붙은 문양을 살피더니 말했다. "그랑엘베르의 신전이군요." 우리는 신전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로 에델린이 가슴에 안긴 슈에게 질문했고 우리는 모두 말에서 내린채 말을 끌고 가며 옆에서 들었다. "슈? 어른들이 저기 있니?" "응. 어른들 모두 아파. 슈가 물을 가져다 머리를 닦아줘도 계속 열이 나." "슈가 계속 여기서 물을 날랐니?" "응. 나 빵도 나르고 물도 날라." 나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 조그만 아이가 병자들의 간호사라고? 저 조그만 손으로 어떻게 병자들의 음식을 날랐단 말인가? "어제 신전의 음식이 다 떨어졌어. 그래서 나 물만 나르다가 오늘 아 침에 빵도 날라. 나 빵을 들고 달려가다가 넘어졌어. 무릎이 아파도 슈 는 참았어. 어른들이 너무 많아. 나 손가락 세 번이나 날랐어." 손가락 세 번? 아, 10번씩 세 번이란 말이군. 이 아이가 저 신전에서 마을까지 서른 번이나 왔다갔다 했단 말이지? 에델린도 목이 메인 목소 리로 말했다. "착하구나, 어딜 다쳤니?" 슈는 치마를 걷어올려 다친 무릎을 보여주었다. 에델린은 조용히 그 커다란 손으로 상처를 쓰다듬었고, 그러자 상처는 곧 없어졌다. 슈는 환 한 표정이 되었다. "아프지 않은 어른은 없니?" "검은 누나는아프지 않아. 오늘은 안보여." 검은 누나? 혹시 그 뱀파이어인가? 에델린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은 누나는 누구지?" "몰라. 검은 누나야. 매일 까마귀랑 놀아. 슈를 도와주지도 않아."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어?" "아이들이 다 없어졌어." "응?" "아이들은 모두 없어졌어. 그리고 어른들은 모두 아파. 아이들이 없어 져서 그러가봐." 멋진 삼단논법이긴 한데. 에델린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들이 없어지다니. 왜 없어졌 다는 말인가? 에델린은 말했다. "신전에 가서 어른들에게 물어보죠." 그러자 카알이 말했다. "에델린양은 좀 뒤에 오시오. 다른 사람들이…" "알겠어요." "네드발군, 퍼시발군. 먼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살펴보도록." 나와 샌슨은 말에 올랐다. 우리는 신전쪽으로 달려갔다. 신전은 불타오 르는 백색이었다. 번쩍거려서 금도금을 한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 요 괴스러운 햇빛의 장난이다. 신전을 두른 낮은 담에 도착했다. 신전 뒷쪽은 그대로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전의 정문은 간단한 나무문이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눈길을 끄는 것을 발견했다. 낮은 담장 주위로 얕은 구덩이가 빙 둘러 파여져 있고 거기엔 액체가 고여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둥둥 떠다니는 쥐의 시체도 보였다. 말에서 내려 바라보니 그 액체는 기름이었다. 기름 표면 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샌슨. 이건?" "격리시킨 것 같은데. 방역조치야. 잠깐, 그럼 우리도 들어가면 안되는 것 아닐까?" "흠. 우린 상관없을거야. 아까 에델린이 우릴 축복했잖아. 그리고 사실 여기는 신의 장난이 펼쳐져서 이렇게 된 것이잖아. 이런 방역이 통할만 한 곳이 아니지. 어차피 슈도 계속 들락거렸을 거야." "흠, 알겠어. 그러니까 저렇게 해봤다가, 소용이 없어서 기름을 그대로 방치해버린 것이군." 결정을 내린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넓은 뜰이 펼쳐져 있 었고 그 안쪽으로 몇 개의 건물이 보였다. 말에서 내린 우리는 제일 큰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 때였다. "정지… 물러가라! 쿨럭, 쿨럭쿨럭!" 고함소리. 피를 토하는듯한 쿨럭거림이 이어졌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 서 손바닥을 눈썹에 붙이고서야 앞의 정문 기둥에 기대앉은 사나이가 보였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6. 끔찍했다. 건물 안쪽과 바깥이 똑같은 색깔이었으며, 그래서 기둥에 기대어 앉은 그 사나이의 모습도 전혀 그늘이 없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게 그렇게 끔 찍스러울 수가 없다. 그 사나이는 하드 리더를 입고 있었는데 지독하게 상해 있었다. 곳곳에 칼자국과 찢어진 자국이 보였다. 땅에 늘어트린 그 사나이의 손에는 할 버드가 들려 있었지만 그 사나이는 도저히 할버드를 들어올릴 힘은 없어 보였다. 샌슨은 되도록 정중하게 말했다. "칼라일의 경비병이십니까?" "쿨럭, 쿨럭쿨럭, 다, 당신? 당신, 사람인가?" "여행자입니다. 도시의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그, 그럼, 당신도 조만간 쓰러질거야. 쿨럭, 멍청하긴. 이, 이상하면 그대로 달아났어야지, 쿨럭, 멍청하게 왜 들어와? 허, 세상에는 바보가 너무 마, 많아." "예?" "보라구, 나, 나도 모험가요. 이곳이 어떤 땅인지 아시…쿨럭! 카악!" 남자는 갑자기 앞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땅에 얼굴을 박고 미친듯이 기 침을 토했다. 핏덩이가 그대로 튀어나와 남자 앞의 땅을 붉게 물들였다. 우리는 달려가서 그 남자를 부축했다. 그 남자를 다시 기둥에 기대게 하자 그 남자는 졸도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다, 당신들, 곧 내 꼴이 돼. 허, 허허허, 아마 꿈도 못꿀걸. 여, 여기 는…" "세이크리드 랜드죠." 남자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남자는 갑자기 샌슨의 팔을 꽉 움켜쥐었 다. "다, 당신 그걸 알고 들어왔나? 그럼 바, 방법이 있단 말이지?" 머리회전이 빠른 남자군. 샌슨은 웃으며 댓구했다. "저희 동료들 중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가 계십니다. 그 분이 저희를 축복해서 여기 들어올 수 있었죠." "프, 프리스티스? 아하! 성직자! 그, 그거 다행이시군, 크하!" 남자는 비웃는 태도였다. 그는 딸꾹질까지 해가며 웃었다. 그는 갑자기 몸에서 힘을 쭉 빼더니 말했다. 이젠 좀 침착하게 말했다. "나, 모험가라고 하지 않았소. 내 동료 중에도 성직자, 마법사가 있소. 우리, 나흘전에 이곳에 왔소. 우리 마법사는 이곳이 세이크리드 랜드라 고 말해주었고 뭔지도 설명해주었소. 크험, 쿨럭! 아마 당신네 성직자도 그랬겠지? 하, 우리도 방어막을 친 다음 들어왔소. 제기랄. 그냥 떠났 어야 했는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결국 우리는 병에 걸려버렸어. 우 리 동료들도 다 쓰러져 버렸어. 저 안에 있는 이 빌어먹을 영지의 시민 들과 함께." "시민들도 여기에 있습니까?" "그렇소. 최소한 살아있는 사람은. 우리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체 는 모두 치워버리고 산 사람은 여기로 옮겼소. 쿨럭, 아마도 그 와중에 우리들도 병이 걸린 모양이야." 그래서 집들이 모두 비어있었구나. 샌슨은 감탄한 어조로 칭찬했다. "훌륭하십니다." 모험가라는 사람들은, 악명도 높지만 정말 재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 일한 조력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 마을 전체가 병에 걸려 쓰러지는 상 황, 혹은 몬스터에게 포위라도 당하는 상황이면 그 때 어떻게 다른 마 을로 연락을 보낼 것인가. 바로 이런 때 숙련된 모험가들, 단련된 전투 능력과 수많은 기술과 임기응변의 능력을 가진 모험가들의 등장은 마을 전체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험가는 항상 어느 마 을에서든 환대받는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이들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상대 는 신의 장난이니까. "훌륭할 것 없소. 어쨌든 왠 일인지 그 다음날부터 계속해서 구름이 꼈어. 우리 마법사가 말하길 구름이 끼는 동안은 질병이 더 확산되지 않 을 거라더군. 헬카네스의 기운이 어쩌니 하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것도 글러버렸어. 오늘 드디어 그 고맙던 구름도 사라졌소. 사람들은 급속도 로 악화되었지. 제기랄, 오늘 해 뜨고 반나절만에 14명이 죽었단 말이 오! 쿨럭! 나도 어제까진 어느 정도 돌아다닐 기운은 있었지만 오늘은 이런 꼴이오. 제기랄, 난 폣병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비참하게도 꼬 마에게 부탁해 물을 길어오게 했소." "슈 말씀이군요." 내 말에 그 모험자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애를 만났어? 이상한 일이지. 쿨럭, 애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아. 하지만 그 애 이외에 다른 애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애만 남았어. 이 안 에 있는 90여명의 사람들을 그 애가 먹여살리게 됐어." "애들이 사라졌다고요?" "그래. 이상해. 언제 어느새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잠시 눈에 안들어온다 싶다가, 찾아보면 없는 거야. 쿨럭, 우리는 환자를 옮 기느라 너무 바빠서 병에 걸리지 않는 아이들은 별로 신경쓰지 못했어. 그리고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아이들을 주의해 보게 되었을 때는 이미 저 슈라는 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그래서 우린 그 때부터 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슈는 사라지지 않더군. 하지만, 우리 마법사가 말하 길, 하아, 하아, 이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면, 질병의 힘이 약해지는 흐린 날씨에는 아이들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더군. 하지만 이제 날이 맑아졌으니…" 샌슨은 안심시키려는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들이 말씀드린 프리스티스가 바로 그 구름을 불러들인 분입니다. 대단한 권능을 지니신 분입니다." 모험자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뭐, 뭐요?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럼 왜 이제껏 구름만 불러들인 거요! 왜, 왜 들어오지 않고?" "그 분과는 어제 저녁에 만났습니다. 그 분은 혼자라서 들어오시지 못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만나서 오늘 들어오시게 된 것이죠." 그 남자는 다시 희망을 되찾았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 분은?" "슈를 데리고 곧 도착하실 겁니다. 잠시 후면…" 그 때 남자의 얼굴이 우리 뒤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루릴과 카알, 그리고 그 뒤로 슈를 안아든 키 큰 에델린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이 급변했다. 이런, 미리 트롤이라고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남자는 고함질렀다. "트, 트롤? 그럼 미드 그레이드의 '치료하는 손' 에델린이오? 오! 감사 합니다! 테페리여, 감사합니다!" 샌슨과 나는 또 멍청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에델린은 미드 그레이드에서 상상 외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하긴 트롤 프리스티스라니, 도저히 소문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겠지. 하지만 알고보니 에델린은 그 특이한 개성 뿐만 아니라 놀라운 편력을 통해서도 명성이 높았던 모양이다. "살았어! 우린 살았어! 에델린, 에델브로이의 따님이!" 터커 올햄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오도방정을 떨고 있었다. 에델린이 그를 치료했던 것이다. 그 남자는 펄펄 날아다닐 정도로 기운을 되찾았 다. 터커의 안내로 우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으음…" 무거운 공기. 뜨겁고, 묵직하다. 마치 갑자기 목욕물 속에 들어온듯한 답답함과 뜨거움이 신전 안의 공기에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바깥과 똑같은 밝기 때문에 천장이 없나 살펴보게 되었다. 하지만 천장은 분명 히 있었다. 그런데 바깥과 밝기가 똑같다. 넓은 공간은 아무래도원래 예배당이었던 모양이다. 원래 열을 지어 놓여있었을 긴 의자는 모두 벽으로 치워져 있었다. 의자를 다 치우고 병자들을 눕힌 것은 터커와 그 동료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넓은 공간에 지금 병자들이 가득 누워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병자들, 빼빼 마른 사람은 아마 영양실조나 비슷한 무엇, 그 옆의 팅팅 불어버린 사람은 콩팥이나 간이 안좋은 것이겠지. 온 몸에 붉은 반점이 가득 나서 신음하고 있는 천연두 환자. 검은 반점을 가진 사람은 페스트 환자인가? 진물을 흘리며 썩어가는 팔다리를 부여잡은채 몸을 뒤틀고 있는 피부병 환자의 모습도 보인다. 피부병에 걸린 처녀는 수치심 같은 것은 예전에 버렸는지 옷을 거의 벗어버린채 긁고 있다. 엉덩이에 말라붙은 피똥이 가득한 저런 처녀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은 없 겠지. "허억…" 나는 신음을 토하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예배당 입구의 기둥을 붙잡았 다. "증세가 제각각이오. 아무래도 각자 다른 병에 걸리는 모양이야. 빌어 먹을, 우리 마법사는 여자라고는 손목도 못잡아 본 순진한 녀석인데, 세 상에 성병에 걸려버렸어. 믿을 수 있겠소?" 샌슨은 헛기침을 하며 눈으로 에델린과 이루릴을 가리켰다. 터커는 머 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 죄송합니다. 에델린. 워낙 황당한 일이라서." "괜찮습니다. 어디 보자…" 에델린은 그 많은 병자들을 보자 좀 당황한 표정이었다. 카알이 말했 다. "원인을 찾아 퇴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증세가 갑자기 악화 되고 있다고 하니 이들이 더 급하군요. 올햄씨, 당신의 동료들을 가르쳐 주시오. 당신들은 모험가이니, 훨씬 도움이 될거요. 그러니 먼저 당신 동료들부터 치료합시다." "아, 예!" "그리고 네드발군과 퍼시발군은 식량 재고가 떨어졌다고 하니 일단 식 량과 물을 좀 나르도록. 약초와 수건 등도 챙겨오게. 세레니얼양께서는 저와 함께 에델린양을 도웁시다." "알겠습니다." 나와 샌슨은 신전을 뒤져 곧 커다란 수레와 물통들을 찾아내었다. 나는 샌슨을 수레에 태우고 마을을 질주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수레를 세워두 고는 우리는 주위의 집을 뒤졌다. 밀가루, 옥수수가루, 햄, 베이컨들. 신선한 야채를 못구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쨌든 수레를 가득 채웠다. "그런데 이 음식들은 오염되지 않았을까?" "카알의 설명대로라면 이 도시 공기 전체가 오염되었을거야. 어떻게 끓여 먹이든가 해야겠지만, 별로 소용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런데 우리는 왜 까딱없지? 아, 참! 에델린에게 축복을 받았지." 그리고 우리는 물통에 물도 채운 다음 다시 언덕을 내달려 올라갔다. 슈는 산더미같은 짐을 실은 수레를 이끌며 달려가는 내 모습을 보더니 감탄했고, 터커는 아에 기절할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 혹시 하프 오우거 쯤 되나?" 크악! 하프 엘프나 하프 오크는 들어봤어도 하프 오우거는 처음 들어보 겠네. 그게 가능하냐! 나는 화난 표정으로 샌슨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우거는 여기 있고! 난 순진무구한 17세 꿈많은 소년!" 딱! 오래간만이군. 으음, 정수리야… 신전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에델린과 카알, 이루릴은 악전고투 중 이었다. 에델린은 정신없이 큐어 디지즈(Cure Disease)를 써대고 있었고 카알과 이루릴은 우리가 가져간 약초들을 꼼꼼하게 검사해서 각양각색의 냄비에 끓이거나 졸이거나 했다. 카알의 말에 의하면 놀랍게도 치료하고 지나갔던 병자에게서 다른 병 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사병에 걸린 사람을 간신히 진정시켜 놓으니 곧 동상에 걸린다는 식이다. 그 말을 듣자니 웃음도 안나온다. 결국 카알은 기진맥진한 어투로 말했다. "일단 급한 환자는 다 봤으니, 에델린양. 이 신전 전체에 게덴의 힘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그 동안 저는 꼼짝을 못합니다." "꼼짝을 못한다고요?" "그렇습니다." "할 수 없지요. 그렇게라도 해 주십시오. 격리조치를 해서 이런 악순환 은 막아야 되니까. 그렇게 해 주시면 저와 세레니얼양이 어떻게 해보겠 습니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신전 전체에 서 중앙이 되는 위치를 찾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리를 잡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 에 들어갔다. 당장 느낄 수 있었다. 신전에 가득하던 열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병 자들의 안색도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우리는 일단 신전 안을 돌아다 니며 시체들을 찾았다. 14구의 시체들. 터커의 말에 의하면 오늘 오전에 죽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썩어가고 있나? 샌슨과 나는 시체가 부 서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들어날라야 했다. 속이 다 뒤집힐 것 같다. 터커의 동료들도 하나씩 일어났다. 터커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만다!" 터커의 동료인 다갈색 머리의 프리스티스는 마구 갈라진 입술을 쓰다듬 으며 일어났다. 현기증이 도는지 주위를 한참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물을 한 그릇 가져다주자 순식간에 비워버리고는 한 그릇 더 달라 고 말했다. "난 테페리를 모시는 사만다 크레틴이야. 넌 누구니?" 난 물을 다시 떠다주며 말했다. "어, 전 후치 네드발. 여행자입니다." "그러니? 여기 우연히 들렸다가 우릴 돕게 된 모양이구나. 착한아이 야. 하지만 좀 어리석은 행동이었어. 여긴…" "세이크리드 랜드죠." 사만다는 눈을 크게 뜨더니 날 바라보았다. "너, 경력있는 모험가니?" "에엑? 천만에요." 터커가 웃으며 에델린을 가리켰다. 사만다는 기도하고 있는 트롤을 보 더니 흠칫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간을 모으고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 였다. "아, 미드 그레이드의 치료하는 손이시구나. 그럼 그 먹구름도 설명되 는군." 사만다는 고개를 갸웃갸웃 하면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 는 주위에 있는 병자들과 그들을 돌보고 있는 카알과 이루릴의 모습도 보았다. "어머나… 저 분들도 네 동료니?" "예." "고마운 일이야. 흠, 나도 일어나서 좀 도와…" 사만다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려다가 휘청거렸다. 터커와 나는 사만 다를 꼼짝하지 말도록 권했지만 사만다는 기어이 일어나서 병자들에게 다가갔다. 환자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이군. 터커의 동료 중엔 거대한 팔치온을 껴안고 끙끙거리는 무식하게 생긴 크라일이라는 전사도 있었다. 그는 심하게 열을 내면서 몸부림치고 있 었는데 그를 살피던 카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증상은 꼭 산욕열 같은데?" 환자의 팔에서 고름을 짜내기 위해 달군 대거를 가져가던 내가 질문했 다. "산욕열이 뭐지요?" "임산부가 산후에 걸리는 병…." "푸헤헥!" 나는 웃느라 자칫 환부를 절개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팔을 날려버릴 뻔 했다. 어쨌든 간신히 진정해서 환자의 팔을 쓺고 피고름을 짜내었다. 역한 냄새와 함께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고름을 다 짜내고나자 환자의 팔에는 커다란 구멍이 보일 지경이었다. 사만다는 날 보며 미소 지었다. "참 착한 아이네. 보통 아이라면 달아나버릴텐데." "보통 아이라도 우리 고향에서 17년 정도 살고나면 나처럼 될 거예 요." 사만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별로 설명하지 않았다. 사만다 는 약초 달인 물을 가져다가 크라일에게 먹였다. 산욕열에 시달리던 크 라일 부인(?)은 머리를 휘휘 저으며 간신히 좀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여자 손목도 못잡아본 주제에 엄청난 병에 걸렸다는 그 마법사는 선량 해뵈는 눈을 가진 펠레일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픈 부위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발악을 하다시피 했지만(나라도 그러겠다.) 카알은 당당히 그의 로브를 걷어올렸고 펠레일은 죽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이루릴은 약초를 졸여서 고약처럼 만들더니 그것을 펠레일의 거기에 바르기 시작했다. 보고있던 우리는 모두 얼굴이 벌겋게 되어버렸다. 치료이긴 하지만, 너무 선정적인걸.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펠레일도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낀 모양이다. 그 는 눈을 떴고, 그러자 이루릴은 그의 얼굴을 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펠레일은 곧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루릴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그녀의 놀란 얼 굴을 보다가 웃느라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푸하하하하!" 펠레일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그만 혼절해버렸다. 좋으면 좋은 거 지 그걸 가지고 혼절씩이나 하나? 터커의 표현대로 정말 이런 병에 걸렸 다는 것이 우스울 만큼 순진한 청년이다. 샌슨이나 나, 그리고 터커는 펠레일을 치료하는 이루릴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낯뜨거워 재빨리 흩어 졌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7. 어쨌든 끔찍하게 많은 환자였다. 에델린이라면 단번에 치료할테지만 그녀는 지금 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 신전을 봉쇄하고 있었고 그래서 카알과 이루릴, 터커, 나, 샌슨, 사만다 의 여섯 명이서 그 많은 환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카알은 원래 그런 부 분에 박학하고 샌슨은 응급치료에 대해서도 배웠고 이루릴이나 터커, 사 만다의 솜씨도 썩 훌륭한 것이어서 난 주로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게 되 었다. 환자 환부에서 고름짜기, 이마에 물수건 갈기, 씻기기, 음식만들 어 먹이기, 깨끗한 옷이나 시트, 붕대 마련하기 등등. 정신없는 반나절이었다. 신전의 부엌에 자리잡고는 입과 오른손으로는 신전의 커튼을 찢어 솥에 집어넣고 왼손으로는 환자에게 먹일 스프를 휘젖고 오른발로는 두 개의 커다란 솥에 들어갈 장작을 만들기 위해 예배당의 긴의자를 박살내고 왼 발로는 박살난 그 장작들을 아궁이에 차넣는 내 모습을 보며 샌슨은 문 어같은 놈이라고 말했다. 난 문어가 뭔지 몰라서 샌슨에게 다시 질문해 야 되었다. 발이 여덟개 달린 물고기라고? 난 머릿속으로 청어의 허리 양쪽에 네개 씩의 다리를 붙여봤다. …나라면 그건 거미고기라고 이름붙이겠어. 문어 가 뭐야, 문어가? 어쨌든 원래 신전의 커텐이었던 우아한 천은 잘게 찢어져 삶긴 다음 붕 대가 되거나 물수건이 되었다. 한참 그 짓을 하고 났더니 커텐을 잡아당 긴 턱이 얼얼했다. 게다가 요리라면 자신있는 나로서도 스프의 맛은 도 저히 자신이 없었다. 결국 펠레일이 비척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와 도와 주겠다고 말했을 때는 나도 기절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펠레일은 참 기괴한 걸음걸이로 걸어와서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후치군이라고 했지요?도와드리겠습니다." 그 걸음걸이를 보면서 아픈 데는 괜찮냐고 물어보기는 민망스러웠다. "아, 고맙습니다. 그럼 저기 냄비에 부어둔 밀가루 반죽 좀 해주세요. 부어놓고는 틈이 안나서 반죽도 못하고 있어요." "뭘 만드시려고요?" "팬케익.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 어려요." "아, 예." 펠레일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씻기 시작했다. 난 그제서야 한숨 돌리고 는 삶은 천조각들을 다시 예배당으로 날라갔다. 예배당에 들어가보니 카알은 입술을 꽉 다물고 급성 설사환자의 속옷을 갈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성격이다. 그 옆에서 보고 있던 터커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카알은 날 보더니 지친 음색으로 말했다. "네드발군. 장작 좀 부탁하네. 퍼시발군이 나갔지만 자네가 더 빠르겠 지?" 그러고 보니 뜨거운 물을 쓰기 위해 예배당 한쪽에 걸어두었던 솥에 불 이 꺼져 있었다. 난 삶은 천을 터커에게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샌슨은 어디서 도끼를 주워와 미친듯이 신전의 나무를 찍어대고 있었다. 나뭇조 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샌슨! 내가 할게. 들어가 물이나 좀 마셔." "헉, 헉. 아이고, 살았다." 난 샌슨이 흠집을 내놓은 나무에 달려가 어깨로 들이박아서 나무를 쓰 러트렸다. 샌슨은 헉헉거리며 말했다. "곰 같은 놈." "아깐 문어 같다고 말하더니." 도끼를 받아든 나는 나무를 쪼개었다. 대충 한두방씩 후려치면 쫙쫙 쪼개져나갔다. 난 입맛이 썼다. "이거, 나무까지 병이군. 안쪽이 다 썩었는데?" "그래? 어디 봐… 정말이네. 보다 보다 이렇게 엉망인 나무는 처음 보 겠군. 겉은 멀쩡하더니 속은 다 썩어버렸는걸." "뭐, 태우기만 하면 되니까." 난 다시 다른 나무 몇 개도 들이박아서 쓰러트렸다. 그 때 예배당 정 문에서슈가 걸어나왔다. 슈는 굉장한 소리가 어디서 나고 있는지 궁금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내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힘 세네?"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지마." 슈는 얼찐거렸다. 그러니까 물러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오 지도 않은 채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샌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렇게 애에 대해서 모르나? "슈, 심심하니?" "어, 응. 애들이 없어서." "저기 샌슨 아저씨가 너랑 놀아주실거야." 샌슨은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후치! 피곤하지 않냐? 내가 교대할께! 어서쉬어! 명령이다, 쉬지 않 겠다면 내 너를…" "관둬, 관둬. 알았으니까." 샌슨은 장남인데도 희안하게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 한다면 어려워한다고 해야 되겠지. 그렇다. 샌슨은 애를 어려워한다. 저 런 모습을 보면, 정말 장가를 빨리 보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 야. 나는 슈에게 다가가서 번쩍 안아올렸다. 슈는 까르륵거리며 내 목에 안겼다. 그러더니 그 작은 손으로 내 목에서 목걸이를 찾아내었다. "와아… 예쁘네?" 윽! 예쁘다고? 난 슈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레너스시의 그 꿈이 너무 왕성해서 현실 감각을 조금 잃어버린 귀여운 아가씨 유스네의 선물이다. 누구에게 들킬까 싶어 갑옷 속으로 깊이 넣 어두었던 것이 어떻게 슈의 손에 잡힌 모양이다. 알록달록하고 그야말 로 예쁘장한 목걸이. 17세 소년이 걸고 다녔다간 눈총에 맞아죽을만한 목걸이지만, 괜히 유스네에게 미안해서 꼬박꼬박 걸고 다니던 것이다. 쳇. 어쩌면 유스네는 벌써 다른 방랑자 하나에게 정신이 나가서 헤롱 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보기에, 의외로 순진하고 낭만적이고 바보스러운 것은 항상 남자쪽이다. 그래서 남자는 영원히 여자에게 당 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아무 것도 미안할 게 없으면서 이 얄궂은 목 걸이를 걸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마음에 들어?" 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걸이를 풀어서 슈에게 건네주었다. 슬슬 잘라둔 장작개비를 안으로 옮겨야 되겠다. "있다가 돌려줘야해?" 옆에서 샌슨이 씨부렁거렸다. "그럼! 돌려줘야 되고 말고. 그 목걸이에는 한 순결한 소녀의…" "그만!" 나는 목걸이에 정신이 팔린 슈를 내려놓았다. 슈는 그것을 목에 걸어 보고는 헤헤 거렸다. 나는 샌슨이 잘라둔 장작을 안으로 옮겼다. 잠깐의 휴식은 지나가고, 다시 전쟁 시작이다. 나는 장작을 모아 기침을 해가며 불길을 다시 살려내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저녁이 되었다. 에델린은 해가 지고 나서야 기도를 멈추었다. 해가 지고나면 헬카네스 의 영역은 끝난다. 따라서 게덴도 더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급성환자들은 거의 치료가 끝났고 시민들은 모두 약을 먹거나 음식을 먹은 다음 편히 누워있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를 연발했지만 기진맥진한 카알은 그런 인사도 받아줄 힘도 없는 모습이 었다. 거의 강제로 카알에게 저녁식사를 하도록 해놓고는 내가 그와 교 대했다. 환자들의 잠자리를 살펴보고 혹시 심각한 예후가 있는지 본다. 그리고 물수건을 갈아준다. 할머니 한 분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 내 손을 쥐었다. 검버섯이 피어난 가느다란 손가락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내 손 을 쥔다기보다는 그저 그 위에 얹어두는 모습이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할머니." 그러자 그 할머니는 더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내가 뭘 실수했나? 잘못 한게 없는데? 그 할머니는 서글픈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여요? 난 23살이예요." 난 기절할듯한 심정이었다. 아니, 이 주름살은? 그리고 하얗게 센 머리 카락은 어떻게 된거지? "조로증이라든가요… 죽고 싶어요… 으흑!" 그 할머니 처녀는 펑펑 울었다. 나도 눈물이 솟구쳤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가장 아름다워야 될 나이에 노인이 되어버린 처녀에게. 나는 목메 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으실 거예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처녀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보이기도 싫다는듯이 시트를 덮어썼다. 너무 잔인한 병이군. 너무, 너무 처참하군. 나는 눈물을 닦으며 다른 환자에게 걸어갔다. 더 처참한 모습이 기다 릴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난 그들을 돌보고 있으니, 불안한 표정은 안되 겠지. 난 되도록 밝은 표정으로 거식증에 걸린 남자에게 저녁을 먹이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그 남자에게 먹인 양보다 내 옷에 토한 양이 더 많았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자들을 대충 살피고 돌아왔다. 카알은 지쳐서 음식도 제대로 못먹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기도를 하고 있던 에델린도 거의 혼절할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신전 한쪽 벽에 기 대어 앉아서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이루릴도 마찬가지로 지쳤겠지만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이외에는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스프를 접시에 담아 에델린에게 가져다주었다. 에델린은 말도 제대로 안나와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들게 스푼을 들었다. 그러나 스푼을 놀릴 힘이 없자, 에델린은 그냥 접시채 마셔버렸 다. 입이 크니 유리한 점도 많군. 터커는 크라일이라는 그 전사를 일으켜 앉혀 음식을 먹이고 있었다. 산욕열에 시달리던 부인께 음식을 먹이는 남편? 왠지 '수고했어요, 부 인.' 이라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다. 크라일은 역정을 부렸다. "음식 정도는 먹을 수 있으니 신경쓰지마." "알았어. 어, 그런데 펠레일은 어디 갔지?" 내가 대답해 주었다. "부엌에서 먹겠다던데요." 터커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부 엌쪽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 펠레일은 터커에게 귀를 잡힌채 끌려왔다. 터커는 펠레일에게 호령했다. "자, 어서!" 펠레일은 처참한 눈초리로 터커를 바라보았지만 터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펠레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그 둘을 바라보기만 했다. 펠레일은 마치 싸움이라도 걸듯한 걸음걸이로 벽에 있는 에델린과 이루릴에게 다가갔다. 펠레일은 말했다. "이, 이루릴 세레니얼양이시죠? 전 펠레일입니다. 마, 마법사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저, 말을 건 까닭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부, 불쾌하 셨을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 치료해주셔서 정말 가, 감사합니다." 펠레일의 얼굴은 쥐어짜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많이 놀라신 것 같더군요. 아까 비명을 지르시길래." "아, 제, 저의 그,실수입니다, 그것은. 너무 당황해서…" "그런가요. 이해하겠습니다. 이제 당신과 전 친구인가요?" "예?" 펠레일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해했고 난 미소를 지었다. 펠레일은 잠시 당황하다가 대답했다. "어, 저, 예. 친구라는게 그러니까… 저, 은혜를 입었으니 당신은 제게 소중한 분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친구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거라면, 예.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참. 성기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난 뒤에 환자가 누워 있어 뒤로 쓰러지진 않았다. 샌슨은 스프를 엎지 르고 말았고, 크라일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있던 카알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에델린은 갑자기 몸을 뒤로 빼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불쌍한 펠레일은 괜찮다는 뜻으로 적당히 우물 거린 다음 다시 부엌으로 달아나버렸다. 터커는 그 뒷모습을 멍한 표정 으로 바라보다가 이번엔 멍한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경악에 휩싸인 우리를 보더니 질문했다. "저, 왜들 그러시죠?" 사만다는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와서 질문했다. "저 분, 원래 저러시니?" "그런가봐요." 저녁식사가 끝나고 다시 우리는 환자들에게 흩어졌다. 에델린은 종일 기도했으니 쉬라고 말하는 우리를 물리치고는 다시 환자 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에델린이 나서니 간단했다. 에델린은 큐어 디 지즈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이 대충 치료해둔 환자들을 거의 완치시켰 다. 하지만 조로증에 걸린 그 처녀를 치료할 때는 에델린도 악전고투를 했 다. "이런 끔찍한 병이…" 카알의 지식으로도 이런 병에는 무슨 처방을 써야될지 짐작도 되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간다. 더 빠르게 늙어가는 것은 쉽 지만,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젊음을 되돌릴 수 있는가? 과연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가? 에델린은 시간을 되돌렸다. "전능한 신의 손길로 유피넬의 저울대에 걸린 헬카네스의 추를 내린 다. 법칙 안에서 만물을 감싸 포용하라. 포용함으로 법칙을 이겨내라. 리스토어(Restore)" 우리는 경이에 찬 눈으로 에델린과 그 처녀를 바라보았다. 처녀의 얼굴에 주름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에는 다시 통통하 고 보기좋은 살이 오르고 있었고, 시트 아래에서 실팍한 가슴이 솟아오 르고 있었다. 처녀는 자기 얼굴을 만져보았다. 처녀는 눈물을 쏟았다. 나도, 카알도, 샌슨도 눈물을 쏟았다. 터커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 었고 크라일은 거칠게 눈을 닦았다. "허, 이것 참. 눈물 흘려본 게 얼마만이지?" "에라이, 곰아. 이럴 땐 울어도 돼…" 터커의 말이다. 처녀는 펑펑 울면서 에델린에게 안겼다. 에델린은 그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처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등 뒤에 이루릴이 서 있었다. 이루릴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루릴의 미소는 좀 당황스러운 미소다. 난 의아쩍었다. 난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이루릴, 뭐가 잘못되었나요?" "저 주문… 위험한 주문이군요." "예?" "법칙을 깨는 주문이군요. 하지만 유피넬의 저울대는 길고, 끝이 없는 법. 처녀의 젊음이 되돌아왔다면, 어디의 누군가가 젊음을 잃었겠지요." 이루릴의 평온한 설명을 듣다가, 나는 느닷없는 경악을 느꼈다. 누군가 가 젊음을 잃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트롤 의 얼굴에 나타나는 노쇠의 증거는 무엇일까? 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 간, 이루릴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8. 밤이 꽤 깊었을 무렵, 마지막 환자의 치료가 끝났다. 에델린은 기진맥 진하여 나의 부축을 받아 잠자리로 걸어갔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에델 린의 거구를 부축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지만, 샌슨은 에델린을 부축하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참 짓궂어보이는 미소다. 에델린을 눕히고 나는 카알에게 돌아갔다. 카알은 램프 하나를 마치 모닥불처럼 가운데 놓고는 다른 사람들과 모여있었고, 그 무릎 위에는 슈가 잠들어 있었다. 램프를 바라보던 터커가 말했다. "저희들도 어디에 빠지지 않는 모험가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분들은 더 놀랍군요. 어떤 모험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모험가'라고? 허. 샌슨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린 모험가가 아니라 여행자일 뿐입니다. 우연히 이 영지 앞에서 에델린을 만났고요." 그러자 사만다가 말했다. "겸손하시네요. 저 소년이 가진 것은 OPG잖아요? 보통의 모험가라면 구경도 하지 못할 아티펙트인데." 모험가라. 음. 그 낭만적이고 짜릿한 단어가 나를 지칭한다니. 이거 기 분은 요절할듯이 좋은데. 그러나 카알은 우리가 잡담할 시간을 주지않 았다. 카알은 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말했 다. "네드발군, 퍼시발군. 힘이 좀 남았나?" "시킬 일이 뭐지요?" "신전 주위를 경계해야 될 것 같아. 밤이 되었으니 헬카네스의 기운은 이제 사그라들었지만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흠, 난 그게 뭔지 알겠다. 샌슨도 알겠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 말이죠?" 터커 일행이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터커가 말했다. "어, 뱀파이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제 저녁, 영지 바깥에서 만났습니다. 우릴 쫓아내려 하더군요." "아, 그래요." 카알은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터커에게 질문했다. "그 뱀파이어에 대해 아시는대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희도 잘 모릅니다. 아마 이곳이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자 질 병 중의 질병인 뱀파이어가 생겨난 것 같은데요." "꽤 신빙성 있는 말이오. 당신들은 어디서 그녀를 만났소?" "저희들이 이 영지에 들어서던 첫날 밤, 그 뱀파이어가 공격해오더군 요. 펠레일이 간신히 막아내었습니다만 그 때 펠레일이 너무 힘을 써버 린 까닭에 그다음날 바로 우리들도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런 것이었군요." "예. 다음날부터 먹구름이 끼어 우리는 간신히 병이 더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들을 옮겼습니다. 영주나 고관들은 이미 다 죽었더군요. 어떤 책임자도 만나볼 수 없어서 우린 산 사람들만 일단 이곳으로 모았 습니다. 바깥에 방역을 위해 구덩이를 파고 기름을 부어둔 것 보셨습니 까? 아마 우리가 오기 전부터 이곳으로 환자들을 모은 모양입니다. 환 자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터커는 말하다가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시체를 모아 소각하는데 그 뱀파이어가 공격해오더군요. 낮에 뱀파이어를 만나서 너무 놀랐습니다. 간신히 물리치고나서 사만다가 설 명해주더군요. 먹구름 때문에 낮에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맞아, 사만다? 응. 그래. 그 다음에는 보지 못했는데, 아마 여러분을 공격하러 갔다가 크게 당한 모양이죠?" "예. 싸우다가 물리쳤는데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 밤 다시 올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온다고 보아 야겠군요. 우리는 완전히 그녀의 소굴에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요." 우리는 대충 의논을 끝내었다. 내일은 반드시 조사를 해서 이 마을이 세이크럴라이제이션(Sacralization)된 이유를 밝혀내야 된다. 그래서 이 루릴, 펠레일은 내일 아침의 메모라이즈를 할 수 있도록 잠들었다. 마법 사들은 푹 잠들지 않으면 메모라이즈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카알과 사만다는 안에서 환자를 돌보기로 했고 에델린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온 것은 나와 샌슨, 터커, 크라일이었다. "결국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만 남았군." 터커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난 크라일이 걱정되었다. "크라일씨. 회복된지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쉬시지요?" 크라일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야, 나도 염치가 있지! 죽어가는 것을 살려줬는데 어떻게 드러누워 쉬 라는 말이야?" 산욕열로 죽기도 하나? 뭐, 크라일의 기분을 생각해서 그런 질문은 하 지 않았다. 산후조리가 안좋으면 산모가 죽을 수도 있지. 그런데 산부 (産父)는 어떨까? 킥킥킥. 난 장작개비를 모았다. 건물 앞 정원에 모닥불을 피우고 우리는 모닥불 주위에 모여앉았다. 신전 건물 뒷쪽은 산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쪽으로는 문이 없다. 따라 서 어디로 오든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릴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신전 안에서 찾아온 커텐을 마치 망토처럼 몸에 두르고는 모닥 불을 등지고 앉아서 (눈이 밝은데 익숙해지면 어둠 속의 적을 볼 수 없 다는 샌슨의 설명이 있었다.) 어두운 바깥을 바라보았다. 크라일은 샌슨에게 꽤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었고 샌슨도 여유있게 웃으 며 그 눈빛을 받아내었다. 양쪽이 다 기골이 장대하다 보니까 서로 일종 의 호승심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크라일은 좀 난처한 병으로 쓰 러져 있다가 구출당한 입장이라 위세가 약했다. 그는 두툼한 눈두덩이 아래에 작은 눈을 가졌고,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는데, 미소를 지을 때 볼에 보조개가 피는 점이 왠지 익살맞아 보 이는 인상이었다. 저런 얼굴에 보조개라니. 그는 그 보조개가 살짝 드러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우습겠지만, 미드 그레이드에선 왼손의 크라일이라면 제법 이름이 있지. 그쪽은 어떤 모험을 하셨소?" 샌슨은 우아하게 웃었다. 샌슨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것은 처 음 알았다. 이 치밀어오르는 닭살, 닭살이여! "말씀드렸다시피 전 모험가가 아니라 헬턴트 영지의 경비대장일 뿐입 니다. 그리고 영지의 일로 수도에 보고차 여행하는 길이지요. 모험가라 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러시오? 흠. 당신 손놀림은 시골 영지의 경비대장 정도가 아닌데? 그 롱소드도 제법이고. 은제요?" "은도금입니다. 저희 고향엔 라이칸스롭도 심심찮게 나타나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모두 이런 롱소드를 가지고 있지요." "허! 라이칸스롭이 심심찮게 나타난다고? 예끼, 여보쇼. 잘하면 트롤 몇 마리쯤은 아침운동 삼아 잡는다는 말까지 나오겠소." "어떻게 아시죠?" 당장 샌슨은 허풍을 마구 섞어가며 고향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에 대한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자랑이냐? 몬스터 많이 나타난다는 것도 자랑이야? 정말 순진한 나의 친구 샌슨이여, 그대는 역시 물레방 앗간에서 마음 졸이며 동네 처녀나 기다려야 할 운명이야. 내가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가 될 운명인 것처럼. 크라일과 샌슨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서로가 잡은 몬스터에 대한 자 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커텐을 목에 두른 채 신전 정문으로 걸어갔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괴기스러웠다. 암흑, 아무런 불빛도 없이 암혹 속에서 암흑의 윤곽이 보인다. 달빛은 하늘을 물들이는데는 성공했지만 희안하게도 땅은 밝히지 못하고 있었 다. 그래서 푸르스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의 마을 모습이 내 마음을 음울하게 만든다. 터커가 다가왔다. "너, 제법이더구나. 오늘 환자들 돌보는 모습. 나, 전쟁에도 나가봤지 만 네 나이 두 배나 되는 전사들도 썩어들어가는 상처를 보고 달아나버 리는 것을 많이 봤지." "설마 그럴 리야." "아냐. 아까 네가 피부병 걸린 남자의 몸에서 살갗에 달라붙은 붕대를 떼어낼 때 난 정말 놀랐지. 넌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하고 있었어. 전혀 불쾌해서가 아니라 혹시 그 환자가 아프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 어." 누굴 말하는거지? 워낙 많은 환자들의 뒤치닥거리를 했더니 누굴 말하 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내가 아플 때 누가 그렇게 해 주길 바라니까요." "그래? 그래. 간단한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결국 대화가 끊어졌고 나와 터커는 나란 히 담장에 팔을 기대고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신전의 담장이라는게 전 혀 외부의 침입을 막겠다는 의미는 없다. 신전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다 그러하듯이 이 담장도 상징적인 의미가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나 와 터커는 간단히 팔을 기대고 그 위에 턱을 얹고는 아래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나는 어렵사리 질문할 것을 생각해내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나요?" "아, 우린 레너스시로 가던 길이었어. 수중에 돈이 달랑거려서, 거기 투기장에서 돈이나 좀 벌려고."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 투기장 주인인 실리키안 남작은 우리에 의 해 재산이 완전히 거덜났다. 투기장은 시의 소유니까 그대로 있겠지만. "그 투기장, 말만 들었는데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던데요?" "요령있게 하면 죽진 않아. 그리고 모험가라는 것은 어차피 목숨 내놓 고 돌아다니는 거니 특별할 것도 없고. 죽기 싫으면 집에서 농사나 지 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일부러 위험을 찾아다닐 이유는 없잖아요?" "아니, 있어. 위험이 많은 곳에 보상도 많기 때문에 위험을 찾아다닐 이유는 충분하지." "그래요?" "응. 너 아비스의 미궁에 대해 들어봤니?" 아비스의 미궁? 타이번이 발록을 불러내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록이 산다는?" "응. 우리가 지난 달에 거기 들어갔었지. 아비스의 미궁에 있다는 엄청 난 보물의 이야기를 들었거든. 하지만 우리가 거기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거기에 발록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 아비스의 보물에 대 한 그 믿기 어려운 이야기보다는, 발록이라는 위험 때문에 확실히 보물 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곧 엄청난 예감이 떠올랐다. 난 터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터커는 괴로운표정을 지었다. "말하기도 끔찍스러워. 어떻게 반도 못들어가서 길을 잃고 발록을 만 났지. 크라일과 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고 펠레일도 자신의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아서 좌절했었지. 그 때 생각만 하면 요새도 등골이 섬 뜩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지." 터커는 정말 무섭다는듯이 이마를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살아있네요?" "응. 이유를 모르겠는데, 우리를 다 죽여버리려던 발록이 갑자기 사라 져버렸어. 아마 우릴 살려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발록이 그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어쨌든 발록이 사라지자마자 도망나와서 간신히 살았지. 입구를 찾아나왔을 때는 정말 태양이 너무너무 고맙더군. 하지 만 치료하느라 돈을 다 날려버렸어. 그래서 레너스로 찾아가던 길이었 지." 난 탄성을 지를 뻔 했다. 그 때였구나. 타이번이 발록을 불러내었을 때, 발록은 모험가들을 박살 내다가 불려왔다고 투덜거렸었다. 그럼 이 터커 일행이 그 때의 모험가 들이구나. 참 세상이 좁기도 하군. 터커는 계속 말했다. "발록이 우릴 살려준 것일까? 사만다도 그 점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 해." "발록은 악마잖아요." "늑대다." "예? 발록이 늑대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저기 늑대가 나타났다. 카알이라는 그 양반은 선견지명이 있구 나." 터커는 말하면서 재빨리 할버드를 고쳐잡았다. 나는 앞을 보았다. 언덕 아래에는 창백하게 번쩍거리는 불꽃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안 광이었다. 그 수효는 대단했다. 어느새 언덕 아래에 늑대들이 모여있었 다. 늑대들은 낮게 으르릉거렸다. 여기저기로 오가며 우리들에게 섬뜩한 눈길을 보내었다. 터커는 주의깊게 정문쪽으로 걸어가서는 정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저빈약한 나무판은 몇 번 걷어차도 간단히 부서져버릴 것이다. 터커는 입술을 깨물었다. 샌슨과 크라일도 자기 자랑을 잠시 멈추고는 담장쪽으로 걸어왔다. 각 자 담장 뒤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내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늑대들은 우리 모습에 흥분한 것인지 어깨의 털을 빳빳하게 곤두세우 며 으르릉거렸다. 난 그렇게 오가는 늑대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14 마 리. 모두 덩치가 예사롭지 않다. "으르르르…" 놈들은 오락가락, 마치 장난을 치듯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저 놈들도 쉽게 달려들긴 어려울 걸. 저 아래로 달려오려면 완전히 몸을 노출시키게 되니까." 터커는 경험있는 모험가답게 정리하고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석궁을 들어올렸다. 허리 뒤 혁대에는 작은 가방이 있었고 그는 그 안에서 콰 렐(Quarrel)을 뽑아들었다. 석궁을 밟고, 시위를 당겨 걸고, 신중하게 콰렐을 장전했다. 그는 그대로 장전한 석궁을 허벅지쯤에 방만하게 내려 놓고는 늑대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손에 든 것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듯한 모습이다. "안 쏴요?" "흥분시킬 필요는 없잖아. 쏘면 그 순간 달려들걸." 늑대들은 지속적으로 으르릉거리기만 했지 함부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들은 천천히 한 발자국씩 언덕 위로 다가왔다. 터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덤빌 모양인데." 그는 석궁을 들어올려 겨냥했다. "늑대란 놈은 말이지, 인간과 섬뜩하리만큼 비슷해. 지휘관은 촐랑대지 않아. 그는 전투의 모든 상황을 고려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갑자기 터커는 석궁을 쏘았다. 탱! 하는 경쾌한 소리. "캥!" 늑대 무리의 약간 뒤쪽, 오만하게 앉아있던 놈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몸을 뒤집었다. 그 놈은 그대로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즉사했다. 터 커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놈들이 배가 고프다면 좋겠는데." 늑대들은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이없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 마리씩 쓰러진 놈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앞발로 툭 쳐보는 놈이 있 는가 하면, 주둥이로 슬쩍 건드려보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쓰러진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흠, 이제 식사 시작인가? 그 생각은 늑대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늑대들은 하늘을 보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크아악!" 늑대들은 미친듯이 육박해왔다. 놈들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도약, 놈들은 단숨에 담장 위로 뛰어 올랐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샌 슨과 크라일은 뛰어오른 놈들을 후려쳤다. 처음 두 마리는 그대로 안으 로 들어오지도 못한채 밖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놈들이 담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일자무식!" 뛰어오른 놈의 몸이 조각났다. 하지만 늑대는 10마리나 남아있었다. 놈 들은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왔다. 지극히 가멸찬 싸움이 시작되었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9. "문 걸어 잠궈요!" 고개를 빠꼼히 내민 이루릴에게 내가 외쳤다. 이루릴은 내 말을 거부 했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오더니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양손엔 어느 새 에스터크와 망고슈가 들려있다. "도와드릴까요, 후치?" "아니, 그 문이나 막고 있어요!" 나는 그 와중에도 이루릴이 안에 있는 환자들은 자신의 친구가 아니므 로 도울 필요가 없지 않냐고 말할 줄 알고 놀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런 걱정은 웃기지만, 이루릴이라면 왠지 그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터커는 야수처럼 할버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너무 길고 묵직해서 날렵한 늑대들을 상대하기엔 힘들었다. 그저 엄청난 솜씨로 몸 주위에 빈틈을 만들지 않는 정도였다. 크라일은 '왼손의 크라일'이라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는 오른손의 팔치온을 오른쪽 어깨에 둘러맨체 싸우고 있었다. 늑대가 뛰어오르면, 크라일은 왼손 주먹으로 늑대를 후려친다. 늑대는 튕겨져 오르거나 땅에 쳐박히거나 한다. 어쨌든 그렇게 몸의 균형을 잃어버린 늑대는 단숨에 크라일의 오른손에 쥔 팔치온에 박살난다. 즉, 크라일은 왼손으로만 싸우며 오른손의 팔치온은 마지막 순간의 결정타에만 쓴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렇게 싸우지? 크라일은 왼손 하나라 방어는 포기하고 발놀림으로 몸의 위치를 항상 늑대들의 사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샌슨을 보라! 저것이 헬턴트 사나이다. 몸 주위로 셀 수도 없는 검이 춤을 춘다. 내 일자무식과는 비교하기가 불가능하다. 저 오우거같은 다 리가 늑대를 걷어차면, 늑대는 네 다리를 휘저으며 솟구쳐오른다. 그리 고 공중에서 샌슨의 롱소드에 베이는 것이다. 땅에 나가떨어진 늑대는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네 다리로 마구 땅을 긁으며 나뒹굴었다. 꼭 덫에 치인 늑대 꼴이다. 샌슨은 의아한 표정으로 늑대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샌슨에게 허리를 베인 늑대의 상처가 시 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샌슨의 무기는 은도금 롱소드다. 은은 달의 힘, 유피넬의 힘이다. 이루릴이 말했다. "보통 늑대가 아니군요." 정말 태연자약한 태도로 이루릴은 설명한다. 내 바스타드를 피한 늑대 하나가 그런 이루릴을 보았다. 늑대는 맞으면 검날보다는 그 파괴력에 박살날 것 같은 내 바스타드를 피해 이루릴에게 달려들었다. 샌슨이 비 명을 질렀다. "이루릴!" 어느 순간, 가만히 서 있던 이루릴이 옆으로 흘렀다. 그 손은 비스듬히 망고슈를 앞으로 뻗고 있었다. 레너스시에서 트롤과 싸울 때 본 그 모 습이다. 나라면 기술 이름을 이렇게 붙이겠어. '사과깍기'. 늑대는 순전 히 자신의 힘에 의해 공중에서 가죽이 벗겨지고 근육이 들려올렸다. 피 가 쏟아졌으나 이루릴은 가볍게 그것을 피했다. "캐애앵!" 허리가 너덜너덜해진 늑대가 땅에 떨어졌다. 이루릴은 그것을 걷어차 버리고는 다시 점잖게 문으로 돌아가 기대어섰다. 혀를 깨물 지경이다. 내가 멍하니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자, 이루릴은 말했다. "조심하세요. 후치. 뒤." 나는 소스라쳐서는 바스타드를 뒤로 돌려쳤다. 뒤에서 날 노리던 늑대 가 물러났다. 그러나 그 늑대는 물러나다가 터커에게 꼬리를 밟혔다. 터 커는 늑대의 꼬리를 밟고는 할버드를 내리쳤다. 늑대는 머리가 쪼개져 버렸다. 그러나 할버드를 후려친 터커의 등에 다른 늑대가 뛰어올랐다. "으악!" 터커는 등에 매달린 늑대를 떨어트리기 위해 빙빙 돌았으나 늑대는 터 커의 등 부분의 갑옷을 물고는 놓지 않았다. 나는 달려들어 늑대의 뒷 다리를 잡아당겼다. "카릉!" 늑대의 이빨이 튕겨지며 그 늑대는 터커를 놓았다. 난 늑대에게 물리 지 않기 위해 늑대의 뒷다리를 쥔채 빙빙 돌렸다가 나무로 집어던졌다. 속속들이 썩은 나무는 간단히 늑대에 맞아 쓰러졌다. 콰광! 나무가 쓰러 지면서 늑대들은 질겁해버렸다. 한 놈이 질린 동작으로 달아나자, 나머 지 놈들도 꼬리를 말고 담장 밖으로 튀어버렸다. 터커는 입을 쫙 벌린채 날 바라보았다. "너, 너, 너…" "나무도 병이예요. 다 썩어서 그래요." "그, 그러냐? 그래도 그렇지, 원. OPG 그거 정말 대단하구나."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샌슨과 크라일은 늑대들이 달아나고 나자 누가 더 많은 늑대를 잡았느냐는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저건 내가 잡은 거요! 상처를 보라고!" "헛! 저 타고 있는 것 보이지 않아요? 내 롱소드에 맞아서 그런 거요!" "그건 찰과상이고! 결정타는 내가 먹였지!" 정말 눈뜨고 못봐주겠군. 그 때 신전의 정문을 막고 서 있던 이루릴이 걸어왔다. 이루릴은 날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난 의아해져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루릴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늑대들이너무 빨리 물러나서 저 여자의 계획은 실패군요." "예?" "저기 있어요… 우릴 바라보고 있군요." 난 소스라쳐서 바깥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조리 칠흑같은 어둠 뿐이다. 그러나 이루릴은 정확히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허공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터커도 할버드를 고쳐쥐면서 걸어왔고, 소란을 떨고 있던 샌슨과 크라 일도 긴장한 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늑대들이 소란을 피워 혼란스러울 때 당신의 마법으로 공격할 생각이 었군요?" 이루릴은 허공에 대고 소근거리듯이 말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 았는데, 이루릴은 다시 말했다. "꼭 그렇게 해야 될까요? 난 당신을 용서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요." 난 당황한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안돼요. 내가 준비하고 있어요." 다시 잠시간의 고요. "그럴까요? 시험해보겠어요?" 난 의아해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 나 터커는 눈을 매섭게 뜨고 말했다. "메시지(Message) 주문인 것 같은데." 이루릴은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밤이 되자 불기 시작한 미풍이 그녀 의 검은 머릿결을 어지럽혔지만 이루릴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한 지점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갑자기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팍! 저멀리 떨어진 마을 어느 곳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우리들은 입을 쫙 벌린 채 이루릴과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다시 다른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전히 소근거리는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다음 번엔 어디를 칠까요?" 이루릴은 다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갔어요. 거짓말을 했어요." 난 얼빠진 표정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라고요?" "예. 뱀파이어가 저기 있었어요. 늑대들을 통해 우릴 혼란시키고 공격 할 모양이었는데 늑대들이 너무 빨리 물러가서 공격시기를 놓쳤어요. 그녀는 내가 강대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는 공격을 못하고 망설 이고 있었죠. 사실 난 아무런 마법도 기억하지 않았어요." "메모라이즈한 마법이 없었어요? 그럼 아까 불꽃은?" "샐러맨더를 이용한 속임수예요. 아, 예, 속임수." 그녀는 자기가 속임수라는 말을 썼다는 데에 대해 당혹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쾌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즐거운 것처럼 말하지 않는군요?" "예?" 이루릴은 멋지게 뱀파이어를 속여넘기고 위기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행동이 마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사건인 것처럼 말하고 있 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가 즐거운 것이죠? 그녀와 난 거짓으로 관계지어졌어요. 후치는 항 상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잖아요? 날 비난하지 않나요?" 무슨 말이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이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어떻게 통하는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마 이루릴은 나를 항상 모든 존재와 친구가 되길 원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나 보다. 물론, 나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끼리 만났으면 친구 가 되기 위해 상냥하게 대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건 사람들이 살 아가는 간단한 지혜 아닌가. 하지만 뱀파이어에게까지 그렇게 해야 되나? "뱀파이어와 친구가 되기 쉬울까요?" 이루릴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었군요…." "예?" 내 얼빠진 대답에 이루릴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친구와 적을 나누는 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죠. 그러나 처음 보는 상대에게는 먼저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민다고 했지요. 난 그 말에 퍽 감동했어요." 감동…했다고? "당신은 헬카네스의 율법에 따라 혼란스러운 이 세상을 살기 위해 분명 한 선은 가지고 있지만, 유피넬의 뜻에 따라 먼저 손을 내밀어요. 그것 이 아름다워 보였어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를 모두 따르는 인간이니 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세계는 모두 조화로와 서 특별히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 줄 몰랐죠." 그런가? 난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루릴의 말을 들었다. "아마 우리가 드워프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그 때문일 거에요. 우리는 왜 드워프와 관계가 나쁜지 몰랐죠. 하지만 난 알았다고 생각해요. 당신 을 보고 알았죠. 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 줄 몰라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몰라요. 그것이 드워프들에 겐 기분나쁘게 보였던 것이예요." 이루릴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눈이다.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었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을 배 우고 싶었어요. 처음 보는 이 영지의 환자들을 돌보았어요. 그것이 기쁨 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루릴이 이 영지의 사람들을 성심껏 도왔던 이유는 그것인가?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을 엘프가 공유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루릴은 내 말에 감동하여 친구가 되기 위해서 먼저 손을 내밀어보았던 것인 모양이다. 인간이었다면,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인간이었다면 몹시 부 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순진한 눈으로 아무런 의혹이나 은유 없이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 엘프다. 그래서 나도 완전히 긴장을 풀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기쁘지 않았어요?"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기뻤어요. 그들의 감사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손을 내밀게 됨으로써 예전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 어요." "그게 뭐지요?" "손을 내밀어도 받아주지 않을 때의 슬픔.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어서 뱀파이어에겐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군요. 난 그것을 배웠어요. 고마워 요, 후치. 당신처럼 익숙하게 손을 내밀 줄 알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 간이 걸릴까요…" 이루릴은 다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터커와 크라일은 대단히 희안 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샌슨도 그렇게 평범한 눈길은 아니었 다. 결국 샌슨이 물어왔다. "이봐, 후치. 조금 전에 나눈 말들이 다 무슨 뜻이야?" 글쎄. 설명할 수 있으려나? 난 늑대들의 시체를 다 처리하고는 잠자코 모닥불을 한참 바라보았다. 샌슨이 결국 못 참고 다시 말하려 할 때, 나 는 입을 열었다. "말을 한 건 나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엘프란 이상한 종족이야. 하지 만, 엘프가 보기엔 인간이 이상한 종족이겠지. 만일, 그렇다면, 이루릴 은 엘프들 중에서도 이상한 엘프인 것일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고 들었어. 그 렇다면 그들의 세계는 조화뿐일 거야." "조화뿐이라고?" "설명하기가 힘들어. 어쨌든, 이루릴의 말을 듣고 있자면 우리가 생각 하는 예의범절이라든가 훌륭한 문화 같은 것이, 모조리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없어서 불안한 인간 종족의 슬픔 때문에 생겨난 것 같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건네는 인삿말, '좋은 아침입니다!' 마저도 서로 원수가 되 지 않기 위해 외치는 말 같다구. 젠장." "뭐? 원수?" "그러니까… '나는 이 아침을 즐기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것을 즐기니 서로에게 화낼 필요가 없다. 되도록 유쾌하게 지내보자.' 이런 식으로. 그러면 상대도 똑같이 대답하지. '좋 은 아침입니다!' 사실 상대는 오늘 아침 변비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지만, 인사를 건넨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기 싫어서, 서로 나쁜 관계가 되기 싫어서 그냥 타성적으로 대답하는 거지. 우린 상대를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에, 그래, 그거야. 우린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를 위해 타성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지… 나와 대단히 친한 사람이 아니라 면, '얼어죽을, 뭐가 좋은 아침이야?' 따위로는 말하지 않는 거지… 우 리는 죽을 때까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 의 상당 부분은 거짓말이나 가식이 되지. 예의범절이란, 잘 조절된 거짓 말. 그런 것 같아…"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이루릴의 머리색깔 을 닮은 칠흑같은 밤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듣고있던 터커가 빙긋 웃었다. "그럴 때가 있지. 후치. 늘상 알던 사람도, 어느날 갑자기 저게 내가 알던 그 사람인가? 싶을 때가 있지. 우린 절대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 그래서 항상 불안해. 그래서 예의범절을 만들었지." 터커는 내 말을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루릴은 우리가 불안해서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마치 모든 피조물과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 어요." 터커는 싱긋 웃으며 할버드의 날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 것 같니? 흠. 후치. 걱정 마. 엘프는 느리게 익히지만 절대로 잘 못 배우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요?" "반면 인간은 빨리 배우기 때문에 잘못 배울 일이 많지. 뭐… 선입견 이라든가, 그런 것 있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완전한 종족은 없나요?" "완전한 종족은 없어. 하지만 어느 종족에서든, 완전한 개인이 나올 수 는 있어. 자기 종족의 약점만 극복하면 돼니까." 나는 터커를 보았다. 터커는, 깊은 눈으로 멀리 바라보았다. 저것이 모험가, 극한의 투쟁을 일상처럼 겪는 모험가의 눈인가? 아침이 되었다. 푸르게 물들어가는 동녘 하늘 아래로 으스름한 산맥의 그림자가 떠오른 다. 산맥은 미드 그레이드의 등뼈인 갈색산맥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완 전히 검정산맥이군. 난 시선을 돌려 다시 칼질을 계속했다. 새벽에 나는 이미 부엌으로 와 있었다. 보통 때는 우리 일행의 요리만 준비하면 되지만 오늘은 거의 100명에 가까운 인원의 요리를 준비해야 된다. 음, 맛에 대해서는 포기 하고, 양이나 정확하게 맞출 수 있으면 다행일텐데. 그 때 부엌문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렸 다. 에델린이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환하게 미 소지으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에델린은 부엌 문 위턱에 부딪히지 않도 록 주의하며 들어왔다. "후치, 요리 준비하고 있나요?" "보시다시피… 잘 잤어요?" "예. 어디 보자, 칼 이리 줘요." "도와주겠어요? 잘 됐네. 그렇잖아도 물 뜨러 가야 했는데. 좀 부탁하 지요." 난 에델린에게 부엌칼로 쓰던 대거를 건네주었다. 에델린이 드니까 무 슨 앙증맞은 주머니칼처럼 보였다. 난 그것을 보며 미소 짓고는 밖으로 나왔다. 밖의 정원에는 샌슨, 크라일, 터커가 서로 뭉쳐서 덜덜 떨면서 자고 있 었다. 하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가을 새벽의 공기는 엄청나게 차갑다. 난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요! 안으로 들어가 자요. 날이 밝아오니까 이젠 여기 있을 필요 없어." 샌슨은 일어나면서 턱이 잘 안돌아간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터커와 크라일은 일어나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크라일은 눈을 뜨고 도 그대로 누운채 한참 허공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다가 정말 참기 어렵 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터커는 눈을 먼저 떴는지, 몸을 먼 저 일으켰는지 구분하기도 어렵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크라일, 이 자식아. 일어나! 새벽잠이 그렇게 많아서." "터커… 하루라도 그 말 좀 빼먹을 수 없어?" "요 며칠은 전부 앓아 누워서 그 말 안했잖아?" 크라일은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물통을 휘두르며 언덕 아래에 있는 우물로 걸어간다. 밤은 지나갔지만 아직 뭔가 위험한 것이 나타날 지도 몰라서 바스타드를 꽉 쥐었다. 하 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나는 싱거운 기분으로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던져넣었다. 텅! 이게 무슨 소리야?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다. 난 우물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새벽의 어스름한 하늘 아래에서 우물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서 아래를 보았다. 그제서야 뭔 가 희끗희끗한 것이 보였다. 그런데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다. 이 냄 새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두레박을 황급히 끌어올려보았다. 두레박에 는 물과 함께 썩어들어가고 있는 팔 하나가 담겨 올라왔다. "우으으… 으아아아!"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0. "물도 못먹게 하는군. 이젠 더 이상 치료에도 신경쓸 수가 없게 되었 어." 카알은 낙담한 투로 말했다. 물이 없어서 오늘 아침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건육과 곰팡이가 살폿 피어있는 빵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카알은 빵에 붙은 곰팡이를 털어내며 말했다. "결판을 내야겠어. 오늘 중에 이 영지가 세이크럴라이제이션 된 이유 를 밝혀내고, 그 뱀파이어도 쫓아내어야겠어. 아니, 결국 뱀파이어는 질 병이니까 이 영지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그것도 사라지겠지." 에델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 곳이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라서 뱀파이어도 생겨났겠지만, 일단 생겨난 뱀파이어는 소멸시키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이 없습니다." 카알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환자들에게 마땅히 먹일 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기도 없이 바싹 마른 빵과 건육을 넘기는 것은 건강한 사람도 힘들다. 하물며 열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타오르고 있는 환자들에게 먹일 수야 없다. 나와 터커, 샌슨, 크라일 등이 마을을 미친듯이 뒤져서 간신히 포 도주와 브랜디 등을 찾아내긴 했지만 환자들의 약한 비위에 술은 너무 독했다. 카알은 더 못참겠다는듯이 일어섰다. "가세! 수색을 시작하세. 여러분도 도와주시겠습니까?" 터커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에델린에게 말했다. "태양이 떠오르면, 저 환자들은 다시 악화되겠지요?"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에델린께서는 여기서 어제처럼 신전을 지켜주십시오. 저희 들이 영지를 수색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전에, 여러분들을 축복하겠습니다. 수색하는동안 병 에 걸리면 곤란하겠지요." 에델린은 신심 어린 표정으로 송곳니를 번쩍거렸다. 카알은 어제처럼 정중하게 축복을 받았고 샌슨과 나도 그랬다. 터커와 크라일은 영문도 모른 채 에델린의 축복을 받았지만 펠레일과 사만다는 그것을 사양했다. 펠레일은 말했다. "치료하는 손 에델린의 디바인 파워라면, 제겐 너무 위험합니다. 전 마 력을 다루죠.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입니다." 무슨 말이야? 하지만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만다는 물론 다른 신의 성직자이므로 에델린의 축복을 받지 않았고 이루릴도 어제처럼 축 복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난 사만다가 걱정되었다. "저, 사만다. 당신은 무기도 없는데, 여기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낫 지 않을까요? 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시고…" 사만다는 날 보며 웃었다. "까르르르… 날 생각하는 거니? 고맙구나. 하지만 나도 무기는 있어." 나는 사만다가 들어올리는 로드(Rod)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참나무를 깍아만든 것이긴 하지만, 남자들이 쓰는 굵직한 전투용 몽둥이라기보다 는 가벼운 작대기 정도였다. 게다가 사만다의 체격으로 저걸 휘둘러봐 야… 하지만 사만다는밝게 말했다. "게다가 수색하면서 테페리의 조력을 빼놓을 수는 없지." 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카알은 덧붙이듯이 설명했다. "호비트와 갈림길의 테페리의 성직자들께서는 갈림길의 권능을 지니셨 네." "갈림길의 권능이요?" 그러자 사만다는 웃으면서 땅에서 돌멩이 하나를 들어올리더니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거대한 장난을 기획하는 악동 같았다. "자, 후치? 이걸 등 뒤에서 아무 손에나 쥐고 주먹쥔 채 내밀어봐. 눈 을 감고 있을께." 응? 무슨 장난이야? 난 어쨌건 시키는대로 등 뒤에서 돌멩이를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사만다는 눈을 뜨더니 말했다. "왼손이군. 갈까?" 나는 왼손에 든 돌멩이를 던지며 입을 쫙 벌렸다. "갈림길의 권능은, 결국 선택의 폭이 둘 중 하나라면 백발백중으로 맞 춘다는 것인가요?" 사만다는 왼쪽길로 꺽어들어가면서 얼굴은 날 향한채 말했다. "대개는 그래.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국 다른 성직자들과 마찬 가지로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지. 아까의 그 돌멩이 같은 것은 중요 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음, 이거 어떨까. 내가 어떤 악당의 목에 대 거를 들이대고 있어. 살짝 그으면 끝이야." 나는 성직자의 이런 말에 너무 놀랐다. "물론 대거를 치우고 죄송합니다, 하겠지요?" "얘는! 내가 에델브로이의 성직자인 줄 아니? 어쨌든 악당의 생사여탈 권은 내게 있어. 그런데 말이야, 이 악당은 내 애인의 원수야. 그런데 이 악당은 고아들을 끌어모아 키우는 아주 골치아픈 취미가 있거든? 쉽 게 말하면 의적이라는 거 있지? 자, 목젖을 자를까, 말까?" 갈수록… 이게 성직자가 하는 말 맞나? 사만다는 싱글거리며 목젖을 어쩐다는 말을 했고, 그래서 나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엉뚱한 질문을 하 고 말았다. "당신 애인도 있어요?" "고향에서 다른 여자에게 한 눈 팔고 있을꺼야. 흥! 어쨌든 그런 상황 이 되면, 난 내가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선택은 해. 그리고 그건 테페리 의 뜻대로 될걸. 알겠지? 난 신의 뜻에 따르는 경우를 맞춘다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맞춘다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그건 성직자가 아니 라 도박사게?" 사만다는 오른쪽으로 돌아갔고 나도 그래서 오른쪽으로 따가들어간 다 음 미간을 긁으며 질문했다. "그래도 테페리는 당신이 알거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테니까 도박을 해도 승률이 높겠네요." "전혀 그렇지 않아. 한 번 시험해봤어." "시, 시험? 도박을 했어요?" "응. 도박장 주인은 불경스럽게도 성직자가 들어가니까 재수없다는듯 이 쳐다보더군. 말이 되냐? 신의 은총이 내리는 거지. 어쨌든 밤새도록 술 마시며 도박을 했지. 술은 마셨지만 그래도 평소와 똑같은 컨디션으 로 내가 판단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지. 블랙잭을 했거든. 그건 판단 이 두 가지 중 하나니까 테페리의 권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임이야. 더 받느냐, 끝내느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파문당했을 것 같아요." "에이, 들키진 않았어." 사만다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키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마치 들키지 않으면 아무런 죄도 되지 않는다고 믿는 어린애들처럼. 사만다는 왼쪽 으로 꺽어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좀 따라간 다음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 다. "그래, 어떻게 낮죠?" "새벽에 나올 때 내 수중엔 전날 저녁에 가지고 들어갔던 것만큼 남아 있었지. 퍼셀 한 닢 틀리지 않고." 나는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흠, 테페리의 성직자들은 모두 재미있 는 사람인가. 그 때 펠레일이 끼어들어 미안하다는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 사만다님. 후치군. 조용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긴 게덴 의 율법을 따르는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만큼…" 펠레일은 정중하게 말했지만, 왜 나는 그만 보면 웃음이 나려고 할까. 여자 손목도 못잡아본 주제에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펠레일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사만다는 입술을 샐쭉 하 더니 다시 또 오른쪽으로 획 꺽었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꺽자마자 사거 리가 나타났고 사만다는 주춤했다. 카알이 사거리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왼쪽길입니다. 진행방향으로 보아선…" 사만다는 왼쪽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게 문제인 모양이다. 두 갈래길에서는 마음내키는대로 갈 수 있지만 세 갈래가 되면 그 때는 다 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춤거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대단히 놀라운 능력일 것 같다. 살아가다보면 겨우 두 가지 갈래에서 얼마나 고민하는가. 하지만 사만다는 그런 데에는 고민 하지 않는다. 내키는대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테페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일뿐 그녀 자 신을 위하는길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페리가 그녀의 죽음을 더 바란다면 그녀의 권능은 그녀를 죽음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 하 지만 그녀는 테페리의 프리스티스니까 그것도 충분히 감수할 뿐 아니라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그러니 고민이 없고 낙천적일 수밖 에. 검소한 녹색 능직 로브를 입고 지팡이도 검소해 보이는 스탭을 들고 있 어서 레너스시의 그 아프나이델보다는 훨씬 고상해보이는 펠레일이 말했 다. (고상해보이지만, 그래도 난 웃음이 나온단 말이야.)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만다는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렸다. "왜, 펠레일?" "이 지점의 지형이 신경에 거슬립니다." 지형이라… 그냥 길다란 길이다. 양 옆으로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저 앞으로는 다시 두 갈래 길이 보인다. 길이는 약 60큐빗 정도. 그러나 그 중간에 다른 갈림길은 없다. 하지만 펠레일은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본 모양이다. "이 근처의 골목길의 형태로 볼 때, 누군가 우릴 감시하고 있다면 저 앞쪽에서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지요. 따라서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샌슨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펠레일께서는, 엄폐와 진형에 대해 좀 아시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허즐릿의 저서 몇 권을 읽었지요." "어, 그래요? 14권에 나오는 글이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펠레일과 샌슨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크라일을 점점 화나 게 만드는 모양이다. 크라일은 앞으로 척 나서면서 그 팔치온을 뽑아들 었다. "아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 그러니까 덮친다면 여기란 말이지? 알았 어. 어차피 앞에서 달려들어오겠군. 내 뒤로는 한 놈도 지나가지 않게 해줄테니 따라만 와." 그렇게 말하며 크라일은 팔치온을 오른손에 들어 어깨에 맨 채 앞으로 척 나섰다. 그 때 터커가 고함소리가 들렸다. "앞이 아냐! 왼쪽, 위!" 우리는 화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왼쪽의 건물 위에서 늑대들의 머리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쪽의 건물 위에서도 나 타났다. "크르르르…" "으르르르…" "며, 몇 마리야?" "뛴다!" 늑대들이 뛰었다. 크라일은 오른손은 그대로 둔 채 허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첫번째 늑대가 부딪히기 직전, 허리를 튕겨올리며 왼손을 크게 올려쳤다. "캐애앵!" 어이구 세상에. 늑대는 도로 위로 튕겼고 크라일은 그 때 오른쪽 어깨 에 매었던 팔치온을 양손으로 휘둘러 내렸다. 허공에 떠오른 늑대가 허 리가 거의 끊어질듯한 모습으로 나가떨어졌다. 역시 왼손의 크라일이다. 그러나 늑대들은 일제히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건물 벽으로!" 우리는 일제히 각자 가까운 건물 벽으로 달려 벽을 등졌다. 위에서 뛰 어내리니 건물 벽을 등지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저쪽으로는 이루릴, 펠 레일, 터커가 섰고 내 쪽에는 샌슨, 카알, 크라일, 사만다가 섰다. 그 렇게 양쪽으로 갈라진채 늑대들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하아압!" 크라일의 싸우는 방식은 어제도 보았지만 정말 아슬아슬하면서도 통쾌 하다. 방어는 포기, 왼손만으로 싸우며, 결정타는 오른쪽 어깨에 맨 팔 치온. 따라서 현란하게 발이 움직인다. 아니, 아예 상체와 발이 따로 노 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저 덩치가 마치 우아한 춤이라도 추는 것 같 다. "으랴아!" 크라일의 모습을 보고 샌슨도 기세가 오른 모양이다. 샌슨은 낮은 위 치의 늑대들을 걷어찬 다음 롱소드로 내려찍었다. 늑대는 피했지만 그 등이 찢겨지고 말았다. "쾌애앵?" 늑대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구 발광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등에 있는 상처가 타오르고 있었다. 터커의 뒤에 있던 펠레일이 외쳤다. "그거, 그거 은이군요? 그렇다면 저것! 제대로 된 늑대가 아냐! 죽은 늑대가 게덴의 힘으로 법칙을 깨고 움직이는 거야!" 어제 이루릴이 말한대로다. 늑대들은 오전의 태양빛을 받아 무서우리 만큼 번쩍이는 샌슨의 롱소드를 보자 달려들 엄두를 못내었다. 그런데 왜 나에겐 덤비냐, 이 놈들아! "에에라, 사정 안본다.!" 나는 낮은 곳에있는 늑대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쳤다. 늑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가 내가 검을 내리쳐 상체를 비운 순간 뛰어들었다. 그러 나 난 아래에서 올라오는 특별한 수단이 있지! "일자무식!" 퀘게게ィ! 늑대가 조각나며 두 조각이 양쪽으로 한참 날았다. 으어, 내 허리! 펠 레일이 입을 쫙 벌리는 것을 볼 새도 없이, 나는 버릇대로 다시 한 바 퀴 더 돌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허리가 뒤틀리니까. 그 때 뭐가 등에 부딪혀왔다. 곧 등을 긁는 소리에 목 뒤의 털이 곤두섰다. 늑대가 등에 달라붙었다. 목에 뜨거운 침방울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아!" 닌 뒤로 돌진해 벽에 부딪혔다. 콰르릉! 벽이 무너지며 난 집 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세상이 마구 뒤집히는 느낌이 들며 난 나동그라졌고 먼지와 돌가루가 숨막힐듯이 날렸다. 낮에 별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군. 황급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봤다. 그 늑대는 목이 부러진 모양이 다. 난 다시 바스타드를 고쳐쥐며 벽에 뚫린 구멍으로 뛰쳐나왔다. "후치? 저 집과 원수졌어?" 사만다는 집 밖으로 등장하는 나에게 이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 네는 사만다에게 난 바스타드를 휘둘렀다. 사만다는 기겁했지만 나는 그녀 옆에서 육박하는 늑대를 친 것이다. 워낙 급하게 내려치다가 나는 기세에 못이겨 땅을 쳤다. 늑대와 함께 내 바스타드를 땅 속에 박아버 린 것이다. 이거, 자꾸 왜 이래! 사만다가 이번엔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능숙한 모험가들은 정말 굉장하군. 그런데 바스타드가 왜 안 뽑혀! 저쪽 벽에 기대어 있던 이루 릴이 내 모습을 보자 재빨리 달려들었다. "오오오!" 크라일의 감탄소리. 이루릴은 마치 번개가 치듯 지그재그로 뛰며 늑대 사이로 달렸다. 늑대들은 이루릴에게 달려들었으나 그 턱은 번번히 허 공을 깨물 뿐이다. 한 놈이 이루릴의 발목을 물려 하자 이루릴은 그대 로 앞으로 뛰며 땅을 짚고 덤블링 했다. 그리고 착지하자마자 내 가슴 을 걷어찼다. "웁!" 이루릴이 걷어차준 덕분에 나는 간단히 땅에 박힌 바스타드를 뽑았다. 좀 점잖은 방법으로 할 수는 없냐고 불평하기도 전에, 이루릴은 내 가 슴을 찬 반동력으로 그대로 뒤로 날았다. 내 가슴 앞, 이루릴이 있던 공 간으로 늑대가 날았다. 나는 잽싸게 다시 내려쳤다. 그 놈의 뒷다리를 맞추는데 성공했고, 이번엔 땅에 박지 않았다. 뒷다리를 맞은 놈은 땅에 뒹굴었고, 그 앞에 있던 카알이 그 놈의 턱을 걷어찼다. 카알이 외쳤다. "크레틴양! 이 놈들은 당신 담당이오!" 정말 카알은 대단하다. 난 어제 한 번 들었던 사만다의 성을 벌써 까먹 었는데 카알은 기억하고 있었군. 사만다는 재빨리 품 속을 뒤지더니 동 그란 쇠붙이를 꺼내었다. 둥근 고리에 가운데는 T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 었다. 테페리의 디바인 마크(Divine Mark 聖表)인 모양이다. 사만다는 그것을 앞으로 내밀며 기도를 했다. "대지가 거부하는 시체여, 사라져라!" "퀘르르, 카악!" 늑대들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터닝이구나! 저게 바로 성직자의 터닝 이다. 대지가 받아들이지 않는 시체, 그래서 대지에 잠들지 못하고 지상 을 배회하는 시체를 쫓는 것. 늑대들은 미친듯이 달아났다. 그러나 그게 좀 안좋은게, 늑대들이 모두 저쪽으로 달려간 것이다. 저쪽이란 터커와 펠레일, 이루릴이 있는 쪽이다. "제기랄!" 터커는 악을 쓰며 할버드를 휘둘러 늑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터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두른 순간 왼쪽에 있던 놈이 터커 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익! 무엇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 터커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루릴이 자신의 특기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달려드는 늑대의 몸에 비 스듬히 망고슈를 들이대었다. 찬탄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늑대는 공중 에서 완전히 면도를 당했다. "캬아아아악!" 땅에 떨어진 늑대의 허리는 말끔하게 털가죽이 벗겨졌고 빨간 속살이 보였다. 터커는 어제도 본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뒤에 있던 펠레일은 고개를 숙이더니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샌슨, 크라 일은 등을 보인 늑대들에게 돌격했다. "어억!" 늑대가 몸을 뒤집으며 샌슨의 발을 물었다. 그 옆에 있던 크라일이 재 빨리 팔치온으로 내려치자 샌슨의 다리에는 늑대의 머리만 남게 되었 다. 그러나 그 머리는 끝까지 샌슨의 발목을 물고 있었다. 샌슨은 눈에 불을 튀기더니 무릎을 들어올리며 롱소드의 자루로 늑대 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뒤에 있던 사만다가 재빨리 샌슨의 어깨 너머 로 디바인 마크를 내밀더니 다시 고함을 질렀다. "물러가라!" 상처입은 샌슨에게 달려들려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리 고 그 쪽에서는 터커가 할버드로 장작 쪼개듯 내리찍었다. 나도 바스타 드를 휘둘렀다. 그런데 늑대는 머리를 어떻게 움직이더니 내 바스타드 를 물었다. 나는 놀라서 당기려고 했으나 늑대는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내 왼쪽에서 늑대가 달려들었다. "일자무식, 옆으로!" 난 바스타드에 늑대를 매단채 옆으로 뱅뱅 돌았다. 바스타드를 물고 있던 놈은 내 옆에서 달려들던 놈과 충돌해서 나가떨어졌고 난 갑자기 너무 세게 도느라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황당하게도 난 휘청거리다가 늑 대 한 놈의 꼬리를 밟았다. 늑대가 펄쩍 뛰어올랐으나 땅에 도로 내리기 도 전에 그 목에 이루릴의 에스터크를 맞고 말았다. 그리고 그 때 펠레일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엔라지(Enlarge)!" 사만다의 몸이 부쩍부쩍 커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사만다는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뚱거렸으나 곧 당당하게 선 다음 늑대들 앞에 섰다. 늑대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사만다는 구름 사이로 내 밀듯이 팔을 아래로 내렸고 그 손에는 거의 방패 크기가 되어버린 거대 한 디바인 마크가 빛을 발했다. 사만다가 특별히 터닝을 하지도 않았지 만, 조금 전 터닝 당했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자 다른 놈들도 덩달아 달아나버렸다. "캐르릉! 캥캥!" 늑대들은 미친듯이 달아나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히익, 히익! 내, 숨소리가, 피리 소리 같아."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1. "그게 테페리의 디바인 마크인가요?" "응, 여기 이 T자는 테페리의 머릿글자이기도 하고, 갈림길을 상징하기 도 한다구." 아하! 그렇구나. T자는 그러고보니 갈림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 이면서 질문했다. "그런데요, 궁금한게 있어요. 아까 그 늑대들은 아마 게덴의 힘 때문에 날뛰는 시체잖아요? 그런데 게덴도 헬카네스의 하위신이고 테페리도 헬 카네스의 하위신인데, 그래도 터닝이 되요?" "에이, 얘는. 터닝은 그 늑대들과 나와의 관계지 신들끼리의 관계가 아 니잖아. 아버지끼리는 사이가 좋아도 아들끼리 싸울 수야 있는 문제 아 냐? 파괴신 레티의 성직자들도 언데드를 터닝할 수 있는걸?"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알아듣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사만다는 계속 설명했다. "그리고 흔히 헬카네스의 하위신, 유피넬의 하위신 이렇게 이야기 하 지만 그건 이해하기 편할대로의 관념이고. 헬카네스나 유피넬이 각자 자기 하위신들의 두목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헬카네스나 유피 넬은 그저 만물의 법칙을 나타내는 이름일 뿐. 그리고 신들은 그 부하 가 아니야. 그렇지. 중력을 생각해보자. 넌 중력을 무시할 수는 없지? 하지만 네가 중력의 부하인 것은 아니잖아. 중력이 너에게 뭘 시키는 것 도 아니고." "아… 어렵군요." 정말 어렵다. 그냥 간단하게 유피넬과 헬카네스를 각자 왕으로 하고 그 하위신들을 신하로 생각하면 훨씬 쉬울텐데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 다.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그저 우주의 원리를 나타내는 고차원적인 은 유라는 사만다의 설명이 뒤따랐지만 난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난 역시 신학에는 적성이 안맞아. 어쨌든 우리는 사만다를 다시 앞세워 걸어가고 있었다. 늑대에게 발목 을 물린 샌슨은 이루릴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끄떡없다는 투였다. 아마 크라일의 비웃는듯한 시선을 의식해서 만용을 부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샌슨은 조금 절뚝거리면서도 꿋꿋이 걸어오고 있다. 이루릴은 한숨을 쉬며 혁대에 매어둔 가방을 열었다. "그럼 이거 한 모금만 마셔요. 당신이 아프지 않다면, 날 위해서라도 마셔줘요. 보고있자니 가슴이 아파요." 샌슨은 눈물을 흘릴듯한 표정이 되더니 이루릴이 내민 약병을 받아 단 숨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이루릴의 눈이 커졌다. "아, 아니 저 한 모금만…" 샌슨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듯이 자신의 양팔을 바 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을 만져보고 팔을 휘둘렀다. 크라일은 저놈 이 갑자기 미쳤나 하는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지만 샌슨은 신경쓰지 않으면서 외쳤다. "우, 우와! 후치! 날 쳐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어처구니 없어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가슴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힘이 솟아난다! 정말 엄청나! 후치, 한 번 네 힘으로 쳐봐!" 그래? 이런, 한 모금만 마시라는 것을 너무 많이 먹어버린 것 때문인 가보군. 나는 샌슨의 복부를 쳤다. 샌슨은 벽을 뚫고 들어가 기절해버렸 고, 다시 깨워서 데리고 가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되었다. 어쨌든 샌슨의 발목은 나았다. 우리 일행은 주위를 경계하며 걸어갔다. 지형지물을 읽어내며 전술전 략에 도통한 펠레일이 있긴 하지만, 경계해서 손해볼 것은 없으니까. 게 다가 조금 전 늑대와의 싸움으로 우리는 모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래서 앞에 있는 사만다 옆에 나와 터커가 서고, 그 뒤에 카알과 펠레 일과 이루릴이 뒤따랐다. 샌슨과 크라일이 맨뒷쪽에서 따라왔다. 다시 네갈래 길이 나타났다. 사만다는 멈춰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뒤에 있던 카알이 말했다. "진행방향으로는 오른쪽이오." 그런데 사만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만다를 쳐 다보았다. 사만다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해." "예?" "음… 아마 이런 건가 본데,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나는 가지 말 것 을 선택한 것 같아. 그래. 더 가고 싶지가 않아." 사만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상해. 여긴 아무 것도 없는 네갈래 길인데. 하지만 테페리의 뜻이니까, 난 더 이상 가지 않겠어." 카알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주위로 보이는 것은 평범한 집들 뿐이었고 뭐 하나 이상한 것이 없었다. 카알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 다. "허, 신의 뜻을 해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때 터커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따르려 했지만, 터커는 손을 휘저어 나를 물러나게 하고는 혼자 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마치 발로 무엇을 밀듯이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치 장님이나 된듯이 할버드를 앞에 길게 내밀어 땅을짚어보거나 허공을 휘저어 보면서 걸 었다. 펠레일이 말했다. "함정은 없습니다. 터커." 터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펠레일은 계속 설명했다. "함정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언디덱트(Undetect)를 사용하면 마법의 흔적을 지울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함정을 설치할 이유가 없는 장소입니다. 던전도 아닌 대로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은 우습지 않을까 요." 터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위를 다시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뭐지?" "아마 이 곳이 목적지인 것 같습니다." "뭐?" 펠레일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 네거리는 평범해 보이지만, 영지 전체에서 볼 때는 중앙에 해당하 는 부분이군요." "아!" 우리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여기가 중앙인지 잘 모르겠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걸? 지형지 물 읽는 법이나 육안 거리 관측술 같은 것을 내가 배웠냐? "잠시 기다리십시오." 펠레일은 고개를 숙이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한참을 웅얼거리던 펠레일 은 고개를 끄덕였다. "땅 속이군요. 터커씨. 물러나십시오." 터커가 물러나자 펠레일은 우리 모두를 우리가 걸어온 골목 쪽에 물러 나 있도록 하고는 혼자서 네거리의 중앙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돌멩이를 들어 벽에 뭔가를 갈겨쓰기도 하고 땅에 그림 을 그리기도 했다. 타이번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펠레일은 돌멩이 몇 개를 이상한 모양으로 쌓아두더니 말했 다. "한가운데입니다. 땅을 좀 파야겠는데요? 그렇게 깊진 않습니다." "땅을 파?" "땅 속에 있는 뭔가가 보입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서 안전장치를 했습 니다." 우리를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크라일과 나, 샌슨이 앞으로 나 서서 각자의 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파기엔 적당하지 않은 물건 이지만, 어쨌든 잠시 후 샌슨이 뭔가를 발견했다. 펠레일은 직접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래서 샌슨은 롱소드의 끝에 그것을 꿰어올렸 다. 샌슨이 들어올린 것은 작은 쇠붙이였다. 마치 사만다의 디바인 마크 비슷한 둥근 고리였는데, 그 가운데는 머 리가 두 개인 까마귀의 모습이 보였다. 펠레일과 사만다가 앞으로 나서 서 샌슨의 롱소드 끝에 매달려 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알이 먼저 말했다. "게덴의 디바인 마크인 것 같은데?" 펠레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머리가 두 개인 까마귀는 체로이인 것 같군요. 그런데 이것 예사 물건이 아니군요. 장식의 모양으로 보나 쇠붙이의 색깔, 무늬 의 선택으로 볼 때 거의 200년은 족히 된 물건인데요?" 크라일이 입을 벌렸다. "200년? 와, 비싸겠네?" 사만다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그 디바인 마크를 보면서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주네. 응. 그럴 거야. 누군가가 의식을 행한 다음 이것을 여기에 묻 은 걸꺼야.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렸고… 잠깐.그렇다 면 의식의 제물이 있을 텐데. 이 디바인 마크는 의식의 보증이니까 틀림 없이 제물이 있을 거야." 터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물이 뭘까?" 펠레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샌슨의 롱소드 끝에서 그 디바인 마크 를 들어올렸다. 우리는 놀랐지만, 펠레일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게 제법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것은 골동품적인 의미 에서 그렇다 이 말입니다.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힘을 낼 수는 없습니 다. 이건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파묻었을 뿐입니다. 제물이나 의식의 주 관자의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어쨌든 이걸 회수했으니 의식의 상징은 없어진 셈이고, 따라서 세이크리드 랜드는 취소될 겁니다." 펠레일이 너무 평온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다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제대 로 기쁨의 표시를 낼 수 있었다. "색깔! 색깔이 돌아왔어! 우하!" 내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들의 색깔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어두운 부분은 어둡고, 밝은 부분은 밝 다. 그림자도 생겼다. 나는 내 그림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이렇 게 기쁜 일인 줄은 몰랐다. "정말이군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는군요?" 카알도 기쁜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펠레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만다님이 있었으니까 간단히 위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해결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부정해야겠군요." "무슨 말씀이시오?" 펠레일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물건이 있다면, 파묻은 자가 있겠지요. 그 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 리고 두번째. 아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흠… 그렇겠구료. 그렇다면 어떻게 찾는다?" 펠레일은 사만다를 둘러보았다. "사만다님?" 그런데 사만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만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니. 더 이상 가기 싫다고. 아직도 그래. 아이들을 찾아봐 야 되겠지만, 이상하게 아이를 찾고 싶은 기분이 안드는데."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호통을 치겠지만 갈림길의 권능을 가진 테페리의 성직자의 말이니 오히려 그 말을 그대로 따르고 싶다. 우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라일이 주저하며 말했다. "혹시… 테페리는 아이들을 찾는 걸 원하지 않는 것은?" 터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크라일." "어, 가정해서 말이야, 음. 가정만 하는 것은 상관없잖아?" 사마다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신의 뜻을 해석할 수는 없으니, 모든 종 류의 가정이 가능하다. 땅에서 파낸 디바인 마크를 들여다보던 펠레일은 말했다. "어쩌면…" 펠레일은 끝말을 잇지 않았다. 터커는 입맛을 다시더니 펠레일에게 말 했다. "펠레일. 자네가 말을 끊으면 대개 뒷말은 듣기 싫은 것이지. 하지만 해봐."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쩌면, 제물은 아이들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아이들을 찾을 수 없으니, 사만다님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해됩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펠레일은 게덴의 디바인 마크가 마치 말이라도 하는듯이 그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의식이 있다면, 제물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 영지에서 없어진 것은 아이들입니다. 괴로운 추측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크라일이 고함질렀다. "도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펠레일은 여전히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어조 는 서늘했다. "저주. 신의 저주는 대개 신격 상징물을 필요로 합니다. 순결을 상징하 는 처녀, 처녀는 생산이 되지 않는 불모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리고 어린 아이는 그 자체로 이미 신이며, 따라서 합당한 제물이죠…." 펠레일의 말은 끔찍스러웠다. 크라일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렇다고 죄없는 아이들을 몽땅 제물로? 그런 미친 놈이 어디 있어?" 샌슨도 이번에는 크라일에게 찬성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모진 짓을 한다는 것은…" 터커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펠레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본다. 사람이란 자기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들도 꺼리낌없이 파괴하는 모습 도 보여주지." 나는 터커의 말에 다른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이루릴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이루릴은 평소처럼 별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속마음은 어떨까. 터커의 말 때문에 이루릴은 인간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 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루릴은 내 시선을 알아차렸다. "후치? 왜 그러죠?" "아, 아뇨. 펠레일의 말대로라면, 참 지독한 놈이죠?" 이루릴은 빙긋 웃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예?" "알 수 없지요. 인간일지, 인간이 아닐지." 아아! 그래서 이루릴은 별 표정 없었구나! 그렇다. 꼭 인간이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은연 중에 인간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항상 인간을 주체로 놓는 관념에 익숙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루릴은 항상 모든 종족을 한꺼번에 생각한다. 친 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루릴이 아닐까? 항상 모든 종족을 고려하는 그녀야말로 모든 피조물의 친구이리라. 펠레일은 이루릴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예. 사람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게덴의 신자들은 거의 인간이니까요. 물론 신자도 아니면서 게덴의 힘만을 불러썼을 수도 있겠지만, 게덴도 신이므로 자신의 신자 도 아닌 자의 부름에 함부로 역사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펠레일은 잠깐 움찔 하더니 사만다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제가 신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할 수야 없지만…" 사만다는 미소지었고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덴의 성직자라… 환자들에게 물어봐야겠군. 일단 세이크럴라이제이 션은 해소되었으니 환자들은 쉽게 회복될 거요. 그들에게 짐작가는 사 람이 있는지 물어봅시다. 그랑엘베르의 신전이 있는 것을 보아 이 영지 의 주민들은 대개 그랑엘베르의 신자겠지. 그렇다면 범인은 이방인일테 고, 뭔가 짐작가는 사람이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을 돌려 다시 신전쪽으로 향했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2.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우리가 쓰러트린 늑대들의 옆을 지나게 되었다. 아까는 조사가 더 급해서 그냥 놔두고 지나쳤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 까와는 달리 모두 썩어있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썩어 있네?" "언데드였잖아. 몸을 박살내어 버리자 다시 원래의 시체의 모습으로 돌 아간 거지." 카알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질문했다. "그럼, 아까 달아났던 놈들도 다 시체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디바인 마 크를 회수했으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이제 더 이상 이 영지가 세이크리드 랜드가 아니 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일어난 일이 취소되지는 않아. 늑대들은 여 전히 언데드 몬스터로 남게 될거야. 에델린양이 그러지 않았는가. 뱀파 이어는 그대로 남게 될 거라고. 이 놈들도 마찬가지지." "그것 참…" 사만다는 그 조각난 채로 썩어있는 모습들을 보며 얼굴을 크게 찌푸렸 다. "끔찍스럽군." 사만다는 혀를 찼다. 하지만 크라일은 싱긋 웃으며 늑대들의 발을 잘라 서 모으기 시작했다. 터커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늑대 발톱 목걸이가 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저런 젠장맞을 놈이 있나. 에이, 퇘!" "얼씨구? 야! 우리 수중엔 돈 한 푼도 없다고! 그러니까 레너스로 가려 고 했던 거 아냐?" "그래도 그렇지. 에이, 언데드 늑대들의 발톱을 뽑아 목걸이를 만들어? 찝찝하게시리." 크라일은 콧방귀를 탕탕 끼었다. 결국 사만다가 구부정하게 엎드려서 작업하고 있던 크라일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크라일은 보기 좋게 나뒹굴 었다. "이익! 그 따위 흉물스러운 짓 멈추지 못해! 뜨거운 맛 좀 볼래?" 사만다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당장 테페리의 디바인 마크를 뽑아들었 다. 크라일은 질겁하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한참 궁시렁거리며 따 라왔다. 카알은 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사만다에게 질문했다. "사만다양. 신의 권능을 그렇게 함부로 협박 등에 사용해도 됩니까?" "뭐 어때요! 저런 발칙한 녀석은 신벌을 좀 받아도 되요!" 카알은 할 말 없다는 투로 빙긋 웃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상한 기분 이 들었다. "저, 카알." "응?" "이 늑대들이 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응?" "이 늑대들 모두 시체였다고 했죠?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모두 죽은 지 오래된 건 아니잖아요? 제일 많이 썩어있는 놈도 아직 형체는 그럴 듯하잖아요." 내 말에 사만다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언데드가 될 수 있는 나이는 정해져 있거든." "언데드가 되는 나이?" "죽은지 얼마가 지났느냐에 따라 언데드가 될 수 있느냐…"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늑대 시체들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언데드가 문제가 아니라, 왜 늑대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느 냐 하는 것이 궁금하다는 말이에요. 죽었으니까 언데드가 된 거 아니에 요?" "어? 글쎄?"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글쎄… 아마 대규모 늑대사냥이라도 했던 것 아닐까? 가을철에 추수가 끝나고 나면 간혹 사냥을 하지 않는가. 녹음이 울창한 계절에는 사냥하 기도 힘들고." "그럼, 여기가 세이크럴라이제이션 되기 직전에 늑대사냥이 있었고, 그 리고 게덴의 힘이 펼쳐지자 그 때 죽은 늑대들이 일어났다?" "그럴 수 있겠지." "말이 안되는데요?" 카알은 멈춰서서 날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멈춰섰다. "늑대들을 왜 사냥하지요? 가죽이나 고기도 필요없는게 늑대예요. 가축 에 피해를 입힌다는 것 정도로 볼 수 있는데, 들어오면서 보셨다시피 여 긴 목장 같은 것도 없는데요?" 카알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사람이 피해를 본 게 아닐까?" "그건 말이 되는군요. 하지만 다음 문제가 남아있는데, 왜 늑대들이 아 무 것도 잘려져 있지 않지요?" 크라일은 눈을 크게 떴다. 난 크라일을 흘깃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크라일씨처럼 발톱을 뽑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사냥 을 했다면 대개 증거를 남겨요. 고기나 가죽이 필요없으면, 그래도 죽이 고 나서 뭘 자르든 잘라요. 어, 그러니까, 에… 아무 것도 자르지 않았 다면 자기가 사냥을 얼마나 했는지 뭘로 증명하죠?" 터커가 턱을 쓸면서 말했다. "하긴… 사냥을 그냥 하는 경우는 드물지. 자, 나가서 모두 늑대를 죽 이자? 아니,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은 그게 아니지. 자기들이 당하지 않 는 이상, 아무런 보상도 없고 위험한 그런 일에 뛰어들지는 않아. 늑대 의 피해가 크므로 늑대 꼬리를 몇 개 가져오면 무슨 보상을 하겠다, 이 런 게 사람의 방식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그렇잖아요, 카알?" "허어… 그렇구만, 네드발군. 정말 늑대들이 왜 이렇게 많이 죽은 걸 까?" 카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늑대들을 살폈다. 펠레일이 입을 열 었다. "병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닐까요?" "무슨 말이오?" 펠레일은 주위를 가리키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여긴 세이크리드 랜드였습니다. 그러니, 늑대들도 병에 걸려 죽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늑대들이 영지에 왜 들어오겠소? 영지에 들어와야…" "그건, 늑대들이 우연히 이 마을의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 었을 겁니다. 공격하기가 쉽지요. 실제로 방어가 약해진 마을은 몬스터 들이나 늑대들의 공격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늑대들은 이 마을 에 공격해들어왔고, 그러다가 자신들도 병에 걸려 죽어버렸겠지요." "아! 그렇구먼." 카알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펠레일의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쫙 올랐다. 나는 벌벌 떨면서 되물었다. "뭐라고요?" 펠레일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늑대들은 병에 걸려 죽었다가…" 순간, 펠레일도 마치 물벼락이라도 맞은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았고, 나도 그런 얼굴로 펠레일을 바라보 면서 다급하게 질문했다. "당신, 당신들, 시체를 태웠다고 해, 했지요?" "그, 그렇습니다." "각 집에서 시, 신발이나 식기의 숫자를 세어봤어요?" "아, 아니.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는데…" "그럼, 그럼 그냥 시체만 옮겨 태웠어요? 얼마나 되었죠? 예?" "대략, 200여구 좀 넘었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도 안된다. "시체가 200여구, 신전에 90여명. 그럼 300명 정도? 말도 안돼! 이 넓 은 영지에?" 나와 펠레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파랗게 질려버렸다. 이 넓은 영지에 300명이라니, 어림도 없다. 적어도 2000명은 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1700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펠레일은 와들와들 떨면서 말했다. "우, 우리가 오기 전에 이, 이 영지의 주민들이 묻은 것이 아닐까요?" "태운게 아니라 묻었다면 큰일이잖아요!" 나는 거의 발악하듯이 댓구했고 펠레일도 화들짝 놀랐다. 묻었다면 정말 큰 일이다. 병에 걸려 죽은 늑대들이 모조리 일어나 우 릴 덮쳤다. 그렇다면,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도 일어나 우릴 덮칠 수 있 다! "어, 하, 그렇다면, 왜 늑대들만 설치고, 그, 그것들은…? 아, 아직 나 타나지 않았잖아요?" 펠레일은 숨막히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 정말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사만다가 고함을 질렀다. "몇 살이죠?!" 우리는 놀라서 사만다를 바라보았다. 난 엉겁결에 대답했다. "17살인데요?" "아니! 네 나이 묻는게 아냐! 저 늑대들, 몇 살이죠? 아무도 몰라요?" 우리는 당황한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능숙한 사냥꾼이라면 몰라도 늑대의 나이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 때 이루릴이 늑대들을 살피기 시 작했다. 이루릴은 말했다. "차이가 좀 있지만 대략 7살에서 10살 정도의 놈들이군요." 사만다는 몹시 긴장했는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그럼, 7일에서 10일일 거야. 사람들은? 아이들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략 20세 이후겠지. 그럼 죽은지 20일이 지나야 언데드가 될 수 있어." 나는 멍청한 얼굴로 사만다를 바라보았다. 사만다는 계속 혼잣말 하듯 이 말했다. "하지만, 펠레일의 말대로라면 늑대들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나서 공 격해왔을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더 전이다. 최소한 10일보다는 훨씬 전이다. 그리고 늑대들이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어젯밤부터. 그렇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만다는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끔찍스러운 공포를 느 꼈다. 샌슨이 황급히 질문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나이만큼의 날짜가 지나야 언데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 그게 언데드가 되는 나이라는 말인가? 사만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요. 그래서 드래곤이 언데드가 되려면…" "아니, 잠깐만요! 그렇다면 이 영지에 과거에 죽었던 자들은요? 이번의 병 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도 죽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 아녜요?" "아!" 샌슨의 말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렇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 우릴 덮 친다면, 벌써 그렇게 되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지에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테니까. 사만다의 말대로 나이만큼의 날짜가 지나야 한 다 해도 그런 자들은 벌써 그 날짜가 지났을 것이다. 한 1년전에 예순살 로 죽은 노인이 있다면 그 노인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만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들은 기다렸을 거예요!" 사만다는 거침없는 태도로 설명했다. "이 정도 크기의 영지에는 일년에 두세 명 정도가 죽을 뿐이죠. 그리 고 몇 년만 지나면 이미 시체가 썩어서 일어날 수 없을 걸요? 그렇다면 과거에 죽었던 자들 중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많아봐야 10명 정도?" 맞는 말 같은데? 사만다는 이마 양쪽에 손가락을 대면서 중얼거리듯이 빠르게 설명했다. "그 정도로 덤벼올 수가 없었겠지. 10명 정도의 언데드로는 승산이 없 다. 여기 있는 사람만 해도 8명이고, 그리고 에델린도 계시니까. 그렇지 만, 최근에는 질병 때문에 엄청난 숫자가 죽었을걸. 그렇다면 그들이 다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덮쳐올 수 있겠지!" 사만다는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젠 더 기다릴 필요가 없을걸. 우리가 그 디바인 마크를 회 수해서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을 취소시켰으니까 더 이상 죽은 자들이 일어 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더 기다려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뛰어!" 터커의 고함소리. 우리는 신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빌어먹고 또 빌어먹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터커는 달리면서 욕설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런 것을 짐 작했겠는가. 우리는 모두 이를 악물면서 달렸다. 펠레일은 헉헉거리며 말했다. "그, 그래서 테페리는… 아이들을 찾으러 가는 것을 반대…." 그렇군! 사만다는 아이를 찾으러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금 더 급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쩌면 당장 일어나 신전을 덮치고 있을지도 모르 는 그… 신전이 저쪽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멈춰요!" 이번엔 이루릴의 고함소리. 우리는 멈춰서서 의아한 눈으로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은 눈을 부릅뜨고 신전 방향을 보고 있었다. "좀비(Zombi)군요. 수효는, 음… 300 쯤 되어보이는군요." 우리들은 모두 질겁해서 신전이 있는 언덕을 보았다. 여기선 그 아스 라한 모습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언덕 아랫쪽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 엇인가도 보였다. 저게 다 좀비라고? 우리는 황급히 건물 벽쪽으로 붙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거리가 엄청 나게 멀다. 약 2,000 큐빗 정도? 매일 책을 읽다보니 시력이 좋지 않은 카알은 눈살을 크게 찌푸리며 신전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답답하다는 듯 이 말했다. "이거, 꿈틀거리는 것만 보이는데, 지금 뭣들 하고 있소?" 우리는 모두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말했다. "신전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군요. 하지만 들어가지 못하는데요?" 사만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에델린님이 막고 있는 거야!" 크라일이 숨가쁘게 말했다. "좋아. 그럼, 아니 그런데 300이라고? 이 영지에 그것밖에 안되나? 어, 혹시 나머지는 어디 숨어있는 건가?" 터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만다가 말했잖아. 나이만큼의 날짜가 지나야 언데드가 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만일 이 영지에서 사람들이 죽어간 것이 20일 전이라 면 20살 이전의 시체들만 일어날걸. 나머지 시체는 이제 일어나지 못해. 우리가 디바인 마크를 회수했으니까."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숫자가 맞는군요. 그럼, 여러분. 일단 접근해 봅시다." 우리는 다시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 서 뛰었다. 언덕쪽으로 다가감에 따라 점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 다.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무슨 소린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가 없는 소리다. 그리고 뭔가 부딪히고 무너지는 소리와 쉴새없이 들려 오는 발자국 소리, 도대체 뭐라고 구분지을 수 없는 복잡한 소리가 들려 왔다. 중간 중간 찢어질듯한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이윽고 언덕 아래의 집들 뒤에까지 도착했다. 언덕쪽을 바라보니 등골 이 서늘해져왔다. 사만다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테페리여…"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3. 300 여명의 좀비들이 언덕을 새카맣게 채우고 있었다. 군데군데 썩은 시체들. 회색의 살갗에 가득 묻은 흙덩이들과 계속 빠 져나가는 머리카락들.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들과 지독한 악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구역질이 나려 한다. "그웨에에에…" "가츠츠르르…" 그것들은 인간의 소리 같지 않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언덕 위로 전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전진과 달리, 좀비들은 앞으로 무조건 전진하고 있었다. 앞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면 그것을타넘고 올라가려 했다. 그 러다가 굴러 떨어지면 그대로 그 뒤의 놈이 밟고 지나갔다. 마치 거대 한 개미떼를 보는 것 같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맹목적으로 앞으 로 전진하고 있다. 놈들이 서로 타고 올라 거대한 산을 만들고 있어 신 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놈들은 맹목적으로 신전에만 달려들고 있어 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긴, 쳐다본다 해도 우린 벽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 을 것이다. "저 놈들, 내버려두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다 뭉개지겠는데? 제일 밑에 있는 놈은 가루가 낮겠어?" 크라일이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사만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델린님이라도 계속 막지는 못해! 저 정도의 언데드에서 뿜어지는 힘만이 아니야, 저 무게를 생각해보라구! 크라일 너라면 300명의 무게를 막을 수 있겠어?" 크라일은 이를 갈기 시작했다. 그 때 펠레일이 나섰다. "빨리 에델린을 도와야겠군요." 펠레일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리가 숨어있는 집 뒷쪽의 이층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영문을 모르고 따라들어가려 하자 펠레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오시지 마십시오. 이 안에 갇히면 도망가지 못합니다." "잠깐! 그럼 너는?" 터커의 다급한 질문에 펠레일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곧 나올겁니다. 준비하고 있으십시오." 펠레일은 그대로 사라졌다. 우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샌슨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샌슨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위를 쳐다보니 펠레일은 집의 이 층에서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눈을 감고 중얼 거리는 폼이 캐스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파이어볼!" 불덩어리! 거대한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아프나이델이 보여줬던 바로 그것이다. 펠레일의 가슴에서 생겨난 거대한 불덩어리는 그대로 우리 머리 위를 날아 저쪽의 좀비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슈르르르르. 공기를 태우는 소리에 머리 꼭대기가 선뜻하다. 서로 엎치고 덮쳐서 산을 이루고 있던 좀비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직격 을 당하고 말았다. 불덩어리는 멋지게 그 좀비들의 산 한가운데에 맞았 다. 화르르르! 콰광! 타오른다! 좀비들의 산이 그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좀비들은 불에 타면서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키괘애애애액!" "쿠아아아아악!" 하지만 좀비들의 산이 너무 높았다. 윗쪽에 있던 놈들은 불에 타올랐 으나 그 놈들이 흩어지자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아랫쪽에 깔려있던 놈들이 보였다. 그 놈들은 일제히 방향을 바꿔 우리쪽으로 걸어오려 했다. 하지만 너 무 얽혀 있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쪽으로 먼저 달려 온 놈들은 불에 타오르고 있던 놈들이었다. "키궤에에에!" 불붙은 좀비들이 뒤로 불똥을 흩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사방으로 휘 젓는 팔에 붙은 불길이 아름다운 날개처럼 보인다. 날아오르려나? "공겨억!" 샌슨이 고함을 지르는 순간, 터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터커는 다급 하게 말했다. "물러나, 천천히 물러나! 서로 섞이면 펠레일이 마법을 못써!" 우리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너무너무 무섭다. 불에 붙은 좀비들이 달 려오고 있는데 천천히 물러나야 되다니. 난 그냥 뒤로 돌아 마구 달려 가고 싶다. 그러나 이루릴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숙이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리스!" 달려오던 놈들은 갑자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 놈들의 발이 하늘로 솟구치며 뒤로 나가떨어지는 장면은 꽤나 코믹했다. 달려오던 놈들이라 멈추지도 못하고 앞에 쓰러진 놈들에 걸려 계속해서 쓰러졌다. 순식간 에 우리 앞에는 좀비들의 산이 만들어졌다. 아주 공격하기 쉬운 목표, 이층의 펠레일이 다시 외쳤다. "파이어볼!" 불덩어리가 차곡차곡 쌓인 좀비들에게 직격되었다. 콰아아앙! 폭발음으로 귀가 멍멍하다. 좀비들의 사체조각이 불붙은 채로 튀기 시 작했다. 역겹다, 정말! 차곡차곡 쌓인 장작더미에 불이 붙은 꼴이다. 불 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난 눈을 돌리고 싶었다. 펠레일이 외쳤다. "앞이 안보입니다!" 터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외쳤다. "내려와! 그리고 칼잡이들은 날 따라! 이루릴양은 조금 후 펠레일과 함 께 나와서 뒤를 쳐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샌슨, 크라일은 터커를 따라 불에 타오르고있던 좀비 장작더미(?) 를 돌아서 언덕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덕이 다시 눈 앞에 나타 났다. 두 번이나 불덩어리에 맞았지만 아직도 많은 수의 좀비들이 남아 있었다. 터커가 외쳤다. "펠레일과 이루릴이 뒤를 칠 수 있도록 유인해간다. 천천히 왼쪽으로!" 우리는 왼쪽으로 달려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크라일은 팔치온을 하늘로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야이! 야! 이쪽이다, 덤벼봐!" 샌슨도 만만찮았다. 그는 크라일을 흘깃 보더니 롱소드를 꽂아넣고 팔 짱을 턱 끼더니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헤이, 식사 준비됐다!" 대단한 배짱. 난 샌슨에게 욕을 한 바탕 해주고 싶었지만 크라일은 얼 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역시 팔치온을 꽂아넣고 팔짱을 꼈다. 터커는 말이 안나온다는 표정이었다. "크과아아악!" 우리를 본 좀비들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와 터커는 슬금슬금 물러났으나 샌슨과 크라일은 그대로 서 있었다. 저거 정말 못봐주겠네! 둘은 서로 곁눈질을 하는 폼이 죽어도 먼저 달아나지는 않겠다는 속셈인 듯했다. 그러면서도 둘의 다리는 달달 떨리고 있었다. 터커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결국 못 참고 고함을 질렀다. "후치, 내버려두고 뛰어!" 그러자 샌슨과 크라일은 기겁하더니 황급히 뒤로 돌아 달려오기 시작했 다. 가관이다. 우리는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비들을 유인하기 위해 뒤로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팔을 휘저어대었다. 좀비들은 몸이 썩어있어서 그 런지 빨리 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좀비들의 모습 에는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다.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귀가 멍할 지경 인데 고함까지 지르고 있었다. "케레레레레!" "크과아아악!" 우리는 언덕을 크게 돌아가고 있었다. 언덕 윗쪽에 있던 좀비들은 우 리 오른쪽에서도 달려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젠 멈추면서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우리들은 숨이 턱에 닿을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장난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파멸을 통해 영생을 구가하는, 파괴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힘이여. 그 모순의 섭리로서 춤을 추어요!" 쉬르르르르! 기괴한 소리에 달리고 있던 우리들은 뒤로 돌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 이 굳어버렸다. 불바람, 불의 장막이다! 길게 늘어진 불길이 마치 커텐처럼 좀비들의 등 뒤에서 솟아오르기 시 작했다. 뒤의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더니 그대로 우리를 ?아오던 좀비들에게로 내려꽂혔다. 그리고는 좀비들 사 이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의 파도다! 좀비들은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크라일은 눈을 부릅떴다. "어? 어? 펠레일이 저런 마법도 썼어?" 샌슨이 당장 댓구했다. "이루릴양이오! 저건 정령술이지, 멋있지 않아요? 어, 그러니까, 후치? 저게 뭐냐?" "그게 중요해? 안 달릴 거야? 불 속에서 헤엄칠래?" 그제서야 크라일과 샌슨도 퍼뜩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파도가 치듯이 뒷쪽에서부터 좀비들을 휩쓸어 오는 불길은 그대로 우리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투투투투투. 샌슨과 크라일은 목이 터져라 고함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그러나 터커는 달려가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저것봐. 저건 정말…" 파도는 우리에게까지 달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커다랗게 우회했 다. 소용돌이, 아이고 맙소사, 소용돌이다. 불꽃의 소용돌이가 좀비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된 불길은 이제 회오리가 되어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좀비들은 마치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먼지들처럼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 "오… 이런 걸 보다니!" 터커의 신음소리같은 탄성이었다. 터커의 얼굴을 불기운으로 벌겋게 되어 있었다. 우리 앞에서 약 직경 30 큐빗의 불꽃의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그대로 휘말려 올라가 하늘을 꿰뎠을듯 했다. 그리고 차츰 그 아래쪽이 땅에서 떠올랐다. 빙빙 돌던 불꽃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쉬르 르르르! 우리는 그것이 까마득히 사라져올라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마침내 불의 회오리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선을 내려보니, 땅에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타버린 흙이 보였다. 그리 고 그 너머에서 이루릴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루릴의 등 뒤에는 펠레일, 카알, 사만다가 우리들처럼 고개를 뽑아올리며 하늘을 보고 있 었다. 이루릴은 불꽃에 시커멓게 타버린 땅을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그녀가 발자국을 뗄 떼마다 재가 조금씩 날렸다. 우리는 멀건히 그 모습을 바 라보았다. 이루릴은 우리 앞으로 걸어와 멈춰섰다. "괜찮아요?" 우리는 기운이 쭉 빠진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와 샌슨, 크라일, 터커등은 마구 달렸기 때문에 조금 지쳐있긴 했지만, 그것보다 는 너무 엄청난 것을 보아버려 다리가 풀려버리는 느낌이었다. "그게 뭐지요? 정령술에 별로 조예가 없긴 하지만, 저런 것은 듣도 못 했습니다." 펠레일이 내가 묻고 싶던 것을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루릴 은 대답했다. "샐러맨더의 힘을 실프에 실은 것이죠." 펠레일의 얼굴엔 온통 '나 놀랐소!' 라고 써둔 것 같았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당연히 가능하죠. 파이어볼 마법은 어떻게 운용되나요?" "예? 아, 그것은…" "이력(異力)이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식이 아닌가요. 마나(Mana)의 집 중, 임계점까지의 억제. 임계 순간의 챠크라의 이동궤도에 따른 마나의 배치." "그것은 이력이라기보다는 운동 방식의 이질점 같군요. 알파 급수는 파이어 챠크라에 따른 변경 정도이겠고, 마나는 이때 집중됨으로써 억제 되는 것이므로…" 칼잡이들은 슬프다. 나, 샌슨, 터커, 크라일은 제각기 하늘, 발끝, 할 버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펠레일은 이후로도 한참 귀신 씨나락 까먹 는 소리를 했고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우리를 슬쩍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힘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요. 간단하잖 아요? 운동에너지와 중력이 동시에 물체에 작용하면 포물선을 그리지 않나요? 그래서 능숙하게 활을 쏘는 사람은 멀리 있는 과녁을 똑바로 겨냥하지 않고 비스듬히 윗쪽으로 쏘아서 맞출 수 있고." 음, 이건 좀 알아듣겠군. 크라일은 이루릴의 말을 알아듣는 자신이 대 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예. 맞아요. 흠. 똑바로 쏘지 않지요." 그리고 펠레일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정령은 데미인텔릭 아닙니까? 마나와 같은 넌인텔릭이 아닌 데요?" 다시 잠잠해지는 칼잡이들. 이루릴은 대답했다. "전 유피넬의 율법을 따르는 엘프니까요." "아! 그, 그럼 인간은 불가능합니까?" "글쎄요. 인간 정령사가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과 정령의 교감에 대해서는 체험할 수가 없어서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우리 칼잡이들마저도 뭔가 대단히 안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해는 전혀 안되지만. 난 신학에도 그렇지 만 마법학에도 취향이 안맞을 모양이다. 사만다가 언덕 위를 보더니 팔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예! 우린 괜찮아요!" 언덕 위를 보니 에델린이 신전 정문으로 나와서 팔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루릴은 눈을 찌푸렸다. "표정이 이상하네요?" 이루릴은 에델린의 얼굴이 보이나보다. 그 때 에델린의 고함소리가 가 늘게 들렸다. "슈가 없어졌어요!" 에델린은 어쩔 줄 몰라하면서 황망하게 말해서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다못한 사만다가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어휴, 진정하세요. 우리도 애 무진장 잃어먹었어요!" 그리고 사만다는 주위의 엄청난 시선에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카알이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러니까, 좀비들을 막아서느라 집중하던 사이에 사라진 것 같다고 요?" "예, 예. 아까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을 때, 아아! 그것을 맥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니! 그래서 그것을 보다가 문득 슈가 놀라지 않을까 싶 어서 돌아보았는데, 그 때 안 보이는 것이예요. 이렇게 멍청했다니! 어 떻게 그것을 멍하게 바라볼 수가!" 이루릴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이루릴이 상당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루릴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카알이 명령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요. 모두 흩어져서 찾아봅시 다. 에델린께서는 환자를 지켜주십시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4. 우리는 신전 바깥으로 나왔다. 터커가 말했다. "보자, 우리와 좀비가 바로 저 아래에서 싸웠으니까 그쪽은 아니고. 그 렇다면 신전 뒷쪽의 산인가?" 우리는 일단 신전 뒷쪽으로 돌아가보았다. 산이라고 하긴 하지만 그것 은 야트막한 야산의 산허리 정도였고 그렇게 험악한 지세는 아니었다. 터커는 사만다를 흘깃 보았지만 사만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긴 두 갈래가 아니잖아?" 하긴 그저 야트막한 산과 숲이 있을 뿐이니까. 커다란 나무로 이루어 진 숲이라 숲 아랫쪽에는 잡풀 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숲 사이로 얼 마든지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터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자국을 찾기 시작했다. "조그만 애의 발자국을 찾아보지." 하지만 그것도 막막하다. 우리는 흩어져서 땅을 노려보았지만, 온통 딱 딱한 땅이라 무슨 발자국이 남아있을 여지가 없다. 게다가 낙엽들도 꽤 뿌려져 있으니 무슨 발자국이… "이게 뭐지?" 낙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던 크라일이 땅에서 무얼 집어들었다. 우린 그에게 다가갔다. 크라일은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 것은 앙징맞은 빨강색 구슬로 가운데를 관통하는 가느다란 구멍이 있었 다. 난 탄성을 질렀다. "목걸이! 그 목걸이!" 샌슨도 입을 쫙 벌리며 좋아했다. 내가 슈에게 주었던 그 목걸이에 있 던 구슬이다.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빠서 돌려받는 것을 잊었는데, 그것 이 여기 떨어져 있다는 말은 슈가 여기를 지나갔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시 흩어져 작은 구슬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걸이의 일 부이던 작은 것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찾는 물 건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잠시후 다시 찾아내었다. 이번에도 크라일이 찾아내었다. "또 있어!" 그것은 처음의 것이 있던 것에서 약 30 큐빗쯤 떨어진 위치였다. 우리 는 첫번째, 두번째와 신전. 이렇게 세 개를 눈으로 이어보았다. 직선이 었다. 터커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좋아. 이거 꼭 옛날 이야기 같은데 말이야, 그 꼬마가 누군가에게 납 치되자, 이걸 하나씩 떨어트리며 갔다?" 사만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이상해. 일단 목걸이를 떨어트릴 정도라면 손발이 자유스 러웠을걸? 그럼 입도 자유스러웠을테니 고함을 지를 수도 있었을텐데?" "입이 막혔다면?" "에이! 입은 막고 손발은 마음대로?" '누군가가 슈의 입을 막은채 끌고 가고 있다. 슈는 목걸이를 꺼내어 그 것을 조심스럽게 분해한 다음 하나씩 떨어트린다. 그 동안 납치자는 참 똑똑한 아이라는듯이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는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일단 목걸이 조각이 떨어져 있던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세번째도 크라일이 발견했다. "어이쿠!" 갑자기 크라일은 발을 하늘로 향하며 나가떨어졌다. 놀란 우리가 다가 가 보니 땅에는 목걸이 구슬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크라일은 그것을 밟았던 모양이다. "으윽. 허리야." 터커는 크라일을 부축할 생각도 하지 않고 땅에 떨어진 구슬들을 바라 보았다.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애가 끌려가다가 어떻게 목걸이가 끊어진 거야. 아마 반항하 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아마 달려가고 있었을걸? 그 래서 한 두개씩 실에서 빠져나오다가 여기서 주루룩 다 떨어진 거야. 이 떨어진 모양을 보라고!" 그러고보니 구슬들은 제가기 흩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약간 길게 늘어 선 모양으로 떨어져 있었다. 터커의 말이 맞을듯하다. 우리는 그쪽 방향 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펠레일은 장기대로 앞쪽의 지형과 양쪽의 지형을 살피더니 말했다. "이 앞쪽은 아마도 계곡으로 이어질 듯합니다. 이 영지를 둘러싼 산악 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요." 터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거기 뭔가 있어! 아마 이 영지가 세이크럴라이제이션 된 것과도 관련 이 있겠지! 어쩌면 애들도 모두 그 쪽으로 납치되어 간 것일지도 몰라!" 이루릴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모두 멈추게 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당신이 듣는 것을 내게도 들려줘요." 이루릴은 잠시 집중하듯이 서 있더니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 다. "달려요! 저 앞쪽, 4000 큐빗 정도에서 달려가는 발자국이 들려요!" "4000 큐빗! 그 발자국이 들려요?" "실프가 들려주니까요. 하지만 오래는 안되요. 실프와 교감을 유지하면 서 달리는 것은 어려워요." 우리는 황급히 이루릴이 지시해주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해를 다 가려버려 숲 아랫쪽은 단단한 땅이었다. 그렇 다고 달리기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난 두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졌다. 절대로! 앞에서 달려가는 이루릴의 가죽 바지의 저 멋진 어느 부분 때 문이 아니다! 난 낙엽에 미끄러진 것이다. 이루릴은 정말 가볍게 달려갔다. 실프와 교감을 유지하며 달리는 것은 어렵다고? 하지만 그녀는 우리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통통 튀듯이 경 쾌하게 달려갔다. 샌슨과 크라일은 그야말로 두 마리의 멧돼지처럼 씨 근거리며 달려갔지만 그래도 이루릴을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아.놓쳤어요." 이루릴은 아쉽다는듯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더니 말했다. "하지만 줄곧 같은 방향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달려갈 태세였다. 미치겠네! 숲 사이의 울퉁불퉁한 땅을 저렇게 사슴처럼 달려가다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볼이 벌겋게 되어 씩 씩거렸다. 이루릴은 달려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천천히 가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지쳐서 도착하면 안되겠죠." 샌슨은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헉헉거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 스스로 도저히 못견디게 되어버렸다. 어린애 가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 자꾸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결국 차츰 발 걸음이 빨라지다가 성큼성큼 걷는다고 표현하기엔 좀 빠른 속도로 나아 가기 시작했다. 즉, 달려갔다. 두번째로 우리를 정지시킨 것은 펠레일이었다. "잠깐… 멈추십시오." 펠레일은 헉헉거리면서 주의깊은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바라본다면, 후우, 지금부터 우리가 보일 겁니다. 헉헉, 나무 들이 적어지며 시야가 좋지요?" 그러고보니 드디어 계곡이 드러났다. 양쪽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산악 사이로 나무들이 적어지며 숲의 끄트머리 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앞쪽 으로는 우리를 막아선 바위 벼랑이 보였다. 벼랑은 한 500 큐빗은 되어 보였다. 펠레일은 벼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른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 같은 것이 보이는데… 나무들 때문에 윗쪽이 잘 안보이는군요. 하지만 위에선 우리가 잘 보일 겁니다." 터커가 말했다. "위에서 감시할까?" "모험을 해 볼까요?" "저 벼랑을 올라간다면, 어차피 위에선 우리가 보일거야. 그런데 윗쪽 에서 누가 공격한다면 정말 싫은데." 그 때 크라일이 말했다. "위가 아냐. 옆이다." 크라일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벼랑을 오른쪽으로 길게 따라간 부분에 동굴이 보였다. 터커는 동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기인 것 같지?" 우리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주의깊게 그 동굴을 향해 걸 어가기 시작했다. "벼랑의 크기로 봐선 의외로 깊은 동굴일 수도 있겠는데…" 펠레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혀를 찼다. 정말 대단하다! 펠 레일은 아마 산의 모양만 보면 그 산 너머 마을의 처녀의 이름도 맞출 것 같다. 동굴은 마치 벼랑 사이로 위아래로 길게 벌어진 틈 같았다. 입구의 높 이는 약 30 큐빗 정도. 넓이도 꽤 넓어서 10 큐빗은 되어보였다. 들어서 는 입구는 바위들 때문에 울퉁불퉁했다. 우리는 약간 멀리서 관찰해 본 다음, 입구로 들어섰다. "자, 확인됐어." 이상한 말을 하며 터커가 들어올린 것은 조그만 신발이었다. 아주 작은 꼬마나 신을만한 신발.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안을 살펴보니 꽤 깊은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타고 들어가 한참을 내려가게 되는 모양이었다. 터커가 말했다. "불은?" 이루릴이 손을 모으더니 당장 월 오 위스프를 불러내었다. 터커는 허 공을 떠도는 작은 빛덩어리를 보면서 킥킥 웃었다. "이루릴. 혹시 우리랑 같이 모험해 볼 생각 없소?" "제겐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아쉽군."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형식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종유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갑자기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꼭 우리 영주님 성의 홀처럼 엄청난 공간이었다. 우리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때 펠레일이 신음소리처럼 말했다. "이건 자연적인게 아니군요." 펠레일이 가리킨 방향을 보며 우리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 다. 종유석들이 창살처럼 앞을 막는 곳에서 몇 개가 잘려져 길이 나 있 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과연 그 뒷쪽으로는 좀 작은 동굴이 있었다. "인간일까?" "바위를 잘라낼 줄 안다면… 그리고 꽤 많을걸. 혼자서 저렇게 해 놓을 순 없겠지?" "이거, 뭔가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 점점 기분이 이상하다. 이건 한 두 명의 소행이 아닐 것이다. 꽤 커다란 집단의 소행이다. 혹시 그 집단이 이 땅을 세이크럴라이제이 션 했다는 말인가? 터커는 일행을 정지시켰다. "제기랄. 그렇다면 조심해야 되겠군. 모두 천천히 날 따라와요." 터커는 주의깊게 걷기 시작했다. 먼저 자기가 디딜 땅을 할버드로 쿡 쿡 찔러보고 디뎠다. 그리고 그 위의 공간도 모두 휘저어 보았다. 느릿 하고 주의깊은 동작이었다. 우리는 터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우리도 천천히 걸어갔으므로 터커 가 갑자기 멈춰섰을 때도 재빨리 멈춰설 수 있었다. 터커는 허공 한 지점에 할버드를 멈춘 자세로 잠시 서 있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매우 느린 동작으로 할버드를 내렸 다. 그리고 똑같이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터커의 손이 허공을 만지는 듯했다. 그는 아주 섬세하게 손가락을 스 윽 허공에 문질렀다. "실이 있어." 우리는 모두 바짝 긴장했다. 터커는 허공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실을 만 져보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로 그것을 밀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리고 터 커는 허리를 깊이 숙여 앞으로 걸어갔다. 터커는 앞으로 좀 걷더니 옆으로 서서는 할버드를 수평으로 들어보였 다. "이 정도 높이. 아래로 지나와요." 하지만 실이 보이지 않으니 무진장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펠 레일과 이루릴, 카알은 허리를 숙이며 부드럽게 빠져나갔지만 샌슨과 크라일은 자신들의 덩치를 생각했는지 아예 네 발로 기었다. 사만다와 나도 불안해서 품위고 뭐고 생각할 것 없이 기어서 지나갔다. 사만다는 다시 일어서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울상이 되었다. "박쥐똥이야…." 우리는 손바닥을 털고 무릎도 턴 다음 다시 전진했다. 다시 터커가 멈춰섰을 때 우리는 소름이 돋았다. 또 함정인가? 그러나 터커는 갑자기 이루릴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러자 이루릴은 고개 를 끄덕이더니 월 오 위스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갑자기 칠흑같은 어 둠이 다가왔다. 터커의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앞쪽에 불빛이 보입니다." 뭐가 보여? 정말 불빛이 보였다. 마치 칼날처럼 곤두선 불빛이다. 왜 저렇게 보이는 것이지? 터커가 말했다. "동굴 벽에 손을 짚고 천천히 걸어와요."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갑자기 불빛이 확 밝아지면서 앞사람의 그림자 가 보였다. 두 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교차로 튀어나오고 있어서 S 자를 이루고 있 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 너머의 불빛이 가늘게 보였던 것이다. 터커는 바닥에 배를 붙이더니 우리들도 모두 엎드리도록 손짓했다. 우 리는 엎드린 채 터커의 옆으로 다가갔다. 불빛이 비쳐나오는 것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간 공간이었다. 저 아래쪽엔 양초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울퉁불퉁하긴 했 지만 그런대로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었는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불빛 때문에 사람들의 옷이 모두 갈색으로 보였다. 모두 단순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제멋대로 앉아서 뭔가 먹거나 뭘 읽거나 하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꽤 커다란 부대들이 보였다. 무슨 밀가루 부대인 것 같은 데, 그런 것들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물통인지 술통인지, 하여 튼 나무통도 보였다. 취사도구처럼 보이는 물건들도 바위 위에 놓여 있 었다. 그릇, 나이프, 접시, 냄비 등.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아! 난 입을 꽉 막았다. 아이들이었다. 저 아래의 바닥 끝에 좀 더 낮은 바닥에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훌쩍거리거나 떠들지도 않고 모두 멍청한 얼굴 로 앉아 있었다. 마치 백치같은 얼굴. 모두 50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 리고 가장 끄트머리에는 슈의 모습도 보였다. 샌슨의 눈에 불꽃이 튕기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어!"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크라일이 이를 갈고 있었다. 터커 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놈들일까?" "두드려패고 물어보지." 터커는 침착하게 말했다. "조심하도록 하자. 아이들을 소리소문없이 데려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예사 실력이 아니다. 게다가 마을 가까운 곳에 이 정도의 설비 를 갖추고 있다면…" "그래봐야 네 놈이야. 우린 여덟이고." 그 때 이루릴이 낮게 중얼거렸다. "밤의 이슬 속에서도 젖지 않는 하나의 모래의 주인이며 휴식의 수호 자,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저들을 달래줘요." 샌드맨이군. 저들을 재울 계힉이구나. 우리는 아래를 노려보았다. 갑자 기 네 명 중 하나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깜짝 놀 라고 말았다. "Aha… Kashnep inma che dollar eerup?" "Tiken un shemmi? Draheny eavllumm inma jian pnahe." 그들은 서로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켜고 머리를 휘저었다. 크라일은 기 겁했다. "뭐, 뭐야? 저게 무슨 말이야?" 그 때 카알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아, 낮인데 왜 이렇게 졸린 거지? 동굴에 있잖아? 밤낮이 구별 안 되니까." 샌슨이 놀란 얼굴로 카알을 돌아보았다. 카알은 말했다. "자이펀어(語)군." 터커의 입매가 올라갔다. 웃느라 그런 것이 아니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5. 나는, 아니 우리 대부분은 어이가 없어졌다. 자이펀이라니. 그건 저 남쪽에 있지 않은가? 잠깐, 잠깐. 여긴 우리 고 향이 아니지. 우린 미드 그레이드에 들어섰으니, 자이펀과는 조금 가까 워진 셈이지. 하지만 그래도 남쪽으로 사우스 그레이드를 한참 지나야 자이펀이 나오지 않는가?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일단 기다렸다. 아래의 네 명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편히 드 러누워 잠들었고, 어떤 친구는 앉아서 졸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네 명이 모두 잠들고나서, 우린 천천히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서자, 터커는 당장 품속에서 나이프 하나를 꺼내었다. 그는 카알을 보며 말했다. "어느 놈을 살려둘까요?" 카알이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터커는 다시 말했다. "어느 놈이 지휘관일까요?" "여보시오, 다 죽일 셈이오?" "이 놈들은 간첩일 겁니다." "일단 묶읍시다. 간첩이라면 판결은 법에 맡깁시다." 터커는 이를 드러내며 더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사만다가 나섰다. "터커." 터커는 사만다를 보더니 거친 동작으로 다시 나이프를 쑤셔넣었다. 그 리고는 잠시 쓰러진 네 명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이펀놈들이 바이서스 한가운데에… 이 놈들을 그냥!" 터커는 당장에라도 할버드를 후려칠 기세였다. 꽤 화나는 모양인데. 침 착하던 평소의 터커답지 않은 모습이다. 사만다는 그를 말리는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터커, 밧줄을 좀 찾아봐." 터커는 궁시렁거리며 한쪽의 밀가루 부대와 잡동사니들이 쌓여있는 곳 으로 갔다. 우리도 밧줄을 찾아보기 시작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터커가 말했다. "손발의 근육을 끊으면 되잖아?" 카알은 질린 표정으로 터커를 바라보았고 크라일마저도 좀 당황한 표정 이었다. 터커는 뭐 어떠냐는 식의 표정이었다. 어쨌든 나무통을 뒤지던 샌슨이 그 중 하나에서 밧줄을 찾아내어 그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 았다. 네 명은 각자 숏소드라든가 대거 등의 무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별로 중무장도 아니었고 갑옷도 입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무장들을 살짝 풀어 내고 네 명을 묶었다. 어찌나 깊이 잠들어 있는지 손발을 다 묶을 때까 지 일어나지 않았다. 완전히 다 묶고 나자, 터커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 작자들 정말 일어나지 않는데, 깨우지 못하는 겁니까?" "아뇨, 깊이 잠든 것뿐입니다. 강한 충격을 주면 일어날 거예요." "그렇습니까?" 이루릴의 대답과 동시에 터커는 한 명의 멱살을 끌어올리더니 뺨을 후 려쳤다. 쫘아악!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변을 당한 그 자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투였다. 그는 머리가 어지러운지 휘휘 젓다가 한참만에 눈에 촛점을 맞 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동료들도 모조리 묶 인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Cashine nharphe! it-na hagasa nharphe!" 그 작자의 멱살을 쥐고 있던 터커가 씨익 웃었다. 쾅! 무지막지하군. 터커는 멱살을 당기며 그대로 이마로 받아버린 것이다. 정말 멋진 박치기다. 당장 상대의 코가 뭉개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우리 말로 떠들어. 여긴 네놈들 물개새끼들의 썩어문드러 질 항구가 아니야." 사만다가 화난 동작으로 터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물러나!" "어, 사만다." "물러나! 이런, 짐승 같아! 뭐하는 짓이야? 이루릴양 보기 부끄럽네." 터커는 이루릴을 보더니 뒷통수를 좀 긁으며 물러났다. 이루릴은 고개 를 갸웃거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터커씨는 당신과 반대군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고 머리로 받아버렸으니까. 이루릴은 인간들끼리 나라가 나뉘어진다 는 개념을 알까? 그리고, 난 갑자기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저, 이루릴. 자이펀의 엘프는 그럼 자이펀어를 하나요?" 이루릴은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자이펀에는 엘프가 없어요. 거긴 숲이 별로 없답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사만다는 코피가 터진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작 자는 귀싸대기를 두드려맞고 연이어 박치기를 당해서 기절해버렸다. 사 만다는 터커를 한 번 흘겨보더니 다른 사람을 깨웠다. 물론 터커완 다 르게 어깨를 흔드는 식으로 깨웠다. 그 작자도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카알이 앞으로 나섰다. "Ime youkchi Djipenian. Tanda nagarse un Bisus?" 카알은 조금씩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훌륭하게 말했다. 우리는 감탄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고 그 작자는 이를 악물면서 대답했다. "Bisus? Ckraap-moinar atlla hahch e daune!" "뭐라는 거예요?" 샌슨이 물었다. 카알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 자이펀인이지. 바이서스에선 뭘 하는 거냐? 라고 물었네." "대답은요?" "바이서스? 땅개 새끼들의 썩어문드러질 땅굴 말이냐?" "푸하하하!" 난 그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터커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대답한 남 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크라일도 빙긋거리며 말했다. "똑같군, 똑같아." "입 조심해!" "알았어. 킥킥킥." 터커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카알씨!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네놈들의 제사에 사용되는 낙타는 어떻 게 되느냐?" 무슨 말이야, 이게? 그 때 그 남자가 말했다. "목의 동맥을 자른 다음 피를 뽑아내고,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사지를 잘라내지. 그 때까지 죽으면 안되지." 샌슨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말을 하네?" 터커도 좀 놀란 표정이더니 다시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래… 간첩이 되려면 우리 말도 잘 익혀야겠지. 이 자식아, 네놈들의 그 낙타처럼 해줄까?" "하겠다면 말릴 수는 없겠군. 팔이 묶였으니." 남자는 대단히 침착한 태도였다. 듣고 있는 우리가 무서울 지경이다. 하지만 터커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외쳤다. "오냐, 하라면 못할 것 같아? 이 자식아!" 터커는 또 나이프를 뽑아들었고, 당장 사만다의 발이 터커의 정강이로 날았다. 터커는 정강이를 움켜쥐고 팔짝팔짝 뛰었다. 사만다는 고함 질 렀다. "가만히 못있어? 엉?" "저 자식은 자이펀놈이란 말이야! 내가 가만히 있으면 죽은 내 전우들 이 무덤 속에서 이를 갈 거야!" 사만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우? 전우 좋아하시네. 용병으로 참전했던 주제에 전우애도 있었다는 거야?" "용병은 전우애도 없는 괴물딱지인 줄 알아!" "뭐, 돈만 많이 줬다면 자이펀에 고용되어 싸울 수도 있었겠지. 네가 머리가 나빠서 자이펀어를 배우지 못했으니까 자이펀 용병은 되지 못한 거 아냐?" 사만다가 유들거리면서 농담처럼 말하자 터커도 더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사만다는 윙크까지 해버렸고 터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만다는 묶 여있는 남자를 돌아보더니 상냥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제 동료의 무례함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었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재차 질문했지만 남자는 아예 못들 은 척 하고 있었다. 그 때 카알이 말했다. "사만다양. 자이펀에서는 아내 아닌 여자와는 말하지 않아요." 허? 괴상한 관습이군. 사만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그래요? 음… 혹시 저 아이들을 납치했는지 물어봐 주겠어요?"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좀 어처구니 없다. 저기 아 이들이 있는데 납치한 거냐고 묻는다니, 우습지 않은가? 남자도 하도 기가 막혀서 말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 퍽! 음, 똑같군. 사만다는 남자의 턱을 올려친 것이다. 멋진 어퍼컷이다. 남자는 완전히 턱이 돌았고 사만다는 아픈 주먹을 움켜쥐고 펄쩍펄쩍 뛰 었다. 그걸로 모자라 사만다는 들고 있던 참나무 로드로 후려치려는 자 세를 취했다. 결국 크라일이 그것을 말렸다. 크라일은 사만다의 로드를 빼앗았다. "이봐, 이거 이러면 당신이 터커 나무란 것이 우습잖아?" 사만다는 부어오르는 주먹을 꽉 쥔 채 매서운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 다. 크라일은 한숨을 쉬더니 남자에게 질문했다. "이봐, 성직자의 주먹맛이 어때?" 남자는 혀로 입 안을 조사하는 것처럼 우물거리더니 피 섞인 침을 뱉 으며 말했다. "꽤 맵군." "저 아래 영지가 세이크리드 랜드가 된 건 알겠지? 네놈들 짓이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크라일은 손가락을 뚜둑 꺽었다. "뭐, 일단 당신들을 체포해서 넘기면 다 알게 될 일이지만, 먼저 좀 말 해주지?" 왠지 크라일과 터커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피식 웃었 다. 그 때 주위를 뒤적거리던 펠레일이 서류같은 것을 찾아 들고 왔다. 그는 카알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읽으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남자는 카알을 노려보았다. 카알은 빙긋 웃으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자네 표정을 보니 이건 대단한 서류군. 그리고 자네에겐 불행하게도, 난 자이펀 글을 읽을 줄 안다네." 남자는 이를 갈았다. 카알은 여유있는 태도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한 두줄 읽어내려가던 카알의 시선에 흥미가 떠올랐다. 이윽고 카알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글을 읽어내려갔다. 정신없이 종이들을 넘기며 열중하는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입도 제대로 못 열고 카알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그 서류를 다 읽고 나더니 침착하게 그것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카알은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콰악! 맙소사! 물들었어! 물들었다고! 카알은 그 남자의 턱을 걷어찬 것이다. 사만다의 앙징스러운(?) 주먹이 아니다. 남자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샌 슨은 눈이 튀어나올듯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내 표정도 아마 저렇겠지. 먼저 시작한 터커나 사만다도 황당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카알은 침착하게 발을 조금 흔들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발목이 조금 쑤시는군." "…그게 뭡니까?" 당황에서 깨어난 것은 이루릴의 질문 때문이었다. 카알은 이루릴을 바 라보더니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부끄러운 일면을 보여드리는군요. 이 글은…" 카알은 고개를 휘휘 젓더니 그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이크리드 랜드 조장에 관한 실험 보고서." 우리는 모두 흠칫했다. 카알은 침울하게 읽어내려갔다. "복잡한 거 다 빼고 간단히 읽겠소. 음. …대상지는, 작전? 아니, 계 획. 계획된대로 한적한 시골마을로 정해졌습니다. …미드 그레이드의 중 심부로 작전의 효율성을 높임과 동시에… 자이펀에의 의혹은 있을 수 없 을 것입니다. …영지의 위치는 별첨한 지도에 따릅니다." 우리는 서서히 싸늘하게 등골을 후리고 지나가는 무엇을 느꼈다. "진행은 순조로왔습니다.… 유소년기 아동의, 정신? 이건, 번역이 좀 자신 없군. 어쨌든 유소년기 아동의 무엇을 사용하여 제례, 제사, 의식? 의식이 맞겠군. 의식을 진행… 영지의 주민 90% 이상이 질병에 감염되었 습니다.… 재래의 독약을 타는 수법에 비해볼 때 훨씬 빠르고 순조로울 것이라던 참모진의 말은 정확했습니다. 확실히 공기, 물, 땅, 모든 것들 이 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못한 부작용이 몇 가지 발 생했습니다. 첫째. 질병으로 사망한 자들이 언데드 몬스터가 되었습니 다. 그들은…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나 저의 소견으로는 언데드 몬스 터도 하나의 질병이므로 당연하다고 보아집니다. …다른 대원들의 의견 도 대략 저와 일치합니다." 난 손을 너무 꽉 쥐어 손가락이 아파왔다. 카알은 종이를 휘적휘적 넘 기며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모험가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영지에 들어옴으로써 두 번째 의 부작용이 밝혀졌습니다. 모험가들 집단이 두 번 방문했습니다. 그들 의 인원은…이건 필요없겠지. 우리들의 이야기야. …첫번째 집단은 영지 의 주민과 마찬가지로 질병에 감염되었으나 두번째 집단에는 흔히들 이 나라에서는 '치료하는 손' 이라 부르는 그랜드스톰의 에델린이 있었습니 다. 에델린에 대한 상세보고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기상변화 의 신성마법으로 하늘에 먹구름을 만들어 태양을 가리자 질병의 전파 속 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 겠습니다만, 어쩌면 흐린 날씨에서는 이 방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할 것 같은 우려를 느낍니다." 카알은 뒤를 좀 더 넘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쓰던 도중이었어. 완결되진 않았군." 우리는 일제히 묶여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비스듬한 시선으 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번엔 누구야?"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6. 터커는 남자를 죽이겠다고 떠들었고 사만다도 이번엔 별로 말리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그리고 크라일은 팔치온을 꺼내어 칼춤을 추어대어서 주 위 사람들의 등골이 오싹하도록 만들었다. "이 자식이!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 했어! 이 분들이 오지 않 았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 아냐? 야이, 개자식들아! 남의 나라에다가 이런 흉악한 짓을 해?" 남자는 유들거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이런 실험을 할까?" "크아아아!" 크라일을 말리기 위해 샌슨과 펠레일이 달려들었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 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그의 팔치온을 뺏은 다음 그를 밀어내었다. 크라일은 내게는 힘으로 당하지는 못하고 악을 바락바락 썼다. "이 꼬마놈이! 그거 못돌려줘?" "계속 그러시면 이거 부러트릴지도 몰라요. 좀 참아요. 똑같은 사람이 되진 말자구요." 크라일은 씨근거렸고, 난 잠시 동안은 팔치온을 돌려주지 말아야겠다 고 생각했다. 펠레일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휴, 이제 설명이 되는군요. 저 아동들의 정신… 아마 아동들 특유의 전신앙(Pro-Faith)이 아닐까 합니다만, 어쨌든 아동들을 제물로 바쳐 그 런 짓을 저지른 모양이군요." 펠레일은 밧줄에 묶인 그 자이펀 간첩을 쏘아보았다. "마법의 가장 지독한 영역에서나 취급되는 것들로 신의 힘을 불러내었 군요. 마나력과 신력을 조화시킨 것은 대단한 기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런 대단한 능력으로 이따위 짓을 하 다니.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 니까?" 앞에 말은 하나도 못알아듣겠지만 뒤의 질문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남 자는 우울한 시선으로 펠레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카알은 서류를 훑어보 다가 말했다. "이 보고서를 다 썼다면 좋았을텐데. 저 남자가 말해줄까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펠레일은 음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카알이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서 같이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펠레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카알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보고서… 제가 보기엔 글씨가 참 좋습니다?" "예?" "글은 모르지만, 둥글둥글하고 섬세한 것이 남자들의 글씨 같지는 않은 데요?" 카알은 다시 한 번 주의깊게 서류를 보았다. "이럴수가. 당신 말이 맞아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자에게 말했다. "이상했어요. 보고서를 쓰던 도중에 그만두었는데, 당신들은 모두 그렇 게 급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지요. 느긋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보고 서를 쓰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급히 어디로 갈 일이 있었겠지요. 다 섯번째 여자는 누굽니까? 그 여자는 어디에 갔지요?" 남자는 비웃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것을 말할 것 같은가?' 라는듯한 표정이었다. 터커가 고함질렀다. "그놈 내게 맡겨! 노래를 부르게 해 주지!" 그 때였다. 휘우우웅! 동굴에서 절대로 만날 것 같지 않던 것.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 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순식간에 위아래로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 질 뻔 했으나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발을 벌리고, 허리를 곧게 세우려 했다. 그러나 너무 캄캄하다 보니 도대체 균형이 잡 히질 않았다. 쾅! 누군가가 엉덩방아를 찧은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도 떠들지 않았 다. 터커 일행은 모두 숙련된 모험가들이니까. 그리고 카알이나 샌슨도 모두 전투상황에선 침착하고. 그러다보니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게 되었 다. "위험해!" 이루릴의 고함소리. 갑자기 암흑속 어딘가에서 불꽃이 튀겼다. 챙! 챙! 다시 불꽃이 연이어 튕겼다. 누군가가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루릴은 고함질렀다. "모두 엎드려요!" 나는 납작 엎드렸다. 턱이 아래의 바위에 부딪혀 눈 앞에 별이 보인다. 이루릴은 외쳤다. "펠레일! 왼손 방향으로 굴러가요!" 챙! 다시 불꽃. 누군가의 신음소리. 정신이 없다. 암흑, 불꽃, 칼의 충 돌음. 그 혼돈의 와중에서 난 간신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 보고서를 쓰던 다섯번째의 여자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바람을 일으켜 촛불을 껐다. 그 여자는 암흑 속에서도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루릴도 암흑 속에서 눈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지금 칼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대단하군. 이루릴과 맞써 싸울 수 있으면 상당한 검술실력이 있나 보지? 그 때였다. "라이트(light)!" 펠레일의 고함소리. 그리고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의 빛. 억지로 눈을 떠보니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 펠레일이 동굴 천장에 무슨 주문을 걸어 버린 모양이다. 동굴 천장에 희미한 광점이 매달려 있었고 주위의 모습 이 식별되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껌뻑거리면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과연 약간 떨어 진 곳에서 이루릴이 어떤 여자와 싸우고 있었다. 그 여자는 레이피어로 이루릴의 에스터크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검은 옷에 치렁치렁한 검은 머 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 뱀파이어다! "하아압!" 샌슨이 뱀파이어의 측면에서 무서운 기세로 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 뱀파이어 여자는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샌슨은 허공을 치고 말았다. "블링크(Blink)! 어디로?" 이루릴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만다가 고함 질렀다. "입구!" 우리가 들어온 입구에 그 여자의 모습이 서 있었다. 여자는 손가락을 들어 이루릴을 겨냥했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여! 무엇 때문에 인간의 일에 간섭하는가!" 이루릴은 잠깐 멈춰서서 대답했다. "이들은 내 친구니까. 당신은 암흑의 주민으로서 왜 인간의 일에 끼어 드는 거지?" "이들은 내 먹이니까. 호호호홋!" 우리들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아예 머리를 휘저으며 웃기 시작했다. "엘프가 동굴 속에서 죽다니, 하! 드워프가 바다에 빠져죽는 것보다 더 웃기는데?" 우리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 여자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 었다. "잘가라!" 갑자기 그 여자는 벽의 한 부분을 쳤다. 그리고는 모습이 바뀌었다. 그 여자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곧 안개가 되어버렸다. 안개는 그대로 옅 어지며 동굴 바깥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샌슨의 얼떨떨한 질문에 대한 답은 대단히 기분 나쁘게 돌아왔다. 우르르르… 쫙, 쫘자아아아… 갑자기 불빛이 일렁거렸다. 우리는 위를 쳐다보았다. 천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펠레일이 천장에 붙여 둔 광점이 흔들리는 것이다. 천장 은 금이 쫙쫙 가면서 돌가루가 떨어져내렸다. "제기랄! 뛰어!" 우리는 후다닥 달려나가려 했다. 그 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아이들, 50여명이 넘는 아이들이 저기 있다. 그리고 붙잡아둔 포로들, 그들은 모두 손발이 묶여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심문하던 남자는 무섭 게 웃고 있었다. 난 저 웃음이 싫다. "아이들은? 포로들은?" 파파파파팡! 천장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터커가 고함지르며 달 려갔다. "같이 죽어줄 생각이야? 방법이 없어! 뛰어!" 터커는 달리다가 멈춰섰다. 사만다, 나, 카알 등이 남아서 우물쭈물하 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바닥도 정신없이 흔들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렵 다. 카알은 절망적인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 하, 하지만 데려갈 수 있는 데까진…" "이런 얼빠진 소리를!" 터커가 욕짓거리를 외치는 순간, 굉음을 내며 천장이 쫙 갈라졌다. 콰 캉! 사만다는 위를 쳐다보며 비명을 질렀고, 터커는 사만다에게 달려들 었다. 그는 사만다를 덮치면서 외쳤다. "제기랄!" 그 때 이루릴이 고함질렀다. "만물을 받치는 힘, 만물의 아래에 있으되 가장 아름다운 것의 위에 있 는 자여! 그 굳건한 팔로 대지를 받들라!" 빠아악, 빡, 빠박! 흔들리고 있는 동굴 바닥에서 종유석들이 솟아올랐다. 맙소사. 난 이 동굴의 역사를 순식간에 다시 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것은 바위 기둥이었다. 바위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동굴 내부 는 마치 숲처럼 바뀌었다. 바위 기둥들의 숲. 콰쾅! 바위기둥들이 갈라지고 있는 동굴 천장에 부딪히며 엄청난 굉음이 들렸 다. 기둥들은 아예 동굴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어쨌든 갈라지려던 천장 은 멈추었지만 엄청나게 쏟아지는 흙먼지, 매캐한 연기에 질식해 죽을 것 같다. 나는 눈을 가리며 미친듯이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콜록, 으흐음! 칵!" 나는 미친듯이 손을 휘저어 내 주위의 먼지구름을 가라앉혔다. 한참 동안 소란을 부렸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먼지가 어떻게 빠져나가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루릴이 실프를 불러낸 모양이 다. 산들바람 같은 바람이 불면서 먼지들을 어디로 날려버렸다. 난 주위 를 둘러보고, 몹시 어둡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루릴은 이제 월 오 위 스프를 불러내어 주위를 밝게 만들었지만, 바위기둥들의 그림자 때문에 주위의 밝기는 제각각이었다. "이봐, 모두 괜찮아? 죽은 사람 대답해!" 터커의 고함소리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터커의 만족한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안죽었군." 그 때 실낱같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너… 빨리 내 위에서 안 비키면 난 죽을 거야…" 터커에게 깔려있던 사만다는 머리를 마구 헤집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 다. 아무도 죽지는 않았지만 떨어지는 돌멩이에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 은 많았다. 사만다를 감싸주었던 터커는 등에 찰과상을 좀 입었고 다리 관절에도 돌멩이를 맞아 부어오르고 있었다. 사만다는 터커의 뺨에 키스 해주었다. "고마워." "같이 죽어줘서 고맙다는 말이야?" 터커는 기분나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저건 얼마 못가서 다시 무너질 거야. 입구쪽은 완전히 막혔 으니 나갈 방법이 없어." 우리는 불안하게 균열을 멈춘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펠레일은 이루 릴에게 질문했다. "놈(Gnome)을 부려서 입구를 만들 수는 없습니까?" "어디에 만들죠? 흙이 약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어요. 우리가 들어온 거리를 생각해 볼 때 그렇게 긴 거리 의 터널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리고 섣불리 그런 시도를 하다간 간신 히 균열을 멈춘 동굴이 통째로 무너지겠죠."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들이 잡아둔 포로에게 다가갔다. 그 포로는 차가운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부탁이 있는데, 동굴이 무너지기 전에 자살하게 해주겠어? 그게 좀 나을 것 같은데." "당신은 태어남으로써 이미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또 자살할 필요는 없습니다." 펠레일의 너무 고차원적인 대답에 난 좀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부지런 히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샌슨과 카알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이제 멍 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네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확신할 순 없지만, 저희들이 그 디바인 마크를 회수한 것, 아니면 그 뱀파이어가 떠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군요. 어쨌든 다행한 일입니다." 아이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하나씩 정신을 차리더니 겁먹은 표정으 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어처구니가 없어 울음도 나오지 않는 모양 이다. 정신을 차려보자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동굴 속에 있는 자신을 발 견하게 되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 때 슈가 내 모습을 보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후치 오빠! 엉엉엉!" 난 슈를 안아올리면서 골치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슈의 울 음은 당장 아이들에게 전염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훌쩍거리기 시작하더 니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엉엉엉!" 귀가 멀 지경이다. 밀폐된 동굴은 울림이 너무 좋았다. 터커가 기겁했 다. "얘들아! 울지마! 울면 동굴이 무너진다고!" 농담이 아니다. 정말 50여명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울리다 보니 그런 것도 충분히 가능해보였다. 아이들도 질겁을 하더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꺽꺽거리며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이루릴이 다가왔다. "애들아. 안심하렴. 곧 나가게 될거야. 얌전히 있으면 곧 예쁜 하늘과 새들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너희들이 울면 우리들이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어요." 아이들은 이루릴의 말보다는 그 분위기에 더 매혹되는 모양이다. 언젠 가 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서서히 진정하더니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이루릴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손짓을 하니 공중 에 떠 있던 월 오 위스프가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입을 쫙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난 슈를 내려서 그것을 구경하게 해 놓고는 주위를 살폈다. 곧 나가게 된다고? 글쎄. 원래 영혼은 바위산이 아니라 강철벽이라도 통과할 수 있으니까 죽으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겠지. 펠레일은 끙끙거 리며 생각에 잠겼다. "인원이 너무 많으니 공기가 빨리 없어질텐데. 공기가 없어지든, 그 전 에 동굴이 무너지든, 양쪽이 다 달갑지 않은데."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펠레일씨. 마법 중에 텔레포… 어쩌고 하는 것이 있잖아요?" 펠레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걸 못해요. 이루릴양은?" 아이들과 놀고 있던 이루릴도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이들은 월 오 위스프의 장난을 구경하면서도 어른들의 불안한 분위기를 잘 감지하 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난 짐짓 기운차게 말 했다. "뭐, 방법이 없네요. 뚫죠?" "예?" "뚫어야죠.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잖아요? 어디 뚫을만한 곳이 있는 지 찾아보죠. 아무래도 그 방법뿐이잖아요?" 터커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치. 여기가 얼마나 깊은 줄 몰라? 우린 한참을 내려왔다고." "그래요? 하지만 중간에 꺽어졌었어요.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들어오 기 전에 보았던 절벽에 가까울지도 모르죠. 다른 방법 있으면 말해보시 고, 없으면 뚫을만한 장소를 생각해봐요. 조금 전의 진동 때문에 어쩌면 없던 틈이 새로 생겼을지도 몰라요. 뭐해요! 앉아서 죽을 생각은 없겠 죠?" 일행은 모두 씨익 웃으며 일어났다. 헬턴트 토박이들인 샌슨이나 카알 도 그렇지만, 터커 일행도 상당히 강인한 면이 있군. 우리는 흩어져서 틈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바위를 두드리며 소리를 듣다가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은 이제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이루릴은 갖가지 희안하게 생긴 불덩어리 들을 만들어내어 춤을 추게 하고 있었다. 나비 모양, 새 모양, 꽃 모양. 아이들은 정신을 잃은 채 그것에 열중해 있었다. 내 옆에 있던 펠레일이 한숨을 쉬었다. "저건 댄싱 라이트(Dancing Light)… 시장 거리의 요술쟁이도 할 수 있 는 간단한 것이지만 저렇게 능숙하게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는군요." 아무리 멋있는 것이라도 지금 걱정되는 것은 하나뿐이다. "저거, 공기를 태워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차원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이라서." "그래요." 그 때 크라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이리와 봐." 어쨌든 크라일은 뭘 찾으라고 하면 제일 먼저 찾는다. 대단해. 우리는 크라일에게 다가가보았다. 크라일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소리를 들어보라고." 우리는 크라일이 벽을 두드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크라일은 벽을 두드 리진 않았다. "이런,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우리는 머쓱해져서 귀를 대어보았다. 벽에 댄 내 귀에, 쉬이익 하는 소 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7. "뭔가 틈이 있긴 있어. 벽 너머에 틈이 있는지, 어쨌든 공기가 지나는 소리야." "바람이 분다면… 아무래도 바깥에 가까운 것이겠지." 그 때 이루릴이 다가왔다. "제가 들어볼까요?" 우리는 이루릴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루릴은 벽에 그 큰 귀를 붙이 더니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이군요. 뭔가 복잡한 틈이 밖에 있어서 그 사이로 바람이 부딪히 는 모양이예요. 잠깐… 우리들이 들어온 동굴은 절벽에 있었죠? 그럼 절 벽의 무슨 틈인가 보군요." 펠레일이 말했다. "두께를 알 수 있겠어요? 실프의 기운을 찾아보면 안될까요?" "글쎄요. 틈이라서… 절벽 자체는 두껍고 틈이 깊은 것일 수도 있지요. 잠깐." 이루릴은 위치를 옮겨가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잠시 후 벽 한 군데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서 실프가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데요. 거리는 20 큐빗 정도." 우리는 이루릴이 가리킨 벽을 바라보았다. "어쩌지?" 샌슨이 물어왔다. 막막한 질문이다. 이루릴은 20 큐빗이라고 했다. 20 큐빗 바깥에 자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20 큐빗을 어떻게 뚫느냐… 이 런 바위벽을. 그 때 펠레일이 나섰다. "사만다님. 후치군의 바스타드소드에 스트라이킹(Striking)을 걸 수 있 습니까?" "가능한데. 왜?" "그럼." 사만다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게 바스타드를 뽑게 하고는 곧 기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사만다의 손이 번쩍 빛났다. 사만다는 그 빛나는 손 으로 내 바스타드의 검신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 손에서 빛이 옮겨오듯, 내 바스타드가 빛났다. 난 황홀한 눈으로 바스타드를 들여다보았지만 이걸 가지고 어쩌란 말이 지? 설마 내가 바위를 오려내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펠레일은 말했다. "후치군. 조심스럽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바위에 깊은 흠집을 내어 주십시오." "예?" "찔러보세요. 당신 힘이면 가능할 겁니다. 단, 아래로 비스듬히 찔러 주십시오." 난 어깨를 으쓱인 다음, 바스타드를 뒤로 당겼다가 힘껏 바위를 찔렀 다. 팔이 부러지는 느낌이 왔지만, 바스타드는 바위 속으로 1 큐빗 정도 나 들어갔다. 나는 입을 쫙 벌렸다. "우와?" 펠레일은 몇 번 더 그렇게 하도록 했다. 나는 시키는대로 바위벽에다 가 여러 개의 흠집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런 칼집을 내어서 어떻 게 하려는 거지? 펠레일은 잠자코 포로들의 물품이 있던 곳으로 갔다. 그는 크라일을 부르더니 물통을 들게 하고는 자신은 주머니와 그릇을 하나씩 들고 왔 다. 펠레일은 주머니를 내려놓고 그릇으로 물을 바위벽에 조금씩 뿌렸 다. 내가 칼집을 내어놓은 바위벽의 흠집 안으로도 물이 배어들어갔다. 비스듬히 찌르라는 것이 이것 때문인가? 그리고 펠레일은 우리를 물러나게 하고는 캐스팅을 시작했다. "프로스트 핸드(Frost hand)." 펠레일의 손으로부터 뭔가 허연 기운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월 오 위스프의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서리, 얼음조각이었 다. 우리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구경했다. 바위벽 틈으로 배어들어간 물은 당장 얼음이 되었다. 벽에 허옇게 김이 서리며 얼음들이 조금씩 삐져나왔다. 그리고 바위벽에 잔금이 가기 시작 했다. 짜자작, 짝, 짝! "살짝 두드려 보십시오. 손은 대지 마시고, 무기로." 우리는 멀건히 서로 쳐다보았다. 터커가 할버드로 두드려 보았다. 몇 번 두드리자, 바위들이 와스스 부서지며 돌멩이가 되어 쏟아졌다. 난 무 너지는가 싶어 놀라서 물러났다. 벽에는 깊이 1큐빗, 직경 4큐빗 정도의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그 아래에는 돌멩이가 쏟아졌다. 펠레일이 웃으며 설명했다. "바위들이 흙이 되는 것은 이런 방식이죠. 바위의 틈에 물이 배어들고, 겨울에 그것이 얼고, 얼음은 물보다 부피가 크기 때문에 바위에 금이 가고, 그리고 흙이 되지요." 우리는 감탄한 표정으로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다시 바스타드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 물을 붓고, 그것을 얼린다. 그 리고 두드리면, 와스스! 부서져나간다. 난 기운이 올라서 다시 바위에 구멍을 내어놓았다. 그런데 펠레일이 어깨를 으쓱 하면서 한 마디 했다. "프로스트 핸드 주문은 두 개만 외워둬서… 이제 다 썼는데요?" 우리는 당연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루릴도 고개를 가로젓 는 것을 보고는 낙담의 한숨을 쉬었다. 묶여 있던 포로들마저도 큰 한숨 을 쉬었다. 그러나 펠레일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어차피 더 이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바위굴이 무너질지도 모르 니까요." "그럼?" "밖을 좀 살펴볼까요?" 펠레일은 정신을 집중하고는 캐스팅을 시작했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 펠레일은 눈을 꼭 감은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카알을 쳐다보았고, 카알은 대답해주었다. "원하는 장소를 보는 마법이야." 펠레일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다행이군요. 바깥에 금이 좀 가 있어서 대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 다. 우리가 들어왔던 절벽 기억하십니까? 진동 때문인지 거기에 금이 가 있더군요.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펠레일은 물통과 함께 가져온 주머니를 들어올려보였다. 그는 그것을 풀더니 물통에 쏟아부었다. "소금입니다." 악! 악! 저 귀한 소금을! 우리는 멍청하게 펠레일이 하는 모양을 바라 보았다. 펠레일은 소금물을 만들더니 내가 뚫어놓은 흠집에 그것을 뿌렸 다. 소금물로 어쩌겠다는 거지? 펠레일은 미소를 씩 짓더니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는 포로들의 밧줄도 다 풀어주라고 말했다. "다 풀어주라고?" 펠레일은 포로들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 챙길 여유가 없어요. 자기 다리로 달려야 됩니다. 그러니 서로 쓸데없는 싸움은 맙시다." 포로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싸운 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까. 터커는 기분나쁜 표정으로 포로들을 풀어주 었다. 펠레일은 아이들을 모두 모으더니 잠시 고민했다. 갑자기 그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 잘들 들어요. 단 한판의 승부입니다. 무너지든가, 문을 만들든가. 문을 만들어도 어차피 곧 무너질 겁니다. 그러니 빨리 달려야 됩니다. 아시겠지요?" 우리는 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레일은 이루릴 을 불렀다. "라이트닝 볼트 됩니까? 전격계로 아무거나…"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을 메모라이즈했는데…" 그러자 펠레일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우리도 덩달아서 몹시 근심스러워졌다. 그리고 펠레일은 다시 피식 웃어버렸다. "뭐, 단판 승부니까. 저기에 체인 라이트닝을 캐스팅 하십시오. 단, 제 가 먼저 캐스팅하고 바로 연이어서 시동되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곧장 말입니까?" "예. 마치 그대로 연결되듯이." "해보겠습니다." 그러자 펠레일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는 우리 각자를 비장한 눈으로 쳐 다보았다. 하지만 그 입매에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죽기 직전에 해보지 않으면 후회될 일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나는 고개를 갸웃한 다음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나 평소부터궁금한게 있었는데. 남자끼리 키스하면 기분이 어 떨까?" 일행은 모두 폭소해버렸지만 샌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나더 니 맹렬한 동작으로 롱소드의 칼자루를 쥐었다. 손발이 잘맞는단 말이 야. 펠레일도 피식 웃더니 말했다. "라이트닝 볼트는 원래 저렇게 두꺼운 암석은 관통하지 못해서 반사됩 니다. 하지만 소금물은 그 전격을 암석 전체로 전달할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파괴력이 모자랄지도 모르며, 또한 폭발이 안쪽으로 전달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 공진폭발(共震爆發)을 일으켜 볼 계획입니다. 폭발 최대 충격파에서 이루릴양이 체인 라이트닝을 사용하며, 다시 그 최대 충격파에서 제가 다시 라이트닝 볼트를 사용할 겁니다. 이러한 연 쇄충격파는 적은 충격으로도 원하는 부위를 파괴할 것입니다." 칼잡이들은 대단히 감명 깊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 난 나 외에도 다른 칼잡이들 전부가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펠레일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라이트닝 볼트의 지속시간과 속도는 잘 아시겠지요? 예. 좋습니다. 하 지만 전 체인 라이트닝에 대해선 익숙하지 못합니다. 제 발 위에 발을 올려놓으세요. 그리고 발을 밟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주세요. 연습을 해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군요. 시작할까요? 여러분, 동굴 양쪽에 붙어선 다 음, 달릴 준비를 하십시오. 길이 생기면, 달립니다." 우리는 빨리 뛰지 못할 것 같은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올린 다음 달릴 준비를 갖추었다. 난 슈를 업어들었다. 펠레일과 이루릴은 벽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펠레일이 말했다. "눈 조심해요." 펠레일은 캐스팅에 들어갔다. 마치 이중창처럼 한 호흡 후에 이루릴도 캐스팅에 들어갔다. 펠레일의 고함소리가 먼저 들렸다. "라이트닝 볼트!" 쿠과아악! 갑자기 지독한 순백색의 빛이 보였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도 없 다. 번개의 강렬한 줄기가 벽에 맞은 순간, 이루릴의 캐스팅이 끝났다. "체인 라이트닝!" 콰르으응! 이번엔 정말 뒤로 날려버릴 것 같다. 허공에 무시무시한 빛의 강이 만 들어졌다. 마치 벼락이 치는 날에 그러하듯이 살갗이 근질거리는 느낌 이 왔다. 이루릴의 체인 라이트닝은 가멸차게 꿈틀거리며 암벽을 두드 렸다. 동굴 전체가 눈도 제대로 못뜰 것 같은 무서운 빛으로 가득 찼다. 우르릉-! 우르릉! 동굴이 흔들린다, 이거, 그대로 무너지는 것 아닌가? 그 때 펠레일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렸다. "라이트닝 볼트!" 세 번째의 빛은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무서 운 진동만이 남았다. 콰르르르 쾅! 위에선 다시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돌이 마찰되는 지독한 소음. 펠레일이 외쳤다. "달려요!" 앞을 보니, 엄청난 크기의 구멍이 뚫여 있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일제 히 달려갔다. 내 앞쪽으로 샌슨이 가장 먼저 달렸다. 갑자기 샌슨의 낭 패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막혔어!" 앞이 막혀 있는 것이다.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달려오고 있다. 동굴 은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 "비켜! 얼마 안 남았어!" 샌슨이 옆으로 비키는 것과 내가 돌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있 는 힘껏 주먹을 뻗었다. "으아아아압!" 허리를 쭉 뻗으며, 주먹을 날린다. 발이 땅으로 박혀드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씨이잉-쾅! 세상에, 이게 무슨! 내 주먹의 크기가 별로 큰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귀 를 찢는 굉음이 들리며 벽에 직경 5 큐빗의 동그란 원이 생기며 그 반경 안에 있던 암벽이 모두 가루가 되어 밖으로 날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우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밖은 바로 그 절벽 앞의 숲이었다. 나는 나무 사이로 달려가 슈를 내려 놓고는 뒤를 보았 다. 절벽에 동그란 구멍이 생겨 있고 거기서 아이들이 가득 쏟아져 나온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이루릴에게 부축되어 나온 펠 레일이었다. 그들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먼지들 사이로 콜록거리면 서 달려나왔다. 터커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안나온 사람 있으면 말해." 물론, 대답은 없었고 터커는 고개를끄덕였다. "전부 다 나온 모양이군." 그야 이루릴과 펠레일이 제일 뒷쪽에 있었으니 다 나온 것이다. 우리 는 계속해서 먼지를 피워올리고 있는 절벽의 구멍을 보았다. 갑자기 그 구멍 윗쪽으로 검은 줄이 생겼다. 크지직! 구멍 윗쪽으로 거대한 금이 줄달음쳤다. 우리는 그것을 보다가, 그 의 미를 깨닫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절벽이 안으 로 함몰되는 것이다. 쾅쾅쾅, 콰르릉! "우우와아아아!" 우리는 취향껏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어찌나 달렸는지, 우린 거의 신 전 가까이까지 돌아와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제자리에 멈춰서서 뒤를 바라보았다. 산쪽에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먼지구름이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나무에 기대어앉은 샌슨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 했다. "허어, 허억, 우린 산을 날려버렸군."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마지막에 말이야, 내가 벽을 찔렀을 때, 당연히 벽에는 내 주먹만한 구멍이 생겨야 되는 것 아냐? 그런데 희안하게도 벽에는 5 큐빗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고. 어떻게 된 거지?" 나와 샌슨은 아이들을 이끌고 가면서 잡담을 나누고있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이끌지 않아도 이 근처 지형을 잘 아는지 흥분하여 비명을 지르 며 마구 달려갔다. 내 뒤에서 힘없이 걸어오던 펠레일이 말했다. "그건 후치군이 팔을 다 뻗었을 때 주먹이 벽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팔이든 무기든, 공격동작이 끝나는 순간에 목표에 맞았을 때 가장 타 격이 큰 것입니다. 제로 지점에서의 타격력은 순수 운동에너지의 전달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충격파가 암석 전체에 전달되었죠." 나는 감명깊게 고개를 끄덕였다.(못알아들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샌슨 은 정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끊어치기." "무슨 말이야?" 샌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설명보단 보여주는게 낫지." 그리고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땅에 떨어진 단풍잎을 하나 주워들었 다. "잘봐?" 그리고 샌슨은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 그 낙엽을 후려쳤다. 물론 주 먹은 지나쳤고 낙엽은 휘어졌다. "그럼 이번엔." 샌슨은 다시 후려쳤다. 하지만 이번엔 낙엽에 부딪히는 순간 다시 뒤로 뺐다. 짜악! 낙엽은 조각나며 흩어졌다. "차이를 알겠어?" "그러니까 뭐냐, 공격은 목표물에 맞을 때 끝나야 된다는 말이야?" "응. 공격이 끝났을 때도 맞지 않는 것은 문제지만, 공격 도중에 맞는 것도 별로 타격이 없어. 가장 좋은 공격은 공격이 끝나는 그 순간에 목 표에 맞아야 돼." 우리는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걸어왔다. 잠시 후 영지의 모습이 눈 앞 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자지러지면서 달려갔다. 슈는 내 옆에서 걷고 있 었다. 슈는 뚱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슈? 기분이 안좋아?" 슈는 갑자기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슈를 안아올렸다. 슈는 내 귓가 에 대고 말했다. "쟤들 아빠 엄마 죽었어." 나는 입안이 깔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 앞이 부옇게 된 이유는 무 엇일까. 나는 간신히 말했다. "쟤들은 그걸 몰라?" "응. 톰도, 수지도 몇 밤 전에 잡혀갔어. 그 다음에 톰 아빠가 죽었어. 수지 누나도. 지금 가면 알거야." 나는 갑자기 영지에 엄청나게 가기 싫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표 정을 보니 그들도 거의 비슷한 심정인 모양이다. 그제서야 난 내가 왜 샌슨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난 이 사실이 닥쳐온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 3.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18. 누워있던 환자들의 아이들은 그래도 재잘거리며 조금 전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그 중에서 자신의 친지들을 찾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 다. 아빠나 엄마, 혹은 다른 친지들을 내어놓으라고 외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이루릴은 상냥하게 그 분들은 벌써 죽었다는 말을 하려 했고 그래서 나 는 엄청난 속도로 이루릴의 입을 막았다. 난 이루릴의 입을 틀어막고는 고함을 질렀다. "얘들아! 엄마 아빠는 잠깐 여행가신 거야!" 이루릴은 입이 틀어막힌채 눈을 크게 뜨고 날 봤다. 하지만 아이들의 질문은 연이어졌다. "몇 밤 자면 와?" "내일 와?" 난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이루릴의 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꽤 멀리 여행가셨어. 응. 아주 멀리 가셨어." "으흑!" 사만다가 갑자기 기성을 지르며 신전 밖으로 달려가버렸다. 아이들은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뭔지도 모를, 이해하지도 못할 불안 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 중 머리가 좀 굵은 녀석들은 이미 사태를 파 악한 모양이다. 그런 아이들은 힘없이 신전 구석으로 가서 움츠리고앉 았다. 무력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그런 아이들은 내게 싸늘한 조소의 시 선을 보내기도 했다. 웃기지 말라는듯한. 하지만 내 바지춤을 부여잡고 몇 밤 자면 아빠가 오냐고, 엄마 없으면 내가 밥해 먹어야 되느냐고 묻는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은 내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라도 이 사태를 어떻게 해준다면 무슨 보상이든 하겠다. 아이들의 눈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도대체 들여다볼 수가 없어 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때 에델린이 날 구원했다. "얘들아, 배고프지 않니?" 당장 아이들은 눈 앞에 없는 부모들보다 맛보게 될 음식에 대한 생각으 로 가득차버렸다. 아이들은 그 간첩들의 동굴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면서 외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 복했다. "잠깐만 기다려! 맛있는 것 만들어줄께!" 뭐라도 좋다, 재료, 재료가 없나? 아이들의 이빨이 몽땅 썩어버려도 좋 으니 설탕 좀 구할 수 없나? 벌꿀이라면 더 좋다. 잼, 우유, 계란, 밤, 딸기, 빌어먹을! 찾는 것마다 있을 리 없는 물건이다. 난 별로 만들 기 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케익을 잘 만든단 말이야! 내가 크림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알아?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며, 어차피 닥칠 진실이지만 잠시라도 그것을 잊을 수 있게 될 음식이 없나? 그리고 배가 불러서 행 복하게 잠들어, 꿈속에서라도 그들의 부모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그 런 음식 없나? "우라질!" 난 부엌의 벽에 구멍을 뚫어놓고 숨이 막힐 때까지 울었다. 이번엔 아 까처럼 정확하게 치진 않았는지 벽에는 작은 구멍이 생겼고 손은 퉁퉁 부어올랐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어른들의 모습은 모두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들은 아이들을 모두 재워두었다. 아이들은 대모험과 격렬한 식사 로 모두 잠들어 있었다. 식사 도중엔 크라일이나 샌슨마저도 아이들에 게 아양을 떨면서 시중을 들어 아이들의 건강한 소화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나 같아도 저런 얼굴이 아양을 떨면 밥이 안넘어가겠다.) 그래 서, 지금, 우리는, 전반적으로 지쳐 있었다. "거창한 모험을 했는데 건진 건 하나도 없군…." "애들은 건졌잖아?" 크라일과 사만다의 대화다. 터커가 피식 웃었다. "어쩌지? 발목 잡혔는데?" 터커의 말에 크라일은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얌전히 있던 펠레일 이 말했다. "아이들을 버리고 가실 계획입니까?" "그렇다고 데려가냐? 골치 아프네. 우린 모험가야." "저, 땅을 갈며 몇 년을 보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응?" "여긴 잘 정비된 땅과 집이 있습니다. 없는 것은 사람뿐이죠. 힘겨운 개척도시의 삶도 아니고… 전, 이곳에 남아서 밭을 일구며 살고 싶습니 다." 펠레일의 말에 터커가 입을 딱 벌렸다. "어? 어? 뭐야?" "제가 그러고 싶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떠나십시오." "잠깐, 잠깐!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 싶다던 꿈은 어쩌고?" 펠레일은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였다. "전 아직 젊습니다. 전사분들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은 인생 최대의 황 금기이고, 그 다음엔 뭘 하고 싶어도 하실 수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 로서는 몇 년을 낭비해도 상관없습니다. 근로는 전투력을 잠식하지만 마 력을 잠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입을 딱 벌린 채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마법사, 전사들의 야망과는 또다른 야망에 얽매어 사는 사람. 그것은 정신세계로부터 뿜어져나오는 갈구이기 때문에 전사들의 그것보 다 더 치열하고 준엄하다. 마법을 익히고,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마력 을 운용하는 것은 우리같은 칼잡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욕망으로 이루 어진다. 전사가 되는 것에 비하면 마법사는 차라리 선택받은 사람이다. 매일같 은 단련은 전사들도 한다. 하지만 몸의 단련이 아닌 정신의 단련은, 끝 없이 광대무변해서 동시에 끝없이 나약해지고 나태해질 수도 있는 정신 을 한결같이 가다듬는 치열한 투쟁을 일상처럼 해낸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같은 범부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마법사는 머리가 좋아 야 된다는데서부터 벌써 우리완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런데 펠레일은 간단히 정착해서 땅이나 일구겠다는 것이다. 나야 그 의 실력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터커나 크라일 같은 자들과 함께 다니 는 것, 그 동굴에서 우리를 꺼낸 것만 보아도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 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수련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그런 인고의 세월을 간단히 버리고 여기 서 땅이나 일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펠레일은 신비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지는 넓습니다. 전 간혹, 대지와 뒤엉켜 싸우며 마침내 대지가 되어 버리는 농부들이 가장 위대한 영웅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몇 년, 그 흉내를 내어보고 싶습니다." "몇 년? 어, 그럼 몇 년 후 다시 움직이겠다는 거야?" "예. 오랜 세월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개척도 시가 아니니까요. 어쩌면 내년 정도에 당장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펠레일은 잠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몇 년 있으면, 저 아이들은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자손들을 퍼트릴 수 있겠지요. 이 대륙의 한귀퉁이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그들의 번영을 노래할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저 개인의 인생 중 몇 년을 투자하는 것은, 썩 수지맞는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터커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허! 이것 참.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갑자기 펠레일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그렇지만 그의 선량해뵈는 얼 굴이 완전히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그 동굴에서의 일이 아마도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응?" "실험 보고서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자이펀인이라는 것은 잠깐 접어 두고,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인간, 그 중에 서도 막강한 지식을 다루는 자들이었지요. 우리들이 흔히 존경하는 사람 들입니다. 그 실험은 그런 사람, 즉 선조의 지혜와 피나는 업적을 다루 어 온 마법사나 성직자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의 선물로 해 내는 일이 고작 이런 것입니다!" 펠레일은 결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이 들어 있었다. 우 리는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행한 일은 인간이 책임져야 됩니다. 저 아이들은 책임을 요구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 요. 말씀드렸다시피, 전사분들은 인생의 몇 년을 간단히 허비할 수 없습 니다. 검을 쥘 수 있는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만다님. 당신 은 테페리의 뜻을 대륙에 퍼트릴 의무를 가지고 있는 순례자입니다. 그 러니 저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펠레일은 다시 그윽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여긴 90여명의 어른과 50여명의 아이들이 있지 요. 제 왕국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왕국에 왕은 없을 겁니다. 여러분들께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펠레일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50 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대륙에 퍼트려 주시겠습니까?" "푸핫하하하!" 크라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터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고, 사만 다는 감탄한 눈으로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펠레일은 미소 지으며 말했 다. "괜찮죠? 열두 드래곤과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100 명의 데스 나이트와 무지개의 솔로쳐 등의 쟁쟁한 이야기들만 대륙에 퍼져서는 사는게 삭막 하겠죠. 그러니 50 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의 이야기 같은 소박 한 노래도 어두운 주점의 한구석에서 불려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노래 를 듣는 주정뱅이들이 모두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정말 괜찮은 노 래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도 썩 괜찮겠지요." 다음날, 우린 칼라일 영지의 대로에 있었다. 자이펀 간첩들로부터 찾아낸 실험보고서는 우리가 가져가기로 했다. 우리는 국왕님을 알현하려 찾아가는 길이므로 같이 보고하면 될 것이다. 펠레일은 칼라일 영지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 트롤 프 리스티스 에델린은 며칠 더 환자들을 보살핀 다음 떠나기로 했다. 성직자인 사만다와 에델린은 신의 계율에 얽매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만 신의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 그것은 신전의 책임자가 될 만한 하이 프리스트의 일이며, 순례자인 사만다나 에델린은 자기 마음대 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정도는 거기 서 봉사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소개장을 써주면서, 여행 중 곤란한 일이 있거든 에델브로이의 신전이나 테페리의 신전에 소개장을 보여주며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감사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터커와 크라일. 그들은 전사다. 전사는 싸움을 찾아 떠돌아야 한다. 안 주는 그들에게 사치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을 땅을 찾아서 영원히 떠돌 아야 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도 머무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은 무기 대신 망치와 괭이를 들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네 명의 자이펀 간첩들은 우리가 데려갈 수 없었다. 우리 인원도 네 명 인데 믿을 수 없는 자들을 데려가면 이동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 서 우리는 한 명만을 데려가기로 했다. 수도에서 실험 보고서를 내놓을 때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동굴에서 우리에게 음험하게 대답하던 남자가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의 이름을 묻자 그는 운차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펠레일은 나머지 세 명에게 농기구를 쥐어주며 이 영지에 내린 그들의 해악을 스스로 퇴치하도록 명령했다. 간첩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만, 그 죽음의 동굴에서 끝까지 데리고 나와 살려준 데는 감사하는 눈 치였다. 펠레일은 우리들에게만 살짝 귀뜸했는데, 그들을 도망보내줄 생각인 모 양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간단히 잡힌 것으로 보아 조무래기들이고, 어 차피 책임자는 그 검은 뱀파이어 여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건으로 바쁠 영지에서 그들을 감시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도망보낼 작정이라는 것이 다. "국왕님께 전해주십시오." 펠레일은 말했다. "칼라일 가문의 후계자를 찾아 조속히 보내어 달라고. 전 성심성의껏 그를 맞이할 것이며, 그가 허락한다면 그를 보좌하고 싶습니다. 그가 허 락하지 않는다면? 뭐, 제 동료들을 찾아 떠나야겠지요. 어쨌든 그 동안 세금은 못보내드리니까 빨리 보내는 게 좋을 겁니다." 카알은 빙긋 웃고는, 그러마고 말했다. 하지만 펠레일의 말은 끝난 것 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여러분이 운반하는 서류는 전쟁의 중요열쇠입니다. 아쉽게도 완성이 되지는 않았지만, 운차이씨가 증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운차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고문할테면 해봐라, 내가 입도 벙긋할까.'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펠레일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나라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파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공작들과 영주들에게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매 파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그 서류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여러분을 쫓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펠레일은 말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조심하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하지만 국왕님께 이 말 한 마디는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펠레일은 카알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카알은 의아한 표정을 짓 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걸프스트림 말이군요." 펠레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예. 거기가 가장 가깝습니다." "놀랍군요. 대충 이해했습니다." 펠레일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카알님은 전령 노릇이나 하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도 이곳에서 농기구를 쥘 사람은 아닌 것 같소." 터커 일행도, 우리들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말을 돌렸다. 사만다가 외쳤다. "테페리가 돌보실 거예요! 갈림길에서 주저하지 말아요, 마음 가는대로 가세요!" 에델린도 말했다. "폭풍을 잠재우는 것은 가녀린 코스모스입니다. 에델브로이의 축복이." 우리는 터커, 크라일, 펠레일, 사만다, 에델린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했 다. 앗! 잠깐, 그리고 말 안했는데, 물론 그 뒤에는 50여명의 아이들이 우리를 환송하고 있었다. "잘가! 후치 오빠!" "돌아오는 길에 꼭 선물 사올께!" 나는 슈의 목소리에 대답해주고는 칼라일 영지를 벗어났다. "사흘을 흘려보냈군. 하지만 그 사흘은 낭비한 것은 아니었어." 카알은 고개를 돌려 칼라일 영지를 바라보았다. 나도 뒤돌아보았다. 우 리가 첫날 느꼈던 그 기괴함, 모든 색깔이 똑같은 요괴스러움은 이제 없 었다. 따스한 가을햇볕 아래에 정겨운 영지의 모습만이 보였다. 나는 운차이를 힐끗 보았다. 그는 포로 상태였지만 묶어서 말에 태울 수는 없었다. (이 마을을 샅샅 이 뒤져 간신히 발견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풀어주었지만 말을 타고 있으니 그냥 달아날지도 몰랐다. 샌슨은 잠깐 머리를 긁적인 다음, 운차이의 말과 자신의 말의 안장을 길다란 밧줄로 묶어버린 다음, 운차 이의 두 발목에 밧줄을 묶어 말의 배 아래로 연결했다. 운차이는 말에서 뛰어내리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 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카알은 운차이에겐 관심없다는듯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이라…" 우리는 모두 미소를 지었고 이루릴도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완벽한 아버지가 될만한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어차피 완벽한 아버지는 없어. 노력하는 아버지가 있을 뿐이지. 그런 면에서, 저 영지 의 내일이 어둡지는 않을 거야." 카알의 말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영지의 내일을 담보할만한 자라면, 그는 대마법사라 불릴 만한 인 물이겠지요." 나는 놀란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헛기침을 좀 하더니 외쳤 다. "자, 달려볼까요?" 우리는 가을 벌판을 달려갔다. 풍요로운 수확은 없겠지만, 풍요로운 인 간의 마음이 있지 않은가. 헬턴트 사나이 세 명, 아름다운 엘프, 그리고 자이펀 간첩은 그 황금빛의 벌판을 질풍처럼 달려갔다. ================================================================== 4. 황소와 마법검……1. …따라서 자이펀의 전사들이 받는 훈련은 우리들 바이서스 의 전사들이 받는 훈련과 그 근본철학부터가 다르다. 우리 바이서스의 전사들은 전투상황에서도 심, 기, 체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하지 만 저 남부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살아가는 자이펀은 육 체능력에 보다 많은 집중을 할 수 없다. 바이서스 최강의 전 사라도 자이펀의 사막에서 매일같이 하는 구보 훈련을 하기 는 어렵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들은 전투훈련에서 정신력의 고양을 그 목적으로 한다. 끈기, 인내, 침착성, 고도의 집중 에서 자이펀의 전사들을 따라갈 전사를 찾기는 힘들다. 살기 가 이미 적을 꿰뚫으면, 손에 쥔 것이 검이든 활이든 똑같다 는 말은 자이펀 전사들의 유명한 격언이다. 그런데…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2 권. PP. 882 (770년 돌로메네 作) "뭐야, 이건? 이 나라 여행자들의 지혜인가?" "뭐야?" "여행의 속도를 위해 누군가 쫓아다니게 한다…" "시끄러! 제기랄, 정말 돌아버리겠네!" 운차이의 느물스러운 말에 샌슨은 화를 바락바락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참 막막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놈들 중 하나가 외쳤다. "취이이익! 이, 이상하다? 하나가 더 늘었다?" "취익취익! 어, 취익, 괴물 초장이만 조심하면 된다!" 오크의 그 말에 샌슨이 눈을 뒤집었다. "뭐야? 난 안 보이냐, 이 자식들아!" 카알은 샌슨의 화를 진정시키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는 오크들 을 향해 말했다. "여보게… 설마 휴다인 고개에서 여기까지 우릴 쫓아왔나?" "그렇다! 취익!" "말도 없이 말인가? 우리가 아무리 며칠씩 멈추면서 달려왔다지만… 정 말 대단하군." 정말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내 앞에서 오크들의 지독한 복 수심… 어쩌고 하며 아는 체 하는 녀석이 있다면 턱을 올려쳐 줄 생각이 다. 직접 당해보란 말이다! 우리는 레너스시와 칼라일 영지에서 각기 사흘을 보내었다. 그러니 도 합 엿새. 그 동안 이 지독한 놈들은 밤마다 걸어서 우리를 추적했나 보 다. 아니 도대체! 각 영지의 사람들은 눈이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이런 큰 무리가 지나치는데! 아무리 밤에만 걷고 숲속으로 쫓아왔을 테지만 그래도 어떻게 안들키고 우리를 쫓아왔단 말이지? 지금 이루릴이 앞에 나서서 댄싱 라이트 주문으로 괴상하게 생긴 불의 생물들을 불러내어 춤추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크들은 눈을 가리며 함 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주문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닐게다.오크들도 춤 추는 불꽃들이 사라지기만 하면 덮치겠다는듯이 글레이브를 꼬나쥐고 있다. 이루릴도 그것을 눈치챈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불꽃이 사라지면 그 다음엔 더 강력한 불을 쏘겠습니다." 오크들은 숨을 죽였다. 난 그 말에는 적극 찬성이다. "그래요! 그 뭐냐, 불회오리! 그걸로 저 놈들 다 구워버려요!" 나는 이루릴이 칼라일 영지에서 실프의 바람에 샐러맨더의 기운을 실어 쏘아버린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 압도적인 장관이었다. 수십 큐빗 의 굵기로 용트림하는 불꽃은 좀비 백여 마리를 순식간에 불태웠다. 그 러나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파괴력이 강해서… 생물에게 그걸 쓴다면 치료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게 되는데요. 대책이 없어요." 그래, 대책이 없겠지. 뼛조각까지 불타버리니까. 난 기회를 놓치지 않 고 말했다. "들었냐, 이것들아! 계속 걸리적거리면 너희들 뼛조각도 남지 않게 다 태워버릴 테다!" 오크들은 겁을 좀 집어먹고는 서로 수근거렸다. 내 말이 공갈인지 진 짜인지 의논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오크들은 물러서고 싶은 기색이 없 었다. 그들의 위치가 압도적으로 좋으니까. 정말 황당한 꼴인데, 우린 스스로 막힌 지형을 선택해서 야영하고 있 었다. 물론 야영을 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막힌 지형을 선택할 리야 없 다. 우리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린 자이펀 간첩인 운차 이를 이송하고 있었고, 따라서 퇴로가 많은 지형을 꺼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강을 등지고 야영을 했다. 강가에서 야영을 하는 것은 완전한 바보짓이다. 물을 구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강가에는 추위를 막아줄 엄폐물도 없고 주위가 너무 드러난다. 하지만 그래서 운차이도 달아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 운차이는 팔짱을 낀 채 우리와 오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는 카알의 허리에 있는 대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대거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왜지요?" "몸을 지키고 싶습니다." "…좀 더 상황을 두고 봅시다." "알겠습니다." 운차이는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무심하게 다시 오크들을 노려 보았다. 그 동안, 이루릴은 결판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갑자기 댄싱 라이트를 없애 버렸다. 오크들은 긴장했다. "후치씨, 샌슨씨, 앞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이루릴은 우리들의 등 뒤에서 캐스팅을 시작했다. "밤의 이슬 속에서도 젖지 않는 하나의 모래의 주인이며…" "취이익! 마법을 쓴다!" 오크들은 우리들에게 덤벼들었으나 그보다 먼저 난 바닥을 차올렸다. 쫘르르! 팍팍! 강가의 자갈들이 앞으로 튕겨나가며 오크들을 저지했다. 그리고 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도, 모양도 냄새도 아무 것도 없지만 정령이 움 직일 때는 뭔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오크들은 픽픽 쓰러졌다. 앞에서 덤벼들던 5마리가 그렇게 쓰 러지자 우린 당장 양 옆으로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샌슨은 왼쪽, 나 는 오른쪽, 그리고 우리가 양쪽으로 벌려짐과 동시에 가운데서 카알이 롱보우를 쏜다. 우리들도 이젠 꽤 익숙해졌다. 퍽! 퍼퍼벅! 우리는 모두 검집을 씌운채 싸우고 있었다. 이루릴이 생명을 죽이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죽여봐야 원한만 깊어질 것 같기도 하니 우리도 찬성이다. 카알도 활을 낮게 쏴서 다리를 맞추거나 혹은 높게 쏘아 겁을 줄 뿐이다. 나도 이젠 꽤 능숙하게 허리로 검을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가운데 있 다. 검법이든 창법이든 결국 허리가 중요하다. 발은 위치를 움직이고, 팔은 무기를 움직이며, 힘과 방향은 모두 허리에서 나온다. 오크들의 글 레이브가 아무리 길어도 내 바스타드에 한번씩 맞으면 다 부러져나간다. 난 주로 오크들의 무기를 공격했다. 쓸 데 없이 오크들을 더 죽였다간 아무래도 원한이 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며, 솔직히 그 글레이브가 지배하는 엄청난 공간을 뚫고 들어가 오크의 몸을 직접 공격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루릴은 외쳤다. "모두 말로!" 이루릴, 카알, 운차이는 이미 말에 올랐다. 샌슨과 나는 말이 있는 곳 으로 달려갔다. 난 바닥에 있는 짐들을 모조리 거머쥐어 달리느라 조금 뒤쳐졌다. 오크들이 우리를 쫓아오려하자 이루릴은 말 위에서 캐스팅했다. "체인 라이트닝!" 푸아팍팍팍! 나와 오크들 사이로 엄청난 벼락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강가의 자 갈들이 순식간에 타버리거나 깨어져 나갔고 오크들은 기겁하며 물러났 다. 솔직히 나도 기겁했다. 그러나 이루릴은 내 말을 끌고 나에게로 달 려오고 있었다. 난 한 손에 든 배낭 뭉치를 말에 얹고 다른 손에 든 프 라이팬을 입에 물고는 말 위에 뛰어올랐다. "달려!" 샌슨이 앞서 달리기 시작했고 우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오크들은 화 나서 글레이브를 집어던지거나 돌멩이를 들어 집어던졌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다. "취이익! 멈춰라! 비겁한!" 저 자식들은 죽이기 싫어서 도망가는 것도 모르고! "읍! 읍읍읍!" 난 프라이팬을 입에 문 채로 악악거렸다. "그거 맛있냐?" 샌슨이 말하고 나서야 난 프라이팬을 계속 물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 을 깨달았다. 음, 좀 부끄럽군. 강을 따라 상류로 달린지 한참, 간신히 다리를 만났다. 우리가 다리를 만나게 된 것은 거의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후줄근한 모습 으로 다리에 다다랐다. "다리가 있으면, 가까운데 마을이 있겠지." 카알의 낙관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난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말 미치도록 자고 싶었다. 아마 말들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옆에 있던 카알이 붙잡아주어서 간신히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앞에서 걷고 있던 샌슨은 강쪽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그래서 샌슨과 운차이는 한꺼번에 강으로 들어갔다. 운차이의 말 안 장과 샌슨의 말 안장은 서로 묶여 있으니까. 운차이는 고함을 질렀다. "이봐! 뭐하는 거야?" 졸면서 강으로 들어가던 샌슨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루릴은 엘프 라서 그런 것인지 별로 졸리는 기색이 없었다. 운차이는 피로한 기색이 었지만 졸지는 않았다. 나나 샌슨이 좀 문제인 것인가? 다리는 거의 150 큐빗은 되어보이는 길이의 돌다리였다. 꽤 잘 만든 다 리인데? 샌슨은 눈을 비비며 설명했다. "아, 여긴 이라무스 다리입니다. 다리를 건너 좀 더 들어가면…(꾸벅) 아, 수도 바이서스 임펠의 서부관문에 해당하는…(꾸벅) 이라무스시가 나타납니다." "그럼 거기 들어가서 쉬세나. 자, 기운들 내게." "…" "퍼시발군?" "아, 예? 옙!" 우리는 이라무스 다리에 들어섰다. 그런데 우리 눈에 재미있는 것이 들어왔다. 다리의 중간쯤, 왼쪽 난간에 기대어 다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남루한 회색 망토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몸에 두른 망토 틈으로는 하더 리더의 모습이 보였다. 흡사 밤새도록 거기서 자고 있었든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강바람이 거센 이런 다리에서 자고 있다 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트롤일 것이다. 아무리 망토를 두르고 있다지만. 그 자의 옆에는 희안하게 생긴 무기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 건, 창이긴 창인데 희안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가운데 창날은 롱소드처 럼 생겼으며 양쪽으로 꺽어진 부속창날이 달렸다. 흡사 E 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가운뎃날이 긴… 아무리 봐도 잘못 만들어진 대형 포크가 생각 나는데? "저게… 아함. 저게 뭐야?" "트라이던트(Trident) 종류인 것 같은데." "에엑? 저렇게 큰 트라이던트가 어디 있어?" 트라이던트는 결국 작살이다. 던질 수도 있어야 하고, 원래 낚시할 때 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하지만 저 자가 들고 있는 것은 모양만 트라이던트지 거의 할버드나 포챠드에 버금 갈 정도로 크다. "모양만 트라이던트군." "쓰기 어렵겠다." "뭐, 저거 익히긴 어렵겠지만 익숙해지면 꽤 좋을 것 같은데. 공수양면 에 좋겠는걸." 우리가 이렇게 노닥거리면서 그 자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다. 난간에 기대어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이 던 그 자가 갑자기 팔을 움직였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둔 그 괴상한 창을 들어 반바퀴 빙 돌리더니 다리를 가로막았다. "…?" 명백한 시비다. 우리는당황해서 멈추었다. 그 자는 천천히 일어서서는 그 창을 짚고 서서는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 자는 후드를 들어올렸다. 멋진 아가씨의 얼굴이 나타났다. 남자가 아니네? 망토는 마치 남자같은 회색인데. 아마도 하더 리더를 입고 그 위에 다 시 망토를 걸쳐서 덩치가 커보이는 모양이다. 여자는 빨강머리를 뒤로 묶어놓고 있는데 엉성한 몸놀림으로 보아 처녀다. 난 그것은 확실히 구 분할 자신이 있다.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처녀는 아줌마보다 몸놀림에서 풋내가 난다. 좋게 말하면 싱그럽다거나 발랄하다고 해야 되나. "뭐요, 아가씨?" 샌슨이 말했다. 그 아가씨는 생긋 웃었다. "오늘은 개시하자마자 손님이네. 남자는 모두 10셀씩 30셀, 엘프는 여 자니까 20셀에 미인이시네? 그럼 30셀. 어린이는 반액요금으로 5셀. 모 두 65셀 되겠군요." 나는 기가 막혀서 일단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 좋겠네? 샌슨은 어려보이니까." "너 말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무슨 돈을 내놓으라는 거요?" "다리 이용료." 카알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허허거리더니 농담삼아 질문했다. "왜 여자는 20셀에 미인은 10셀 추가요?" 여자는 생긋 웃었다. 그런대로 귀여워 보이네. "난 남자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미인은 기분 나빠서." 난 한숨을 폭폭 쉬면서 말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할 수 없군. 비장의 미남계를 써야겠군. 아무래도 그거라면 내가…" 딱! 그만 때려라, 키 안 큰다! 샌슨은 내 정수리를 찍고는 말했다. "여보쇼! 우리가 왜 다리 이용료를 내야 되?" "안내면 헤엄쳐서 건너야 되니까." "아하? 강도군?" "어떤 사람들은 내 직업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난 나이트호 크(Nighthawk)라는 직업명을 더 좋아해." 흠. 레너스시의 듀칸 버터핑거는 자기를 소유권 이전 전문가라고 부르 더니 이 여자는 나이트호크 (쏙독새, 밤도적의 은어.)라 부르는군. 샌슨 은 킬킬 웃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는 롱소드를 뽑아들면서 말했다. "나이트호크가 낮에 돌아다니냐? 좋아, 난 여자를 좋아하니까 10셀, 하 지만 미인이 아닐 경우엔 10셀 추가. 20셀을 내면 안건드리고 지나가주 지." 여자는 발끈했다. "내가 미인이 아니라고? 이 정도면 어디 안빠지잖아?" 샌슨은 엄지손가락을 뒤로 해서 이루릴을 가리켰다. "미안하군. 이 분과 함께 다니다보니까 말이야, 왠만한 얼굴은 눈에 안 들어온다고." 여자는 까르륵 웃었다. "보다보다 이런 배짱 좋은 놈은 처음봤네. 아, 너 시골에서 방금 올라 왔지? 그래서 내 이름을 못들어본 모양이네? 내 창만 보더라도 기억하 는 사람이 많은데 말이야." 샌슨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들어봤어." "난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잘 기억해." "그래? 난 헬턴트의 샌슨 퍼시발. 혼자 상대해 주지."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들에게 좀 물러나라고 시켰다. 물러나며 난 말했다. "샌슨, 조심해! 지형이 좁아서 창이 유리하다고." "그거야 맞을 때의 이야기고." 샌슨은 롱소드를 빙빙 돌리더니 앞으로 쥐었다. 선제공격은 할 수 없 다. 상대의 창이 기니까. 샌슨은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리아라는 그 여자 강도도 기다리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창을 앞으로 세워 샌슨의 가슴 부위를 겨냥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두 사람 은 그렇게 1분쯤 대치했다. 샌슨은 하품을 했다. 그리고 갑자기 샌슨은 외쳤다. "왁!" "이얍!" 한심해서… 네리아는 긴장하고 있다가 샌슨이 고함을 지르자 엄청난 속 도로 트라이던트를 찔러왔다. 샌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옆으로 돌 며 트라이던트를 내리쳤다. 치챙! 네리아는 허겁지겁 물러났고 샌슨도 뒤로 몇 발자국 움직였다. 네리아 의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힘 좋네?" "어, 팔 아파? 미안. 그런데 빨리 끝내자고. 난 피곤해." 피곤해라고 말하면서 샌슨은 앞으로 걸어갔다. 네리아는 놀라서 트라 이던트를 찔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속임수. 샌슨은 마치 걸어갈듯이 허 리만 앞으로 내밀었을 뿐 앞으로 내디딘 발로 땅을 차며 뒤로 움직였다. 트라이던트는 아슬아슬하게 샌슨의 가슴 앞에서멈췄고 샌슨은 그것을 쳐올렸다. 아래에서 쳐올리는 저 멋진 동작은 눈에 익은데? "저거, 일자무식이다!" ================================================================== 4. 황소와 마법검……2. 난 감탄해서 말했다. 내가 할 때보단 훨씬 멋있지만. 샌슨은 일단 위로 쳐올리고는 그대로 회전하며 다리를 크게 내딛고 옆으로 베어들어갔다. 탕! 네리아는 허리를 맞고는 까무라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몇 발자국 물러서고는 자기 허리를 내려다보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샌슨은 피 식 웃더니 롱소드를 들어올려 손가락으로 검날의 옆면을 가리켰다. 네리아는 붉으락푸르락 하기 시작했다. "하압!" 네리아는 돌격하면서 찔렀다. 하지만 샌슨은 이번엔 트라이던트를쳐 내렸다. 네리아는 급격히 앞으로 쏠리다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몇 발자 국 더 디뎠고, 샌슨은 그대로 네리아의 옆으로 걸어갔다. 찰싹! 샌슨의 검 옆면에 엉덩이를 맞은 네리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 다. 그러나 몸을 돌린 그녀의 목에는 롱소드가 겨냥되어 있었다. "…!" 네리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샌슨은 눈짓으로 창을 버리라고 명령하며 롱소드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탈깡. 경쾌한 소리를 내며 트라이던트가 떨어졌다. 샌슨은 주의깊게 그 것을 주워들더니 카알에게 던졌다. 카알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샌슨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자, 20셀이야. 어쩔래?" 네리아는 입을 앙다물었다. "못내겠다면? 날 어쩔 건데?" "음… 넌 지금까지 돈을 못낸 사람을 어떻게 했는데?" "헤엄치게 했다고 하…" 네리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샌슨이 짓궂은 표정으로 강물을 흘깃 바 라본 것이다. 늦가을의 강이다. 게다가 네리아는 하드 리더에 망토까지 입고 있다. 헤엄치기도 어려울테고, 어쨌든 무진장 추울 것이다. 네리아의 얼굴이 시퍼렇게 바뀌었다.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둬. 꿈자리가 사나울걸. 아함…. 그런 것은 보고 싶지 않아." 샌슨은 롱소드를 치워주고는 말 위에 오르더니 말했다. "가자. 그리고 난 말을 잘 못하니까. 카알이 한 마디 하세요." 카알은 빙긋 웃고는 말했다. "네리아양? 실력으로 보아 강도영업도 어렵겠소. 가진 재주가 무술이라 면 어디의 군대에라도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하지만 군대는 위험 하니까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두고, 뭐 다른 기술을 익혀보는 것이 좋을 거요." 네리아는 실력 운운하니까 자존심 상해 죽겠다는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돌려줘요!" 카알은 트라이던트를 들어보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저 우리가 지나가고." 네리아는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다리 옆으로 비켜섰다. 우리는 그녀 옆 을 지나갔다. 카알은 우리가 다 지나가고 나서 트라이던트를 던져주었 다. "자, 퍼시발군…?" 샌슨은 다시 졸고 있었다. 조금전에 격렬하게 움직여서 더 졸린 모양이 다. 네리아도 그걸 보더니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샌슨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음? 어, 뭐냐? 어, 여긴 이라무스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지나면 수도 바이서스 임펠의 서부관문에…" "아, 아냐, 됐네. 퍼시발군. 가세나." 샌슨은 눈을 좀 껌뻑이고는 머리를 좀 휘젓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 리도 피식 웃고는 다시 말을 걷게했다. 그런데 잠깐 후에 고개를 돌린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어? 따라오네?" "누가 따라간다고!" 고함을 지른 것은 물론 네리아다. 네리아의 목소리에 다른 일행도 모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네리아는 화난 표정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그대 로 멈춰선 우리를 지나치며 말했다. "누가 따라가? 난 이라무스에 간다고! 젠장, 여관비가 없어서 한 건 하 고 갈려고 했는데." 샌슨은 졸린 눈으로 네리아를 보더니 말했다. "그래? 그럼, 그래. 아함…" 네리아는 팔짝팔짝 뛰면서 외쳤다. "야! 좀 태워주겠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 나보고 그 먼 거리를 걸어가 라는 거야? 너 때문에 난 여관비도 못 벌었다고!" 우리는 기막힌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샌슨은 하품이 나와서 짜 증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럼, 그래. 아아… 죽겠네. 저기 운차이랑 같이 타. 저 말엔 짐도 없으니." 그러자 운차이의 얼굴이 대번에 바뀌었다. "Nhatro! 아니, 안돼!" 운차이의 고함소리가 너무 커서 네리아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놀랐다. 난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아. 그렇지. 아내 아닌 여자와 가까이 할 수 없지." 자이펀인의 관습인가? 여자완 말도 못한다더니… "그래요? 같이 말에 타는 것도 안되요?" "음. 친지가 아니면 방 안에 단둘이 같이 있는 것도 안될걸?" 나는 운차이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골치 아픈 관습을 지녔네. 하지만 저 친구는 간첩이잖아? 간첩이면 예의범절은 무시해도 되는 것 아닌가? 아, 우리에게 이미 들켰으니 위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이루릴이 말했다. "제 몸무게가 가벼우니까 저와 같이 타죠." 그러자 네리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미인하곤 같이 안타요! 음. 이봐! 너, 샌슨? 네 말이 제일 크네. 같이 타자." 샌슨은 졸려서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거야. 나랑 같이 타!" 네리아는 샌슨이 너무 좋아하자 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잠자코 말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샌슨은 네리아를 이상한 방향으로 인도했다. 네리아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뭐, 뭐야?" 샌슨은 네리아를 자신의 앞에 태우더니 고삐를 쥐어주었다. "내가 졸면 네가 말을 이끌어. 알았지? 아, 다행이다. 내가 졸면 일행 을 인도하지 못하거든. 으음…" 그리고 샌슨은 당장 눈이 풀어졌다. 네리아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뒤 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거… 보기보다 음흉하네?" 샌슨은 벌써 졸고 있어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참, 대단하다. 앉은채로 자네? 운차이는 못볼 것을 본다는듯이 샌슨과 네리아에게서 고개를 돌렸 다. 고개를 돌린채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아무래도 무슨 욕짓거리인 것 같다. 그렇게 우린 반쯤은 샌슨의, 반쯤은 네리아의 인도를 받아 이라무스시 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불편한듯이 계속 몸을 움찔거리 고는 했지만 샌슨은 졸면서 끊임없이 네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박았다. 네리아는 몇 번 화를 내다가는 포기해버리고 아예 혼자서 고삐를 잡고 샌슨을 등 뒤에 기대게 한 채 걸었다. 그러자 샌슨은 팔을 쫙 늘어트리 고는 네리아의 등에 기대어 본격적으로 자버렸다. 드르렁! 카알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리아양. 무겁지 않소?" "가볍지는 않네요. 그런데 댁들은 모험가예요?" "그런 말을 전에도 들었지만, 우린 여행가일 뿐이오. 분명한 목적을 가 진 여행가." "흐음… 내 등 뒤의 덩치 큰 아가는 칼솜씨가 무섭던데." "덩치 큰 아가?" "전혀 기회포착을 못하고 있잖아요? 이런 좋은 기회에." 카알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지금 많이 졸려서 그렇긴 하지만, 정신이 맑더라도 네리 아양에게 무슨 추잡스런 짓을 할 젊은이는 아니외다." 그야 그렇지. 샌슨 순진한 것은 유피넬이 알고 헬카네스가 알고 내가 안다. 하지만 네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헤엣? 저 미녀 엘프 때문에 나 정도는 여자로 안보이신다?" "그런 뜻은 아니오." "아, 됐어요. 그건 착한게 아니라 쑥맥인거지. 그런데 저 과묵한 청년 은? 저 친구도 쑥맥인가요?" 네리아가 지적한 것은 운차이였다.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올시다. 안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소." 네리아는 밧줄을 보고는 운차이를 다시 봤다. 그녀는 운차이에게 말했 다. "이봐요. 당신 이름은?" 운차이는 못들은 척 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네리아의 눈썹이 올라 가더니 네리아는 샌슨의 안장과 운차이의 안장을 연결한 줄을 확 끌어당 기며 말했다. "이봐! 레이디가 묻잖아?" 운차이는 화난 표정으로 네리아를 보더니 갑자기 내게 고개를 돌렸다. "후치. 강도도 레이디라고 불릴 수 있는지 저 아가씨에게 전해줘." "라는군요." 나는 친절하게 전해주었다. 그러자 네리아는 발끈하면서 말했다. "왜 직접 말하지 않는거야? 무슨 애들 장난치는거야?" 운차이는 역시 내게 말했다. "용모가 아름답지 못하면 성격이라도 고와야 하고, 성격이 곱지 못하다 면 언행이라도 고와야 하는 법이라고 저 아가씨에게 전해줘." "라는군요." "야! 누가 널더러 날 책임이라도 지라고 그랬어? 내 언행이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용모가 뭐 어째?" 운차이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유유하게 말했다. "저런 패악스럽고 사나운 성격을 일생 동안 참아낼 남자를 찾는 것은, 익힌 달걀에서 병아리를 까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전해 줘." "라는군요." "뭣이 어쩌고 어째? 넌 뭐가 잘나서? 보아하니 이 사람들 포로인 모양 인데!" 운차이는 여전히 유들거렸다. "난 포로라도 되지만, 저 아가씨의 경우엔 포로로 삼을 가치도 없어서 이기고도 내버려두고 떠난 것이 아니냐고 전해줘." 난 약간의 변화를 모색해봤다. "라는데요?" "익힌 돼지머리같은 얼굴에, 비오면 다 들어갈 것 같은 납작코를 가진 주제에 뭐가 자신 있어서 미인에게 함부로 구는 거야?" "몸매가 거의 시각폭력에 가까운 주제에 과대망상을 가지기까지 했으니 그 앞날이 참으로 막막하여 도대체 대책이 안선다고 전해줘." "라는걸요." "그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냐? 엉? 깡촌에서 비루먹은 당나귀같은 여 자만 보다가 날 보니까, 도대체 세련미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게 자랑이 냐?" "지나가는 남자 100 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그 중 98 명이 모두 머리를 흔들면서 달아나버릴 얼굴도 세련미라 칭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전해 줘." "라시네요." "98명? 2명은 그럼 뭐야?" "한 명은 장님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쟁이였다고 전해줘." "라셨어요." 정말 대단하다. 네리아와 운차이는 이라무스 다리에서 이라무스 시에 들어갈 때까지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도시의 외성이 멀리 보이고 있 다. 외성이라. 꽤 커다란 도시인가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걸 볼 겨를 도 없이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운차이가 조금만 덜 느물거렸으면, 아니 네리아가 조금만 더 겸손했다 면 모르겠지만 지금 둘은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가중되는 피로를 느꼈다. 졸려 주-욱겠는데! 정말 존경스럽다. 누구? 샌슨. 어떻게 저렇게 떠드는 여자의 등에 볼을 갖다댄채 저렇게 편안하게 자고 있을 수 있는지. 샌슨은 자기 집의 자 기 방의 자기 침대, 즉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마음편한 자리에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자고 있다. 네리아는 조금도 지치지 않는 모습으로 또 말했다. "야! 네가 길을 걸으면 지나가던 여자들 100 명 중 98 명이 기절해 버 릴 거다! 1 명은 장님이고… 꺄악!" 응? 이건 좀 이상한데? 난 졸린 눈을 비비며 네리아를 보았다. 샌슨이 네리아의 허리를 덥썩 안은 것이다. 네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드, 드디어 행동개시인가?" 이번엔 우리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눈을 감은 채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음… 이루릴. 예상외로 허리가 굵은데…" 샌슨은 네리아에 의해 말에서 떨어졌을 때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면서 여관을 둘러보았다. "괜찮네. 마굿간도 있고. 들어가자. 졸려 쓰러질 것 같아." "그래. 아까 꾸던 꿈 마저꾸어야지. 그럼." 네리아의 퉁명스러운 말에 샌슨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버렸다. 네리아 는 그대로 우리에게 손을 젓더니 말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샌슨. 친절을 베풀어줘서 그 댓가로 조 언 하나 할께요. 아무에게나 베푸는 그런 친절은 위험해요." 샌슨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운차이를 노려보았지만 운차이 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콧방귀를 뀌고는 그대로 그 긴 트라 이던트를 지팡이처럼 짚으며 걸어갔다. 우리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이름은 이라무스 플라이? 무슨 여관 이름이 저런지 모르겠군. 우리는 지친 표정으로 여관에 들어갔다. 말구 종이 달려나오더니 우리들의 말을 데려갔다. 우리는 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홀이었는데 홀 안의 테이블을 닦고 있던 아주머니가 말 했다. "발 털고 들어와요! 그렇지. 다섯 분? 난 여기 주인 레네즈요. 방은 어 떻게 쓰시겠소?" 샌슨은 여관 현관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힐 뻔 하다가 말했다. "아…함. 큰 방 있어요?" "네 사람 들어갈 방은 있지." "좋아요. 그럼 그 방에, 이루릴은 독실로 가시죠?" "예." 레네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4인실에 독실, 아침식사 하시겠소?" "아니… 일단 방부터. 졸려죽겠어요." "그래? 밤새도록 왔나보군. 하루치 요금 선불이오. 4셀 30퍼셀." 샌슨은 그새 여관기둥에 기댄채 또 졸고 있었다. 나도 정말 미치도록 졸렸다. 그래서 카알이 샌슨을 흔들어 깨웠다. "퍼시발군. 여관비 선불로 4셀 30퍼셀이라네." "예? 아, 예. 아하함!" 샌슨이 품 속을 뒤적거리는 것이 점점 희미하게 보인다. 아, 아, 아무 래도 안되겠어… 나도 여관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런데 갑자기 고함소리 가 들렸다. "없어!" ================================================================== 4. 황소와 마법검……3. 난 눈을 떴다. 샌슨이 품 속을 정신없이 뒤지는 것이 보였다. 나도, 카 알도, 운차이도, 그리고 이루릴도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는 샌슨을 보 며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샌슨은 온몸을 비비꼬며 뒤틀었다. 그건 결국 품속을 뒤적거리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어떻게 바짓속에 돈주머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거지? 샌슨은 정말 바짓 속까지 다 뒤지다가 갑자기 외쳤다. "그 여자!" 알겠다, 알겠어! 이해했다. 카알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네리아양에게 소매치기 당했나?" "으아악! 그게! 그게 나랑 같이 말을 탄 이유가! 그냥 강도인 줄 알았 더니!" 그러자 우리와 더불어 샌슨의 춤을 감상하던 여관 주인 레네즈가 딱하 다는듯이 혀를 찼다. "소매치기를 당했구랴? 이런, 쯧쯧쯧. 조심하지 않고. 네리아라고 했 소? 혹시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어? 그 여자를 아세요?" 레네즈는 다시 테이블을 닦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 여자가 돌아왔군. 유명했지. 그런데 당신들 꽤나 실력이 있는 모양 이지? 그 여자가 아양을 부리며 소매치기를 하는 일은 적은데. 혹시 당 신들에게 계속 말을 걸진 않았어요?" 운차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내 얼굴도 저럴 것이다. "맙소사, 그럼 그 말싸움이…" 이루릴이 요금을 치뤄주었다. 샌슨은 그야말로 쥐구멍을 찾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이루릴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일행인 걸요. 당연하죠. 그렇잖아도 이번엔 제가 지불하려고 했 어요." 그리고 이루릴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우리들도 너무나 피곤해서 방에 안내되자마자 침대에 바로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우리들 남자 네 명이 있는 방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다. "으악! 그게, 그게 실력으로 안되니까!" 우하, 허, 정말 놀랐다. 누워있던 샌슨이 갑자기 벌쩍 일어나서 절규한 것이다. "으흐흐허흠! 흠, 흠!" 벌떡 일어났던 샌슨은 카알의 좀 높은 헛기침소리에 쑥스러운듯이 다시 드러누웠다. 카알이 언짢은듯이 기침소리를 좀 더 내고는 주위가 고요해 졌다. 그리고 잠시도 지나지 않아, "크아악! 그 괘씸한 것이!" "그만해!" 나는 베개를 집어던졌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졌던 참이라 내 손엔 OPG가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베개도 대단한 속도로 날아가 샌 슨은 거의 턱이 돌 뻔 했다. 내심 기절하기를 바랬는데 워낙 단련이 잘 된 샌슨이라 별 탈이 없었다. 샌슨은 투덜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간신히 잠이 들려 했을 때다. "끄으응… 끙. 우우우… 으윽! 아드득." 샌슨은 이제 침대에 머리를 박고 신음 소리에 이 가는 소리 등을 마구 섞어서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머리카락을 쭈뼛서게 만들었다. 그러자 운차이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Kuuaaak! En Nhash harphe nyan un craemadol!" 우리는 그의 양팔목을 침대 기둥에 묶어놨기 때문에 운차이는 샌슨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아마 팔이 묶이지 않았다면 달아나기보다 먼저 샌슨 의 목을 졸라 죽일 태도였다. 나는 힘없이 엎드린채 카알에게 물었다. "카알, 저게 무슨 소리죠?" "벌써부터 고문하는 것이냐…라는 뜻이네. 정말 고문이군." 오후 좀 늦게 우리는 부스스한 얼굴로 내려왔다. 점심은 먹어야 하니 까. 샌슨은 운차이의 발목과 자신의 발목에 밧줄을 연결해서 내려왔다. 우리는 모두 샌슨 때문에 잠을 설쳐서 비몽사몽간이었다. 샌슨과 운차 이는 발목이 서로 묶여서 계단에서 구를 뻔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내려오니 홀에는 이루릴만이 앉아 있었다. "늦으셨네요. 다른 손님들은 벌써 식사를 마쳤어요." 이루릴은 언제나처럼 깔끔하고 침착한 태도였다. 그녀는 자켓은 입지 않고 블라우스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마치 자 기 집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가을의 낮은 햇살 이 창으로부터 비쳐 들어 이루릴의 옆얼굴에 부딪히는 모습도 평화로웠 다. "이루릴? 잠은 좀 잤어요?" "네? 물론이죠. 그러고보니… 여러분들은 잘 못잔 것 같네요?" 우리는 모두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샌슨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샌슨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 레네즈는 다른 사람 먹을 때 같이 먹으라며 투덜거렸지만 우리가 밤새도록 달려왔다는 점을 감안하여 조금만 투덜거렸다. 샌슨은 마치 빵이 그 네리아인 것처럼 씹었다. 꼭꼭 씹는 것은 소화에 도 도움이 될테니까 상관없지만, 빵을 먹으면서도 계속 으르릉거리니 빵 조각이 사방으로 날린다. 운차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빵 자르는 나이프를 들었지만 샌슨도 운차이를 감시하기 위해 롱소드를 들고나와서 덤벼들지 는 못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너, 얌전히 먹지 않으면…" "알았어, 알았다고! 제기랄, 분통 터져서 미치겠네." 이루릴은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며 생긋 웃더니 다시 무슨 책을 들여다보 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우리들 중 여행 배낭에 책이 들어있는 사람이 꽤 많군. 아니, 운차이와 나 외엔 전부 책을 가졌네? 카알은 순수과학서 적과 여러가지 잡다한 책을 가졌고 이루릴도 마법책으로 짐작되는 몇 개 의 책을 가졌다. 하다못해 샌슨도 지리서를 가졌다. 나도 책이나 좀 구 해서 읽을까? 여긴 수도 근처니까 책 구하기도 좋을텐데. 아! 돈이 없었군. 망할. 그 때 스프를 다 먹고는 스프 접시를 숟가락으 로 긁적긁적 하고 있던 샌슨이 느닷없이 외쳤다. "잡아야해!" 그리고 샌슨은 벌떡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으악!" "어억!" 샌슨과 운차이는 발이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운차이는 의자채 뒤로 넘어졌고 샌슨은 앞으로 넘어졌다. 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얼굴을 가렸다. 정말 창피스럽군. 카알은 운차이가 일어나도록 부축했고 샌슨은 코가 깨졌다는듯이 얼굴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이봐요! 주인장 아주머니!" 레네즈도 허리를 꺽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걸어왔 다. "그래, 프흡, 왜 불렀소?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묶고 있는데?" "그건 아실 필요 없고, 그 네리아라는 여자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 요?" "글쎄… 어떻게 할까? 난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서 모르겠네. 여러분 이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아요? 모험가처럼 보이는데." "흠. 그 여자 집이 여깁니까?" 레네즈는 그 황당한 질문에 머리를 휘저었다. 그녀는 우리가 앉아 있 던 테이블 옆에 앉으며 말했다. "집? 천만에. 그 여자 떠돌이요. 여기저기 떠돌다가 오늘은 이 마을에 들린 모양이군. 모르지. 어쩌면 벌써 떠났을지도." "아주머닌 그 여자를 어떻게 아십니까?" "당신들처럼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오. 보통은 그 여자 에게 통행료랍시고 돈을 뺏기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진짜 실력 있는 사 람들에게는 애교로 접근하지. 그 여자, 자기가 여자라는 점을 잘 이용해 요. 턱없는 아양도 부리고 콧대높은 철부지 아가씨 흉내도 잘내지." 운차이는 신음소리를 뱉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여자, 계속 그런 헛소리를 했군." 샌슨은 씩씩거렸다. "좋아. 그럼 어떻게 그 여자 자취를 추적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람 없 겠습니까?" 레네즈는 빙긋 웃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도둑 길드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우리는 모두 긴장해서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카알이 말했다. "그건… 도둑들의 조직 아닙니까. 정보를 교환하고, 배신자를 처벌하고 등등." "그렇지. 그런데 그런 길드에서는 그것 말고도 하는 일이 많다더군요. 허가없이 그 지역에서 그런 영업을 하는 자를 암살하거나, 도둑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도 한다우." 레네즈는 방글거리며 말했지만 내용이 좀 끔찍스럽다. 우리는 모두 불 편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레네즈는 말했다. "단념하는게 좋을 겁니다. 그냥 잊어요. 괜히 그 여자의 성질을 긁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 여자를 어떻게 잡는다손 치더라도, 다른 패거리들 이 밤에 잠자고 있을 때 찾아오면 어쩌시겠어요들? 댁들이 왠만큼 손에 굳은살이 박혔다 하더라도,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도둑의 방식으로 싸우게 된다면 어쩌시겠소? 꼼짝없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우." 흐음. 좀 소름끼치는 말이군. 자고 있을 때라… 샌슨도 그 말에는 찔끔 한 모양이다. 카알은 팔짱을 끼고는 곰곰히 생각에잠겼다. 아아, 제미니. 네가 그립구나. 속마음과 겉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타 이번의 말을 이제야 알겠다. 제미니는 속셈 같은 것은 없는 아이. 어두 운 계획은 없는 그랑엘베르의 순결한 소녀. 화나면 토라지고, 기쁘면 헤 헤 웃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덕목이었구나. 그렇다 면 여인의 최대의 무기는, 기쁨과 슬픔에 아무런 관계없이 눈물짓거나 미소지을 수 있다는 점이겠지. 제미니. 난 정말 무서운 여자를 만났었어. 난 멋도 모르고 그 여자와 운차이의 말싸움 - 어둡고 무서운 계획을 감추기 위한- 사이에서 꼬박 꼬박 말을 전했지. 네가 전폭적으로 대책없이 무조건 보고 싶구나! 너의 허리를 다시 붙잡고, 너의 가슴에서 콩닥거리는 고동 소리, 그리고 너의 입술… …중증이다. 난 아무래도 갈데까지 갔나보다. 어쨌든 돈이 없어지니 당장 골치가 아팠다. 식료품을 구입할 돈이 없 으니. 이루릴은 친절하게 자신이 다 사겠다고 말했고 샌슨은 눈물을 좍 좍 흘릴듯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멍청해서…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피곤하셨잖아요. 그리고 노리고 덤벼오는데 어떻게 막겠어요" 이루릴의 위로에도 샌슨은 거의 제정신을 못차릴 만큼 괴로워하고 있었 다. 어쨌든 우린 운차이를 데리고 쇼핑에 나섰다. 누구 한 사람에게 운 차이를 맡겨둘 수가 없으니 항상 다섯 명이 한꺼번에 움직인다. 우리는 먼저 대장간으로 가기로 했다. 운차이의 발목에 채울 족쇄를 구하기 위해서다. 뭐, 우리가 일일이 신 경쓸 수가 없으니 급할 땐 바로 채울 수 있는 족쇄가 필요했다. 수갑도 좋고. 그런데 이루릴이 거기서 반대하고 나섰다. "유피넬이 두 다리를 준 것은, 그것을 묶으라는 의미가 아니었어요." 허, 이것 참. 그렇다고 풀어두면 달아날 것이 뻔한 사람을 계속해서 밧 줄 등으로 묶어둘 수야 없지 않은가. 샌슨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것을 설 명하려 했으나 이루릴은 전혀 뜻을 굽힐 기색이 아니었다. "전 인간들끼리 나라를 나누는 것도 잘 이해하진 못하지만, 다른 나라 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지나 가족에게는 하지 않을 모진 짓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아요." "하지만 이루릴… 놔두면 달아날 겁니다." 이루릴은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운차이. 달아날 건가요?"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내게 물었다. "후치. 운차이에게 달아날 건지 물어봐주세요." 나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야 물어볼 필요도 없죠. 우리도 귀찮아요. 그냥 이 도시 경비대에 맡기면 편하죠. 하지만 간첩은 전범… 맞나? 어, 전범이라서 경비대에 맡길 수가 없어요." "그럼, 수도까지 데려갈 건가요? 그러면 그냥 동료로서 데려가지요." "달아난다니까요!" "물어보지도 않고… 아, 후치는 현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물어봐주세 요." 난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이봐요, 운차이. 라는데요?" "뻔하잖아. 기회만 오면 달아날 거야."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거봐요." "그럼 보내주면…" "그게 안된다고요! 이 사람은 간첩이고, 따라서 우리 국왕의 적이라고 요. 그리고 우린 국민으로서 국왕의 적을 놔줄 수 없어요! 그건 우리 국 왕에 대한 배신행위라고요." 꼭 이런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해야 되나? 나도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이런 이야기를? 그러나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치씨는 항상 설명을 잘하세요. 이제 이해했어요." 다행이다. 이루릴이 이해했다니. 하지만 그래도 이루릴은 족쇄에는 반 대였다. "그래도 반대예요. 제가 잘 감시할께요." 감시한다고? 음. 감시라. 이루릴은 암흑 속에서도 볼 수 있고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감시자라면 최고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 울까? 카알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너무 힘드실 겁니다." "조금 집중하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결국 포기. 우리는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라무스 시의 사람들은 숲의 종족이 대로를 걸어가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 모습을 보며 수근거렸다. '야! 저게 엘프인가 봐. 정말 미인인데? 뭐야? 뒤의 녀석들은? 그렇고 그렇게 생겼는데?' …그렇고 그렇게 생겨서 미안하군. 그러나 이루릴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말했고 그러자 사람들은 완전히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저 뒤의 사람들 보기완 달리 대단한가봐? 모험가들인가? 혹시 정체를 숨긴 귀족이나, 뭐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에구. 인간이란. 우리는 되도록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주의하며 잡화점을 찾았다. 밀가루와 건육, 베이컨, 기타 조미료 계통을 사고 램프에 들어갈 기름 도 산다. 기름은 모닥불에 불 붙일 때도 좋다. 나와 샌슨이 기름을 채우 는 동안 이루릴은 자신의 비어버린 약병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힐링 포션(Healing potion)을 구하려고 하는데요. 신전이 있나요?" 잡화점의 대머리 주인은 이루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말했다. "예! 여기서 잠깐만 가시면 됩니다. 아니, 제가 안내해 드리죠." 곧 그 옆에서 앙칼진 고함소리. "여보!" 음… 웃기는군. 잡화점 사모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와서 엄청난 시선으로 대머리 주인을 노려보았다. 결국 대머리 주인은 친절하게 지 리를 가르쳐 주는 정도로 끝내었다. 그 때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카알 이 말했다. "이건 뭐죠?" 카알이 가리킨 것은 희안하게 생긴 브레이슬릿(Bracelet) 한 쌍이었다. 금속으로 되어 있는데 빛깔이 곱고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여자아 이나 찰듯한, 그저 팔에 감는 장신구다. 잡화점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거 리며 말했다. "팔찌죠, 뭐. 예쁘지요?" 카알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얼마죠?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하는데." "1셀만 내세요." 이루릴은 그 팔찌의 대금도 지불했다. 잡화점 바깥으로 나와서 나는 카 알에게 물었다. "그 브레이슬릿은 왜 샀지요?" "말했잖은가. 선물하겠다고." "선물? 누구에게?" "네리아양에게." "예?" ================================================================== 4. 황소와 마법검……4. 카알은 미소를 짓더니 작전을 설명했다. 우리는 그 작전을 한참 동안 들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더 들어야 했다. 카알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말 했다. "잘 될까요?"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일세. 세레니얼양, 제가 말씀드리는 것들 다 준 비되겠습니까?" "되기는 되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문제는 없어. 어떤가, 친구들?" 샌슨은 무조건 찬성이었다. "절대로 찬성입니다. 그 여자를 엎어놓고 볼기짝을 두드릴 수만 있다면 뭐든하겠어요!" "그럼 네드발군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소매치기 당했다는 것은 기분 나쁘다. 게다가 돈이 없으면 앞으로 얼마나 고생을 해야 될까. 카알은 운차이에 게도 질문했다. "운차이군은? 도와주겠소?" "웃기지 마십시오." "그럴 줄 알았소. 그럼 할 수 없지. 일단 주위를 정찰하고 여관으로 돌 아가세." 우리는 마을 주변을 정찰했다. 이루릴은 신전에 들러서 힐링 포션을 구입했다. 이 이라무스 시에는 에 델브로이의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에델린의 소개장을 보여주고 는 꽤 싼 값에 힐링포션을 구입할 수 있었다. 꽤 싼 값이라지만 그래도 50셀이나 나갔다. 하지만 원래 가격은 100셀이라고 했다. 엄청난데? 나는 신전의 수련사들이 내어주는 힐링 포션을 보며 이루릴에게 물었 다. "이거, 먹으면 만병통치인가요?" "병에는 잘 듣지 않아요. 이건, 치료보다는 회복에 가깝죠. 자연치유되 는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거지요." 흠. 그런가? 이루릴은 그것을 세 병 구입했다. 신전에서는 갑자기 거금 을 손에 쥐게 되어 퍽 기뻐했다. 150셀이라면 대단한 돈이 아닌가. 수련 사들은 감사하며 말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이루릴은 역시 우아하게 댓구했다.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여관으로 돌아온 다음 준비를 갖췄다. 이루릴은 꽤 여러가지 준비를 해 야 되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식사를 든든히 했다. 그리고 우선 운차 이를 단단히 묶기로 했다. 우리 인원이 전부 출동해야 되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감시하게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샌드맨을 불러 운차이를 재워버렸다. 운차이는 좀 반항하는듯 하더니 곧 곯아떨어져 버렸다. "이러면 안 일어납니까?" "슬립(Sleep) 주문보다야 훨씬 안전하죠. 8 시간은 꼼짝없이 잠들 겁니 다." 그리고 다음은 내 차례. 샌슨은 홀의 벽난로에서 가져온 재와 침대 아래의 먼지를 뒤섞어 내 얼 굴에 발랐다. 골고루 펴발라서 얼굴의 색깔이 몹시 거무죽죽하게 만들 고 피부도 거칠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동안 난 숨쉴 새 없이 기침이 나와서 퍽 고생했다. 어쨌든 카알이나 샌슨은 내가 아무리 봐도 17 세로 는 보이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까지 얼굴에 재를 발라주었다. 나는 이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나왔다. 계획대로 각자 따로 여관을 나갔다. 먼저 이루릴이 나가고, 그 다음 카 알, 그 다음은 샌슨, 그리고 내 차례다. 매일 함께 다니다가 혼자 떨어 져서 행동하려니 좀 겁나는군. 나는 이라무스 시의 대로를 걸어갔다. 등에는 바스타드를 매고 팔에는 오늘 낮에 카알이 산 브레이슬릿을 차 고 있다. 난 되도록 평온해보이는 동작으로 바지에 손을 꽂고는 휘파람 을 불면서 이라무스 시를 걸어갔다. 바지 속에 집어넣은 손에는 동전들 이 만져졌다. 이루릴에게 미리 받아둔 돈들이다. 미드 그레이드의 중심부이고 수도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꽤 커다란 건물들이 보였다. 건물들마다 불꽃이 환한 것이 모두 양초나 램프 정도 는 기본으로 갖춘 도시이다. 레너스 시도 비교가 안되겠는데? 그리고 지나다니는 아가씨들도 모두 어여쁜 것 같았다. 뭐… 양갓집 규수라면 해가 지고 돌아다니는 일은 드물 것이다. 모두 커다란 저택의 하녀들이거나 여염집 처자들이겠지. 그래도 내가 보기엔 퍽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나 난 이제 여자를 별로 믿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자라면! 이루 릴이 여자다. 그리고 나의 레이디 제미니 스마인타그… 아악! 나는 머리를 좀 휘젓고는 다시 느긋하게 걸어갔다. 이라무스 시를 거의 횡단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트라모니카의 바람'이 라는 주점 겸 여관이다. 오늘 낮에 이미 답사를 해 뒀던 곳이다. 위치 상으로 손님들이 제일 많이 몰릴 만한 주점으로 정했었다. 나는 주점의 문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내가 처음 보는 문으로, 스윙 도어라 불리는 문이다. 그냥 기분상 문처럼 만들어둔 것이다. 가슴 높이 에 작은 널빤지 두 개를 매달아 둔 것이다. 난 그 스윙 도어를 가슴으로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넓은 홀이었다. 벌써 요란한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잔 부딪 히는 소리, 호탕한 고함소리, 그리고 노랫소리들이 요란했다. 난 주점을 대충 훑어 보았다. 역시 카알과 샌슨이 먼저 와서 제각기 앉아 있었다. 이루릴도 어딘가에 숨어었을 것이다. 이루릴은 체인지 셀프(Change self) 주문을 사용하여 모습을 인간으로 바꾸고 있겠다고 했다. 그 주문 은 몸의 모습을 비슷한 체형의 다른 모습으로 바꿔준다고 한다. 엘프가 사람으로 변장하는 것은 쉽겠지. 어쨌든, 난 그녀를 알아볼 수 없다. 난 주위에 별로 시선을 보내지 않고는 빈 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샌슨 에게 좀 가까운 자리가 비어있었다. 난 거기에 앉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달려와서 테이블을 닦았다. 난 동전 하나를 튕겨주며 말했다. "맥주." 내 나이와 비슷할 듯한 소녀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곧 달려갔다. 곧 맥 주가 날라져 왔다. 난 가만히 한 모금 맛을 보았다. 제길. 레너스 시의 여관 주인 쉐린이 만드는 맥주는 정말 끝내줬는데. 수도 가까운 도시의 맥주는 오히려 맛이 떨어지는군. 그리고 잔을 비워놓고는 잠시 기다렸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은 여전했다.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 만 난 혼자니까 별 상관 없다. 그 때 그 여급 소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 다. 내 옆을 지나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럼 시작해볼까? 난 눈을 질끈 감을까 했지만, 관두었다. 난 슬쩍 손 을 옆으로 뻗었다. 제미니, 용서해줘. 난 옆을 지나치는 소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꺄악!" 소녀의 앙칼진 고함소리에 주점이 고요해져버렸다. 사람들은 놀라서 나와 그 소녀를 쳐다보았다. 난 능글스럽게 웃었다. "아이쿠! 여러 아가씨를 연주해봤지만 이렇게 음이 독특한 아가씨는 처음 보겠네?" 샌슨은 바로 이렇게 능글스럽게 말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떠맡 게 되었지. 으윽, 젠장. 당장 와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샌슨이 일어났다. "이 놈! 무례하게!" 그리고 샌슨은 저렇게 말할 때 가장 어울리기 때문에 저 역을 맡게 되 었다. 기분 나쁘지만, 난 인정할 것은 깨끗이 인정한다. 난 능글거리며 말했다. "어어랏? 뭐야, 넌. 이 아가씨 기둥서방 쯤 되시나?" "뭐야? 이 놈이 도대체 눈에 뵈는게 없나?" 그렇게 말하며 샌슨은 탁자를 꽝 내리쳤다. 나는 유유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할 거야?" "오냐, 좋다! 너 오늘 임자 만났어!" 곧 사색이 된 주점 주인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실내에서 싸우면 안돼요!" 샌슨은 그 말을 무시하면서 내게 주먹을 날려왔다. 난 가볍게 피하면 서 샌슨의 복부를 올려쳤다. 물론 힘을 빼서. 하지만 샌슨은 허리가 덜 컹 하는 시늉을 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샌슨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꺄악!" "어, 어억!" 어쩔 줄 모르고 우리들을 보던 그 소녀가 먼저 달아나자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좌우로 물밀듯이 물러났다. 검, 검이다! 시시한 주정뱅이들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난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이봐, 이봐. 도시 내에서 그런 걸 쓰면 어떻게 해?" "시끄러! 네 녀석 가만 두지 않겠어! 검을 뽑아!" 난 손가락을 우드득거리며 좀 꺽은 다음 말했다. "난 쇠창살 여관에는 관심 없어. 미친 돼지새끼를 다루는데는 좀 더 좋 은 방법이 있지." "뭐야, 이 자식아!" 샌슨은 아주 리얼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마 연극이라도 이런 말을 들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겠지. 자, 이제 이루릴 차례인데… 이루 릴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난 이루릴을 믿기로 하면서 두 팔을 앞 으로 내밀었다. "이거 보이나? 내 팔찌." "뭐야? 그걸 줄 테니 살려달라는 거야?" "이런, 돌대가리. 물건 볼 줄도 모르는군." 난 그렇게 말해주곤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제미니는 귀여운 나의 천사. 키스를 하면 울어버리는 나의 악마." 어, 물론, 절대로! 이 말이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한 것은 아니다! 난 그저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하압!" 번쩍! 순간 굉장한 빛이 주점을 가득 채웠다. 이루릴이 어디선가 정확 하게 시간 맞춰서 마법을 써준 것이다. 주위 사람들도 놀랐겠지만 나도 꽤 놀랐다. "으으윽!" 사람들은 모두 허둥거리며 눈을 가렸지만 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 고 빛이 사라지고나자 내 팔에 있던 브레이슬릿이 불꽃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숨막히는 탄성이 들려왔다. "뭐, 뭐야, 저건!" 내 팔에서 손까지 몽땅 불로 휘감겨 있었다. 난 손이 타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뜨겁지는 않았다. 샌슨은 사색이 되어 뒤로 허둥지둥 물러났다. 난 오른손을 들어올려보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해볼까? 난 주먹으로 싸우겠어. 그럼 난 잘못한게 없지?" 샌슨은 롱소드를 든 손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몰랐어, 정말 몰랐 어! 샌슨이 저렇게 연기를 잘 할 줄이야. 샌슨은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 했다. "그, 그건 뭐야?" 난 씨익 웃으며 내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청동으로 된 보통 술 잔이었다. 난 그것을 들어올려 샌슨에게 똑바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것을 양손으로 잡은 다음, 쫙 찢어버렸다. 사람들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난 그것을 종이조각처럼 뭉쳐버린 다 음 손에 놓고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내 앞의 테이블에 던졌다. 쾅! 테이블은 산산조각이 났다. "정말 해볼까?" "비, 빌어먹을!" 샌슨은 외치며 달려들 태세였다. 그 때 카알이 일어서더니 샌슨을 붙잡 았다. "여보게, 젊은이! 관두게. 죽고 싶은 건가! 저건 화이어 자이언트의 팔 찌(Bracelet of Fire giants)야!" 샌슨은 당혹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놀란 눈으로 카 알을 바라보았다. "어랏? 당신, 이걸 아나?" 카알은 샌슨의 팔을 잡아당기며 내게 말했다. "젊은이, 어, 어떻게 그 귀한 것을 손에 넣었나?" 그야 잡화점에서 샀지.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카알을바라보았다. 카알 은 말했다. "그, 그건 돈으로 따진다면 수천 셀을 호가할 물건인데, 자, 자네 그것 을 어디서 산 건가?" 사람들의 눈이 당혹과 탐욕으로 빛났다. 난 유들거리며 말했다. "이게 그렇게 비싼가? 고맙군. 알려줘서. 내가 모험에서 건진 물건인 데, 감정해볼까 하다가 그냥 가지고 다녔거든." "그건 화이어 자이언트의 팔찌가 틀림없어! 모든 불을 막아내고, 거인 의 힘을 내는, 대마법사 헨드레이크도 가지기를 열망했던 물건! 도대체 그것을 어디서 구했나?" 끝내준다. 정말 말 잘 만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웃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마법사가 뭣때문에 거인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칼 들 고 싸울 일도 없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라는 말에 그 말을 믿어버 리는 눈치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알려줄 수는 없어. 조만간 다시 가 볼 계획이라서." 그리고 난 샌슨을 한 번 흘겨보면서 말했다. "상대를 알아보고 덤벼라, 알았나? 내 상대가 되기엔 까마득한 놈이니 살려둔다." 샌슨은 아마도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내게 덤벼듦으로서 산통 다 깨지는 않았다. 난 샌슨을 차갑게 노려보고는 주 점 주인에게 말했다. "방 하나. 술맛 다 떨어졌군. 방으로 가져와. 제일 독한 걸로." "이, 이쪽으로…" 난 내가 치근거렸던 소녀를 가리켰다. "술시중은 저 아이더러 들라고 해." 아… 내가 이런 말을 해야 되다니! 여관 주인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저, 저, 손님, 그것은…" 난 눈살을 찌푸리며 10셀짜리 은화 하나를 던져주었다. 주인은 은화를 보더니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더러운 놈! 난 속으로 그 주점 주인에게 욕설을 퍼붇고는 그 소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 소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난 그 소녀에게 날카로운 미소를 지어주고는 주인을 따라 올라갔다. 내가 안내된 방은 3층으로 다행히 창문이 있었다. 난 들어가자마자 창 문을 활짝 열고는 바람을 쐬는 시늉을 했다. 아마 밖에서 대기하고 있 을 카알과 샌슨은 내 방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창턱에 팔을 괸채 잠시 기다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아까 그 소녀가 술병과 잔, 그리고 안주로 보이는 몇 가 지를 소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난 글러버렸다 는 느낌이 들었다. 파랗게 질려서 이빨을 사려물은 모습이다. 하도 떠느라고 소반에 있는 것들을 다 떨어트릴 듯했다. 연극이라면 최상급이겠지. "어, 어디에 놓을까요…" 목소리도 완전히 모기 소리다. 젠장. 난 턱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는 테이블에 소반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주춤거렸다. 그녀는 치맛자 락 속에 손을 모으고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치마라… 어쩌면 위험하겠군. 난 주의깊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난 왼손 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엄청나게 떨고 있었다. 난 혹시나 해서 그녀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역시다. 치맛자락에 나이프 같은 것을 숨겨 둔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쥐어져 있지 않다. 그녀는 그저 두 손을 내 게 붙잡힌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이리와." 난 침대로 끌고 갔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날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다. "아, 안돼요. 수, 술시중만 들라는 거…" 난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 집어던졌다. 내가 집어던지자 물론 그녀는 가볍게 날아가 침대에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려 할 때 난 재빨리 그녀를 덥치면서 입을 가로막았다. 난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 4. 황소와 마법검……5. "마스터를 만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되지?" 그녀는 거세게 몸부림을 칠 뿐이었다. 제발 그렇게 꿈틀거리지마! 가슴 뜨거워져 미치겠다고! 난 침착하려 애쓰면서 한 번 더 말했다. 그녀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떠들지 않겠다면 손을 치워주겠어. 낮게 말해." 난 손을 치워주고 다시 물었다. "마스터를 만나고 싶은데. 어쩌면 좋지?" "마, 마스터는 아래층에 계시는데…" "장난치지마! 길드 마스터를 만나고 싶단 말이야!" "예에…?" "아까 들었겠지만 난 조만간 다시 모험을 떠날 생각이야. 도둑 하나가 필요해." "저, 저, 무슨 말이신지…?" 확실하군. 얘는 아냐. 젠장. 난 찍어도 꼭 요 모양이다. 대개의 술집, 여관, 역참 등에는 틀림없이 그 주인에서부터 마굿간 하 인에 이르기까지 도둑에게서 돈을 받는 녀석이 있다. 그 놈들은 돈을 받 는 대신 여행자나 짐마차 등의 정보를 넘겨준다. 난 얘가 그런 아이기를 바랬지만, 들어오면서 하는 행동으로 보나 지금 나눠본 말로 보나 확실 히 그런 계통은 아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카알의 계획은 복합적인 것이다. 제 2 단계 로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그 2 단계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나는 그녀 옆에 일어나 앉았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 소녀는 내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고는 일어나자 놀란 표정이었다. 난 시트를 들어올린 다음 그녀의 옆에 드러누웠다. "꺄아…" 난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으며 시트를 머리까지 덮어썼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 버둥거리고 있었고 시트를 차내렸다. 난 잇소리 를 내며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 "닥쳐! 떠들면 가만 안둬! 아까 술잔 기억나?" 그녀는 벌벌 떨면서도 내 경고에 숨을 죽였다. 난 시트를 뒤집어 쓴 다 음 말했다. "좋아. 얌전히 있어요." 자… 이거 머리가 뜨거워져 미치겠군. 난 되도록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 으려 했다. 뭐, 그녀도 그랬으니까 서로 떨어지는 것은 간단했다. "손을 치울 테니 낮게 말해요. 시트를 덮은 것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 게 하려고 한 거요. 알겠죠?" 어두웠지만 그녀의 떨림이 좀 줄어들었다. 뭐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뭐라고 말해야 되지? "이름이 뭐지요?" "메, 메리안…" "좋아요. 난 후치라고 합니다. 당신 하는 모습을 보니, 어, 그러니까 아직 …그런 경험 없지요?" 그녀는 당장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목메인 목소리로 메리안은 말 했다. "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전, 전 아직 남자랑… 그, 그러니까, 불쌍 히 여겨주셔…" "됐어요, 됐어! 그럴 생각 없어요!" "예?" "지금 이 일도 내 레이디에게 들키면 난 맞아죽을 거야. 하물며 내가 더 진도 나가봐요. 난 산채로 가죽을 벗기게 될걸? 난 살고 싶으니 그럴 생각 없어요. 알았어요?" 그럼! 제미니는 물론 그럴 거다. 메리안의 떨림이 멎었다. "프흡!" 얼씨구? 웃네? 나도 싱긋 웃어버렸다. 난 정중히 메리안의 몸에 손을 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했다. "부탁이니 겁먹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줘요. 난 아가씨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겠어요. 알았죠?" "예에…" "좋아요. 내 부탁은 이거요. 아가씨가 그저 나랑 같이 …하는 것처럼 행동해 달라는 겁니다." 메리안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하는 척만 한다고요?" "예. 내 뒤를 노릴 사람이 있어요. 난 그 자를 잡을 생각입니다. 그래 서, 에, 그러니까, 내가 독한 술을 마시고 아가씨랑… 으음. 그래서 피곤 해서 곯아떨어진 것처럼 위장할 생각입니다. 알았죠?" 그러니까 이것이 카알의 계획이다. 네리아의 소재를 물어보려면 결국 도둑 길드에 물어봐야 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서로 잘 알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도둑 길드에 접선하는 방 법을 모른다. 우리가 도둑 길드의 비밀의 손짓이나 신호, 암호문장을 알 까닭이 있나. 그래서 일부러 대단한 보물을 가진 풋내기 모험가가 들른 것처럼 위장 한다. 그리고, 음음, 기타 등등의 짓을 하고는 곯아떨어진 척 한다. 그 러면 도둑길드에서 좋아라 달려들 것이다. 그 때 그 자를 붙잡아 네리아 의 자취를 추적한다. 메리안은 황당했는지 부끄러웠는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 었다. "알았어요?" "에에…" "부탁 들어줄 수 있겠어요?" "…너무 하시네요.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난 정말로 끝장이 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그런 위장을 하려고 강제로 날… 하지 않을 건가요?" 메리안은 이제 긴장을 풀었는지 좀 앙탈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휴. 어쨌든 골치아픈 일은 이제 지나갔군. 메리안은 질문해왔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글쎄요. 일단 갑갑하니 시트를 좀 치웁시다. 하지만 말을 할 때 무조 건 목소리를 낮춰요." 난 시트를 치우고 앉았다. 메리안도 내 옆에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아 직 안심이 되지 않는듯이 벽쪽에 바싹 붙어앉았지만 난 신경을 쓰지 않 고 시간을 쟀다. 카알과 샌슨, 그리고 이루릴이 자리를 잡으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 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이 도시의 길드에 전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분명 그 난동을 부렸으니 어떤 모험가 한 놈이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지금쯤 모종의 행사를 치르고 곯아떨어 져 있을 것이다, 따위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화이어 자이언트의 팔 찌? 참 대단하시네, 카알은. 난 침대에서 일어섰다. "술 좋아합니까?" "예?" "이걸 비워야 되는데… 난 마시면 안되거든. 바닥에 뿌리면 치우기 힘 들테고." 난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을 보여주었다. 메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잘 못마셔요. 그리고… 취하고 싶지도 않아요." "예?" "취하면… 그러니까…" "할 수 없군. 아깝지만." 난 화장실에다가 그것을 비웠다. 다행히 이 여관에는 화장실이 방방마 다 설치되어 있었다. 관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소리가 너무 크지 않도 록 주의했다. 한 잔 분량을 남겼다. 그리고 안주를 주워 먹고는 테이블 위를 적당히 흐트러지게 해놓았다. 술잔에는 술을 부어 두고는 술병은 일부러 바닥에 구르도록 내버려두었 다. 메리안은 내 모습에 점점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녀는 불안을 떨치고 내가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술잔의 술을 적당히 머 릿카락에 뿌렸다. 그러자 메리안은 킥킥거리기까지 했다. "킥킥. 왜 술을 머리에 뿌리세요?" "술냄새가 나게 하려고요. 술병을 다 비운 사람이 술 냄새가 안나면 이 상하잖아요." 메리안은 감탄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메리안. 당신 방에 아무에게도 안들키고 갔다올 수 있습니까?" "예? 어… 그건 안되는데요. 다른 하녀와 같이 방을 쓰기 때문에." 그럼 이제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해야 되는군. "그럼, 미안하지만 옷을 좀 벗어줘야겠는데요." 메리안은 퍼렇게 질려버렸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침대 옆에 옷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어요. 우습잖아요. 옷을 얌전히 입고 누워있다니. 당신이 당신 방에 갈 수 있었다면 옷가지를 가져오라 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안되잖아요. 제발. 당신에겐 손끝 하나 대 지 않을께요. 원한다면, 맹세를 해도 좋고."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다. 난 아직 맹세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니까 내가 맹세한다면 그것은 무효다. 따라서 난 맹세에 아무런 구애됨이 없 이… 아냐! 하지만 메리안은 그 말을 믿는지 벌겋게 된 얼굴을 푹 숙이 고 말했다. "…보면 안돼요." 난 몸을 돌렸다. 뒤에서 메리안이 옷을 벗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 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사회적으로 매장을 세 번쯤 당하고 도 남음이 있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뒤돌아보고 싶지? "…됐어요." 난 몸을 돌리고는 기겁할 뻔 했다. 침대 옆에는 옷가지가 몽땅 다 나와 있었다. 저 아가씨! 적당히 겉옷만 벗을 일이지 속옷까지 다 벗어버렸잖아? 미치겠네. 정말 말 잘 듣네. 메 리안은 시트를 뒤집어쓰고는 머리만 내어놓고 있었다. 어찌나 떨고 있는 지 침대가 내려앉을 것 같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 다. 하드 리더와 셔츠, 바지만 벗어두어 적당히 흐트러지게 만들어 두었다. 롱부츠는 집어던져 버렸다. 메리안의 속옷을 잡을 땐 나도 모르게 부끄 러워 두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올려서 적당히 흩어 놓았다. 도둑이 노릴 물건, 그러니까 그 팔찌들은 테이블 위에 잘 보이도록 얹어두었다. 그리 고 창문을 걸어잠그고 촛불을 끈 다음, 조심스럽게 바스타드와 대거 하 나씩만 쥔채로 침대로 다가갔다. 옷은 벗었지만 OPG는 그냥 끼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들어갈께요." 메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난 되도록 조심스럽게 몸이 닿지 않도록 침대 속에 들어갔다. 나는 대거를 메리안에게 내밀었다. "자, 이걸 쥐고 있어요." "예?" "내가 돌아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 7 "…킥!" "농담이고. 혹시 위험할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요." "네에…" 괴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자면 안되기 때문에 실눈을 뜨고 바스 타드를 꽉 쥐고는 문과 창문을 살폈다. 손에서 땀이 나서 바스타드가 미 끌거렸다. 그런데 메리안은 잠도 들지 않고는 계속 커다란 숨소리를 내었다. 그 숨소리 정말 사람 돌게 만드네. 난 17세란 말이다! "좀 잘 수 없어요?" "미, 미안해요. 저, 흥분도 되고, 또 거, 겁이 나요. 다, 당신이 마음 만 먹으면…" "내가 덤비면 그걸로 찌르면 되잖아요?" 내 말에 메리안은 마치 토라진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잠이 들면 방어할 수 없잖아요?" 말 되는군. 음. 난 관두고 계속 자는 시늉을 하며 감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젠장. 도저히 더 못참겠다. 난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몸을 좀 일으켜 베개를 높게 하고는 침대머 리에 기대어 앉았다. 젠장, 도둑이라는 놈, 언제 올 줄 알아서 이렇게 자는 척하며 기다려? 난 일부러 자는 척 하는 것보다 그냥 기대 앉으니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 안은 괴괴한 푸른 달빛만이 가득했다. 밝은 곳은 청백색, 어두운 곳 은 암청색. 흩어진 옷가지들이 기괴한 그림자로 바닥을 수놓았다. 조금 추운 듯했지만, 포근한 달빛으로 기분은 좋았다. 난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시트를 뒤집어쓴채 뻣뻣하게 굳어있는 메리 안이 보였다. 미치겠군! 푸르스름한 달빛이 그녀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 내고 있었다. 나는 그만 아무 말이나 꺼내고 말았다. "메리안?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되었죠?" 메리안은 여전히 온몸을 뻣뻣하게 하고 있었지만 내 말을 듣자 몸의 긴 장을 좀 풀었다. 그녀는 내려 얼굴을 내밀었다. "여관 주인이 제 삼촌이세요." 윽!난 욕설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개새끼. 조카딸을 이렇게 보내?" 메리안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맙죠. 제 부모님은 모두 병으로 돌아가셨어 요. 제 언니는 미인이라서 영주님이 후견인이 되어 줄 수 있었죠." 후견인? 말이 좋다. 나는 그 이야기를 안다. 우리 영주님도 그렇게 하니까. 사망한 가신이 나 주민의 고아들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고아들은 영주가 후견인이 됨 으로써 가식적이긴 하지만 높은 신분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영주님과 다른 영주의 차이가 난다. 우리 영주님 은 후견인으로서 그런 고아들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한다. 남자아이라면 소질에 따라 훌륭한 장군의 부하로 보내어주거나, 이름있는 직공의 도제 로 넣어주거나, 좋은 직업을 알선해주거나 하고, 여자아이는 좋은 곳에 시집 보낸다. 영주님이 후견인이니까 가문 따지기 좋아하는 집안에서도 잘 받아들인다. 그리고 영주님은 꼬박꼬박 지참금도 후하게 챙겨주시고. 우리 영주님의 재산이 거덜나는 이유가 이토록 많다. 하지만 다른 영주들은 똑같이 하긴 하지만 그것은 재산의 매매이다. 즉 남자아이들은 하인으로 팔거나 군인으로 팔고, 여자아이는 미인일 경 우 다른 못된 귀족의 첩으로 파는 것이다. 후견인이 아니라 주인이다. 제길, 사망한 나이트의 과부들도 그렇게 모아들인다고 한다. 정말 말이 좋아서 후견인이다. 칵! 우리 영주님 본 좀 받으라고! 메리안은 계속 말했다. "…전 미운 아이였어요. 그래서 삼촌이 데려와서 절 양육했죠. 전 그거 나마 감사하게 생각해요." 난 목에 받히는 뜨거운 것을 삭이며 말했다. "당신은 밉지 않아요. 내가 혹시 돌아버릴까봐 대거까지 준 걸 보면 몰 라요?" 메리안은 킥킥거렸다. 그녀는 긴장을 많이 풀고 말했다. "그런데, 후치씨는 어쩌다가 쫓기게 되었어요?" 이 소녀는 수치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자극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난 간단히 대답했다. "뭐, 저 팔찌 때문이죠."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아, 그렇지. 아까 그것 정말 미안해요." "예? 아, 예. 괜찮아요. 하루에 몇 번도 더 당하는 일인데요. 그럴 때 마다 놀라긴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도 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메리안은 흠칫하더니 말했다. "다행히… 마음씨 고운 분을 만나서… 전 운이 좋은가 봐요." "헤? 마음씨 고운남자가 그렇게 발가벗겨요? 천만에. 나 좋으려고 하 는 일이죠, 뭐." "그래도 덮치진 않으셨잖아요. 그렇게 하면 더 확실한 연극이 될텐데, 절 생각해서 일부러 이렇게 더 위험할지도 모르게 하시는 거잖아요." 이건 아무래도 덮치지 말라고 의식적으로 하는 말 같은데. 난 피식 웃 었다. 내 마음 깊은 곳은 내가 잘 안다. 난 물론 덮치고 싶다. 어차피 이런 소녀의 운명이란 뻔하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면서, 내가 아니더라도 어 느 놈이 끝장내던 분명히 이 소녀를 끝장낼 놈이 있을테니 내가 한다 해 서 뭐 어떠랴하는 합리화도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난 아니다. 위선(僞善)? 글쎄. 난 위선이라는 개념이 항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위선의 반대말은 뭐냐? 위악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맹추고, 결국 욕망에 충실하라는 말 정도 되겠지. 그 욕망은 인정하면서, 왜 위선을 부리고 싶은 욕망은 인정하지 못하지? 칭찬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어서 착한 일을 한다면 질색할 것인가? 웃기는 소리. 그럼 칭찬이나 존경은 뭐란 말이냐? 그런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 양떼를 모는 개가 있다. 개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양을 보면 양지기는 저 놈은 성질이 사나운 놈이라고 말하며 싫어하고 잡아먹을 일이 있다면 그 놈부터 고를 것이다. 그리고 개의 인도를 잘 따르면 양지기는 순한 놈이라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놈은 사실 목장 바깥의 풀맛을 보지 못해 욕구불만일지도 모른다. 똑같지 않나? 한 인간이 오로지 칭찬을 받기 위 해 착하게 행동한다. 난 그게 개의 말을 잘 듣는 양과 다른 점을 모르겠 다. 내 마음 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메리안을 그냥 덮쳐버리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하지만 난 하지 않는다. 메리안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카알이나 샌슨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어때? 그게 위선이라면, 위선자로 남지 뭐. 그러나 이런 말을 메리안에게 똑바로 전달시킬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난 농담삼아 대답해주었다. "간단하죠. 난 내 레이디에게 가죽을 벗겨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메리안은 다시 킥킥거렸다. 아앗! 조심해! 웃느라고 시트가 내려간단 말이야! 정말 웃기 좋아하는 아가씨로다. 내가 다시 합리화를 시도하면 어쩌려고? 메리안은 그렇게 무방비하게 킥킥거리더니 말했다. "…당신은 나이트예요?" "예?" "레이디라고 하셨잖아요." "뭐, 이런 겁니다. 그 소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에게만 레이디이고, 난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소녀에게만 나이트입니다. 아시겠지요?" 메리안은 싱긋 웃었다. "이해했어요. 그 소녀가 부럽네요." 난 피식 웃으며 댓구하려 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4. 황소와 마법검……6. 난 기겁하면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메리안도 내가 갑자기 움직이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 소리는, 뭔가 긁히는듯한 소리였다. 꽤 멀리서, 정확하게는 건물 바 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아무래도 뭔가가 건물 벽을 타고 올라 오는 듯한 그런 소리다. 아주 미세했고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난 긴 장해서 시트 속에서 바스타드를 꽉 쥐었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메리안도 이번엔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메리안은 숨죽여서 말했다. "오, 오는 거예요?" "코를 골아요! 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드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리안이 내 어 깨를 잡았다. "너무 이상하게 들려요.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 좋겠어요." 그런가? 제법이네. 난 코고는 것을 중지하고 그냥 숨만 느릿하게 쉬었 다. 메리안도 눈을 꼭 감고는 느릿하게 숨을 쉬는 모습을 취했다. 딸각, 딸각. 창문이다! 벌써 창문까지 올라왔다. 뭔가가 밖에서 잠긴 창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무런 대비도 없었다면 절대로 들을 수 없을만큼 작은 소리다. 너무 긴장이 되어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 때 메리안이 뒤척이는 시늉을 하더니 팔을 내 가슴 위에 척 올렸다. "흐음… 음냐, 쩝." 메리안 만세! 최고다! 그러고보니 우리 둘은 둘다 차렷자세로 침대 위 에 누워 있었다. 누가 봐도 괴상하다고 생각했겠다. 메리안은 멋지게 잠 든 시늉을 하며 내 옆에 안겨들어왔다. 하지만 몸이 직접 부딪히고 나니 까, 메리안이 얼마나 떨고 있는지 잘 느껴졌다.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 었지만 그럴 수야 없다. 잠시 그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지리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딸가닥, 철컥. 끼이익. 아주 낮은 소리지만, 엄청나게 긴장한 내 귀에는 잘 들려왔다. 놈은 지 금 창문의 걸쇠를 어떻게 열고는 창문을 연 것이다. 볼까? 관둬. 위험하 다. 어쩌면 놈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발자국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구 흩어진 옷가지는 그 자의 발에 걸릴 것이다. 그건 위장뿐만이 아니라 그런 목적도 있거든? 역시 옷가지가 밀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사락, 사락. 그 자는 이윽고 테이블 위에 있는 내 팔찌를 들어올리는 모양이다. 그 건 안될걸? "콰쾅!" "으아아악!" 엄청난 굉음과 불꽃, 그리고 비명소리. 걸렸구나! 뭔지 모르지만 이루 릴의 준비에 걸렸어! "이야아압!" 나는 벌떡 일어서며 시트를 집어던지…려고 했으나 메리안이 목숨 걸고 시트를 붙잡느라 그러지는 못했다. "안돼요!" 그래서 나는 일단 몸으로 부딪혀갔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샌 슨과 카알도 램프를 들고 뛰어들어왔다. 그 도적은 그저 갑작스러운 굉 음과 불꽃에 놀란 모양이다. 나는 테이블 옆에서 멍하니 서있던 그 도 적에게 온몸으로 부딪혔다. 그러자 곧 그 자는 숨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부딪혔다. "꺄아악!" 여자잖아? 맙소사, 바로 걸렸다! 너 죽었다고 복창해라, 네리아였다! 벽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방 구석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은 네리아였 다. 등에는 그 트라이던트를 둘러매고 있었다. 저걸 둘러매고 도둑영업 을 하나? 어쨌든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는지 눈을 뒤집고 있었다. "우하! 한 방에 잡았어!"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카알과 샌슨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그 들이 흘깃흘깃 바라보는 곳은… 그들은 겸연쩍은 시선으로 시트로 몸을 가린 메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로 아니예요!" "물론이예요!" 두 번째는 메리안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이 양반들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하다. 나는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 이루릴은?" "여기 있어요." 난 그만 기절할 뻔했다. 이루릴이 우리가 있던 침대 밑에서 나온 것이 다! 그녀가 침대 밑에서 마법을 썼나보군. 이루릴은 말했다. "이 아랫방에 있었죠. 천장을 소리없이 뚫고 올라오기가 퍽 힘들더군 요." "됐어! 그럼 이루릴이 증언해줘요! 아무 일도 없었죠?" "아무 일? 뭘 말하죠?" "어, 그, 그러니까." "먼저 좀 나가주시죠. 이 소녀가 옷을 입어야 하니까." 으악! 나도 벗고 있었잖아? 나는 미친 듯이 옷을 챙겨들고 그 끔찍스러 운 방에서 뛰쳐나왔다. 물론 내 뒤를 따라서 카알과 샌슨도 꽤 허둥거리 며 네리아를 끌고 나왔다. "부럽다…" "주, 죽일 거야!" "정말 부럽다…" 샌슨은 멍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 돌 겠네! 난 이루릴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내었다. "이, 이루릴! 제발 증명해줘요. 나와 메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이루릴은 멍한 표정으로날 바라보았다. "아무 일? 뭘 말하는… 아! 알았어요." 우리는 일제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생식 행위 말이죠?" "푸흐업!" 카알은 마시고 있던 물컵의 물을 반쯤 밖에다 쏟아놓았다. 이루릴은 놀 라더니 말했다. "예. 놀라셨군요. 후치는 생식 행위를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제가 알기론 후치 정도의 나이의 인간 남자는 언제라도 생식 행위가 가능하다 고 들었는데… 그런 충동이 대단히 강하다고 들었는데… 샌슨의 말을 통 해 생각해봐도 그렇게 판단되는데요." 부러우니 어쩌니하던 샌슨의 얼굴이 당장 붉어졌다. 그리고 나는 비명 처럼 외쳤다. "언제나 가능하지만 아무와 하진 않아요!" "이상해요… 후치. 당신은 짝이 없잖아요. 메리안양은 아름다운 여성으 로 보이는데… 다른 여성상을 가지셨나요?" 관두자, 관둬! 젠장. 이런 식의 대화, 죽어도 더는 못하겠다. 엘프는 인간이 대단히 방종하다고 알고 있나? 하긴 엘프보다야 인간이 훨씬 종 족 번식이 빠르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렇고 그 런 놈이 아니란 말이다! 여관 주인을 불러다 우리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다. 그리고 나 개인으 로서도 몇 마디 전했다. 조카딸을 제공해줘서 우리 계획을 순조롭게 해 준 것은 고맙지만, 이왕이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만일 또 그 런 일을 저지르면 대륙 끝에서라도 찾아와서 박살내어주겠다는 뜻을 전 달했다. 아마 그 주인장은 꽤나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난 다시 청동 술 잔을 뭉개어 그걸 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면서 말했으니까. 물론 소란을 일으키고 한 점에 대해서 이루릴이 충분한 사례를 지불했다. 내 생각엔 그런 것 필요없을 것 같았지만. 우리가 나올 때 메리안은 발갛게 익은 얼굴로말했다. "저, 저, 후치. 17 세라고?" "응. 변장이 그럴듯하지?" "응. 난 16 살이야. 저, 그리고… 이라무스 플라이에 묶고 있다고?" "응." "저… 이 마을을 곧 떠날 거야?" "곧 떠날 거야. 도와준 것 정말 고맙게 생각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 줄께." "원하기는… 건드리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지." 듣고 있던 이루릴은 다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난 신경쓰지 않 았다. 아무래도 이루릴은 인간이 그런 방면으로 꽤나 난잡하다고 알고 있나 본데, 언제 기회봐서그렇지 않다고 좀 설명을 해줘야겠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겠지. 내 행동이면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그 때 메리안이 뒷통수를 두드리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고마운 것인지 모르겠어. 그런 상황까지 가서 날 건드리지 않았다는 거…" 난 한 대 맞은 듯한 멍한 표정으로 메리안을 바라보았고 메리안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뒤로 돌아서 달려가버렸다. 뒤에서는 샌슨이 휘 파람을 아주 몰상식하게 불어젖혔다. "휘익! 들리는 마을마다 애인을 만드시는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샌슨은 정말 기쁘다는듯이 고향에서 내가 항상 하던 짓, 즉 노래를 부 르기 시작했다. 꽤나 별러왔던 모양이다. "레너스의 유스네는? 그녀의 마음을 훔쳐 달아났지. 칼라일의 에델린 은? 오, 맙소사, 그녀의 가슴을 훔쳤지. 이라무스의 메리안은? 드디어 침대에까지 끌어들였네. 오! 위대한 모험가 후치. 어떠한 엄청난 모험에 서도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크아아악!" 나는 샌슨을 뒤쫓기 시작했고, 그래서 카알이 네리아를 업고 오게 되었 다. 우리는 그렇게 원래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라무스 플라이의 레네즈는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떻게 소매치 기 당하고 하룻만에 잡아오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당신들 정말 대단한 모험가들이구먼?" 우리는 간략히 설명하고는 곧 남자들이 묵는 커다란 방으로 네리아를 끌고 갔다. 방에서는 아직껏 운차이가 코를 골고 있었다. 운차이는 내버 려둔채, 우리는 네리아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를 의자에 묶는 귀찮은 작업이 있었다. 네리아는 앙칼지게 반항했지만 나와 샌슨이 악전 고투 끝에 그녀를 묶는데 성공했다. "뭘 바라는 거야!" 샌슨은 간단히 말했다. "간단하지. 훔쳐간 것 돌려줘. 그걸로 끝내자." 네리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신고하지 않는 거야? 날 어떻게 한다든가…" "어떻게 해? 너 생각이 참 불순하구나. 하긴 그러니 이기고도 물에 빠 트리지 않은 나에게서 돈주머니를 훔쳐갈 정도지." 네리아는 투덜거렸다. "쳇. 그렇게 말하니 쪼-금 찔리네." "다른 것 필요 없어. 도둑길드에 원한을 사는 것도 싫고. 우린 바쁜 몸 이라서 그건 안돼. 그러니 훔쳐간 돈만 내놔. 그러면 놔주겠어." "놔준다고?" 네리아는 다시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것이 카알의 계획의 마지막이다. 즉, 도둑길드에 원한을 사서 우리 행동에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은 삼가하자. 그러므로 네리아를 체포하게 되면 돈만 돌려받고 놔준다. 그것이 카알의 계획의 최종 마무리였다. 샌 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두번씩 말하게 할래? 돈을 돌려주면, 놔준다. 이 이상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어." 갑자기 네리아는 웃기 시작했다. "에헤헤헤… 미안해서 어쩌나? 난, 나이트호크라고. 그것, 이 도시에 들어와 영업하는 대신 길드 요금으로 벌써 바쳤는데." 샌슨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그 많은 걸?" "어, 조금 남긴 했지만, 그것도 정보료로 다 지불했어. 왠 모험가가 엄 청난 팔찌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 말이야. 뭔 말인지 알겠지?" 샌슨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으으으으음…" 아이고, 돌겠다. 그럼 뭐야? 우리 멋진 계획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 이런 괘씸한 우연이 있나. 카알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럼 몸으로 갚아!" 샌슨의 말에 우리 모두는 이제 샌슨을 바라보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네리아도 눈을 사납게 뜨면서 말했다. "무슨 뜻이지, 너?" "너 현상금이 있을 거 아냐!" 아, 그런 뜻인가? 난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리아도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거… 내 현상금? 그건 없는데." "뭐야?" 네리아는 샐쭉샐쭉 웃었다. "난 대개 정정당당하게 통행료를 받거든. 그리고 여자 한 명에게 박살 난 모험가들은 부끄러워서 별로 신고를 안하고. 10셀이나 20셀은, 뭐 잃 으면 아쉽지만 그렇다고 찾으려고 날뛰기엔 그런 돈이잖아? 적어도 여행 자들에게는 말이야. 난 그렇게 잃어도 가슴 아파할 일이 적은 사람만 골 라서 덥치거든." "넌 우리 돈을 몽땅 훔쳐갔잖아?" "어? 이상하네. 난저 엘프 아가씨 돈은 안 건드렸어!" 하긴 그렇긴 그렇군. 그러니까 네리아는 다른 사람 것은 놔두고 샌슨의 주머니만 건드렸다, 이런 말이렸다? 너무 큰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아서? 젠장. 착하다고 해야 하나? 네리아는 계속 설명했다. "이야기가 도는데, 어쨌든 난 귀족이나, 어쨌든 후환이 골치 아플 자들 은 안 건드려. 그러니 현상금은 거의 없어. 몇몇 도시에는 날 현상범으 로 게시하긴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내게 건 현상금이 없는데." "아아하흐오후후후…!" 샌슨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정말 요걸 어떻게 해야 되나? 나도 골치가 아파서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카알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퍼시발군, 풀어주게." "예?" "어쩔 건가, 풀어줘야지. 달리 방도가 없잖은가." 샌슨은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네리아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네리아는 진짜 풀어주자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놀랐다는 표정으로 우리 들을 둘러보았다. 샌슨은 꼴보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네리아를 외면하면 서 손을 저었다. "가라, 가! 보고 있으면 울화통 터진다." 네리아의 얼굴에 뭐라고 설명 못할 희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양이가 웃을 줄 안다면, 꼭 저런 표정이겠다. "흐음… 당신들, 세고, 머리도 좋은데, 정말 마음에 드네? 아까 아침에 도 퍽 마음에 들게 행동하더니 말이야. 닳아빠진 모험가 같지 않아. 닳 아빠진 모험가들이라면, 돈을 못찾을 거 재미나 보자는 식으로 말할텐 데." 샌슨이 속 뒤집어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릴 뭐 취급하는 거야!" 나도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며 한 마디 했다. "우리 돈을 꿀꺽 해버린 걸로 충분해. 우리를 싸가지 없는 놈들로 만들 지는 어서 가요!" 네리아는 킥킥 웃더니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절하는 시늉을 하고는 나 가버렸다. 문을 닫은 다음 문 저편에서 쾌활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호호호!" 환장하겠네, 정말. 메리안과 그런 괴상망측한 짓까지 해가며 겨우 잡았 더니… 그런… 그런 꿈같은 일을… 으음. 내가 왜 이러나. 아니나다를 까, 샌슨이 당장 찔러왔다. "그럼 덕 본 건 후치뿐이군." "솔직히 기분 나빴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좀 그만해 두지? 그렇게 부 러워할 거면 처음부터 악당 역할을 샌슨이 하지 그랬어?" 샌슨은 천장을 보며 넋두리를 뱉었다. "아, 제기랄. 이 억울함을 어디다 호소한다? 젠장. 나도 다리를 막아서 고 통행료나 받아낼까?" "퍼시발군!" "아, 아네요. 농담이예요. 농담도 못합니까. …그런데 네리아 말이 그 럴 듯한데. 정말 부끄러워서 신고 못할 사람을 노린다면…" "자네 좀 그만하게!" ================================================================== 4. 황소와 마법검……7. 네리아를 놓아준 밤도 결국 꽤나 잠을 설치는 밤이 되어버렸다. 샌슨은 침대속에서 끊임없이 끙끙거리는 소리만 내었다. 저 인간은 잠도 없나?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난 꿈 속에서 메리안을 보았 다. 음. 상당히 에로틱한 꿈을 꾸게 되었다. 꽤나 침착하려고 했지만 아 무래도 그 상황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둔 모양이다. 메리안은 혹시 내 꿈을 꿨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열여섯 처녀, 밤에 마당에 나왔지. 달빛이 너무 부끄러워,순결을 빼앗긴 느낌. 처녀는 달을 피해, 그림자를 찾았네. 어두운 밤, 붉어진 뺨 누가 볼까봐. 열여섯 처녀, 홀로 달을 마시는 나이. 에구… 여자 나이 16세니 그건 몬스터에 가깝다. 용서하지. 그런 골 때 리는 말로 내 복장을 다 뒤집어놓고 밤새도록 끙끙거리게 만들었지만, 용서해버리지. 하지만 허리가 정말 뻐근하군. 그녀는 못된 삼촌에게 꿈만 먹고도 배가 불러야 할 유년기를 빼앗겼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다. 난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씻으러 내려왔다. 잠을 설쳤다고 했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다시 침대에서 자니까 기분은 정말 좋았다. 세수를 하고나서 홀로 나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여 관의 홀. 낯선 장식과 낯선 방모양. 컴컴해서 더욱 이상해보인다. 여행 을 할 때 아침마다 새로운 것을 본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모르겠 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까운 테이블로 걸어갔다. 컴컴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테이블에 앉아서 멍하니 다른 사람들이 내려오길 기다 렸다. 창밖으로는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검은색 도시가 보였다. 주방쪽에 불빛이 바알갛다. 거기서 왔다갔다 하며 일하고 있던 레네즈 아주머니가 날 보고는 흠칫 놀란 모양이다. 하긴 어두컴컴한 홀에서 내 모습은 시커멓게 보였을테니까. 내가 먼저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너니? 일찍 일어났네?" 레네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난 그 쪽에 신경 끄고는 좀 더 밝은 쪽, 그러니까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새 지저귀는 소리들. 뭔가 털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아침이 밝아오기 전부터 움직이는 사람들. 나는 기지개를 켰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다시 올라가서 좀 더 잘까? 에이, 관둬라. 조금씩 알게모르게 주위가 밝아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전보다 훨 씬 홀의 벽이 밝아져 있었다. 난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레네즈는 이런 이른 시간에 손님인가 싶어 부엌에서 황급히 나왔다. 들어선 사람은 시커멓게 보였다. 완전히 검은 그림자같은 것은 아니었 지만 그래도 누군지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는 들어서자 마자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야, 주인 아주머니. 안녕하쇼? 좋은 아침임다! 딸꾹! 여기 샌슨이라든 가 하는 녀석들 묶고 있지요?" 네리아잖아? 레네즈 아주머니도 놀란 눈으로 술에 취한듯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테이블쪽으로 걸어왔다. "그 녀석들 좀 깨워줘요. 네리아가 왔다고, 음냐. 딸꾹! 어… 어? 너?" 네리아는 머리를 휘휘 젓더니 촛점이 잘 안맞는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 다. 그리고 갑자기 와락 달려들듯이 내 얼굴 앞 한 뼘도 안되는 거리에 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야! 너, 딸꾹! 그 꼬마구나?" 우욱, 술냄새에 정신이 몽롱하군. "후치입니다. 그런데 우릴 찾고 있었어요?" "잘 됐네. 와,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아이코!" 네리아는 앉으려다가 그대로 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디 서 엄청나게 취해서 왔네. 난 그녀를 부축하며 의자에 앉혔다. 의자에 앉히자 네리아는 테이블을 붙들고는 허리를 세우고 눈을 껌뻑거리기 시 작했다. 그러나 곧 허리가 앞뒤로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후이, 아니 후치, 졸리냐?" 내가 기우뚱거리는게 아니라 당신이 기우뚱거리는거야. 참 못말리겠군. 난 레네즈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찬물 좀 갖다주시겠어요?" "찬물보다는 좀 더 진한게 있어야겠다." 레네즈는 한숨을 쉬더니 부엌으로 걸어갔다. 난 잠시 말을 걸지 않고 네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그 동안에도 계속 의자 옆으로 굴러 떨어질듯하 자세여서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중심이 안잡히면 그냥 테이블에 엎드려요." "어, 아아안돼지! 엎드리면 다 올라온다고. 딸꾹!"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속 버리게." "까르르르! 나 걱정해주니? 딸꾹, 너희들 돈, 모조리 꿀꺽 삼켰는데?" "돈을 훔쳐갔든 어쨌든 사람 걱정해줄 수야 있는 거잖아요." "파하, 딸꾹! 파하하하하!" 네리아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재빨리 일어서서 의자 등받 이를 잡았기 망정이지, 하마트면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난 의자 를 끌어와서 네리아의 옆에 앉았다. 참나. 왠지 싸늘하고 고즈넉해서 좋 은 아침이 순식간에 주정뱅이 하나 때문에 깨어지는군. 네리아는 죽어 라고 웃어대고 있었다. 그 때 레네즈가 돌아왔다. 그녀는 색깔만 봐도 뭔지 이것저것 굉장히 많은 것을 섞은듯한 음료를 들고 왔다. "자, 마셔." 눈물을 훌리며 웃고 있던 네리아는 그 잔을 들더니 외쳤다. "건배!" 가지가지 하는군. 네리아는 그것을 쭈욱 들이켰다. "어? 술 아니네? 이거 뭐지?" "약술이야. 좀 있으면 정신들거야." 레네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버렸다. 난 다시 창밖 을 바라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햇님이 솟아오르시겠군. 꽤나 밝아졌 는데? 난 다시 네리아의 얼굴을 봤다. 나는 숨을 삼켰다. "당신, 어디서 맞았어요?" 네리아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 속이야. 뭐라고 했니?" "당신 눈이… 그거 왜 그래요?" "응? 아, 부었어? 괜찮아, 딸꾹!" 네리아는 가슴을 쾅쾅 치기 시작했다. 딸꾹질이 나와서 못견디겠다는 투다. 좀 밝아지고나서 자세히 보니 옷차림이고 뭐고 모조리 엉망이다. 눈에는 멍이 들어있고 윗옷은 바지밖으로 나와있다. 바지도 부츠 속으로 쑤셔넣다 말아서 엉망으로 부풀어 있다. 군데군데 찢어진 망토도 말이 아니다. 네리아는 가슴을 두드리더니 숨을 좀 들이켰다. 그리곤 품속을 뒤지더 니 뭔 자루를 하나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로 봐서 돈자루다. "자, 내가 훔쳐간 돈." "에엑? 돌려주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 어제는 돈이 없다고…" "어제는 없지만, 오늘은 있지."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다. 아직 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지만 네리아는 좀 침착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돈자루를 보면서 미심 쩍게 물었다. "돌려줘서 고맙긴 한데요.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돈이 생겼죠? 설마 이 돈…" 네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훔친 건 아냐. 길드료로 냈던 돈을 돌려받았지. 정보료도. 그러니까 그건 100% 완전히 너희들 돈이야." "그걸 돌려줘요?" "흠. 여자에겐 네가 모르는 수단이 있단다, 꼬마야."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그런 내 얼 굴을 보더니 와하하 웃었다. "아하하! 이런, 알 거 다 아니? 미안해, 꼬마야. 그래. 길드 마스터랑 같이 자줬어. 그 자식, 변태더라.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놓냐." 난 정말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허, 돈 귀한 줄 모르고!" 네리아는 방긋 웃었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네리아는 부어오르는 눈두덩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꼬마야. 누님은 너희 샌슨씨가 퍽 마음에 들었단다. 아니, 너도 마음 에 들고 그 인자해 보이시는 아저씨도 꽤나 마음에 들었어. 푸후… 세 상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야."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런 맹추들 때문에 나이트호크 네리아가 훔친 돈을 돌려주게 되다니 말이야. 참 우습지! 깔깔깔!" 네리아는 다시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난 그저 그녀가 넘어지지 않 도록 주의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못했다. 정신없이 웃던 네리아는 간 신히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휴우… 너, 누님이 마음에 들지 않지? 그래. 난 도둑이고, 그리고 아 무하고나 막 자는 나쁜 여자야. 뭐, 그러니까 이런 수단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지. 낄낄낄." 네리아는 그렇게 낄낄거리듯이 말하더니 일어났다. "관둬라, 관둬. 애를 데리고 내가 무슨 소릴 하냐. 나 나가고 나거든 욕해라. 그런데 말이야, 내가 취해서 실수했거든? 조금 전에 들은 이야 기는 절대로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네리아는 다시 한 번 다짐하듯이 말했다. "몸 판 돈이라고, 더럽다고 받지 않겠다고 할지도 몰라. 사람들은 그런 걸 따지지. 이건 말이야, 오로지 너희들 돈이었을 뿐이야. 잠깐 왔다갔 다 했을 뿐이지.알았지?" "예. 그런데 그래가지고 어딜 가려고?" 네리아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딘들 내 한 몸 기댈 곳 없겠냐. 아침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따스 하겠지. 저녁엔 해가 저무는 서쪽이 포근할거야. 멋진 행운은 언제나 남 동쪽에서 찾아와. 그러니 황야에선 북서풍을 따라가면 돼." "저, 네리아…" 네리아는 등을 돌린 채 무서운 음성으로 말했다. "입 닥쳐! 꼬마. 난 등 뒤에서 말하는 걸 가장 싫어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는 그대로 휘청거리면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잠시 문 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다. 몸은 돌리치 않은채, 그냥 그 렇게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냥 나가버렸다. 삐이이걱. 문짝이 가늘고 뻑뻑한 음을 내며 다시 닫혔다. 난 테이블에 놓여있던 돈자루를 바라보다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젖히고 여관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울타리를 지나 밖의 길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없었다. 대로에는 아침안개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시커먼 건물들의 머리머리가 이제 조금씩 제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밤은 지나가고 또다른 날이 밝 아왔다. 하지만 잃어도 가슴 아파할 일이 적은 사람만 덮치는 착한 나이트호크 아가씨, 네리아는 지난 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난 그저 안절부절하며 좌우를 돌아보았다. 뭔가 미치도록 안타까운 기 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난 어깨를 늘어트리고 도로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셨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말했잖아. 천사가 와서 이걸 돌려주고 갔다고." 샌슨은 내 이마를 짚어보았다. 샌슨은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 다. "그럼… 그 천사는 어디로 갔지?" "하나의 밤이 영영 사라지듯 그렇게 떠나갔지." 샌슨은 이제 본격적으로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돈주머니를 보면서 뭐라 말은 못했다. 옆에선 카알이 빙 긋 웃었다. "다행이군. 우리 여행에 천사께서 도움을 주셨다니. 유피넬의 천사인지 헬카네스의 천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드발군. 내 생각엔 밤의 천사 같 은데 말이야, 맞나?" 나는 싱긋 웃었고 카알도 웃었다. 샌슨은 뭐가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 로 서로 웃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를 휘휘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운차이는 기겁하 면서 같이 일어났다. 샌슨은 레네즈에게 말하려다가 운차이를 보더니 말했다. "넌 왜 따라오냐?" "너, 너!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어?" 운차이는 화난 표정으로 자신의 발목과 샌슨의 발목을 연결한 밧줄을 가리켰다. 샌슨은 밧줄을 보더니 알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참. 그렇지. 흠. 레네즈씨?" "뭐요, 총각?" "10인분 도시락 좀 부탁합니다. 점심 때 먹을 거랑 저녁에 먹을 겁니 다. 아무거나 양만 맞춰서 해주면 돼요.물론 대금은 지불하지요." "알았소." 샌슨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운차이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표정으로 샌슨을 졸졸 따라왔다. 샌슨은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자, 돈도 돌아왔고. 도시락만 준비되면 떠나자." "침대가 또 안녕이로군. 오늘 밤은 야영이지?" "응. 걱정마. 갈색산맥 통과에 이틀 쯤 걸리겠지. 내일과 모레만 지나 면 수도야." "긴 여행이 드디어 끝나는군." 아침 식사를 마치고 푸근하게 도시락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동안 운차이는 빵 자르는 나이프를 하나 슬쩍했지만 레네즈가 귀신 같이 알아내었다. "여봐요들! 나이프가 하나 모자라!" 그래서 운차이는 잠자코 그것을 내어놓아야 했다. 카알은 빙긋 웃었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보니 꽤 오래간만에 푸근한 시간이다. 오랫동안 여행해왔지만 지붕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이었던 것 같다. 그런 틈이 생기자마자 샌슨은 밖에 나가서 온몸을 뒤 틀고 있다. 밖의 마당에서 해괴한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헬턴트 경비대원 지침서 검격 14번 공격세!" "헬턴트 경비대원 지침서 검격 21번 변형세!" 뭐…저 모양이다. 난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 왔다. 그러자 역시 운차이는 후다닥 일어나며 날 따라왔다. 샌슨이 내 발에다가 밧줄을 묶어놓고 나갔거든. 운차이는 위궤양이 도진다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아이고, 이유가 있구나? 여관 밖의 대로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샌슨은 저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던 것이군. 그러고보 니 입을 헤 벌린 채 우유통에서 우유를 반쯤 흘리고 있는 아가씨,(아마 어딘가의 목장에서 받아오는 길이렸다. 아침식사의 우유가 좀 모자라겠 어.) 감탄을 표하며 어깨를 움찔거리는 노인, 킥킥거리며 팔짱을 낀채 바라보는 젊은이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가며, 혹은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난 현관 옆의 건물벽에 기대어서서 그것을 구경했다. 뭐, 폼이야 봐줄만 하다. 아침햇살을 등지고 땀방울을 흩날리는 샌슨. 롱소드가 정말 가슴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고 있다. 은도금이니까. 하지 만 그 모든 것 차치하고, 정말 폼 하나가 봐줄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도약하며 베어내리고 그대로 허물어지듯이 돌려친다. 다섯 번을 앞으 로 끊어치며 돌격하다가 검의 회수동작으로 그대로 뒤를 돌아친다. 도대 체 끊어짐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모든 방향으로의 공격이 원활하다. 저 런 가벼운 동작이 하더 리더까지 입고 가능하다. 나는 샌슨의 동작을 보며 새도우 파이트(Shadow fight)를 해보았다. 그러니까 샌슨의 동작에 맞추어 내 동작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다. 안되겠다. 도대체 칠 각도가 안나온다. 저렇게 치면… 난 이렇게 피할 방법밖에 없군. 그러니 다음 공격은 둘 중 하나인데… 쳇, 벌써 하나는 봉쇄당하는군. 그럼 이 공격으로 들어가면… 역시군. 헛점이 나온다. 아 무래도 샌슨도 지금 새도우 파이트를 하는 모양이다. 똑같이 건물 벽에 기대어 구경하던 운차이가 말했다. "영자팔법(永字八法) 모두 익숙하군. 좋은 도량이다." "무슨 말이에요, 그거?" "우리 검사들이 하는 말이다. 신경쓸 거 없어." "국가 기밀 쯤 되요?" 내 농담에 운차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다. 나도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우리 둘도 만인의 시선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 둘은 마치 형제처럼 똑같이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 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었고 그 발목에는 밧줄이 서로 묶여 있다. 참 봐 줄만 하겠다. 결국 야유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헤이, 이봐! 우리 마을에 서커스가 들어왔나?" ================================================================== 4. 황소와 마법검……8. 농담을 던진 것은 인상이 사납게 생긴 젊은이였다. 사람들은 뭔 일이 나나 싶어서 모두 입을 다물고는 그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그 말을 듣더니 우뚝 멈춰섰다. 그리곤 빙긋 웃더니 대거를 꺼 내어 들고는 입을 왁 벌려서 먹어치우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은 와- 웃 으며 박수를 쳤다. 하는 짓이 귀여우니까. 그 젊은이도 피식 웃어버렸 다. 그런데 그 다음은 조금 사태가 심각했다. "여보게, 젊은이? 내가 대무해줄까?" "아아! 아버님, 안돼요!" 딸과 아버지일까,며느리와 시아버지일까? 어쨌든 팔팔하게 보이는 중 년 아저씨 하나가 농을 던져온 것이다. 그 옆의 여자는 사색이 되어 그 아저씨를 말렸다. 샌슨은 얼떨떨해져서 그 중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아저씨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죽고 싶지 않은데요." "와하하! 걱정 마! 살살해줄께!" "아버님! 저 청년 하는 것 못보셨어요? 참으세요! 안된다고요. 저 청년 이 겸손해서 저러는 거예요." 딸보다는 며느리쪽이 확실한 것 같다. 공손하게 말하니까. 그러나 그 아저씨는 들은 척 하지도 않고는 여관 마당으로 불쑥 들어섰다. "내가 말이야, 이래뵈도 왕년에 자이펀의 개들을 수도 없이 잡았지! 자 넨 그런 것은 구경조차도 못해봤겠지?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라는 건 말 이야…"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냥 조금 전과 똑같이 여관 벽에 기대어선 채,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자이펀에 침입했다가 잡혀서, 우리 바이서스를 욕하는 말을 들었 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샌슨은 결국 점잖은 말로 그 아저씨를 돌려보내었다. 다행히도, 그 때 안에서 준비가 끝났다는 레네즈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그 아저씨는 아 쉽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몸을 돌렸다. 말들을 도로 꺼내었다. 샌슨의 말이며 가장 우람한 슈팅스타, 놈은 우리 말들 중 우두머리처 럼 당당하다. 아담하고 날씬한 내 말 제미니, 저 놈과 정말 무지무지하 게 싸웠지만 이젠 친하다. 카알의 말은 '트레일(Trail)'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가볍게 걸을 때는 발을 조금 끄는 버릇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병은 아닌데 희안하게 버릇이 그렇다. 이루릴의 말 '레이셔널 셀렉션' 은 웬지 주인을 닮아가는 느낌이다. 다른 말처럼 행동하지 않고 침착하 며 차분하게 움직인다. 주인을 닮아가나? 운차이는 자신의 말을 '앰뷸런 트 제일(Ambulant jail)'이라고 부른다. 꽤나 그럴듯하다. 마구를 얹고 짐을 고정한다. 샌슨은 자신의 말과 운차이의 말을 긴 밧 줄로 서로 묶었다. 아침햇살은 이제 중천을 향한 도약을 시작하고 있다. 가을 아침의 싸늘한 바람에도 이제 안온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 간.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거야. "항상 여행객으로 북새통을 이루세요!" "원, 고마운 말을 다하네. 잘들 가요." 레네즈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출발했다. 다가닥, 다가닥. 거창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서, 마을의 반대편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시 둘레를 둘러싼 외성에 난 성문이다. 성문에는 경비병들의 초소로 보이는 건물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경비병들이 들락거리는 사람 들을 감시하고 있긴 했지만 별로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이 근처는 미드 그레이드의 중심지니까 유동 인구가 많은 모양 이다. 그들은 그저 쌀쌀한 아침날씨에 작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샌슨이 희안한 희파람을 불었다. "추울텐데… 거 참." "응?" "네가 침대로 끌어들인 아가씨다." 아아, 그랑엘베르여! 성문에는 메리안이 나와 있었다. 불쌍하게 여긴 성문 경비병들이 끼워 주었는지 모닥불 옆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똑바로 내쪽 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메리안은 걸어오더니 다른 사람에게 목례하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 가니?" 난 말에서 내렸다. "너, 어떻게 여기 나와있는거야?" "그냥… 지나던 길에 혹시 후치가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잠시 말이 끊어졌다. 메리안은 추운지 손을 치맛자락 속으로 묻으면서 말했다. "또 오니?" "그럴 거야. 수도에 갔다가 그대로 돌아올 거야. 아, 그렇지. 내가 어 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그랬지? 수도에서 뭐라도 사다줄까?" 메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응. 됐어. 그럴 필요는 없구… 다시 돌아온다고? 그럼, 우리 주점 에 들러줄래?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릴께." "꼭이야? 기다릴 거야?" "응. 저, 그런데 말이야…" 난 메리안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네가 시집도 못가는, 뭐 그런…" 메리안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웃었다. "헤에. 걱정해주니? 그럼 네가 나 책임지렴?" 이건 장난이 아닌데? 난 우물쭈물하며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스러 워지기 시작했다. 말 위에 앉아 있던 다른 일행들은 모두 재미있다는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메리안은 말했다. "걱정마. 후치에겐 레이디가 있잖아." "푸히흐어아하하!" 샌슨이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저 작자는 도대체! 메리안은 멍한 표 정으로 샌슨을 보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그럼, 꼭 돌아오는 거지?" "물론이야." "알았어. 그럼 작별은 아직필요없네. 잘 갔다오라고 할께." "그럼…" 난 다시 말 위에 올랐다. 메리안은 잠시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뭐라고 말할듯이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뛰어가버렸 다. 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자." 샌슨의 재촉을 듣고서야 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성문을 빠져나왔고, 곧 속도를 내어 야산에 인접한 도로를 따 라 달려갔다. 산고비를 구비구비 돌면서 펼쳐진 길이며, 길 옆으로는 가 을걷이가 끝난 밭들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갈색산맥으로 들어섰다. 가을의 산 속은, 꽤 추울듯 하지만 희안하게 별로 춥지 않다. 적어도 낮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어쨌든 가을 햇살이 내리쬐면서 헐벗기 시작 하는 나뭇가지들에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산길을 따라 걷는 것도 고역 스러운 일은 아니며, 꽤 즐길만한 여행이다. 펠레일이 있다면 산 모양만 척 보면서 '에, 이 산맥의 뻗어내린 모양을 보아 하오에 접어들면 수목한계선이 나올 듯합니다. 야간에 수목한계선 보다 고지에서 잠들게 되는 것은 고려할 수 없으므로 진행 속도를 변경 해야 할 듯합니다.' 등의 말을 했겠지. 그 똑똑한 마법사는 지금 전설에 남을 위대한 업적, 그러니까 50명의 꼬마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을 것 이다. 흠, 말해놓고보니 그거 정말 전설적인 업적이 되겠군.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라도 그런 일은 못할 거다. 나? 나라면 한 명의 꼬마만 맡게 되더라도 하루만 지나면 쓰러질 거다. 그 때였다. "쉬이이이, 펄럭, 펄럭." 날개소리기는 한데, 그게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느리게 날면 떨어질텐데? 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기겁할듯이 놀랐다. 샌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길 옆으로! 어서, 길 옆의 나무 아래로!" 우리는 황급히 나무 아래에 숨었다. 저 놈이 독수리처럼 시각이 좋다 면 어쩌지?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그냥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숨소리도 제대로 못내며 머리 위의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 았다. 다행히도 침엽수림이라 가을인데도 나뭇잎이 울창했다. 그것은… 마치 도마뱀처럼 생겼고 독수리는 비교도 안되게 덩치가 컸으 며, 박쥐의 날개 같은 커다락 피막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거꾸로 올 려다 보아서 그런지 온통 시커멓게 보였다. 그것을 얼핏 본 순간, 나는 뒷통수의 머릿털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크윽, 아무르타트?" 아냐, 저건 블랙드래곤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던 난 이마의 땀 을 닦아 내렸다. 그것은 훨씬 날씬하고 덩치도 작다. 꼬리길이까지 다 쳐도 15 큐빗 정도밖에(?)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캇셀프라임이 하늘을 날 때처럼 저렇게 큰 것이 하늘을 날다니 말도 안된다… 는 느낌으로 날 지는 않았다. 아주 가볍게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와이번(Wyvern)이다." 카알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만큼 낮게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얼 굴이었다. 그는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어떻게 저걸 우리가 못봤지?" "갑자기 날아오른 모양이군요." 이루릴이 말했다. 샌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하늘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군. 잘못 하면 큰일날 뻔했어." 샌슨은 멀어져가는 와이번을 보며 덧붙였다. "우리를 보진 못했군. 저 놈은 정신없이 날아가는데. 마치 뭘 쫓아가는 것처럼…" 그 때였다. "아아아악!" 비명소리. 젠장! 분명히 공포에 질린 목소리이다. 샌슨의 말처럼 와이 번은 뭔가를 노리고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샌슨은 곧장 말의 배를 걷 어찼다. "빌어먹을! 이랴! 하!" 운차이는 대경실색했다. "이 자식아, 죽고 싶어서!" 운차이는 악을 썼지만 역시 기겁하면서 말을 달리게 했다. 밧줄이 서로 연결되었으니 자칫하면 둘 중 하나가 낙마할지도 모르니까. 운차이는 기 를 쓰고 샌슨을 따라갔으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조리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정신없이 머리 위로 흘러 지나갔다. 볼을 할퀴며 귓가에 소용돌이치는 바람소리. 쉬익쉬익쉬익. 급격한 말발굽 소리에 호응하듯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줘요!" 샌슨은 앞뒤볼 것 없이 달려갔다. 잠시 후, 우리가 뛰어나온 곳은 산과 산 사이에 마치 분수령처럼 생긴 넓은 분지였다. 중부대로가 지나는 장 소라 그런지 나무들이 별로 없었고 잡풀만이 무성한 분지였다. 하지만 모두 허리를 넘을듯한 풀들이었다. 우리는 말에 타고 있어서 멀리 볼 수 있었다. 분지 저 쪽에서는 뭔가가 다급하게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뒷쪽의 하늘에서는 와이번이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어 내려꽂힐 기세였다. 이루릴이 외쳤다. "네리아군요!" 뭐? 저게 보이나? 우리는 그것을 물어볼 새도 없이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이 잘 보인다. 그런데 그 때 네리아 의 뒤를 쫓고 있던 와이번은 선회를 끝내었다. 그것이 이제 땅에 있는 네리아를 덮치고 내려꽂히려 하고 있었다. 샌슨은 발악을 하며 와이번 의 주의를 끌어보려 했다. "이 자식아! 여기 더 많다!" 그 때 나는 황당한 것을 보고야 말았다. 내 앞에 달려가던 카알은 고삐를 놓아버렸다. 그는 롱보우를 뽑아들었 다. 불가능하다! 말 위에 앉은 채론 정면으로 롱보우를 쏠 수 없다! 그 런데 카알은 다리 하나를 들어올려 옆으로 앉은 자세가 되었다. 그는 롱보우를 수평으로 들어 당겼다. 빠아아아- 롱보우가 비명을 지른다. 이 거리에서, 달리는 말 위에서? 내가 카알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기도 전에, 카알은 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쾌애애액!" 숨이 막히는 희안한 비명소리. 맞은 모양이다. 땅으로 내려꽂히려던 와 이번이 순간 몸의 균형을 잃으며 기우뚱거렸다. 와이번은 거세게 날개 짓을 하며 다시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쾌재를 올렸다. "우와!" 그러나 놈은 공중에서 다시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네리아에게 최고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루릴이 갑자기 쳐지기 시작하더니, 그 녀는 말을 세우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매직 미사일!" 부우우웅! 이루릴의 몸 주위에서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희게 타오르는 다섯 개의 광선이 나타났다. 그것은 제각기 허공에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와이 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쾅쾅쾅쾅쾅! 다섯 개의 광선들이 차례차례로 와이번에게 부딪혀갔다.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은 조금의 충격에도 균형을 잃을 염려가 있는데 저런 것이 다섯 개나 작렬했으니 제정신일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와이번은 광선 들을 무시하면서 날아들고 있었다. 맞아도 상관없다는 투다. "크아아아악!" "흩어져!" 샌슨의 고함소리와 함께 우리는 양 옆으로 갈라져 달리기 시작했다. 샌슨과 운차이가 왼쪽으로, 그리고 나와 카알이 오른쪽으로 달렸다. 그 런데 캐스트하느라 제자리에 서 있던 이루릴은 출발이 좀 늦었다. 그녀 는 뒤로 돌아 달려갔으나 와이번은 똑바로 그녀를 쫓아갔다. "제기랄!" 난 다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루릴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 나 내가 하늘에 있는 와이번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난 고함을 지르 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임마! 여기 있다!" 그러나 와이번은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절망적으로 카 알을 바라보았다. 지금 와이번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카알 뿐이다. 카 알은 역시 롱보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피이이윳! 와이번의 날개에 화살이 명중했다. "쾌애액!" 그러나 와이번은 그대로 몸으로 뭉개버리겠다는 듯이 이루릴에게 부딪 혀갔다. "아아아악!" 충돌! 와이번은 뒤에서 이루릴의 말에 부딪혀갔다. 이힝힝힝힝! 레이셔 널 셀렉션이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디는 것이 똑바로 보인다. 말라있 던 풀이 마구 하늘로 튕겨오르고 낙엽이 폭풍이 되어 흩날렸다. 흙먼지 가 피어오르고 땅을 진동시키는 굉음. 이루릴은 충돌의 순간 앞으로 튕 겨 날아갔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는지 이루릴은 그저 맥없이 땅에 부 딪혀 굴러가버렸다. 레이셔널 셀렉션도 네 다리를 휘저으며 나가 떨어 졌다. 와이번도 성할 리 없다. 땅에 온몸으로 부딪혀 버렸으니. 그 놈은 날개 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찢어졌다. 카알의 화살에 맞은데다가 충격까지 겹쳤으니까. 그러나 와이번은 용트림을 하더니 몸을 뒤집으며 일어났다. 놈은 그대로 머리를 높게 들어올려 휘휘 목을 저었다. 그 아래에는 정 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이루릴이 보였다. 놈은 이루릴을 발견하더니 곧 머리를 밑으로 내려꽂았다. "안돼!" "멈춰!" ================================================================== 4. 황소와 마법검……9. 샌슨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고 나도 정신없이 달 려갔다. 그러나 와이번이 머리를 내려찍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다. 놈의 이빨이 희게 번뜩였다. "아아악!" 이루릴의 비명소리. 놈은 이루릴의 허리를 물어올렸다. 붉은 피가 사방 으로 튄다. 놈은 그대로 이루릴을 휘휘 젓다가, 달려가는 우리를 발견하 자 이루릴을 우리쪽으로 집어던졌다. 허공에 피를 뿌리며 이루릴이 날 아오고 있었다. "이루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안장을 두 손 으로 강하게 내려찍으며 뛰어올랐다. 나 외에는 안된다. 말 위에서 뛰어 오를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앉은뱅이도 물에 빠지면!" 뒤에 생략된 말은 헤엄친다는 말이다. 급하면 안될 게 없다는 뜻이다. 손목이 그대로 박살나는 느낌과 함께 나는 날아올랐고, 내가 강하게 아 래로 밀어버리느라 제미니는 그대로 땅에 가슴을 들이박으며 나동그라졌 다. 이힝힝힝! 나는 허공에서 간신히 이루릴을 잡아내었다. 땅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다. "아아아압!" 나는 죽을 힘을 다해 허리를 뒤틀어 이루릴이 위로 가도록 했다. 콰광! 눈 앞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밝아졌다. 백색, 화끈한 백색과 함께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 귀가 땅에 쓸리는지 통채로 떨어져나갈듯한 느낌이 든 다. 그러나 난 이루릴을 꼭 껴안았다. "너 이 죽일 놈아!" 샌슨의 고함소리에 난 머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우으음!" 등에서 모진 고통이 다가왔지만 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내 품에 안 겨있는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의 검은 머리는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녀의 하얀 살갗 곳 곳에 붉은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질척거리는 감각에 부 들부들 떨며 그녀의 허리를 보았다. 그녀의 옷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피는 계속해서 하얀 블라우스를 물들여가고 있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일단 와이번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폈다. 샌슨은 와이번에게 말을 달리면서 롱소드를 후려쳤다. 그러나 와이번 은 찢어진 날개를 퍼득거리며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와이번은 샌슨 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운차이에게 달려들었다. 샌슨은 황급히 뒤로 칼 을 휘둘렀다. 샌슨의 슈팅스타와 연결되어있던 밧줄이 잘리자 운차이는 급히 앰뷸런 트 제일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와이번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러나 와이번은 이제 운차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놈은 찢어진 날개를 펄럭이며 두 발로 땅을 박차며 마치 거대한 수탉처럼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수탉에게 쫓기는 지렁이 신세가 된 운차이는 죽으라고 달 려가고 있었다. 그 때 와이번의 옆의 풀숲에서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왔다. "이야아아압!" 네리아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온몸을 던지며 그녀의 트라이던트 를 와이번의 옆구리에 꽂아넣었다. 와이번은 머리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꽤애애액!" 그러나 놈은 곧 날개를 휘둘렀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놓아버리며 뒤로 덤블링해서 빠져나왔다. 난 일단 와이번이 내게서 멀어졌기 때문 에 떨리는 손으로 이루릴의 허리의 상처를 막았다. 이루릴은 상처를 꽉 누르자 신음을 뱉었다. "으으음… 하아, 하악." 나는 그녀에게 충격이 가지않도록 주의하며 그녀의 허리 뒤를 만져보 았다. 기억대로다. 그녀의 혁대 등쪽에 있는 작은 가방이 만져졌다. 난 떨리 느라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여서 힐링 포션을 꺼내었 다. 이루릴의 얼굴은 벌써파리하게 변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쇼크사 가 일어날텐데, 엘프는 제발 아니길 빈다. 난 힐링 포션의 병 주둥이를 거의 부수듯이 하며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려넣었다. 이루릴은 입술을 적시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녀는 약병을 보더니 목 이 타듯이 말했다. "사, 상처에도…" 상처에? 아, 상처에도 바르라고? 난 이루릴의 혁대를 풀고 블라우스를 끄집어내었다. 피에 젖은 블라우스를 조심스럽게 치우고는 그녀의 허리 의 상처를 꺼내었다. 참혹했다. 이루릴의 허리와 배에 둥글게 나 있는 구멍들에는 내 손가락도 들어가겠다. 난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 피를 먼저 닦아내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쭈볏하는 느낌을 받았 다. 뭘 느꼈던 거지? 내게 다가오는 큼직한 발자국소리다. 난 그것을 느꼈던 것이다. "조심해! 후치!"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육박하고 있는 와이번이 보였다. 아니, 와이번은 보이지 않고 놈의 허연 이빨과 입안만이 보일 지경이다. 시간이 없다! "죽어보자!" 난 무릎 위의 이루릴을 덮치며 웅크렸다. 목만 물지마라. 그럼 좀 버틸 수 있겠지. 그러면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안오는데? 난 머리를 살그머니 들어보 았다. 내 앞에는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등을 따라 올라가 뒷 통수가 보였다. 그 좌우에는 펼쳐진 양팔.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 있었 다. 운차이였다. 그리고 운차이 앞에는 와이번이 서 있었다. 머리를 꼿꼿이 들고 서 있 으니 그 거대한 몸은 운차이의 뒤에 앉아 있는 내게도 똑바로 보일 정도 이다. "크르르르…" 놈은 으릉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덤벼들지 않는다. 운차이는 그저 양팔을 벌려선채 내 앞을 막아서 있을 뿐인데 저놈이 왜 덤벼들 지 않지? 그 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Peca, Nanysanchee amai… Ahn choudar." 운차이의 목소리는 낮은 으르릉거림 같았다. 그러더니 운차이는 앞으 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와이번이 뒤로 물러난 것이다. "Ahn choudar!" 운차이는 다시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와이번은 두 발자국이나 물러 났다. 와이번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 눈빛은 자신이 왜 물러나는지도 모르겠다는듯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놈은 갑자기 물 속에서 뛰쳐나온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놈은 뒤로 물러 나는 것을 정지했다. 놈의 눈에서 불똥이 뿜어졌다. "크르르르…" 놈은 다시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가 나 지막하게 말했다. "여기까지군. 달아나. 후치." "꽤애애애액!" 와이번은 마치 무엇을 떨쳐버리는듯이 포효하며 날개를 쫙 펼쳤다. 엄 청나다. 놈은 양날개를 쫘악 펼치고 목을 울리고 있었다. 귀가 먹어버릴 듯하다. "꽤애애애액!" 놈은 땅을 박차며 운차이에게 달려들었다. 운차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콰당! 놈은 운차이의 옆을 스치며 땅에 턱을 박았다. 놈의 길다란 목은 운차이의 뒤에 앉아 있던 내 옆에까지 와서 땅에 나동그라졌다. 놈은 혀를 빼물고 죽어있었다. 운차이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나도 바라보았다. 그 목에는 화살깃이 보였다. 목을 깨끗이 관통당한 것이다. "여어! 다들 괜찮은가?" 저 멀리서 카알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카알이 우릴 구했군. 운차이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앉은채로 헉헉 거렸다. 운차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후우. 하루에 두 번은 못할 일이군…" 내 가슴에 안겨 있는이루릴의 얼굴을 내려보며, 나도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조금 전엔 어떻게 된 거죠?" "응?" "그 와이번 말이예요. 완전히 질려버린 듯하더군요." "아, 그거?" 운차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질려버리게 한 거야." 우리는 더 이상 전진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분지 끄트머리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이라무스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레니얼양." 카알의 질문에 이루릴은 파리한 얼굴을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나을 거예요. 이라무스로 되돌아가면 시간을 더 소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겐 숲이 더 안온합니다. 이라무 스로 돌아간다고 더 나을 것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거기까지 가느라 더 힘겨워지겠죠."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이루릴은 엘프라 어떤 기후에도 크게 거리낄 것이 없다지만 그것도 건 강할 때의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장작을 많이 준비하기로 했다. 샌슨은 손도끼를 들고 나무들을 바라보더니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 다. 고원이긴 하지만 분지지형이라 바람을 별로 안타는지 나무들은 모 두 우람한 것들이었다. 작은 것도 직경이 한뼘은 되는 것들이었다. 손도 끼로 찍으면 하루 종일 걸리겠다.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 나무를 내가 바스타드로 자를 수 있을까, 없을까?" "칼날 부러진다." "그럼 곰 흉내를 내는게 좋겠군." 네리아는 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손바닥에 침을 뱉어 문 지르고는, 있는 힘껏 돌격해서 나무에 부딪혔다. 콰지지직! 첫번째 충돌에 나무는 뿌리가 들리고 말았다. 그러자 나머지는 나무의 무게로 알아서 넘어가게 되었다. 쿠궁. 네리아는 입을 쫘악 벌리고는 말 도 제대로 못했다. 난 샌슨에게서 도끼를 건네받아 쓰러진 나무위에 곧게 세웠다. 그리 고 주먹으로 도끼머리를 내리쳤다. 나무는 반 동강이 났다. 그런 식으로 길다란 나무를 가로로 몇 토막으로 내고는, 다시 세로로 쪼개고를 몇 번 하니 한 시간도 안걸려서 훌륭한 장작더미가 만들어졌다. 네리아가 질문해왔다. "너 사람 아니지?" "들켰군요. 그건 당신과 나만의 비밀로 남겨둬요." 내 실없는 말에 네리아는 실소했다. 한편 카알은 나무에 기대어 앉은 이루릴 옆에 앉아서 근심스러운 표정 으로 분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밤이 되면… 사방의 몬스터가 다 몰려들 수 있는 지형이구만. 주위의 산등성이가 모조리 몰려 있는데. 산 속에 있는 평지니까, 어쩔 수 없겠 지." 샌슨과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울타리를 세울까요?" "글쎄. 퍼시발군. 갈색산맥의 몬스터 분포는 어떠한가?" 샌슨은 자신의 짐배낭에서 책을 꺼내어 들더니 바닥에 앉아 그 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어, 장난이 아니군요. 중부대로가 지나는 부분에서는 꽤 자주 토벌이 있었지만 아직 미확인 몬스터들의 출몰이 확인되고 있답니다. 갈색산맥 이 워낙 넓어서 중간에 평야 지형이나 암석 지형, 언덕 지형 등 각양각 색의 지형과수종을 가지고 있어 여러 몬스터들에게 적절한 환경이랍니 다. 우리가 지나는 길은 그래도 가장 짧은 길이지만 그래도 말로는 2, 3 일 정도 소요될 정도니까 얼마나 넓은지는 짐작이 되죠." "자주 출현하는 몬스터는?" 샌슨은 미간을 문지르며 몇 페이지를 더 넘기더니 읽기 시작했다. "화염의 창이라 불리는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 "크억?" 난 눈을 뒤집을 뻔 했다. 드래곤이라고! 그것도 레드 드래곤과도 맞먹 는다는 크림슨 드래곤(Crimson dragon)이라고! 그러나 샌슨은 유유히 읽 어 나갔다. "이게 가장 유명하지만 아직 수면기입니다." 나와 카알은 동시에 엄청난 한숨을 쉬었다. 샌슨은 뭐가 재미있는지 열심히 책을 읽는 눈치였다. "와!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사망했답니 다. 그래서 발광해버려서 갈색산맥과 미드 그레이드 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군요. 그 때는 굉장했다는데요? 결국 토벌은 꿈도 못꾸다가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가서 겨우 파괴는 멈추었답니다." 카알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흠, 지식의 습득은 기분 좋은 일이네만, 지금은 우리의 관심을 현실 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몬스터에 맞추어보세." "예. 어, 그외에 스톤 자이언트가 조금 발견되었고, 오우거… 이건 좀 의외군요. 어쨌든 발견은 되었답니다. 산능선을 따라 6부 능선 쯤에 분 포한다는데,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모양입니다. 오우거가 사냥할 게 있을 지 모르겠네. 트롤이 여행자를 습격하는 일이 간혹 있답니다. 그리고 오 크나 고블린은 그저 산을 넘을 일이 있어서 오가는 정도. 와이번이나 키메라 등이 좀 분포한답니다. 맨티코어(Manticore)도 있고." 샌슨의 말을 들으며 난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 았다. "그리고 뱀 종류가 무서운게 꽤 되지만, 이건 가을이 깊었으니 벌써 동 면에 들어갔겠고… 곤충형 몬스터들도 역시 가을이라 별로 나타나진 않 을 것 같습니다. 식물형 몬스터는 이동성이 없으니 상관없겠고. 스터지 나 슬라임 계열, 기타 여러 가지 몬스터도 있긴 하지만, 역시 길이 있는 이 부분까지는 나오지 않고 보다 깊은 산 속까지 들어가야 나타난다는군 요. 우와! 유니콘이 있을 수도 있다는데요? 그리고 그 외에 요정 종족 들, 드라이어드(Driad)나 페어리(Fairy), 님프(Nymph) 등도 있지만 이런 존재들은 인간을 습격하지 않으니 상관없겠습니다. 그리고 온순한 성 격의 몬스터들도 모두 제외해도 좋을테고. 어쨌든 산이나 숲을 좋아하는 몬스터라면 없는 게 없을 정도랍니다." 없는 게… 없다라… 우후후후훗. "하지만, 야! 이런 말이 적혀 있군요. '이것은 모두 생존자의 보고를 기반으로 한 것이므로,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을 정도의 몬스터는 수록되 지 않았음을 명심하도록. 조언하자면, 길에서 만나는 몬스터라면 그건 길을 가는 인간을 덮칠 만큼의 몬스터라는 점을 유념하여 항상 조심하 라.' 고 적혀 있군요. 음,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정도입니 다." 샌슨은 태평하게 읽었지만 나와 카알, 그리고 운차이의 얼굴은 핼쓱해 져 버렸다.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좀 으스스한 느낌을 받으며 샌슨에게 질문했다. "그럼, 어쩌지?' "뭐, 평소에 하던대로 불침번 서면서 불이나 열심히 지피는 거지." "응?" 샌슨은 만사가 아주 간단하다는듯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책을 세워도 날아오는 것은 못 막아. 하지만 숲이니까 날아오는 것 은 상관없지. 그리고 땅 밑으로 기어들어와도 나무 뿌리들 때문에 역시 상관없어. 그래도 다가올 녀석들은 있겠지만, 밤에 나돌아다니는 것들은 불을 싫어해. 네가 산더미처럼 장작을 만들어놨잖아? 열심히 태우는 거 지. 뭐가 올 줄 알아서 대비를 하냐?" 샌슨의 말은 무성의하게까지 들리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그것 이외 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뭐가 온다는 것을 알면 그에 대비해 방 법을 취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방도가 없다. 장작은 충분하니까 불이 나 열심히 지피는 게 최상이겠다. 그런데 네리아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있나 보다. "야, 샌슨. 그 책 얼마야? 정말 탐나." "이건 왕실 지리원에서 편찬해서 각 영지에 배포하는 책이야. 돈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지." 그러다가 샌슨은 빙긋 웃었다. "참, 넌 원래 돈 주고 물건 사지 않지?" 네리아는 그 말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샌슨은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작업도 대충 끝났으니 점심 먹으며 네 이야기나 좀 듣자." "내 이야기?" "돈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었지?" 나와 네리아가 동시에 놀랐다. 네리아는 날 바라보았고 난 고개를 휘 저었다. 그러자 샌슨이 말했다. "뻔하잖아. 너 말고 누가 있어. 그건 바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말이야, 후치가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야. 왜 그랬을까? 그 돈이 좀 께름직한 것이기 때문이라면 난 슬플 거야. 특 히 네 얼굴이 그 모양이니 더 의심스러운데?" 네리아는 입을 딱 벌리고 나와 샌슨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나는 얼굴 이 벌개져서 그 시선을 외면했다. 샌슨은 갑자기 우리 둘이 왜 바보가 되었는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 천천히 듣자고. 뭐, 네가 좋은 의도로 그랬으니까 그렇게 나쁜 짓 을 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후치? 점심 도시락이나 꺼내. 먹고 하 자, 응?" 샌슨은 배를 문지르면서 지금 당장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뭔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 부리나케 말에 매어둔 도시락 바구니로 달 려갔다. 흘깃 돌아보니 네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샌슨의 눈을 피한채 앉아 있었다. ================================================================== 4. 황소와 마법검……10. 샌슨은 네리아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내가 바구니를 대령 했다. 그러자 샌슨은 만사제쳐두고 도시락 바구니에 대한 치열한 공격을 감행했다. 생존자가 거의 없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샌슨은 트림을 하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이 되어 나무에 기대 앉았다. 아무래도 갈색산맥에 출 몰하는 몬스터의 목록에다가 샌슨 퍼시발도 추가해야 될 것 같다. 성명 : 샌슨 퍼시발 (Male) 출현빈도 : 유니크 활동범위/시간 : 모든 지형에서/주로 낮 특성 : 이 강인하고 흉폭한 생물은 음식물에 대한 무한한 복수심 으로 불타오르며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어떠한 종류의 음식물도 잔혹하리만큼 처절하게 먹어치워버림. 내가 이런 목록을 구상하고 있을 때 샌슨은 이루릴에게 말했다. "이루릴, 좀 더 드시죠?"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고 난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먹을 걸 남겨두고 그렇게 말해!" "바구니 더 없냐?" "그건 저녁 때 먹을 거야!" "뭐, 어떠냐. 오늘은 시간도 많은데 네 요리 솜씨 발휘하면 되지." "됐다, 됐어! 적당히 하자. 사람같이 살자고!"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와인병을 쥐어들었다. 그는 배낭에서 그릇들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돌리고는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루릴, 와인 괜찮겠습니까? 회복에 혹시 해가 된다거나…" "아뇨, 상관없어요. 치료는 끝났는걸요." 이루릴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면 나쁘지 않겠지. 환자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와이번에게 씹혔던 환자가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 있 으니 와인 한 잔에 죽을 것 같지는 않다. 난 샌슨이 네리아에게 질문을 꺼낼까봐 화제를 계속 이루릴에게 집중시켰다. "그 약 정말 좋네요. 힐링 포션? 비싼 값을 하네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모험가들이 신전을 자주 찾는 것은 그들의 모험의 안녕을 기 원하기 위해서보다는 힐링 포션을 구입하기 위한 경우가 더 많다더군요. 이 약은 너무 비싸서 모험가들처럼 위험하게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구입 할 수도 없죠." "하긴, 100셀이라니. 100셀이면… 어디 보자, 5퍼셀짜리 양초가 2000개 로군. 휘유. 하루에 쉰개씩 만들어도 한 달 열흘 동안 계속 만들면 2000 개. 하지만 재료 준비하고 기타 먹고 쓸 일이 있으니… 에고에고." 네리아가 눈을 둥글게 뜨더니 말했다. "초?" 다른 것 다 내버려두고 왜 초를 말하는 건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직업정신이죠. 난 초장이거든요." "초장이?" 네리아의 얼굴이 더 이상해졌다. 난 윙크를 하며 말했다. "어어, 직업엔 귀천이 없어요! 멋진 도둑이라고 해서 초장이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다고요. 옛 선인들 중 똑똑하신 분이 우리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어요. 빛의 세공사." "빛의 세공사? 멋지네. 그런데 초장이라고? 초장이는 모두 힘이 엄청나 게 세야 하니?" "그건 내 개성이죠. 초장이의 개성은 아니죠." 나는 말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마을의 이야기와 훌 륭하신 우리 영주님의 이야기, 그리고 아무르타트와, 타이번과, 우리의 여행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네리아에게 들려 주었다. 카알은 나와 함께 겪은 사건들이 자신의 관점이 아닌 나의 관점을 통해 새롭게 이야기되는 것을 들으며 즐기는 듯했다. 그는 간혹 고개를 갸웃 거리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는 식의 시선도 보내어왔지만 전혀 방해는 하지 않았다. 운차이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잠자코 꽤 열 심히 들었다. 하지만 샌슨은 엄청난 방해를 해대었다. 화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일 때 는 이야기하는 것이 세 배로 어렵다더니 정말 그렇군.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이루릴이 그 30명의 경비병들을 하늘로 날려보내자…" 그러면 샌슨이 냉큼 끼어든다. "아냐, 후치. 실리키안 남작의 경비병은 32명이었지." "어, 그래?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었지?" "존경해라. 경비대 필수과목이다. 5명씩 묶어서 세는 거지." "아하, 그런 거야?"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면 네리아는 볼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야, 야! 그거 중요하니? 30명이든 32명이든 말이야. 어쨌든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어? 빨리 말해봐, 후치." 이렇게 무수한 방해를 받아가며 이야기하려니 지치지 않을 수 없다. 어 쨌든 간신히 나는 칼라일 영지의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이야기까지 진행 했고 그 이야기는 네리아를 퍽 놀라게 만들었다. 네리아는 그 엄청난 단 어의 길이에 놀란 모양이다. "자, 잠깐. 뭐라고?" "세이크럴라이제이션(Sacralization) 되었다고요. 그래서 칼라일 영지 는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어서…" "…초장이는 원래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써야 돼?" "그것도 내 개성이라고 해두죠. 그런데 계속 이야기해도 될까요?" "응? 아, 그래. 계속해." 시간 가는 것이 대단히 재미있을 정도다. 어쨌든 늦은 점심식사 뒤의 이야기는 하늘이 마구 막막해보이는 시간, 오후가 무르익는 시간까지 계 속되었다. 네리아는 꽤 착실한 청자였다. 그녀는 미소를 짓거나 긴장하거나 하면 서 얼굴의 표정을 지어주는 데 충실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들 었다. 어쩌면 네리아가 날 조종하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 리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테니까. "까르르르… 재미있네. 그럼 완전히 모험가 초보들이구나?" "모험가는 아니죠. 우린 모험을 찾아나온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어. 사람들은 다 모험가야. 산다는 것만큼 큰 모험은 없어." 평범한 말이었지만, 네리아의 말은 꽤나 비장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흔히 그러하듯, 비장한 말이 꺼내어지고나자 다른 사람들이 말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네리아는 재빨리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넌 수도로 끌려가면 끝장이겠네?" 운차이는 네리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네리아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폴짝 뛰어서 운차이의 바로 옆에 붙어섰다. 그리고 운차이의 귓가에 숨 을 불어넣듯이 말했다. "지금 기분이 어때흐…?" 운차이는 귓뿌리까지 벌겋게 되더니 후다닥 일어났다. 그는 마치 자리 를 피하고 싶다는 듯한 몸짓을 했지만 샌슨은 롱소드의 칼자루를 잡아올 려 보여주었다. 운차이가 움찔하자 샌슨은 낮고 위압적으로 말했다. "행동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안돼." 그러자 운차이는 내 왼편에 와서 앉더니 내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 다. "후치! 바이서스 여자들은 모두 방종한 성격을 가지고 있냐?" "예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도 내게 뛰어와 내 오른편에 앉았다. 결 국 나는 운차이와 네리아 사이에 끼어버렸다. 네리아는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후치. 자이펀에서는 도대체 애정생활이 어떻게 실현될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운차이가 내 반대쪽 귀에 대고 외쳤다. "후치. 건전한 애정생활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성숙한 성인이 서로에게 충실함으로써 느껴지는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무에게나 자 신의 성적 매력을 은유적으로 남발하는 것이 여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해? 마치 남자들을 기쁘게 하면 좋은 일이라는 것처럼 여자들이 은근히 음란 한 복장이나 교묘히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남자들을 자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역시 난 대답할 틈이 없었다. 네리아는 말했다. "후치.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로써 여자를 바라보며 자기가 느 끼는 음란한 충동을 여자가 고의적으로 발산한다는 식으로 여자에게 뒤 집어 씌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여자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남 자 혼자서 흥분해버려서는, 자기 혼자 깨끗해지고 싶어서 '여자가 먼저 잘못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 이런 식으로 모든 죄는 여자에게 있 다고 뒤집어씌우는, 그런 소아병적인 추태를 어떻게 생각해?" 난 한숨을 쉬고 말했다. "…두 분, '후치'는 빼고 말해도 좋아요. 계속하세요." 양쪽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이다. 정말 우스운 꼴이다. 그냥 서로 이야 기를 나누면 되는 것 아니냐? 왜 날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지만 난 샌슨에게 네리아가 돌려준 그 돈에 대해 질문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그 수난을겪어야 했다. 어쨌든,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운차이와 네리아의 악다구니는 끝났 다. 난 양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 기의 요지나 결말이 뭔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이지만 결말은 없었을 것이다. 둘 다 모두 서로에게 말하지 않 고 나에게 말했으니 그건 일종의 혼잣말이고, 혼잣말을 서로 떠들어대 는 토론에서 무슨 근사한 결론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특히나 두 사람 이 모두 성깔이 대단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니 무슨 제대로 된 결론 이 나올까. 어쨌든 지금은 해가지고 저녁식사도 끝내었다. 카알의 제안에 따라 네리아는 갈색산맥을 넘을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래도 돼요, 아저씨? 내 직업 알잖아요?" 네리아의 약간은 도전적인 어투에 카알은 싱긋 웃어버렸다. "글쎄. 네리아양의 경우에는 모르지만, 나라면 우리 일행같은 사람의 짐보따리는 노리지 않겠소. 가난하잖소?" 카알의 온화한 말에 네리아는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카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체포하고도 놔주고, 그리고 와이번에게 쫓길 때 목숨 걸고 구해준 사람의 짐보따리는 노리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고마워요. 저, 갈색산맥을 넘을 때까지 여러분께 도움이 되도록 할 께요." 일행은 오늘 손해본 시간을 내일 되찾기 위해 모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갔다. 첫번째 불침번은 내가 서게 되었다. 난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샌슨은 모포를 다 걷어차버리고 큰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있다. 내가 조금전에 모포를 다시 덮어줬는데도 저 모양이다. 그냥 모포를 몸에 감 고 밧줄로 묶어버릴까? 에이, 관둬라. 저러고 자도 감기에 안걸리는 체 질이다.다른 편에서는 카알이 얌전히 죽은 사람처럼 자고 있다. 이루릴 과 네리아는 같은 모포 속에서 서로 따스하게 자고 있다. 운차이는 나무에 발목이 묶인 채 누워있었다. 운차이의 얼굴을 보니,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안 자요?"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 이르군." "자둬요." "걱정 마라. 난 불침번도 세우지 않을 것 아니냐. 포로가 편한 점도 있 지." 하긴 그렇다. 운차이를 불침번으로 세울 수야 없으니 나, 샌슨, 카알이 서로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설 것이다. 이루릴은 다쳤고, 게다가 아침에 일어나 메모라이즈하려면 푹 자둬야 된다. 네리아? 할 수 없지. 믿지 못 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안세우는 것이 낫겠다. "후치." 운차이가 말을 걸었다. 난 장작개비를 다시 던져넣으며 바라보았다. "날 놔줘." "…그건 곤란해요." "사례하마. 기필코 하겠다. 날 놔줘." "안돼요." "기어코 바이서스 임펠에 데려가서 교수대에 걸겠다는 거냐?" 기분 나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난 시무룩하게 댓구했다. "당신은 간첩이 되었을 때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을 거 아네요?"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각오도 있었지." "…살아남겠다고요? 당신은 전쟁포로로 취급되긴 어렵겠죠. 간첩활동을 했으니까. 그리고 당신들이 칼라일 영지에 일으킨 해악을 생각해봐요. 그러고도 살아남겠다고요?" "그건 그 여자의 짓이다. 우린 그 여자의 호위였을 뿐이지. 우리는 그 저 그 땅에 아지트를 만들어두고 그 여자를 기다렸을 뿐이다." "재판에서는 막지 않았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할걸요. 그걸 방조죄 라고 하던가?" 운차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옳은 말이지만, 옳은 말이 아니기도 하다. 자신의 손에 닿지 않 는 것도 많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질 수는 없다." 나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내 눈을 똑바 로 들여다보았고, 난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내 듣기에, 넌 전장과 멀리 떨어진 웨스트 그레이드의 주민으로 바이 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이 살았구나. 하지만 만일 자이펀이 바이서스를 침공해서 너희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너에게 왜 우리 나라에 전쟁을 걸었느냐고 물으며 널 죽이려 든다면, 넌 뭐라고 하겠냐?" "내가 전쟁을 걸진 않았잖아요?" "바로 그것이다. 너의 국왕이 전쟁을 걸었을 뿐이야. 그런데도 너에게 전쟁의 댓가를 치르게 하려 든다면, 넌 뭐라고 하겠냐?" "장기판의 말 신세인 아랫사람만 죽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로군요." "억울하지 않느냐?" "전혀." "…이유를 말해봐라." 모닥불을 다시 헤집었다. 잠시 불티가 밤하늘을 향해 비산해갔다. 나는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4. 황소와 마법검……11. "내가 윗사람이 아니라서 억울하다는 그런 식의 논리대로 따진다면, 난 내가 독수리처럼 날 수 없어서 억울할 수도 있어요. 내가 물고기처 럼 물 속에서 숨쉴 수 없어서 억울할 수도 있지요." 운차이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이 되었다. "넌 독수리나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고 너의 국왕, 귀족, 장 군들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왜 아래에 있는 사람들만 이 댓가를 뒤집어써야 되느냐. 나도 인간이고, 날 바이서스로 파견한 내 상관도 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난 명령 때문에 여기로 왔고 결국 죽 게 되었지만, 내 상관은 또다른 간첩을 육성시키며 지금도 배불리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그 놈이 더 나쁜 놈 아니냐?" "같은 인간? 허, 웃기는군요." 내 대답에 운차이는 놀란 모양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 "바보나 그런 말을 해요. 같은 인간이면서 어쩌니 저쩌니. 헤, 같은 인 간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자신과 비슷한 범주에 넣고 이해하는 것은 다시 없는 바보죠." 운차이는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건 카알의 말씀이시지. 난 내 눈 가득히 검은 밤하늘을 담으며 이야기했다. "당신처럼 생각하면 귀족이나 왕족을 욕하기에는 쉽겠죠. '제기럴, 같 은 인간인데 왜 난 보리빵에 물 한 그릇으로 아침 떼우는데 녀석들은 미 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산해진미를 먹느냐.' 그게 억울하면 나라를 세 우고 왕이 되어버려요.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겠다면 입 다물고 앉아 있 어요." "귀찮아서…라고?" "귀찮은 것 아니예요? 당신 말마따나 같은 인간이면, 당신도 자이펀의 왕(거기서도 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처럼 왕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귀찮아서 하지 않 는 것 아닙니까?"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는거냐? 불가능하지…" "얼씨구. 이젠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무시하시는군요. 당신 같은 화법 은 추해요. 불평할 때는 같은 인간이고, 당신을 그런 사람들에게 비교해 서 꾸짖을 때는 다른 인간인가요?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판하 면 기분나쁜 법이죠. 동일성을 가져요. 그렇게 같은 인간이라면, 이 넓 은 대지 어느 한 편에 나라를 세워요. 이제 너는 왜 그러지 않겠냐고 묻겠지요?" 운차이는 매서운 어조로 질문했다. "묻고 싶군." "난 귀찮아요. 난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로 남는게 훨씬 속편해요. 내가 야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간혹 나도 귀족들이 되고 싶기는 해요.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밤공기가 차갑다. "하지만 누군가가 야심 없고 능력 없는 자의 자기 위안이라고 날 욕하 게 하진 않겠어요. '쳇, 넌 야심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안되니까 비굴하 게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것 아니냐?' 바보 아네요? 그런 사람들은 야심 이 사람의 본능인 것처럼 생각하죠. 자기가 그 야심 때문에 목숨까지 걸며 허겁지겁 돌아다니니까 다른 사람도 그런 줄 알아요. 그런 작자들 은 남을 이해할 줄 몰라요. 뭐, 보통은 그런 자들이 왕이 되고, 영웅이 되고 하겠지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만일 그런 영웅이 무능 력하고 비굴하다고 날 비판하겠다면, 난 그 작자에게 초를 만들어보라 고 하겠어요. 그리고는 '초 한 자루도 못만드는 주제에. 시장 한편에 집 어던지면 굶어죽기 십상이겠군.' 이라고 말해주지요. 그러면 그 작자는 화내겠지요? 하지만 그런 영웅들은 자기 손으로 먹고 살 재주는 없을걸 요? 다만 무한한 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왕이 될 수 있는 능력 을 가졌을 뿐이죠. 그리고 난 그런 야심이 없는 대신, 내 손재주로 내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고." 운차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되지도 않는 말재주로 장황하게 말하자니 머리가 아프다. 결론을 어떻 게 내려야 되나? 에라. 좀 거칠더라도 그냥 끝내자. 머리가 아프다. "그게 진정한 '같은 인간'이지요.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어 요. 당신은 당신을 이곳으로 파견한 상관이 될 수 없어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추억, 당신의 사랑, 당신의 과거의 소중한 것을 모두 팽개치고 그 상관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라면,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럴 수 있어 요? 당신 상관의 아내를 부인이라 부르고, 당신 상관의 자식들을 내 아 들아, 혹은 딸아, 이렇게 부를 수 있어요?" "…내 상관은 독신이다." 난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운차이도 피식 웃어버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잘 모르겠지만, 펠레일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중 요인물이래요." "중요인물?" "뭐라더라…. 당신은 우리 나라의 비둘기파, 그러니까 주화파(主和派) 들을 주전파(主戰派)로 바꿀 수 있는 산 증거물이라더군요. 그러니 당신 의 증언은 중요해요. 그러니까 수도에 도착하면, 당신이 한 짓을 뉘우친 다는 식으로 말해봐요. 그리고 당신 상관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일 이라고 말해보세요." "그런다고 내가 살겠냐?" "그럼 끝까지 조국에 대한 충성을 지켜 교수대의 이슬이 되든가." 운차이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하는구나." "당신이 결정하기 쉬우라고 쉽게 말하는 거죠. 결정을 내려요. 살고 싶 다면, 전향을 해서 당신 조국을 마구 꾸짖고 선전책동의 앞잡이가 되어 요. 그럴 수 없다면, 표표히 죽어가요. 양자가 다 싫다면, 재주껏 달아 나요. 하지만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는 말아요. 알아서 도망쳐요." 운차이는 내 말에 빙긋 웃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알겠다. 책임지지도 못할 꼬맹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구나. 알아서 도망치지." "그게 좋은 태도지요. 잘해봐요. 난 잘 지킬테니까. 조언해봐요? 샌슨 은 의외로 마음씨가 착해요. 샌슨이 불침번일 때 꼬셔봐요. 고향에 있는 처녀가 날 애타게 기다린다는 식이면 꽤 흔들릴걸요?" 윽. 실수다. 샌슨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조언이었군. 운차 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헛기침을 하며 외면했다. 그 때 샌슨이 벌떡 일어섰으니 내가 얼마나 놀랬겠는가. "뭐, 어, 안자고 있었어?" "요놈아, 흉측한 계획을 말하더군. 정말 무서운 계획이라서 모포 속에 서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너에 대한 처리는 좀 있다가 하자." "소변 마려워?" "땅에 귀를 대고 있자니 뭔가의 발자국이 들리더라." 난 재빨리 허리를 튕겨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었다. 샌슨은 갑옷을 걸 쳐입더니 (갑옷 입는 것이 정말 빠르다. 저것도 훈련인가보다.) 한 손에 롱소드를 들고는 내게 손짓했다. "그냥 앉아 있어. 살펴보고 올께." "다른 사람 깨울까?" "조용히."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카알과 이루릴, 네리아를 깨웠다. 그들을 흔들어 깨우고는 조용히 하라고 시키는 사이에 샌슨은 숲의 나무들 사 이로 사라졌다. "발자국?" 이루릴은 누운채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대로 땅에 귀를 대었다. 그 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예… 맞군요. 꽤 많은데요?" 우리는 모두 조심스럽게 일어나 각자의 무기를 당겨쥐었다. 잠시 후 샌 슨이 돌아왔다. 그는 이빨을 마구 갈아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 오크들이다." '그 오크'라고? 우리는 곧 샌슨의 말을 알아차렸다. 네리아도 아까 내 가 이야기해주어서 곧 알아차리는 표정이었다. 그 빌어먹을 오크놈들이 다. 휴다인 고개에서부터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 미드 그레이드 지방까지 우리를 추적한 그 오크들! "아이구, 오크와 복수의 옹호자 화렌차여! 정말 엄청난 복수심을 녀석 들에게 주시는군요!" 내 탄식을 가로지르며 카알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어떤가, 덥쳐올 모양인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약 5, 600큐빗 쯤 떨어져 있는데 지금 포위망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무리무리로 나뉘어 움직이던데요. 어두 워서 수효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약 4,50 마리 정도 됩니다." "이런, 또 달아나야 하는가?" "밤중에 산 속을 달리는 것은 위험할텐데요." "허어, 낭패로군." "결판을 짓겠습니다."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루릴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계획이 있으세요?" "글쎄요… 제 판단이지만 그들로서도 이젠 한계상황일 겁니다. 식료품 등의 보급이 얼마나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갈색산맥에서 우릴 놓치 면 더 이상 따라오지는 못하겠지요. 그리고 갈색산맥을 넘으면 곧 바이 서스 임펠이 나타나니까요. 따라서 이번이 그들로서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그러니 이번만 막으면 됩니다." "어떻게요?" "그들은 지금 불빛을 보고 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은 방심하고 있겠죠. 거꾸로 덥치는 겁니다. 인원은 많이 필요없습니다. 의 외의 방향에서 기습함으로써 놀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저와 후치 가 가겠습니다." "왜 두 분이서죠? 저도 가겠어요." "저, 이루릴은…" "전 이제 괜찮아요. 얼마든지 칼을 쓸 수 있어요. 빨리 가죠." "운차이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자 이루릴은 난처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차 갑게 미소지었다. 기습하러 가면서 그를 데려갈 수는 없다. 난전 중에 달아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놔두고 갈 수도 없고. "…믿으면 되는데." 이루릴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지만 샌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러자 네리아가 발딱 일어섰다. "가자고. 시간 없어." "야, 네리아…" 그러나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챙겨들더니 곧장 숲속으로 들어가버렸 다. "젠장. 멋대로군. 카알, 운차이를 부탁합니다. 이루릴도 여기 계십시 오. 작전이 원활하지 못하면 그대로 달아나는 겁니다. 그러니 말들을 준 비시키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알았네. 조심하게." "가자, 후치." 나와 샌슨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모닥불가에서 좀 떨어지자마자 곧 주위는 캄캄해졌다. 하늘에는 셀레 나가 벌써 진 모양이다. 그래도 루미너스는 아직 남아있어 잠시 후 달 빛에 푸르게 보이는 분지의 지형이 그런대로 보였다. 우리는 숲에서 나 온 것이다. 샌슨은 풀들 위로 머리를 내밀지 않도록 몸을 많이 숙이고 걸었다. 난 그와 똑같은 자세로 샌슨의 뒤를 따라갔다. 컴컴한 밤중에 풀 사이로 걸어가자니 몸에 이슬들이 묻어났다. 우리는 두 마리 두더지처럼 풀숲 을 소리 없이 헤치고 걸어갔다. 잠깐, 두더지처럼? 표현이 이상하군. "그런데 이 여자는 어디로 간 거야?" 샌슨이 투덜거렸다. 정말 네리아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숨어 간 거지? 어쨌든 잠시 샌슨의 뒤를 따라가는데 샌슨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풀들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보이냐?" 뭐가? 온통 검푸른 것들밖에 보이지 않는데? 분지의 풀밭은 검푸른 바 다처럼 보였다. 뭐, 바다를 본 적은 없지만 꼭 이럴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에 있는 샌슨의 얼굴도 시커멓게 보여서 잘 보이지 않 는다. "안보여." "저기… 글레이브가 번쩍이잖아. 저 놈들은 무기에 비반사처리 하는 방 법도 모르는군." "옳거니. 보인다." 간신히 글레이브의 번쩍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위치로 미루어보아 그 머리도 찾을 수 있었다. 풀들 사이로 간신히 구별할 정도의 움직임 이 보였다. "작전은?" 샌슨은 간단히 대답했다. "거대한 함성으로 공격하는 거지." 흐음… 당황하게 만들어서 도망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나는 고개 를 끄덕였다. "서로 흩어지자. 여러 방향에서 함성을 지르는 게 낫지 않겠어?" "그게 좋겠네. 그럼, 난 저기 저쪽에 나무, 보이지? 그쪽에서 기습한 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그 다음에 네가 공격해라. 하지만 절대로 과격 하게 할 필요는 없어. 포위되지 않도록 주의해. 우리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만 하고 달아나라. 알겠지?" "그러다가 놈들이 모닥불쪽으로 달려가면?" "아냐. 기습을 당하면 모닥불은 미끼라고 생각할거야. 하지만 만일 그 런 일이 일어나면 죽도록 달려가서 말을 타고 튄다. 알겠지? 네리아에 게도 외치면서 달려라. 이 여자 정말 어디 숨어있는지 모르겠네." "알았어." 샌슨은 조심스럽게 풀이 흔들리지 않도록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깜쪽같던지 샌슨의 모습이 사라지자 곧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자, 그런데 네리아는 어디 있을까? 난 눈을 부릅 뜨고 간신히 보이는 오크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 했다. 오크들은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하도 여러 번 쓴맛을 보 고나니까 꽤나 조심스러워진 모양이다. 샌슨은 어디쯤 도착했을까? 저 나무쪽에서 함성이 들려오면, 곧장 돌 격이다. 자, 언제쯤이냐. 지금인가? 지금인가? '어랏?' 난 다음 순간 이상한 것을 보고 헛바람을 삼켰다. ================================================================== 4. 황소와 마법검……12. 분지 저편에서 왠 사나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남자는 좋은 체격에 뭔가를 타고 있었는데 그 게 뭔지를 모르겠다. 말은 아니고 덩치가 꽤 좋은 것이 혹시 황소가 아 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설마 황소를 타지야 않았겠지. 달빛 아래에 으슴 푸레하게 보이는데다가 풀밭에 몸이 가려져 있어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 지만 아무래도 말은 아니다. 갑옷도 근사한 걸 입은 모양이다.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품이 아무래 도 금속제인 듯하다. 저런 건 비쌀텐데. 왼팔에 있는 저 커다란 것은 방 패겠지? 그런데 그 남자 꼴이 영 이상하다. 자기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취한 것처럼 머리를 홱홱 저으며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중얼하고 있는데, 고요한 밤의 산 속에서 꽤 멀리까지 들 려온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뭐야? 오크들? 네놈들 여기서 뭘하는 거지?" 어라? 어떻게 발견했지? 남자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멍청한 작자도 있나? 눈이 좋아서 발견했으면 그냥 조용 히 사라지던가 할 일이지 무슨 들꽃을 발견한 처녀 모양으로 '오크 아 냐?'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오크들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며 새로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취치익! 뭐, 뭐냐?" "취치익, 취익!" 풀밭 곳곳에서 날카로운 글레이브의 반사광이 빛났다. 샌슨은 정말 대 단하군. 확실히 4,50여개의 글레이브의 반사광이 나타났다. 곳곳에 퍼져 접근하고 있었는지 꽤 넓은 범위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모습이 섬뜩했 다. 이상한 것 위에 앉아 있는 그 작자는 사방에서 나타나는 글레이브를 둘 러보는 눈치더니 맥이 풀린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어? 한 두 마리가 아니잖아? 뭣들 하는 거… 시끄러워, 말 좀 하 자! 아, 저기 보이는 불빛 때문이군? 녀석들, 여행자를 덮치려고 했군?" 장난 치나! 뭘 타고 있다면 빨리 뒤돌아 도망쳐! 아직 그 남자의 뒤는 막히지 않았다. 나와 그 남자 사이로 오크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양 이다. 나서야 되나? 고함 질러야 되나? 그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덥썩 짚었다. 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였다. "네리아, 도대체 어디 숨어 있었어요? 아니, 그것보다. 왠 골빈 남자 하나가…" "나도 보여. 좋은 표현이네. 골빈 남자라. 저거 정말 뭐하는 녀석이야? 그건 그렇고 샌슨은 어디 있어?" 그러자 풀숲이 흔들리면서 샌슨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여기 있다. 저거 모험가는 아닌 모양인데 단독으로 밤중에 갈색산맥 을 넘어가면서 저렇게 고함을 탕탕 지를 정도의 사람에는 어떤 사람이 포함될까?" "자살기도자, 정신이상자, 지진아…" 우리는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며 오크들과 대치하고 있던 그 남자를 바 라보았다. 젠장, 뭐에 타고 있으니 여차하면 달아날 수 있겠지. 도와준 다면 오크의 뒤를 칠 수 있도록 저 남자가 움직이고 나서다. 그런데 그 남자는 도대체 위기감각이 없는지 넉살좋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별 짓 하지 않았으니 봐주겠다. 어서들 가거라. 좀 조용히 해! 지금 내가 이야기 하는 것 안들려? 아, 오크들. 흠, 어서 가라. 밤길 조 심하고. 아, 참. 너희들은 밤중에 돌아다니지?" 저 남자 말을 꽤 이상하게 하는군. 하지만 내가 오크라도 저 말에는 돌아버리겠다. 오크들도 어처구니가 없다는듯이 말했다. "취이이익! 누가, 누굴 봐준다고?" "저거, 취이익? 돌아버린 인간 아냐?" 옆에서 샌슨이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도 저 말에 찬성이야. 으으음… 도대체 저거 뭐지? 아무리 풋내기 모험가라도 저렇게 앞뒤 없지는 않을텐데? 게다가 말투는 왜 저래?"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남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남자는 피곤한 음성 으로 말했다. "안가? 왜 안가. 봐준다고 했잖아? 야! 닥치라면 닥쳐! 그만 울어! 내 가 오크들을 보내준다고 하잖아! 그만 짜라고! 젠장. 야, 너희들, 빨리 가!" 뭐야? 누가 울고 있다는 거야?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 아무래도 환청을 듣는 모양인데?" "아, 환청? 흠. 그렇군. 정신병자란 말이지." 오크들도 그런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오크들은 이제 낄낄거리고 있었 지만 그 중 하나가 외쳤다. "젠장, 취익! 저 놈 때문에 기습 못하겠다! 쳐라!" 그러자 오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샌슨은 벌떡 일어섰다. "야! 임마들아! 내가 간다!" "그리고 나도 간다!" 오크들은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모양이다. "취치치치엑! 괴, 괴물 초장이다!" 나와 샌슨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위에서 바람이 불더니 네리아가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다. 뭐야? 엄청난 덤블링이군! 네리아는 창대를 수평으로 쥐고 공중제비를 넘으며 우릴 뛰어넘더니 오 크들에게 곧장 달려갔다. "하아압!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달빛이 정말 멋지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허리까지 뒤덮는 풀밭에서 눈부시게 움직이며 오크들을 유린 했다. 마치 양떼를 모는 번견처럼 네리아는 그 사이로 뛰어들지 않고 가장자리로 돌며 오크들을 찔러나갔다. 오크들이 크게 반회전하는 순간, 나와 샌슨이 그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흐아아압!" 샌슨은 롱소드를 검집에 꽂은 채 맹렬하게 움직여나갔고 나도 역시 맹 렬하게 샌슨과 등을 대며 바스타드를 휘둘렀다. 오크들은 글레이브를 휘둘러 우릴 치려 했으나 풀숲 지형에서는 오크들은 거의 턱까지 오는 풀 때문에 동작이 원할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암흑과 풀더미의 도 움으로 무리 없이 오크들을 밀어붙였다. 기습의 효과가 충분히 살아있 는 동안 최대한 겁을 줘야지. 나는 잠시 빈틈을 타서 그 남자를 흘깃 보았다. 그 남자가 타고 있는 것은… 황소였다. 샌슨도 그걸 봤는지 순간적으로 칼부림이 흐트러졌다. "푸엑?" 그 남자는 정말 황소를 타고 있었다. 뭐야, 저건? 진짜 정신병자인가? 그러나 난 오크들과 싸우느라 그 남자를 오래 볼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스르르르… 번쩍! 난 정말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가렸다. 황소에 타고 있던 남자가 아 래로 뛰어내리더니 검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샌슨의 은도금 롱소드 저 리 가라고 빛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날이 좋아도 그렇지 달빛에 이 렇게 번쩍일 수가 있나? 오크들은 기습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네리아 쪽에 있던 녀석들은 크게 돌아서 물러났고 그 틈을 타서 나와 샌슨은 네리아 와 합류했다. 그 남자는 그 번쩍이는 검을 들고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 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우리가 아니라 오크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걸어가면서 혼잣말을 했다. "어쩌겠냐. 그만 좀 울어라! 싸움이란 말이다. 젠장,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주제에 내숭은. 관둬! 시끄럽단 말야! 오크다, 오크. 너도 퍽 좋아 하잖아? 뭐, 아냐? 웃기네!" 아무래도… 저 친구는 맛이 갔다. 저 남자는 머리를 홱홱 휘두르며 환 청을 듣고 있었다. 오크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다가오는 그 남자에 게 돌격했다. "취이익!" "위험! …하지 않네?" 샌슨이 다급하게 외치다가 이상하게 마무리했다. 나도 턱이 빠져서 샌 슨에게 질문했다. "난 못봤어. 샌슨은 봤어?" "아니. 못봤어."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아마 검을 휘두른 모양이 다. 남자에게 달려들던 오크가 그대로 나동그라지며 두 개로 쫙 나뉘어 졌다. 허리를 멋지게 절단해놓았다. "오에엑… 역겹다." 네리아는 두 토막이 된 오크를 보며 헛구역질 소리를 내었다. 처녀가 구역질을 하니 말세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입을 다물었다. 오크들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남자는 계속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지? 좋지? 웃기지 마! 그만 좀 울어!" 그러더니 남자는 오크 무리에게 달려들어갔다. "우와자자잣!" 이건 정말 눈으로 봐도 못믿겠는데, 시커먼 분지의 밤하늘 아래에 보 이는 것은 검의 잔영뿐이다. 눈 바로 앞에서 손을 휘저으면 손가락이 수십 개로 보이는 그것처럼, 남자의 그 번쩍이는 검이 갑자기 수십 개 가 되어버리더니 오크가 절단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게 가능한가? "일단 돕자." 샌슨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그 남자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샌 슨은 그 남자의 동작을 유심히 살피더니, 곧 자신의 방향을 정했다. 샌 슨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더니 남자의 등 뒤에서 등을 맞댄 자세로 섰 다. 아마 남자의 동작에서 발생되는 빈틈을 엄호하려는 모양이다. 남자는 어깨 너머로 샌슨의 움직임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솜씨가 괜찮소? 야! 남자잖아! 날 이상한 놈으로 만들지 마! 난 남자 에게 관심 없어!" 샌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별로 대답할 기분이 아닐 것이다. 나도 일단 뛰어들어 오크들의 뒤를 후렸다. 네리아는 그 길다란 트라이던트로 나 에게 보조를 맞추어 싸웠다. "챙! 챙챙, 쾅!" "크아악!" "취이에에엑!" 나와 샌슨은 늘 그러하듯이 오크들의 무기를 부러트려 놓았다. 그런데 남자는 그게 절묘한 협동공격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나 나 샌슨이 무기를 부러트려 놓으면 지체없이 남자는 오크를 후려쳤다. 젠장.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야말로 풀잎 사이로 부 는 가장 빠른 바람이었다. 그는 나와 샌슨의 빈틈도 엄호하면서 엄청나 게 움직였다. "으라라라랏!" 잠깐 동안에 남자는 오크 10 마리 정도를 해체해놓았다. 어디 푸줏간 에 취직하면 정말 깔끔한 솜씨로 주인에게 사랑받겠다. 오크들은 허리 에 뼈가 없나? 에이, 설마. 그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허리를 잘라놓 지? 그 남자가 싸우는 모습은 어쨌든 그렇게 멋있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 오크들도 생명인데…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 명이면 어쩌라는 거냐? 라고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다. 내가 오크들을 세상에 창조한 것이 아닌 이상, 난 오크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 고 따라서 그 살해가 부당한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누군가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딱딱한 얼굴로 내 존재 이유를 물어오 면 난 정말 할 말이 없다. 내가 '왜' 세상에 있는 거지? 아버지와 어머 니가 날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외엔 없다. 비참할 정도로 없다. 그러니 오크들을 죽이면 안되는 합리적인 이유는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그 남자는 그 이유를 아는 듯이 보이고 그 강철 같은 의지로서 오크들을 도륙한다는 것뿐이다. 더군다나 상당히 깔끔한 솜씨로 오크들을 해체하고 있다. 오크들을 빼고, 그 남자의 손놀 림, 발놀림, 시선의 이동, 다음 행동의 결정을 위한 행동의 변화 등만 본다면 그것은 꽤나 아름답긴 했다. 예술적일 정도로. 어쨌든 샌슨과 그 남자의 호흡 잘 맞는 공격에 나와 네리아가 진로를 차단하자 결국 오크들은 분지 입구 쪽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달아나는 오크들을 바라보더니 칼을 휘둘러 피를 뿌리고는 몸 을 돌렸다. 우리는 순간 대단히 싸늘한 느낌이 등골을 후리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치광이가 우리쪽으로 곧장 오고 있는 것이다. 샌슨은 주춤거리며 우리쪽으로 물러났고 샌슨의 등 뒤에 숨어있던 네 리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야, 야! 샌슨! 뭐라고 좀 해봐, 다가오지 말라고!" "어,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말해… 같이 싸웠는데." 그 남자는 털래털래 걸어왔다. 일단 공격자세는 아니지만 정신병자가 시간 정해놓고 발작하는 것은 아닐테니 나와 샌슨은 긴장한 자세로 검 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30살 정도의 건장한 남자로 잿빛 머리에 하프 플 레이트의 흉갑을 걸치고 있었다. 다리에는 금속제의 레깅(Legging)도 붙이고 있었고 왼손엔 카이트 실드도 들고 있어 중무장을 잘 갖춘 모습 이다. 하지만 그건 기능적인 모습이었고 품위나 우아함은 없었다. 걸치 고 있는 것들은 한 세트라기보다는 여기 저기서 한 두개씩 구해서 붙이 고 다니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우릴 보더니 피식 웃었다. "오크들이 그쪽들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칼들 놓으시지요. 당신들은 산적… 야! 너 무조건 그럴래? 산 속에서 만났다고 다 산적이냐!" 남자는 자기 말에 자기가 고개를 젓더니 의아한 표정의 우리에게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하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내가 미쳤기 때문… 너 끼어들래! 장난 치지마!" 결국 나와 샌슨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난 샌슨을 보았다. "돌았지?" "이것참. 이상한걸. 돌아버린 자의 솜씨로 보기엔 칼솜씨가 보통이 훨 씬 넘던데… 돌아서 그런가?" "역시! 샌슨이군. 돌아서 그렇구나?" 남자는 우리가 물러나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냐. 미안하오. 달빛이 곱지… 아냐, 이런 빌어먹을. 에, 누구 좀 저에게 키스해주세… 아냐! 에, 누구 좀 가까이 와 주겠습니까?" "샌슨, 가봐." "시, 싫어! 키스를 한다잖아! 네리아가가!" "뭐야? 싫어! 내 입술이 싸구려인 줄 알아? 공짜로는 안돼!" 나와 샌슨은 잠깐 동안 앞의 남자와 뒤의 네리아 중에 누가 더 정신상 태가 괴상한지 고민에 빠졌다. "할 수 없군." 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힘으로 제일 나은게 나니까 키스를 하 려고 해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지. 내가 다가서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 을 쉬더니 자기 검을 거꾸로 쥐어 칼날을 쥐더니 내게 내밀었다. 난 의심스럽게 그 검을 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말했다. "각설하고, 제발 그것 좀 쥐어봐." 난 얼떨떨해져서 그 검을 바라보았다. 설마 정신병자라도 검을 내게 주 면서 어떻게 하지는 않을텐데? 이상하군. 남자가 내민 것은 롱소드로 멋지게 생긴 검이었다. 제멋대로에 가까운 남자의 복장에 비해 볼 때 검은 정말 고급으로 보였다. 바디 부분은 검은 색의 금속이었는데 그 가운데로 흰 색의 금속이 길게 박혀 있었고 그 흰색 금속이 무지무지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 고 가드 부분은 바디와 일체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만히 넓어지던 바디가 갑자기 크게 넓어지며 가드가 된 모양이다. 가드의 중간에는 검 정색으로 보이는 보석이 박혀 있다. 남자가 내 쪽으로 내민 힐트 부분에는 흰색의 가죽이 칭칭 감겨 있었고 폼멜은 그저 장식 정도의 기능만 있도록 작았고 가드에 있는 것과 비슷 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상하군. 이 정도의 롱소드에 폼멜이 없다면 균형 잡기가 어려울텐데. 난 되도록 빠르게, 그러나 무례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칼자 루를 쥐었다. 그 검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그래서 폼멜이 없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난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너무해! 앙앙앙! 치한, 치한! 어디다 손을 대! 너 손은 씻었니? 까아 아… 이 지저분한 손 좀 봐! 잉잉잉! 살살 잡지 못하니? 내 몸 부서져! 너무했어, 정말! 외간남자에게 날 넘기다니, 으흑흑! 이럴 줄 알았어. 엉엉엉, 배신이야, 배신! 언젠가는 날 배신할 줄 알았지만…어어어." 난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 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예요? 이게 말한 거예요?" 그 때 샌슨이 말했다. "후치! 남의 무기를 그렇게 땅에 집어던지다니." "앗, 죄송해요." 난 후다닥 다시 검을 쥐었다. 그러자 또 머릿속으로 앵앵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니? 뭐니? 싫다고 집어던질 땐 언제고 또 들어올리니? 어헝어헝! 나 멍들었을거야. 내 몸이 얼마나 연약한데 오크들을 치고, 아아악! 생 각해버렸어! 잊으려고 했는데! 나, 날 오크 몸 속에 집어넣었어! 욕지기 가 나와, 까아아… 오엑오엑! 그리고 땅에 던지기까지 해. 살기 싫어! 죽고싶어죽고싶어죽고싶어!" "…말을 퍽 빨리 하네요?" 내 얼빠진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과 네리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특히 샌슨은 이제 갈색산맥의 분지에 모여선 네 명의 인간 가운데 제정신인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소외감을 느낀다는 듯 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잠깐, 실례." 난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샌슨에게 검을 쥐어주었다. 샌슨은 펄쩍 뛰었다. ================================================================== 4. 황소와 마법검……13. 카알은 질겁을 하더니 검을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나처럼 황급하게 주워들더니 입을 쩌억 벌렸다. 이루릴은 근 심스러운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루릴도 그 검을 쥐게 되자 곧 안색이 변해버렸다. 카알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에고 소드(Ego sword)입니까?" "그렇습니다." 길시언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에고 소드가 뭐죠?" 카알은 넋빠진 얼굴로 말했다. "마법검…들 중에서도 최고의 물건이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간신히 만들 수 있는 칼이라네. 검이 스스로의 자 아를 가지게 되지." "와, 그런데 검이 자아를 가지게 하는 이유가 뭐죠? 그럼 좋나요?" "응? 그야 검이 스스로 주인을 알아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자아가 없는 것이 어떻게 마법을 쓰겠나." "검이 마법을 써요? 우와! 그럼 비싸겠네?" "허허허. 돈으로 따질 수가 있겠나. 네드발군. 웬만한 영지와도 바꾸기 어렵겠지." "와악! 영지를 손에 들고 다니는 셈이네?" 난 감탄해버렸다. 네리아를 보니 그녀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기고 있었 다. 아차, 그녀는 모종의 전문직 종사자였지? 위험하군. 네리아는 시선 으로 꿰뚫을 듯이 그 검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명을 마친 카알도 감동한 표정으로 이루릴의 손에 쥐어져 있는 그 검 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시언을 보며 말했다. "에고 소드라면 이만저만한 보물이 아닐텐데, 혹시 어딘가의 기사님이 십니까?" "천만에요. 떠돌이입니다." "떠돌이라고요… 허어." 검을 손에 쥔 이루릴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 었다. 전혀 평소의 이루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지 으며 말했다. "그러니? 고맙구나." 길시언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걔가 뭐라든가요?" "아, 제가 마음에 든다는군요." 그러자 길시언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녀석. 밝히기는. 저 녀석은 용모 단정하고 마음씨 착하면 남녀를 안따 지고 좋아합니다." 음. 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퍽이나 음란하게 들릴 법한 이야기로 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카알은 점잖게 말했다. "성격이 좋은 에고 소드로군요. 사악한 마법사가 만든 에고 소드의 경 우에는 선한 이의 손에 쥐어지면 그 사람에게 상처 입히거나 지배하려고 들기도 한다던데요." 네리아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격이 좋아서 지배하려 들거나 피에 미치게 만들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칼날도 좋아서 훌륭한 검이고, 마법도 잘쓰는 녀석입니 다만…" 길시언은 하늘을 보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다만 저 수다! 저 끝없는 수다 때문에 주인을 반쯤 미치게 만듭니다! 게다가 내숭을 떤단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절규에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길시언은 꽤나 쌓인 감정 이 많았나 보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 넋두리하듯이 외쳐대었다. "자기도 검이라서 결국 좋아하면서도 적의 몸 속에 들어가는 것을 끔찍 하게 싫어하는 척, 도도한 척 합니다! 어떻게 자기를 오크나 고블린 같 은 동물에게 꽂아넣으냐고 엉엉거리면서도 전투만 벌어지면 미쳐 날뛴단 말입니다! 저게 정말 우습지도 않은게, 하루 종일 입을 다무는 일이 없 는데 단 한 순간, 상대의 몸 속에 꽂아넣을 때만 조용합니다. 왠 줄 아 십니까?" 카알은 좀 끔찍스러운 말이 아니냐는 듯이 머뭇머뭇 웃었다.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혹시 비통해서 그런게…" 길시언은 악에 받혀서 외쳤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럼 천사게요? 저게, 저게 그 때 조용한 까닭은,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듣 고 있죠! 어떤 때는 심장 박동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헤죽헤죽 웃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정말 쥐고 있는 제가 소름이 돋습니다!" 길시언씨… 그건 나도 소름 돋는 말이야. 어휴. "그러면서도 죽어도 아니라고 막 잡아떼고는 왜 자신 같은 고귀한 몸을 저렇게 추악한 것의 몸 속에 쑤셔박냐고 오히려 엉엉 울며 앙탈입니다! 피에 젖었다면서 향수 목욕 시켜달라고 고함지를 때는 어이가 없습니다. 아니, 어느 골 빈 놈이 검을 향수로 씻습니까!" "허, 허허… 그런가요?" 난 피식피식 웃었고 샌슨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킬킬거렸다. 내숭을 떠 는 칼이라. 그것 참 웃기네. 길시언은 그 정도로는 멀었다는듯이 계속 이야기했다. "그래서 저 녀석은 슬라임을 싫어합니다. 아마 베는 맛이 나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구울이나 좀비 같은 언데드를 찌르면 마구 토하는 소리를 내어서 쥐고 있기 고역스럽게 만듭니다. 스켈레톤(Skeleton)을 두드리면 또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아십니까? 비명을 질러댑니다. 자기가 멍들었다 고 생각하죠. 웃기지도 않습니다. 저 녀석으로 스톤 골렘(Stone golem) 을 잘라봤는데 이도 안빠지더군요. 그렇게 칼날이 좋은 주제에 말입니 다. 저도 저 놈 때문에 검법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검법이 바뀌셨다고요?" "예. 찌르기를 거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녀석을 상대의 몸 속에 꽂아넣을 때 저 녀석이 헤죽거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소름이 돋는단 말 입니다. 아니, 그것까지는 견디더라도, 그 뒷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루 왼종일 질질 짜면서 어떻게 자기에게 그런 짓을 시켰냐고 칭얼거립 니다. 돌아버리는게 느껴집니다." 카알은 도무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투로 힘겹게 미소 지 었고 나와 샌슨은 길시언을 외면하며 킬킬거렸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아, 돌려드려야죠." 길시언은 두 손을 다 내밀어 손을 휘저었다. "아닙니다! 제발, 조금만 더 쥐고 있으세요! 부탁입니다. 그 놈이 좋아 하는 사람은 드물단 말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제발. 전 눈 뜨고 있을 때는 계속 그 녀석 수다를 들어야 합니다. 아니, 걔는 심심하면 잘 때도 절 깨웁니다. 꼴에 성능은 좋아서 검날을 진동시켜 소리도 낼 줄 압니 다. 저 놈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자다가 가위에 눌립니다. 제발 절 좀 봐주셔서…" 길시언은 거의 애걸복걸하는 수준이었고 마음씨 착한 이루릴은 승락했 다. "예에… 알겠습니다." 길시언은 안심한듯한 표정이었다. 카알은 궁금함을 참지 못한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길시언씨는 왜 황소를 타고 다니시오?" 카알은 우리들의 말 옆에 묶여 있는 황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흠. 나도 그것 참 궁금하게생각하던 참이다. 길시언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 을 쉬기 시작했다. "저건 황소가 아니라 말입니다." "…예?" "저건 한 때 북부대로의 황제로 불렸던 썬더라이더였습니다. 북부대로 에서 가장 빠른 야생마, 속도의 신, 찰라의 강탈자… 그런 근사한 이름 이 많이 있던 놈이죠.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는지…" "…예?" "저주에 걸렸습니다. 스네어트레일의 다크 메이지 리치몬드와 싸울 때 그 놈이 썬더라이더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저 북부대로의 황제 가 황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예?" 우리는입을 쫙 벌린 채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뭐 이렇게 흥미무쌍하게 사는 사람이 다 있냐? 이건 진짜 모험가인가 보다. 난 이런 작자가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지금 마법검(수다가 심하지만)을 휘두르며 북부대로에서 가장 빠른 말(황소가 되었지만)을 타고 돌아다니는 모험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실례인데요, 당신 애인은 어느 나라 공주고 지금 어느 드래곤에 게 잡혀있죠?" "무슨 말이야? 나 애인 없어." "그래요? 꼭 그럴 것 같은데." "여동생이 드래곤에게 잡혀있긴 하지만…." "음. 그렇군요. 샌슨, 안녕. 이만 자야겠어. 이럴 땐 자야해…." 내 기절하는 모습을 보며 길시언은 싱긋 웃었다. "농담이었어. 걱정하지 마." 아무도 걱정 안한다. 오히려 실망이다. 꼭 그러면 어울릴 듯한데. 샌슨 은 확실히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로 가시는 길이시오?" "수도로 갑니다. 썬더라이더에 걸린 주문도 해소해야 되고,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마법 칼집입니다." "마법 칼집이요?" "예. 마법사 길드에 의뢰해서 사일런스(Silence) 주문이 걸린 칼집을 구할 생각입니다. 저 놈 수다를 좀 막아야 되니까요. 6년을 참고 견뎠지 만 이젠 더 못참겠습니다." 그 때 이루릴이 기겁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큰 귀를 막았지만 곧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휘저었다. "아… 놀랐어요.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가 비명을 질러서." 프림 블레이드(Prim blade)? 저 칼 이름이 프림 블레이드인가? 새침떼 기 칼이라. 길시언은 이루릴에게 물었다. "뭐라고 그러던가요?" "아… 그냥 마구 비명을 지르더니, 추악한 짐승, 내가 적을 쓰러트릴 땐 내가 싫어하는데도 내 몸 구석구석에 그 꺼실꺼실한 볼을 비비며 좋 아하더니 이젠 내가 말도 못하도록 그런 고약한 칼집을…" 길시언은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직접 듣겠습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이루릴이 그렇게 말하니 너무 이상하다. 이루릴은 얌전히 프림 블레이드를 길시언에게 돌려주었다. 칼자루를 받 아든 길시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그것을 왁살스럽게 검집에 꽂아넣었고, 그러자 곧 프림 블레이드는 검집 안에서 떨리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 와, 신기하군. 저게 칼이운다는 것인가? 샌슨과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이 칼집을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숨소리는 너무 커서 옆에 있는 내게 잘 들렸다. 길시언은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검집을 노 려보았다. 그 때 조용히 있던 운차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댁의 몸에서 피냄새가 나오." 우린 모두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놀란 듯이 되물었다. "나 말입니까?" "그렇소." "거야 조금 전에 오크들과 싸웠으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니, 인간의 피요. 꽤 많소. 얼마나 죽이셨소?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군." 순간 길시언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희한한 종류의 미소였다. "모험가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흠. 죽을 고비를 엄청나게 넘기셨군. 댁은 거의 빌린 목숨으로 대지를 걷는데." 운차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고 길시언도 이빨을 드러내었다. 이빨이 깨끗한 빛을 뿜었다. "당신, 살기를 감지하는군? 그것도 꽤 능란한데, 자이펀인입니까?" "그래서 이렇게 포로로 잡혀있지." 길시언은 운차이가 보여주는 밧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입을 조심하십시오." 운차이는 다시 차갑게 웃더니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려 서, 카알이 입을 열었다. "어, 그래, 길시언께서는 갈색산맥을 넘어 바이서스 임펠까지 가실 계 획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랑 동행하시지 않겠소? 이런 험한 곳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길시언은 조금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동행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내가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길시언의 말에 나와 샌슨은 조금 흠칫했다. 그러나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마법검은 마음씨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면서요?" 아, 그렇군. 그러나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어떤 불행이 따라다닐 지도 모릅니다. 인간 관계라는 것이 단순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생 각해보셨습니까?" 어라? 뭐가 이렇게 복잡해? 옆에서 듣고 있던 이루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카알은 눈 을 크게 떴다가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희들이야말로 미안하지요." "예?" "아까의 그 오크들은 저희를 노리고 있었고,그래서 길시언께서는 엉뚱 하게 휘말려든 셈이니까요." 길시언은 얼굴을 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인간 관계가 아무리 덫과 함정으로 가득한 길이라 해도, 선량한 마음 을 지팡이 삼아 걷는다면 상관없을 것이오." 길시언은 잠시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 역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음… 좋습니다. 여러분께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샌슨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그런데 우리는 말을 타고 있습니다. 황소로 따라오시기가 쉽지 않 을 텐데요?" 그러자 길시언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저래뵈도 북부대로의 황제로 불리던 놈입니다. 아마 도저히 황소로 믿 어지지 않을 겁니다." ================================================================== 4. 황소와 마법검……14. 새벽이다. 4시쯤 되었을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주위는 컴컴하다. 사람들이 오가는데, 그것은 모두 그림자뿐이다. 쌀쌀할 새벽공기 사이로 샌슨이 기지개를 켜 는 것이 간신히 보인다. 수건에 물을 뿌려서 얼굴을 닦는다. 우와! 얼굴이 갈라질 듯하다. 이루릴은 얼굴을 닦고 나서 윌 오 위스프를 불러내더니 머리를 마구 휘 젓는 그녀만의 독특한 머리 손질을 하고는 책을 꺼내었다. 윌 오 위스프 의 빛으로 책을 들여다보며 메모라이즈를 하는 것이다. 캄캄한 새벽공기 속에서 그녀만이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편리하군. 난 사그라드는 모닥불 위에 솥을 걸고 다시 불을 일으켜 물을 끓였다. 주위가 한층 밝아졌다. 나는 엊그제 이라무스에서 사둔 고기랑 야채를 집어넣어 끓이기 시작했 다. 스프 스톡이지. 길시언이 이상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요리." "뭐? 그 귀찮은 걸 한다고?" "야외에 나오면 더 잘먹어야죠. 당신은 그럼 요리 하지 않고 뭘 먹으며 돌아다니죠?" "휴대식량이지, 뭐." "당신 정말 재수 좋았어요. 우리와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 특히 오늘 아침. 왜냐하면 재료가 떨어지면 나 요리 안하거든. 엉성한 요리를 할 바에야 때려치운다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은 재료가 충분하거든요." "그런데 그 음식 냄새는 갈색산맥 전체에 퍼질 텐데?" 몬스터들 말인가? "오면 나눠주죠. 어차피 밤새도록 지핀 불은 잘 보였을 텐데." 길시언은 하긴 그렇다는 듯이 웃었다. 난 돌멩이를 모아 따로 불을 일 으킨 다음 프라이팬을 꺼내었다. 버터로 밀가루를 볶는다. 우유와 생크 림이 있다면 크림 스프를 만들텐데. 아쉽군. 볶은 밀가루를 스프 스톡에 집어넣어 휘젓는다. "샌슨, 이리와서 이것 좀 저어." 그리고 난 프라이팬에다가 베이컨을 굽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킁킁거 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네리아가 눈꼽도 떼지 않은 얼굴을 불쑥 내밀 었다. "고소한 냄새… 발작하겠네…" "프라이팬에 눈꼽 떨어져요! 수통 저기 있으니 수건에 물 적셔서 손이 랑 얼굴이랑 닦고 와요!" "니에, 마님." 네리아는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귀엽게 걸어갔고 난 그만 웃어버렸 다.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은 그야말로 구도의 자세로 스프를 젓고 있다. 완 벽한 원을 그리는 팔의 움직임. 스으윽, 사아악. 팔 이외에는 미동도 하 지 않는 상체. 단호한 의지를 담은 강철 같은 얼굴. 불꽃을 응시하는 타 오르는 눈빛. 오! 스프를 젓고있을 때마저도 그는 전사다. 하지만… "그만 저어! 불에서 내려." "어, 그러냐? 음." "거기 옆에 크래커 있을 거야. 부스뜨려 넣어. 그리고 주전자 올려." "알았어." 베이컨도 다 되었고, 이제 팬케익을 굽는다. 샌슨은 주전자를 올려놓았 다. 보골거리는 물거품 소리. 하늘이 조금씩 파랗게 바뀌어 간다. 흠, 또다른 하루, 시작이군, 내일 아침에 눈 뜨는 고통을 맛볼 때까진 하루나 남아있군. 룰루루. 길시언은 대단히 감명 깊은 아침식사였음을 피력했다. 기쁘군. 모두에 게 차를 돌렸다. 이루릴은 매일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오늘 저녁은 제가 해볼께요." "이루릴이요? 흐음. 엘프 음식에 대해서 듣기로…" 잠깐,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엘프들이 먹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 는 들어본 적이 없군. 그게 인간이 먹을 수 있다, 없다, 해가 된다, 아 니다를 떠나서, 아예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루릴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들이 엘프의 음식을 먹는다면 몹시 기분이 상하실 거예요. 먹기 도 힘들고. 인간식으로 해보죠." "그래요? 어, 그럼 인간의 음식은 이루릴에게…" "아뇨. 맛있어요, 후치. 걱정 말아요." "휴우, 다행." 운차이와 샌슨은 마지막 팬케익을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샌슨은 롱소 드를 절거럭거리는 등의 치사한 방법까지 동원했다. 정말 창피스럽군. 그러자 운차이는 무서운 눈으로 샌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샌슨 이 움찔거렸다. "살기군. 정말 컨트롤이 자연스러운데?" 구경하던 길시언의 감탄이었다. 오, 어제 운차이가 저걸로 와이번을 겁 주는것을 봤다. 난 길시언에게 살기가 뭐냐고 물었다. "드래곤 피어에 대해 알아?" "어, 그건, 드래곤이 상대를 마구 겁주는 오러…" "그거랑 비슷해." "사람도 그게 되요?" "사람과 드래곤만 그게 되지. 살기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킬링 오러 (Killing aura). 학자들은 드래곤만 그게 된다고 생각했지만, 흰 토끼를 보셨나요. …아냐! 젠장. 어, 자이펀인들은 그걸 해냈어. 내 생각엔 모 든 동물이 다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은 드래 곤과 인간일 거야. 인간은 원래 짐승에 가까우니… 방해하지 마! 에, 그 러니까,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니까 될 것 같기는 한데, 성격상 안될 것 같다. 엘프는 몸매가 너무 좋으… 그아아아악! 임마! 아니, 엘 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니까!" 흠, 모험가들은 똑똑하군. 카알은 감탄한 눈을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아가면서도 끝까지 꿋꿋하게 행하여진 길시언의 설명을 들었다. 나? 배를 잡고 웃었지. 결국 운차이의 살기에 눌려, 샌슨은 마지막 팬케익을 양보했다. 운차이 는 내게 말했다. "살기를 퍼트릴 정도의 맛이야. 훌륭하다, 후치." 난 미소 지었다. 아마 샌슨이 음식을 양보한 것은 이게 평생 처음이 아 닐까 한다. 속으로 눈물을 쫙쫙 뽑고 있겠지. 아무래도 저건 황소가 아니다. 황소라면, 저건 미친 황소다. "허, 그거, 제법 잘, 달립니다?" "그쪽도, 보통 말이, 조용히 해! 아니군요!" 샌슨과 길시언은 서로 양쪽의 승마술과 승우술 (이런 말이 가능한지 모 르겠지만, 어쨌든 황소를 타고 달리고 있으니까.)을 칭찬하면서 달렸다. 길시언은 허리에 있는 프림 블레이드에 한 손을 얹고 달리고 있느라 여 전히 말이 이상했다. 하지만 손을 대고 있지 않으면, 그러니까 말을 들 어주지 않으면 프림 블레이드는 계속 웅웅거리기 때문에 손을 뗄 수가 없다. 참으로 수다스러운 칼이군. 덕분에 길시언은 한손으로 썬더라이더 를 달리게 하고 있었다. 내 허리를 붙잡고 있던 네리아가 투덜거렸다. "좀, 적당히, 달릴 수, 없나?" "힘들죠?" "그래도, 네가, 바람막이라서, 좀 낫네." "저 황소, 정말 잘, 달리네요." 그러니까 시작은 이렇다. 샌슨은 길시언의 황소가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까봐 천천히 달렸다. 그 런데 길시언의 황소는 샌슨을 앞질렀다. 그러자 샌슨은 제법이라는 식으 로 씨익 웃으며 속도를 높였고, 그러자 길시언도 씨익 웃으며 속도를 높 였다. 그러자 샌슨은 입술을 깨물며 최고 속도로 달렸고, 길시언도 눈을 사납게 뜨면서 속도를 높였다. "이랴아! 하아, 하아!" "으랴, 하! 그 말 하지마! 이랴아!" 결국 둘은 지금 갤럽으로 갈색산맥의 험한 산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 뒤에서 따라가는 운차이는 죽을 맛일게다. 그리고 그 뒤의 카알 과 이루릴도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었고, 맨 뒤에서 나와 네리아가 달렸 다. 네리아는 말이 없어서 나와 함께 타고 있다. 난 샌슨 같은 체격은 아니 라 좀 강마른 체격이고 네리아는 가벼운 편이니 제미니에게 부담은 별로 없겠다. 왜 나와 함께 타느냐… 네리아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샌슨 과 함께 타자니 과거에 한 짓이 있어서 함께 못 타고, 운차이는 절대로 여자와 함께 못탄다고 했고, 길시언은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데다 황소 에 타기는 싫다고 했고, 이루릴은 미인이라서 싫고, 그러니 남은 건 카 알과 난데, 내가 카알보단 체격이 가느다라니까 더 좋댄다. 합리적이군. "우두두두두!" "이랴, 하,하,하, 하아!" 그건 그렇고 저 황소 정말 시원스럽게 달린다. 자기가 말이라고 착각했 는지, 아, 원래는 말이었다고 했지? 저주를 받아서 황소가 되었다고? 흠. 어쨌든 황소가 저렇게 신나게 달리는 것은 보다보다 처음 봤다. 황소는 뛰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뛸 일이 있다면 다리를 편 채로 뛴다. 몸이 무거운데다가 다리가 짧아서 그렇게 다리를 많이 구부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길시언의 저 황소는 흡사 말처럼 몸을 띄운채 다리를 구부리며 달리고 있다. 그러니까 말처럼 땅을 박차며 달리고 있다. 뒤에서 보고 있자니 경탄스러울 정도다. 결국 길 사정이 좀 좋지 않아졌을 무렵에야 두 사람의 기수는 질주를 멈추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각, 다각. 푸르르릉!" "음메에에에…!" 슈팅스타도, 썬더라이더도 모두 거품같은 땀을 흘리며 씩씩거리고 있 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운차이였을 것이다. 샌슨은 달리고 싶 은대로 달리면 되지만 운차이는 밧줄 때문에 샌슨과 맞추어 달려야 했을 테니 두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운차이가 타고 있는 앰뷸런트 제일은 그 대로 쓰러지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운차이는 노랗게 변한 얼굴로 뒤에 따라가고 있던 카알에게 손을 내밀 었다. "물… 물 좀 주십시오. 헉헉." 운차이는 수통으로 나팔을 불며 걸어갔다. 썬더라이더는 천천히 걷게 되자 모듬발로 걷고 있었다. 아, 원래 야생마라고 했지? 북부대로의 야 생마들 중에는 가끔 모듬발로 걷는 놈들이 있다고 들었다. 황소가 모듬 발로 걸으니 그건… 정말 눈 뜨고 못봐주겠지만. 샌슨은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지 고개를 돌려 씩씩하게 말했다. "저기 저 산 보이십니까? 갈색산맥의 주봉인 닐 드루카입니다." 카알이 파랗게 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저걸 넘는다는 말은 아니겠지, 퍼시발군?" "천만에요. 우리는 중부대로로 다니고 있는 겁니다. 산을 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 중 닐 드루카 아래에 도착한 다음, 내일 그 산등성 이에 있는 메드라인 고개를 넘을 겁니다." "흐음. 오늘 여정은 벅찰 것 같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기…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수면이 보이시죠? 요정의 성이 있다는 레브네인 호수입니다. 저기까지만 달려가면 그 다음 은 평탄한 길입니다. 오후 동안은 호숫가를 따라 걸어가는 편안한 여행 이 될 것입니다." "걷는다고?" "예." 카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마찬가지다. "잠깐, 이상하잖아. 여기서 저기까진 길이 좋지 않은데 달려가고, 저기 서부턴 길이 좋은데 걸어간다고? 바뀐 것 아냐?" "아냐. 저기선 걸어가야 돼." 그 때 내 등뒤에서 네리아가 내 귀에 숨을 불어넣듯이 말했다. "저 아름다운 호수엔 요정의 성이 있다네흐…" 으우웃! 닭살이야. "우우우… 그만해요! 그런데 요정의 성이요?" "까르르. 저긴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성이 있지요. 경건한 마음으로 경 배하듯이 걸어가야 돼. 소란스럽게 달리면 안돼. 조용히만 걷는다면 중 부대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란다." "가장 안전해요?" "몬스터가 없거든." "몬스터가 없다고요?" "페어리퀸의 영토니까." "그럼 소란스럽게 달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녀의 영토에서 무례하게 달리면? 모르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그렇게 달린 자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거든." 어어? 어. 장난이 아니네? 샌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서 저기서 속도가 느려질 것을 감안할 때, 오전 동안은 열심히 달 려야 될 것입니다. 길시언. 그 황소는 더 달릴 수 있겠습니까?" 길시언은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프림 블레이 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샌슨은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다. 길시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그 쪽 말이 좀 지쳐보이는데 잡아먹어버리는 것 이… 아냐! 임마, 끼어들지마! 에, 지쳐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뭐,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그쪽이야말로 달리며 이야기까지 하느라 힘들어 보이는군요." "천만에요. 동시에 두 가지 정도 하는게 뭐 어렵겠습니까. 난 정신병자 라서… 젠장! 너, 임마!" 샌슨은 킬킬 웃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울상이 되어 따 라갔다. 아무래도 이 질주에는 그 마지막 팬케익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좀 내포된 것이 아닐까 한다. ================================================================== 4. 황소와 마법검……15. 산길을 달려가는 것은 말도 괴롭겠지만 사람도 괴롭다. 말 위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중노동이다. 말은 자신이 태우고 있는 자의 균형까지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이름난 명마라면 혹 모르지만, (길시언의 썬더라이더는 이름난 명마였다지만 지 금은 황소다. 흠.) 보통의 말에 속하는 슈팅스타, 트레일, 제미니, 레이 셔널 셀렉션, 그리고 앰뷸런트 제일은 자신의 몸무게에다가 기수의 몸무 게, 그러니까 최대 300 파운드에서… 최저치는 모르겠다. 이루릴의 몸무 게를 모르니까. 어쨌든 최대 300 파운드는 되는 기수들을 싣고 달리는 것만 해도 죽을 맛일게다. 그러니 기수는 자기가 알아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산길의 급격한 경사 때문에 제멋대로 움직이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웬만한 승마술로는 어렵다. 이루릴을 보라! 저 놀라운 움직임은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말의 충격이 전혀 기 수에게 전달되는 것 같지가 않다. 등자에 얹힌 그녀의 발과 다리는 말 과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그녀의 허리 위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허리에서 하반신의 모든 충격이 사라지고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다. 샌슨? 저 인간의 탈을 쓴 오우거는 말을 끌고간다고 표현해야 옳다. 분명히 말 위에 타고 있지만, 그는 마치 자기 가랑이 사이의 말을 앞으 로 질질 끌고가는 느낌이다. 힘이 넘치는 승마술이다. 말의 방향을 바꿀 때 그는 고삐로 하지 않고 300 파운드는 쉽게 넘어가는 그의 온몸을 기 울여 말을 틀어버리는 듯하다. 그러니 슈팅스타는 옆으로 휩쓸리듯 몸을 틀 수 밖에. 운차이는 나동그라지기 싫어서 죽자고 샌슨을 따라가고 있으니 별로 볼 품이 없다. 카알의 승마술도 그저 그렇고. 역시 봐줄만한 것은 길시언이 다. 황소! 저 미친 황소를 다루는 그의 능력은 엄청나다. 황소라서 그의 위 치는 참 낮고 그래서 충격이 머리 끝까지 올라가는 모양이다. 아마 이빨 이 부서져라 부딪히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평평하고 약간 휘우듬한 황 소의 등은 안정감이 없다. 그리고 그는 황소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왼손에 쥐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와의 대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그는 오른손으로만 고삐를 쥐 고 왼손으로는 왼쪽 허리의 프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마지 막으로, 그는 좀 구색이 안맞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중 최고의 중무장을 갖추고 있다. 아마 꽤나 무거울 것이다. 그런데도 용케 떨어지고 있지 않는 것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나? 난 최악이다. 내가 제일 뒤에 달리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무도 못볼테니까. 제미니 는 다른 말들의 두 배에 가까운 체중 때문에 (그래도 샌슨의 몸무게 정 도일 것이다. 난 별로 덩치가 크지 않고 네리아는 날씬하니까.) 기진맥 진하고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난 떨어지지 않는데 에만 신경을 써도 모자란다. 그런데 네리아는 계속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 칵! "어머, 흔들려! 왜 이러는, 거니?" "길이, 엉망이잖아요! 좀 떨어져요!" "안돼, 싫어, 무서워." "뭐가 무서워요!" "떨어질까봐. 으음…" "소, 손 올리지 못해요!" "얘는, 흔들리니까 그렇지." …요런 식이다. 망할! 애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냐? 엉? 악전고투 끝에, 정말 거의 전투에 가까운 질주 끝에 우리는 간신히 정 오가 되기 저에 고개를 넘어서 평지로 내려섰다. 이루릴은 전혀 변함이 없어서 몇 시간이라도 더 달릴 수 있는 모습이었 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녹초가 되어버렸다. "고, 골반이 뒤틀린다아아…" 네리아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땅에서 기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카 알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 표정은 미골의 아픔을 삭이 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그러지 않다면 왜 서 있겠는가. 난 운차이와 나 란히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 아하, 아하하하…" 오우, 짜릿한 충격이 저 아래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군. "저, 저 짐승 같은 놈. 정말 무, 무식하게 달리는군." 운차이는 샌슨에게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말에 적극 찬성이다. 샌슨은 입술을 삐죽이며 가볍게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옆의 길시언 은 황소 등 위에 드러누워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는 썬더라이더의 넓직 한 등을 침대 삼아 누워서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샌 슨의 판정승이군. 하지만 대결이 공정하진 못했어. 길시언은 황소를 탔 으니까. 샌슨은 외쳤다. "밥먹자!" "아아아아아… 샌슨!" "왜?" "…내 안장 주머니에 팬케익 있어. 꺼내 먹어." "알았어." 콰당! 땡그렁. 뭔 소린가 싶어 돌아보니 길시언이 기어코 황소 등 위에 서 굴러떨어졌다. 하프 플레이트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는 엄청났고 그 옆에 떨어진 카이트 실드는 핑그르르 돌고 있었다. 그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악, 하악." 샌슨은 그걸 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거기 누워있다간 황소가 싸면 입에 떨어지겠소." "우으으음…" 길시언은 죽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망자의 신음소리를 뱉었다. 흠, 왠지 적절한 듯한 표현이다. 레브네인 호수는 산중호였다. 그 엄청난 크기 하나만 빼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모습의 산중호로, 수 면에는 근처의 산의 모습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트인 곳 으로는 아마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레브네인 호수의 서 쪽 자작나무 숲에 서 있었는데, 호수가 넓고 곳곳에 곶이 튀어나와 남 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형상 남쪽으로 낮아지니까 거기 로 빠져나가겠지. 게다가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폭포의 우르릉거리는 소 리도 들려왔다. "저어어어어어기 북쪽을 따라 크게 도는 거야." 샌슨은 팔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지만 우린 북쪽 땅이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 동쪽도 아스라하게 물 위로 솟아있는 산봉우리의 모습만 이 보였다. 정말 광대한 호수였다. 이런 호수가 산 속에 어떻게 생겼는 지 의아할 정도였다. 평지라면 그냥 물이 고여서 생길 수도 있겠지만, 여긴 산 속이 아닌가? 산 속에 어떻게 이런 많은 물이 고이는 거지? 네리아는 내 질문에 대답했다. "물을 잡아뒀거든." "예? 무슨 말이죠, 네리아." "수백년 전에는 이 호수는 훨씬 낮고 작았어. 지금의 1/10 쯤? 그리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아름다운 성이 호숫가에 있었지. 그런데 다레니안 이 물이 빠져나가는 남쪽에 산을 몇 개 세워서 물이 모이도록 했어. 결 국 호수는 범람하고 물은 수년에 걸쳐 점점 차올라 다레니안의 성은 물 속에 잠기게 되었어. 결국 남쪽에 새로 생긴 산들 사이로 폭포가 만들어 져 수면은 더 올라가지 않게 된 거야." "다레니안은 왜 그렇게 했는데요?" "그건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고 하던데." "남자? 인간 남자요?" "으응. 그녀는 어떤 인간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와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물 속에 가라앉혔다고 해요. 영원한 물의 감 옥으로 말이야. 멋있지?" "틀려요." 갑자기 들려온 말은 이루릴의 목소리였다. 이루릴은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등을 돌린 채 멀리 보이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가 물었다. "틀려요?" 이루릴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다시 찾아오지 못하도록 저 성을 폐쇄했죠. 90년전, 그녀의 성에 들렸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아름다운 성이었죠." 90년… 맙소사.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길시언이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싫어요." 이건 인간의 말이라면 불쾌하게 들릴 법한 말이지만, 이루릴은 그저 부 정의 뜻을 표현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인간이 라면 '죄송하지만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정도로 말했을 법한 어투였다. 어떻게 저 짧은 말에 그런 의미를 담는 것인지는 잘 모 르겠지만. 그래서인지 길시언도 별로 화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난 앞 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한데요. 이루릴. 이 호수는 수백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했는데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전 90년 전에 물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성에 간 것이죠. 놀라운 광경 이었어요. 하늘로부터 내려온 햇살이 물 속에서 수십, 수백 가닥으로 갈 라져 일렁이는 가운데 호수의 바닥에그녀의 성이 서 있었죠." 와! 정말 멋있었겠군. 하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그런데요… 어떤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백년 동안 물의 장벽으로 막아야 되는 남자라면 그건 인간이 아니잖아요? 그저 인간을 막기 위해 저런 엄청난 장벽을 만든다는 것은…" 이루릴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그 남자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였어요. 더 이 상은 묻지 마세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아니, 잠깐. 그 마법사는 300년 전의 인물이잖아? 그는 루트에리노 건 국왕을 도와 우리 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가 있었기에 루 트에리노 대왕은 바이서스를 건국할 수 있었지만, 루트에리노 대왕이 아 니라면 그도 아무런 일을 못하고 그저 조금 능력 있는 마법사로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알려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난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라면 역사에 대해 훤할 것이다. 그 정도로 유 명한 인물의 이야기라면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알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이상하군. 식사와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샌슨은 우리를 모두 말을 끌고 걸어오게 했다. 말을 타면 안된단다. 그는 한손엔 슈팅스타의 고삐, 다른 손엔 지 리서를 들고서는 호수의 수면 가까이 걸어갔다. 호수 쪽으로 가까이 걸어감에 따라,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되는 장소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길하 거나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마치 허락도 받지 않고 영주님 의 집무실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있을만한 장소가 아닌, 터무니없이 고귀한 장소에 함부로 들어가는 듯한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주위 어디를 보아도 신격이 느껴질 만큼 굉장한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 다. 그저 산 중에 있는 터무니없이 큰 호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네리아가 그런 날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소근거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지?" "어, 당신도 그래요?" "모두 다 그럴 거야. 여기는 페어리퀸의 영토니까." 흐음. 신기한 일이군. 샌슨은 이윽고 수면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지리서를 보더니 그것을 읽 기 시작했다. "저희들…"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샌슨은 헛기침을 하더니 좀 크게 말했다. "저희들, 대지를 걷는 방랑자가 고귀하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영토를 걷고자 하오니…" "됐어요, 샌슨씨. 가죠." 이루릴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샌슨은 고개를 돌리더니 얼빠진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말에 오르면서 말했다.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땐, 인사나 허락은 필요없어요." "예?" "전 다레니안의 친구이고, 저의 친구는 곧 다레니안의 친구죠. 가요. 조용히 예의를 지켜 걸어가면 됩니다." "아, 예…"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에 올랐다. 이루릴의 태도가 확신에 차 있었으므로, 우리 모두 별 불안감 없이 말에 올랐다. 우리는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말을 걷게 했다. 네리아가 내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헤에. 동료가 좋긴 좋구나? 원래 한참 떠들고나서 허락을 받아야 지나 갈 수 있는데." "허락이요?" "원래 물 속에서 광채가 솟아오르게 되어 있어. 그게 페어리퀸의 통과 신호이고 그래야 지나갈 수 있지." "어? 잠깐만요. 지금은 광채가 없었잖아요?" "어머나? 너 왜 이러니? 이루릴이 말했잖아?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때 허 락이 필요없다고. 마찬가지로 다레니안도 허락의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 는 거겠지." "어라. 좋은게 아니군요. 허참. 구경하면 멋있었을텐데." "음, 그렇긴 그렇네. 볼만하거든. 호수 가운데서 광선이 쫘악 올라가서 하늘까지 솟구치지. 근사해. 특히 밤에 볼 때는 정말 멋있어. 하아…." 아깝다…. 음, 돌아올 때 봐야지. 우리 일행은 모두 점잖게,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이 보조를 맞추어 걸 아나갔다.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그 이상한 기분은 여전했 지만, 더욱 이상한 건, 그런 기분을 느낄 때 당연히 느껴져야할 할 반발 감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호수는 우리에게 적의가 없다. 그저 유려 하고 아름다우며, 페어리퀸의 성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물일 뿐이다.마 치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치윳!" 시야 한 구석에서 뭔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겁한 내 마음은 날 낙마시킬 뻔 했다. 호수 한 가운데서 붉은 빛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수면 아래의 빛은 잘 보 이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호수의 맑은 물에도 불구하고 수면 아 래는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광선 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시야가 닿는 극한까지 하늘로 뿜어져 올라가 구름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감정, 무서운 적의가 느껴지며 그 에 반발하는 나의 적개심도 느껴졌다. 난 저것이 싫다! 저건 무섭고, 끔 직하다! "저, 저거예요?" "아, 아냐. 저건 거부인데! 붉은 빛은 거부야!" 말들이 투레질을 시작했다. 말들은 히힝거리며 발을 굴러 호숫가에서 멀어지려 했다. 당황한 사람들은 말을 진정시키느라 제대로 대화를 나누 지 못했고 우리 일행의 말은 단속적으로 들려왔다. "뭐야! 다레니언이 거부를?" "토,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어, 이럇! 정신차려! 도, 도망가야 하나?" 그 때 이루릴이 외쳤다. "쾌속의 다리를 가지고 무한한 속도에 도취되는 정열적인 영혼을 가진 짐승들이여, 진정해요!" 말들의 버둥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이루릴은 말 안장 위로 뛰어올 라 자신의 말 위에 섰다. 갑자기 왠 서커스지? 저건 그녀를 닮아가는 침 착한 말 레이셔널 셀렉션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이루릴은 다시 안장에 앉더니 말했다. "안보이는군요. 어쨌든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호수와 그 주변의 땅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당한 모양입니다." 샌슨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 우리가 아니고요?" 이루릴은 생긋 웃었다. "인간은… 그런 면이 있죠.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생 각. 그런 놀라운 생각 때문에 그들은 번영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 요." 샌슨은 얼굴을 붉혔다. 이루릴은 말했다. "이상하군요. 다레니언이 거부를 말하는 일은 적은데. 그녀는 어떠한 존재라도 예의를 지키면 지나가게 해줍니다. 몬스터들은 아예 이곳에 범 접하지 못하니 아닐 테고…" "치윳!" 기이한 소음과 함께 수면 위에는 다시 빛이 솟아올랐다. 조금전보단 안 정되었지만 그래도 크게 놀랐다. 이제 두 개의 광선이 올라가고 있었다. 치윳, 치윳! 곧이어 세번째, 네번째 광선이 솟아올랐다. 호수의 표면이 마치 바늘꽂이가 된 듯했다. 붉은 광선들이 빗발처럼 하늘로 쏟아졌다. 이루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렇게 격렬한 거부가… 으음?" 이루릴은 급격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멀리 우리의 앞쪽을 바라보았다. "뭔가가 달려오고 있어요." "뭐죠?"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기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요." 샌슨은 그 말에 재빨리 롱소드를 뽑아들었고 길시언도 뒤질새라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카알은 일행의 뒤로 돌아가 활을 뽑아들었고 나 는 앞으로 나섰다. "네리아는…?" 네리아는 벌써 말에서 내려 등에 매고 있던 트라이던트를 뽑아들었다. 그리곤 옆의 숲으로 달려가더니 트라이던트를 땅에 짚으며 솟아올랐다. 그녀는 공중에서 나무를 박차더니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보이지 않게 되 었다. 어찌나 날렵하던지, 마치 다람쥐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듯했다. "대단해." 난 침을 삼키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두두두- 하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말, 그것도 꽤나 숫자가 많다. 앞쪽에서 마침내 모습이 보이기 시 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검은 점으로 보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 시각각 커져가고 있었다. 이거, 뒷통수가 뜨끈해질 정도군. 긴장되는데? 샌슨은 재빨리 자신의 안장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 카알에게 건네주 었다. 운차이는 그렇게 카알에게 인계되었다. 그 사이에도 이루릴이 중 얼중얼 말했다. "인간, 남자, 8명, 검은 옷, 두건, 활!" ================================================================== 4. 황소와 마법검……16. "프로텍트 프럼 노멀 미사일(Protect from normal missile)!" 길시언은 고함을 지르며 프림 블레이드를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프림 블레이드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갔다. 마법을 쓰기 위해 자아 를 가진 마법검! 그 빛은 삽시간에 퍼져 우리 앞쪽에 맑은 푸른색의 막 을 형성했다. "탱, 탱탱!" 날아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뭔가 공 중에서 방어막에 맞아 튕겨나기 시작했다. 화살이었다. 샌슨은 악을 썼 다. "뭐하는 녀석들이야! 산적인가?" 길시언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산적들이라고 보기엔 화살이 정확한데. 기마사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솜씨의 전사들일게요." "아, 그렇군!" 칼은 말에 옆으로 앉아서도 쐈는데… 그런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그들 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검은색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 었고 타고 있는 말들도 모두 흑마다. 젠장, 산적이라고 보기엔 코스튬이 너무 잘 통일되어 있는데? 말들은 호숫가를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물보라가 하늘로 쏟아지고 있었다. "촤아아, 다다다다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롱소드를 뽑아들기 시작했다. 왼팔에는 모두 라운 드 실드를 들고 있었다. "말로 해결이 안되겠군." 카알이 노한 음성으로 말하더니 롱보우를 당겼다. 그리고 이루릴도 캐 스트를 시작했다. 카알은 시위를 놓았다. 탱! 경쾌한 탄력음과 함께 화살이 쏘아져 나갔 다. 그런데 맨 앞에 달려오고 있던 자가 방패를 내밀어 화살을 튕겨내었 다. "노, 놀랍군!" "매직 미사일!" 이루릴의 몸 둘레에서 나타난 다섯 개의 광선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 광선은 달려오는 남자들의 주 위에서 소멸되었다! 이루릴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안티 매직 쉘(Anti-magic shell)?" "이런 빌어먹을!" 샌슨은 고함을 지르더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공격 당할 수는 없다. 나도 말을 박차 달려가기 시작했고 길시언도 달려가기 시작 했다. 황소인 썬더라이더가 정말 말이 못당할 정도의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음메에에엣!" 오우, 용감한 황소여! 제미니, 들었지? 가자! "이힝힝힝힝!" 이건 정말 자신 없는데. 난 땅에서는 간신히 싸우지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말 위에서의 싸움은 처음인데, 제기랄, 게다가 끔찍한 놈들인 데. 에이, 최악의 경우 사망이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내게 저지를 수야 없겠지! 달려라, 제미니! 그 때 샌슨이 외쳤다. "후치! 시간차 공격이다, 내 뒤를 따라!" 뭔 말이야? 그러나 댓구할 새도 없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샌슨이 첫번 째 남자와 부딪혔다. 그들은 서로 격렬히 검을 부딪히면서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콰광! 둘은 균형을 잃으며 서로 지나쳐갔다. 말들이 쓰러지지 않기 위해 거칠 게 땅을 밟아대며 후숫가의 물보라와 모래를 함께 튀겨 올리고 있었다. 얼굴에 물이 날아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철썩, 쏴아아, 푸르릉!" 그리고 난 그 때 샌슨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샌슨과 검이 부딪히느 라 검을 쥔 팔이 뒤로 크게 젖혀졌던 그 남자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달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휘둘러 그 자의 복부를 후려쳤다. 내 힘에 말의 속도까지 더한 공격이다. "쾅깡!"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그 자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쇳소 리? 남자의 로브가 크게 찢어져 있었으며 그 안이 보였다. 이 자들, 로 브 아래에 체인 메일을 입고 있잖아? 그 자는 체인 메일을 믿고 방심하 다가 순수한 힘으로 치는 내 공격에 뒤로 날아가 쳐박히고 말았다. 남 자들은 두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으윽!" 뭐야? 고개를 들어보니 샌슨이 어깨를 부여잡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놈들도 우리 둘과 똑같은 전술을 썼다. 앞에 달려오던 놈 뒤의 녀석이 샌슨을 공격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자는 이제 나에게 달려오고 있다. 그 자는 라운드 실드로 앞을 가리고 그 옆으로 롱소드를 랜스(Lance)처 럼 내밀고 있었다. 멋진 돌격 자세군! 하지만 이거 먹어봐! "기름 젓기!" 말 위에서 기름 젓기를 하다가 나는 제미니의 귀를 날려버릴 뻔 했다. 어쨌든 그 자는 라운드 실드로 여유있게 내 바스타드를 막아내었지만 그 라운드 실드는 박살나며 그 자는 그대로 뒤로 튕겨버렸다. "이런 말도 안되는…!" 콰다당! 남자는 그대로 나가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버렸다. 모래에 깊게 패인 자국이 남았다. 아마 그 자는 내가 꼬마라 얕봤겠지. 그렇잖다면 샌슨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의 남자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난 그제서야 간신히 말을 돌려 세웠다. 길시언이 보였다. "으합!" 길시언은 옆에서 뻗어오는 검을 방패로 쳐내며 그대로 밀어붙이고, 앞 으로 오는 자에게 프림 블레이드를 내찔렀다. 앞에서 오던 자는 그것을 옹케 막았으나 썬더라이더가 상대편 말을 들이받았다. 굉장하군! 그야말 로 인마일체(人馬一體), 아니 인우일체(人牛一體)다! 황소의 뿔에 들이 받힌 상대편 말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 기수 는 말에 깔려버렸다. "크아아악!" 그런데 이상하다. 우릴 스쳐 지나갔던 남자들 중 쓰러진 세 명을 제외 하고 네 명이 길시언을 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나에게 달려왔다. 길시 언의 무장이 가장 좋으니 그가 제일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저 작자들은 황소를 탄 전사가 우습지도 않나? "이크! 이 자식이!" 딴 생각 하다가 큰일날 뻔했다. 내게 달려오던 놈이 제미니를 치려고 한 것이다. 난 생각할 것 없이 바스타드로 그 자의 검을 내려쳤다. "으아아악!" 남자의 검이 부러지며 그는 그만 낙마하고 말았다. 너무 강하게 내려치 자 충격으로 균형을 잃은 모양이다. 길시언이 위험하군. 난 길시언을 돕 기 위해 달려갔다. 그 때 이루릴이 뛰어와 한 명의 허리를 찔렀다. "찰그랑!" 금속음이 요란히 퍼지며 에스터크는 상대를 파고들었다. 체인 메일이라 도 에스터크처럼 뾰족한 찌르기 검은 막지 못한다. 남자는 상체를 부르 르 떨더니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 때 하늘에서 고함소 리가 들려왔다.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대단한 버릇이군. 네리아가 나무 위에서 도약하더니 한 남자의 등 뒤에 내려 앉았다. "좀 태워주시겠어요?" "뭐, 뭐야?" "버릇이 없군." 그녀는 창대로 남자의 목을 걸어 당기더니 그대로 옆으로 같이 떨어져 버렸다. 체인 메일을 입은 남자는 땅으로 나동그라졌으나 가벼운 네리아 는 그대로 땅을 짚으며 공중제비를 넘더니 똑바로 섰다. 이거, 싸움 중 만 아니라면 박수를 치고 싶다! 난 길시언 주위에 있던 두 명 중 한 명 에게 덮쳐 들어갔다. "이야압!" 그 남자는 길시언을 치려다가 방패에 막히던 참이라 행동이 흩어져 있 었다. 그래서 등 뒤에서 노리는 내 공격을 막지 못했다. 난 고삐를 놓고 두 손으로 풀스윙을 했다. 그 남자는 그대로 말 위에서 튕겨나갔다. "우아아아!" 남자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하늘을 날아 호수에 쳐박혀 버렸다. 풍덩! 세 명이 없어지자 길시언은 남은 한 남자를 적극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전사들의 기마전다운 검격 이었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수십 개로 바꿔 검은 남자를 공격했으나 남 자도 그 재빠르고 풍부한 변화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길시언을 찔렸 다. 길시언은 방패를 쓸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이며 그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황소 위에 있어서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길시언은 아예 하프 플 레이트로 가려진 가슴으로 공격을 막아내며 남자를 후렸다.엄청난 대결 이다. 그러나 길시언은 타고 있는 것조차 무기였다. 썬더라이더는 앞쪽에서 얼씬거리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이 그 면상을 들이박았다. 뻐 억! 말은 쇠뿔에 들이받히자 그대로 앞발을 꿇으면서 기수를 낙마시키 고 말았다. 남자는 떨어지는 도중에 길시언의 칼을 맞았다. "후치, 조심해!" 고함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불꽃이 튀었다. "이힝힝힝힝!" 제미니가 비명을 지르며 발길질을 해서 나는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어푸!" 일어나려다 미끄러졌다. 물 속에서 다시 데굴 구른 다음 살펴보니, 쓰 러졌던 놈이 등 뒤에서 날 치려 하다가 샌슨에게 막힌 모양이다. 샌슨 은 남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남자는 검을 들어 막았으나 그 순간 샌슨 은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말 위에 앉아 있으니 말 아래에 있는 자의 가슴을 차는 것은 간단했다. 남자는 뒤로 벌렁 쓰러져버렸다. 난 제미니에서 내려온 김에 쓰러진 남자들의 무기를 들어 호수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써 일어나는 녀석이 있었다. 그 놈은 롱소드 를 앞으로 뻗어 날 견제했다. 좋아. 지상이라면 내겐 독특한 기술이 있지! "일자무식!" 난 밑에서 위로 두 번 올려쳤다. 호숫물이 갈라지며 물보라가 정신없이 흩날렸다. 남자는 첫번째를 막고 두번째는 옆으로 돌아 피했다. 그러나 난 세번째에서 가로로 돌았다. "으억!" 남자는 가까스로 피했다. 남자의 로브 가슴 부분이 크게 찢어져 있었 다. 그 때 등 뒤에서 트라이던트의 창대가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남자는 다리가 걸려 철썩! 물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지만 네리아는 그 자의 가슴을 밟으며 목에 트라이던트를 겨누었다. "칼 놔." "아압!" 남자는 자신의 가슴 위에 있던 네리아의 다리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자 네리아는 곧장 목을 찔렀다. "키히히…힉!" 남자는 바람 빠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부들거리는 손이 네리 아의 발목을 꽉 잡았다. 네리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트라이던트를 뽑았 다. 목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남자의 머리가 털썩 떨어지더니 잠 시 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피가 호수를 붉게 물들였다.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그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풍덩. 네리아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망할 놈… 자살도 꼭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는 놈이 있어…." 다른 남자들도 고통을 참으며 일어서더니 육탄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젠장! 난 비무장인 상대가 덤벼오자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할 수 없 이 난 바스타드의 검날 옆으로 남자들의 뺨을 후려쳤다. 남자들은 몽둥 이에 맞은 듯이 픽픽 나가떨어졌다. 길시언은 말에서 떨어지고, 무기도 없어진 자가 그냥 덤벼오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황소에서 내리더니 마구잡이로 덤벼오는 상대를 방 패로 막고 칼 칼자루로 남자의 뒷통수를 내리쳤다. 저기선 샌슨이 역시 말 위에서 내려와 남자의 복부를 치는 장면이 보였 다. 그악스러운 자들이었다. 무기가 없어졌는데도, 죽을 것이 뻔한데도 덤벼오니 막는 쪽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이루릴도 허리에서 피를 흘리는 자가 상처를 무시하면서 덤벼오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 에 깊은 수심이 피어올랐다. "왜… 왜 죽으려들죠?" "이 자식들 도대체 뭐야!" 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이루릴을 공격하던 자의 등을 들이박았다. 남자는 숨막히는 고함을 지르며 나가떨어졌지만, 체인 메일을 입은 자를 그냥 들이박았더니 내 어깨도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그 때였다. "위험해!" 뭐지? 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카알이 롱보우를 들고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시위. 뭘 쐈지? 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뺨을 쳤던 남자가 땅에 앉아서 허공에 팔을 든 채 부르르 떨고 있 었다. 남자의 팔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무슨 스크 롤(Scroll)처럼 보이는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카알이 다급하게 외쳤다. "네드발군, 저걸 뺏아!" "크으윽!" 남자는 팔의 근육이 다쳐 어떻게 할 수 없자 다른 손으로 그걸 바꿔쥐 었다. 내가 달려가려 했으나 너무 늦었다. 그 남자는 고함을 질렀다. "국왕 전하 만세!" 남자는 고함을 지르더니 이빨과 손으로 스크롤을 찢어버렸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의 입자들이 남자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쌔에에에엑! 뭐, 뭐 야? 나는 남자의 눈을 보았다. 보아선 안될 것을 보고 말았다. 죽으려 하는 자의 눈. "콰콰쾅!" 눈을 불태우는 화염이 몰아쳤다. 귀를 찢는 폭음. 격렬한 폭풍에 난 뒤 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엄청난 불꽃과 날 향해 날 아오는 불길의 폭풍. 죽었구나! "제미니!" 이런! 또 부르고 말았어! 난 역시 할 수가 없는 놈이군. 응? ================================================================== 4. 황소와 마법검……17. 살아있잖아? 난 머리를 들었다. 내 몸을 보았으나 전혀 다친 곳이 없다. 그저 땅에 나동그라질 때 긁힌 자국들만 몇 개 보였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맙소사…!" 가까이 있던 나무들은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했고 좀 멀리 떨어진 나무 들은 모두 쓰러져 불타고 있었다. 땅은 시커멓게 변했고, 남자가 서 있 던 땅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직경 50 큐빗은 넘어보이 는 구덩이였다. 잠시 후 호수의 물이 그곳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런 빠져죽겠다!" 쏴아아아-! 물은 급격히 쏟아져 들어와 호수 옆에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난 황급 히 일어나 뒤로 달렸다. 잠깐. 이런 엄청난 폭발에 내가 살았을 리가 없 잖아? 그, 그럼, 난 영혼인가? 그럼, 내 시체는 방금 만들어진 저 작은 호수 아래에… 맙소사! 난 그 호수를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저, 저 아래에 내 시체가? "안돼… 장가도 못갔는데… 훌쩍." "뭔 소리 하냐?"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가 서 있었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음, 하긴 나도 그렇군. 하나도 다친 데가 없으니, 확실히 우리 둘 다 영 혼이다. "자, 네리아. 훌쩍. 올라가죠." "어딜?" "뭐, 가봐야 알겠죠… 훌쩍. 전 처음 죽어봐서요. 어머니가 거기 계실 지 모르겠네요." 네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다음 순간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 그럼, 너와 난, 여, 영혼이야?" "그러니까 그 폭발 속에서도 모양이 제대로지요. 훌쩍. 네리아는 직업 이 직업이라 혹시 나와는 가는 곳이 다를지도 모르겠네. 훌쩍, 걱정 말 아요. 가끔 편지할께요." "어, 어, 어머나! 아, 아, 안돼! 내가 죽다니! 으아앙!" 네리아는 내게 달려들더니 날 껴안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울었다. 그 때 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해봐. 정말 볼만하네." 샌슨도 살아 생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여전히 어깨에서 피를 흘리네? 그리고 카알도, 이루릴도, 길시언도, 운차이도. 그런데 그 남자들의 영 혼은 어디 갔지? 응? 그런데 영혼 치고는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네리아의 몸이 아주 적나라하게 느껴지네? 네리아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는 벌겋게 된 눈으로 날 올려다 보더니 내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좀 이상하네? 전통적인 방법으로 확인 좀…." "으아아아! 왜 날 꼬집어요!" "안 죽었잖아? 후치, 임마! 진짜 죽은 줄 알았잖아!" "어, 그러네? 어떻게 그 폭발에서 살았지?" 이루릴이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막아주었군요." "예?" "여긴 다레니언의 영토. 그녀가 우릴 보호한 모양입니다." "아!" 난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표면은 잔잔하고 변함없었다. 카알은 떨리 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마치 그에 대답하듯이, 호수 표면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얼어붙은 채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호수 표면에 거대한 물보라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물의 탑이었다. 아니, 물의 커텐? 장막? 그것은 파도였다. 믿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라면 혹시 모를까, 호수에서? 그러나 무지무 지하게 큰 파도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느리게 움직였다. 거짓말 같다. 물방울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서 파도는 마치 단단한 물질처럼 서서히 움직였다. 그것은 우리 머리를 넘어 불타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파도는 불타고 있는 나무들 위에 쏟아졌다. 불은 단숨에 꺼 졌다. 푸와악! 그러나 우리 머리 위로는 전혀 쏟아지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호수 표면은 잔잔해졌다. 조금 전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불타오르던 숲에서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 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쏴아아아… "놀라워…" 샌슨은 떨리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호숫가로 걸어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급히 고개를 꾸벅거렸다. 이루릴은 다정하고 애틋한 어조로 말했다. "고마워요… 내 친구 다레니안." "뭘까?" 샌슨의 단순하며 심각한 질문에 네리아가 대답했다. "글쎄. 산적은 아냐. 자폭하는 산적이라니, 우습잖아? 그리고 하는 짓 도 그래. 무기가 없어지니까 맨몸으로 덤볐어. 그건, 포로로 잡히느니 자살하겠다는 거야. 에이, 소름끼쳐! 아까 일 떠올리기도 싫어!" "게다가 보통 실력이 아니었어." "맞아. 그 자들이 길시언씨 외에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 우리가 쉽게 상 대한 거지." "음, 무장이 좋아도 꼭 좋을 건 없지. 공격은 혼자서 다 당하니까." 우리는 모두 그 폭발현장에서 좀 떨어져 있었다. 나무들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있기가 힘들었다. 남자들의 시체는 모두 가루가 되었거나 새로 생긴 웅덩이 속에 있어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 들의 말들은 모두 무사했다. 다레니안은 말들도 모두 보호한 것이다. 다 행이다. 말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괜찮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도울께." 이루릴은 멀리서 썬더라이더에 받힌 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루릴은 말들에게 상냥하게 말까지 건네고 있었지만, 말들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 는 모양이었다. 그 말들이 아무리 전투훈련을 많이 받았다 해도 설마 전 투 중에 황소를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네리아의 말마따나 우리가 저 자들을 쉽게 상대한 것은 저 자들이 우리 를 얕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난 어린애고 샌슨은 덩치가 좋긴 하지 만 무장은 평범하다. 그에 반해 길시언은 하프 플레이트에 마법검에 방 패까지 들고 있다. 그래서 남자들은 길시언을 노렸고, 우리는 그 틈을 타서 남자들을 제압한 것이었다. 남자들이 우리에 대해 제대로 알아차리 기도 전에 말이다. 천만다행이다. 카알은 볼을 긁적이더니 샌슨과 네리아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우릴 노리는 암살자라는 것이겠군."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암살자?"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목적은 우리의 살해였겠지요. 다른 목적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유가 뭘까? 왜 우릴 노렸지?" "아! …으악!" 샌슨이 손바닥을 딱 치더니 곧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어깨에 상처 를 입고 붕대로 감아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이루릴이 힐링 포션을 좀 발라두었지만 아직은 꽤나 아플 것이다. 샌슨은 어깨를 부여잡더니 힘겹 게 말했다. "으윽… 운차이! 운차이와 그 서류 때문입니다." 운차이는 놀란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계속 설명했다. "펠레일도 그렇게 말했지요. 우리가 그 보고서를 가지고 가지 않습니 까? 그 서류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서류를 제출하고 운차이가 증언을 하게 되면 자이펀으로서는 대단히 곤혹스러워질 테니까… 그겁니다! 아 니면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비둘기파의 어떤 인물이 라든지, 뭐, 그런 사람이…" "아닐걸." 내 말에 샌슨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야, 후치?" "난 분명히 들었어. 내가 제일 가까이 있었다고." "듣다니?" "그 남자 말이야. 자폭하기 직전, 분명히 국왕전하 만세라고 했어." "국왕전하? 아! 그럼 자이펀의 국왕이 보낸…" "샌슨! 좀! 자이펀인이라면 왜 우리 나라 말로 외치냐?" "어? 어, 그렇군. 잠깐. 그럼 그게 무슨 말이야? 국왕 전하를 위해 우 릴 죽이려 들었다고?" 우리는 잠깐 동안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국왕 전하께서 우릴 죽이려 들 리가 없잖아? 후치 너, 나 모르 게 무슨 반역질이라도 공모했었냐?" "샌슨, 순순히 자수하지?" 우리가 시덥잖은 소리를 하는 가운데 카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그런 이유가, 그런 말 같잖은 이유가 있다 해도, 그냥 수도에 도 착하면 우리를 처리해도 되잖아? 왜 암살자를 보내어 우리를 처리한다는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네, 네드발군." "맞아요, 카알. 후치 네가 잘못 들었을 거야." "똑바로 들었다니까!" "야, 그럼 국왕께서 왜 우릴 죽이려 했다는 거지?" "어, 어, 그건…."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길시언이 조금 떨어져 앉은 채 고 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시언은 간혹 신경질적으로 잿빛 머 리카락을 헤집었고 그 얼굴 표정은 몹시 사나웠다. 또 프림 블레이드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군. 샌슨은 단정짓듯이 말했다. "산적은 아냐. 목숨을 걸고 죽이려 들었으니까. 그러니 암살자고. 그렇 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운차이 때문에 덤벼드는 암살자야. 펠레일도 그렇게 말했잖아?" 하긴 그렇다. 그 똑똑한 펠레일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운반 하는 그 보고서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우릴 쫓아올 것이라고. 그 때 말들의 치료를 끝내었는지 이루릴이 걸어왔다. 그녀는 우리 옆에 앉더니 말했다. "여러분, 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그 보고서와 운차이를 호송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 여러 분이 계십니다만, 목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죠. 카알과 샌슨, 후치는 고향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수도로 가시죠? 그것은 어떨까요?" "어? 그건 암살자가 쫓아올 만한 일은 아닙니다." 샌슨의 말에 이루릴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전 어떨까요? 제 생각에 제 일 때문에 인간 암살자들이 쫓아 올 것 같지는 않군요. 전 델하파의 항구로 가서 누굴 만날 계획입니다만 그건 인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예요."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나와 샌슨, 카알도 모두 그 시선을 따라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펄쩍 뛰었다. "에, 아니예요! 난 그저 싸구려 도둑이라고요! 암살자들이 쫓아올 일은 없어요! 길드료도 착실히 내었고, 혹시 내게 털린 자들 중에 앙심을 가 진 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자폭 암살대를 보내요? 겨우 도둑 하나 잡으려고?" 카알은 빙긋 웃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네리아양." 그 말에 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루릴은 운차이를 바라 보았다. "운차이씨는 암살자가 노릴 만하죠?"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씨가 칼라일 영지에서 한 일이 들통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들이 죽기 직전 바이서스어로 국왕 전하 만세라고 외쳤어요. 그건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 다." "이루릴도… 들었어요?" 샌슨의 질문에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사람,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그 때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길시언씨." "…" "길시언씨." "예? 아,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암살자들이 따라다닐만한 일을 저질렀나요?" 길시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까 그 암살자놈들이 날 노렸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모험을 하다 보니 원한 살 일도 가끔은 했습니다. 복수를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겁니 다. 하지만 저렇게 엄청난 암살자를 보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는데요?" "그런가요?" "도무지… 그럴 만한 작자는 생각나지 않는데요?" "예. 음, 이상한 일이군요."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꺽더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그 때 조용히 있던 운차이가 입을 열었다. "길시언." 길시언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모두 운차이를 보았다. "어제도 말했지만, 당신 정말 피냄새가 많이 나." 길시언은 무슨 시비냐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왜 자꾸 하는 겁니까?" 운차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당신 정도의 남자라면 그렇게 몸에 피 묻힐 일이 많 지 않아. 오히려 적수가 적기 때문에 그렇지. 당신은…" 운차이는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Yamus dsidafra un ert m'kima?" 그는 갑자기 자이펀어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굳은 얼굴로 말 했다. "여보시오. 자이펀어로 말하는 이유가 뭐요?" "Ert m'kima unte raleil Djipenian. Releil?" 길시언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Talledeon yahi nhannega durrtasatr unes rithroii." "Impawerr, en dikkasia nowms." "Xychro nen… zima dsidfra yilkin jian diweelts." 우리는 당황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차갑게 웃으 며 말했다. "이보시오, 길시언. 당신 나에게 속았어." "속았다고?" "여긴 자이펀어를 아는 사람이 또 있거든?" 길시언은 눈을 부릅 떴고 샌슨과 나는 카알을 쳐다보았다. 카알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통 경악한 눈치가 아니다. 길시언 도 카알의 그 얼굴을 보더니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뒷통수를 긁 적거리더니 말했다. "쳇. 아직 수양이 덜됐군. 그런 간단한 유도심문에 넘어가다니." 카알은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손을 내저어 말렸다. "앉으십시오. 카알." "그, 그러나 전하…" 전하라고? 머리 꼭대기에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4. 황소와 마법검……18. "전하는 무슨. 궁성이나 귀족원에서는 내놓은 부랑아입니다." "전하…" "전하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길시언이라고 부르십시오." "어떻게… 제 감히…" "허어! 그것도 불충이라는 것 모르십니까? 국왕이나 태자 이외의 자를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국왕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거 중범죄입니다?" "아…" 카알은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나 샌슨보 다는 훨씬 낫다. 카알은 그래도 뭔가를 알고 저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그 야말로 장에 끌려온 황소마냥 얼떨떨해져서 도대체 앉아야 될지 서야 할 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최소한 누우면 안 된다는 것은 짐작하니까 좀 낫다고 해야 되나? 전하, 전하라. 그리고 말 을 들어보니 왕족이란 말이지? 샌슨이 조심스럽게,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카알, 저, 설명을 좀…" 카알은 길시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길시언은 머리를 내젓더니 말 했다. "허, 이것 참. 6년 동안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유피넬의 저울추는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짐작도 못하겠군. 헬카네스의추 는 또 얼마나 무거운가. 에, 간단히 얘기하죠. 나 길시언 바이서스, 국 왕 형입니다." "예에?"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까지 벼락맞은 듯이 벌떡 일어섰다. 저 자가! 저 자가 바로 그 개망나니 태자… 이크. 어쨌든 그 사람이라 는 말인가? 놀기를 하도 좋아해서 궁궐에서 도망쳤고 그래서 태자 지위 를 페위당했다는 그 폐태자? 길시언은 우리들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괜찮습니다. 앉으십시오. 내 꼴을 보십시오. 어디가 왕족처럼 보입니 까? 그리고 여긴 임펠리아도 아닙니다. 서로 편하게 지내십시다. 앉으십 시오." "아, 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라니. 앉는 법 모르십니까? 다리를 구부리며 몸의 균형 을 잘 잡은 다음 먼저 손으로 땅을 짚으며 엉덩이를 부드럽게 땅에 가져 다대면 되는 겁니다. 균형을 잃으면 미골에 충격이 가해져 척추가 아플 수도 있으니 각별히 유념하십시오." 우리는 국왕 전하의 형님께서 세세히 지시하신대로 앉았다. 긴장이 되 어 웃지도 못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말해야 되는 거 아닐까? 길시언은 한결 보기좋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뭐, 대수로울 건 없고, 내 동생은 왕이고 난 방랑자고, 내 동생은 임 펠리아에 있고 난 황야를 돌아다닙니다.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귀 족원의 원로들은 판단을 잘 했죠. 내 목을 친 다음, 내 동생을 왕위 계 승권자로서 추대했으니까. 그것뿐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샌슨의 대답에 길시언은 입을 조금 벌렸다. 샌슨은 제정신이 아닌 모양 이다. 네리아를 바라보니 네리아는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정말 표정만 봐도 여러 가지를 읽을 수 있군. 왕족 의 물건을 건드렸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테니 프림 블레이드를 슬쩍할 수 가 없어서 실망스럽다는 것이렸다? 어쨌든 길시언은 그거면 설명이 충분하다고 느꼈는지 더 이상 말할 의 도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카알은 거기서 끝장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전하." "아니, 제발! 전하가 아니란 말입니다." "전하. 어찌하여 도성을 버리시고 야인으로 계시는지요." 길시언은 두 손 들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손짓을 해가며 설명 했다. "전후가 바뀌었습니다. 도성을 버리고 야인으로 있기를 좋아하니까 태 자 자리 박탈당했습니다. 전 국왕 노릇할 재목이 못되었습니다. 그보다 는 방랑 생활을 더 좋아했습니다. 천성이 게을러 국정을 보살필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지요." 그러더니 길시언은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귀족원 원로들이 목을 쳤죠.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오기 힘든 성군의 재목으로 추앙 받으셨던 분이십니다." "그 말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거야 아첨꾼, 모리배들이 왕태자에게 하는 상투적인 어휘입니다. 제가 왕태자 책봉되었던 것이 5살 때였죠. 5 살짜리 꼬마에게 성군의 재목이 어쩌니 할 때는 5살 꼬마였던 저도 어이 가 없더군요." 길시언은 시원시원하게 말했고 그러자 카알은 말이 곤궁스럽다는 표정 을 지었다. 카알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혹 전하께서는 자이펀과의 전쟁 때문에 국왕을 보필하기 위해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길시언은 지긋이 웃었다. "아니, 그건 걱정 안합니다. 내 동생, 어려서부터 책벌레여서 병서도 엄청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신하들도 많습니다. 제가 가서 전쟁 에 도움될 어떤 조언을 하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내 동생 주위에는 전 문가들이 넘치고 넘칩니다." "그럼 왜 바이서스 임펠로…?" "기억력이 좋지 못하십니다. 썬더라이더에 걸린 저주를 해소하고 마법 칼집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길시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프림 블레이드가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웅 웅웅웅웅! 길시언은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칼집을 바라보았다. "망할… 내가 임펠리아를 빠져나올 때 이것 하나 훔쳐나오고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하면…" "예?" "임펠리아에서 쫓겨날 때 궁성 보물 창고에서 이것 하나 슬쩍했습니다. 그 때는 마법검이라 도움될 거라고 생각했는데,제길, 사람을 미치게 만 드는 검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카알은 난처한 미소를 지은 다음 질문했다. "전하, 전하께서 그럴 생각이 없다면 전하께 암살자가 달라붙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길시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떫은 표정이 되었다. 카알은 우리의 표정을 보더니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운차이군은 아까 그 암살자들이 이 분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네. 그리고 이 분의 살기를 읽고는 수많은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던 거지. 그래서 저 분이 전하임을 파악한 것일세. 정녕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군." 운차이는 차갑게 웃었다. "6년간이라는 말, 암살자들이 따라다니는 중요인물, 1+1=2요." 흠, 창피스러운 일이군. 운차이는 흡사 우리들에게 자기 나라의 국왕의 형님도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지금 당장 우리 나라의 국왕이 나타나도 모를텐데. 운차이야 간첩 교육을 받았을 테니 우리들보다 훨씬 우리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에 대해 잘 알겠지만. 길시언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 참. 내가 마법의 가을에 들어섰나? 올 가을엔 이상한 일들만일 어나는군." "전하?" 길시언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이 안됩니다. 요새 갑자기 나타 나서 날 공격하는군요. 간단히 생각하면 내 동생의 측근들이 내가 왕권 을 노릴까봐 날 제거하려 든다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생활 태도를 보면 나에겐 제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텐데요. 난 근 6년 동안 수도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험가 일 뿐 왕권에 위험이 될 사람은 아닙니다." "…모험가는 비왕족으로서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종이 아닐까 요?" "옛이야기처럼 말입니까? 엄청난 모험을 겪는다면, 지방세력과 혈연관 계, 동맹관계 등 적절히 관계를 맺고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세력 을 육성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려면… 모험가의 나이 4, 50살은 되 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 동안 내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활동했을 경우 간신히 가능합니다. 저처럼 살면 벌써 글렀죠." 카알은 길시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현재 바이서스는 전쟁 중입니다." 갑자기 길시언은 무서운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침착하게 말했다. "전쟁 중에는 많은 일이 가능합니다. 계속된 전쟁으로 왕권에 대한 신 망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시키고 적국과는 동맹을 맺는 식 으로 일처리가 가능해집니다. 자이펀과 손을 잡아서 왕이 되는 것을 간 단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설마?" "들어보십시오. 이런 식이겠지요. 자이펀의 도움으로 쿠테타를 일으킨 다음, '국왕이 자신의 야욕으로 불합리한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그를 멸한다. 그리고 그 대신 자이펀에게 사과하며 배상의 책임을 지겠다.'고말하면 될 겁니다. 그러면 자이펀에 서는, '길시언 국왕의 등극을 인정하며 축하한다. 그는 현명하므로 전임 자의 죄악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죠. 그리고 백성들은 전쟁을 끝내어준 반란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맙소사… 유피넬이여! 나와 샌슨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길시언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듯한 모습으로 카알을 바라보았으나 카알은 조용히 마무리를 지었다. "특히나 길시언 전하께서는 귀족원에 의한 폐태자인 만큼 왕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가 용이합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길시언은 카알을 맹렬히 노려보았고 카알은 그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었 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날 회유하려 드는 것 같지는 않군요." "전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분이군요. 예. 인정하겠습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바 로 그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내게 암살자를 보내는 측도 아마 그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추 측됩니다. 내가 전쟁을 틈타 내 동생을 쫓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아마도 내 동생은 아닐 겁니다. 그 녀석은 마음씨가 선량합니 다. 그 녀석의 측근 중 자신의 야욕과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혼동하는 돌대가리들 중에 하나일 겁니다." "전하께서는 그럴 생각이 없으십니까?" "…짓궂으십니다. 카알."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날 두 번씩 시험하지 마십시오. 난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 자리가 탐 났다면 어릴 때 행실 바른 왕태자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헬카네스는 내게 옥좌에 앉아 버티지 못할 만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제 이마에 역마살 하나 박아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마살이 뭐지? 이상한 단어를 쓰는군.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러하시면, 바이서스 임펠에 가시면 더욱 위험한 것 아닙니까?" "위험하겠죠. 하지만 내 마음에는 그런 야욕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그곳이 아니라면 썬더라이더의 저주를 풀만한 성직자를 만나기 어렵습니 다." "그럼 가실 겁니까? 이런 일을 겪고도?" "여러분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겪어온 일입니다." 길시언은 담담하게, 그러나 흔들림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식으로 자신 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카알도 그 말이 아니라 그 말 뒤의 뜻을 읽었을 것이다.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길시언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가 아니라니까요. 제발. 그리고 여러분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겠습니다." "예?" "저 때문에 여러분이 위험해집니다. 곤란한 일이죠." 카알은 입을 딱 벌렸다. 길시언은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요. 암살자들 때문에 샌슨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들이 여러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승기가 있었습 니다만, 그래도 이곳이 다레니안의 영토가 아니었다면 모두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다. 우리는 모두 호수 옆에 새로 생긴 호수와 불에 타버린 숲 을 바라보았다. 끔찍스러웠다. 길시언은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절대로 여러분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전 갈색산맥의 다른 길에 대해 서도 좀 압니다. 여기서 헤어져야 되겠습니다." "예? 아, 아니. 안됩…" "더 말하지 마십시오. 카알." 길시언은 단호하게 카알의 말을 끊었다. 카알은 입을 다물었다. 길시언 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여러분들과 동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정말 미안한 일입니다. 나를 마음껏 욕하셔도 좋습니다. 설마 이 험한 갈색산맥 중간에까지 암살자들 이 따라다닐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내 불찰입니다." "전하…." "미안합니다. 6년 동안 야인이었으니, 이젠 야인인 길시언으로 봐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 편히 모험가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 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도 나를 길시언 바이서스로 보는군요. 하루도 안 되는군요." 하루도… 안돼? 길시언은 힘을 주어 말했다. "그건 내가 감수할 운명입니다만, 그 때문에 여러분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길시언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썬더라이더 에 올라탔다. 우리가 뭐라고 말할 새도 주지 않고, 길시언은 그대로 걸 어갔다. "저, 전하!" 길시언은 멈춰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우릴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 었다. "만일, 이것이 마법의 가을이고, 이 만남이 이 가을의 마법에 의한 것 이라면,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 때까지는 작별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샤스의 가호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저건 어디서 들었는데… 메리안의 말이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면, 작별의 말은 필요없다는… "하아!" 만난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길시언,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자유로 운 영혼 때문에 왕좌를 물리쳤던 인물이 우릴 떠나가는군. 저주에 걸린 황소를 타고, 수다스러운 마법검에 골머리를 썩히는 황야의 왕자. 우리는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발전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루릴의 말이었다. 카알은 지긋이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우리들처럼 보장된 조화가 없기 때문에 서로 의견을 좁혀가 는 방법, 합의하는 방법들을 익혀야 하며, 그렇게 타인을 이해하려고 드 는 과정에서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이해력이 길러진다고 알았지요." "엘프들의 생각입니까?" "제 생각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아, 네. 엘프들은 모두 조화로울 테니, 아마 세레니얼양의 생각에 대 한 다른 엘프분들의 반대의견은 없겠지요." "예. 그런데 저 왕자, 길시언 바이서스는 그 관계 때문에 오히려 괴로 워하는군요." "괴로워한다라…." "그렇게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려 들지만, 그러니까 모험 을 즐기는 보통의 낭만가의 모습을 견지하려들지만 그 자신의 관계가 그 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확하신 지적입니다." "그런가요? 기쁘군요. 저,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 길러지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스스로 이해력이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예. 당연하지요. 항상 조화로운 관계 속에 살아온 저로서는 자신과 다 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카알은 멀리 갈색산맥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은 결국 감정이입이 지요. 그래서 같은 부피의 헝겊이 있을 때 인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헝겊 은뭔가 다른 느낌이 드는 겁니다. 같은 부피의 돌이라 할지라도 조각으 로 만들어진 것은 훨씬 더 애정, 혹은 두려움, 경배, 어떤 감정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감정이입 의 결과이고, 결국 따스한 마음씨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믿습니다." "어렵습니다." "제 뜻은 이렇습니다. 선량한 마음씨가 있다면, 타인에 대한 이해는 자 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량한 마음만으로 충분할까요?" "이 세계에선…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일국의 왕자가 황소를 타고 마법검을 휘두르는 세계에서는…" 카알은 말을 맺지 않고 대신 빙긋이 웃었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1. …그러므로 위대하신 루트에리노 국왕께서 말씀하시길, "내 벗의 하루의 슬픔은 나의 백일의 슬픔이오, 내 벗의 하루의 기쁨은 나의 백일의 기쁨일 것이다." 그러자 현명한 핸드레 이크가 대답하였다. "치료해드릴까요?"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6 권. PP. 211 (770년 돌로메네 作) "어어어, 살려줘!" 나도 저랬나! 흠, 아냐. 난 더 심했지. 어쨌든 네리아는 말에서 굴러떨 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무리 몸놀림이 좋더라도, 날뛰는 말에서 굴러 떨어질 때는 대책이 없다. 겨우 몸을 둥글게 만들어 충격을 좀 줄일 뿐 이다. 네리아는 땅에 나동그라지더니 그대로 팔을 쫙 펼친채 큰댓자로 누워 헥헥거리고 있었고 샌슨과 나는 날뛰는 말을 붙잡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쪽이다, 잡아!" "으아아압!" 말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내 욕을 무지무지하게 했을 것이다. 내가 말 을 잡는 방법은 언제나 그 목에 뛰어들어 매달린 다음, 목을 겨드랑이 에 끼고 쓰러트려버리는 것이니까. 콰당! 말은 땅에 나동그라져서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자욱한 먼지 에 재채기가 난다. "엣취! 임마. 후욱, 후욱. 나도 죽을 맛이다. 너 정도의 덩치를 눕히는 게 쉬운 줄 알아? 헉, 헉. 에, 엣취! 성깔 좀 그만 부려라." 그 암살자들의 말들 중 네리아의 말을 하나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풀어 주었다. 야생마가 되겠지. 이들이 제대로 훈련받은 말이라면 알아서 자 기 마굿간으로 돌아갈테고. 그런데 아무래도 제대로 훈련된 말인 것 같다. 주인이 바뀌니까 엄청난 성깔을 부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네리아가 고른 말은 제일 덩치가 큰 말 이었다. 샌슨이나 이루릴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네리아는 무조건 제일 큰 말을 고집했다. "네 체격을 생각해. 저렇게 큰 말은 네 팔다리에 맞지 않아." "샌슨씨의 말이 맞아요. 게다가 이 말은 성격이 사납군요." 그러나 네리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싫어! 제일 큰 말이 팔아먹을 때도 제일 비쌀 거야. 미래를 생각해야 지, 미래를!" 샌슨은 울화통이 터져서 조언을 포기했다. "차라리 돈자루를 타고 다녀라!" "어머나? 내 소원을 어떻게 알았지? 돈방석에 앉는게 내 꿈이야!" 그리고는 네리아는 이렇게 자신과, 자신의 말과, 우리를 동시에 괴롭히 고 있는 것이다. 난 그 말을 조심스럽게 일으켜세웠다. 말은 용트림을 하며 일어났으나 내가 왼손으로 고삐를 단단히 쥐고 오른손으로 한 대 칠듯이 을러대자 도망가지는 않았다. 대신 내 왼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우와랏찻차!" 나는 기겁을 하며 손을 빼서 간신히 물리지는 않았다. 카알은 나무 꼬 챙이로 땅에 한 줄을 그었다. "17번째 시도 실패." 그 옆의 나무에 묶여 있던 운차이가 킥킥 웃었다. 네리아는 누운 채 하 늘을 향해 외쳤다. "그럼, 18번째 시도!" 네리아는 다리를 끌어올렸다가 핸드스프링으로 발딱 일어났다. 정말, 아무리 충격을 줄이며 나동그라진다지만 말에 17 번이나 떨어진 여자가 저렇게 건강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말도 대단한 고집이지만 네리아도 엄청난 고집이다. "요오오오옵!" "저건 뭐야…?" 샌슨이 얼빠진 모습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앞으로 덤블 링하며 달려오더니 하늘로 솟구쳐올라 원 트위스트 원 써머솔트의 멋진 공중제비를 넘으며 말에 올라탔다. "짠!" "거꾸로야." "…쨘!" 네리아는 다시 똑바로 탔다. "놔, 후치." "차마 볼 수가 없어…" 난 눈을 가리며 고삐를 놓았다. 이힝힝힝! 다각, 다가닥, 이히르힝힝! "사람 살려!" 장장 39번째 시도에서 말은 간신히 네리아의 말을 듣게 되었다. 네리아 는 말의 귀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착한 말이야." 말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쨌든 그 동안 계속 말과 씨름하던 나와 샌 슨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땅에 주저앉고,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내가 질문했다. "후우, 후우, 이름은 뭘로 지을 거죠?" "이름? 까만 색이니까 이거 어떨까? 에보니 나이트호크스 세이버 위드 아웃 풋스탭.(Ebony nighthawk's saver without footstep)" '발자국 없는 칠흑의 쏙독새의 구원자'라… 난 왜 말 이름을 이상하게 짓는 사람만 만나는 거지? "약간 긴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어때. 뭐라고 부르든 어차피 못알아 들을텐데. 꼭 길다면 자르면 돼잖아." "잘라요?" 네리아는 싱긋 웃더니 말의 정수리 갈기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말했다. "나 네리아는 성실한 나이트호크로서 널 에보니 나이트호크라 부른다. 넌 나의 모든 작업의 반려이며 나의 도주의 제일 지원자로 행동해야 한 다. 알았지?" 그게 좀 낫군. 칠흑의 쏙독새라. 칠흑의 밤도적인가? 놀랍게도 말은 고 개를 끄덕였으며, 네리아는 그걸 보고는 까르륵 웃으며 말의 목을 껴안 으며 그 갈기에 얼굴을 묻었다. "에, 에취!" 저 놈 무지무지하게 땅에 쓰러졌었지? 갈기에 먼지가 가득하겠지. 그래서 도둑의 말이라기 보다는 용사의 말로 훨씬 어울리게 생긴 그 성 깔 사납고 덩치 큰 흑마는 에보니 나이트호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네리아의 요란스러운 말 길들이기 때문에 그날 오후는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어차피 메드라인 고개는 내일 넘을 생각이었으니까 별 상관은 없 다. 우리는 닐 드루카 봉우리 아래에서 야영을 했다. 닐 드루카 봉우리를 왼편에 끼고 메드라인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중부 대로에서도 가장 바쁜 고개라고 한다. 물론 고개가 바쁠 수는 없고, 거 기만 넘어서면 수도 바이서스 임펠이 지척이기 때문에 고개를 넘는 여행 자들의 걸음이 바빠진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부터는 수도의 치안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간혹 돌로 만들어진 바라크가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수도에서 파견된 레인저들이 바라크에 근무하며 여행객들의 불편 사항을 돕는다. 식량이 떨어지거나, 잠자리가 필요하다는 등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난을 당했다거나, 몬스터들로부터 습격당했다거나 하는 경우에 구출 임무도 맡는다. 그래서 이 근처의 길 에서는 몬스터가 출몰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며, 따라서 안전한 길이기도 하다. 레인저들이 자주 근처를 순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페어 리퀸 다레니안의 영토를 침범할 수는 없어서 그 이상 서쪽으로 진출하지 는 않는다. 그러니 여행객들의 보호라고 해봐야 반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조금 전에도 산악 지형에 적절한 듯한 무장을 걸치고 있는 레인 저 대원들과 지나쳤다. 그들은 모두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차림도 깔끔하 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네었다. 그들은 운차 이를 묶고 가는 우리에게 별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여행객들에게는 그 보다 더 신기한 일도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멀어져가는 레인저를 돌아보며 샌슨이 말했다. "저, 레인저 대원들에게 호위를 요청하면 안될까요?" "응? 왜 그러나, 퍼시발군?" "그러니까… 운차이는 적군 포로입니다. 그러니 레인저들의 호위를 받 으며 수도로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 우리들만으로도 운차이군의 호송에는 차질이 없지 않는가? 레인 저 대원들은 이 근처의 경비업무만으로도 바쁠텐데. 그리고 그들의 임무 는 국왕께서 정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요청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아 닐세." "그래도 전범의 호송인데요." "우리 인원으로 호송이 힘들 것 같은가?" 샌슨은 그냥 미소지어버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가죠. 어차피 다 왔으니." 운차이를 돌아보니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이제 바이서스 임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망은 꿈도 못꾸게 되었다. 샌슨도 그 얼굴을 보더니 말 했다. "이봐. 혹시 도망가더라도 이 근처에서라면 대번에 체포될테니, 차라리 얌전히 호송당하면 정상참작의 기회가 많을 거야." 운차이는 이를 박박 갈았다. "생각해줘서 정말 고맙군." "뭐, 천만에." 길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확실히 수도 가까이 오니까 훨씬 낫군. 몬스 터의 출몰에 대한 걱정도 없이 마음 편한 여행 끝에 우리는 메드라인 고 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어 평지에 내려서도 별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언덕들 과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로 중부대로의 유 장한 흐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카알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곧 황혼이 내리겠는데. 퍼시발군. 바이서스 임펠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에, 전속력으로 달리면 오늘 밤 중엔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하루를 더 손해볼 필요는 없겠군." 샌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달려보자! 오늘 밤 안에는 바이서스 임펠에 도착하고 내일부 터 우리의 임무를 시작하는 거지." "그럼… 오늘이 여러분과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길이겠군요." 이루릴의 말에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어, 후, 후치. 좀 피곤하지 않아? 천천히 갈까?" 여기서 피곤하지 않다고 말하면 내가 살 수 있을까? 카알은 그만 고개 를 돌리며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루릴이 먼저 대답했다. "오늘은 편안한 여행이었는데요… 전 빨리 좀 씻었으면 좋겠어요. 괜 찮다면 오늘 중 여관에…" "예! 물론입니다. 출발!" "나… 난 대답 안했는데."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샌슨은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러자 운차이는 여전 히 그 저주스러운 밧줄에 이끌려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마냥 샌슨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루릴과 카알도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먼저 선언을 한 마디 했다. "자! 에보니 나이트호크. 첫번째 질주다. 잘해 보자! 이랴!"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곧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덩치 에 어울리는 롱 스트라이더의 걸음걸이로 죽죽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비명처럼 탄성을 질렀다. "우와! 너, 눈물나게, 잘 달린다!" 난 뒤질새라 제미니를 출발시켰다. "하아! 하아!" "이랴아!" 석양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붉게 타오르는 평야 위를 여섯 개의 그림자를 쫓아 달려갔다. 우리 뒤가 서쪽이라 그림자는 우리 앞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빛이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테고, 그 동 안 조금이라도 더 질주해야지. 이윽고 해가 졌고, 우리는 달이 떠오를 때까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쪽의 동쪽 지평선에서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오! 오늘은 셀레나와 루미너스가 동시에 뜨는 날이군." 멋진 광경이었다. 동쪽 지평선 위에서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동시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처음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무엇이 땅에서 손톱을 내 밀 듯이 보였다. 마침내 솟아오르자, 그것은 똑같은 크기의 보름달이었 다. 다시 달리기에 충분할 만큼의 조명이 생겼다. 우리는 두 개의 달을 향해 달려갔다. 멀리 지평선 위로, 그리고 달빛 아래로 불빛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 했다. 샌슨이 감격어린 말투로 말했다. "바이서스 임펠이야. 드디어 도착이군!" 검은 지평선 위에 바이서스 임펠은 불야성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갈색 산맥이 휘어지는 부분에 위치한 이 도성은 밤하늘로 굉장한 불빛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희한한데? 그냥 촛불이 많다거나 하는정도로 저렇게 멀 리까지 밝은 빛이 비출 수 있나? "마법사들이 많아서 그렇지." 네리아가 말해줬다. "마법사?" "빛의 탑이라는 마법사 길드 건물도 있고. 저 도시 길에는 밤마다 곳곳 에 마법적인 불빛이 켜져. 그래서 밤에도 아무런 등불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 "와아!" 정말 그랬다. 우리는 바이서스 임펠을 감싸고 도는 임펠 리버에 이르렀 을 때 그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임펠 리버에는 커다란 아치형의 석조다리가 놓여 있었다. 열 명이라도 동시에 걸어갈 수 있을 듯한 큰 다리 양쪽에 초소 같은 것이 서 있었다. 저 강은 바이서스 임펠의 자연적 장벽 역할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다리 에 초소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초소 건물 위에는 도대체 뭔지 모를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횃불은 아 니고 그저 밝은 빛덩어리가 둥둥 떠있었다. 이루릴은 그것을 보더니 말 했다. "컨티뉴얼 라이트(Continual Light)군요. 초소 건물에까지 저런 마법을 쓰다니, 대단한데요." "그래요? 그럼 낮에도 빛나요?" "그렇겠죠. 낮에는 뭘로 덮어두든가 하나 보죠." 초소의 경비병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샌슨은 그들의 무구를 보더니 다시 자신의 갑옷과 검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들은 모두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완전한 풀세트로 입고 있었다. 바이서 스의 상징인 붉은 독수리 문양이 가슴에 새겨져 있었고, 머리에는 멋진 깃털 장식의 투구. 허리엔 화려한 롱소드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정지시켰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2.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려 합니까?" 카알이 우리를 대표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야심한 밤이라 조사가 필요합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카알은 짐 속에서 자신의 서류들을 꺼내주었다. 경비대원은 그것들을 빠르게 읽었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국왕님을 알현키 위해 왔습니다." 경비대원은 카알 뒷쪽의 우리를 훑어보았다. "수행인원이 좀 독특하군요?" 하긴. 샌슨은 좀 초라하지만 수행무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더라도 그 외에는 어린애, 엘프, 밧줄에 묶인 남자, 큰 말을 탄 여자니까 영주 의 수행인원이라면 기이하다 하겠다.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엘프분은 저희 여행 동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훌륭한 헬턴트의 시민들이죠." 경비대원은 빙긋 웃으며 서류를 돌려주었다. 아마 깡촌의 영주라 수행 인원도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쳇. 그렇게 보일테니 어쩔 순 없군. "알겠습니다. 옥새는 확실하군요. 국왕의 봉신으로서 당신과 당신 수행 원의 통행권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엘프께서는 우리 국왕님의 친 우로서 바이서스의 모든 땅을 마음대로 지나실 수 있습니다. 통과하십시 오." 경비대원은 비켜주었다. 우리는 그 옆을 지나 다리로 들어섰다. 엘프는 바이서스의 시민이 아니지만, 따라서 바이서스의 법률에 저촉되지도 않 는다. 그래서 경비대원은 이루릴에게 무례하게 이름이 뭐냐, 목적이 뭐 냐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샌슨은 주눅든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게 진짜 '경비대원'이야… 굉장해." 카알은 헛기침을 하더니 농담삼아 말했다. "갑옷 말인가, 그 안의 인물 말인가?" 샌슨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알. 카알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런 갑옷을 입고 저렇게 경쾌하 게 움직인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죠. 전사로서 존경스럽군요." 그러자 이루릴이 방긋 웃었다. "대단할 것 없어요. 샌슨이 훨씬 강해요." "이런… 과찬의 말씀을." 그러자 네리아도 말했다. "이런, 샌슨아, 샌슨아! 저 갑옷들에는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대단 히 가벼운 거란다. 넌 갑옷 볼 줄도 모르면서 그러니?"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아?" "저런 갑옷 입은 사람과 사귄 적이 있거든." "그래? 흐음… 그래도 대단해. 그런 귀한 갑옷을 입었다는 것은 말이 야." 난 이루릴이나 네리아처럼 친절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난 주변을 보기 가 더 바빴다. 굉장했다. 임펠 리버를 가로지르는 그 아치형의 돌다리 난간에도 그 컨티뉴얼 라 이트가 걸려 있는지, 난간에서 은은한 빛이 비쳐 나와 우리는 흡사 빛의 다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치형의 다리라 마치 무지개를 밟고 지나 가는 느낌도 들었다. 컴컴한 밤중이라 그 광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밤에 와서 정말 다행이야! 다리 난간의 빛은 검은 강물을 반짝거리게 만들었 다. 검은 강물 위에 보석을 뿌려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리를 다 건너자 곧 엄청난 성벽이 다가왔다. 높이가 적어도 150 큐빗은 되어 보이는 성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돌을 어떻게 저렇게 쌓았을까! 저 무게로 땅이 꺼지지 않나? 그 높은 성벽 위로도 일 정하게 무슨 빛이 깜빡이고 있었는데 그건 횃불인 듯했다. 검은 하늘에 규칙적으로 늘어선 불빛은 최면작용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리고 정면에는 20큐빗 정도의 성문이 보였다. 밤이라서 그런지 성문 은 닫혀 있었으나 그 옆의 작은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작은 문을 지키 던 경비대원들은 다리에서 통과시켰으면 상관없다는 듯이 그대로 아무 말없이 통과시켰다. 샌슨은 그들의 복장을 보더니 다시 한숨을 푹 쉬었 다. 작은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니 곧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우와…!" 넓은 대로가 쫙 뻗어있었다. 대로 양쪽으로는 30 큐빗마다 규칙적으로 길다란 막대기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꼭대기에도 컨티뉴얼 라이트가 빛 나고 있어 대로는 환했다. 그것은 정말 교묘하게 생겼는데, 크기가 조금 차이가 나는 쇠로 된 반구 두 개를 모아 구 모양으로만든 다음, 두 개 의 구가 겹치는 부분에 쇠막대기를 꽂아 중심축을 따라 움직이게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중심축에 컨티뉴얼 라이트가 빛나는 것이다. 그래서 반구를 한쪽으로 겹쳐 모으면 빛이 나오고, 반구를 닫으면 완전한 구가 되어 빛이 가려지는 그런 모양이었다. 대로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런 밤중인데도 저렇게 많 은 사람들이? 마치 한낮처럼 사람들은 오가며, 이야기하고, 물건을 팔았 다. 요란한 소리에 정말 낮으로 착각하기가 쉬웠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모조리 가볍고 밝은 색의 옷이었다. 갑자기 내 하드 리더가 칙칙하게 보였다. 하드 리더를 입은 남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하드 리더는 모두 흰 색이나 붉은 색, 간혹 푸른 색도 보였다. 희한한 갑옷이군. 모두들 망토를 두르고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대개 아름다운 옷의 처녀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처녀들도 모 두 빛이 나는 듯했다. 모두 하얗고 밝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어서 주 위의 불빛에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이렇게 조명이 좋은데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저런 밝은 옷이라면 세탁하기 만만찮겠다. 카알이 말했다. "허어… 참. 저건 갑옷이 아니군." "예?" "저렇게 눈에 잘 띄는 색깔이 갑옷일 리가 있나. 아무래도 장식용 갑옷 인 모양이군. 축제인가?" 축제? 어, 그럴지도 모르겠군. 저렇게 많은 처녀 총각들이 밤 중에 이 렇게 데이트라니. 네리아가 카알의 말을 확인해주었다. "아, 오늘 보름달 두 개가 동시에 떴죠?" "그렇소." "그럼 오늘은 트윈문의 축제군요." "아! 오늘이…." 그 때 내가 끼어들었다. "보름달이야 원래 두 달에 한 번은 같이 뜨지 않아요?" "아, 네드발군. 오늘은 초대 바이서스 임펠의 시장이자 루트에리노 대 왕의 세째 왕자이신 세류델헨 왕자가 이 땅에 수도를 정하게 된 것을 기 념하는 날이라네. 전설에 따르면 세류델헨 왕자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수도로 정할 땅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두 개의 보름달이 동시에 지평선에 떠오를 때 독수리와 영광의 신 아샤스를 만나셨네. 그리고 아샤스의 명 령으로 이 땅을 수도로 정했어요. 그래서 바이서스 임펠에서는 그 날을 기려 축제를 가진다네." 아,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화려하게 돌아다니는 모양이군. 마차들도 얼마나 많이 오가는지 모르겠다.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별 로 보이지 않았다. 이 대로는 모두 사람들이 걸어다니기 좋은 대로였지 말이 편자를 따각거리며 걸을 길은 아니었다. 샌슨과 나는 잔뜩 주눅들 어서 그 밝은 색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말을 몰아갔다. 사람들이 우릴 흘깃흘깃 쳐다보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사람들은 우리 둘이 아니라 모두 이루릴과 네리아 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숨죽인 탄성이 들려왔다. "오, 맙소사… 엘프인가?" "저 말 좀 봐! 저 여자, 저런 말을 탔어!" "이건… 이건, 정말…" 주위의 장대 위의 불빛들이 이루릴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마음껏 흘러내리고 있다. 처녀들은 모두 금발이나 갈색 머리카락으로 머리를 올리거나 부풀려 모양을 한껏 내었지만 이루릴의 자연스러운 흑발머리만한 것은 없다. 그러고보니 정 말 매력적인 흑발 아가씨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칙칙한 금발이나 갈색 뿐이군. 그리고 이루릴의 낡은 가죽 자켓에 가죽 바지. 가죽은 낡 을수록 그 빛깔이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 처녀들의 화려하고 섬세한 옷 차림을 욕할 생각은 없지만, 이루릴의 가죽 옷 앞에선 몽땅 세탁장의 빨 래처럼 보일 뿐이다. 저 가죽 바지는 최고야! 말 위의 안장에서 등자까 지 뻗어내리는 다리의 곡선이 그냥 대책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옆의 네리아. 남자들도 못탈 것 같은 엄청난 흑마를 타고 있는 날씬한 아가씨. 하드 리더와 망토까지 입고 있지만 에보니 나이트 호크가 워낙 크다 보니 네리아는 작아보인다. 도발적인 붉은 단발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고 당당하게 걸어간다. 아니, 경쾌하다고 해야할까? 등 에는 거대한 트라이던트를 매고 있다.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뿜어내는 거 대하고 야수적인 매력과 네리아의 발랄하고 청신한 매력이 조화된 것은 거의 드래곤 브레스 정도의 폭발력을 발휘했다. 두 여자는 인공적인 화려한 옷차림의 처녀들에게 대해 완전한 자연미로 서 강력한 시위를 펼치는 셈이었다. 내가 보기에, 주위의 처녀들은 모두 순식간에 자신의 청년들을 잃는 아픈 경험을 하는듯이 보였다. 남자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이루릴과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과장없 이, 대로가 훨씬 조용해졌다. "킥킥킥…" 불쌍하리만큼 잔뜩 주눅들어있던 샌슨이 날 바라보았다. "왜 웃어?" "아가씨들이 불쌍해서." "불쌍하다니?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인데." "주위를 자세히 봐. 지금 남자들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전혀 눈길을 보 내고 있지 않아. 킥킥."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남자들이 모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이루릴 과 네리아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듣고는 빙 긋 웃었다. "이상하네… 이루릴은 아름답지만, 화려한 옷은 아닌데. 게다가 아가씨 답지 않게 말까지 타고…" "어이구… 오우거야! 주위를 봐. 모두 화려한 옷에 인형처럼 생긴 아가 씨들 뿐이잖아. 그러니까 이루릴과 네리아는 정말 살아 숨쉬는 아름다움 을 보여주는 거라고!" "그러냐? 휴우, 어렵다." 난 그 때 친절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가 하나 더 가르쳐 줄까?" "응?" "여기 수도의 아가씨들은 말이야. 샌슨같은 완전 오우거형의 전사는 처 음 보는 것이거든? 장식용의 갑옷을 걸친 샌님들이 아니라 방금 트롤 목 이라도 하나 치고 온 듯한 광폭해 보이는 남자는 처음 본단 말이야. 무 슨 말인지 알겠어?" 샌슨의 허리가 당장 곧아지고 그는 가슴을 쫙 폈다. 그는 사나운 눈길 로 지긋이 아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에구. 누가 말리겠냐. 내 농담이 었지만 진짜 몇몇 아가씨들은 숨이 멎는 듯한 얼굴로 도시 한복판에서 황야의 거친 야성을 풍기는 싸나이 샌슨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들, 정신 차려! 저건 인간이 아니라고! 어쨌든, 수도 시민들에게 사열을 받는듯한 걸음걸이로 - 샌슨이 사납게 노려보고 있자 마차 하나는 황급히 길 옆으로 비켜나기까지 했다. - 우 리는 여관이 밀집한 거리로 들어섰다. "카알, 역시 시민들에게 물어볼까요?" "그게 좋겠지." 난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봐. 샌슨이 한 번 물어봐." "내가? 알았어." 샌슨은 주위를 사납게 노려보더니 곧 지나가는 아가씨 하나를 눈빛 공 격으로 마비시켜버렸다. 뱀파이어나 메두사(Medusa)라도 지금의 샌슨보 다 더 무서운 눈을 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봐, 아가씨." 샌슨은 으르렁거리 듯이 말했다. 난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그 불쌍한 아가씨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 발발 떨면서 샌슨의 거무튀튀 하고 거대한 실루엣을 올려다 보았다. 샌슨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어두운 밤하늘의 성좌를 바라보며, 마치 엣노래를 노래하는 선원의 구슬픈 음성처럼 애잔한 울림이 있는 거친 목 소리로 슬픈 노래처럼 읆조렸다. "난 여행자요. 좋은 여관 하나 소개해 주겠어?" 여자는 멍한 얼굴로 샌슨을 보더니 대답했다. "나, 난 몰라요! 아무 데나 가보세요!" 그리고 여자는 부리나케 달아나버렸다. 샌슨은 얼빠진 얼굴로 그 여자 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난 너무 웃느라 결국 말에서 떨어졌다. "새, 샌슨! 우히히히! 어, 어떻게 아가씨가 여관에 대해, 헥헥, 잘 알 거라고 생각했지? 우킬킬킬킬! 저, 저 아가씨가 집 내버려두고 이 여관, 저 여관에서 자겠나? 우헤헤헤헤!" "아… 아차!" "나, 나이 지긋한 아, 아저씨에게 물어봐야지, 에헤헷헤헷! 그, 그래야 여관 주인들도 좀 알테고, 킬킬킬!" 결국 카알이 물어서 우리는 유니콘 인이라는 여관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난 그 동안에도 계속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웃었고 샌슨은 의기소침 하여 아무와도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수도라서 무조건 비쌀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오류였다. 수도라 서 오히려 물건들이 풍족해서 물가는 별로 비싸지 않았다. 여관비도 그 랬는데, 수도라서 여행객들이 많이 들려 그런지 상당히 훌륭한 여관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여관비는 저렴한 편이었다. 이루릴과 네리아는 지하에 욕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환호를 올리고 지하로 잠적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욕탕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지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충 씻고 먼저 저녁식사를 주문 하여 먹고 나서 홀로 물러났다. 이 도시의 모든 건물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니콘 인의 건물 안은 엄 청나게 밝았다. 홀 천장에는 거대한 상들리에가 있었고 벽마다 초가 두 개씩 세워져 있으니 그야말로 앞사람 땀구멍이 보일 정도로 밝았다. "이건 엄청나군. 그림도 그리겠는데?" 카알은 식후 디저트로 커피를 마시며 주위의 밝기에 감탄했다. 그 동안 나와 샌슨, 그리고 운차이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앞의 컵을 바라 보고 있었다. "카아아알…" "응? 왜들 그러나?" "저, 이거 주문해주신 것은 고맙지만, 못 먹겠어요." "아니, 왜?" "슬라임 같아요… 스푼으로 찌르니 물컹거리는 것도 그렇고…" "흐음… 자네들 기호엔 젤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겠군. 여보쇼, 주인 장. 맥주 셋." "그거예요! 그래요!" 역시 그게 훨씬 낫다. 우리는 젤리 컵엔 손도 대지 않고 치워둔 다음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운차이도 훨씬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훨씬 낫군. 소화에도 도움이 되고 말이야. 옆의 테이블 손님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에라, 웃든지 말든지. 우리 좋아하는 것 먹 으며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야! "음, 맥주맛은 괜찮군. 좋은 맛이야." 그 때 이루릴과 네리아가 홀로 들어왔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3. 아아… 파격적인 그녀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그냥 어슬렁어슬 렁 들어섰다. 네리아는 아에 머리에 수건까지 얹어둔 채로 들어섰다. 이 루릴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검은 머리에 물기가 반짝이는 것이 잘 보였다. 게다가 이루릴의 하얀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은 정말 못봐주겠다. 이루릴은 블라우스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단추는 몇 개 풀어 둔 채 완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복장이었고 네리아도 그에 별 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드 리더는 던져 두었는지 헐렁한 셔츠 하나 걸 치고 들어섰다. 남자들이 입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목 깃 부분은 크게 벌어져 어깨가 보일 정도였다. 내려오기는 또 얼마나 내 려오는지 허벅지를 다 덮었다. 그래서인지 네리아는 머플러 같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는 옆에서 질끈 묶고 나머지를 늘어트렸다. 흠. 그렇게 입 으니 그것도 괜찮네. "여기들 계셨군요." "식사는 하셨소?" "예. 식당에 갔다가 여러분이 이미 나가셨다고 해서 먹고 오는 길이예 요." 이루릴과 네리아가 우리 테이블에 앉자 당장 주위의시선이 경멸에서 시샘으로 확 바뀌었다. 날아오는 시선에 뒷통수가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난 네리아에게 질문했다. "그 옷은 어디 있었어요?" "응? 이거? 내 옷이지. 편해서 좋아." "네리아 옷 같지는 않은데요. 너무 큰데. 꼭 남자 옷처럼." 네리아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내가 훔쳤다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잖아요. 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옷을 가졌어요?" 네리아는 피식 웃더니 의자를 움직여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말했다. "변장용이야." "남자로요? 그런 몸으로?" "할 수 있어. 키 작고 뚱뚱한 남자로 변하는 건 쉬워. 샌슨같이 변하는 거야 불가능하지만 너 정도는… 그러고보니 너랑 나랑 키가 비슷하네?" "무슨 소리! 내가 훨씬 더 커요! 앉은 키가 비슷한 거죠." "그런가? 에휴. 다리가 짧아서. 나 욕탕에서 이루릴 다 봤지. 정말 다 리 길더라. 부러워서." "…이루릴 다리 긴 건 원래 아니까 그 이야긴 그만하죠." "아냐. 훌쩍. 나 정말 슬퍼. 치마 입고 다니는 여자는 이 마음 모를 거 야. 난 성실한 나이트호크로서 치마를 입지 못한다는게 너무 슬퍼." "으하하, 으하, 그만해요, 닭살 돋아요!" 샌슨은 우리 둘이 귓속말을 한참 주고 받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러나 그의 눈길은 우리에게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흘끔흘끔 이 루릴을 쳐다보다가 얼굴이 붉어졌다. "저, 이루릴." "예?" "사람들이 자꾸 쳐다봅니다." "왜지요? 아, 제가 엘프라서 그런가 보군요." "…그런가 봅니다.. 샌슨은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리고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맥주잔 을 들어올렸다. 네리아는 그런 샌슨을 보면서 배실배실 웃었다. 네리아 는 맥주를, 이루릴은 와인을 주문한 후, 우리는 홀에 앉은채 만인의 시 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내일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세레니얼양은?" "내일 델하파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런가요.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여러분들은 여기 얼마나 머물 계획이시죠?" 흠. 그건 나도 알고 싶은 것이다. 카알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못되도 이주일은 걸릴 겁니다. 어쩌면 한달 정도는 너끈히 있을 수도 있고." "그럼… 제 용무는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주일 쯤 후에 수도 에 들릴 테니, 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돌아갈 때도 같이 돌아간다면 좋 겠군요." 샌슨은 숨을 죽이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좋겠지요." 샌슨의 얼굴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좋아서 죽겠다는 듯한 얼굴이다. 나 도 좋지. 이루릴은 같이 여행하기에 좋은 동료야. 칼도 잘 쓰고 마법도 잘 쓰고, 일단 눈이 즐겁지. 같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상식에 대해 다시 금 생각하게 해주는 것도 참 좋고. 이루릴은 우리 모두가 찬성을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이셔널 셀렉션은 여러분들이 좀 맡아주시겠습니까?" "걸어가실 생각입니까?" "전 엘프니까요. 숲을 통해 갈 땐 말보다 훨씬 빨리 갈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네리아양은?" 머리에 뒤집어 썼던 수건으로 복면을 만들어본다든지, 목에 둘러본다든 지, 팔에 묶어 휘두른다든지 하는 장난을 치고 있던 네리아는 곰곰히 생 각하다가 말했다. "당신들은 어쩔 건데요?" "우리? 우린 계속 이 여관에 머물면서 수도의 이곳 저곳에 돌아다니게 될 겁니다. 대개의 경우, 내가 주로 돌아다니게 될 테고 퍼시발군과 네 드발군은 좀 심심하겠죠." 내가 끼어들었다. "우린 따라다니면 안돼요?" "글쎄. 난 여러 관리와 귀족가에 들를 생각이네. 사실 말해서 동냥질을 다니는 거지. 그런데 거기서는 별로 실질적인 도움도 되지 않는 예의범 절이 까다롭거든. 자네들은 그런 것 잘 모르잖아? 그리고 날 따라다녀 봐야 별로 재미는 없을텐데. 구걸하는 사람 따라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 할텐데." "구걸…이요?" "몸값을 마련해야잖나." 샌슨과 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카알은 10만셀을 어떻게 장만할 생각 일까? 우리도 따라나서서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가 수도에 지인이 있나, 친지가 있나? "흠. 꼼짝없이 여관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아야 되나?" "걱정말게. 자네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만나서 유익할만한 분들께는 꼭 데리고 갈테니." 그러자 네리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카알 아저씨. 하루에 1셀씩 해서 애 봐주기. 어때요?" "예?" "내가 후치랑 샌슨이랑 돌봐줄 테니까 안심하고 돌아다녀요." "괜찮은 제안 같습니다만… 허허허." "농담. 난 당장은 별로 할 일이 없어요. 이 근처에서는 통행세 받는 그 런 일도 못하고, 또 수도 경비대원 무서워서 다른 일도 할 게 없고. 뭐, 여기 계속 머물면서 일거리 찾아볼 거예요." 네리아는 수건을 내 목에 걸어 당기면서 말했다. 켁켁!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시오. 하지만 저…" "불법적인 일? 됐어요. 그런 부탁 안해요." "예. 그럼 퍼시발군, 네드발군. 자네들은 내일 오전 일찍 나랑 같이 옷 을 사러 가세. 예복을 갖출 수야 없지만 궁궐에 들어갈 테니 옷은 제대 로 갖춰야겠지. 그리고 운차이군의 신병을 넘기고 국왕 전하를 알현하 세." 어? 아주 쉽게 말하시네? 내 생각엔 아랫관리들에게 먼저 요청을 하고 윗관리를 만나 허락을 받고, 어쨌든 층층시하를 밟아가야 알현할 수 있 을 것 같은데? "어, 어? 알현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알현할 수 있어요?" "우리야 보통의 탄원자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말게. 우리의 임무는 국왕의 드래곤에 관한 것이니까." 그 때 날 마구 당기며 놀고 있던 네리아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 그러더니 테이블 아래에서 내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난 질겁했지만, 네리아는 내게 윙크하더니 내 허리의 벨트에 꽂혀 있는 대거를 뽑아들었 다. 뭐지?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그 때였다. "야! 네리아! 오래간만이네?" 좀 떨어진 테이블의 남자 하나가 네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30대 정도 로 보이는 기민해보이는 털보였다. 네리아는 내 대거를 그대로 수건 틈 에 감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봤을 것이다. "어머! 오래간만이야. 어머니는 잘 계시니? 저, 여러분. 저기 고향친구 가 있네요. 잠깐 갖다올께요." 그러더니 네리아는 반갑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 남자에게 다가갔 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생각하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테이블 옆에 기대어 놓았던 비스타드의 끝을 발로 밀어 내 무릎쪽 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난 그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남자와 네 리아를 살폈다. 고향 친구라고? 그 고향에서는 오래간만에 만날 때는 대 거를 숨기고 만나야 되나 보군. 따사로운 고향 인심인데. 난 그 남자를 자세히 훑어 보았지만, 그저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고 갑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마트면 그 자의 신발을 놓칠 뻔 했다. 얼핏 보기엔 보통의 신과 똑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신발 바닥에 털 가죽이 붙어 있었다. 호비트의 발바닥을 흉내낸 것인가?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겠군. 불안하네. 네리아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놔두어야 하나? 네리아가 우리 일행에게 알리지 않고 저렇게 한 것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뜻일 게다. 그 때였다.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남자 하나가 네리아와 그 털보의 옆을 지나쳤 다. 그 흉터 남자는 아주 기술적으로 둘을 가렸다. 그러나 난 보았다. 그 흉터가 살짝 가리는 틈을 타서, 털보는 네리아의 손목을 비틀어 대거 를 뺏어내고는 네리아의 허리를 쿡 찔렀다. 네리아의 몸이 굳는 것이 보 였다. 그리고 네리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 털보는 네리아의 어깨에 어깨동 무를 하고 있었다. 약간 떨어져서는 흉터가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 아는 털보와 함께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이봐요, 나, 친구와 잠깐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고 올께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시오. 늦으시겠소?" "좀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기다리지 말아요." 그리고 네리아는 물러날 채비를 갖췄다. 제길, 안돼! "아차, 네리아!" 네리아와 그 털보는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난 테이블에서 후다닥 일어 나면서 외쳤다. "그, 그거! 그거 까먹었어요! 이런, 젠장! 네리아가 가지고 있죠? 빨리 좀 와봐요. 아, 잠깐 실례!" 그렇게 말하며 난 네리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털보는 할 수 없이 네리 아를 놓아주었다. 난 네리아의 손목을 끌고 부리나케 홀을 빠져나갔다. 일행들은 멍한 눈으로 날 봤으나 설명할 새가 없다. 홀을 빠져나와 복도의 벽에 붙어섰다. 네리아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고마워." "뭐예요? 저 작자들 뭔데요?" 네리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골치아픈 얘들이야. 저 녀석들은 나이트호크도 아냐. 파렴치한 사깃꾼 들이지." "좋아요. 방으로 올라가죠." 네리아와 난 우리들 방으로 올라왔다. 혹시 누가 본다면 복도에 멍청 하게 서 있을 순 없으니까. 우리들은 방에 올라와서 발코니로 나갔다. 이 여관은 이층이 일층보다 면적이 작았으며 그 나머지는 발코니로 만들 어져 있었다. 발코니와 방 사이에는 미닫이 문이 있어서 잘 때는 그것을 닫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 문 밖에서 들을까봐 발코니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긴 탁 트였으니 감시할 수도 없겠지. 눈 앞에 바이서스 임펠의 야경이 펼쳐 졌지만 그 기막힌 광경을 감상할 새도 없었다. "저 친구들이 원하는 것은?" "날 쓰고 싶대." "복잡한 이야기는 빼고. 좋아요, 싫어요?" "싫어. 보수도 많이 준다고 하지만 일 끝나면 나 죽일꺼야." 끔찍스럽군. 내용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네리 아가 끔찍스럽다는 말이다. 난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에 말했다. "알았어요. 털보와 흉터 두 명 뿐입니까?" 네리아는 놀란 눈으로 날 보았다. "너 흉터도 알아차렸구나? 제법이네. 응. 그 둘이야. 하지만 어딘가 다 른 패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돌려보내면 또 올까요?" "강제로 돌려보낸다면. 아마 여자가 필요한 일거리가 있나봐." "길드의 일입니까?" "아냐. 길드에서 왜 죽이려들겠어? 저 놈들은 길드에서도 추격하는 고 약한 녀석들이야. 어쩌다가 저런 놈들을 알게 되었는지… 젠장." "좋아요. 길드 소속이 아니라면, 저 놈들을 요리해도 상관없다?" 네리아는 내 손을 잡아 쥐더니 말했다. "후치. 저 놈들은 무서운 놈들이야." "이렇게 묻죠. 죽을 거예요? 마음에 있는대로 말해요. 친구니까." "…살려줘." "좋아요. 여기서 기다려요. 샌슨을 데려오죠." 난 네리아를 두고 다시 방을 나왔다. 난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간 다 음 홀로 들어섰다. 홀에서는 그 남자가 멀뚱히 서서 날 바라보았다. 그 털보는 내 옆에 네리아가 없는 것을 보자 날 사납게 노려보았다. 난 시 치미떼고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네리아도 모르겠대. 젠장, 그게 어디 있지?" 샌슨은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아니, 뭘 말야? 말을 좀 제대로 해봐. 서두르지 말고." 어떻게 하면 털보가 눈치채지 못하게 저 오우거를 데려간다? 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 때 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거 있잖아? 성 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아소리 요란한데…" "으으아아가각!" 샌슨은 조건반사적으로 나에게 돌진했고 곧 운차이와 함께 나동그라지 고 말았다. 여전히 발목을 서로 묶어 두었으니까. "으억!" "꽤액!" 그러나 샌슨은 곧 벌떡 일어서더니 운차이를 확 들어올려 어깨에 둘러 매더니 날 쫓아왔다. 운차이는 땅에 나동그라졌다가 어깨 위로 올라갔다가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무섭군, 무서워. 우리 방에서 간신히 샌슨을 정지시켜 네리아의 위기를 전해주었다. 쉬 운 일은 아니었지만. 샌슨은 곧 침착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어. 털보와 흉터는 사깃꾼들이란 말이지?" "맞아. 그 놈들은 내가 말 안들으면 죽이려들꺼야." "내려가서 박살내어놓지." 아이고, 머리야.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 다른 패거리가 있다잖아?" "찾아오면 다 박살내지." "잘 때 찾아와서 심장에 나이프 하나 꽂아두고 가면 어쩔래?" "…아래에 있는 놈들 붙잡아서 족친 다음 패거리들도 다 잡지." "…그건 왠지 마음에 드는데?" 그야 당연하지. 난 헬턴트 토박이니까. 네리아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 와 샌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가장 위험한 계획을 좋아하는구나?" "다른 계획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모르겠어.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시간 없어. 가자, 운차이, 잠깐 실례." 그리고 샌슨은 운차이의 턱을 올려쳤다. 뻐억! 열심히 듣고 있던 운차 이는 그대로 기절했다. "네리아는 운차이를 감시해." 샌슨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도 따라갔다. 네리아는 머리를 휘젓더 니 운차이를 침대에 묶기 시작했다. 샌슨과 나는 계단에서 간단히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쿵쾅거리며 계단 을 내려왔다. 홀에 내려오자마자 난 울화통이 터진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되는게 없어!" 샌슨도 이마를 짚고 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휘저으며 은근슬쩍 흉터 남자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화장실이 어디 있지?" 좋아, 지금이다. 난 털보에게 다가섰다. "앗! 잠깐만." 털보는 당황해서 날 바라보았다. 난 황급하게 말했다. "당신 배에 파리가 있어!" 퍽! 털보는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아마 배가 뚫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내가 끼고 있는 장갑이 뭐냐? 샌슨도 흉터 남자의 어깨를 잡으 며 기세좋게 외쳤다. "어? 오래간만이네?" 빡! 흉터 남자는 턱이 돌아갔다. 샌슨은 그대로 쓰러지려는 남자의 어 깨를 붙잡은채 다시 복부를 호되게 올려치고 말했다. "야! 이거 정말 반갑네. 네놈들이 도박장에서 내 돈 떼어먹고 달아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러자 홀 안에 있던 손님들도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 다. 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시나? 헷. ================================================================== 5. 복수의 검은 손길……4. 난 재빨리 외쳤다. "이거, 사람들 많으니 방으로 가자." 그리고 난 그 기절한 털보 남자의 뒷덜미를 들어올려 우리 방으로 끌고 왔다. 여관 주인이 황급하게 달려왔다. "이봐요, 손님들! 방에서 소란을 부리면…" 샌슨이 재빨리 10셀짜리 은화 하나를 집어주면서 말했다. "절대로 조용히 있지요. 만일 우리가 시끄럽다면, 그 때 쫓아내십시오. 괜찮겠죠?" 여관 주인은 손바닥의 돈과 샌슨의 체격, 그리고 그 말을 번갈아 생각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소란을 부리면 안됩니다! 집기를 부숴도 안되고." "염려마십시오." 카알과 이루릴은 대단히 놀란 눈으로 우릴 바라보다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뒤를 따라왔다. 샌슨이 그 흉터 남자를 끌고 나올 때까지 난 카알 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이놈들 사깃꾼들이예요. 네리아와 아는 사이인데, 네리아를 위협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고요." "아, 그런가?" 샌슨도 흉터 남자를 끌고 나왔다. 기습을 당한 둘은 거의 실신 상태였 다. 우리는 둘을 끌고 네리아가 기다리는 방으로 올라갔다. 네리아는 우 리가 둘을 질질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빚을 졌네…" "뭔 빚. 괜찮아. 신경쓰지마. 돕고 살아야지." 샌슨은 간단히 말했다. 그는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어 둘을 묶고 재갈 까지 물렸다. 두 남자를 바닥에 앉히고 우린 고민에 쌓였다. 이 친구들 에게는 패거리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달래서 패거리들이 우릴 공격 하지 않도록 해야 될까? 네리아가 나섰다. "음… 이젠 내게 맡겨." 네리아는 둘 중 털보를 먼저 깨웠다. 털보는 눈을 뜨더니 험악한 표정 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재갈을 풀어주 었다. "자, 문댄서. 내 친구들은 이렇게 세다고. 난 너희들하고 동업할 생각 없어." 문댄서(Moondancer)? 괴상한 별명의 그 털보는 침을 뱉더니 말했다. "…저 놈들은 밤이슬 맞는 놈들이 아닌데?" "이 분들은 그런 분들이 아냐." "흠,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도 갈데까지 갔군. 모험가 흉내라도 낼 생각 인가?" "난 열쇠따기나 함정해체 같은 것은 할 줄 몰라. 그건 특별히 더 미화 된 열쇠기술자이지 성실한 나이트호크가 아냐. 그리고 이 분들은 보물 만 있다면 산꼭대기든 땅 밑이든 찾아가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고. 우린 그냥 친구야." "…죽은 친구가 될 거야." 문댄서는 사나운 눈길로 우릴 쏘아보았다. 샌슨이 욱 했지만 네리아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말을 못알아듣는구나. 할 수 없지. 후치? 술 한 병만 받아올래?" 술? 갑자기 술이라니? 그 말을 듣자 문댄서의 눈빛이 순간 흩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난 머저리가 아냐. 그런 장난으로 날 어떻게 할 것 같아?" "해봐야 알지. 후치. 드래곤의 숨결을 달라고 하면 돼. 그리고 컵은 다 섯 개." 뭔 말이지? 어쨌든 나는 방을 나와서 홀로 내려갔다. 주인장을 불러 드 래곤의 숨결을 한 병 달라고 하니까 주인장은 날 쏘아보기 시작했다. "네가 그걸 마시냐?" "심부름이지요. 그거 무슨 술인데요?" "…자네들 중에 그걸 마실 사람은 없어보였는데." "이보세요. 그게 금지물품이라도 되나요?" "그건 아니지. …여기 있다. 가져가라." 난 술병과 다섯 개의 컵을 받아들고 우리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보니 문댄서라는 그 털보는 의자에 앉아 벽에 등을 대고 있 었다. 네리아는 내가 가져간 술병과 컵들을 받아들더니 먼저 다섯 개의 컵을 테이블 위에 일렬로 세웠다. 그리고 밀봉된 술병을 뜯었다. 난 현 기증을 느꼈다. 진짜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듯한 독주였다. 샌슨도 눈을 껌뻑이더니 말 했다. "후아, 이거, 레너스에서 유스네가 가져왔던 그거잖아?" 아, 그 진짜 엄청난 술? 카알과 이루릴도 어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다음 네리아는 우리들 각자가 가진 대거들을 모았다. 나와 샌슨, 카 알은 대거를 가지고 있었고 이루릴은 허벅지에 묶어 두었던 망고슈를 건 네주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대거도 꺼내고 문댄서의 품을 뒤지더니 나이프를 하나 꺼내었다. 네리아는 그 다섯 개의 대거들을 역시 테이블 위에 쫙 늘어놓았다. 무 슨 대거 전시회 하는 것 같은데? 네리아는 두 손을 깍지껴서 머리 위로 들어올려 기지개를 켜고는 말했다. "이봐. 문댄서. 여자가 필요하다는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른 여자를 구해보면 되잖아. 너희들은 오늘 처음 날 봤어. 그냥 돌아가 서 날 잊으면 되잖아." "…너 외에 다른 여자는 안돼." "그래? 음… 이렇게 해. 돌아가서 날 쓰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해버 려." "싫어." "할 수 없지. 여러분, 네리아 스페셜입니다." 네리아는 우리에게 허리까지 숙여보이면서 인사했다. 박수를 쳐야 되 나? 그 대신 우리는 네리아가 지시하는대로 침대 위에 앉아 네리아를 구 경했다. 네리아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아요. 끼어들지도 말 고. 이건 우리 세계의 일이니까 끼어들면 곤란해요. 알았어요?"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몇 번이나 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네리아는 먼저 테이블 위의 첫 잔을 들어 문댄서에게 건배 하듯이 내민 다음 쭉 들이켰다. 오! 저 엄청난 술을 한 번에 비워? 네리아는 그것을 내려놓더니 눈을 조금 껌뻑였다. 그리고는 대거를 들어 한 두번 위로 던지면서 무게를 살피더니 휙 집어 던졌다. "아악!" 이루릴의 낮은 비명. 대거는 날아가서 문댄서의 왼쪽 귀 옆에 꽂혔다.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차이일까? 우리는 모두 기겁해서 네리아를 바라 보았다. 네리아는 말했다. "포기해." 문댄서는 전혀 흔들림없는 태도였다. "안돼."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두번째 잔을 들었다. 이거 말려야 되는 것 아닌가? 네리아는 역시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이번엔 두 손으로 얼굴 을 확 감쌌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욱. 역시 세네…" 그리고 네리아는 두번째 대거를 들어올렸다. 역시 한 두번 공중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균형을 살펴보더니 그대로 집어던졌다. 문댄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오른쪽 귀 옆에서 한 마디쯤 떨어진 벽 에 꽂혔다. "포기해." "안돼." 네리아는 별로 신경쓰는 투도 아니었다. 그녀는 문댄서의 대답을 듣자 마자 세번째 잔을 들어올려 그대로 비웠다. 그녀의 입술에서 턱을 타고 술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는 한 두번 휘청거렸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쥐고 거칠게 숨을 쉬더니 머리를 심하게 흔들며 다시 똑바로 섰다. 카알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네리아양!" "뒤에서 말하지 마! 죽일 거야!" 거침없이 터져나온 폭언에 카알은 굳어버렸다. 그것은 울부짖음이었다. 네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번째 대거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이루릴 의 망고슈였다. 네리아는 그것을 한두 번 던졌다. 이번엔 그녀는 그것을 놓쳤으며 망고 슈는 아래로 떨어져 네리아의 발 앞에 똑바로 꽂혔다. 네리아는 히죽 웃 었다. "칼날이 좋네…." 네리아는 그것을 뽑아들다가 망고슈가 쉽게 빠져버리는 바람에 엉덩방 아를 찧고 말았다. "아코코…!" 그녀는 씩씩거리며 의자를 잡고 일어났 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리를 벌린 다음 팔을 뒤로 당겼다. 그 때 문댄서가 말했다. "포기하지." "난 맺고 끊는게 확실한 남자가 좋더라." 네리아는 헤죽 웃더니 비틀거리며 문댄서에게 걸어갔다. 네리아는 문댄 서의 뺨에 키스해 주었지만 문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질린 표정으로 네리아와 문댄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댄서는 별로 표 정의 변화도 없이 시무룩한 얼굴이었고 네리아는 다시 비틀거리며 돌아 와 의자에 주저앉으며 자기가 들고 있던 세번째 컵을 카알에게 내밀었 다. "카알 아저씨. 고함 질러서 미안해요." 카알은 거의 무의식 중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문댄서를 한 번 보고, 네리아를 한 번 본 다음, 고개를 흔들고는 잔을 그냥 비워버렸 다. "흠, 좋군…" 그리고 카알은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카알은 네리아가 아니니까 저걸 한 번에 비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카알은 침대에 쓰러진 다음 그대로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되었다. 네리아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네번째 잔을 이루릴에게 건네었다. 이루릴 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네리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대거를 잘 던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실수를 하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어요?" "그건 저 친구의 판단이죠.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면 계속 버텼을테 고, 목숨이 귀하다면 포기하는 거죠. 내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죠. 난 상 황을 만들 뿐." "생명과 의지, 둘 중에 하나를 강제로 선택하도록? 하지만 그것은 상대 의 자유?" "정확하네요." 이루릴은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얌전히 한 모금 마시고나서 눈을 심하게 껌뻑거리기 시작했다. "후우우, 헉, 헉. 이거 너무 독해요오오오…" "효과가 빠르죠." 이루릴은 상체를 흔들거리며 흐느적흐느적 말했다. "…당신은 후치와는 또다르은 의미에서, 후우, 친구를 만드는군요오오. 후우, 강제적이인 서어언태액의 요구우. 인간이라아안, 이해하기 어려워 어…" 네리아는 그런 이루릴을 보더니 비실비실 웃으며 다섯번째 잔을 샌슨에 게 내밀었다. 샌슨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네리아는 빈 잔 두 개에 술을 채우더니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아까 들어보니 넌 이걸 마셔본 모양이더라?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열 어주는 술이지." 난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네리아는 잔 을 들더니 발코니쪽으로 나갔다. "바람이나 쐬자… 혼자 있게 해줘." 그리고 네리아는 발코니 쪽에 가서 난간에 팔꿈치를 괴었다. 난 내 손 에 들린 잔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문댄서를 보았다. 문댄서는 발코니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한 잔 할래요?" "…놔주기나 해." "확실히 포기한 것 맞지요?" "저 여자가 저렇게 믿는 것 보면 모르겠냐?" "좋아요." 난 술잔을 내려놓고 한 손에 바스타드를 뽑아들고 다른 손으로만 문댄 서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문댄서는 손목을 문질렀다. 난 거리를 좀 두고 말했다. "저 남자 밧줄은 당신이 풀어요." 문댄서는 흉터 남자의 밧줄을 풀었다.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은 다음 나가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바닥에 흩어진 밧줄과 벽에 꽂 힌 두 개의 대거뿐이다. 정확히 사람 머리 하나 들어갈 정도의 간격이 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거를 뽑았다. 돌아보니 샌슨은 잔을 비우고 있었고 이루릴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카알 을 편히 눕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루릴은 카알의 다리를 들어 올리다가 놓치고 침대에 코를 박는 둥 악전고투 중이었다. 내가 걸어가서 카알을 똑바로 눕혔다. 이루릴은 방긋방긋 웃으며 테이 블에 놓아둔 자기 잔을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핥으면서 말했다. "음냐, 지이인짜 도옥해요. 하아아…" "괜찮겠어요?" "그래에도 차암, 맛있어요오오." 그리고 이루릴은 잔을 들고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난 그녀를 부축했다. 이루릴은 헤죽헤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바앙에 좀 데려다줘요오오."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난 그녀를 부축하여 우리 방 바로 옆에 있는 그녀와 네리아의 방에 데려다주었다. 우리 방에 돌아와보니 샌슨은 다시 자기 잔을 따르고 있었다. 난 그의 옆에 앉아서 내 잔을 들었다. "정말 강한 술이다." "나도 좀 마셔볼까?" 난 잔을 코 앞에 가져와 그 냄새를 맡은 다음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천천히, 방향(放香)을 즐기면서. 네리아는 술을 마실 줄 몰라. 무색무취 형의 독한 술이라면 그렇게 마셔도 좋겠지만, 향이 좋은 술은 삼단계로 마시는 법. 먼저 코 앞에서 향을 즐기고, 입에 머금어 미각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목구멍에서 넘길 때의 감각을 즐긴다… 고 카알은 얘기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왕창 마시고 뻗어있다니. 난 피식 웃었다. "세긴 세네." 샌슨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대거를 보며 말했다. "도둑이라는 직업에도 윤리관이 있을까?"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글쎄? 뭔 직업엔들 규칙이 없겠어. 다른 사람 보기에 좀 이상하게 보 일지도 모르지만." 일반론, 일반론. "그럴꺼야. 음. 포기한다고 한 마디 하니까 그냥 놔주는군." "문댄서나 네리아나 둘 다 풋나기가 아닌가 보지. 자기 말에 책임을 져 야 되는 인물." 보편적, 보편적. 참 재미없는 말이군. 하지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된다." 난 발코니쪽을 보았다. 네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어? 네리아 어디 갔어?" "응. 조금 전에 공중제비를 넘더니 옆의 발코니로 넘어갔어." "헤에… 술 마시고 공중제비?" "깔끔하게 넘어가던데." 샌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난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난 입을 쫙 벌리고 샌슨을 바라보았다. "아…! 그럼?" 샌슨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취한 척 한 것은 연극이었지. …그 여자 정말 술 세군." ================================================================== 5. 복수의 검은 손길……5. 이루릴은 우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그 드래곤의 숨결인지, 트림인지를 마셔서 지금 좀 피 곤한 상태였다. 오늘 아침엔 네리아가 그녀가 죽은 줄 알고 기겁하는 소 동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술에 완전히 취해버려 아무런 감각도 없 이 호흡을 매우 느릿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리아가 그녀를 들춰업 고는(그래도 다리가 질질 끌렸다.) 욕탕으로 들어간지 1시간만에 이루릴 은 간신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루릴은 인간처럼 푸스스해지거나 속이 뒤집히거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그런 식의 숙취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신 평소에 보기 힘든 좀 피곤해진 모습,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너스시의 지하감옥에 서 그 고생을 했을 때도 단정하고 침착하던 모습이었던 그녀가 그 술 한 잔에 이토록 피곤한 모습을 보이다니. 음, 정말 엄청난 술이다. "2주일 후에 뵐께요." "조심하세요. 그리고 부탁 하나 할께요. 조심하세요." 이루릴은 내 농담에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운차이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운차이는 본체 만체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네리아가 눈썹 을 곤두세우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루릴은 오히려 고개를 꾸벅이 며 사과했다. "아,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그리고나서… 그녀는 우리들의 말에게도 인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미소 이외에는 합당한 표정이 없어서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구경했다. 이 루릴은 말들의 콧등을 쓸면서 말했다. "슈팅스타, 광활한 황야의 노예. 이 돌의 도시는 네게 갑갑하겠지만 주 인을 잘 모셔요. 트레일, 끝까지 걷는 끈기 있는 구도자. 네 주인의 중 요한 임무를 잘 헤아려 성심성의껏 보필하렴. 제미니, 쾌활한 주인을 좋 아하지? 넌 주인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행복하겠지. 앰뷸런트 제일, 사랑 하는 주인과 헤어지겠지. 유피넬께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원해요. 에 보니 나이트호크, 패할 수 없는 용맹의 화신. 그래서 오히려 아름다운 숙녀에게 항복한 너. 넌 유니콘을 닮았구나." 오…. 우리 말들이 그렇게 대단한가? 말들은 이루릴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얌전히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사납고 거친 에보 니 나이트호크도 얌전히 이루릴이 쓰다듬는대로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루릴은 자신의 말 레이셔널 셀렉션의콧등을 쓰다듬었다. "레이셔널 셀렉션. 난 돌아와요.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 즐거웠다면, 날 기억하고 기다려줘요." "푸르릉, 히힝, 히힝힝힝!" 놀라워. 자기 주인을 닮았는지 우리 말들 중 가장 조용하고 온화한 말 레이셔널 셀렉션이 갈기를 마구 휘저으며 이루릴에게 대답하듯이 머리를 움직였다. 레이셔널 셀렉션은 이루릴의 말을 확실히 알아듣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루릴은 말들에 대한 인사도 마치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럼,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우리들 중 카알이 대표로 대답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그리고 이루릴은 가볍게 몸을 돌려 바이서스 임펠의 중앙 대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볍게, 마치 바람을 밟아가듯이. 그녀는 걸을 때 다리를 쭉쭉 뻗는다. 그렇게 이루릴은 바이서스 임펠 시민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멀어져갔다. "자, 우리도 가볼까?" 카알의 말에 따라 우리는 말에 올랐다. 먼저, 이루릴과 작별하기 위해 데리고 나왔던 레이셔널 셀렉션을 여관의 마굿간에 도로 데려다 놓은 다 음 우리는 도시 중심가로 들어섰다. 가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우리는 옷가게를 찾았다. 카알은 네리아에게 말했다. "네리아양. 골라보시겠습니까? 네리아양이 돈을 돌려준 덕분에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옷 한 벌쯤 선물하는 것 어렵지 않아요." "헤에… 카알 아저씨도. 자꾸 부끄럽게 하시네. 전 옷 필요없어요. 응 응, 여러분은 이대로 왕궁에 가실 거죠?" "그렇소." "전 왕궁이라면 두드러기가 나요. 돌아다니면서 일거리나 찾아볼래요. 축제라서 일거리 찾는게 쉬울지 모르겠네. 오래간만에 수도에 왔으니 친 구들도 만나보고… 밤에 여관에서 봐요." "아, 예. 편하실대로." 그리고 네리아는 그대로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걷게 했다. 흠. 네리아도 정말 이루릴만큼이나 이목을 집중시키는군. 네리아는 엄청난 흑마에 올 라타고 등에는 희귀한 창 트라이던트를 걸쳐 매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하드리더도 입지 않고 그냥 편한대로 걸치는 남자 셔츠라 가냘픈 몸매가 더욱 두드러진다. 에보니 나이트호크 위에 있다면 어차피 커보이긴 힘들 겠지만 더 작아 보이는 것은 간단하지. 주위의 시민들은 탄복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킥킥. 네리아가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고른 건 오 로지 팔아먹을 때 비쌀거라는 이유에서였지?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딸랑. "어섭셔!" 쾌활하고 싹싹한 주인이 우릴 맞이했다. 주인은 산더미 같은 옷 속에서 헤엄쳐 나오듯이 하면서 우리 앞에 나섰다. 카알은 우리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게. 하지만 우린 예절을 차려야 되는 자리에 간 다는 것을 명심하고." 난 잠깐 고민한 다음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 자켓을 골랐 다. 검정색은 때가 안타니까. 우히히. 아무리 궁궐에 들어가기 위해 구 입하는 옷이라 해도 옷이 한 번 입고 말 물건인가? 카알도 원래 점잖은 옷이라 회색 망토 하나만 골랐다. 그런데 문제는 샌슨이었다. "어, 팔이 안들어가는데?" "윽, 목이 좁아." "수, 숨 막혀서… 이건 안되겠는데?" 샌슨의 팔에 달려있는 좀 끔찍스러울 정도의 이두박근 때문에 왠만한 옷의 소매에는 팔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는 별로 크지 않지만 목 둘레에 뭉쳐진 승모근 때문에 목구멍이 맞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삼각근은 왜 저렇게 발달했는지 가슴 둘레는 웬만한 여자도 못따라올 것 이다. "손님, 도대체 지금 입고 계신 옷은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거요? 우리 영주님 지급품이죠." "그쪽 영주님은 덩치가 얼마나 크시길래?" "아, 아뇨. 우리 경비대원들이 모두 덩치가 좋아요." 하긴 그렇지. 우리 고향에 가면 샌슨보다 더 큰 해리 같은 경비병도 있 다. 그래서 경비병 제복은 모두 보통 사람의 두 배에 가까운 옷감이 든 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체격이 빈약하고 약한 경비병은 오래 못살 아 남는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령 그런 사람이 들어와 살아남는다 해도 끔찍한 현실과 치열한 훈련 때문에 몸에근육이 엄청나게 매달린다. 옷가게 주인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손님은 천상 옷을 맞춰 입어야겠군요. 점잖은 옷을 찾으신다고 했죠? 점잖은 옷에는 그렇게 커다란 옷이 없습니다. 모험가들이나 입을 옷이나 작업복 등에는 그렇게 큰 것도 있습니다만." 카알은 고민했다. "어쩌지?" "뭐, 상관 없습니다. 카알. 전 경비대원이니까, 경비대 제복이 정복이 죠." "…국왕전하 앞에서 갑옷을 걸칠 수 있는 것은 국왕전하의 근위병이 아 니라면 전장에서뿐이네." "그런가요? 그럼 하드 리더만 벗죠." 그럼 그냥 셔츠 차림인데… 카알은 간단히 해결했다. "망토 하나 큰 거 주시오." 그래서 샌슨은 셔츠 위에 망토를 두른, 좀 희안한 모습이 되었다. 하지 만 근사한 체격이 있으니 그렇게 걸쳐놔도 보기 흉하지는 않았다. 운차 이는 우릴 보며 한숨을 쉬었다. "번쩍번쩍 하는군. 이제 날 진상할 준비가 다 된 건가?" 샌슨은 턱을 쑥 내밀면서 말했다. "네가 무단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그 따위 쓰레기같은 짓을 할 때부 터 너에게 배정되었던 장소로 데려갈 준비가 끝난 거다. 억울하다는 식 으로 말하진 마." 아니! 저렇게 긴 말을 하다니! 운차이는 잇소리를 내었다.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럼 가지." 우리는 궁성으로 용감하게, 대책없이, 찾아갔다. 용감한 건 샌슨이고 대책이 없는 것은 나다. 카알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주의하라든가 무 슨 말을 하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이것, 참. 우리나 라에서 가장 존귀한 집으로 갈 때는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거지? 길가에 주욱 늘어선 그 불장대는 모두 둥근 구 모양으로 닫혀 있었다. 아마 우리가 낮에 왔더라면 왜 거리에 장대를 세우고 쇠공을 얹어 놓았 는지 이상하게 여겼겠지. 성이 보였다. 이미 도시를 둘러싼 훌륭한 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성은 전투용 성이었다. 그러니까 궁전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첨탑과 해자, 도개교, 높은 석벽과 총안. 어느 산꼭대기나 험악한 고개 등에 세 워놔도 손색이 없을 모양이었다. 규모가 상당히 크긴 했지만. 난 카알에 게 물었다. "이상하네요. 국왕의 궁전이라면 그냥 아름답게 만들어도 될텐데 왜 이 렇게 전투용 성처럼 만들어뒀죠? 우리 영주님 성보다 더 전투적이네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뼛속까지 무골이었으니까. 핸드레이크가 그것 때문 에 골치가 많이 아팠다더군." "그래요? 흠. 그래도 이건 정말…." 웃기는 노릇이다. 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 도시 바깥에 벌써 엄청 난 장벽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돌파할 정도의 적이라면 이 성으로 뭘 막겠는가. 카알은 말했다. "좋은 의미도 있지. 저 성은 국왕이 기사도의 제일 수호자라는 것을 상 징하거든. 루트에리노 대왕의 명언이 있지. 기사들은 추운 북풍 맞아가 며 성 위에 서고, 기사 중의 기사, 만인의 종복인 국왕은 궁전의 비단쿠 션 위에서 뒹굴면 개도 웃을 노릇이라고 하셨네." 샌슨은 그 말을 듣고는 엄청난 감동을 실은 눈길로 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품위라든가 위엄 같은 문제도 있을 텐데요? 나라의 국민이 모 두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지도 자 아닐까요? 완전 무골인 국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위엄 있는 국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걸 다 포용할 줄 알아야 되지 않을 까요?" 카알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흠, 카알. 당신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요. 나같은 인재를 길러내었으니까. 헤헤. 카알은 말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핸드레이크가 골치 아팠다는 걸세. 하지만 핸드레이 크의 조언이라면 벌거벗고 바이서스 임펠을 달리는 일이라도 세 번쯤은 생각해보고나서야 반대하겠다던 루트에리노 대왕도 그 일에서는 고집을 피우고는 궁전 대신 궁성을 세웠다더군." "흠…." "그리고, 사실 나쁘지는 않아. 국왕전하께서 저렇듯 성에 살고 있으니 그 아래 신하들이 무슨 배짱으로 화려한 집을 짓고 호화로운 별장을 짓 겠는가?" "그건 맞군요. 괜찮네요." 어쨌든 루트에리노 대왕 덕분에 궁성 임펠리아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고향의 영주 저택을 찾아가는 것 만큼이나 여상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도개교를 따라 들어가자 궁성 수비대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우릴 막아섰다. "이곳은 국왕의 성 임펠리아입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카알이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안으로 연락해주시오. 국왕의 드래곤 캇셀프라임의 일을 보고드리러 헬턴트 영지에서 사람이 왔다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도개교 위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몇 명의 무관들을 동행한 남자가 나왔다. 수도 경비대나 궁성 수비대 모두 화려한 플레이트를 입고 있었지만 지금 나온 남자는 간단한 푸른 무늬의 흰색 무관 제복을 입고 있어 대단한 인물로 생각되었다. 우 리는 어쩔까 하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 남자는 반백의 머릿결과 그와 잘 어울리는 반백의 수염을 가진 늙은 이였으나 아직 꼿꼿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궁성 수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입니다. 귀하들은?" 아프나이델? 어? 샌슨과 난 동시에 서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알은 선 선히품에서 서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조나단 아프나이델이라는 이름 의 궁성 수비대장은 서류를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라. 그렇군. 아무르타트라는 블랙 드래곤 때문에 할슈타일가의 캇셀프라임을 요청한 그 영지군요?" "그렇습니다." "따라오시죠. 보고는 먼저 국왕 전하께 드려야 되니까." 오, 카알의 말이 맞군. 국왕 전하의 드래곤이라는 이유로 그냥 일사천 리인데? 우리는 조나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조나단은 궁 성 수비대원에게 지시하여 우리 말들을 마굿간에 데려가도록 했다. 성의 마당으로 들어가니 그래도 국왕의 집다운 맛이 느껴졌다. 마당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에는 포석이 깔려 있었고 그 외의 땅 에는 모두 잔디와 풀이 돋아 있었다. 관목과 정원수들이 멋진 조화를 이 루고 있었다. 밖에서 보던 것과는 딴판이군. 무엇보다도 많은 나무들과 꽃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본성건물을 타 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에서부터 성벽 곳곳에 서 있는 나무들과 만발한 꽃 들이 퍽이나 아름다운… 잠깐! 꽃이라고? 이 가을에? 샌슨과 나는 다시 서로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 계절에 꽃이 피어있는 것이지? 여기가 별로 따뜻하거나 특별한 기후인 것은 아닌데? 우리는 그게 무지 묻고 싶었지만 카알이나 조나단 모두 엄숙하게 걸어 가고 있어 우리 같은 졸병들이 뭐라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기회 가 되면 물어보기로 하고 꾹 참고서 걸어갔다. 카알은 도중에 조나단에게 말했다. "궁성에 감옥이 있을까요? 어떻게든 감금시설이면 됩니다." "무엇 때문이십니까?" "저희가 호송해 온 인물은 자이펀의 간첩입니다." 조나단의 얼굴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황급히 샌슨을 돌아보았다. "저 자가…?" 샌슨은… 좀 그렇게 생겼지. 카알은 운차이를 가리켰고, 그러자 조나단 은 다시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저 자가…?" "그렇습니다." "아, 그럼 저 자의 신병을 일단 구속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는 궁성 수비대원들에게 끌려갔다. 흐음… 드디어 안녕이 군. 조금 씁쓸한 것 같기도 하다. 운차이는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본성 건물의 입구에 도달하자 조나단은 뒤로 물러났고 대신 다른 인물 이 나타나서 우릴 맞이했다. 그는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사람으 로, 궁내부장은 말하자면 우리 영주님저택의 하멜 집사 같은 일을 담당 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는 우리들을 응접실로 데려가 앉히더니 잠시 기 다리라고 말했다. 우린 그렇게 궁성의 응접실에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주위는 모두 하얀 벽이다. 벽에는 장식 삼아 방패와 검 등이 걸려 있었 는데 아무리 봐도 먼지 한 톨도 떨어져 있지 않다. 청소를 잘 하나보지. 가운데 우리 엉덩짝을 가져다대기 황송스러울 정도의 소퍼들이 둥글게 놓여있었다. 화려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우린 어차피 땅바닥에서 뒹굴던 몽이라 소퍼라면 좀 떨뜨름한 것이다. 잠시 후 시녀로 짐작되는 인물이 얌전히 나타나더니 뭘 드시겠냐고 물 어보았다. 골치 아프네… 으윽. 맥주 한 잔! 이렇게 말하면 웃길텐데. 샌슨은 잔뜩 긴장했는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맥주 있어요?" …미치겠다. 시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전하를 알현하러 오신 손님들 아니신가요? 술을 드시고 알현하실 생 각이십니까?" "아, 아차! 실수. 물이나 주세요." 시녀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쥬스를 부탁했고 카알은 여전히 그 괴상한 커피를 주문했다. 저걸 마실 수 있다니, 카알은 정말 존경해도 괜찮을 거룩한 인물이야. 마침내 거룩하신 물 한 잔과 쥬스 한 잔과 커피가 다 비워져버렸고 우 린 몸이 근질거려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음. 인내, 인내를 배우자. 아 무리 심심하더라도 지금 샌슨이 하는 것처럼 컵을 빙빙 돌려본다든가 하 는 저런 추태를 부려서는 안된다. 이윽고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그 궁내부장이 다시 나타났다. 샌슨은 허 둥거리다가 컵을 떨어트릴 뻔 하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절 따라오십시오." 복도를 따라 걸으니 정말 위압스러웠다. 천장이 왜 이리 높지? 바닥에 깔린 카펫은 또 왜이리 푹신푹신하고 벽에 늘어선 창문들은 또 왜이리 큰지. 흠. 이윽고 우리는 어떤 방문 앞에서 멈춰섰다. 리핏 트왈리전이 먼저 방문 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리핏 트왈리전은 옆으로 물러났다. 뭐지? 우 리가 문 열고 들어가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뜻인 것 같아서 카알은 문을 열었다. 우리는 방 안에 들어섰다. 방에는 벽이 없었다. 벽 대신 전부 책장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서재인 것 같은데? 가운데는 소퍼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 쪽엔 책상이 있었 다. 빛이 들어올 곳이 없는데도 안은 환했다. 천장을 보니 천장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루릴의 말대로 무슨 마법을 걸고 영구화시킨 모양이다. 책상 귀퉁이엔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6. 무명 셔츠에 무명 바지. 위 아래로 통일이 잘된 옷을 입고 있는 그 젊 은이는 대략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잿빛 머리카락의 그 남자는 그 때까지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인지 우리가 들어가니 책을 책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그대로 책상 귀퉁이에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우릴 바라보았다. 카알은 잠시 당황한듯 그 남자를 멀건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도 똑같이 멀건히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남자가 먼저 자기 머리 를 딱 쳤다. "아, 실례.거기들 앉으시죠. 미안해요." 우리는 일단 시키는대로 앉았다. 그 남자는 책상에서 풀쩍 뛰어내리더 니 이젠 우리 맞은편의 소퍼 귀퉁이에 앉았다. 귀퉁이를 참 좋아하나 보 군. "날 만나러 오셨다고요?" 순간 카알은 고슴도치라도 깔고 앉은 듯이 벼락치듯 일어났다. "저, 전하. 에, 처음 뵙겠습니, 아, 아냐." "어? 어, 그럼 의미가 없어요." "예?" "여러분들을 서재로 불러들인 의미가 없잖아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 려 했는데." 아이고 맙소사! 저, 저 분이 우리 국왕이야? 샌슨과 나도 튕겨나듯이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길시언과 비슷하기는 하다. 아니, 길시언을 어디 도서관 같은 곳에 가두고 한 3년쯤 묵혀두면 저렇게 될 것 같다. 국왕전하께서는 멀뚱히 우릴 보더니 황급히 손을 저어 우리를 앉혔다. "앉아요, 앉아요들." "저, 전하, 에, 그러니까…" 무릎을 꿇어야 되겠는데 앞에는 테이블 때문에 방해가 되는군. 그러려 면 소퍼 뒤로 돌아가야 되나? 우리가 허둥거리자 국왕은 아주 간단히 우 리 문제를 처리하셨다. "앉아요. 어명이오." "옙." 우린 일어났을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주저앉았다. 국왕 전하께서는 콧잔등을 긁적거리시며 말씀하셨다. "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입니다. 그쪽은?" "카알 헬턴트, 헬턴트 영주 대리이자 전권 대리인입니다." "샌슨 퍼시발, 헬턴트 경비대장입니다." "후치 네드발, 헬턴트 초장이 후보입니다." "예?" "아, 아니, 헬턴트 시민입니다." "아, 예. 그렇군요." 닐시언 전하께서는 머리를 갸웃하셨고 난 궁성에도 쥐구멍이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있다면 들어가고 싶다. 닐시언 전하는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부딪히며 말씀하셨다. "캇셀프라임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오셨다고요?" 카알은 심호흡을 하고는, 앉아서 이야기하니 너무나도 송구스럽다는 태 도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예.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 스 전하께서 그 어린 백성이자 나날이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 하를 흠모하는 정을 되새기는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이 극악, 간교, 포 악, 잔혹, 무도한 창조의 실패물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의 부적합하며 몰가치적이며 무목적이며 야수적이며 비탄스러운 폭력에 의해 그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전하의 사 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사…" 닐시언 전하는 고귀하신 하품을 하신 다음 말씀하셨다. "오늘 중엔 끝납니까?" "예?" "아, 혹시 내일까지 계속된다면, 내일 일정을 좀 조절해야겠군요." 불쌍한 카알은 그만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닐시언 전하는 두 손을 깍지 껴 뒷통수를 받치고는 소퍼에 기대었다. "간단히 말해주십시오. 그것도 어명으로 할까요?" "예. 캇셀프라임은 아무르타트에 패했고 휴리첼 백작은 아무르타트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차라리 긴게 나을 뻔 했군. 젠장." 아아아니! 젠장이라니? 지금 전하께서 젠장이라고 하셨잖아? "골치 아프군. 캇셀프라임을 써먹을 곳이 있었는데. 흠, 용건은 그게 답니까?" "예?" "내가 불같이 진노했고, 당신은 용서를 빌었고, 그래서 은혜로운 내가 용서했다고 기록해두면 되겠죠?" "예, 예?" "없다면, 이만."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소퍼 귀퉁이에서 일어나 또다른 귀퉁이, 책상 귀 퉁이로 옮겨갔다. 이거 뭐야? 사람 무시하는 건가? 아! 그러고보니 정식으로 접견실로 불러들이지 않고 이렇게 서재로 불 러들인 것 정말 괘씸한데? 젠장! 우리가 고작서재에 불려와 이런 취급 이나 받으려고 새옷 사입고 가슴 두근거리며 왔나? 난 그렇지 않아도 아 직 길이 들지 않아 거북한 옷을 확 벗어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 릴 뭘로 취급하는 거지?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그 '아무리' 라는 말이 절대로 붙을 수 없는 사람이 국왕 이긴 하다. 난 어금니를 사려물며 꾹 참았다. 카알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그외에도 보고드릴 일이…" "뭡니까?" "저, 저희들은 이 성스러운 성도로의 복된 여행 도중 모처에서 벌어진 어떤 불민한 사태에 봉착하여 그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던 중, 국왕 전하 께 크게…" "짧게 하시오. 어명이오." "간첩을 잡았습니다." 닐시언 전하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건 좀 길게 말해봐요. 하지만 궁정 사집관들이나 좋아하는 그런 수 식어는 빼고." 카알도 이젠 조금씩 얼굴에 안좋은 기색을 띄고 있다. 거창한 환영식을 기대하며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뭐냐? 백성으로서 나라의 가장 큰 어른께 어려움을 말하러 왔는데 자기가 필요한 말만 듣겠다는 식의 저런 태도는 뭐지? 최소한의 관심을 보여주며 그대들의 어려움을 가슴 아파한다는 식의 말 정도는 해줄 수 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게 어렵나? '이러이러하게 기록해 두면 되겠지? 그럼, 이만.', '그건 좀 들어야겠다. 길게 해봐.' 라고? 그러고보니 서재로 불러들인 것 생각할수록 정말 기분 더럽군. 카알은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다. 헬턴트 영지는 국왕에 대한 충성의 의무 를 가지지만, 그러므로 국왕은 헬턴트 영지에 대해 그 충성에 합당한 명 예로운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뭐야, 이건? 카알은 되도록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는 아무런 감상도 없이 그저 사실의 나열이었고, 그 일들을 같이 겪었던 나에게도 낯설게 들릴 정도였다. 우리가 그랬나? 흠, 왜 그 랬지?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특히 50 명의 꼬마를 맡게 된 펠레일의 이야기는 너무나 가식적인, 마 치 못된 귀족들이 고아들 끌어모아 자칭 후견인이 되는 그런 이야기로까 지 느껴졌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그런게 아니었어.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할 순 없어. 여기가 다른 자리였다면 나나 샌슨은 벌써 몇 번은 끼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알은 국왕 전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니만큼 끼어들 수가 없 었다. 비록 여기는 서재고, 국왕 전하는 우릴 '공식적'으로 만나 줄 생 각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사람이 되긴 싫다. 쳇! 이윽고 카알은 그 보고서를 전하에게 건네주었다. 전하는 그것을 빠르 게 읽어내렸다. "굉장하군요! 그런데 혹시 실험 개요서나 설명서는 없습니까?" 실험 개요서? 설명서? 내 옆에 앉아있던 샌슨이 꿈틀하는 것이 잘 느껴 졌다. 카알의 얼굴에서는 엄청난 혐오감이 드러났다. "…아쉽게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굳어버린 카알의 얼굴을 보던 닐시언 전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 혹시 내가 그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을 흉내내어 보고 싶어한다고 생 각하진 마십시오. 증거가 뚜렷해야 자이펀을 공박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증거가 불확실하면 허튼 소리다, 흑색선전이다라는 말을…" 말 돌리기는. 지금 카알의 눈빛은 거의 운차이의 살기어린 눈빛에 맞먹 을 정도였다. 닐시언 전하는 그 눈빛에 움찔했다. 카알은 나직히, 점잖 은 그 어투 그대로 말했다. "…자이펀을 공박하기에 앞서 칼라일 영지의 주민들의 비극에 대해 먼 저 생각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닐시언 전하의 얼굴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카알은 조 용한 어투로 못박듯이 말했다. "물론, 하해로운 성총의 힘입음으로 칼라일 영지의 비극은 역사의 장에 서만 취급되는 비극으로 탈바꿈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렵군. 닐시언 전하는 헛기침을 좀 한 다음 말했다. "그 영지에 대해서는… 강구될 수 있는 모든 조력이 함께 할 것입니 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카알은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상대를 기분좋게 하는 온화함은 아니었다. 상대가 개라고 해도 난 인간처럼 굴겠다는 식의 온화함이었 다. 어쨌든 카알의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어 이윽고 갈색산맥에서 길시언 과의 만남까지 접어들었다. 닐시언 전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시언? 그 모험가는…" 카알은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가면같은 얼굴로 말했 다. "전하의 형님이라고 주장하더군요." "…다 아는 모양이군. 계속 하세요." 카알은 계속 무감각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길시언이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우리가 죽을 뻔한 그 이야기도 카알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카알은 '암살자들' 이라는 말 대신 '정체불명의 괴한들'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카알의 태도는 마치 그것 이 무슨 산적들의 습격 정도로 그 배후나 음모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도 전혀 없는, 하찮은 사건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닐시언 전하는 바 보가 아니었다. "암살자군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국왕 전하 만세라고 했다면서요?" "한 개인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할지는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어쩌면 그 자는 평소에 만인을 두루 살피시는 전하의 덕을 남몰래 흠모해왔기 때문 에 그 죽음의 순간에 전하의 만세를 기원한 것일 수도 있지요." 카알은 그야말로 냉기가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닐시언 전하는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 끝을 올렸다. "내가 당신들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단도직입적이군. 흠, 그러나 카알이 그 정도로 흥분해버릴 인격은 아니 지. "저는 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술 빚고, 빵 사며, 책을 읽는 독서가입니 다. 전 그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엄격히 정의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 바이서스에 대한 사랑이겠죠. 그러나 전하께옵서는 바이서스라는 이 국가를 개인으로써 대신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닐시언 전하는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깨놓고 이야기합시다. 당신, 말하는 투로 보아하니 촌구석에서 올라와 자기 고장의 일로 한 국가의 장인 날 귀찮게 만들 정도의 위인은 아니군 요. 당신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길시언 형님은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이 나라에서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은 분입니다. 간 판감으로는 최고지요. 쿠테타를 일으킬만한 세력의 앞잡이가 되기에는 가장 훌륭한 대외명분감입니다." 카알은 닐시언 전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하. 제가 알기로, 국왕은 어느 변두리 시골의 촌로가 키우는 수탉이 여우에게 잡혀가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되는 분인 것 같습니다." 닐시언 전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카알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촌구석에서 올라와 자기 고장의 일로 한 국가의 장인 전하를 귀찮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런 귀찮은 일이 싫어서 우리를 이런 장소로 불러들여 간단히 끝내기로 마음 먹으신 겁니까? 저희들이 전하께 찾아온 목적은 캇셀프라임의 패퇴 소식과, 이에 따라 저희 영지에 대해 끼쳐질 해악에 대해 상의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것은 도외시 하시고 길시언 폐태자에 대한일을 말씀하시는군요." "아, 그건… 아무르타트가 10만셀을 원한다고요? 알겠습니다. 내가 마 련하죠. 그건 그렇고…" "감사하신 말씀입니다. 전하의 확언으로, 어리석은 촌부인 전 커다란 안심을 느낍니다. 그럼 성총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전하의 귀중 한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도록 물러남을 허락해 주십시오." "젠장… 이보십시오!" 닐시언 전하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나와 샌슨은 움찔했으나 카알은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쩌란 말입니까! 지금 자이펀과의 전쟁만 해도 숨가쁘단 말입 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전쟁에 대한 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전쟁과 상관없는 일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의 일에 시간을 뺏길 수는 없단 말입니다! 난 지금도 어전회의를 잠시 중단시켜놓고 시 간을 낸 겁니다!" 카알은 묵묵히 닐시언 전하를 바라보았다. 닐시언 전하는 팔까지 휘두 르며 말했다. "끊임없는 어전회의가 매일 계속됩니다. 당신 영지에 대해서는 미안하 지만, 지금 웨스트 그레이드의 어느 외딴 영지에 대해서까지 신경쓸 수 도 없을 만큼 시급한 현안들이 쌓여있습니다. 내형님인 길시언의 일도 그 중 하나입니다만 그외에도 산적한 문제가 끝도 없습니다. 이 지역의 병탄은 전략적으로 어떤 잇점을 주는가, 저 장군의 아들을 강등시키는 일은 그 장군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내 여동생은 과연 예쁜가!" 마지막 말에 우리 셋은 한 방 맞은 표정을 지으며 닐시언 전하를 바라 보았다. "예에?" 닐시언 전하는 한숨을 푹 쉬고나서 말했다. "우습습니까? 내 여동생, 이 임펠리아에 꽃을 피어나게 할 정도로 재주 좋고 상냥한 나의 여동생을 헤게모니아 국왕의 빈으로 보내는 것으로써, 헤게모니아가 장악한 북부대로에서 우리 상인들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하여 원활한 상거래로 소금값의 안정을 가져와 전쟁 이전의 비율로 물가 성장률을 억제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긴 물음을 간단히 줄 인 겁니다." 난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하려 했지만 벌써 앞부분은 가물가물,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저 긴 말을 한 문단으로 말하는 거지? 생 각나는 것은 이 성에 꽃이 피는 것은 닐시언 전하의 여동생이 재주가 좋 아서라는 것 뿐이다. 카알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간단히 대답했다. "안됩니다." "예?"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카알은 한숨을 푹 쉬더니, 들려주기 아깝기 그지없지만 국왕이니까 애 기해준다는 식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북부대로를 통해 소금을 운반하는 상인은 독과점 영업이 가능할 겁니 다. 실제로 그 정도의 상단을 조직할 수 있는 상회나 재벌은 드뭅니다. 북부대로는 험악한 곳인데, 전시이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니까요. 정부 의 규제를 아무리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군대에 납품하게 되는 소금에 대 해서는 규제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북부대로의 통행권을 원활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독과점을 육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규모 상단에 의해 공급되는 소금으로 현재의 소규모 소금 채취업자들은 모두 도산하 게 될 것이며, 현재 군대에 소금을 납품하며 생계를 잇는 영세업자들의 잇따른 도산이 예상됩니다." 닐시언 전하는 입을 쩍 벌리고 카알을 바라보았고 샌슨과 나는 여전히 감명 깊다는 식의 표정밖에 짓지 못했다. 책 좀 읽었어야 했는데… 카알은 계속 유수처럼 말했다. 졸음이 올 지경인걸? "전시가 아니라면, 소규모업자들도 공정한 경쟁을 통해 북부대로의 소 금 수송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 게다가 그런 대규모 상회에 의해 소금이 매점매석되게 된다면 바이서스 내부에 소금 채취 산업이 더욱 피폐해져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수입된 소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태도 야기될 수 있습니다. 소금은 향신료 등의 상품이 아 닙니다. 필수품이죠. 따라서 절대로 그런 사태를 일으켜서는 안될 것입 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가가 치솟는대로 내버려둘까요?" 닐시언 전하는 바삐 물어왔다. 카알은 손가락을 깍지껴 무릎에 얹고는 소퍼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어전회의에서 상의해보시죠." 졸음이 확 달아났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7. 샌슨도 아마 그럴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머릿속으로 교수대의 밧줄이 목에 감길 때의 기분은 어떨까, 등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악, 카 알! 우, 우릴 죽일 생각입니까? 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새로 산 옷의 불편함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져 왔다. 아마 내 감각이 엄청나게 긴장해서 그런 모양이지? 닐시언 전하는 무서운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국왕 모독은 사형이라는 것 아십니까?" "모독을 느낄 줄은 아십니까? 전하의 머릿속엔 전쟁에 대한 생각 뿐이 실텐데." 카알은 아예 본격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오, 맙소사! 난 항상 샌슨은 몰라도 카알은 헬턴트 사나이의 규격 미달 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그렇지 않잖아? 카알은 완전 한 헬턴트식 배짱을 부리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날 죽이는 것 말고 더 뭘 하겠냐? 하지만 내 목숨은 내 것이고, 내 마음대로 종말처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죽는 것이니, 넌 사실 날 죽일 수조차도 없다. 멋대로 해 봐!' …라는 식의 배짱 말이다. 닐시언 전하가 헬턴트식 배짱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화를 삭이느라 엄청나게 고생중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퍼 가장자리를 꽉 쥐면 서 말했다. "당신은…" 닐시언 전하는 입술을 한 번 적시고 다시 말했다. "어전회의에 가봤자 지금 들은 것보다 더 명료한 의견을 들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건 항복선언인 것 같은데? "고견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항복선언 맞군. 교수대 밧줄아, 안녕! 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으며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도 죽었다 살아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카알은 닐시언 전하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고견이요? 글쎄요. 제 생각엔, 전쟁이 끝난다면 물가에 대해서는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닐시언 전하는 카알의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아 의심스 러운 눈으로 카알을 볼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카알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는 것에 대해서인데, 제가 칼라일 영지에서 만났던 펠레일이라는 젊은 마법사가 제게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조금 전 저희들의 여행에 대해 말씀드릴 때에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그 마법사는 지형,풍토, 기후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 펠레일은 정말 지형을 잘 읽었지. 그러고보니 기억난다. 칼라일 영지를 떠나올 때, 펠레일은 카알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지. 그 이야기 인가? "그는 말했습니다. 12월까지 루펠만 해안을 차지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 다." "루펠만 해안?" 닐시언 전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따라서 샌슨과 나 도 참으로 근심스러워졌다. 카알은 느긋하게 말했다. "루펠만 해안은 일스 공국에 소재한 해안입니다." "아, 그, 그렇습니까?" 모른다는 말이군. "예. 일스 공국에 있는 이 루펠만 해안은 볼품 없는 장소죠. 일사량이 모자라고 백사장도 없어 염전을 할만한 곳도 아니고, 어획 채취도 역시 기대되지 않습니다. 항구로 쓸 수 있는 장소도 못됩니다. 아마 군사지도 에는 전략적 성과가 기대되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펠 레일은 대륙을 주유하던 중 루펠만 해안에 잠시 머물렀고, 거기서 놀라 운 발견을 했나 봅니다." "예?" "루펠만 해안은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이 대륙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장소지요." "거, 걸프스트림(Gulf steram)?" 카알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왠지 교활해보이는 미소다.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경우 생 기는 잇점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펠레일은 그래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닐시언 전하의 얼굴이 크게 붉어졌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나와 샌슨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닐시언 전하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말 했다. "거, 걸프스트림이 무엇입니까?" 카알은 입을 딱 벌리더니 어떻게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쪽의 총애를 받 는 인간으로서 이다지도 무지할 수 있느냐는 식의 표정으로 닐시언 전하 를 쳐다보았다. 아마 저 표정의 상당 부분은 복수의 쾌감을 위한 것일게 다. 그런데 걸프스트림이 정말 뭐지?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이런, 저 간악한 자이펀을 패퇴시키기 위한 불세출의 전략을 짜내시느라 공사다망하신 전하께 그런 사소한 것은 관 심밖일 것이라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카알은 아주 간곡한 태도로 사과했고 따라서 우리 얼굴에선 거의 핏기 가 빠져나갔다.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카알! 그 정도면 됐어요! 일단 사는게 중요하다고! 카알도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비꼬지는 않았다. "촌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우리 나라는 해양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 은 드물 것입니다." 닐시언 전하는 헛기침을 하며 굴욕을 삼키는 듯했다. 카알은 여전히 부 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전하. 자이펀은 현재 우리 나라와 교전 상태이므로 중부대로를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나라에서 어떻게 수출입이 가능하겠습니까?" "그야, 자이펀에는 강력한 해군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양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나라라서 그 강한 해군력으로도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는 것이 다행스럽지요." "예. 그 점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어쨌든 자이펀에서는 그 해 군력 덕분에 우리나라와 교전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없이 수출 입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해군력을 사용하지 못할 경 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닐시언 전하는 펄쩍 뛰어올랐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 소퍼에서 1큐빗 은 뛰어올랐다. 덩달아 샌슨과 나도 소퍼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닐시언 전하는 그야말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적어도 12월까지 바이서스가 루펠만 해안을 이용할 수 있 게 될 경우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12월? 그게 무슨 뜻입니까?" "12월에 접어들면 대륙의 동쪽 해안에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배들은 거 의 북진항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을 이용 하면 배들은 얼마든지 항행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12월에 접어 들면 배들은 어쩔 수없이 루펠만 해안 바로 근처를 지나야 된다는 이야 기입니다." "거, 걸프스트림이 무엇이길래?" "세계에서 가장 큰 해류입니다. 오세니우스해 전체를 주유하는 거대한 해류지요. 게다가 속도가 거의 6, 7 노트에 가까운 초고속 해류입니다." 난 엄청나게 출세했다. 왜냐하면 난 현재 닐시언 전하, 즉 우리나라의 국왕과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냐고? 지금 카알은 교사가 되어 닐시언 전하와 샌 슨, 그리고 나에게 해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 명은 똑같은 학생 입장인 것이다. 에헤헤. 해류란… 카알의 설명에 의하면 바닷물이 흐르는 길이랜다. 도저히 이 해가 안된다. 똑같은 물인데 그 중에서 다르게 흐른다고?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닐시언 전하도 몹시 궁금하던 차에 내가 질문해 서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정말 똑같은 입장이지 않은가? 카알은 설명 했다. "똑같은 공기 중에도 바람이 흐를 수 있지 않습니까?" 간단한 설명! 하지만 이해는 쉽군. 카알은 좋은 교사였다. 닐시언 전하 도 아주 착실한 학생이었다.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 점잖게 들어와서 어전회의의 각료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자 닐시언 전하는 간단히 처 리했다. "어명이오! 각료들은 모두 다 대가리를 테이블에 박고 있으라고 전하시 오!" "예?" "젠장! 아, 아닙니다. 이렇게 전하십시오. 어전회의를 마칠테니 모두 자택으로 돌아가 근신하고 있으라고 전하시오!" "예?" "몇달간에 걸쳐 하루도 빼지않고 어전회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가져오신 것의 반만큼이나 귀중한 정보를 이야기한 각료가 없잖습 니까!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내 여동생을 헤게모니아에 보내 소금값이나 내려보자는 의견뿐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무슨 어전회의를 계속 하잔 말입니까! 조속히 어명을 시행하지 못하겠습니까?" 리핏 트왈리전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닐시언 전하는… 길시언을 도서관에 넣어 3년쯤 묵힌 것처럼 생겼지만 속으로는 비슷한 성격을 가졌나 보다. 길시언은 조금 더 외향적이라서 뛰쳐나왔고 닐시언 전하는 조금 더 내향적이라서 왕이 되었다는 차이뿐 인가 보다. 아무래도 형제니까 비슷하겠지. 아니, 어쩌면 그것은 루트에 리노 대왕의 핏줄을 이은 왕족의 공통된 성격이 아닐까? 날 보라. 우리 아버지와 참으로 비슷한 성격… 오, 맙소사. 내가? 어쨌든 카알은 계속 설명했다. 그 해류라는 놈을 잘 알면, 바람이 적어도 배를 움직일 수 있단다. 그 리고 그런 해류들 중에서도 가장 큰 해류가 오세니우스해를 일주하는 오 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이다. 그런데 12월에 들어서면 대륙의 동부해안에서 는 북풍이 불기 때문에 배들이 북진항해를 할 수가 없다. 역풍도 이용하 려들면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자이펀의 군함들이나 상선 같은 거대한 배는 역풍 항해가 거의 힘들단다. 허어? 배가 역풍을 타고도 움직일 수 있다 는 것은 처음 알았는걸? 어쨌든 이 시기 동안은 대륙 동쪽에서 북진하는 해류인 오세니우스 걸 프스트림을 이용하지 않으면 자이펀에서는 항해가 불가능하다. 돛을 다 접어버리고, 해류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걸프스 트림에서 살짝 벗어난 다음 북풍을 타고 내려온다. 간단하다. 그런데 여기서 루펠만 해안의 중요성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도에서 보면 루펠만 해안은 대륙에서 오세니우스해를 향해 툭 튀어나 온 뿔처럼 생겼다. 그리고 걸프스트림은 오세니우스해를 일주하다가 루 펠만 해안에서 가장 해변에 가깝게 흐른다. 따라서 이 때 루펠만 해안에 마법사들과 노포, 기타 장거리 공격 부대 를 잔뜩 주둔시켜 지나가는 자이펀 배를 박살내어버린다. 배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결국 배다. 바람이 없으니 그 해류 이외엔 달리 이용할 것 이 없어 도망도 못가고 꼼짝없이 두드려 맞게 된다. 자이펀 배들이 상륙 해서 해안을 공격할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루펠만 해안은 전혀 항구로 쓸만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배들을 두드려 잡으면 자이펀으로서는 해상무역이 단절되 므로 대단히 김빠지는 처지에 빠진다는 것이다. 물론 봄이 되면 다시 바 람이 불기 때문에 걸프스트림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이 겨울 동안만 해도 충분하다. 원래 자이펀은 사막이 많은 나라라서 생필품의 고갈은 쉽게 찾아올 것이다. 닐시언 전하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흥분상태였다. "그, 그러나 루펠만 해안은 분명히 일스 공국의 땅인데…" 아무리 공국이라고 해도 나라는 나라다. 아니, 다른 나라보다 공국은 더 건드리기 어렵다. 무력한 공국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비 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국에다가 어떻게 부대를 주둔시키느 냐는 질문일 것이다. 나와 샌슨도 궁금하다는 듯이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친절하게 말했다. "여기서, 그 운차이라는 간첩의 증언이 필요해집니다." "예?" "일스 공국은 분명히 우리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키고 있습 니다. 일스 공국에서는 장미와 정의의 오렘의 총본산이 있으며 일스 대 공 자신도 정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그 분의 기사단인 일스 기사단의 이름을 져스티스 기사단이라 칭할 정도입니다. 그 분을 직접 뵙진 않아 서 정말로 정의로운 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겠지 요?" 카알의 말에 나와 샌슨은 어리둥절해졌지만 닐시언 전하는 교활하게 웃 었다. "중요하지 않지요. 정의로운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사실 그 교활한 자는 지금 어느 쪽에 더 승기가 있느냐를 따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카알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대외적으로 그 분은 우리와 자이펀, 어느 한 쪽에 편드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운 차이의 증언과 그 실험 보고서를 일스 대공께 제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정의를 수호하시는 일스 대공의 반응은 어떠해야 될까요?" "아샤스여…" 닐시언 전하는 탄식 비슷하게 바이서스 왕족을 지켜준다는 독수리와 영 광의 아샤스의 이름을 불렀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전 외교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위의 두 가지가 있을 경우 외교에 능숙한 각료라면 쓸모없는 땅인 루펠만 해안의 임대와 군대 주둔을 부탁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닐시언 전하는 계속된 흥분에 탈진되어버렸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 시나. 샌슨과 나는 죽었다 살았다를 계속해서 지금 쓰러질 정도로 지쳐 있는데. 어쨌든 닐시언 전하는 카알에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현신입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술 빚고, 빵 사며, 책을 읽는 독서가입니 다." "카알. 미리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이야기?" "그러니까, 그 전쟁을 끝장낸다는 계획 말이예요. 미리 이야기를 좀 해 줬다면 덜 놀랐을 것 아닌가요?" "흐음.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네. 국왕전하를 직접 만나뵙고 말씀드릴 때까지는 입을 조심하자고 생각했거든. 언짢다 면 용서하게나." "아니… 뭐, 생각해보니 이야기해줘봐야 어쩌겠어요. 잘 하셨어요." 우리는 국왕의 서재를 나와 걷고 있었다. 카알의 말이 맞다. 카알이 그걸 내게 이야기해봐야, 뭐 어쩌겠는가? 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은 우리 국왕님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을수록 비 밀의 낭비다. 그렇지 않아도 닐시언 전하는 이 이야기를 다른 누구에게 도 말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명심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극비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달린 문제를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궁성에 머무 르라고 말했다. 국왕의 가장 귀중한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면서. 하지만 카알은 아직도 좀 화가 덜풀린 모양이다. 나라도 그렇겠다. 처음에는 시 골에서 수도까지 올라와 징징 우는 소리나 하며 국왕을 귀찮게 하는 상 소꾼으로 취급하더니, 전쟁을 끝장내는 계획을 말해주자마자 사근사근하 게 군다면 누가 예쁘다 그럴까. 그러나 카알은 점잖게 말했다. "동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궁성에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말씀은 다드렸으니, 이제 현명하신 전하의 처분만 있으면 될 듯 합니다. 저, 그런데 아무르타트가 요구한 몸값은…" "걱정 마십시오. 보석으로 준비하라고 했지요? 보석을 갑자기 모으기는 힘들지만, 준비되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전혀. 내 백성의 일인데요." 뻔뻔하시군… 내 백성의 일이라고? 언제는 귀찮다며? 카알은 굳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고 점잖게 물러났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8. 하지만 카알은 내심 꽤나 기뻤던 모양이다. 그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게들.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나로선 전쟁에서의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전략을 말씀드렸다는 것보다는, 아무르타트에게 줄 몸값을 쉽게 마련하게 된 것이 훨씬 기쁘다네." 샌슨은 뒷꼭지를 긁으며 웃었다. 나도 그렇다. 우리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다. 전쟁? 미안하지만, 우리 일이 아니다. 제기랄, 닐시언 전하가 먼저 '당신들의 일'이라고 말했다. 마치 자기가 바이서스의 모든 백성을 책임져야 할 국왕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나도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은 '닐시언 전하의 일'이다! 죄책감 없이 기뻐해버릴 테다! 입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궁성의 그 길 잃어먹기 딱 적당한 길을 리핏 트왈리전의 안내를 받아가며 나갔다. 리핏 트왈리전 궁내부장은 도저히 치솟아오르는 호기 심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질문을 하거 나 하는 것은 품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궁금하면 그냥 묻지. "이쪽입니다." 엥? 어라? 바깥이 아니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정확히 뭐하는 공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척 보기 엔 집무실 비슷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벽면 가득한 창문으로 실내는 환 했다. 닐시언 전하의 서재도 꽤나 밝았지만 여기는 자연광이라서 한결 좋군. 한 옆에는 커다란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꽃 이 꽂힌 수반이 있었다. 벽에는 테피스트리, 몇 개의 장식물이 있었다. 한 귀퉁이에는 몇 개의 무기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보였다. 지금 창문 앞에는 왠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우리가 들어 가자 몸을 돌렸다. 조나단 아프나이델이라는 그 궁성 수비대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알현은 잘 마치셨는지요." 카알은 멀뚱히 조나단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만…." 조나단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햇다. "그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책임지고 여러분을 호위 하라고 하시더군요.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 전하 좀 조증 아닌가? 조나단은 테이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앉 으라고 말했다. 우린 일단 죽 둘러앉았다. 조나단은 자신의 감정은 '상 당히 당황했습니다.' 라는 한 마디로 끝내고는, 필요한 것만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이름, 현재 머물고 있는 여관, 얼마나 머물 것인가, 아, 걱정마 시오. 그 여관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궁성 수비대원을 파견하 겠습니다. 예? 누가 우릴 죽인답니까? 그렇다기보다는, 귀하들에게 국왕 의 가호가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카알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헬턴트 영지에서 이 영광스러운 성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국 왕 전하의 가호 덕분이었습니다. 전하의 가호가 항상 함께 하는데 구태 여 다시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너희들이 안지켜줬어도 우린 여기까지 잘 왔다. 까불지 마라. 이런 뜻 이죠, 카알? 조나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젠 여러분은 궁성 임펠리아를 방문한 인물입니다. 궁성이란, 간단히 보자면 하나의 장소일 뿐입니다만 하나의 장소로만 볼 수는 없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언짢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여 러분들이 바이서스 임펠을 구경하시고 싶다거나 명사들의 저택이라도 방 문하고 싶다면, 저희들이 그 편의를 돌봐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카알은 피식 웃었다. "궁성 수비대원을 시종으로 쓰기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쓰십시오." 조나단의 대답에 카알이 오히려 놀라버렸다. 실제로 바이서스 임펠 자 체가 훌륭한 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궁성 수비대원이라면 궁성을 수비 한다기보다는 국왕의 경호원 같은 인물들 아닌가? 국왕의 경호원을 우리 시종으로 쓰라고? 카알이 뭐라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플레이트 메일을 멋지게 차려입은 병사가 들어왔다. 샌슨 은 자꾸 주눅든다는 표정이었다. 병사는 조나단 아프나이델에게 경례를 딱 붙였는데, 갑옷이 별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경량화 갑옷이라서 그런 가? 아니면 소리가 별로 나지 않게 만들었나? "제 4 분대. 출동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느려터진 놈들! 얼마나 걸린 거야!" …왕실예법에도 저런 말이 있나? 병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시정하겠습니다." "흐음. 밖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조나단은 일어나더니 우리들에게도 일어나라고 손짓하며 창가로 걸어갔 다. 그러고보니 창을 열면 베란다가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베란다로 나 가니 밖에 도열한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샌슨은 완전히 의기소침해져버렸다. 4 열 횡대로 늘어선 40 명의 병사들이 바닥에 금 그어놓고 선 것처럼 줄 잘맞춰서 서 있었다. 모두 붉은 독수리 모양의 문양이 들어있는 풀 플레이트를 걸치고 있었고 손에 손에 번쩍거리는 할버드를, 역시 공중에 줄 매어놓고 맞춘 것처럼 정확히 빗겨들고 서 있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 로 쳐다볼 수도 없는 장관이었다. 조나단은 멋있지 않느냐는듯이 바라보며 푸근하게 말했다. "여러분을 모실 궁성 수비대원입니다." …맙소사. 나는 기가 막혀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카알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저 번쩍이는 40명의 궁성 수비대원을 우리 시종으로 쓰라고? 차 라리 우리 세 명이 저들 중 하나의 시종이 된다면 훨씬 어울리겠다. 너 무 당황스러운 친절이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카알을 바라 보았다. 쓰자구요! 끝내주네. 저들에게 내 발을 닦게 할까요? 젠장. 끔 찍스러워서 못하겠네. 그런데 카알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카알은 눈을 가늘게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을 꽉 다물어 입술이 하 얗게 바뀌었다. 조나단은 그 표정을 보더니 놀라서 그 궁성 수비대원들 이 뭐 잘못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카알은 조용히 몸을 돌려 조나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들을 데려가진 않겠습니다." "예?" "전하께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촌부께 내려주신 하해로운 성총을 감당 할 수가 없으니 부디 거두어달라고. 그럼, 이만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 다." "아, 저…?" 카알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더니 문쪽으로 걸어가버렸다. 나와 샌슨도 어쩔 줄을 모르고 일단 카알을 따라나왔다. 밖에 나오자 당장 어디로 가 야 될지 몰라 헷갈려 버렸지만 카알은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카알의 얼굴은… 말을 걸면 내 혀를 뽑아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카알이 저렇게 화난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보겠군. 칼라일 영지에서 운차이의 턱을 걷어찰 때도 침착한 얼굴이지 않았었나?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사람이 갑자기 없던 능력이 생겨나진 않는다. 카알은 계속 걷다가 그만 울화통이 터져버렸다. "도대체 어디가 나가는 길이야!" 샌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쪽입니다." 그러자 카알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샌슨의 기억이 정확했는 지, 우린 곧 정문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나가던 궁내부원들이나 시녀들이 우릴 보고 놀랐지만 카알은 거기에 눈길도 주지않고 걸어갔고 우리 둘도 카알을 따라가느라 별로 주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뛰쳐나왔다는 것이 적합할 듯한 동작으로 카알은 정원으로 나왔다. 정 원으로 나온 카알은 당장 하늘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뭐가 저렇게 화가 난 거지? 나와 샌슨은 말도 못 걸고 아주 불쌍한, 그러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잔뜩난 수탉을 피해다니는 병아리 모양으로 조심스럽 게 카알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카알은 자신의 분노를 억제시키듯이 한참 을 후후거리더니나직히 한 마디 했다. "빌어먹을 놈…." 당황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할 뻔 했다. 샌슨이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닐시언이라는 놈 말고 누가 있겠어." 목소리는 높이지 않았다. 카알도 어느 칼에 맞아죽을지 모르는 그런 말 을 함부로 고함 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샌슨과 나는 소름이 돋아 말도 제대로 못했다. 샌슨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도 황급하게 둘러보 았다. 저 멀리 아까의 그 40명의 궁성 수비대원들이 보였지만 거리가 충 분히 멀었다. 아무도 못듣겠다. 샌슨은 일단 안심하고나서 허옇게 질린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 카알. 저, 무슨 일로 화가 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화를 좀 가 라앉히시고…" "가라앉히시고? 대거라도 입에 물고 닐시언을 찾아갈까?" 나도 더 못참게 되었다. "카알! 제발. 왜 이러세요!" 카알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제기랄 놈, 대가리는 여물어서 형의 자리를 꿰찰 정도는 됐겠지. 하지 만 더러운 근성은 어찌할 수 없었군. 젠장, 루트에리노 대왕의 핏줄에 저렇게 비열한 자손이 나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군." "카, 카아아아알!" "아무도 안 듣잖아!" 이게 정말 카알 맞나? 카알은 아무도 안듣는다고 이렇게 누굴 험담할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났길래 이러는 거지? 그 때 누군가 가 말했다. "내가 듣는데요?" 죽었구나. 돌아보니, 정원수 뒤에서 한 아가씨가 나타났다. 20대 중반쯤? 꺽다리 아가씨로 상당히 훤칠했다. 이루릴 정도로 키가 크지만 몸이 좀 가냘프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루릴처럼 잘 짜이지 않은 평범한 몸매라고 해야겠다. 이루릴은 키가 큰데도 몸이 잘 짜여 있어 키 가 크다는 느낌이 별로 없지만, 이 아가씨는 키에 어울리는 몸매를 하고 있어 훤칠하다는 느낌이 바로 온다. 잿빛 머리에는 머릿수건을 쓰고 가 슴까지 올라오는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전정가위를 들고 있었다. 작업복 의 커다란 주머니에는 밧줄 오라기, 작은 가위, 칼 등이 가득 들어있었 다. 정원사인가? 카알은 당황해서 말했다. 흠,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나? "누구십니까?" "데미 바이서스. 원래는 데밀레노스 바이서스지만 데미라고 불러요. 데 미 전하는 이상하죠?" "공주님이시군요…." 카알은 맥이 탁 풀린다는 음성이었다. 이제 죽게 되었으니 갈데까지 가 보자는심정인가 보다. 계속 무릎도 꿇지 않고 태평한 모습이다. 뭐, 난 재빨리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카알이 이렇게 나오니 나만 무릎을 꿇는 것도 어째 치사스러운 것 같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샌슨도 멍하니 서 있었다. 데미 전하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정원수의 가지 하나를 잘라내 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른다라… 이번엔 단두대가 생각나는걸? "당신은?" "카알 헬턴트. 공주님의 오빠를 알현하고 가는 길입니다." "국왕 전하를 욕하시던데요?" "욕 먹어 싸니까 욕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을까? "왜죠?" "공주님의 오빠는 자기가 루트에리노 대왕, 제가 핸드레이크, 이런 식 으로 꾸미려 했습니다. 제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저마저 속여넘기려 했지요." 이게 무슨 말이야? 나와 샌슨은 멍하니 카알을 바라보았고 데미 전하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죠?" 카알은 고개를 돌리더니 멀리 떨어져서 이제 해산하고 있는 궁성 수비 대원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어떤… 귀중한 손님을 호위하기 위해서라더군요. 그래서 나도 나무 뒤 에 숨었죠. 내가 시종도 동행하지 않고 나무를 손보면 시끄럽거든요." "그 귀중한 손님이 바로 저올시다. 황송스러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군 요." 데미 전하는 머리를 갸웃거리는 모습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었다. "무슨 말인지…." "우릴 보십시오." "예?" "우리가 어디 귀중한 손님처럼 보입니까?" "아니오. 전혀." "40명이나 되는 궁성수비대원이 호위에 나설 인물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군요." "그러니까 더 좋죠. 우리는 시골 구석에서 올라왔습니다. 운이 좋아서 공주님의 오빠에게 우리나라와 자이펀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조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오빠도 기뻐하더군요." 카알은 끝까지 국왕 전하라 부르지 않고 공주님의 오빠라고 말하는군. 데미 전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말했다. "고마운 일이군요. 그런데요?" "음유시인들의 노랫거리가 됩니다. 전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만, 공주님 의 오빠는 했나 봅니다. 황야에 숨어있던 은자가 표표히 나타나서 국왕 을 도와 대륙을 질타한다는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도 그랬지요. 루트에리노 대왕은 핸드레이크를 만나서 비로소 바이서스 를 건국할 수 있었고,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만났기에 비로소 그 웅대한 위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럼… 국왕 전하는 당신을 숨겨진 은자로 만들 생각이란 말입니까?" "실제로 촌구석에서 방금 올라왔으니까. 그리고는… 아마 이렇게 되겠 지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저의 진면목을, 오로지 공주님의 오빠만 이 알아보고는 저에게 과분한 은혜를 내리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놀 라지만, 제가 드린 조언에 따라 전쟁을 승리할 경우에는 이렇게 말하겠 지요. 아아! 우리의 국왕만이 그를 알아보았구나!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 드레이크의 만남의 재현이로다. 이해가 되십니까?" 카알은 그 내용을 전혀 듣지 않아도 그 어투만으로도 충분히 비아냥거 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말했다. 젠장, 난 지금 죽을 걸 생각하느 라 정신이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둘 수도 있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깨끗이 죽여달라고 부탁해… 어헛, 제기랄! 내가 뭘 잘못했 다고! 카알 때문에 나까지 죽일 순 없어! …치사스럽군. 데미 전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그게 싫으십니까?" "싫습니다. 이게 뭡니까? 광대를 만드는 겁니까? 저렇게 번쩍번쩍하는 병사들로 호위시켜서 가공의 천재 전략가를 만들어내어서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공주님의 오빠는 처음엔 우릴 제대로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주님의 오빠는 잠깐 시간내어 서재에서 우릴 만나고 쫓아버릴 계획이 었죠. 그런 무례한 경우를 당했지만 그래도 전 꾹 참고 모든 것을 이야 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계획을 말씀드리자마자 번쩍거려서 쳐 다볼 수도 없는 40 명의 궁성 수비대원을 보내어 절 가공의 은자로 만들 어 자기 위엄까지 높이려 드는군요. 치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 5. 복수의 검은 손길……9. 데미 전하는 저 놈의 목을 쳐라! 라고 말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당신을 가공의 은자로 만드려는 그 계획 을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절 제대로 대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건 거짓이기 때문에 따를 수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 "황야에 숨어있던 지혜로운 은자가 홀연히 나타나 국왕을 돕는다면, 백 성들은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듯하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 지혜로운 은자도 아닐뿐더러, 이 이상의 조언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지만서도. 제가 공주님의 오빠에 게 말한 전략도 제 생각이 아닙니다. 제가 여행길에서 만난 어떤 지혜롭 고 선량한 젊은이의 생각이었습니다. 차라리 그 젊은이에게 그 역할을 주면 어울리겠군요. 어쨌든 거짓은 곧 들통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기만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왕가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얼마나 떨어지 겠습니까?" 글쎄. 펠레일은 말했잖아? 카알은 전령 노릇이나 할 사람은 아니라고. 펠레일의 짤막한 말 한 마디로 카알은 그것을 다 알아들어버렸으니까, 내가 보기엔 카알은 핸드레이크의 역할을 해도 될 것 같은데. 그 때였다. 멀리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그 궁내부장이었다. 그는 몇 명의 궁내부원과 함 께 황급하게, 그러나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우리에게 걸어왔 다. "아, 데밀레노스 전하도 여기 계셨군요. 이 분들과 환담을 나누셨습니 까?" "예. 몹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재미있는… 재미있는… "글라디올러스의 구근을 재배할 때의 주의점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알." 카알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공주님." 공주님은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광의 창공에 한 줄 섬광이 되어." 응? 저게 무슨 말이지? 그런데 카알은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 날개에 뿌려진 햇살처럼 정의롭게." 그리고 데미 전하는 다시 정원수로 걸어가버렸다. 저게 무슨 인삿말이 지? 어쨌든 고마운 공주님. 아샤스의 축복이 3년이 세 번씩 세 번 지나 갈 때까지 공주님께 계속되길. 리핏 트왈리전은 순간적으로 시종도 없이 정원을 돌아다니는 공주를 붙 잡아야 될지, 안내도 없이 돌아다니는 궁성의 손님인 우리를 붙잡아야 될지 갈등을 느끼는 모양이다. 결국, 항상 그러하듯, 손님이 먼저다.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요." "절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리핏 트왈리전은 궁내부원을 불러 말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우 리는 되도록 서두른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점잖게 궁성을 나온 다음, 부리나케 걸어가기 시작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묻지 는 마라. 우리들은 분명히 '부리나케 걸었다.' 다시는 그렇게 못할 것이 다.) "헉헉, 목숨이 10년은 짧아졌을 거야." "헉헉, 난 20년은 짧아졌을 거야." "…아무래도 내 목숨이 30년은 짧아진 것 같은데?" "…안녕, 이제 죽나봐." "…커험, 흠. 죽을 뻔하게 만들어 미안하구만, 친구들." 수도 대로를 따라 돌아왔다. 여러 번이나 죽을뻔한 고비를 지나고 나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밥생각이었다. 얼마나 감미로운가! 살아있는 것의 확인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축제로 요란한 바이서스 임펠의 대 로에서도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도의 요리를 먹자, 응? 후치 네 솜씨보다 나은지 볼까?" "비교할 걸 비교해! 난 조악한 재료로 거의 몸부림에 가깝게 만들었단 말이다!" "네게 재료를 충분히 공급했다면?" "…할 말 없음." 할 말 없지. 내가 다룰 줄 아는 재료의 범주 내에서라면 난 자신이 있 다. 하지만 정말 고급요리에 사용되는 재료라면 난 구경도 못해봤다. 특 히 난 해산물 요리라면 절대적으로 몰지각하다. 내가 구경한 물고기는 민물고기 뿐이니까. "자네들의 위장에 경탄을 보내도록 하지. 죽을 뻔했는데 밥생각이 나는 가?" "긴장했으니까 배가 고프지요." 우리는 그래서 축제 풍경보다는 식당을 구경하며 돌아다니기로 했다. 뭐, 양쪽 다 겸사겸사. "샌슨. 지리서에 여기 특산물이 뭐라고 나와 있어?" "어, 바이서스 임펠에 대해서는 워낙 길게 적혀 있어서 끝까지 다 안 읽었는데." "흐음… 이번에도 시민들에게 물어볼까?" "네가 물어!" "알았어." 그래서 난 지나가던 풍채 좋은 아저씨를 붙잡아 물어보았다. 그 풍채 좋은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바이서스 임펠 최고의 요리를 맛보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 요?" "어, 자네 정말 재수 좋았어. 우리 집으로 오게!" "…예, 물론 안주인의 음식 솜씨가 훌륭할 것은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 다만…." "아, 아니. 우리 집이 식당이네! 우리 주방장은 바이서스 최고의 수플 레를 만들고 스테이크 뒤집는 솜씨 하나가 정말 일품이지! 난 하트 브레 이커에서 바이서스 임펠 시장의 트로피도 받았다네." "하트 브레이커가 뭐죠?" "자네가 마셔보고 정의를 내려보는 건 어떻겠나?" 흠, 좋은 상술이군. 어쨌든 우리는 그 이름이 래디라는 아저씨를 따라 스트레이트 헤븐이라는 펍으로 가게 되었다. 스트레이트 헤븐은 작고 아담한 펍이었다. 식사 때는 지났고 아직 술 마시러 오는 사람은 없어 손님은 우리 셋 뿐이었다. 하긴 축제 기간엔 이런 작은 펍엔 손님이 없겠지. 테이블은 전부 6개였고 반지하 건물이라 낮에도 조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테이블마다 조미료통과 함께 촛대가 세 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초의 밝기라는게 정말 끝내주었다. 그래서 초 이외에 다른 조명이 필요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어디 가서 내가 초장이라는 말 하면 무진장 웃겠군. 이건 도대체 뭘로 만든 거야?" 주인장 래디가 말해주었다. "경뇌유로 만든 거야." "경뇌유…?" "말향고래의 머리에서 채취하는 기름이야. 델하파 특산품이지." 나는 샌슨의 옆구리를 찌른 다음 귓속말로 물었다. "말향고래가 무슨 몬스터지?" "나도 모르겠는데… 희귀한 몬스터인가봐." 흠, 다음에 언제 그 말향고래라는 몬스터가 델하파 어디에 살며 잡기 쉬운지도 좀 알아봐야겠군. 정말 고운 빛을 내면서 타는데? 말로만 듣 던 고래기름 양초가 이럴까? 하지만 샌슨이나 카알은 초의 밝기를 감지 하지 못하는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이구, 보면 모르냐? 이렇게 빛깔 이 고운데? 그러고 보니 샌슨과 카알은 그 바이서스 최고의 수플레를 만든다는 주 방장의 스테이크 뒤집는 솜씨에 홀딱 반해있었다. 어디 보자. 오? 정말 멋있는데? 그 주방장은 프라이팬과 뒤지개를 멋지게 이용하고 있었다. 마치 방심 하고 있는듯한 무덤덤한 시선과 귀찮다는 듯이 놀리는 손, 그런데 스테 이크는 철푸덕 떨어져서 기름을 튀긴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눌어 붙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부드럽군. 역시 어떤 기술이든 달인이 되면 그 몸놀림이 대충대충 하는 것처럼 바 뀌어버리는 모양이다. 완전히 손에 익어버리니까. 우리 아버지가 양초틀 에 기름 붓는 것 보면 기름을 흘리든 말든, 넘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대충대충 붓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절대로 흘리는 일도, 넘치는 일도 없다. 에고에고… 반면 내가 양초틀에 기름 부울 때 보면 그야말로 구도 의 자세가 따로 없다. 산 속에 틀어박혀 수련을 하는 성직자들 못지 않 은 진지한 자세가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흘리거나 넘치거나 하는 일이 가끔씩은 일어나거든? 어쨌든 멋진 솜씨로 스테이크 세 개가 접시에 놓이고 깔끔하게 단장되 어 우리 앞에 나왔다. 흠, 멋지군. 포크를 대기가 송구스럽군. 그러나 샌슨, 오, 나의, 으윽, 오우거여… 샌슨은 대충대충 먹어치워버린 것이다… 그도 달인인가 보다. 두번째 코스로 잘 부풀어오른 수플레와 함께 바이서스 임펠 시장님의 트로피도 받았다는 그 하트 브레이커를 시음하게 되었다. 하트 브레이커는 일종의 칵테일인가 본데, 얼핏 보기엔 브랜디와 진을 다 사용하는 모양이다. 허어. 나야 칵테일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 지만, 저렇게 강한 술을 두 개나 사용해서 칵테일을 만들 수 있을까? 이윽고 래디는 우리 테이블에 하트 브레이커를 내려놓았다. "자, 하트 브레이커입니다!" "유리잔이닷!" "…." 래디씨에겐 대단히 죄송스러웠지만, 우린 유리잔에 더 감탄해버렸다. "이야, 정말 투명하다." "으아아, 후우치! 넌 OPG 벗고 잡아! 유리잔은 잘 깨진대!" "아, 그래, 맞아맞아." 우리 둘이 이런 난리를 치는 가운데 카알은 빙긋빙긋 웃으며 하트 브레 이커를 들어올렸다. 나와 샌슨은 손가락에 힘을 주면 깨질까봐, 그러나 힘을 주지 않으면 미끄러질까봐 너무 조심스러웠다. 처음엔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순간, 촛불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이빨이 눼혀나갈 정도로 센데? "화끈하다아…." "차가운데에…?" "화끈하다니깐." "아냐, 역시 시원해." 우리는 서로 좀 으르렁거린 다음, 다 마셔보고 다시 한 번 감상을 말하 기로 했다. 다 마시고나서도 서로 감상이 통일되지 않는다면, 한 잔 더 마시지 뭐. 샌슨은 잔을 비우더니 바지춤을 붙잡고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야, 따라와." "응?" 샌슨은 잠시 풀린 눈으로 날 보더니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이런, 항상 운차이를 발목에 묶어다니던 것 때문에… 버릇이 됐군. 아냐. 화장실에 좀 다녀올께." "음… 그래." 운차이는 지금 감방에 들어가 있겠지? 흠. 에잇, 잊자! 잊어! 간첩은 감방에, 우리는 술집에. 운차이. 간수한테 살기를 마구 뿜어봐요. 혹시 알아? 살기에 겁먹고 좋은 대접해줄지. 하트 브레이커는 첫맛은 도대체 뭐라 말할 수 없이 강하고, 여운은 상 당히 오래 가는 칵테일이었다. 그것도 꽤나 진한 여운이 남았다. 심장이 깨져나가는 듯한? 어쨌든 샌슨과 나의 감상은 통일되지 않았지만, 한 잔 더 시켜본다는 데에는 통일을 보았다.그래서 우리는 한 잔 더 주문 한 다음 좀 느긋하게 마시기로 했다. 그 때까지도 카알은 첫잔도 비우 지 않고 있었다. 그는 거의 10분에 한 모금씩의 느린 속도로 마시고 있 었다. 샌슨은 탁자를 또각거리며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루릴은, 이루릴은…." "그래서?" "그걸로 끝이야. 음…."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샌슨과 난 서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나누면서 완전히 취해버린 채 의 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샌슨의 마음은 대충 짐작이 간다. 끝나지 않 는 문장. 카알은 멍청히 손등에 턱을 얹고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흡사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샌슨은 다시 흥얼거리며 말했다. "후치. 노래나 불러봐. 성밖 물레방앗간이 어쩌고 하는 건 빼고…." "…그럼 뭘 부르지?" "아이야 이켈리나의 구두장이 믹 더 빅. 난 그게 좋아." 난 벽쪽으로 몸을 옮긴 다음 벽에 기대어 앉았다. 등이 서늘한게 기분 좋았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에는 팔을 올려놓고 다른 팔은 테이블에 기대었다. 그런 삐딱한 자세로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구두장이 믹 더 빅은 꽤나 긴 노래니까 편한 자세가 좋겠지. 또한 구두장이 믹 더 빅은 흥겨운 노래다. 난 발뒷꿈치로 땅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아이야 이켈리나. 미치광이의 마을에, 그래, 용감한 구두장이 믹 더 빅! 오른손에는 망치, 왼손엔 작은 못. 용감하고 쾌활한 구두장이 믹 더 빅! 구두장이치고도 너무나 용감한 사내였지만, 창밖에 리틀 브리짓. 산책을 나서면, 그날은 왼발만 두 개씩, 이야히호! 창밖에 리틀 브리짓. 산책을 나서면, 그날은 오른발만 두 개씩, 이야히호! 그래서 착한 리틀 브리짓. 언제나 산책은 반드시 두 번씩 다녔지. 그래서 아이야 이켈리나. 미치광이의 마을엔 할아버지도, 꼬마도, 새침한 아가씨도. 구두는 모두 두 벌씩 있었다지? 카알은 키들거리기 시작했고 샌슨은 벙긋거리며 따라부르려 했다. 하지 만 노래가 워낙 길어서 샌슨은 중간에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샌 슨은 노래가 막히면 웃으며 듣고, 아는 부분이 나오면 다시 따라부르며 즐겼다. 결국 나는 최고의 구두용 가죽을 구하겠다고 드래곤 사냥에 나선 용감 한 믹 더 빅이 거의 장난에 가까운 모험 끝에(호비트에게 구두를 팔아먹 어 여행비를 벌고, 12 명의 거인에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문제를 내어 서로 싸우게 만든 다음 도망가고, 등등.) 구두 수선용 작은 못으로 드래곤을 때려잡는 모험과 봄맞이 축제에 나선 수줍은 리틀 브리짓이 믹 더 빅이 만든 드래곤 가죽 구두를 신고 춤추는 장면까지 감동적으로 불 러젖혔다. "이야히호!" 주인장 래디와 그 멋드러진 주방장도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같이 술을 마시며 벌겋게 된 얼굴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이야히호!" 라는 구두장 이 믹 더 빅의 독특한 후렴을 함께 고함질렀다. 대낮부터 쾌활하게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은 스 트레이트 헤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엔 6개의 테이블을 꽉꽉 채우고도 모자라 선 채로 손에 술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손님들로 가 득차 버렸다. 작고 아늑한 펍이라도 함께 노래 부르고 즐길 수 있는 사 람들로 가득 채운다면 궁성이 부러울까, 빛의 탑이 부러울까. 내 노래는 많은 박수를 받았고 곧 새로 들어온 손님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우리들만의 축제… 왠지 그런 말이 어울리겠군. 바이서스 임펠 곳곳에 축제가 벌어지고 있지만, 여기 작고 아늑한 펍에서는 사람들이 몸 부대끼며 노래와 술뿐인, 그렇지만 신나는축제를 열고 있었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10. 어느새 황혼이 되었는지, 새로운 손님이 문을 열어젖혔을 때는 지면 높 이에 있는 문으로부터 반지하의 펍 안으로 황금색의 노을빛이 쏟아져 들 어왔다. 손님은 잠시 실루엣으로 서 있다가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계시오?" "어, 주인장, 계십니까?" 새로 들어온 손님은 두 번은 점잖게 부르고 세번째는 악을 쓰다시피 불 렀다. "주인장 계시냐고!" 래디는 벌겋게 된 얼굴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고함 질렀다. "보시다시피, 손님. 테이블 아래에 들어가거나 천장에 매달리지 않고서 는 더 이상 손님 못받겠는데요?" 그러자 그 시커먼 손님의 그림자는 투덜거렸다. "이런. 하트 브레이커를 바를 수… 아냐! 마실 수 없다면 수도에 온 즐 거움이 하나 사라지는데?" 래디는 벼락맞은 듯이 몸을 돌렸다. "오, 이런. 길시언!" 누구라고? 난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서 새로 들어온 사람으로 시선을 옮겼다. 샌슨과 카알도 놀라서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구와 잿 빛 머리가 보였다. 무엇보다도 왼손을 허리의 칼자루에 올려놓은 자세. "정말! 길시언!" "어라? 후치! 오, 여러분들, 벌써 와 있었군요?" "오래간만입니다. 래디. 그 동안 바람은 많이 피워… 끼어들지마! 에, 그 동안 잘 지냈습니까?" 래디는 길시언을 잘 아는 모양인지 그의 괴상한 말에도 화내거나 하지 는 않았다. 그는 그저 길시언과 악수를 나누며 크게 웃을 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래, 이게 얼마만입니까? 왕자님이 리치몬드를 잡겠다고 떠난 게." "리치몬드는 잡았습니다만, 대신 썬더라이더가 사춘기… 젠장! 썬더라 이더가 저주에 걸렸습니다. 임마! 좀 닥치란 말이다! …웃지마!"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다. 길시언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래디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우리 테이블로 왔다. 내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앉기로 해서 자리를 겨우 만들었다. 나는 닐시언 전하처럼 테이블 귀퉁이에 앉았다. 카알은 한쪽 귀를 막고 고함질렀다. (주위가 너무 시끄러웠으니까.) "언제 바이서스 임펠에 오셨습니까?" "지금 오는 길입니다. 오자마자 하트 브레이커나 한 잔 바르려고… 아 냐! 에, 마시려고 찾아왔습니다. 흠, 이거 엄청난 열기군요. 이 스트레 이트 헤븐은 항상 지옥 같은… 아니! 푸근하고 조용한 펍이었는데, 아무 래도 여러분 소행인 것 같습니다?" 길시언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카알도 웃으며 말했다. "건강하신 걸 보니 기쁩니다." 그리고 샌슨도 고함질렀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시끄러우니 칼자루를 놔도 될텐데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칼자루를 놨다. 와르릉! 와르릉! 와르릉! 유리컵 깨지는 줄 알았다… 주위에서 노래 부르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문쪽으로 뛰어가 밖의 날씨를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후, 어쨌든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가 다시 노래 부르며 난장판이 되어버렸지 만. 샌슨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성능 좋은 마법검입니다." 길시언은 씨익 웃고는 계속 칼자루를 쥔 채 말했다. "그래, 국왕 전하는 알현했습니까?" 카알은 조금 슬픈 듯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카알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뇨. 잘 됐습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것 이상으로 잘 되었지요. 몸값 마련하느라 애쓸 필요도 없게 되었고." "그런데 표정은 개핥은 죽사발… 죄송합니다. 야! 조용히 못해! 주인을 이렇게 바보 만들래? 뭐야! 에, 음. 어쨌든 카알씨의 얼굴은 좋지가 않 습니다?" 카알은 그저 미소만 지었고 테이블 귀퉁이에 앉은 내가 말했다. "길시언. 전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요?"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국왕 전하 말이냐? 왜, 뭐 기분나쁜 일이 있었어?" "글쎄요…" 말을 하려고 들면 뭔 말을 못하겠는냐마는, 백성된 자로서 국왕을 모욕 하는 것은 자기 아버지 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고, 게다가 앞에서 듣고 있는 사람이 그 형이니 뭔 욕을 할 수 있나. 길시언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것 같군. 내가 알기로 그는 좋은 사람이 다. 조금 우유부단한 면이 있지만, 좀 조용히 해! 에, 그건 오히려 따스 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어쨌든 인간미가 있는 사람인데?"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였죠?" "그야 6년전이다." "우린 3시간쯤 되었군요. 6년 사이에 뭐가 바뀌어도 많이 바뀐 모양이 예요. 최소한 따스한 성품에서 나오는 우유부단은 빼도 될 것 같군요. 이해득실을 냉혹하게 따지며…" "네드발군. 입조심하게." 카알이 나지막하게 끼어들었다. 하긴, 조금전에 교수대 밧줄의 감각을 궁금하게 여겼던 주제에 다시 이런 망발이라니. 취했나보군. 길시언은 내 말에 몹시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자기 프림 블 레이드의 칼자루를 꽉 쥐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30 분만 조용히 해라. 그러지 않으면 널 당장 대장장이에게 데려간다. 그리고 검신에다 수다쟁이 칼이라고 새기게 할 거다. 여기는 바이서스 임펠이니까, 마법검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기능공을 찾는 것 은 간단한 일이다. 알았지?" 그리고 길시언은 칼자루를 놔버렸다. 프림 블레이드가 그 협박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에 입을 다물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 림 블레이드는 웅웅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카알? 국왕이 당신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 까?" "별로… 대단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카알은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 강하게 내비치는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뇨. 국왕 전하께서 아무르타트에게 줄 몸값을 마련해주실 때까지는 기다려야겠지요. 뿐만 아니라 세레니얼양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2주일 동 안은 수도에 머무를 계획입니다." "그 엘프 아가씨 말입니까? 어디 갔습니까?" "그 분은 수도가 아니라 델하파의 항구에 용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들린 다음, 2주일 뒤에 이곳으로 돌아오시기로 했지요." "2주일? 흠…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신 여관은 어디입니까?" "유니콘 인이라고, 여관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만." "거기 묵을 만합니까?" "괜찮은 곳입니다만." "그럼 저도 거기 묵도록 하겠습니다. 좀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카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이상하네? 길시언은 레브네인 호수 옆에 서 분명히 말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우리도 위험할 것이므로 함께 있 을 수 없다고. 길시언도 우리가 왜 의아하게 여기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아, 걱정 마십시오. 수도에서는 안전합니다. 외딴 황야에서 죽는다면 모험가답게 죽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도 있지만, 내가 수도에서 죽는 다면 그 혐의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여기서는 조금만 조사해도 내 가 누군지 당장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런가?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앰뷸런트 제일을 이끌고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걸어갔다. 앰뷸런트 제일은 자신의 주인이 없어진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 다. 녀석은 그냥 내가 이끄는대로 따라왔다. 이 놈을 팔아야 되겠지. 여 관 주인에게 여관비 대신 줘버릴까? 해가 지고 다시 불장대가 켜지기 시작했다. 불장대 앞의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고리 달린 긴 막대기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불장대의 구를 회전시켜 반구로 만들자 안에서 컨티뉴얼 라이트가 빛나기 시작했다. "흠, 저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저런 일을 해야 되는가 보군." "맞다." 길시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공공복리를 위한 자신의 노동 에는 인색한 법이다. 그렇다면… "그래요? 그럼 불장대를 열고닫는 일로 시청에서 돈을 받나요?" "불장대? 아, 가로등 말이니?" "가로등이라고 하나요?" "응. 그런데 돈을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기 집 앞에 가로등을 설치 하는 것은 집에 퍽 도움이 되거든? 일단 밝은 데다가 선전이나 집의 품 격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 설치해달라고 시청 에 요청서를 많이 낸다. 그리고 기꺼이 저런 일을 하는 거다." "아하." 내가 그 불장대, 아니, 가로등을 재미있게 본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시 선이 우리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와 샌슨은 취해버려서 말 위에서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지만 수도 시민들의 놀란 시선을 받게 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축제 기간이 라 그런지 주정뱅이의 모습은 희귀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시선의 집 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 둘 앞에서 황소를 타고 걸어가는 전사 때문 이다. 전사는 분명 체격도 좋고 멋진 검에 방패도 가졌고 갑옷도 훌륭하 지만, 그것보다는 그 황소 때문에 수도 시민들의 정신 없는 시선을 받고 있었다. 어쨌든 열렬한 시선 속에 (몇몇 아가씨들은 우리들을 끝까지 따라오면 서 잡담을나누기도 했다. '정말 용감하다아아?', '저 남자, 네 취향 아 냐?', '뭐야, 농담 하지마!' 등으로. 할 일이 퍽이나 없나 보지. 취향이 아니면 왜 끝까지 따라오며 구경하냐고?) 유니콘 인으로 돌아왓다. 유니 콘 인의 말구종도 갑자기 황소를 만나게 되자 퍽이나 당황했다. "거, 건초를 먹이면 됩니까?" "그냥 말 먹이는대로 귀리나 보리 먹이면 돼. 원래 말이다." "예?" "저주에 걸려서 그렇게 된 거다." 길시언은 간단히 설명한 다음 썬더라이더를 건네주었다. 말구종은 그 황소가 모듬발로 걷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 "진짜 말인가봐?" 우리가 홀로 들어서자 벌써 돌아와 테이블에 앉아있는 네리아가 보였 다. 네리아는 길시언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황야의 왕자!" "안녕하십니까, 발빠른 레이디." "여기 오셨군요? 반가워요. 우리랑 함께 머물 거예요?" 네리아는 대단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왜 저렇게 기뻐하지? 혹 시 아직도 프림 블레이드를 슬쩍할 야욕에 빠져있나? 샌슨과 나는 속도 좀 차릴 겸 체이서로 맥주를 주문한 다음 홀에 앉았다. 길시언은 친절하 게 네리아에게 대답했다. "예. 그럴 생각입니다만." 네리아는 희색이 만면해서 말했다. "좋네요. 그런데 카알 아저씨? 가셨던 일은 잘 되었어요?" 카알은 웃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네리아는 뭔가 길다란 설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답이 너무 간단하자 고개를 갸우뚱거 렸다. "애개? 궁성에 다녀온 사람치곤 너무 대답이 짧네요? 난 당신들이 앞으 로 평생동안 그 이야기를 자랑해댈 줄 알았는데. '이봐. 내가 궁성에 들 렀을 때 말이야…' 이런 식으로." 네리아는 카알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었다. 카알은 빙긋 웃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자랑하려들면 끝이 없다. 우린 국왕도 만났고, 공주 전하도 만났고, 여러 번 죽음의 고비도 넘겼고, 기분도 엉 망이다. …자랑할 게 없군. 네리아는 자기 혼자서 뭐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당신들 역시 예사롭지 않아요. 이라무스에서 내가 제대로 봤지." "과찬의 말씀이군요." 저녁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카알과 나, 샌슨이 묶는 큰 방으로 올라왔 다. 운차이가 없어 침대는 하나 비어있었고, 그래서 길시언은 그냥 우리 방에 머무르기로 했다. 여관 주인장은 새로 온 손님이 다른 손님과 함 께 방을 쓴다고 투덜거렸지만 길시언은 우리 대신 두둑하게 여관료를 줘 버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허어, 이런… 신세를." "됐습니다. 나 때문에 여러분이 죽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난 수전노 라서… 젠장! 에, 보답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30분이 지났나보군. 하긴 시간이 되었다. 네리아는 이루릴과 둘이서 쓰던 방을 혼자 쓰려니 심심하다면서 우리 방에서 함께 술이나 마시고 물러나기로 했다. 그녀는 내 목을 껴안고는 흥얼거렸다. "흥흥, 둘이서 지내다가 혼자 맞이하게 되는 밤은 쓸쓸할거야. 나도 여 기서 자면 안될까?" 난 그녀의 팔을 떼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떼내려 하면 더 달라붙기 때 문이다. 우웃! 등 뜨겁다! "여긴 침대 더 없어요." "후치씨 침대에서 함께 자면 안될깡?" "칵!" 정말 성격 이상하네… 애 데리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난 화를 내 면 네리아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화를 낼 수밖 에 없었다. 목덜미가 벌개질 지경이거든. 네리아는 까르르거리면서 대단 히 재미있어 했다. 한편 길시언과 카알은 썬더라이더의 저주에 대한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 어느 신전에 가볼 생각입니까?" "그랜드스톰에 가 볼 생각입니다. 코스모스와 폭풍의 에델브로이의 총 본산인데다가, 대대로 왕가와 깊은 관련을 가진 신전이죠. 나도 어릴 적 에 거기 많이 들렀습니다." "오호… 그렇습니까? 그럼, 함께 들러도 될까요? 견문을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합니다." "그러시죠." 샌슨이 옆에서 갑옷을 벗다가 말했다. "그랜드스톰? 에델린이 자라난 그 신전이요?" 길시언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어라? '치료하는 손' 에델린을 아주 친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야… 그날밤은 술과 우리들의 여행 이야기로 흠뻑 젖은 밤이 되 어버렸다. 나는 대낮부터 너무 마셔버려서 일찌감치 곯아떨어져 버렸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11.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에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대충대충 하듯이 말씀하 셨다. "아들아. 파라핀 양초의 제조법에 대해 말해보아라." 아무르타트는 수다스런 마법검 때문에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 다. 나는 아무르타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라핀 양초는… 저주걸린 말의 머리에서 짜내는 경뇌유로 만듭니다. 이 때 하트 브레이커를 섞어, 경뇌유를 완전히 돌아버리게 하는 것이 중 요합니다." "옳거니! 역시 내 아들이다. 그리고?" "불장대의 커버를 벗긴 다음 기름을 붓고 커버를 닫습니다. 그리고 밤 이 올 때까지 놔둡니다. 밤에 커버를 벗기면 찬란한 빛이 나옵니다." "불장대가 아니라 가로등이다." "앗! 그렇군요. 어쨌든 그 다음에 걸프스트림 가까이 피워둡니다." "이유는?" "그래야 자이펀인들의 낙타가 제대로 다닙니다. 자이펀인들의 낙타는 밤눈이 어둡거든요." "그렇지. 그래서 데미 공주를 시집보내야 하는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그 때 아무르타트가 마법검의 칼자루를 놓았다. 와르릉! 아무르타트는 날 내려다보더니 외쳤다. "우하하! 100만셀! 100만셀에 마법검을 팔겠다." 그러자 내 목을 껴안고 있던 네리아가 외쳤다. "필요없어! 훔치면 되지." 네리아는 내 목을 더 바싹 끌어당겼다. "캑캑! 이거 놔요!" 우르릉, 우르릉! "우으음…" 아이고 머리야. 하트 브레이커가 아니라 헤드 브레이커다. 천장이 이상 하게 보였다. 비스듬한 모습이… 아무래도 내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양 이군. 천장은 아침 햇살 때문에 반쯤 환하고 반쯤은 어두워 바라보고 있 자니 더욱 현기증 났다. 난 아픈 머리를 휘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어나지지 않았다. 뭐 야, 이건? 난 내 가슴에 팔이 하나 올라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팔 을 쭉 따라가보니 시트 윗쪽으로 선명한 빨간 머리의 일부가 보였다. "흐어억?' 난 조심스럽게 시트를 내려보았다. 입가에 침흘린 자국이 가득한 네리 아의 얼굴이 보였다. 맙소사… 내가 제일 먼저 시트 아래로 손을 집어넣 어 내 아랫도리를 더듬어봤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휴우… 다행이다." 망할! 정말 내 침대에서 같이 잤군. 난 조심스럽게 네리아의 팔을 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네리아는 몇 번 몸을 뒤척였지만 여전히쌕쌕거리면서 잘 잤다. 난 네리아에게 시트를 덮어주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침햇살에 두드려맞는 기분이었다. 으윽! 난 휘청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알은 자신의 침대에서 평온한 모 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샌슨과 길시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챙! 채챙! 탕!" 뭔 소리야? 난 창문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샌슨과 길시언이 여관 뒷뜰에서 대무를 펼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바쁜 아침시 간임에도 불구하고 여관 하인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박수를 보내 거나 응원하고 있었고,자세히 보니 여관 뒷뜰에 면한 골목길에도 화사 한 나들이 옷을 차려 입은 아가씨들과 청년들이 샌슨과 길시언의 대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얼래? 마차도 한 대 멈춰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좀 차린 다음 아래로 내려갔다.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뒷뜰로 나가버린 모양이지? 그 때 여관 주 인이 기지개를 켜면서 홀로 들어섰다. 그는 날 보더니 아는 척 했다. "으하암… 잘 잤냐?" "아, 예. 그런데 뒷뜰로 가는 길이 어디죠?" "응? 거긴 왜?" "지금 하인들이 다 거기 가 있지요." "뭐야?" 주인장은 놀라서 어느 복도로 달려갔고 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바깥으로 나가기도 전에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왔다. 흠. 그리 고 그 뒤에선 주인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 게으름뱅이 자식들아! 10분내로 아침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 집 망 하는 줄 알아!" 그리고 주인장도 달려들어왔다. 난 피식 웃고는 뒷뜰로 나갔다. 뒷뜰로 나가니 칼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합!" "하앗!" 샌슨과 길시언은 모두 기합을 가볍게 끊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기합이 길어봐야 뭐에 좋겠나. 어쨌든 샌슨은 롱소드 하나를 쌍수로 잡 고 있었고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와 방패를 들고 있었다. 샌슨은 쌍수 로 들고 있어서 속도에 훨씬 자신이 있다는 투였고 길시언은 방패가 있 어 방어는 걱정없다는 투였다. 그래서 대무는 주로 샌슨의 공격으로 이 루어져 있어 샌슨이 더 유리해보였다. 하지만 길시언도 침착한 동작으로 잘 막아내고 있었다. 난 뒷뜰 구석의 나무에 가서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아 구경했다. 확실히 샌슨의 공격이 더 빨랐다. 방어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공격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지.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고 하지 않았나. 게다 가 방패 든 손과 칼 든 손은 결국 같은 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방 패로 막으며 칼로 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패의 충격이 반대쪽 팔까지 간다. 더구나 저 오우거의 쌍수로 쥔 롱소드에 맞는다면 더욱 힘 들 것이다. 길시언은 손을 들어 잠시 떨어질 것을 요구했다. "후우… 역시 당신 말대로 방패들고 싸울만한 상대가 아니군요." "방패를 놓으시겠습니까?"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몸을 돌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인 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나에게 직업을 주었다. "방패 좀 맡아줘." 그리하여 나는 기사의 종자 비슷하게 길시언의 방패를 들고 두 사람의 대무를 구경하게 되었다. 방패를 놓은 길시언은 팔을 한 번 휘두르더니 역시 프림 블레이드를 쌍 수로 쥐었다. 길시언은 신중한 중단 겨누기의 자세로 검을 허리 앞에 세 워들었고 샌슨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양자 모두 같은 자세이니 헛점 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모두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검끝을 서로 맞댄 채 신중히 노리기만 했다. "허엇!" 샌슨이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샌슨은 검끝으로 길시언의 검끝을 쳐내 린 다음 그대로 찌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길시언은 뒤로 물러나며 샌 슨의 검을 쳐올렸다. 그러자 샌슨도 빠르게 물러나며 자세를 바로잡았 다. 다시 대치. 길시언은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기술입니다." "감사합니다."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오른발을 들었다. "얍!" 길시언은 오른발을 들어올리며 그대로 머리를 칠 자세를 취했다. 샌슨 은 롱소드를 들어올려 머리 위를 막으려 했으나 길시언은 오른발로 땅을 밟으며 동시에 샌슨의 허리를 치고 지나갔다. 탕! 샌슨의 등 뒤에서 길시언이 외쳤다. "한대!" "허어, 이런." 샌슨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검 옆면으로 쳤나 보다. 주위 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골목길에서 여관 뒷뜰을 구경하던 사람들이었 다. 샌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방패를 놓으니 확실히 빨라지는군요." "어? 이런, 두 번은 못써먹을 모양입니다?" 길시언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치 자세를 취했다. 샌슨은 롱소드 끝을 빙빙 돌리더니 공격해 들어갔다. "이얍!" 샌슨은 앞으로 뛰며 그냥 무식하게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 치기로 들어 갔다. 길시언은 칼을 들어 막아내었으나 그것은 속임수. 샌슨은 대각선 치기에서 갑자기 자세를 변형시켰다. 길시언의 칼에 걸린 자신의 칼을 당기면서 왼발을 내딛어 왼쪽 팔꿈치로 친 것이다. 부우웅-! 팔꿈치는 길시언의 코 앞에서 멈추었다. 길시언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엄청난 기술입니다?" "한 대입니다. 실전에서 나오는 거죠." 다시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흠, 두 사람 정말 행복하겠군. 에라, 나도 바스타드 들고 내려와서 대무나 하자고 해볼까? 관둬라. 내가 샌슨이나 길시언과 싸웠다간 박수보다는 조롱이나 동정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 다. 흠. 그러고보니 저 마차 아직도 있네. 거 참 요상하네. 마차를 타고 간 다면 어디 갈 일이 바쁘다는 말일텐데 왜 가지 않고 저렇게 구경하고 있 지? 마차 안을 슬쩍 훔쳐보자 서른 살 가량의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 다.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샌슨과 길시언의 대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 떨어지겠다아! 옷 입은 품새로 보아 귀족가의 청년인가 보다. 화려한 윗 저고리의 모습이 잘 보였다. 마차 창문 밖으로 거의 몸을 내밀듯이 하고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잘 보이는 거지. 흠. 젊은이. 황야에서 방금 트롤 두세 마리 쯤 잡고 온듯한 남자들의 싸움은 처음 보시지?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허업!" "얍!" 둘은 한참 동안 자신들의 밑천을 다 드러내듯이 보여주었다. 정말 멋진 기술들이 많았다. 특히 샌슨은 여러 가지 볼만한 기술을 많이 보여 주었 다. 샌슨이 수직 내려치기를 한 다음 뒤돌려 치기를 할 때는 길시언도 크게 놀랐다. 샌슨은 왼발을 내딪으며 수직 내려치기를 한 다음 오른발 을 왼발의 왼쪽으로 보내며 완전히 돌아 수평 뒤돌려베기로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돌던 길시언은 갑자기 옆에서 날아오는 칼날에 기겁했다. "아악!" 골목길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샌슨은 검날 옆면으로 길시 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질려버린 길시언에게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한 대입니다. 오른손잡이를 상대할 때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검사의 상식이죠? 하지만 그런 상식도 고정화되면 위험합니다." "허, 아무리 그래도 뒤돌려베기가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후치 저 놈은 나보다 더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죠. 저 놈은 수직 올려치기를 두 번씩이나 하는 무식한 놈입니다." 길시언은 새삼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머쓱해져버렸다. 그 때였다. "아아아악!" 고막이 터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앙칼지고도 구성진 함 성이 들려왔다. "나가! 나가라고! 멀쩡하게 생겨서!" "네리아잖아?" 나와 샌슨, 길시언은 부리나케 뛰어들어갔다. 계단을 몇 단씩 건너뛰며 우리 방문을 열어젖혔다. 퍼억! 뭐야? 윽. 베개에 맞았군. 네리아는 시트로 온 몸을 감싼채 베개를 집 어던졌고 카알은 방구석에서 두 손을 휘젖고 있었다. "아, 아니오. 네리아양, 오해가…" 그 순간 길시언과 샌슨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 았고 카알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 네리아는 계속 구성지게 외쳤 다. "음흉하게! 누굴 건드리려는 거야앗!" 카알은 못참겠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나, 난 네드발군인 줄 알았단 말이오! 그래서 일어나라고 시트를 벗겼 을…" 네리아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씩씩하게 외쳤다. "후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엣! 내 방에서 후치는 왜 찾아!" …윽. 아이고 맙소사. 샌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리아…. 여기 우리 방이야." 네리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리아는 침대 수를 세 더니, 그 다음 천장의 무늬를 보고, 그 다음 우리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 더니, 기어코 시트 속으로 파고들어가 버렸다. 네리아는 시트 속에서 머 리를 감싸고 웅크린 자세로 외쳤다. "나 세 개 던졌어요! 세 대만 때려요!" "커허험! 흠, 흐흐흠!" 어쨌든 우린 그 소란 끝에 아침식사하러 내려올 수 있었다. 카알은 내 침대에 누워있는 네리아를 나로 착각해서 점잖게 시트를 들추었고, 네리 아는 시트가 들추어지자마자 카알의 얼굴이 보여서 기겁해버린 모양이 다. "죄소옹해요." "뭐, 실수였잖소." 카알은 힘들게 미소 지으며 네리아를 용서했다. 샌슨은 네리아에게 '너 정도의 용모로 카알을 유혹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냐?' 등의 말을 하다 가 네리아에게 발등을 찍히고는 펄쩍펄쩍 뛰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샌슨과 길시언은 조금 전에 나누었던 기술들에 대해 토의했다.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훔쳐듣자니 샌슨은 변칙과 임기응변에 능하고 길시언은 정통파의 기술이란다. 그냥 칼 휘두르는데 정통이 있고 변칙이 있나? 길시언은 빵을 쪼개면서 말했다. 프림 블레이드는 그 짧은 시간이라도 길시언이칼자루를 놓자 당장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웅웅웅. "칼 휘두르는 데는 정통과 변칙이 따로 없다. 어떤 무기라도 기본은 모 두 주먹쓰기에서 파생되는 것이니까 똑같다." "샌슨에게 들었던 말이군요. 그런데…?" "다만 어떤 때 어떤 기술을 사용하느냐, 거기서 정통과 변칙의 차이가 나오는 거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묻지는 마라. 설명하려면 한달은 걸린 다." 샌슨은 웃으며 스프를 떠먹었다. 그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 다. "이거, 발목이 묶이지 않고 식사하니 그것도 참 희한하군." "그새 미운 정이 들었나보지?" "그런가봐. 그래도 동고동락하던 사이였으니까." "하긴… 진짜 동고동락이다." 샌슨과 나는 히죽거리며 운차이를 회상했다. 살기를 퍼뜨릴 줄 아는 무 서운 전사이면서도 그는 우리에겐 한 번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아 니, 샌슨에겐 했던가? 하긴, 그 때는 팬케익이 걸려 있었으니까… 훗.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이를 쑤시면서 홀로 갔다. "응?" 샌슨이 날 돌아보았다. "왜 그래?" "저 사람…." 홀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 아까 골목길에서 마차를 세운 채 샌슨과 길시언의 대무를 구경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단정한 자세로 홀 한쪽 끝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일 행으로 보이는 마부의 모습이 보였다. 마부는 탄탄한 몸집의 중년남자로 마치 경호원 비슷한 자세로 청년의 옆에 앉아 있었다. 등에 롱소드 하나 매고 있는 것도 꼭 그렇게 보였다. 청년은 우릴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마부도 기민한 동작으로 청 년을 뒤따랐다. 분명히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는 것이라 우리는 가만히 서서 그 청년을 바라보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이런 고약한 경우를 봤나. 우리 일행이 다섯인데 다섯 명을 향해 한꺼 번에 말을 걸어오니 누가 대답할지 순간적으로 당황해버렸다. 카알은 길 시언을 바라보았지만,(왕자니까.) 길시언은 카알을 바라보았다.(최연장 자니까.) 그래서 청년은 자신의 인삿말에 대한 대답을 받지 못할 뻔했 다. "누구세요?" 딱 부러지는 음성으로 네리아가 물었다. 휴, 다행이다. 우리는 네리아 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러고보니 청년은 귀족가의 자제답게 그런대로 준수한 얼굴이었지만 지금 은 뭔가 깊은 수심이 있다는 듯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전 넥슨 휴리첼이라고 합니다." 휴리첼… 휴리첼… 카알이 먼저 대답했다. "혹시, 휴리첼 백작의…?" "제 아버님 되십니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12. 기사 휴리첼, 제 9 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사령관. 수도에서 캇셀프라 임을 호송하여 우리 마을에 왔던 그 백작. 흠, 나야 그 사람 멀리서밖에 못봤지. 넥슨 휴리첼은 바로 그 휴리첼 백작의 아들이라고 했다. "어제 임펠리아에 들렀다가 아버님의 소식을 가져온 분이 계셨다는 말 을 들었습니다. 전 아직 젊고 세력도 없는 사람이라 그 보고에 대해 더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간신히 그 보고를 가져오신 분이 여기 계시 다는 말은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들으시려고 오셨습니까?" "예. 이 여관으로 오는데 뒷뜰에서 대무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 다. 대번에 저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샌슨과 길시언은 동시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알은 진중한 표정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젊고 세력이 없어 듣지 못했다고 하셨습니까?" 넥슨은 얼굴을 조금 붉히더니 대답했다. "예.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세력이나 지위를 이용하여 제 소관도 아닌 정부의 중요 문건이나 정보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 하지는 마십시오. 원래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도 저히 기다릴 수가 없더군요." "이해합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서 하멜 집사 의 회의에 고집 부려 참가했던 입장이므로 넥슨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카알은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넥슨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고민하실 필요도 없고 위로할 말을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병사들 이 달려온 것이 아닌 바에야 승전보는 아니겠지요. 패했다는 것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와! 제법이다. 카알은 무거운 시선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얼 음장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의 생사만 말씀해주십시오. 아버님께서는 명예롭게 전사하셨습 니까?" 뭐? 명예롭게 전사? 카알과 샌슨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특히 카알은 황당할 것이 다. 명예롭게 '전사'했냐고 물어온다면, 불명예스럽게 '생존'해 계신다 고 대답해야 하나? 이런, 제기랄. 질문이 처음부터 엉망이잖아? 어떻게 대답해도 불유쾌한 대답밖에 할 수가 없는 질문이잖아? 그러나 카알은 대답했다. "기쁘게도 춘부장의 명예와 목숨, 모두를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넥슨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예? 이겼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저 회색산맥의 공포 아무르타트는 춘부장의 위용에 대한 솔 직한 경탄으로, 몸값을 받고 춘부장을 돌려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다스리거나 죽여버릴 수 있는 범용한 인물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겠지 요." 넥슨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포로가 되신 겁니까?" "아무르타트의 보호를 받고 계시는 것이지요." 넥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외교 용어를 쓰시는군요. 외교관 일을 하셨습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넥슨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말했다. "몸값은 얼마입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춘부장의 몸값을 마련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닐시언 전하께서요?" "그렇습니다." 넥슨은 입술 끝을 실쭉거렸다. 저건 무슨 의미지? 넥슨은 테이블에서 일 어났다. "아버님의 소식을 전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수도에서 뭐든 도 움이 필요하시다면 휴리첼 가문이 성심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어랏? 어디서많이 듣던 인사다? 카알은 넥슨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에델브로이의 신자셨군요?" "재가(在家) 프리스트입니다." 넥슨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곧이어 그 마부도 몸을 돌려 넥 슨을 따라나갔다. 그러고보니 저 마부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 네? 난 카알에게 물어보았다. "재가 프리스트가 뭐죠?" "아, 그건, 프리스트이긴 한데 신전에 머물지 않고 집에서 머무는 프리 스트를 말하는 거야, 네드발군." "집에서? 집에서 뭐하는데요?" "그러니까 일종의 명예직에 가까운 것일세. 흠. 그러니까 평신도보다 조금 높은 신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프리스트가 될 정도로 신앙이 깊 어 디바인 파워를 쓸 수도 있지만, 교단의 제재에서는 조금 자유로운 프리스트라네. 귀족의 경우 신전에 들어가면 가문을 이을 수 없지 않는 가? 그래서 재가 프리스트가 되는 거야." "어, 디바인 파워를 쓴다고요? 에델린처럼?" "아마 그 정도까진 아닐 거야. 하지만 최소한 잔병치레하는 일은 적겠 지. 그리고 시시한 몬스터들은 접근하기 어려울테고." 듣고 있던 길시언이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재가 프리스트가 많은 교단은 확실히 하늘이 푸른… 으 윽! 아니, 위세가 높다." 난 퍼뜩 어제의 데미 공주를 떠올렸다. 난 역시 민첩해. "그럼, 왕족들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겠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많지." 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아마 데미 공주님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겠지. 어제 인삿말 기억나는가?" 길시언이 빙긋 웃었다. "내 누이를 만나셨군요?" "예." "어떻든가요, 건강합니까?" "예? 예. 제가 뵙기에는 건강해 보이던데요." 그 때 네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말이죠. 난 저 사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딱딱하게 구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살아있다는데 기뻐하는 구석이 전혀 없네요?" 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이 수치다, 뭐 그런 말인가? 웃기네! 그 때 길시언이 말했다. "그는…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말했다. "그의 가문에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말 을 했겠지요." "씻을 수 없는 불명예라고요?" "그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입이 개구리만큼… 그만둬! 그 러니까, 어, 남의 가문의 불명예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가요? 흠."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마음에 안들어." 우리는 피식 웃어버렸다. 어쨌든 우린 밖으로 나섰다. 네리아는 오늘도 수도를 돌아보겠다고 하 면서 가버렸고, 우리 세 명은 별로 할 일도 없어진 참이라 그랜드스톰으 로 가는 길시언을 따라갔다. 여전히 황소를 바라보며 놀라는 수도시민들 의 당황스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시외곽으로 빠져나오자, 난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대번에 그랜드스톰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와."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언덕 위에 날아오를 듯이 우뚝하게 서 있는 장엄한 건물이 보였다. 아 래쪽에서 여러 번 굽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곧 깍아지른 듯한 절벽 같은 건물의 벽이 보였다. 벽에는 곳곳에 창문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반대쪽으로 돌아가보니 몇 층에 걸쳐 정원과 마당들이 한 눈에 들어왔 다. 2층 정원, 3층 마당, 이런 식으로. 그리고 현아한 계단들과 난간들, 우아한 담장과 다리들이 건물 내의 층층과 곳곳을 서로 잇고나누고 하 고 있었다. 엄청난 위용이었다. 우리가 정문에 도달하자 곧 어린 수련사들이 나섰다. 수련사들은 고개 를 꾸벅이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길시언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를 뵈러 왔습니다. 선약은 없지만, 길시언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려주시겠습니까?" 수련사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 어린 수련사들은 길시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황급히 우리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예엣? 뭐라고 하셨습니까?" 길시언은 펄쩍 뛰어올랐다. 덕분에 테이블에 있던 찻잔이 쏟아질 듯이 흔들려 나와 샌슨이 부리나케 찻잔을 붙잡아야만 했다. 길시언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귀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를 후비더니 말했다. "두 번 말한다고 해서 뭐 바뀔 건 없네." "그럼 안됩니다!" "…하늘을 향해 해가 동쪽에서 뜨면 안된다고 고함을 질러보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두고 보겠네." 하이 프리스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그럼 안됩니다.'라니. 우습지 않은가? 주위에는 지나가던 수련사들이 우릴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길시언 의 고함소리가 하도 커서 그랜드스톰이 울릴 지경이다. 우린 지금 그랜드스톰의 후원에 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확실히 멋진 건물이었다. 회랑과 문설주의 기둥들이 모두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하다못해 바닥도 석재로 포 장되어 있었다. 부지도 대단히 넓어서 커다란 마당과 분수들이 몇 개씩 이나 보였고 건물 내에 구역을 나누는 담장들이 여러 군데 서 있을 정도 였다. 우리는 그런 담장을 몇 개나 지나서 하이 프리스트가 있는 이 후 원까지 안내되어 왔다. 하이 프리스트는 후원 한귀퉁이의 정자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의 단순한 모직 로브를 입고 있는 중늙은이 모습의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는 보슈왈이라고 자기를 밝혔다. 성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와 가볍게 환담을 나누다가 우리 일행이 에델린을 만나서 칼라일 영지의 저주를 풀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크게 기뻐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자이펀의 흉계였다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것 은 현재는 국가 기밀에 해당하니까. 왕실에서 그것을 잘 가다듬어 외교 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함구하라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은 그저 알 수 없는 저주였고, 에델린과의 협력하에 병자들을 구출했다고만 말했다. "오호… 다행한 일이로군요." 카알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에델브로이의 은총에 힘입었음입니다. 하이 프리스트." 카알은 존칭을 사용했다. 나나 샌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면 큰일날 뻔했 군. 흠. 에델린은 그냥 이름을 불렀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경칭을 사용해 야 하나 보지? 어쨌든 길시언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우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 은 다음, 썬더라이더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하 이 프리스트는 썬더라이더를 살펴본 다음 길시언을 펄쩍 뛰게 만든 것이 다. 길시언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리, 리치몬드는 제가 죽였단 말입니다!" "자랑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주의 주체만이 풀 수 있다니오! 그 외에 다른 방 법은 없습니까?" "지금으로선." "예? 지금으로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무슨 방법이…" 하이 프리스트는 이마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저주를 푸는 건 원칙적으로 저주의 힘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야. 대개 의 경우 저주의 시전자가 죽어버리면 저주가 풀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 지." "그럼, 썬더라이더는…?" "끝까지 듣게. 그런데 해괴한 수단이나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면 문제가 까다로와져. 프리스트들 중에 타락한 자들이 쓰는 방법으로 신의 이름으 로 저주를 내리는 방법이 있네. 이 때는 성직자를 죽여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신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증거물을 파괴해야 되지." 나와 샌슨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 칼라일 영지의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그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회수함으로써 해제되지 않았는가? 펠레일은 그 디바인 마크가 '의식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신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증거물' 이라고 하시는군. 하이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이해가 되는가? 그럼 썬더라이더를 볼까? 잘생긴 황소군. 허, 인상 풀 게. 어쨌든 리치몬드라는 그 마법사를 죽였는데도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 는 것은 리치몬드가 뭔가 다른 것에 걸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 되지. 자네 머리엔 힘들겠지만, 이해되나?" 하이 프리스트는 왕자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고 그래 서 우리는 조금 놀랐다. 길시언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아니, 아주 구 겨진 얼굴로 대답했다. "차라리 이해못하면 좋겠군요." "이해했군. 좋아. 그런데 마법사니까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리지는 않았을 거야.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만, 어쨌 든 내 디바인 파워로 해제가 안되는 것을 봐서 보통 하는 식으로 마나를 집중시키는, 그런 방법은 아닌가 보네." "그럼?" 하이 프리스트는 턱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빛의 탑으로 가보게. 아무래도 마법사끼리는 서로 잘 알테지. 혹 다른 사람의 수법을 알아볼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길시언은 입을 딱 벌렸다. "빛의 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제 말 듣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리치 몬드를 사랑한단… 아니! 죽였단 말입니다." "아무래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군?" "아니오. 마법사를 죽인 제가 빛의 탑으로 가라니오. 그게 말이나 됩니 까?" "글쎄. 리치몬드는 다크메이지라고 하지 않았나?" "다크메이지든 어쨌든 마법사입니다. 저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정중히 섹스를 요구… 죄송합니다. 제발! 내가 지금 하이 프리스트와 이 야기 하고 있는 것 모르겠어? 입 좀 닥쳐엇! 그리고 그런 말을 하고도 네가 숙녀냐! 아아악! 웃지 말고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고는 검신에 침을 튀겨가며 바락바락 악을 써대고 있었다. 흠. 저 짓을 6년 동안이나 했다고? 미치지 않은 것 이 다행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참으로 보기에 즐거운 광경이라는 듯이 길시언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호기심이 동한다는 표정으로 길시언에게 말 했다. "그거 나도 한 번 쥐어보면 안될까?" 길시언의 얼굴이 허옇게 되었다. 그는 주춤주춤 했지만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는지 머리를 절절 흔들다가 프림 블레이드에게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께 무례하게 굴지마." 길시언은 그렇게 말하면서 프림 블레이드를 건네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점잖게 프림 블레이드를 쥐다가 어깨를 흠칫했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말 이 들려왔겠지. 이윽고 하이 프리스트는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수련사들은 그들의 하이 프리스트가 롱소드를 들고서 히죽거리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개중에는 황급히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들고 에델브로이를 부르 며 기도를 올리는 수련사도 보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오냐, 그래. 너 참 귀엽구나. 응? 글쎄다. 아름다운 숙녀가 될 것 같 구나. 하지만 여자를 모르는 늙은 프리스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 니. 응? 떽. 늙은이를 놀리다니." 남녀를 안가리고 좋아하는 검이라… 이제 보니 노소도 가리지 않는가 보군. 하이 프리스트는 프림 블레이드를 길시언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귀여운 검이구먼. 자넨 퍽 즐겁겠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지옥이 따로 없습… 으악!" 길시언은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마 프림 블레이드가 커다 랗게 고함을 지른 모양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가보게. 그들은 요즘 돈이 모자라는 모양이더군. 자네가 제시하는 것 처럼 그런 커다란 일거리는 크게 반길 거야."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이 모자라다니요? 마법사들이오?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될 건 또 뭐겠나." "항상 마법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왜 돈이 모자라겠습니까?" "에끼. 이 사람아. 그런 것들은 만들기 쉬운가? 재료비는 또 얼마나 드 는데." 길시언의 얼굴에 조금 희망이 떠올랐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13. 웅장한 담장과 소문을 몇 개 지나서 간신히 그랜드스톰을 다시 빠져나 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길 잃어먹기 딱 알맞은 곳이군. 아마 간혹 수련사들은 길을 잃겠지. 그리고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 다가 그만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디바인 마크를 꺼내들어 목청껏 '에델 브로이여, 길을 열어주소서!'라고 외치겠지. 그럼 밖에서 듣는 사람들은 참으로 신심 깊은 수련사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을 하겠지. 음. 우리는 수련사들이 대기시켜둔 각자의 말을 타고 나왔다. 난 엉뚱한 생 각을 하느라 등자에서 발이 두 번이나 미끄러졌다. 수도의 쾌청한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랜드스톰은 수도 외곽의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였고 외성에 바로 접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래로 넓고 규칙적으로 늘어선 시가지의 모 습과 저 멀리 반대쪽 외성 바깥의 검붉은 황야까지 굽어보였다. 황야에 는 은실같은 강물이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임펠 리버인 모양이 다. 우리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언덕길의 굽이진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래, 어쩌시렵니까. 빛의 탑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카알의 질문에 고민에 잠겨있던 길시언이 한숨을 쉬었다. "어렵겠습니다. 아무리 다크메이지였다 해도 리치몬드는 마법사였고, 따라서 마법사를 죽인 나같은 백정… 그만해! 나같은 전사에게 잘 대해 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희귀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동아 리 의식이 남다릅니다." "그런데, 어차피 마법 칼집을 구하러 마법사 길드에 간다고 하지 않았 습니까?" 길시언은 푸- 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도 꽤나 호된 가격을 부를 테지요." "허어. 어쨌든 방법이 없으니 그곳에 들러보아야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우린 언덕을 내려와 빛의 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도에서도 꽤나 유명해져버렸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아니라 길 시언이었지만. 황소를 탄 채로 돌아다니는 중무장의 모험가라는 것 때문 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입 넓이를 과시하는 사람들 사이로 이상한 사열식을 하고 있었다. 혹은 자신의 눈 크기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 다. 길시언은 그런 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은 모두 프림 블레이 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로서야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임에 틀림없다. 길시언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가… 응? 왜 그리 늦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카알은 대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했다. 우리는 일행으로 보 기에는 의심스러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길시언을 따라가고 있었으니 까.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가 다가설 때까지 기다렸다. 왕자 님, 친절하시군요. 왕자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디 가서 돼지라 도 구해와서 타고다녀야 되는 것 아닐까? "이제 다왔습니다. 빛의 탑입니다." 길시언은 말했다.그래서 샌슨과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빛도 없고 탑도 없는데요?"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야말로 보통의 건물들이 모여있는 길거리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무슨 커다란 광장이나 분수대는커녕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보통의 길다란 길일뿐이다. 뭐가 빛의 탑이라는 거지? 그러나 길시언이 가리킨 곳을 보고는 나와 샌슨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옆의 건물들 중 하나의 입구 오른쪽에 고풍스러운 - 좋은 말로 그렇고,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초라한 - 현판이 두 개 붙어 있었다. 그 중 큰 것 은 '커웨인 대서소'라고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보다 작은 현판이 붙어 있었다. '빛의 탑-2F' 아이고 맙소사. 샌슨은 딸국질을 시작했다. 역시 단련된 전사답군. 나 는 딸꾹질할 기운도 안나는데? 그 건물은 우리가 묵고있는 유니콘 인보다 별로 좋을 것도 없는 보통의 2층 목조건물이었다. 게다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박공형식으로 된 지붕 중 일부는 조금씩 떨어져 내려와 있었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 면 지붕에 얹어둔 널들이 그냥 쏟아질 것 같다. 그 건물은 양옆의 건물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더 장엄해 보인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래 되었다는 것에서 좋은 의미는 다 빼고나면 남는 것, 오로지 낡아빠진 건물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모자라 2F라고? 그렇다면 2층만 쓴다는 말인가? 카알은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퍽… 유서 깊어 보이는… 건물입니다만." 흠, 역시 카알이군. 표현을 잘하시네. 나와 샌슨은 반쯤은 뭔가 속았다 는 기분을, 반쯤은 우스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그 '빛의 탑'을 바라보 았다. 길시언은 황소에서 뛰어내리더니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말뚝에 썬더라이더를 묶었다. 우리들도 일단은 그렇게 했다. 난 기가 막힌 심정 때문에 길시언에게 말했다. "저, 한꺼번에 네 명이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계단이 좁긴 하지만…" "아니, 무너지지 않을까요?"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그냥 들어섰다. 아무래도 무너질 것 같은데. 샌 슨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길시언을 따라 들어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와 샌슨도 따라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더 답답했다. 채광이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밝은 바깥 에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치 이불 속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간신히, 왼쪽에 붙은 문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왼쪽에 붙은 문에는 바깥에 붙어있는 것을 그대로 줄인 듯한 '커웨인' 대서소라는 명 판이 붙어있었고 계단은… 아이고 맙소사. 저게 계단이면 우리 영주님이 타고 나간 그것도 전차가 맞다. 용감한 길시언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삐이-걱, 삐이-걱. "한 번에 한 사람씩 올라가죠. 예?" 내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먼저 카알이 올라서고나서 내가 조심스럽게 발을 얹었다. 삐이-걱. 뼈 긁는 소리를 내며 계단이 울 어젖혔다. 어쨌든 간신히 이층까지는 올라갔다. 이층에도달하니 역시 아래와 같 은 문이 붙어 있었다. 문에는 역시 명판이 붙어있었다. '빛의 탑 - 마법사들의 길드' 그리고 그 아래에는 조금 작지만 더 화려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눈이 별로 좋지 않은 카알은 코를 바싹 붙이고서야 그 글을 읽어내었다. 저렇 게 눈이 안좋은데 활은 어떻게 그렇게 잘 쏘시지? 하긴 창문도 없는 계 단이라 엄청나게 어두워서 나도 그 글을 읽기 쉽지 않았다.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저울과 저울추를 만들었다면, 나는 저울눈을 속 이겠다.' 흐음. 대단한 자존심이 엿보이는 글귀군. 나는 카알을 흘깃 바라보았 고, 카알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말이로군." 길시언은 우리가 충분히 구경하고나자 문을 두드렸다. 쾅쾅. 안에서 가느다랗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안으로 들어서자 횡뎅그레한 공간이 나타났다. 이층 전체가 하나의 방인 모양인데, 무슨 가구나 기타 등등은 전혀 보 이지 않고 오로지 맞은 편 벽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문 옆에는 책상과 의 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상하군. 이 방 넓이로 보니 이층엔 거의 남은 공간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반대쪽의 저 문은 뭐지? 그 문의 옆에 놓인 책상 뒤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는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약간 지친 듯이 머리를 방만하게 하늘 저편 어딘가로 기울인 자세로 허 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 보통 초상화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온 몸은 태 풍이 불어도 머리카락 하나 날리지 않을 정도의 경직성을, 그 위에 어색 하게 (물론 곧은 자세이지만 너무 곧아서 어색한) 머리가 달려 있고 그 머리에서는 타오르는 안광이 앞을 노려보고 있는, 그런 초상화와는 너무 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초상화였다. 젊은이의 얼굴은 무슨 밤을 세운 작업이라도 끝내고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알게모르게 드러 나 있지만 그 눈빛에는 뿌듯한 감정이 가득해 있었다. '핸드레이크의 초상화인가?' 마법사의 길드에 걸려있는 초상화니까, 그것 이외에는 생각할게 없다. 흐음. 핸드레이크가 저렇게 생겼나? 초상화 아래의 의자에는 '인간이 여길 찾아온 것은 수천년만이군….'하 는 식의 옛날 이야기에 잘 나오는 말을 해도 썩 어울릴 듯한 노인이 하 나 앉아 있었다. 위의 생기있는 젊은이의 얼굴에 비해볼 때, 처음에는 앉은 채 죽은 시체로만 보이던 그 노인이 입을 열어서 난 크게 놀랐다.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용건이 뭐요?" 길시언이 말했다. "마법적인 일에 대한 상담을 원합니다." "규칙은 아오? 자격을 보이시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속을 뒤지더니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 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와! 방 이 열 배는 밝아진 것 같다. 보석은 자그마한 것이지만 꽤나 아름다웠 다. 노인은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으로 보석을 집어들더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보석을 도로 내려놓았다. "가져가시오." 길시언이 그것을 다시 집어들었다. 저건 뭐야?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 는지 보이라는 건가? 노인은 말했다. "들어가보시오." "알겠습니다." 가라니? 어디로? 길시언은 노인의 책상 옆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아무래도 저 뒤에는 그저 벽장 정도의 공간밖에 없을텐데? 카알 이 들어가고 나서 샌슨도 들어서… 려고 했다. 그러나 샌슨은 문을 콰앙 닫아 버렸다. "왜 그래?" 샌슨은 얼빠진 얼굴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난 의아해서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었다. 그리곤 나도 역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문 부서져!" 노인이 고함을 빽 질렀다. 할 수 없어서 우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섰 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샌슨과 나는 부리나케 도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 이거, 잠깐. 여긴 그 방인데?" "…두 가지 중에 하나야. 샌슨도 그걸 본 모양이니 난 안 미쳤어. 아니 면 샌슨과 내가 동시에 미친 거야." 노인은 우리를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고, 그래서 샌슨과 나는 도로 들 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되는데?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곳에는 아래로 길게 계단이 놓여 있었다. 벽 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그저 계단만 놓여 있었다. 계단은 저 아래의 평 야까지 뻗어있었다. 하늘은 주황 색조였다. 평야에서 조금 멀리로는 탑이 하나 솟아있었다. 그리고 주위는 그저 넓은 공간뿐이었다.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였고 우리 가 서 있는 계단은 허공에서 그냥 끝나 있었다. 그리고 계단 꼭대기에 우리가 들어온 문 하나만 서 있었다. 아무래도 발걸음이 안 떨어져 나와 샌슨은 우리가 들어온 문을 다시 노 려보았다. 그건 그냥 공중에 서 있는 문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문 뒷 쪽을 보니 허공이었다. 하지만 문을 여니까 다시 아까의 그 어두운 방과 우리를 째려보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자꾸 문을 여닫는 거야!" 노인이 고함을 빽 지르는 바람에 우리는 황급히 문을 도로 닫았다. 샌 슨은 결정짓는 듯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둘 다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어." "존경스러워, 샌슨. 샌슨은 참으로 똑똑한 거 같아… 내가 왜 샌슨을 오우거라고 생각했지?" 우리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 말도 안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웃 음밖에 안나왔으니까. 계단을 다 내려서자 아름다운 평야에 서 있게 되었다. 주위는 산 하나 도 볼 수 없는 완전한 평야였다. 들판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에 황금 잎 사귀가 피어있는 것이나 머리 위 하늘을 날고 있는 몇 개의 양탄자는 별 로 괴상할 것도 없다. 지금 내 왼쪽에서 코를 드르렁거리며 졸고 있는 드래곤도, 그 드래곤의 꼬리를 베고 잠들어 있는 노인도, 그 노인의 다 리를 베고 잠들어 있는 블링크독(Blink dog)의 모습도 있는데 뭐. 블링 크독은 졸면서 껌뻑거리고 있어 보고 있기가 어지러웠다. 난 그 드래곤을 보고는 다시는 드래곤을 무서워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건 뭐야? 왜 드래곤이 뿔 사이에 리본을 매고 저고리 와 바지를 입고 있는 거지? 도대체 저 바지는 어떻게 만들었지? "꼬리 구멍은 내놓았군." 내 말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나는 뭐가 다행인지 되묻지 않았다. 말할 기분이 아니니까. 길시언과 카알은 탑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시언은 평온 한 모습이었지만 카알은 경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 러보았다. 길시언은 말했다. "정식으로는 이게 빛의 탑입니다." 빛의 탑? 나 같으면 뒤죽박죽탑이라고 하겠다. 탑에 창문들이 제멋대로 달려 있다는 것도 별로 내 눈을 잡아놓지는 못 했다. 탑은 층수마다 크기가 다 다른 모양이다. 아니, 층이라는 것이 별 로 없는 것 같았다. 중간 중간에 아무렇게나 튀어나오고 들어가 있었다. 심한 경우 탑 벽에 새로운 방을 몇 개씩 달아둔 것도 보였다. 아무래도 생각나는대로 크기가 각자 다른 방을 하나씩 두개씩 마구 쌓아올린 탑 같았다. 중간에 아무렇게나 튀어 나와있는 발코니나, 그 발코니 끝에 매 달린 거대한 새장에 새 대신 스크롤이 들어가 있는 것도 별로 놀라고 싶 은 광경은 아니다. 카알은 이 빛의 탑에 대한 단순명쾌한 감상을 말했다. "허… 허… 허… 허…." 카알의 비평은 참으로 날카로운 데가 있군. 정문으로 들어서자 넓은 홀이 보였다. 그리고 홀 주위에는 에상대로 들 쭉날쭉한 벽 중간에 뚫려 있는 통로, 높이가 제멋대로인 천장에 수직으 로 뚫려 있는 통로 등이 보였다. 통로라기보다는 방을 마구 쌓아올리다 가 중간중간에 생긴 틈처럼 보였다. 정상적으로 걸어다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더 이상 탑의 다른 곳으로 갈 방법이 없겠는걸. 어쨌든 그 넓은 일층 홀에는 둥글고 약간 낮은 바닥이 있었고 그 중앙 에 2큐빗 정도의 기둥과 그 위에 얹힌 수정구가 보였다. 길시언은 수정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마법 물품의 구입과 마법적 저주에 대한 상담을 원합니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14. 그러자 어디선가 맑은,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입하시려는 마법 물품은 어떤 종류입니까?" 우와흐하흐하…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다. 길시언은 대답 했다. "마법 검집입니다. 사일런스 주문이 걸린 검집의 제작을 원합니다."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피리자니옵스님께서 여러분을 맞이하실 겁니다. 그 후 마법적 저주에 대한 상담을 해 주실 분을 수배하겠습니다." 피리자니옵스? 발음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별로 품위가 없는 이름이군. 우리는 그 피리자니옵스라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으아아아아!" 꽝! 천장에 뚫린 틈 중 하나에서 왠 노인이 하나 떨어져 홀 바닥에 쫙 엎어졌다. 두 다리와 두 팔을 완전히 펼친 안정감 넘치는 자세였다. 우 리들은 놀라서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심한 타박상을 입은 채 기 절해 있었다. "크, 큰일이다. 의사! 의사 없어요?" 다시 그 간드러지면서도 우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의료적 상담을 추가하시겠습니까?" "…사람이 떨어졌어요!" "인력이 부족하십니까?" "그게 아니고 추락했다고요!" 그 때 우리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이 노인이 눈을 떴다. 노인은 끙끙거리더니 눈을 감고 뭔가 캐스팅을 하는 눈치였다. 곧 노인은 몸을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이런… 젠장. 내 방을 수직통로 옆으로 옮겼던가?" 카알이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괘, 괜찮습니까?" 노인은 허리가 쑤신다는듯이 뒤로 좀 젖혔다가 대답했다. "괜찮소. 끄응. 그런데 무기에 대해 상담을 요청한 것이 당신 일행이 오?" 카알은 황망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고 길시언도 아직 충격에서 벗 어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 다. "그럼, 내 방으로…" 노인은 말을 멈추고는 구멍과 틈이 숭숭 뚫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 다가 노인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디서 떨어졌지?" "…저긴데요?" "에잇! 올라가기 귀찮군. 루! 내 방을 일층으로 옮겨줘!" 그러자 다시 고막이 녹아내릴 듯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리자니옵스님. 당신은 이번 달에만 벌써 방을 네 번 옮기셨습니다. 길드장님의 요구에 따라 더 이상의 방의 이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피리자니옵스는 입을 쩍 벌리더니 외쳤다. "거짓말! 난 세 번 옮겼어!" "뮤테온님이 유니콘 - 페가서스 교배 실험을 하던 당시 주무시는데 방 해가 된다고 옮기신 것이 네번째 이동입니다." …유니콘과 페가서스를 교배하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되지? 유니서스? 페가콘? 난 잠시 머리에 뿔이 나고 등에 날개가 달린 말을 생각해보았 다. 나쁘지 않은데? 썬더라이더와 싸워도 뿔싸움이 볼만하겠군. "아차! 젠장. 잠결에 옮겼지. 그래서 내 방이 수직통로 옆에 있었군! 젠장. 알았어, 알았어!" 피리자니옵스는 역정을 내었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입에 꺽어넣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곧 수직통로에서 뭔가 붉으스름한 것이 밑으 로 떨어졌다. 그것은 둘둘 말린 양탄자였다. 피리자니옵스는 양탄자를 탁 펼치더니 그 위에 올라서면서 우리에게 말 했다. "올라서시오." 우리는 쭈볏거리며 양탄자에 올라섰다. 우리가 다 올라서자 그는 말했 다. "내 방으로 올라가자." 양탄자는 둥실 떠올랐다. 나는 무릎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양탄자는 그대로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올라갔다. 구멍 옆 벽은 마치 여러 개의 방을 쌓아올린 사이의 틈처럼 보였다. 들쭉날쭉한데다가 길다 란 틈도 있었고 통로도 있었고 문도 보였다. 잠시 후, 다른 건물이라면 대략 3층 정도로 느껴질 높이까지 올라왔을 때 양탄자는 멎었고 우리 앞에는 문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피리자니 옵스는 그 문을 열더니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갔다. 난 양탄자가 출렁이면 어쩌나 싶었지만 양탄자는 단단하게 굳은 바닥 같았다. 그래서 우리 일행도 모두 쉽게 방으로 들어섰다. 흠, 요런 구조 니까 문 열다가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군. 건망증이 심하면 비명횡사 하겠는걸? 방 안은창문이 몇 개 있었지만 그 창문이라는 것이 별로 소용이 없었 다. 창문 바깥은 또다른 방의 벽이 막아서 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다 행히 방 천장에 라이트인지 컨티뉴얼 라이트인지 어쨌든 빛나는 공을 붙 여두었기 때문에 방안은 밝았다. 피리자니옵스는 벽 한쪽의 책장에서 어린애 장난감처럼 보이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다섯 개를 꺼내어들더니 등 뒤로 휙휙 던졌다. 그러자 테이 블과 의자는 거대해졌다. 이젠 말할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샌슨과 나는 묵묵히 의자를 만져본 다음 털썩 주저앉았다. 피리자니옵스는 술병과 잔을 들고와서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이건 여기서도 만들 수 없는 거란 말이야." 카알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예?" "여기선 뭐든 되지만 제대로 된 술은 안되지요. 허허." 카알은 곧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놀라운 기적들은 이 공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하긴… 이런 말씀 뭣합니다만, 밖의 공간에서도 가능했다면 바이서스 는 예전에 마법왕국이 되었겠군요." 피리자니옵스는 놀란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우시군? 하긴, 이런 일들이 저 바깥에서도 가능했다면 예전에 우리 마법사들은 세계를 지배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여 기는 가장 깊은 꿈의 뿌리와 가장 선량한 거짓말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총체적 환상이지." "실제가 아닙니까?"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엔 실제가 아니지… 하지만 댁은 지금 여기 앉아 있지 않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카알의 푸근한 대답에 피리자니옵스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허… 오늘 잘못하다간 크게 물어뜯기게 생겼군. 핸드레이크의 백일 몽에 타이거가 한 마리 들어왔구료." "가당찮은 말씀이십니다." 결국 길시언 또한 갈데없는 칼잡이가 되어버려, 나와 샌슨과 더불어 역 시 감명깊은 대화라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간신히 피리자니옵스는 용건을 물어보았다. 길시언은 별로 설명하지도 않고 프림 블레이드를 피리자니옵스에게 건 네었다. "으랏차, 와차와차앗!" 피리자니옵스는 대단히 희한한 비명을 지르며 프림 블레이드를 테이블 에 던졌다. 프림 블레이드는 웅웅거리기 시작했고 피리자니옵스는 간신 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번쩍번쩍 빛내면서 프림 블레이드를 바라 보았다. "오오… 이, 이건! 이런 엄청난 마법검이… 혹시 당신은…." "길시언 바이서스입니다." 피리자니옵스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길시언에게 목례했다. "역시! 미욱한 마법사가 전하를 뵙소. 그렇다면 이건 장물이구먼?" 피리자니옵스는 짓궂은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지만 길시언은 담담 하게 대답했다. "장물은 아닙니다. 난 왕자고, 궁성은 내 집입니다. 가출한 셈이지만. 어쨌든 내 집의 창고에서 꺼내온 것이 장물이 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헛, 알겠소. 그런데 저에게 뭘 원하시오, 왕자님? 이런 엄청난 마법검 에 제가 뭘 더 추가할 수는 없는데?" "검이 아니라 검집의 문제입니다. 저게 하도 시끄러워서 그러는데, 내 검집에 사일런스 주문을 영구히 걸어주시겠습니까?" 피리자니옵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래서 길시언은 좀 더 설명했다. 하루 종일 칼자루를 쥐고 말을 들어줘야 하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끊 임없이 울어젖힌다는 식으로. 피리자니옵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거 참. 왕자님은 이런 말씀 들어보셨소? 자연력은 한 곳에 비 정상적으로…" "마력이 집중되는 것을 거부한다." 사람들이 모두 날 쳐다보아서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피리자니옵스 에게 말했다. "아, 제가 아는 마법사 한 분이 들려줬습니다." "그런가? 좋아. 들으셨소, 왕자님? 마력이 계속 한 장소에서 위력을 발 휘하게 하는 것은 자연력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일이 오." "그런데요?" "영구히 효과를 나타내는 마법검이 비싼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그러니 검집 하나에 사일런스 주문이 계속 작용하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 라, 이런 말이지." "안됩니까?" "차라리 새로 만드는게 낫소."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십시오. 모양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지만, 방음은 확 실히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보통 좋은 검집이 가져야할 조건 을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래요? 흠… 잠깐." 피리자니옵스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천장에 대고 말했 다. "루, 내 스톡에 아다만타이트가 얼마나 남아있지?" 곧 어디선가 그 착착 달라붙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습니다." "뭐야? 없어? 그럼 미스릴은?" "3 파운드 가량 남아 있습니다." "엇? 3 파운드라고? 이런… 내화석은?" "2 파운드 가량 남아 있습니다." 피리자니옵스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럼, 다른 마법사들 중에 혹시 창고에 여유분 남아 있는 사람 없나?" "여유분으로 취급된 품목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피리자니옵스는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갑자기 책장으로 달려가더 니 수정구를 꺼내어왔다. 그리고는 수정구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그 러니까 이런 식이다. "어이, 케이지. 어, 혹시 아다만타이트 남아있는 것 있나? …뭐, 없어? 미스릴도, 아무 것도 없다고? 이런 젠장. …시몬슬, 시끄러, 너 말고 진 짜 시몬슬을 데려와! 클론과 이야기할 거 아냐. 그래, 시몬슬, 혹시 아 다만타이트나 미스릴… 없다고? 아, 고맙네. …한, 한! 좀 일어나! 제 길, 또 정신동결에 들어갔군. …키뤼시나! 오, 내 사랑. …뭐야? 없다 고! 이런, 알았네." 피리자니옵스는 한참 동안 정신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포기해버린 얼 굴이 되었다. "이거 정말 마법사란 족속은 재료 아낄 줄을 모르고 써댄다니까. 그 귀 한 금속들을 무슨 진흙이나 모래 정도로 여기고 실험을 해대니, 거 참. 안되겠군. 길시언 왕자님. 내일 다시 들러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회색 산맥이나 갈색산맥에 연락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길시언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피리자니옵스를 바라보았다. "재료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빛의 탑에?" 피리자니옵스는 턱을 쓸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마법사란 동물이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가 잘못했 다고 생각하지 않고 재료가 불순해서 실험이 실패한다고 믿는 동물이거 든. 그래서 실험 한 번 할 때마다 희귀금속 수십 파운드씩을 날려버리는 놈들이라서. 걱정 마십시오. 내일까지는 재료를 충분히 구해놓고 견적도 낼 수 있을 거요." 피리자니옵스는 마치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 것처럼 마법사에 대한 험담 을 퍼부었다. 길시언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뭔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 다. 그는 잠시후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언제쯤이면 되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정도라면 되겠습니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 누가 잘못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우리는 피리자니옵스에게 인사를 보내고는 다시 그 양탄자를 타고 일층 까지 내려왔다. 그 동안 길시언은 계속해서 뭔가 생각에 잠기는 얼굴이 었다. 일층 홀에 도달하고나서 길시언은 우릴 둘러보더니 말했다. "갑시다." "예? 썬더라이더의 저주는…" "그것도 어차피 재료가 없어서 못한다고 할 겁니다. 몇 가지 확인할 것 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시언은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 빛의 탑 바깥으로 나왔다. 난 아쉬워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일행의 끄트머리를 따라 걸었다. 정말 기막힌 경관이다. 바람을 따라 황금 꽃잎이 수천개씩 흩날리는 모 습도, 까마득한 주황색 하늘 아래에 하얀 점이 되어 날고 있는 해오라기 들의 모습도, 졸면서 껌뻑거리고 있는 블링크독이나, 그 목 위에 다리를 얹어놓았다가 발뒷꿈치를 물리고 펄쩍펄쩍 뛰는 늙은 마법사의 모습도. 계단을 다 올라가 문을 열고 원래의 공간으로 나왔다. 숨막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컴컴하고 냄새나는 도시 건물의 이층이 었다. 어쩐지 눈물이라고 흐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진저리를 치며 길시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바깥에 나왔어도 여전히 꾀죄죄하고 냄새가 난다. 도시니까. 하늘 빛깔 하나만이 봐줄만 했다. 푸른 색이었다. 길시언은 깊은 생각에 잠겨 프림 블레이드가 웅웅거리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거의 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프림 블레이드는 끔찍한 소 음을 내었고 길시언은 화다닥 칼자루를 쥐었다. "이봐, 이봐! 나 지금 대장간에 가는 길이다. 그래도 계속 떠들래?" 그리고 길시언은 칼자루를 놓았으며 프림 블레이드는 고요해졌다. 카알 이 물었다. "대장간에 가신다고요?" "대장간이나… 보석상 몇 군데 돌아봐야겠습니다. 길드도 몇 군데 돌아 봐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따라다니기 힘드시다면 돌아가셔도 좋습 니다." "어, 저희는 상관없습니다만." "그러신가요. 그럼." 그리고 우리는 길시언을 따라 대장간 순례에 들어갔다. 길시언은 조그만 대장간에는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무기 공방이라고 불릴만한 곳에 주로 들렀으며, 책임자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 졌다. 요즘 귀금속 시세가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대개 요즘 귀금 속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대답이었다. 길시언은 상인 길드나 상회 에도 몇 군데 들렀다. 찾아간 곳마다 대접하는 방식이 모두 달라서 나는 벼라별 종류의 차를 다 얻어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커피를 내어놓는 곳 에서는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길시언은 보석상들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그 때는 이미 해가 하늘의 정점에서 살짝 빗겨나 서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딪는 시간이었다. 샌슨은 당연히 하루 중 이 시간에 가져야할 중대행사를 생각하며 안절부 절못하고 있었고 길시언도 그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 레이트 헤븐으로 찾아갔다. "여! 어서 오시오!" 샌슨은 고함을 질렀다. "스테이크 5인분! 수플레 10인분!" ================================================================== 5. 복수의 검은 손길……15. 샌슨은 산더미 같은 음식을 먹어치우고는 배에 손을 얹어둔 채 더없이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플레를 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카 알과 길시언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하트 브레이 커를 마시고 있었다. 길시언은 하트 브레이커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 다. "내 생각이 틀렸습니다. 난 마법사 길드에서 날 괴롭히려고 재료가 없 느니 하는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녔습니다." 길시언은 말을 꺼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바이서스 임펠에서 귀금속이 진짜 동이 난 것 같습니 다. 이건 예사일이 아닌데요." 카알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철이라면 모르겠지만 귀금속이 품귀현상을 보이다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철이라면 전쟁에 꼭 필요한 금속입니다. 그리고 귀금속 이라도 금이나 은 같은 것이 품귀를 일으킨 것은 이해가 갑니다. 결재수 단으로 사용되는 물품이니까요. 하지만 아다만타이트나 미스릴 같은 마 나 메탈마저도 품귀현상이라니…. 그건 너무 귀중한 금속이라 마법사 말 고는 아무도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장으로 갈 일은 없을 텐 데요." 나와 샌슨은 카알과 길시언의 대화를 열심히 들었다. 프림 블레이드마 저도 호기심을 느끼는 건지 아직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렇지요. 전쟁은 양산의 다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더 과격하게 소모해버리고도 버틸 수 있느냐, 라는 뜻이지요. 전 략전술이라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예. 그렇기에 양산과 관련이 없는 그런 물품이 품귀를 일으킨다… 글 쎄요. 혹 채굴 인원이 모두 전장으로 나갔기 때문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귀금속들은 드워프들만이 캐낼 수 있습니 다." "드워프만이?" "예. 그것은 채굴의 난이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카리스 누멘의 허락에 대 한 문제입니다. 결국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드워프 들이 채굴을 못한다거나, 혹은 중간 상인 누군가가 반출을 하지 않고 있 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소한 드워프들은 매점매석으로 자신들의 광물의 물건값을 올리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광물을 반출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두번째가 조금 가능성이 높겠군요. 전쟁의 특 수경기를 노리는…" 길시언은 말을 끝재지 않고 대신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잠시 후 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특히 여러분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카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말했다. "여러분들은 아무르타트에게 보석을 지급해야 되지 않습니까? 국왕 전 하가 보석을 준비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오전에 들러보 셔서 아시겠지만 바이서스 임펠에서 귀금속뿐만 아니라 보석도 구경하기 가 하늘에 별따기가 아닙니까?" 앗! 어, 억? 그런가? 그게 그렇게 되나? 카알은 입을 크게 길시언을 바 라보았다. 길시언은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무작정 국왕 전하만 믿고 기다려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대비책이 있어야겠습니다." "허나 무슨 대비책이 있겠습니까? 보석이 정말 모자란다면 저희들로서 도 대책을 강구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길시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힌 듯이 말했다. "이유를 알아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특수경기를 노린 상 인의 매점매석인지, 아니면 뭔가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만일 어느 거상의 농간이라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길시언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덩달아 우리도 비장해져버렸다. "우리가 전선에 있지 않는다 해서 전쟁이 우리 일이 아닌 것은 아닙니 다. 그것은 우리 형제의 일이며 우리 아버지의 일이며 우리 아들의 일입 니다. 그런 자들의 피의 값으로 지켜내는 이 나라의 평화를, 한낱 상인 의 이익증대를 위해 양도할 수는 없습니다." 음, 상거래의 부정은 용납할 수 없음이다! 그것은 저 남부의 열사의 뙤 약볕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일 부 거상들의 부의 증대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길시언은 엄숙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자!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 이 왕자님 좀 싱거운 데가 있군. 엄숙하게 말하길래 무슨 방법이 있는 줄 알았더니. 한참 고민 끝에 카알이 의견을 내어놓았다. "첫째로, 물건을 고가에 구입하겠다는 소문을 유포시키는 방법이 있겠 습니다. 통상가격의 10배나 혹은 20배로 구입하겠다고 말한다면 매점매 석의 경우 물건을 내어놓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방법은 우리 스스로 가 무슨 거상이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질 거라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겠군요." "둘째로, 창고들을 조사해보는 겁니다. 정말 바이서스 임펠의 모든 귀 금속을 모조리 수거했다면 그 부피는 엄청날 겁니다. 창고영업을 하는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대충 윤곽이 나올 듯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의 문 제는, 우리가 창고영업자들의 장부를 조사할 권한이 없다는 점이겠지요. 혹 개인창고를 가진 상회의 경우라면 아예 조사가 안될 겁니다." "세번째는?" "…전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길시언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아, 보통은 세 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보통은 세번째가 가장 기가 막 힌 방법인데." "글쎄요. 지금 당장은 더 이상 생각나는 방법이… 아! 네리아양!" "예?" 카알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네리아양은 우리도 알고 있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금속이나 보석류에 관한 정보라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빠르겠 습니까?" 그렇네? 달아나는 귀중품을 쫓으려면 레인저에게, 달아나지 않는 귀중 품을 쫓으려면 도둑에게 맡기라고 했던가?(달아나는 귀중품이란 발이 달 린 것, 즉 중요인물을 말한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세번째가 있고, 항상 그렇듯이 세번째 방법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이트 헤븐을 나와 우리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에 돌아오는 것이 좀 일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해는 많이 남아있었고, 샌슨과 길시언은 식후운동을 빙 자하여 또 뒷뜰에서 어울려버렸다. 그리하여 유니콘 인의 모든 하인들은 우르르뒷뜰에 나와서 두 사람을 구경했다. 카알은 우리 방에서 또 책을 꺼내어들었고 난 그냥 홀에서 죽치고 앉았다. 심심하군. 대낮의 여관 홀이라는 장소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장소다. 샌슨과 길시언 대무하는 것이나 구경할까? 에이, 관둬라. 그냥 나 혼자 나가서 수도 구경이나 할까? 음… 안되겠어.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뒷뜰쪽에서는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치챙! 챙! 티캉! 흠. 두 사람은 재미있겠군. 박수 소리와 한숨 소리, 탄성 소리도 요란했다. 아 마 또 뒷골목은 야외극장 비슷하게 바뀌어있겠지. "지루우하다아…." 난 테이블면을 긁적거리기 시작했다. 삐이걱. 손님이 들어오나? 난 입구를 바라보았다. 입구로 들어선 자는 세 명이었다. 먼저 덩치가 좋은 남자 두 명과 옷을 잘 차려입은 소녀였다. 척 보기에도 숙녀와 그녀를 호위하는 두 명의 전 사처럼 보인다. 누구라도 남자 둘과 그들을 보호하는 여자 하나라고 생 각하지는 않겠지. 난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남자들은 모두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었고 검집에는 똑같은 문장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녀는 나보다 두세 살 어릴 것 같고 꽤 화려해보이 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이상하네. 저렇게 옷을 잘 차려입은 소녀가 여관을 이용할 리가 없는데. 누가 여행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친척집이 나 친구집에 편지를 써줬어야 정상일 듯한데. 그 소녀는 홀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치 생전 처음 여관이라는 곳을 구경한다는 태도였다. 그 소녀는 홀에 앉아 있는 유일한 사람을 바 라보았다. 물론 그건 나다. 나도 물끄러미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신의 옆에 있던 거한 중 하나에게 뭐라고 말했다. 거한은 내 게 걸어와서 말했다. "꼬마야. 여기서 일하느냐?" "당신, 눈치가 없군요. 내가 여기 종업원이면 '어서 옵셔!'라고 말했을 텐데요?" 거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 뒤를 힐끗 보자 웃고 있는 소녀 의 모습이 보였다. 거한은 말했다. "어, 그러냐? 이거 무슨 여관이 손님이 왔는데 종업원 하나 나오지 않 는 거지? 그럼 미안하지만 말 좀 묻자. 여기 헬턴트 영지에서 오신 사절 단 일행이 묵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냐?" "사, 사절단? 푸헤헤헤헤." 거한은 내가 폭소를 터뜨리자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눈물 을 닦고 말했다. "그래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네가 그것은 왜 묻냐?" "나도 그 사절단 일행이니까요." 거한은 매서운 눈으로 날 쏘아보았다. "버릇이 없구나. 말구종이나 하인과 더불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 주인을 모셔오너라." "내 주인? 흠. 좋지. 잠깐만 기다리시죠. 어이, 후치! 누가 너 부르는 데? 응. 그래, 알았어. 자, 무슨 용무이십니까?" 거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설명해줬다. "내 주인은 나니까." 거한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난 귀를 후비며 말했다. "이것 보쇼. 우리 일행들은 지금 좀 바쁘긴 하지만 손님을 만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그 손님이 이름이라도 알 려주며 공손하게 대화를 요청하면 더 기쁘게 만날 수 있을 텐데?" 거한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괘씸한 놈! 아랫것이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구나! 네놈의 고향에서 굴 러먹던 예절을 어디다 들이미는 거냐!" "거 참. 나 내 입으로 단 한 번도 내가 하인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당 신이 멋대로 내가 하인일 거라고 짐작하지 않았어요? 저 뒤의 소녀는 나 보다 더 어리네. 그렇다고 나 저 소녀가 당신들 하녀일 거라고 생각하지 는 않는데. 그렇잖습니까?" 아아! 내 입이여! 축복받을지어다. 거한은 논리정연한 내 말에 말이 막 혀버린 모양이다. 난 적당히 하자고 마음먹고는 친절하게 말했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시죠. 우리 일행을 데려올 테니까." 거한은 황망한 눈길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신경쓰지 않고 이층으로 올 라갔다. 그리고 카알을 불러왔고, 뒷뜰로 가서 누가 보면 원수라고 착각 하기 적당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도 불러들였다. '헬턴트 영지의 사절단 일행'이 집합하자 두 거한과 소녀는 더욱 어리 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 사절단이라는 것이 중늙은이 얼굴에 허허 웃 는 중년 하나, 오우거에 옷을 입혀둔 듯한 전사 하나, 그리고 머리에 새 집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한 소년 하나니까.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를 찾아오셨다고요? 전 카알 헬턴트.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 입니다." 거한은 당황하면서 소녀를 소개했다. "아, 예. 할슈타일 가문의 에포닌 아가씨입니다." 할슈타일? 어라? 에포닌은 얌전히 목례하면서 카알의 앞에 앉았고 두 사람의 거한은 에 포닌의뒤에 시립했다. 흠, 나와 샌슨도 카알 뒤에 시립해야 되는 거 아 닐까? 에구, 관둬라. 대신 회담은 전적으로 카알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관계치 않는다는 자세 를 취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와 샌슨, 길시언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몰려앉아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회담을 구경했다. 샌슨과 길시언은 조금 전 나누었던 기술에 대해 토의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라는 얼굴이었 지만 조용히 입을 다문채 회담을 방해하지 않았다. 카알은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이라면…" 에포닌은 얌전한 어투로 말했다. 예의범절이 몸에 밴듯한 아가씨다. 갑 자기 제미니가 그리워지는군. "저희 가문의 한 사람이 드래곤 라자로 있는 드래곤 캇셀프라임이 귀 영지에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소공자 말이오?" "제 동생입니다." 카알은 놀란 표정으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 로 말했다. "어, 저, 이거 죄송한 질문입니다만, 그 소공자가 할슈타일 가문의 적 자였습니까?" 에포닌의 볼에 살짝 홍조가 올랐다. "아시는군요. 예. 저와 제 동생은 할슈타일 가문에 입양되었습니다. 전 드래곤 라자의 자질은 없습니다만 동생 덕분에 함께 귀족가에 입양될 수 있었습니다." 카알의 얼굴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요…." 에포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전에 넥슨 휴리첼님을 뵈었습니다. 듣자니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 에게 패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디트리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드래곤 라자 꼬마의 이름이 디트리히였나? 디트리히 할슈타일? 어? 잠깐. 그러고보니 우리들은 그 꼬마의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잖아? 어떻게 된 거지? 왜 우리는 그 꼬마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못했던 것이지? 왜마치 알 필요가 없는 일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 카알은 말했다. "에포닌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드래곤이 사망할 경우 드래곤 라자의 생 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에포닌은 주먹을 꼭 쥐면서 말했다. "확실한 겁니까?" "아니오. 죄송합니다만 할슈타일공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에포닌은 분노에 찬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저…" 카알은 어쩔 줄 몰라했다. 에포닌은 독기어린 말투로 말했다. "확인하지 않으셨군요!" "…그렇습니다." 에포닌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카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에포닌 의 입에서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렇겠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캇셀프라임일 뿐이죠. 어차피 드래곤 라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존재니까요. 드래곤에 따라다니는 부속물 같은 것이죠. 드래곤과 대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있어야 되는 귀찮은 존재일뿐이죠. 캇셀프라임이 이미 죽었다면 드래곤 라자는 아무 데도 쓸 모없는 존재, 신경쓸 가치가 없겠죠!" 나는 에포닌의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그거였다. 드래곤만이 중요할 뿐이다. 드래곤 라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과 인간의 매개물. 드래곤이 인 간의 명령을 듣게 되는 계약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물… 제미니에게 들 려줬던 말이었던가? 그런 상징물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비정했다. 우리는 그 어린 꼬마를 전장에 보내어놓고 전 혀 모른 척 해버린 것이다. 위대한 캇셀프라임만 만세였을 뿐. 나는 지 금까지 그 꼬마의 이름을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에포닌은 눈을 부릅뜬 채 외쳤다. "그래서… 당신들은 디트리히의 생사 따위는 전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캇셀프라임의 패배소식만을 가지고 허겁지겁 수도로 달려 오셨군요. 하긴 캇셀프라임이 패했다면 드래곤 라자가 무슨 가치가 남아 있겠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그러니 전하께는 그 소식만 전해드 리면 되고요!" 카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에포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말했 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무가치한 제 동생 의 생사를 묻다니, 귀하신 분들의 시간을 뺏어서 정말 죄송하군요! 후작 님도 그 소식에는 관심이 없으실테니 안심하시죠!" ================================================================== 5. 복수의 검은 손길……16. 후작님이 관심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카알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에포닌은 그대로 목례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두 명의 거한도 부리나케 그녀를 따라나갔다. 카알은 멍한 얼굴로 여관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카알의 테이블로 옮겨갔다. 카알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카알." "후우우. 네드발군. 나란 존재가 싫어지는군. 그 어린 소년의 생사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니…." "우리 모두 그랬어요. 캇셀프라임이 패했다는 말은 결국 그 꼬마가 죽 었다는 말과 같은 걸로 생각한 거죠. 카알의 잘못이 아니예요."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고통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잘못일세. 잘못이야. 캇셀프라임을 제외해도 그 디트리히는 디트리히 여야 했어. 왜 캇셀프라임이 없어지면 아무도 그 소년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가. 인간이란, 그렇게 아무렇게나 취급되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거늘… 어떤 수단이나 가치를 제외하고, 쓸모가 있느냐 없느 냐를 떠나서 모두 존중받아야 하거늘. 펠레일이 지금 날 보면 얼마나 꾸 짖을까…" 나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펠레일, 펠레일이 지금 날 보면! 펠레일. 저 먼 적국의 간첩들의 농간으로 부모를 잃은 꼬마들을 위해 정착해버린 선량한 마법사. 그는 적국과 고국을 구분하지 않고 그것을 어른이 아이들에게 저지른 죄로 보았지. 그래서 어른으로서 대신 그 죄 값을 갚으려 했지. 그런데 우리는 캇셀프라임이 패했다는 이유 하나만으 로 그 드래곤 라자 꼬마에게 더 이상 신경쓰지를 않았지. 아아, 부끄럽다! 네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카알 아저씨, 웃어보세요. 이렇게. 이히이…" 네리아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좌우로 잡아당기며 괴상한 웃음을 지어보 였지만 카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알은 오늘 작정을 해버린 모양이다. 우리 테이블 옆에는 맥주통이 통 째로 옮겨져 있었고 카알은 내게 맥주통 뚜껑을 뜯어버리게 한 후 잔을 그냥 집어넣어 퍼마시고 있었다. 주인장은 맥주통이 박살나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맥주통 값까지 다 계산하겠다고 달래놓아서 방해하지 는 않았다. 카알은 아주 해괴한 모습으로 취하고 있었다. "인간은 간악하도다. 대지를 거부한 그의 몸은 두 발로 섰도다.보라, 교만한 그 얼굴은 목 위에 똑바로 서 하늘을 바라보는구나. 순한 성품의 모든 동물이 대지를 바라보는 머리를 가졌으되 인간만이 목 위에 머리를 얹고 하늘을 주시하며 창조를 희롱하는도다. 그러나 그 죄많은 몸이 대 지에 누울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이더냐…" 절대로 고함은 아니다. 차라리 속삭임에 가깝다. 하지만 끊임없이 저렇 게 중얼거리고 있다. 누군가 말을 걸면 친절하게 대답까지 하고는 다시 중얼거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카알을 내버려두고는 각자 따로 취하기로 했다. 나도 기분은 정말 지저분했다. 내가 그 꼬마였다면, 드래곤 라자의 자 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와 생이별하고, 귀족가에 끌려갔다가, 자 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전쟁터에 내보내지고, 그리고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젠장! 우리들 중 그 전투를 직접 겪었던 샌슨은 오히려 침착했다. "전쟁에서 누가 누구를 신경씁니까. 자기 목숨 하나 챙기기도 바쁩니 다. 그것도 제대로 못하니까 전사자들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카알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옳은 말일세. 퍼시발군. …허나 인간은 간교하도다. 주체로서 세상을 보며 세상을 자신의 종속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은 그의 도구요, 가치기 준은 오로지 내재되어 있을 뿐. 그 억지스러운 가치기준을 이해시킬 생 각도 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바라니…" 샌슨은 포기해버리고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길시언은 오히려 카알 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소중한 말을 듣게 되어 기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남자, 열심히 듣고 있는 남자, 포기해버린 남자, 화나고 부끄러워하는 남자. 이렇게 네 명의 남자가 우울한 술판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네리아가 돌아온 것이다. 네리아는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이해가 안되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모두 이 모양이지?" 카알은 거의 맥주를 입에 쏟아붇듯이 마신 다음 빈 잔을 맥주통에 집어 넣어 퍼올려 다시 입에 퍼부었다. 마치 불난 집에 물 끼얹는 듯한 꼬락 서니다. 네리아는 그만 화가 나버린 모양이다. 그녀는 카알의 맥주잔을 뺏어들었다. "카알 아저씨! 그만 하시고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아, 네리아양.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부글부글…" 마지막은 맥주잔을 빼앗긴 카알이 머리를 통째로 맥주통에 처박았기 때 문에 나는 소리였다. 샌슨과 길시언이 기겁해서 카알의 상체를 잡아당겼 다. 맥주통에서 건져낸 카알은 푹 젖은데다가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네 리아는 펄쩍 뛸 듯이 놀라서 카알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자 카알 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말했다. "이 죄인께 내리는 형벌로는 너무 약하오. 더 세게 쳐주시오." "아악! 정말 못말리겠네!" 네리아는 맥주잔을 도로 돌려주고는 카알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그 래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듯한 사람, 즉 샌슨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왜 이러셔?" 샌슨은 잠깐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듯한 표정이더니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꼬마가 전쟁에 나갔다. 그리고 그 꼬마의 생사 에 대해 알려고들지도 않았다. 그보단 더 중요한 다른 것에 신경을 썼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그 꼬마의 누나가 찾아와서는 꼬마가 살았냐고 물 어왔다. 모르니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렇지 뭐." "퍽 간단하네. 그래서 이렇게?" "요약하지 마!" 내 고함소리인 것 같다. 네리아와 샌슨, 길시언이 모두 날 쳐다보았으 니까. 난 계속 뭐라고 떠드는지도 모르는 채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그딴 식으로 요약하지 마! 그럼 샌슨은 뭐야? 태어나서, 살 다가, 죽겠지? 샌슨의 삶을 요약하면 그것밖에 더 돼? 네리아는! 태어나 서, 살다가, 죽겠지! 루트에리노 대왕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지! 빌 어먹을, 빌어먹을! 그딴 식으로 다른 사람 인생을 간단하게 말하고 대수 롭잖게 취급하지 마! 디트리히, 오, 제기랄! 그 꼬마는 드래곤이 걱정되 어 한밤중에 산을 탔었지. 그 애는 너무 큰 백마 위에서 부들부들 떨면 서 나타났었어. 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아!" "쟤 왜 저래?" 네리아의 질문에 샌슨이 대답한 것 같았다. "카알과 비슷해. 여기까지 오면서도 그 아이 생각을 단 한 번도 떠올리 지 못해서 미안해서 그럴 거야." "웃기네. 누가 다른 사람을 일일이 신경써? 바보 아냐?" "나쁜 거 아니니까 핀잔하진 마." "나쁜 거야. 사람은 그런 동물이 아냐. 사람한테 환상을 가지면 평생 살기가 괴로워. 후치는 아무래도 이루릴에게 물이 든 모양인데?" "글쎄." "우어어어억!" 샌슨과 네리아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카알은 포효하며 다시 맥주통 속으로 잠수를 시도했던 것 같다. 튕겨져 오르는 맥주방울이 공중을 수 놓는 것이 보였다. 황금색 방울방울. 그리고 난 나가떨어진 모양이다. 천장이 기울어보였다. 시간관념이 거의 서지를 않는다. 빙빙 도는 머리를 다잡으며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잘 떠지지 않았 다. 누군가가 내 뺨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진다. 여자 손길… 네리아인 모양 이군. 그녀는 내 베개를 손보고는 시트를 가슴 위로 끌어올려주었다. "후치. 괜찮아?" 대답을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네 리아는 말했다. "샌슨에게 다 들었어. 그건 누구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란다." 눈시울이 축축해지는 것 같다. 네리아의 손가락이 내 눈꺼풀을 살며시 훑고 지나갔다. "물론… 디트리히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로지 드래곤 라자의 자 질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전장으로 내몰렸지. 네가 가슴 아파하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그런 불행한 소년에게 눈길 한 번, 관심 한 번 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겠지?" 네리아의 손이 내 가슴을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안온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는 없단다." 네리아의 손은 따스했다. "우리는 인간이야. 엘프가 아니지. 인간의 아이는 10년만 지나면 어른 이 돼. 너도 어른이 되어야 해. 안될 수는 없으니까." 네리아의 손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내 맥박인지, 어쨌든 맥박 뛰는 것이 느껴졌다. "서글픈 일이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우리 사는 세상은 모든 이 가 행복할 기회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반드시 누구 하나는 불행한 쪽에 있게 돼. 그러니 그걸 보고 견딜 줄 알아야 되지." 그 때 쭉 침울하던 갑자기 네리아의 말투가 조금 익살스러워졌다. "하지만 말이야… 어쩌면, 어떤 인간은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을 수도 있을 거 같아."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흠. 가능성이 있어. 카알 아저씨를 봐. 까르르… 상상도 못했어. 그렇 게 근엄한 얼굴을 하고 엄숙하게 말하던 분이, 속마음은 그렇게 순진했 다니. 믿어지지가 않아. 넌 그 분의 닮은 꼴인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가 말했다. "후치. 착한 후치야."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가지마! 가지마, 엄마! 나는 없어, 나는 없어!" "나는 엄마가 없어. 나는 아버지가 없어. 난 고아야. 아무르타트가 내 아버지를 가져갔어. 난 고아야! 펠레일이 돌보는 50명의 꼬마와 같아. 다를게 없어." "내 발로 걸어야해. 내 발로 걸어야해. 왜 보지 않지? 왜 듣지 않지? 함께 걸어가면서, 왜 따돌리지? 내 발로 걸어야해. 아냐! 함께 걸을 수 있어. 함께 걸어야해." "그렇지 않아요." 이루릴의 말이었다. 이루릴은 웃었다. "손을 내밀어도 돌아보지 않는 슬픔. 글쎄요. 누굴 위해서 손을 내미는 건가요?" "이루릴. 틀려요." "틀려요, 그렇지 않아요! 난 엄마가 없어. 난 외로움을 알아. 손을 내 밀어주고 싶어. 함께 걷고 싶어요! 난 외로움을 알아. 난 다른 사람의 외로움도 알아. 다른 사람과 싸우기 싫어서, 버릇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 기 싫어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야! 난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알기 때 문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외로움을 털기를 바래요. 그것 때문이 야!" "당신은 디트리히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어요." "그, 그건… 그건 잊어먹었을… 아니야… 아니야!" "아무도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알 수는 없어요." 곤란한 꿈이다…. "네리아." "응?" "나, 깨어있어요?" "뭐야? 어, 그런 것 같은데?" "확실해요?" "궁금하니?" "으아가가각!" 난 네리아에게 쥐어뜯긴 코를 부여쥐고 펄쩍 뛰었다. 오, 맙소사! 하필 이면 침대 위였잖아? 맞아. 난 침대 위에 누워있었어.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한 죄로, 난 발을 헛디디고는 침대 옆의 방바닥에 얼굴을 들이박 았다. 샌슨은 감명깊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네드발식 기상법이냐?" "난 원래 독특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가지거든." 헛소리를 하며 몸을 일으켰더니 낮이었다. 주위는 훤한데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니 벌써 늦은 아침이라 고 부르기에도 늦어버린 시간이다. 허 참. 밤 하나와 아침 하나가 누가 베어먹듯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렸군. 카알은 자기 침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시언은?" "빛의 탑에 들러본다고 나갔다. 속은 좀 괜찮냐?" "괜찮아. 고마워." "됐다. 욘석아." 샌슨은 빙긋 웃으며 내게 냉수컵을 건네었다. 난 냉수를 들이켰다. 우 어어어! 뱃속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난다. 뱃속의 진동 때문에 온 몸이 떨릴 지경이다. 무엇보다, "이, 이거 냉수 아니지?" "드래곤의 숨결을 조금 섞었어. 냉수보단 나을 거다." "으응. 그렇구나. 오에에엑!"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방에서 샌슨의 말이 들려왔다. "카알, 사실 말하자면 그 커피에도…" "그런가? 음. 어쩐지 오늘따라 커피향이 좋더… 우으으읍!" ================================================================== 5. 복수의 검은 손길……17. 네리아는 오늘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숙취로 나가떨어지다시피한 카알 과 나를 돌봐주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에 네리아는 불평 반 웃음 반으 로 말했다. "아니. 나가봐야 할 일도 없는데. 너어무 재미없어. 수도가 수도 같지 가 않아." "무슨 말이죠?" "반짝거리는 예쁜 물건 구경을 못해. 흥. 원래 수도에서는 한 시간만 돌아다니면 모자 속에 숨겼든, 치마 속에 숨겼든, 어쨌든 반짝거리는 패 물을 가지고 다니는 아줌마들이 있다고. 그걸 보면 얼마나 좋은데. 그리 고…" 샌슨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슬쩍?" "할 수도 있지. 최소한 전쟁 벌어진 나라에서 그런 것 자랑하고 싶어서 주렁주렁 달고 나오는 꼴은 못봐주니까." 네리아는 당당하게 말했고 그래서 샌슨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요 며칠 동안 그런 거나 하려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하지 는 말라고. 단기 고용직 좀 없나 싶어서 여러 군데 알아봤는데 전혀 안 보여. 히잉. 아무래도 수도를 떠나야 될 거 같아." 그 때 카알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금붙이가 보이지 않는다라… 그거 참." 우리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두통으로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 다. "네리아양. 그러니까 어떻다는 말입니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금붙이 가 안 보인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안보인다는 말입 니까?"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떠더니 말했다. "글쎄요? 왜요, 카알 아저씨. 나랑 동업하시려고요?" 카알은 빙긋 웃었고 네리아는 말했다. "이상하다…고 보는 것이 좋겠어요. 금, 은, 사파이어, 루비, 오팔, 다 이아몬드… 반짝반짝 예쁘고 비싼 것들이 모조리 사라졌어요. 뭐, 아까 말씀 드린대로 전쟁이라 온 국민이 검약을 실천해야 되는 시점에서 그런 것 달고 나올만큼 배짱이 큰 사람은 없다! 고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보 기엔 그런 정도도 아니에요. 아줌마들이 그런 것 따지면서 보석 달지는 않거든요. 완전히 수도에 귀금속이 씨가 말랐다고 보는 게 좋겠…" 네리아는 제스춰까지 써가면서 명랑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덜컥 하는 표 정을 지었다. "자, 잠깐. 여러분들은 수도에 귀금속을 구하러 왔죠? 그러니까 그 드 래곤에게 줄 보석을 구하러…?" 카알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네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그럼 안 되네? 보석이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되겠지요. 국왕께서 약속한 일이니까." "약속은 약속이고 안되는 건 안되는 거예요. 큰일이네. 나가서 좀 알아 봐야겠어요." 그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설명하지요." 길시언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한 말이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 말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음… 마루에 떨어진 충격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길시언은 먼저 프림 블레이드를 테이블 위에 풀어놓고는 입 다물고 있 으라고 협박한 다음 나직하고 분명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빛의 탑에 갔더니 난리도 아니더군요. 어제 그 피리자니옵스라는 마법 사가 소란을 떠는 통에 마법사 길드 자체에서도 조사에 나선 모양입니 다. 정말 마법사답게 조사를 했더군요. 그들은 수십 명의 마법사들과 제 자들을 동원해서 디텍트 쥬얼(Detect Jewel) 마법으로 수도 전체를 훑어 본 모양입니다. 덕분에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지쳐 쓰러졌다고 합니다." 길시언은 미소를 지었지만 카알은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길시언은 계 속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어쩐지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들처럼 그냥 돌아다니며 물어보 면 될 것을, 그렇게 마법으로 조사를 하다니… 보통 사람에서 한쪽이 비 상하게 발달하는 대신 다른 쪽이 엉망이 되면 그것이 천재라는 선인들의 말씀이 맞나 봅니다. 어쨌든 그들이 알아낸 바는 저희들이 알아낸 것과 같습니다. 수도에는 현재 보석류나 귀금속이 품절을 일으킬 지경입니 다." "이유도 알아내었답니까?" "그걸 알아내려면 상인에게 묻는 것이 낫겠지요. 그래서 난 친분관계가 있는 몇몇 상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보석을 사들이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길시언은 턱을 쓸면서 말했다. "어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했었습니다. 첫째, 누군가가 보석을 사들이고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 일입니다만 알아본 바로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째, 공급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라고 보았었지만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공급이 안된다는 것이 상인 들의 대답이었습니다." 카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급이라니오? 보석이 소비재는 아닌만큼 원래 있던 것은 그대로…"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보석은 소비재가 아닙니다만, 이곳은 바이서스 임펠, 빛의 탑이 있는 곳입니다. 마법사들에게는 보석과 귀금속이 소비재입니다. 그들의 실험 하나에 들어가는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왠만한 가정의 1년 생활비를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예. 그래서 공급원들 중 어느 곳이 막혔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금속을 채취할 수 있는 자들은 하나 뿐이니까요." "드워프들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드워프들이 반출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쪽이 막힌다면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뭐, 일반인들에 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조용합니다만, 보석을 필요로 하는 이 들에게는 엄청난 소동입니다." 우리는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다른 때라면 우리들도 보석 따위, 비싸기만 한 물건이 품절을 일으키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 먹지도 못할 물건 따위,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다. (내가 샌슨이 된 것 같아….)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 우리는 몸 값을 마련해야 된다. 왜 하필 지금 이런 괴상한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 길시언은 계속 말했다. "거기에 관련해서 마법사, 어제의 그 피리자니옵스가 말해준 정보가 있 습니다." "무엇입니까?" "피리자니옵스는 회색산맥과 갈색산맥에 연락을 해 본 모양입니다. 그 는 마법으로 연락을 하다가 지쳐버린 모양입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정보 를 알아내었습니다." 길시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드워프들의 노커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노커? 난 길시언에게 물었다. "아니, 문에 다는 노커가 움직이다니오?" "그 노커가 아니다. 후치. 드워프들의 노커란 것은 두드리는 자, 신성 한 카리스 누멘의 모루를 처음으로 두드리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국왕과 비슷하다. 물론 드워프들은 노커를 섬기지는 않고 노커라고 해서 다른 드워프들을 강제할 수는 없으니까 국왕과는 좀 다르지만, 어쨌든 가장 큰 발언권과 가장 중대한 회의의 주최권을 단독으로 가진 자야. 설 명하려면 한이 없으니까 간단히 말해서 가장 존귀한 드워프라고 생각하 면 돼." 그런가? 흠. 길시언은 계속 말했다. "드워프들의 노커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의 보석 반출 중지를 조사하기 위해 나섰답니다. 그리고 조사가 끝나는대로 수도에도 들릴 모양입니다. 국왕 전하를 만나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입 니다." 카알은 말했다. "언제 출발했습니까?" "9월 말입니다." "예? 벌써 10월 하순인데,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답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노커가 늦어지는 이유는 나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지요?"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두 다리로 걸어오고 있을 테니까요." 윽. 맙소사. 아무리 말을 탈 수 없다고 해도, 세상에 가장 존귀하신 드워프께서 걸 어서 수도까지 오고 있다고? 조랑말이나 나귀라도 타고 오지 않고? 길시 언은 내 표정을 보며 말했다. "드워프들이란 이상한 일에 고집을 부리곤 합니다. 그들이 보기엔 두 다리가 있으면서 말을 타는 우리가 괴상한 종족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드워프들의 노커 엑셀핸드 아인델프는… 뭐, 뭐야?" 길시언은 내가 펄쩍 뛰어오른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곤 잠시 후에 샌 슨이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더 놀랐다. 샌슨과 나는 서로 눈길을 주고 받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가장 존귀한 드워프래…." "응. 그렇대…." "그럼 우리도 가장 존귀하게 탈옥하신 건가?" "응, 그럴 거야." 카알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천장이다. "허어… 이런." "그 분을 만나셨다고요?" 카알은 한숨을 쉬었다. "만난 정도가 아닙니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우린 수도에 도달하기는커 녕 생사불명이 될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투미했다니." "투미하다니오. 그 드워프, 노커님이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그런 몰골 을 하고 있는데 누가 가장 존귀한 드워프라고 생각했겠어요?" 샌슨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후치. 길시언이 말한 우리의 국왕과는 좀 다르다라는 말을 정말 잘 이해하겠군요." 네리아가 폴짝 끼어들었다. "몰골이 어떤데에?" 샌슨은 아주 신랄하게 엑셀핸드의 모습을 묘사했다. 샌슨의 묘사는 좀 지나쳐서, 엑셀핸드는 완전히 어느 뒷골목에서 일주일 쯤 술 마시다가 방금 대로로 기어나온 드워프 정도로 의심받게 되었다. 좀 심하군. 그래 서 나도 끼어들고 카알도 끼어들어 간신히 엑셀핸드의 위상을 좀 높여놓 았다.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탈하다는 말이네? 당신들처럼?" 으잉? 이건 또 무슨 반응이야? 샌슨과 카알과 난 서로 쳐다보았다. 우 리가 소탈한가? 하긴,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의 헬턴트 영지에서 방금 올라왔으니 촌스러워 보이는 거야 당연하지. 흠. 네리아는 촌스럽다는 말을 좀 고상하게 하시는군. 길시언은 말했다. "그럼… 그 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10월 초였는데… 아마 4일 아니면 5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길시언은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마도 갈색산맥에 벌써 도착하셨겠군요. 그렇다면 조만간 수도 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그 분이 도착하면 보석 공급이 중지된 이유 도밝혀지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그 분이 도착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나…. 아니지. 여보게, 피시발군. 우리가 헬턴트 영지로 돌아갈 기간, 아니, 아무르타트가 있는 끝없는 계곡까지 가야하니까 그 기간까지 모조리 계산해 보고 우리가 언 제까지는 수도에서 출발해야 되는지 좀 알아봐주게." "알겠습니다." 샌슨은 테이블 위에 지리서를 펼쳐놓고는 종이와 잉크, 펜 등을 꺼내서 계산을 시작했다. 그러자 네리아와 길시언도 끼어들어 자기가 아는 길을 가르쳐주며 같이 토론했다. 두 사람은 모두 미드 그레이드 지방에 대한 지식은 충분했고, 미드 그레이드를 벗어나면 우리 고향까지는 거의 일직 선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보급과 잠자리를 어디어디에서 설정하느냐다. 나는 핑핑 도는 머리를 다잡으며 세 사람의 스케쥴 짜는 모습을 구경했 다. 한참 후, 샌슨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예… 저희들이 수도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총 27일입니다. 하지만 그 중 레너스시에서 3일, 칼라일 영지에서 3일을 허비했으니까 21일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돌아갈 때는 좀 더 빠르게 돌아간다고 보고, 몇 개 의 루트도 변경해보면 약 18일 정도까지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리고 헬턴트 영지에서 끝없는 계곡까지는 도보로 10일 거리지만 말을 탔 을 경우라면 약 4일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총 22일이 됩니다. 12월 31일까지 도착해야 되므로 늦어도 12월 9일까지는 출발해야 되는군 요." "좋네. 오늘은 며칠이지?" "10월 26일입니다."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한달하고 좀 남는군. 퍼시발군의 계산이 거의 정확하군, 그래." 그렇군. 샌슨은 언젠가 여유일자가 한달 보름 정도라고 말했었지. 거의 정확한데, 그래?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군. 아인델프님께서 도착하는 것은 며칠내 일 테니까…" "그럼 며칠 동안 할 일 없이 기다려야 되는군요?" "그런 셈이지." "쇼핑해요!" 내 외침 소리에 카알은 놀란 눈이 되었고 네리아는 깔깔거리기 시작했 다. 카알은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서 엄숙하게 말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는가, 네드발군?" "예. 우선, 나 읽을 책. 나도 책 좀 사줘요. 여행하는 동안 내내 책이 있었으면, 책 좀 읽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요. 수도에서는 책 구하기 훨 씬 쉽겠죠?" 카알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참으로 갸륵한 소망이군." "그리고 또! 우선 제미니한테 기념선물, 이루릴한테 약속한 손수건, 칼 라일 영지의 슈에게 약속한 선물, 메리안한테 사다줄 선물…" 카알은 점점 얼굴을 굳혔고 그와 비례해서 샌슨과 네리아의 얼굴은 점 점 밝아졌다. 카알은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허흠. 퍼시발군. 우리 여비가 충분히 남아 있는가?" "뭐, 충분합니다만… 후치, 요녀석아. 이건 공금인데? 엄밀하게 따지자 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우리 출장비란 말이다. 네가 주워삼긴 그런 물건이 우리의 공무와 무슨 상관이 있냐?" "이이이잉!" 네리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머나? 후치씨는 여자도 많네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안 연애만 했 나봐?" "여자들이 날 가만두지 않으니까. 이건 공정함과 조화로움을 바라는 유 피넬의 은총이죠." "그게 무슨 말이니?" "세상에 샌슨 같은 오우거도 내었으니 나 같은 미소년도 내어야 조화를 이룰 수…" 딱! 으음… 이 기분. 오래간만이군. ================================================================== 5. 복수의 검은 손길……18. 뭐라고 떠들든 샌슨은 날 따라나왔다. 샌슨이니까. 카알도 다른 쇼핑에 는 관심이 없지만 내가 들먹인 '책'이라는 말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 다. "그렇군. 그 생각을 못했어. 수도까지 왔으면서 책을 구한다는 생각을 못했다니. 허허, 워낙 정신적으로 압박되는 일이 많아서 그랬나 보군. 일깨워줘서 고맙네, 네드발군." 길시언은 어제만 해도 죄책감에 죽을 둥 살 둥 몰라 하던 사람들이, 게 다가 구하고자 했던 보석이 품절을 일으키는 엄청난 위기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희낙낙하면서 쇼핑을 나서는 모습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는 모습이었다. 흠, 황야의 왕자님. 그건 헬턴트식 배짱의 또다른 표현 이올시다. 죄책감과 후회는 물론 남아있다. 하지만 계속 붙잡혀 있을 수는 없다. 괜히 기분 좋아할 일을 찾는 것이 낫다. 아니, 아무 거나 하면서 기분 좋아하는 것이 낫다. 길시언과 네리아도 털래털래 따라나왔다. 길시언과 네리아가 타는 말 (?)들은 수도 시민들에게 너무 놀라움을 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길시언과 네리아가 마치 우리 일행이 아닌 것처럼 멀 찌감치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걷느라 마음이 들뜬, 그러니 까 말 위에 올라 있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던 것과 달리 다른 사 람과 함께 걷기 때문에 마음이 풀어져버린 샌슨과 내가 난리를 피웠기 때문이다. "와아! 샌슨! 저, 저 아가씨 드레스 가슴 판 것좀 봐!" "윽! 이 녀석 눈 좀 보게!" "씨이… 내 눈이 뭐가 어때서?" "저건 아가씨가 아니라 아주머니잖아!" "어, 그런가?" "우와! 후치! 저, 저 건물 좀 봐! 유리창에 색칠도 했어!" "아냐! 저건 색유리야." "어?그런가?" 뭐… 요 모양 요 꼴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렇게 난리를 피운다 해도, 카알! 어떻게 당신이! 우리와 멀찌감치 떨어져 길시언과 동료인 척 하는 겁니까! 어쨌든 그 소동 끝에 길시언의 안내를 받아 책방골목을 찾을 수 있었 다. 길시언은 감개무량한 어투로 말했다. "6년전과 똑같군요. 어린 시절, 내가 밤중에 임펠리아를 빠져나와 미친 삵괭이처럼… 그만해! 에, 어쨌든 바람난 암말처럼… 그만 하라니까! 어 쨌든 돌아다니던 그 시절과 같군요. 하하. 이 골목엔 주로 레드북을 구 하기 위해 왔었습니다." "레드북이 뭐죠?" 내 질문에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도색서적." "우와! 그런 거 구할 수 있어요? 어디서 파는… 어, 흠. 그만 노려봐 요!" 카알은 나와 길시언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던 샌슨에게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샌슨은 머쓱해져서 눈길을 돌렸다. 카알은 말했다. "그런 책 읽을 시간이 있거든 양식이 되는 책을 좀 읽을 생각을 해야 지. 그런 책들은 그릇된 성의식이나 성에 대한 편견, 오해밖에는 일으키 지 않는다네."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그래도 읽을 때는 재미있는데에…" "네리아양!" 카알이 씩씩거리자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길 옆에 있던 책방으로 쪼르 르 달려갔다. 책방 앞의 가판대에는 많은 수의 서적이 쌓여 있었다. 마 치 짐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적을 보며 네리아는 탄성을 질렀다. 네리아는 책 한 권을 뽑아들더니 말했다. "이거봐! 제목 멋있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 모두로부터 인 정받는, 사회의 귀감이 될만한 고상한 교양과 학식의 소유자 에리드리네 스가 고찰, 분류한 상사병의 종류와 증상, 치료법.'이라. 에리드리네스 씨의 교양은 좀 이상한 방향으로 발달했군. 누구 상사병 걸린 사람?" 샌슨은 킬킬 웃으며 책더미를 뒤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더 웃기 시작 했다. "우하하. 이것도 정말 괜찮네. '사해동포들의 충만한 안녕과 보장된 번 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취합, 분류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 든 여성 동지들에게 고하는, 머리카락 땋는 방식의 복잡미묘한 테크닉과 변형 일체-도해 첨부'라는데? 네리아. 혹시 머리 땋을 일 없어?" 네리아는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헤죽 웃었다. 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상한 필명을 사용하거나 단체명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에리드리네스라고? 허, 그것참. 우리는 킬킬거리며 제각기 흩 어져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가끔 폭소를 터뜨릴만한 제목이 나오면 서로 보여주며 웃었다. 카알은 책방 주인에게 중노동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 는 책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책방 주인은 가장 으슥한 귀퉁이나 책장 높 은 곳에 올라가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해 고생해야 했다. 길시언은 예전 버릇이 나오는지 주로 도색서적만을 뒤적거렸고 그래서 난 길시언 주위 만을 맴돌았다. 으음… 네리아는 책에는 별로 관심없었고 주로 제목을 보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일에만심취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샌슨이 말했다. "어라? 이것 좀 봐?" 책방주인을 끝없이 괴롭히고 있던 카알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 두 모였다. 샌슨은 굉장히 오래되었을 법한 책을 한 권 보여주었다. 검 은 표지에 두꺼운 책으로 제목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마법 입문' "허, 그것 참 독특하게 제목이 짧네. 그게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는 것이 우습긴 한데…." "아니, 제목 말고 저자명을 보라고. 여기 아래에 있잖아?" 저자명? 난 샌슨이 가리키는 부분을 보았다. 검은 표지라서 저자명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읽을 수 있었다. '타이번.' 어랏? 타이번? 이게 타이번이 쓴 책인가? 우와! 타이번이 책도 썼나? 샌슨은 책을 펼쳐 읽을 태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곧 낭패한 표정이 되었 다. 샌슨은 책을 바라보며 주춤거리듯이 말했다. "이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어? 룬어인가? 난 궁금해져서 샌슨이 펼쳐든 페이지를 보았다. 룬어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못읽는다는 거야? 난 샌슨의 옆에서 소리내어 읽어 보기 시작했다. "대저 마법이라 함은 마나의 집합과 이산, 변형과 전이에 작용하는시 전자의 의지의 발현에 지나지 않음이라는 상기의 진술에 대한 가장 비근 한 예로 시전자의 순수 의지 이외의 부수적인 요건들, 즉 시약의 적절한 사용과 주문의 영창 등의 제반 사항은 본질적으로 시전자의 의지 발현을 돕는 매개체로서만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이너 퀴시냅의 언명을 들어 상기의 진술의 이해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겠으나 가이너 카쉬냅의 언명이 나름대로 주목할만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 라도 그 언명의 주창에서 파악되는 비본질 매체, 시약과 주문에 대한 파 격적인 축소해석이마법 입문자들에게 있어 무익한 선입견으로서 작용할 수 있음은 재론의 여지를 남기지 않음이니…" 쓰러지겠군. 네리아는 어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 르겠다는 샌슨의 말이 이해되는데? 샌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사볼까? 그런데 읽지도 못할 책을 산다는 것은…" 그 때 책방 주인과 씨름하던 카알이 다가왔다. 카알은 우리가 뭣때문에 몰려 서 있는지 물어보고는 그 '마법 입문'을 샌슨에게서 받아들었다. "이게 타이번씨의 저술이라고? 어디 보세." 카알은 몇 페이지를 뒤적거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읽어내려갔다. 카알 은 한참 읽다가 빙긋 웃었다. "허어, 동명이인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이 책은 마치 타이번 그 어르신 의 말투처럼 정말 쉽게 쓰여졌는데? 마법책치곤 상당히 쉬워." 난 카알을 존경해버릴 거다! 카알은 대충 훑어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이 책은 교양서적이라기보다는 전문서적에 가깝군. 마법 배우 는 사람에게만 쓸모있는 책이겠는걸? 어디 보자… 응?" 책을 훑어보던 카알이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난 물어보았 다. "왜 그러시죠, 카알?" "이 책 발간년도가 246년인데?" 엥? 246년이라고? 그럼 몇 년 전인가, 근 70년 전이잖아? "타이번씨는 80살 가량으로 보이던데… 설마 10살 때 마법 입문서를 쓰 시지야 않았을 텐데?" 카알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샌슨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그건 말이 안되는군요. 동명이인인가? 아!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타이번 하이시커! 그 사람은…"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레니얼양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이 다리를 만든 것은 200년 전이라 고 하지 않았나. 퍼시발군. 그것도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데?" 그럼 타이번이라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나? 그것도 전부 마법사? "같은 이름을 가진 세 명이 모두 같은 직업을 가졌다라… 그것도 희귀 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라는 직업을. 그거 정말 신기한 일이군." 그 때 우리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길시언이 끼어들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카알은 설명해주었다. "아, 예. 우리 고향에 타이번이라는 마법사가 계십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기 조금 전에 마을에 들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약 70년 전 에 발간된 책이군요. 이 책의 저자의 이름도 타이번이군요. 퍽이나 신기 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휴다인 고개에서 보았던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사람도 타이번 하이시커입니다. 그 다리는 200년 전에 만들 어졌다고 하더군요." 길시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현재, 70년전, 200년전에 활약했던 각각 세 명의 타이번이라는 마법사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마 그런 모양이군요. 허허. 타이번이라는 이름이 마법사들에게 꽤나 사랑받는 이름인가 봅니다?" "글쎄요. 그렇게 유명한 이름이라면 나도 알텐데. 난 타이번이라는 이 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12인의 다리를 만들었다는 마법사의 이 야기는 들어보았지만…" "들어보셨습니까?" "예. 하지만 그저 어느 마법사가 만들었다는 식으로밖에 알지 못합니 다. 그 다리를 만든 사람이 타이번 하이시커라고 합니까?" 나와 샌슨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저 길다란 말을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말했다. 그 말은 곧 프림 블레이드가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 지? 길시언은 나와 샌슨이 놀라서 바라보자 의아해하다가 곧 자신도 그 사 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길시언 역시 크게 놀란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야, 네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이런 기쁠 데가… 응?" 길시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조용해! 젠장. 이 녀석도 신기한 말을 들어서 방해하는 것을 잠깐 잊었던 모양입니다." 에구, 사람하고 똑같군. 난 희희낙낙하며 책을 쓸어보았다. 내가 산 책은 이제 나에게 가공할 지식을 전수함과 동시에 선현의 경험들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제목도 얼마나 좋은가?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 우헤헤. 난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펼쳐보았다. "걸을 때 책 읽지 마!" 샌슨의 주의가 날아왔다. 흠. 하지만 궁금한걸. 난 아쉬움을 삼키며 책 을 덮었다. 카알이 산 책은 내 것보다 월등히 커다란 것으로 이루릴의 방패만한 마법책에 버금갈만한 것이다. 하지만 저런 책을 왜 보시지? '서지학의 발달과 전승에 대한 고찰' 서지학이면 책에 대한 학문인데, 그것 정말 우습잖아. 책에 대한 학문 을 다시 고찰한 학문이라니. 도대체 어느 게 먼저고 어느 게 나중이야? 내가 보기엔 정말 쓸모없는 학문 같은데 말이야. 그래도 무협 소설을뽑아든 샌슨보다는 품위있다고 해야 되나? 샌슨은 나보고 걸으면서 책 읽지 말라고 해놓고선 자기는 책을 읽고 있다. "우히힛히히!" "으윽… 제발! 걸을 땐 책 읽지 마!" 내 고함소리에 샌슨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책을 덮었지만 그래도 우스운 지 낄낄거리고 있다. "너무 웃긴다. 이 책." 흠, 나는 무협 소설이 왜 우스운가에 대해서 질문하지는 않았다. 선원 이 항해에 관한 소설을 보면 얼마나 웃겠는가. 비슷한 거지. 샌슨은 계 속해서 자기가 사든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악당들에게 외치는 길고도 엄 숙하며 장엄한 대사를 뇌까리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스우면 왜 사! 게다가 칼 뽑아들고, "내 목숨은 한 개! 그래서 비싸지! 유니크하거 든?" 이라고 외치는 주제에! 네리아는 책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무 책도 사들지 않았고 길시언도 책 을 사들지는 않았다. 자기 짐에 책 들어갈 공간이 있다면 거기다가 물이 나 한 통 더 넣겠다는 것이 길시언의 주장이었다. 길시언은 모험가니까, 뭐. 카알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수건을 산다고 했는가, 네드발군?" "예. 그런데 카알이 골라주시게요?" "내가 무슨. 네리아양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그러자 네리아는 까불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요. 나 따라와요." 네리아가 우리를 이끌고 간 곳은 여성용 악세사리를 파는 가게였다. 네 리아는 거침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그외 남자들은 좀 우물쭈물거리 며 네리아를 따라 들어갔다. 주인으로 짐작되는 아주머니는 처음에 네리아를 보더니 반색을 하다가 곧 우락부락한 네 명의 남자들도 함께 따라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네리아는 활기차게 주인장에게 말했다. "이봐요, 손수건. 손수건 좀 볼까요?" 주인장 아주머니는 싹싹한 표정으로 구석에 있는 나무 궤짝을 가리켰 다. 네리아는 궤짝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네리아는 몇 개의 손수건을 꺼내어 들어보더니 그 중에 하나를 자기 목에 둘러보이며 말했다. "자, 심사위원 여러분? 각자 점수를 말해주세요." 뭐야, 이건? 무슨 가축 품평회라도 되나? 아니면 채소 전시장이라든가, 어쨌든 난 갑자기 축제에서 벌어지는 그런 대회를 떠올리게 되었다. 난 빙긋 웃으며 말했다. "10점 만점에 9점! 머리카락 색깔과 어울리지 않아서." "손수건은 9점, 그리고 손수건 안에 있는것은 5점… 아니 4점?" 샌슨의 말에 네리아는 혀를 낼름 내밀었고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10점 드리지요." 길시언은 주춤거리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보단 이 놈이 훨씬 안목이 있겠지요. 이 녀석은 7점이라는데요?" "애개, 짜다." 네리아는 히히거리며 계속해서 손수건을 바꾸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점 수를 매기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점수를 불러주었지만 (카알은 항상 10 점이었다.) 결국 네리아의 결정에 따라 난 이루릴에게 선물할 손수건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슈에게 사다줄 파란 리본과 메리안에게 선물 할 브로우치, 제미니에게 선물할 팔찌도 골랐다. 뭐, 속마음으로 말하자 면 향수나 보석반지를 고르고 싶었지만…헤헤. 그것들을 다 고르고 나서 나는 샌슨의 허리를 찔렀다. "안 골라?" "응?" "어헛! 결혼 반지." 샌슨의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샌슨 때문에 여기로 왔다. 겸사겸사 내 선물거리도 장만하면 좋고. 카알도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카아아아알!" 샌슨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카알도 저 노래를 알고 있었군? 난 확실 히 너무도 천부적인 음악적 소양을 타고난 모양이야. 네리아는 눈이 동 그래져서 질문했다. "결혼 반지?" 샌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얼굴 색깔을 보여주었다. 난 흐느적거리 는 유려한 어투로 설명해주었다. "말하자면… 샌슨은 결혼식장에서 끌려나온 신랑과 마찬가지… 그의 가 슴에 맺혀있던… 그날 아침의 향기는… 잊혀질 수 없는 약속의 증거…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의…" "그, 그만해!" 샌슨은 내 목을 비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얼빠진 얼굴로 우리들을 바 라보다가 곧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고향 언덕에서 황혼을 등진채 검어져가는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 라보는 어떤 아가씨?" "오, 좋은, 켁켁! 표현, 한번 더, 케에엑! 말해봐요. 까먹었어." 결국 네리아는 멋진 반지까지 골라주었고 샌슨은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몸짓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연구대상이야. 완강히 거부하듯이 받아들 다니. 역시 샌슨인가?) ================================================================== 5. 복수의 검은 손길……19. 쇼핑을 마치고나자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유니콘인으로 돌 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샌슨은 가끔 주머니 속의 무언가를 만지며 헤벌레 웃음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네리아는 붉으스름한 하늘빛 아래에서 깡총깡총 뛰었다. 네 명의 남자 는 그것을 구경하며 웃으며 따라갔다. 네리아는 두 팔을 벌리고 큰 동작 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선물받는 것도 좋지만, 선물할 사람이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예요." 난 웃으며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받을테니 나한테 선물해요." "이건 어때?" 네리아는 키스를 날렸다. 난 질겁하면서 샌슨의 뒤에 숨어버렸다. 네리 아는 깔깔 웃으며 다시 빙글 돌아 깡총거리며 뛰어갔다. 왼쪽으로 뛰었 다 오른쪽으로 뛰고, 경쾌하게 좌우로 뛰었다가 뒤로도 뛴다. 그 때마다 네리아의 단발머리가 석양의 빛으로 더욱 붉게 찰랑거렸다. 그 때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저기 길 앞쪽에서 건장한 말들이 끌고 있는 쌍두마차가 보였다. 정말 화려한 마차로군. 네리아는 마차가 달려오자 길 옆으로 폴짝 뛰었다. 그 런데 그 마차가 네리아옆에 멈추더니 마부석에 있던 남자가 내렸다. 그 마부는 체격이 좋은 남자로 하드리더를 입고 손엔 말채찍을 들고 있 었다. 그 남자는 네리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야, 거기." 네리아는 멈춰섰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왜?" 으음. 네리아답군. 남자는 험악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너 몇 살이야?" 네리아의 어깨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남자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네리아의 대답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 굴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저 남자의 태도가 어처구니 없다. 남자가 뭐라 고 대답하기 직전, 우리들은 재빨리 네리아의 등 뒤에 나란히 섰다. 남자는 네리아 하나뿐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네 명의 남자가 그 뒤에 서자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네 명 중 세 명이 검을 둘러매고 있으 니 더욱 위축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네리아는 우리들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야이, 자식아. 내 나이가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어디서 봤다고 보자마자 틱틱 반말 짓거리야, 엉?" 남자는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이 천한 것이 미쳤나…" 그 때였다. "훈트. 입 조심하라." 마차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훈트라는 그 남자는 찔끔하는 표정이 었다. 난 마차를 흘깃 보았다. 마차는 무슨 귀족의 것인지, (하긴 귀족이 아 니면 누가 마차를 타고 다니겠는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마차 문에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낯익은 문장인데? 문에 달린 창문으로는 왠 남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나이가 거의 카알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밤색 머리카락 에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였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말한 것이겠지만 그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의아쩍은 생각이 들 었지만 그 때 훈트가 말했다. "젠장. 나이만 말해주면 돼. 그럼 얌전히 보내주지." 네리아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샌슨이 먼저 나섰다. "난 이렇게 말해주지. 공손한 태도로 레이디께 실례를 사과하면 얌전히 보내주겠다. 알았냐?" "레, 레이디?" 네리아는 입을 콱 틀어막았다. 웃음이 터져나와서 못견디겠다는 투다. 그리고 훈트도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그는 눈에 불을 켜더니 말했다. "이 자식이 감히 어느 면전이라고!" 훈트는 으르렁거리며 말채찍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쉬식-. 훈트는 꼼짝도 못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샌슨이 빠른 손놀림으로 롱 소드를 뽑아 훈트의 목젖에 가져다 댄 것이다. 흠, 멋있는 장면이군. 난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감상했다. 훈트는 퍼렇게 질리더니 말했다. "이, 이 놈! 감히 누구에게, 이, 이 안에 계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 샌슨은 콧방귀를 뀌며 마치 마차 안의 인물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하인을 보니 상전의 인품도 대충 짐작하겠군." 훈트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너 이 녀석. 모르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무례하게…." "훈트!" 마차 안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리더니 그 안의 중년남자가 내렸다. 밖으로 나온 얼굴을 보니 확실히 날카로운 얼굴이다. 샌슨은 일단 롱소 드를 거두었지만 남자는 그에 신경쓰지않고 훈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 니 곧 훈트의 뺨을 갈겼다. 철썩! 훈트는 무릎을 꿇었다. "후, 후작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놈이 너무나 무례하여…" "닥쳐라. 훈트." 훈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남자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훈트를 노 려보더니 몸을 돌려 샌슨에게 말했다. "아랫것의 잘못을 사과하오, 젊은이." "…교육을 좀 잘 시켜야겠습니다." 샌슨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맙소사. 도대체 저 인간은 머리 양편에 귀라고 불리는 고귀한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전에 후작이라고 했잖아! 그 후작씨는 샌슨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투 로 말했다. "실례를 범한 이유를 설명하겠소. 나는 어떤 아가씨를 찾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나이는 대략 10대 후반쯤 입니다. 그래서 혹시 이 아가씨가…" 그 후작씨는 말을 맺지 못했다. 네리아는 걷잡을 수없이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까르르르! 와, 와! 후치, 지금 이 말 들었니?" "핏. 당연하죠. 그렇게 깡총거린 데다가 60대 노파라도 10대 소녀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석양의 빛의 마력이 더해졌으니까." "어어랏? 심술궃은 말이네. 이봐요, 후작님. 딸이 없으시죠?" 네리아의 발랄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 후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네리아 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재미 없다는 투로 웃으며 말했다. "나 10대 아니에요. 겉모습은 그렇게 보이겠지만." 샌슨은 네리아의 말에 피식 웃었고 그래서 네리아는 샌슨을 흘겨보았 다. 후작은 여전히 별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오. 실례를 용서하시오. 그럼." 후작은 간단히 말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훈트도 허겁지겁 일어 나더니 마부석에 올랐다. 그는 사나운 눈길로 샌슨을 노려보았다. 샌슨 은 그냥 무표정하게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이랴!" 훈트는 마치 말에게 화풀이 하듯이 채찍질했다. 마차는 빠르게 출발했 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차 안에 타고 있던 그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 그 중년남자도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잊혀지지 않을듯한 날카로운 눈이다. 마차가 빠르게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네리아는 10대로 보여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쁘다는 듯이 헤죽거렸다. 그게 그렇게 좋나? 네리아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헤헤. 후치랑 같이 걸으면 나 후치 동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네?" "으악! 내가 그렇게 늙어보이지는 않을 텐데!" "야야! 조금 전에 엄밀한 상황증거가 나타난 것 보고도 모르겠어? 지나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볼까? 이봐요! 아저씨!" 네리아는 정말 지나가는 중년 남자를붙잡았다. 정말 못말리겠다! 네리 아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내가 누나일까요, 이 사람이 오빠일까요?" 난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내가 네리아보다 키가 크 기야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껏 세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청초한 얼굴이 있다! 길시언과 샌슨, 카알도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으채 구경하기만 했 다. 남자는 피식피식 웃더니 말했다. "글쎄. 네 아빠 아니니?" 어어억! 이 남자 혹시 장님 아냐! 네리아는 저녁 내내 그 사실을 가지고 나를 놀려대었고 난 그 남자가 농담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물론, 당연히, 입증되지 않았다. 망할… 난 간신히 네리아를 그녀 방으로 쫓아내고나서 책을 펴들 수 있었다. 샌슨도 자기 침대 위에 드러누워 곧 킬킬거리기 시작하다가 카알의 헛기 침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샌슨은 계속 웃어대었고, 그래서 카 알은 의자와 촛대를 들고서 발코니로 나가버렸다. 10분쯤 후, 시퍼렇게 질린 카알이 들어왔다. 헤에. 야경이야 멋있겠지 만 10월의 찬바람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실걸. 카 알은 별 말 없이 침대 속에 들어갔고샌슨은 웃음을 좀 참으며 책을 읽 었다. 마침내 평화로운 독서분위기를 맞이하여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 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아, 행복해라. 음, 설명만 보아도 정말 입에 군침이 도는군. 에게? 이렇게 배합해서 맛이 죽지 않나? 어엉? 가재를 사용하라고? 그 조그만 가재 벗기고 다듬 고 할 게 뭐 있나? 그냥 구워먹으면 되지. 난 카알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바다에 사는 가재는 민물가재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힛히히힛!" 으악! 제미니다! 아니, 샌슨인가? "좀 그만 두지 못해!" "어,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난 진저리를 치며 발코니로 나갔다. 카알은 '못버틸텐데.' 하는 눈초리 로 날 바라보았지만 뭐, 그 정도를 못버티랴? 카알보다야 내가 훨씬 젊 은데 말이야아아아… 춥다! "어흠! 흠, 험! 시원하군!" "어랏?" 옆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발코니 난간에 다리를 올 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입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등에 커다란 그 트라이던트 를 매고 있는 모습은 잘 보였다. 난 놀라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네리아는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난 옆쪽 발코니에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전엔 카알 아저씨가 나오더니, 넌 또 왜 나오니?" 네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래서 나도 낮게 질문했다. "그런 복장으로 어딜 가려고요?" "으음.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위험한 거 아닙니까? 무장도 하고?"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그렇다고 내가 아, 그렇습니까? 잘 다녀오세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관심 끊고 살지는 않겠다.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디 트리히 하나로 충분하다. 난 팔짱을 끼고 말했다. "여긴 수도에요. 나이트호크가 함부로 돌아다닐 곳이 아닐 텐데." "그것 참… 너완 상관없는 일이야." "그 때 기억나요?" "응?" "죽을 거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죠?" "…살려줘." "뭔 일인지 모르지만, 같이 가죠."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샌슨이나 길시언, 카알 아저씨는 안돼. 알았지? 그 사람들은 절대로 안돼. 조용히 나와.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는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대단 하네. 난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산책?" "발코니에서 바라보니 야경이 너무 좋아서. 잠깐 돌아보고 올게요." "산택 나선다면서 검은 왜?" "그냥, 몸조심해야지요. 나처럼 남장여인으로 오해받기 쉬운 얼굴의 미 소년은 원래 몸조심을…" "잘 다녀오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시언이 함께 가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난 고즈넉하게 혼자 걷고 싶다고 말해버리 고는 밖으로 나왔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20. 여관 밖으로 나오니 네리아는 여관 벽에 기대어서서 돌멩이를 툭툭 차 고 있었다. 네리아는 날 보더니 말했다. "내가 그냥 나가면 뭐 밤도둑질이나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까봐 데려가 는 거야. 하지만, 절대 조용히 따라오고 함부로 나서면 안돼. 알았지?" "위험한 일이군요?" "위험한 일이면 너 하나 데려가겠니? 여자와 어린애는 괜찮으니까 데려 가는 거지." 우와! 어린애라니. 역시! 난 청초가련형 동안이 확실해!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내 팔짱을 끼더니 활발하게 걷기 시작했 다. 뭐야, 이건. 정말 밤산책이라도 다니는 꼴이잖아? 난 네리아에게 물었다. "이러고 다니면 연하를 건드리는 여자 소리 들을 겁니다." "아빠 따라나온 딸네미가 아니고?" "그건 그만! 아빠 따라나온 딸네미가 그런 무시무시한 창을 등에 매고 다녀요?" "무인 집안이라고 생각하겠지. 너도 등에 바스타드 매고 있잖아?" 우린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그야말로 산책이라도 다니는 듯이 편하게 걸어갔다. 주위의 시선은 아무래도 연하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닌 듯했다. 아아… 헬턴트의 햇살이 왠수로다! 그러 고보니 이라무스에서도 난 깜쪽같이 청년으로 통했었지. 물론 변장을 하 긴 했었지만. 한참을 걸었다. 네리아는 길을 잘 아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지도 않고 마구 걸어 갔지만 주위가 점점 이상하게 바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걸어갔다. 네리아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더니 곧 주점과 사창굴이 밀집한 장소가 나왔다. 어, 이런… 고약한 장소에 왔는데 그래? 주위에는 입었다보다는 벗었다에 더 가까운 옷차림의 여인네들이 추파 를 던지고 있었다. 난 네리아와 함께걷고 있어서 그런 추파의 대상은 되지 않았지만, 대신 욕설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헤에. 털도 안벗겨진 걸 남자라고 데리고 다니네?" "도련님 뼈 녹겠네?" "뻣뻣해서 못쓸텐데, 내가 먼저 좀 튀겨줄까?" 벼라별 욕설들. 차마 다 기억도 못하겠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화는 나지 않았다. 그녀들은 왜 욕을 하는가. 난 그녀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녀도 나에게 원한이 없다. 저것은 무슨 의미로 나오는 욕설인가. 그냥, 그냥이겠지. 한 마디 튕겨주지 못하면 배길 수 없는 심정 때문에. 그리고 그 때 내가 여기있기 때문에. 그러 니 저건 눈 감고 던지는 돌멩이와 같다. 날 향한 욕설도 아니다. 네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어른이 되어볼래?" "그거 무슨 뜻입니까?" 내가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네리아는 빙긋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마. 지금부터 무조건 입 다물고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마. 무조건 내 뒤에 서 있고, 그리고 등 뒤를 조심해. 내가 지키겠지만, 완전할 수는 없어. 급하면 나 버리고 튀어. 내 몸은 내가 빼낼 수 있으 니까 네가 엉겨들어 귀찮게 굴면 나만 골치 아파. 알겠어?" 심상찮은 분위기로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한숨을 포옥 쉬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확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쇳소리를 내며 나지막하지만 사납게 말했다. "잘 들어두라고. 넌 이미 내게 멍청한 모습을 보였었어. 너와 아무 상 관도 없는 꼬마 때문에 목놓아 울어젖히는 모습을 보였다고, 이 얼간아. 만일 내가 위험해지면, 너 살 궁리나 하고 튀란 말이야. 알았어!" 내가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버 렸기 때문이다. 네리아는 그대로 거리에 늘어선 지저분한 술집 가운데 한 건물에 들어섰다. 그 건물은 양쪽의 건물들 사이에 간신히 우겨넣은 듯이 자리잡고 있었다. 삐이-걱.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연기와 숨막힐 듯한 악취가 풍겼다. 내가 말쑥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지만, 지금 이곳에서라면 난 귀 족가의 외아들이라고 해도 믿어주겠군. 덮수룩한 수염, 흉터, 문신, 붕 대, 안대, 괴상한 악세사리들. 남자들은 모두 날 한 번씩 바라보고는 피 식 웃었다. 그걸로 끝. 더 이상 신경쓸 가치도 없는 놈이 되어버렸다. 남자들은 모두 자신의 우울과 고독으로 돌아갔다. 매캐한 연기속으로 돌 아가 나와 무관계해지는 남자들이 거기 있었다. 일곱겹 쯤의 벽이 주위에 둘러지는 느낌이다. 네리아는 주위에 시선을 보내지 않고 곧장 바로 걸어갔다. 나 또한 매 캐한 연기를 헤치고 네리아를 따라갔다. 안개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들 었다. 그리고 그 칙칙한 안개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남자들. 날 선 칼날 같은 남자들이 몰려 앉아 있었다. 침침한 듯하지만 싸늘한 시선들이 번 뜩였다. 기가 죽는 느낌이다. 술을 들이키다가 그대로 굴러떨어지는 남 자도 보였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구석자리에서 왠 여급 하나를 붙 잡고 장난치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얼굴 뜨거워지는군. 남자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무슨 망측한 짓을 하고 있었고 여자는 심드렁 하게 교태어린 한숨 소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여자는 날 바 라보았다. 난 얼굴을 돌렸다. "뭐야?" 바텐더는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 때문에 발음이 튀었다. 나는 묵묵히 네리아 뒤에 섰고 네리아는 나에겐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으로 말했 다. "문댄서를 만나고 싶어." 남자는 파이프를 바에 털더니 다시 입에 던져넣으며 말했다. "그런 술은 없어." "장난칠 서열이야? 아닐 텐데…." "넌, 누구야?" "슬로드의 관뚜껑을 내가 덮었지." "난 슬로드 몰라." "기억력이 나쁜 건 자랑이 아냐." 바텐더는 침을 탁 뱉더니 걸레를 들어 묵묵히 바를 닦기 시작했다. 네 리아는 바 앞에 앉아서 턱을 괴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난 그저 묵묵히 네리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바 전체를 닦고나서 바텐더는 턱으로 홀 한쪽의 문을 가리켰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네리아는 일어나서는 그 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네리아를 따라갔다. 매캐한 연기에 기침이 나올 것 같다. 네리아는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안은 어두웠다. 홀의 불빛이 닿는 바닥에 밝은 사각형이 그려질 뿐, 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리아는 말했다. "문 닫고 기대서, 후치." 문을 닫으니 완전히 컴컴했다. 네리아는 손을 뒤로 뻗어 내 손을 쥐었 다.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쥐었다. 마치 내게 무언의 다짐을 받는듯한 손 길이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나야." "뒤쪽은 누구야?" 들어본 목소리다. 문댄서라는 그 남자다. "까불지마." "용건은?" "불 켜, 빌어먹을 자식아." 잠시 후, 탁탁거리는 부싯돌 소리가 나더니 주위가 으스름하게 밝아졌 다. 자세히 보니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램프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 램프 뒷쪽으로는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문 댄서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 다. 네리아는 그대로 서서 말했다. "날 찾는 이유를 말해봐." "마음 바뀌었어?" "바뀔지도 몰라." "단검 집어던질 때는 언제고." "일이야, 일. 쓸데없는 소리 끼우지 말아." "빨강머리가 필요해."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강머리 10대 후반의 아가씨를 찾는 놈들이 있더군." "손 잡을 건가?" "설명부터." 미동도 하지않던 문댄서가 의자 등에 몸을 기대며 꿈지럭거리기 시작했 다. 몸을 뒤로 기울이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네리아는 전혀 움직 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고, 그래서 나는 네리아와 문 사이에 끼어 서 있었다. 문댄서의 얼굴이 있을만한 장소에서 빨간 빛이 반짝였다. 담배를 피나? 문댄서는 연기를 뿜었다. 램프의 검붉은 빛 때문에 붉은 뱀들이 허공에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어떤 귀족이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어." "후작이지?" "그래." "잃어버린지 꽤 되나 보지?" "아기일 때 잃어버린 모양이야." "빨강머리와 나이만으로 찾는다면 정말 힘들텐데." "그것뿐이야. 다른 증거도 있을 텐데, 그건 알아내지 못했어." "재산?" "서류야." "그래서 가능하다는 것이군?" "응." "생각해보고 대답하지." "젠장, 서툰 수작 하지마."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내일까지." "넌 깨끗하게 구는게 마음에 들어." 그리고 네리아는 몸을 돌렸다. 나가자는 신호인 것 같아서 나는 문을 열려고 했다.갑자기 네리아가 내 손을 쳤다. 네리아는 사납게 말했다. "밖에 떨거지들 치워."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자 네리아는 날 밀어내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두 명의 남자가 좌우에 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쳐다보았고 네리아는 별 표정 없 이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네리아를 따라나왔다. 홀 안의 아무도 우릴 쳐다보지 않았다. 네리아는 거침없이 바깥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네리아는 그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멍 청히 그녀를 뒤따라갔다. 주위에선 여전히 욕짓거리들이 들려왔지만 별 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네리아는 다시 팔짱을 끼고는 방긋거리기 시작했다. "좋은 밤이지?" "아까 그 대화, 물어보면 화낼 건가요?" 네리아는 대답 대신 내 팔에 뺨을 붙였다. 난 그저 멍청히 걸었다. 새 로 산 검정자켓이 네리아의 볼에 부딪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리아는 말했다. "너 머리 좋잖아. 무슨 말인지 짐작할텐데?" "…아까 저녁 무렵에 봤던 그 귀족은 빨강머리 소녀를 찾고 있었죠." "계속해봐." "그 문댄서는 사깃꾼이라고 했어요. 아마 빨강머리 소녀, 잃어버린 딸 이라죠? 어쨌든 그 소녀를 찾고 있는 귀족 집안에 당신을 대신 들여넣을 계획이겠군요." "계속해." "그래서 당신은 그 잃어버린 딸인 것처럼 위장해서 그 집에 들어가서는 그 집에 있는 어떤 서류를 훔쳐내 온다는, 그런 계획인가 보군요." "계속." "끝인데요." "흐음… 네가 말할 때 팔이 울리는 게 재미있어. 계속해봐." 하긴 뺨을 그렇게 붙이고 있으니까. 난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했다. "당신은 그걸 할 건가요?" 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해? 그 후작에게 이미 내 나이가 10대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후작일까?" "할슈타일 후작입니다." ================================================================== 5. 복수의 검은 손길……21. 네리아는 멈춰서서는 날 바라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였고, 그러자 네리 아는 다시 걷기 시작하며 내 팔에 뺨을 붙였다. 계속 하라는 의미 같은 데. 난 그래서 설명해주었다. "그 마차에 있던 문장… 어제 아침에 우리들을 찾아왔던 할슈타일 가문 의 에포닌 아가씨를 호위하던 남자들의 검집에도 같은 문장이 있었어 요." "그러니? 확실해?" "확실해요. 에포닌 아가씨도 후작님이라는 말을 했고." 네리아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와… 할슈타일 가문이면 드래곤 라자가 태어난다는 가문이잖아." "드래곤 라자는 태어나지 않아요." 네리아는 뺨은 붙인 채 눈만 위로 올려 떠서 날 바라보았다. 이러고 걸 으니 정말 힘들군. "15년전부터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 기로 약속된 기한이 15년전으로 끝났어요." 네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난 드래곤 로드와 할슈타일공의 300여년 전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네리아는 가늘게 한숨을 쉬 었다. "너, 아는게 많구나. 그럼 내가 후작을 만나지 않았다 해도 어차피 못 하는 일이네." "예?" 바람이 불었다. 네리아는 눈을 잠시 가렸다가 코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우우. 추워." 난 바스타드를 벗어들고는 자켓을 벗어 네리아에게 주었다. 네리아는 까르르 웃더니 자켓을 받아들고는 트라이던트를 내게 건네었다. 흠, 아 무래도 난 기사의 종자 타입인가 보군. 난 바스타드와 트라이던트를 한 꺼번에 거머쥐었고 네리아는 내 자켓을 어깨에 둘렀다. 검정색 자켓이라 네리아의 검은색 옷에 잘 어울렸지만 크기에서는 좀 차이가 난다. 자켓 이 아니라 코트 같은걸. 네리아는 다시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 "15년전에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끝났다고?" "예." "그럼 뻔해. 그 집안에서 딸을 잃어버린 건 꽤 오래되었겠지?" "아기였을 때 잃었다고 했죠." "그동안 안찾다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딸을 찾는 이유 는 간단해." "간단해요?" "드래곤 라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드래곤 라자가…." "10대 후반의 그 소녀는 혈통이 끊기기 전에 태어난 아이잖아.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지." 난 침을 뱉었다. "젠장…." 네리아는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잃어버린 딸을 찾는 식의 애틋한이야기는 아니지, 뭐. 아마 '다른 증 거'라는 것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겠지. 그러니 위장할 수가 없어." 갑자기 에포닌 아가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후작님도 그 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 소식이란? 디트리히의 생사가 확실하지 않다는 소식이지. 그런데 카알의 말에 의하면 할슈타일 가문은 드래곤 라자가 꼭 필요한 가문이다. 드래곤 라자가 약속된다는 이유로 300년 동안 영화를 누려온 가문이니까. 그런 가문에서 소중한 드래곤 라자가 생사불명이 되었는데 신경쓰지 않는다… 그 말은, 새로운 드래곤 라자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 빨강머리 소녀. 그 잃어버린 딸은 양자도 아닌 확실한 할슈타일 가문의 사람이니까 훨 씬 확률이 높겠지. 그러니 양자인 디트리히 정도는 없어도 그만. 특히 디트리히는 아직 어려서 혈통을 만들 수 있는 나이도 아니지만… 제기 랄! 그 잃어버린 딸은 10대 후반이라니까 자손을 생산할 수도 있겠지. 나는 다시 후작의 그 날카로운 얼굴을 떠올렸다. 젠장. "빌어먹을 놈의 귀족 녀석…." "갑자기 뭐니?" "인간을 다루는게 아니라 무슨 가축 다루는 것 같잖아요." "무슨 말이니?" 난 네리아에게 차근차근 내 생각을 말해주었다. 다 듣고난 네리아는 한 숨을 푸욱 쉬었다. "그런 거니이…? 휴우. 정말 마음에 안드는구나. 하지만, 그거 확실한 것은 아니지? 후치의 생각일뿐이잖아." "다른 추리가 가능하면 말해봐요. 열심히 들을 테니까." "난, 머리 나빠서 그런 것 못해. 그리고 그런 이야기 그만해." 난 한숨을 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모습은 헬턴트나 이곳이나 똑같군. 돌아가고 싶다. 이런 곳에 있고 싶지않다. 젠장. 마음씨 좋은 우리 영주님이 다스리는 헬턴트로 돌 아가고 싶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비교적 늦은 시간이라 거리엔 아무도 없었고 가로등만이 우울하게 10월 의 밤하늘에 미명을 던지고 있었다. 땅에 그려지는 빛의 동그라미들이 아름다웠다. 이곳엔 밤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도 없군. "그런데 네리아는 정말 몇 살이지요?" 네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신사가 못되시는군?" "나이부터 말해줘요. 그럼 그 다음부터 신사가 될테니." "호호호. 사실 몰라." "예?" 네리아는 가로등에 비친 자기 그림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말했다. "고아거든. 그래서 정확한 나이는 몰라." "그럼… 설마 진짜 내 나이보다 더 어릴 수도!" 네리아는 갑자기 앞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가로등 아래에서 한바퀴 돌더니 날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그럴 것 같니?" 뭐라고 대답하지? 난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나보다 연상으로 알고 있 었다. 당연히 그렇게 느껴왔다. 분위기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 떨어져 쌓이는 가로등 불빛 속에서 펑퍼짐한 내 자켓을 걸치고 빙글 도는 그녀 는… "에구! 당신은 80살 먹은 마녀야. 어서 가요, 춥다구." "뭐야! 저게 죽고 싶어서, 어? 너 거기 안서!" 우리는 인적 없는 바이서스 임펠의 밤거리에서 빛의 동그라미들을 징검 다리처럼 밟아가며 달렸다. 네리아의 목소리는 짜랑짜랑 울렸고 내 발 소리도 우렁우렁 울렸다. 볼에 부딪히는 바람은 무한한 속도감을 선사했 다. 유니콘 인이 순식간에 눈 앞에 나타났다. 네리아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 헐떡거렸고 나도 유니콘 인의 정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푸하하하." "뭐가, 헥, 우스워." "그냥,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좋아? 어, 그럼 이 소식 알려주기 싫네." "무슨 소식인데요?" "문이 잠겼어." "어어어억!" 난 부리나케 몸을일으켜 정문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홀의 불빛은 꺼져 있었고 문을 밀어보니 확실히 잠겨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조금만 밀면 문 정도야 간단히 부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간신히 그 유혹을 억눌렀다. 네리아는 헤죽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 트라이던트." 트라이던트를 네리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네리아는 여관 반대쪽으 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까지 걸어간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거 꾸로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탁! 트라이던트를 땅에 찍으며 네리아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녀는 그 야말로 나이트호크. 한 마리 새가 날듯이 그녀는 가볍게 이층 발코니에 올라섰다. 발소리도 없이. "오우! 멋있어요!" "그러니? 고마워. 그럼 잘 자!" "어? 어어어어! 문 안 열어줘요?" "마녀가 어쩌고 한 벌이야. 호호호. 자켓도 없으니 조오금 춥겠다?" "어! 그거 농담이라면 별로 재미없고 진담이라면 별로 달갑잖아요!" "달가운 벌도 있니? 날이 새면 문 열릴 거야, 안녕!" 어어랏! 정말? 네리아는 정말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조용해졌 다. 난 아래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아 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네리아는 몸이 가벼우니까 발소리를 안낼 수 도 있겠지. 에, 지금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서, 홀을 가로질러, 문 손잡이를 잡고, 지금, 연다! 안 열리네? 노, 농담이 아니다! 정말 날 여기서 재우려고? 어, 조금 버티면 열어주 겠지? 약올리려는 거겠지? 난 팔을 감싸안고 벌벌 떨었다. 달려오느라 몸에 열이 올랐다가 식으니 무지 추웠다. 자, 지금 열겠지? 이 정도면 장난으로도 괜찮아. 웃으며 넘어가주지. 어, 장난이 아냐? 에이, 열어주겠지! "카악! 네리아!" 라고 고함 지를 뻔했지만, 난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고함을 지르 면 난 눈총맞아 죽을 것이다. 우와, 이거 정말 체온이 뺏기는 감각이 온 다? 에이! 네리아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 난 벌벌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 았다. 장대, 장대 없나? 하지만 한밤중의 도시의 거리에서 장대를 찾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눈 딱 감고 문 부셔버린 다 음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까? 아버지는 지금 얼마나 추우실까? 난 갑자기 처량맞은 기분이 들었다. 난 유니콘 인의 정문 기둥에 기대 어 앉았다. 아버지는 고블린들의 동굴에 잡혀 계시겠지. 고블린들이 불을 잘 다루 던가? 하지만, 그 놈들이 오크 같다면 불을 잘 다루지 못하겠지. 설령 불을 잘 다룬다 해도 포로들에게 난방을 잘 해줄까? 그 놈들이 따스한 마음씨를 가졌을까? 난 이루릴이 아니고, 따라서 놈들에게 호의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놈들은 분명 아버지를 차가운 동굴바닥에 가두어두었겠지. 그렇다면, 아버지는 회색 산맥의 어느 차가운 동굴바닥에서 극도로 떨 고 계시겠지. 뭘 드실까? 아버지는 지금 무얼 드실까? 카악! 빌어먹을!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 선'이라고? 잘도 그런 책을 샀군. "아버지… 아버지…" 삐이-걱.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귓가에 말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나? 후치, 너 우는 거니? 얘, 얘. 장난이었어. 이렇게 나왔잖아?" 네리아인가 보다. 네리아는 내 어깨를 잡고 흔들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들어올렸다. 하지만 난 네리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다. "너 정말 우는 거니? 어처구니 없어서, 그런 일로?" "…보고 싶어요." "응?"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네리아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네리아. 나 몇 번씩이나 당신을 실망시키지요? 또 멍청한 모습 보였지요? 하지만 보고 싶은걸. 무슨 욕설이 날아올까? 욕설은 날아오지 않았다. 네리아는 날 살며시 안았다. 네리아는 가볍게 내 등을 쓸어주었고, 추위와 울음 때문에 덜덜 떨던 내 몸은 조금씩 진 정하기 시작했다. "울음 그쳐, 후치." 난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멈추었다. 네리아는 낮게 말했다. "들어가자, 후치." 난 몸을 일으켰다. 네리아는 날 부축하듯이 안고는 이층의 우리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 방 앞에서, 네리아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내 눈을 닦았다. "이젠 됐어?" "…예." "들어가서 내 꿈이나 꿔. 조금 에로틱해도 용서해줄께." "…그건 어렵겠지요. 네리아라면." 네리아는 킬킬 웃었다. 나도 바보 같이 웃어버렸다. 아마 내 얼굴 볼만 했을 거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바보같이 웃고 있었으니. 하지만 네리아 는 내 얼굴을 보고 웃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어서 들어가라는듯이 손 짓했고, 난 문을 열었다. "잘자, 후치." "잘자요, 네리아." 방안에 들어서자 그르릉거리는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갑자기 심술이 맹렬히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 양반들 은! 내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팔자좋게 잠들어 있어? 에라이, 인정머리 없는 양반들아! 난 씩씩거리며 배낭을 뒤진 다음 잉크병을 꺼내었다. 그리고 잠들어있는 카알, 샌슨, 길시언의 모습을 한 번 싸늘하게 훑어 보았다. "후후후. 차가운 밤의 숨결 속에서, 그대를 주시하는 복수자의 눈길이 더욱 활활 타오름을 알라." 난 잉크병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난 손가락에 묻은 잉크를 바 라보며 말했다. "복수의 검은 손길이로군… 우후후후!" 내일 아침이 몹시 기대된다. ================================================================== 6. 탑메이지……1. …심연의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끌어올린 가장 강인한 철을 최고의 대장장이의 손길로 가공하여 만들어낸 검으로 편지 봉투를 자를 수도 있는 법. 부러진 낫의 끝 부분을 적당히 다듬고 나뭇조각을 하나 붙여 손잡이로 삼은 칼로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법. 100 마리의 드래곤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공격해도 오두막 하나를 넘어트릴 수도 없는 법. 1명의 마법 수련자가 내뱉은 가벼운 주문으로도 100 개의 성채가 쓰러질 수도 있는 법. 이러한 법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인생이라 부르는 법.…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5 권. PP. 172 (770년 돌로메네 作) 언덕길을 올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두번째로 찾아드는 길이라 그런 지 이젠 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언덕 위를 보자, 전에 찾아보았던 때와 똑같은 경외의 마음이 날 내리누른다. 멋진 작품이란 말이야, 저 건물은. 그랜드스톰. 정말 멋지다. 저 건물을 설계한 자는 틀림없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저 언덕을 한 번쯤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니, 설마 한 번만 바라보았을까? 수십 번도 넘게 보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땅을 단단히 디딘 모습으로 하늘을 압도하는 저런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휘유우…." 샌슨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건?" "감탄의 의미.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야." 샌슨은 동감의 의미인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 덕였다. 길시언은 언제나 그렇듯이 마치 황소 위에서 졸듯이 고개를 조 금 숙인채 왼손으론 칼자루를 쥐고 웅얼거리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 면 취한 채 황소 탄다고 생각하기 딱 알맞은 모습이다. 카알은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흠, 어흠. 제군들. 우린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네만, 모든 것을 말 할 필요는 없다네." 네리아가 힐쭉 웃으며 말했다. "뭐죠, 카알 아저씨? 에델브로이의 하이 프리스트를 믿지 않으시나요?" "아, 네리아양. 그러니까 말입니다. 저희들은 국왕 전하와 최고위 각료 들만이 알고 있어야 할 중대한 극비를 알고 있답니다." 네리아의 눈이 커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네리아는 그야말로 번쩍 거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에 고정되었 다. "후우웃치야아아아?" 어어어억! 저 닭살스러운 콧소리! "천만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테니까, 좀 들려줄래? 궁금해 죽겠어." 카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리아양." "농담, 아저씨. 그런데 왜 그걸?" "에델브로이의 교단의 세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그 성직자들은 당연 히 국경에 간섭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습니다. 간첩들이 이용 하려면 가장 좋은 위장수단이 됩니다." "아하?"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은 질문했다. "저번에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때는 우리가 찾아간 것이었지. 그리고 우리가 수도에 온지 얼마 되 지도 않았을 때였고.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지 않은가. 그랜드스톰에서 우릴 불러들인 것이야."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다. 오늘 아침 갑자기 그랜드스톰에서 온 사자라면서 몇 명의 수련사가 우릴 찾아왔다. 수련사들은 얼굴에 잉크를 칠한 채 법석을 피우고 있는 우리 일행을 보 며 얼빠진 얼굴이 되었고 카알은 얼굴이 벌겋게 되었지만 샌슨은 역시 주위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단호한 태도로 내 얼굴에 잉크를 발랐다. 존 경스러운 전사야. 얼굴 다 닦고 무례를 사과한 다음 수련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복잡한 절차 다 빼고 말하자면 하이 프리스트께서 말씀하시길, 오후에 차나 한 잔 하고 싶은데 들러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길시언이 아니라 우리에게 전해온 말이었다. 그러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지. 하지만샌슨은 고지식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하이 프리스트의 초대가 아닙니까?"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를 의심하지는 않겠네. 세상이 너무 비참해져 보이는 일 이니까. 하지만 난 그 비밀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의심할 생각이라고 말 한다면 답이 되겠는가, 퍼시발군?" "예. 알겠습니다." 네리아는 카알의 말에 놀랐다는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후우웃치야아아아?" "아아악! 그만!" 정문에는 수련사들과 몇몇 프리스트들이 이미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허, 확실히 '차나 한 잔'은 아닌 모양인데 그래? 프리스트들은 정중히 인삿말을 꺼내었고 카알은 역시 능란하게 프리스트들의 인삿말에 댓구했 고 우리는 뭐… 날씨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다. 수련사들은 역시 정중하게 우리의 말과 황소를 데려가려고 했고, 여기 서 수련사들 세 명이 에보니 나이트호크에게 질질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 며 에델브로이의 이름을 외치는 불상사가 조금 있었다. 정말 성격 골치 아픈 말이다. 결국 내가 몸을 날려 그 놈을 땅바닥에 메다꽂아야 했다. 윽. 차 마시러 가면서 옷이 엉망이 되었군. 프리스트는 가슴을쓸어내리며 말했다. "따, 따라오시지요. 하이 프리스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련사가 아니라 프리스트가 직접 우릴 안내했다. 갈수록 대접이 수상 하다? 우리야 길시언 따라서 여기에 한 번 들린 것뿐인데 무슨 귀빈이 될 수 있나? 아, 굳이 따지자면 우리가 칼라일 영지에서 에델린과 함께 행동했다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궁성 임펠리아와 맞먹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길을 따라-최소 한 임펠리아에는 구름다리나 허공에서 갈라지는 계단 등은 없었으니까.- 걸어가자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응?" 샌슨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앞을 보니 복도 한편에 서서 프리스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 두 명이 보였다. 신전에서 평상복을 입 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조금 젊은 남자였고 나머지 하나는 등 에 롱소드를 매고 있었다. 어디서 본 사람인데? "휴리첼공?" 카알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프리스트와 담소하고 있던 그 남자도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아, 헬턴트 영지의…" 넥슨 휴리첼이었다. 그리고 등 뒤의 그 남자는 그날 아침에도 보았던 그 마부 같은 남자였다. 넥슨은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하이 프리스트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십니까?" 넥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우리같이 방금 수도에 올라온 자들 이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의 초대를 받는 것이 이상하다는 눈치인 모양이다. 흠, 그건 나도 이상해. 그러나 넥슨은 별다른 말 없이 점잖게 말했다. "아, 참. 할슈타일 가문의 에포닌 아가씨가 당신들의 소식을 묻길래 가 르쳐줬습니다. 만나셨습니까?" 에포닌의 이야기가 나오자 곧 카알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젠장. 또 생각나는군. "예… 만났습니다." 넥슨은 카알의 얼굴빛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자 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그러나 여전히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좋은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카알이 대답하자 넥슨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이야기를 나누던 프리스트 와도 인사를 나누고 떠나갔다. 그 뒤의 남자는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넥슨의 뒤를 따라갔다. 카알은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말했 다. "흠.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였지." "그렇지요." 그래서 여기에 들리는 모양이군. 넥슨 휴리첼과 헤어지고 나서 역시 한참 동안 프리스트들의 안내를 받 아 걸어갔다. 그러자 언젠가 안내되었던 그 후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후 원에는 전에 보았을 때부터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로 똑같은 모습으로 하이 프리스트가 앉아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일어나며 미소지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어서들 오시오." 길시언은 정중히 목례하면서 말했다.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냥 따라서 목례했다. 하이 프리스트의 눈길이 이동하다가 잠시 네리아에게 멈추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숙녀분은 전에 못뵈었던 분이시군?" 네리아는 고개를 까딱하면서 말했다. "네리아입니다. 이 분들 동행입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잠시 네리아를 이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리아양,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좀 묻고 싶은데." 네리아의 눈이 반짝했다고 느껴졌다. 그건 내 느낌뿐일지도 모르지만. 허어… 하이 프리스트도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말인가? 네리아는 간단히 말했다. "음, 10대는 넘었고 30대는 아직 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지요."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미안하오. 아가씨와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어서 무례를 범했소. 자! 귀한 손님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손님까지 맞이하게 되어 더욱 기쁘군. 앉으시지요." 우리는 테이블 주위에 몰려 앉았다. 잠시 후 수련사들이 쟁반과 다기들 을 들고 왔고 조그만 램프와 주전자도 옮겨졌다. 하이 프리스트는 손수 램프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그래, 길시언. 그 귀여운 마법검은 어떻게 되었나?" "…." "길시언?" "…예? 아,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됐네. 대답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하이 프리스트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따라서 찻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카알은 역시 능란하게 차맛을 칭찬했고 하이 프리스트는 적당한 겸양을 표시했다. 두 어르신들이 하도 절묘하게 말을 주고받는 통에 난 차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나서 하이 프리스트는 날씨 이야기도 하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 어갔다. "카알 선생과 일행들은 수도에 보석을 구하러 오셨지요?" 카알이 정말 존경스러운걸? 놀란 얼굴이 된 나와 샌슨과는 달리 카알은 얼굴에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가볍게 대답했다. "그걸 물으시는 하이 프리스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내 의도에 따라 대답이 바뀐다는 말이오?" "대답이 필요없지 않겠습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손가락을 깍지껴 무릎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빛의 탑에 들리신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수도에 보석이 동이 났다는 것은 알고 계실 줄로 믿소만." 카알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윽한 미소만 지었다. 와, 나라면 벌써 몇 마디는 대답했을 텐데 카알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로하이 프리스트의 말 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하이 프리스트는 조금 주춤하다가 말 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귀금속에 대해 물어보고 다닌 통에 나 또한 그 소 식을 알게 된 거지."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어떻소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감사합니다만 이미 마련해주시기로 약속한 분이 계십니다." "국왕이? 글쎄. 닐시언 국왕이라 해도 없는 물건을 만들어낼 수야 없지 않겠소?" "그랜드스톰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그건 신만이 가능한 일이고, 동시에 신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지." 카알은 묵묵히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언외언을 읽어낼 정도로 지각있지 못한 미욱한 촌부올시다. 하이 프리 스트의 말씀은…"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말이오."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석이 품절된 이유를 말입니까?" "그렇소. 하지만 내가 아니지." 하이 프리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들도 덩달아 고개 를 돌렸다. 이 곳 후원과 본관(본관? 글쎄. 제일 큰 구조물.) 3 층을 잇 고 있는 구름다리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카알은 눈을 찌푸렸지만 눈이 좋은 샌슨은 알아보았다. "어어?" 역광이라서 나도 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은 아 버지와 아들인지, 어쨌든 키가 크고 작은 두 사람… 그런데 아들쪽이 수 염이 더 많군 그래? "엑셀핸드?" "어어? 아프나이델?" 나와 샌슨이 차례대로 말했다. 키가 작은 쪽은 탄탄한 몸집에 떡벌어진 어깨를 가진 그 드워프, 엑셀 핸드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어서인지 빈약해보일 정도로 껑충해 보 이는 남자는 아프나이델이었다. 엑셀핸드가 먼저 손을 휘저었다. "여, 오래간만이군. 그래, 요즘도 말과 함께 후치에 타고 다니시나?" 샌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프나이델 역시 미소를 지으며 우 릴 둘러보다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그 엘프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카알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가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 다.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이 웃었다. ================================================================== 6. 탑메이지……2. "길시언 바이서스입니다. 이 분들과 동행하고 있습…" "바이서스! 전하십니까?" 아프나이델은 기겁했고 엑셀핸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엑셀핸드는 뚱 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그 난봉꾼 왕자인가?" 으윽. 드워프니까 인간의 왕자에 대해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저게 원래 엑셀핸드의 성격인 것 같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프나이델은 당황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어 쨌든 길시언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간의 소개를 끝내었다. 나는 먼저 엑셀핸드에게 질문했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흐음. 레너스시에서 헤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퍽 빨리 오셨군요?" 우리는 그 뒤에 칼라일 영지에서 역시 사흘을 지체했고 수도에서도 그 정도의 기간을 보내었다. 그러니 엑셀핸드가 걸어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른 것이다. 그러나 엑셀핸드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사실 자네들 탈옥시킨 것이 들켜버렸어. 그 칠칠치 못한 호비트놈! 그 래서 시청에 불려가고 여러 가지 조회를 받다보니 늦어졌지. 안그랬으면 훨씬 일찌감치 도착했을텐데." 엑셀핸드는 수도에 늦게 도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 생각엔 저 짧은 다리로 꿋꿋하게 걸어오느라 늦어진 것 같은데 말이야. 카알은 황 급히 사과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나 하고 싶은대로 하다가 당한 일인데. 신경 쓸 필요 없 네!" "아니, 그래도…" "됐다니까! 그리고 시청에서도 나 때문이 아니라 그 듀칸 녀석 때문에 날 닥달한 거야. 자네들 탈옥건은… 자네들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고 떠 났더군? 시청에서 날 붙잡아놓고 닥달한 것은 듀칸의 그 열쇠 때문이었 어. 시청에서는 큰 일 아닌가." "아하. 그랬군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저희들 때문에…" "아냐, 됐네. 덕분에 좋은 구경도 했지." "좋은 구경이오?" 엑셀핸드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생각할수록 말이야, 정말 교활한 수법이었어. 자네들이 시청에 넘겨버 린 투기장 말이야."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아, 네." "그런데 말도 마. 원참. 실리키안이라는 그 작자는 인간성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경영 능력은 괜찮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자네들 덕분에 그 투기장이 시 소유가 된다음 레너스시는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었지." "그렇습니까? 그것 참. 도박장이나 다름없는 그런 곳이 경영난에 허덕 인다는 것은 믿기 어렵군요?" "그게 말이야, 원참. 사상 최악의 승률이 터져버렸어. 내가 거기 잡혀 있느라 그 과정을 잘 볼 수 있었지. 그리고 그게 내가 말한 좋은 구경이 고." "사상 최악의 승률이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신인 두 명이 사상 최악의 승률에서 이겨버렸단 말이야. 기가 막혀서. 그 두 신인은 겁도 없이 전투 상대로 트롤을 지명 했거든. 승률이 얼마였는지 아나? 자그마치 300 대 1이었다고! 그런데 이겨버렸어. 시청에 금고가 텅텅 비게 될 뻔 했지. 어쨌든 완전 적자 경 영에 허덕이게 되었어." "허, 놀랍군요." "그래서 시청에서는 실리키안을 고문으로 받아들였어. 옛날처럼 포악한 짓은 못하게 되었지만 실리키안은 투기장 경영도 열심히 하고 시청 재산 도 불려주며 간신히 체면 차릴 정도로 벌어들이게는 되었어. 성격도 괜 찮아졌고. 내 생각엔 잘된 결말인 것 같아. 간수도 못할 큰 재산을 받아 들인 레너스 시에서만 좀 고생을 했다 뿐이지만, 지금은 경영이 정상으 로 돌아간 것 같아." "그것 참잘됐군요. 그 두 남자는…" "뭐, 엄청난 거금을 만지게 되었으니 그 남자들도 행운의 바람을 탄 사 람에 속하고. 원참. 지금도 기억나는군. 늑대발톱 목걸이를 걸친 완전 야만인 같은 놈… 뭔가?" 엑셀핸드는 신나서 말을 하다가 내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다. 난 기가 막힌 심정으로 물었다. "느, 늑대발톱 목걸이? 혹시 팔치온을 좀 이상하게 쓰지 않았어요? 얼 굴에는 보조개가 있고." "어랏?" "나머지 하나는 혹시 할버드를…." "자네 아는 사람들인가?" "…알다 뿐이겠어요?" 내 한숨에 샌슨은 껄껄 웃었고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레너스시에서 했던 일을 모르는 길시언과 네리아는 엑셀핸드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며 감탄했다. 그 다음엔 내가 칼라일 영지의 이야 기를 해주었고 샌슨과 카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고 우리 이 야기를 들었다. 중간중간에 카알의 눈짓을 받아가며, 난 그 이야기에서 자이펀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그저 알 수 없는 저주에 걸린 마을의 이 야기로 바꿀 수 있었다. "그 남자들은 발록을 잡겠다고 설칠 정도로 배짱있는 사람들이지요. 거 기로 간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는데 정말 갔군요. 허 참." "발록을 잡는다고? 그 친구들은 돌았구만! 하긴 그 정도로 돌았으니 그 런 지명을 할 수도 있었고 레너스 시청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겠지. 푸하하!" 하이 프리스트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꾹꾹 눌러참고 있었다. 뭐, 누 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주 대화에 끼어들 틈을 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엑셀핸드는 이야기하는 것을, 특히 입을 큼지막하게 벌리고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야 기하는 것을 퍽이나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옆에서 보기에 좀 안쓰러울 정도로 하이 프리스트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지만 엑셀핸드는 영 눈치가 안좋았다. 가장 존귀하신 드워프라… 가장 존귀하시다보니 눈치도 가장 좋지 않은 모양이군. 눈치 볼 일이 없어서 그럴 테지? 그래서 보다못한 카알이 점잖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하이 프리스트께 돌 려주려고 했다. "이거 참 반가운 손님들이로군요.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이 분들을 소개 시켜주시려고 우릴 부르셨습니까? 감사한 일이로군요." 하이 프리스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파하하! 모루와 망치의 불꽃의 정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세상 어느 곳 에 있어도 드워프의 우정이 함께 하는 거라네. 더우기 자네들은 오크, Cxakro, Dmeiin! 그 추악한 생물에 대항하여 나와 함께 섰던 사람들, 어 떻게 우리가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만남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라네. 핫하하!" 하이 프리스트는 그만 웃어버렸다. 그리고 카알은 곤혹스럽게 웃으며 재시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이 프리스트, 아까 이 분들이 오기 전에 하셨던 말씀은…" 하이 프리스트는 재빨리 말했다. "엑셀핸드. 드워프들의 노커여." "흠, 왜 그러시나, 그랜드스톰의 다락귀신?" 다, 다락귀신? 확실하군. 엑셀핸드의 원래 성격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이 웃었다. "신선한 느낌의 호칭이오. 고매하신 드워프의 노커가 인간들의 수도까 지 그 짤막한 다리로 걸어오신 이유를 좀 들려줬으면 하는데, 어떻겠 소? 난 여기 이 분들에게 수도에서 보석이 바닥난 이유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소만." 엑셀핸드는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턱수염을 쓸면서 말했다. "저 놈의 다락귀신은 해가 가면 갈수록 징그러워지는군. 에이, 백년 묵 은 너구리 같은 신의 지팡이 녀석. 이 놈아! 드워프를 초대해서 이야기 를 듣고 싶다면 맥주라도 한 잔 내어오는 것이 어떠냐?" "미안하오만 그랜드스톰에는 맥주가 없소. 곡식의 무가치한 사용이라고 종규에 제조가 금지되어 있거든." "이 멀건 찻물은 무가치하지 않고?" "찻잎은 곡식이 아니지 않소? 기호품이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장 고귀한 드워프와 가장 고귀한 에델브로이 의 성직자의 독설공방-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설을 사용하는 것은 엑셀핸 드뿐이었지만.-을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고 그래서 엑셀핸드는 별로 재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엑셀핸드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에흠, 험. 그러니까 말할테니 잘들 들어보게." 우리는 대륙 어디엘 가도 이만한 청중을 얻으시기는 어려울 거라고 외 치는듯한 진지한 얼굴로 들을 준비를 갖추었다. "세상에서 보석을 가장 탐내는 자는 누구인가?" 엉뚱하다면 엉뚱한 엑셀핸드의 질문에 우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샌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라 해도 드워프들이 보석을 가장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퍼헐헐헐, 점잖게 말해줘서 고맙네만 세상에는 드워프들과 쌍벽을 이 룰만큼 보석을 좋아하는 놈이 하나 더 있지." 카알이 말했다. "드래곤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드래곤을 거론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드래곤 때문에 수도에 보석과 귀금속이 동이 나 버렸으니까." 써늘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뭘까? "약 3 개월 전의 일이었지. 갈색산맥의 광산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네." 엑셀핸드는 침착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갱도 어느 곳에서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었네. 자 네들도 알겠지만 드워프들은 지하에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확실하게 맞출 수 있다네. 우리는 지하에서라면 100 큐빗 이상 거리에서 기침하는 소리만 듣고도 오크인지 코볼드인지 구분해낼 수 있지.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드워프들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쓸었다. "멀리서 들려오지만 거대한 소리였다더군. 소문이 하도 무성해져서, 알 겠지만 드워프들은 성격이 원래 헛소문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도록 되어 먹었거든, 그런데도 소문이 무성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갈색산맥으 로 출발하게 되었다네. 그리고 도중에 자네들을 만났었지." "아, 그런 것이었군요." "젠장, 그러다가 재수가 사나워서 레너스시에서 지체하게 되었지.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직 거기서 썩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면서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을 가리켰다. 아프나이델은 황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 "겸손은 징그러워. 관둬." "아니, 겸손이라니오. 이런. 제가 말씀드리죠." 그렇게 말하다가 아프나이델은 우리들을 한 번 훑어 보았다. "세 분들은 저를 사깃꾼으로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저, 제 말을 믿으 시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선입관을 버리고 들어주셨으면 가, 감사하겠 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은 엑셀핸드님도 함께 겪으신 일이 니까…" 허어, 이 남자, 예전에 비해 태도가 상당히 좋아졌군.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린 인간에게 하나의 면만 있다고 믿는 바보는 아니오. 말씀하십시 오." 아프나이델은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그날 밤, 우선 실리키안 남작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하지 만 그렇다고 그냥 털래털래 어딘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여행이라는 것 이 하고 싶다고 그냥 발 가는대로 출발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 서 그는 며칠 동안 레너스시에서 채류하면서 거취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는 카알이 말한 것을 받아들일 결심을 했다. 그는 결국 마 법사였으니까. 그런데 그 때 레너스 시청에서 그에게 협조 요청이 날아 들었다. "여행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우연히 레너스 시청에서 고초를 겪으시던 엑셀핸드를 뵙게 되었습니다. 시청에서는 여러분의 탈옥을 조사하다가 결국 듀칸 버터핑거라는 그 호비트는 놓쳤지만 엑셀핸드님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엑셀핸드님은 그 호비트에 대한 증언을 완강히 거부 하신 바람에 억류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청에서는 절 불러서 그 호 비트의 소재를 알아내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프나이델은 잠깐 말을 끊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때까지도 레너스 시청에서는… 절 대마법사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하라는 시늉을 했다. 아프나이델은 솔직하게 말할 결심을 했다. 그는 대마법사도 아니며 대 륙 어디에 숨어있는 사람이든 간단히 찾아낼만한 마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미 새출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다시 과오를 저지를 수 야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엑셀핸드와의 면담에서 그는 엑셀핸드의 귓속 말을 듣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호비트 듀칸 버터핑거의 소재를 알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 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계속 시청에 억류당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 서 그는 아프나이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는 아프나이델에게 듀칸 버터 핑거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엑셀핸드님이 가르쳐주셔서 저는 그 호비트를 찾았고 그에게서 열쇠를 받아다가 시청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시청에서 원하는 것은 그 열쇠였으 므로 거기서는 만족했습니다. 따라서 호비트 듀칸 버터핑거도 안전해지 고, 시청에서도 원하는 열쇠를 찾았으니 만족하고, 또한 엑셀핸드님도 풀려날 수 있었지요." 그 때 엑셀핸드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카리스 누멘께 맹세코 그 놈은 틀림없이 복사본을 만들어 두었을 거야! 하하하하!" 하이 프리스트는 질린 표정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고 엑셀핸드는 간 신히 웃음을 멈추었다.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전 스승님을 찾기 위해 수도로 올 결심을 하고 있었죠. 그래서 엑셀핸 드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엑셀핸드는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타파해준 댓가로 아프나이델에게 동 행을 요청했던 모양이다. 아프나이델로서는 빈약한 자신의 마법만 믿고 수도까지의 여행을 결심하는 것은 어려웠던 차에 퍽 달가운 제안이었다. 그래서 둘은 함께 출발했다. 여행 도중 몬스터를 만나거나 산적을 만나는 등의 위험이 몇 번 있었지 만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을 훌륭히 지켜내었고 아프나이델도 빈약한 마 법이나마 열심히 엑셀핸드를 도왔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이 자신의 마법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할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여보게! 자네가 해 준 그런 일을스스로 깍아내리지는 말아!" "아닙니다. 엑셀핸드, 그러니까…" "됐어! 아무리 내가 마법에 무지해도 그건 알아! 자넨 퍽 훌륭한 마법 사였어." 카알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다. 흠. 우리야 저 마법사에게 좋지 않은 인상만 남아있었지만 엑 셀핸드의 태도로 보건대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를 만날 때는 완전히 다 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모양이군. 어쨌든 둘은 서로를 도와가며 무사히 갈색산맥에 도착했다. 아프나이델 은 잔잔하게 말했다. "그리고 엑셀핸드님 덕분에갈색산맥의 드워프들의 광산을 구경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단히 진귀한 경험이었습니다만, 그 이상음 때문에 드워프 들의 광산을 구경했던 감동도 잊혀지는군요." 거기서부터 엑셀핸드가 말하기 시작했다. "흠. 이 친구는 마법사 아닌가. 이 친구는 스스로 보잘 것 없는 마법사 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이미 마법사 아닌가. 나야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 지만 마법사가 되려면 보통 이상의 학식을 쌓아야 된다는 것쯤은 안다 네." 엑셀핸드의 말에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붉혔다. 엑셀핸드는 말했다. "그래서 조사에 합류시켰다네. 어쨌든 갈색산맥에 도착한 다음 나와 이 친구, 그리고 몇몇 늙다리 드워프들을 모아서 그 이상음이 들려온다는 갱도로 들어가보았지.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네. 차츰 헛소문 이 아닌가 생각할 무렵, 그 소리가 들려오더군." 그는 우리를 쓰윽 훑어보았다. "드래곤이었다네."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6. 탑메이지……3. "틀림없었지. 수면기에서 깨어나는 드래곤의 소리. 나 같은 해묵은 광 부나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는 희귀한 소리지. 내 몇 번 듣지는 못했지 만 무엇에 걸고든 맹세할 수 있어! 그 소리는 수면기에서 깨어난 드래곤 의 웨이크닝 사운드(Wakening sound), 그러니까 활동기에 들어가기 전, 온몸으로 혈액을 돌리기 위해 행하는 특수한 움직임에서 나는 소리였다 네. 나와 함께 그 소리를 들었던 드워프들의 얼굴이 모두 창백해졌지. 푸… 내 생전 그렇게 새하얀 드워프의 얼굴은 처음 보았지." 샌슨의 침 삼키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난 잠시 백옥 같은 얼 굴을 한 드워프를 상상해보다가 찻잔을 뒤집을 뻔했다. 엑셀핸드의 심각 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아야 되다니, 그거 정말 예삿일이 아니다. 아프나이델도 그 때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흐 흠, 어둡고 밀폐된 지하의 갱도에 서서 멀리서 울려퍼지는 드래곤의 소 리를 들었단 말이지? 그거 무서웠겠는걸. 엑셀핸드는 계속 말했다. "소리가 들려오는 갱도는 폐쇄되었다네. 그리고 인접 갱도들도 모조리 폐쇄되었고. 그리고 갈색산맥의 드워프들을 모아서 대책회의에 들어갔지 만, 솔직히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 헛 참! 믿을 수 있겠나? 드 래곤의 레어를 찾아서 아직 활동에 들어가지 않은 그 놈을 죽이자는 의 견이 가장 높았다네." 드워프답군. 하지만 엑셀핸드는 탐탁찮다는 듯이 말했다. "요새 젊은 드워프들은 도대체 드래곤을 제대로 구경도 못해봐서 말이 야. 늙은이들은 모두 반대했고 내가 가장 크게 반대했지. 왜냐하면 그 웨이크닝 사운드로 미루어볼 때 보통 어마어마한 놈이 아닐 거라는 판단 이 되더라구." 카알은 숨죽인 어투로 물었다. "보통 어마어마하지 않다면…?"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래도 거의 신비나 전설, 기상천외? 이건 좀 이 상하군. 어쨌든 뭐 그런 수식어를 앞에 달아야 되는 급인 것 같아." 기상천외급이라. 흠. 길시언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이채로웠다. 프 림 블레이드의 수다를 듣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던 길시언마저도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카알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아인델프님의 말씀으로는 엄청난 드래곤이 활동기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얼마 후에…?" "그런 어려운 것은 나한테 묻지마. 난 늙다리 광부일 뿐이야. 여기 마 법사가 계시니 그 분한테 여쭈어봐." 카알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읽은 바로는, 어, 저 그 웨이크닝은 드래곤의 나이에 비례한다고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건, 에, 드래곤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만 드래곤은 나이와 크기가 거의 완벽한 비례를 이루며 평생도록 성장기 에 있는 생물이니까, 뭐, 나이든 크기든 같습니다. 그 드래곤의 나이를 알 수 있다면 정확한 웨이크닝 기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엑셀핸드님은 보통이상으로 엄청난 드래곤이라고 했으니 나이도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장년 정도의 연령의 드래곤은 대개 3차 웨이크닝까지 있습니다만, 그 드래곤이 보통 드래곤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최소 4차 웨이크 닝까지 있을 테지요. 그렇다면 기간은 약 4개월이 소모될 것입니다." 카알은 대경실색했다. "그, 그럼 3개월 전부터 들려왔다고 했으니 남은 기간은 1개월? 한 달 후에 그런 엄청난 드래곤이 활동기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엑셀핸드는 침중하게 말했다. "그러니 광산을 몽땅 폐쇄하고 급히 상경한 거야." 드워프들이 광산을 폐쇄했으니까 수도에 보석이 동이 나버린 모양이군. 어지러운 대화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간신히 그거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카알은 허겁지겁 말했다. "그, 그럼 아인델프님의 복안은?" "복안? 복안이라. 뭐, 첫번째. 그 드래곤이 선한 드래곤이기만을 바란 다. 이건 좀 소극적이지?" "선한 드래곤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뜻밖에도, 대답한 것은 샌슨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샌슨을 바라보았다. 아니, 샌슨이 미쳤나? 갑자기 무 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샌슨이 아침에 먹었던 메뉴를 돌이켜보고 있는 동안 카알이 먼저 샌슨에게 질문했다. "무슨 말인가, 퍼시발군?" 샌슨은 뒷통수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아, 제가 가진 왕실 지리원 편찬 지리서에는 갈색산맥에 크림슨 드래 곤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가 있다고 되어 있던데요? 어, 드래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크림슨 드래곤은 선한 드래곤이 아니지 않습니 까? 뭐, 악한 드래곤도 아니지만." "뭐야!" 엑셀핸드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 그리고 하이 프리스트의 미소가 뒤따 랐다. "정확하오. 정말들 지혜로운 분들이시군. 갈색산맥의 드래곤이라면 틀 림없이 크라드메서일 거요."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멋지군! 이거 정말 멋지군!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에게 축복 있기 를 바라네. 크라드메서, 크림슨 드래곤이라고? 겨우 놈의 정체를 알게 되었어, 고맙네, 샌슨. 허헛! 인간의 수도까지 오는 동안 내내 수염을 쥐어뜯으며 고민했던 것인데, 원참! 자네는 듣자마자 알아차리는가?" 샌슨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야 뭐, 책에 적혀 있길래…." 카알은 하이 프리스트에게 질문했다. "크라드메서에 대해 아십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 자네가 말하지? 자넨 그 때 도성에 있었지 않았는가? 난 그 때 북부대로 순례 중이었고 처음부터 제대로 보지는 못했거든."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다란 말을 하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지금 상당히 중요한 회담 중이라는 것은 짐작하겠지? 점잖은 숙녀답게 굴어라."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은 검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길시언을 아주 괴상 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크라드메서는 좀 독특한 드래곤입니다. 아니, 아주 희귀한 드래곤이라 고 해야 할까요. 크림슨 드래곤이라는 것이 원래 희긔한 종류이긴 합니 다. 레드 드래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성격은 천양지차입니다. 레드 드래곤이 오로지 탐욕과 폭력의 가치만을 추종하는데 비해 크림슨 드래 곤은 조화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유피넬의 추종자입니다." 유피넬의 추종자라고?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엘프와는 다른 형태로 유피넬의 법칙을 추종합니다. 엘프 는 완벽한 조화를 구가하지만 크림슨 드래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을 선의 힘과 악의 힘의 투쟁장으로 파악합니다. 엘프는 완벽한 조 화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관념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크림슨 드래곤은 항상 세상의 흐름을 바라보고 선의 힘과 악의 힘을 저울질합니다. 그리 고 악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는 악의 근원을 처절하게 공격합니 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선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는 악의 대변 인이 되어 악을 실천합니다." "예에에…?" 나는 놀라서 무의식 중에 되물었다. 그럼, 샌슨이 말한 이야기는 그런 뜻인가? 크림슨 드래곤은 선한 드래곤도, 악한 드래곤도 아니라는 말이 그것이었나?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보통의 경우 활동하지 않습니다. 깊은 산중의 그의 레어에서 자 신을 관조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드래곤이라는 오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 을 위해서라면 그는 분연히 일어납니다. 이 때의 크림슨 드래곤의 힘은 저 강한 레드 드래곤이나 골드 드래곤마저 목숨의 위험을 느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철저히, 돌이킬 수 없이 선의 힘이든 악의 힘이든 파괴해 버립니다." "우우와…!" 네리아의 탄성이었다. 샌슨과 나, 네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잘 안다 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 길시언은 조용히 말했 다. "크라드메서, 그는 그런 독특한 크림슨 드래곤입니다. 게다가 그는 할 슈타일 가문 이외의 인물을 드래곤 라자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도 독특 합니다." "할슈타일 가문이 아니라고요?" "예. 할슈타일 가문의 드래곤 라자들이 모조리 나서보았지만 크라드메 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크 라드메서로부터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드래곤 라자는 까뮤 휴리첼로서 휴리첼 가문의 인물이었습니다." "어어랏? 휴리첼?" 휴리첼?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리첼 가문은 무문의 명가였습니다. 그런 가문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 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드래곤 라자는 무골과는 관계가 적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까뮤 휴리첼은 크라드메서의 드 래곤 라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아무르타트에게 붙잡혀 있는 로넨 휴리첼의 동생입니다." "그럼, 아까 보았던 그 넥슨 휴리첼은?" "그 조카가 되지요." 하이 프리스트가 끼어들었다. "이미 그를 만났소?" "아. 예. 들어오던 길에 만났었습니다." "음, 그렇군." 카알과 하이 프리스트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길시언의 말 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잠깐만요. 그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인가요? 무문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났다는 것이?" 넥슨 휴리첼. 자기 아버지가 '명예롭게 전사했느냐?'고 물어오던 남자. 길시언은 그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를 배출했다는 것이 씻을 수 없는 불명예란말인가?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휴리첼 가문의 불명예는, 그 까뮤가 수치스럽게 죽었고 그 때문에 크라드메서가 발광하게 되어 미드 그레이드를 쑥밭으로 만들 었다는데 있지." "수치스럽게 죽다니오?" 길시언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밀통을 하다가 여자의 남편에게 칼맞아 죽었거든." 으으으. 유피넬이여. 사람들은 대부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엑셀핸드는 노골 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인간들은 성욕이 왜 그리 왕성한가? 나 원참. 그 성욕 때문에 번영하긴 하겠지. 하지만 동시에 이 따위 사건도 일어나게 되는군. 도대 체 그 왕성한 성욕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군!" 엑셀핸드의 노골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홍일점이었던 네리아는 별로 표 정의 변화가 없어서 주위의 남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길시언은 엑셀핸 드의 악담이 더 이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 어쨌든 까뮤 휴리첼이 죽자마자 드래곤 라자를 잃은 크라드메서는 폭주하게 되었고 13 개 도시를 생존자 하나 남겨두지 않고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히이익?" 네리아의 감탄 소리. 길시언은 말했다. "게다가 행동 주기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려 노스 그레이드의 도시를 파괴하기도 하고 그 날로 날아가 이스트 그레이드의 도시를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닥치는대로 파괴한 것이지요. 하지만 크라드메서는 주로 미드 그레이드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까뮤 휴리첼이 미드 그레이드 에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사상 최대의 방어선이 펼쳐 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미쳐버린 크림슨 드래곤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 습니까. 매일같이 들려오는 것은 파괴된 도시의 비보와 무너진 군대의 패전소식이었습니다. 아바마마는 피난준비를 하셔야 했습니다. 바이서스 임펠 300년의 역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때 아샤스의 가호인지, 어쨌든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크라드메서가 지나치게 활동을 많이 하 여 수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설을 펴기는 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아무 도 모릅니다. 그 날이 기억나는군요. 아바마마는 피난을 위해 마차에 오 르셨었지요. 그 때 전령이 달려와 고했습니다. 크라드메서가 갑자기 갈 색산맥 방향으로 날아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기뻐하신 아바마마는 다음에 태어날 자식을 아샤스에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누이 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가 된 것입니다." 아아. 그런가? 길시언은 말했다. "갈색산맥을 향해 날아가는 크라드메서를 본 사람들 중에 어떤 자는 크 라드메서가 눈물을 흘리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도 합니다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그것이 약 20여년 전의 일이로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알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 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정말 큰 일이군요." 엑셀핸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 일?" "옛날 크라드메서가 바이서스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 것은 수면기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활동기에 들어가게 되는 크라드메서는 다음 수면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바이서스 전 체를 파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젠장." 엑셀핸드도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카알은 말했다. "아인델프님은 아까 첫번째라고 하셨습니다. 두번째는?" "뭐? 두번째? 아, 그거. 두번째는 가능성이 조금 높아. 그러니까드래 곤 라자를 찾아서 그 놈에게 고삐를 채워버린다는 거야." 카알은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드래곤 라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못 찾아? 옛날에도 드래곤 라자가 있었다며?" "하지만 찾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카알의 질문에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엑셀핸드는 머리를 긁적였 다. 그 때 조용히 있던 아프나이델이 주저하듯이 말했다. "저, 제가 아는 바로는 그 어떤 드래곤이든 반드시 드래곤 라자가 있 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 그것은 유피넬의, 유피넬의 법칙입니다. 저울대 양쪽에는 반드시 같은 추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은 하이 프리스트께서 확인해 주실 겁니 다." 아프나이델은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 덕였다. "만물은 완전할 수 없고 따라서 그 불완전한 면을 채워주는 또다른 불 완전한 짝이 있는 법이오. 비록 헬카네스의 법칙에 따라 그 짝이 제대로 만나지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 짝이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소." 아프나이델은 침착하게 하이 프리스트의 말을 듣고나서 말했다. "예. 바로 그것이 관건입니다. 헬카네스의 법칙. 예. 그렇습니다. 예. 그것 때문에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헬카네스의 법칙에 따라 시공간의 장벽이 생깁니다. 장벽, 그렇지요.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 고, 혹은 시기가 달라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에, 후자의 경우라 면 드래곤 라자가 이미 죽고나서 드래곤이 활동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경 우겠지요. 헬카네스는 그런 식으로 유피넬의 법칙을 깨트리지 않으면서 깨트리지요."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그것은 헬카네스의 은총이라 해야 정확하겠지요. 완벽한 획일성 때문 에 세상이 경직되는 것을 막아주는 은총이 아니겠소." 아프나이델은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약한 미소를 지었다. 에델브로이는 헬카네스의 하위신이니까 에델브로이의 하이 프리스트가 그렇게 말씀하 시는 것에 뭐라 반박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겠지. 하지만 카알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짝이 있어도 만날 수 없다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에, 그것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문제니 까요. 사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 짝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심 지어 그 둘, 그러니까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 당사자들도 과연 자기들이 스스로 적합한 짝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뭐, 부부들도 서로가 서로 의 이상적인 배필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난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법칙이야!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루어지 는지 파악할 수도 없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법칙이라면 난 수십 개도 더 만들겠다!법칙 1. 사람은 누구나 원래 선하다. 그럴듯하지? 하지만 원 래 선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 엑셀핸드가 말했다. "고맙네, 아프나이델. 어쨌든, 자! 이해가 되었는가? 내가 말한 두번째 방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야." 도대체 이 가장 존귀하신 드워프는 지금까지 나눈 말을 듣기는 한 건 가? 카알은 힘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의 재질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그곳으로 끌고 가야 합니까?" "좋은 방법이지 않은가?" 그 때 하이 프리스트가 말했다. "이제 내가 여러분들을 불러들인 이유를 설명해야 되겠군요." 우리들은 모두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 6. 탑메이지……4. 하이 프리스트는 먼저 나직한 기도를 올렸다. 말하기 앞서 기도를 올리 는 이유가 뭘까? 하이 프리스트는 기도를 마치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할슈타일 가문이 언급되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헛기침을 조금 한 다음 말했다. "흠, 여러분들 모두 조금씩은 아실 것이오. 할슈타일 가문은 드래곤 라 자의 혈통이 약속되는 가문이지. 하지만 그 약속은 15년 전에 끝났고, 따라서 그 가문은 세인들의 신망을 잃어가고 있소. 하지만 300년 이상 영화를 누려온 가문답게 아직그 세력은 막강하오. 그래서 그들은 야심 찬 계획을 세운 다음 실천할 수도 있었지. 바로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만들어낸다는 계획." 길시언과 샌슨은 기겁했다. 하지만 카알은 그 정도는 벌써 저 멀고 먼 헬턴트의 자기 집에 앉아서 파악해내었던 사람이고 나 또한 카알에게 이 미 그 말을 들었으니 별로 놀라지 않았다. 흠, 그러고보니 카알은 존경 받을만 해. 네리아도 내게 들었던 이야기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길시언은 경악을 감출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침중한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무슨 뜻이냐고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끌어모아 서로 교배시킨다는 추악한 이야기죠." 내 말에 길시언의 얼굴이 허옇게 되었다. 하이 프리스트도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라? 후치군,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지?" "카알이 말해줬어요." 주위의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카알에게 집중되었고 카알은 겸연쩍은 표 정이 되었다. 카알은 대충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해 주었고 하이 프리스 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허! 놀랍군. 어쨌든 정확한 예견이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드래곤 라 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양자, 양녀로 끌어모으고 있소. 겉으로는 빈 민아동 구제나 고아원 운용 등 사회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지 만 눈감고 아웅하는 수작이지." "고이약한! …죄송합니다." 길시언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아니. 괜찮네. 그런데 말이오. 할슈타일 가문이 아닌 다른 집안의 아 이들의 드래곤 라자의 자질은 퍽 약하지. 그것이 핏줄의 힘인지 드래곤 로드의 약속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할슈타일 가문 출신의 드래곤 라자만큼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았소. 조금 전 크라드메서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밝혀졌듯이 할슈타일 가문 이외의 인물이 우수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는 것은 퍽이나 드문 일이지. 지금 지골레이드와 함께 하고 있는 돌맨만 하더라도 드래곤 라자의 자질 로만 따지자면 역사상 최약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소." 돌맨이 누구지? 그런데 카알은 처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 할슈타일공은…?"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슈타일공?" "디트리히 할슈타일 말입니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꼬마 이야기만 나오면 정말 죄책감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이 프리스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 디트리히 그 아이. 흠, 그 아이도 자질면으로는 대단치 않았소.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의 관계는 대단히 친밀했소. 많 은 이들이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을 유피넬이 정한 짝이라고 믿을만큼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의 관계는 돈독했소. 그 아이와 캇셀프라임은 마치 까 뮤 휴리첼과 크라드메서의 관계의 재현 같았거든. 그 아이에 비해 보면 돌맨과 지골레이드는 오히려 원수 관계처럼 보일 정도였소." "그랬군요." "어쨌든 여러분들은 이제 이해하셨을 거요. 할슈타일 적통의 아이가 아 니라면 드래곤 라자의 자질은 약하다. 하지만 15년전부터 할슈타일 가문 에서는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질 않는다. 이해하셨겠지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그런데 말이오. 최근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붉은 머리의 10대 후반의 소녀를 찾고 있소." 이번에는 네리아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카알은 의아쩍은 얼굴로 네리아를 보더니 말했다. "저희들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여기 계신 네리아양에게 나이를 묻던데… 아까 하이 프리스트께서도 네리아양의 나이를 물었지요?"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본 바로는, 아무래도 옛날 언젠가 할슈타일 가문의 아이가 하나 있었던 모양이오. 그런데 불가사의한 사건들로 인해서 할슈타일가에서는 그 아이를 잃게 되었소. 단서는 붉은 머리에 여자 아이, 두 가지만 남아 있지."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참지 못하고 그냥 말해버렸다. "물론 그 소녀는 드래곤 로드의 약속의 기한 이전에 태어난 아이니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을 가능성이 퍽 높겠군요? 게다가 아까 말씀하 신 바에 따르면 그 아이는 적통의 후계자. 따라서 현재 대륙 최고의 자 질을 가진 드래곤 라자일 수도 있겠군요. 맞지요?"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하이 프리스트는 다시 놀란 얼굴로 날 바라 보았다. "놀라운 지혜로군! 정확하네." 샌슨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 빙긋이 웃고 있는 네 리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이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 는 말했다. "굉장한 소년이군. 그럼 조금 더 추리를 해보겠나? 왜 이렇게 많은 세 월이 지나서 그 아이를 찾는 것일까?" 그거야 간단하지 뭐. "뭐, 간단히 생각하자면 양자나 양녀로 들인 아이들이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너무 약해서 그 아이를 찾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그 아이는 현 재 나이가 10대 후반, 따라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겠지요. 칵! 그 할슈 타일 가문의 뜻대로 혈통을 만드는 데는 최고로 도움이 되겠지요." 길시언의 얼굴이 분노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샌슨만큼은 아니 었다. 샌슨은 목을 울렁거리고 있었다. 한바탕 욕설을 내뱉고 싶지만 자 리가 자리인지라 그렇게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카알의 표정도 만만치 않 았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씁쓸하게 말했다. "기분 나쁜 말이지만 조리있는 말이기도 하네. 지혜로운 소년. 흐음. 그런 의미도 있겠지.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생각하거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조금 전, 우리는 크라드메서가 활동기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 가?" "설마!" 카알은 고함치느라 기어코 찻잔을 뒤엎었다. 우리는 모두 의아해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이 왜 저렇게 놀라시 지? 카알은기막힌 표정이 되었고 네리아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어 탁 자를 닦았다. 그러자 카알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그런데… 300년. 300년 동안의 기간이라 해도, 그게 가능합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번쩍이는 눈빛으로 카알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 정말 놀랍군. 흐흠. 대답을 하자면, 가능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 소?" 카알과 하이 프리스트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 다. 대화의 진행을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고마워요. 카알." "응? 무슨 말인가, 네드발군?" "이제부터 설명해주실 것 아니에요? 미리 감사해두죠." 카알은 힘빠진 미소를 지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턱을 괴면서 말했다. "나도 감사해두지. 한 번 설명해보시겠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은 300년 동안이나 드래곤과 함께 해 온 가문입니다." "좋은 시작이오. 계속하시오." "그러니, 그들은 드래곤에 대한 일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을 겁니다. 수십년간 말을 다루어온 마부는 눈 감고 말발자국 소리만 들 어도 그 말의 색깔을 맞춘다고 하던가요? 하물며 300년 동안 드래곤과 동거동락해온 가문이라면… 어쩌면 그들은 드래곤의 활동주기에 대해 어 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을 짐작했을 수도 있다 이겁니다." "옳거니." 하이 프리스트는 아주 기쁜듯이 맞장구를 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로 기뻐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카알은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사상 최대의 드래곤이 깨어나는 시기에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단절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만들어 보려고 애썼겠지요. 하지만 적통의 후계자가 아닌 자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좋아, 좋아. 계속하시오." "그래서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잊혀졌던 한 아이를 찾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조금 전 네드발군이 말했다시피 적통의 후계자. 어쩌면 대륙 전 체에서 가장 강한 드래곤 라자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아이를 찾아서?" "크라드메서는 할슈타일 가문에 귀속될 수 있겠지요. 적어도 그 가문에 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크라드메서를 수하로 부릴 수 있다면, 글쎄요. 자선사업이나 사회봉사에 도움이 될까요?" "생각하기 어렵겠지. 허허." 하이 프리스트는 퍽이나 만족스러운 어투였다. 샌슨은 자신의 입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자신의 턱수염 을 몹시 아프게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아프나이델은 이마를 짚 고 있었다. 길시언은 끝없이 '고약한, 고약한!'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빠르게 설명했다. "현재 할슈타일 가문의 우두머리인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가문의 영 광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여념이 없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 들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지. 300년. 결코 짧은 기 간이 아니오. 그런 기간 동안 영화를 누려오다가 갑자기 그 영화를 잃게 되면 마치 억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오." 엑셀핸드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억울하다라. 흠. 기 득권을 빼앗기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 하이 프리스트 의 말은 씁쓸하군. 나는 다시 후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이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나 또한 카알이 말한대로 생각했소. 그렇다면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 오." 카알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저희들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랜드스톰의 이름으로, 아니 에델브로이의 이름으로 부탁하오." 하이 프리스트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 소녀를 찾아주시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은 그랜드스톰의 현아한 지붕 장식들이 신에 대한 찬미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례하게도 자신들의 지친 날개를 쉬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 다. 아마도 새들은 인자하신 에델브로이가 용서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나 보지? 나는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굳은 얼굴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 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난 어제 엑셀핸드에게서 갈색산맥에 드래곤이 깨어난다는 말을 들었 소. 그리고 한참 동안 추측해 보고 서적과 기록을 마구 뒤져 본 끝에, 그 드래곤이 크라드메서일 것이라고 짐작했었소. 흠, 여러분들은 당장 알아차린 일인데 말이오. 껄껄껄." 그러자 엑셀핸드는 당장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라고? 다락귀신 네놈은 그 드래곤이 뭔지 짐작했단 말이냐?" "그렇소, 노커여." "그럼 어제 왜 말하지 않았어?" "노커여. 온갖 서류를 뒤져 본 이후에야 알아차렸다고 하지 않았소? 그 리고 어제 당신은 피곤해하지 않았습니까?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에 깨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분들을 불러들여 한 꺼번에 모인 자리에서 말하리라고 생각했소. 불쾌하시다면 사죄하지요." 엑셀핸드는 두툼한 아랫입술을 위로 불쑥 올리더니 볼멘 목소리로 말했 다. "흠. 알았어. 계속하게."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이 웃고나서 말했다. "고맙소, 노커. 그리고 그 이야기 외에 난 요즘 할슈타일 가문에서 찾 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소. 이런 이야기들을 조합해볼 때 간 단히 결론이 나왔소. 그 소녀를 찾으면 그 크라드메서를 조절할 수 있 다. 조금전에 후치군도 명쾌하게 이야기해준 바니 모두들 이해하실 줄로 믿겠소." 뭐, 이해되는군.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 했다. "난 할슈타일 후작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의 가문의 영화에 내가 관심 가질 까닭은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 그 알 수 없는 소녀 는 바이서스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희망이오. 드래곤 라자를 잃어 폭 주해버렸던 크라드메서가 아직껏 그 광폭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이 바이서스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는 차마 언급할 수도 없소." 우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따라서 그 드래곤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그 소녀가 꼭 필요하오. 물론 그 소녀가 아니라도 다른 드래곤 라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오. 따라서 최선책은 그 소녀를 찾아내는 일이오. 그 소녀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강력한 드래곤 라자일 수 있으니까." 카알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난 어제 저녁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소. 그 소녀는 찾아야 하오. 그런 데 난 성직자라 누구를 추적하거나 하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 지. 이런 노구를 이끌고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소녀를 찾아낼 수는 없다는 말이오." "노구? 허헛." 엑셀핸드는 피식 웃었고 하이 프리스트도 미소를 지었다. "노커여. 당신 보기엔 내가 어려보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늙은이라오." "알았어, 알았어." "이해해줘서 고맙소.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보니 여러분들이 생각나더군." 하이 프리스트는 우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6. 탑메이지……5. "생각해보니,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짐작이나 했다 는 듯이 수도로 찾아오시었소. 게다가 여러분들은 저 먼 웨스트 그레이 드에서 이곳까지 힘들이지 않고 달려온 인물들이오. 그리고 당신들은 도 착하자마자 닐시언 국왕을 놀라게 했소." 카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을 호위하기 위해 50 여명의 임펠리아 수비대원들이 집합했었다가 당신들의 거부로 그대로 해산되었다는 소문은 간단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소. 그걸로 미루어보아 여러분들은 국왕에게 대단히 솔깃한 어떤 제안이나 조언을 했었다고 보 는데, 내 짐작이 맞소?" 카알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고 하이 프리스트는 재빨리 말했다. "아, 꼭 대답할 필요는 없소. 난 국왕의 권한을 침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곧장 수도에 귀금속이 품절을 일으켰다는 것도 알아차렸소." 하이 프리스트는 두 팔을 조금 벌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의 대화에서, 여러분들은 여러 차례 나를 놀라게 함으 로써 나의 결심을 굳혔소." "그 결심이란, 저희들에게 그 소녀의 추적을 부탁하자는 말씀이십니 까?" "그렇소." "그 말씀은… 할슈타일 가문과 별개로 그랜드스톰에서 그 소녀를 찾고 싶다는 것입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차라리 그 가문을 돕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이 프리스트는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시오. 난 그 가문을 직접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 가문의 영광은 이제 충분하고, 그 댓가의 추가 유피넬의 저울대에 올라갈 준비 를 하고 있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는 찾아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바이서스가 위험해지니까. 그런 고충 끝에 낸 타개 책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소녀를 찾게 하자는 것이오." "그 말씀은?" 하이 프리스트는 싱긋 웃었다. "결국, 관건은 그거 아니오? 할슈타일 가문에서 그 소녀를 찾으려 드는 것도 바로 그 이유고. 크림슨 드래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힘." 하이 프리스트는 힘이라는 말을 강하게 발음했다. 사람들 모두가 번쩍 거리는 눈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그 얼굴들 을 모조리 둘러보며 말했다. "따라서 그 소녀를 찾는 자는 전무후무한 힘의 소유자가 될 수 있소. 적어도 당분간은 더 이상 강력한 드래곤 라자가 출현할 가능성이 적은 지금에 와서는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랜드스톰의 일원이 아닐 뿐 더러 할슈타일 가문의 일원도 아니오. 적어도 현재로선 누구의 세력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이지."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카알은 어눌한 듯하면서도 강하게 질문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난 여러분들이 그 소녀를 찾아주기를 바라오. 그리고 그 소녀를 드래 곤 라자로서 크라드메서에게 데려다주길 바라오. 그걸로 끝이오." "끝이라고요?" "끝이오. 그렇게 된다면 크라드메서는 인간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차별적인 파괴행위도 하지 않겠지." "그랜드스톰에는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그랜드스톰뿐만이 아니라 바이서스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 와 안정을 얻게 되는 거겠지." 하이 프리스트의 담담한 대답에 네리아는 눈을 반짝거렸다. 샌슨은 감 동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카알은 여전히 회의에 찬 표 정으로 질문했다. "저희가 아니라 할슈타일 가문이 그 소녀를 찾는다면?" "그래도 평화와 안정은 있을 것이오. 그리고 덧붙여 그들로서는 가문의 영화를 증대시키겠지. 하지만 그들은 찾지 못할 것이오. 그 소녀를 찾는 것은 당신들이 될 테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흰 그 소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하지만 지금 그 소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아무도 없소." "마법사에게 부탁하시면?" 카알은 말을 하다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 로저었다. "아, 저, 제가 보잘 것 없는 마법사이긴 하지만 에, 그래도, 그래도 마 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알님의 질 문은 마법의 기초 지식만 있으면 충분히, 얼마든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불가능합니다. 마법사는 마나를, 마나를 힘으로서 사용하는 것이지 의지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나는 넌 인텔릭입니다. 예. 넌인텔릭입니다. 힘은 언제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이 며 마법사가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마나는 사용 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러니까, 저,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빠른 말이라도 태우지 않은 사 람을 이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말을 이용해 어딘가로 가고 싶다면 말에 타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렇군요." "그리고 기수는, 기수는 말에게 지시를 해야 됩니다. 당연히 승마술은 알아야겠지요. 즉,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항상 최소한의 지식은, 기본 적인 지식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프나이델은 이 말을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마 퍽 중요한 말을 했나 보다. 샌슨과 나는 진지한 얼굴에 감명 깊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 다. 아프나이델은 두 호흡 쯤 후에 다시 말했다.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누군가를 찾으려면, 당연히 그 누군가에 대해 최 소한의 지식이라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구 별되는 특징, 그를 형성하는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얼굴이면 충 분합니다만, 빨강 머리와 10대 후반, 그런 특징만으로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긴 그렇군. 빨강머리에 10대 후반이면 제미니도 포함되겠는걸? 그러 나 카알은 집요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에게 질문했다. "위시(Wish)를 사용한다면?"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어렵습니다. 아무리 위시 주문이라 하더라도 기본 원칙은 깨트 리지 못합니다. 물론 저는 그런 고급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이 런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위시 주문이 그렇게 뭐든지 가능하다면 예전에 세상은 파멸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오?" "에, 이런 농담이 있지요. 정신병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 종이 무엇입니까?" 카알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고위 마법사지요." "고위 마법사는 위시 주문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미친 마법사들도 많지요. 그렇다면 미친 마법사가 위시 주문으로 세상을 끝내려 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아직껏 세상이 안전한 것 아니 겠습니까? 워낙 놀라운 마법이라 위시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그런 황 당한 소원까지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서 마법사들에게 부탁한다 해도 그 소녀를 찾을 수는 없소. 그렇 다면, 누구도 그 소녀를 찾을 확률이 높지 않다면 그 말은 동시에 누구 에게도 똑같은 정도의 확률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소?" 카알은 끝까지 버티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글쎄요. 달아나는 귀중품을 쫓으려면 레인저에게, 달아나지 않는 귀중 품을 쫓으려면 도둑에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리아는 그 말에 샐쭉 웃었고 카알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소녀를 찾을 확률이 똑같다면 문제는 찾는 이의 능력이겠지요. 보 다 능숙한 인물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난 전설이 될만한, 최소한 노래로 남을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 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노래라고하셨습니까?"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세 남자. 그 여행에서 그 들이 겪은 모험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이 경이로 가득차게 만드는군. 누군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될 필요가 있다면, 난 그에게 당신 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들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항상 훌륭하 신 분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카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륙의 사활이 걸린 문제요. 거절하지 마시오." 나와 샌슨도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차라리 국왕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왕명으로 각 영지나 도시의 시장들에게 붉은 머리의 소녀를 찾으라는 공고를 하면 되 지 않겠습니까?" 카알은 끈질기군. 좋아요, 카알. 끝까지 버팁시다. 그러나 하이 프리스 트도 꽤나 끈질긴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되오." "예?" "이유는 간단하오. 왕명으로 그 소녀를 찾으면 결국 공식적으로 찾는다 는 말이 되지요. 그럼 할슈타일 가문에서 이의를 제기할 것이오. 그 소 녀는 자기 가문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오."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렵게 질문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안됩니까? 결국 소녀의 가정을 찾아주 는 일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소녀도 행복한 일이고, 크라드메서도 진정시킬 수 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카알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퍼시발군의 말이 맞습니다. 바로 그 점. 할슈타일 가문에서 그 소녀를 왜 찾으면 안되는지를 먼저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저희들로서는 하이 프리스트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카알의 말을 듣고서야 아까부터 회담이 자꾸 빙빙 도는 이유를 깨 달았다. 하이 프리스트가 상호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크라드메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그 소녀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소녀가 할슈타일 가문에 의해 발견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다. 몇 번에 걸쳐 카 알이 질문하고 지금은 샌슨도 그 질문을 하고 있다. 왜 할슈타일 가문에서 그 소녀를 찾아내면 안되는가? 어차피 그 소녀는 할슈타일 후작의 딸이지 않는가. 그 소녀를 찾게 되 면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저 남 잘되는 거 못봐준다는 식으로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성직 자가 그런 식의 심술을 부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인데. 하이 프리스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군." 갑자기 하이 프리스트는 카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카알은 움찔했다. "예? 아니, 이것은? 아, 예. 말씀하십시오." 카알은 긴장된 표정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고 하이 프리스트도 여전히 카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뭐하는 거지? 두 사람은 서로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엑셀핸드가 의아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이봐, 눈싸움 하나?" 그러자 아프나이델이 엑셀핸드를 말리며 말했다. "지금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메세지 주문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카알님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뭐야? 거 참 무례한 다락귀신이군!" "중요한 말씀이라서 그러시겠죠." 다른 사람들도 그제서야 알아보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프리스 트는 뭔가 길게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고 카알은 자주 얼굴 표정을 바 꾸는 것을 봐서 이야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한참 후에 카알은 말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그 소녀를 찾으면 안되 는군요." 뭐라고? "이해하신다니 고맙소." 잠깐, 여기 이해하지 못한 사람 하나 있어! 설마, 카알. 그 소녀를 찾 는 일을 맡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카알은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 그 소녀를 찾으면 안되니, 결국 다른 누군가가 찾 아야 되는군요. 크라드메서는 진정시켜야 되고…" 뭐야? 설마?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이건 안돼. 난 얼굴이 벌겋 게 된 채로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신다면, 저도 한 마디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우와, 허, 이거 장난이 아닌데? 늙은 성직자, 늙은 드워프, 전사가 둘 (모두 이마에 '순종전사임을 보증함.'이 라고 써놓은 것처럼 생긴.)에다가 마법사와 도둑이 각각 하나, 그리고 독 서가 한 명까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독서가는 늙은 성직자를 바라보았고 늙은 성직자는 말했다. "말해보게, 후치군." "좋아요. 그럼 말씀드리죠. 전 반대입니다." "어? 야, 후치…" 샌슨이 놀라서 말했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손을 들었다. "이유를 말해보겠나?" 난 어금니를 꽉 물었다가 빠르게 말했다. "우린 할 일이 있습니다.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도 할 수 있다고 봐요. 아니, 인간 추적에 대해서라면 전문가들 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르타트에게 몸값을 가져다주고 우리 영주님 과 병사들을 되찾아오는 일은 우리의 일이며, 대신 해줄 사람은 없어요. 자기 생각만 하는 놈이라고 꾸짖으셔도 할 말은 없어요. 하지만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겁니다." 얼마나 빠르게 말했는지 내가 말해놓고도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하이 프리스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카알은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고맙네, 네드발군. 하지만 바로 그것, 우리의 일 때문에 내가 고민하 는 거라네." "무슨 말이죠?" "우리 일은 뭐지?" "몸값을 마련하는 거… 아!" 그랜드스톰에는 내가 들어갈만한 커다란 쥐구멍이 있을까? 인자하신 에 델브로이라면 날 위해서 그런 것을 준비해뒀을 것 같은데 말이야. 샌슨 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고 카알은 말했다. "수도에 보석이 떨어진 것은 결국 크라드메서가 활동기에 들어가기 때 문이지. 한달 후, 크라드메서가 활동을 개시할 때까지 크라드메서의 드 래곤 라자가 될 수 있는 소녀를 찾아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영영 보석 구 경하기는 힘들게 될 걸세." 아아아! 쥐구멍, 쥐구멍! 네리아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엑셀핸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문제의 요점을 파악한 것 같군." 하이 프리스트도 미소를 지었다. 카알은 왼쪽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 로 꼭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샌슨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그렇군요! 크라드메서를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보석은 구할 수 없 다? 그럼 찾아야 합니다! 그 소녀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카알은 결심을 굳힌 표정이 되었다. "퍼시발군. 우리 여유일자가 한달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카알은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희들이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로서도 간절한 일인 만큼 모자란 재주지만 그 소녀를 찾아보겠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대단히 커다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들은 반드시 해낼 거요."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유피넬이 저울을 만들고, 헬카네스는 추를 만들지. 유피넬은 우리들에 게 닥친 시련을 막기 위해 당신들을 이곳으로 출발시켰고, 헬카네스는 당신들이 안전하게 수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돌보았을 것이오." 카알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예…. 저희들의 여행에는 정말 많은 행운이 있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손을 강하게 휘저으며 말했다. "그것이오! 매처럼 날카로운 눈과 하루에 세 개의 산을 넘는 다리를 가 진 레인저라 하더라도 그 소녀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오. 그 소녀를 찾는 자는 유피넬의 저울대를 위해 헬카네스가 마련한 추, 바로 당신들 이오." 하이 프리스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흠.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 버리 면 간단한 일이지. 하지만, 젠장. 언젠가 카알이 말한 바 있지만 우리가 신의 뜻을 알 수 있나? 어쩌면 신은 그 소녀를 찾을 수 있는 레인저를 벌써 준비해 놓았고 우리는 그 소녀를 찾지 못한 채 좌절하는 역할일지 도 모르지. 하, 하, 하. 음… 그러고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우리가 레인저냐, 뭐냐? 어떻 게 붉은 머리와 10대 후반이라는 단서만 가지고 이 넓은 대륙에서 한 소 녀를 찾아내지? 차라리 신이 우리에게 그 소녀를찾는 역할을 맡긴 거라고 생각해버리 는게 낫겠군. 에구! 머리 아파! 난 신학은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을 테 다. ================================================================== 6. 탑메이지……6.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카알은 하이 프리스트에게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말씀하셨다시피 할슈타일 후작이 그 소녀를 찾는 것은, 결국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획득하는 것은 엄청난 힘이 되기 때문일 것 입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소. 그리고 아마 당신은, 내가 그랜드스톰의 힘으로 그 드래곤 라 자를 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으시겠지." 엑셀핸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알 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옳은 말이오." 그러자 엑셀핸드는 더 못참겠다는 듯이 카알에게 말했다. "이거 봐! 성직자를 못믿겠다는 거야?" 카알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카알을 구원했다. "노커여, 당신은 드워프고 저 카알은 인간이오. 드워프보다야 인간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지 않겠소? 더우기 저토록 현명한 인간이라면 말이 오." "뭔 소리야? 다락귀신 네놈은 성직자잖아? 신의 지팡이 노릇하는 놈이 드래곤을 부려서 대륙을 결딴내겠다는 거야, 뭐야?" "인간은… 원래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의 관심을 받는 생물이오." "나원 참. 이해를 못하겠구만 그래. 젠장. 그럼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산다는 거야? 성직자도 못믿는다면 누굴 믿고 살지? 부모, 자식이나 남 편, 아내도 서로 못믿겠구만, 그래." 카알은 얼굴을 붉혔고 하이 프리스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이 프 리스트는 카알에게 말했다. "카알. 신께 맹세하겠소. 당신은 지혜로우니 성직자가 신께 맹세한 것 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줄은 알고 있을 것이오." 카알은 감동한 눈길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의 지팡이고, 따라서 신의 걸음을 보좌하오. 지팡이가 그 쥔 자를 인도하지는 않소. 난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는 것으로 우 리 교단의 위세를 높이고 싶은 생각은 없소. 난 평화를 원하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들이 그 소녀를 찾거든, 자의로 그 소녀를 크라드메서에게 데려가시오. 그걸로 끝이오." "믿겠습니다." 간단하네? 허어, 참. 어떻게 저렇게 간단히 믿을 수 있는 거지? 뭐, 카 알이 결정한 일이니 정확한 판단이겠지. 하이 프리스트는 이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쩌겠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험가의 생활, 어차피 내일의 계획은 없겠지. 좋은 일에 동참해보고 싶지 않은가?" 길시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랜드스톰의 고용입니까? 얼마 내시겠습니까?" 네리아의 눈이 번쩍번쩍. 저건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이 프리스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델브로이 신전에서 영구적으로 공짜 치료에 힐링포션 무료." "좋군요. 껄껄" 길시언은 껄껄 웃었지만 갑자기 찢어지는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그 웃음 소리는 묻혀지고 말았다. "나이트호크 하나 필요 없으세요오!?" 아이고 맙소사. 나와 샌슨은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우리들의 이 유피 넬도 탄복할 조화로운 행동을 보던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가 네리아에게 질문했다. "소개해줄 만한 사람이 있소?" "예. 머리도 너무너무 좋고 용모도 아름답고 몸매도 끝내주며 날카로운 손가락들 사이에서는 항상 매서운 바람이 일어나는, 100년 쯤 지나면 전 설의 인물로 불려질 나이트호크가 현재에 하나 있어요." "우우, 후치. 등 좀 두드려줘." "내가 더 급해. 나부터 좀…" 하이 프리스트는 우리들의 반응에서 그 전설적인 나이트호크가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가씨 직업이 그거요?" "그 음산할 수도 있는 직업에 저의 매력으로 밝은 분위기를 더하고 있 지요." "샌슨… 남길 말은…" "나, 나한테 남기지 마… 나도 죽을 거야…" 네리아의 앙징스러운 주먹이 우리 둘을 좀 난타한 다음, 하이 프리스트 는 일행의 선택은 카알의 마음대로라고 말했다. 네리아는 카알에게 귀여 운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고, 그래서 카알은 속이 좀 불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막막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랜드스톰에서 제시하는 일이니만큼 정보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오?" "가능성이 있으니까 부탁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가능성은 아마 보 다 많은 정보에 기인할 테고."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고는 말했다. "있소. 하지만 그 정보는 할슈타일 가문 외에는 나밖에 모르는 일이오. 비밀을 지켜주시오." "알겠습니다." "좋소. 그럼." 하이 프리스트는 로브 자락 속에 손을 집어넣어 종이들을 꺼내었다. 그 는 그것을 카알에게 건네주었다. "당신만 읽어보시오. 그러나 당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정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소." "이것이 추적에 도움이 되는 그 정보입니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오." "알겠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지금 이 대륙에 불어닥칠지도 모르는 재앙에 대 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오. 가급적 입을 조심해주길 바라오. 바이서스는 현재 전쟁 중이며 그것만으로도 민심은 흉흉하오. 모두들 지혜로운 분들 이니 잘들 아실 것이오." 모두들 입을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아프나이델에게 말 했다. "노커님과 카알 일행은 어떻게든 그 드래곤 라자를 찾아야 되는 이유가 있소. 다른 분들, 길시언과 네리아양, 그리고 아프나이델씨는 어쩌시겠 소? 별 계획이 없다면 카알 일행을 도와주셨으면 하오. 그랜드스톰에서 는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것이며 만족할 만한 보상도 있을 것이오." 네리아는 진한 콧소리를 내었다. "카아아알 아저씨이이잉?" 카알은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도와주신다면 좋겠지요. 네리아양은 밤의 세계의 정보를 취급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 "키스해줄까요?" "아니! 그건 됐소." 아프나이델은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알님. 전 당신들에게 갚을 빚이 있습니다. 좋은 기분으로 허락하실 수는 없겠지만, 저도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욕 심의 문제도 있습니다. 전 스승을 찾아왔지만, 여러분들처럼 우수한 모 험가들을 따라다니며 제 자질을 키워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우린 별로 우수한 모험가는 아니오. 그리고 나야 별로 거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엑셀핸드는 간단히 말했다. "난, 그 드래곤 라자를 찾아야될 이유가 크지. 함께 해도 될까?" "당연합니다." 카알은 무조건 선선히 웃으며 허락했다. 에구, 사람이 너무 좋아.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 빼고 모두 한 가락 하는 사람들이니 상관없겠지 만. 그런데 그 때까지 길시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카알과 하이 프리스트는 길시언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길시언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난 모험가며, 모험과 보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갑니다. 하지 만, 동료의 문제. 어렵군요. 카알. 아실 겁니다. 내가 함부로 동료를 고 를 수 없다는 것을." 하이 프리스트와엑셀핸드,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우리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누군지도 모를 암살자에게 추적당 하는 사람이다. 그 작자는 길시언이 왕권에 위험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없애려 하고 있다. 그리고 길시언은 그 암살자들과의 충돌과정에서 우리에게까지 해가 올 것이 두려워 함께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카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에서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 소녀가 수도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수도에서는 도와주시겠군요." 길시언은 묵묵히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미소로서 길시언을 바라보 았다. 길시언은 피식 웃어버렸다. "모험가의 생활이 길었습니다만, 그 동안은 동료도 없는 좀 이상한 모 험가였죠. 이제 슬슬 동료를 맞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력하지만,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카알은 환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전하께서 함께 하신다면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전하가 아닙니다! 길시언, 길시언입니다!" "아, 예…" 하이 프리스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한 달 후 크라드메서가 활동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추적의 기간은 한 달로 정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더 힘들겠지. 이 어려운 여정에 오 로지 행운만이 함께할 거라는 식의 약속은 드릴 수 없소. 하지만 그랜드 스톰이 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드렸고,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 엇이든 돕겠소. 일행의 지휘는 카알이 맡으실 것이고, 카알의 판단에 따 라 모두들 움직여 주시오." 카알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대들에게 에델브로이의 축복이 함께 하길." 난 잠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이 프리스트는 내 시선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결국 하이 프리스트가 모아놓은대로 우리는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 목적은 어떤 소녀의 추적. 사실 어떤 소녀의 추적이라면 여행자나 상인 에게 의뢰하는 것이 나을 텐데. 하이 프리스트는 크라드메서가 웨이크닝 에 들어갔다는 소식과 우리의 도착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이 팀 을 구성시켰다. 그것 참… 그것이 에델브로이의 가르침인가? 수단은 사건의 옆에 있다 는?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연속으로 들어버려서 머리가 꽤 아픈데. 우리는 모두 그랜드스톰의 거대한 회의실 하나에 모여 있었다. 하이 프 리스트는 이 방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으며 그외에도 식사나 잠자리가 필 요하다면 얼마든지 제공하겠다고 했다. 우와! 여관비 굳었다! 그러나 카 알은 정중하게 여기서는 회의만 가질 것이며 숙식은 여관에서 하겠다고 말했다. 에이. 까마득한 천장에다 멋진 발코니에는 계단이 달려 다른 건물의 발코니로 이어져 있었고 아름다운 창문들로는 평범한 태양빛마저도 아름다운 찬양 으로 빛나게 만드는 색유리들이 끼어 있었다. 근사한 장소였고, 근사한 장소에 들어올 때마다 그러하듯이 샌슨과 나 는 좀 불편했다. 엑셀핸드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신전은 드워프의 손으로 만들어졌지." "아, 그렇습니까? 하긴 이런 건물을 만드려면…" 아프나이델은 적절하게 대답했고 그래서 엑셀핸드는 씨익 웃었다. 모두 가 자리에 모여앉게 되자, 난 먼저 조금 전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질문 했다. 카알은 내 질문에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가? 사건을 해결할 열쇠는 항상 사건의 바로 곁에 있다 는 것이 헬카네스의 법칙 중에 하나일세." 아프나이델이 그 말을 보충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건의 열쇠는 유피넬이 만들고 헬카네스는 그것을 숨긴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숨기는 장소는 항상 사건의 바로 옆. 왜냐하 면 그곳이 가장 찾기가 어려우니까." "그럼 하이 프리스트는 똑똑한 사람, 재주있는 사람보다는 우리가 바로 이 때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군요?" 내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도 있으시겠지. 허허. 이거 실망시켜드리면 어쩌나?" 그러자 엑셀핸드가 말했다. "실망은 무슨! 아직 시도하지 않은 일이라면 결과를 미리 걱정할 필욘 없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어디 하이 프리스트가 주신 문건을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시작할까요?" "그거? 자네가 읽게. 그 다락귀신 놈은 자네만 읽으라고 했잖은가." 카알은 조금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문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물러나 그곳에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 했고 네리 아는 카알의 어깨 뒤로 살며시 다가가다가 샌슨의 고함소리를 듣고는 입 술을 삐죽거리며 물러났다. 카알은 심각한 표정으로 문서를 읽어내려갔다. 문서는 대략 10여 페이 지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우리는 발코니로 나가서 신전의 건물 을 구경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더욱 머리 아픈 구조였다. 아무래도 수 련사들은 반드시 '에델브로이여, 길을 열어주소서!'라고 외칠 것 같은데 말이야. 왜 그런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지? 엑셀핸드는 다른 사람은 팔을 얹는 난간에다가 혼자 턱을 올려놓고는 말했다. (불쌍해라…) "그런데 말이야. 여보게, 드래곤 라자는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다른 뭔가 가 있는가?" 발코니에 모여있던 사람은 나와 길시언, 아프나이델, 그리고 엑셀핸드 였다. 네리아는 호시탐탐 카알이 읽는 문서를 훔쳐보려고 애쓰고 있었고 샌슨은 네리아를 막기 위해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엑셀핸드의 질 문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길시언이 대답할까, 아프나이델이 대답할까? 길시언이 입을 열었다. 오! "잘 모르겠는데요?" …싱거운 왕자님. 아프나이델이 대답했다. "그런 것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 이나 다른 드래곤 라자만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알아보지 못합 니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만이 알아본다고? 어떻게?" "그야 저로서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옛글에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난 글 좋아하지 않아. 노래라면 몰라도. 말해보게." "예. 그러니까 드래곤이 드래곤 라자를 알아보고는 '귀하는 드래곤 라 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군. 날 선택하겠는가?' 라고 말하지요. 그럼 드래 곤 라자도 말합니다. '당신을 선택하겠다. 당신은 날 선택하겠는가?' 또 는 이런 대목도 많지 않습니까? 드래곤 라자가 어느날 어떤 소년을 보고 서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졌군. 내가 널 돌봐주마.' 뭐 그렇게 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 뭐, 드워프는 확실하고, 엘프도 알아보지 못하는가?"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 말씀입니까? 글쎄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엑셀핸드는 날 바라보았다. "그 이루릴은, 델하파의 항구로 갔다고?" "예." "뭐하러?"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래? 흐음. 그 엘프 아가씨가 있다면 확실히 알 수 있을텐데." "2주일 후면 돌아올 거예요." "그런가?" 그 때 안에서 카알의 말이 들려왔다. "들어들 오십시오. 다 읽었습니다." ================================================================== 6. 탑메이지……7. 안으로 들어가자 카알은 서류들을 탁탁 추스려 모으고 있었고 네리아는 볼이 부어 있었고 샌슨은 득의만만한 표정이었다. 헷. 우리는 중앙의 테 이블에 몰려 앉았고 카알은 말했다. "이 서류의 내용을 공개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 서류가 할슈타일 가 문의 개인적인 비밀을 담고 있어서입니다. 알려지면 할슈타일 가문의 수 치가 되겠지요." "그런가? 그럼 됐네. 말하지 말게." 엑셀핸드는 간단히 대답했다. 우아아앙! 듣고 싶은데! 다른 집안의 비 밀이라면 흥미있는데 말이야.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몇 가지는 알려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이해 가 될 듯합니다. 다만 다른 곳에 가셔서 이 내용을 말씀하시지는 마십시 오. 귀족가에 있어 명예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네리아는 히죽 웃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지 않겠다 는 표정을 짓자 카알은 천천히 말했다. "되도록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할슈타일 후작이 훨씬 젊었던 시절, 그는 간혹 집안의 하녀를 침대로 끌어들였던 모양입 니다.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귀족가에서는 그다지 낯선 일도 아닙니다." 엑셀핸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카알은 설명했다. "하지만 할슈타일 후작은 그저 재미나 보려고 그랬던 것은 아닌가 봅니 다. 당시는 드래곤 로드의 약속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할슈타일 후작은 조금이라도 일찍 자손을 봐두고 싶었던 모양입 니다. 몇 년이 지나버리면 다시는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지 않을 테니까 요. 그런데 본처에게서는 자손이 태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할슈타일 후 작은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집안의 하녀들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 이죠." 네리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동물 같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아이고, 얼굴 붉어진다. 망할. 난 다시 그 후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흠. 그 양반, 젊었던 시절에는 그랬단 말이지? 카알은 말했다. "그런데 하녀들에게서도 자손이 태어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후작은 자 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고 거의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드래 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끌어모은다는 그 계획을 세우게 된 것 이죠." "흠, 그런데요?" "그런데 최근 할슈타일 가문에 이상한 여자가 찾아왔던 모양입니다. 아 주 낡은 옷을 입은 병색이 완연한 여자였지요. 그 여자는 할슈타일 저택 앞에 쓰러졌고, 후작가에서는 거지인 줄 알고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그 중 한 하인이 그 여자를 알아보았습니다. 과거에 그 저택에 있 었던 하녀였답니다." 우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후작가에서는 그 하녀를 안으로 옮겨서는 왜 돌아왔냐고 물었지요. 그 하녀는 후작을 불러달라고 말했답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고작 옛날에 그 저택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후작을 만나고 싶어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 하인들의 반응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하 녀가 놀랄만한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후작의 아기를 가졌었다는 말이지 요." "휘이?" 샌슨이 희한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흠.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할슈타일 후작은 놀라서 그 여자에게 달려왔고 여자가 병색이 완연한 것을 보고는 치료하려고 애썼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었지요. 어쨌든 후작은 그 여자의 임종을 지켰는데, 아마 그 때 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 혹은 아기는 살아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만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가 없군요. 후작과 그 여자 단 둘이서 나눈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죽고나서 후작은 갑자기 붉은 머리의 10 대 후반의 고아 소녀를 찾으라고 명령했답니다." "그게 그 여자가 남긴 유언인가 보군요." 아프나이델의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단지 붉은 머리의 10대 후반의 소녀라고 한다면…" "그리고,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네리아의 말이었다. 아프나이델은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렇게 찾는 것이겠죠. 붉은 머리의 10대 소녀를 먼저 찾은 다 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거 아닐까요?" 아, 저 이야기. 바로 어제 네리아와 나눈 이야기로군. 엑셀핸드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군. 조금 전 아프나이델 자네도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 라자를 알 아본다고 했지?" "그렇군요. 그런 방법으로 찾겠군요. 그렇다면 그 소녀가 수도에 있다 는 말입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소. 후작은 바이서스 곳곳에 사람을 보내어 붉은 머리의 10대 소녀인 고아가 있는지 알아보게 한 모양이오." 아프나이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무 막막하군요. 그 죽은 하녀가 정확하게 어디에 그 소녀가 있 는지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후작은 친분관계가 있는 상인들에게 부탁하거나 의 뢰하여 바이서스 곳곳에서 붉은 머리의 소녀를 찾아보라고 명령했던 모 양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식한 방법입니다만, 생각해보니 붉은 머리, 10 대 후반, 고아,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아이가 그렇게나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못돼도 백단위까지는 올라갈 텐데?" "그럴까요?"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엑셀핸드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말해보게." "이 문서를 작성한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수학을 퍽 좋아하는 모양 입니다.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 읽어드리고 싶군요." 카알은 문서를 뒤적거리더니 한 부분을 찾아내고는, 헛기침을 좀 한 다 음 말했다. "흠, 들어보십시오. 바이서스의 인구는 약 35만명 가량이다. 여기서 소 거법으로 그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내어보면, 먼저 여자이므로 인 구의 반인 17만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다음 10대 후반. 15세에서 20세까 지의 소녀로 가정하고, 전체 인구중 이 나이의 비율을 보면 대략 15% 정 도 된다. 허, 이 수치는 다시 조사해봐야겠군요. 정확한 건지. 어쨌든 17만명의 15%니까 25,500이 된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빨강머리? 그건 어떻게 하지요" 아프나이델의 질문에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머릿카락 빛깔이라는 것이, 희귀한 색깔도 있고 흔한 색깔도 있어서 이 부분에서는 좀 고민을 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문서의 작성자는 하루 종일 대로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의 숫자와 그 중 붉은 머리의 사람의 숫 자를 세어보았나 봅니다."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내가 보아도 말이 안되는 말이다. "하핫! 그게 말이나 되요?" "응? 왜 그러는가, 네드발군?" "그 말은 결국 대로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가지고 조사를 했다는 말이 잖아요. 여자들은 대로에 잘 돌아다니지 않아요. 그런데 필요한 확률은 여자들 중에 붉은 머리가 얼마나 되는지 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샌슨이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뭐 머리빛깔의 비율은 똑같지 않을까?" "에이, 말도 안돼. 그럼 남자와 여자의 키나 몸무게 비율도 똑같아야 되게? 게다가 그런 식으로 조사하면 백발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지? 필요한 비율은 10대 후반 소녀 중에서의 붉은 머리 소녀의 비율인 데. 한 가지 더. 지방마다 머리빛깔에 조금씩 차이가 날 수도 있잖아?"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지만 일단은 이 조건을 따라가보세나. 여자와 남자의 머리 빛깔 비율이 다르다 해도 극심하게 다를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 작성자도 백발 머리는 빼었겠지. 지방마다 다르다는 말은 일리가 있네만 바이서스 임펠은 나라 중앙에 있는 도시이고 많은 인구가 사는 곳이니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수치라고 볼 수도 있겠지." "흐으음… 그래서 얼마래요?" "이 작성자가 세어보길, 대로에 돌아다니는 사람 중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4% 정도라는데?" 네리아가 붉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말했다. "4%? 그렇게 적나?" "그런가 봅니다. 그런 식으로 계산해서 25,500 명 중 붉은 머리의 비율 을 계산해보면 1,020 명 정도가 나온답니다." 엑셀핸드는 숫자가 계속 나오자 머리가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원참, 그 놈의 숫자놀음. 그럼 끝났는가? 바이서스 내부에는 그런 조 건이 맞아드는 소녀가 1,000 명 쯤 된다, 이 말인가?" "아니,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고아라는 겁니다." 엑셀핸드는 머릿가죽을 매우 험악하게 긁적였다. "고아 비율은 어떻게 계산해?" "이것은 왕실 학술원에서 조사한 자료를 이용했나 봅니다. 요즘은 전쟁 때문에 고아발생률이 높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요즘 자료를 이용할 수야 없습니다. 찾는 아이는 10대 후반… 따라서 10년 정도 전의 기록을 사용 해서 알아본 결과 고아의 비율은 200명에 3명 꼴이랍니다." 엑셀핸드는 그만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쳤다.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은 빠르게 대답했다. "1.5%라는 말입니다." "그래? 그럼? 1,020 명이라고? 그 중에서는?" "15명에서 16명 정도 됩니다." 엑셀핸드는 그 굵직한 눈썹을 크게 꿈뻑거렸다. "그것밖에 안돼?" 어랏, 정말 그것밖에 안되나? 이 넓은 나라 안에 그 조건이 맞는 사람 이 고작 그거야? 사람들은 모두 의아쩍은 표정을 지었고 난 네리아를 바 라보았다. "헤에, 그럼 네리아도 이 대륙에 15명밖에 없는 사람들 중에 하나네요? 나이가 조금 틀리지만." "무슨 소리! 신비에 속하는 매혹적인 얼굴과 거의 범죄에 속할 만큼 아 름다운 몸매, 그리고 우아한 거동, 상냥한 마음씨, 그런 조건은 계산하 지 않았잖아? 그런 조건까지 따진다면 확률이 더 떨어질걸?" "새, 샌슨! 나, 남길 말은…" "나 죽었어. 사인(死因)은 기가 막혀서. 그러니 말 걸지마." 네리아에 의해 잠시 동안 우리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급박한 순간이 지나고나서 길시언은 말했다. "그럼 간단하군. 대륙을 이 잡듯이 뒤져서 그런 소녀를 15명 정도만 찾 아보면 된다, 이거군요?" 길시언의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계산은 순수하게 탁상공론이니만큼 실제와는 많이 다를 겁니 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수백명의 소녀를 찾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한 결 편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이서스를 그냥 돌아다니며 그런 소녀를 찾아야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일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 나 여유기간은 한 달입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말만 하면 고개를 끄덕이시는군. "하긴… 우리는 웨스트 그레이드에서 미드 그레이드까지 오는 데만도 한달 가까이 걸렸지. 더군다나 그것은 그냥 달린 것. 만일 마을이나 도 시마다 조건에 맞는 모든 소녀를 찾아보려고 한다면… 그건 너무 어렵겠 군." 사람들은 모두 취향대로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엑셀핸드가 가장 다이나믹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카알이 가장 점잖았지만 어쨌든 모두 골 치 아픈 표정이었다. 그 때 신비에 속하는 매혹적인 얼굴과 거의 범죄에 속할 만큼 아름다운 몸매, 그리고 우아한 거동, 상냥한 마음씨를 가졌다 고 주장하는 사람이 말했다. "거꾸로 하죠?" "무슨 말이오, 네리아양?" 네리아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 소녀의 과거의 조건 말고 현재의 조건으로 찾아봐요. 10대 후반의 소녀, 그리고 고아죠? 만일 살아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 에서 고아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 퍽 적어요. 내 경험상으로."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렇다 해도 뾰족한 방법이 있겠소? 의견이 있다 면 들려주시오." "일단은 새모이를 던지죠. 상회, 조합 등에다 물어보는 방법도 좋고요." "새모이를 던진다고요?" ================================================================== 6. 탑메이지……8. "왜 하필 나예요!" "넌 얼굴이 익었잖아. 불필요한 의심을 받지 않아." "사실대로 말해봐요." "사실대로? 할 수 없군. 넌 누가 봐도 위험해보이지 않아. 그 점에서 샌슨, 길시언, 엑셀핸드가 빠지고, 그 다음 남는 것은 카알과 아프나이 델인데, 에이. 카알이나 아프나이델은 그런 곳에 데려다놓으면 이상해. 말시장에 잘못 끌려나온 황소 같을걸?" "그 말에 찬성해야 된다는 것이 슬프군요. 하지만 혼자 가면 안되요?" "어머나? 여자를 그런 곳에 혼자 보내시려고?" "으커어억!" 그리하야, 나는 네리아에게 이끌려 또다시 그 고약한 장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망할. 다행히 이번에는 낮이라 머리 아프게 만드는 여인네들은 나와 있지 않 았지만 밤의 장막이 가리고 있던 지저분한 것들이 그대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건물 곳곳에 쌓여있는 뽀얀 먼지, 부서져내리는 지붕 끄트머리, 곳곳에 널려있는 쓰레기들과 으슥한 곳이면 어김없이 쌓여있 는 토사물과 배변들. 지릿한 냄새와 함께 자욱한 먼지들이 코를 간지럽 혔다. 나는 코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낮에 찾아가도 상관 없어요?" "상관없어. 수도에서 연중무휴인 사람들을 찾으라면 소방대원과 수도 경비대원, 그리고 도둑뿐이야." "소방대원?" "소방서, 불 나면 끄는 곳. 주로 마법사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래요? 마법으로 불을 끄나 보지요?" "응. 훈련기간 동안 대민봉사 차원에서 빛의 탑으로부터 파견근무를 나 가는 거지. 뭐, 빛의 탑과 시청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흐흠." 그것 참 볼만하겠군. 어디서 불이나 안나나? 응? 내가 이 무슨 망발을. 저번에 한 번 찾아왔던 장소지만 낮에 오니까 하나도 모르겠다. 난 그 저 네리아만 열심히 따라갔다. 네리아는 쉽게쉽게 찾아갔다. 뭐? 여자 혼자 이런 곳에 오면 안된다고? "으응. 사실 혼자서 들어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야." "나이트호크가 도둑을 무서워해요?" "무섭지. 안무서울 수가 없어."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쾌활하게 걸어갔다. 그래서 정말 믿기가 어려 웠다.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번에 왔던 그 주점이다. 건물들 사이에 묻 힌 듯이 처박혀 있는 주점의 모습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문은 닫혀있었 지만 네리아는 신경쓰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영업시간 아냐!" "까불지 마! 들어올 때부터 감시하고 있었으면서. 문 열어!" 응? 우리가 이 골목에 들어설 때 이미 이곳으로 연락이 갔을 거라는 말 인가? 그거 참 몸조심해야 되는 장소가 맞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을 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컴컴한 내부의 암흑만이 보였다. 네리아는 나에게 천천히 따라들어오라고 입모양으로 말하고는 들어섰다. 나는 속으로 다섯을 세고 따라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숙 해지고나자 홀 안에 늘어서 있는 테이블들과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의자 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무슨 밀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홀 에는 창문이 없었고 그래서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이 간신히 어둠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문 닫고 기대고 서." 나는 저번처럼 문 닫고 거기에 기대어섰다. 아마 퇴로를 확보해둔다, 뭐 그런 이유가 있겠지.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니 늘어선 테이블들 중에 하나에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 테이블에서만 의자를 내려 서 앉아 있었다. 그 바텐더와 문댄서였다. 네리아는 척척 걸어가서는 옆에 의자 하나를 내려서 남자들의맞은편에 앉았다. 문 쪽에 서 있자니 문댄서의 표정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의 입가에서 빨갛게 불타고 있는 파이프와 홀을 휘감아도는 연기의 모 습은 보였다. 문댄서가 말했다. "어쩌겠어?" "안돼." "빌어먹을, 장난치나? "그 후작과 이미 만나버렸거든." "만났다고?" "그래. 할슈타일 후작. 이미 만났었어." "젠장. 알았어." "의뢰가 있어." "돈." "외상으로 해줘." "웃기네." "넌 내가 슬로드 관뚜껑 덮은 값도 지불하지 않았어." "부탁한 적 없어." "슬로드의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문댄서는 다시 파이프를 피우기 시작했고 보다 짙은 연기가 홀을 감싸 고 돌았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뭐야?" "네가 부탁한 바로 그거야. 빨강머리 10대 소녀를 찾는 거. 수확이 있 어?" "없어. 젠장, 너만큼 하는 여자를 찾기가 쉽진 않아." "아니, 정말 빨강머리 소녀를 찾아본 적은 없어?" "찾아봤지. 없어." "좋아. 그럼 고용주가 누군지 말해주겠어? 그대신 후작가에서 그 소녀 를 찾는 이유를 말해주지." "이유? 딸을 찾는 데 무슨 이유." 그 말에 네리아는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흥흥흥, 문댄서, 넌 그짓 그만 두는게 좋겠어." 문댄서는 턱수염을 만지며 씁쓸하게 말했다. "천만에. 나만한 남자는 없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찾아와서 정보를 주는 사람은 드물지." "좋아.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에 대비해서 그 소 녀를 찾는 거야." "크라드메서가 뭐지?" "네 차례. 고용주는?"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청년." 난 잠깐 놀라서 입을 열 뻔했다. 넥슨 휴리첼이라고? 그 청년의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난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는 평이한 어 조로 말했다. "노리는 서류는?" "네 차례." "크라드메서는 언젠가 미드 그레이드를 끝장낼 뻔했던 크림슨 드래곤이 야." 바텐더가 움찔했다. 문댄서는 바텐더를 바라보았고 바텐더는 문댄서에 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문댄서는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였다. "장난이 아니군." "서류는?" "나도 몰라. 그냥 파란 표지의 책이야." "좋아. 그럼 넌 내게 빚졌어." "제길. 알뜰하시군." "나같은 마누라 만나야 너도 편할걸." 문댄서는 피식 웃었다. "같이 뛸 생각 없어?" "난 담배 피는 남자는 싫어. 빚 갚을 생각이나 해." "뭐야?" "빨강머리10대 후반의 소녀를 발견하면 즉시 내게 연락해줘." 문댄서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한참 후 문댄서는 말했 다. "그 소녀는 드래곤 라자겠군?" "할슈타일 가문의 인물이니까." "그렇다면, 그 소녀는 크림슨 드래곤의 드래곤 라자도 될 수 있겠군? 굉장한 일인데." "굉장한 일? 굉장하지. 하지만 허튼 생각은 하지마." "무슨 말이지?" "그 소녀를 찾지 못하면 미드 그레이드는 다시 쑥대밭이 된다는 말. 어 쩌면 바이서스가 날아갈지도 모르지." 문댄서의 파이프가 조금 흔들렸다. 바텐더의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찾는 거야?" "응." "바이서스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흠. 장사 안되는 일에 끼어들었군. 네리아. 너 요즘 정말 이상해지는데." "무슨 소리? 장사 안되다니. 세상이 평화로와야 나이트호크도 평화로운 거야." "알았어. 찾아보고 연락하지." "고마워. 밖의 녀석들 치워줘."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이런, 또 밖에 누가 있나? 정말이었다. 밖에 나와보니 그 때의 그 남자들이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 로 건물 벽에 기대어앉아 조는 듯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쳐다보 지도 않았고 네리아 역시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걸어가버렸다. 정말 마음 놓을 수 없는 장소로군. 난 후다닥 네리아를 따라갔다.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이 아닐까요?" "걱정마. 도둑들은 믿어도 돼. 응? 까르르. 해놓고보니 정말 웃기는 말 이네." "정말 웃겨요." "내가 걱정하는 사람들은 상인들에게 찾아가기로 한 길시언과 아프나이 델이야. 에구. 그 왕자님은 평소에도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 정보를 캐내 는 일은 제대로 하려나?" "아프나이델이 마법사니까… 뭐 믿어보시죠. 아니, 그것보다 카알과 샌 슨, 엑셀핸드가 걱정이예요." "흠. 하긴, 그러고보니 문제다. 카알 아저씨는, 흐응. 사람이 좋아서 위험하고 샌슨은? 샌슨이니까 위험하지. 엑셀핸드는 드워프니까 말도 못 하겠고." 우리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유니콘 인으로 돌아왔다. 각자의 정보수집이 끝나면 그 곳으로 모이기로 약속되어 있었 다. 유니콘 인에 도착하니 이미 홀에 카알, 샌슨, 엑셀핸드가 앉아 있었다. 모두들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카알 과 엑셀핸드는 껄껄거리고 있었고 샌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카 알은 우리들이 들어온 것을 보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어서들 오게. 갔던 일은?" "그쪽부터." "모험가 길드쪽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지. 퍼시발군이 아주 능 숙하더군. 자기 동생을 찾고 있다면서 모험가들에게 인정으로 호소하던 데?" "카알!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나와 네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허어? 샌슨이? 샌슨 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발, 그런 표정 짓지마. 쑥스러워하는 오우거는 악몽 중에서도 최악이야. 엑셀핸드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정말 보여주고 싶군! 눈뜨고 못봐주겠던데?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 로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을 붙잡고 물어보는 그 꼴이라니. 하늘 아래 하 나뿐인 혈육이어요. 제발, 어느 분이시든 빨강머리의 소녀를 아시는 분 없으신가요? 제발 좀 알려주시어요…" "엑셀핸드!" 샌슨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외쳤고 네리아는 숨 넘어갈 듯이 웃었다. "흐어, 허, 우헷헤헤헷! 틀림없이 무, 무서워서, 아니, 보고 이, 있기 가 역겨워서 마, 말해줬을 거야. 까르르륵!" 샌슨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모두들 날 동정해서 친절하게 말해줬다고!"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해보지는 않기로 했다. 사람은 밤에 좋은 꿈을 꿔 야 된다. 샌슨이 그런 거북한 장면까지 연출하면서 물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붉은 머리의 10대 소녀라는 것이 이렇게 희귀한 것인 줄은 몰랐다는 것이 엑셀핸드의 평이었다. "괴상하다고 말할 정도야." "그래요? 그거 신기하네. 이쪽에서도 전혀 없어요." "그것 참. 그럼 아프나이델과 길시언을 기다려야 되는군." 샌슨의 말에 네리아는 눈을 깜빡여 보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흐음. 카알 아저씨라면 알아차리실까? 재미있는 정보 가 있어요." ================================================================== 6. 탑메이지……9. "말씀해보시오?" "그러니까 말이죠. 저번에 봤던 그 문댄서 기억하시죠?" "그런데?" 네리아는 조금 전 문댄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줄줄 들려줬다. 도둑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누구던가? 어쨌든 네리아는 문댄서가 네리아를 그 소녀로 위장시켜 할슈타일 저택 에 침투시킬 계획이었으며, 그렇게 침투하는 목적은 어떤 책이며, 그 책 을 원하는 자가 넥슨 휴리첼이라고 말해주었다.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그 젊은이 말이오?" "예. 자,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 동안 나는 맥주!" "어, 나도 맥주!" 나의 황급한 주문에 카알은 히죽 웃더니 곧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맥주가 도착했고 네리아와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카알은 이내 말했다. "그 정도만 가지고 뭘 추측하기는 어렵구료. 그런데 넥슨 휴리첼이라면 까뮤 휴리첼의 조카가 되는 사람 아니오? 그리고 까뮤 휴리첼은 바로 크 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였던 사람이고." "그렇죠.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명예롭게 전사했냐고 물었던 사람." 나의 악의가 좀 담긴 대답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소. 넥슨 휴리첼씨가 할슈타일 가문에 있는 책을 노리는 이유가 뭔지, 그 책이 뭔지, 지금 당장으로서 야 아무런 추리가 되지 않는데." "그 책, 가져다 드릴까요?" 네리아의 말에 카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얼굴을 찌푸렸다. "훔친다는 말이오?" "담장 위로 날개짓을 한 차례 하는 거죠." "그런 불법적인 일까지 고려하고 싶지는 않소.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인 지 아직 확신이 서는 것도 아니고." "좋아요, 뭐. 하지만 이거 하나 알아두세요. 지금 위험한 것은 바이서 스 전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거. 내가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거 든요." 네리아의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고 그 사실은 명심하고 있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들어왔고 길시언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채로 들어섰다. 나는 의아해서 질문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안좋죠?" 길시언의 패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젠장. 말도 하기 싫어! 내 이 놈의 검을 당장!"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씹어먹겠다는 식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프 나이델은 의자에 앉더니 곧 킬킬거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길시언은 아프 나이델에게도 똑같은 시선을 보내었다. 오우, 안돼. 아프나이델을 씹어 드시겠다니. 아프나이델은 웃음을 참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참, 곤란하시겠습니다. 그 검." "됐소! 나 대장간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참으시죠. 어차피 귀금속이 없어 대장간에서도 마법검을 손질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프나이델의 말에 길시언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에 앉았다. 그 앉는 자세가 몹시 강맹하여 주인장은 의자의 생사를 우려 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되도록 길시언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차분히 설명 했다. "저희들은 상인들을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상거래 도중에 붉은 머리 의 소녀를 본 적은 없냐고요. 그러던 도중에 어떤 상인이 왜 찾냐고 물 어오더군요. 그래서 길시언께서는 그 소녀가 자기 어머니라고 대답했습 니다." "푸흐허아하하핫!" 길시언이 이를 북북 갈고 있었지만 엑셀핸드는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웃어젖혔다. 물론 네리아와 샌슨도 크게 웃었다. 아프나이델은 치밀어올 라오는 웃음을 아래로 끌어내리려 애쓰면서점잖게 말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어진 상인이 그게 말이 되냐고 묻자 길시언은 요 즘 아이들은 조숙하다고 대답하시더군요. 상인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며 두 번 다시 저희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우하하, 힉, 히꾹, 아아악! 나, 나 죽어, 히꾹, 수, 숨이 우하하! 마, 막힌다아아…" 네리아는 웃음과 딸꾹질과 비명을 동시에 꺼내어놓았다. 길시언은 이를 박박 갈았고 아프나이델은 길시언의 눈치를 보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다음 상인에게 들렀을 때는 그 소녀가 자신의 첫여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콰당! 기어코 샌슨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샌슨은 미친 듯이 웃느라 두 번이나 테이블을 헛짚으면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아프나이델은 침 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상인이 괴이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언제 그랬냐고 묻자 10년 전이라고 대답을 해서 그 상인은 우리를 아주 괴상한 놈들이라는 식으로 쳐다보며…" "그아악! 아프나이델! 이제 계속하시오!" "예에?" "아, 아니! 그만하시오옷!" 어쨌든 길시언이 그런 수모를 당한 보답인지, 어쨌든 아프나이델은 소 득을 가지고 돌아왔다. "소득이 있었다고요?" 카알은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예. 저 먼 웨스트 그레이드의 어느 영지에서 그런 소녀를 봤다는 이야 기를 들었습니다. 영지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소녀의 이름 은 제이미인지 젬인지 그랬… 왜 그러십니까?" "그건, 별로 대단한 소득이 못되는 것 같소." 카알은 힘빠진 표정으로 대답했고 나와 샌슨도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이고 머리야. 제미니가 이렇게 유명했었나? 세상이 정말 좁군. 카알은 우리 고향에 제미니라는 소녀가 살며 그 소녀가 붉은 머리인 것은확실 하다는 이야기와, 나의 악착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가 여기 있 는 후치 네드발의 레이디라는 이야기까지 몽땅 해버렸다. 아프나이델은 피식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소녀는 고아가 아닌가 보군요?" "부모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오." "그래요. 허, 이거 참.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렇게 드문 것인지는 몰랐 군요."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다. 붉은 머리 소녀가 이렇게 희귀 한 것인가? 카알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뭐, 우리는 오늘 처음 시작한 것이니 아직 수확을 기대할만한 단계는 아닌 것 같소. 지금까지의 방법이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나 오지 않았고, 따라서 계속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 어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붉은 머리의 소녀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즉각 출발하도록 하지요." 모두들 카알의 의견에 찬성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모두들 내일의 조사를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 로 했다.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도 우리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들은 유니콘 인에 방을 마련했다. 유니콘 인의 주인은 마법사로 보이 는 청년과 드워프가 같은방을 쓰겠다고 말하니까 매우 괴이하다는 눈초 리로 바라보았지만 괴이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을 내어주기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카알은 하이 프리스트가 준 서류를 검토하다가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 이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난 인간이 항상 이해하기 어렵다네." "무슨 말씀이시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로부터 관심을 받는 존재란 말은 항상 들어맞는다는 말이야." "모호한 말씀이네요." "닐시언 국왕 말일세. 길시언 전하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기뻐한 사람이 많았다 할 정도로 온화하고 학자적인 사람이었지. 길시언 전하도 그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아니, 관두세. 그런데 아프나이델 말이야. 저 젊은이, 우리도 아는 한 때의 과 오를 깨끗이 잊고 새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카알. 우리는 겨우 하루 동안 그를 봤어요." 모두들 방으로 올라가고 남은 것은 나와 카알뿐이었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워프를 속일 수 있는 악인은 없다네." "엑셀핸드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뭔가,네드발군?" 바로 이 질문 때문에 나는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계속해서 카알 옆에서 얼씬거리고 있었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아버지가 그 딸을 찾으면 안되는 이유 말씀해보세요." 카알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할슈타일 후작이 그 딸을 찾으면 안되는 이유 말인가?" "예." 카알은 빙긋 웃더니 커피를 주문하고는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며 말했 다. "하이 프리스트가 내게 은밀히 말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알면 안되는 이유라도 말해주세요." 카알은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평범한 저 얼굴. 저 얼굴 뒤에선 어떤 생각들이 움직이고 있을까. 나는 카알의 얼 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유가 될만한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그 딸을 찾는 것을 누가, 왜 말 린단 말이죠? 비록 할슈타일 후작이 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 딸을 찾 는 것은 아니라 할지는 몰라도, 그 어머니는 분명 마지막 순간에 할슈타 일 후작에게 부탁했어요. 뭐, 이건 내 추측이지만, 그 죽은 하녀라는 여 자가 할슈타일 저택을 찾아갔다는 말은, 결국 그 딸을 아버지에게 부탁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좋은 추측일세."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난 답답한 마음에 질문했다. "말씀을 그렇게 끊지 마시고 좀 들려주세요." "글쎄… 들려주기가 어렵군.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유가, 그러니까 하이 프리스트가 내게 들려준 그 이유는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이유라네. 그러니 확신을 담고 자네에게 들려줄 수가 없어. 물론 하이 프리스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내게 말해보요. 내가 정확히 판단해줄께요. 믿을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카알은 싱긋 웃었다. "안되겠네. 네드발군." "절대로 안되나요?" "그래. 이 일은 너무나 불확실한 근거에 기인하고 있어." "예?" "자네와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난 그 소녀를 찾고, 그리고 내가 알 고 있는 그 이유를 들려준 다음 그 소녀에게 결정하도록 맡기고 싶네. 그 이유라는 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것인지 는 그 소녀에게 판단하게 하고 싶네. 어쩌면 그 소녀는 그런 이유는 말 도 안된다고 할지도 모르지. 나도 믿고 싶지 않은 이유니까. 하지만, 그 렇게 해야겠네." "그런가요? 흠. 알겠어요." 아무래도 카알은 그 이유를 들려주지 않을 모양이군. 할 수 없지. 카알 의 판단이니까. 난 카알에게 인사를 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잠시 계단층계에 서서 홀을 내려다보았다. 카알은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그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층층계를 다 올라가 우리 방으로 들어섰다. 샌슨은 언제나와 마찬가 지로 침대 위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길시언은 갑옷을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대 속에서 검집을 부여잡고 악몽을 꾸듯이 이를 갈고 있었 다. 아마 꿈 속에서 프림 블레이드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둘 다 자는 모 습에선 왕자든 경비대장이든 다를 바가 없다. 난 머리를 휘저으며 발코니로 나갔다. 오늘 하루 정말 요상한 일이 일어나버렸군. 어쩌다가 이런 일에 말려들 었지? "나왔니?" 옆쪽을 돌아보니 네리아가 자기 방의 발코니에 나와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네리아는 혼자서 자겠군. 아주 고요하고 좋겠는걸. "안 잡니까?" 이번엔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프나이델이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흠, 세 개의 발코니에 나란히 여자, 소년, 청년 이로군. 잠시 후 그 모습은 여자와 소년, 그리고 청년으로 바뀌었다. 네 리아가 공중제비를 넘더니 내가 서 있던 발코니로 넘어온 것이다. 아프 나이델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멋있습니다." 나는 조금전 카알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프나이델, 당신 앞으로 뭘 할 생각이죠?" 아프나이델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했다. "나? 글쎄. 그 소녀를 찾는 것 말고 말이지?" 역시 마법사로군. 말이 잘 통해. 아프나이델은 팔짱을 끼었다가 나직하 게 말했다. "보다 수련을 쌓아야지. 그리고 소원이 있다면, 고금의 모든 마법을 다 익혀보는 것." "그게 원래 소원이었어요?" 아프나이델은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레너스시에서의 그 일." "괜찮아요. 지난 일인데." 네리아는 우리 둘의 대화를 잘 알아듣지는 못한 채 그저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 사위를 어지럽히고 있 다. 아프나이델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것도, 변명하자면 나의 욕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겠지." "대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그렇지. 그 소원을 이루기 너무 힘드니까 가짜로라도 그렇게 되어보고 싶었던 거지. 변명치곤 받아들이기 힘든 변명이지?" 아프나이델은 몸을 돌려 발코니에 팔꿈치를 기대고 멀리 바이서스 임펠 의 전경을 바라보며 내겐 옆얼굴만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런 자세로 말 했다. "그래서 시골로 내려가, 사이비 남작의 졸개로 들어가서 그 사아비 남 작의 부하들과 촌사람들을 겁주면서 뿌듯한 느낌을 받으려 했던 거지." "그렇게 비참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비참? 아니야. 비참하지 않아." 아프나이델은 지긋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았다. 다시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눈 앞을 어지럽혔지만, 아프나이델은 신경쓰 지 않았다. "비참하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태를 계속 유지해나가야 하는 거지. 하지만 난 나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이젠 다른 길을 걷고 있 어. 그러니 비참하지 않아. 모두 너희 일행 덕분이지." 난 잠시 반대쪽의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여전히 난간에 등을 기대고 팔꿈치를 댄 자세로 턱을 치켜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다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 "그 전에, 먼저 너희 일행에게 진 빚은 갚아야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냐. 카알씨에게 말했듯이, 이건 나 자신의 자기 단련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소녀를 추적하는 일이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으면 좋겠구나." 조용히 있던 네리아가 튕기듯이 한 마디 했다. "무서운 말을 하시네?" "미안합니다. 네리아양." "괜찮아요, 뭐. 욕심만이라면야 무슨 생각을 못해." 네리아는 가볍게 대답해버리고는 아까와 똑같이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아프나이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아프나이델, 그건 당신 이름입니까, 성입니까?" "응? 그건 왜?" "궁성 임펠리아에서 조나단 아프나이델이라는 수비대장을 만났어요."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자세 그대 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인지 잘 보이지도 않았 다. "희한하군. 내 이름이 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응." "그렇군요. 아, 이름이 같아서 조금 놀랐기 때문에 묻는 거예요." "응." 아프나이델은 그 자세 그대로 바이서스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도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한하군. 마법사가 몸을 구부려 대지를 바라보고, 도둑은 몸을 젖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군. 가짜 전사는? 나는 그저 똑바로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생각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 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그 딸을 찾으면 안되는 이유가 뭘까? ================================================================== 6. 탑메이지……10. 다음날도 우리는 제각기 흩어졌다. 아프나이델과 길시언은 상인들을 만 나러, 샌슨과 카알, 엑셀핸드는 모험가들을 만나러, 그리고 나는 또 네 리아에게 귀를 잡힌 채로 도둑길드라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오우, 망 할. "도둑 길드요? 에비!" "괜찮아, 괜찮아. 들어가는 사람 중에서 죽어서 나오는 것은 세 사람에 한 명뿐이야. 그런데 우리는 두 명이잖아." "지금 그거 안심하라고 하는 말 맞아요?" "아마 그런 것 같아." 네리아는 이런 식으로 날 겁주면서 도둑 길드로 끌고갔다. 수도의 거리 들도 이젠 제법 눈에 익는 것 같군. 돌아다닌지 얼마나 되었다고. 헤헷. 늦가을의 하늘은 묵직하게 대지를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맑았다. 이미 겨울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활기가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모두들 벌겋게 익은 코 를 가리고 하얀 김을 몰아쉬며 돌아다녀야겠지. 그래도 이 도시에는 낙엽이 날리지 않아 살풍경한 가을 풍경이다. 흐 음. 그래서 난 그 칙칙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고 있는 존재들 을 구경했다. 난 그렇게 지나가던 아가씨 하나를 구경하다가 네리아에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방법이 과연 제대로 된 걸까요?"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잖아.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국왕님께 부탁해서 각 영지나 도시로 붉은 머리 소녀를 찾아봐달라고 말하면?" "그건 이미 나왔던 계획이고 안된다고 하잖았어?" "그건 나도 기억해요. 왕명으로 그 소녀를 찾는 것은 결국 공식적으로 찾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된다면 그 소녀는 할슈타일 가문으로 가게 된다 는 것 때문이었죠?"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상하지 않아요?" "응?" "그 소녀는 어차피 할슈타일 후작의 딸이잖아요. 왜 아버지가 그 딸을 찾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어? 흠. 이상하네?" 좋아! 넘어온다, 넘어온다. 네리아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 괜찮아. 수도에 사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더 골치아픈 일도 많이 일어나. 하이 프리스트가 분명히 카알 아저씨에게 잘 설명했고, 카알 아 저씨도 찬성한 일이잖아? 신경쓸 거 없어." 윽. 넘어오다 말았다. 다시 한 번! "우리, 그거나 알아보면 어떨까요?" "응? 무슨 말이니?" "왜 할슈타일 후작이 자기 딸을찾으면 안되는가 하는 거. 궁금하지 않 아요?" "그거? 별로 궁금하구나?" 이게 무슨 뜻이지? 궁금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는 거야? 네리아는 턱 을 긁다가 기지개를 쫙 펴면서 말했다. "넌 그게 궁금하니?" "궁금해요."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내 얼굴을 곁눈질로 들여다보았다. "너도 아버지가 그리우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글쎄다. 하이 프리스트가 카알 아저씨에게 말할 때는 마법까지 써가면 서 은밀하게 말했잖아? 동료들끼리니까 괜히 비밀같은 거 물어보고 싶지 는 않아." 으윽. 네리아는 호기심도없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아요. 뭐." 네리아의 뒤를 졸졸 따라가니 이번에는 대로에 있는 상점가였다. 곳곳 에 벼라별 상점이 다 있었다. 네리아는 거대한 포목점과 건초상을 지나 조그만 구두가게로 접어들었다. 구두방? 흠, 희한한 장소네. 네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방 벽으로는 가위니 가죽이니 미완성구 두니 하는 것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채광이 조금 좋은 곳에서는 허 리가 굽은 노인네 하나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서는 두꺼운 손을 꿈지럭 거리면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앉았는데 온몸에 서 움직이는 것은 손가락뿐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손놀림마저도 그다 지 빠르지 않았고 아주 느긋하게 구두를 만들고 있었다. 마치 구두 만드 는 모습의 조각 같았다. 네리아가 그 앞에 서자 빛이 가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조각 같던 노 인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는 벗겨지고 이빨도 시원치 않은 노인이었는데 목소리는 카랑카랑해서 신기했다. "숙녀화는 안 만들어." 네리아는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 투로 벽에 걸린 구두 하나를 만지작거 렸다.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네리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등 을 돌린 채로 말했다. "요즘 유행은 어때요?" 노인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10년 전과 같지." "10년 전의 유행은 어땠는데요?" "20년 전과 같지." "10년 후의 유행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과 같지." "들어가도 되요?" "들어가봐." "고마워요, 쟈크." 저 할아버지 이름이 쟈크인가? 네리아는 만지작거리던 구두를 아래로 당겼다. 뭐지? 그 구두에는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네리아가 당기자 곧 구석진 곳에서 뭔가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리아는 나에게 손짓을 하고는 구석 벽쪽으로 걸어갔다. 네리아가 벽 을 밀자 벽은 문처럼 뒤로 밀려났다. 삐이걱. 허어. 신기하네. 난 바짝 긴장한 채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길다란 수직통로가 보였고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계단이 있었다. 난 발을 조심하면서 나선계 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것 참 신기하네. 구두방 벽 뒤에 이런 지하실이 자리하고 있다니. "여기가 길드에요?" "그렇지." "흠. 그럼 저 노인이 문지기예요?" "응. 한 마디라도 틀렸다면 내 구두도 저 벽에 걸리게 될걸? 쟈크는 사 실 구두 만드는 데는 소질이 없어." "헷?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말 암호예요?" "암호이긴 하지만 너 어디 가서 써먹을 생각은 하지마. 사실 내용은 중 요할 것이 없고 높낮이와 손동작이 더 중요하거든." "그렇겠군요." 나선계단을 다 내려가자 엄청나게 어두웠다. 지하인데다가 조명이 없었 으니까. 그러나 네리아는 별 주저하는 기색없이 문을 찾아 두드렸다. 똑 똑.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네리아는 턱을 세운 채 말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 네가 밤마다 꿈꾸는 여자." "…들어와요. 네리아." 정말 못말리겠군. 네리아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밝은 빛이 비춰져서 난 눈을 껌뻑였다. 별로 밝지는 않았지만 컴컴한 나선계단을 따라 내려 오느라 눈이 암순응되어버린 모양이다. 안은 그야말로 너저분한 지하실이었다. 한쪽에는 뭔가 잡동사니들이 잔뜩 들어있는 책장, 그리고 또다른 문이 보였고 문 맞은편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한쪽 벽에는 길다란 벤치 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한 남자가 잠들어 있는 것인지, 어쨌든 옆으 로 누워 있었고 몇 개의 술병이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남자는 몸 위에 모포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 하나가 책상 위에 앉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 다. 남자는 손에 대거를 들고는 책상에 던졌다 뺐다 하면서 우리를 바라보 았다. 탁, 탁. 무표정한 얼굴에 눈에 촛점도 잘 맞지 않는 시선이어서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네리아는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남자 에게는 시선도 보내지 않고 벤치에 누워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벤치에 누운 남자를 흔들면서 말했다. "일어나요, 아빠!" 아빠? 아버지라고? 난 놀란 눈으로 네리아와 그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 았다.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 병을 비웠어요. 앞으로 두 시간은 못일어날걸?" "내기할래? 내가 일어나게 한다면 어쩔래?" "10셀." "짠 놈. 좋아. 10셀이야." 그러더니 네리아는 벤치에 누워있던 남자의 모포를 잡아당겨버렸다. 그 러자 남자는 데구르르 굴렀다. 얼핏 보기에도 술에 무진장 절어버린 중 년 남자다. 턱수염에 술이 묻었다가 그대로 엉겨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 고 머리는 거의 정수리까지 벗겨져 있었다. 남자는 구르다가 그대로 멈 춘 아주 역동적인 자세로 코를 골아대었다. "푸우… 크르릉… 푸르릉…" 모포가 없어지니 코고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일단은 항상 그랬듯이 문을 기대고 섰다. 네리아는 그 정도로 일 어날 것은 예상치도 않았다는 듯이 당장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네리아 는 척척 걸어가더니 벽에 걸려있는 램프를 가져왔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맙소사, 어쩌려고요?" "깨우려고." 네리아는 모포에서 털실뭉치를 조금 뽑아내더니 남자의 신발을 벗겼다. 아, 맙소사.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 네리아는 대단히 직접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계획하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취한 남자의 발가락 사이에 실뭉치 를 꽂고는 불을 붙이고 후다닥 물러났다. 잠시 후, 술에 취한 남자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일어났다. "으아아악! 물! 물!" 그러면서 남자는 옆에 있는 병을 쥐어들었다. 안돼! 그건 술병이야! 누 가 말릴 새도 없이 남자는 술병을 발에 기울였다. 휴우, 다행이다. 술병 이 몽땅 비어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미친 듯이 발을 털면서 눈물을 찔끔거렸고 네리아 는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부턴 술병을 치우고 해야겠군." 불침을 맞은 남자는 그 목소리에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역시 너였군." "오래간만이에요, 아빠." "아빠, 아빠 하지마! 총각 혼삿길 막을 일 있냐?" 초, 총각? 오, 맙소사.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빠." 남자는 불안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콧소리를 내면 난 무지 불안해. 이번엔 또 날 얼마나 벗겨먹으려 고 왔냐?" 난 하마트면 옳소! 할 뻔했다. 네리아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성실한 나이트호크를 무슨 사깃꾼 취급하지 마세요." "사깃꾼은 문댄서 같은 놈이고. 일단 거기 앉아라."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의자를 두 개 가져왔다. 네리아는 내게 손 짓했고 그래서 난 좀 불편한 심정으로 네리아와 나란히 앉아서 벤치의 남자를 마주보게 되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는 날 보면서 말했 다. "이 아인 누구냐?" "동료에요." "바람잡이로도 못쓰겠고, 뭐에 쓰는데? 침대에서 쓰냐?" 그거 듣기 거북한 말이로군. 난 싸늘한 시선으로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 고 그러자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마주보았다. 마치 이 놈 보게? 하 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리아가 말했다. "주책 좀 부리지 말아요, 아빠." "원하는 게 뭐야? 아니, 그보다, 쟈크! 가서 물 좀 가져와라. 어흠." 중년 남자는 목이 칼칼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대거를 가지고 놀 던 그 남자는 책상 위에 있던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저 청년의 이름도 쟈크인가? 그 청년 쟈크가 물컵을 내밀고 돌아가려 할 때 네리아는 쟈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쟈크는 한숨을 쉬었다. "알뜰한 네리아로군요." 그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머니를 뒤져 10셀짜리 은화를 꺼내주었 다.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은화를 공중에 튕겼다가 받아내어 바지주머니 에 집어넣었다. 저 위에 구두장이 노인도 쟈크였고, 이남자도 쟈크고.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정면의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중년 남자도 쟈크 아닐까? 네리아가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쟈크." 내 생각이 맞군…. 중년 쟈크는 턱수염을 긁적거렸으나 곳곳에서 손가 락이 걸리자 포기해버렸다. "뭔데?" ================================================================== 6. 탑메이지……11. "어떤 사람을 찾아요. 밤새들 사이에 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뭘 찾는데?" "붉은 머리 소녀." "지금 당장 하나 가르쳐줄 수 있지." "나 말고." "왜 찾아?" "묻지 말고." 중년 쟈크는 이번엔 턱수염을 꼬기 시작했다. 원래 잘 꼬여있던 거라 아주 쉽게 엉망이 되었다. "상인들하고 모험가들 사이에 그런 걸 묻고 다니는 사람이 있던데." 네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래요?" "그래서 밤새들 몇명이 그 사람들을 따라서 유니콘 인까지 따라갔었 지." 나는 그만 놀라버렸다. 그럼 뭐야? 이 작자는 벌써 우리 일행을 다 알 고 있다는 말인가? 에구, 못말리겠군. 하긴 도둑들이 미행하는 것을 어 떻게 눈치챌 것인가. 네리아는 벌쭉 웃으면서 말했다. "헤. 아빠는 모르는게 없네?" 중년 쟈크도 히죽 웃었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큰 건이야?" "아주 큰 건이죠." "킥킥. 그럴 줄 알았어. 문댄서놈들도 그런 여자아이를 찾고 있더라 고." "역시 아빠네!" "아빠, 아빠 하지 마라니까!" "헤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데. 네리아는 겉으로 아주 기분좋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고 있었고 중년 쟈 크 역시 호인처럼 웃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난 흘깃 뒤쪽을 보았다. 청년 쟈크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무 표정한 얼굴로 책상에다 대거를 꽂았다, 뺐다 하고 있었다. 조금도 박자 가 틀리지 않는 기계적인 동작이다. 네리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어쩌시겠어요?" "무슨 건수야? 좀 들려줘." "이거 들으면 아빠 심장 터질텐데. 너무 큰 건이라서." "그럼 살살 말해." "바이서스가 통채로 날아가는 건수에요." 중년 쟈크는 히죽이 웃었다. 그리고 청년 쟈크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대거를 던졌다 뺐다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 왜 놀라지를 않는 거지? "바이서스가 통채로 날아가? 그것 구미가 당기는데 그래." "뭐죠, 아빠?" "응?" 네리아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손은 천천히 허리쪽 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긴장해서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의자에서 튕겨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해, 쟈크. 뭘 숨기고 있지?" 네리아의 말투마저도 바뀌어버렸다. 중년 쟈크는 킬킬거렸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말이야, 요즘 바이서스가 날아간다는 이야기 를 너무 많이 듣게 되는데." "무슨 뜻이지?" 네리아는 이제 쉭쉭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야하나? 지금인가? 중년 쟈크는 말했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삐이-걱. 한쪽 옆 벽에 달려있던 문이 열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 자 의자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 순간 뭔가 섬뜩한 빛이 눈 앞을 지나갔 다. 퍽! 대거였다. 책상에 앉아있던 청년 쟈크가 대거를 집어던졌다. 다행히 내 가 의자에서 튕겨져나오느라 빗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그 순간 네리아가 펄쩍 뛰어올랐다. "도망가, 후치!" 네리아는 날아오르며 그대로 청년 쟈크에게 뛰어들었으나 청년 쟈크는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러나 네리아는 책상을 밟고 다시 그를 걷어찼다. 청년 쟈크의 얼굴이 픽 돌아가는 순간, 나는 새로 나타난 자를 바라보았 다. 넥슨 휴리첼이었다. "이야아아압!" 누군가가 내 몸을 껴안았다. 뒤에서 중년 쟈크가 날 붙잡은 모양이다. 좋아, 기회다. 난 힘에서 밀리는 척 하다가 그대로 뒤로 돌진했다. "어억? 뭐, 뭐…" 쾅! 분명히 벤치와 중년 쟈크와 벽 중에 두 개는 박살났을 것이다. 어 쩌면 전부 다. 난 그대로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네리아는 옆에서 대거 를 뽑아든 채 청년 쟈크를 상대하고 있었다. 넥슨 휴리첼은 잠시 네리아를 보다가 날 보았다. 그는 내가 바스타드를 뽑아든 것을 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그 역시 롱소드를 뽑아들었 다. "구면이군. 그거 내려놔라." 난 쌀쌀맞게 웃어주고는 그 대답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난 오른발을 들 었다가 힘껏 내리밟았다. "으아아아아!" 중년 쟈크는 내게 다리를 밟히고는 기절할 듯한 비명을 질렀다.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린 놈이… 안되겠군." 순간 넥슨은 오른발을 크게 내딪으며 베어들어왔다. 감각적으로, 무조 건 튀어나가는 나의 기술은, "일자무시익!" "크어억!" 넥슨은 팔목이 부러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롱소드를 부러뜨리지 않은 것은 손목이 부드러워 그렇겠지. 그건 좀 있다 칭찬해줄 테니까 삐지지 말라고. 제기랄, 내가 기선을 잡았을 때 끝낸다. 난 풋나기니까 반칙을 써도 용서해줘! "먹어랏!" 난 바닥에 구르고 있던 술병을 강하게 걷어찼다. 술병이 박살나며 도자 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겼다. "쾅쾅- 파아악!" 넥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목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 나? 누구 맘대로. 난 기름젖기로 들어갔다. "우와자자자잣!" 뭐야? 넥슨은 빙긋 웃으며 롱소드를 앞으로 내찔러왔다. 해보겠다는 거 냐! 그런데 넥슨의 롱소드가 마치 샌슨의 그것처럼 빠르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상하게 손목에 힘이 빠지며 내 바스타드는 전혀 엉 뚱한 곳으로 튕겨나고 말았다. 나는 허리가 끊어져라 뒤로 튕겼다. 내가 있던 장소에 바로 넥슨의 검이 찌르고 들어왔다. 우와! 죽을 뻔했어! "크어억!" 순간 나와 넥슨 사이에 청년 쟈크가 쓰러졌다. 나와 넥슨은 둘 다 놀라 서 뒤로 물러났고 네리아가 재빨리 내 쪽으로 뛰어들었다. 자세히 보니 청년 쟈크의 허벅지에 대거가 꽂혀 있었다. 청년 쟈크는 피가 벌컥벌컥 쏟아지는 허벅지를 움켜쥐고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 으윽!" 네리아는 사나운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난 순식간에 바스타드를 빼앗겼다. "네, 네리아?" "자식아! 튀라고 그랬잖아!" "도망가게 하려고 데려왔어요?" "넌 어쩌면 그렇게 날카로운 데가 있냐." 네리아는 헛소리를 하면서 바스타드를 빙빙 돌렸다. 우와? 저건 우리 고향에서 터커나 해리가 보여주던 그건데? 네리아는 허리를 부드럽게 돌 리며 바스타드를 기상천외하게 돌려대었고 넥슨은 그걸 보며 피식 웃었 다. "설익었어. 아가씨." "뭐야?" "차라리 저 소년에게 맡겨." "알았어." 그 말 듣자마자 네리아는 몸을 돌리더니 내게 도로 바스타드를 돌려주 었다. 뭔가 바보가 된 느낌이 드는데?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바스타드를 받아들었고 네리아는 다시 몸을 돌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네리 아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넥슨은 기겁하며 옆으로 움직였고 빗나간 대거는 벽에 부딪히며 날카로 운 소리를 내었다. 탱! 넥슨은 이를 갈면서 롱소드를 앞에 곧추세웠다. "성미 사나운 아가씨로군." "책임지라고 안할 테니 고맙다고 그래." "고마워." 네리아는 내게 등을 보인 채로 뒤로 훌쩍 뛰어 내 옆에 섰다. 정말 가 벼운 몸이다. 그녀는 품에서 또 대거를 꺼내며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나 물러날 테니 후치가 공격해. 저 자식 빈 틈만 보이면 찌를 테니까 마구잡이로 공격해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등만 보이면 던질게." "그거… 너무 솔직한 이야기군요." "그게 내 매력이야." 넥슨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난 폭력에는 관심없어." "자기가 질 확률이 높을 때는 누구나 폭력에 관심 없어져." 네리아는 낭랑하게 대답했고 넥슨은 코를 씰룩거렸다. 거 참, 네리아. 정말 축복받을 입을 가지셨습니다, 그려? 넥슨은 두 손을 들어보이고는 롱소드를 도로 꽂았다. "좋아, 졌어." "됐어! 후치, 저 놈 빈손이야, 쳐!" "농담이죠?" "재밌잖아." 넥슨은 황당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보다가 아에 의자를 하나 끌어와 자 리에 앉아 버렸다. "이야기 좀 하지." "조금 있다가. 후치. 저 청년감시해. 코를 풀 때도 허락을 받아." "들었죠?" "알았다." 넥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앉은 채로 팔짱을 끼었다. 나는 바스타 드를 뽑아든채 그의 뒤에 섰다. 엉뚱한 활극은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네리아는 곧 익숙한 동작으로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책장에 걸어가서는 붕대와 약병들을 꺼내어왔다. 그녀는 청년 쟈크와 중년 쟈크를 일으켜 벤치에 앉혔다. 네리아는 청년 쟈크의 허벅지를 붕대로 감싸주면서 말했다. "넌 아직 안된단 말이야. 섣불리 덤비지 마. 그러니까 다치잖아. 명성 이 그렇게 쉽게 생기는 거 아니란다." "졌어. 젠장. 누님을 찌르면 나도 깃발 좀 날릴 텐데." "5년이나 10년쯤 후에 그런 시도를 해봐." 네리아는 상냥하게 말하고는 붕대 위를 찰싹 때렸다. 청년 쟈크는 자지 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중년 쟈크는 좀 심각했다. 내가 밟아버린 다리가 아무래도 부러진 모양 이다. 중년 쟈크는 파리한 얼굴로 누워서 씩씩거렸다. "젠장, 이 나이에 뼈 부러지면 잘 아물지도 않는데." "내가 왜 이 아이 데리고 다니는지 알겠죠? 메롱." 네리아는 혀를 낼름거리며 중년 쟈크를 약올렸다. 중년 쟈크는 신음소 리를 터프하게 내었다. 청년 쟈크까지 힘을 합쳐서 잡동사니들 사이에 서 부목으로 쓸 것을 가져와 다리에 대고 묶어 두었다. "내일은 왠 일로 신전에 다 가겠네?" 네리아는 계속해서 중년 쟈크를 약올렸다. 중년 쟈크는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으윽. 제기랄. 신전에 한 번 가면 한 달 동안 재수가 없는데." "다리 안 고치면 한 달 동안 못 움직일걸?" "으으으윽!" 중년 쟈크는 그런 한숨을 쉬며 날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헹, 쏘아 봐서 어쩌겠다는 거야? 나는 시익 웃으며 그 눈길을 받아내었고, 그러자 중년 쟈크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정말 네가 데리고 다닐만한 꼬마로군." "난 눈이 높다니까."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네리아의 치료 과정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과 쟈크, 둘이 잘 아는 사이인가?" "잘 알지. 적어도 당신보다는 안 지가 더 오래되었을걸?" "그래? 흠. 쟈크가 당신 칭찬을 많이 하더군." "용모가 빼어나다고? 기술이 엄청나다고?" "알뜰하다고." 난 웃음소리를 기침소리로 감추려했지만 아무래도 내 기침소리는 웃음 소리에 가까웠나 보다. 네리아는 볼이 불룩해져서 쟈크를 노려보았다. 넥슨은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난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야. 그를 좀 치료해주고 싶은데." "그래? 지금은 안돼. 있다가 우리 가고나면 해." "치료는 빠를수록 좋은데." "아픈 사람은 나 아냐. 그리고 응급처치를 해뒀으니 바로 쓰러질 일도 없어. 누굴 뭘로 보는 거야? 난 트라이던트의 네리아야." 난 도저히 못참고 한 마디 해버렸다. "알뜰한 네리아…" "그만 둬!" 넥슨은 히죽 웃더니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좀 할까?" "해봐. 들어주지." "내 이야기는 이거야. 들어와." 무슨 말이야? 바로 그 때였다. "쾅!" 엄청난 소리가 나며 우리가 들어왔던 문이 박살날 듯이 열렸다. 그리고 는 뒤돌아볼 틈도 없이 뒷머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끄으윽…" 이게 뭐지? 난 정신이 가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쓰러지면서 보니 문 에서 뛰어들어 날 후려쳤던 그 누군가가 이제 네리아에게 덤벼드는 모습 이 보였다. 저건 누구지? 아, 안돼. 네리아를 건드리지 마. 이, 이런… 눈 앞이 캄캄해졌다. ================================================================== 6. 탑메이지……12. "으아아악!" 쾅! 별이 보인다. "꺄아아악!" 으윽! 뭐야? 퍽! 오, 맙소사. 내 배! "그 발 못 치워요! 콜록콜록!" 네리아는 던져진 주제에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는 내 배 위에 완벽한 동작으로 착지를 했다. 네리아는 서둘러 비켜주었 고 난 드러누운 채 배를 쓰다듬으며 위를 보았다. 천장에는 하얀 사각형이 보였고 거기에 쟈크들과 넥슨의 얼굴이 보였 다. 그리고 그 옆으로 마지막 남자, 우리 뒤에서 우리를 덮쳐 기절시킨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망할, 바로 넥슨을 뒤따라 다니던 그 마부였다. 저 엄청난 친구는 넥슨의 말을 듣자마자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면서 내가 돌아볼 틈도 없이 곧장 내 뒷통수를 후려친 모양이다. 그리고나서 네리아도 어찌어찌 붙잡은 모양이다. 솜씨가 상당한 모양인데. 그리고는 우리를 이곳으로 집어던진 것이다. 여기는 우리들이 있던 방 아래의 또 다른 방인 모양인데 꽤 거대했다. 네리아는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따로따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위에서 중년 쟈크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명은 비석에나 새겨둬." 네리아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야이…" 야이, 다음부터 나온 네리아의 말은 몹시 험악했다. 난 귀를 막고 싶어 졌다. 왠지 들었다간 수명이 짧아질 것 같은 그런 욕설들이었다. 기상천 외한 욕설도 있었고, 그 재치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욕설이 있는가 하 면,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저런 욕설을 하는가 싶은 욕설들도 있었 다. 중년 쟈크는 히죽거리며 천장의 문을 닫아버렸다. "머리 좀 식히라고." 네리아는 문이 닫히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한참 동안 고래고래 욕설을 퍼붇다가 내가 질릴 때 쯤 멈췄다. "끝난 거예요?"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리아는 주위를 더듬거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후치?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곧 네리아의 손이 더듬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잠시 만지 더니 곧 주위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뭘 찾아요? 불?" "응." "감옥에 무슨 조명 장치가 있을까요?" 컴컴한 허공에 대고 말하려니 기분이 퍽 이상했다. 숨이 막히는 기분도 들었고.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덜거럭거렸다. 덜거럭거려? 무슨 물건들이 있다는 말이네? 난 허리를 굽혀 바닥을 짚어보았다. 네리 아가 말했다. "목소리 별로 안울리는 것을 봐서는 제법 넓은 곳인데." 흠, 정말 그런데? 난 벽에 손을 짚은 채 움직였다. 뭔가 손에 만져지는 물건들이 있었지만 도통 뭔지 모르겠다. 아무리 만져봐도 무슨 지푸라기 같은 것 밖에 안보이는데? "지푸라기가 있는데, 됐어. 잠깐만." 네리아는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지? 그런데 잠시 후 캄캄한 암흑 속에서 뭔가 불꽃이 팍 튀겼다. 동시에 치이익! 하는 마찰음도 들 렸다. 그리고 조금 후, 주위가 환해지며 손에 지푸라기를 꼬아서 막대기 처럼 만든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그 지푸라기 막대를 횃불 처럼 들고 있었다. 난 웃으며 물었다. "부싯돌이 있었어요?" "응. 여기 대거 손잡이가 발화 장치야. 어디 보자… 일단 지푸라기 좀 더 모아." 그러고보니 바닥에는 짚이 많이 깔려 있었고 주위는 꽤 넓은, 무슨 창 고 같았다. 나는 재빨리 지푸라기를 모아 꼬아대었고 잠시 후 꽤 굵은 막대를 만들 수 있었다. 네리아는 거기다 불을 옮겨붙이고는 말했다. "창고 같은데? 잠깐, 이 옆에 건초상이 있었지?" "아, 그럼 여긴 건초상의 지하 창고인가요." "그렇겠군. 아마 두 건물을 몽땅 쓰고 있나 보군. 에이, 젠장! 불조심 하지 않으면 타죽겠군." "짚은 별로 없군요. 괜찮겠어요." 네리아는 투덜거리며 주위의 벽들을 조사했다. 나도 주위를 조사해보았 다. 잠시 후, 원래 문으로 쓰였을 법한 장소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곳 은 문짝을 떼어내고 벽돌로 막아두었다. 그 외에 다른 출구는 하나뿐이 었다. "그럼 나갈 곳은 저 위의 트랩 도어 뿐이네?" 나는 느긋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일단 불 끄죠. 볼 건 다 봤으니까." 네리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연하네?" "좋잖아요. 이건 하나의 계기죠. 우리가 그 붉은 머리 소녀를 찾기 시 작하자마자 이렇게 빨리 무슨 조짐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에헤. 하긴 그렇네." 네리아는 불붙은 지푸라기를 흔들어 꺼버렸다. 음. 너무 캄캄한데? 네 리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네리아는 내 손을 쥐었다. 나는 네 리아의 손을 마주 쥐어주었다. 나와 네리아는 서로 어깨를 마주대고 벽 에 기대어 앉았다. 네리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는 말했다. "넥슨은 왜 우리를 붙잡았을까?" "쟈크가 아니고요?" "쟈크는 멍청이야. 아마 넥슨의 의뢰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런데 진짜 아빠?" "무슨.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런 것 같더군요." "그런데 넥슨은 왜 우리를 붙잡았을까?" "내 생각을 듣고 싶은 거예요?" "응." "들려드리죠. 내 생각엔! …모르겠어요." "왜 모를까?" 네리아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투로 그냥 계속해서 질문했다. 나도 캄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자니 뭐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좋아. 지금까지 의 상황을 좀 정리해보자.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계기로 하게 되는군. "으음. 좋아요. 먼저, 넥슨 휴리첼의 삼촌이 되는 까뮤 휴리첼은 크라 드메서의 드래곤 라자였지요. 하지만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크라드 메서는 발광해버렸었죠. 아마 그것은 가문의 커다란 수치였겠죠." "좋아. 계속해." "아! 그렇군. 이제 알았어. 왜 백작 쯤 되는 사람이 우리 영지에 파견 근무를 나왔는지." "무슨 말이니?" "넥슨 휴리첼의 아버지인 그, 이름이 뭐더라? 아, 로넨 휴리첼. 그렇 지. 그 사람이 우리 영지에 왔었어요.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포함될 캇셀 프라임을 호위해서 왔었죠. 그거군요. 아마 로넨 휴리첼은 가문의 명예 를 되찾기 위해 웨스트 그레이드까지의 파견 근무를 나온 모양이군요." "조-금 단정적이지만, 뭐 계속해봐. 재미있네." "예. 그날 아침의 질문. '아버지는 명예롭게 전사했느냐?' 는 질문, 기 억나죠?" "흠, 맞아떨어진다. 가문의 명예란 말이지?" "그리고 그는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니까, 어쩌면 그랜드스톰의 정보를 알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랜드스톰의 정보, 그러니까 할슈타일 후 작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인 붉은 머리 소녀를 찾고 있다는 정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확실히 알았을 거예요. 문댄서의 말 기억나죠? 넥슨 휴리첼은 할슈타일 가문의 어떤 책을 노리고 있다. 누군가를 그 붉은 머리 소녀로 위장시켜 그 집안에 들여보내어 책을 홈쳐오게 하려고 하고 있다." "흐음. 그렇지." "그러니까 분명히 넥슨은 할슈타일 가문에서 붉은 머리 소녀를 찾고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옳지, 옳지, 잘한다! 그래서?" "그래서!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죠." 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네리아의 한숨 소리가 잘 들려왔다. "에휴, 그럼 있다가 물어보자. 아마 취조를 하겠지." "그렇겠군요." "자자, 자!"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내게서 떨어져갔다. 잠시 후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푸라기 틈새로 들어가버린 모양이다. 난 차가운 돌벽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넥슨 휴리첼.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끼어드는데. 그건 그렇고 골치 아프게 되었군. 우리는 도둑 길드로 오는 참이라 행 선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은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하겠지만 우리를 찾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 재주로 여기 서 빠져나가야 되는군. 하지만 빠져나가는 것은 천천히 생각하자. 아무래도 넥슨 휴리첼은 뭔 가 많은 정보가 나올만한 사람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아까는 네리아를 안심시키려고 말한 거지만, 그래도 이것은 분명히 기회다. 난 벽에 머리를 기댄채 소르르 잠이 들었다. 컴컴하니까 잠자기에 딱 좋다. "뒤에서 말하지 마." 무슨 말이야? 이런,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르겠군. 위아래의 감 각도 없고 좌우도 구별되지 않는다. 잠시 균형이 잡히지 않아 앉은 채로 그대로 옆으로 넘어갈 뻔 하다가 간신히 땅을 짚었다. "뒤에서 말하지 마! 날 욕하지 마!" "뭐,뭐야? 네리아?" 난 정신을 차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캄캄한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네리아!" 네리아가 있는 쪽이 어디더라? 이런 방향 감각도 오지 않는데? 난 일단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허둥지둥 기어갔다. 차가운 지하실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무릎이 땅에 부딪히니까 엄청나게 아팠다. 와, 빛이 보인 다! 윽, 눈에 불꽃 튀는 거군. 망할 벽쪽으로 기어갔어. 난 눈물을 찔끔 거리며 허둥지둥 방향을 바꿔서 기어갔다. 잠시 후 짚더미가 만져졌다. 어디 보자, 네리아는 분명히 짚더미 속에 들어가서 잠들었었지? "죽일 거야!"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우와, 정신 없어. 네리아의 고함소리가 갑자기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온 것이다. 난 놀라서 무턱대고 손을 내밀었 다. 뭔가 부드러운 것이 만져졌다. 네리아의 어깨인 것 같았다. 난 네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네리아, 네리아!"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저리 가! 안돼, 다가오지마! 저리 가! 안돼!" 네리아의 손이 마구 휘저어지면서 나는 몇 번이나 가슴, 턱, 뺨을 두드 려맞게 되었다. 다행히 어두워서 타격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네리아앗!" "누구야… 제발… 날 건드리지 마… 으흑." 뭐야, 이건? 우는 건가? 네리아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고 주먹질은 멎었 다. "네리아, 나예요! 후치라고요!" "안돼… 제발… 으흐흑."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끅끅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였다. 이게 도대체 뭐람. 난 조금 더 손을 뻗쳐 네리아의 팔 이 있을만한 곳을 찾았다. 그런데 손이 닿은 곳은 무언가 말랑거리며 축 축한 곳이었다. 네리아의 입술? "…후치니?" 윽. 맞군. 말소리가 나올 때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이 손가락에 닿았다. 갑자기 뭔가가 뻗어오더니 내 손을 옆으로 치웠다. 네리아의 손인가 보 다. "네리아, 괜찮아요? 예? 나에요." "후치구나… 여긴 어디지?" 미치고 팔짝 뛰시겠네. "어디기는요. 도둑 길드의 지하 감옥이죠." "그것 말고. 여기가 어디지?"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것 말고? 그것 말고라니, 그럼 다른 뭔가가 더 있 나? 네리아는 다시 흐느끼듯이 질문했다. "여긴 사람이 있어?" "두 명 있는데요." 네리아는 갑자기 악에 받힌 목소리가 되었다. "사람 말이야! 사람! 아무 것도 없어! 캄캄해! 목소리뿐이야! 뒤에서 말하지 마! 내 눈에 보이지 않잖아!" 난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젠장. "난 당신 앞에 있어요."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구." "손을 이리 줘요." 네리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난 네리아의 손이 있을만한 장소를 더듬었다. 조금 후, 작은 손이 만져졌다. 난 그 손을 들어 내 볼에 가져 왔다. 네리아의 손을 내 불에 가져다 누르면서 말했다. "만져지죠?" "…응." "죽은 자도 아니에요. 따뜻하고, 맥박이 뛰고 있지요?" "…으응." "말할 때 내 볼의 움직임이 느껴지죠?" "…으응." "난 당신 앞에 있지요?" "…응." 난 네리아의 손을 놓았지만 네리아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네리아는 양 손을 올려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난 그녀가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네리아는 손을 내리면서 일어나 앉는 눈치였다. "내가 나잇값을 못하는구나. 고마워, 후치." "좋지 않은 꿈을 꾸었나보군요. 아마 허기져서 그럴 거에요. 으… 괜히 먹는 이야기 꺼냈다. 뱃속 사정으로 봐서 꽤 오래 지났나 본데요." "그런 것 같아. 크응!" 네리아는 코를 크게 훌쩍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짐짓 바꾸더니 활발 하게 외쳤다. "야! 이 자식들아! 사람 굶겨 죽일 거야아아?" 응? 그건 절대로 안 돼지! "아무 쟈크나 머리 좀 내밀어 봐! 밥 좀 먹자!" 우리는 기세좋게 천장을 향해 고함질러대었다. 잠시 후 천장에 사각형 의 빛이 생겼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와, 단, 허튼 짓은 하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 넥슨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곧 위에서 밧줄 사다리가 떨어졌다. ================================================================== 6. 탑메이지……13. "헤엣? 간단하네? 올라가서 얌전히 굴다가 다 박살내어 버릴까?" 네리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설마, 무슨 대비를 하겠지." "레이디 퍼스트."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바보 아냐? 그러고보니 줄사다리는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올라가는데. 위로 올라와보니 역시 삼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칼 뽑아든 남자들이 자그마치 다섯 명이나 포위하고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아까의 그 쟈크 들이었고 하나는 우리 둘을 때려눕힌 그 마부였다. 나머지 둘은 새로 온 남자들이었다. 네리아는 이미 쟈크들에게 양쪽 팔목을 잡힌 채로 내게 빙긋 웃었다. 쟈크들이 손에손에 대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네리아는 이미 무장해제를 당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남자 하나가 내게 손을 내밀었 다. 나는 별로 반항할 생각 없다는 듯이 바스타드를 내밀어주었다.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봐, 서툰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 장갑 벗어." "쳇. 아는 게 많아 좋겠군." "아까 칼 부딪혀 봤었지. 검 한 번만 부딪혀봐도 상대의 기술과 힘을 파악해야 검사라고 하는 법이다." "물론 그렇지. 그러니까 당신은 모를 줄 알았는데." 퍽! 옆에 있던 놈이 칼자루로 내 복부를 찍었다. 망할 녀석! 난 우욱 하면서 일어나 덤빌 태세를 취했지만, 아무래도 다섯 개의 반짝거리는 검날을 향해 돌진하기엔 내 앞날이 아직 창창한걸. "썅, 맨손의 사람 치고도 검사야?" "재밌잖아." 넥슨은 유들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저 얼굴은 그날 아침의 얼굴 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날 아침, 카알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던 모습은 가짜란 말인가? 그 수심어린 표정은 모두 꾸민 것이었고? 나는 OPG를 벗어주었다. 넥슨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네리아와 나는 주위 를 한번씩 노려보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넥슨은 우리 맞은 편에 앉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우리들 뒤에 둘러서는 모양이었다. 난 괜히 심사가 뒤틀려서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손가락을 튕겨주었다. "난 팬케익, 스테이크는 미디엄, 입가심으로 맥주!" 네리아는 까르르 웃었고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 니 다시 칼자루로 날 찍을 태세를 취했다. 으악! 그만 찍어! 넥슨이 손 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뭐 마실 거라도 가져다줘라." 남자들 중 아까의 그 마부가 밖으로 나갔다. 저 작자는 정말 말이 없 군. 그리고 넥슨은 손가락을 꺽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귀 를 파는 시늉을 하더니 말했다. "당신 뭐 하는 작자야?" "나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네리아는 한숨을 크게 쉬더니 날 바라보았다. "후치. 네가 말해봐. 왠지 너와 잘 통할 것 같아." "악담이라도 그건 좀 심하네." 난 고개를 조금 꺽은 다음에 넥슨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중에서 제일 잘하는게 뭔데? 이길 수 없는 상대는 부하 시 켜 패기? 졸개들 끌어모아 둘러세우고 어깨에 힘주기?" 넥슨은 피식피식 웃었다. 흠, 이거 말로 어떻게 해 볼 사람은 아니군. 샌슨과는 다른데? 그 때 밖으로 나갔던 마부가 맥주잔을 들고 돌아왔다. 네리아와 나 앞에 맥주잔이 하나씩 놓이게 되자, 나와 네리아는 서로 쳐 다보게 되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걸까? 넥슨은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 며 미소지었다. "독은 없어."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있으면 있다고 말할 거야?" "응." "후치, 넌 조금 있어봐."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대어 마셨다. 그녀는 혀를 내밀어 먼저 맛을 보고는 조금씩 입안에 흘려넣더니 잠시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는 듯했다. 그녀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마시지마." "뭐? 그럼!" "김이 빠졌어." 넥슨은 곧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핫하하하!" 그는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넥슨은 한참 동안 웃더니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처음 보겠군. 하하하! 좋아. 아주 배짱들이 좋 아." "고마워. 대접 잘 받았으니 이만 돌아가도 될까?" "어디로? 하늘로?" 넥슨은 싱글거리며 그렇게 대답했고 그래서 난 기분이 점점 더러워졌 다. 이 친구가 원하는 것이 뭘까?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우릴 끄 집어내어 말을 걸어오는 것이겠지. "당신과 사교 관계를 논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원하는 거나 빨리 말 해봐." 놀라워. 역시 네리아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귀신같이 질문하는데? 넥슨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그래도 난 신사다. 먼저 소개를 좀 하지. 그 날 아침에 당신 보기는 했지만 소개를 받지는 못했어." "그래? 난 숙녀다. 네리아.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그건 아까도 들었던 말인데. 일명 알뜰한 네리아라고도 하던 것 같던 데?" 네리아는 콧방귀를 뀌었고 넥슨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할 말이 없나 보군. 좋아. 그리고 이쪽은?" "후치 네드발. 일명 괴물 초장이, 오크의 재앙이자 가짜 남작 실리키안 의 재앙이며, 팩케익의 성자, 오우거 일루전 슬레이어, 칼라일의 구원 자, 레이디 제미니의 나이트. 그리고 헬턴트의 초장이 후보이며…" 넥슨씨가 점잖게 손을 들지만 않았다면 난 몇 마디고 더 지껄였을 것이 다. 넥슨은 기분좋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장자,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 콧방귀를 뀌고 있던 숙녀께서 그 마지막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길드 마스터?" 네리아는 몸을 돌리며 중년 쟈크를 바라보았고 중년 쟈크는 그냥 빙긋 이 웃고 있었다. 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중년 쟈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들은대로야." "젠장, 밤의 신사도 갈데까지 갔군. 뭐야, 귀족을 길드 마스터로 섬긴 다고? 웃기네." 옆에서 사나이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노려보아서 간신히 네리아의 목 소리는 좀 수그러들었다. 어이없는 일인데? 길드 마스터라니. 도둑도 아 닌 자가 도둑 길드의 마스터가 될 수 있나? 넥슨은 마치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전통적인 조직학의 응용일뿐이야." 네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했다. "허수아비?" "그렇지." "맙소사…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가 허수아비였다니, 말도 안 돼." "말이 돼. 시간과 노력의 문제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란 말이군?" "그렇지." 네리아는 넥슨이 더 말하길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넥슨은 더 말하지 않 았다. 그래서 내가 질문했다. "원하는게 뭐야?" "단순한 복종." "거절하면?" "시시한 죽음."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라. 음. 골치 아픈 일이로군. 난 김이 빠졌다는 그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다행히 맛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리에서는 점점 김이 빠지고 있다. 네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좋아, 죽긴 싫어. 말해봐. 뭘 복종하면 되지?" "붉은 머리 소녀. 알고 있겠지? 하이 프리스트가 이미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이 친구는 역시 그 소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군. 네리아는 우울한 표 정으로 넥슨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난 빨강색이 싫어. 내가 빨강머리라서. 푸른 표지 책 이야기는 어때?" 처음으로 넥슨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떠올랐다. 넥슨은 날카로운 시선으 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여전히 약간 힘빠진 듯한 촛 점 없는 시선으로 넥슨을 마주보았다. "할슈타일 저택에 있다는 그 푸른색 책. 맞지? 할슈타일 저택에서 찾는 붉은 머리 소녀로 위장하여 거기 잠입해서 그 책을 빼와라. 그거 아냐?" "푸른 책에 대해 뭘 알고 있지?" "표지가 푸르다는 것 외엔 몰라." 넥슨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손끝을 모았다 벌렸다 하면서 네리 아를 바라보았다. "문댄서 녀석이 다 불었군." 네리아는 별 말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넥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그 녀석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 솜씨좋은 녀석들이 부족하 다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차라리 안하는 것만 못한 일이었군. 그 문댄서 녀석에게 선물을 좀 보내야겠군." 선물이라. 그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넥슨은 계속 말했다. "이미 알고 있다면 간단하겠군. 그래. 하이 프리스트가 말해줬을 테니 너희들도 잘 알겠지. 크라드메서가 웨이크닝에 들어가게 되며, 따라서 할슈타일가에서는 옛날에 잊었던 한 아이를 찾고 있다. 그 소녀만이 크 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와 네리아는 알고 있다는 듯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넥슨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 당신이 그 붉은 머리의 소녀로 위장하여 할슈타일가에 들어가 도록. 그리고는 내가 원하는 책을 가져다주면 된다." "당신 의뢰는 거절. 안되거든." "안된다고?" 네리아는 말했다. "난 그 후작을 이미 만나버렸어. 그리고 내 나이가 10대가 아니라고도 말했어. 그런데 지금 다시 찾아가서 사실은 저 10대예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 넥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만났다고?" "응." "이런 젠장…" 넥슨은 투덜거리더니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그럼 쓸모가 없군. 알았어." 뭐라고? 이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넥슨은 갑자기 내 등 뒤로 눈짓을 했다. 뒤를 재빨리 돌아보자 롱소드를 뽑아들고 있는그 마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제기랄!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원하는 것은, 그 푸른 책이지?" 넥슨은 다시 눈짓을 했고 그러자 마부는 롱소드를 꽂아넣었다. 우, 우 화! 10년 감수했다. 넥슨은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우울한 얼굴 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든 그걸 가져다주면 되는 거 아냐?" 넥슨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여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훔쳐오겠다는 식의 말은 안되겠는데. 그게 가능했다면 벌써 했을걸. 도둑 길드에는 재주좋은 자들이 많아. 하지만 할슈타일 저택에 잠입해 서 그 책을 가져올만한 자는 없었어." "어쨌든, 가져다주면 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럼, 가져다줄테니 살려줘." "살고 싶어서 하는 말인가?" 네리아는 사나운 눈길로 넥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질을 잡아둬. 우린 둘이야. 그러니까 하나가 나가서 그 책을 가져오 면, 인질과 교환해. 이러면 되겠지?" 넥슨은 그 말을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좋은 말이긴 한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네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잖아? 원하는 것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거 아 냐?" "그건 그렇군." "알아들으니 다행히군. 그럼 내가 인질이 될테니 저 아이를 보내줘. 저 아이가 그 책을 가져다줄 거야." 나는 놀라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리아는 넥슨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넥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걸? 네가 도둑이잖아. 그런데 저 꼬마를 보낸다고?" "살고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의 말이니까 묻지 말고 믿어." "그렇다면 믿지." 난 더 못참고 외쳤다. "자, 잠깐만요! 네리아, 지금 무슨…" "닥쳐!" 네리아는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 귀에 대고 귓속말로 말 했다. "멍청아.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야지." "네, 네리아?" "입 닥치고 나가. 내 몸은 내가 빼낼 테니까." 그리고 잠깐 쉬었다가, 네리아는 갑자기 어조를 바꿔서 말했다. "너희 일행을 만나고부터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정말 엉망진창이다, 휴 우." 그리고 네리아는 그대로 내게서 떨어져버렸다. 난 어쩔 줄 모르고 네리 아를 봤다가 넥슨을 봤다가 했다. 그러나 네리아는 차가운 태도로 넥슨 에게 말했다. "이 꼬마에게 가져와야할 물건을 정확히 말해줘." ================================================================== 6. 탑메이지……14. 기운 빠지는 귀가길이다. 젠장. 품속에는 넥슨이 대충 그려준 할슈타일 후작 저택의 지도가 들어있다. 그럼, 이제 이 지도를 보고는 저택가에 침입해서 그 책을 빼와야 하나? 허 참. 기막히구만. 내가 수도까지 올라와서 도둑질에 대해 염려해야 되 게 되었다니. 걸음마저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내 다리가 이렇게 무거웠나? 말이 안된 다. 17년 동안 걸어다녔던 느낌을 그 새 잊어먹었단 말이야? 제기랄. 늘 상 끼고 있던 OPG가 없으니 기분이 여러가지로 이상하다. 그런 발걸음을 더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은, 빌어먹을, 네리아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것이다. 괴상한 녀석! 왜 우리한테 시키는 거야! 참, 그 제안은 네리아가 한 거였지. 기운 빠진다. 정말 기운 빠진다. 정말… "으어어엇!" 최악이다. 내 다리에 내가 걸려 넘어지다니. 땅이 강하게 내 볼을 때렸 고 쓸려버린 볼의 살갗은 까슬까슬하게 벗겨졌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것!" "제 발에 제가 걸리고 누굴 욕하는 거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나에게 던진 말이다. 젠장, 그러고보니 땅에 쓰 러진 내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뭐 볼게 있다고 그렇게 들 쳐다봐? 난 일어나서 몸을 털었다. 몸을 터는 손에 힘이 너무 없었다. 젠장, 내 힘이 이것밖에 안되나? 난 있는 힘껏 내 몸을 쳤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대신 손바닥만 벌겋게 되었 을 뿐이다. 난 악에 받혀서 내 몸을 두드려대었다. 퍽, 퍽, 퍼벅! 주위에서는 왠 미친 놈이 땅에 쓰러지고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자해 중이라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보든지 말든지. …아무래도 보든지 말든지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군. 난 입술을 깨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음걸이가 너무 맥빠진다. 허수아비가 걸 어도 나보다는 잘 걷겠다. 허수아비? 갑자기 조금전에 들었던 말이, 그러나 당황한 감정 때문에 거의 신경쓰 지 않았던 말이 떠올랐다. "맙소사…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가 허수아비였다니, 말도 안 돼." 네리아의 말이었지. 무슨 뜻이지? "나는 넥슨 휴리첼. 휴리첼 가문의 장자,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 넥슨은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 길드 마 스터인 쟈크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그렇게 말했으며 쟈크는 그 말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역시 실제의 마스터는 넥슨이며 쟈크는 지금껏 허수아비 마스터였다는 말이 되는군. 나는 갑작스런 깊은 생각에 잠겨 심각한 얼굴로 걸었다. 볼만 했을 것 이다. 볼에는 쓸린 자국이 가득하고 몸은 흙투성이가 된 소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전통적인 조직학의 응용일뿐이야." 넥슨의 말. 전통적인 조직학. 이게 뭘까? 난 뒤에 '학'자가 붙으면 일 단 삼엄한 경계태세에 들어간다는 점이 문제로군. 젠장, 학자 붙은 것은 싫지만, 어디 보자. 전통적인 조직학이라. 그게 무슨 말일까? 아까의 상 황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그렇군. 넥슨은 귀족이기 때문에 도둑 길드를 거느릴 수 없군. 그래서 쟈크를 대리인으로서 내세워 도둑 길드를 운영해왔단 말이렸다? 그게 넥슨이 말 한 전통 조직학의 응용이로군.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란 말이군?" 네리아의 말. 넥슨 휴리첼은 오랜 기간에 걸쳐… "말이 돼. 시간과 노력의 문제야." 넥슨의 말. 엄청난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도둑 길드를 만들어 내었다는 말이겠지. 귀족이면서도. 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왜? 돈이 좋아서? 그건 바보같은 말이다. 돈 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도둑길드를 만들다니. 그런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웃기는 말이 된다. 도둑이 좋아서? 젠장, 그만해라, 후치 네 드발! 자꾸 말이 안되는 말만 하는군. 이거 장난이 아니게 돌아가는걸? 나는 걸음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카알과 의논을 좀 해봐야겠다. 아니, 어차피 네리아를 구해내 려면 우리 일행과 의논을 해야 되긴 하지만, 내가 알아낸 사실이 의외 로 굉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급하다. 그런데 걸음이 왜 이 모양이지? 내게 OPG를 돌려줘! 망할. "안내해. 가서 다 때려눕히지." 샌슨의 말. 그리고 나는 길시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요. 5셀." "젠장. 이건 불공평해!" 길시언은 투덜거리면서도 왕자님답게 동전 5개를 내밀었고, 그래서 샌 슨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길시언과 더불어 먼저 와있던 아프나이델 이 설명해주었다. "후치군은 당신이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거라고 했고, 길시언님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내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샌슨은 결국 '그 정도'로 심한 녀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샌슨 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야, 그럼 내게도 2셀 쯤 내놔." 샌슨의 말에 그와 함께 돌아왔던 엑셀핸드와 카알의 얼굴이 괴상하게 바뀌었다. "퍼시발군." "농담입니다. 젠장,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건 대체 무슨 말 이야?" 우리는 모두 남자들의 방으로 모여 있었다. 내가 유니콘 인에 도착해서 일행이 돌아오기를 초조히 기다린 끝에, 먼저 입에 거품을 문 길시언과 킬킬거리는 아프나이델이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후 샌슨과 카알, 엑셀 핸드도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모조리 우리 방으로 끌고 올라와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카알은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또각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책을 가져다줘야 네리아양이 풀려난다, 그런 말 이로군?" "그래요." "이상한 일에 말려들었군. 허허, 참." 엑셀핸드는 툴툴거리면서 말했다. "그 나이트호크 아가씨는 자기가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자넬 내보냈다 고 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기다릴 순 없지. 좋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자." 그러자 일행의 눈은 동시에 카알에게 집중되었다. 그것 참. 카알은 대 단해. 그리고 역시 카알은 엄숙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의아하군요. 넥슨 휴리첼이 사실은 바이서스 임펠의 마스터였다라. 그 가 왜? 돈이 궁해서? 천만에. 돈이 궁하다고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사 람은 없지. 그렇다면?" "심상치 않군요." 아프나이델의 대답이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이 궁금해지는군요. 그 자가 원하는 푸른 책을 본다면, 그 자의 목적도 짐작할 수 있겠지요." "훔쳐내실 생각이십니까?" 길시언의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의 내용에 따라 넥슨의 정체가 보다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 고 네리아양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그 책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도의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런 말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만, 할 수 없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돕겠습니다. 여러분의 중지를 알고 싶습니다만." 샌슨은 카알의 뜻대로 하겠다고 말했으며, 엑셀핸드는 도둑질에는 관심 이 없지만 동료의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역시 그 책이 궁금하다고 말하며 찬성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내게 질문했다. "후치? 그 푸른 책에 대해서 차근차근 좀 들려다오. 들은 그대로." 넥슨은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였지만 그의 길드에 있는 그 누구 도 할슈타일 저택에는 잠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할슈타일 가문에서 찾고 있는 빨강머리 소녀로 위장시켜 들여 보낸다는, 어쩌면 실현 가능성이 전무할지도 모르는 계획이 나왔던 것이다. 넥슨은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해준 것은, 그 책은 할슈타일 후작의 서재 책장에 들어있 으며, 푸른 표지라서 다른 장부나 서류와는 구분하기 쉽다는 것뿐이다. 샌슨이 말했다. "그럼 뭐야? 살금살금 후작의 저택에 들어간 다음, 그 서재에서 책을 가져오면 된다, 이거군?" 그런데 그 할슈타일 저택이라는 것이 걸작이다. 최소한 바이서스 임펠 의 도둑 길드에 있는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니까. 나는 넥슨이 준 종이를 꺼내어보여주었다. 일행의 머리가 전부 테이블 위의 종이에 쏠렸다. 아니, 단 한 명. 엑셀핸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엑셀핸드는 노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다가 아에 테이블 위에 올라앉았다. "잘 보세요. 후작의 저택은 어디의 담을 넘어가더라도 정원을 한참 가 로지르지 않으면 본관에 가 닿을 수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건물 이 바로 바깥에 노출되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밤마 다 이 정원에는 페이스풀 하운드(Faithful Hound)들이 소환된다더군요.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아프나이델은 신음을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맞다. 그거 안좋은 소식이군." 카알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푸우. 그건 클래스 4 이상의 마법입니다. 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략은 알고 있습니다. 페이스풀 하운드들은 다른 차원에서 마법사에 의 해 호출되는 개들입니다. 이들은 우리 차원의 무기로는 절대로 칠 수 없 습니다. 그러나 페이스풀 하운드 자체는 이쪽 차원의 생물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개들은 아무리 어두워도 상대를 볼 수 있고, 심지어 투명마법을 써도 그 마법적인 기운을 느끼고 짖어댑니다." "못 때린다고요?" 샌슨이 아주 억울하다는 어투로 물었고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은 자신의 검을 가리키면서 다시 질문했다. "저 검은 은이 입혀져 있습니다. 은으로 된 무기는 대개 그런 유령같은 놈들을 때릴 수 있는데요?" "물론 언데드 계열이라면 타격이 가능합니다만 페이스풀 하운드는 언데 드가 아닙니다. 말했다시피 다른 차원의 생물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언 데드는 우리 차원의 생물입니다." 샌슨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질 문했다. "그런 고급의 마법을 사용하면다면 틀림없이 마법사가 있을텐데, 거기 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나?" "마법사는 없어요. 그 저택에 있는 모든 마법은 드래곤이 걸어준 거래 요." 아프나이델은 탄식을 뱉었다. "아, 드래곤이… 그렇군." "예. 그 가문은 300년이 넘게 드래곤 라자를 배출한 가문이죠. 그 동안 드래곤들이 그 저택에 무수한 마법을 걸어주었던 모양입니다. 그 저택은 이 도시에서 빛의 탑을 제외하면 가장 신비한 장소라는 말을 하던데요." "후우. 좋아. 계속해보게. 아니, 잠깐. 적어가면서 하지." 아프나이델은 잉크, 펜 등을 가져와서 넥슨이 준 그 지도의 정원 부분 에다가 FH라고 적어놓았다. 나는 계속 설명했다. "어쨌든 이 개들이 짖어대면 즉각 경비병들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여 기, 별관에서 출동하게 된답니다. 예. 거기요. 이 경비병들의 숫자는 모 두 30명인데, 모두 노련한 전사들이라고 하는군요. 그 사람들 역시 할슈 타일 가문이 300년간 대대에 걸쳐 정성을 가지고 길러낸 전사들의 후예 이기 때문에 매수 당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합니다." 아프나이델은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F-30이라고 썼다. 파이터가 30명 이라는 말이겠지. 샌슨은 이빨을 사려물었다. "갈수록… 더 있어?" "아직 시작도 안했어." "아이고!" "본관은 3층 건물로 3층에 후작의 침실과 기타 중요한 방들이 있다고 해요. 각층을 연결하는 것은 중앙의 커다란 계단 하나인데, 예. 그거요. 커다랗죠? 본관 안에는 항상 하인들이 오가기 때문에 이 커다란 계단을 몰래 올라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내요. 왜냐하면 후작 저택의 하인들은 3교대로 움직이거든." "3교대. 허어!" 엑셀핸드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8 시간씩 교대로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인이 움직이 지 않는 시간이 없대요. 그리고 후작의 방은 3층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게 정말 또 걸작이거든. 이 건물에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있 지만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없어요." "뭐야? 그럼 후작은 어떻게 올라가는데?" "2층 여기 중앙의 방에 주문이 걸려있대요. 텔레포트 스펠을 영구화시 켜 3층 중앙의 방에 연결시켜 둔 모양입니다. 예. 거기 그 방이오. 그래 서 2층의 이 방에 들어가서 약속어를 외우면 3층의 방으로 휘익! 옮겨 간대요. 끝내주죠? 그리고 물론, 텔레포트 스펠을 작동시키는 약속어는 후작 이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3층은 후작만이 사용하는 층이랍니다." "얼씨구, 잘 한다. 3층에는 당연히 창문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렸다?" 엑셀핸드의 질문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환기 문제도 있고해서 창문은 큼직한 것들이 달려있대요. 거의 발코니를 달아도 될 정도로 크다는데요. 그런데 이 창문이 역시 기가 막 힌 물건이죠. 창문으로 올라가려면 벽을 타야 되는데, 도둑 길드가 알고 있는 어떤 벽타기꾼도 이 벽은 못탄답니다. 왜냐하면 벽에는 그리스 주 문이 영구화로 걸려있거든요." 샌슨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 이루릴이 쓰던 거, 그러니까 미끄러지게 하는 마법?" "응."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쉬다가 다시 말했다. "만일 날아들어간다면?" "창문은 평범한 형태지만 전부 알람(Alarm)스펠이 걸려있답니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한숨을 쉬다가 주위 사람들을 위해 설명했다. "알람 주문은 누군가 지나가게 되면 요란한 소리를 내게 되는 경계용의 주문입니다." "안들키고 지나갈 수는?" "유령이 아닌 바에는 아무도 들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비지빌리티를 사용해도 들키는 걸요." 샌슨은 기막힌 표정으로 으르릉거렸다. "그걸로 끝이야?" "여기까지가 도둑 길드에서 아는 거래. 3층 내부에는 들어가보지 못해 서 어떤 마법이 더 걸려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데?" 사람들은 모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지었다. 카알은 지긋이 아프나이 델이 기록해둔 그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허탈한 표정으로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샌슨이 말했다. "젠장, 그냥 도둑 길드를 덥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리아양이 위험해질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책이라는 것이 보통 관심 을 끄는 것이 아닌걸." "그 책이 왜죠?" "적어도 넥슨씨는 그 붉은 머리 소녀보다 그 책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 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책에 담긴 비밀이 대단한 거라 는 것은 간단히 짐작되는데." 샌슨은 손을 양쪽으로 펼쳐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들어갈 수 없다라… 그것 참. 어디 보세나. 아프나이델씨. 이 마법들 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드래곤이 건 마법이라면 그건 이 만저만 강한 것이 아닐 겁니다. 저 같은 풋내기 마법사가 덤벼볼만한 것 이 아니겠지요." 카알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 종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주위의 사 람들 역시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그 종이를 노려보게 되었다. 카알은 잠시 후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께는 미안하지만, 역시 그 책이 필요해." 샌슨은 카알을 바라보았다. "필요하시다면?" "훔쳐내야지… 뭐." "어떻게요?"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맞아. 온갖 노력을 다해야 되겠지. ================================================================== 6. 탑메이지……15. 하늘에 무겁게 깔린 암회색의 구름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엄 중히 경고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며칠 내에 눈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 군. 할슈타일 저택의 웅장한 모습이 눈 앞에 보였다. 굉장하군. 지금 정문 앞에 서 있는데 본관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암회색의 하늘은 낮게 대지를 내리누르고 있으되 할슈타일 저택의 건물은 바로 그 하늘을 꿰뚫는 모습으로 저 앞에 서 있었다. 카알은 기운찬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가관이다. 카알의 옷은 예절보다는 솔직함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 나 누더기라고 불러줄만한 것이다. 저 옷을 만들기 위해 오늘 아침 헌옷 을 산 후 샌슨이 저 옷을 가지고 공놀이를 했다. 뭉쳐서 걷어차고 짓밟 고 발로 비비고. 거기다가 엑셀핸드는 코를 풀었으며 길시언은 저 옷을 들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다. 무슨 짓을 했을까? 카알은 죽고싶다는 얼 굴로 저 옷을 입었다. 게다가 카알의 얼굴엔 재를 부드럽게 발라 멋진 화장을 하고 코를 씰룩거리고 있었으며 허리는 완전히 굽어버린 상태였 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입에서 침이 길게 떨어질 듯하다. 그리고 샌슨도 말에서 내렸다. 샌슨은 한결 낫다. 오늘 아침 여관의 마굿간을 찾아간 샌슨은 옆에서 길시언이 열심히 "할 수 있소! 기운내시오, 샌슨! 오! 우리의 희망 샌 슨! 헬턴트 사나이의 참멋을 보여주시오! 사나이는 외모보다는 행동으로 말하는 법!" 등등의 시시껄렁한 응원을 하는 가운데 씩씩하게 머리를 여 물통에 집어넣고는 그대로 머리를 감아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말구종 의 눈이 1큐빗은 튀어나올 뻔했다. 그 상태 그대로 식당에 들어서자 유 니콘 인의 주인장은 샌슨을 살해하려고 들었고, 그래서 샌슨은 밖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옷은 건드리지 못했지만 (샌슨은 옷이 소중하다. 치 수가 맞는 옷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신 아주 파격적으로 입고 있 다. 바지는 한쪽은 부츠 안으로, 다른쪽은 부츠 바깥으로 나와있고 혁대 는 풀어버리고 대신 밧줄로 묶고 있다. 망토 하나를 아낌없이 엑셀핸드 의 도끼에 건네주어 걸레로 만들어 두르고 있다. 하지만, 오, 빌어먹을. 그래도 둘은 나보다는 낫다. 난 아직 말에서 내 리지도 못했다. 으윽. 엉덩이가 아파 죽겠다. 난 옆안장으로 말을 탄 경 험이 없단 말이다. 내 표정을 보더니 샌슨은 곧 폭발할 듯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난 잡 아먹을 듯이 샌슨을 노려보았고, 샌슨은 지나치게 정중한 동작으로 고개 를 숙여보이며 내게 말했다. "원로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레이디 후칠리아. 이제 다 왔습니다." 오… 맙소사. 후칠리아! 정말 이름 짓는 센스하고는! 그랬다. 난 가슴에 커다란 솜뭉치를 집어넣어 붕대로 단단히 둘러맨 다 음 대단히 요염한 브라를 걸쳐매었다. 허리에는 거들을 입고 그 아래에 가터에 스타킹까지 걸치고 있다. 젠장, 다리에 털 난 것 깍다가 베인 상 처가 아직까지도 쓰라리다. 그리고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흰색의 원피 스를 입고 있는 것이다. 원피스! 맙소사. 우리 아버지가 지금 날 보면 날 절대로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실 거다. 이게 카알이 말한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말인가? 난, 맙소사, 여장을 하고 있다! 죽고 싶어라! 카알은 대문 앞에 섰고 곧 문지기가 달려나왔다. 문지기는 창살처럼 생 긴 철문 틈 사이로 우리를 내다보며 말했다. "누구십니…" 문지기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곧 나를 바라본 채 넋이 빠져 버렸다. 오, 안돼. 내가 매력이 넘친다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 지만, 그렇다고 그런 징그러운 시선으로 보지마! 젠장. 저 문지기는 아 마 내 머리카락을 보고 놀라고 있는 것일게다. 멋있지? 아프나이델이 온 갖 고생을 다해서 만들어낸 걸작이지. 붉은 머리! 타오르는 불꽃처럼 요 염무쌍하고 도발적인 이 컬러, 뇌쇄적이지? 맙소사, 내가 원래 이런 면이 있었나? 난 다소곳이 문지기의 시선이 수 줍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카알은 말했다. "여보슈, 혹시 이 집안에서 빨강머리 계집애를 찾는다던데?" 저 거칠고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 멋진 말투야… 카알은그야말로 어 디 뒷골목에서 굴러다니다가 조금 전 기어나온 듯한 말투로 말했다. 문 지기는 얼빠진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카알은 다시 말했 다. "맞소, 아니오? 그런 말이 들리길래 저 계집애를 노스 그레이드에서 여 기까지 데려왔는데. 엉?" "마, 맞습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문지기는 곧 안으로 달려들어갔고 잠시 후 다시 달려나와 철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십시오." 카알은 곧 트레일의 말고삐를 붙잡은 채 걸어들어갔고 샌슨은 한손에는 슈팅스타를, 다른 손에는 제미니의 고삐를 쥔 채 카알의 뒤를 따랐다. 나? 물론 제미니 위에 옆안장을 한 채로 다소곳이, 요조숙녀처럼, 고고 하게 앉아있었다. 망할. 길다란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주위의 모습은 가을의 정서를 한껏 뽐 내며 고즈넉하면서 장엄했다. 정원 양쪽에 서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분수대는 계절이 계절인지라 물이 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었고 낙 엽이 멋있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포석이 깔린 길에는 낙엽이 전혀 보이 지 않았다. 낙엽들 사이로는 각양각색의 조각들이 서 있었는데 그 전체 의 배치가 대단히 정교했다. 동상의 모습은 주로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실제 드래곤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 박력어린 모습은 마치 지금 당 장이라도 으르렁거리며 내게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자도 아닌 것이!" 라고 외치며. 아우, 뒷덜미야. 길을 따라 걸으니 곧 본관이 보였다. 본관 앞에 도착하니 곧 말구종과 다른 하인들이 달려나왔다. 말구종이 달려오자 샌슨은 나에게 징그러운 시선을 보내더니 곧 내 안장 옆에 한 쪽 무릎을 꿇고는 두 손을 겹쳐 내밀었다. 어울린다, 어울려! 젠장. 난 조심스럽게 샌슨의 손을 밟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말구종은 우리 말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 떠나가는 속도가 엄청난 까닭은, 카알과 샌 슨에게서 풍기는 향기 때문이겠지. 하인들은 우리를 안으로 모셨다. 으리으리한 건물이다. 건물 벽에 그리스 주문이 걸려있다는 것이 사실 인지, 건물 벽은 먼지 한 올 묻지 않은 모습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본 관 정문 위로는 거대한 드래곤 얼굴 모양의 부조가 걸려 있었다. 되도록 다소곳이 걸으려 애쓰면서,(쉬운 일이 아니었다. 젠장. 구두가 너무 작단 말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홀의 모습이 보였다. 홀 바닥 에는 타일이 깔려 있었고 정면으로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 그리고 양쪽으로는 커다란 문들이 보였다. 천장을 본 순간 놀라버렸다. 천장에는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뼈로 만들어진 상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우와! 드래곤의 머리뼈! 역시 300년 이상 드래곤과 동거동락해온 집안다 운 모습이다. 난 입을 쩍 벌리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샌슨은 그 냥 입을 쩍 벌려버렸다. 아마 집사로 짐작되는 인물이 나오더니 우리를 쳐다보았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멋있게 뒤로 넘긴 그럴듯한 중년 남자였다. 그 남자는 우 리들에게서 풍겨나오는 그윽하달 수는 없는 향취에 찔끔하는 모습이었지 만 침착하게 말했다. "할슈타일가의 사무를 보는 궤헤른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카알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반갑수다. 나 카알이오." 집사 궤헤른은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 가문에서 붉은 머리 소녀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뭐? 아, 조가 말해줬소." 퀘헤른은 카알의 대답이 너무 엉망이어서 조금 냉정을 잃은 모양이다. "조가… 누굽니까?" "아, 내 친구요. 조, 멋쟁이 조. 그 녀석이 그러던데 할슈타일인가 하 는 집안에서 빨강머리 계집애를 찾는다고 그러더라고." "그 조라는 분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다고 합니까?" "누구더라? 아, 그래. 메리에게서 들었다고 그러던데?" "…메리는 누굽니까?" "내가 알게 뭐요. 조 녀석이 어디서 끼고 자던 작부겠지. 그 놈, 여자 후리는 솜씨가 비상하거든? 끝내준다고. 어느 여자든지간에 녀석이 한 번 찍으면 그날로 그 여자 치마끈 풀었다고 봐야돼. 녀석 솜씨가 어떤가 하면…." 퀘헤른 집사는 정중히 손을 들어 카알의 수다를 막았다. 맙소사, 카알.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려? 집사는 말했다. "우선, 이리로 드시지요." 퀘헤른이 우릴 안내한 곳은 홀 옆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이거 안 좋네. 이층으로 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필 일층이람. 그러나 카알은 별 내 색도 하지 않고 씩씩하게 집사를 따라 들어갔다. 안내된 곳은 아름다운 장식이 가득한 화려한 응접실이었으나 카알은 과격하게 소퍼에 앉아버렸고 그러자 샌슨은 보다 더 과격하게 소퍼를 뭉개버릴듯이 앉았다. 카알은 소퍼 위에서 엉덩이로 펄쩍펄쩍 뛰었다. "허! 그거 푹신푹신하네!" 카알… 오, 제발. 샌슨도 차마 그 동작은 따라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 알은 꺼리낌없이 집사 궤헤른에게 수다를 떨었다. 벽에 있는 저것은 진 짜 금붙이냐? 우와, 초상화 멋있네. 비싼 건가? 커튼 한 번 우라지게 하 얗네. 계집애 속옷보다도 더 하얗구만. 헤이? 당신 속옷은 어때? 집사 궤헤른은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참아내었다. 그는 카알이 차와 함 께 나온 온제 차숫가락을 소매에 감추려다가 떨어트리는 모습을 보면서 까지 온화한 모습을 지켜내었다. 솔직히 박수를 쳐주고 싶은데? 카알은 머쓱한 표정으로 숫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 소녀의 내력은 어떻게 됩니까?" 궤헤른의 정중한 질문은 전혀 정중하지 않은 답변을 받았다. "푸하! 내력? 내력은 무슨 얼어죽을. 거, 언제더라? 내가 소장수할 때. 야, 샌슨! 그거 기억나지? 참. 그 때가 내가 깃발날릴 때였지. 내가 소 를 몰아서 노스 그레이드를 지나가면 쫘악! 술집의 아가씨들마다 모두 자지러졌다고! 치마를 뒤집으며 환호했지! 뭐라고? 아, 그래. 노스 그레 이드의 윌라무트 마을에서 여기로 소를 끌고 왔을 때였지. 그게 얼마 전 이더라? 어쨌든 여기 왔다가 저 계집애를 주웠지. 쬐그만게 시장 바닥에 서 징징 짜고 있는 모습이 하도 보기 안쓰러워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 집에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고 키웠지." 카알의 저 멋진 거짓말은 집사 궤헤른을 몹시 감동시킨 모양이다. 궤헤 른은 냄새 때문에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대단히 열성적인 태 도로 질문했다. "그게 정확히 언제쯤인지요." "몰라! 야! 후칠리아! 너 몇 살이야?"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전 17세이어요." 집사 궤헤른은 내 대답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다. 10대 후반, 붉은 머리, 고아 출신, 멋지게 맞아떨어졌을것이다. 하하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궤헤른은 차숫가락이 몹시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카알은 그가 나가자마자 곧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퍼시발군. 시간이 없으니 바로 행동으로." 샌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곧 일어났다. 그는 응접실 문을 열 고 나섰고, 곧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이봐! 어디서 싸면 돼?" 어울린다. 정말 무섭도록. 샌슨이 나가고나자 우리는 그저 태평하게 천장과 주위 벽장식, 테피스 트리나 감상했다. 태피스트리의 무늬도 대개 드래곤의 모습들이 많았다. 내게 이름을 붙여도 좋다고 허락한다면 난 이 저택에 드래곤의 신전이라 는 이름을 붙이겠어.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샌슨인가해서 보니 샌슨은 아니고 집사 궤헤른이 었다. 그런데 집사 궤헤른 뒤쪽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섰다. 난 순간 얼 굴을 내리깔았지만 의심스럽게 보일까 싶어 눈을 올려떠 고개 숙인 채로 그를 훔쳐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이었다. 전에 보았을 때도 날카로운 얼굴이었지만 지금 정체를 숨긴 채로 만나 게 되니 정말 그 시선으로 내가 오늘 아침에 먹은 메뉴를 짚어낼 정도로 보였다. 무서워. 카알은 멀뚱한 시선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집사 궤헤른은 좀 일어나 줬으면 고맙겠다는 시선을 간절하게 보내었지만 카알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이 태평하게 말했다. "난 카알이라는 사람인데, 댁은 뉘시오?" 후작은 싸늘한 얼굴로 카알을 마주보았고 집사 궤헤른은 부리나케 설명 했다. "할슈타일 후작이십니다. 일어나시오!" 그러자 카알은 미적거리며 일어났다. 후작은 카알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곧 인상을 찡그리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카알은 그게 불만스럽다는 듯 이 느물거렸다. "헤엣. 처녀의 향기가 더 마음에 드시오?" 맙소사, 카알. 정말이지… 당신은… 멋져! 궤헤른은 이 당돌한 말에 사 색이 되었지만 후작은 별로 신경쓰지도 않고 날 바라보았다. "저 아이인가?" 궤헤른은 곧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후작은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 다. 우와, 최고의 위기 순간이다앗! 난 얼굴이 붉어질만한 상상을 열심 히 했지만 내 얼굴은 창백해진 모양이다. 후작은 물끄러미 날 보더니 말 했다. "얼굴을 들어보아라." 주, 죽겠군. 난 얼굴을 조금 들어 후작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후다닥 내 렸다. 후작은 뚫어질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후작은 손을 뻗더니 내 손을 쥐었다! 아, 안돼! 젠장. 손을 만져보면… 와, 우화, 다행이다. 그 동안 OPG를 계속 끼고 있어서 내 손은 햇빛을 별로 받지 못했고 그래서 하얗게 바뀌 어 있었다. 그래도 소녀의 손이라기에는 너무 투박했지만. 난 손을 빼려 고 꿈지럭거렸지만 그렇다고 너무 힘센 소녀라고 의심받을까봐 힘을 많 이 주지도 못했다. 후작은 내 손을 쥔 채로 한참 서 있더니 다시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사람 불쾌하게만드는데? 난 후작의 발만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후작은 싸늘 하게 궤헤른에게 말했다. "내 집에서 냄새나는 것들을 치워라." "예?"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후작은 곧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알은 얼떨떨한 얼 굴이 되어 쾅 소리가 나며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궤헤른 은 말했다. "자, 이만들 나가주시오. 또다른 남자는 어디로 갔소?" "이, 이봐! 뭐하는 거야? 저 먼 노스 그레이드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런데 이렇게 쫓아내는 거야?" "누가 초청이라도 했소? 속히 나가주시오." "제기랄! 누굴 놀리는 거야? 안돼! 이렇게는 못나가. 여비라도 줘야지!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농담하지 마시고 나가시오!" 카알은 계속 억지를 부려대기 시작했고 그러자 궤헤른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카알은 질세라 험악하고 야비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 다. 그러자 궤헤른은 화를 내며 하인들을 불러들였다. 하인들은 우리를 붙잡아 곧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카알은 고래고래 고 함과 비명을 질러대었고 그 중 90% 이상은 욕설로 점철되었다. 홀 중간 쯤 끌려갔을 때 샌슨이 털래털래 나타났다. "어? 뭐야, 이건?"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하더니 하인들을 불러세우려 했다. 그러나 하인들은 샌슨을 보자마자 곧 그도 붙잡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샌슨 역시 욕짓거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장난치는 거야! 사람 여기까지 불러놓고!" "누가 불렀어? 너희들이 찾아왔잖아!" "빨강머리 계집애를 찾는대면서! 죽을 고생을 하며 데려다 줬잖아! 왜 이러는 거야! 젠장, 저만하면 침대에 눕혀놓고 봐도 괜찮잖아?" "이 놈이 뚫린 입이라고옷!" "저 계집애도 저만하면 괜찮잖아! 엉덩이도 펑퍼짐하고 가슴도 빵빵하 고! 게다가 원하는대로 빨강머리잖아? 뭘 더 바라는 거야!" 새애앤스으은, 주우욱일 거야아아…! 하인들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외쳤 다. "이 자식아! 우리 후작님이 어디 끼고 잘 계집 찾는다더냐!" "뭔 오리발이야! 빨강머리가 좋아서 불렀잖아! 그래서 데려다 줬잖아!" 샌슨과 카알은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후작이 여자를 원해서 찾는 줄 알 았다는 식으로 퍼부어대었다. 잘들 논다. 아마 날 놀리기 위해 저러는 것일테지. 그러나 후작이 딸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인들로서 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일 것이다. 주먹다짐만 나오지 않았다뿐이지 거의 싸움에 가깝게 우리는 쫓겨났다. 말과 함께 바깥으로 쫓겨나고도 한참 동안 카알과 샌슨은 철문을 흔들면 서 욕짓거리를 퍼부어대었고 난 좀 멀찌감치 떨어져 고개만 숙이고 있었 다. 카알과 샌슨은 내가 봐도 좀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욕설을 퍼부어대고 는 투덜거리며 물러나 말에 안장을 올렸다. 난 그 틈을 봐서 샌슨에게 살짝 다가서서 귓속말을 말했다. "돌아가면… 샌슨, 각오해!" 샌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싱글거렸다. 어디 두고 보자! 난 얌전히 말 위에 올라 옆안장을 하고 다소곳이 손을 모아쥐었다. 하지만 속이 부 글거리는 것은 못참겠는걸? 그러나 카알은 내 참담함에는 관심이 없는지 샌슨에게 묻는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러자 샌슨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 다. 좋아, 제대로 해뒀다는 말이렸다? 우리는 유니콘 인으로 돌아왔다. ================================================================== 6. 탑메이지……16. "거, 네드발군. 퍼시발군의 목은 이제 그만 조르고…" "그럼 다리를 꺽지요!" "우어어억!" 내가 엎드린 샌슨의 등에 올라타서 다리를 꺽어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카알은 한숨을 쉬었다. 샌슨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을 두드려 대었다. "죽는 시늉 하지마! OPG가 없으니 내가 꺽어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그럼 네가 누워봐라! 내가 꺽어줄 테니까! 아픈지 안아픈지…" "오우거에게 자기 다리 맡기는 등신이 어디 있어!" 카알은 대단히 힘겨운 표정으로 우리를 말렸다. "여보게들. 자네들이 계속 떠드니까 아프나이델씨가 시작을 못하지 않 는가." 난 씩씩거리며 샌슨의 다리를 놔주었고 샌슨은 껄껄 웃었다. 확실히 별 로 아프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야. 언제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음, 레이디 후칠 리아. 고향에 돌아가서 한 번 그런 모습으로 퍼레이드를 할 계획은…" 곧 나는 샌슨에게 날아들었고 우리 둘은 동시에 균형을 잃고 침대 뒤로 나가떨어져버렸다. 꽥! 그러자 곧 엑셀핸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 시끄러운 친구들아, 좀 조용히 못하겠느냐!" 우리는 툴툴거리며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오도카니 앉았다. 그러자 아 프나이델은 한숨을 쉬며 마법 시전 준비를 갖추었다. 아프나이델은 초조 한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가에서라면, 1시간 후쯤이 식사시간일 겁니다." "후우… 좋습니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대략 1시간쯤 걸릴 것 같으 니까요. 하지만,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진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보지 않으셨다고요?" "이루릴양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셔서 패밀리어의 소환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껏 패밀리어와 복합 커뮤니케이션은 시도해보지 않았습니 다." 카알은 웃으며 격려했다. "소환도 성공했으니, 접촉도 당연히 성공할 것이오." "그럼." 아프나이델은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역시 마법사답게 침착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먼저 짐속에서 쇠막대기들을 꺼내 어 조립했다. 그러자 커다란 삼발이처럼 생긴 것이 우리 방 한가운데 서 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여관 주인에게 빌어온 솥을 그 위에 걸 었다. 흠, 확실히 삼발이가 맞군. 샌슨은 한쪽 옆에 준비되어 있던 통에서 솥으로 숯을쏟아부었다. 숯을 차곡차곧 쌓고 나자 아프나이델은 정성어린 손놀림으로 그 위에 향을 덮 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숯은 바알간, 약간은 미약한 빛을 내면서 타올랐다. 그러자 아프나이델 은 방안의 초를 전부 끄도록 명령했다. 촛불이 다 꺼지고나자 방 안에는 숯불에서 나오는 미약한 붉은 빛만이 남게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붉그스름하게 바뀌었다. 아프나이델은 기이하게 생긴 쇠막대기를 들어올리더니 숯불 위에 피어오르는 향의 연기를 가로 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가 모르는 기이한 시동어를 읊조리기 시작 했다. 아프나이델의 주문은 길었다. 끊어질듯 끊어질듯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그러나 절대로 끊어지지 않았 다. 목소리의 고저에 따라 쇠막대기가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고 가끔 아 프나이델은 격정적인 동작으로 향을 집어 숯불에 팽개치듯 뿌렸다. 그 때마다 불티가 날리며 연기가 자욱해졌다. 엑셀핸드의 드워프다운 얼굴이 검붉은 빛 속에서 더욱 드워프답게 보였 다. 어둡고 침침한 불빛 속에 반짝거리는 그 작고 둥근 눈. 카알의 얼굴 은 마치 깊은 고뇌에 싸인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다. 미명은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더욱 씨게 만들었다. 샌슨은 그저 입을 헤벌리고 있었으나 길 시언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는 프림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놓고 있었 지만 프림 블레이드는 떠들지 않았다. 웅얼거리는 소리는 언제 멎었는지 모르게 멎었다. 소리가 멎었어? 난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숨을 들이쉬었 다. 아프나이델은 눈을 뒤집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 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 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실패인가? 뭔 가 위험한 것인가? 갑자기 아프나이델의 입가가 위로 스르르 올라갔다. "보인다!" 카알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에 아프나이 델은 계속 흐느끼듯이 웅얼거렸다. "차가운 천정… 살짝 내려가자. 그래. 문으로… 살며시 밀어라… 너무 긁지는 말고… 발톱을 주의해. 딱딱한… 주위를 보고… 역시 식사시간이 군…" 저건 길시언의 주장이다. 아무리 하인들이 오간다해도 절대로 식사시간 에는 오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 귀족가니까 식사시간에 소란스러운 발 자국 소리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며, 물론, 하인들도 먹어야 되니까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길시언은 식사시간에는 들키 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물론 사람처럼 큰 것은 들키 겠지만, 지금 우리의 정보원은 사람이 아니니까. "이건 계단이군… 좋아. 살짝… 그렇지." 아프나이델은 마치 날아오르듯이 허리를 슬쩍 올렸다. 아마 지금 그는 저택에 있는 그의 패밀리어와 완전히 혼연일치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아 프나이델은 땅에 내려서는 것처럼 몸을 살짝 구부리기까지 했다. "좋아… 없군… 됐어, 중앙의 방으로… 그래…" 아프나이델은 마치 살금살금 걷듯이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고 그래서 길 시언이 기겁하면서 그를 붙잡아 간신히 숯불을 걷어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시언이 붙잡느라 아프나이델은 잠시 머리를 가로저었으나 다 시 나직하게 말했다. "놓칠 뻔했어. 옳지. 그래… 당황하지 마라… 그 방이다. 그래… 짜릿 한 기운이 느껴진다. 역시 마법이로군… 영구화된 마법의 힘이야… 밀 어라. 응? 이런… 좋아. 천장에 매달린다." 아프나이델은 위로 날아올라 천장에 매달릴 자세를 취해서 다시 한 번 길시언을 놀라게 만들었다. 길시언의 부축을 받은 아프나이델은 머리를 휘저었다. 그의 눈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며 아프나이델은 크게 심호흡 을 하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뿌듯한 미소와 함께 짧게 말했다. "접속은 순조롭습니다." "좋았소! 당신이 해낼 줄 알았습니다!" 카알은 크게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박수를 쳐주었 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모습으로 말했다. "지금 그 박쥐는 그 방 앞의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방 안의 목소리 는 충분히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박쥐의 청각도 괜찮은 편이거든요." 카알은 히죽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다. 이루릴이 레너스시에서 아프나이델에게 가르쳐준 주문, 파인드 패밀리 어. 아프나이델은 이루릴 덕분에 그 주문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선택한 패밀리어는 박쥐였다. 그리고 지금 아프나이델은 우리가 오늘 낮에 숨겨둔 그 박쥐와 완벽한 의사 소통을 성공시킨 것이다. 우리는 기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엑셀핸드는 손가락까지 꺽어가며 만족을 표시했다. "저 친구는 역시 마법사라고! 하하하!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아직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후작이 식사를 마치고 3층으로 올라갈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럼, 계속 그 박쥐와 접속하고 있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번 성공했으니 이젠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 다. 이루릴에게 연락을 부탁할 수도…" 아프나이델은 말을 꺼내다가 흠칫했다. 나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 물었 다. "박쥐 이름을 그걸로 지었어요?"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아, 감사의 의미로… 그렇게 지었어." 샌슨은 입을 쩍 벌리더니 다시 다물며 피식 웃었다. "박쥐 이름으로는 좀 그렇군요." "푸핫하하하! 오, 이런, 미안하네, 아프나이델, 하지만 박쥐에게 이루 릴이라니… 프허업!" 엑셀핸드는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더욱 얼 굴이 벌겋게 되었다. 우리는 깊은 긴장 상태에 놓여있어서 몹시 허기가 졌다. 하지만 후작이 언제 그 방에 들어갈지 모르므로 우리는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 시 방으로 올라왔다. 유니콘 인의 주인장은 우리의 식사 속도에 상당한 감동을 표명했다. 아프나이델은 침대 위에 누워서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패밀리어 박쥐 이 루릴과의 접속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방해될까봐 숨도 제대 로 못쉬면서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샌슨이 나직하게 말했다. "긴 밤이 될 것 같군."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길시언은 술병과 잔을 돌리기 시작했 고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모두들 조용조용한 동작으 로 술을 마시거나 파이프를 피우거나 혹은 샌슨처럼 주방장에게 얻어온 빵을 단조롭게 씹거나 하고 있었다. 우리도 조용히 있으려니 지루했지만 아프나이델도 퍽 힘들 것이다. 계 속해서 박쥐와 접속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로 마법을 계속해서 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누운 채로 기다리는 것이지만. 샌슨이 빵을 모조리 대충대충 먹어버리고,(그는 달인이니까!) 술잔을 몇 번 비우고, 심심해진 나머지 내 코를 비틀려다가 나에게 손등을 물어 뜯기고, 소리 없이 비명을 좀 지르고, 카알의 눈총에 머쓱한 표정을 짓 고, 테이블 아래로 내 다리를 걷어차려다가, 엑셀핸드의 무릎을 걷어차 도끼머리로 한 대 쥐어박히고, 다시 한 번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을 무렵 이었다. "올라오는군…" 아프나이델의말이었다. 너무나 희미해서 평상시라면 거의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목 소리는 잘 들렸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드러누워있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인가 보군… 밤색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 맞습니까?" "맞소." 카알이 대답했다.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조용해졌다. "좋아… 계단을 올라왔어. 후후. 사람들은 자기 집의 천장에 뭐가 매달 려 있어도 모른단… 으응. 좋아. 잠겨 있었군. 열쇠를 돌리고… 그래. 들어가. 모두 조용히! 이제 시동어를…" 모두 조용히라는 말에 우리는 모두 숨을 멈출 정도로 긴장했다. 아프나 이델 역시 몹시 긴장했는지 누운 채로 상체를 조금 떠올리기까지 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이를 악물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상체를 조금 떠올린 자세로 주먹을 부르쥐고 긴장 해 있었다. 잠시 후, 아프나이델은 다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고 네 명 의 남자와 한 명의 드워프가 크게 호흡하는 소리에 천장이 들썩거릴 정 도였다. 아프나이델은 느릿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좋아… 창문으로 날아가거라. 그래. 그대로 날아가라. 가서 쉬어라. 수고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눈을 뜨더니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모두 그의 얼 굴을 쳐다보았다.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들었습니다." "시동어는 뭡니까?" 아프나이델은 머리를 절절 흔들다가 말했다. "원참. 허탈해서 말할 기분도 안나는군요… 시동어는 옮겨라입니다." 모두들 얼빠진 표정으로 합창하듯이 말했다. "옮겨라?" "예. 어쩌면 마법을 건 드래곤들은 평범한 것이 생각하기 어렵다는, 그 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나 보군요." "그렇군요. 하하. 좋습니다. 그럼 시동어는 알았군요." 카알은 싱긋 웃으며 그 간단한 말을 종이 위에 적어두었다. 원참. 그걸 잊어먹을까봐? 어쨌든 넥슨이 준 지도의 2층에는 '옮겨라'라는 말이 적 히게 되었다. "예? 한밤중이요?" 카알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많이 걸릴 듯합니다." 그랜드스톰의 프리스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 이 프리스트에 의해 임무를 받았고 모임이나 회의에 사용하라고 방까지 배정받았던 사람들이라 거절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 6. 탑메이지……17. 밤하늘엔 구름이 끼어있어 달빛 하나 없이 칠흑같은 밤이다. 요 며칠새 계속 구름이군.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꺽으며 담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세요?" "응? 어, 괜찮다. 걱정마."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어깨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추 워서 떠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몹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앰뷸런트 제일의 목을 쓰다듬었다. 운차이가 없어지고 처리곤란이던 앰뷸런트 제일은 오늘 밤의 모험을 위 해 아프나이델을 태우고 있었다. 담은 그렇게 높지도 않았고 게다가 이런 밤이라면 누구의 눈에도 들키 지 않고 넘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담 뒷쪽에는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유령견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젠장. 그 놈들은 투명한 물건도 볼 수가 있으니 어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프나이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엑셀핸드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곧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엑셀핸드는 이루릴의 말 레이셔널 셀렉션을 타고 있었다. 우하하. 엑셀 핸드는 절대로 말에는 탈 수 없다고 말했지만 오늘 밤의 계획에서 그를 말에 태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엑셀핸드는 불평하고, 투덜거렸고, 자신 의 신세를 좀 저주한 다음, 레이셔널 셀렉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레이 셔널 셀렉션을 고른 이유는 그 말이 가장 얌전할뿐만 아니라 한 때 엘프 를 태웠던 말이기에 기수를 낙마시키지 않을 정도의 지혜와 배려가 있을 지도 모른다… 는 우리의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엑셀핸드는 그런 믿음은 전혀 따르지 않고 대신 자기만의 안전 장치를 구사했다. 그 는 자신의 몸을 안장에 묶어버린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 위에 묶인 채로 당당하게 말했다. "걱정마! 자네나 조심하게. 마법사들은 항상 느리게 움직이다가 엉덩이 에 칼 맞는다는 내 소견을 따라서는 안된다구!" 아프나이델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모양이다. 엑셀핸드는 말을 마치자 곧 기운차게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 다. 물론 기운찬 것은 레이셔널 셀렉션이었고 엑셀핸드는 꽁꽁 묶여있음 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떨면서 걸어갔다. 그 다음, 길시언과 샌슨이 움직 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우리에게 기운찬 손짓을 해보이고는 각자 멀 어져갔다. 엑셀핸드는 건물의 동편, 샌슨은 서편, 그리고 길시언은 북쪽을 맞는 다. 정문이 있는 남쪽에는 나와 카알,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남았다. 한쪽 옆에 서 있던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아프나이델. 그리고 네드발군, 자네도. OPG가 없는 이상 자네는 평범한 전사도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네. 왠만하면 자네에 게 그 일을 맡기지 않았으면 했는데…" "염려 마세요. 그래도 제가 제일 다리가 빠르잖아요. 그리고 목숨 날릴 자리는 따로 준비해뒀으니 걱정 말아요." "목숨 날릴 자리?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대륙 최고의 미녀 100명이 운집하여 내 옷깃이라도 만져보려고 애쓰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행복에 겨워 죽어갈 생각입니다." "…자넨 영원히 살지도 모르겠군." 카알은 이런 대답을 한 다음 역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아프나이델은 각자 정문 옆에 서서 준비를 갖췄다. 아프나이델은 계속 호흡을 크게 하고 있었다. 겁이 나는가 보군. 하긴 나도 긴장이 되어 어 깨가 결릴 지경이다. 나는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 는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쥐어보았다.설마 OPG가 없다고 검을 놓쳐버리 는 꼴불견은 보이지 않겠지? 자, 할 수 있어! 시작은 엑셀핸드부터다. "야호오!" 건물의 동편에서 굉장한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곧 저택에서 개짓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개소리였다. (어째 말 이 좀 이상하다.) 엑셀핸드는 그 커다란 목소리로 구슬픈 드워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다. 나는 기억하지. 밤과 낮이 처음으로 갈릴 때 고개 숙여 바라본 호수 속에 하늘의 가장 깊은 노천광에 점점히 박혀 있는 보석들. 별이여, 아름다운 그대, 신비여. 내게 와서 빛나라! 나는 땅을 파네. 딱딱한 바위는 나의 침상이니 망치는 휘두르고, 정으로는 쪼고 주의깊게 살펴보고, 세심하게 더듬어 대지의 품 속에, 나의 별을 찾는다. 보석이여, 땅으로 내려온 별이여. 내게 와서 빛나라! 그들의 한없는 욕망이 올올이 서려있기 때문인지, 엑셀핸드의 노래는 무겁고 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구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할슈타일 저택의 그 유령견들에게는 그야말로 개소리였나 보다. 엑셀핸드가 '내게 와서 빛나라!' 라고 외칠 때마다 더 크게 짖어대고 있 었다. 왈왈왈!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드디어 정원에서 램프의 불빛이 움직이 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 30 명의 전사들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불빛이 저택의 동쪽 담장쪽으로 움직여가더니 곧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 다. "이 짜리몽땅한 광부 녀석이! 여기가 어디라고 고함을 지르는게냐!" "밤중에 무슨 짓이야! 네 녀석들 땅굴인 줄 알아!" 그런 여러가지 욕설이 퍼부어지기 무섭게 곧 엑셀핸드의 노랫소리는 더 욱 높아졌다. 대단해. 곧 전사들은 더 크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바 로 그 순간. "으아아악! 유령개다!" 멀리서 들려오는 처절한 고함소리. 저택의 서쪽이다. 그러자 곧 전사들 은 기겁하며 외쳤다. "침입자다!" 흐음. 샌슨의 고함소리 정말 끝내주네. 샌슨은 정원 안으로는 들어가지 도 않은 채 저택 바깥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사들은 침입자가 들어와서 페이스풀 하운드에게 공격당하는 줄 알고 놀라서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에도 샌슨의 고함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으악! 살려줘! 유령개다! 이런! 으악!" "내게 와서 빛나라!" 저택의 동쪽과 서쪽에서 고함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페이스풀 하 운드들은 온갖 보석의 이름을 대면서 무조건 자기에게 와서 빛나라고 외 치는 엑셀핸드가 상당히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한편 전사들은 페 이스풀 하운드들이 모조리 동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쪽에서 누군가가 유령견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여기고는 그를 구해주려는 목적은 절대로 아닌 걸음걸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 북쪽에서 길시언이 행동에 들어갔다. "도둑이야!" 그러자 곧 전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이런, 저택 뒤에도 침입자다!" "지금이다!" 바로 그 순간, 아프나이델과 나는 재빨리 철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하게 올라갔던지 바지가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투 둑! 우리는 거의 굴러떨어질 듯이 철문 뒤로 뛰어내린 다음 곧장 한바퀴 구르고는 앞으로 달려갔다. 이야아아아압! 전사들과 페이스풀 하운드들 이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문에서 본관까지 달려가야 한다. 아프나이델과 나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왼쪽에서는 개 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고 오른쪽에서는 전사들의 고함소리가 요란한 가 운데, 우리는 다리가 빠져나갈 듯이 달려 간신히 본관 입구에 다달았다. 자, 이제 내 차례다! 나는 달려가던 그 자세 그대로 땅을 박차면서 뒤로 돌았다. 다리가 뒤 로 지지직하고 밀렸지만 어쨌든 몸은 돌렸다. 그리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잠겼잖아!" "으아악! 본관이다앗!" 왼쪽에서(뒤로 돌았으니까.) 전사들의 기겁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 는 신경쓰지 않고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웅얼 거리기 시작했다. "내 지친 영혼의 안식이며," "누구냐! 섰거라!" 서라면 서냐? 내가 돌았냐? 개들도 요란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젠장! "내게 와서 빛나라앗!" 엑셀핸드의 노래소리가 거의 악쓰는 소리로 들릴 만큼 높아졌지만 개들은 이제 엑셀핸드에게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다. 개 들의 고함소리가 점점 커졌다. 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나 지금 그대에게로 달려가노라." "섰거라! 제기랄, 거기 서!" 정중하게 요청해봐. 그러면 혹시 설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 "월월월월!" 젠장, 너희들의 이빨에는 관심이 없어! "아름다우신 나의 레이디," 정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사들의 발자국 소리도 무서 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빌어먹을! 페이스풀 하운드들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데 울음소리는 지척이다. 유령견이라서 발자국 소리가 없 나? 왼쪽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잡아… 으악!" 전사들의 당황한 외침이 들려왔다. "뭐, 뭐야?" "화살을, 으윽, 화살을 쏜다! 팔에 맞았어!" 카알이 한 대 쏘아붙인 모양이다. 좋아, 그럼 일단 전사들은 좀 뒤쳐지 겠고, 페이스풀 하운드들은? 그 때 오른쪽 뒤에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크아아악!" 뭐야, 그새? 젠장, 물린다! 눈 앞에 철창이다, 해보자! "제미니잇!" 나는 몸을 날렸고 간신히, 그야말로 간신히 철창에 매달리는데 성공했 다. 나는 거의 철창을 제대로 밟지도 않으면서 문 위로 기어올라갔다. 내 뒤에서 달려오던 유령견은 허공을 물었다가 그대로 속도를 줄이지 못 한 채 철문을 들이박고 말았다. 깨갱! 얼씨구, 유령견 주제에 할 건 다 하네. 나는 굉장한 속도로 철문을 넘었고 곧 땅에 나동그라졌다. 땅을 구르는 내 귀에 말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힝힝힝! 카알이 트레일에 탄 채 제미니와 앰뷸런트 제일까지 끌고 달려왔다. 나 는 한바퀴 구르자마자 다시 뛰어 제미니의 안장을 붙잡았고 한 호흡도 하기 전에 올라탔다. 그러자 카알은 안쪽을 향해 들으라는 듯이 목청껏 외쳤다. "실패다! 도망가자! 이랴!" "제기랄! 실패라니! 어째서 실패를! 왜 실패를! 이런 실패가!" 나도 실패라는 말을 대단히 강조해버린 다음에 욕짓거리를 좀 곁들이고 는 굉장한 속도로 달려갔다. 등 뒤의 저택쪽에서는 저 놈들을 잡아서 대 단히 아프게 때려줘야 된다는 의미를 험악한 욕설로서 퍼부어대고 있었 다.그러나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달려갔다. 침입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막을 내려야 하니까. 골목길을 달려가는 동안 곧 카알과 길시언이 합류했다. 잠시 후 질린 얼굴의 엑셀핸드가 나타났다. 우리 모두 엑셀핸드에게 대단히 훌륭한 승 마술이라는 칭찬을 해주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질려서 멋대로 달 아나버리지도 않고 정확하게 우리에게 합류했으니까. 하지만 엑셀핸드는 정신이 없어서 우리의 칭찬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꽤나 멀 리 떨어진 다음에, 추격자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카알은 숨을 돌리고 말했다. "좋아. 전부들 괜찮은가?" "예. 추적자는 없군요." "그럼, 이제 아프나이델에게 달려있군." 후우, 후우. 숨이 막힐 지경이군. 볼이 얼얼한데. 어쨋든 이젠 시작이 다. 경비병들이 침입자들에 대한 보고를 하려면 본관 문이 열릴 것이다. 적 어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문을 열 것 이다. 후우우. 그리고 보고가 이루어지며 조사에 따른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인비지빌리티를 사용한 아프나이델은 열린 문을 통해 유유히 2층 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동어를 알고 있으니 역시 유유히 3 층까지 올라갈 것이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아프나이델은 3층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 엑셀핸드는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셔널 셀렉션의 안장을 꽈악 거 머쥐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젠장. 그 친구, 수완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는데." 카알은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어 보시죠" "흠. 어차피 믿었으니 시작한 걸세. 그건 그렇고, 젠장. 엄청나게 높구 만. 이제 좀 말에서 내려도 되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추적자들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기다리시죠." 엑셀핸드는 투덜거리며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만 쳐 다보았다. 허, 수도까지 걸어오신 노커가 수도에서 말을 타게 되시는군. 난 숨을 몰아쉬다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고, 결과적으 로 딸꾹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딸꾹! 딸꾹! ================================================================== 6. 탑메이지……18.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하늘을 보던 샌슨이 말했다. 카알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름이 저런데, 별이 보이는가?" "별을 본 건 아닙니다. 아까부터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대 충 다섯번 불렀으니 시간이 맞을 겁니다." "그런가? 재미있는 기술이구만. 좋아. 그럼." 어두운 골목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던 우리들은 다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할슈타일 저택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저택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었고 정원에는 횃불들이 마구 오가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카알이 혀를 찼다. "어허. 실패하고 달아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인데?" 그럼 작전 실패인데? 젠장,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달아난 이유는 우 리가 실패했다고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인데, 저 사람들은 아직까지 소란 을 떨고 있잖아. 몇몇은 문밖에 나와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 대체 뭐야? 그 때였다. "땡땡땡땡땡-!" 갑자기 건물의 3층 정면에서 굉장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에서는 놀 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건? "3층에 침입자다! 정면 창문이다!" "어디야! 어느 곳이야?" 우리는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런, 아프나이델이군! 길시언이 외 쳤다. "알람 주문! 그렇다면 창문으로?" 설마 아프나이델은 3층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인가? 이런 제기랄, 지금 정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3층에서 뛰어내려 살아난다 하더라 도 도망갈 수는 없다! 샌슨은 돌격 준비를 갖추었고 그러자 레이셔널 셀 렉션 위에 묶여 있던 엑셀핸드는 카리스 누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긴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외쳤다. "뛰어듭시다! 그를 구해야…" "뒤쪽으로!" 카알의 고함소리가 더컸다. 우리는 놀라서 카알을 바라보았으나 카알 은 이미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에하!" 카알이 달려가는 방향은 저택 뒷쪽이었다. 우리도 영문을 모르고 달려 갔다. 저택이 크긴 하지만 말로 달리니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저택 뒤 쪽에 도착하고나자 카알은 빠르게 말했다. "길시언, 샌슨! 담을 넘으시오, 엄호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카알은 말을 담 옆에 붙이더니 안장 위에 서서 담 위 로 올라섰다. 저렇게 날렵한 동작이라니. 길시언과 샌슨도 무슨 영문인 지 몰라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담장을 넘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로프 트릭!" 아프나이델의 목소리! 그리고 저택 3층의 뒷쪽 창문에서 던져진 밧줄이 허공에 서는 것이 보였다. 땡땡땡땡땡! 저건 레너스에서 보았었지. 밧줄 은 허공에 묶인 것처럼 꼿꼿이 섰다. 곧 3층 창문에서 시커먼 것이 뛰쳐 나오는 것이 보였다. 허공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아프나이델은 죽을 힘을 다 해 밧줄에 매달렸고 마법에 의해 꼿꼿이 곤두선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 았다. 그는 밧줄에 매달려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로브가 크게 부풀어올랐다. 멀리 본관 앞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속았다! 뒷쪽이다!" "뒤로! 뒤로 가라앗!" 길시언과 샌슨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고 아프나이델도 떨어지 는 속도와 다름없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는 곧장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그 때였다. 드디어 저택을 돌아온 것인지 저택의 양쪽 모서리에서 횃불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길시언과 샌슨은 아프나이델의 뒤에서 달려오 고 있었다. 카알은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탱탱탱! "으악! 화살이다!" 카알은 저택의 벽을 맞추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저 커다란 저택 을 집중사격하고 있었다. 탱! 태댕, 탱탱! 저렇게 큰 건물이 과녁이니 아무렇게나 쏴도 되겠지. 창문 깨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쨍그랑! 그리고 창문이 깨질 때마다 알람 주문이 발동되면서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땡땡땡땡! 횃불은 갑자기 낮아졌다. 아마 전사들은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을까봐 재빨리 허리를 숙인, 혹은 땅에 엎드려버린 모양이다. 그 동안 에도 아프나이델과 길시언, 샌슨은 계속 달려왔다. 엑셀핸드는 애가 타 서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마침내 그들은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카알은 드디어 전통을 완전히 비워버렸다. 화살 서른 개 정도를 순식간에 쏴버 린 모양이다. 세 사람이 담을 넘어서자마자 우리는 각자를 말에 태우고는 곧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추적자들이 있겠지. 길 시언은 목청껏 지시했다. "날 따라오시오!" 길시언은 바이서스 임펠의 복잡한 뒷골목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두 두두두두. 한참동안 정신없이 이리 꼬이고 저리 비틀어진 골목길을 누비 다보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길시언은 황소에서 내 려서더니 우리에게 낮게 외쳤다.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우리도 일단 말에서 내렸다. 엑셀핸드만이 말에 묶여 있어서 빠르게 내 리지 못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다 내리고나자 길시언은 느긋하게 황소를 끌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걸음걸이다. "말발자국 소리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걷다가 곧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길시언은 아예 썬더라이더를 세우더니 벽에 기대어 서 버렸다. "조용히 기다립시다." "알겠습니다." 엑셀핸드는 살았다는 표정이 되더니 곧 밧줄을 풀고는 샌슨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품위를 지킬 정도의 모습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아 예 파이프를 꺼내어 물었다. 아프나이델은 벽을 짚고 헉헉거리고 있었지 만 역시 달아날 자세가 아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질문했다. "추적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기다린다고?" "그렇지. 잠시 기다리면 저택의 하인들과 전사들은 성문까지 달려가버 리겠지." 성문으로? 아하. 그거군. 모두들 성밖으로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죽어라고 성문으로 달려갈 테니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는 말이로 군. 역시 말에서 내린 카알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괜찮소, 아프나이델? 손은? 밧줄을 잡았는데." "괜찮습니다. 후우, 후우. 손수건을 대고 밧줄을 잡았습니다." "아, 그런가요?" 아프나이델은 숨을 몰아쉰 다음 차분하게 로브 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무슨 책 같은 것이 보였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난 저 책의 표지가 무슨 색깔일지 장담할 수 있다. "푸른 표지의 책입니다." "성공하셨군요!" 샌슨은 크게 기뻐하며 아프나이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엑셀핸드는 손이 닿지 않아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기뻐했다. 아프 나이델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아,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뒤로 나올 줄 알았습 니까? 제발 예측해달라고 빌긴 했습니다만, 정말 길시언씨와 샌슨씨가 달려올 때는 내 눈을 믿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다시 카알을 바라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마법사잖소." 카알의 그 말에 엑셀핸드는 목청껏 웃었다. 기겁한 샌슨이 엑셀핸드의 입을 틀어막아 그는 간신히 웃음소리를 죽였다. "큭큭큭! 그래! 이 친구는 마법사라고! 그리고 카알 자네는? 허허, 마 법사의 계략도 가볍게 알아차리는 괴물이구만. 큭큭큭!" 아프나이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책을 카알에게 넘겨주었다. 카알은 컴컴한 골목길에서 그것을 읽을 수는 없는지라 그냥 말안장의 주 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할슈타일 저택의 사람들은 성문 경비병들에게 물어보고는 우리가 성밖 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곧 여관들을 돌아다니며 우리들을 찾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리 짐을 챙겨 서 나왔었다. 골목길에서 한 시간쯤 기다린 다음, 우리는 모두 흩어져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씩, 혹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우리는 그랜드스톰으로 돌아왔다. 낮에 미리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수련사들은 별 말 없이 우리를 들여 보내주었다. 하이 프리스트에 의해 배정받은 우리 방으로 돌아오고나서, 우리는 그제서야 깊은 피로감을 느겼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잠들지 않았다. 모두들 눈을 비벼가며 테이블 주위 에 몰려앉았고, 카알은 아프나이델이 훔쳐내온 그 책을 가져왔다. 카알은 피로한 목소리로 그 표지를 읽기 시작했다. "바이서스 임펠 여행객을 위한 가볼만한 술집들이라…" 모두들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 다. "넥슨은 술 마시고 싶을 때 꺼내볼 책이 필요했나 보군요?"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카알도 단조롭게 웃 으며 말했다. "비밀이 있는 책이라면 표지는 가짜겠지. 어디 보세나." 카알은 표지를 넘겼다. 그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그는 후다닥 책 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맨 뒷페이지까지 읽었고, 그리고 는 다시 뒤에서 앞쪽으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어? 전부 술집이름 맞는데?" 우리는 놀라서 모두다 그 책을 한 번씩 보았다. 진짜 그랬다. 각 페이 지마다 맨 위에 주점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주점의 주인이라든지 자 랑할만한 술의 이름이라든지 하는 것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스 트레이트 헤븐의 이름과 함께 바이서스 임펠 최고의 수플레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얼빠진 표정이 되 었다. 그러나 그 책이 마지막으로 아프나이델의 손에 들어갔을 때, 아프나이 델은 빙긋 웃었다. "시크릿 페이지(Secret page)입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예?" "페이지들 중에 서류 몇 개를 끼워놓았습니다. 그리고 마법으로 그 서 류를 다른 페이지와 똑같이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마법으로 풀어야 됩니까?" "아뇨.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찾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냥 꼼꼼히 읽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페이지를 찾아내어도 됩니다만, 그건 시간이 걸리겠군요. 음, 엑셀핸드님?" "으응?" "여기선 엑셀핸드님의 손이 가장 정교하겠군요." 엑셀핸드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드워프니까 손 재주는 가장 정교하겠지. 아프나이델은 책을 엑셀핸드에게 내밀면서 말 했다. "눈을 감고 페이지를 만져보십시오. 읽으려고 하면 속게 됩니다. 그러 니까 눈을 감고 감촉만으로 느낌이 다른 페이지가 있는지 살펴보십시 오." "그런가? 알았네." 엑셀핸드는 그 책을 받아들고는 눈을 턱 감고 한 페이지씩 넘기며 손으 로 페이지를 쓰다듬었다. 누가 보면 드워프는 눈이 손에 달려있다고 생 각하게 될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엑셀핸드는 자기의 감각에 자신이 있 는지 그야말로 대충 스치듯이 한 페이지씩 만져보며 빠르게 넘겼다. 우 리는 그가 너무 살짝 만져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엑셀핸드 는 그 중 하나를 접어버렸다. 저것인가? 엑셀핸드는 계속 페이지를 넘기 다가 중간중간 페이지를 하나씩 접곤 했다. 빠른 속도로 책의 마지막 페 이지까지 만져보고 엑셀핸드는 눈을 떴다. "자네 말이 맞군. 접어놓은 것들은 느낌이 달라." 아프나이델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드워프다우십니다." 그 다음은 샌슨이 나이프를 꺼내어 책을 묶은 끈을 자르고 접어놓은 페 이지를 뽑아내게 되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책의 한 페이지였을 때는 그야말로 빼곡한 술집 이름의 나열이었던 종이들이 책 밖으로 빠져나오 게 되자 곧 글자들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우리는 감탄하면서 그 광경 을 보았다. 서류를 모두 뽑아내기도 전에 카알은 다급한 마음에 첫 페이지를 읽었 다. 서류를 뽑아내는 샌슨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숨죽여 카알을 바라보았 다. 카알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건… 바이서스의 군단 편성과 군단장들에 대한 조사 보고서인데?" "예에?" 모두들 크게 놀랐다. 길시언은 황급히 손을 내밀었고 카알은 그에게 서 류를 넘겨주었다. 길시언은 눈이 빠져라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이럴 수가… 이건 군 기밀인데!" 카알은 샌슨이 뽑아놓은 다음 종이들을 서둘러 읽어내려갔다. 그는 기 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이건 군대의 보급 계획표 아닌가! 보급선과 중간 집결지가 다 표시되어 있어!" 우리는 완전한 당혹에 빠져버렸다. 모두들 앞다투어 서류들을 보았다. 모두다 군 기밀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바이서스 군대 보급 계획표, 인사 표, 배치도, 기본 전술과 응용, 작전 단기 계획, 장기 계획! 길시언은 너무 기가 막히자 허탈하게 웃어버리면서 말했다. "맙소사, 이것들을 보기 위해서라면 자이펀 군대에서는 뭐든 내놓겠는 데?" 엑셀핸드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엑셀핸드는 바이서스의 군대 기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나 보지만 우리는 숨죽여서 그것들을 읽었다. 그 때 느닷없이 카알이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 위에 온 몸을 던지듯이 하면서 서류를 그러모았다. "모두들! 읽지 마시오!" ================================================================== 6. 탑메이지……19. 카알이 너무나 험악하게 외쳐서 우리는 찔끔했다. 그러나 카알은 주저 하지 않고 마치 빼앗듯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서류를 가져갔다. 너무 급하게 당긴 나머지 찢어질 뻔한 것도 있었다. 카알은 황급히 서류를 모 으면서 말했다. "이건, 이건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겁하면서 서류를 내던졌다. 그래서 카알은 한결 편하게 서류를 모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으면서도 그 스스로도 역시 절대로 보 지 않으려 애쓰는 동작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듯이 혼잣말 비 슷하게 중얼거렸다. "만일의 경우 우리 입에서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오. 절대, 절대 읽어서 는 안됩니다." 모두들 그 말에 찬성했다. 샌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다시 끼워넣을까요?" 카알은 크게 심호흡한 후에 말했다. "아니, 그건 안되네. 이 서류가 왜 할슈타일 저택에 있는지, 그리고 왜 넥슨이 이 서류를 훔쳐내려고 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이건 누구에게도 줄 수 없네." 카알은 자기 손에 모여진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 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투다. 그러자 길시언이 말했다. "태우십시오." "예?" "그 서류, 누구에게도 유출되어서는 안됩니다. 태워버리십시오." 카알은 그게 합당한 말인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길시 언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곧 초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더니 카알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알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대에서는 성급하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행동은 즉각이어야 합니다." "아뇨. 안되겠습니다. 이 서류는 국왕 전하께 제출해야 됩니다." "전하께 말입니까?" "예. 그리고 전하께서 할슈타일 후작을 불러 추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왜 할슈타일 후작이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를." 길시언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내일 즉각입니다. 날이 밝는대로 임펠리아에 가야 합니다. 이 서류가 우리 손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위험합니다." "당연한 말이십니다." "네리아가 먼저에요." 카알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말했고 그러자 길시언은 놀란 표정을 지 었다. 나는 급하게 말했다. "네리아가 먼저에요. 넥슨이 진짜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면 우리가 궁성 으로 향하는 것쯤은 간단히 알아차릴 거에요. 수도에 정보망이 쫙 깔려 있을 테니까. 그럼 우리가 서류를 빼돌리는 것도 짐작하겠죠. 그러면 네 리아가 위험해져요." 그 말에 길시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갑자기 험악한 얼굴이 되었 다. "젠장. 이 서류들은 바이서스의 안보가 걸린…" 길시언은 말을 맺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길시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치. 네 말은 이 서류들을 넥슨에게 넘겨주자는 말이냐?" "아뇨. 그런 말이 아니에요. 이 서류는 넘겨주면 안되죠. 하지만 네리 아를 먼저 구출해야 되요. 네리아를 구한 다음에 이 서류를 전하께 드리 도록 하죠." "어떻게 네리아를?" 말문이 막힌다. 서류는 전하에게 갖다줘야 한다. 하지만 네리아를 구하 기 전에는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런데 네리아를 구하려면 서류는 넥슨에 게 줘야 한다. 그러나 넥슨에게 주면 전하에게는 줄 수 없다. 뭐가 이 래? 카알은 턱을 긁으며 이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넥슨이 원한 것은 푸른 책니까. 책만 가져다주지. 술 마시고 싶을 때 이용할 수 있도록." 우와, 간단하시군. 길시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프나 이델은 부정적인 표정이었다. "서류가 빠진 것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그는 마법사가 아니지 않소." "예. 하지만 어떻게 확인을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 스스로도 책 에 뭔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책을 노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확인할 수단은 갖춰두었을 텐데요." "그렇겠군요. 음. 이젠 그걸 고민해봐야겠군요. 아프나이델, 당신은 그 거, 시크릿 페이지, 맞습니까? 예.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만 메모라이즈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메모라이즈를 하면 되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은 지금부터 푹 자 두십시오. 내일 아침엔 그 마 법을 메모라이즈 해야 됩니다." "그럼?" "예. 가짜 서류를 만들겠습니다.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지만, 네리아양 을 구할 정도의 시간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럼 되겠군요." 아프나이델도 찬성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습니다. 그럼 가짜 서류를 만드십시오. 저는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이 서류가 우리 손에있는 한, 설령 이곳이 그랜드스톰이라 해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샌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대로 서도록 하지요." 뒷정리에 들어섰다. 먼저 책을 다시 원상태로 만들어놓고 그 서류는 따로 모아 추렸다. 그 리고는 그것을 누가 맡을 건지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자 기 배낭을 모조리 비우고나서 서류를 배낭에 집어넣고는 배낭에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온갖 물건을 다 꺼내며 흔들고 뿌리고 중얼거 리고나서 아프나이델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왠만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제 이 배낭은 제 허락 없이는 열 수 없습 니다." 그러자 길시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프나이델의 배낭의 용도 를 쿠션으로 바꿔버렸다. 그는 그렇게 배낭을 아래에 깔고는 험상돎은 표정으로 프림 블레이드를 지팡이삼아 짚고 당당한 자세로 앉았다. 마치 '날 죽이기 전에는 내 엉덩이 아래의 이 물건엔 손도 못댄다!'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다. 카알은 말했다. "네드발군?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게." "알았어요." 카알은 곧 테이블에 앉았다. 길시언은 여전히 험악한 눈초리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방문을 노려보고 있었고 아프나이델은 곧 침대로 갔다. 카알은 나와 샌슨에게도 종이를 내밀면서 말했다. "자네들, 졸린가?" 샌슨은 허허 웃고나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뭘 쓰면 됩니까?" "언뜻 보기에 마치 군 기밀인 것처럼 보이게 쓰도록. 그렇게 할 수 있 겠는가?" "글쎄요. 군기밀인 것처럼 쓰는게 쉬운 일은…" "아니, 그렇게까지 정확할 필요는 없네. 그저 언뜻 보기에 그렇게 보이 도록 쓰면 된다 이 말이네. 자신이 없다면 아무 말이나 써도 좋네만 최 소한 무슨 서류처럼은 보여야 하네. 마구 갈겨쓴 낙서만 아니면 되네." "알겠습니다. 해보죠." 나와 샌슨도 곧 위조서류 작업에 동참했다. 엑셀핸드는 글쓰기에는 관 심이 없다고 하며 질색했지만 그렇다고 잠자리에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 옆에서 작업을 구경했다. 그리고 길시언은 여전히 그 엄청난 서류 들을 세인의 관심으로부터 자신의 굳건한 엉덩이로 지켜내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허, 이런 날씨에 바닥에 앉아 있으면 힘들텐 데. 그러나 곧 우리도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젠장.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하지? 난 샌슨을 흘깃 바라보았지만 샌슨은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이 팔로 감 싸고 쓰고 있었다. 에엑! 관둬라. 안 본다, 안 봐! 그럼 어디. 난 카알 을 슬쩍 보았다. 카알은 그야말로 펜이 날아갈 듯이 써대고 있었다. '상기의 예에서 추측될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전력의 배치에 대 한 군단장 개개인의 차이는 대저 허즐릿의 저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 군단장이 아침식사로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르는 것임은 의심할 바 없 는 진리이다. 그러나 군단장이 아침 식사를 섭취할 때 사용한 수저의 형 태에 대한 다원적이고 심오한 고찰이 동반되지 않은 결론은 자칫…' 나는 자지러지듯이 웃고 나서 곧 펜을 잉크에 적셨다. 좋아. 그런 식이 라면. 나는 또박또박 정서로, 아주 공식서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 씨체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전략의 최우선적인 보루는 바로 헬턴트 영지 내에 소재한 사바 인 계곡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 마땅할 것임을 다시 한 번 주장한다. 사 바인 계곡에 산재해 있는 민트의 형태와 그 배치에 대한 최우선적인 고 려가 선결조건이라면, 그 이후 동반될 수 있는 조건은 바야흐로 민트 채 집단이라는 암호명으로 암약하고 있는 비밀의 부대 헬턴트 경비대에 대 한 완벽한 조사가 될 것이다. 헬턴트 경비대는, 흡사 인간으로 착각하기 쉬운 외모를 가졌으되 그 식사 형태나 음식물에 대한 무서우리만큼의 탐 욕으로 미루어보아 의심의 여지 없이 오우거임이 분명한 전사 샌슨 퍼시 발에 의해 지휘되는 공포의 부대로서…' "푸흐허아하하하!" 엑셀핸드가 웃어버리는 바람에 샌슨은 내 글을 보게 되었고 잠시 후 우 리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서로 상대의 몸을 아껴주지 않고 그 관 절을 꺽어주게 되었다. 그리고 카알의 헛기침 소리에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털면서 일어나 다시 차분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잠시 후 엑셀핸드는 샌슨의 글을 보고 마구 웃어버리게 되었고 샌슨의 글 내용을 보게 된 나는 비명을 올리게 되었다. '그날 밤 순진한 소녀 제미니에게 술을 먹이고 그녀를 숲으로 끌고간 후치 네드발의 야비한…' "샌스으은!"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바닥에서 뒹굴게 되었고, 이 이상한 분위기 에서 홀로 삼엄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지키려 애쓰는 길시언의 모습 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괜찮습니까?" 아프나이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샌슨과 나는 모 두 녹초가 된 채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고 카알은 완전히 부어버린 눈으로 신중하게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펜을 쥐었던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듯이 아파왔다. 와! 늦은 가을밤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그렇게 정신없이 글을 쓰고 나니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저려온다. "허어, 허어… 어, 어어어어." 샌슨은 팔을 조금 움직이려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난 움직일 힘도 없이 테이블에 뺨을 갖다댄 모습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애써 참고 있지만 밤새도록 우리가 글을 써버리느라 아무도 그와 교대해 주지 않은 후유증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프나이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놀라운 자 제력으로 신음소리는 내지 않았고 그의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도 그대로 였으나 그의 다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기절할 듯한 얼굴로 침대로 다가가서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카알은 한결같은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더니 그 중에서 몇 개를 추려내었다. "흠, 됐어." 그리고 카알은 그 가짜 서류를 엑셀핸드에게 주었고 엑셀핸드는 세심한 손놀림으로 책을 분해해서 그 가짜 서류를 끼워넣었다. 엑셀핸드는 나이 프로 밖으로 삐져나온 여백들을 정확하게 잘라내었다. 저 두껍고 짤막짤 막한 손가락들이 어쩌면 저렇게 교묘하게 움직이는지. 엑셀핸드가 책을 붙잡고 조금 꿈지럭거리고 나자 이제 정교한 솜씨는 누구의 눈으로도 원 래 종이와 끼워넣은 종이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카알은 그 책을 아프나이델에게 건네었다. "당신 차례입니다." "알겠습니다." 아프나이델은 배낭에서 꺼내두었던 물건들 중에서 몇 개의 주머니와 몇 개의 약병들을 들고 오더니 곧 책에 가루를 뿌리고 물건을 위로 집어던 지고 아래로 던져 깨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그의 얼굴에서 는 끊임없이 땀이 흘러내렸고 그의 입술은 잠시도 쉬지않으며 주문을 웅 얼거렸다. "시크릿 페이지!" 아프나이델은 격렬한 동작으로 책을 가리켰다. 그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책을 겨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라? 뭐야. 실패 인가? 이런 어이없는.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곧 손을 내리더니 이젠 편안 한 동작으로 책를 뒤적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만족한 웃음이 배어나왔 다. 그는 카알에게 책을 내밀었다. "찾아보시죠." 카알은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퉁퉁 부은 눈으 로 미소를 지으니 보기가 좀 그렇다. "훌륭합니다." 카알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에게도 책을 내밀어주었다. 페이지를 좌르륵 넘겨보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술집 소개서처럼 보일 뿐이다. 카알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됐군요. 그럼 도둑 길드로 출발…하고 싶지 않군요." 카알은 허리를 채 펴지도 못한 모습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일어 난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고통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침대 에 누워있던 길시언도 말했다. "지금은… 도저히 못가겠군요." "조금 쉬었다가 갑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제각기 쓰러져버렸다. 다섯 도적들은 에델브로이의 가호를 바라며 그렇게 잠들었다. 푹 자버린 아프나이델은 우리들을 지키 고, 또한 그 서류를 지키게 되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보니 그는 빙긋빙긋 웃으며 그 푸른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헷. "자신의 솜씨가 자랑스러우세요?" "응? 어, 안자냐?" "너무 피곤하니까 오히려 잠이 안오는 것 같네요." "아. 그래."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모습으로 책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조금 불확실한 발음으로 말했다. "당신 솜씨는 썩 훌륭해요. 아프나이델." "뭐, 별 것 아닌 마법이다. 시크릿 페이지같은 것은 초급의 마법이지." "초급이든 고급이든 필요한 순간에 도움이 되면 그게 최고죠." "고맙구나. 후치." "흐음. 그거 괜찮네. 당신, 다음에 별명을 붙일 정도로 유명해지면 최 고마법사라고 정하는 것이 어때요? 대마법사는 솔직히 너무 많이 쓰잖아 요." "녀석. 미안하다, 그래. 그만 놀려라. 그건 젊은 날의 치기라는 낡은 말로밖에 설명이 안되는 거였다." "놀리는 것 아녜요. 괜찮잖아요? 탑메이지(Topmage) 아프나이델. 어때 요?" "탑메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내 말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아프나이델은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 는 그의 미소를 보며 잠이 들었다. 어이구. OPG가 없으니 더 피곤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 7. 항구의 소녀……1. …그리하여 드래곤 라자는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드래곤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자. 그러나 그 역시 그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인 것이다. 드래곤과 인간의 매개자였으되 그 스 스로를 타인과 연결시켜주는 매개물 또한 그 자신이다. 우리 들 모두가 자신을 변화시켜 타인과의 매개물로 만들듯이. 보 라. 그대는 부모에게 보이는 얼굴이 다르고 연인에게 보여주 는 행동이 다르지 아니하냐. 그대의 원수를 향해 내뱉는 언 어가 다르고 그대의 은인에게 드리는 사례가 다르지 않느냐. 그러므로 그대와 타인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자는 다름아닌 그대 자신이다. 이는 저 드래곤 라자도 더불어 마찬가지였음 이니…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3 권. PP. 527 (770년 돌로메네 作) 모두들 몸의 리듬이 엉망이었지만 억지에 가깝게 일어났다. 벌써 늦은 오후였다. 모두가 일어나고나자 아프나이델은 그 동안 하이 프리스트가 몇 번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 "예. 일어나는대로 좀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전부 다 말입니까?" "아뇨. 카알만 오시면 된답니다." "그래요? 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수련사들이 들어왔다. 우리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수련사들은 황송스럽게도 대야와 물을 가져다 주었고 우리는 감사히 세수를 마쳤다. 그리고나자 곧 수련 사들은 식사도 가져다주었다. 길시언은 크게 감사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에델브로이의 지팡이여." 수련사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 아직은 그 지팡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예. 그럼 에델브로이의 어린 나무여. 종규에는 식사 시간에 대해 엄격 할 것이 명시되어 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희 길을 찾는 이들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지, 손님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길시언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적당히 감사치레를 하고는 수련사들을 돌려보냈다. 늦은 오후니까 수련사들은 아마도 경전 봉독 시 간일 것이다. 수련사들은 맛있게 드시라고 말하고는 물러났다. 길시언은 식사를 들면서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우리에게 많은 친절을 베푸시는군요." 카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렇게 식사시간까지 어겨가면서… 흐음. 그 분의 희망을 꼭 들어드려야 될텐데요. 부담스럽군요." 다른 사람은 대략 대여섯 번 쯤 베어먹어야 다 먹을 빵을 두 입만에 끝 장낸 샌슨이 빵가루를 튀겨가며 말했다. 저건 샌슨 브레스다…. 으으으. "그런데요, 쩝쩝, 지금쯤 시내에서는, 쩝, 꿀꺽! 난리가 낫겠죠?" "응? 왜 그러는가, 퍼시발군?" "아니, 저, 우리가 도둑 길드를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응? 무슨 말인가?" "소문이 났잖습니까.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저택이 털렸다, 뭐 이런 식으로. 시내가 대단히 삼엄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넥슨더러 네리 아를 데리고 여기로 오라고 배짱을 부려보지요. 넥슨도 소문을 들었을 테니까 우리가 성공한 것을 알았을 겁니다. 도둑길드로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라. 흠." 맞아. 위험하겠군. '수고했다. 그럼 이만 죽어라.' 젠장, 옛날 이야기 에 나오는 악당은 항상 그 모양이잖아? 넥슨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악 당과는 많이 다르긴 하지. 품위도 있고, 게다가 재가 프리스트이기도 하 고.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소문은 나지 않았을 걸세." "예? 그런 엄청난 집이 털렸는데?" "퍼시발군. 자네는 퍽 자랑스러운 모양이군? 하긴 우리는 도둑 길드의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저택을 침입하기는 했네." 그 말에 샌슨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자랑스러운가? 흐음. 결국 도둑질이긴 하지만 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소문은 나지 않을 것 같아." "왜지요?" "도둑맞은 물건이 공개되선 안되는 물건이니까." "아! 그렇군요." 샌슨은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아프나이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샌슨씨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는데요." 길시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에게 뒤지지 않는 모습의 반모 범적인 식사 태도로 나를 상당히 감동하게 만들고 있던 위대한 노커 엑 셀핸드가 위대한 트림을 꺽꺽하면서 말했다. "그럼, 끄어억! 에, 그 놈보고 여기로 오라고 하세!" 카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되겠군요.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네리아양과 서류의 교 환은 안전한 곳에서 이루어져야겠습니다." 나는 카알의 말에 그만 웃어버렸다. 아이고, 능구렁이! "똑바로 말해야죠, 카알. 네리아와 가짜 서류의 교환이라고." "응? 허허. 그렇구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말에 씨이익 웃었다. 왠지 한겨울에 땅 파면 나 오는, 뱀들이 득실거리는 땅굴 같다. 으으으… 이런 사악한 사람들 사이 에서 내 섬세하고 순진한 성품이 타격을 입지는 않을까? 카알은 하이 프리스트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그러자 심심해진 샌슨은 나에게 팔씨름을 하자느니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망할. OPG 없다고 이렇게 괴롭히냐? 내가 펄쩍펄쩍 뛰면서 악을 바락바락 써대자 샌슨은 길시언에게 대무나 하자고 말해서 길시언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신전에서 대무를요?" 그래서 샌슨은 구석에서 몹시 가여운 얼굴을 하고 있게 되었다. 아프나 이델은 그 모습을 보며 웃더니 이루릴의 그것만큼이나 큼직한 책을 꺼내 어 읽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숯돌을 꺼내어 도낏날을 갈기 시작했다. 쓰으윽, 싸아악. 모두들 평화스러워 보였지만 이 평화에는 숨겨진 면이 있다. 모두들 나 름대로 왜 할슈타일 후작이 이 군 기밀 서류를 가지고 있는지를 추측해 보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모두들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민 하고 있었다. 결국 엑셀핸드가 먼저 도끼를 가는 손놀림에 맞추어 흥얼 거리듯이 말했다. "할슈타일이란 후작, 왜 이런 서류를?" 아프나이델은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더니, 곧 책장을 내려놓고 말했다. "가장 쉽게 생각하면, 스파이겠죠." "후작이 무엇 때문에?" "자이펀과의 거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구미가 동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침착하지만 진지한 어 투로 말했다. "카알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 름다운 프림 블레이드… 그만 둬엇! 에, 어, 죄송합니다. 카알은 전쟁 중에는 많은 일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후작은 자이펀과 손을 잡고 둥글게 돌며 춤이라도… 야이, 빌어먹을 칼아아악!" 진지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길시언은 검무를 추기 시작했 다. 그래서 구석에서 가여운 표정을 하고 있던 샌슨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길시언은 너무 흥분해서 검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욕짓거리 를 뱉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했다간 눈 먼 칼에 맞아죽을지도 모르 니까. 아프나이델이 길시언의 말을 이었다. "자이펀과 손을 잡고 바이서스를 전복시킨다, 이런 말입니까?" 길시언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그를 체포, 구금하시겠지 요." "그렇게 되긴 어렵습니다." 길시언의 말에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반역자를 가만 둘 수 없다니오." "죄와 벌이 같이 다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할슈타일 후작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후작은 건드리기엔 너무 민감해서… 아냐! 에, 건 드리기엔 세력이 너무 큽니다. 캇셀프라임은 패퇴되었지만 아직 드래곤 은 남아 있습니다." 드래곤이 남아있다고? 나는 질문했다. "크라드메서요?" "아니, 자이펀과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의 드 래곤 라자는 역시 후작의 가문에 입양되었던 양자이긴 합니다만, 지골레 이드를 생각해서라도 할슈타일 후작을 건드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으어… 죄와 벌은 함께 다니는게 아니군. 젠장. 아프나이델은 미간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국왕 전하께서 정하실 일이고, 우리는 이 서류를 가져다드리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길시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찜찜한 표 정이었다. 그 얼굴이 재미있어서 나는 한 마디 걸어보았다. "전쟁에는 관심없다고 하시더니, 역시 걱정은 되시나 보군요?" 내 말에 길시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응? 무슨 말이냐?" "지금 나라일을 걱정하고 있잖아요. 국왕 전하의 곁에는 전문가가 많아 서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 기억나거든요." 길시언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창문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굵은 눈썹이 부드럽게 움직여 창문 밖의 관목들을 향했다. 그는 나직하게 말 했다. "솔직히 걱정 안될 수는 없다. 동생이고, 우리나라니까." 우리나라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내 나라가 될지도 몰랐던 나 라라고. 어쨌든 그는 순종 모험가는 못되겠군. 흐흠. 대화가 끊어질 쯤 해서, 방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리며 들어선 것은 카알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샌슨의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카알은 뭐가 그리 급한지 우리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이상하군요. 소문이 났습니다." "예?" 카알은 테이블 옆에 앉더니 우리를 모두 모이게 했다. 모두들 빠른 몸 놀림으로 테이블 주위에 모여앉자 카알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가 물어왔습니다. 어제 할슈타일 후작의 저택이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꺼내시더군요. 나는 그랬느냐는 식으로 대답하긴 했 습니다만 하이 프리스트는 지나가는 어투로 우리가 어젯밤 늦게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예?" 모두들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크게 갸웃거리며 말했다. "후작이 돌았나? 아, 그것, 이상하군요. 도둑 맞았다는 것을 말한다면 도둑맞은 물건에 대해서도 말해야 될텐데?" "그렇소. 이상한 일이오. 어쨌든 하이 프리스트께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습니다." 엑셀핸드가 머리를 마구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흐음… 그것 참! 골치 아프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어?"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서류는 조속히 전하께 전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네리아 양을 빨리 구해야 됩니다. 퍼시발군, 네드발군." "예." "네드발군이 안내하게. 도둑 길드를 찾아가서 우리가 그 책을… 아니, 소문이 났다면 그쪽에서도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그 책을 가지고, 에, 길시언? 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 그야 중앙광장이겠죠. 루트에리노 대왕 기념관이 있는." "알겠습니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네드발군과 퍼시발군은 넥슨에게 우 리가 책을 가지고 중앙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네리아를 데리고 나 오라고 전하게. 무슨 말을 하든 듣지 말고 무조건 지금 당장 중앙광장으 로 오라고 말하게나. 알았지?" "지금 당장이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방 한쪽에 놓여있던 아프나이델의 배낭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길시언은 이 서류를 가지고 즉시 임펠리아를 찾아가십시 오. 길시언은 전하를 바로 만나뵐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나이델, 배낭 을 열어 서류를 꺼내드리십시오." 아프나이델은 배낭을 열었다. 길시언은 서류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책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 넥슨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내가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서툰 짓은 못할테고, 그리고 그런 야 외에서 책을 뒤지며 종이를 확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네 리아양을 돌려받자마자 임펠리아로 달려가겠습니다. 부탁이니 우리를 맞 아들일 준비를 좀 갖춰주시겠습니까? 국왕 전하께 그 정도의 부탁은 드 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카알은 조금 쌀쌀맞게 말했다. 하긴, 우리는 자이펀을 박살낼 계획도 말해줬고, 이번엔 반란자의 비밀서류도 가져다 준다. 만인의 종복, 기사 중의 기사인 국왕에게 그 정도쯤은 요구해도 되겠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았습니다." 그 때 아프나이델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임펠리아로 갑니까?" "예. 그곳보다 안전한 곳이 있겠습니까?"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프나이델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마법사는 궁성 을 싫어하나? 어쨌든 나와 샌슨은 곧 도둑길드로 출발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카 알과 아프나이델, 그리고 엑셀핸드는 책을 들고 중앙광장으로 출발했다. 길시언은 중앙광장까지 그들을 안내한 다음 임펠리아로 달려가기로 했 다. ================================================================== 7. 항구의 소녀……2. 대로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 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소란을 부리고 있었다. 특히 샌슨은 여전 히 그 험악한 표정과 힘이 넘치는 몸짓으로 주위 사람들이 감히 불평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서 꽤 멀어진 다 음에 안들리도록 궁시렁거리는 것은 수도 시민의 당연한 자유다. "아닌 것 같은데." "이…! 머릿속에 여자 생각밖에 없는 녀석아! 어떻게 모른다는 말이 야?" 나는 샌슨을 째려본 다음그를 무시하며 다시 다음 골목으로 걸어갔 다.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그에 보조를 맞추듯이 가볍게 튀어나온 콧노 래. "성밖 물레방앗간에…" "그만해! 말 돌리지 말고!" "젠장. 나도 돌겠다고! 네리아 따라서 딱 한 번 와봤어. 이런 망할, 무 슨 골목길이 이렇게도 복잡해? 거기가 거기 같고 저기도 거기 같고 요기 도 거기 같단 말이야!" 거기란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턱이 아프다. 샌슨은 인간이 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로 작정했는지 그래도 기억해내야 된다, 멍청 아, 한 번 가봤으면 당연히 알아야지,넌 그럼 절벽에서 한 번 떨어지고 도 다음 번에 또 절벽으로 걸어갈 셈이냐? 등의 말도 안되는 말을, 그것 도 아주 큰 목소리로 뱉어내고 있었다. "너무 늦잖아!" "저기다!" "어? 어디, 어디 말이야?" "저기, 저기 있다! 바로 저거야, 샌슨에게 필요한 것은!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와." 샌슨은 내 손가락을 따라갔다가 건초상 앞에 있는 말 여물통을 보고는 펄쩍펄쩍 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 망할 자식아!" 샌슨이 너무 고함을 지르자 슈팅스타마저도 좀 놀란 모양이다. 샌슨이 서 있던곳 바로 옆에 있던 포목점에서 주인이 더 이상 못참겠는지 천 자르는 가위를 들어보이며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입 닥치지 않으면 이걸로 혀를 잘라 줄 거야!" "뭐야? 말 다했어? 자식아! 잘라봐, 잘라봐!" 샌슨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말에서 내린 다음 그 젊은 포목점 주인 에게 삿대질을 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이구, 안되겠다. 나도 재빨리 제미니에서 내려 샌슨을 붙잡았다. 젠장, 질질 끌려가네. 난 있는 힘을 다해 샌슨을 끌어보려 애쓰면서 그 포목점 주인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청년 겉보긴 멀쩡해보여도 사실 말로 해선 못알아듣는 지진아에요. 정상인인 제가 대신 사과할테니…" 딱! 오! 반가운 소리. 젠장. 분명히 이 근처 어딘 거 같은데? 샌슨은 내 귀를 붙잡아당기며 말했 다. "자식아!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다며? 뭐라고? 포목점 지나 건초상 돌 아가면 바로 나오니까 눈 감고도 찾아가, 가, 가…" "어…?" 잠깐. 포목점과 건초상? 샌슨과 나는 서로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들의 고삐를 쥔 채로 다시 뒤로 돌아서 우리가 서 있던 포목점에서 그 뒤의 건초상으 로 지나갔다. 그러자 그 뒤에 구두가게가 보였다. 샌슨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슬라임 같은 놈…" 슬라임 같은 머리로 취급받게 되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샌슨에 게! 죽고 싶다는 감정이 이다지도 쉽게 느껴지는 것이었구나. 으으. 그 래도 별로 할 말은 없군. 우리는 말들을 세워두고는 구두가게로 들어섰다. 역시, 기억난다. 여기다. 늙수구레한 노인 쟈크가 앉아서 구두를 쥐고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노인 쟈크는 우릴 흘깃 보더니 곧 내 얼굴을 알아 차렸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노인 쟈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구두 중에 하나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내려가봐." "수고하세요." 어울리는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주었다. 노인 쟈크는 괴상한 눈길로 날 보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구두를 또각거리기 시작했다. 샌슨은 벽의 구두를 당기자 구석벽이 열리는 모습 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어쨌든 그대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 계단이 보였다. 샌슨은 신 중한 걸음걸이로 게단을 내려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아래에 내려가 자 샌슨은 곧장 문을 두드렸다. 정말 앞뒤없군. "누구야?" 샌슨은 잠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곧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야." 아이고 맙소사. 나는 머리를 좀 가로젖고는 대신 말했다. "약속대로 네리아를 찾으러 왔다. 문 열어." "들어와." 문이 열렸다. 샌슨은 문만 열고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선 채 안을 살폈다. 안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서있었다. 몇몇은 테 이블에 몰려앉아 있었고 몇몇은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넥슨 휴리첼도 보였다. 그는 전에 왔을 때 청년 쟈크가 앉아 있던 그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넥슨은 우릴 보더니 말했다. "자네들인가?"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젠장. 정말 당신이 길드 마스터였군. 프리스트가 도둑길드의 마스터라 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쳇." 샌슨의 이 막나가는 말에 안에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러 나 넥슨은 별로 표정을 바꾸지도 않은채 말했다. "그런데, 거기 서 있을 건가?" 샌슨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포위되기 쉬워서 그 러는 모양이다. "내 마음이야. 네리아는 어디 있지?" "잘 있어. 물건은?" "소문은 들었을텐데." 그러자 구석에 있던 남자 하나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들었어. 자네들이 진짜 그 집을 털었…"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넥슨이 사납게 그 남자를 노려보았던 것 이다. 넥슨은 거의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끼어들지 마라." 남자는 창백해진 얼굴을 옆으로 꺽었다. 넥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 쪽으로 말했다. "축하하지. 도대체 어디 가서 그런 도둑을 구했지?" "응?" 우리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도 바깥에 서 있어서 우리 표정 은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넥슨은 말했다. "내가 모르는 도둑인 걸 보니 길드 소속은 아닌 것 같은데. 할슈타일 저택에 침입할 정도의 도둑이 그렇게 명성이 없다니, 놀라워. 그 이름을 알고 싶은데?" 샌슨은 빙긋 웃었고 나도 킬킬거리며 말했다. "당신 알 바가 아니야. 어쨌든 그 이상한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어. 그 런데 무슨 그런 책을 원하는 거지?" "내용을 봤나?" "그래. 술집 안내서가 왜 필요하지?" "내가 그 책이 필요한 이유를 자네가 알아야 할 필요는 있는가?" "없지. 관심없어. 그런데 네리아는 어디 있지?" 넥슨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샌슨은 그 자리 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넥슨은 방 한가운데 서서 불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어두컴컴했으나 그의 눈 만은 번쩍번쩍 빛나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숨이 막혀서 샌슨을 쳐다보았다. 샌슨은 바깥의 어둠 속에서 방안의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도 바 깥의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 눈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넥슨이 번쩍거리 는 눈빛이라면 샌슨은 불타오르는 눈빛, 오오, 운차이! 나 이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것이 살기인가? 넥슨은 말했다. "자네, 그 날 아침의 대무 모습을 봤었지." "그랬었지." "길시언 폐태자를 봐주면서 하고 있더군." 뭐라고? 샌슨은 찔끔한 표정이더니 다시 씨이익 웃으며 말했다. "눈이 좋군. 좋은 대무 상대는 구하기 어렵거든. 하지만 네게 시덥잖은 칭찬이나 들으려고 온 것은 아냐. 네리아는 어디 있냐고 한 번만 더 물 으면, 에, 어, 후치야?" "세번째." "그래. 세번째다. 대답해." 넥슨은 갑자기 옆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서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옆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네리아의 팔을 붙잡고 돌아왔다. 샌 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 때 네리아는 크게 입을 벌렸다. "흐아아아…. 아이, 씨이잉! 왜 깨워? 치잇." 샌슨은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허, 참. 팔자가 좋았나 보지?" 네리아는 눈을 비비다가 샌슨의 목소리를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문 바깥에 서있는 우리들을 발견했다. "음냐, 쩝. 응? 어라? 야! 후치! 왜 돌아왔어?" "아이고 돌겠네. 당신이 인질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해가지고서 죽을 고 생을 해서 푸른 책을 찾아왔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진짜 그걸 훔쳐내었어?"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쪽으로 걸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넥 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넥슨은 네리아의 팔을 쥐었다. "아아아악!"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자식이! 샌슨이 먼저 고함 질렀다. "무슨 짓이야!" 넥슨은 씨익 웃으며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네리아는 팔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아, 아윽! 좀, 야, 이 개같은 자식아앗! 으, 으흑! 이, 이거 못놔아!" "저 새끼가!" 나는 앞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샌슨이 그 때 내 어깨를 붙잡지 않았다 면 난 뛰어들었을 것이다. 샌슨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 난 넥슨을 쏘아보 았다. 빌어먹을 자식! 내 OPG를 끼고 있었다! "그건 내 거다! 돌려줘!" "싫어." 이 황당한 대답. 도대체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다. 몰염치하고, 무자비 하고, 잔인한 대답이다. 무슨 논리가 닿지 않는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돌려줘? 바보 아냐?" "이이익!" 말이 통하지 않는 놈, 좋아. 그럼 공격 방향을 바꿔보지. 난 옆에 서 있던 남자들에게 외쳤다. "저따위 거지 같은 성격의 두목을 모시고 있냐? 끼리끼리 정말 어울린 다. 하! 당신들 입에 든 것도 저 녀석에게 내어주지? 혹시 아내나 애인 은 안내줘?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지?"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다싶은 말이니 남자들의 표정이 극도로 험악해진 것이야 당연하다. 남자들 사이에서 폭언이 튀어나왔다. "저, 새끼! 잡아! 이리와, 이새꺄!" "네가 나와봐, 문 밖으로 머리만 내밀어봐, 어깨가 시원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 때 넥슨은 고함을 질렀다. "입들 닥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샌슨도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만해, 후치." 넥슨은 샌슨보다는 훨씬 과격한 방법으로 부하들을 꾸짖었다. 그는 네 리아의 팔을 놓더니 곧장 고함을 지른 부하에게 다가갔다. 다른 사내들 이 허겁지겁 옆으로 비키는 가운데 넥슨은 빠르게 그 남자에게 다가섰 다. 남자는 질린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퍽! 넥슨의 발이 남자의 배에 박혔다. 남자는 배를 감싸쥐며 쓰러졌다. 넥슨은 쓰러진 남자를 계속 걷어차며 으르렁거렸다. "저런 꼬마의 말에 넘어가? 엉? 네가 그러고도 길드의 도둑이냐!" 퍽! 퍼벅! 남자는 신음소리를 토했다. 몇 번이고 쓰러진 남자를 걷어차 던 넥슨은 마지막으로 세차게 남자를 걷어차 벽쪽으로 데굴 구르게 만들 었다. 주위의 남자들은 모두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채 그 모습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는 네리아는 그 모습에 놀라더니 뽀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벽쪽에 굴러가 끙끙거리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넥슨은 험한 눈초리로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네리아는 눈을 쭉 찢으며넥슨을 노려 보았다. 죽어도 비키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넥슨은 더 못참겠다는 듯이 다리를 들어올렸고 네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였다. "차면 죽는다." 샌슨의 낮은 목소리가 넥슨의 다리를 붙잡았다. 넥슨은 고개를 돌려 문 밖의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굳은 얼굴 그대로 넥슨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봐라. 넌 바로 죽는다." 넥슨은 주춤 하더니 다시 똑바로 섰다. 샌슨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 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넥슨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우리 거래 이야기나 하지. 책을 내놔." 샌슨은 목에 뭐가 걸린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라." "응?" "내가 머리가 빈 줄 알아? 여기로 책을 가져오게. 책은 다른 일행이 가 지고 있다. 거기로 안내할테니 네리아를 데리고 따라와라." "준비가 철저했군." 갑자기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네게 칭찬 들으려고 온 거 아니라고 했었다! 네리아를 데 리고 얌전히 따라와라. 그리고!" 샌슨은 애써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따라오는 동안, 다시는 네리아에게 손을 대지 마라." 샌슨은 바위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넥슨은 한숨을 쉬며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팔은 벌겋게 물들어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는 손목을 어 루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쓰러진 남자 앞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목에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네리아는 전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위아래로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이다. 넥슨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군. 알았어, 가자." ================================================================== 7. 항구의 소녀……3. 샌슨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네리아를 좀 더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샌슨을 따라 올라갔다. 다시 바깥 으로 나온 우리는 각자 말에 올라탔다. 잠시 말 위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샌슨에게 물었다. "진짜야?" "뭐가?" "봐주면서 했다는 말과 죽이겠다는 말." "길시언에겐 비밀이야. 그리고 두번째 것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뛰 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난 잠시 멀건히 샌슨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샌슨은 별 표정 없이 구두 가게의 정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옆에 있던 건초상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몸을 돌리자 말 다섯 마리가 보였다. 넥슨이 있었고 나머지 네 명의 남 자들이 그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롱소드를 어깨에 맨 그 과묵한 마부도 있었는데 그 마부의 등 뒤에 네리아가 타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네리아의 얼굴엔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하지만 네리아는 별 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닦아버리고는 우리에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넥슨은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가실까요?" 어? 말투가 바뀌었네? 아하. 바깥으로 나왔으니까? 하긴 그러고보니 지 나가던 시민들은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말을 타고 서 있자 의아한 표정 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말했다. "예. 그런데 넥슨씨. 중앙광장으로 가고 싶은데, 좀 안내해주겠어요?" 넥슨의 눈가에 순간 빛이 번뜩였다. 이 자식아! 중앙광장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장소라며? 속 아프지? 그러나 넥슨은 차분한 목소리 로, 심지어 부드럽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알았다. 날 따라오렴." "그럼, 부탁드릴께요." 나와 샌슨, 그리고 넥슨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리아와 네 명의 남자들 역시 평온한 걸음걸이로 우리들 뒤에서 따라왔다. 뒤가 좀 근질거리는군. 하지만 넥슨은 계속 평온한 얼굴로 샌슨에게 말 을 걸고 있었다. "날씨가 좋죠? 아직은 가을이라 해도 좋겠군요." 샌슨은 물끄러미 앞만 바라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겨울이오." 넥슨은 빙긋 웃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누가 보아도 적대자들이 서로 섞여서 함께 걸어가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젠장, 넥슨이 라는 놈! 넥슨의 인도를 받아가며 우리는 중앙광장으로 걸어갔다. 넥슨은 계속 샌슨이나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은 대개 기품있고 온화한 말들이었 다. 정말 혀를 내두르고 싶군. 샌슨은 거의 대답을 하지 않거나 퉁명스 런 몇 마디만을 짤막하게 뱉어내었고 난 가차없이 대답해주었다. "후치? 초장이라고?" "예. 생각해보세요. 직업이라는 것은 모두들 고귀한 거에요. 그런 점에 서 난 초장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세상에는 도둑이라는 직업도 다 있대요. 허 참!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이 그런 고약한 직업을 가지는 걸까요? 아, 물론 도둑들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 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도둑들을 다시 등쳐먹으며 사는 길드 마스터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불러주기엔 아까울 정도로 지저분하고 더럽고 야비한 놈일 거예요. 넥슨씨 생각은 어떠세요?" "…그렇게 생각하니. 음. 그래. 그건 그렇고 해가 기울어가는구나." "예. 해가 기울어가네요. 그건 도둑들이 활동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의 미이죠. 그러면 그 도둑 길드의 마스터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지는 해 를 바라보고 있겠죠. 내 도둑들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칼날을 다듬어 라! 이제 달려가 나의 배를 불려줄 보물을 훔쳐와라! 뭐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마 붉은 노을보다 더 시뻘건 혓바닥에서 침 을 질질 흘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샌슨이 킬킬거리기 시작했고 넥슨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아, 저기 저 건물이 보이지? 저게 루트에리 노 대왕 기념관이다." "예. 루트에리노 대왕 기념관을 바라보며 수도 시민들은 우리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를 이 대륙 위에 세운 그를 생각하고 기릴 거예요. 하 지만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면 저런 건물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건물이 라고 생각하겠죠. 훔칠 물건이 들어있지 않은 집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 할 테니까요. 그의 더럽고 야비한 근성에서 설마 고귀한 추모의 감정 같 은 것이 나오겠어요?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는 것은 절대적인 인간 말종 이고 세상에서 제거해도 상관 없는 목록을 만들 때 가장 먼저 그 이름을 올리게 되겠지요. 이런 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넥슨은 다른 사람에게는 미소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빨을 드러 내는 것으로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샌슨은 얼굴을 크게 일그러 뜨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잡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나는 사실 그 기념관을 바라보지 않았 다. 하지만 넥슨이 사납게 노려보는 바람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넓은 광장과 함께 중앙에 있는 작은 건물이 보였다. 커다란 삼단 케이크처럼 생긴 계단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그 위에 건물이 서 있었다. 계단들은 모두 큼직큼직하고 넓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방을 넣는다면 네 개 이상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웠다. 건물 전체는 커다란 팔각형의 모습이었고 8개의 기둥마다 칼을 짚고 선 기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건물이 여덟 기사에 의해 수호되 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에는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 그림들의 모습은 아마도 루트에리노 대왕의 업적들을 단계별 로 새겨둔 것인 모양이다. 지금 정면으로 보이는 조각에는 커다란 거인이 바위를 들고 있는 모습 이 보였고 그 앞에 검을 곧게 세워들고 있는 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아무래도 그덴산의 거인과의 싸움을 나타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 다면 저 자그마한 기사의 모습이 루트에리노 대왕인 모양이군. 조각가가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한 모양인지, 거인과 대왕의 크기 비교는 사실적이 었지만 대왕의 모습은 작아보이지 않았다. 멋있는데? 중앙광장에는 오후의 뉘엿한 햇살을 받으며 계단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 는 사람들, 혹은 누군가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인지 가만히 서서 눈길을 어디로 둘지 몰라하는 사람들, 그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확실히 사람들이 꽤나 많군. "말에서 내려라." 넥슨은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뭐지? 젠장, 네 말을 내가 왜 들 어야 해? 그러나 넥슨은 설명했다. "기념관 앞에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는 없다." 아, 그런가? 샌슨은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러나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쥔 채 걸어가는 사람 의 모습을 보자 그도 말에서 내렸다. 뒤를 보니 따라오고 있던 네 명도 말에서 내렸다. 그 마부는 한 손에 네리아의 트라이던트를 들고는 마치 연인이나 된 듯이 네리아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네리아는 뭐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뿌리치고 달아날 배짱은 없는 모양이다. 나머지 세 명이 네리아를 거의 둘러싸듯이 서 있 었다. 넥슨이 갑자기 말했다. "좋은 장소로군. 당신들 정말 철두철미한데?" 샌슨은 으르렁거렸을 뿐 별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 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였다. "여, 넥슨씨! 반갑습니다!" 카알의 목소리였다. 카알은 광장 중앙에 있는 그 계단들 중 가장 낮은 단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엑셀핸드가 검은 빛이 뿜어나오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카알은 트레일 과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말고삐를 쥔 채 서 있었고 엑셀핸드는 레이셔널 셀렉션의 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드워프가 말고삐를 붙잡고 서 있으니 그것 정말 희한하군.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어디 있지? 넥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친근하게 말했다. "아,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양쪽다 정말 뱀같은 모습이로다. 으음. 샌슨은 갑자기 걸음을 빨리 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계단 아래에 서서 넥슨을 돌아보며 서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우리 둘은 카알 과 엑셀핸드를 보호하듯이 서서 넥슨을 가로막은 것이다. 카알은 친절한 얼굴 그대로 넥슨에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우리 두 명보다 더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엑셀핸드도 따라 걸어왔다. 넥슨은 주저 없는 태도로 걸어와서 카알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무서운 놈. 카알 은 조금 찔끔했지만 곧 표정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이런, 안돼! 예상대로다. 넥슨과 악수한 카알이 갑자기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카알 이 이를 악무는 것이 느껴졌다. 제기랄 녀석! 넥슨은 카알의 손을 꽉 쥐 면서 낮게 말했다. "시골뜨기 주제에 머리가 돌아간다… 틀림없이 네놈의 머리지? 궁성에 서는 왕을 크게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군." 몸에 전율이 감돈다. 지금까지 말을 타고 오면서 보여주던 침착하고 부 드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넥슨은 사악한 목소리로 쉭쉭거리듯이 말했다. 카알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고 그의 이마에선 땀이 흘러내렸다. 넥슨의 손에 쥐인 카알의 손은 허옇게 바뀌어 있었다. 샌슨은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듯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아직까지 네리아가 붙잡혀 있다. 나와 샌슨은 턱을 부들부들 떨면서 넥슨을 노려 보았다. 그 때 엑셀핸드가 나섰다. "여어, 반갑구먼! 넥슨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말하며 엑셀핸드 역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넥슨은 어쩔 수 없이 카알의 손을 놓았다. 엑셀핸드 덕분에 살아난 카알은 한숨을 쉬었 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넥슨은 역시 엑셀 핸드의 손을 쥐었다. "넥슨 휴리첼입니다. 하이 프리스트께 말씀 들었습니다. 노커님." "아, 자네 재가 프리스트라고 했지? 나 엑셀핸드 아인델프…일세." 엑셀핸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넥슨은 또 손을 꽈악 쥐어버린 것이다. 엑셀핸드는 부르르 턱수염을 떨더니 팔에 힘줄이 돋아나도록 마주 쥐었 다. 엑셀핸드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장담해도 좋다. 지금 엑셀핸드는 평생 가장 강력한 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넥슨은 부 드럽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제기랄 자식. 남의 물건으로!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일 즈음 해서 넥슨은 손을 도로 놓았다. 엑셀핸 드는 이를 악물면서 넥슨을 노려보았다. 젠장. 그의 두꺼운 손이 허옇게 변해있었다. 샌슨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넥슨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아, 참. 제게 주실 책이 있었죠?" 으응? 젠장. 지금 책을 줄 순 없어! 네리아가 먼저야! 이걸 어떻게 말 해야 하지? 카알은 떨리고 있는 오른손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말했다. "예. 네리아도 그 책을 받으면 크게 기뻐하겠죠. 어? 같이 나왔군요! 네리아!" 카알은 넥슨이 미리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를 크게 불렀다. 그러자 저 쪽에 있던 네리아도 마주 손을 들면서 외쳤다. "카알 아저씨! 아저씨! 우와, 오래간만이에요!" 네리아가 호들갑을 떨자 그 마부는 어쩔 수 없이 네리아의 팔을 놓아버 렸다. 그러자 네리아는 마치 몇 년만에 만난 좋아하는 친척 아저씨에게 달려오듯이 팔을 흔들며 마구 달려왔다. 네리아는 아예 풀쩍 뛰어 카알 에게 안겨버렸다. 카알은 당혹하는 눈치도 전혀 없이 기쁜듯이 말했다. "어이구, 어디 보자. 많이 컸구나? 이젠 숙녀가 다 되었는걸?" 감탄이다… 나와 샌슨보다도 더 손발이 잘 맞는군. 샌슨과 나는 얼빠진 얼굴로 엄청난 호흡을 보여주는 네리아와 카알을 바라보았고 넥슨은 뭐씹은 얼굴이 되었다. 네리아는 카알의 가슴에 얼굴 을 마구 비비며 계속 외쳐대었다.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아세요? 엉엉. 너무 하셨어요! 이 이쁜 네리아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편지라도 쓰셨어야지요!" "그래그래, 미안하구나. 하지만 여기 이렇게 오지 않았니?" 주위의 그 누가 봐도 따사로움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별 일이 아니구나 하는 표정으로 흘깃 바라보다가 곧 걸어갔다. 넥슨이 뭐 라고 말하려 할 때, 카알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넥슨씨. 아, 참. 저기 아프나이델씨가 넥슨씨께 드릴 것 이 있다고 해서 모셔왔습니다." 넥슨은 카알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러자 광장 저편에 있는 아프나 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앰뷸런트 제일의 고삐를 쥔 채로 광장 주위의 건물들 중 하나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다리 옆에는 무슨 가방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카알의 손짓이 신호였 던 모양인지 손을 들어 위로 휘저어보이더니 살짝 자신의 옆에 놓여 있 는 가방을 가리켰다. 넥슨은 의아한 표정으로 카알과 아프나이델을 번갈 아 쳐다보았다. 카알과 네리아가 서로 손을 맞잡고 뒤로 걸어갔다. 넥슨은 눈썹을 찌푸 리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 때 샌슨과 내가 그의 앞을 막았다. 넥슨은 우리 둘을 사납게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내었다. 그 때 광장 저편 에 있던 아프나이델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아, 넥슨! 반갑습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외치며 다시 한 번 가방을 가리켰다. 넥슨은 사나 운 눈길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지만 아프나이델은 이쪽으로 걸어오지 않았다. 카알은 빠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넥슨.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어느 틈엔가 카알은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말고삐를 네리아에게 건네주 었다. 네리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잠시 사나운 눈길로 넥슨을 노려보았 다. 넥슨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책은 분명히 저쪽에 있는 아프나이델의 옆에 있는 가방에 들어있 을 것이다. 넥슨은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뒤에 서 있던 마부에게 손짓했 다. "가서 책을 받아오너라." 마부는 곧장 아프나이델에게 걸어갔다. 젠장! 카알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대충 알겠다. 넥슨과 그 일행이 모두 아프나이델쪽으로 걸어가면(여기 선 말을 못타니까.) 그 틈에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나 보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가방을 놔둔채 말에 올라타 다른 곳으로 달려가버리고. 그 런데 넥슨은 그대로 우리 앞에 서 있었고 넥슨의부하들도 마찬가지다. 저 입이 무거운 마부 녀석만이 아프나이델에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카알은 힘겹게 말했다. "저, 우리들은 이만 바빠서…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뇨, 섭섭하게 왜 그런 말씀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만나자 마자 헤어지다니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넥슨은 유려하게 말했고 카알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젠장. 결국 저 쪽의 마부는 아프나이델에게 거의 다가갔다. 그 때 아프나이델이 외쳤 다. "이보시오, 여보세요!" 아프나이델은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어조로 외쳤다. 그리고는 곧 허둥지둥 말을 끌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부는 주위의 눈을 의식해 그런 아프나이델에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아프나이델은 로브 자락을 마구 흩날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는 그 가방을 놔둔 채로 달려온 것이다. 넥슨은 움찔하는 표정이 되더니 몸을 조금 저쪽으로 기울였다. 아프나 이델은 주저없는 태도로 달려왔고 그러자 그 쪽으로 걸어가던 마부는 아 프나이델과 가방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곧 가방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 에 아프나이델은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넥슨의 부하들이 사나운 동작을 취했지만 역시 그를 막아서지는 못했다. 아프나이델은 카알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팔을 황급히 붙잡으며 말했다. "어서, 급합니다! 기다리십니다!" 카알은 잠시 얼떨떨한 얼굴이 되더니 곧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이며 넥슨에게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카알은 두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아프나이델이 뛰어온 반대 방 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그의 팔을 잡아 끌며 더욱 급 하게 걸어가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엑셀핸드와 네리아도 덩달아걸어 갔고, 나와 샌슨도 그 뒤를 막아서는 자세로 걸어갔다. 잠시 넥슨은 저쪽의 가방과 멀어져가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했 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이미 꽤 멀어져버렸다. 아프나이델이 호 들갑을 떨면서 카알을 잡아 끌었기 때문이다. 맨 뒤에 걸어가던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저쪽의 마부를 바라보았다. 마부는 가방을 들어올리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표정이었다. 마 부는 곧 넥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넥슨은 안심한 표정을 짓더 니 우리게 미소까지 보내주었다. 저 망할 미소! 제기랄, 기분 같아서는 도망은커녕 저 놈 얼굴을 한 번 갈겨주고 싶은데. 우리가 광장 끝까지 와서 말에 올라탈 준비를 했을 때였다. 그 마부는 어느새 넥슨에게 돌아가 가방을 건네주었다. 가방을 열어젖 히고는 그 푸른 책을 꺼내어 휘리릭 넘기는 넥슨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 였다. 요놈아. 책은 그대로지만 서류는 없다! 응? 저게 뭐냐? 넥슨은 갑자기 책을 집어던지더니 고함을 질렀다. 온 광장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제기랄, 저 놈들 붙잡아! 빼돌렸다!" ================================================================== 7. 항구의 소녀……4. 이런! 어떻게 벌써 알았지? 내 속마음을 읽었나? 우리는 후다닥 말에 올라탔다. 샌슨은 엑셀핸드를 거의 집어던지듯이 레이셔널 셀렉션 위에 올려놓았고 엑셀핸드는 죽어라고 말의 목을 껴안 았다. 그리고 샌슨은 슈팅스타에 올라탔고 네리아는 멋지게 몸을 날려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라탔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허둥거리며 몇 번 이나 발을 헛디뎠다. 젠장! 급히 제미니에 올라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들은 허둥거리며 말을 끈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좋아! 광장에서는 말에 탈 수 없다고 했지! 이러면 시간은 충분하겠군.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말 위에 올라타고 질주해오는 넥슨을 보고는 내가 너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넥슨은 고함을 질렀다. "병신들아! 말을 끌고 뛰냐! 차라리 업고 뛰지 그러냐!" 남자들은 완전히 당황해버린 모양이다. 광장에서는 말에 탈 수 없다는 규칙과 우두머리의 호된 명령 사이에서 패닉에 빠져버린 모양이다. 그러 나 넥슨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러자 남자들도 허둥지둥 말 에 올라탔다. 광장의 시민들이 비명과 욕짓거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꺄악! 사람 살려!" "저게 돌았나?" "이 자식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어, 으아!" 고함을 지르던 시민 하나는 넥슨이 뽑아든 롱소드를 보고는 놀라 달아 나버렸다. 뭐야, 저 자식! 완전히 갈데까지 가보자는 거냐? 광장에 있던 시민들이 좌우로 좌악 갈라졌고 넓은 중앙광장에는 순식간에 공포의 기 운이 번져나갔다. 그 때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달려가!" 샌슨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프나이델이 힘겹게 앰뷸런트 제일에 올라 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카알은 곧장 말을 출발시켰고 샌슨과 네리 아도 출발했다. 나도 허둥지둥 제미니를 걷어찼다. "이랴, 하아하앗!" 제기랄, 저 자식이 이렇게까지 마구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 서류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물론 중요한 거지만, 저 놈이 왜 저렇게 마구 나 오는 거지? "비켜! 비켜요!" 앞에서는 샌슨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슬쩍 보니 엑셀핸드의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그렇게 하얀 드워프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네리아도 정말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슈팅스타와 에보 니 나이트호크는 그 커다란 덩치로 골목길을 거의 가로막듯이하고 달려 갔다. 그리고 그 뒤로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가 달려갔고 카알과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주위의 시민들은 모두 죽어라고 뛰어 그 앞에서 비켜났다. 여섯 마리의 말들이 골목을 질주하니 그만한 구경거리가 없다. 벽에 달라붙을 수 있 는 자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급히 우리들을 피하느라 진흙탕에 데굴 구르는 사람까지 보였다. 그 때였다. 저 앞에 왠 아이 하나가 골목길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5살? 6살? 꼬 마는 멍한 얼굴로 땅바닥에 앉아서 달려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골목이 너무 좁아서 급하게 움직일 수 없다! "꺄아아악!" 옆에서 들려오는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 아이의 어머니인가? 주위의 사 람들이 맹렬히 그 여자를 붙잡았지만 그 여자는 무서운 힘으로 주위 사 람들을 뿌리치고는 길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부등켜안았다. 앞에서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꼼짝마시오!" "이힝힝힝!" 슈우우웃! 슈팅스타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 여자의 등 위로 잠시 그 림자가 하늘을 가렸다. 슈팅스타는 가볍게 여자와 아이를 뛰어넘었다. 여자는 놀라서 머리를 들었으나 그 뒤에 달려가던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보더니 다시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뛰어! 뛰지 않겠다면 날아!" 네리아의 어처구니없는 기합소리,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가볍게 여자와 아이를 뛰어넘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다음은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은 눈을 꼭 감은 채 말을 뛰어넘게 했 다. 앰뷸런트 제일도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 다음, 정말 걱정스러운 장 면, 오, 엑셀핸드! "카리스 누멘께 맹세코 뛰지 않으면 널 잡아먹을 거야!" 나라도 뛰어넘겠다. 레이셔널 셀렉션, 한 때 엘프를 태웠던 그 말은 서 투른 기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의지인 것처럼 가볍게 뛰어넘었다. 엑셀핸드는 비명을 질렀다. "봤냐! 세계 최고의 드워프 기수다! 우하하!" 그 웃음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트레일이 여자와 아이를 뛰어넘었다. 잠깐, 트레일까지 뛰어넘으면 그 다음은 누구냐? 여자는 머리를 들어올 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젠장! 이건 연습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차피 인생에 연습이 어디 있냐? 제미니, 너만 믿는다! "하아앗!" 제미니! 네가 해내는구나! 제미니는 부드럽게 뛰어올랐다. 잠깐 동안 몸의 중량감이 사라지고 주 위의 처마들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싶더니, 곧 격렬한 충격이 엉덩 이를 가격했다. 좋아! 엉덩이가 부서져도 좋다! 주위에선 박수소리가 터 져나왔고 뒤를 보니 그 여자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드는 모습 이 보였다. 그 때였다. 주위에서 다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보시오, 고개를 숙여요!" "고개 숙여요, 아줌마!" 여자는 질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달려오는 넥슨과 그 부하들,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다시 한 번 곡예가 펼쳐지는 것을 기대하면서. 여자는 머리를 푹 숙인채 다시 뛰어넘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너졌다. "꺄아아악!" 콰드득, 꽈곽! "으아아아아!" 도저히 못참겠다. 나는 말을 돌렸다. 빌어먹을 자식! 길거리에 뒹구는 시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흐르는 핏물. 제기랄, 제기랄 놈! 이 죽일 놈아! 넥슨은 여자와 아이를 밟아버리며 지나쳐왔다! 그리 고 그 뒤로 그 부하들이 이미 죽은 그 시체를 다시 죽이기 시작했다. 두 번 죽이는구나, 두 번! 주위 사람들의 하얀 얼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아버린 그 눈동자들은 자신이 본 장면을 거부하고 있었다. 너덜 거리는 여자의 치마와 핏덩이로 바뀌어버린 아이. 눈 앞이 부옇게 바뀌 어온다. "너, 죽인다!" 바스타드를 뽑아드는 손바닥이 차갑다. 젠장, 손에 도는 한기가 너무 차가워 바스타드를 놓칠 것 같았다. 눈을 닦는다. 바스타드를 부여잡는 다. 머리를 날려주마! "죽인다앗!" 제미니의 허리를 걷어찬다. 제미니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넥 슨의 모습이 커진다. 개새끼! 입에 미소를 띠고 있다! 넥슨은 롱소드를 뽑아들더니 앞으로 뻗었다. 나도 바스타드를 들어 앞으로 뻗고는 돌격자 세로 나아갔다. 온몸의 흔들림은 말의 동작과 내 몸 자체의 경련으로 더 욱 심해진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가운 데 단 하나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절대의 부동으로 그것은 차갑게 나를 겨냥하고 있다. 넥슨의 눈! 인간의 눈이 아니다. 저건 사람이 아냐! "매직 미사일!" 힘겨운, 짜내는 듯한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 내 등 뒤에서 하얀 빛의 화살이 하나 휙 날아왔다. 그것은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쳐 넥슨에게 날아 갔다. 당황한 넥슨은 칼을 휘둘렀지만 그 빛의 화살은 그대로 넥슨이 아 니라 그 말을 명중시켰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던 넥슨에겐 그것으 로 충분했다. 말은 나가떨어졌고 넥슨은 그대로 하늘을 날아 옆의 건물 을 부수고 들어가버렸다. 쾅! 콰드득! 목조의 건물벽은 크게 부러지며 넥슨을 받아들였고 뒤를 따라오던 그 부하들은 날리는 먼지와 나뭇조각 으로 급히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귓가에 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돌려! 이 자식아, 말을 돌려!" "저 자식 죽이고나서!" "이 빌어먹을 자식이!" 그 때 샌슨과 함께 돌아왔던 엑셀핸드가 빠르게 말했다. "말을 돌려라." 나는 잠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질린 얼굴로 레이셔널 셀렉션 위에 앉아 있는, 그러나 엑셀핸드의 눈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나에 게 명령이 아니라 호소를 말하고 있었다. "제에기랄!" 제미니를 뒤로 돌렸다. 뒤에서는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그리고 사 람들의 비명 소리와 울음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난 몸을 돌려 달려갔 다. 볼이 차갑다. 젖은 볼에 부딪히는 바람은 내 얼굴을 저며내는 것 같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무슨 눈물이 이렇게도 많이 흐르는 거지? 우리 가 여기로 도망가지만 않았다면, 저 여자와 아이는 죽지 않았겠지. 그리 고 아이는 커서 행복을 노래하고 사랑에 목메어 할 수도 있었겠지. 어른 이 될 수 있었겠지. 무엇이 되었을까? 아이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었을 까? 그러나 이제 그 가능성, 그 열려지지 않은 미래, 아무 것도 남지 않았 다. 남은 것은 차가운 대로 위에서 식어가는 핏덩어리 시체뿐이다. 파리 가 몰려들고 있을까? 먼지가 그 위에 쌓이고 있을까? "으아아아아!" "어명을 전달한다. 전시 특별 명령 제 89호로 넥슨 휴리첼을 체포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넥슨 휴리첼을 긴급수배, 체포하라. 넥슨 휴리 첼을 보호하거나 은닉시켜주는 자 역시 국왕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한다. 휴리첼 백작가로 출동하여 모든 서류와 동산을 압류하고, 휴리첼 가문과 그 방계 가문 소속의 모든 부동산과 권리를 무기한부로 동결한다. 즉각 시행하라!" "예!" 궁성 수비대 분대장들의 엄청난 호령 소리. 그러나 나는 풀이 죽은 채 발코니에서 멍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가을에도 꽃이 만발한 궁성의 풍경이 아름답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 는 꽃잎들이 궁성의 회색 돌벽들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은 너무도 살풍경하다. 궁성까지 달려왔던 순간의 영상들이 머릿속에 어지럽다. 다급한 샌슨의 얼굴, 눈이 빠져라 우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 달 리는 말, 거칠게 볼을 할퀴는 바람, 궁성 앞에서 우릴 기다리다가 그대 로 안으로 끌고 들어간 길시언의 모습, 그리고 우리를 삼층으로 끌고오 던 모습, 다급하고 빠른 말, 말, 말. 그러나 난 아무 것도, 아무런 말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한 순간순간마다 항상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 던 것은 흩어진 시체, 땅을 적시는, 그리고 도로의 포석 사이로 기하학 적으로 흘러가는 핏물, 직선으로 흐르다가 직각으로 꺽여 흐르는 핏물, 그 위로 달려오며 이를 번뜩이며 달려오는 넥슨의 모습, 넥슨의 무서운 모습, 인간의 웃음이 아닌 서늘한 웃음뿐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다. 하늘이 새하얗다. 아니, 흰가? 넥슨의 얼굴만이 보일 뿐이다. 웃고 있다. 웃고 있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머리가 엉망이야." 네리아였다. 난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싱긋 웃었 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였다. 하지만 곧 나도 그런 미소 를 지을 수 있었다. "달리다보니까…" 네리아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서 내 머리를 빗어내렸다. 난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내렸다. "괜찮아요. 네리아." 네리아는 손을 모아쥐고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들어가자, 후치. 할슈타일 후작이 설명하겠대." "예에…" 발코니에서 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 이곳은 임펠리아 삼층의 회의실이 었고, 회의실 안에는 일행들이 제각각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위로는 방문들이 있었다. 간신히 그 방들이 우리의 침실로 배정받은 방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지. 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회의실 가운데 테이블에 엄한 얼굴을 하고 곧은 자세로 앉아 있 었으며 샌슨과 엑셀핸드도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말 위에 서 마법을 사용하느라 몹시 지쳐버린 아프나이델은 안락의자에 거의 쓰 러지듯이 앉아 있었다. 카알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아프나이델?" "아, 예. 죄송합니다. 워낙 모자란 재주라…" "천만에 말씀이오. 당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넥슨을 저지했겠소."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반대편을 보았다. 길시언과 함께 할슈타일 후 작이 앉아 있었다. 길시언은 날 보더니 손을 들어올려보였다. 난 목례하 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네리아도 내 곁에 앉았다. 할슈타일 후작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카알은 그 말에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할슈타일 후작에게 한 수고는? 그의 집을 털었지, 뭐. 할슈타일은 유머감각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도 없는 저런 얼굴로 이렇게 말해왔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개를 거북하게 꺽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계속 냉랭하게 말했다. "그 수고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도움이 되었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알았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넥슨 휴리첼은 도둑 길드를 장악해왔 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에 대한 갈망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의 삼촌이 되는 까뮤 휴리첼의 사망 이후 크라드메서가 미드 그레이드 에 끼친 해악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어쨌든 그 댓가로 휴리첼 백작가는 많은 지위와 권리를 상실 하게 되었소. 다행히도 그 가문이 지난 세월 동안 바이서스에 행해온 충 성과 노력을 감안하신 전하의 성총으로 백작의 지위는 상실치 않게 되었 지만, 결국 그 로넨 휴리첼은 군부에 백의종군하는 신세와 다를 바 없게 되었소. 그 명문가의 수장이 대 자이펀 전쟁의 최전선이 아닌 당신네 영 지 같은 곳에 출동하게 된 것만 보아도 대충 짐작할 거요." 당신네 영지? 쳇. 헬턴트 영지가 어때서. 국왕 전하도 그러더니 할슈타 일 후작도 우리 속을 긁는군. 에라이, 당신들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씀 도 못들어봤어! 국왕은 기사 중의 기사, 만인의 종복이라는 말씀 말이 다!시시하게 한 명의 레이디에게 복종하는 기사가 아니라 만인에게 복 종하는 것이 국왕이라면, 그 국왕의 종자나 다름없는 귀족들은 백성보다 얼마나 아래의 사람들이냐고! 그러나 카알은 별 내색없이 할슈타일 후작 의 말을 들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냉랭한 어법 그대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반골의 기질은 그 가문의 전통이었나 보오. 넥슨 휴 리첼이 에델브로이의 성직자 흉내를 내게 된 것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밖 이었소. 아마도 로넨 휴리첼 백작은 자식에게도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 게 되자 자신의 힘으로 가문의 영예를 되찾을 생각이었던 것 같소. 그래 서 그는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자원한 것이지." "그렇군요…" ================================================================== 7. 항구의 소녀……5. "그렇소. 그런데 그의 아버지를 실망시켜가며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 스트가 된 넥슨이지만, 나에게는 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 였소. 그래서 나는 그를 주의해서 보았지.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걸을 인 물이 아니었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 눈엔 그의 아버지보다 그가 더 격렬한 야망을 가진 인물로 보였소. 그가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가 된 것도 어쩌면 그의 야망을 감추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는 것이 내 생각이었지." "그렇습니까?" "그랬소. 그래서나는 그를 예의주시했소. 불행하게도 내 눈은 정확했 소. 그의 아버지는 창칼을 어깨에 매고 전선으로 달려나가 가문의 영예 를 되찾으려 했소. 존경받을 무인이지. 하지만 그는 가문의 영예보다 더 큰 것을 과녁으로 삼고 있었소. 그는… 불경하게도 왕좌를 노리고 있었 던 모양이오."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커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할슈타일 후작은 냉랭하게 말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루어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바이서스 임 펠의 도둑 길드를 장악하게 되었소. 물론 반역의 중추부대로 삼을 세력 은 아니지만 전쟁수행국인 바이서스에서는 충분히 위험한 힘이 될 수 있 는 집단이오." 샌슨의 씩씩거리는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수행국인 바이서스에서는 도둑 길드라도 나라를 한 번 뒤집을 수 있다? 흠. 어쩐지 일리있는 말인 것 같다. 카알도 그렇게 말했다. '전쟁중에는 많은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는 자이펀과의 협력을 기도했소." "역시!" 길시언의 말이다. 언젠가, 레브네인 호수 옆. 그렇군. 카알은 다시 정 확하게 지적했군. 밖으로 자이펀과 손을 잡으며, 안으로는 도둑 길드의 힘을 통해 내부를 장악한다. 이것이 반란 계획이었구나! 우리는 긴장한 얼굴로 할슈타일 후작을 노려보았다. 후작은 차가운 얼굴 그대로 말했다. "다행히 나는 그 자가 자이펀으로 파견한 밀사를 붙잡을 수 있었소. 넥 슨은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였고, 따라서 그가 위임한 사람은 간단 히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그를 의심하고 있다 는 것은 몰랐을 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선에서 지골레이드와 함께 활약 중인 내 아들 돌맨이 있소." "들었습니다." 아아. 돌맨이라는 사람도 디트리히처럼 할슈타일 후작의 양자인가 보 지? 그리고 지골레이드라는 드래곤과 함께 자이펀과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고? 할슈타일 후작은 말했다. "음. 어쨌든 내 아들이 나의 밀명을 받아서 그 밀사를 붙잡았지. 그 밀 사의 품에서 나온 책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소. 당신들도 기억할 거요. 당신들이 내 집에서 가져간 책이니까." 우리는 다시 고개를 꺽었다.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와! 저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를 수 있구나. 하지 만 싸늘한 미소다. "힐책하는 것은 아니오. 불쾌하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후작님." "아니오. 길시언 왕자님께 이미 들었소. 동료분을 구하기 위해서였다지 요? 좋소. 어쨌든 나는 그 서류를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밀사의 입을 열게 하는 데는 실패했소. 그는 자결해버렸지." "자결을…" "그렇소. 그래서 나로서는 골치 아프게 되었소. 그 서류는 되찾았지만 그 서류가 넥슨이 자이펀에게 건네려 한 서류라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 었기 때문이오. 넥슨을 의심하고 그를 계속 감시해온 것은 나 혼자뿐이 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증거를 댈 수가 없었지." "그럼, 미끼?" 카알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러자 할슈타일 후작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 다. "그렇소. 현명한 분이군. 나는 그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소문을 내었 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도둑길드에게서 무엇을 감추는 것은 어 려워도 무엇을 드러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니까. 그래서 어떤 녀석이든 그 책을 되찾으러 오면, 그 놈을 붙잡아 넥슨이 반역자임을 실토하게 만 들 생각이었소." 그리고 그 때, 다시 한 번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에 희한한 미소가 떠올 랐다. "그날 낮, 당신들이 찾아왔을 때 난 당신들이 넥슨의 패거리일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지." 카알의 얼굴이 팍 붉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나보단 낫다. 할슈타일 후 작은 나에게 조금 징그러운 미소를 보낸 것이다. 으아, 맙소사! "자네의 여장은 매우 인상적이었네, 소년." 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고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고, 유피넬이여! 할슈타일 후작은 다시 카알에게 말했다. "그러나 카알 당신의 연기가 훨씬 더 훌륭했소. 결국 난 당신들이 그저 뜨내기일거라고 생각했지.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했고. 능란했소."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그렇겠지. 그리고 곧장 우리집을 터셨더군."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괜찮소. 당신들 덕분에 넥슨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소. 그 서류가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기에, 그는 대로상에서 그 런 난동을 부렸지." "중요한 서류…" "그렇소. 넥슨은 자이펀과의 완벽한 신뢰관계를 얻기 위해 그 서류를 선물삼아 보내려 한 모양이오. 자이펀으로 하여금 전쟁에 승리하게 만들 고, 그 댓가로 이 나라의 통치를 원한 것이오. 이해하시겠지?" "그렇군요." "좋소. 어쨌든 귀하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국왕 전하와 모 든 각료들을 대표해서." 할슈타일 후작은 정중히 목례까지 했다. 우리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 때 카알이 말했다 "그럼 넥슨 휴리첼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그랜드스톰은…"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넥슨은 당연히 반란자로서 체포, 처형될 것이오. 그랜드스톰에서는 그 러한 반란자를 프리스트로 두었으니만큼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겠지 만, 아무래도 그랜드스톰은 모르는 일이며, 전통적으로 통치권은 신권의 경계를 존중하는 법이오. 신권측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따라서 별다른 처 벌은 받지 않을 것같소."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정말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로넨 휴리첼 백작 의 일입니다. 저, 국왕 전하께서는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구해주신 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로넨 휴리첼은 반란자의 아버지이지 않습니 까?" "그건 그렇소. 하지만 아무르타트가 포로로 붙잡고 있는 것은 그만이 아니오. 그러니 그 일은 과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물론 전하 께서 결정할 일이지만."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들 쉬시오. 국왕 전하께서 조만간 당신들을 불러 직접 치하 하실 것이오." 할슈타일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우리들도 모두 일어났다. 후작은 가볍게 목례하고는 별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리는 다시 자리 에 모여앉았다. 카알은 테이블에 앉자마자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그것 참."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서류는 원래 넥슨이…" 의자에 거의 쓰러져있던 아프나이델이 그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그렇군요. 그렇게 빨리 우리의 속임수를 알아차렸군요. 그 가 직접 작성한 책이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심호흡을 하고는 팔짱을 끼었 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넥슨의 일은 해결되었고, 이젠 다시 우리의 일을 생각해볼 때로군요." "우리의 일이오?" "예.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 말입니다. 엉뚱하게도 반역자를 하나 색출 하는 이득이 있었긴 하지만 아직 우리 추적의 원래 목표에는 별로 접근 하지 못했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그러고보니 또 국왕 전하 좋은 일만 시켰군. 우리 일은 언제 하지? 네리아는 고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보다 배는 어려워지겠어요. 에휴…" "무슨 말입니까, 네리아양?" "길드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잡아먹으려 들거라구요, 카알 아 저씨." "그렇겠군요. 어쩔 수 없지요." 그 때 네리아는 실실 웃으며 카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카알 의 목을 콱 껴안았다. 카알은 크게 놀랐다. "으어어어?" "그래도, 진짜 고마와요. 아직 인사 못했죠? 나 때문에 정말 고생들 하 셨어요. 음!" "으어, 어, 이런!" 네리아는 카알에게 키스했다. 카알은 눈이 둥그래져서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고개를 들더니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 다음은…" "바깥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궁금해!" 쿠당! 먼저 샌슨이 뛰쳐나갔고 그 뒤를 이어 내가 방을 뛰쳐나왔다. "나도 궁금해!" 내 뒤에서 네리아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궁내부원들의 놀란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정원까지 달려나왔다. 샌슨은 정원 한귀퉁이의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샌슨은 온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이, 이상한 일에 휘말려버렸어." 샌슨의 말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쳇. 수도에 오면 모든 사람들이 선량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젠장. 이렇 게 심한 일들을 보고 들을 줄은 몰랐어.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왜 이리 지저분하게 구는 거지?" 나는 샌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카알의 말이 생각났다. "여기다 아무르타트를 데려다 놓을까?" 내 혼잣말 비슷한 말에 샌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 말이야?" "그럼 최소한 서로 쥐어뜯고 싸울 생각은 못할 테니까." "헤헷? 말도 되는 것 같다. 어지간히." "말 안돼?" "서로 쥐어뜯고 싸우든, 아무르타트와 싸우든."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사이에 샌슨은 아예 땅 에 드러누웠다. 그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 다. 그러다가 갑자기 씨익 웃었다. "이거 하나는 좋군." "뭐가?" "이 계절에 잔디에 드러누울 수 있다는 거." "아이고, 오우거야. 좋기도 하겠다. 쳇. 데미 공주님께 감사!" "알았어. 에, 데미 공주님께, 음, 후치야? 네가 해봐라." "뭐가 어려워? 그러니까 해지기 직전의 서녘 하늘, 가장 상쾌한 바람이 스치는 호수 표면, 가인의 손가락이 스치는 현의 울림, 가장 높은 나뭇 잎에 반짝이는 밤이슬, 이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으로 노래하라, 데밀레 노스 공주님을." "괜찮네. 하하하. 정식으로 노래 한 번 불러봐." 나는 나무에 기대어앉아 궁성의 벽을 바라보았다. 11월의 하늘 아래에서도 여전히 푸르른 녹음이 그 벽을 물들이고 있었 고,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꽃잎들은 대기를 타고도는 분홍빛 의 눈보라 같았다. 아름답군. 하지만, 젠장! 이따위 수도의 이따위 사람 들을 위해 노래부르지는 않겠어! 나는 샌슨을 위해 노래부르겠어. 진짜 인간에 대한 노래를 불러주지. 들어보라구! 인간이 뭔지를.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불렀다. 검은 녹슬고 책은 낡아가지. 봄날에 새돋이 싹트고 미풍에 낙엽이 날리면 빛나는 이들, 모두 사라져가네. 노래는 물결처럼 전설은 바람처럼 매끄러운 가인의 입술에도 시간의 입맞춤이 더해지고 결국 모든 것은 자취도 남지않네. 여기 잠시 서있다가 결국엔 떠나가고 지나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정표 없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우리는 모두 세상의 나그네. 그러나 돌아보라! 그대 스치는 황량한 길가에도 꽃은 피어있음을! 벗이여 노래하라!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을! 별빛이 스러지는 새벽이 올 때 대마법사 펠레일은 눈을 뜨네. 캄캄한 공허 속에서도 그는 보지. 마법보다 신비하고 신화보다 아름다운 사랑하는 그의 50명의 꼬마들을. 태양이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뿌릴 때 대마법사 펠레일은 웃음 짓네. 뛰고, 달리고, 울고, 웃고. 노래하고, 고함지르고, 아이들은 다시 돌아와 팔에 매달려 노래부르네, 그 노래 귓가에 울리네. 석양이 어둠을 약속하며 부정할 때 대마법사 펠레일은 손을 젓네. 아이들은 달려가고 어둠이 모든 것을 덮지만. 밤바람이 실어나르는 웃음소리들. 은은하게 울려퍼져 부드럽게 멀어지네. 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은은하게 울려퍼져 부드럽게 멀어지네. 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나그네는 고개 돌려 다시 밤속으로 걸어가네. 매일 수 없는 그의 발걸음은 끝이 없지만 그러나 그의 귓가엔 아직도 울려퍼지네. 50명의 꼬마들의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루 루루루 루루루루루…." 샌슨이 미쳤다! 아니, 어떻게 샌슨이 여자 목소리를 내는 거지? 그런데 그 목소리 꼭 데미 공주님의 목소리 같네. 샌슨은 부리나케 일어나다가 머리맡에 있는 낮은 나뭇가지를 부러트렸다. 물론 그의 머리는 끄떡없 다. 달리 오우거냐? "데, 데미 전하. 인사드리옵니다." 나도 엉겁결에 일어났다. 허름한 작업복에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박고 손에는 전정가위를 들고 있는 공주님. 데미 전하는 배시시 웃으며 우리 를 바라보고 있었다. ================================================================== 7. 항구의 소녀……6. "궁성에서 이런 노래를 듣는 것은 생전 처음이군요."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공주님과 샌슨은 이 노래를 듣는 최초의 사람입 니다." "어머, 그런가요? 영광이네요. 그럼 이 노래는?" "방금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피워서…"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런 노래라는 것은 아무런 반주도 없이 그저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 그런 노래를 처음 듣는다는 거지요. 궁중음악 들어보셨어요? 참 졸리는 노래죠." "그렇습니까. 아, 네." 샌슨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겁도 없이 공주님과 부담없이 말을 나누냐는 눈초리였다. 으악! 그러고보니 내가 미쳤나봐? 공주님은 배시시 웃으시더니 곧 샌슨에게 다가갔다. 샌슨은 당황해서 물러났으나 공주님은 허리를 굽혀 샌슨이 부러트린 나뭇가지를 주워들었 다. 공주님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천과 실 등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나뭇가 지를 부러진 자리에 다시 가져다대고는 천으로 감싸고 실로 묶었다. 샌 슨은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 그런데 그런다고 다시 살아나지는 않을 텐데요?" 공주님은 실을 감으면서 빙긋 웃었다. 실을 단단히 묶고나서 공주님은 두 손을 모았다. 기도? 공주님이 무언가를 웅얼거리자 곧 공주님의 두 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나와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데미 전하는 나뭇가지를 감싼 천에 그 빛나는 손을 가져갔다. 잠시 어 루만지듯 데미 전하의 손이 움직이자, 마치 그 손에서 나무로 빛이 옮겨 가듯이 손에서 빛이 사라지며 나무가 잠시 빛을 뿜었다. 그리고는 조용 히 그 빛이 희미해졌다. 그렇군. 공주님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였지. 놀랍군. "이젠 괜찮을 거에요." "아, 예. 다행입니다." 데미 공주님은 두 손을 작업복의 주머니에 쑤셔박은 자세로 서서는 우 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공주님 같지 않아. 공주님은 미소를 띠며 말했 다. "감사드립니다." "예? 뭘요?" "덕분에 시집가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닐시언 국왕 전하는 데미 공주를 헤게모니아로 시집보내서 북 부대로의 상로를 확보하려고 했었지. 소금값을 내려보기 위해서. 그런데 카알이 그건 안된다고 말했었지. "죄송합니다… 결혼을 방해해서." "아뇨. 정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얼굴 한 번 못본 사람에게 시집가라 는 것은 가혹해요." 데미 공주는 팔을 펼쳐 주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정원을 두고 그 먼 북부의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습니까? 어,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에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건 우리 일행인 카알의 의견이었는걸요." "그런가요? 그럼 카알씨에게 감사드려야겠군요. 역시 여기 오셨지요?" "예." "그렇잖아도 찾아가는 길이었어요. 안내해주시겠어요?" "예? 아, 예." 데미 공주는 어슬렁거리듯이 걸어왔다. 아무래도 무슨 드레스 같은 것 을 입은 모양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작업복이 참 잘 어울 리는 느릿하고 처지는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궁내부원들이 질겁을 하며 우리를 따라왔다. 삽시간에 거의 일개 소대 에 가까운 궁내부원들이 데미 공주의 뒤를 따랐다. 이건 뭐야? 샌슨과 난 놀라서 공주의 뒤를 보았다. 아, 수행원이구나. 저렇게 따라다니다가 심부름이나 한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데미 공주는 뒤를 보며 눈살을 찌 푸렸다. "내 주머니 튼튼해요." "예?" 궁내부원 중에 하나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미 공주는 어눌하 다 싶을 정도로 낮게 대답했다. "흘릴 거 없어요. 그러니 따라다녀봐야 주울 것도 없어요." 샌슨과 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입술을 틀어막 았다. 그 궁내부원은 입을 크게 벌린 채 공주를 바라보다가 대단히 억울 하다는 듯이 외쳤다. "전하!" "가서 일들 봐요." 그러나 궁내부원들은 전혀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데미 공주의 뒤를 따라왔다. 데미 공주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곧 말없이 우리를 따라왔 다. 잠깐, 그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궁내부원은 공주의 수행원이고, 공주는 우리를 수행하고 있나? 허헛, 참. 방에 도달하자 곧 궁내부원들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어주었 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공주님 때문이겠지. 흐흠. 공주님은 어깨를 으 쓱하더니 안으로 들어갔고 우리도 따라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카알이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엑셀핸드는 그런 카알의 표정을 보고 있기 괴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리아는 안락의자에 쓰러져 누운 아프나이델을 괴롭히고 있었 고 길시언이 제일 먼저 문소리를 들었다. 길시언은 우리들이 돌아온 줄 알았는지 가볍게 고개를 돌리다가 곧 눈이 커졌다. 그는 반가운 목소리 로 외쳤다. "어, 이런? 데미야!" 데미 공주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길시언과 동행이라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겠군. 데미 공주 는 곧 쇳소리를 내었다. "오빠!" 데미 공주는 정신없이 달려가 길시언에게 안겼다. 길시언은 데미 공주 를 번쩍 들어올리다가 곧 숨막히는 신음을 흘렸다. "으윽. 6년전과는 다르구나." 데미 공주는 길시언의 가슴에 정신없이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 "그래, 응. 나 컸어. 응응, 너무해. 이렇게 클 때까지 얼굴도 비치지 않고, 너무했어! 내가 커가는 모습 하나도 보지 못했잖아?" 길시언은 따스하게 웃으며 데미 공주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랬다면 별로 놀랍진 않았을 거야.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니 놀 라움이 더 큰데? 하하. 정말 예뻐졌구나." "으응… 오빠…" 데미 공주는 한참 후에야 좀 진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도 길시언의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길시언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카 알에게 인사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 들었어요. 국왕 전하께서 저보고 가서 인사를 전하 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셨습니까?" "예. 전하께서 직접 오셔야 되지만 넥슨의 뒷수습이 바쁘셔서." 흠. 그러니까 우리가 한 일은 귀족의 원로가 되는 후작과 최고위 왕족 인 공주가 감사를 드려야 되는 문제라는 말인 모양이군. 그래서 국왕 전 하는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공주를 보낸 모양이다. 우리는 참 대단 해. 하지만 생각해보니 데미 공주가 더 대단하군. 그녀도 분명히 그런 의미를 알텐데 저렇게 작업복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왔군. 카알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백성된 도리를 다했을뿐입니다." 데미 공주는 생긋 웃을 뿐 겸양에 다시 칭찬을 더해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게 하진 않았다. "국왕전하께서는 내일 쯤 여러분들을 장엄의 홀에서 접견하실 거에요." 카알은 기겁했다. "자, 장엄의 홀? 오, 맙소사. 그럼 문무백관들이…" "다 정장을 하시고 모이시겠지요." 일행은 모두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아예 까무라치는 표정을 지었다. 전사로서 장엄의 홀에 무릎을 꿇고 전하를 접견할 수 있다는 것 은 최대의 영광이라고 했던가? 카알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요." "전시엔 영웅이 필요해요." 데미 공주는 간단히 말했고 카알의 얼굴은 조금 일그러졌다. "그렇군요… 젠장." 아아아니! 젠장이라니! 공주님 앞에서 또다시! 아프나이델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데미 공주는 그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기분 나쁘시겠지만 이건 피하실 수 없어요. 당신들의 일은 꼭 공개해 야 되요. 대로에서의 난동도 설명해야 되고… 그러니 잠시만 견디세요. 그렇게 길진 않을 거에요." "알았습니다. 쳇. 하지만 예복이 없는데요?" "내일 아침까지 모두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비전하가 아직 계시지 않으 니 제가 궁성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거든요." 나는 피식 웃었다. 궁성의 안살림은 궁내부원들이 책임지는 거 아닌가?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미 공주는 말했다. "이건 공식적인 일이 아닙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도 감사드려요." "예?"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 나라를 떠나지 않게 되었어요." "무슨… 아, 헤게모니아?"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알은 기분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요, 공주님. 그건, 그저 우리나라의 상익 보호를 위한 조언이었 습니다. 특별히 공주님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 데미 공주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카알씨는, 정말 핸드레이크 같아요." "예?" "그날 전하께서 하신 일,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으신가요?" "…좋은 추억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핸드레이크 같아요. 핸드레이크도 페어리퀸 다레 니안을 구했죠. 그리고는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그건 그저 나의 왕, 루트에리노 전하를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페어리퀸 당신을 염 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 라고 말했지요." 카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 정말, 정말 오래간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카알이 우리들과 똑같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 말 이다. "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 그러실 거에요. 그건 왕실 기록물에만 조금 남아있는 이야기이고 핸드레이크는 자서전이나 자기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카알의 저 독서가의 눈이 번쩍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의 언행이나 업적은 거의 루트에리노대왕님의 전기를 통해서만이 파악됩니다. 자랑할만한 정도는 못되지만 그래도 꽤 많은 서적을 읽어보았습니다만, 그 어떤 기록에도 핸드레이크는 직접 거 론되는 일이 없더군요. 항상 다른 사람의 기록에만 조금씩 편린으로 나 타날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을 루트에리노 대왕의 그림자 속에 있게 하 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공주님은 그 내용을 어디서 읽으셨습니까?" "예. 왕실에 남아있는 핸드레이크의 일지에서 읽었습니다. 일기라고 하 기엔 작은, 그러니까 수기 비슷한 것입니다." 길시언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런게 있어?" 데미 공주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읽으라는 책은 안읽고 매일 궁성을 빠져나가 이상한 책이나…." "으랏찻차! 야, 그거 나 어릴 때의 일이야!" 으음. 여동생이 저렇게 말할 때 자지러지는 것은 왕족이라고 해서 별 다를 바는 없군. 우리는 모두 겸연쩍은 얼굴로 궁성의 생김새를 관찰하 기 시작했고 길시언은 벌겋게 된 얼굴로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데미 공 주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에, 어릴 때 읽은 이야기였어요. 그 이야기를 참 좋아했던 것으로 기 억되는군요." "얘, 얘는 원래 책을 좋아했어요, 예. 으하하하하! 어릴 때부터 책하고 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껄껄껄!" 길시언은 아주 호탕하게 웃으려 애썼고 그래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미 소를 지어주었다. 오로지 카알만이 화장실로 달려갈 때의 표정으로 데미 공주를 쳐다보았다. 그 애걸스런 표정에 데미 공주는 천천히 설명했다. "예… 영광의 7주 전쟁 제 2 주째의 일입니다." 카알이 곧장 아는 척했다. "연속으로 세 개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드래곤 로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전선에 나타났을 때를 말씀하십니까?" "훤히 외시는군요? 음, 조금 더 말씀해보세요." 카알은 두 손을 깍지껴 무릎에 올리더니 그윽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 했다. "에, 그러니까 그 앞의 세 개의 전투는 드래곤 로드를 불러내기 위한 핸드레이크의 철저한 심리전이었습니다. 이 점은 대개의 전사학자들이 동감하는 바로서, 절대적 세력비에서 불리한 입장을 일거에 역전시키기 위해 단숨에 드래곤 로드를 공격하여 결판을 짓는다… 는 핸드레이크의 작전이었지요. 아군의 피해를 돌보지 않는 그 완전한 파괴와 기만적인 전후처리 방식은 드래곤 로드를 대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드래곤 로드는 친정을 결심하게 됩니다. 허즐릿의 저서에서도 여기까지는 핸드레이크의 전략적 우위였음을 인정합니다. 드래곤 로드가 스스로의 잇점, 즉 방대 한 배후 지원세력과 수성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보급선의 잇점을 포기하고 직접 전선에 나서게 만든 핸드레이크의 수완은 칭찬받 아 마땅합니다." 아아! 샌슨마저! 외로워라. 아프나이델이나 길시언이 관심을 곤두세우 는 것은 이해하더라도 샌슨까지 저 골치아픈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다니. 전사니까 그런가? 그래서네리아와 나, 엑셀핸드는 멀뚱한 표정으로 카 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카알의 이야기는 점점 재미있게 진 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대륙전사 최고의 전격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길시언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습니다. 그건 정말 전무후무한 전격전입니다!" "예. 장대한 전략에 의해 기어코 드래곤 로드의 친정을 이끌어낸 지혜 로운 핸드레이크는 전선 곳곳에 산개되어있던 여덟 별, 루트에리노 대왕 의 여덟 기사를 세미나스 평원으로 집결시킵니다. 핸드레이크의 전략적 우위가 가장 빛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핸 드레이크를 기만한 것입니다. 세미나스 평원으로 집결한다는 것은, 결국 부대의 이동이 노출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에게 속아넘 어간 것처럼 위장하여 여덟 별을 노출시키는 데 성공한 드래곤 로드는 세미나스 평원으로 나서는 대신, 그 곳으로 향해 오고 있던 여덟 별의 각개격파에 나섰습니다.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그 신속한 진 격에 의해 여덟 별 중 세 개의 부대가 괴멸당했습니다. 세미나스 평원에 서 그 비보를 접한 핸드레이크가 남긴 말이 기억나는군요." "이빨이 다 빠진 줄 알았는데, 아직 물어뜯을 힘은 남아있군. 꽤 아픈 데?" 길시언의 우스꽝스러운 말과 표정에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핸드레이크 가 그렇게 말했다고? 허허, 참. 카알도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러나 여덟 별 중 다섯이 남아있었고, 핸드레이크는 좌절하는 대 신 남은 세력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간신히 후퇴에 성공합니다. 이 또 한 허즐릿의 저서에서 후퇴의 모범 답안은 아니지만, 최고 답안이다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걸작입니다." "예. 그것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상대가 후퇴할 거라고 믿 을 멍청이는 없었겠지요. 드래곤 로드가 추적을 단념한 것도 할 말은 있 을 겁니다." 길시언의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 공주는 방그레 웃으며 말 했다. "정말 지혜로우시군요. 7주 전쟁의 전사를 완전히 암기하시는 모양입니 다. 그런데 그 2 주째 전투의 후퇴전에서, 드래곤 로드의 암살이 기도되 었다는 것은 모르시겠지요?" 카알의 눈이 커졌다. "예? 암살이라고요?" "이야기가 좀 긴데… 괜찮으시겠어요?" 카알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모두들 찬성의 표시였다. 오늘 하루 동안 너 무 심적 충격이 컸다. 느긋하게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겠지. 모두 들 관심어린 표정을 짓자 카알 역시 찬성했다. 그래서 우리는 데미 공주의 부드러운 말소리로 영광의 7주 전쟁의 가장 급박했던 장면,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 7. 항구의 소녀……7. 부러진 창과 검, 신음하는 병사와 그를 안락사시키는 동료의 눈물, 프 리스트들의 소매는 이미 피와 땀에 굳어버려 더 이상 피에 젖지도 않는 다. 부상자를 간호하기 바쁜 프리스트들에게는 음식물을 만들어낼 여력 도 남지 않았다. 다행히 보급선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했던 핸드레이크 의 선견지명으로 부상병들에게 음식물은 보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기 는 보급할 수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우울한 눈으로 속속 도착하는 부상병들의 행렬을 바라본 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도중 각개격파당한 세 별의 군대다. 현 시점에서의 집결지는 세미나스 평원, 그들을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다. 부상병들의 행렬이라도 끝까지 기다려 모두 수용한 다음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기 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드래곤 로드의 손길은 더욱 가까워 질 것이다. 패배한 세 별 중 캄드리는 온 몸 곳곳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지도 않은 채 그의 주군 앞에 무릎을 꿇는다. 패장은 죽음 이외엔 바랄 것이 없으 며, 죽을 육체에 치료는 필요없다는 그의 절규. 루트에리노 대왕은 눈물 을 흘리며 그를 껴안는다. 주군의 품에서 기절한 캄드리는 프리스트들의 손에 넘겨진다. 라인버그는 피로한 얼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짤막하게 패전 보고를 마친다. 금일 일출 직전, 갈색산맥 물푸레나무 고개에서 드래곤 로드의 본진으로 추측되는 부대와 조우. 1시간 전투 후 부대의 4할을 잃고 후퇴 결정. 주군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뻔뻔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무표 정한 얼굴. 그러나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의 눈이 아닌 가슴으로 쏟아내 는 피눈물을 본다. 루트에리노 대왕마저 목이 메어 간단히 그를 물러나 게 한다. 가서 쉬도록. 패전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 나머지 한 별은 우타크, 그의 활은 이제 다시는 멍청한 활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과녁 가운데 맞추는 일 이외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해서 그의 활에 붙인 루트에리노 대왕의 농담. 이봐, 가끔은 가운데 말고 조 금 빗나가게 쏘아보라구? 그것, 너무 어려운데요. 싱글거리며 대답하던 우타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루트에리노 대왕은 부러진 우타크의 활을 부 여잡는다. 유품인가? 그렇습니다. 기어코 루트에리노 대왕은 뜻 모를 괴 성을 지르고는 혼절해버린다. 핸드레이크는 혀를 차며 그를 막사로 옮기 도록지시한다. 승전보다 더 어려운 패전의 뒷수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트에리노 대왕이 기절할 권리를 잃지는 않는다. 핸드레이크가 있으므 로. 핸드레이크는 진지 외곽에 혼자 서서 먹구름 낀 하늘과 처참한 모습의 진지를 번갈아보며 한숨을 쉰다. 여덟 별 중 최연장자인 제로딘이 핸드레이크에게 다가온다. "뜻밖이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상병들을 기다려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로딘의 무골다운 시커먼 얼굴이 핸드레이크의 하얀 얼굴을 마주한다. 그 두꺼운 눈두덩이 아래에 차가운 시선이 번뜩인다. "당신이라면, 즉각 후퇴준비를 명령할 줄 알았습니다." "후퇴? 후퇴는 다음 승리를 위해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 승리를 위 해서라면 부상병들이라도 끌고가서 고쳐놔야 써먹을 수 있죠. 신병 모집 과 훈련하는 비용보다는 부상병 치료 비용이 싸게 먹힙니다." 제로딘의 관자놀이가 사납게 떨린다. 핸드레이크는 무심하게 제로딘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먹구름 낀 하늘을 본다. "비 맞는 건 싫은데." 무심한 말투. 수많은 부상병들에게 쏟아지는 비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 이 아니라 마치 약속이 있는데 비가 올 것같아서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 다. 제로딘은 기어코 말해버린다. 몇 년 동안 묵혀두고 하지 않았던 말 을. "당신을 한 대 치고 싶습니다." 핸드레이크는 여전히 하늘을 본다. "주먹 맞는 것은 더 싫은데." 제로딘은 목울대를 울렁거리다가 간신히 참는다. "부상병의 수용에는 반나절이 소모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야영 준비를 갖출까요?" "그래야죠.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여덟 별 중 최연장자답게 제로딘은 검의 손잡이를 쥐었을 뿐 뽑지는 않 는다. 제로딘은 물러난다. 핸드레이크는 생각한다. 반나절이면 드래곤 로드는 얼씨구나 하면서 바이서스군을 공격할 것이 다. 평소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누구도 세 개의 부대를 패주시 키고나서 그날로 본진을 습격하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속한 부대 운용을 보고 난 후 핸드레이크는 그 날로 드래곤 로드가 전투를 걸 어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전격전은 처음부터 드래곤 로드가 핸드레이크의 기만 전술 을 파악했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것이 다. 그는 오늘 온다. 남은 것은 다섯 별의 다섯 부대. 원래 계획대로여 덟 별의 여덟 부대가 다 집결했다면 승리의 자신도 있었다. 다섯 부대가 남은 지금이라도 방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드래곤 로드와 맞붙게 된다면 지리한 소모전으로 이끌어가는 것 외엔 방 법이 없다. 그러나 소모전이라면 루트에리노 대왕측이 절대적으로 불리 하다. 그들의 보급선은 가늘다. 실처럼 가늘다.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 드에게 기만전술을 사용한 것도 이런 약점 때문이다. "이빨이 다 빠진 줄 알았는데, 아직 물어뜯을 힘은 남아있군. 꽤 아픈 데? 젠장, 완전히 저쪽에게 자리 깔아주고 박수까지 치게 되었군." 이제 드래곤 로드는 자기 방식으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전면전으로. 여덟 별이 아니라 다섯 별이므로 전면전의 승산은 드래곤 로드에게 훨씬 크다. 결코 도망쳐서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은 주지 않을 것이다. 핸드레 이크는 자신이 왜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지 안타깝게 생각한다. 수염을 길렀다면 좀 잡아당겨 볼텐데.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수염 대신 머리카락 을 잡아당긴다.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린다. "페어리퀸?" 하늘 저편에서 다레니안이 그에게 날아온다. 페어리의 날개는 날고 있을 때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다.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씨였다면 반사광이 아름답겠지만 지금 먹구름 아래에서는 그런 반사광도 없다. 그래서 핸드레이크에겐 그녀가 둥둥 떠 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핸드레이크는 그의 얼굴 앞쪽에 둥둥 떠있는 다레니안을 보며 말한다. "여기는 왠 일이십니까?" "당신의 승리를 보러 왔어요. 그런데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군요." "당신 구경거리를 제공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핸드레이크의 대답에 페어리퀸의 얼굴이 굳어진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핸드 레이크에게 이상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 단순한 병사 들에게는 간혹 밤중에 평원 한가운데 서서 허공에 뜬 요정과 이야기하곤 하는 핸드레이크의 모습이 너무도 무섭게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먹구름이 끼었지만 낮이다. 병사들은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 로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무 것도 못본채 하는 것이 다. 페어리퀸은 쌀쌀맞은 어투로 말한다. "이대로 기다리다간 궤멸하는 당신의 모습을 내게 구경시켜줄것 같은 데?" 핸드레이크는 차갑게 말한다. "페어리답지 않은 저급한 취미시군요. 보고싶으시다면 기다려보시죠." "패배할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길 거죠?" 핸드레이크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병사들과, 그 너머로 보이 는 부상병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페어리퀸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바이서스 군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핸드레이크는 말한다. "이 상황에선, 잘 달아나는 것이 이기는 것이겠죠." "드래곤 로드는 지금 당신이 달아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텐데?" 핸드레이크는 쓴 미소를 짓는다. 그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이서스 군은 맞서 싸워야 한다. 패배할 것이 두려워 달아난다면 드래곤 로드는 즉각 그 뒤를 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궤멸이라는 결과 이외에 다른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맞서 싸운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미가 있 다면 패배의 순간을 조금 더 지연시킨다는 의미뿐. 어떤 방법으로도 좋 은 결과는 얻기 어렵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왜 수염을 기 르지 않았는가를 안타깝게 여긴다. 페어리퀸은 말한다. "조언할까요? 달아나는 것이 좋겠군요." "무슨 말입니까." "부대를 해체하고 달아나버리세요." 핸드레이크는 무서운 눈길로 페어리퀸을 노려본다.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그의 몸을 던진 후, 그와 더불어 각고의 세월을 견디며 키워온 꿈과 희망을 포기해버리라고 말하는 요정의 여왕이 그의 눈 앞에 있다. 지금 부대를 해체해버린다면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방 법 밖에 없다. 아니, 전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다시는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대답을 보류한다. 그는 눈을 돌려다시 한 번 부 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바이서스군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다 죽 일 것인가? 핸드레이크는 결심을 굳힌다. "아니, 달아나지 않겠습니다." 페어리퀸은 차가운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며 노골적인 비난이 섞 인 말투로 말한다. "모두 함께 이루어지지 못한 꿈과 더불어 이 땅에 뼈를 묻겠다는 건가 요?" "아니, 대왕께서는 이루어진 꿈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실 겁니다." 페어리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왜 우리라고 하지 않고 대왕께서라고 하지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페어리퀸은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러나 핸드레이크 의 얼굴에는 잠시 결심이 빛이 떠오르다 사라졌을 뿐, 아무런 표정이 나 타나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확고한 걸음걸이로 진지로 돌아가버린다. 남겨진 페어리퀸 다레이안은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암흑이 가릴 수 없는 것이 단 하나 있다. 암흑이다. 핸드레이크는 암흑이 되어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엄밀하게 보면 그 는 현재 날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은 암흑의 말에 실려 있다. 새카만 몸과 역시 새카만 갈기가 밤바람을 할퀸다. 눈에 잘 보이지않는 희미한 다리는 거세게 움직여 허공을 밟고 있다. 그리고 하얀 눈에는 아무런 눈 동자가 없다.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현실에 소환되는 말 팬텀 스티드(Pantom steed) 는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세미나스 평원 위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유혈의 냄새를 담은 바람이 부는 세미나스 평원에 설 정도로 겁 없는 자 가 지금 그를 본다면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가 복수의 대상물을 찾아 소 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전운이 감도는 세미나스 평원에는 지각있는 생물은 전혀 다가오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달려가고 있다. 핸드레이크는 그 날 저녁의 대화를 생각한다. "도주를 제가 책임지라고 하셨습니까?" 제로딘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왕은 현재 극심한 충격으로 올바른 지휘를 하실 수 없는 상태니까 요." "그러나, 당신이 참모장이잖습니까?" "무슨 말씀을. 바이서스 군율에는 참모장의 지휘권을 명시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제로딘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실질적인 총지휘권자이지 않은가, 제로딘은 그 말을 하고 싶었 다. 핸드레이크는 빙긋 웃었다. "그 동안 절 한 대 치시고 싶으셨죠?"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제로딘은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바 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을 싫어하는 부하들은 맡지 않겠다는 겁니까? 당신, 그 정도밖에 안됩니까?" "아니,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절 치고 싶다면 지금 치시죠.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현 상황에서 도피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실 겁니 다." "나도 검으로 뼈가 굵은 무부요. 대충은 짐작할 수 있소." "따라서도피를 하려면 적을 저지해야 됩니다." "어떻게… 당신!" 제로딘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테이블 에 앉은 채 말했다. "유피넬의 저울에 실린 우리의 추는 너무 무겁군요. 아래로 처지고 있 습니다. 헬카네스의 도움이 아닌 바에야 저울대를 다시 올릴 수는 없겠 지요. 하지만 나는 마법사입니다." 제로딘은 핸드레이크를 노려보았다. 수 년간 함께 해왔으면서도 처음으 로 보내는 시선이다. 핸드레이크는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울눈을 속일 겁니다." 장탄식, 거부의 말, 호소, 감정과 상관없이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럴 수는 없다. 인륜에 의거한 갖가지 말들, 제로딘은 자신이 웅변의 대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검으로 뼈가 굵었다는 제로딘, 아마 일 생 최대의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모두 무시했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날 설득한 적이 있습니까?" 제로딘은 입을 다물었다. "대왕께는 알리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제로딘의 눈가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눈물이 흘렀지만 그는 인식하지 못 하고 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세미나스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밤의 습격은 확실하다. 드래곤 로드는 어둠과 함께 공격해올 것이다. 그러나 핸드레이크 역시 밤이 되기 전에는 단신으로 이곳을 가로지를 수 없다. 이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핸드레이크의 의지가 팬텀 스티드에게 전달되면서 팬텀 스티드는 북풍의 매서움으로, 그러나 남풍의 고요함으 로 달려간다. 마침내 멀리 드래곤 로드의 진지가 보인다. 암습의 준비를 갖추는 그들의 모습은 분주해보인다. 횃불이나 기타 등 등의 조명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핸드레이크는 느낄 수 있다. 확실한 승리의 예감으로 그들의 입가에서는부지불식간에 낮은 웃음과 거친 고 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사기를 복돋우는 고함소리이다. 저들이 과연 어제와 오늘 새벽에 걸쳐 세 개의 부대를 패주시킨 부대인가? 핸드레이 크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피로한 모습이나 흐트러진 태도 같은 것은 없 다. 마치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은 부대의 모습처럼 깨끗하고 정돈된 규율이 흐르는 모습이다. 수백년에 걸쳐 이 땅에 드래곤의 지배를 가능하게 한 저력이 느껴진다. 핸드레이크는 조용히 땅에 내려섰다. 드래곤 로드의 진지에서 훨씬 떨어진 언덕에 내려선 핸드레이크는 팬텀 스티드를 돌려보낸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밤이슬의 축축함이 그를 적 신다. 핸드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찾아왔으면서, 옷이 젖는 것을 신경쓰는군. 그는 고요하고 캄캄한 구릉의 기슭에 앉아 멀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드래곤 로드의 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본 다. 먹구름이 지독해서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핸드레이크는 다리를 쭉 펴보았다. 딱딱하며 축축한 땅의 느낌이 다리 전체로 전해져온다. 핸드레이크는 당황하며 다시 다리를 모아 가슴 앞에 세웠다. 너무 궁상맞아 보이는걸? 흠. 아무도 안보겠지. 핸드레이크는 다리를 모으고 팔로 무릎을 감싸쥐었다. 그렇게 약간은 궁상스러운 모습 으로 핸드레이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 언덕을 스치는 바람에 풀들이 스치는 소리. 핸드레이크는 눈을 감는다. 세월을 되짚는다. 주군과의 만남, 동지적 결속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애증에 가까운 감정들로 점철된 세월들, 그러나 야망의 실현이 다가옴에 따라 보다 현실적으로 바뀌어버린 두 사람. 루트에리노 대왕은 루트에리 노 대왕이고 핸드레이크는 핸드레이크다. 두 사람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 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그들은 세상의 정점에 힘겹게 올라가고 있 다. 그러나 이젠… 주군께 글이라도 남기고 올 걸 그랬나. ================================================================== 7. 항구의 소녀……8. 핸드레이크는 눈을 뜬다. 드래곤 로드의 진문이 열린다. 선두는 항상 그래왔듯이 와이번의 부대 들이다. 새카만 날개의 움직임은 먹구름 낀 밤하늘 아래 거의 판별이 어 렵다. 하지만 적의에 충만한 그 붉은 눈만 보아도 충분하다. 핸드레이크 는 그들을 보낸다. 와이번은 하늘로 솟구쳐 사라져간다. 그 다음 진문을 나서는 것은 오크들의 부대, 사나운 콧김 소리가 언덕 위까지 들려온다. 핸드레이크는 마치 군대의 출병식을 구경하는 노인이 나 된 듯이 태연히 앉아서 그 모습을 굽어본다. 오크들의 행렬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핸드레이크는 박수라도 쳐줄까 하는 잡념이 들었다. 간혹 트롤들의 거체가 그 사이사이에서 움직인다.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의외로군. 핸드레이크는 차라리 냉철한 제 3 자의 시 각으로 바라본다. 암습을 하려 하면서 저렇게 시끄러운 녀석들을 선봉으 로? 핸드레이크는 쓴 웃음을 짓는다. 고맙군, 드래곤 로드. 오늘밤의 암 습 쯤은 내가 예측할 거라고 믿는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암습이 아니라 전면전의 개시가 되겠군. 드래곤 로드는 핸드레이크가 암습을 당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는 당당하게 진격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핸드레이크가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핸드레이크가 설마 드래곤 로드의 공격 시 기에 앞서 부대를 버려둘 것이라고는, 게다가 드래곤 로드의 진지 곁으 로 단신으로 와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핸드 레이크에게 암살 따위의 가장 확률이 적은, 그러나 배당이 가장 높은 판 을 노리는 도박사 기질이 있다고는 더욱 믿지 못할 것이다. 미안한데, 늙은이. 오크들의 행렬은 아직까지 이어진다. 놈들은 흥분했고 지금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칼질을 해댈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행렬의 길이에 지루한 기분이 들어서 팔을 높이 올려 기지개를 켠다. 빨리 나와. 삶에 미련이 남을 것 같잖아. 그 때 핸드레이크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주의깊게 드래곤 로 드군의 편성을 바라본다. 지금 진문을 나서는 것은 손에 팔치온을 든 채 거대한 늑대들에 올라탄 오크들의 모습이다. 평범한 모습이지만, 이상한 일이다. 울브라이더(Wolves Rider)가 왜 보병의 뒤에 나오지? 암습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울브라이더의 정숙성은 크게 떨어진다. 따 라서 보병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혼란해진 적군들 사이로 울브라이더 들이 뛰어든다… 안돼. 역시 그럴 수는 없다. 정숙성 하나를 위해 울브 라이더의 돌격력을 포기하는 처사다. 게다가 암습이 아니지 않는가. 핸드레이크의 척추를 타고 싸늘한 기분이 든다. 그와 동시에, "취이이익! 잡아라!" 울브라이더들은 정확히 핸드레이크가 서있는 언덕으로 돌격해온다. 늑 대들의 포효소리가 철판을 긁는 칼날의 소름끼치는 매서움으로 핸드레이 크를 후려친다. 핸드레이크는 벌떡 일어섰다. 뒤를 돌아본다. 선두에 진 격했던 오크들과 트롤들은 이미 언덕 배후에 포진을 마쳤다. 플라이(Fly) 주문? 안된다. 날아올라도 도망갈 수는 없다. 와이번들이 상공에 대기하고 있겠지.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는다. 난 하나인데 너무 많잖아. 바로 다음 순간 핸드레이크의 입이 빠르게 움직인다. 울브라이더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늑대들의 발톱에 흩날리는 풀. 그러나 핸 드레이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빠르게 끝난 캐스팅. "타임 스톱(Time Stop)!" 순간, 달려오던 울브라이더들이 허공에 얼어붙어 버린다. 밤바람과 늑대들의 거친 발놀임으로 흩날리던 풀들마저 단단한 조각상 처럼 굳어버렸다. 시간은 핸드레이크에 의해서 그 거침 없는 모래를 정 지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핸드레이크는 걸어간다. 그는 울브라이더들 중 가장 앞쪽에 달려오고 있던 오크에게 다가갔다. 오크의 입은 크게 벌어져있고 그의 눈은 증오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지 만 움직임은 없다. 늑대의 앞발은 허공을 걷어찬 자세 그대로이다. 핸드 레이크는 그 놈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다음 캐스팅한다. "프렌드(Friend), 레먼테이블 빌레이먼트(Lamentable Belaborment.). 주제는 오크는 왜 르르거리는가." 핸드레이크는 다시 그 뒤의 몇 마리를 지나친 다음 캐스팅에 들어갔다. "폴리모프 셀프(Polymorph Self)" 핸드레이크의 모습이 서서히 변한다. 키가 작아지고, 얼굴은 마치 돼지 처럼 변한다. 이제 그는 한 마리 오크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의 모래는 다시 떨어진다. 바람이 다시 불고, 풀은 흩날린다. 오크로 변한 핸드레이크가 씨익 웃는 다. 곧 뒤쪽에서 핸드레이크의마법에 의해 엄청난 지도력을 가지게 된 오 크가 격렬한 토론의 불을 당겼다. "취이익! 생각하라! 사랑하는 오크 동지들이여!" 좋은 시작이군. "취익! 우리의 의사를 전달함에 있어, 취익! 르르거리는 소음이 무엇에 필요하냐, 취익! 우리는 오크의 자긍심을 버릴 셈인가? 취이이익! 르르 거리는 소음은 흡사 우리를 돼지 같은 하등 동물, 인간이든 우리든 똑같 이 먹거리로밖에, 취익! 취급하지 않는 하등 동물로 여기게 하지 않는 가! 르르취익!" 곧 격렬한 반응. "취이익! 우리는 돼지가 아니다! 취익!" "그렇다! 취익! 경애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취이익! 오오, 그대들에 대 한 나의 사랑, 르르! 벅차 끓어올라 말로 다할 수 없도다! 취익! 그러나 생각하라, 형제들이여, 오, 나의 아들이여! 까마귀가 르르거리는가? 피 라미가 르르거리는가? 지렁이가 르르거리는가? 취이익르 ! 그렇다면 우리가 왜 르르거려야 된단 말인가!" 오크의 감동어린 연설은 절정을 치닫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군가 나서 서 끌어내려야 된다고 생각할 시점에서, 역시 오크들 중에서도 반골 오 크 하나가 나선다. "옳은 말이다.취익! 그러나 본성을 억누르는 것은, 취익! 잔인한 처사 다. 우리는 오크고, 취익! 오크는 르르거릴 때 가장 숭고한, 취익! 만족 감과 기쁨을 느낀다! 취익! 그것은 우리의 자아의 확인이다! 르르르!" 여지없이 맞받아쳐야겠지. "취이익! 자아! 저열한 본능과 자아를 혼동하진, 취익! 말아라! 그러한 논법은 신물이 난다! 취췻! 음습한 욕망에 자아확인이라는 이름의 면죄 부를 주지 말지어다! 취익!"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달려간다. 그의 등 뒤의 언덕에서는 격렬한 노변 대토론이 더욱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으며 주위의 군대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그 격렬한 토론에 참가한 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생각한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온다는 것을 알았을까. 내가 한 짓은 도저히 논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비논리적인 행동을 어떻게 추측할 수 있었을까. 마법을 써서 내 위치를 파악한 것인 가? 아니다. 그런 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관찰했다 면 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생각을 관두기로 한다. 어느새 본진 입구가 가까워지고 있다. 진지의 병사 오크들이 놀란 눈으로 언덕 위의 일대 소란을 바라보 다가 그를 멈추게 한다. "취익! 무슨 일인가!" "취익취익. 급하다! 마법사의 마법으로, 취익! 부대가 혼란에 빠졌다! 급보다!" 핸드레이크의 다급한 오크 목소리에 오크들은 놀라서 목책을 열어준다. 핸드레이크는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든다. 평소에 오크로 변하는 연습을 많이 해두었기에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갑자기 짧아진 다리 때문에 뛰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그야말로 허겁지겁 달려간다. 그런데 드래곤 로드의 막사는? 마법을 사용한다면 들키게 될 것이다. 아예 여기서 그냥 자폭해버릴까? 그러나 마법사의 정신은 그것을 가로막 는다. 확실치 않은 방법에 기댈 수는 없다. 목숨을 건 만큼, 댓가도 톡 톡히 받아내어야 한다. 드래곤 로드는? 다행히도 핸드레이크는 급히 달려가는 장교급 정도로 보이는 오크를 본 다. 장교급이 급히 달려간다면, 어디로 달려가 보고하겠는가. 핸드레이 크는 그 뒤를 따른다. 진지답게 곳곳에 화톳불이 켜져있다. 하지만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이 진지에 화톳불은 퍽이나 적다. 불을 싫어하는 놈들이 대부분이기에. 그 래서 핸드레이크는 어둠을 타고 유유히 오크 장교를 쫓는다. 무거운 갑옷을 걸친 그 오크는 씩씩거리며 달려가더니 곧 중앙의 커다 란 막사로 뛰어든다. 핸드레이크는 주의깊게 막사에 다가간다. 안에서 고함소리같은 오크 장교의 보고가 들려온다. "보고합니다, 드래곤 로드. 취익! 그 마법사는…." 핸드레이크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 뒤의 말은 필요없다. 여기 드래곤 로드가 있다는 것만 알면 그만이다. 핸드레이크는 캐스팅에 들어간다. 파악! 막사의 천이 찢어지며 핸드레이크의 옆구리에 화끈한 느낌. 이어 발끝 에서 머리끝까지 일격에 관통하는 고통. 핸드레이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 한 채 찢어진 천막 안을 노려본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페어리퀸 다레니안. 그녀였군. 정신없이 퍼덕거리는 그녀의 날개는 으 스름한 촛불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핸드레이크는 시선의 촛점을 좀 앞으로 당긴다. 그러자 천막과 함께 자신의 허리를 베어버린 남자의 모 습이 보인다. 하얀 수염, 길다란 백발,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달려있는 커다란 눈썹 도 희다. 그 아래의 눈은 깊고 심원하다. 마법사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 다면 최고의 모델이겠지. 그러나 그 마법사의 품격을 가지고있는 늙은 이는 거대한 롱소드로 핸드레이크의 허리를 베었다. 핸드레이크는 허물 어진다. 노인은 쓰러진 핸드레이크를 경멸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고작 암살인가. 믿기 어려웠거늘, 정말 실망 을 금할 수 없군." 드래곤 로드로군. 폴리모프한 상태인가 보다. 하긴 원래의 거대한 몸이 라면 이런 조그만 막사에 들어갈 수도 없겠지.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우 스워졌다. 페어리퀸 다레니안이 부리나케 날아온다. 그녀는 통곡한다. "미안… 미안해요. 핸드레이크. 내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그녀는 핸드레이크의 상처에 날아가 어떻게든 그 손으로 피를 막아보려 한다. 핸드레이크는 더 우스워졌다. 맨손으로 폭포를 막으려드는 것과 같다. 다레니안은 한편으로는 눈물을 쏟으며 다 른 한편으로는 드래곤 로드를 쏘아본다.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드래곤 로드는 별 말도 하지 않고는 검으로 다레니안을 후려갈겼다. 다 레니안은 급히 피하려했으나 페어리의 속도와 그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로드의 롱소드에 날개를 잃고 만다. 다레니안은 비명을 지르며 마치 날개 잃은 나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떨어진다. 드래곤 로드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날파리나 다름없는 페어리 주제에 위대한 드래곤에게 명령하는 것인 가." 그리고 드래곤 로드는 그대로 발을 들어 그야말로 파리라도 뭉개듯이 다레니안을 뭉갠다. 아니, 밟아버리려 한다. 날개를 다친 다레니안은 꼼 짝도 하지 못한다. "아압!" 핸드레이크는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뻗어 드래곤 로드의 발을 붙잡아 올 려버린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드래곤 로드는 뒤로 기우뚱하고, 핸 드레이크는 그 틈을 타서 몸을 굴린다. 벌떡 일어서는 그의 입에서 부상 자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한 스펠이 읊어진다. "게이트(Gate)!" 중심을 잡은 드래곤 로드가 본 것은… 허공에 만들어진 차원문과 그 앞 에서 허리를 숙여 다레니안을 들어올리는 핸드레이크의 모습이다. 드래 곤 로드는 노호성을 지르며 롱소드를 휘두른다. 아직 충분히 커지지 못 한 게이트를 바라보며 핸드레이크는 주저없이 다레니안을 집어넣고는 옆 으로 몸을 굴린다. "핸드레이크!" 다레니안의 찢어지는 목소리는 차원문을 통과하며 희미해진다. 핸드레 이크는 드래곤 로드의 롱소드는 간신히 피했으나 드래곤 로드에게 보고 를 하고 있던 오크 장교는 생각지 못했다. 느닷없이 날아온 팔치언이 그 의 다리를 할퀴고 지나간다. 검은 하늘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핸드레이 크의 눈에 튀어들어온 핏방울 때문일까. 미친듯이 타오르는 모닥불 때문 일까. "크윽!" 차원문을 통과하여 단숨에 드래곤 로드의 진지로부터 수백 큐빗 떨어진 평야까지 날아가버린 다레니안은 허공에 튕겨져 나오자마자 날개를 잃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다시 땅에 떨어진다. 조그만 돌멩이조차도 페어리 에겐 바위나 마찬가지다. 다레니안은 돌멩이와 흙덩이에 부딪혀 멍들고 상처입으며 땅에 구른다. "으으윽… 으음." 다레니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몸이 부서져가는 고통이 느껴지지 만, 다레니안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난다. 키를 덮는 풀들, 아무 것도 보 이지 않는다. 다레니안은 순간 몸을 부르르 떤다. 다레니안은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한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 개구리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뭐든 먹어버 리니까. 하지만 곧 다레니안은 자기가 과잉불안에 시달린다는 것을 깨닫 는다. 이 언덕에 무슨 물기가 있다고 개구리가 있겠는가. 다레니안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똑바로 선다. 눈 앞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잡초들 때문 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개굴." "으아아아! 개구리다…!" 다레니안은 급히 몸을 돌린다. 실수다. 가벼운 페어리의 몸은 제자리에 서 몇 바퀴나 돌면서 곧 중량감보다 원심력이 강해져 데구르르 굴러버린 다. 다레니안은 고꾸라진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뒤를 본다. "하하하." 씨익 웃고 있는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보인다. "핸드레이크!" 핸드레이크는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무겁게 앞으로 쓰러진다. "꺄아아!" 쾅! 다레니안은 눈을 감는다. 휘리릭. 다레니안은 날려가버린다. 핸드 레이크가 쓰러지면서 일으킨 바람은 가벼운 페어리를 멀찌감치로 날려버 린다. 그래서 다레니안은 간신히 깔려죽지 않았다. 다레니안은 힘겹게 핸드레이크에게 기어간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본다. 핏기없이 싸늘한 얼굴. 독한 죽 음의 냄새가 퍼지는 것 같다. "핸드레이크! 핸! 핸! 정신차려요!"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입술을 마구 민다. 그리고는 코를 잡아당긴 다. 핸드레이크는 코가 간지러워진다. "에취!" 데구르르… 다레니안은 다시 온몸에 멍이 든다. 핸드레이크는 말한다. "아직 안죽었습니다." 허리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얼굴을 박고있는 남자의 말투라기엔 차분하 다. 다레니안은 눈물을 글썽이며 핸드레이크에게 기어간다. "핸…" "텔레포트 됩니까?" 핸드레이크가 말을 할 때 날리는 먼지가 다레니안에게는 먼지폭풍이다. 하지만 다레니안은 애써 참아내며 되묻는다. "예?" "텔레포트 되냐고요." "아… 예. 메모라이즈했어요." "절 좀 옮겨주십시오." "아, 예. 저, 그리고 고마워요. 핸. 살려줘서."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는다. 죽기 직전에라도 웃음을 지어야 남자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건 그저 나의 왕, 루트에리노 전하를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특별 히 페어리퀸 당신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예? 무슨 말입니까?" "당신 덕분에 암살이 실패한 이상, 난 살아있는 것이 주군께 도움이 되 는 일입니다." 다레니안은 앞쪽 말에 창백해졌다가 곧 뒤쪽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 7. 항구의 소녀……9. "그래서?" "살아나려면, 그 진지 안에서 내 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이용 하는 것이 낫겠지요." "당신이 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살려는 이유는 주군을 위해?" "그렇습니다." 다레니안은 잠시 말을 멈춘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본다. 예고없이 그녀 의 입이 열린다. "도대체 왜 사는 거에요!" 다레니안의 짜랑짜랑한 목소리. 물론 크지는 않지만 핸드레이크의 얼굴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 핸드레이크에겐 천둥소리나 다름없다. 핸드레이크는 땅에 뺨을 가져다댄 채 옆으로 선 것처럼 보이는 다레니안 을 바라본다. "왜, 무엇 때문에 사는 거에요! 100년도 살지못할 인생이면서, 왜 자기 를 위해 살지 않아요!" "다레니안…" 다레니안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내가, 내가 왜 드래곤 로드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지 알아요?" "물론 날 체포되게 하려고 했겠지요." "그래요! 그래야 당신이 죽지 않을테니까! 오후에 당신의 얼굴엔 모두 다 드러났어요. 당신이 죽을 생각이라는 것 알아차렸죠. 난 차라리 다행 이라고 여겼어요. 당신이 체포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멍청한 이상 도 모두 버리고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습니까?" 갑자기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손가락을 쥔다. 그녀는 낮지만 열성적 인 어투로 말한다. "핸.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자기를 위해 살아요. 당신 이 루트에리노를 도와 왕국을 세울 수도 있어요. 그 왕국이 수천년간 번 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수천년 후를 살지 않아요. 다른 사람 대신에 사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세운 왕국도 영원하지는 않을 거에 요. 왜 가장 소중한 목숨을 쓸데없는 것 때문에 희생하려는 거죠?" "쓸데없는 것…." "그래요. 당신이 대룩 최고의 왕국을 세우고, 아니, 대륙을 아예 통일 할 수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충 실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과연 제대로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격한 고통으로 신음이 흘러나오지 만 핸드레이크는 언덕 위에 정좌한다. 밤바람이 그의 뜨거운, 그러나 차 가운 뺨을 스친다. 핸드레이크는 손바닥을 내밀어 다레니안을 올라타게 한다. 핸드레이크 는 손을 다리 위에 올려다레니안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다레니안은 느닷없는 질문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재촉하 지 않고 그녀를 바라본다. 다레니안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을 하고 있어요." 이번엔 핸드레이크가 당황한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타 있는 요정의 여왕을 내려다본다. "날 사랑합니까."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핸드레이크는 눈을 들어 다레니안을 외면 한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어느 새 먹구름이 걷혔는지, 밤하늘엔 루미너스의 빛이 반짝인다. 핸드레이크는 달을 보며 말한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예?" "우리는 인간입니다. 당신 같은 페어리나 조화의 엘프가 아닙니다. 더 군다나 독단의 드워프도 아닙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는 하나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주군의 신하 핸드레이크, 루 트에리노의 친구 핸드레이크, 바이서스군의 참모장 핸드레이크, 클래스 9의 마법의 마스터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의 철천지 원수인 핸드레이 크,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입이 잠시 멈춰졌다가 말한다. "고귀한 페어리퀸의 사랑을 받는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붉어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무정한 핸 드레이크의 얼굴은 아래를 향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달을 향해 말한 다. 밤기운이 차갑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참지 못하고 말한다. "무슨 말씀이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총애를 동시에 받습니다. 원래 불안하 죠. 우리는 관계 속에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부러워한다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 닙니다."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페어리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인간에게 있어 나는 하나일 수 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수형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다면 적이고 여럿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왜죠? 왜 안된다는 거죠? 굴뚝새에서부터 크라켄까지, 페어리에서부터 악마까지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요. 그런데 왜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이죠." 다레니안은 얼빠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 본다. 핸드레이크는 침 울하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는 핸 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는 핸드레이 크, 바이서스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상 최초로 클 래스 10의 마법을 만드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를 죽이기 위 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레니안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젖는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 눈 앞에 핸, 그것일 뿐이잖아요? 핸을 사랑하려고 수많은 핸을 찾아낼 필요는 없어요. 여기, 언덕 위에 앉아 있는 핸이잖아요! 나를 들고 있는 핸이잖아요. 드래곤 로드가 당신 을 죽이려고 그 많은 핸을 일일이 하나씩 죽이지는 않잖아요! 드래곤 로 드는 오로지 여기 있는 이 핸만을 죽이면 그만이잖아요! 마찬가지에요. 나도 그 많은 핸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여기 있는 이 핸만 사랑해요." 핸드레이크는 드디어 얼굴을 내려 다레니안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을…" 다레니안은 충격에 말을 잃는다.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한 채 두번째로 앞으로 기울어진다. 다레니안은 크게 외친다. "핸!" 어느새 기울어버린 햇빛이 발코니를 통해 들어온다. 방 안 허공으로는 사각형의 빛들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빛이 닿는 곳 은 밝고, 닿지 않는 곳은 어둡다. 불그스름한 광선들과 검은 어둠 사이 로 300년 전의 이야기가 휘감아돈다.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카알의 감탄어린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와, 우와. 어느새 네리아나 엑셀핸드마저도 데미 공주님의 이야기에 빨 려들어가 있었다. 아프나이델마저 몸을 일으켜 데미 공주에게 기울이고 있었다. 역사 이야기라면 항상 지루하지만, 이건 정말 재미있는데? 역사 에 관심을 좀 가져봐도 되겠네. 카알은 말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페어리퀸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를 바이서스 군으로 옮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났지요. 프리스트들의 힘으로 핸드레이크는 구 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력은 마력에 위험한 법. 핸드레이크는 이후 몇 주일 동안 마법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상에 누운 채 바이 서스군을 지휘했습니다." "그 최고의 후퇴작전이 침상에서 나왔습니까?" 샌슨의 어처구니없는 목소리였다. 길시언도 혀를 차고 있었고 데미 공 주는 미소를 지었다. "핸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죠. 항상 모든 것을 마법과 연관지어 생각 하다가 마법을 완전히 배제해놓고 생각하니 머리가 더 잘돌아간다고." 우리는 모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흠. 갑자기 며칠 전의 빛의 탑 의 소동이 생각나는군. 카알은 두 손을 맞잡아 무릎에 올려놓은 자세로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군요." "흐음. 독단의 드워프라." 엑셀핸드가 투덜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석양의 햇빛이 닿은 그의 수염 은 황금이었다. 카알 역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속눈썹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나의 왕이라.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데. 나의 왕이라. 그렇다면 그것 은 내가 먼저고 왕이 나중이군. 왕은, 내가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인가. 그것 참. 에라. 관둬라. 저녁식사 시간은 악몽이었다. 화려한 테이블로 안내되어 들어간 우리들은 단숨에 의기소침해졌다. 물 론 엑셀핸드와 길시언, 그리고 샌슨은 제외된다. 우리는 불편한 마음으 로 우리 속옷보다 더 깨끗한 식탁보가 덮인 식탁에 앉았고 궁내부원들은 모두 자신의 동작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아하고 부드럽 게 음식물들을 날라왔다. 아으, 아으! 궁성에서 식사를 하다니! 영광스 러워라. 하지만 식탁에서 영광이란, 소금이나 양념처럼 꼭 필요한 것은 커녕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 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우 제길! 샌슨이 나 대신 창피를 당해준 덕분에 난 간신히 샌슨처럼 손 씻는 물 을 마시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요리라고 해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뭘로 먹어야 되죠?" 난 나지막하고도 심각하게 카알에게 질문했다. 내 앞에 있는 요리의 이 름을 알게 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이게 손으로 집어먹는 건지, 포크로 찍어먹어야 되는 건지, 스푼으로 떠먹어야 되는 건지만이 라도 알게 된다면 좋겠다. 카알은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길시언 전하를 참고하세나." "현명하세요." 아프나이델은 우리보다는 훨씬 똑똑했다. 역시 마법사라 그런가? 아프 나이델은 어떻게 먹어야 되는 건지 확실한 음식만 골라서 먹는 것이었 다. 그래서 그가 손을 댄 것은 스프와 빵이 다였다. 반면 샌슨과 엑셀핸 드는 그와 정반대의 태도로 나와 카알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 두 명은 어떠한 예법으로 먹든 음식물의 최종 목적지는 입이 아니냐고 웅변을 토 하는 듯한 동작으로 음식들을 입 속으로 쓸어넣었다. 다행히도 길시언은 천천히 확실한 동작을 취해주었고 그래서 나와 카알, 네리아 등 상식이 있어서 여태까지 피곤했던 세 사람은 그 모습을 훔쳐보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이건 정말 못견디겠다. 왜 다른 사람 식사하는 것을 들여다보냔 말이다! 궁내부원을 향해 내뱉 는 나의 소리없는 항변이다. 젠장. 왜 다른 사람 식사하는데 옆에 서있 는지 모르겠다. 물론 시중을 들기 위해서일 거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아 무리 그래도 옆에 사람 세워놓고 밥먹기가 어디 쉬운가? 게다가 난생 처 음 보는 요리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간신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식당을 빠져나왔다. 도대체 무슨 맛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네리아와 카알도 곧 내 뒤를 따랐고 길시언과 아프나이델도 천천히 따라나왔다. 오로지 샌슨 과 엑셀핸드만이 아직도 식당을 점거한 채 궁성 주방장을 기쁘게 만들고 있었다. 네리아는 심각하게 말했다. "무시하자." "좋아요." 그래서 우린 그 두 명을 무시해버리고 삼층으로 올라와버렸다. 우리 침실은 낮에 우리들이 몰려 있던 거대 회의실 옆에 붙어 있었다. 나와 카알, 샌슨이 한 방을 쓰고 길시언, 아프나이델, 엑셀핸드가 한 방 을 쓰며 네리아는 혼자 방을 쓴다. 나는 내 발로 궁성의 화려한 침대의 탄력도를 좀 조사해보고는 곧 밖으로 나왔다. 책을 읽던 카알이 헛기침 을 해대었기 때문이다. 회의실로 나와보니 네리아와 아프나이델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길시 언은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고 두 명의 주방장 옹호인들은 아직도 올라오지 않은 모양이다. 네리아는 감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이제서야 조금씩 실감이 나네. 내가 궁성에 들어와 저녁식사 를 마치고 이렇게 유유히 앉아 있다니." 나는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그동안 묻고 싶었어요. 도둑길드에서는 고생하지 않았어요?" "응. 별로. 아무리 포로라도 같은 업종 종사자들끼리니까 괜찮아." "그 날 날 보낸 것은 그때문이에요?" 네리아는 그 말을 듣더니 시선을 내게 돌렸다. 그녀의 눈이 재미있게 빛났다. "그럼 꼬마를 두고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나오니?" "그러셨군요, 할머니." 네리아는 깔깔거리며 손을 뻗어 내 코를 비틀었다. 어, 어어! "그래. 이야기나 들어. 도대체 어떻게 그 책을 훔쳐낸 거야? 나이트 호 크 자부심에 금가는 소리가 들려오네." 난 곧 신이 나서 우리들의 계획을 줄줄 이야기했다. 내가 여장을 했다. 네리아는 죽어라고 웃어대면서 나의 옷차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 했다. 그리곤 아프나이델의 패밀리어를 숨겨 들어갔다. 네리아는 박수를 딱 쳤다. 그리고는 패밀리어를 통해 시동어를 알아내었다. 네리아는 숨 을 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도둑 소란을 일으키면서 아프나이 델을 숨겨 들여보냈다. 네리아는 감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프 나이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풍부한 아가씨야. "그래서요?" 아프나이델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뭐,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저택에 숨어들어가니 모두들 일층에서 우 왕좌왕하더군요. 그래서 이층에 몰래 올라가는 것은 간단했습니다. 그리 고는 시동어를 말하고 삼층에 올라갔지요. 방이 많아서 좀 헤매기는 했 습니다만 결국 후작의 방을 찾았습니다. 사실 방마다 뒤지다가 서가가 있는 방을 발견하고는 거기가 후작의 방일 것임을 짐작한 거죠. 푸른 표 지의 책을 찾기는 쉬웠습니다. 무슨 장치나 함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 는데, 역시 자신이 항상 사용하는 방이라 그런 것은 없더군요. 후작은 텔레포트 마법과 창문마다 걸려있는 알람 주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정면의 창문을 깨트리고는 뒷쪽의 창으로 뛰어나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장면에서 난 카알의 판단력에 대해 장황하 게 이야기했고 아프나이델과 네리아 모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영리해… 정말, 모두들. 흠. 난 후치 너희 일행과 만나고부터 내가 너 무 멍청한 도둑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에이, 설마요. 우린 운이 좋았겠죠." "후치군의 말이 옳아요. 우리 계획은 급조된 것이었고 모두들 익숙치 않았지만 운이 좋아서 성공한 거죠." 네리아는 헤헤거렸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네리아가 좀 말해봐요. 잡혀있으면서 뭐 들은 거 없어 요?" "응? 듣다니?" "넥슨 말이에요. 뭐가 못마땅해서 반란을 저지르려 든 건지, 뭐 참고가 될만한 말 듣지 못했어요?" "아니. 전혀. 난 거의 감옥에만 잡혀 있었고 넥슨은 만나지도 못했어. 거기 있던 도둑들에게 이야기를 좀 시켜보려고 했지만 별로 들은 게 없 어." "그래요? 흐음. 도대체 뭐가 답답해서 반란이죠?" "글쎄다." 그 때 아래쪽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즐거운 콧노래가 들려왔다. 우리들 은 계단을 돌아보았다. 샌슨과 엑셀핸드가 나란히, 그렇다.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말이 안되는 구도라니. 샌슨과 엑셀핸드가 나란히 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즐 거운 표정으로 이를 쑤시며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손에손에 하나씩 술병을, 총 네 개의 술병을 들고왔다. 네리아가 반색했 다. "와아! 그거!" 샌슨은 씨익 웃었다. 이쑤시개가 하늘로 솟구쳤다. "주방장이 우릴 너무 좋아하던데? 이거 선물이래." "퍼헐헐헐헐. 자네들도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랬나. 그럼 좀 더 많이 받 아왔을텐데." 난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질문했다. "잠깐. 그저 음식 잘먹어줬다고 술병을 줘?" "응? 어, 뭐 부탁을 좀 했지. 좋은 음식을 먹었으니 좋은 술이 필요하 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말 잘 알아듣고는 즉각 선물을 주던데?" 선물… 강탈물, 혹은 전리품이 어울릴 것이다. 상식이 있어뵈는 사람들 은 모두 나가버리고 아무도 말려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술병을 내놓으라 고 점잖게 추궁하는 오우거와 드워프를 상대해야 했던 그 불쌍한 궁내부 원들과 주방장을 위해 묵념. 그리고 시음. 푸하하. 난 지긋지긋하게 떠오르는 넥슨의 얼굴을 잊기 위해 더 빠르게 마셔대 었고,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카알에게 물어보니 난 술병을 껴안고 테이블 아래에 들어가 자고 있었다고 한다. 그 상황이 되도록 왜 말리지 않았냐 고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모두들 엄청나게 취했던 모양이군. ================================================================== 7. 항구의 소녀……10. 다음날 아침, 참으로 감격스러운 경험을 또 한 가지 하게 되었다. "샌슨… 믿을 수 있겠어?" "뭐 말이야?" "나 뜨거운 물로 세수하는 것 처음이야." "사실 나도 처음이야. 놀라워…" 그 경험은 분명 평생에 남을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는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왜 저녁 식사와 아침 식사의 요리 종류가 다른 거지? 또 다른 고민의 흔적들을 무수히 테이블 위에 남겨놓은 다음, 진저리를 치 며 물러나 방에서 쉬고 있자니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 예복을 하나씩 받쳐든 6명의 궁내부원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카알은 마땅찮은 얼굴로 리핏 트왈리전과 6 명의 궁내부원을 바라보았 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모두들 별로 반기는 표정이 아닌 것을 보 고는 리핏 트왈리전씨는 좀 당황한 모양이다. 리핏 트왈리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내리신 의복입니다." 카알의 표정은 꼭 이런 옷을 입고 나서야 되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리아양은 저를 따라오시죠." "저요? 왜요?" "저… 데밀레노스 전하께 안내하겠습니다. 공주님께서 시녀들과 더불어 네리아양의 의복을 돌봐드릴 겁니다." "그래요? 흐음." 네리아는 리핏 트왈리전을 따라서 회의실을 나갔다. 리핏 트왈리전과 궁내부원, 그리고 네리아가 나가고 나서 우리는 각자 받아든 옷을 보았 다. 샌슨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샌슨에게는 대단히 커다란 옷이 주어졌다. 샌슨은 싱글거렸다. 엑셀핸드 또한 놀랐다. 드워프의 체격에 맞는 옷이 주어진 것이다. "허, 묘하네." 엑셀핸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그 옷을 집어던져버렸다. 길시언은 의 아해서 말했다. "입지 않으실 겁니까?" "내가 왜? 난 노커야. 독단의 드워프가 하는 일에 간섭말게." 그 말에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었다. 아프나이델에게 주어진 로브는 새 하얗고 품위있는 옷이었다. 아프나이델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이건 너무 화려한데." "예복이니까, 뭐. 입고 다닐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거 입으면 정 말 탑메이지처럼 보이겠네요."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하긴 저 옷을 입혀두면 정말 무슨 현자 처럼 보이겠다. 그리고 난 내게 주어진 옷을 보고는 한숨을 쉬어버렸다. 어깨가 부푼 핑크색 블라우스에 꼭 달라붙는 흰색 더블릿, 아이고 미치겠다! 제킨에 는 자수까지 놓아져 있었다! "이건 애나 입는 옷이잖아." 길시언이 웃었다. "그럼 네가 노인이냐?" 그 말에 나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푸른색 로브를 보고는 나와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그는 내 옷을 보고는 곧 웃음을 지었 다. 난 그 옷을 던져버리고는 선언했다. "절대로! 이 옷 이대로 가겠어요." "그러겠는가? 좋을대로." 길시언은 자기에게 주어진 옷을 보고는 한참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역시 집어던졌다. "자네를 따르지, 후치. 동생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어." 잠시 후 리핏 트왈리전은 네리아를 안내해주고 돌아왔다. 그는 우리 모 습을 보더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샌슨과 아프나이델, 카알의 세 명은 새옷으로 갈아입고 점잖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와 길시언, 그리고 엑셀 핸드는 원래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 리핏 트왈리전은 당황해 서 질문했다. "저, 세, 세 분은?" 엑셀핸드는 근엄하게 말했다. "내 옷은 드워프 최고의 의복이오. 인간의 왕이 준 옷이라 해도 이 옷 보다 더 품위 있고 예절 바르다 하진 못할 것이오." 드워프의 노커의 말에 리핏 트왈리전은 뭐라 댓구도 못하고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저, 전하…?" "내가 궁에 있을 때 어떻게 입고 돌아다녔는지는 기억하지요?" 리핏 트왈리전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묻기 전에 말했다. "전하께서는 격의를 무척 싫어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범한 옷을 입 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번에도 서재에서 뵈었지요." 리핏 트왈리전의 울 듯한 얼굴이 이번엔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나 를 한참 노려보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총은 물과 같아, 사방으로 흘러가지만 지나고나면 흔적도 남지 않을 수 있다." 뭔 말이지? 아, 이거군. 네가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해도 까불면 재미없 다. 이 말인가 보네? 흠. 마음대로 하셔. 그렇다고 나에게 저런 유치한 옷을 입힐 수는 없지.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리자 리핏 트왈리전씨는 말없이 몸을 돌려 우리를 안내했다. 밖으로 나와서 잠시 걸어갔다. 통로는 길고, 화려하고, 어쨌든 걷기 불 편한 곳이다. 시무룩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는데 샌슨이 갑자기 말했다. "자, 후치. 너의 확인이 필요해." "뭘 확인해줄까?" "저게 네리아 맞냐?" 우리가 걸어가는 복도 반대쪽에서 몇 명의 시녀들과 함께 걸어오는 여 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게 네리아라고? 에이, 샌슨도. 무슨 그런 말도 안, 안, 안… 맙소사. "난 확인해줄 자격이 없을 것 같아." 아이고 맙소사. 지금 바닥에 사르락거리며 드레스 자락을 끌고 걸어오 는 저 여자가 네리아라고? 네리아는 우리 모습을 보더니 수줍게 웃었다. 어깨를 시원하게 파버린 드레스 위로 네리아의 살결이 잘 드러나 보인 다. 약간 까무잡잡한 건강한 살결에 맞춘 것인지 드레스는 붉은 색이었 고 그 색깔은 네리아의 머릿결과도 잘 어울렸다. 원래 날씬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저 드레스는 허리를 더욱 강조해놓아 네리아는 숨을 쉰다는 것이 신기해보일 정도로 가는 허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치마는 주름장식을 해놓았는데 희안하게도 아래로 내려갈수록 진해져가는 검정 색 세로 줄무늬를 넣어두었다. 그래서 네리아의 전체 모습은 아래-검다. 허리-가늘고 선명한 붉은 색이다. 어깨와 머리-드레스 색깔 때문에 하얗 게 보인다. 머리카락-다시 붉다. 그래서 검은 산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그 얼굴로 시선이 집중되도록 되어 있었다. 희한하게 멋진 배 색인데. "오, 네리아양? 아름답습니다." 카알의 찬탄에 네리아는 샐쭉 웃더니 곧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후치? 넌?" "으윽. 나도 데미 공주님께 찾아가는 건데. 데미 공주라면 훨씬 멋진 의상을 마련해줬을 거에요." "옷이 마음에 안들었어?" "예. 뭐, 괜찮겠죠. 그런데 네리아 정말 예쁘네요?" "헤헤헤. 얼굴 가득히 분칠을 했어. 기침이 나와 죽을 뻔했다고." 샌슨은 근엄하게 평했다. "지금이라면… 범죄에 속할만큼 예쁘다고 말해도돼." "어머나? 샌슨까지? 호호호." 네리아와 합류하고나서 우리는 다시 걸어갔다. 궁성 임펠리아의 화려한 복도를 걸어가면서 우리 일행은 점점 의기소침 하게 바뀌었다. 단 두 명, 그러니까 궁성이 자기 집이었던 길시언과 엑 셀핸드만 빼놓고. 왜냐고? 생각해보라. 걸어감에 따라 궁내부원들이 좌우로 좌악 갈라지면서 코가 땅에 닿으라 고 인사를 하고, 마침내 장엄의 홀 가까이 다가가자 홀 바깥에 도열한 병사들이 일제히 발뒷꿈치를 따닥! 소리가 나도록 부딪히고, 문이 좌우 로 열리면서 순식간에 꽃이 뿌려지는 가운데,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트럼펫 소리가 빠바바빵바빵-! 짜랑짜랑하게 울리면서 그 엄청난 장엄의 홀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으아! 안돼! 이럴 거라고는 아무 도 말하지 않았잖아!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옷을 입고 와야겠어! 농담이 아니다… 장엄의 홀 설계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악취미하게 설계를 해 두었다. 가운데 커다란 길은 홀 바닥보다 1큐빗 정도 높게 뻗 어있었다. 그래서 좌우에 도열한 문무백관들은 가운데를 걸어가는 사람 들을 올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어느게 문관복이고 어느게 무관복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으로는 푸른 예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좌악 도열해있 었고 다른쪽으로는 노랑색 예복을 입은 남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국왕의 면전이라 검을 휴대할 수 없어 그런지 문관복과 무관복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위를 보자 더 미치겠다. 좌우의 벽에는 발코니가 설계되어 있었고 귀부 인으로 짐작되는 여인들이나 처녀들, 또다른 예복의 남자들이 발코니에 선채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런 지경이니 아래로도 시선을 못두겠 고 위로도 못보겠다. 오로지 앞의 앞사람의 뒷통수만을 바라보고 걸어가 야 했다. 왜앞의 앞사람이냐고? 내 앞엔 엑셀핸드가 걷고 있었으니까. 맨 앞에 걸어가고 있는 길시언과 카알은 어디다 시선을 보낼까? 우리가 걸어가는 길 앞쪽으로는 높은 단이 있었고 그 위에 왕좌로 짐작 되는 의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닐시언 전하가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 다. 어쨌든 좌우의 그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려니 먼 지와 땀에 절은 내 검은 옷들이 모조리 걸레 비슷하게 보였다. 좌우의 정장한 백관들이 날 보며 수근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호흡도 좀 가빠지는 것 같다. 젠장, 뭐야 이건? 겨우 스파이 하나 잡았다고(물 론 엄청난 서류도 회수했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대우라니? 우리는 모두 질린 채로 걸어갔다. 걷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중간쯤 걸어갔을 때 다시 한 번 트럼펫 소리가 요란했다. 빠바바빵바 빵-!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잠시 주저했다. 그런데 트럼펫 소리가 울리자마 자 좌우의 문무백관들이 모조리 정면으로 돌아보며 무릎을 꿇었다. 이거 구나! 우리는 모두 부리나케 무릎을 꿇었다. 아윽! 무릎이야! 그러나 엑 셀핸드만이 무릎을 꿇지 않았다. 무릎을 꿇지 않아도 눈높이가 비슷했지 만. 난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네리아가 바알개진 얼굴로 힘겹게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치마가 좌악 퍼지게 멋있게 무릎을 꿇는 것이 힘든 모양이다. "일어나시오." 고요한 장엄의 홀 가운데로 닐시언 국왕의 목소리는 잘 퍼졌다. 낮은 목소리인데 희안하게 잘 울려퍼지는군. 설계를 잘했나봐? 우리는 주저하 면서 일어났고 주위의 신하들도 모두 일어났다. 잠시 소음이 들렸다가 다시 일시에 고요해졌다. "바이서스의 국왕이자 기사 중의 기사인 나 닐시언 바이서스가 그대들 을 환영하오." 뭐라고 대답하지? 우리 일행이 잠시 주춤했을 때 국왕의 옆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의젓한 동작으로 문건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저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자이펀의 악도의 무리들이 천인공 노할 사악의 손길로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께서 한없는 성총으로 다스리시는 이 복된 땅 바이 서스에 무도한 위해를 가하고자 한 전쟁이 벌어진 작금에 있어 가련한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인심은 날로 흉흉해지며 가없는 폭력 행위와 불충 한 반역 행위가 곳곳에 창궐하고 있음이 기왕의 현실이다. 보라. 이러한 현실에서 악행의 유혹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옴이니 한 때 누대의 명문으로 대대손손 국왕 전하의 은혜가 함께 한 절륜한 가문의 후손마저 도 성총의 은혜 갚음을 도외시하고 저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자이펀의 악도의 무리들과 내통하려 드는 비통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의로운 자 있어 성총의 빛은 한없음을 되새기며 누대의 명문에 미거한 힘으로 대항하니 그들은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 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함을 알았기에 이 토록 경이롭고 정의롭고 영광되며…" 안돼, 지금은! 지금은 졸면 안돼! 하지만 조는 거나 다름없다. 극도로 긴장해버린 귀에는 저 낭랑한 목소리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하나도 이해 되지 않는다. 말은 그저 소리일뿐이다. 아아. 미치겠다. "…하니 …해서 …하므로 …하나 …하지만 …하기 때문에 이왕의 사실 은 명료하다." 도대체 뭐가 명료한지 모르겠네. 그렇게 길게 말하니 명료하던 것도 불 명확해지는 것 같잖아. "…이므로 …이어서 …이지만 …이나 …이기 때문에 더더욱 놀라울 따 름이다." 맞아맞아, 그렇게 길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정말 놀랍기 짝이 없어. 난 발바닥이 가려워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만인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는 것 뿐이다. 그런 괴로운 시간이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되었을 때 쯤. "그들을 찬양하라!" 느닷없는 문건 봉독자의 외침소리에 나는 기겁했다. 찬양하라고? 알았 어. 그런데 그들이 누구지? 오우, 젠장! 열심히 들어둘걸. 에라, 무조건 찬양하자. 내가 팔을 반쯤 들어올렸을 때였다. "그대들을 찬양하오!" 좌우에서 열렬한 박수와 함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이구나! 난 들어올리 던 손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뒷머리로 가져갔다. 머쓱한 듯이 뒷머리 를 긁는 가운데 닐시언 전하마저도 왕좌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박수를 보 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닐시언 전하는 천천히 우리들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의 박수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닐시언 전하는 우리들에게 걸어와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기 시작했다. "카알 헬턴트. 그대는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려고 바이서스 임펠에 오 신 것 같소." 카알은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조금 숙여 예를 표했을 뿐 이다. 하지만 닐시언 전하는 힘차게 그의 손을 흔들다가 아예 그를 포옹 해버렸다. 카알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길시언의 손을 붙잡았다. "형님. 야인으로 계시면서도 이 미력한 동생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 는군요." 길시언은 씨익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전하. 감당할 수 없는 광영의 말씀이옵니다." 닐시언 전하는 허리를 좀 숙이며 엑셀핸드의 손을 쥐었다. "위대한 드워프의 노커, 엑셀핸드 아인델프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나큰 우정, 길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천만에요. 바이서스의 왕이여." 엑셀핸드 역시 간단하게 대답했다. 닐시언 전하는 이어 아프나이델에게 도 인사했고 아프나이델은 긴장에 다리가 풀려버려 더듬거리며 대답했 다.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네리아에게 살짝 무릎을 굽히며 손등에 키스 했고 네리아는 발개진 얼굴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는 입속으로 뭐라 고 조금 우물거렸다. 마지막으로 닐시언 전하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 국왕에 대한 충성이 나이에 상관없음을 보여준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여." 당신 나 사랑해? 미안하군. 난 당신 사랑하지 않아. 남자는 싫어. 그리 고 우리가 한 일을 은근슬쩍 당신에 대한 충성으로 만들지 마. 우린 네 리아를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영광이옵니다. 전하." 젠장. ================================================================== 7. 항구의 소녀……11. 국왕님에 의해 우리는 모두 그럴듯한 칭호도 받고 상패도 받고 훈장도 받았다. 아이고 머리야. 그 동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거대한 사람들의 덩어리와 거기서 울려퍼 지는 박수소리뿐이다. 간신히 그 복잡한 의례가 끝나고 우리는 식장을 빠져나왔다. 장엄의 홀 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골치가 아파. 네리아는 다시 데미 공주에게 갔고 우리는 삼층의 우리 회의실로 몰려와 앉았다. 그러나 앉기가 무섭게 달 려온 리핏 트왈리전씨에게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되었다. "무도회?" 리핏 트왈리전씨는 여러분들의 공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저녁에 무도 회가 열린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말도 안돼. 돌아버리겠어. 카알은 이제 완전히 체념하는 얼굴이 되었다. "저녁시간에요?" "예. 그렇습니다." 죽여라, 죽여. "꼭 참석해야 됩니까? 훈장 수여식에도 참석했는데…" "그러니까 이젠 보다 가벼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신하들께 소개해야지 요." 카알은 졸린 표정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언제입니까?" 저녁시간이 되어 우리는 다시 리핏씨에게 끌려가듯이 내려가게 되었다. 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번에야말로 눈 딱 감고 그 유치한 옷 을 입어야 되는가? 난 결심했다. 역시 안돼. "무도회에 그런 복장으로 가려는가?" "어차피 춤 못춰요. 구석에서 가만히 서있다가 나올래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내생각도 그렇다네." 우리는 그렇게 말하며 내려갔다. 홀에 이르렀다. 새하얀 벽에 화려한 장식들, 역시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사방에 풍족하게 쌓여있는 음식물들과 중앙에 넓게 비워진 댄스장, 그리 고 사방에 놓인 의자들과 한쪽에 몰려앉아 있는 악사들. 화려하군. 난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지 않기 위해 무척 애써야했다. 인사, 소개, 답례, 아이고 정신없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당하고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끌려다니며 인사를 하고 나니 정신이 하 나도 없었다. 소개받은 사람 중에 기억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 래도 카알은 품위있게 미소를 지었고 나도 그러려고 애썼다. 샌슨과 엑 셀핸드의 경우엔 별로 끌려다니지 않았다. 간신히 폭풍 같은 소개가 끝나고 나는 되도록 주의를 끌지 않도록 행동 했다. 난 벽에 기대어선채 그야말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샌슨과 엑셀핸 드는 죽이 맞아서 음식 테이블로 걸어가버렸고 아프나이델은 왠 귀족 처 녀에게 이끌려 가버렸다. 아프나이델은 절망적인 얼굴로 자신은 댄스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은 먹혀들지 않았다. 길시언 과 카알은 그 모습을 아주 품위있게 감상하며 각자 손에 든 술잔을 홀짝 거렸다. "시무룩한 얼굴이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개를 돌렸고, 그 다음 휘파람을 불 려다가, 곧 여기서는 그게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고는 나직히 한숨을 쉬 었다. "네리아, 멋있어요." 네리아는 이번엔 새카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드레스 에는 금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무늬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네리 아는 발그레진 볼을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에헤헤. 데미 공주님 옷이야. 내게 맞게 하느라 시녀들이 몹시 고생을 했어." "데미 공주님은 키가 크니까… 그런데 딱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네요." "그러니? 고마워." 곧 쟁반을 받쳐든 궁내부원 하나가 지나쳤고 네리아는 술잔 하나를 받 아들었다. 그녀는 내 옆에 기대어서서는 춤추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네리아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아아… 근질거려." 그 말에 나와 길시언, 카알이 동시에 움찔했다. 이크! 그녀는 전문직 종사자이고, 여기엔 수많은 보석들과 장식물들이 춤을 추고 있다. 오, 하지만 여기선 안돼. 들키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야? 그러나 네리아는 도 발적인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못참겠는걸?" "제, 제발!" "아냐. 견딜 수 없어. 자아, 가자구요!" 그러면서 네리아는 재빨리 잔을 내게 주면서 카알의 손을 잡아당겼다. 기습을 당한 카알은 영문도 모른채 끌려나갔고 잠시 후 나와 길시언은 네리아와 카알의 춤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길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춤을 평했다. "괜찮은데. 카알도 의외로 스텝이 훌륭하군." 나는 싱긋 웃으며 네리아가 건네준 잔을 들이켰다. 잠시 후, 음악이 끝 나고 시종장의 낭랑한 목소리로 국왕 전하의 입장이 예고되었다. 나는 급히 허리를 숙이느라 자칫하면 술을 쏟을 뻔했다. 휴우. 다행이 다. 술잔이 비어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으아, 아직 아니잖아? 나는 사람들이 아직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후치? 그만 허리 들어." 길시언이었다. 음. 이젠 들어도 되나? 고개를 들어보니 국왕 전하와 데 미 공주가 입장해 있었다. 국왕 전하는 품위있게 데미 공주의 손을 잡은 채 가운데로 들어왔고 곧 음악이 다시 연주되자 두 사람은 춤을 추기 시 작했다. "비전하가 안계셔서 공주님과 춤을 추는 건가요?" "응. 그래. 저 녀석 왜 아직 장가가지 않았지?" 길시언은 간단히 대답했다. 난 국왕 전하와 데미 공주의 댄스를 구경하 다가 그만 미소를 지어버렸다. 허허. 참. 데미 공주님이 너무 훤칠한데.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여전히 아프나이델이 절망의 끝에 도달한 인간의 표정으로 그 귀족처녀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내 보기엔 그래도 카알과 네리아의 페어가 가장 나은 것 같다. 키나 체격도 저 정 도로면 서로 어울리고, 카알의 품위있는 스텝과 네리아의 맵시있는 몸놀 림도 잘 어울렸다. 아빠와 딸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도 보기 괜찮은 요 소였다. 길시언에게 물어보자 그도 내 의견에 찬성했다. 잠시 후 음악이 끝나고 카알과 네리아는 다시 걸어왔다. "후와. 카알 아저씨 너무 잘 추시네." "아니, 네리아양에게 모자라는 솜씨라 힘들었을 거요." 카알의 부드러운 답변. 그리고 조금 후 아프나이델이 초죽음이 된 얼굴 로 걸어왔다. 아프나이델은 등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 내게 물었다. "후, 후치. 그 여자 아직도 날 보고 있냐?" 나는 아프나이델의 어깨너머로 바라보았고 저쪽에서 그 귀족 처녀가 아 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곧 아프나이델은 다음 음악이 들릴 때까지 사라지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는 사방을 둘 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달아날 곳이 없었다. 내가 테이블 아래로 숨으면 어떨까, 등의 얼빠진 의견을 내어 아프나이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을 때 네리아가 그를 구원했다. 네리아는 손을 아래로 내리며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한 곡 추실까요, 메이지?" 이 바뀌어버린 남녀의 역할에 아프나이델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러나 그는 저쪽의 그 처녀를 돌아보고는 곧 결심을 굳혔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가버렸다. 흠. 난 여전히 음식 테이블을 장악중이던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씩씩하 군… 궁내부원들은울상이 되어 테이블에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돌려보았다. 그러자 데미 공주가 우리들에게 다가와있는 것이 보였다. 데미 공주는 길시언을 빤히 바라보 고 있었고, 그러자 길시언은 피식 웃어버렸다. "한 곡 추실까요?" 데미 공주는 살포시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요즘도 파트너의 발을 걸어넘어뜨리냐?" "확인해봐." 난 웃으며 그 광경을 감상했다. 발을 넘어뜨리기는커녕, 두 사람은 아 주 멋있게 춤을 추었다. 훌륭한걸? 난 카알에게도 평가를 내리게 하려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카알은 나와 조금 떨어져서 닐시언 전하와 함 께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뭔가 낮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뭐지? 난 눈치채이지 않도록 다가가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관둬버렸다. 이야기를 엿들어봐야 뭐하 겠어. 나중에 카알에게 물어보지. 난 다시 벽에 기대어 서서 주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둘러보았 다. 손에 든 술잔은 다시 궁내부원에게 넘겨주고 새 잔을 들었다. 갑자기 심사가 뒤틀리는걸. 여기다 아무르타트를 데려다놓으면 어떨까. 에이, 무슨 심술. 모두들 즐거운데. 아아아. 제미니. 네가 여기 있었더라면. 그럼 난 지금 저기서 우아하게 춤추고 있는 길시언과 데미 공주, 그리고 날렵하게 춤추고 있는 네리아 와 아프나이델 모두들 한 방에 보내버릴 정도로 멋진 춤을 출텐데. "무슨 말씀 나누셨어요?" 잠시 휴게실로 나왔을 때 카알에게 말했다. 카알은 지긋이 날 바라보았 다. "닐시언 전하와 말인가?" "예." "아. 대단한 건 아닐세." "전 대단치 않은 이야기가 좋아요. 충격이 적으니까." 카알은 빙긋 웃었다. "일스 공국에 파견될 사절을 맡아달라시더군." 난 잠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사절이라니, 사절? 카알은 너무나 평 범한 표정이어서 난 내가 잘못 들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한번만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일스 공국에 파견될 사절 말일세. 날더러 그걸 맡아달라고 하시던데."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 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외교는 모른다고 했지." "잠깐만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뭐가 말인가?" "왜 외교관이죠? 국왕 전하는 카알을 선전용으로 쓰려고 하는 거 아니 에요? 카알을 전쟁영웅으로 만들고 동시에 카알을 등용시킨 국왕 전하의 위명도 높이고요." "궁성에서 듣기엔 거북한 말이네만." "그런데 무슨 사절단이죠? 군사쪽으로 가야 되는 것 아닌가요?" "핸드레이크처럼 말인가? 참모라도 맡기지 않냐고?" "예." 카알은 빙긋 웃으며 아직까지 스승에 미치지 못하는 제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스승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제자의 표정 을 지어보였다. "자네도 내가 핸드레이크처럼 되길 원하는 모양이군." "그렇다고 보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는 난세의 인물이야. 그러나 지금 바이 서스는 체제가 굳건한 사회고. 함부로 나를 중요 군사관계에 임명할 수 는 없다네. 군부의 반대도 심각할 테고, 또한 귀족원의 반대도 만만찮겠 지. 다행히 사절단의 자리라면 별 마찰없이 내가 맡을 수도 있겠지. 그 리고 내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고 입지를 키워나가면 차차 날 군사관계 로 끌고 가려는 계획이겠지." "휴우. 다 꿰뚫어보시는군요. 그런데 반대를?" "우린 할 일이 있잖은가." 난 빙긋 웃으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휴게실까지 들고온 술잔을 조금씩 비웠다. 하여튼 술 잔 하나를 잡으면 하루밤을 셀 수 있다니까. 외교관이라. 흠. 카알이? 카알은 좀 쉬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난 카알을 내버려두고 휴게실을 빠 져나왔다. 어지러운 밤이군. 무도회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싫고, 음. 정원으로 나가볼까? 기억을 더듬어 간신히 정원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내었다. 궁성 내의 궁 내부원들은 모조리 무도회장 근처로 집결해 있어서 그런지 난 아무도 만 나지 않고 정원까지 나섰다. 밤바람, 시원하군. 이 계절에 풀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거야. 국왕님은 생각을 잘못했어. 좀 춥기는 하지만 가든 파티를했어야 했어. 이 향취, 좋잖 아. 난 가슴 깊이 풀내음을 빨아들였다. 우훗. 속이 다 후련하군. 난 아무도 없는 정원을 털래털래 걸어갔다. 어디 으슥한 곳 찾아 앉아 서 별이나 봐야지. 그런데 조금 걸어갔을 때였다. 저 앞에 나무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 다. 뭐지? "아프나이델이라고?" 응? 이게 뭐지? 난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그 나무 근처로 다가가 보았 다. 어두운데다가 나무들이 방해가 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프나이델의 목소리잖아? 그런데 스승님? "돌아왔다면, 왜 내게 찾아오지 않았는가?" 잠깐, 이 목소리는 누구지? 에, 에. 아! 궁성 수비대장 조나단 아프나 이델?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찾아뵈려고 했습니다만…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난 놈." "죄송합니다." "돌아온 이유는 뭐냐?" "전… 마법사였습니다." "다시 마나를 주물럭거리고 싶어졌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용서해주십시오!" 잠깐. 그러면 아프나이델이 말하던 그 스승님이 바로 궁성 수비대장 조 나단 아프나이델인가? 난 숨죽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조나단이 천 천히 말했다. "돌아왔으니 됐다." "스승님!" 조나단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놈.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제자 이기는 스승 없다는 것을 알렸다? 돌아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과거는 불문이다." "스승님…." "그래, 네 방은 그대로 비워뒀다. 언제든 들어오너라."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당장은…" 조나단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졌다. "뭐냐? 과거의 미련이 남아있단 말이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 인 게냐?" "그게, 저, 그게 아닙니다. 전 지금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조나단의 어조가 다시 차분해졌다. "그래. 굉장한 모험가들과 함께 다니더구나." "예. 지금 전 그들과 함께 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하냐? 무슨 일인데." "저, 그건 제 동료들에게 의향을 묻지 않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만." "오냐. 알았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해서 네게 무슨 득이 있느냐?" "제가 그들에게 득이 됩니다." "…뭐라고?" "그들 중에 한 소년이 있습니다." "안다. 후치라는 그 꼬마 말이냐?" "예. 그 소년이 저에게 어떤 별명을 주었는지 아십니까? 탑메이지입니 다." 조나단의 가벼운 웃음소리. 아이고, 얼굴 뜨거워라. 아프나이델은 말했 다. "전 스승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미력한 재주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은 저의 이 미력한 재주를 훌륭히 쓰도록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고위마법이든 초급마법이든 도움이 되는 마법이 최고라고 말 해주었습니다. 전… 전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댓가를 바라지 않고 순전한 선의로서 제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것 을…" 아프나이델의 말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참 동 안 말이 없었다. 내가 조바심을 내려는 찰라에, 조나단이 말했다. ================================================================== 7. 항구의 소녀……12. "네 방은 비워둘테니 언제든 찾아오너라." "스승님!" "마력을 다루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마법사는 기술자 이상의 무엇 이어야 한다. 내 누누히 가르친 것인데도 네가 알지 못하더니, 날 떠나 그들을 만남으로서 네가 알아차렸구나. 나보다는 그들이 너의 스승이다. 그들에게 도움되도록 노력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난 히죽 웃고는 다시 조용히 몸을 돌려 궁성으로 돌아왔다. 아프나이델은, 그럼 그의 본명이 아니겠군. 그는 스승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의 표시로 그 가명을 사용했었겠지. 본명이 뭘까? 에이, 알게 뭐냐. 아프나이델은 아프나이델이지, 뭐. 며칠만에 햇살이 따사롭다. 의외로 겨울 날씨치고는 좋은 날씨다. 아 니, 늦가을이라고 해야 되나? 국왕님께 명예의 칭호도 받고, 떠들썩한 축하파티에도 끌려다니고나서, 그 다음날로 우리는 궁성을 빠져나왔다. 그 날 아침에 우리에게 서류가 하나 날아왔기 때문이다. 리핏 트왈리전씨가 정중한 동작으로 건네준 그 서류에는 앞으로 한 달 동안 우리가 참가해야 하는 파티와 연설회, 음악 회, 사냥대회, 기타 등등의 사소한 사교 모임에서부터 국가 공식 행사까 지 좌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자마자 머리를 휘두르며 재빨리 짐을 챙겼다. 우리가 궁성에서 나가겠다는 말을 전하자 리핏씨는 크게 놀란 모양이다.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예. 저희들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일이신데, 허어. 국왕 전하의 친구의 일이라면 곧 저의 일입니 다. 말씀하십시오." 국왕 전하의 친구라. 꽤 출세했군.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건, 예.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릴 수가 없 습니다." "수도를 떠나야 되는 일입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궁성 수비대원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호위하도록…"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리핏씨는 안달복달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는 명제는 모든 설명에 대 한 완벽한 거부권으로 작용했다. 예의바른 리핏씨는 무례하게 '개인적인 일'에 대해 설명을 요구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그 일의 정확한 경중을 논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합리적으로 카알을 붙잡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유유히 걸어나왔다. 하하하. 리핏씨는 거의 울듯한 얼굴로 정원까지 따라나와서 어떻게 전하를 뵙지 도 않고 떠나냐고 강권했지만 국왕의 형이자 왕자인 길시언이 나서서, "내가 그의 형제로서 이 분들과 함께 하오. 형제는 한 몸이니 전하께서 함께 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라고 못박아버리자 할 말이 없어졌다. 편리한데? 그래서 우리는 완저히 굳어버린 리핏씨를 뒤로하고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데미 공주의 모습이 보였다. 데미 공주는 여전히 나무들과 꽃을 돌보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 갈 때까지도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끝에 뭔 가 자그만 꼬챙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부드러운 솜뭉치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그녀는 온몸의 신경을 집중시킨 채 그것으로 꽃 을 건드리고 있었다. 뭐지? 벌들처럼 꽃가루를 끌어모으는 건가? 그녀는 잠시 후 이마의 땀을 닦다가 그제서야 우리가 가까이 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우리들이 말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란 눈이 되었다. "가세요?" "예. 공주 전하."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틀이나 머물렀는데요. 이만 가봐야죠. 저희 일도 있으니까요." "아, 예." 갑자기 데미 공주는 고개를 돌려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안타까 운 시선으로 길시언에게 물었다. "이젠 언제 올 거지?" 길시언은 빙긋 웃을뿐 대답하지 않았다. 데미 공주는 한참 동안 길시언 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주위에 있는 우리들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 다. 그 때 데미 공주가 말했다. "인사, 필요 없지?" "응." 길시언은 즉각 대답했다. 데미 공주는 환한 얼굴이 되더니 우리에게 고 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나무와 꽃들에게 돌아갔다. 우리는 잠시 얼떨떨 한 얼굴로 길시언과 데미 공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길시언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걸어갔으며 데미 공주도 모든 관심을 꽃에 집중시 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별 말 없이 길시언의 뒤를 따랐다. 카알은 말했다. "공주님은 길시언을 퍽 좋아하시나 봅니다." 길시언은 웃으며 말했다. "둘째 오빠보다야 첫째 오빠가 만만하고 좋겠죠. 특히 집 떠난 큰오빠 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은 하지마! 에, 집 떠난 큰오빠가 애처로 와서 그렇겠지요." "예. 그녀를 위해서라도 궁성에 자주 들리시는 것이 좋겠군요." "모험가의 생활이라서." 궁성수비대원들 역시 우리가 나가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그들은 들어 오는 사람이 아니라 나가는 사람도 막아야 되는지 의아해했고, 게다가 길시언이 호령하자 즉각 비켜났다. 그리고 우리는 궁성을 나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카알은 바깥의 공기를 크게 빨아들이며 말했다. 샌슨은 슈팅스타의 고 삐를 편안히 내려둔 채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현명함의 기사님." 현명함의 기사라. 픽. 저건 국왕 전하가 준 훈장에 새겨진 글귀였지. 카알은 말했다. "그만하게, 퍼시발군. 그런데 자네는 뭐였지? 기억도 안나는군." "저요? 우하하. 진격의 기사랍니다." 샌슨은 국왕이 내려준 명예의 칭호를 아주 무엄한 용도, 그러니까 우리 끼리 시시덕거리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지혜의 기사 라는 엄청난 칭호를 받았고 길시언은 왕자라 칭호가 주어지지 않았다. 엑셀핸드도 노커라서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나는… "이봐, 약관의 기사!" "그만두라는 카알의 말 못들었어요, 밤바람의 레이디?" 네리아는 기분 좋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도 원래의 옷 차림으로 돌아와서는 마음 편한 자세로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타고 있었 다. 밤바람의 레이디라고? 나 원 참. 다행히도 카알의 설명에 의하면 그 우 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칭호는 공식 서류에만 기록된다고 한다. '국왕이 그들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이러저러한 칭호를 하사하셨다.' 정도로. 만일 닐시언 전하가 루트에리노 대왕처럼 전기를 쓸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는다면 우리들의 칭호도 전기 작가들에게 엄청나게 인용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단서가 붙어있긴 했지만.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처럼?" "그렇다네. 네드발군." 엑셀핸드는 레이셔널 셀렉션 위에 그럴듯한 자세로 탄 채 한 손으로 턱 수염을 긁적거렸다. 그는 이제 완전히 자신을 드워프 최고의 기수라 믿 고 있었고 그래서 레이셔널 셀렉션을 타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기수보다는 말이 똑똑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 었지만 위대한 노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위대하신 엑셀핸드는 느긋하게 말했다. "어쨌든 궁성을 빠져나와 다행이군. 그 서류대로 계속 파티에 참석했다 간 자칫했다면 내가 귀부인께 댄스 요청을 받을 뻔했으니." 그 말에 나와 샌슨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아리따운 귀부인과 엑셀핸드가 댄스를 춘다면, 그것 정말 봐줄만 할걸? 하지만 어제 봤듯이 엑셀핸드는 절대로 댄스 요청을 걸지도 받지 도 않았다. 우헤헤. 카알은 말했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급하게 굴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쓸데없이 하루를 낭비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어쨌든 다시 일에 착수하게 되었으니 기쁩니다."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명예의 칭호를 내리신 것이 쓸데없는 일이란 말입니 까?" 카알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만, 영광 이외엔 아무 것도 없는 일이기도 하외 다."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그래도요. 난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네리아가 가리킨 것은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등에 매달 린 상자였다. 그 상자에는 네리아의 그 아리따운 드레스들과 구두, 장갑 등이 들어있었다. 데미 공주는 그 옷들을 완전히 네리아에게 줘버린 모 양이다. 샌슨은 피식거리며 '너도 여자라고 옷이 그렇게도 좋으냐?' 등 의 말을 꺼내다가 네리아의 손톱에 얼굴이 완전히 밭고랑처럼 바뀔 뻔했 다. 다행히 말에 타고 있어 네리아는 빠르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헤엥! 돈이 되잖아?" "서, 설마 팔아먹으려고?" "그럼? 그렇지 않으면 저거 뭐에 써?" 샌슨은 말도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약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리아양. 그 옷을 입고 계실 때 퍽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도 그 옷 을 간수하시며 간혹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요?" 네리아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아프나이델에게 다가갔다. 앰뷸런트 제일 에 타고 있는 아프나이델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당신, 옷이 마음에 든단 말인가요, 아니면 내가?" "무, 물론 네리아양이…" "그럼 옷 핑계 대지말고 순순히 나의 매력에 사로잡혔음을 인정해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쩍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전도 못뽑으시는군. 우리가 유니콘 인으로 돌아오자 말구종은 다시 한 번 입을 좌악 벌렸 다. 저번에 길시언이 황소를 타고 나타난 이후로 두번째로군. 말구종은 차라리 처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소의 기, 기사에 이어 드, 드워프 기수까지…!" 엑셀핸드는 아주 우아하게 말에서 뛰어내리더니(난 그가 말에서 내리기 전에 이를 악물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빠른 손놀림으로 고삐를 말구 종에게 건네었다. "이봐, 말먹이에 신경쓰고 잘 씻겨주도록." 드워프의 노커는 그렇게 아주 익숙한 기수처럼 말했고 우리 모두는 고 개를 돌리고 웃음을 감추었으나 말구종은 얼빠진 얼굴로 고삐를 받아들 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여관 주인은 그만 웃어버렸다. 그의 이름은 리테들이 었다. "당신들은 도대체 방을 어떻게 쓰는 거요?" 하긴 우리는 사흘 전에 해약하고는 다시 돌아왔군. 사흘전, 그러니까 할슈타일 후작의 집을 털던 날 밤이군. 허어. 그게 사흘전이었나? 엄청 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겨우 사흘이군. 여관 주인은 어쨌든 다시 들 러줬으니 고맙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여관의 하인들과 하 녀들도 샌슨과 길시언이 돌아오니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각자의 방에 짐을 던져넣고는 홀로 내려오자 유니콘 인의 주인 장 리테들은 맥주를 가져다주면서 질문했다. "사흘 동안 뭣들 하신 거요?" 카알은 웃으며 대답했다. "온갖 일이 다 있었습니다. 허허." "그래요? 하하. 어쨌든 말이오. 전할 소식이 있는데." "전할 소식이오?" "그렇소. 당신들이 다시 여기로 들리면 전해주라더군. 그랜드스톰의 수 련사들이 찾아와서 그랜드스톰에 꼭 좀 와달라고 그러던데요?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모험가들이길래 귀족들이 끝없이 찾아오고 그랜드스톰에서 도 당신들을 목메어 기다리죠?" 카알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마도 마법의 가을에 들어선 여행객들인 모양이오." 그거 정답인 것 같네. 리테들은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머리를 딱 치면 서 말했다. "아! 그리고 왠 남자가 당신들에게 전해달라고 편지를 남겨두었소." 그리고 리테들은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곧 접은 종이 한 장을 들고왔다. 카알은 그것을 받으며 물었다. "누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저 그것만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알은 편지를 펼쳤다. 우리는 카알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카알의 눈빛이 이상해지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카알은 한숨을 쉬 며 그 편지를 옆으로 돌렸다. 차례대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엑셀핸드는 콧방귀를 뀌었고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쉬며 부르르 떨었다. 네리아는 골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샌슨은 씩 씩거렸다. 길시언은 피식 웃어버렸다. 마침내 내게까지 그 편지가 돌아 왔다. 간단한 글이 적혀 있었다. '조만간 만나뵙지요. N.H.' 길시언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했다. "낭만주의자는 못말리겠군." 카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분노한 낭만주의자만큼 위험한 것도 없소. 거 참. 공공연히 우리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 것을 보니 아직은 체포당하지 않은 모양이구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체포 당하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길드의 마스터였고 국가 전복을 꾀해보았던 사람이니까. 몸조심하도록 하십시다. 그외엔 딱히 할 일도 없으니." "하긴 그렇군요. 그럼, 모두들 그랜드스톰으로 가볼까요?" ================================================================== 7. 항구의 소녀……13. 하이 프리스트는 피로한 표정이었다. "역시 당신들이었군. 할슈타일 후작의 집에 침입한 것이…" 하이 프리스트는 며칠 새에 훨씬 늙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의 이 모습은 그의 피로감 때문에 감춰져 있던 원래의 노쇠한 얼굴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카알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심려가 크셨겠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허허. 투미했구려. 그가 그런 야욕을 가지고 있을 줄은 내 미 처 몰랐소." 그라는 것은 넥슨을 말하겠지.카알은 말했다. "궁성에서 추궁이 컸겠습니다." "그랬소. 하지만 괜찮아요. 그는 재가 프리스트였을 뿐 그의 음모는 우 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물론 에델브로이의 이름으로 파견된 그의 밀사라든지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괜찮소. 그랜드스톰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니까." "예. 국왕 전하께서도 귀 신전의 충만한 은혜로움을 잘 이해하시고 계 실 겁니다." 카알의 말에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들도 덩달아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 낀하늘 의 모습과 그 아래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그랜드스톰의 모습이 보였다. "귀하들의 수탐은 어떻게 되셨소?" 하이 프리스트는 갑자기 물어왔다. 카알은 흠칫하다가 말했다. "아직… 엉뚱하게 일어난 넥슨의 일 때문에 전혀 진척이 없습니다." "그렇겠구려. 흐음. 어쨌든 계속 그 일을 하실 테지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임펠리아에서 도망나왔습니다." 카알의 말에 하이 프리스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음울한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좋지 않은 시기요. 전쟁은 너무 길어 민심은 황폐한데 위기는 가까워 지고 있소. 넥슨의 일은 다행히도 여러분이 있었기에 원만하게 처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또다른 야심가들에게 동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신들을 재촉할 수밖에 없소.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조속히 찾 아주시기 바라오. 이 황량한 시기에 대륙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은 만인에게 희망을 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랜드스톰의 명예 회복은 어떻습니까." 카알의 말에 하이 프리스트는 움찔했다. 카알은 선한 얼굴 표정으로 하 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그랜드스톰의 의뢰로 이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위기를 짐작하 신 것도 하이 프리스트고, 저희들을 조직하여 그 드래곤 라자를 찾게끔 하신 분도 하이 프리스트입니다. 넥슨 휴리첼의 일 때문에 그랜드스톰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자면…" 하이 프리스트는 멀뚱히 카알을 바라보다가 곧 미소띤 얼굴로 대답했 다. "관심없소." "예?" "그랜드스톰의 명예는 우리가 온건히 에델브로이를 섬김으로써 획득하 는 것이오." "잘 알겠습니다만…." "아니, 그걸로 족하오." 하이 프리스트는 단정짓듯이 말했고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들 의 말은 항상 어렵군. 난 찻잔 받침을 만지작거렸다. 하이 프리스트는 짐짓 기운찬 어조로 말했다. "자,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오?" "송구스러우나, 계획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는 보았습니 다만 붉은 머리 소녀에 대한 정보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셨소? 흠.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손을 놓고 있는 셈이겠구려?" 카알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죄송합니다." "괜찮소. 나는 믿어요. 당신들만이 그 소녀를 찾아낼 것이오. 나는 변 함없는 신뢰를 보내오. 그런데, 내 불현듯 한 가지 계책이 떠올라서 말 인데." "계책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쩐지 엉뚱한 생각이오만, 아프나이델씨도 여기 오셨으니까…" 아프나이델은 놀라서 테이블을 짚으며 말했다. "예,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내 궁금한 것이 있어 아프나이델씨에게 조언을 요청하오만. 내게 생각이 하나 있는데 그 가능성을 좀 말씀해주시겠소?" "어, 저, 전 보잘 것 없는 초보마법사…" 엑셀핸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함을 빽 질렀다. "시끄러워! 자네가 뭐라 해도 저 다락귀신보다는 마법에 대해 잘 아니 걱정 말아. 이봐, 다락귀신. 어서 말해봐라!" 아프나이델은 몸둘 바를 몰라했고 하이 프리스트는 엑셀핸드의 말에 미 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씀이오, 노커여. 그럼 묻겠소. 마법사들에게는 패밀리어라 불리는 친구가 있지 않소?" 아프나이델은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예. 그렇습니다." "당신도 있소?" 물론 있지. 나와 샌슨이 동시에 약간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고 아프나이 델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 패밀리어는 바, 박쥐입니다만." "아주 아리따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샌슨이 주석을 달자 모두들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오. 독수리도 패밀리어로 가능합니까?" 아프나이델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독수리요? 천만에요, 불가능합니다. 독수리는 새들의 제왕입니다. 한 낱 인간의 마법사에게 그 몸을 의탁할 존재가 아닙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열성적인 얼굴로 질문했다. "그럼 매는 어떠하오?" "글쎄요. 매는… 아!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아프나이델은 알아차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말해보시오." "매나 독수리처럼 눈이 날카로운 새들을 날려보내 붉은 머리 소녀를 찾 게 한다, 맞습니까?" "그렇소. 그게 내 생각이오." 카알도 밝은 얼굴이 되었다. "오오, 그건 말이 될 듯한데요?"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러하오?" "전설적인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라도 그건 어려울 겁니다. 만일 바이서 스 전체를 매의 눈으로 주시하려면 매가 수백 마리는 필요할 겁니다." "아니, 바이서스에는 도시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각 도시마다 한 마리의 매의 눈으로도 충분히 수탐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매 한 마리가 하나의 도시를 관찰한다라… 물론 그 매는 하늘에서만 볼 수 있을 겁니다. 확실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며칠을 계속 관찰해야겠 지요. 문제는 마법사의 패밀리어라 해도 굶주리면서 관찰 활동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마법사는 한 번에 하나의 패밀리어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백 명의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오?" "그렇겠지요. 그 방법이라면 차라리…" 갑자기 아프나이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우리는 놀란 눈으로 아프나 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딱 내리치며 말했다. "엘프!" "무슨 말씀이오?"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하이 프리스트가 다급하게 질문했다. 아프나이델 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의 패밀리어는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엘프는 모든 생물의 친구 입니다. 겨우 매 한 두 마리가 아니라 모든 날짐승, 길짐승들에게 부탁 할 수 있습니다! 바이서스 전역의 동물들에게 부탁할 수 있겠지요! 그 런데 우리는 엘프를 한 명 알지 않습니까?" 카알이 말했다. "세레니얼양 말씀이십니까?" 아프나이델은 흥분해서 손짓까지 해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루릴양은 엘프고 따라서 무수한 생물들에게 부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건 부탁이니만큼 마법사의 패밀리어처럼 확실한 종 속관계에서의 추적은 될 수 없겠지만 그대신 이루릴양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동물들에게 부탁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아맞아. 이루릴은 칼라일 영지에서 까마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 리 말들하고는 항상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래. 누가 뭐래도 지금 엑셀핸 드가 드워프 최고의 기수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루릴이 레이 셔널 셀렉션을 잘 길들였기 때문이겠지. 아프나이델은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루릴양은 언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까?" 카알은 잠시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세레니얼양은 이주일을 기약하고 출발하셨는데, 에, 오늘이…" "열흘째에요. 얼마 안있어 돌아오겠는데요?" 카알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음. 세레니얼양이 돌아오면 그 분께 물어보도록 합 시다. 흠. 정말 괜찮은 계획인 것 같습니다. 만일 날짐승들을 모두 우리 의 친구로 할 수 있다면 수색이 훨씬 용이해지겠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정말이네. 새들이 날아다 니며 붉은머리 소녀를 찾는다면야 사람이 찾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겠지. 그러나 샌슨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 저, 그런데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우리는 모두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당황해서 말했다. "제가 전에 한 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삼 주 쯤 남았을까요?" "그럼 정말 시간이 촉급하군요. 세레니얼양이 그런 도움을 주고, 그리 고 그 소녀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 소녀를 다시 찾아서 갈색산맥으로 데려가려면… 휴우. 그 소녀가 어디서 발견되는가가 문제의 관건이 되겠 군요." "그렇겠군요." 유니콘 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다시 상인들과 모험가들을 찾아다녀보는 것이 어떠냐는 의논을 하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이 그 의견에 반대했다. "안됩니다. 넥슨 휴리첼의 경고를 생각하자면 제각기 흩어져서 돌아다 니는 것은 위험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흠. 넥슨 그 친구가 정말 문제로군요. 그 친구뿐만 아니라 수도의 모 든 변태들이 우릴… 그런 말 좀 하지마! 에, 수도의 모든 도둑길드 멤버 들이 우릴 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야겠지요." 우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인원은 7명. 반씩 흩어진다 해도 4명과 3명이다. 확실히 불리한 숫자다. 그렇다고 7명이 모두 우르르 돌아다닌 다니 그것도 참 골치아픈 노릇이다. 난 내 손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얼굴 이 되었다. "난 넥슨 그 사람 잡고 싶은데." "응, 무슨? 아, 네 OPG" "예. 그것 되찾아야 된다고… 왜그러세요?"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렇지!넥슨 휴리첼은 너의 OPG를 가지고 있지! 여러분. 빛의 탑으로 갑시다." "예?" "넥슨 휴리첼을 붙잡는데 도움이 될 물건이 있습니다. 그를 붙잡는다면 후치군의 OPG도 회수할 수 있고 우리들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의 탑으로 가서 스크롤을, 에. 좀 비싸겠지만…" 그러자 길시언은 걱정말라는 얼굴이 되었다. 모험가는 넘치는게 돈밖에 없는 모양이다. "필요한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구입하십시다. 그런데 뭐가 필요합니까?" "가서 말씀드리지요."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로 빛의 탑으로 찾아왔다. 아프나이델은 마법사가 그런지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네리아와 엑셀핸 드는 대단히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빛의 탑-2F'라는 현판 에는 정말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2층이라고? 그렇다면 높으니까 탑은 탑이네." 네리아의 얼빠진 말에 나는 빙긋 웃었다. "탑은 이 안에 있어요." "이 안에?" ================================================================== 7. 항구의 소녀……14. 네리아와 엑셀핸드는 나머지 일행을 보며 대단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니 여전히 '인간과 드워프가 여길 찾아온 것은 수천년 만이군.' 이라고 말할 것 같 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혹시 저 노인은 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 이 아닐까? 저번에 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인데? 노인은 우리 모습을 둘러보다가 의아쩍은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빛의 탑에 들어가시려는 거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프나이델이 나섰다. "길드 소속의 마법사입니다." "증명은?" 아프나이델은 뭔가 손짓을 해보였다. 별로 어려운 손짓은 아니었는데 희한한 것은 아프나이델이 손짓을 하자 허공에 그의 손가락의 궤적이 나 타나는 것이었다. 빛나는 선이 허공에 그려지며 무언가 글자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들어가보시오." 네리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노인을 보다가 노인 옆의 문을 바라보았 다. 우리도 그랬지. 그래서 나와 샌슨은 네리아의 반응을 보기 위해 뒤 에서 기다렸다. 카알과 길시언, 아프나이델이 들어가고나자 네리아는 우릴 돌아보더니 주춤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문에 다가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했다. "이상하네. 세 사람이나 들어갔어? 저 뒤가 그렇게 넓어?" "응. 넓어." 네리아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나오지 않았다. 어라? 우린 부 리나케 뛰쳐나왔는데? 나와 샌슨은 서로 마주보았다. 그 때 갑자기 네리 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까르르르!" 우리는 심각한 표정을 서로에게 선물했다. 웃어? 그 다음 우리는 엑셀핸드에게 기대를 걸었다. 엑셀핸드는 우리 둘이 들 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몹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문 에 다가갔다. 그도 문 안으로 들어갔고, 역시 조용해졌다. 나와 샌슨은 다시 한 번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상하네?" 그 때 노인이 고함을 빽 질렀다. "너희들은 왜 올 때마다 시간 끄는 거야!" 우리는 놀라서 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문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여전히 붉은 핑크빛의 하늘이 보였고, 핑크빛 하늘에 흰 선으로 날아가는 해오라기의 모습들과, 이번에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해와 별이 동시에 둥글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황금빛의 꽃들 사이로 크게 웃으며 팔짝팔짝 뛰고 있는 네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무너무 예뻐어!" 나와 샌슨은 맥이 풀려버렸다. 엑셀핸드는? 엑셀핸드는 근엄한 자세로 풀밭 가운데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카알과 길시언, 아프나이델의 모습도 보였다. 허 참. 왜 두 사람은 놀라지 않는 거지? 내가 질문해보았다. "엑셀핸드, 놀라지 않아요?" "뭐 말인가?" "이런 환상적인 모습이 있는데… 네리아도 저렇게 즐거워 하잖아요." "이런 속임수에, 뭐가?" 속임수? 물론 이건 환상이고 에, 또,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현실은 아 니며… 뭐 그런 것인데, 어쨌든 그건 나도 알지만, 그렇다고 놀라지 말 라는 법은 없잖아! 아프나이델이 웃으며 설명했다. "드워프가 왜 마법을 익히지 않으시겠나." 에구, 난 몰라. 대답하지 않겠어. 카알이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내 알기로, 드워프의 깊은 눈은 절대 눈에 보이는 허상에 속지 않는다 고 알고 있네, 네드발군. 우리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에 마음마저 흔들리지. 그러나 드워프들께서는 눈에 보이더라도 믿을 수 없는 것이면 마음에 한 점 흔들림을 느끼지 않으신다고들었지. 맞습니까, 아인델프 님?" "그렇다네.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려있는 것이 네."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인간은 그렇게 되기 어렵군요." 아프나이델이 미약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그래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엑셀핸드는 가소롭다는듯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합리적이지 못한 눈을 가진 것이 무에 좋은가?" "드워프들에게 자랑할만한 문학이 있습니까?" "문학? 그걸 뭣에 쓰는가."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고 카알은 그 문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어느새 그 뒤죽박죽 탑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네리아는 어느새 조그맣게 보일 때까지 달려가버려 고함을 좀 지른 다음에야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를 보니 가관이었다. 가슴과 머리가 잘 안보일 정도로 꽃을 가득 끌어안고는 샛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몰아 쉴 때마다 가슴에 있는 꽃들이 눈발처럼 꽃잎을 흩날렸다. 네리아는 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너어무 좋다, 예쁘다아! 이것봐, 후치야. 이거 전부 금이야! 꽃 잎도 금이고 꽃술도 금실이야!" "예. 그렇네요." 갑자기 네리아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내가 이거 꺽어가면 마법사들이 화를 내는 거 아닐까? 그래서 캄 캄한 감옥에 가두고, 먹다남은 음식 찌꺼기만 주고, 날 실험 재료로 쓰 고, 금단의 의식의 제물로 쓰거나 괴물에게 시집보내고…" 그녀의 차라리 발랄한 상상은 아프나이델의 말에 의해 제지당했다. "원하는대로 가져가세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정말?" "예." 나는 샌슨을 붙잡기 위해 애써야 했다. 샌슨은 즉각 고향에 계신 그녀 를 위해 수만 송이의 황금꽃을 꺽는 열성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취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샌슨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샌슨!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이 공간뿐이라는 말 기억 안나?" 샌슨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네리아한테는 좀 있다가 말해줘 야지. 네리아는 계속 품속의 꽃들에 코를 파묻고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뒤뚱뒤뚱 뛰어다니면서 나비를 붙잡기 위해 애쓰는 드래곤의 옆을 지나 (땅이 좀 울리던데.) 손수건으로 정성스레 태양 표면을 문질러 광을 내 는 남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네리아는 거의 정신 착란을 일으킬 듯 한 표정으로 할딱거렸다.) 그 뒤죽박죽 탑으로 걸어갔다. "저게 빛의 탑이야?" 안으로 들어섰다. 내 예상대로라면 분명히 그 동안 천장과 벽의 모양이 몇 개는 바뀌어 있을 것이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역시 바뀐 것 같 았다. 아프나이델은 중앙의 수정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길드원입니다. 스크롤의 구입을 원합니다." "어떤 스크롤을 원하십니까?" 오래간만에 들어도… 역시 닭살이 돋는다. 네리아는 놀란 눈으로 주위 를 둘러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로케이트 오브젝트(Locate Object)의 스크롤이 필요합니다." "아!" 카알이 탄식을 뱉었다. 로케이트 오브젝트? 물건을 찾는다고? 무슨 물 건? 카알은 말했다. "OPG를 찾으면, 그렇다면 넥슨도 찾을 수 있겠군." 아? 그게 그렇게 되나? 그거 기발한데? 다시 그 성별 불확실한 루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숙련 정도를 말씀해주십시오."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좀 주저하였다. 그러더니 낮게 말했다. "…클래스 3의 러너입니다." "클래스 2는 마스터이십니까?" 아프나이델의 고개가 더 아래로 쳐졌다. "아니오… 클래스 2는 익스퍼트입니다만." "클래스 1은 마스터이십니까?" 아프나이델은 최대한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마 부끄러운가 보다. 우리들은 그게 뭐 부끄러울 게 있냐는 듯한 얼 굴을 지어주기 위해 애썼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잠시 후 루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케이지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샌슨과 나는 곧 열심히 천장을 살폈다. 혹시 가까운 데서 떨어지면 받 아내어야지! 우리는 온몸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안녕들 하시오?" 음… 케이지라는 그 마법사는 홀 옆의 벽이 갈라진 틈에서 얼굴을 내밀 었다. 그런데 그는 방과 방 사이의 틈으로 힘겹게 비져나오려다가 그만 화가 나버렸다. "뭐가 이렇게 좁아! 에잇!" 그래서 나와 샌슨은 그 늙은 마법사를 붙잡아 끌어내어주었다. 케이지 는 끙끙거리고, 신음을 좀 내뱉었으며, 심지어 코끝까지 시뻘개졌지만, 어쨌든 나오는데는 성공했다. 그는 몸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원 이런. 젠장. 잠시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문도 없는 방에 갇히겠 군. 그래, 스크롤을 원하신다고?" "그렇습니다." 케이지라는 마법사는 훤칠한 키에 근엄하게 생긴 늙은이였는데 희한하 게 수염을 깨끗이 면도했다. 우리는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턱을 바 라보았고 그러자 그는 헛기침을 조금 했다. "흠. 뭘들 보는 거요? 실험 도중에 어쩌다가 수염을 좀 태웠소." "아, 네… 죄송합니다." 카알은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감추었 다. 케이지는 다시 헛기침을 좀 하고나서는 손가락을 튕기며 뭐라고 말 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튼튼하게 생긴 상자가 나타나더니 아래로 텅- 떨어졌 다. 우리는 놀라서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케이지는 별 표정없이 말했다. "무슨 스크롤을 원하시오?" "예. 어떤 물건을 좀 찾으려고, 로케이트 오브젝트를 원합니다." "당신 숙련도는?" 아프나이델은 아예 처음부터 말해버렸다. "클래스 1의 마스터입니다." "어디까지 하는데?" "클래스 3까지…" "클래스 3까지? 흐음. 그렇다면 유효거리가 얼마 되지 않을 텐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글쎄. 한 2,300 큐빗이 넘어버리면 거의 거리는 못맞춘다고 봐야될 거 요." "2,300이라. 그것 참." 아프나이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2,300이라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요. 일단 2개만 부탁하겠습니다." 밖으로 돌아나오는 길에 날개 달린 개구리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네리아 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소동이 있었다.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웃으며 개 구리뜀으로 뛰며 그 개구리를 잡으려 했고 덕분에 우리는 눈은 좀 즐거 웠지만 네리아를 붙잡느라 고생도 좀 해야 했다. 네리아는 가슴 가득히 끌어안은 꽃에 코를 파묻으며 낄낄거렸다. "너무너무 예뻐. 으헤헤. 금꽃이다, 금꽃. 그런데 이 꽃씨를 받아다가 심으면 다시 이런 꽃이 날까? 음. 데미 공주님에게 물어보면 전문가답게 말해주겠지?" 난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예상이지만 아마도… 계단을 다 올라왔다. 우리들이 차례로 나오고나서도 네리아는 계단 꼭대기에 서서 그 신비로 운 광경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느라 맨 마지막에 나왔다. 자, 이제 나 오기만 하면 그 꽃은 사라지겠지? 이히히. 이윽고 네리아가 나왔다. 그리고 그 꽃은 사라져버렸다. "어머!" 네리아는 펄쩍 뛰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우하하. 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환상에 속하는 것으로… 네리아?" 네리아는 망연히 자신의 빈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 고.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놀라서 네리아에게 다가갔다. 네리아 는 자신의 빈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맺 히고 있었다. "네리아? 이런, 네리아!" 네리아는 꼼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거기 그대로 꽃이 있는 양, 빈손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눈물은 더욱 굵어졌다. 난 당황해버렸다. "이런, 미안해요. 네리아. 실망했군요. 미리 말했어야 되는데." "허무해…" "예? 뭐, 뭐라고 그랬지요? 네리아?" 대답없이 네리아는 손을 축 늘어뜨렸다가 그 반동으로 다시 올렸다. 그 리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마치 햇살이 눈부시다는듯이 손으로 눈을 가 렸다. "하하하…"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웃는 것은 입뿐이었다. 눈은 가려버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나가버렸다. 책상에 앉아있던 노인을 제외하 고는 모두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노인만 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든 우리는 모두 당황해서 빛의 탑을 내려왔다. 대로로 나오니 네리 아는 어느 새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라타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느리네. 빨리 가요. 배고파."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난 정말 그를 존경 해버릴 테다! "여관까지 누가 빨리 가나 내기!" 샌슨을 존경해야 되나? 샌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네리아는 웃으며 에 보니 나이트호크를 출발시켰다. "좋아!" "야! 비겁해에!" 곧 샌슨도 출발해버렸다. 나라고 질 수야 없다! 난 제미니를 급하게 출 발시켰다. 아니, 출발시키려 했다. 그 때 그 말만 들려오지 않았더라도 출발했을 것이다. "푸하하! 바람처럼 빠른 드워프 앞에 누가 앞서 달리느냐!" 웃느라 도저히 출발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난 엑셀핸드에게까지 앞을 내 어주고 말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우린 바이서스 임펠의 폭주족으로 소문 나겠는걸? ================================================================== 7. 항구의 소녀……15. 유니콘 인으로 돌아온 순서는 역시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일위였다. 그 러나 말구종의 증언에 의하면 슈팅스타와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고 한다.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각자 맘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난 살짝 여관을 빠져나왔다. 수도의 길에 익숙하진 않지만 어렵 게 어렵게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여관에 돌아와보니 역시나 샌슨과 길시언은 환호를 올리고 뒷뜰로 달려 가버린 후였다. 그리고 하인 하녀들과 손님들 상당수도 역시 환호를 올 리고 따라가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홀은 고요했고 카알과 아프나이델은 각자 채광이 좋은 자리에서 책을 읽으며 간혹 뭔가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적당한 테이블에 앉아 파이프를 피워물고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대단히 만족한 얼굴을 한 채로 눈을 가늘게, 거의 감긴 것처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네리아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샌슨과 길시언은 역시?" 뒷쪽에서 들려오는 박수와 검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 알고 있지만 확인 삼아 물어보았다.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처럼 운율을 맞추어 말했다. "전사들은 부지런하네." 그리곤 부드럽게 이었다. "시간만 나면 대무, 대무, 대무." "아가씨의 한숨은 듣지도 않나요?" 나 역시 노래하는 것처럼 네리아의 말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네리아 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시선은 보지도 않나요?" 마치 바딩 대결 같은걸? 바딩 대결이란 바드들이 서로 즉흥곡으로 대결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우리들처럼 이렇게 간단하게 하지는 않고 꽤 오 래 노래한 다음 상대편이 부드럽게 그것을 받아넘겨 다시 자신의 노래를 해야 된다. 하지만 난 맘편하게 했다. 밖에서 구해온 물건을 네리아에게 내밀며 노래를 받았다. "전사는 나보다 검을 더 좋아하네." 네리아는 내가 건넨 꽃다발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꽃에 코를 파묻으며 노래를 불렀다. "검을 들고 뛰느니, 나와 춤춰요." "이렇게 과감하게 말하니, 미운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네. 봐요, 햇살이 따사로와요." 엑셀핸드는 미소를 지으며 파이프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락이 점점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노래했다. "봄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삼월이 오면," 네리아는 꽃 한 송이를 뽑아들더니 귀에 꽂으며 노래했다. "봄맞이 축제에 반짝이는 웃음 조각들." "낙엽이 바람을 타고도는 시월이 오면," 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알에게 다가가며 노래했다. "추수제의 유쾌한 농부의 노래." "두 개의 달이 떠올라 세상을 비추면," 네리아는 꽃 한 송이를 카알의 귀에 꽂아주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돌리며 웃었고 난 배를 잡고 웃었다. "트윈문의 축제에서라면 나도 용기가 생겨요." "나와 함께 춤춰요. 봐요, 즐겁지않아요?" "나와 함께 춤춰요. 하나, 둘, 셋." 카알은 서툴게 웃으며 우리들의 노래를 감상했다. 역시 카알이라서 귀 에 있는 저 꽃을 차마 뽑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어렵지 않아요. 전사 양반. 날 보아요." "내 손을 잡아요. 칼자루를 놓고서." "어렵지 않아요, 전사 양반. 그냥 춤춰요." "즐겁게 내딪고 신경쓰지 않으면 그게 춤이죠." 우리는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노래 불렀다. 길시언과 샌슨도 석양이 내 려 서로 볼 수 없을 때까지 대무를 계속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프나이델은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아프나이델은 방 가운데 섰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신경을 집중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방안의 조명은 모두 최대로 낮춰두었고, 그래서 지금 방안에는 촛불 하나만이 붉게 타 오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격정적으로 손짓을 함에 따라 그의 얼굴은 그의 손 그림자로 가려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고 그 때마다 그의 동공에 반사되는 촛불빛이 번뜩였다. 어두운 방안에 침울한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그리고 주위에는 모두 과거의 한 시간에 영혼을 붙들어 매 어둔 것처럼 생긴 사람들이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이런 기괴한 빛 아래에 지극히 생기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 프나이델의 저 치열하며 음울한 캐스팅 동작 때문에 무거워진 내 마음 이… 잠시 후 열린 창문으로 박쥐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푸드드득! 우리는 경탄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팔을 내밀었고 그러자 박쥐는 부드럽게 아프나이델의 손에 매달렸다. 아프나 이델은 다른 손으로 그 박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음. 저게 이루릴인 가. "충실한 내 친구. 언제나 부를 때마다 달려와주어 고맙구나." 우리들도 한결 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원참. 아프나이델의 캐스팅 동작은 항상 우리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군. 아프나이델은 너무 나 정성어린 동작으로 모든 힘을 다 기울인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캐스 팅한다. 아마 아프나이델도 아직 달인은 아닌가봐. 달인이라면 대충대충 할텐데. 아프나이델은 박쥐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말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창 가로 걸어가 박쥐를 다시 날려보냈다. 박쥐는 퍼더덕거리며 검은 손수건 처럼 날아가버린다. 그 다음 아프나이델은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빛의 탑에서 사둔 스크롤을 꺼내었다. 우리는 다시 숨을 몰아쉬고는 조용해질 준비를 갖추었다. 아프나이델은 스크롤을 찢으며 시동어를 말했다. "로케이트 오브젝트!" 아프나이델의 몸이 뻗뻗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눈을 꽉 감고 이빨도 앙 다물고 있었다. 그의 팔이 사람의 팔이라기엔 너무 딱딱한 동작으로 들 려지더니 그는 서서히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여기군… 그 OPG야. 확실해…" 나는 침을 꼴깍거리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빙빙 돌 다가 벽을 가리켰다. 우리는 모두 그 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뭐가 보 이는 것처럼 애써 심각하고 그럴듯한 표정을 서로 짓다가 곧 맥이 빠져 버렸다. 아프나이델이 저쪽이라면 저쪽이겠지. 그런데 저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거야? 100 큐빗? 1000 큐빗? 수십만 큐빗? 아, 물론 수십만 큐빗까지야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무조건 저쪽이라니. 아프나이델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제길… 거리가… 거리를 모르겠어." 한참 동안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한숨을 푹 쉬면서 눈을 떴다. "방향은 파악했습니다만 거리를 알 수가 없군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것도 모르겠습니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많이 숙이며 말했다. "예. 오후에 케이지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200 큐빗 정도의 거리에서 뿐입니다. 그보다는 더 멀 텐데, 문제는 250 큐빗 정도인지 수천 큐빗인지는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박쥐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저쪽 방향의 도시를 감시하게 해두었습니다만, 방 안에 있거나 하면 어차피 알 수가 없겠지요." 카알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왜 낮에 시도하지 않고 밤에 시도했습니까?" "넥슨은 수배당하고 있는 자이니만큼 낮에는 움직임이 없을 겁니다. 그 리고 우리에게 보복하겠다고 했으니 밤에 움직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 했습니다." "흠. 논리적인 생각이오. 그런데 스크롤은 왜 두 개 구입했습니까?" "이루릴이 찾아내면 확인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루릴로부터는 연락이 없군요." "그럼 잠시 후 한 번 더 시도해보고 그래도 거리를 알 수 없다면 그냥 불침번을 서면서 자도록 합시다. 그게 낫지 않을까요?"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서로서로 잡담을 나누면서 한 시간쯤 보 내고 나서, 아프나이델은 한 번 더 시동어를 말하며 스크롤을 찢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향이 달라… 응? 움직인다." 움직인다고? 우리는 숨죽인 채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숨쉴 사이 없이 다시 캐스팅을 시작했다. "이루릴… 이쪽 방향이다. 주욱 날아가라. 힘의 강도가 달라진다… 움 직이는 속도를 봐선… 말이다. 말을 탔다면 역시 대로. 대로에서 말이나 마차들을 유의해서 살펴보자… 멍청이! 그건 퇴비수레잖아! 파리는 천천 히 ?고 어서 날아가. 그래. 비틀지 말고. 이쪽 방향이다…" 아프나이델은 안타깝다는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좀 더 찾아보고… 말이야, 말… 그렇다면 어디의 방 안이나 실내에 있 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말을 달리고 있으니까… 틀림없이… 찾을 수 있 어."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입을 딱 벌리더니 말했다. "저쪽! 150 큐빗!" 아프나이델은 창문쪽을 가리키며 외쳤고 우리는 그의 말에 벼락치듯 일 어났다. 뭐라고? 150 큐빗이라고? 아프나이델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루릴! 왜 말을 보지 못했어? 100큐빗? 이럴 수가!" "이야아아아!" 길시언의 동작이 가장 빨랐다. 길시언은 재빨리 창쪽으로 달려가더니 발코니 문을 쾅 열어젖히며 프림 블레이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얼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로에는 아무 것도 없소!" "50 큐빗! 없다고요?" 우리들도 모조리 달려나갔다. 대로에는 밤이라 걸어다니는 사람들뿐이 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말 같은 것이라고는 저기 하늘에 떠있는 것 말 고는 아무 데도… 하늘에 떠있어? "하늘이다!" "뭐라고?" "꺄아아아악!" 우리들이 지른 고함소리가 대로에 걸어가던 사람들에게도 들렸나보다. 대로에서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검은 밤하늘에 달을 등지고 떠있는 말들과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셋.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서스 임펠의 야경 위로 그들은 시커먼 그림 자, 흉흉한 적의만을 띤 채로 떠있었다. 아프나이델이 쥐어짜는 목소리 로 말했다. "팬텀 스티드다! 하늘을 날아오고 있었어!" 밤하늘과 별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반사의 검은 털빛을 가진 말, 그 발굽은 허공을 밟고 서 있으며 희뿌연 눈동자는 촛점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다. 팬텀 스티드. 이 유령마들은 각자 하나씩 세 명의 사람 들을 태운채 도시의 야경을 밟고 서 있었다. "으아아! 유령이다!" "화렌차의 3기사다! 달아나라! 보면 안돼!" 저게 화렌차의 시간의 기사, 공간의 기사, 의미의 기사라고? 하긴 시민 들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퍽 놀랐지만 팬텀 스티드에 탄 그 작자들도 우리가 뛰쳐나오자 좀 당황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 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유있게 우리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떠 있는 자는 차갑게 웃기까지 하고 있었 다. 젠장, 저 얼굴은 절대 잊을 수 없어. 이 시커먼 밤하늘에서 이런 괴 상한 만남이라 할지라도 네 녀석의 그 얼굴은 못잊어! "넥슨 휴리첼!" 난 넥슨의 얼굴을 보고는 이를 갈았다. 내가 발코니에 서 있다는 것도 잊어먹고 앞으로 달려갈 뻔하다가 간신히 멈췄다. 넥슨의 양쪽으로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떠있었다. 넥슨은 싸늘하게 말했다. "오래간만이군, 모두들. 역시 굉장한 친구들이군. 놀라게 해주려 했는 데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줄 줄이야." 기습을 못해서 안타깝다 이 말이지? 오냐. 성대한 환영을 해주지. 일행 은 모두 무기를 뽑아들었다. 난 바스타드가 힘겹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를 악물었다. "너의 머리를 날려주지. 아니면 네 머리에서 그 몸을 떼내어주지!" 넥슨은 빙긋 웃었다.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그거 내 트라이던트, 돌려줘." 넥슨의 왼쪽에 떠있던 남자는 그 마부였다. 젠장, 마부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과묵한 넥슨의 심복 녀석은 네리아의 트라이던 트를 들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자기 손에 들고 있던 트라이던트를 살짝 들어보이더니 곧 우리가 서 있던 발코니에집어던졌다. 네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어라?" 진짜 던져주네? 허, 그것 참.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들었다. 난 그 마부의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할 따 름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건 내가 아니다. "주인보다는 낫군. 도벽을 가진 주인 섬기기 어렵겠어?" 넥슨은 이를 드러내었고 마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런데 내 옆에서 롱소드를 뽑아들던 샌슨이 갑자기 멈칫거렸다. 샌슨은 넥슨의 옆에 떠있 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라고? 저건 누구지? 그 때 샌슨이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너… 그 때!" 그 여자도 샌슨을 보더니 무언가를 알아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죽지 않았어?" "그거 질문이야, 확인이야?" "확인이야. 어떻게 살아났지? 아, 그 유피넬의 어린 자식의 소행이로 군." 뭔 말들이야? 저 여자가 누군데? 저 여자는 시커멓고 엉망진창인 머릿 결에 역시 시커먼 옷,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 손엔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 여자일 뿐인데, 에, 오우! 빌어먹을! 카알이 낮게 신음처럼 말했다. "그 때의 그 뱀파이어!" ================================================================== 7. 항구의 소녀……16. 칼라일 영지에서 우리를 죽이려 들었던 그 뱀파이어이다. 빌어먹을! 저 뱀파이어 여자는 자이펀의 간첩으로 활동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바이서 스의 배신자인 넥슨 휴리첼과 함께 있는 것도 설명은 되는 것 같군. 길 시언이 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넥슨 휴리첼! 그대에게 실망했다! 누대에 걸쳐 그대 가문에게 내려진 성은이 작다 하지 못할진대 어찌 적국과 내통하여 그 성은을 배신한단 말이냐!" 나와 샌슨은 정말 놀라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길시 언이 들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길시언도 자기 말에 놀라 서 프림 블레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거 방해를 받지 않고 말하자니 그것도 이상하다…" 우리 앞 허공에 떠 있던 넥슨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대에 걸친 성은이라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에게 늙어죽을 기회도 주 지 않고 저 변경의 촌구석으로 쫓아내었나? 우리 아버지가 반생을 통해 어전에 바친 적의 수급의 숫자는 명백히 기록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드래곤의 뒷바라지나 시켰는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캇셀프라임 말인가 보군. 나는 그 일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까 뮤 휴리첼의 배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아버지에게 명예 회복의 기 회를 선사한 성은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배덕한 죽음이라. 하하하. 미드 그레이드가 파멸의 낭떠러지에 선 것 은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의 머리가 돌아버린 것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 에 왜 우리 가문이 핍박받아야 하는가?" "공인으로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이 잘못이 아니란 말이냐?" "공인? 공인 중의 공인이자 기사 중의 기사인 너희 바이서스 왕족이 백 성들을 함부로 전쟁터로 내보내는 것은 어떻고." "이 놈! 입을 닥쳐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넥슨은 킬킬거렸다. "웃기는군. 저기 저 카알과 샌슨, 그리고 후치는 그 먼 변경에서 여기 로 달려왔지? 이봐. 카알. 당신은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 무 엇을 알지요?" 엉뚱하게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오네? 나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말했다. "이 전쟁에 대해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우리에겐 왕의 명령으로 전장에 나가 죽을 권한, 왕에겐 우리를 아낌 없이 사지로 보낼 권한이 있는 이 빌어먹을 바이서스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이오?" "억울하지 않으시오?" 넥슨은 갑자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미심쩍은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감당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이 말 이 됩니까?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 를 달려 나라를 세웠고, 그래서 그들의 위엄과 권한을 오롯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게으르고 무기력한 후손들은 단지 왕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 으로 손에 흙 한 번 묻힐 일도 없이 태연히 그 백성들을 전장에 내보내 어 죽이고 있소. 그런 전쟁이 벌써 몇 년째입니까!" 어디서 들었던 말이로군. 카알은 착찹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웅시대를 꿈꾸는 젊은이로군. 당신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흉내를 내 어보고 싶은 게로군." "그래서, 안됩니까? 드래곤 로드의 지배를 받기 싫었던 루트에리노 대 왕은 핸드레이크와 힘을 합쳐 그에 반대하여 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나 는 바이서스 왕가가 싫습니다. 그래서 바이서스 왕가를 멸망시키고 새로 운 나라를 세울 것이오. 누구도 상대에게 죽음의 명령을 내릴 권한 따위 는 가지지 않는 나라, 인간의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카알은 묵묵히 넥슨을 바라보다가 입술 사이로 새는듯한 목소리로 말했 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앞길을 가로막는 어린아이를 짓밟으며 자신의 길을 걷지는 않았소." 넥슨은 입을 콱 다물었다. 카알은 낮지만 힘있게 말했다. "나 또한 나라의 영속성, 세습의 권한 획득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오. 대지는 넓고, 왕좌는 원한다면 세울 수 있소. 나라는 영원할 수는 없고, 누구라도 왕은 될 수가 있을 것이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어떤 나라 를 세우든, 그 나라는 어린아이의 핏값을 전제로한 나라가 될 것이오. 누구도 상대에게 죽음의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당신이 그 어린아이에게 베푼 죽음의 손길은 어떻게 된다는 말이오." 넥슨은 이를 갈듯이 말했다. "완벽은 없소. 소수의 희생 없이 변혁을 꿈꾸는 것은 몽상가의 논리일 따름입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소." 카알이 드디어 특유의 비꼬는 얼굴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좋겠군. 그렇다면 지금 이 나라의 현실에 가장 적합한 희생이 될 것 같소. 전쟁으로 어지러운 나라 를 접수하시겠다고? 왜? 평화가 우선이 아니라 당신의 권력획득이 먼저 인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평화고, 그래서 이 나라의 전쟁과 이 나라를 한꺼번에 끝낼 거요. 그리고 평화의 땅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거 요." 카알은 넥슨의 옆에 있던 그 뱀파이어 여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렇군. 자이펀과 손을 잡고 전쟁을 끝내시겠다 이 말이겠군." 뱀파이어 여자는 별말 없이 다만 싸늘하게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을 뿐 이었다. 그녀의 눈은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 었다. 카알이 결기어린 목소리로 넥슨에게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시오. 당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당신은 자이펀 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소. 그 서류도 이미 국왕전하에게 돌려주었소. 따라서 자이펀에서 당신을 받아줄 까닭이 없소. 당신에겐 아무런 이용가치가 남지 않았으니까." 넥슨은 킬킬거렸다. "웃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뭘 어쩌겠단 말이오? 당신에게 무엇이 남아있단 말이오. 당신 이 건네주려했던 그 서류는 이미 우리가 국왕께 돌려드렸소. 그리고 당 신은 그랜드스톰의 은혜도 바랄 수 없소. 도둑 길드? 글쎄. 도둑 길드가 당신을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당연히 당신 가문의 힘을 사용 하지도 못하게 되었소. 그런 당신이 무엇을 한단 말이오." "천만에, 천만에. 나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네리아가 그 말에 코를 찡그렸다. 갑자기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 다. "헤이, 넥슨?" 그러더니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빙빙 돌려 허리 옆에 세웠다. "말은 필요없어. 끝장을 보자. 덤벼라." 샌슨과 길시언도 그 말에 네리아의 옆에 서서 검을 세워들었다. 그리고 나와 엑셀핸드는 약간 뒤에 섰고 아프나이델과 카알은 맨 뒤에 섰다. 넥 슨은 히죽 웃었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싸우러 왔다면 우린 간단히 당신들을 죽일 수 있지." 카알은 미심쩍은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진지한 얼굴로 말 했다. "난 원한을 잊는 성격은 아닙니다. 하지만 날 패퇴시킬 정도의 능력과 힘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은 가지고 있지요." "무슨 말을 하는 게요?" "협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당신과 협력한다는 말입니까?" "당신들이 목숨을 걸만한 댓가를 원한다면 댓가를 지불하지요. 당신들 이 몸 바칠 이상을 필요로 한다면 이상을 드리지요. 원하는 바를 말해보 시오." "당신에겐 받을만한 것이 없을 것 같소." 넥슨은 빙긋 웃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삼인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 웃 고 있는 넥슨의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신비로운 것이었다. 넥슨은 차분하 게 말했다. "들어보시오, 카알. 이 나라의 역사는 300년이 넘었소. 루트에리노 대 왕이 드래곤 로드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고 이미 3 세기가 흘렀단 말이 오. 고귀했던 이상은 잔재도 남기지 않고 흩어져버렸고 남은 것은 타성 뿐이오. 기사 중의 기사인 국왕은 섬기기보다는 섬김받기를 더욱 원하고 있소. 귀족들은 축적된 명예를 낭비하며 만인의 재산을 한 가문에 귀속 시키려 애쓸 따름이오. 카알, 당신은 지금의 국왕이 기사 중의 기사로 백성을 섬긴다고 보시오?" 카알의 얼굴이 순간 흐려졌다. 길시언은 뒤를 돌아보고는 찌푸린 표정 을 지었다. "그렇군! 당신의 얼굴은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생각을 거부할 수 없음 을 나타내고 있소. 카알! 당신도 느끼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또 보시 오! 300년의 영화가 아쉬워 그 영화를 연장시키기 위해 인간들을 잡종교 배시켜 우수한 품종을 만들어내려는 가문이 있소! 모른다 말하진 않을 테지." 이번엔 우리 모두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다. 넥슨은 여유만만 하게 말했다. "너무 길었소. 타성의 모든 악덕이 자리잡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단 말이 오!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계속 누리기 위해 변화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변성은 우리 모두에게 불평등만을 강요하 고 있소! 알고 있겠지요! 당신은 알고 있을 거요! 저 멀고 먼 서녘, 석 양의 빛이 마지막으로 닿는 서쪽의 황야에서 이곳으로 달려오자마자 국 왕을 놀라게 만든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오, 카알! 태양은 천공을 일주 하며 바라본 바이서스의 모든 모습을, 일몰의 시간에 서 있는 당신에게 전달했을 것이오.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오!" 카알의 턱이 꿈틀거렸다.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뭘 원하시오." 넥슨은 팬텀 스티드의 안장을 놓고는 두 팔을 좌우로 쫙 벌렸다. "나와 손 잡읍시다. 그 아이의 일은 사과하겠소. 그러나 보시오. 칼은 위험하리만큼 날카로와야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자를 상하 게 만들기도 하는 겁니다. 내가 그 날카로운 칼날이 되겠소. 당신은 손 잡이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손 잡고, 저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만남을 여기서 다시 재현하는 겁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뒤돌아보았다. 카알은 꼼작도 하지 않은 채 우울한 얼굴로 허공에 떠있는 넥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닐시언 국왕이 왜 날 화나게 만들었는지 모르시겠지." 넥슨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말하려 할 때 카알이 재빨리 말했 다. "닐시언 국왕은 자신이 루트에리노 대왕이 되고내가 핸드레이크가 되 기를 원했었지… 당신처럼." 넥슨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치 않은 말이었군. 당신이 화를 낸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그런 요청을 했으니까. 나와는 전혀 다른…" "다르지 않아요." "예?" 카알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르지 않아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속이고, 위협하고, 억누르 려 드는 것, 똑같습니다. 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서 상대로 하여 금 자신을 알게 하려 들지 않습니까. 왜 자신을 더 위대해보이고, 더 강 해보이고, 더 위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되기를 원하는 겁니까." "예?" "루트에리노 대왕은 루트에리노 대왕으로 살았고 핸드레이크는 핸드레 이크로 살았소. 그러니 닐시언 전하는 닐시언 전하로 살아야 하고 넥슨 당신은 넥슨 당신으로 살아야 하오. 그리고 당신들 중 누구도 나에게 카 알 헬턴트가 아닌 다른 자로 살도록 명령할 수는 없소." "이, 이보시오. 카알. 내 말은…" "천공을 가로지른 태양이 그 본 바를 낱낱이 가르쳐 주어 무한한 지식 을 갖추게 된 현자라… 멋있군요. 나에게 붙일 칭호를 꽤나연구하신 모 양이군요. 하지만 그건 기만적입니다." 넥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카알은 계속 말했다. "난 이곳으로 여행하다가 어떤 젊은이를 보았소. 그는 마나에 몸을 맡 긴 젊은이였지만, 아쉽게도 아직 그 정진의 세월이 짧았는지 그렇게 능 숙하지는 못했소.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위대한 대 마법사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 나와 샌슨은 확실히 눈치가 없다. 이 순간에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보다 니. 아프나이델의 얼굴은 붉게 변했지만 카알은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 다. "그는 결국 알아차렸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소. 그 젊은이에게 부끄러워서라도 난 그렇게는 못하겠소." 아프나이델은 물기어린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 둘보 다야 확실히 눈치가 있는 카알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허공에 있는 넥슨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혁명 이론, 부분적으로 공감가는 곳은 있습니다만, 반대합니다." 넥슨의 얼굴이 이젠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알의 목소리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가 만난 또다른 젊은이가 한 행동이 그 대답이 될 것이오. 그 젊은 이 또한 자신의 왕국을 만들었지. 그는 50명의 고아들을 위해 자신을 위 한 여행을 중단하고 그의 인생을 고아들에게 바쳤소. 그 왕국의 국민들 인 그 50명의 고아들은 자라나 사랑을 알게 되고 관용을 알게 되고 자비 를 알게 될 것이오." 샌슨은 눈을 꿈뻑거리고 있었다. 저 오우거, 틀림없이 눈물을 찔끔거리 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당신이 나라를 만든다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희생되어도 좋을 소수로 인식하는 나라가 될 것이오. 그 나라의 국민들 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된 상만을 보여주고자 애쓰는 나라가 될 것이 오." 카알은 단호하게 끝맺었다. "나는 그런 나라에 찬성할 수 없소." 넥슨은 싸늘하게 카알을 노려보았다. "잘못봤군. 당신은 몽상가이며 낭만주의자였군." 카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넥슨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나의 복수의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시오네." 그게 누군데? 그러자 그 뱀파이어 여자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저 여자 가 시오네인가? 아프나이델이 기겁섞인 비명을 질렀다. "캐스팅한다!" ================================================================== 7. 항구의 소녀……17. "파이어…" 피윳! 카알이 어느새 한 방 날렸다. 시오네는 기겁하면서 캐스팅을 중 지하고 허리를 틀었지만 화살은 그녀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놀 라서 뒤를 돌아보았고 카알은 낮게 말했다. "하늘을 나는 자, 화살 앞에 두려움 없을 수 있소?" 시오네는 크게 노한 얼굴이 되었다. "너, 너!" "매직 미사일!" 아프나이델의 때를 놓치지 않은 캐스팅. 그리고 하얀 빛의 화살 세 개 가 떠올랐다. 그것은 각자 하나씩 세 명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곧 카알 은 화살을 마구 튕기기 시작했다. "펑펑! 쉬유우우욱!" 마부를 제외하고 두 명은 모두 매직 미사일에 맞았다. 넥슨과 시오네는 매직 미사일에 맞고는 주춤하면서 물러났지만 놀랍게도 마부는 검을 가 슴 앞에 세워 매직 미사일을 막아내었고 곧 엄청난 검막을 형성하여 날 아가는 화살을 모두 튕겨버렸다. 아래쪽에서는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으아아악!" 그러나 세 명은 돌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공중에 그냥 떠 있었 고, 그러자 우리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바에야 저쪽을 어떻게 공격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카알의 화살에 맞지 않기 위해 재빨리 더 높 이 솟아올랐다. 카알은 활을 거의 수직으로 들어올려 쏘아올렸다. 그러 나 화살은 그렇게 높이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들이 너무 작아져 캄캄한 밤하늘에서 거의 알아보기 힘들어졌을 때 아프나이델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캐스팅을!" 이런, 큰일났다!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모두 안으로!" "우아아아!" 엑셀핸드의 투박한 비명 소리를 뒤로 하며 우리는 부리나케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역시 엑셀핸드는 다리가 짧아 좀 느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발코니로 통하는 문 양쪽으로 몰 려섰다. 이런, 도대체 어떻게 해야되지? "들어와라! 이 자식들아! 그 빌어먹을 말에서 내려 들어와!" 샌슨은 막무가내로 바깥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밖에선 시오네의 앙칼진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우드킬(Cloudkill)!" 뭐야? 곧 창문쪽에서 연두색 구름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저 건 아무리 봐도 향기로울 것 같지는 않은데?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 다. "숨쉬지 말아요! 독구름입니다!" 그 사이에도 연두색 구름은 창틀을 타고 넘실넘실 새어들어왔다. 이런, 구름이라면 어떻게 피해야 돼? 코가 낮은 곳에 있는 엑셀핸드는 엄청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아프나이델은 빠르게 캐스팅했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곧 아프나이델의 손에서 무서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리아의 머릿카락이 마구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의 손에서 일어난 바 람은 매섭게 소용돌이쳐 창문쪽으로 불어갔고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던 연 두색 독구름은 바람에 흩날려 뒤로 밀려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기가 무 섭게, 아프나이델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여, 연속으로 너무 많이…" 아프나이델은 연속으로 너무 많은 마법을 써서 피로해진 모양이다. 휘 청거리는 그를 잡기 위해 엑셀핸드가 그의 허벅지를 붙잡으려다가 함께 넘어갈 뻔했다. 간신히 샌슨이 아프나이델을 잡아내었다. 그리고 그 동 안 밖에서는 다시 시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사, 사람 살려!" "수, 숨이… 으아아!" "커어억!" 카알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구름이 아래로 깔리는 모양이다!" 오우, 이런 얼어죽을! 아프나이델이 밀어낸 독구름이 그대로 아래의 길 로 퍼져나가는모양이다. 이런 망할 경우가 있나? 우리는 어쩔 줄 모르 고 우왕좌왕했다. 공중에 떠있는 저들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은 카알 하 나뿐인데, 발코니로 튀어나가면 그대로 시오네의 마법을 맞을 것이다. 카알은 입술을 깨문 채로 달려나갈 자세를 취했지만 길시언이 그의 허리 를 붙잡았다.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면 어, 어떻게 하라고!" "카알! 당신은 여기 그대로 남아 있으십시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저들 을 유인하겠습니다! 아프나이델! 마법 남아있는 것 있습니까?" "며, 몇 개 정도…" "그럼 여기서 카알을 도우시오!" 길시언은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와 샌슨도 그를 뒤따 랐다. 여관의 홀로 내려오자 홀바닥에 머리를 파묻고 덜덜 떨고 있는 하 인 하녀들과 그들을 다독거려 피하게 하려고 정신이 없는 여관 주인 리 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설명해 줄 시간도 없이 그대로 달려나왔 다. 길시언이 몸을 내밀었을 때다. "라이트닝 볼트!" 퍼버벅! 길시언은 옆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피했다. 하늘에서 내려꽂힌 벼락은 그가 서있던 자리를 시커멓게 태워버렸다. 땅에는 패인 자국이 커다랗게 나버렸고 흙과 연기가 흩날렸다. 뒤따라 나가려했던 나와 샌슨 은 건물 안에서 발이 굳어버렸다. 이런, 젠장! 길시언은 땅을 구르다가 그대로 일어났고 샌슨은 곧장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샌슨은 창문으로 위 쪽을 살펴보며 욕짓거리를 뱉어내었다. "저 빌어먹을 여자! 저건! 내려오지도 않고!" 밖으로 달려나간 길시언이 퍽 위험하게 보였다. 그러나 길시언은 흔들 립없이 프림 블레이드를 하늘로 뻗은 채 마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주 로 날 공격해보라는 식의 단순한 고함이었지만 그 시오네라는 뱀파이어 도 마법을 무한정으로 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틈을 봐서 밖으 로 뛰쳐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길가 곳곳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독구 름에 당한 사람들인 모양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를 토하거나 코나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신음을 흘리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고요했다. 그 말은 모두가 죽었다는 말. 우리는 눈에서 불을 튕기며 하 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선 그 삼인이 당당한 자세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저 악마!" "넌 시체의 나라를 만들 셈이냐!" 나와 샌슨은 악에 받쳐서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우리의 고함이 무슨 암시가 된 모양이다. 하늘에 떠있던 시오네에게서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그것, 좋은 생각이군. …에니메이트 데드(Animate dead)" "뭐야?" 우리는 순간 뒷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와 샌슨, 길시언은 황 급히 몸을 돌렸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건 아니겠지? 시체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있었다. 동공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는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것은 차라리 연민이라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그 연민의 댓가가 너무 비싸다. 그러한 연민을 느끼기에 앞서 엄청난 공포와 지독한 적개심을 지불해야 되니까. 꿈틀거리며, 그러나 딱딱한 동작으로 일어난다. 죽은 자, 누워있어도 무서운 느낌이 들지. 그런데 지금 하나 둘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걸어오 고 있었다. "두 번을 죽여? 죽은 자를 모욕하지 마라!" 샌슨의 목이 터질 것 같은 고함 소리, 그리고 나도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돼! 나이만큼의 날짜가 지나지 않으면…" 길시언이 이를 갈면서 설명했다. "저건 성직자의 디바인 파워가 아니라 마법사의 마나로 움직이는 것이 다. 저건 좀비만큼의 지성도 없는시체, 허수아비일 뿐이다! 제기랄, 그 냥 쓰러트려! 시끄러! 어쩔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언데드가 베기 싫다고 해도, 난 저 모습을 더 두고 볼 수 없다." 난 덜덜 떨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난 OPG도 없고, OPG의 부재는 내게 힘의 상실뿐만 아니라 용기의 상실까지 가져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제기랄, 난 겨우 그거였나? 내가 부린 배짱은 헬턴트식 배 짱이 아니라 OPG의 배짱이었나? 그렇지 않아! 샌슨이 먼저 돌격했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길시언! 후치를 지키고 위를 감시해주십시오!" "이런, 샌슨!혼자서는 안됩니다! 후치, 넌 들어가!" 길시언은 그렇게 외치며 날 밀어젖혔다. 난 길시언에게 떠밀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내가 밀려났나? 그런데 왜 다행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왜 이렇게 치사스러운 거지? 샌슨은 은도금 롱소드를 기운차게 휘저었고 그것에 맞은 좀비들은 검이 아니라 무슨 메이스에 맞은 것처럼 퍽퍽 부서져나갔다. 쓰러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떨어져나간 살덩이들은 퍼덕거렸고 선혈이 낭자했다. 토하 고 싶다. 그러나 길시언은 그 피를 뒤집어쓰면서 악을 쓰고 있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슬프지 않아. 제기랄! 슬프지 않아! 살려고 하는 짓이야. 시끄러워!" 아니다. 길시언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음모 때문에 이 평화로운 밤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죽어버린 사람들. 친구를 만나기 위 해 걸어가고 있었을까? 따스한 저녁식사 테이블을 기대하며 바삐 걸어가 고 있었을까? 그러나 뜻없이 죽어버리고, 게다가 죽은 뒤에도 일어나 피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을 공격해야 되는 저 시민들을 베어넘겨야 되는 황 야의 왕자. 프림 블레이드가 무슨 소리를 지르는지 대충 알 수 있다. 난 질려버린 채 입술을 덜덜 떨면서 하늘을 보았다. 아래쪽에서는 샌슨과 길시언이 시선을 끌기는 커녕 좀비들을 상대로 싸 우느라 자신들도 주체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위에서는 아프나 이델이 처절하게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 슬립!" 아프나이델은 남은 마법을 다 쏟아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프나 이델이 구사하는 마법들은 거의 상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슬립 주문에 시오네는 콧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그나마 시오네가 더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카알이 계속 화살을 날려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화살 때문에 시오네는 정신 집중에 필요한 시 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강력한 전사들이 모조리 밑에 내려왔기 때문 에 위에서는 네리아와 엑셀핸드가 넥슨과 마부를 막아내어야 했다. 엑셀핸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들을 막는 데 도끼는 전혀 쓸모있는 도구가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네리아가 길다란 트라이던트로 상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간혹 대거를 집어던지면서 막아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위험해! 후치 이 자식아!" 뭐지? 퍼억! 위를 쳐다보는 사이에 좀비 하나가 다가왔던 모양이다. 난 턱이 돌아버 리는 충격을 느꼈다. 허, 확실히 턱을 맞으면 고통이고 뭐고 없어. 난 그저 화끈하게 정신이 들었다. 날 쳤어? "제기랄, 죽어보자!" "이 자식아, 어서 못들어가!" 제기랄, 시끄러워! 날 쳤어? 이렇게 느려터진 상대라면 나도 상대할 수 있어. 난 바스타드를 마구 휘저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이지? 바스타드 가 전혀 평소의 속도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난 허리의 회전과 팔의 회전 속도가 비틀려버려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간신히 쓰러지진 않고 몇 발 자국 비틀거렸다. 제기랄, 크게 휘두를 수가 없어! 난바스타드를 늘어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허리 높이에 똑바로 세워들었다. 절대로 휘두르지는 못한다. 젠장,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그 사이에도 내 턱을 때린 좀비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아저씨였 다. 그 눈이 뒤집힌 것이 천만 다행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만일 저 눈이 날 똑바로 본다면 곧장 기절해버릴 것이다. "에에에랏!" 내미는 팔에 맞추어 양 팔 사이로 바스타드를 찔렀다. 크극! 바스타드 는 겨우 끝부분 조금만 들어갔다. 그리고 곧 요동치는 좀비의 몸부림이 전달되어 하마트면 바스타드를 놓칠 뻔했다. 좀비는 괴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고 난 부리나케 뒤로 빠졌다. 그러자 끝부분만 조금 박혔던 바스 타드는 허무하게 빠져버렸다. 좀비의 가슴에선 피가 흘렀지만 저 정도의 상처로 좀비가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제기랄. 위쪽에선 아프나이델의 절망적인 발악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젠 더 이상은! 으흐흑!" "기운 차려! 아프나이델, 이 놈아, 기운 차려!" "엑셀핸드… 미안해요. 난, 난 역시 쓸모없는…" "시끄러워!" 엑셀핸드가 고함을 크게 질렀다. 네리아의 비명이 들렸던 것도 같다. 올라가야 되나? 그러나 좀비는 계속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계속 물러 나버리느라 어느새 여관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버렸다. 이런, 낭패다! 그 때였다. "이야아압!" 여관 주인장 리테들이 의자를 들고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양반이 돌았나? 리테들은 멀리서 의자를 집어던져 내 앞에 있던 좀비를 맞추었 다. 좀비는 콰당 쓰러져버렸다. 할 수 없다! "으아아아!" 난 뛰어올라 온몸의 체중을 실으며 좀비의 목에 바스타드를 꽂았다. 목 을 날리지 않으면 별 소용도 없겠지. 바스타드는 기분 나쁜 충격을 내게 전달하며 좀비의 목을 관통했다. 난 눈을 딱 감으며 좀비의 머리를 걷어 찼다. "어, 우어어어!" 리테들의 비명소리. 젠장, 저 쪽으로 걷어찼나? 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여관 정문으로 달려갔다. 발가락이 부러진 거 아닌가? 난 절뚝거리며 달려갔다. 리테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주위를 살 펴보았다. 샌슨과 길시언은 두 마리의 미친 오크처럼 싸우고 있었다. 길시언은 방 패로도 상대를 때려죽일 정도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고 샌슨은 거의 한 번에 하나씩 상대의 수족을 끊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샌슨의 롱소드에 맞은 좀비들은 모두 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피가 지글거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둘이 매섭게 공격해서 대로는 거의 안정되었다. 그러나 위쪽에 서는? "꺄아아아!" 네리아의 비명 소리다! 기겁해서 위를 보니 발코니 끝에 매달린 네리아 의 모습과 그녀를 붙잡아 올리기 위해 활을 집어던지는 카알의 모습이 보였다. 카알은 활을 집어던지고 허리를 숙여 네리아의 팔을 붙잡았고 그러자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욕설을 퍼부어대었다. "이런 바보 아저씨! 죽으려고! 돌았어요?" 위에서 그 마부가 묵묵히 롱소드를 뽑아들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안돼! 카알은 잠깐 위를 보다가 다시 아래를 보았다. 그는 네리아의 손 을 놓을 수 없었다. 네리아는 몸부림쳤다. 그 때 엑셀핸드의 노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카리스 누멘의 이름으로!" 뭔가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발코니쪽에서 뭔가가 빠르게 돌면서 무수 한 빛을 튀겼다. 윙윙윙윙윙! 엑셀핸드가 도끼를 집어던진 것이다. 날아 간 도끼는 곧장 팬텀 스티드 위에 있는 그 마부를 향했고 마부는 롱소드 로 그것을 막아내었으나 곧 비명을 질렀다. "으어억!" 롱소드가 부러지며 그 부러진 칼날 조각이 마부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 다. 마부는 비틀거리다가 황급히 위로 다시 떠올랐다. 도끼를 던져버린 엑셀핸드가 발코니 끝으로 달려오더니 네리아의 팔을 붙잡는 것이 보였 다. 그러나 그 때 넥슨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넥슨은 꺼리낌없는 태도로 단호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안돼!" 이젠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다. 바스타드를 던질까? 젠장, 저 높이까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난 죽어보자는 심정으로 바스타드를 어깨 위로 당 겼다. 안돼, 이건 미친 짓이야! "이루리일!" 아프나이델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달려들던 넥슨이 갑자기 움 찔하는 것이 보였다. 푸드득푸득! 뭔가가 넥슨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박쥐구나. 그 박쥐가 넥슨의 얼굴에 달라붙은 것이다. 그러나 넥슨 저 놈은 나의 OPG를 가지고 있다. 저 놈은 얼굴에 붙은 박쥐를 떼어내더니 그대로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으아아아아!" 아프나이델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패밀리어의 죽음이 그대로 마법사 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다행히 그 사이에 카알과 엑셀핸드는 네리아를 끌어올렸다. 카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내려갑시다!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 이런!" "거기 섰거라!" 넥슨의 고함소리가 들렸고 곧 넥슨은 발코니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여 관 안쪽을 보니 위에서 뛰어내려오고 있는 엑셀핸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프나이델을 부축한채로 내려오고 있는 카알과 네리아의 모 습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거의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었다. "후치, 이 멍청한 자식아!" 고함 소리. 그리고 뭔가가 내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샌슨인가? 그리고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불덩어리가 내려꽂혔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은 사이에 시오네가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다. 쾅쾅! ================================================================== 7. 항구의 소녀……18. 나는 한참을 날아갔다. 데구르르. 하늘과 땅이 몇 번씩 자리바꿈을 한 다. 온 몸이 부서져나가는 것 같다. 털썩! 엎어진 자세로 포석에 쓸려버린 볼을 들어올리자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샌슨의 모습이 보였다. "새, 샌슨…"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샌슨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 무래도 날 막아준 모양이다. 온통 그을리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 다. 그러나 샌슨은 눈을 똑바로 뜨며 일어나 앉으려 했다. 팔이 미끄러 지며 그는 다시 호되게 땅에 몸을 부딪혔다. 쾅! "으으윽…" "샌슨, 샌슨!" 일어나지지 않아! 이게 내 팔인가? 이게 내 다리인가? 난 힘겹게 일어 나려고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 아무리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여 관에서 달려나온 네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샌슨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보 였다. 그녀는 날 보더니 다시 비명을 질렀다. "후, 후치!" "난 괜찮아요. 샌슨, 샌슨은?" 샌슨은 네리아의 부축을 받아가며 몸을 일으켰다. "너만큼 괜찮아." "그럼 죽을 지경이겠군…" 난 가까스로 턱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곧 엑셀핸드가 내게 달려오더 니 그 강한 팔이 날 일으켜앉혔다. 무지막지한 고통. 난 기절할 듯한 정 신을 간신히 지탱하며 내 키의 반 밖에 되지 않는 엑셀핸드의 품에 기대 어 앉았다. 저쪽에는 아프나이델이 카알의 품에 쓰러져 있었다. 넥슨과 시오네, 그리고 그 마부는 땅으로 내려왔다. 시오네가 뭐라고 중얼거리고 나자 팬텀 스티드들은 다 사라졌다. 그리 고 세 명은 각자의 검을 뽑아들었다. 마부는 한쪽 눈을 다친 상태였지만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사살인가. 이빨 이 맞부딪히는데. "다가오지 마라!" 길시언이 세 명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길시언은 어느새 좀비들을 모두 격퇴시켜놓았지만 그 댓가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다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숨결도 고 르지 못했다. 하지만 길시언은 방패를 앞에 세워들고는 당당하게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멍청한 왕자. 차라리 달아나. 감성은 만족되 겠지만, 합리적이지 못해. 길시언의 짜내는 듯한 협박 소리에 세 명은 멈춰섰지만 그건 그저 웃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나 보군. 시오네가 처음 으로 말했다. "먼저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데." 길시언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노려보았다. 넥슨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시오네는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저 뒤의 세 명, 잘 알지. 무너진 굴 속에서도 도망쳐나왔군. 정말 존 경스러워." 길시언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오네는 갑자기 길시 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길시언 왕자 당신도. 당신 정말 끈덕지군. 그런데 여기서는 오 히려 죽으려드는군. 기이한 일이야." 길시언은 낮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여덟 명이나 되는 암살자들로부터 달아난 자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 려 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뭐라고? 잠깐. 여덟 명의 암살자? 레브네인 호수 옆에서, 그 여덟 명의 암살자 말인가? 나는 몽롱해지려는 의식의 끄트머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길시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놈들… 네가 보낸 것인가?" "그래." "저 분들에게 듣기로, 넌 자이펀의 간첩이라고 들었다. 맞는가?" "어감이 좋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그런데 어떻게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날 죽이게 할 수 있었지?" 시오네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오홋호호! 물론 국왕 전하의 이름으로. 여기 계신 넥슨 휴리첼 국왕 말씀이다. 자이펀의 참된 위대함을 경배할 줄 아는 진정한 국왕의 재목 인 넥슨 휴리첼, 그의 이름이었지." 길시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넥슨은 팔짱을 낀 채 시오네를 노려보고 있었고 시오네는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이름은 바이서스에서 휴리첼로 바뀌게 될 거야." 바이서스에서… 휴리첼로? 젠장. 그ㅉ 이름이, 그까짓 이름이? 이름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거야. 빌어먹을.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 생각은 오 히려 빠르게 진행되었다. 길시언은 말했다. "네가 모든 것의 원흉이었군. 칼라일 영지의 악몽도, 나에 대한 암살 기도도, 그리고 신심 깊은 재가 프리스트가 반역자가 된 것도, 모두 너 때문이었군." 시오네는 마치 수줍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맨 마지막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전하?" 넥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의 의지였지. 난 남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길시언은 이를 갈며 말했다. "절대로 휴리첼이라는 이름이 왕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시오네는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오네는 길시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안될 거라고 생각해? 왕족의 피는 무슨 맛이지?" 길시언은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프림 블레이드를 맹렬하게 거머쥐었다. "할 수 있다면 해봐!" 그러나 시오네는 덤벼드는 대신 손을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냐. 길시언 왕자. 당신은 어차피 죽을 테니까, 죽을 자 에게 협박을 하지는 않아. 난 그런 취향은 없어. 다만 말하고 싶은 것 은, 당신은 당신 혈관에 흐르는 피가 다른 사람의 피와 다르다고 생각 해?" "…다르다." "왕족의 피?" 시오네는 사납게 물어왔지만 길시언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라… 그래?" "나의 의지를 위해 맥박치고, 나의 꿈을 위해 흐르는 나의 피다. 그것 은 다른 누구의 피와도 다른, 오로지 나만의 피다." "그런가? 그렇다면 당신의 피는 지금 당신을 구원하지 못해. 그 피 때 문에 당신은 여기서 죽으려들고 있는걸." 길시언은 밤의 골목길 그 침침한 어둠 속에서 희게 웃었다. "죽음도 내 삶의 한 부분이다. 떼어 놓을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생명 으로 자신의 죽음에서 도망치는 당신 같은 뱀파이어는 알지 못하겠지 만." 시오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입을 벌리며 뱀처럼 사앗- 거렸 다. 번쩍이는 송곳니가 드러난다. "그래. 그럼 그 피를 흘리며 죽어봐. 길시언 왕자. 그 왕족의 피를! 그 리고 휴리첼의 피가 새로운 왕족의 피로 맥박치게 되겠지."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공식 명칭에는 항상 붙는 이름이 있다. 간첩이니까 그 정도는 알 겠지?" 시오네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당신 폐태자는 왕족의 위치를 버리고 백성에게 내려온 자라는 건가?" "천만에. 난 백성에게 내려간 적은 없다." "뭐라고?" "난 무엇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엇을 버린 적은 없다. 내가 버린 것은 내가 아닌 것. 그리고 난 버림으로써 나만을 남겨둘 수 있었다. 길시언. 모험가 길시언." 길시언의 목소리가 우울해졌다.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먼지 날리는 길을 걷고 걸어 이곳 에 선 폐태자. 그는 우리들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 처음 보는 여자가 날 죽이려 드는군. 나에게서 모험가 길시언이 아니라 내가 버린 태자 길시언 바이 서스의 피를 받아내려고 하는군." 시오네는 입술 끝을 올렸다. "너희 나라의 핸드레이크가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간은, 그렇군." 그러나 길시언은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를 앞으로 뻗어 시오네를 겨냥했 다. 시오네는 마치 그 검끝이 자신의 가슴에 닿은 것인양 흠칫하며 물러 났다. "그러나 폐태자 길시언 바이서스도 나 모험가 길시언이 지키겠다. 그리 고, 내 동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험가 길시언으로서 지키겠다. 어 둠의 레이디여. 그대 앞에 선 자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떤 자인지," 길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가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놓듯이 격렬하게 외쳤다. "확인하라!"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파고든다. 돈다. 뭐지? 입에서 어떤 말이 돈다. 들었던 말인데. 길시언은 나의 왕이었다. 지독한 고통도, 자꾸 흐려지는 눈 앞도, 그리고 복받치는 감정의 오열 도 사라졌다. 그는 날 위해 저기 서 있는 기사 중의 기사, 그는 스스로 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인물이었으며, 그것으로써 능히 나의 왕이다. 밤의 어둠도, 고통의 어둠도, 이 참혹한현실이 가져다주 는 어둠 중의 어둠도 내 눈에서 나의 왕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우, 제기 랄! 귓가가 화끈해지는걸. 그게 그거였군. 하하하. "나의… 왕이라고…? 하, 하하하…" "뭐라고? 후치. 이런 말하지마!" 엑셀핸드의 굵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안돼. 이걸 놔. 나의 왕이 저곳에 서 있어. 난 일어나야 돼. 그를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 냐. 그와 함께 서기 위해서 일어나야 돼. 나의 왕과 함께 서야 돼. 난 비로소 300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전설의 대마법사와 하나된 감정에 휩싸 였다. 빌어먹을! 왕을 찾았는데 난 이렇게 쓰러져 누워있잖아. 내가 인 정해주지 않으면 그는 왕이 아니야. 왕일지는 몰라도, 나의 왕은 아니 야. 난 일어나야 돼. 그러나 몸은 자꾸 아래로 늘어질 뿐이다. 시오네는 양팔을 조금 들어보이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자인지는 몰라. 그리고 알 필요도 없어. 죽을 자의 신상 명 세를 모으는 저급한 취향은 없지." 그리고 시오네는 레이피어를 뽑아들었다. 넥슨이 말했다. "시오네. 지금 무슨…" 시오네는 말했다. "내 일을 할 따름이야. 길시언 바이서스의 제거." "그래. 알았다." 시오네는 앞으로 걸어나왔다. 길시언은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 로 서서 우리를 가리고 있었다. "당신은 죽는 것이 좋겠어. 길시언 왕자." "그렇더라도, 지금 여기선 안돼." 시오네는 킬킬거리며 레이피어로 허공을 몇 번 베었다. 어둠 속에서 시 리도록 차가운 검의 잔영이 흉포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길시언은 마치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너무 많이 본 뒷모습이다. 우리 고향에선 꽤 흔하지. 가장 커다란 사람은 등을 보 여주는 사람이야. 내 앞에 서서 날 가려주는 저 등.안돼. 이젠 지겹다. 더 이상 등 뒤에 숨을 수는 없어. 일어나야 돼. "일어나야…!" 그러나 내 몸은 내 의지를 무시하고 다시 힘없이 엑셀핸드의 품에 쓰러 져버렸다. 길시언은 굳어버린 양 저 곳에 서 있는데. 빌어먹을! 내가 왕 시켜줬잖아! 인정해줬잖아. 뒤로 돌아 도망가! 시오네는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죽어."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패를 힘있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시오네 는 곧 앞으로 달려나오려 했다. 그 때였다. "멈춰요." 이건 누구의 목소리지? 시오네는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달려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몇 발 물러났다. 어디선가 들려온 그 목소리는 밤바람에 다 날아가버렸 다. 희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타는 목으로 간신히 침을 삼키며 고개 를 돌려본다. 그러나 어둡다. 캄캄하다. 내가 눈을 감았나? "그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오네는 레이피어를 거두었다. 길시언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지금, 둘은 싸울 수 없었다. 시오네는 이를 갈았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안 보이길래 어디 숨어있는가 생각했지만, 아직도 나타나지 않아서 여기 없는 줄 알았지. 유피넬의 어린 자식. 내 일을 방해하는 것이 벌써 두 번째야." "미안하군요."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은 조용히 걸어왔다. 침침한 골목의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처럼 이루릴은 느닷없이 나타났 다. 등에는 배낭, 여전히 왼쪽에만 두 개의 검을 차고, 밤바람을 닮아버 린 그 검은 머릿결은 풍부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마 침내 평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그러나 이루릴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 았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인간 아 닌 그녀가 우리 인간들의 싸움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다. "세, 세레니얼양!" 카알은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반가움은 엄청났다. 엑셀핸드의 놀람에 찬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았다. 이루릴이 똑바로 보였다. 네리아도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릴! 이루릴! 돌아왔어요! 돌아왔군요!" "이루…릴양." 네리아에게 안겨있는 샌슨은 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왔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목례를 보내고는 곧장 시오네에 게 말했다. "내 친구들에게 대단히 처참한 일을 저질렀군요." 시오네는 웃었다. 그녀는 레이피어를 빙글 돌려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때리기 시작했다. "친구라. 당신, 고귀한 유피넬의 어린 자식 맞는가?" 이루릴은 고개를 약간 숙인채 눈을 위로 떠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일이 날 슬프게 만드는 이상 방해하지 않을 수 없 군요." "천만에. 미안할 것 없어. 나타나줘서 너무 기쁘군." "그랬나요?" 시오네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서 있었다. "한꺼번에 처리해주지."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가세요." "싫다면?" "당신과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친구 아닌 자와 한 자리에 길게 있고 싶지 않아요. 분노의 강이 흘러 증오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 같습니다. 가게 만들겠어요." "만들어보시지." "알겠습니다." 이루릴은 가볍게 말하며 손을 앞에 모았다. 시오네는 흠칫할 사이도 얻 지 못했다. 이루릴의 평온한 동작은 모든 사람에게 주의를 받지 못했고, 그래서 별로 빠르지도 않은 그 동작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작되 어버렸다. "만물을 받치는 힘…" "캐스팅을! 어딜!" 시오네는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루릴은 스르르 뒤 로 걷기 시작했다. 시오네의 날카로운 공격은 밤바람을 끊었으되 이루릴 의 동선을 끊지는 못했다. 넥슨과 마부가 뜻모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 었지만 이루릴은 여전히 뒤로 스르르 움직이며 끝까지 캐스트했다. "만물의 아래에 있으되 가장 아름다운 것의 위에 있는 자여. 파멸을 통 해 영생을 구가하는, 파괴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힘이여. 혼돈 속 으로 불타올라 끝까지 나아가라." 푸화화화화악! 난 까무라치고 말았다. ================================================================== 7. 항구의 소녀……19. 숲이다. 숲을 걸어가고 있다. 내 앞의 나무에서 제미니가 머리를 내민다. "후치 네드발?" "제미니?" "에헤헤." 제미니는 나무 뒤에서 앞으로 훌쩍 뛰어나왔다. 그러다가 낙엽을 밟고 미끄러졌다. 콰당. 나는 크게 웃어버렸다. 제미니는 새빨개진 볼을 부풀 리더니 앉은 채로 낙엽을 거머쥐더니 내게 집어던졌다. 그러나 낙엽은 바람을 타고 흩날려 제미니의 어깨와 머리에 떨어졌다. "이잇츄!" 제미니는 코를 간지럽히는 낙엽에 기침을 했다. 난 껄껄 웃으며 제미니 에게 다가갔다. 제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녀는 머리카락에 커다란 낙엽을 붙인채 내게 말했다. "왕을 찾았다고?" "응." 난 제미니의 머리에 붙은 낙엽을 털어주었다. 제미니는 움찔하다가 떨 어지는 낙엽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왕은 어떤 분인데?" 난 멍청하게 닐시언 전하의 모습을 설명하진 않았다. "왕이란, 뒷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야." 제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뒷모습?" "뒷모습은… 내 앞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 내게 거짓된 표정을 말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난 그 뒤를 따라 걸어가." "호호호." 제미니는 웃더니 그대로 반바퀴 휙 돌았다. 치마가 가볍게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제미니는 뒤를 보인채 낭랑하게 말했다. "나안 여왕이다아!" 난 빙긋 웃으며 제미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건 안돼지. 뒷통수에 키스할 수는 없으니까." "꺄하하하." 그리고 난 제미니를 다시 돌렸다. 제미니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칠흑같은 머릿결 사이로 시오네의 창백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시오네는 내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송곳니가 내 목을 파고든다. "으아아아!" 쾅! 으잉? 정수리에 느껴지는 이 감각은 뭐지? "아이고, 코야! 야, 이 망할 자식아!" 엑셀핸드는 코를 움켜쥐고 펄쩍펄쩍 뛰더니 곧 도끼 자루로 날 후려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곧 하얀 손이 다가오며 엑셀핸드를 말렸다. "그만하세요. 엑셀핸드. 후치는 환자에요." 그 하얀 손의 임자는 길쭉한 귀 사이에 하얀 얼굴이 맞춤하게 자리잡고 있는 미인이다. 그녀는 천천히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이루릴… 이루릴?" "괜찮아요, 후치?" 방 안은 아직 캄캄했다. 왠지 새벽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 는 모르겠지만. 이루릴의 칠흑같은 검은 머리는 촛불빛을 반사하며 붉은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캄캄한 공허 속에서 여전히 촛점 을 맞추어 보기 힘들 정도로 투명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다. "이루릴? 반가워요. 돌아왔군요!" "예. 후치. 다시 만나서 반갑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이루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루릴이 미간을 조금 찌푸리지 않았다면 못알아차릴 뻔했다. 난 황급히 이루릴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아!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을 보니 누워있는 샌슨과 그 옆에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는 내게 눈을 찡긋 하고는 샌슨의 모포를 끌어올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다른 분들은 다 완쾌되셨어요. 그런데 아프나이델씨가 좀 걱정스럽군 요." "아프나이델이? 왜지요?" "패밀리어의 죽음은 그 마법사에게 커다란 충격을 줍니다. 어떻게 보자 면 패밀리어는 정신이 직접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나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넥슨이 그 박쥐…" 그 순간 나는 아까의 처절했던 싸움을 떠올렸다. 어떻게 되었지? "그런데 넥슨은? 그 뱀파이어는?" "도망갔어요." "당신이 쫓아내었어요?" "예." 이루릴은 짤막하게 말했다. 별로 설명이 필요치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 려 엑셀핸드가 흥분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 굉장했어, 후치. 땅이 좌악 갈라지면서 수맥 터지듯이 불길이 솟 구쳐 오르더라고! 그 뱀파이어는 머리끝이 그을려서는 어마 뜨거라 달아 나버렸지! 허허허." "아. 네. 그럼 아프나이델 이외엔 모두들 괜찮은 거군요. 그런데 아프 나이델은 어떻게 되는 거죠?" "정신적으로 충격을 입은 거니까, 달리 치료는 필요없어요. 그 스스로 이겨내어야 됩니다." "그렇군요." 난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니, 뭐가요." "우리가 목숨이 위험할 때 나타나서 우릴 도와주었군요." 이루릴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친구… 이지 않아요?" 난 그만 웃었다. 어두워 더 작아보이는 방 안에 앉아 약간 당황한 엘프 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날 유쾌하게 만들었다. "맞아요. 친구죠. 난 당신이 친구라서, 당신이 친구라는 그 사실이 고 맙고 행복해요." "아, 그런 건가요? 저도 그래요." 이루릴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엑 셀핸드가 이마를 마구 긁어대기 시작했다. "원 참! 그런 얼굴로 잘도 그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하는구만!" 저쪽에서 네리아가 다가왔다. 네리아는 엑셀핸드의 목을 감싸며 말했 다. "에헤. 드워프 아저씨. 좀 낯간지러우면 어때요. 모두 안전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에요." 엑셀핸드는 기겁하며 네리아의 팔을 뿌리쳤고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 렸다. 엑셀핸드는 헛기침을 하면서말했다. "어헛! 으흠, 험! 뭐, 나도 감사하지. 이루릴." "고맙습니다. 엑셀핸드." 난 그제서야 피로를 느끼며 다시 드러누웠다. 이루릴은 모포를 끌어올 려 날 덮어주었다. 난 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풀리니까 무지 피곤하네요. 음. 이루릴?" "말해요, 후치." "갔던 일은 잘 되었어요? 일찍 돌아왔군요." "예. 일이 잘 끝나서 일찍 돌아올 수 있었어요. 뭐, 그것보단 여러분이 빨리 보고 싶어서…" 이루릴은 자신의 말에 흠칫했다. "아… 예. 여러분들을 빨리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발걸음이 바빠졌 어요." 그 말에 엑셀핸드는 온몸을 긁으며 침댓가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네리 아는 입을 가리며 킬킬 웃었다. 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우리는 그 동안 엉망이었어요." "예. 후치가 잠든 사이에 네리아양과 엑셀핸드씨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난 거의 비몽사몽간에 말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엑셀핸드는 치 가 떨리는 표정으로 전해주길, 난 이루릴이 무지무지 보고 싶었으며 이 루릴이 없어서 너무너무 슬펐다는 말을 아주 애처롭게 말했던 모양이다. 에이, 설마? 아무래도 엑셀핸드는 좀 과장한 모양이다. "아프나이델의 상태가 참 걱정이로군." 카알은 묵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보다는 창밖을 바라보며 거북한 기분을 느끼느라 바빴다. 여관 홀에 나있는 창문에는 수도의 시민들이 오구구 모여서서는 우리들 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가 밤중에 이 여관에서 벌인 대활약의 소문은 엄청난 속도로 수도 전역에 몰아친 모양이다. 길시언이 전해주길 이미 어젯밤에 수도경비대원들이 가득 다녀갔다고 한다. 그들은 사건의 전말 을 전해듣고는 지명수배자인 넥슨 휴리첼의 공격으로부터 명예의 기사들 인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개 분대를 파견시켰다. 그래서 유니콘 인 의 주인장 리테들은 우거지상이 되었다. 수도 경비대원들이 삼엄한 경계 망을 펼치고 있는 여관은, 여행객들의 고려대상이 되기엔 마땅찮은 점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길시언은 왕자의 명령으로 수도 경비대원들을 모조리 쫓아보내 었다. 길시언은 정말 편리할 때만 왕자로서 활동하는군. 헤헷. 모험가 길시언이라면서? 그러나 그것은 선량한 마음의 표현이었고 리테들은 크 게 기뻐했다. 수도 경비대원들은 난색을 표명했지만 이미 나버린 소문의 위력 때문에 라도 그들은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이란 주로 이루릴에 대한 과 장된 소문이었다. 어쨌든 여관 앞의 대로에는 어젯밤의 엄청난 난투의 흔적이 잘 남아있으니까 그 소문도 탓할 바는 못된다. 난 오늘 아침에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포석이 단단히 깔린 수도의 대로에 깊이 5큐빗 이상의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주위의 포석들은 강한 열에 의해 포석들이 녹아버렸 다. 그리고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포석들은 가루가 되다시피 부서져있었고 주위의 건물 몇 채엔 어젯밤의 치열한 불꽃에 의해 돌벽이 녹아내리다가 굳은 자취까지 남아있었다. 그래서 지금 바깥에는 수도 시민들이 가득 몰려와 그 광경을 보며 놀라 워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빛의 탑의 고명한 마스터들 몇 명도 몰려와서 는 그 흔적을 검토하면서 서로 엄청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밖에서 그 고명한 마스터들이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는 거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기로 했고 리테들은 치열한 상술을 발휘하여 밖으로 무수한 맥주를 나르고 있었다. "말이 되는 말을 해라, 케이지! 이 흔적이 어떻게 미티어 스웜(Meteor swarm)이란 말인가!" "이덜떨어진 대장장이 피리자니옵스야! 그럼 무슨 마법으로 이 놀라운 흔적을 설명하겠느냐!" "뭐라고? 말 다했느냐! 이 수염도 없는 엉터리 늙은이가!" "크아아악! 이 놈아! 수염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랬지!" 음… 그 고명한 마스터들이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군. 그들이 가장 간 단한 방법, 즉 여관으로 들어와 이루릴에게 물어본다는 간단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해서 저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루릴은 아프나이델을 치료하 고 있어 바쁜 것이다. 샌슨은 몸에 감긴 붕대가 간지러워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는 긁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네리아가 완벽한 감시를 하고 있 었다. 은근슬쩍 상처를 긁으려 했던 샌슨은 네리아에게 손등을 찰싹 얻 어맞고는 축 처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루릴양이 말하길 정신적 충격이라니까 곧 괜찮아지겠지요."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마법사라는 사람들은 정신이 대단히 섬세하다네. 마법사들이 정 신적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들 같은 사람의 그것과는 훨씬 다른 수 준의 이야기일세. 아프나이델이 한 농담이 있지 않은가. 정신병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종은 고위마법사라는." "흠. 그게 그렇습니까." "그렇지. 드래곤 라자를 잃은 드래곤이 폭주한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 들 들어보지 않았는가? 마법사와 패밀리어의 관계도 그것도 마찬가지라 네. 정신적으로 강하게 연결된 두 객체 중 하나에게 주어진 파멸은 다른 하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네." "아아… 그렇군요." 샌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상처 부위를 긁으려 시도하다가 이번 엔 네리아에게 손등을 꼬집히고는 참으로 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길 시언은 관자놀이를 긁으며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넥슨 휴리첼은 다시 달아났습니다. 또 돌아올까요?" "글쎄. 어젯밤엔 우리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 것 아닙니까. 이미 우리 뜻을 확실히 전했으니 또 돌아올 필요는 없겠지요." "복수는 어떻습니까." "그가 복수에 미쳐 자신의 처지, 쫓기고 있는 처지를 잊어버리는 멍청 이는 아니기를 바래야겠죠." 길시언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이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어쨌든 그는 복수 이외엔 우릴 굳이 처치할 필요는 없 겠군요. 프림 블레이드를 탐내서 다가오지 않는다면… 누가 널 탐내! 탐 내는 사람 있으면 그냥 주겠다! 뭐야? 에, 어흠. 그럼 이루릴양에게 부 탁하여 우리 일을 진행해도 되겠군요." "예. 그런데 아프나이델씨가 문제로군요." 그 때 쇠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전 괜찮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루릴의 부축을 받아가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아프 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엑셀핸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아니, 뭐 그저 그의 허벅지 정도를 붙잡은 거지만 그래도 그 의 의도는 부축에 있었을 테니까 부축했다고 말해도 되겠지. 그가 의자에 앉자마자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뻐 했다. "다행이군! 이제 괜찮은가!"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의 조금 지나친 애정 표시에 몇 번 휘청거리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루릴이 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아프나이델씨는 일단은 안전하시지만, 제 생각엔 요양을 취하시는 것 이 좋을 겁니다. 제가 듣기로 인간의 정신적 충격은 재발의 가능성이 높 다고 들었는데요." 카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치가 되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고 요." 엑셀핸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참. 그 정신적인 충격이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건가?" 엑셀핸드는 곧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약한 미 소를 지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은 우리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쉬도 록 하세요." "죄송합니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때 이루릴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붉은 머리 소녀의 추적이라니오?" "아, 예. 그것은…" 카알은 한참 동안 설명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가깝다는 말에 이루릴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드래곤 라자를 찾기 위해 그 붉은 머리 소녀를 찾아야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장시간 에 걸쳐 설명한 다음 끝을 맺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세레니얼양이 동물들에게 부탁하여 붉은 머리 소녀 의 추적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자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물들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우리는 모두 놀랐다. 카알은 입을 딱 벌리고는 뭐라 말도 못한 채 이루 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차분한 얼굴 그대로 설명했다. "겨울철이 가깝습니다. 동물들에게 과중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 다. 이 계절에는 동물들에겐 생존 그 자체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허, 허나 그 드래곤 라자를 찾지 못한다면…" 카알은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루릴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 었다. "그리고, 제가 붉은 머리의 소녀를 알고 있으니 더욱 부탁할 필요가 없 겠지요." "예?" 카알은 거의 일어날 뻔했다. 우리들은 놀란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 고 이루릴은 말했다. "제가 델하파의 항구에 들른 것은 잘 아시겠지요?" "아, 예? 예." "델하파의 항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그런 소녀를 보았습니다." "보셨다고요?" "예." "잠깐, 저, 세레니얼양은 델하파의 항구에 누구를 만나러 가신다고 했 는데, 그 사람이 붉은 머리의 소녀입니까?"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델하파의 항구 주점에서 일하는 소녀였습 니다. 네리아양과 유사한 붉은 머리라서 인상이 깊었어요. 하지만 주점 에서 일하는 소녀에게 뭘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 가 할슈타일 후작의 딸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히 붉은 머리의 10대 후반 가량으로 보이는 소녀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그 때 네리아가 손뼉을 딱 쳤다. "역시! 이루릴은 멋져요! 우릴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구 원해요. 하하하!" "예? 아, 예."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요. 드디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런 소녀를 찾았군요. 가서 확인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길시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델하파의 항구로 출발해야겠군요. 그런데…" "예? 왜 그러십니까?" "델하파의 항구는 일스 공국의 땅입니다. 엘프이신 이루릴양이라면 몰 라도 우리들은 살그머니 국경을 넘는 것이… 그게 아니고! 국경 통과의 허락을 얻어야겠군요." 그러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 카알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난 밝은 얼굴이 되어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자. 짐을 챙깁시다. 델하파의 항구로 가서 그 항구의 소녀를 만나봅시다." ================================================================== 8. 인간의 무기……1. …바다는 대지를 향해 끝없이 다가오고 대지는 바다에서 끝 없이 멀어지려 한다. 가장 깊은 해원의 신비는 차라리 대지 에의 갈구이다. 그러나 인간들 중 하나의 인종이 있어 거꾸 로 바다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부는 오늘도 그 몸을 바다에 던지고, 어부의 아내는 그 눈물을 바다에 던진다. 태 초의 어부이자 최초로 바다에서 실종된 희구와 갈매기의 그 림 오세니아. 그의 아내 시무니안이 흘리는 눈물이 억겁의 세월 동안 바닷물을 짜게 만들었고 오늘도 바다 밑바닥, 그 림 오세니아의 거대한 몸을 조용히 쓰다듬는 혈류의 흐름은 파도로 대지의 시무니안에게 달려간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3 권. P. 527 (770년 돌로메네 作) "이래가지고선… 조심스럽게 후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카알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리고, 곧 호위대장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나타난다. 카알은 묵묵히 손을 들어 우리 앞에 늘어선, 오, 젠장! 오크 무리를 가리킨다. "너무 많습니다." 호위대장 스카일램 트리키는 불평섞인 어조로 말했다. "길을 우회하게 된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토록 많은 오크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두 섬멸하면 그만입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섬멸?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 물론 국 왕 전하께서 직접 사절단의 호위대장으로 선택했다는 무문의 명가 트리 키 가문의 11대손 스카일램 트리키의 기사적 소양과 그 실천의식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섬멸한다는 말이야! 우리 인원 전부 다해봐야 겨우 30명 정도인데. 그러나 카알은 말도 안되는 소리 하 지도 말라고 말하는 대신 점잖게 말했다. "무익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스카일램 트리키의 엄숙한 얼굴에서 딱딱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카알님과 여러분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 권한에 대한 침범은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트리키공의 권한을 침범할 생각은…" "샌슨!" 네리아의 고함소리. "으아아아!" 그리고 이어진 샌슨의 비명 소리에 카알의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서 있는 언덕 아래의 평야에서는 샌슨이 땅에 넘어져 있었다. 가을 벌판에 널려진 죽은 풀들이 흙먼지와 함께 솟구쳤다. 그리고 그 앞 에는 하얀 옷을 입은 기가 막힌 미녀가 날개를 펼쳐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공중에서 거꾸로 내리꽂히듯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샌슨을 찍어누 르려 했고 샌슨은 쓰러진 채로 롱소드를 험하게 휘저었다. 부우우웅! 여자는 샌슨의 롱소드에서 뻗쳐나오는 기운에 밀린듯이 날개를 쫘악 펼 치며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녀는 샌슨의 롱소드를 피해 다시 위로 올라갔고, 그 사이에 샌슨은 몸을 굴려 일어났다. 똑바로 일어선 그는 무서운 눈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곧, 다시 눈이 풀려버리고 만다… 저 오우거! 네리아가 다시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질렀다. "샌스은! 이 바보야, 제발 정신차려엇!" "어, 어엇!" 샌슨은 네리아의 악에 받힌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고, 그래서 간 신히 그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여자의 손톱을 피할 수 있었다. 샌슨 스스 로도 돌아버릴 지경일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이상한 자세로 섰다. 그러자 여자는 기합을 질렀다. "합!" "응?" 샌슨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았 다. 저런, 저런! 샌슨의 입가가 다시 스르르 올라갔다. 여자는 가차없이 손톱으로 샌슨의 가슴을 할퀴었다. "크으윽!" "아아악!" 네리아의 비명 소리와 함께 샌슨은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라면 갈비뼈에 닿는 부상일 것이다. 샌슨은 뒤로 데굴데굴 굴러가서는 벌떡 일어났다. 가슴에 섬뜩하게 그어진 세갈래 핏길에서 선혈이 흘러내 리고 있었지만, 샌슨은 그것보다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이 더 약 오른 모양이다. "제기랄, 그런 느끼한 눈짓 하지 말고 제대로 싸우잔 말이다!" 여자는 샌슨이 일어나는 것, 게다가 씩씩하게 고함까지 지르는 것을 보 고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래도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는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안되겠는걸. 역시 괴물 초장이가 앞으로 나오시지?" 그러자 곧 그녀의 뒷쪽에서는 100여 마리의 오크들이 함성을 질렀다. 오크들은 글레이브로 하늘을 찌르며 고함소리를 질렀다. "와악! 취취취취치! 그래, 덤벼라, 그 뾰족한 콧대를 내밀어봐!" "괴물 초장이! 취익! 어디 갔냐? 어서 나와봐!" "취취취취! 쿠헬! 괴물 초장이도 남자다! 절대 못이긴다!" 저 망할 놈들. 나도 남자니까 저 헬메이드(Hellmaid)를 상대할 수 없다 는 것은 둘째치고, 난 지금 OPG가 없단 말이야. 난 그저 냉엄하고 쌀쌀 맞아 보이는 표정을 보내주기 위해 애쓸 뿐이다. 호위대원 중 척후병으로 앞서가던 2 명에게서 들판 가득히 오크의 군단 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조심스럽게 달려 왔다. 그래서 우리는 녀석들을 우회하여 보다 좋은 지형, 그러니까 언덕 위에서 오크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이만저만 많 은 것이 아니다. 도열한 오크의 군단을 보는 순간 나와 샌슨, 그리고 카 알은 차라리 웃고 싶어졌다. "이번엔 정말 많이 모아왔는데…?" "으응… 그렇군. 허허허." 그렇게 나와 샌슨이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미소를 짓는 가운에 호위대 장 스카일램 트리키는 드디어 자신이 나라의 은공에 대한 보답을 할 자 리를 찾았느니 뭐니 하면서 우리와 호위대원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 런데 저 놈들은 분명히 언덕 위의 우리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살거 리 바깥에 멈추어선채 달려들지 않았다. 우리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 는 가운데, 오크들 중 한 놈이 걸어나오더니 1대1로 붙자고 제의해왔다. "1대1로 붙자고?" "그렇다! 취익! 우리는 10의 10배다! 하지만 싸우면 둘 다 다친다. 취 익!" "그래서?" "1대1로 붙자! 취익! 그래서 우리가 지면 물러난다! 취익! 그러나 그쪽 이 지면, 취취칫! 괴물 초장이와 두 명을 내놓아라!" 괴물 초장이와 두 명은 서로 쳐다보고는 서로의 얼굴을 향해 한숨을 쉬 어주었다. 그리고나서 샌슨은 먼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고 나서 당당하게 아 래로 내려갔다. 스카일램은 호위대장인 자신에게는 일행의 호위에 대한 최우선적인 의무가 있으니 자신이 나가겠다고 거의 떼를 쓰다시피했지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활을 들어올렸을 뿐이다. 혹시나 1대1 어쩌고 하다가 한꺼번에 달려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스카일 램 역시 호위대원들에게 활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오크들은 여전히 화살 거리 바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언덕을 다 내려간 샌슨은 롱소드를 뽑아들며 말했다. "내가 하지. 누구냐?" 샌슨이 내려서자 오크들은 대단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괴, 괴물 초장이가, 취익! 아니라?" 샌슨은 얼빠진 얼굴이 되더니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왜, 괴물 초장이와 싸우고 싶어?" 그 말에 잠시 오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뭐야, 저 놈들은? 내 가 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어쨌든 잠시 후에 오크들 중 왠 녀석 이 걸어나왔다. 샌슨은 자신의 상대로 나온 오크가 다른 오크들에 비해 오히려 덩치도 작고 가냘파보여서 어처구니 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오크는 뒤 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빨을 꽉 깨물고는 갑자기 대거를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뭐, 뭐야?" 샌슨뿐만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우리 모두가 크게 놀랐다. 그 오크는 자신의 가슴을 찌른 채 무슨 못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오 크들은 놀라지도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루릴은 눈 썹을 크게 찌푸렸다. "이 기운은…?" 그리고 갑자기 오크의 몸은 땅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진흙탕 위에 던져진 동전처럼 땅은 유동체가 되어 오크의 몸을 받아들였다. 그 리고 곧 땅은 핏빛으로 물들어갔고, 그 핏빛의 땅 가운데가 커다랗게 입 을 벌렸다. 샌슨은 다부지게 롱소드를 겨누었다. 그런데 크게 입을 벌린 땅 속에서 한 마리 거대한 새의 비상처럼 솟아오른 것은 푸른 날개와 붉 은 날개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것이 저 아름답고 화려한 날개를 가진 지옥의 숙녀 헬메 이드였다. 오크들은 나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내가 나갈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헬메이드가 공포스러운(어흠, 흠!) 괴물 초장 이를 물리쳐주면 그 즉시 돌격해서 싹 쓸어버린다는 식의 작전을 세운 모양이다. 괴물 초장이라도 남자는 남자니까, 남자들을 몽롱하게 만들어 버리는 헬메이드 앞에서는 당연히 꼼짝 못할 것이다, 뭐 이런 것이 오크 들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거 정말 대단하다. 오크 수준에서 나온 생 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거의 천재적이다. 나는 저 놈들이 내가 OPG를 잃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억울해할까를 생각하며 속으로만 웃어주었 다. 내가 어떻게 오크들의 작전을 아냐고? 그렇지 않다면야 저게 1대1 대결 구경하는 꼴이냐? 모두 돌격 자세로 글레이브를 꼬나들면서서로간에 기 세를 올리기 위해 "르르! 힘내라! 취익! 집중해서! 취익! 괴물 초장이만 나오면!" 등의 속 드러나는 함성을 지르고 있는데, 내가 카알이 아니라 도 그 정도는 짐작하겠다. "퍼억!" 잠시 딴 생각하는 사이에 샌슨은 다시 헬메이드의 주먹을 맞았다. 샌슨 은 말도 안되는 고함소리를 마구 지르며 물러났다. 정말 골치아픈 노릇 이다. 샌슨은 어떻게든 상대를 보지 않고 싸우려 했지만, 상대를 보지 않고 싸운다는 것이 처음부터 말이 안된다. 그래서 이루릴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루릴은 샌슨이 발이 미끄러질까봐 주의하며 힘들게 내려간 언덕받이 를 단 세 발자국 - 세 번 날았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 에 뛰어 평지 에 내려섰다. 헬메이드는 흠칫해서 물러났고 샌슨은 이루릴을 마치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루릴마저도 마치 해 질 무렵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는 듯한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쉬세요. 샌슨. 이 대결은 공정하지 못해요." "이, 이루릴양. 그럼…." 샌슨은 자신이 한심해 죽겠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헬메이드에 게 끔찍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곧 샌슨의 얼굴은 해맑은 미 소로 바뀌고 말았다. 이루릴이 그의 어깨를 흔든 다음에야 샌슨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 러났다. 오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여자고, 또한 엘프다. 오크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취에에엑! 어딜 달아나는 거냐! 끝까지 싸워라!" "취익취익! 비겁하다! 비겁하다!" 이루릴은 무표정한 얼굴로 헬메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1대1로 싸우자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당 신은 남자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니 내가 싸우겠 습니다." 굉장하군. 네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헬 메이드가 헐떡거리며 목에서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 엘프! 엘프!" 조금전과는 상황이 거꾸로 되어 헬메이드가 이루릴에게 위압감을 느끼 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어라? 그거 신기하네? 헬메이드는 지금까 지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이를 갈고 헐떡거리며 손을 사납 게 흔들어대기는 했는데 전혀 앞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루릴은 천천 히 에스터크와 망고슈를 뽑아들고는 양손에 쥔 검을 그냥 양쪽에 늘어트 린 자세로 서서 헬메이드를 바라보았다. 헬메이드는 고양이 만난 쥐 모양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피리소리 같은 희한한 숨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오크들은 당황했다. "취이잇칙! 암흑의 숙녀여!" "르르! 이, 이런!" 오크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난 언덕을 올라 오는 샌슨을 끌어당기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 됐어요. 도망갈 걱정은 안해도 되겠는데요?" 스카일램과 토론 중이던 카알은 다시 언덕 끄트머리로 다가왔다. 스카 일램도 같이 걸어왔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고, 조금 후 카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 저 부조화와 불합리의 산물인 헬 메이드가 겁을 먹지 않을 수 없겠군." 스카일램은 완전히 감동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릴은 차분히 헬메이드를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결국 헬메이드는 못견디게 되어 버렸다. "끼요요욧!" 헬메이드는 느닷없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헬메이드는 공중에서 날개를 촤악 펼치더니 세차게 몸을 돌리기 시작했 다. 곧 그녀의 붉고 푸른 화려한 날개에서 깃털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 작했다. 파파파팟. 이루릴은 옆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깃털은 거의 빗발처럼 쏟아졌고, 나 라면 죽었다 깨도 못피했을 정도로 세차게 몰아쳤다. 그러나 이루릴은 그렇게 가볍게 뛰면서 캐스팅했다. 곧 그녀의 몸 주위로 실프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실프의 바람은 헬메이드의 깃털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까하아아압!" 헬메이드는 깃털 폭풍으로 시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이루릴에게 급 격히 뛰어내렸다.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잡아채는 모습이다. 그 급속한 움직임과 실프의 바람 때문에 잠시 허공에 소용돌이가 생겨났고 그 소용 돌이는 헬메이드의 깃털을 그러모아 거대한 장막을 형성했다. 이루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악!" 네리아와 내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깃털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두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맙소사!" 스카일램의 근엄한 비평이 들리는 가운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뻣뻣하 게 서 있는 이루릴의 옆모습과 커다랗게 나가떨어져 있는 헬메이드의 모 습이었다. 땅에 뒹굴고 있는 헬메이드의 날개는 아름다운 깃털에 피가 엉켜 눈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이루릴이 이겼어! 나와 네 리아는 펄쩍펄쩍 뛰면서 덩실덩실 춤을 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헬메이드는 웃기 시작했다. "하하핫하! 패배를 시인하는가?" 이루릴은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루릴의 반대편 어 깨에 난 커다란 상처가 보였다. 그렇다면 헬메이드의 날개에 엉긴 피는? 이루릴은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볼을 감쌌다. "이루리일!" 네리아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카알이 재빨리 그녀 의 팔을 붙잡았다. "뛰어내리면 안되오! 오크들이 달려들거요!" 네리아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지만 카알 은 입술을 꽉 깨문채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악에 받힌 고함 소리 들을 질러대었지만 그 목소리는 오크들의 함성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았 다. 이루릴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마치 앉아있는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취이이! 보았느냐! 나와라, 괴물 초장이! 우헷헤헷!" "괴물 초장이! 어서 나와라! 르르 취이잇!" 좋아, 나가주지. 나가준다고! 스카일램이 내 어깨만 놓는다면 지금 당 장이라도 내려가주겠어! 헬메이드는 땅에서 일어나 웃으며 이루릴을내 려다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우리쪽을 올려다보았다. "졸개들은 그만 내보내라! 괴물 초장이가 누구냐? 머리를 내밀어라!" 카알은 분노에 덜덜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 놈들은 아직까지 네드발군에게 겁을 먹고 있어서 함부로 덤비지 않 고 있다. 그렇지만 네드발군을 내보낼 수야 없지. 트리키공." 스카일램은 무거운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단호하게 말했 다. "남자는 헬메이드와 싸울 수 없소. 도망가야 합니다. 아시겠소?" 스카일램은 목에 걸린 것을 간신히 끌어내리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당신도 남자요! 제발, 왜 이러시오?" 스카일램은 그 말에 다시 침을 삼켜대었다. 아래쪽에선 여전히 헬메이 드와 오크들이 우리에게 삿대질과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스카일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8. 인간의 무기……2. "그러나, 지금 달아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 은 곧 우리 뒤를 추적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명령받은 것은 사절단이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일스 공국에 도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 니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게다가 저 아래에 계시는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양은 어떻게 합니까?" 카알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스카일램은 다부지게 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나가보아야… 당신도 남자입니다. 될 리가 없습니다." "해봐야 압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네리아가 말했다. "그를 보내죠?"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우리 뒷쪽을 향했다. 카알은 놀란 표정이 되었고 스카일램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리아는 말했다. "그는 남자긴 남자지만 좀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눈으로 싸우는 거라면 그가 가장 낫지 않을까요?" 카알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다가 손뼉을 쳤다. "맞소! 그가 있군. 트리키공." "안됩니다!" "아니, 네리아양의 말이 옳습니다. 내가 보증하지요. 그 외엔 방법이 없소." 스카일램은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카알은 기다 리지 않았다. 카알은 즉각 몸을 돌려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호위대원들 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의 직속상관인 스카일램을 바라보았다. 스카일 램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카알 헬턴트님!" "농담이 아니오. 난 당신보다는 그를 잘 알아요. 그리고 그도 이런 황 야에서 오크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달아나지는 못할 거요. 부탁하겠소, 트리키공." 스카일램은 한참 동안 카알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래의이루릴을 바라보 았다. 그의 얼굴에 무서운 고민의 흔적이 지나쳤지만 군인답게 고민의 시간이 길진 않았다. 스카일램은 호위대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대원들은 즉각 마차로 달려갔다. 그 마차는 튼튼하게 만들어진 죄 인 호송용의 마차였고, 호위대원들은 열쇠를 꺼내어 마차 문을 열었다. 삐이이-걱. "이리 나와!" 마차의 철문이 열리고 호위대원이 고함을 지르고나서 잠시 후, 햇살을 가리기 위해 눈썹 위로 손을 펼친 남자가 마차 밖으로 나왔다. 남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호위대원들을 바라보았고 호위대원들은 우리쪽으로 손 짓했다. 그러자 남자는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운차이. 당신 이외엔 방법이 없구려." 운차이는 무표정하게 카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에까지 들리더군요. 알겠습니다." 샌슨은 신뢰 어린 동작으로 자신의 롱소드를 운차이에게 내밀었다. 운 차이는 롱소드를 들고 몇 번 휘저어보았다. 호송 중인 죄수에게 무기를 건네주는 모습을 보는 스카일램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근엄하게 체통을 지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매서운 눈으로 운차 이의 동작 하나하나를 노려보았다. 운차이는 잠시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곧 가벼운 동작으로 아 래로 뛰어내렸다. 그 때까지 우리에게 야유를 보내던 헬메이드는 남자가 하나 뛰어내려오 자 곧 경계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오크들에게 물었다. "저 자가 괴물 초장이인가?" "취, 취익? 아, 아니오?" "뭐야? 이런. 또 졸개를 내보내는 건가!" 헬메이드는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는 침을 삼키며 언덕받이에 몰려섰다. 언덕을 다 내려간 운차이는 헬메이드를 흘깃 바라보았다. 헬메이드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운차이에게 말했다. "이봐! 너 말고 괴물 초장이에게 나오라고 그래. 죽고 싶은가?" 운차이는 그 말에는 댓구도 하지 않고 이루릴에게 걸어갔다. 이루릴은 그 때까지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운차이는 이루릴을 바라보다 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간신히 언덕 위의 우리에게까 지 들려왔다. "마비됐군." 마비라고? 독이란 말인가?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혼잣말 하듯이 말했 다. "그래. 헬메이드의 깃털은 강력한 마비를 일으키지…" 운차이는 이루릴을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헬메이드에게 걸어갔다. 적당 한 거리를 둔 채 운차이는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커다랗 게 외쳤다. "이봐, 후치! 저 여자에게 그 미모에는 경배를 보내되 그 목숨에는 경 배를 보낼 수 없다고 전해줘워!" 스카일램은 놀란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정도 의 해괴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난 참으로 한심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아 래쪽으로 고함질러주었다. "라고 했다아!" 네리아는 딸꾹질을 시작하는 샌슨에게 공감의 시선을 보내며 함께 딸꾹 질을 하는 동지애를 발휘했다. 딸꾹, 딸꾹. 헬메이드의 얼굴은 필설로 형용할 수 있는 한계를 가볍게 벗어나고 있 었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입은 쫘악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운차이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언덕 위의 나를 바라보았다. 헬메이드는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말한 건가?" "후치! 그렇다고 전해줘어!" "라고 했다아!" 헬메이드 뒷쪽의 오크들마저도 르르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그들은 모두 비죽한 송곳니를 번쩍거리며 침까지 조금 흘리고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헬메이드는 크게 숨을 쉬어 자신을 진정시키며서 말했다. "자, 잠깐. 그러니까 내게 직접 말하지 않고 저 소년을 통해 말한다는 것인가? 그런 거야?" "후치! 지금껏 어떻게 지옥의 숙녀가 저 지저분한 오크의 소환에 응했 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눈치가 엉망이라서 아무나 부르면 좋아라 뛰 어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해줘어!" "라고 했다아!" 헬메이드의 얼굴에 결코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 했다. 하긴 너무 황당무계한 일을 당했으니만큼 즉각 화를 내지 못한 것 을 탓할 수는 없겠군. "이 놈! 내게 장난치는 거냐!" "장난은 정신 수준이 비슷한 사람에게 칠 수 있는 것이라고 전해줘어!" "라고 했다아!" "으아아! 뭐야, 이건!" 헬메이드는 발칵 화를 내더니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러자 운차이는 롱소드를 들어올려 헬메이드를 겨냥했다. 헬메이드는 롱소드에서 반사되 는 은광에 주춤하더니 곧 씩씩거리며 운차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둘 은 그렇게 잠시 동안 대치했다. 갑자기 헬메이드는 뒤로 튕기듯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녀의 놀란 목소 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운차이는 매몰차게 웃었다. 헬메이드는 크게 당황했다. 헬메이드는 다 시 한 번 운차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지만 운차이는 싸늘하게 마주볼 뿐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헬메이드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숨막히는 어투로 말했다. "너, 너!" 헬메이드는 참으로 두렵다는 듯이 말했다. "…여자냐?" "푸하하하!" 기어코 네리아는 샌슨의 어깨를 두드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운차이는 싱겁게 웃으며 롱소드를 내리며 말했다. "눈빛이 흐릿해서 의심쩍었는데, 확실히 눈이 엉망인 것을 알게 되었다 고 전해줘." "라고 했…" "그만! 도대체 뭐야! 장난칠 기분이 아냐! 너, 너 도대체 어떻게 된 녀 석이냐?" 내 말을 끊으며 헬메이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운차이는 그 말에 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 다. 갑자기 운차이는 눈을 떴다. 그러자 곧 헬메이드는 덜컥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으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쿠다당. 운차이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헬메이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 다. "Ahn choudarii. Nanysanchee ama Rekijarklapi… Pecaii!" 헬메이드는 자신이 주저앉았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와 누운 자세의 중간쯤 되는 자세를 자연스럽게 유지하며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운차 이는 롱소드를 팍 들어올려 헬메이드의 가슴을 겨냥했다. 헬메이드는 마 치 검에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Ahn choudarii!" "으아아아아아!" 헬메이드는 땅을 박박 긁으며 뒤로 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날개가 있 으면서 날아오를 생각도 못하고 있다. 운차이는 즉각 앞으로 뛰며 사납 게 롱소드를 휘둘렀다. 은제 롱소드에서 번뜩이는 살벌한 검광에 지옥의 숙녀는 가중된 공포를 느꼈다. 운차이는 맞추기 위해 휘두른다기보다는 겁주기 위해 휘둘렀지만 이미 겁에 질린 헬메이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 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뒤로 기어가다가 곧 쓰러졌고 그대로 몸을 굴려 일어 나더니 미친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구르느라 뽑혀나온 깃털들 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스카일램은 입을 딱 벌렸다. 오크들은 갑자기 일어난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어떤 반응을 취해야 될지 짐작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헬메이드는 오크들의 대군이 앞을 막 아서자 그제서야 날개를 펼쳐 비틀거리며 날아올랐다. 몇 번이나 제대로 못 떠오르고 위태위태하게 날개를 퍼득이던 헬메이드는 간신히 오크 무 리와 충돌하지 않고 날아올라 곧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오크들은 멍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헬메이드를 바라보다가 새로운 공포 를 느끼며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옆으로 적당히 늘어 트린 자세였다. 게다가 조금 비스듬하게 서서는 삐딱한 눈길로 오크들을 쏘아보았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스카일램에게서 숨소리같이 낮은 말소리 가 들려왔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록크로스 해변의…" 흐음. 스카일램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유명한 모험을 이야기하는 모양이 군. 하지만 록크로스 해변에서 300여마리의 오크들과 대치하던 루트에리 노 대왕은, 사실 등 뒤에 핸드레이크라는 엄청난 지원세력을 갖춘 상태 였지. 지금 운차이는 혼자서 100 마리의 오크들과 대치하고 있다. 발이 움직이고. 운차이는 스르르 걸어갔다. 적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산책이라 도 하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는 그냥 그렇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의 무서운 시선은 오크들을 물러서게 하고 있었다. 오크들은 달아나버 리는 헬메이드의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지금 헬메이드를 달아나게 만든 자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있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취에엑! 괴, 괴물 눈알이다!" 오크들은 당황하며 물러났다. 호위대원들의 감탄 소리가 높았다. 오크 들은 떨리는 글레이브를 내밀어 운차이를 겨냥하긴 했지만 앞으로 걸어 나올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오크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고함 을 질렀다. "취에에엣! 한 놈이다! 덤벼라!" 그러나 오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오크가 외쳤다. "안돼, 안돼! 췻취치익! 괴물 초장이는 아직 나오지도, 취익 않았다! 췻르!" 그러자 곧 오크들은 외경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으로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언덕 위의 나를 쳐다보았다. 난 되도록 험악하게 보이기 위해 콧김을 푸릉거리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목이 부러져라 뻣뻣하게 뒤로 젖혀 오크들을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내 모습을 보더니 곧 입을 틀어막더니 뒤로 달려가버렸지만 다른 호위대원들은 꼼짝도 하 지 않고 활을 잔뜩 당겼다. 빠아아아. 언덕 위에서 겨냥된 20여개의 활보다는 나 때문에 더 겁먹었다면 내 자 존심에 도움이 되겠지. 오크의 속마음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 크들은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이라는 심리적인 공포와, 그리고 20개의 활이라는 현실적인 두려움 때문에 달려들지 않았다. 그 놈들은 서서히,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운차이가 고함을 질렀다. "Peca!" 오크들은 괴성을 지르며 용맹스럽게 뒤로 돌아 달려갔다. "취이이익!" 스카일램 트리키 호위대장은 자신이 호송하는 죄수에게 최대한의 경의 를 표현해야했다. 혼자서 눈짓만으로 100마리의 오크를 달아나게만든 죄수니까. 그런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스카일램은 품위를 잃지 않 고 정중히 운차이에게 감사했다. 멋진 군인이야. 일스 공국로 출발하는 사절을 맡겠다는 카알의 말에 닐시언 전하는 크 게 기뻐했다. 아마 그는 카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모 양이다. 카알은 자신이 델하파의 항구에 들러 붉은 머리의 소녀를 만나 보기 위해 그 임무를 수락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성은에 어긋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신임장 수여, 임명장 수여, 아샤스에 대한 감사와 축원의 기도, 빵빠방 빵빠방, 좀 시끄러워지고, 제법 요란해지고, 꽤 번쩍거리고, 그리고 우 리는 약간 우중충한 날씨에 바이서스 임펠을 출발할 수 있었다. 인원은 간단했다. 카알의 말, 아니 펠레일의 말에 의하면 바이서스로서 는 12월까지 루펠만 해안을 차지하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일스 공국과의 회담은 최대한 빨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로서도 급하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품위나 예의는 잠시 접어두고 최대한 빠른 진행을 위해 단순하게 구성했다. 카알의 말에 의하면 원래 국가 사절에는 상인, 학자, 유학생들뿐만 아 니라, 음악가, 미술가, 작가 등 온갖 종류의 예술적 소양을 덧붙일 수 있는 사람들이 따라다닌다고 한다. 그것은 사절의 품위를 높여주는 것이 며 동시에 두 나라간에 문화 교류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라 한다. 하 지만 지금은 사태가 사태니만큼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 ================================================================== 8. 인간의 무기……3. 먼저 스카일램 트리키 자작이 20명의 호위대원들과 함께 우리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바이서스 사절인 카알, 그리고 샌슨과 나, 이루릴, 네리아가 함께 가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패밀리어의 죽음으로 심한 충격을 받아 요양해야 했으므 로 우리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엑셀핸드는 그런 아프나이델을 간호 하기 위해 남았다. 카알은 길시언에게 함께 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길시언은 자신의 말에 충실했다. 자신에겐 위험이 따라다니므로 수도를 벗어나서까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말. 그래서 우린 길시언과 아쉽 게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일스 공국에 가서 증언하기 위해 자이펀의 간첩인 운차이가 우 리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운차이는 호송되는 것이 지만 그것은 스카일램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들은 동행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저녁식사 시간에 샌슨과 운차이가 서로 건배를 나누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스카일램씨가 이빨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 고 튀어나올 정도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어 차마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 하진 못했지만, 샌슨은 그 대신 술잔을 들고 호송 마차로 걸어가 마차 안에 있는 운차이에게 잔을 건네주고 철창 사이로 건배함으로써 스카일 램을 괴롭히고 있었다. "죄수에게… 주류를 지급할 수는 없습니다." 스카일램은 그렇게 말했지만 샌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취한 사람이 어떻게 달아나요." 스카일램은 분통이 터질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샌슨, 네리아, 이루릴에게는 공식 직함이 없다. 일괄적으로 수행원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스카일램은 샌슨에 대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정할 수 없어서 분통 터지는 모양이다. 스카 일램도 엄밀히는 수행무관이지만, 샌슨도 하는 행동으로서는 수행무관이 다.(우헤헤. 나도 그렇지 않나?) 그러나 스카일램은 공식적인 호위대의 대장이며, 따라서 그에게 샌슨은 받들어 호위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 '군인' 스카일램은 이런 불명확한 관계가 그렇게 유쾌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확실한 상하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호위대원들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헤, 헤헤. 물론 불쌍한 스카일램씨는 사병들 노는 곳에 상관 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래서지금 그는 우거지상을 하고는 우리들이 몰려있는 횃불가에 앉아 있었다. 이루릴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이의 얼굴이 검붉다. 탁탁 튀는 불티들이 잠깐의 자유와 극도의 열정을 허공에 그리고 있다. 불티의 탄생-비약-정열-소진. 저것도 하나의 생애라면, 저 불티는 우리 인간을 너무 느려터지고 답답한 놈들이라고 생각하겠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멍청한 생각을 한 댓가로 차를 조금 흘렸다. "턱받이가 필요하니?" 네리아의 톡 튀는 듯한 말. 허헛. 네리아는 손수건을 꺼내어 내 턱을 닦아주기까지 한다. 왠지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지는데. 취사병이 가져다 준 커피를 마시며 카알은 스카일램에게 대화에의 참여 기회를 선사했다. "트리키공. 일스 공국에는 가보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좋은 곳인가요?" "예. 바닷바람 닿는 곳 어디라도 해원의 신비가 어리지 않은 땅 없겠지 만 일스 공국은 유난히도 그 신비로움에의 발디딤이 깊은 땅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대답에 카알은 잠깐 짓눌려버렸다. 허, 허허허. 저 군인 아저씨가 왜 저러시나? 그러나 나는 곧 그가 어디서 읽은 글을 외운 것 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런 감동도 없이 말하고 있는 표정을 보니 알겠군.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트리키공의 감상은 어떠시오?" "예?" "트리키공께서는 그곳에서 무엇이 마음에 드시오?" "제가… 말씀이십니까?" 스카일램은 곧 명상하는 얼굴이 되어 고민에 잠겼다. 우리는 참을성있게 기다리며 각자 커피, 와인, 차 등을 마시면서 기다 렸다. 저쪽에선 샌슨과 마차 안의 운차이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 누는지 샌슨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핫하! 사방의 몬스터들이 다 도망가버리겠다. 따라서 우린 안전해. 네리아가 머리카락을 꼬다못해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엉겨버릴 정도가 되었을 때 스카일램은 말했다. "어부가 마음에 들더군요." 카알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부? 물고기를 낚는 어부를 말합니까?" "예. 가장 거대한 적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싸움 자체를 잊어버 리고 싸움을 싸움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그 과묵한 사람들이 인상적이 었습니다." "그런가요. 흠. 어부라. 농부 역시 거대한 적과 싸우지 않습니까?" "대지는 늙어죽은 농부 이외에는 농부를 삼키지 않습니다." 의외로 재치있는 스카일램의 대답에 카알은 밝은 표정이 되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하하하." 스카일램도 무조건 군인이라고 부르면 안되는, 그런 사람이군. 샌슨을 봐. 저게 경비대장이냐? 괴물딱지지. 날 보라고. 나는… 에… 참 할 말 없군. "푸핫하하! 괴물 눈알!" 마차에 비딱하게 기대어 서서 마차 안의 운차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샌 슨이 다시 크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싱긋 웃어버렸다. 카알 은 모포를 꺼내어 둘러쓰고는 책을 꺼내었다. 이루릴은 곧 윌 오 위스프 를 불러내어 카알에게 보내었다. "아, 이런. 감사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보시면 눈에 해로와요." 이루릴은 낮에 입은 상처 때문에 어깨에 붕대를 감고 팔은 고정시켜 둔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없는 듯하면서도 푸근하게 미소짓고 있었 다. 그녀는 아마 벼랑에 매달려 있거나 드래곤의 입 속에 들어간 채 있 어도 무표정하면서 약한 미소를 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인 생은 어떤 것일까? 수백년의 이야기, 아니 그녀는 200살이 좀 넘었다지. 200년의 추억은 어떤 것일까. 17년짜리 추억을 가진 나로선 물어봐야 이해를 못하겠지. 그런저런 생 각을 하던 끝에 나는 약간 멍청한 어조로 불쑥 이루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루릴은 델하파에서 뭘 했죠?" 이루릴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질문했나? "아, 실례가 된다면 죄송하고요." "아뇨. 실례랄 것은 없습니다만. 전 어떤 사람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 다." "흔적이라고요?" "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 난 신경끄고 자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 도 내일 새벽엔 또다시 죽을 고생을 해야 될테니까 빨리 자두는 것이 좋 겠다. 아아, 피곤해. 모포 속에 드러누워 있자니 잠시 후에 샌슨이 돌아 오는 것이 보였다. 카알은 샌슨을 불러들였다. "여보게, 퍼시발군." "예?"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을 일러줌세. 잘 듣고 기억하게나." "아, 예." 그리고 카알은 뭐라고 말했지만 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으으. 새벽이 오는 것이 두렵다. "다리 그 따위로 놀릴 거야?" "얼씨구, 엉덩이가 춤을 춘다. 흐늘흐늘해가지고. 눈 똑바로 못 떠?" 이건 너무해! 왜 인간이 오우거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꾸지람을 들어야 하냐고! 호위대원들은 얼빠진 얼굴로 샌슨의 시범을 보았다가 곧 나에게 참으로 불쌍하다는 식의 시선을 보내어왔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샌슨에게 호승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안개 자욱한 11월의 숲속이었다. 낙엽을 밟을 때마다 부스러지는 서리의 소리가 뽀드득뽀드득 들려온다. 네리아는 추위를 잔뜩 타는 고양 이처럼 모포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보고 있었으며 이루릴은 언제나처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책을 읽으며 메모라이즈 중이었다. 카알은 진지한 표정으로 취사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사병이 뭐 볼게 있다고? 사실 카 알은 취사병 옆의 위치가 가장 따스하다는 이유를 높이 사고 있을 것이 다. 그렇긴 하겠지만, 여기 와서 샌슨 좀 말려줘요, 카알! "이거 뭐야! 몇 번 말했어? 완전히 감으란 말이야!" "낮다! 높다! 틀려, 더 가볍게! 아냐, 더 힘껏!" 난 결국 몸서리를 치며 고함지르고 말았다. "으으아! 제발 좀 쉬운 걸로 가르쳐줘! 난 인간이란 말이야!" 난 인간이다. 따라서 저 오우거처럼 저런 짓은 못한다. 아니, 어떻게 똑같은 힘으로 상하좌우 여덟 번을 찌르고 베고 후리냐? OPG만 있었어도 어떻게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못한단 말이다. 샌슨은 나에게 OPG가 없어진 지금, 제미니를 시집도 못간 과부로 만들 수는 없느니 어쩌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아침마다 내 귀를 붙잡 아 끌고는 훈련을 시킨다. 차라리 고향에서 터너에게 배울 때가 나았지, 이건 죽어도 못하겠다. 그러나 샌슨은 나의 모든 항변의 말들을 하등의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 로 치부해버리고는 계속 날 닥달 중이다. "연결세 3번, 연속 동작 다시 해봐!" 좋아, 하지! 한다고! 먼저 어깨 위에서 발검 준비, 앞으로 뛰며 치고, 오른쪽으로 베고, 왼쪽으로 베고, 오른쪽으로 베고, 왼쪽으로 베고, 위 로 올렸다가, 다시 뛰며 치고, 발을 빼며 검을 어깨 위로 올려 상단 막 기, 그 자세에서, 그 자세에서, 그 자세에서… 딱! 어이구, 젠장. "반대로 돌며 뒤로 베기!" 바우우웅! 샌슨의 시범. 저게 칼에서 나는 소리냐? 마차 안의 운차이가 싱긋 웃고 있다. 하지만 호위대원들은 넋나간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 다. 나는 악에 받혀서 검을 휘둘렀다. 으잉? 왜 내 검이 더 큰데 소리가 전혀 안나는 거야? 몇 번을 더 반복한 끝에 간신히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할 수 있었 다. 그러자 샌슨은 아주 담담한 얼굴로 엄청난 말을 했다. "백 번이라고!" "그럼. 백 번 실시다." "오늘은 여행 안할 거야?" "물론 하지. 너도 우리 따라오려면 빨리 백 번 하는 것이 좋을 텐데? 못하면 놔두고 간다." "오십 번! 절대로, 무슨 일과 어떤 일이 있어도!" 샌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온갖 야비한 수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오십번으로 타협이 되었다. 난 이 차가운 겨울 아침에 땀을 질질 흘리며 그 얼어죽을 연결동작을 해야 되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던 스카일램은 고개를 묵직하 게 끄덕이더니 곧 날 구경하는 호위대원들에게 할 일이 그렇게 없냐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래서 호위대원들도 일제히 창술 훈련에 들어가야 했 다. 따라서 나와 20명의 호위대원들은 그야말로 한 마음 한 뜻으로 샌슨 에게 증오의 시선을 보내며 서로간의 진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먹여줄까?" "그래주면 정말 고맙죠." 그러자 네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스프를 떠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난 그것을 받아먹으며 슬픔이 가슴을 저미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아버지 의 창술 수련이 생각나는군요. 흑흑흑. 팔다리가 아파서 스푼도 못들겠 다. 네리아는 친절하게도 빵까지 찢어서 입에 넣어…주다가 내가 씹으려 는 순간 확 빼내었다. 윽. 장난감이 되었다. 비참해라. 네리아는 깔깔거 리며 계속 날 가지고 놀았고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그 모습을 보 았다. "네리아. 후치에게 빵을 줄 의도가 없다면 왜 그런 의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죠?" 네리아는 두 말 없이 내 입에 빵을 던져넣었다. 왁왁.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 우리는 이스트 그레이드를 거대하게 감싸 고 있는 붉은산맥으로 향했다. 붉은산맥을 넘어서면 곧 산맥과 바다 사 이에 끼어 있는 일스 공국이 나타난다고 한다. 카알은 일스 공국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산맥과 바다 사이의 협소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는 일스 공국은, 그래서 인지 전략적으로 병탄 필요성이 적은 지형이며 그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공국이 성립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일스 국민들은 바이서스어를 사용한 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자이펀어나 헤게모니아어 역 시 별로 어려움없이 말할 수 있다 한다. "바이서스어를 사용해요?" "그렇다네, 네드발군. 사실 성직자들과 마법사들이 그토록 오가며 우리 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단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이상 대륙 전체에서 같은 말을 쓰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네. 흐음. 자네 방언이라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방언이요?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같은 말인데 지방에 따라 조금 다른 말을 말하지." "같은 말인데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어떤 곳에서는 어머니를 오머니라고, 팔을 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이해가 되겠지." "예? 바보 아니에요? 왜 그렇게 말한다는 거죠?" "그거야 사람들이 서로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로 오래 살게 되면 그런 것이 생긴다네. 자네도 한 번 생각해보게. 어떤 지역과 다른 지역이 바 다나 산으로 가로막혀 오가지 못한다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는 가?"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말이네. 그런다고 말이 달라지나요? 부모에게 자식이 그대로 말을 배우는데?"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진다네. 조금씩의 차이가 생기면서 많은 세월이 지나면 커다란 차 이가 생겨난다네." "하지만… 우리나라엔 그런 것 없잖아요?" "바로 그걸 말하고 싶었다네. 마법사들은 엄청나게 떨어진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마 법사들이나 성직자들은 대개 학문적으로나 뭐로나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우리 나라엔 방언이 없다네. 하지만 마 법이 발달되기 전에는 그런 방언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네.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기만 읽어보아도 그런 방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아주 괴상한 말이군. 방언이라니. 허헛, 참.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해가 안되네. 그렇다면 방언이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 이야기 를 나눈 것일까? 흠. 혹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는 않았을까? 카알은 계속 유창하게 말했다. "사실 몇 번에 걸쳐 마법사들이나 성직자들은 대륙 공용어를 만들어내 자고 한 적도 있지. 우리들이야 외국까지 돌아다닐 일은 없지만 그들은 얼마든지 서로 말을 전달할 수 있으니만큼, 공용어를 만들면 편할 테니 까." "오, 괜찮겠네요? 그런데?" 카알은 이루릴을 흘깃 보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학문적 요구는 정치적 장벽을 넘기 힘들다는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 을 뿐이지." "예?" "인류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성직자들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외국인과 다른 말을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네. 그래야 민족애를 느낄 수 있다는 거지." "헤에? 그건 좀 이해가 가네요. 흠흠. 그런데 왜 일스 공국에서는?" "그 사람들은 삼국 어디와도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니까." 지금의 일스 공국의 일스 대공은 바이서스와 자이펀, 헤게모니아 삼국 에 조공을 바치고 있기는 하지만 조공은 그렇게 대단한 양이 아니다. 삼 국 모두가 일스 공국에 대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만으 로 일스 공국은 공물에 대해 조금 푸념을 한다든지 삼국의 상인들에게 간혹 무거운 관세를 매긴다든지 하는 정도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 아, 물론 삼국 중 어디라도 단독으로 얼마든지 일스 공국을 점령할 수 있으 므로 일스 공국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울 정도로, 그러나 상대의 자존심은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게 행동하고 있다. "라고요?" "그래." "저, 그렇다면 일스 공국은 그렇게 가치도 없는 땅인데 뭘 먹고 사는데 요?" "삼각무역이라네, 네드발군. 삼국에서 각각 흔한 상품을 사들여 부족한 곳에 파는 거지. 그들이 삼개 국어를 모두 잘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네. 특히 요즘은 헤게모니아와 자이펀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남기겠지. 우 리와 자이펀이 전쟁 중이므로 헤게모니아의 상인들은 우리 나라는 통과 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일스 공국을 경유할 것 같네." "흠. 그런가요. 어? 잠깐. 그렇다면 자이펀의 상인들도 일스 공국에서 만날 수 있겠네요?" "물론 그렇다네. 혹시나 일스 공국에서 자이펀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조 심하세나. 우리나라가 아닌만큼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되네." "흐음. 예. 알겠어요." 나와 카알은 말 위에서 기분좋게 흔들리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옆에서 걷고 있던 네리아가 카알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요.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데요?" 네리아가 몸을 지나치게 기울여서 카알은 크게 놀랐다. "아! 위, 위험하오!" "괜찮아요, 카알 아저씨도. 걱정말아요. 그런데 얼마나 남았어요?" "아. 내일 아침엔 도착할 수 있을 거요." "헤? 이루릴은 왔다갔다 하는데 열흘 넘게 걸렸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사흘만에 도착하는 건가요? 우리는 말에 타고와서 빠른 건가?" "아, 내일 아침엔 일스 공국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델하파의 항구까지 가려면 또 시일이 걸릴 거요." "음. 그럼 대충 시간이 맞네. 와. 그럼 이루릴은 말타고 달린 것과 똑 같은 속도로 왔다갔다 한건가?" 그 말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이루릴이 생긋 웃었다. "숲을 달렸으니까요." "훌륭해요." 그 때 마차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따라오던 샌슨이 말했다. "이봐, 괴물 눈알!" 운차이는 왁왁거리며 댓구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썩 편하다는 입장 인 모양이다. 비록 강금 마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차니까 앉을 수도, 혹은 누워 있을 수도 있다. 샌슨과 발목을 묶여서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며, 그래서 마차 안에서 운차이의 느긋한 목 소리가 울려나왔다. "왜 불러?" "그 기술 나도 가르쳐줄래?" 마차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운차이가 창살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창틀에 팔을 올려놓고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겁주는 눈빛 말이야. 살기라고?" 운차이는 냉랭하게 웃었다. "너처럼 둔한 녀석은 안돼." "뭐야!" 샌슨은 눈을 부라렸지만, 곧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누구에게 눈싸움을 거는 거야. 마차는 달그닥달그닥. 말은 타박타박. 이스트 그레이드는 우리 발 아래 로 쉼없이 흘러가고, 우리는 붉은 산맥으로 들어섰다. ================================================================== 8. 인간의 무기……4. "다바다!" "뭐라고?" "아, 아니 바바다!" "후치…" "으아, 바다다!" 바다구나. 저게 바다구나. 우와, 신기하다. 물이 너무너무 많다. 심하 게 많다. 수평선에서 항구를 향해 들어오는 조그만 범선들의 모습이 흰 점으로 보인다. 사실 조그만 범선은 아니겠지. 하지만 산기슭에서 내려 다 본 바다의 넓은 수면과 범선의 모습은 평야에 던져둔 흰 꽃잎 같다. 배들의 뒤로 길게길게 이어지는 항적들에서 하얀 길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 하얀 흔적 끄트머리의 배는 너무 작아 보인다. 이른 아침의 태양이 바다에 뿌린 햇살들이 파도에 넘실거리며 수면을 구른다. 으아, 바다다! 바람에선 희한한 냄새가 난다. 비릿한 듯하면서 뭔가 강렬하다. 이상하 군. 민물고기에선 이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비릿한 걸 봐서 물고기 냄새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럼 무슨 냄새지? 평야에서 부 는 바람과는 너무 이질적인 바람이 분다. 나와 샌슨은 좀 심하게 코를 벌렁거리고 있어서 카알과 이야기를 나누 던 일스 공국의 국경수비대 대장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수행원들이 초행인 모양이군요." "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군요." "아, 말씀 낮추십시오. 귀하는 귀국을 대표하시는 사절이시고, 전 국경 수비를 맡고 있을 뿐입니다.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산 가운데 조그맣게 자리한 바라크지만 그래도 엄연한 국경 수비대였 다. 그래서 그 안에는 마굿간도, 병기고도, 그리고 사절 대접용 식당도 모조리 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조찬을 대접받고는 국경 수비대장의 안내 를 받아 일스 공국으로 들어섰다. 산 위에서 바다를 볼 때는 꽤 가까워 보였는데 어떻게 된 것이 가도가 도 끝이 없었다. 어쨌든 산길을 꾸준히 걸어가다 보니 정오쯤 되어 평야 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게 델하파의 항구에요?" 이루릴은 내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후치. 델하파의 항구는 해안선을 따라 훨씬 더 올라가야 되요. 여긴 그저 국경에 인접한 조그만 포구일 뿐이랍니다." "아, 그래요? 이게 조그만 포구인가요?" 이렇게 커다란 항구가 조그만 포구라고? 그것 참. "예. 이곳도 꽤 크긴 하지만 델하파의 항구는 훨씬 더 거대하답니다." "허어." 그 항구 마을의 이름은 세들레스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바이서스의 사절단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 와 환호를 보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효가 그 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 붉어지는 장면이다. 11월의 바닷바람 이 매서운데 저렇게 바알간 코만 내놓은 차림으로 나와서는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이다. 아이구 부끄러워라. 그런데 그들은 외국 사절의 기이한 모습에 꽤 놀라는 모양이다. 사절단 에 포함된 아름다운 엘프와 거마를 탄 처녀의 모습은 당연히 기이한 모 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아쩍은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가 서로에게 이 야기를 걸었다. "바이서스에선, 여기사들이 많은가 보지?" "그래도 엘프 기사 이야기는 못들어봤는데." 난 그들의 발음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국경수비대장의 발음은 거의 흠잡을 데 없는 바이서스 발음이었다. 그 런데 이 마을 사람들의 발음은 우리와 고저가 조금 달랐다. 아하! 저게 그 방언이라는 건가? 하지만 별로 많이 다른 것도 아니네, 뭐. 어쨌든 단어나 문법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퍽 감명을 받은 표정으로 환호의 수준을 높였다. 이루릴 은 별 표정 없었지만 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샌슨 이 제발 품위를 지키라고 억압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손을 흔들었을 것이 다. 세들레스 마을의 대로를 그렇게 환호를 받아가며 걸어간 끝에, 국경 수 비대장은 마을의 커다란 공회당으로 안내했다. 공회당인지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변 대로를 따라 걸 어가다가 약간 높은 해안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그 커다란 건물은 이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한쪽면은 완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 건물 내의 전망이 퍽 좋을 것 같았고 벽에는 두툼한 판자들이 대어져 있어 사나운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난샌슨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지붕에 왜 밧줄을 매는 거지?" 샌슨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글쎄? 아! 태풍이나 바닷바람에 날려가지 말라고 그러겠지." "아, 그래?" 하긴 바람이 정말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좁은 골목길에도 최소 세 가지 종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람의 도 시라고 하면 어떨까. 공회당 안까지 우리를 안내한 국경 수비대장은 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시는대로 나우르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우르첸에 서 수도에서 오신 영접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카알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 식사? 흠. 겸손한 표현이군. 만찬 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는데? 공회당 안의 1층은 전부 넓은 홀이었는데 지금 그 넓은 홀 가득히 테이 블이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에 앉았다. 갖가지 요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무엇보다 내 눈 길을 사로잡는 것은 테이블 가운뎃자리에 놓여 있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머리는 도마뱀처럼 생긴 괴물이었는데 발은, 와, 저런 발은 도대체 어떻 게 걸을까? 마치 통나무 같은 발이다. 그런데 등에는 단단한 방패를 둘 러쓰고 있었다. 난 다시 샌슨의 허리를 찌를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모, 모르겠는데? 왜 테이블 위에 몬스터를 올려놓는 거지?" 그래서 난 반대쪽에 있는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려버렸 다. 네리아는 하얀 얼굴로 입을 크게 벌리고는 그 괴물이 덤비면 곧장 달아나버리기 위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조금 띄운 상태였다. 스카일램이 우리를 구원했다. "바다거북이다." "바다거북이오?" "음. 일스 공국의 유명한 요리 중에 하나다." 이루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바다거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통 째로 먹나? 잠시 후 우리의 시중을 들기 위해 젊은 처녀들이 몰려왔을 때야 난 그것을 어떻게 먹는지 알 수 있었다. 처녀들 중 하나가 바다거 북의 등의 방패를 살짝 떼어내자 그 안에 온갖 양념이 되어 있는 살이 보였고 거기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정말 이상 한 취미로군. 왜 요리에 원래 모습이 남아있도록 하는 거지? 이루릴은 아예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바다거북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처녀들이 접시를 날라와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아 이구 맙소사! 이 지방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가 뭘 먹는지는 확실히 알아 야 된다고 생각하나보지? 내 앞에 놓여진 접시에는 물고기가 거의 완벽 한 원형을 보존한 채로 허연 눈을 내게 흡떠 보이고 있었다. 물론 살은 저며저 있고 거기에 양념도 되어 있는데다가 요리도 잘 되어 있었다. 하 지만 그 커다란 생선의 머리와 꼬리는 완전하게 남아있었고, 그래서 난 왜 음식물과 눈싸움을 하면서 먹어야 되는 건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요상한 취미네? 몇 번에 걸쳐 놀랐기 때문에 잠시 후 커다란(유 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저렇게 크다니!) 가재가 접시에 담겨 나타 났을 때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 가재 역시 요리는 되었지만 완전한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확실히 맛으로 음식 이름 맞추기가 싫은가봐. 척 보면 알도록 해놓는데?" "응. 그런가봐." 스카일램은 근엄하게 우리들에게 그 바닷가재 요리의 우수성과 희귀성, 그리고 높은 영양가와 더없이 훌륭한 맛에 대해 설명해주었지만 우리는 찜찜한 표정으로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네리아는 비싼 음식이라는말을 듣기가 무섭게 얌얌거리며 먹기 시작했지만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로 조 심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음식물의 맛뿐만이 아니라 그 생물의 모습까지도 사랑 하는가 보군요." "그런가 보네요." 샌슨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하긴, 우리도 돼지 바비큐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지." "그건 그래도 거의 모습이 안남잖아. 그리고 그걸 직접 먹나? 베어내어 서 먹지." "뭐, 다들 먹고 건강하게 사는 음식이니까 우리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샌슨은 역시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간단히 말하고는 요리에 달려들었 다. 난 되도록 요리가 맛없어서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원래 소식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면서 점잖게 식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되도록 진저리를 치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예의바르게 홀 에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니 곧 맹렬한 바닷바람이 볼을 때렸다. 우화! 속이 다 후 련해지는 것 같네. "하아아아압. 휴우우우우" 절벽 위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건물 앞의 넓은 마당에서 주위를 둘 러보니 모두가 수평선이었다. 더군다나 하늘엔 먹구름이 끝도 없이 펼쳐 져 기막히게 넓어 보였다. 난 주위의 경관에 질려 조금 주춤하다가 마당 한 켠에 세워져 있는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에는 두 명의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운차이를 감시하느라 연회에 초대되지도 못하고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마 을 사람들이 가져다 준 것인지, 어쨌든 그들은 빵과 케익 몇 종류, 그리 고 고기요리 한 접시와 와인 한 병을 들고서는 서로 기분좋게 주고 받으 며 소탈하게 식사중이었다. 그들은 날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 벌써 식사 끝내셨소?" "말 놓으세요. 전 후치에요. 후치 네드발." 두 사람은 자기 소개는 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들은 마시던 술병을 나에게 건네주었고 난 감사히 받아 마셨다. "안으로 들어가 식사하시죠? 마차는 어차피 잠겼잖아요?" "아, 명령이야." 호위대원은 간단히 대답했고 난 별로 할 말도 없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술병을 돌려준 다음 운차이는 어쩌는가 싶어서 마차 뒤로 돌아가 문의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차이 역시 빵과 와인, 접시 하나를 가지고 대충 식사를 하고 있다가 창쪽이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는 날 바 라보았다. "비켜라, 어둡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차 뒷문의 발판에 앉았다. 마차의 싸늘한 쇠장 식이 등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눈 앞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광막한 바다 가 보였다. 그리고 수평선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회색의 먹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거기 있냐?" 등 뒷쪽 마차 안에서 울려나오는 운차이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발을 구를 때마다 마차가 울리니까." 흐음. 그러고보니 난 발판에 앉은 채 발을 흔들고 있었군. "그 안 춥지 않아요?" "어머니 품 속 같지야 않다. 구름 때문에 어둡기도 하고." 난 고개를 돌려 마차 문에 귀를 댄 채로 멍하니 옆쪽을 바라보았다. "바깥도 별로 밝지는 않아요. 컴컴하군요." "비가 올 것 같군." "예?" 운차이가 뒤척거리는 것인지, 마차가 조금 울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운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한 것을 볼 거야." 위를 올려다보자 운차이는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는 창턱에 팔을 모아 기대서 있었다. 무슨 굉장한 것을 본다는 거지? 그러나 잠시 후 난 그것이 뭔지 깨달았다. 후두두둑. 마차 앞쪽에서 호위대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랑비인데 뭐. 그리고 난 마차 발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운차이가 말 한 굉장한 장면, 기가 막힌 장면을 보게 되었다. 겨울 바다에 비가 오는 것이다. 쏴아아아… 머리 위 마차 지붕에서 빗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졌지만 그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굉장했다. 저 넓은 바다에 비가 오는 것이다. 마치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쏴아아아… 주위가 온통 희거나 회색이었 다. 그리고 바다 표면을 비가 때렸다. 바다 표면이 튀어 올랐지만 이 먼 거리에선 그저 아련하고 신비로운 흰색과 회색의 일렁거림일 뿐이다. 짓 누르는 회색 사이로 촛점없이 흔들리는 바다, 저 거대한 해수면과 저 거 대한 하늘이 빗방울로 이어지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빗방울들. 너무 나 많은 하얀 실과 은실이 눈에 보이는 곳, 모든 곳에서 세로로 뻗어 있 다. 해수면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자잘하게 섞여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수많은 하프현이 동시에 흔들리는 소리처럼 아련하게 들려왔 다. 쏴아아아… 상쾌하면서도 우울한 빗소리. 회색빛 겨울 바다에 내리 는 빗소리. 어느새 수평선은 희미해져 보이지 않고, 주위는 온통 우윳빛 의 세계다. 현실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와있는 것 같은, 부드럽고 촉촉 한 공기와 빗방울들. 휘- 휘휘- 휘- 휘리릭휘- 운차이는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민채 휘파람을 불었고, 그리고 그 아래 발판에서는 내가 앉아 빗방울 그려지는 하늘을 보았다. 운차이는 말했 다. "내 고향은 사막이지. 이런 광경은 내겐 현실 이상이야." "행복한가요?" "지금은." "지금 외엔 생각지 않고?" "생각은 부질없어." 쏴아아아… "전향해서, 새롭게 살 거야." "그럴 건가요." "네 말이 도움이 되었다.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들어는 가야지." "만들어 간다고요?" "인생을." 쏴아아아… ================================================================== 8. 인간의 무기……5. "어젯밤 모닥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불티가 하나의 생애라 면, 불티는 우리들이 까무라칠 정도로 느리고 답답하게 살아간다고 생각 할 거라고. 그런데 빗방울은 어떨까요." "바다는 어떨까." "예?" "신은 어떨까." "할 말 없군요." "할 말이 없으면 안되지. 인간이니까. 무슨 말이든 해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국왕 전하께서 약속했나요? 제대로 증언하면 살려준다고." "목숨 외에 많은 것을 약속했어. 난 이제 일스 공국의 수도 바란 탄에 가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세상에 다시 없을 악의 소굴이라고 말 해야지. 그리곤 적당히 댓가를 받는 거지. 고국이 내게 줄 수 있는 마지 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 발 앞에 어느새 물구덩이가 생겼다. 마차가 굴러오느라 생긴 바퀴자국 에 물이 고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면에 빗방울이 좁은 파문을 그려나 갔다. 수면에 부딪혔다가 비산하는 물방울들이 어지럽다. 마차 지붕의 쇠장식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 탕 타당, 탕탕. "그리곤, 자이펀도, 바이서스도 다 상관 없는 땅으로 가서 살아갈 거 야." "우리 고향에 오세요." 운차이는 머리를 불쑥 내밀어 날 내려다보았고 난 머리를 조금 기울여 위를 보았다. 어느새 머릿카락은 비에 젖어 눈을 찔렀고 그래서 난 젖 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말했다. "우리 고향은 바이서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살만한 동네지요. 그리고 거기 가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꽤 도움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에요." "왜지?" "몬스터가 많아요." 운차이는 차갑게 웃으며 다시 앞을 보았기 때문에 난 그의 턱을 보게 되었다. 난 다시 고개를 내려 발 근처에 흩어지는 빗방울들을 보았다. 운차이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런 동네에 오라는 거냐?" "예. 카알의 말에 의하면, 그 때문에 우리 마을은 정말 괜찮은 마을이 래요." 운차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별로 대답하진 않았다. 빗줄기들 이 기분좋게 시야를 가려 마을의 모습은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했다. 쏴아아아… 운차이의 목소리마저 내 귀까지 날아오는 동안 젖어버리는 것 같다. "하긴, 몬스터가 많을 거라는 것은 짐작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흉폭 한 몬스터는 지금 식당 안에 있고?" 그 때 공회당 문이 열렸다. 나와 운차이는동시에 돌아보았다. "어라? 비 오네?" 가장 흉폭한 몬스터의 얼빠진 목소리였고, 그래서 나와 운차이는 동시 에 킥킥거렸다. 비는 그치고 하늘은 푸르렀다. 하얀 구름 몇 조각이 유유히 비개인 오 후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국경 수비대장의 인도를 받으며 우리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세들레스 의 시민들은 다시 우리들에게 환호를 보내었다. 뭐 특별히 기쁜 일이 있 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자기 나라를 찾아준 손님에게 보내는 것 같은 예의 바른 환호였다. 그들은 그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시간까지 환호를 보낸 다음 정중히 자기 일로 돌아갔다. 세들레스 마을을 벗어나 해안을 따라 나있는 길을 걷게 되었다. 고개 돌려 포구쪽을 보았다. 비가 개이자 곧 출항준비를 하는 어선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 두 사람 이 충분히 다룰 것 같은 나룻배들이었고 주로 낚시를 들고 나서는 모습 이었다. 아하. 아마 저녁거리라도 준비하러 나가는 모양이지? 흠. 집 앞 에 무진장한 음식 창고를 가진 사람들이로군. 그들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품위있는 걸음걸이와 느긋한 태도로 나 룻배를 저어 앞바다로 나갔다. 흰 구름아래로 수평선을 지향하여 고요 히 떠가는 나룻배들이 이제 작은 점들처럼 보이게 되었다. 해안을 따라 길은 계속되었고 나른한 오후였다. "하아아아…픔." 네리아는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우뚱거렸다. "많이 먹었더니 졸린다아. 음냐." 바람은 짭짤하지만 부드럽게 불었다. 아무리 비가 왔다지만 오전과 오 후가 이렇게 다른 날씨라니. 네리아는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에보니 나 이트호크를 운차이의 마차 옆으로 붙였다. 그리곤 마차 위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지붕 위에서 에보니 나이트호크에게 말했다. "너 혼자서도 잘 갈 수 있지?" 마부석에 앉아 있던 병사들이 쓴웃음을 짓는 가운데 네리아는 마차 지 붕 위의 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졸기 시작했다. 에보니 나이트호크 는 잠시 당황했고, 그러자 이루릴이 미소를 지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러자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별 투정도 부리지 않고 이루릴의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쪽에서는 샌슨과 스카일램이 국경 수비대장과 함께 걷고 있었 다. 스카일램 트리키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 그는 자신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 전방을 날 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하긴 국가 사절을 호위하고 있으니만큼 지금의 이 여정은 그의 경력뿐만 아니라 그의 자존심 전반에 걸쳐 획기적이면서 도 인상적인 일이어야 마땅하겠지만 지금 그 호위당하고 있는 사절단들 이 너무나도 방만한 태도로 임하고 있어 국가 사절 수행이라는 엄격한 분위기를 크게 희석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스카일램은 그것이 마음에 들 지 않아서 자기 혼자서라도 엄하고 강직한 표정을 지어보이려 애쓰는 것 일 게다.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았다. 지금 스카일램과더불어 전방에서 말을 걷 게 하고 있는 샌슨은 한쪽 손으로만 고삐를 쥔 채 다른 손은 실에 꿰어 목에 걸어둔 반지를 꺼내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이서스 임펠에서 산 그 반지이다. 그윽하고도 충만한 행복감으로 반지를 바라보는 샌슨의 저 헤벌레한 표정은 스카일램의 표정과 대비를 이루어 스카일램의 기분을 대단히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나른한 거지? 난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호위대원들 20여명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린다는 것은 이상하다. 왜일 까. 왜 이다지도 나른하고 푸근한, 약간은 지루한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 까. 카알에게 물어보았다. "기분이 너무 나른한데요?" "응? 아, 바닷바람 때문이겠지." "그런가요?" "바다는 영원한 아버지이니까요." 대답은 이루릴에게서 들려왔다. 뒤에 따라오고 있던 이루릴은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우리들 옆에 섰 고, 그러자 에보니 나이트호크도 점잖게 따라왔다. 저 거대한 흑마는 확 실히 그냥 걸어도 점잖기 그지없다. 위에 네리아가 타고 있지 않으니 확 실히 알 수 있는데 그래. 카알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예. 최초의 선원이자 최초로 수장된 그림 오세니아를 말씀하시는가 보 군요." "그림 오세니아의 혈류가 흐르는 땅은 시무니안의 아들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불러일으키니까요."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로서 다가오기도 하지요." 카알과 이루릴의 저 정겨운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시무니안의 아들이 뭐죠?" "뱃사람을 말한다네, 네드발군." "뱃사람 말인가요?" "그렇다네. 그렇다고 해서 배를 타는 현실적인 뱃사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세. 모든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이니까. 그 런 의미에서의 포괄적인 뱃사람을 말하는 거지." 비유는 참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카알은 계속 말했다. "뱃사람들은 그들의 어머니 시무니안을 박차고 아버지 그림 오세니안에 게 달려가지.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수평선에 해가 떨어지면, 역시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 시무니안에게 돌아온다 네. 그들은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의 바다에서 투쟁하며, 그들의 마음 의 고향은 언제나 따스한 대지 시무니안이라네. 하지만 따스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지에발붙일 수 없지." "…가끔은 대화 상대의 나이를 생각해주세요."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카알은 빙긋이 웃었다. "그건 이런 말이네. 세상의 모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떼를 쓰며 사랑하 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사랑하지. 어머니의 말은 모조리 반대하며 따 르고, 아버지의 모습엔 반발하며 모방하지." "전 어머니가 없어서 모르겠어요." 카알은 흠칫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위로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뿐이다. "자네는 그래서 스마인타그양을 자네의 어머니처럼…" 간신히!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무 슨 망발을? "카, 카알! 도대체 그런 진위판단불가적 망발성농후기담을 들려주는 이 유가 뭐죠!" "한 번 더 말해보라면…" "당연히 못하죠."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카알은 다시 웃었다. 이루릴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예. 어쨌든 인간에겐, 아니 대지에 발디딘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뱃사 람의 기질이 있고, 그들의 아버지인 바다를 걸으며 무기력한 느낌을 받 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슨 말이야? 난 이루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요. 아버지 옆에서는 무기력해진다고요?" 그 대답은 반대쪽의 카알에게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최초로 만나는 신격대응물이라서 그러하네." "카아아알! 도대체 뭔 말이에요?" "시간이 자네의 이해를 도울 걸세."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기다리지. 이루릴은 잠시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영원한 아버지… 대지에 발디딘 우리가 영원히 두려워하며 사랑해야 되는 저 바다. 무섭고 두렵고 진저리쳐지는 애정이 함께하는 바다로군 요." 이런, 이루릴마저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네. 난 잠시 볼이 부었다 가 말했다. "이루릴." "예?" "델하파의 항구에 아버지로서의 바다를 보러 간 거였어요?" 이루릴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누굴 만나보러 간다고 그랬지요. 그리고 엊그제는 누구의 흔적을 찾으러 간다고 하셨지요?" "예.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누굴 만나보러 갔었어요." "예. 그게 바로 아버지 바다였어요? 도대체 누굴 찾으시는데요?" 이루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난 무안해진 나머지 사과 하려고 했다. 내가 입을 막 열려는 순간에 이루릴이 말했다.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입니다." 나와 카알만이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와 카알만이 얼떨떨한 표 정을 지었다. 카알이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자취를 추적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카알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다가 대답했다. "핸드레이크를… 300년전의 인물의 자취를 왜 추적하시는 것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들려주실 수 없는 이야기입니까?" 이루릴은 잠시 카알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 다. 우리들의 말과 네번째 말인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300년의 역사에 아 무런 관심이 없는 듯 그들의 역사를 걸어가고 있었지만, 말 위의 우리들 은 잠시 현실을 벗어나 300년의 바다에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핸드레이크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아실 겁니다." 이루릴은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카알은 그래서 이루릴의 볼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껏 대륙에 나타났던 마법사들 중 전무후무한 클래 스 9 마스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클래스 9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마법사들은 여럿 있었습니다만, 클래스 9를 마스터한 마법사 는 없습니다." 카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100 명의 데스나이트를 물리쳤다는 저 무지개의 솔로쳐도 클래스 9 마법을 사용하기는 했습니다만 한 번도 자신이 클래스 9의 마 스터라고 말하지는 않았지요. 자신이 클래스 9를 마스터했다고 말한 마 법사는 핸드레이크뿐입니다." 이루릴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 그리고 하나의 클래스를 마스터한 자는 다음 클래스의 마법을 개 척할 수 있습니다." "개척… 한다고요?" "지금은 인간들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더라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네요. 왜냐하면 핸드레이크 이후로는 아무도 클래스 9를 마스터한 자가 없었고, 그래서 마법사들은 선학들에 의해 이미 개척된 것들만 익힐 뿐 새로운 것을 개척할 수 없게 되었으니 까요." 카알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계단 꼭대기에 오른 자만이 새로운 계단을 만들 수 있는 것이군요?" "예. 좋은 비유세요. 지금의 마법사들은 그저 같은 클래스의 마법을 조 금 개조하거나 손질하기만 할 뿐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지는 못 합니다. 물론 그러한 연구는 활발합니다. 많은 새로운 마법들이 계속 연 구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새로운 마법이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마법들을 가공한 것일 따름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마법이 나타난 것은 이미 너무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까…" ================================================================== 8. 인간의 무기……6.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예.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하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 다. 하지만 그가 창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없지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에 대한 기록의 양이 참으로 적으므로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군요." "예. 정확하게 조사해 보기 전에는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했는 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카알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세레니얼양은 핸드레이크의 자취를 추적하여 그가 클래스 10 의 마법을 창조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예." "왜… 왜 그 마법이 창조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겁니까? 호기심이나 학문적인 요구입니까?" "아니오. 전 그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예?" 카알이 되물었지만 이루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 우고 싶다고?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가 하는 일에 의미를 묻지 말라고 했지요." 이루릴은 방긋 웃었다. 카알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클래스 10의 마법이 필요하신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뭐, 마법사들에게 새로운 마법이란 소중한 것이라고 하던가요. 이해할 듯합 니다. 아, 물론 클래스 10의 마법이 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는 있겠군요?" "예.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마스터가 아니면 안되지만 이미 존재하는 마법은 배워 사용할 수 있겠지요." 이루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카알은 의구심 담긴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클래스 10의 마법이 필요하시다면… 이상하군요." 이루릴은 흥미있는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상하십니까?" 카알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항상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적은 정보, 게다가 300년의 모진 풍상이 흘러가면서 그에 대한 어떤 기록이 남아있을까요? 과연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었 는지 확인할만한 정보가 남아있을까요?" "가능성이 적겠지요." "게다가…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르치 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세레니얼양이 말씀하시길, 창조는 불가능해도 배워 익히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따라서 그보다 능력 이 좀 떨어지는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가르치려고 들었다면 얼마든지 가 르칠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누군가에게 그 마법을 가르 쳤다면 그 마법은 지금 남아있을 텐데요." "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클래스 10의 마법은 남아있지 않지요." "예. 따라서 그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설령 그 마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결국 실전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했는지 확인하실 필요가 있습 니까? 그가 창조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 다. 그리고 만약 그가 창조했다 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전 되었으니 역시 그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레니얼 양께서는 클래스 10의 마법의 존재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법 자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면 어떻게 배우실 생각이십니까?"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신 지적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껏 어떤 마법사도 핸드레 이크의 클래스 10 마법에 대해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겠죠. 그가 만들었 든 만들지 않았든, 배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가 달린 황야와 오늘의 우리가 달리는 황야 사이엔 300년의 강이 흐르고 있으니 까요." "예. 그렇다면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 그 신비의 마법을 창조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하지만 그 마법이 실제로 창조되었다면, 그가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 았다 해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 해도? 그 마법의 룬어가 남아있기를 바라 시는 겁니까?" 이루릴이 대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그건 아니시겠지요." 내가 갑자기 끼어들자 카알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이루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루릴은 언젠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룬어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 분하지 않다, 그 마법이 운용되는, 거, 뭐냐, 복잡무쌍한 뭐, 어쨌든 더 가르칠 것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룬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지요. 만일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면, 뭔가 꼼꼼하게 적어둔 사용 방법 같은 것이 있어야 이루릴이 배울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기록물이 남아있다면 벌써 누군가가 그 마법을 배웠겠지요. 하지만 그 마법은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기록물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배우시겠다는 거죠?" "그 마법을 만든 본인에게서요." 카알은 부릅뜬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잠깐, 뭐라고? 그 마법을 만든 본인에게서 배운다고? 핸드레이크에게 배운다는 말인가? 난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다. "저, 저, 이루릴. 하, 하하하. 엘프의 관점으로 말고 인간의 관점으로 생각해야죠.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아요." 이루릴은 빙긋이 웃었지만 카알은 여전히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는 떨 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리치(Lich)… 핸드레이크가 리치라는 말씀입니까?" "히에엑?"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리치라고? 이루릴은 긍정도 부정도 하 지 않고 조용히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카알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는 클래스 9의 마법을 마스터한 자, 원한다면 리치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간 방식, 그가 한 말들을 통해 볼 때… 아, 물론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 도 핸드레이크가 리치가 되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소. 그가 자신의 인간성을 버려버릴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루릴은 그 말에는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인간성을 간직했기를 바랍니다." "예?" "그래야만…" 이루릴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자신이 타고 있는 레이셔널 셀렉션의 갈 기를 쓰다듬었다. 나와 카알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이루릴은 한참 동안 말하지 않았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인가? 그러다가 이루릴은 빠르 게 말했다. "그가 끝까지 인간이었기를,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지켜 지지 못한 약속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푸른 산 속에 검은 호수가 생긴 이유를 기억하고, 무너진 탑에 이끼가 덮이는 이유를 기억하고, 드래곤 라자의 맹약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삽시간에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지만 이루릴은 숨찬 기색도 없이 말을 마무리지었다. "그가 핸드레이크이기를 바랍니다." 카알은 깊은 의문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난 마음 속에 묻고 싶은 것들 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러나 이루릴의 말에는 더 이상의 질문을 거절하 는 분위기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목이 가려워 기침을 하고 말 았다. 나는 카알이 이왕이면 정면을 보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나 역시도 정면을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카알은 우리들을 환영 하기 위해 일스 공국의 수도 바란 탄에서 나우르첸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환영단에게 자신이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했다. 카알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와주셔서… 미거한 소생은… 에… 반갑고도 고마운 감정을… 이루 다… 표현 못함과 동시에… 보다 성실함과 선의에 입각 한… 양국의 내일을…" 그러나 나우르첸까지 와서 우리들을 기다리던 환영단의 단장은 카알의 무례함을 꾸짖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외면한 채 말하고 있는 카알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알의 볼을 향해 말했다. "아름답죠?" 카알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예?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환영단의 단장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일몰을 마저 보고 말씀 나누시죠. 이곳에 사는 우리들도 이렇게 좋은 날씨에 저런 일몰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단장은 먼저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알도 멋적 게 웃으며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우리 일행도 카알의 옆쪽으로 주욱 늘 어섰고 환영단원들도 웃으며 단장의 옆으로 죽 늘어섰다. 지독하게 붉었다. 하늘은 불타오르는 것 같았고 물결은 완전히 황금실로 짠 융단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모조리 검붉게 바뀌어 있었고 그들 면면의 음영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나우르첸의 하얀 절벽(지금은 불의 절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대기에 일렬로 서서 가라앉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쪽의 나라 일스 공국에서 수평선으로 가라앉는 일몰을 본다는 것은 희 한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우르첸의 거대호수 실키안 레이크의 동 쪽 기슭에 서 있는 것이다. 환영단의 단장은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바다에서 떠올라 호수로 가라앉는 해를 본답니다. 물에서 떠올 라 물로 떨어지는 해를 보는 것이지요. 다른 지방을 험담할 생각은 없습 니다만, 우리는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가졌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자부심을 가지셔도 될만큼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황금의 바다에서 떠 올라 황금의 호수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멋진 일이겠지 요." 정말 기막힌걸? 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뒷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실키안 레이크가 거대한 수평선을 보여주고 있 다. 우리가 서 있는 하얀 절벽은 바다와 호수 사이의 담장처럼 서 있는 장소였고 호수쪽 절벽 사면에는 하얀 측백나무들이 밀생하여 있었다. 그 리고 바닷쪽 사면에는 백송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정말 멋있어. 왜 하얀 절벽이라 불리는지 알겠는걸.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말 끔찍해… 여행을 나오지 않았다면…" 샌슨 역시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서녘 수평선으로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 온통 붉은 색뿐인 세상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네 리아의 머릿결은 불결 같았다. 네리아의 눈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 다. 그녀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벌어져 있었고 두 손은 꼭 모아쥐어 있었 다. "후치야? 너무너무 이쁘지이이?" "그러네요. 예. 정말 그래요." 환영단의 단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서쪽에서 오신 손님들에게 우리 고장의 장관을 보여드리게 되어 기쁩 니다. 자, 이제 들어가도록 하시죠. 해가 완전히 지고나면 몹시 추워진 답니다." 서쪽에서 오신 손님? 갑자기 가슴이 덜컥하는걸. 왜 이러지? 서쪽, 불길 같은 석양. 물까지 지글지글 태워버릴 듯한 불은. …제기랄. 우리는 안타까운 얼굴로 이제 막 수평선에 절반쯤 내려간 태양을 한번 씩 더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절벽 위라 그런지 바닷바람과 호수바람이 한꺼번에 불어닥치고 있었다. 꽤 춥군. 아냐. 엄 청나게 추워. 일스 공국에 들러 두번째로 보는 도시 나우르첸은 여전히 굉장한 바람 이 부는 도시였다. 도시의 이마를 삐죽하게 찌른 몇 개의 첨탑들에는 예 외없이 풍향계가 달려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혹은 길다란 장대에 풍향 계를 세워둔 가옥도 몇 개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대에 세워둔 풍향 계가 내 눈엔 아주 이상하게 보였다. "카알. 저게 뭐죠? 왜 장대 위에 자루를 달아두는 거죠?" 샌슨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야. 저거 혹시 새잡으려고 매달아 둔 것 아닐까?" "여기 새들은 대부분 살아가는 재미가 없나보지? 저런 자루에 몸을 들 이박는다고?" 카알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저것 풍향계라네. 바람이 저기로 들어가면 자루가 똑바로 서게 되 지. 풍속계도 겸하고 있군.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루가 똑바로 설테 니까." "그리고 간혹 눈먼 새도 들어가고?" "하하하." 하긴 이 사람들은 바람에 신경을 많이 써야겠지. 저녁 무렵이라 이번엔 도시의 사람들이 모조리 몰려나와있는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해 질 무렵 저녁 준비를 하는 아낙네들이나 그런 아낙네들에게 귀를 붙잡여 끌려 들어가는 사내애들 등은 놀란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삽시간에 보랏빛이 되었다고 곧 어두운 남색으로 바뀌어갔다. 우리는 환영단을 따라서 나우르첸의 영주님의 성으로 가게 되었다. 샌 슨과 나는 약간 물러나서 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흠. 이봐. 헬턴트 경비대장. 나우르첸성을 어떻게 평가해?" "너도 뭔가를 느낀 모양이군. 육로로는 약한 성이야. 하지만 해군 전술 에 대해선 잘 모르겠으니 그쪽은 제외하지." "하지만 3면이 바다니까 육로도 하나뿐이잖아? 그러니 육로로도 약하다 고 볼 수는 없을텐데?" 나우르첸 성은 해안 절벽에 달아둔 것처럼 성의 3부분 성벽은 바다속까 지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1면이 육지와 맞닿고 있었다. 성문까지 좌악 늘어선 길 양편으로는 해송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 정면 길이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육로로 공격한다면 정면뿐 이다. 나머지 3면은 바다에서부터 들어와야 되니까. 하지만 샌슨은 피식 거릴뿐이다. "정면 하나뿐인데 그 정면이 약해. 왼쪽의 언덕도 문제고… 언덕 위에 서 화살 쏴넣으면 정말 골치 아프겠군. 수비측 입장에선 고지대의 잇점 이라는 것이 없어. 허즐릿은 이상적인 성의 요건을 세 가지로 요약했지. 수직적으로 높을 것, 수평적으로 좁을 것, 그리고 자급자족이야. 그런데 일단 수직적으로 높다는 것은 빠지지." "수평적으로 좁다는 말은 뭐야. 성이 좁아야 된다고?" "아니. 성까지 접근하는 길이 좁아야 된다는 거야. 이건 거의 대로야. 화살거리 밖에서 성 정면까지 달려가는데 1분도 안걸리겠는데. 나라면 군사…" 샌슨의 말이 사그라들었다. 샌슨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나도 놀랐다. 어 느새 환영단의 그 단장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우리 들의 수다를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군사 얼마만 있으면 정복하실 수 있겠소?" 샌슨은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농담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괜찮소. 대륙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지? 전사로 서 말씀해보시오.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겠소." 샌슨은 거의 말할 뻔했다. 내가 조금만 느렸다면 어쩔 뻔했을까. 휴우. 나는 정신없이 말했다. "저희는 세작이나 염탐꾼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사절의 임무 를 위해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찾은 자들이옵니다. 자칫 선의로 충만한 양국의 관계가 저희 무지한 자들의 허언에 의해 금이 가게 되는 것은 바 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과드립니다. 귀하신 어르신께서는 저희들의 실언을 용서해주시고 더 이상 죄를 추궁하여 어리석은 입이 더 큰 죄를 짓게 만들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마에 땀이 날 정도다. 샌슨이 말하기 직전이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긴 말을 후다닥 해야 되다니. 에휴, 휴. 환영단의 단장은 이채로 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정중히 사과를 받아들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카알은 어디선가 굉장한 속도의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리더니 곧 피식 웃으셨다. "자! 샌슨, 나에게 빚졌으니 호되게 갚을 준비하라고." 샌슨은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휴으윽. 정말 뭐든지 요, 요구해도 할 말이 없겠군. 허 참. 여긴 다른 나라였지. 야, 임마! 왜 성의 이야기는 꺼내가지고!" "꺼낸다고 좋아라 줄줄 서어댄 사람이 누군데?" "에잇! 젠장." 샌슨은 투덜거리며 나우르첸성으로 들어섰다. ================================================================== 8. 인간의 무기……7. 먼저 무구와 말들을 하인들에게 건네어 준 다음, 옷의 먼지를 털고 단 정하게 차려입은 후 홀로 안내되었다. 홀에는 정장한 기사들과 가신들이 도열해 있었고 성주님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 장엄의 홀을 보고났더니 이 홀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을 수는 없었지 만 그런대로 괜찮은 건물이었다. 난 주로 벽에 걸린 초를 관찰했다. 여기는 바다가 가까우니까 생선기름 을 사용하겠지? 생선기름은 양초용으로는 저급에 속한다. 물론 최고의 기름은 그 뭐냐,고래 기름으로 만들어지긴 하지만 그외에 다른 생선들 의 기름은 별 볼 일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벽에 걸린 양초들의 불빛 이 상당히 고왔다. 흠. 수입품일 거야, 아마. 우리 일행, 그러니까 카알과 나, 샌슨, 네리아, 이루릴, 스카일램이 들 어서자 성주님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어야 되나? 아냐, 잠깐. 아무래도 여긴 다른 나라고 따라서 우리에겐 충성의 의무를 표시할 이유 는 없을 것 같은걸. 예상대로 아무도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선 성주는 목례하고는 말했다. "바이서스의 사절단 여러분을환영하오. 나 카미엔 나우르첸은 우정과 신뢰로서 여러분들을 맞이하오. 정의가 닿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피어오 르는 장미를." 카알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우아하게 대답했다. "성주님의 따스한 환영으로 저 카알 헬턴트는 이미 노정의 여독을 잊었 을 뿐만 아니라 귀국과 바이서스의 빛나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느낍니 다. 열정의 꽃잎처럼 불타는 마음을." 그러자 이번에는 카미엔 영주의 얼굴에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예 상치 않은 타인에게서 우정을 발견한 사람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다가와 카알과 악수하며 말했다. "장미는 붉고, 정의는 만인에 대한 사랑이오. 바이서스의 산천은 지혜 의 보고로군요." "일스의 바다야말로 심원한 지혜가 나날이 파도치는 곳. 성주님의 무한 한 복덕이십니다." 카미엔 성주는 밝은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다가 활기차게 말했다. "자, 바이서스의 여러분들을 만나뵈어 너무나도 즐겁소. 여러분들의 광 영된 이름을 듣고 싶구려." 그래서 우리는 차례대로 자신을 소개하게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 사할 때마다 카미엔 성주는 적당한 답례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소년 과 엘프, 그리고 활동적으로 차려입은 단발머리 아가씨가 사절단에서 무 슨 역할을 하는 것인지는 짐작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별 말 하지 않고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머나먼 여정을 걸어오시며 쌓인 노독을 치료하십시다. 바이서스에서는 일스의 기괴한 음식물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겠지요? 내가 오늘 소문의 헛됨을 일러드리겠소. 따라오시오." 연회장은 다행스럽게도 바이서스식 음식들도 제법 많았다. 세들레스에 서 먹었던 완전 일스식 음식을 각오하고 있던 난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 에 다가설 수 있었다. 식사를 하는 틈틈이 카미엔 성주는 카알에게 말했다. "내일 수도 바란 탄으로 모실까 합니다. 혹 노독이 심하다시다면…" "아니오.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걸었던 것이었으니 노독은 없습니다. 내일 출발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 전하께서는 한시바삐 여 러분들을 뵙고저 하십니다." "대공 전하께서요?" "그렇습니다. 귀국과 자이펀국의 전쟁은 너무 길었고, 저희들은 성실한 이웃으로서 양국 모두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이러한 시 기에 바이서스에서 사절단이 도착하셨으니, 대공께서는 대륙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람직한 회견이 되실 것으로 기대하고 계십니다." 카알의 눈빛이 조금 조심스러워졌고 동시에 스카일램의 눈이 조금 번뜩 였다. 자, 이게 외교인가? 나로선 도대체 뭐가 중요한 말이고 어떤 속뜻 이 있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태도에서 지금 카미엔 성 주가 한 말이 뭔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알은 부드럽게 말했다. "평화는 값진 것이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 자이펀이 그것을 모르니 참 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번엔 카미엔 성주의 눈꼬리가 조금 오르락내리락 했다. 이거야, 원. 이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정말 음식맛 즐기며 식사하기 힘들어졌는걸? 나와 네리아는 불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루릴은 무표정했고 샌슨이야 먹기 바빴다. 카미엔 성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성실한 조정자가 나타나서 양국의 의견을 조절해야 될 시 기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예. 평화를 위해서 정의가 희생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조정자는 양자 모두에게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 이 평화가 희생될 수는 있습니다만, 평화를 위해 정의를 희생할 수는 없 는 법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가식과 거짓 위에 실현되는 것으로 사상누 각이나 진배없겠지요." "정의라… 옳으신 말입니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악용되는 도구일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전사자의 어머니의 눈물과 연인의 슬픔 과 그 지기의 비탄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카미엔 성주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그 후로 한참 동안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온화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따스한저녁시간 은 아니었다. 원참. 소화 안되네. 스카일램 트리키는 싱긋 웃었다. "왜 전하께서 야인이나 다름없는 헬턴트님을 사절로 추천했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동안 제가 모시고 있는 사절은 온화 한 사절이긴 하지만 유능한 사절이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긴 그래. 그렇게 봐도 할 말 없겠어. 항상 허허거리기만 하고 시간나 면 지금처럼 저렇게 책만 붙들고 사는 중늙은이가 무슨 유능한 외교관일 거라고 생각했겠어? 카알은 여전히 허허거리며 책을 덮고는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유능함이란 당대에 평가하기는 힘든 덕목이겠지 요." "아닙니다. 오늘 저녁, 카미엔 성주가 은근히 조정 문제를 내비쳤을 때 의 대답은 썩 훌륭했습니다. 더군다나 장미의 정의의 오렘의 추종자에게 한 대답으로서는 걸작이라 하겠습니다." 나우르첸성의 한 거실에 모여 앉은 채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바닥의 양탄자에 다리를 곧게 편 채로 앉아 있던 이루릴은 곤혹스러 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스카일램과 카알이 무슨 말을 나 누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벽난로 바로 앞에 엎드려 누운 채로 다리를 까딱거리던 네리아도 어리둥절한 표정인 것은 마찬가 지였다. 난 네리아에게 다리를 더 흔들다간 벽난로에 다리를 집어넣게 될 거라고 주의를 준 다음 말했다. "카알." "응? 왜 그러나, 네드발군?" "도대체 아까 저녁 시간의 그 구름잡는 이야기는 다 뭐였어요?" 카알은 웃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들었다. 그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차향이 썩 괜찮군. 일스산일까?" "카아아알." "알았네, 알았어. 흠. 그건 별로 대단할 것은 없는 것이었네. 하지만 외교계에서는 그런 대단할 것이 없는 문제가 때론 중대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웃기지." "야! 웃기는 이야기 좋아요. 해보세요." "껄껄.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카알은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책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걸세. 마을에서 혈기방장한 두 청년이 싸움을 벌였다 네. 청년들은 둘 다 비슷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싸움은 결판이 나질 않아. 처음에 무엇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 로 오랫동안 싸웠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먼저 항복할 수는 없게 되었 지." 네리아는 귀를 쫑긋거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눈을 반짝이고 있 었다. 그녀는 누운 채로 무릎과 팔꿈치만 이용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카 알과 나, 스카일램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다가왔고, 그래서 중간에 있던 이루릴은 웃으며 다리를 움츠렸고 저 근엄한 스카일램 호위대장께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카알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자. 이제 어쩌면 좋지? 더 이상 싸우다간 서로 몇 달은 고생해야 될 정도로, 어쩌면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태야. 하지만 서로의 자 존심이 있는지라 먼저 항복할 수는 없어. 어쩌면 좋을까?" "인덕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두 청년을 말려야죠." "그렇지. 그렇게 누군가가 나서서 말려주면 두 청년은 모두 못이기는 척하며 화해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좋아요. 알아들었어요. 그렇다면 일스 공국에서는 바이서스와 자이펀 의 중간에서 인덕 있는 그 누군가가 되겠다는 말이군요?" "그런 의미였던 것 같네." "그럼 왜 그런 화해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스카일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그를 무시했 다. 그는 낮고 세차게 말했다. "이런 발칙한… 저 간악한 자이펀과의 무슨 화해가 있겠는가! 나가서 싸워 이길 따름이다." "둘 다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다치더라도 말이죠?" 스카일램은 본격적으로 화를 내었다. 하지만 역시 내게 하는 말이라 타 이르는 듯한 어조가 강했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아무리 나이 어리다지만 어떻게 바이서스의 국민 으로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내가 다시 말하려 할 때 카알이 재빨리 말했다. "네드발군. 내 설명하지. 잘 듣게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네. 그리고 트리키공도 어린 아이의 허물을 나무라시지는 마십시오." 난 실제로 볼이 부었고 스카일램은 정신적으로 볼이 부은 표정이었다. 카알은 내게 말했다. "화해를 하게 되면 일단 발등의 불은 끌 수 있겠지. 그리고 전선에 나 간 병사들이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고. 하지만 그 댓가로 우리나라는 일스 공국에 대해 일종의 부채를 형성하는 것이 된다네. 일스 공국에서도 그것을 노리고 화해조정자의 역할을 맡으 려 하는 것이고. 일스 공국에서 워낙 사랑과 자비심이 넘쳐서 그렇게 하 는 것은 아니라고 보네." "글쎄요. 그건 그저 심리적인 부채일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맞는 말일세. 그런데 외교라는 거대한 소꿉놀이에서는 그 심리적인 부 채도 참으로 무거운 것이지. 간단히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아마 전후 혼란스러운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상권 잠식이 그들의 목적이겠지." "상권 잠식?" "그렇지. 전후에는 많은 물자들이 필요하고, 아예 경제권 전체가 새로 조정될지도 몰라.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을 통해 일스 공국에서 양국의 경제권을 잠식하는 거지. 전쟁을 말려준 나라의 상인을 박대할 수는 없 으니까 양국에서도 일스의 상인들에 호의를 베풀 수밖에 없고, 그러한 호의를 업은 일스의상인들은 대단히 큰 잇권을 챙길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과적으로 목이 좀 아팠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그건 그렇게 대단한 이유로 들리지는 않는 데요. 상권이야 잠식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그만이고, 전선에 나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일 인 것 같은데요." 스카일램은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카알이 먼저 말했다. "그렇긴 하네.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도 이 상하지 않은가? 저 펠레일의 조언을 생각해보게." "음. 하긴 그렇군요." 스카일램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화, 확실히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 그는 그 이야기를 모를 테지. 그야 우리들의 호위대장일 뿐이고, 그 펠레일의 항로 봉쇄 작전은 아마 최고기밀일 테니까. 카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이 전쟁에서의 확실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작전이 있습니 다. 그리고 전 그 작전 때문에 일스 공국에 사절로 온 것이오. 이 작전 에서는 일스 공국의 조력이 필요하거든. 물론 기밀사항이니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시겠지요?" 스카일램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어떤 사절단을 모시고 있는 것인지 이제야 알았 습니다. 목숨을 바쳐 헬턴트님을 호위하겠습니다." "아. 됐소. 괜찮아요. 이제 내일이면 바란 탄에 들어갈테니 안심하셔도 될 거요." "예. 그러나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겠습니다." "지나치게 그러실 것은 없어요. 지금까지처럼 평범하게 하셔도 되오. 그런데, 그렇다면 트리키공은 지금껏 제가 무슨 임무를 가지고 있는지 대충이라도 듣지 않았단 말이오?" "예."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스카일램은 좀 더 덧붙여야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군에서는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임무를 받으면 수행할 뿐입니 다." "예. 그래야 될테지요.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임무만 수행하시면 됩니 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스카일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난 다리에 뭔가가 닿는 느낌을 받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슬금슬금 기어온 네리아가 내 다리를 툭툭 찌르고 있었다. "후우웃치야아아아?" "그만해요! 뭐 들었어요? 기밀, 기밀이라고요!" "흐음. 그게 전에 그랜드스톰 앞에서 말한 그거구나. 이잉. 궁금한데." "당신 궁금한 것은 이해해요. 그러니 당신은 말 못해주는 날 이해해줘 야 되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네리아는 누운 채로 옆으로 빙글 돌아 똑바로 눕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이해할께." "좋네요. 그리고 애들도 아니고 왜 그렇게 굴러다녀요?" "무슨 소리. 애들은 굴러다니면 어른한테 야단맞아. 난 애가 아니니까 마음대로 굴러다니는 거야." 난 네리아에게 혀를 낼름거려주고는 재빨리 훌쩍 뛰었다. 네리아가 내 발목을 잡아채려 했으니까. 네리아와 나의 좀 과격하다면 과격하달 수 있는 장난을 보며 스카일램 대장은 헛기침을 하고 나갔다. "야심한 시각이군요. 퍼시발씨를 찾아보겠습니다." "아, 저 찾아볼 필요가 없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스카일램은 나갔다. 찾긴 뭘 찾아. 샌슨 은 아마 지금 이 시간까지 나우르첸성의 주방장을 즐겁게 하고 있거나 술 저장고의 책임자를 협박하거나, 뭐 그런 짓을 하고 있을 텐데. 그 때 네리아가 누운 채로 다리를 당겨 핸드스프링으로 일어났다. 테이블을 걷 어찰 뻔했고, 카알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후치야, 후치야. 우리도 샌슨이나 찾아볼까?" "찾기는 뭘 찾아요. 어디 위험한 데라도 갔을까봐? 샌슨이?" 네리아는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니아니, 샌슨이 다른 누구에게 위험해질까봐." "빨리 가죠!"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우리는 사절단 인데 외국의 성에서 소란을 부릴 수는 없다. 허억. 그러고 보니 오늘 낮 의 환영단 단장과의 그 살벌했던 대화도 기억난다. 이런, 빨리 그 작자 를 찾아야겠군. 카알은 다시 독서 삼매에 들어가 있었고, 이루릴에게 함 께 갈 것인지 물어보려다가 난 그만두어버렸다. 이루릴은 대단히 깊은 생각에 빠져버린… 완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아마 조금 전 우리들의 대 화를 골똘히 생각해보는 모양이다. 엘프는 외교라는 거대한 소꿉놀이를 이해할까? ================================================================== 8. 인간의 무기……8. 네리아와 난 각자 하드리더 위에 망토를 두르고 나섰다. 벌써 계절이 계절인지라 날씨가 꽤 험하게 추웠다. 벽난로가 있던 방에서 나오자마자 목 뒤가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네리아는 입김을 호호 불더니 망토 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어디 있을까?" "첫째, 주방의 점거 및 농성. 둘째, 술저장고로의 기습 감행." "좀 폼나게 나우르첸 성주의 무남독녀 방 창문 아래서의 세레나데, 그 런 건 안돼?" "누구에게 뭘 바라죠?" 11월의 이 날씨에 세레나데라. 음. 샌슨은 할수 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한다고 해도, 샌슨은 그런 짓은 안하겠지. 샌슨이 목에 걸어둔 반지는 아마 지금쯤 그의 손때가 시커멓게 묻었을지도 모른다. 난 킬킬 거리며 주방쪽으로 향했다. 역시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는 못하는군. 그런데 조금 기이한 방식으로 벗어나는데? "죄, 죄수를 본관의 허락 없이 호송마차에서 풀어 주, 줄 수는 없소!" "글쎄요. 야, 운차이. 너 달아날 거야?" 운차이는 묵묵히 자신의 발목을 가리키며 뭐 씹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카일램은 칭칭 동여맨 그 밧줄을 보고서는 조금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 고 샌슨은 헤벌레 웃었다. 나우르첸 성의 식당엔 성의 하인들과 하녀들, 그리고 견습기사로 보이 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샌슨과 운차이와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그 한 옆에서 스카일램이 대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카일램은 고개를 저으 며 말했다. "이보시오, 샌슨 퍼시발! 아무리 밧줄을 묶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권한에의 침범이오." 입에 대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은 샌슨은 뒷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말했 다. "에, 어디 보자. 트리키공은 호위대장이죠?" "무슨 말이오?" "호위 대장이라는 것은 결국 사절인 우리들을 호위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운차이도 일종의 사절 아닐까요? 운차이는 우리 바이서스의 전쟁 포로니까, 결국 지금 그의 신병은 바이서스에 속하지요. 일스 공국에 넘 겨주려고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일스 공국 내 에서는 운차이에 대해서도 호위 책임을 가진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스카일램은 잠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스스 로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간단하게 말해서, 사나이들끼리 술 한 잔 할 때는 왕도 간섭 못한 다고 했잖아요. 루트에리노 대왕도 우타크와 차넬을 만나러 갔다가 둘이 술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했잖아요. 내가 사과할 테니, 거기서 그렇게 서있지 말고 함께 술이나 마십시다. 당신이 여기 있다면 운차이가 어떻게 달아나겠소?" 스카일램은 조금 고집스런 표정으로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바로 그 때 네리아가 그에게 살짝 다가서서 팔짱을 끼며 끌어당겼다. "그렇게 하세요, 대장님." 스카일램은 놀라 팔을 뺐다가 겸연쩍게 웃고는 결국 테이블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우르첸 성의 하인, 하녀, 견습기사들은 환호로써 스카 일램을 맞이해주었다. 샌슨은 기분좋게 웃다가 말했다. "여, 너희들도 왔구나? 이리 와 앉아." 난 머리를 가로저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게 한결 낫군. 그 으리으리하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카미엔 성주의 연회보다는 이렇게 아랫사람들이 밤에 펼치는 연회가 훨씬 마음에 드는 데. 거대한 테이블 주위에는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술잔을 들이키는 샌 슨, 샌슨 ㎖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리를 올린 운차이, 아예 의자를 걷어차고 테이블에 올라앉아 볼이 발갛게 된 채 두 손으로 술잔을 꼭 쥐 고 마시는 하녀, 그 하녀에게 박수를 보내는 하인들과 견습기사들로 가 득했다. 네리아는 끼르륵거리며 웃었고 스카일램 자작은 근엄한 표정으 로 그 하녀에게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의가 어쩌니, 예법이 어쩌니 하는 말을 꺼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는 운차이의 옆으로 다가가 술잔 하나를 건네받았다. "운차이. 샌슨에게 끌려나온 겁니까?" "그런 셈이다. 망할 놈. 마시고 싶다면 혼자 마실 것이지." 당장 샌슨은 팔꿈치로 운차이의 허리를 찔렀고 운차이는 신음소리를 내 었다. "자식아, 잘도 마시면서 헛소리 하지 마라. 여기까지 끌고 와줬으면…" "알았다, 알았어! 젠장. 고맙다. 됐냐?" "좋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샌슨은 희희낙낙했고 운차이는 얼굴 근육 전체를 사용해서 찌푸린 얼굴 을 만들며 술을 마셨다. 네리아는 스카일램에게 건배를 요청했다. 난 아 마도 아까 연회에서 사용되었다가 다시 담겨져 나온 듯한 음식 부스러기 들 - 그래도 몹시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 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런데 마차 감시병들이 문 열어줘?" 스카일램 대장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 놈들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습니까?" 샌슨은 능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예. 술 한 병씩 안겨주고 밧줄로 묶는 것까지 확인시켜주니까 별 말은 안하더군요." "내 이 놈들을!" 스카일램 대장은 곧장 밖으로 달려나가버렸고 우리는 그 뒷모습을 좀 감상하다가 치도곤을 당할 호위병들에 대해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거짓말이야. 감시병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빼내왔지." "사악하군…. 불쌍한 감시병들." 샌슨은 그야말로 오우거처럼 사악하게 웃었고 네리아는 배를 잡고 웃었 다. 운차이는 피식거리며 술병을 기울여 잔에 따르면서 말했다. "나 스스로가 나의 감시병이다. 내가 달아날 마음이 없으니, 절대로 달 아날 리가 없지."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렵겠지요." "그렇겠지." 운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쿠키를 집어 윗입술과 코 사이에 끼웠다가 입 속으로 쏙 집어넣는다든지, 비스켓을 던져서 받아먹 는다든지 하면서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운차이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달아날 마음이 없어?" 운차이는 고개를 기울여 네리아를 흘깃 바라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후치. 달아나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전해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친지들도 만날 테고, 혹시 애인이나 부인 은 어때?" 운차이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괴로움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운차이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돌아간다면 그들에게 더 폐가 될 것이라고 전해줘, 후치." 이번에도 내가 말하기 전에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이봐! 그만 둬. 어차피 고국을 버렸다면 고국의 관습도 버려야지? 나 에게 직접 말하라고." 운차이는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헛기침을 하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얼굴이 확 붉어진 다음,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관습은 좀 천천히 고쳐야 되겠다고 전해줘." 샌슨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난 전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네리아 는 깡총깡총 뛰어오더니 곧 운차이의 바로 앞쪽에 허리를 굽히고 섰다. 운차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네리아는 운차이의 얼굴 가는 방향으 로 계속 몸을 돌려 그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몇 번 고개를 돌 려 네리아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는 말했다. "후치! 이 여자에게 왜 이러냐고 좀 전해줘!" "날 보며 말해라, 날 보며 말해라, 날 보며 말해라." 네리아는 무슨 캐스팅을 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고 운차이는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난 얼굴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샌슨은 테이블에 서 다리를 내려주지 않았다. 어느새 주위가 고요해져서 둘러보니 주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네리아와 운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그야 말로 귓볼까지 빨개졌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후치. 이 여자를 치워주면 너에게 뭐든 하겠다." "나에게 말해라. 나에게 말해라. 나에게 말해라." "난 별로 가지고 싶은게 없는데…" 나도 그러고보면 꽤 사악해. 그러자 운차이는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살기를 다루고 싶다고 그랬지? 가르쳐주마. 이 여자 좀 치워줘." 순간 샌슨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리아는 화들짝 놀라더니 곧 샌슨을 가 멸차게 쏘아보았다. 샌슨의 입가가 스르르 올라갔다. "그거 이상한데." "뭐가 말이냐?" "그 살기로 네리아를 쫓아버리지는 못하는 거야?" 운차이는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그리고 그는 곧 네리아를 쏘아보기 시 작했다. 네리아는 헤죽 웃으며 운차이를 마주보았다. 흠. 괴상한 장면이다. 운차이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무시무시한 눈 으로 네리아를 노려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무릎을 짚은 채 방긋거리며 운 차이를 마주보는 것이다.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지만 그들의 코는 서로 1큐빗도 떨어지지 않았고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숨막히도록 바라보 고 있는 것이다. 콰당. 결국 네리아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황급 히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운차이는 득의만만하게 웃었고주방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등 뒤에서 네리아의 가녀린 목소리 가 들려왔다. "무, 무서워 죽을 뻔했어… 잉." "운차이도 수십 년 동안 지켜온 관습을 깨긴 어려울 거에요. 너무 괴롭 히진 말아요." "그, 그래도. 너무, 너무 무서웠어. 허헉." 네리아는 의자에 앉아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손이 계 속 떨려서 술잔도 들어올리지 못하고 양손을 꼭 마주잡았다. "이런… 너무 오래 버텼나 보군요." "으, 으응. 무서워도, 꾸, 꾹 참고…" "괜한 고집이었어요. 와이번도 졸도시키고 헬메이드도 도망치게 만든 눈을, 그래 버틴다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꾸 그러지 마. 그, 그렇잖아도 떨려 죽, 죽겠다고." 나우르첸성의 사람들은 한결 놀라는 표정이 되더니 운차이를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운차이는 피식 웃고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후치. 미안하다고 전해줘. 하지만 고집부린 것이 잘못이라고도 전해 줘." "들었지요?" "이… 미워! 저 작자." 운차이는 한결 깊은 눈매로 미소를 지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그래서 술맛이 별로였다. "네리아를 위해." "날 위해? 뭐?" "노래하나 하지요. 아이야 이켈리나의 구두장이 믹 더 빅." "이야히호!" 잠시 후 테이블 위로 술병이 구르고 의자는 제멋대로 뒹굴었다. 사람들 은 모두 일어나 목청껏 노래부르고 다른 사람 머리에 술을 부어 주었다. 그 중 한 견습기사와 하녀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접시를 걷어차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광란이 끝나고 사람들의 옷들도 술에 푹 젖어버려 이제 술잔도 천천히 비우게 되었을 무렵 나우르첸성의 견습기사 하나가 어디서 류트를 하나 들고 왔다. 나우르첸성의 사람들은 모두 정중한 환호를 보내어주었고, 그래서 우리들도 기분좋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 견습기사는 미소를 지으며 점잖게 말했다. "오늘 저 먼 서녘의 땅에서 이곳 해뜨는 나라 일스의 아름다운 성 나우 르첸을 찾아주신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기쁨을…" "우! 우!" "하하하. 좋습니다. 시작합니다." 견습기사는 가볍게 류트의 선을 튕기다가 곧 노래를 시작했다. 낡은 대지 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바람에 날리는 풀씨같은 인생에도 한 번은 찾아오는 신비로운 바람. 마법의 가을이여.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가을은 짧았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가을은 끝이 없었다. 나는 술잔을 꽉 붙잡았다. 급히 손을 움직이다가 술잔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릴 뻔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노래지? 핸드레이크와 다레니안이 라고? 난 좀 더 집중해서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바람마저 길을 잃는 세미나스 평원에 떨어지는 별 하나. 솟아오르는 별 둘. 그러나 노래하는 가인의 추억에는 희미해진 별 하나.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시선은 드높았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발걸음은 사라져갔다. 페어리의 노래,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그들의 날개에 빛나는 섬광, 잊혀졌다. 파도치는 호수, 수면 아래의 성. 추억은 아름답다. 앞으로 걸어가는 인간의 뒷그림자. 그림자에 서서 멈추어버린 페어리.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야기를 하라고! 난 잔뜩 긴장한 채로 기다렸지 만 견습기사는 계속 뜻모를 이야기만 할뿐이다. 떨어지는 별 하나? 이건 아무래도 드래곤 로드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솟아오르는 별 둘은 틀림없이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를 말하는 것이지? 그렇다 면 희미해진 별이란 페어리퀸을 말하는 것인가? 그녀가 왜 희미해진 별 이지? 날개 잃은 여왕은 광휘 또한 잃게되니 광휘 잃은 여왕은 사랑의 사슬도 무겁다. 돌아보지 않는 시선은 가슴의 온기마저 잃게 한다. 세월이 나무에 나이테를 덧매기고 잊혀진 이름은 차가워만 가는데. 차가운 가을바람 나뭇잎을 훑어내리고 대지에 떨어진 메마른 낙엽들 속에 희미하게 움트는 기운을 느낀다. 팽개쳐진 사랑을. 핸드레이크는 몸을 굽혀 대미궁을 바라보나 드래곤 로드의 칼날은 검붉기만 하다. ================================================================== 8. 인간의 무기……9. 갑자기 주방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뭔지 모 를 숙연하고도 비장한, 그러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하녀 하나는 질린 표정으로 귀를 막고 싶어하는 듯했고 다른 하인 하나는 갑자기 헛 기침을 했다가 자신의 기침 소리에 자신이 놀랐다. 드래곤 로드의 칼날 이 검붉기만 하다고? 그 때 갑자기 류트 소리가 멎었다. 견습기사는 씨익 웃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다음이 기억 안나네요." "푸하! 이런!" 모두들 폭발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견습기사는 멋쩍게 웃었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에게 조롱이나 핀잔을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래가 끝난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도대체 뭐지? 나는 그 견습기사에게 이야기나 걸어볼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때 갑자기 주방 문으로 시커먼 것이 휘익! 뛰어들었다. 그 시 커먼 것은 스카일램 대장이었다. 스카일램은 들어서자마자 우리들을 손 가락질하며 외쳤다. "눈이 있다면 봐라! 이 멍청이들아!" 곧 그 뒤를 따라서 운차이의 마차를 경비하던 병사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탈주한 죄수가 성의 주방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엇다. 그러나 그들의 난감함은 표현될 기회가 없었다. 스카일램이 매섭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가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즉각 죄수를 원위치로 보내고 마차 앞에 모든 호위병들을 집합시켜라!" "예!" 호위병들은 경례까지 붙이며 말했고 그래서 주방의 사람들은 모두 얼떨 떨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운차이는 한숨을 쉬고는 다리의 밧줄을 풀었다. 샌슨 역시 입맛을 쩝쩝 다시며 운차이를 호위병들에게 보내어주 었다. 호위병들이 운차이를 데리고 사라지자 스카일램은 샌슨에게 다가 왔다. "듣기로, 당신은 저 호위병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죄수를 빼내 어왔다고 하더군요?" "흠. 뭐, 그렇습니다." 스카일램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 더니 무겁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의하죠." 샌슨이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스카일램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샌슨은 한숨을 쉬고는, 주방에 몰려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를 보내었다. "자. 이런 미안합니다! 저희들 일로 괜히 이곳 분위기만 흐려버렸군요. 전 이만 가볼테니 계속들 즐기세요. 덕분에 퍽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도대체 얼마 동안 계속할 생각이지?" 네리아의 투덜거림. 샌슨은 정말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일부러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저렇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스카일램은 호위병들을 모조리 집합시켜 놓고는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 가 우리 방의 발코니에서 바라보기 좋은 위치였다. 게다가 스카일램은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고 있어서 발코니에 있는 우리들은 그의 앞에 일렬 로 서있는 병사들과 똑같이 위축될 수 있었다. 병사들은 밤중에 다른 나 라의 알지 못하는 성의 연병장에 집합하게 되자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 만 스카일램이 하도 윽박지르고 있어 감히 불평을 못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알았나! 여긴 우리 나라가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란 말이다! 곧은 정신을 유지하고 눈을 크게 뜨고,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단 말이 다! 군인의 자세가 뭐냐? 바다의 기운에 홀려버려 긴장감이 다 풀려버려 가지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앗!" 스카일램의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난 방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에구. 머리 아픈 사람이에요." "그를 탓하진 말게. 퍼시발군 자네의 실수일세." 샌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가요?" "그렇다네. 어쨌든 여긴 타국이고, 그래서 호위대장의 신경은 베틀의 실만큼이나 팽팽해져 있을 걸세. 그런데 그의 소관이라 할 수 있는 운차 이가 어처구니없이 사라져버렸으니, 그가 얼마나 상심해하고 불쾌해 하 겠는가. 자네의 실수야."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아니고 이런 타국의 성에서 저렇 게 병사들을 괴롭힌다는 것은…" 카알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빨리 마쳐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라 망신이군." 이루릴은 갈수록 혼동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깊 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미안합니다만 그렇다면 스카일램씨의 잘못은 무엇이죠?" "예?" "운차이씨는 분명 바이서스국의 전쟁 포로로서, 무관에 해당하는 스카 일램씨에게 그 신병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샌슨씨의 잘못은 이해됩니다만, 스카일램씨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지는 이해되지 않습니 다." "아… 스카일램씨의 잘못이라는 것은 별로 대단치는 않은 것입니다. 그 는 지금 다른 나라에 와서 부하들을 공개적으로 꾸짖고 있지요. 같은 나 라 사람들끼리 좀 망신스럽군요." "부하들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까? 호위의 임무를 가볍게 취급했으니까 요." "예. 하지만 조용히 꾸짖을 수도 있겠지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꼭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군요. 아무래도 제 자식 못나게 보이고 싶 은 부모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조용히 말해도…" "가식입니까?" "예?" "잘못된 것은 같은 집단 내에서 조용히 해결하고 외부에는 좋은 모습만 을 보여줘야 된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좋은 모습이든 좋지 않은 모습이든 둘 다 진실이 아닌가요? 왜 가식을 보여줘야 되지요?" "저 부하들이 부끄러워할 테니까요. 괴로움을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누 군가가 자신을 꾸짖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불쾌할 겁니다. 그런데 외국인 이 구경하는 장소에서 그런 일을 당하면…" 카알은 설명하다가 그만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이런,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 했군요. 유피넬의 어 린 자식에게 외국인이나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이해되지 않으시겠죠." "이해되지 않네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고, 카알 역시 머리를 마구 긁기 시작하는 네리 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어떻게 말해도 이해되시기 어려울 겁니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루릴은 물끄러미 카알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더 열심히 관찰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감사하군요." 카알은 다시 책을 펴들었고 이루릴 역시 조용히 책을 펼쳤다. 도대체 저 둘은 저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부드럽게 해버리고 곧장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야? 이루릴이 이상하기보다는 카알이 인간 같지가 않군. 난 김빠진 얼굴로 의자에서 다리를 쭉 뻗었고 샌슨은 생각에 잠겼다. 카알은 갑자기 책을 덮으며 말했다. "퍼시발군. 일러준 말은 잘 기억하겠지?" 생각에 잠겨 있던 샌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며 대답했다. "예? 아, 예.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됐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카알은 손을 젖고 걸어갔다. 스카일램 호위대장은 아직까지도 머뭇거리 다가 한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정말 호위대원들이 필요 없습니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저희들이야 뭐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일종의 여행객 인 셈이죠. 사절은 카알이 아닙니까. 카알을 잘 부탁합니다." "하지만 제 임무에는 여러분들의 안전 보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걱정마세요." 스카일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운차이의 호송 마차로 걸어갔다. "이봐, 운차이!" 운차이는 언제나 그러하듯 약간 시무룩해 보이면서도 차가운 얼굴을 내 밀었다. 샌슨은 웃으며 말했다. "바란 탄에 가거든 말 잘하고, 몸 조심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나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고 이루릴은 나를 통해서 운차이에게 인사했 다. 네리아는 콧방귀를 탕탕 끼고는 여행길에 눈병에나 걸려버리라는 식 의 축복을 해주었다. 운차이는 냉엄하게 웃으며 나를 통해 이루릴과 네 리아에게 대답하고는 다시 마차 바닥에 주저앉았다. 실키안 레이크 기슭에서 우리는 떠나가는 카알과 운차이, 그리고 호위 대원들과 나우르첸성에서 추가된 호위대원들을 전송했다. 동녘에서는 바 다에서 떠올라 길고 긴 하룻길의 여정을 시작한 태양, 그리고 서녘에는 푸른 물빛이 그윽한 호수. 카알 일행은 그 실키안 레이크 가장자리를 따 라 멀리 사라져갔다. 언뜻언뜻 소나무들 사이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했다. 샌슨은 팔을 좀 휘두르고는 가볍게 말했다. "자, 가자. 신전으로!" 네리아는 웃으며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엉덩이를 짚으며 가볍게 뛰어올 랐다. 저 커다란 말에 저렇게 오르다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에 오르 자 네리아는 말했다. "얼마나 걸릴까?" 이루릴이 대답했다. "오늘 하루를 달리면 오후 늦게나 저녁 무렵엔 도착할 수 있을 겁니 다." "좋아요. 그럼 해변을 달려봐요! 이랴아!" 네리아는 곧장 언덕의 기슭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샌슨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 뒤를 따랐고 나와 이루릴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네리아는 물 거품이 깔렸다가 사라지는 백사장으로 뛰어들었다. 백사장의 젖은 모래 가 잠시 튀어오르고 나서, 곧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발 아래에서 물보라 가 폭발적으로 튀어올랐다. 네리아는 비명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하하!" "우엣취!" "젖은 채로 찬 바람 맞으며 말을 달렸으니, 감기 안걸렸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네리아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다시 기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샌슨은 투덜거리며 배낭에 묶어 두었던 자신의 망토를 꺼내어 네리아에게 주었 다. 네리아는 계속 기침을 하면서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망토를 받아들었다. "아으으… 떨, 떨린, 에, 엣츄! 엣츄!" "안그래도 신전으로 찾아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견뎌봐요." "으잉! 신전에 한 번 찾아가면, 서, 에츄! 훌쩍. 석 달은 재수없는데." "그럼 신전 밖에 앉아 있던가."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날 노려보다가 다시 거세게 기침을 했다. 에 취! 에이취!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 우리는 일스 공국으로 넘어오기 전에 조사해 두었던대로 길을 찾아가 마침내 테페리의 신전을 만날 수 있었다. 나우 르첸에서 델하파로 접어드는 길 중간쯤에 위치한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산등성이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테페리의 신전은 저무는 노을빛을 정 면으로 받으며 붉은 색깔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평야는 이미 거뭇거뭇해지고 있었지만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테페리의 신전은 아직껏 붉은 색이었고 그래서 허공에 떠있는 빛의 건물처럼 보였다. 네리아는 벅찬 표정으로 건물을 올려보았다. "꽤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건물… 에츄!"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신전으로 나있는 소로를 따라 접어들었다. 석양이 산기슭의 신전을 비추는 시간이니, 아마도 오후 경전 봉독은 끝 나고 저녁식사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빵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 다. 신전 위로 엉성하지만 단단하게 쌓아올린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모 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랜드스톰처럼 우아하지는 않았고 잘못 본 다면 흡사 산촌의 장로 저택 정도로 착각할 수도 있는 건물이었다. 이루 릴은 방긋 웃었다. "테페리의 신전답네요." "예?" "문이 두 개에요." 이루릴의 저 좋은 눈에는 벌써 신전 정문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이 두 개라고? 아, 이런.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가짜인가? 정말이었다. 오솔길의 경사가 완만해지며 신전이 가까이 오자 확실히 담장 정면에 있는 두 개의 문이 보였다. 갈림길의 신인 테페리였지? 문 은 둘다 단단한 나무문으로 닫혀 있었다. "왠지 둘 중 하나는 열리지 않을 것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이런… 신의 지팡이들이 하는 일로 보기엔 왠지 장난 같다. 그렇지?" 나와 샌슨은 잡담을 나누며 두 개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디 보자. "에, 에, 에츄우! 오, 오른쪽이야. 훌쩍." 우리는 모두 네리아를 돌아보았다. 네리아는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문 손잡이가 닳은 정도로 알 수, 수, 에이치이!" 샌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오른쪽 문을 밀었 다. 삐이이걱. "놀라운데?" 그 때 이루릴이 방긋 웃었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더니 왼쪽으로 다가갔 다. 우리가 쳐다보는 가운데 이루릴은 왼쪽문을 밀었다. 삐이이걱. 열리 네? "한쪽이 옳다고 해서 다른 쪽이 그르게 되는 것은 아니겠죠." 샌슨과 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다. 오른쪽 문이 더 많이, 많이, 에츄!" "오른손잡이가 많으니까 그렇겠죠." 이루릴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고삐를 쥔 채 문으로 들어섰다. 샌슨은 감 탄한 표정으로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재미있는 걸. 일부러 문 두 개를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테고, 뭔가를 느끼라고 이렇게 만들었겠지?" "뭔가가 느껴져?" 샌슨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맥풀리는 어조로 말했다. "문 하나가 고장났을 때 편리하겠어." ================================================================== 8. 인간의 무기……10.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마당이 보였고 수련사들이 건물들에서 나오는 모 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들이 문 두 개를 다 열고 들어서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프리스트 한 명이 걸어나왔다. 팔뚝이 굵직한 그 프리스트는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산문에 들어선 손님들을 환영하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샌슨은 잠시 당황하다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루릴이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마음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저희들은 지나가던 여행객들입니다. 날은 저물고 바람은 차가워 귀 신전의 지붕 아래 하룻밤을 유했으면 합니다." 그 산적 두목같이 생긴 프리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사들에 게 말했다.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고 식사수발 들거라." 그 때 샌슨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아, 저, 잠깐만요. 에…" 그리고 샌슨은 자기 머리를 딱 치더니 갑자기 슈팅스타의 안장을 뒤지 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종이조각, 먹다가 쑤셔 박아둔 빵 덩어리와 햄 조각, 씻기 싫어서 대충 닦아 쑤셔박아둔 컵이라든지 식기, 부러진 화살 촉들 몇개와 기름이 시커멓게 묻은 각종 주머니들이 테페리의 프리스트 앞에 선을 보이게 되었고 수련사들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망신스 러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네리아는 기침을 하면서 동시에 깔깔거리느 라 결국 딸꾹질까지 하게 되어 몹시 괴로워했다. 간신히 샌슨은 칼라일 영지에서 사만다에게서 받아둔 소개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샌슨은 소개장에 묻은 빵가루와 기름얼룩을 보고는 얼굴이 벌개졌다가 송구스럽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소개장을 내밀자 프리스트는 먼저 참 한심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샌 슨은 어쩔줄 몰라했지만 프리스트는 별 말 없이 소개장을 받아들여 읽 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어내려가던 프리스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우리 자매분의 소개장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품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 "아, 괜찮소. 편지는 마음을 전달하면 충분하오. 우리 종단의 친구로서 여러분들을 맞이합니다. 먼저 들어오셔서 노독을 푸시지요. 이야기는 천 천히 나누도록 하십시다." "예. 감사합니다." 수련사들의 안내를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충 손발을 씻고나자 우리들에게 방 두 개를 내어주었다. 샌슨과 내가 한 방, 그리고 이루릴과 네리아가 한 방에 들어갔다. 방안에 배낭과 보 따리를 던져두고 갑옷을 벗어두고 무기도 풀어둔 다음 잠시 기다리자 수 련사들이 찾아왔다. "오세요! 하루에 가장 중요한 행사를 할 시간입니다!" 샌슨의 얼굴을 보니 내 얼굴도 아마 저럴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수련사를 바라보다가 뭐라고 말도 못한 채 일어났다. 수련사는 싱글거리며 우리를 안내했다. 밖으로 나와 여자들이 있는 방쪽을 보니 네리아는 보이지 않고 이루릴만 걸어나왔다. "네리아는?" "음식 생각이 없다고…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아, 그래요. 흠. 아파도 잘 먹어야 될텐데." 우리들을 안내하던 수련사들은 우리들의 말을 듣자 말했다. "아, 아까 그 분, 안색이 좋지 않더군요. 감기입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흠. 그럼 식사가 끝나고 약을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가져다드리는 약을 드시면 아마 내일 아침엔 봄날 망아지만큼이나 건강 해지실 겁니다. 하하하." 샌슨은 간신히 감사를 표시했다. 봄날 망아지? 신전에서 사용되는 어휘 치곤 조금 저속하군. 봄날 망아지라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바람 피느 라 정신 없는 여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도 그럴까? 식당 안의 모습은 역시 산 위의 신전다운 분위기였다. 사방 벽에는 나 무 기둥들이 드러나보였고 벽은 두꺼웠지만 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 저 거대한 오두막 정도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 다. 그러나 프리스트들의 분위기는 별로 아늑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크 게 낄낄거리며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 들어 간 수련사 역시 들어가자마자웃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봐! 좀 비키라고! 하하. 손님들 모셔왔어!" "여! 어서들 오세요!" 삽시간에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나왔고 그래서 우리는 사방에 대고 절 을 해야 했다. 잠시 후 우리들은 종단의 친구로서 신전의 하이 프리스트 와 같은 테이블로 안내되었고 거기서 처음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뵙게 되 었다. "프리스티스 사만다의 소개장은 보았소. 난 링거스트라 하오." 샌슨은 눈치있게도 안녕하쇼, 링거스트씨. 어쩌고 하지는 않았다. 경험 이란, 결국 시간이란 무서운 거다. "예, 하이 프리스트. 황야의 방랑자에게 베풀어주신 귀 신전의 우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빙긋 웃으며 우리들에게 음식을 건네고 간단한 인삿말 들을 주고받았다. 물론 간단한 인삿말마저도 거의 고함에 가깝게 큰 소 리로 나누어야 했다. 이게 신전인가? 난 크게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로 용맹무비한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수련사들을 보고는 얼이 빠져버렸다. 그 옆에선 젊은 프리스트 하나가 껄껄거리며 응원까지 하고 있었다. 허 어, 참.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한 수련사가 식탁 위로 뛰어올라 다른 수련사에 게 달려들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근엄한 얼굴의 프리스트는 근엄하게 팔을 뻗어 수련사의 다리를 걸어넘어트렸다. 수련사는 식탁 위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 모습을 본 주위의 수련사들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난 샌슨에게 말했다. "언제 달아날까?" "밥은 먹고서… 달아나고 싶은데…" 샌슨은 재빨리 빵을 입 안에 쑤셔넣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눈 앞에 보이는 음식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참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는 것을 본 하이 프리스트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는 주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조용히들 해! 이야기 중이잖아!" 그리고는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 이 나라에는 무슨 용무로 찾아오시었소?" 샌슨은 재빨리 빵을 삼키고는 가슴을 좀 두드리고 말했다. "아, 예. 저희는 바이서스의 사절단을 따라 이 나라에 왔습니다만 저희 들에겐 따로 개인적인 용무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저희들의 용무입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사절단을 따라왔다는 말에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말했다. "누군가를 찾아왔다고? 흐음." "예. 바로 그 일로 테페리의 신전의 조력을 원합니다만." "우리가 도와드릴 것이 있소? 말씀해보시오." "테페리의 성직자들 중 한 분을 모셔갔으면 하는데요." 이것이 카알이 샌슨에게 말한 계획이다. 우리들은 드래곤도, 드래곤 라자도 아니므로 그 붉은 머리 소녀가 과연 할슈타일 가문의 딸인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테페리의 성직자들은 둘 중 하나일 경우 맞출 수 있는 권능이 있다. 따라서 테페리의 성직자 한 분을 모셔가서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 소녀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드래곤 라자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답이 둘 중 하나만 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카알은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 하이 프리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모험에의 동료가 필요하시다는 겁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내일 델하파의 항구로 갈 생각인 데, 그곳에서 테페리의 지팡이에게 확인 받을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 확인만 끝난다면 저희들의 용무는 끝나며, 동행해주신 성직자분은 다시 이 신전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늦어도 모레쯤까지만 저희들과 동행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아… 그래요? 내 알아보도록 하지." "아, 감사합니다." "이거 좀 마셔봐요. 프리스트가 직접 만들어준 약이에요. 이걸 마시면 봄날 망아지처럼 뛰게 된다던데요?" 네리아는 이상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다시 약사발을 바라보았다. "아… 훌쩍. 에츄! 이빨이 부딪혀." 모포 속에 틀어박혀 있던 네리아는 벌벌 떨면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먼저 약그릇을 보더니 곧 코를 찡그렸다. "이거 색깔이 왜 이㎖? 냄새도 이상하고…" "약이 그럼 맛있게 보일 거 같아요? 어서 마셔요." 네리아는 한손으로 코를 쥐더니 약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곧 볼을 크게 부풀렸다. 나는 기겁하며 말했다. "삼켜요오!" 꿀꺽. 네리아는 간신히 약을 삼키고는 코를 놓았다. 그녀는 곧 혀를 낼 름거리기 시작했다. "으아, 아, 에엑, 너무 써." 그러자 샌슨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약효가 좋은 모양이다." 이루릴은 방긋 웃으며 배낭을 뒤지더니 곧 엄청난 것을 꺼내어 네리아 에게 내밀었다. 네리아는 환호를 올렸다. "설탕이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요. 속 버려요."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고 빼서 손가락 을 핥기 시작했다. 샌슨은 피식거리며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하는 거 보니 내일 당장 출발해도 무리 없겠군." 쩝쩝거리며 손가락을 핥던 네리아는 곧 너무 달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 머니를 묶어서 이루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래, 뭐래? 이츄! 성직자 한 사람 내어주겠대? 훌쩍." "음. 하이 프리스트를 뵈었어. 알아본다고 하시더군." "언제 대답해주겠대?" "그건 모르겠어." 그 때 똑똑 하면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리아가 말했다. "들어오세…츄우!" 문이 열리면서 하이 프리스트와 젊은 프리스트 한 명이 들어섰다. 젊은 프리스트는 약 20대 중반쯤의 흑발 머리가 산뜻한 사나이였다. 쭉 찢어 진 눈이 장난기 있게 생긴 것과 계속 싱글거리고 있는 입매가 특이할 뿐 나머지는 평범한 인상의 젊은이였다. 입고 있는 옷이 프리스트의 사제복 이 아니라 수련사의 사제복이었으면 더 어울릴 듯한데. 하이 프리스트는 들어서더니 먼저 네리아에게 목례하고는 말했다. "아, 이 분이 편찮으시다는 그 동료분이군요. 좀 어떠십니까?" 네리아는 재빨리 설탕과 침범벅인 손을 아래로 숨기며 고개를 까딱했 다. "훠얼씬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옆에 서있는 Þ은 프리스트를 가 리켰다. "이 녀석은 간신히 테페리의 지팡이 흉내는 내니까 데려가셔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놈을 좀 세상으로 쫓아내려고 고심을 하고 있던 참인데 퍽 잘되었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좀 데려가주 시겠습니까?" 윽. 소개 말이 좀 괴이하다. 그런데 저 젊은 프리스트는 왠지 낯이 익 은데? 아, 그렇군. 아까 저녁시간에 수련사들의 칼싸움을 구경하며 박수 치던 그 프리스트이다. 샌슨은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하이 프리스 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고민할 사이는 없었다. 그 젊은 프리스트 가 먼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남자 둘에 여자 둘이라.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면 짝이 맞지 않 잖아요." 따악! 저건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하이 프리스트의 강맹한 주먹이 그 젊은 프리스트의 뒷통수에 경쾌하게 날아가 부딪혔다. 젊은 프리스트는 뒷통수를 움켜쥐고 팔짝팔짝 뛰었으며 하이 프리스트는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얼이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보시는 바와 같은 놈이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샌슨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 죄송합니다만 프리스트니까 당연히 테페리의 권능에 닿아 계 시겠지요?" 그러자 젊은 프리스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음. 맞춰볼까요? 당신은 틀림없이 남자군요. 그리고 미혼이 고, 애인은 있고, 오른손잡이군요." 샌슨은 남자군요 에서는 맥풀린 표정을 지었다가 그 뒤로 가면서 점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지요?" "남자라는 거야 보면 알고, 결혼 반지가 없으니 미혼이고, 그대신 목에 반지가 있으니 애인은 있고, 검을 차는 고리가 혁대 왼쪽에 있으니 오른 손잡이지요." 샌슨은 한층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보았고 하이 프 리스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때 네리아가 냉큼 말했다. "이거 보세요. 그럼 이거 맞춰보세요. 이츄! 저기 벽에 기대어 있는 트 라이던트 보이죠? 저게 여기 청년의 것일까요, 아니면 소년의 것일까 요?" 젊은 프리스트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정답. 내 것이니까." 네리아는 히죽 웃더니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하나 꺼내었다. 그녀는 동 전을 위로 던졌다가 받아서 손으로 가리고는 말했다. "앞면인가요, 에취! 뒷면인가요?" 젊은 프리스트는 역시 웃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뭐야? 그러자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손을 치웠다. 손에는 동전이 없었 다. 손 빠르네. 어디로 빼냈지? 젊은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리 아에게 다가갔다. 네리아가 빤히 바라보는 가운데 젊은 프리스트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저 친구는 기도하면서도 싱글거리네? 갑자기 그의 손에서 빛이 떠올랐다. 나와 샌슨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그는 네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라지 마세요." 그는 네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에서 빛이 사라 졌다. 네리아는 눈을 껌뻑거리다가 얼굴을 환하게 폈다. "기침이 안나와! 콧물도 안나오고." 나와 샌슨은 감탄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이 조용히 말했다. "테페리의 권능에 닿아계시는군요." 하이 프리스트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소. 정말 테페리의 불행이지." 고개를 끄덕여야 되나? ================================================================== 8. 인간의 무기……11. 테페리의 불행이라는 그 젊은 프리스트는 자신을 제레인트 침버라고 소 개했다. 제레인트는 끝없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 그렇잖아도 이 신전의 밥 축내기 싫어서 순례 여행이나 떠날까 생 각 중이었죠. 멋진 모험가분들과 함께 출발하게 되어 기분 좋습니다." 샌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우리들은 모험가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그저 제레인트님께서 델하 파의 항구에서 무엇을 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 후에는 다시 우 리나라로 돌아갈 겁니다." "그래요? 멋지군요! 나도 바이서스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페어리퀸과 핸드레이크의 전설이 숨쉬는 땅에는 매력이 있어요. 빌붙는 거 같습니다 만, 나도 도움이 될 겁니다. 바이서스까지만 좀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그 후에는 포교 활동을 빙자하여 유람이나 다닐 생각입니다. 바이서스는 아름답겠죠? 짠바람은 이제 지겹습니다. 바이서스는 아마도 초목의 향기 가 나는 땅일 것 같은데." "예? 아… 예.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바이서스는, 제 생각엔 아 름다운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쁘군요. 드디어 레브네인 호수를 보게 되다니, 꿈 만 같습니다! 산중에 펼쳐진 바다요, 땅에 떨어진 하늘의 거울이라던가 요? 정말 기대됩니다. 바이서스에는 테페리의 신자들이 많습니까? 종단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그쪽으로의 포교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습 니다." "예. 그렇잖아도 저희들은 테페리의 프리스티스의 소개를 받고 찾아온 길입니다." "멋지군요! 신의 지팡이가 당신들을 나에게 안내하고, 당신들은 날 모 험 속으로 안내하겠군요!" "아, 우리들은 그저…" "야! 멋진 검이군요. 그렇지. 모험가들은 무기를 가지고 다녀야 되지 요? 어디 보자. 난 무슨 무기를 들고 나간다? 다룰 줄 아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는데요. 아, 샌슨은 전사지요? 무기 좀 골라주시겠습니까?" "예? 아, 그렇게 해드릴 수 있긴 합니다만, 어디서 말입니까?" "창고에 무기 비슷한 것들이 몇 개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 숨어서 술 마시다가 본 것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네. 따라오세요!" 그리고 제레인트는 곧장 샌슨을 잡아끌듯이 하고 달려나가버렸다. 원 참. 정신 사나운 프리스트로다. 네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드러누운 채 킬킬거렸다. "저 사람과 함께 하게 된 이상… 나 앞으로 말수가 줄어들 것 같아." "하. 그렇군요. 그럼 몸조리 잘하세요. 난 이만 내 방에 가볼께요." 이루릴과 네리아에게 인사를 보내고 난 샌슨과 내 방으로 돌아와 드러 누웠다. 신전의 침대라기보다는 왠지 고향마을에 있는 우리집의 침대 같 다. 나무로 튼튼하게 속을 채우고 짚으로 매트리스를 만들고 이끼를 잘 깐 다음 천으로 덮는, 완전히 시골식의 침대였다. 흐음. 이런 건 정말 오래간만이야.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잠이 들려고 하는 찰라에 요란한 소리가 나며 샌슨과 제레인트 가 우리 방에 들어섰다. 제레인트는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후치라고 했나? 봐. 이거 나에게 어울리냐?" 난 눈을 비비며 일어났고 곧 폭소를 터뜨렸다. 제레인트는 이 컴컴한 신전의 방 안을 황야의 분위기, 즉 거치른 황야에서 드래곤과 대치 중인 전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굉장해. 어떻게 저런 무기를 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지? 제레인트는 양손에 하나씩 블랙잭을 들고서 는 팔을 거창하게 펴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블랙 잭을 들고 드래곤과 대치라. 나쁠 건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여행길에 목숨을 담보하게 되는 무기로는 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제레인트는 여 러 가지 포즈를 잡아보면서 물었다. "어때? 블랙잭의 제레인트라면 어떨까?" 나는 그런 황당한 칭호를 불러주기에 앞서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도대체 어쩌자고 저걸 골랐지?" "메이스나 플레일 멋진 것이 제법 되던데, 제레인트씨가 도통 들지를 못하더군." 난 한숨을 쉬고는 제레인트에게 평했다. "그거, 괜찮기는 한데 별로 도움은 안되겠어요." "다른 건 무거워서 안되겠던데?" "그걸 쓰려면 몸이 보통 빨라서는 안될텐데. 제레인트씨는 빠르게 몬스 터의 뒤로 다가가서 그걸로 뒷통수를 후려칠 자신이 있어요?" "앗! 그렇구나! 이건 짧아서 접근해서 써야되는 거지? 샌슨씨, 갑시 다!" "아, 예…" 샌슨은 쓰다 달다 말도 못하고 또다시 제레인트에게 끌려갔다. 잠도 다 달아나버렸군. 난 제레인트의 무기 고르기 장면이나 구경할까 해서 그들 의 뒤를 따랐다. 과연 제레인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신전의 구석에 있는 창고였다. 곡 식자루로 보이는 자루들이 쌓여있었고 갖가지 약초 무더기들과 여러가지 주머니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어 창고 특유의 그윽한 냄새가 났다. 제레 인트는 램프에 불을 붙이더니 농기구들과 함께 몇 가지의 무기들이 걸려 있는 곳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갔다. 샌슨은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역시 이게 제일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나와 제레인트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샌슨이 가볍게 들어올린 것은 아무리봐도 중량이 20 파운드는 되어 보이는 메이스였다. 원참. 난 샌슨에게 손을 내밀어 그 메이스를 받으려다가 발등 찍을 뻔했다. "제레인트씨는 샌슨처럼 오우거가 아니니까… 역시 무기는 긴 게 좋지. 제레인트. 저 스탭 어때요?" "그래? 어디 들어볼까?" 제레인트는 씩씩하게 길다란 스탭을 들어올려 휘두르다가 곧 천장에 매 달린 약초 무더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궁시렁거리며 약 초를 그러모아 다시 묶어 천장에 매달기 시작했다. 그 소동을 부린 탓에 곧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누구냐?" "아, 접니다. 제레인트." "또 거기서 술 마시고 춤 추는 게냐?" 나와 샌슨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머 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주 그러지는 않아요. 가끔." "그러시군요." 창고 문을밀면서 나타난 것은 늙수그레한 프리스트였다. 그는 우리들 의 모습을 보자 의아해했고, 사정을 설명하자 곧 웃기 시작했다. "제레인트 저 놈은 농기구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오. 그런데 언감생심 무기라니. 당신들이 측은하구려. 진심으로 테페리의 가호가 함께 하길 기도해야겠소." 제레인트는 자신을 정확히 지정하여 말하는 이 비난에도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을 동료로 하게 된 것 같다. 다음날 아침, 하이 프리스트는 제레인트와 함께 하게 된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 기도를 소집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우울한 마음으로 예배당 에 앉아 있게 되었다. 기도의 내용이야 우리들의 여행을 축원하며 제레인트가 훌륭한 테페리 의 지팡이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는 교훈적이고도 품위 있는 내용이었지 만, 제레인트는 싱글거리며 도반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우리들을 불안하 게 만들었다. "야, 제레인트. 모험 떠난다고?" "그래, 자식아. 몇 년 후에 내 노래가 만들어질 거야." "음. 제목이 그럴 듯하겠지. 제레인트의 파멸, 아니면 대륙의 불행 제 레인트." "부러우면 솔직히 부럽다고 말해, 임마." 이엄숙한 기도 순간에 제레인트는 쉴 새 없이 소근거렸고 그래서 하이 프리스트는 대노한 표정으로 기도를 빨리 마쳤다. 제레인트는 기도가 끝 난 것도 모르고 잡담을 나누다가 다시 하이 프리스트의 신성한 응징을 받게 되었다. 따악! 수련사들과 프리스트들은 마당까지 나와서 우리들을 전송했다. 아무리 봐도 제레인트와 함께 하게 된 우리들의 불행을 슬퍼하는 듯한, 혹은 고 소하다는 듯한 표정이어서 왠지 전송장의 분위기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제레인트는 어디로 간 거지? 하이 프리스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레인트는 어디 있느냐?" 그 때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여깁니다! 지금 갑니다!"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자 마굿간에서 회색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오는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기가 찬 표정으로 그 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는 꿋꿋하게 노새를 끌고 와서는 하이 프리스 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이 놈아, 그걸 가져가면 짐은 어떻게 나르라고!" "제가 모험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틀림없이 대미궁의 침범자 제레인트, 혹은 아비스의 승리자 제레인트라고 불릴 겁니다. 혹은 발록의 불행 제 레인트도 괜찮겠고. 그럼 제가 그 고대의 보물들을 모조리 교단에 바칠 텐데, 이까짓 노새 한 마리가 문제인가요? 투자를 해야 얻는 것이 있 죠." 샌슨은 기이한 신음소리를 내었고 네리아는 갑자기 에보니 나이트호크 의 발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웃음을 참느라 그러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 제레인트는 이것을 옛노래에 나오는 모험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모양 인데. 그는 우리들이 그에게 대단히 현실적인 요구가 있어 찾아왔다는 것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우리들을 그저 모험가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발 록의 불행이라고? 맙소사. 아비스의 미궁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던 터 커 일행이 생각나는군. 하이 프리스트는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져가라. 가져가.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네 놈을 쫓아내느데 대한 댓 가로 노새 한 마리는 너무나 싸다. 가져가." "감사합니다!" "멍청한 놈. 너 주려고 준비한 선물은 따로 있었는데 고작 노새냐. 그 럼 그 노새를 가져가고…" "어서 주세요." 제레인트는 빠르게 손을 내밀었고 하이 프리스트는 그 손을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싱글거렸을 뿐이다. 하이 프리스트 는 질린 표정으로 로브 자락에 손을 집어넣더니 곧 디바인 마크 하나를 꺼내었다. 제레인트의 눈이 커졌다. 하이 프리스트는 그 디바인 마크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세차게 건네주 며 말했다. "가지고 꺼져라!" 제레인트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놓인 디바인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건 사만다가 가지고 있던 것과 모양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보석으로 장식까지 되어 있는 물건이었다. 제레인트는 갑자 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오우, 맙소사! "흑, 흐윽. 이건 하이 프리스트가 교단 본부에서 선사받으신… 감사합 니다." "시끄럽다. 어서 가거라." "예. 하이 프리스트. 흐윽. 테페리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지팡이가 되 겠습니다." "테페리의 분노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놈아." 하이 프리스트의 눈시울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못말릴 사람들이 다. 산 위에 틀어박혀 사는, 게다가 종교적인 이유로 낙천적인 사람들이 라서 그런가? 다른 수련사들도 매우 감동적인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 보고 있었고 그래서 속물들에 가까운 나와 샌슨, 네리아는 매우 거북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물론 이루릴은 따스함이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였 다. 결국 제레인트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얻어낸 노새에 올라타고는 우리들 과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참으로 화창하고도 맑은 겨울날 아침, 괴상한 전송을 받으며 시작된 출발이었다. "다시는 오지 마라!" "오면 가만 두지 않는다!" "꼭 돌아오려거든 로브를 뒤집어 입고 신발을 벗어 입에 물고 '날 때리 시오'라고 적힌 팻말을 등에 걸고 돌아와라!" 제레인트는 그러한 환송의 말에 일일이 응수해주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 먹었다. 어쨌든 간신히 출발은 하게 되었다. 샌슨은 앞으로 우리 여행에 있을 암담한 미래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노새가 끼어있어서 어제처럼 빠르게 달리지는 못했다. 제레인트는 노새 위에서 스탭을 들고서 랜스 챠지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지만 그런다고 해서 노새가 달려줄 까닭은 없다. 그 고집스러워 보이는 회색 노새는 위 에 타고 있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바로 옆에 자신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마들이 걷고 있든 어쩌든 상관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속력을 지키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쉼 없이 이야기를 해서 우리는 알기 싫어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구의 보통 소년이었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새하얗게 질려버리는 어머니를 보며 세 월을 헤던 것이 멈춰지곤 하던 항구의 소년.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출 항에 앞서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어느 날 아버 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침대에 누웠다가 얼마있지 않아 무덤 속에 몸을 누이게 되었다. 제레인트는 바다를 한 번 흘겨보고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산중의 테페리의 신전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결국 그의 인생경험은 대개 테페리의 신전에서 읽은 책과 소설 등을 통 한 간접경험의 총괄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남성관은 소설 속의 남 성들처럼 정의롭고 씩씩하며 불굴의 남성이었고 그의 여성관은 모두 아 름답고 상냥하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매일처럼 계속된 신앙의 생활은 그 의 그런 소박한 감성들을 더욱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겐 생각 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생각이 고착되는 것도 훨씬 간단한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신앙의 독특함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의 현실관과 괴 리를 일으키는 현실의 모습에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의 생각을 간 단히 요약하면 결국 이런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다 착하고, 언제든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기회가 온다면 그들은 언제든 남을 도울 것이다.' 소박하지만 오히려 단단한 믿음이었다. 네리아는 미소를 지었지만, 노 새에 타고 있는 제레인트는 네리아의 허리에 눈을 보내게 되는지라 네리 아의 미소를 보지 못한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확인할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궁금한데요." ================================================================== 8. 인간의 무기……12. 샌슨은 잠깐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더니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 다. 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샌슨은 날 바라보았다. "어쩔까?" "말하지, 뭐. 내가 할까?" "흠. 그래. 네가 잘못 말하면 내가 막지." "괜찮군." 우리들의 대화를 들으며 제레인트의 눈은 빠르게 왔다갔다했다. 뭔가 대단히 재미난 일을 기대하는 악동의 눈이었다. 그것 참. 난 입을 열었 다. "그러니까… 에, 제레인트씨.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어요?" 제레인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테페리의 이름으로! 그 드래곤을 잡으러 가는 거야? 드래곤 슬레이어 가 되려고…" "아니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어, 아냐? 아, 날 걱정해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깊은 땅 밑, 공 포가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되어 휘몰아치는 드래곤의 굴에서라도 테페 리의 가호가 나와 함께 한다. 사실대로 말해. 두려움 때문에 동료를 버 리고 도망가지는 않아." 제레인트의 장엄한 얼굴이 퍽이나 아름다웠다. "…당신은 안 두려울지 몰라도 우린 두려워요. 어쨌든 크라드메서에 대 해서는 아는 모양이군요." "어, 그러니까 너희 나라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크림슨 드래곤 아니야?" "예.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아시죠?" "물론이지. 드래곤을 부리는 사람 아니야?" "예? 어…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드래곤 라자가 없는 드래곤은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아시겠지요?" "그래그래. 음. 이거 무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제레인트의 얼굴은 전혀 무서워하는 얼굴이 아니어서 그 말이 내겐 아 주 이상하게 들렸다. 어쨌든 난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노새 위의 프리스 트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크라드메서가 조만간에 다시 활동기에 접 어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레인트는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돼!" 제레인트의 비명같은 고함소리. 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게 아니고! 크라드메서가 벌써 일어날 까닭이 없어. 크라드메서가 사람처럼 불면증이라도 걸렸단 말이야?" 이번엔 나와 샌슨이 얼빠진 얼굴이 되었따. 샌슨은 당황한 얼굴로 제레 인트에게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레인트씨의 생각으로는 수면기가 너무 짧다는 말입니까?" "예. 수면기에 들어선 것이 언제라고 벌써 일어나다니… 아! 그래서 드 래곤 라자를 찾으시는 거군요? 알았습니다. 이해했습니다. 흠. 그러므로 제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난 팔을 마구 휘둘러 제레인트의 말을 막고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제레인트씨가 이해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만 안타깝 게도 우린 아직 이해하지 못했어요." "뭐가?" "크라드메서가 벌써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요?" "응. 말이 안되지. 크라드메서가 어떤 드래곤인데 벌써 활동기에 들어 가?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지.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 나는 거겠지." "존재를… 느낀다?" 제레인트는 우리들의 얼굴을 전부 한 번씩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 다. "모르는 모양이네요?" "더 슬픈 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거지요. 도대체 무슨 말이죠?"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 크라드메서가 깨어날 때가 아닌데도 깨어난다 는 것은, 드래곤 라자가 그를 부른다는 말이잖아?" "드래곤 라자가 부른다? 그렇다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벌써 대 륙에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뭐. 어? 그럼 당신들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는 거 아니신가?" "마, 맞기는 맞는데 순서가 반대네요." "순서가 반대라고?" "우리는 크라드메서가 깨어나는 것을 알게되고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드래곤 라자를 찾는 겁니다." 제레인트는 기분좋게 웃었다. "아, 그래? 순서는 반대지만 결과는 같네. 그게 바로 테페리의 갈림길 이지! 갈림길은 갈림길 그 자체이지 결과가 아니야. 갈림길 때문에 결과 를 잊으면 곤란하지. 우리 신전에 정문이 두 개 있던 것 기억나나?" 제레인트의 만사태평식의 웃음을 뚫고 샌슨이 다급하게 질문했다. "잠깐만요, 제레인트씨.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는 벌써 자신이 드래곤 라자인 것을 알고서 드래곤을 부른다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겠죠. 그 라자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는 못하겠 지요. 오히려 잠들어있던 크라드메서가 그 라자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난 다는 것이죠." "아, 그렇습니까?"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문제가 복잡해지는군요." 우리는 모두 이루릴을 쳐다보았다. 이루릴은 생각을 하며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다름아닌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 이라면… 그는 깨어나자마자 드래곤 라자를 찾아가겠군요. 그렇다면 우 리가 찾을 필요가 없지 않나요?" "예?" 샌슨은 놀라서 말고삐를 떨어트렸지만 난 놀란 나머지 제미니의 옆구리 를 걷어차고 말았다. 그래서 한참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샌슨은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다시 말했다. "제레인트씨. 도대체 어디서 그런 지식들을 얻으셨습니까?" "글쎄요?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어느 문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군 요. 신전이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 책이 오가는지는 짐작하지 못하시겠지 요? 책이라고 하면 마법사를 떠올리기 쉽겠지만 마법사들은 오히려 책을 별로 읽지 않아요. 그들이 보는 것은 어려운 책들뿐이죠. 하지만 성직자 들은 세상을 순례하면서 벼라별 책을 다 접하게 되고 그래서 신전으로 그러한 책들을 가져오게 되지요. 물론 떠나갈 때 그런 책을 가지고 떠나 가기도 하고… 신전은 책의 사거리 같은 곳이죠. 많은 책이 있긴 하지만 머무는 책은 적은." "그렇다면 그 생각이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 중요한 일이니까 서투른 확신은 삼가해야겠죠?" "확신할 수 없으신가 보군요." "예. 미안합니다만." 제레인트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샌슨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야기가 겉돌았군요. 원래 우리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원래 계획이라는 것은 참 좋은 거에요. 비록 내가 그것을 자세히 알지 는 못한다 하더라도." 제레인트의 말에 샌슨은 웃으며 말했다. "예. 우리는 드래곤 라자일 가능성이 높은 어떤 소녀를 찾아가는 길입 니다. 당신이 그 소녀가 드래곤 라자인지 확인해 준다면, 우리는 그 소 녀를 데리고 갈색산맥으로 크라드메서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멋지군요! 알았어요." 이루릴은 샌슨을 쳐다보았고 그래서 샌슨은 설명했다. "크라드메서가 스스로 드래곤 라자를 찾아간다면 다행한 일이긴 합니 다. 하지만 제레인트씨의 말에 의하면 확실치 않은 일입니다. 따라서 무 조건 희망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할 수 있는 행동을 계속 취해야겠습니 다." "알았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네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헤이! 결국 델하파로 달려간다는 이야기지? 그럼 가자고! 이랴!" "잠깐! 노새를 탄 사람도 생각해줘요!" 점심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우리는 델하파로 달려갔다. 그래서 오후 중간 에서 짧아진 해 안에 간신히 델하파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제레인트는 자 신이 4인의 기사와 함께 달려온, 전무후무한 노새의 기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난 언덕받이에서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짠바람을 불어넣었다. 후우우우욱! 딱! 켈록, 켈록, 누구야? 네리아가 등을 치는 바람에 사레가 들릴 뻔했 다. 눈을 흡뜨면서 네리아를 돌아보니 네리아는 얼굴이 멍해진 채 한 방 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후치야, 후치야! 저거, 저 배 좀 봐! 궁궐보다 더 크다!" 네리아가 가리킨 것은 항구 한켠의 도크에서 건조 중인 거대 범선이었 다. 허, 땅 위에 올려놓고보니 정말 큰데? 그 옆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지? 우와, 말도 안나온다! 그 옆의 다른 건물들의 지붕이 모두 그 배의 허리춤에도 못올라가고 있었다. 띵깡, 탱! 띵깡, 탱! 멀리서부터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가 경쾌하다. 도크 한 켠에는 아예 노천 용광로가 만들어져 있어 그곳에서 배에서 사용되는 각 종 철부품과 의장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산더미 같은 목재와 나무통이 쌓여 있었다. 정말 많아도 너무 많다. 제레인트가 웃으며 말했다. "배를 만드는 것은 세계의 창조를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라 고 했던가요. 항해 중인 배는 바다로 완전히 둘러쌓인 고립된 세계, 그 안에서 모든 선원들의 생활을 처리해내어야 되지요. 100 명 이상이 타는 배는 확실히 거의 세계를 설계하는 기분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하더군 요." 이루릴은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름답군요. 세계의 축소판이라…" 샌슨 역시 감동적으로 눈으로 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이나 궁전이 거대한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다. 하지만 저 거대한 것은 움직이는 물체이다. 저렇게 커다란 것이 물 위에서 떠서 움직이다니,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배는 어째서 가라앉지 않는 거지?" 내 혼잣말에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배니까." "뜨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물이 받치고 있으니까." 난 나머지 일행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 내려가죠! 어느 술집이죠?" 이루릴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델하파의 항구로 들어섰다. 항구도시 주 변을 둘러싼 얕은 성이 보였고, 성은 도시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도시의 전경을 잘 감상할 수 있었다. 마치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그릇 밑바닥에 있는 것들 을 보는 기분이었다.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간단했다. 엘프도 있는데다가 성직자도 끼어 있 어 아무도 우리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성문 경비병들은 우리 를 검문하지도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하긴 이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전 시에 있는 것도 아니지. 우리들 외에도 많은 수의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포석이 잘 깔린 길을 따라 다가닥거리며 점점 낮은 지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항구의 사나이들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날씨가 꽤 쌀쌀한데도 모 두들 두꺼운 선원용 외투를 어깨에 둘러매거나 아예 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단 짠바람 부는 곳이라 그런지 철제 갑옷 같은 것 은 구경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모두들 덮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대부분 머리에 선원모나 수건을 얹고 있는데 그 눈가에는 역풍 속에서 항로를 바라보느라 생긴 잔주름들이 가득했고 꽉 다물린 입술은 당장이라도 술 병 마개를 씹어 부술 것 같은 강인함이 느껴졌다. 덩치들이 모두 이만저 만 큰 것이 아니었다. 샌슨이 보통 체격으로 보일 정도이니… 네리아는 감동적인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폭풍과 사나운 파도를 뚫고 여기에 오른 것 같은, 마치 물장구치다가 뭍에 오른 곰처럼 생겼다. "모두들 대단히 크다아?" "뱃일은 힘들 테니까." 샌슨은 간단히 대답했고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때 제레인트 가 대답했다. "대해원의 시련을 생활로 여기는 사나이들이니까요." "그 대답이 한결 마음에 드네." 이루릴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의 사나이들은 바이서스와는 달리 엘프에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엘프는 숲의 종족이었지. 저 들은 바다의 사나이들이고. 이루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는군요. 이쪽 길이에요." 이루릴은 우리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항구의 건물들은 모두 꽤 단단해보였다. 일스 공국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느끼는 것인데 벽이 정말 두껍다. 바닷바람 때문인가? 그리고 건물 들이 대개 땅딸막해 보인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곳곳에서 비 릿하게 풍겨오는 생선 냄새, 그리고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각종 해산물들이 보였다. 여러 명의 사나이들이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 (?)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네리아는 질겁을 했다. 저게 물고기 맞나? 생긴 것은 휘우듬하고 멋진 날개가 양쪽에 붙어 있어 거대한 방석처럼 생겼는데 마치 창처럼 생긴 꼬리가 뒤에 길죽이 나 있었다. 네리아는 그 것이 그대로 날아와 덮칠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 무슨 물고기가… 물고기 맞나?" 제레인트는 히죽 웃으며 설명했다. "저건 바다의 악마군요." "악마요?" "가오리입니다. 바다의 악마라는 것은 선원들이 부르는 별명이지요. 저 거대한 날개를 펼치면서 간혹 바다 수면 위를 날아다닌답니다. 그럴 때 보면 영낙없이 검은 망토를 두른 바다의 악마지요. 이 계절에는 잘 잡히 지 않는 물고기인데, 아마도 자이펀해쪽의 원양항해에서 잡아온 것인가 보군요." 자이펀해라. 흠. 하긴 여기는 일스 공국이니까 얼마든지 자이펀해쪽으 로 항해할 수 있겠지. 이루릴 역시 놀란 눈으로 그 가오리라는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들을 안내했다. 사람보다 바람이 더 많이 다니는포석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삐이걱. 바람에 간판이 삐걱거리는 펍이 보였다. 간단한 2층 건물로 간판에는 웨일즈 본야드(Whale's boneyard)라고 적혀 있었다. 고래의 묘지라고? 샌슨은 말에서 내려 펍 앞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말을 매어둘 말뚝이 없 는 것이다. 샌슨은 안을 향해 외쳤다. "이거보셔, 주인장! 웨일즈 본야드에 주인장 계십니까? 말은 어디다 묶 으면 되오?" "네! 잠시 기다리세요!" 안에서 짜랑짜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묵직한 항구도시에서 듣기엔 왠지 맑아서 이상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그 소녀의 목소리에 크 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목소리라? 그렇다면?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안에서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달려나왔 다. 간단한 모직 원피스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 소녀였다. 소녀는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고 우리는 그 머리를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였다. ================================================================== 8. 인간의 무기……13. 소녀는 먼저 우리 일행을 보고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우린 외국인이니까 복장에서부터 여러가지로 많이 달라보이겠지. 한편 우리는 그 소녀의 머리카락을 보며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못꺼내고 있었다.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안녕하세요?" 꼭 적당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특별히 흠잡을 것도 없는, 상당 히 무난한 말이었다. 소녀도 그제서야 자신의 역할을 알아차린 듯이 말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전에 오신 분이군요?" 소녀는 이루릴에게 말했다.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절 기억하세요?" "예. 엘프분이시니까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처음 뵙네요." 제레인트가 냉큼 말했다. "아, 난 일스 사람이고 이 분들은 저 전설이 숨쉬는 초원의 땅 바이서 스에서 오신 손님들이오, 아가씨." 전설이 숨쉰다고? 헤헷? 그 소녀는 곧 선망의 눈초리로 우리들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이마를 가볍게 치고는 말했다. "아, 말을 데리고 절 따라오세요. 일스는 항구라 말들이 별로 없긴 하 지만 저희 펍에서는 마굿간을 만들어 두었지요. 말들은 바람을 싫어하지 요? 마굿간을 뒷쪽에 만들어 두었어요." "아, 예." 우리는 긴장된 걸음걸이로 그 소녀를 따라 걸어갔다. 건물 뒷편을 돌아 가니 그런대로 마굿간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다. 흠. 그 소녀는 여기가 썩 훌륭한 마굿간이 아니냐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우리는 그래서 참으로 대단한 마굿간이라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우리 말들의 속마음은 어땠는 지 모르지만. 말들을 매어두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네리아는 입을 쫙 벌렸다. "히야아아…!" 건물 안은 온통 거대한 뼈와 이빨로 장식되어 있었다. 왜 웨일즈 본야 드인지 알 것 같다. 아마 고래뼈인가 보다. 마치 건물의 기둥처럼 벽에 는 거대한 갈빗대 - 그 갈빗대를 보자 고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 다. - 가 세워져 있었고 벽에는 옷걸이 대신 커다란 이빨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바를 보자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바에서 식당으로 통하는 문 은 거대한 머리뼈 - 아마 고래 머리뼈겠지 - 로 장식되어 있어 주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마치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되어 있었 다. 장관인걸? 안에는 두 세명의 손님들이 앉아 있을 뿐 한산했다. 아마 선원일 것이 라고 생각되는 그 사람들은 모두 엄청나게 독할 것처럼 보이는 시커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모두 별 말도 없이 조용했다. 그들은 우리들이 들어섰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소녀는 재빨리 빈 테이블 하나를 행주로 훔치더니 우리들을 앉게 했 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샌슨은 떨뜨럼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펍이 자랑할만한 술이 뭡니까?" "어떤 술이든 다 좋아요. 아, 제가 마셔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손님들은 다 좋아해요." "맥주 있습니까?" 소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의아 해졌다. 소녀는 말했다. "역시 초원의 나라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일스에선 맥주보리가 자라지 않아요." "아, 그렇겠군요. 음. 그럼 저기 저 분들이 마시는 걸로 주세요." 이루릴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전에 마시던 걸로. 기억하세요?" "와인이죠? 물론이에요." 그러자 네리아와 제레인트도 와인을 주문했다. 거 참 호기심 없군 그 래. 난 샌슨과 마찬가지로 '저기 저분들이 마시는 것' 이라는 길다란 이 름의 술을 주문했다. 소녀는 뽀르르 달려갔다. 그 새에 샌슨은 재빨리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자, 확실한 거 같지? 10대 후반이고, 머리카락은 정말 붉은데?"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고아인지 확인하면 되겠네?" 그러자 이루릴이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샌슨은 재빨리 말했다. "아, 걱정말아요. 이루릴. 우리 중엔 그럴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까. 어 이, 후치야? 너만 믿는다." "엉? 무슨 말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고아인지 확인해." "왜 나야?" "네가 우리 중 제일 얼굴이 두꺼우니까." 샌슨은 왜 저리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어려워할까. 게다가 저 소녀는 이제 아이라 부를 수도 없이 다 큰 처녀인데. 제레인트는 우 리들의 대화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난 샌슨에게 푸념섞인 표 정을 지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루릴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 다. 헤헷. 고아냐고 물어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 잠시 후 그 소녀는 소반을 받쳐들고 와서 잔을 내려놓았다. 샌슨은 좀 과장되게 나에게 눈짓을 보내었고, 난 그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 지금 바쁘신가요?" "예? 아뇨. 별로 바쁘지는 않은데요." "우리는 여행자들이거든요. 그래서 델하파의 이것저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요.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자 저쪽의 바에서 주 인으로 짐작되는 중년 남자가 흘깃 우리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손님들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자 소녀는 기세좋게 말했다. "시끄러워요! 아빠는 조용히 해요! 여기 외국 손님들이 뭘 좀 물어볼 게 있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자 주인은 피식거리며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빠라고? 샌슨은 맥이 탁 풀리는 표정을 지었다. 오우, 젠장! 이 먼 일스까지 찾 아왔는데 아니라니. 네리아는 짜증섞인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루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허, 이것 참. 나도 기운이 쭉 빠졌 지만 그렇다고 말을 걸어놓고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난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후치라고 해요. 후치 네드발."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흠. 바이서스의 이름은 신기하네요. 아, 이상하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저, 좀 낯설다는 거지요. 난 레니에요." "레니라. 멋진 이름이네요. 그런데 성은 뭐지요?" 레니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성은 없어요. 고아거든요." 나도 놀랐지만 샌슨은 정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레니의 뒷통 수 쪽에서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며 소리없이 환호를 보내었 고 그 얼굴을 보느라 난 하마트면 웃어버릴 뻔했다. 네리아는 환한 얼굴 이 되더니 이루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이루릴은 살폿 미소를 지었 다. 아하! 그녀는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아까부터 말하려 했던 것이군. 난 기운이 펄펄 나서 질문했다. "아, 미안합니다. 아까 저기 저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예. 진짜 아버지는 아니에요. 저 분이 절 맡아서 키워주셨거든요. 그 래서 그렇게 부르는 거에요." "아, 그럼 레니양의 친부모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저도 잘 몰라요. 전 어릴 때 이 항구에 어떻게 들어왔대요. 어디서 나 타난 여행자가 절 데리고 왔대요. 그 여행자도 제 부모는 아니었는데, 어머, 죄송해요. 제 이야기를 늘어놓았군요." "아뇨,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예? 아, 예.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걸요. 그 여행자는 이 펍 에 절 맡겨놓고는 배를 타고 떠났대요. 그리곤 돌아오지 않았어요. 헤헤 헤. 흔한 이야기지요?" 레니는 자신의 우울한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단단한 아가씨로군. 바닷바람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레니라는 이름은, 그럼?" "그 여행자가 절 그렇게 불렀대요." 여행자라… 도대체 어떤 여행자인 걸까? 흠. 어쨌든 이젠 확인의 순간 이군. 샌슨과 네리아는 누가 보면 우리들에게 덮쳐들려고 작정하고 있다 고 판단할 정도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짐짓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저, 레니. 잠시 실례 좀 해도 될까요?" "예? 무슨 말씀이죠?" "사실, 우리는 어떤 소녀를 찾고 있어요. 고아 소녀지요. 우리는 여기 엘프분의 말을 듣고 바로 당신을 찾아왔어요." "예?" 레니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놀라지 말아요. 우리는 어쩌면 당신이 우리들이 찾던 그 소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저, 저를요?" 레니는 크게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진정시켜야 돼지? 에라, 그냥 밀고 나가자. "우리는 절대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소녀를 꼭 찾아야 되는 임무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 소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붉은 머 리이고, 10대 후반이며, 그리고 고아라는 겁니다." "저, 저랑 같네요?" "예. 그래서 이 머나먼 일스 공국까지 찾아온 겁니다." "저, 왜 그 소녀를 찾는데요?" "그건 지금으로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 당신이 그 소녀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럼, 그럼 어떻게 절 확인하실 거죠? 전 어릴 때의 기억같은 것은 없 어요. 뭔가 증거가 될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난 제레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계시지않습니까." 제레인트는 놀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가 다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 역시 날 바라보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내겐 너 무 우습게 보였지만 난 엄숙하게 말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께서 그 디바인 파워로 당신을 확인하실 겁니다." 제레인트는 먼저 레니에게 좀 어설픈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날 쳐다 보았다. "어, 후치. 그러니까 뭘 확인하면 되는 거지? 이 소녀가 너희 일행이 찾는 그 소녀인지를 확인하면 되는 거야?" "예. 그래요." 그 때 레니가 재빨리 말했다. "저, 설마 그거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지요? 무슨 특별한 준비를 해야 된다거나…" 그러자 제레인트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런 것은 없습니다. 벌써 끝났으니까요." "끝났다고? 벌써?" 네리아가 놀라서 외쳤다. 레니도 놀라는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 다. 제레인트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어요." "뭐라고?" 이건 샌슨의 놀라는 목소리다. 나도 놀란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 다. 주점의 다른 손님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들의 관심사로 돌아갔다. 제레인트는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데요? 아마 당신들의 질문이 잘못된 것 같아요." "질문이 잘못되었다니오? 그게 무슨 말이죠?" "당신들은 정확하게 어떤 사람을 찾고 있지요? 붉은 머리 소녀, 10대 후반, 고아의 소녀라면, 내게 물어볼 것도 없이 확실하게 이 소녀가 맞 아요. 테페리께서 날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지요." 샌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지요." 이루릴은 손을 들어 레니를 가리켰다. 레니는 움찔하면서 불안한 눈으 로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레니를 가리킨 채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테페리의 지팡이, 그 지팡이를 쥔 자의 권능에 의지하여 묻겠으니, 이 소녀에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나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 8. 인간의 무기……14.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난 잠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아니라 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분명히 대답했다. '예.' 환호를 올려야 되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되나? 그러나 샌슨은 싱 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요. 그럼." 네리아는 멍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샌슨의 말에 정신을 차렸 다. 그녀는 박수를 딱 쳤다. "뭐가 그리 간단해! 됐네! 그럼 레니가 바로 그 소녀구나!" 샌슨도 그제서야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하. 그렇군. 다행이군." 이루릴도 미소를 지었고 나도 멍청한 웃음을 지었다. 레니는 아직 뭐가 뭔지 몰라서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우리들 모두가 웃고 있는 것을 보다 가 레니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자, 잠깐만요. 드래곤 라자라니오? 제가요?" 샌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이 바로 우리들이 찾던 드래곤 라자입니다." "드래곤 라자면… 드래곤을 부리는 그 드래곤 라자 말인가요? 제가요? 말도 안돼요!" 레니는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제가요? 제가 드래곤 라자라고요?" 주점의 손님들이 다시 우리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속해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레니의 입에서 나온 드래곤 라자 라는 말에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바쪽에서는 주인도 놀란 얼굴이 되어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난 당황해서 말했다. "잠시만요, 레니. 설명할께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보세요. 천천 히 설명을 들어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레니는 어쩔 줄 모르고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 치 그대로 뒤로 돌아 달아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 때 이루릴이 말 했다. "레니양." "예, 예?" "당황스럽겠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앉아보세요. 우리들은 최선을 다 해 설명하겠습니다. 그 다음 우리들의 설명이 합당한지 판단해보세요. 그러니 먼저 우리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레니는 한참 동안 이루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 주춤거리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자 손님들은 의아한 시선을 보 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들쪽으로 비상한 관심을 쏟는 것은 확실했다. 그 때 바쪽에 있던 주인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만. 난 그레이든이라 하오." 그러자 샌슨이 일어서며 대답했다. "아, 반갑습니다. 그레이든씨. 난 샌슨 퍼시발입니다. 그렇잖아도 주인 장께도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거기 좀 앉으시지요." 그레이든은 역시 의자를 끌어오더니 레니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말했 다. "댁들은 바이서스 분이지요? 그런데 드래곤 라자라는 것은 무슨 말이 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레니양이 드래곤 라자라고 생 각합니다." 레니는 마치 치한이라도 만난 소녀가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듯이 그레이 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레이든은 마치 딸을 보호하는 아빠처럼 레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여기 계신 테페리의 프리스트께서 확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레이든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저의 확신은 곧 테페리의 확신입니다. 레니양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레이든은 불안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레니를 바라 보았다. 레니는 애처로운 눈으로 그레이든을 바라보았고 그레이든은 고 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가…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레이든은 샌슨을 도전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도대체 뭣들 하는 사람이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폭풍과 코스모스의 에델브로이의 총본산 그 랜드스톰에 의해 의뢰를 받고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소녀를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엔 제레인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저희 나라에는 드래곤 라자의 혈통이 약속되는 가문이 있습니다." 그레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할슈타일 가문 말이지?" "아시는군요. 그 할슈타일 가문에서 과거 언젠가 어떤 소녀가 실종되었 습니다. 우리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그 소녀를 찾기 위해 동분서 주 하던 도중, 마침내 이곳까지 이르러 레니양이 바로 그 소녀임을 확인 하게 된 것입니다." 나와 네리아는 감탄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의젓하다 니. 음. 멋있는데? 확신에 찬 샌슨의 음성은 도저히 반론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 그레이든은 이마를 짚었다가 말했다. "그럼, 레니가 할슈타일 가문의 딸이란 말입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든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 두세 명의 남자들에게 고함질렀다. "이봐! 오늘 장사 끝이다. 어서들 일어나." 남자들은 모두 그레이든에게 불평섞인 시선을 보내었지만 그레이든은 완고한 표정을 지었고 남자들도 별 말없이 일어났다. 그들이 술값을 치 르고 나가자 그레이든은 술집의 문을 닫아버리고는 다시 우리들쪽으로 걸어왔다. "이제 조용하니 터놓고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말대 로라면 레니는 할슈타일 가문의 후손으로, 그러니까 당신 나라의 귀족이 라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맙소사… 레니. 멋지군, 그래?" 그레이든은 얼빠진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지만 레니는 여전히 질린 얼 굴이었다. 그레이든은 사나운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요?" "예?"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찾아온 거요? 왜 지금껏 찾지도 않다가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나서 우리들을 찾아온 거요? 그렇소. 우리들이라고 말했소 레니와 난 피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15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온 사이오. 레니는 나에게 친딸이나 다름없소." 샌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 말은 간단해서 좋군. 당신들이 뭘 이해한단 말이오? 당신 들이 이해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그레이든의 사나운 기세에 우리는 모두 죄나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샌슨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그레이든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언제 데려갈 거요?" "아빠!" 레니는 그레이든에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레이든은 레니의 손을 꽉 쥐었다. "레니야." "싫어요! 전 안갈 거에요! 싫어요!" 그레이든은 묵묵히 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니야. 왜 이제껏 너에게 내 성을 주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레니는 울먹거리며 그레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든은 말했다. "난 널 내 친딸이라고 생각하며 키웠어. 그 점만은 뱃사람들이 가장 무 서운 맹세를 할 때 거론하는 절망의 바다에 걸고 맹세할 수도 있다. 하 지만 내가 널 내 친딸로 생각한다고 해서 너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넌 너의 친부모를 찾아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길지도 몰랐거든." 레니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숙연한 표정으로 그 부녀 를 바라보았고 그레이든은 레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난 네가 친부모를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너에게 성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던 거야. 다행히도, 네가 귀족의 딸이었구나. 허허.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정말 다행한 일이야." "뭐가, 뭐가 다행이에요! 아빠, 아빠가 나의 아버지에요!" 레니는 울먹이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레이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많은 생각을 했다. 간혹 영영 너의 친부모를 알 수 없게 되면 어쩌 나 생각도 했지.그럴 경우라면 네가 고아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었기 때 문에 너에게 좋지 않은 미래를 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했었지. 정말 괴로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내 결정은 옳았어. 허허, 아마 나에게 테페리의 은총이 내렸나보다." 그레이든의 굵은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젠 말을 높여야 돼나? 레니 아가씨." "아빠!" 레니는 바락 고함을 지르고는 곧 일어나서 달려가버렸다. 그녀는 고래 머리뼈로 만들어진 그 주방 입구로 달려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그레 이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거칠게 비비고는 다시 우리들을 바 라보았다. "걱정 마시오. 자기 방에 올라갔을 거요." "아, 예." 그레이든은 다시 제레인트를 흘깃 보았다가 말했다. "테페리의 성직자께서 확인하셨으니, 아마 확실하겠군. 그렇다면 좋소.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인해야겠소." 그레이든은 사나운 눈길로 샌슨을 노려보았다. "왜 이제서야 찾아온 거요? 당신들이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15년 동안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이제서야 그 행복을 깨는, 그런 권한 까지 있지는 않을 것이오!" 샌슨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했다. "저, 저 우리는 귀족이 아닙니다." "뭐라고? 어쨌든 귀족의 심부름꾼 아니오!" "아, 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그랜드스톰의 의뢰 를 받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레이든은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그는 우리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말했다. "잠깐, 그럼 그게 무슨 말이오? 할슈타일 가문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슈타일 가문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찾아온 것이오? 그 가문과는 상관도 없으면서?" 샌슨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허 이거 참. 그러고보니 우리 입장이 좀 이상하긴 하군 그래. 할슈타일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그 잃 어버린 딸을 찾아왔는걸? 그 이유는… 카알이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딸을 찾으면 안 되는 이유. 설마 이걸까? 카알은 레니가 보나마나 지난 세월 동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을 짐작했고, 따라서 지금 그녀에게 원래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는 것인가? 설마. 아니겠지. 그렇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이유가 도대체 뭘까? 샌슨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 해서 말하는 것처럼 샌슨은 조심스럽고 진지한 태도로 설명했다. "저희 나라에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이 있습니다. 그 드래곤은 언젠가 우리 나라에 엄청난 해를 입혔습니다. 만일 그 드래곤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우리 나라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레이든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어 아오. 수면기에 들어서지 않았소?" "예. 갈색산맥에 있는 그의 레어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갈색산맥 의 드워프들이 그 크라드메서가 다시 깨어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레이든은 숨막히는 얼굴로 말했다. "다시 깨어난다고?" "예. 드워프들은 그 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드래곤이 다시 깨어나 게 된다면 저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강력한 크림슨 드래곤은 대륙 전체의 위험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대처가 필요합니다. 많은 고명 하신 분들의 의견교환 끝에, 저희들은 크라드메서에게 드래곤 라자를 맺 어주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라고 결론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레니를?" "예…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륙에서 더 이상 드래곤 라자를 발견 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슈타일 가문의 후손인 레니양은 확실한 드래곤 라자이며, 어쩌면 가장 강한 드래곤 라자일 것입니다. 그 래서 저희들은 레니양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레이든은 창백한 얼굴로 말도 제대로 못한채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성함이?" "이루릴 세레니얼입니다." "예. 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대답을 하지 않을 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 말이 진실입니까?" "진실입니다." 이루릴이 너무도 간단히 응낙해버리자 그레이든은 힘이 쭉 빠지는 표정 을 지었다. 그는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었다. "하, 이런… 오늘은 도대체 말싸움도 못해볼 사람들만… 찾아오는군. 테페리의 프리스트에 엘프라…. 오늘이 내 인생 최악의, 최악의 날인가? …아니면 내가… 내가 가장 처절한 가을을 맞이해버린 건가? …이게 마 법의 가을인가?" 그레이든은 혼잣말을 하듯이 띄엄띄엄 말했고 우리는 모두 아무 말도 못한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든은 손을 치우더니 갑자기 바로 걸어갔 다. 그리고는 바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더니 병채로 주욱 들이켰다. 우리 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레이든은 술병을 든 채 다시 걸어왔 다. "그렇다면, 저 애를 데리고 갈색산맥으로 그 드래곤을 찾아가는 거요?" "그렇습니다." "미쳤어…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군. 이게 핸드레이크와 페어리퀸이 나 오는 옛이야기인가? 레니가, 내 주방에서 빈 술병이나 닦아가며 자라온 레니가 드래곤을 만나러 초원의 나라 바이서스로 찾아가서, 그리곤 크라 드메서를 만난다고? 최악의 크림슨 드래곤을?"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됐소! 엘프가 확신했고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확신했소! 제기랄. 여기 서 내가 말도 안된다고 말하면 내가 미친 놈이겠지." 그레이든은 다시 술병을 들이켰고 우리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갑자기 그레이든은 술병을 탕 내리면서 말했다. "어떻게 되는 거요?" "예?" "만일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 8. 인간의 무기……15. 갑자기 우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샌슨은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이, 이런. 그 생각은 못해봤는데? 샌슨은 입을 꽉 다물었다가 말했다. "레니양의 안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 다." "그래요? 그래서 목숨을 건 기사들을 두었던 그 많은 레이디들이 죽어 갔던 모양이지?" 그레이든의 비아냥거림은 왠지 카알의 그것과 비슷했다. 샌슨은 무안한 얼굴이 되었지만 다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전 기필코…" "됐소! 필요없어. 그러면 저 아이는 다시 돌아오는 거요?" "예?" 샌슨은 다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이런.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만 일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니, 이건 받아들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레니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되는 거지? 할슈타 일 가문으로 돌아가야 되나? 아니면 여기 그레이든에게로 돌아와야 되 나? 난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딸로서 레니를 찾는 것이 아니다. 잡종 개량의 도구로서 레 니를 찾는 것이다! 레니는 반드시 여기 그레이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건 확실하다. 그 때 네리아가 처음으로 말했다. "저희들에게는 레니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이 없어요." "뭐요?" 그레이든은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우리들 모두가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레니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봐요.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아 니, 어린애라도 그런 것을 결정할 수 있을 테지요. 아무리 어린애라도 누가 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모를까요?" 그레이든은 멍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알 거에요. 우리는 그녀의 결정에 따르겠어요. 당신, 좋은 기회를 잡은 거에요. 호호호." "뭐라고요?" "후작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들이 찾아온 것 말이죠. 우리는 후작 가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레니의 의사만 존중할 거에요. 레니가 여기로 돌아오길 원한다면 책임지고 여기로 돌려보내드리겠어요. 하지만 레니가 귀족 부모를 원한다면 당신도 그 뜻에 따라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실 테지요. 마음의 부담이 있었으면서도 15년 동안이나 성을 주지 않 았던 당신이니까." 그레이든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레니가 우리와 함께 떠나야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크 라드메서는 너무너무 위험해요. 이건 대륙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이든 레니든 할슈타일 가문에서든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어요. 아시겠지요?" "아, 어, 알겠소. 그렇다면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된다 면?" 네리아는 한쪽 눈을 가볍게 깜빡여 보이고는 말했다. "난 드래곤 라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 그녀는 어쩌면 크라드 메서를 타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만일 그녀가 여기 로 돌아오고 싶어할 경우에 한해서." 샌슨은 감탄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도 정말 놀랐다. 네리아 가 저렇게 말을 잘하다니. 그레이든은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다. "알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대륙의 사활이란 말이지. 허헛! 이거 정말 엣이야기로군. 정말 핸드레이크와 페어리퀸이 나오는 옛이야기야." "허락하시는 거죠?" "허락하지 않을 수 있소? 레니에겐 내가 말하겠소. 언제 출발하실 거 요?" 네리아는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허둥지둥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내일 당장이라도…" 그레이든은 샌슨을 흘겨보며 말했다. "알았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헛, 그래도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게는 해주는군." "아, 예…" 그레이든은 다시 한 번 삼엄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분명한 거죠? 오로지 레니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거?"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샌슨은 다부지게 말했다. 설령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 부활해서 일렬로 늘어선 채 맹세를 한다 해도 지금의 샌슨만큼이나 믿음을 주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된다. 웨일즈 본야드를 빠져나왔다. 레니는 물론 나오지 않았고 그레이든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말을 꺼내어 올라타면서 다시 한 번 그 고래의 묘지를 바라보았다. 그들 부녀가 호젓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우리 는 내일 아침에 여기로 오기로 했다. 샌슨은 네리아에게 말했다. "야, 네리아. 정말 감탄했어." "헤에. 그랬어? 하지만 그 이야기 그만해. 가슴이 아파." "그래? 음. 하지만 넌 잘 말했는데. 나도 네 말에 그대로 찬성이야." 네리아는 샌슨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내가 한 말? 좋은 말이지. 너무너무 옳은 말이지. 하지만 그 아이에게 그런 결정을 내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 아?" "…어쩔 수 없잖아." "맞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그게 슬픈 일이라는 것도 어쩔 수 없어." 네리아는 매몰차게 대답했고 그래서 샌슨의 처지는 매우 곤궁해졌다. 제레인트는 노새 위에서 참으로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 다. 무슨 기도를 올리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루릴은 반대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나는 다시 고래의 무덤을 되돌아보았다. 어쩌면 오늘 밤은 그들 부녀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겠지. 갑자기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그 마지막날, 마치 친구집 나들이나 가듯이 가볍게 떠나셨지. 그리고 나도 그렇게 행동했었고. 하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레니 를 데리고가서, 크라드메서를 진정시키고, 보석을 준비해서 아무르타트 에게 가져다주면,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시는 것이다. 하지만 레니는? "바다가 보이는 방이 없다니오! 일부러 밖에서 그런 방이 있는지 둘러 보고 들어왔는데!" "2층은 꽉 찼소." "3층은요!" "그 방은 나와 우리 가족들의 방이오." 여관 주인의 말에 네리아는 말이 막혀버렸다. 샌슨은 피식거리며 말했 다. "더 돌아다니기에도 늦었다. 그냥 여기서 자지. 밤바다를 못본다고 해 서 큰 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이잉. 싫어! 나가자." "뭐야? 이봐, 네리아." "언제 또 돌아올거라고! 안돼. 빨리 나가자." 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래서 샌슨과 내가 주인 장에게 사과를 하고 나와야했다. 밖으로 나오니 네리아는 발돋움을 하며 바다쪽으로 창이 난 건물을 찾아보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한숨을 쉬었 고,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고, 샌슨은 소리없이 투덜거렸지만, 네리아는 기어코 그런 여관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청새치의 노래라는 좀 이상한 이름의 여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항구 한쪽으로 길게 바다쪽으로 나있는 곶에 위치한 여관이라 밤바다의 풍경 은 확실히 아름다울 것 같았지만 건물이 너무 낡은 것 같다. 흐음. 게다 가 시내에서도 꽤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네리아는 히죽거리며 여관으로 들어갔고 우리들도 더 돌아다니기에 지쳐서 그냥 말없이 따라들어갔다. 여관안은 그래도 꽤 튼튼해보이는 건물이었고, 그리고 여관 주인도 마 치 여관처럼 겉으로 보기엔 허술해 보였지만 꽤 야무질 것 같은 눈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우리들을 보더니 말했다. "방은?" 간단하군. 샌슨이 방을 잡는 동안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걸 려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눈을 잡았다. 흐음. 이 주인장은 아마 젊었 을 적에 수레꾼이었나 보지? 그런데 저 수레바퀴는 정말 이상한데. 왜 바퀴 둘레에 촘촘하게 손잡이가 달려있는 거지? 저래가지고서야 굴러가 지도 않을텐데? 제레인트는 내 시선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타륜이야. 아마 주인장이 젊었을 적에 조타수였나 보지." 윽. 조용히 있길 잘했다. 어쨌든 방 두 개를 잡자마자 네리아는 이루릴을 이끌고는 욕탕으로 돌 진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나 이거 참.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떠들더니." 샌슨은 투덜거리며 주방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주방장은 샌슨의 주문 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먹어보라는 표정으로 4인분이 넘을 듯한 요리를 대령했고, 샌슨은 남김없이 먹어치워 주방장에게 깊은 감명 을 주었다. 잠시 후, 취한 선원들이 우루루 여관으로 들어왔다. 선원들은 모두 시 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몇 군데의 술집을 전전하다가 이제서야 잠자리를 찾아드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홀이 소란스러워 술병 하나와 잔 몇 개 를 들고서 방으로 올라왔다. 방은 침대가 두 개 있었는데 이층침대였다. 허허, 그것 참. 무슨 침대 를 선반처럼 저렇게 쌓아두었지? 제레인트는 우리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뭐가 잘못되었는지 두리번거리다가 머리를 딱 치면서 말했다. "아, 이건 배에서 사용하는 침대를 흉내낸 겁니다. 배 안은 좁아서 침 대를 많이 만들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침대를 위아래로 쌓는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위로 올라갈 준비를 갖추었다. 나는 그에 게 매달려 말리느라 한참 동안 애써야 했다. 도대체 저 덩치로 윗침대에 올라가겠다니! 샌슨을 말리고나서 난 갑옷을 벗어던지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네리아가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고생이었어." 샌슨은 곧 내 등 뒤로 다가오더니 나와 같이 밤바다를 내려다보기 시작 했다. 시커먼 먹물, 아니, 아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해원, 그리고 그 수면 위로 달빛의 조각들이 부서져 떠다니고 있었다. 루미너스와 셀 레나 모두 천공에 있는 시간이라 밤하늘은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지만 바 다 위에는 부서지는 달빛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 다 표면의 달빛도 거대한 해원의 암흑에 감싸여 그 빛이 퇴색해 있었다. 마치 무의 공간처럼 보였다. 칠흑 같은 바다는 원근의 감각을 무디게 만 들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오히려 바다보다 가까이 느껴져 마치 하늘이라 도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은데." 이런 샌슨같은! 아, 샌슨이지. 샌슨은 방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테이블을 끌고오더니 창가에 딱 붙이 고는 침대를 의자삼아 앉았다. 제레인트 역시 침대에 앉았고 난 나의 독 특함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층침대로 올라가 창을 굽 어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멋진 방의 멋진 밤이로군.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거 같아. 창밖으로 검은 것이 휘익 지나갔다. 갈매기인가? "응? 박쥐다?" 샌슨은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난 침대에서 몸을 쭉 내밀어 밖으로 보려고 했다가 굴러떨어질 뻔했다. 박쥐라고? 샌슨은 창밖을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좀 어떨까." 아, 그렇군. 아프나이델. 그 박쥐가 죽어서 아프나이델은 큰 충격을 받 았었지. 그 박쥐… 이루릴. 샌슨은 큭큭거리기 시작했고 나도 침대 위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레 인트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샌슨은 별 말없이 술잔만 들어올렸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예?"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네리아와 이루릴이었다. 샌슨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네리아와 이루릴은 놀란 표정이 되었고 그 얼굴에 나도 모르 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왜들 웃는 거야?" "아, 하하하. 그, 그냥 그런 일이 있어. 푸히히히!" 네리아는 이마에 가로주름을 만들더니말했다. "무슨 웃음 소리가 그래? 어쨌든 잘 자." "아, 그래, 그래. 킥킥킥." 샌슨은 네리아의 밤인사를 받으면서도 계속 웃었다. 이루릴은 우리들이 자신 때문에 웃는 것인 줄도 모르고는 그저 미소를 짓더니 나갔다. 우리 는 계속 웃으며 술잔을 비웠고, 그래서 제레인트는 우리를 매우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쾅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거야, 내 머리를 두드리는 거야? 난 머리를 마구 휘저으 며 일어나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으윽. 난 이층 침대에 누워있었지. 그래서 천장이 꽤 가깝다. 창문을 돌아보다가 난 눈을 껌뻑 였다. 지독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이른 낮인가보다? 어라? 그 런데 낮치고는 햇살의 궤도가 퍽 낮은데. 겨울이 벌써 이렇게 가까운 것 인가? "쾅쾅쾅쾅!" "이봐! 그렇게 두드려서 문 부서지겠어?" 난 홧김에 그렇게 말해주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샌슨은 다리 하나 를 침대 밖에 던져둔채 잠들어있었고 제레인트는 그와 정반대로 몸을 있 는대로 오그리고 잠들어 있었다. 그 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이보세요! 이봐요! 바이서스에서 오신 분들 맞아요?" 어라? 왠 소녀의 목소리… 레니의 목소리잖아? 난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피해서 문으로 걸 어갔다. 샌슨과 제레인트도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레니가 튀어들어오듯이 들어왔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와! 숙취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봐요, 제발! 당신들 따라갈게요! 우리 아빠 좀 살려줘요! 예? 제 발!" 으윽, 머리야.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야? "자, 잠깐만요. 일스 법률에도 아마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아침 일 찍 침대에서 끌려나온 사람에겐상세한 전후사정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 레니 생각은 어때요?" 샌슨은 주먹을 휘둘러 내 헛소리를 막고는 말했다. "레니양. 그레이든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입니까?" 레니는 숨막힐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이상해요, 병에 걸리셨어요, 예, 병이오. 마구 열이 나시는 데 오히려 춥다고 그러세요. 그런데 땀을 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어요!" 제레인트는 일어나다가 해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로브를 걸쳤다. 그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왜 의사를 부르지 않고…?" "의사도 아파요!" "예?" 제레인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미쳐 날뛰듯이 말했다. "제발요! 어서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예? 의사에겐 이미 달려갔었어 요. 그런데 의사선생님도 중환이세요! 이 마을엔 의사가 하나밖에 없어 요. 제발! 당신들은 모험가잖아요? 그리고 프리스트께서도 계시고…" "아, 예. 알겠습니다. 갑시다."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우리들도 갑옷과 무기를 챙겨들고 나섰다. 그 때 네리아와 이루릴도 밖으로 나왔다. 네리아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옆에까지 다 들리더라. 어서 가보지." "응. 그래." 레니 덕분에 일층을 뛰어내리듯이 내려오게 되었다. 홀에는 주인장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이런, 이 바쁜 아침시간부터 왠 졸음이람. 샌슨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여보세요. 우리 나갑니다. 여관비는…" 콰당! "꺄아아악!" 레니의 비명소리. 뭐야? 샌슨이 건드리자 주인장은 갑자기 의자채로 옆 으로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레니는 스르르 주저앉았고 놀란 제레인트 가 황급히 그녀를 받쳤다. 이루릴과 내가 황급히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주인장은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빨을 딱딱 부딪히면서 떨 고 있는 여관 주인장의 얼굴에는 검붉은 반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게 뭐야? 그 때 이루릴이 급하게 외쳤다. "제레인트! 프로텍트 프럼 디바인 파워! 급해요!" "예? 아, 예." 제레인트는 의아한 얼굴이 되더니 레니를 네리아에게 넘겨주고는 곧 기 도에 들어갔다. 제레인트가 기도를 올리자 곧 푸르스름한 막이 형성되며 우리를 둘러쌌다. 샌슨은 질린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요?" 난 질린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엄청난 햇살이 내려쬐 고 있던 그 창문을.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 8. 인간의 무기……16. 샌슨은 우선 주인장을 업고서 방으로 옮겼다. 우리는 여관의 방마다 돌 아다니며 투숙객을 조사해보았다. 투숙객들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들 제 각기 다른 병에 걸려 있었다. 미치겠군. 이건 칼라일 영지처럼 작은 영 지도 아니야. 엄청나게 큰 항구라고. 샌슨은 질린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 한 방으로 모아라. 아냐, 홀이 좋겠군. 후치, 시트를 끌어모아. 제레인트씨는 이 여관 전체를 막아주십시오. 네리아와 이루릴은 나와 함 께 환자들을 옮깁시다."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지금 바로 움직여야 되요." "예?" "여긴 대단히 큰 도시이고 우린 겨우 다섯 명입니다. 오늘 아침에서야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아 아마 어젯밤에 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그 리고 오늘 아침 해가 뜨면서 발병이 시작되었고요. 아직까지는 환자가 별로 많지 않겠지만 우리가 치료하느라 시간을 소모하면 환자는 더 늘어 날 거에요. 그러니 빨리 디바인 마크를 찾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아, 예." 제레인트는 우리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난 그에게 설명했다. "프리스트시니까, 세이크리드 랜드는 아시죠?" 제레인트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맙소사, 여기가! 모험의 시작으로는 너무 과격한데?" "지금 모험이 문제가 아니에요. 시간을 끌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거 에요. 빨리! 당신은 테페리의 프리스트에요. 당신이 우릴 안내해야 된다 고요.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증거물을 찾아서 회수해야 되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겠어. 그런데 너희 일행은 이 일에 대해 너무 잘 아는데?" "우리는 몇주일 전에 바로 이런 세이크리드 랜드를 지나왔거든요." 제레인트의 눈에 선망과 동경이 떠올랐다고 해서 지금 우쭐거리고 있을 수야 없다. 우리는 그를 다그쳐서 밖으로 나왔다. 네리아는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그림자가…!" 항구도시 특유의 저 단단한 돌건물은 지금 찬란한 회색이었다. 회색이 저렇게 찬란할 수 있다니. 그러나 그 요괴스러운 음영의 부재는 보는 사 람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제레인트 역시 얼이 빠져버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였다. "크아아악!" 재빨리 옆을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건물에서 왠 사나이가 달려나왔 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손은 미친 것처럼 휘젖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더니 곧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샌슨이 악에 받혀서 고함질렀다. "제기랄! 간질병이다!" "우오오오!" 샌슨은 무기를 뽑아들려다가 곧 고개를 가로젓더니 검집채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곧 무지무지한 속도로 검집을 휘둘렀다. 퍼어억! 사나 이는 맞고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기절해버렸다. "좀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어." 샌슨은 기절한 사나이에게 사과를 보내었고 제레인트는 대단히 감탄한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입술을 핥고는 말했다. "이, 이거, 이건 진짜 모험이군." 샌슨은 콧방귀를 뀌고는 곧 마굿간에서 말을 꺼내면서 내게 말했다. "후치! 장작개비를 찾아서 전부에게 쥐어줘. 무기는 안돼. 나에게도 하 나 가져다 주고." "알았어." 난 빠르게 장작개비를 찾아서 각자에게 내밀었다. 레니는 부들부들 떨 면서 그 몽둥이를 받아들었고 이루릴도 탐탁찮은 눈으로 받아들었다. 네 리아는 트라이던트를 거꾸로 쥐었고 제레인트는 자신의스탭을 힘껏 쥐 었다. 샌슨은 말에 올라타더니 말했다. "레니! 당신은… 아니, 우리와 함께 있어요. 그게 안전하니까." "에?"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우리 옆에 붙어있어야 돼!" 그러자 네리아는 레니를 잡아올려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태웠다. 레니는 말에 처음 타는 것인지 치마를 주체하지 못해 애먹으며 올라탔고 모두들 말에 오르자 샌슨은 말했다. "제레인트, 아니, 레니! 이 도시의 한가운데가 어딥니까?" "예? 예?" "가운데! 그러니까 도시의 정중앙 말입니다!" 레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데다가 당황해버려 말을 제대로 못했다. "자, 잠깐만요. 우리 아빠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니! 제기랄. 당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라고요! 우리 말을 믿어 요!" 레니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렸다. 샌슨은 속이 타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이루릴이 조용히 말했다. "일단 시내쪽으로 달리죠. 우리는 도시의 외곽쪽에 있으니까 저쪽이 중 심방향이겠군요." "이랴아!" 샌슨은 다급하게 출발했지만 곧 우리들 중에 노새에 탄 사람이 있는 것 을 깨닫고는 혀를 차며 속력을 줄였다. 우리는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트 롯 정도의 가벼운 속력으로 달려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칠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림자 하나 없는 건물들에선 비명소리나 신음소리들이 울려퍼졌고 간 혹 타는듯한 갈증을 호소하며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의 모습까지 보였다. 고열로 정신착란을 일으킨 모양이다. 건물의 문으로 비척거리며 기어나 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기어나오다가 무슨 말인 지 모를 말을 외치면서 쓰러져버렸다. 샌슨은 달려가면서 그 중 변변해 보이는 사람, 그러니까 악성 무좀인 듯한 병으로 고생하는 사나이에게 외쳤다. "이봐! 시청으로 달려가서 빨리 프리스트들을 모두 집합시키라고 그래! 이 도시는 지금 세이크리드 랜드라고 전하라고!" 사나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며 말 했다. "뭐? 뭐라고? 무슨 랜드?" "세이크리드 랜드!" 사나이는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나름대로 기민한 사람인지 즉각 몸 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샌슨은 이를 악물었다. 그 때 제레인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군가가 저주를 내렸다는 말이군요?"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놀란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당신! 어떻게 말을 하면서 이 방어막을 계속 형성할 수 있지요?" 어라? 그러고보니 우리들은 계속 그 푸르스름한 막에 둘러싸여 있었지 만 제레인트는 전혀 기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에델린은 기도하는 동안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나 역시 놀란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말했다. "예? 아, 예. 이것 덕분이죠." 제레인트는 로브 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곧 찬란한 빛을 뿜어내 는 디바인 마크를 꺼내었다. 모두들 눈이 부셔서 어쩔 줄을 몰랐다. 특 히 제레인트는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와? 진짜 반짝거리네?" 우리는 조금 괴상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음, 저건, 아. 테 페리의 하이 프리스트가 그에게 선물한 바로 그것이었다. 샌슨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거, 굉장한 물건인가 보군요?" 제레인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은 다행스러운 얼굴이 되더니 다시 앞을 향해 달려갔다. 델하파는 꽤 넓은 도시였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이끄는 속도로는 순식 간에 횡단할 수 있는 거리였다.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 쯤인 거 같다. 그럼 제레인트… 젠장!" 샌슨은 말을 하다가 화를 내었다. 그러고보니 우리들이 서 있는 곳은 주위로 다섯 개의 갈림길이 있는 광장이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는 선택 의 폭이 둘일 경우에만 그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다섯 개라니.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땅에 묻었을 겁니다. 모두 포석이 깔려 있으니 지금 즉시 포석이 파헤 쳐진 곳, 흙이 드러나 있는 곳을 찾아보지요." "아! 그렇군! 그럼…" "으아아아!" 뭐야? 우리는 얼빠진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어떤 방향 을 바라보며 질려있는 상태였다. 뭐지? 뭣때문에? 우리는 네리아가 바라 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오, 맙소사. 테페리여!" "젠장!" 멀리 항구쪽에서 물살이 움직이고 있었다. 파도는 아니었다. 수면 아래 에서 무언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해변으로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바다로부터 수많은 해골들과 시체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수장된 시체들! 그것들이 언데드가 되었어!" 샌슨의 고함소리였다. 그렇다. 여긴 항구도시다. 그들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들은 평생토록 거친 바다에 애증을 던지며 살아왔던 선원 들을 마지막에 어디로 돌려보내는가. "우아아!" 항구쪽에서 아스라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릴은 눈살을 찌푸리더 니 말했다. "흙을 찾으세요. 빨리!" 그리곤 이루릴은 레이셔널 셀렉션을 돌렸다. 샌슨은 놀라서 외쳤다. "뭐하는… 안됩니다! 방어막을 벗어나면 이루릴도 병에 걸려요!"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빨리 그 디바인 마크를 회수해주세요." 이루릴은 그렇게 말하며 바로 달려갔다. 샌슨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혼자 달려가서 어쩌겠다고!" "악쓰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이루릴을 생각한다면 어서 흙을 찾아!" 네리아의 앙칼진 고함소리였다. 그리고 나도 외쳤다. "괜찮아! 이루릴은 칼라일 영지에서도 병에 걸리지 않았어. 에델린은 이루릴을 축복하지 않았었잖아?" 샌슨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저 많은 언데드를 어쩌겠다고!" 우리는 모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제기랄. 카알이 있어야 하는 데. 우리는 지도자 없는 쥐떼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때 난 레니 를 보았다. 그녀는 힘겹게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내 시선을 보더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이봐! 조용히 좀 하라고!" 네리아는 레니에게 몸을 기울였다. 레니는 힘겹게 말했다. "흙이라면… 저쪽에 공원이…" "달려!" 우리는 레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우리 들이 방어막의 범위를 벗어날까봐 죽어라고 달려왔다. 잠시 건물들과 골 목을 지나고나자 과연 넓은 공원이 보였다. 공원은 이 접시 모양의 도시 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환형 도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아래쪽으로 멀 리 항구가 보이는 약간 높은 지대였다. 이 공원에도 포석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나무들과 풀이 자라는 곳은 흙이 드러나있었다. 그런데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그걸 찾지? 우리는 막막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때 난 샌슨의 얼굴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샌슨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얼굴에 질린 채 샌슨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른 아침, 이 타오르 는 듯한 대기 속으로 꿈틀거리는 아지랑이들. 그 사이로 공원 저편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공원 한켠의 바위 위에 편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넥슨 휴리첼!" 넥슨, 넥슨! 저 빌어먹을 놈. 저 놈이 여기 왜 있는 거지? 넥슨은 고개 를 들어 작렬하는 태양을 흘깃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들에게 고개를 돌렸 다. "의외로군. 꽤 빨리 오는군." 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네가 이 도시를 세이크럴라이제이셔닝 한 것이냐?" 넥슨은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샌슨은 턱을 덜덜 떨면서 말에서 내렸 다. 난 말에서 내린 다음 네리아에게 말에 타고 있도록 손짓했다. 레니 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레인트는 의아한 얼 굴로 노새에서 내려섰다. 제레인트는 나에게 살며시 물어왔다. "저 사람은 누구지?" "우리나라의 반역자에요. 자이펀과 손잡고 반역을 꿈꾸다가 들통나서 달아났지요.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샌슨은 검을 뽑아들면서 음산하게 말했다. "여기서 뭐하냐?" "기다리고 있었지." "우리를? 우리를 따라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너희들이 이 도시에 있는 것을 알 게 되었지." 난 갑자기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창가를 날아가던 박쥐. "그 박쥐가!" 샌슨은 의아한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이를 악물면서 외쳤다. "그 뱀파이어도 와있었군! 낮이라서 못나오는 모양이지? 그렇군. 역시 이 도시의 이 질병도 그 여자의 작품이군?" 샌슨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넥슨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넥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랍군. 정말 무서운 놈들이야. 모르는 것이 없는걸." "왜? 왜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에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 나라에 이 런 짓을 하는 거야?" 넥슨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설명할 의무가 없다." "뭐야?" ================================================================== 8. 인간의 무기……17. 그 때 샌슨이 앞으로 나섰다. 롱소드를 쥔 샌슨의 팔에 힘줄이 돋는 것 이 보였다. 지독한 열기와 지독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공원은 기이하게 보였고, 모든 것이 백렬하여 끓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샌슨은 말했다. "아마 넌 디바인 마크의 위치를 알겠지. 말한다면 죽이지 않겠다." 넥슨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은 여러 가지로 방해가 된다. 너희들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긴 하지만, 그것은 좀 더 장엄하고 고상한 장면에서 이루어지길 바 랬지. 이런 시시한 장소에서일 줄은 몰랐지. 하지만 기회가 왔으니, 내 복수심을 충족시키겠다." "말은 필요없군." 샌슨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제레인트가 기겁한 고함을 질렀다. "샌슨씨! 나가면 병에 걸립니다!" 그러나 샌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쾅캉! 넥슨 저 빌어먹을 자식은 여전히 내 OPG를 끼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힘으로 샌슨에게 검을 휘둘러대었다. 하지만 샌슨은 그 굉장한 힘이 실 린 검을 상대하지는 않았다. 샌슨은 가볍게 발을 놀리며 넥슨의 검을 피 해나갔다. 그리고 샌슨은 평범하게까지 보이는 찌르기를 시작했다. 넥슨은 질겁하며 물러났다. 샌슨의 공격은 극히 평범했지만 도저히 피 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단순한 중단 찌르기. 그리고 곧 가벼운 상하단 베기. 넥슨은 극히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샌슨은 가볍게 발을 움직여나갔고 그의 팔은 계속 움직였다. 마치 파리나 ?는 듯이 가 벼운 팔놀림. 그러나 넥슨은 그 가벼운 검의 궤적에 당황하며 계속 물러 나는 것이다. 네리아는 감탄을 터뜨렸다. "대단해…"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샌슨과 넥슨의 대결을 바라보았 다. 샌슨은 여전히 귀찮은 파리를 ?는 노인처럼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대었다. 하지만 그 공격에 넥슨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다. 넥슨은 몇 번 반격하려는 듯이 어깨를 움직였지만 그 때마다 반격을 포기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네리아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전부 막히고 있어… 저렇게 간단히 휘두르는 건데." 달인이군. 그래. 샌슨은 대충대충 넥슨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가 항상 연습하는 그 교본에 나오는 공격자세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넥슨은 어쩔 줄 모르면서 물러났다. 그러나 한참 밀려나던 넥슨은 고함을 질렀다. "으아압!" 넥슨은 고함을 지르며 뒤로 크게 뛰었다. 그리곤 뒤로 내디딘 발로 그 대로 다시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순전히 힘으로 밀어붙이기로 작정한 듯했다. 샌슨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바우우웅! 목 뒤에 소름이 돋았다. 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갑자기 한기가 느껴진 다. 넥슨이 휘두른 검에서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고 샌슨은 아랫 입술을 깨물면서 뒤로 물러났다. 검으로 막아낼 수는 없다. 저 무지막지 한 힘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샌슨은 뒤로 물러나면서 견제를 위해서 아래를 베었다. 그러나 넥슨은 그것을 무시하면서 검을 휘둘러내렸다. "크으윽!" "아아악! 샌슨!" 네리아의 비명소리. 피다! 피! 넥슨은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 도 샌슨의 어깨를 내리쳤다. 저 자식이 완전히 미쳤구나! 아래로 깊이 베어들어가던 참이라 샌슨은 간신히 목이 통째로 날아가지는 않았다. 대 신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으며 뒤로 물러났다. 샌슨은 어깨를 부여잡으 며 말했다. "뭐냐… 죽으려고 작정한 거냐?" 넥슨은 빙긋 웃었다.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어 바지가 피에 젖어가는데 도 그는 웃고 있었다. 하얗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 그의 웃음이 시퍼렇게 빛났다. "상처는 고치면 그만이야. 희생을 두려워하면 결과를 얻지 못해." "희생을… 그래. 너다운 행동이군. 아무 데나 가벼운 희생이라는 말을 붙이는. 그 아이도 가벼운 희생이었지?" 샌슨은 경멸적인 표정으로 넥슨을 바라보았고 넥슨의 얼굴이 일그러졌 다. 넥슨은 고함을 질렀다. "죽어랏!" 넥슨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견디지 못한 내가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샌슨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크으… 칵!" 샌슨은 황급히 입을 가로막았고 네리아와 레니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 다. 샌슨은 하얗게 된 얼굴로 말했다. "폣병인가? 젠장. 하필이면…" 넥슨은 싸늘하게 웃었다. 제기랄! 난 앞뒤없이 달려나가고 말았다. 샌 슨은 뒤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치! 이 자식아, 나오지 마!" "시끄러워! 입에서 피 토하면서 할 말 못할 말 구분도 못하는 바보 같 으니! 물러나!" 난 바스타드를 단단히 감아쥐고 넥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샌슨 이 거칠게 내 어깨를 붙잡아 밀어버려 난 휘청거렸다. 제기랄, 이런 때 샌슨과도 싸워야 되나?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넥슨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쾅쾅쾅콰왕!" 대지가 진동했다. 말들의 비명소리, 이힝힝힝힝! 나는 샌슨에게 밀리다가 그대로 발디딤 이 불안해져서 땅에 주저앉고 말았고 달려들던 넥슨도 휘청거리느라 더 이상 달려들지 못했다. 이게 뭐야? 네리아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외 쳤다. "바다가!" 바다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칼라일 영지에서 본 그것과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는 불의 회오 리였고 지금은 물의 회오리라는 것. 이루릴이구나! 이루릴이 바다에 거 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서 언데드들을 휘말아올리는 소리였다. 바다에서 하늘로 뻗어오르는 그 소용돌이는 직경이 수십 큐빗은 되어보였고 이 거 리에서 보아도 그 크기에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제레인트는 부들부들 떨 면서 그 광경에 질려버렸고 넥슨마저 얼빠진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엘프인가. 놀랍군. 그 때처럼 정령 둘을 불러들인 모양이군. 저건 … 실프와 운디네인가?" 난 최대한 빠르게 일어나며 외쳤다. "그래! 이제 곧 그녀가 올 것이다. 그러면 넌 끝장이야! 지금은 낮이라 서 그 뱀파이어도 널 돕지 못해! 항상 네 옆에 붙어다니던… 어라?" 그 마부는? 항상 넥슨에게 붙어다니던 그 말없는 마부는 어떻게 된 거 지? 갑자기 넥슨의 눈에 이상한 빛이 번뜩였다. 뭐지? "아아악!" 비명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에서 떨어지는 네리아가 보였다. 그리고 네리아 대신 말에 올라타는 남자의 모습도. 그 마부다! 네리아는 팔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제레인트는 황급히 스탭을 휘저었다. 그 러나 마부는 검을 휘둘러 가볍게 스탭을 쳐내고는 그대로 말을 출발시켰 다. 샌슨이 외쳤다. "너, 레니를!" 저 빌어먹을 녀석이 레니를 노리고 있었군! 넥슨은 히죽 웃었다. 그러 나 그 때 쇠약한 네리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실수야, 실수." 뭐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레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에보니 나이트호크, 저 용맹한 말은 바뀐 주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 보니 나이트호크는 발길질을 하며 마부와 레니를 떨어트려버렸다. 나와 샌슨은 잠시 서로를 쳐다본 다음 곧장 레니에게 달려갔다. 지금 이 순간 에는 레니가 가장 중요하다. 그녀는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 절대로 보호해야 된다. 뒤에서 넥슨이 고함질렀다. "거기 서라!" 웃기네. 샌슨은 어깨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무섭게 달려갔고 나 또 한 무슨 말인지도 모를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갔다. 마부는 말에서 떨어 진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 사이에 우리는 레니를 붙잡았다. 레 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와 샌슨은 레니를 뒤로 돌리면서 앞을 가로막았고 제레인트와 네리아가 양쪽에서 레니를 둘러쌌다. 달려오던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끈질긴 놈들이군!" 그럼! 우리는 순종 헬턴트 사나이거든? 샌슨은 온몸이 피범벅이 된채 로 웃고 있었다. 하하. 나도 쌀쌀맞게 웃으며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 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웃어? 뭐가 우스운거지?" 난 피식거리며 말했다. "인생이 너무 즐겁거든. 드문드문 불쾌한 녀석들이 끼어들긴 하지만 말 이야." 샌슨은 콜록거리면서도 웃었다. "쿨럭, 큭큭. 그래. 여기도 죽을 자리로는 괜찮군. 쿨럭. 인생이 장미 빛이군." 넥슨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 그 마 부가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마부는 넥슨에게 다가서더니 머리를 조아렸 다. 넥슨은 말했다. "됐어. 예상 외의 일이었으니." 말을 하던 넥슨은 갑자기 휘청거렸다. 마부는 당황해서 넥슨을 부축했 다. 저 녀석, 역시 다리의 상처가 크지? 넥슨은 이를 악물면서 우리를 노려보다가 마부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 다. 그러자 마부는 손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뭐지? 마부는 품속에서 스 크롤을 꺼내었다. 뭐야, 스크롤? 넥슨은 마부에게 부축된 채로 말했다. "오늘도 아쉽게 헤어져야겠군." 무슨 말이야? 마부는 한 팔로 넥슨을 부축한 채 이빨과 손으로 스크롤 을 찢었다. 그러자 그 순간 이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무서 운 빛이 터져나왔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넥슨과 마부의 모습은 사라졌 다. 제레인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텔레포트…" 털썩. 샌슨은 무릎을 꿇었다. 레니와 네리아는 모두 질겁을 하면서 샌 슨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샌슨은 조용히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제레인트씨. 치료가 되겠습니까?" "아, 예." "그럼 됐습니다. 후치. 잠시 네가 좀 찾아봐라. 그 디바인 마크를." 난 온몸에서 피를 흘리다시피 한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 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았어." 하지만, 하지만 어디서 그것을 찾지? 젠장. 난 일단 미친듯이 뛰어다니 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난 흙이 보이는 곳은 모조리 달려 가보았다. 하지만 일일이 다 파헤쳐 보아야 하나? 제기랄! 도대체 어떻 게 땅 속에 있을 그것을 찾는다는 말이야? 그 때였다. 멀리서 다가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 자 달려오고 있는 레이셔널 셀렉션과 이루릴의 모습이 보였다. 이루릴은 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리며 말했다. "여기서 빛이 번뜩이던데요? 어머, 샌슨!" "넥슨… 그 개자식이 여기 있었어요." 네리아의 대답에 이루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흙이 있군요. 이 근처인가요?" "예. 그럴 것 같아요." 이루릴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역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공원에는 온 통 나무들이었고 따라서 엄청나게 많은 흙이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쩌 면 좋지? 칼라일 영지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네거리였다. 하지만 여기는 너무 넓다! 그 때 제레인트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찾는 것이 디바인 마크야?" "예? 아, 예. 그래요." "진작 말하지!" 제레인트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의 디바인 마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잠시 참아주십시오. 잠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곧 푸른 방어막을 없애버렸다. 그는 디바인 마크를 두 손으로 들고 기도에 들어갔다. 우리들 모두 숨죽인 가운데, 그는 기 도를 마치고 외쳤다. "디텍트 디바인 파워(Detect divine power)!" 그는 잠시 디바인 마크를 들러올린 채 서있다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어라? 무슨 느낌이 이렇지?" 이루릴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더니 말했다. "여기 전체가 세이크리드 랜드입니다. 이 도시 전체에 디바인 파워가 가득한 셈이지요. 디텍트로는 알아낼 수가 없을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짜증스러운 느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니, 내가 짜증스러워서 그런 것인가? 제레인트는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방어막을 형성했다. 우리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주위 를 둘러보았다. 시간은 급한데, 방법은 없다. 난 일단 다시 뛰어다니며 흙을 살피기 시작했다. "후치! 이런, 돌아와!" 제레인트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빨리 찾아야 된다고! 이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안돼. 제기랄!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언제 찾아내지? 도시에선 계속 사람들이 죽어갈텐데! 나는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커억, 헉!"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뭐야, 이건? 조금 달렸다고 왜 숨이 막혀와? 난 핑핑 도는 머리를 붙잡으며 허리를 꺽었다. "헉, 커어억! 콜록콜록, 카아악!" 이런, 천식인가? 무슨 병이지? 숨이 막힌다. 나도 걸려버렸어. 난 숨이 막힌 채로 주저앉아버렸다. 이루릴이 달려와 날 일으켰지만 도대체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우… 칵! 커어억! 쉬이익, 쉭." 목에서 피리소리 같은 소리가 난다. 제기랄, 하필이면! 안돼, 빨리 찾 아야 돼! 그런데 왜 앞이 캄캄해지는 거지? ================================================================== 8. 인간의 무기……18.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앞은 캄캄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 는 것은 이 뜨거운 열기다. 난 헐떡거리며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눈 이 떠지지 않았다. 내 머리가 어디 있지? 다리는 또 어디에 있지? 위아 래도 구분되지 않았고 내 팔이 어디에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치? 후치야." 네리아의 목소리다. 그리고 이마를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감각으로 간신히 내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위치를 통해 추측하여 난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네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네…리아. 여긴?" "임시구호소야. 시청에서 만든." "임시…구호소. 빌어먹을… 그런데 디바인…마크는?" 네리아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마. 지금 시청에서 소집한 프리스트들과 도시 경비대원들이 찾고 있어. 대규모 인원이 그 공원에 투입되었으니까 곧 찾아낼 거야." "아직… 못찾았군요. 그럼… 많이 죽었겠군요."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감겨지는 눈을 힘겹게 뜨며 말했다. "샌슨은…?" "으응. 제레인트씨가 다 치료했어. 지금 제레인트씨는 이 구호소를 방 어하고 있어." "예… 제레인트도… 꽤 대단한 디바인 파워를…" "아니. 그 디바인 마크가 대단한 것인가 봐. 뭐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노 고를 깍아내릴 수는 없지만. 지금 제레인트씨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여념 이 없어. 이루릴도 그렇고. 나도 이만 가봐야겠네. 후치. 푸욱 자도록 해." "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녁이었다. 주위는 컴컴했다. 아마 조명에 신경쓸 사람이 없나 보다. 들리는 것은 신음소리와 간혹 찢어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울음소리뿐이었다. 뭔가 잘 못된 세상에 눈을 뜬 기분이 든다. 난 몸을 일으켰다. 난 바닥에 깔린 시트 위에 있었고 주위는 공회당인지 뭔지, 어쨌든 커 다란 천장과 꽤 넓은 실내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넓은 실내에는 온통 시 트와, 그리고 환자들이었다.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서 도로 누울 뻔했지만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어디 있지? 약간 떨어진 곳에 몰려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네리아였다. 난 비틀거리며 일어 나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내 다리 같지가 않은걸. "후치?" 이루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곧 날돌아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네리아 가 일어나서 내게 달려와 부축했다. "이런, 왜 일어났어? 누워있지 않고." "아뇨. 괜찮아요. 역시 밤에는 병이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죠?" "어? 너 어떻게… 아참. 너 전에도 이런 일 겪었다고 했지?" 네리아는 날 부축하여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어 깨에 붕대를 감아맨 샌슨의 모습과 이루릴, 그리고 초췌한 모습의 제레 인트가 보였다. 제레인트는 내게 힘겨운 미소를 지어보였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도시의 시청관계자들이겠지. 그 모르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그러니, 당신들 말대로라면 그 디바인 마크만 회수하면 이 모든 질병 이 멈춘다는 말입니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힘겨운 어투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계속 수색해야 됩니다. 밤이라 어둡긴 하지만 낮이 되면 병이 더욱 심하게 확산될 겁니다. 그러니 오늘 밤중에 찾아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다른 사람들은 일어나 어딘가로 걸어갔다. 남은 것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난 자꾸 구겨지려고 하는 몸을 힘겹게 곧추세우며 말했다. "아직 못찾았구나." "응." "레니는… 그레이든씨는?" "레니는 그레이든씨를 간호하고 있어. 제레인트씨가 수고해줘서 이젠 좀 괜찮아." 제레인트는 다시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가 말했다. "그런데… 왜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자이펀과 일스는 전쟁 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샌슨은 피곤한 듯이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젠장.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린 어쩌지?" "응?" 자꾸 고개가 앞으로 쳐박혀지는걸. 제기랄. 난 무릎을 꽉 누르면서 말 했다. "우리가 있는다고 해서 디바인 마크를 찾아준다거나 할 수는 없어. 칼 라일 영지에서는 펠레일이나 사만다가 있어서 쉽게 찾았지만, 여긴 넓은 도시야. 우리가 뭐 도움 될 것이 없는걸." 샌슨은 대답없이 묵묵히 바닥만 쏘아보았다. 난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시 며 말했다. "내일 출발하는 거야?" "레니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렵겠지. 위중한 아버지를 두고 떠나라는 말은 듣기 어렵겠지. 난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레니를 설득해야 되지 않을까." 샌슨은 다시 말없이 바닥을 쏘아보았다. 시야가 너무 흔들거리는군. 난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여전히 시야는 어지러웠다. 내 입 김이 너무 뜨거운걸. "레니는 어디 있지?" "이봐, 후치. 지금은 조용히 있자." "샌슨." "일단… 일단 그 디바인 마크를 찾으러 간 사람들이 그걸 찾아내기를 기다리자. 그렇게 된다면 그레이든씨도 곧 나을테니 말하기 쉬울 거야. 지금은 기다리자." "으음…" 다음날 새벽, 공원으로 떠났던 사람들은 기어코 그 디바인 마크를 찾아 왔다. 사람들의 떠드는 말을들어보니 공원 전체를 파헤치다시피 하고는 찾아온 모양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사람들은 우 리를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곧 불안한 얼굴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긴장감 속에서도 마침내 동쪽 하늘에서는 어김없이 해가 떠올랐 고, 건강한 사람들은 재빨리 자신의 친지와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렸다. 아마 그들은 해가 뜨면 환자들이 다 나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샌슨은 힘겨운 얼굴이었지만 차근차근 설명 해주었다. 디바인 마크를 회수했으니 더 이상 병이 진전되지는 않게 된 것이며, 따라서 환자들도 열심히 치료하면 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 람들은 불평섞인 시선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힘든 몸을 이끌고 레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레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이러신데, 떠날 수는 없어요." 난 막막한 시선으로 그레이든씨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다. 제레인트는 기절할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입술을 깨물며 기 도에 들어갔다. 레니는 놀란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손에서 빛을 내더니 곧 그레이든씨를 치료했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우리는 그를 눕히고는 그레이든씨를 살펴보았다. 그레이든씨는 한결 평온한 표정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레니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으신 건가요?" "예." "…아버지는 말했어요. 제가 가지 않으면 대륙이 위험해진다고." "맞는 말씀입니다." 레니는 처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같이 떠나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아버지와 날 떼 어놓을 수는 없어요.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시급하시죠?" "예." "그럼, 지금 떠나야 되나요?"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았어요.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나요?" "갈아입을 옷만 몇 벌 준비하면 됩니다." "예. 그럼 일단 집으로 가야겠군요." 그렇게 말하고도 레니는 한참 동안 그대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조바심내면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레니는 허리를 굽혀 그레이든의 뺨에 키스하고는 일어났다. "가지요." 혼수상태에 가까운 제레인트와 부상당한샌슨, 그리고 밤을 세워 환자 들을 간호하느라 힘이 쭉 빠져버린 이루릴과 네리아, 그리고 병에 걸렸 다가 겨우 나은 나. 아주 초라한 일행이었다. 멋지도록 초라했다. 그 중 에서도 가장 가슴에 걸리는 것은 가면이라고 착각될 정도로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걸어가는 레니의 모습이었다. 델하파의 시청이나 여기저기서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우리는 최대한 빠 르게 짐을 챙겨 출발했다. 레니는 네리아와 함께 말에 탔다. 그녀의 짐 보따리는 처량하도록 작았다. "전 외출을 할 일이 없어서 아무런 옷이 없어요. 평상복뿐이죠." "아, 예." 더이상 지체하다간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우리 스스로 도 이 도시에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이유를 모른다. 우리는 물론 그 범인을 알고 있지만 이것은 국제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 스스로도 전 모를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황급하게 델하파를 빠져나왔다. 모두들 힘들었지만 델하 파에서 충분히 떨어진 다음 쉬기로 했다. 제레인트는 몇 번이나 나귀에 서 떨어질 뻔했고 샌슨은 부상 때문에 몹시 힘겨운 표정이었다. 나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고. 도대체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간신히 한 발 한 발을 내딛은 끝에 우 리는 겨우 델하파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레니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위의 모 든 것들이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산도, 숲도, 들도, 나무도 그녀에겐 모조리 낯설었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 아 버지에게 달려가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레니는 네리아의 허리를 꽉 붙잡 고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네리아는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간혹 레니에게 말을 걸었다. 하 지만 얼마 있지 않아 포기해버렸다. 무슨 말을 걸어도 레니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여주었다. 네리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삐를 늘어트리고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루릴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간혹 안스러운 얼굴로 레니를 바 라보았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칠대로 지쳐빠진 우리는 많이 걷지도 못하고 오후 중간쯤에 멈춰서게 되었다. 모두들 피곤해서 점심이고 뭐고 관두라는 심정이었고, 그래서 서로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 무거운 손으로 시트를 끄집어내어 바닥에 대충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샌슨은 불침번을 서려고 했지만 이루 릴이 조용히 그를 눕히고 대신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난 모포 속에 몸을 틀어박고는 날씨와 아직 남아있는 병기운 때문에 덜 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켜보려고 애썼다. 그런 내 귀에 이루릴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릴은 별 피곤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말했다. "레니양. 피곤하지 않아요?" 그리고 조금 후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예. 괜찮아요. 그런데…" "그런데?" 레니는 한참 기다린 다음에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지만… 대륙을 구하는 여행이 아니라 무슨 초 라한 유랑민 같아요." "그런가요?" 킥, 키긱! 유랑민이라. 하긴 온통 아픈 사람에 지친 사람들, 게다가 후 다닥 달아난 사람들이다. 멋스러운 점은 커녕 비장한 점이나 그럴 듯한 면도 없다. 이런 우리가 지금 대륙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대륙에서 가장 소중한 소녀를 호송하는 영웅들인가? 푸헷헤헤! 갑자기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생은 그렇게 멋있는 것도, 영웅서사시 같은 것도 없어요. 특히 자신 의 인생은." "그런가요?" 레니가 대답했다. 난 모포에서 눈만 꺼내어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힘 든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잠들기 전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우주를 구한다고 해도, 당신의 인생이 다른 수많은 인생보다 특별히 가치 있어지진 않아요.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시 시하게 산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틀려요." "틀리다고요?" "모두들 똑같이 고귀해서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다는 것이지, 모두들 시시해서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 유랑민같은 여행도? 푸훗." "하하. 오히려 지금의 이 상황은 모험 중인 영웅들에게 어울리는 고난 아닌가요?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드에게 패해 달아날 때는 이보다 더 심했지요." 난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정말 못말리겠군. 그렇 게 고생을 했으니 모험이라는 말에 정이 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난 기 분좋게 잠들 수 있었다. ================================================================== 8. 인간의 무기……19. 우두둑, 두둑! "아, 아이고 뼈다귀야." 레니는 감탄한 얼굴로 몸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레니의 관심대상이 되어버린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 다. 그리곤 팔다리를 휘둘러 잠기운을 모두 몰아내기 시작했다. 샌슨도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안색이 한결 나았다. 샌슨은 행복한 잠에 취했던 멧돼지처럼 모두에게 미소를 지어주곤 곧 내게 이빨을 들이대었 다. "밥!" "악! 악! 악!" 난 투덜거리며 물통을 뒤적거리고 돌을 모았다. 레니가 다가왔다. "저, 야외에서 요리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준다고요? 고맙지요. 거기 앉아서 나 하는 것 잘 본 다음에 다음 번 식사 준비 때 그대로 해요." "예? 아, 예." "아, 그리고 말 놓지? 난 17살인데." 레니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내 나이는…." "비슷하겠지? 됐어." 그러자 레니는 모은 무릎 위에 턱을 얹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날 바라보 았다. 커다란 돌멩이를 모아 불을 지피고 물 끓이고, 프라이팬 꺼내어 휘파람 불며 닦고. 네리아는 자신의 태도를 대단히 정확히 했다. 그녀는 요리에 대해서는 관계치 않고 식사에 대해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단 순명쾌한 논리로 편안하게 모포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루릴은 생긋 웃더니 우리 일행에 생물은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 듯 말들을 살펴보러 갔다. 제레인트는 내 옆에 쪼그려앉아서는 침을 꿀 꺽꿀꺽 삼키면서 전혀 성직자답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 은, 에, 은근슬쩍 프라이팬에 손을 뻗어 팬케익 훔쳐가려다가 튀는 기름 에 데이고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테페리를 부르고는 손가락을입 에 넣어 쭉쭉 빤다든가 하는 그런 거… 아이고. 정말 요리할 분위기 만 들어주는군. 결국 한 시간 후, 우리는 한손에 커다란 팬케익 - 먹고 목이나 메어버 리라는 심정으로 프라이팬이 넘치도록 만들어 준 특대형이다. - 을 들고 말에 올라탄 샌슨의 인도를 받아 출발하게 되었다. "가자. 실키안 레이크로. 온통 물뿐인 나우르첸으로 가자." 우리는 한참 동안 이상한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먼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온통 물뿐인… 같은 말이라도 좀 품위있게 못하니?" 그리고 내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 은색의 대지, 그 푸르른 수면에 고고히 서있는 저 나우르첸으 로 우리의 지향을 보내자." "그것도 괜찮고. 수면으로 떠올라 수면으로 사라지는 태양빛이 하루 종 일 머무는 아름다운 나우르첸으로." 샌슨은 볼이 미어져라 팬케익을 쑤셔넣더니 말했다. "그래서? 품위가 없다고 안 갈 거야?" "가야지, 뭐." 흠. 역시 제레인트의 말대로 인생은 그렇게 멋있는 것은 아니군. 그래 도 걸음은 앞으로 나가고, 시야는 높이 두는 것이지. 가자구. "온통 물뿐인 나우르첸으로." 일스 공국의 수도 바란 탄으로 간 카알 일행은 일스 대공을 접견한 다 음 나우르첸으로 돌아와 우리들과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우르첸성으로 향했다. 레니가 익숙지 않은 여행에 자주 피곤해했지만 그외에 별다른 일은 없 었다. 단 하나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제레인트가 멋모르고 자신이 가진 디바인 마크는 대단히 값비싼 것이라는 말을 꺼낸 이후로 간혹 네리아가 눈을 번뜩이게 된 것뿐이랄까. 어쨌든 드래곤 라자 소녀도 찾았고, 우리 임무는 깨끗이 완료다. 바란 탄으로 떠난 카알이야 별로 걱정되지 않고. 이제 레니를 데리고 갈색산 맥까지 돌아가면 되는군. 에구, 길다란 여정이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어제 오늘 다르게 쌀쌀해진 바람을 맞는다. 산등성 이를 돌아 올라갈 때는 겨울로 넘어가는 숲의 신비로운 죽음들. 그리고 산기슭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끝없이 펼쳐진 호수가 보인다. "실키안 레이크다." 샌슨은 말했고 네리아의 등 뒤에 있던 레니는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 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저게 호수에요? 저, 저쪽에 저 바다와 연결된 거 아니에요?"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했다. "호수야. 너희나라의 유명한 호수인데 모르니?" "집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응. 그래. 그럼 잘 바둬. 늙었을 때 손자손녀 모아놓고 이야기할 거리 는 있어야지." 레니는 입술을 샐쭉거렸다. "난 시집 안갈 거에요." 푸흑! 난 어이가 없어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도대체 뭐야? 애도 아 니고. 저런 유치해서 귀여운 말이라니. 샌슨도 어이가 없어서 레니를 바 라보았다. 보라구. 저 오우거도 놀라잖아. 네리아는 헤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빠하고 살 거야?" "어떻게 알았어요?"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우리는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목적지에 눈 앞에 보이게 되면서부터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호수 에 어리는 햇살의 눈부심이 갈수록 강렬해지고, 그리고 우리는 나우르첸 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 서 있던 문지기들은 우리들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어왔 다. "돌아오셨군요. 카알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카알이 벌써 돌아왔어요?" 어? 이상하다. 여기서 바란 탄까지의 거리는 델하파까지의 거리와 비슷 하다고 들었긴 하지만, 게다가 우리는 델하파에서 하루를 지체했지만, 그래도 카알은 대공전하를 만나러 간 것이라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 는데? 우리는얼떨떨한 얼굴로 성안에 들어갔다. 레니는 감탄한 얼굴로 성을 둘러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성을 구경할 수 있도록 네리아와 함 께 남겨놓고는 먼저 카알을 만나러 들어갔다. 성 안으로 들어서서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쓰던 방으로 안내되 었다. 카알과 스카일램이 그 거실에 앉아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왔는가?" 카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카알은 먼저 샌슨의 부상을 보고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레인 트를 보았다. 카알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은 테페리의 프리스트이신가 보군?"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들었습니다. 카알 헬턴트님이시죠? 전 제레인트 침버라고 합니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마음가는 길은 죽 곧은 길. 반갑소. 어서 오시오." 스카일램 트리키도 대충 인사를 나눴다. 그 동안 카알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저, 네리아양은? 그리고 그 소녀는… 못찾았는가?" 샌슨은 웃으며 발코니를 가리켰다. 우리들 모두 발코니로 걸어가서 아 래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아와 함께 성의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카알은 소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 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소녀의 이름은 레니이고, 제레인트씨가 확인한 바로는 바로 드래곤 라자입니다." "다행이군!" 카알은 크게 기뻐하는 얼굴이 되더니 다시 레니를 내려다 보았다. 그 때 네리아가 위쪽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 다. "야호! 카알 아저씨!" 레니는 놀라서 위를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네리아의 뒤로 돌아 가버렸다. 네리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레니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우리 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아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때 샌슨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이렇게 빨리 돌아오시다니오." 카알의 얼굴에 문득 어두운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카알은 웃으며 말했 다. "아, 그건 천천히 설명함세. 자네들 모두 긴 여행길이었나보군? 그리고 이 상처는 또 왠건가? 아무래도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 같은데, 그 렇다면 먼저 푹 쉬고 들려주게나."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다시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씻고, 갈아입고, 먹고, 좀 자고, 그리고 우리는 저녁식사 후에 다시 거 실에 모였다. 네리아와 레니는 방안에 틀어박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나와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레니가 낯선 곳에서 힘들어할까봐 네리아가 붙어다니는 모양이다. 그래서 거실에 모인 것은 카알과 나, 샌슨, 이루 릴, 스카일램, 그리고 제레인트였다. 먼저 카알이 이야기했다. "그래, 자네들 이야기를 들려주게."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시작했다. "예. 먼저 테페리의 신전에 들러 제레인트씨를 만나고, 그리고 델하파 에 가서 레니를 만났습니다. 제레인트씨는 레니가 드래곤 라자임을 확인 했고, 그래서 레니의 보호자였던 그레이든이라는 분의 동행 허락을 얻어 돌아오려던 참이었지요. 아, 저 그레이든씨는 레니를 15년이 넘도록 길 러오신 분으로 친딸과 같이 생각하시더군요. 하지만 크라드메서의 위험 을 이해하시고 허락해주었습니다. 이후 레니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니, 이 점은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예. 그런데 그 출발일 아침, 갑자 기 델하파의 항구가 세이크리드 랜드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이크리드 랜드!" 카알과 스카일램이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를 쳐다 보았다. 샌슨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예. 저희는 그날 아침이 바로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첫날일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도시의 중심부를 찾아갔습니다. 거 왜, 칼라일 영지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까?" 카알은 다시 샌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그래서?" "예. 그런데 도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공원에서 넥슨 휴리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카알의 반문은 극히 낮았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제레인트는 그날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나도 소름이 돋는데. 샌슨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전 그와 싸웠습니다만 세이크리드 랜드에서의 싸움이라 제대로 싸울 수가 없던데요. 정말 아쉬웠습니다만 그래도 전 그 녀석에게 물러날 정 도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젠장. 그 놈도 OPG를 가지고 있어서 저에게 이 멋진 상처를 남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무승부가 되고 녀석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런… 맙소사. 그가 일스에 있었군. 그래, 자네 상처는 괜찮은 건 가?" "예. 괜찮습니다. 어쨌든 델하파 시청의 도움을 얻어 디바인 마크를 회 수하고는 레니와 함께 여기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 그래. 정말 수고들 했네. 감사합니다,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역시 모험은 영웅들과 함께 다녀야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 었습니다. 전 이 분들 뒤만 열심히 따라다녔는 걸요. 하하하." 그리고 샌슨은 질문했다. "그런데, 카알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죠?" 카알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먼저 스카일램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말했 다. "우리는 별 무리없이 바란 탄에 도착했네. 아름다운 도시였네만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어쨌든 사절의 자격으로 대공 전하를 만날 수 있었 네. 난 찾아간 목적을 이야기했고, 대공 전하를 설득하기 시작했지. 운 차이도 사실대로 다 이야기했고. 처음엔 잘 풀려나갔어. 대공 전하는 크 게 노여워했고 내 말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 "과거형이군요. 그런데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났다?" 내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바로 그 다음날, 갑자기 대공 전하는 회견 중단을 통고해오 더군. 어처구니가 없었다네. 여기저기로 알아본 결과 그날 아침, 일스 곳곳이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머리가 띵해지는걸? 난 눈이 튀어나올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카알을 바라 보았다. 제레인트는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자네들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알겠군. 그 이야기가 역시 사실이었군 그래." "맙소사…" 샌슨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시오네는 확실히 실험에 성공했고…" 카알은 날 보며 말했다. "계속 말해보게, 네드발군." "예… 시오네는 칼라일 영지에서의 실험에 성공해서… 이제 어느 땅이 든 디바인 마크만 묻으면 세이크리드 랜드로 바뀌어버릴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만들었군요." 카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맙소사, 그렇다면. 그런데 왜 일스를?" 사람들은 모두 긴장해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간단하잖은가? 일스 공국이 바이서스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위협한 거 지."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군요!" "그렇지. 바이서스가 일스 공국에 사절을 보냈다는 것이야 비밀도 아니 지. 그래서 자이펀에서는 우리들이 일스 공국과 손잡게 되는 것이 마음 에들지 않아서… 그래서 그 무기,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될까? 질병의 무기라고 해야 될까? 어쨌든 그 무기의 최초 실험겸 해서 이런 일을 벌 인 것일게야." 스카일램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끝장이군요. 자이펀에서 그런 무서운 무기를 개발했다면… 어서 고국 으로 돌아가서 방도를 찾아야 됩니다!" "어떤 방도가 있을지 의문이오. 누구든 밤에 몰래 도시 가운데다가 디 바인 마크를 묻기만 하면 되오. 그러면 그 다음날로 그 도시는 질병의 율법만이 판을 치는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는 것이오. 그리고 모든 사람 이 쓰러지고 나면 전투도 아닌 점령을 시작하고, 그리고 디바인 마크를 파내기만 하면 되지. 그러면 땅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정말 가공할 무 기로군." 스카일램은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맙소사. 이건 여느 무기가 아니다. 아마 스카일램도 전략에는 꽤 조예가 있겠지만 이런 황당한 무기에 대해 서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내의 온도가 갑자기 한참 내려간 듯 한 느낌이 든다. 싸늘하군. 카알은 말했다. "할 수 없지. 일단 돌아갑시다. 방도라고 해봐야 도시의 가운데를 경계 하고 간첩을 열심히 색출하라는 것뿐이겠지만. 어쨌든 돌아가서 전하께 알리도록 합시다." "예. 그럼 내일 출발을?" "그렇게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씩씩하달 수는 없는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카알 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핸드레이크라도 이런 무기에는 대책이 없을 거야. 전쟁의 룰이 바뀌는 데." 우리는 모두 무거운 얼굴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자신이 갑자기 말려든 이 거대한 이야기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인생은 굉장한 서사시는 아닐지 몰라도, 느닷없이 굉장한 비극은 될 수 있군요. 제레인트.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신의 두 손을 서로 꽉 쥐고 있었다.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은… 마침내 신의 권능까지도 인간의 무기로 쓰기 시작했군요." 카알은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 …할슈타일 공은 말한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당신 의 원수다. 그것은 당신을 억제하고 억누르며 억압한다. 당 신의 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말은 겨울 가지 에 피어나는 설화와도 같다. 순백의 아름다움은 앙상한 나뭇 가지를 숨긴다. 그것은 시체에 더하는 치장이며 수의에 놓아 진 자수, 관에 던져진 꽃송이와 같은 것. 말은 당신을 끝없 이 쫓아다닌다." 그러자 지혜로운 핸드레이크는 말한다. "역 시 설명은 실례를 보면서 듣는 것이 이해하기 쉽군요." …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4 권. P. 7 (770년 돌로메네 作) "지독한 밤이군." 콰광! 제레인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네리아는 바 닥에 주저앉은 채 베개를 꽉 부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방 안에서 베개를 껴안은 채 거실로 튀어나와서는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네리아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샌스은! 어떻게 좀 해봐아!" 샌슨은 황당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폭풍우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샌슨은 이 엄청난 폭풍우 속에서도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닦고 있었다. 게다가 간혹 기품있는 손놀림으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기까지 하고 있 었다. 도대체 저 작자의 신경은 얼마나 굵은지 상상도 안되는걸. 신경 굵은 사람이라면 두 명 더 있다. 이루릴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창밖을 무슨 정물화 감상하듯 평온한 얼굴 로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선 제레인트가 전혀 다른 얼굴 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허어, 저런… 음!" 제레인트는 이 폭풍우를 자연이 베푸는 참으로 희한하고도 볼만한 어떤 잔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감탄한 얼굴로 바깥을 바라보 고 있었다. 참, 대단해. 카알마저도 이 해양성 폭풍에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우 리 바이서스에서 폭풍이라는 것은 그저 사나운 바람이다. 그런데 여기 일스에서의 폭풍이라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무슨 무기를 휘두르는 느낌 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람은 사물을 때려부술 것 같았다. 지금 카알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천둥 소리와 낙뢰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굉장한 폭풍 소리에 모두들 잠이 들 지 못하고 전부 거실에 모여 있었다. 꽈르르릉! 번쩍! "꺄아아아악!" "켁! 케엑. 이거 못 놔!" 네리아는 죽을 힘을 다해 샌슨의 목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거의 착란상 태에서 엉엉거리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전 싸구려 도둑이에요. 엉엉. 주로 통행세만 받았고 담위로 날개 짓은 좋아하지도 않아요. 꺄악! 예. 했어요. 하지만 열 번도 안되요! 꺄악꺄악! 아니에요. 사실 열 두어 번 쯤… 잘못했다구 요! 제발 좀 그만해요! 아악!" "네가 좀 그만해! 이건 그냥 바람이라고!" 그냥 바람? 말이 좋다. 난 바닥에 주저앉아서 샌슨의 흉내를 내어보려 고 숯돌을 꺼내어 바스타드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천둥이 칠 때마다 숯 돌을 내 손톱에 대고 갈어버렸다. 난 한숨을 쉬고는 숯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리아. 벼락을 무서워해요?" 네리아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샌슨은 그녀를 떼어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네리아가 아무리 날씬하고 가벼운 체구라 해 도 지금 그녀는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고 그렇게 매달린 채 발작적으로 엉엉거리는 사람을 떼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온세 상이 허옇게 바뀌는 순간, 네리아는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사납게 몸부 림치며 샌슨에게 엉겨들었고 샌슨은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쿠당! "윽… 머리 깨졌겠다." 샌슨은 누운채 투덜거렸고 샌슨 덕분에 직접 바닥에 부딪히지 않은 네 리아는 죽어라고 샌슨의 목을 감고 늘어졌다. 레니는 그 모습을 보며 입 을 가리고 큭큭거렸다. 난 레니에게 말했다. "레니. 넌 무섭지 않아?" "난 항구에서 자랐는걸. 내 방 창문을 통해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배도 본 적이 있어." "배가 침몰한다고? 어, 어떻게?" 레니는 손을 들어 바람에 비틀거리며 항해하는 배처럼 어지럽게 움직였 다. "바람이 심할 때… 풋내기 조타수가 접안시설에 배를 들이받는 거지. 이렇게 말이야." 레니는 그렇게 말하며 움직이던 손을 다른 손에 부딪혔다. 그리곤 가라 앉는 배처럼 손을 뒤집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 아무리 항구라고 해도 이렇게 심한 바람이 불 때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가라앉는걸." 음. 저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 그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응? 아무 일 없어. 항구 근처니까 모두들 구출되지." "이렇게 날씨가 사나운데 구출이 돼?" 레니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바이서스는 초원의 나라지. 그래. 후치도 헤엄은 칠 줄 모르겠구나?" "어, 헤엄? 글쎄. 개울가에서 개헤엄치는 것 외에는… 그러고보니 난 바다에 던져두면 꼼짝없이 죽겠군. 레니는 헤엄 잘 쳐?" 레니는눈이 동그래져서 날 바라보았다. "어머? 수영은 남자들만 하는 거야." 어라? 수영이 왜 남자들만, 남자들만… 윽. 그렇군. 옷 입고 헤엄치지 는 않지. 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미안. 잘 몰라서 그런 거야." "응. 대신 바이서스 사람들은 말을 잘 타겠지?" 말… 으윽. 괴로웠던 말타기 훈련이 생각나는구나. 난 대충 미소를 지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일행들은 모두들 말을 잘 타지. 난 바 스타드를 매끈하게 닦아서 검집에 꽂아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얼마나 심한지 볼까? 내일 아침엔 출발해야 되는데…" 오늘 느닷없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우리의 출발이 지연되고 말았 다. 스카일램 트리키 대장이 성화를 부려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 채비를 마쳤다. 그런데 마차 속에 갇혀있던 운차이가 중얼거리며 말한 것이다. "오늘은 못가. 지독한 폭풍우가 올 거야."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스카일램 트리키는 콧방 귀를 뀌었다. "네가 날씨를 어떻게 짐작한다는 것이냐?" 그 때 내가 말했다. "잠깐만요. 운차이? 전에도 비가 올 것을 맞췄지요?" 사람들은 날 바라보았다. 난 세들레스 마을에서 운차이가 비가 올 것이 라고 말하자 곧 비가 내린 사실을 이야기했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자이펀은 메마른 사막이다. 그래서 자이펀의 모든 동물들은 비에 민감 하지.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자이펀 남자들은 모두 능숙한 뱃 사람이나 다름없다. 바다의 날씨에 대해서라면 갑옷을 걸치고 마차 안에 갇힌 사람에게 으스대는 누구보다는 내가 더 정확할걸." 갑옷을 걸치고 마차 안에 갇힌 사람에게 으스대던 스카일램 트리키는 불같이 노하게 되었다. 그 때 나우르첸성의 사람들도 폭풍우가 칠 것이 라는 말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스카일램은 아마도 운차이를 끄집어내어 치도곤을 안길 기세였다. 스카일램은 고국에 대한 위험 신호를 가지고 불타는 충성심으로 달려갈 자신을 그까짓 바람이 가로막을소냐, 하는 태도로 출발을 고집했다. 그 리고 그 같은 고집에 대한 적절한 대처방안이 없던 우리들은 모두 좀 고 생하면 되겠지, 하는 태도로 출발에 동의했다. 하지만 성 밖으로 얼마 나오지도 않아서 우리는 그 폭풍우라는 분을 만 나게 되었는데, 여기 일스의 땅에 불어닥치는 폭풍우는 내가 알고 있던 폭풍우와는 이름만 같고 성질은 전혀 다른 분이었다. 바다는 뒤집힐 것 처럼 몸부림쳤고 실키안 레이크는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마차가 넘어질 뻔하고 짐이 모두 바람에 날려갈 뻔한 소동 속에서 악다구니를 쓰다가 우리는 간신히 성으로 되돌아왔고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었으며 스카일램 은 운차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일어서자 레니도 따라 일어섰다. 방 저쪽에서는 아직도 샌슨과 네 리아가 엉겨 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선 카알이 초연하게 책을 읽는 척하 고 있었다. 난 이루릴의 옆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내가 다가서자 조용히 말했다. "저 분 참 무모하시네요." 난 창밖을 내다보았고 곧 한숨을 쉬었다. 제레인트 역시 창밖을 바라보 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온몸으로 세계에 맞서는 전사군." 스카일램이 컴컴한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거친 폭풍우를 묵 묵히 참고 견디며 시선을 먼 곳에 보내고 있었다. 온 몸이 축 젖었을 텐 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뜨거운 심장이 향하는 저 서편, 그의 고국 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의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빗방울과 뒤섞여 흐르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된다. 호위대원들이 그를 안으로 끌어들이려 애쓰는 모양이었지만 스카일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마 고국으로 달려가려는 자신을 가로막는 폭풍우 에 대해 무언의 저주를 퍼붇고 있는 모양이다. "저건 무모하다기보다는, 글쎄요. 폭풍우에 대해 항거하는 거지요." "항거…? 저렇게 서있는다고 해서 폭풍이 잠들지는 않아요." "예. 물론이죠. 그저 기분이나마 항거하는 기분을 내는 거죠." "왜 그런 쓸모없는 행동을?" "사실 사람이 하는 짓에 쓸모 있는 행동이 몇 개나 될까요. 그저 그 중 에 몇 개에 자신이 생각해서 적당한 쓸모를 붙이는 거죠." 이루릴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저 자이펀의 사람들이 그런 무서운 무기를 만든 것에도 쓸모가 있나 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나요?" "솔직히 시인하자면, 아마 그럴 거에요." 이루릴은 어두운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제레 인트와 레니는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와 이루릴의 대화를 듣고 있었 다. 흠. 난 이미 이런 대화에 익숙해. 난 다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저건 좀 심하군요. 나가서 뭐라고 좀 말해야겠군요." 난몸을 돌려서 방을 나왔다. 제레인트가 내 뒤를 따라나왔다. 성안의 복도를 걸으며 제레인트는 말했다. "이봐, 후치. 왜 엘프에게 그렇게 말했지?" "왜? 사실을 말하는데 왜라는 게 무슨 필요가 있어요?" 제레인트는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 다. "인간은 불안한 것. 유피넬도 헬카네스도 모두 따를 수 있다는 것은 동 시에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지. 유피넬의 어린 자 식인 엘프가 그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어려운 이야기는 머리 아파요. 지금은 우리의 관심사를 스카 일램 대장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좁히고 싶네요?" 제레인트는 싱긋 웃으며 내 말에 찬성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정 문으로 나섰다. 휘우우우웅! 문을 열자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뒤로 쓰러질 뻔했다.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면서 몸은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우와, 이거, 저기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의문인걸. 하하하!" 제레인트는 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는걸? 바 람의 방향과 그 세기는 숨쉴 사이 없이 바뀌었고 그래서 제레인트와 나 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스카일램은 저쪽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 었다. "이봐요! 스카일램 대장!" 이 험악한 빗발과 바람 속에서라도 내 고함소리는 충분히 들렸을 것이 다. 하지만 스카일램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제레인트가 외쳤다. "보시오, 트리키공!" 그러자 스카일램은 몸을 돌렸다. 그는 얼굴에 달라붙은 머릿카락을 걷 어내고는 마치 세수하듯이 얼굴을 주욱 훑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 의 모습을 보더니 당황해서 말했다. "제레인트,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그러는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제레인트는 지독한 바람에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펑퍼짐한 로브는 비 에 젖어서 그를 몹시 거추장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스카일램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게 신경쓰시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나 이거 참, 신경 안쓰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말하시죠!" 스카일램은 다시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 의 시선은 강풍이 몰아치는 실키안 레이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마 음은 아마도 바이서스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스카일램은 이를 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안타깝습니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 "예?" 스카일램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꽉 쥐어 하얗게 변한 그의 주먹은 마치 단련된 강철처럼 빗방울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스카일램은 말했다. "너무도,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고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제가 이렇게 머나먼 땅에 발이 묶이다니. 게다가 제게는 고국에 알려야 될 위급한 보 고가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움직일 수 없다니. 비통합니다!" 스카일램은 감동적으로 말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아니, 그의 의도야 어쨌든 분명히 감동적으로 들으며 숙연한 기분을 느껴야 될 것이다. 하 지만 이 미친 바람 때문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비틀거리다 보니 감동에 앞서 먼저 짜증부터 치밀어오른다. 젠장. "비 맞으셔서 몸 상하면, 가시는 길이 더 어려워질 거에요!" 스카일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건 지. 원참. 발디딤이 정말 좋은 모양이군.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빗 방울을 걷어내며 난 다시 고함을 질렀다. "스카일램 대장, 지금 근무태만이라는 것, 몰라요!" 스카일램은 의아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고 제레인트는 결국 내 팔에 매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레인트보다야 강단이 좋으니까. 난 제레인트를 부축하며 외쳤다. "대장은 전하로부터, 호위임무를 부여받았잖아요! 호위임무를 팽개쳐두 고, 이렇게 폭풍 가운데 서 있으면, 그게 근무태만이지요!" 스카일램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의 얼굴로 흐르는 빗물이 그의 표정 을 더욱 어떤 무기질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외쳤다. "벌써 밤이에요! 폭풍우가 그쳐도, 지금은 출발 못해요! 내일 아침에 출발할 준비도 해야지요!" 그는 말했다. "알았다. 들어가자." 크하! 해냈다. 스카일램은 제레인트를 부축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 들어가자 호위대원들이 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겨우 네리아를 뿌리치고는 원래의 자세로 돌아와있는 샌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네리아는 괴성을 지르며 레니에게 달려들었고 레니는 쓰러진채 파닥거리며 이것 좀 놓으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카알은 여전히 책 장을 넘기며 초연한 척하고 있었다. 천둥이 칠 때마다 책장을 넘기는 손 가락이 조금씩 움찔거렸지만. 제레인트와 나는 아쉽게도 사람들 중에서는 온건한 대화의 상대를 발견 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루릴에게 다가갔다. 이루릴은 우리를 보더니 생 긋 웃었다. "어떻게 들어오게 한 거죠?" "잘 설득했지요." "설득…? 아, 예. 조화를 이뤄가는 인간의 특기 말이지요?" "윽. 예. 그거요." 엘프는 서로 설득하고 할 일도 없겠지? 모두들 조화로울 테니까. "레니야, 레니야! 나 좀 막아줘, 저거 좀 멈춰줘요, 카알 아저씨! 책만 보지 말고 저거 좀 멈춰달라구… 꺄아아! 으아아앙! 잘못했어요오오! 으 아! 내가 아냐, 내가 아냐! 나보다 나쁜 놈도 많아요오오!" 뒤통수를 되게 쥐어박아서 기절시키자는 샌슨을 말린 다음, 이루릴은 한숨을 쉬고 샌드맨을 불러내어 네리아를 잠들게 했다. 그리고 잠시후 네리아는 잠든 채로 이를 박박 갈면서 간혹 잠꼬대로 비명을 질러대었고 우리는 넌덜머리를 내며 그녀를 방 안에 집어던짐으로서 모든 사태를 종 결시켰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기분은 더욱 이상해졌다. 지독한 바람소리와 천둥 소리, 그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번쩍거 리는 번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을 흔들어대었고 번개의 섬광, 밤의 암흑, 천둥의 단속음, 바람의 지속음, 어쨌든 총체적인 소리와 색채의 불협화음에 귀가 먹어버리고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시트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이 얇은 시트는 세계의 횡포로부터 날 보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지는 이유는 그 것 때문이 아니었다. 뭔지 모를 불안감에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침대 속은 마치 빨래더미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눅눅하고 거북했다. 성벽을 때리는 바람과 빗소리는 마치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 때였다. "무슨 소리지?" 샌슨의 목소리다. 나와 샌슨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난 시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바로 그 때 번개가 쳤고 순간적으로 침대에 일어나 앉 아있는 샌슨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소리긴. 밖엔 소리가 너무 많아." "조용히 해봐! 잠깐…" 샌슨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왜 이러지? 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천 둥소리와 빗소리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해보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집중한다고 될 일인가. "아무런 소리도… 이거!" 나와 샌슨은 동시에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갑옷을 걸칠 사이도 없이 각자 검만 들고 뛰어나왔다. 분명히 비명소리였다. 그것도 여자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엄청난 바람이 우리를 뒤로 밀어붙였다. 샌슨은 벽을 짚 으며 외쳤다. "뭐야, 이건! 발코니의 문이 열렸잖아?" 거실 안의 집기와 테이블, 의자 등이 마구 쓰러져 뒹굴고 날리고 있었 다. 난 욕짓거리를 뱉어내며 발코니로 달려갔다. 그 때 샌슨이 다시 외 쳤다. "레니!" 난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레니의 방문이 열려 있었고 그 방문은 지금 거세게 여닫히고 있었다. 샌슨은 레니의 방문으로 달려가서 안을 들여다 보더니곧 외쳤다. "없어졌어!" 그렇다면 누군가 발코니로 침입? 난 발코니 문을 닫는 대신 밖으로 뛰 어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지만 쏟아지는 비와 암흑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번개가 치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난 아래에서 말을 달려가는 한 사나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 나이가 허리에 끼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도. 마치 폭풍 속을 뚫고 어린 소녀를 납치해가는 화렌차의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붉은 머리가 번개빛에 이상하게 빛났다. 레니였다. "마당이다! 침입자다!" 난 고함을 지르며 문쪽으로 달려갔다. 샌슨도 악을 쓰며 달려나왔다. 하지만 내 고함소리는 폭풍우의 소리에 다 묻혀버리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샌슨과 난 계속해서 악을 지르며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말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어!" "젠장, 이 날씨에 얼마나 달려갈 수 있는지 보자! 후치, 마굿간으로!" 문을 발로 걷어차 열면서 뛰어나왔다. 사나운 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게다가 하루 종일 쏟아진 비 때문에 성의 마당엔 엄청난 양의 빗 물이 고여있었다. 해안 절벽에 서있는 성에 이토록 빗물이 고이다니. 우 리는 철벅거리며 미끄러져 뒹굴고 하면서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폭풍에 대비하여 잠겨진 마굿간 문을 보더니 샌슨은 두 말 하지 않고 롱소드를 후려쳤다. 콰광. 그리고 나 역시 옆에서 바스타드를 후려쳤다. 얼마 있지 않아 문은 부서졌고 우리는 마굿간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장 을 찾을 겨를도 없이 맨몸으로 말 위에 올랐다. 우리는 둘 다 갑옷도 없 이 검 하나씩만 든 채 안장도 없는 말을 달려나왔다. 그리고 비바람은 미친 것처럼 몰아쳤다. 성의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샌슨은 욕설을 뱉었다. 나우르첸의 병사들이 빗속에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빗줄기를 타고 퍼 져나가고 있었다. 정문 경비병인 모양이다. 그 침입자의 소행인 모양이 다. 이런 칠흑 같은 밤에는 정문 경비병들도 어쩔 수 없었겠지. 샌슨은 악을 쓰며 정문을 돌파했다. 난 안장도 없는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로 제미니를 꽉 감싸며 달려나왔다. 샌슨은 잠시 멈추더니 고 함을 질렀다.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여!" "잠깐! 기다려, 헉헉, 번개가 칠 때…" 콰르릉! 쾅쾅! "저기다!" 멀리서 달려가는 말의 뒷모습이 망막에 확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우리 는 곧 죽으라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들은 겁에 질렸는지 콧김을 푸르 릉거렸지만 이 쏟아지는 빗 속에서 반항함으로써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 지는 않았다. 이윽고 달려가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온통 물 이라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잘 들려왔다. 우리는 이제 소리를 들으며 정 확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날아와서 온몸을 때리는 빗줄기는 몽둥이 같았다. 그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세찬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머리카락은 통째로 뽑혀나 가는 것 같았고 헐렁한 셔츠는 젖은 채로 마구 철퍽거렸다.숨을 쉴 때 마다 목구멍이 아파온다. 속눈썹마저 눈을 찔러대고 있었다. 두두두두! 촤촤촤촤촤! 납치자는 나우르첸의 시내를 달려가고 있었다. 젠장! 이 도시의 지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 우리는 말들이 미끄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동시에 우리가 말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사라졌다. 우리는 멈춰서고 말았다. "후우, 후우. 뭐야? 소리가 안들려?" "잠깐… 후우. 여기 있다." "응?" 샌슨은 극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쏴아아아! 빗소리 사이에서 샌슨의 목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놈도 멈추었다. 여기 어딘가에 있다." 등골이 쭈볏하는걸? 달려가던 것을 멈추자 비는 이제 우리 머리를 때리 기 시작했다. 시내라서 그런지 바람은 조금 약했지만 번개와 천둥은 여 전히 요란했다. 콰우웅, 꾸르릉! 우리는 긴장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그 납치자는 아마도 추적자가 둘인 것을 깨달았으니 우리를 처치하 고 도망갈 속셈일 것이다. 얼굴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에 숨이 막히려 하 면서도 난 눈을 부릅떴다. 그 때였다. "살려줘…" 우리 눈 앞의 사거리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레니!" 난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려고 했다. 그 때 뭔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말 위에 올라타있는 스카일램이었다. 그 역시 갑옷 하나 걸칠 새가 없었는지 평상복에 검 하나 든 채로 달려 나와 있었고 우리들처럼 엉망으로 젖어있었다. 나와 샌슨이 놀란 얼굴로 말하기도 전에, 스카일램은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이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일부러 비명을 지르게 한 거다. 달려가면 당한다." 난 입을 꽉 다물었다. 샌슨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스 카일램은 조용히 검을 뽑아들더니 말했다. "내가 우회할 테니 조심해서 앞으로 걸어가라." 그리고 스카일램은 옆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샌슨과 난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난 고함을 질렀다. "레니! 어디 있어!" "…지마!" "뭐! 어디야!" "아… 오지… 오면 안…" 그 때였다. 채챙!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와 샌슨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철벅철벅. 발이 미끄러질 뻔했지만 우리는 간신히 사거리에 뛰어들었다. 옆을 보니 스카일램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옆에는 다른 남자 하나가 레니를 붙잡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복면을 하고 있 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와 샌슨은 동시에 소리없이 달려들려고 했 지만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가운데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다. 레니를 붙잡고 있던 남자는 우리가 달려들자 곧장 레니의 목에 검을 가져갔다. 레니는 하얗게 질려버리더니 그만 기절해버렸다. "오지 마!" 나와 샌슨의 발이 굳어버렸다. 스카일램과 싸우던 남자 역시 검을 거세 게 휘둘러 물러났다. 스카일램은 재빨리 걸어와 우리와 함께 섰다. 쏴아 아아! 비는 미친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레니의 목에 검을 겨눈 남자는 젖어버린 복면을 풀어던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넥슨 휴리첼의 얼굴이 나타났다. "제기랄! 네 놈이!"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3. 나와 샌슨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스카일램은 검을 강하게 부여잡 았다. 눈 앞이 하얗게 바뀌며 꽈광!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샌슨은 고함 을 질렀다. "여기까지 따라왔느냐!" 넥슨은 빙긋 웃으며 뒤로 물러났고 그가 물러나는 것에 맞추어 우리 세 명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넥슨은 레니의 목에 댄 롱소드에 눈짓을 보내어 우리를 멈추게 했다. 그는 말했다. "자네들이 왜 일스에 왔는지 궁금하더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지독한 바람 에 실린 폭우는 온 세상을 파괴할 듯이 쏟아져내렸다. 넥슨은 눈을 껌뻑 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자네들이 그 날 아침 이 계집애를 데리고 다니던 것도 꽤 이상 하게 보였고. 사실 뻔한 이야기이지. 자네들이 데리고 다니는 붉은 머리 의 소녀라… 간단한 이야기였지." 얼굴에 달라붙는 빗방울 때문에 얼굴 가죽을 뜯어내고 싶은 느낌이 든 다. 빌어먹을 녀석! 넥슨은 유유히 말했다. "이 소녀가 할슈타일 가문의 후계자, 적통의 마지막 드래곤 라자일 테 지. 맞는가?" "왜 묻는 거냐!" "이봐. 이러지들 말라구. 우리들이 그 동안 사귀어왔던 세월의 길이가 짧긴 하지만, 그 짧은 세월 동안 참 많은 우의를 다져오지 않았나?" 우의? 허,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가 기가 막혀 말을 못하는 사이에 스 카일램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넥슨 휴리첼! 감히 국가 전복을 꾀한 죄만도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 이다. 너의 죄과를 씻을 길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그 소녀를 내려놓는 다면 우리는 널 추적하지 않겠다." "크하하하! 이 소녀를? 왜. 내가 미쳤어?" 스카일램은 넥슨을 날카롭게 쏘아보았고 넥슨은 껄껄거리며 말했다. "자이펀이든 바이서스든, 아니 헤게모니아까지라도. 저 루트에리노 대 왕과 핸드레이크마저도 이루지 못한 대륙의 통일! 그것이 가능한데 내가 왜?" "무슨 말이냐!" 꽈광! 다시 번개가 쳤고 그 하얀 빛 속에서 넥슨의 얼굴은 괴이한 은색 으로 빛났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최강의 드래곤! 저 크라드메서, 바로 우리 가문의 드래곤이었던 크라 드메서를 다시 획득하게 된다. 휴리첼의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난 악에 받혀서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 드래곤 라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드래곤과 인간이 대 화하는 거야! 크라드메서가 네 미친 계획 따위를 들어줄 리가 없어!" 넥슨은 싸늘하게 날 노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당연하지. 크라드메서는 선의 율법도, 악의 율법도 따르지 않는 다. 오로지 조화만을 원할 뿐이지! 대룩을 하나로 만든다는 그 멍청한 계획을 따라줄 것 같아앗!" "드래곤은 기억한다." "뭐라고?" 넥슨은 클클거렸다. 그 충실한 마부 녀석이 말을 끌고 오더니 넥슨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넥슨은 사납게 뿌리치며 오히려 우리쪽으로 한 발 다 가섰다. 그는 이를 갈듯이 말했다. "드래곤은 기억한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불행한 종족이 몇 있지. 그 중에 하나가 드래곤이야. 드래곤은 절대로 망각의 축복을 향유하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크라드메서는 그의 드래곤 라자였던 까뮤 휴리첼의 죽음을 기억할 거 라는 말이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 자식! 크라드메서를 충동질할 생각인가? 넥 슨은 계속해서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복수를 원할걸?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물론 난 삼촌 에 대한 복수, 별로 관심없어. 하지만 나는 바이서스의 파멸을 원하고, 크라드메서도 그럴 거야. 대화가 잘 통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 "마, 말 같지 않은 소리!" "말이 안 될 거 같아? 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하하하!" 그 때 마부는 다시 한 번 넥슨의 팔을 잡아당겼다. 넥슨은 화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마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넥슨은 이를 악물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없군. 긴 이야기 나누지 못해서 말이야. 아, 그리고 자네들에게 는 좋은 선물 한 가지 남겨두었네." "선물이라고?" "내일 아침 해가 뜨면 흥미로운 일이 발생할 거야." 샌슨은 멍한 얼굴이 되었지만 난 소스라쳐버리고 말았다. "세이크럴라이제이션!" 넥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이펀인들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줄 알더군. 이만 가보겠어. 따 라오려고 들지 마." 그리고 넥스은 축 늘어져버린 레니를 가볍게 말 위에 올리더니 말에 올 라탔다.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넥슨은 다시 한 번 우리들을 바라보며 웃고는 달려가버렸다. 샌슨은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젠장! 말로 달려!" 나와 스카일램은 황급히 샌슨의 뒤를 따랐다. 샌슨은 슈팅스타에 올라 타자마자 외쳤다. "후치! 일행을 끌고 와!내 짐도 챙겨오고! 난 저 놈들의 뒤를 따라가 며 흔적을 남기겠다. 그리고 스카일램씨, 당신은 나우르첸 영주에게 이 도시가 세이크럴라이제이션 되었다고 말해요! 자세한 것은 카알이나 제 레인트가 말해줄 겁니다!" 샌슨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곧 달려가버렸다. 저 멍청한! 맨몸에 검 한 자루 들고서 추적을 하겠다고? 저렇게 앞뒤없는 작자가 다 있나. 그러나 내가 고함을 질렀을 때는 이미 샌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그가 사라져간 방향을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고는 곧 제미니에 올라타서 스카일램과 함께 성으로 달려갔다. 카알은 내 말을 듣자마자 곧 손으론 짐을 챙겨들면서 동시에 말을 했 다. "트리키공.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잘 들어요. 당신은 나우 르첸 영주에게 이 도시의 중심부, 흙이 있는 곳에 묻혀진 디바인 마크를 회수라하고 전하시오. 그 디바인 마크를 오늘 밤안에 회수하지 않으면 이 도시의 모든 것이 병에 걸려 죽어갈 것이며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 라고 전하시오." 스카일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카알은 쉽없이 말했다. "그리고 나우르첸 성주를 돕든지, 아니면 오늘밤 내로 이 도시를 벗어 나든지 당신 자의에 따라 결정하시오. 하지만 내 생각으론 지금 당장 벗 어나는 것이 좋겠소. 당신이 이 도시의 지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바에야 특별한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고, 게다가 이 무기는 자이펀에서 개발 한 것으로 한시바삐 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까." "헬턴트님은 어쩌실 겁니까?" "전하께 믿음을 저버려 죄송하다고 전해주시오. 사절의 임무는 실패였 다고.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바이서스 임펠에 돌아갈테니 죄를 묻겠다면 그 때 물어달라고 전하시오. 나는 사절의 지위를버리고 지금부터 우리 일행과 함께 레니양을 구출하기 위해 넥슨을 추적할 것이오." "레니양을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의 승패보다도 더 중요 한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꼭 그녀를 되찾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에 대해 잘 말해주시길 부탁합니다. 비록 임무는 실패했 지만, 당신도 봐서 알듯이 바란 탄에서 그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성실히 답변했습니다. 전하께 그를 잘 대해달라고 부탁해주시길 바랍니다." 스카일램은 한참 동안 카알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알은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침버씨. 당신은 어쩌겠습니까? 당신은 바이서스로 가고 싶어했으니 트 리키공과 함께 행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제레인트는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 화 내시겠습니까?"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테페리의 성직자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화낼 수는 없어요." 그리고 카알은 이루릴과, 그녀에게 매달린 채로 벌벌 떨고 있는 네리아 를 바라보았고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재빨리 짐을 들어 올리며 스카일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스카일램은 망연히 카알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해서 기뻤습니다." 스카일램은 몇 번이나 뭐라고 말하려고 애쓰다가 포기해버렸다. 그는 카알의 손을 놓더니 곧 경례를 붙였다. "헬턴트님을 호위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수고해주시오." 그리고 카알은 곧장 달려나왔다. 난 샌슨의 짐까지 둘러매고는 끙끙거 리며 그의 뒤를 따랐고 이루릴은 네리아를 달래며 걸어오느라 힘들어했 다. 밖으로 나와 마굿간으로 달려가는 길은 몹시 힘들었다. 휘우우웅! 무시 무시한 비바람은 도대체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힘들게 마굿 간까지 걸어가 말들을 꺼내었다. 네리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번개가 칠 때마다 성안으로 도로 달려들어가려는 자세였고 그래서 이루릴은 그녀와 함께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랐다. 이루릴은 네리아의 등 뒤에 앉은 채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레이셔널 셀렉션 위에 타세요." "어, 전 말을 탈 줄 모릅니다만…" "당신을 낙마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제레인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의 노새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레이셔 널 셀렉션 위에 올라탔다. 역시 저 엘프의 말은 얌전히 제레인트를 받아 들였다. 카알은 곧장 출발했다. "이랴아, 하아!" 나와 카알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네리아와 이루릴이 탄 에보니 나이트 호크와 제레인트를 태운 레이셔널 셀렉션이 뒤따랐다. 난 거친 비바람과 새벽이 가까워오면서 가장 어두워지는 암흑 속에서 간신히 샌슨과 헤어 진 위치까지 일행을 인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샌슨이 마지막으로 달려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방향이라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나우르첸을 벗어나는 외곽으로의 방향이었고, 그래서 도시를 통채로 날 려버릴 듯한 폭풍우를 간신히 뚫고 나우르첸을 나선 우리는 바로 그 때 부터 어디로 가야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카알은 사납게 몰아치는 비바 람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아내듯이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고는 잠 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자네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데리고 있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쉬운 질문이군. "갈색산맥으로." 카알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고 그 때마다 우리 는 네리아의 구성진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수면 전체로 흐느끼고 있는 실 키안 레이크 옆을 달려갔다. 난 주의깊게 바라보며 말했다. "샌슨이 남긴 신호겠지요?" "다른 추측을 하긴 어렵겠군. 하지만 뜻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에는 누군가 칼로 급 히 새긴 자국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곧은 길을 쭉 따라오다가 산 속에서 갈림길을 만났었고, 그래서 양쪽 중에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제레인트에 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 때 이루릴은 밤에도 보이는 그 눈으로 이자취 를 발견한 것이다. 나무에는 S-R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씨가 루미너스가 질 때 여기를 지나갔다는 말인 것 같군요." 우리는 놀란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허헛? 정말 그럴 듯한데? 카 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새벽녘이니… 한 두 시간 전에 지나갔다는 말이군요. 좋습니 다. 계속 달려갑시다." 제레인트는 기진맥진한 얼굴이었지만 카알의 말을 듣자마자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샌슨씨는 아무런 장비도 준비도 없이 떠났으니, 빨리따라가야겠 습니다." "이랴아!" 산으로 다가감에 따라 비바람은 차차 멎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새 도록 비를 맞으며 달려왔던 우리 일행은 새벽녘의 살을 에는 추위에 모 두들 무섭게 떨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뺏긴 체온은 어디서도 보충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좀 나을까. 그러나 겨울밤은 길었다. 고원을 넘고 산등성이를 타고 돈다. 끝없이 펼쳐진 낮은 산들. 주위에 는 몇 아름도 넘어보일 것 같은 거대한 나무들이 기둥처럼 서 있어 하늘 엔 지붕이 펼쳐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거대한 숲속에까지도 빗방울은 사납게몰아치고 있었다. 나뭇잎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가 날카롭다. 우리는 숲을 지나 조 금 높은 지형에 올라섰다. 끝없이 펼쳐진 고원. 수목 한계선 위로 올라 왔나 보다. 우리는 어찔어찔한 상등성이를 따라달렸다. 시선이 몽롱해진다. 주위의 나무들과 풀, 산등성이들이 밤하늘과 엉겨 버려 윤곽을 잃고 있다. 들려오는 소리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연 속적으로 계속되는 말발굽 소리.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손발의 감각은 점점 사라지고 난 아무데서도 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 다.지독한 밤이 흘러가고 있었고 흔들리는 주위의 환상. 우리를 제외하 고 주위의 세계 전체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고 그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암흑의 허공을 쉽없이 느릿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후치! 정신 차려!" 네리아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 난 퍼뜩 정신을 차렸고, 덕분에 급한 산 비탈로 달려가던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미칠 것 같은 밤이다. 네리아가 외쳤다. "카알 아저씨! 안되겠어요. 여기서 멈춰요. 비맞으면서 너무 오래 달렸 어요." 카알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 산등성이까지만 올라갑시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안돼요, 이 상태로선… 무리라구요." "넥슨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도 더 이상은 달려가기 힘들 테지. 퍼시발 군도 그렇고. 그러니 조금만 더 무리합시다. 퍼시발군이 이 상태에서 아 침을 맞이하기는 쉽지 않을 거요." 네리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저것은 평소의 카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으며 달려갔다. 그 단호한 인도에 따 라 우리는 보슬비가 흩뿌려지는 밤의 숲 속을 달려갔다. 온몸은 이제 딱 딱해져 더 이상 습기는 습기가 아니었고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몸도 더 이상 떨리지 않게 되었다. 간신히 우리는 주위보다 조금 높은 산등성이까지 올라섰다. 모두들 힘 에 겨워 말에서 뛰어내렸지만 카알과 이루릴은 여전히 주위를 돌아다녔 다. 잠시 후 카알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카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난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려 카알 을 바라보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멩이를 들여다보는 카알의 모습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깨닫고는 머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그 때 이루릴의 근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피우죠." 카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모두들 체온을 너무 많이 빼앗기셨군요." 그리곤 이루릴은 카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는 주위의 나무를 모으기 시작했다. 폭풍우 때문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네리 아는 땅바닥에 앉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하얀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난 앉지도 못한 채 허리를 꺽고는 무릎을 짚은 채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루릴과 카알 두 명이서 나뭇가지를 모았다. 카알은 나뭇가지를 주워모으면서 말 했다. "넥슨이 가까이 있다면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할 텐데." "불을 피우지 않으면 더 위험할 것 같아요." "…알겠소." 두 사람이 모아온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이루릴은 샐러맨더를 불러내어 불을 피웠다. 이 지독하게 젖은 나뭇가지들에 불이 붙는 것이 신기했다. 난 없는 힘이나마 네리아를 부축해서 불가로 옮겨와서 앉혔다. 모두들 우울한 얼굴이 되어 불가에 모여앉았다. 카알은 불가에 앉아서 자신이 발견한 돌멩이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반 반한 돌멩이 표면을 칼끝으로 긁어 만든 것 같은 자취였는데 SH 라고 적 혀 있었다. 샌슨도 정말 답답하군. 이게 무슨 뜻이지? "퍼시발군은 군대 암호를 사용하지 않았군. 우리들이 그걸 읽을 줄 모 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난 쾅쾅 울리는 것 같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샌슨이 여기 있었다." "그게 적당할 것 같기는 한데." 그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여기 멈춰라라는 뜻이야." 우리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족을 돌아보았다. 샌슨이 서서 씨익 웃 고 있었다. "샌슨!" 네리아는 힘없이 웃었다. 샌슨은 약간 낮은 산등성이에서 이쪽으로 올 라오고 있었다. 그 때 태양이 떠오르며 주위는 환하게 바뀌었다. 샌슨은 태양빛을 받으며 정상에 올라왔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4. 샌슨의 옷은 완전히 젖어버린데다가 무엇게 걸려 찢어졌는지 너덜너덜 해져 있었다. 산기슭을 급하게 달리느라 그렇게 된 모양이다. 팔다리에 도 곳곳에 상처가 나거나 흙이 묻어 있거나 했다. 하지만 샌슨은 그저 조금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그를 맞이했다. "샌슨? 괜찮아?" "그런대로." 샌슨은 싱긋 웃으며 앉았다. 우리는 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카알에게 설명했다. "넥슨과 그의 종복은 저앞쪽 산 너머에서 야영 중입니다. 레니는 몹시 지친 것 외에는 별 일 없어 보였습니다. 야영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훌륭하네, 퍼시발군!" "뭘요. 지독하게 피곤하긴 하지만… 다른 분들도 모두 많이 지쳐 보이 는군요." 카알은 뭔가 물어볼 것이 많다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을 억제하며 말했 다. "자네, 우선 옷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짐 안에 마른 옷을 꺼내어 갈아 입게나. 그리고 다른 분들도 모두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읍시다." 잠시 후, 옷을 들고 조금 떨어진 숲으로 걸어갔던 이루릴과 네리아가 돌아오자 카알은 본격적으로 질문했다. 네리아와 나는 모포 속으로 들어 가 머리만 내놓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 납치범은 그 둘뿐인가? 넥슨과 그 말없는 종복?"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넥슨과 그 마부 녀석을 따라 저 앞의 산을 넘어갔는데 거기서 다 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략 20여명 되는 무리들 이 캠핑 준비까지 해놓고서 그들을 기다리더군요." "이런…" "넥슨은 레니를 그 녀석들에게 넘겨주고는 잠들었습니다. 그 마부 녀석 도 마찬가지고요. 둘 다 밤새도록 비 내리는 산속을 달려서 대단히 힘들 어 하더군요. 레니 역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저는 우선 돌아와서 아 까의 그 표시를 남겨두었습니다. 혹시 뒤따라 오는 여러분들이 거기까지 다가왔다가 들킬까 싶어서였지요." "아아, 그런가?" "예.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그 녀석들을 정탐했습니다. 무슨 특징이 될 만한 기장이나 계급장, 장식 등은 없이 모두 제멋대로에 가까운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규군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단체 생 활을 하던 놈들은 아니더군요. 지휘체계도 보이지 않고 엉성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그저 캠핑 준비를 하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 다. 아마도 넥슨이 일어나면 무슨 활동에 들어갈 모양입니다." "그래? 흠. 정말 수고가 많았네, 퍼시발군. 어디 보자. 정규군이 아니 지만, 어쨌든 일단의 무리가 넥슨을 따른다는 말이지. 그는 바이서스 임 펠의 길드마스터였으니까, 어쩌면 도둑 길드쪽의 인원일지도 모르겠군." 모포 속에서 엎드려있던 네리아가 팔 위로 힘들게 머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아… 그럼 제가 가서 보면 되겠어요. 음냐. 여기서 멀어, 샌슨?" "산을 넘어가니까." "죽을 각오를 해야겠네." 카알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푹 쉬고 움직입시다. 넥슨은 몰라도 나머지 무리들은 별로 피곤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20 여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니 섣불리 다 가가는 것도 고려할 일은 못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 "퍼시발군. 자네 생각에 그들이 오늘 내로 움직일 것 같던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짐은 별로 없이 모두 개인 물품을 지니고 있더 군요. 그래서 움직이려고 들기만 한다면 당장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음. 골치 아픈 일이군." 나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 말했다.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놈들은 갈색산맥으로 향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네드발군." "그렇다면… 그들의 방향을 아니까 계속 따라가다가 밤에 기습하지요. 그래서 레니를 구출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낮에 그들을 습격해서 레니를 빼내오는 건 어려울 테니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군. 여기서 갈색산맥까지의 거리는 꽤 되니까… 좋네. 어차 피 우리는 레니양을 갈색산맥으로 데리고 가려 했으니 방향이 틀려지는 것도 아니군. 추적을 계속 하면서, 적당한 기회를 노리도록 하세나. 하 지만 저들이 갈색산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갈 경우도 생각해 봐야겠 어." 그러자 이루릴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감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레인트도 쇠약한 목소리나마 유쾌하게 말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는 레인저만큼 빠르지는 못하지만 레인저보다 정확 한 추적자입니다." 카알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예. 엘프의 눈은 별빛 아래에서도 수천 큐빗 떨어진 지빠귀와 박새를 구별한다 했지요. 게다가 테페리의 가호가 함께 하시니 우리는 길이 어 긋날 염려도 없겠군요. 음. 일단 여기서 피로를 풀고 추적을 계속합시 다. 그런데 우리는 급하게 달려와 여행 준비가 퍽 부실하군, 그래." "제가 조사해보겠습니다. 쉬십시오."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 곧 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대단한 철골이 야. 난 좀 부끄러웠지만 도저히 쏟아지는 졸음을 어쩔 수 없었다. 진저 리를 치고나서 나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타이번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세요?" 타이번은 피식 웃어버리더니 내 귀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는 내 얼굴 을 자기 얼굴 옆에 바짝 붙여더니 시선의 방향을 일치시키고는 말했다. "임마, 하늘이 보이냐?" "보이죠." "난 안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늘이 없겠느냐?" 아무르타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점잖게 꼬리를 깔고 앉더 니 그 길다란 목을 우아하게 휘어서는 타이번의 반대쪽 볼에 얼굴을 가 져다대어 역시 시선의 방향을 일치시켰다. "보이는군." 그래서 나와 타이번과 아무르타트는 얼굴을 나란히 한 채 하늘을 올려 다보고 있었다. 박쥐로 변한 시오네가 하늘을 날아가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해?" 그녀는 망연히 위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타 이번은 시오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난 박쥐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쥐가 없겠느냐?" 아무르타트는 브레스를 확 뿜어 시오네를 떨어트렸다. 시오네는 잘 구 워진 박쥐구이가 되어 떨어졌다. 난 말했다. "박쥐가 안보이는데요?" 타이번은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그 허연 눈을 하늘로 향했다. "야!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저기 박쥐가 있지 않아?" "안보여요." 타이번은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아무르타트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서 나와 타이번, 그리고 아무르타트는 얼굴을 나란히 한 채 하늘을 바라 보았다. "크르르릉!" 굉장한 콧김소리를 내며 크라드메서가 하늘을 날아갔다. 타이번은 하늘 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크라드메서가 날아가는데요?" 내가 말하자 타이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보이면 없는 거야." "없다고요?"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버지는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난 아버지가 없나요?" "그렇지." 아무르타트는 씩 웃더니 역시 브레스를 확 뿜었다. 그러나 크라드메서 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르르릉!" "크르르릉!" 눈을 떠보니 크라드메서가 아니라 샌슨이 코를 골고 있었다. 샌슨은 내 모포 속에 들어와 열렬한 동작으로 날 껴안은채 잠들어 있었고 난 몸부 림을 쳐 간신히 그의 포옹에서 벗어났다. 으으으! 아무래도 앞으로 사흘 은 재수가 없을 것 같다. 네리아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낄낄 웃었다. 그러고보니 카알은 나무에 기 대어 자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하늘을 보니 해 가 흘끔흘끔 서쪽을 곁눈질하는 시간이었다. "일어났어?" "저 상태에서 네리아라면 잘 수 있겠어요?" "나? 좋지. 까르르르. 샌슨도 괜찮은 남자니까. 어젯밤엔 정말 멋지지 않았어?" "아, 샌슨이 멋지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겠는데, 난 남자라구요!" 네리아는 히죽히죽 웃더니 불 위에 얹어둔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차 마실래?" "예." 나와 네리아는 찻잔을 든 채로 주위에 펼쳐진 고원과 산악을 바라보았 다. 산 정상의 지독한 바람에 난 옷깃을 끌어올렸다. 주위는 온통 헐벗 은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진 고원과 산의 분수령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산이고 산이며 산이다. 우리 위치가 꽤나 높은 모양인데. 난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물 구하기 어렵겠는데. 물통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아, 걱정마. 샌슨은 물통도 다 채워놓고 잠든 거니까." "그래요? 흐음. 역시 멋지네." 난 잠들어있는 샌슨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리곤 곧 얼굴을 굳 히며 외면하고 말았다. 이를 바악바악 갈아대며 잠들어있는 샌슨을 바라 보며 미화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 다. 난불길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런. 산 정상에서 이렇게 불피우면 엘프가 아니라도 누구나 볼 수 있을 텐데." "할 수 없지, 뭐. 이렇게 싸늘한 날씨인데 불 피우지 않고 견디다간 동 사할 거야." 그건 그렇군. 난 갑옷을 꿰어입고 검을 바싹 당겨놓았다. 움직일 때마 다 뼈마디가 아파왔다. 난 머리를 가로저으며 요리도구를 꺼내었다. "모두들 어제저녁부터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으니…" "흐음. 기대할 테니 만들어봐." "빈말로라도 좀 도와주겠다고 하면 안될까요?" "내가? 요리? 싫어. 잘하는 사람이 해라." 네리아는 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 다. 네리아는 멀리 고원 하나를 스쳐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어제 의 지독한 날씨는 온데간데 없고 하늘은 희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 치 얼음장 같은 하늘이다. 달그락. 떼구르르. 난 실수로 그릇 하나를 걷어찼고 굴러가던 그릇을 주워든 네리아는 날 바라보았다. 난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가 걱정되는군요."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도로 집어던졌다. 내가 그릇을 받 아들자 네리아는 말했다. "할 수 없지. 넥슨에게도 레니는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 별 일은 없 겠지." "그렇긴 하지만… 지금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울지."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난 다시 말했다. "이런 말 우습지만, 우리가 그녀를 찾아가기 전까지 그녀는 그야말로 행복했겠지요. 세상은 단순했고, 아마 즐거웠겠지요." 네리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펼쳐진 산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세상에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순 없어." 콰당, 풀썩. "이, 이런. 내가 졸았군…"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자고 있던 카알의 목소리다. 나와 네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알을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5. "졸다니오? 저언혀. 완전히 잤다고 말해야 되지요." 카알은 겸연쩍게 머리를 가로젖더니 하늘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이런! 벌써 이렇게 늦었다니. 안되겠군, 모두들 깨워요들." "아니, 잠깐… 먹을 건 먹고 움직이지요. 나 요리 끝날 때까지만 모두 자게 두는게 좋지 않을까요?" 카알은 눈을 비비며 내 프라이팬을 바라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주게. 네드발군." 카알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멀리 산쪽을 바라보았다. 그 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다리 옆에선 네리아 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역시 비슷한 시선으로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치이이익. "음? 냄새가 난다." 그 말과 함께 샌슨이 몸을 일으켰다. 웃음밖에 안나오는걸. 잠시 후 이 루릴도 일어나더니 잠에 취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흐으음. 잘들 잤어요?" 그러나 제레인트는 끝까지 모포 속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몹 시 흔들어 깨워야했다. 제레인트는 이를 사납게 부딪히며 말했다. "멋지군요. 눈을 뜰 때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니. 그리고 식후엔 아마도 격렬한 추격전이 준비되어 있겠지요? 어쩌면 목숨이 조금 위험할지도 모 르는. 하하! 음식 맛나겠어요."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샌슨은 콧김을 핑핑거리며 음식을 쑤셔넣었 다. 즐거움보다는 그 실용적 의미에의 접근에 보다 많은 주안점을 두었던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말 없이도 재빨리 짐을 챙겨 말 에 올랐다. 샌슨은 원기왕성하게 앞장을 섰다. 수목한계선 위까지 올라 왔기 때문에 주위는 그저 짧은 풀이나 노출된 흙들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고원지형을 따라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말들이 아직 지쳐있었고 주위의 풀들도 말들 먹기엔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말도 황소처럼 풀 만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는 길시언처럼 황소를 타는 것이 더 나을까나? "조만간 마을에 들리긴 해야겠군요." "레니를 구출하고나서 가지." "그래야죠." 우리는 힘차게 30 분쯤 달려갔다. 오른쪽 멀리로는 넓게 펼쳐진 황야가 아스라하게 보였고 왼쪽으로는 까마득한 준령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 이로 작은 구릉을 넘어가면서 샌슨은 말없이 손을 들어 속도를 늦추도록 지시했다. "마구 노출된 지형이니 척후가 있다면 곤란해." 우리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구릉 정상을 넘어서자 샌슨은 곧 혀를 찼다. "제길! 벌써 출발했군." 그리고 샌슨은 다시 말에 올라서 달려내려갔다. 우리들도 그 뒤를 따랐 고, 잠시 후 우리는 거대한 침엽수림이 형성된 숲을 따라내려가다가 계 곡 사이에 위치한 공터에 내려설 수 있었다. 공터 주위를 돌아보며 샌슨은 혀를 찼다. 우리들도 우울하게 주위를 둘 러보았다. 주위에는 불 피운 자리라든지 풀 베어낸 자리 등이 보였고 천 막을 쳤던 것으로 보이는 말뚝 자국도 보였다. 네리아는 불을 피운 자리 로 걸어가더니 돌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약간 남아있는데. 그렇게 많이 지나지는 않았을 거야." "어디로 향했을까?" 이루릴은 눈을 깜빡이더니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달려온 방향 과 반대쪽이다. "풀들이 꺽여졌고, 그리고 비 때문에 발자국도 잘 남아있군요." 이루릴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젖은 흙 위에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숲 사이로 난 길, 아마도 짐승의 길이 아닌가 싶은 험한 길이었다. 험하 다 해도 이 거대한 숲의 아래쪽에는 관목이나 잡목등이 거의 나 있지를 않아서 걸어다니기엔 수월해보였다. 카알은 물었다. "퍼시발군. 그들은 말을 이용하던가?" "아니오. 말은 넥슨과 그 마부녀석이 타던 것뿐이더군요." "좋아. 그러면 따라잡을 수 있겠군. 갑시다, 여러분." 다시 숲 사이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 가운데 있다고 믿기엔 신기할 정도로 평탄한 길이어서 말들을 가볍게 달리게 하는 것은 간단했다. 다 시 말없는, 그러나 숨가쁜 추적이 계속되었다. 지붕처럼 펼쳐진 나뭇가지와 잎들 사이로 간혹 광선이 내리비치는 것 이외에는 숲 아래는 대부분 컴컴했다. 컴컴한 숲 속의 검은 나무들은 묵 묵히 선 채 지나가는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커튼처럼 늘어선 광선 들은 곧고 날카롭게 어둠을 절단하고 있었다. 숲속에서 스며나오는 특유 의 산뜻한 내음. 그리고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우리는 아무 도 말하지 않았고, 변함없이 일정한 속도로 달려가는 동안 속도감은 상 실되어 사라져버렸다. 달리는 것인지 서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하군. 잠깐 멈춰볼까." 카알의 말이었다. 우리 모두는 조용히 멈추었다. 카알은 주위를 둘러보 며 말했다. "해가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방향이 이상해. 우리가 바이서스에 서 여기로 넘어오는 동안 이런 수해(樹海)를 보았던가?" 수해라. 그러고보니 정말 끝도 없는 숲이군. 아까 식사를 하던 산봉우 리만 해도 헐벗은 산들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샌가 끝도 없이 거 대한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거의 동시에 불안감을 느 꼈다. 그리고 카알이 그 불안감을 간단하게 말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이런 맙소사.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 방향도 모르겠고 위치도 모 르겠다. 샌슨은 안간힘을 써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나우르첸에서 서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에, 바이서스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네리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아냐. 햇살의 방향이 이상해." "햇살이 이상하다고?"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햇살은 정면쪽에서 우리에게 뻗어와야 돼." 어라? 우리는 머리를 들어 숲속으로 내려꽂히는 광선의 각도를 바라보 았다. 광선은 모두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다 면 우리는…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제레인트는 황급히 말했다. "잠깐, 중간에 다른 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우리는 곧장 달 려왔는데…" "아, 분명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발자국 방향이 그대로인 데?" "그렇다면 넥슨은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잖아?" "갈색산맥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넥슨을 계속 따라간다 해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끝까지 따라갈 수야 없다. 나우르첸을 떠날 때 워낙급하게 떠났기때문에 우리 짐 속엔 보급품도 별로 없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일스의 북쪽엔 뭐가 있지요?"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일스의 북쪽엔 뭐가 있 지? 그러다가 우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 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당황하다가 말했다. "어, 어. 일스의 북쪽에는 헤게모니아가 있지요. 영원의 숲 너머로…" 제레인트는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네리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영원의 숲?" "어라? 잠깐, 북쪽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영원의 숲쪽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제레인트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카알이 질문했다. "영원의 숲이 무엇입니까?" 제레인트는 얼빠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뿐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카 알은 한 번 더 질문해야 했다. 제레인트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예? 아, 예. 그건, 그건 드래곤 로드와 핸드레이크의 맹약으로 영원 히, 영원히 존재하기로 된 숲입니다.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을 치료하는 댓가로 그 숲을 드래곤 로드에게…" "잠깐, 뭐라고요!" 카알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마 찬가지였다. 우리들이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자 제레인트는 그제서야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요. 여러분들은 모른다는 말입니까?" "예? 아, 예. 모릅니다. 핸드레이크와 드래곤 로드의 맹약이라니오?" 제레인트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고선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허허, 이런. 바이서스분들이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를 일스 사람에게 묻 는다는 말입니까? 그것 정말 우습군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여러분들은 그럼 대미궁에 대한 이야기도 모릅니까?" 카알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아, 대미궁이야 영광의 7주 전쟁의 마지막날,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패 퇴당한 드래곤 로드가 숨은 곳 아닙니까? 할슈타일공이 아마 그를 그곳 으로 데리고 갔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카알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예? 아, 그건 아무도 모르는 장소라고…" 제레인트는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무도 모르는지는 몰라도 전 압니다. 대미궁은 영원의 숲에 있지 요." "예?" 카알은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가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잠깐… 분명히 할슈타일 가문이 바이서스에 귀속된 것은 제 4 대 에리 네드 대왕의 북방정벌… 북방정벌 때였지. 그렇지! 할슈타일 가문은 원 래 북쪽의 호족이었지." 제레인트는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엿듣기나 하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이 영원의 숲이 원래 그들의 영지입니다." "여기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있는 대미궁에 드래곤 로드를 숨겨주었고… 아니, 그런데 정말 이 이야기를 모른다는 말입니까?" "전혀 모릅니다. 금시초문인데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심하게 갸웃거렸다.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군요. 조금 더 달린 후 해가 진 다음에 듣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레니양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텐데." "아, 예. 일단은 계속 따라가봅시다." "안됩니다. 아니, 됩니다" 제레인트가 황급히 말했다. 우리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 라보았고 제레인트는 자신의 말에 놀라는 얼굴이었다. 카알은 의아쩍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이건 정말 이상한데?" "아, 그런 거 같군요?" "이런, 죄송합니다. 영원의 숲은 드래곤 로드와 핸드레이크의 맹약에 의한… 이곳엔 들어가면 안됩니다. 일스 사람이라면 아무도 들어가지 않 을 겁니다. 하지만… 들어가야겠군요." 샌슨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야 된다는 말입니까, 들어가면 안된다는 말입니까?" "들어가면 큰 일 나지요. 하지만, 하지만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때 카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버씨의 말은 테페리의 말이지요?" 우리는 다시 놀란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크게 당혹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여긴 들어가면 안되는데… 그런데 들어가야 된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오는군요. 이런, 젠장!" 제레인트는 이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씹어뱉듯이 말했 다. "이건 말이 안돼!" "침버씨?" "이건, 이건 정말 웃기지도 않은…" 그러다가 제레인트는 황급히 손을 모아 기도에 들어갔다. 우리는 어쩔 줄을 모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제레인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 다. "전 테페리의 지팡이입니다." 그의 굳은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카알은 엄숙하게 그를 바라보았 지만 제레인트는 거의 자신에게 말하듯이 말했다. "따라서, 전 그 분의 의지대로라면 죽음의 길을 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안됩니다!" 카알은 잠시 창백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띠며 말 했다. "이렇게 물어볼까요. 저희들이 들어가면안됩니까?" 제레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6.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군요. 침버씨는 우리가 들어가면 보나마나 죽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군요. 하지만 침버씨를 이끄는 테페리께서는 우리가 들어가야 된다고 말씀하시나 보군요?" 제레인트는 이제 처량한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씨…" "그렇지요?" 우리는 묵묵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지만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페리께서… 절 통해서 여러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시는지도 모릅 니다." "알 수 없지요. 테페리께서는 우리들을 영광의 길에 이끄는 것인지도." "영원의 숲에서 영광이란 없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다는 말로 고칩시다." 카알은 확고부동한 얼굴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 를 끄덕였다. 카알은 제레인트를 보며 말했다. "침버씨는 이곳에 가공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레인트는 침울하게 카알을 바라보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위험? 위험이지요. 허헛!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영원의 숲 을 무서워합니다." "무엇인지 모르신다고요?" "예! 흔히 그러듯이 영원의 숲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몇 명은 돌아오지 못하지만, 몇 명은 돌아옵니 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지요. 그 점에선 영원의 숲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무서워하는 겁니까?" 제레인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돌아온 사람은 사라져요." "예?" 제레인트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지독한 공포입니다. 영원의 숲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엔 분명히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사고도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져갑니다." "사라지다니…" "잊혀진다고요! 하핫!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레인트는 상쾌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은 무서운 공포를 나타내고 있었 다. 빠르게 깜빡거리는 그의 눈 주위로는 지독한 열기가 끓어오르는 모 양이다. 제레인트는 무서운 속도로 말했다. "사라지고, 잊혀집니다. 어쩌다가 부모가 그를 못알아봅니다. 자식들이 그를 못알아볼 경우도 있지요. 그 주위의 사람들은 서서히 그와 함께 했 던 옛추억을 잊어갑니다. 왠지 주위에 있는데도 시선에 잘 들어오지 않 습니다. 그에게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몸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의 방에 있는 기둥의 나뭇결은 어떤 모양이지요? 거의 신경쓰지 않으면 모릅니다. 바 로 그런 일이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나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돼! "이해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됩니다. 영원의 숲에 들어갔 다가 돌아온 남자가 있습니다. 그에겐 사랑하는 애인이 있습니다. 이야 기를 나누죠. 별로 달라진 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어느 샌가 서서히 기억 들이 사라져갑니다. 남자가 묻지요. '그 때 같이 거닐었던 길 기억나?' 여자는 '아니, 모르겠어. 그게 언제였지?' 라고 대답합니다. 이 정도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요? 하! 예. 그저 사소한 추억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그러다가 차츰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더 심해지기 시작합니 다." 제레인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우리들의 숨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그의 생일은 언제더라? 뭘 좋아하더라? 첫만남은 언제였지? 그리고 다 른 중요한 일들이 그녀의 앞을 막습니다. 왠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 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느끼지 못하지요. 매일 만나지던 것이 일주 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잊어버리 게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지?' 이렇게까지 되어버립니다. 그 남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심지어 그 자신까 지도!" 카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을 잊어갑니다. 어릴 때 친구의 얼굴 이 떠오르지 않게 되다가, 차츰 주위의 사람들을 잊어가게 되고, 끝내 자신의이름도 기억나지 않게 되고, 자기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게 없어집니다! 아무도 그를 모르고, 심지어 그 자신도 그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가 존재하는 사람이 됩니까? 그러다가 아주 드물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 행운을 통해 누군가가 간신히 그의 기 억을 떠올립니다. '이봐, 어떤 친구가 있었는데, 그 왜 있잖아?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 '누구 말이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제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것이 됩니다. 아무도 몰라요." 카알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되죠. 절대로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됩니다." "잠깐, 이상한데요.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면 그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 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기록은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예?" "기억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기록은 남아요. 아까 그 남자의 예를 듭시 다. 그 애인이 일기를 썼다면? 그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그가 완전히 사 라진 다음, 그 애인이 어느날 옛 일기를 뒤적거립니다. 그리곤 처음 보 는 이름이라든지 도저히 기억도 안나는 사건들을 읽으면서 당황하게 되 지요. 이게 도대체 뭐야? 그제서야 우리는 알아차립니다. 또 누군가가 사라졌던 것이구나. 어쩌면 그 사람은 나의 부모이거나 형제, 혹은 내 자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제레인트는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어쩌면 300년 전 영원의 숲이 처음 생겼을 때 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분명 그런 이상한, 믿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 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 우리는 영원의 숲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혹 누군가 배짱있는 사람들이 계속 들어갔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모르는 친지들로 둘러쌓인 셈이지요. 하하!" "그런… 그런 일이 왜 다른 곳에 알려지지 않았…" "모르니까요!" "예?" "모르니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누가 사라졌는지. 원래 있었는지조차 모른단 말입니다! 누군가는 사라졌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모 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영원의 숲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아예 다가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른 나라에 는 알려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일스의 사람들은 전부 다 압니다. 혹시 다른 나라의 여행자들이 찾아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영원의 숲 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들 역시 사라졌을 겁니다. 그러니 누가 압니까? 우리들도 기록에 의지해서,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있 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당황할 정도로 낯선 기록에 의지해서 간신히 알아 차리는 일인데 어떻게 다른 곳에 알립니까?" 우리는 모두 심한 추위를 느꼈다. 낮아진 오후의 햇살에 한기를 느끼 고, 제레인트의 말에 한기를 느꼈다. 카알은 진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 다. 그는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페리는 우리들이 들어가기를 바란다는 말입니 까?" 제레인트는 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카알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전 가겠습니다." "예?" "침버씨도 물론 들어가시겠지요?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엇을 결정하라는 거야?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어차피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 다. 자신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난 레니양을 구출하려는 내 자 신을 압니다. 난 들어가겠습니다." 카알은 쓰게 웃으며 질문했다. "자아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도?" "시간 아래 영원한 것은 없어요." 바로 그 말이 우리의 행동지침이 되었다. 샌슨은 손바닥을 딱 치며 말 했다. "하핫! 어차피 우리가 죽고나서 100년, 200년 쯤 지나면 우리는 존재하 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죠. 우리에 대한 기억은 아무 데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현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렵니다." 그리고 내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는 지금을 사는 거니까요. 난 갑니다. 내가 사라지면 우리 아버지 는, 우리 아버지는…" 말이 맺어지지 않는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서 눈 앞이 흐려졌다. 샌 슨은 묵묵히 내 어깨를 짚었고, 바로 그 때 난 악쓰듯이 외쳤다. "술주정꾼 아들 하나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요!" "푸하하하!" 샌슨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눈을 쓱 닦으며 웃었다. 카알은 빙긋 웃 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테페리의 인도라는 담보가 있다네. 해볼만 하지 않 은가? 누구는 신의 권능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 마당에, 우리도 신의 권 능을 한 번 담보물로 삼아보세나. 하하하." 제레인트는 입을 딱 벌린 채 카알을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신경쓰지 않 는다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아직까지 의사 표현을 하지 않은 사람을 바 라보았다. 네리아 역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알은 강요하지는 않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뭐. 난 황야 어디서 죽어버리면 아무도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기억 못할 거야. 내가 세상을 살아갔고, 사람을 좋아했고, 반짝거리는 것을 몸살나게 좋아했다는 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좋 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사라져보는 것도 괜찮아."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어버렸다. 제레인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 었다. "사라져도 좋습니까?"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하지만 사라질 때까 진, 제대로 살아보렵니다." 제레인트는 울듯한 얼굴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그는 고 개를 푹 숙였고, 그리곤 고개를 들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갑 자기 고함을 질렀다. "좋아요!" "예?" 카알이 반문했지만 제레인트는 거의 듣지도 않은 채 외쳤다. "그렇다면 자기가 걸린 모험이군요. 끝내줍니다. 사상최대의 모험이군 요! 최소한 자아를 가진 개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모험은 없겠군요. 하핫! 지성을 가진 존재 최후의 모험입니다!" "아, 예. 그렇긴 하군요." 제레인트는 갑자기 팔을 들어올려 앞을 가리켰다. 그는 힘껏 외쳤다. "남겨진 사람의 기억에는 신경쓰지 말고, 우리 뜻에 따라, 갑시다! 영 원의 숲으로." 그리고 제레인트는 힘차게 달려갔다. "이랴아, 히하! 아우우우우우!" 우리는 그 미친 듯이 흔들리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보 다가, 그냥 히죽 웃어버렸다. 우리는 곧 그의 뒤를 따라서 출발했다. "이랴아아!" 밤이 깊었다. 우리는 약 1시간의 거리를 두고 넥슨의 뒤를 따라왔다. 그들은 많은 인 원이었고, 그래서 흔적을 많이 남겼다. 따라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도 밤에는 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안자면 되지. 우리는 주의깊은 동작으로 말을 묶어두고 각자의 무장을 챙겨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 엄청나게 울창한 숲 때문에 달빛도 별빛도 비치지 않았다. 저녁마다 하는 일, 그러니까 장작은 충분히 해두었지만 혹시나 넥슨 쪽에서 우리 를 볼까 싶어서 불은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는 너무도 캄캄해서 우 리들도 서로가 안보일 지경이다. 그러니 몰래 넥슨의 무리에 다가가 레 니를 구하기는 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이루릴이 앞장을 섰다. "보고 올께요." 이루릴은 말소리만 남기고 스르르 사라졌다. 우리는 어떻게든 주위를 살펴보려고 애썼지만 사실 바로 옆에 있는 사 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 속이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 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주위는 지독하게도 캄 캄했고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으려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우리 일행을 놓쳐버릴지도 몰랐다. 게다가 소 리도 낼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지독하게 지루한 기분을 느꼈다. 주위에는 우석거리는 숲 특유의 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이거 참! 도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숲인지 모르겠다. 고요, 정말 인간이 만든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짓누르는 고요만이 있을 뿐이다. 바람소리 도 없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나 자 신의 맥박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핸드레이크와 드래곤 로드의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우화! 허, 하. 놀래라. 카알이 느닷없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뒤로 쓰러 질 뻔했다. 갑자기 어둠 속 곳곳에서 커다란 숨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사람들도 대개 나와 비슷하게 놀랐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연장감 때문에 제레인트의 대답은 꽤 늦 다고 생각되었다.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숲이 왜 생겨났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예. 허허. 이것 참. 말하는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 허공에 대고 이 야기하는 기분이 듭니다?" "하하하…" 제레인트는 아마도 자세를 바꾼 모양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 고 조금 후, 제레인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 그러니까, 루트에리노 대왕께서 드래곤 로드와 싸울 때, 그러니까 영광의 7주 전쟁이라고 하지요? 그 전쟁 초반기에 그 천재적인 핸드레이 크에게 크게 밀리던 드래곤 로드는 비상수단으로서 핸드레이크의 연인인 페어리퀸 다레니안을 인질로 삼았었지요." "예? 인질이오?" 카알의 대답은 그의 당황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 야기야? 제레인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예. 그렇습니다. 인질입니다. 드래곤 로드도 어지간히 급했으니까요. 드래곤 로드는 페어리퀸 다레니안을 인질로 붙잡아 핸드레이크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자신 때문에 바이서스군의 패배를 불 러올 수도,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다레니안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수 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아. 아마 이 이야기는 잘 모르실 수 도 있겠군요. 워낙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그래서요?" "아, 예. 결국 핸드레이크는 단신으로 다레니안을 구출할 것을 결심했 었지요. 그가 성공한다면 당연히 좋고, 실패한다 해도 페어리퀸 때문에 약점 잡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므로 자기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했던 모 양입니다. 조금 통속적인 데가 있지요? 뭐 통속적인 것들에도 많은 진리 가 숨어 있긴 합니다만." "아, 예…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핸드레이크는 페어리퀸을 구출해 냅니다만 그 탈출 과정에서 페어리퀸 은 분노한 드래곤 로드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저주를 위해 오크 100 마리가 희생되었다든가요. 어쨌든 그 저주 때문에 페어리퀸은 여왕의 권 능의 상징인 날개를 잃게 됩니다. 페어리의 여왕의 권능은 그 날개에서 나온다나 봐요." 뭐, 뭐야 이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잖아? 데미 공주님께 들은 이야기와 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아, 결과야 비슷하기는 한데 전개가 너무 다 르다? 어느게 사실이지? 제레인트는 계속 낭랑하게 말했다. "그런데 페어리에게 있어 그 여왕이 권능을 잃게 된다는 것은 종족 전 체의 비극입니다. 자칫 종족 전체가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문제 지요. 인간들도 왕을 자신의 대표자로 하고 페어리도 그렇지만, 인간들 은 말로만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할 뿐 왕이 죽든, 아니 왕이 바뀌든 어 쨌든 종족으로서의 인간은 영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나라야 바 뀔 수도 있고 왕조가 바뀔 수도 있지만 종족은 영원하지요. 따라서 인간 의 왕은 나라를 대표할 뿐이지 인간의 대표는 아닙니다. 하지만 페어리 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대표자로서 페어리 퀸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페어리퀸이 자신을 잃게 되면 페어리 전 체가 위험해집니다." "어머나…." 네리아의 탄성이었다. 제레인트는 신난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 결국 드래곤 로드는 인질을 잃게 되고 또 그 무리한 저주 의식 때문에 힘을 많이 소모하여 영광의 7주 전 쟁 후반기에 지리멸렬, 결국 그 마지막 날, 그 해의 첫눈이 내리던 날 그 처절한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루트에리노 대왕의 검 아래쓰러지고 말 았지요. 그러나 루트에리노 대왕 역시 그를 끝장낼 힘은 남아있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할슈타일 공은 드래곤 로드를 수습해갈 수 있었습니 다." "예. 그건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이 숲 은?" "아, 예. 에, 그리고 바이서스가 건국되고나서입니다. 핸드레이크는 다 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단신으로 북쪽으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7. "여행이오? 그야 원래 여행을…" "예. 여행을 많이 하는 마법사였지요. 마법 수련과 재료 채집도 그렇 고, 뭐 마법사답게 아티펙트나 고서적들을 찾기 위해서도 그랬습니다만 건국 초기의 나라라 곳곳이 어수선하던 그 시절에는 주로 감찰 여행이었 습니다. 공무적인 여행을 많이 돌아다녔던 시절이지요. 그리고 북쪽 여 행도 명목상으로는 북쪽 국경 지대의 감찰 여행이었지요. 하지만 그 여 행은 뭐랄까, 좀 다른 면이 있었지요. 우선 단신이라는 점이 그렇고, 정 확한 여정과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지요. 그는 사실 드래 곤 로드를 만나러 왔던 것입니다." "드래곤 로드를요?" 제레인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예. 그는 저주의 주체인 드래곤 로드를 만나서 페어리퀸에게 내려진 저주를 해소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온 것입니다." "허어… 이런." 카알은 놀란 목소리였다. 이런 젠장. 캄캄해서 아무도 표정을 볼 수가 없잖아? 난 눈살을 찌푸리며 제레인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저 이야기는 너무, 에, 뭐랄까. 음… "당시 이 북쪽 황야는 할슈타일공의 세력이 막강했던 장소입니다만 대 마법사 핸드레이크는 무인지경을 걷듯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할슈타일공을 만난 핸드레이크는 단도직입적으로 드 래곤 로드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기사의 본보기라 할만한 할슈타일 공이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요.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인 간의 적이 되면서까지 드래곤을 지켰던 기사 아닙니까. 핸드레이크가 드 래곤 로드를 암살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으니까요." "예, 예. 그래서요?"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가 죽으면 다레니안에게 내려진 저주는 영원 히 풀 수 없으며, 그렇게 될 경우 페어리족 전체가 멸망하게 될지도 모 른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여러가지 설득으로 간신히 할슈타일 공으로 하여금 그를 대미궁으로 안내하도록 설득했지요. 하지만 할슈타 일공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날 설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드래곤 로드를 설득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대미궁에서 육신을 잃은 혼이 되어버릴 것이다. 뭐 이렇게 말했다지요." 네리아가 듣기 싫을 정도로 할딱거리고 있었다. 몹시 긴장하는 모양인 걸. "어쨌든 그 말만 남기고 핸드레이크와 할슈타일공, 이렇게 두 사람만이 대미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나서 두 사람은 다 시 나왔다지요. 그 때, 그 때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람의 얼 굴 같지가 않았답니다. 할슈타일공도 대단히 창백한 얼굴이었고요. 어쨌 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졌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예.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그 날 할슈타일 영지를 떠나기 전에 영지를 가리키며 말했답니다. 이 땅에는 무한을 가둘 수 있을 정도의 숲이 자라 나 시간을 희롱하며 영원할 것이다." "무한을…" "예. 그리고는 바로 이 숲이 생겨났답니다." "허어…" 제레인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핸드레이크 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며 그 댓가로 핸드레이크는 영원의 숲을 만들어 그 를 보호한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할슈타일공의 바이서스 귀속을 미리 내다본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몇 대가 흘러, 할슈타일공은 과연 바 이서스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할슈타일공 역시 드래곤 로드로부터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별로 나쁜 취급을 당하지는 않 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3자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핸 드레이크는 페어리퀸의 저주를 풀었고 할슈타일공은 가문에 영광을 더할 수 있게 되었고 드래곤 로드는 영원히 평화로울 수 있는 휴식처를 얻었 으니까요."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군요." "예." "그런데 페어리퀸은? 그녀가 저주에서 풀려났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페 어리의 여왕이며 페어리족 역시 존속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아,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데 제가 들었던 이야기에서 는 페어리퀸은 아마도 완전히 저주에서 풀려나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한 번 저주에 걸렸던 부작용이 크다고 할까요. 어쨌든 그래서 그 녀는 활동을 삼가하고 영원의 호수 아래에 은거하게 된 것이죠." 그 때 갑자기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샌슨이 입을 연 것이다. "그런데 그거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데요?" "예?" 제레인트가 반문하고나자 카알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 퍼시발군. 300년의 간격이 있다네. 흐음. 침버씨. 그 이야기는 어떻게 아시게 되었습니까?" "아니, 뭐 다른 점이 있습니까? 전 그 이야기를… 에, 어린 시절 어섄 들에게 들었습니다. 일스 국민들은 대부분 잘 아는 이야기인데요. 노래 도 몇 개 남아있지요. 낡은 대지 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인데." 그러자 샌슨이 다시 말했다. "그 노래는 전에 들어보았습니다. 그 노래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 까?" 제레인트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들어보셨다면서 내용을 물으시는 겁니까?" "끝까지 듣지를 못했습니다." "아, 그래요? 예. 그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인 간뿐이다, 뭐 그런내용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드래곤 로드는 영원의 숲에 잠들게 되었고, 페어리퀸은 영원의 호수 아래 잠들게 되었다. 그리 고 핸드레이크는 나라를 만들었고, 할슈타일가문은 드래곤 라자의 가문 으로 영광을 계속 누리게 되었다. 그런 내용일 겁니다, 아마." "영원의 호수라. 레브네인 호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이거 정말 이상한 이야기이다. 카알도 입을 다물었고 샌슨도 말을 멈추 었다. 그러자 다시 침묵이 우리를 감싸게 되었다. 모두들 방금 들은 이 야기를 되짚어보고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이야기를생각해보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데미 공주의 이야기에서는 핸드레이크와 다레 니안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다레니안 혼자서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전사와도 맞아떨어진다. 핸드레이크는 정말 암살 이라도 계획해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몰렸으니까. 반면 제레인트의 이야기는 그 뒷부분이 상당히 맞아떨어진다. 실제로 영원의 숲이라는 이 숲도 있고, 할슈타일 가문의 이야기도 맞아떨어진 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바 이서스와 일스의 이야기가 이렇게 다른 거지? 방언이라는 그것처럼 이야 기도 300년쯤 지나버리면 많이 바뀌어버리는 것일까? 혹시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들도 일스에서는 이상하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난 너무도 이상한 이야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봐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난 캄캄한 허공을 향해 오크 의 얼굴을 흉내내어 보았다. 흠. 그거 재미있네. 난 계속해서 트롤의 얼 굴을 만들어보고 그 다음에 샌슨의 얼굴… 어, 그러니까 오우거의 얼굴 을 만들어보았다. "후치, 왜 그러죠?" 이루릴의 목소리였다. 윽. 벌써 왔나? 난 보이지도 않는 이루릴에게 머 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릴은 잠시 조용히 있더니 곧 캐스팅을 시작했 다. "자신의 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령, 그를 감추는 어둠은 오히려 그 의 먹이, 나와서 어둠을 삼켜요." 파아앗! 지독한 암흑 속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더니 윌 오 위스퍼의 빛 에 눈물이 찔끔할 지경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눈을 비비면서 고 개를 돌리고 있었다. 카알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세레니얼양, 불빛을 비춰도 괜찮습니까?" "예. 넥슨의 무리들과 우리들 사이에는 언덕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불 빛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휴우, 다행이군요." 윌 오 위스퍼의 파르스름한 빛은 마치 맥박치듯이, 아니 춤을 추듯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 빛에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충분히 볼 수 있 었다. 다만 파르스름한 빛이라 모두들 창백하게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지 만. 샌슨은 고개를 돌리다가 네리아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네리아는 소리없이 웃었다. 이루릴은 말했다. "그들은 정확히 우리 앞쪽에 있더군요. 약 30분쯤 걸어가면 되겠어요. 보초들이몇 명 서 있지만 그저 야외라서 불침번을 서는 정도입니다." "헤엣? 이루릴은 얼마 걸리지도 않아서 갔다 왔잖아요?" 네리아의 놀라는 목소리에 이루릴은 대답했다. "숲속이니까요." 아, 역시 엘프는 숲속에서 엄청난 속도를 내는구나. 그 때 카알이 말했 다. "그런데 불을 켜들고 접근하면 들키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접근할 수가 없을 텐데요. 이런 암흑속에서 30분 동안 정확히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루릴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가 혼자 잠입해볼까요?" "아니, 그건 위험합니다. 세레니얼양 혼자서라니, 말도 안됩니다." "하지만 저들도 인간이니 이런 암흑 속에서는 제가 훨씬 유리합니다. 저쪽 야영장의 불을 꺼버리고 침입하면 거의 잡힐 일이 없을 것 같습니 다만."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아니, 그렇진 않을 거에요. 카알 아저씨 말대로 저 사람들이 길드 사 람이라면 밤눈이 무시 못하게 좋을 텐데. 어림없어요." 샌슨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새벽녘이 어떻겠습니까? 초병들도 그 시간이면 가장 해이해집니다. 그 리고 새벽이면 우리들도 보다 접근하기 쉽지않을까요?" "일리있는 말이네만, 그렇다면 달아날 때가 문제 아닌가. 그들도 우리 들을 추적하기가 쉬울 텐데." "그들은 말이 없습니다." "아, 그렇군. 전속력으로 달려간다면 우리쪽이 유리하겠군."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일단 잠을 자두도록 하세나. 그리고 새벽녘이 되기 직전에 움직이기 시작하도록 하지. 저, 그런데 세레니얼양. 확실히 저쪽 에서는 경계하는 눈치가 없었습니까?" "예. 말씀드렸다시피 일상적인 경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우리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로군. 음. 좋네. 일단 자 도록 하세나. 아, 먼저 불을 피우지. 주위가 싸늘해서 이렇게 자다간 내 일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겠군." 그래서 우리는 먼저 모닥불을 피웠다. 싸늘한 어둠 속에 앉아있다가 모 닥불을 피우자 정말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모라이즈를 해야 되는 이루릴과 제레인트는 먼저 잠들었고 나머지 네 사람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먼저 네리아가 불침번을 서고 나머지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었다. 나 역 시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젠 정말 단단한 땅, 나뭇가지와 돌멩이 들이 등에 배기는 이런 땅에서 잠드는 것에도 익숙해져 버렸어. 음, 나 도 이만하면 경험 많은 모험자 아닌가? 난 머리 위까지 모포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이 컴컴한 숲 속에서 다시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난 머리를 내밀고 팔베개를 한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하늘이라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나뭇잎들 뿐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아래쪽 의 모닥불 때문에 밑둥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시 커멓게 변하는 나무들이었다. 간혹 나뭇잎들이 바알간 불빛에 물들어 춤 추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위쪽은 대부분 캄캄한 장막처럼 보였다. 그것은 나름대로 안온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껏 야외에서 잔 일이 허다 했지만 이 숲처럼 밀폐된 느낌의 장소에서 잠든 적은 없었다. 겨울로 넘 어가는 야외의 숲은 대부분 헐벗은 나무들뿐이었고 이토록 울창한 침엽 수림은 보지를 못했다. 위쪽은 마치 검고 단단한 천장 같았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붉어지는 주 위의 모습은 퍽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난 눈을 감빡거리다가 옆을 돌 아보았다. 네리아는 느긋한 자세로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는 간혹 나뭇가지를 부러 트려 넣거나 했다. 그녀의 얼굴엔 음영이 깊게 패어있었다. 모닥불의 일렁거림에 따라 그 녀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계속해서 표 정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표정이 없었다. "뭘 보니?" 네리아는 날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별로 적당한 표정이 없어서 그 냥 씩 웃은 다음 말했다. "범죄에 속할만큼 아름다운 나이트호크."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런데 왜 나 사랑하는 남자는 어디에도 없을까?" "에엣?" 네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끅끅 웃었다. 허어, 참. "시집가고 싶어요?" "아니. 거, 시집은 안가도 상관 없고. 그냥 나 좋다는 남자 있으면 좋 겠네."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응." "잘 관찰하지 않아서 그렇겠죠. 또 직업도 문제고." "응? 직업이 문제야? 어떻게?"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비상한 관심이 담긴 시선을 보내었다. 이 봐, 이봐! 아가씨! 지금 하는 질문이 사춘기를 간신히 통과하고 헉헉거 리고 있는 17세 소년에게 물어볼만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정말 큰 일이야! "숨어다니는 직업이잖아요." 네리아는 미간에 세로 주름을 넣으면서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나 담장 위로 날아다닌 적은 별로 없는데. 아, 물론 성실한 나이트호크로서 조심하긴 했지만… 음. 그거 때문인가?" "실례일진 모르겠는데, 사귀는 도적은 없어요?" 네리아는 목을 움츠려 어깨 속에 파묻으면서 말했다. "도둑놈들은 싫어." "아, 그러시군요." 네리아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음, 음. 후치야?" "예?" "너희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너희들 같으니?"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8. "예? 글쎄요. 아니, 잠깐. 나와 카알과 샌슨을 하나로 묶어서 너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무슨 공통점이 있나?" 네리아는 헤죽 웃으며 말했다. "설명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어." "그렇다면, 음, 이렇게 대답하지요. 난 우리 마을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나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비 슷하기 때문이겠죠?" "음. 옳지. 옳은 말이다." 네리아는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 생활 걷어치우고 너희 마을에나 정착할까?" "정착? 좋지요. 그런데 정착해서 뭐할 건데요?" "뭐하냐고? 글쎄. 음. 농사는 못짓고, 기술은 싸우는 기술하고 도둑질 하는 기술밖에 없는데. 히잉. 너도 알다시피 요리도 못해." "요리를 못하는 거였어요?" "응." "흐음. 의외로군요. 뭐, 상관은 없겠죠. 천천히 배우면 되니까. 나도 어머니 없는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구박받다 보니 늘어난 요리솜씨인데 요. 뭐." 갑자기 네리아의 눈에서 엄청난 빛이 번뜩였다. "너희 아버지 미남이시니?" 맙소사! 안돼! "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네리아는 환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다. 음, 정말 멋져." "예. 멋진 것은 알겠는데, 중요한 것은 그 멋지다는 감정에 내가 동참 하지 못하는 거에요." "남편은 초를 만들고, 아들은 요리를 만들고. 음, 완벽해. 난 할 일이 없겠네?" "이거 보세요오오." "괜찮아, 괜찮아. 널 보면 네 아버지도 짐작이 가. 음. 나이가 무슨 상 관이람." "예, 사랑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지만." "너희 아버지 혹시 사귀는 여자분 계시니? 아, 괜찮아. 우히히. 용모가 받쳐주니까 경쟁을 해도 자신 있어." 오,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여! 아, 참 오래간만입 니다. 그 동안 별 일 없으셨는지? 아니, 도대체 이 무슨 망발입니까! 도 대체 당신이 돌보시는 여자들은 전부들 왜 이 지경입니까? 예? 네리아는 순결한 소녀가 아니라고요? 이거 보세요. 신이시니까 그렇게 째째하게 굴지 맙시다. 내가 보기엔 네리아는 순결한 소녀, 아니 처녀인가? 어쨌 든 그렇단 말입니다. 레니처럼 시집도 안가겠다는 소녀만 순결한 소녀라 고 하신다면 그것도 참 곤란해요. 아악! 그러고보니 당신 근무태만이야! 당신은 레니를돌보지 않았어! 난 하늘에서 느닷없이 벼락이나 운석 등이 떨어진다 해도 피할 수 있도 록 주의깊게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뭘 할 건데요? 돈은 남편이 벌고 밥은 아들이 하면? 아마 빨래나 집안 청소도 모조리 아들 몫이 될 거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되는 데?" "집안에 어머니가 있음으로써 생기는 따사로움을 선사하지." "졌군요." 네리아는 턱을 들어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소리없이 웃었다. 난 자리에 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요, 자. 난 잠이 다 달아났어요. 네리아는 수면 부족인 것 같아. 잠 자리에서누워서 이런 캄캄한 암흑 속에 드러누워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 로 황당한 말을 듣는 한 순수한 소년의 가슴을 헤아려봐요." "그게 누군데?" "…누워요!" 네리아는 히죽거리며 모포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난 그녀가 기대어있던 나무로 다가가 기대어앉았다. 네리아는 모포 속으로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난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없겠지?" 난 잠시 침울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모포 속 에 얼굴을 묻은 채 내다보지 않았다. 난 역시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네리아는 네리아의 아이에겐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내 어머니가 될 생각은 하지 말아요." 잠시 후 다시 네리아의 잠꼬대 같은 말이 들려왔다. "하아… 모르겠어. 내가 과연 뭘까. 난 서툰 손재주를 가진 나이트호크 일 뿐이고, 이 날 이때까지 이룩한 것이 없어. 내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리고 네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난 왜 네리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대답을 못했을까. 앉아 있자니 조금 싸늘했다. 난 모포를 들고와 어깨 위로 둘러쓰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주위는 여전히 캄캄했다. 간혹 그 검은 장막 사이로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고 할까? 밤바람은 모닥불 주위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모닥불의 열기에 휘말려 위로 솟구쳐버리는 것 같았다. 낮은 가지들에 생기는 그림자는 묘한 모양이었다. 나무들에 생기는 기 기묘묘한 그림자들은 흡사 날 바라보는 얼굴이나 스쳐지나가는 동물의 모습처럼 보였다. 난 피식거리며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우드득, 뚝. 잠깐. 이상하다? 나뭇가지는 한 번 부러뜨렸는데 소리는 두 번 나네? 뚜둑. 난 슬그머니 다리를 뻗어 샌슨의 어깨를 차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말하지 말고 들어. 뭔가 다가오는 것 같아." 샌슨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롱소드를 당겨 쥐었다. 뚝. 뚜둑. 이젠 확실하다. 나는 오른쪽으로 달렸고 샌슨은 왼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황급 한 동작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두드려 깨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공격이 시작되었다. "채챙!" "습격이다!"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났다. 샌슨이 무언가의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는 소리, 그리고 내 고함소리다. 사람들은 속속 일어났지만, 저쪽에서도 속 속 들이닥쳤다. 나무들 사이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 했다. 두두두, 버석버석. 그 때였다. "으아아악!" 피가 얼어붙을 것 같다고 하나? 샌슨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질렀다. 놀 라버린 난 뒤를 돌아보았다. "어어어억!" 샌슨이 둘이다! 두 명의 샌슨이 서로 롱소드를 맞댄 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 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움에 떨면서 서로 물러났다. 얼어붙은 얼굴 까지도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때였다. 다른쪽에서 고함소 리가 들려왔다. "테페리여!" "맙소사, 저건 나잖아!" 제레인트? 고개를 돌려보았다. 서로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 들다가 상대 를 보고 놀라는 제레인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장 면이야? 그 때 하늘 위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뭐라고? 젠장, 우습지도 않아! 난 간신히 일자무식으로 바스타드를 들 어올려 위에서 내려지르는 트라이던트를 막아내었다. 상대는 나에게 막 힌 다음 뒤로 훌쩍 뛰다가 외쳤다. "으악! 후치? 너 여기서 뭐해?" 맙소사, 날 공격한 사람은 역시 네리아였다. 그리고 그 뒷쪽에서 또다 른 네리아가 외쳤다. "넌 뭐야?" 날 공격했던 네리아는 뒤를 돌아보고는 경악에 질려버렸다. 그건 저쪽 의 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꺄악!" "나잖아?" 내 뒤에서 카알이 달려나오며 외쳤다. "이건 도대체… 으억?" 난 앞을 보고 질려버렸다. 저쪽엔 내가 바스타드를 든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선 황급히 활을 내리는 카알의 모습이 보였다. 난 나의 모습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무슨! 그 때였다. 이쪽과 저쪽의 카알이 동시에 외쳤다. "도펠겡어(Doppelganger)?" 그들은 서로 상대의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을 바라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저 쪽의 후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무슨 말도 안되는 장면이야? 이봐, 너, 나야?" 저 자식이 도대체 누구에게 질문하는 거야?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자. "잠깐, 이렇게 결정하자고. 샌슨의 애인 이름은 뭐지?" "어? 너라면 대답했겠어?" "대답을 안했어… 저건 나잖아?" 저쪽의 샌슨은 저쪽의 후치를, 그리고 이쪽의 샌슨은 날 후려쳤다. "이 자식아!" 딱! 아이고 머리야. 음. 이 상태에서도 의리를 지켜 대답하지 않은 것 을 보니 저건 확실히 나다. 저쪽에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이루 릴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어느 쪽이 우리(?) 이루릴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쪽 이루릴이 말했다. "당신은 나인가요?" "이상하군요. 당신은 나로군요?" "그렇군요. 음. 놀라운 일이군요." "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맙소사. 이루릴들은 서로 예의바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 을 보자니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 카알들도 허둥거리며 말했다. "잠깐! 싸움을 멈추시오! 아무도 공격하지 마시오!" "그래요! 일단 이 사태를 설명해 보도록 하십시다!" 정말 똑같군. 카알들은 서로를 흘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닥불 주위에 원래 잠들어있던 자들은 내 옆으로 모이시오!" "그렇지! 멈추시오! 넥슨 일행을 기습하려던 사람들은 내 옆으로 모이 시오!" 저쪽과 이쪽의 카알은 그렇게 외치면서 다시 서로의 말에 기가 찬 표정 을 지었다. 뭐라고? 넥슨 일행을 기습하려고 했다고? 그럼 바로 우리잖 아? 잠시 후 우리는 대치 상태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젠장, 이 무슨 괴상망측한 일이야? 저쪽의 네리아는 우리를 보면서 얼빠진 얼굴이 되었 다가 다시 자기 일행을 바라보며 의혹에 찬 표정을 지었다. 샌슨들은 서 로를 노려보며 검을 사납게 들어올리고 있었고 이루릴들은 차분히 서로 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똑같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후치 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에, 일단, 후치라고 부르지. 네가 나라면 예절 차릴 필요는… 젠장! 머리가 아파." "얼씨구, 이봐. 누가 머리가 아프다는 거야? 말해두겠는데 네 녀석이 진짜라느니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기엔 난 나에 대한 자의식이 너무나 투 철하다고." "저 말버릇… 맙소사. 징그러울 정도로 닮았어. 이봐! 너 헬턴트 마을 의 뭐야?" "너 설마 나처럼 초장이 후보라고 대답할 생각은 아니겠지?" 우와, 우와! 이거 미치겠다. 아무리봐도 저건 나다. 똑같잖아? 네리아 는 의아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거봐. 무, 묻겠는데… 아니, 관둬." "어, 어? 너 설마 나와 똑같은 질문을 떠올린 거야?" "어머나!" "어머나!" 네리아들은 서로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무슨 질문들을 떠올린 거야? 저쪽의 일행은 저쪽의 네리아를, 그리고 우리 일행은 우리 네리아를 멀 뚱히 바라보았다. 우리쪽의 카알이 먼저 말했다. "아무리 봐도… 도펠겡어는 아닌 것 같소. 에, 헬턴트씨라고 불러야 되 나?" 저쪽의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적합하지 않을 듯하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에 대한 호칭으 로는 부적합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음. 그러나 시의적절한 호칭이 생각나지를 않는구려." 미치겠군! 저쪽의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이봐! 어, 너! 너 여기서 뭘하고 있었지?" 이쪽의 샌슨은 이를 박박 갈면서 말했다. "우린 넥슨에게 납치당한 레니를 구출하기 위해 여기서 대기중이었다. 넌 뭐냐?" "젠장. 우리는 레니를 구출하기 위해 뛰어든 거야!" 그러자 우리쪽 샌슨이 환호를 질렀다. "야하! 그래? 너 이 자식, 잘 걸렸다. 네가 가짜지?" "뭐야? 입조심하시지!" "네가 가짜가 아니라면 20명이나 되는 도적들에게 이렇게 무모하게 뛰 어들 리가 없어! 적어도 나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아!" "웃기네! 이루릴이 샌드맨을부르고 슬립으로 다 재우기로 했단 말이 다! 그리고 잠들지 않은 녀석들은 우리가 공격해서 끝내고!"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9. 그러자 이쪽의 이루릴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우리 이루릴은 저쪽 이루 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있군요. 하지만 그 방법을 시행하려면 넥슨의 무리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 될 텐데, 어떻게 밤눈이 좋지 않은 인간 일 행을 데리고 접근할 수 있었지요?" 그러자 저쪽의 이루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밤눈이 어둡기는 하지만 이쪽의 모닥불은 멀리서도 잘 보이던걸요." "아, 그렇습니까? 이해가 됩니다. 이 모닥불을 넥슨의 모닥불로 생각하 셨군요?" "네. 제레인트씨의 말에 의하면 이 숲에는 절대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사실 저희들도 그런 계획을 생각했지만 넥슨의 일행 이 너무 멀리 있어서 어둠 속에서 접근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시야가 좋아지는 새벽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이해했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이상한 대화다. 이루릴들은 서로를 향해 살폿 미소를 짓 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들은 서로 칼부림을 일으키고 싶은 기분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저쪽의 카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가는 말들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동일인이군요. 기이합니다. 우리는 일스 공국의 나우르첸에서 이곳까지 추격해오는 동안의 모든 기억이 완 전합니다. 아마 그쪽도 그럴 것 같은데?" "예상하시는대로요. 물론 그 이전의 모든 기억이 확실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현상을 설명할만한 이론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나라면?" "없습니다." "그렇군요." 제레인트는 나에게 바싹 다가서면서 말했다. "잠깐, 그렇다면 우리 서로를 해치는 일은 삼가하도록 하지요? 에, 우 리가 공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일단은 서로 무기를 치우고 대화해보 지요?" 저쪽의 제레인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저쪽의 카알을 바라보았다. 이 쪽과 저쪽은 서로 암묵적인 약속 하에 무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샌슨들 이 마지막으로 불평섞인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꽂아넣는 것까지 똑같았 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젠장! 저 후치놈, 보면 볼수 록 기분이 나쁘군. 눈, 코, 입 어디 한 군데 다를 것 없이 똑같이 생겼 잖아? 저쪽의 후치는팔짱을 끼면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칵! 네가 날 노려봐? 녀석아, 네가 날 의심하다니. 내가 진짜인데? 윽.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쪽의 후치 녀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듯하다. 이쪽의 카알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분명 도펠겡어는 아니군. 서로의 기억까지 똑같을 수는 없으니. 그렇 다면 이건 도대체 무엇이지?" "으아아악!" 네리아, 왜 이래요? 카알의 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난 네리아 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리아는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는 네리아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허, 허허…" 카알은 실성한 듯이 웃고 말았다. 뭐 별로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닥불의 가녀린 빛이 퍼지는 경계 저쪽에서 나타나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리 일행이었다. 세 명의 카알은 서로 심각하게 쳐다보았고 세 명의 샌슨은 서로에게 으 르릉거리고 있었다. 세 명의 이루릴은 두 명이나 되는 자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런 진귀한 상황에 퍽 기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실제로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 나에겐 꼭 그렇게 보였다. 세 명의 네리아는 서로를 못볼 것처럼 쳐다보면서 떨고 있었고 세 명의 제레인트는 서로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명의 나는… 퍽 재미가 없었다. 농담을 걸려고 해도 전부들 나이기 때문에 도대체 농담 이 통하지가 않는 것이다. 아니, 일단 농담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어느 카알인지는 모르지만 카알이 일단 말했다. "자, 설명은 천천히 하고, 일단 서로 섞이지 않도록 구분합시다. 마지 막에 여기로 걸어온 사람들은 내 옆으로 모이세요. 그리고 모두 오른쪽 소매를 걷어올려요." 음, 저카알은 마지막에 나타난 카알인가 보군. 그러자 다른 카알이 또 말했다. "모닥불 옆에서 자고 있던 일행들은 모두 왼쪽 소매를 걷읍시다. 하지 만…" 조용히 있던 카알이 그 말을 받았다. "나를 나와 구분하다니, 그것도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대화의 편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구료." 그래서 나는 일단 왼쪽 소매를 걷어붙였다.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광경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소매를 흘끔거리다가 곧 끼리끼리 모였다. 난 뒤죽박죽인 머리를 감싸며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카알 옆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무슨 마법에 걸린 듯하오. 이 숲이 우리에게 주는 마법일까 요?" "예. 그것 참. 음. 일단 서로의 기억을 비교해보십시다." "그러지요. 제가 먼저 물어볼까요?" 어떻게 카알들은 저리도 싹싹하게 이야기를 잘도 주고 받을까! 미치도 록 존경스럽군, 그래. 세 무리나 되는 우리들은 카알들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 카알이 말했다. "에, 그럼 묻겠소. 헬턴트 영지의 영주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야 나의 형님이신…" 한 카알이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어라? 저건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카알, 그러니까 우리 카알인데?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샌슨이 놀라서 물었다. "어, 이, 이봐요! 카알. 왜 그래요?" 우리 카알은 절망적인 얼굴이 되었다. "기억이 안나… 맙소사! 내가 형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당장 다른 무리들의 우리들이 우리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니, 젠 장! 나에게 날 의심받게 되다니!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인 샌슨이 씩씩거 리며 말했다. "하아! 이건 말도 안되지. 카알이 우리 영주님의 이름을 잊을 리가 있 나?" 우리 샌슨은 당장 욱하고 나서려 했다. 바로 그 때 내가 외쳤다. "잠깐! 너, 이봐, 후치! 젠장. 이게 무슨 노릇이람. 날 불러야 되다니. 어쨌든, 우리 아버지 이름이 뭐지?" 소매를 걷지 않았던 후치가 피식 웃었다. "자식아, 장난치냐?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는…" 소매를 걷지 않았던 후치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저 후치가 갑자 기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것은 통쾌하면서도 동시에 나까지 괴 로워지는 일이었다. 정말 지금 누군가 나에게 미쳐버리는 기분에 대해 질문한다면 난 아주 상세하게 대답해줄 수 있을 거 같다. 소매를 걷지 않은 후치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 이건 말도 안돼. 내가 우리 아버지 이름을 기억 못하다니 …" 그러자 소매를 걷지 않았던 제레인트가 오른쪽 소매를 걷은 제레인트에 게 질문했다. "저, 이보세요. 나 이거 참. 야! 너, 결국 나니까 기분 나쁠 거 없지? 말해봐. 우리 수도원에서 기르는 오리의 숫자는 모두 얼마지?" 참 대단한 질문이다. 오른쪽 소매를 걷은 제레인트는 턱을 치켜들면서 대답했다. "그야 12마리지." "틀렸어! 저번에 그 수련사… 가 아플 때 그 오리를 잡았어! 그걸 기억 못하는군? 그런데, 잠깐. 그 수련사가 누구더라?" 그러자 왼쪽 소매를 걷은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혹스였어. 그래. 혹스가 아팠지. 그런데 그 때 오리를 잡아먹였었나?" 왼쪽 소매를 걷은 샌슨이 외쳤다. "이런, 말도 안돼! 야! 너! 우리 경비대 대원 총수가 얼마야?" 지적을 받은 자는 소매를 걷지 않은 샌슨이었다. 그는 턱을 부들부들 떨더니 힘없이 말했다. "이 무슨 웃기는… 기억이 안나." "말도 안돼! 이 자식아! 경비대장이 대원 총수를 모른다고!" "제기랄, 기억이 안나! 이 자식아, 그럼 너도 말해봐라. 대원들 중에 은도금 롱소드를 가진 사람은 누구누구야?" "뭐야? 그거야 해리와 터너지!" 그러자 오른쪽 소매를 걷은 샌슨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 잠깐. 자렌과 터너 아니야?" 그러자 소매를 걷지 않은 샌슨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맙소사… 이 멍청한! 잠깐. 내가 날 욕하는군. 해리, 자렌, 터너 전부 다야!" 우리는 서로를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그 때 오른쪽 소매를 걷은 이루 릴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세 명의 자신들은 각자 상대가 가지지 못 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군요. 바꿔 말하자면 각자 자신의 얼마씩은 잃은 상태이군요." 뭐라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들은 말을 잃은 채 이루릴을 바 라보았다. 그 때 왼쪽 소매를 걷은 이루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세 개로 분리되어 있는 셈이군 요. 서로 상대가 가진 것은 가지지 못한 부분들이 된 셈이군요." "멈춰!" 어느 카알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알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다 른 카알들도 허옇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 내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역시 같은 사람이라 서로 잘 통하는군요." 오른쪽 소매를 걷은 네리아가 질린 얼굴로 오른쪽 소매를 걷은 카알에 게 말했다. "카알 아저씨, 뭐에요? 왜 그러죠?" 오른쪽 소매를 걷은 카알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서로에게 질문하지 마시오. 그럴수록 잊어버리게 됩니다. 난 방금까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었소. 그런데 여러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마다 내 기억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예?" "잠깐 기억을 되짚어보시오. 중요한 기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 소. 어쨌든 뭔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있을 거요." "맞소." 그 대답은 카알의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카알들은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세 무리의 우리들은 기절해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목소리 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네번째의 우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네번째의 무리들 역시 세 명이나 되는 자신들을 보며 커다란 충격을 받 았다. 네번째의 네리아는 그만 기절해버렸고 네번째의 샌슨은 눈을 심하 게 비볐다. 그러나 네번째의 이루릴은 역시 침착했다. 오른쪽 소매를 걷은 카알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은 소매 두 개를 모두 걷어야겠군. 우리들은 현재 그렇게 서로 를 구분하고 있소." "그래요? 알겠소. 세 명이나 되는 나에게서 명령을 받는 것이니, 따르 지 않을 수 없군. 허허." 네번째의 카알은 소매 두 개를 모두 걷어올리며 말했다. "세레니얼양이, 그러니까 이쪽의 세레니얼양이 당신들을 발견하고 우리 를 이끌어왔소. 난 처음에 도펠겡어인가 생각했지. 하지만 세 무리나 되 는 도펠겡어라니. 그리고 그 순간, 난 어이없게도 도펠겡어가 뭔지 모르 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나에게 묻겠으니, 도펠겡어가 뭐였지 요?" 왼쪽 소매를 걷은 카알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람을 죽이고 그 모습을 훔치는 몬스터요. 그리곤 그 사람 행세를 하 지." "아… 그랬군." 소매 두 개를 모두 걷어붙인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는 몸을 돌려서 자신의 무리, 그러니까 소매를 모두 걷어붙인 우리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젠장! 저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내가 영혼이라도 되어버 린 것 같잖아? "여보게들. 아무래도 우리 각자의 기억이 쪼개지면서 갈라진 우리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네. 결국 우리는 모두 진짜인 셈이지." "예? 뭐라고요? 잠간, 그럼 저기 있는 저것들이 모두 나란 말입니까?" 소매 두 개를 걷어붙인 샌슨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매 두 개를 걷어붙인 제레인트는 이루릴과 함께 네리아를 부축해 걸어왔다. "다 우리들이니, 좀 비켜주시오. 네리아양이 기절했거든." 우리들이 비켜주고 나자 네번째의 제레인트와 네번째의 이루릴은 네리 아를 불가에 눕혔다. 세 명의 네리아들은 기절한 네리아를 내려다보면서 측은한 표정 반, 공포에 질린 표정 반이 되었다. 소매 두 개를 걷어붙인 카알은 다른 카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다 나라는 말인데, 나한테 묻자니 참 기이하군요. 어쨌든 여러분 들은 서로 이야기를 했을 테니 뭔가 이유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내셨소?" "이유는 잘 모르겠소.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하는 순간 다른 우리들이 생겨난다는 것만을 알아내었을 뿐이오." "질문? 무슨 질문 말이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려는 순간 그렇게 되는 것 같소." 그러자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인 이루릴이 흠칫하면서 말했다. "바로…" 그러자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이루릴 역시 흠칫하면서 말했다. "자신에게…" 그리고 또다른 이루릴이 말을 이었다. "의심을…" 그리고 마지막 이루릴이 말을 맺었다. "가졌을 때." 파아앗!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0. 공간이 마구 일그러지면서 난 잠시 몸의 중량을 모두 잃었다. 시간은 멈추어있었으나 동시에 지독하게 빠르게 흘렀다. 마치 내가 태어나서 지 금까지 살아온 17년이 순식간에 다시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은 낮이었으며 동시에 밤이었고 주위는 허공이었으며 우주였다. 하 지만 주위엔 아무 것도 없었고 쓸모없는 것들이 무한하게 많이 쌓여 있 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의 시간을 흘러갔다. 그러나 아무 것도 움직 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였다. 난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인 후치였고,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후치를 쏘 아보던 소매를 걷지 않은 후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나서 세 명 이나 되는 나를 보던 후치였다. 나는 조금 전, 샌슨과 함께 걸어오면서 넥슨 패거리들을 습격할 계획을 짜내던 날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이나 되는 날 보며 놀라던 기 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카알에게 설명을 들으며 세 명이나 되는 날 바라보던 나였다. 그러나 난 하나였다. 모두들 하나였다. 카알도, 샌슨도, 이루릴도, 네리아도, 제레인트도. 그리고 나역시.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 다 기억나. 난 날 쳐다보았고, 그리고 난 나였고, 젠장! 말을 못 하겠어! 어쨌든 그게 전부 다 나였어!" 네리아 역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난… 기절했는데. 아냐, 난 기절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엉? 뭐 가 어떻게 된 거야?" 이루릴은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의 나로 합쳐졌군요." 카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우리는 다 원래대로 돌아왔소." 털썩. 옆을 돌아보니 땅에 주저앉은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당히 편안할 것이라 추측되는 자세로 땅에 주저앉은 채 넋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런… 젠장. 기억이 정리가 안되는데? 하하. 네 명의 제레인트의 기 억이 모두 다 나야. 이런, 도대체 앞뒤를 맞출 수가 없는데요." "모두들 그런 것 같소. 하긴, 모두들 자신이었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심했을 때 우리들이 분리되었다는 겁 니까?" "그런 것 같소." "그리고, 그리고 이루릴양이 그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원래대로 합쳐 진 것이고?" "그러하오. 고맙습니다, 세레니얼양." 카알은 이루릴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날 바라보았다. "후치." "예?" "확인하고 싶군요. 후치가 불침번이었죠. 혹시 자신을 의심했나요?" 그러자 모두들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날 의심하다니. "예? 아뇨. 말도 안되는…" 순간 나와 네리아는 서로 눈을 맞부딪혔다. 네리아는 질린 얼굴로 말했 다. "그거였어!" 우리는 모두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창백한 얼굴에 울 듯한 눈 이 되어 말했다. "그거였어. 나였어요. 나때문이었어요!" "네리아양?" "난, 난 내가 형편없다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것인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이 숲에 들어오기 전에, 그 때 말했던 것처럼, 난, 난 지금 당장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어디서 죽 어도, 그래도 아무도 모르는, 신경쓰지 않는… 으흐흑!" 샌슨은 눈을 끔뻑거리며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카알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곧 따뜻하게 웃으며 네리아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짚었다. "네리아양." 갑자기 네리아는 와락 카알에게 안겨들었다. "우와아아앙!" 카알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네리아의 등을 두드렸다. 네리아는 숨막 힐 듯이 울었고, 카알은 차분하게 말했다. "네리아양. 우리가 함께 있잖소. 그런데 그런 슬픈 생각이라니." "예. 어, 어헉, 흑. 그래요. 그래서, 그래서 여기까지 드, 들어왔어요, 꺽, 꺼억, 여러분들과,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사라져도 좋다고 그건 진 심이었어요! 끅, 으흑! 난, 도대체 무엇인지, 내가 무언지, 아무도 사랑 해주지 않고, 아무에게도 사랑 주지 않고, 않고… 어컥, 끅."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 둘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뒤통수를 긁적거리기 시작했고, 제레인트는 마치 기도하는 듯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양. 우리가 있어요. 우리는 네리아양을 사랑하오." "으흑, 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으아아아! 나, 난 여러분 들이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좋다구요! 그래서, 으헉, 헉. 그래서 난 더 비참했어요. 난, 난 싸구려 도둑이고, 요리도 못하고, 하는 일이 전 혀 없는, 흑, 으흐흑. 그래도 여러분들은, 날 따스하게 대해주었고, 새, 샌슨은, 그날 아침 날 그렇게도 친절하게, 친절하게… 크으억, 큭." "우리는 당신의 재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오. 네리아양." "그래서! 예, 컥, 여러분들은 필요에, 필요에 의해 사람을 고르지 않 았, 어헝! 어허허허! 컥! 비참하게, 사람을 비참하게도 필요하냐에 따 라… 으흐흑!" "네리아양." 카알은 조용히 네리아의 등을 쓸었고 네리아는 쉼없이 울었다. 네리아 는 그리고도 한참 동안 카알의 품에서 울다가 마침내 지쳐서 잠들었다. 이봐요. 그랑엘베르. 난 '내가 그랬잖아요.' 하는 식의 말투, 별로 좋 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내가 뭐랬어요? 네리아는 순결한 소녀, 아니, 처녀라고 그랬지요? 할 말 있으면 지금 당장 내 앞 에 나타나서 말해보라고? 난 지금 당장 신께서 현신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 혔지만 다행히 그랑엘베르께서는 현신하지 않았다. 휴우. 카알은 이루릴과 함께 네리아를 눕혔다. 모두들 너무 놀라서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카알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네리아양은 의외로 섬세하고 가냘픈 데가 있군 그래." 샌슨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잠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도 돌아보았 다. 몹시 울어서 네리아의 얼굴은 홀쭉해 보였고 머리카락은 마구 엉겨 있는 채 잠들어있었다. 샌슨은 말했다. "쩝. 하아, 그거. 말괄량이처럼 굴더니." 제레인트는 그 과격한 표현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깨를 으쓱 였다. 하지만 난 기억한다. 그날, 바이서스 임펠의 도둑 길드에서 네리아와 함께 갇혔을 때. 그녀가 그 어둠 속에서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 었던 것을. 왜 그걸 지금껏 잊었던 것일까. 카알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잘 알겠지만, 이 일은 오늘 밤으로 잊어버리십시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네리아양은 그대로 네리아양인 것이오. 지금까지처럼 대합시 다. 그녀가 이 사건으로 특별히 더 상처입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소." "예.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제레인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런데 이루릴을 바라보자 이루릴의 얼굴은 수심에 가득찬 얼굴이었 다. "이루릴?" "아, 네?" "아, 별 건 아니고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아까 이루릴은 전혀 놀라거 나 하지 않던데요?" "네? 저도 놀랐답니다." "아, 뭐 놀란다기보다는 무섭다거나 화가 나는, 그런 기분 없었어요?" "네? 왜 무서워하거나 화를 내는… 아, 이해하겠어요. 여러분들은 모두 다르지요." 카알이 끼어들었다. "여보게, 네드발군.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 아니신가." 그리고 이루릴도 대답했다. "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를 만날 일이 절대로 없으시겠군요. 저희들은 모두가 조화롭기 때문에 놀랄 만큼,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경우라면 놀랄만큼 의견이 일치되거나 하는, 그런 존재감의 위협이라는 것을 느낄 일이 없지요." 존재감의 위협이라. 어렵군. "음.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서로가 다르다는 데서 존재감을 느낀다는 말이죠?" "예. 개성이라고 하던가요? 정확하게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 네. 그렇군요.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 가지 더 물을 게 있는데." "그게 뭐지요?" "왜 그렇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조용 히 말했다. "아… 전 넥슨의 일행이 걱정됩니다." "어엇!" 카알은 비명같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루릴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여기 계세요. 아무래도 가보고 와야겠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의심할지 않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숲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안 이상 가봐야겠습니다." 카알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예. 큰일이군요." "뭐가 큰일인데요? 뭐, 기분이 좀 나쁘긴 하겠지만…" 샌슨은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러자 카알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여보게! 아까 퍼시발군 자네는 상대쪽 퍼시발군을 죽이고 싶지 않던 가?" 샌슨은 입을 딱 벌리고 카알을 바라보았다. "예?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닌… 그렇군요. 예. 사실 그랬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네." "카알도요? 아니 아까는 전혀 그런 모습이…" "스스로의 언동은 조절할 수 있네! 퍼시발군! 하지만 나 역시 맹렬한 살의를 느꼈다네. 그렇지 않다면 그게 사람인가?" 살의. 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를 죽이고 싶어하는 느낌? 솔직히 부인할 수가 없다. 나와 똑같이 생긴 모습, 죽이도록 싫었다. 내가 사라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 OPG를 가졌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OPG를 가진 자는 오우거를 피 해다녀야 된다. 젠장. 서로의 존재감을 위협하게 되니까! 서로의 자아를 위협하니까! 이제 알겠다. 이루릴이 말한 존재감의 위협이라는 말이 무 엇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샌슨도 곧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맞았어. 난 또다른 날 보면서 지독하게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녀석들을 다 없애버리고 싶었어. 그런데도 우리가 맹렬한 싸움부터 벌이지 않은 이유는, 그렇지. 다행히 도 우리들 중엔 이루릴과 카알이 있어 그야말로 침착하게 대응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넥슨 일행에게도 그런 인물이 있을까? 이루릴은 곧 몸을 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이루릴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남아있는 우리들은 모두 서로의 불안한 얼굴이 보기 싫어 제각기 하늘 을 보거나 모닥불을 바라보거나 했다. 젠장. 20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만일 우리들과 똑같은 일이 생긴다면 80명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라면 무서운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라면 레 니는 어떻게 될까. 이런 빌어먹을! 제레인트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했다. "횃불을 들고 가십시다. 만일 아무 일이 없다면 도망오면 됩니다. 하지 만 무슨 일이 있다면 레니양을 구출해야 됩니다. 거친 전사들이 그토록 싸우는 과정에서 레니양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일 도망치게 된다면 레니양을 구출하기는 더욱 어 려워질 겁니다. 지금은 우리의 추적이 들키지 않아서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 우리의 추적이 들켰을 때는 저들의 경계가 훨씬 심해질 것입니다." 카알의 신중한 대답에 제레인트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카알 은 갑자기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잠깐. 혹시 테페리의 지팡이로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레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저에게 확신이 없군요. 테페리께서 답을 주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전 가고 싶습니다만,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그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테페리께서는 아무 언질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으음. 그럼 불안하지만, 세레니얼양이 돌아올 때까지 기 다려봅시다. 하지만 준비는 해야겠지요. 여보게, 퍼시발군, 네드발군." "알겠어요. 곧장 출발할 수 있도록?" "음." 샌슨과 나는 모포를 말고 짐을 챙겼다. 말들 역시 잠들어 있는 것을 깨 워 안장을 얹었다. 말들은 모두 푸르릉거리며 항의했지만 지금 말들의 항의를 들으줄 여유가 없다. 말들을 달래가면서 짐을 다 챙기고 출발 준 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이루릴이 나타났다. "모두들 일어나세요.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루릴은 나타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이 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의 표정은, 뭐랄까, 마치 곧장 울음이라도 터 뜨릴 듯한 표정과 공포에 질린 표정을 적당히 반반씩 섞어둔 듯한 표정 이었다. 희미한 표정이긴 했지만 항상 익숙하던 이루릴의 얼굴은 아니었 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네리아를 깨운 다음 말에 올랐다. 네리아는 눈 을 비비며 말했다. "음? 뭐지? 밤인데…" 샌슨이 당장 대답했다. "넥슨쪽이 심상치 않아. 어서 가봐야겠어." 네리아는 동그란 눈이 되더니 곧 말 위에 올랐다. 모두들 말 위에 올라 타자 이루릴은 샌슨과 나에게 검을 뽑아들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빠르 게 캐스팅했다. "라이트!" 두 번에 걸쳐 라이트 주문이 외워졌고 곧 샌슨의 롱소드와 나의 바스타 드는 눈부신 빛을 뿜어내었다. 검에서 나오는 빛에 숲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루릴과 네리아가 탄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앞장을 서 고 그 다음에 나와 샌슨이 검을 뽑아든 채 섰다. 그리고 카알과 제레인 트가 뒤를 따랐다. 우리들이 달려감에 따라 검에서 뿜어나오는 청백의 빛은 주위의 숲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무서운 숲 사이로 달려 가는 우리 일행은 사람의 일행 같지가 않았다. 선두엔 빛나는 검을 곤두 세운 두 명의 기사. 그리고 그 앞뒤론 공포스러운 얼굴을 한 남자와 여 자. 마치 망령의 질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무 말 없이 그 어두운 숲을 가능한 한 빠르게 달려갔다. 두두두두두. 그렇게 소리없이 얼마를 달렸을까. 멀리서 미약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신음소리라 니? 우리는 더욱 속력을 높였다. 그리고 갑자기 눈 앞이 팍 밝아지며우 리는 숲속의 공터에 들어서게 되었다. "우우윽!" 앞에 있던 네리아가 신음을 뱉었다. 우리들은 지독한 참극의 현장 바로 옆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들을 죽여버린 현장이었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1. 현기증이 돌 지경이다. 모닥불은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져 있었지만 주위 의 많은 것들이 불타고 있어서 공터는 환했다. 그 중 몇 개의 불은 끔찍 하게도 사람을 장작으로 삼아 불타고 있었다. 넓은 공터 가득 뿌려진 피 에서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와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은 똑같이 생긴 수십 구의 시 체였다. 그것은 마치 수십 쌍의 쌍동이들이 싸움을 벌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똑같이 생긴 자들이 서로의 가슴을 찌른 채 죽어 쓰러져 있었다. 똑같이 생긴 자들이 이곳과 저곳에 누워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지독한 짓들을 자기 자신에게는 저질러버린 모양이다. 많은 시체 들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래. 눈 뜨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세상에서 가 장 무섭고도 증오스러운 적의 모습을. 하지만 이건 뭐란 말이냐. 어떤 자는 쓰러진 상대의 얼굴을 난도질하다가 등에 칼을 맞은 모양인지 쓰러 진 자의 엉망이 된 얼굴에 키스하는 듯이 쓰러져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 들이 똑같았다. 네리아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곧 뒤로 돌아 달려갔다. "우웨에에엑!" 이런, 너무 잘 들려! 나도 토할 것 같잖아! 난 간신히 속을 억누르면서 말에서 내렸다. 샌슨은 이미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쓰러진 자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난 샌슨이 시체를 뒤지는 줄 알았다.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 순간, 샌 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있어!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샌슨이 가리키는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곧 기도를 올렸다. 땀을 뻘뻘 흘리던 그는 말했다. "이런… 수면이 부족해서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군요… 그리고 너무 위 중합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주세요. 제발." 나와 카알도 그 옆으로 다가갔다. 과연 시체들 사이에서 아직도 숨을 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가망이 없어보이는 모습이었 다. 그는 심장을 맞은 모양인지 아직도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레인트의 빛나는 손이 그의 가슴에 닿자 그는 펄쩍 튀어올랐다. 놀라 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보니 그는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었다. 제레인트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말했다. "그는 이 이상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샌슨은 곧장 고함을 질렀다. "이봐! 레니, 레니는 어떻게 되었어! 붉은 머리 소녀 말이야!" "커허헉!" 남자는 한 차례 무서운 기침을 하더니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 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눈의 촛점이 전혀 맞지가 않았다. 남자는 가 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펠…겡어가… 흐으윽." "멍청아! 그건 도펠겡어가 아니야! 너희들 자신이었다고! 붉은 머리 소 녀, 붉은 머리 소녀는 어떻게 되었어?" 샌슨이 바락바락 고함을 질렀지만 남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 었다. 그는 계속해서 신음을 흘렸다. 샌슨이 입술을 깨무는 순간, 남자 는 갑자기 팔을 확 뻗더니 샌슨의 멱살을 붙잡았다. 남자는 상체를 들어올리더니 피를 토하면서 외쳤다. "도, 도펠겡어! 나, 나가. 이 숲을 나가! 이 숲은 죽음의…" 남자가 토한 피가 샌슨의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남자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는 쓰러져버렸다. 제레인트는 손을 거두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제기랄!" 샌슨은 주먹으로 땅을 후려쳤다. 그는 다시 재빨리 일어서더니 시체들 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알은 크게 숨을 쉬면서 호흡을 고르더니 말했다. "흩어져 찾아보세. 무슨 흔적이 남아있는지." 그리고 카알은 걸어가버렸다. 이루릴도 조용히 움직였다. 하지만 난 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을 죽여버린 이 거대한 시체의 무 리에서 흔적을 찾아보라니. 제기랄! 샌슨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펠겡어 좋아하시네. 멍청한 녀석들! 죽고나서도 원래 모습 그대로인 도펠겡어라니. 그걸 보면서도 끝까지 서로를 죽였단 말이야! 아니, 자기 를 죽였단 말이야!" "퍼시발군. 조용히 못하겠나?" 카알이 낮은 목소리였지만 윽박지르는 의미가 분명하게 말했다. 샌슨은 이를 갈아대었지만 어쨌든 입은 다물었다.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와질대 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제기랄 녀석들, 전부 자기 자신을 가장 삼하게 공격했…" "퍼시발군!" 돌아버릴 것 같다. 코로 들락거리는 공기 중의 절반은 피인 것 같다. 입안에서까지 피맛이 느껴진다. 심할 정도로 숨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 간다. 레니는? 항구의 소녀는? 물컹. 발에 무엇이 밟힌다. 난 어느 남자의 손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손 위 쪽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난 고개를 들었다. 끔찍스러울 정도의 불기운은 밤의 숲을 검붉게 물들 이고 있었다. 고개를 더 들어올렸다. 날 내리누르고 있는 나뭇잎과 가지 들마저도 붉다. "으아… 으아아… 으아아!" "네드발군?" 머릿속이 웅웅거린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하늘마저도 빙빙 도 는 것 같다.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넥슨의 시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저히 난자당해 있더군요." "모두 세 구였지?" "예. 다른 남자들은 최대 다섯 구까지 똑같은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최소 다섯 번 분열되었다는 말인 것 같군 요." 카알은 눈을 비비며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음. 그렇다면 최소한 두 명의 넥슨은 남아있다는 말이로군." "그런데 기이한 점은 마부의, 예, 그 마부 기억하시죠? 넥슨의 충복 말 입니다. 그 녀석의 시체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레니의 시 체도 없었습니다." 카알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해가 떠올랐다. 숲에는 어제처럼 광선들의 기둥이 곳곳에 서 있었 다. 아침녘의 낮은 태양 때문에햇살의 기둥은 비스듬히 허공을 가로지 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숲 가운데 공터에는 우리가 어젯밤 내 도록 모아들인 시체 더미가 있었다. 제레인트는 그 옆에 서서 무언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릴은 제레인트의 옆에서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제레인트 는 기도를 끝내었고, 그러자 이루릴은 캐스팅에 들어갔다. "파멸을 통해 영생을 구가하는, 파괴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힘이 여. 이들의 불운한 몸을 받아들여 그대의 존재 속으로 함께 하라." 부아아악! 마치 지푸라기와 불쏘시개 사이에 있던 불씨가 바람을 만난 것처럼 시체 더미는 갑자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불기운에 놀라 황급히 물러났고 이루릴은 천천히 물러났다. 매캐한 연기와 살타는 냄새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카알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 연기는 주위 어디서든 보이겠군. 할 수 없지. 그래도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샌슨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레니도 없고, 그 마부도 없었으니, 그들은 아마 분리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네, 퍼시발군. 우리도 어제 경험했지만,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면 일행 전체가 그런 현상을 겪게 되지 않았던가?" 카알은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네리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어젯밤 내도록 실성한 것처럼 울고 구토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지금은 실신한 상태였다. 난 그녀의 볼에 달라붙은 머릿카락을 걷어내며 말했다. "예. 그리고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그 이유를 알아차리면, 우리는 이 루릴이었지요? 예. 그러니까 원상태로 돌아갔어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다면어떻게 생각해보아야 할까. 레니와 그 마부 역시 분 리되었지만,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이유를 알아차렸고, 그래서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럴 듯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멈추게 되었던 것이군요."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씁쓸한 얼굴로 손에 낀 OPG를 내려다보았 다. 넥슨의 시체에서 회수한 것이다. 넥슨의 시체는 모두 세 구였고 그 중 두 구의 손에서는 장갑이 벗겨져 있었지만 나머지 한 구에는 남아 있 었다. 그 한 구의 시체는 공터 가장자리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등에 화 살을 맞은 채 쓰러져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손에 OPG가 그대로 남아있었 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저히 낄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난 OPG를 낀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두 명의 넥슨에게서는 OPG가 벗겨져 있었어요. 무슨 의미일까요?" 그 때 이쪽으로 걸어오던 이루릴이 말했다. "생존자들이 가져갔을 테지요. 아마 세 명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별로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 없 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언제와도 같은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우리 옆의 바위에 앉으며 말했다. "전투가 거의 종결되던 시점에서 누군가 사태를 파악했을 듯합니다. 어 쩌면 샌슨의 말대로 죽어도 모습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는 도펠겡어가 아니라 그들 자신인 것을 깨달았을 수도 있지요." "일리있는 말씀이군요." "네. 그렇게 사태를 파악함에 따라 더 이상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아마 다시 하나가 되었을 테지요. 하지만 이미 죽 은 자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고. 우리가 올 때까지 살아있었던 남자를 기 억하십니까? 그 남자는 하나였습니다." 카알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릴은 차분하게 말했다. "아마 그 상황에서 생존자가 넥슨 이외에 세 명 더 있었던 것 아닐까 요? 전 레니양의 시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먼저 레니양이 살아있을 것 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그 마부의 시체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 서 두 명. 그런데 OPG는 두 개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포로인 레니양에게 OPG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 마부와 또 한 명의 누군가에게 OPG가 건네어 졌을 듯합니다. 넥슨은 원래 가지고 있었을 테고." "예. 하지만 생존자가 더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OPG 하나를 남겨두었을까요?" "그 마지막 시체는 으슥한 곳에 있었습니다." "음… 찾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아마도 이 진저리 쳐지는 광경에서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었 던 것일 수도 있지요. 차분히 뒷정리를 할 기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요." 카알과 이루릴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 듯하다. 그냥 차분히 이야기만 나누면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것 같다. 아니, 결과야 어쨌든 일단 마음이 그럴 수 없 이 차분해지는걸. 샌슨은 코를 벌름거리다가 말했다. "음. 어쨌든 이들은 꽤 많은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쪽에 승 산이 있습니다. 빨리 그들을 추격하여 레니양을 구출하는 것이 어떨까 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옳은 말이네. 그런데 난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하나의 의문이 있다 네." "예? 그게 뭔데요?" "넥슨은 왜 갈색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 영원의 숲으로 들어온 것일까?" "약간 동물적이지만 그래서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붙잡아서 두들 겨놓고 물어보지요?" "허헛. 참. 알겠네. 퍼시발군." 우리는 시체 더미에서 수거한 무기들을 한 곳에 쌓아두었다. 모두들 자 신의 무기가 있어 무기는 별로 챙기지 않았고 돈과 식량 등을 좀 챙겼 다. 기운없이 일어난 네리아는 대거와 나이프 몇 자루를 가졌다. 그녀는 단검들을 들여다 보며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들 길드원 맞아요. 아는 얼굴들이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예. 이 대거들도 기억이 나네요. 후우. 이 먼 땅까지 와서 밤의 신사 들이 떼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 네리아는 갑자기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넥슨이라는 녀석. 죽이고 싶어요!" 별로 대답할 말은 없었다. 네리아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우 울하게 말에 올랐다. "이루릴. 내가 뒤에 탈께요. 말 달릴 힘이 없어요." "알았어요." 그래서 이루릴이 고삐를 잡고 네리아가 뒤에 탔다. 우리들 모두 말에 오른 다음 아직껏 불타오르고 있는 시체더미를 뒤로 하고 천천히 흩어져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쪽이군요." 이루릴은 부러진 나뭇가지와 칼로 베어버린 듯한 관목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 쪽 방향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이루릴은 가끔 멈춰서서 말에서 몸을 옆으로 늘어뜨려 땅을 바라보았 다. 참 멋진 재주다. 이루릴은 상체를 거의 전부 내밀다시피 한 채로 땅 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 작은 발자국은 확실히 레니일 듯하군요. 말에 타지 않았나봐요." "발로 달려갔다는 말이군요." "예. 그리고 서로 다른 몇 개의 발자국이 보이는군요. 레니는 몇 명의 남자들에게 끌려간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음. 우리가 시체를 수거하느라 걸린 시간이 있지만, 그래도 저쪽이 발 로 걸어가고 있다면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겠군요. 모두들 힘들겠지만 기운냅시다." 모두들 앞으로 달려갔다. 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숲의 나무들 위로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여. 자기 자신에게 죽임 당한 자들 의 복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복이나 빌어주지요. 슬픈 죽음에 대해.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2. 추적하는 동안 내내 제레인트는 나로 하여금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제레인트는 한참 동안이나 '난 지금 대단한 생각을 하고 있다.' 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마침내 말했다. "생각난 것이 있는데요." 카알은 계속 말을 걷게 하면서 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예. 저, 분리되는 것 말입니다. 어제 우리에게 일어났고 저 불쌍한 사 람들에게 일어났던 것이요." "예. 그런데요?" "에, 그러니까, 아, 분명히 기억들이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니까여러 개로 분리되면서 각자 자신의 기억들의 일부만을 가지게 되었었지요?" "그랬습니다." 제레인트는 말을 걷게 하면서 말하는 것이 힘들어보였다. 그는 앞을 주 의깊게 바라보느라 카알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다면 넥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슨 말씀인지?" "그, 왜, 세 명의 넥슨은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남은 넥슨은 그 세 명의 넥슨에 해당하는 기억은 영원히 잃게 된 것일까요?" 카알은 눈을 흠칫 치켜떴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일리있는 말씀이오. 최소 다섯 번 분리되었을 테니, 그가 생존해 있다면, 어쩌면 그는 자신의 생의 3/5의 기억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겠군 요." "예. 그런 상태에서 그가 과연 정상인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용감하게 외쳤다. "음. 아무래도 빨리 추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슴을 노리는 레인저 처럼! 꾀꼬리를 노리는 매처럼!"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참, 참. 저 사람은. 하핫. 오후의 햇살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꼿꼿하게 곤두선 빛살이었다. 우리는 그 빛살들 사이로 달려갔다. 이루릴은 완전한 확신을 가진 모양 이다. 그녀는 두 번 돌아볼 필요도 없이 곧장 달려갔다. "이 방향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이루릴은 거의 날아갈 듯 달려갔다. 그녀의 뒤에 앉은 네리아가 숨을 몰아쉬는 것이 보였다. 샌슨과 나 역시 씩씩거리며 달려갔지만 사 슴을 노리는 레인저처럼 달려가는 제레인트야말로 정말 장관이었다. 그 의 펑퍼짐한 로브를 펄럭거리며 극명한 명암 사이로 달려가는 모습은 감 동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그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대해서는 생각 지 말기로 한다면. "이, 이런. 난 모험이 시작부터, 어, 어려운 거야. 세이크리드 랜드로 시작하더니, 영원의 숲이고, 기마는 숲에서부터 시작해." 그의 불평도 일리는 있었다. 숲을 달린다는 것은 지독하게 힘든 일이었 다. 특히 제미니는 꽤나 고생하게 되었는데, OPG를 되찾은 내가 다시 힘 에 익숙해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삐를 잡아당겨 대었기 때문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거대한 장애물이었고 땅의 기복도 고르지 않았다. 말들은 콧김소리를 거칠게 내면서 달려갔다.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날씬 한 아가씨 두 명 정도는 별로 부담이 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니, 엘프 가 타서 그런가? 저 흑마는 다른 말들을 인도하면서도 오히려 여유가 있 어보였다. 휙휙 지나치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번쩍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햇살 들 사이로 달려간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고 가슴을 떠밀어버리는 바람은 살갗을 죄어들게 만든다. 그런 굉장 한 속도로 한참 동안 달려갔을 때였다. 콰콰콰콰콰. 굉장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도 전해졌다. 마치 하늘 이 땅을 북으로 삼아 최악의 불협화음을 연습하는 듯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루릴은 멈추어섰다. 그리고 그 뒤로 나머지 네 명이 차례대로 멈추어섰다. 우리들은 숲의 끝부분, 높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눈 앞 멀리 멀리까지 펼쳐진 숲의 윗부분이 보여 땅은 푸른 융단을 깔아둔 것 같았 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흐르는 강의 모습이 보였다. 절벽 위로 부는 바람이 포효했다. 쏴아아아아! 일종의 계곡이었다. 아래에서는 그제의 비 때문에 불어난 것인지 거세 게 흐르는 강물의 모습이 보였다. 음? 이상하군. 그제의 비가 아직까지 도? 아, 아니다. 이런 엄청난 숲이라면 굉장한 양의 물을 품고 있었겠 지. 아니면 원래 세차게 흐르는 강일까? 강 또한 웅장한 소리를 퍼뜨리 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숲의 전경도, 세차게 흐르는 강의 모습도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바로 왼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왼쪽은 우리들이 서 있는 절벽보다 훨씬 높은 절벽이었다. 그 절 벽은 왼쪽에서 저 앞쪽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넓은 절벽 중간에 난 동굴에서 폭포가 시작되고 있었다. 폭포는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너무도넓은 절벽 때문에 폭포의 크기가 작아보였다. 마치 거대한 성벽의 배수로에서 가냘프게 흘러내리는 빗물 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폭포였다. 폭은 적게 잡아도 수십 큐빗, 높이는 수백 큐빗은 되어보였다. 저 아래 까마득한 연못으로 떨어져내리는 물은 대지를 두드려부술 것 같았다. 아 래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때문에 우리 발 아래는 완전히 농무 에 휩싸여 있었고 그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연못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 고 그 연못에서 강이 시작되어 흐르고 있었다. 동굴은 자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입구는 분명 사람의 손이 더해졌 던 모양이다. 양쪽으로 서 있는 거대한 돌기둥과 입구 윗쪽으로 대들보 처럼 쌓여져 있는 석재들은 분명 사람의 손이 더해졌던 것이리라. 하지 만 저런 가파른 절벽에서 어떻게 공사를 했던 것일까. 게다가 저런 폭포 가 쏟아지는 곳에서.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 "예? 뭐라고요?" "…!" 분명히 카알은 아까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른 모양이다. 하지만 폭포 소리 때문에 카알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루릴은 카알을 바라보 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이루릴의 캐스트하는 소리 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갑자기 폭포 소리가 확 줄어들 었다. 그리고 그 때 카알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고함을 질렀다. "폭포가 참 크다고오옷!" 고함을 지른 카알은 자기 목소리에 놀라서 흠칫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깔깔거리기 시작했고 이 루릴은 싱긋 웃더니 말했다. "실프의 도움으로 소리를 좀 줄였습니다." 카알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말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야하지요?" 이루릴은 잠시 양옆을 바라보더니 곧 폭포의 옆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 리켰다. "이쪽이군요. 저기 돌이 구른 것이 보이시죠? 원래의 위치에서 빠져나 와 아래에 흙이 묻어있는."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면서 아느 척을 해야 하니 죽겠군. 어느 돌멩이 말이지?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도 아마 틀림없이 어느 돌 멩이인지 모르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이루릴의 손가락과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카알은 말했다. "예. 그럼 위로 올라가십시다." 그러자 이루릴은 실프를 돌려보내었고 곧 가만히 서 있어도몸이 울리 는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귀가 이상해질 것 같아. 절벽 옆의 길은 꽤 가파르고 돌멩이가 많아서 말들이 걸어올라가기 힘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에서 내려 말들을 끌고 올라갔다. 간혹 돌멩이 가 구르고 말들이 발을 헛짚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폭포 쪽으로 굴러떨어진 돌멩이는 그대로 짙은 안개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만일 내가 저기 떨어진다면? 아래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 같았다. 말들을 끌어당기듯이 하면서 간신히 정상까지 올라가자 우리는 기진맥 진하고 말았다. 하지만 난 OPG를 되찾았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멍청한 제미니 녀석은 아예 나만 믿겠다는 듯이 거의 자기 힘을 쓰지 않 았다. 고약한 말 녀석! 욕설, 비명, 기합소리, 어쨌든 벼라별 소리를 다 질렀지만 폭포 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별별 말을 다했던 모양이고 말들도 제각기 취향대로 푸르릉거렸을 듯하다. 아무 소리도 들 을 수 없었지만. 폭포 위쪽의 절벽 위로 올라가게 되자 우리는 모두 땅바닥에 주저앉았 다. "허억, 허억." 샌슨의 거친 호흡소리가 제대로 들려왔다. 후우, 여기 위로 올라오니까 폭포 소리가 좀 줄어드는군. 말들도 모조리 땀에 범벅이 되어 몸에서 김 을 올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역시 몸이 가벼운지라 별로 피곤한 표정도 아니었고 이루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그대로 땅에 드러 누워버렸다. "헤엑, 헥! 하늘 색깔이 원래 저러했던가?" "간혹 그렇게 바뀌기도 한대요." "응, 그래? 후욱, 후우우. 어느 때?" "주로 죽을 때가 가까울 때 그렇대요." "안돼! 허억! 아직 키스도 못해봤는데." "…당신 프리스트 맞아요?" "프리스트는 입술이 없냐?" 그러자 네리아는 웃으면서 쓰러져 누운 제레인트의 위로 허리를 굽히고 는 '내 눈엔 대단한 의미가 담겨져 있지요?' 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 다. 제레인트는 헛바람을 삼키며 얼굴을 급격히 감쌌고 그래서 사레가 들려 고생했다. 제레인트를 그런 지경에 빠트린 네리아는 킥킥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봐!" "안 봐! 고개 돌릴 힘도 없어!" 샌슨은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절벽 위의 넓은 평지였고 저 끝쪽의 산봉우리와 맞닿은 곳에는 건물의 폐허가 서 있었다. 무너진 담장과 잔해 사이로 힘 겹게 서있는 기둥 등이 보였다. 그리고 몇 개의 방은 아직도 제대로 남 아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위로는 덩굴풀들이 잔뜩 덮여있었다. 비록 무너져 볼품 없었지만 그 남아있는 잔재만 보아도 원래는 엄청나 게 거대한 건물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땅바닥엔 건물의 기 초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리저리 꺽인 직선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직 선은 우리들이 주저앉아 있는 곳 근처까지 뻗어있었다. 그 말은, 원래 절벽 바로 위에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이 서 있었다는 말이로군? 카알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원래는 얼마나 큰 건물이지?" "굉장했겠는데요? 왠만한 성곽과 맞먹었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성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뒷쪽은 절벽으로 막혔으니 성곽으로 괜찮긴… 잠깐. 하지만 이런 숲속에 뭐하러 성을 짓지요?" "성을 지을 필요가 없는 곳이잖아. 마을도 없고 도로도 없고. 이런 끝 도 없는 숲에… 아!" 카알은 갑자기 제레인트를 돌아보았다. "침버씨. 이곳이 원래는 숲이 아니었다고 하셨지요?" "예? 아, 300년전에는 그렇습니다." 그러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는 300년전 할슈타일 가문의 성일 가능성이 높군." "아, 그렇군요." 우리는 갑자기 장엄한 기분에 휩싸여버렸다. 갑자기 저 루트에리노 대 왕과 핸드레이크가 질풍처럼 말을 달리며 꿈을 노래하던 시절로 돌아가 버린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바로 300년전 할슈타일공이 있었던 곳이구 나. 그리고 아마도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패퇴당한 드래곤 로드를 이곳으 로 데리고 왔겠지. 그 때는 이곳이 숲이 아니었을 것이며, 크게 상처입 은 드래곤 로드는 힘겹게 이곳, 천애의 성곽으로 옮겨졌겠지. 마법의 가 을을 넘기고 그 해의 첫눈이 내려 루트에리노 대왕은 끝내 이곳까지 추 적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나 300년이 지나고, 비록 쫓는 대상은 다르 지만 우리는 마침내 이곳까지 도달했군. 우리는 잠시 그 무너진 성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이 곳에서 지독한 고통과 무한한 복수심을 다스렸겠지. 하늘에서는 아마도 눈이 내리고 있었겠지. 그는 저 남쪽을 노려보며 불타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겠지. 이 끝없는 폭포의 윗쪽에서. 카알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자, 일어나세나. 레니양을 찾아야지. 세레니얼양?"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흔적을 찾아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숨을 좀 돌리세요." 그리고 이루릴은 곧 날렵하게 걸어갔다. 나는 무너진 성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수 해를 바라보았다. 지평선이 있는 곳까지 모두가 나무들이었다. 노출된 흙도 보이지 않았고 바위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푸른 나뭇잎들 뿐 이었다. 아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이 아니라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장 소가 없을 듯했다. 저렇게 많은 상록수라니. 마치 계절이 거꾸로 돌아가 는 기분이 든다. 영원의 숲이라. "여기 나무들은 죽지도 않는가 보지요. 어디 한 군데 땅이 제대로 보이 는 곳이 없어요." 제레인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대답했다. "영원의 숲이니까. 아! 그렇지." 제레인트는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의 일 말입니다. 제가 영원의 숲에 들어온 사람은 점점 사라진다 고 말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제레인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은 자신을 의 심할 때마다 점점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낱낱히 흩어져 파 편이 되고 마침내 사라져가는 것이 아닐까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예. 그런데 우리는 이루릴양의 도움으로 다시 우리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숲에서 나가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 아닐까요?" "허허. 예. 그렇게 된다면야 정말 좋겠지요.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마당 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테페리께서 우리를 사지로 인도 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 중에 엘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많이 불안하셨겠군요." "예. 여기 들어와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저니까요." "아아… 괜찮습니다. 우리는 레니양을 구출하기 위해 자의로 이곳에 들 어왔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고마운 말씀입니다. 하하하." 샌슨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곧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음.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다행이야. 우 리들 중에 이루릴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군. 그 때 이루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3. 우리는 무너진 성벽들 사이에 서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 다. 난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번 해볼까?" "네가 아니라 진짜 오우거가 10 마리가 와도 이건 어렵겠어." 하긴 그렇겠다. 이런 엄청난 바위라니. 우리는 무너진 성의 지하실 쯤으로 짐작되는 곳에 서 있었다. 원래는 지면보다 낮았을 테지만 무너진 돌들과 300년의 세월이 쌓여버려 지하실 은 거의 묻힌 상태였다. 그런데 이루릴은 바로 여기서 흙먼지 사이로 나 있는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을 따라가보자 곧 엄청난 바위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바 위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고 원개 건물의 일부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석재 들도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높이는 사람의 키의 몇 배였다. 아무래도 이 아래에 어떤 구멍이 있었고, 누군가가 거기로 들어간 다음 그 위로 건물 의 잔해와 바위가 무너져버린 모양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돌들은 무너진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무너지면서 바위에 생긴 흠집들, 하얀 흠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군요. 아무래도 넥슨의 일행이 이 아래에 있는 어딘가로 들어갔고, 그 때 뭔가 충격이 일어나면서 위쪽의 담장과 건물의 잔해가 무너진 모양입니다." 카알은 눈살을 있는대로 찌푸리면서 말했다. "큰일이군요. 이 아래까지 다 무너졌다면 그들은 살아날 가망성이 없겠 는데." 이루릴은 잠시 눈을 감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후 말했다. "실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바위들 틈으로 들어가본 실프의 말에 의하 면 이 아래에는 상당히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공간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습니다. 이 윗쪽만이 그냥 막혀버린 모양입니 다." "그렇습니까? 음. 그렇다면 일단 압사당하지는 않았겠군요. 다행입니 다. 하지만 그래도 나올 출구가 없다면 이 아래에서 죽는 것은 마찬가지 일 텐데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위는 도저히 치울 방법이 없겠군요. 마법을 써서 바위를 파괴한 다면 아래쪽이 너무 위험합니다. 아래쪽이 붕궤되어 버릴지도 모르지요. 게다가 바위가 너무 크고 많아서 파괴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하긴 그래. 이게 도대체 뭐야? 거의 산이구만. 우리는 답답한 표정으로 그 바위를 노려보았다. 이걸 다 안전하게치우려면 수백 명의 일꾼을 불 러다가 몇 년 동안 공사를 해야 되겠는데? 할 수 없이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른 입구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쯤 후 우리는 다시 바위더미 앞에 모여서는 서로의 풀죽은 얼굴을 바라보며 풀이 죽어버렸다. 그 때 네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 아래의 폭포!" "응?" "저 아래의 폭포는 땅속에서 나오는 거잖아? 아마 틀림없이 이 지하의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을 거야. 그런 세찬 폭포라면 아마 꽤 거대한 공간 이 있어야 될 테니까. 폭포구멍으로 들어가보자." 난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예. 잠시 기다려요. 네리아. 지금부터 열심히 언덕 위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할께요. 저녁 무렵이면 아마 내 겨드랑이에 틀림없이 날개가 돋 아나겠지요. 폭포 위로 비상하는 한 마리 아름다운 새가 되어…" "이런, 살펴나 보자구!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내 생각엔 저 아래의 폭포 구멍에도 무슨 길이 있을 것 같아. 기둥 쌓고 기타등등 손본 것 봤 잖아?" 카알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살펴본단 말이오?" 네리아는 신나게 짐을 뒤지기 시작했고 잠시후 우리는 절벽에 몰려서 게 되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폭포가 쏟아지는 구멍 바로 윗쪽에 섰다. 샌슨과 내가 한참 동안 티격태격하다가 - '조금 왼쪽이야!' '아냐! 여기라구!' '눈이 비뚤어졌어?'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 - 이루릴의 조용한 말에 의해 위치가 정해졌다. - '조금 오른쪽이에요.' 그리고 네리아는 밧줄을 내게 건네었다. 나는 밧줄을 허리에 묶고 나머 지는 둥글게 말아서 한 손에 쥐었다. 밧줄의 반대쪽 끝은 네리아의 허리 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샌슨과 제레인트, 카알 등이 내 몸을 붙잡았 다. 이루릴은 혹시 네리아가 추락할 때를 대비해서 절벽 옆에서 마법을 준비한 채 서 있었다. "그런데 왜 네리아가 내려가지요?" "내가 가볍잖아?" 네리아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곧 밧줄을 붙잡았다. 그녀는 잠시 절벽 끝 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입술을 오므렸다. "휘익!" 그리고 네리아는 곧 밧줄을 붙잡고 절벽에 매달렸다. "자, 됐어. 후치! 줄 풀어." 그리고 네리아는 절벽을 놓았다. 난 밧줄을 단단히 붙잡고는 조금씩 풀 어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네리아의 무게는 거의 두레박 늘어트리는 정 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칫하면 큰 일이 난다. 난 신중하게 밧줄을 풀었다. 이루릴은 절벽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천천히. 네. 조금만 더… 방향은 정확해요. 네. 그대로, 흔들리지 않 도록 천천히…" 그리고 잠시 후 이루릴은 손을 들어올렸다. 난 밧줄을 그대로 감아쥐고 멈추었다. 함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내가 지루해져서 뭐라고 물어보려고 할 때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루릴은 다시 손짓을 했다. "올리세요. 천천히." 난 밧줄을 끌어당겼다. 네리아도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올라오는 것인지 굉장히 빠르게 올라왔다. 잠시 후 절벽 끝에서 네리아의 얼굴이 올라왔 다. 그녀는 올라오면서 바로 말했다. "으와, 추워서 얼어죽는 줄 알았네." 네리아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녀의 바지는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방 울 때문에 젖어있었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절벽에 바람이 엄청나지? 물보라도 대단했을 테고." "으으, 그래. 얼어죽는 줄 알았네. 어쨌든 다행이야." "뭐가?" "아래에 길이 있어. 물이 흘러나오는 수로 양옆으로 약간 높게 선반처 럼 길이 나 있던데. 안은 캄캄해서 안보였지만 길 모양새를 봐서 확실히 꽤멀리까지 뚫려있는 길인 거 같아." "그래? 그렇다면 됐군!" 이 아래의 공간이 얼마나 거대할지 알 수가 없다. 절벽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봐선 도시 하나를 넣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공간이 있을 수도 있 다. 우리는 연료로 쓸 장작개비를 주워모았다. 혹시 이 안에서 굶어죽을 지도 모르니까. 그 다음은 말들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도 간단히 처리되었다. 이루릴 은 레이셔널 셀렉션에게 다가가 말했다. "친구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기다려요. 하지만 내가 부르면 다 시 달려와줘요." 레이셔널 셀렉션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우리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제레인트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말이 말을 알아듣다니! 나는 말의 말을 모르는데!" 그리고 내려갈 준비다. 이게 어려운 부분이었다. 내려가려면 밧줄을 묶 어야 되는데 주위는 공터여서 밧줄을 묶을 장소가 없었다. 멀리 떨어진 숲에 있는 나무에 묶으려니 밧줄의 길이가 모자랐다. 난 잠시 한숨을 쉬 고는, 손가락을 좀 꺽은 다음, 근처 숲에서 나무를 꺽어와 말뚝으로 만 들어서는 절벽 위에 꽂아놓았다. 제레인트는 나의 인간성을 의심하기 시 작했다. 말뚝의 단단함을 확인하기 위해 샌슨이 몸을 들이박고는 비명을 좀 질 렀다. 그 다음엔 밧줄을 단단히 감아매고는 아래로 늘어트렸다. 샌슨은 밧줄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 밧줄이 끊어지면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군. 젠장."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밧줄이 있는 이상 우리는 언제든 저 아래에서 나올 수 있겠군." 우리는 서로에게 씨익 웃음을 지어주었다. 먼저 네리아가 밧줄을 허리 에 묶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는 절벽에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네리아는 가볍게 통통 튀듯이 아래로 내려갔다. 절벽을 내려가는 것인 지 평지를 걷는 것인지. 음. 대단하군. 네리아가 그대로 폭포 속으로 떨 어질 것처럼 위태로와 보이는 순간, 네리아는 절벽 속으로 사라져버렸 다. 그리고 밧줄이 풀렸다. 제대로 내려간 모양이군. 그 다음 카알, 이루 릴, 제레인트의 순서로 내려갔다. 그 순간까지도 내려가지 않고 버티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샌슨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전을 던질까?" "관둬. 내가 내려갈 테니." 난 밧줄을 허리에 묶고는 나머지를 절벽에 늘어트렸다. 그리곤 밧줄을 단단히 붙잡고 절벽으로 내려섰다. 절벽을 차면서 밧줄을 번갈아 쥐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중력 때문에 거의 힘을 쓸 필요도 없이 쉽게쉽게 내려 갔다. 다만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폭포의 굉음 때문에 목덜미 에 털이 곤두서는 것이 기분나빴을 뿐이다. 왼손을 놓고, 오른손의 아래 부분을 쥐고, 오른손을 놓고, 왼손의 아래 부분을 쥐고, 발로는 가볍게 절벽을 차면서 충돌하지 않도록, 이윽고 귀 가 멀어버릴 듯한 폭포의 굉음이 바로 아래로 들리고 세차게 뿜어나오는 물보라가 바지를 적셨다. 그리고 눈 앞에는 거대한 동굴이 입을 벌렸다. 동굴의 가운데로는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그 양편에는 확실히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먼저 내려간 일행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 다. 난 카알의 손을 붙잡고 간단히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왼쪽으론 무 서운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저 미소를 지어주고는 밧줄을 풀었다. 밧줄은 슬금슬금 올라갔다. 음. 이제 샌슨만 내려오면 되는군. 우리는 귀를 틀어막고는 샌슨의 모습이 보이길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 도 샌슨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난 궁금함을 참다못해 동굴에서 몸을 내밀어 위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이제서야 절벽 끝에서 조금 내려온 상태였다. 고함을 질러주려고 해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테니 소용이 없다. 샌슨은 철저히 안전하게 내려오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발을 한 번 디디 는데 1분씩 걸릴 지경이었다. 손을 바꾸는데도 거의 비슷한 시간이 걸렸 다. 좀 적당히 하라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간신히 샌슨은 동굴 앞에 몸을 나타내었다. 난 샌 슨의 팔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난 샌슨에게 굉장한 분노의 표정을 지어주었지만 곧 관두고 말았다.샌슨은 파랗게 질려있었던 것이다. 미리 준비한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내가 그것을 들고 앞장섰다. 폭포수가 뿜어나오는 수로는 상당히 곧고 길었다. 한참을 걸어가도 굉 음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하긴 절벽 전체가 울릴 테니 절벽 안에 있는 우리가 조용해지긴 어렵겠지. 그래도 한참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간신히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난 먼저 샌슨에게 말했다. "이봐요, 퍼시발군. 도대체 왜 그렇게 시간을 끈 거야?" 별로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잘 울려서 놀랐다. 샌슨은 투덜 거리며 말했다. "녀석아! 난 밧줄타기가 항상 서툴단 말이야. 제기, 고향에서 훈련할 때도 항상 밧줄타기에서 부하 녀석들에게 조롱을 받았는데." 하지만 곧 샌슨은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 놈들도 지금의 날 보면 그런 조롱은 못할걸? 그 녀석들 중 에 누가 이런 엄청난 폭포 위에서 밧줄을 탈 수 있을까." "여기 그런 일을 한 사람 많아. 자랑할 거 없어." 샌슨은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길다란 동굴은 우리들이 걸어감에 따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다. 차 츰 우리 옆으로 흐르는 물의 유속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 니 우리가 들어온 입구는 이미 손톱만하게 작아져 있었다. 카알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거 엄청난 동굴인가 본데." 그 말의 울림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말없이 걸어갔다. 동굴의 윗부분은 거의 자연석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걷는 길과 양쪽의 벽은 확실히 가공이 되어 있었다. 들어간 부분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지 만 튀어나온 곳은 깍아내고 다듬어 두었다. 그래서 한참을 걸어도 계속 동굴은 곧기만 했다. 이제 수로의 유속은 거의 잔잔한 시냇물 정도였다. 꽤 오랫동안 걸어온 모양인데. 하지만 그 시커먼 물은 꽤나 싶을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동 굴 속에서 먹물같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난 앞 만 보면서 걸어갔다.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걷자니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앞쪽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을 때는 크게 놀랐다. 길 앞쪽에 쌓여있는 돌무더기가 나타난 것이다. "이게 뭐지?" 돌무더기라고 말한다면 좀 이상하고, 원래 무슨 구조물이 있다가 무너 진 자취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바닥에서부터 시작되 는 몇 개의 작은 돌기둥과 벽에 나오는 몇 개의 돌기둥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역시 원래는 잘 다듬어졌던 것이 분명한 돌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이 원래는 무엇이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 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의 반대편 길, 그러니까 수로의 왼쪽 길에는 거의 원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카알은 그것을 곰곰히 바라보다가 말 했다. "돌격자로군?" 음. 돌로 된 격자였다. 아마 원래는 길양쪽을 다 막고 가운데 수로에도 돌격자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처럼 보인다. 카알은 말했다. "아무리 단단하게 설치된 돌격자라도 수백년 동안 계속된 이 빠른 물의 흐름을 견디기는 어려웠겠지. 그래서 먼저 가운데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충격으로 양쪽 돌격자까지 다 무너진 모양이군."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오른쪽으로 들어와서. 그런데 그렇다면 여긴 원래 통행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보이는군. 하지만 길을 막던 돌격자가 무너졌으니, 한 번 끝까 지 가보세나." 무너진 돌격자를 넘어서자 다시 아까와 똑같이 죽 곧은 길, 그리고 어 두운 길이었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나서 카알이 다시 말했다. "이상하군. 우리가 걸어온 거리를 봐서는 이미 위쪽의 폐허에 있는 그 입구를 지나쳐왔을 텐데. 갈림길 같은 것이 전혀 안보이는데." 그리고 제레인트가 말했다. "예. 그리고 이 수로를 만든 솜씨,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군요. 할슈 타일 가문이 강대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엄청난 공사라니."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네리아의 말이었다. 네리아는 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동굴이 300년이 넘은 동굴처럼 보이나요? 아, 아까 무너진 돌격자 가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 다른 벽들은 모두 정말 깨끗한데요?" 카알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아무래도 여기는 거기인 것 같소." "맞아요. 그리고 거기는 여기고요." 내 대답에 카알은 피식 웃으며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대미궁인 것 같지 않소?"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4. 제레인트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영원의 숲 안에 있는, 게다가 할슈타일 저택의 폐허 아래에 있는 이토록 큰 동굴이라면 그것 이외엔 생각하기가 어렵겠군요." "허억?" 샌슨은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손짓발짓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다가 결국 말을 하는데 성공했다. "그럼 여기 어딘가에 드래곤 로드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횃불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드래곤 로드 역시 드래곤이니 그 수명은 말도 못하 겠지. 300년은 인간의 세대로는 몇 세대가 지나갔겠지만 드래곤에겐 그 다지 긴 세월이 아니겠지." 카알은 그렇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샌슨은 그러한 카알의 태도에 당혹 을 느낀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들어가서 식사 대령이오. 이렇게 말해야 됩니까?" "우리가 뭐 먹을 게 있겠나. 어쨌든 레니양을 찾아야 되니 별 수가 없 지." 그 때 이루릴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넥슨은 크라드메서가 아니라 드래곤 로드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요?" "예?" "레니양은 드래곤 라자입니다.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과 인간을 연결시 켜줄 수 있지요. 넥슨은 레니양을 이용하여 드래곤 로드와 자신을 연결 짓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카알은 차라리 우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헛. 그런 말도 안되는!" 하지만 이루릴은 여전히 근심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왜 갈색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일까 요?" 그러자 카알은 대답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카알은 이루릴과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아무리… 그가 설마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리는 없을 텐데." 네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카알을 보면서 말했다. "카알 아저씨. 그게, 어, 가능하기는 하나요?"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되오. 네리아양. 드래곤 라자의 권능은 드래곤 로드가 주는 것 이오. 그 권능을 거꾸로 드래곤 로드에게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오." "하지만 드래곤 로드도 결국 드래곤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거 참!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는지. 이봐요, 네리아 양. 각 영지의 영주들은 사실 국왕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오. 그런데 영주가 그 권한으로 국왕을 다스릴 수가 있소?" "그건 안되는 것 같네요. 음. 하지만…" 그리고 이루릴이 말했다. "그것은 인간의 경우지요." 카알은 다시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역시 비유란 위험한 거다. 그는 관자놀이를 심하게 문지르면서 말했다. "안되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돼. 여러분! 걸음을 재촉합시 다. 넥슨이 정말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가 드래곤 로 드를 만나기 전에 그를 따라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걸음을 바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길다란 동굴 속엔 우 리들의 발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런 식의 접근 은 좋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기겁한 다음 다시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걸어가게 되었다. 쏴아아아. 앞쪽에서 다시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우리는 그 물소리 때문에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걸어가면서 샌슨은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미궁이람? 쭉 곧은 길인데." "곧아서 불만이야? 난 길을 잃을 염려가 없어서 정말 기쁜데." "하긴 그렇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횃불빛이 도저히 닿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공 간이 나타났다. 우리는 지하의 거대한 공동 속에 들어와 있었다. 굉장히 넓은 이 암흑 의 공간은 횃불빛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고 있었다. 양 옆으로 둥글게 돌 아가는 길이 보였고 정면에는 거대한 지하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의 물 이 우리들이 들어온 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맞은 편에서는 규모가 좀 작은 폭포가 보였다. 그것은 맞은 편의 벽에서 쏟아져 나와 지하 호수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호수의 물이 다시 우리가 들어왔던 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모양이다. 우리 들이 다가오면서 들었던 물소리는 바로 저 지하 폭포의 소리였다. 이루릴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주위가 잘 보이지 않겠군요. 후치? 횃불을 높이 들어요." 그리고 이루릴은 캐스트를 시작했다. "어펙트 노멀 파이어(Affect normal fires)" 부아아아. 내 손에 들려있던 횃불이 갑자기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거세 게 불타올랐다. 장작 하나에서 나오는 불빛이 아니라 거대한 장작더미에 서 나오는 불꽃 같았다. 난 갑자기 내 키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커져버린 횃불에 놀라서 자칫 횃불을 떨어트릴 뻔했다. 머리카락이 그을릴 것 같 은 기분이 들어 난 횃불을 최대한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하에 숨어있던 엄청난 비경이 순식간에 우리 눈 앞에 폭로되 었다. 주위의 공간은 거의 완전할 정도로 둥글었고 까마득한 위쪽은 둥그스름 한 것이 돔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 돔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종유석들 이 보였다. 주위의 벽들은 각양각색의 종유석들이 이리저리 쌓여서 형성 되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불을 켜둔 양초처럼 종유석들이 켜켜히 쌓 여있었다. 그러나 가장 아래쪽, 그러니까 우리들이 서 있는 지면 높이로 내려오면 서 벽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홀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벽 은 벽돌로 잘 다듬어져 있었고 둥근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걸 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횃불걸이들 사이로 여러 개의 통로가 보였다. 우리가 들어온 오른쪽부터 세어보니 모두 세 개의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통로들의 위 치상 네 번째의 통로가 있어야 할 위치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으며 그리고 다시 왼편으로 넘어가서 세 개의 통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 다. 그리고 우리들이 들어온 수로가 있었다. 따라서 통로들의 위치는 팔 각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너무너무 큰 팔각형이었지만. 아무래도 달 려서도 10분은 걸려야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가운데 있는 호수는 참으로 거대했다. 닐시언 전 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바이서스 임펠에 있는 궁성 임펠리아를 옮겨 다가 이 호수에 집어넣어도 다 들어가버릴 것이다. 물 아래가 전혀 보이 지 않아서 깊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새카만 호수는 아무래도 무한히 깊어보였다. 빠져들기라도 하면 영원히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새카만 수면 위로 내가 들고 있는 횃불이 길게 뻗었다. 횃불의 크기 도 엄청났지만 호수의 크기는 더 엄청나서 물에 비치는 횃불은 그렇게 커보이지 않았다. 카알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 그런데 어떻게 절벽이 붕궤되지 않았을까?" 카알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 공간은 도저히 커다란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분위기랄까. 게다가 지 금까지와는 달리 카알의 목소리는 조금도 울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그저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흐음. 정말 넓기는 넓은 모양이다. 이루릴은 벽을 빼곡히 메워버린 종유석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차곡차곡 쌓인 종유석들이 생각외로 튼튼한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려. 대미궁을 만들기 위해 드워프들의 노커 익시노아 크레 벤이 10년 동안 설계를 했다지. 게다가 완성에는 50년이 걸렸고. 정말 대단하구려. 이건… 뭐라고 평해야 좋을까. 자연적인 장점을 최대한 살 리면서도 그 공간에 완벽한 대칭미와 조화미를 더했다고 말할까? 정말 엄청난데."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요? 어차피 우리가 온 곳이 오른쪽이라 오른 쪽에 있는 통로 세 군데밖에 못들어가긴 하겠지만." 그러고보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 우리가 걸어온 수로는 가운데가 물살이라 건너갈 수 없었고 이 넓은 호수를 헤엄쳐 건 널 수도 없다. 이 호수 주위의 길이 정말 둥글다면 저쪽 맞은편에서 왼 쪽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저쪽은 또다른 폭포로 막혀 있다. 그러니 우 리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오른쪽에 있는 세통로로 제한된다. "이상하군. 그렇게 서로 통행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두었을 리가 없 는데. 여기 들인 노고를 보아하니 가운데 어디에 다리를 만드는 것도 어 렵지는 않았을 텐데. 저 커다란 호수에야 다리를 놓기 어렵겠지만 여기 좁은 수로쪽에는 얼마든지 다리를 놓을 수 있을 텐데." 정말 그런데? 왜 다리를 놓지 않았을까?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앞 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별로 꺼리낄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차례대로 들어가보세." 그래서 우리는 지하 호수를 따라 걸어 첫번째 통로로 걸어갔다. 이루릴 은 간단히 무슨 말을 중얼거렸고 그러자 10큐빗 크기로 늘어났던 횃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첫번째 통로까지 걸어가서 우리는 잠시 통로를 살폈다. 통로의 높이는 약 10 큐빗 정도였고 넓이도 그 정도 될 것 같았다. 꽤 거대한 통로인 걸. 이루릴은 통로의 입구 윗쪽을 가리켰고, 횃불을 높이 들어올리자 입 구 위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네리아는 소리내어 읽었다. "회상." 회상이라라? 무슨무슨 방, 이런 것도 아니고 그저 회상이라니? 입구 위 쪽에 적혀있을 글로는 너무 이상하게 보이는걸? 우리들은 어깨를 으쓱거 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앞쪽에 눈이 좋은 이루릴과 나, 샌슨이 섰고 그 다음 카알과 제레인트, 네리아가 섰다. 통로가 넓어서 얼마든지 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었 다. 통로는 우리가 걸어들어왔던 수로처럼 아무런 갈림길이 없이 그냥 죽 곧게 뻗어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아서 앞쪽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우 리는 문 앞에 멈춰섰다. 문은 돌인지 금속인지 재질을 짐작하기 힘든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다. 불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는 윤택없는 모습은 돌처럼 보였지만 그 모양새 나 재질은 마치 금속처럼 매끈하면서 차가웠다. 꽤 커다란 문이었는데 사실 문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샌슨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 다. "손잡이가 없잖아?" 문은 손잡이가 없이 그저 매끈하고 평평한 직사각형일 뿐이었다. 문 맞 나? 그저 벽에 구멍 뚫고는 구멍에 딱 맞는 돌을 끼워둔 것처럼 보였다. 샌슨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길 수 없다면 밀어보지. 모두 무기를 준비하고 약간 떨어지십시오." 그리고 나와 샌슨이 문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와서 보아도 역시 매끈한 판일 뿐이었다. 샌슨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손을 내밀어 문을 밀었다. 잠시 후, 샌슨은 우리들에게 벽을 밀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모습을 보 여주게 되었다. "뭐야, 이건?" "이거 들고 있어봐. 내가 해보지." 난 샌슨에게 횃불을 건네주고는 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힘껏 문을 밀 어보았다. 그런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가 걸려서 움직이지 않는다거 나 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완전히 벽을 미는 기분이 들었다. 난 손을 뗀 다음 샌슨에게 말했다. "자, 손잡이 없는 문을 당기는 방법에 대해 토론을 시작할까?" "크게 고함을 지른다. 문 열어!" "그건 안에 누가 있을경우이고." 우리가 이런 시덥잖은 소리를 주고받는 동안 우리 일행은 모두 가까이 다가왔다. 네리아는 꼼꼼하게 문을 관찰했지만 역시 벽에 틀어박힌 돌처 럼 보이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말했다. "이 뒤가 벽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하진 않을 거 같은데?" 이루릴 역시 이곳저곳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약속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 마법으로 닫힌 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러자 제레인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그렇지! 간단하군. 열쇠는 문제의 옆에 있지! 여러분, 잠시 비켜 주십시오." 그리고나서 제레인트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문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회상!" 제레인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문이 스르르 열리지는 않았다고 해서 제 레인트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야겠다. 문은 쌀쌀맞게도 꼼짝도 하지 않 았고 제레인트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카알은 푸념처럼 말했다. "이 문은 헬카네스의 율법엔 관심이 없나 보오." 우리는 잠시 더 궁리하다가, 시간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그리고 우리는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 통로를 빠져나와서 우리는 두 번째 통로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입 구로 들어서기 전에 모두 위를 살폈다. 과연 입구의 윗쪽엔 글자가 새겨 져 있었다. 복수. 네리아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회상… 복수… 뭐 공통점이나 연상되는 뭔가가 있을까?"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언혀." 그러자 네리아는 입술을 크게 삐죽거렸다. 우리는 다시 통로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얄돎게도 거의 비슷한 깊이를 들어가자 첫번째 통로에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문이 나타났다. 나와 샌 슨은 혹시나 해서 문을 밀어보았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레 인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복수." 그리고 우리는 몸을 돌려 통로 밖으로 나왔다. 세번째 통로로 다가감에 따라 폭포 소리가 더욱 커졌다. 세번째 입구에 도착하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들어 입구 윗쪽을 바라보았 다. 입구 윗쪽에는 역시 단어가 적혀있었다. 순결.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전혀 맥락이 닿지가 않는 단어들이군. 회상, 복수, 순결이라니. 무슨 공통점 같은 것이 떠오르지가 않는데." 네리아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냐아냐. 뭔가 서로 통하는 말이 있을 텐데. 에, 순결을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를 회상하니…." 우리는 아무도 네리아를 바라보지 않았고 네리아는 벌겋게 된 얼굴로 땅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통로를 따라들어갔으며, 비슷한 깊이에서 똑같은 문을 발견하게 되자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들은 모두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별로 말할 기분이 아니었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결." 그리고 제레인트는 바로 몸을 돌렸다. 우리들도 모두 짜증을 느끼며 몸 을 돌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내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요." 일행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일행에 신경쓰지 않고 몸을 돌려 문을 향했다. 그리고는 별로 희망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대 로 들어줄만한 목소리로 문을 향해 말했다. "그랑엘베르." 문은 소리도 없이 밖으로 열렸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5. "네드발군!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네! 그렇군. 역시 열쇠는 문제 옆에 있었군!" 카알은 크게 기뻐했고 샌슨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네리아는 숨쉴 새 없이 손가락을 튕겨대었고 제레인트는 숨쉴 새 없이 자기 머리를 치고 있었다. 하하. 뭐, 별 거 아니지. 순결이라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고. 잠시 소란을 벌인 다음 우리는 문 쪽으로 다가섰다. 문 안쪽은 무슨 방 인 모양인데 안은 캄캄했다. 먼저 나와 샌슨이 횃불을 들고는 문에 접근 했다. 열린 문으로 접근하자 뭔가 퀘퀘한 냄새가 났다. 샌슨은 곧 험악한 얼 굴이 되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혹시 독이라도?" 그러자 곧 뒤에서 카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책은 독일 수도 있겠지. 책냄새로군." 곧 샌슨은 네리아에 의해 책을 독으로 여기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파아앗. 갑자기 빛이 쏟아져 눈을 꽉 감아버리고 말았다. 으윽!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난 눈물을 찔끔거리며 실눈을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은 천장에서 뿜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닐시언 전하의 서재처럼 천장 전체가 빛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방은, 이걸 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중간중간에 천장을 받치는 기둥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은 온통 책장이었다. 사방 벽은 말할 것도 없고 방 가운데에도 책장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하나의 열은 책장 열 개씩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었으며 그러한 열이 최소한 쉰 개는 되어 보였 다. 그러니까 가운데 있는 책장들만 해도 모두 1,000개. 현기증나게 많 은 책들이었다. 카알은 탄성을 질렀다. "이런!" 그는 곧 책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들도 흩어져서 책장의 이곳저곳을 훑 어보았다. 잠시 후 카알의 탄성이 들려왔다. "맙소사! 이 책이 남아있었어! 크라이제의 문명 비평! 이 책은 이미 200여년 전에 모두 사라져버렸지. 200년 전에 남아있던 마지막 1권이 루 스휴레인 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그런데 여기 남아있어! 게다가 이 깨끗 한 상태라니." 그리고 곧 제레인트의 탄성도 들려왔다. "맙소사! 이거 보십시오, 카알. 헤트로이처의 신에게로의 사색적 산책 초판본입니다." 카알은 비명을 질렀다. "예? 뭐라고요?" 나도 역시 책을 한 권을 뽑아들었다.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히, 히야아!" "응? 뭔가? 왜 그러는가, 네드발군!" 카알은 다시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나에게 황급히 달려왔다. 난 감동 적인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보여주었다. "따사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주방을 위한 요리 100선" 카알은 책 제목을 읽더니 곧 한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난 기 쁘게 말해주었다. "나도 이 책 있는데, 여기도 있어요! 우와!" "그, 그런가? 허허, 기쁘겠군, 네드발군." 카알은 그 말만 남겨놓고는 곧 부리나케 걸어가버렸다. 그리곤 또다시 제레인트와 더불어 비명을 올리며 책구경을 계속했다. 난 책을 꽂아놓고 는 혹시 요리 1,000선이나 10,000선 같은 책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제레인트와 카알은 모두들 즐거워하며 책을 뽑아들고 있었다. 우리는 왜 저 아름다운 경악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일까. 음. 옆을 보니 이루릴 도 책 한 권을 뽑아들고는 미소를 지은 채 읽고 있었다. 나와 샌슨, 그 리고 네리아는 매우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로 서가에서 책을 뽑아들어 펼 쳐보았지만 곧 거의 동시에 책을 꽂고말았다. 탁탁탁! 모두들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 있어 책장만 치더라도 대단한 고가일 것 같았다. 일급의 장인이 달려들어 1년 내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해도 믿 어줄만한 책장들이었다. 게다가 책들의 정리 상태는 완벽했다. 책들마다 장정의 화려함이라든가 크기, 두께 등은 다 달랐지만 이렇게 주욱 꽂혀 있는 모습이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었다. 제레인트와 카알은 내키는대 로 뽑아보고 있었지만. 카알과 제레인트가 진정하게 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그 동안 샌슨과 네리아는 퍽 지루해했다. 카알은 사방의 책들에게 탐욕스러 운 눈빛을 보내면서 말했다. "이거 정말 굉장한 곳일세. 몇백년 묵은 고서들이 모여있군, 그래. 그 것도 이렇게나 많다니." "몇백년 묵은 고서라고요?" "그렇다네. 이것 좀 보게나." 그리고 카알은 손에 든 책을 들어올렸다. 그는 굉장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보여주었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왜 책의 표지 를 보여주지 않고 책등을 보여주는 거지? 너무 흥분해서 카알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카알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여보게. 이런 제책방식을 본 적이 있는가? 이건 까마득하다고 말할 정 도로 오래된 제책방식이라고!" "아, 그렇습니까?" 윽. 그게 그런 의미였군. 하지만 난 봐야 책들의 제책방식을 구분 못하 겠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여긴 도서관인 모양이군요. 그랑엘베르의 도서관을 흉내낸 모양입니 다." "예. 그 도서관은 사실 책들의 도서관이라 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비슷 하기는 하군요. 허어, 이거참!" "카알. 저, 그런데." "아, 그래. 나가세. 그거 참." 우리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카알을 붙잡아 끌고 나오려고 꽤 나 고생해야 되었다. 카알은 몇 권이라도 가져가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내진 못했다. 이 환하고 아름다우며 정숙한 도서관은 도저히 책도둑질을 감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방안의 불은 꺼졌으며 다시 문이 스르르 닫혔다. 신기하 군. 아마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경우에 닫히도록 되어 있나 보다. 갑 자기 어두운 바깥으로 나오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시 시력을 회복 하기 위해 머뭇거린 다음, 우리는 다시 앞서의 통로로 돌아갔다. 앞쪽의 통로는 복수였지. 우리는 두번째 문 앞에 섰다. 난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고, 제레인트는 쾌활한 목소리로 멋드러지게 말했다. "화렌차." 문은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의 이름 이 불리워지자 문이 스르르 열린 것이다. 다시 나와 샌슨이 앞장섰다. "방 안에 들어가면 불이 켜지겠지?" "확인하자고. 눈 조심하고." 난 눈을 가늘게 뜬 다음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파아앗! 방안은 곧 환해졌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역시 눈이 부셨다. 눈 물을 찔끔거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선 일행들이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는 우리들을 밀어붙일 태세였다.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모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네리아가 몸을 날렸다. "보물이다!" 네리아는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금관, 금반지, 보석 팔찌와 귀고리, 브로우치 등의 금장식 악세서리, 보석 홀과 보석상자, 각양각색의 부채 와 값비싸 보이는 검, 방패들 속에서 헤엄을 칠 자세였다. 물론 보물이 라는 것은 대개가 단단한 것이다. 네리아는 틀림없이 몸에 멍이 들었을 테지만 궤념치 않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왠만한 언덕이라고 불러주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보물 더미 앞에 무릎을 꿇더니 곧 손가락이 부러져라 그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그녀는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그 무거운 금화를 집어들더니 곧 황홀한 표정으로 금화들을 떨어트렸다. "좌르르… 딸랑딸랑." 금화에서는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음. 저렇게 많은 금화가 떨어지는 것은 처음 보니, 그 소리도 역시 처음 듣는 셈이다. 어쨌든 다음에 누군 가에게 '금화가 떨어질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느냐 하면 말이야,' 이런 식 으로 이야기는 꺼낼 수 있게 되었군. 우리는 일제히 주욱 늘어서서는 턱이 빠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 쌓여있는 보물을 세어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웃기는 일이 될 것 같다. 굳이 세어야 된다면 무슨 됫박이나 커다란 저울 같은 것을 가져와 서는 부피나 무게로 세어야 될 것 같다. 물론 이 보물들을 다 셀 때까지 됫박이나 저울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아냐. 그걸로는 안되겠 어. 정말 웃기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세어야 될 것 같군. 보물 몇 수레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것은 다른쪽에 견고하게 쌓여있는 금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 다. 대단히 무겁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저 금괴를 벽돌로 삼아 아담한 집 한 채는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샌슨은 넋빠진 얼굴로 금괴 무더기로 걸 어갔다. 그는 질린 표정으로 손을 뻗어 금괴를 집어들려다가, 곧 당혹한 얼굴이 되어서는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도 무거워서 낑낑거렸다. "진짜 금이야?" 맙소사. 드워프들이라면 이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수염을 깨끗이 면도해도 좋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보물이라 니. 금괴가 쌓인 곳의 반대편 벽은 더 기가 막혔다. 벽에는 커다란 선반 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 위에 옷상자 정도로 보이는 상자 수십 개가 얹 혀있었다.그런데 상자들의 색깔이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푸른색, 붉은 색, 노랑색, 검정색, 흰색 등 벼라별 색깔이 다 있었다. 제레인트가 상 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뭐가 들었는지 볼까요?" 제레인트는 상자들 중에 푸른 상자 하나를 들어올리려다가 곧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다가가서 그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OPG를 끼고 있 는데도 불구하고 허리가 휘청했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상자를 바닥에 내렸다. 상자는 잠겨있지 않 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화황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보 석, 셀 수도 없이 많은 푸르스름한 보석들이 들어있었다. 상자에서 뿜어 져나오는 푸른 빛이 얼굴을 후려갈기는 기분이 들었다. 난 얼빠진 얼굴 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의 얼굴은 푸르게 물들어있었다. 이 런 엄청난 빛이라니. "그거 무슨 빛이야!" 네리아는 누가 본다면 원래 네 발 짐승이었을 거라고 말할 정도의 몸짓 으로 상자로 다가왔다. 그녀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더니 곧 졸도하는 표 정을 지었다. "사, 사, 사파이어야! 이렇게 많은 블루 사파이어라니!" 네리아는 곧 무서운 속도로 몸을 돌렸다. "후치야, 후치야! 사랑하는 후치야! 제발! 저기 하얀색 상자 좀 꺼내 줘. 응? 제발!" 난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하얀색 상자를 들어내렸다. 일행들은 모두 상자 주위로 모였고 네리아는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상자를 열어젖 혔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상자 속에서 번개가 튀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네리아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다, 다, 다… 다, 다, 다…" 카알이 그녀를 도와주었다 "다이아몬드." "예. 다, 다, 다…" 이거 이름이 다이아몬드인가?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투명한 보석이 었는데 거의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이거 반짝거리 기는 하지만 아까의 블루 사파이어가 파르스름한 것이 더 예쁘던데. 어 쨌든 그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이 상자 가득히 쌓여있었다. 네리아는 신음 을 흘렸다. "아무나 날 잡아. 쓰러질 거야." 이루릴은 곧 네리아의 어깨를 붙잡았고 네리아는 한숨을 쉬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어. 이토록 많은 보물이라니. 나라 한 두 개쯤 사고도 기념품이 몇 개는 남겠는걸?" "네? 카알 아저씨. 이걸로 나라도 살 수 있어요?" 네리아의 숨막힌 목소리를 듣자 카알은 곧 빙긋 웃었다. 그는 상자 속 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곧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을 하나 들어올렸다. 카알 이 들어올린 것은 직경이 손가락 두 마디쯤 되어보이는 보석이었다. 그 아름다운 가공이라니, 도대체 몇 개나 되는 면이 있는지 셀 수조차 없었 다. "이거 하나로도 왠만한 성채 하나는 살 수 있소." "됐군요! 카알, 챙기죠!" "응? 무슨 말인가, 네드발군?"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이요!" "아, 그렇군. 하지만 이 보석들의 임자는 드래곤 로드일 텐데." "그거 하나로도 성채 하나는 살 수 있다면서요? 그럼 몇 개만 들고 나 가면 아무르타트에 줄 10만셀은 우습게 되겠는데요? 이렇게 많은데 몇 개 없어진다고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내 말이 끝나자 네리아는 곧 카알에게 간절한 시선을 집중시키기 시작 했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바닥에 보석이 굴러다닌다 해도 저녁 약속은 지켜야 되는 법이다. 누구의 말이지, 네드발군?"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이지요. 하지만 저녁 약속이 아니잖아요, 이건." 나와 네리아의 안타까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카알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 이었다. "그건 약속의 귀중함을 말하는 말이 아니었다네. 네드발군.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는 의미였 네." 제레인트와 이루릴은 정말 화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이런 엄청난 보석을 앞에 두고, 그 중 몇 개가 없어진다 해도 도저히 셀 수가 없어서 모를 정도의 보석을 앞에 두고 무슨 구름 잡는 이야기람. 그러나 카알은 완고했다. "이 보석의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바에야 절대로 취할 수는 없다 네. 여보게, 네드발군. 아버님을 생각하는자네의 마음은 짐작할 수 있 네. 나 또한 형님의 일이 걸려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렇게 하세." 이런, 포기해야겠군. 나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대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경우가 많지요." 카알은 싱긋 웃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한 이 동굴을 완전히 탐사해보세. 그리고 양심에 비추어 한 점 티끌도 없이 저 보석을 취할 수 있도록 해보세나." "카알 아저씨이이이!" 네리아의 앙탈에 가까운 말에도 카알은 요지부동이다. "네리아양. 이건 차라리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요. 네리아양도 사람이 들어오면 빛이 들어오는 이 방을 보지 않았소?" 네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 두 질겁을 했다. 맞다! 이런, 그 생각을 못했어. 보석에 눈이 멀어버렸 나 보군. 하지만 카알은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까? 그는 여유있게 말했다. "난 이다지도 많은 보물을 보니 욕심보다는 차라리 두려움이 앞서는구 려. 여기에 빛의 마법 외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소.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자에게 경계나 징벌을 줄만한무서운 마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러자 네리아는 곧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윗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 다. 저 아가씨, 뭐 하는 거야? 잠시 후 네리아의 가슴에선 꽤나 큼직해 보이는 보석들과 금화가 나왔다. 카알은 기막힌 어조로 말했다. "그새 챙겼소?" 네리아는 멋적은 표정으로 장화에도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소매 속 에서도, 혁대에서도 보석과 금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아이고 맙소사. 이 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 많이도 챙겼다. 샌슨은 다람쥐 도토 리 챙기듯, 어쩌고 하다가 네리아에게 꼬집히고 말았다. 다람쥐는 먹지 도 자지도 않고 도토리를 모아놓고는 자신이 모아둔 장소를 잊어먹는다. 앞뒤없이 모으기부터 하는 사람을 야유하는 말이다. 어쨌든 네리아는 온 몸에서 수십 개나 되는 보석들을 꺼내어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네리아는 사방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보내었다. "그래두우… 보는 건 괜찮겠지요? 음, 후치후치후치야. 저기 검은 상자 좀 내려봐. 블랙 다이아몬드는 가장 비싼 보석 중에 하나라고. 혹시 흑 진주가 있을까?" "네리아양. 우린 급하오." "이이이잉!" 내가 상자를 원위치에 돌려놓고 모든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왔을 때까 지도 네리아는 나오지 않았다. "저, 동굴 탐사에서 한 사람쯤 빠져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네리아양!" "어어어어!" 결국 네리아는 카알에게 정신적으로 귀를 붙잡힌 듯한 모습으로 시무룩 하게 끌려나왔다. 네리아마저 나오고나자 역시 불이 꺼지며 문이 스르르 닫혔다. 제레인트는 그 닫히는 모습을 보더니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 다. "이런 말 우습지만, 어째 너무 보안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 까? 저 안에 있는 저 엄청난 보물에 비해볼 때 말입니다." "예. 내 생각도 그러하오. 약속어만 말하면 그냥 열리는 문이라든지, 사방으로 갈림길 하나도 없이 뚫려있는 통로들이라든지. 아무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마법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점점 확실성을 띠는 데요." "예. 그럴 거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요. 아무 물건도 가지고 나오지 않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통로를 나서자마자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화렌차!" 우리는 모두 네리아를 돌아보았고,네리아는 열린 방 안으로 뛰어들었 다. 질린 표정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니 네리아는 바지춤을 뒤적거리고 있 었다. 아이고 맙소사. 잠시 후 네리아는 손을 탁탁 털더니 겸연쩍은 얼 굴로 걸어나왔다. 샌슨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말했다. "이젠 더 없냐?" 네리아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샌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벗어볼까?" "됐어. 만일 가지고 있다면 네가 위험해지는 거야. 알겠지?" "아니까 도로 돌려놓았잖아."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6. 우리는 웃으며 다시 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첫번째 통로로 걸어갔 다. 걸어가면서 카알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 방마저도 무슨 창고나 그런 것이라면 우리의 탐색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것 참 큰 일이로군. 세 번째에는 행운이 있어야 될 텐데." 제레인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할 때엔 작은 행운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기대하며 첫번째 통로의 첫번 째 문 앞에 늘어섰다. 이 통로의 입구 윗쪽에는 회상이라고 적혀 있었 지? 제레인트는 씩씩한 얼굴로 말했다. "시무니안."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곧 시무니안의 아들들에 게 문이 열렸다. 음. 이제 시무니안의 아들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짐작가는걸. 방문이 열리고 역시 불이 밝혀졌다. 우리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샌슨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게 다 뭐야? 음식이잖아?" 맙소사. 엄청난 공간 안에 쌓여있는 것들은 모조리 먹을 것과 마실 것 이었다. 벽 가득히 쌓여있는 통은 아마 술통일 것 같다. 그리고 반대편 벽에 쌓여있는 통들은 밀가루나 기타 등등 곡식류를 저장한 곳인 듯하 다. 벽 위쪽으로는 선반이 있었고 선반엔 갖가지 병들이 놓여있었다. 잼, 마멀레이드인가? 그리고 양념거리, 조미료 계통이 엄청나게 쌓여있 었다. 향초는 무더기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 린 햄과 훈육 등은 기가 막힌 냄새를 풍겨대었다. 방 구석에는 거대한 수조 비슷한 것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안엔 생선들의 퍼득임이 들려왔 다. 가득 쌓여있는 채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행 모두가 순식간에 꼴깍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해도 별로 겸연쩍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 고 방 다른 부분에는 엄청난 식기들이 놓여있는 찬장이 보였다. 샌슨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뭐야? 헬턴트 주민을 모조리 데리고 와도 여기 있는 거 반도 못 먹겠네." 그리고 카알은 기막힌 어조로 말했다. "그것 참. 300년 묵은 술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이 음식들은 마치 오늘 아침에 장만해 둔 것 같은데?" 이루릴은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보존의 마법을 사용했나 보군요." "아, 그렇군요." 샌슨은 척척 걸어가더니 통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는 곧 환한 얼굴이 되더니 사과 하나를 꺼내어들었다. 그의 손이 입으로 움직이기 전에 재 빨리 그를 말리느라 부리나케 움직여야 했다. "샌슨! 건드리면 안된다는 팻말이 꼭 있어야겠어?" "어? 아, 그렇지. 음. 하지만 이 계절에 사과라니. 허엇!" 샌슨은 멋적은 표정으로 사과를 도로 집어넣었다. 으음. 도서관, 보물 창고 다음으로 여기는 음식 창고인가? "대지의 시무니안, 무한한 음식창고를 가지고 있다는 그녀에 대한 전설 이 기억나는군. 음. 그걸 상기시키는 데가 있군 그래." 카알은 그렇게 평했다. 그런데 이 기가 막힌 음식들을 보는 것이 즐겁 긴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리 탐색은 끝이 아닌가. 그것 참.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저거!" 20 큐빗 떨어진 곳, 그러니까 방 전체의 중간쯤 되는 곳에 갑자기 희뿌 연 모습이 떠올랐다. 차츰 뚜렷해지는 영상은 두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 그리고 몸이 있었고 그 위엔 머리가 있었는데 머리엔 눈이 두 개 고…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후다닥 물러나며 제각기 손을 검으로 가져갔다. 샌슨은 허리에, 난 어깨에. 그리고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완전한 긴 장상태를 유지한 근육. 모두들 완벽한 대응이었다. 우리는 매서운 눈으 로 그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영상은 우리들에게 말했다. "주문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퍽 한심스럽게 만드는 질문인데 그래. 이 질문을 듣고도 계속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나도 모르게 맥이 풀 려서 스르르 손을 내려버렸다. 샌슨은 이를 악물면서 낮게 속삭였다. "긴장을 풀게하고 덤빌 작정인지도 몰라. 조심해!" 난 정신이 퍼뜩 들어서 다시 바스타드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 카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특별한 주문은 없소. 식사시간은 아니구려." 그러자 그 남자의 영상은 고개를 조아리며 그럴 수 없이 다정하고 충성 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간단히 음료라도 대접해 드릴까요? 다과라도 준비할까요?" "아,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 준비 가능한 음식의 목록에는…" "아, 아니오. 뭐가 준비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오." 그러자 영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충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현재 보관 중인 재료의 목록에는…" "어, 그게 아니오. 부탁이니 내 말을 먼저 듣고 대답해주지 않겠소?" "네, 알겠습니다." 이런 지경까지 와서 긴장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더 우스웠지만 난 끝 까지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샌슨은 뒤통수를 긁적 거리더니 다시 편한 자세를 취했다. "야, 후치. 긴장 풀어라." 이잇! 나도 긴장을 풀고 똑바로 섰다. 제레인트는 앞으로 걸어가더니 신기해서 못견디겠다는 듯이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공중에 살짝 비치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었다. 제복으로 짐작되 는 단순하면서도 딱딱한 선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선량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점잖게 카알의 말을 기다리는 그 모습은 완전한… "시종이다." 그래. 맞아요, 네리아. 우리는 네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긋 하게 그 시종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가 먼저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어, 난 제레인트 침버라는 사람으로 테페리의 지팡이오. 당신은 누구 시오?" "원하시는 이름으로 절 부르십시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없나보군. 하긴 이건 필요성에 따른 영상이니까 특별히 개성을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음. 내가 묻겠는데, 이 곳의 주인은 누구요?" "이 곳의 주인은 접니다." "예?" "제가 이 주방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것 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명만 하시면 제가 즉각…." 카알은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 이 동굴과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냐고요." 그러자 시종의 영상도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겸손한 얼굴로 말했 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인은 한 분이시지 않습니 까?" "예?" "위대하신 드래곤 로드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드래곤 로드. 역시!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인트는 심호 흡을 하면서 말했다. "아, 그럼 여기는 대미궁입니까?" 시종은 갑자기 쌀쌀맞은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가 의 아한 표정이 되었을 때 카알이 말했다. "여보시오. 묻겠는데, 여기가 드래곤의 안식처, 카르 엔 드래고니안입 니까?" 시종은 즉각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영광된 이름이 이곳을 지칭합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 로드가 드워프들에게서 이 대미궁을 빼앗은 다음 그런 이름을 붙였다네. 그건 추악한 사기극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거론할 때가 아니로 군. 시종은 드래곤 로드에게만 충성을 바칠 테니 모두들 입을 조심하 게." 네리아는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 음. 우리는 가만 있을 테니 카알 아저씨가 말해요." 카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시종에게 말했다. "저희들은 그 위대한 드래곤 로드께 경배를 바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 니다만, 이 위용있는 모습에 감탄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군요."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카알의 말은 시종의 얼굴에서 동정의 빛이 떠오르게 만드는데는 성공했다. "아, 그러십니까? 안내자가 불성실했던 모양이군요. 전 미거한 주방 담 당인이지만 항상 그 오크들을 쫓아내고 인간이나 엘프들을 고용하자고 드래곤 로드께 상주했지요. 하지만 드래곤 로드께서는 그 추악한 피조물 들에게도 애정을 거두시지 않으시는 관대한 성품을 지니셔서…" "아, 예. 고충을 이해하겠습니다." 아하. 원래는 오크들이 이 대미궁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기로 되 어 있었나 보군. 그렇다면 저 시종이 말하는 안내자는 아마 하얀 백골이 되어 있겠군. 시종은 계속해서말했다. "예. 안내도 없이 이 최하층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충이 대단하셨겠군 요. 저 추악한 오크들을 대신하여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아, 테페리의 프리스트께서 함께 하셨군요. 그래서 이 아래까지 내려오 실 수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내려온다고? 어, 아차, 그렇지. 우리들은 통로가 바위로 막히는 바람에 수로로 들어왔었지. 그렇다면 우리는 지름길로 온 셈이군. 카알은 미심 쩍은 얼굴로 말했다. "고생이라니오? 음, 저희들은 별로 고생없이 이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 습니다만, 위쪽에 뭔가 위험한 것이 있었습니까?" 시종은 크게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여러분들께는 테페리의 가호가 함께 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 다. 이 윗쪽엔 저 욕심 사납고 추잡스러운 드워프들이 지독한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답니다. 드래곤 로드께서는 그 함정들을 침입자에 대한 징계 용으로 남겨두기로 결심하셨지요. 그것은 세련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 다. 허락없이 찾아드는 무례한 침입자들은 그 목숨을 내놓는 것이 당연 하겠지요. 하지만 골치 아픈 것은, 저 저능하고 미련스러운 오크들이 오 가다가 자주 함정을 작동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는 정말 카르 엔 드 래고니안 전체가 소란스러워집니다. 통로가 봉쇄되고 갈림길의 위치가 바뀌어버리니 참으로 곤란합니다. 땅강아지처럼 지하를 돌아다니는 드워 프들마저도 이곳을 대미궁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땅강아지라. 허헛. 우리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어버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마 엑셀핸드가 여기 있었다면 저 영상을 향해 무서 운 욕설을 뱉으며 배틀엑스를 집어던져버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카알은 웃지 않았다. 그는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가 빠르게 말했다. "저런, 그렇습니까? 이거 큰 일이군요. 사실 저희들의 일행 중 일부가 아직도 여기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함정이 있다면 정말 큰 일이군요. 미안합니다만 위로 올라갈 방법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저희들은 내려 오기는 내려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카알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 알은 넥슨 일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길이 아닌 곳으로 들 어와서 다행히도 함정을 피할 수 있었지만 넥슨 일행은 위쪽의 입구로 들어왔을 테니 이 시종이말하는 엄청난 함정들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 다. 제길, 큰일이군! 시종은 근심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습니까? 이런. 하지만 전 주방 담당인이라 이 곳을 나갈 수 없습 니다. 밖으로 나가서 통로 양쪽에 있는 가고일들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안내해드릴 겁니다." 통로 양쪽의 가고일이라고? 어, 미안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가고일은 이 미 세월의 풍상에 묻힌 존재일 거라고. 카알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이 좀 소심한지라 가고일에게 말을 거는 것이 저어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가고일에게 혹시 대화하기 편한 사람을 만 날 수 없냐고 물어보자 여기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저, 저 엄청난 거짓말 구사능력! 카알은 꼭 진짜처럼 이야기했고 그러 자 시종의 영상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러셨군요. 음. 어떻게 하지요? 전 나갈 수가 없는데." "말씀으로 설명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예. 음. 중앙 폭포 뒤편에 있는 통로로 내려오셨지요? 그 위에 있는 중앙 홀에서 가장 왼쪽 끝에 있는 통로로 가시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지나가는 오크들 아무 놈이나 붙잡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입니다. 아, 위압적인 어투를 쓰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오크들은 도저히 예의라는 것을 가르칠 수가 없는 놈이라서요. 그러한 피조물에게까지 차별없는 사 랑을 베풀어주시는 드래곤 로드를 다시 한 번 경하할 일입니다." 카알은 짐짓 고개까지 숙여보이며 말했다. "예. 정말 그러합니다. 친절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 있는 모든 기쁨을 느끼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희미하게 변하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우리 는 카알을 쳐다보았고 카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리아는 가느다란 눈 으로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 잘 하시네요?" 카알은 미소띤 얼굴로 말했다. "이왕이면 상대와의 의견 조절을 위한 자기희생능력이 충분하다고 말씀 해주시겠소?" 우리는 모두들 피식피식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우리들이 나오자 불 이 꺼지며 문은 조용히 닫혔다. 나는 횃불을 다시 높이 들었다. 네리아 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이름도 없는 영상, 참 불쌍하네요. 저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니 세 월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카알은 빙긋 웃었다. "그것은 영상일 뿐이오. 네리아양." "하긴 그렇지만." 이루릴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흐음. 원래 사람이라는 것이 좀 그래요. 이루릴.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7.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호수 옆을 따라 중앙 폭포라는 그 폭포로 걸어갔 다. 이 뒤에 통로가 있다고? 다가감에 따라 폭포소리는 굉음으로 바뀌었 고 수면에 그려지는 파문은 더욱 커졌다. 횃불빛에 비친 폭포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수많은 금실, 은실이 풀어 헤쳐지는 것 같다. 샌슨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폭포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폭포 뒤 를 바라보더니 곧 손을 들어 우리를 불렀다. 그쪽으로 걸어가보니 과연 폭포 뒷쪽으로 계속해서 길이 나 있었으며 거기엔 폭포의 물살로 숨겨진 통로가 보였다. 음. 이게 네번째 통로로군. 그렇다면 확실히 통로의 위 치는 팔각형이 맞는데. 네리아는 귀를 막으며 고함을 질렀다. "저 방들에는 안 가봐요?" 그러고보니 폭포 뒤쪽에 길이 있어서 왼쪽에 있는 세 개의 통로에도 걸 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역시 고함을 질렀다. "레니양을 먼저 찾아야 하오. 저 방들도 아마 무슨 창고들이겠지. 가 볼 필요는 없소." 네리아는 저기가 바로 창고이기 때문에 가보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음. 사실 궁금하기는 하네. 저 방들에는 과연 뭐가 쌓여 있을까. 그런 궁금증을 남겨두고는 우리는 폭포 뒤에 있던 통로 안으로 들어갔 다. 통로를 조금 걸어가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대한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잠시 후 층계참이 나타나면서 왼쪽에는 반대 방 향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다시 층계참이 있었고 왼쪽으로 중앙 폭포의 위를 지나가는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는 위치상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발 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물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다 리 건너편에는 다시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우리는 갑자기 넓은 홀에 서 있게 되었다. 홀 주위를 둘러싸고 기둥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기둥마다 무슨 조 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천장은 별로 높지는 않았지만 횃불을 비춰보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자취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그림인지 도저 히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리고 홀 바닥에는 먼지가 가 득 쌓여 있었으며 지저분하게 흩어진 나뭇조각, 천조각, 부러진 칼 조각 등이 보였다. 곳곳에 걸린 거미줄은 덩어리져 늘어져 있었다. 바닥은 온 갖 지저분한 것들이 기어다닌 모양이다. 벼라별 얼룩들과 무엇의 시체인 지도 구분하지 못할 썩은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이상하군. 여기는 확실히 300년은 묵은 느낌이 나는데." 카알은 먼지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카알이 말하자마자 푸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주춤하며 고개를 들었고 곧 복도 저편으로 날아가는 박쥐의 모습을 보았다. 샌슨은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아니, 어떻게 지하 동굴에 먼지가 이렇게도 많이 쌓여있지요?" "아마도 환기시설이 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그러한 환기구를 통해 외 부의 먼지들이 들어와 쌓였을 테고. 하긴 이런 지하에 환기 시설이 되어 있지 않는다면 큰일이겠군." 우리는 모두 샌슨을 따라서 손수건을 꺼내어 복면을 만들었다. 카알은 복면이 가장 안어울리는 얼굴이었고 두 아가씨들은 복면을 해도 예뻤다. 제레인트는 천장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그림은 왜 저리 훼손되어 있을까요? 이 아래에는 음식 재료 마저도 신선하지 않았습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래는 주로 창고로 이용되는 공간이라 보존의 마법을 부여한 것일 테지요. 우리가 들어온 수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아래는 대미궁의 최하층일 테니까 중요 물품을 보존하는 창고의 위치로는 적당하겠지요. 그리고 여기는 원래 거주 공간이라 그런 것을 걸어두지 않았고. 우리는 대미궁의 아래쪽에서부터 거꾸로 들어온 셈이군요." "음. 그렇군요. 그런데 가장 왼쪽 통로로 가라고 했던가?" "예." 우리가 올라온 계단 맞은편으로 긴 통로가 보였다. 그리고 왼쪽과 오른 쪽에도 긴 통로가 있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왼쪽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 바닥에는 원래 카펫이 깔려있을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형체를 짐 작하기 어려운 넝마가 깔려 있을 뿐이다. 먼지와 수많은 얼룩, 게다가 발자취가 덮이고 쌓인 모습,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더해져 거의 돌바닥 처럼 굳어있었다. 여름철에 들어왔다면 각종 곤충들과 뱀들이 우리를 성 대히 환영해주었을 듯하다. "저게 뭐야?" 샌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통로 앞쪽에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이루릴은 말했다. "유골입니다." 유골? 조금 더 다가가보니 과연 통로 옆벽에 기대어 앉은 백골의 모습 이 보였다. 내가 횃불을 가까이 비치고나서 우리 일행들은 유골을 조사 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오크의 유골이었다. 손을 대면 바스라져 버릴 지경이 지만 저 갑옷은 그런대로 원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오크식이었다. 두개골의 모양을 봐도, 손이나 발을 봐도 확실했다. 카알은 나직하게 말 했다. "여기가 대미궁, 드래곤 로드의 거처였으니 오크가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이 오크는 참 이상하군." "예?" "왜 통로에 죽어있지? 통로라는 것은 죽어있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지.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이 통로를 지나다니던 다른 오크들에게 걸리적거 렸을 텐데 왜 그대로 놔두었지?" "어? 그렇네요. 음. 뭔가 난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내분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상하군. 드래곤 로드가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는데." 그 순간 우리들은 모두 전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공간, 도대체 누군가 손본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통로와 홀과 계 단, 이 아래쪽의 창고는 보존의 마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도대체 누군가 현재 거주하는 꼴이 아니다. 제레인트는 이 광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을 빠르게 말했다. "우리는 드래곤 로드의 묘지에 들어와있는 것일까요?" "글쎄요. 수면기일까? 음. 어쨌든 현재 이곳은 전혀 관리되지 않았소. 그리고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서 어떤 내분 같은 것이 일어났을 수도 있 겠지요. 좀 더 둘러봅시다."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통로 양쪽에는 간혹 방이 보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었다. 우리들은 문짝이 떨어져나간 방안을 보고는 크게 의아해하게 되었다. 방안의 가구들은 모조히 없어져있었으나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로 사라 졌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오랜 기간에 걸쳐 불을 피운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원래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것으 로 짐작되는 가구들의 파편이 남아있었다. "가구를 부숴 불을 피웠군." 게다가 사방에 흩어져있는 모포 쪼가리들, 그리고 흩어진 취사도구들은 아무래도 야영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룩한 모포를 들춰보니 그 아 래에서는 오크의 유골이 우릴 보고 불평하듯이 턱을 달각거렸다. 물론 모포를 들어올리자마자 곧 부서져버렸지만. 그러니까 뭐냐? 이 공간 전 체가 한꺼번에 야만으로 돌아가버렸다는 말이렸다? 제레인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상하군요. 이 아래에 막대한 창고가 있었는데 왜 거기서 살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옹색하게 살았을까요?" "역시, 그 창고의 물건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네리아는 가슴을 쓸어내 렸다. 카알은 추리를 계속했다. "확실히 이곳은 관리되지 않았소. 이런 지하에서는 굶어죽기 쉽상이겠 지. 우선은 가구와 남아있던 물자들을 가지고 생활했겠지만 곧 물자는 바닥났고, 이 아래의 창고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오. 아래에 약탈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틀림없소. 어쨌든 그런 궁핍한 생활 끝에 모조리 대미궁 밖으로 달아나버렸겠지. 그 와중에 생긴 무정 부상태에서 살육이 있었을 테고." 우리는 어두운 기분을 느끼며 방 바깥으로 나왔다. 다른 방들도 몇 개 들여다보았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거의 모두가 횡뎅 그레한 공간이었을 뿐이고 어쩌다가 몇 개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 다.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네리아가 주워든 금화 하나뿐이었다. 금 화는 지금 사용되는 것과는 모양이 전혀 달랐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드래곤 로드 시대의 화폐로군. 우리가 배운 소중한 지식들 중엔 드래 곤 로드에 기인하는 것도 많지. 화폐 제도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지요." 이루릴의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그것을 튕겼다가 받 아내며 말했다. "이건 가져도 되겠지요? 음, 여기는 심한 약탈을 당했잖아요. 그래도 안전한 것을 보니 무슨 마법은 없겠지요?" "그렇겠지요." 네리아는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도 아쉬운 얼굴이었다. "에휴, 산더미 같은 금화 다 젖혀두고 겨우 금화 한 닢이라니." 우리는 피식웃으며 걸어갔다. 통로 끝에 도달하자 오른쪽으로 계단이 나타났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이었다. 카알은 일행에게 말했다. "자, 이 아래는 창고, 그리고 여긴 거주 공간이었으니 상관없지만, 이 윗쪽부터는 정말 대미궁일 거야. 모두들 조심하십시다. 그 영상이 말했 던 엄청난 함정이 있겠지." 그래서 선두에는 이루릴과 네리아가 섰다. 이루릴은 날카로운 눈이 있 었고 네리아는 나이트호크였으니까. 계단은 꽤 높았다. 그리고 계단을 다 올라서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은 크고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벽과 천장도 모두 마찬가지 였다. 횃불에 비치는 거무튀튀한 돌벽에는 장식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이 투박했다. 트롤이라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답답한 느낌이 앞섰다. 붉은 횃불빛에 물 든 회색의 돌은 구리빛으로 빛났다. 사방의 벽엔 거미줄이 흉하게 늘어 서 있었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이곳에서도 동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 다. 하긴 그러니 퇴락한 기분이 더욱 강하게 들었지만. "을씨년스럽네." 네리아는 중얼거린 다음 트라이던트를 앞으로 내밀어 사방을 툭툭 건드 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음. 세 갈래 길이라. 이래가지 고서야 제레인트에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 네리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왼 쪽길을 가리켰다. "무조건 왼쪽으로 꺽어요. 알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대거를 꺼내어 왼쪽 통로의 옆 벽을 긁어 동그라미를 그 렸다. 카알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무슨 기술이지? 왼쪽 통로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우 리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레인트는 멀 뚱히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말했다. "어느쪽으로 갈까요?" "모르겠는데요?" 뭐? 모르다니? 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여기는 완전히 다른 길이로군. 돌아나가세나." 음. 그런가? 우리는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서 다시 세 갈래 길로 돌아나 왔다. 그리고는 이번엔 다른 길로 들어섰다. 네리아는 또 들어가기 전에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어디가 어딘지 헷갈리게 되었다. 통로는 오직 통로였을 뿐 무슨 문이나 방으로 연결되는 공간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람. 두더지도 아니고 왜 쓸모없는 통로들만 여기저기로 뚫어둔 거지? 그야말로 들어온 사람 길 잃어먹게 만드려는 의도가 뻔뻔 스러우리만큼 드러나는 장소였다. 제레인트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나면 왼 쪽이다, 오른쪽이다, 모르겠다. 등으로 말했지만 주로 모르겠다는 대답 이 많았다. 그리고 세 갈래 길이 나타나면 네리아가 유쾌하게 기호를 새 겨대었다. 그녀는 처음 들어갈 때마다 기호를 새겼고, 만일 돌아다니다 가 기호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게 되면 기호가 없는 통로로 들어섰다. 이 건 한 번 가 본 장소는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러나 잠시 후 우리는 교차로에서 네 갈래 길에 모두 기호가 새겨진 광경을 보게 되었다. 네리아는 휘파람을 불며 그 중 하나에 다시 기호를 더한 다음 들어섰다. 샌슨은 드디어 못참고 말했다. "잠깐, 전부 다 가봤다면 왜 또 들어가는 거야?" "이 안쪽에 다른 갈림길이 있겠지, 뭐. 걱정 말고 무조건 기호가 가장 적은 곳으로만 다니면 돼. 넌 미로 빠져나가는 기초기술도 모르니?" "미로 빠져나가는 기술을 내가 왜 배워! 원참 머리 아픈 장소도 다 있 네. 도대체 이 넓은 공간을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야?" 카알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는 자를 경계하는 거라네, 퍼시발군. 그리고 과거엔 드워프들이 자신의 건축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미로를 만드는 풍조도 있었지. 인간들도 그런 풍조를 좀 답습했지만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미궁도 여기 대미궁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네. 마음을 단단히 먹게 나." 샌슨은 마구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처음 와보는 대단히 긴 통로에 접어들게 되었다.네리아는 멈칫 하더니 말했다. "길다. 무슨 기관 장치를 하기 적절한 장소야." 샌슨은 눈살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말했다. "기관?" "응. 뭐 밟으면 꺼진다든가 화살이 휙휙 날아온다든가 하는 그런 거 있 잖아?" "이거 지금 무슨 난롯가의 옛이야기야!" "옛이야기라면 옛이야기지. 우리는 300년이 넘은 미궁에 들어와 있다는 거 아직도 실감 못해? 300년짜리 이야기라고."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는 주의깊게 주위를 둘러보며 한 발 한 발 내딪으며 투덜거렸다. "히잉. 난 나이트호크라구. 자물쇠 기술자가 아니란 말이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컹, 덜컹! 갑자기 굉음이 울려퍼졌다. 네리아는 질겁하면서 물러났 다.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로 툭 건드리자 바닥이 갑자기 양쪽 벽을 중심 축으로 빙글 뒤집혔던 것이다. 바닥이 한 바퀴 휙 돌면서 잠시 아래의 시커먼 공간이 언뜻 보였다. 우리는 모두 잔뜩 굳어버린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은 조금 전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어느 불운한 희생자가 이 아래에 빠졌다 하더라도 흔적도 남지 않겠는걸. 네리아는 어깨로 숨을 쉬며 샌슨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샌슨에게 눈을 찡긋했지만 샌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자, 어느 정도의 폭일까?" 네리아는 다시 트라이던트로 바닥을 찔렀다. 그러자 바닥은 휘익 뒤집 히며 바람이 훅 일었다. 바닥이 뒤집힐 때의 크기를 보니 뒤집히는 부분 은 대충 6 큐빗 정도는 되는 거 같았다. "잠깐 기다려봐요." 네리아는 대거로 벽에 T라고 새겨두고는 뒤로 물러났다. 네리아는 뒤에 서 힘껏 달려오더니 함정 위를 뛰어넘어 정확히 함정이 끝나는 장소에 착지했다. 그녀는 땅에 닿자마자 몸을 굽히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우리 는 함정 이쪽에서 초조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트라이던트를 내밀어 주위를 찔러보았다. 벽을 찔러보고 바닥을 주위깊게 찔러본 그녀는 곧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2차 함정은 없네. 뛰어와요." 먼저 샌슨이 뒤로 물러나더니 멧돼지처럼 달려와서 뛰어넘었다. 꽈광. 샌슨이 착지하는 소리에 네리아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카알이 뛰 었으며 이루릴은 가볍게 떠가듯이 넘어갔다. 제레인트는 비참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던져줘." 샌슨은 제레인트를 잘 받아내었다. 제레인트는 땅에 내려서자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그러데 그렇다면 여기를 잘 아는 사람도 항상 이렇게 다녀야 되나? 그 거 정말 체력 단련에 도움되겠는걸." 네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길로는 안다녔겠지요. 하지만 우린 모든 길을 다가봐야 되니 어쩔 수 없고." 다시 지루한 미궁 답사가 계속되었다. 제레인트는 두 갈래 길에서 간혹 조언을 했고, 네리아는 세 갈래 이상의 길에서 계속 표시를 했다. 중간중간에 드디어 통로가 아닌 다른 것들도 나타났다. 간혹 넓은 광장 이 나타나는가 하면 계단이 나타나기도했다. 캄캄한 허공 속에 놓여진 다리를 건널 때도 있었는데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자 저 아래 까마득하게 물결의 일렁임이 보였다. 지하에 있는 중앙호수인가 보다. 높이 30 큐빗 쯤 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때도 있었는데, 사다리는 모든 종족 의 다리 길이를 고려한 것인지 단이 매우 조밀했다. 아직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지루해지고 기분이 나빠 진다. 우리는 눈먼 쥐새끼처럼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닥치는대 로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걷는 것만도 상당히 힘들었다. 지하에 묵은 공기들의냄새도 기분 나빴지만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공간인지 짐작도 되 지 않았다. 네리아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으응. 원래 넓기도 한데에, 이리저리 꼬아놓아서 더 긴 거야. 긴 실이 라도 꽉꽉 뭉쳐놓으면 작지? 그런 거야. 지하에 여기저리로 길을 뚫어놓 아서 길 모르는 사람은 굉장히 많이 걷게 만드는 거지."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8. 목적지를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전체의 여정을 머리 속에 그릴 수가 없었 고 그저 한없이 걷기만 해야 되었다. 게다가 언제 함정이 나타날지 몰라 긴장하고 있어야 되니 정신적으로 꽤나 피로했다. 횃불빛이 일렁임에 따 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우리 그림자들도 대단히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 고 있었다. 간혹 함정에 치어버린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장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져 복도를 막고 있 었다. 그리고 그돌 아래로 무엇인가의 다리뼈가 비죽 나와 있었다. 가 운데로 나와있는 꼬리뼈로 보아 아마 가고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닥에 뚫린 구멍의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별로 소 화에 도움될 듯한 장면은 아니었다. 아래에 삐죽삐죽 나와있는 쇠꼬챙이 들에 걸려있는 유골은 아마도 오크인 것 같다. 멍청한 녀석들! 왜 그러 냐고? 어떻게 같은 함정에 스물도 넘는 오크들이 빠져있느냔 말이야. "오크들은 어깨 위가 허전해서 머리를 얹고 다닌다고 하지?" 제레인트의 농담에 우리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우리는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영상이 말하던 무시무 시하다던 함정들은 별로 우리들의 위험이 되지는 못했다. 오크들이나 기 타 다른 몬스터들이 파손시킨 함정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갈래의 길에서는 제레인트가 대단히 많은 시간을 절약시켜주었다. 우리 는 원래의 최하층에서 꽤나 높이 올라왔다. 난 걸어가면서 카알에게 질문했다. "드래곤 로드가 이 대미궁을 차지한 것은 사기극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응? 아, 그것말인가? 말 그대로네." "역시! 내 예상대로 그건 사기극이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죠?"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오래 전, 드래곤 로드가 이 북부의 땅과 대륙의 거의 대 부분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지. 잘들 알겠지만 드래곤 로드는 같은 드래곤 들마저도 무자비하게 살륙하면서 그 철권을 휘둘렀지만 몇몇 자유스러운 종족들, 대표적으로 엘프와 드워프들은 건드리지 못했지.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드워프들은 지배당할 바에는 죽어버 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게다가 귀금속을 채취할 수 있는 능력에 서 드워프들을 따를 수 있는 종족은 없지않은가.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지금의 인간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엘프와 드워프들을 대할 수밖에 없 었다네. 믿을 수 없는 맹방이자 견제하지 않는 적." "믿을 수 없는 맹방… 견제하지 않는 적… 그럼 뭐, 결국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좀 어렵게 한 거뿐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드래곤 로드는 언젠가 드워프들에게 제의했지. 이 북 방의 땅에 아비스의 미궁에 대응하는 미궁을 건설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는 제안이었다네." "아비스의 미궁에?" "물론 오크들의 노동력과 드래곤 로드의 재화와 그의 권능을 투입하고 거기에 드워프들의 기술이 더해진다면, 신의 손으로 암흑을 봉인하기 위 해 만들어졌다는 저 아비스의 미궁에 상응하는 미궁을 건설하는 것도 불 가능하지 않아 보였던 게지. 미궁을 건설하는 것은 드워프들에게는 남다 른 긍지를 주는 일이었고, 또한 드래곤 로드는 그 미궁을 전폭적으로 노 커와 드워프들의 것으로 제공하겠다고 말했네. 그는 드워프들에 대한 선 의의 선물로서 그것을 제공하며, 그 댓가로 자신의 우방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네. 그것은 세련된 교섭으로 보였고, 그래서 드워프들의 노커 익시노아 크레벤은승낙했지." 또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되었고 네리아가 기호를 새겼다. 카알은 부드 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익시노아 크레벤은 드워프들을 설득하기 위해 퍽 고생했지. 드워프들 은 드래곤 로드와 조약을 맺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하지만 아비스의 미궁에 상응하는 대미궁이라는 것은 드워프들을 크게 유혹했 지. 사실 아비스의 미궁, 그토록 거대한 미궁이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은, 게다가 그것이 드워프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드워프 들에게는 끔찍한 치욕이었거든." "그게 치욕이에요?" "자네 정도는 새발의 피로 여기는 초장이를 만나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네드발군? 눈 감고도 초를 만들어낸다든가 하는 사람 말일세." "좋지는 않겠지요. 음. 알았어요. 그래서?" "결국 드워프들은 그 조건을 수락했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좋게 표 현해도 일종의 교만이지. 미망이라고까지 표현할 수도 있겠지. 지상 최 후의 감옥이자 슬픔과 고통만이 새어나오는 저 아비스의 미궁을 흉내낸 다는 것은 말이야. 어쨌든 그들은 승락했고, 정이 바위를 때리며 공사는 시작되었지. 하지만…" 카알은 갑자기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그 때의 정과 망치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부지런히 오가는 드워프들, 동굴 곳곳에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웃고, 노래하고, 휘파람 불렀겠지. 카알은 마치 그들의 솜씨의 흔적을 찾듯이 천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들은 오크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탐탁치 않게 여겼어. 물론 현실적으로 그 노동력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이 대미궁 의 공사는 처음부터 내재된 불안의 요소를 가지고 시작되었던 것이야." 제레인트는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카알의 이야기를 들었다. 샌슨은 퍼뜩 퍼뜩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경계하곤 했지만 어느새 카알의 이야기에 빨 려들어오고 있었다. 난 아예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카알의 이야기를 들 었지만. "길고, 어려웠지. 결국 완성은 되었지만, 그것은 지하에서 일어난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하고도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네. 결국 우리가 지금 걷고 있듯이 대미궁은 완성되었어. 그리고는 예정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배신이 있었지." 카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궁의 공사가 끝나고도 오크들은 나가지 않았네. 그들은 이 넓은 대 미궁 곳곳의 으슥하고 후미진 장소에 흩어져 살았지. 사실 완성에 50년 이 걸릴 정도였으니 그 동안 여기에 아예 거주하게 되어버리는 것도 당 연하다면 당연하겠지. 그래서 오크들은 이 곳을 그들의 은신처로 삼았고 그들의 지저분한 재화를 쌓아두는 장소로 활용했지. 그리고 동료들을, 글쎄, 그것도 동료라 할 수 있을까? 괴물들을 끌어들였지. 그리고 이곳 으로 운반되던 드워프들의 보물을 좀도둑질하기도 하고."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 카알이 말을 멈출 때마다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 만 울려퍼진다. "드워프들은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게 되었다네. 드워프와 오크들 서로간의 반목은 나날이 심해져갔고 드워프들은 드래곤 로드에게 항의했 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저 퉁명스럽게 말할 뿐이었지. 당신들의 집에 빌 붙어 사는 식객에 대해 나에게 따지지 말라는 태도였지. 사실 대미궁의 소유권은 전폭적으로 드워프에게 있는 것이잖은가. 그러니 드워프들은 자신의 집을 단속하지 못해서 이웃에게 투덜거리는 꼴이 되었다네. 게다 가 드래곤 로드로서는 선물을 준 것으로 모자라 뒷처리까지 해주어야 되 냐고 윽박지를 수도 있었지. 그러니 드워프들은 할 말이 없었지." 마침내 카알의 이야기에 빠져있던 제레인트가 발을 헛디디고 휘청거렸 다.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고 카알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리고 어느날,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는 이 지하의 어느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지. 그리고 비명 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오크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드워프들의 것이었네. 노커인 익시노 아 크레벤은 가장 먼저 살해된 드워프들 중에 하나였지. 반란이라고 표 현할 수 있을까? 글쎄. 그것은 손님이 주인을 내쫓는 격이었지. 폭동, 그게 정확할 듯하군. 드워프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지상 최고의 미궁 안 에 오크들과 가고일, 트롤, 코볼드, 놀 등과 함께 갇혀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 음울한 역사일세. 폭동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무려 1년이 걸 렸다고 하더군.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드워프를 몰아붙일 때는 빠져나갈 곳을 마련해두고 밀어붙인다고 하지. 궁지에 물린 드워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네. 그들은 이 대미궁의 곳곳을 모르는 곳이 없었고 모든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으니까." 카알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투쟁이었다네. 결국 드워프들은 대미궁에서 도망쳤다 네. 아, 물론 살아난 드워프들의 경우이지. 그리고 그 후로 이 대륙의 지하 곳곳에서, 혹은 지상에서도 드워프들과 오크는 피로써 피를 씻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지. 그리고." "그리고?" 카알은 야유의 뜻이 분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크들은 자신들로서는 이 거대한 대미궁을 감당할 수 없음을 겸허히 시인하고는 그들이 생각하는 합당하고 온당한 주인, 드래곤 로드 에게 바친 거지." "휴우.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군요. 결국 드래곤 로드가 그 모든 것을 배후조종한 것이군요?" "그렇다네. 50년에 걸친 사기극이지. 그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할까? 글 쎄. 그의 50년과 우리의 50년은 많이 다를 테니 우리의 경의는 모욕이 될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결국 드래곤 로드로서는 이런 대성곽을 소유하 게 되었고 껄끄러운 대상이던 드워프들은 매우 약화되었으니까 기분좋은 결말이었겠지."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뭔가 자신의 생각에 잡힌 모양이다. 그 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엄숙한 기분을 느꼈다. 검붉은 횃불빛에 물 든 지하 동굴에서 듣는 낮게 울려퍼지는 카알의 목소리는 옛시대에서 그 대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네리아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다시 앞 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우리는 또다른 갈림길을 마주쳤다. 네리아는 주 위를 둘러보며 표시를 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놀란 목소 리를 내었다. "이게 뭐야?" 우리는 네리아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벽에 누군가가 숯으로 동그라 미를 하나 그려놓은 것이다. 샌슨은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보다가 말했 다. "이게 뭐야? 네리아, 너 칼로 긁어놓지 않았어?" "물론이야! 그리고 난 이렇게 크게 그려놓지 않았다고. 이게 도대체 뭐 지?" 카알은 그것을 보더니 곧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됐군! 지금 이 대미궁 안에 들어와 있고, 또 표시를 함으로써 길을 찾 으려 애쓰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확실하지. 이건 넥슨 일행이로군." 제레인트는 기운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나 봅니다. 아,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들어왔지요?" "그래요. 아마 위쪽에는 더 많은 미궁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어쨌든 그 사이에 여기까지 온 거요. 이 표시를 따라갑시다." 우리는 부쩍 기운이 났다. 이제서야 넥슨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숯으로 표시된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콰광! 우르르르-룽! 갑자기 동굴이 울렸다. 우리는 제각기 벽을 짚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 다. 지나고보니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일이라 놀 라버린 것이다. 네리아가 말했다. "뭐, 뭐지? 이게 무슨 소리지?" 샌슨은 말했다. "동굴 어디가 무너지는… 것 같은데?" 카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서두릅시다!" 우리는 모두 무기를 뽑아든 다음 빠르게 걸어갔다. 벽에 비치는 우리들 의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뒤로 사라져갔다. 또 하나의 갈림길, 우리들 이 잠시 주춤하고 있을 때 제레인트가 먼저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네리 아는 급히 대거로 벽을 긁어놓으며 그 뒤를 따랐다. "서두르지 말아요! 여긴 미궁이라고요!" 네리아의 말에 제레인트가 주춤했다. "우리들도 길을 잃어버리면…" 쾅쾅콰광! 다시 육중한 진동음. 이번에는 퍽 가까웠다. 우리는 귀를 막고 벽에 기 대어섰다. "이게 도대체 뭐야? 여기 드래곤이 들어오기라도 했… 허어억?" 샌슨은 자신의 말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우리들은 질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샌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설마, 아니겠지? 드래곤 로드가…" "빨리!" 카알의 재촉이었다. 우리들은 황급히 앞으로 걸어갔다. 설마 우리가 들 어온 것을 깨닫고 드래곤 로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동굴이 이렇게… 꽈르르릉! 우리는 쓰러질 듯 흔들리며 힘겹게 앞으로 나갔다. 다시 세 갈래 길. 우리는 황망하게 좌우를 둘러보았고, 네리아는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네리아가 가리킨 곳에는 역시 숯으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있었다. 우리 는 그쪽으로 접어들었다. 횃불을 든 채 달리려니 불티가 얼굴로 튀었다. 미치겠는걸. 탁탁탁탁탁! 우리들이 모두 빠르게 달려가자 제레인트는 뒤 로 처지기 시작했다. 앞에 푹 꺼진 구덩이가 보였다. 네리아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뛰어넘었다. 또 망가진 함정인가? 우리들 모두 그 위를 휙 휙 뛰어넘었다. 내가 뛰어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레인트가 뛰어넘었 을 때였다. 쾅쾅! 난 뒤를 돌아보았다. 흔들림 때문에 제레인트는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의 몸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 난 있는 힘껏 그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덕분에 나와 제레인트는 구덩이 반대편으로 뒹굴고 말았다. "헥, 허억! 고마워, 후치." "아, 다행이에요. 휴우." 제레인트에게 깔린 채로 나는 히죽 웃었다. 그 때 고개를 들어올린 제 레인트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가각!" 뭐지? 난 재빨리 누운채로 몸을 뒤집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면의 갈림길에서 벽이 무너져 있었다. 조금 전의 충격은 저 벽이 무 너진 것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벽돌들이 힘없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 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 무너진 구덩이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우리는 모두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끌어내렸다. 먼지 때문에 숨도 못 쉴 정도였지만, 우리는 복면을 끌어내리고 구멍으로 걸어나온 사람을 바 라보았다. 당연히 만나리라고 예상한 자였기 때문일까? 제레인트와는 달 리 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샌슨은 이를 갈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 구멍으로 걸어나온 것은 넥슨 휴리첼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마부녀석 과 그 녀석에게 붙잡힌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레니는 우리들을 보더니 곧 비명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후치! 후치!" 마부는 사나운 동작으로 레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의 손이 빠 르게 움직이며 레니의 목에는 롱소드가 겨누어졌다. 레니는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우리들 을 보자 놀라며 대거를 뽑아들었는데 우리가 아는 얼굴이었다.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에서 보았던 청년 쟈크였다. 그는 네리아를 보고는 놀랐다. "어라? 누님?" 그러나 그는 곧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넥슨은 우리들을 바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 쳤다. "멍청한 새끼! 그 잘난 OPG로 미궁을 부수고 다녔군! 두더지 같은 놈! 네놈 때문에 수많은 밤의 신사들이 이 별빛마저 낯선곳에서 개죽음을 당했어! 그리고 너 쟈크! 이런 놈을 끝까지 따라다녔단 말이야!" 쟈크는 창백한 얼굴로 발뺌하듯이 말했다. "마스터니까. 그리고 난 길드원이고. 어쩔 수 없잖아." "잘 한다, 잘 해! 그래서 이런 녀석을 끝까지 따라다녔단 말이지? 길드 원들을 모조리 사지로 끌고 온 이런 녀석을? 길드 일 때문에도 아니고, 시커먼 자기 뱃속 때문에 너희들을 끌고 다니는 거라는 것을 몰라!" 청년 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목소리를 죽이며 으르렁거렸 다. "동그라미는 네가 그렸지?" "응." "그런데 갑자기 왜 벽을 부수고 난리지?" "마스터께서… 길 찾기 귀찮으시다고." 저 녀석도 상황 판단을 못하는 축인가 보군. 넥슨이 바이서스의 배반자 든 쫓기는 입장이든 신경쓰지 않고 한 번 마스터면 끝까지 마스터로 모 신다는, 마스터의 성격이 어떠냐 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권위에 복 종하는 그런 성격인 모양이군. 도둑들은 약삭빠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넥슨 일행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역시 세 명이었나 보군. 없 어진 OPG는 모두 2개. 나는 마부와 쟈크의 손을 빠르게 보았다. 역시 그 두 명이 OPG를 끼고 있었다. 아무리 오우거라도 이런 돌벽은 부수지 못 하겠지. 하지만 세 명이나 되니까 돌벽도 부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젠 장. 만만치 않겠는걸. 샌슨과 나, 네리아는 완전히 긴장한 채로 앞을 쏘 아보았다. 넥슨은 서늘하게 웃으며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넥슨은 입을 열 었다. "너희들은, 내 적인가?" "그럼 우리가 네 친구냐!" 샌슨은 마주 고함을 질렀다. 넥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적인가 보군. 그런데 이곳까지 날 따라온 것을 보니 대단한 친구들인 가 본데. 아니면 나에 대한 원한이 엄청난 것일지도." 그럼, 그럼 우리가 네놈에게 원한 말고 무슨 감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이 야! 난 입이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대신 넥슨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나 넥슨은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저 아가씨의 애인이라도 죽였나 보군. 애인이 밤의 신사였나?" 우리는 모두들 한꺼번에 뒤통수를 두드려맞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무 슨 말이야? 넥슨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틀림없이 쓸만한 녀석이었겠지. 난 멍청한 녀석은 적이라도 죽이 지 않아." 넥슨의 옆에 있던 마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넥슨에게 안타까운 표 정을 보내었다. 넥슨은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의 얼 굴은 마치 백치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미안해. 과거를 돌이키면 머리가 아파."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희다… 이런 기분, 너희들은 알 수 있을까? 달도 별도 없는데 하얀 밤 하늘을 보는 기분이야.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그래, 어떤 녀석이 었지? 그 밤의 신사라는 작자는?" "뭐라고?" 네리아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다가 쟈크를 바 라보았다. 쟈크는 침울한 얼굴이었다. 넥슨은 키들키들 웃더니 야유의 의미가 분명한 제스춰로 허리를 숙여보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소개하지. 내 이름은 넥슨 휴리첼. 당신들의 이름을 알려주겠어?" 저 자식이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건가? 그 때 카알이 낮게 말했다. "침버씨의 추측이 맞았군. 당신, 자신을 죽여버림으로써 기억을 잃었구 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19. 넥슨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카알을 바라보았 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가련한 자. 또다른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모조리 죽여버렸 군. 그리곤 그 댓가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잃으셨군." "너… 넌 누구냐! 어떻게 알고 있지! 넌 나의 뭐였어!" 카알은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말이오? 난 아무도 아니오. 당신이 나에 대한 기억을 잃은 순간 난 당신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소. 하지만 굳이 알고 싶다면 말해 드리지. 난 카알 헬턴트. 거기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쫓아 당신을 추격 하던 사람이외다." 넥슨의 눈이 더욱 번질거렸다. 그는 사납게 롱소드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렇군. 네놈들은 할슈타일의 개들이로군. 아니, 바이서스 왕가의 개 인가?" 넥슨은 앞으로 척척 걸어나왔다. "누구라도 상관없어. 나에게 방해된다면 죽일 뿐이고, 그렇다면 너희들 에 대해 알 필요가 없지. 죽어랏!" 넥슨은 걸어나오던 그대로 선두에 섰던 네리아를 후려쳤다. 무슨 기법 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걸어와 후려치고 있었다. 그래서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채챙! 내가 그의 검을 막았다. 샌슨, 제자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까불지 마!" 난 그의 눈을 쏘아보며 힘껏 밀어붙였다. 넥슨은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 나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넌 뭐냐, 어떻게 내 검을 막았… 그거! 내 장갑!" "내 장갑? 웃기고 있군. 이 자식아! 네가 내게서 뺏어간 것이잖아!" 넥슨은 다시 백치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얼떨떨하게 날 내려다보았 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교활한꼬마 같으니라고!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날 속이려드는 거냐?" 그 때 마부가 황급히 그를 잡아당겼다. 마부는 어느새 레니를 쟈크에게 건네어주고 다가왔던 것이다. 넥슨은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우리들도 뒤 로 물러났다. "왜 그래, 하슬러?" 맙소사. 정말 이름이 하슬러(Hostler)였나? 그럼 우리는 지금껏 저 친 구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고 있었군. 샌슨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 슬러는 넥슨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 꼬마의 말이 맞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군. 차갑고 고저가 없는 저음이었다. 넥슨은 혼 란스러운 표정이 되어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저런 꼬맹이의 물건을 뺏었다고? 내가 그런 녀석이었어?"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들은 모두 끈질기고 지독한 녀석들입니다." 우리는 이 평가에 대해 심히 불쾌했지만 아무 말 없이 넥슨을 바라보았 다. 넥슨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하슬러를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으며 하슬러에게 외쳤 다. "빌어먹을, 저건 엘프잖아! 난, 난 엘프의 적이었나?" "그렇습니다." "모르겠어… 제기랄! 그럼 저프리스트는 또 뭐야? 난 프리스트에게도 쫓기는 작자였었나?" 제레인트는 자신을 지적하는 넥슨의 손가락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슬러는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넥슨은 악에 받힌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기억나지 않아! 제기랄, 난 뭐였어? 내가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던 건가!" 하슬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넥슨의 눈 주위의 근육들이 떨리는 것이 보 였다. 그는 외쳤다. "말해라, 하슬러! 저 놈들은 내 방해물인가?" "그렇습니다." 넥슨은 다시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좋아, 그럼 아무 상관없어. 엘프든 뭐든, 그래. 하! 유피넬의 어린 자 식? 웃기는군. 진실과 선과 미덕은 글쟁이의 펜 끝에만 있는 것, 그렇다 면 내가 글쟁이를 고용하면 돼! 그럼 내가 진실이며 내가 선이며 내가 미덕이 되는 거지. 프리스트? 잘난 제단에 경배를 표하지. 엘프든 뭐든 다 덤벼! 다들 죽여버리겠다. 그럼 되는 거지!" 그러면서 넥슨은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제레인트는 움찔하면서 물러났 자만 샌슨은 기죽은 태도도 없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식아, 너 혹시 다리에 상처 없냐?" 넥슨은 멈칫 하더니 곧 무서운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네 놈의 소행이냐?" "그렇지. 너 그 때 내게 죽을 뻔한 거 기억 안나나 보군.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주지." 그러면서 샌슨은 롱소드를 넥슨의 가슴으로 겨냥했다. 넥슨은 흠칫거리 며 다시 고개를 돌려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저… 저 녀석들, 그렇게도 강한가?" "말씀드린대로 무섭고 끈질긴 녀석들입니다." 넥슨은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제기랄… 제기랄! 그런데도 생각이 안나! 생각이! 텅 비었어! 머릿속 이고 뭐고 모조리 비었어! 너무 희다. 너무 하얗단 말인다! 제길, 제길, 제길! 도대체 내가 뭐야! 내가 뭐냔 말이야!"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하던 넥슨은 갑자기 광기어린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흘러넘치는 빛에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 같다. 그 러나 카알은 차분히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당신과 관계된 인물이오. 우리를 죽이고 싶소? 그래서 떠오르지 않는 과거를 그냥 묻어버리고 싶은 거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당신과 만나게 될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오?" 넥슨은 움찔하더니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핫하하! 당신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날 여 러 번 화나게 했을 거 같군. 이름이 카알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네." "죽어랏, 카알!" 넥슨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이번에도 내 검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네리아가 사납게 트라이던트를 찔러왔다. 넥슨은 다시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동작들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이상하군, 조금 전의 공격들 이 계속 막히는 것도 그렇고, 또 네리아의 공격을 피하는 저 동작도 그 렇고. 우리 둘은 그대로 앞으로 돌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레니를 붙잡고 있던 쟈크가 사나운 고함을 질러 우리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서툰 짓 하지 말아요, 누님!" 네리아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잘 하는 짓이다! 네녀석이 그러고도 밤의 신사야? 아무런 무장도 없는 젖내나는 계집애를 붙잡고 날 협박해? 엉?" 쟈크는 어깨를 크게 들썩거리며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제기, 나도 좋은 기분은 아니야. 계속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마." 네리아는 가만히 선 채로 쟈크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나는 넥슨을 쏘아 보았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완전히 초보는 아니고, 대충 알겠군." 넥슨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이냐?" "너, 검술도 잊었군?" 넥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자식!" "그렇군. 분열된 넥슨들 중에서 검술을 기억하던 넥슨은 죽은 모양이 군. 아니, 지금 칼 쥐는 것이나 흔드는 것을 보니 그 중 일부를 잊어먹 었군. 하지만 검술이라는 것이 일부만 기억해서 되는 게 아니지. 다리 놀리는 것은 완전히 잊어먹었군? 가장 중요한 것인데 말이야."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넥슨은 그런 샌슨을 시선 으로 꿰뚫어 죽여버릴 태세였다. 샌슨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꽤나 여러 번 분열되었나 보지? 하긴 그렇게 많은 인원이었니까. 하지 만 이상한데? 검술 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 그 요체를 기억하는 넥슨이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닌가? 왜 너처럼 모자라는 녀석이 살아남았 지?" 놀라워! 샌슨이 저렇게 날카롭게 지적하다니. 우리는 모두 입을 벌린 채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갑자기 움찔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하슬러를 바라보았고, 그 러자 카알은 재빨리 말했다. "하슬러, 저 자가 그 넥슨들을 죽였군?" 넥슨은 마치 몰리는 짐승처럼 카알을 바라보았다가 하슬러를 바라보았 다를 반복했다. 그의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에는 어느새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슬러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주인님. 당신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며 나에게 살려달라고 말했고, 다른 넥슨을 모두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군. 하지만 그거야 저 샌슨이 하슬러의 기억을 가졌다는 단순한 우 연 때문이지. 그런데 하슬러 저 작자는 그 작은 이유만으로 주인과 똑같 은, 아니 또다른 주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단 말인가? 무서운 작자로군. 하슬러의 말을 들으며 넥슨은 벌벌 떨었다. 그는 그의 일부, 아니 그 자신을 죽인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의 충성스러운 종복 이 그를 죽였던 것이다. 그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러자 하슬러 는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넥슨은 하슬러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주인님." "제기랄… 그래, 하슬러…" 넥슨은 흐느끼듯 말했다. 하슬러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고 넥슨은 이 를 악물어가며 말했다. "제길, 그래. 이왕 이렇게 되어버렸어. 이젠 돌이킬 수도 없어. 내게 남겨진 것은 나의 조각뿐이야. 그래, 가는 거야. 그것 이외엔 없어. 내 게 남겨진 가장 작은 조각, 그걸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 어. 난 바이서스를 멸망시킬 거야.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 어!" "가장 고약한 부분이 살아남았군…"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넥슨은 카알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런,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건 벌레만도 못해. 먹이를 향해 나아 가는 것, 적을 피하는 것밖에 모르는 벌레야. 그래? 그렇다면 난 벌레가 되겠어. 그렇다면 벌레의 가치관에 따라, 벌레의 철학에 따라 움직이겠 어! 충실한 벌레가 되겠어! 바이서스라는 먹이를 먹어치우겠어!" 카알은 음울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왜지요? 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겠다는 거요?" "그것 외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이유를 묻지 마! 고귀하신 인간께서 벌레에게 무슨 이유를 묻는 거냔 말이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천치로군!" 카알은 씹듯이 말했다. 넥슨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잊혀진 것은 과거일 뿐이오. 당신은 현재를 살고 있고, 그리고 미래는 오지 않았소.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앞으로 가질 수 있는 많은 것 들이 남아있단 말이오. 왜 그걸 못보는 거요!" 넥슨은 목울대를 울렁거리며 카알을 노려보았다. 카알은 차분하지만 강 하게 말했다. "검을 버리시오, 넥슨 휴리첼! 차라리 잘된 일이오." "뭐야?" "과거를 잊음으로써 이제 과거는 당신과는 별개의 것이 되었소. 당신은 바이서스에 대한 증오만 기억할 뿐 그 이유는 잊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이유없는 증오를 버리시오. 그것 외엔 아무 것도 없다고? 그렇다면 새로 운 것을 받아들이시오. 다시 자신을 만들면 돼오. 이해할 수 없소? 우리 들도 당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를 추궁하지는 않겠소. 그건 없어진 것이오. 우리는 이제부터의, 지금부터의 당신만을 받아들이겠소." 넥슨의 눈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고개를 약간 떨군 채 카 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도 말하는군."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남의 일이지. 하지만 당신의 그 이유없는 증오, 그걸 폭발시켜 버리고 나면 당신에겐 뭐가 남겠소? 당신은 이유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고 나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소? 어림없지! 적어도 그것은 짐작할 수 있어. 그리고 나서 무엇을 할 생각이오!" 넥슨의 얼굴 근육이 일제히 풀어져버렸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무엇을 하냐고? 그리고 나서… 무엇을?" "그렇소. 당신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는 그 증오를 불태우고난 다음엔, 그 다음에 당신은 뭐란 말이오? 당신은 조금 전 조각이라고 말했소. 바 이서스를 증오하는 넥슨의 조각, 그 조각의 사명을 완수하고 난다면 당 신은 뭐냔 말이오?" 넥슨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카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카알 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의 촛점은 전혀 맞지가 않았다. 그는 허공을 바라 보며 흐느끼듯 말했다. "조각의 사명을 완수하고 나면? 그럼 아무 것도 없지." "그렇소! 당신은 다시 넥슨이 되어야 하오. 완전한 넥슨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비뚤어진 증오심외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넥슨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냔 말이오? 그것마저 버리시오! 그것은 당신 아닌 다른 넥슨, 과거의 넥슨의 파편일뿐이오! 이제 당신은 새로운 넥슨이 되어야 하오. 과거의 파편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파편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소! 그건 당신의 몸에 박힌 과거의 가시 같은 것이오, 빼서 던져버리 시오!" 넥슨은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는 초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슬 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주인의 등을 쳐다보았고 그 뒤의 쟈크는 불안 한 시선으로 여기저기를 쳐다보았다. 쟈크에게 붙잡혀 있는 레니는 과도 한 흥분에 까무러칠 듯한 표정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넥슨은 얼굴을 들었다. 갑자기 그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좋은 말을 들려줘서 고맙군. 널 죽이겠어."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0. 카알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넥슨은 하얗게 웃으며 즐거운듯이 말했다. "죽이겠어, 너도, 그 옆의 다른 녀석도, 그래. 하하하! 너희들은 내 과 거와 관계된 녀석들이야. 과거의 난 죽었어. 난 과거를 잃었는데, 이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우주인데, 왜 사라진 과거의 인물들이 나의 지금 에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들지? 제기랄! 난 없어졌어! 그런데 왜 너희들 은 거기 서서 날 바라보냔 말이다!" "넥슨 휴리첼!" "그것마저 버리라고! 가진 자의 위선들도 이것보단 덜 뻔뻔하겠군. 그 것마저 버리라고! 왜 목숨마저 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 거냐!" 갑자기 횃불빛마저도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울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그는 상처입은 야수처럼 포효했다. "그것마저 버리라고! 망해버린 상인에게 말해보시지? 남겨진 마지막 재 산마저 버리라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라고!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여인에게 말해보시지? 하나 남은 젖먹이 아들마저 버리라고! 그리고 새 로운 가정을 꾸며보라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 를! 내가 자살해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를 버리라고?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라고? 이, 추악한 위선자!" 카알은 음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넥슨은 갑자기 손을 뻗어 카알을 가 리켰다. 카알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넌 무엇을 버렸어?" "뭐요?" "넌 지금의 네가 되기 위해 무엇을 버렸냐고?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망각했나! 네가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죽어버린 부모 에 대한 기억이 필요없다고 해서 버렸나? 사랑하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 이 필요없다고 버렸나? 지금의 네가있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버렸느냔 말이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소. 추억은 모두 소중하지." 넥슨은 불타는 눈으로 카알을 노려보며 발악했다. "난 그 모든 것을 버렸어! 아니, 뺏겼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빌 어먹을 숲이 내게서 뺏아갔지! 그런데, 그런데 나에게 남아있는 하나마 저 버리라고? 새로운 내가 되라고? 왜? 그렇다면 왜 넌 새로운 네가 되 기 위해 그것들을 버리지 않았느냐! 엉?"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난 그 추억들을 다룰 수 있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소. 당신 처럼추억 때문에 자신을 소진시켜버리려 들지는 않소. 난 현재를 살아 갈 줄 아오." "가졌으니까! 넌 과거의 널 모조리 가졌으니까 현재를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가진 과거는 하나뿐이고, 따라서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도 오로지 하나뿐이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마치 눈 먼 말 같은 사람이 되었군. 방향도 모른 채 계속해서 달리거나, 아니면 멈춰서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젠 비난하는가? 말문이 막히니 날 비방하는가? 과거를 가지지 못했 다고, 반편이 인간이 되었다고 날 비난하는 것이냐!" 카알은 찌푸린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왜 들어왔소?" 넥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금까지의 분노을 잠시 잃으며 당황해했다. "뭐라고?" "그게 계속 궁금했지. 당신은 아직까지도 바이서스를 파멸시키겠다는 생각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테니, 대답해보시오. 당신은 왜 갈색산맥으 로 가서 크라드메서를 만나려 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거요?" 넥슨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눈을 굴렸다. 그는 어지러운 듯이 머리를 휘젖더니 말했다.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 아, 그렇군. 저 계집애의 드래곤 말인가? 물론 그 드래곤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드래곤을 이용하여…" "그런데 여기는 왜 왔느냐는 거요?" 넥슨은 이상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드디어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넌 그것을 모르는 거야? 왜 모르지? 모르면서 날 쫓아온 것인가?" 그러자 하슬러가 조용히 말했다. "저들은 그저 이 계집애를 되찾기 위해 우리들을 쫓아왔을 겁니다." 넥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내가 설명해 줄 이유는 없군. 모르는 채로 죽도록." 샌슨은 고함질렀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해봐! 기억을 잃었으니 말해주지만, 넌 항상 우 리들에게서 도망다녔어! 바이서스 임펠에서는 저 이루릴양 앞에서 도망 쳤었고 델하파에서는 내 검 앞에 도망쳤었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랬었나? 알았어. 복수해주지." 넥슨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나오려 했다. 그 때 하슬러가 넥 슨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무익한 일입니다. 저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놔라, 하슬러! 저 놈들을 죽일 거야!" 하슬러는 넥슨을 우울하게 바라보다가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러나라. 저 소녀의 목숨이 아깝다면." "개자식!" 샌슨은 고함을 질렀지만 하슬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올렸으며, 그러자 레니를 붙잡고 있던 쟈크가 대거를 바싹 당겨대었 다. 하슬러는 말했다. "내가 손만 내리면 저 계집애는 죽는다. 무기를 놓고 물러나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슬러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제기랄. 하지만 이 좁은 동굴에서 무기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도망갈 곳도 없 는데, 얌전히 죽으란 말인가? 그 때 네리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쟈크!" 순간 쟈크는 불안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말했다. "넌 아냐." 쟈크는 불안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넥슨은 사납게 고개를 돌 려 쟈크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쟈크는 움찔거렸다. 하지만 네리아는 계 속 말했다. "넌 아냐. 넌 단순히 깃발 날리고 싶은 욕심밖에 없는 철부지야. 넌 사 람들을 좋아했고 나처럼 잘 싸우고 싶었고 우쭐해하고 싶었던 착한 바보 녀석일 뿐이야. 너, 너 정말 그 소녀를 죽일 수 있어? 그 시체더미에 너 의 모습은 없었어! 넌 자신을 죽이지 않았던 녀석이야. 그러니까 다시 하나로 합쳐졌겠지. 그런 네가 정말 그 가련한 소녀를 죽일 수 있어?" 쟈크는 멈칫거렸다. 그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마스터의 명령이라면…" "닥쳐! 네가 어린애야? 마스터의 명령이 어째?" 쟈크는 더욱 우물거렸다. 넥슨과 하슬러는 모두 쟈크에게 매서운 눈을 보내었다. 우리들 모두도 손을 축축히 적시는 땀을 느끼며 그 광경을 바 라보았다. 넥슨이 우리들쪽으로 돌진해왔기 때문에 넥슨과 하슬러는 쟈크와 꽤 많 이 떨어져 있다. 만일 쟈크가 레니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쟈크에게 돌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을 덥칠 것이다. 반면 쟈크가 레니를 죽이겠다고 굴면 우리들로서는 속수무책이다. 넥슨과 하슬러를 뚫고서 레니를 구출할 수가 없다. 결국 이들 두 무리의 운명이 쟈크의 심중에 따라 결정되게 된 것이다. 쟈크는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 때 레니가 부들거리는 입술을 열었 다. "쟈크 오빠…" 쟈크는 질린 얼굴로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흐느끼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흑, 으흑. 예? 제발 살려주세요…" 쟈크는 주춤거렸다. "어… 이런, 입닥쳐!" "제발… 죽고싶지 않아요… 제발…" 모두들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으로 레니의 흐느낌이 울려퍼졌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아빠를 만나고 싶어요… 아빠가 절 기다리실 거 에요. 제발, 제발 쟈크 오빠… 살려주세요." "입 닥치란 말이다!" 쟈크는 고함을 질렀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때 갑자 기 넥슨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쟈크는 멍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고 레니마저도 숨을 죽였다. 넥슨은 걸어가며 말했다. "날 배신하려는 거냐?" 쟈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시오!" 넥슨은 멈추어섰다. "그래… 배신하겠다는 말이로군?" 쟈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튀어나갔다. "멈춰, 넥슨!" 그러나 곧 하슬러의 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눈 앞이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내 바스타드와 하슬러의 롱소드가 공중에서 엇갈렸다. 난 고함을 질렀다. "샌슨! 넥슨을 잡아! 이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하슬러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하슬러 역시 OPG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묘히 손목을 뒤틀었으며 그러자 곧 내 바스타드가 미끄 러지며 난 앞으로 휘청거리고 말았다. "후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네리아의 트라이던트가 찔러 들어왔다. 날 노리던 하슬러는 물러났으며 간신히 내 목이 달아나진 않았다. 난 앞 으로 휘청거린 김에 아예 몸을 쓰러트리며 하슬러의 다리를 노리고 후려 쳤다. 하슬러는 다리를 살짝 들어 피했다. "거기 서라! 넥슨!" 샌슨이 달려갔다. 그러나 넥슨은 샌슨을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기합을 지르며 쟈크에게 달려들었다. "둘 다 죽여버리겠어!" 그 때 난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카알의 손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이 좁은 통로에서, 이 많은 사람들 사이로? 카알! 미쳤어요? 쉬우우웃! 달려가던 넥슨은 덜컥 멈춰서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 네리아, 샌슨, 하슬러의 네 명이 난동을 부리는 사이로,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날 아간 화살은 넥슨의 등을 맞추었다. 네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 다. "달아나! 쟈크, 달아나! 그 소녀에게 아빠를 만나게 해줘!" 쟈크는 이 모든 광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멍하 니 멈춰서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OPG를 낀 그의 팔은 레니를 단 단히 붙잡고 있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찢어질 듯 외쳤다. "마스터를 건드리지 마!" 모든 사람들의 동작이 멈춰졌다. 쟈크는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화살을 맞고 무릎을 꿇은 넥슨마 저도 꼼짝을 하지 못했다. 마치 어린 꼬마들이 싸움을 벌이다가 어른의 고함소리에 놀라 멈춰서는 형국이었다. 우리는 초조하고 불안한 눈으로 쟈크를 바라보았다. 쟈크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며 힘겹게 말했다. "젠장! 계집애 하나 때문에! 계집애 하나 때문에 다 포기할 순 없어! 난 쟈크야! 쟈크 3대의 마지막 쟈크라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모두 죽 었어!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다고!" 무슨 말이야? 그러나 네리아는 음울하게 말했다. "반란자의 수하였으니까…" 그랬었나? 우리들이 바이서스 임펠을 떠나고나서, 그렇겠군. 궁성 경비 대가 총출동하여 반란자 색출에 나섰을 테지? 우리는 질린 표정으로 쟈 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리아는 아직 포기하지 않는 듯했다. "그건 다 저 녀석 때문이야! 귀족 주제에 길드를 집어삼키고 밤새들을 반란으로 끌어들인 게 누구야! 그리고 이 숲까지 끌고와서 생존자들마저 도 다 죽여버린 게 누구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해 봐!" 쟈크는 갑자기 음울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 당신 입술이 항상 탐났었지." 네리아는 굳은 얼굴로 쟈크를 바라보았다. 쟈크는 힘겨운 목소리로 말 했다. "말을 참 잘해. 제길. 그렇다면?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 럼 밤새들은 떳떳한 바이서스의 국민이라는 말이야? 우리가 반란을 일으 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밤일을 할 수 있기라도 하냔 말이야?"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쟈크는 무서운 눈으로 우릴 쏘아보며 말했 다. "마스터는 약속했어.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평생을밤일해도 절대로 훔 칠 수 없는 거. 떳떳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약속했다고! 제길, 나도 한 번은 윗대가리에 서서 다른 놈들을 호령하고 싶었어. 목숨을 걸고 쫓겨다니는 밤새가 아니라. 마스터가 그것을 약속 했고 쟈크 가문은 그것을 받아들였어! 그리고 아버지는 길드장의 자리를 넥슨에게 주었고! 난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어. 따르겠다구!" "걸리는 놈들을 다 죽여버리고 말이야! 아무 곳이나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 다 죽여가면서!" "제길! 루트에리노 대왕도 걸리는 놈들 다 죽여버리고 대왕이 된 거 아 냐? 내가 하면 어때서? 썅! 몇백년 쯤 지나면 난 휴리첼 대왕의 여덟 별 이 될지도 모른다 이거야. 다들 그렇고 그런 거잖아!"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꽤나 심하게 설득당했군." 쟈크는 무섭게 외쳤다. "물러나! 난 이 계집애를 죽이고 싶진 않아. 하지만 우릴 귀찮게 군다 면 죽이겠어! 하슬러! 마스터를 부축해요."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넥슨을 일으켰다. 넥슨은 신음소리를 뱉으며 일어났다. 하슬러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를 꽉 깨무십시오." 그리고 하슬러는 곧장 넥슨의 등에서 화살을 뽑았다. 넥슨은 진저리를 치더니 하슬러의 품 속에 쓰러졌다. 하슬러는 화살을 내팽개치고 말했 다. "모두들 그 뒤의 구덩이 너머로 건너가라."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이 먼저 체념한 어투로 말했 다. "할 수 없군." 그리고 카알이 먼저 뒤로 돌아 구덩이를 뛰어넘었다. 네리아는 머리 끝 까지 화가 난 태도로 구덩이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루릴이 차분히 건 넜으며 그 다음 내가 뛰어넘었다. 샌슨은 그 때까지도 건너지 않고서 넥 슨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하슬러는 낮게 외쳤다. "건너가!" 샌슨은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자신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는 화가 난 것이 명백한 태도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제레인트. 건너십시오." 제레인트는 아까 빠질 뻔한 구덩이를 내려다보더니 눈을 꽉 감고는 뒤 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달려오다가 훌쩍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슈우웃! "허어억!" 갑자기 제레인트는 숨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바로 앞에서 멈춰섰 다. "아아악!" 비명소리는 레니의 것이었다. 레니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우리는 모 두 굳어 버렸다. 제레인트의 공포과 경악에 질린 눈과 내 눈이 마주쳤 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스르르 아래로 쓰러졌다. 마치 무슨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아래로 사라졌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 다.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그의 등에 꽂힌 대거가 눈에 들어왔다. "제레인트!"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1. 난 몸을 날렸지만 이미 늦었다. 난 바닥에 누운 채 구덩이에 머리를 내 밀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구덩이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어둠이었 다. 제레인트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샌슨의 고함소리가 들 려왔다. "너 이 자식!" 하슬러는 질린 표정으로 자신이 부축하고 있는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 슨은 하슬러의 품에 안긴 채로 대거를 던진 자세 그대로였다. 그는 천천 히 팔을 내리며 쇠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림길의 수호자가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곤란해." "이 개자식아!" "너도 건너가. 그렇지 않으면 레니는 죽는다." 샌슨은 죽일 듯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다가 우리쪽으로 뛰었다. 쟈크 는 벌벌 떨면서 우리들과 넥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넥슨은 하슬러의 팔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어 섰다. "하슬러. 바닥을 부숴라." 하슬러는 무표정하게 걸어오더니 구덩이 반대편에 섰다. 그리고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훌쩍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 쳤다. 콰아아앙! 구덩이 저쪽편이 붕궤되고 말았다. 돌들이 무너져 아래로 떨어졌다. 하 슬러는 몇 번 더 그 짓을 계속했고 우리들은 아무런 일도 못한 채 그 모 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도저히 건너뛰지 못할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놓은 하슬러는 뒤로 물러났다. 넥슨은 벽에 기대어 선채 고개만 돌려 우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기억은 안나지만 정말 날 많이도 괴롭혔을 듯하군. 쫓아오지 마라. 쫓아오면 이 계집애를 죽여버릴 테다." 그리곤 넥슨은 하슬러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쟈크는 아직까지도 어리 둥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우리들과 넥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넥슨 은 말했다. "그 계집애를 업고 따라와." 쟈크는 잠시 도전적인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 안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체념한 얼굴로 레니를 업더니 그의 뒤를 따랐 다. 잠시 후 네 명의 모습은 갈림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일행들은 그 때까지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 사라지고 나자 우리들은 아무 말도 없이 구덩이 쪽으로 다가섰다. 모두들 구덩이 주위에 몰려서서 망연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단순히 재미있을 거 같다고 우릴 따라온 낙천적인 프리스트가,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네리아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오열했다. "으흐흐흑! 제레인트!" 카알은 눈을 닦으며 외쳤다. "슬픔은 평화롭게 그를 되새길 시간을 위해 남겨둡시다. 어서들 갑시 다. 넥슨 일행을 뒤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힘없이 몸을 돌렸다. 네리아는 펑펑 울면서 이루릴에게 매 달려 있었고 이루릴은 그녀의 어깨를 그러안고는 고개를 숙인 채 걸었 다. 샌슨은 벽을 쥐어박았다. 젠장!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저기서 도로 올라올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투덜거리면서, 혹은 웃으면서 올라올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바 닥이 보이지 않는 함정이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다. 다만 현재에 존재하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 남보다 빠르다는 것뿐이다. 사고나 추리가 필요없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처럼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신의 뜻에 따라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이 우리와는 다르지만. 그리고 그는 결국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스스로 선택한 길에 따라. 하지만 이건 말 도 안돼! "으흐흐흑!" 네리아의 통곡 소리. 목에 치미는 것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우 리는 축쳐진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목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 때 문에 입안이 몽땅 녹아버릴 것 같다. 머릿속이 웅웅거리고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뜨겁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지하라서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가혹 한 정신적 충격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우리들은 적당히 넓은 공간이 나 오자 모두들 말없이 주저앉았다. 나와 샌슨은 힘없는 동작으로 짐에서 장작을 풀어내었다. 연기에 질식 해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불을 피워보니 연기는 그런대로 잘 빠져나갔다. 우리들은 모닥불 주위에 조용히 몰려앉았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헤엑, 헥! 하늘 색깔이 원래 저러했던가? 간혹 그렇게 바뀌기도 한대요. 응, 그래? 후욱, 후우우. 어느 때? 주로 죽을 때가 가까울 때 그렇대요. 나는 진저리를 쳤다. 죽을 때가 가까울 때, 죽을 때가 가까울 때라고? 기어코 죽고야 말았군. 기쁜가? 후치 네드발? 넌 정확했어. 그래, 기쁜 가? 제기랄! 쿠르릉! 멀리서 울려퍼지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꽤나 먼 거리인지 희미하게 들 려왔다. 네리아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저 개같은 새끼! 대미궁을 다 부숴버릴 작정인가!" 카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거리가 많이 떨어졌나 보오. 빨리 따라가야 될 텐데." 모두들 말이 없었다. 지금은 일어나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 다. 카알도 그러했는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루릴이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서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요." "예?" "넥슨이 대미궁의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아마 최하층이나 아니면 중간 의 그 거주구역 어디일 것 같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 만 미궁 자체에 어떤 볼 일이 있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문제는 넥슨 일행이 과연 제대로 찾아올까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길을 부순다고 해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또 문제는 아까의 그 거주구역과 이 미궁 사이에 연결 통로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는 것입니다." 네리아는 붉어진 눈을 비비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미궁이니까… 통로를 여러 개 만들어놓지는 않았겠지요." 카알은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 휴식한 다음 표시를 따라 돌아내려가서 기다려 보십시다." 그래서 우리들은 선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샌슨이 불침번을 섰다. 난 모포를 몸에 두르고 불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러나 얼핏 잠이 들려고 할 때마다 멀리서 쿠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때 마다 네리아의 욕짓거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다 부수고 싶은 모양이군, 망할 녀석. 동굴이 무너져서 확 깔려버려라! 다시 한 번 우르릉거렸고 네리아는 어김없이 투덜거렸다. "두더지 녀석! 지칠 줄도 모르는군!" 카알은 불편한 신음소리를 좀 내었다. "큰일이군. 저렇게 부수고 다니면 정말 위험할 텐데. 동굴이 무너지기 라도 하면 어쩌지." "콱 깔려버렸으면 좋겠어요." "레니양은 어쩌고?" 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젠장, 젠장! 웅크리고 앉은 샌슨의 등 뒤로 벽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만들어지고 있 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거대한 암흑 속으로 사 라졌다. 제가 모험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틀림없이 대미궁의 침범자 제레인트, 혹은 아비스의 승리자 제레인트라고 불릴 겁니다. 예. 당신은 정말 대미궁의 침범자. 하지만 대미궁이 당신의 무덤이 되 었군요. 마지막 햇살이 산봉우리를 비치고 테페리의 집에도 밤이 찾아오면 밝은 눈의 현자 제레인트가 눈을 뜬다. 그의 손엔 술병? 샌슨은 음울하게 킥킥거렸다. 카알은 몸을 돌려누우며 내쪽을 바라보았 다. 난 천장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놀렸다. 어느 저녁 여느 때처럼 해가 질 때 서녘으로부터 불어온 알 수 없는 바람 희망 하나를 위해 달리는 나그네들이 그를 부른다. 제레인트는 일어선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갈림길은 없었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비극도 없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달렸고 언제나 선두로 출발하지만 항상 뒤쳐졌지. 인생은 그렇게 멋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인생엔 서사시도 없었지. 하지만 흐르는 시간에 던져진 것은 세월을 멈추는 그의 웃음소리. 드래곤 로드로부터 300년, 묵은 그림자 대미궁의 암흑은 무한을 단속한다. 쾌활한 그의 미소 변함이 없건만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이 없다. 최후의 갈림길을 돌아들어간 그를 땅이 삼키고 암흑이 뒤덮는다. 웃음은 사라진다. 비탄은 한이 없다. 시간은 흘러 그를 덮는다. 주위가 어지러웠다. 깨어있는 것인지 잠들어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들어 있는 쪽인 것 같다. 미궁이 빙빙 도는 것을 보 니. 마구 회전하던 미궁은 곧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모든 곳이 통로고 모든 곳이 벽이었다. 우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레인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이쪽이야. 걱정 마!" "이렇게 갈림길이 많은데 어떻게 선택하는 거에요?" "그거? 어렵지 않지. 이건 제레인트의 선택이야. 하하하." 그리고 제레인트는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추락하는 제레인트를 보며 네 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웃었다. "까르르르!" 정신없이 떨어지던 제레인트의 로브 자락에서 갑자기 하얀 날개가 돋아 났다. 제레인트는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우리는 가벼운 실망을 느끼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우리들을 보며 웃더니 계속해서 날개짓했다. 우리는 불안감 을 느꼈다. 제레인트는 이미 충분히 올라왔다. 그런데도 날개짓을 계속 하고 있었다. 네리아가 갑자기 외쳤다.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우릴 돌아보며 하얗게 웃었다. 갑자기 동굴 천장이 쫘악 갈 라지며 눈부신 빛이 아래로 쏟아졌다. 우리는 모두 눈이 부셔서 위를 바 라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마치 햇살에 이끌리듯 점점 속력을 더해가며 위로 위로 솟아올랐다. 난 고함을 질렀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돌아와요, 제레인트!"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히 맑은 웃음만 흩뿌리며 솟아올랐다. 햇살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점점 강해지는 햇살은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그러 나 난 볼 수 있었다. 그 하늘 위, 제레인트의 머리 위에 팬텀 스티드를 탄 수십 명의 넥슨이 기다리는 것을. 제레인트는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넥슨들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제레인트!" 그리고 수십 명의 넥슨은 제레인트를 붙잡아 태양 속으로 집어던져버렸 다. 제레인트의 날개에 불이 붙었고 그의 로브에 불이 붙었다. 제레인트 는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마치 유성처럼 길다란 꼬리를 이끌며 제레인트는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드래곤이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난 고함을 질렀다. "제레인트!" "뭐, 뭐야? 제레인트가 어디 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난 벽에 기대어앉은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는지 주위는 컴컴했고 샌슨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 었다. 졸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난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 왔고,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샌슨은 눈을 비비더니 말했다. "꿈을 꿨군?" "으응… 그래. 꿈이었어." 샌슨은 기지개를 펴더니 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길이 확 살아나며 샌슨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벽에는 샌슨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려졌다. 나는 어지러운 눈으로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샌 슨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꿈이었는데?" "여느 때처럼, 말도 안되는 꿈이지. 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불길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제 일어나야겠군. 시간이 많이 지났어. 모두들 깨워." 난 힘없이 일어서서 모두를 깨웠다. 다시 무거운 걸음을 계속했다. 우리는 표시해둔 길을 따라 되짚어 걸었 다. 표시를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샌슨과 네리아는 말 다툼을 일으켰으며 카알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네리아는 쉴새없이 짜증 을 부렸고 샌슨은 쉴새없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표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걸어가다가 몇 번이나 되짚어 돌아와야 했다. 심지어는 표식이 있 음에도 불구하고 표식을 믿지 않고 우리들의 기억에 따라 걸어려다가 낭 패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간혹 멀리서, 혹은 어쩌다가 가까 이서 동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네리아는 반드 시 저주의 말들을 외쳤으며 마침내 샌슨은 네리아를 저주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들을 겪으며 걷는 상태인지라 다시 거주구역으로 내려가는 긴 계단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이루릴을 제외한 모두가 지쳐빠진 상태였 다.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바닥에 이르자 카알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음, 저기 복도 옆에 있는 방 안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방 안에서 계 단을 감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우리 방 앞을 지나가면 뒤에 서 살그머니 나와서 덮치는 겁니다." 카알은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도록 하세나. 조용히 감시하는 것은 모두들 입을 다무는 데도 도 움이 되겠지." 카알의 말에 네리아와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이 대미궁 안에서는 횃불만 끄면 곧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온다. 이루릴 같은 엘프나 박쥐가 아니라면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횃불을 끄고 복도를 감시할 준비를 갖추었다. 모두들 자리를 잡은 다음 마지막으로 내가 횃불을 끄려고 했을 때였다. 그 때 다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리아는 발작적으로 윽!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루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끄지 마세요, 후치." "예?" "이 소리, 방향이 이상하군요." "방향이 이상해요?" "네. 아무래도… 이 층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넥슨은 이미 거주구역에 내려와 있습니다." "뭐요?" 카알은 황급히 일어났다. 우리들은 모두 방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샌슨 은 다시 롱소드를 뽑아들었고 나도 횃불을 왼손으로 옮기며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이루릴은 방향을 잡으며 말했다. "저쪽! 저쪽 방향이었어요. 가지요." 이루릴은 스르르 움직여나갔다. 카알은 안타까운 소리를 질렀다. "이런! 벌써 내려오다니, 우릴 앞질렀나?" 달려가며 네리아도 말했다. "그런 흔적 없었어요! 녀석, 틀림없이 바닥을 부수고 내려온 걸 거에 요!" "맙소사! 그 생각을 못했군." 다시 우르르릉! 이번엔 나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우리와 같은 층이었다. 동굴을 울리는 충격음이 발바닥에 바로 느 껴졌다. 우리는 황급히 달려갔다. 횃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고 탁탁거리 는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복도의 벽을 휙휙 지나치는 우리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앞에서 달려가는 이루릴의 뒷머리에 붉은 불 빛이 어지럽게 흘러내렸다. 통로는 죽 곧았으며 우리는 어느새 최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돌아 와 있었다.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세 갈래 길이며 넥슨이 지하로 내려가려면 이곳으로 와야 될 것이다. 샌슨은 바로 옆의 방을 가 리키며 말했다. "모두들 저기로!" 우리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후치! 불을 꺼!" 급한 나머지 횃불을 바닥에 던지고 밟아 버렸다. 삽시간에 무서운 어둠 이 다가왔고 망막에 희뿌옇게 남아있던 다른 사람의 모습이 어지러웠다. 난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손을 옆으로 뻗어 간신히 벽을 짚었다. 어둠 속에서 샌슨의 숨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조용히! 녀석들이 다가오면 불빛이 보일 겁니다. 녀석이 최하 층으로 내려가려면 틀림없이 저 계단을 지나쳐야 될 테니까." 네리아의 목소리. "확실히 최하층으로 내려갈까? 혹시 거주구역에 볼 일이 있는 거 아닐 까?" "아니오, 네리아양. 대충 둘러보았지만 거주구역은 모두 황폐화되어 있 었소. 그러니 그곳엔…" 카알은 말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저벅저벅저벅. 나는 숨을 죽이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집중했다. 캄캄한 어 둠 속이라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고 그 상태에서 다른 곳에 정 신을 집중하려니 몸이 흔들려왔다. 그 때 눈 앞에 미세한 빛이 느껴졌 다. 앞쪽에서 사각형의 빛이 조용히 떠오른 것이다. 문쪽이었다. 샌슨은 희미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 빛이 보이며 간신히 똑바로 설 수는 있었다. 우리는 방문 옆에 몰려 섰다. 앞쪽의 빛이 점점 강해지며 발자국 소리도 점점 강해졌다. 우리는 침을 삼키며 앞쪽을 주시했다. 저벅저벅저벅. 그리고 느닷없이 넥슨의 모습이 나타났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2. 넥슨의 옆얼굴은 귀신 같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무서운 표정을 떠올 린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카알의 화살에 맞은 것때문에 지독한 고 통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허트러짐이 없었다. 뒤 이어 하슬러가 횃불을 든 채 따라왔고 그 뒤로 쟈크가 레니의 어깨를 붙 잡은 채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눈깜짝할 사이에 방문 앞을 지 나치려 했고 그 동안 우리는 숨도 제대로 못쉰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넥슨이 멈춰서자 나는 기절할 뻔했다. "계단이로군. 좋아." 넥슨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본 것이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하슬러가 탐탁찮은 어조로 말했다. "정말 저 아래로 내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와서야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간다는 것 은 말도 안 돼." "이 아래엔 드래곤 로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찾는 그것도 있을 거야." 넥슨의 모습은 반쯤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하슬러의 모습은 잘 보였 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쟈크가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쟈크의 손에 잡혀있는 레니는 초췌하고 힘없이 보였다. 갑자기 레니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 다. 레니는 멍한 얼굴로 우리들이 숨어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우리를 본 것 인가? 안돼! 지금 들키면 구출 계획이고 뭐고 끝이야! 그 때 쟈크가 말 했다. "뭘 보는 거야?" 레니는 별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의아한 얼굴로 방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곧 다시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꺽였다. 가슴이 쿵쿵거리 는 소리가 넥슨에게 들릴 것 같았다. 우화, 정신없어! 쟈크는 의아한 얼 굴로 우리들이 숨어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뭘 본 거야, 레니?" 레니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때 넥슨이 말했다. "과거의 망령이라도 보았겠지. 핸드레이크의 망령인가? 꾸물거릴 시간 이 없어. 가자!" 그리고 다시 네 명의 모습은 사라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잠시 후 문쪽은 다시 캄캄해졌다. 나는 암흑 속 곳곳에서 들려오 는 길다란 한숨 소리를 들었다. 이루릴이 조용히 캐스트를 시작했다. 잠시 후 허공에선 윌 오 위스퍼가 떠올랐으며 나는 이마의 땀을 닦거나 하는 우리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찾고있는 거지?" 카알의 말에 샌슨이 대답했다.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지요. 그리고 붙잡아서 레니양도 구출하고 카알 의 의문도 풀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릴 텐데. 좀 더 기다리세. 놈들이 아래의 중앙 폭포 근처까지 내려가면 우리 발자국 소리를 못 들 을 거야." 카알의 신중론이었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인질이 있으니…" 이루릴이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슬립을 사용해 보겠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됩니다. 세레니얼양이 안계실 때 아프나이델이 저들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슬립 주문은 거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음. 카알과 제가 각자 한 명씩을 저격할 수 있을 텐데요. 카알, 하슬러를 저격하실 수 있겠지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이루릴은 말했다. "네. 그러면 제가 매직 미사일로 쟈크라는 그 청년을 저격하겠습니다. 쟈크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는 있을 겁니다. 그 때 나머지 분들이 달려 가서 레니양을 구출하며 동시에 넥슨을 저지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는 조 금 전 상처를 입었으니 동작이 빠르지는 못할 겁니다." "위태로운 작전이지만 할 수 없군요. 갑시다!" 우리는 방을 나왔다. 이미 그들은 중앙 폭포 부근까지는 내려갔을 것이 다. 하지만 우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 기 위해선 할 수 없이 윌 오 위스퍼의 빛이 필요했다. 제레인트의 복수다. 넥슨.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난 바스타드를 힘있 게 쥐었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난 네 녀석을 죽이지는 않겠어. 제레인트가 그것을 원할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네 녀석의 입에서 제레 인트에 대한 사과의 말을 들으내고야 말겠다! 그의 죽음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게 만들겠어! 중앙폭포의 물소리가 다시 거세어지자 이루릴은 윌 오 위스퍼를 돌려보 내었다. 우리는 벽을 짚은 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몸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걷어차거나 하면서 힘겹게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돌아내려오자 우리 눈앞에 빛나는 물살이 보였다. 콰콰콰콰콰. 넥슨! 여기 있구나! 넥슨 일행에게서 나오는 불빛인모양이다. 그리고 그 불빛 때문에 폭포의 물살은 빛의 장막처럼 보였다. 우리는 조용히 뇩 포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하슬러, 우리들을 끈질기고 지독한 녀석들 이라고 말했던가? 그래. 우리는 다시 여기까지 쫓아왔어. 잠시만 기다려 라! 멀리서 움직이는 횃불이 보였다. 이 넓은 공간에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 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넥슨 일행은 우리 들이 들어온 방향의 반대쪽,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보았을 때 오른쪽 반원지대에 가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오른쪽 첫번째 통로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몸을 가릴 마땅한 장소가 없어 폭포 뒤에 몸을 숨겼 다. 휘우듬하게 굽은 호수 옆의 길이었기 때문에 간신히 그들의 모습은 보였다. 그 때 이루릴이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문이야?" 우리는 놀라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곧 그녀가 넥슨 일행의 말을 전달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하군! 이루릴은 폭포의 바로 뒤의 이곳 에서 저쪽에 있는 넥슨 일행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루릴은 계속 말했다. "부술 수도 없고 열 수도 없어! 젠장, 이건 또 뭐야? 파괴? 파괴할 수 도 없는 문인데 뭐가 파괴란 말이야?" 카알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 방은 검과 파괴의 레티의 방인 모양이군." 폭포소리 때문에 카알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루릴은 계속해서 말 했다. "파괴라는 것이 약속어가 아닐까요." "그래? 음. 다시 들어가보자." 그리고 그들은 다시 통로로 들어갔다. 카알은 활을 꺼내었다. "좋아. 됐어. 세레니얼양. 녀석들이 나와서 두번째 통로로 걸어갈 때 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달려갈 준비를 하시오." "알겠습니다."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는 앞쪽에 일렬로 서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했다. 네리아의 이를 가는 소리가 폭포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복수야! 바이서스 임펠의 그 아이와, 그 날 밤의 시민들, 그리고 델하 파에서 죽은 자들, 밤의 신사들과, 젠장! 너무 많아서 이름도 다 못대겠 어." "그리고 제레인트의 복수다." 샌슨 역시 사납게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바스타드를 세 게 쥐었다. 손잡이에 감아둔 가죽끈이 손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 다. 나는 캄캄한 허공 속에서 앞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선 카알과 이루릴이 서서 준비를 했다. 카알이 활에 화살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릴은 아마도 캐스트를 준비하는 것인지 아무 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불빛이 보이며 녀석들이 걸어나왔다. 이루릴이 말을 전해 주지 않아서 알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빨리 나온 것이라든지 횃불빛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보자 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넥슨은 뭔가 분명히 불평을 토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옆엔 하 슬러가 묵묵히 서 있었고 쟈크와 레니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서 둘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넥슨이 몸을 휙 돌렸고 그러자 나머지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 때 카알이 고함을 질렀다. 저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 도로, 그러나 폭포소리를 뚫고 우리들에게는 들릴 정도로. "지금이다!" 탱-! 화살은 급격히 튀어나와 불빛을 향해 야수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 때 네 개의 빛화살이 튀어나갔다. 물 위를 날아가는 화살들의 광포한 비행이 횃불빛에 번뜩거렸다. 이루릴이 쏜 매직 미사일은 검은 허공에 길다란 선을 그어대었다. 쾅쾅쾅! 쟈크가 매직 미사일에 맞아 나가떨어 지는 모습이 보였다. "꺄아악!" 레니의 비명소리. 그 순간우리 셋은 앞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각오해라! 넥슨!" "죽인다!" 하슬러가 펄쩍 뛰는 것이 보였다. 카알의 화살에 맞은 모양이다. 하슬 러가 쓰러지면서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이 물 속에 떨어져버렸다. 삽시간 에 주위는 다시 어두워져버렸다. 으악! 제기랄! 이걸 생각 못했잖아! 우리들은 욕짓거리를 뱉으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벽을 짚은 다음 한 손을 벽에 댄 채 달려갔다. 그러나 곧 앞에서 달려가던 샌슨과 엉켜 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샌슨과 나는 조금만 몸을 잘못 놀리면 곧 호 수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몸부림을 치지도 못했다. 퍼억! 윽. 네리 아가 우리들에게 걸린 모양이다. 네리아는 헐떡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들! 어디서 뒹굴고 있는 거야!" "그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너부터, 크억! 어딜 밟아!" "제발, 제발 먼저 일어나고 싸워! 머리가 비었어들!" 우리 세 명은 쓰러진 채 버둥거리며 서로들과 자신을 향해 동시에 욕을 퍼부어대었다. 그리고 곧 뒤에선 이루릴이 외쳤다. 윌 오 위스퍼의 빛이 호수 위에 떠올랐다. 다시 주위가 밝아지면서 우리는 간신히 일어났다. 젠장! 작전 실패다. 불빛을 생각하지못하다니. 그리고 다시 시야가 밝아지자 넥슨은 비틀거 렸다. 하지만 곧 그는 험악한 얼굴로 레니를 붙잡으려들었다. "안돼!" "달아나, 레니!" "꺄아아아아!" 레니는 비명을 지르며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넥슨은 그녀를 덮치려 고 했지만 레니는 아슬아슬하게 피한 다음 다시 일어나서 비명을 지르며 우리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우리들도 허겁지겁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 때 난 넥슨이 롱소드를 뒤로 당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자식! 던 지려고! "레니! 엎드려!" 샌슨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버린 레니는 샌 슨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 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멍청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 였다. 제기랄, 안돼! 넥슨은 발악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 지독한 놈들! 너희들에게 넘겨주진 않는다!" 펑펑펑펑펑! 갑자기 대미궁 전체가 진동했다. 우리들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는 황급 히 주저앉았다. 자칫하다간 저 검은 호수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그 때 카알이 비명을 질렀다. "호수가!" 호수에서 물들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호수 중심부의 물들 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곧 호수 전체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바뀌고 말 았다. 우리는 시야를 어지럽히는 빛에 눈을 들어올렸다. 사방의 거대한 벽에 쌓여있는 무수한 종유석들이 제각기의 빛을 뿜어내 기 시작했다. 깊은 바위틈으로 비쳐나오는 청록색, 푸른색, 그리고 밝은 갈색의 빛이 뿜어나왔다. 어지러웠다. 종유석들은 마치 거대한 쇳조각들 을 가득 달아맨 것처럼 빛을 뿜었다. 그리고 역시 바람에 부딪히는 쇳조 각들처럼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딸그랑 딸그랑. 동굴 전체가 기이 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 얼굴 모두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종유석들에서 빛이 튀어나왔다. 마치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동굴 전체엔 빛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었다. 중앙의 호수는 매섭게 회전하며 거대한 물소리를 만들어내었고 그 위론 종유석들이 수천개의 방울들처럼 딸랑거리고 있었다. 그 울림소리가 깊어짐에 따라 점점 많은 빛발이 쏟아져나왔다. 동굴 전 체에 마치 가을의 낙엽들처럼,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무수한 빛의 포말들 이 헤엄치고 있었다. 노란색, 하얀색, 청백색의 빛방울들. 그리고 소용 돌이를 만들어낸 바람이 허공의 빛무리들을 춤추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그 빛의 포말들 속으로 과거의 얼굴들이 지나가는 것을. 힘센 전사의 당당한 어깨가 보였다. 즐거워 노래부르는 청년의 모습, 그리고 고뇌에 잠긴 노인의 모습, 울부짖으며 전장을 달려가는 전사의 피묻은 검이 번 득였다. 긴 밤을 지새고 마침내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는 자의 피로한 얼굴이 보 였다. 형제의 주검 앞에 오열하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고귀한 얼굴, 슬 픔에 잠긴 얼굴, 교활한 얼굴, 비통한 얼굴, 기쁨에 날뛰는 얼굴, 비장 한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희미한 과거의 음영. 단지 과거로부터 여기에 투영되는 그림자들처럼. 그리고 그곳엔 울음소리, 전장의 말발굽 소리, 달리는 전차의 소리, 비 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겨울 아침 창가에 맺힌 서리를 닦아내는 소 리, 여름날 대지를 두드리는 소나기 소리. 봄을 찬미하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고 쓸쓸한 가을 벌판의 쟁기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난 그것을 정확히 보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본 것은 그 저 허공에 마구 반사되는 빛무리뿐이었을지도. 내가 들은 것은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물소리였을지도. 그리고 주위가 하얗게, 혹은 완전히 검게 바뀌었다.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3. "아니, 그렇진 않아요." "그래? 그럼 어떻게 되었는가?" "예. 우리들 중엔 엘프가 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목소리는 기억에 있는데. "흐음. 그래서?" 이 목소리는 처음 듣는군, 누구지? 다시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엘프 이루릴이 저에게 간절히 부탁했었지요. 제발! 진실한 길 을 따르는 용맹한 프리스트여, 악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세요!" 이루릴이 저런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흐음. 그래서?" "전 품 속에서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 들었지요. 우리의 일행은 처절한 공포의 암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듯이 절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전 겸허히 테페리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만. 어쨌든 전 외쳤지요. 우둔 의 권능, 질병의 권능이여! 내 앞에 그 검은 손을 치워라! 난 이런 모욕 을 참을 수 없노라!" "허허허… 대단했겠군." "예. 그래서 우리 일행은 저의 보호 아래 생존자의 수색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더 중요한 것은 생존자의 수색이 아니었지요. 샌슨 은 강인한 전사답게, 아, 이 강인하다는 의미를 잘 헤아리셔야 되겠군 요. 어쨌든 그는 생존자를 수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힘 앞 에 평정을 되찾은 엘프 이루릴은 상황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었지요. 저 야 프리스트였으니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 세이크리드 랜드를 해소시킨 다면 모든 것이 원래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 말입니다." "오호라! 그랬겠군?" 왠지 슬금슬금 화가 나려고 하는데? "예. 저는 일행을 이끌어 세이크리드 랜드의 원인, 질병의 권능이 춤추 게 만든 아티펙트가 묻힌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도시의 시 민들은 픽픽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애끓는 비명을 지르며 저에게 치료를 갈구했습니다.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군요." "음. 이해가 가네." "예. 제가 영웅이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눈 앞의 작은 일에 매달리는 범부는 아니라 자신합니다. 저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 았습니다만 슬픔을 삭히며 생각했지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겠습니 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치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시간 을 낭비하기보다는 차라리 한시라도 세이크리드 랜드를 해소시키는 것이 보다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음, 그렇지. 눈 앞의 일에 발목이 잡히지 않는 자는 진실로 영웅의 자 질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겠지." "하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 슬픔을 가슴에 묻어두고는 우 리 일행을 다그쳐…" 장황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물론 계속해서 나나 다른 일행들의 이야 기는 최소화되거나 건너뛰게 되었고 오로지 한 사람의 업적만이 눈부시 게 빛나고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되었다. 난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제레인트! 제발! 나 이미 정신차렸는데 다시 기절하겠다고요!"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위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내가 쓰러져 있던 장소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었고 주위는 물 속인 듯 했다. 머리 위에서는 밝은 빛이 물살의 일렁거림에 따라 흔들리며 아래 로 스며내려오고 있었다. 주위를 빙글 돌면서 얕은 계단들이 세 단 놓여 있었고 그 위로 기둥들이 서 있었는데 기둥 외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물 은 거기서 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은 이 얕은 접시처럼 생긴 공간의 가장 아래쪽 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 배낭들도 모두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주위는 따스했다. 아니, 지금껏 추운 땅굴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공간은 지나치게 춥지도, 지나치게 덥 지도 않은 그야말로 적당한 온도였다. 공기 중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 지 않았다. 약간 떨어진 곳의 계단엔 왠 늙은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하얀 색의 로 브를 입고 흰 수염을 늘어트린 백발 늙은이였는데 도대체 나이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얼굴 가득한 주름살이라든지 가슴을 온통 뒤 덮는 수염과 백발로 미루어보아서는 꽤나 나이가 많을 듯했다.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훌륭한 체격은 중년의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 다. 그리고 그 늙은이의 옆에는 지금껏 내 복장을 뒤집고 있던 사나이, 제레인트가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말도 못한 채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쓰러져 있던 샌슨이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는 멍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나에게 고개 를 돌리더니 말했다. "난 말이야. 지금껏 아주 고약한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제레 인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꿈 속이니까 웃거나 말 을 꺼내는 그런 일이 안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후치 넌 말을 하네? 이거 환상이 아니야?" 난 그 대답을 아주 이상하게 해버렸다. "제레인트! 내가 죽었어요, 당신이 살았어요?" 제레인트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테페리의 권능도 필요없는 질문이군. 하하하! 물론 자네는 살아 있지." "그럼 당신도 살아있는 거에요?" "확실히 그렇다고 말해줄 수 있지." 샌슨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럼 당신을 확실히 죽일 수가 있군! 우리 속을 몽땅 뒤집어놓고, 너 무 울어서 숨이 막히게 해놓고는 뭣이 어쩌고 어째? 강인하다는 말의 의 미를 잘 이해하라고!" 제레인트는 멋적게 히죽 웃었고 그러자 그 옆의 늙은이는 기분좋은 미 소를 띠었다. 그리고 샌슨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카알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앞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듯 멍청한 얼굴로 우리들을 둘러보았 다. 그 때 네리아가 외쳤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살아있었어요?"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군요. 하하하." "정말 살아있는 거에요?" 제레인트는 일어나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네리아는 벌떡 일어서더니 제 레인트의 어깨를 붙잡더니 뒤로 휙 돌려버렸다. 제레인트는 난처하게 웃 으며 뒷통수를 긁었고, 우리들은 그의 등에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을, 정확하게는 로브에 아무런 자국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네리아는 제레인 트의 등을 만지작거리며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 아파요?" 뒤에 생각해보니 어째 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 때는 아무도 이상하 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제레인트가 얼빠진 웃음을 지었을 뿐이 다. 그 때 이루릴이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제레인트. 살아있었군요." 이루릴의 그 말은 마치 우리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마지막 확인처럼 들렸다. 우리는 그제서야 웃음을, 혹은 울음을 터뜨리며 제레인트를 껴 안았다. 제레인트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끌려다니고 포옹당하고 키스당 하며 제정신을 못차렸다. 샌슨은 그를 아주 과격하게 흔들어대었고 네리 아는 열렬히 그의 뺨에 키스해주었다. 카알은 눈물을 쏟을 듯한 얼굴로 그를 포옹했고 이루릴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으며 난 눈을 닦은 다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야기 아주 멋지던데요? 하지만 살아있으니 화내진 않겠어요. 하하 하!" 제레인트는 계속 뒷통수만 긁어대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까지 우리 의 해후 장면을 보면서 미소를 띠고 있던 노인에게 고개를 돌릴 수 있었 다. 이루릴이 먼저 말했다. "제레인트.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저 분은?" "아, 그래요. 제레인트! 레니는 어디 있지요? 넥슨은, 다른 녀석들은?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요?" 샌슨도 다급하게 물었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했 다. 그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아, 이런 실례가. 소개하지요. 저 분이 절 치료해주셨습니다." 카알은 붉은 눈을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구덩이에서 어떻게…" 제레인트는 곧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예. 구덩이로 정신없이 떨어지는데, 그건 정말 악몽같은 기억이었 습니다. 음.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고통보다는 끝없이 추락하는 것이 더 떨리더군요. 그런 무한히 계속되는 추락 끝에 마침내 저는…" "여기가 어디냐는 것과 저 분이 누구시냐는 말은 언제쯤 듣게 되지요, 제레인트?" 내 말에 제레인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레인트는 말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여기는 중앙 호수의 아랫부분입니다." 카알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호수 아래라고요?" "예. 그리고 저 분은 이 곳의 주인이시지요." 아무래도 카알보다는내가 더 입이 큰 모양이다. 내가 더 입을 크게 벌 렸으니까.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카알은 말했다. "그, 그, 그럼 저, 저 분이 바로…" "드래곤 로드이십니다." "꺄아아아악!" 네리아의 비명 소리. 우리는 아무래도 드래곤 로드에게 예의 바르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겠는걸.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희미한 미소만 띤 얼굴로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뒤로 물러났다. 샌슨의 손을 보니 불안하게시리 칼자루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처럼 검을 뽑아들 용기는 없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카알의 뒤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카알과 이루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표 정은 대조적이었다. 카알은 커다란 감동이 묻어나는 얼굴로 드래곤 로드 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루릴은 별 표정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말이 없어졌다. 우리는 그저 숨을 죽인 채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 고 있었을 뿐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를 몰라 주춤거렸다. 그 때 이루릴이 목례하면서 말했다. "이루릴 세레니얼이 영광스러운 드래곤 로드를 뵙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숲의 딸을 만나게 되어 반갑군." 그러자 카알도 천천히 말했다. "카알 헬턴트입니다. 허락없이 대미궁에 들어온 불청객의 무례를 용서 해주십시오." "집을 오래 비워두어 손님맞이가 적절치 못했음을 사과하지." 샌슨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샌슨 퍼시발입니다." 드래곤 로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깊은 눈이 날 바라보았고 난 덜덜 떨면서 말했다. "후치, 후치 네드발입니다." "반갑군. 후치." 네리아는 그 때까지도 카알의 등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 알은 고개를 돌려 네리아에게 눈짓을 보내었으며 네리아는 하얗게 된 얼 굴로 말했다. "네, 네리아에요. 절대로! 절대로 보석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 요! 모두 다 제자리에 두고 한 알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예. 그래요!" 드래곤 로드는 빙긋이 웃었다. "손님의 예를 아는 자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드래곤 로드는 다시 계단에 앉았다. 우리들은 그 앞에 도열한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말했다. "앉게나. 좋은 자리는 아니겠지만. 올려다보고 말할 순 없네." 그러자 이루릴은 살폿 웃더니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녀를 따라 바닥에 앉았다. 다만 네리아는 조금 떨어져서는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그녀는 곧 울상이 되었다. 사방 벽이 모조리 물인데 어디로 달아날 수 있나. 그녀는 체념한 표정으로 카알의 등 뒤에 앉았다. 드래곤 로드는 편안한 자세로 계단에 앉아서는 말했다. "그래, 이 곳엔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가. 이곳이 나의 집인 것은 알 텐데. 제레인트의 기지 넘치는 이야기는 잘 들었네만 그의 이야기하는 방식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선 적합하지 않더군." 우리는 머뭇거리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납치당한 어떤 소녀를 되찾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그 소녀의 납치자가 이곳으로 들어왔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들어온 것입니 다." "그런가. 그 댓가로 목숨을 잃어도 말인가." 카알은 움찔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카알을 직시하며 말 했다. "이곳은 나의 집이고 자네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아닐세. 난 허락한 기 억이 없네." 카알은 천천히, 그러나 설령 드래곤 로드 앞이라고 해서 카알 헬턴트의 일부분이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희들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무력한 소녀가 시시각각 저희들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주인 있 는 정원인지 거친 불모지인지 파악하고 있을 겨를이 없지 않습니까. 게 다가 질문할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니 달리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닐시언 전하를 접견할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고개를 돌려 보니 샌슨이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입모양을 자세히 보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저녁식사.' 네리아는 쉴새없이 카알의 허리를 찔러대고 있었는데 딴에는 들키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 있어 보였 지만 그 동작은 너무 잘 보였다. 드래곤 로드는 빙긋이 웃었다. "바이서스의 핏줄인가?" "그렇습니다." "자네들은 항상 자신들이 달리는 땅의 주인을 알아보는데 게으르군.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카알은 입술을 적시고는 말했다. "상황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지?" "루트에리노 대왕께서는 당신과 대결하여 이 땅에 보다 어울리는 주인 을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 이전에 주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패배했으며 그 패배에 대한 댓가를 부정하셔서는 안됩 니다. 당신은 자신의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온건 했다. "그 간악한 녀석의 지혜를 찬양하고 싶은가?" "간악한 녀석이라면…" "핸드레이크가 날 패퇴시켰음을 나에게 다시 인식시켜주고 싶은 건가?"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설마 그의 일을 잊으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습니다. 물론 당신의 패배도." 카알은 차분하게 말했고 샌슨은 이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드래 곤의 디저트.' 네리아는 곧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고 제레인트는 드 래곤 로드와 카알을 번갈아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 로드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잊지 않았네. 나는 잊을 수가 없는 존재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축복 은 오로지 너희 종족에게만 있을 뿐이지." "그렇습니다." 카알은 별로 자랑하는 기색도 없이, 그러나 겸양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 하게 말했다. 드래곤 로드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선택하게."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4. 카알은 맑은 눈으로 드래곤 로드를 마주보며 말했다. "무엇을 선택해야 됩니까." "난 자네의 말 중 일부를 받아들이겠네. 자네에겐 이 카르 엔 드래고니 안에 주인이 있는지 물어볼 시간도 없었거니와 알아볼 수도 없었다는 말 에 동의하지. 아마 자넨 이 곳이 나의 집이라는 것은 짐작했겠지만 그것 에 관해선 말하지 않겠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평온한 눈으로 우리들을 내려 보았지만 우리들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제 자넨 이 곳의 주인인 내가 여기 있음을 두 눈으로 보았 어. 부정할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불청객이며, 따라서 나에겐 자네에 대한 정당한 추방명령이 가능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명령할 테니 선택하게. 이 곳에서 지금 당장 나갈 것을 명하니,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카알은 천천히 일어났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방의 벽에선 빛을 모두 갈 라놓는 부드러운 물의 출렁임. 그리고 이 푸르고 밝은 빛들. 대리석들의 하얀 빛은 눈을 시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눈 앞엔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인간의 앞에 나타난 절대의 드래곤 로드가 엄격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대한 체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돌덩어리 같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 껴지지 않았고 아무런 생명이 느껴지지 않은 채 그곳에 다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한 인간, 카알이 서 있었다. 그러나 카알은 왜소하지 않았다. 그는 꼿꼿이 선 채로 드래곤 로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의 체 구는 그대로였고 중년의 세월이 더해진 카알의 어깨는 축 쳐져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굽힐 수 없는 소나무처럼 서서 드래곤 로드를 마주보 았다. "전 따르지 않겠습니다." "나의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인가?" "저의 마음이 이끄는 길을 가로막는 이상 당신의 권리를 부정합니다." "자네의 마음은 무엇으로 자네를 이끄는가?" "저희들이 레니라고 부르는 소녀를 구출하여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것 때문에 날 부정하겠다는 것인가? 자네들의 두루마리를 단번에 종 말지을 수 있는 나에게?" 드래곤 로드의 말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위가 말해 도 지금의 드래곤 로드보다는 더 생동감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카알은 갑자기 피로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는 급격했다. 그는 갑자기 나이를 먹는 것 같 았고, 그의 얼굴에 갑자기 급격한 세월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빠르면 서도 급격한 흐름이 멎자 그는 놀랍게도 드래곤 로드와 같은 연배로 보 였다. 우리는 숨죽여 그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과 인간을. 카알의 입이 힘없이 열렸다. "날 데리고 장난치지 마라. 드래곤." 네리아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나는 네리아를 안았다. 네리아의 몸은 가벼웠지만 내 팔이 너무 심하게 떨려서 그녀를 놓칠 뻔했다. 제레인트가 황급히 나를 도왔다. 나와 제레 인트는 그녀를 부축한 채로 일어났다. 그리고 샌슨과 이루릴도 모두 일 어났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도대체 뭐가 바뀌는가? 우리들이 이렇게 드래곤 로드에게 대항하듯이 주욱 늘어서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 이지? 이건 차라리 저녁식사 차례를 기다리는 꼴이잖아! 내가 식탁의 주 인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맙소사, 아버지. 아버지는 드래곤에게 아내와 아들 모두를 잃게 되실지 모르겠군요. 젠장! 우리는 숨소리를 낼 소박한 자유마저도 박탈당했다. 그래서 나와 제레 인트, 그리고 샌슨은 질식할 듯한 중압감을 느끼며 카알과 드래곤 로드 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의 암석 같은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카알 은 이제 완연히 늙어버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 그것은 신중히 감춰 지고 위장된 그의 본 모습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 같았다. 이루릴은 평온한 얼굴 그대로 약간 물러난 곳에서 두 존재의 대화를 듣 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마저도 드래곤 로드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암석처 럼 보였다. 그리고 엘프와 드래곤 양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인간은 이제 힘없이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카알은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그대로 목 뒤에 손을 대었다. 그는 그렇게 머리를 숙인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꺽었다. 방자한 태도였다. 그는 피로 에 지친 표정으로 음울하게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맛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 그리고 넌 잊지도 못 하니 그것을 망각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겠지. 심심했나?" 입안에 이상한 맛이 느껴진다. 이게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할 수 있 는 말이지? 그러나 그것은 카알 헬턴트의 말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말 이었다. 카알은 팔을 늘어트리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 드는 변함없는 얼굴로 카알을 마주보았다. 그의 입이 열릴 기색이 없자 카알은 계속 말했다. "그래. 너의 눈 앞에 흘러가는 300년의 세월, 짐작도 할 수 없다. 그 눈으로 바라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상상도 안되는걸. 하지만 생각해보지. 나는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니까 말이야." 카알은 여전히 방약무인한 태도로 팔짱을 끼더니 턱을 긁적거리며말했 다. "무엇이었을까. 몸을 짓씹고 정신을 짓누르는 고독? 아냐. 그런 건 너 의 관심사가 아니었겠지. 드래곤은 고독을 모르는 존재니까. 방대한 기 억에 짓눌리는 것? 터무니없어. 잊지 못하는 존재는 기억에 휘둘리지도 않아. 난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로지 남은 하나의 기억에 매달 리는 남자를 보았지." 그 때 카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내부로 빠져들어가는 표정을 지 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알은 잠시 후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뭘까. 역시 내 생각대로 무료함이었나?" 드래곤 로드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을 경우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해줄 수 있을 정도의 몸짓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말했다. "그랬네." "그랬군.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날 장난감 취급하는 것은 좋지 않아."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300년을 살아온 자를, 자네는 과 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300번의 개화, 300번의 낙엽, 전혀 이해할 수 없어. 하지 만 솔직히 말하지 그랬나?" "미안하군."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지금 드래곤 로드가 카알에게 미안하다고 말했 나? 난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알은 전 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난 네리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기절할 자유 도 잃었다. 샌슨의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핏기는 다 어리로 사라지는 것 일까. 제레인트는 벌벌 떨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갑자기 드래곤 로드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에 익은 모습 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얼굴에 거대한 피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순식간에 발톱 달린 악마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부수며 모든 의미를 무시하는 악마.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자 식, 시간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마침내 드래곤 로드의 바 위같은 얼굴에는 황폐화된 폐허만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사막의 모 래 틈으로 불쑥 드러난 어떤 몰락한 옛나라의 동상처럼 보였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놀리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네. 하지만 사실 난 아직 도 이해하지 못한다네. 세계에 대한 자네들의 그 터무니없는 오만 말일 세."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나?" "그렇다네.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자네들의 표현으로는 머리로는 알고 가슴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던가? 조악하며 사실과는 터무니없 이 먼 비유지만 어쩔 수가 없군." 카알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다르지." "그래. 너무 달라." "어쩔 텐가?" 카알의 질문에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카알도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으며 나도 부지불식간에 위를 바라보았다. 왠지 빛이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의 물들은 보다 짙은 군청색을 띠기 시작했고 위에서 영롱하게 내려비치던 빛들도 그 위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내가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을 말인가?" 드래곤 로드는 카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레 인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이 제레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 조금 전, 드래곤 로드의 표정이 변하고부터다. 이제 그는 한 자리에 300년 동안 서 있는 바위에 서는 느낄 수 없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바위는, 그저 서 있을 뿐. 그러 나 드래곤 로드는 바위처럼 선 채 사색했을 것이다. 그는 바라보며, 생 각했을 것이다. 그가 바위라면 그는 폭포 속에 서 있는 바위일 것이다. 수백년의 물살을 맞으면서도 깍여나갈 줄 모르는 자존심 강하고 고집센 바위일 것이다. 깍여나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가 원해서 물 살에 실어 흘려보낸 것뿐이다. 그는 말했다. "제레인트 침버. 인간의 아들이며 테페리의 지팡이여." "예? 아, 예?" 제레인트는 크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카알은 잠시 드래곤 로드를 바라 보더니 그대로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제레인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상황은 제레인트의 마음에 들지 는 않았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식은 땀을 좍좍 흘리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예? 아, 저 말씀이십니까?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거요?" "물론 그렇다네." "아, 저, 그것은 테페리의 뜻입니다." "테페리의 뜻?" 제레인트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말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예. 저는 테페리에게 저의 몸을 던진 자이며 그의 뜻에 따라 길을 선 택할 수 있는 권능을 수여받았습니다. 제가 걷는 모든 길에 그 분의 은 총이 함께 합니다." "목숨보다도?"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드래곤 로드의 질문도 빨랐고 제레인트의 대답도 빨랐다. 카알은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대담하게시리 콧방귀를 뀌어대고 있었다. 왜 저러시지? 드래곤 로드는 카알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다. "좋네. 제레인트. 자네는 갈림길의 신 테페리의 지팡이일세. 그러니 선 택하게. 난 자네들의 무리를 둘로 나누겠네. 자네와 그외의 다른 자들 로.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날 기회를 주겠네." 그 음성은 평온했다. 비록 그가 사람 정도는 간단하게 잡아먹고 나서는 잇사이에 끼인다고 불평할 진면목을 숨기고 있다지만 음성만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포는 조금 늦게 찾아왔다. 제레인트는 굳어버렸다. "예?" "이해가 어려운가? 다시 말해주지. 자네가 죽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은 살려보내주겠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이 죽는다면 자네는 살려주겠네.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선택하게." 제레인트는 멍한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지만 드래곤 로드는 자 기가 내뱉은 무시무시한 말에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은듯이 태연하게 제 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나와 샌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뭣때문에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모든 반응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웃는다니? 혹시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그 때 제레인트는 박수를 딱 치더니 말했다. "큭크크큭. 우힛히! 그거 너무 쉽습니다. 내가 죽지요. 하하하하." "쉽다고?" "하핫! 예! 정말 간단한 질문이군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300년이나 살아오신 드래곤 로드께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아하! 그렇군요. 이제 서야 카알이 장난 어쩌고 한 말이 이해되는군요. 하하하!" 제레인트는 너무 웃어서 흘린 눈물을 닦아내더니 배를 잡고 말했다. "드래곤 로드, 위대한 드래곤이여. 하하하. 당신은 인간을 아실 겁니 다. 인간이란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항상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테페리에 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내가 죽습니다. 친구들을 내보내주세요." 나와 샌슨은 넋을 잃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샌슨의 얼굴에 흘러넘 치는 저 감동은 형언하기가 힘들다. 과연 인간이라면 모두 그렇게 대답할까? 아니다. 난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레인트 당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믿는 당신이니 그런 얼빠진 대답을 하겠 지. 그러나 왠지 나의 생각엔 확신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제 유쾌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니 왜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드래곤 로드는 제레인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페리의 대답은 무엇이었지?" 드래곤 로드는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갑자기 얼굴을 굳혔 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뻔한 거 좀 그만 물어요. 젠장. 저 사람들은 테페리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난 테페리의 뜻을 실천해요. 당신이 나를 죽이겠다는 것은 테페리 를 죽이겠다는 것과 같아요. 테페리는 나보고 살라고 하겠지요." 샌슨의 얼굴은 다시 파랗게 변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말 했다. "그럼 자넨 테페리의 뜻을 어기겠다는 것인가? 자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제레인트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 나 드래곤 로드는 제레인트를 냉정하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제레인 트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명확해졌다. "물론입니다. 난 테페리가 아니라 제레인트니까."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테페리입니다." "제레인트가 아니라?" 제레인트는 콧등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헤헷.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없다면 테페리를 섬길 수 없어요. 헤트로 이처가 쓴 신에게로의 사색적 산책 한 번 읽어보시죠. 여기도 있던데.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신앙도 없어지게 되지요. 더 간단히 말할까요? 테페리께서는 그를 섬기는 노예를 원하시지 않아요. 노예를 원하셨다면 인간 같은 것은 자격 미달이겠지요. 노예는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드래곤 로드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뭐… 이런 거죠. 내가 없으면 테페리를 향한 나의 신앙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난 테페리를 섬기기 위해서는 테페리와 구분되는 제레인트로 남아야 하며, 그런 제레인트로서 당신의 질문에 대해 죽겠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테페리의 뜻을 어김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테페리에게 바쳤으니, 내 죽음 정도는 제레인트를 위해 쓰지 요. 테페리께서도 화내시지는 않을 겁니다." 제레인트는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고 드래곤 로드는 미소를 지었다. "테페리라는 교사는 학생 제레인트에게 낙제점을 줄 듯하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하하." "자네 대답은 잘 들었네. 고맙군. 그럼…" 드래곤 로드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움찔해버렸으나 동시에 적개심을 담은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그 의 손이 또 칼자루 근처로 움직이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샌슨의 어깨는 무섭도록 경직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수틀리면 치고들 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 역시 그것 을 보았을 텐데도 아무 변함없이 말했다. "샌슨 퍼시발."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5. 샌슨은 불안한 눈으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더니 마침내 잔뜩 볼멘 목 소리로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 목소리에 정말 모든 상황을 잊어버리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샌슨 은 자기 손에 든 장난감을 빼앗으려 드는 어른에게 말하는 듯한 어투로 말해버린 것이다. 불안과 적개심도 이렇게 표현되니 차라리 희극이다. 카알은 고개를 돌리고는 배를 떨고 있었고 제레인트는 갑자기 하늘을 매 섭게 쏘아보았다. 기절한 네리아와 이루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저요? 에. 저 말씀이십니까?"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모든 불안감을 잊을 수 있는 기 회가 왔다. 우리들 모두는 샌슨이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한다는 시선으 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멋적게 뒤통수를 긁더니 곧 심각한 얼굴 이 되었다. 그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내부에 빠져들어갔다. 드래곤 로드와 우리들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전사 샌슨. 헬턴트의 땅이 그의 유년 을 형성했고 그의 성장은 피 묻은 검과 함께였을 것이다. 그가 그 생사 의 틈에서 바라본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잡 은 것은 무엇인가. 마침내 깊은 성찰과 사색을 끝내고 헬턴트의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은 위대한 드래곤 로드의 질문에 대답했다. "에이, 씨. 너무 어려워요. 한두 개라야지." "파하하핫하!" 제레인트는 카알에게 매달려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카알은 위엄을 지키 려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제레인트의 맹렬한 웃음 소리에 네리아가 눈을 떴다. 그녀는 어지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 다. 그러자 그녀는 영문도 모른채 덩달아서 빙긋이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나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푸히흐으흐어아하핫하!" 네리아는 웃는 내 모습을 보더니 다시 히죽이 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몸을 돌려 드 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마저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점잖게 샌슨 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한두 개가 아닌가?" "예. 제 고향도 중요하고, 조국도 중요하고, 우리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에,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고향에서 기다리는 여자도 있는데요." "성밖 물레방앗간에…" "그거 하지 마!" 샌슨은 내 목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카알은 샌슨의 대답에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리고 드래곤 로드는 다시 카알을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샌슨에게 말했다. "고향, 조국, 가족, 여자 이 모든 것 앞에 붙는 것이 있지 않은가?" "예?" "그 모든 것들 앞에는 '나의' 라는 말이 붙어야 되는 거 아닌가? 자넨 다른 사람의 고향이나 다른 사람의 조국을말하는 것은 아닐 텐데." "어? 아, 예. 그렇군요." "그러므로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샌슨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뭐. 그렇게 말한다면 저겠지요. 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네의 고향이나 조국, 또는 가족, 여자는 자네가 없어도 아무 일이 없겠지? 가족이나 여자라면 자네가 없어 슬퍼할 수 있겠지만, 그들 에게 슬픔 외에 다른 해가 돌아가지는 않겠지? 자네가 없어도 그들은 그 대로 존재할 수 있을 테지. 맞는가?" "예? 아, 아, 그렇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나서서 자네의 조국을 모두 파멸시키겠다면 어 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자네의 고향도, 가족도, 그리고 그 여인도 틀 림없이 죽게 될 테지." 샌슨은 입을 딱 벌린 채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에 서 불꽃이 튀기더니 그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말릴 새도 없었다. 그 는 맹렬하게 땅을 밟으며 칼자루를 불끈 쥐었다.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샌슨의 얼굴엔 이제 불안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수 하게 정리된 분노만이 드래곤 로드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 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드래곤 로드는 서서히 팔을 들어올렸다. "나를 막겠다고? 나를? 드래곤 로드를?" 그리고 그의 음성은 천둥이 되었다. 그는 온세상이 울리도록 외쳤다. "감히 나를 막겠다고!" 그의 고함소리에 귀가 터져나가는 듯했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울림. 드래곤 로드는 온세상을 덮어버릴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늘도 보 이지 않았고 주위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거대한 드래곤 로 드가 있을 뿐이다. 주위는 모조리 암흑밖에 없었고 내 발로 디디고 있는 땅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한없이 미친 바람이 불어 세계가 모조리 휘날 려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와 드래곤 로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구름 위에서 외치듯이 말했다. "네가! 나를! 막겠다고!"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건 말도 안돼. 젠장! 젠장! 세상이 없어져버 렸어. 아무 것도 없다고! 드래곤 로드, 드래곤 로드만이 남아있었다. 고 개 돌려보니 제레인트 역시 무릎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아버렸고 네리아 는 땅에 무릎을 꿇고는 팔 사이에 머리를 묻은 채 떨면서 흐느끼고 있었 다. 카알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바뀌었다. 나는 주저앉은 채 샌슨을 보았다. 샌슨은 떨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뒤로 물러나려는 발걸음을 붙 잡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숨소리를 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는 검을 뽑아들었다. 온몸을 찢어버릴 듯이 불어닥치는 바람 속에서 그 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는 가슴 앞에 검을 세우며 안간힘을 다해 외쳤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소!" 그러자 곧 온세상이 붕궤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죽어도 좋은가!" 멍청이! 틀림없이 죽게 돼! 난 샌슨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악을 질렀다. 이 멍청한 작자야! 드래곤 로드가 당신의 조각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거 야! 부서진 몸의 가장 작은 조각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떨게 될 것이 분명해! 아니, 그 영혼까지도 공포에 질려 영원히 울부짖게 될 거 야!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분명치 않았 다. 하지만 난 짓눌릴 것 같은 공포 속에서 헐떡이며 샌슨을 바라보았 다. 폭풍은 세상을 그대로 조각낼 태세였지만 그 조각날 세상이라는 것 이 없었다. 그리고 샌슨이 말했다. 이 폭풍을 뚫고 그의 악쓰는 목소리가 들려왔 다. "죽어도 좋아! 하지만 이 자식아, 내 의지는 꺽지 못해!" 순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물 속의 건물에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장갑을 벗었다. 아아, 젠장. 손톱이 부러졌어. OPG를 낀 채로 바닥을 심하게 긁어대어서 그랬 는지 손톱이 몇 개 부러져 있었다. 난 후들거리는 손을 붙잡았다. 네리아는 눈물로 범벅이 되다시피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녀는 덜덜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그 녀는 훌쩍거리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카알은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족감? 슬픔? 모르겠다. 그 양쪽 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 같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뭔가 기도를 올리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어깨는 심하게 떨리 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릴은 조용히 샌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샌슨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창백했다. 그는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고 검을 쥔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한 점 흐림이 없었 다. 여전히 불타오르는 분노로 드래곤 로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자네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그 평온한 어조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마치 우리들을 쓰다듬는 듯 했다. 난 헐떡거림을 멈추려 애쓰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가슴 이 너무 뛰고 있었고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야. 자네가 있음으로 해서 자네의 조 국, 자네의 고향, 자네의 가족, 자네의 여인이라는 것들이 이해될 수 있 지. 그런데 자네 자신을던지겠다는 말인가? 자네라는 한 개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것들을 위해?" "아무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래. 자네의 가족과 자네의 여인을 볼까. 그 사이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네. 자네를 뺀다면 말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가 아무런 관계 도 없는 타인들이지. 자네의 조국을 볼까. 자네의 조국과 저 헤게모니아 는 똑같은 나라이며 서로 특별히 다를 것은 없어. 하지만 자네라는 존재 가 있음으로서 바이서스는 자네의 조국이며 자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 는 것이지 않는가. 세상 모든 것들은 기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대한 쓰레기들이지. 하지만 자네가 있음으로서 거기엔 의미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고 사랑이 생기지 않는가." 샌슨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 았다.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곧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들을 위해 자네를 희생하겠다는 것인가?" 샌슨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난 입술을 적셨다. 드래곤 로 드의 말은 틀린 데가 없는 거 같다. 미칠 것 같이 두근거리는 심장과 지독하게 뜨거운머리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저 말 은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이상해. 뭔가 맞지 않는 말이야. 그게 뭘까? 샌슨은 말했다. "제기… 난 그런 거 몰라! 어려운 거 묻지 마. 하지만 내가 어떻게 대 답할지는 잘 알고 있어! 잘 돌아가는 입술이 없어서 설명은 못해. 하지 만 난 죽어도 막겠어!" 그러자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성실한 인간이여." 성실한 인간? 샌슨이 뭐가 성실했지? 설명도 제대로 못했거니와 말도 마구 했는데? 샌슨은 어안이 벙벙해저서는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알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리아." "하지 마세요!" 네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소리가 어찌나 패악스러운지 우리는 질겁하고 말았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저 고개를 갸웃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발악하듯이 말했다. "그,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세상을 다 없애버리고, 시커멓게 만들고, 마구, 마구 바람을 불게 하고! 어, 어, 그런 거,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난 못견딜 거에요. 제발! 난 한 번 더 그런 것을 당하면 죽어버릴 거에 요!"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겠으니, 안심하게." "아아!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죽는 줄 알았어요. 어, 어흑! 난, 난 이런 것은 상상도 못했어. 제발, 그런 거 다시는 하지 마세요!" "하지 않겠다." 네리아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이 조용히 걸어가서 네리아를 부축하자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났다. 이루릴은 차분히 웃으면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멍 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닦았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묻겠으니 성실히 대답해다오." 네리아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에게 가장 소중한 거요?" "아니. 자네가 가장 증오하는 것에 대해 묻겠네." "예?" 네리아는 입을 딱 벌리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딱 딱하게 대답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대답을 얻었으니 더 물을 필요가 없군. 난 자네에게 가장 증오하는 것에 대해 묻고 싶다네." 네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자 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제가가장 싫어하는 거요?"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그녀는 우리 일행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들여다보고 나더니 다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얹 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네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대화를 나 누는 당사자들보다 우리가 더 초조해졌다. "내가, 내가 싫어하는 건…" 난 침을 삼키며 네리아를 보다가 드래곤 로드를 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전혀 초조한기색이 없었다. 네리아가 자꾸만 머뭇거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태평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아, 그래. 후치 네드발. 그걸 알아야했어. 멍청이. 드래곤 로드는 우리와 달라. 그는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존재지. 대미궁 하나를 위해 50년쯤 간단히 기다릴 수도 있는 존재였지. 따라서 그는 초조하다는 것을 모르겠지. 그 러나 초조해할 줄 모른다는 것은… 나는 순간 카알을 바라보았다. 이제 알았다. 카알의 말이 무엇인지, 아까의 그 태도가 무엇인지 알았 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평온한 마음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등 뒤에서 말하는 사람이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이지?" 네리아는 자신의 말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냥 그거에요. 예. 뒤에서 말하는 사람이 싫, 싫어요." "의미가 있을 듯한데. 설명해주겠나?" 네리아는 갑자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고함을 질렀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싫어요!" 그녀의 눈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도망다니고, 피해다니는 것이 싫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싫어 요! 따뜻한 창 안쪽에 앉아 웃는 사람들이 싫어요. 자기들끼리 행복한 눈길을 보내면서 나에겐 냉담한 사람들이 싫어요!" 네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쉬지않고 외쳤다. "그걸 바라보다가 고개 돌려 걸어가야 되는 것이 싫어요! 그 때 내 등 뒤에서 욕설을 던지는 것이 싫어요! 넘치는 행복은 조금도, 조금도 나눠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식하고, 자기들끼리만, 자기들끼리만! 그리고 욕설과 무표정은, 차가운 말은 모두 내 등에 던지는 사람들이 싫어요! 그런 사람들이 싫어서 고슴도치처럼가시를 곤두세우는 제가 싫어요. 담 장 위와 어둠 속만 찾아다니게 된 제가 싫어요!" 네리아는 두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만족하세요? 예? 이제 만족하세요? 다 설명드렸어요. 더 원하시는 것 이 있어요? 그래요. 전 지저분한 도둑고양이 같은 계집애에요. 한 치의 어둠이라도 있으면 뛰어들어 달아나버리고, 몰리면 쉭쉭거릴 줄 밖에 모 르고, 그래요. 그게 나에요." 우리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 때 드래곤 로드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군." 네리아는 고개를 들어 처연한 표정으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 래곤 로드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봄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주위는 따스했다. 모든 것이 부드러워 보였다. 난 눈을 비볐다. 이상한 데. 분명히 아까 그대로의 차가운 대리석 건물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담쟁이 덩굴이 대롱대롱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담쟁이 덩굴들은 따가운 오후의 햇살에 졸음을 참지못해 축축 늘어지며 그 뽀송뽀송한 잎 들을 한껏 펼치고 있다. 그리고 바람에 실리는 꽃향기가 느껴졌다. 숨막 힐 정도로 짙은 향기가 폐부를 온통 씻어내는 것 같았다. 멀리 떨어진 녹색의 산으로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에 피 어오르는 아지랑이들. 그리고 저멀리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시냇물은 터무니없이 아스라했다. 반짝반짝하는 실을 들판에 대충 던져둔 것처럼 보인다. 꽃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움직임이 어지럽다. 그리고 덩굴풀이 가득 매달린 대리석 기둥 뒤에선 점잖은 사슴이 풀을 뜯고 있 었다. 사슴의 순한 눈이 아름다웠다. 무장이라는 것은, 전쟁이라는 것은 모두 사라진 최후의 낙원에 돌아온 것 같았다. 드래곤 로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얀 옷을 입고 한없이 인 자한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천국 사정이 어떠냐는 질 문을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길 것 같지 않은걸.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당신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야." 네리아는 가만히 선 채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모든 사물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젠장. 왜 갑자기 이런 질투심이 느껴 지는 거지? 아니, 질투심이라기보다는 경외감에 가깝다. 난 네리아를 존 경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는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네리아의 웃음에 새들이 노래했 다. 네리아의 손짓에 꽃들이 피어올랐다. 네리아의 걸음걸음에 산들바람 이 불었다. 여기에 이루릴이 있지만, 솔직히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흩날 리며 경쾌하게 걷는 네리아는 이루릴보다 더 엘프다웠다. 아니, 그것은 실제의 엘프라기보다는 엘프의 좋은 점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엘프 의 모습을 모조리 모아둔 것처럼 보였다. 엘프의 주위에선 나타나는 깊 은 세월의 그림자들이 네리아에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영원한 현재 를 살고 있는 여신이었으며, 영원한 아이였으며, 영원한주인이었다. 만물들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네리아의 전속 초 장이라도 되어야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샌슨은 그녀를 위해 발씻을 물이 라도 대령해야 될 것 같고.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기분 나쁘지 않은 일 이다. 기분 나쁘기는 커녕 어서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다. 네리아의 웃음 을 위해서라면, 네리아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해주고 싶은 기분 이 든다. 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덩굴풀에 뒤덮인 폐허에서, 드래곤 로드는 인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 남겠는가?" 당연하지! 드래곤 로드가 왜저리 멍청한 질문을 다하는 거야? 도대체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존경받기는 어렵겠 어? 당연히 이 현실을 영원히 고정시켜!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돼. 네리 아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존재해야 돼. 이것이야말로 천국이야. 다른 것들은 다 거짓말이야. 환상이라구. 우리는 기어코 도착한 천국의 입구 에서 네리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요. 네리아. 이겁니다. 어서 대답 해요. 그러나 네리아는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 지고 있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불안감을 느꼈다. 안돼요. 네리아! 세 상을 어둡게 만들지 말아요. 이건 절대로 안돼! 이 아름다운 세상을 버 리지 말아요. 웃어줘요! 우리는 감히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진 못했다. 그래서 가슴이 죄어드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의 여신이신 네리아의 안색만을 살펴보았다. 미칠 것 같은 세상의 거짓됨이 느껴졌다. 안돼, 안돼요. 네리아는 말했다. "싫어요."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6. "싫다고?" 네리아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한숨을 쉴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안돼요. 제발! 한숨을 쉬지 말아요. 네리아! 네리아는 이제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음. 난 엘프가 아니에요." "엘프가 아니라고?" "예. 어어… 그러니까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나에게 조화를 이루는 이 런 세상은… 저, 그러니까 저는 충실한 나이트호크예요." "충실한 나이트호크?" "그래요. 음, 저, 그러니까 난 슬쩍할 수 있어야 돼요. 모든 것이 내 것이면 훔칠 수가 없는 걸요." 드래곤 로드는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네리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 했다. "저, 잘 설명하진 못하겠는데, 어쨌든 그래요. 예. 모든 것이 내 것이 고, 모든 것이 날 위한 것이라면, 그건 삶이 아니에요. 전 그렇게 생각 되어요. 이건 세상이 아니라고요." "자넨 자네를 경멸하는 세상을 원하는가?" 네리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굳이 말하라면, 예. 그래요. 날 싫어하기도 하는, 날 죽여버릴지도 모 르는, 날 타락시키기도 하는 세상을 원해요. 난 역경과 고난이 가득찬 세상을 원해요." 그런 지옥을 원하다니! 네리아, 도대체 제정신이에요? 우리는 모두 대 경실색하여 창백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리아는 이제 확신을 얻은 얼굴로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저에게 맞추어진 세상은 싫어요." 다음 순간, 우리들은 다시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주위는 차가운 물뿐이다.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물은 이제 진파랑빛이었다. 차가운 대리석은 여전히 완벽한 건축미를 뽐내며 고고 하게 서 있었다. 담쟁이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드래곤 로드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아까처럼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친 근한 분위기는 없었다. 그는 드래곤의 제왕, 위대한 드래곤 로드였다. 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천국에 살 수 있었는데, 멍청한 네리아 같 으니라고! 안타까워진 내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네리아는 히죽 웃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리고 그녀 는 두 손을 뒤로 모으고는 고개를 살짝 꺽으며 드래곤 로드에게 미소지 었다. "드래곤 로드. 너무했어요." "그랬나?" "예. 이건 샌슨에게 한 거보다 더 심하네요. 이잉. 이제 죽을 때까지 아까 그 장면을 잊지 못할 텐데. 허락하신다면, 당신이 밉다고 말하고 싶어요." 네리아의 표정은 안타까운 듯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즐거웠다. 우리는 그제서야 가슴이 통째로 날아가버릴 정도의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건 아니었어. 그건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몸이 녹을 정도로 따 스했지만,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선물은 아니야. 내 생각이지만 아마 도 그건 엘프에게 주어진 선물일 거야. 드래곤 로드는 날 돌아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후치 네드발." "예." 이제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 난 카알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내었지 만 카알은 지금까지와 똑같이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젠장. 나 혼자서 드래곤 로드를 상대해야 되나? 난 드래곤 로드의 입이 벌어지 기를 기다리며 내 맥박이 쾅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와서 크게 기침이라도 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자네가 원하는 소원을 말해보게." 윽! 이건 또 무슨 질문이지? 난 주위를 돌아보았다. 카알은 약간 근심 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아랫입술을 크게 내민 채 날 바라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씨익 웃으면서 대답이 기대된다는 듯한 얼굴이었고 이루릴의 얼굴은 설 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불편해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자, 이거, 머리가 아파오는 질문이로군.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소원이오?" "그렇다네. 말해보게." 사실대로 말해야 되나? 난 침을 삼켰다. "에, 그러니까 레니를 되찾고 여기서 나가는 거요." 드래곤 로드는 의아쩍은 얼굴이 되었다. 대답을 잘못 했나? 다른 사람 들도 대부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알만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알겠지. 나는 자신을 되찾았다. "그것뿐인가?" "그것뿐이라니오? 그것 하나를 위해 나우르첸에서 여기까지, 영원의 숲 을 지나서 카르 엔 드래고니안까지 들어왔는데요." "자네 평생의 소원을 듣고 싶네만?" "예? 그런 거 없어요." "없다고?" "예. 아직 평생을 다 살아보지 못해서 평생의 소원이 뭔지 모르겠어 요." 드래곤 로드의 눈이 갑자기 깊어지는 듯했다.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 작했다. 이거 짜릿하군.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난 계속 말해버렸다. "레니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소원이 없었어요. 그리고 레니를 납치당하 지 않았다면 역시 그런 소원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레니는 납치당했고, 그리고 그녀는 중요해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드래곤 로드께서 저 에게 어떻게 질문하신다고 해도 전 요 며칠 동안의 절 부정할 수는 없어 요. 요 며칠 동안의 전 그것 하나를 위해 달려왔고,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는 거니까." 숨이 가빠져서 말을 멈추었다. 난 호흡을 고르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 았다. 젠장. 이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너무 다른데. 표정의 변 화나 분위기의 변화 같은 것이 대화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것인지는 몰랐군. 도대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 때 드래곤 로드가 말했다. "자네에겐 그 소녀, 레니가 중요한가?" "예… 그래요." 드래곤 로드는 싱긋 웃었다. 평범한 대화에서라면, 다른 사람과의 대화 에서라면 미소를 짓는 것은 퍽이나 대화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겠지만 지 금 드래곤 로드와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는 말했 다. "그렇다면 결정하게. 레니와 자네 둘 중의 하나만 나갈 수 있다면 어떻 게 하겠는가." "예?" "레니와 자네 둘 중에 하나는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서 생명을 끝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네. 그러니 선택하라는 것이야." 순간 울화가 치밀어오르면서 떨림은 사라져버렸다. 나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내 변화가 이상하다는 눈 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굳어버린 내 얼굴을 보는 모양이다. 이거 괜찮은 기분이군. 좋아. 내가 말할 테니 잘들 들어보라고. "드래곤 로드. 아까부터 거의 비슷한 질문을 해오시는데요, 이렇게 말 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느리시군요." "느리다고?" "아까부터 이런 질문이에요. 너와 다른 무엇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맞 지요? 제레인트도 대답했고 샌슨도 대답했고 네리아도 대답했어요. 그런 데 나에게까지 같은 것을 묻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자네의 대답은 무엇인가?" "당연히 레니를 내보내라는 거지요." "이유는?" 난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자, 진정해. 진정하라고. 난 나 스스로도 놀 랄 정도로 낮고 차갑게 말했다. "내가 나가면 난 죽는 것이지만 레니가 나가면 난 사는 거니까."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카알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 끄덕임은 내게 힘을 주었다. 난 말했다. "레니가 나가지 않으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예. 그래요." "그래? 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지 자네가 죽는 것이 아 니잖은가." 난 한심한 기분이 들어버렸다. "이런 말을 언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그 말이 생각나고, 또 좋은 대답이 될 거라고 생각되어서 말씀드리니까 잘 들어보세요." 드래곤 로드가 이 말을 알까? "나는 단수가 아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는 질겁했다. 그렇군. 그는 알고 있었군. 드래곤 로드는 차갑게 말했다. "그 간악한 녀석의 말이로군." 드래곤 로드의 목소리의 울림은 스산했다.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에요. 당신이 아까부터 우리 일행에게 던져 온 질문, 아마 당신은 우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셔서 그렇겠지요. 무례 하다고 꾸짖지 않으시겠다면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하나가 아니에요. 따라서 당신은 아까부터 얼빠진, 죄송하지만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돼요. 예. 얼빠진 질문을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가슴이 쾅쾅거리는걸? 다행히도 드래곤 로드는 초장이의 맛이 어떨지 심사숙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나의 실수를 설명해주겠나?"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눠놓고는 선택하라고 질문하셨어요." "나눌 수 없는 것?" 제레인트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두 손을 곽 쥔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파랗게 질려있었고 이루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카알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질문하셨어요. 당신 보시 기에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 아요. 드래곤 로드께서는 샌슨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지요." 샌슨은 덜커덩하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심장이 내려앉은 사람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계속 말했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걸? 난 슬쩍 그것을 바지에 닦아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말했다. "샌슨의 가족들을 죽이겠는가, 샌슨을 죽이겠는가. 조금 달랐을지 몰라 도 대충 그런 의미였지요. 하지만 그건 나눌 수 없어요." "어째서지?" "샌슨은 하나가 아니니까. 샌슨은 헬턴트의 경비대장 샌슨이고, 나의 좋은 동료 샌슨이고,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씨의 사랑하는 장남이에요. 카알의 신뢰받는 길앞잡이고,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인 샌슨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샌슨이지요. 이런 식의 이야기도 들어 보셨겠지요? 어쨌든 당신은 샌슨 하나를 살려주는 대신 그 가족들을 죽 이겠다고 말했지만, 그 가족들을 죽이면 샌슨도 죽는 셈이에요." 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이마에 열기가 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 이 들어서 도저히 말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요. 그 모든 것이 샌슨이에요. 당신이 헬턴트 영지를 파괴하면 헬 턴트 경비대장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날 죽인다면 후치의 동료 샌슨을 죽이는 셈이고요. 당신이 조이스씨를 죽인다면 조이스씨의 아들 인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카알을 죽인다면 카알의 길앞잡이 샌 슨이 죽지요, 그리고, 그리고 그 아가씨를 죽인다면 그 아가씨의 연인인 샌슨을 죽이는 셈이라고요." "샌슨은 하나가 아닌가?" 난 기가 막혀서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하나가 아니에요!" 그리곤 곧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계속 다물 수가 없었다. "영원의 숲, 영원의 숲 아시죠? 거기서는 자신이 자신을 죽이게 되어 요.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드래곤 로드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안다만, 그것이 이 이야기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말해주겠나?" "나가면 그 사람은 사라져버려요!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남아있어도 다 른 사람들이 모두 잊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아직까지 그걸모르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요. 그것이라고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구요. 우리는 그 렇게 살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말을 마치고나자 숨이 찼다. 너무 흥분해 버렸나봐. 난 목을 타고 흘러 내리는 땀을 닦아 내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차가운 냉수 한 잔만 준 다면 그를 위해 노래 100곡을 바치겠어. 농담이 아니라고. 드래곤 로드는 침울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랬었군… 그럴 거라고 짐작했지. 이제야 확신을 얻게 되었군." 드래곤 로드는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감히 끼어 들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로군." 드래곤 로드는 스스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나와 너희들의 차이였군. 그래서 루트에리노는 그렇게 나에게 달려들 수 있었군. 자신이 죽어도 그의 나머지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남 아있을 테니.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그렇게 무모할 수가 있었군. 그의 나 머지 역시 다른 인간들, 그를 아는 인간들에게 남아있을 테니까." 드래곤 로드의 입술이 조금씩 올라갔다. "너희들이야말로 불사의 생명이었군… 하, 하하하, 핫하하하…" 드래곤 로드는 곧이어 온세상이 뒤흔들릴 정도로 웃었다. "아핫하하하하!" 우렁찬 웃음소리. 천지가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나는 갑자기 너무도 행 복해져버렸다. 샌슨을 돌아보니 온얼굴로 웃고 있었다. 네리아의 눈은 꿈결 같았고 제레인트는 이미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것은 온세상의 웃음이었다. "핫하하하하하!" 드래곤 로드는 그렇게 세계와 함께 웃었다. 우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 서 웃었다. 너무도 유쾌했다. 정말 이렇게 웃어보는 것은 태어나고 처음 인 것 같았다. 카알마저도 얼굴을 형편없이 일그러뜨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 얼굴을 보며 다시 숨이 막히도록 웃었다. 이루릴은 화사한 미소를 지 으며 큭큭거렸다. 아름다웠다. 드래곤 로드는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300년만에 대답을 얻었군. 내 패배의 원인을 이제야 알게 되었군." 카알은 눈물을 닦더니 숨을 고르려 애썼다. 그는 한참 후에야 그런대로 정중하게 말할 수 있었다. "드래곤이여… 당신은 혼자서 오롯한 생물이십니다." 우리들도 서서히 웃음을 멈추며 - 아랫배가 당겨서 제대로 설 수도 없 었다. -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난 하나인 생물이지. 다른 피조물에 투영된 나 같은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네. 그래서 나의 죽음은 나라는 것 전체의 파멸이 지." 카알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너무도 오랜 시간을 존재하는 분입니다. 당신에게 선사된 그 무한한 시간은 당신 개인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나누고 서로에게 자신을 건네어야 됩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네들에게 내려진 선물일세. 그리고 나에겐 다른 선물이 내려 진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이제 서로의 선물을 비교하지는 마세나. 자네 는 이미 이해했고, 나도 이제서야 이해했네. 하지만 그 두 가지의 경중 을 논하는 것은 우리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드래곤 로드의 온화한 목소리에 카알은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아니야. 잘못은 나에게 있네. 이미 말했지만 자네는 이미 날 이해했고 난 그렇지 못했으니 그런 고약한 말들을 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험들 을 내어야 했지. 그래. 장난치는 짓거리였지. 용서해주게." 드래곤 로드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자네들의 반응을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대단한 신비를 주었네. 이해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후치군. 자네의 대답에서 비로소 난 해답을 얻었 네. 드래곤 로드의 이름으로 감사하지." "아, 예. 하하. 당연, 아, 아니, 저, 음, 천만부당한 말씀입니다." 평소의 날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건 도저히 내가 한 대답이라고 생각하 지 못할 것이다. 윽. 난 간신히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저 웃었다. 그는 우리 모두를 돌아본 다음 점잖게 말했다. "자네들을 내보내주겠네. 자네들과의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네. 감 사의 뜻을 표하고 싶군.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곳은 자네들에게 허 락된 장소는 아닐세." 카알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해합니다. 저, 그런데 그 소녀와 다른 일행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 소녀와 나머지들은 모두 대미궁 밖으로 보냈다네. 제레인트에게 물 어보자니 그들은 동료가 아니라고 하더군. 난 이 장소에서 싸움이 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네. 그래서 그들은 내보내고 자네들만을 만나기로 했 지." 카알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혀를 찼다. "할 수 없지요. 주인은 자신의 집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자는 이곳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 마 다시 들어올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자네는 그의 목적을 아는가?" "아니오. 모릅니다."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목적을 안다네. 그는 휴리첼 가문의 사나이였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시는지요?" "나는 까뮤 휴리첼이라는 사람을 알지. 그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더군." 카알은 눈을 크게 떴다. "까뮤 휴리첼을 어떻게 아십니까?" "까뮤 휴리첼은 크라드메서의 라자였지. 나는 드래곤 로드이지 않은 가."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저 그가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드래곤 로드는 카알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혼잣말처럼 말했을 뿐이다. "거대한 불은 거대한 불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우둔한 자겠 지. 덤불 깊은 곳에 숨겨진 미약한 불씨, 입김으로도 꺼트릴 수 있는 불 이 온 세상을 태울 수도 있겠지." ================================================================== 9.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27. 드래곤 로드는 그냥 그렇게만 말한 다음 다시 우리들에게 고개를 돌렸 다. "그 자는 다시는 오지 못할 걸세. 걱정하지 말게나." 카알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이만 나가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자를 뒤쫓아야겠 습니다.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습니다만, 거기에 대한 사과를 받는 것은 관두겠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 난 그것도 이해할 수 없다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마음의 모습이야." 카알은 빙긋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것이 우리의 선물입니다." "그래. 그 무모해보일 정도의 발걸음, 참으로 무섭군. 자네 덕분에 핸 드레이크의 악몽을 다시 꾸게 되겠군. 그렇다면 나가보게. 시간을 빼앗 은 데 대해서, 그리고 내게 해답을 준 것에 대해서 선물을 하고 싶군. 내 창고에서 내키는 것이 있다면 가져가도 좋네." 카알이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가 먼저 펄쩍 뛰었다. "예엣?" 그녀는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가 곧 움츠러들면서 말했다. "저, 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그런데 정말요? 정말 마음 대로 가져가도 돼요?"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내키는대로 가져가게."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네리아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태세였다. 카알은 정중히 말했 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눈에 확연히 확인될 정도로 빛이 줄어들었다. 드래곤 로드의 하얀 옷은 이제 청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의 물빛도 보다 어두워졌 다. 약간 떨어진 드래곤 로드의 안색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 같은 것은 받지 못했다네." 순간 카알은 굳어버린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드래 곤 로드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은 생동감 없는 바위가 아니었다. 그는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밝았다. 카알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드래곤 로드여." 드래곤 로드는 빙긋 웃었다. "관두게. 관둬. 자네도 나도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카알은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런지 모르겠 지만, 그들의 대화는 내 눈에는 꼭 80 살 먹은 노인 둘이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맑게웃는 모습, 아무런 욕심도 욕망도 없이, 그 런 것들은 모두들 잊어버린 채 장난스럽게 말을 나누고 있는 늙은이들처 럼 보였다. 카알은 뜻모를 말을 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군." 그 때 이루릴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녀는 조용히 드래곤 로 드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드래곤 로드는 이루릴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있는가, 숲의 딸이여?" 이루릴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두 분의 대화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카알씨에게 물어보면 되 겠군요. 저에겐 당신께서 대답해주실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핸드레이크는 어디에 있습니까?" 드래곤 로드는 말없이 이루릴을 바라보았고 이루릴의 검은 눈 역시 꼼 짝도 하지 않은 채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위엄있게 말했 다.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모든 것을 다 잃은 가련한 자에게." "클래스 10의 마법을 원합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말했다. "자네들은… 이제 결심했는가?" "그렇습니다." "알았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여. 헬카네스는 어디다 열쇠를 숨기는지 짐작해보게." 이루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를 만나고나서 지금처럼 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한 얼굴이었다. "정녕 그러합니까?" "그렇다네." "감사합니다. 영광의 드래곤 로드여." 드래곤 로드는 빙긋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기둥들 사이로 빛의 판들이 죽 떠있는 모습 이 보였다. 그것은 이 바닥에서 시작하여 위로 일정한 간격으로 떠 있었 다. 마치 계단 같은 모습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더 이상 말할 태세가 아니었다. 왜 그런지모르겠지만 그에겐 작별의 말이란 필요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그저 목례를 보낸 다음 각자의 배낭을 들어올리고는 천천 히 빛의 계단쪽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떠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 지 않고 가만히 다른 장소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밟았다.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젖지 않았다. 우리는 빛의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그것은 위로 나선을 그리며 뻗어있 었다.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물 속에 있다는 것 때문인지 아무도 말을 하 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올라갈 때였다. 맨 뒤에서 오던 제레인트가 말했다. "없어지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지나온 계단들은 하나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어두운 물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계단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 다. 그 때 난 숨을 깊이 들이키고 말았다. 저 아래의 호수 바닥에 거대한 황금의 용이 잠들어 있었다. 황금의 드래곤은 아찔할 정도로 거대했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 다. 그래서 고개를 한참 돌려야 그 끝에서 끝까지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개미가 된 채로 사람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거무튀튀한 물 속에 서 황금색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인지 더 거대함이 느껴졌 다. 눈 앞이 어지러웠다. 황금의 드래곤은 그 거체를 호수 바닥이 모자랄 정도로 눕힌 채 웅크리 고 있었다. 잠든 것처럼 보였다. 소란을 일으켜 그의 잠을 방해하는 것 은 세상에 다시 없이 무례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 다시 그를 돌아볼 생각을 못한 채 재빨리, 그러나 조용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마치 제왕의 침실에 무례하게 침범한 시종 나부랭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와, 떨려. 계단을 올라감에 따라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캄캄할 정도였다. 꽤 멀어졌을 거라고 생각되어 난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 로드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없이 거대한, 그러나 과거의 무엇이 거기 있었다. 우리의 시간엔 존재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지독하게 슬퍼졌다. 물 밖으로 나오게 되자 이루릴은 먼저 윌 오 위스퍼를 불러내었다. 우 리들이 서 있는 곳은 중앙 호수의 옆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제레인트가 올라오고나자 빛의 계단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물은 검은 거울처럼 바뀌었다. 하지만 난 잊지 못할 거 같다. 저 아래에 잠들어 있 는 그를. 곧이어 네리아는 팔짝팔짝 뛰면서 동굴이 무너질 듯한 환성을 올렸다. 그녀는 곧 한쪽 방향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물론 복수의 방, 화 렌차의 방이었다. 카알은 머쓱하게 우리를 바라보더니 곧 헛기침을 하면 서 말했다. "흠, 허흠. 침버씨. 가실까요?" "그러시지요. 카알." 제레인트도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게 말한 다음 둘은 곧 앞서거니 뒷서 거니 하면서 순결의 방, 그랑엘베르의 방으로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난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샌슨에게 말했다. "음. 선물을 챙기는 것은 천천히 하고, 우리 왼쪽의 방에 가볼까?" "아. 그러지." 그리고 샌슨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웃으며 우리와 함께 걸 었다. 왼쪽에 있는 방들은 각자 파괴, 폭풍, 불이라고 적혀 있었다. 따라서 각자 레티, 에델브로이, 카리스 누멘의 이름을 말함으로써 들어갈 수 있 었다. 검과 파괴의 레티의 방은 무기고였다. 온갖 종류의 무기들과 갑 옷, 방패 등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해괴한 무기들도 많았고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무기로는 보이지 않는 무기들도 있었다. 우리는 혹시나 마법검이 없나 싶어서 검들을 쥐어보았지만 잠시 후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쥐어봐도 쥐자마자 떠들기 시작하는 무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검만 잡아본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정도로 무기가 많았다. 게다가 이루 릴이 말하기로 모든 마법검이 프림 블레이드처럼 떠들지는 않는다는 것 이었다. 샌슨은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뭐, 난 헬턴트 경비대장이고, 영주님이 주신 롱소드면 충분해." 샌슨이 그렇게 말하고나자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어졌다. 이제껏 죽으라 고 휘둘러대어 간신히 이 바스타드에 익숙해졌는데 다른 무기로 바꿀 생 각을 하니 앞이 노랗다. 더군다나 나야 무기의 성능보다는 OPG에 더 기 대는 놈이니 좋은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서 이루릴이 화살을 좀 챙긴 다음, 우리들은 그 방을 나섰다. 폭풍과 코스모스의 에델브로이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레너스시에 서 보았던 아프나이델의 지하연구실을 떠올렸다. 이루릴은 내 생각을 확 인시켜주었다. "이곳은 마법 연구실이군요." 우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서 멀뚱히 서 있다가 잠시 후 괴상하 게 생긴 도구들을 붙잡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이루릴은 마법책으로 보이는 책들과 스크롤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것 들을 다 내려놓았다. "이건 300년 전의 마법 체계로군요. 너무 오래되어 별로 필요없는 것이 에요." 이루릴은 몇 개의 약병과 스크롤만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어깨를 으 쓱이며 마지막 방으로 향했다. 마지막 방인 드워프와 불의 카리스 누멘의 방은 아무리 보아도 연장실 이었다. 가지가지 도구들과 연장들이 놓여있었다. 굴 파는데 쓰일 듯한 도구가 가장 많았지만 그외각종 공사에 다 쓰일 만한 도구들이 있었다. 망치나 곡괭이, 톱, 드릴, 집게, 지렛대, 가위나 펜치 등등의 공구들. 엄청나게 많은 밧줄과 철사, 못, 나사들과 도르레, 기중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해괴한 도구들이 다 있었다. 그 웅장한 연장의 천국에서, 나는 랜턴 하나를 들고 나왔다. 횃불이 있긴 하지만 내가 골라든 랜턴은 인간의 것보다 월등히 좋아보였다. 아무래도 드워프제인 것 같은데? 방 한 구석에서 기름통을 찾아서 기름을 채우고 불을 붙여보니 과연 찬란한 불빛이 주위를 밝혔다. "이루릴, 이제 윌 오위스퍼를 돌려보내세요." 우리는 랜턴 불빛을 받으며 다시 우리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카알과 제레인트는 참으로 가여운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이 노릇을 어찌 한다… 참으로 고약한 지경이군…" 카알은 그렇게 한탄했고 제레인트 역시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있었다. 책이라는 것은 썩 부피가 나가는 물건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고다닐 수 있는 책의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이 거대한 도서관에서 들고나갈 수 있는 만큼의 책을 고르라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형 벌이었던 모양이다. 네리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보석들이라는 것은 책에 비하면 월 등히 부피가 가볍다. 하지만 무게라는 면에서는 책보다 더 심했다. 네리 아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날 붙잡고는 모든 상자를 꺼내도록 명령했고, 그래서 나는 상당한 중노동을 해야 되었다. 마침내 카알이 들어와서는 넥슨을 빨리 추적해야 된다고 말하고 나서야 네리아는 마지못한 얼굴로 다이아몬드들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잠시 후 네리아의 주머니는 터져 버렸고 그래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보석들을 옮겨가기 위해 나와 샌슨이 카리스 누멘의 방에서가죽 주머 니들을 찾아왔다. 카알은 대충 주머니 하나를 채우더니 말했다. "이 정도면 10만셀이 될 거야." 그리고 카알은 주머니 하나를 더 채워서 가졌다. "이 정도면 죽을 때까진 쓰겠군."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챙겨들었다. 이루릴은 보석들에 별로 관 심이 없는 모양인지 여비로 쓸 금화들만 약간 가졌다. 제레인트는 희희 낙낙한 얼굴로 가죽 주머니들을 채워들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하이 프리스트도 기절하실 거야. 하하하! 대미궁의 침입자 제레인트. 그의 전설의 증거가 되겠지?" 나와 샌슨도 욕심껏 보석들을 챙겨들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허리 가 휘청할 정도였다. 샌슨은 무조건 큰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부피에 비 해 가짓수가 많지 못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 만 네리아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카알이 헛기침 소리를 심하게 낼 때까지 고르고 골라서는 부피가 작으면서도 가장 값비싸보이는 보석 들만을 골라가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죽 주머니 열다 섯 개를 채우고야 말았으며 지금 배낭을 들어올리지 못해서 울상이 되어 있었다. 카알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개 덜어내시오." 네리아는 그만 울어버릴 듯했다. 그래서 내가 한숨을 쉰 다음 내 배낭 과 그녀의 배낭을 바꿔드는 것을 제안했다. 네리아는 기뻐 날뛰며 내게 키스를 퍼부어대었다. 우리들, 특히 네리아가 그토록 보물들을 가졌지만 방안에 남겨진 보물 들에는 덜어낸 흔적도 없었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보물이다. 네리아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놓은 것은 카알의 무수한 잔 소리가 있은 다음의 일이었다. 어쨌든 가까스로 우리들은 다시 수로로 돌아왔다. 랜턴 불빛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는 길은 고달픈 길이었다. 아, 물론 모두들 평생 쓰고도 못쓸 보물을 가졌고, 게다가 나나 샌슨, 카알의 경우에는 우리 여행의 원래 목적까지 완수했다.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장만한 것이다. 도대체 생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생각도 하 지 못한 방법으로 얻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영주님, 게다가 다른 병사들 모두의 목숨은 건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레니를 아직 되찾지 못했고, 따라서 우리의 여행은 아직 도 끝나지 않았다. 아무르타트에게서 풀려난 다음 크라드메서에게 죽게 된다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달팠다. 거의 가진 것이 없는 이루릴은 가볍게도 걸어갔지만 카알이나 제레인트의 경우엔 책들의 무게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은 보석들의 무게 때문에 모두들 허리가 아파서 낑낑거렸으며 특히 네리 아의 엄청난 배낭을 짊어진 나는 OPG에도 불구하고 죽을 맛이었다. 폭포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간신히 수로 입구로 돌아오게 되었다. 앞쪽 에서 점점 발갛게 불타오르는 동그라미가 보였다. 걸어감에 따라 점점 붉어지는 동그라미는 황혼의 하늘이었다. 돌아나온 것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게다가 물살도 사납게 쏟아져 우리가 타고 내려온 밧줄은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루릴은 실프를 불러내어 밧줄을 우리 쪽으로 끌어왔다. 이루릴이 먼저 올라가고 나서 카알, 제레인트, 네리아 가 올라갔다. 또 우리 둘이 마지막으로 남았군. 으으… 그런데 내려왔을 때보다 훨씬 불안한걸. "이거, 참. 배낭이 무거워서 밧줄이 끊어지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내 혼잣말에 샌슨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밧줄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올라가는 것은 내려올 때보다 훨씬 힘들었 다. 게다가 벌겋게 타오르는 절벽을 밟고 올라가려니 눈 앞이 이상해지 는 것 같았다. 절벽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내 몸을 그대로 날려버리는 것 같았다. 배낭 때문에 어깨가 뒤로 쳐지고, 들어올리는 팔은 너무도 힘들 었지만, 밧줄에 끝은 있었다. 난 절벽 위로 올라왔다. 절벽 위에선 이미 일행들이 모여 앉아 내게 팔을 내밀어 주었고 난 카 알과 제레인트의 도움을 받아 쉽게 올라왔다. 그리고 난 숨을 좀 고른 다음 아래로 고함을 질렀다. "샌슨! 밧줄을 몸에 묶어!" 그리고 나는 배낭을 내려 둔 다음 밧줄을 위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후치! 카알!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영주님! 나의 님이여!" 아래에서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난 상관하지 않고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그 비명소리 웃기네. 왠 사람 이름들을 저렇 게 불러대는 거야? "날 잊지 말아요!" 밧줄을 놓을 뻔했다. 이윽고 샌슨의 모습이 절벽 위로 나타났다. 샌슨의 얼굴은 석양의 하늘 아래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하얗게 질려있었다. 샌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절벽 위에 주저앉아버렸다. 우리는 할슈타일 저택의 폐허에 주저앉아 지글지글 타오르는 해가 지는 모습을, 그리고 반대편으로부터 영원의 숲 위로 어둠이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높은 지대에 앉아 있어 하늘은 끝없이 광막했다. 그 광막한 하늘 전체가 더 붉은 색을 찾을 수 없이 붉어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의 숲에 밤이 찾아들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카알의 뜬금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미궁에서 잠을 두 번이나 잤더니 오늘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제 아침에 대미궁에 들어가고… 오늘은 11월 19일입니다." "그래요? 음. 저 아래에서 몇 년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숲을 굽어보았다. 발 아래 로는 폭포의 물소리가 땅을 울렸고 바람은 사방으로 치닫고 있다. 짙어가는 밤하늘에 별이 떠올랐다. 한없이 많은 별이었다. 이 높은 절벽 위에서 나는 세상에 우리 일행만 남겨진 채로 수없이 많은 별들을 바라보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말했다. "드래곤 로드… 직접 만나보았지만 아직 감상이 정리되지 않는군요." 카알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드래곤 로드는 태양이지." 우리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카알의 말은 조용히 이어졌다. "그는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리고 그의 빛은 무서울 정도로 세계 를 비추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지. 하 지만 그는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이며, 그 빛을 강요하는 존재야. 그는 자 신의 빛 때문에 오히려 다른 어둠을 바라보지 못하지. 그는 너무나 위대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카알은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달이지." "달이오?" "우리가 어둠을 걸어갈 때 달은우리를 비추지. 그의 빛은 똑바로 바라 볼 수도 있고, 바라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정도 로 위해하진 않을지 몰라도, 어둠 속을 걸어가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력 이 되고 희망이 되는 존재였지." "…우리는요?" 네리아의 약간 가냘픈 목소리였다. 카알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말이오?" "예. 우리, 뭐, 예. 우리요." "우리는 별이오." "별?" "무수히 많고 그래서 어쩌면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도 있지. 바라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도 있소. 영원의 숲에서처럼 우리들은 서로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한 언제라도 그 빛을 잊어버리고 존재를 상 실할 수도 있는 별들이지." 숲은 거대한 암흑으로 변했고 그 위의 밤하늘은 온통 빛무리들 뿐이었 다. 카알의 말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줄 아오. 밤하늘은 어둡고, 주위는 차가 운 암흑뿐이지만, 별은 바라보는 자에겐 반드시 빛을 주지요. 우리는 어 쩌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존재하는 별빛 같은 존재들이지. 하 지만 우리의 빛은 약하지 않소.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빛을 뿜어내지." "나 같은 싸구려 도둑도요?" 네리아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카알의 대답도 평온하다. "이제는 아시겠지? 네리아양. 당신들 주위에 우리가 있고, 우리는 당신 을 바라본다오. 그리고 당신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빛을 뿜어내고 있소.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질 수 없는 존재들이오. 최소한 우리가 서로를 바 라보는 이상은." 어둠 속에서 네리아의 눈이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는 혹시 반짝 인 것은 그녀의 눈물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고 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자, 별들은 나에게 빛을 주었다. ================================================================== 10. 약속된 휴식……1.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당신을 나타내는 가? 당신의 이름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 의 이름이라는 것은 타인 속에 있는 당신일 뿐이다." 그러자 저 용맹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 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은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책임지는 것은 접니다. 그리고 제가 걷 는 이 길은 샌슨 퍼시발의 이름을 위해 걷는 길입니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12 권. P. 11 (770년 돌로메네 作) "은근히 춥구만 그래. 그런데 넥슨 녀석,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 지?" "바위는 차갑구나 하는 정도?"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이지? 나도 그래."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다가 등에 덮어쓴 나뭇가지에 목덜 미를 찔리고는 좀 투덜거렸다. 우리는 현재 고지에서 버터핑거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샌슨과 나는 등 에 나뭇가지를 가득 덮어쓴 채로 땅에 엎드려 계곡쪽에 있는 넥슨 일행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샌슨의 경우에는 나뭇가지가 좀 많이 필요했다. 하슬러는 뭔지 모를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서류 를 들여다보다가 간혹 고개를 들어 넥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넥슨은 현재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은 채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샌슨은 싸늘하게 말했다. "엉덩이가 꽤 시리실 텐데." "최종 결과물 배출구에 동상이나 걸리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어." "이하 동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악담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레니는 세 명 중에 누구의 옷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커다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험하게 끌려다 닌 모양인지 옷은 지저분하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여행 같은 것을 전혀 다녀본 일이 없는 레니가 험한 남자들에게 끌려서 산을 넘고 계곡 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옷 매무새 같은 것에 신경 쓸 수는 없겠지. 그녀 는 무릎을 모으고는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채 슬프게 앉아 있었다. 쟈크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레니의 모습을 흘깃 보더니 잠시 넥슨의 눈치를 살핀 다음 모포를 가져다가 레니에게 덮어주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 나 레니는 고개를 들어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한 모양이다. "쟈크 녀석. 마음에 드는군." 샌슨의 말이었다. 음. 나도 마찬가지야. 레니가 입고 있는 저 바지는 아무래도 쟈크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쟈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움직일 것 같지 않군." "좋아. 돌아가자." 나와 샌슨은 비비적거리며 누운 채 뒤로 물러났다. 넥슨의 일행에게 보 이지 않을 정도로 물러나고 나서 우리는 일어나서 옷 앞에 묻은 흙을 털 었다. 샌슨은 말했다. "그런데 저 녀석들 어디로 가지도 않고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글쎄. 다시 대미궁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거 아닐까?" 샌슨은 고개를 돌려 대미궁의 폭포를 바라보았다. 꽤 떨어져 있어서 이제는 폭포의 모습은 꽤 작아져 있었지만 이 거리에 서도 거대한 절벽과 폭포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우르 릉거리는 물소리도 꽤 작아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들려왔다. 대미궁을 나서자 우리들은 곧장 넥슨의 자취를 추적했다. 주의깊은 추 적 끝에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을 따라 좀 내려간 곳에서 야영 중인 넥슨 의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뭐 그들이 피워놓은 불빛을 보고 찾 아갔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절벽 위에서 대충 훑어보니까 계 곡 아래에 있는 불빛이 바로 보였으니까. 그리고 우리들 역시 그 근처에 숨어서 야영을 했다. 샌슨적 저돌성에 의해 우리들은 곧장 습격할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카알적 경계심은 저쪽은 OPG를 낀 남자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다가 꽤나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게 되었다. 인질인 레니의 문제도 걱정이 되고 해서 우리들은 일단 그들이 움직이면 따라다니면서 기회를 노린다는 소 극적인 계획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밤이 지나고나서 나와 샌슨은 그들을 감시하러 이 곳에 온 것이 다. 그런데 지금 넥슨은 그저 멍청하게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쟈크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도 그렇게 급 해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샌슨은 폭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잖아. 미궁의 입구가 무너져버렸으니까. 혹시 우리들처 럼 수로로 들어선다면 또 모르지만." "혹시 그 생각을 떠올려 주면 좋겠는데. 녀석들이 밧줄에 대롱대롱 매 달려 있을 때라면 레니를 구출하는 것도 퍽 쉬운 일이 될 거란 말이야." 내 대답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드래곤 로드가 말했잖아? 넥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 을 거라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한걸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뭐, 그렇게 말했으니 믿을 수밖에. 그래도 드 래곤 로드의 말이잖아." "어휴, 나도 모르겠다. 가보자." 조금 떨어진 숲 속에서는 일행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슥하고 후미진 곳이라 쉽게 발견되지 않을 위치였다. 우리들이 돌아가자 네리아 는 스튜 냄비를 내밀면서 말했다. "대미궁에서 가져온 재료야. 300년 묵은 재료일지도 모르겠지만 변질된 건 없던데." 잠깐? 이상한데? 네리아는 팔을 걷어붙인 채 머릿수건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요리를 한 모습이었다. "어라? 네리아가 요리를 했어요?"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헤. 사실은 제레인트가 했어. 난 옆에서 거들기만 했지." 난 고개를 돌려 샌슨이 이미 스푼을 꺼내어 스튜를 포식하고 있다는 것 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냄비에 달려들었다. 다른 일행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튜를 먹는 짬짬이 샌슨은 카알에게 보고를 했다. 기회다! "쩝, 그러니까 말이죠. 넥슨은 지금은 꼼짝도, 쩝쩝, 하지 않고 있습니 다. 그냥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꿀꺽, 모양인데요." 카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그럼 급할게 없으니 식사부터 마치고 보고를 들으세나, 퍼 시발군." 아아! 안돼! 역시 내 예상대로 카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샌슨은 두 말 없이 식사에만 열정을 보내었다. 그래서 내 입에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샌슨은 냄비를 박박 긁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입에 물 었다. 그리고 난 넌더리를 내면서 식기를 걷어모았다. 물통에 물도 얼마 없는데 계곡 쪽엔 넥슨이 버티고 있으니 설겆이도 못하겠군. 젠장. 난 샌슨의 손과 입에서 냄비와 스푼을 뺏은 다음 식기들을 몽땅 짐보따리 속에 꾸려넣었다.설겆이는 천천히 해야겠군. 커다란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제레인트가 먼저 물어왔다. "아,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레인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움직일지는 모르겠습 니다만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짐도 풀어둔 채 그대로였습니다. 뭐, 움직이려들면 빠른 시간 안에 움직일 수야 있겠지 만 분위기로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상하군. 오늘은 벌써 11월 20일이네. 어디 보자, 그랜드스톰에서 아 인델프님이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한 달 정도 남았다고 말씀하신 것 은 10월 말이었지?" 샌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월 27일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제 3 주일 정도 지난 셈인가?" 그게 겨우 삼 주 전의 일인가? 히야.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말이 야. 난 새삼 감회에 젖어 그 때의 일을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카알은 감 회에 허비할 시간은 없나 보다. "정확히 한 달이라고 생각한다면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11월 27일이 겠지. 물론 오차가 며칠 있겠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일주 일 정도 남은 셈인가. 그런데 넥슨은 왜 서둘러 갈색산맥으로 달려가지 않는 거지? 퍼시발군. 이 곳에서 갈색산맥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나?" 샌슨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주일이라면 빠듯하겠 는데요?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서 바이서스 임펠까지 돌아가는데 닷새 정도로 잡고, 그리고 갈색산맥으로 들어가는 데 역시 이틀 정도 잡 는다면 딱 일주일이군요.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렸을 경우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허허, 이런. 그렇다면 이제 즉시 출발해야 된다는 말 아닌가." "예. 넥슨이 아니라 우리들로서도 이제는 갈색산맥으로 출발해야 되는 겁니다. 넥슨에게 가서 며칠 남지 않았다고 경고라도 해줘야 될 지경이 군요." "그런데 넥슨이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고?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것 일까?"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넥슨도 급할 텐데 갈색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 로 온 거라든지, 지금 서두르지 않는 것이라든지. 혹시 넥슨 녀석은 크 라드메서가 언제 깨어나는지 모르는 거 아닐까요?"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냐.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는 어쨌든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 였고 또한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였지. 설마 그가 그런 정보를 모 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러면 왜 서두르지 않는 거죠? 아,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이 있어요." "응? 뭐가 이상한가, 네드발군?" "그 뱀파이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죠?" "시오네 말인가?" "예. 그 여자는 델하파에서는 분명히 넥슨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우르첸에서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대미궁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는데요?" 카알은 잠깐 고민하다가 곧 간단히 대답했다. "그녀야 간첩이니까… 뭐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지 않겠나. 혹시 모르지. 넥슨과 헤어지고는 바이서스의 각 도시를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 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카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듣는 우리들로서는 소름이 좍 돋는 말 이었다. "허, 허어, 음… 그럼 어떻게 하지요?" "가정에 대해 대책을 세우자는 말인가? 모르겠네. 트리키공께서 전하께 그 사실에 대해 경고를 잘 하기를, 그리고 닐시언 전하께서 훌륭한 대책 을 세워주기를 바라는 정도 밖에는. 우리 손은 두 개고 그 손들로는 지 금 넥슨에게서 레니양을 구출해내기도 벅차군. 따라서 지금의 우리들로 서는 시오네나 자이펀의 공작에 대해서까지 내밀 손이 없네. 우리 눈 앞 에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그렇긴 하군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복잡한 건 천천히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은 넥슨의 손아귀 에서 레니양을 구출하여 일주일내로 갈색산맥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넥슨이 갈색산맥으로 향한다면 따라가면서 기회를 노려도 되겠지만 그가 움직일 기미가 없는 바에야 지금 당장이라도 레니양을 구출해야겠습니 다. 시간이 없어요."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흠칫 하면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 우리들은 그랜드스톰으로부터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 는 겁니다. 하지만 침버씨는 그렇지 않지요." 제레인트는 뚱한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싱글거렸다. "예. 그래서요?" 카알은 겸연쩍게 말했다. "침버씨는… 대미궁에서 막대한 보물을 획득하셨는데, 혹시 신전으로 돌아가시고 싶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제레인트는 계속 싱글거리며말했다. "어려운 때 함께한 동료를 버리는 짓은 안합니다. 여러분들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런 보물을 얻지는 못했을 테지요. 아, 그리고 저도 크라드메 서의 마수로부터 대륙을 구하는 모험에 동참하고 싶은데요." 허헛. 제레인트는 대미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전혀 바뀐 점이 없 군. 카알은 웃으며 그에게 목례했다. "나머지 분들은 어떠십니까?" 카알은 나머지분들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흠, 네리아는 그랜드스톰에서 약속한 보상 때문에 이 일에 동참했지. 하지만 그녀는 이제 막대한 보물을 얻었고 따라서 이 위험한 일을 계속할 필요 는 없다. 하지만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하지는 않았다. 네리아 는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나? 카알 아저씨. 왜 저를 바라보는 거지요? 내가 '그동안 즐거웠 어요. 이제 안녕!' 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은 아니시죠? 카알 아저씨도 드래곤 로드만큼이나 음흉한 데가 있네요." 카알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네리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분과 함께하겠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이루릴 역시 미소를 띤 채 말했 다. "저 역시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카알은 이루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카알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 다. 카알은 저 대답을 들어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속에 너구리가 10 마리는 들어앉은 양반 같으니라고. 그도 설마 정말로 우리들이 이대로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염려한 것은, 음. 아마도 우리 들이 대미궁에서 획득한 보물 때문에 고달픈 길을 계속 걸으려는 의지가 약해질 것을 염려했겠지. 그래서 저런 질문을 하고는 스스로 자신의 마 음을 굳히는 대답을 하게 한 것이다. 헤헤헷! 카알은 재빨리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계획을 짭시다. 저쪽에는 우리들도 잘 아다시피 OPG를 가진 남자들이 3명이나 있소. 게다가 인질도 있으니 정면대결은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지형에서라면 기습의 요건이 그런대로 있습니다. 대미궁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해볼까요?" 이루릴이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쟈크와 하슬러를 저격하는 방법 말입니까? 하지만 그럴 경우엔 넥슨이 남지 않습니까. 그 때는 주위가 어두워서 상당히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만 이번에는 어려울 텐데요." "그렇군요. 음… 우리들 중 저격이 가능한 사람이 두명인데 저쪽은 모 두 세 명이라. 허어, 참. 한 명만 더 있다면 좋겠는데. 음. 퍼시발군? 자네 활 다룰 줄 모르나?" 샌슨은 뒷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왠만큼 다룰 줄은 압니다만 명사수라고 자신할 수는 없는데요. 이런 계곡의 바람이 부는 곳에서, 그리고 두 방은 쏠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자신 없습니다." 그 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아, 저. 카알. 제게 그럴듯한, 아, 뭐 들어보시기 전에 판단하실 수는 없으시겠지만 제 생각에는 괜찮을 듯한 계획이 있는데요." "듣겠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제레인트는 헛기침을 좀 하고 나서 말했다. "흠, 허음.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에서 이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 "루트에리노 대왕이 그덴산의 거인에게 도전했을 때의 이야기 말입니 다. 그 이야기를 약간 각색해서 사용하면 어떨까요?" 카알은 눈썹을 잠깐 곤두세웠다. 그러다가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레 인트를 바라보았다. "어, 그런 소설… 프리스트나 수련사들에게는 금서에 해당할 텐데, 신 전에서 읽게 해줍니까?" 그런 소설? 아, 창칼이 난무하고 살륙이 상세히 묘사되는 거. 하긴 그 덴산의 거인과의 싸움… 확실히 프리스트나 수련사들이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금서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읽는 재미가 각별하더군요." 제레인트의 뻔뻔할만큼 솔직한 대답에 카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각색한다는 말씀입니 까?" ================================================================== 10. 약속된 휴식……2. 제레인트는 진지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타크와 차넬이 그덴산의 거인을 속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들도 위장 항복을 하는 겁니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찾아가서는 합류하고 싶다고 속이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 무리 중에서 내분이 일 어난 것처럼 위장하면 될 것입니다. 음, 이게 좋겠군요. 대미궁에서 가 지고 나온 보물 때문에 우리들이 서로 싸움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래서 그 와중에 도망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넥슨을 따르겠다고 속이는 겁니 다. 그리고는 적당한 틈을 봐서 안팎에서 호응하여 레니양을 구출하는 겁니다. 위장항복을 한 사람이 레니양을 데리고 도망칠 때 밖에서 도와 주면 될 것입니다." 나와 샌슨은 제레인트에게 우리들의 입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게 되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점잖게 말했다. "아, 그렇게 놀랄 것들 없어요. 간단한 각색인데요." 윽. 제레인트는 우리가 그 말도 안되는 계획에 감탄한 줄 아는 모양이 다. 샌슨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상합니까?" 나도 기가 막혀서 말했다. "넥슨이 비록 인간 같잖은 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크도 믿지 않을 그런 이야기를 믿을 거 같지는 않은데요?" 제레인트는 내 표현에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오크도 믿지 않을 거라고?" "예.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쫓아다니다가 이제서야 항복이라고요? 게다 가 우리 쪽이 훨씬 인원이 많은데 왜 인원이 더 적은 편에 서겠다는 거 냐고 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하지요?" 제레인트는 눈을 크게 뜨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덴산의 거인이야 우둔한데다가 자만심이 강해서 그 말에 속아넘어간 것이겠지요. 하지만 넥슨은 거인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아, 그야 기억을 많이 잃었다지만 하슬러나 쟈크가 있지 않습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게다가 우리들 중에 누가 찾아가면 믿어주겠습니까? 세레니얼양이 찾 아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마 폭소를 터뜨리겠지요. 프리스트이신 침 버씨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퍼시발군이야 침버씨가 말씀하신 대로 강인한 전사이므로…" "카알!" 샌슨은 콧김을 뿜어대었고 그러자 카알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하하. 예. 저쪽 사람들이라 해도 퍼시발군이 태도를 바꿀 사람으로 보 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곧은 성격의 전사이고 그건 척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그러자 샌슨은 곧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음. 그게 칭찬인 줄 아나 보지? 뭐, 칭찬이라면 칭찬일 수도 있겠군. 카알은 이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드발군? 아마 절대로 믿지 않을 겁니다. 17세의 소년이 일행 을 버리고 어제까지 싸우던 자들에게 찾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돼지요." 맞아맞아. 난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거든. 카알은 네리아를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리아양도 물론 안됩니다. 저쪽엔 쟈크가 있으니까. 네리아양. 당신 이 그런 식으로 전향하겠다고 말한다면 쟈크라는 그 청년이 과연 믿어줄 까요?" 네리아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말했다. "잘 모르겠네요. 음. 쟈크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나이트호크이고, 밤의 신사들의 죽음에 대해 화난 모습을 분명히 보 여주었으니까 힘들겠지요." 그러자 카알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밖에 없군요. 내가 찾아가서 그렇게 말해볼까요?" 난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카알. 카알은 대미궁에서 넥슨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잖아요. 그 러니까 그건 어려울 거에요." 제레인트는 입술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 하하. 그러고보니 정말 갈 사람이 없군요. 음. 그 의견은 취소입 니다." "전 그 의견이 마음에 드는데요." 이루릴의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이루릴을 바 라보았다. "세, 세레니얼양?" 카알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리고 네리아는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이루릴! 가서 뭐라고 말할 건데요? 제기랄, 망할 인간 녀석들 이 내 보물까지 뺏어갔어. 그 놈들이 싫어졌어. 그러니 너와 손잡고 싶 은데. 뭐 이렇게 말할 거에요?" 네리아의 목소리 흉내는 그럴 듯했다. 그러자 이루릴은 반가운 표정으 로 말했다. "아… 그렇게 말하면 될까요?" 이루릴의 대답에 우리는 기어코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우리들을 돌아보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 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건 안되나요?" 네리아는 숨가쁜 표정으로 말했다. "하, 하아. 미안해요, 이루릴. 그건 안되겠는데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제레인트씨의 말대로 우리들 중 누군가가 찾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레니양을 구출하여 나오면 되겠지요." 카알은 놀라서 되물었다. "예? 우리들 중에 저들이 믿을 사람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이루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 중엔 없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잊혀지는 법이라든가 요." "예?" "우리들 중 누군가가 인비지빌리티의 마법을 사용하여 접근하면 되지 않을까요? 전 오늘 아침에 그 생각을 하고서는 인비지빌리티를 몇 개 메 모라이즈해두었는데요." 우리는 조금 전과는 다른 경악에휩싸인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이 내놓은 계획은 그러니까 이러하다. 먼저 우리 일행들 중에 하 나를 이루릴의 마법을 사용해 보이지 않도록 한다. 그리곤 보무도 당당 하게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투명화된 상태이므로 레니에게 접근하 는 것은 간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곤?" 카알의 질문에 네리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간단해요! 레니에게 귓속말을 하는 거지요. 볼 일이 있다고 말하라고 시키면 될 거에요!" "볼 일… 아. 예." 카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아무리 막나가는 저 녀석들 이라고 해도 탁 트인 장소에서 그렇게 하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혹 감 시가 따라붙을지 모르지만 그 때는 투명화된 사람이 뒷통수라도 후려치 면 그만이다. 혹 들키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다른 일행들이 남아있는다. 그리고는 뒤에서 넥슨 일행을 공격하여 레니와 그 침입자가 순조롭게 빠 져나오도록 돕는다. 그리고나서 레니양의 안전을, 크라드메서의 안정을, 대륙의 평화를, 오, 빛나는 내일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상당히 일리있는 말씀입니다만, 확실히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움직이다가 돌멩이를 걷어차거나 하면 소리는 날 겁니다. 하 지만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면 되겠지요. 그 외엔 특별히 들킬 일이 없습 니다. 저들은 모두 인간이고 특별한 마법을 익힌 사람은 보이지 않더군 요." "넥슨 휴리첼은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 아닙니까? 프리스트의 권 능으로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특별히 경계한다면 다른 기운을 느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 만 과연 누군가 투명술을 사용하여 접근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경계하 고 있을까요?" 제레인트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했다. "으흠. 그거 말이 됩니다. 그것도 상당히 되는데요. 실행해 볼만합니 다." 네리아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괜찮은데요? 하지만 들키면 위험하다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 데요." "그 때는 남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들던가 하면 될 겁니다. 우선 저쪽도 잠깐 동안은 당황 때문에 대응이 느려질 테니까요." 샌슨의 말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흠. 위험하지만 시간도 없으니, 어쩔 수 없군. 에, 누가 투명술 을…" 카알은 말꼬리를 흐렸다. 카알의 시선을 보다가 난 가슴이 덜커덩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어, 어? 뭐…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긴 하군. 그래, 당 연하지. 다른 사람은 안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이지. 하지만 나도 이건 싫어! 왜 변장이라고 하면 항상 나냐고! "왜! 이라무스에서도 내가 변장했어요. 할슈타일 저택에 찾아갔을 때 도, 어어억! 내가 여자로 변장했었다고요. 그런데 왜 또 나냐고! 이번엔 좀 바꿔볼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알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는 척하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 면서 말했다. "첫째, 마력과 신력은 어울리기 힘든 법이다. 여기서 침버씨가 제외되 네. 제 말이 맞습니까, 침버씨?" "아, 예. 마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 해볼까요?" 제레인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었지만 카알은 꿈쩍도 하지 않고 손가락 만 꼽아대었다. "둘째, 유사시 레니양을 업고서 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도주 는 상당히 위험하고 급박할 거 같으니까. 여기서 네리아양이 제외되지. 셋째, 저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남아있어야 한다. 여기서 나와 세레니 얼양이 제외되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샌슨과 자네인데." "내가 가야겠군요." 샌슨은 내 목을 졸라대기 시작하더니 곧 자신도 거짓말과 사기와 변장 등의 악덕에 대해 남다른 조예가 있으므로 그까짓 투명화된 상태로 접근 하는 일 따위는 식은 죽먹기라는 식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심 지어 자신이 약간만 신경을 쓰면 여자로 변장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 전 혀 없다는 식의 망발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루릴 외엔 아무도 그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이루릴은 샌슨의 의견을 듣다가 말했다. "그럼, 샌슨씨에게도 인비지빌리티를 사용할까요?" 카알은 잠시 더 고민에 휩싸였다. 아마 틀림없이 샌슨을 어떻게 말리느 냐 하는 고민이죠, 카알?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어억, 안돼! 이루릴은 먼저 숲을 향해 말했다. "친구들이여. 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해줘요." 잠시 후 숲을 헤치는 우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풀숲을 헤치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거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슈팅스타의 모습도 보였다. 트 레일은 역시 발을 좀 끌면서 나왔고 레이셔널 셀렉션은 그 뒤에서 점잖 게 걸어나왔다. 말들은 각자의 주인들에게 반갑게 달려갔다. 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목을 끌어안고 그 풍성한 갈기에 볼 을 비벼대었다. "오래간만이야! 그 동안 더 이뻐졌네?" 음. 말에게 대한 인사로는 좀 그렇군. 샌슨은 슈팅스타의 콧등을 쓸면 서 히죽 웃었다. "자식아! 나 보고 싶었지?" 희한한 우연으로 - 마치 파리라도 쫓는 것처럼 - 슈팅스타는 고개를 가 로저으며 갈기를 흩날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낄낄거렸고 샌슨은 험악 한 표정을 지었다. 카알은 점잖게 트레일의 볼을 쓰다듬었지만 별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이루릴은 레이셔널 셀렉션의 갈기를 쓰다듬으면 서 말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레이셔널 셀렉션은 점잖고 품위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그런데 제미니는? 잠시 후 제미니는 입에 뭔가를 우물거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윽! 저 괘 씸한 말 같으니라고. 뭔가를 먹느라고 늑장을 부렸군. 어째 사람이나 말 이나 똑같냐! "임마! 부르면 빨리빨리 와야지!" 제미니는 멀뚱히 날 바라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푸르렁거렸다. 마치 비 웃는 것 같잖아? 저 괘씸무쌍한 말 같으니라고! "오늘 저녁은 말고기를 시식해볼까?" 내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반대로 실천되지는 못했다. 두번째 단계. 말들을 조심스럽게 이끌면서 우리는 주의깊게 넥슨 일행 이 있는 계곡 아래쪽으로 접근해갔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꽉 다물었고 말들도 침묵을 지켰다. 간혹 제미니가 푸르렁거리려 할 때마다 내가 질 겁하면서 녀석의 입을 틀어막은 일 외에는 조용히 접근하는 데 있어 어 려움은 없었다. 세번째 단계. 마지막 얼마를 남겨두고 우리는 말들을 세워두고는 가만 히 있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나와 샌슨은 이루릴 앞에 섰으며 이루릴은 나에게 캐스팅을 시작했다. 이루릴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동안 나는 눈을 부릅뜨고는 긴장해 있었다. 뭐, 대단한 일이 있으려고? 설마 아프거나 하지는 않겠지. "인비지빌리티." 역시 고통 같은 것은 없었다.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응? 그대로인 데?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루릴 뒤에 있 던 카알과 제레인트, 네리아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리아가 숨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후치야?" 그런데 네리아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면서 내 모습을 찾고 있었다. 어라? 내가 정말 안보이나 보지? 난 살금살금 움직여보았다. 역시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모양인데. 난 살그머니 네리아의 옆으로 접근했다. 그런데도 네리아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두리번거 리고 있었다. 난 네리아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에비." 네리아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난 장난을 친 댓가로 턱을 얻어맞고 말았다. 네리아가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마구 팔을 휘젖다가 내 턱을 깨끗이 명중시킨 것이다. 네리아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끙끙거렸으며 난 턱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좋아. 훌륭하군. 전혀 보이지 않는데, 네드발군." 카알은 점잖게 말하고 있었지만 엉뚱한 방향을 보고 말하고 있는지라 그 모습이 우스웠다. 이루릴은 생긋 웃더니 곧 샌슨에게도 마법을 걸었 다. 팟! 와! 우와! 샌슨이 사라졌다. 경사났네! 이제 그 성밖 물레방앗간의 가 련한 아가씨는 오우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아닌가? "샌슨? 어디 있지?" "여기야. 그런데 넌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윽. 이거 문제군. 나와 샌슨도 서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일 행들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나와 샌슨의 대화에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비틀거린 끝에 나와 샌슨은 간신히 서로의 손을 쥘 수가 있게 되 었다. 그 동안 우리 일행들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간신히 카알 이 먼저 정신을 차려서 우리는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다. ================================================================== 10. 약속된 휴식……3. 모습이 보이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야말로 숨소리 도 내지 않은 채 다가섰다. 눈 앞을 가린 관목을 치우자 계곡의 바위들 틈에 앉아 있는 넥슨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쟈크와 하슬러는 각자 손에 그릇을 들고는 뭔가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식사장면은 아니었다. 쟈크는 자주 그릇 위로 불안한 시선을 들어 넥슨을 바라보며 흠칫하곤 했다. 그리곤 짜증난 태도로 사납게 스푼을 놀려대었다. 그리고 하슬러 역시 맛없는 태도로 그냥 입안에 음식을 우겨넣고 있었다. 그도 간혹 입 안에 든 음식물을 우물거리며 넥슨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바위 위에 정좌해 앉은 넥슨의 옆에는 그릇이 보였다. 아마 그에게 먹 으라고 권하다가 듣지도 않자 그냥 거기 내버려 둔 모양이다. 넥슨은 그 릇에는 일별도 보내지 않고 그저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카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새틱(Ascteic) 흉내를 내는 건가?" 그러고보니 정말 산에 틀어박혀서 수도하는 프리스트처럼 보이기도 한 다. 아, 넥슨은 원래 재가 프리스트였지? 어쩌면 저 짓은 익숙한 짓일지 도 모르겠군. 그러나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합니까?" "아, 저 작자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런데요?"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트들은 묵상 자세가 저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 른 어느 교단에도 저런 자세는 없습니다. 저렇게 방만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교단의 묵상 자세 정도일까… 저희 교단에서는 묵상 자세를 그렇게 까다롭게 지정하지 않거든요." "그럼 명상에 잠긴 것도 아니고, 지금 뭘하는 거지?" 샌슨이 갑자기 말했다. 뭐 특별히 갑자기랄 것은 없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깜짝스러웠다. "옛이야기에 나오는대로, 그가 입은 손실과 그의 레이디를 생각하며 고 뇌에 잠긴 것 아닐까요?"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나로선 넥슨이 그런 낭만적인 나이트 흉내를 낼 시간도, 여유 도, 성품도 가지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레니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행복한 식사 장면은 아니었다. 음식을 떠올리는 손길은 자주 멈추었고 목에서 무엇이 북받치는지 제대로 삼키지도 못했다. 공포와 서러움 때문에 음식 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어 간신히 먹고 있다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었다. 카알은 여전히 엉뚱한 방향을 향해 속삭였다. "좋네. 퍼시발군, 네드발군. 시작하세." 그러자 샌슨의 목소리도 허공에서 나직하게 들려왔다. "후치, 손을 잡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놓는다. 넌 레니에게 접근해서 말해라. 그리고 난 다른 놈들을 경계할 테니까.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래봐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난 나직하게 대답했다. "좋아, 가자구."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바스타드를 뽑아들고나서, 나는 되도록 수풀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계곡의 안쪽은 모두들 커다란 바위들 뿐 이었고 관목이나 나무 등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 음 앞으로 발을 내딪었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노출되었다. 넥슨은 아직도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쟈크나 하슬러의 경우 엔 고개를 약간 돌리기만 해도 내가 있는 곳을 보게 될 것이다. 난 쿵쾅 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하슬러가 고개를 들자 난 기겁할 뻔했다. 그러나 하슬러는 내쪽 을 쳐다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쪽을 바라보았다. 난 꼼짝도 못하고 그 시선 을 마주 보았다. 그 때 쟈크가 말했다. "왜 그래요?" "…아냐." 하슬러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맛없는 식사를 계속했다. 보이지 않아! 난 확실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좋아. 난 놀랄 정도로 침착을 되찾았다. 아무리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계곡에 있는 작은 돌들이 내 발에 밟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면 저들은 기겁할 것이다. 난 커다란 바위들만 골라 밟으며 조심스럽게 하슬러와 쟈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 가갔다. 레니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면 어쨌든 그들 옆을 지나야 했다. 내가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도 하슬러와 쟈크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 모양이다. 난 장난기가 치밀어 오는 것을 느꼈다. 이 작자들 면전 에서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봐? 아니면 이 작자들의 밥그릇에 돌멩이라 도 한 개 떨어트려 음식물이 얼굴에 튀도록… 그런 욕망이 뭉게뭉게 부 풀어올랐지만 난 간신히 참아내고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옆을 지났다. 레니는 여전히 음식보다는 눈물을 더 많이 삼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앉아있었다. "흑." 갑자기 그녀는 도저히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릇을 내려놓 았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쟈크가 이쪽을 한 번 쳐다 보았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좋아, 됐군. 난 최대한 주의깊게 레니에게 다가갔다. 소리없이 크게 한숨을 쉰 다음, 난 레니의 머리를 붙잡으면서 동시에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고개 들지 말고 내 말 들어." 레니의 머리를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레니는 고개를 불쑥 쳐 들고 고함을 지를 뻔했다. 거세게 머리를 들어올리려는 레니의 움직임이 잘 느껴졌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참이라 난 레니의 머리를 그대로 고정시켜 둘 수 있었다. 레니가 난동을 부리기 전에 난 빠르게 말했다. "나야, 후치. 들키면 안되니까 꼼짝도 하지 말고 그대로 들어." 레니의 몸이 굳었다. 그녀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난 레니의 머리에서 손을 치우며 말했다. "자, 함부로 굴어서 미안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하지만 내 모습 이 보이지 않을 거니까 너무 놀라지는 마." 레니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 이다. 내가 보기엔 갑옷 입은 기사가 고개를 드는 꼬락서니였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크게 놀란 모양이다. 가까스로 비명을 억누르는 그 표정이 잘 보였다. "마법이야. 마법. 마법을 써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한 거야. 고개 끄 덕이지 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 말 듣기만 해." 레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상하좌우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조금씩 벌려지는 입술에선 하얀 입 김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난 혀를 찼다. "많이 기다렸지?" 곧 레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최소한 떨지는 않으니 다행이 군. 난 레니의 손을 붙잡았고 그러자 레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 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난 빠르게 말했다. "이제 가자, 레니. 저 작자들과는 너무 오래 있었지. 내가 널 구출해 줄게. 하지만 너도 날 도와주어야해." 레니는 하마트면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 때 쟈크가 갑자기 이곳을 바라보았기에 나와 레니 모두 기겁해서 굳 어버렸다. 레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녀의 눈이 쟈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난 급하게 말했다. "그냥 다시 고개를 숙여. 그게 낫겠어." 레니는 힘없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쟈크는 안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릇을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젠장! 쟈크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난 다급하게 바스타드를 들어올렸 다. 저 친구가 날 눈치챈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저 레니가 걱정되어 오는 것일까? 만일 후자라면 괜히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샌슨은 어디 있을까? 만일 샌슨이 소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지? 샌슨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아무런 짐작을 못하겠다. 하지만 쟈크가 지금 걸어오는 모습은 태연했다. 난 이를 악물었다. 좋아. 할 수 없지. 만일 잘못된다면 쟈크의 다리를 베어버리고는 곧장 레니를 들고 튀는 거야. 하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자. 쟈크는 이제 내 앞 3 큐빗도 안되는 위치에 섰다. 팔만 휘두르면 그대 로 쟈크를 베어버릴 수 있는 위치였다. 팔만 휘두르면 돼. 그리고 레니 를들고 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 떨리는 상황도 끝이라고. 제기, 엄 청난 유혹이 느껴지는데? 참아야돼, 참아! 억눌러라, 후치! 쟈크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레니에게 말했다. "이봐, 레니. 입맛이 없어? 반도 먹지 않았잖아." 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 차분한 음성은, 정말 여동생을 걱 정하는 오빠의 목소리 같다. 하지만 난 레니가 근심스러워졌다. 예상대로 레니는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녀의 귀가 벌겋게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안돼! 그 귀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윽. 사람은 귀의 색깔을 마음대로 못바꾸던가? 레니, 레니! 제발 지금은 그렇게 흥분하지 말란 말이야. 다행히 쟈크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그저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레니의 어깨를 짚으려 했다. 오, 맙소사. 이젠 끝 장이야! 난 바스타드를 들어올렸다. 당장 후려친다. 어쩔 수 없어. 쟈크 가 레니의 몸에 손을 대면 레니는 아마도 비명을 질러버릴 거다. 난 바 스타드를 뒤로 힘껏 당겼다. "레니…" "신경쓰지 말아요!" 레니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쟈 크를 표독스럽게 쏘아보았다. 쟈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 고 난 하마트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레니의 눈이 발갛게 불타는 것 같았다. 레니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 함을 질렀다. "내가 굶어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힘이 없으면 달아나기도 더 어려울 거 아니야!" 쟈크는 어이없는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더니 곧 얼굴을 찌푸렸다. "어, 이봐, 레니.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런 의미고 저런 의미고 내가 알게 뭐야! 어차피 이렇게 끌고 다니기 도 귀찮을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만일 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어지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거 아니야!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수 있으면서 걱정 하는 척, 위하는 척하지 말아요!" 쟈크의 얼굴에 마침내 분노가 떠올랐다. "야!" "으아아아아!" 레니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쟈크는 분노 어린 표정 으로 레니를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몸을 휙 돌려서 걸어갔다. 난 입을 쩍 벌렸다. 난 레니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진짜 울어?" "으어, 으어어어어… 천만에." 레니의 대답을 들으며 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허허, 이거 여성 동지들에 대한 무서운 공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군, 그래. 항구의 소녀라서 그런가? 음,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제 미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능청스러운 짓은 못할 거라는… 잠깐. 정말 그럴까? 제미니도 혹시 급박한 순간이면 연극도 하고 가짜 울음도 터뜨릴까? 으허! 무서워라! 난 순진한 의도로 접근했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선 쟈크의 등을 향해 같은 남자로서 잠시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준 다음, 거짓 울음을 계속하 고 있는 레니의 귀에 대고 말했다. "좋아. 계획은 이래.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변 볼 일이 급하다 고 말해. 알았지? 그리고는 저기 왼쪽으로 보이는 후미진 덤불 속으로 들어가." 레니는 울음을 억누르는 꺽꺽거리는 소리까지 내었다. 난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르고는 말했다. "설마 저녀석들도 따라오겠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따라오 겠다고 해도 거절하지는 마. 알겠지? 그냥 순전히 볼 일이 급하다는 식 으로 행동해. 따라오는 녀석은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레니는 고개를 들어 눈을 닦아대었다. 역시 그 눈에는 눈물 자국이라고 는 전혀 없었다. 으으… 나도 세상의 남성 동지들을 위한 책을 한 권 쓰 고 싶어지는군. 여자의 눈물을 조심할지어다. 난 씩 웃으면서 몸을 일으 켰다. "좋아. 시작하자." 레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우리 일행이 기다리는 풀숲 쪽으로 걸 어가기 시작했다. 자, 지금부터 몇 분 안에 모든 것이 결판난다. 난 바 스타드를 단단히 쥐었다. 어째 저곳까지의 거리가 이렇게도 멀어보이지? 그 때 쟈크가 고함을 빽 질렀다. 물론 그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이 계집애야! 어디 가!" "오줌 싸러 간다, 왜!" 레니… 레니! 정말 대단해.레니는 눈을 부릅 뜬 채로 그야말로 표독스 럽게 댓구했고 그러자 고함을 지른 쟈크가 더 놀라버렸다.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레니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그럼 멀리 가지 말고 그, 그 근처에서…" 그 때 하슬러가 말했다. "일어나서 따라가, 쟈크." "예?" 하슬러는 두 말 하지 않았고 그러자 쟈크는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레니 는 차가운 눈으로 쟈크를 쏘아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쟈크는 계속해서 투덜거리며 따라왔다. "썅. 별 우스운 직책을 다 맡게 되네." 난 레니를 보내고 쟈크를 보낸 다음 천천히 쟈크의뒤를 따라갔다. 쟈 크의 뒷통수를 바라보다가 난 잠시 고개를 돌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 슨은 그대로 바위라도 된 양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샌슨은 도 대체 어디 있을까? 수풀 속으로 적당히 걸어들어오자 쟈크는 말했다. "거기서 볼 일 봐. 달아날 생각은 절대 하지마!" 그리고는 쟈크는 몸을 휙 돌렸다. 순간 나와 그는 서로를 마주보게 되 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군. 하지만 쟈크는 그저 기분나쁜 얼굴로 팔짱을 끼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선 레니가 혁대를 붙잡고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좋아, 지금이다. 난 살짝 옆으로 움직인 다음 바스타드의 손잡이로 쟈크의 목 뒤를 내려찍었다. 퍽! "크욱!" 완전한 불의의 기습을 당한 쟈크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난 재빨리 레니에게 다가갔다. 그 때 레니는 바지를 끌어내리려다가 기겁하면서 도 로 올리는 참이었다. 난 두 말 하지 않고 그대로 레니를 들어 어깨에 둘 러매고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하슬러는 우리를 보고는 잠시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저건…!" 아마 하슬러가 보기에 레니는 허공에 떠오른 채 거꾸로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곧 하슬러는 이를 갈면서 외쳤다. "인비지빌리티!" 하슬러는 두 말 하지 않고 롱소드를 빼들었다. 그 외침에 넥슨이 벌떡 일어났다. 넥슨은 내 쪽을 쏘아보더니 역시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렁!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리고 하슬러도 달려왔다. 그 때였다. "어어억!" 갑자기 하슬러가 땅을 굴렀다. 샌슨이구나! 넥슨은 주춤하더니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한 두 놈이 아니군! 받아라!" 넥슨은 하슬러의 근처 허공을 베어대기 시작했다. 그 때 허공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핫하하! 이 자식아. 뭐하는 거지?" 넥슨은 샌슨의 웃음소리를 듣더니 곧 검을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그대로 허공을 베어내었다. 그러나 샌슨은 다시 웃을 뿐이었다. "자세는 여전히 엉성하군. 좀 상대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치 않는 데." 좋아, 됐어! 난 그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레니는 내 어깨 위에서 바들 바들 떨면서 비명을 토해내었지만 난 신경쓰지 않고 달려갔다. 이제 조 금만 더 달려가면… 바아우우웅! 갑자기 무서운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뭐야? 말도 안돼. 달 리고 있는데 바람이 날 앞질러분다고? 그 때 갑자기 어깨가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어라? 갑자기 레니가 왜이리 가벼워지는 거지? "꺄아아악!" "레니양!" 카알의 고함 소리.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레니가 허공에 떠오르는 모 습이 보였다. 저게 뭐야? 레니는 그대로 뒤로 떨어질 듯이 날았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녀를 나꿔채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땅에 떨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둥둥 뜬 채로 뒤로 움직이기 시작 했다. 레니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내려줘어!" 카알은 기가 막혀서 외쳤다. "네드발군! 무슨 짓인가?" "예? 제가 아니에요! 샌슨? 샌슨이야?" "어, 어, 나도 아닌데?" 샌슨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둘 다 아니라면 레니가 왜 갑자기 새들과의 친척 관계를 주장하게 된 거지? 이루릴이 짧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샌슨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 났다. 그는 내 옆에서 입을 딱 벌리고 선 채로 허공을 날아가는 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샌슨은 서로를 얼빠진 모습으로 바라보았으나 샌 슨이 먼저 움직였다. "자, 잡아!" 그제서야 나도 정신을 차렸다. 레니는 어느새 꽤 멀어지고 있었다. 난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내뻗은 손이 레니의 발목에 닿으려는 순간, 레니 는 내 손을 절묘하게 피해서는 다시 계속 날아갔다. 짧은 순간 공포에 질린 레니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기 시작했지만 레니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날아가는 방향에는… 넥슨이었다. 넥슨은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서서는 롱소드는 땅에 꽂 아두었다. 그리고 한 손을 자신의 얼굴 앞에 세로로 세우고 다른손은 우리들 쪽으로 뻗고 있었다. 뒤에서 제레인트가 쥐어짜는 음성으로 말했 다. "에어리얼 서반트(Aerial servant)! 맙소사, 저 녀석은 고작 재가 프리 스트라고 하잖았습니까?" 카알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이루릴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구원을 원하는 소녀에게 날아가 그녀를 보호해요!" 덜컹. 소리가 났던가?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니는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그리고 곧 사나운 바람이 그녀 주위에 몰아닥쳤다. 넥슨이 불러낸 바람의 하인과 이루릴이 불러낸 실프가 허공에서 싸우고 있는 모 양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실프는 맹렬할 바람이 되어 레니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바람의 하인 역시 무서운 힘으로 레니를 휘몰 아갔다. 순간적으로 레니는 허공에 뜬 채 양쪽으로 잡아당겨지게 되었 다. 그녀의 붉은 머리가 붉은 불꽃처럼 흩날렸다. "잡아!" 샌슨은 고함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발바닥의 자갈 을 마구 튀겨올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허공에 뜬 레니를 붙잡 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저쪽에서도 하슬러가 달려오고 있었으며 쟈크 도 어느 새 몸을 일으키더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야아아압!" ================================================================== 10. 약속된 휴식……4.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지만 계곡에는 온통 바위와 돌덩어리 뿐 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계곡의 바위 틈을 제대로 달리지 못해 비틀거렸 다. 이루릴과 넥슨은 각자의 위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캐스팅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들의 힘이 더해짐에 따라 허공에 뜬 레니 주위에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레니는 허공에서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 주위에 일어나는 회오리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고 바람의 하인의 포효 소리와 실프의웃음 소리가 계곡을 가 득 메웠다. "우루루루루루!" "까르르르르르!" 저 웃음 소리에 돌아버리는 기분이 든다. 실프들은 미친듯이 웃고 있었 고 바랍의 하인은 계곡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질러대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비틀거린 순간 하슬러는 이미 레니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내 말을 들어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무턱대고 고함을 질렀다. 역 시 하슬러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레니에게 손을 내뻗었다. 레니 는 여전히 숨막힌 얼굴로 그 손을 공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였 다. "받아랏!" 카알이 바위 위로 뛰어오르더니 그 위에 무릎을 꿇으면서 곧장 화살을 한 대 쏘아붙였다. 쉬이익! 순간 하슬러는 입을 꽉 다물었다. 뭐가 움직였지? 하슬러 주위의 공간에 잠깐 번뜩이는 빛이 휙 지나갔 다. 그리고 동작이 끝난 하슬러의 팔은 이미 회수되고 있었고 요란한 울 림소리와 함께 화살은 두 동강 난 채로 계곡 위의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 었다. 핑그르르르. 맙소사, 화살을 쳐냈어? 하슬러는 화살을 쳐내고는 그대로 도약해 올랐다. 그가 도약한 곳은 물 론 레니가 떠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난충분히 달려가 있었 다. 난 다시 한 번 하슬러에게 정지를 명령했다. "멈춰!" 하슬러가 레니의 다리를 잡기 직전, 난 온몸을 그에게 부딪히는데 성공 했다. 퍼어억! 우리 둘은 서로 엉킨 채 바위 무더기 사이로 곤두박질쳤 다. "크으윽!" 우리들은 바위 사이로 우겨넣듯이 처박혔고 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허리가 좀 상한 것 같은데. 간신히 고개를 들어보니 하슬러는 내 아래에 깔려 있었다. 하슬러는 바위에 틀어박힌 채 고통에 겨운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다. 그 때 난 후회할 짓을 하고 말았다. 난 하슬러를 깔아뭉갠 것이 미안해져서 히죽 웃었던 것이다. 퍼어억! 하슬러의 오른주먹이 멋지게 움직였고 내 턱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뒤 틀렸다. 이 자식이! "에에에라!" 난 머리가 오른쪽으로 돌아간 김에 그대로 반동을 주어서 다시 아래로 내려꽂았다. 난 두 손으로 하슬러의 어깨를 단단히 쥔 다음 그의 얼굴을 들이박은 것이다. 꽈광! "커헉!" 아이고, 내 이마! 하지만 네 녀석도 앞니 몇 개는 나갔을 거다! 난 앞 머리를 쥔 채 일어났다. 와, 계곡의 색깔이 희한하군. 그리고 하슬러도 얼굴을 감싸쥔 채로 일어났다. 우리들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손을 치운 하슬러의 얼굴을 보니 아쉽게도 그 의 앞니는 이상 없었다. 나는 하슬러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 만 하슬러는 무표정했다. "이야아아압!" 기합 역시 나 혼자서 질렀다. 난 기합과 함께 온힘을 다해 바스타드를 아래에서 올려쳤다. 바위 투성이라 발디딤이 불편하긴 했지만 난 최선을 다했다. "이이일자무우우식!" 위로 두 번 올려치고 세 번째는 낮게 몸을 숙이며 옆으로 돌려쳤다. 그 리곤 곧장 죽으라고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두 번의 공격을 피하고 마지막 하단 공격은 훌쩍 뛰어서 피한 하슬러가 그 대로 공중에서 찍어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몸은 다시 한 번 바위들 틈에 볼품없이 처박히고 말았지만 덕분에 허리가 날아가지는 않았다. 챙캉! 하슬러의 검에 맞은 바위가 불꽃과 함께 굉장한 소리를 내었다. 터텅! 내 몽이 바위에 부딪히자 내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끄윽. 바위 틈에 거꾸로 처박힌 바람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내 목을 향해 내리꽂히는 롱소드의 은광이 번뜩였 다. 난 눈을감으며 외쳤다. "제미니!" "시끄럽다!" 샌슨의 고함소리. 눈을 뜨니 뒤로 훌쩍 뛰는 하슬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 머리 윗쪽에서는 샌슨이 롱소드를 든 채 서 있었다. 샌슨은 말했다. "가서 레니를 잡아! 이야아합!" 샌슨은 곧장 바위를 밟으며 위로 뛰어올랐다. 샌슨은 온몸의 힘을 실어 하슬러를 내려쳤다. 그러나 하슬러는 OPG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검을 휘 둘러 샌슨의 검을 쳐내자 샌슨은 거의 허리가 통째로 돌았다. 난 악을 쓰고 말았다. "멍청아, 힘 차이가…" 그리고 난 말을 맺지 못했다. 허리가 돌던 샌슨은 그대로 다리를 끌어 올려 하슬러의 옆구리를 걷어차버린 것이다. 샌슨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제자리에 섰고 하슬러는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힘 차이가 어떻다고?" "…없다고! 젠장. 사람이 아니었지." 샌슨은 피식 웃으며 곧장 하슬러에게 달려들었다. 난 레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때였다. "이 놈!" 뒤통수쪽에서 들려오는 쟈크의 고함소리, 이럴 때는! 나는 곧장 앞으로 굴러버렸다. 이거 왜 일어서기가 이다지도 힘든 거야! 바위들 위로 구르 는 것은 온몸의 근육 전체를 해체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간신히 다시 일 어나서 뒤를 돌아보자 바위를 찌른 채 날 올려다보는 쟈크의 모습이 보 였다. 쟈크가 들고 있는 대거는 바위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젠장! OPG 가진 놈들은 사람도 아냐! 나는 그 욕설이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바스타드를 바 로잡았다. 그리고 쟈크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대거는 간 단히 뽑혀나왔다. 쟈크의 오른손 손가락이 기묘하게 움직이더니 그는 곧 대거를 거꾸로 쥐고는 오른손을 허벅지에 붙였다. 그의 비어있는 왼손은 앞으로 뻗어 나를 견제했다. 희한한 자세인데. 어쟀든 앞을 가리는 것이 없으니 그대로 돌진이다. 난 바스타드를 앞쪽으로 그대로 찔러넣었다. 그 때였다. 네리아가 고함을 질렀다. "무릎 꿇어!" 쟈크는 앞으로 내민 왼손을 급격히 몸 앞쪽으로 당기며 그대로 뒤로 반 바퀴 돌아서 오른손의 대거를 거꾸로 들이대었다. 내 바스타드는 쟈크의 몸 앞 허공을 찔렀고 난 오른쪽에서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대거를 만 나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쟈크의 몸에 가려졌다가 나타나는 대거라서 무 섭도록 빨랐다. 그러나 난 고함소리가 시키는대로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간신히 대거는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쉬이익! 난 무릎을 꿇었다가 대 거가 내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내면서 머리 위로 지나가자 그대로 몸을 튕겨올렸다. "턱조심!" 난 바스타드를 당길 수가 없어서 그대로 오른팔 팔꿈치로 쟈크의 턱을 올려쳤다. 쟈크는 힘껏 돌고 있던 중이라 앞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쿠으윽!" 쟈크는 1 큐빗 정도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 네리아가 함 성을 질렀다. "멋지다, 후치!" "고마워요, 네리아!" 난 즉시 레니를 바라보았다. 이루릴과 넥슨은 그때까지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호각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어느 새 제레인트와 카알이 레니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레니를 붙잡아 끌어내리려고 애쓰고 있었 다. 그러나 바람의 하인의 힘은 무서웠다. 카알이 온힘을 다해 레니의 허리를 당기고 있는데도, 아니 카알과 제레인트 두 사람이 거의 레니에 게 매달리다시피 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니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레니 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이런, 제기랄! 이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넥슨!" 난 쟈크의 위를 뛰어넘어 곧장 넥슨에게로 달려갔다. 쟈크는 날 잡으려 했으나 네리아가 재빨리 트라이던트를 내밀어 쟈크를 도망치게 만들었 다. 그래서 난 지체없이 넥슨에게 달려들 수 있었다. 넥슨은 얼굴이 벌 겋게 될만큼 화가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바람의 하인은 그 소환자인 넥슨의 정신집중을 잃게 되었고 곧장 사라졌다. 레니는 카알과 제레인트의 위에 떨어졌다. 레니의 비명소리가 카알과 제레인트의 비명 과 섞여서 들어왔다. "아아악!" "어이쿠!" "으억!" 좋아, 됐다! 난 바스타드를 어깨 위로 완전히 젖힌 자세로 뛰어올랐다. "받아랏, 넥슨!" 난 곧장 넥슨을 내리쳤다. 넥슨은 무서운 기세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콰앙! 나와 넥슨은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 팔목이 부러져나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눈 앞이 번쩍하는데? 난 잠시 바스타드 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으로 팔목을 열심히 주물렀다. "우웅, 짜릿한데?" 넥슨 역시 눈 앞에 불이 번쩍했던 모양이다. 그도 한 손으로 롱소드를 쥐고는 다른 손으로 팔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자 넥슨 역시 날 보며 히죽 웃었다. "죽인다!" 넥슨의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사정없이 달 려들었다. 어어엇! 난 재빨리 바스타드를 돌려 그의 검을 막아내었다. 넥슨은 쉴새없이 찌르고 베어 들어왔으며 난 팔이 빠져나가라고 그의 검 을 막아내었다. 창창창창창! 이야! 내가 이걸 다 막다니! 내가 이렇게 대견할 수가 없는걸. 넥슨은 무리할 정도로 공격하다가 모조리 막히고나자 곧 리듬을 잃기 시작했다. 좋아! 난 정신없이 그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빠르게 생각했 다. 넥슨의 동작에서 한 번, 딱 한 번의 틈만 생기면, 그 틈을 노려 한 방의 수를 노리는 거다. 이 대결을 단번에 결정낼 수 있는 수법, 기회는 한 번뿐이다! 잠시 후 내가 크게 몸을 뒤틀었을 때 넥슨의 검이 크게 허 공을 베게 되었다. 그리고 넥슨은 커다란 빈틈을 노출했으며 그는 창백 한 얼굴이 되었다. 바로 지금이다! "안녕!" 난 곧장 뒤로 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넥슨의 얼빠진 고함소리가 들 려왔다. "어? 어? 이 자식아, 서라앗!" 너 같으면 서겠냐! 카알과 제레인트는 간신히 일어나고 있었고 난 그들 옆에 있던 레니를 다시 나꿔채어 들어올렸다. "실례. 벌은 나중에 받을게." 레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내 옆구리에 끼이게 되었다. 난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 달려가면서 외쳤다. "달아나요!" 제레인트는 잠시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당황하여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제서야 내 뒤로 육박하고 있던 넥슨의 모습을 본 모양이다. "테페리여!" 그리고 제레인트는 달리기 시작했고 그의 로브는 찢어져라 나풀거렸다. 카알은 아무 말 없었지만 역시 단호하면서도 확고한 태도로 도주하기 시 작했다. 나는 달려가면서 외쳤다. "샌슨! 네리아! 가자구요! 파티는 끝났어요!" "좋아!" 하슬러와 그야말로 봐줄만한 검격을 교환하고 있던 샌슨은 거세게 하슬 러를 공격하여 물러나게 한 다음 역시 몸을 빼내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긴 트라이던트로 쟈크를 몰아세우고 있던 네리아 역시 다람쥐 처럼 가볍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하슬러와 쟈크들 역시 사용 어휘의 상 당부분을 욕설에 할애하면서 우리들을 쫓아왔다. "월 오브 아이스!" 이루릴의 낭랑한 캐스팅 소리와 함께 우리들 뒤로 굉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드드드득! 고개를 돌려보니 계곡이 없어져있었다. 우리들 바 로 뒤로 거대한 얼음의 벽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뒷쪽에 서 굉장한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압!" 콰광! 기억이 있는 장면인데? 넥슨, 하슬러, 쟈크의 OPG 트리오는 대미 궁에서 벽을 부수던 그 기세를 십분 발휘하여 얼음벽을 송두리째 박살내 며 달려왔다. 계곡에 부는 바람에 무수한 얼음 입자가 흩날렸다. 햇살에 비치는 수천 개의 얼음 조각들이 허공으로 비상하며 눈부시게 반짝였고 그 사이로 세 명의 추적자들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제레인트는 목 이 터져라 외쳤다. "테페리여! 테페리여! 당신의 성실한 지팡이를 구원해주소서!" 그의 간절한 기원은 참으로 희한한 방법으로 보답받게 되었다. 우리들 뒤로 달려오던 세 명은 자신이 부숴버린 얼음조각을 밟고 나동그라진 것 이다. "으아악!" "으하하! 이러니까 당신을 좋아해요, 테페리!" 제레인트는 그렇게 불경스러운 말을 외치며 웃었다. 이윽고 앞쪽으로 수풀을 헤치고 뛰어들어가자 이루릴과 함께 말들이 우리를 대기하고 있 었다. 네리아는 외쳤다. "됐어! 후치, 내려!" 난 레니를 내려주었다. 레니는 그 때까지도 혼이 나가버린 얼굴로 창백 하게 질려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네리아에 게 매달렸다. "네리아 언니!" 네리아는 레니를 안고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고생 많았지? 미안해. 일찍 못구해줘서. 하지만 이야기는 천천히 하자 구." 그리고 네리아는 즉시 레니를 데리고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랐다. 카 알과 이루릴도 각자의 말 위에 올랐고 제레인트는 슈팅스타 위에 뛰어올 랐다. 나도 제미니 위에 올랐는데 제미니는 그 와중에서도 풀을 뜯고 있 다가 내가 갑자기 뛰어오르자 발길질을 했다. 자칫 떨어질 뻔했지만 급 히 고삐를 당겨서 다행히 낙마하지는 않았다. 이… 정말 주인 속을 뒤집 는 말 같으니라고! 예전에 나였다면 당장에 떨어졌을 거다! 이젠 말타는 실력이 제법 되니까 괜찮지만. 난 제미니 위에 탄 채로 고개를 돌려 넥 슨쪽을 바라보았다. 넥슨과 하슬러, 쟈크들은 간신히 일어났다가 다시 미끄러지는 짓을 반 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얼음에 해당하는 욕설을 모른다는 것이 천추의 한인 양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간신히 일어난 쟈크와 하슬러는 이미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깨닫고는 씁쓸한 얼굴로 우리들을 쏘아보았지 만 넥슨은 우리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달려오면서 돌멩이들 을 들어 집어던지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찢어죽일 녀석들아!" 마음대로 고함 질러. 어차피 말이 없으니 우리들을 따라오지는 못할걸. 하하하. 카알은 기분좋은 얼굴로 롱보우를 꺼내들더니 말했다. "이별 선물이오! 휴리첼!" 카알은 경쾌하게 활시위를 놓았다. 탱! "으악!" 넥슨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하슬러와 쟈크 역시 재빨리 앞으로 쓰러졌다. 카알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고 난 가슴이 터 질 듯이 웃었다. "푸하하하!" 카알은 화살을걸지 않았던 것이다. 난 크 게 웃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레니도 구출했고 넥슨들은 말 이 없으니 우리들을 쫓아오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화살이 날아 오는 줄 알고는 머리를 들지 못한 채 바닥에 업드려 있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수백 큐빗 쯤 떨어지고 났을 때 상처입은 거인이 고 함을 지르는 듯한 무서운 굉음이 들려왔다. "이놈들- 이놈들- 이놈들-!" "반드시 죽일 테다- 죽일 테다- 죽일 테다!" 넥슨의 처절한 저주가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소 리는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말에게 박차를 가하도록 만들었고, 우리는 삽시간에 그들로부터 수천 큐빗 이상 떨어져버렸다. ================================================================== 10. 약속된 휴식……5. "이제 좀 쉴까." 샌슨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들은 거의 말도 제대로 못꺼낼 정도로 지쳐있었다. 우리는 중간에 아주 잠깐씩 한숨을 돌려가면서 그 날 저녁까지 영원의 숲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말도 사람들도 더 이상은 달릴 수 없게 되어 멈춰선 것은 태양이 온 세상에 저녁인사를 던질 무렵이었다. 영원의 숲을 빠져나오자 우리들은 붉은산맥의 기슭 부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샌슨은 짐 속에서 지도를 꺼내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 들이 붉은산맥의 분수령, 흔히들 말하는 블러드혼의 아래쪽에 있다고 말 해주었다. 나는 블러드혼이라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과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도 무방할 테니 지금으로 선 이스트 그레이드로부터의 거리가 더 궁금하다고 말해주었고, 샌슨은 블러드혼을 지나 조금 더 산맥을 따라 이동하면 붉은산맥을 넘을 수 있 는 고개 중 세피아파인 고개가 나타나며 그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이스트 그레이드라고 말해주었다. "여기서 반나절 거리 쯤 되겠는데. 음. 그럼 이대로 세피아파인 고개까 지 전진할까? 그럼 내일은 곧장 이스트 그레이드에 들어설 수 있을 텐 데." 샌슨의 의견에 대해서는 인간과 엘프와 말 모두가 거부의 의사를 표명 했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대로 멈춰서서 야영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행이 멈추게 되자 제레인트는 말에서 내리더니 신성한 로브자락을 땅 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는 그렇게 드러누워 씩씩거리면서 붉어지 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도, 도대체 오늘 하루 동안, 푸우, 푸우, 얼마의 거리를 달린 겁니까? 헉, 헉." 샌슨은 지도를 들여다보며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아요. 17 펜큐빗 정도?" 17 펜큐빗이라… 그럼 170,000 큐빗인가? 맙소사. 정말 많이도 달렸군. 네리아 역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땅바닥에 구겨지듯이 앉았다. 카알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레니의 얼굴은 노랗게 변해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그 색깔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참 흥미로운 일이었다. 모두들 지칠대로 지쳐버린 까닭에 상당히 뻔뻔스러워졌다. 그래서 샌슨 은 혼자서 주위의 지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양심을 두드려대는 망치소리 가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아 - 사실은 거칠게 뛰고 있는 내 맥박소리였을 것이다. - 난 간신히 일어나 그를 도와 야영 준비를 했다. 나와 샌슨은 잠시 후 산봉우리 아래에 형성된 숲에서 약간 으슥한 지형을 골라서 우 리 일행과 말들을 숨겼다. 정말 뛰어난 명마라면 하루 30 펜큐빗을 뛸 수 있다지만 우리 말들도 이 정도면 상당히 고생한 셈이다. 그래서 샌슨 과 난 말들의 편의도 최대한 돌봐주었다. 우리들이 장작을 해서 돌아왔을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있었다. 사람이 아닌 이루릴은 일행 옆에 앉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사도 없이 그저콧소리로 흥얼거리는 노래였는데 아마 자장가가 아닐까 싶다. 자고 있는 사람들은 이루릴의 노래를 들으며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샌슨과 나는 장작을 내려놓고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속이 시원해지도록 웃었다. "모두들 저녁 생각도 없는 모양이군. 나도 말을 너무 달려서 입맛이 없 어." 난 샌슨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샌슨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안장 주머니를 뒤졌다. 잠시 후 샌슨은 빵덩어리 하나를 들고서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레니와 네리아는 서로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들의 똑같은 붉은 머리 때문에 마치 자매처럼 보였다. 제레인트는 언제나처럼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불타오르고 우리 위에 지붕처럼 펼쳐진 나무들이 발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나뭇잎들은 떨어져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모닥불빛이 엉겨붙은 나무들은 마치 다시 찾아온 가을을 누리는 듯하다. 카알은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그는 잠시 갑자기 잠을 깬 사람 특유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비비며 일 어나 앉았다. "아, 이런. 내가 잠들었군." 샌슨은 빵조각을 뜯으면서 말했다. "그냥 주무세요. 나와 후치가 불침번을 서지요." "자네들도 피곤할 텐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난 잠깐 눈을 붙였으니 내 가 먼저 불침번을 서지." 난 피식 웃으며 무닥불을 쑤셔 불이 잘 붙도록 하면서 말했다. "사실 너무 흔들려서 잠도 오지 않아요. 아직까지 몸이 흔들리는 느낌 인걸요." "허허, 그런가." 카알은 모닥불 옆으로 당겨 앉으며 손을 펼쳐 불을 쬐었다. 난 불빛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지루해지는군. 난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갈색산맥으로 달려가면 되는 건가요? 바이서스 임펠에는 들릴 필요가 없을까요?" "특별히 그럴 일은 없겠지. 보급 이외에는 다른 볼 일이 없지 않은가?" "뭐, 엑셀핸드나 아프나이델과 합류해야 되지 않을까요?" 카알은 잠자코 불빛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긴, 아인델프님이 계셔야 크라드메서를 찾는 일이 수월해지겠지. 음. 우리들만으로 크라드메서의 레어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테니 까. 가는 길에 들러서 합류하도록 해야겠군." 우리는 다시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카알이 입을 열었 다. "세레니얼양." "네." 엘프란 참 이상하다. 카알이 갑자기 말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 황한 기색도 없이 마치 기다리던 질문을 받는 것처럼 침착하게 말한다. 카알은 그것이 놀랍지도 않은지 평온하게 말했다. "핸드레이크는 확실히 살아있는 것입니까?" 난 카알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대미궁에서 이루릴은 드래곤 로드에 게 질문했다. 핸드레이크는 어디에 있냐고. 어디에 묻혀있냐는 식의 질 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 주일 전, 일스 공국에서도 이루릴은 비슷한 말을 했다. 클래스 10의 마법은 그 마법의 창시자에게배우면 된다는 말 이었다. 그렇다면 이루릴은 핸드레이크가 아직 생존해 있으며 그에게서 직접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울 생각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핸드레이 크는 역사라는 나라의 주민이지 현실이라는 나라의 주민은 아니지 않는 가? 그러나 이루릴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믿기 어렵군요… 300년 전의 인물이 살아있다니오. 인간의 수명은 그 렇게 길지 않습니다." 이루릴은 차분히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불기운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맑고 깊은 눈이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이지요."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마나를 다루는 자는 결국 신의 율법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혹은 핸드레이크의 말처럼 신을 속 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 율법을 피할 수 있을 겁니 다." 카알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가능할까요?"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카알은 장작개비 하나를 모닥불에 던졌다. 불티가 위로 팍 튀어올라 순 간적으로 분수처럼 흩어져 날아갔다.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를 동시에 따릅니다. 유피넬의 추종자라면 헬카네스를 무시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헬카네스의 추종 자라면 또 반대의 경우가 가능할지도. 하지만 양자 모두를 따른다는 말 은…." "양자 모두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요." 카알은 고개를 들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음. 유피넬과 헬카네스를 모두 무시한다라.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유 피넬은 질서고, 헬카네스는 혼돈이다. 그 양자가 아닌 상태라는 것이 있 을 수가 있나? 카알은 불기운들이 어려서 마치 단풍나무처럼 바뀐 겨울나무를 바라보 며 말했다. "인간들 중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말입니까?" 이루릴의 질문에 카알은 다시 얼굴을 내려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 자는 아주 과격한 논법에 의해 질서는 혼돈의 한 기형이라고 말했 지요." 음? 질서가 혼돈의 기형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내가 갑자기 끼어들자 카알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인자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네드발군. 돌멩이 네 개를 주워 땅에 던져보게. 돌멩이들은 아무렇게 나 흩어지겠지? 그것들이 별자리처럼 어떤 모양을 이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던져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렇지요." "하지만 아주 우연히 그 돌멩이들이 완전한 정사각형을 이룰 수도 있겠 지?" "예? 어… 우연히라면, 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돌멩이들이 그리는 모습은 결국 하나의 혼돈일세. 어떻게 될지 알 수 가 없다는 말일세. 하지만 그 돌멩이들이 어쩌다가 완전한 조화와 질서 를 가진 정사각형을 그릴 수도 있는 문제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서라는 것이 혼돈 중에 한 특이한 형태임을 알 수 있지 않은 가? 특이할 뿐이지만 결국 다른 것들과 별로 다를것도 없다는 말일세." 잠깐, 잠깐. 이게 무슨 말이지? 어라.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어, 하지만 그것들이 완전히 정사각형을 그릴 확률은 없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한 번 그렸던 모양을 또다시 그릴 확률도 매우 드물 지. 모양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사각형이든 비뚤어진 평 행사변형이든 혹은 마름모이든 간에 그 모양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 면 돌멩이들이 그릴 수 있는 형태들은 모두 똑같은 확률을 가질 뿐이 야." "어, 어… 그렇네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말해볼 수 있을 것이네, 네드발군. 모든 것은 원래가 혼돈이며, 질서라는 것은 그 무수한 혼돈의 형태 중에 하나일 뿐이다. 모래사장에 펼쳐진 무수한 모래알 중에 한 알을 들어올려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꽤나 설득력있게 들리는걸? 난 그 다음에 나올 말을 생각해보고는 놀란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웃으며 말했다. "따라서 세계에 유피넬이라는 것은 없다. 그리고 유피넬의 반대개념으 로서의 헬카네스라면, 헬카네스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난 놀란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모닥 불의 이글거리는 불빛에 비친 이루릴의 얼굴엔 깊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거 괴이한걸. 이루릴은 엘프인데. 엘프라는 것은 유피넬의 어린 자식 이잖아. 그런데 유피넬이 없다는 저런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는걸. 하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난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고 결과 적으로 머리가 아파졌다. 그러나 카알이 먼저 말했다. "재미있는 생각이지? 하지만 말일세. 이건 관념의 유희 정도일 수밖에 없다네. 우리 눈 앞에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 계시지 않은가?" 아! 그렇군!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네? 그래서 이루릴도 별 표정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이루릴을 바라보았 다. "하하, 그렇네요. 이미 엘프가 있는데 유피넬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되겠네요." 그런데 이루릴의 표정이 이상했다. 지금껏 무표정하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오른 것이다. 그 미소라는 것이 정말 괴상했다. 미소라면 반드 시 있어야 할 기쁜 느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왜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걸까? 카알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 역시 조금 의아한 얼굴 이 되어서는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니얼양?" 이루릴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이건 현실감이 하나도 없다. 이루릴은 여전히 저기 앉아 있는데, 그것이 나와 같은 시간, 나와 같은 공간을 숨 쉬는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게 무슨 괴상한 느낌이지? 심지 어 이루릴이 바라보는 하늘마저도 내가 보는 하늘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다. 그녀는 마치 태초의 하늘, 창세기의 첫 밤하늘과 첫 별빛을 바라보 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네. 우리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고 하지요." 나와 카알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루릴 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음. 왜 블러드혼이라고 부르는지 알겠군. 거대한 바위, 산봉우리가 전부 하나의 바위였다. 바위의 색깔은 갈색에 가까웠는데 희한하게도 꼭 말라붙은 피의 색깔처럼 보였다. "으시시한 봉우리야." 네리아는 쌀쌀한 아침 공기 속에서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레니는 감탄 한 표정으로 그 붉은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블러드혼 좌우로 좌악 펼쳐진 붉은산맥의 토질 전체는 불그스름한 빛깔 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산맥의 거의 대부분을 뒤덮은 수림 역시 대부분 적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땅의 빛깔을 빨아들여 자라난 나무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일행들은 지친 말 위에 지친 기수로서 앉은 채로 서로에게 정말 딱하다 는 시선을 보내었다. 제레인트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가죠, 뭐." "저희들이 가기 위해선 말의 동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이루릴의 말이었다. 사람들도 물론 지쳐있었지만 말들 역시 며칠 동안 게속된 강행군에 모두들 지쳐있었다. 제레인트는 이루릴의 말에 잠시 머 리를 갸웃거리더니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 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말들의 앞에 서서 거창한 동작으로 팔을 들어 올리더니 말들을 축복하기 시작했다. 그 축복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이봐, 난 어차피 바닷바람 부는 일스의 프리스트일 뿐이니까 너희들처 럼 대지의 영혼에 닿아있으면서 동시에 바람의 영혼에 귀 기울이는 우아 한 짐승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어차피 네발 짐승이니까 우리보단 발이 두 배인 셈이잖아. 왼쪽 앞발이 달릴 때 왼쪽 뒷발이 쉰다든지, 혹은 오른쪽 앞발이 달릴 때 왼쪽 앞발이 쉰다든지, 뭐 너희들만이 독특한 요령이 있을 거라고 생각돼. 머리를 써보란 말이 야, 머리를. 아, 물론 내 생각이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 게다가 우리들이 타고 있으니까 무거울 거라는 것도 이해해. 십분 인정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몸을 가볍게 만들 재주가 있는 것은 아 니잖아. 우리들로서는 방도가 없으니까 다리 많은 너희들에게 부탁할 뿐 이야. 아, 미안하다고, 미안해. 그렇게 푸르렁거리지 마. 다행히 소금기 물씬 배인 프리스트도프리스트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 너희들의 편의를 돌보겠어. 테페리의 축복을." ================================================================== 10. 약속된 휴식……6. 저 길고 장황한 축복의 말이 끝나고나서 제레인트는 두 손을 빛나게 만 들어 말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제레인트를 경계 했지만 네리아가 그의 고삐를 쥔 채 안심시켰기 때문에 달아나지는 않았 다. 제미니 역시 제레인트를 경계했으며 내가 녀석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윽박질렀기 때문에 달아나지는 못했다. 제레인트는 모든 말들을 축복한 다음에 다시 장엄하게 말했다. "이거 보라구. 자, 너희들도 부정할 수는 없겠지. 난 할 도리를 다했 어. 인정할 것은인정해야 되겠지? 사실 인간들 중에서도 프리스트의 축 복을 자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제 너희들도 최 선을 다해줘. 서로 돕고 사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같은 길을 걷는 동료 로서 말이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이니만큼 난 동료가 풀을 뜯든 네 발로 걷든 상관하지 않고 동료로 생각하겠단 말이야. 그러니 너희들 도 내가 고기를 뜯든 너희들에 올라타 있든 상관치 말고 동료로서 최선 을 다해줘. 알았지?" 말들은 멀뚱히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카알은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하하! 설교 연습도 많이 하니까요." 윽. 제레인트는 카알이 칭찬을 한 줄 아나보군. 제레인트는 자신의 설 교에 깊은 감동을 받은 얼굴로 말에 올라탔고 샌슨과 나는 그를 외면한 채 히죽 웃었다. 샌슨은 웃음기를 거두고는 외쳤다. "자! 출발!" 제레인트의 축복이 효험이 있었는지 말들은 꽤 상쾌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붉은산맥의 붉은 흙먼지들이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흙들이 도대 체 물기가 없는 것인지 메마르고도 팍팍했다. 마치 뼈처럼 단단한 땅인 걸. 말들의 발굽이 걱정될 지경이다.그러나 말들은 단단한 겨울 대지 위를 잘도 달려간다. 우리 왼쪽으로 붉은산맥이 쉼없이 흘러갔다. 샌슨은 달리며 외쳤다.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어서면, 이스트 그레이드 입구의 마을이 있습니 다! 거기서 쉬면 될 것입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달려! 우리들의 가장 믿지 못할 원수도 시간이고, 우리들의 가장 든든 한 동지도 시간이오. 일주일 내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갈색산맥에 도착해 야 하오!" "하, 하, 하아!" "이랴아, 에, 하!" 두두두두두. 말들의 발은 쭉쭉 뻗어 대지를 당겼다가 힘차게 밀어내었 다. 그 때마다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남쪽으로 튕겨졌다. 마침내 적송들 의 붉은 기운이 더욱 짙어지면서 우리는 세피아파인 고개에 접어들었다. 고개 앞에서 우리들은 잠시 멈춰서서는 우울한 기분으로 세피아파인 고 개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동안 달려오면서 계속 우리 왼쪽으로 치달아내려오던 붉은산맥이 갑자기 낮아지면서 거대한 고개를 형성하고 있는 장소였다. 좁은 선상지 를 돌아 들어가면서 굽어진 산등성이들과 절벽들이 첩첩히 계속되는 장 소로서 사실 고개라기보다는 산맥 사이의 협로라고 불러야 더 정확할것 같다. "상당한 장소야." 네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타고 있는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알은 한참동안 고개를 바라보더니 샌슨에게 물었다. "이 고개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 "흠… 약 2.8 펜큐빗입니다." 그러자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에게 하마를 지시했다. "잠시 쉬도록 하십시다. 저걸 넘어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은 데, 난 그 중 두번째 방법을 택하고 싶소." "그럼 먼저 첫번째 방법을 말해보세요." "천천히 쉬어가면서무리없이 넘어가는 것. 오늘 고개의 정상까지 올라 가 쉬고 내일 아침에 쾌적하게 고개를 내려가는 거겠지." "두번째 방법은?" "이를 악물고 단숨에 넘어가는 것. 오늘 해 안에 고개를 넘어 내일은 쾌적하게 평지를 달리는 것." "…둘 다 뒷부분이 쾌적하다는 것은 마음에 드는군요." "그런데 아무래도 고개를 내려가는 것도 말들에겐 쉬운 일은 아닐 거 야. 그냥 오늘 고생해버린 다음 내일 평지를 걸으면서 쉬도록 하세나." 모두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카알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 래서 우리들은 중간에 휴식 없이 단숨에 고개를 넘기 위해 고개 아래에 서 푹 쉬기로 했다. 말들도 모두 제멋대로 풀을 뜯게 내버려두고 우리들 도 모두 마음대로 뒹굴었다. 제레인트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 고향 사람들은 모두 이렇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비록 오후에 저 고개를 단숨에 넘는다는 합리적인 계획이 있긴 하지 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어디 쉴 수가 있습니까?" 제레인트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샌슨 때문이겠지. 샌슨은 풀 밭에 그야말로 온몸의 관절을 다 편 상태로 드러누워 마음껏 코를 골아 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미친 듯한 강행군을 시도하는 사람으로 보 이지는 않는 태도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난 마른 풀잎을 뜯어 잘 다듬은 다음 귀를 파고 있었으니까. "다가올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카알 역시 그렇게 말하며 땅에 드러누워버렸다.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 쓱하면서 바닥에 앉았다. 네리아는 약간 떨어진 곳의 바위 위에 레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녀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는데 서로가 상 대의 손아귀 힘이 너무 세다가 투덜거렸다. "아, 아아, 좀 살살, 살살해에, 레니!" "아아악, 아후, 네리아 언니, 좀… 어깨 부서져요." 뭐 이런 식이다. 엄살들은. 이루릴은 약간 낮은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 사이에서 다리를 쭉 뻗고는 나무 등걸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 다. 바람이 몇 차례 불어서 마른 풀잎들을 날려버리는 일 외에는 모두들 완 전히 편한 자세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심심한걸. 난 휘파람을 불다 가 그것도 지루해져서 누웠다. 바닥에 드러누우니 이루릴의 곧은 두 다 리가 잘 보였다. 이루릴의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신기하군. 이루릴은 쉴 때도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평소에도 쓸모 없는 행동이 거의 없지만 말이야. 샌슨을 보라구. 잠시도 가만히 누워있 지를 못해서 왼쪽다리를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렸다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렸다가 옆으로 누웠다가 바로 붑기도 하고, 어쨌든 가만히 누워있지를 못한다. 레니는 카알에게 다가갔다. "카알 아저씨. 힘드시죠?" "아니, 괜찮소. 레니양이야말로 우리들 덕분에 정말 고생이 많아요. 우 리들 따라나서서 한 번이라도 재미있었던 적이 없지요?" 레니는 카알의 등 뒤에 무릎을 꿇고는 카알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 다. 카알은 멋적은 표정이 되었다. 네리아는 깔깔 웃고는 카알 앞에 주 저앉았다. "카알 아저씨. 내 어깨 주물러줘요." 카알은 피식 웃고는 네리아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네리 아, 카알, 레니가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레니는 말했다. "뭐 지금까지 재미없었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델하파의 술집에서 술잔 을 나르던 레니가 어떻게 이런 여행을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미안하오. 고생만 시키고." "아뇨. 천만에요." 그 때 위에서 이루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옵니다." 우리들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이루릴은 나무 위에서 먼곳을 바라보 고 있었고 우리들은 이루릴의 시선 방향을 가늠하다가 고갯길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고갯길에서는 뭔가 굉장히 많은 것이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다. 먼 지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러고보니 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리 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꽤 많은데?" "어디의 군대인가?" 그러자 이루릴이 대답했다. "저 군대의 지휘관은 막대기로 지휘를 하는군요. 그리고 병졸들의 투구 의 뿔은 날카롭지만 모두 네 발로 걷고 있고." 막대기로 지휘하고 네 발로 걷는 병사들…이라고? 카알이 말했다. "소떼로군." 그러고보니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 사이사이로 음메거리는 소리와 방울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왠 소떼가 고갯길을 넘어오는 거지? 우리는 잠시 앉은 채로 고개를 넘어오는 소떼 무리를 바라보았다. 꽤나 큰 행렬인지 숲 전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약 30분쯤 기다리자 마 침내 그 선두의 소가 보였다. 그리고 소들 사이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남자는 우리들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우리들을 확실히 발견한 모양 이다. 우리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남자 하나가 선두의 그 남자를 추격하듯이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두의 남자는 무슨 동물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야만스럽게 보이는 털가죽 자켓을 걸치고 있는 20대 초반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였 다. 그을린 얼굴과 거세게 생긴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허리에는 동물의 힘줄 같은 것으로 큼직하게 생긴 대거를 묶고 있고 등엔 상당히 세게 생 긴 콤포짓 보우를 메고 있었으며 손엔 쇠테를 두른 긴 막대기를 들고 있 었다.장화도 무슨 가죽인지 모르겠지만 왠만한 뱀이 물어선 이빨도 안 들어가게 생겼다. 남자가 타고 있는 말의 마구도 희한하게 생겼는데 주 로 털가죽이나 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커다란 밧줄 사리가 잠시 눈을 끌었다. 남자는 꽤 좋은 솜씨로 말을 다루어 우리에게로 달려오더 니 가벼운 동작으로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에 거의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또다른 남자 하나도 달려오더니 역시 멋진 동작으로 뛰어내렸다. 샌슨이 부지불식간에 감탄을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두의 남자는 호의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반갑습니다. 모험가이십니까?" 어라? 저거 방언이라는 건가? 남자의 억양은 일스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거센 억양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들었을 때는 외국어인 줄 알았다. 우리는 놀란 눈으로 남자들을 바 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바이서스어였다. 그 때까지도 고개에 서는 계속해서 꾸역꾸역 소떼들이 내려오고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 드문 드문 다른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들은 모두 일어섰고 이루릴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남자는 이 루릴의 모습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카알 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저 여행자들입니다.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기 위해 잠시 쉬고 있 던 참입니다." 그러자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실 거라고 짐작되어 달려왔습니다. 제 이름은 리츄입니다. 두 가 지 용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권고이고 하나는 요청입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요청과 권고 모두에 귀를 활짝 열 줄 알아야겠지요. 제 이름은 카알 헬턴트입니다." 리츄는 말하기 전에 잠시 자신의 뒤를 따라온 그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료는 별로 대화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 딴곳을 바라보며 서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리츄는 다시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저희들의 권고는 저 고개를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개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고개에 괴물이 나타납니다." "예에?" 우리는 모두 놀란 눈으로 리츄라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리츄는 우울 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먼저 말씀드리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린 목동들입니다. 납품 계약에 따라 저 소들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군부와의 계약으로 전선에서 사용될 식용 소를 운송하고 있지요." 아, 이 사람들이 노스 그레이드의 목동들인가? 언젠가 카알이 이 사람 으로 변장했었지. 난 그 때를 떠올리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카알은 내 웃음의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리츄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우리는 엇그제 고개를 넘다가 상인 무리를 만났습니다. 상인 무리들도 지금의 우리들처럼 황급히 고개를 되짚어 내려오는 중이었지요. 이유를 물어보니 고개에 괴물이 나타나서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죽인다는 겁니 다. 사람을 덥쳐서는 뼈만 남을 때까지 그 생명을 빨아먹는다는 겁니 다." 생명을 빨아먹어? 우리는 놀란 얼굴로 리츄를 바라보았다. 리츄는 약간 쾌활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표정변화가 다양한 사람이로군. "뭐, 우리의 명성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동들은 그런 괴물 이야기 따위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소떼를 데리고 방랑할 때는 별 괴상한 몬스터들을 다 만나거든요." "그러십니까. 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 명궁 우타크도 목동 출신이 었지요." 우타크의 이름이 꺼내어지자 리츄의 얼굴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남자도 미소를 떠올렸다. 리츄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하. 예.그래서 우리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고개를 계속 넘어갔 습니다. 그런데 그젯밤 기습을 당했습니다." "기습이오?" "예. 한밤중이었는데 갑자기 괴상한 고함소리와 함께 불덩어리가 날아 들더군요." "불덩어리요?" "예. 저희들은 괴물이라고 하기에 그저 몬스터 나부랭이인 줄 알았습니 다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저와 다른 목동 몇이서 그 놈에게 덤벼들려고 해보았습니다만 어둠 속에서 정말 잽싸게도 움직이더군요. 재수없게도 친구 하나는 불에 맞아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소들도 한 20여 마 리 죽었고 그러자 소떼들이 발광을 시작했습니다. 자칫했다간 소떼를 모 조리 잃을 뻔했습니다. 소라는 것들은 한 번 혼란에 빠지면 다시 진정시 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허어. 산속에서 그런 일을. 정말 고생하셨겠군요." "예. 어쨌든 밤새도록 고생해서는 소떼들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 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리 동료 두 명이 놈에게 당했습니다. 숲을 뒤져 서 발견된 시체는 그 상인들의 말대로 빼빼 말라서 뼈가 만져질 정도였 습니다. 소지품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우리 친구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요. 온몸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머리카락도 뭉텅이로 빠 지더군요." 레니는 지금 당장이라도 리츄가 그 괴물로 변하기라도 할 듯이 네리아 의 등 뒤로 숨었다. 리츄는 여자들쪽으로 미소를 지어주고는 말했다. "우리는 친구의 복수를 위해 소떼들을 안전한 계곡에 모아두고 어제 낮 에 그 괴물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놈의 자취를 추적하여 우리는 마침내 어느 산봉우리 아래에서 놈을 몰 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숲 속의 추적이라는 것이 정말 신경 곤두서는 일 이지요.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않고 그 기척만 가지고 추적하는 것입니 다. 어쨌든 우리는 퇴로를 봉쇄하고 놈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갑자 기 내 앞의 숲 속에서 뭔가 튀어나오더군요. 뭔지 알아볼 사이도 없었지 만 기억나는 것은 시커먼 모습과 붉은 눈뿐입니다. 전 놈을 베었지만 어 찌나 잽싼지. 놈은 내 칼을 피하고는 내 손목을 덥썩 쥐더군요." "손목을 쥐어요?" 리츄라는 남자는 씩 웃더니 곧 활달한 동작으로 자켓을 벗었다. 그 뒤 에 점잖게 서있던 남자는 리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이 눈살 을 찌푸렸지만 리츄는 꺼리낄 것 없이 겉옷을 벗고는 소매를 걷어올리더 니 팔을 내보여주었다. "히익?" 네리아가 숨막힌 소리를 질렀고 네리아의 등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살 펴보던 레니는 다시 파다닥 숨어버렸다. 드러난 팔은 가관이었다. 리츄의 건장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그 팔은 뼈처럼 가늘었다. 게다가 시커멓게 변해있는 것이 마치 죽은 자의 팔처 럼 보였다. "이건 도대체…?" 리츄는 쓰게 웃으며 다시 소매를 걷어내렸다. "독은 아닙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팔 하나를 완전히 잃게 되 는 줄 알았지요. 놈에게 팔을 잡힌 순간 늑대가 팔을 물어뜯는 줄 알았 습니다. 창피하게시리 여자처럼 비명을 빽빽 질렀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놈은 이미 없어지고 이 팔은 이 지경이 되어 있더군요.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자 그 놈은 달아나버렸다고 하더 군요. 그래서 목숨이 날아가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새 소떼들은 이미 우리 옆에 당도했고 그들 중에 서있던 목동들은 우 리들을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소떼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카알은 믿어지 지 않는다는 얼굴로 리츄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요청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리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모험가들은 다재다능하지요. 저, 우리 친구 중에 화상을 입은 자를 좀 돌보아주실 수 없는지…" 그 때였다. 등 뒤에서 가만히 서있던 남자가 짧게 외쳤다. "리츄!" ================================================================== 10. 약속된 휴식……7. 그러나 리츄는 웃으면서 말할 뿐이었다. "하하! 결국 입을 열고 말았지? 여러분, 여기 과묵한 친구의 이름은 하 이츄입니다." 우리는 인사를 못했다. 하이츄는 우리들에게 대충 목례만을 하고는 다 시 리츄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 임마두와 이렇게 길게 잡담을 나누는 것은, 뭐 위험에 대한 경고의 의미였으니까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동료를 임마두 에게 맡기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리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좋은 웃음을 띠 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자, 자. 하이츄. 안되겠군. 여러분 죄송합니다. 잠깐 우리들끼리 이야 기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츄는 하이츄의 어깨를 둘러안아서 끌고 갔다. 그 둘은 우리들 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리아 는 눈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카알 아저씨. 임마두라니오? 무슨 말인지 혹시 아시겠어요?" "아. 예. 북부의 목동들은 상당히 폐쇄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목동 이 아닌 자를 지칭하는 말이 임마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들끼리 만 말을 나누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임마두, 그러니까 외부인과 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제레인트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아, 치료도 거부한다는 말입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쌩그렐, 그러니까 영혼의 아버지 이외에 목동들의 몸을 책임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소. 그런 이야기 못들어봤소? 방목 중인 목동들이 혹시 도시에 들렀다가 병에 걸리면 치료를 거부하고 죽는 다는 이야기." "글쎄요. 목동들은 도시에 잘 들리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정말 죽어 도 치료를 안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뭐 저렇게 답답한 사람들이 다 있냐? 난 어이가 없어서 토론 중인 두 목동을 바라보았다. 하이츄는 강직한 얼굴로 뭐라고 강변하고 있었고 리 츄는 되도록 웃으면서, 하지만 가끔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침내 리츄는 뒷통수를 세차게 긁더니 외쳤다. "이 자식아! 우린 쌩그렐에게 돌아가려면 몇 달이나 남았단 말이다. 그 동안 골고츄가 버틸 거 같아? 제기, 몇 달은커녕 오늘도 못넘길 지경이 야. 여기서 모험가들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입 좀 닥치고 나 하는대로 내버려 둬. 누가 지휘자냐고 꼭 말해야 돼?" 그러자 하이츄는 쓴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리츄를 바라보았다. 리츄는 넌더리를 내더니 다시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먼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녀석이 고집이 심해서…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리는데, 저 희 동료를 좀 돌봐두시겠습니까?" 카알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래서 우리들은 리츄의 안내를 받아 목동들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 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소떼들 사이에 서있던 목동들은 당장 험악한 표정, 혹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는 리츄에게 달려들듯 이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허엇, 참. 환영받지 못하는 집단에 다가가는 것은 참 신경쓰이는 일이군, 그래. 리츄는 별말 하지 않고는 한 목동에게 다가갔다. 목동은 극히 불쾌하다 는 시선으로 우리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곧 하늘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 목동이 타고 있는 말의 안장에는 길다란 나무 막대가 두 개 연결되어 뒤 로 끌리게 되어 있었고 그 막대의 뒷부분에는 들것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들것은 밧줄과 덩굴, 털가죽 등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 그 안에는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남자는 언뜻 보기에도 환자처럼 보였다. 파리한 얼굴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몸은 털가죽으로 꽁꽁 묶이다시피 되 어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제레인트는 당장 혀를 찼다. "이렇게 환자를 끌고다니다니. 먼지를 얼마나 먹인 거야?" 그러자 말 위에 앉아있던 목동은 헛기침을 뱉었다. 제레인트는 그에 신 경쓰지 않고는 털가죽을 들추었다. 드러누워있던 남자는 약한 신음을 뱉더니 눈을 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제레인트가 털가죽을 들추자 곧 화상을 입은 상체가드러난 것이다. 몹시 타버린 피부들 사이로 진물이 흐르고 피가 말라붙은 데다가 몹시 지저분해서 끔찍스럽게 보였다. 제레인트는 다시 혀를 찼다. "차라리 관에 넣어 끌고 다니는 것이 낫지, 화상 환자를 털가죽으로 꽁 꽁 묶어? 참 골치 아프군." 리츄는 뒷통수를 긁적였고 하이츄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제레인트는 혀를 차면서 기도에 들어갔다. 그러자 누워있던 남자 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우… 우우우! 저리 가!"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제레인트는 놀라서 기도를 멈추고 물러났다. 그 러자 리츄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운 남자에게 몸을 굽혔다. "이봐, 골고츄! 닥치고 가만히 있어. 제발. 널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 "아, 안돼… 쌩그렐이 아닌 자… 물러나! 나에게 손을 대, 댈 순 없 어!" 리츄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리들도 갑자기 그림자가 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는 어느 새 목동들이 몰려서 있었다. 목동들은 험악한 얼굴로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검집에 그대로 있었고 손에 들고있는 것은 막 대기뿐이었지만 아무래도 꼭 무기를 겨누고 있는 느낌이 든다. 리츄는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 할 말 있나?" 그러자 목동들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리츄.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설마 골고츄의 치료를 부탁한 것은 아니 겠지?" 리츄는 잠깐 움찔하더니 다시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러면 안되나?" 그러자 입을 열었던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리츄를 바라보았다. "쌩그렐만이 우리를 보살필 수 있다. 넌 골고츄를 살리는 것이 아니야! 제길, 혹시 저 자들이 골고츄를 치료할 수 있을진 몰라. 하지만 그런다 고 골고츄가 행복할 것 같아?" 그러자 리츄는 턱을 쑥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 다. "살아있어야 행복할지 아닐지 알 수 있는 거야, 멍청아! 덜 여문 머리 로 멋대로 말하지 마." 그러자 말 위의 목동의 얼굴도 험악해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리츄는 재빨리 치고들어갔다. "네가 쌩그렐이냐? 출세했군. 언제부터 우리의 스마락츄가 쌩그렐이 되 었지? 언제 그 머리띠를 만지고 나무패를 던지게 되었지? 좋아. 그렇다 면 위대하신 쌩그렐 스마락츄가 판단하고 지시해보시지?" "…난 내가 쌩그렐이라고 말한 적 없다." 그러자 리츄는 곧장 말했다. "그렇다면 내 말을 따라! 여기 지휘자가 누구야? 내가 쌩그렐의 징표를 가진 지휘자라는 것을 무시할 셈이냐! 목동들이 쌩그렐의 울타리를 벗어 났을 때 지휘권은 누구에게 있지? 그리고 그 지휘권에 대한 거부가 있을 수 있는가?" 스마락츄라는 그 목동은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흠. 사실 저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할 말이 없겠지, 뭐. 스마락츄는 씹듯이 말했다. "네가 지휘자고, 우린 거부할 수 없지. 굳건한 마음도 여린 몸도 너의 뜻대로. 하지만 쌩그렐의 울타리 안으로 돌아갔을 때…" "그 때는 네 녀석의 입을 마음대로 놀려! 지금은 입 닥치고!" 제레인트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치료를 하게 되었다. 주위의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치료를 받는 당사자까지도 험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정말 치료할 기분 안나겠는걸. 들것 속에 누워있던 골고츄는 지휘자인 리츄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수치를 참고견딘다는 식의 눈 길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면 황야에서 죽어넘어지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라고 고함질러버리고 말 텐데. 제레인트가 푸르게빛나는 손으로 쓰다듬지 골고츄의 상처는 완전히 사 라졌다. 목동들은 감탄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제레 인트는 치료를 끝내고나서 우리 짐 속에서 붕대를 찾아내어 골고츄의 상 처를 감아놓고는 물러났다. "뭐, 상처는 이제 괜찮으니까 며칠 있으면 다시 원래의 살로 돌아갈 거 요. 당신들 위생 관념에 대해 좀 떠들어주고 싶지만 들어먹힐 것 같지가 않으니 관두겠소." 리츄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프리스트님." "천만에요." 리츄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자신들의 목동들에게 험한 눈을 보내 었다. 그러자 목동들은 우물거리다가 목례 비슷한 동작을 취했다. 몇 명 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듯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자 리츄는 발칵 화를 내더니 그들의 이름을 주욱 소개해주었 다. 리츄, 네츄, 하이츄, 도츄, 스마락츄, 한탈츄, 기츄, 빌츄, 파빌츄, 날라츄. 그리고 누워있던 골고츄. 난 그들의 이름을 소개받는 동안 계속해서 침이 튈까봐 불안했다. 그들 은 이름을 소개당하자 어쩔 수 없이 정중하게 인사해야 되었다. 그러니 까 이런 식이다. "여기 멍청하게 생긴 눈을 가진 놈은 도츄라 하지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골고츄를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천만에요." "그리고 여기 꺽다리는 한탈츄." "…고맙습니다. 프리스트."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하하." 요런 식으로 해서 리츄는 그 많은 목동들에게서 모조리 감사의 말이 나 오도록 만들었고 제레인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겸양을 표시해 야 되었다. 네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하아, 이상해요. 왜 모두들 감기 걸린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네리아의 말에 레니도 깔깔 웃었고 그러자 리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카알이 먼저 황급하게 말했다. "아, 네리아양. 이 분들은 아마도 같은 영혼의 아들일 겁니다. 그러니 까 형제인 셈이지요. 그렇지요?" 리츄는 놀란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예? 아니, 대단히 박학하신 분이군요." 카알은 다시 리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천만에요. 저희 일행이 도움이 되어드려서 저 또한 기쁘군요." 그러자 제레인트가 다시 말했다. "도와주려면 완전히 도와야지요. 어디, 당신 팔 좀 다시 내밀어보십시 오, 리츄." 그러자 리츄는 난색을 표시했고 주위의 목동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특 히 스마락츄라는 작자는 섬뜩한 눈으로 제레인트와 리츄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리츄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오. 이미 베풀어주신 것만해도 충분합니다. 또다시 수고를 끼 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레인트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가 다시 뭐라고 하려고 할 때 카알 이 그의 팔을 가볍게 잡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돌 렸고 카알은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한 몸짓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레인트는 의아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뭐, 당신은 아마 죽지는않을 거요. 그 팔은 아무래도 뱀파이어릭 터 치(Vampiric Touch) 계통의 마법을 당한 모양이니 가만히 놔둬도 회복은 될 거란 말이오. 하지만 그 팔의 저항력이 몹시 약해져 있고 또 다른 합 병증이 생기기도 쉬울 텐데. 게다가 이런 날씨에 그런 팔을 아무렇게나 놔두는 것도 위험하고." '츄'들은 제레인트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루릴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정확하신 눈이에요. 제레인트." "확실하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리츄는 당황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 저 이방인들의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당신은 이게 무슨 마법인지 알겠다는 말입니까?" "하하. 그거 별로 대단한 마법은 아닙니다. 접근해서 생명력을 빨아들 이는 마법이라 마법사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마법이고. 마법사들은 보통 좀 느리거든 . 엘프라면 간단히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어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가 그런 괴악한 짓을 할까요." 이루릴은 다시 생긋 웃었다. 리츄는 완전히 당황한 얼굴이 되어 말했 다. "아니, 저, 그럼 그게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불덩어리라는 걸로 봐서도 그렇고, 음. 아마 마법사인 모양이군요." 그러자 '츄'들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후 그들의 얼굴엔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한탈츄가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그것이 사람이라면 겁먹을 필요 없어. 아라츄와 달츄 의 복수를 해야 돼! 그리고 골고츄의 상처에 대해서도 빚을 받아내어야 돼!" 그러자 파빌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쌩그렐께서도 이방인의 전사는 건드려도 좋지만 마법사는 조심해 야 된다고 항상 당부하셨다. 괜히 위험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이대로 중부대로로 내려가면 된다." 그러자 화상을 입었는지 팔에 붕대를 하고 있던 기츄가 고개를 가로저 었다. "하지만 중부대로를 이용하면 계약 날짜 안에 도착하기 어려워. 눈이 내리면 소를 끌고 가기 어렵단 말이다." '츄'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예의바르게 그들의 토론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샌슨은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했 다. "해가 높아. 이제 출발해야겠군."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말을 불러들여 마구를 얹고 출발 채비를 갖추었 다. 그러자 리츄가 놀라서 말했다. "아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카알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물론 세피아파인 고개입니다." "예? 당신들은 그 마법사를 겁내지 않으십니까?" "겁내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그 자는 밤에 기습하곤 하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우리들은 저기서 밤을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리츄는 이제 더 놀랐다. "예? 밤을 보내지 않으시다니, 밤새도록 달리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오늘 해 안에 고개를 넘을 생각입니다." 그러자 목동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 한 둘은 고개 를 돌리며 피식피식 웃기까지 했다. 리츄는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 혹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제정신입니까? 세피아파인 고개를 말로 반나절만에 넘을 수는 없습니다. 고갯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길단 말입니다. 직선거리 로도 3 펜큐빗은 되는데 평지의 3 펜큐빗과 산속의 3 펜큐빗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러니 빨리 출발해야겠지요. 하하하." ================================================================== 10. 약속된 휴식……8. "허어, 이런 참…" 리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말하려 할 때 카알이 먼저 말했다. "그런데 저 고갯길에 대해서 다시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 습니까?" "예? 아, 얼마든지." "여러분들이 추격하던 그 괴인은 여러 무리였습니까?" "아니오. 한 놈이었습니다. 최소한 저희들이 본 것은 하나뿐입니다." "음. 그렇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군요." 리츄는 당황한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 일행을 돌아보았 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진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이런 조무래기들이 겁도 없이….' 뭐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리츄는 샌슨을 흘깃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러분들은 세피아파인 고갯길에 대해서도 무모하더니 생명의 위험에 대해서도 무모하군요. 싸울 수 있는 전사는 이 분뿐이군요. 음, 뭐 무용 이 대단하실 것을 의심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12명이었지 만 놈에게 당했습니다." 샌슨은 무용이 대단한 남자의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으 윽. 그런데 여기 칼을 든 남자가 하나뿐이지는 않을 텐데. 난 리츄를 바 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후치 네드발이고 당신이 아직 확인하지 못했을까봐 설명해 드리는데 싸울 줄은 압니다." 리츄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이봐, 꼬마. 어떻게 이 분들을 따라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들이 아 직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하하. 북부의 목동들 앞에서 함부로 잘 난 척을 하다간 큰일난다." 갈수록… 못참겠군. 이 작자에게 내가 대미궁의 침범자라는 사실을 설 명해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왠지 내가 제레인트가 되는 느낌이라서 잠시 대답을 보류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네리아와 레니가 앉아 있던 바위가 보였다. 난 리츄를 향해 말했다. "저거 뭐지요?" "뭐라고?" "저게 뭘로 보입니까?" 리츄는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위 아니냐?" "틀렸어요." 난 바위 옆으로 다가가 잠시 숨을 골랐다가 주먹으로 힘껏 내려찍었다. 콰쾅! "음메에에!" "움메에에!" 소들이 질겁했다. 소들 중 바깥쪽, 그러니까 내 쪽에 가까이 있던 몇 마리의 소들은 발광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동들은 그렇게 소 몇 마 리가 놀라 달아나는데도 내버려둔 채로 날 바라보았는데 모두들 질린 얼 굴이었다. 쾅! 콰광! 몇 번 그렇게 쥐어박자 곧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면서 흩어졌 다. 네리아와 레니는 환호를 지르면서 나에게 박수를 보내었고 카알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츄를 바라보자 그는 북부의 목동들이 크게 놀랐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난 되도록 여유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아이고, 주먹이야! 눈물이 찔 끔 나려고 하네. 하지만 난 차분하게 말했다. "이건 보통 자갈이라고 부르지요." 리츄는 턱을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내 눈빛이 어때? 북부의 목동 친 구. 난 그 때 이루릴이 날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이루릴, 왜 그래요?" 이루릴은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후치. 당신이 질문하던 시점에서는 그것은 바위가 맞아요. 대답이 나 오고 나서 문제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공정하지 못해요." 으윽. 난 이루릴에게 사과하고 또한 리츄에게도 사과했다. 문제를 바꿔 서 죄송합니다. 목동들이 크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출발 준비를 갖추 었다. 리츄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들을 말리려 했지만 우리들은 정중 히 사양했다. 그러자 리츄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대단히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허어. 이런. 감사의 표시로 소라도 몇 마리 드리려고 했는데. 그것외 에는 드릴 것이 없거든요." "하하.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도움이 되어드렸으니 그것이 기쁠 뿐 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리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보더니 말했다. "예. 여러분들이 모두 무사히 저 고갯길을 넘게 되기를 기원하겠습니 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을 떠나왔다. 목동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우리들 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들에게서 충분히 떨어지고나자 제레인트는 카 알에게 질문했다. "저, 카알. 왜 리츄를 치료하는 것을 말린 겁니까?" 카알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저 목동들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윤리를 퍽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지요. 골고츄가 죽을지언정 치료를 받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잘 보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우두머리인 리츄는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물론 합리적이니까 자기들의 윤리나 관습을 마구 무시하고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아까의 경우와 같이 필요할 경우 윽박질러서 그들의 관습을 무 시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예. 그렇게 보이더군요." "하지만 그는 리더이기 때문에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골고츄는 리더가 아니라 그저 일행이므로 침버씨에게 치료를 받는 것이 큰 허물이 안되지만 리더인 리츄의 경우엔 큰 허물이 될 수도 있지요. 어쩌면 리더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그의 독단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큰 댓가를 치르게 되겠지요." "음…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리츄라는 저 사람도 만일 다른 무리들이 없는 장소에서라면 얼마든지 당신에게 치료를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는 안되지요." 거 참. 생각할수록 답답한 사람들이군. 우리들은 모두 카알의 말에 수 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한 사람은 도저히 수긍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바라보니 그녀는 과연 너무나도 복잡하다는 표정 을 지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난 킥킥 웃으며 말했다. "자! 골치아픈 이야기는 관둬요. 저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습이 그런대 로 참아줄만 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마음에 만족을 주니까 지켜나가는 거겠지요. 만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답답한 관습이 라고 생각되면 그걸 깨트리겠지요.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카알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네드발군. 정말 좋은 말일세." "그럼 이만 달려볼까요? 리츄씨는 우리가 이 고개를 오늘 안에 못 넘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세나. 이랴! 해가 지기 전까지!" 우리는 고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옆을 지나가는 나무들의 모습은 도저 히 분간되지 않았고 모든 것들이 그저 녹색과 회색, 갈색의 흐름으로 보 였다. 우리는 구덩이를 뛰어넘고 급한 경사로를 치달아올랐으며 좁은 오 솔길을 갈랐다. 두두두두두! 우리는 절벽 위를 맹렬히 달렸고 산바람을 앞서 달렸다. 제레인트는 목청껏 말들을 축복했다. "임마들아! 테페리의 이름으로, 너희들의 다리를 축복한다! 다리가 떨 어져나가라고 달려라!" 그리고 이루릴은 역시 끝없이 말들을 독려했다. "달려요! 그대 주인들의마음을 받아들여요! 쾌속의 다리를 가지고, 무 한한 속도에 도취되는! 정열적인 영혼을 가진 바람의 아들들이여, 달려 요!" 말을 탄 것이 아니라 정말 산바람을 탄 것 같다. 산의 지독한 경사로와 구불구불한 길 위로 우리들은 바람이 되어 날았다. 길을 가로지른 개울 물을 건너뛰고 굽은 길을 맹렬하게 돌았다. 말들의 발굽 소리가 온산을 울리게 만들었고 말들이 뿜는 콧김에 안개가 서릴 것 같았다. "이힝힝힝힝!"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포효하면서 달려나갔다. 네리아는 몸을 말 등에 딱 붙인 상태였고 레니는 네리아의 등에 딱 붙어 있었다. 슈팅스타는 추 월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추적했다. 샌 슨의 등 뒤에 있는 제레인트는 거칠게 휘날리는 로브 때문에 거의 보이 지도 않을 정도였다. 트레일은 도저히 발을 끄는 버릇이 있는 말로는 보 이지 않았다. "이힝힝힝!" 오! 제미니! 약속하마.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지더라도 절대로 말고기 에 대한 꿈은 꾸지 않겠다! 제미니는 다른 말들의 질주에 고무된 것인지 흥분하여 달려갔다. 한쪽으로 까마득한 절벽이 보일 때조차도 제미니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런 무서운 질주 끝에 차츰 고개가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보 이지 않는 고원과 구릉을 넘어서고 절벽길을 따라 달렸다. 어느새 구름 이 휘감아도는 절벽길로 들어섰다. 말들은 미친듯이 질주했다. 투투투투투! 절벽의 좁은 길을 따라 달리며 허공으로 돌멩이를 튕겼다. 길을 가로질 러 쓰러진 나무등걸을 뛰어넘을 땐 몸의 중량감이 다 사라졌다. 머리 위 로 무섭게 지나가는 나뭇가지들은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칼날처럼 보 였다. 그 때였다. "멈춰요!" 계속해서 말들을 고무시키고 있던 이루릴이 갑자기 외쳤다. 그리고 느 닷없이 옆의 숲속에서 빛의 화살들이 튀어나왔다. 파파파파팟! "그으으악!" 빛의 화살들은 모조리 샌슨을 명중시켰다. 샌슨은 슈팅스타 위에서 나 가떨어지며 관성에 의해 앞으로 몇 바퀴 더 굴러갔다. 제레인트는 느닷 없이 말을 책임지게 되자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고삐를 당기긴 했지만 슈팅스타가 갑자기 멈춰서자 곧 제레인트도 굴러떨어졌다. 당황한 우리 들은 거의 5, 60 큐빗은 더 달려가고나서야 간신히 멈추었다. "그 목동들이 말하던!" 카알은 고함을 질렀고 이루릴은 말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공중에서 에스터크를 뽑아들더니 땅에 내려서자마자 덤불을 찔렀다. 파 파밧! 덤불이 급격하게 움직였다. 난 말을 돌려 그 움직임쪽으로 달려갔 다. 그리곤 말 위에서 바스타드를 내려쳤다. 푸스석! 덤불들이 잘려나갔지만 다른 뭔가가 맞은 느낌은 없었다. 난 말에서 내려 다시 덤불을 몇 번 후려치고는 그 속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이런, 제기랄. 숨어버렸어!" 그 때였다. "후치, 뒤를 봐!" 네리아의 고함소리가 들려온 순간 난 뒤로 돌면서 그대로 바스타드를 후려쳤다. 완전히 도는 순간 뒤로 펄쩍 뛰면서 내 바스타드를 피하는 자 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윤곽을 보는 것이 어려웠다. 놈은 무서 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도대체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루릴이 외쳤다. "헤이스트(Haste) 스펠이야!" 슈슈슈슛!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움직 였다. 발톱 아니면 나이프다. 그런데 무슨 나이프를 저렇게 빨리 휘둘 러! 난 죽으라고 뒷걸음질치며 바스타드를 휘둘렀지만 그 자는 간단히 피했다. 너무나 빨리 움직여서 그런지 검은 윤곽 밖에 보이질 않아 사람 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자는 마치 검 옆으로 일어나는 바람처 럼 내 바스타드 옆으로 스며들어오더니 곧장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 이 런! 잡히면 당한다!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쉬시익!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를 찔러들어왔고 그러자 그 검은 윤곽은 내 팔을 잡으려던 손을 당기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네리아는 멈추지 않 고 계속해서 트라이던트로 그 그림자를 찔러대었지만 그 자는 물러나는 것이 너무도 빨랐다. 정말 바람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그 때 카알이 외 쳤다. "이것도 피할까!" 씨융! 카알이 화살을 쏘아붙였다. 피했다! 놈은 우습다는 듯이 화살을 피해낸 것이다. 그러나 카알의 활은 멈추지 않았다. 쓩쓩쓩! 연거푸 발사된 화살들은 그 그림자를 향해 무섭게 날아갔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화살들은 모두 그 놈의 뒤로 지나쳤다. 나 와 네리아가 찔러들어갔지만 화살마저 피해버리는 놈의 바람같은 움직임 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네리아는 악에 받혀서 트라이던트를 크게 휘저었다. 풀잎과 몇 개의 나뭇가지를 잘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놈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야아앗! 너무 빨라앗!" 네리아는 급격히 달려가다가 트라이던트를 찔렀으나 놈은 땅 위 2 큐빗 정도의 높이로 날아서 피했다. 그러자 네리아는 곧장 그 뒤의 나무를 걷 어차면서 몸을 뒤집어 트라이던트를 찔러넣었다. "타아앗!" 공중에서 완전히 펼쳐진 네리아의 몸길이와 트라이던트의 길이가 합쳐 져서 네리아의 공격은 무섭도록 길어졌고 그 길이는 놈과 네리아의 거리 를 단숨에 지워버렸다. 피윳! 치직! 그러나 네리아의 그 가멸찬 공격은 놈의 옷자락을 찢는데 그치고 말았 다. 그리고 놈은 곧바로 뒤로 날며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쉬익! 네리아는 기겁하면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이루릴의 팔이 매섭게 움직였다. 타탕! 이루릴의 에스터크가 네리아에게 날아들던 나이프를 쳐내었다. 좋아! 저 녀석은 이제 빈손이야! 난 놈의 이동 방향 을 막아서며 바스타드를 찔러넣었다. 그러나 놈의 몸은 도대체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았다. 이루릴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허리를 낮게 두고는 바람처럼 놈의 다리를 찔러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놈의 상체방향을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부었고 네리아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놈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찔러들어왔다. 잠깐 동안 무기 휘두르는 소리가 폭풍처 럼 몰아치면서 먼지가 일어날 정도였다. 우리들이 모든 방향을 공격했지 만 놈은 그것을 모조리 피했다. 게다가 우리 공격권에서 빠져나가지도 않은 채로! 좋아.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샌슨, 잘 보라고! "에라, 이거 먹어봐! 샌슨화(Sansonalization)!" ================================================================== 10. 약속된 휴식……9. 네리아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킥킥거리는 가운데 난 샌슨에게 배운 모든 기술을 딱 3초만에 다 시도했다.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어깨 위에서 앞으로 검을 뿜어내자 놈은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곧 좌우로 두 번 베 는 공격에 의해 놈의 동선(動線)은 뒤로 몰렸다. 야? 이거 신기하네. 그 다음은 올려쳐서 확실히 뒤로 밀어붙였다가 다시 앞으로 뛰어치고 발을 빼며 검을 어깨 위로 올려 상단 막기, 어라? 막은 보람이 없는걸? 놈은 공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놈은 멍하니 날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저 바보녀석 공격도 안하는데 왜 막고 있냐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배워 익힌 공격은 그대로 튀어나갔다. "반대로 돌며 뒤로 베기!" "크어억!" 우와! 우와, 신기해라! 반대로 돌 때만 해도 바보짓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놈은 마치 빨려들어오듯이 내 검의 궤도에 들어왔다. 분 명히 검을 통해 느낌이 온다! "맞았어! 이젠 기름 젖기!" 끝까지 샌슨화로 밀고 갈 걸! 놈은 팔을 움켜뒤며 뒤로 피했던 것이다. 그리곤 그대로 풀숲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이 자식, 어딜 도망가!" "추적하지 말게, 네드발군!" 젠장! 난 혀를 차며 멈춰섰다. 망할 놈, 도대체 뭐가 저렇게 빨라? 벌 써 풀숲의 움직임은 없어졌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이루릴은 조용히 주위 를 둘러보며 에스터크를 다시 꽂아넣었다. 일행들은 일단 낙마하여 땅에 처박힌채 끙끙거리는 샌슨에게 달려갔다. 나는 가까이 있던 제레인트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제레인트는 힘들게 미 소를 지었지만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단단 히 쥔 채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이거 낮에도 기습을 하네?" "샌슨 오빠, 샌슨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요?" 레니는 당황해서 샌슨을 일으키려 했지만 레니의 힘으로 일으킬 수 있 는 샌슨이 아니다. 제레인트는 헉헉거리며 기도를 시작했다. 제레인트가 치료를 시작하자 샌슨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위 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매직 미사일이었어… 마법사다." "그래. 맞아. 마법사야. 젠장.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빠른 마법사야. 마 법사가 느리다는 말은 못하겠군. 그런데 그 마법사 녀석, 왜 산적 흉내 를 내는 거지?" 제레인트가 샌슨을 치료하고 자기 자신도 치료하는 동안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사가 단독으로 산속에 숨어서 여행객을 기습한다라… 그래가지고 뭘 얻을 수 있지? 돈? 마법사들은 돈에 대해서라면 안전하고도 좋은 방 법이 훨씬 많은데."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제자리에 서서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그대가 듣는 것을 나에게도 들려줘요." 우리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가만히 선 채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뜨고는 한쪽 방향을 가 리키며 말했다. "약하군요… 흔적을 잘 감추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지금 가장 가까이 서 들리는 숨소리는 약 1,000 큐빗 정도 떨어져있군요." "예? 1,000 큐빗이라니오. 그 새 그렇게 멀리까지 달아났다는 말입니 까?" "네. 그 빠른 속도를 보셨지요?" "허어, 이런. 그렇다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이겠군요." 마법사란 역시 무섭군. 으으. 어쨌든 잠시 후 샌슨은 다시 원기왕성하 게 일어났다. 그는 아직 고통이 남아있는 모양인지 간혹 눈살을 찌푸리 긴 했지만 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전 이제 괜찮습니다. 추적하고 싶지만 우리 용무가 급하니까 놔두고 가지요." "하지만 달려가다가 또 사고를 당할 수는 없네. 곤란한 문제로군. 게다 가 자넬 노렸다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계획성있게 움직이는 놈이야." "예?" "우리 일행 중에서 얼핏 보기에 전사처럼 보이는 자는 자네뿐이지. 그 렇다면 놈은 우리들을 잘 관찰한 다음 가장 어려울 듯한 상대인 자네를 먼저 공격한 것이겠지." "아,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다시 공격할 수도 있겠지. 이 작자가 뭐하는 친구인지는 모 르겠지만 아무런 대비없이 그냥 달려갈 수는 없군 그래." "말이 없으니 더 따라오진 못할 텐데요." "글쎄… 순식간에 1,000 큐빗을 달아나는 놈인걸. 골치 아프게 되었는 데." 할 수 없이 우리들은 대형을 갖추고 주위를 경계하면서 나아가게 되었 다. 카알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걸. 늦게 걸어가니 해가 더 빨리 지는 것 같아. 오후 늦도록 더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그래서 카알의 얼굴은 어느 누구 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할 표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는 고개를 넘지 못하고 고갯길에서 약간 떨어진 계곡으로 내려가서 야영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계곡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리고 있 었다. 아직 물이 얼어붙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휴. "그래서 솔로쳐는 말했지요." "뭐라고 했어요? 예?" "아가씨. 난 오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을 만났지. 당신의 사랑은 위험해. 아가씨의 사랑은 너무도 격렬히 타오르기 때문에 주위의 모든 것을, 심지어 내 차가운 가슴까지도 타오르게 만드는군." "와아…" 네리아는 레니의 등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카알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 기에 넋을 잃고 있다. 그리고 네리아에게 안겨있는 레니 역시 마찬가지 였다. 레니는 입을 딱 벌린 채 카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저 런 이야기가 재미있나? 닭살이 치밀어오르는군 그래. 카알은 웃으며 말 을 이었다. "그리고 솔로쳐는 100 명의 데스나이트가 기다리는 코르넬 계곡으로 찾 아간 것이오. 천공의 3기사를 위해서도, 오렘의 져스티스 기사단을 위해 서도 아니고 오로지 한 시골 처녀의 애인을 구하기 위해." 네리아와 레니는 숨쉬는 것마저 잊은 채 카알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갔 다. 난 피식 웃으며 바스타드를 손질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숯돌을 가볍게 움직이며 날을 고른다. 젠장. 넥슨 녀석과 싸울 때 이가 많이 빠졌어. 이게 검날인지 톱날인지 구별도 안되는군 그래. 난 날을 직선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옆에서 보고있던 샌슨이 말했 다. "그거 용광로에 집어넣고 다시 녹이기 전에는 제 날을 찾기 어려울 거 야. 너무 오래된 검이라서 어려워." 샌슨의 조언이었다. 난 한숨을 쉬고는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그 때 카알이 나에게 말했다. "여보게, 네드발군. 그 노래가 어떻게 되지? 콜로넬 계곡에 솔로쳐라는 번개가 치던 날." "…싫어요." "응? 왜 그러나." "그 노래는 너무 조야해서 싫어요." 그러자 네리아는 눈썹을 곤두세웠고 레니는 반대로 눈썹을 축 처지게 만들었다. 그녀들의 저 음험한 눈길이라니. "아, 좋아요, 좋아! 젠장." 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정말 조야한데. 씨이. 사우스 그레이드에 석양이 내리고 밤의 여왕의 옷자락이 펼쳐질 때. 콜로넬 계곡 아름다운 수원에도 이슬의 전달자들이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 그들의 검이 소리높이 피를 부른다. "얼어붙은 마음! 핏빛 깃발! 데스나이트의율법!" 피리새의 가는 숨결도 잦아든다. 올빼미의 밝은 눈도 캄캄해진다. "얼어붙은 마음! 핏빛 깃발! 데스나이트의 율법!" 병사들의 전율, 투구끈은 풀려버리고. 검집 속의 검이 조각조각으로 부러진다. 공포, 절망, 어둠의 데스나이트. 그 앞에 누구도 똑바로 설 자 없다. 그러나 지켜지지 못한 소중한 약속과 이루어져야만 하는 사랑이 지평선, 그 끝을 넘어 사나이를 부른다. 잿빛 황야, 빗발이 지평선을 세로로 쪼개고 마침내 하늘에 거대한 아치가 그려질 때 무지개의 솔로쳐. 그는 손을 들어올린다. 결국 나는 레니와 네리아의 환호를, 제레인트의 감탄을, 샌슨의 한숨소 리를, 그리고 이루릴의 신비한 미소를 받으며 그 긴 노래를 다 부르고야 말았다. 으으. 사우스 그레이드 전체를 그들의 공포만으로 얼어붙게 만 들었다가 솔로쳐의 마법 한 방에 노래 속의 공포로 바뀌어버린 100명의 데스나이트를 위해 묵념. 레니는 모포 속에 들어가서도 콧노래로 '솔로 쳐라는 번개가 치던 날'을 웅얼거림으로써 내 볼이 화끈거리게 만들었 다. 모포 속에서 뒹굴던 나는 샌슨의 손아귀에 코를 붙잡혀서 깨어나게 되 었고, 하품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곤히 잠들어있었다. 난 눈을 비비며 모닥불 옆에 주저앉았다. 피곤한걸. 오늘 낮에 말을 너 무 많이 탔어. 말들도 선 채로 잠들어있었고 주위는 고요했다. 샌슨은 모포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했다. "잊지마. 우리를 노리던 고약한 마법사가 있어. 다시 덤벼올지도 모르 니까 철저하게 경계해." "알았어." "다음 차례는 카알이야. 별을 보다가 적당한 시간에 깨워." "으음." 샌슨은 곧장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난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는 무릎 위에 바스타드를 올려놓은 채 주위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올테면 와라! 박살을 내어주지! 하지만 5 분도 지나기전에 곧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주위는 캄캄했고 우석거리는 숲의 잠꼬대 외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싸늘한 밤에 숲 속에 앉아 있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 들기에 최적이다. 캄캄한 밤하늘을 날카롭게 찢어버리는 별빛들, 휘황찬란하다. 밤하늘이 손에 만져질 듯 낮아보인다. 별이 머리 위까지 내려온 것 같다. 차가운 공기는 피부를 얼얼하게 만들고 정신은 무감각해진다. 따스한 모포 속이 아니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 잠이 잘 오는 이유가 뭘까. 난 무의식적 으로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공상에 잠겨들어갔다. 그래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을 때는 머리가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은 것이다. 그녀는 날 보더니 생긋 웃었다. 난 어느새 꽉 쥐었던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놓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루릴, 왜…?" "글쎄요. 잠이 오지 않는군요." "그러세요?" "네." 이루릴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짐 속에서 책을 꺼내어들고는 윌 오 위스 퍼를 불러내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싸늘 한 겨울밤에 숲속에 앉아 여유있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가 엘프 이외에 어디 있을까. 난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려했다. 그 때 한 생각이 들었다. "이루릴, 저 방해가 될지 모르겠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아, 저, 핸드레이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젠 믿어야겠군요. 드래곤 로 드의 말에 비춰봐도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으니까. 그 런데 그에게 배우고 싶다는 클래스 10의 마법은 뭐지요?" "그 마법 말인가요…." 그 때 카알이 천천히 일어나앉았다. 나와 이루릴은 카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카알은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게 궁금한데요, 세레니얼양." 이루릴은 조용히 책을 덮어놓고는 윌 오 위스퍼를 돌려보내었다. 우리 세 명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이루릴은 조용히 불길을 응시하다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어제도 이런 자리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그 대화 마지막에 카알은 뭐라고 말하셨나요." "예? 어, 그러니까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는 말 아니었습니 까?" 이루릴은 웃었다. 하지만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웃음이다. 이루릴은 무 릎을 모아 가슴 앞에 끌어안았다. 추위를 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녀 의 볼은 모닥불 때문에 발그랗게 물들어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이루릴의 꿈결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현실에서 단절되어 버렸다. 마치 엘프식의 시간 흐름 속으로 들어와버린 것 같다. 공간은 마구 물 결처럼 흐르고 비틀려지고 있었다. 모닥불과, 나와, 카알과, 그리고 이 루릴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간들이 사라져버렸다. 이루릴은 그러한 망각의 흐름 속에서 계속 말했다. 아니, 말했나? "유피넬의 어린 자식… 어린 자식… 어린 자식이지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루릴이 말하는 동안 난 아무런 소리 도 빛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루릴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니, 이루릴 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듣고 있었다. "영원히 홀로 설 수 없는… 영원히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우리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자이며… 처음으로 걸었던 자이며 … 처음으로 사라져야 할 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저 듣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 죽이 되는 느낌이다. "사라진다고요!" 카알의 고함소리. 그리고 갑자기 세계가 원위치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약간 싸늘한 11월의 밤 공기 속에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주위는 우석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숲이었고 우리는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여행자의 몰골로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었다.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은 모포를 걷어차며 뒤척이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카알의 얼굴이 왜 창백하게 바뀌어 있지? 그 때 카알의 마지막 말이 기억났고, 그러자 이루릴의 말도 기억났다. 잠깐, 사라진다고? 사라지다니, 엘프가 사라진다는 말이야? 이루릴은 한결같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카알은 마치 별 일도 아닌데 당황해서 외치는 노인처럼 보였다. "사라지다니, 누가 말이오? 숲의 종족들이 사라진다는 말이오?" 이루릴은 싱긋 웃었다. 마치 세월을 적잖이 훔친 노인의 경박스러움을 꾸짖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 노인 역할을 맡은 카알은 정신이 없는 얼굴 이었다. 이루릴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정원사지요." "예?" 이루릴은 다시 고개를 들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는 위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나뭇가지에 꽃잎이 피어나고 있었다! "정원사들이 그들의 정원을 완전히 이해하듯이, 우리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종족으로서 만들어졌지요." 태양이 떠오르고, 다시 지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들이 움직였다. 그 리고 달이 뜨고, 다시 달이 지고나자 태양이 떠올랐다. 봄이 오고, 꽃들은 앞다투어 피어난다. 여름이 오자 푸르름이 사방에 가득하다.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의 신비로서 아름답고, 다시 백설이 부 드럽게 대지와 나무들의 눈꺼풀에 키스하면 봄의 눈뜸을 기다리며 만물 은 잠든다. "그리고 우리는 한없는 조화를 부여받았지요. 인간이 하늘을 보면 별자 리가 만들어지고,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겨난다던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르지요. 우리 몸에 쏟아지는 별빛을 느낄 때 우리는 별이 됩니다. 우리들이 숲을 악기 삼아 노래를 부르려는 바람을 만날 땐 우리 는 허공을 날리는 나뭇잎이 될 뿐입니다." 대지 위로 산이 솟아오른다. 자유로이 떠다니던 구름은 산에 걸리게 되 고 마침내 높은 산의 이마를 적시는 빗물이 되어 사라진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은 대지에 이르러 마침내 강이 된다. 물살의 흐름에 계곡은 더 욱 깊어지고, 산은 더욱 늙어간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향해 손 을 내밀 수 없는 존재들이지요. 정원사들은 한없이 정원을 이해하며 아 름답게 가꾸지만, 그것을 파헤쳐 곡식을 심어 내일을 대비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듯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온 격한 물살이 대지를 적실 때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바람은 꺼리낌없이 만물을 질리도록 애무한다. 그러나 꽃들이 피어나던 대지는 어느덧 황야가 되고 바람은 광폭해져서 흙먼지만을 피 워올린다. 그리고 황야 위로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고, 세상은 청초함을 잃는다. 그리고 거친 황야 위로 인간의 쟁기가 떨어진다. 시무니안의 가슴의 온 기로 덥혀지던 대지는 식은 흙덩어리가 되어 부서져나간다.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는 공존을 위해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딸이자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광포한 힘을 가진 위대한 존재. 그것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실패라고 봅니다." "실패라고요?" "예. 그들은 한 가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무 앞에서는 질서도 혼 돈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면 어지럽힐 수도, 정리할 수도 없다. "그들은 공존이 아니라 공멸의 원인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멸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태양의 뜨고 짐에 따라 이루릴의 얼굴에는 빠른 속도로 그림자가 움직 였다. 주위는 우리를 내버려둔채 미친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때 카알 이 말했다. "클래스 10의 마법은 무엇입니까?" 이루릴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인간의 말로는 옮기기 어렵군요. 굳이 말하자면…" 이루릴은 적당한 어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양이다. 그녀는 잠시 후 말 했다. "창조입니다… 우주창조." ================================================================== 10. 약속된 휴식……10. 다시 싸늘한 11월의 겨울밤으로 돌아왔다. 발가락의 저림까지도 돌아왔어. 음. 오랫동안 말을 타서 그래. 불쌍한 내 엉덩이 같으니라고. 요즘들어 의자나 침대에 앉아본 것이 얼마나 되 지? 항상 딱딱한 안장 아니면 차가운 바닥이로군. 우주창조라고? 뭐라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안드는걸. "우주창조라면…" 카알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이루릴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곳엔 은행나무에 보라색 석류가 열리고, 그곳엔 땅이 하늘 위에 있 고, 그곳엔 일곱 개의 태양이 있지만 낮은 없고, 그곳엔 강이 상류로 흐 르고, 그곳엔 비가 하늘로 쏟아져오르겠지요. 단풍잎들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니고, 수탉이 곰을 쪼고, 장미 꽃잎 한 장에 백만 개의 이슬이 맺 히는 땅, 붉은 바다 위에 푸른 눈이 내리는 곳…" 카알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법칙을 새로 만들고 모든 피조물을 새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 곳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을 수도 있고 시간이 없다면 그곳에는 인과 가 없을 수도 있는, 결과만 있고 원인은 없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이 존재를 겨루는…." "항상 그러시지만 이번에도 정확하세요." 이루릴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카알은 정확하지. 난 괜히 웃어 버렸다. "그건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웃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카알의 고함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보다는 그 내용 때문에 놀랐다. 신이라도 불가능하다고? 이루릴은 평온하게 말했 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이지요." "그러나, 그래도, 허나…" 카알 맞나? 난 의심스러운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이 저런 머 저리같은 화법을 쓰다니. 할 수 없군. "그걸로 뭘 할 생각인데요?" "네?" 이루릴은 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클래스 10의 마법을 가지고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요? 이 세상이 마음에 안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하나 만드시겠다는 건가요?" 이루릴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하 고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빛을 완전히 흡수해버리는 새카만 눈동자만 있을 뿐이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우리들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웃어야 되나?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다니. 세상에 그렇게 심한 농담이 도대 체 어디 있지요? 엘프가 어울리지 않는다니오?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엘프가?" 난 기막힌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슬프게 고개를 숙 였다. "어울리기 위해선 달라야 되지요." "예?" 이루릴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듯이 한 채로 말했다. "유피넬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서야 알게 되었 지만." "어, 괜찮다면 나도 이제 알게 해주겠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숙인 채 큭큭 웃었다. "당신은 불완전한 존재니까 제 말을 이해하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생각 해보세요. 단단한 흙벽을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예? 어, 자갈과 모래, 지푸라기 등을 적당히 섞어서 반죽을 잘 해서 쌓아올리면…" "예.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흙만 쌓아서는 단단하지 못하지 요. 모래만으로는 쌓을 수조차 없고. 자갈들을 쌓아올리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적절히 섞으면 단단한 흙벽이 되지요. 서로 조화 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가 달라야 된답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달라야 한다?" "그래요." 이루릴은 갑자기 일어났다. 그녀는 약간 떨어진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나무의거친 껍질이 마치 어린 새의 깃털이라도 되는 양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후치, 당신은 카알과 달라요. 그리고 당신은 샌슨과도 다르지요. 그래 서 당신은 카알과 샌슨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영원의 숲에서 보았겠지요." 이루릴은 나무를 올려보며 말했다. "그 때 전 조금도 증오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지요. 하지만 여러분들 은 맹렬한 증오심을 느꼈어요. 넥슨의 일행들 같은 경우에는 그 증오심 때문에 모두들 죽기까지 했지요. 슬픈 일이었습니다만, 동시에 여러분들 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당신들은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어졌지요." 이루릴은 갑자기 몸을 빙글 돌렸다. 검고 긴 머리가 한 순간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손을 뒤로 돌 린 채 나무에 기대어 서더니 말했다. "우리들을 만들 때 유피넬은 그것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유피넬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것과 하나될 수 있게 만들었지요. 조화롭고도 평 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선량한 마음으로. 하지만 선량한 마음이라도 무지 의 아궁이에서는 좋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없지요. 우리는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루릴은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여 웃으며 자신이 실패작이 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을 앞으로 돌려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 그래요. 그래서 유피넬은 저희들의 경우를 통해 알게 되었죠. 조화는 먼저 구별을 전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스스로 절대 로 다른 자와 같아질 수 없는 지성을 만드려고 했지요. 그것이 당신들이 예요." 카알은 입을 벌린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없어도 내 표정을 알 수 있다. 카알의 얼굴을 보면 되니까. "그러나 그것은 유피넬로 하여금 이율배반에 빠지게 만들었지요." 이루릴은 심술돎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한 결 같았다. 하지만 왜 나에겐 그녀가 신의 실수를 꼬집고 있다고 느껴지 는 거지? "그는 조화의 유피넬. 다른 자와 항상 달라지려 하는 지성이라는 것은 그의 전체에 대한 부정. 재미있지요? 그래서 그는 헬카네스와 손을 합쳐 당신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요. 결과적으로 당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자들과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그러나 항상 다른 자들에게 자신을 나눠주기를 바라는 지성이 되었어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의 관심을 받아서." 그런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 이 말은 둘이 같다는 말이 아니다. 멋지게 어울 린다. 역시 둘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조화는 두 개가 다 르다는 말을 전제한다. 그렇군. 이제 알겠어. "이해하겠어요… 아마 거짓말이 될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일단 이해했 다고 말해두지요. 그래서 당신들은 어쩔 생각인가요?" 이루릴은 여전히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그녀 의 몸이 왠지 가냘파 보인다. "글쎄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들에게 남겨진 길은 두가지로 좁혀집니다." "두…가지요?" "네. 우리는 엘프. 끝없이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 자체가 이미 거짓된 조화, 가식적인 조화를 체현하고 있으니만큼 우리들은 지속적인 조화를 위해 다른 존재들과 달라지려고 애쓰든지, 아 니면 우리 스스로 조화로운 엘프라는 위치를 버려야 됩니다. 하지만 양 쪽 어느 것도 우리의 길이 되기엔 어렵더군요." 카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세계를 버리시려는 작정이시오?" 난 흠칫해서 카알을 보다가 다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의 머릿 결이 물결치고 있었다.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탈출하는 것이지요." "핸드레이크에게서 클래스 10의 마법, 우주창조를 배워서 새로운 세계 를 하나 만들겠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이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겠다는 말인가요?" 이루릴은 대답 없이 카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흔들렸 다. 난 눈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을 무시하면서 말했다. "우리를 버릴 건가요?" 이루릴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난 흐느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를 버리고, 당신들은 이 세계를 버리고 떠날 생각이군 요. 당신들의 새로운 세계로 갈 생각이군요." "후치… 이 세계는 엘프를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든 것과 조화를 이 루는, 따라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에요." "그럼 그대로 있어요. 당신들은 아름다워요. 들판에 핀 꽃 한 송이는 세계를 위해 피지 않아요. 왜 당신들이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들지 요? 당신들 스스로를 위해 살아요." 바람이 분다. 밤의 바람은 검은 머릿결에서 무수한 이슬을 떨어트린다. 지금 이루릴 의 머리가 꼭 그러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밤바람이 되어 물결치고 있 었다. "우리는 엘프. 유피넬의 어린 자식입니다." 이루릴은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호칭은 얼마나 정확했는지… 어린 자식들은 부모의 품에서는 영원 히 행복합니다. 부모는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오직 어린 자식 을 기쁘게만 해주려 하지요. 하지만 어린 자식은 그 행복을 알면서도 끝 내 부모를 버리게 되지요. 시무니안의 아들들이 시무니안의 품을 떠나 그림 오세니아에게 달려가듯이." 이루릴은 도저히 더이상의 말을 꺼낼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떠나갈 것입니다." 이루릴이 다시 모포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카알은 허공을 응시한 채로 앉아 있었다. 난 우울한 마음에 바스타드를 뽑아 그 검신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검광이 모닥불빛에 물들어 불길처럼 타올랐다.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으며 난 카알에게 말했다.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엘프들은 왜 떠나가려 하는 걸까요?" 내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는 잠시 이루릴을 훔쳐보다가 몸을 움직여 내 옆에 앉았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네. 네드발군. 하지만 말일세. 이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들려주세요." 카알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우리가 흔히 호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네.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어 떤 일에도 얼굴 붉히는 일이 없는 사람. 누가 뭐라고 말해도 그래, 좋은 말이야. 다른 자가 또 다르게 말해도 그래, 그렇군.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지." "몇 사람 알아요." "그런 작자들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뇨.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싸우지 않아요." "그렇지. 호인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의 색깔이 없는 사람이 네. 그리고 그런 자는 흔히 영웅이 될 수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없 는 작자이기가 쉽지. 심하게 말한다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자가 되기 쉽네." "엘프가 그러하다는 말씀이세요?" 카알은 자신의 말에 자신이 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조악한 비유라 말하기 창피스러울 정도지만, 그걸 생각해보면 조 금 이해가 될 듯도 하네. 엘프들은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자들이지. 하지만 만물은, 아니 세계 자체는 서로 부딪히며 성장하는 거야. 물론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는 경우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지. 간단히 말해볼까. 매일같이 화목하기만 한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역사가 만들어지겠는가.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어가고 그걸 로 끝이야. 하지만 서로 피로써 피를 씻는 두 나라, 두 집단 사이에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법이지." "전쟁을 찬양하세요?" 카알은 음울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니죠…" "꼭 전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예가 이상했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게. 스승이 어떤 위대한 연구를 했네. 그 제자들이 모두 그 스승의 업 적을 찬양하지. 하지만 그 중 어느 특출한 제자 하나가 스승의 연구에 반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어놓는다면, 자넨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는 가?" "그게 제대로 된 해석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죠." "그래. 그 도발적인 제자는 최소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방식, 새로운 해 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일깨워준 셈이지. 그것이 발전 아니겠는 가? 모든 제자가 스승에 찬성해버리면, 결국 그 연구는 거기서 끝나고 더 이상의 진척은 있을 수 없겠지." "이제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엘프에서는 그런 당돌한 제자가 나올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엘프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네. 그 영원의 숲에서 세레니얼양은 분열된 자신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 네. 세레니얼양은 통일성, 동일성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하네." "일리 있는 추리 같군요." 나와 카알은 잠시 나란히 앉아서 모닥불을 바라보며 각자의 상념에 잠 겼다. 탁, 타닥. 가느다른 가지에 불이 붙어 탁탁거린다. 나는 허리를 숙여 커다란 나무를 뒤집어 불이 잘 붙도록 해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했다. 뭐지? 분명히 봤어. 난 다시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졸리는 표정을 지으며 카알의 어깨에 기대었다. "졸리나, 네드발군?" "아뇨. 왠 녀석이 우릴 감시하고 있을 땐 졸음이 달아나는군요." ================================================================== 10. 약속된 휴식……11. 카알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다시 일어나 앉으며 기지개를 켰 다. 나무를 뒤집느라 허리를 숙였을 때 분명히 보았다. 수풀 속에서 모닥불 의 빛에 반사되어 번쩍인 나이프의 모습. 녀석이 누군지 모르지만 비반 사 처리도 모르는군. 그 마법사인가? 자, 이걸 어쩌면 좋지? "카알! 활 쏘는 법 좀 가르쳐 줄래요?" "응? 활 말인가?" "예. 어디 보자." 난 일어나서 카알의 짐에서 활과 화살을 하나 뽑아들었다. 그리곤 카알 앞에서 활을 잡아보이면서 말했다. "자, 어떻게 하면 되지요?" 카알이 눈치를 채야 할 텐데. 카알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일단 서 보게." 나와 카알은 천천히 일어났다. 카알은 지시했다. "먼저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게. 사선, 그러니까 화살이 날아가는 선과 직각 방향으로 서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서게." 난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면서 조금 전 나이프의 빛이 번쩍였 던 방향에 직각으로 섰다. 요 녀석, 맛 좀 봐라. "먼저 어깨에 힘을 쭉 빼고 등을 똑바로 펴게. 그렇지. 그리고 그 다음 노킹(Nocking)일세." "노킹? 그게 뭔데요? 보여주세요." 난 카알에게 활을 건네주었다. 자, 카알. 조금 전에 내가 방향을 가르 쳐줬죠? 역시 카알은 내가 섰던 방향과 똑같이 섰다. 난 카알의 옆으로 물러나며 슬그머니 땅에 놓았던 바스타드에 발을 가져갔다. "노킹은 스트링(String)에 노크(Nock), 그러니까 화살 뒤의 여기 걸리 는 부분을 끼우는 것을 말하네. 여기까지 활이나 몸이 움직여서는 안되 지. 그 다음엔…" 카알은 순식간에 활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 다음엔 과녁의 확인, 넌 누구냐!" 그러자 곧장 풀숲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그것은 그대로 옆으로 움직여 나갔고 카알은 활을 옆으로 틀면서 외쳤다. "다 건너뛰고 릴리스(Release)!" 카알은 수풀 속으로 활을 쏘았다. 푸스석! 화살이 수풀을 뚫고 지나가 면서 괴상한 소리가 났지만 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발로 바스타드를 차올려 두 손으로 잡았다. "교습은 다음에 받지요! 모두 기상!" 난 검집을 뽑아 팽개치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땅! 하필이면 날아간 검 집은 샌슨의 머리를 강타했다. "으윽! 뭐야?" 그리고 샌슨의 잠이 덜 깬 듯한 고함소리, 네리아는 일어나자마자 아무 말 없이 트라이던트를 거머쥐었다. 난 수풀을 후려치며 외쳤다. "손님이야! 일어나서 친절하게 환영!" 파사삿! 덤불이 베어지며 나뭇잎과 잔가지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순 간 난 시야 왼쪽에 무엇이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 있냐? 그 때 카알이 외쳤다. "네드발군, 움직이지마!" 쓩쓩쓩! 카알은 내 왼쪽으로 화살을 쏘아붙였다. 우화! 왼쪽으로 뛰었 다간 화살꽂이 될 뻔했다. "크으윽!" "맞았어!" 난 뒤로 물러났다. 그 때 신음소리같은 캐스팅이 들려왔다. 등골이 쭈 뼛해진다. 저 놈, 화살에 맞고도 캐스팅을 하는 것인가?막아야 해! 난 다시 앞으로 달려들려고 했지만 뒤로 물러나던 동작 때문에 몸이 흐트러 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때 캐스팅이 끝나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 스케일(Dragon Scale)!" 순간 수풀 속에서 번쩍이는 빛이 뿜어져나왔다. 난 눈을 가리며 주춤주 춤 물러났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모닥불에서 불티가 미친듯이 휘 날렸고 그러자 제레인트가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네리아가 외쳤다. "저 녀석! 무슨 마법이야!" 그 때 샌슨이 앞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수풀을 향해 힘차게 롱소드를 찔러넣었다. 쨍그렁! "크윽!" 샌슨이 뒤로 물러났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목을 떨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샌슨은 신음을 흘렸다. "뭐야, 이건! 철판도 아니고." "드래곤의 비늘이에요! 칼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 칼이 소용이 없다고요?" 그 때 수풀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나와 샌슨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것은 검은 로 브를 입고 있는 가냘파 보이는 사람이었다. 머리에 후드를 깊이 눌러쓰 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의 몸 주위로 황금빛의 반 투명한 기운이 어려있었다. 그는 달려나오더니 그대로 모닥불 쪽으로 뛰 었다. 난 얼떨떨하게 녀석을 바라보다가 그놈이 모닥불을 걷어차려고 한 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하아앗!" 난 바스타드를 거칠게 휘둘렀다. 놈은 나에게 신경쓰지 않고는 모닥불 을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들어올렸다. 드래곤의 비늘이라는 그 마법에 퍽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실수야! 퍼어억! "쿠와앗!" 검은 남자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이 자식아. 이건 날붙이로 치는 것 이 아니라 힘으로 때린 거다! 샌슨은 탄성을 질러올렸다. 하지만 대굴대굴 굴러간 검은 남자는 별로 충격도 받지않은 듯한 모습 으로 일어나 앉았다. 네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트라이던트를 뻗었다. "움직이지마!" 트라이던트는 남자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러나 검은 남자는 네리아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려 했다.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복부를 찔렀다. 철그렁!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놓칠 뻔했다. 네리아가 찌른 트라이던트는 남자 의 황금빛 기운에 부딪혔을 뿐 남자에게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아 니, 아예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네리아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럼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제기! 전사도 아니야. 그 저 단단한 마법으로 보호되는 마법사라고! 너 맛 좀 봐라. "이야아아아!" 난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걷어찼다. 검은 마법사는 나의 공격 에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콰아앙! 뒤로 우아하게 날아간 마법사는 그대 로 아름드리 나무에 몸을 부딪혔다. "케에엑!" 그러나 부딪히는 그 순간 마법사는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외쳤다. "매직미사일!" 이런, 젠장! 부아아악! 허공에 떠오른 빛의 화살 5개가 순식간에 나에 게로 날아왔다. 어떻게 하지? 난 머리를 가슴에 묻고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서 완전한 대응 자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충돌. 텅텅텅텅텅! 우와, 우와, 머리 울려. 팔과 어깨에 세 발, 그리고 허리와 다리에 한 발씩 맞았다. 다리 다섯 개 달린 말이 날 걷어차는 느낌이 든다. 비틀거 리는 다리를 견디다 못해 매직 미사일에 맞은 다리가 꺽이고 말았다. 난 주저앉으면서 팔을 치웠다. 마법사는 나무 밑둥 아래에 처박혀 있었고 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 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적인 시선의 교환. 그러나 마법사는 후드를 깊 이 눌러쓰고 있는데다가 얼굴을 무슨 가면인지 복면인지로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것은 시뻘건 눈뿐이다. 모닥불의 불빛 때문 인지, 아니면 원래 붉은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쎈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말을 하지 않으면 기절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 때 왼쪽으로 샌슨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루릴이 다가섰다. 샌슨은 마법사를 견제하면서 날 일으켰다. 내 겨드 랑이를 붙잡아 올리는 샌슨에게 난 감사의 말 대신 신음 소리를 좀 들려 주었다. "괜찮아?" "시원찮아." 그 때 검은 마법사도 스르르 일어났다. 우리 세 명은 각자의 무기를 앞으로 내밀면서 마법사를 겨냥했다. 마법 사는 나무를 등진 채 우리들을 쏘아보았다. 뒷쪽에서 카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리들을 공격하는 거요? 당신은 누구시오?" 마법사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올려 가슴 앞에 세우더니 캐스팅을 시작했다. 샌슨이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달려들었다. "캐스팅을! 막아야 해!" 병신! 드래곤 스케일인지 뭔지 하는 마법으로 완전히 보호되고 있는데! 생각대로 샌슨이 휘두른 롱소드는 마법사의 주위에도 가지 못하고 그 황 금빛의 기운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터텅! 샌슨은 손목이 부러지는 표정 을 지으며 물러났다. 내가 가야돼.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바스타드를 휘두를 수가 없다. 제기랄. 마법사는 캐스팅을 끝내고 외쳤다. "파워 워드 블라인드(Power word blind)!" 번쩍! 마법사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번뜩였다. 바로 그 순간. "프로텍트 프럼 매직!" 이루릴의 고함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샌슨은 비명을 질렀 다. "으아아아! 눈, 눈이!" 샌슨은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 뒷쪽 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알은 두 손으로 눈을 거칠게 문지르고 있었다. "보, 보이지 않아!" 네리아는 땅으로 주저앉으며 주위를 더듬어대었다. "안보여! 카알 아저씨? 레니! 어디 있어!" 그러나 제레인트는 어느새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 든 채 레니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침착하게 카알과 네리아를 뒤로 잡아당겼다. 난 왜 보이는 거지? 그러고보니 이루릴이 어느새 내 어깨를 짚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루릴이 그녀와 날 보호한 모양이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자신의 디바인 파워로 마법사의 마법을 막았고.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 한 난 샌슨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아당겼다. 급한 마음에 거의 샌슨 의 팔을 뽑아놓을 뻔했지만 간신히 마법사의 공격 범위 내에서 빼낼 수 있었다. "으아앗!" "나야! 안심해!" 나의 이 거짓말. 난 샌슨에게 안심하라고 말해놓고는 그대로 그를 뒤로 집어던져버렸다. "이 망할 자식아! 쿠엑!" 샌슨은 제레인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난 그를 집어던져놓고는 다 시 앞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는 이제 한결 여유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젠장. 공격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루릴과 나뿐인가? 뒤에는 장님이 된 세 명이 제레 인트와 레니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싸울 능력 이 없다. 레니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루릴은 검을 뽑지 않고 대신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검으로 는 공격이 되지 않으므로 마법을 쓸 작정인 모양이다. 난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이놈! 도대체 무슨 짓이야!" 마법사는 대답이 없었다. 남은 우리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모 양이다. 그 때 뒤에서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법사님은, 우릴 죽일 생각은, 그런 생각은 없는 거에요? 그렇 죠?" 마법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니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 지만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 때 제레인트가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 였지만 말했다. "레니양의 말이 맞아요. 이 정도의 마법사라면 우리를 죽이는 것은 훨 씬 간단할 텐데. 어, 그러니까 잠들어있는 우리들 위로, 뭐, 미티어 스 웜이라도 쏘아버리면 간단한 해결방식이 될 거요. 그, 그런데 아까 낮에 도 마법사답지 않게 헤이스트를 사용하여 접근전을 하더니, 에, 지금도 드래곤 스케일을 사용하면서 접근전을, 마법사답지 않게 접근전을 펼치 는군. 그리고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 같은 마법 대신 실명을 시 키고." 뒤에서는 네리아와 샌슨이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카알은 힘 없는 목소리로나마 제레인트의 말에 찬성했다. "침버씨의 말이 맞군. 당신의 목적은 도대체 뭐요? 우릴 죽일 의도는 없는 거요?" 그렇다면 저 작자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말 인가? 하지만 살의가 없다 해도 나이프를 휘두르고 눈을 멀게 만드는 것 이 호의일 수야 없지. 그 때 처음으로 마법사가 대답했다. "…식탁에 돌을 던지는 바보는 없지." 잔뜩 쉰 목소리였다. 식탁? 식탁이라고? 엉뚱한 말을 들어서 난 잠시 말을 잃고 마법사를 바 라보았다. 그 때 다시 뒤에서 카알의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동들은 생명력을 빼앗겼지.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 까닭이 설마…" 그러자 제레인트가 비명을 질렀다. "너, 너! 새, 생명력을! 사람이 아닌가? 뱀파이어?" "꺄아악!" "레니야! 목, 목 좀 놔! 켁켁!" 마지막 비명은 네리아의 것이었다.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 면 저 놈이 힘들여가면서도 나이프로 찌르려들고 실명 마법을 사용하고 한 것은 모두 우리들이 죽지 않은 상태로 무력화되게 하기 위해서인가? 설마 저 놈이 목적이… "우리의 생명력을 흡수하겠다는 말이군요." 이루릴의 침착한 말은 기분을 대단히 이상하게 만들었다. 난 침을 퇘 뱉은 다음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난 바스타드를 단단히 고쳐쥐며 말했다. "그까짓 드래곤 스케일! 아까 맞아봤지? 기분이 어땠어? 이번엔 온힘을 다해 치겠어. 네 녀석의 그 몸이 조각날지 안날지 두고 보자고!" 마법사는 조용히 날 쏘아보았다. 녀석, 캐스팅하는 흔적만 보였단 봐 라. 바로 치고들어간다. 캐스팅하는 순간이면 달아나지도 못하겠지! 그 때 후드 아래에서 다시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제안? 제안이라니? 이루릴이 말했다. "무슨 제안이지요?" "너희 일행은 모두 7 명이군. 그 중 2 명만 나에게 넘겨주면 나머지 일 행의 안전을 보장하지." 우리는 잠시 말을 잃은 채 그 검은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도대 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어, 만일 내어주지 못하겠다면 어쩔 거요?" "네가 말한대로 모두 죽이는 수밖에. 하지만 그건 나로서도 손해야. 난 살아있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이 놈! 확실히 사람의 생명력을 노리는 것이구나!"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모두 죽이겠 다." 남자의 침착한 말에 제레인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내 입은 열 려버렸다. "누가? 누구를?" 난 마법사를 향해 악을 쓴 다음 아래를 바라보았다. 발 밑에 돌멩이가 만져진다. 난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몇 개 든 다음 허공에 몇 번 던졌다 가 받았다. "할 테면 해봐! 하지만 네 마법과 내 돌멩이 중 어느 것이 더 빠를까?" "그까짓 돌멩이로 어쩌겠다는 거냐." 난 대답하지 않고 대신 그 마법사가 등지고 있는 나무를 향해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콰자자작! 나무가 조각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멩이는 나무에 깊숙히 박혔다. 뒤쪽에서 레니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들어가버렸어…" ================================================================== 10. 약속된 휴식……12. 마법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하지 만 미미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OPG인가. 이런 아티펙트를 가진 진짜 모험가를 만나본 것도 정말 오 래간만이군." 헤헷. 진짜 모험가라고? 난 남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성질 같아서는 바스타드로 후려치고 싶지만 함부 로 달려들 수가 없다. 만일 나까지 쓰러지면 남는 것은 이루릴과 제레인 트, 레니뿐이다. 할 수 없지. 캐스팅만 해봐. 그러면돌메이를 던지고 단숨에 뛰어든다. 저 놈도 아마 그 생각인 모양이다. 뜻밖에도 드래곤 스케일을 무시하면 서 공격하는 내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캐스트를 할 수가 없어서 주저하 는 모양이다. 제기랄. 하지만 이런 골치아픈 대치 상태라니. 그 때 이루 릴이 말했다. "물러나세요." 이루릴은 자신이 정중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는 아름다운 착각에 빠진 모양인데. 저 마법사도 이루릴의 말을 받아들일까? 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돌멩이를 놓칠 뻔했 다. 이루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야말로 당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죽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루릴이? 어떻게? 칼은 들어가지도 않는데, 마법으로? 하지만 상대도 마법사이니만큼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마법사는 말없이 이루릴을 바라 보았고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유없는 공격이 아니었다면 친구가 되 자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도 공격하겠습니다." 다시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프… 느린 종족. 네가 인간 마법사를 마법으로 상대하겠다는 건가." "말씀하신대로 전 느리지만, 그래도 120년 이상 마법을 수련해왔습니 다." "난 그 두 배 이상 마법을 수련했지." 순간 이루릴의 얼굴이 창백해져버렸다. 뭐라고? 120년의 두 배 이상 마 법을 수련했다고? 그게 무슨… 뭐야! 난 얼빠진 얼굴로 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저 친구가 돌았나? 아니, 잠깐. 혹시 엘프인가? 아냐. 엘프가 저런 목소리를 낼 까닭이 없다. 아 니, 엘프가 엘프를 공격할 리가 없다. 그들은 조화의 자식들이지 않은 가! 그렇다면 분명 인간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은…." 마법사는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침을 삼키며 다시 말하 려 애썼다. "당신은… 설마…" 설마… 설마? 난 머리로부터 냉수 한 동이를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검은 마법사를 바라보았지만 마법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설마? 그 때였다. "파이어 볼!" 먼 곳에서 느닷없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파바바밧! 그리고 숲속의 허 공을 뚫고 불덩어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부아아아! 불덩어리의 궤도에 있는 나뭇가지들이 마구 꺽이며 불붙은 채로 흩날렸다. 불붙은 나뭇잎들 이 춤을 추며 휘날렸다. 나무들 사이를 뚫고 날아온 불덩어리는 곧장 그 마법사를 향했다. "블링크!" 콰아앙! 마법사가 등지고 있던 나무는 불덩어리에 맞아 폭발을 일으켰 다. 나무가 통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나무에서 조 금 떨어진 위치에서 다시 나타났다. 누구지? 누가 마법사를 공격한 것이 지? 캐스트 소리가 끝나자마자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 두두두! 마법사는 주춤했다. 마법사를 공격한 그 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 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둘이아니다. 됐어! 마법사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방해자가 있군. 지금은 물러나지. 하지만 너희들에게 안식은 없을 것 이다." 그리고 마법사는 뒤로 물러났다. 캄캄한 수풀 속으로 그가 사라지자 잠 시 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스타드를 내렸다. "갔군요." 이루릴도 힘없이 팔을 내렸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계속해서 커 졌다. 잠깐, 그런데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은 누구지? 레니가 말했다. "저, 누가 오는 거지요? 물어볼까요?" 난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발굽 소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당신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걸? 와핫하하!"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왠지 낯익은 목소리다. 이루릴과 나는 서 로를 돌아보았다. "어라, 저 친구 꼭 엑셀핸드처럼 말하는데요?" "그렇군요." 그리고 잠시 후, 우리들 앞쪽으로 달려오는 말들과, 그리고. 음, 황소 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얼빠진 얼굴로 빙글빙글 웃으면서 길시언과 운차이, 아프나이 델, 그리고 엑셀핸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여러분." 황소에서 뛰어내린 길시언은 먼저 카알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그 러나 카알은 눈이 보이지 않아서 허둥거렸다. 길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카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제레인트가 먼저 치료에 들어갔다. 잠시 후 카알은 눈을 비비다가 길시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길시언!" "반갑습니다. 카알." 카알은 길시언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아한듯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길시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야말로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원의 목욕탕으로 향 했다는… 이거봐! 에, 영원의 숲 방향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즐거 워 한 잔 술을 그대에게… 그만해!" 카알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웃 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카알. 우리는 스카일램 트리키 대장의 연락을 받고 여러 분들과 합류하기 위해 영원의 숲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영원의 숲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요?" "엑셀핸드께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엑셀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던 운차이는 싸늘 한 얼굴 그대로 시무룩하게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다시 눈이 보이게 된 샌슨은 그에게 다가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운차이는 샌슨의 손을 쳐 다보더니 핏 웃으며 그 손을 잡고는 정다운 말을 건네었다. "아직 살아있구나." "교수대는 어떻게 피했냐?" 샌슨과 운차이는 곧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반가운 얼굴 로 아프나이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젠 괜찮아요?" "예. 이젠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들은 모두 법석을 떨 면서 그를 안고 흔들어대었으며 이루릴은 웃으며 엑셀핸드에게 손을 내 밀었다. "반갑군요. 엑셀핸드." 엑셀핸드는 의아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그 손을 잡았다. 훤칠 한 이루릴이 허리를 숙인 채 엑셀핸드와 악수하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 다. 엑셀핸드는 이루릴의 손을 적당히 흔들고는 말했다. "자네 많이 바뀌었군." "제가요?" "그래. 이젠 먼저 손을 내밀 줄도 아는군." 어라? 그랬나? 그러고보니 이루릴이 악수를 청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루릴은 조금 당황해서는 엑셀핸드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시간은 만인의 교사니까요." "허흠. 흠. 괜찮은 교사로군." 카알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길시언은 레니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 그들은 감탄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알은 웃 으며 그들을 소개시켰다. "견실한 테페리의 지팡이를 뵙게 되어 길시언 바이서스의 커다란 영광 입니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을." 이 그럴듯한 인사 - 게다가 왕자가 하는 인사다. 비록 황소를 타고 있 는 데다가 조화를 대담하게무시한 갑옷들을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 - 는 제레인트를 크게 기쁘게 만든 모양이다. 제레인트는 정중함을 다해 인사했다. "마음가는 길은 죽 곧은 길. 테페리의 지팡이 제레인트 침버가 바이서 스 왕가의 정화를 뵙습니다." 그러자 길시언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가의 정화라니오. 왕실의 수치에 가깝습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고가고 난 후 카알은 레니를 길시언에게 소개했다. "레니양입니다.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자 길시언의 얼굴엔 커다란 빛이 떠올랐다. "크라드메서의…?" "그렇습니다." 그러자 길시언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레니에게 인사했다. 우리 는 놀라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고 레니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면서 인사했다. "길시언 바이서스가 대륙의 희망을 뵙습니다." "아, 저, 네. 과분한 영광입니다." 뭐야, 이건? 제레인트는 찬탄이 담긴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 지만 이건 정말 난롯가의 엣날 이야기의 한 장면이군. 그러니까 세피아 파인 고개에서 방랑 왕자와 드래곤 라자 레이디의 만남인가? 갑자기 우 리 일행의 품격이 한 세 배는 올라간 것 같군 그래. …솔직히 그 동안 너무 무식하게 여행했어. 그래도 대륙의 희망을 호송 하는 여행인데 말이야. "암살 기도라고요?" 카알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를 삘 뻔했다. 샌슨은 마시고 있던 술병의 주둥이를 씹어버리고는 이빨이 아파서 죽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 고 네리아는 모닥불에 발을 집어넣을 뻔했다. 길시언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의 이야기대로라면 그 시오네라는 뱀파이어는 델하파에서의 공 작 이후 넥슨과 헤어져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온 것 같군요. 그리고는 궁 성에 잠입하여 국왕 시해를 기도한 것입니다. 간악한!" 물론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서 상당한 협박을 해놓은 다음이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었다. 카알은 얼떨떨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 가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프나이델이 그녀를 막았습니다." 우리는 입을 쩍 벌리고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으며 아프나이델은 멋적 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길시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아프나이델은 위중한 상태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의 스승인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치료를 받기 위해 우리들은 궁성에 체류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오네로서는 정말 불운한 일이었지요. 하하. 드워 프의 노커와 탑메이지 아프나이델이 궁성을 지키고 있을 줄…" "길시언!" 아프나이델은 탑메이지라는 말에 질겁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당황 해서 운차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는 그저 운차이씨의 말을 듣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모든 공은 운차이씨의 것입니다." 카알은 팔짱을 낀 채 웃으며 말했다. "정황을 확실히 들어본 다음이라면 누구의 공인지 판단할 수 있겠지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프나이델은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아프나이델은 책에서 눈을 들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황금빛 노을을 바라 보았다. 그는 패밀리어의 죽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입은 상태였지만 그의 스승인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치료로 어느 정도 상태를 회복하고 있던 중 이었다. 치료를 제대로 받기 위해 그는 지금 궁성 임펠이아에 들어와 있 었다. 아프나이델은 노을에서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의 화병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수더분하게 꽂혀있었다. 이 계절에 꽃을 본다는 것은 임펠리아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환자를 위한 데미 공주의 선물이다. 아프나이델은 꽃잎에 부서지는 노을 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화로운 기분이다. 그 때 문이 벌컥 열 렸다. "이봐, 스카일램인가 하는 그 자가 돌아왔다는데?" 엑셀핸드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책을 내 려놓으며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들도 돌아왔겠군요?" "아니, 이상해.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예?" 엑셀핸드는 팔짱을 낀 채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워낙이 꽁무니에 사고를 달고다니는 친구들이니, 또 무슨 사고를 만났 겠지. 조금전 길시언과 만났는데 잠시 후에 와서 설명해주겠다던걸." "그래요?" 그리고 잠시 후 길시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애타게 바 라보고 있는 드워프와 마법사의 얼굴을 보고는 먼저 웃음을 머금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어차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 푸른 하늘에 뜬 구 름과도 같은… 아냐!" 길시언은 성난 몸짓으로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두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프나이델은 침대에 걸터앉았고 엑셀핸드는 두 다리를 딱 벌린 채 서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말했다. "일스에서 그들은 드래곤 라자로 추정되는 소녀를 찾는데 성공했습니 다." "역시! 그 친구들답군." 엑셀핸드는 만족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 이델은 조급하게 질문했다. "그럼 그들은 바로 갈색산맥으로 달려간 겁니까?" "아니오. 그들에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넥슨 휴리첼이 일스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야?" 엑셀핸드는 기겁해서 수염을 잡아뽑을 뻔했다. "넥슨 휴리첼이 그들에게서 소녀를 납치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트리 키공과 헤어져 넥슨을 추적하기 시작했답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인간 녀석은 곳곳에서 해악만을 불러일으키는군!" 엑셀핸드는 그리고나서 드워프어로 몇 마디 욕설을 내뱉었다. 드워프어 의 욕설을 알지 못하는 나머지 두 사람은 그저 찬성의 의미로 고개를 좀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좀 더 정확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어디 보자… 트리키공은 지 금 어디 계십니까?" "보고를 마치고 자택에 돌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면, 어디 보자. 호위에 나섰던 병사들도 다 돌아갔으니 지금은 안되겠군요. 아, 그렇지. 운차이가 있습니다." "운차이? 그 간첩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궁성 감옥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그 자에게 물어보 면 되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 다." "예. 좋은 생각이시군요. 지금 가볼까요?" "음. 저녁 식사 후에 만나보도록 하지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궁성의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의 간수 장은 전하의 명령 없이는 죄수의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길 시언은 간단히 처리했다. "형제는 한 몸이오." 간수장은그들을 운차이에게 안내했다. 간수장이 든 횃불이 감옥의 음침한 돌벽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보여 아프나이델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엑셀핸드 는 가소롭다는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허엇, 돌 다듬은 솜씨하곤. 이건 어린애 나무집인가?" 간수장은 불퉁한 얼굴이 되었지만 길시언의 면전이라 투덜거리지는 않 았다. 감옥의 통로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곳의 통로도 그렇게 넓지 않 은 데다가 굽이굽이 꺽이는 길이 많았다. 어쨌든 꽤 아래로 내려가고나 자 삼엄하고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간수들이 엄청난 불신감을 가지고 그 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간수장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지를 받지는 않았다. "그 간첩은 국사범이기 때문에 최하층에 있습니다. 엄중한 경계를 받고 있지요. 돌벽에도 땅굴을 팔 줄 아는 드워프가 아닌 바에야 달아날 수 없습니다." 간수장은 그런 식으로 엑셀핸드에게 복수했지만 엑셀핸드는 콧방귀를 뀔 뿐 상대하지 않았다. 깊숙한 감옥으로 들어서자 간수장은 단단해보이 는 철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입니다." 그는 철창 안으로 외쳤다. "이봐, 면회다!" 그러자 어둑어둑한 감옥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잠시 후 모포를 걷으 며 운차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모포 속에서 얼굴을 반쯤 내밀었을 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러자 간수는 당장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 일어나지 못해?" 운차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다시 모포를 뒤집어썼다. 간수장은 머 리 끝까지 화가 나서는 검을 뽑아들려고 했지만 길시언이 그를 말렸다. "내가 이야기하겠습니다." ================================================================== 10. 약속된 휴식……13. 간수장의 뒤에 있던 길시언은 앞으로 나서서는 감옥 안으로 말했다. "보시오. 나 길시언이오." "…그 바보 왕자로군." 엑셀핸드는 키들거리기 시작했지만 간수장은 입에 거품을 물고는 철창 을 향해 돌격자세를 취했다. 길시언은 다시 그를 말리고는 말했다. "그렇소. 카알 일행에 대해 정겹게 악담이나 좀 나눕시… 젠장! 그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좀 일어나주겠소?"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나서 잠시 후, 운차이는 일어나 앉아서는 이 마에 손을 붙이며 말했다. "눈이 부신데." 운차이는 간수장의 횃불의 불빛을 가리며 말했다. "왜 그러지?" "말했잖소. 카알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그건 트리키인가 하는 해파리가 이야기를 했을 텐데." "해파리? 바다 생물이오? 우리는 그 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당신 의 인용은 넘어갑시다. 정확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운차이는 바닥에 앉아 무릎을 모은 채 우울한 눈으로 철창 밖을 바라보 았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바라보기만 했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속이 탔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고 한 순간 운차이가 입을 열었다. "당신, 국왕의 형이지?" 길시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차이는 말했다. "그 옆의 병신을 좀 치워주지 않겠소?" 그 옆의 병신은 이제 열쇠 꾸러미를 바쁘게 뒤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 도 철창을 열고는 운차이를 검으로 꿰어놓을 태세였다. 길시언은 좋은 말로 그를 말려서 조금 떨어지도록 명령했다. "위험합니다. 저의 입회가 없는 상태에서 죄수와 단독 면담을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저 자가 정말 날 위협할 정도라면 당신이 있어도 소용없소. 당신은 설 마 내 검의 위명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간수장은 이후로도 한참 떠들었지만 결국 길시언에게 횃불을 넘겨주고 는 물러나게 되었다. 간수장이 멀어지고나자 길시언은 말했다. "자, 그는 갔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운차이는 철창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는 그리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이거봐. 그 이야기를 해줘봤자 나에겐 도움될 것이 없어. 당신이 사식 이라도 넣어줄 건가? 고맙지만 지금 배를 곯지는 않아. 난 지금 식사가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 배를 곯고 있으니까." "자유?" "제기랄. 일스까지 갔던 이유는 자유 때문이야. 결국 헛고생만 한 셈이 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정보를 하나 주지. 대신 날 석방시켜주지 않겠 나." 그러자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당신이 내놓을 정보가 당신의 자유를 보장할만큼 값진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요?" "그래. 난 바보가 아니야. 내 정보의 가치를 잘 알아.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말해주면, 날 석방시켜 주겠나?"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다시피 그건 불가능하오. 난 일개 모험가일 뿐이니까." 그러자 운차이는 차가운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용무는 없어. 이만 꺼져주시지." 길시언은 침울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이거 보시오. 그 정보를 듣지도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함부로 당신의 자유를 보장한단 말이오? 그러니 먼저 말해보시오. 그리고 당신 말대로 그게 정말 당신의 자유를 보장할만큼 중요한 정보라면 우리가 굳이 애쓰 지 않아도 당신은 자유로와지지 않겠소?" 운차이는 어두운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피곤 함이 물씬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갈데까지 간 몸이야." 길시언은 가만히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피곤한듯이 말했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시간도 별로 없으니 내가 배짱을 부릴 게재도 못되는군." "시간이 별로 없다니?" "오늘 밤 안에 닐시언 국왕의 암살이 시행될 거요." 길시언은 순간 철창을 콱 움켜쥐었다. 아프나이델은 놀란 얼굴로 운차 이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 중 그래도 안정을 유지하던 엑셀핸드가 말했다. "무슨 근거로?" 길시언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엑셀핸드가 대신 하자 말없이 운차 이를 쏘아보았다. 운차이는 목소리를 더 낮추며 말했다. "짜릿한 살기가 느껴진다. 바이서스에는 살기를 감지하는 자가 없기 때 문에 암살자들은 살기를 지우지도 않고 있어. 살기에 대해선 길시언 당 신도 알 테지?" 길시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기의 방향은 모두 닐시언 국왕의 침실로 집중되고 있어." "네가 국왕의 침실을 어떻게… 그렇군." 운차이는 쌀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난 간첩이었으니까. 난 최소한 당신만큼은 이 궁성의 지형을 잘 알고 있지.그래서 국왕의 침실의 위치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살기 중엔 익숙한 것도 있군. 시오네가 이곳에 와있어." "그 뱀파이어!" 아프나이델이 기겁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자신의 입을 가렸다. "시오네가 거기로 갔군! 그래서 영원의 숲이나 대미궁에서는 그녀의 모 습이 보이지 않았어."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샌슨은 여차하면 손톱을 물어뜯을 듯 이 바짝 긴장해서는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아. 나는 운차이를 바라보았 다. 운차이는 느긋한 얼굴로 하늘만 쏘아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지금 어 떤 기분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랑스러운 기분은 아닐 거라는 점이 다. 네리아가 무심코 그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했어?" 충분히 비난으로 들릴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네리아는 그저 별의미 없이 순수하게 물었던 것이다. 운차이는 네리아를 쏘아보다가 우물거리 듯 말했다. "일스의 일이 엉망이 되었으니 뭐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전 해줘. 후치." 샌슨은 입을 쩍 벌린 채 운차이에게 말했다. "히야, 너 정말 제법이다. 그게 느껴지냐?" 그러자 운차이는 평정을 되찾고는 피식웃었다. "난 누구같은 곰이 아니니까." 샌슨은 으르릉거렸고 아프나이델은 계속 이야기했다. 운차이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해서 궁성에 잠입하지는 않았겠지. 어쩌면 서류나 다른 걸 노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군. 그런 거라면 살기를 뿜어낼 필요가 없 으니까. 그러니 암살이다. 이 정도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전부야." 길시언은 잠시 뚫어지게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그걸 간수장이나 다른 자에게 말하지 않았지?"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었다. "난 간수를 믿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 국왕이 죽기를 바 라는 마음도 있었지.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자이펀에게 넘어갈 테고 나 역시 자유를 되찾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데 아무래도 너희들이 나에게 보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국왕이 암살된다면, 과연 궁성에 갇혀있던 자이펀 간첩이 안전할 수 있 을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리고 당신이라면 말귀가 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 당신은 살 기에 대해서도 알고, 또한 하루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나와 함께 여 행했었지. 무엇보다…" "무엇보다?" 운차이의 눈에 잠시 신비한 미소가 지나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쌀쌀 맞게 말했다. "우린, 같은 사람들을 친구로 알고 있지."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운차이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그 친구들이라면 내 말을 믿어줬을 거다." 길시언은 마음을 굳혔다. "좋아. 알겠어. 이봐요, 간수장!"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간수장은 길시언의 부름에 달려왔다. 길시언은 곧 장 말했다. "이 죄수를 오늘 밤 동안만 풀어주시오." "예?" 갑자기 길시언은 두 다리를 쫙 편 채 크고 고압적인 자세로 간수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낮지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말하진 않겠소. 대신 설명을 할 테니 내 설명이 끝나면 즉각 철 창을 여시오. 첫째, 당신은 왕족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을 거부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소. 내가 원하는 것은 방면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가석방 이고 그 정도는 나에게도 요구할 권한이 있소! 따라서 만일 당신이 거부 한다면 당신은 왕족에 대한 반역을 일으키는 셈이오. 둘째, 이 죄수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 길시언 바이서스가 지겠소. 이것은 왕자의 이름으 로 하는 맹세이며 당신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 맹세에 대해 거론함으로 써 당신의 무죄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오. 셋째, 당신이 만일 거부한다 면 난 당신을 무력화시키고 열쇠를 회수하여 저 죄수를 꺼내겠소. 난 급 하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이곳엔 내 행동을 도울 탑메이지와 드워프 최고의 도끼잡이가 있소." 운차이와 엑셀핸드는 놀란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 긴 말을 정확하게 했을까! 간수장은 뭐 씹은 얼굴이 되었지만 동시에 질려버렸다. 그는 길시언의 위엄에 상당 부분, 그리고 그의 협박에 적당 부분 굴복해버렸다. 하지만 그는 체면을아는 자였다. "국왕이 임펠리아의 주인이듯, 이곳의 주인은 나입니다." 길시언의 얼굴이 잠깐 험악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간수장은 말했다. "따라서 이곳의 죄수는 내 소관이오. 길시언 왕자님께 내어드리겠습니 다. 멩세까지 요구하지는 않겠으니, 명예를 아는 기사답게 내일의 해가 뜨기 전까지 이 죄수를 다시 데리고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 가슴 앞에 세워들고 말했 다. "당신은 왕자에게 대한 예의로 맹세를 요구하지 않았겠지만, 난 이곳의 주인인 당신에 대한 경의로써 맹세하겠소. 저 죄수는 내일 아침까지 이 곳으로 돌아와 있을 거요." 그러자 간수장은 두말없이 철창을 열었다. 운차이는 음울한 얼굴로 길 시언을 바라보았다. "어쩌려는 거지?" 길시언은 간단히 말했다. "도와주려면 완전히 도와줘. 너의 그 감각으로 암살자들의 위치를 찾아 라." 암살자라는 말에 간수장은 대경실색했다. 운차이는 이를 갈면서 말했 다. "제기랄. 알았어." "자, 잠깐! 지금 암살이라고…" 길시언은 황급히 간수장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조용히 하시오! 지금 궁성 안에 국왕 시해의 음모가 있소. 그리고 우 리는 저 자이펀인의 감각을 이용하여 그들을 잡아낼 생각이오. 소란을 일으키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겠지요?" 간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명령하실 것은?" "평상시처럼 행동해달라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명은 황급히 감옥을 빠져나왔다. 가파른 지하감옥의 계단을 오르며 아프나이델은 헉헉거렸고 엑셀핸드는 투덜거렸다. 길시언과 간수 장, 그리고 운차이들은 바람처럼 달려올라갔다. 중간중간 궁성 경비대원 들이나 감옥의 경비병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간수장이 나서서 그들을 함구하도록 명령했다. 계단을 다 오르고 지하감옥을 빠져 나오자 아프나이델은 숨을 고르고는 궁금함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했 다. "지금 이런 질문이 어울릴진 모르겠지만, 도대체 아까 간수장에게는 어 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까?" 길시언은 별 것 아니라는 태도로 말했다. "프림 블레이드가 불러준대로 말한 거요. 나였다면 그렇게 거만하고 고 압적인 말을 할 자신이 없지요." "…그랬군요." 네 사람은 황급히 궁성의 본관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은지라 궁내부원 들의 움직임도 드물었다. 1층의 홀로 들어서자 길시언은 운차이를 바라 보았다. 운차이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바깥에 있는 몇 놈은 별 것 아니야. 신경 쓸 필요 없어. 침실 주위의 세 놈이 문제로군." 길시언은 다급하게 말했다. "궁성 경비대에 연락을…" "아니, 좋지 않아. 침실 주위의 놈들이 문제라고 그랬잖아. 소란을 일 으키면 즉각 닐시언의 목을 베어낼 것이다. 당신 동생이니 잘 알겠지. 자기 몸을 지킬만한 남자인가? 그것도 밤중의 기습으로부터." "어렵겠지. 그럼 어떻게?" "조용히 올라가자."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에 걸린 장식용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검과 방패를 운차이에게 내밀었다. "맨손으로 암살자와 싸울 순 없지." 운차이는 의아함 반, 감탄 반의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치고 달아나면 어쩔 건가?" "해볼 텐가?" "관두지." ================================================================== 10. 약속된 휴식……14. 네 명은 조용히, 그러나 신속하게 국왕의 침실로 향했다. 길시언에겐 자신의 집이었고 운차이 역시 별로 거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아프나 이델과 엑셀핸드는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2층 중앙 복도로 들어서기 직전, 운차이는 계단에 멈춰서서 길시언에게 말했다. "말해두겠는데, 계단을 올라서서 만나는 자는 모두 베어버려. 알았지?" "알았다. 가도 되나?" 길시언과 운차이는 셋을 센 다음 광포한 태도로 중앙 복도로 돌진했다. "꺄아아악! …왕자님?" "이런, 빌어먹을!" 길시언은 산통 다 깨진다는 생각이 들어 부지불식간에 혀를 찼다. 하필 이면 그들의 앞에 시녀 하나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은 것이다. 그 녀는 파랗게 질린 채 일행들 - 무장한 두 전사와 험악하게 생긴 드워프 와 무시무시한 마력을 숨긴 탑메이지라는, 정말 공포스러운 모습의 일행 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지를 태세였고, 그러자 길시언 은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황급히 검을 치우고 손을 내밀었다. 그 때였 다. "멍청한 왕자!" 운차이가 낮게 외치며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길시언이 말릴 사이도 없이 운차이는 쓰러진 시녀를 노리고 찔러들어갔다. 순간 시녀는 주저앉 은 자세에서 그대로 솟구쳤다. 아프나이델이 숨막힌 탄성을 질렀다. 시녀는 뒤로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넘고는 치맛자락으로 손을 집어넣었 다. 다시 튀어나온 그녀의 손엔 롱소드가 들려져있었다.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시녀를 베어들어갔다. 챙챙챙챙챙! 순간적으로 불꽃의 폭포가 복도를 환히 비추었다. 운차이와 가짜 시녀 는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 셀 수도 없는 공격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검 이 부딪힐 때마다 복도의 명암이 바뀌었다. 파파파팟! 자이펀의 병영이 나 전쟁터에서 겨우 볼 수 있는 무섭도록 빠르고 경쾌한 자이펀식 검법 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길 시언은 감탄했지만 그 감탄보다 빠르게 앞으로 돌격했다. "암살자!" 운차이의 빠른 롱소드에 의해 몰리고 있던 가짜시녀는 길시언의 묵직한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시녀는 이를 악물면서 뒤로 빠져나갔다. 그 때 아프나이델이 외쳤다. "그리스!" 시녀는 뒷걸음질치던 자세 그대로 다리를 하늘로 솟구치더니 나가떨어 져버렸다. 길시언과 운차이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지만 시녀는 뒷통수 를 부딪히고는 뇌진탕을 일으킨 모양인지 기절해있었다. 길시언은 이마 의 땀을 닦다가 운차이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차 이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것봐. 내 목숨과 자유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있어. 당신이 죽어넘어 지기라도 하면 내 제안도 모두 소용이 없단 말이야. 그러니 칼자루와 검 신도 구분 못하는 견습기사처럼 일일이 돌보게 만들지는 않아줬으면 좋 겠는데." 길시언은 얼굴을 붉혔다. 운차이는 이미 계단에서 만나는 자를 모두 공 격하라고 경고했었다. 길시언은 솔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해, 조심하지." 순간적으로 운차이의 눈에 이채가 지나쳤다. 운차이는 잠시 길시언을 바라보더니 곧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가 들렸을 거야. 강행돌파다!" "제기랄! 다리 짧은 자에게 강행을 요구해?" 엑셀핸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잘도 달려왔다. 길시언은 이 긴박한 순간에 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 때였다. 콰광! 그들이 지나가던 복도 옆의 문이 열리면서 궁내부원 하나가 롱소 드를 들고 뛰어나왔다. 사나이는 두 말없이 엑셀핸드를 노리고 뛰어들었 다.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엑셀핸드!" 엑셀핸드는 옆을 흘깃 바라보고는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카리스 누멘!" 바우웅! 거대한 곡선을 그린 도끼는 그대로 짓쳐들어오는 롱소드에 맞 았다. 절그렁! 길시언의 행동은 빨랐다. 궁내부원이 롱소드를 떨어트리 자마자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아 들어올리며 벽에 밀어붙였다. 쾅! 그는 프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로 남자의 복부를 찌르곤 곧장 목에 검끝을 겨냥 했다. "한 놈은 어디 있어!"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얼굴에 경멸을 담고 길시언을 바라 보았다. 길시언은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는 그대로 검을 내려 남자의 다 리를 베었다.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길시언은 그를 내버려두 고는 국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침실 앞에는 이미 운차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꼼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 채로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길시언이 이상하게 여겨 말을 걸 려고 한 순간, 문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한다. 한 놈이라도 들어오면 국왕의 목숨은 없어!"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운차이는 신음을 흘렸다. "시오네…" "운차이! 네 놈이군?" 운차이는 괴로운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고 전해주시겠소? 아니, 관두지." 길시언은 말 없이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안쪽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시오네의 말이 저렇다면 국왕은 아 마도 시오네에게 인질로 잡혀 있을 것이다. 길시언은 입천장이 타는 느 낌이 들었다. 잠시 고요가 지나가고나서 안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 다. "문 앞에서 모두 물러나." 길시언과 운차이는 모두 물러났다. 그런데 길시언은 물러나면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엑셀핸드가 복도에 놓여있던 작은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작은 테 이블이었지만 엑셀핸드가 들어가자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은 다 시 한 번 입술을 적셨다. 삐이걱.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앞쪽은 잠옷 차림의 닐시언 국 왕이었고 시오네는 그의 등 뒤에 붙어서 닐시언 국왕의 목에 대거를 들 이대고 있었다. 닐시언 국왕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져 있었지만 위엄을 잃지는 않았다. "형님. 불민한 동생의 모습을 보여드리는군요." 길시언은 이를 갈면서 고개를 숙였다.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늦어서 옥체에 이런…" 시오네는 킬킬 웃더니 말했다. "뜨거운 형제애의 발출을 방해해서 미안한데, 어서 비켜!" 길시언은 시오네를 쏘아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시오네는 안정을 되찾고 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이 아프나이델에게 닿자 아프나이델은 질끔했지만 잠시 후 적의를 가득 담은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다. 시 오네는 차갑게 웃더니 운차이를 쏘아보았다. 운차이는 우울한 얼굴로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시오네는 매서운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스에서는 제법 잘 떠들었더군…" 운차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시오네는 지금 운차이가 일스에서 행한 고발, 그러니까 자이펀이 행한 세이크리드 랜드에 대한 고발을 거론하는 것이다. 시오네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타입은 아니었는지 그대로 말했다. "뒤로 물러서라. 벽에 등을 붙여." 세 사람은 뒤로 물러났다. 길시언은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 테이블로 향하려 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고는 뒤로 물러 났다. 시오네는 세 명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흘깃 복도 끝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낭패다! 만일 시오 네가 창문까지 갈 수 있다면 그녀는 국왕을 죽이고 박쥐로 변해 도망가 버릴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제 잠시 후면 시오네는 그들의 앞을 완전히 지나 치게 된다. 길시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시오네의 대거가 사나운 움직임을 보여주자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때였다. 엑셀핸드가 테이블 아래에서 천천히 기어나오는 것이 아프나이델의 눈 에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질겁하면서 시선을 다시 시오네에게 향했다. 지금 들키면 만사 끝장이다. 시오네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시오네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카아압!" 엑셀핸드는 기합과 함께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그러나 시오네는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때 닐시언 국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세차 게 흔들며 팔꿈치로 시오네의 복부를 찍었다. "커헉!" 시오네는 숨막힌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시오네는 간신히 엑셀핸드의 도끼를 피했고 닐시언 국왕은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길시언의 프 림 블레이드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프림 블레이드의 고함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우우우웅! 씨융! 갑자기 시오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블링크!" 시오네는 프림 블레이드로부터 2 큐빗 떨어진 위치로 간신히 블링크했 다.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 많은 공격을 당하면서도 블링크에 성공했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운차이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Colkodachi, K'nmaii!" 채챙! 시오네의 레이피어와 운차이의 롱소드가 부딪혔다. 그러나 운차 이는 그대로 시오네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야아아압!" 시오네가 벽에 닿기 직전,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운차이는 앞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콰당! 시오네가 희미한 안개로 변해버린 것이다. 길시언이 이를 갈았다. "이 뱀파이어!" 프림 블레이드가 무서운 속도로 안개를 향했다. 프림 블레이드는 마법 검이며, 만일 맞았다면 시오네는 그대로 세상 구경은 다하게 되었을 것 이다. 그러나 안개는 간신히 프림 블레이드의 공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흘러가 창문을 향했다. 길시언은 그 뒤를 쫓아가려다가 멈칫하면서 닐시 언에게 다가갔다. 그는 닐시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안개는 이미 창밖 으로 날아가버렸고 창문까지 달려간 엑셀핸드는 허공을 향해 드워프어로 갖가지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닐시언 국왕은 헐떡거리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길시언 의 두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영원히 형님께 폐만 끼치는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하. 제가 미욱하여 전하를 이런 곤경에 빠지게 한 죄,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시오네는 사라져버렸고 복도에 남은 것은 기절한 가짜 시녀와 다리를 베이고 끙끙거리는 가짜 궁내부원뿐이었다. 길시언은 먼저 닐시언 국왕 을 침실로 모시고는 황급히 궁성 경비대를 출동시켰다. 그는 그 밤 동안 경비대를 지휘하여 경비대원들에 대한 완전한 함구령 을 실시하면서도 궁성에 잠입한 암살자들을 색출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전시의 국가에서 국왕의 암살 소문은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길 시언은 그들을 잘 단속했다. 그의 탁월한 지휘에 아프나이델은 혀를 내 둘렀다. 궁성 경비대는 완전히 국왕의 직속이었지만 아무도 길시언의 지 휘에 대해 정당성을 의심하거나 반대를 표시하지 않았다. 비록 지휘하는 도중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아 몇 번씩이나 헛소리를 하곤 했지만 길시언은 썩 위엄있는 태도였다. 긴 밤이었다. 궁성 내에 잠복해있던 암살자들의 다른 패거리는 경비대에 의해 대부분 체포되었지만 체포 과정에서 격렬히 저항하여 많은 수의 경비대원이 사 망했으며 암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성에서 비명 소리와 검 부딪히 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던 그 날 밤은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에게도 퍽 이나 불안한 밤이었을 것이다. 길시언은 거의 강제에 가깝게 귀족원 회 의를 소집했고 귀족원의 귀족들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왜 귀족들을 장악해야 되는데요?" 잠깐의 틈을 탄 내 질문에는 카알이 대신 대답했다. "암살의 헛소문 때문에 왕가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의 맹세가 흐려질 것 을 대비한 것이지. 아마도 길시언께서는 귀족들에게 닐시언 전하가 안전 한 것을 확인시키고는 왕가에 대한 귀족의 충성이 변함없음을 서약하도 록 강요하셨겠지. 아마 겉으로는 국왕의 집에 어두운 손길이 미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식이었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렇게 해두지 않으 면 어느 야심만만한 귀족이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 그런 거에요?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길시언은 미소를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설명을 계속했다. 결국 길시언의 영웅적인 분투의 노력으로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과 귀 족들 모두가 안정되었다. 길시언은 귀족원들을 거의 완전하게 장악한 후 그랜드스톰에 재빨리 연락을 취했다. 길고 긴 밤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애 쓴 끝에 바로 그 다음날 그랜드스톰에서는 대규모 승전 기도회가 열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제레인트는 크게 감탄했다. "하루만에요?" "정확하게는 하룻밤 안이지요." 그 기도회에서 닐시언 전하와 귀족들은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냄으로 써 시민들을 안정시켰다. 그랜드스톰에서 호화스러운 대규모 기도회가 벌어지는 가운에도 길시언은 드러나지 않는 궃은 일을 마무리했다. 그는 왕실의 돈을 꺼리낌없이 끄집어내어서는 사망한 궁성 경비대원들의 가족 들에게 전달했고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씨는 울상이 되었다. 그는 감히 반항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런 식으로 왕실유지비를 탕진했다가는 전하께서는 스프 한 접시와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하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길시언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난 그런 식사라도 세 끼만 먹을 수 있다면 만족이오." "기, 길시언 전하가 아니라 국왕전하 말씀입니다!" "형제는 한 몸이오." 리핏 트왈리전씨는 결국 왕실유지비의 가용자금 전부를 길시언에게 내 주고 말았다. 이후 며칠 동안 궁성에서는 리핏 트왈리전씨가 궁성의 으 슥한 정원에서 하늘을 우르러 그 암살자들과 함께 길시언을 저주하곤 한 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하긴 왕실유지비를 모조리 내놓은 리핏 트왈리전 씨가 궁성의 살림을 어떻게 수행할지는 정말 의문이다. 그리고 길시언은 붙잡힌 포로들을 심문했다. 길시언은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인정 을 베풀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포로들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고문을 묘사하는 아프나이델의 말에 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고 레니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들으실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간략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이루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포로들로부터 알아낸 사실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조무래기들이 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알 아낸 바에 의하면 시오네는 거의 모든 계획을 단독으로 수행하며 필요에 따라 부하들을 모아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점은 운차이도 확인해주었 다. "나도 당시 칼라일 영지에 거점을 마련하고 시오네를 기다리라는 지시 외에는 아무런 설명을 받지 못했다. 시오네는 항상 단독으로 움직이는 셈이지. 우리들은 그녀의 도구일 뿐이고. 그 친구들도 아마 궁성에 들어 오기 전까지는 아무 이야기도 못들었을걸." "진짜 거물이란 말이군?" "그렇지." 운차이의 확인이 끝나자 길시언은 더이상의 무의미한 고문을 중단하고 포로들을 모두 강금시켰다. 시오네가 국왕을 암살하려고 한 시점으로부 터 만 하루 동안, 길시언은 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는 쓰러질 지경이 되 어서는 회의에 참석했다. ================================================================== 10. 약속된 휴식……15. 회의는 비공식적인 것이었으며 주로 길시언의 요구에 따라 실제적인 필 요성으로 모인 것이다. 즉 궁성의 대단히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닐시언 전하와 길시언, 그리고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 그리고 전시내각 몇 명 이 모였다고 한다. 닐시언 국왕은 먼저 충혈된 눈을 한 채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은 그의 형 길시언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길시언은 피로한 얼굴이지만 씩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전하. 필부들의 집안에서도 형제는 서로 돕는 법입니다. 하 물며 왕실의 근친들끼리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야인으로 떠 돌고 있지만 저는 언제라도 전하를 보필하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습니 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경악할 뻔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고는 저 매끄러운 말은 틀림없이 프림 블레이드의 작품일 거라고 단정지었다. 닐시언 국왕 은 그 사실을 짐작도 못한 채 길시언에 감동의 눈길을 보내었다. 정보부의 국장이 간략하게 사태를 설명했다. "수도의 여론은 이제 안정적입니다. 헛소문의 유출은 거의 없었고 귀족 들의 움직임에도 수상한 점이 없습니다. 사태는 진정국면인 셈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정보가 퍽 적습니다." "시오네라는 그 여자를 잡았어야 했는데… 아쉽군요." 말을 꺼낸 것은 내부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길시언에게 머리를 조 아리며 말했다. "아, 전하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저로서도 아쉽습니다. 그녀의 몸매가 지금도 눈 앞에… 빌어먹 을!" 아프나이델은 픽 웃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장난기가 다시 도진 모양이 다. 테이블 주위의 각료들 사이로 가벼운 웃음이 번지고나서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놓고는 말했다. "이 암살건에 대해 자이펀에 대해 항의할 수는 있겠지만 별로 소득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일스 공국에 고발하는 방법도 역시 소용이 없겠지 요. 스카일램 트리키의 보고에 의하면 사절은 임무에 실패했다고 하니까 요." 외무장관은 기분나쁜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 약삭빠른 일스 대공은 정의가 별로 필요없을 때만 정의를 부르짖습 니다. 하지만 정말 정의가 필요할 때는 꽁무니를 빼지요." "오렘의 이름이 아깝군요." "하지만 우리들이라도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위협을 받는 마당에 다른 나라를 도울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입장도 이해해 주어야겠지요." "역시 한 나라를 책임지는 자이니만큼." "평소의 행실이 문제란 말입니다. 평소엔 정의의 화신인 양 떠들지 않 습니까." 몇 마디 한담이 오고간 다음 정보부 국장이 다시 발표했다. "시오네라고 알려진 그 뱀파이어 여자는 상당히 위험한 여자입니다. 그 녀는 뱀파이어이며 고급한 마법에 익숙해있습니다. 대륙 곳곳에 발이 넓 지만 발자취를 숨기는 데도 능합니다. 저번 131 전선의 키다린 장군의 암살건도 이 여자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암살자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추측을 하는 겁니다." 다른 각료 하나가 책망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행적은 물론 파악이 안되겠군요." 그러자 정보부 국장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파악이 되었다면 당장 붙잡았을 겁니다. 이 여자는 악마입니다. 우리 정보부에서도 이 여자에게 많은 전사들을 잃었습니다." 길시언은 턱을 쓸어내렸다. "의외로 유명한 여자인가 보군요? 하긴 운차이도 그렇게 말했지요." "그렇습니다. 대단히 유명하지요." "그래요… 뭐 잡을 수 없다면 지금으로선 정보부의 계속적인 활약을 기 대할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길시언은 닐시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어젯밤에 밝혀진 바와 같이 이곳의 궁내 부원들은 음탕합니… 이이잇! 위험합니다. 궁내부원의 전통적인 심사, 그 엄정함이 크게 의심받게 되었지요."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길시언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한궁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닐시언 국왕은 씨익 웃었다. "기사가 성을 비울 수야 없지요. 형님께서는 우제를 시험치 마십시오." 그러자 길시언도 웃었다. 국왕은 기사 중의 기사. 그가 전시에 본성을 비운다는 것은 전선의 전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 그는 전사 들의 마음의 고향인 장엄의 홀의 호스트로서 이곳에 있어야 한다. 이 성 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아들 세류델헨 왕자의 작품이며, 루트에리노 대왕 의 혼이 서린 성지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에게 다른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 일스로 갔던 사절인 카알 일행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뼈에 사무치 는 연정이… 젠장! 에, 어쨋든 그들을 만나려 합니다. 제게 동료를 선발 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각료 하나가 말했다. "그 사절은 임무에 실패하자 그를 그 영화스러운 자리로 끌어올려주신 국왕 전하의 은혜를 잊고 도주했다지 않습니까? 그 자를 만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길시언은 잠시 말을 꺼낸 자를 싸늘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사절 일행은 지금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 따위는 상대도 되지않 는 중요한 일 때문에 황야를 방랑 중이오. 그들은 바이서스의 도움도, 아니 세상 그 누구의, 그 어떤 종족의 도움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 자신들의 힘만으로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입니 다." 각료들은 잠시 놀란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지만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그 시선들을 모조리 되받아주었다. 그 때 닐시언 국왕이 말했다. "형님. 저도 트리키공으로부터 그 카알 일행의 여정과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낮 그랜드스톰에 들렀을 때 하이 프 리스트로부터 언질을 받았지요." "그럼 잘 알고 계시겠군요." "예. 형님께서는 모험가이고 모험가가 오고가는 것은 모두 그의 의지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 욕심 같아서는 형님께서 계속 이 우제의 옆에 계시면서 일깨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미 형님께 커다란 은혜를 입은 참에 다시 그런 송구스러운 말을 드릴 수가 없군 요." 길시언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보임으로써 닐시언 국왕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닐시언 국왕은 말했다. "그런데 모험가가 동료를 고르는데 있어 국왕의 허락이 필요하지는 않 으실 텐데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제가 원하는 동료 중에 하나가 현재 왕실여관 0층에 있기 때문입니 다." 왕실여관 0층이라는 말에 내각들은 실소했다. 물론 그들도 그 말의 의 미는 잘 알고 있다. 바이서스 임펠의 지하, 그러니까 지하감옥을 말하는 것이다. 닐시언 국왕도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형님께서는 죄수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죄수를… 그 법의 지엄함으로부터 사사로이 방면하는 것은 국왕으로서 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하지만 우제는 형님 께서 누구를 거론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운차이라는 그 자이펀 간첩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겠지요?" "그의 공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예. 그의 고발이 아니었던들 암살자들의 추악한 음모가 사실로 진행될 뻔했지요. 그리고 어젯밤의 그의 활약은 제 눈으로도 직접 확인했습니 다." "죄 있는 자 공을 이루었으니 죄도 공도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선 왜 그 자를 원하십니까?" "전 그 자에게 정보의 댓가로 자유를 약속했습니다. 그는 국사범이지 요." 그러니까 길시언은 이렇게 말한 셈이다. 왕자 길시언이 그의 신병을 책 임질 것이니 간첩 운차이를 풀어달라는 의미이다. 법무장관이나 국방장 관의 불평 - 아무리 공이 있으되 간첩을 풀어줄 수는 없다는 불평에 대 해 왕자 길시언의 명예를 댓가로 바치는 것이다. 닐시언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에겐 더 이상 얻어낼 것도 없으며 해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우리들에게 완전히 협조하기로 했었으나 일스에서의 성과가 만족스 럽지 못해서 그 신병 처리에 애를 먹고 있던 참입니다. 그가 형님을 도 울 수 있는 재목이라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일행은 바로 그 다음날로 빛의 탑에 들러서는 마법사들에게 우 리의 위치를 투시하도록 의뢰하여 우리가 영원의 숲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곤 영원의 숲으로 향하는 이 세피아파인 고개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바이서스 임펠에서 이스트 그레이드를 대 각선으로 크게 가로질러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는 그 질주의 대목에 대해 서는 간단하게 요약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프나이델의 간결하고도 정확한 설명이 끝나자 우리들은 잠시 침묵했 다. 카알은 관자놀이를 심하게 문지르다가 말했다. "시오네, 그 여자가 그렇게 유명한 자입니까?" "나도 그 여자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보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과거가 상당히 화려하더군요. 기밀이라 알려드리지는 못합니다만 지금 카알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대단할 겁니다." "놀랍군요." 그러나 길시언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저희들은 여러분들이 레니양을 납치당하고 곤경에 빠졌을까봐 도움을 드리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만 여러분들은 이미 레니양을 구출하셨군요. 역시 여러분답습니다. 이제 갈색산맥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 때까지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기 위해 턱수염을 잡아뜯고 있던 엑셀핸드가 마침내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잠깐!" 우리는 놀란 눈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엑셀핸드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버렸다. "커험, 허흠. 흠. 그러니까, 에, 자네들 정말 대미궁에 들어갔었나?" "예?" "시치미떼지 말게! 그 빛의 탑인지 뭔지 하는 장난꾸러기 소굴에서 자 네들이 영원의 숲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나? 가슴이 뛰어 쓰러지는 줄 알았네. 영원의 숲, 오! 대미궁이 잠들어있는 그 곳! 자네들 설마 그곳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영원의 숲을 빠져나온 것 은 아니겠지?" "아… 예. 하하.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엑셀핸드의 얼굴은 확 밝아졌지만 아프나이델과 길시언은 크게 놀란 얼 굴이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저, 그러니까 드래곤 로드가 잠들어있다는 그 대미궁 말씀입니까?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군요." 그러자 네리아가 톡 튀어나오면서 말했다.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우리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네리아는 안장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 나를 꺼내었다. 우리는 그 주머니를 알아보고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길시 언과 엑셀핸드, 아프나이델, 운차이 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잠 시 후 그들은 얼굴을 후려갈기는 황금빛에 졸도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인원이 얼마 없어서 조금밖에 못가지고 나왔어요." "그, 그, 금화! 그 금화는! 제발, 네리아! 그 중 하나만 좀 보여주겠 나?" 엑셀핸드의 간곡한 말에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금화 하나를 꺼내어주었 다. 엑셀핸드는 눈빛으로 금화를 녹일듯이 바라보았다. "이건 익시노아 크레벤 시대의 금화야! 이걸 마지막으로 본 것이 100년 도 더 되었는데!" 엑셀핸드는 당장 300년 전의 열정으로 돌아가서는 우리들을 안내역으로 삼아 대미궁에 돌아가자고 외치려 했다. 할 수 없이 내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노커여! 크라드메서는 어쩌고요?" "…Aaaaak! Kzaht! Choracairam hened ailsh!" "맞아요, 맞아. 참 좋은 말씀이세요." "욕한 거야." "참 훌륭한 욕설이셨어요." 우리 둘 다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엑셀핸드는 별 부담없이 내 뒷통수를 가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드워프들의 위대한 노커 엑셀핸드는 그야 말로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얼굴이 되어 동북쪽의 밤하늘을 쏘아보았 다. 가만 내버려두면 동북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라도 한 자락 할 태 세였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누르고는 말했다. "우리가 버린 집이야…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 자네들은 내 안내가 되어주어야 해." "뭐 어려울 것은 없지만, 왜 직접 찾아가지 않으세요?" 엑셀핸드는 처연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모든 기억, 모든 비밀암호가 다 사라졌지. 우린 자네들 인간처럼 열심 히 기록하는 종족은 아니거든. 대미궁의 드워프들은 거의 생존자가 남지 않았고 그래서 기억은 잊혀졌네. 게다가 우린 숲, 그것도 영원의 숲을 쏘다니면서 대미궁을 추적할 재능은 없다네." "아, 그러세요?" 엑셀핸드는 신세타령처럼 혼잣말을 계속했다. "난 대미궁의 공사에 동원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환란의 시대를 피할 수 있었지. 난 당시에는 젊은 드워프, 아니 어린 드워프였고 대미궁의 공사 에는 드워프 최고 기술자들만이 동원되었거든. 게다가 난 돌의 혼, 그러 니까 광부 부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공사에 참여할 기회는 전혀 없었지." "자, 잠깐 잠깐. 당시라고요? 그럼 그 때 살아계셨단 말인가요?" "이놈아! 그러니까 지금 노커를 해먹고 있지 않느냐? 넌 내가 무슨 나 이에 노커가 되었다고 생각하는게냐?" "어? 아, 그렇겠군요. 으음." 으으… 그러고보니 엑셀핸드는 루트에리노 대왕과 같은 시절의 인물인 셈이잖아? 역사가 삽시간에 현실의 내 인생에 끼어드는군 그래.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 묻겠습니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여러분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단 공격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러자 길시언과 엑셀핸드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운차이는 조금 떨 어진 곳에서 음울하게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카알은 우리들을 습격하던 마법사에 대해 길시언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있던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예?" "이런 말씀 우습습니다만, 굳이 습격할 의도가 있다고 볼 때 저 같으면 파이어볼 몇 방으로 간단히 끝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빈사상태 에 빠질 테니 간단히 뒷처리를 할 수 있습니다." 아프나이델의 말에 제레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 사실에 대해 물어보았지요. 그 자의 목적은 우리의 생명 이었습니다." "생명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일을 당한 그 목동들은 생명력이 모두 고갈되 어버렸답니다. 그리고 리츄라는 그 목동의 리더 역시 뱀파이어릭 터치 계통의 마법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해는 입 히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죽여버리면 생명력을 빨아 낼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딱 벌렸다. "생명이라고요?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인간처럼 보이더군요. 하지만 그 목적이 생명력을 빨아내는 데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겁니까?" 우리 일행은 당장 맹렬한 토론에 빠져들었다. 아, 사실 맹렬한 토론에 빠져든 것은 우리 일행이 아니라 카알, 아프나이델, 제레인트의 세 명이 었고 샌슨과 네리아, 길시언은 주로 옆에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 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엑셀핸드와 운차이는 별 관심이 없이 주위를 경 계하는 축에 속했다. 그러자 남는 것은 레니와 나, 이루릴이었다. 우리 세 명은 뭘 했냐고? 레니의 경우엔 다시 잠이 들었고 나는 이루릴을 관 찰했다. 이루릴은 일행에게서 좀 떨어져서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내가 그녀 옆으로 다가갔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난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아까 그 마법사… 120년의 두 배 이상 마법을 수련했다고 했지요?" 이루릴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지요." "그가… 그라고 생각하세요?" 이루릴의 깍아 만들어도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유리로 만들어진 조각 처럼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후치?" "어, 그러니까. 음. 그 마법사가… 그러니까…" "모르겠군요." 이루릴의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로서도 의혹은 있 다. 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입 밖에 냄으로써 내 생각이 어느 한쪽 방향 으로 쏠리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어떤 확인의 의미를 띨 지도 모르는 말은 꺼내지 말아달라.' 이런 복잡한 의미의 말을 '모르겠 군요.'라는 한 마디로 다 말해버렸다.그러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난 그녀가 자신의 상념에 빠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이것 참. 그 마법사가 정말 그일까? ================================================================== 10. 약속된 휴식……16. 난 머리를 가로젓고는 운차이에게 다가갔다. 운차이는 웅크린 자세로 나무에 앉아 있었지만 조용히 주위를 경계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엑셀핸드는 여전히 동북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주 저앉았다. "그럼 길시언이 당신의 보증을 선 건가요?" 음. 이거 정말 무턱대고 말을 해버렸군. 운차이는 슬쩍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다." "언제까지지요? 무슨 약속이 있어요?" "길시언은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도와달라고 하더군. 그 다음엔 자유를 약속했다." "아, 그래요? 그러니까 크라드메서에게 레니를 데려갈 때까지?" "그렇게 되겠지." "기쁘시겠군요?" 운차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멀리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 래서 난 말을 더 못잇고는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흐음. 시 끌벅적하군. 어쨌든 11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니 안전은 이제 확실하다고 봐야 되겠는걸. 어느 몬스터라도 가까이 왔다가는 큰일 나겠군. 그러고 보니 레니도 그것때문인지 안심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난 대륙의 희 망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각자 마력, 신력, 그리고 학력(?)을 대표하여 토론에 들어간 세 명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 자는 리치일 겁니다." "리치가 특별히 타인의 생명력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좀 의아스럽습니 다." "아뇨. 고문에 희귀하지만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리치의 부작용에서 중대한 것 중에 하나인데, 리치가 자신의 생명력을 동결시킨 LFV가 불완 전한 경우가 있습니다." "LFV? 그게 뭡니까?" "아, 그건 우리 마법사들이 부르는 약어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력용기 (Lifeforce Vessel)입니다. 이 LFV가 불완전할 경우 보존되어 있던 생명 력이 서서히 고갈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허엇. 술병 같은 것이 새는 것처럼 말입니까? 흐음. 마나에 대한 설명 으로는 좀 그렇군요." "분명히 그런 예가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 생명력의 고갈을 막기 위해 라이프포스 트 랜스퍼(Lifeforce transfer) 마법을 적당히 응용하여 타인의 생명력으로 용기를 다시 채우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요." "허어! 참으로 괴악한 짓이 아닐 수 없군요!" "리치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도로 사악에 물든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럼요." 거의 정신을 빼놓은 상태로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길시언, 샌슨, 네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 리치라면 죽지않는다. 아까 그 마법사 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120 년의 두 배 이상 마력을 연구했다 고. 그렇다면 그가, 그가 그일까? 과연 정말 그가 그일까? 나는 다시 한 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 은 여전히 주위의 모든 사물과 격리된 듯한 모습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습을 받은 장소에 계속 야영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중이지만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좀 더 으슥한 위치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밤중에 고개를 넘어버릴 생각이다. 이루릴이 윌 오 위스퍼를 불러내어 앞길을 밝히게 한 다음 앞쪽에서는 샌슨과 제레인트가 탄 슈팅스타, 그리고 길시언이 탄 썬더라이더가 선도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네리아와 레니,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이 따랐으 며 운차이와 이루릴이 양 옆에 벌려섰다. 뒷쪽으로는 카알과 내가 따랐 다. 뒷쪽에 카알과 나란히 선 김에 나는 카알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알은 날 보더니 말했다. "뭘 말인가, 네드발군?" "리치, 그 리치 말이에요." "그 리치가 왜?" "리치란, 불사마법사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어쩌면 300살쯤 먹었을지도 모르지요?" 카알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앞에 서 걸어가는 이루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데요.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잖아요." 카알은 턱을 쓸었다. "리치라는 것이 희귀하긴 하지… 그러니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 겠지. 하지만 그가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는… 그가 살아간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네. 흠. 아냐, 아니지. 사람이란 알 수가 없는 동물이 지." 카알과 나는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말 그일까? 그 리치가 정말 로? 그 때 네리아가 말을 조금 천천히 걸리더니 우리 위치까지 쳐졌다. 그 녀의 등 뒤에 있는 레니는 졸음을 참지 못해서 말 위에서 잠들어 있어 불안해보였다. 네리아는 카알에게 질문했다. "저, 아까는 너무 어려운 말씀들을 나누셔서들 질려서 질문을 못했는데 요. 리치가 도대체 뭐지요? 전 그게 무시무시하다는 것외에는 잘 알지 못하거든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 리치란 대단이 높은 수준의 마법사 중에 불사의 길을 선택한 일부 의 마법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사? 죽지 않아요?" "그런 셈이라고 봐야겠지요. 대마법사라 불리울만한 마법사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집중하여 만든 특수 용기에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주입시키 면 리치가 됩니다. 혹자는 마법사의 언데드를 리치에 포함시키기도 합니 다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리치는 내가 말씀드린대로입니다." "어, 어, 그러니까 은행에 재산 넣어두는 것처럼요?" "그렇지요. 그리고 은행에 넣어두었을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명력은 안 전하게 보관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그 몸에는 생명력이 남지 않기 때문 에 그 몸을 아무리 공격해도 다시 부활해버립니다. 그 용기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우우우와! 좋은 거네요?" 그 말에 나와 카알이 동시에 쓴 미소를 지었다. 네리아는 미간에 세로 주름을 만들더니 말했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이상해. 음. 좋은 거 아니에요?" "네리아양. 영생을 원합니까?" "음. 뭐, 죽는 게 좋은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긴합니다. 예. 그들도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런 길을 선택한 것 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생에 어떤 즐거움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 어떤 즐거움이라니오?" "루트에리노 대왕이 한 말이 있지요." "뭐라고 했는데요?" "그가 말하길…" 카알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이루릴이 낮게 외쳤기 때문이다. "모두들 주의하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금 앞쪽에 있던 제레인트도 허둥지둥 말했다. "어, 심상치 않습니다. 이건, 이 기운은…" 모두들 잔뜩 긴장하면서 멈춰섰다. 뭣 때문이지? 제레인트와 이루릴은 아까와는 달리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뭘 느낀 것일까? 운차이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혀를 찼다. "빌어먹을 지형이군!" 난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보니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는 두 개의 절벽 사이로 난 소로였다. 이런 젠장. 좌우가 막힌 셈이잖아? 앞이나 뒤로밖에 움직이지 못해. 앞쪽에서 샌슨이 빠르게 말했다. "후치. 뒤를 주의해라.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도록 하지." "빠져나간다고?" 이것은 내 대답이 아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쉰 목소리 였다. "이힝힝힝!" 말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고 버둥거렸다. 위를 올려다보자 새카만 밤하늘에 뭔가가 떠 있었다. 그것은 양쪽의 절벽 사이로 보이는 검은 하 늘에 떠 있었는데 별들이 가려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네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 리치다앗!" 모두들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상대는 공중에 떠있고 우리들 이 있는 곳은 완전히 노출된 지형이니 어떻게 숨을 도리가 없다. 리치라는 소리를 듣자 그 자는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새 나에 대해 몇 가지를 짐작해낸 모양이군." "어, 어쩔 셈인가?" 카알의 말이었다. 그런데 공중에 떠있는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이 목소리를 알아. 하지만 지금 듣고 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데." 길시언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하늘에 있는 검은 마법사도 놀란 기색이 었다. 그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더 물러났다. 하지만 길 시언과 썬더라이더는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그 자는 우리 앞 30큐빗 정 도의 높이까지 내려오더니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아래로 내려오자 윌 오 위스퍼의 빛이 닿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역시 우 리들을 공격했던 그 검은 로브의 마법사였는데 지금은 어깨에 무언가 커 다란 자루같은 것을 걸머매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길시언을 향해 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넌… 길시언!" 어라? 둘이 아는 사이인가?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높이 들었고 그 러자 프림 블레이드는 마구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어쩐지, 썬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리지 않았었지. 제기랄. 네놈이 살아 있었군! 리치몬드!" 리치몬드라고?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로 리치몬드를 겨냥하면서 외쳤다. "하지만 넌 분명히 죽지 않았나! 스네어트레일의 네 간악한 탑 꼭대기 에서 널 집어던졌어. 그 때 절벽으로 떨어지며 몸이 산산조각나며 굴러 떨어지는 네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리치몬드라는 그 마법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 었다. 탁한 목소리에다 나지막하게 말하니 알아듣기가 정말 힘들었다. "정말 고통스러웠지. 난 죽음을 초월한 존재지만, 거기에도 단점이있 지. 그 끔찍한 고통, 몸이 산산조각나는 고통을 산 채로 맛보며 신음해 야 했지. 네놈 때문에!" "죽지도… 못해? …너!" 옆에서 제레인트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당신, 역시 리치인가!" 리치몬드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공중에 떠있었다. 길시언은 이를 악 물면서 말했다. "제에기랄! 네녀석이 리치였구나! 난 네놈이 죽은 줄 알고는, 그래서 물러났는데. 빌어먹을! 어쩐지 썬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까닭이 있었군. 저주의 시전자, 저주의 주체인 네녀석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리치몬드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크핫하하하!" "뭐가 좋아서 웃는 거냐?" 리치몬드는 통쾌하게 웃더니 다시 음울한 목소리로, 하지만 이를 북북 갈면서 말했다. "복수의 때가 원하지도 않았을 때 찾아오는군. 내게 화렌차의 가호라도 있었나? 도대체 네녀석이 어떻게 여기 온 것이지? 믿을 수가 없군, 길시 언! 하지만 잘됐어. 네녀석 때문에 난 다른 놈의 생명력이나 빨아들이는 신세가 되었지!" "무슨 말이냐!" "그 빌어먹을 마법검!" 리치몬드는 날카롭게 외치며 손을 뻗어 프림 블레이드를 가리켰다. 그 리고 프림 블레이드는 거세게 울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 "그 빌어먹을 마법검! 그건 도대체 뭘로 만들어진 거지? 그 마법검 때 문에 내 LFV에 커다란 타격이 있었지. 생명력이 새어나가고 있어! 그래 서 매일같이 사람을 죽이는 귀찮은 일을 해야 돼." "역시… 그랬군. 부작용이 아니라, 프림 블레이드 때문에…" 아프나이델이 떨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말했다. 그러나 리치몬드는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정말 안됐군. 너희들 말이다. 그 지저분한 생명이나마 사용할까 생각 했기에 상처 없이 붙잡으려고 애썼지.하지만 저 길시언 녀석이 있는 한 그 계획은 수정해야 되겠군. 모두들, 모두들 가장 끔찍스러운 죽음을 맛 보게 해주지!" 길시언이 무서운 눈으로 말했다. "난 이미 너를 한 번 죽였다. 그것도 나 혼자서! 이번에는 나보다 우수 한 동료들도 함께 있지. 다시는 부활하지 못할 죽음으로 널 인도해주마! 화렌차의 가호라고? 천만에! 아샤스의 가호가 나에게 있음이다. 이번에 야말로 널 확실히 죽이고 썬더라이더의 저주를 풀겠다!" "크그그긋.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감이 넘치는 모양이군, 왕자여." 그 때 이루릴이 앞으로 나섰다. 이루릴은 허공에 떠있는 리치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옆으 로 벌리며 힘들게 말을 꺼내었다. "리치몬드씨. 당신의 이름은 그것뿐입니까?" ================================================================== 10. 약속된 휴식……17. 다시 냉수 한 양동이. 떨리는군. 일행들 중 몇 명은 이루릴의 질문에 의하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난 잘 삼켜지지도 않는 침을 힘겹게 삼키 며 리치몬드를 바라보았다. 후드에 뒤덮여 있는 리치몬드의 얼굴은 알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들려왔다. "이름?" "네. 당신은 처음부터 리치몬드였습니까?" 리치몬드는 묵묵히 서 있다가 말했다. "난 많은 세월을 살아왔고 그래서 많은 이름을 가졌지." 이루릴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설마, 설마 그 이름 중에 하나가 아주 유명한 어떤 이름이라는 말인 가? "설마, 당신이…" 일행들은 모두 당황하여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루릴은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리치몬드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하늘의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치몬드는 말했다. "엘프, 역시 귀가 좋군. 알아차린 모양이군." "왜 그러십니까, 세레니얼양?" 카알이 물었을 때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리치 몬드를 바라보았다. "이 소리는… 설마?" 리치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어깨에 매고 있던 그 커다란 꾸러미같은 것을 들어내렸다. 모두들 질겁해서 물러나는 가운데 리치몬드는 그것을 아래로 떨어트렸 다. 으악! 폭발하는 건가? 아니면 불덩어리가 일어난다든가 지진, 화산, 혹은 태풍이… 그런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리치몬드가 던진 것은 그냥 툭 떨어져 땅 에 뒹굴 뿐이었다. 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땅에 떨어진 그것을 바라보다 가 다시 리치몬드를 쳐다보았다. 리치몬드는 말했다. "크핫하하하! 죽음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라!" 그리고 리치몬드는 위로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밤하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저게 뭐야? 우리는 서로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리치 몬드가 던지고 간 물건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샌슨과 길시언이 먼저 말에서 내려서는 검을 뽑아든 채 그 물건으로 접 근했다. 마법사가 주고 간 물건에 섣불리 접근하는 것은 바보짓일 것이 다. 우리는 최대한 주의깊게 접근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이 상한 냄새가 났다. 이게 무슨… 피냄새? 우리는 리치몬드가 던지고 간 물건 주위에 모여섰다. 이루릴이 윌 오 위스퍼를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었고 윌 오 위스퍼의 창백한빛 아래에 드러난 것은… 그것은 큼직한 도마뱀의 시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원래는 푸른색의 몸이었을 듯하지만 지금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날개가 달려있는 데다가 이마엔 뿔도 돋아나 있었다. 우리는 정신이 나 간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카알이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해츨링(Hatchling)이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곧 입을 감싸쥐었다. 아마 혀를 깨문 모양이다. 그 는 입을 틀어막은 채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으거, 어, 해츠리이라며, 그러다며?" 곧 우리 모두는 기가 막힌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엑셀핸드가 덜 덜 떨면서 물었다. "이, 이거봐. 무슨 소리를,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이루릴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 거대한 소리는 우리들의 귀에도 들 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짓 소리였다. 해츨링은 드래곤의 어린 새끼. 드래곤은 자신의 보물을 훔쳐간 자와 자 신의 새끼를 공격한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복수를, 목숨을 건 복수를 한다. 혹 선한 드래곤이라면 자신의 보물을 영웅이나 현자들에게 선물하 기도 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영웅이나 현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드래곤 로드에게 보물을 선물받았지. 하지만 아무리 선한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새끼를 공격한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자살 의 방법이 있다면 드래곤의 새끼를 건드리는 것이라던가. 그런데 우리 앞에는 그 해츨링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떨어져 있었고 하 늘 저편에서는 날개짓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멋진 밤이로군. 최고야! 모든 사람의 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 제기랄, 이걸 먹어! 아, 아니 치워!" "먹어치우라고?" "으아아아! 없애버려요! 아, 아니 달아나!" "날아오는 것으로부터 도망갈 순 없어! 어, 어서 저 해츨링 시체를 없 애!" "어, 어떻게 없애죠? 땅을 파나? 태울까요?" 우리 일행은 혼란에 빠져버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무턱대고 고함이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말들 역시 무턱대고 푸르릉거렸다. 드 래곤이, 드래곤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새끼의 죽음 때문에 아 마도 눈이 뒤집혀 있을 것이 확실한 드래곤이! 우와, 이거 미치겠네! 그 때였다. "카아아아아아!" 무서운 포효소리. 귀가 찢어져나가는 것 같다. 레니는 땅에 무릎을 꿇 고는 귀를 틀어막았다. 서있는 사람들도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젠장! 다리가 떨려! 도망가야 되는데, 도망가야 되는데? 어디로 도망가지? 하 늘에서 광포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힝힝힝!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으니, 호비트처럼 땅 을 파고 숨는 것이 아니라면 숨을 도리가 없잖아? "카아아아아아!" 우리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폐부를 찢을 정도로 가슴 아픈 소리라고 느 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래곤은 목놓아 울부짖고 있었다. 다만 우 리 스스로가 그 분노와 울분의 대상자가 되어 있었기에 동정의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윽고 하늘의 별이 다 사라져버렸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절벽 사이의 하늘을 모조리 가려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꼬리일까? 이 황당한 상황에서 난 그것을 궁금하게 여겼다. "카아아아아!" 이번에는 정말 포효소리에 날아가버릴 뻔했다. 그 때였다. 난 드래곤의 머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타오르는 선홍색의 눈, 그리고 입안에서 뿜어나오는 밝은 빛 때문에 그 림자로 보이는 검은 이빨들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새카만 밤하늘이 입을 벌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입 안이 왜 밝은 거지? 입 안에 불이라도 피워놓고 있나? 잠시 후 나는 그것이 마구 불타오르는 번 개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탓탓탓탓탓! "벼, 벼락의 브레스! 블루 드래곤이다!" 그 때 카알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의 입 안에 서 튕겨지는 번개는 점점 더 강렬해졌다. 바- 바아- 바아아- 바아아아 아-앗. 이윽고 블루 드래곤은 우리들을 향해 번개의 폭포를 쏟아놓을 준 비를 갖추었다. 그 때였다. "우리를 공격하면 이 놈을 당장 죽이겠소오오!" 카알? 오, 맙소사! 카알은 해츨링의 시체를 안아들고는 그 목에 나이프를 들이대고 있었 다. 나이프로 찌르든 말든 이미 죽은 해츨링이 또 죽을 리가 있나! 하지만 블루 드래곤은 해츨링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쾌애애애애!" 블루 드래곤은 브레스를 뿜기 직전 급격하게 목을 틀었다. 콰자자자작! 눈알이 타버리는 느낌이다. 블루 드래곤이 토해놓은 벼락의 강은 암흑의 밤하늘을 발기발기 찢으며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쳤다. 모두들 되지도 않 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몸을 던졌다. 땅이 내 몸을 호되게 후려친다. 그 러나 우리 일행들이 제각기 토해놓은 비명소리는 벼락의 굉음 때문에 하 나도 들리지 않았다. 벼락의 폭포는 아슬아슬하게 우리들의 위를 지나쳐 서 옆의 절벽에 명중했다. "캬아아악! 벼락이다!" 네리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절벽이 무너져내 리기 시작했다. 쿠- 쿠- 쿠- 쿠웅! 쏴르르르. 자갈 굴러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쨍! 쨍! 하는 바 위 깨지는 소리도.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난다. 난 땅에 엎드린 채 눈을 꼭 감고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 어올렸다. 맙소사! 벼랑의 모양이 바뀌어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수직에 가깝던 벼랑이 거 대하게 무너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무너진 벼랑에서 쏟아져내린 바위 덩어리와 흙무더기는 우리 등 뒤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 순간 난 눈을 감고 말았다. 짐작했어, 짐작했다고! 뭘 보게 될 건지는 분명히 짐작했어. 하지만 정 말 저런 모습이라니! 난 속으로 제미니의 이름을 다섯 번 정도 부른 다 음, 이 시점에서 제미니를 부르다니 난 완전히 코가 꿰인 녀석이구나, 어쩌고 하는 말을 역시 한 다섯 번 정도 웅얼거리고나서 다시 눈을 떴 다. 눈 앞에는 꼿꼿하게 서있는 카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거대한 푸른 발이 보였다. 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곧 실팍한 다리와 가슴, 고개를 더 들어올렸으나 목의 아랫부분만이 간신히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 위로 목이 더 이어지고 거대한 머리가 달려있을 것은 확실하 지만 아무리 고개를 뒤로 꺽어도 그 윗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이 자리 에서 1,000 큐빗 정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저 거대한 몸 전체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 위에서 암흑을 배경으로 번득이는 붉은 눈은 볼 수 있었 다. 두 번 다시 바라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블루 드래곤의 발 크기와 비슷한 카알은 안간힘을 다해 기절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 드래곤이 고개를 좀 숙이기만 한다면 그 해츨링이 이미 시체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들킨다면 … 말도 하기 싫다. 카알은 뼛조각 하나도 남지 않게 되겠지만 그건 나 도 마찬가지겠지. 카알은 말했다. "…!" 하나도안들린다. 카알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간신히 들릴만한 목소리 로 다시 말했다. "뒤, 뒤로 물러나시오!" "크르르르…" 오, 맙소사. 기절해버릴 것 같아. 이건 드래곤 로드와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드래곤 로드의 위압감은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되는 위압감이랄 까? 하지만 눈 앞의 블루 드래곤은 그야말로 박진감 넘치는 위압감을 선 사하고 있었고 그래서 까무러치지 않는 내 정신이 불만스러울 지경이다. 젠장. 블루 드래곤은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으악! 카알, 이제 한 때는 카 알이라 불리웠던 시체가 되시겠군요. 아니, 나도 곧 한 때는 후치라고 불리웠던 뼛조각과 고기덩어리로 바뀔 테니… 블루 드래곤은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자 자존심의 미약한 끄트머리도 잡을 수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들 죽다가 살아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리아는 벼락에 놀라서 웅크린 채 펑펑 울고 있었고 레니는 네리아의 등 위에 엎드린 채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네리아는 번개를 무서워했지. "네리아 언니, 괜찮아요. 끝났어요. 이젠 괜찮아요." 글쎄. 과연 정말 이제 괜찮을 걸까? 난 후들거리는 팔에서 바스타드를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카알에 게 다가갔다. 겨우 대여섯 걸음 밖에 되지 않는 거리가 헬턴트에서 델하 파까지의 거리보다 더 길게 느껴졌지만 난 간신히 카알의 옆에 설 수 있 었다. 카알의 몸은 그대로 부서져버릴 듯이 떨리고 있었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난 카알에게 말을 걸었다. "조, 조금 물러나는 것이 어떨까요?" "아, 안되네, 네드발군. 그, 그러니까, 에, 자신없는 모, 모습을 보였 다간…" "아, 알겠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요?" 블루 드래곤은 뒤로 다섯 발자국 쯤 떨어졌다. 드래곤의 다섯 발자국이 다 보니 거리는 삽시간에 100 큐빗 정도로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크기였다. 이윽고 길시언과 샌슨도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네 명은 사이좋게 떨면서 블루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샌슨이 카알 의 귀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카, 카, 카알. 어, 어, 어떻게 하지요?' "제길, 제기랄! 왜 모두들 그걸 나,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나도 모, 모, 모르겠다고!" 그 때 이루릴이 입을 열었다. 후우, 후우. 자,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다? 이미 죽어버린 해츨링을 가지 고 인질극을 벌이는 데도 한계가 있다. 뒷쪽은 무너진 절벽 때문에 막혀 버렸고 앞쪽은 블루 드래곤이 떡하니 막고 있다. 요행히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었다가는 우리는 남은 평생 동안 블루 드 래곤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리 오래 살 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드래곤에게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그걸 믿어줄까? 이미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애는 이미 죽었는데요, 우리가 죽인 건 아니에 요.' 이런 말이 통할 수 있을까? 혹시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블루 드 래곤이 새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우 리 같이 하찮은 생물을 단숨에 밟아죽이려들지 않을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루릴이 말을 시작한 것은 카알의 말이 끝나고 곧장이었는데 그 새 이렇게 많은 생각을 떠올 린 것이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이루릴의 말은 평온했다. 도대체가 말이야! 엘프와 순결한 소녀를 보호 하시는 그랑엘베르여! 좀 너무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왜 엘프는 드 래곤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심드렁하게 말한단 말입니까? 블루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보나마나 그 눈은 지글지글 타고 있을 테지만 감히 올려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난 고개를 돌려 이 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칠 때 그녀의 머릿카락이 물결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왠지 그녀는 밤의 여왕처 럼 보이는군. 나도 큰일이야.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 니. 이루릴은 블루 드래곤 앞에 섰다. 검은 폭포수 같은 그녀의 머릿결이 매끄럽게 쏟아져내리다가 아름답게 흩날린다. 한결같은 평온함. 우리는 한 조각 희망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 았다. 그녀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는 우리를 불안에서 끄집어내었 다. 그녀는 두 팔을 옆으로 조금 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해츨링은 이미 죽었습니다만." …역시 그녀는 엘프다. "달아나아앗! 네드발군! 세레니얼양을 붙잡아!" 카알은 해츨링을 떨어트리고는 부리나케 몸을 돌렸고 난 앞으로 달려나 갔다. "이야이야이야아압!" 이루릴의 왼쪽으로 달려들어가서! 그녀의 앞을 돌아! 오른쪽으로 빠져 나오면서! 오른팔로 이루릴의 허리를 감아당긴다. 그녀의 가벼운 몸은 아무 저항 없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난 오른팔에 그녀의 허리를 걸친 채 목숨을 걸다시피 달려갔다. 아니, 진짜 목숨을 걸었다. "파이어볼!"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 그의 파이어볼이 길을 막고있는 바위 덩어리에 작열했다. 하지만 흙먼지와 돌멩이들이 조금 튀어올랐을 뿐 바위들은 꼼 짝도 하지 않았다. 낭패다! 샌슨은 그 위로 뛰어넘을 생각을 한 모양이 지만 말들이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다. 그 때 난 눈 앞이 캄캄 해지는 광경을 보았다. 레니가 일행들과 떨어져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젠장! 팔이 하나 남아있지! 레니는 왼팔로 잡아내야겠군! 난 여전히 오른팔 안 쪽에 이루릴을 걸친 채 레니쪽으로 달려갔다. 그 때 레니가 손을 들었다. "후치. 괜찮아. 멈춰." 응? 뭐지? 난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러자 이루릴은 두 손으로 내 팔을 짚고는 가볍게 공중을 돌아 땅에 내려섰다. 그녀는 레니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일행들 역시 모두 입을 벌린 채 내 등 뒤를 바라 보며 서있었다. 뭐지?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 우우… 우…" 블루 드래곤은 땅에 팽개쳐진 해츨링 앞에 서 있었다. 그(그녀? 드래곤 은 부모가 모두 새끼에 대해 각별하다고 한다. 어미인지 아비인지 알 수 가 없지만, 음. 아무래도 여성대명사로 불러 줄 엄두는 나지 않는걸.)는 하늘로 길게 목을 뻗어올린 채 울고 있었다. 그것은 가냘프고도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늑대나 다른 맹수들의 울음소 리와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맑고도 잘 울리는 소리였다. "우루루루루…" "우루루루루…" 샌슨도, 길시언도 멈춰섰다. 아프나이델은 캐스팅을 위해 모아올린 두 팔을 천천히 내렸다. 긁힌 정도의 상처도 주기 힘들 화살이나마 쏘아보 기 위해 활을 당기고 있던 카알도 시위를 놓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네 리아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고 제레인트는 멈춰선 채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이 되었다. 운차이는 냉엄한 눈을 조금 내리깐 채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도끼를 허리에 꽂아넣는 동작을 상 당히 과장되게 실행하고 있었다. 거기에 신경씀으로써 드래곤을 보지 않 으려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루릴은 평온한 얼굴로 드래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난 레니를 보았다.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레니의 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 가득히 맺힌 눈물은 바라보고 있기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또르륵. 마침 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쉼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동 안에도 드래곤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는 계속되었다. "우루루루루…" "우루루루루…" ================================================================== 10. 약속된 휴식……18. 레니의 입술이 조금씩 열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난 그녀의 입 가까이로 귀를 가져갔다. 레니는 말했다. "…아파." "응? 뭐라고, 레니?"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프다니?" "드래곤이… 드래곤이 슬퍼하고 있어. 그걸 보니 가슴이 아파…" 난 잠시 겁먹은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자체는 무표정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그녀는 그렇게 무표정하게 울고 있었다. 순간 나는 한 가지 잊었던 사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느끼지는 못하던 사실을 깨달 았다. 레니는 드래곤 라자다. 음? 울음 소리가 멈췄어. 나는 고개를 돌려 블루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블루 드래곤은 고개를 숙여 해츨링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주 둥이로 시체를 건드렸다가 혀로 핥기도 했다. 하지만 시체는 시체일 뿐 이다. 블루 드래곤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렸다. "카아아악! 카아아악! 카아아악! 카아아악! 카아아악!" 블루 드래곤은 목이 통째로 떨어져나가라고 포효했다. 난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털썩, 털썩.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루릴도 귀를 막 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레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 다. "크롸라라라라락!" 산맥 전체가 울리는 것 같다. 온몸이 울린다. 귀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 지 못할 정도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지만 머릿속에서 계속 불꽃이 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 앞이 하얗게 바뀌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그 때마다 레니의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가 음영이 반전된 모 습으로 보였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레니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울고 있었다. "크롸라라라라라…" 드래곤의 마지막 포효소리가 거대한 산울림으로 사라져갈 때, 드래곤은 힘없이 고개를 늘어트렸다. 산울림이 사라지고나자 우리 일행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난 무거운 머리를 휘저으며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다. 하 지만 도대체 다리에 힘이 안들어간다. 드래곤은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찌이이잉. 무슨 소리지? 블루 드래곤은 입을 꾹 다문 채 우리를 바라보 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날카로운 진동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런데 잠 시 후 그 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뀌었다. "프리스트인가?" 드래곤이… 말한 건가? 우리는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블루 드래곤은 꼼짝도 하지 않고서 우 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난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씀입니까, 드, 드래곤이여?" "그렇다. 프리스트인가?" "예. 테페리의 지, 지팡이인 제레인트 침버라고 하, 합니다. 위대한 드 래곤이여." "부활을 사용할 수 있는가?" 부활? 부활이라고? 제레인트는 황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드, 드래곤이여. 제가 그렇게 느, 늙어보이십니까? 아, 아니. 그 런, 그런 막강한 권능은 대단히 오랜 연륜을 가지신 프리스트들이나 사 용할, 사용할 수 있는 거, 것입니다." 드래곤은 우울하게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외쳤다. "그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이 아닌가!" 히이익! 큰일이다! 드래곤이 화났어. 블루 드래곤은 간단히 목소리만으 로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서 있 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 때 무릎을 꿇고 있던 이루릴이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루릴은 레니의 등 뒤에 섰다. 그녀는 레니의 어깨를 짚더니 조심스럽 게 가슴쪽으로 잡아당겨 안았다. 레니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측은한 얼굴로 레니를 껴안았다. 이루릴은 위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블루 드래곤과는 전혀 달리 이루릴 의 목소리는 산들바람처럼 약했다. 하지만 블루 드래곤의 목소리처럼 똑 똑하게 들렸다. "드래곤이여.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닥쳐랏!" "드래곤이여…" "누구냐!" "네?" "누구냐! 감히 드래곤의 자식을 죽인 놈이 누구냔 말이다! 너는 아니겠 지! 엘프가 드래곤의 자식을 죽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시체가 이곳 에 있으니 너희들은 그 살해자의 모습을 보았겠지. 너희들의 눈과 입에 고마워해라! 너희들이 아직 죽지 않은 까닭은 너희들에게 그 살해자를 확인한 눈과,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입이 있기 때문이다! 말해라, 누구 냐!" 분노에 젖어 반쯤 미쳐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위대 한 종족은 역시 현명하다.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이다. 블루 드래곤은 계 속해서 미친듯이 외쳤다. "부활을 할 수 없는데다가 그것마저 대답할 수 없다면 너희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당장 죽여도 상관없는 버러지들! 그러니 너희들의 입으로 너희들의 목숨을 보존하라! 어서!" 카알은 크게 한숨을 쉬고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럼 그걸 말씀드리면 저희들은…" "닥쳐라, 인간!" 조금 전부터 목소리에 맞아 멍이 든다는 말이 실감나게 되는걸. 블루 드래곤의 고함 소리는 정말 우리들의 몸을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은 계곡이 무너져라 고함질렀다. "네놈들이 간특한 줄은 이미 알고 있지만, 감히 드래곤에게 흥정을 하 는 것이냐!" 카알은 두 말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네놈들이 감히 드래곤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다는 거냐! 묻는 말에 대답 할 뿐이다. 말해라! 너희들 모두 말을 할 수 있겠지! 말할 때까지 한 놈 씩 죽여야겠느냐!" 그리고 블루 드래곤은 곧장 우리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히이익? 설마 누구부터 죽일 것인지 고르는 거야? 그 때 레니가 이루릴의 팔을 풀어내더니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레니, 맙소사. 레니? 뭘 할 생각이야! 나서면 곧장 죽는다는 말이야! 우리는 모두 굳어버렸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니 는 우리들과 블루 드래곤 사이의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를 한평생처럼 걸어갔다. 레니가 우리와 드래곤의 중간까지 가는 동안 나는 몇 번 숨을 쉬었지? 레니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블루 드래곤은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시야 양쪽으로 쭉 펼쳐진 절벽, 그리고 그 사이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그가 숨만 좀 거세게 쉬면 당장 날아가버릴 지도 모르는 가냘픈 소녀를 묵묵히 내려다보는 거대한 푸른 드래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블루 드래곤은 말했다. "드래곤 라자인가…." 블루 드래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혼잣말이 띄엄띄엄 이어졌 다. "왜 여기에, 왜 여기에 드래곤 라자가… 도대체 어떻게? 300년의 약속 의 기한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레니는 블루 드래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그저 흐느끼면서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요. 제발, 제발 울부짖지 말아요. 가슴 아프게 하지 말 아요. 하늘을 울리게 하지 말아요…" 블루 드래곤은 레니를 가만히 굽어보았다. "내 감정에 대해 지배하려 들지 마라.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 여." 레니는 입을 다물고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드래 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 이상하다. 어디서 들었던 이름인 것 같다? 길시언이 꿈틀 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생각에 잠길 여유가 없었다. 그 블루 드래곤 은 복받치는 슬픔을 참듯이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고 그 얼마 안되는 시간은 수명이 짧아지는 느낌이 대단한 현실감으로 다가오는 시간이었 다. 이윽고 지골레이드는 입을 열었다.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여. 말하라. 이것은 드래곤에게 숙명 으로 지워진 언약이며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날 받아들이겠는가?" 지독히 혼란된 머리 때문에 잠시 나는 드래곤 지골레이드가 무엇을 말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고? 뭘 말이지? 그 때 아프나이델이 잔뜩 쉰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드래곤 라자의 계약!" 그러자 곧 나도 지골레이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골레이드는 지 금 레니에게 그것을 묻고 있다. 레니가 자신의 라자가 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피붙이의 죽음으로 가슴을 저미는 슬픔에 빠졌음에도 불구 하고, 숙명의 부름을 무시하지 못하는 저 드래곤 지골레이드가, 지금 레 니에게 자신의 드래곤 라자가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레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의아한 얼굴이 되어 드래곤을 올려다보 았다. "전, 전 레니에요. 그런데 뭘 받아들인다는 말씀이세요?" 지골레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레니를 바라보았다. 마치 고개를 숙 여 레니를 관찰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난 순간적으로 그가 야식 생각이 난 것인가 생각하고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지골레이드는 레니를 관찰하다가 다시 죽어있는 해츨링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말없이 해츨링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모습은 마치 슬픔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지골레이드는 그런대로 침착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 레니여. 그대는 드래곤 라자가 되어 나를 저 인간들과 연결지어줄 수 있다. 그대는 정당한 죽음이 너와 나를 갈라놓을 때까지, 혹은 너와 나 양자의 요구에 의해서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때까지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대에게 충 실하며 그대가 연결지워준 인간들에게 충실한 친구로서 남을 것이다. 그 임무를 받아들이겠는가?" "안, 안되오!" 카알이 갑자기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레니를 바라보는 지골레이드의 부드러운 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간신히 억제된 분 노가 다시 폭발하는 모양이다. "감히 어디서 떠드느냐!" 부우우웅! 으아! 제기랄! 지골레이드의 거대한 앞발이 위에서 내려꽂혔 다. 카알은 그 무서운 기세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는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이런, 안돼! 콰아아앙! 난 원래 이런 체질은 아니야. 음.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역시 이 렇게 행동해버리는군. 난 달려가서 카알을 걷어차면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떨어지는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엇갈아든 두 팔로 막아내었 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불꽃이 튕기며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도대 체 내 몸에 달린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멀게 느껴지는 무릎에서 관절 이 박살나는 느낌이 아련하게 전해져왔다. 아마도 한쪽 무릎을 꿇은 것 같다. 입안이 찝찔하군. 이런…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는 건가? 화끈거리는 관자놀이 때문에 눈이 불타오르는 기분이다. 난 힘들게 머 리를 들었다.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드래곤의 앞발을 두 팔 로 막아낸 것이다. 아래를 보니 꿇어버린무릎이땅 속으로 손가락 한 마디쯤 들어가있었다. 어쩐지 무릎이 깨지는 느낌이 들더라. 저 멀리 나동그라진 카알이 힘겹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네드바알군!" 내 이름의 두번째 음절은 그렇게 길지 않은데요, 카알. 강세는 첫번째 음절에 두고. "임마아, 후치, 이 미친 자식아!" 샌슨의 고함소리. 흐음. 유니크한 호칭이라고는 부를 수 없군. 난 꼼짝 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에서 지골레이드의 앞발이 내리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몸 중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리에 붙어있는 몇 가지, 그러니까 눈이라든가 입, 목 등이 고작이었다. 갑자기 지골레이드가 발을 들어올렸다. 내가 지금껏 쓰러지지 않은 이 유는 위에서 지골레이드가 누르고 있었기 때문인데 지골레이드가 발을 들어올리면?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왜 저러는 거 지? 세상이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후치잇! 아아악! 후치잇!" 자꾸 내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는군. 난 옆으로 쓰러진 채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덜덜 떨고 있었다. 끝내주는 기분이 드는군. 팔은 무감각 했고 고통은 주로 어깨에서 전해져왔다. 난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달려오는 발자국소리, 그리고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여러 가지 비명과 고함소리. 날 끌어올리는 것은, 음. 이 거친 손놀림으로 미 루어보아 샌슨임이 분명하다. 난 샌슨에게 안긴 채 떨고 있었다. 눈 앞 에 보이는 제레인트의 얼굴은 자꾸 빙빙 돌고 있었다. 제레인트. 어지럽 지 않아요? 킥, 키긱. "어라? 이 놈 웃고 있네? 정신이 나갔나보군." 엑셀핸드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프나 이델의 모습도 보였다. "이봐, 후치! 괜찮아? 내가 보여? 내가 누구야?" "아, 아아.당신은… 오래간만이에요,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아프나이델은 얼빠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샌슨은 피식 웃고는 말했 다. "괜찮은 모양이군." 목이 부러지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고개를 조금 돌리자 사람들 틈 사이 로 카알을 부축하는 길시언과 네리아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지골레이 드는? 레니는? 지골레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감한 소년이로군. 경의를 표하지." 오우, 좋았어! 경의를 표한다고? 끝내주는군. 하지만 그 전에 박살난 것 같은 내 팔이나 허리에 대해 경의를표해주면 더 좋겠는데. 샌슨이 지골레이드 대신 경의를 표했다. "어디 보자, 팔 괜찮은 건지." "꾸으으…윽!" 으아, 으아앗! 이 망할 오우거야! 너무 아파서 비명도 못지르겠다. 제 레인트가 기도에 들어가는 모습이 아련하게 보였다. 졸도할 것 같아. 여 러분. 잠시 졸도할 테니 내가 깨어나거든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말해 줘요. 아니, 다 집어치우지. 나 이대로 잠들었다가 일어날 테니까 그 때 는 내 옆에서 아버지가 날 내려다보고 있어야 돼. 그리고 집 밖에서는 새들의 아침노래 사이로 제미니의 외침이 들려와야지. '후치야, 벌집 따러 가자!' '벌집을 딴다? 똑바로 말하시지.' '응응. 넌 벌집 따고, 난 벌꿀 먹고. 이힛히히히!' 아무렴. 그게 정상이지. 그게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 의 아침의 눈뜸이야. 거어럼! 그럼 이제 졸도해보실까…. 아쉽게도 졸도하지는 않았다. 제레인트의 기도가 끝나고 잠시 후 몸의 고통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 속을 씻어내리는 듯한 상쾌한 기 분이 든다. "괜찮아?" "그런대로." 난 주위의 환호를 받으며 일어났다. 엑셀핸드는 내 등을 철썩 쳤고 네 리아는 날 껴안았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지골레이드 때문에 주위의 환 호는 별로 높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겁먹은 얼굴로 지골레이드를 바라 보았다. 푸른 드래곤 지골레이드는 카알을 노려보며 험하게 말했다. "저 소녀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녀는 나의 드래곤 라자가 아니다. 감히 드래곤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산산히 조각내어 죽일 놈! 저 소년의 용기에 감사해라. 저 소년의 용기에 대한 경의로서 널 용서하 겠다!" 카알은 길시언의 부축을 조용히 물리치며 힘겹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하지만 저소녀에게한 마디만 조언 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이 놈!" 카알은 간신히 주저앉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 어버렸다. "이 건방진 녀석! 조언이라고? 이것은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대화이 다. 제삼자의 조언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 비천한 목숨이 아깝지 않다 는 말이냐? 죽여야 입을 다물겠느냐?" 카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 때 레니가 말했다. "지골레이드님. 제발 카알 아저씨의 말을 듣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러자 지골레이드는 묵묵히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알도 다시 힘을 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드래곤이여. 제발. 당신의 현명함으로 어리석은 우리들을 판단하지 말 아주십시오. 우리는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어리석 음을 돌보아주기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조언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지골레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우리 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카알은 그것이 무언의 승낙이라고 생각했는지 레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 동안에도 그는 몇 번이나 지골레이드 의 눈치를 살폈지만 지골레이드는 여전히 외면한 채였다. 카알은 나지막 하게 말했다. "레니양." "예. 카알 아저씨." "승낙하지 말아요." "예? 하지만…" "당신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고 다시 달려가려는 것입니다." "아? 아. 그, 그렇군요." 그 때 아프나이델이 재빨리 끼어들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카알. 만일 레니양이 거절하면 저 지골레이드는 우리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분노 때문에 우리를 단숨에 죽여버릴지도 모릅니다. 저 드래곤에게는 우리가 언제 죽어버려 도 상관없는 미물입니다. 게다가 난폭한 블루 드래곤, 거기다가 해츨링 의 시체까지 앞에 둔 블루 드래곤 아닙니까?" "이런…!" ================================================================== 10. 약속된 휴식……19. 카알은 낭패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골치 아픈 경우가 다 있나. 샌슨이 눈에서 불똥을 튀기면서 말했다. "모두 얻거나, 모두 잃거나입니다. 레니양. 걱정하지 말고 거절해요. 제가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그러자 카알은 곧 혀를 찼다. "이건 드래곤 슬레이어 나오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네, 퍼시발군!" 카알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레니는 어쩔 줄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 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뭔가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다. 레니는 고개를 휙 돌려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저, 지골레이드님." 해츨링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지골레이드는 한숨처럼 말했다. "말하라." "제가 거절하면, 우리들을 다 죽이실 건가요?" 우리는 바짝 긴장해서 지골레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골레이드는 쌀 쌀맞게 말했다. "네가 거절한다면 난 여전히 자유로운 드래곤이다. 너희들과의 우정의 의무가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저 놈, 우릴 죽일 모양이군! 그 때 어디선가 바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것은 길시언의 입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길시언, 희한한 소리를 내시는군요? 길시언은 목청껏 외쳤다. "네가 어떻게 자유로운 드래곤인가!" 어라? 길시언,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지골레이드는 그 커다란 목을 길시언에게 휘었다. 저 커다란 목이 휙휙 움직이는 것을 보니 정신이 하 나도 없는걸. "지골레이드라는 이름이 널 가리킨다면, 넌 바이서스 왕가의 드래곤이 다! 캇셀프라임이 그러하듯이 넌 왕의 드래곤이란 말이다!" 뭐라고?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로 지골레이드를 곧장 겨냥하면서 말했 다. "너! 넌 분명 돌맨 할슈타일을 너의 라자로 가질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자유로운 드래곤인가! 어찌하여 네가 자이펀과의 전선이 아닌 이 곳에 있다는 말이냐!" 돌맨 할슈타일? 할슈타일… 지골레이드? 잠깐, 잠깐만. 생각을 좀 정리해보자고. 그랜드스톰에서, 그래. 그렇 다. 할슈타일가의 돌맨, 분명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이펀과의 전선에 서 싸우고 있다지? 돌맨은 역사상 최약의 드래곤 라자라지? 어, 어쨌든 그렇다면 저 지골레이드는 드래곤 라자를 가진 드래곤이다. 그런데 저 드래곤이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지골레이드는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누구지?" "네가 날 보았을 때는 내가 아주 어릴 때였지. 지금과는 모습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릴 때의 모습이 조금 남아있나 보군." 지골레이드는 다시 그 거대한 목을 숙여 길시언에게 향했다. 길시언은 놀란 얼굴이 되어 프림 블레이드를 거세게 들어올렸지만 지골레이드는 괘념치 않았다. 묵묵히 길시언을 바라보던 지골레이드는 말했다. "그렇군. 누구인지 대충 짐작하겠군. 그 망나니 왕자로군? 너희 인간들 은 너무 빨리 자라는군." 지금은 웃으면 안되겠지. 하지만 웃고 싶은걸. 길시언은 불만스러운 얼 굴로 말했다. "날 기억한다면 내 말에 대해 대답해서 바이서스 왕가의 적손인 날 설 득해라! 왕의 드래곤이여!" 지골레이드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그게 꼭 웃는 것 처럼 보였다.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휘이익! 갑자기 시야 오른쪽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 식간에 우리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때문에 머릿카락이 다 뽑 혀 나갈 것 같다. 위이이잉!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간 지골레이드의 꼬리 는 절벽에 부딪혔고 거대한 진동음이 울려퍼졌다. 콰아아앙! 오늘은 정말 가만히 서있는다는 지극히 간단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 힘 든 날이군. 난 엎드린 채 땅에 부딪힌 코를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옆에서는 네리아가 나와 비슷한 자세로 엎드려있었다. 좌 르르르르. 지골레이드의 꼬리에 강타당한 절벽에서 돌멩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내렸다. 조금 앞쪽에 있던 길시언은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 지만 떨리는 턱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길시언은 흐르는 땀 때문에 달라붙은 머릿카락을 거칠게 떼어내었다. 지골레이드는 호통치듯 말했다. 그냥 말해도 호통치는 것 같다.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왕의 드래곤이라고? 허튼 소리! 난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무, 무슨 말인가? 설명해… 주시오." 지골레이드는 날카롭게 말했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는 양자의 동의에 의해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 덜떨어진 녀석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녀석과 계약을 할 때부터 였다! 숙명의 잔혹함이 일신을 구속하게 된 그 때부터! 그리고 나의 자 식이 생겼을 때 이후로는 매일같이 떠나게 해달라고…" 지골레이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구슬픈 눈빛으로 해츨링을 바라보았다. 우리들도 잠시 숙연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골레이드는 다시 우 리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여태껏 놈이 동의하지 않아서 떠날 수 없었지." 카알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돌맨 할슈타일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떠나실 수 없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지금은…?" 지골레이드는 음울하게 말했다. "녀석이 동의했다는 말이지. 그래서 난 나의 자식과 함께 어리석기 짝 이 없는 그 인간들의 전쟁이라는 것을 등질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넌 더리가 났지만… 무엇보다도 고귀한 내 자식이… 인간들의 쓸모 없는 싸 움박질을 보지 않게 된 것이 가장… 즐거웠다." 지골레이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포효했다. "소중한 시간은 어찌 이리도 빨리 끝난다는 말이냐아! 유피넬과 헬카네 스의 딸 시간이여! 이것은 너무 잔혹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귀가 이상해질 것 같군. 목소리만으로 땅을 울리게 만드는 존 재하고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했어. 제기랄. 지골레이드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우릴 내려다보았다. "나의 자식의 살해자도 틀림없이 인간이겠지!" 어? 어? 섬뜩한 기분이 드는데? "너희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교만하게 두 다리로 서 감히 하늘을 쏘 아보는 너희 간악한 놈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오! 저 소녀가 거절한다 면!" 지골레이드는 무서운 눈으로 우릴 노려보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저 소녀가 거절한다면!" 제길! 압력을 가하면 터지는 법이야! 난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속에 서 악쓰는 소리가 막을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레니가 거절하면! 나 역시 너에게 우정의 의무가 없다! 난 자유로운 인간으로 너 같은 이상 비만 도마뱀을 죽일 수 있다구!" 지골레이드는 날 내려다보았는데 저 표정은 아무래도 드래곤식으로 어 처구니 없다는 표정일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결심을 굳힌 얼굴이 되었 다. 네리아는 떨면서 트라이던트를 들어올렸다. "쓸쓸한 죽음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야." 엑셀핸드 역시 배틀 엑스를 꽉 움켜쥐었다. "선조들께서는 지하의 곳곳에서 드래곤과 맞서 싸우며 아름다운 동굴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피는 불민한 후손인 나에게까지 흐르고 있다." "길지 않은 생. 화려하게라도 끝내면좋겠지요." 아프나이델은 만사 포기한 얼굴이 되어 그렇게 말했고 반대로 제레인트 는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신나는 표정으로, 오, 맙소사. 신나는 표정이라니. 아무리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테페리의 프리스트라지만. 어 쨌든 그런 표정이 되었다. "세피아파인 고개, 제레인트의 파멸. 노래 하나 될 거야. 이런, 제기 랄! 안타깝게도 목격자가 없잖아?" 운차이는 우리를 쏘아보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미친 북부 놈들." 하지만 그 역시 롱소드를 힘있게 들어올렸다. 카알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우리들을 돌아보며 어이없는 표정 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여태껏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샌슨 에게 말했을 때 난 웃고 말았다. "퍼시발군. 레니양을 부탁한다. 우리가 혈로를 뚫겠다. 레니양을 갈색 산맥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카, 카알!" "반대는 용납하지 않아. 경비대장 퍼시발! 나는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 리인이다. 레니양이 갈색산맥에 도착하지 못하면 대륙 전체가 끝장이다. 자네가 여기선 가장 빠르니 자네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카알은 활을 들어올렸다. 샌슨은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아대기 시작했다. 레니는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모르고 주위를 둘 러보았다. 지골레이드는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우리를 내려다보 았다. "그 불쌍하도록 작은 머리가 미치기까지 했군…" 윽. 저 자식이 목숨 팽개치고 싸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지는 못할 망 정. 레니는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갑자기 외쳤다. "아, 안되요!" 우리들은 지골레이드에게 무기를 겨눈 채 경악한 눈을 레니를 바라보았 다. 놀란 나머지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하는 가운데레니는 서슴치않고 외치기 시작했다. "저, 전 당신을 받아…" "레니양." 레니를 말린 것은 지금껏 조용히 있던 이루릴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레니의 어깨를 짚었다. 레니는 말을 멈추고는 눈물로 범 벅이 된 얼굴을 들어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말했다. "저 사람들은 당신을 갈색산맥으로 보내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 습니다. 당신이 거절하면 저 사람들은 외진 산길에서 드래곤을 만난 여 행자. 따라서 모두 죽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쓰지 말아요." "예…에?" "당신이 승낙하면 그것은 당신 속에 있는 저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 다. 전 대미궁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아니, 그 전부터 저들과 함께 하 면서 배워온 사실이지요. 당신에게 기대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망을 뿌리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루릴 언니…" "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일스까지 당신을 찾아가고, 그리고 영원의 숲으로, 대미궁으로 당신을 따라갔는지를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어차피 목숨을 돌보면서 당신을 추적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것 같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대답은 오래 전에 이미나와있 는 것이 아닐까요?" 레니는 이루릴을 망연히 올려다보았고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레니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지골레이드를 올려다보았고 지골레 이드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고는 간신히 말했다. "저, 저, 전 다른 드래곤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나도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 그래서…" 레니는 다시 말을 끊고는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 랐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난, 저, 죄송해요. 이런 이야기, 언짢으시겠지만…" "말해라." "그러니까. 어, 전 그동안 쭉 생각했었어요. 밤에 모포에 누울 때, 아 침에 눈을 뜰 때, 네리아 언니의 등 뒤에 앉아서 말을 달릴 때. 드래곤 의 라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어요." 난 조용히 레니를 바라보며 놀람에 젖어드는 가슴을 달래었다. 그렇군. 레니는 당사자야. 난 그녀는 당연히 드래곤 라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단지 어떻게 갈색산맥에 도 착하는가 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였지. 하지만 레니는 다르겠군. "이 분들은 저를 데리고 가면서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들려주지 않았어 요. 드래곤을 부리게 되면 큰 돈을 구하겠다느니, 나라를 세우겠다느니, 그런 말씀들이 전혀 없었어요. 마치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 았어요. 그래서 저도 드래곤 라자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레니는 잠시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 분들은 그저 절 그곳에 데리고 가서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을 만나 게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행동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아 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구나, 시시하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골레이드는 말없이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점점 호흡이 힘들어 지는지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전 지금 알게 되었어요. 아니, 한 가지는 알게 되었어요. 여기 이 분들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한다는 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건 대단히 중요한 일일 거에요. 그러니까 저같은 계집애는 상상도 할 수 없 을만큼 중요한 일일 거에요." 레니는 마지막으로 비명을 토하듯이 급하게 말했다. "저, 그래서, 당신의 라자가 될 순, 그럴 순 없어요. 하지만 우릴 죽이 지 말아요!" 좋았어! 레니, 허락한다면 키스해주고 싶은데? 전투 준비! 이제 아무나 돌격 신호만 외치라고. 그럼 죽으러 달려갈 테니까. 긴장된 근육은 끊어 져나갈 듯한 느낌을 보내왔고 심장은 쾅쾅거렸다. 입안에서 단내 같은 것이 나며 머릿속은 윙윙거린다. 호흡을 고르자, 호흡을. 난 바스타드를 가볍게 쥐기 위해 애썼다. 어느 부위를 노리고 들어갈까. 흠. 덩치가 크 니까 때릴 곳도 많군, 그래. 어떻게 쳐도 빗나갈 염려는 없는걸? 지골레이드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 차례인가." 좋아, 시작할까? 세피아파인 고개. 후치의 파멸, 그 멋진 시작이다. "누가 나의 자식을 죽였는가. 말한다면 너희들을 고이 보내주겠다." 이제 돌격! 아니아니, 정지! 정지! 잠깐, 뭐라고? 고이 보내준다고? 우리는 당황하여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드래곤이 우리에게 조 건을 제시하는 것인가? 우리를 찢어발겨서 진실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흥정을 시작하는 것인가? 우리같은 미물에게? 카알은 활을 내 리며 말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신 뜻은…" 카알은 말을 맺지 못했다. 팽팽해진 물주머니가 터지듯이 네리아의 목 소리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리치몬드요! 마법사요! 새카만 마법사요! 그러니까 리치몬드인 리치 요! 아니, 리치인 리치몬드요! 에엑! 이름이 리치몬드니까 아마 애칭도 리치일 거에요! 그러니까 리치요! 리치인 리치요!" 모든 사람(엘프, 드워프, 그리고 드래곤도 포함한다.)들의 시선이 네리 아에게로 쏠렸다. 지골레이드는 호통을 쳤다. "도대체 몇 명인가!" 네리아는 겁먹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리치몬드요오…" "그건 누구인가?" "마법사인데요. 그 녀석이 갑자기 우리 앞에 저 해츨링을 던지고 날아 가버렸어요.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어느 방향으로?" "저어기, 저쪼옥…" "알았다." 지골레이드의 고개가 휘익 움직였다. 그는 땅에 떨어져있던 해츨링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땅에 떨어져있던 해츨링의 시체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산들바람들이 몰려와 낙엽을 떠오르게 만들듯이, 그 시체는 부드럽게 떠올라 지골레이드의 머리 높이까지 떠올랐다. 해츨링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떨어진 물방울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드래곤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다. 크라드메서가 미드 그레이드를 황폐화시키다가 붉은산 맥으로 날아갈 때 눈물을 흘리며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 10. 약속된 휴식……20. 그리고 지골레이드의 날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밤하늘을 가려가는 날개,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듯한 날개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침내 지 골레이드의 날개가 절벽 위의 하늘을 거의 가려버렸다. 거센 광풍. 그리고 지골레이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은 말이 야! 도대체! 시무니안은 얼마나 신경질이 날까. 저런 거대한 몸이 제멋 대로 땅에서 떠오르다니. 어쨌든 지골레이드는 그렇게 말도 안되도록 떠 오르기시작했다. 그가 떠오름에 따라 해츨링의 시체 역시 똑같이 떠올 랐고 우리는 바람에 흩날려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말들은 다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골레이드는 계곡 위로 떠올랐다. 공중에서 잠시 멈춰선 지골 레이드는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소년. 나에 대한 호칭, 재미있더군." 소름이 쫙 돋으면서 동시에 얼굴이 붉어지니까 기분이 정말 이상한걸. 지골레이드는 조용히 웃었다. "하하하하…" 지골레이드는 그렇게 웃더니 곧 리치몬드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밤하늘을 붉게 물들일 것만 같은 불길이 쏟아졌다. 그리고 포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단언한다! 리치몬드는 지골레이드에게 죽을 것이다! 유피넬과 헬카네 스도 이를 막진 못할 것이다!" 잠시 후 그 거대한 몸은 절벽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굉장한 날개짓 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계곡을 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도 잦아들더니 이윽고 계곡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만 남게 되었 다. 고요한 밤이다. "갔네?" 제레인트의 말소리. 왠지 섭섭하다는 느낌이 스며있다. "갔군." 이건 엑셀핸드의 말로서 허탈한 기분이 스며있었다. "갔어!" 이건 네리아다. 네리아는 곧장 샌슨의 손을 덥석 잡더니 빙글빙글 돌면 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갔어! 갔어! 살았어, 살았다고! 으핫하, 핫, 으하하하!" 나머지 일행들 모두의 고함소리. 모두들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이루 릴은 레니의 어깨를 그러안았고 레니는 이루릴을 껴안은 채 펑펑 울고 있었다. "죽는 줄, 죽는 줄 알았어요! 으아아아앙!" 카알은 고개를 숙인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길시언은 이마를 닦으며 검을 꽂아넣었고 아프나이델은 결국 주저앉아서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 로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살았어. 후우우." 갔어! 블루 드래곤은 그냥 가버렸어! 이야호! 난 엑셀핸드의 손을 붙잡 고 말도 안되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으│으│! 방아소리 요란한데! 우라차차!" 노래를 이상하게 바꿔불렀지만 상관 없었다. 엑셀핸드 역시 시뻘건 얼 굴로 전혀 알아듣지 못할 드워프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고 있었기 때문 에 내 노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살았어! 엑셀핸드를 다시 말 뒤에 태워 출발하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 다. 그는 원래 드래곤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난 드워프는 반드시 노래 100 곡을 불러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으니까. 어쨌든 우리들은 간신히 진정하고는 다시 세피아파인 고개를 횡단할 준비를 갖 추었다. 출발 직전, 말 위에서까지 노래를 불러대고 있던 엑셀핸드가 말 이 갑자기 출발하자 그대로 굴러떨어지는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그런 대로 부드러운 출발이었다. 모두들 너무 웃고나서 힘이 빠진 상태였지만 살아났다는 기쁨 하나만으 로 힘차게 말을 출발시켰다. 샌슨은 심술궂은 얼굴로 말했다. "리치몬드 녀석,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군. 블루 드래곤에게 쫓겨다니 게 되었으니 따분할 틈은 없겠는걸?" 모두들 쾌활하게 웃었다. 말을 천천히 걸리면서 카알은 길시언에게 말 했다.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드래곤이 우리같은 미물에게까지, 뭐 그는 그렇게 생 각할 테니까요. 어쨌든 논리로써 대해준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습니 다." "예. 그런데 말입니다. 지골레이드가 자유로운 드래곤이 되었다는 것, 신기한 일이군요." "그렇습니다. 도통이해할 수가 없군요. 돌맨이 왜 계약을 파기한 것일 까요?" "양자 모두의 동의가 아니면 그 계약은 불가침이라지요? 지골레이드의 경우는, 조금 전 나눠본 이야기로는 그 드래곤 라자로서의 권능이 약한 돌맨에게 매어 있는 것이 싫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식을 위해서도 자유로 운 드래곤이 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맨은 왜 그것을 허락해 주었을까요? 자이펀과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드래곤을 자의로 풀어줄 수 는 없을 텐데요." "예. 그가 혹 지골레이드의 요청을 받아줄 마음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전선 지휘관들이 허락해 줄 까닭이 없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으음. 정말 이상한 일이군. 지골레이드는 최전선에 있어야 되는 드래곤 인데 왜 자유로운 드래곤이 되어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지? 왜 돌맨은 그 를 자유롭게 놓아준 것이지? 길시언은 갑자기 후미에서 걸어오던 운차이 를 바라보았다. "이봐, 운차이. 자이펀쪽에서는 지골레이드를 어떻게 평가하지?" 운차이는 음울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출격 정보는 1급 비상사태였다. 하지만 자주 있지는 않 았지." "자주 있지는 않았다고?" "난 주로 바이서스 내부에서 활동해서 정확한 정보는 모른다. 하지만 듣기로 지골레이드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싸웠던 것 같지는 않다. 드래곤 은 하늘을 날 수 있고 벼락을 뿜는다. 그 이동속도를 따라잡으면서 반격 을 준비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하지만 아직껏 자이펀이 바이서스와 대 등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본다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흐음. 그도 그렇군. 지골레이드는 확실히 달갑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 었단 말이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맨이 그를 자유롭게 놔줬다고? 이해하기 어렵군." "저… 몰래 놔준 것이 아닐까요?" 내 질문에 카알과 길시언은 날 바라보았다. "저, 디트리히 할슈타일 말이에요. 캇셀프라임의 라자였던 소년. 그 소 년은 캇셀프라임이 굶고 있으니까 밤중에 산 속을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 하지 않던데요. 라자는 드래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돌 맨 할슈타일도 지골레이드가 측은해서 놔준 것이…" 카알은 빙긋 웃었다. "글쎄. 그럴듯한 추리로군, 네드발군. 하지만 밤중에 산 속을 뒤지는 것과 지골레이드를 함부로 전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전쟁터에서? 아냐, 네드발군. 아무래도 이상해. 옆에서는 많은 병사들 이 죽어가고 있어. 그 상황에서 죽을 염려도 별로 없는 드래곤이, 단지 싸우기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물러나게 허락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 해."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레이셔널 셀렉션 위에 앉아있는 이루릴을 돌아보 았다. 이루릴은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살아난 것이 별로 기쁘지도 않은 것 인가? "이루릴, 왜 그런 얼굴이세요?" "예? 아, 그 자의 다른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다른 이름이라고? 어, 그렇군. 그러고보니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는걸. 리치몬드가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렸었는지를. 으으. 이거 고민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로군. "천천히 고민하지요. 음. 일단은 살아난 것을 기뻐해야 되는 거 아닐까 요?"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굳은 표정이 되었다. 계곡을 빠져나와 다시 숲 사이로 난 길을 지나게 되었을 때, 이루릴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저,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 다. "저, 여러분과 헤어져야겠습니다." "예?" 샌슨이 비명처럼 말했다. 어, 어? 무슨 말이야? 제레인트는 눈을 동그 랗게 떴고 네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이루릴 언니?" "어, 세레니얼양?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루릴은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그 리치몬드를 쫓아가고 싶습니다. 그가 과연 누군지를 확인해야겠 습니다." 카알은 당장 이맛살을 찌푸렸다. "리치몬드가 핸드레이크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프나이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길시언과 엑셀핸드도 당황한 표정이되었다. "어, 예? 핸드레이크라니오?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프나이델의 질문에 카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짧게 설명할 수 있 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천천히 설명드리겠소. 그런데 세레니얼양. 단지 그가 리치라는 이유만 으로 그를 핸드레이크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루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확인해야 됩니다. 만일 시간 이 늦어 리치몬드가 지골레이드에게 살해당한다면 영영 확인할 길이 없 을지도 모릅니다." "허어, 이런…" "만일 그가 핸드레이크가 아니라면, 곧 여러분들에게로 돌아오겠습니 다." "저에겐 세레니얼양의 자유를 간섭할 권한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껏 함께해주시고 도움을 베풀어 주신 것에 고마워해야 마땅한 일이지요. 알 겠습니다." 네리아는 울상이 되어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갈 거에요?" "예. 네리아. 제가 여행을 시작한 목적이었으니까요." "알겠어요. 응…. 하지만 저 못된 마법사가 핸드레이크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확인하지 않은 이상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하지만 헬카네스는 문제 옆에 열쇠를 숨기는 법이지요." "드래곤 로드의 말이오?" "예." 이루릴은 다른 사람들과도 모두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샌슨은 말이 제 대로 나오지 않아서 그저 간단하게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 다. 엑셀핸드는 잘가라고 말했고 아프나이델은 만나자마자 헤어져서 섭 섭하다고 말했으며 제레인트는 곧 다시 보자고 말했다. 나는 뭐라고 했냐고?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그러자 이루릴은 방긋 웃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그리고 이루릴은 레이셔널 셀렉션을 되돌렸다. "갈까요, 레이셔널 셀렉션." 푸르르릉. 이힝힝! 레이셔널 셀렉션은 전혀 밤새도록 걸어왔던 말답지 않았다. 레이셔널 셀렉션은 앞발을 높이 구르더니 곧 힘차게 달려갔다. 이루릴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벽 옆을 따라 난 숲 속으로 사라 져갔다. 잠시 후 숲속에서 들려오는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들려오 다가 그것마저 사라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나자 엑셀핸드가 투 덜거리듯 말했다.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군." "다시 만날 테니까 떠날 때 시간을 끌 이유는 없습니다." 길시언의 대답이었다.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램프를 꺼내면서 다시 한 번 이루릴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았 다. 주위와 똑같이 캄캄한 숲이었지만, 왠지 다르게 보인다. 난 입맛을 다시면서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거 드워프제잖아! 300년 전의 디자인이야!"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 아, 이 램프 대미궁에서 가지고 나온 거였지? 우리 등 뒤로 동쪽하늘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갈 무렵, 우리는 밤새도록 달려서 겨우 세피아파인 고개를 넘게 되었다. 주위는 약간 파르스름한 빛이 도는 아침 안개가 꿈결처럼 흐르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훤칠한 적송들이 언듯언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를 반복하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아침 공기는 촉촉했다. 안개 속을 걸어가는 우리 일행의 모습은 유령처럼 보였다. 뚜걱거리는 말발굽 소리도 안개 속으로 사라져 희미해져갔다. 모두들 밤새도록 달려 서 피로한 모습이었다. 레니는 네리아의 등 뒤에서 졸고 있었고 네리아 는 레니의 앞에서 졸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에보니 나이트호 크마저도 졸음에 겨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등 뒤로 뜨끈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지나 온 세피아파인 고개 위로 아침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카알에게 말했다. "음냐, 쩝. 그런데 그 자는 왜 리치가 되었을까요?" 카알은 잠시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글쎄. 역시 죽음이 두려워서이지 않을까." "글쎄.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에 의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요,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 때 졸고 있던 네리아가 갑자기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약간 부은 눈 을 비비면서 말했다. "아, 그거. 어젯밤에도 들려주시려다가 말씀하지 못했지요. 으하아암. 냥냥, 대왕이 뭐라고 했는데요?" 카알은 미간을 문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아, 예. 네리아양. 대왕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카알은 웃으면서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 하지만 범죄에 속할만큼 아름다운 나이트호크는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 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 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 있다." "휴식이 약속되어… 죽음이?"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요." 네리아는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거리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럼 죽음이 축제라는 말이에요?" 네리아의 톡 튀는 듯한 질문 방식에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축제가 일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일상의 괴로움을 모 두 잊고 자신마저도 잊을 수 있는 의미에서의 축제라면 죽음은 곧 축제 인 셈이지요." "…너무 어려워요." 엑셀핸드의 굵은 눈썹이 희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난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난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아침해가 떠오르는 세피아파인 고개 를 올려다보았다. 네리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약속된 휴식이라…"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 …저 용맹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마저도 때로는 그의 어린 종자 후치 네드발의 도움을 받았다는 믿을만한 기록들이 있 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신빙성 없는 자료로 생각 하곤 하는데, 한낱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던 후치 네드발이 세상에 그 이름이라도 전하게 된 것은 오로지 위대한 샌슨 퍼시발이 그를 가엾게 여겨 종자로서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 서 수많은 옛노래와 가인들의 하프에서 울려퍼졌던 진리를 다시 한 번 밝힌다. 가장 현명한 자도 때로는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배울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현명함을 더 욱 빛나게 할지언정 그 광휘를 줄어들게 하지는 않는 법이 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12 권. P. 15 (770년 돌로메네 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맹렬히 일어나는 먼지 구름의 모습이 보였 다. 이 광막한 황야에서 먼지 구름은 1,000 큐빗 거리까지 계속되고 있었 다. 저 뒷쪽의 먼지구름은 하늘로 솟구쳐오르면서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우리 바로 뒤에서 일어나는 짙은 먼지구름은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흡사 먼지구름이 우리를 추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랴! 하, 하! 하! 하! 하아아!" "달려라! 이스트 그레이드를 단숨에 돌파하라!"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선두에서는 다부진 황소가 일행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렇다. 황소다. 그리고 그 위에는 건장한 전사가 앉아서 목청껏 고함을 질러대며 기세를 복돋우고 있었다. 길시언과 썬더라이더다. 썬더라이더는 쭉쭉 뻗어나가 는 발로 대지를 힘차게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뒷쪽으로는 날씬한 여도적, 그리고 여행 초보자의 모든 특징 을 다 보여주고 있는 소녀가 거대한 흑마에 탄 채 달려가고 있었다. 네 리아와 레니, 그리고 에보니 나이트호크다. 길다란 트라이던트를 안장 옆으로 느긋하게 빗겨들고등 뒤에 소녀를 태운 채 붉은 머리를 나풀거 리며 달려가는 네리아의 모습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 같았다. 그녀의 옆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다부진 전사와, 그에 비해 볼 때 가냘 파 보이는 프리스트를 태운 거대한 말이 다리가 보이지 않도록 달려가고 있었다. 샌슨과 제레인트, 그리고 슈팅스타. 샌슨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 러대고 있었고 그 고함 소리를 듣는 말들은 마왕의 소환을 받은 악마들 처럼 질풍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로브를 걸치고 약간 피로해 보이지만 그것이 원숙 미를 더해주는 얼굴의 마법사가, 원숙함이 넘치는 얼굴이지만 파랗게 질 려있어서 그 원숙미를 대폭 삭감시키고 있는 드워프를 등 뒤에 태운 채 쭉쭉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 그리고 세레니얼… 이 란다. 아프나이델이 수도에서 타고 온 말인데, 거 참. 이름이 왜 항상 저렇지? 그들의 오른쪽으로는 꿰뚫을 듯이 날카로운 눈의 전사가 입을 꾹 다물 어 강직한 성격을 마구 노출시키면서 고삐를 놀리고 있었다. 운차이와 앰뷸런트 제일이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꿰뚫릴 듯이 부드러운 눈의 독서 가가 입을 꾹 다물어 먼지를 마시지 않기위해 애쓰면서 달리고 있었다. 카알과 트레일이다. 그리고 일행의 후미를 지키는 남자.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막아낸 자' 라고 할까? 어쨌든 느린 풍문의 속도 때문에 아직 그 위명이 대륙에 퍼 지지 않았을 뿐 영웅의 모든 자질을 갖춘 불세출의 전사가, 그 사자와도 같이 들끓는 피를 굴복시켜 양처럼 순하게 만들어버린 고귀한 레이디의 이름을 딴 용맹한 말에 탄 채 달려가고 있었다! 아! 젠장! 요 따위로 말해봐도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아! 제일 뒤쪽에서 달리니까 일행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는 모조리 내 입으로 들어온단 말이 다! 일행의 말들이 갈겨대는 똥도 모조리 내 앞으로 떨어지고!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지평선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우리 뒷쪽으로 아 스라하게 보이던 붉은산맥도 이제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한없이 넓은 이 스트 그레이드의 평원을 쉴새없이 달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먼지 구름은 하나의 산만큼이나 거대했지만 이 넓은 평원에 비해보면 한 줌 티끌처럼 보인다. "하아, 하아, 하앗!" "에, 에, 에하! 타!" 머리 위로 부드러운 구름들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도 한없이 넓어 구름은 길을 잃고 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람과 우리 외 에 모든 것들이 정지해 있는 듯한 평원은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선두의 길잡이가 외치는 쾌활하고도 힘찬 응원에 고무되어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갔다. 기수들은 물론이거니와 말들도 분명히 지치지 못할 것이다. 자존심 문 제니까. 샌슨의 등 뒤에서 제레인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황소의 뒤를 따라가지도 못한다면, 그게 말이냐아!" "이힝! 힝힝힝히!" 아프나이델은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는 주의깊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 들이 지치는 기색이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로브 자락 속으 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 이상하게 생긴 고약 같은 것을 허공으로 던지며 캐스트를 하곤 했다. "스트렝스(Strength)!" 그리고 그 때마다 말들은 새로운 힘을 얻어 고고성을 터뜨리듯 포효했 다. 그리고는 바람마저 따돌려버릴 속도로 달려나가곤 했다. 아, 물론 그렇게 말들이 급가속할 때마다 엑셀핸드는 구슬픈 비명을 질러대었다. "오우, 카리스 누멘! 신실한 드워프를 돌보소서!" 풀썩. 말발굽이 땅을 밟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난다. 거친 황야 가운데 서있는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막막한 대지 위에 한 점 얼룩처럼 자리잡은 도시였다. 주위는 온통 황야였고 그 황야에서 불 어오는 바람은 엄청난 양의 흙먼지를 아낌없이 도시에 퍼부어대고 있었 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그 회색의 성벽은 희미하게 보였고 게다가 저녁무렵이라 햇빛의 양도 부족했다. 춤추는 먼지들과 붉은 햇빛 때문에 성벽 전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 만들어진 성 같아. 콜록!" 네리아의 잔뜩 쉰 목소리.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땀에 절어붙은 먼지가 턱 아래를근질거리게 만들었다. 힘없이 손을 들어 머리를 긁어 보았지만 손가락에는 머릿카락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걸렸다. 대장장이의 모루만큼이나 질기고 강인한 의지로,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하프현보다 더 곧은 직진을 게속하여, 우리는 그 날 해를 추적하며 12 시간 동안 장장 24 펜큐빗의 거리를 주파했다. 그리고 지금 석양 무렵, 우리는 해를 따라 달려와 석양이 마지막으로 스치는 도시에 이르른 것이 다. "쿨럭쿨럭, 뭐하는 도시지?" 카알 역시 잔뜩 쉰 목소리였다. 샌슨은 배낭을 꺼내더니 먼저 그 위에 쌓인 먼지를 거칠게 털어내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자 그 옆에 있던 길시언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날 묻어버릴 작정이오? 지도를 꺼낼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여기가 어딥니까?" "칸 아디옴입니다. 이스트 그레이드의 중앙 도시." "흐음. 이런 곳에 어떻게 도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군요." "교역도시지요. 이스트 그레이드의 여행자들이 들리면서 만들어진 도시 입니다." "아아. 물이라도 나오나 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색의 여행자들이 되어 칸 아디움으로 들어섰다. 성문에 접근하자 성문 옆에 놓여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지나가던 통행 인을 감시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은 모두 포챠드를 들고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마도 햇빛과 먼지를 막기 위한 것 인가 보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중 한 병사가 일어나더니 말했다. "칸 아디움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행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우리들을 다시 관찰했다. 여행자치고는 구성이 정 말 희한하기 짝이 없으니까. 짐수레나 짐말 같은 것이 없으니 상인은 아 니고, 모두들 무장을 하고 있는데다가 지휘고하를 구분할 수 없도록 모 두 말에 타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황소에 타고 있는데다가, 드워프도 끼어있었고 마법사와 성직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 병사는 최선을 다해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모험가분들인가 보군요."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모험가는 들어가면 안됩니까?" 길시언의 밝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병사는 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렇게 많은 무장 인원이 도시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 니다." 그러자 일행 모두가 동시에 떠들기 시작했다. 허헛, 참. 모두들 쓰러져 죽을 듯한 얼굴이더니 잘도 떠드네. 네리아가 얼굴이 시뻘개져서 뭐라고 떠들긴 했는데 엑셀핸드의 고함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프 나이델은 세상의 종말 신호를 들은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카알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거의 떨어지는 것과 유사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려서서 발이 땅에 닿은 순간 제레인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 게 가만히 선 채 몸의 고통을 다스리더니 잠시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 다. "죽겠군…" 제레인트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로드를 지팡이처럼 짚고는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병사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 면 한 70살 먹은 노인이라고 오해되기에 적당한 걸음걸이였다. 그 동안 병사는 참으로 안스럽다는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처절한 표정으로 병사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신의 미력한 지팡이에게… 제발 하룻밤 쉴 자리와 목을 축일 한 모금 의 물을 빼앗지 말아주십시오." 병사는 이미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제레인트가 말하 지 않았어도 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과허락을 내주었을 것이다. "죽었어요?" "죽는다는 것이 불멸의 영혼만이 움직일 뿐 그 육신에 대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난 현재 죽어있어." 제레인트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관 주인장에게 장의사에게 연락하라고 말했다. 제레인트는 드러누운 채 무서운 신음소리를 뱉어내 었다. 지금 제레인트는 여행자들의 흙 묻은 발이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홀 바닥에 드러누워있다. 완전히 끝장난 술주정뱅이라도 이렇게 볼품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성스러운 프리스트의 옷을 입고 있는 제레인트가 그러고 있음에야. 하지만 제레인트는 땀 때문에 그 머릿결이 밧줄만큼이나 굵게 엉겨 있는데다가 몸을 좀 움직이기만 하 면 곧 자욱한 먼지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래서 여관 주인장도 프리 스트의 허물을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관 주인장은 융통성까지 제법 갖추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 러져 누워있는 제레인트의 몸을 보자 가볍게 건너 뛰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손에 든 맥주잔에서 한 방울의 맥주도 흘리지 않는 묘 기를 선보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맥주잔을 돌리면서 말했다.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오신 모양이군요."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쓰러져 있던 아프나이델은 여관 주인장의 말에 힘들게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가락 2개를 펼쳤다가 다시 4개를 펼쳤다. 여관 주인장은 큼직하고도 붉은 자신의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2 펜큐빗 4000 큐빗?"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위로 들어올린 손가락만 좌우로 까딱거렸다. "설마 24 펜큐빗?" 그러자 아프나이델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까딱거렸고 주인장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굉장한 일을 한 말들이니, 잘 좀 부탁합니다." "염려마시오. 말들은 임펠리아에 있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그 말에 우리 일행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여관 주인장은 설마 길시언 이 왕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여관 주인장은 우리의 미소를 제멋대 로 해석하고는 빙긋 웃었다. "엑셀핸드, 일어나요. 맥주 왔어요." 엑셀핸드는 급조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죽은 드워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노커라서 그런지 테페리의 프리스트처럼 바닥에 마구 드 러눕지는 않을 정도의 분별이 있는 엑셀핸드는 의자 두 개를 딱 붙여서 자신의 키에 들어맞는 침대를 만들어 누워있었던 것이다. 엑셀핸드는 참으로 드워프답지 않은 대답을 했다. "필요없어." 여관 주인장은 자신의 홀에 누워있는 드워프가 혹시 드워프처럼 생긴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하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긴, 드워 프가 맥주를 거절하다니. 문가에 서서 몸을 털고 있던 샌슨은 여관의 정문에 먼지 구름을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우리들 모두 이스트 그레이드의 먼지란 먼지는 모조리 몸에 덮어쓰다시피 한 상태였다. 샌슨에게 잔을 건네고나서 난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왔다. "허어억!" 하아! 카! 하루 종일 달려서 말라붙다시피 한 목구멍으로 맥주가 넘어 가니 목이 찢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술기운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머리 가 빙빙 돌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호롱불이 세 개로 보일 정도였 다. 카알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졸면서 맥주를 마시느라 옷에 상당량의 맥주를 흘려버렸다. 운차이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맥주잔을 든 채 엑셀핸드의 곁으로 걸어갔다. "이봐, 드워프. 담배 좀 내놔." 엑셀핸드는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뜨면서 운차이를 노려보았다. "이 놈이! 말버릇 한 번 고약타!" 그러나 운차이는 묵묵히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을 뿐이다. "주면 귀찮게 하지 않겠어." 그러자 엑셀핸드는 신음을 흘리고는 누운 채로 품 속에서 담배쌈지를 꺼내어 운차이에게 건네었다. 운차이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고맙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파이프는?" "크아아아악!"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꺼내어 운차이의 얼굴을 향해 던졌으나 운차이는 그것을 입으로 척 받아내었다. 여관 주인장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운차 이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발을 올리고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호롱불로 불을 붙이고나서 운차이 는 팔을 들어 머리를 받치며 느긋하게 연기를 뿜어올리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침착하게 운차이에게 말했다. "담배에 대한 보답으로 엑셀핸드씨를 침실로 좀 안내하시지?" 운차이는 물끄러미 길시언을 쏘아보더니 곧 가벼운 동작으로 벌떡 일어 섰다. 그는 의자 위에 있던 엑셀핸드를 마치 짐짝 다루듯이 들어올려 어 깨에 들어매었고 반항할 기운이 없는 엑셀핸드는 욕설만 줄기차게 해댈 뿐 잠자코 운차이에게 들려갔다. 둘이 침실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뭘 집어던지는 둔한 소리가 나더니 엑셀핸드의 비명소리도 좀 들려왔 다. 그리고 운차이는 손을 털면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파이프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로 바라 보자 운차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침대에 갖다놨으니." "…수고했소." 카알은 그렇게 말하고는 운차이의 옆에 나란히 엎어져버렸다. 그는 테 이블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웅얼거렸다. "나를 침실로 안내해줄 필요는 없소. …조금 있다가 내 발로… 걸어갈 테니… 그르렁!" 길시언은 애처로운 얼굴로 카알을 내려다보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후우. 피곤한 하루였소. 그래도 잘들 달렸습니다. 이제 수도는 하루 반 정도의 거리입니다." 샌슨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달린 것과 똑같이 달렸을 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맙소사. 내일도 오늘처럼 달린다니! 난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뜨여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샌슨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뿐이다. "내일도 굉장하겠군요." 굉장? 굉장이라고 했나? 난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 말들의 편자를 모두 뽑아놓고 싶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잠깐, 편자라고? 그렇지! "어, 우리야 괜찮지만 말들의 편자가 괜찮을까요?" 그러자 샌슨은 기특하다는듯이 날 바라보았다. "흠.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치. 내가 다 살펴보고 왔어. 괜찮더군." 아아아! 망할! 말들이 모두 감기라도 걸려서 쓰러져버리면 좋겠다! 난 샌슨에게 힘없이 웃어준 다음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 때 홀 한켠의 문 이 벌컥 열리면서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2. "후치! 후치야. 나 좀 도와줘!" "어? 왜 그래요?" 돌아보니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고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 와 레니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목욕탕으로 직행해버린 참이었다. 그런 데 왜 날 부르는 거야? "레니가 뻗어버렸어. 그런데 나도 힘이 없어서 못 일으키겠다고." "자, 잠깐! 그럼 지금 알몸이란 말이에요? 거절!" "아냐. 옷 다 입고나서 기절했어. 걱정말고 들어와." 난 넌더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다리가 풀려버릴 지경인데누 구를 부축하라는 거야. 네리아를 따라 욕탕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나무통 몇 개와 아궁이, 그리 고 아궁이 위에 놓인 커다란 가마솥 등이 보였고 바닥은 물바다였다. 흐 음. 틀림없이 물장난을 쳤으렸다. 다른 쪽의 긴의자에는 목욕을 끝낸 다 음이라 그런지 젖은 머리에 바알간 볼을 한 레니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 다. 아마도 앉았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것으로 짐작되는, 꽤나 귀여 운 모습으로 잠들어있었다. 하루 종일 뒤집어쓴 먼지들을 말끔히 씻어낸 다음이라 그런지 레니의 모습은 싱그럽고 촉촉하게 보였으며 게다가 목 욕통에서 방금 나와서 따뜻하기까지 했지만, 나에겐 끔찍스러울 정도로 묵직한 짐일 뿐이었다. 으으으! 레니를 업고 그녀들의 침실에 데려다주 는 길이 왜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내가 레니를 눕혀놓고 돌아오자 샌슨이 아프나이델을, 그리고 길시언이 제레인트를 부축하여 침실로 옮겼다. 결국 침대로 옮겨진 그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카알의 경우에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테이블 위에 쓰 러져 있도록 내버려두고는, 우리들은 욕탕으로 들어섰다. 욕탕에서 나와보니 저녁 준비가 되어있었다. 저녁 테이블에 남은것은 길시언, 샌슨, 운차이, 그리고 나와 테이블에 여전히 엎드려있는 카알뿐 이었다. 제레인트의 말에 따르자면 카알은 죽은 셈이고, 따라서 저녁식 사는 상당히 칼잡이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기이하게 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서 지골레이드의 해방이 의미하는 바는 몹 시 중대하오. 거기 소금 좀 줘." "여기 있어요. 음. 자이펀이 이미 선보인 무기, 그러니까 디바인 마크 를 이용한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위협이 현재하는 가운데 바이서스의 야 전 전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국면이라 할 것 같은데요. 샌슨! 식탁에서 제발 다리 흔들지 마!" "옳은 말이야, 후치. 쩝쩝, 따라서 지골레이드는 절대로 해방되어서는 안된단 말이야. 꿀꺽. 그런데 이미 해방된 채로 돌아다니고 있어. 전선 지휘관들이 돌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허락할 리가 없지. 이상하군. 야, 괴물 눈알! 네 생각은 어때?" "…질문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질문하면서 포크를 휘두르지는 마라. 이 인간 같잖은 녀석아." 여관 주인장은 대경실색해서는 우리들의 식사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차마 바라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괜히 닦은 테이블을 또 닦으면서 우리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길시언은 침울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빵을 위엄있게 쪼개면서 말했다. "카알씨가 제시한 해안봉쇄 전략이 성공할 수만 있었어도 전선의 걱정 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만일 그 계획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전선에서 적당 기간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었을 거요." "예. 무익한 희생을 상당히 줄일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의 발안자는 펠레일이라는 젊은 마법사였습니다." "흠. 그 마법사를 만나봤으면 좋겠군요. 이 상황에 대해 해석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거라면 내가 해줄 수도 있지." 길시언은 쪼개던 빵을 점잖게 내려놓았지만 샌슨은 물어뜯던 빵을 좀 튀겼다. 난 놀란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설명할 수 있다고요?" 운차이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스푼과 포크, 그리고 접시를 평행이 되게 놓았다. 그 동작은 완만하면서도 완성을 지향하는 엄숙함이 스며있었지 만 샌슨은 그 동작을 바라보면서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졌다.운차 이는 그 동작을 완료한 다음에도 다시 느긋한 동작으로 물컵을 들어올렸 고 그러자 샌슨은 기어코 포크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투창자세를 취했 다. "말하지 않으면 던진다!" "그럼 맨손으로 먹겠군." 운차이의 대답에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운차이는 그제서야 천천히 말 을 시작했다. "촛점을 옮겨보지."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촛점을 옮기다니?" "지금 지골레이드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군. 돌맨에게 촛점을 맞 추면 어떨까." "돌맨 할슈타일 말인가? 그가 왜?" "그 역시 현존하는 드래곤 라자다. 확실한 드래곤 라자이지. 더구나 지 골레이드를 놓아줌으로서 현재는 드래곤이 없는 드래곤 라자가 된 셈이 고." 길시언과 샌슨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 다. 운차이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내가 그 들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운차이의 생각은… 돌맨 할슈타일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운차이는 날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바보 왕자와 인간 같잖은 전사보다는 좀 낫다." 길시언은 이 냉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화를 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샌슨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이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운차이는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한 것이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붉은 머리 소녀, 즉 크라드메서 의 드래곤 라자를 찾고 있었다. 너희들이 찾아낸 그 레니 말이야. 그런 데 현재 레니는 너희들의 수중에 있다. 그렇다면, 할슈타일 가문에서 기 필코 크라드메서를 획득하고 싶다면, 게다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 를 뺏긴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하면 될까." 길시언은 빵이 목에 걸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지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대신 크라드메서를?"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 다. 길시언은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겼고 샌슨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는 구운 감자를 대상으로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이프로 감자를 이리 저리 찔러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샌슨은 나이프를 놓으 면서 말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되는 이유를 말해봐." "어, 그러니까, 에, 이거봐. 확실한 자기 여자 팽개치고 자기를 좋아하 지도 않는 여자에게 달려가는 남자는 바보 아냐?" …무슨 비유가 저래. 운차이는 더욱 심각한 경멸을 담아 샌슨을 바라보 았고 샌슨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당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뒤통 수를 긁으며 말했다. "에, 그게 아니라. 음. 잡은 토끼 팽개치고 다른 토끼를 쫓아가는 사냥 꾼은 바보다, 이런 말이야."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샌슨의 말이 맞아. 지골레이드는 할슈타일 가문의 드래곤이지 만 크라드메서는 그렇지 않아. 왜 확실한 자기 소유의 드래곤을 포기하 고 대신 불확실한 드래곤을 노린단 말이지?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그 계약은 쌍방의 동의에 의해 이루 어지고 쌍방의 동의에 의해 결렬되는 거잖아." 운차이는 냉랭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기 싫어하는 자는 얻는 것이 없지." "허어… 참. 그거. 지골레이드는 블루 드래곤이고 크라드메서는 크림슨 드래곤이니까? 지골레이드보다는 크라드메서가 더 좋다, 이 말인가? 그 거 왠지 어린애의 논리 같잖아."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테이블에 엎드려있던 카알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휘둘리는 느낌이군. 퍼시발군. 나 거기 맥주 좀 주게." 샌슨은 테이블 한 켠에 놓여있던 맥주잔을 카알에게 건네었다. 카알은 천천히 목을 축이고나서 말했다. "커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군. 큼. 에, 엎드려서 나누는 말씀 다 들 었습니다. 여러분. 내 생각을 말해보지요." 카알은 되도록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운차이씨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최선을 다해 레니양을 찾아왔지요. 하지만 현재로선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이오. 그러니 최후수단으로 돌맨 할슈타일로 하여금 크 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되게 하는 임시방편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요." "임시방편이라고요?" "지골레이드는 온전한 상태지만 크라드메서는 정신이 이상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길시언은 손을 딱 부딪혔다. 샌슨은 아직 이해를 못한 표정이 되었고 그러자 카알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도 대륙의 위기를 막아보려 한다는 거지. 그래서 지 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돌맨을 자유롭게 만든 다음, 그를 크라드메서에게 연결시켜 크라드메서를 안정시킨다는 말일세." "아…!" 음. 그렇긴 하네. 우리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으려 애쓴 이 유도 크라드메서가 돌아버렸을지 모르기 때문이지. 크라드메서는 드래곤 라자를 잃고 발광해버린 전력이 있고 여전히 발광한 상태라면 대륙이 위 험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대륙의 동쪽 끝 일스까지 달려가서 레니를 데 려온 거지. 그렇다면 할슈타일 가문에서도 대륙을 구하기 위해 지골레이드를 포기 하고 돌맨을 내세울 수도 있는 문제로군. 흐음. 말이 되는 거 같다. 나 는 테이블 위의 호롱불을 향해 고개를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그 토대가 좀 불안합니다.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 스트의 말씀에 의하면 돌맨 할슈타일은 역대 최악의 드래곤 라자라고 하 지요. 과연 그 최악의 드래곤 라자가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의 드래 곤 라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문제입니다." 으. 그게 문제인가? 길시언은 턱을 쓸면서 말했다. "확률이 약한 판에 걸고 도박입니까? 하지만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 같은 도박입니다." 카알은 관자놀이를 문질러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휘젖고나서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요.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라면 크라드메서도 획득하지 못한데다가 지골레이드도 잃고, 두 마리 토 끼를 다놓치는 경우의 전형적인 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하함. 설 령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는 지골레이드 의 대역은 될 수 없을 겁니다." "예?" "음… 크라드메서는 균형을 지키는 크림슨 드래곤입니다. 그가 인간의 싸움, 지골레이드의 말처럼 인간들의 쓸모 없는 싸움박질을 도와줄 거라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바이서스로서는 크라드메서의 안정은 얻게 되지만 전 선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겠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 가설이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그 때 운차이가 말했다. "바이서스로서는 그렇다는 말씀이시겠지." 운차이의 말은, 마치 따뜻한 방 안에서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힌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 길시언은 운차이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의미지?" "촛점을 다시 바꿔보자는 말이지. 왠지 오늘 저녁에 내가 하는 일은 그 것밖에 없는 것 같군." "촛점을… 어떻게?" "바이서스가 아니라 할슈타일 가문만을 놓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만 일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인다면 할슈타일 가문으로서는 지골레이드라는 투정 심한 드래곤 대신 미드 그레이드를 박살낸 전력을 가진 크라드메서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창문을 열어젖힌 듯한 운차이의 말 때문인지 테이블 위의 호롱불이 흔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시언은 어두운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숨겨진 의도는 상당히 기분 나쁜데." "당신 기분을 맞춰줘야 할 의무는 없어." "…할슈타일 가문은 바이서스의 안보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냐? 오로 지 더 강한 드래곤을 가지기만을 원한다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 "바이서스가 없다면 할슈타일 가문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길시언은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귀가 타버릴 정도 로 뜨거웠다. 하지만 운차이의 차가운 얼굴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웃기는군. 바이서스가 할슈타일의 존속에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할슈 타일 가문이 공신의 후손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운차이는 구태여 차갑게 말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은 진실 이었고 진실은 차갑다. 길시언은 자신의 입을 악기로 삼아 귀에 거슬리 는 음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차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은 원래 바이서스에 대해서는 반란자의 입장이었던 것으 로 알고 있는데. 그 가문이 후작의 이름을 가지게 되고 누대에 걸쳐 상 당한 권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 가문 출신들의 비할 데 없는 충성심 때문이었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멍청이 왕자?" "그렇지는 않다." 길시언은 여전히 똑바른 자세였지만 그 목소리는… 심리적으로 복부 아 래를 가격당한 기분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왕자님. 항상 속마음을 감 추는 데는 능숙하지 못하시군요. 당신은 너무 솔직해요. 어쩔 수 없군. 길시언이 지금부터 해야 될 말은 왕족으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말이겠지. 내가 대신 해야겠군. 난 맥주잔을 옆으로 조금 밀면서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운차이. 결국 힘이 있으면 만사 그만이다는 식의 간단한 처세술을 설 명하려는 건가요?" 운차이는 딱딱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가문은 강력한 드래곤과 그 드래곤을 조절할 수 있는 라자를 계속해서 배출할 수 있는 한, 결국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한 자신 들이 어느 깃발 아래에 무릎을 꿇는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길시언으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사도를 진창에 팽개 치는 말이니까. 길시언씨. 다음에 언제 나한테 한 번 그럴듯하게 대접해 야 돼. 운차이는 미소 비슷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똑똑하군. 그들이 계속 강력한 드래곤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그들은 자 이펀의 지배를 받아도, 헤게모니아의 지배를 받아도 상관없어. 그 나라 들도 바이서스의 경우를 좋은 예로써 따르겠지. 바이서스 왕가는 시조의 원수였던 그들에 대한 원한을 고작 4대만에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운차이는 지금 제 4 대 국왕 에리네드 전하의 북방정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리네드 전하는 드래곤 로드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토벌하고 북방 을 안정화시켰지만 할슈타일 가문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가문은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는 가문인 것이다. 그래서 에리네드 전하는 할슈타 일 가문에 대해 높은 지위를 보장하며 바이서스의 귀족으로 귀속시켰다. 실리 앞에서는 명분이 사라진다는 좋은 예인 것이다. 길시언은 운차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입을 조심하시지… 그 지하실의 그 약속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 어." 세상의 모든 전사들 중에, 아니, 세상의 모든 전사들을 만나보지는 못 했으니까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이 여관의 홀 안에서 저런 식의 협박에 대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인 것 같다. 운차이는 냉엄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지금 난 자유롭고, 무기도 가지고 있 다. 약속을 잊을 수 있는 것이 당신만의 특권은 아니지. 당신을 베고 도 주해버림으로써 나의 인생을 쾌적하게 만드는 것을 고려해볼 수도 있 다." 길시언은 일어날 뻔했다. 그는 거의 일어나며 테이블을 걷어차면서 프 림 블레이드를 뽑아들 뻔했다. 카알이 그 때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 게 했을 것이다. 장담해도 좋아! "그만들 하시오." 길시언은 홱 고개를 돌려 카알을 노려보았다. 카알은 깊은 눈으로 길시 언의 눈빛을 빨아들였다. 길시언의 호흡소리가 하도 거창해서 여관 주인 이 불안한 눈으로 우리들을 쳐다볼 정도였다. 카알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기운 없이 말했다. "상황과 행동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가 있고, 그 관계에 따라 그 사람 을 파악할 수 있다고들 하지오." 어, 어, 저게 누구의 말이더라? 길시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챠넬의 대답이군요." 아, 그래. 저 이야기는 챠넬의 말이로군. 제로딘이 챠넬에게 유능한 전 략가는 어떤 사람이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았을 때 챠넬이 대답한 말이 다. 상황과 행동의 관계는 첫째, 그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 는 자는 민첩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상황에 어울리려면 당연히 그 상황 을 폭넓게 이해하는 영리한 머리와 적절한 행동의 타이밍을 맞출 수 있 는 민첩성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민첩하기는 하지만 영리하지는 못하다. 악화시키 는 것도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민첩 하다는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영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호전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셋째, 그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동. 이런 행동 을 하는 자는 민첩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하다. 그리고 이 경우는 셋 중에 서 가장 나쁘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최소한현재 상황에서의 변화 를 의미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는 행동일 경우 행동에 투입된 시간과 물 자, 모든 힘의 낭비만 있을 뿐 현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흐 음. 이 정도면 나도 쓸만한 기억력이야. 하하하.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3.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처럼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5분전까지만 해도 상 황과 행동의 관계 중 첫번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소. 그런 데 지금은 세번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운차이는 천장을 노려보았고 길시언은 얼굴을 붉히며 카알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이 구절을 써먹어야겠군. 누군가 왕족으 로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길시언 바이서스는 거 기에 속한다. 그러나 누군가 왕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카알 헬턴트는 거기에 속한다. 오오! 나의 재능은 너무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발달해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던 토론은 카알의 일갈 때문에 완 전히 끝나버렸다. 길시언은 바람이나 쐬고 싶다는 형편없는 변명을, 그 것도 우물거리듯이 말하고는 홀 밖으로 나갔으며 운차이는 홀 구석의 긴 의자에 반쯤 드러눕듯이 앉아서 말없이 엑셀핸드의 담배쌈지를 축내기 시작했다. 샌슨은 의아한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히 굴뚝이네. 그렇게 계속 피우면 머리나 목 안아프냐?" "걱정해주나?" "아니. 네가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면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이건 드워프제야. 질이 좋은 거지." 운차이가 그런 식으로 버티고 있자 곧 여관 주인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 다. 그는 괜히 의자들을 밀었다 당겼다 하기도 하고 천장에 걸린 램프를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곧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손님. 난 이만 들어가 자야겠는데." 음. 여기는 외진 곳의 외진 여관이라 그런지 여관 주인도 일찌감치 잠 에 드는군. 지금까지 들려본 여관 중에서 이렇게 이른 시각에 잠자리에 드는 여관 주인은 본 적이 없는데. 운차이는 능글스러운 무표정으로 여 관 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시오." "손님이 여기 계시면 내가 잠자리에 들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 여기서 자오?" 운차이의 이 쌀쌀맞은 대답에 주인장은 더욱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 에게는 당연히도 이런 무례한 대답에 대해 화를 벌컥 낼 권리, 심지어 이런 식으로 행동하려거든 내 집에서 나가라! 고 외칠 권리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잊어먹게 만드는 모양이다. 사실 여관 주인장은 흘깃 봐도 간단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쟁과 국가, 그리고 국왕과 귀족의 이름이 함부로 거론되는 우리들의 대화라든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여정, 그리고 검을 든 전사가 네 명이나 되는 데다가 희귀한 마법사도 섞여 있고 거기에 성 직자까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드워프와 날렵해 보이는 처녀에 소녀 등 신비로운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우리들을 보면서 그의 상상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참으로 흥미로운 문제다. 그래서 그는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 았다. 다행스럽게도 샌슨이 여관 주인의 편을 들었다. "일어나라, 자식아. 내일도 오늘만큼 달려야 돼. 올라가서 침대에 쓰러 지자고. 이봐, 후치! 너도 밖에 나가서 길시언을 찾아서 데리고 들어 와." "알았어." 샌슨에 의해 거칠게 일으켜지면서 화를 바락바락 내는 운차이의 모습을 뒤로 하고서, 나는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곧 모래가 섞인 맹렬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팔을 이마 까지 들어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랄. 샌슨! 이런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것 을 믿을 수 있어?" 샌슨은 킬킬거렸다. 난 홀 안으로 먼지와 모래가 들어가면 주인장이 싫어할 것을 생각해서 재빨리 밖으로 나와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나의 친절함은 여관 주인에 게 다 써버리게 되었다. 난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가서 길시언을 찾고 싶 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난 문을 등지고 선 채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길시언! 길시언!" 대답이 없었고 그러자 난 앞으로 더 걸어나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더 크 게 외쳤다. "이런 바람을 쐬고 있다면 당신은 이상한 호칭으로 불릴지도 몰라요! 아, 그렇지! 사람들이 이런 바람을 쐬고 있는 당신을 보면 틀림없이 무 슨 고행을 해야 될 극악범죄를 저지른 전사로 생각할 거라고요!" 잠시 후 시커먼 어둠과 시끄러운 바람 사이로 길시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옷깃을 세우고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다시피 한 자세로 걸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짓으로만 빨리 들어가자고 했고 우리 두 사람 모두 홀 안으로 들어서자 길시언은 몸을 털면서 말했 다. "그래, 휴. 상쾌한 밤바람은 아니군." 정말 상쾌한 밤바람은 아니었다. 황야 한 가운데 잘못 돋아난 뿔처럼 자리한 칸 아디옴은 사방에서 불어 오는 모래와 먼지들에 대하여 가장 완벽한 저항, 즉 무저항을 채택하고 있었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도시의 외곽 성벽은 꽤 훌륭한 것이었다. 하 지만 성벽은 대책 없는 모래와 바람까지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 든 교역도시 칸 아디움에 우리들의 대인원을 모두 수용할 여관이 남아있 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 찬성했 으며, 따라서 그 여관에 방이 두 개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네리아와 레니가 차지하고나서 남게 된 하나의 방에는 모두 네 개의 침대가 있었다. 네 개의 침대 위로 아프나이델, 카알, 제레인트, 엑셀핸드를 집어던지고나자 칼잡이들에게는 침대를 고를 권한이 남지 않 게 되었다. 그래서 길시언과 샌슨, 운차이, 그리고 나는 홀을 점령하기로 결심했 다. 침실의 바닥에서 자는 것도 고려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벽난로가 있는 홀 쪽에 더 점수를 주게 되었다. 주인장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홀에서 자겠다고요?" "어쩔 수가 없군요. 설마 마굿간으로 쫓아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주인은 우리를 마굿간으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운차이는 씨익 웃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짐 속에서 모포를 꺼내와서 홀바닥에 깔고 드러누웠다. 운차이는 치사스럽게도 눈빛을 번쩍거리더니 홀 구석에 있는 긴의자를 차지했다. 그곳은 홀 옆벽에 있는 벽난로쪽으로 발, 혹은 머리를 향하게 드러누울 수 있어서 참으로 고려해볼만한 자리였지만 운차이는 우리들이 그런 고려를 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윽. 길시언은 벽난로 바로 앞에 모포를 깔고는 드러누웠다. 물론 그는 운차 이와는 달리 품위를 아는지라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웠다. 그러자 그 공 간에는 샌슨이 냉큼 끼어들었다. 곤란해, 곤란해. 난 약간 궁리한 다음 홀에 있던 테이블 두 개를 바싹 붙인 다음 그 위에 모포를 깔고 드러누 웠다. 아무래도 바닥에서 잤다가는 땅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내일 아침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잠시 후 나는 테이블에서 황급히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테이블이 아우성을 질렀기 때문이며, 테이블이 그렇게 아우성을 칠 때마다 나머지 세 남자들도 불안감에 떨며 아우성을 쳤다. 나는 샌슨을 옆으로 밀어붙인 다음 그 옆에 드러누워 조금이라도 더 벽 난로쪽에 가까워지려 애썼다. 잠시 소란과 투덜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결 국 모두들 자리를 잡고 눕게 되었다. 바닥에 나란히 세 명, 그리고 그 바로 옆으로 벤치 위에 한 명. 네 남자는 그렇게 누워 불 꺼진 캄캄한 홀, 하지만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든 홀의 천장을 바 라보았다. 탁. 탁. 벽난로 속의 장작개비는 이글거리며 잘도 타올랐다. 그리고 바깥의 모 래바람 역시 쉼없이 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머리카락이 타버릴 정도로 벽난로에 바싹 붙어 있던 샌슨이 말했다. "이거 참. 내일 아침엔 삽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는걸." "삽?" "모래를 퍼내야 걸어갈 거 아냐." "그것보다는 낙타를 수입하는 것이 낫겠군. 아, 그렇지. 운차이?" 운차이는 뒤척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가만히 천장을, 벽난로 불빛에 발 갛게 물들어있는데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낙타는 사막을 달리는데 왜 발이 빠지지 않아요? 말보다 덩치가 작아 요?" 난 질문을 던지다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옆에 누워있던 샌슨과 길시언 이 동시에 운차이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차이 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천장으로 날려보냈다. "낙타가? 훗. 낙타의 어깨 높이는 약 4 큐빗 정도 된다." "4 큐빗? 우와? 말보다 훨씬 크네. 그런데 발이 빠지지 않아요?" "낙타는 말과는 달리 발가락이 두 개다. 그리고 그 사이가 크게 벌어져 있지. 모래밭에서도 잘 빠지지 않는 발이다." "그래요? 흠.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크네. 그렇게 높은데 어떻 게 탈 수있지요? 탈 때마다 무슨 받침대 같은 것을 가져다 놓나요?" "아니. 낙타는 무릎을 꿇어 그 기수를 태운다. 기수에 대한 완벽한 충 종을 표시할 줄 아는 선한 생물이지." "무릎을 꿇어요?" "낙타는 튼튼하면서도 유연한 다리를 가지고 있지. 그는 무릎을 꿇고 차분히 기다린다. 그리하여 기수, 혹은 짐이 완전히 실리고나면 그는 일 어서 타오르는 사막의 아지랑이를 향해 걸어가지." "허어. 낙타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떻게 생겼냐고?" "예. 말은, 음, 어, 날카롭게 생겼잖아요. 바람을 앞지르는 종족답게." "낙타는 바람과는 별 상관이 없지. 그는 사막의 동물들에 대해서도 근 심하지 않고 뜯을 풀이 있느냐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아. 낙타는 시간 에 대해서도 근심하지 않아. 말은 시간에 대해 너무도 근심해서 바람과 같이 빠른 다리를 선사받았지. 그렇지만 낙타는 시간에 대해 아무런 근 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혹을 선사받았지." "혹?" 운차이는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다리를 들어 벤 치 아래에 내려놓고는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던 엑셀핸드의 파이프와 담 배쌈지를 들어올렸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파이프에 불을 붙 인 운차이는 어두운 홀 안으로 파르스름한 담배연기를 흘려보냈다. 위이 잉-윙. 바람 소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낙타에겐 혹이 달려있다. 그 기박한 운명에 어울리는 선물을 받은 모 든 생물들 중 낙타만큼 경이로운 선물을 받은 생물도 드물지." "혹이 선물이에요? 불편한 것 아닌가요?" 운차이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담배연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다. 천 장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서 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난로의 탁탁거리 는 소리와 바깥의 바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느 유목민 소년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예?" "넓은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 어떤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시무 룩한 상태였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Dsifaruum-Iethena, 그러 니까 항상 불만스러운 소년이라고 불렀지." "왜 시무룩했나요?" "그 소년의 눈에는 사물의 불합리함과 만물의 약점이 극명하게 들어왔 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 소년은 자신이 실수투성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겨서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상태였다. 그 소년은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 지." "하하, 그래요?" "그래. 그래서 소년의 Arra-bi-fanumosa, 그러니까, 너희 말로는 추장 정도 될까? 아버지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어쨌든 추장은 소년이 항상 시 무룩한 것을 보다 못해 어느날 소년을 사막으로 보내었지. "사막으로요?" "그렇지. 대사막. 사막은 넓고, 볼품없고, 황량하지만, 묻는 자에게 대 답을 해주거든. 그리고 현명한 추장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 소년은 추장 의 조언에도 명백한 모순을 발견했지만 잠자코 그 조언에 따랐다. 그래 서 소년은 낙타젖이 든 주머니 하나를 든 채 사막으로 나아갔지." 잠시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눈을 떠보니운차이는 파이프를 빨고 있었 다. 다시 담배연기로 홀의 모습을 어지럽혀 놓은 다음 운차이는 말했다. "소년은 해가 뜰 때 출발했지. 그리고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 동안 계 속해서 사막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어. 그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야. 가장 뜨거울 때의 사막은 어떤 생물도 견디지 못하거든. 게다가 길을 잃을 가 능성도 엄청나고. 햇빛이 뜨겁게 내려쪼일 때의 사막은 움직이지." "움직인다고요?" "꿈틀댄다… 춤을 춘다. 음. 너희들의 말에는 사막의 춤을 설명할 말이 없군. 어쨌든 그런 상태야. 사막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거든. 거기엔 모 래밖에 없지만." 춤을 춘다라. 모래들이? 난 잠시 상념에 잠겨 바람에 따라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모랫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모래 위로 이글거리는 공기의 움 직임,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모래들. 그리고 그 때마다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선인장 부스러기, 전갈, 검은 곤충들 과 붉은 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 상념들 사이로 운차이의 말소리 가 멀리서 들려오듯 들려왔다. "그러나 소년은 걸어갔어. 한참을 걸어갔지.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에 빗발같은 땀을 흘리다가 소년은 낙타젖을 꺼내어 마시기 시작했지. 그러 다가 소년은 Katzhita, 에, 너희 말로는 전갈이지? 전갈을 만났지. 소년 은 더위를 탄데다가 지쳤지만 전갈의 모습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어.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은 채 소년은 말했지." '이봐, 저걸 좀 보란 말이야. 우습지도 않잖아. 전갈의 무기는 그 무서 운 독침이지. 그런데 왜 그게 뒤에 달려있느냔 말이야. 전갈이 뒤로 걷 는 생물이기라도 한가? 전갈도 앞으로 걸어. 그러니까 당연히 그 무기인 독침은 앞에 달려있어야지. 뒤에 달려있다 보니까 꼬리를 구부리다 못해 허리까지 구부리며 공격해야 되잖아.' "소년은 불만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 길시언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는 상체를 반쯤 일 으켜 왼팔로 몸을 기댄 채 운차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자 전갈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지." '멍청한 소년아. 독침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떨어져버리 면 난 무력해진다. 그런데 그 독침을 마치 선물 보따리라도 되는 양 앞 에 내밀고 다녀야 된단 말인가? 누구든지 뜯어갈 수 있도록?' "그러자 불만스러운 소년은 말했어." '그건 궤변이다. 독침은 쓰기 위해 달려있지, 보호하라고 달려 있지 않 단 말이야.' '글쎄. 만일 독침을 써야 될 지경에 빠진다면, 그게 앞에 달려있는가 뒤에 달려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난 그런 지경에 빠지 지 않기를 바라겠어.' "소년은 전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갈은 그냥 걸어가버렸고 소년도 자신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둘은 그냥 헤어졌지." "말 되는 거 같은데. 어. 하긴 언제든 안전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고 다 닐 수야 없지. 손이 비어있어야 식사라도 할 테니까." 샌슨이 맞장구를 치자 운차이는 빙긋 웃었다. 위이이잉-윙윙. "소년은 뜨거운 태양빛을 온몸에 받으며 걸어갔지. 잠시 후 소년은 멈 춰서서 목을 축이기 위해 주머니를 들어올렸지. 소년은 낙타젖을 마시다 가 Pinnack-voe, 그러니까… 방울뱀을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방울뱀은 꼬리를 촤르르 흔들면서 두 마리의 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쥐 들의 등 뒤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지. 쥐들은 뭔가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꼬리를 흔들어?" "방울뱀은 꼬리를 흔들어 소리를 낼 수 있지. 우리는 그것을 죽음의 음 악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방울뱀의 소리를 들 으며 서 있었지. 그 광경을 본 소년은 또 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소년 은 혼잣말로 말했어." '이건 정말 지독한 고문이야! 방울뱀은 고기를 먹고 산단 말이야. 그래 서 사냥을 해야 돼. 그런데 그런 방울뱀에게 소리나는 꼬리를 달아주다 니! 저건 평생을 따라다니는 족쇄나 다름없어!' "소년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어. 갑자기 방울뱀이 휙-! 날았지. 그리고 쥐들 중 작은 놈 하나를 덥썩 물었어. 작은 놈이 잡힌 덕분에 큰 놈은 달아날 수 있었지. 소년은 어이가 없었어." "어이가없다라…" "달아난 큰 쥐는 멀리서 애처로운 눈으로 방울뱀이 식사하는 모습을 바 라보았지. 소년은 기가 차서 말했어." '이봐, 방울 소리를 듣지 못했어?' '물론 들었지! 여기 달려있는 귀가 보이지 않아?' "그러자 소년은 벌컥 화를 내면서 말했어." '그런데 왜 달아나지 않았던 거야? 바로 등 뒤에서 방울소리가 들려왔 잖아?' "그러자 쥐는 슬픈 가운데서도 어리석은 소년을 타이르듯이 점잖게 말 했지." '방울소리가 어쨌다는 거야? 방울소리가 우리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우 리의 문제는 방울뱀의 이빨에 있지 그 꼬리에 있지 않아.' 샌슨은 배를 잡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점잖고도 냉랭하게 저 멍청한 말을 했고 그런 식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정말 웃겼 다. 운차이는 계속해서 근엄하게 말했다.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때 방울뱀은 식사를 끝내었지. 그러자 소년과 이야기하던 쥐는 바삐 달아났어. 그 모 습을 보면서 소년은 투덜거렸지." '우습지도 않아. 멍청한 쥐 같으니. 방울 소리가 들리는 곳에 방울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잖아. 도대체 꼬리와 몸이 따로 다니기 라도 한다는 말이야?' "소년은 대충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어갔지." 북부의 황량한 모래바람 속에서 모래 바람 소리와 함께 사막 전사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신비로운 기분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홀 안은 여전 히 캄캄하고, 운차이의 얼굴은 오른쪽 반만 보였다. 오른쪽 불은 붉게 물들어 있고 왼쪽볼은 새카맣다. 그리고 그 왼쪽 불 위로 운차이의 왼쪽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은 지칠대로 지쳐 목을 축이다가 낙타를 보게 되 었지. 소년은 목을 축였는데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서는 목 이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어. 소년은 거의 발작하듯이 외쳤지." '저걸 좀 보라구! 저, 저것! 난 도저히 못참겠어. 낙타는 말보다 훨씬 빠르단 말이야! 다리도 더 길고 힘도 더 강해! 그런데 등에 저 커다란 혹이 달려있어서 빨리 달리지 못한단 말이야!'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4.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타가 말보다 빠르다고?" 운차이는 샌슨에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더 빨라. 네가 만일 자이펀에 가게 된다면 낙타 경주를 구경하도록. 말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질풍처럼 달리는 낙타를 보게 될 테니." "그렇게 빨라?" "빨라. 하지만 말처럼 그 속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낙타의 단점이다." "음. 그래?" "어쨌든 소년은 목이 꽉 막힐듯이 화가 나서 그렇게 외쳤지. 그러자 낙 타는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지." '소년. 난 빠르게 달릴 일이 없는걸.' '그럴 일이 있어도 빨리 달리지는 못할 거잖아?'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안그래?' '지금 빨리 뛸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빨리 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영원히 그럴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 "소년은 벌컥 화를 내고 싶어졌지.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일을 찾아 걸 어가버렸지. 무려 3 번에 걸쳐 바보 취급을 당한 소년은 몹시 화가 나게 되었다. 하지만 추장의 명령은 무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항상 불만스러 운 소년은 계속해서 나아갔지.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은 지금까 지 본 것 중에 가장 황량한 모래 벌판에 섰지. 사막 중에서도 완벽하게 모래만 있는 사막 말이야. 그리고 소년은 모래 언덕 위에 서서 모래 때 문에 깔깔해진 목을 축이고는 말했지." '이봐. 뭐, 여기까지 왔으니 말은 해야겠어. 온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하다간 나도 당신만큼이나 나이를 먹게되겠지. 난 합리적인 사람이 니까,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질문하진 않겠어. 너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을 하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이 모래! 도대체 이 많은모래가 왜 있는 거야? 모래 위에선 곡식도 자라지 않아. 그 위에선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어. 전갈들도 사실 이런 날씨엔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선인장도 이 런 모래사막에선 살 수 없잖아. 도대체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못하 는 이런 모래가 왜 이리도 많이, 그것도 넓게 쌓여있는 거지? 하는 일이 라곤 태양의 열을 흡수하여 지글지글 타오르는 일밖엔 없잖은가.' "소년은 대충 이런 식으로 질문했지"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샌슨이 먼저 말했다. "야, 그거 그렇다. 음.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사막이 뭐라고 대답했 어?" "너 바보냐? 사막이 대답을 해?" 운차이는 몇 마디 평범한 말로도 상대로 하여금 평생 동안 들어왔던 그 어떤 욕설보다도 더 심한 욕설을 들었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는, 참으로 독특하고도 싸가지 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샌슨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야! 전갈도 말하고 쥐도 말하고 낙타도 말하는데 사막은 왜 말 안하 냐!" 그러자 운차이는 정말 저렇게 불쌍한 작자는 처음 본다는 식으로 샌슨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차이는 점잖게 말했다. "사막엔 입이 없다." 샌슨은 목구멍에서 괴이한 목소리를 내었고 나와 길시언은 킥킥거리기 시작했지만 운차이는 그 모두를 무시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사막이 무슨 대답을 하나. 모래만 가득가득 쌓여있는데. 소년 역시 대 답을 기대하진 않았지. 소년은 불만에 가득차 있었지만 최소한 북부의 머저리처럼 사막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스러워하진 않았지. (샌 슨의 목이 졸린 듯한 신음소리.) 소년은 잠시 증오스러운 눈으로 고요한 사막을 쏘아본 다음 그대로 몸을 돌려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걸 어가기 시작했다." 샌슨은 시비를 걸듯이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탁탁, 위이이잉.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움직이는 달그락 소리. "사막이 움직여버렸지." "움직였다고?" "그렇다. 움직였지. 소년은 길을 잃었어. 돌아오는 길을 도저히 알 수 가 없게 된 거야." "태양이나, 어, 그림자 같은 것을 보면 되잖아?" "북부 머저리 같으니… 태양이나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길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사막엔 길이 없다. 조금만 빗나가도 터무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걷게 되는 것이 사막이야." "그래?" "그렇다. Kahnat도 없고, 아, 우물도 없고 바위도 없는 완전한 모래사 막에선 누구도 길을 찾을 수 없다. 대상들도 그런 곳으로는 다니지 않는 다. 소년은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걸어갔지. 눈에 익은 선인장이나 바위 등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 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지. 주로 되지도 않는 욕설들이었어." 샌슨은 운차이의 말에 벙긋거렸다. 모래밭 한가운데서 하늘을 향해 고 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걸어가는 소년의 모습이라. 흠. 운차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게 미친듯이 걸어가다가, 소년은 아까 마주쳤던 낙타를 마주치게 되었지. 낙타는 지치고 초라한 몰골을 한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 했다." '소년. 그 주머니를 버리는 것이 어때?' '뭐라고?' "낙타의 말에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젖주머니를 바라보았지. 낙타는 바로 그 주머니를 가리킨 거야." '그걸 버리면 몸이 가벼워질 테니 더 빨리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 지 않은가?' '말도 안돼. 더 빨리 걸으려다가 목이 말라 죽을지도 몰라. 이 주머니 는 길을 찾을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약속한다고.' '그런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지. 소년은 낙타를 쏘아본 다음 계속해서 걸어가 기 시작했어. 최소한 아까 마주쳤던 낙타를 마주친 이상 방향은 똑바로 잡은 셈이거든. 그래서 소년은 다시 기운을 차려 걸어가게 되었지. 그러 다가 소년은 어느 모래 언덕을 돌아가다가 방울소리를 듣게 되었지. 소 년은 당황했어. 방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방울뱀이 있다는 뜻이지. 하 지만 소년은 다시 생각해보았지. 아까의 그 방울뱀은 쥐를 포식했지. 방 울뱀은 보통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하기 위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거 든. 그래서 소년은 그냥 걸어갔지. 그 때 모래 언덕 위에서 쥐가 나타나 서 말했지." '이봐.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물론 들려!' '아, 그래?'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 소년은 기분나쁜 얼굴로 쥐를 쏘아 본 다음 계속 걸어갔어. 역시 방울뱀은 공격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몹시 기분이 상했지. 게다가 지쳤기 때문에 손에 든 주머니는 엄청나게 무겁 게 느껴졌지. 소년은 그것을 버리고 싶어졌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 애초에 버릴 수 없는 것이면 고민도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기진맥진하 여 나아가던 소년은 뜨거운 모래밭에서 걸어가고 있는 전갈을 만나게 되 었지. 전갈은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지." '이것봐. 왜 그것을 들고 다니는 거지?' '뭐야? 목이 말라 죽어버리라는 말이야?' '어차피 그것은 모두 네 입 속으로 들어갈 것이잖아. 그러니 다 마셔버 리고 걸어가면 되는 거 아냐? 왜 힘들게 그것을 들고 다니는 거지?' '지금은 목마르지 않아!' '그래? 목 마를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는 거로군. 그렇다면 좀 더 조심하는 것이 좋겠군.' '무슨 뜻이지?' '그 주머니는 새고 있어.' "소년은 놀라서주머니를 바라보았지. 과연 아래쪽에서 낙타젖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어. 얼마 남지도 않은 낙타젖을 그렇게 낭비해버린데 대해 서 소년은 크게 낙심했지. 소년은 일단 주머니를 거꾸로 들었지. 거꾸로 들면 잡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주머니야. 그래서 소년은 그것을 가슴에 안다시피 한 채 기진맥진해서 걸어야 했지. 사막의 모래들이 붉게 변할 때 소년은 마침내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 소년은 쓰러 질 것 같았지만 힘들게 다리를 움직여 추장의 천막으로 걸어갔어. 담배 를 피면서 기다리던 추장은 소년을 바라보다가 말했지." '무엇을 보고 뭘 깨달았느냐?' '사막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도가도 모래, 모래뿐이었어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자 추장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지." '그런가? 이상하군. 낙타와 쥐와 전갈이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예? 아, 그 어리석은 동물들 말인가요?' "그러자 지혜로운 추장은 말했지." '그 동물들의 이야기는 좀 다르던데. 그 동물들은 네가 마치 낙타가 매 달고 다니는 혹처럼 무거운 주머니를, 전갈이 꼬리를 돌보듯이 소중히 끌어안은 채, 방울뱀 소리의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래요. 하지만 사막 자체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막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글쎄. 내 생각에 사막은 낙타와 전갈과 쥐를 보여준 것 같은데.' "그러자 소년은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되었지." 운차이는 이야기를 마치고나서 다시 침착하게 파이프 부리를 물었다. 샌슨은 어느새 일어나 앉아서는 생각에 잡긴 표정이 되어 있었고 길시언 은 팔베개를 한 채 드러누워있었다. 난 여관 건물의 벽을 두드리는 모래 바람 소리를 들었다. 탁, 타다다닥, 휘이이잉. 샌슨이 툭 튀어나오듯이 질문했다. "그 이야기가 전하려는 바가 뭐야?" 운차이는 구슬픈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 미친 녀석으로 만들고 싶은가? 전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그냥 그 이야기를 말해버리지 왜 길다란 이야기를 하느냔 말이야." "어, 그런가?" 운차이는 다시 한 번 홀의 시커먼 공간을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로 물들 인 다음 말했다. "낙타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이야기가 생각났을 뿐이야." "흐음."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카알이 있었다면 저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 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레인트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 전갈이라… 낙타? 흐음. 방울뱀. 갑자기 몸이 부웅 떠올라 저 열사의 사막으로 날아 가버리는 기분이 드는군, 그래. 휘이이잉! 길시언은 바람 소리의 끝자락에 붙여서 말했다. "이만 자둡시다. 험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러자 샌슨은 난로에 장작 하나를 던져넣은 다음 다시 드러누웠다. 나 역시 모포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흐음. 한 두어 달 쯤 전에 누군가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인 나 후치 네드발이 북부의 어느 여관 홀 바 닥에서 포근한 표정으로 잠들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난 상대의 정신 상 태를 의심했겠지. 핫하! 우스운 거야, 인생이란. 모두들 운차이가 말하 는 낙타처럼 혹 하나씩을 매달고 그저 걸어가는 것인가? 내 혹은 뭘까? 쾅쾅쾅! 이건, 음. 그렇지. 델하파의 항구다. 거기서도 누군가가 아침부터 문짝 이 부서져라 두드려대었었지. 하지만 여긴 델하파가 아니잖아. 쾅쾅쾅! "젠장! 어느 녀석인지 모르지만 내 아침잠을 깨울 정도로 급하지 않다 면 그 짓 그만둬!" 샌슨의 졸음에 겨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간신히 현실감각 을 되찾고는 누군가 우리가 누워있는 여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경우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내다보아야 될 것이다. 난 양식이 없어. 제발 그만두자고. 쾅! 콰과광쾅! 쾅쾅! 쾅! 쾅! 아주 리듬감 있는 노크소리로군. 눈을 떠보니 내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노크 소리에 맞춰 땅바닥을 두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탁, 타다닥탁, 탁 탁, 탁, 탁. 제기랄. 아무래도 일어나야 되겠는걸. 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여관 정문까지 걸어가는 길이 참으로 멀게 느껴지는군. "으아아!" 무슨 소리지? 괜찮아. 설마 누 군가를 밟지는 않았겠지. "내 다리!" 음. 샌슨. 잠꼬대를 이상하게 하는 군. 꼭 내가 샌슨의 다리를 밟은 것 같잖아. "밖에 누구요! 그런데 나에게 이 질문을 할 권리가 있냐고 묻지는 말아 요." 왜냐하면 난 이 건물의 주인은 아니니까. 문을 열자 곧 맹렬한 바람이 불어닥쳐서 나는 머리를 홱 젖혔다. 잠시 후 힘들게 다시 앞을 바라보니 검푸른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자 그 그림자는 커다란 망토 같은 것을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에는 길다란 막대기… 창인가? 어쨌든 그런 것을 들고 있었는데 남자는 뭐라고 마구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등 뒤 로도 몇 명의 다른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 사람들 역시 뭐라고 떠 들고 있었다. 난 머리를 휘젖고나서 말했다. "잠깐, 잠깐만. 나 잠에 취해서 그러는데, 좀 천천히 침착하게 말해주 겠어요?" 남자는 내 의견을 받아들여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오크요!" "아, 그러세요? 전 인간이에요." 남자는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등 뒤에서는 운차이의 것으 로 짐작되는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밖 의 남자는 자기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나 또한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기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이라는 사람 있소?" 등 뒤에선 목이 걸린 듯한 켁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것 도 아마 운차이인 것 같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5. 칸 아디움의 외성은 여덟 개의 거대한 성탑과 그것들을 잇는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도시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길다란 팔각형의 모습이었다. 기단부는 조금 복붇워져 있었지만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 고 성벽 위의 갤러리(Gallery)와 지상은 성탑 내부에 있는 나선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황량한 북부의 외진 곳에 있는 성 치고는 상당히 튼튼한 규모였다. 어쨌든 성탑 내의 나선계단을 따라서 성벽 위의 갤러리에 올 라가자마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마치 전선으로 돌아온 것 같군." 그러자 길시언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스름한 새 벽 공기, 그 축축한 대기 사이로 병사들의 그림자들이 성벽 위에 돋아난 혹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병사들 중에서 특히 큼직한 덩치를 가진 사내 의 그림자가 보인다. 사내는 흉벽에 몸을 기댄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 는데 그 그림자가 독특했다. 길시언은 곧장 그에게 물었다. "제대군인이오?" 사내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우리들을 쓰윽 훑어보더니 고개 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그 사람들인 모양이군. 나는 아넨드 라이스터 중위. 12연대 강행 정찰부대 소속. 상이군인. 1년 전 퇴역했지. 자이펀 장교를 두 명 잡았거든. 그리고 이건 그 때의 추억이고." 아넨드씨는 오른팔 상완 부분에서 묶여있는 소매를 흔들어보였다. 그래 서 그림자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군. 길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훌륭한 군인이셨군요, 라이스터 중위. 난 길시언이오. 그 팔에 대해서 는 유감이오." "아, 괜찮소. 덕분에 일계급 특진에 퇴역.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아넨드라고 부르시오." 아넨드씨는 씨익 웃고는 다시 황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도끼 를 들어 흉벽의 요철돌을 탁탁 두들겼다. 만일 오른팔이 남아있었다면 오른손에 대고 탁탁 두드렸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성벽의 싸늘한 돌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다란 성벽에서 내려다보자 황야보다는 먼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푸르스름하면서 동시에 누르스름한, 그리고 보라색과 붉그스름한 가로줄 들. 다채로운 새벽하늘이었다. 황야에는 밤새 솟아나기라도 한 듯이 모닥불이 잔뜩 피어있었다. 얼핏 봐도 모닥불의 숫자는 3,40 개가 넘어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춤을 추 는 것인지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괴성을 지르며 위로 들어올린 무 기를 흔들어대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네리아는 눈꼽을 떼어내면서 졸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오크야." 뒤따라 올라온 제레인트는 아래쪽을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는 미 소를 지은 채 네리아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니, 아주 많은 오크군요." "네. 그러네요. 굉장히, 엄청나게, 끔찍하게 많은 오크네요." 네리아는 톡 쏘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제레인트는 여전히 웃으며 밖을 쳐다볼 뿐이다. 하긴 오크 대부대에 의해 포위된 도시에 갇힌다는 것은 진귀한 경험에 속하는 것이긴 하며 그래서 제레인트는 신기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경비대원들이 모두 입을 꽉 다문 채 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벽 위에서는 저렇게 미소짓지 않아줬으면 하는데. 어쨌든 지금 이 성벽 위에서 기분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제레인트 혼자 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넨드라는 저 한쪽날개의 전투천사 역시 짜릿한 긴장감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뒤따라 올라온 아프나이델은 새벽의 추위에 벌벌 떨다가 말했다. "저, 아넨드씨. 전 아프나이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놈들이 우리 를 부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넨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봐, 대장!" 그러자 잠시 후 그런대로 투구와 갑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데다가 오른 손엔 롱소드도 들고 있는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남자는 얼굴을 찌푸린 채 걸어오더니 아넨드를 향해 말했다. "이봐, 아넨드. 자네 고함 소리는 이스트 그레이드 전역에 울리겠군. 그 도끼 발등에 떨어트리기 전에 어서 내려가게." "뭐야? 이 목수 녀석이! 난 네녀석이 여기서 대팻밥이나날리고 있을 때 전선에서 자이펀 놈들을 수도 없이 베어넘겼어. 네가 그까짓 돌려가 면서 해먹는 경비대장이 된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에게 잘난 척하는 것은 못봐줘." 그러자 그 그럴듯한 복장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품위가 격하되어버린 남 자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레니는 고개를 돌리고는 킥킥 웃었다. 그 남자는 레니를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했다. "그래, 당신들이 그 여행자들이오? 나는 칸 아디옴의 경비대장 라스 크 레블린이오." 카알은 어제의 피로도 가시지 않은 데다가 새벽에 높은 성벽을 달음박 질쳐 올라오느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땀을 닦아내며 라스 대장 에게 말했다. "나는 카알 헬턴트라는 여행자입니다. 크레블린 대장. 사태를 좀 설명 해주시겠습니까?" "사태? 간단하오." 크레블린 대장은 롱소드를 들어 바깥의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아침 경비대원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저 지경이었 소. 아, 우리는 외딴 곳에 위치한 도시라 밤새도록 경비를 세우지는 않 소. 성문은 잠궈두지만. 어쨌든 급하게 성문의 폐쇄를 강화하고 예비경 비대원까지 모조리 소집시켜 성벽 위에 배치시킬 때 쯤이었던가, 갑자기 저 편에서 화살이 날아왔지." "화살이라고요?" 샌슨의 질문에 크레블린 대장은 품 속을 뒤지더니 구겨진 종이 하나를 꺼내었다. 종이라. 오크들이 어디서 종이를 구했을까? 음. 하긴 무기도 만들고 갑옷도 만드니 종이도 어떻게 만들 수는 있겠지. 여행자들에게 훔쳤을 수도 있고. 난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카알은 라스 크레블린 대장에게 종이를 받아들고는 눈을 찌푸렸다. 그 러자 아프나이델은 중얼거리더니 허공에 조그마한 빛덩어리를 하나 만들 어내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놀란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활을 뽑아든 채 갤러리에 도열해있던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자이펀 과의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웠던 용맹한 상이군인 아넨드씨는 별로 놀라 지 않았지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맙소. 아프나이델." 카알은 아프나이델에게 감사하고는 그 종이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짧아서 가장 늦게 올라온 엑셀핸드가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원, 제기랄! 그 놈의 계단 높기도 하다. 이봐. 거, 뭐라고 적혀있나?" "글씨가 너무 지저분해서 읽기도 힘들군요. 에… 우리는 오크다. 허참. 척 보면 오크인 줄 모를까봐. 음. 어쨌든 읽겠습니다. 우리는 휴다인 계 곡에서 인간들을 따른다 왔다. 따른다 왔다? 따라왔다는 말인가 보군요. 우리는 복수를 한다. 너희들은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을 내놓는다. 내 놓지 않는다면 이 도시를 막살내겠다? 아, 박살내겠다는 말인가 보군 요." 제레인트는 카알이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낄낄거리더니 말했다. "하하하! 그, 그래도 그건 아마도 오크 중에서 가장 문학적 소양이 우 수한 녀석이 썼을 겁니다. 하하하!"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제레인트의 밝은 태도 때문에 다른 사 람들도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게 대해 화를 낼 권한이 있는 크레블린 대 장마저도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들 중에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이 있단 말이오? 아, 먼저 근래 우리 마을에 들어온 외부인들은 당신들뿐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겠 소." 난 카알을 한 번 쳐다본 다음 앞으로 나섰다. "시치미 떼진 않겠어요. 제가 괴물 초장이입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괴물 같은 초를 만드는 사람? 아니면 초를 만드는 괴물 같은 사람?" "후자지요. 크레블린 대장님. 물론 가끔 실수해서 괴물 같이 생긴 초를 만들기도 하지만." "원참. 이런 꼬마를 노리다니. 그럼 누가 괴물 눈알이오? 당신들 중에 눈빛이 날카로운 자는 보이지만 눈이 괴물 같은 자는 안보이는데?" 운차이는 냉랭하게 말했다. "놈들은 날 그렇게 부르오." 크레블린 대장은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저 아래쪽 황야를 바 라보고 있었다. 새벽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데 따라서 황야의 색깔도 조 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검은색 흙탕물처럼 막막하고 깊이감이 없던 황 야가 천천히 음영을 드러내면서 그 윤곽의 항폐함을 우리들에게 선사하 고 있었다. 오크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은 작았다. 그것이 오크들의 거친 살결을 따 스하게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침침한 적의와 자신 감을 표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발갛게 된 볼을 맹렬히 문지르고 있던 레니는 그 광경을 보며 부르르 떨고나서는 불안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크레블린 대장은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뭐요? 왜 오크들에게 쫓겨다니는 거요? 저 녀석들의 지저분한 동굴을 털었다는 것은 웃기는 말이 될 테고. 모습들을 보아하니 황야에 서 오크 몇 마리 쯤 베어넘긴 모양인 것 같은데. 맞소?" 카알은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긍정을 표시했다.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 은 턱에 꺼끌꺼끌하게 나있는 수염을 긁었다. 아마 면도도 하지 못한 채 뛰쳐나온 모양이다. 크레블린 대장은 말했다. "그래. 어쩌실 생각이오?" 흠. 고약한 말이군. 우리들에게 먼저 말을 꺼내보라는 것이겠지. 카알 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오늘 떠날 작정입니다. 저 포위진은 도시의 반 대편에도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가 반대쪽으로 달아나버리면 되겠 습니까?"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당장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보시오. 편지를 읽었잖소? 당신들이 나가지 않으면 저 놈들이 이 도시를 친다고 하지 않았소. 이 상황에서 당신들만 살자고 달아나버린다 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 그러자 카알의 안색도 좋지 않아졌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하실 일이 아니지요. 저 친구들은 우리를 쫓는 것 이니 우리가 떠나면 우리 등 뒤를 따라오지 않겠소? 우리는 저 친구들을 끌고 사라져주겠다는 겁니다." "보시오! 당신들은 모두 말을 가졌지 않소! 그러니 당신들은 그렇게 가 볍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말이 오. 저 녀석들이 저런 대부대를 유지하려면 보급은 중요한 문제일 거라 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보급이오?" "그렇소! 저 녀석들이 당신들을 뒤쫓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 때문에 엉뚱한 우리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말도 안되지 않소? 당신들이 달아나면 저 녀석들은 이곳에서 분탕질을 친 다음에야 당신들을 추적할 거란 말이 오!" 난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 때 칸아디움의 새벽공기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부 인간들의 멋진 우정이군." 운차이의 서리가 묻어나는 말이었다. 우리들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뒷말을 이었다. "오크에게 쫓기는 인간을 다른 인간들이 쫓아내려고 애쓴다라. 맞아. 원래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서로 돕고 사는 거지." 크레블린 대장은 움찔하더니 곧 불타는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말들이 튀어나왔다. "보시오! 난 모험가 떨거지들을 좋아하지 않소. 이 도시에서 저 도시 로, 저 계곡에서 이 미궁으로! 그렇게 제멋대로 날아다니다가 지칠 때쯤 되면 시체에 몰려드는 파리처럼 도시에 찾아들어서는 먹을 것과 침대를 요구하고, 난동을 부리고! 우리의 발랄한 십대들을 헛된 몽상에 빠지게 만드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소. 누구나 그 나이에는 그러는 법이니 까. 하지만 꽁무니에 재앙과 질병을 달고 다녀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견실 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 터전을 위협하는 것은, 그런 작자들에게 내가 왜 호의를 베풀어야 된다는 거요?" 우리는 멍한 눈으로 크레블린 대장을 바라보았고 크레블린 대장은 옆에 서 아넨드씨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얼굴을 붉힌 채 우리들 을 쏘아보았다. "웅변술은 언제 그렇게 익혔지? 라스." 아넨드씨의 말에 크레블린 대장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이 성벽 위에서는 크레블린 대장이라고 불러! 그러기 싫다면 당장 내 려가서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침대 속에 그 병신 같은 몸을 처박든지… 미안하네." 참 보기 싫은 광경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크레블린 대장의 목소리가 들 리는 범위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아넨드씨의 오른쪽 소매로 몰렸다. 아넨드씨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이봐. 아넨드. 실수였네. 그저 홧김에 나온 말이야. 본심이 아니라 네." "괜찮습니다. 크레블린 대장님.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넨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끼를 어깨에 둘러매더니 성벽 저쪽으로 걸 어가 버렸다. 크레블린 대장은 그를 붙잡을 듯하다가 관두고는 입술을 좀 깨물었다. 잠시 후 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는 당신들에게 고마워해야 될 거요. 당신들이 내 부아를 돋운 덕분에, 이 일이 잘 끝나면 저친구에게 술 한 잔 멋지게 대접해야 될 것 같으니." 그러자 네리아가 당장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게 왜 우리 책임이지요? 이건 당신이…" "네리아양." "카알 아저씨. 이건 말도 안되는…" "조용히 해요. 네리아양." 네리아는 볼이 부어서는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났다. 카알은 피로한 음성이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에게 원하는 바가 뭐요?" 크레블린 대장은 마치 카알을 흉내내듯이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체면 차리기도 싫고, 그래봐야 속보이는 짓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 겠소. 저 오크들이 우리 도시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도록 해 줄 방법이 있겠소?" "흐음. 당신들은 어떻게 도와주겠소?" 크레블린 대장은 매몰차게 대답했다. "우리가? 우리가 왜. 꽁무니에 오크들을 달고 온 것은 당신들이오. 난 이 도시의 경비대장이니 뜨내기들의 경비대장이 아니오." 그러자 느닷없이 풍부하게 울리는 음성, 그것도 화가 난 기색이 분명한 약간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한 영지의 안보를 책임지는 경비대장이지만, 지금 말씀은 받아들 일 수 없군요." 보라! 헬턴트 영지의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이 앞으로 나섰다. 크레블린 대장은 험한 눈초리로 샌슨을 바라보다가 보통 사람들의 얼굴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가슴을 발견하고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새벽 공기 속에서 더욱 위압적으로 거대해보이는 샌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요? 경비대장이라고?" "샌슨 퍼시발. 헬턴트 영지의 경비대장입니다." "어? 모험가들이 아니란 말이오?" "천만에요. 우리는 헬턴트 영지의 공무로서 출발한 일행입니다. 중간에 몇 가지 사건이 생기긴 했지만 이 모든 사태는 결국 헬턴트 영지의 공무 의 연장입니다. 어르신께서도 경비대장이라면 공무 사절의 여행에 있어 타영지가 당연히 베풀어야할 조력의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고는 말씀하시 지 못할 테지요." "어, 나, 난 그런 거 모르겠소. 당신들이 정녕 그렇다면 왜 우리 칸 아 디움의 시장을 접견하여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어스름한 새벽 공기. 그리고 황야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샌슨 은 다부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장대한 어깨는 성벽보다 굳건해 보 였고 단단한 두 다리는 첨탑과도 같았다. "이 도시에는 용무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식사와 잠자리뿐 이며 그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타영지의 책임자의 관심을 끌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곤경에 빠진 것이 분명한 이 시점에서, 칸 아 디움의 시장은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신 여기 카알 헬턴트공에게 모든 종류의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공이라고?" 이 질문은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왔다. 크레블린 대장과 카알에게서. 카알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퍼시발군. 내가 언제부터 공이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지?" "그야 국왕 전하께서 카알 헬턴트공에게 현명함의 기사라는 칭호를 내 리신…" "으랏찻차차! 여보게, 퍼시발군! 그 우습지도 않은 칭호를 꼭 거론해야 되겠나!" 샌슨은 아무런 대답없이 그저 칭찬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빙긋이 웃었을 뿐이다. 네리아까지 나서서 자신은 '밤바람의 레이디' 임을 밝히고나자 레니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어쨌든 카알은 마땅찮은 얼굴로 헬턴트 영지 전권대리인의 증명서와 국왕 전하께서 하사하신 훈장까지 내보여야 했고,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의 무릎은 그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활발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 외딴 곳에서 귀하신, 귀하신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 되어… 저,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길시언이 자신이 왕자임을 밝히지 않은 것은 크레블린 대장의 심장 상 태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별로 보기에 유쾌한 광 경은 아니군. 우리는 모두 일치단결하여 싸늘한 시선으로 크레블린 대장 을 바라보았고 크레블린 대장은 황급히 말했다. "어, 어서 시청으로 가시지요. 즉시 시장님께서 여러분들께 격에 맞는 대접을…" "아니오. 나는 여기서 오크들을 보며 생각 좀 해봐야겠소." "아니, 당치도 않습니다! 귀하신 분들을 이런 성벽 위에 모셔두다니오. 어서 내려가셔서 초라하나마 아침 식사부터 하시고…" "아, 우리 꽁무니를 따라온 재앙의 무리를 두고는 밥맛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게다가 우리들만 살자고 떠나버릴 수는 없으니 대책도 강구해야 되겠고. 그러자면 저 친구들을 노려보고 있어야 되지 않겠소?" 카알의 차분한 말에 크레블린 대장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제레인트와 네 리아는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크레블린 대장은 눈에 띄게 허둥대며 말했 다. "아, 그렇군요. 이봐! 누가 가서, 아, 아냐. 내가 직접 가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헬턴트공. 즉각 시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이봐! 그룬!" 그러자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 하나가 일어서며 경례를 붙였다. "예! 대장님." "성벽의 지휘를 맡아라! 난 시장님을 모셔오겠다." "알겠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카알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성벽에서 굴 러떨어져 목뼈를 부러뜨릴 정도의 걸음걸이로 성탑을 향해 달려갔다. 엑 셀핸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어, 우습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막장에서 뼈가 굵은 드워프의 머리로 는 말이야, 어떤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것은 많은 세월동안 그 사 람을 겪어오면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카알은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든 훈장을 장난스러운 동작으로 흔들면서 말했다. "이까짓 번쩍이는 쇳조각 하나에 저렇게 태도가 바뀌는 모습은 보기 언 짢으시겠지요." "정확하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카알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훈장을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박았다. 잠깐, 내 훈장은 어디 놔뒀더라? 잘 기억이 안나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6. 어쨌든 카알은 다시 성벽 바깥을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지혜로워보이고 근엄해 보이는 중년 독서가 옆에서는 작지만 다부진 드워프의 노커가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도끼를 짚은 채 서 있었 다. 그리고 총명해보이는 이마를 가진 젊은 프리스트와 젊은 얼굴에 어 울리지 않는 깊은 그림자를 가진 마법사가 그 옆으로 벌려서서 묵묵히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건장한 두 명의 전사 샌슨과 길 시언이 도열해 있었다. 꽤나 멋진장면이었다. 이스트 그레이드의 새벽, 높은 성벽 위에 지금 전설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군 그래. 괴물 초장이가 끼어들만한 자리를 찾아보다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병사들은 그들의 대장이 놀라서 목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고귀한 인물들과 같은 성벽 위에 있다는 것이 몹시 부담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운차이는 그 모든 사람들과 조금씩 떨어져서는 흉벽 위에 걸터 앉은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여기서 가장 긴장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운차이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병사들은 모두 흉 벽 뒤에 웅크리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태평하게 앉아서는 잔치 구경이라도 하듯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때 레니가 조그맣게 기침을 했다. 엣취. 그러자 운차이는 눈살을 찌 푸리더니 내게 말했다. "네리아와 레니에게 여관에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전해줘." "라는군요." 그러자 네리아는 방긋 웃고서는 언제나 그러하듯 운차이를 똑바로 바라 보며 말했다. "흐음. 네가 나 걱정해주니?" 그러자 운차이는 여전히 흉벽 위의 조각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앉 아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리아가 아니라 레니를 걱정하는 거라고 전해줘, 후치." "라는군요." 네리아는 의외로 별 대답을 하지 않고는 대신 생긋 웃으며 레니를 이끌 었다. "가자. 레니.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퍼지고 하는 일은 남자들 몫이라고 생각들 하라지, 뭐." 레니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남자들 일 맞는 거 같은데요." "그런가? 흐음. 그러고보니 나도 좀 조신하게 행동해야 되겠네. 이 여 행이 끝나면 곧 멋진 남편과 아들이 생길 테니까…" 샌슨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까는 왜 굴러떨어질 뻔한 거냐?" "몰라도 돼!" 난 그렇게 고함질러주고나서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알은 관자 놀이를 짚은 채 말했다. "골치 아프군. 아까의 그 편지는 결국 이런 말이잖아. 우리가 더 달아 나면 대신 이 도시를 공격하겠다. 규모가 좀 큰 인질극이군." 카알은 그렇게 머리 아픈 표정을 짓더니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퍼시발군. 저들의 인원이 얼마쯤 되지?" "예. 어두워서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250에서 270 마리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썩 정확하네, 퍼시발군. 고맙네. 휴우… 300 여마리의 오크 라. 록크로스 해변에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대적했던 오크와 같은 숫자로 군." 카알은 그런 식으로 샌슨의 계산을 간단히 확대해버렸다. 샌슨은 어깨 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도시의 경비대와 협조하여 모두 물리치면 어떨까요?" 샌슨의 씩씩무쌍한 제안은 카알의 한숨을 이끌어내었다. "보게, 퍼시발군. 우린 지금 전쟁 놀이를 할 시간이 없네. 그리고 아까 의 경비대장의 모습이라든지 저 경비대원들의 모습을 봐선… 이 도시 전 체를 샅샅이 둘러봐도 저기 아넨드씨보다 더 우수한 전력은 기대하기 어 려울 듯하이. 이 친구들이 우리 영지의 경비대원들의 반만큼이나 활약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네만." 하긴 그렇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지금 성벽 위에 몰려있는 병사들은 활을 들고 있는 허수아비에 비해 딱 한 가지 점에서만 나아보였다. 그들 은 허수아비와는 달리 웅성거릴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불안스 럽게. 길시언은 성벽을 주욱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 도시는 황량한 이스트 그레이드에 위치하니까요. 전쟁이나 재난에 서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따라서 경비대원들의 허리가굵다고 해서 그 바지가 흘러내리지… 미안합니다. 임마! 에, 하지만 성 자체는 그런 대로 견고해보입니다." "예. 그리고 저 오크들이 공성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있을 것 같 지도 않고.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시민들의 불안도 문제고 경 비대원들의 수준도… 튼튼한 성을 만드는 것은 성벽의 두꺼움이 아니라 그 성벽을 지키는 자들의 굳건한 마음이라든가요." "예, 허즐릿의 말이군요. 물론 그 굳건한 마음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었지요."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꽉꽉 들어찬 식량창고와 병기고라지요." 길시언과 그렇게 농담 비슷한 말을 주고받은 다음, 카알은 아프나이델 을 바라보았다. "뭔가 해볼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예?" "대단한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저 이빨이 멋진 친구들의 주의를 좀 끌어보고 싶습니다. 효과는 없어도 좋습니다." "주의를… 끌면 됩니까?" "예. 회담을 좀 가지고 싶습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미리 놀라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싶은데요." 그러자 길시언이 곧장 고개를 돌려 외쳤다. "보시오. 그룬씨라고 했소?"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받았던 그 병사가 경례를 붙이 며 말했다. "그룬 크라이첵 상병입니다." "난 길시언입니다. 지금부터 여기 마법사께서 마법을 쓰실 테니 병사들 로 하여금 당황하지 말도록 지시해주시겠습니까?" "마법이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룬 크라이첵은 즉시 명령을 옆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모두 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꼼짝도 하지 말고 엉덩이를 단단히 고정시켜랏!' 그 명령이 빠르게 옆으로 전달되고나자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숙이고 캐 스팅을 시작했다. 우리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 중 일부는 활을 내려놓을 만큼 놀라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음. 내가 언제부터 마법을 별 경 이감없이 바라보게 되었지?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두 손을 하늘로 들어올 리며 외쳤다. "환타스멀 포스(Phantasmal force)!" 잠시 동안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벽 하늘은 여전히 푸르 스름한 공허로서 존재하였고 쥐죽은 듯 조용한 성벽 위의 침묵도 여전했 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지? 그 때였다. "크롸라라라라!" 거의 뽑을 뻔했다. 거의 바스타드를 뽑아들 뻔했단 말이다. 새벽 하늘 그 어두컴컴한 구름 저 위에서 하늘을 울리게 하는 포효 소리가 울려왔 다. 병사 하나가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입 닥Ф! 존!" 그룬 상병은 이를 악물고 외쳤지만 그 역시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 다. 그리고 잠시 후, 높은 성벽 위에서 바라보느라 훨씬 가깝게 느껴지 는 구름들 사이로 길다랗고 거대한 입(?)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뒤로 길게이어지는 콧등과, 마침내 눈, 그리고 그 위 의 뿔… 그리고 탄탄하면서도 우아하게 휘어진 목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 작했다. "드, 드, 드…!" 병사들은 거의 혼란 상태에 빠졌고 그래서 그룬 상병은 목이 터져라 고 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되었다. 성벽 이곳저곳만이 아니라 우 리 등 뒤의 도시에서도 비명 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꺄아아!"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것은 마치 신의 머리가 내려와 지상의 버러지들을 굽어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목은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 주위의 구름들은 갈갈이 쓺겨져 흩어졌다. 천천히 갈라지던 구름들은 마침내 무 서운 속도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맹렬한 구름의 소용돌이. 그리고 황야에서는 거친 바람소리. 구름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그 목은 계속해 서 내려왔고 마침내 그 목 뒤로 강인한 어깨, 거대한 날개 등이 내려오 기 시작했다. 날개가 나올 때 구름들은 폭발하듯이 파악 쓺겨져 흩어졌 고 소용돌이 자체가 하늘의 모든 공간으로 흩어져버렸다. 구름들이 하늘 의 모든 방향을 향해 날아가버리자 그 거대한 몸이 전부 드러나게 되었 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위용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크롸라라라라!" 그것은 마침내 구름 아래로 내려온 블루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운차이 는 피식 웃었다. "기억력이 좋군. 지골레이드잖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롱소드의 칼자루를 꽉 쥐고 있던 샌슨은 그제서야 이마를 닦았다. 그래. 저것은 지골레이드의 모습이었 다. 다만 아프나이델의 상상력이 보태어져서 터무니없이, 거의 산덩어리 만큼이나 과장되게 표현된 블루 드래곤이었다. 제레인트는 좀 더 잘 보 기 위해 성벽 위로 몸을 불쑥 내밀다가 중심을 잃을 뻔했고 그룬 상병이 그를 붙잡았다. "아, 고맙습니다. 상병님." "처, 천만에요. 프리스트님. 그, 그런데 저것은 환상, 환상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오, 테페리여…" 그러자 제레인트는 반색했다. "테페리를 믿으십니까?" 그룬 상병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신앙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인가 하 는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앞으로 좀 나아가서 황야를 바 라보았다. 황야에서는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크들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거나 무기를 집어던지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용감한 오크들도 몇 마리 보였지만 대개의 경 우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저앉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함성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최고에요! 나의 탑메이지!"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주의를 끈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카알도 저 굉장한 광경에 매혹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잠시 멍한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굉장하군요. 아프나이델." "천만에요.그런데 어떻게 할까요? 아, 물론 저것은 환상이므로 브레스 를 뿜어 오크들을 태우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환상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들킬 확률이 높습니다." 카알과 아프나이델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에도 그룬 상 병은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안정시켜야 했다.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저건 환상이야! 어서 일어나지 못해? 헤이! 너희들 사귀나? 남자 들끼리 껴안고 뭐하는 거야? 어… 자넨 돌아가서 갈아입고 오는 것이 좋 겠군. 괜찮아! 소문내진 않겠네. 이봐! 명령이다! 성벽경비대원 지크가 바지를 적셨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말 머리에 뿔이 날 때까지 군기밀이 야! 괜찮아! 환상이라고. 저기 마법사님께서 만든 환상이야. 오! 정말로 저게 환상일까? 누가 나에게 저건 환상이라고 말해줘!' 길시언과 샌슨도 성벽을 따라 달리며 그를 도와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카알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적시고는 말했다. "음. 내가 말하는대로 말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 그의 목소리는 잊혀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얼마든지 그 목소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후 황야를 온통 뒤덮은 그 지골레이드의 환상은 폭풍 같은 목소리 로 외치게 되었다. "이 쓰레기같은 조그만 놈들!" "으아아아!" 비명 소리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탑에서 갤러 리로 나오는 계단에서 무릎을 꿇거나 혹은 엎드려 있는 사람들 몇 명이 보였다. 그 중에는 시장님을 모시러 간다고 달려간 크레블린 대장의 모 습도 보였는데 크레블린 대장은 자신의 검을 성벽 아래로 팽개치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려있었다. 우리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 보자 그들은 고개를 들더니 황급히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는 겁니까! 어서 숨어요!" 음. 황당스럽군. 제레인트는 키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눈 앞에 손 가락을 세워서는 익살스럽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계단에 넘어져 있 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제레인트를 보았다. "마법입니다. 걱정 마시고 올라오세요." 그러자 계단에 있던 사람들은 의혹에 쌓인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때 다시 한 번 천공의 지골레이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기특한 녀석들! 크핫하하! 불까지 준비했구나! 그 질긴 고기를 씹기 좋게 구워야겠군!" 아이고, 맙소사.난 못마땅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어깨 를 으쓱이면서 날 바라보았다. "이봐, 네드발군. 너무 세련된 협박을 사용하면 저 친구들이 못알아들 을까봐 그런 거야." "그래도 너무 조야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 옆에선 아프나이델이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잠시 후 지골레이드는 이 렇게 외치게 되었다. "그 냄새나는 몸이 귀하다고 생각되면 즉시 땅에 쓰러져라, 버러지들아 아!" "그것도 별로 세련되진 않아." 길시언은 이렇게 평했지만 어쨌든 오크들 대부분은 그 몸을 땅으로 날 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모두 쓰러져 누운 모습은 마치 거대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쓰러진 오크들이 모두 아무런 상처도 없다는 점이 전쟁터와 는 달랐지만. 그 동안에 계단에 쓰러져있던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올라왔 다. 그들 중 허연 턱수염과 허연 백발이 허연 구렛나룻으로 멋지게 연결 되어 마치 늑대의 갈기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지골 레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거 진짜 가짜입니까?" 진짜 가짜? 가짜 가짜도 있나? 카알은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예. 진짜 가짜입니다. 그리고 저는 카알 헬턴트입니다." "아, 보, 본인은 칸 아디움의 시장 카를로스 안티고어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시장님은 우리들 모두가 평온한 얼굴인 것을 보고는 안심하면서 카알과 악수를 나누었다. 카알은 안티고어 시장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시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저 오크들부터 먼저 처 리해야 되겠군요." "아, 예, 부디." 그러자 카알은 다시 아프나이델에게 몸을 돌려서 조용히 속삭였다. 카 알의 속삭임은 지골레이드의 우렁찬 목소리로 증폭되어 황야 곳곳에 울 려퍼졌다. "지금 당장 이 도시에서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도시는 내가 차지할 것이다! 드래곤의 침소에 접근하는 녀석은 두 발 달린 녀석 이든 네 발 달린 녀석이든 가리지 않고 죽이리라!" 그 때 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설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크들 가운데서도 완전히 미친 오크가 한둘은 나 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오크는 많은 세월이 지나면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워질지 모르는 것이고. 어쨌든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현실은 왠 정신나간 오크 하나가 육중한 글레이브를 들어올리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났 다. 그 오크는 다른 오크들보다 월등히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어 거의 사람만한 녀석이었고 머리엔 새카만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 오크는 온 들판이 올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취이이익! 새빨간 거짓말! 넌 드래곤이 아니야앗! 취이이익!" 농담이 아니다. 비록 가느다랗긴 했지만 성벽 위에 있는 우리들에게까 지 충분히 들려왔다. 저 오크가 서있는 장소와 성벽까지는 직선 거리로 1,200 큐빗 정도 되는 것 같으며, 따라서 저 오크 녀석은 의심할 여지없 이 괴물이다. 곧이어 그 정신나간 오크의 어깨는 부풀어 터져버릴 듯이 팽창했다. "맙소사!" 엑셀핸드의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오크는 온힘을 모아서 공중의 지 골레이드를 향해 글레이브를 투척했다. 그 어떤 영웅이라도, 설령 루트 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중의 라인버그가 내 OPG를 끼고 던지더라도 저 높이의 드래곤에게 던질 수 있는 의문이다. 높이는 둘째치고 눈 앞을 완 전히 가로막아버리는 저 위용에 짓눌려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하 지만 저 검은 투구의 오크는 그렇게 했다! 글레이브의 쇠창날이 검은 들 판을 배경으로 번뜩였다. 쐐애애애액! 섬광처럼 날아간 글레이브는 그대로 지골레이드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물론 지골레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글레이브는 허공을 날아서는 요 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쟁그렁! 잠시 후 공중에 떠있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환상은 사라지는 법. 땅에 쓰러져있던 오크들 은 천천히, 하지만 맹렬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황야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환성이 들려왔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무슨 말인지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들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 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취이이익! 취익, 취이익!" 하는 소리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카알은 씁쓸한 얼굴이 되어 아래를 내 려다보았고 아프나이델 역시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그 소란스러운 환성 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검은 투구의 오크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크우우우우! 크아아아아!" "녀석들, 기분 좋겠군." 제레인트는 아주 단순한 즐거움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크가 기분 좋으니 자신도 기분좋다는 식으로. 그래서 샌슨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입매를 씰룩거렸다.그런데 그 검은 투구의 오크가 다시 고함을 지른 순 간 샌슨의 입술은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아프나이델 의 마법이 깨진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검은 투구의 오크의 고함소 리는 퍽 작았지만 여전히 확실히 들렸다. "취잇취이이익! 화렌차와! 오크의 친구인 성자 핸드레이크가 나를 돌보 신다! 취익! 지저분한 속임수 따위, 치워랏! 취이이이익! 내려와서 칼과 칼로써, 피와 피로써 싸우자앗! 취이이익!"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7. "샌슨." "응?" "내가 들은 말을 샌슨도 들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정신이 이상한 사 람은 나 하나로 족해." "…미안해. 나도 들었어." "그럼 우리 둘 다 정신이 이상한 거로군?" "그런 것 같아. 사실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샌슨과 내가 이런 넋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카알은 성벽 바깥으 로 투신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맹렬히 앞으로 달려갔다. 카알은 성 벽 위로 상빈신을 거의 다 내밀고는 오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앞으로 달려갔던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내 목소리가 저기까지 울리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아니오. 지금 그런 마법은 없습니다." "이런! 어디 보자. 저 친구를 여기로 불러들이려면…" 그 때 운차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카알에게 말했 다. "할 말이 있습니까?" "예? 아, 예. 저 오크 친구가 지금 핸드레이크의 이름을 거론…" 운차이는 카알의 이야기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전해주지요. 뭐라고 물어볼까요." "예?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저 친구가 말한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인지 좀 물어봐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는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곧 흉벽 위에 섰다. 운차이는 크 게 숨을 들이키면서 두 팔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자세를 취했다. 안티고어 시장은 불편한 얼굴이 되어 카알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헬턴트공. 이곳의 책임자는 나인 줄 알았는데." 흐음. 조금전 지골레이드가 있을 때만 해도 카알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다는 식으로 행동하시더니. 난 불쾌한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카 알은 점잖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이 질문만 좀 하도록 허락해 주십 시오. 부탁입니다. 전 다른 병사들이나 이 도시의 지휘체계에 대해 간섭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전사는 제 동료이고 제 부탁에 의해 오크들에 게 질문하는 것이니…" "하지만 당신은 우리 도시의 손님이고 주인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당연 하지 않소! 더우기 전시상황인 도시 내에서라면 말이오." 안티고어 시장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안티고 어 시장의 이야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 더니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봐아! 오크들아아아!"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뭐라고 말하려던 입을 그 대로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허, 허어어…억." "아이고, 내 귀!" 엑셀핸드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서 물러났다. 엑셀핸드는 귀가 퍽 민감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시장과 다른 수행원들, 그리고 라스 대장 역시 얼굴을 찡그리 며 좌우로 물러났다. 성벽 위라서 뒤로는 물러날 수 없었으니까. 두 손 으로 귀를 막으며 물러나면서도 미소를 떠올리는 카알의 얼굴이 보였다. 운차이가 그렇게 성벽이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저 아래에서 오크 들의 소란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놈이 고함을 질렀다. "취이엑! 노린내나는 인간!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냐아앗!" 미약하지만 정확한 목소리. 샌슨은 기막힌 얼굴로 말했다. "웃기는 일이군. 1200 큐빗 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다니. 게다 가 더 웃기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야." 샌슨은 투덜거렸지만 난 이것이 좋은 노래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짙푸른 새벽 하늘, 광막한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 그리고 운차 이는 푸른 새벽 하늘을 머리에 이고 흉벽 위에 당당히 서서 고함을 지르 고 있는 것이다.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휘휘 젖더니 다시 뭐라고 말하 려 했지만 그 때 운차이는 다시 외쳤다.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이냐아아!" "네 이놈! 취이이익! 그 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이냐아앗!"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마음대로다! 대답햇! 네가 말하는…" 그 때였다. 안티고어 시장은 자꾸 자신의 말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해 짜증이 난 것처럼 운차이의 허리를 붙잡아 아래로 잡아당겼다. 운차이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안전하게 뛰어내렸지만 노한 얼굴이 되어 거칠게 시장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자 시장 역시 몸을 긴장시키며 방어자세를 취했고 그의 수행원들이 재빨리 시장의 주위를 둘러쌌다. 운차이는 손을 칼자루로 가져갈 듯했지만 다시 손을 내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무슨 짓이오?" 시장은 잠시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시장님. 운차이의 눈 을 똑바로 들여보았군요? 시장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얼굴 을 떨구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카알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헬턴트공." "예. 시장님?" "당신도 지각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 을 것이오. 저 목청 좋은 작자가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 록 저런 이야기를 해대는 것 말이오!" "예? 아니,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이런, 제기랄!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가장 소중한 뿌리이자 긍지요! 그의 이야기에 오크 따위가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오. 아시겠소? 지금까지 오간 이야기만 해도 도대체 무 슨 소문이 퍼질지 모르겠구만 그래." 카알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안티고어 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희귀한 종류의 인간을 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딱 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두 분의 이야기는 모든 종류의 의혹과 불쾌한 시선에 대해 보호받 아야 된다, 이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소! 이 나라는 지금 전시오. 온국민이 단결해야 되는 시점 이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전설은 그러한 단결의 근간이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데 저 오크 따위가 오크의 친구 핸드레이크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다는 말이 퍼져보시오. 어처구 니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핸드레이크가 오크들과 뒷거래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먼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뭐요? 웃기지 마시오!" "웃기는지 아닌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정말 핸드레이크가 오크의 친구였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시장님도 아시겠지만 핸드레이크에 대한 믿 을만한 기록은 드물지요. 그리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전 여기 있는 누 구보다도 핸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 의 여행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 저도 저 이야 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어쩌시겠습니 까?" "그런 사실은 필요없소!" "예?" "사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소. 알아야할 사실과 알 필요가 없는 사 실, 아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사실 말이오! 어린 아이에게 독극물의 지식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 것 아니오?" 주위의 사람들은모두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저 멀 리 오크들이 내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카알 과 안티고어 시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눈에는 그것은 두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인간형의 대립처럼 보였다. 한쪽은 국가나 역 사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진실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 카알은 수많은 인 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라는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만 족시킬 차가운 진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과거의 모 든 것을, 설령 거짓과 가식을 동원해서라도 소중히 지키려는 사람. 안티 고어 시장은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에 커다란 애정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정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도 상관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누가 올바른 거지? 그러나 카알은 곧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사죄하겠습니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전을 주고받느라 상 당히 긴장했던 모양인지 어깨를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는 헛기침을 좀 하고나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도시에 들러주신 이상 나는 이곳의 주인으로서 여러분 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들의 안전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다하겠 소. 여러분들이 위험한 이곳에 계실 필요는 없으니 시청으로 가시지요." "저 오크들은 저희들의 뒤를 쫓아온 것입니다. 저희들도 책임을 져야겠 지요." "걱정마시오. 칸 아디움의 성벽을 믿으시고 그 경비대의 힘을 믿으십시 오. 우리들이 친구이자 동포로서 여러분들의 어려움을 돕도록 해주시 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카알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별 의견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 곳에서 오크들을 더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성벽에 남게 되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티고어 시장의 뒤를 따라 성벽을 내려갔다. 흐음. 시청에서의 아침 식사와 식후의 차 한 잔이 기대되는군. 국왕 전하를 친견하고 거기에 덧붙여 직접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은 몰랐어. 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엑셀핸 드의 말마따나 후치 네드발이란 인물에 대한 존경심은 날 오랫동안 사귀 어보고 난 다음에 표현해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지금 우리들은 따스한 아침 식사를 대접받고 거기에 덧붙여 시 청의 시장님 사무실에 모여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사무실은 대단 한 특징은 없이 그저 공무원의 사무실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테이블 상석에 앉은 안티고어 시장께서는 자못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우 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참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네드발군. 전하를 친견했을 때의 기분이 어땠나?" 뭐라고 대답하지? 훈장수역식의 기억이라고는 장엄의 홀인지 뭔지, 가 운데 걸어가는 사람 무진장 애먹이는 그런 장소, 지독하게 졸리는 문서 봉독자의 화려취미의 미사여구, 훈장을 받게 되었을 때는 정말 기뻤지.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면서. "어, 서툰 표현으로 그 감동을 함부로 표현하고 싶지 않군요." 이 정도면 내 혀에 대한 칭찬도 아깝지 않지. 핫하하! 엑셀핸드는 너 그 때 반쯤 졸고 있지 않았느냐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뻔뻔스 럽게 무시했다. 길시언은 그런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카알은 커피 - 그렇다, 커피! 그것이 이 도시에도 있었던 것이다. 안티 고어 시장의 기호품인 모양인데 그는 카알이 커피를 마신다고 하자 퍽 좋아했다. 음. 나라도 내가 저런 괴상한 음식을 좋아한다면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쁠 거야. - 를 한 모금 삼킨 다음 찻잔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시장님.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커피맛은 퍽 좋군 요. 하지만 전운이 감도는 도시에서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그 향취에 깊 이 빠져들 수가 없군요." 성 밖에선 충만한 살의를 불태우는 오크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어서야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속뜻이 담겨있 지요, 카알? 그러나 안티고어 시장은 카알과의 언외언 문답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는 푸근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아, 불안을 떨치십시오, 헬턴트공. (카알은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여러분들이 저 흉악한 오크들에게 쫓기면서 심신이 많이 피로해지셨을 줄은 익히 짐작합니다. 이제 나의 도시에서 그 피로를 잊으시고 심신의 활력을 되찾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보다 충만한 여행이 되도록 대 비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더없이 감사한 말씀입니다. 시장님." 높은 의자 위에서 체면 떨어지게시리 다리를 흔들고 있던 엑셀핸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보시오. 시장. 여기 계속 있어도 되겠소?" 엑셀핸드의 보다 직접적인 말에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했다. 그러자 아 프나이델이 재빨리 말했다. "아, 엑셀핸드님께서는 시장님께서 저희들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 하시지 않으실까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밖에선 병사들이 시장님의 지휘 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얀 턱수염을 쓸어 내리면서 말했다. "염려마시오. 오크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바에야 저 단단한 성벽을 어떻게 하겠소?"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게 눈을 감 은 채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록크로스 해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뭐라고?"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당황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팔짱을 끼고 있느라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여유있게 말했 다.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록크로스 해변에서 300여 마리의 오크들을 대적했던 루트에리노 대왕 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해변이지요. 성벽같은 것은 눈을 씻 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 때 루트에리노 대왕이 의지했던 것은 굳건한 성벽이 아니라 핸드레이크라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자신의 굳건한 우정이었습니다." 안티고어 시장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물론 그렇지. 길시언군.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덧붙여 굳건한 성 벽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길시언은 김빠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문득 길시언이 바로 길시언 바이서스, 국왕 전하의 형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 올렸다. 그런데 길시언은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지? 길시언이 자 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일행들도 모두 암묵 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긴 우리가 국왕전하께 칭호를 받은 명예 의 기사라는 이야기만 듣고도 라스 대장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로 놀 랐었다. 만일 길시언이 왕자라는 사실까지 밝힌다면? 음. 귀찮은 일이 되겠군. 결국 샌슨이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 시장님. 그럼 우리들은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되는 겁니까?" "어? 어. 그렇소, 퍼시발공."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왕자인 길시언 바이서스는 길시언군이고 우 리 고향의 경비대장, 성밖 물레방앗간의 처녀에게 코를 꿰인 샌슨 퍼시 발은 퍼시발공인가? 길시언을 훔쳐보자 그는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샌슨 역시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꾹 참고서 말했다. "그럼 친절한 대접에 감사를 표한 다음 이만 떠나고 싶군요. 저희들의 여정이 몹시 바빠서요." 샌슨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해버렸다. 카알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늦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아, 그런가? 이런. 여러분들의 급한 여정이 나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 되겠지. 헬턴트공. 혹시 여정에 필요한 물자나 기타 등등이 있으면 말씀 해보시오. 내 손 닿는 것이면 모두 다 준비해드리리다." 카알은 한숨을 쉬고나서 말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여정이 그렇게 급하지는 않습니다. 퍼시발군. 우리 때문에 곤경에 처한 도시를 뒤로 하고 우리가 어떻게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시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퍼시발군." 샌슨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평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자 안티고 어 시장은 다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런. 퍼시발공의 말씀이옳소, 헬턴트공. 칸 아디움에 대해서 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아니, 여러분들의 여정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저 오크들은 우리가 처리해드리지요." 아이고 맙소사. 그거 정말 감사한 말씀이군요. 더이상 우리들을 쫓지 못하게 해주신다고? 저 녀석들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 요, 시장 나으리. 헷! 카알은 안티고어 시장에게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도의상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오크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책임을 져야지요." "오, 천만에요.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고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안티고어 시장은 그렇게 웃었고 카알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 한 시장님이군. 밖에 300 마리 쯤 되는 오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것이 당연할 텐데 외려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거절하다니. 호탕하게 보이고 싶은가 보지? 샌슨은 입맛을 다시 고는 말했다. "시장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 호의를 받아들이시지요, 카알?" 카알은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며 유유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카알이 다시 안티고어 시장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 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8.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달려들어와서는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고 잠시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들 에게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안티고어 시장이 밖으로 나가자 카알은 곧장 샌슨을 노려보기 시작했 다.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려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시장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마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를 재현해보고 싶은 모양인데요. 칸 아디움 성에서 안티고어 시장과 300 오 크의 혈전." "그래서? 그냥 이 도시에 맡겨두고 달아나버리자는 말인가?" "시장은 그러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난 안티고어 시장에겐 관심없네.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저 밖의 오크들은 바로 우리들을 쫓아온 것인데 그때문에 이 도 시의 시민들이 불행한 사건을 겪게 만들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손들고 나간다고 해서 오크들이 물러날 리는 없습니다." 카알은 샌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샌슨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 명해나갔다. "저 놈들이 저만큼 조직화된 바에야 뭔가를 얻기 전에는 흩어지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는 어차피 구실일 겁니다. 아마도 노리는 것 은 겨울식량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정말 우리를 노리는 거라면 이런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를 앞질러 간 다음 적 당한 곳에서 매복한 다음 기습하는 것이 낫지요." 샌슨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우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옳은 말일세. 퍼시발군. 아마도 우리를 쫓던 오크들이 이 근방의 오크들을 규합한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겨울식량을 위해 노략질을 준비 하던 오크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가든 말든 오크들은 여기를 공격할 거란 말입니다. 우리를 불러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성에 있으면 귀찮 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까요?" "귀찮다고?" 샌슨은 나와 운차이를 힐끗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의 위명은 오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까 요." 이거 자랑스러워 해야 되나? 카알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오크들에게로 나가겠다고 말한 적 없네. 저 녀석들의 편지를 그대 로믿고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가 나왔으니 이 도시는 공격하지 않으시 겠지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네. 저 친구들의 게획이 자네 가 말한대로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저만큼이나 모였으니 한 번 휩쓸어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 것은 어느 부대의 지휘자라도 아쉬 울 거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네." "됐네요! 그럼 우리는 책임감을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도시 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시장은 우리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습니까? 카 알이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입니다." "도움을 줄필요가 있다면 상대가 뭐라고 하든 도와야지! 어린애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어린애가 싫어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듯이." 샌슨은 입을 다물고 다시 불평불만이 가득한 헬턴트 남자의 표정을 지 었다. 헬턴트 남자들은 스스로를 던져 스스로의 도시를 지키는 법이지. 아무래도 나 역시 불평 섞인 표정을 짓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카 알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환상이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아니, 아프나이델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요.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완전히 괴물이었습니다. 그런 용맹한 오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 까."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제레인트와 네리아, 그리고 레니가 나타났 다. 제레인트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서는 흥분해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 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굉장하더군요." "예?" "녀석들이 공성추를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고, 공성추요?" 제레인트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곧 마구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예. 황야 저편에서 오크들이 거대한 나무를 운반해오고 있습니다. 이 근처 어디에도 나무 같은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세 피아파인 고개에서 무리를 두 개로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두 무리는 이 도시로 진격하고 후방부대는 나무를 해서 끌고온 모양입니다. 지름이 4, 5 큐빗은 될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인데 녀석들이 거기에 십 자형으로 나무 두 개를 묶어서 바퀴축까지 만들었더군요. 아, 바퀴는 둥 근 방패 여러 장을 겹친 다음 가운데 구멍을 뚫어 만들었습니다. 오싹하 고 멋지더군요." 제레인트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일이 아니냐는 듯이 신나게 설 명했고 그러자 카알은 이마를 딱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오, 맙소사. 퍼시발군. 자네에게 경의를 표해야 되겠군. 자네 말이 맞 았네. 아무래도 놈들은 제대로 결심하고 온 모양이군." "예? 무슨 말입니까?" 제레인트는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카알은 저 놈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 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이 도시에 대한 노략질일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이나 아넨드씨도 그렇 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요?" "예. 후방 부대는 수레나 짐꾸러미 같은 것에다 기치 같은 것도 몇 개 들고 왔더군요. 크레블린 대장이 낙담한 어투로 설명해주길 선두를 맡은 부대는 빠른 이동을 위해 무기만 들고 돌격해온 것이며 후방부대가 식량 이나 기타 지원물품을 가지고 이제 도착한 거랍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온 것이며 그렇다면 놈들의 목적은 우리 일행이 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요. 음. 후방부대의 수는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예에. 전 숫자를 세는 데는 자신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선두부대와 거의 같은 숫자인 것 같습니다." 카알은 얼굴이 노랗게 바뀌었다. 샌슨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전 시장님께 찾아온 병사가 무슨 소식을 전했는지 짐작하겠군요." 카알은 자신의 심정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망할…" 칸 아디움의 시내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날은 이미 밝았지만 짙은 구름 때문에 태양은 따스함이란 전혀 없는 동그란 구슬이 되어 있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흉흉한 느낌을 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는지 모 르면서 목이 터져라 우는 꼬마, 이리저리 부산하게 달려가는 병사와 사 내들, 왜 모두들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것일까. 그리고 집안으로 뛰어들 어가는 아낙네들과 그 아낙네들에게 귀를 붙잡힌 채 끌려가는 머리가 좀 굵은 사내아이들. 사내아이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엄마는 항상 재미있는 것은 못하게 해!' 하는 식의 말을 외치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잔칫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뿐인 것 같다. 제 레인트는 코를 쓱 닦으며 말했다. "흐음.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군요." "당신은 불안하지 않소? 이방인이라서?" 길시언의 질문에 제레인트는 어깨를으쓱였다. "모든 것이 테페리의 뜻대로. 전 여기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떠날 필 요를 느끼기 힘들군요." "예?" 우리 일행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크게 놀란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 남겠다는 말입니까?" "예. 떠나야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레니양의 호송은 시급한 일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성벽은 안전하다. 그리고 내가 있어봐 야 오크들과의 전쟁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성벽 위에 서서 이런 이 유들을 차분히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떠나고 싶지 않군요. 그리 고 저는 이런 마음이 언제 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테페리의 뜻이군요." "예! 그리고 테페리의 뜻을 따르는 것이므로, 전 불안하지 않군요." 나도 테페리의 신자가 되어볼까? 어느 때라도 불안감은 없을 것 같은 데.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마디만 하지요." 우리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자들이며 서 로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세레니얼양이 자의로 떠난것은잘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를 강제할 아무런 권한도 없는 집단이지요. 물론 그랜드스톰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 들은 그 책임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만, 전 지금 그 책임을 잠시 잊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전 다른 사람이 저에게 부 여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군요."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임무를 이행하지 못한다고요? 일스 공국의 사절건 말씀입니까?" "예. 그리고 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지금갈색산맥을 향해 달려가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도시의 위험을 수수 방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카알 아저씨는 멋져요! 이대로 달아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 데. 이 도시의 시장님도 우리들보고 가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미혼이시 죠? 어떻게 아직 미혼이세요?" 네리아의 이상한 질문에 우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카알은 머쓱한 표 정으로 말했다. "여성분들의 안목이 정확한 때문이겠지요. 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 야기를 좀 하지요. 우리 책임도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 니다만, 갈색산맥으로 갈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무리를 나누자는 말씀입니까?" 길시언의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먼저 여러분들의 찬성이 있어야겠지만, 여러분들이 찬성한다면 저로선 우리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한 무리는 이 도시를 돕고 다른 무리는 레니양을 갈색산맥으로 데리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나쁜 의견처럼 들리지는 않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손바닥에 침을 퇘 뱉더니 도끼자루를 힘있게 쥐어보 였다. "난 이곳에 남지! 오크놈들의 머리가 600 개야. 골라가면서 벨 수 있겠 군."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미소는 난처한 표정으로 바 뀌었다. 엑셀핸드를 필두로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남겠다고 말해버 린 것이다. 그 각자의 이유를 들어보자. "이미 말했죠? 테페리의 뜻대로. 제가 신의 뜻을 거부해야 될 만한 이 유가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아, 그런 이유야 없지요." "미력한 마법이지만 엑셀핸드님을 돕고 싶습니다. 아, 저, 물론 전 풋 내기 마법사이고 풋내기 마법사가 감히 전쟁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고 는…" "아닙니다. 누가 아프나이델씨가 풋내기 마법사라고 그러겠습니까. 아 까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지요." "프림 블레이드는 무기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품… 칵! 무기입니다. 뭐 야! 네가 무기가 아니고 그럼 뭐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어, 흠! 어쨌 든 무기가 있을 곳은 적이 있는 곳입니다."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헬턴트 전권대리인을 보호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카알 곁에 있겠 습니다." "퍼시발군. 그건…" "어? 샌슨. 내 임무와 같네?" "…네드발군." "장래의 아들을 돌봐야 돼요." "예?" 난 까무러치는 표정을 지었고 카알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네리아와 날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아직까지 대답을 하지 않은 운차이를 돌아보았지만 곧 시선을 되돌렸다. 운차이는 조용히 검을 뽑아들고서 햇빛에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알은 시무룩한 얼굴 로 레니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레니는 토끼 같은 눈이 되어서는 말했다. "저 혼자 가요? 길도 몰라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레니양." 카알은 두 팔을 축 늘어트렸고 우리들은 모두웃었다. 길시언은 미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여행자이며 서로가 서로를 간섭할 수 없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카알?" 카알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600 마리의 오크들을 처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에 대해 논의해봅시다." 작전명은 그랬다. 오크 600 마리 최단시간 격파작전. 독창성이나 참신 함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작전명은 그렇게 정해졌고 그 누 구에 의해서도 불리워지지 않은 채 사장되어버렸다. 그 작전의 수행인원을 보자면, 먼저 자칭 독서가, 타칭 독서가를빙자 한 독설가 카알 헬턴트가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내가 왜 독설가인가, 네드발군?" "진짜 독설가는 독설을 내뱉을 때도 전혀 독설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법이라고 전에 가르쳐줬지요?" "별로 할 말 없네." 그리고 작전인원을 보자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착각될 수 있는 오우 거, 마법검에 시달리면서도 그 성능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전사, 신의 뜻에 따라 교수대에 목이 매이면서도 웃어버릴 성직자, 실제로 교수대에 걸릴 뻔했지만 다행히 풀려난 자이펀 간첩, 면도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예리한 도끼를 시도 때도 없이 휘둘러대는 드워프에, 아들 딸린 홀아비 를 노리고 있는 시집가고 싶어하는 처녀가 하나요, 그리고… "후치. 탑메이지가 어쩌니 하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줘." "스스로가 거부하는 칭호를 받게 될 불운한 마법사." "…젠장." "난 뭐니, 후치야?" "그 모든 인원들이 애정과 헌신으로 보호하는 항구의 소녀." "호호호." "이렇게 화려한 인원이라고요, 카알.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지 금 어느 때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 화려한 인명록은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600마리의 오크를 처리할 수 있 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카알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어투가 갈수록 화려취미에 물드는 것 같군." "지금 내 어투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럼 중요한 문제를 풀어보세나.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먼 저 작전 지휘소를 찾아야되겠군. 그런데 이 도시의 작전 지휘소는 도대 체 어디 있는 거야?" "아직 설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저기 크레블린 대장이 있군요."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9. 샌슨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갤러리 저편에서 병사들에게 뭔가를 말하 는 크레블린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다가왔다. "칸 아디움의 성벽 위에 몰려 있는 이 화려한 인원에게로, 지금 칸 아 디움의 안보와 번영할 내일을 담보하는 막중한 책무에 시달리는 전사 라 스 크레블린이 황급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만해!" 나는 샌슨에게 쥐어박힌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크레블린 대장을 맞이하 게 되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기엔 왠 일이십니까? 헬턴트공?" "카알이라고 불러요. 전황은 어떻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 바깥을 가리켰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녀석들의 1차 돌격은 사수들의 공격으로 격퇴 시켰지만 놈들의 인원은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난 아래의 황야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선 레니가 가쁜 숨을 쉬고 있었 다. "어머나…" 황야에는 곳곳에 오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숫자는 아니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황야에 점점이 흩어져있는 시체라서 보기에 끔찍했다. 그리고 나머지 오크들은 화살 거리 바깥에 장방형 진을 친 채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레인트의 말대로 오크들의 숫자는 2배로 불 어나 있었으며 그 중간중간에 바람을 받아 펄럭거리는 깃발의 모습도 보 였다. 깃발에 무슨 그림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분나쁜 붉은 색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제레인트가 말하던 공성추의 모습 도 보였다. 그것은 똑바로 성문을 향한 채 놓여있었는데 굵은 통나무를 통째로 잘라 만든 것이었으며 오크들이 끌고 다닌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 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샌슨은 그 광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성추는 오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수레바퀴 자국은 보이지 않는데 요." "그렇소. 조금 전의 돌격은 그저 인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방패를 머리에 이고 돌격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들의 신경을 자극시켜 지 치게 만들고 싶은 모양입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면 화살을 낭비시키고 싶은 것이겠군요." "그래요." "돌이나 끓는 기름 등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얼빠진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닦으며 말 했다. "아니,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 하지만 저기엔…" 길시언이 가리킨 것은 흉벽 아래쪽과 갤러리가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투석구였다. 음. 그러고보니 정말 도시의 외벽치고는 굉장한 규모로군. 갤러리에 투석구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크레블린 대장은 길시언의 손을 따라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저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저기엔 투석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요?"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얼굴을 붉혔다. "저게 투석구입니까? 난 빗물 빠지는 구멍인 줄 알았습니다." 오, 맙소사. 빗물 빠지는 구멍이라고? 저렇게 커다란 구멍이? 길시언은 기막힌 얼굴이 되었고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여보시오. 이곳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도시란 말입니다. 솔 직히 말해서 난 지금 내 지위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단 말이오. 우리 경비대원들은 그저 술주정뱅이들의 싸움이나 시장에 서 상인들의 자리 싸움, 아니면 가장 위험한 싸움인 부부싸움을 말리는 존재였지 도시를 향해 처들어오는 오크 부대를 막아내는 사람들이 아니 었소." 길시언은 동정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퍽 정연한 모습이군요. 사수들의 배치도 훌륭하 고." "그래요? 아넨드가 들으면 굉장히 잘난 체를 하겠군. 지금 아넨드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놈은 그래도 우리들 중 전쟁을 겪었던 녀석이고 아마도 유일한 전쟁 전문가일 거요." 그러자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한 일이군요. 저, 우리들도 여러분을 돕고 싶습니다만. 우리들은 전쟁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지요. 더군다나 저 오크들은 우리들을 쫓아온 것이니 우리들로 서는 당연히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환한 얼굴이 되었다. "아, 정말 도와주시겠습니까?" "새벽에는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 때의 무례함은 다시 한 번 사과를…" "아니오. 괜찮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두고, 오크들을 물리칠 방 도나 연구하지요.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셨으니 화살 보유량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크레블린대장은 당장 처량한 얼굴이 되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일원화된 지휘체계, 부대간 유기적 연 결로, 하다못해 보급 계획도 제대로 서 있지 않다. 사수들은 자신들이 언제 교대할 수 있는지 모르고 활이 없는 경비대원들은 어디에 집결해서 뭘 준비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비대원들이 밥을 먹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될 정도인 것이다. 카알은 한숨 을 쉬었다. 아넨드씨는 멋진 배치를 이루어 오크들의 급습을 대비할 정 도까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이건 너무 심하군. 시장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답니까?" "나도 그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크레블린 대장님. 절 당신의 임시 고문 으로 좀 삼아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카알은 곧 부리나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명령이 너무 빨라서 내가 그의 임시 사서가 되어서 종이에 목록을 적은 다음 줄을 긋게 되었다. 카알의 명령에 따라 정신없이 오가던 활없는 경비대원들은 경비대 건물 에서 솥과 식량부대, 취사도구들을 옮겨왔다. 그것들은 성문에 가장 가 까운 건물 하나를 징발하여 설치되었으며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성안의 아낙네들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잠시 후 칸 아디움에서 가장 용감한 아 주머니들이 몰려와서 구수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 카알은 그 냄새를 맡으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전략적 거점은 결국 성벽 주위가 된다. 이 도시 바깥의 지형은 극히 평탄하고 경비대원들의 무장은 빈약하므로 성밖에서의 전투는 절대 불가 능하다. 따라서 성 안쪽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한다." 카알의 지시에 따라 경비대원들은 성문 안쪽에 옹성(壅城), 혹은 방책 이라 불릴만한 것을 설치했다. 음.우리 헬턴트성에도 저런 것이 있다. 헬턴트성의 옹성은 성문 바깥에 있고 돌과 목책으로 된 훌륭한 건조물이 었지만 칸 아디움의 옹성은 건초수레와 물통, 가구 등으로 만들어진 볼 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에 의해 성문이 돌파당할 경우, 성안쪽 으로 진입하게 되는 오크들은 옹성 너머에서 공격하는 경비대원들의 창 에 적지않게 당하게 될 것이다. 카알은 활을 쏠 줄 모르는 경비대원들로 하여금 창을 들고 옹성 뒤쪽에 포진하게 했다. 그 옹성을 구축하는 동안 나는 수레를 밀어붙이고 물통들을 걷어차고 가구를 집어던져 쌓아올렸으 며, 칸 아디움의 경비대원들은 서부에서 온 괴물 후치 네드발에 대한 소 문을 만들어내었다. 으으. 어쩌면 수십년쯤 지나고나면 '우리들의 도시 가 바람 앞의 양초처럼 위급한 시기에 빠졌을 때, 이 도시를 구하기 위 해 서풍을 타고 날아온 괴물 초장이 후치 네드발…' 어쩌고 하는 이야기 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카알은 가장 우수한 사수 몇 명을 골라서 성탑 윗쪽의 원총안에 배치시켰다. 라스 크레블린 대장이 원총안을 가리켜 쓸데없이 좁은 창문 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하자. "여러분들은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크들이 달려온 다고 해서 화살을 쏘아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노릴 대상은 이렇습니 다. 첫째, 가장 크게 고함을 지르는 녀석들. 둘째, 깃발을 든 녀석들. 그 녀석들이 중요합니다. 가장 무서워보이는 녀석을 고를 필요는 없습니 다. 따라서 그 외에 다른 녀석들은 달려오든 말든 내버려두십시오." 사수들 중에 하나가 질문했다. "왜 그 녀석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녀석들이 전체의 사기를 좌우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당신들은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그런 녀석들이 사격권 안에 들어오면 자의에 따라 사격하시오." 정선된 사수들은 성탑으로 올라갔다. 사수의 총수는 50 여명. 그리고 100명 쯤 되는 경비대원들이 성안쪽의 방책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게 되 었다. 모든 배치가 끝나자 우리 일행과 라스 크레블린 대장, 그리고 아넨드씨 는 성문 위의 성루에 모였다. 카알은 성루 너머로 오크들을 바라보며 말 했다. "150대 600이라. 공성전의 이상적인 비율이군." "이상적인 비율이라고요?" "성은 세 사람의 몫을 한다고 하지. 허즐릿이 말한 이상적인 성의 요건 을 기억하는가? "어… 수직적으로 높을 것, 수평적으로 좁을 것, 그리고 자급자족이지 요?" "그래. 이 성은 수직적으로 50 큐빗쯤 되겠군. 충분한 높이야. 그리고 바깥의 길이 대책없이 좁아." "잠깐만요! 저렇게 넓은 황야인데 좁다니오?" "녀석들은 사다리가 없어. 설사 사다리가 있다고해도 오크들이 사다리 를 타고 올라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 따라서 몰려올 곳은 성문뿐 이야." "아, 예." "그리고 자급자족은 되었으니, 따라서 이 성은 세 사람의 몫은 하고 있 지 않은가. 거기다가 병사들이 150명. 계산이 나오는가?" "나오네요. 오크와 이 도시는 현재 막상막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이상적이라는 거야. 하지만 칸 아디움쪽에 더 승산이 있지. 사 람들이나 오크들은 지칠 수 있지만 성벽은 지치지 않으니까." "하지만 화살은 어떻게 하지요? 지금부터 열심히 만들까요?" "그건 곤란하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받아쓰게. 아, 알아보기 쉽 게 써야 되네." 성루 위에는 테이블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의자에 앉아서 글 을 쓸 준비를 갖추자 카알은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썩어빠진 이빨과 냄새나는 콧구멍에 경의를 표하며. 사랑과 우정으 로서 조언하는데 너희들이 이 성을 공격한다면 너희들 중 단 한 놈도 너 희들의 지저분한 동굴로 돌아가지 못한다. 안쓰고 뭐하는가?"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쓰라고요? 킥, 킬킬킬." "물론이지. 그러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오크 가죽이나 오크 고기의 유 익한 이용법을 알지 못하므로 파리들이나 즐거워할 오크 시체 더미를 만 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살아있을 적에도 냄새를 풍기는 너희들이 죽고 나면 얼마나 지독한 냄새를 풍길지 잘 안다. 따라서 괜히 이곳에 돌격하 여 죽어넘어지지 마라. 불쾌하다. 이 편지를 받는 즉시 달아나라. 그대 의 벗이." "오크들의 눈이 뒤집히게 만들고 싶으신 거에요?" "난 평소에도 저 작은 눈이 뒤집힐 수 있는지 궁금했다네." 난 카알이 불러준 말을 적당히 각색해서 더 심각한 말로 만들어내었다. 길시언은 내가 쓴 글을 읽어보더니 폭소를 터뜨렸고 엑셀핸드의 경우엔 똑같은 글을 몇 장 더 쓰라고 간청했다. 자신의 집 거실 벽에 걸어두고 싶은 명문이라는 것이었다.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카알 을 바라보았다. "보시오, 카알. 오크들을 도발해서 어쩌시려는 생각이오?" "저 녀석들이 우리의 화살을 소모시키기 전에 먼저 우리가 저 녀석들의 인원을 소모시킬 생각입니다." "놈들이 이 편지를 보고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무턱대고 돌격해오기 를 바란단 말이오? 그거 너무 순진하지 않습니까?" "전 대장님보다는 오크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맡겨주시겠습 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카알을 묵묵히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자신감있는 눈으 로 그 눈길을 되받았다. 마침내 크레블린 대장의 고개가 움직였다. "음… 좋소." 편지를 다 쓰고 나자 카알은 그것을 화살에 묶었다. 그리곤 성루의 난 간에 발을 올리곤 태양을 쏘아버릴 듯이 활을 높이 들어올렸다. 피유웅! 하늘을 향해 날아간 화살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투덜거렸다. "햇님을 쏴버린 것 같군. 저게 제대로 날아간 것 맞는가?" "제대로 날아갔어, 드워프 친구." 대답한 것은 운차이였다. 운차이는 도대체 눈이 얼마나 좋은 거야? 아 무리 탁트인 사막에서 자라났다지만 저렇게 좋다니. 나도 눈이 별로 나 쁜 편은 아니지만 카알이 쏘아버린 화살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오크의 몸을 맞추거나 하지는 않았군. 땅에 떨어졌어. 오크 들이 거기에 접근하고 있군." "좋아. 됐어. 크레블린 대장님! 병사들에게 단단히 대기하라고 전해주 십시오. 그러나 일제사격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쏘아서는 안 됩니다." "알았소. 그룬!" 그룬 상병은 크레블린 대장의 명령을 하달받고는 갤러리 곳곳을 뛰어다 니며 명령을 전달했다. 성루 양쪽의 성벽에서 병사들은 화살 하나씩을 흉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또 하나를 꺼내어 활에 걸고는 활을 느슨히 늘 어트린 채 흉벽 너머를 주시했다. 모두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옆 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아프나이델이 긴장한 얼굴 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조그만 장난감삽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아프나이델의 주 머니 안에는 얼마나 많은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 거지? 잠시 동안 성벽 위의 인간들과 오크들 양편 모두에서 쥐죽은 듯한 고요 만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터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 의 그 검은 투구의오크의 목소리였다. "이 찢어 죽일 인간놈드으으을! 일제에에 돌겨어어억!"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고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 손님께서 오시는군."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 오크들은 대지를 할퀴는 폭풍처럼 질주해왔다. 황야를 빽빽하게 덮으며 질주하는 모습은 악몽 같았다. '우아아아! 취이 이익!' 번쩍이는 글레이브의 반사광, 그리고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가 오크들의 뒤로 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오크들은 화 살에 대비하여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돌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크들의 무리 가운데로 그 공성추, 충차? 어쨌든 바퀴 달린 통나무 가 돌격해오고 있었다. 그 공성추에는 오크 수십 마리가 매달려 밀고 있 었으며 그 거대한 공성추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가속도를 받자 곧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투투투! 방패로 만들어진 그 바 퀴가 깨어져나갈 듯이 진동했고 그 몸체는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리면 서도 그것은 곧장 성문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었다.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첫번째에서 기를 꺾어야 된다! 아프나이델! 사용할 수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목표는 저 공성추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아프나이델은 곧장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 는 손에 쥔 그 장난감삽으로 허공을 퍼내듯이 손을 놀리며 고함질렀다. "디그(Dig)!" 콰우웅! 오, 맙소사! 공성추가 굴러오던 길 앞에서 흙이 솟구쳐 올랐 다. 마치 아프나이델이 그 땅을 퍼낸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질주하던 공성추는 걷잡을 수 없이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나 무 부러지는 소리와 거대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거 대한 공성추가 구덩이에 곤두박질치자 마치 황야에 나무가 돋아난 것처 럼 보였다. 땅에서 비스듬하게 솟아나온 공성추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공성추를 밀고 있던 오크들 중의 상당수도 구덩이 에 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쾌애애액!" "취이이익!" "맙소사! 이토록 멋진 마법이라니!" 카알은 펄쩍 뛸듯이 기뻐하고 있었고 크레블린 대장은 체통 없게시리 함성을 지르며 하늘을 향해 롱소드를 휘둘러대었다. "우아아아!" 그리고 성루 양쪽에서도 병사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아프나이델 의 마법 한 방으로 공성추는 당장 못쓰게 되어버렸고 그러자 오크들은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었다. 질주하던 오크들 중 상당수가 제자리에 멈춰 서기까지 했다. 아넨드씨도 그 모습을 보며 함성을 지를듯이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넨드씨는 숨막힌 소리를 내었다. "맙소사! 갈고리?" 카알은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이런 빌어먹을! 그래서 사다리가 없었군!" 그렇다. 성쪽으로 돌격하던 오크들 중 일부가 갑자기 등 뒤에서 밧줄을 꺼내어 든 것이다. 그것은 앞쪽에 갈고리가 달려 있었으며 오크들은 밧 줄을 빙빙 돌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카알은 옆에 세워두었던 활을 들어올리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일제사격! 목표는 갈고리를 든 오크!"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0. 크레블린 대장이 다시 고함 지를 필요도 없었다. 사수들도 목표를 정확 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수들은 갈고리를 든 오크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퓽퓽퓽퓽퓽! 첫번째 일제사격에서 많은 수의 오크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혹은 다른 곳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취에에엑!" "크우욱!" 그러나 다른 오크들 이 커다란 방패를 들어올려 갈고리를 든 오크를 보호했다. 그리고 갈고 리를 든 오크들 뒷쪽으로 다른 오크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놈들은 곧장 성 위를 향해 활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오크들이 가진 것은 조잡한 숏 보우였지만 조잡하다고 해서 맞아도 안죽는 것은 아니다. 빌어먹을! 놈 들이 성문을 향해 올 줄 알았는데 성벽을 곧장 넘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니!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든 채 외쳤다. "성벽 위로 갑니다! 칸 아디움의 성벽을 넘을 오크들은 나 길시언에게 허락을 받아야 될 거요!" 그렇게 외치면서 길시언은 성루에서 곧장 갤러리를 향해 뛰어내렸다. 그러자 샌슨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저쪽의 통과허가증은 내가 발부하지! 댓가는 오크의모가지야!" 그리고 샌슨은 반대쪽 갤러리로 뛰어내렸다. 사수들의 2회에 걸친 사격 이 끝나고 잠시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오크들은 어느새 성벽 아래까지 진격했다. 놈들은 빙빙 돌리던 밧줄을 힘차게 위로 던져올렸고 곧 흉벽 에 갈고리가 걸리면서 쇳소리를 내었다. 철컥, 타당! 흉벽 뒤의 사수들 은 당황해서 활을 내려놓으며 갈고리를 다시 던져내려고 했지만 사수들 이 일어나면 곧장 아래쪽의 오크 사수들이 집중 사격을 했다. 삽시간에 상당수의 사수들이 성벽 위에 쓰러졌다. "어머니! 으악!" "크으윽!" 갤러리로 뛰어내린 길시언은 두 말하지 않고 갈고리 자체를 후려쳤다. 카각! 밧줄이 잘려나가며 올라오고 있던 오크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길시언은 갤러리를 주욱 달려가면서 계속해서 옆으로 검을 휘둘러 밧줄을 잘라내었다. 칵! 카가각, 탕탕! 흉벽의 돌과 프림 블레이드가 부 딪히며 뼈를 긁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성루에 남아있던 나머지 일행 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다음 양쪽으로 뛰어내렸다. 아주 빌어먹게 도 성벽 위에는 칼잡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파이커즈나 소드맨들은 성문 이 돌파당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모두 아래쪽의 옹성에 대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벽을 넘어오는 오크들을 막을 사람은 우리들 뿐이다. 엑셀핸드 와 운차이는 길시언쪽으로, 그리고 나와 네리아는 샌슨 쪽으로 뛰어내렸 다. 그리고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 레니는 성루 위에 남았다.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파이어볼!' 성 아래쪽에 불구덩 이가 만들어지며 수많은 오크들이 산 채로 불타올랐다. 굉장한 폭음과 연기. 불붙은 오크들이 발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크아아악! 그러 자 옆에 있던 오크들이 극진한 우정으로서 불붙은 놈들의 목을 단숨에 날려주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사수들이 날 린 화살보다 오크에 의해서 쓰러지는 오크가 더 많은 것 같은 착각이 든 다. 내 앞쪽으로 샌슨은 작두로 건초 썰듯이 갈고리 밧줄들을 신나게 잘 라내고 있었다. 탱탱탱! 샌슨은 여유있게도 밧줄에 오크들이 매달릴 때 까지 기다린 다음 잘라내고 있었다. 그래서 밧줄이 끊어지면서 오크들은 아래로 떨어져 목뼈를 부러트리고 있었다. 아넨드씨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사수들 중 셋의 하나는 대거를 꺼내어 밧줄을 잘라라! 명심해! 셋의 하나다! 나머지 둘은 계속 활을 쏴!" 웃기는 소리! 이 난장판에서 어떻게 셋을 정하고 어떻게 하나를 고른단 말이야! 명령을 받은 사수들은 대거를 뽑아들면서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오크들의 숏보우는 사정이 없었다. "으아아아!" "꺄아아악!" 네리아는 가슴에 화살을 맞은 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를 보며 비 명을 질렀다. 난 허리를 굽힌 채 달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머리를 들지마! 머리를 들지 말라고!" "카리스 누멘!" 저편의 엑셀핸드는 도끼를 양손잡기로 쥔 채 신나게 흉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도끼가 돌에부딪혀 불꽃이 튀었고 그 때마다 밧줄은 끊어지며 오크들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 때였다. "후치! 엎드려!" 난 항상 그 명령에 충실하지! 난 앞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내 가 서 있는 곳은 높은 성벽 위였고 함부로 몸을 던질 수 없었다. 옆을 돌아본 순간 커다란 이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제에에길! "크아아악!" 흉벽 너머에서 오크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어느새 밧줄을 타고 올라온 그 놈은 흉벽을 걷어차며 나에게로 몸을 날렸다. 컥! 머리카락이 빳빳하 게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은 짧았고, 순간 목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입 김. 그리고 뒤로 디딘 발에는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하늘이 빙 도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뻗은 팔에 잡히는 것을 콱 끌어당겼다. "후치잇!" 그렇게 해서 나와 오크는 성벽 뒤 도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면 했다. 난 한 손으로 성벽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내게 뛰어든 오크는 내 허리에 매달렸다. 그런데 망할 오크 녀석은 내게 매달린 채 내 허리를 깨물었다. 이 개자식아! 난 다른 손을 들어올렸다가 그 놈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꽤애액!" 오크는 아래로 떨어졌고 나는 네리아의 팔을 붙잡아 간신히 올라왔다. 깨물린 허리에서는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고통도 느껴 지지 않는다. 난 숨을 헐떡이며 흉벽을 쳐다보았다. 흉벽 여기저기서 오 크들의 머리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샌슨이 고 함을 지르며 흉벽 위로 올라오는 오크들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그 리고 활을 들어 오크를 내려치는 사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제길, 성벽이 함락 직전이다! 그러나 내가 있는 한 그건 안돼! 트라이던트를 휘둘러 성벽 위로 올라온 오크의 손을 내려친 네리아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후치야! 너 괜찮아?" "직접 보여드리죠!" 난 허리의 고통을 깨끗이 무시한 채 손을 뻗어 가까이 걸려있던 갈고리 밧줄을 잡았다. 묵직한 느낌으로 봐서 오크가 매달려 있는 것이 확실하 다. 그럼 됐어! 난 고함을 지르며 밧줄을 끌어올렸다. "이야아아! 성벽 위의 사람들! 모두 머리를 숙여!" 그리고 곧장 밧줄을 머리 위까지 단숨에 튕겨올렸다. 네리아가 숨넘어 가는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후치야!" 고향 개울에서 낚시하던 생각이 나는군. 지금 나는 칸 아디움의 성벽 위에서 거대한 낚시질을 하는 셈이야. 낚싯줄인 밧줄은 거대한 원을 그 리며 하늘로 솟아올랐고 밧줄에 매달린 대어인 오크는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라고 밧줄을 붙잡았다. 성벽 위를 중심점으로 해서 허공에 수직으로 거대한 원호가 그려지는 순간 주위에서 비명과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 고 오크와 밧줄이 정점으로 솟아올라 중량감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흉 벽 위로 뛰어오르며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외쳤다. "사랑스러운 악마 제미니의 이름으로!" 나는 오크가 매달린 밧줄을 힘차게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옆으로 뿌렸 다. 눈 앞에 섬괌이 번쩍하면서 허리가 아우성을 쳤지만 공중에서 잡아 당겨진 밧줄은 천천히, 하지만 무서운 힘을 담은 물체 특유의 완강함으 로 장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그것이 한 바퀴 돌아 네 리아의 머리 위를 스치자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임마! 누구 목을 날릴 생각이야!" 칸 아디움의 외성 위 하늘에 지름이 80 큐빗은 넘어보이는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순간, 아래의 오크들과 성벽 위의 인간들 모두가 입을 쩍 벌렸 다. 원심력이 발생하면서 아래로 처지는 힘은 사라지는 대신 밧줄은 무 서운 속도로 돌게 되었다. 부웅, 부웅, 붕붕붕붕! 난 팔이 끊어지는 느 낌을 받으면서도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그거 놓지 마라!" 물론 밧줄에 매달린 오크를 향해 지른 고함이다. 오크는 지금 허공에서 지름 80 큐빗의 원을 형성하는 무게추 역할을 하면서도 밧줄을 놓치지 않았다. 저 놈에게라면 오크라는 것 잠시 잊고서 키스를 해도 좋아! 도 저히 참을 수 없는 느낌이 폐부를 찔러왔다. 나는 허공을 향해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핫하하하하! 미치도록 헬턴트식이야!" 성벽을 오르던 오크들은 기겁하면서 밧줄을 놓고 내려갔다. 밧줄을 놓 치고 떨어지는 녀석도 보였다. 아래에서 고함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 다. "악마, 악마다! 취이익! 악마다!" "괴물 초장이다아앗! 취이이익! 췻췻, 취익!" "뭐? 르, 취익! 저, 저게 그 괴물 초장이인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돌아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다. 날 노 리고 쏘아붙이는 것이 확실한 화살들이 핑핑 소리를 내며 내 옆을 지나 쳤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웃고 싶을 뿐이다. 난 화살을 바 라보며 웃었다. "우하하하! 받아볼래!" 정신없이 돌아가던 밧줄을 놓는 순간 오크와 밧줄은 쏘아진 화살처럼 황야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인간과 성벽 아래의 오크들 이 모두 하나가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황야 위로 혜성처럼 날아 가던 오크는 오크들의 무리 뒷편 멀리 떨어진 곳에 작렬했다. 콰아아앙! 오크의 단단한 머리에 화렌차의 축복을! 아쉽게도 먼지가 팍 피어오르지 는 않았지만 눈앞을 어지럽히는 피보라가 튀어올랐다. 구토가 일어날 것 같군. 젠장! 난 구토를 참기 위해 흉벽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요철형으 로 생긴 흉벽의 돌을 징검다리 밟듯이 뛰는 동안 모든 것이 잊혀진다. 나는 성벽 위로 부는 가장 날카로운 바람! "이 미친 자식아, 어서 내려와!" 샌슨에겐 틀림없이 미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화살이 정신없이 날아 드는 흉벽 위를 줄타기 하듯 달려가는 내 모습은. 나는 허리를 숙여 갈 고리 밧줄 두 개를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밧줄에 매달렸던 오크들은 처 절한 비명을 지르며 밧줄을 놓아버렸고 그래서 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 을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나는 밧줄을 거꾸로 들어 갈고리를 추 로 삼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알아둬라, 이 망할 자식들아! 괴물 초장이의 여가 생활은 즐거운 오크 낚시와 함께! 쿠핫하하하!" 이번에는 훨씬 간단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도는 밧줄은 삽시간에 직 경 100 큐빗은 넘는 원을 형성했고 공기를 가르는 밧줄에서는 살갗을 간 지럽히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성벽 위의 사수들은 모두 질겁하면서 갤러 리의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그래서 다행히도 누군가의 목을 걸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오크들을 노려서 천천히 밧줄의 회전 경사 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핑핑핑핑핑! 빙빙 도는 갈고리 밧줄은 성벽과 지 면을 잇는 대각선이 되어 회전했다. 아무래도 갈고리 밧줄을 돌려서 오크를 낚아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무서운 속도로 도는 갈 고리가 땅을 스치며 불꽃과 흙먼지, 돌멩이들을 튀기는 마당에 뒤로 물 러나지 않는 오크가 어디 있으랴. 오크들은 뒤로 물러나며 정신없이 숏 보우를 당겼다. 코 바로 앞으로 화살이 지나가는 순간, 나는 밧줄을 놓 아버리고는 흉벽 아래 갤러리로 뛰어내렸다. "오늘치 용기는 다 소모! 이젠 겁많은 소년으로 복귀!" 네리아는 정신나간 듯이 웃으며 외쳤다. "아핫하하하!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복귀야! 핫하하하!" 그리고 저편 성루쪽에선 카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오! 손님들께 잊혀지지 않는 작별선물을 주시오, 아프나이델!" "플레이밍 스피어(Flaming sphere)!" 아프나이델이 있는 성루쪽의 허공에서 폭발하듯이 불길이 일어났다. 화 르르르! 허공에 나타난 불의 공은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땅에 부딪혀 몇 번 퉁, 퉁 튕기더니 그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황야의 잡초들을 불태우며 굴러가는 불의 공은 오크들을 미치 게 만들었으며 오크들은 괴성을 지르며 죽어라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리고 불의 공은 계속해서 그 뒤로 따라굴러갔다. 지평선으로 달려가는 오크들의 모습과 그 뒤를 따라 텅, 텅 굴러가는 불의 공의 모습을 보면 서 나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주위의 병사들은 모두 얼빠진 모습으 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때 아넨드씨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함 을 질렀다. "아우우! 이후, 이후, 이후후후후!" 아넨드씨의 고함 소리는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주 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경비대원들은 성벽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을 터뜨 렸다. 승전의 함성이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1.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봐요! 멋쟁이 괴물 초장이씨!" 창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길시언은 프림 블 레이드를 닦아내며 웃었다. "멋지군, 자네. 몇 년만 지나면 이 도시의 아이들은 루트에리노 대왕이 나 핸드레이크의 이름보다는 황야에서 나타난 전설의 명검 프림 블레… 젠장. 황야에서 나타난 괴물 초장이 후치 네드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 으며 자라나겠는걸?" 나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내가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 을 했지? 오크 사수들이 노리고 있는 성벽 위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한참 동안 서 있었다니. 화살에 맞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 군. 오크들의 숏보우의 취약한 성능에 대해 화렌차에게 감사해야 되겠 군. "됐어. 이제 옷 입어." 샌슨은 내 허리에 붕대를 다 감았놓고는 붕대 위를 철썩 때렸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되다니! 붕대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입는다. 망 할 오크 녀석. 내 살 맛이 그렇게 궁금했나? 우리 일행은 지금 성탑 이층의 회의실 같은 방에 집결해 있었다. 물론 정식으로 대 오크 전투 지휘소는 성 안쪽 평지에 설치된 야전 막사지만, 병사들이 날 어깨에 매고 도시를 일주하겠다는 계획을 말한 순간 나는 성탑으로 도망쳤고 그래서 다른 일행들도 터덜터덜 이곳으로 올라왔다.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질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후드 를 깊이 눌러쓴 두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이 후드를 걷어올리자 나는 그들이 바구니를 든 네리아와 레니인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네리아는 질겁한 내 얼굴을 보더니 당장 킥킥 웃으면서 말 했다. "이봐, 괴물 초장이씨.지금 밖에선 칸 아디움의 낭만적인 소녀들이 당 신의 발치에 몸을 던져 기절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미친듯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오로지 후치 네드발을 찾기 위해서 말이 야." "…이곳에서는 후치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기를 바라겠어요." "왜지?" "그 소녀들에게 헛된 명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교훈이 될 테니까. 엉뚱한 남자의 발치에 몸을 던지면 부끄러워서라도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겠지요." "음. 좋은 말이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린 이런 후드를 둘러쓰고 돌아 다녀야 된다고." 레니 역시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후치. 너 때문에 전투에서 영웅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이 컴컴한 성탑 안에 갇혀있잖니." "모두들 미안해요." "괜찮네, 네드발군. 그런데 어디 보자… 왠지 즐거울 것 같은 바구니로 군요, 네리아양?" 네리아는 웃으면서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샌슨의 황급한 손길이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걷어내었고, 그러자 곧 구운 새고기와 빵, 와인병, 치즈, 말린 과일 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엑셀핸드와 샌슨은 환성을 질렀다. 네리아는 마치 테이블을 관장하는 가정주부라도 된 양 자상하면서도 품 위있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영웅이라서 이런 음식들을 받을 수 있는 거에요. 아넨드씨 가 우리 바구니를 풍성하게 채워주었지요. 지금 아래의 경비대원들은 멀 건 수프와 딱딱한 빵을 먹고 있지요." "아, 이런. 부끄러운 노릇이군." 카알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샌슨도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 서 참으로 부끄럽다는 듯이 와인병의 병마개를 이빨로 뜯어내었다. 그리 곤 곧장 엄청나게 부끄러워 하는 엑셀핸드에게 와인병을 빼앗겼다. 어이 구, 이 작자들아! 네리아는 샌슨과 엑셀핸드 때문에 아프나이델과 제레 인트가 굶주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하면서 - 그 러니까 새구이의 다리를 뜯어 아프나이델에게 건넨다든지 엑셀핸드를 흘 겨보면서 와인병을 빼앗아 잔에 부어 제레인트에게 건넨다든지 하면서 말했다. "라스 대장님하고 시장님이 잠시 후에 올라오겠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아, 그래요. 승전 처리로 바쁘시겠군요. 그런데 내가 전하라고 한 말 은 전했습니까?" "예. 성벽 바깥으로 바리케이트와 목책 등을 구축하게 하는 것. 맞지 요? 그대로 전했어요.지금 경비대원들은 성 밖으로 통나무와 수레 등을 이동시키고 있어요." "아, 그것말고도 또 있었는데?" "물론이죠. 사수들로 하여금 목책 구축 작업을 엄호하게 한다. 맞지요? 그것도 다 제대로 되었어요." "훌륭한 전령입니다. 네리아양." 네리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이트호크는 기억력이 좋아야 되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요?" "오크들이 성벽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럽니다. 아까 돌격 때 녀석들이 밧줄을 던지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지요. 놈들은 공성추로 성문을 파괴한 다음 들어올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제 목책이 설치 되면 오크들이 접근하여 밧줄을 던지기 전에 사수들이 저격할 수 있겠지 요." "정확하네요!" "예?" "아넨드씨도 그럴 거라고 말했거든요." "아아. 그렇습니까. 역시 참전 용사라 다르군요." 그리고 네리아는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아, 너한테도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 "뭔데요?" "아넨드씨는 자식이 없다던데. 양자로 들이고 싶다고 하던걸?" "아이고, 맙소사!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내가 엄마라고 대답했지. …어머? 후치야? 괜찮아?" 모두들 즐거운 식사를 마칠 때 쯤 해서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선 것은 전투 동안 내내 보이지 않던 카를로스 안티고어 시장과 라스 크레블린 경비대장, 그리고 아넨드씨였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아넨드씨가 외쳤 다. "여기 카알씨에게 물어봅시다! 이봐요, 카알. 당신 생각은 어때요?" 카알은 당황한 얼굴로 아넨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군요." "아니! 그게 아니고! 승전의 기세를 살려서 진격하자는 얼빠진 주장 말 이오!" 그러자 카알이 대답할 새도 없이 안티고어 시장이 외쳤다. "말 조심하게, 아넨드!" "제기랄, 시장님. 난 원래 입이 거치니 적당히 순화해서 들으시지요. 어쨌든 카알에게 물어보자는 말입니다!" "말을 조심하라니까, 아넨드! 헬턴트공이라고 불러야 되네!" 그러자 카알은 피곤한 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그냥 카알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런데 진격 의견이 나왔습니 까?" 안티고어 시장은 방 가운데 있던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말했 다. "그렇소. 우리 경비대는 성벽에서 커다란 승리를 획득했고 지금 그 기 세가 영광의 7주 전쟁 때의 바이서스군보다도 더 낮다고는 못할 정도란 말이오. 이 기세를 살리지 못한다면 작은 승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소. 지금 오크들이 패배의 충격에 빠져있는 동안 즉시 공격을 감행해야 되 오!" 도대체 커다란 승리야, 작은 승리야? 말이 빨리도 바뀌는군, 그래. 카 알은 안티고어 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조금전 공방전에서 오크들의 사상자는 얼마나 됩니까?" "예? 아, 이봐, 크레블린 대장?" 아이고 맙소사. 숫자에는 신경도 안쓰시나 보군. 안티고어 시장은 크레 블린 대장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대장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성벽 바깥에서 확인된 오크의 시체는 약 80 구 정도 됩니다. 1차 돌격 때의 사망 숫자까지 합친 겁니다. 그리고 부상자 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크들은 부상자들을 호송해 가지 않기 때문에 그 다지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카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칸 아디움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사망 11 명, 그리고 부상자가 20 명 정도 됩니다." "그럼 아군은 120명 정도 남았군요. 오크들은 500 마리 정도?" "그런 셈이죠."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승기가 있지 않습니까, 헬턴트공. 게다가 인간이 오 크보다는 더 크고 그 창도 더 길단 말입니다. 단순히 숫자로 비교할 수 는 없습니다." 카알의 눈썹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 다. "시장님. 검을 가지고 계시지 않군요. 하지만 검이 없으시진 않겠죠. 나가서 오크 다섯 마리만 처리해주시겠습니까?" "뭐, 뭐요?" "명령을 내릴 자는 모법을 보여야 되니까요. 시장님께서는 지금 경비대 원들에게 다섯 마리의 오크들을 상대하라고 말하려 하십니다. 그러니까 시장님께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티고어 시장은 입을 딱 벌렸다. "이보시오! 그 무슨 유치한 논리란 말이오? 난 노인이오. 내가 나가서 오크들을 상대하라니! 물론 난 시장으로서 이 도시를 지키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소. 하지만 난 몽상가는 아니란 말이오. 게다가 내가 나서서 오크들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이 도시는 그 지휘자를 잃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거요. 어떻게 그런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 거요?"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크레블린 대장이나 아넨드가 분명히 하고 싶은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을 꺼내놓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몹시 하고 싶을 것이다. 다행히 그 말은 운차이가 대신 했다. "내가 보기에, 아까 전투에선 그 중요한 지휘자가 없이도 잘들 싸우던 데."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한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 굴은 곧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하지만 또다시 공포스러운 얼굴로 바뀌게 되었는데, 운차이가 안티고어 시장을 '똑바로' 바라보았 기 때문이다. 참 다채로운 표정 변화로군. 엑셀핸드 역시 수염을 쓸어내 리며 결코 친근하다고는 볼 수 없는어조로 말했다. "이거 보오, 당신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괜히 나서서 돌아다니다가 흙 탕물을 밟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잖겠는가? 안전한 시청에 틀어박 혀 계시는 것이 좋겠구먼." "이거 보시오, 말이면 다 말인 줄…" 엑셀핸드는 곧 서슬퍼런 기세로 말했다. "말이라고 다 말은 아니지! 그러니 진격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그만 하시지? 오크들의 머리를 몸과 분리시켜놓는 작업이라면 나 드워프의 노 커 엑셀핸드 아인델프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자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나 역시 몽상가가 아니네. 그러니 입 닥치고 전투는 전문가에게 맡기게! 무 릇 우두머리가 하는 일은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를 기르는 법일세. 그리고 이곳의 전문가는 저기 아넨드라는 젊은이고!" 우하, 하, 엑셀핸드가 저렇게 달변이라니. 어, 아넨드씨를 젊은이라고 말한 것은 좀 이상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엑셀핸드의 나이는 300살 가 량이다. 당연한 말이로군. 안티고어 시장 역시 그 젊은이라는 말에 움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기서 가장 연장자였지만 그것은 인간들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엑셀핸드가 있는 이상 연장자의 권위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군. 설마… 엑셀핸드가 그것까지 예견해서 젊은이라는 말을 한 것일 까? 에이, 설마. 어쨌든 엑셀핸드는 그 말 한 마디로 당장 좌중의 최연장자의 후광을 빛 내게 되었다. 그리고 제2연장자로 그 격이 떨어져버린 안티고어 시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쩌자는 말입니까? 화살은 떨어지고 경비대원들은 모두 지쳐버 리길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이 도시에 대해 이방인이시라 잘 모르실 테 니 말씀드리지요. 이 칸 아디움은 교역도시입니다. 이 척박한 땅에서 논 밭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곳은 오로지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지르는 여행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유지되는 도시란 말입니다. 만일 오크들의 봉 쇄가 더 길어지면 이 도시는…" 벌컥!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든 병사 때문에 안티고어 시장의 청산유수 같은 말은 중단되었다. 들어온 병사는 황급히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보고합니다! 지금 몇 명의 여행자들이 오크들과 접전 중입니다! 그들 은 성문쪽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오크들의 방해를 받고 있습 니다!" "뭐라고? 이런! 어서 가보세!" 크레블린 대장은 당장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방문을 나와 계단을 올라가니 바로 성벽 위 갤러리였다. 크레블린 대장 은 성루쪽으로 달려갔고 우리들은 흉벽 너머로 황야를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는 정오였다. 그리고 그 정오의 햇살 아래 저 편 지평선에서 굉장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맙소사! 저거 제정신이야?"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크들의 무리 한가운데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크들은 여 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구 움직이고 있었는데 대단히 무질서한 모습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꿈틀거리는 슬라임처럼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오크들의 무리가 갈라지며 그 가운데로 달리고 있는 몇 명의 인간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오크들의 무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 는 대담한 짓을 하고 있었고 오크들은 그 인간들을 가로막기 위해 애쓰 고 있는 모양이다. 오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몰아붙이는 바람에 인간 들은 맹렬히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위진을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했다. 그들은 포위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달리 고 있었고 그에 따라 오크들은 이곳저곳으로 급격하게 움직였다. 레니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파도를 뚫기 위해 애쓰는 배 같아." 음. 항구의 소녀다운 말이야. 정말 오크들은 파도처럼 움직이고 있었지 만 인간들은 절묘하게 그 힘이 흩어지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크 들이 다시 움직이자 인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 붙잡히 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포위진은 두꺼웠고 저 인간들이 저지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거친 욕설과 창칼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까 지 들려온다. 카알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젠장! 저 여행자들은 미쳤군! 오크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다니! 이 넓 은 황야를 두고 왜 저기로 뛰어들었단 말이야! 눈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 나?" 길시언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이 성으로 곧장 달려오고 싶었던 모양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좀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니오!" "저 사람들을 구해야 됩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곧 잡힐 겁니다!" 샌슨은 그렇게 외치며 몸을 돌렸고 카알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길시 언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팔짱을 낀 채 황야를 바라보던 운차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남자가 세 명이오. 그런데 아주 이상한 모습이 보이는걸." "이상한 모습이라니오?" "저 친구들… 마치 후치 같은걸." "예?" 난 놀라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샌슨과 길시언도 달려가던 동작을 멈추고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운차이는 여전히 황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들 말이오. 마치 후치처럼 오크들을 날려버리고 있는데. 지금 오크가 찌른 글레이브를 빼앗았군. 지금 휘두르는데, 저거 굉장하군! 한 번 휘두르니까 오크들 대여섯 마리가 날아가버리는걸? 그리고 저거, 이 런. 오크 하나를 들어 던지는데 주위의 오크들이 모두 밀려서 날아가버 리는걸. 도저히 사람의 힘이 아니오." 왜 서늘한 기분이 드는 거지? 카알은 질린 어투로 질문했다. "남자들의 얼굴이 보입니까, 운차이?" "아니,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럽니까?" "그럼… 혹시 두 명은 롱소드를 쓰며 한 명은 대거를 사용하지 않습니 까? 그리고 롱소드를 쓰는 남자 중 하나는 덩치가 좀 크고 나머지 둘은 보통 체격…" "그렇군요. 아는 사람들입니까?" 샌슨과 난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한데, 둘 다 꺼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할 수 없군. 내가 말하지. "샌슨. 오크들만 끈질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샌슨 생 각은 어때?" 샌슨은 대답을 하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자식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온 거지? 우리는 어제 24 펜큐빗을 달렸는데!"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2. "예? 아니, 저 녀석들이 어떻게 후치의 OPG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 까? 어, 후치는 지금 그걸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복제품이란 말입니 까?" "영원의 숲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요.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 다. 어쨌든 믿기 어려운 괴력을 사용하는 세 명의 남자라면, 그리고 두 명이 롱소드를 사용하고 한 명은 대거를 사용한다면 거의 확실하군요."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넥슨 휴리첼과 하슬러, 그리고 쟈크의 세 명인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말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렇게도 빨리 우리 들을 추적해왔단 말이야? 저 녀석들과 헤어졌던 것은 사흘 전이다. 그리 고 그 동안 우리는 거의 45 펜큐빗은 넘게 달려왔다. 아니, 어떻게 인간 이 사흘 동안 45 펜큐빗을 달릴 수 있단 말이야! 엑셀핸드는 수염을 비 비 꼬면서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와?" "OPG를 가진 세 명의 여행자들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제레인트가 손을 들며 말했다. "잠깐만요.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을 저대로 내 버려둘 생각입니까?" 샌슨은 못마땅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구해주자는… 말씀입니까?" "예? 그러면 내버려둡니까? 오크들에게 죽음을 당하도록?" "글쎄요. 그건 어느 누구에게도 저지르면 안되는 일이긴 합니다만. 참, 그거… 에잇!"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이것 정말 골치 아프군.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다가 칼을 중간쯤 뽑아든 채로 카알을 바라보았 다. 그의 눈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카알은 찌푸린 얼굴로 황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야에선 여전히 오크 들의 소란이요란했고 비명 소리같은 것이 아스라이 들려오곤 했다. 제 기랄, 저 빌어먹을 녀석들! 난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주어를 빠트렸다. 도대체 오크들을 욕해야 할지 넥슨 일행을 욕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난 고개를 돌려 카알의 입을 바라보았다. 왠지 카알이 뭐라고 말할지 짐작 이 되는 것 같단 말이야. 카알은 마침내 씹어뱉듯이 말했다. "제기랄, 구합시다! 저 친구들은 끝까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는군!" 네리아는 놀란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예? 구해요?" "그럼 어쩝니까?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째서요? 오크가 죽이는 거지…" 네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카알은 네리아를 바라보면서 무겁게 말했다. "글쎄요. 대개의 인간들은 하지 않음으로써 저지르는 잘못이 함으로써 저지르는 잘못보다 낫다고 믿나 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네 리아양."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간단히 말할까요? 지금 특별히 할 일 있습니까?" "예?" "별로 할 일 없지요? 난 세레니얼양의 말을 기억합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게 뉘우칠 시간은 줘야 합니다. 식후운동 삼아 인간 세 명을 오크 무리에서 구출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청산할 시간을 남 겨주는 일은 어떻습니까." 어라? 이루릴이 언제… 아. 그렇군. 난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아프나이 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아프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길시언은 입술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웃음을 참는 것이다. "괜찮은 운동이군요. 육체와 육체와의 뜨거운… 으악! 에, 육체와 정 신! 그 둘쪽 모두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 좋은 운동이지요! 난 찬성입니 다." 그러면서 길시언은 곧장 성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샌슨은 길시언의 등을 바라보다가 다시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모 르고 고개를 휙휙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난 쓴웃음을 지었다. 샌슨 은 마침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오, 맙소사. 내가 날 못믿겠어! 내가 저 저주받을 녀석들을 구하러 600 마리의 오크 무리에 뛰어들다니!" "500 마리야." 내가 정정해주며 그의 옆을 지나치자 샌슨은 당황하며 뒤를 따라왔다. 카알은 재빨리 지시했다. "아프나이델씨, 침버씨, 아인델프님은 여기 남아있으십시오. 레니양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네리악!" 네리악? 무슨 소리야? 난 놀라서 뒤를 돌아보고는 역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네리아는 갤러리 위를 달리다가 그대로 트라이던트로 바닥을 짚으 며 옆으로 뛰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벽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이층 건물 의 건초로 된 지붕 위에 뛰어내렸다. "오, 맙소사! 아가씨!" 아래에서 경비대원들이 기겁했다. 난 틀림없이 네리아가 목뼈를 부러뜨 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리아는 그대로 지붕 위에서 한 바퀴 구 르고는 엎드렸다. 그녀는 그렇게 주루루 미끄러지다가 지붕 끄트머리에 서 트라이던트를 앞으로 내밀어 땅에 짚고나서는 멋지게 반원을 그리며 땅에 사뿐히 섰다. 네리아는 가슴에 묻은 건초 부스러기를 털더니 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옆에선 땅에 주저앉은 채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몇 명의 경비대원들이 보였는데 모두들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 었다. 난 아래를 향해 외쳤다. "시범은 고맙지만 난 계단을 이용하겠어요!" 칼잡이들은 모두 계단을 이용해서 품위있게 내려갔다. 여기서 품위라는 것은 네리아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발목이 삘 정도로 급하 게 계단을 내려갔다. 성탑 아래로 나서니 네리아는 이미 작전 지휘소 옆 에 매어둔 우리 말들을 끌고 오는 중이었다. 네리아는 우리들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고 샌슨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서 말했다. "헤이, 멋진 말구종! 원하는 포상이 있다면?" "손등에 키스해줘." 네리아는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올렸고 샌슨은 거기에 대충 입을 맞추어 주고나서는 슈팅스타 위에 뛰어올랐다. 네리아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다음 차례." 길시언은 그 와중에서도 한쪽 무릎을 꿇고 네리아의 손등에 키스를 해 버려 주위를 당황시켰다. 누가 왕자 아니랄까봐. 운차이는 네리아를 싹 무시하며 지나치려고 했고 그러자 네리아는 재빨리 운차이의 발을 걸었 다. 물론 운차이는 가볍게 뛰어넘어갔고 네리아는 그 뒤를 향해 주먹을 마구 흔들었다. "나도 좀 넘어가지요." "까르르르!" 네리아는 웃으면서 에보니 나이트호크 위에 뛰어올랐다. 샌슨은 어느새 성문 경비병에게 외치고 있었다. "성문을 여시오! 밖의 여행자들을 구출해야 하오!" 경비대원은 당황한 눈으로 샌슨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성루 위를 바라보 았다. 그 때 성루위에서 크레블린 대장이 외쳤다. "이거 보시오! 만일 오크들을 끌고 돌아온다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요! 괜찮소?" 샌슨은 기세좋게 맞받아쳤다. "그런 거 걱정했으면 애초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좋소! 성문을 열어줘! 그리고 통과하는 즉시 다시 닫아! 여러분의 무 운을 비오!" 경비대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성문을 열었다. 샌슨은 성문이 채 열리기 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로 썬더라이더를 탄 길시언이 뛰어나갔 다. 성문 옆으로 물러난 경비대원들은 열띤 목소리로 외쳤다. "죽지 마시오!" "고마워요! 멋쟁이 경비대원!" 봄날 망아지라던가? 네리아는 유쾌하게 외쳤고 그러자 경비대원들은 얼 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 뒤로 운차이가 입을 꽉 다문 채 무서운 눈길로 지나갈 때는 경비대원들도 질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와 뒤늦 게 내려온 카알이 지나칠 때는 경비대원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내어왔다. "괴물 초장이 만세! 유피넬의 이름으로 축복을!" 난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제미니에게 박차를 가했다. 제미니는 용맹스럽게 돌진했다. 성문을 통과하는 동안 아주 빠르게 그림자가 지나 갔고, 잠시 후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넓은 평야가 눈 앞을 가로막았다. 저 앞에선 이미 샌슨과 길시언, 네리아, 운차이 등이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경비대원들이 설치해둔 목책이 보였지만 그것은 오크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앞의 네 명은 그것 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랴아! 제미니! 매일 고생만 시켜 미안한데, 이번에도 날 도와줘!" "이힝힝히잉!" 제미니는 우렁찬 울음소리로 대답한 다음 가볍게 목책을 뛰어넘었다. 오, 말에 대해 끓어오르는 이 애정! 난 바스타드를 뽑아 말 옆으로 늘어 트린 채 한 손으로 고삐를 거머쥐고 달려갔다. 머릿카락이 흩날리며 얼 굴을 찔러왔고 볼을 때리는 바람에 얼굴이 얼얼해졌다. 뒤에서는 성문을 닫아거는 소리가 둔중하게 들려왔지만 희한하게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 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인다. "야하아아!" 뒤에선 카알이 외쳤다. "퍼시발군! 길시언! 쐐기꼴 형태로! 뱅가드(Vanguard)를 형성합시다! 선두 자리 비우고!" 뱅가드가 뭐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합시다, 카알! 그러나 샌슨과 길시언은 그 말을 알아듣는 모양이다. 그들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서로의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정신 없는 돌격 가운데서도 차가운 정 확함으로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그리고 카알 의 고함 소리는 계속되었다. "운차이와 네리아, 뒤로 벌리시오! 그리고 가운데로 네드발군이 강행합 니다! 네드발군! 고개를 숙이고 최고 속도로 달려!" 뭔 말이야! 어디로 강행하라는 거야? 그러나 다시 앞의 사람들이 나를 도왔다. 샌슨과 길시언이 양쪽으로 벌려서고 그 뒤에서 네리아와 운차이 가 더 폭이 넓게 벌어졌다. 두두두두두! 그러자 마치 쐐기꼴 형태로 앞 쪽이 뾰족하고 뒤가 넓은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쐐기꼴의 첨단부가 없 는 것이다. 바로 저기구나! "이랴아! 핫, 하아! 저기가 네 자리다, 제미니!" 난 제미니를 독려했고 제미니는 크게 울부짖더니 앞으로 죽죽 나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잠깐 사이에 내 왼쪽으로 네리아와 샌슨, 그리고 오른쪽으로 운차이와 길시언이 지나갔고 곧 나는 선두에 서서 달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뒤를 흘깃 보자 카알도 속도를 높이는 것이 보였다. 우 리는 최전방에 나, 그리고 그 뒤로 샌슨과 길시언, 그리고 운차이, 카 알, 네리아로 완전한 삼각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왜 내가 최전방이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오크들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놈들 의 모습이 시시각각 커지면서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놈들은 우리를 발 견하고는 당황한 모습으로 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길시언의 고함 소리 가 터졌다. "프로텍트 프럼 노멀 미사일!" 바우우! 내 앞쪽으로 푸르스름한 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오크들이 날 린 화살, 돌멩이 등이 튕겨나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 해보자구! 난 바 스타드를 높이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야아아아! 내가 간다! 헬턴트 만세!"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괴물! 괴물! 취익! 괴물 초장이다악!" "끄아아아! 괴물 초장이다!" "취이이익! 달아나랏!" 어라? 뭐 이래? 전방의 오크들은 날 바라보더니 곧장 옆으로 몸을 날리 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으로 물러나면서 날 공격하려던 놈들은 뒤에서 따라오던 샌슨과 길시언에게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난 오크들로 이루어 진 벽으로 뛰어들었지만 제미니는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달리고 있었다. 앞에 있던 오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갈라져가는 것이다. 헤엣? 그거 신기하네?그러나 기뻐할 새도 없었다. 뒤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온 것이 다. "네드발군! 머리를 숙이라고 했잖아!" 아, 그렇지. 난 급히 허리를 숙여 제미니의 목 옆으로 머리를 내려서 바스타드를 마구 휘둘렀다. 이거 마치 멧돼지 같은 모습이군. 턱 바로 아래에서 흙먼지가 튀어올라 눈을 뜨기가 겁난다. 오크들의 다리가 움직 이는 모습에 눈이 돌아버리는 것 같다. 난 되지도 않는 고함 소리를 지 르며 계속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머리 위쪽으로 공기를 가르는 파 열음이 들려왔다. 쓩쓩쓩! 아이고, 카알! 카알은 내 머리위로 활을 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절대로 머리는 못들겠군! 난 제미니가 제발 앞발로 돌을 차올리지 않기 를 빌며 바스타드를 풀 베듯이 휘저었다. 오크들의 글레이브가 코 앞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주위로는 거친 바람 소리와 오크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보다 더 큰 소음은 바로 내 입에서 나오 고 있었다. "야야야야야! 모두들 비이이켜어엇!" 그 때였다. "너! 후치 네드발!" 제기랄! 이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까! 난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 다. 우리들은 오크 무리의 바깥 부분에있었다. 그런데 오크들의 무리가 좌우로 좌악 갈라지면서 바로 앞 30 큐빗 정도에서 오크 한 놈의 가슴을 베고 발로 걷어차는 하슬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을 옆으 로 늘어트린 넥슨 휴리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 었다. 넥슨 휴리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 사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 양이다. 그 멍청한 입 좀 다물어! 이 소란통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모조 리 그 멍청한 입 안으로 들어가겠군! 넥슨은 그렇게 가만히 선 채 입을 벌리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오크 하나가 넥슨의 등 뒤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조심해! 뒤!" 말하기가 무섭게 하슬러가 뒤로 돌아서 넥슨에게로 돌진했다. 하슬러는 넥슨을 옆으로 밀어내며 달려들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튕겨 올렸다. 카카 캉! 그는 튕겨올린 롱소드를 그대로 한 동작으로 내리그어 오크의 얼굴 을 갈라놓았다. 그러면서도 하슬러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슬러에 의해 옆으로 밀쳐진 넥슨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는 잠시 허리 를 굽힌 채 멍청하게 서있었다. 저 작자가 정말! 치매에라도 걸렸나, 갑 자기 왜 저래? 그 때 넥슨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우리들을 노려보며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너! 죽어랏!" 저 미친 자식이! 넥슨은 롱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앞으로 돌진 해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살인이 꼭 죄가 되는가 하는 따위의 생 각을 떠올리며 바스타드를 뒤로 당겼다. 이 자식아! 사실 너무 길었어! 이대로 내려치기만 하면! 그 때 무엇에 홀린 것인지 나와 넥슨 사이로 오크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 녀석은 곧장 넥슨을 찔러들어갔고 넥슨은 그대로 롱소드를 내리쳤다. 휘익! 글레이브와 오크의 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취이에에엑!" 오크는 잘린 팔을 위로 쳐들면서 비명을 질렀다. 넥슨은 검을 내려친 자세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여 어깨로 오크를 받아 쓰러지게 만들었다. 넥슨이 그대로 롱소드를 아래로 찌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난 고개를 돌 리고 말았다. 제미니가 앞발을 들어올리며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힝힝 힝힝힝! 정신이 팍 들면서 난 고삐를 당겼다. 다행히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 정신은 현재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야 옆으로 번뜩이는 반사광에 놀라 옆을 보니 오크 한 놈이 제자리에 서있는 날 노 리고 찔러들어오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뿌렸다. 타당! 글레이브가 튕겨지는 느낌이 손으로 전달되어왔다. 그리 고 그 때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넥슨! 당신들을 구하러 왔다! 그러니 지금은 싸우지 말자! 만일 덤빈 다면 이대로 놔두고 가겠다!" 그리고 길시언도 옆으로 다가오는 오크를 베어넘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서둘러! 오크들이 크레센트(Cresent)를 형성한다!" 크레센트라고? 난 좌우를 급히 돌아보았다. 소름이 쫙 돋는걸? 우리 일 행과 넥슨 일행 사이에서 빠져나가며 좌우로 갈라졌던 오크들은 그대로 비스듬히 달리면서 우리 옆을 지나쳤다. 놈들은 이대로 우리 뒤를 가로 막아 포위진을 만드려는 것이다! 난 넥슨을 향해 손을 저으며 고함질렀 다. "빨리와! 도와주려고 왔단 말이야!" "뭐…야? 도와준다? 도와준다고?" 저게 도대체 인간이야, 트롤이야! 넥슨의 손과 가슴, 얼굴은 오크의 피 로 범벅이 되어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악마 녀석은 멍한 눈 으로 날 바라보며 내가 한 말을 반복하면서 정말 악마 같은 소행을 저지 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잖아? 젠장! 그 때 네리아가 외쳤 다. "쟈아아크! 네 멍청한 마스터를 어서 이리로 데리고 와! 지금밖에 기회 가 없어!" 그러자 넥슨의 그림자에서 나타나듯이 쟈크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났다. 넥슨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쟈크는 대거의 손잡이로 넥슨의 목 뒤를 후려쳤다. 퍼억! 넥슨은 그대로 고꾸라졌고 쟈 크는 그를 붙잡아 어깨에 둘러매며 외쳤다. "하슬러씨! 갑시다! 앞을 뚫어요!" 하슬러는 고개를 조금 끄덕인 다음 곧장 우리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 다. 오크들은 우리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그 사이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하슬러의 팔이 움직이는 앞에서는 그 어느 오크도 3초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하슬러는 달리면서 그 속도에 팔힘을 덧붙여 롱소드를 휘둘렀고 오크들은 모두 팔과 글레이브가 한꺼번에 날아가버렸다. 하슬러의 팔이 움직이는 곳에서 어떤 오크는 상하반신이 완전히 분리되기까지 했다. 그 리고 그 뒤로는 넥슨을 둘러맨 쟈크가 달려왔다. 오크들은 내쪽으로도 달려들었다. 그러자 제미니는 다시 앞발을 들어올 리며 거세게 날뛰었고 그러자 오크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격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그리고 말 울음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았지만 난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며 날아오는 글레이브를 쳐냈다. 하슬러는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오더니 날 흘깃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쟈크가 다가오더니 넥슨을 집어던지듯이 건네 며 외쳤다. "마스터를 부탁해!" 난 안장 앞에 넥슨을 받고는 그대로 제미니를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알이 외쳤다. "모두 반전! 네리아와 운차이! 좌우로 벌려 네드발군이 달릴 길을 뚫는 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3. 뒤로 돌아보니 쟈크는 길시언의 등 뒤에, 그리고 하슬러는 샌슨의 등 뒤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모두 뒤로 돌아 달려가기 시 작했다. "취이익! 잡아랏! 저 놈들을 붙잡아!" 그러자 네리아는 앙칼진 고함 소리로 응수했다. "이 자식들아! 레이디에게 다가오려면 양치질부터 해!" 네리아는 그 긴 트라이던트의 물미 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는 도리깨질 하듯이 전후좌우로 휘두르고 있었다. 트라이던트의 창신이 번뜩이며 네 리아의 몸 주위로는거대한 원호들이 그려졌다. 반면 운차이는 검을 아 끼고 있었다. 그는 검을 별로 휘두르지 않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녀 석들만 하나씩 찔러버렸다. "Ahn choudar!" 그러면서 네리아와 운차이는 좌우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물 러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쓰러졌다. 두 사람이 좌우로 밀어붙 이면서 그 사이에 공간이 생기자 카알과 샌슨, 길시언이 곧장 달려나갔 다. 그리고 그 뒤로 내가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달려올 때와 정반대의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최전방에 카알, 그리고 그 다음에 샌슨과 길시언, 제일 뒤에는 네리아와 나, 그리고 운 차이가 달리게 되었다. 오크들은 주춤주춤 다가오려고 했지만 길시언과 샌슨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밀어붙였다. 오크들의 형성되다 만 포 위진은 여지없이 박살났고 우리들은 그대로 쏜살처럼 달려나왔다. 뭐야! 성벽이 저렇게 멀었나! 이스트 그레이드도 운차이의 사막처럼 움직여버 린 건가? 그 높아보이던 성벽이 지금은 신전 담벼락처럼 보였다. 젠장! 저기까지 어떻게 달려가지? 그 때였다. 성벽 위에서 뭔가가 번쩍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장 성벽 위에서 광선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 위 를 지나쳐 등 뒤의 오크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의 솜씨군! 뒤 쪽에서 오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취이이익!" 카알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외쳤다. "모두 일자로!" 이번엔 뭔 말인지 알았습니다! 진작 그렇게 쉽게 말하시지! 난 넥슨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급히 왼쪽으로 비스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리아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틀었으며 운차이는 오른쪽으로 뒤틀었다. 다섯 명의 기수는 이제 일직선으로 늘어선 채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게 되었으며 그러자 카알은 롱보우에 화살을 걸었다. 아니, 어쩌시려는 생 각이에요? 다음 순간 나는 카알의 모습을 보면서 넥슨을 놓칠 뻔했다. 카알은 허리를 젖혀 말 위에 드러눕더니 턱을 한껏 젖히고는 뒤로 활을 쏜 것이다. 피융! 취에엑! 길시언은 기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 당신 혹시, 우타크의 자손 아닙니까?" 카알은 다시 똑바로 앉으며 외쳤다. "내 가계에 대한 설명은, 성 안에 도착한 다음으로, 미룹시다! 이랴 아!" 그렇게 멀어보이던 성벽이 어느새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성벽 위에선 경비대원이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서! 빨리! 더 빨리 달려요! 더 빨리! 그리고 사수들이 흉벽 위로 몸을 내밀더니 화살을 마 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우리 머리 위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화살들이 날아가면서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이렇게 기분좋게 들릴 수가 없는걸? 눈 앞에 목책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성문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됐어! 그때였다. "절대로 도망 못간다아아!" 등골이 쭈뼛하다는 말이 있지. 난 겁에 질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투구의 오크가 옆에 있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빼앗아 어깨 뒤로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젠장! "카아아악! 핸드레이이이이크!" 또 저 소리! 검은 오크는 그렇게 기합을 지르면서 글레이브를 집어던졌 다. 글레이브는 황야 위로 검은 뱀처럼 머리를 흔들면서 날아왔다. 휭휭 휭휭! "히히힝!" 왜 하늘이 땅 밑으로 내려오는 거지? 몸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지는걸? 꽈앙! 순간 머리 뒤에서 충격이 오면서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크허, 허헉! 뺨이 땅에 쓸리면서 지독한 아픔이 느껴진다. 등이 거세게 부딪히 면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온다. 제발 좀 멈춰! 나는 데굴데굴 굴러가 면서 속으로 외쳤다. 하늘과 땅의 자리바꿈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지 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춰졌다. 오크들의 고함 소리. 퇘! 쓰러진 채 입 안으로 들어온 흙을 뱉어내니 피와 침이 섞여 나왔다. 간신히 고 개를 들어보았다. "이힝힝, 힝힝! 푸르릉! 힝힝힝힝!"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저건 뭐야? 땅에 쓰러져 발버둥을 치면서 피를 콸 콸 쏟아내는 저 덩치 큰 생물은 뭐지? 저 생물은 계속해서 발을 구르며 일어나려고 하는군. 왜? 일어나지 못하지? "으… 으으. 제, 제미…니?" 말인가? 저건… 내가 타던 그 제미니? 그런데 왜 누워있지? 말이 눕기 도 하던가? 게다가 왜 저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 거지? 어? 저건… 글레 이브? 제미니는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저 다리를 흔드는 동작에 불과했다. 제미니가 왜 못 일어나는 거야? "제미니이이잇! 으아아아아!" "힝힝힝! 이힝, 힝! 푸르르릉!"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난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로 땅을 짚는 순간 발이 미끄러 져버렸고 나는 다시 콰당 쓰러져버렸다. 난 다시 몸을 돌렸다. 휘청거리 며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또다시 땅에 얼굴을 박으며 고꾸라졌다. 컥! 숨이 막히는걸. 다시 팔을 휘둘러 땅을 짚는다. 쓰러진다. "카아아악! 헐헐헐르르르. 쿨럭쿨럭!" 땅을 짚는다. 다시 쓰러진다. 몸부림을 치며 팔을 휘젖는다. 다리로 땅 을 밟으며, 하지만 다시 앞으로 쓰러진다. 몸을 뒤튼다. 일어나야 돼. 일어나야 돼! 다시 무서운 속도로 땅에 쓰러진다. "이힝힝힝힝!" 제미니가, 제미니가! 이런, 빌어먹을! 일어나야 된다고! 콰당탕! 이 개 같은 땅이 왜 이래! "후치야아악! 아악! 후치얏!" 네리아의 울음 섞인 비명. 제미니, 제미니! 난 일어날 거야. 그러니 너 도 일어나란 말이야! 이… 개 같은! 이 때려죽일 말대가리야! 어서 일어 나! 콰당. 일어나! 몸부림. 튀어오르는 핏방울. 일어나! 콰당. 입안에서 단내가 팍 피어오른다. 목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먼지. 목이 콱 막힌다. 눈물. 부옇다. 귓가가 뜨겁다. 일어나아아아아! "크아아아아! 으아아아아!" 하늘이 새카맣다. 벌써 밤인가?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팔이 나에게 날아든다. 저건… 오크의 팔인가? 쿠우욱! "카아악! 이 교활한 인간놈! 감히, 취이익! 어딜 뛰어들어!" 컥, 어허억. 그만… 그만 걷어차. 그만 때려.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만 하란 말이야! "이 오크 새끼야! 그만 하란 말이야! 우으으으아!" 몸이 솟아오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투구의 오크. 놈의 콧잔등 을 쥐어박는다. 손등이 뒤틀려나가는 느낌. 오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다. 입술 사이로 들어와 혀에 닿는 피맛. 위장을 모조리 뒤집어 입 밖으 로 토해버리고 싶은 구토감. 옆으로 몸을 날린다. 어깨에 뭔가가 부딪힌 다. 그대로 밀어버린다. 약속이나 한 듯이 날아드는 글레이브. 서걱! 귓 가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동시에 불같이 뜨겁다. 바닥에 떨어진 귓볼을 본다. 조금 전까지 내 귀에 달려있던 것인데 지 금은 땅에 떨어져 있다. 저게 내 귀인가? 저렇게 생겼었군. 신기하네. 자기 귀는 볼 수가 없어야 되는 거 아냐?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오 크의 글레이브를 잡는다. 오크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빼앗기지 않으려 고 반항한다. 놈을 매단 채로 허리를 뒤틀어버린다. 귀에서 볼을 타고 피가 흐르는 모양이야. 목이 뜨끈한걸? 관자놀이를 타고 눈으로 피가 들 어온다. 세상이 붉다. "체에엑! 카악!" "노래! 노래를 불러라, 이 새끼들아! 취이이익? 취이익! 취익취익거리 는 노래를 불러봐!" 오크의 글레이브가 날아온다. 다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무시하면서 허리 를 뒤튼다. 글레이브가 지나가게 하고, 균형을 잃은 오크의 정수리에 손 에 든 글레이브를 꽂아준다. 푸아악. 놈이 쓴 투구가 찢어지며 머리와 투구 사이로 피가 흐른다. 놈의 노란 눈알이 피에 젖는다. 놈은 그대로 허물어진다. 바스타드를 뽑아드느라 멈칫하는 사이에 다른 쪽에서 왠 놈 이 글레이브로 어깨를 내려찍는다. 상반신이 휘청거린다. 바스타드를 두 손으로 쥐고 그대로 돌기 시작한다. 주위의 오크들이 베어져나간다. 갑 옷이 깨지고 찢어지는 소리. 오크들의 노란 눈알, 핏발 선 노란 눈알들 이 끝도 없다. 그것들이 피에 젖는다. 한 오크는 턱이 날아가버린다. 오 크는 다시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 것을 알아차리고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노래를 불러라!" "케에에엑!" "음정이 틀렸어! 가사가 틀렸다고! 취익거려야지!" "크우우욱!" "틀렸다고!" 쾅! 뒷통수에 충격이 느껴진다. 땅이 위로 솟아오르고, 곧 허리와 어 깨, 허벅지쪽으로 고통이 온다. 오크들이 내 몸을 걷어차면서 내는 소리 가 왠지 낯설다. 욕설, 고함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 등이 가늘게 이어 지다가 나는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암흑이 싫어. 내 봄날은 잔혹한 비극의 전주곡이었나. 꽃잎이 무리지어 날아오를 때 난 행복했네. "취이익! 뭐라는 거야?" 여름은 옷을 벗고 날아오르는 나의 여신. 뜨거운 공기 속에 나는 숨이 막혔지. "취익! 괴물 초장이! 뭐야? 이 자식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지?" 봄도 아름다웠지. 여름도 즐거웠지. 하지만. 내 주위는 어느새 낙엽. 난 가을에 서 있네.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하는 마법의 가을이여.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을 타고 나 동으로 달렸네. 찰싹! 볼에서 불이 튄다. "취익! 이 놈아, 뭐라고 떠드는 거냐!" "검은 흙 위를… 추수의 들판을… 반짝이는 개울을… 황량한 산봉우리 를…" "이 놈이 미쳤나? 취이익! 뭐야?" "적막의 대지를… 고통의 바위언덕을… 나 달리고 또 달렸네." 퍽! 숨이 막혀서 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누군가 창대로 내 배를 찍은 모양이다. 눈꺼풀이 어디에 있더라? 이 눈꺼풀이라는 녀석은 잠시만 신 경쓰지 않으면 곧 어딘가로 달아나버리는 놈이라서. 눈을 뜨니 붉은 가슴이 보인다. 저건 내 가슴이군. 엉망진창이야. 볼품 없군. 피와 흙이 묻어 끔찍스러울 정도인데다가, 어디서 붉은 빛이 비치 고 있는 것인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을 들어올린다. 수백 마리의 오크들. 그 검은 얼굴들 위로 하늘엔 황혼이 펼쳐져 있다. 팔을 들어보려 하다가 내 몸이 나무기둥 같은 곳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굴을 들어 석양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에 태 양은 붉은 불덩어리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 오 크들의 머리가 수도 없이 보인다. 윗쪽을 보는 것이 낫겠군. 왼쪽 눈은 눈꺼풀이 부은 건지 거의 떠지질 않는다. 그래서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거리감각이 맞지 않아 몽환적이다. 난 서편의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 한다. 목이 갈라지는 느낌이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크는 어이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태양을 등지고 있는 놈들의 얼굴은 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얀 이빨들이 번쩍인다. 멋진 이빨들이 군. "부디 뒈지시길…" 오크들은 입을 쩍 벌린다. 기막힌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들의 얼굴 은 그대로 희극이다. 난 바싹 마른 입술이 그대로 갈라지려하는 것을 무 시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에헤헤헤헤…" "카아악! 이 놈!" 오크 한 놈이 창대를 들어 내 복부를 찌른다. 퍼억! 웃다가 그대로 숨 이 막힌다. "코올록, 쿨럭쿨럭, 커, 커허어억!" 배가 뚫린 거 아냐? 목구멍에서 위액이 넘어오다가 만다. 미치겠다. 차 라리 토해버렸으면… 콧속이 간질거리고 목구멍이 타는 듯이 쓰리다. 그 리고 머리는 쾅쾅 울리고 배에서는 찢어지는 고통이 온다. 온몸에서 동 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통의 4중주로군. 젠장. 오크들은 일제히 떠들 기 시작한다. 광란스럽군. "이 자식! 취에에엑! 이제 좀 어울리는군!" "저 인간 죽여! 왜 살려두는 거야! 취이이익! 죽여버려! 그 냄새나는 말처럼!" 냄새나는 말… 말이라고? "컥! 제미니?" 오크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날 바라봤다. 그 때 제미니는? 검은 투구의 오크가 던진 글레이브…? "내 말, 쿨럭쿨럭! 내 말은 …어떻게 되었어?"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던 오크들은 잠시 후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러더 니 놈들은 곧 나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그 말? 고기가 퍽도 질기더군, 갤! 취이익!" "낄낄낄! 취취취익! 먹을 게 많은 점은 좋던데 말이야. 취엑!" 그러자 한 놈이 배를 쑥 내밀더니 길게 트림을 하는 것이 보였다. 거어 어억. 다른 놈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웃어대었다. 이 놈들이 제미니를 잡아… 먹었다고? 잡아먹었어? "으아아아아! 제미니! 제미…닉, 우크, 쿨럭!" "제미닉? 취익! 제미닉? 쿠할할할할하!" 오크놈 중에 한 녀석이 내 흉내를 내면서 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 자 다른 놈들은 쓰러질 듯이 웃어젖혔다. 저 새끼들을 당장! 난 온몸을 비틀어보았지만 아픔만 더해갈 뿐이다. "이 …죽일 놈들아." "아? 취잇, 취! 왜? 그 말을 도로 내놓을까? 웩, 웨에엑!" 오크 놈은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게워놓는 시늉을 해보였고 그러자 다른 오크들은 박장대소했다. 웃어? 웃는다고? 네 놈들이 지금 웃는 거 야? "이 죽일 놈들, 으아아아! 크헐, 쿨럭! 이거 풀어! …주, 죽여버릴…거 야!" 철썩! 가까이 있던 오크 한 녀석이 내 뺨을 올려붙인다. 오크의 거친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가자 살갗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 같다. "도로 내놓는다는데, 취! 불만인가 보군? 취이익!" 난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주 위의 오크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이렇게 되다니. 미안 해, 제미니. 제미니. 이 멍청한 말아, 미안해! 그 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며 다른 목소리들이 모두 기어들어가게 만든다. "닥쳐! 취이익! 지저분한 짓들 하지마! 치칫, 취이익!"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4. 눈가가 불타오르는 느낌이다. 힘들게 눈을 뜨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 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깜빡거려서 눈물을 흘려내니 볼이 뜨겁 다. 볼의 상처에 눈물이 들어가나 보군. "취이이잇! 어라? 눈물을 질질 흘리는 건가? 한결 보기 좋군, 취이익!" 잔인하게 웃고있는 오크가 보인다. 다른 오크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 는 얼굴이 보인다. 그 검은 투구의 오크다. 저 놈이야! 저 놈이 글레이 브를 던졌지! "이봐. …미안한데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좀 알려주겠어?" "취이익! 난 아그쉬! 아그쉬다, 인간!" "아… 그래? 그럼. 쿨럭쿨럭. 후우. 커험! 위대한 아그쉬여. 후치 네드 발이… 당신께 충성과 사랑으로서 제안하는데… 다른 오크와 키가 같아 지도록 할 생각 없나?" "취이이? 키가 같아진다?" "그 위대한 대가리를 잘라내면… 어떻겠냐고 묻는 거야." 콰앙! 아그쉬의 주먹이 내 얼굴에 꽂혔다. 눈 앞이 빙빙 돈다. 꽉 감은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석양의 햇살 때문에 검붉은 암흑 속에 별이 보인 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것 아닌가? "취이, 취이! 이건, 너의 용기에대한 찬양이다! 크핫하하하. 배짱이 좋은 꼬마군. 취이익!" "아… 고마워.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따위 찬양을 하면… 넌 죽어." "끝까지! 이 썩어빠진 오크놈들보다, 취이이잇! 백배는 마음에 드는 꼬 마군." "취이익! 아그쉬! 말 조심해!" "닥Ф! 취익!" 아그쉬는 다른 오크들처럼 글레이브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녀석은 마 치 인간처럼 허리에 큼직한 브로드 소드(Broad sword)를 차고 있었는데 지금 그 브로드 소드를 뽑아들고는 대화에 끼어든 오크를 죽일 듯이 바 라보고 있었다. 그 오크는 콧김을 풀풀 뿜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욕지 기나는 꼴들이군. 난 다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핏빛 석양이 내 늘어진 머리카락에 부딪혀 반짝이고 있었다. 핏방울 때문인지 땀 때 문인지 머릿카락들은 볼에 붙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제미니. 아 름다운 황혼이지? 하늘 위를 달릴 땐 가끔 내 생각을 해다오. 제미니. 그런데 귀가 왜이리 아픈 거지? 아… 아까 잘려나갔지. 그 때, 오크와 싸울 때. 그 때 우리는 오크와… 우리 일행들은? 난 퍼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내 몸이 완전히 꼼짝도 할 수 없도록 통나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크 녀석들은 팔을 묶어놓는데 그치지 않고 가슴과 허리도 밧줄로 칭칭 감아 놓은데다 가 발목도 묶어 놓았다. 이건 거의 오우거를 묶어놓는 수준이군, 그래. 왼쪽을 돌아보니 또다른 통나무 하나가 보였고 거기에 묶여 있는 남자가 보였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시체 아닌가? 하지만 가슴이 오르 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넥슨이었다. 넥슨도 나와 비슷한 정도로 묶여 있었다. 기절한 거야, 그냥 고개를 숙 이고 있는 거야? 넥슨은 석양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온 몸이 불그스름 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옷은 갈갈이 찢어지다가 만 수준이었고 피가 엉겨붙은 머리카락은 앞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그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이군. 넥슨은 OPG를 끼고 있 었다. 그럼 내 손도 마찬가지겠군.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밧줄을 끊을 수 는 없겠지만 우선 다행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좌우를 돌아보았지만 오크 외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일행들은 성문으로 들어갔군. 아그쉬는 날 보면서 배부른 미소를 지었 다. "그래! 췻췻, 취이익! 너희 간교한 인간놈들의 상투 수단이지! 취이익! 네 친구들은 널 버리고 갔어!" "…내 친구들은 그게 날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 문이지." "기쁘다고? 췻취익! 기쁜가? 기쁘냐고?" 커헉! 이 자식이! 아그쉬놈은 칼자루로 명치를 콱 찍었다. 숨이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목구멍에서 허파가 튀어나올 정도로 격렬한 기침을 한 다음, 난 아그쉬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언하겠어. 지금… 날 죽이는 것이 나을 거야." "취이잇? 왜지?" "그러지 않으면 네가… 죽을 테니까." 말을 하고 곧 이를 꽉 깨문다. 이상하다? 왜 창대나 주먹 같은 것이 날 아오지 않는 거지? 난 눈을 떠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아그쉬는 웃고 있 었다. "그래? 취키키키! 킷키키! 누가 영원히 살 수 있지?" "뭐라고?" "널 죽이지 않는다고 내가, 취이익, 영원히 살 수, 취이킷! 있을까? 키 키키! 취익!" 이거 뭐하는 녀석이야? 이거 헬턴트식 오크잖아? 눈꺼풀이 멍들어 앞을 보기도 힘들었지만 난 최대한 눈을 치켜떠서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놈은 밝게 웃고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있어 어두운 얼굴, 게다가 오크의 얼 굴에 저렇게 밝은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아그쉬는 킬킬거리는 것은 멈추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취이이익! 영원히 사는 것은, 저 위대한 성자 핸드레이크, 취취, 그뿐 이다. 그 외에 누가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취익!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 가." 뭐라고? 윽! 눈을 크게 뜨자 지독한 아픔이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아그쉬 놈은 오른팔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외쳤다. "핸드레이크 만세!" 그러나 주위의 오크들은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놈들은 그저 아그쉬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이 저렇게 조용하다니? 저 침묵 이야말로 완벽한 경의의 표현인 것 같은걸. 아그쉬도 오크들의 침묵에 대해 별 기분나쁜 기색없이 팔을 도로 내렸다. 그 때였다.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살지는 못하지만… 영원히 죽을 수는 있지." 나와 아그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넥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 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넥슨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처럼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지. 쿡, 쿨럭쿨 럭. 어어흠! 죽어서 말이야." 아그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알아듣겠지? "누가 재가 …프리스트 아니랄까봐. 후우, 후우. 이것봐… 오크들에게 설교를 하시는 건가? 이 엉터리 재가 프리스트…" 갑자기 넥슨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는 아그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아, 아직 영원성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쿨, 쿨럭. 말 했나?" 들어올린 넥슨의 얼굴에선 두 눈이 불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 그거 정말 궁금한 건데 마침 잘 물었다. 난 넥슨에게 퍼부어줄 욕을 잠 시 목구멍 속에 보관해두고는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아그쉬는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라면, 취이익! 당연히 그렇다! 위대한 성 자 핸드레이크는, 췻취익!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신이다!" "왜? 왜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야 그 분은 위대한 마법사이시니까! 취이이익!" "네가 보았나? 네가 살아있는 핸드레이크를 보았, 컥! 콜로콜록! 보았 냐고, 쿠우울럭! 카아악!" 넥슨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채 격렬한 기침을 쏟아내었다. 그의 입 에서 침과 핏방울이 함께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넥슨은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끝까지 아그쉬를 노려보고 있 었다. 아그쉬는 불쾌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야 안단 말인가? 취이익! 안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 취이, 취이!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면, 뒤에 있는 것도 볼 수 있 다." 주위의 오크들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아그쉬를 바라보았고 아그쉬 역시 우쭐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하군. 오크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야. 하지만 그 말은 잘못 인용한 거야. 원래 그 말 뒤에는 다른 말이 이어지게 되어있지. 그런데 저 녀석이 어떻게 루트 에리노 대왕의 말을 알고 있는 것일까? 넥슨은 한참 동안 아그쉬를 노려보더니 곧 실망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침 소리를 몇 번 내다가 곧 조용해졌다. 저 빌어먹을 작자는 영원의 숲에서 분리되고 나서는 도대체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 만 하는군. 난 타는 입술을 힘들게 놀려 말했다. "이봐아… 아그쉬. 푸후우. 오크가 왜 핸드레이크를, 휴우우, 친구라고 부르는 거지?" 아그쉬는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코를 벌렁거리며 말했다. "친구를 친구라고 부르지, 취이익! 뭐라고 부르나?" "핸드레이크는… 인간이잖아. 커험! 컥! 게다가 루트에리노 대왕을 도 와서, 쿨럭! 오크들을 수도 없이 죽였는데…?" 난 질문을 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그쉬는 입을 쩍 벌 려 그 멋진 이빨들을 나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그쉬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취에엑?" "내 말이… 틀렸나?" "취이이이익! 핸드레이크가 대항한, 취익! 것은 드래곤 로드다! 오크가 아니다! 취익! 오크가 아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취이이! 핸드레이크 는 드래곤 로드와, 취이치치칫! 싸운 것이다!" 뭐라고? 난 아그쉬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그쉬의 모습은 계속 두 개, 세 개로 보였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이 멍청한 오크 녀석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무래도 다시 정 신을 잃으려는 것 같은데. 아그쉬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 분은 우리에게, 취이익!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취칫! 우리를 드래곤 로드에게서, 취이익! 구출했다! 그 분이 아니라면 우리 오크가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흔들면서… 말하지마. 귀가 미치도록 아프다. 나도 모르게 더러운 욕설을 뱉어내며 눈을 뜬 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색 배경 으로 붉은 색의 동그라미들 뿐이다. 일렁거리는 붉은 동그라미들. 왠지 고향 언덕에서 바라보던 반딧불들 같아. 어지럽군. 난 다시 욕짓거리를 뱉었다. "시끄러워." 넥슨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네가 지금 나에게 시끄럽다고 했냐? "누구한테 시끄럽다고 하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서 넥슨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좀 더 눈에 촛점을 맞추고 보자, 주위는 어느새 밤이 되었고 오크들이 군데 군데 모닥불을 피워둔 것이 보였다. 제길. 반나절 동안 묶여있었던 몸은 내 몸 같지가 않다. 손끝이나 발끝 에 감각이 없다. 가슴은 어디에 있고 허리는 어디에 있지? 크윽! 그럼 반나절 동안 묶인 채 서 있었던 건가? 온몸의 피가 몸 아래로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퉁퉁 부은 다리에 밧줄이 쓸리면서 지독한 아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차가운 밤바람이 불 때마다 몸은 정신없이 떨린다. 하 지만 그것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밧줄은 살갗을 파고들듯이 몸을 죄어왔다. 차라리 죽고 싶다… 빌어먹을! 웃기지마! 아 직은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있을 거야! 다시 한 번 눈에 힘을 준다. 오, 제기랄! 차라리 오크놈의 얼굴을 보고 싶어. 넥슨 녀석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 같은 눈에선 침 침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자니 소름 이 돋아오른다. 입이 저절로 열린다. "네놈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내 말은 오크들의 간식거리가 되 었고. 더 원하는 것이라도 있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쉬어버린 목소리. 이거 내 목소리 맞나? 기침은 사 그라들었지만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터지는 느낌이 든다. 말라붙은 입 술을 적시려 해보았지만 침도 나오지 않는다. 넥슨은 한참 동안 날 쏘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친 꼬마놈. 네놈이 좋아서 뛰어들어놓고는 누굴 탓하는 거냐." "넌 오크에게 고마워해야 돼." "뭐라고?" "난 지금 어떻게 달아나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널 죽고 싶을 만큼 괴 롭힐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오크들이 날 이렇게 칭칭 묶어 두지 않았다면 난 지금이라도 네 빌어먹을 목구멍에서 살려달라는 애원 도 안나오게 될 때까지 때려줄 거야." "더러운 입에서 더러운 말만 나오는군…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거지?" "뭐야?" "아둔한 놈. 왜 날 싫어하냐고 물었다." 저 자식이 누구 복장 터져서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건가? 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려다가 멈추었다. 아차, 저 녀석 영원의 숲에서 자신을 잃었 었지? 갑자기 놈에 대한 분노가 방향을 잃는 것 같다. 저 놈에게 그 자 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과거의 행적에 대해 비난해야 되나? 이런… 우라질. "말해주지. 넌 사실 내 아들이다." "웃기지마." "네가 나에게 저주를 걸어서 내 모습이 이렇게 어리게 바뀐 거야. 기억 나지 않느냐, 아들아?" "…진짜냐?" "당연히 거짓말이지." "이… 망할 놈!" 난 힘없이 웃었고 넥슨 녀석도 미소를 지었다. 제길. 꼴좋군. 저 때려 죽이고 싶은 녀석과 같이 오크 무리 한가운데 묶여서 너절한 농담이나 널어놓으며 웃고 있다니. 같은 입장에 빠졌다는 것이 이렇게도 희한한 작용을 일으키는 건가? 난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눈이 나빠진 건가? 주위엔 모닥불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마리의 오크들이 좀 떨어진 위치에 앉아서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외에 다른 오크들은 전혀 보 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이 도대체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느라 고개를 움직이니 곧장 귀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졌 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넥슨에게 질문했다. "망할. 지독하게 아프군. 그런데, 당신. 도대체 기억하는 것이 무엇무 엇이야?" 넥슨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좀더 큰 목 소리로 말할 것이냐, 아니면 나직한 목소리지만 욕짓거리를 섞어서 화를 돋우는 식으로 말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 넥슨은 입을 열었다. "희다." "뭐라고?" "기억… 하얗다. 대미궁에서 말한대로. 머릿속이 지독하게 희다." 흰 것은 네녀석의 뒤집어진 눈알이 희지. 쳇. "대미궁엔 왜 간 거지?" 넥슨의 고개가 움직이며 그는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은 여전 히 증오의 빛이 담겨 있었지만 왠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이었다. 망할. 증오가 잊혀지는군. 자신의 3/5을 잃어버리고 저렇게 초라한 모습 으로 묶여있는 것을 보니 동정심이 일어나려고 하잖아. 젠장. "말해봐.그건 잊지 않았을 테잖아. 그럼 내가 뭔가를 도와줄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꼬리가 흐려진다. 설마 넥슨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넥슨의 기 억은 망각된 것이 아니라 아예 소멸되었다. 그 기억은 죽은 그의 다른 부분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뭘 되찾는다는 거지? 넥슨은 말을 시작했다. 그의 어조는 어두웠다. "빌어먹을. 네 놈을 아무리 노려보아도 감정이 일어나질 않아." "감정?" "넌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다, 이 꼬마 녀석아. 아무리 쳐다보아도 감정 이 일어나질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날 안다 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인데, 그런데 마주보고 있어도 아무 것도 떠 오르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건 완전한 타인 을 보는 것과 달라. 감정이 전달되어오고 눈빛이 전달되어오는데, 난 아 무런 기억이 떠오르질 않아." 별로 할 말도 없군. 난 차분히 기다렸다. 그건 당신 스스로가 감당해야 될 일이야.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의 나로선 입에 발린 말 해줄 기운도 없다고. 그럴 기운이 있어도 해줄지 의문이지만. 넥슨은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여덟 별중 남은 하나, 드래곤의 별을 찾기 위해 대미궁에 간 것이 다." "잠깐. 뭐라고? 여덟 별이 뭔데?" "드래곤 로드의 여덟 별… 넌 그것을 모르는가? 아, 그래. 아무도 모르 지. 하지만 난 그것을…" 갑자기 넥슨의 말이 끊어졌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촛점없는 눈으 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그것을 누구에게…? 누구더라?" "누구에게 들었단 말이야? 하슬러? 시오네?" 넥슨의 머리가 급격하게 움직였다. 그는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시오네? 그게 누구냐? 말해! 그게 뭐야?" 맙소사. 저 녀석 도대체 뭘 기억하는 거야? 난 고개를 좀 가로저으려다 가 기겁하며 멈추었다.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왔던 것이다. 망할 오크 놈들! "이봐. 당신이 바이서스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야! 그것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 꿈에서도 지워지지 않 아. 그런데 시오네는 뭐야?" "시오네는 자이펀의 간첩이야. 당신을 돕고 있었는데." "자이펀의? 왜?"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5. "맙소사. 잘 들어봐, 이 작자야! 자이펀은 바이서스와 전쟁 중이잖아. 그런데 당신이 바이서스를 뒤집어버리면 자이펀으로서도 좋은 일이잖아? 그러니까 자이펀은 당신이 반역을 일으키도록 도와주고, 대신 당신은 왕 이 되면 자이펀에 대해 사과하고 항복 선언을 하는 거야. 이해가 돼?" 넥슨의 눈에서 동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가? 괜찮은 계획이군. 괴뢰정부의 수립이란 말이지." "그래. 내가 아는 정도는 거기까지다. 나와 넌 서로 반대입장이거든." "그랬나? 그렇겠군. 그래서 날 싫어하는 모양이군. …그래서, 시오네라 는 그 자이펀 간첩이 날 돕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반역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음. 괴뢰정부를 수립해서." 넥슨은 마치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는 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되뇌었다. 불쌍한 녀석. 잃어버린 부분을 보완하려는 건가? 측은한 모습 이군. "그래. 그런데 드래곤의 별이라는 것은 뭐지? 여덟 별이라니, 그건 루 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순간 넥슨은 교활한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눈빛은 마음에 안드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넌 기억을 잃었어. 내게서 무슨 정보 를 긁어내려면 너도 아는 것을 말해야 될걸. "쿨럭, 커흠, 흠. 그… 그런데 시오네라는 사람은 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거지? 영원의 숲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은 하슬러와 쟈크, 그리 고 레니라는 그 계집애뿐이었다. 그 사람은 왜 없었지?" 이 놈이? 나도 그렇게까지 오냐오냐 해줄 수는 없어. "질문을 하려면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이 못된 꼬마놈, 어서 말해!" "닥쳐! 대미궁에서의 기억은 남아있을 텐데? 난 너에게 겁먹은 적 없 어." 얼씨구? 네가 날 죽일 듯이 바라보면 어쩔 건데? 운차이의 눈은 어떤지 알아? 난 똑같은 눈으로 넥슨을 바라봐주었다. 넥슨은 이를 북북 갈더니 잇사이로 새는 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은 정말 죽이고 말테다, 이 꼬마놈아!" "하, 내가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넥슨은 움찔했다. 제대로 된 대답이었나 보지? 잘봐둬. 득의만만한 웃 음이란 바로 이런 거야. 넥슨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 시무룩한 얼굴 이 되었다. "여덟 별, 그리고 드래곤의 별이 뭐야?" 넥슨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는 것은 들어봤겠지." "바이서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잖아." "천만에! 누구나 잘못 알고 있는 이야기지!" "뭐라고?" "키키키… 그 정식 명칭이 뭔지 알고 있나?" "정식명칭이라니. 그런 것이 있었던가?" "그래. 그 정식 명칭은 여덟 별의 추구자다. 에잇스타시커(Eight star seeker). 그걸 줄여서 여덟 별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에잇스타시커? 그게 줄어서 에잇스타라고? 넥슨은 말을 이어나갔다. "여덟 개의 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그 숫자를 맞춰서 여덟 명의 기사가 있었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잊혀지고 변형되어서 여덟 별 이란 여덟 명의 기사를 가리킨다고 알려졌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일 테지?" "어, 그래. 그런데 원래의 여덟 개의 별이 뭔데?" 넥슨의 머리가 휘익 움직였다. "내 차례다, 꼬마놈!" 수탉이 지렁이를 쪼기 전에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꼭 저렇지.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머리. 하지만 상체는 꼼짝도 하지 않고. 보기 싫은 놈. "뭐가 알고 싶지?" "시오네라는 그 간첩은 왜 나와 함께 있지 않은 거지?" "휴우. 내가 알기로 그 여자는국왕 전하를 암살하기 위해 바이서스 임 펠로 갔다고 알고 있어." 넥슨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즈막했다. "국왕 암살?" "그건 당신들로서는 비밀이었겠지. 그래서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해. 하 지만 당신은 델하파에서 우리들과 싸울 때는 시오네와 함께 있었지. 그 런데 그 다음부터 시오네가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후 바이서스 임 펠에서는 임펠리아 침투 소동이 일어났지. 그러니 간단한 거잖아. 당신 은 델하파에서 시오네와 헤어진 거야." "델하파? 그 세이크럴라이제이션된 도시 말인가?거기서 너희들과 내가 싸웠나?" "그렇지… 잠깐! 당신 세이크럴라이제이션에 대해 알고 있나?" "뭐? 어, 그야 알고 있지… 알고 있다? 안다?" 넥슨은 멍한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그 눈은 날 향하고 있었지만 촛점은 거의 맞지 않았다. 저 불안한 얼굴이 진짜 넥슨 휴리첼의 얼굴인 가? 내 OPG를 자기 것처럼 빼앗고, 길을 막는 아이를 말로 밟아 죽이고, 평화스러운 델하파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들고, 영원의 숲으로 부하들을 끌고 가서 다 죽게 만든 남자의 얼굴인가? "이상하군.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자이펀에서 개발한 기술이야. 당신이 그걸 기억한다고? 그럼 자이펀과의 협력사항도 기억한다는 거야?" "자이펀? 협력? 몰라. 모르겠다. 하지만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기억난 다. 그래… 그날 새벽. 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고… 잠깐, 디바인 마크를 묻었을 때… 혼자였던가? 아냐. 혼자가 아니었어. 난 그것을 누 군가에게 받았지. 그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래. 그것에 대해 누 군가와 질문했지. 이 디바인 마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를 물었었 지.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었었지? 그걸 왜 묻어야 되는 거지?" "이건 정말이지…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기억한다면서!" 넥슨은 마치 야단맞는 어린애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돌 겠네. 정말 교사라도 된 기분이군, 그래. 나와 넥슨이 이렇게 사이좋게 회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샌슨은 아마 기절하겠지. 쳇. "이봐, 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는 거지? 난, 난 그것을 받았어. 그 리고 물었지.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했냐고. 그래. 물었어! 물었 다는 것은 그것이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테지? 그렇지, 꼬 마야?" "후치라고 불러. 제길. 그 디바인 마크를 묻는 것이 의식의 마지막, 그 러니까 의식의 증거야. 의식이 치뤄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땅은 세이 크리드 랜드가 되는 거지." "아, 제물처럼 말인가?" "그래. 아, 아냐. 난 신학에 대해선 잘 몰라. 그러니까 제물처럼 신력 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아니면 무슨 도장처럼 그냥 증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넥슨은 곰곰히 생각하는 얼굴로 질문했다. "다른 제물 같은 것은 없나?" "난 잘 모른다고 했잖아. 에, 내가 아는 것은 이렇다. 난어떤 영지에 서 그 시오네라는 여자가 디바인 마크를 사용해서 그 영지를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드는 것을 보았지. 하지만 나보다 똑똑한 누군가가 말하길 그 힘은 디바인 마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50명의 꼬마들의… 뭐라더라? 무슨 신앙인데?" "전신앙?" "아, 그래. 전신앙. 그게 뭔데?" 넥슨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전신앙은 합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형태의 신앙을 말한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신앙은 방향성이 없어. 어른들이라면 에델브로이나, 그랑엘베르 나, 레티 등 정해진 신을 알고 그 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따를수 있지. 그 신앙은 방향성이 뚜렷해. 하지만 아이들의 신앙은 단지 무섭고 위대 한 것에 대해 맹목적으로, 막연하게 따르지. 그래서 그 순수한 신앙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어느 신에게도 그 힘을 바칠 수 있다. 조악하게 설명하자면 한 마디로 이런 거야. 어린 아이에게 오크를 가리켜 저것은 트롤이라고 가르칠 수 있겠지?" "아… 그럼 그 신안, 아니 전신앙은 잘만 유도하면 어느 신에게든 바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말이야?" "그래. 더군다나 완전히 맹목적이고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형 태의 신앙이기 때문에 강력하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들의 전신앙을 유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전신앙을 유도할 …시술자? 제사장? 어쨌든 그 시행자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지. 그런데 50명이 나 되는 아이들이 동원되었다고?" "그래. 어라? 이상하군. 델하파에서는 어린 아이의 납치 같은 것에 대 해선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델하파 뿐만 아니라 일스의 도시들 곳 곳에서 동시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군?" "뭐야? 무슨 말이야? 어린 아이가 동원되지 않았다고?" "그래. 칼라일 영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사라졌어. 하지만 일스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넥슨은 다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쳇. 간단하군. 자이펀 꼬마들이다." "뭐?" "아이들을 50명이나 납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네가 말하는 그 영 지라는 것은 필시 시골이었을 테지?" "그런 셈이지." "하지만 일스 곳곳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 간단해. 자이펀 꼬마들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한 거야. 의식은 아마도 자이펀 국내에서 진 행되었겠지. 그리고 그 디바인 마크는 의식의 증거, 그리고 신력이 나타 날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서 일스로 운반되었을 테고. 꼬마들을 끌고다니 거나 납치하는 것보다는 디바인 마크를 운반하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 거 굉장한 무기로군. 디바인 마크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까." "야! 잠깐, 이거 좀 묻자. 그 의식에 동원된 꼬마들은 어떻게 되는 거 야?" "뭐라고? 어,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전신앙이 발달해서 신앙이 되는 거 니까. 음. 아마 평생 동안 회의적인 인간이 되겠지. 무엇에 대한 신뢰나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인간.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이런… 맙소사! 그런잔인한 일을?" "그게 어때서. 고대의식에서는 아이들을 통채로 제물로 삼는 경우도 있 는데. 훨씬 신사적인 방법이군, 그래." 넥슨은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설마 그거 진심은 아니겠지?" "진심이야." "이 때려죽일 가짜 성직자야!" "뭐라고?" "아무 것도 못믿는다며? 부모도 못믿고, 애인도 못믿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못믿으면서 평생 동안 살게 만드는 것이 신사적인 일이라고! 그 게 성직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냐?" 넥슨은 갑자기 어깨를 심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밧줄을 꼼짝도 하지 않 았고 그러자 넥슨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고함을 지른 것이다. "그게 어때서! 세상에 믿을 것이 어디 있어? 모두가 거짓이고 모두가 환상이라는 주장도 있지 않아? 살아남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살아가는 데 뭐 특별하게 고상한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고상한 방법은 없더라도 보다 비참한 방법은 있어! 그 꼬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게 만드냐고!" "내가 했냐! 시끄러워!" 나와 넥슨은 잠시 말을 잊은 채 서로를 쏘아보았다. 놈의 눈빛은 아무 래도 비정상이다. 그 입은 합리적인 듯이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이다. 저게 자신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증후군 인가? 아니면 원래 저따위 녀석이었나? 알 수 없는 일이군. 저멀리 앉아있던 오크들은 우리가 떠들자 곧 고함을 질러왔다. "취이익! 시끄러워, 인간들! 그 나무 기둥 침대가 편한가 보지? 취췻! 더 편하게 만들어줄까?" 숨을 고르는 것이 참 어렵군.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미쳐버린 것이 분명한 녀석과 말을 나누는 고통도 만만치 않은걸. "젠장. 좋아. 어쨌든 델하파에서 당신에게 그 디바인 마크를 건네준 것 은… 아마도 시오네가 당신에게 주었겠지." 넥슨은 다시 반색을 했다. 말 한 마디에 저렇게 곧 밝은 얼굴이 되는 것을 보니 정말 동정심을 지울 수가 없군 그래. "시오네가? 그 간첩이 준 거라고?"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잖아. 그건 자이펀에서 만들어내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이펀 간첩인 시오네가 당신에게 줬겠지. 왜 줬냐고는 묻지 마. 내가 하는 말은 전부 추측이야." "이런, 제기랄! 그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사실? 흥. 누가 사실을 알지? 네가 조금 전에 한 말 아니야? 모두가 거짓이라면서?" 나는 매몰차게 쏘아붙였고 그러자 넥슨은 턱을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 다. 정말 저 표정 바뀌는 거 눈 뜨고 못보겠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덜 딱딱하게 바뀐다. "어쨌든 내 추측이 그렇게 틀리진 않았을 거야. 당신이 그 디바인 마크 를 준비하지는 않았잖아? 누가 줬다며? 그런데 게덴의 디바인 마크는 자 이펀에서 개발해내는 거니까 시오네가 줬겠지. 시오네와 당신 사이에 무 슨 계약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계약… 계약이라고? 무슨 계약?" "아앗, 이 빌어먹을! 시오네가 그것을 왜 당신에게 줬는지 뭔가 추측되 는 것이 없어?" 넥슨은 다시 백치 같은 얼굴로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 통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군. 정말 골치 아픈 노릇이군. "이봐, 계약이라면, 그러니까… 시오네는 내가 괴뢰정부를 수립하게 도 와준다고 했는데… 그게 일스의 도시를 세이크럴라이제이션하는 것과 무 슨 상관이 있지?" "알게 뭐람. 이제 내 차례야." 넥슨의 얼굴에 또다시 노여움이 떠오른다. 무슨 표정이든 마음대로 지 어봐. "원래의 여덟 별이 뭐지?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것을 찾기 위해 여덟 기 사를 구성한 것인가? 아, 그리고 말해둘 것이 있는데, 만일 거짓말을 하 는 것처럼 느껴지면 나도 거짓말을 하겠어. 그런 느낌만 오면 아무 내색 없이 당신의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해버릴 거라고. 알겠어?" 넥슨은 이를 북북 갈면서 날 바라보았다. 난 잠시 고개를 숙여 몸을 묶 고 있는 밧줄을 내려다보았다. 한심스럽군. 이런 꼴이 되다니. 그런데 우리 동료들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성 안에서 어쩌면 내 구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크레블린 대장이나 안티고어 시장이 그것을 허락할까? 카알은 이성적인 척하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그 반대 다. 틀림없이 네드발군을 구출해야 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을 것이다. 음. 왠지 치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할 수 없잖아. 구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날 구하기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을 대비 해 달려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오늘 하루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 고 말았는데. 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고는 싶지만, 솔직하게 그렇지만. 그 래서 난 넥슨의 말 중에 몇 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 호비트, 페어리, 오크… 나 머지 하나는 모른다. 어쨌든 땅위에 발 디디고 사는 생물들 중 말을 하 는 생물이 여덟 있지.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생물 여덟." 어라? 무슨 말이지? "갑자기 왠 박물학이지?" "닥치고 들어! 음… 뱀파이어나 라이칸스롭은 말을 하지만 생물이 아 냐. 도펠겡어도 말한다고 우기지는 마라. 그건 생물의 모습을 훔치는 거 니까. 자유롭게 태어나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지적생물… 신을 우러러 볼 줄 아는 생물이 여덟 있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걷는 종족." "토끼도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뛰어다녀." 넥슨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왠지 바보가 된 것 같군. "멍청아! 토끼는 자신의 자유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토끼는 자신 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할 줄도 모른다. 무지와 자유가 같은 것 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자유는 그것을 인식하고 추구할 줄 아는 자에게 의미가 있는 거야. 황소가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냐? 네 가 황소를 풀어주면서 '자, 자유다.'라고 말하면 황소가 좋아할 것 같 냐? 머리가 달렸다면 생각하는데 써! 투구나 모자걸이로 사용하지 말 고!" "아, 그런 거야? 그런데 그 여덟 종족이 어땠는데?" "그런 자유로운 여덟 생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 있다." "보석?" "그래… 정확하게 보석인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보통 별이라고 부르 는 것은 보석일 가능성이 높지. 그것을 여덟 별이라고 하니까. 그것은, 우주가 열릴 때,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마저도 희미할 때, 수탉이 첫 번째 울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새벽 으스름 속에 첫번째 샛별이 떠오를 때… 이런 말은 쓸데없지. 어쨌든 그런 보석이 여덟 개 있다. 왜 있는 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누가 만들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지 모른다. 어쨌든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우리들로서는 모른다. 우 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발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것을 깨닫고 그 존재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 에." "박수 쳐줄까?" "집어치워!" "좋아. 그런데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라니. 그 희한한 보석이 뭔 일을 하는데?" "그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하는 보석… 그 번영과 그 사상과 그 마음 을 지도할 수 있는 보석. 스스로의 의지는 없다. 결정권과 그 실행권.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엄청난힘이 있을 뿐이다." "뭐라고?"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6. 이 자식이 드디어 돌았구나. 아무래도 오크들이 저 녀석의 머리쪽을 때 린 모양이다. 난롯가의 옛날 이야기도 저렇게 황당하지는 않겠군. "이봐, 잠깐만. 그러니까 그 잘난 보석만 가지고 있다면, 예를 들어서 내가 드워프의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드워프들에게 모두들 왼쪽 콧수염 은 모두 잘라내어라, 라고 말할 경우 모든 드워프들이 왼쪽 콧수염을 잘 라낸다는 말이야?" "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꼬마놈! 만물을 네 수준으로 끌어내려 시시덕거 리지 마라! 그것이 신을 조롱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모르느 냐?" "다른 프리스트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나도 좀 부끄러워했을 거야. 하지만 너 따위 엉터리 재가 프리스트에게 그런 식의 비난을 들을 순 없 어! 까불지 마! 네녀석의 입으로 신을 말해? 그게 어린 꼬마를 말로 밟 아죽이는 녀석의 입에서…" 입에서 나오던 말이 입천장 쯤에서 붙어버린 것 같다. 넥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뭐라고? 어린 꼬마를… 어떻게?" "제기랄. 네녀석의 과거 행적 중에 하나다.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떠 들어도 좋아. 난 사실을 말할 뿐이야. 넌 말을 달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 는 꼬마가 있자 그대로 밟아죽이면서 달렸어." "새빨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마음대 로!" 넥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꺽여지고 그 어깨는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인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곧 볼을 후려치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밧줄의 고통이 다시 몸을 파고든다. 어떻게 몸 을 뜨겁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이 지독한 경련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 을까? 뒤로 묶인 손을 비틀어보려 했지만 도대체 내 손이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 감각도 오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의 감각을 찾아보다가 난 포기해 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밤의 어둠은 더욱 짙어져 가는 것 같다. 하늘엔 별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넥슨의 얼굴엔 아무 별도 없었다. "미안해."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제길, 미안하다고! 하지만 어쩌란 말이야. 그건 네가 저지른 짓이야. 내 눈으로 직접 보았어." "됐어. 입 다물어. 내 차례야." 많이 쉰 목소리. 그 울림엔 왠지 물기 같은 것이 묻어있는 듯하다. 녀 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그런 짓을 할만한 사람임을 납득 하고 있을까, 아니면 과거의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있을까. "뭐가 묻고 싶지?" "내가 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거지?" "…보통 사람들끼리의 대화라면, 그거 정말 웃기는 질문이야. 하지만 웃지는 않겠어. 그렇다고 대답해주겠다는 말도 못하겠는데." "왜?" "나도 모르거든. 당신이 왜 그러는지. 당신이 한 몇 마디의 말은 기억 나지만." "그게 뭐지?" "당신은 아버지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염증을 내는 것 같이 말했어. 그리고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귀족이나 왕족으로 불려 져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것 같아." 넥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라. 그렇군. 우리 아버지의 죽음은 부당한 것인가 보군." "그래… 아니, 잠깐? 어라, 당신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뭐라고? 무슨 소리야!" "당신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어. 로넨 휴리첼 백작은 아무르타트 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지 죽은 것은 아니야." 넥슨의 눈자위가 커졌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을 꿈틀거렸지만 말을 꺼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말을 했다. "이봐! 후치!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난 다른 것을 몰라도 그것은 기억해! 우리 아버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단 말이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 아버지를 직접 보았어. 우리 고향에 찾아오셨을 때 말이야. 그리고 과거의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분열되기 전의 당신 말이야. 그런데 당신이 태어나기 도 전에 죽었다니?" "뭐라고? 어, 어엇? 아냐! 우리 아버님께서는 분명히 돌아가셨어! 우리 아버님의 이름이 로넨 휴리첼인가? 어쨌든 그 분은 죽었단 말이야!" 이 작자가 지금 모자란 기억 속에서 무슨 망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 야? 기억의 파편들이 모이면 얼토당토하지 않은 새로운 기억이 생길 수 도 있다는 말인가? "그럼 설명해봐.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당 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면 누가 이야기를 해줬겠지. 그것은 기억나 는 거야?" "그것은…" 넥슨은 다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수명이 짧아지는 느낌이군, 제기 랄. 이렇게 답답한 대화라니. 넥슨의 입에서 말들이, 아니 단어들이 띄 엄띄엄 나왔다. "부당한 죽음… 억울함… 사무치는 슬픔… 배신… 이러한 기분들. 명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내 하얀 머릿속은 마치 안개 속 같아. 안개 속 에서 보는 사물들처럼 희미하고, 그 윤곽마저 흐리고… 느낌은 기억나. 하지만, 하지만…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고! 형제의 손 에 죽음을 당했…!" 넥슨은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랐고 나 역시 크게 놀라버렸다. 무슨 말이 야? 로넨 휴리첼 백작이 형제의 손에 의해 죽다니? "이봐, 이봐. 당신 아무래도 뭔가를 크게 착각하는 모양이야. 당신 아 버지의 형제가 있기는있었어. 그러니까 당신의 삼촌이지. 그 삼촌 되는 사람이 죽기는 죽었어. 하지만 당신 아버지는 죽지 않았단 말이야." "삼촌이라고?" "그래. 아니,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니… 기억나지 않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제기랄!" 난 한숨을 내쉬었다. 묶여있는 몸 때문에 벌써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 든데,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작자를 상대해야 되다니. "좋아. 후우우… 이 빌어먹을 밧줄! 하나씩 하나씩 설명할 테니까 잘들 어. 그러니까…" "잠깐." 넥슨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지? 난 입을 다물고 넥슨을 바라 보았다. 넥슨은 말했다. "이 소리 들리지 않나?" "무슨… 어랏?" 그러고보니 들려온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인지 꽤나 희미한 소음 이다. 하지만 불길한 소음이다. 비명소리, 욕설?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 는 소리도 들려오고 말의 울음 소리도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 깐! 오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지? 이 오크놈들이 야습을 시도하는 것이구나! 서쪽이 어느 쪽이지? 낮에 내가 묶여있었을 때 석양이 보였었지. 그러 니까 정면이 서쪽이다. 그렇다면 칸 아디움이 있는 방향은 바로 내 정 면. 지평선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을 노려본다. 이윽고 지평선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불길이 보인다. 마치 피부를 살짝 베었을 때처럼 빨갛고 가느다란 선이 보인다. "저 놈들이잇!" "야습에 성공했군." "뭐라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성공했다는 거야?" "멍청한 꼬마놈.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불길이 오를 리가 없지." "이이익! 제기랄!" 저쪽에 있던 오크들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놈들은 벌떡벌떡 일어 나더니 불길을 가리키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커다란 웃음소리와 왁자 지껄한 환성을올리며 놈들은 어딘가로 뛰어갔다. 젠장! 그럼 카알은? 샌슨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오크들에게 야습 을 허용한단 말이야! "보는 눈이 없군. 됐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난 넥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넥슨 녀석은 갑자 기 앞으로 쓰러졌다. 쿠당탕. 놈은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면서 두 팔을 부둥켜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밧줄은?" 넥슨은 벌벌 떨리는 팔을 힘있게 잡으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머 리를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난 도둑이었다, 후치. 이까짓 밧줄이야 아까 낮에 끊어두었다. 다만 달아날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기다린 거지." "뭐라고? 넌 도둑이 아니야. 도둑 길드의 마스터지." "뭐야? 아니… 마스터가 도둑이 아니라고…?" 넥슨은 다시 멍청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도대체 남아있는 기억마저도 뒤죽박죽이군. 넥슨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 다리는 곧 옆으로 미끄러졌고 그는 무릎을 강하게 부딪혓다. 무릎이 꽤 아플 텐 데도 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다리를 끌어당겨서 앞에 세웠다. 그 손과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는 조금전까지 자신이 묶여 있던 그 나무기둥을 붙잡으며 힘들게 일어났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나무기둥을 거의 안다시피 한 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이마를 나무 기 둥에 댄 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늘어트린 오른손에는 어디에 숨겨두었던 것인지 조그만 나이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도둑이라 고? 어쨌든 도둑 길드의 마스터다운 솜씨다. 아니, 오크들의 소지품 검 사가 엉망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는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오더니 내가 묶인 나무에 왼손을 짚었다. 녀석의 기분나쁜 얼굴이 내 얼 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똑바로 내 가슴에 겨누어 졌다. "너…?" 뒷통수의 머릿카락이 모두 하늘로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넥슨은 씩 웃더니 밧줄을 끊었다. 툭, 투둑. 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까지 모두 끊어 지자 난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땅에 호되게 부딪혔지만 둔한 아픔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가 땅에 닿는 순간 난 이를 꽉 깨물었다. 그곳은 오전에 오 크에게 깨물렸던 곳이고, 제레인트와 샌슨이 치료해주었지만 아직 낫지 는 않았던 모양인지 지독한 아픔이 느껴졌다. 난 땅에 나동그라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손으로 몸을 만져보았지만 손 의 느낌도 몸의 느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듯이 내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그렇게 느 낄 수밖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다리쪽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어떻게 일어난다는 말이야. "일어나." 빌어먹을! 다 참아도 저 녀석이 저렇게 날 깔보듯이 바라보게 할 수는 없어. 난 팔을 휘둘렀다. 마구 휘두른 팔은 나무기둥에 세게 부딪혔지만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어쨌든 난 나무기둥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간신 히 일어나는 순간, 발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입 술이 땅에 부딪히며 눈 앞이 번쩍한다. "크…흐윽. 허어, 허어엇." "일어나, 멍청아. 도와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 후우, 후우. 결국엔 자신의 다리로 달리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는 것은 소용이 없 어!" "다, 다, 닥쳐라… 일어날 거야!" "그럼어서 뜻대로. 널 걷어차서… 일어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 쉽다. 쿨럭쿨럭." 망할. 댓구는 꼬박꼬박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지? 눈에서 흘러내 린 눈물은 얼굴에 말라붙은 땟국물과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온다. 일어나 다가 쓰러지면서 몸이 급격하게 움직이자 뱃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부 들거리는 팔을 끌어모아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네 발로 선다. 머리를 들어 넥슨을 본다. 제길! 넥슨은 나무기둥에 기대어 선채로 날 보고 있 었는데 그 시선이 꼭 발치의 개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 도와줘." "도와달라고? 웃기는… 소리. 밧줄도 잘라줬다. 이젠 너의 발로… 일어 서라!" "빌어먹을!" 다시 팔에 힘을 준다. 땅을 거세게 밀면서 허리를 튕겨올린다. 하지만 모래가 미끄러지며 발은 뒤로 밀려나버리고 배가 호되게 땅에 부딪힌다. 콰앙! "어커억! 쿠울럭, 쿨럭!" 난 배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나가떨어졌다. 배가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목에서 토기가 올라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지독하 게 쓴 맛. 눈앞이 흐리다. "케엘록, 켈록, 쿨쿨쿨…럭!" 넥슨의 모습이 비스듬하게 보인다. 그것도 두 개, 세 개로 보인다. 어 지러워, 어지러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낸다. 그러자 경멸스러운 표정 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넥슨의 얼굴이 보인다. 놈의 입술이 빠르게 움 직인다. "퇘!" 볼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액체의 느낌. 난 어리둥절해졌다. 목에선 휘 파람 소리 같은 숨소리를 내면서 난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넥슨을 올려다 보았다. 넥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죽어랏! 죽어버렷! 그게 네가 살아가는 방식인가? 그 정도에 포기할 목숨이냐! 그렇다면 지금 죽어버려!" "이 새끼야아아! 넌 맨처음 볼 때부터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어!" 어떻게 된 거지? 난 일어나 있었다. 내 머리는 땅에서 한참 떨어져 있 었다. 하지만 다리엔 감각이 없다. 난 땅을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 다. 말도 안돼. 17년 동안 이 높이에 있었던 머리가 이제서야 현기증을 느낀다고? 하지만 현기증을 느낄 사이가 없다. 팔을 마구 휘저으며 상반 신을 앞으로 날린다. "쿠으윽!" 이 자식아, 그 턱이 깨졌지? 난 이마로 넥슨의 턱을 받아올린 다음 그 대로 머리로 넥슨을 밀면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야야야야야야!" 퍼퍼퍼퍼퍽! 내 주먹에선 아무런 감각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여전 히 머리로 넥슨의 가슴을 밀면서 그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고 있었다. 어 라? 내 주먹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난 내 주먹을 관찰하면서 어리 둥절해졌다. 그 주먹들은 미친 듯이 튀어나가면서 넥슨의 복부를 때려대 었고 그럴 때마다 넥슨의 입에선 숨막히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퍽! 마지막 한 방을 꽂아준 다음, 나는 마침내 팔을 늘어트렸다. 난 팔 을 늘어트린 채 머리를 넥슨에게 밀어붙인 자세로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넥슨은 나무 기둥과 나 사이에 끼어 쓰러지지 못하는 모 습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 때였다. 저 아래에서 넥슨의 손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 을 보면서도 난 팔을 늘어트린 채 꼼짝도 못하고 기대어 서있었다. 콰앙! 넥슨은 두 주먹을 깍지끼고 내 뒤통수를 내려친 모양이다. 아무 힘이 담기지 않은 주먹질이었지만 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두 팔을 허우 적거리다가 넥슨의 허리를 붙잡았다. 순간 목구멍이 타오르는 느낌이 든 다. "우우윽!" 무릎을 꿇은 채 넥슨의 허리를 부둥켜안고서 그대로 토해버렸다. 넥슨 은 피하지도 못한 채 그 발에 내 구토물을 뒤집어썼다. 머리 위에서 넥 슨의 신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려한 복수군." "젠장… 우윽! 우… 미안해." "걸을 수 있나?" "…죽지는 않을 거야." "좋아."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7. 목구멍은 쓰라렸지만 속은 후련하다. 난 나 스스로 놀랄만큼 경쾌한 동 작으로 일어났다. 사실 허우적거리며 볼쌍사납게 일어난 것이지만 그렇 게 유쾌할 수가 없다. 넥슨은 그대로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선 채 고개를 옆으로 꺾은 자세로 날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입을 쓱 닦은 다음 그를 노려보았 다. 넥슨의 입이 열렸다. "…어깨 좀 빌릴까?" "킥킥킥… 좋아." 넥슨은 아무런 표정없이 그대로 내게 허물어졌고 난 그의 오른팔을 붙 잡아 목뒤로걸쳤다. 그리고 왼손으론 그의 허리를 감았다. 넥슨은 그렇 게 나에게 기댄 다음 손을 힘없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무기는… 저쪽에 있다. 지금은 감시가… 없을 거야." "쿨럭, 무기가 그대로 있을까?" "녀석들에겐 나나 네놈의… 무기가 너무 크다. 그대로 있을 거야." "알았어. 가자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오크란 오 크는 모조리 칸 아디움으로 달려가버린 것인지 야영지에는 한 마리의 오 크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괴괴한 야영지를 흐느적흐느적 걸어갔 다. 넥슨이 말한 방향에는 솥이나 밧줄, 방패, 깨진 투구 등의 잡동산이 들이 쌓여있었고 넥슨의 검과 내 바스타드도 거기 꽂혀있었다. 우리 둘은 각자의 무기를 회수한 다음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넥슨은 지저분한 잡동산이들에 등을 기댄 채 하얗게 된 얼 굴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너무 세게 때린 모양인 데. "괜찮아?" "그렇게 맞고 괜찮을 것 같나?" "미안해. 그런데…어디로 가지?"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반쯤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밤하늘을 올 려다보며 곧 막혀버릴 듯한 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난처하군. 가장 좋은 방법은 칸 아디움으로 달아나는 것이지만 만일 오 크들이 칸 아디움을 함락시켰다면 우리들이 힘들게 그곳으로 걸어가 녀 석들의 승전 기쁨을 두 배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다른 도 시로? 난 이곳의 지리를 전혀 모른다. 넥슨은? "이봐. 당신. 이 근처 지리를, 쿨, 쿨, 알고 있나?" "모른다… 하슬러가 알지." "없는 사람은 거론하지… 말자구. 크허험!" "말이 없는지 살펴봐." "당신 미쳤어? 오크들이 말을 탄다고?" "…제길. 혹시 모르잖아! 찾아봐! 보지도 않고…클럭! 크하악!" 넥슨은 머리를 구부려 무릎에 묻고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오크들의 야영지에서… 말을 찾아? 왜? 유, 쿨럭! 유니콘이나 드래곤 은 어때?" "너 자꾸 그 입을…" "시끄러워! 지금 두 다리 외에는 탈만한… 것이 없어. 그러니 어서 일 어나…자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전혀 일어날 기운이 없다. 정말 다리를 타고 달려야 되나? 바람이라도 탈 수 있다면, 이대로 날개가 돋아 날아갈 수 만 있다면… 바람? 잠깐만. 바람을 탄다고? "어, 잠깐! 당신 바람의 하인을 다룰 줄 알잖아?" 내 기대에 어긋나게시리 넥슨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이… 미친 꼬마야! 쿨럭! 이 몸으로 기도를 하라고? 디바인 파워는 신 의… 힘이지만, 컥! 커.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내 몸이다!" "제길, 필요할 때 못쓰는 힘 따위… 개나 줘버려. 일어나자구. 태어날 때부터 선물받은… 이동수단이 있으니까." 이건 마치 말구유로 술을 마신 것 같군. 일어나자 머리가 윙 돌면서 균 형감각이 상실된다. 난 허리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넥슨은 여전 히 창백한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난 손을 내밀었다. 넥슨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난 그 손을 붙잡 아 그를 일으켰다. 넥슨 역시 일어나서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기 위해 애쓰더니 날 쏘아보며 말했다. "언제까지로 할까?" "뭐 말이야?" "우리 휴전 말이다. 언제까지로 할까?" "아까 낮에 당신을 구하러… 쿨럭. 달려왔을 때부터 난 영원히 휴전이 야." 넥슨은 어두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다가 말했다. "나 혼자 탈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널 살려둔 거야. 하지만 난… 쿨럭! 네녀석이 날 돕도록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진 않겠 어." 넥슨은 눈을 부라리며 빠르게 말했다. "안전해지는 순간 널 죽인다. 알았어?" "왜지?" "뭐라고?" "당신은 말했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것은 나에 대 한 증오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아무런 증오도 없이… 날 죽이 고 싶다는 거야?" 넥슨은 잠시 주춤거렸다. 망할 녀석. 그 주춤거림은 모든 것을 설명해. 난 숨을 좀 몰아쉬고나서 말했다. "좋을대로 해라. 날 죽이려드는 순간이…커험! 네 녀석 숨 넘어가는 순 간이야. 그 때가 되면 영원한 휴전 따위 없어. 이제 내 할 말은… 다했 어." "좋아.어디로 가지?" "저 도시로…클, 쿨럭. 이 황량한 곳에서 말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저기 뿐이잖아." "크험! …할 수 없군." 난 넥슨의 팔을 붙잡았다. 넥슨은 움찔하면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난 지긋이 그의 팔을 당겨 어깨에 매었다. 넥슨은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았 다. "안 갈 거야?" "가자." 지독한 밤이었다. 밤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캄캄한 공간은 끝이 없었다. 눈을 들어보아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오 크들에게 두드려맞고 하루 종일 묶여있었던 것 때문에 눈이 침침해진 때 문일까? 보이는 것이라곤 저멀리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뿐이다. 불 길만을 바라보며 이 캄캄한 암흑을 밟아나가는 우리들은 마치 부나비 같 다. "저기로 가서 우리를 불사를까."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것이 마지막 발걸음인 것처럼 옮기고 있었다. 그가 비틀거릴 때마다 난 휘청거리거나 땅에 쓰러졌다. 몇 번이고 딱딱한 땅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나자 더 이상 의 고통은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몸에도 새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이 녀 석이 왜이리 유난을 떠는 거지? 설마 영원의 숲에서 이곳까지 달려와서 지쳐버린 것인가? "당신들… 거기서 헤어진 다음 여기까지 달려왔나?" "…" 뭐라고 대답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고개가 조금 끄덕여진 것 같 다. "맙소사. 어떻게? 어떻게 사흘 동안 45 펜큐빗이 넘는 거리를?" 넥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인간인가? 어떻게 그 거 리를 사흘만에 걸었다는 거지? 그 때였다. 갑자기 넥슨의 팔이 미끄러지 더니 그의 몸이 아래로 허물어졌다. "어, 어엇!" 넥슨이 허물어지자 나 역시 기댈 데를 잃고 쓰러졌다. 콰쾅! 아하! 별 이 다 어디 갔는가 했더니 저기 있군? 젠장. 난 넥슨을 깔아뭉갠 자세로 쓰러져 땅에 호되게 부딪힌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 이것봐. 괜찮아?" "…비켜." "그래, 비켰어. 그런데 괜찮은 거야?" "…잠시만. 잠시만 쉬어 가자." "쉬기는 뭘 쉬어. 이런 데서 이 몸으로 있으면 영원히 쉬게 될 거야. 계속 걷는 것이 낫지 않겠어?" "못걷겠어… 제길." "젠장." 어렵게 되었는걸. 사방이 탁 트인 황야, 밤의 어둠 외엔 몸을 가릴 것 이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 오크들이 밤눈이 좋던가? 어쨌든 그렇다면 어둠의 엄폐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당황스러운 곳에서 숨어 있 어봐야 얼마나 숨어있을 수… 나무?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내 눈에 커다란 나무가 하나 보였다. 저건 뭐지? 좀 더 자세히 살펴 본 다음 나는 그것이 오크들이 끌고온 공성추라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건 아프나이델에 의해 파손된… 어라? 그새 이렇게 많이 걸어왔나? 그럼 성벽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겠군. 물론 지금의 우리 두 사람에게는 엄청난 거리일 테지만. "이봐, 넥슨. 넥슨! 저기 구덩이가 있다. 저기까지만 가자고. 거기서 좀 쉰 다음 새벽녘에 성으로 잠입하자."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운 채 힘들게 팔을 들어올렸다. 난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무시하면서 그를 일으켜세웠다. 디그 마법에 의해 만들 어진 구덩이까지는… 스무 걸음? 서른 걸음? 젠장. 어둠 속에서 거리 감각이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탁 트인 황야에서 삐죽하게 솟아있는 것이라 더 가깝게 느낀 것인지도. 어쨌든 그곳까지 걸어가는데 10 분도 넘게 걸렸다. 10 분간의 지옥같은 고통 끝 에, 나와 넥슨은 애인의 무덤 속으로 쓰러지는 처녀 같은 모습으로 구덩 이 속에 들어갔다. -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들어간다기보다는 빠졌다고 표현해야 옳다. "크… 커허억! 헉!" 넥슨은 구덩이 속에 나동그라지면서 목이 찢어지는 신음을 흘렸다. "뭐야? 왜그래?" "빌어먹을… 공성추에 부딪혔어." "공성추는 차라리 낫지. 글레이브에 부딪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 야." 난 그렇게 쏘아준 다음 구덩이 속에서 고개를 내밀어 황야를 살펴보았 다. 왠지 땅쥐가 된 기분이군. 난 눈 높이에서 황야를 바라보며 주의깊 게 살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벽 쪽에선 여저히 불그스름한 불기운이 하늘로 뻗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야습이 성공한 모양이다. 단순히 횃불만 가지고 저런 불기운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 까. 칸 아디움의 시내가 모조리 불타는 것 같은 불기운이었다. 게다가 성벽에 의해 가려진 것인지 하늘 중간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붉은 기운 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소리는? 멈춰서 들으니 비명소리나 창검 부딪히는 소리를 확실히 구분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우리 일행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난 다시 몸을 돌려 구덩이 속으로 주르르 미끄러져들어갔다. 그것은 그 저 발에 힘을 빼고 중력에 몸을 맡겨버린 행동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편한 방법이다. 몸이 엄청나게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기는 했지만. 그 렇지 않아도 캄캄한데 구덩이 속이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봐, 넥슨. 어디 있지?" "구덩이 속에." "아, 고맙군." 넥슨의 목소리는 왼쪽 전방에서 들려온다. 난 구덩이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잠들면 안돼. 알았지? 날씨가 굉장히 춥다고. 이런 밤에 이런 곳에서 이런 몸으로 잠들면 간단하게 체온을 빼앗기게 될 거야." "네 녀석의 그 수다스러운 입이 있는데… 어떻게 잠이 들겠냐." "고맙다고 느껴지지?" "빌어먹을 꼬마놈…" "이야기나 들려줘. 여덟 별에 대해서."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봤자 넌 내가 당기는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지, 뭐. "시오네는 말이야…" "뭐라고?" 넥슨은 정말 불쌍하리만큼 급히 말했다. 좀 잔인한가? "아주 뛰어난 간첩이라고 들었어. 게다가 뱀파이어이고." "잠깐! 뱀파이어라고? 사람이 아니야?" "그래. 사람이 아니야. 뱀파이어지." "이런 맙소사. 그렇다고? 시오네라는… 여자냐?" "여자야." "그래…" "이제 내 질문에 좀 대답해줘. 좀 딱딱한 흥정 분위기가 들지만. 여덟 별은 뭐지?" "…말했잖아.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한다고." "스스로의 의지는 없다면서?" "그래… 의지는 없다. 그러니까 검과 마찬가지. 쿨럭. 검은 충분히 적 을 죽일 수 있지만… 검이 죽일 대상을 고르는 것은… 아니다." "좋아. 알겠어. 그럼 누가 그 별들을 이용할 수 있지? 소유자?" "그런 셈이지." "그걸 어떻게 믿지?"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하군. "이봐, 그걸 어떻게…" "넌 바보냐! 드래곤 로드는 거의 모든 종족들을 억압할 수 있었지 않느 냐! 그걸 알면서도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어, 쿠울럭! 쿨럭쿨럭!"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8. 어라? 이게 무슨 말이야? 드래곤 로드가 모든 종족을 지배한 것이 그것 과 관련이 있는 건가? "잠깐! 뭐야, 이런 말이야? 드래곤 로드는 300년 전 그 여덟 별을 가지 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들을 지배한 거라는… 그런 말이야?" 넥슨은 밭은 기침을 계속하다가 간신히 진정해서 말했다. "그래. 투구걸이로밖에 못쓸 텅텅 빈 머리를 가진 꼬마야." "어, 어? 하지만 드래곤 로드도 드워프나 엘프를 지배하지는 못했어." "하지만 드워프나 엘프들이 드래곤 로드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멍청아. 엘프는 혹 모르더라도, 지배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드워프가 드래곤 로드를 믿을 수 없는… 쿨럭!" "믿을 수 없는 맹방이자 견제하지 않는 적. 그 말이야?" "너… 의외로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군." 그거야 헬턴트 마을의 독서가 카알의 복음을 어릴 때부터 무수히 받았 으니까. "그게 그런 건가? 드래곤 로드가 그 여덟 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면 왜 엘 프나 드워프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며, 쿨럭, 원래 복종이라는 개념이 없는 존재…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그 콧대 때문에 복속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지." "이봐. 그 여덟 별인지 뭔지를 가지면 그 종족의 창생소멸을 결정할 수 있다면서? 그럼 복종하지도 않는 드워프나 엘프를 왜 멸망시키지 않은 거지?" "드래곤 로드는 너 따위… 풋내나는 꼬마보다는 훨씬 현명하니까." "칭찬할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내가 싱그러운 나이라는 말로 받아들이지. 드래곤 로드가 현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 야?" "세상에 이유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모두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유피넬의 이야기 같은데?" "그래… 박쥐들이 보기 싫다고 해서 모든 박쥐를 없애버리면, 그 다음 날 곧장 세상의 곤충들이 훨씬 늘어나버릴 것이다. 그 곤충들 때문에… 우, 우컥. 다른 동물들이 죽어갈지도 모르지. 드래곤 로드는 드워프나 엘프를 복속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명하기 때문에, 쿨 럭! 드워프나 엘프를 모조리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힘으로 억누 를 뿐이었지." "이해가 되는 듯도 해. 엘프나 드워프도 분명 이 세상의 한 부분이고 그들이 없어질 경우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맞나?" "맞아…." 넥슨의 대답은 한숨소리 같았다. 난 어지러운 머리를 다잡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건…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 넥슨은 내 혼잣말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 여덟 별 을 빼앗기로 마음먹고… 그와 싸웠지. 그 골빈 전쟁광, 기사도 맹신자답 게… 자신의 부하들에게 여덟 별의 추구자라는 얼빠진 이름까지… 붙여 가면서." "뭐라고?" "못들었으면 집어치워!" "이봐, 루트에리노 대왕 앞에 무슨 말을 붙였지? 골빈 전쟁광, 기사도 맹신자라고?" "그래, 왜? 잘못 말했나?" "…당신이 그렇게 보겠다면, 좋아. 마음대로 해. 그럼 3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드래곤 로드가 패배했으니까 그 별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거지?" 넥슨은 다시 대답이 없었다. 난 초조해진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이봐! 말해!" "몰라… 핸드레이크가 실망했으니… 그 별들은 파괴된 것이 분명해… 하나의 별만 제외하고…" "자, 잠깐! 꽤나 많은 말을 했는데 그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어! 핸드레이크가 실망하다니? 별들이 파괴되었다고? 그런데 하나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신음소리,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봐!" "시끄러워, 이, 이 자식아… 힘들어… 너무, 너무 힘들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난 어둠 속을 더듬어 넥슨의 몸을 찾았고 잠시 후 시체처럼 차갑게 굳은 넥슨의 몸을 만질 수 있었다. 그는 극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이마를 짚어보니 뜨거운열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은 차가운데 머리에선 이런 열이라니?" "손… 치워. 머리가 아파…" 넥슨은 잠꼬대를 하듯이 웅얼거렸다. 그의 눈가와 이마에선 굉장한 열 이 느껴졌지만 몸은 추위 때문인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길,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모포 없나? 불을 피워야 되나? 난 일단 넥슨의 몸 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이 작자야! 여기서 죽어넘어지기 위해서 그렇게 달렸어? 당신 죽어도 난 가슴 아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엔 단 한 사람 당 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사람이 있잖아!" "…나 말인가? 크후후… 넥슨 휴리첼이? 그는… 죽었어. 넥슨의 3/5는 … 영원히 사라졌어." "빌어먹을, 그럼 여기 내가 주무르고 있는 이 작자는 뭐야?" "…이거? 조각… 인간 파편… 크흐흐흑! 크핫하! 파편이 아닌 척 하기 위해… 이유도 모르면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려 드는… 이유도 모르면 서 미친 꼬마를… 죽이려드는…비참하기 짝이 없는… 쓰레기…" "떠들 힘이 있으면 움직여! 죽든 말든 상관없어. 알아?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죽는 것은 안돼. 절대로 용납못해!" "감정도… 없이… 기억도 없이… 죽이고 싶어해야 되기… 때문에…" 이 자식아, 무슨 말인지 알아. 네녀석은 잃어버린 과거 때문에 자신을 잃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럼 계속 날 미워해! 그렇게 해야 널 잃지 않을 것 같다면 마음대로 날 미워해! 이유 따위, 뭐가 중요해?" 땀이 돋아나면서 내 몸도 사정없이 떨린다. 하지만 난 넥슨의 몸을 주 무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넥슨의 몸이 조금씩 유 연해지는 것 같다. 입에서 더운 김이 술술 나오면서 시야 주위로 자그마 한 광점들이 명멸한다. 관자놀이가 터져나가는 것 같다. 눈꺼풀이 덜덜 떨린다. 끝내주는 밤이군. "정신 차려어!" "그… 커다란 입 좀… 다물어라. 주위의 오크란… 오크는 다 몰려… 오 겠다." "얼씨구? 지금 네가 날 걱정해? 그럴 기운 있거든 네 걱정이나 해! 절 대로 내 눈앞에서 죽어넘어지게 놔두지는 않겠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널 살려서,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참회하게 만들겠어! 너의 모든 기억 을 돌려주고 말겠어! 이 벼락맞아 죽어도 할 말 없는 자식아, 일어나!" 넥슨의 멱살을 잡아올린다. 그리고 사정없이 앞뒤로 흔든다. 놀랍군. 내게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다니. 그런데 이게 이성적인 행동일까? 녀 석을 눕혀놓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이렇게 흔드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눕혀두면 왠지 그냥 죽어버릴 것 같다. 이 암흑 속에 누워있는 넥슨의 모습은 시체를 연상시킨다. 난 어쩔 줄 모르고 그의 몸을 흔들었다. 제 길, 제레인트가 여기 있었다면… 어랏? "자, 자, 잠깐! 넌 프리스트잖아? 엉터리지만 프리스트 아니야? 자신은 치료못하는 거야?" "못해… 사흘 동안 체력을… 너무… 소모했어. 제발… 그만 흔들어." "사흘이고 나흘이고 못하긴 왜 못해! 어서 해! 기도해!" "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원래 인간이 가진… 것이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기도해! 기도하라고!"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의 것에 대한 발견…" "기도해!" "자신으로의… 회귀… 어두워…" "쿨럭." 이젠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슴 전체가 찢어지는 것 같다. 머리를 움직일 힘도 없어 내 눈은 하늘을 향해 대책없이 열려 있다. 넓은 하늘. 지상의 한 점이 되어 저것을 바라본다. 하늘의 부분부분을 내 얼굴과 연 관시켜 생각한다. 이마쪽에서는 보라색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땀에 엉기고 흙덩이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머리카락 하나가 왼쪽 눈썹 방향의 하늘을 둔한 각 도로 가로지르고 있다. 왼쪽눈은 부어오를 데까지 부어오른 모양인지, 왼쪽 하늘은 찌그러진 모양이다. 게다가 뿌옇다. 왼쪽에 떠오르는 별무 리들은 환상적인 모습이다. 미간쪽 하늘에서 구름이 갈라진 모양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별 하나 가 나타난다. 별은 가물가물 빛나다가 다시 밀어닥친 구름에 가려 사라 진다. 오른쪽 콧등을 바라본다. 콧등 위로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칸 아 디움에서 올라오는 불빛인 모양이다.고작 저기까지 걸어가질 못해서 여 기 이렇게 맥없이 누워있군. 콧등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 같이 느껴진 다. 내 코가 불타고 있나? "키득… 쿨럭! 쿨럭, 쿨럭!" 갈비뼈가 모조리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차갑고 맑은 정신 때문에 통 증은 더욱 고약하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일 뿐이다. 오른쪽 볼을 씰룩거려본다.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넥슨의 모습이 떠 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넥슨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 그의 몸은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을씨년스럽게 처박혀 있 다. 구덩이의 검은 흙이 그의 어깨와 가슴에 떨어져 있다. 내가 마지막 으로 그를 팽개쳤을 때 흘러내린 흙이다. 그는 팽개쳐진 모습 그대로 사 지를 집어던진 채 쓰러져있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어버린 거야. 내 눈 앞에서. 날 영면의 참관인으로 삼아. "…쿨럭."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 넥슨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창백한 얼굴은 두드러지게 떠오른다. 뭘 위해 살지? 당신은 과거를 잃은, 불완전한 현재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미아. 현재는 과거라는 기단 위에 서 있는 탑이지. 하지 만 당신의 탑은 기단없이 허공에 떠 있었어. 고집과 억측으로 과거를 만 들어내는 것에도 실패해버리고, 그렇게 쓰러져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시체는 무슨 꿈을 꿀까? 어쨌든 꿈을 꿀 시간은 영원하지. 하슬러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지? 저 친구의 주인은 저기 쓰러져있다.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마.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제멋대로 죽어버렸 어. 난 여기까지 저 친구를 끌고 왔어. 그리고 안간힘을 다했어. 하지만 넥슨은 죽었어.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쩌란 말이야? 하슬러의 얼굴이 사라진다. 언제나 말이 없는 사나이.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말을 모두 합쳐도 제미니가 하루에 하는 말보다 적을걸? 에 헤헤헤… 제미니.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니? 내 생각을 하고 있니? 지금은 너의 포 근한 새벽잠에 취해있겠지. 조용한 평화 속에 잠들어있겠지. 오우, 천만 에! 시트를 걷어찬 채 그 사슴의 다리같은 어린 다리를 마음대로 벌리고 두 팔은 밤하늘을 통째로 끌어안을 듯이 벌린 채 누워 코를 골고 있을 거다. 네가 옛날 잠버릇 그대로라면 말이야. 코에서 흘러내리는 콧물을 쩝쩝 마셔대던 시절의 제미니가 그랬지. "킥, 키킥! 우헤헤… 쿨럭! 우하하…핫!" 기억해둬. 제미니. 네 애인은 말이야, 대륙의 위기를 구한답시고 이름 없는 황야와 거친 산, 그리고 지하의 아름다운 미궁을 헤메고 다녔지. 한 마디로 철이 없었어. 익숙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낮 동안 두 손으로 신의 작업을 흉내내어 빛을 세공하고 황혼이 피어오르는 시간이 되면 저녁식사 메뉴를 최대의 고민거리로 생각하며 살았어야지. 어울리 지 않게시리. 그리고,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에 드러누워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작자 아니야? 하하하. 세상의 여자들 에게 말해줘. 철부지 애인은 감당할 도리가 없는 것이니 절대로 사귀거 나 하지 말라고. 다시 넥슨의 얼굴을 본다. 그의 얼굴에 맺힌 서리들. 새벽이 멀지 않은 시간이군. 시간은 날 떼어 놓고 잘도 흘러가버리는군. 난 여기 멈춰섰고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 쓴 것인가. 졸린다. 졸린다. "후치야!" 당신도 죽었어요? 어젯밤 오크들이 칸 아디움을 야습했지. 어제? 뭐가 어제지? 이제 시간이라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는데. 그렇잖아 요, 네리아? "후치야! 후치야!후치야!"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사람에겐 그 이름의 소유권이 영원하라. 내 이름 은 태어날 때부터 내 것 아니었지. 난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 내 이 름은 항상 다른 사람의 것. 그래요. 나는 떠나가고 내 이름만 당신들 옆 에 남게 되겠지. 드래곤 로드는 틀렸어. 우리는 불사의 생명이 아니야. 우리의 이름이 불사일 뿐이지… "후치야!" 주위는 따스하고 안온한 느낌이었다. 한없이 포근하다.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중량감 상실. 그런데 누군가 내 몸을 주 무르고 있다. 겨우 내 몸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군. 그거 좋은 느낌인걸. 거기, 그 위쪽을 좀 더… 허공에서 일렁거리는 붉은 머리. 아름답게 흔 들리는군. 그리고 그 아래에 보이는 좁은 이마, 커다란 눈, 굳이 튀어나 왔다고 말하기엔 좀 모자라게 튀어나온 광대뼈. 참 예쁘장한 저 얼굴은… "네리아?" "어마! 후치! 일어났구나! 우아아앙!" 커억! 네리아는 곧장 나에게 쓰러졌고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을 강하게 압박한다. 네리아는 날 껴안은 채 펑펑 울면서 볼을 비벼대고 있었는데, 그거 기분 나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숨쉬기가 곤란한걸. "수… 숨막혀욧!" 네리아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로워 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네리아는 내 볼을 끌어당기더니 숨막힐 정도 로 키스를 퍼부어온 것이다. "읍! 으으읍! 그만 해요!" "살았구나! 요 미운 것! 살아났어! 우아앙! 이 이쁜 것아! 우아앙!" "미운 거에요, 이쁜 거에요?" "둘 다야!" "여기는 어디지요? 만약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라면 괜히 눈길을 피하면서 '너도 짐작할 텐데?' 하는 식의 눈짓은 하지 말고 똑바 로 말해주길…" "정신 차리는 절차가 뭐 그렇게 복잡해!" 엑셀핸드의 호통 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역시 얼굴이 벌겋 게 된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애써 감추려드는 엑셀핸드의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선 엑셀핸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은 채 서 있는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니? 다행이구나." 그 때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다고요? 후치가요? 일어났어요?" 아프나이델은 힘차게 달려온 레니에 의해 옆으로 밀쳐지면서도 빙글빙 글 웃었다. 레니는 날 내려다보더니 곧장 시트 위로 몸을 던지면서 울음 을 터뜨렸다. "우아아앙! 얼마나 걱정했다고! 살아났어! 이 나쁜… 아냐. 살아줘서 너무 기뻐. 으아아앙!" 어떻게 해야 되지? 난 난감한 얼굴로 내 가슴 위에 얹힌 레니의 붉은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레니의 머릿결을 쓸 어내리자 그녀는 눈물로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날 쳐다보았다. "레니…" "응. 후치야." "…푸흐, …킥, 푸하하핫! 눈물 좀 닦고 말하자! 우헤헤헤헤! 아이고, 죽겠네!" "뭐…야? 이 나쁜 놈아!" "아, 아, 아냐. 농담이야. 으킬킬킬킬! 제, 오, 제발! 그 눈물 좀 닦 아. 얼굴이, 얼굴이이이! 크학, 핫하하하!" 레니는 내 가슴에 힘껏 두 주먹을 꽂아넣었지만 그걸로 내 웃음이 멈춰 지진 않았다. 살아났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유쾌했다. 레니는 내 가슴을 두드리다가 자기 손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침 대에서 굴러떨어지도록 웃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둘러보자 내가 누워있는 곳이 어느 방 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꽤나 깔끔하고 정결해보이는 것이 여관의 방 같은 곳 은 아니었다. 채광이 좋은 창이라든가 커텐, 벽도제의 모습이라든지 기 둥의 모습을 봐도 분명 큰 저택 안이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내가 누 워있는 침대 옆에는 긴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긴의자에는 제레인트가 길게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카알과 샌슨, 길시언, 운차이는 또 어 디 있는 거지? "프하, 하아. 좀 진정하고.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무 슨 일이 있었어요, 네리아?" 네리아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 그녀도 레니를 보면서 꽤나 웃었다. 그 래서 레니는 지금 몹시 부어있는 상태다. -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응. 오늘 아침 우리들이 성 밖으로 나갔다가 구덩이 속에서 널 발견했 어. 자칫 지나칠 뻔했지 뭐니.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낀 데다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렇게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으니. 하지만 엑셀핸 드님이 네 신음 소리를 들었거든." "아… 고마워요. 엑셀핸드." "별 거 없어. 그렇게 커다랗게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는데 드워프라면 당연히 들어야지."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때 문득 생각나는 것 이 있었다. "어, 잠깐. 그럼 여기가 칸 아디움의 성 안이에요?" "그렇지. 여긴 시장님의 저택이야." "잠깐, 잠깐! 어젯밤에 오크들이 야습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갑자기 엑셀핸드는 잔인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핫하하하!' 그 리고 아프나이델도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야습한 오크들 중에서 살아남은 놈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일걸." "예?" 아프나이델은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어제 오후와 어젯밤 사이에 일어났 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니와 네리아는 침대에 앉았고 엑셀핸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아프나이델의 이야기를 거들었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9. "후치가 낙오되었어!" 샌슨의 고함 소리. 샌슨은 급히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한참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을 급정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행이 멈춰선 것은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밖에선 오크들이 무섭게 육박하고 있었 다. 카알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경비대원! 성문을 닫아! 어서!" 샌슨은 기가 막힌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아니, 안돼! 닫지마!" 샌슨은 그대로 도로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카알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샌슨은 그대로 밀고지나갈 듯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 자식들은 구하면서 후치는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건 절대로 안됩니 다!" 그러나 카알은 꿈쩍도 하지 않을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지금 성문이 열리면 칸 아디움의 시민들은 어떻게 되지?" 샌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힘없이 말에서 내렸고 성문은 닫히고 말았다. 네리아는 성문쪽으로 달려가서는 잠긴 성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앗! 시민 따위 알게 뭐야! 어서 성문 열어! 열어줘요!" 경비대원들이 무거운 얼굴로 네리아를 외면했을 뿐 성문은 열리지 않았 다. 네리아는 통곡했다. "후치야아악! 아악! 후치얏!" 길시언은 눈물을 뿌리며 성벽 위로 올라갔고 샌슨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비통한 얼굴을 한 채 망연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운차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꼿꼿이 선 채 지푸라기를 주워모아 검을 닦아내고 있었지만 그 손 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알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성문 밖에서는 내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곧이어 오크들의 환성이 울려퍼지면서 내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네리아는 성문을 긁으며 비명을 질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카알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 았다. 그 때였다. 길시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후치는 죽지 않았소!" 네리아와 샌슨은 놀란 얼굴로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성벽 위 로 올라간 길시언이 성벽 바깥을 기리키며 숨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크들에게 체포되었소! 하지만 아직 살해당하지는 않았어!" "뭐라고!" 이 때 일행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살아있다 는 소식에 놀란 나머지 모두들 하슬러와 쟈크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성 벽 위로 줄달음질친 것이다. "설마… 카알도?" "그래. 카알씨도 정신없이 성탑 계단을 뛰어올랐지. 그 굉장한 속도를 봤어야 하는데. 하하."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엑셀핸드가 다시 수염을 쓸어내리 며 말했다. "난 아래쪽을 보고 있었지. 성벽 아래쪽에서 카알과 샌슨, 길시언, 그 리고 운차이와 네리아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어. 하슬러와 쟈크는 재빨리 달아나버리더군. 아래쪽을 향해 고래고 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 전부였지."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엑셀핸드님께서 '저 놈들 잡아라!'하고 고함을 지르시길래 고개 를 돌려보니까 그 사람들은 시내쪽으로 달아나고 있더군. 경비대원들이 쫓아가긴 했지만 놓치고 말았어. 경비대원들이 시내를 샅샅이 수색했지 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어." "흠. 그 쟈크는 원래 도둑이니까 숨는 데는 재주가 있겠지요. 하슬러도 만만찮은 사람이고." 네리아가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응. 우리들은 네 생존 소식을 듣고는 순간 갈팡질팡해버렸거든. 난 내 려가서 하슬러랑 쟈크를 쫓아야될지, 성벽 위로 올라가서 네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해야 될지 혼란스러웠어. 카알 아저씨마저도 어리둥절한 얼굴 이 되었다고." "그것 참.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카알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답게 그 행동에 많은 시간을 들이진 않았 다. 욕설 몇 마디를 하늘로 띄워보낸 다음 카알은 성벽 위로 올라와 날 관찰했다. 내가 오크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바짝 긴장해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렸다. 마침내 나와 넥슨이 오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카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죽지 않았으니 됐어. 구출하면 돼." 마치 스스로에게 확신을 시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일단은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 그렇게 일행이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 오후가 빠르게 지나갔다. 황혼이 어스름하게 펼쳐질 무렵, 성문 위의 경비대원은 밖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를 발견했다. 화살에는 편지가 묶여져 있었고, 그래서 병사는 그 편지를 전투 지휘소인 야전 막사로 가져왔다. 우리 일행들은 야전 막 사에 몰려 있다가 크레블린 대장과 함께 그 편지를 보게 되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편지를 읽어내려가다가 몹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궁금한 얼굴로 초조하게 기다렸고 그러자 대장은 편 지를 카알에게 건네었다. 카알은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는…? 괴물 초장이라고 썼다가 그 위에 줄을 그었군. 으흠. 어쨌든 나는 후치다. 달아난다. 밤에 성문을 열어라. 내가 들어간다." 순간 작전 지휘소는 엄청난 정적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 정적이 깨어진 것은 제레인트의 폭발적인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푸흐히어히아히에에에!" 제레인트는 그렇게 인간의 웃음소리 같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고 길시언 은 운차이의 어깨를 쾅쾅 두드렸다. 운차이마저도 고개를 조금 돌린 채 쓴웃음을 지었으며, 네리아는 얼빠진 얼굴로 카알에게서 편지를 빼앗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품위없게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 만 당시엔 아무도 그를 허물할 생각을 못했다. 샌슨은 의자에 주저앉아 서 숨을 제대로 못쉬면서 웃었고 아프나이델은 테이블을 짚은 채 헉헉거 리며 웃었다. 레니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저, 그럼 후치가 달아난 거에요?" "크카카카카! 레, 레니양! 요건 오크의, 오크의 솜씨올시다. 하하하하 하!" 제레인트는 의자에 쓰러지 듯이 앉으며 말했다.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예에…?" 카알은 이마를 짚고 웃으며 말했다. "허, 허허, 프허허. 오크들 주제엔… 괜찮은 작전이군. 하지만 그… 떨 어지는 문재가 큰 일이로군. 헛허허." 네리아는 아직 미심쩍은 얼굴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샌슨에게 내밀었 다. "샌슨, 샌슨! 이거 후치 글씨 아니지?" "글씨 볼 필요가, 크힉! 어디 있냐. 그래, 어디, 어디 보자. 크히히히 히! 오, 맙소사. 이건 후치 글씨 아냐. 그래도 오크치곤, 치곤, 꽤나 훌 륭한 글씨… 푸하하하!" "후치가 아니에요? 앙! 난 모르겠어요. 설명 좀 해주세요." 레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주위의 웃음 소리가 더욱 커지게 만 들 뿐이었다. 레니는 볼이 부은 채 주위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카알이 간 신히 진정하면서 말했다. "오크들은, 우리로 하여금 후치가 달아났다고 생각하게 만드려는 겁니 다. 레니양. 그래서 밤중에 성문을 열어젖히게 하려는 거지요. 그리고 성문을 열면 곧장 뛰어들겠다는 것이 오크들의 생각일 겁니다. 괜찮은 작전이에요. 아니, 훌륭한 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다만, 다만…" 카알은 네리아가 들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불쌍한 문재가… 핫하하하!" 그 때까지도 웃지 못하고 있던 크레블린 대장도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 다. 아넨드씨의 경우엔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우와! 그거 교활한 방법이네? 오크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 을 정도야." "오크들에게 조금이라도 글쓰기 재능이 있었다면 위험했겠지요. 하하 하." "아니, 후치가 조금이라도 글쓰기 재능이 엉망이었다면 위험했겠지요. 이힛히히히!" 일행은 그렇게 오크의 계략에 대해 실컷 비웃었다. 일행이 더 웃을 힘 도 없을 만큼 웃어버리고난 다음, 카알은 곧 작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밤중에 성문을 열어줍시다." 크레블린 대장은 신나게 대답했다. "에! 알겠습니다. 오크들의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대장님께서도 이미 이해하셨을 테니 제가 더 드릴 말은 없 군요. 허허. 대장님께서 알아서 부대를 배치해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들도 대장님을 돕지요. 시켜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쾌활한 동작으로 일어나 경비대원들에게 달려갔다. "아이고… 맙소사." 내 감탄사에 엑셀핸드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네리아는 깔깔거렸고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뒷일은 간단했지. 크레블린 대장은 성문 주위의 모든 주민들을 소개시킨 다음 집집마다 병사들을 매복시켜두었 지. 아넨드씨와 카알씨의 지휘 하에 병사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것야." "이 친구도 꽤 활약했지. 하하하!" 엑셀핸드의 말에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별 말씀을. 그래. 나도 성문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대로에 약간 손을 봐두었지. 하지만 다른 분들이 더 고생을 했지.경비대원들은 저녁도 굶 어가면서 성내에 함정을 팠거든. 사수들도 모두 지붕이나 옥상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굉장한 잔칫판이었지. 그 다음은 간단해. 밤중에 누군가 성문을 두드리게 된… 하하하! 그 때 정말 대단했지." "대단했다고요?" "샌슨과 길시언이 성문 주위에 대기하고 있었거든. 밤도 꽤 깊었을 무 렵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는 거야. 샌슨은 웃음을 참으며 질문했지. '후치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성문 두드리는 소리만 더욱 커 졌어. 샌슨과 길시언은 성문의 가로대를 치워버리고는 재빨리 물러났 지." "그리고는 오크가 밀어닥친 거군요?" "그래. 맞았어. 오크들은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이 밀어닥쳤어. 녀석들 은 작전이 성공했다고 여겨서인지 무서운 기세로 들어오더군. 그런데 선 두에 있던 놈들은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한 거야. 성내에 아무도 없었거 든." "흐음." "그래. 무리 전체가 거의 다 들어오고나서야 오크들은 뭐가 잘못되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하지만 뒤에서 밀어부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멈추 지도 못했어. 그 때 선두의 오크들이 함정에 빠지기 시작한 거야. 그리 고 매복해있던 경비대원들은 오크들의 뒤를 치고 들어가 성문을 봉쇄해 버렸지. 오크들은 미친듯이 저항했지만 이미 기세가 꺽여있었어. 사방의 집 위에서는 불화살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경비대원들이 튀 어나오는 거야. 오크들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경비대 원들이 지리에도 훨씬 익숙했거든. 아넨드씨의 말마따나 자기 집 안마당 에서 싸우는 셈이었지. 오크들은 함정쪽으로 밀려나거나 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놀라지마. 엑셀핸드는 골목 하나를 맡아서는 오크 32 마리를 베어넘겼지." "33 마리야!" "엑셀핸드… 마지막 녀석은 길시언이 쓰러트린 오크 아니었습니까?" "녀석은 일어나려고 했다고!" "휴우. 하하, 예. 알겠습니다. 33 마리야. 후치." "흠. 자네의 그 굉장한 불꽃들은 왜 말하지 않는 건가, 아프나이델?" "예? 하하. 뭐 다른 분들의 활약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요. 안티고어 시장님은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할 테니 민가에 신경쓰지 말라고 명령 했거든. 주민들은 미리 귀중품들을 가지고 대피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경비대원들은 오크들을 집안으로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식으로도 꽤 많 이 쓰러트렸지. 그 불꽃과 함성,곳곳에서 나타나는 경비대원들의 창과 밤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드는 화살, 그리고 밟는 땅마다 꺼지는 함정 들 속에서 오크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긴 어려웠겠지." "아… 굉장했겠군요." "응. 날이 밝을 무렵엔 칸 아디움으로 돌진한 오크들 중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정도였지. 몇 마리들이 살아남아서 시내를 도망쳐다니고 있어서 카알과 나머지 사람들이 경비대원들과 함께 추격에 나섰어. 우리 들은 널 찾으러 밖에 나갔다가 구덩이에서 널 본 것이고." 아.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래서 밤하늘에 그토록 불길이 솟아올랐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럼 넥슨은… 벌써 묻었어요?" "응? 넥슨?"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왜 저러는 거야? "어, 내 옆에 있던 넥슨의 시체 말이에요." "뭐야? 시체라니?" 순간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뭐야? 지금 아프나이델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프나이델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널 발견했을 땐 넌 혼자 구덩이 안 에 있었어. 어떻게 거기까지 달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넌 굉장 한…" "뭐라고요? 그럴 리가! 넥슨이 없었다고요?" 난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어제 밤 오 크들이 야습을 위해 떠나간 다음 나와 넥슨이 오크들의 진지에서 함께 달아난 일, 중간 쯤에 구덩이를 발견하고 그 속으로 쓰러지듯이 들어간 일, 끝내 견디지 못한 넥슨이 죽어버린 일, 그리고 나 또한 죽음을 기다 리고 있었던 일. "넥슨이 죽은 것이 확실해?" "…모르겠어요. 난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요. 맥박을 확인하거나 호흡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창백한 얼굴과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보면 서, 그렇게 믿었어요. 그래서 하슬러의 환상…?" 다시 한 번 머리끝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일행들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머릿속으로 하슬러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느라 거의 그 얼굴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만일 내 생각과는 달리 넥슨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우리 일행들은 하 슬러와 쟈크가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슬러와 쟈크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크와 인간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소란스러운 틈 을 타고 성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구덩이에서 나와 넥슨을 발견하고는 넥슨을 데리고 갔을 수도 있다. 만일 넥슨이 이미 죽 었다면 그들이 넥슨을 데리고 갔을까? 생각하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도망자의 몸이고 시체 하나를 들고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면 칸 아디움의 사람들이 알아서 매장해줄 테니까. 그렇다면 넥슨은 살아있었던 것이구나! 가능성이 있다. 나도 살아있으니까 넥슨도 살아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는 사흘 동안 45 펜큐빗을 달려서 몸의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그렇지 만 시체를 들고 달아날 녀석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럴 땐 무슨 말을 해 야 되지? "다행이군…"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20. 샌슨은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내 등을 철썩 때렸다. "괜찮아. 귀 하나 없어졌지만 여전히 미남이야. 오, 유피넬이여. 오늘 도 거짓을 말한 저의 입을 용서해 주십시오… 낄낄낄." 샌슨은 그 따위 헛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렸다.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주 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면서 난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어깨에 숄 을 두르다가 풀죽은 내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괜찮아. 머리를 조금 더 길러서 덮으면 되겠네. 음… 여자면 이런 거 라도 줄 텐데. 둘러볼래?" 레니는 어깨에 두르던 숄을 흔들어보였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 그런데 보기 끔찍하지?" "음… 사실대로 말해서 좀 그렇긴 해.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더 경 력있고 실력있는 모험가처럼 보여. 매력 있어." "그래? 좋아. 그럼 반대쪽도 잘라내지, 뭐." 난 힘없이 웃어주었고 옆에서 걷던 네리아는 손을 뻗어 내 귀 - 가 있 던 부분을 쓰다듬었다. "소리는 잘 들리니?" "조금 이상하긴 해요. 이쪽으로는 소리가 잘 모이지 않나 봐요." "소리가 모여? 무슨 말이니?" "네리아. 귓바퀴가 왜 달려있는지 몰라요? 귓바퀴는 소리를 모아서 고 막으로 보내주기 위해 달려 있다고요." "어머나… 유식하네, 후치는." 날 치료하기 위해 힘을 많이 써서 졸도 비슷한 잠에 빠져있던 제레인트 는 눈을 비비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귀를 재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수도에 가게 되면 큰 신전에 들러보자구.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디바인 파워가 막강하다 고 들었어." "예. 참! 제레인트, 고마워요." "아…함. 괜찮아. 뭐. 솔직히 말하자면 네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걱정 이 좀 되었었지. 하지만 이렇게 일어나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구나. 하하 하." 카알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문 앞에 서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네드발군. 각오 단단히 하게." "각오라고요?" 카알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빙긋이 웃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 혔다. 문이 열리면서 햇살이 무자비하게 쏟아져들어와 눈이 부셨다. 그 리고 느닷없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네드발이다!" "괴물 초장이 만세!" "유피넬의 이름으로! 괴물 초장이 만세!"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데. 난 기막힌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짙푸르렀다. 가을의 하늘치고도 최고로 맑은 하늘이었다. 앙상 해진 나뭇가지들에서도 열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상쾌한 오 후였다. 바람마저도 오늘은 모래를 나르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시장님의 관사 앞 넓은 공터에는 지금 시민들이 빽빽하게 모여서 있었 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저 대단찮은 공터에 칸 아디움의 시민들이 모 조리 몰려들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칸 아디움의 시민들 전부가 모 여든 것 같은걸. 사람들은 모두 땟국물에 젖어있고 옷차림도 흐트러져 있었다. 아낙네들은 머리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채 어깨 위로 흐르게 내 버려두었고 사내들은 턱의 수염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모습들이다. 어제 낮과 밤 동안 오크들과 싸우고 그 뒷처리들을 하느라 고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 었다. 그들은 모두들 입이 터져라 외치고 노래 부르고 비명과 함성을 질 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만은 또렷하게 알 아들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이었다. "후치 네드발 만세! 만세!" "후치 네드발! 괴물 초장이 만세!" 난 기막힌 얼굴이 되어 카알을 돌아보았다.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 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이 광란스러운 소음 속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멋적은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흔들어주었고 그러자 시 민들은 우레같은 함성으로 대답했다. 시민들을 가로막고 있는 경비대원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 다. 수많은 소녀들과 처녀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오려 들었고, 그런 아가씨들에게 냉정하게 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저 젊은 경비대원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비대원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중이었고 경비대원들에게 밀려나면 서도 소녀들은 고함을 지르며 웃어대었다. "네드발씨잇! 후치 네드발씨! 사랑해요!" "이쪽 좀 봐줘요! 후치잇! 후치잇!" 에고에고…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다. 대륙 최고의 미녀 100명은 아니 지만 어쨌든 저 많은 처녀들이 내 옷깃이라도 만져보려고 애쓰는 장면이 니까 이대로 죽어도 좋겠군. 난 얼빠진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내들은 좀더 경의가 담긴 박수를 쳐보내면서 말했다. "용감하오! 소년! 소년의 기백이 우리를 살렸소!" "최대의 경의를 그대에게! 후치 네드발 만세!" 그리고… 그리고 내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다리뼈가 부러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 쏘아보았다. 미안해, 친구들. 어쩔 수 없잖아. 걱정말 라고. 내가 떠나면 저 소녀들에게 다시 도전해봐. 오늘만은 날 용서해주 고 말이야. 사실 그 사내아이들도 질시와 분노보다는 경외감쪽에 더 많 은 표정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인파를 뚫고 안티고어 시장과 크레블린 대장 등의 인원 이 나타났다. 안티고어 시장은 시민들이 열렬히 휘두르는 주먹에 턱을 한 방 맞아가면서 힘들게 걸어왔지만 만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는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섰고, 난 참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럴 땐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되는 것이 자? 누가 좀 이 상황을 설명해 줘! 안티고어 시장은 팔을 들어올렸고 그 러자 시민들의 소란이 사그라들었다. 굉장한 침묵 속에서 시민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시장은 땀을 닦아내더 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 네드발공." "아? 예? 아, 예. 안티고어 시장님." 정말 싫다… 으. 저렇게입을 꽉 다물고 있는 시민들의 침묵 사이로 이 렇게 얼빠진 대답을 해야 되다니. 시장님의 미소가 더욱 커졌지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의 이 사랑스러운 도시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우타 크와 챠넬의 일이 우리 앞에 현실로 되살아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 오!" 뭐라고? 난 당황한 얼굴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시장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러나 우타크와 챠넬의 저 믿어지지 않는 위업도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는 후치 네드발공의 일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일일 것이니. 우타크와 챠넬은 위대한 전사들이었건만 적진에 뛰어들 때 그들은 서로에게서 위 안을 얻었으리라. 하지만 용맹한 후치 네드발공은 그 어린 나이에도 불 구하고 단신으로 1,000명의 적들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그들을 기만 하였으니, 이 놀라운 업적 앞에서는 여덟 별에게 바쳐진 모든 헌사를 합 쳐도 오히려 모자라다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여러분!" "으와아아아!" 시민들은 함성으로써 안티고어 시장의 연설에 맞장구쳤고 난 현실에 작 별 인사를 보내려드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 이야? 난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그저 빙긋 이 웃으면서 내 눈길을 회피했다. "전사들의 전설을 믿지 못하는 의혹 많은 자라 하더라도 오늘의 이 태 양 아래엔 전설들과 노래속의 업적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보라! 우리 앞 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1,000 명의 적들을 단신으로 격퇴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이는 가장 전설 같은 전설보다 더욱 전설 같음이나,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현실이니! 이 어찌 놀라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 최 고의 경의 속에 그를 있게 하라, 칸 아디움의 수호자 후치 네드발 만 세!" "으와아아아! 후치 네드발 만세! 칸 아디움의 수호자 만세!" 아이고, 맙소사… 아무래도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책임있는 대답을 해야 될 사람들이 꽤 있을걸? 어디 두고 봅시다, 카알. 시민들은 이제 나에게 연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후치 네드발공! 한 마디 하시오!" "후치 네드발공! 칸 아디움의 수호자!" 시장은 웃으면서 날 조금 앞으로 나오도록 밀어내었다. 난 거의 비틀거 릴 뻔하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잡고는 시민들 앞에 섰다. 와! 떨리는 위 치다. 난 저 엄청난 환호의 물결 앞에 단신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팔을 휘두르고 박수를 치고… 어쨌든 동 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찬양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순박한 사람 들.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갔다면 세 걸음도 걷기 전에 잊어버릴 나 같은 꼬마에게 지금 그들은 열성적인 환호를 보내고 있다. 난 말하다가 웃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저를 칸 아디움의 수호자라고 불렀지만, 그 명예 로운 호칭은 엉뚱한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잠시 당황을 의미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난 목소리 를 좀 더 높여서 외쳤다. "이 도시를 정녕 사랑하고, 오늘 사랑했던 것처럼 내일도 사랑하며 이 도시를 일구어나갈 여러분들이야 말로 칸 아디움의 수호자입니다! 여러 분들이 지켜낸 도시이며, 여러분들의 자랑인 이 도시가 앞으로도 영원히 번영하길 기원합니다! 칸 아디움 만세!" 그러자 사람들은 만족하면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우와아아! 칸 아디움 만세!" "후치 네드발 만세!" "괴물 초장이 만세!" "후치 네드발씨-! 사랑해요!" 그만해, 관두자고. 하지만 속마음과는 상관 없이 난 영원히 게속될 것 같은 저 환호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시민들은 거의 폭동을 일으킬만큼 흥분해서는 우리 일행을 어깨에 태우고는 칸 아 디움의 시내를 돌았다. "어떻게 된 거죠?" 시장님이 우정의 선물로서 내어준 마차 속에서 난 시트에 고꾸라진 채 말했다. 칸 아디움의 시민들의 어깨를 타고 시내를 돌았던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지만 굉장히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 광란스러운 행진이 끝나자마 자 우리들은 안티고어 시장님의 작별과 칸 아디움의 시민들의 열렬한 환 호를 받으며 화려하게도 칸 아디움을 떠나올 수 있게 되었다.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도 썩 겸연쩍은 일이었지만 안티고어 시장의 작별에는 놀랍 게도 6두 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에. 6두 마차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정말 말 6 마리가 매어지는 마차는 처음 보는군. 그렇지만 칸 아 디움의 시민들도 우리 일행들이 6두 마차에 5 마리의 말과 1 마리의 황 소를 묶는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랐을 것이다. 어쨌든 경비대원들은 마차 에 산더미 같은 보급품을 실어놓았고 우리들은 멋진 모습으로 칸 아디움 의 성문을 나설 수 있었다.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카알은 책을 내려놓으면서말했다. "이야기가 간단해서… 시민들에겐 그게 정말 기분 좋은 이야기 아닌가? 병사들에게 설명하기도 간단했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덴산의 거인 이야 기를 따와서 자네가 오크들에게 일부러 잡힌 다음 그들을 함정으로 끌어 들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기로 하고는 서로 입을 맞추었지. 자네의 명성이야 이미 유명하니까 이야기를 꾸미기도 쉽더군." "맙소사. 아니, 왜지요?" 카알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일이 필요했다네. 네드발군."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일이오?" "그렇다네. 오크들은 물리쳤지만 사실 저 도시는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네. 뭐, 오크들이 사용하던 무기나 갑옷 같은 것은 충분한 전리품이 라기에는 좀 모자라지. 사람들의 머리가 차가워지면 그들은 전사한 경비 대원들이나 오크들이 끼친 피해를 생각하며 슬퍼하겠지. 그래서 그들에 게 뭔가 크게 즐거워하고 환호를 지를 수 있는 일이 필요했네.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니 더욱 좋은 일이고." "음… 그래도 거짓말이잖아요." 당신은 국왕이 당신을 핸드레이크라도 되는 양 꾸미려고 했을 때 크게 화를 냈잖아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멈추었다. 하지만 카 알은 내 목구멍에 있는 말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 나로서도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네. 하지만 안티고어 시장 님이 그것을 요구했고, 그 뜻에 삿된 구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만 허락했지. 저 시민들은 적어도 내일이나 모레까지는 크게 즐거워할 수 있을 테고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시장님의 위무 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겠지." "흐음." 그 때 갑자기 내 옆에 앉아있던 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네리아 언니!"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에서 네리아의 머리가 거꾸로 나타나 있었 다. 네리아는 밀어닥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말했다. "기분 좋은 일이잖아, 후치야. 그리고 덕분에 이런 마차도 하나 얻었 고." "조, 조심해요! 지금 달리는 마차라고요!" "까르르… 괜찮아." 네리아는 다시 몸을 들어올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이구, 수명 짧아 졌겠다. 지붕 위에서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생각은 어때, 운차이? 너도 마차 여행이 편하지 않아? 고삐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등자에 신경쓸 필요가 있나?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을 즐기기만 하면되고. 여행이란 이런 거지, 뭐." 그러자 곧 운차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샌슨! 귀찮게 굴면 지붕에서 던져버릴 거라고 전해줘!"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샌슨은 운차이의 말을 전해주는 대신 낄낄거 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대답은 샌슨의 옆에 앉아있던 길시언이 대신 하는 모양이었다. "운차이는 조용한 마차 여행을 원한답니다. 네리 아." 그 대화를 들으며 마차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미소를 지 었다. 카알 옆에 앉아 있던 엑셀핸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난 정말 마음에 드는군." 엑셀핸드는 시트 위에 두 다리를 다 올려놓고는 기분좋게 말했다. 아프 나이델은 웃으면서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저도 마음에 듭니다, 엑셀핸드. 말에 타는 것이 힘든 것은 드워프나 마법사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껄껄껄!" 마차는 신나게 굴러갔지만 요동은 거의 없었다. 꽤나 훌륭한 마차인가 보네. 지금 5 마리의 말과 1 마리의 황소가 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흐 음. 썬더라이더는 그렇게 끼워놔도 말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 다. 굉장한 황소야. 아, 원래 말이지. 어쨌든 6 마리나 되는 말이 끌고 있는 것이라 마차는 무서운 속도로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지평선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흰 구름들이 게으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졸음을 불 러왔다. 난 시트에 몸을 파묻으면서 말을 꺼내었다. "그럼 말이지요. 이제부터 마차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재 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지요." "재미있는 이야기? 그게 뭔데? 난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써." 반쯤 졸고 있던 제레인트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난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덟 종족과 여덟 별에 대한 이야기." 마차 안에 있던 일행은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난 특히 엑셀핸드 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폈지만 엑셀핸드는 그저 심드렁한 의문을 담은 표 정이었을 뿐이었다. 엑셀핸드가 표정을 저렇게 잘 관리할 리야 없으니 아무래도 그 역시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엑셀핸드는 300년 전 에도 살았었잖아? 이상하네.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어서 해보게. 네드발군."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21. 난 되도록 말 한 마디도 빠트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말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은 숨쉴 사이없이 바뀌었다. 아프나 이델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해 있었고 제레인트는 숨을 헐떡거렸 다. 엑셀핸드는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투덜거렸고 카알 은 자기 얼굴에 무엇무엇이 달려있는지 잊어먹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턱과 관자놀이, 코 등을 만져대었다. 어느새 이야기가 끝났다. 창밖을 바라보니 지평선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구름의 모양은 꽤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난 일행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본 다음 이야기를 마쳤다. "이 정도면 넥슨이 한 말은 전부 다했어요." 일행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카알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 간을 문지르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라고…? 그것 참. 그리고 그게 왜 있는지도 모 른다고?" "예. 적어도 넥슨의 말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 존재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는데요." "그래? 흐음. 이상한 일이군. 그렇다면 그 별들은 유피넬과헬카네스의 손길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말인데. 만일 그 별들이 유피넬과 헬 카네스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지." "왜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없는데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제레인트가 대신했다. "어, 그거야 만일 그 별들이 실재하고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힘으로 만 들어진 사물과 같은 것이라면 그 존재 이유를 설명 못할 까닭이 없잖아. 물론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럴 경우 그 별들 역시 다른 사 물들과 마찬가지이므로 분명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거든? 따라서 굳이 우리는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식의 말을 할 필요는 없 는 것이 된다고." 제레인트의 말을 듣다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세상에 이유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모두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레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 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말했다. "그래! 정확한 말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힘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 들 중엔 이유없이 태어나는 것이 없지. 따라서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른다 는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넥슨이 해 준 말이에요." "그래? 음. 재가 프리스트도 프리스트니까." 카알은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짓다가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 저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엑셀핸드는 잔뜩 노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참. 기막힌 말이군!" "기막히다고요?" "그럼! 그렇다면 뭐야? 드래곤 로드는 우리 드워프들을 얼마든지 멸망 시킬 수도 있었지만, 다만 세상의 균형을 위해 우리를 내버려뒀다, 뭐 이런 말이야?"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난 저런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네! 물론 우리 드워프들이 전승지식이 나 학식에 대해 뭐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저런 이야 기를 태어나서 처음 듣는구만." "그러시다고요… 음. 네드발군? 당시 넥슨의 상태는 어떤 것처럼 보이 던가?" "그의 상태요? 저랑 마찬가지였지요. 아, 아니 저보다 더 지쳤을 거에 요. 무슨 수로 그렇게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작자들은 정말 사흘 동안 우리 뒤를 추적해왔나봐요." "그래? 음. 그럼 치밀한 거짓말을 구사할 수는 없는 상태라는 말인가?" "그렇게 물어오신다면, 그래요. 그리고 내 생각인데요, 넥슨처럼 기억 이 불분명한 사람이 과연 능숙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잘못된 기억을 가질 수는 있겠지. 책에서도 그렇지만, 중간 부 분이 빠져버리면 전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는 일이 많다네." 책이라는 말에 엑셀핸드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잘못된 기억에서 나온 이야기가 그렇게 명료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긴 어렵겠지요. 음. 네드발군. 그러니까 그 여 덟 별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써 넥슨이 말한 것은, 첫째,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둘째, 드래곤 로드의 모든 종족 지배. 맞는가?" "그렇지요." "여덟 별이 누구누구더라…" "제로딘, 캄드리, 일스, 라인버그, 우타크, 챠넬, 멜다로, 허즐릿입니 다." 카알이 말하자마자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카알은 빙긋 웃었다. "예. 여덟 별이 그 여덟 명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란 말인가." "예. 그 사람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다고 해도 다른 이야기를 많이 들 을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그 사람이 말한 것은 그게 전부에요. 아, 핸 드레이크가 실망한 것으로 보아 일곱 개의별은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말 도 있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핸드레이크가 실망했다라… 그가 실망했다? 무엇에 대해 실망했을까?" "핸드레이크가 실망할 일이 있어요? 그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도와 드래 곤 로드를 물리쳤어요. 그리고 바이서스를 건국했고. 도대체 그만한 일 을 이루어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실망할 수 있지요?" 아프나이델과 제레인트는 동시에 그럴듯한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엑셀핸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아버렸고 카알은 조 용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일이없어져서 레니와 함께 스무고개 놀이나 말잇기 놀이라도 할까 생각할 무렵, 카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첫번째 증거 말인데…"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난 피식 웃어버리고는 카알 을 바라보았다. "첫번째? 첫번째라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말씀인가요?" "응. 그래. 그 비유는, 언뜻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상한 말 이지." "어째서 이상한 말인데요?" "왜냐하면 그 여덟 별이 제로딘, 우타크, 캄드리, 라인버그, 챠넬… 또 일스와 허즐릿, 멜다로의 여덟 명이긴 하지만, 사실은 기사들은 모두 아 홉 명이거든." 제레인트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예? 아홉 명이라니… 핸드레이크를 포함해서 말입니까?" "아니지요. 핸드레이크는 기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간과하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예?"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어라? 숨겨진 기사가 하나 있었단 말인가? 카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도 기사였지 않습니까? 그 스스로도 기사 중의 기사라고 자부하셨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아프나이델은 얼빠진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고 제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이고 맙소사. 그렇군! 누가 뭐라고 해도 루트에리노 대왕 자 신도 기사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넥슨의 말마따나 루트에리노 대 왕은 기사도 맹신자인데 말이야. 카알은 침착하게 말했다. "따라서 그 별이라는 것이 기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엄밀하게 말해 서 아홉 별이라고 불러야 정확한 것이 됩니다.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은 항상 다른 기사들을 친구로 대했지 상명하복의 주종관계로 인식하기를 꺼려했으니까… 그래야 더 그 분의 성격에 맞는 일이 됩니다." "맙소사! 그렇군요. 아홉 별이라고 불러야 되는군요." 그 때 레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지만 보통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요. 레니양. 그래서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은 것 입니다. 하지만 네드발군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 여덟 별이라는 명 칭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겨지는군요. 어쩌면… 그 여덟 별에서 루트에 리노 대왕이 빠져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식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인지 도 모르지요.아홉 별이라고 부르는 대신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 라는 식으로." "음. 그럴 듯합니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후치의 말이, 아니 넥슨 의 말이 맞다면… 이렇게 된 것이군요? 루트에리노 대왕과 여덟 기사들 은 원래 자신들 아홉 명을 가리켜서 여덟 별의 추구자, 에잇스타시커라 고 불렀는데, 그 명칭이 와전되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고 불 리게 된 것이군요?" 제레인트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은 빙그레 웃었다. "예. 하지만 이건 억지로 끼워맞춘 말이 될지도 모르지요. 넥슨의 말 이외엔 아무 증거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진실성이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대왕의 성격을 생각 해보자면…" 아프나이델 역시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그리고 두번째 증거. 드래곤 로드의 전종족 지배… 글쎄. 이건 굳이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하는 신비의 보석이 없어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 은데. 드래곤 로드의 강력함이야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엑셀핸드는 꾹꾹 눌러참았다가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보게! 카알. 지금 자네는 그 웃기는 이야길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 같구만?" 카알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오.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 위해 고찰해보고 있는 중입니 다." 엑셀핸드는 굵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카알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 그 놈의 혀 잘도 돌아가는군. 하지만 그거 정말 웃기지도 않는단 말일세!" "웃기기로 말한다면야…" 카알은 갑자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카알의 시 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카알은 혼잣말을 하듯이 가락을 붙 여서 말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구름이 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뭐라고?" 엑셀핸드는 콧잔등을 한 방 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당황한 얼굴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과연 또다른 구름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 알은 변함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흙이 있지요? 왜 저녁이면 가라앉고 말 태양이 저렇게 힘겹게 솟아오르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많은 나비와 그 많은 꽃 들은 어쩌자고 세상을 저토록 어지럽혔을까요? 가을이 다가오면 모두 시 들고 사라져버릴것들이? 어쩌자고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죽어버릴 운명의 자손을 힘겹게 키워내는 것일까요?" "여, 여보게?" "별은 또 왜 그렇게 많다는 말입니까? 땅 아래 보석은 왜그리도 많지 요? 새들은, 저녁에 둥지로 찾아들 새들은 왜 아침이면 깃털에 묻은 이 슬을 흩뿌리며 날아오르는 것이지요? 양치기는 피리를 불어 모아들일 양 들을 왜 풀어놓는 것이지요?" 엑셀핸드는 입을 딱 벌린 채 카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알은 변함없 이 창턱에 팔을 괸 채 약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는 다시 바드처럼 웅얼거렸다. "소멸의 축복을 받지 못한 신들은 우리를 경배할까요?" "예?" 제레인트의 숨막힌 반문이었다. 그러나 카알은 그것도 무시해버렸다. "웃기기로 따진다면 이 만물, 이 세계보다 더 우스운 것이 어디에 있을 까요." 마차 안에는 카알 이외에 다섯 명이나 되는 일행들이 있었지만 그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카알은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렇게 밖을 쳐다보았다. 마차바퀴 구르는 소리, 그리고 지붕 위에서 운 차이를 괴롭히고 있는 네리아의 목소리만이 가늘게 들려왔다. 카알은 갑자기고개를 돌리더니 히죽 웃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보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난 스스로 놀랄만큼 차분하게 대답했다. 카알은 여전히 그, 약간은 바 보처럼 보이는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렇지. 네드발군. 범부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현자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카알은 기분좋게 웃더니 시트 속으로 몸을 파묻으며 팔짱을 끼었다. "넥슨의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카알은 그 말을 작별 인사로 남기면서 자신의 사색 속으로 침잠해버렸 다. 좌중의 한 사람이 자기 속으로 몰입해버리니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제각기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난 지루한 심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베어져나간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 했다. 음. 꺼끌꺼끌한 느낌이 참 괴상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군. 그 때 레니가 내 팔꿈치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후치야. 그게 무슨 말이니?" "응?" "바보도, 범부도, 또 현자도 모두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고?" "하하하…" 갑자기 아그쉬의 그 멍청한 인용이 생각나서난 웃어버렸다. 그러자 레 니는 눈살을 찌푸렸고 난 즉각 사과했다.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서 웃었어. 그 이야기는… 말 그대로지." "말 그대로라고?" "그래." "뭐가 그래?" "그냥 그래." 레니는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말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난 학교 같은 것 다닐 여유가 안되었단 말 이야. 그러니까…" "나도 학교는 구경도 못해보고 자라난 사람이야. 그냥 생각해봐, 레니. 이건 별 것 없는 말장난이야." 레니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난 말장난은 같이 웃을 수 있을 때만 좋아해." "하하. 그러니? 음. 앞을 보면서도 뒤에 따라오지도 않는 추적자를, 혹 은 자신의 과거, 어제의 실수 따위를 생각하면서 진구렁탕에 발을 빠트 리는 사람이 있다면 넌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를 거지?" "바보…지?" "그래. 바보는 마치 곰곰히 생각하기만 하면 지나간 실수가 바로잡아질 것처럼 믿지.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완전히 고정된 것인데 말 이야." "그럼 범부는?" "범부도 어떤 의미에선 바보와 마찬가지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실수를 생각해서 앞으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범부, 보통사람일 뿐 이지. 하지만 범부라고 해봐야 결국은 그 사람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존 재하는 것이야. 바보든 범부든 과거라는 시간의 산물이지. 바보는 그것 에 매달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서 배운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의 저 감춰진 시선을 느끼는 것은 퍽 유쾌한 일 인걸? 두 사람은 모두 안듣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고 두 사람 모두 능숙한 거짓말쟁이나 사깃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자신의 행동을 잘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레니는 한참 고민 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그 풀려버린 표정 그대로 말했다. "그럼… 현자는?" "현자는 과거의 시간과 상관없는 존재가 현자야. 그는 현명하므로 과거 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미래를 깨달을 수 있지. 사실 이런 사람은 드 물지. 핸드레이크나 그렇게 불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역사 책을 읽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왜냐하면… 그들 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생각하니까. 여기서는 사실 '앞' 이라는 말과 '뒤' 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거야. 음, 그러니까 레니, 넌 지금 나의 앞을 보고 있지?" "그렇지."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내 앞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볼 수 있다면 넌 현자인 셈이지." "아… 그래?" "그래." 레니는 입술을 잡아당기면서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감고 있는 카알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카알의 입 술 가장자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는 폭소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파묻고는 꽉 틀어쥐었다. 우헤헤헤! 지붕 위에서는 나이크호크가 간첩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가운데, 사색에 잠긴 여섯 명을 태우고 두 명의 전사가 모는 마차는 신나게 신나게 달려 갔다. 해가 지는 방향, 저녁의 고향으로. 그러나 가장 무서운 드래곤의 아침을 향해.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 …저 용맹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춘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마저도 때로는 그의 어린 종자 후치 네드발의 도움을 받았다는 믿을만한 기록들이 있 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신빙성 없는 자료로 생각 하곤 하는데, 한낱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던 후치 네드발이 세상에 그 이름이라도 전하게 된 것은 오로지 위대한 샌슨 퍼시발이 그를 가엾게 여겨 종자로서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 서 수많은 옛노래와 가인들의 하프에서 울려퍼졌던 진리를 다시 한 번 밝힌다. 가장 현명한 자도 때로는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배울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현명함을 더 욱 빛나게 할지언정 그 광휘를 줄어들게 하지는 않는 법이 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12 권. P. 15 (770년 돌로메네 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맹렬히 일어나는 먼지 구름의 모습이 보였 다. 이 광막한 황야에서 먼지 구름은 1,000 큐빗 거리까지 계속되고 있었 다. 저 뒷쪽의 먼지구름은 하늘로 솟구쳐오르면서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우리 바로 뒤에서 일어나는 짙은 먼지구름은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흡사 먼지구름이 우리를 추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랴! 하, 하! 하! 하! 하아아!" "달려라! 이스트 그레이드를 단숨에 돌파하라!"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선두에서는 다부진 황소가 일행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렇다. 황소다. 그리고 그 위에는 건장한 전사가 앉아서 목청껏 고함을 질러대며 기세를 복돋우고 있었다. 길시언과 썬더라이더다. 썬더라이더는 쭉쭉 뻗어나가 는 발로 대지를 힘차게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뒷쪽으로는 날씬한 여도적, 그리고 여행 초보자의 모든 특징 을 다 보여주고 있는 소녀가 거대한 흑마에 탄 채 달려가고 있었다. 네 리아와 레니, 그리고 에보니 나이트호크다. 길다란 트라이던트를 안장 옆으로 느긋하게 빗겨들고등 뒤에 소녀를 태운 채 붉은 머리를 나풀거 리며 달려가는 네리아의 모습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 같았다. 그녀의 옆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다부진 전사와, 그에 비해 볼 때 가냘 파 보이는 프리스트를 태운 거대한 말이 다리가 보이지 않도록 달려가고 있었다. 샌슨과 제레인트, 그리고 슈팅스타. 샌슨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 러대고 있었고 그 고함 소리를 듣는 말들은 마왕의 소환을 받은 악마들 처럼 질풍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로브를 걸치고 약간 피로해 보이지만 그것이 원숙 미를 더해주는 얼굴의 마법사가, 원숙함이 넘치는 얼굴이지만 파랗게 질 려있어서 그 원숙미를 대폭 삭감시키고 있는 드워프를 등 뒤에 태운 채 쭉쭉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 그리고 세레니얼… 이 란다. 아프나이델이 수도에서 타고 온 말인데, 거 참. 이름이 왜 항상 저렇지? 그들의 오른쪽으로는 꿰뚫을 듯이 날카로운 눈의 전사가 입을 꾹 다물 어 강직한 성격을 마구 노출시키면서 고삐를 놀리고 있었다. 운차이와 앰뷸런트 제일이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꿰뚫릴 듯이 부드러운 눈의 독서 가가 입을 꾹 다물어 먼지를 마시지 않기위해 애쓰면서 달리고 있었다. 카알과 트레일이다. 그리고 일행의 후미를 지키는 남자.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막아낸 자' 라고 할까? 어쨌든 느린 풍문의 속도 때문에 아직 그 위명이 대륙에 퍼 지지 않았을 뿐 영웅의 모든 자질을 갖춘 불세출의 전사가, 그 사자와도 같이 들끓는 피를 굴복시켜 양처럼 순하게 만들어버린 고귀한 레이디의 이름을 딴 용맹한 말에 탄 채 달려가고 있었다! 아! 젠장! 요 따위로 말해봐도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아! 제일 뒤쪽에서 달리니까 일행들이 만들어내는 먼지는 모조리 내 입으로 들어온단 말이 다! 일행의 말들이 갈겨대는 똥도 모조리 내 앞으로 떨어지고!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지평선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우리 뒷쪽으로 아 스라하게 보이던 붉은산맥도 이제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한없이 넓은 이 스트 그레이드의 평원을 쉴새없이 달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먼지 구름은 하나의 산만큼이나 거대했지만 이 넓은 평원에 비해보면 한 줌 티끌처럼 보인다. "하아, 하아, 하앗!" "에, 에, 에하! 타!" 머리 위로 부드러운 구름들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도 한없이 넓어 구름은 길을 잃고 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람과 우리 외 에 모든 것들이 정지해 있는 듯한 평원은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선두의 길잡이가 외치는 쾌활하고도 힘찬 응원에 고무되어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갔다. 기수들은 물론이거니와 말들도 분명히 지치지 못할 것이다. 자존심 문 제니까. 샌슨의 등 뒤에서 제레인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황소의 뒤를 따라가지도 못한다면, 그게 말이냐아!" "이힝! 힝힝힝히!" 아프나이델은 킥킥거리고 있었다. 그는 주의깊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 들이 지치는 기색이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로브 자락 속으 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 이상하게 생긴 고약 같은 것을 허공으로 던지며 캐스트를 하곤 했다. "스트렝스(Strength)!" 그리고 그 때마다 말들은 새로운 힘을 얻어 고고성을 터뜨리듯 포효했 다. 그리고는 바람마저 따돌려버릴 속도로 달려나가곤 했다. 아, 물론 그렇게 말들이 급가속할 때마다 엑셀핸드는 구슬픈 비명을 질러대었다. "오우, 카리스 누멘! 신실한 드워프를 돌보소서!" 풀썩. 말발굽이 땅을 밟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난다. 거친 황야 가운데 서있는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막막한 대지 위에 한 점 얼룩처럼 자리잡은 도시였다. 주위는 온통 황야였고 그 황야에서 불 어오는 바람은 엄청난 양의 흙먼지를 아낌없이 도시에 퍼부어대고 있었 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그 회색의 성벽은 희미하게 보였고 게다가 저녁무렵이라 햇빛의 양도 부족했다. 춤추는 먼지들과 붉은 햇빛 때문에 성벽 전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 만들어진 성 같아. 콜록!" 네리아의 잔뜩 쉰 목소리.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땀에 절어붙은 먼지가 턱 아래를근질거리게 만들었다. 힘없이 손을 들어 머리를 긁어 보았지만 손가락에는 머릿카락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걸렸다. 대장장이의 모루만큼이나 질기고 강인한 의지로, 그리고 음유시인들의 하프현보다 더 곧은 직진을 게속하여, 우리는 그 날 해를 추적하며 12 시간 동안 장장 24 펜큐빗의 거리를 주파했다. 그리고 지금 석양 무렵, 우리는 해를 따라 달려와 석양이 마지막으로 스치는 도시에 이르른 것이 다. "쿨럭쿨럭, 뭐하는 도시지?" 카알 역시 잔뜩 쉰 목소리였다. 샌슨은 배낭을 꺼내더니 먼저 그 위에 쌓인 먼지를 거칠게 털어내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자 그 옆에 있던 길시언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날 묻어버릴 작정이오? 지도를 꺼낼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여기가 어딥니까?" "칸 아디옴입니다. 이스트 그레이드의 중앙 도시." "흐음. 이런 곳에 어떻게 도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군요." "교역도시지요. 이스트 그레이드의 여행자들이 들리면서 만들어진 도시 입니다." "아아. 물이라도 나오나 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색의 여행자들이 되어 칸 아디움으로 들어섰다. 성문에 접근하자 성문 옆에 놓여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지나가던 통행 인을 감시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은 모두 포챠드를 들고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마도 햇빛과 먼지를 막기 위한 것 인가 보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중 한 병사가 일어나더니 말했다. "칸 아디움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행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우리들을 다시 관찰했다. 여행자치고는 구성이 정 말 희한하기 짝이 없으니까. 짐수레나 짐말 같은 것이 없으니 상인은 아 니고, 모두들 무장을 하고 있는데다가 지휘고하를 구분할 수 없도록 모 두 말에 타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황소에 타고 있는데다가, 드워프도 끼어있었고 마법사와 성직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 병사는 최선을 다해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모험가분들인가 보군요."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모험가는 들어가면 안됩니까?" 길시언의 밝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병사는 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렇게 많은 무장 인원이 도시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 니다." 그러자 일행 모두가 동시에 떠들기 시작했다. 허헛, 참. 모두들 쓰러져 죽을 듯한 얼굴이더니 잘도 떠드네. 네리아가 얼굴이 시뻘개져서 뭐라고 떠들긴 했는데 엑셀핸드의 고함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프 나이델은 세상의 종말 신호를 들은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카알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거의 떨어지는 것과 유사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려서서 발이 땅에 닿은 순간 제레인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 게 가만히 선 채 몸의 고통을 다스리더니 잠시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 다. "죽겠군…" 제레인트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로드를 지팡이처럼 짚고는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병사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 면 한 70살 먹은 노인이라고 오해되기에 적당한 걸음걸이였다. 그 동안 병사는 참으로 안스럽다는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처절한 표정으로 병사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신의 미력한 지팡이에게… 제발 하룻밤 쉴 자리와 목을 축일 한 모금 의 물을 빼앗지 말아주십시오." 병사는 이미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제레인트가 말하 지 않았어도 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과허락을 내주었을 것이다. "죽었어요?" "죽는다는 것이 불멸의 영혼만이 움직일 뿐 그 육신에 대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난 현재 죽어있어." 제레인트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관 주인장에게 장의사에게 연락하라고 말했다. 제레인트는 드러누운 채 무서운 신음소리를 뱉어내 었다. 지금 제레인트는 여행자들의 흙 묻은 발이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홀 바닥에 드러누워있다. 완전히 끝장난 술주정뱅이라도 이렇게 볼품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성스러운 프리스트의 옷을 입고 있는 제레인트가 그러고 있음에야. 하지만 제레인트는 땀 때문에 그 머릿결이 밧줄만큼이나 굵게 엉겨 있는데다가 몸을 좀 움직이기만 하 면 곧 자욱한 먼지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래서 여관 주인장도 프리 스트의 허물을 탓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관 주인장은 융통성까지 제법 갖추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 러져 누워있는 제레인트의 몸을 보자 가볍게 건너 뛰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손에 든 맥주잔에서 한 방울의 맥주도 흘리지 않는 묘 기를 선보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맥주잔을 돌리면서 말했다.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오신 모양이군요."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쓰러져 있던 아프나이델은 여관 주인장의 말에 힘들게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가락 2개를 펼쳤다가 다시 4개를 펼쳤다. 여관 주인장은 큼직하고도 붉은 자신의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2 펜큐빗 4000 큐빗?"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 위로 들어올린 손가락만 좌우로 까딱거렸다. "설마 24 펜큐빗?" 그러자 아프나이델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까딱거렸고 주인장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굉장한 일을 한 말들이니, 잘 좀 부탁합니다." "염려마시오. 말들은 임펠리아에 있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그 말에 우리 일행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여관 주인장은 설마 길시언 이 왕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여관 주인장은 우리의 미소를 제멋대 로 해석하고는 빙긋 웃었다. "엑셀핸드, 일어나요. 맥주 왔어요." 엑셀핸드는 급조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죽은 드워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노커라서 그런지 테페리의 프리스트처럼 바닥에 마구 드 러눕지는 않을 정도의 분별이 있는 엑셀핸드는 의자 두 개를 딱 붙여서 자신의 키에 들어맞는 침대를 만들어 누워있었던 것이다. 엑셀핸드는 참으로 드워프답지 않은 대답을 했다. "필요없어." 여관 주인장은 자신의 홀에 누워있는 드워프가 혹시 드워프처럼 생긴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하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긴, 드워 프가 맥주를 거절하다니. 문가에 서서 몸을 털고 있던 샌슨은 여관의 정문에 먼지 구름을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우리들 모두 이스트 그레이드의 먼지란 먼지는 모조리 몸에 덮어쓰다시피 한 상태였다. 샌슨에게 잔을 건네고나서 난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왔다. "허어억!" 하아! 카! 하루 종일 달려서 말라붙다시피 한 목구멍으로 맥주가 넘어 가니 목이 찢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술기운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머리 가 빙빙 돌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호롱불이 세 개로 보일 정도였 다. 카알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졸면서 맥주를 마시느라 옷에 상당량의 맥주를 흘려버렸다. 운차이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맥주잔을 든 채 엑셀핸드의 곁으로 걸어갔다. "이봐, 드워프. 담배 좀 내놔." 엑셀핸드는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뜨면서 운차이를 노려보았다. "이 놈이! 말버릇 한 번 고약타!" 그러나 운차이는 묵묵히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을 뿐이다. "주면 귀찮게 하지 않겠어." 그러자 엑셀핸드는 신음을 흘리고는 누운 채로 품 속에서 담배쌈지를 꺼내어 운차이에게 건네었다. 운차이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고맙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파이프는?" "크아아아악!" 엑셀핸드는 파이프를 꺼내어 운차이의 얼굴을 향해 던졌으나 운차이는 그것을 입으로 척 받아내었다. 여관 주인장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운차 이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발을 올리고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호롱불로 불을 붙이고나서 운차이 는 팔을 들어 머리를 받치며 느긋하게 연기를 뿜어올리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침착하게 운차이에게 말했다. "담배에 대한 보답으로 엑셀핸드씨를 침실로 좀 안내하시지?" 운차이는 물끄러미 길시언을 쏘아보더니 곧 가벼운 동작으로 벌떡 일어 섰다. 그는 의자 위에 있던 엑셀핸드를 마치 짐짝 다루듯이 들어올려 어 깨에 들어매었고 반항할 기운이 없는 엑셀핸드는 욕설만 줄기차게 해댈 뿐 잠자코 운차이에게 들려갔다. 둘이 침실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뭘 집어던지는 둔한 소리가 나더니 엑셀핸드의 비명소리도 좀 들려왔 다. 그리고 운차이는 손을 털면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파이프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로 바라 보자 운차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침대에 갖다놨으니." "…수고했소." 카알은 그렇게 말하고는 운차이의 옆에 나란히 엎어져버렸다. 그는 테 이블 위에 엎드려 누운 채 웅얼거렸다. "나를 침실로 안내해줄 필요는 없소. …조금 있다가 내 발로… 걸어갈 테니… 그르렁!" 길시언은 애처로운 얼굴로 카알을 내려다보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후우. 피곤한 하루였소. 그래도 잘들 달렸습니다. 이제 수도는 하루 반 정도의 거리입니다." 샌슨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달린 것과 똑같이 달렸을 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맙소사. 내일도 오늘처럼 달린다니! 난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뜨여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샌슨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뿐이다. "내일도 굉장하겠군요." 굉장? 굉장이라고 했나? 난 당장 밖으로 달려나가 말들의 편자를 모두 뽑아놓고 싶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잠깐, 편자라고? 그렇지! "어, 우리야 괜찮지만 말들의 편자가 괜찮을까요?" 그러자 샌슨은 기특하다는듯이 날 바라보았다. "흠.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치. 내가 다 살펴보고 왔어. 괜찮더군." 아아아! 망할! 말들이 모두 감기라도 걸려서 쓰러져버리면 좋겠다! 난 샌슨에게 힘없이 웃어준 다음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 때 홀 한켠의 문 이 벌컥 열리면서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2. "후치! 후치야. 나 좀 도와줘!" "어? 왜 그래요?" 돌아보니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고 있는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 와 레니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목욕탕으로 직행해버린 참이었다. 그런 데 왜 날 부르는 거야? "레니가 뻗어버렸어. 그런데 나도 힘이 없어서 못 일으키겠다고." "자, 잠깐! 그럼 지금 알몸이란 말이에요? 거절!" "아냐. 옷 다 입고나서 기절했어. 걱정말고 들어와." 난 넌더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다리가 풀려버릴 지경인데누 구를 부축하라는 거야. 네리아를 따라 욕탕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나무통 몇 개와 아궁이, 그리 고 아궁이 위에 놓인 커다란 가마솥 등이 보였고 바닥은 물바다였다. 흐 음. 틀림없이 물장난을 쳤으렸다. 다른 쪽의 긴의자에는 목욕을 끝낸 다 음이라 그런지 젖은 머리에 바알간 볼을 한 레니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 다. 아마도 앉았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것으로 짐작되는, 꽤나 귀여 운 모습으로 잠들어있었다. 하루 종일 뒤집어쓴 먼지들을 말끔히 씻어낸 다음이라 그런지 레니의 모습은 싱그럽고 촉촉하게 보였으며 게다가 목 욕통에서 방금 나와서 따뜻하기까지 했지만, 나에겐 끔찍스러울 정도로 묵직한 짐일 뿐이었다. 으으으! 레니를 업고 그녀들의 침실에 데려다주 는 길이 왜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내가 레니를 눕혀놓고 돌아오자 샌슨이 아프나이델을, 그리고 길시언이 제레인트를 부축하여 침실로 옮겼다. 결국 침대로 옮겨진 그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카알의 경우에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테이블 위에 쓰 러져 있도록 내버려두고는, 우리들은 욕탕으로 들어섰다. 욕탕에서 나와보니 저녁 준비가 되어있었다. 저녁 테이블에 남은것은 길시언, 샌슨, 운차이, 그리고 나와 테이블에 여전히 엎드려있는 카알뿐 이었다. 제레인트의 말에 따르자면 카알은 죽은 셈이고, 따라서 저녁식 사는 상당히 칼잡이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기이하게 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서 지골레이드의 해방이 의미하는 바는 몹 시 중대하오. 거기 소금 좀 줘." "여기 있어요. 음. 자이펀이 이미 선보인 무기, 그러니까 디바인 마크 를 이용한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위협이 현재하는 가운데 바이서스의 야 전 전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국면이라 할 것 같은데요. 샌슨! 식탁에서 제발 다리 흔들지 마!" "옳은 말이야, 후치. 쩝쩝, 따라서 지골레이드는 절대로 해방되어서는 안된단 말이야. 꿀꺽. 그런데 이미 해방된 채로 돌아다니고 있어. 전선 지휘관들이 돌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허락할 리가 없지. 이상하군. 야, 괴물 눈알! 네 생각은 어때?" "…질문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질문하면서 포크를 휘두르지는 마라. 이 인간 같잖은 녀석아." 여관 주인장은 대경실색해서는 우리들의 식사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차마 바라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괜히 닦은 테이블을 또 닦으면서 우리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길시언은 침울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빵을 위엄있게 쪼개면서 말했다. "카알씨가 제시한 해안봉쇄 전략이 성공할 수만 있었어도 전선의 걱정 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만일 그 계획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전선에서 적당 기간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유익한 일이 될 수 있었을 거요." "예. 무익한 희생을 상당히 줄일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의 발안자는 펠레일이라는 젊은 마법사였습니다." "흠. 그 마법사를 만나봤으면 좋겠군요. 이 상황에 대해 해석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거라면 내가 해줄 수도 있지." 길시언은 쪼개던 빵을 점잖게 내려놓았지만 샌슨은 물어뜯던 빵을 좀 튀겼다. 난 놀란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설명할 수 있다고요?" 운차이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스푼과 포크, 그리고 접시를 평행이 되게 놓았다. 그 동작은 완만하면서도 완성을 지향하는 엄숙함이 스며있었지 만 샌슨은 그 동작을 바라보면서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해졌다.운차 이는 그 동작을 완료한 다음에도 다시 느긋한 동작으로 물컵을 들어올렸 고 그러자 샌슨은 기어코 포크를 어깨 위로 들어올려 투창자세를 취했 다. "말하지 않으면 던진다!" "그럼 맨손으로 먹겠군." 운차이의 대답에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운차이는 그제서야 천천히 말 을 시작했다. "촛점을 옮겨보지."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촛점을 옮기다니?" "지금 지골레이드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군. 돌맨에게 촛점을 맞 추면 어떨까." "돌맨 할슈타일 말인가? 그가 왜?" "그 역시 현존하는 드래곤 라자다. 확실한 드래곤 라자이지. 더구나 지 골레이드를 놓아줌으로서 현재는 드래곤이 없는 드래곤 라자가 된 셈이 고." 길시언과 샌슨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 다. 운차이는 경멸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내가 그 들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운차이의 생각은… 돌맨 할슈타일이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운차이는 날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바보 왕자와 인간 같잖은 전사보다는 좀 낫다." 길시언은 이 냉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화를 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샌슨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이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운차이는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한 것이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붉은 머리 소녀, 즉 크라드메서 의 드래곤 라자를 찾고 있었다. 너희들이 찾아낸 그 레니 말이야. 그런 데 현재 레니는 너희들의 수중에 있다. 그렇다면, 할슈타일 가문에서 기 필코 크라드메서를 획득하고 싶다면, 게다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 를 뺏긴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하면 될까." 길시언은 빵이 목에 걸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지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대신 크라드메서를?"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 다. 길시언은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겼고 샌슨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는 구운 감자를 대상으로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이프로 감자를 이리 저리 찔러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샌슨은 나이프를 놓으 면서 말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되는 이유를 말해봐." "어, 그러니까, 에, 이거봐. 확실한 자기 여자 팽개치고 자기를 좋아하 지도 않는 여자에게 달려가는 남자는 바보 아냐?" …무슨 비유가 저래. 운차이는 더욱 심각한 경멸을 담아 샌슨을 바라보 았고 샌슨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당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뒤통 수를 긁으며 말했다. "에, 그게 아니라. 음. 잡은 토끼 팽개치고 다른 토끼를 쫓아가는 사냥 꾼은 바보다, 이런 말이야."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샌슨의 말이 맞아. 지골레이드는 할슈타일 가문의 드래곤이지 만 크라드메서는 그렇지 않아. 왜 확실한 자기 소유의 드래곤을 포기하 고 대신 불확실한 드래곤을 노린단 말이지?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그 계약은 쌍방의 동의에 의해 이루 어지고 쌍방의 동의에 의해 결렬되는 거잖아." 운차이는 냉랭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기 싫어하는 자는 얻는 것이 없지." "허어… 참. 그거. 지골레이드는 블루 드래곤이고 크라드메서는 크림슨 드래곤이니까? 지골레이드보다는 크라드메서가 더 좋다, 이 말인가? 그 거 왠지 어린애의 논리 같잖아."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테이블에 엎드려있던 카알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휘둘리는 느낌이군. 퍼시발군. 나 거기 맥주 좀 주게." 샌슨은 테이블 한 켠에 놓여있던 맥주잔을 카알에게 건네었다. 카알은 천천히 목을 축이고나서 말했다. "커험!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군. 큼. 에, 엎드려서 나누는 말씀 다 들 었습니다. 여러분. 내 생각을 말해보지요." 카알은 되도록 편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운차이씨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최선을 다해 레니양을 찾아왔지요. 하지만 현재로선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이오. 그러니 최후수단으로 돌맨 할슈타일로 하여금 크 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되게 하는 임시방편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요." "임시방편이라고요?" "지골레이드는 온전한 상태지만 크라드메서는 정신이 이상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길시언은 손을 딱 부딪혔다. 샌슨은 아직 이해를 못한 표정이 되었고 그러자 카알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할슈타일 가문에서도 대륙의 위기를 막아보려 한다는 거지. 그래서 지 골레이드를 포기하고 돌맨을 자유롭게 만든 다음, 그를 크라드메서에게 연결시켜 크라드메서를 안정시킨다는 말일세." "아…!" 음. 그렇긴 하네. 우리가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를 찾으려 애쓴 이 유도 크라드메서가 돌아버렸을지 모르기 때문이지. 크라드메서는 드래곤 라자를 잃고 발광해버린 전력이 있고 여전히 발광한 상태라면 대륙이 위 험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대륙의 동쪽 끝 일스까지 달려가서 레니를 데 려온 거지. 그렇다면 할슈타일 가문에서도 대륙을 구하기 위해 지골레이드를 포기 하고 돌맨을 내세울 수도 있는 문제로군. 흐음. 말이 되는 거 같다. 나 는 테이블 위의 호롱불을 향해 고개를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그 토대가 좀 불안합니다.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 스트의 말씀에 의하면 돌맨 할슈타일은 역대 최악의 드래곤 라자라고 하 지요. 과연 그 최악의 드래곤 라자가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의 드래 곤 라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문제입니다." 으. 그게 문제인가? 길시언은 턱을 쓸면서 말했다. "확률이 약한 판에 걸고 도박입니까? 하지만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 같은 도박입니다." 카알은 관자놀이를 문질러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휘젖고나서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요. 만일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라면 크라드메서도 획득하지 못한데다가 지골레이드도 잃고, 두 마리 토 끼를 다놓치는 경우의 전형적인 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하함. 설 령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는 지골레이드 의 대역은 될 수 없을 겁니다." "예?" "음… 크라드메서는 균형을 지키는 크림슨 드래곤입니다. 그가 인간의 싸움, 지골레이드의 말처럼 인간들의 쓸모 없는 싸움박질을 도와줄 거라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바이서스로서는 크라드메서의 안정은 얻게 되지만 전 선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겠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 가설이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그 때 운차이가 말했다. "바이서스로서는 그렇다는 말씀이시겠지." 운차이의 말은, 마치 따뜻한 방 안에서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힌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 길시언은 운차이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무슨 의미지?" "촛점을 다시 바꿔보자는 말이지. 왠지 오늘 저녁에 내가 하는 일은 그 것밖에 없는 것 같군." "촛점을… 어떻게?" "바이서스가 아니라 할슈타일 가문만을 놓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만 일 크라드메서가 돌맨 할슈타일을 받아들인다면 할슈타일 가문으로서는 지골레이드라는 투정 심한 드래곤 대신 미드 그레이드를 박살낸 전력을 가진 크라드메서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창문을 열어젖힌 듯한 운차이의 말 때문인지 테이블 위의 호롱불이 흔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시언은 어두운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숨겨진 의도는 상당히 기분 나쁜데." "당신 기분을 맞춰줘야 할 의무는 없어." "…할슈타일 가문은 바이서스의 안보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냐? 오로 지 더 강한 드래곤을 가지기만을 원한다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 "바이서스가 없다면 할슈타일 가문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길시언은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귀가 타버릴 정도 로 뜨거웠다. 하지만 운차이의 차가운 얼굴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웃기는군. 바이서스가 할슈타일의 존속에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할슈 타일 가문이 공신의 후손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운차이는 구태여 차갑게 말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은 진실 이었고 진실은 차갑다. 길시언은 자신의 입을 악기로 삼아 귀에 거슬리 는 음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운차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은 원래 바이서스에 대해서는 반란자의 입장이었던 것으 로 알고 있는데. 그 가문이 후작의 이름을 가지게 되고 누대에 걸쳐 상 당한 권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 가문 출신들의 비할 데 없는 충성심 때문이었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멍청이 왕자?" "그렇지는 않다." 길시언은 여전히 똑바른 자세였지만 그 목소리는… 심리적으로 복부 아 래를 가격당한 기분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왕자님. 항상 속마음을 감 추는 데는 능숙하지 못하시군요. 당신은 너무 솔직해요. 어쩔 수 없군. 길시언이 지금부터 해야 될 말은 왕족으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말이겠지. 내가 대신 해야겠군. 난 맥주잔을 옆으로 조금 밀면서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운차이. 결국 힘이 있으면 만사 그만이다는 식의 간단한 처세술을 설 명하려는 건가요?" 운차이는 딱딱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가문은 강력한 드래곤과 그 드래곤을 조절할 수 있는 라자를 계속해서 배출할 수 있는 한, 결국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한 자신 들이 어느 깃발 아래에 무릎을 꿇는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길시언으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사도를 진창에 팽개 치는 말이니까. 길시언씨. 다음에 언제 나한테 한 번 그럴듯하게 대접해 야 돼. 운차이는 미소 비슷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똑똑하군. 그들이 계속 강력한 드래곤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그들은 자 이펀의 지배를 받아도, 헤게모니아의 지배를 받아도 상관없어. 그 나라 들도 바이서스의 경우를 좋은 예로써 따르겠지. 바이서스 왕가는 시조의 원수였던 그들에 대한 원한을 고작 4대만에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운차이는 지금 제 4 대 국왕 에리네드 전하의 북방정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리네드 전하는 드래곤 로드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토벌하고 북방 을 안정화시켰지만 할슈타일 가문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가문은 드래곤 라자를 배출하는 가문인 것이다. 그래서 에리네드 전하는 할슈타 일 가문에 대해 높은 지위를 보장하며 바이서스의 귀족으로 귀속시켰다. 실리 앞에서는 명분이 사라진다는 좋은 예인 것이다. 길시언은 운차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입을 조심하시지… 그 지하실의 그 약속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 어." 세상의 모든 전사들 중에, 아니, 세상의 모든 전사들을 만나보지는 못 했으니까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이 여관의 홀 안에서 저런 식의 협박에 대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인 것 같다. 운차이는 냉엄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지금 난 자유롭고, 무기도 가지고 있 다. 약속을 잊을 수 있는 것이 당신만의 특권은 아니지. 당신을 베고 도 주해버림으로써 나의 인생을 쾌적하게 만드는 것을 고려해볼 수도 있 다." 길시언은 일어날 뻔했다. 그는 거의 일어나며 테이블을 걷어차면서 프 림 블레이드를 뽑아들 뻔했다. 카알이 그 때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 게 했을 것이다. 장담해도 좋아! "그만들 하시오." 길시언은 홱 고개를 돌려 카알을 노려보았다. 카알은 깊은 눈으로 길시 언의 눈빛을 빨아들였다. 길시언의 호흡소리가 하도 거창해서 여관 주인 이 불안한 눈으로 우리들을 쳐다볼 정도였다. 카알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기운 없이 말했다. "상황과 행동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가 있고, 그 관계에 따라 그 사람 을 파악할 수 있다고들 하지오." 어, 어, 저게 누구의 말이더라? 길시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챠넬의 대답이군요." 아, 그래. 저 이야기는 챠넬의 말이로군. 제로딘이 챠넬에게 유능한 전 략가는 어떤 사람이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았을 때 챠넬이 대답한 말이 다. 상황과 행동의 관계는 첫째, 그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 는 자는 민첩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상황에 어울리려면 당연히 그 상황 을 폭넓게 이해하는 영리한 머리와 적절한 행동의 타이밍을 맞출 수 있 는 민첩성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민첩하기는 하지만 영리하지는 못하다. 악화시키 는 것도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민첩 하다는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영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호전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셋째, 그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동. 이런 행동 을 하는 자는 민첩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하다. 그리고 이 경우는 셋 중에 서 가장 나쁘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최소한현재 상황에서의 변화 를 의미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는 행동일 경우 행동에 투입된 시간과 물 자, 모든 힘의 낭비만 있을 뿐 현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흐 음. 이 정도면 나도 쓸만한 기억력이야. 하하하.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3.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처럼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5분전까지만 해도 상 황과 행동의 관계 중 첫번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소. 그런 데 지금은 세번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운차이는 천장을 노려보았고 길시언은 얼굴을 붉히며 카알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이 구절을 써먹어야겠군. 누군가 왕족으 로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길시언 바이서스는 거 기에 속한다. 그러나 누군가 왕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카알 헬턴트는 거기에 속한다. 오오! 나의 재능은 너무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발달해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던 토론은 카알의 일갈 때문에 완 전히 끝나버렸다. 길시언은 바람이나 쐬고 싶다는 형편없는 변명을, 그 것도 우물거리듯이 말하고는 홀 밖으로 나갔으며 운차이는 홀 구석의 긴 의자에 반쯤 드러눕듯이 앉아서 말없이 엑셀핸드의 담배쌈지를 축내기 시작했다. 샌슨은 의아한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히 굴뚝이네. 그렇게 계속 피우면 머리나 목 안아프냐?" "걱정해주나?" "아니. 네가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면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이건 드워프제야. 질이 좋은 거지." 운차이가 그런 식으로 버티고 있자 곧 여관 주인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 다. 그는 괜히 의자들을 밀었다 당겼다 하기도 하고 천장에 걸린 램프를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곧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손님. 난 이만 들어가 자야겠는데." 음. 여기는 외진 곳의 외진 여관이라 그런지 여관 주인도 일찌감치 잠 에 드는군. 지금까지 들려본 여관 중에서 이렇게 이른 시각에 잠자리에 드는 여관 주인은 본 적이 없는데. 운차이는 능글스러운 무표정으로 여 관 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시오." "손님이 여기 계시면 내가 잠자리에 들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 여기서 자오?" 운차이의 이 쌀쌀맞은 대답에 주인장은 더욱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 에게는 당연히도 이런 무례한 대답에 대해 화를 벌컥 낼 권리, 심지어 이런 식으로 행동하려거든 내 집에서 나가라! 고 외칠 권리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잊어먹게 만드는 모양이다. 사실 여관 주인장은 흘깃 봐도 간단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쟁과 국가, 그리고 국왕과 귀족의 이름이 함부로 거론되는 우리들의 대화라든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여정, 그리고 검을 든 전사가 네 명이나 되는 데다가 희귀한 마법사도 섞여 있고 거기에 성 직자까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드워프와 날렵해 보이는 처녀에 소녀 등 신비로운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우리들을 보면서 그의 상상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참으로 흥미로운 문제다. 그래서 그는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 았다. 다행스럽게도 샌슨이 여관 주인의 편을 들었다. "일어나라, 자식아. 내일도 오늘만큼 달려야 돼. 올라가서 침대에 쓰러 지자고. 이봐, 후치! 너도 밖에 나가서 길시언을 찾아서 데리고 들어 와." "알았어." 샌슨에 의해 거칠게 일으켜지면서 화를 바락바락 내는 운차이의 모습을 뒤로 하고서, 나는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곧 모래가 섞인 맹렬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팔을 이마 까지 들어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랄. 샌슨! 이런 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것 을 믿을 수 있어?" 샌슨은 킬킬거렸다. 난 홀 안으로 먼지와 모래가 들어가면 주인장이 싫어할 것을 생각해서 재빨리 밖으로 나와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나의 친절함은 여관 주인에 게 다 써버리게 되었다. 난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가서 길시언을 찾고 싶 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난 문을 등지고 선 채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길시언! 길시언!" 대답이 없었고 그러자 난 앞으로 더 걸어나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더 크 게 외쳤다. "이런 바람을 쐬고 있다면 당신은 이상한 호칭으로 불릴지도 몰라요! 아, 그렇지! 사람들이 이런 바람을 쐬고 있는 당신을 보면 틀림없이 무 슨 고행을 해야 될 극악범죄를 저지른 전사로 생각할 거라고요!" 잠시 후 시커먼 어둠과 시끄러운 바람 사이로 길시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옷깃을 세우고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다시피 한 자세로 걸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짓으로만 빨리 들어가자고 했고 우리 두 사람 모두 홀 안으로 들어서자 길시언은 몸을 털면서 말했 다. "그래, 휴. 상쾌한 밤바람은 아니군." 정말 상쾌한 밤바람은 아니었다. 황야 한 가운데 잘못 돋아난 뿔처럼 자리한 칸 아디옴은 사방에서 불어 오는 모래와 먼지들에 대하여 가장 완벽한 저항, 즉 무저항을 채택하고 있었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도시의 외곽 성벽은 꽤 훌륭한 것이었다. 하 지만 성벽은 대책 없는 모래와 바람까지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어쨌 든 교역도시 칸 아디움에 우리들의 대인원을 모두 수용할 여관이 남아있 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들 모두 찬성했 으며, 따라서 그 여관에 방이 두 개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네리아와 레니가 차지하고나서 남게 된 하나의 방에는 모두 네 개의 침대가 있었다. 네 개의 침대 위로 아프나이델, 카알, 제레인트, 엑셀핸드를 집어던지고나자 칼잡이들에게는 침대를 고를 권한이 남지 않 게 되었다. 그래서 길시언과 샌슨, 운차이, 그리고 나는 홀을 점령하기로 결심했 다. 침실의 바닥에서 자는 것도 고려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벽난로가 있는 홀 쪽에 더 점수를 주게 되었다. 주인장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홀에서 자겠다고요?" "어쩔 수가 없군요. 설마 마굿간으로 쫓아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주인은 우리를 마굿간으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운차이는 씨익 웃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짐 속에서 모포를 꺼내와서 홀바닥에 깔고 드러누웠다. 운차이는 치사스럽게도 눈빛을 번쩍거리더니 홀 구석에 있는 긴의자를 차지했다. 그곳은 홀 옆벽에 있는 벽난로쪽으로 발, 혹은 머리를 향하게 드러누울 수 있어서 참으로 고려해볼만한 자리였지만 운차이는 우리들이 그런 고려를 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윽. 길시언은 벽난로 바로 앞에 모포를 깔고는 드러누웠다. 물론 그는 운차 이와는 달리 품위를 아는지라 충분한 공간을 남겨두웠다. 그러자 그 공 간에는 샌슨이 냉큼 끼어들었다. 곤란해, 곤란해. 난 약간 궁리한 다음 홀에 있던 테이블 두 개를 바싹 붙인 다음 그 위에 모포를 깔고 드러누 웠다. 아무래도 바닥에서 잤다가는 땅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내일 아침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잠시 후 나는 테이블에서 황급히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테이블이 아우성을 질렀기 때문이며, 테이블이 그렇게 아우성을 칠 때마다 나머지 세 남자들도 불안감에 떨며 아우성을 쳤다. 나는 샌슨을 옆으로 밀어붙인 다음 그 옆에 드러누워 조금이라도 더 벽 난로쪽에 가까워지려 애썼다. 잠시 소란과 투덜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결 국 모두들 자리를 잡고 눕게 되었다. 바닥에 나란히 세 명, 그리고 그 바로 옆으로 벤치 위에 한 명. 네 남자는 그렇게 누워 불 꺼진 캄캄한 홀, 하지만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든 홀의 천장을 바 라보았다. 탁. 탁. 벽난로 속의 장작개비는 이글거리며 잘도 타올랐다. 그리고 바깥의 모 래바람 역시 쉼없이 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머리카락이 타버릴 정도로 벽난로에 바싹 붙어 있던 샌슨이 말했다. "이거 참. 내일 아침엔 삽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는걸." "삽?" "모래를 퍼내야 걸어갈 거 아냐." "그것보다는 낙타를 수입하는 것이 낫겠군. 아, 그렇지. 운차이?" 운차이는 뒤척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가만히 천장을, 벽난로 불빛에 발 갛게 물들어있는데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낙타는 사막을 달리는데 왜 발이 빠지지 않아요? 말보다 덩치가 작아 요?" 난 질문을 던지다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옆에 누워있던 샌슨과 길시언 이 동시에 운차이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차이 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천장으로 날려보냈다. "낙타가? 훗. 낙타의 어깨 높이는 약 4 큐빗 정도 된다." "4 큐빗? 우와? 말보다 훨씬 크네. 그런데 발이 빠지지 않아요?" "낙타는 말과는 달리 발가락이 두 개다. 그리고 그 사이가 크게 벌어져 있지. 모래밭에서도 잘 빠지지 않는 발이다." "그래요? 흠.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크네. 그렇게 높은데 어떻 게 탈 수있지요? 탈 때마다 무슨 받침대 같은 것을 가져다 놓나요?" "아니. 낙타는 무릎을 꿇어 그 기수를 태운다. 기수에 대한 완벽한 충 종을 표시할 줄 아는 선한 생물이지." "무릎을 꿇어요?" "낙타는 튼튼하면서도 유연한 다리를 가지고 있지. 그는 무릎을 꿇고 차분히 기다린다. 그리하여 기수, 혹은 짐이 완전히 실리고나면 그는 일 어서 타오르는 사막의 아지랑이를 향해 걸어가지." "허어. 낙타는 어떻게 생겼어요?" "어떻게 생겼냐고?" "예. 말은, 음, 어, 날카롭게 생겼잖아요. 바람을 앞지르는 종족답게." "낙타는 바람과는 별 상관이 없지. 그는 사막의 동물들에 대해서도 근 심하지 않고 뜯을 풀이 있느냐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아. 낙타는 시간 에 대해서도 근심하지 않아. 말은 시간에 대해 너무도 근심해서 바람과 같이 빠른 다리를 선사받았지. 그렇지만 낙타는 시간에 대해 아무런 근 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혹을 선사받았지." "혹?" 운차이는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다리를 들어 벤 치 아래에 내려놓고는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던 엑셀핸드의 파이프와 담 배쌈지를 들어올렸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파이프에 불을 붙 인 운차이는 어두운 홀 안으로 파르스름한 담배연기를 흘려보냈다. 위이 잉-윙. 바람 소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낙타에겐 혹이 달려있다. 그 기박한 운명에 어울리는 선물을 받은 모 든 생물들 중 낙타만큼 경이로운 선물을 받은 생물도 드물지." "혹이 선물이에요? 불편한 것 아닌가요?" 운차이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담배연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진다. 천 장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서 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난로의 탁탁거리 는 소리와 바깥의 바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느 유목민 소년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예?" "넓은 사막 어느 오아시스에 어떤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시무 룩한 상태였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Dsifaruum-Iethena, 그러 니까 항상 불만스러운 소년이라고 불렀지." "왜 시무룩했나요?" "그 소년의 눈에는 사물의 불합리함과 만물의 약점이 극명하게 들어왔 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 소년은 자신이 실수투성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겨서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상태였다. 그 소년은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 지." "하하, 그래요?" "그래. 그래서 소년의 Arra-bi-fanumosa, 그러니까, 너희 말로는 추장 정도 될까? 아버지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어쨌든 추장은 소년이 항상 시 무룩한 것을 보다 못해 어느날 소년을 사막으로 보내었지. "사막으로요?" "그렇지. 대사막. 사막은 넓고, 볼품없고, 황량하지만, 묻는 자에게 대 답을 해주거든. 그리고 현명한 추장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 소년은 추장 의 조언에도 명백한 모순을 발견했지만 잠자코 그 조언에 따랐다. 그래 서 소년은 낙타젖이 든 주머니 하나를 든 채 사막으로 나아갔지." 잠시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눈을 떠보니운차이는 파이프를 빨고 있었 다. 다시 담배연기로 홀의 모습을 어지럽혀 놓은 다음 운차이는 말했다. "소년은 해가 뜰 때 출발했지. 그리고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 동안 계 속해서 사막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어. 그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야. 가장 뜨거울 때의 사막은 어떤 생물도 견디지 못하거든. 게다가 길을 잃을 가 능성도 엄청나고. 햇빛이 뜨겁게 내려쪼일 때의 사막은 움직이지." "움직인다고요?" "꿈틀댄다… 춤을 춘다. 음. 너희들의 말에는 사막의 춤을 설명할 말이 없군. 어쨌든 그런 상태야. 사막은 실제로 살아 움직이거든. 거기엔 모 래밖에 없지만." 춤을 춘다라. 모래들이? 난 잠시 상념에 잠겨 바람에 따라 꿈틀거리고 움직이는 모랫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모래 위로 이글거리는 공기의 움 직임,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모래들. 그리고 그 때마다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선인장 부스러기, 전갈, 검은 곤충들 과 붉은 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 상념들 사이로 운차이의 말소리 가 멀리서 들려오듯 들려왔다. "그러나 소년은 걸어갔어. 한참을 걸어갔지.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에 빗발같은 땀을 흘리다가 소년은 낙타젖을 꺼내어 마시기 시작했지. 그러 다가 소년은 Katzhita, 에, 너희 말로는 전갈이지? 전갈을 만났지. 소년 은 더위를 탄데다가 지쳤지만 전갈의 모습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어.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은 채 소년은 말했지." '이봐, 저걸 좀 보란 말이야. 우습지도 않잖아. 전갈의 무기는 그 무서 운 독침이지. 그런데 왜 그게 뒤에 달려있느냔 말이야. 전갈이 뒤로 걷 는 생물이기라도 한가? 전갈도 앞으로 걸어. 그러니까 당연히 그 무기인 독침은 앞에 달려있어야지. 뒤에 달려있다 보니까 꼬리를 구부리다 못해 허리까지 구부리며 공격해야 되잖아.' "소년은 불만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 길시언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는 상체를 반쯤 일 으켜 왼팔로 몸을 기댄 채 운차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자 전갈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지." '멍청한 소년아. 독침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떨어져버리 면 난 무력해진다. 그런데 그 독침을 마치 선물 보따리라도 되는 양 앞 에 내밀고 다녀야 된단 말인가? 누구든지 뜯어갈 수 있도록?' "그러자 불만스러운 소년은 말했어." '그건 궤변이다. 독침은 쓰기 위해 달려있지, 보호하라고 달려 있지 않 단 말이야.' '글쎄. 만일 독침을 써야 될 지경에 빠진다면, 그게 앞에 달려있는가 뒤에 달려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난 그런 지경에 빠지 지 않기를 바라겠어.' "소년은 전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갈은 그냥 걸어가버렸고 소년도 자신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둘은 그냥 헤어졌지." "말 되는 거 같은데. 어. 하긴 언제든 안전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고 다 닐 수야 없지. 손이 비어있어야 식사라도 할 테니까." 샌슨이 맞장구를 치자 운차이는 빙긋 웃었다. 위이이잉-윙윙. "소년은 뜨거운 태양빛을 온몸에 받으며 걸어갔지. 잠시 후 소년은 멈 춰서서 목을 축이기 위해 주머니를 들어올렸지. 소년은 낙타젖을 마시다 가 Pinnack-voe, 그러니까… 방울뱀을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방울뱀은 꼬리를 촤르르 흔들면서 두 마리의 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쥐 들의 등 뒤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지. 쥐들은 뭔가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꼬리를 흔들어?" "방울뱀은 꼬리를 흔들어 소리를 낼 수 있지. 우리는 그것을 죽음의 음 악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쥐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방울뱀의 소리를 들 으며 서 있었지. 그 광경을 본 소년은 또 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소년 은 혼잣말로 말했어." '이건 정말 지독한 고문이야! 방울뱀은 고기를 먹고 산단 말이야. 그래 서 사냥을 해야 돼. 그런데 그런 방울뱀에게 소리나는 꼬리를 달아주다 니! 저건 평생을 따라다니는 족쇄나 다름없어!' "소년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어. 갑자기 방울뱀이 휙-! 날았지. 그리고 쥐들 중 작은 놈 하나를 덥썩 물었어. 작은 놈이 잡힌 덕분에 큰 놈은 달아날 수 있었지. 소년은 어이가 없었어." "어이가없다라…" "달아난 큰 쥐는 멀리서 애처로운 눈으로 방울뱀이 식사하는 모습을 바 라보았지. 소년은 기가 차서 말했어." '이봐, 방울 소리를 듣지 못했어?' '물론 들었지! 여기 달려있는 귀가 보이지 않아?' "그러자 소년은 벌컥 화를 내면서 말했어." '그런데 왜 달아나지 않았던 거야? 바로 등 뒤에서 방울소리가 들려왔 잖아?' "그러자 쥐는 슬픈 가운데서도 어리석은 소년을 타이르듯이 점잖게 말 했지." '방울소리가 어쨌다는 거야? 방울소리가 우리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우 리의 문제는 방울뱀의 이빨에 있지 그 꼬리에 있지 않아.' 샌슨은 배를 잡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점잖고도 냉랭하게 저 멍청한 말을 했고 그런 식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정말 웃겼 다. 운차이는 계속해서 근엄하게 말했다.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때 방울뱀은 식사를 끝내었지. 그러자 소년과 이야기하던 쥐는 바삐 달아났어. 그 모 습을 보면서 소년은 투덜거렸지." '우습지도 않아. 멍청한 쥐 같으니. 방울 소리가 들리는 곳에 방울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잖아. 도대체 꼬리와 몸이 따로 다니기 라도 한다는 말이야?' "소년은 대충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어갔지." 북부의 황량한 모래바람 속에서 모래 바람 소리와 함께 사막 전사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신비로운 기분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홀 안은 여전 히 캄캄하고, 운차이의 얼굴은 오른쪽 반만 보였다. 오른쪽 불은 붉게 물들어 있고 왼쪽볼은 새카맣다. 그리고 그 왼쪽 불 위로 운차이의 왼쪽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은 지칠대로 지쳐 목을 축이다가 낙타를 보게 되 었지. 소년은 목을 축였는데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서는 목 이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어. 소년은 거의 발작하듯이 외쳤지." '저걸 좀 보라구! 저, 저것! 난 도저히 못참겠어. 낙타는 말보다 훨씬 빠르단 말이야! 다리도 더 길고 힘도 더 강해! 그런데 등에 저 커다란 혹이 달려있어서 빨리 달리지 못한단 말이야!'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4.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낙타가 말보다 빠르다고?" 운차이는 샌슨에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더 빨라. 네가 만일 자이펀에 가게 된다면 낙타 경주를 구경하도록. 말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질풍처럼 달리는 낙타를 보게 될 테니." "그렇게 빨라?" "빨라. 하지만 말처럼 그 속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낙타의 단점이다." "음. 그래?" "어쨌든 소년은 목이 꽉 막힐듯이 화가 나서 그렇게 외쳤지. 그러자 낙 타는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지." '소년. 난 빠르게 달릴 일이 없는걸.' '그럴 일이 있어도 빨리 달리지는 못할 거잖아?'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안그래?' '지금 빨리 뛸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빨리 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영원히 그럴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 "소년은 벌컥 화를 내고 싶어졌지.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일을 찾아 걸 어가버렸지. 무려 3 번에 걸쳐 바보 취급을 당한 소년은 몹시 화가 나게 되었다. 하지만 추장의 명령은 무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항상 불만스러 운 소년은 계속해서 나아갔지.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은 지금까 지 본 것 중에 가장 황량한 모래 벌판에 섰지. 사막 중에서도 완벽하게 모래만 있는 사막 말이야. 그리고 소년은 모래 언덕 위에 서서 모래 때 문에 깔깔해진 목을 축이고는 말했지." '이봐. 뭐, 여기까지 왔으니 말은 해야겠어. 온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하다간 나도 당신만큼이나 나이를 먹게되겠지. 난 합리적인 사람이 니까,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질문하진 않겠어. 너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을 하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이 모래! 도대체 이 많은모래가 왜 있는 거야? 모래 위에선 곡식도 자라지 않아. 그 위에선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어. 전갈들도 사실 이런 날씨엔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선인장도 이 런 모래사막에선 살 수 없잖아. 도대체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못하 는 이런 모래가 왜 이리도 많이, 그것도 넓게 쌓여있는 거지? 하는 일이 라곤 태양의 열을 흡수하여 지글지글 타오르는 일밖엔 없잖은가.' "소년은 대충 이런 식으로 질문했지"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샌슨이 먼저 말했다. "야, 그거 그렇다. 음.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사막이 뭐라고 대답했 어?" "너 바보냐? 사막이 대답을 해?" 운차이는 몇 마디 평범한 말로도 상대로 하여금 평생 동안 들어왔던 그 어떤 욕설보다도 더 심한 욕설을 들었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는, 참으로 독특하고도 싸가지 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샌슨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야! 전갈도 말하고 쥐도 말하고 낙타도 말하는데 사막은 왜 말 안하 냐!" 그러자 운차이는 정말 저렇게 불쌍한 작자는 처음 본다는 식으로 샌슨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차이는 점잖게 말했다. "사막엔 입이 없다." 샌슨은 목구멍에서 괴이한 목소리를 내었고 나와 길시언은 킥킥거리기 시작했지만 운차이는 그 모두를 무시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사막이 무슨 대답을 하나. 모래만 가득가득 쌓여있는데. 소년 역시 대 답을 기대하진 않았지. 소년은 불만에 가득차 있었지만 최소한 북부의 머저리처럼 사막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스러워하진 않았지. (샌 슨의 목이 졸린 듯한 신음소리.) 소년은 잠시 증오스러운 눈으로 고요한 사막을 쏘아본 다음 그대로 몸을 돌려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걸 어가기 시작했다." 샌슨은 시비를 걸듯이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탁탁, 위이이잉.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움직이는 달그락 소리. "사막이 움직여버렸지." "움직였다고?" "그렇다. 움직였지. 소년은 길을 잃었어. 돌아오는 길을 도저히 알 수 가 없게 된 거야." "태양이나, 어, 그림자 같은 것을 보면 되잖아?" "북부 머저리 같으니… 태양이나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길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사막엔 길이 없다. 조금만 빗나가도 터무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걷게 되는 것이 사막이야." "그래?" "그렇다. Kahnat도 없고, 아, 우물도 없고 바위도 없는 완전한 모래사 막에선 누구도 길을 찾을 수 없다. 대상들도 그런 곳으로는 다니지 않는 다. 소년은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걸어갔지. 눈에 익은 선인장이나 바위 등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 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지. 주로 되지도 않는 욕설들이었어." 샌슨은 운차이의 말에 벙긋거렸다. 모래밭 한가운데서 하늘을 향해 고 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걸어가는 소년의 모습이라. 흠. 운차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게 미친듯이 걸어가다가, 소년은 아까 마주쳤던 낙타를 마주치게 되었지. 낙타는 지치고 초라한 몰골을 한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 했다." '소년. 그 주머니를 버리는 것이 어때?' '뭐라고?' "낙타의 말에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젖주머니를 바라보았지. 낙타는 바로 그 주머니를 가리킨 거야." '그걸 버리면 몸이 가벼워질 테니 더 빨리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 지 않은가?' '말도 안돼. 더 빨리 걸으려다가 목이 말라 죽을지도 몰라. 이 주머니 는 길을 찾을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약속한다고.' '그런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지. 소년은 낙타를 쏘아본 다음 계속해서 걸어가 기 시작했어. 최소한 아까 마주쳤던 낙타를 마주친 이상 방향은 똑바로 잡은 셈이거든. 그래서 소년은 다시 기운을 차려 걸어가게 되었지. 그러 다가 소년은 어느 모래 언덕을 돌아가다가 방울소리를 듣게 되었지. 소 년은 당황했어. 방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방울뱀이 있다는 뜻이지. 하 지만 소년은 다시 생각해보았지. 아까의 그 방울뱀은 쥐를 포식했지. 방 울뱀은 보통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하기 위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거 든. 그래서 소년은 그냥 걸어갔지. 그 때 모래 언덕 위에서 쥐가 나타나 서 말했지." '이봐.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물론 들려!' '아, 그래?'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지. 소년은 기분나쁜 얼굴로 쥐를 쏘아 본 다음 계속 걸어갔어. 역시 방울뱀은 공격하지 않았지만 소년은 몹시 기분이 상했지. 게다가 지쳤기 때문에 손에 든 주머니는 엄청나게 무겁 게 느껴졌지. 소년은 그것을 버리고 싶어졌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 애초에 버릴 수 없는 것이면 고민도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기진맥진하 여 나아가던 소년은 뜨거운 모래밭에서 걸어가고 있는 전갈을 만나게 되 었지. 전갈은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지." '이것봐. 왜 그것을 들고 다니는 거지?' '뭐야? 목이 말라 죽어버리라는 말이야?' '어차피 그것은 모두 네 입 속으로 들어갈 것이잖아. 그러니 다 마셔버 리고 걸어가면 되는 거 아냐? 왜 힘들게 그것을 들고 다니는 거지?' '지금은 목마르지 않아!' '그래? 목 마를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는 거로군. 그렇다면 좀 더 조심하는 것이 좋겠군.' '무슨 뜻이지?' '그 주머니는 새고 있어.' "소년은 놀라서주머니를 바라보았지. 과연 아래쪽에서 낙타젖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어. 얼마 남지도 않은 낙타젖을 그렇게 낭비해버린데 대해 서 소년은 크게 낙심했지. 소년은 일단 주머니를 거꾸로 들었지. 거꾸로 들면 잡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주머니야. 그래서 소년은 그것을 가슴에 안다시피 한 채 기진맥진해서 걸어야 했지. 사막의 모래들이 붉게 변할 때 소년은 마침내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 소년은 쓰러 질 것 같았지만 힘들게 다리를 움직여 추장의 천막으로 걸어갔어. 담배 를 피면서 기다리던 추장은 소년을 바라보다가 말했지." '무엇을 보고 뭘 깨달았느냐?' '사막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도가도 모래, 모래뿐이었어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자 추장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지." '그런가? 이상하군. 낙타와 쥐와 전갈이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예? 아, 그 어리석은 동물들 말인가요?' "그러자 지혜로운 추장은 말했지." '그 동물들의 이야기는 좀 다르던데. 그 동물들은 네가 마치 낙타가 매 달고 다니는 혹처럼 무거운 주머니를, 전갈이 꼬리를 돌보듯이 소중히 끌어안은 채, 방울뱀 소리의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래요. 하지만 사막 자체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막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글쎄. 내 생각에 사막은 낙타와 전갈과 쥐를 보여준 것 같은데.' "그러자 소년은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되었지." 운차이는 이야기를 마치고나서 다시 침착하게 파이프 부리를 물었다. 샌슨은 어느새 일어나 앉아서는 생각에 잡긴 표정이 되어 있었고 길시언 은 팔베개를 한 채 드러누워있었다. 난 여관 건물의 벽을 두드리는 모래 바람 소리를 들었다. 탁, 타다다닥, 휘이이잉. 샌슨이 툭 튀어나오듯이 질문했다. "그 이야기가 전하려는 바가 뭐야?" 운차이는 구슬픈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 미친 녀석으로 만들고 싶은가? 전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그냥 그 이야기를 말해버리지 왜 길다란 이야기를 하느냔 말이야." "어, 그런가?" 운차이는 다시 한 번 홀의 시커먼 공간을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로 물들 인 다음 말했다. "낙타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이야기가 생각났을 뿐이야." "흐음."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카알이 있었다면 저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 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레인트가 들으면 뭐라고 할까? 전갈이라… 낙타? 흐음. 방울뱀. 갑자기 몸이 부웅 떠올라 저 열사의 사막으로 날아 가버리는 기분이 드는군, 그래. 휘이이잉! 길시언은 바람 소리의 끝자락에 붙여서 말했다. "이만 자둡시다. 험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러자 샌슨은 난로에 장작 하나를 던져넣은 다음 다시 드러누웠다. 나 역시 모포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흐음. 한 두어 달 쯤 전에 누군가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인 나 후치 네드발이 북부의 어느 여관 홀 바 닥에서 포근한 표정으로 잠들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난 상대의 정신 상 태를 의심했겠지. 핫하! 우스운 거야, 인생이란. 모두들 운차이가 말하 는 낙타처럼 혹 하나씩을 매달고 그저 걸어가는 것인가? 내 혹은 뭘까? 쾅쾅쾅! 이건, 음. 그렇지. 델하파의 항구다. 거기서도 누군가가 아침부터 문짝 이 부서져라 두드려대었었지. 하지만 여긴 델하파가 아니잖아. 쾅쾅쾅! "젠장! 어느 녀석인지 모르지만 내 아침잠을 깨울 정도로 급하지 않다 면 그 짓 그만둬!" 샌슨의 졸음에 겨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간신히 현실감각 을 되찾고는 누군가 우리가 누워있는 여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경우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내다보아야 될 것이다. 난 양식이 없어. 제발 그만두자고. 쾅! 콰과광쾅! 쾅쾅! 쾅! 쾅! 아주 리듬감 있는 노크소리로군. 눈을 떠보니 내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노크 소리에 맞춰 땅바닥을 두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탁, 타다닥탁, 탁 탁, 탁, 탁. 제기랄. 아무래도 일어나야 되겠는걸. 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여관 정문까지 걸어가는 길이 참으로 멀게 느껴지는군. "으아아!" 무슨 소리지? 괜찮아. 설마 누 군가를 밟지는 않았겠지. "내 다리!" 음. 샌슨. 잠꼬대를 이상하게 하는 군. 꼭 내가 샌슨의 다리를 밟은 것 같잖아. "밖에 누구요! 그런데 나에게 이 질문을 할 권리가 있냐고 묻지는 말아 요." 왜냐하면 난 이 건물의 주인은 아니니까. 문을 열자 곧 맹렬한 바람이 불어닥쳐서 나는 머리를 홱 젖혔다. 잠시 후 힘들게 다시 앞을 바라보니 검푸른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자 그 그림자는 커다란 망토 같은 것을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에는 길다란 막대기… 창인가? 어쨌든 그런 것을 들고 있었는데 남자는 뭐라고 마구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등 뒤 로도 몇 명의 다른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 사람들 역시 뭐라고 떠 들고 있었다. 난 머리를 휘젖고나서 말했다. "잠깐, 잠깐만. 나 잠에 취해서 그러는데, 좀 천천히 침착하게 말해주 겠어요?" 남자는 내 의견을 받아들여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오크요!" "아, 그러세요? 전 인간이에요." 남자는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등 뒤에서는 운차이의 것으 로 짐작되는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밖 의 남자는 자기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나 또한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기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이라는 사람 있소?" 등 뒤에선 목이 걸린 듯한 켁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것 도 아마 운차이인 것 같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5. 칸 아디움의 외성은 여덟 개의 거대한 성탑과 그것들을 잇는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도시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길다란 팔각형의 모습이었다. 기단부는 조금 복붇워져 있었지만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 고 성벽 위의 갤러리(Gallery)와 지상은 성탑 내부에 있는 나선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황량한 북부의 외진 곳에 있는 성 치고는 상당히 튼튼한 규모였다. 어쨌든 성탑 내의 나선계단을 따라서 성벽 위의 갤러리에 올 라가자마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마치 전선으로 돌아온 것 같군." 그러자 길시언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스름한 새 벽 공기, 그 축축한 대기 사이로 병사들의 그림자들이 성벽 위에 돋아난 혹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병사들 중에서 특히 큼직한 덩치를 가진 사내 의 그림자가 보인다. 사내는 흉벽에 몸을 기댄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 는데 그 그림자가 독특했다. 길시언은 곧장 그에게 물었다. "제대군인이오?" 사내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우리들을 쓰윽 훑어보더니 고개 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그 사람들인 모양이군. 나는 아넨드 라이스터 중위. 12연대 강행 정찰부대 소속. 상이군인. 1년 전 퇴역했지. 자이펀 장교를 두 명 잡았거든. 그리고 이건 그 때의 추억이고." 아넨드씨는 오른팔 상완 부분에서 묶여있는 소매를 흔들어보였다. 그래 서 그림자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군. 길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훌륭한 군인이셨군요, 라이스터 중위. 난 길시언이오. 그 팔에 대해서 는 유감이오." "아, 괜찮소. 덕분에 일계급 특진에 퇴역.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아넨드라고 부르시오." 아넨드씨는 씨익 웃고는 다시 황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도끼 를 들어 흉벽의 요철돌을 탁탁 두들겼다. 만일 오른팔이 남아있었다면 오른손에 대고 탁탁 두드렸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성벽의 싸늘한 돌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다란 성벽에서 내려다보자 황야보다는 먼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푸르스름하면서 동시에 누르스름한, 그리고 보라색과 붉그스름한 가로줄 들. 다채로운 새벽하늘이었다. 황야에는 밤새 솟아나기라도 한 듯이 모닥불이 잔뜩 피어있었다. 얼핏 봐도 모닥불의 숫자는 3,40 개가 넘어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춤을 추 는 것인지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괴성을 지르며 위로 들어올린 무 기를 흔들어대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네리아는 눈꼽을 떼어내면서 졸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오크야." 뒤따라 올라온 제레인트는 아래쪽을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는 미 소를 지은 채 네리아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니, 아주 많은 오크군요." "네. 그러네요. 굉장히, 엄청나게, 끔찍하게 많은 오크네요." 네리아는 톡 쏘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제레인트는 여전히 웃으며 밖을 쳐다볼 뿐이다. 하긴 오크 대부대에 의해 포위된 도시에 갇힌다는 것은 진귀한 경험에 속하는 것이긴 하며 그래서 제레인트는 신기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경비대원들이 모두 입을 꽉 다문 채 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벽 위에서는 저렇게 미소짓지 않아줬으면 하는데. 어쨌든 지금 이 성벽 위에서 기분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제레인트 혼자 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넨드라는 저 한쪽날개의 전투천사 역시 짜릿한 긴장감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뒤따라 올라온 아프나이델은 새벽의 추위에 벌벌 떨다가 말했다. "저, 아넨드씨. 전 아프나이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놈들이 우리 를 부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넨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봐, 대장!" 그러자 잠시 후 그런대로 투구와 갑옷을 제대로 차려입은 데다가 오른 손엔 롱소드도 들고 있는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남자는 얼굴을 찌푸린 채 걸어오더니 아넨드를 향해 말했다. "이봐, 아넨드. 자네 고함 소리는 이스트 그레이드 전역에 울리겠군. 그 도끼 발등에 떨어트리기 전에 어서 내려가게." "뭐야? 이 목수 녀석이! 난 네녀석이 여기서 대팻밥이나날리고 있을 때 전선에서 자이펀 놈들을 수도 없이 베어넘겼어. 네가 그까짓 돌려가 면서 해먹는 경비대장이 된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에게 잘난 척하는 것은 못봐줘." 그러자 그 그럴듯한 복장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품위가 격하되어버린 남 자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레니는 고개를 돌리고는 킥킥 웃었다. 그 남자는 레니를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했다. "그래, 당신들이 그 여행자들이오? 나는 칸 아디옴의 경비대장 라스 크 레블린이오." 카알은 어제의 피로도 가시지 않은 데다가 새벽에 높은 성벽을 달음박 질쳐 올라오느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땀을 닦아내며 라스 대장 에게 말했다. "나는 카알 헬턴트라는 여행자입니다. 크레블린 대장. 사태를 좀 설명 해주시겠습니까?" "사태? 간단하오." 크레블린 대장은 롱소드를 들어 바깥의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아침 경비대원들이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저 지경이었 소. 아, 우리는 외딴 곳에 위치한 도시라 밤새도록 경비를 세우지는 않 소. 성문은 잠궈두지만. 어쨌든 급하게 성문의 폐쇄를 강화하고 예비경 비대원까지 모조리 소집시켜 성벽 위에 배치시킬 때 쯤이었던가, 갑자기 저 편에서 화살이 날아왔지." "화살이라고요?" 샌슨의 질문에 크레블린 대장은 품 속을 뒤지더니 구겨진 종이 하나를 꺼내었다. 종이라. 오크들이 어디서 종이를 구했을까? 음. 하긴 무기도 만들고 갑옷도 만드니 종이도 어떻게 만들 수는 있겠지. 여행자들에게 훔쳤을 수도 있고. 난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카알은 라스 크레블린 대장에게 종이를 받아들고는 눈을 찌푸렸다. 그 러자 아프나이델은 중얼거리더니 허공에 조그마한 빛덩어리를 하나 만들 어내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놀란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활을 뽑아든 채 갤러리에 도열해있던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자이펀 과의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웠던 용맹한 상이군인 아넨드씨는 별로 놀라 지 않았지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맙소. 아프나이델." 카알은 아프나이델에게 감사하고는 그 종이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짧아서 가장 늦게 올라온 엑셀핸드가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원, 제기랄! 그 놈의 계단 높기도 하다. 이봐. 거, 뭐라고 적혀있나?" "글씨가 너무 지저분해서 읽기도 힘들군요. 에… 우리는 오크다. 허참. 척 보면 오크인 줄 모를까봐. 음. 어쨌든 읽겠습니다. 우리는 휴다인 계 곡에서 인간들을 따른다 왔다. 따른다 왔다? 따라왔다는 말인가 보군요. 우리는 복수를 한다. 너희들은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을 내놓는다. 내 놓지 않는다면 이 도시를 막살내겠다? 아, 박살내겠다는 말인가 보군 요." 제레인트는 카알이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낄낄거리더니 말했다. "하하하! 그, 그래도 그건 아마도 오크 중에서 가장 문학적 소양이 우 수한 녀석이 썼을 겁니다. 하하하!"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제레인트의 밝은 태도 때문에 다른 사 람들도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게 대해 화를 낼 권한이 있는 크레블린 대 장마저도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들 중에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이 있단 말이오? 아, 먼저 근래 우리 마을에 들어온 외부인들은 당신들뿐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겠 소." 난 카알을 한 번 쳐다본 다음 앞으로 나섰다. "시치미 떼진 않겠어요. 제가 괴물 초장이입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괴물 같은 초를 만드는 사람? 아니면 초를 만드는 괴물 같은 사람?" "후자지요. 크레블린 대장님. 물론 가끔 실수해서 괴물 같이 생긴 초를 만들기도 하지만." "원참. 이런 꼬마를 노리다니. 그럼 누가 괴물 눈알이오? 당신들 중에 눈빛이 날카로운 자는 보이지만 눈이 괴물 같은 자는 안보이는데?" 운차이는 냉랭하게 말했다. "놈들은 날 그렇게 부르오." 크레블린 대장은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저 아래쪽 황야를 바 라보고 있었다. 새벽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데 따라서 황야의 색깔도 조 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검은색 흙탕물처럼 막막하고 깊이감이 없던 황 야가 천천히 음영을 드러내면서 그 윤곽의 항폐함을 우리들에게 선사하 고 있었다. 오크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은 작았다. 그것이 오크들의 거친 살결을 따 스하게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침침한 적의와 자신 감을 표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발갛게 된 볼을 맹렬히 문지르고 있던 레니는 그 광경을 보며 부르르 떨고나서는 불안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크레블린 대장은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뭐요? 왜 오크들에게 쫓겨다니는 거요? 저 녀석들의 지저분한 동굴을 털었다는 것은 웃기는 말이 될 테고. 모습들을 보아하니 황야에 서 오크 몇 마리 쯤 베어넘긴 모양인 것 같은데. 맞소?" 카알은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긍정을 표시했다.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 은 턱에 꺼끌꺼끌하게 나있는 수염을 긁었다. 아마 면도도 하지 못한 채 뛰쳐나온 모양이다. 크레블린 대장은 말했다. "그래. 어쩌실 생각이오?" 흠. 고약한 말이군. 우리들에게 먼저 말을 꺼내보라는 것이겠지. 카알 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오늘 떠날 작정입니다. 저 포위진은 도시의 반 대편에도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가 반대쪽으로 달아나버리면 되겠 습니까?"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당장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보시오. 편지를 읽었잖소? 당신들이 나가지 않으면 저 놈들이 이 도시를 친다고 하지 않았소. 이 상황에서 당신들만 살자고 달아나버린다 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 그러자 카알의 안색도 좋지 않아졌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하실 일이 아니지요. 저 친구들은 우리를 쫓는 것 이니 우리가 떠나면 우리 등 뒤를 따라오지 않겠소? 우리는 저 친구들을 끌고 사라져주겠다는 겁니다." "보시오! 당신들은 모두 말을 가졌지 않소! 그러니 당신들은 그렇게 가 볍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말이 오. 저 녀석들이 저런 대부대를 유지하려면 보급은 중요한 문제일 거라 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보급이오?" "그렇소! 저 녀석들이 당신들을 뒤쫓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 때문에 엉뚱한 우리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말도 안되지 않소? 당신들이 달아나면 저 녀석들은 이곳에서 분탕질을 친 다음에야 당신들을 추적할 거란 말이 오!" 난 화가 나서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 때 칸아디움의 새벽공기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부 인간들의 멋진 우정이군." 운차이의 서리가 묻어나는 말이었다. 우리들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뒷말을 이었다. "오크에게 쫓기는 인간을 다른 인간들이 쫓아내려고 애쓴다라. 맞아. 원래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서로 돕고 사는 거지." 크레블린 대장은 움찔하더니 곧 불타는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말들이 튀어나왔다. "보시오! 난 모험가 떨거지들을 좋아하지 않소. 이 도시에서 저 도시 로, 저 계곡에서 이 미궁으로! 그렇게 제멋대로 날아다니다가 지칠 때쯤 되면 시체에 몰려드는 파리처럼 도시에 찾아들어서는 먹을 것과 침대를 요구하고, 난동을 부리고! 우리의 발랄한 십대들을 헛된 몽상에 빠지게 만드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소. 누구나 그 나이에는 그러는 법이니 까. 하지만 꽁무니에 재앙과 질병을 달고 다녀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견실 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 터전을 위협하는 것은, 그런 작자들에게 내가 왜 호의를 베풀어야 된다는 거요?" 우리는 멍한 눈으로 크레블린 대장을 바라보았고 크레블린 대장은 옆에 서 아넨드씨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얼굴을 붉힌 채 우리들 을 쏘아보았다. "웅변술은 언제 그렇게 익혔지? 라스." 아넨드씨의 말에 크레블린 대장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이 성벽 위에서는 크레블린 대장이라고 불러! 그러기 싫다면 당장 내 려가서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침대 속에 그 병신 같은 몸을 처박든지… 미안하네." 참 보기 싫은 광경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크레블린 대장의 목소리가 들 리는 범위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아넨드씨의 오른쪽 소매로 몰렸다. 아넨드씨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이봐. 아넨드. 실수였네. 그저 홧김에 나온 말이야. 본심이 아니라 네." "괜찮습니다. 크레블린 대장님.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넨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끼를 어깨에 둘러매더니 성벽 저쪽으로 걸 어가 버렸다. 크레블린 대장은 그를 붙잡을 듯하다가 관두고는 입술을 좀 깨물었다. 잠시 후 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는 당신들에게 고마워해야 될 거요. 당신들이 내 부아를 돋운 덕분에, 이 일이 잘 끝나면 저친구에게 술 한 잔 멋지게 대접해야 될 것 같으니." 그러자 네리아가 당장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게 왜 우리 책임이지요? 이건 당신이…" "네리아양." "카알 아저씨. 이건 말도 안되는…" "조용히 해요. 네리아양." 네리아는 볼이 부어서는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났다. 카알은 피로한 음성이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에게 원하는 바가 뭐요?" 크레블린 대장은 마치 카알을 흉내내듯이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체면 차리기도 싫고, 그래봐야 속보이는 짓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 겠소. 저 오크들이 우리 도시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도록 해 줄 방법이 있겠소?" "흐음. 당신들은 어떻게 도와주겠소?" 크레블린 대장은 매몰차게 대답했다. "우리가? 우리가 왜. 꽁무니에 오크들을 달고 온 것은 당신들이오. 난 이 도시의 경비대장이니 뜨내기들의 경비대장이 아니오." 그러자 느닷없이 풍부하게 울리는 음성, 그것도 화가 난 기색이 분명한 약간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한 영지의 안보를 책임지는 경비대장이지만, 지금 말씀은 받아들 일 수 없군요." 보라! 헬턴트 영지의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이 앞으로 나섰다. 크레블린 대장은 험한 눈초리로 샌슨을 바라보다가 보통 사람들의 얼굴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가슴을 발견하고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새벽 공기 속에서 더욱 위압적으로 거대해보이는 샌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요? 경비대장이라고?" "샌슨 퍼시발. 헬턴트 영지의 경비대장입니다." "어? 모험가들이 아니란 말이오?" "천만에요. 우리는 헬턴트 영지의 공무로서 출발한 일행입니다. 중간에 몇 가지 사건이 생기긴 했지만 이 모든 사태는 결국 헬턴트 영지의 공무 의 연장입니다. 어르신께서도 경비대장이라면 공무 사절의 여행에 있어 타영지가 당연히 베풀어야할 조력의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고는 말씀하시 지 못할 테지요." "어, 나, 난 그런 거 모르겠소. 당신들이 정녕 그렇다면 왜 우리 칸 아 디움의 시장을 접견하여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어스름한 새벽 공기. 그리고 황야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샌슨 은 다부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장대한 어깨는 성벽보다 굳건해 보 였고 단단한 두 다리는 첨탑과도 같았다. "이 도시에는 용무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식사와 잠자리뿐 이며 그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타영지의 책임자의 관심을 끌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곤경에 빠진 것이 분명한 이 시점에서, 칸 아 디움의 시장은 헬턴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신 여기 카알 헬턴트공에게 모든 종류의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공이라고?" 이 질문은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왔다. 크레블린 대장과 카알에게서. 카알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퍼시발군. 내가 언제부터 공이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지?" "그야 국왕 전하께서 카알 헬턴트공에게 현명함의 기사라는 칭호를 내 리신…" "으랏찻차차! 여보게, 퍼시발군! 그 우습지도 않은 칭호를 꼭 거론해야 되겠나!" 샌슨은 아무런 대답없이 그저 칭찬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빙긋이 웃었을 뿐이다. 네리아까지 나서서 자신은 '밤바람의 레이디' 임을 밝히고나자 레니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어쨌든 카알은 마땅찮은 얼굴로 헬턴트 영지 전권대리인의 증명서와 국왕 전하께서 하사하신 훈장까지 내보여야 했고,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의 무릎은 그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활발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 외딴 곳에서 귀하신, 귀하신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 되어… 저,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길시언이 자신이 왕자임을 밝히지 않은 것은 크레블린 대장의 심장 상 태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별로 보기에 유쾌한 광 경은 아니군. 우리는 모두 일치단결하여 싸늘한 시선으로 크레블린 대장 을 바라보았고 크레블린 대장은 황급히 말했다. "어, 어서 시청으로 가시지요. 즉시 시장님께서 여러분들께 격에 맞는 대접을…" "아니오. 나는 여기서 오크들을 보며 생각 좀 해봐야겠소." "아니, 당치도 않습니다! 귀하신 분들을 이런 성벽 위에 모셔두다니오. 어서 내려가셔서 초라하나마 아침 식사부터 하시고…" "아, 우리 꽁무니를 따라온 재앙의 무리를 두고는 밥맛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게다가 우리들만 살자고 떠나버릴 수는 없으니 대책도 강구해야 되겠고. 그러자면 저 친구들을 노려보고 있어야 되지 않겠소?" 카알의 차분한 말에 크레블린 대장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제레인트와 네 리아는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크레블린 대장은 눈에 띄게 허둥대며 말했 다. "아, 그렇군요. 이봐! 누가 가서, 아, 아냐. 내가 직접 가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헬턴트공. 즉각 시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이봐! 그룬!" 그러자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 하나가 일어서며 경례를 붙였다. "예! 대장님." "성벽의 지휘를 맡아라! 난 시장님을 모셔오겠다." "알겠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카알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성벽에서 굴 러떨어져 목뼈를 부러뜨릴 정도의 걸음걸이로 성탑을 향해 달려갔다. 엑 셀핸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어, 우습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막장에서 뼈가 굵은 드워프의 머리로 는 말이야, 어떤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것은 많은 세월동안 그 사 람을 겪어오면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카알은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든 훈장을 장난스러운 동작으로 흔들면서 말했다. "이까짓 번쩍이는 쇳조각 하나에 저렇게 태도가 바뀌는 모습은 보기 언 짢으시겠지요." "정확하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카알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훈장을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박았다. 잠깐, 내 훈장은 어디 놔뒀더라? 잘 기억이 안나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6. 어쨌든 카알은 다시 성벽 바깥을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지혜로워보이고 근엄해 보이는 중년 독서가 옆에서는 작지만 다부진 드워프의 노커가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도끼를 짚은 채 서 있었 다. 그리고 총명해보이는 이마를 가진 젊은 프리스트와 젊은 얼굴에 어 울리지 않는 깊은 그림자를 가진 마법사가 그 옆으로 벌려서서 묵묵히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건장한 두 명의 전사 샌슨과 길 시언이 도열해 있었다. 꽤나 멋진장면이었다. 이스트 그레이드의 새벽, 높은 성벽 위에 지금 전설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군 그래. 괴물 초장이가 끼어들만한 자리를 찾아보다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병사들은 그들의 대장이 놀라서 목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고귀한 인물들과 같은 성벽 위에 있다는 것이 몹시 부담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운차이는 그 모든 사람들과 조금씩 떨어져서는 흉벽 위에 걸터 앉은 채 아래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여기서 가장 긴장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운차이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병사들은 모두 흉 벽 뒤에 웅크리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태평하게 앉아서는 잔치 구경이라도 하듯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때 레니가 조그맣게 기침을 했다. 엣취. 그러자 운차이는 눈살을 찌 푸리더니 내게 말했다. "네리아와 레니에게 여관에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전해줘." "라는군요." 그러자 네리아는 방긋 웃고서는 언제나 그러하듯 운차이를 똑바로 바라 보며 말했다. "흐음. 네가 나 걱정해주니?" 그러자 운차이는 여전히 흉벽 위의 조각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앉 아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리아가 아니라 레니를 걱정하는 거라고 전해줘, 후치." "라는군요." 네리아는 의외로 별 대답을 하지 않고는 대신 생긋 웃으며 레니를 이끌 었다. "가자. 레니.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퍼지고 하는 일은 남자들 몫이라고 생각들 하라지, 뭐." 레니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남자들 일 맞는 거 같은데요." "그런가? 흐음. 그러고보니 나도 좀 조신하게 행동해야 되겠네. 이 여 행이 끝나면 곧 멋진 남편과 아들이 생길 테니까…" 샌슨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까는 왜 굴러떨어질 뻔한 거냐?" "몰라도 돼!" 난 그렇게 고함질러주고나서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알은 관자 놀이를 짚은 채 말했다. "골치 아프군. 아까의 그 편지는 결국 이런 말이잖아. 우리가 더 달아 나면 대신 이 도시를 공격하겠다. 규모가 좀 큰 인질극이군." 카알은 그렇게 머리 아픈 표정을 짓더니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퍼시발군. 저들의 인원이 얼마쯤 되지?" "예. 어두워서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250에서 270 마리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썩 정확하네, 퍼시발군. 고맙네. 휴우… 300 여마리의 오크 라. 록크로스 해변에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대적했던 오크와 같은 숫자로 군." 카알은 그런 식으로 샌슨의 계산을 간단히 확대해버렸다. 샌슨은 어깨 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도시의 경비대와 협조하여 모두 물리치면 어떨까요?" 샌슨의 씩씩무쌍한 제안은 카알의 한숨을 이끌어내었다. "보게, 퍼시발군. 우린 지금 전쟁 놀이를 할 시간이 없네. 그리고 아까 의 경비대장의 모습이라든지 저 경비대원들의 모습을 봐선… 이 도시 전 체를 샅샅이 둘러봐도 저기 아넨드씨보다 더 우수한 전력은 기대하기 어 려울 듯하이. 이 친구들이 우리 영지의 경비대원들의 반만큼이나 활약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네만." 하긴 그렇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지금 성벽 위에 몰려있는 병사들은 활을 들고 있는 허수아비에 비해 딱 한 가지 점에서만 나아보였다. 그들 은 허수아비와는 달리 웅성거릴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불안스 럽게. 길시언은 성벽을 주욱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 도시는 황량한 이스트 그레이드에 위치하니까요. 전쟁이나 재난에 서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따라서 경비대원들의 허리가굵다고 해서 그 바지가 흘러내리지… 미안합니다. 임마! 에, 하지만 성 자체는 그런 대로 견고해보입니다." "예. 그리고 저 오크들이 공성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있을 것 같 지도 않고.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시민들의 불안도 문제고 경 비대원들의 수준도… 튼튼한 성을 만드는 것은 성벽의 두꺼움이 아니라 그 성벽을 지키는 자들의 굳건한 마음이라든가요." "예, 허즐릿의 말이군요. 물론 그 굳건한 마음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었지요."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꽉꽉 들어찬 식량창고와 병기고라지요." 길시언과 그렇게 농담 비슷한 말을 주고받은 다음, 카알은 아프나이델 을 바라보았다. "뭔가 해볼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예?" "대단한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저 이빨이 멋진 친구들의 주의를 좀 끌어보고 싶습니다. 효과는 없어도 좋습니다." "주의를… 끌면 됩니까?" "예. 회담을 좀 가지고 싶습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미리 놀라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싶은데요." 그러자 길시언이 곧장 고개를 돌려 외쳤다. "보시오. 그룬씨라고 했소?"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받았던 그 병사가 경례를 붙이 며 말했다. "그룬 크라이첵 상병입니다." "난 길시언입니다. 지금부터 여기 마법사께서 마법을 쓰실 테니 병사들 로 하여금 당황하지 말도록 지시해주시겠습니까?" "마법이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룬 크라이첵은 즉시 명령을 옆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모두 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꼼짝도 하지 말고 엉덩이를 단단히 고정시켜랏!' 그 명령이 빠르게 옆으로 전달되고나자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숙이고 캐 스팅을 시작했다. 우리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 중 일부는 활을 내려놓을 만큼 놀라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음. 내가 언제부터 마법을 별 경 이감없이 바라보게 되었지?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두 손을 하늘로 들어올 리며 외쳤다. "환타스멀 포스(Phantasmal force)!" 잠시 동안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벽 하늘은 여전히 푸르 스름한 공허로서 존재하였고 쥐죽은 듯 조용한 성벽 위의 침묵도 여전했 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지? 그 때였다. "크롸라라라라!" 거의 뽑을 뻔했다. 거의 바스타드를 뽑아들 뻔했단 말이다. 새벽 하늘 그 어두컴컴한 구름 저 위에서 하늘을 울리게 하는 포효 소리가 울려왔 다. 병사 하나가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입 닥Ф! 존!" 그룬 상병은 이를 악물고 외쳤지만 그 역시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 다. 그리고 잠시 후, 높은 성벽 위에서 바라보느라 훨씬 가깝게 느껴지 는 구름들 사이로 길다랗고 거대한 입(?)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뒤로 길게이어지는 콧등과, 마침내 눈, 그리고 그 위 의 뿔… 그리고 탄탄하면서도 우아하게 휘어진 목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 작했다. "드, 드, 드…!" 병사들은 거의 혼란 상태에 빠졌고 그래서 그룬 상병은 목이 터져라 고 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되었다. 성벽 이곳저곳만이 아니라 우 리 등 뒤의 도시에서도 비명 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꺄아아!"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것은 마치 신의 머리가 내려와 지상의 버러지들을 굽어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목은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 주위의 구름들은 갈갈이 쓺겨져 흩어졌다. 천천히 갈라지던 구름들은 마침내 무 서운 속도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맹렬한 구름의 소용돌이. 그리고 황야에서는 거친 바람소리. 구름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그 목은 계속해 서 내려왔고 마침내 그 목 뒤로 강인한 어깨, 거대한 날개 등이 내려오 기 시작했다. 날개가 나올 때 구름들은 폭발하듯이 파악 쓺겨져 흩어졌 고 소용돌이 자체가 하늘의 모든 공간으로 흩어져버렸다. 구름들이 하늘 의 모든 방향을 향해 날아가버리자 그 거대한 몸이 전부 드러나게 되었 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위용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크롸라라라라!" 그것은 마침내 구름 아래로 내려온 블루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운차이 는 피식 웃었다. "기억력이 좋군. 지골레이드잖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롱소드의 칼자루를 꽉 쥐고 있던 샌슨은 그제서야 이마를 닦았다. 그래. 저것은 지골레이드의 모습이었 다. 다만 아프나이델의 상상력이 보태어져서 터무니없이, 거의 산덩어리 만큼이나 과장되게 표현된 블루 드래곤이었다. 제레인트는 좀 더 잘 보 기 위해 성벽 위로 몸을 불쑥 내밀다가 중심을 잃을 뻔했고 그룬 상병이 그를 붙잡았다. "아, 고맙습니다. 상병님." "처, 천만에요. 프리스트님. 그, 그런데 저것은 환상, 환상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오, 테페리여…" 그러자 제레인트는 반색했다. "테페리를 믿으십니까?" 그룬 상병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신앙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인가 하 는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앞으로 좀 나아가서 황야를 바 라보았다. 황야에서는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크들은 미친듯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거나 무기를 집어던지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용감한 오크들도 몇 마리 보였지만 대개의 경 우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저앉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함성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최고에요! 나의 탑메이지!"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주의를 끈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카알도 저 굉장한 광경에 매혹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잠시 멍한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굉장하군요. 아프나이델." "천만에요.그런데 어떻게 할까요? 아, 물론 저것은 환상이므로 브레스 를 뿜어 오크들을 태우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환상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들킬 확률이 높습니다." 카알과 아프나이델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에도 그룬 상 병은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안정시켜야 했다.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저건 환상이야! 어서 일어나지 못해? 헤이! 너희들 사귀나? 남자 들끼리 껴안고 뭐하는 거야? 어… 자넨 돌아가서 갈아입고 오는 것이 좋 겠군. 괜찮아! 소문내진 않겠네. 이봐! 명령이다! 성벽경비대원 지크가 바지를 적셨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말 머리에 뿔이 날 때까지 군기밀이 야! 괜찮아! 환상이라고. 저기 마법사님께서 만든 환상이야. 오! 정말로 저게 환상일까? 누가 나에게 저건 환상이라고 말해줘!' 길시언과 샌슨도 성벽을 따라 달리며 그를 도와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카알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적시고는 말했다. "음. 내가 말하는대로 말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 그의 목소리는 잊혀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얼마든지 그 목소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후 황야를 온통 뒤덮은 그 지골레이드의 환상은 폭풍 같은 목소리 로 외치게 되었다. "이 쓰레기같은 조그만 놈들!" "으아아아!" 비명 소리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성탑에서 갤러 리로 나오는 계단에서 무릎을 꿇거나 혹은 엎드려 있는 사람들 몇 명이 보였다. 그 중에는 시장님을 모시러 간다고 달려간 크레블린 대장의 모 습도 보였는데 크레블린 대장은 자신의 검을 성벽 아래로 팽개치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려있었다. 우리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 보자 그들은 고개를 들더니 황급히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는 겁니까! 어서 숨어요!" 음. 황당스럽군. 제레인트는 키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눈 앞에 손 가락을 세워서는 익살스럽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계단에 넘어져 있 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제레인트를 보았다. "마법입니다. 걱정 마시고 올라오세요." 그러자 계단에 있던 사람들은 의혹에 쌓인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때 다시 한 번 천공의 지골레이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기특한 녀석들! 크핫하하! 불까지 준비했구나! 그 질긴 고기를 씹기 좋게 구워야겠군!" 아이고, 맙소사.난 못마땅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어깨 를 으쓱이면서 날 바라보았다. "이봐, 네드발군. 너무 세련된 협박을 사용하면 저 친구들이 못알아들 을까봐 그런 거야." "그래도 너무 조야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 옆에선 아프나이델이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잠시 후 지골레이드는 이 렇게 외치게 되었다. "그 냄새나는 몸이 귀하다고 생각되면 즉시 땅에 쓰러져라, 버러지들아 아!" "그것도 별로 세련되진 않아." 길시언은 이렇게 평했지만 어쨌든 오크들 대부분은 그 몸을 땅으로 날 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모두 쓰러져 누운 모습은 마치 거대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쓰러진 오크들이 모두 아무런 상처도 없다는 점이 전쟁터와 는 달랐지만. 그 동안에 계단에 쓰러져있던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올라왔 다. 그들 중 허연 턱수염과 허연 백발이 허연 구렛나룻으로 멋지게 연결 되어 마치 늑대의 갈기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지골 레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거 진짜 가짜입니까?" 진짜 가짜? 가짜 가짜도 있나? 카알은 너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예. 진짜 가짜입니다. 그리고 저는 카알 헬턴트입니다." "아, 보, 본인은 칸 아디움의 시장 카를로스 안티고어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시장님은 우리들 모두가 평온한 얼굴인 것을 보고는 안심하면서 카알과 악수를 나누었다. 카알은 안티고어 시장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시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저 오크들부터 먼저 처 리해야 되겠군요." "아, 예, 부디." 그러자 카알은 다시 아프나이델에게 몸을 돌려서 조용히 속삭였다. 카 알의 속삭임은 지골레이드의 우렁찬 목소리로 증폭되어 황야 곳곳에 울 려퍼졌다. "지금 당장 이 도시에서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도시는 내가 차지할 것이다! 드래곤의 침소에 접근하는 녀석은 두 발 달린 녀석 이든 네 발 달린 녀석이든 가리지 않고 죽이리라!" 그 때 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전설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크들 가운데서도 완전히 미친 오크가 한둘은 나 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오크는 많은 세월이 지나면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워질지 모르는 것이고. 어쨌든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현실은 왠 정신나간 오크 하나가 육중한 글레이브를 들어올리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났 다. 그 오크는 다른 오크들보다 월등히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어 거의 사람만한 녀석이었고 머리엔 새카만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 오크는 온 들판이 올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취이이익! 새빨간 거짓말! 넌 드래곤이 아니야앗! 취이이익!" 농담이 아니다. 비록 가느다랗긴 했지만 성벽 위에 있는 우리들에게까 지 충분히 들려왔다. 저 오크가 서있는 장소와 성벽까지는 직선 거리로 1,200 큐빗 정도 되는 것 같으며, 따라서 저 오크 녀석은 의심할 여지없 이 괴물이다. 곧이어 그 정신나간 오크의 어깨는 부풀어 터져버릴 듯이 팽창했다. "맙소사!" 엑셀핸드의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오크는 온힘을 모아서 공중의 지 골레이드를 향해 글레이브를 투척했다. 그 어떤 영웅이라도, 설령 루트 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중의 라인버그가 내 OPG를 끼고 던지더라도 저 높이의 드래곤에게 던질 수 있는 의문이다. 높이는 둘째치고 눈 앞을 완 전히 가로막아버리는 저 위용에 짓눌려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하 지만 저 검은 투구의 오크는 그렇게 했다! 글레이브의 쇠창날이 검은 들 판을 배경으로 번뜩였다. 쐐애애애액! 섬광처럼 날아간 글레이브는 그대로 지골레이드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물론 지골레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글레이브는 허공을 날아서는 요 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쟁그렁! 잠시 후 공중에 떠있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환상은 사라지는 법. 땅에 쓰러져있던 오크들 은 천천히, 하지만 맹렬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황야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환성이 들려왔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무슨 말인지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두들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 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취이이익! 취익, 취이익!" 하는 소리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카알은 씁쓸한 얼굴이 되어 아래를 내 려다보았고 아프나이델 역시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그 소란스러운 환성 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검은 투구의 오크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크우우우우! 크아아아아!" "녀석들, 기분 좋겠군." 제레인트는 아주 단순한 즐거움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크가 기분 좋으니 자신도 기분좋다는 식으로. 그래서 샌슨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입매를 씰룩거렸다.그런데 그 검은 투구의 오크가 다시 고함을 지른 순 간 샌슨의 입술은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아프나이델 의 마법이 깨진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검은 투구의 오크의 고함소 리는 퍽 작았지만 여전히 확실히 들렸다. "취잇취이이익! 화렌차와! 오크의 친구인 성자 핸드레이크가 나를 돌보 신다! 취익! 지저분한 속임수 따위, 치워랏! 취이이이익! 내려와서 칼과 칼로써, 피와 피로써 싸우자앗! 취이이익!"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7. "샌슨." "응?" "내가 들은 말을 샌슨도 들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정신이 이상한 사 람은 나 하나로 족해." "…미안해. 나도 들었어." "그럼 우리 둘 다 정신이 이상한 거로군?" "그런 것 같아. 사실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샌슨과 내가 이런 넋빠진 소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카알은 성벽 바깥으 로 투신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맹렬히 앞으로 달려갔다. 카알은 성 벽 위로 상빈신을 거의 다 내밀고는 오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앞으로 달려갔던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프나이델! 내 목소리가 저기까지 울리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아니오. 지금 그런 마법은 없습니다." "이런! 어디 보자. 저 친구를 여기로 불러들이려면…" 그 때 운차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카알에게 말했 다. "할 말이 있습니까?" "예? 아, 예. 저 오크 친구가 지금 핸드레이크의 이름을 거론…" 운차이는 카알의 이야기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전해주지요. 뭐라고 물어볼까요." "예?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저 친구가 말한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인지 좀 물어봐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는 가볍게 날아오르더니 곧 흉벽 위에 섰다. 운차이는 크 게 숨을 들이키면서 두 팔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자세를 취했다. 안티고어 시장은 불편한 얼굴이 되어 카알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헬턴트공. 이곳의 책임자는 나인 줄 알았는데." 흐음. 조금전 지골레이드가 있을 때만 해도 카알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다는 식으로 행동하시더니. 난 불쾌한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카 알은 점잖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이 질문만 좀 하도록 허락해 주십 시오. 부탁입니다. 전 다른 병사들이나 이 도시의 지휘체계에 대해 간섭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전사는 제 동료이고 제 부탁에 의해 오크들에 게 질문하는 것이니…" "하지만 당신은 우리 도시의 손님이고 주인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당연 하지 않소! 더우기 전시상황인 도시 내에서라면 말이오." 안티고어 시장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운차이는 안티고 어 시장의 이야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 더니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봐아! 오크들아아아!"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뭐라고 말하려던 입을 그 대로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허, 허어어…억." "아이고, 내 귀!" 엑셀핸드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서 물러났다. 엑셀핸드는 귀가 퍽 민감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시장과 다른 수행원들, 그리고 라스 대장 역시 얼굴을 찡그리 며 좌우로 물러났다. 성벽 위라서 뒤로는 물러날 수 없었으니까. 두 손 으로 귀를 막으며 물러나면서도 미소를 떠올리는 카알의 얼굴이 보였다. 운차이가 그렇게 성벽이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저 아래에서 오크 들의 소란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놈이 고함을 질렀다. "취이엑! 노린내나는 인간!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냐아앗!" 미약하지만 정확한 목소리. 샌슨은 기막힌 얼굴로 말했다. "웃기는 일이군. 1200 큐빗 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다니. 게다 가 더 웃기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야." 샌슨은 투덜거렸지만 난 이것이 좋은 노래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짙푸른 새벽 하늘, 광막한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 그리고 운차 이는 푸른 새벽 하늘을 머리에 이고 흉벽 위에 당당히 서서 고함을 지르 고 있는 것이다.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휘휘 젖더니 다시 뭐라고 말하 려 했지만 그 때 운차이는 다시 외쳤다. "오크의 친구, 성자 핸드레이크가 무슨 뜻이냐아아!" "네 이놈! 취이이익! 그 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이냐아앗!"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마음대로다! 대답햇! 네가 말하는…" 그 때였다. 안티고어 시장은 자꾸 자신의 말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해 짜증이 난 것처럼 운차이의 허리를 붙잡아 아래로 잡아당겼다. 운차이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안전하게 뛰어내렸지만 노한 얼굴이 되어 거칠게 시장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자 시장 역시 몸을 긴장시키며 방어자세를 취했고 그의 수행원들이 재빨리 시장의 주위를 둘러쌌다. 운차이는 손을 칼자루로 가져갈 듯했지만 다시 손을 내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무슨 짓이오?" 시장은 잠시 숨이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시장님. 운차이의 눈 을 똑바로 들여보았군요? 시장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얼굴 을 떨구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카알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헬턴트공." "예. 시장님?" "당신도 지각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 을 것이오. 저 목청 좋은 작자가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 록 저런 이야기를 해대는 것 말이오!" "예? 아니,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이런, 제기랄!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가장 소중한 뿌리이자 긍지요! 그의 이야기에 오크 따위가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오. 아시겠소? 지금까지 오간 이야기만 해도 도대체 무 슨 소문이 퍼질지 모르겠구만 그래." 카알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안티고어 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희귀한 종류의 인간을 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딱 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두 분의 이야기는 모든 종류의 의혹과 불쾌한 시선에 대해 보호받 아야 된다, 이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소! 이 나라는 지금 전시오. 온국민이 단결해야 되는 시점 이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전설은 그러한 단결의 근간이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데 저 오크 따위가 오크의 친구 핸드레이크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다는 말이 퍼져보시오. 어처구 니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핸드레이크가 오크들과 뒷거래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먼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뭐요? 웃기지 마시오!" "웃기는지 아닌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정말 핸드레이크가 오크의 친구였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시장님도 아시겠지만 핸드레이크에 대한 믿 을만한 기록은 드물지요. 그리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전 여기 있는 누 구보다도 핸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 의 여행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 저도 저 이야 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이면 어쩌시겠습니 까?" "그런 사실은 필요없소!" "예?" "사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소. 알아야할 사실과 알 필요가 없는 사 실, 아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사실 말이오! 어린 아이에게 독극물의 지식을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 것 아니오?" 주위의 사람들은모두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저 멀 리 오크들이 내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카알 과 안티고어 시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눈에는 그것은 두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인간형의 대립처럼 보였다. 한쪽은 국가나 역 사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진실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 카알은 수많은 인 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라는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만 족시킬 차가운 진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과거의 모 든 것을, 설령 거짓과 가식을 동원해서라도 소중히 지키려는 사람. 안티 고어 시장은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바이서스에 커다란 애정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정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부정하고 무시해도 상관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누가 올바른 거지? 그러나 카알은 곧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안티고어 시장님. 사죄하겠습니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전을 주고받느라 상 당히 긴장했던 모양인지 어깨를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는 헛기침을 좀 하고나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도시에 들러주신 이상 나는 이곳의 주인으로서 여러분 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러분들의 안전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다하겠 소. 여러분들이 위험한 이곳에 계실 필요는 없으니 시청으로 가시지요." "저 오크들은 저희들의 뒤를 쫓아온 것입니다. 저희들도 책임을 져야겠 지요." "걱정마시오. 칸 아디움의 성벽을 믿으시고 그 경비대의 힘을 믿으십시 오. 우리들이 친구이자 동포로서 여러분들의 어려움을 돕도록 해주시 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카알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별 의견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 곳에서 오크들을 더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성벽에 남게 되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티고어 시장의 뒤를 따라 성벽을 내려갔다. 흐음. 시청에서의 아침 식사와 식후의 차 한 잔이 기대되는군. 국왕 전하를 친견하고 거기에 덧붙여 직접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은 몰랐어. 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엑셀핸 드의 말마따나 후치 네드발이란 인물에 대한 존경심은 날 오랫동안 사귀 어보고 난 다음에 표현해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지금 우리들은 따스한 아침 식사를 대접받고 거기에 덧붙여 시 청의 시장님 사무실에 모여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사무실은 대단 한 특징은 없이 그저 공무원의 사무실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테이블 상석에 앉은 안티고어 시장께서는 자못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우 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참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네드발군. 전하를 친견했을 때의 기분이 어땠나?" 뭐라고 대답하지? 훈장수역식의 기억이라고는 장엄의 홀인지 뭔지, 가 운데 걸어가는 사람 무진장 애먹이는 그런 장소, 지독하게 졸리는 문서 봉독자의 화려취미의 미사여구, 훈장을 받게 되었을 때는 정말 기뻤지.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면서. "어, 서툰 표현으로 그 감동을 함부로 표현하고 싶지 않군요." 이 정도면 내 혀에 대한 칭찬도 아깝지 않지. 핫하하! 엑셀핸드는 너 그 때 반쯤 졸고 있지 않았느냐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뻔뻔스 럽게 무시했다. 길시언은 그런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카알은 커피 - 그렇다, 커피! 그것이 이 도시에도 있었던 것이다. 안티 고어 시장의 기호품인 모양인데 그는 카알이 커피를 마신다고 하자 퍽 좋아했다. 음. 나라도 내가 저런 괴상한 음식을 좋아한다면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쁠 거야. - 를 한 모금 삼킨 다음 찻잔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시장님.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커피맛은 퍽 좋군 요. 하지만 전운이 감도는 도시에서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그 향취에 깊 이 빠져들 수가 없군요." 성 밖에선 충만한 살의를 불태우는 오크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어서야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속뜻이 담겨있 지요, 카알? 그러나 안티고어 시장은 카알과의 언외언 문답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는 푸근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아, 불안을 떨치십시오, 헬턴트공. (카알은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여러분들이 저 흉악한 오크들에게 쫓기면서 심신이 많이 피로해지셨을 줄은 익히 짐작합니다. 이제 나의 도시에서 그 피로를 잊으시고 심신의 활력을 되찾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보다 충만한 여행이 되도록 대 비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더없이 감사한 말씀입니다. 시장님." 높은 의자 위에서 체면 떨어지게시리 다리를 흔들고 있던 엑셀핸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보시오. 시장. 여기 계속 있어도 되겠소?" 엑셀핸드의 보다 직접적인 말에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했다. 그러자 아 프나이델이 재빨리 말했다. "아, 엑셀핸드님께서는 시장님께서 저희들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 하시지 않으실까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밖에선 병사들이 시장님의 지휘 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얀 턱수염을 쓸어 내리면서 말했다. "염려마시오. 오크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바에야 저 단단한 성벽을 어떻게 하겠소?"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는 그렇게 눈을 감 은 채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록크로스 해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뭐라고?" 안티고어 시장은 다시 당황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팔짱을 끼고 있느라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여유있게 말했 다. 눈은 계속 감은 채로. "록크로스 해변에서 300여 마리의 오크들을 대적했던 루트에리노 대왕 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해변이지요. 성벽같은 것은 눈을 씻 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 때 루트에리노 대왕이 의지했던 것은 굳건한 성벽이 아니라 핸드레이크라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과 자신의 굳건한 우정이었습니다." 안티고어 시장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물론 그렇지. 길시언군.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덧붙여 굳건한 성 벽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길시언은 김빠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문득 길시언이 바로 길시언 바이서스, 국왕 전하의 형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 올렸다. 그런데 길시언은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지? 길시언이 자 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일행들도 모두 암묵 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긴 우리가 국왕전하께 칭호를 받은 명예 의 기사라는 이야기만 듣고도 라스 대장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로 놀 랐었다. 만일 길시언이 왕자라는 사실까지 밝힌다면? 음. 귀찮은 일이 되겠군. 결국 샌슨이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 시장님. 그럼 우리들은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되는 겁니까?" "어? 어. 그렇소, 퍼시발공."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왕자인 길시언 바이서스는 길시언군이고 우 리 고향의 경비대장, 성밖 물레방앗간의 처녀에게 코를 꿰인 샌슨 퍼시 발은 퍼시발공인가? 길시언을 훔쳐보자 그는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샌슨 역시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꾹 참고서 말했다. "그럼 친절한 대접에 감사를 표한 다음 이만 떠나고 싶군요. 저희들의 여정이 몹시 바빠서요." 샌슨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해버렸다. 카알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늦었다. 안티고어 시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아, 그런가? 이런. 여러분들의 급한 여정이 나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 되겠지. 헬턴트공. 혹시 여정에 필요한 물자나 기타 등등이 있으면 말씀 해보시오. 내 손 닿는 것이면 모두 다 준비해드리리다." 카알은 한숨을 쉬고나서 말했다. "아니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여정이 그렇게 급하지는 않습니다. 퍼시발군. 우리 때문에 곤경에 처한 도시를 뒤로 하고 우리가 어떻게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시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도시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퍼시발군." 샌슨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평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자 안티고 어 시장은 다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런. 퍼시발공의 말씀이옳소, 헬턴트공. 칸 아디움에 대해서 는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아니, 여러분들의 여정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저 오크들은 우리가 처리해드리지요." 아이고 맙소사. 그거 정말 감사한 말씀이군요. 더이상 우리들을 쫓지 못하게 해주신다고? 저 녀석들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 요, 시장 나으리. 헷! 카알은 안티고어 시장에게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도의상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오크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책임을 져야지요." "오, 천만에요.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고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안티고어 시장은 그렇게 웃었고 카알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참 이상 한 시장님이군. 밖에 300 마리 쯤 되는 오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것이 당연할 텐데 외려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거절하다니. 호탕하게 보이고 싶은가 보지? 샌슨은 입맛을 다시 고는 말했다. "시장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 호의를 받아들이시지요, 카알?" 카알은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며 유유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카알이 다시 안티고어 시장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 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8.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달려들어와서는 시장에게 경례를 붙이고 잠시 우 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티고어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들 에게 실례한다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안티고어 시장이 밖으로 나가자 카알은 곧장 샌슨을 노려보기 시작했 다. 샌슨은 그 눈길을 회피하려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시장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마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를 재현해보고 싶은 모양인데요. 칸 아디움 성에서 안티고어 시장과 300 오 크의 혈전." "그래서? 그냥 이 도시에 맡겨두고 달아나버리자는 말인가?" "시장은 그러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난 안티고어 시장에겐 관심없네.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저 밖의 오크들은 바로 우리들을 쫓아온 것인데 그때문에 이 도 시의 시민들이 불행한 사건을 겪게 만들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손들고 나간다고 해서 오크들이 물러날 리는 없습니다." 카알은 샌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샌슨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 명해나갔다. "저 놈들이 저만큼 조직화된 바에야 뭔가를 얻기 전에는 흩어지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는 어차피 구실일 겁니다. 아마도 노리는 것 은 겨울식량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정말 우리를 노리는 거라면 이런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 일입니다. 우리를 앞질러 간 다음 적 당한 곳에서 매복한 다음 기습하는 것이 낫지요." 샌슨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우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옳은 말일세. 퍼시발군. 아마도 우리를 쫓던 오크들이 이 근방의 오크들을 규합한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겨울식량을 위해 노략질을 준비 하던 오크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가든 말든 오크들은 여기를 공격할 거란 말입니다. 우리를 불러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성에 있으면 귀찮 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닐까요?" "귀찮다고?" 샌슨은 나와 운차이를 힐끗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괴물 초장이와 괴물 눈알의 위명은 오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니까 요." 이거 자랑스러워 해야 되나? 카알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난 오크들에게로 나가겠다고 말한 적 없네. 저 녀석들의 편지를 그대 로믿고 밖으로 나가면서 '우리가 나왔으니 이 도시는 공격하지 않으시 겠지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네. 저 친구들의 게획이 자네 가 말한대로일 거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최소한 저만큼이나 모였으니 한 번 휩쓸어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 것은 어느 부대의 지휘자라도 아쉬 울 거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네." "됐네요! 그럼 우리는 책임감을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도시 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시장은 우리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습니까? 카 알이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입니다." "도움을 줄필요가 있다면 상대가 뭐라고 하든 도와야지! 어린애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어린애가 싫어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듯이." 샌슨은 입을 다물고 다시 불평불만이 가득한 헬턴트 남자의 표정을 지 었다. 헬턴트 남자들은 스스로를 던져 스스로의 도시를 지키는 법이지. 아무래도 나 역시 불평 섞인 표정을 짓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카 알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환상이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아니, 아프나이델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요. 그 검은 투구의 오크는 완전히 괴물이었습니다. 그런 용맹한 오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 까."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제레인트와 네리아, 그리고 레니가 나타났 다. 제레인트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서는 흥분해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 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굉장하더군요." "예?" "녀석들이 공성추를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고, 공성추요?" 제레인트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곧 마구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예. 황야 저편에서 오크들이 거대한 나무를 운반해오고 있습니다. 이 근처 어디에도 나무 같은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세 피아파인 고개에서 무리를 두 개로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두 무리는 이 도시로 진격하고 후방부대는 나무를 해서 끌고온 모양입니다. 지름이 4, 5 큐빗은 될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인데 녀석들이 거기에 십 자형으로 나무 두 개를 묶어서 바퀴축까지 만들었더군요. 아, 바퀴는 둥 근 방패 여러 장을 겹친 다음 가운데 구멍을 뚫어 만들었습니다. 오싹하 고 멋지더군요." 제레인트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일이 아니냐는 듯이 신나게 설 명했고 그러자 카알은 이마를 딱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오, 맙소사. 퍼시발군. 자네에게 경의를 표해야 되겠군. 자네 말이 맞 았네. 아무래도 놈들은 제대로 결심하고 온 모양이군." "예? 무슨 말입니까?" 제레인트는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카알은 저 놈들이 우리 이야기를 하 는 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이 도시에 대한 노략질일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이나 아넨드씨도 그렇 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요?" "예. 후방 부대는 수레나 짐꾸러미 같은 것에다 기치 같은 것도 몇 개 들고 왔더군요. 크레블린 대장이 낙담한 어투로 설명해주길 선두를 맡은 부대는 빠른 이동을 위해 무기만 들고 돌격해온 것이며 후방부대가 식량 이나 기타 지원물품을 가지고 이제 도착한 거랍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온 것이며 그렇다면 놈들의 목적은 우리 일행이 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요. 음. 후방부대의 수는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예에. 전 숫자를 세는 데는 자신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선두부대와 거의 같은 숫자인 것 같습니다." 카알은 얼굴이 노랗게 바뀌었다. 샌슨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전 시장님께 찾아온 병사가 무슨 소식을 전했는지 짐작하겠군요." 카알은 자신의 심정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망할…" 칸 아디움의 시내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날은 이미 밝았지만 짙은 구름 때문에 태양은 따스함이란 전혀 없는 동그란 구슬이 되어 있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흉흉한 느낌을 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는지 모 르면서 목이 터져라 우는 꼬마, 이리저리 부산하게 달려가는 병사와 사 내들, 왜 모두들 고함을 지르며 달리는 것일까. 그리고 집안으로 뛰어들 어가는 아낙네들과 그 아낙네들에게 귀를 붙잡힌 채 끌려가는 머리가 좀 굵은 사내아이들. 사내아이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엄마는 항상 재미있는 것은 못하게 해!' 하는 식의 말을 외치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잔칫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뿐인 것 같다. 제 레인트는 코를 쓱 닦으며 말했다. "흐음.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 같군요." "당신은 불안하지 않소? 이방인이라서?" 길시언의 질문에 제레인트는 어깨를으쓱였다. "모든 것이 테페리의 뜻대로. 전 여기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떠날 필 요를 느끼기 힘들군요." "예?" 우리 일행은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크게 놀란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 남겠다는 말입니까?" "예. 떠나야할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레니양의 호송은 시급한 일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성벽은 안전하다. 그리고 내가 있어봐 야 오크들과의 전쟁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성벽 위에 서서 이런 이 유들을 차분히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떠나고 싶지 않군요. 그리 고 저는 이런 마음이 언제 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테페리의 뜻이군요." "예! 그리고 테페리의 뜻을 따르는 것이므로, 전 불안하지 않군요." 나도 테페리의 신자가 되어볼까? 어느 때라도 불안감은 없을 것 같은 데.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마디만 하지요." 우리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자들이며 서 로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세레니얼양이 자의로 떠난것은잘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를 강제할 아무런 권한도 없는 집단이지요. 물론 그랜드스톰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 들은 그 책임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만, 전 지금 그 책임을 잠시 잊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전 다른 사람이 저에게 부 여한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군요."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임무를 이행하지 못한다고요? 일스 공국의 사절건 말씀입니까?" "예. 그리고 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지금갈색산맥을 향해 달려가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도시의 위험을 수수 방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카알 아저씨는 멋져요! 이대로 달아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 데. 이 도시의 시장님도 우리들보고 가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미혼이시 죠? 어떻게 아직 미혼이세요?" 네리아의 이상한 질문에 우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카알은 머쓱한 표 정으로 말했다. "여성분들의 안목이 정확한 때문이겠지요. 아,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 야기를 좀 하지요. 우리 책임도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 니다만, 갈색산맥으로 갈 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무리를 나누자는 말씀입니까?" 길시언의 질문에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먼저 여러분들의 찬성이 있어야겠지만, 여러분들이 찬성한다면 저로선 우리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한 무리는 이 도시를 돕고 다른 무리는 레니양을 갈색산맥으로 데리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나쁜 의견처럼 들리지는 않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손바닥에 침을 퇘 뱉더니 도끼자루를 힘있게 쥐어보 였다. "난 이곳에 남지! 오크놈들의 머리가 600 개야. 골라가면서 벨 수 있겠 군."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미소는 난처한 표정으로 바 뀌었다. 엑셀핸드를 필두로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남겠다고 말해버 린 것이다. 그 각자의 이유를 들어보자. "이미 말했죠? 테페리의 뜻대로. 제가 신의 뜻을 거부해야 될 만한 이 유가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아, 그런 이유야 없지요." "미력한 마법이지만 엑셀핸드님을 돕고 싶습니다. 아, 저, 물론 전 풋 내기 마법사이고 풋내기 마법사가 감히 전쟁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고 는…" "아닙니다. 누가 아프나이델씨가 풋내기 마법사라고 그러겠습니까. 아 까 지골레이드의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지요." "프림 블레이드는 무기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품… 칵! 무기입니다. 뭐 야! 네가 무기가 아니고 그럼 뭐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어, 흠! 어쨌 든 무기가 있을 곳은 적이 있는 곳입니다."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헬턴트 전권대리인을 보호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카알 곁에 있겠 습니다." "퍼시발군. 그건…" "어? 샌슨. 내 임무와 같네?" "…네드발군." "장래의 아들을 돌봐야 돼요." "예?" 난 까무러치는 표정을 지었고 카알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네리아와 날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아직까지 대답을 하지 않은 운차이를 돌아보았지만 곧 시선을 되돌렸다. 운차이는 조용히 검을 뽑아들고서 햇빛에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알은 시무룩한 얼굴 로 레니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레니는 토끼 같은 눈이 되어서는 말했다. "저 혼자 가요? 길도 몰라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레니양." 카알은 두 팔을 축 늘어트렸고 우리들은 모두웃었다. 길시언은 미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여행자이며 서로가 서로를 간섭할 수 없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카알?" 카알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600 마리의 오크들을 처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에 대해 논의해봅시다." 작전명은 그랬다. 오크 600 마리 최단시간 격파작전. 독창성이나 참신 함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작전명은 그렇게 정해졌고 그 누 구에 의해서도 불리워지지 않은 채 사장되어버렸다. 그 작전의 수행인원을 보자면, 먼저 자칭 독서가, 타칭 독서가를빙자 한 독설가 카알 헬턴트가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내가 왜 독설가인가, 네드발군?" "진짜 독설가는 독설을 내뱉을 때도 전혀 독설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법이라고 전에 가르쳐줬지요?" "별로 할 말 없네." 그리고 작전인원을 보자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착각될 수 있는 오우 거, 마법검에 시달리면서도 그 성능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전사, 신의 뜻에 따라 교수대에 목이 매이면서도 웃어버릴 성직자, 실제로 교수대에 걸릴 뻔했지만 다행히 풀려난 자이펀 간첩, 면도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예리한 도끼를 시도 때도 없이 휘둘러대는 드워프에, 아들 딸린 홀아비 를 노리고 있는 시집가고 싶어하는 처녀가 하나요, 그리고… "후치. 탑메이지가 어쩌니 하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줘." "스스로가 거부하는 칭호를 받게 될 불운한 마법사." "…젠장." "난 뭐니, 후치야?" "그 모든 인원들이 애정과 헌신으로 보호하는 항구의 소녀." "호호호." "이렇게 화려한 인원이라고요, 카알.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지 금 어느 때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 화려한 인명록은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600마리의 오크를 처리할 수 있 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카알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어투가 갈수록 화려취미에 물드는 것 같군." "지금 내 어투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럼 중요한 문제를 풀어보세나.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먼 저 작전 지휘소를 찾아야되겠군. 그런데 이 도시의 작전 지휘소는 도대 체 어디 있는 거야?" "아직 설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저기 크레블린 대장이 있군요."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9. 샌슨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갤러리 저편에서 병사들에게 뭔가를 말하 는 크레블린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다가왔다. "칸 아디움의 성벽 위에 몰려 있는 이 화려한 인원에게로, 지금 칸 아 디움의 안보와 번영할 내일을 담보하는 막중한 책무에 시달리는 전사 라 스 크레블린이 황급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만해!" 나는 샌슨에게 쥐어박힌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크레블린 대장을 맞이하 게 되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기엔 왠 일이십니까? 헬턴트공?" "카알이라고 불러요. 전황은 어떻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 바깥을 가리켰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녀석들의 1차 돌격은 사수들의 공격으로 격퇴 시켰지만 놈들의 인원은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난 아래의 황야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선 레니가 가쁜 숨을 쉬고 있었 다. "어머나…" 황야에는 곳곳에 오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숫자는 아니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황야에 점점이 흩어져있는 시체라서 보기에 끔찍했다. 그리고 나머지 오크들은 화살 거리 바깥에 장방형 진을 친 채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레인트의 말대로 오크들의 숫자는 2배로 불 어나 있었으며 그 중간중간에 바람을 받아 펄럭거리는 깃발의 모습도 보 였다. 깃발에 무슨 그림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분나쁜 붉은 색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제레인트가 말하던 공성추의 모습 도 보였다. 그것은 똑바로 성문을 향한 채 놓여있었는데 굵은 통나무를 통째로 잘라 만든 것이었으며 오크들이 끌고 다닌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 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샌슨은 그 광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성추는 오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수레바퀴 자국은 보이지 않는데 요." "그렇소. 조금 전의 돌격은 그저 인사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 방패를 머리에 이고 돌격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들의 신경을 자극시켜 지 치게 만들고 싶은 모양입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면 화살을 낭비시키고 싶은 것이겠군요." "그래요." "돌이나 끓는 기름 등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얼빠진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닦으며 말 했다. "아니,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 하지만 저기엔…" 길시언이 가리킨 것은 흉벽 아래쪽과 갤러리가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투석구였다. 음. 그러고보니 정말 도시의 외벽치고는 굉장한 규모로군. 갤러리에 투석구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크레블린 대장은 길시언의 손을 따라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저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저기엔 투석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요?"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얼굴을 붉혔다. "저게 투석구입니까? 난 빗물 빠지는 구멍인 줄 알았습니다." 오, 맙소사. 빗물 빠지는 구멍이라고? 저렇게 커다란 구멍이? 길시언은 기막힌 얼굴이 되었고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여보시오. 이곳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도시란 말입니다. 솔 직히 말해서 난 지금 내 지위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생각을 완전히 잊고 있단 말이오. 우리 경비대원들은 그저 술주정뱅이들의 싸움이나 시장에 서 상인들의 자리 싸움, 아니면 가장 위험한 싸움인 부부싸움을 말리는 존재였지 도시를 향해 처들어오는 오크 부대를 막아내는 사람들이 아니 었소." 길시언은 동정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퍽 정연한 모습이군요. 사수들의 배치도 훌륭하 고." "그래요? 아넨드가 들으면 굉장히 잘난 체를 하겠군. 지금 아넨드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지요. 놈은 그래도 우리들 중 전쟁을 겪었던 녀석이고 아마도 유일한 전쟁 전문가일 거요." 그러자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한 일이군요. 저, 우리들도 여러분을 돕고 싶습니다만. 우리들은 전쟁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지요. 더군다나 저 오크들은 우리들을 쫓아온 것이니 우리들로 서는 당연히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러자 크레블린 대장은 환한 얼굴이 되었다. "아, 정말 도와주시겠습니까?" "새벽에는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 때의 무례함은 다시 한 번 사과를…" "아니오. 괜찮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두고, 오크들을 물리칠 방 도나 연구하지요.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셨으니 화살 보유량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크레블린대장은 당장 처량한 얼굴이 되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일원화된 지휘체계, 부대간 유기적 연 결로, 하다못해 보급 계획도 제대로 서 있지 않다. 사수들은 자신들이 언제 교대할 수 있는지 모르고 활이 없는 경비대원들은 어디에 집결해서 뭘 준비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비대원들이 밥을 먹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될 정도인 것이다. 카알은 한숨 을 쉬었다. 아넨드씨는 멋진 배치를 이루어 오크들의 급습을 대비할 정 도까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던 것이다. "이건 너무 심하군. 시장님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답니까?" "나도 그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크레블린 대장님. 절 당신의 임시 고문 으로 좀 삼아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카알은 곧 부리나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명령이 너무 빨라서 내가 그의 임시 사서가 되어서 종이에 목록을 적은 다음 줄을 긋게 되었다. 카알의 명령에 따라 정신없이 오가던 활없는 경비대원들은 경비대 건물 에서 솥과 식량부대, 취사도구들을 옮겨왔다. 그것들은 성문에 가장 가 까운 건물 하나를 징발하여 설치되었으며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성안의 아낙네들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잠시 후 칸 아디움에서 가장 용감한 아 주머니들이 몰려와서 구수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 카알은 그 냄새를 맡으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전략적 거점은 결국 성벽 주위가 된다. 이 도시 바깥의 지형은 극히 평탄하고 경비대원들의 무장은 빈약하므로 성밖에서의 전투는 절대 불가 능하다. 따라서 성 안쪽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한다." 카알의 지시에 따라 경비대원들은 성문 안쪽에 옹성(壅城), 혹은 방책 이라 불릴만한 것을 설치했다. 음.우리 헬턴트성에도 저런 것이 있다. 헬턴트성의 옹성은 성문 바깥에 있고 돌과 목책으로 된 훌륭한 건조물이 었지만 칸 아디움의 옹성은 건초수레와 물통, 가구 등으로 만들어진 볼 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에 의해 성문이 돌파당할 경우, 성안쪽 으로 진입하게 되는 오크들은 옹성 너머에서 공격하는 경비대원들의 창 에 적지않게 당하게 될 것이다. 카알은 활을 쏠 줄 모르는 경비대원들로 하여금 창을 들고 옹성 뒤쪽에 포진하게 했다. 그 옹성을 구축하는 동안 나는 수레를 밀어붙이고 물통들을 걷어차고 가구를 집어던져 쌓아올렸으 며, 칸 아디움의 경비대원들은 서부에서 온 괴물 후치 네드발에 대한 소 문을 만들어내었다. 으으. 어쩌면 수십년쯤 지나고나면 '우리들의 도시 가 바람 앞의 양초처럼 위급한 시기에 빠졌을 때, 이 도시를 구하기 위 해 서풍을 타고 날아온 괴물 초장이 후치 네드발…' 어쩌고 하는 이야기 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카알은 가장 우수한 사수 몇 명을 골라서 성탑 윗쪽의 원총안에 배치시켰다. 라스 크레블린 대장이 원총안을 가리켜 쓸데없이 좁은 창문 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하자. "여러분들은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크들이 달려온 다고 해서 화살을 쏘아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노릴 대상은 이렇습니 다. 첫째, 가장 크게 고함을 지르는 녀석들. 둘째, 깃발을 든 녀석들. 그 녀석들이 중요합니다. 가장 무서워보이는 녀석을 고를 필요는 없습니 다. 따라서 그 외에 다른 녀석들은 달려오든 말든 내버려두십시오." 사수들 중에 하나가 질문했다. "왜 그 녀석들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녀석들이 전체의 사기를 좌우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당신들은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그런 녀석들이 사격권 안에 들어오면 자의에 따라 사격하시오." 정선된 사수들은 성탑으로 올라갔다. 사수의 총수는 50 여명. 그리고 100명 쯤 되는 경비대원들이 성안쪽의 방책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게 되 었다. 모든 배치가 끝나자 우리 일행과 라스 크레블린 대장, 그리고 아넨드씨 는 성문 위의 성루에 모였다. 카알은 성루 너머로 오크들을 바라보며 말 했다. "150대 600이라. 공성전의 이상적인 비율이군." "이상적인 비율이라고요?" "성은 세 사람의 몫을 한다고 하지. 허즐릿이 말한 이상적인 성의 요건 을 기억하는가? "어… 수직적으로 높을 것, 수평적으로 좁을 것, 그리고 자급자족이지 요?" "그래. 이 성은 수직적으로 50 큐빗쯤 되겠군. 충분한 높이야. 그리고 바깥의 길이 대책없이 좁아." "잠깐만요! 저렇게 넓은 황야인데 좁다니오?" "녀석들은 사다리가 없어. 설사 사다리가 있다고해도 오크들이 사다리 를 타고 올라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 따라서 몰려올 곳은 성문뿐 이야." "아, 예." "그리고 자급자족은 되었으니, 따라서 이 성은 세 사람의 몫은 하고 있 지 않은가. 거기다가 병사들이 150명. 계산이 나오는가?" "나오네요. 오크와 이 도시는 현재 막상막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이상적이라는 거야. 하지만 칸 아디움쪽에 더 승산이 있지. 사 람들이나 오크들은 지칠 수 있지만 성벽은 지치지 않으니까." "하지만 화살은 어떻게 하지요? 지금부터 열심히 만들까요?" "그건 곤란하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받아쓰게. 아, 알아보기 쉽 게 써야 되네." 성루 위에는 테이블과 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의자에 앉아서 글 을 쓸 준비를 갖추자 카알은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썩어빠진 이빨과 냄새나는 콧구멍에 경의를 표하며. 사랑과 우정으 로서 조언하는데 너희들이 이 성을 공격한다면 너희들 중 단 한 놈도 너 희들의 지저분한 동굴로 돌아가지 못한다. 안쓰고 뭐하는가?"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쓰라고요? 킥, 킬킬킬." "물론이지. 그러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오크 가죽이나 오크 고기의 유 익한 이용법을 알지 못하므로 파리들이나 즐거워할 오크 시체 더미를 만 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살아있을 적에도 냄새를 풍기는 너희들이 죽고 나면 얼마나 지독한 냄새를 풍길지 잘 안다. 따라서 괜히 이곳에 돌격하 여 죽어넘어지지 마라. 불쾌하다. 이 편지를 받는 즉시 달아나라. 그대 의 벗이." "오크들의 눈이 뒤집히게 만들고 싶으신 거에요?" "난 평소에도 저 작은 눈이 뒤집힐 수 있는지 궁금했다네." 난 카알이 불러준 말을 적당히 각색해서 더 심각한 말로 만들어내었다. 길시언은 내가 쓴 글을 읽어보더니 폭소를 터뜨렸고 엑셀핸드의 경우엔 똑같은 글을 몇 장 더 쓰라고 간청했다. 자신의 집 거실 벽에 걸어두고 싶은 명문이라는 것이었다.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카알 을 바라보았다. "보시오, 카알. 오크들을 도발해서 어쩌시려는 생각이오?" "저 녀석들이 우리의 화살을 소모시키기 전에 먼저 우리가 저 녀석들의 인원을 소모시킬 생각입니다." "놈들이 이 편지를 보고서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무턱대고 돌격해오기 를 바란단 말이오? 그거 너무 순진하지 않습니까?" "전 대장님보다는 오크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맡겨주시겠습 니까?" 크레블린 대장은 카알을 묵묵히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자신감있는 눈으 로 그 눈길을 되받았다. 마침내 크레블린 대장의 고개가 움직였다. "음… 좋소." 편지를 다 쓰고 나자 카알은 그것을 화살에 묶었다. 그리곤 성루의 난 간에 발을 올리곤 태양을 쏘아버릴 듯이 활을 높이 들어올렸다. 피유웅! 하늘을 향해 날아간 화살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엑셀핸드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투덜거렸다. "햇님을 쏴버린 것 같군. 저게 제대로 날아간 것 맞는가?" "제대로 날아갔어, 드워프 친구." 대답한 것은 운차이였다. 운차이는 도대체 눈이 얼마나 좋은 거야? 아 무리 탁트인 사막에서 자라났다지만 저렇게 좋다니. 나도 눈이 별로 나 쁜 편은 아니지만 카알이 쏘아버린 화살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오크의 몸을 맞추거나 하지는 않았군. 땅에 떨어졌어. 오크 들이 거기에 접근하고 있군." "좋아. 됐어. 크레블린 대장님! 병사들에게 단단히 대기하라고 전해주 십시오. 그러나 일제사격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쏘아서는 안 됩니다." "알았소. 그룬!" 그룬 상병은 크레블린 대장의 명령을 하달받고는 갤러리 곳곳을 뛰어다 니며 명령을 전달했다. 성루 양쪽의 성벽에서 병사들은 화살 하나씩을 흉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또 하나를 꺼내어 활에 걸고는 활을 느슨히 늘 어트린 채 흉벽 너머를 주시했다. 모두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옆 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아프나이델이 긴장한 얼굴 로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조그만 장난감삽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아프나이델의 주 머니 안에는 얼마나 많은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 거지? 잠시 동안 성벽 위의 인간들과 오크들 양편 모두에서 쥐죽은 듯한 고요 만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터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 의 그 검은 투구의오크의 목소리였다. "이 찢어 죽일 인간놈드으으을! 일제에에 돌겨어어억!" 라스 크레블린 대장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고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 손님께서 오시는군."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 오크들은 대지를 할퀴는 폭풍처럼 질주해왔다. 황야를 빽빽하게 덮으며 질주하는 모습은 악몽 같았다. '우아아아! 취이 이익!' 번쩍이는 글레이브의 반사광, 그리고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가 오크들의 뒤로 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오크들은 화 살에 대비하여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돌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크들의 무리 가운데로 그 공성추, 충차? 어쨌든 바퀴 달린 통나무 가 돌격해오고 있었다. 그 공성추에는 오크 수십 마리가 매달려 밀고 있 었으며 그 거대한 공성추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가속도를 받자 곧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투투투! 방패로 만들어진 그 바 퀴가 깨어져나갈 듯이 진동했고 그 몸체는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리면 서도 그것은 곧장 성문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었다.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첫번째에서 기를 꺾어야 된다! 아프나이델! 사용할 수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목표는 저 공성추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아프나이델은 곧장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 는 손에 쥔 그 장난감삽으로 허공을 퍼내듯이 손을 놀리며 고함질렀다. "디그(Dig)!" 콰우웅! 오, 맙소사! 공성추가 굴러오던 길 앞에서 흙이 솟구쳐 올랐 다. 마치 아프나이델이 그 땅을 퍼낸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질주하던 공성추는 걷잡을 수 없이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나 무 부러지는 소리와 거대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거 대한 공성추가 구덩이에 곤두박질치자 마치 황야에 나무가 돋아난 것처 럼 보였다. 땅에서 비스듬하게 솟아나온 공성추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공성추를 밀고 있던 오크들 중의 상당수도 구덩이 에 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쾌애애액!" "취이이익!" "맙소사! 이토록 멋진 마법이라니!" 카알은 펄쩍 뛸듯이 기뻐하고 있었고 크레블린 대장은 체통 없게시리 함성을 지르며 하늘을 향해 롱소드를 휘둘러대었다. "우아아아!" 그리고 성루 양쪽에서도 병사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아프나이델 의 마법 한 방으로 공성추는 당장 못쓰게 되어버렸고 그러자 오크들은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었다. 질주하던 오크들 중 상당수가 제자리에 멈춰 서기까지 했다. 아넨드씨도 그 모습을 보며 함성을 지를듯이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넨드씨는 숨막힌 소리를 내었다. "맙소사! 갈고리?" 카알은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이런 빌어먹을! 그래서 사다리가 없었군!" 그렇다. 성쪽으로 돌격하던 오크들 중 일부가 갑자기 등 뒤에서 밧줄을 꺼내어 든 것이다. 그것은 앞쪽에 갈고리가 달려 있었으며 오크들은 밧 줄을 빙빙 돌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카알은 옆에 세워두었던 활을 들어올리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일제사격! 목표는 갈고리를 든 오크!"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0. 크레블린 대장이 다시 고함 지를 필요도 없었다. 사수들도 목표를 정확 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수들은 갈고리를 든 오크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퓽퓽퓽퓽퓽! 첫번째 일제사격에서 많은 수의 오크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혹은 다른 곳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취에에엑!" "크우욱!" 그러나 다른 오크들 이 커다란 방패를 들어올려 갈고리를 든 오크를 보호했다. 그리고 갈고 리를 든 오크들 뒷쪽으로 다른 오크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놈들은 곧장 성 위를 향해 활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오크들이 가진 것은 조잡한 숏 보우였지만 조잡하다고 해서 맞아도 안죽는 것은 아니다. 빌어먹을! 놈 들이 성문을 향해 올 줄 알았는데 성벽을 곧장 넘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니!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든 채 외쳤다. "성벽 위로 갑니다! 칸 아디움의 성벽을 넘을 오크들은 나 길시언에게 허락을 받아야 될 거요!" 그렇게 외치면서 길시언은 성루에서 곧장 갤러리를 향해 뛰어내렸다. 그러자 샌슨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저쪽의 통과허가증은 내가 발부하지! 댓가는 오크의모가지야!" 그리고 샌슨은 반대쪽 갤러리로 뛰어내렸다. 사수들의 2회에 걸친 사격 이 끝나고 잠시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오크들은 어느새 성벽 아래까지 진격했다. 놈들은 빙빙 돌리던 밧줄을 힘차게 위로 던져올렸고 곧 흉벽 에 갈고리가 걸리면서 쇳소리를 내었다. 철컥, 타당! 흉벽 뒤의 사수들 은 당황해서 활을 내려놓으며 갈고리를 다시 던져내려고 했지만 사수들 이 일어나면 곧장 아래쪽의 오크 사수들이 집중 사격을 했다. 삽시간에 상당수의 사수들이 성벽 위에 쓰러졌다. "어머니! 으악!" "크으윽!" 갤러리로 뛰어내린 길시언은 두 말하지 않고 갈고리 자체를 후려쳤다. 카각! 밧줄이 잘려나가며 올라오고 있던 오크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길시언은 갤러리를 주욱 달려가면서 계속해서 옆으로 검을 휘둘러 밧줄을 잘라내었다. 칵! 카가각, 탕탕! 흉벽의 돌과 프림 블레이드가 부 딪히며 뼈를 긁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성루에 남아있던 나머지 일행 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다음 양쪽으로 뛰어내렸다. 아주 빌어먹게 도 성벽 위에는 칼잡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파이커즈나 소드맨들은 성문 이 돌파당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모두 아래쪽의 옹성에 대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벽을 넘어오는 오크들을 막을 사람은 우리들 뿐이다. 엑셀핸드 와 운차이는 길시언쪽으로, 그리고 나와 네리아는 샌슨 쪽으로 뛰어내렸 다. 그리고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 레니는 성루 위에 남았다.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파이어볼!' 성 아래쪽에 불구덩 이가 만들어지며 수많은 오크들이 산 채로 불타올랐다. 굉장한 폭음과 연기. 불붙은 오크들이 발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크아아악! 그러 자 옆에 있던 오크들이 극진한 우정으로서 불붙은 놈들의 목을 단숨에 날려주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사수들이 날 린 화살보다 오크에 의해서 쓰러지는 오크가 더 많은 것 같은 착각이 든 다. 내 앞쪽으로 샌슨은 작두로 건초 썰듯이 갈고리 밧줄들을 신나게 잘 라내고 있었다. 탱탱탱! 샌슨은 여유있게도 밧줄에 오크들이 매달릴 때 까지 기다린 다음 잘라내고 있었다. 그래서 밧줄이 끊어지면서 오크들은 아래로 떨어져 목뼈를 부러트리고 있었다. 아넨드씨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사수들 중 셋의 하나는 대거를 꺼내어 밧줄을 잘라라! 명심해! 셋의 하나다! 나머지 둘은 계속 활을 쏴!" 웃기는 소리! 이 난장판에서 어떻게 셋을 정하고 어떻게 하나를 고른단 말이야! 명령을 받은 사수들은 대거를 뽑아들면서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오크들의 숏보우는 사정이 없었다. "으아아아!" "꺄아아악!" 네리아는 가슴에 화살을 맞은 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병사를 보며 비 명을 질렀다. 난 허리를 굽힌 채 달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머리를 들지마! 머리를 들지 말라고!" "카리스 누멘!" 저편의 엑셀핸드는 도끼를 양손잡기로 쥔 채 신나게 흉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도끼가 돌에부딪혀 불꽃이 튀었고 그 때마다 밧줄은 끊어지며 오크들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 때였다. "후치! 엎드려!" 난 항상 그 명령에 충실하지! 난 앞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내 가 서 있는 곳은 높은 성벽 위였고 함부로 몸을 던질 수 없었다. 옆을 돌아본 순간 커다란 이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제에에길! "크아아악!" 흉벽 너머에서 오크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어느새 밧줄을 타고 올라온 그 놈은 흉벽을 걷어차며 나에게로 몸을 날렸다. 컥! 머리카락이 빳빳하 게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은 짧았고, 순간 목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입 김. 그리고 뒤로 디딘 발에는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하늘이 빙 도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뻗은 팔에 잡히는 것을 콱 끌어당겼다. "후치잇!" 그렇게 해서 나와 오크는 성벽 뒤 도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간신히 면 했다. 난 한 손으로 성벽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내게 뛰어든 오크는 내 허리에 매달렸다. 그런데 망할 오크 녀석은 내게 매달린 채 내 허리를 깨물었다. 이 개자식아! 난 다른 손을 들어올렸다가 그 놈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꽤애액!" 오크는 아래로 떨어졌고 나는 네리아의 팔을 붙잡아 간신히 올라왔다. 깨물린 허리에서는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고통도 느껴 지지 않는다. 난 숨을 헐떡이며 흉벽을 쳐다보았다. 흉벽 여기저기서 오 크들의 머리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샌슨이 고 함을 지르며 흉벽 위로 올라오는 오크들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그 리고 활을 들어 오크를 내려치는 사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제길, 성벽이 함락 직전이다! 그러나 내가 있는 한 그건 안돼! 트라이던트를 휘둘러 성벽 위로 올라온 오크의 손을 내려친 네리아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후치야! 너 괜찮아?" "직접 보여드리죠!" 난 허리의 고통을 깨끗이 무시한 채 손을 뻗어 가까이 걸려있던 갈고리 밧줄을 잡았다. 묵직한 느낌으로 봐서 오크가 매달려 있는 것이 확실하 다. 그럼 됐어! 난 고함을 지르며 밧줄을 끌어올렸다. "이야아아! 성벽 위의 사람들! 모두 머리를 숙여!" 그리고 곧장 밧줄을 머리 위까지 단숨에 튕겨올렸다. 네리아가 숨넘어 가는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후치야!" 고향 개울에서 낚시하던 생각이 나는군. 지금 나는 칸 아디움의 성벽 위에서 거대한 낚시질을 하는 셈이야. 낚싯줄인 밧줄은 거대한 원을 그 리며 하늘로 솟아올랐고 밧줄에 매달린 대어인 오크는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라고 밧줄을 붙잡았다. 성벽 위를 중심점으로 해서 허공에 수직으로 거대한 원호가 그려지는 순간 주위에서 비명과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 고 오크와 밧줄이 정점으로 솟아올라 중량감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흉 벽 위로 뛰어오르며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외쳤다. "사랑스러운 악마 제미니의 이름으로!" 나는 오크가 매달린 밧줄을 힘차게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옆으로 뿌렸 다. 눈 앞에 섬괌이 번쩍하면서 허리가 아우성을 쳤지만 공중에서 잡아 당겨진 밧줄은 천천히, 하지만 무서운 힘을 담은 물체 특유의 완강함으 로 장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그것이 한 바퀴 돌아 네 리아의 머리 위를 스치자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임마! 누구 목을 날릴 생각이야!" 칸 아디움의 외성 위 하늘에 지름이 80 큐빗은 넘어보이는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순간, 아래의 오크들과 성벽 위의 인간들 모두가 입을 쩍 벌렸 다. 원심력이 발생하면서 아래로 처지는 힘은 사라지는 대신 밧줄은 무 서운 속도로 돌게 되었다. 부웅, 부웅, 붕붕붕붕! 난 팔이 끊어지는 느 낌을 받으면서도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그거 놓지 마라!" 물론 밧줄에 매달린 오크를 향해 지른 고함이다. 오크는 지금 허공에서 지름 80 큐빗의 원을 형성하는 무게추 역할을 하면서도 밧줄을 놓치지 않았다. 저 놈에게라면 오크라는 것 잠시 잊고서 키스를 해도 좋아! 도 저히 참을 수 없는 느낌이 폐부를 찔러왔다. 나는 허공을 향해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핫하하하하! 미치도록 헬턴트식이야!" 성벽을 오르던 오크들은 기겁하면서 밧줄을 놓고 내려갔다. 밧줄을 놓 치고 떨어지는 녀석도 보였다. 아래에서 고함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 다. "악마, 악마다! 취이익! 악마다!" "괴물 초장이다아앗! 취이이익! 췻췻, 취익!" "뭐? 르, 취익! 저, 저게 그 괴물 초장이인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돌아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다. 날 노 리고 쏘아붙이는 것이 확실한 화살들이 핑핑 소리를 내며 내 옆을 지나 쳤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웃고 싶을 뿐이다. 난 화살을 바 라보며 웃었다. "우하하하! 받아볼래!" 정신없이 돌아가던 밧줄을 놓는 순간 오크와 밧줄은 쏘아진 화살처럼 황야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인간과 성벽 아래의 오크들 이 모두 하나가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황야 위로 혜성처럼 날아 가던 오크는 오크들의 무리 뒷편 멀리 떨어진 곳에 작렬했다. 콰아아앙! 오크의 단단한 머리에 화렌차의 축복을! 아쉽게도 먼지가 팍 피어오르지 는 않았지만 눈앞을 어지럽히는 피보라가 튀어올랐다. 구토가 일어날 것 같군. 젠장! 난 구토를 참기 위해 흉벽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요철형으 로 생긴 흉벽의 돌을 징검다리 밟듯이 뛰는 동안 모든 것이 잊혀진다. 나는 성벽 위로 부는 가장 날카로운 바람! "이 미친 자식아, 어서 내려와!" 샌슨에겐 틀림없이 미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화살이 정신없이 날아 드는 흉벽 위를 줄타기 하듯 달려가는 내 모습은. 나는 허리를 숙여 갈 고리 밧줄 두 개를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밧줄에 매달렸던 오크들은 처 절한 비명을 지르며 밧줄을 놓아버렸고 그래서 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 을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나는 밧줄을 거꾸로 들어 갈고리를 추 로 삼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알아둬라, 이 망할 자식들아! 괴물 초장이의 여가 생활은 즐거운 오크 낚시와 함께! 쿠핫하하하!" 이번에는 훨씬 간단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도는 밧줄은 삽시간에 직 경 100 큐빗은 넘는 원을 형성했고 공기를 가르는 밧줄에서는 살갗을 간 지럽히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성벽 위의 사수들은 모두 질겁하면서 갤러 리의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그래서 다행히도 누군가의 목을 걸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오크들을 노려서 천천히 밧줄의 회전 경사 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핑핑핑핑핑! 빙빙 도는 갈고리 밧줄은 성벽과 지 면을 잇는 대각선이 되어 회전했다. 아무래도 갈고리 밧줄을 돌려서 오크를 낚아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무서운 속도로 도는 갈 고리가 땅을 스치며 불꽃과 흙먼지, 돌멩이들을 튀기는 마당에 뒤로 물 러나지 않는 오크가 어디 있으랴. 오크들은 뒤로 물러나며 정신없이 숏 보우를 당겼다. 코 바로 앞으로 화살이 지나가는 순간, 나는 밧줄을 놓 아버리고는 흉벽 아래 갤러리로 뛰어내렸다. "오늘치 용기는 다 소모! 이젠 겁많은 소년으로 복귀!" 네리아는 정신나간 듯이 웃으며 외쳤다. "아핫하하하!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복귀야! 핫하하하!" 그리고 저편 성루쪽에선 카알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오! 손님들께 잊혀지지 않는 작별선물을 주시오, 아프나이델!" "플레이밍 스피어(Flaming sphere)!" 아프나이델이 있는 성루쪽의 허공에서 폭발하듯이 불길이 일어났다. 화 르르르! 허공에 나타난 불의 공은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땅에 부딪혀 몇 번 퉁, 퉁 튕기더니 그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황야의 잡초들을 불태우며 굴러가는 불의 공은 오크들을 미치 게 만들었으며 오크들은 괴성을 지르며 죽어라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리고 불의 공은 계속해서 그 뒤로 따라굴러갔다. 지평선으로 달려가는 오크들의 모습과 그 뒤를 따라 텅, 텅 굴러가는 불의 공의 모습을 보면 서 나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주위의 병사들은 모두 얼빠진 모습으 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때 아넨드씨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함 을 질렀다. "아우우! 이후, 이후, 이후후후후!" 아넨드씨의 고함 소리는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주 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경비대원들은 성벽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을 터뜨 렸다. 승전의 함성이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1.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봐요! 멋쟁이 괴물 초장이씨!" 창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길시언은 프림 블 레이드를 닦아내며 웃었다. "멋지군, 자네. 몇 년만 지나면 이 도시의 아이들은 루트에리노 대왕이 나 핸드레이크의 이름보다는 황야에서 나타난 전설의 명검 프림 블레… 젠장. 황야에서 나타난 괴물 초장이 후치 네드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 으며 자라나겠는걸?" 나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내가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 을 했지? 오크 사수들이 노리고 있는 성벽 위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한참 동안 서 있었다니. 화살에 맞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 군. 오크들의 숏보우의 취약한 성능에 대해 화렌차에게 감사해야 되겠 군. "됐어. 이제 옷 입어." 샌슨은 내 허리에 붕대를 다 감았놓고는 붕대 위를 철썩 때렸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되다니! 붕대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입는다. 망 할 오크 녀석. 내 살 맛이 그렇게 궁금했나? 우리 일행은 지금 성탑 이층의 회의실 같은 방에 집결해 있었다. 물론 정식으로 대 오크 전투 지휘소는 성 안쪽 평지에 설치된 야전 막사지만, 병사들이 날 어깨에 매고 도시를 일주하겠다는 계획을 말한 순간 나는 성탑으로 도망쳤고 그래서 다른 일행들도 터덜터덜 이곳으로 올라왔다.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질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후드 를 깊이 눌러쓴 두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이 후드를 걷어올리자 나는 그들이 바구니를 든 네리아와 레니인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네리아는 질겁한 내 얼굴을 보더니 당장 킥킥 웃으면서 말 했다. "이봐, 괴물 초장이씨.지금 밖에선 칸 아디움의 낭만적인 소녀들이 당 신의 발치에 몸을 던져 기절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미친듯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오로지 후치 네드발을 찾기 위해서 말이 야." "…이곳에서는 후치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기를 바라겠어요." "왜지?" "그 소녀들에게 헛된 명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교훈이 될 테니까. 엉뚱한 남자의 발치에 몸을 던지면 부끄러워서라도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겠지요." "음. 좋은 말이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린 이런 후드를 둘러쓰고 돌아 다녀야 된다고." 레니 역시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후치. 너 때문에 전투에서 영웅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이 컴컴한 성탑 안에 갇혀있잖니." "모두들 미안해요." "괜찮네, 네드발군. 그런데 어디 보자… 왠지 즐거울 것 같은 바구니로 군요, 네리아양?" 네리아는 웃으면서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샌슨의 황급한 손길이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걷어내었고, 그러자 곧 구운 새고기와 빵, 와인병, 치즈, 말린 과일 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엑셀핸드와 샌슨은 환성을 질렀다. 네리아는 마치 테이블을 관장하는 가정주부라도 된 양 자상하면서도 품 위있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영웅이라서 이런 음식들을 받을 수 있는 거에요. 아넨드씨 가 우리 바구니를 풍성하게 채워주었지요. 지금 아래의 경비대원들은 멀 건 수프와 딱딱한 빵을 먹고 있지요." "아, 이런. 부끄러운 노릇이군." 카알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샌슨도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 서 참으로 부끄럽다는 듯이 와인병의 병마개를 이빨로 뜯어내었다. 그리 곤 곧장 엄청나게 부끄러워 하는 엑셀핸드에게 와인병을 빼앗겼다. 어이 구, 이 작자들아! 네리아는 샌슨과 엑셀핸드 때문에 아프나이델과 제레 인트가 굶주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하면서 - 그 러니까 새구이의 다리를 뜯어 아프나이델에게 건넨다든지 엑셀핸드를 흘 겨보면서 와인병을 빼앗아 잔에 부어 제레인트에게 건넨다든지 하면서 말했다. "라스 대장님하고 시장님이 잠시 후에 올라오겠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아, 그래요. 승전 처리로 바쁘시겠군요. 그런데 내가 전하라고 한 말 은 전했습니까?" "예. 성벽 바깥으로 바리케이트와 목책 등을 구축하게 하는 것. 맞지 요? 그대로 전했어요.지금 경비대원들은 성 밖으로 통나무와 수레 등을 이동시키고 있어요." "아, 그것말고도 또 있었는데?" "물론이죠. 사수들로 하여금 목책 구축 작업을 엄호하게 한다. 맞지요? 그것도 다 제대로 되었어요." "훌륭한 전령입니다. 네리아양." 네리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이트호크는 기억력이 좋아야 되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요?" "오크들이 성벽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럽니다. 아까 돌격 때 녀석들이 밧줄을 던지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지요. 놈들은 공성추로 성문을 파괴한 다음 들어올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제 목책이 설치 되면 오크들이 접근하여 밧줄을 던지기 전에 사수들이 저격할 수 있겠지 요." "정확하네요!" "예?" "아넨드씨도 그럴 거라고 말했거든요." "아아. 그렇습니까. 역시 참전 용사라 다르군요." 그리고 네리아는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아, 너한테도 전해달라는 말이 있어." "뭔데요?" "아넨드씨는 자식이 없다던데. 양자로 들이고 싶다고 하던걸?" "아이고, 맙소사!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내가 엄마라고 대답했지. …어머? 후치야? 괜찮아?" 모두들 즐거운 식사를 마칠 때 쯤 해서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선 것은 전투 동안 내내 보이지 않던 카를로스 안티고어 시장과 라스 크레블린 경비대장, 그리고 아넨드씨였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아넨드씨가 외쳤 다. "여기 카알씨에게 물어봅시다! 이봐요, 카알. 당신 생각은 어때요?" 카알은 당황한 얼굴로 아넨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군요." "아니! 그게 아니고! 승전의 기세를 살려서 진격하자는 얼빠진 주장 말 이오!" 그러자 카알이 대답할 새도 없이 안티고어 시장이 외쳤다. "말 조심하게, 아넨드!" "제기랄, 시장님. 난 원래 입이 거치니 적당히 순화해서 들으시지요. 어쨌든 카알에게 물어보자는 말입니다!" "말을 조심하라니까, 아넨드! 헬턴트공이라고 불러야 되네!" 그러자 카알은 피곤한 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그냥 카알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런데 진격 의견이 나왔습니 까?" 안티고어 시장은 방 가운데 있던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말했 다. "그렇소. 우리 경비대는 성벽에서 커다란 승리를 획득했고 지금 그 기 세가 영광의 7주 전쟁 때의 바이서스군보다도 더 낮다고는 못할 정도란 말이오. 이 기세를 살리지 못한다면 작은 승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소. 지금 오크들이 패배의 충격에 빠져있는 동안 즉시 공격을 감행해야 되 오!" 도대체 커다란 승리야, 작은 승리야? 말이 빨리도 바뀌는군, 그래. 카 알은 안티고어 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조금전 공방전에서 오크들의 사상자는 얼마나 됩니까?" "예? 아, 이봐, 크레블린 대장?" 아이고 맙소사. 숫자에는 신경도 안쓰시나 보군. 안티고어 시장은 크레 블린 대장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대장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성벽 바깥에서 확인된 오크의 시체는 약 80 구 정도 됩니다. 1차 돌격 때의 사망 숫자까지 합친 겁니다. 그리고 부상자 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크들은 부상자들을 호송해 가지 않기 때문에 그 다지 많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카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칸 아디움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사망 11 명, 그리고 부상자가 20 명 정도 됩니다." "그럼 아군은 120명 정도 남았군요. 오크들은 500 마리 정도?" "그런 셈이죠."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승기가 있지 않습니까, 헬턴트공. 게다가 인간이 오 크보다는 더 크고 그 창도 더 길단 말입니다. 단순히 숫자로 비교할 수 는 없습니다." 카알의 눈썹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 다. "시장님. 검을 가지고 계시지 않군요. 하지만 검이 없으시진 않겠죠. 나가서 오크 다섯 마리만 처리해주시겠습니까?" "뭐, 뭐요?" "명령을 내릴 자는 모법을 보여야 되니까요. 시장님께서는 지금 경비대 원들에게 다섯 마리의 오크들을 상대하라고 말하려 하십니다. 그러니까 시장님께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티고어 시장은 입을 딱 벌렸다. "이보시오! 그 무슨 유치한 논리란 말이오? 난 노인이오. 내가 나가서 오크들을 상대하라니! 물론 난 시장으로서 이 도시를 지키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소. 하지만 난 몽상가는 아니란 말이오. 게다가 내가 나서서 오크들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이 도시는 그 지휘자를 잃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거요. 어떻게 그런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 거요?"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크레블린 대장이나 아넨드가 분명히 하고 싶은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을 꺼내놓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몹시 하고 싶을 것이다. 다행히 그 말은 운차이가 대신 했다. "내가 보기에, 아까 전투에선 그 중요한 지휘자가 없이도 잘들 싸우던 데." 안티고어 시장은 당황한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 굴은 곧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하지만 또다시 공포스러운 얼굴로 바뀌게 되었는데, 운차이가 안티고어 시장을 '똑바로' 바라보았 기 때문이다. 참 다채로운 표정 변화로군. 엑셀핸드 역시 수염을 쓸어내 리며 결코 친근하다고는 볼 수 없는어조로 말했다. "이거 보오, 당신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괜히 나서서 돌아다니다가 흙 탕물을 밟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잖겠는가? 안전한 시청에 틀어박 혀 계시는 것이 좋겠구먼." "이거 보시오, 말이면 다 말인 줄…" 엑셀핸드는 곧 서슬퍼런 기세로 말했다. "말이라고 다 말은 아니지! 그러니 진격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그만 하시지? 오크들의 머리를 몸과 분리시켜놓는 작업이라면 나 드워프의 노 커 엑셀핸드 아인델프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자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나 역시 몽상가가 아니네. 그러니 입 닥치고 전투는 전문가에게 맡기게! 무 릇 우두머리가 하는 일은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를 기르는 법일세. 그리고 이곳의 전문가는 저기 아넨드라는 젊은이고!" 우하, 하, 엑셀핸드가 저렇게 달변이라니. 어, 아넨드씨를 젊은이라고 말한 것은 좀 이상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엑셀핸드의 나이는 300살 가 량이다. 당연한 말이로군. 안티고어 시장 역시 그 젊은이라는 말에 움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여기서 가장 연장자였지만 그것은 인간들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엑셀핸드가 있는 이상 연장자의 권위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군. 설마… 엑셀핸드가 그것까지 예견해서 젊은이라는 말을 한 것일 까? 에이, 설마. 어쨌든 엑셀핸드는 그 말 한 마디로 당장 좌중의 최연장자의 후광을 빛 내게 되었다. 그리고 제2연장자로 그 격이 떨어져버린 안티고어 시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쩌자는 말입니까? 화살은 떨어지고 경비대원들은 모두 지쳐버 리길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이 도시에 대해 이방인이시라 잘 모르실 테 니 말씀드리지요. 이 칸 아디움은 교역도시입니다. 이 척박한 땅에서 논 밭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곳은 오로지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지르는 여행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유지되는 도시란 말입니다. 만일 오크들의 봉 쇄가 더 길어지면 이 도시는…" 벌컥!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든 병사 때문에 안티고어 시장의 청산유수 같은 말은 중단되었다. 들어온 병사는 황급히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보고합니다! 지금 몇 명의 여행자들이 오크들과 접전 중입니다! 그들 은 성문쪽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오크들의 방해를 받고 있습 니다!" "뭐라고? 이런! 어서 가보세!" 크레블린 대장은 당장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방문을 나와 계단을 올라가니 바로 성벽 위 갤러리였다. 크레블린 대장 은 성루쪽으로 달려갔고 우리들은 흉벽 너머로 황야를 바라보았다. 해는 이미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는 정오였다. 그리고 그 정오의 햇살 아래 저 편 지평선에서 굉장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맙소사! 저거 제정신이야?"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크들의 무리 한가운데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크들은 여 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구 움직이고 있었는데 대단히 무질서한 모습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꿈틀거리는 슬라임처럼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오크들의 무리가 갈라지며 그 가운데로 달리고 있는 몇 명의 인간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오크들의 무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 는 대담한 짓을 하고 있었고 오크들은 그 인간들을 가로막기 위해 애쓰 고 있는 모양이다. 오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몰아붙이는 바람에 인간 들은 맹렬히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위진을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했다. 그들은 포위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달리 고 있었고 그에 따라 오크들은 이곳저곳으로 급격하게 움직였다. 레니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파도를 뚫기 위해 애쓰는 배 같아." 음. 항구의 소녀다운 말이야. 정말 오크들은 파도처럼 움직이고 있었지 만 인간들은 절묘하게 그 힘이 흩어지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크 들이 다시 움직이자 인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 붙잡히 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포위진은 두꺼웠고 저 인간들이 저지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거친 욕설과 창칼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까 지 들려온다. 카알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젠장! 저 여행자들은 미쳤군! 오크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다니! 이 넓 은 황야를 두고 왜 저기로 뛰어들었단 말이야! 눈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 나?" 길시언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이 성으로 곧장 달려오고 싶었던 모양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좀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니오!" "저 사람들을 구해야 됩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곧 잡힐 겁니다!" 샌슨은 그렇게 외치며 몸을 돌렸고 카알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길시 언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팔짱을 낀 채 황야를 바라보던 운차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남자가 세 명이오. 그런데 아주 이상한 모습이 보이는걸." "이상한 모습이라니오?" "저 친구들… 마치 후치 같은걸." "예?" 난 놀라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샌슨과 길시언도 달려가던 동작을 멈추고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운차이는 여전히 황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들 말이오. 마치 후치처럼 오크들을 날려버리고 있는데. 지금 오크가 찌른 글레이브를 빼앗았군. 지금 휘두르는데, 저거 굉장하군! 한 번 휘두르니까 오크들 대여섯 마리가 날아가버리는걸? 그리고 저거, 이 런. 오크 하나를 들어 던지는데 주위의 오크들이 모두 밀려서 날아가버 리는걸. 도저히 사람의 힘이 아니오." 왜 서늘한 기분이 드는 거지? 카알은 질린 어투로 질문했다. "남자들의 얼굴이 보입니까, 운차이?" "아니,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럽니까?" "그럼… 혹시 두 명은 롱소드를 쓰며 한 명은 대거를 사용하지 않습니 까? 그리고 롱소드를 쓰는 남자 중 하나는 덩치가 좀 크고 나머지 둘은 보통 체격…" "그렇군요. 아는 사람들입니까?" 샌슨과 난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한데, 둘 다 꺼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할 수 없군. 내가 말하지. "샌슨. 오크들만 끈질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샌슨 생 각은 어때?" 샌슨은 대답을 하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자식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온 거지? 우리는 어제 24 펜큐빗을 달렸는데!"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2. "예? 아니, 저 녀석들이 어떻게 후치의 OPG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 까? 어, 후치는 지금 그걸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복제품이란 말입니 까?" "영원의 숲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요.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 다. 어쨌든 믿기 어려운 괴력을 사용하는 세 명의 남자라면, 그리고 두 명이 롱소드를 사용하고 한 명은 대거를 사용한다면 거의 확실하군요."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넥슨 휴리첼과 하슬러, 그리고 쟈크의 세 명인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말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렇게도 빨리 우리 들을 추적해왔단 말이야? 저 녀석들과 헤어졌던 것은 사흘 전이다. 그리 고 그 동안 우리는 거의 45 펜큐빗은 넘게 달려왔다. 아니, 어떻게 인간 이 사흘 동안 45 펜큐빗을 달릴 수 있단 말이야! 엑셀핸드는 수염을 비 비 꼬면서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와?" "OPG를 가진 세 명의 여행자들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제레인트가 손을 들며 말했다. "잠깐만요.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을 저대로 내 버려둘 생각입니까?" 샌슨은 못마땅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구해주자는… 말씀입니까?" "예? 그러면 내버려둡니까? 오크들에게 죽음을 당하도록?" "글쎄요. 그건 어느 누구에게도 저지르면 안되는 일이긴 합니다만. 참, 그거… 에잇!"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이것 정말 골치 아프군.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다가 칼을 중간쯤 뽑아든 채로 카알을 바라보았 다. 그의 눈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카알은 찌푸린 얼굴로 황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야에선 여전히 오크 들의 소란이요란했고 비명 소리같은 것이 아스라이 들려오곤 했다. 제 기랄, 저 빌어먹을 녀석들! 난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주어를 빠트렸다. 도대체 오크들을 욕해야 할지 넥슨 일행을 욕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난 고개를 돌려 카알의 입을 바라보았다. 왠지 카알이 뭐라고 말할지 짐작 이 되는 것 같단 말이야. 카알은 마침내 씹어뱉듯이 말했다. "제기랄, 구합시다! 저 친구들은 끝까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는군!" 네리아는 놀란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예? 구해요?" "그럼 어쩝니까?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째서요? 오크가 죽이는 거지…" 네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카알은 네리아를 바라보면서 무겁게 말했다. "글쎄요. 대개의 인간들은 하지 않음으로써 저지르는 잘못이 함으로써 저지르는 잘못보다 낫다고 믿나 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네 리아양."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간단히 말할까요? 지금 특별히 할 일 있습니까?" "예?" "별로 할 일 없지요? 난 세레니얼양의 말을 기억합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게 뉘우칠 시간은 줘야 합니다. 식후운동 삼아 인간 세 명을 오크 무리에서 구출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청산할 시간을 남 겨주는 일은 어떻습니까." 어라? 이루릴이 언제… 아. 그렇군. 난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아프나이 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아프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길시언은 입술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웃음을 참는 것이다. "괜찮은 운동이군요. 육체와 육체와의 뜨거운… 으악! 에, 육체와 정 신! 그 둘쪽 모두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 좋은 운동이지요! 난 찬성입니 다." 그러면서 길시언은 곧장 성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샌슨은 길시언의 등을 바라보다가 다시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모 르고 고개를 휙휙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난 쓴웃음을 지었다. 샌슨 은 마침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오, 맙소사. 내가 날 못믿겠어! 내가 저 저주받을 녀석들을 구하러 600 마리의 오크 무리에 뛰어들다니!" "500 마리야." 내가 정정해주며 그의 옆을 지나치자 샌슨은 당황하며 뒤를 따라왔다. 카알은 재빨리 지시했다. "아프나이델씨, 침버씨, 아인델프님은 여기 남아있으십시오. 레니양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네리악!" 네리악? 무슨 소리야? 난 놀라서 뒤를 돌아보고는 역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네리아는 갤러리 위를 달리다가 그대로 트라이던트로 바닥을 짚으 며 옆으로 뛰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벽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이층 건물 의 건초로 된 지붕 위에 뛰어내렸다. "오, 맙소사! 아가씨!" 아래에서 경비대원들이 기겁했다. 난 틀림없이 네리아가 목뼈를 부러뜨 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리아는 그대로 지붕 위에서 한 바퀴 구 르고는 엎드렸다. 그녀는 그렇게 주루루 미끄러지다가 지붕 끄트머리에 서 트라이던트를 앞으로 내밀어 땅에 짚고나서는 멋지게 반원을 그리며 땅에 사뿐히 섰다. 네리아는 가슴에 묻은 건초 부스러기를 털더니 위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옆에선 땅에 주저앉은 채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몇 명의 경비대원들이 보였는데 모두들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 었다. 난 아래를 향해 외쳤다. "시범은 고맙지만 난 계단을 이용하겠어요!" 칼잡이들은 모두 계단을 이용해서 품위있게 내려갔다. 여기서 품위라는 것은 네리아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발목이 삘 정도로 급하 게 계단을 내려갔다. 성탑 아래로 나서니 네리아는 이미 작전 지휘소 옆 에 매어둔 우리 말들을 끌고 오는 중이었다. 네리아는 우리들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고 샌슨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서 말했다. "헤이, 멋진 말구종! 원하는 포상이 있다면?" "손등에 키스해줘." 네리아는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올렸고 샌슨은 거기에 대충 입을 맞추어 주고나서는 슈팅스타 위에 뛰어올랐다. 네리아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다음 차례." 길시언은 그 와중에서도 한쪽 무릎을 꿇고 네리아의 손등에 키스를 해 버려 주위를 당황시켰다. 누가 왕자 아니랄까봐. 운차이는 네리아를 싹 무시하며 지나치려고 했고 그러자 네리아는 재빨리 운차이의 발을 걸었 다. 물론 운차이는 가볍게 뛰어넘어갔고 네리아는 그 뒤를 향해 주먹을 마구 흔들었다. "나도 좀 넘어가지요." "까르르르!" 네리아는 웃으면서 에보니 나이트호크 위에 뛰어올랐다. 샌슨은 어느새 성문 경비병에게 외치고 있었다. "성문을 여시오! 밖의 여행자들을 구출해야 하오!" 경비대원은 당황한 눈으로 샌슨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성루 위를 바라보 았다. 그 때 성루위에서 크레블린 대장이 외쳤다. "이거 보시오! 만일 오크들을 끌고 돌아온다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요! 괜찮소?" 샌슨은 기세좋게 맞받아쳤다. "그런 거 걱정했으면 애초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좋소! 성문을 열어줘! 그리고 통과하는 즉시 다시 닫아! 여러분의 무 운을 비오!" 경비대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성문을 열었다. 샌슨은 성문이 채 열리기 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로 썬더라이더를 탄 길시언이 뛰어나갔 다. 성문 옆으로 물러난 경비대원들은 열띤 목소리로 외쳤다. "죽지 마시오!" "고마워요! 멋쟁이 경비대원!" 봄날 망아지라던가? 네리아는 유쾌하게 외쳤고 그러자 경비대원들은 얼 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 뒤로 운차이가 입을 꽉 다문 채 무서운 눈길로 지나갈 때는 경비대원들도 질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와 뒤늦 게 내려온 카알이 지나칠 때는 경비대원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내어왔다. "괴물 초장이 만세! 유피넬의 이름으로 축복을!" 난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제미니에게 박차를 가했다. 제미니는 용맹스럽게 돌진했다. 성문을 통과하는 동안 아주 빠르게 그림자가 지나 갔고, 잠시 후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넓은 평야가 눈 앞을 가로막았다. 저 앞에선 이미 샌슨과 길시언, 네리아, 운차이 등이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경비대원들이 설치해둔 목책이 보였지만 그것은 오크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앞의 네 명은 그것 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랴아! 제미니! 매일 고생만 시켜 미안한데, 이번에도 날 도와줘!" "이힝힝히잉!" 제미니는 우렁찬 울음소리로 대답한 다음 가볍게 목책을 뛰어넘었다. 오, 말에 대해 끓어오르는 이 애정! 난 바스타드를 뽑아 말 옆으로 늘어 트린 채 한 손으로 고삐를 거머쥐고 달려갔다. 머릿카락이 흩날리며 얼 굴을 찔러왔고 볼을 때리는 바람에 얼굴이 얼얼해졌다. 뒤에서는 성문을 닫아거는 소리가 둔중하게 들려왔지만 희한하게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 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인다. "야하아아!" 뒤에선 카알이 외쳤다. "퍼시발군! 길시언! 쐐기꼴 형태로! 뱅가드(Vanguard)를 형성합시다! 선두 자리 비우고!" 뱅가드가 뭐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합시다, 카알! 그러나 샌슨과 길시언은 그 말을 알아듣는 모양이다. 그들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서로의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정신 없는 돌격 가운데서도 차가운 정 확함으로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그리고 카알 의 고함 소리는 계속되었다. "운차이와 네리아, 뒤로 벌리시오! 그리고 가운데로 네드발군이 강행합 니다! 네드발군! 고개를 숙이고 최고 속도로 달려!" 뭔 말이야! 어디로 강행하라는 거야? 그러나 다시 앞의 사람들이 나를 도왔다. 샌슨과 길시언이 양쪽으로 벌려서고 그 뒤에서 네리아와 운차이 가 더 폭이 넓게 벌어졌다. 두두두두두! 그러자 마치 쐐기꼴 형태로 앞 쪽이 뾰족하고 뒤가 넓은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쐐기꼴의 첨단부가 없 는 것이다. 바로 저기구나! "이랴아! 핫, 하아! 저기가 네 자리다, 제미니!" 난 제미니를 독려했고 제미니는 크게 울부짖더니 앞으로 죽죽 나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잠깐 사이에 내 왼쪽으로 네리아와 샌슨, 그리고 오른쪽으로 운차이와 길시언이 지나갔고 곧 나는 선두에 서서 달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뒤를 흘깃 보자 카알도 속도를 높이는 것이 보였다. 우 리는 최전방에 나, 그리고 그 뒤로 샌슨과 길시언, 그리고 운차이, 카 알, 네리아로 완전한 삼각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왜 내가 최전방이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오크들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놈들 의 모습이 시시각각 커지면서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놈들은 우리를 발 견하고는 당황한 모습으로 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길시언의 고함 소리 가 터졌다. "프로텍트 프럼 노멀 미사일!" 바우우! 내 앞쪽으로 푸르스름한 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오크들이 날 린 화살, 돌멩이 등이 튕겨나는 모습이 보였다. 좋아, 해보자구! 난 바 스타드를 높이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야아아아! 내가 간다! 헬턴트 만세!"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괴물! 괴물! 취익! 괴물 초장이다악!" "끄아아아! 괴물 초장이다!" "취이이익! 달아나랏!" 어라? 뭐 이래? 전방의 오크들은 날 바라보더니 곧장 옆으로 몸을 날리 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으로 물러나면서 날 공격하려던 놈들은 뒤에서 따라오던 샌슨과 길시언에게 공격을 당하는 것이다. 난 오크들로 이루어 진 벽으로 뛰어들었지만 제미니는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달리고 있었다. 앞에 있던 오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갈라져가는 것이다. 헤엣? 그거 신기하네?그러나 기뻐할 새도 없었다. 뒤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온 것이 다. "네드발군! 머리를 숙이라고 했잖아!" 아, 그렇지. 난 급히 허리를 숙여 제미니의 목 옆으로 머리를 내려서 바스타드를 마구 휘둘렀다. 이거 마치 멧돼지 같은 모습이군. 턱 바로 아래에서 흙먼지가 튀어올라 눈을 뜨기가 겁난다. 오크들의 다리가 움직 이는 모습에 눈이 돌아버리는 것 같다. 난 되지도 않는 고함 소리를 지 르며 계속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머리 위쪽으로 공기를 가르는 파 열음이 들려왔다. 쓩쓩쓩! 아이고, 카알! 카알은 내 머리위로 활을 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절대로 머리는 못들겠군! 난 제미니가 제발 앞발로 돌을 차올리지 않기 를 빌며 바스타드를 풀 베듯이 휘저었다. 오크들의 글레이브가 코 앞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주위로는 거친 바람 소리와 오크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보다 더 큰 소음은 바로 내 입에서 나오 고 있었다. "야야야야야! 모두들 비이이켜어엇!" 그 때였다. "너! 후치 네드발!" 제기랄! 이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까! 난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 다. 우리들은 오크 무리의 바깥 부분에있었다. 그런데 오크들의 무리가 좌우로 좌악 갈라지면서 바로 앞 30 큐빗 정도에서 오크 한 놈의 가슴을 베고 발로 걷어차는 하슬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을 옆으 로 늘어트린 넥슨 휴리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 었다. 넥슨 휴리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이 사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 양이다. 그 멍청한 입 좀 다물어! 이 소란통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모조 리 그 멍청한 입 안으로 들어가겠군! 넥슨은 그렇게 가만히 선 채 입을 벌리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오크 하나가 넥슨의 등 뒤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조심해! 뒤!" 말하기가 무섭게 하슬러가 뒤로 돌아서 넥슨에게로 돌진했다. 하슬러는 넥슨을 옆으로 밀어내며 달려들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튕겨 올렸다. 카카 캉! 그는 튕겨올린 롱소드를 그대로 한 동작으로 내리그어 오크의 얼굴 을 갈라놓았다. 그러면서도 하슬러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슬러에 의해 옆으로 밀쳐진 넥슨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는 잠시 허리 를 굽힌 채 멍청하게 서있었다. 저 작자가 정말! 치매에라도 걸렸나, 갑 자기 왜 저래? 그 때 넥슨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우리들을 노려보며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너! 죽어랏!" 저 미친 자식이! 넥슨은 롱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앞으로 돌진 해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살인이 꼭 죄가 되는가 하는 따위의 생 각을 떠올리며 바스타드를 뒤로 당겼다. 이 자식아! 사실 너무 길었어! 이대로 내려치기만 하면! 그 때 무엇에 홀린 것인지 나와 넥슨 사이로 오크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 녀석은 곧장 넥슨을 찔러들어갔고 넥슨은 그대로 롱소드를 내리쳤다. 휘익! 글레이브와 오크의 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취이에에엑!" 오크는 잘린 팔을 위로 쳐들면서 비명을 질렀다. 넥슨은 검을 내려친 자세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여 어깨로 오크를 받아 쓰러지게 만들었다. 넥슨이 그대로 롱소드를 아래로 찌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난 고개를 돌 리고 말았다. 제미니가 앞발을 들어올리며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힝힝 힝힝힝! 정신이 팍 들면서 난 고삐를 당겼다. 다행히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 정신은 현재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야 옆으로 번뜩이는 반사광에 놀라 옆을 보니 오크 한 놈이 제자리에 서있는 날 노 리고 찔러들어오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뿌렸다. 타당! 글레이브가 튕겨지는 느낌이 손으로 전달되어왔다. 그리 고 그 때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넥슨! 당신들을 구하러 왔다! 그러니 지금은 싸우지 말자! 만일 덤빈 다면 이대로 놔두고 가겠다!" 그리고 길시언도 옆으로 다가오는 오크를 베어넘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서둘러! 오크들이 크레센트(Cresent)를 형성한다!" 크레센트라고? 난 좌우를 급히 돌아보았다. 소름이 쫙 돋는걸? 우리 일 행과 넥슨 일행 사이에서 빠져나가며 좌우로 갈라졌던 오크들은 그대로 비스듬히 달리면서 우리 옆을 지나쳤다. 놈들은 이대로 우리 뒤를 가로 막아 포위진을 만드려는 것이다! 난 넥슨을 향해 손을 저으며 고함질렀 다. "빨리와! 도와주려고 왔단 말이야!" "뭐…야? 도와준다? 도와준다고?" 저게 도대체 인간이야, 트롤이야! 넥슨의 손과 가슴, 얼굴은 오크의 피 로 범벅이 되어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악마 녀석은 멍한 눈 으로 날 바라보며 내가 한 말을 반복하면서 정말 악마 같은 소행을 저지 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잖아? 젠장! 그 때 네리아가 외쳤 다. "쟈아아크! 네 멍청한 마스터를 어서 이리로 데리고 와! 지금밖에 기회 가 없어!" 그러자 넥슨의 그림자에서 나타나듯이 쟈크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났다. 넥슨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쟈크는 대거의 손잡이로 넥슨의 목 뒤를 후려쳤다. 퍼억! 넥슨은 그대로 고꾸라졌고 쟈 크는 그를 붙잡아 어깨에 둘러매며 외쳤다. "하슬러씨! 갑시다! 앞을 뚫어요!" 하슬러는 고개를 조금 끄덕인 다음 곧장 우리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 다. 오크들은 우리들이 합류하지 못하도록 그 사이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하슬러의 팔이 움직이는 앞에서는 그 어느 오크도 3초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하슬러는 달리면서 그 속도에 팔힘을 덧붙여 롱소드를 휘둘렀고 오크들은 모두 팔과 글레이브가 한꺼번에 날아가버렸다. 하슬러의 팔이 움직이는 곳에서 어떤 오크는 상하반신이 완전히 분리되기까지 했다. 그 리고 그 뒤로는 넥슨을 둘러맨 쟈크가 달려왔다. 오크들은 내쪽으로도 달려들었다. 그러자 제미니는 다시 앞발을 들어올 리며 거세게 날뛰었고 그러자 오크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격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그리고 말 울음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았지만 난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며 날아오는 글레이브를 쳐냈다. 하슬러는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오더니 날 흘깃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쟈크가 다가오더니 넥슨을 집어던지듯이 건네 며 외쳤다. "마스터를 부탁해!" 난 안장 앞에 넥슨을 받고는 그대로 제미니를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알이 외쳤다. "모두 반전! 네리아와 운차이! 좌우로 벌려 네드발군이 달릴 길을 뚫는 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3. 뒤로 돌아보니 쟈크는 길시언의 등 뒤에, 그리고 하슬러는 샌슨의 등 뒤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모두 뒤로 돌아 달려가기 시 작했다. "취이익! 잡아랏! 저 놈들을 붙잡아!" 그러자 네리아는 앙칼진 고함 소리로 응수했다. "이 자식들아! 레이디에게 다가오려면 양치질부터 해!" 네리아는 그 긴 트라이던트의 물미 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는 도리깨질 하듯이 전후좌우로 휘두르고 있었다. 트라이던트의 창신이 번뜩이며 네 리아의 몸 주위로는거대한 원호들이 그려졌다. 반면 운차이는 검을 아 끼고 있었다. 그는 검을 별로 휘두르지 않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녀 석들만 하나씩 찔러버렸다. "Ahn choudar!" 그러면서 네리아와 운차이는 좌우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물 러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히며 쓰러졌다. 두 사람이 좌우로 밀어붙 이면서 그 사이에 공간이 생기자 카알과 샌슨, 길시언이 곧장 달려나갔 다. 그리고 그 뒤로 내가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달려올 때와 정반대의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최전방에 카알, 그리고 그 다음에 샌슨과 길시언, 제일 뒤에는 네리아와 나, 그리고 운 차이가 달리게 되었다. 오크들은 주춤주춤 다가오려고 했지만 길시언과 샌슨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밀어붙였다. 오크들의 형성되다 만 포 위진은 여지없이 박살났고 우리들은 그대로 쏜살처럼 달려나왔다. 뭐야! 성벽이 저렇게 멀었나! 이스트 그레이드도 운차이의 사막처럼 움직여버 린 건가? 그 높아보이던 성벽이 지금은 신전 담벼락처럼 보였다. 젠장! 저기까지 어떻게 달려가지? 그 때였다. 성벽 위에서 뭔가가 번쩍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장 성벽 위에서 광선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 위 를 지나쳐 등 뒤의 오크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의 솜씨군! 뒤 쪽에서 오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취이이익!" 카알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외쳤다. "모두 일자로!" 이번엔 뭔 말인지 알았습니다! 진작 그렇게 쉽게 말하시지! 난 넥슨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급히 왼쪽으로 비스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리아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틀었으며 운차이는 오른쪽으로 뒤틀었다. 다섯 명의 기수는 이제 일직선으로 늘어선 채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게 되었으며 그러자 카알은 롱보우에 화살을 걸었다. 아니, 어쩌시려는 생 각이에요? 다음 순간 나는 카알의 모습을 보면서 넥슨을 놓칠 뻔했다. 카알은 허리를 젖혀 말 위에 드러눕더니 턱을 한껏 젖히고는 뒤로 활을 쏜 것이다. 피융! 취에엑! 길시언은 기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 당신 혹시, 우타크의 자손 아닙니까?" 카알은 다시 똑바로 앉으며 외쳤다. "내 가계에 대한 설명은, 성 안에 도착한 다음으로, 미룹시다! 이랴 아!" 그렇게 멀어보이던 성벽이 어느새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성벽 위에선 경비대원이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서! 빨리! 더 빨리 달려요! 더 빨리! 그리고 사수들이 흉벽 위로 몸을 내밀더니 화살을 마 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우리 머리 위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화살들이 날아가면서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이렇게 기분좋게 들릴 수가 없는걸? 눈 앞에 목책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성문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됐어! 그때였다. "절대로 도망 못간다아아!" 등골이 쭈뼛하다는 말이 있지. 난 겁에 질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투구의 오크가 옆에 있던 오크의 글레이브를 빼앗아 어깨 뒤로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젠장! "카아아악! 핸드레이이이이크!" 또 저 소리! 검은 오크는 그렇게 기합을 지르면서 글레이브를 집어던졌 다. 글레이브는 황야 위로 검은 뱀처럼 머리를 흔들면서 날아왔다. 휭휭 휭휭! "히히힝!" 왜 하늘이 땅 밑으로 내려오는 거지? 몸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지는걸? 꽈앙! 순간 머리 뒤에서 충격이 오면서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크허, 허헉! 뺨이 땅에 쓸리면서 지독한 아픔이 느껴진다. 등이 거세게 부딪히 면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온다. 제발 좀 멈춰! 나는 데굴데굴 굴러가 면서 속으로 외쳤다. 하늘과 땅의 자리바꿈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지 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춰졌다. 오크들의 고함 소리. 퇘! 쓰러진 채 입 안으로 들어온 흙을 뱉어내니 피와 침이 섞여 나왔다. 간신히 고 개를 들어보았다. "이힝힝, 힝힝! 푸르릉! 힝힝힝힝!"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저건 뭐야? 땅에 쓰러져 발버둥을 치면서 피를 콸 콸 쏟아내는 저 덩치 큰 생물은 뭐지? 저 생물은 계속해서 발을 구르며 일어나려고 하는군. 왜? 일어나지 못하지? "으… 으으. 제, 제미…니?" 말인가? 저건… 내가 타던 그 제미니? 그런데 왜 누워있지? 말이 눕기 도 하던가? 게다가 왜 저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 거지? 어? 저건… 글레 이브? 제미니는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저 다리를 흔드는 동작에 불과했다. 제미니가 왜 못 일어나는 거야? "제미니이이잇! 으아아아아!" "힝힝힝! 이힝, 힝! 푸르르릉!"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난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로 땅을 짚는 순간 발이 미끄러 져버렸고 나는 다시 콰당 쓰러져버렸다. 난 다시 몸을 돌렸다. 휘청거리 며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또다시 땅에 얼굴을 박으며 고꾸라졌다. 컥! 숨이 막히는걸. 다시 팔을 휘둘러 땅을 짚는다. 쓰러진다. "카아아악! 헐헐헐르르르. 쿨럭쿨럭!" 땅을 짚는다. 다시 쓰러진다. 몸부림을 치며 팔을 휘젖는다. 다리로 땅 을 밟으며, 하지만 다시 앞으로 쓰러진다. 몸을 뒤튼다. 일어나야 돼. 일어나야 돼! 다시 무서운 속도로 땅에 쓰러진다. "이힝힝힝힝!" 제미니가, 제미니가! 이런, 빌어먹을! 일어나야 된다고! 콰당탕! 이 개 같은 땅이 왜 이래! "후치야아악! 아악! 후치얏!" 네리아의 울음 섞인 비명. 제미니, 제미니! 난 일어날 거야. 그러니 너 도 일어나란 말이야! 이… 개 같은! 이 때려죽일 말대가리야! 어서 일어 나! 콰당. 일어나! 몸부림. 튀어오르는 핏방울. 일어나! 콰당. 입안에서 단내가 팍 피어오른다. 목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먼지. 목이 콱 막힌다. 눈물. 부옇다. 귓가가 뜨겁다. 일어나아아아아! "크아아아아! 으아아아아!" 하늘이 새카맣다. 벌써 밤인가?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팔이 나에게 날아든다. 저건… 오크의 팔인가? 쿠우욱! "카아악! 이 교활한 인간놈! 감히, 취이익! 어딜 뛰어들어!" 컥, 어허억. 그만… 그만 걷어차. 그만 때려.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만 하란 말이야! "이 오크 새끼야! 그만 하란 말이야! 우으으으아!" 몸이 솟아오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투구의 오크. 놈의 콧잔등 을 쥐어박는다. 손등이 뒤틀려나가는 느낌. 오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다. 입술 사이로 들어와 혀에 닿는 피맛. 위장을 모조리 뒤집어 입 밖으 로 토해버리고 싶은 구토감. 옆으로 몸을 날린다. 어깨에 뭔가가 부딪힌 다. 그대로 밀어버린다. 약속이나 한 듯이 날아드는 글레이브. 서걱! 귓 가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동시에 불같이 뜨겁다. 바닥에 떨어진 귓볼을 본다. 조금 전까지 내 귀에 달려있던 것인데 지 금은 땅에 떨어져 있다. 저게 내 귀인가? 저렇게 생겼었군. 신기하네. 자기 귀는 볼 수가 없어야 되는 거 아냐?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오 크의 글레이브를 잡는다. 오크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빼앗기지 않으려 고 반항한다. 놈을 매단 채로 허리를 뒤틀어버린다. 귀에서 볼을 타고 피가 흐르는 모양이야. 목이 뜨끈한걸? 관자놀이를 타고 눈으로 피가 들 어온다. 세상이 붉다. "체에엑! 카악!" "노래! 노래를 불러라, 이 새끼들아! 취이이익? 취이익! 취익취익거리 는 노래를 불러봐!" 오크의 글레이브가 날아온다. 다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무시하면서 허리 를 뒤튼다. 글레이브가 지나가게 하고, 균형을 잃은 오크의 정수리에 손 에 든 글레이브를 꽂아준다. 푸아악. 놈이 쓴 투구가 찢어지며 머리와 투구 사이로 피가 흐른다. 놈의 노란 눈알이 피에 젖는다. 놈은 그대로 허물어진다. 바스타드를 뽑아드느라 멈칫하는 사이에 다른 쪽에서 왠 놈 이 글레이브로 어깨를 내려찍는다. 상반신이 휘청거린다. 바스타드를 두 손으로 쥐고 그대로 돌기 시작한다. 주위의 오크들이 베어져나간다. 갑 옷이 깨지고 찢어지는 소리. 오크들의 노란 눈알, 핏발 선 노란 눈알들 이 끝도 없다. 그것들이 피에 젖는다. 한 오크는 턱이 날아가버린다. 오 크는 다시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 것을 알아차리고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노래를 불러라!" "케에에엑!" "음정이 틀렸어! 가사가 틀렸다고! 취익거려야지!" "크우우욱!" "틀렸다고!" 쾅! 뒷통수에 충격이 느껴진다. 땅이 위로 솟아오르고, 곧 허리와 어 깨, 허벅지쪽으로 고통이 온다. 오크들이 내 몸을 걷어차면서 내는 소리 가 왠지 낯설다. 욕설, 고함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 등이 가늘게 이어 지다가 나는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암흑이 싫어. 내 봄날은 잔혹한 비극의 전주곡이었나. 꽃잎이 무리지어 날아오를 때 난 행복했네. "취이익! 뭐라는 거야?" 여름은 옷을 벗고 날아오르는 나의 여신. 뜨거운 공기 속에 나는 숨이 막혔지. "취익! 괴물 초장이! 뭐야? 이 자식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지?" 봄도 아름다웠지. 여름도 즐거웠지. 하지만. 내 주위는 어느새 낙엽. 난 가을에 서 있네.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하는 마법의 가을이여.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을 타고 나 동으로 달렸네. 찰싹! 볼에서 불이 튄다. "취익! 이 놈아, 뭐라고 떠드는 거냐!" "검은 흙 위를… 추수의 들판을… 반짝이는 개울을… 황량한 산봉우리 를…" "이 놈이 미쳤나? 취이익! 뭐야?" "적막의 대지를… 고통의 바위언덕을… 나 달리고 또 달렸네." 퍽! 숨이 막혀서 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누군가 창대로 내 배를 찍은 모양이다. 눈꺼풀이 어디에 있더라? 이 눈꺼풀이라는 녀석은 잠시만 신 경쓰지 않으면 곧 어딘가로 달아나버리는 놈이라서. 눈을 뜨니 붉은 가슴이 보인다. 저건 내 가슴이군. 엉망진창이야. 볼품 없군. 피와 흙이 묻어 끔찍스러울 정도인데다가, 어디서 붉은 빛이 비치 고 있는 것인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얼굴을 들어올린다. 수백 마리의 오크들. 그 검은 얼굴들 위로 하늘엔 황혼이 펼쳐져 있다. 팔을 들어보려 하다가 내 몸이 나무기둥 같은 곳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굴을 들어 석양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에 태 양은 붉은 불덩어리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 오 크들의 머리가 수도 없이 보인다. 윗쪽을 보는 것이 낫겠군. 왼쪽 눈은 눈꺼풀이 부은 건지 거의 떠지질 않는다. 그래서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거리감각이 맞지 않아 몽환적이다. 난 서편의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 한다. 목이 갈라지는 느낌이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크는 어이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태양을 등지고 있는 놈들의 얼굴은 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얀 이빨들이 번쩍인다. 멋진 이빨들이 군. "부디 뒈지시길…" 오크들은 입을 쩍 벌린다. 기막힌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들의 얼굴 은 그대로 희극이다. 난 바싹 마른 입술이 그대로 갈라지려하는 것을 무 시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에헤헤헤헤…" "카아악! 이 놈!" 오크 한 놈이 창대를 들어 내 복부를 찌른다. 퍼억! 웃다가 그대로 숨 이 막힌다. "코올록, 쿨럭쿨럭, 커, 커허어억!" 배가 뚫린 거 아냐? 목구멍에서 위액이 넘어오다가 만다. 미치겠다. 차 라리 토해버렸으면… 콧속이 간질거리고 목구멍이 타는 듯이 쓰리다. 그 리고 머리는 쾅쾅 울리고 배에서는 찢어지는 고통이 온다. 온몸에서 동 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통의 4중주로군. 젠장. 오크들은 일제히 떠들 기 시작한다. 광란스럽군. "이 자식! 취에에엑! 이제 좀 어울리는군!" "저 인간 죽여! 왜 살려두는 거야! 취이이익! 죽여버려! 그 냄새나는 말처럼!" 냄새나는 말… 말이라고? "컥! 제미니?" 오크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날 바라봤다. 그 때 제미니는? 검은 투구의 오크가 던진 글레이브…? "내 말, 쿨럭쿨럭! 내 말은 …어떻게 되었어?"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던 오크들은 잠시 후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러더 니 놈들은 곧 나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그 말? 고기가 퍽도 질기더군, 갤! 취이익!" "낄낄낄! 취취취익! 먹을 게 많은 점은 좋던데 말이야. 취엑!" 그러자 한 놈이 배를 쑥 내밀더니 길게 트림을 하는 것이 보였다. 거어 어억. 다른 놈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웃어대었다. 이 놈들이 제미니를 잡아… 먹었다고? 잡아먹었어? "으아아아아! 제미니! 제미…닉, 우크, 쿨럭!" "제미닉? 취익! 제미닉? 쿠할할할할하!" 오크놈 중에 한 녀석이 내 흉내를 내면서 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 자 다른 놈들은 쓰러질 듯이 웃어젖혔다. 저 새끼들을 당장! 난 온몸을 비틀어보았지만 아픔만 더해갈 뿐이다. "이 …죽일 놈들아." "아? 취잇, 취! 왜? 그 말을 도로 내놓을까? 웩, 웨에엑!" 오크 놈은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게워놓는 시늉을 해보였고 그러자 다른 오크들은 박장대소했다. 웃어? 웃는다고? 네 놈들이 지금 웃는 거 야? "이 죽일 놈들, 으아아아! 크헐, 쿨럭! 이거 풀어! …주, 죽여버릴…거 야!" 철썩! 가까이 있던 오크 한 녀석이 내 뺨을 올려붙인다. 오크의 거친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가자 살갗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 같다. "도로 내놓는다는데, 취! 불만인가 보군? 취이익!" 난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다. 주 위의 오크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만 가고 있다. 이렇게 되다니. 미안 해, 제미니. 제미니. 이 멍청한 말아, 미안해! 그 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며 다른 목소리들이 모두 기어들어가게 만든다. "닥쳐! 취이익! 지저분한 짓들 하지마! 치칫, 취이익!"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4. 눈가가 불타오르는 느낌이다. 힘들게 눈을 뜨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 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깜빡거려서 눈물을 흘려내니 볼이 뜨겁 다. 볼의 상처에 눈물이 들어가나 보군. "취이이잇! 어라? 눈물을 질질 흘리는 건가? 한결 보기 좋군, 취이익!" 잔인하게 웃고있는 오크가 보인다. 다른 오크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 는 얼굴이 보인다. 그 검은 투구의 오크다. 저 놈이야! 저 놈이 글레이 브를 던졌지! "이봐. …미안한데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좀 알려주겠어?" "취이익! 난 아그쉬! 아그쉬다, 인간!" "아… 그래? 그럼. 쿨럭쿨럭. 후우. 커험! 위대한 아그쉬여. 후치 네드 발이… 당신께 충성과 사랑으로서 제안하는데… 다른 오크와 키가 같아 지도록 할 생각 없나?" "취이이? 키가 같아진다?" "그 위대한 대가리를 잘라내면… 어떻겠냐고 묻는 거야." 콰앙! 아그쉬의 주먹이 내 얼굴에 꽂혔다. 눈 앞이 빙빙 돈다. 꽉 감은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석양의 햇살 때문에 검붉은 암흑 속에 별이 보인 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것 아닌가? "취이, 취이! 이건, 너의 용기에대한 찬양이다! 크핫하하하. 배짱이 좋은 꼬마군. 취이익!" "아… 고마워.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따위 찬양을 하면… 넌 죽어." "끝까지! 이 썩어빠진 오크놈들보다, 취이이잇! 백배는 마음에 드는 꼬 마군." "취이익! 아그쉬! 말 조심해!" "닥Ф! 취익!" 아그쉬는 다른 오크들처럼 글레이브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녀석은 마 치 인간처럼 허리에 큼직한 브로드 소드(Broad sword)를 차고 있었는데 지금 그 브로드 소드를 뽑아들고는 대화에 끼어든 오크를 죽일 듯이 바 라보고 있었다. 그 오크는 콧김을 풀풀 뿜어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욕지 기나는 꼴들이군. 난 다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핏빛 석양이 내 늘어진 머리카락에 부딪혀 반짝이고 있었다. 핏방울 때문인지 땀 때 문인지 머릿카락들은 볼에 붙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제미니. 아 름다운 황혼이지? 하늘 위를 달릴 땐 가끔 내 생각을 해다오. 제미니. 그런데 귀가 왜이리 아픈 거지? 아… 아까 잘려나갔지. 그 때, 오크와 싸울 때. 그 때 우리는 오크와… 우리 일행들은? 난 퍼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내 몸이 완전히 꼼짝도 할 수 없도록 통나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크 녀석들은 팔을 묶어놓는데 그치지 않고 가슴과 허리도 밧줄로 칭칭 감아 놓은데다 가 발목도 묶어 놓았다. 이건 거의 오우거를 묶어놓는 수준이군, 그래. 왼쪽을 돌아보니 또다른 통나무 하나가 보였고 거기에 묶여 있는 남자가 보였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시체 아닌가? 하지만 가슴이 오르 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넥슨이었다. 넥슨도 나와 비슷한 정도로 묶여 있었다. 기절한 거야, 그냥 고개를 숙 이고 있는 거야? 넥슨은 석양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온 몸이 불그스름 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옷은 갈갈이 찢어지다가 만 수준이었고 피가 엉겨붙은 머리카락은 앞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그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이군. 넥슨은 OPG를 끼고 있 었다. 그럼 내 손도 마찬가지겠군.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밧줄을 끊을 수 는 없겠지만 우선 다행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좌우를 돌아보았지만 오크 외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머지 일행들은 성문으로 들어갔군. 아그쉬는 날 보면서 배부른 미소를 지었 다. "그래! 췻췻, 취이익! 너희 간교한 인간놈들의 상투 수단이지! 취이익! 네 친구들은 널 버리고 갔어!" "…내 친구들은 그게 날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 문이지." "기쁘다고? 췻취익! 기쁜가? 기쁘냐고?" 커헉! 이 자식이! 아그쉬놈은 칼자루로 명치를 콱 찍었다. 숨이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목구멍에서 허파가 튀어나올 정도로 격렬한 기침을 한 다음, 난 아그쉬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언하겠어. 지금… 날 죽이는 것이 나을 거야." "취이잇? 왜지?" "그러지 않으면 네가… 죽을 테니까." 말을 하고 곧 이를 꽉 깨문다. 이상하다? 왜 창대나 주먹 같은 것이 날 아오지 않는 거지? 난 눈을 떠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아그쉬는 웃고 있 었다. "그래? 취키키키! 킷키키! 누가 영원히 살 수 있지?" "뭐라고?" "널 죽이지 않는다고 내가, 취이익, 영원히 살 수, 취이킷! 있을까? 키 키키! 취익!" 이거 뭐하는 녀석이야? 이거 헬턴트식 오크잖아? 눈꺼풀이 멍들어 앞을 보기도 힘들었지만 난 최대한 눈을 치켜떠서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놈은 밝게 웃고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있어 어두운 얼굴, 게다가 오크의 얼 굴에 저렇게 밝은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아그쉬는 킬킬거리는 것은 멈추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취이이익! 영원히 사는 것은, 저 위대한 성자 핸드레이크, 취취, 그뿐 이다. 그 외에 누가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취익!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 가." 뭐라고? 윽! 눈을 크게 뜨자 지독한 아픔이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아그쉬 놈은 오른팔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외쳤다. "핸드레이크 만세!" 그러나 주위의 오크들은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놈들은 그저 아그쉬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이 저렇게 조용하다니? 저 침묵 이야말로 완벽한 경의의 표현인 것 같은걸. 아그쉬도 오크들의 침묵에 대해 별 기분나쁜 기색없이 팔을 도로 내렸다. 그 때였다.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살지는 못하지만… 영원히 죽을 수는 있지." 나와 아그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넥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 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넥슨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신처럼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지. 쿡, 쿨럭쿨 럭. 어어흠! 죽어서 말이야." 아그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알아듣겠지? "누가 재가 …프리스트 아니랄까봐. 후우, 후우. 이것봐… 오크들에게 설교를 하시는 건가? 이 엉터리 재가 프리스트…" 갑자기 넥슨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는 아그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아, 아직 영원성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쿨, 쿨럭. 말 했나?" 들어올린 넥슨의 얼굴에선 두 눈이 불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래. 그거 정말 궁금한 건데 마침 잘 물었다. 난 넥슨에게 퍼부어줄 욕을 잠 시 목구멍 속에 보관해두고는 아그쉬를 바라보았다. 아그쉬는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라면, 취이익! 당연히 그렇다! 위대한 성 자 핸드레이크는, 췻취익!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신이다!" "왜? 왜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야 그 분은 위대한 마법사이시니까! 취이이익!" "네가 보았나? 네가 살아있는 핸드레이크를 보았, 컥! 콜로콜록! 보았 냐고, 쿠우울럭! 카아악!" 넥슨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채 격렬한 기침을 쏟아내었다. 그의 입 에서 침과 핏방울이 함께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넥슨은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끝까지 아그쉬를 노려보고 있 었다. 아그쉬는 불쾌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아야 안단 말인가? 취이익! 안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 취이, 취이!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면, 뒤에 있는 것도 볼 수 있 다." 주위의 오크들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아그쉬를 바라보았고 아그쉬 역시 우쭐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하군. 오크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야. 하지만 그 말은 잘못 인용한 거야. 원래 그 말 뒤에는 다른 말이 이어지게 되어있지. 그런데 저 녀석이 어떻게 루트 에리노 대왕의 말을 알고 있는 것일까? 넥슨은 한참 동안 아그쉬를 노려보더니 곧 실망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침 소리를 몇 번 내다가 곧 조용해졌다. 저 빌어먹을 작자는 영원의 숲에서 분리되고 나서는 도대체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 만 하는군. 난 타는 입술을 힘들게 놀려 말했다. "이봐아… 아그쉬. 푸후우. 오크가 왜 핸드레이크를, 휴우우, 친구라고 부르는 거지?" 아그쉬는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코를 벌렁거리며 말했다. "친구를 친구라고 부르지, 취이익! 뭐라고 부르나?" "핸드레이크는… 인간이잖아. 커험! 컥! 게다가 루트에리노 대왕을 도 와서, 쿨럭! 오크들을 수도 없이 죽였는데…?" 난 질문을 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그쉬는 입을 쩍 벌 려 그 멋진 이빨들을 나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그쉬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취에엑?" "내 말이… 틀렸나?" "취이이이익! 핸드레이크가 대항한, 취익! 것은 드래곤 로드다! 오크가 아니다! 취익! 오크가 아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취이이! 핸드레이크 는 드래곤 로드와, 취이치치칫! 싸운 것이다!" 뭐라고? 난 아그쉬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그쉬의 모습은 계속 두 개, 세 개로 보였다.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이 멍청한 오크 녀석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무래도 다시 정 신을 잃으려는 것 같은데. 아그쉬의 목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 분은 우리에게, 취이익!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취칫! 우리를 드래곤 로드에게서, 취이익! 구출했다! 그 분이 아니라면 우리 오크가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흔들면서… 말하지마. 귀가 미치도록 아프다. 나도 모르게 더러운 욕설을 뱉어내며 눈을 뜬 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은 색 배경 으로 붉은 색의 동그라미들 뿐이다. 일렁거리는 붉은 동그라미들. 왠지 고향 언덕에서 바라보던 반딧불들 같아. 어지럽군. 난 다시 욕짓거리를 뱉었다. "시끄러워." 넥슨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네가 지금 나에게 시끄럽다고 했냐? "누구한테 시끄럽다고 하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서 넥슨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좀 더 눈에 촛점을 맞추고 보자, 주위는 어느새 밤이 되었고 오크들이 군데 군데 모닥불을 피워둔 것이 보였다. 제길. 반나절 동안 묶여있었던 몸은 내 몸 같지가 않다. 손끝이나 발끝 에 감각이 없다. 가슴은 어디에 있고 허리는 어디에 있지? 크윽! 그럼 반나절 동안 묶인 채 서 있었던 건가? 온몸의 피가 몸 아래로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퉁퉁 부은 다리에 밧줄이 쓸리면서 지독한 아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차가운 밤바람이 불 때마다 몸은 정신없이 떨린다. 하 지만 그것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밧줄은 살갗을 파고들듯이 몸을 죄어왔다. 차라리 죽고 싶다… 빌어먹을! 웃기지마! 아 직은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있을 거야! 다시 한 번 눈에 힘을 준다. 오, 제기랄! 차라리 오크놈의 얼굴을 보고 싶어. 넥슨 녀석이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 같은 눈에선 침 침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자니 소름 이 돋아오른다. 입이 저절로 열린다. "네놈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내 말은 오크들의 간식거리가 되 었고. 더 원하는 것이라도 있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쉬어버린 목소리. 이거 내 목소리 맞나? 기침은 사 그라들었지만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터지는 느낌이 든다. 말라붙은 입 술을 적시려 해보았지만 침도 나오지 않는다. 넥슨은 한참 동안 날 쏘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친 꼬마놈. 네놈이 좋아서 뛰어들어놓고는 누굴 탓하는 거냐." "넌 오크에게 고마워해야 돼." "뭐라고?" "난 지금 어떻게 달아나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널 죽고 싶을 만큼 괴 롭힐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오크들이 날 이렇게 칭칭 묶어 두지 않았다면 난 지금이라도 네 빌어먹을 목구멍에서 살려달라는 애원 도 안나오게 될 때까지 때려줄 거야." "더러운 입에서 더러운 말만 나오는군…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거지?" "뭐야?" "아둔한 놈. 왜 날 싫어하냐고 물었다." 저 자식이 누구 복장 터져서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건가? 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려다가 멈추었다. 아차, 저 녀석 영원의 숲에서 자신을 잃었 었지? 갑자기 놈에 대한 분노가 방향을 잃는 것 같다. 저 놈에게 그 자 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과거의 행적에 대해 비난해야 되나? 이런… 우라질. "말해주지. 넌 사실 내 아들이다." "웃기지마." "네가 나에게 저주를 걸어서 내 모습이 이렇게 어리게 바뀐 거야. 기억 나지 않느냐, 아들아?" "…진짜냐?" "당연히 거짓말이지." "이… 망할 놈!" 난 힘없이 웃었고 넥슨 녀석도 미소를 지었다. 제길. 꼴좋군. 저 때려 죽이고 싶은 녀석과 같이 오크 무리 한가운데 묶여서 너절한 농담이나 널어놓으며 웃고 있다니. 같은 입장에 빠졌다는 것이 이렇게도 희한한 작용을 일으키는 건가? 난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눈이 나빠진 건가? 주위엔 모닥불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마리의 오크들이 좀 떨어진 위치에 앉아서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외에 다른 오크들은 전혀 보 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이 도대체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느라 고개를 움직이니 곧장 귀에서 다시 통증이 느껴졌 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넥슨에게 질문했다. "망할. 지독하게 아프군. 그런데, 당신. 도대체 기억하는 것이 무엇무 엇이야?" 넥슨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좀더 큰 목 소리로 말할 것이냐, 아니면 나직한 목소리지만 욕짓거리를 섞어서 화를 돋우는 식으로 말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 넥슨은 입을 열었다. "희다." "뭐라고?" "기억… 하얗다. 대미궁에서 말한대로. 머릿속이 지독하게 희다." 흰 것은 네녀석의 뒤집어진 눈알이 희지. 쳇. "대미궁엔 왜 간 거지?" 넥슨의 고개가 움직이며 그는 날 똑바로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은 여전 히 증오의 빛이 담겨 있었지만 왠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이었다. 망할. 증오가 잊혀지는군. 자신의 3/5을 잃어버리고 저렇게 초라한 모습 으로 묶여있는 것을 보니 동정심이 일어나려고 하잖아. 젠장. "말해봐.그건 잊지 않았을 테잖아. 그럼 내가 뭔가를 도와줄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꼬리가 흐려진다. 설마 넥슨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넥슨의 기 억은 망각된 것이 아니라 아예 소멸되었다. 그 기억은 죽은 그의 다른 부분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뭘 되찾는다는 거지? 넥슨은 말을 시작했다. 그의 어조는 어두웠다. "빌어먹을. 네 놈을 아무리 노려보아도 감정이 일어나질 않아." "감정?" "넌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다, 이 꼬마 녀석아. 아무리 쳐다보아도 감정 이 일어나질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날 안다 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인데, 그런데 마주보고 있어도 아무 것도 떠 오르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건 완전한 타인 을 보는 것과 달라. 감정이 전달되어오고 눈빛이 전달되어오는데, 난 아 무런 기억이 떠오르질 않아." 별로 할 말도 없군. 난 차분히 기다렸다. 그건 당신 스스로가 감당해야 될 일이야.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의 나로선 입에 발린 말 해줄 기운도 없다고. 그럴 기운이 있어도 해줄지 의문이지만. 넥슨은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여덟 별중 남은 하나, 드래곤의 별을 찾기 위해 대미궁에 간 것이 다." "잠깐. 뭐라고? 여덟 별이 뭔데?" "드래곤 로드의 여덟 별… 넌 그것을 모르는가? 아, 그래. 아무도 모르 지. 하지만 난 그것을…" 갑자기 넥슨의 말이 끊어졌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촛점없는 눈으 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그것을 누구에게…? 누구더라?" "누구에게 들었단 말이야? 하슬러? 시오네?" 넥슨의 머리가 급격하게 움직였다. 그는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시오네? 그게 누구냐? 말해! 그게 뭐야?" 맙소사. 저 녀석 도대체 뭘 기억하는 거야? 난 고개를 좀 가로저으려다 가 기겁하며 멈추었다.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왔던 것이다. 망할 오크 놈들! "이봐. 당신이 바이서스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야! 그것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 꿈에서도 지워지지 않 아. 그런데 시오네는 뭐야?" "시오네는 자이펀의 간첩이야. 당신을 돕고 있었는데." "자이펀의? 왜?"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5. "맙소사. 잘 들어봐, 이 작자야! 자이펀은 바이서스와 전쟁 중이잖아. 그런데 당신이 바이서스를 뒤집어버리면 자이펀으로서도 좋은 일이잖아? 그러니까 자이펀은 당신이 반역을 일으키도록 도와주고, 대신 당신은 왕 이 되면 자이펀에 대해 사과하고 항복 선언을 하는 거야. 이해가 돼?" 넥슨의 눈에서 동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가? 괜찮은 계획이군. 괴뢰정부의 수립이란 말이지." "그래. 내가 아는 정도는 거기까지다. 나와 넌 서로 반대입장이거든." "그랬나? 그렇겠군. 그래서 날 싫어하는 모양이군. …그래서, 시오네라 는 그 자이펀 간첩이 날 돕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반역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음. 괴뢰정부를 수립해서." 넥슨은 마치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는 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되뇌었다. 불쌍한 녀석. 잃어버린 부분을 보완하려는 건가? 측은한 모습 이군. "그래. 그런데 드래곤의 별이라는 것은 뭐지? 여덟 별이라니, 그건 루 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순간 넥슨은 교활한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눈빛은 마음에 안드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넌 기억을 잃었어. 내게서 무슨 정보 를 긁어내려면 너도 아는 것을 말해야 될걸. "쿨럭, 커흠, 흠. 그… 그런데 시오네라는 사람은 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거지? 영원의 숲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은 하슬러와 쟈크, 그리 고 레니라는 그 계집애뿐이었다. 그 사람은 왜 없었지?" 이 놈이? 나도 그렇게까지 오냐오냐 해줄 수는 없어. "질문을 하려면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이 못된 꼬마놈, 어서 말해!" "닥쳐! 대미궁에서의 기억은 남아있을 텐데? 난 너에게 겁먹은 적 없 어." 얼씨구? 네가 날 죽일 듯이 바라보면 어쩔 건데? 운차이의 눈은 어떤지 알아? 난 똑같은 눈으로 넥슨을 바라봐주었다. 넥슨은 이를 북북 갈더니 잇사이로 새는 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은 정말 죽이고 말테다, 이 꼬마놈아!" "하, 내가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넥슨은 움찔했다. 제대로 된 대답이었나 보지? 잘봐둬. 득의만만한 웃 음이란 바로 이런 거야. 넥슨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 시무룩한 얼굴 이 되었다. "여덟 별, 그리고 드래곤의 별이 뭐야?" 넥슨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는 것은 들어봤겠지." "바이서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잖아." "천만에! 누구나 잘못 알고 있는 이야기지!" "뭐라고?" "키키키… 그 정식 명칭이 뭔지 알고 있나?" "정식명칭이라니. 그런 것이 있었던가?" "그래. 그 정식 명칭은 여덟 별의 추구자다. 에잇스타시커(Eight star seeker). 그걸 줄여서 여덟 별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에잇스타시커? 그게 줄어서 에잇스타라고? 넥슨은 말을 이어나갔다. "여덟 개의 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그 숫자를 맞춰서 여덟 명의 기사가 있었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잊혀지고 변형되어서 여덟 별 이란 여덟 명의 기사를 가리킨다고 알려졌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일 테지?" "어, 그래. 그런데 원래의 여덟 개의 별이 뭔데?" 넥슨의 머리가 휘익 움직였다. "내 차례다, 꼬마놈!" 수탉이 지렁이를 쪼기 전에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 꼭 저렇지.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이는 머리. 하지만 상체는 꼼짝도 하지 않고. 보기 싫은 놈. "뭐가 알고 싶지?" "시오네라는 그 간첩은 왜 나와 함께 있지 않은 거지?" "휴우. 내가 알기로 그 여자는국왕 전하를 암살하기 위해 바이서스 임 펠로 갔다고 알고 있어." 넥슨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즈막했다. "국왕 암살?" "그건 당신들로서는 비밀이었겠지. 그래서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해. 하 지만 당신은 델하파에서 우리들과 싸울 때는 시오네와 함께 있었지. 그 런데 그 다음부터 시오네가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후 바이서스 임 펠에서는 임펠리아 침투 소동이 일어났지. 그러니 간단한 거잖아. 당신 은 델하파에서 시오네와 헤어진 거야." "델하파? 그 세이크럴라이제이션된 도시 말인가?거기서 너희들과 내가 싸웠나?" "그렇지… 잠깐! 당신 세이크럴라이제이션에 대해 알고 있나?" "뭐? 어, 그야 알고 있지… 알고 있다? 안다?" 넥슨은 멍한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그 눈은 날 향하고 있었지만 촛점은 거의 맞지 않았다. 저 불안한 얼굴이 진짜 넥슨 휴리첼의 얼굴인 가? 내 OPG를 자기 것처럼 빼앗고, 길을 막는 아이를 말로 밟아 죽이고, 평화스러운 델하파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들고, 영원의 숲으로 부하들을 끌고 가서 다 죽게 만든 남자의 얼굴인가? "이상하군.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자이펀에서 개발한 기술이야. 당신이 그걸 기억한다고? 그럼 자이펀과의 협력사항도 기억한다는 거야?" "자이펀? 협력? 몰라. 모르겠다. 하지만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기억난 다. 그래… 그날 새벽. 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고… 잠깐, 디바인 마크를 묻었을 때… 혼자였던가? 아냐. 혼자가 아니었어. 난 그것을 누 군가에게 받았지. 그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래. 그것에 대해 누 군가와 질문했지. 이 디바인 마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를 물었었 지.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었었지? 그걸 왜 묻어야 되는 거지?" "이건 정말이지…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기억한다면서!" 넥슨은 마치 야단맞는 어린애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돌 겠네. 정말 교사라도 된 기분이군, 그래. 나와 넥슨이 이렇게 사이좋게 회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샌슨은 아마 기절하겠지. 쳇. "이봐, 왜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는 거지? 난, 난 그것을 받았어. 그 리고 물었지.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했냐고. 그래. 물었어! 물었 다는 것은 그것이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테지? 그렇지, 꼬 마야?" "후치라고 불러. 제길. 그 디바인 마크를 묻는 것이 의식의 마지막, 그 러니까 의식의 증거야. 의식이 치뤄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땅은 세이 크리드 랜드가 되는 거지." "아, 제물처럼 말인가?" "그래. 아, 아냐. 난 신학에 대해선 잘 몰라. 그러니까 제물처럼 신력 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아니면 무슨 도장처럼 그냥 증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넥슨은 곰곰히 생각하는 얼굴로 질문했다. "다른 제물 같은 것은 없나?" "난 잘 모른다고 했잖아. 에, 내가 아는 것은 이렇다. 난어떤 영지에 서 그 시오네라는 여자가 디바인 마크를 사용해서 그 영지를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드는 것을 보았지. 하지만 나보다 똑똑한 누군가가 말하길 그 힘은 디바인 마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50명의 꼬마들의… 뭐라더라? 무슨 신앙인데?" "전신앙?" "아, 그래. 전신앙. 그게 뭔데?" 넥슨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전신앙은 합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형태의 신앙을 말한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신앙은 방향성이 없어. 어른들이라면 에델브로이나, 그랑엘베르 나, 레티 등 정해진 신을 알고 그 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따를수 있지. 그 신앙은 방향성이 뚜렷해. 하지만 아이들의 신앙은 단지 무섭고 위대 한 것에 대해 맹목적으로, 막연하게 따르지. 그래서 그 순수한 신앙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어느 신에게도 그 힘을 바칠 수 있다. 조악하게 설명하자면 한 마디로 이런 거야. 어린 아이에게 오크를 가리켜 저것은 트롤이라고 가르칠 수 있겠지?" "아… 그럼 그 신안, 아니 전신앙은 잘만 유도하면 어느 신에게든 바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말이야?" "그래. 더군다나 완전히 맹목적이고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형 태의 신앙이기 때문에 강력하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들의 전신앙을 유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전신앙을 유도할 …시술자? 제사장? 어쨌든 그 시행자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지. 그런데 50명이 나 되는 아이들이 동원되었다고?" "그래. 어라? 이상하군. 델하파에서는 어린 아이의 납치 같은 것에 대 해선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델하파 뿐만 아니라 일스의 도시들 곳 곳에서 동시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군?" "뭐야? 무슨 말이야? 어린 아이가 동원되지 않았다고?" "그래. 칼라일 영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사라졌어. 하지만 일스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넥슨은 다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쳇. 간단하군. 자이펀 꼬마들이다." "뭐?" "아이들을 50명이나 납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네가 말하는 그 영 지라는 것은 필시 시골이었을 테지?" "그런 셈이지." "하지만 일스 곳곳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 간단해. 자이펀 꼬마들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한 거야. 의식은 아마도 자이펀 국내에서 진 행되었겠지. 그리고 그 디바인 마크는 의식의 증거, 그리고 신력이 나타 날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서 일스로 운반되었을 테고. 꼬마들을 끌고다니 거나 납치하는 것보다는 디바인 마크를 운반하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 거 굉장한 무기로군. 디바인 마크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까." "야! 잠깐, 이거 좀 묻자. 그 의식에 동원된 꼬마들은 어떻게 되는 거 야?" "뭐라고? 어,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전신앙이 발달해서 신앙이 되는 거 니까. 음. 아마 평생 동안 회의적인 인간이 되겠지. 무엇에 대한 신뢰나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인간.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이런… 맙소사! 그런잔인한 일을?" "그게 어때서. 고대의식에서는 아이들을 통채로 제물로 삼는 경우도 있 는데. 훨씬 신사적인 방법이군, 그래." 넥슨은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설마 그거 진심은 아니겠지?" "진심이야." "이 때려죽일 가짜 성직자야!" "뭐라고?" "아무 것도 못믿는다며? 부모도 못믿고, 애인도 못믿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못믿으면서 평생 동안 살게 만드는 것이 신사적인 일이라고! 그 게 성직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냐?" 넥슨은 갑자기 어깨를 심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밧줄을 꼼짝도 하지 않 았고 그러자 넥슨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고함을 지른 것이다. "그게 어때서! 세상에 믿을 것이 어디 있어? 모두가 거짓이고 모두가 환상이라는 주장도 있지 않아? 살아남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살아가는 데 뭐 특별하게 고상한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고상한 방법은 없더라도 보다 비참한 방법은 있어! 그 꼬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게 만드냐고!" "내가 했냐! 시끄러워!" 나와 넥슨은 잠시 말을 잊은 채 서로를 쏘아보았다. 놈의 눈빛은 아무 래도 비정상이다. 그 입은 합리적인 듯이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이다. 저게 자신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증후군 인가? 아니면 원래 저따위 녀석이었나? 알 수 없는 일이군. 저멀리 앉아있던 오크들은 우리가 떠들자 곧 고함을 질러왔다. "취이익! 시끄러워, 인간들! 그 나무 기둥 침대가 편한가 보지? 취췻! 더 편하게 만들어줄까?" 숨을 고르는 것이 참 어렵군.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미쳐버린 것이 분명한 녀석과 말을 나누는 고통도 만만치 않은걸. "젠장. 좋아. 어쨌든 델하파에서 당신에게 그 디바인 마크를 건네준 것 은… 아마도 시오네가 당신에게 주었겠지." 넥슨은 다시 반색을 했다. 말 한 마디에 저렇게 곧 밝은 얼굴이 되는 것을 보니 정말 동정심을 지울 수가 없군 그래. "시오네가? 그 간첩이 준 거라고?"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잖아. 그건 자이펀에서 만들어내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이펀 간첩인 시오네가 당신에게 줬겠지. 왜 줬냐고는 묻지 마. 내가 하는 말은 전부 추측이야." "이런, 제기랄! 그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사실? 흥. 누가 사실을 알지? 네가 조금 전에 한 말 아니야? 모두가 거짓이라면서?" 나는 매몰차게 쏘아붙였고 그러자 넥슨은 턱을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 다. 정말 저 표정 바뀌는 거 눈 뜨고 못보겠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덜 딱딱하게 바뀐다. "어쨌든 내 추측이 그렇게 틀리진 않았을 거야. 당신이 그 디바인 마크 를 준비하지는 않았잖아? 누가 줬다며? 그런데 게덴의 디바인 마크는 자 이펀에서 개발해내는 거니까 시오네가 줬겠지. 시오네와 당신 사이에 무 슨 계약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계약… 계약이라고? 무슨 계약?" "아앗, 이 빌어먹을! 시오네가 그것을 왜 당신에게 줬는지 뭔가 추측되 는 것이 없어?" 넥슨은 다시 백치 같은 얼굴로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 통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군. 정말 골치 아픈 노릇이군. "이봐, 계약이라면, 그러니까… 시오네는 내가 괴뢰정부를 수립하게 도 와준다고 했는데… 그게 일스의 도시를 세이크럴라이제이션하는 것과 무 슨 상관이 있지?" "알게 뭐람. 이제 내 차례야." 넥슨의 얼굴에 또다시 노여움이 떠오른다. 무슨 표정이든 마음대로 지 어봐. "원래의 여덟 별이 뭐지?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것을 찾기 위해 여덟 기 사를 구성한 것인가? 아, 그리고 말해둘 것이 있는데, 만일 거짓말을 하 는 것처럼 느껴지면 나도 거짓말을 하겠어. 그런 느낌만 오면 아무 내색 없이 당신의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해버릴 거라고. 알겠어?" 넥슨은 이를 북북 갈면서 날 바라보았다. 난 잠시 고개를 숙여 몸을 묶 고 있는 밧줄을 내려다보았다. 한심스럽군. 이런 꼴이 되다니. 그런데 우리 동료들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성 안에서 어쩌면 내 구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크레블린 대장이나 안티고어 시장이 그것을 허락할까? 카알은 이성적인 척하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그 반대 다. 틀림없이 네드발군을 구출해야 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을 것이다. 음. 왠지 치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할 수 없잖아. 구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날 구하기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을 대비 해 달려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오늘 하루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 고 말았는데. 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고는 싶지만, 솔직하게 그렇지만. 그 래서 난 넥슨의 말 중에 몇 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 호비트, 페어리, 오크… 나 머지 하나는 모른다. 어쨌든 땅위에 발 디디고 사는 생물들 중 말을 하 는 생물이 여덟 있지.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생물 여덟." 어라? 무슨 말이지? "갑자기 왠 박물학이지?" "닥치고 들어! 음… 뱀파이어나 라이칸스롭은 말을 하지만 생물이 아 냐. 도펠겡어도 말한다고 우기지는 마라. 그건 생물의 모습을 훔치는 거 니까. 자유롭게 태어나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지적생물… 신을 우러러 볼 줄 아는 생물이 여덟 있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걷는 종족." "토끼도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뛰어다녀." 넥슨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왠지 바보가 된 것 같군. "멍청아! 토끼는 자신의 자유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토끼는 자신 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할 줄도 모른다. 무지와 자유가 같은 것 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자유는 그것을 인식하고 추구할 줄 아는 자에게 의미가 있는 거야. 황소가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냐? 네 가 황소를 풀어주면서 '자, 자유다.'라고 말하면 황소가 좋아할 것 같 냐? 머리가 달렸다면 생각하는데 써! 투구나 모자걸이로 사용하지 말 고!" "아, 그런 거야? 그런데 그 여덟 종족이 어땠는데?" "그런 자유로운 여덟 생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 있다." "보석?" "그래… 정확하게 보석인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보통 별이라고 부르 는 것은 보석일 가능성이 높지. 그것을 여덟 별이라고 하니까. 그것은, 우주가 열릴 때,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마저도 희미할 때, 수탉이 첫 번째 울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새벽 으스름 속에 첫번째 샛별이 떠오를 때… 이런 말은 쓸데없지. 어쨌든 그런 보석이 여덟 개 있다. 왜 있는 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누가 만들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지 모른다. 어쨌든 그것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우리들로서는 모른다. 우 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발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것을 깨닫고 그 존재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 에." "박수 쳐줄까?" "집어치워!" "좋아. 그런데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라니. 그 희한한 보석이 뭔 일을 하는데?" "그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하는 보석… 그 번영과 그 사상과 그 마음 을 지도할 수 있는 보석. 스스로의 의지는 없다. 결정권과 그 실행권.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엄청난힘이 있을 뿐이다." "뭐라고?"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6. 이 자식이 드디어 돌았구나. 아무래도 오크들이 저 녀석의 머리쪽을 때 린 모양이다. 난롯가의 옛날 이야기도 저렇게 황당하지는 않겠군. "이봐, 잠깐만. 그러니까 그 잘난 보석만 가지고 있다면, 예를 들어서 내가 드워프의 보석을 가지고 있다면 드워프들에게 모두들 왼쪽 콧수염 은 모두 잘라내어라, 라고 말할 경우 모든 드워프들이 왼쪽 콧수염을 잘 라낸다는 말이야?" "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꼬마놈! 만물을 네 수준으로 끌어내려 시시덕거 리지 마라! 그것이 신을 조롱하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임을 모르느 냐?" "다른 프리스트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나도 좀 부끄러워했을 거야. 하지만 너 따위 엉터리 재가 프리스트에게 그런 식의 비난을 들을 순 없 어! 까불지 마! 네녀석의 입으로 신을 말해? 그게 어린 꼬마를 말로 밟 아죽이는 녀석의 입에서…" 입에서 나오던 말이 입천장 쯤에서 붙어버린 것 같다. 넥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뭐라고? 어린 꼬마를… 어떻게?" "제기랄. 네녀석의 과거 행적 중에 하나다.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떠 들어도 좋아. 난 사실을 말할 뿐이야. 넌 말을 달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 는 꼬마가 있자 그대로 밟아죽이면서 달렸어." "새빨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마음대 로!" 넥슨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꺽여지고 그 어깨는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인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곧 볼을 후려치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밧줄의 고통이 다시 몸을 파고든다. 어떻게 몸 을 뜨겁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이 지독한 경련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 을까? 뒤로 묶인 손을 비틀어보려 했지만 도대체 내 손이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 감각도 오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의 감각을 찾아보다가 난 포기해 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밤의 어둠은 더욱 짙어져 가는 것 같다. 하늘엔 별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넥슨의 얼굴엔 아무 별도 없었다. "미안해."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제길, 미안하다고! 하지만 어쩌란 말이야. 그건 네가 저지른 짓이야. 내 눈으로 직접 보았어." "됐어. 입 다물어. 내 차례야." 많이 쉰 목소리. 그 울림엔 왠지 물기 같은 것이 묻어있는 듯하다. 녀 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그런 짓을 할만한 사람임을 납득 하고 있을까, 아니면 과거의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있을까. "뭐가 묻고 싶지?" "내가 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거지?" "…보통 사람들끼리의 대화라면, 그거 정말 웃기는 질문이야. 하지만 웃지는 않겠어. 그렇다고 대답해주겠다는 말도 못하겠는데." "왜?" "나도 모르거든. 당신이 왜 그러는지. 당신이 한 몇 마디의 말은 기억 나지만." "그게 뭐지?" "당신은 아버지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염증을 내는 것 같이 말했어. 그리고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귀족이나 왕족으로 불려 져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것 같아." 넥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라. 그렇군. 우리 아버지의 죽음은 부당한 것인가 보군." "그래… 아니, 잠깐? 어라, 당신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았는데?" "뭐라고? 무슨 소리야!" "당신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 말했어. 로넨 휴리첼 백작은 아무르타트 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지 죽은 것은 아니야." 넥슨의 눈자위가 커졌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을 꿈틀거렸지만 말을 꺼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말을 했다. "이봐! 후치!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난 다른 것을 몰라도 그것은 기억해! 우리 아버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단 말이야."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 아버지를 직접 보았어. 우리 고향에 찾아오셨을 때 말이야. 그리고 과거의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분열되기 전의 당신 말이야. 그런데 당신이 태어나기 도 전에 죽었다니?" "뭐라고? 어, 어엇? 아냐! 우리 아버님께서는 분명히 돌아가셨어! 우리 아버님의 이름이 로넨 휴리첼인가? 어쨌든 그 분은 죽었단 말이야!" 이 작자가 지금 모자란 기억 속에서 무슨 망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 야? 기억의 파편들이 모이면 얼토당토하지 않은 새로운 기억이 생길 수 도 있다는 말인가? "그럼 설명해봐.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당 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면 누가 이야기를 해줬겠지. 그것은 기억나 는 거야?" "그것은…" 넥슨은 다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수명이 짧아지는 느낌이군, 제기 랄. 이렇게 답답한 대화라니. 넥슨의 입에서 말들이, 아니 단어들이 띄 엄띄엄 나왔다. "부당한 죽음… 억울함… 사무치는 슬픔… 배신… 이러한 기분들. 명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내 하얀 머릿속은 마치 안개 속 같아. 안개 속 에서 보는 사물들처럼 희미하고, 그 윤곽마저 흐리고… 느낌은 기억나. 하지만, 하지만…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고! 형제의 손 에 죽음을 당했…!" 넥슨은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랐고 나 역시 크게 놀라버렸다. 무슨 말이 야? 로넨 휴리첼 백작이 형제의 손에 의해 죽다니? "이봐, 이봐. 당신 아무래도 뭔가를 크게 착각하는 모양이야. 당신 아 버지의 형제가 있기는있었어. 그러니까 당신의 삼촌이지. 그 삼촌 되는 사람이 죽기는 죽었어. 하지만 당신 아버지는 죽지 않았단 말이야." "삼촌이라고?" "그래. 아니,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아니… 기억나지 않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제기랄!" 난 한숨을 내쉬었다. 묶여있는 몸 때문에 벌써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 든데,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작자를 상대해야 되다니. "좋아. 후우우… 이 빌어먹을 밧줄! 하나씩 하나씩 설명할 테니까 잘들 어. 그러니까…" "잠깐." 넥슨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지? 난 입을 다물고 넥슨을 바라 보았다. 넥슨은 말했다. "이 소리 들리지 않나?" "무슨… 어랏?" 그러고보니 들려온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인지 꽤나 희미한 소음 이다. 하지만 불길한 소음이다. 비명소리, 욕설?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 는 소리도 들려오고 말의 울음 소리도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 깐! 오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지? 이 오크놈들이 야습을 시도하는 것이구나! 서쪽이 어느 쪽이지? 낮에 내가 묶여있었을 때 석양이 보였었지. 그러 니까 정면이 서쪽이다. 그렇다면 칸 아디움이 있는 방향은 바로 내 정 면. 지평선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을 노려본다. 이윽고 지평선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불길이 보인다. 마치 피부를 살짝 베었을 때처럼 빨갛고 가느다란 선이 보인다. "저 놈들이잇!" "야습에 성공했군." "뭐라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성공했다는 거야?" "멍청한 꼬마놈.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불길이 오를 리가 없지." "이이익! 제기랄!" 저쪽에 있던 오크들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놈들은 벌떡벌떡 일어 나더니 불길을 가리키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커다란 웃음소리와 왁자 지껄한 환성을올리며 놈들은 어딘가로 뛰어갔다. 젠장! 그럼 카알은? 샌슨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오크들에게 야습 을 허용한단 말이야! "보는 눈이 없군. 됐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난 넥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넥슨 녀석은 갑자 기 앞으로 쓰러졌다. 쿠당탕. 놈은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면서 두 팔을 부둥켜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밧줄은?" 넥슨은 벌벌 떨리는 팔을 힘있게 잡으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머 리를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난 도둑이었다, 후치. 이까짓 밧줄이야 아까 낮에 끊어두었다. 다만 달아날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기다린 거지." "뭐라고? 넌 도둑이 아니야. 도둑 길드의 마스터지." "뭐야? 아니… 마스터가 도둑이 아니라고…?" 넥슨은 다시 멍청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도대체 남아있는 기억마저도 뒤죽박죽이군. 넥슨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 다리는 곧 옆으로 미끄러졌고 그는 무릎을 강하게 부딪혓다. 무릎이 꽤 아플 텐 데도 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다리를 끌어당겨서 앞에 세웠다. 그 손과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는 조금전까지 자신이 묶여 있던 그 나무기둥을 붙잡으며 힘들게 일어났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나무기둥을 거의 안다시피 한 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이마를 나무 기 둥에 댄 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비틀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늘어트린 오른손에는 어디에 숨겨두었던 것인지 조그만 나이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도둑이라 고? 어쨌든 도둑 길드의 마스터다운 솜씨다. 아니, 오크들의 소지품 검 사가 엉망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는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오더니 내가 묶인 나무에 왼손을 짚었다. 녀석의 기분나쁜 얼굴이 내 얼 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나이프는 똑바로 내 가슴에 겨누어 졌다. "너…?" 뒷통수의 머릿카락이 모두 하늘로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넥슨은 씩 웃더니 밧줄을 끊었다. 툭, 투둑. 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까지 모두 끊어 지자 난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땅에 호되게 부딪혔지만 둔한 아픔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허리가 땅에 닿는 순간 난 이를 꽉 깨물었다. 그곳은 오전에 오 크에게 깨물렸던 곳이고, 제레인트와 샌슨이 치료해주었지만 아직 낫지 는 않았던 모양인지 지독한 아픔이 느껴졌다. 난 땅에 나동그라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손으로 몸을 만져보았지만 손 의 느낌도 몸의 느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듯이 내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으니 그렇게 느 낄 수밖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다리쪽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어떻게 일어난다는 말이야. "일어나." 빌어먹을! 다 참아도 저 녀석이 저렇게 날 깔보듯이 바라보게 할 수는 없어. 난 팔을 휘둘렀다. 마구 휘두른 팔은 나무기둥에 세게 부딪혔지만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어쨌든 난 나무기둥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간신 히 일어나는 순간, 발이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입 술이 땅에 부딪히며 눈 앞이 번쩍한다. "크…흐윽. 허어, 허어엇." "일어나, 멍청아. 도와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 후우, 후우. 결국엔 자신의 다리로 달리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도와주는 것은 소용이 없 어!" "다, 다, 닥쳐라… 일어날 거야!" "그럼어서 뜻대로. 널 걷어차서… 일어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 쉽다. 쿨럭쿨럭." 망할. 댓구는 꼬박꼬박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지? 눈에서 흘러내 린 눈물은 얼굴에 말라붙은 땟국물과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온다. 일어나 다가 쓰러지면서 몸이 급격하게 움직이자 뱃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부 들거리는 팔을 끌어모아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네 발로 선다. 머리를 들어 넥슨을 본다. 제길! 넥슨은 나무기둥에 기대어 선채로 날 보고 있 었는데 그 시선이 꼭 발치의 개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 도와줘." "도와달라고? 웃기는… 소리. 밧줄도 잘라줬다. 이젠 너의 발로… 일어 서라!" "빌어먹을!" 다시 팔에 힘을 준다. 땅을 거세게 밀면서 허리를 튕겨올린다. 하지만 모래가 미끄러지며 발은 뒤로 밀려나버리고 배가 호되게 땅에 부딪힌다. 콰앙! "어커억! 쿠울럭, 쿨럭!" 난 배를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나가떨어졌다. 배가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목에서 토기가 올라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지독하 게 쓴 맛. 눈앞이 흐리다. "케엘록, 켈록, 쿨쿨쿨…럭!" 넥슨의 모습이 비스듬하게 보인다. 그것도 두 개, 세 개로 보인다. 어 지러워, 어지러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낸다. 그러자 경멸스러운 표정 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넥슨의 얼굴이 보인다. 놈의 입술이 빠르게 움 직인다. "퇘!" 볼을 타고 흐르는 진득한 액체의 느낌. 난 어리둥절해졌다. 목에선 휘 파람 소리 같은 숨소리를 내면서 난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넥슨을 올려다 보았다. 넥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죽어랏! 죽어버렷! 그게 네가 살아가는 방식인가? 그 정도에 포기할 목숨이냐! 그렇다면 지금 죽어버려!" "이 새끼야아아! 넌 맨처음 볼 때부터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어!" 어떻게 된 거지? 난 일어나 있었다. 내 머리는 땅에서 한참 떨어져 있 었다. 하지만 다리엔 감각이 없다. 난 땅을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 다. 말도 안돼. 17년 동안 이 높이에 있었던 머리가 이제서야 현기증을 느낀다고? 하지만 현기증을 느낄 사이가 없다. 팔을 마구 휘저으며 상반 신을 앞으로 날린다. "쿠으윽!" 이 자식아, 그 턱이 깨졌지? 난 이마로 넥슨의 턱을 받아올린 다음 그 대로 머리로 넥슨을 밀면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야야야야야야!" 퍼퍼퍼퍼퍽! 내 주먹에선 아무런 감각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여전 히 머리로 넥슨의 가슴을 밀면서 그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고 있었다. 어 라? 내 주먹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난 내 주먹을 관찰하면서 어리 둥절해졌다. 그 주먹들은 미친 듯이 튀어나가면서 넥슨의 복부를 때려대 었고 그럴 때마다 넥슨의 입에선 숨막히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퍽! 마지막 한 방을 꽂아준 다음, 나는 마침내 팔을 늘어트렸다. 난 팔 을 늘어트린 채 머리를 넥슨에게 밀어붙인 자세로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넥슨은 나무 기둥과 나 사이에 끼어 쓰러지지 못하는 모 습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 때였다. 저 아래에서 넥슨의 손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 을 보면서도 난 팔을 늘어트린 채 꼼짝도 못하고 기대어 서있었다. 콰앙! 넥슨은 두 주먹을 깍지끼고 내 뒤통수를 내려친 모양이다. 아무 힘이 담기지 않은 주먹질이었지만 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두 팔을 허우 적거리다가 넥슨의 허리를 붙잡았다. 순간 목구멍이 타오르는 느낌이 든 다. "우우윽!" 무릎을 꿇은 채 넥슨의 허리를 부둥켜안고서 그대로 토해버렸다. 넥슨 은 피하지도 못한 채 그 발에 내 구토물을 뒤집어썼다. 머리 위에서 넥 슨의 신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려한 복수군." "젠장… 우윽! 우… 미안해." "걸을 수 있나?" "…죽지는 않을 거야." "좋아."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7. 목구멍은 쓰라렸지만 속은 후련하다. 난 나 스스로 놀랄만큼 경쾌한 동 작으로 일어났다. 사실 허우적거리며 볼쌍사납게 일어난 것이지만 그렇 게 유쾌할 수가 없다. 넥슨은 그대로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선 채 고개를 옆으로 꺾은 자세로 날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입을 쓱 닦은 다음 그를 노려보았 다. 넥슨의 입이 열렸다. "…어깨 좀 빌릴까?" "킥킥킥… 좋아." 넥슨은 아무런 표정없이 그대로 내게 허물어졌고 난 그의 오른팔을 붙 잡아 목뒤로걸쳤다. 그리고 왼손으론 그의 허리를 감았다. 넥슨은 그렇 게 나에게 기댄 다음 손을 힘없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무기는… 저쪽에 있다. 지금은 감시가… 없을 거야." "쿨럭, 무기가 그대로 있을까?" "녀석들에겐 나나 네놈의… 무기가 너무 크다. 그대로 있을 거야." "알았어. 가자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오크란 오 크는 모조리 칸 아디움으로 달려가버린 것인지 야영지에는 한 마리의 오 크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괴괴한 야영지를 흐느적흐느적 걸어갔 다. 넥슨이 말한 방향에는 솥이나 밧줄, 방패, 깨진 투구 등의 잡동산이 들이 쌓여있었고 넥슨의 검과 내 바스타드도 거기 꽂혀있었다. 우리 둘은 각자의 무기를 회수한 다음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넥슨은 지저분한 잡동산이들에 등을 기댄 채 하얗게 된 얼 굴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너무 세게 때린 모양인 데. "괜찮아?" "그렇게 맞고 괜찮을 것 같나?" "미안해. 그런데…어디로 가지?"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반쯤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밤하늘을 올 려다보며 곧 막혀버릴 듯한 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난처하군. 가장 좋은 방법은 칸 아디움으로 달아나는 것이지만 만일 오 크들이 칸 아디움을 함락시켰다면 우리들이 힘들게 그곳으로 걸어가 녀 석들의 승전 기쁨을 두 배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다른 도 시로? 난 이곳의 지리를 전혀 모른다. 넥슨은? "이봐. 당신. 이 근처 지리를, 쿨, 쿨, 알고 있나?" "모른다… 하슬러가 알지." "없는 사람은 거론하지… 말자구. 크허험!" "말이 없는지 살펴봐." "당신 미쳤어? 오크들이 말을 탄다고?" "…제길. 혹시 모르잖아! 찾아봐! 보지도 않고…클럭! 크하악!" 넥슨은 머리를 구부려 무릎에 묻고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오크들의 야영지에서… 말을 찾아? 왜? 유, 쿨럭! 유니콘이나 드래곤 은 어때?" "너 자꾸 그 입을…" "시끄러워! 지금 두 다리 외에는 탈만한… 것이 없어. 그러니 어서 일 어나…자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전혀 일어날 기운이 없다. 정말 다리를 타고 달려야 되나? 바람이라도 탈 수 있다면, 이대로 날개가 돋아 날아갈 수 만 있다면… 바람? 잠깐만. 바람을 탄다고? "어, 잠깐! 당신 바람의 하인을 다룰 줄 알잖아?" 내 기대에 어긋나게시리 넥슨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이… 미친 꼬마야! 쿨럭! 이 몸으로 기도를 하라고? 디바인 파워는 신 의… 힘이지만, 컥! 커.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내 몸이다!" "제길, 필요할 때 못쓰는 힘 따위… 개나 줘버려. 일어나자구. 태어날 때부터 선물받은… 이동수단이 있으니까." 이건 마치 말구유로 술을 마신 것 같군. 일어나자 머리가 윙 돌면서 균 형감각이 상실된다. 난 허리를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넥슨은 여전 히 창백한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난 손을 내밀었다. 넥슨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난 그 손을 붙잡 아 그를 일으켰다. 넥슨 역시 일어나서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기 위해 애쓰더니 날 쏘아보며 말했다. "언제까지로 할까?" "뭐 말이야?" "우리 휴전 말이다. 언제까지로 할까?" "아까 낮에 당신을 구하러… 쿨럭. 달려왔을 때부터 난 영원히 휴전이 야." 넥슨은 어두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다가 말했다. "나 혼자 탈출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널 살려둔 거야. 하지만 난… 쿨럭! 네녀석이 날 돕도록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진 않겠 어." 넥슨은 눈을 부라리며 빠르게 말했다. "안전해지는 순간 널 죽인다. 알았어?" "왜지?" "뭐라고?" "당신은 말했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것은 나에 대 한 증오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아무런 증오도 없이… 날 죽이 고 싶다는 거야?" 넥슨은 잠시 주춤거렸다. 망할 녀석. 그 주춤거림은 모든 것을 설명해. 난 숨을 좀 몰아쉬고나서 말했다. "좋을대로 해라. 날 죽이려드는 순간이…커험! 네 녀석 숨 넘어가는 순 간이야. 그 때가 되면 영원한 휴전 따위 없어. 이제 내 할 말은… 다했 어." "좋아.어디로 가지?" "저 도시로…클, 쿨럭. 이 황량한 곳에서 말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저기 뿐이잖아." "크험! …할 수 없군." 난 넥슨의 팔을 붙잡았다. 넥슨은 움찔하면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난 지긋이 그의 팔을 당겨 어깨에 매었다. 넥슨은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았 다. "안 갈 거야?" "가자." 지독한 밤이었다. 밤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캄캄한 공간은 끝이 없었다. 눈을 들어보아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오 크들에게 두드려맞고 하루 종일 묶여있었던 것 때문에 눈이 침침해진 때 문일까? 보이는 것이라곤 저멀리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뿐이다. 불 길만을 바라보며 이 캄캄한 암흑을 밟아나가는 우리들은 마치 부나비 같 다. "저기로 가서 우리를 불사를까."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것이 마지막 발걸음인 것처럼 옮기고 있었다. 그가 비틀거릴 때마다 난 휘청거리거나 땅에 쓰러졌다. 몇 번이고 딱딱한 땅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나자 더 이상 의 고통은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몸에도 새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이 녀 석이 왜이리 유난을 떠는 거지? 설마 영원의 숲에서 이곳까지 달려와서 지쳐버린 것인가? "당신들… 거기서 헤어진 다음 여기까지 달려왔나?" "…" 뭐라고 대답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고개가 조금 끄덕여진 것 같 다. "맙소사. 어떻게? 어떻게 사흘 동안 45 펜큐빗이 넘는 거리를?" 넥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인간인가? 어떻게 그 거 리를 사흘만에 걸었다는 거지? 그 때였다. 갑자기 넥슨의 팔이 미끄러지 더니 그의 몸이 아래로 허물어졌다. "어, 어엇!" 넥슨이 허물어지자 나 역시 기댈 데를 잃고 쓰러졌다. 콰쾅! 아하! 별 이 다 어디 갔는가 했더니 저기 있군? 젠장. 난 넥슨을 깔아뭉갠 자세로 쓰러져 땅에 호되게 부딪힌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 이것봐. 괜찮아?" "…비켜." "그래, 비켰어. 그런데 괜찮은 거야?" "…잠시만. 잠시만 쉬어 가자." "쉬기는 뭘 쉬어. 이런 데서 이 몸으로 있으면 영원히 쉬게 될 거야. 계속 걷는 것이 낫지 않겠어?" "못걷겠어… 제길." "젠장." 어렵게 되었는걸. 사방이 탁 트인 황야, 밤의 어둠 외엔 몸을 가릴 것 이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 오크들이 밤눈이 좋던가? 어쨌든 그렇다면 어둠의 엄폐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당황스러운 곳에서 숨어 있 어봐야 얼마나 숨어있을 수… 나무?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내 눈에 커다란 나무가 하나 보였다. 저건 뭐지? 좀 더 자세히 살펴 본 다음 나는 그것이 오크들이 끌고온 공성추라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건 아프나이델에 의해 파손된… 어라? 그새 이렇게 많이 걸어왔나? 그럼 성벽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겠군. 물론 지금의 우리 두 사람에게는 엄청난 거리일 테지만. "이봐, 넥슨. 넥슨! 저기 구덩이가 있다. 저기까지만 가자고. 거기서 좀 쉰 다음 새벽녘에 성으로 잠입하자." 넥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운 채 힘들게 팔을 들어올렸다. 난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무시하면서 그를 일으켜세웠다. 디그 마법에 의해 만들 어진 구덩이까지는… 스무 걸음? 서른 걸음? 젠장. 어둠 속에서 거리 감각이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탁 트인 황야에서 삐죽하게 솟아있는 것이라 더 가깝게 느낀 것인지도. 어쨌든 그곳까지 걸어가는데 10 분도 넘게 걸렸다. 10 분간의 지옥같은 고통 끝 에, 나와 넥슨은 애인의 무덤 속으로 쓰러지는 처녀 같은 모습으로 구덩 이 속에 들어갔다. - 너무 점잖은 표현이다. 들어간다기보다는 빠졌다고 표현해야 옳다. "크… 커허억! 헉!" 넥슨은 구덩이 속에 나동그라지면서 목이 찢어지는 신음을 흘렸다. "뭐야? 왜그래?" "빌어먹을… 공성추에 부딪혔어." "공성추는 차라리 낫지. 글레이브에 부딪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 야." 난 그렇게 쏘아준 다음 구덩이 속에서 고개를 내밀어 황야를 살펴보았 다. 왠지 땅쥐가 된 기분이군. 난 눈 높이에서 황야를 바라보며 주의깊 게 살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벽 쪽에선 여저히 불그스름한 불기운이 하늘로 뻗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야습이 성공한 모양이다. 단순히 횃불만 가지고 저런 불기운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 까. 칸 아디움의 시내가 모조리 불타는 것 같은 불기운이었다. 게다가 성벽에 의해 가려진 것인지 하늘 중간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붉은 기운 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소리는? 멈춰서 들으니 비명소리나 창검 부딪히는 소리를 확실히 구분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우리 일행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난 다시 몸을 돌려 구덩이 속으로 주르르 미끄러져들어갔다. 그것은 그 저 발에 힘을 빼고 중력에 몸을 맡겨버린 행동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편한 방법이다. 몸이 엄청나게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기는 했지만. 그 렇지 않아도 캄캄한데 구덩이 속이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봐, 넥슨. 어디 있지?" "구덩이 속에." "아, 고맙군." 넥슨의 목소리는 왼쪽 전방에서 들려온다. 난 구덩이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잠들면 안돼. 알았지? 날씨가 굉장히 춥다고. 이런 밤에 이런 곳에서 이런 몸으로 잠들면 간단하게 체온을 빼앗기게 될 거야." "네 녀석의 그 수다스러운 입이 있는데… 어떻게 잠이 들겠냐." "고맙다고 느껴지지?" "빌어먹을 꼬마놈…" "이야기나 들려줘. 여덟 별에 대해서."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봤자 넌 내가 당기는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지, 뭐. "시오네는 말이야…" "뭐라고?" 넥슨은 정말 불쌍하리만큼 급히 말했다. 좀 잔인한가? "아주 뛰어난 간첩이라고 들었어. 게다가 뱀파이어이고." "잠깐! 뱀파이어라고? 사람이 아니야?" "그래. 사람이 아니야. 뱀파이어지." "이런 맙소사. 그렇다고? 시오네라는… 여자냐?" "여자야." "그래…" "이제 내 질문에 좀 대답해줘. 좀 딱딱한 흥정 분위기가 들지만. 여덟 별은 뭐지?" "…말했잖아.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한다고." "스스로의 의지는 없다면서?" "그래… 의지는 없다. 그러니까 검과 마찬가지. 쿨럭. 검은 충분히 적 을 죽일 수 있지만… 검이 죽일 대상을 고르는 것은… 아니다." "좋아. 알겠어. 그럼 누가 그 별들을 이용할 수 있지? 소유자?" "그런 셈이지." "그걸 어떻게 믿지?"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하군. "이봐, 그걸 어떻게…" "넌 바보냐! 드래곤 로드는 거의 모든 종족들을 억압할 수 있었지 않느 냐! 그걸 알면서도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어, 쿠울럭! 쿨럭쿨럭!"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8. 어라? 이게 무슨 말이야? 드래곤 로드가 모든 종족을 지배한 것이 그것 과 관련이 있는 건가? "잠깐! 뭐야, 이런 말이야? 드래곤 로드는 300년 전 그 여덟 별을 가지 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들을 지배한 거라는… 그런 말이야?" 넥슨은 밭은 기침을 계속하다가 간신히 진정해서 말했다. "그래. 투구걸이로밖에 못쓸 텅텅 빈 머리를 가진 꼬마야." "어, 어? 하지만 드래곤 로드도 드워프나 엘프를 지배하지는 못했어." "하지만 드워프나 엘프들이 드래곤 로드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멍청아. 엘프는 혹 모르더라도, 지배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드워프가 드래곤 로드를 믿을 수 없는… 쿨럭!" "믿을 수 없는 맹방이자 견제하지 않는 적. 그 말이야?" "너… 의외로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군." 그거야 헬턴트 마을의 독서가 카알의 복음을 어릴 때부터 무수히 받았 으니까. "그게 그런 건가? 드래곤 로드가 그 여덟 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면 왜 엘 프나 드워프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지?"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며, 쿨럭, 원래 복종이라는 개념이 없는 존재…다. 그리고 드워프들은 그 콧대 때문에 복속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지." "이봐. 그 여덟 별인지 뭔지를 가지면 그 종족의 창생소멸을 결정할 수 있다면서? 그럼 복종하지도 않는 드워프나 엘프를 왜 멸망시키지 않은 거지?" "드래곤 로드는 너 따위… 풋내나는 꼬마보다는 훨씬 현명하니까." "칭찬할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내가 싱그러운 나이라는 말로 받아들이지. 드래곤 로드가 현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 야?" "세상에 이유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모두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유피넬의 이야기 같은데?" "그래… 박쥐들이 보기 싫다고 해서 모든 박쥐를 없애버리면, 그 다음 날 곧장 세상의 곤충들이 훨씬 늘어나버릴 것이다. 그 곤충들 때문에… 우, 우컥. 다른 동물들이 죽어갈지도 모르지. 드래곤 로드는 드워프나 엘프를 복속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명하기 때문에, 쿨 럭! 드워프나 엘프를 모조리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힘으로 억누 를 뿐이었지." "이해가 되는 듯도 해. 엘프나 드워프도 분명 이 세상의 한 부분이고 그들이 없어질 경우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맞나?" "맞아…." 넥슨의 대답은 한숨소리 같았다. 난 어지러운 머리를 다잡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건…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 넥슨은 내 혼잣말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 여덟 별 을 빼앗기로 마음먹고… 그와 싸웠지. 그 골빈 전쟁광, 기사도 맹신자답 게… 자신의 부하들에게 여덟 별의 추구자라는 얼빠진 이름까지… 붙여 가면서." "뭐라고?" "못들었으면 집어치워!" "이봐, 루트에리노 대왕 앞에 무슨 말을 붙였지? 골빈 전쟁광, 기사도 맹신자라고?" "그래, 왜? 잘못 말했나?" "…당신이 그렇게 보겠다면, 좋아. 마음대로 해. 그럼 3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드래곤 로드가 패배했으니까 그 별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거지?" 넥슨은 다시 대답이 없었다. 난 초조해진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이봐! 말해!" "몰라… 핸드레이크가 실망했으니… 그 별들은 파괴된 것이 분명해… 하나의 별만 제외하고…" "자, 잠깐! 꽤나 많은 말을 했는데 그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어! 핸드레이크가 실망하다니? 별들이 파괴되었다고? 그런데 하나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넥슨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신음소리,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봐!" "시끄러워, 이, 이 자식아… 힘들어… 너무, 너무 힘들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난 어둠 속을 더듬어 넥슨의 몸을 찾았고 잠시 후 시체처럼 차갑게 굳은 넥슨의 몸을 만질 수 있었다. 그는 극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이마를 짚어보니 뜨거운열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은 차가운데 머리에선 이런 열이라니?" "손… 치워. 머리가 아파…" 넥슨은 잠꼬대를 하듯이 웅얼거렸다. 그의 눈가와 이마에선 굉장한 열 이 느껴졌지만 몸은 추위 때문인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길,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모포 없나? 불을 피워야 되나? 난 일단 넥슨의 몸 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이 작자야! 여기서 죽어넘어지기 위해서 그렇게 달렸어? 당신 죽어도 난 가슴 아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엔 단 한 사람 당 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사람이 있잖아!" "…나 말인가? 크후후… 넥슨 휴리첼이? 그는… 죽었어. 넥슨의 3/5는 … 영원히 사라졌어." "빌어먹을, 그럼 여기 내가 주무르고 있는 이 작자는 뭐야?" "…이거? 조각… 인간 파편… 크흐흐흑! 크핫하! 파편이 아닌 척 하기 위해… 이유도 모르면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려 드는… 이유도 모르면 서 미친 꼬마를… 죽이려드는…비참하기 짝이 없는… 쓰레기…" "떠들 힘이 있으면 움직여! 죽든 말든 상관없어. 알아?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죽는 것은 안돼. 절대로 용납못해!" "감정도… 없이… 기억도 없이… 죽이고 싶어해야 되기… 때문에…" 이 자식아, 무슨 말인지 알아. 네녀석은 잃어버린 과거 때문에 자신을 잃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럼 계속 날 미워해! 그렇게 해야 널 잃지 않을 것 같다면 마음대로 날 미워해! 이유 따위, 뭐가 중요해?" 땀이 돋아나면서 내 몸도 사정없이 떨린다. 하지만 난 넥슨의 몸을 주 무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넥슨의 몸이 조금씩 유 연해지는 것 같다. 입에서 더운 김이 술술 나오면서 시야 주위로 자그마 한 광점들이 명멸한다. 관자놀이가 터져나가는 것 같다. 눈꺼풀이 덜덜 떨린다. 끝내주는 밤이군. "정신 차려어!" "그… 커다란 입 좀… 다물어라. 주위의 오크란… 오크는 다 몰려… 오 겠다." "얼씨구? 지금 네가 날 걱정해? 그럴 기운 있거든 네 걱정이나 해! 절 대로 내 눈앞에서 죽어넘어지게 놔두지는 않겠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널 살려서,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참회하게 만들겠어! 너의 모든 기억 을 돌려주고 말겠어! 이 벼락맞아 죽어도 할 말 없는 자식아, 일어나!" 넥슨의 멱살을 잡아올린다. 그리고 사정없이 앞뒤로 흔든다. 놀랍군. 내게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다니. 그런데 이게 이성적인 행동일까? 녀 석을 눕혀놓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이렇게 흔드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눕혀두면 왠지 그냥 죽어버릴 것 같다. 이 암흑 속에 누워있는 넥슨의 모습은 시체를 연상시킨다. 난 어쩔 줄 모르고 그의 몸을 흔들었다. 제 길, 제레인트가 여기 있었다면… 어랏? "자, 자, 잠깐! 넌 프리스트잖아? 엉터리지만 프리스트 아니야? 자신은 치료못하는 거야?" "못해… 사흘 동안 체력을… 너무… 소모했어. 제발… 그만 흔들어." "사흘이고 나흘이고 못하긴 왜 못해! 어서 해! 기도해!" "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원래 인간이 가진… 것이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기도해! 기도하라고!"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의 것에 대한 발견…" "기도해!" "자신으로의… 회귀… 어두워…" "쿨럭." 이젠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슴 전체가 찢어지는 것 같다. 머리를 움직일 힘도 없어 내 눈은 하늘을 향해 대책없이 열려 있다. 넓은 하늘. 지상의 한 점이 되어 저것을 바라본다. 하늘의 부분부분을 내 얼굴과 연 관시켜 생각한다. 이마쪽에서는 보라색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땀에 엉기고 흙덩이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머리카락 하나가 왼쪽 눈썹 방향의 하늘을 둔한 각 도로 가로지르고 있다. 왼쪽눈은 부어오를 데까지 부어오른 모양인지, 왼쪽 하늘은 찌그러진 모양이다. 게다가 뿌옇다. 왼쪽에 떠오르는 별무 리들은 환상적인 모습이다. 미간쪽 하늘에서 구름이 갈라진 모양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별 하나 가 나타난다. 별은 가물가물 빛나다가 다시 밀어닥친 구름에 가려 사라 진다. 오른쪽 콧등을 바라본다. 콧등 위로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칸 아 디움에서 올라오는 불빛인 모양이다.고작 저기까지 걸어가질 못해서 여 기 이렇게 맥없이 누워있군. 콧등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 같이 느껴진 다. 내 코가 불타고 있나? "키득… 쿨럭! 쿨럭, 쿨럭!" 갈비뼈가 모조리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차갑고 맑은 정신 때문에 통 증은 더욱 고약하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일 뿐이다. 오른쪽 볼을 씰룩거려본다.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넥슨의 모습이 떠 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넥슨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다. 그의 몸은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을씨년스럽게 처박혀 있 다. 구덩이의 검은 흙이 그의 어깨와 가슴에 떨어져 있다. 내가 마지막 으로 그를 팽개쳤을 때 흘러내린 흙이다. 그는 팽개쳐진 모습 그대로 사 지를 집어던진 채 쓰러져있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어버린 거야. 내 눈 앞에서. 날 영면의 참관인으로 삼아. "…쿨럭."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 넥슨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창백한 얼굴은 두드러지게 떠오른다. 뭘 위해 살지? 당신은 과거를 잃은, 불완전한 현재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미아. 현재는 과거라는 기단 위에 서 있는 탑이지. 하지 만 당신의 탑은 기단없이 허공에 떠 있었어. 고집과 억측으로 과거를 만 들어내는 것에도 실패해버리고, 그렇게 쓰러져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지? 시체는 무슨 꿈을 꿀까? 어쨌든 꿈을 꿀 시간은 영원하지. 하슬러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지? 저 친구의 주인은 저기 쓰러져있다.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마.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제멋대로 죽어버렸 어. 난 여기까지 저 친구를 끌고 왔어. 그리고 안간힘을 다했어. 하지만 넥슨은 죽었어.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쩌란 말이야? 하슬러의 얼굴이 사라진다. 언제나 말이 없는 사나이.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말을 모두 합쳐도 제미니가 하루에 하는 말보다 적을걸? 에 헤헤헤… 제미니.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니? 내 생각을 하고 있니? 지금은 너의 포 근한 새벽잠에 취해있겠지. 조용한 평화 속에 잠들어있겠지. 오우, 천만 에! 시트를 걷어찬 채 그 사슴의 다리같은 어린 다리를 마음대로 벌리고 두 팔은 밤하늘을 통째로 끌어안을 듯이 벌린 채 누워 코를 골고 있을 거다. 네가 옛날 잠버릇 그대로라면 말이야. 코에서 흘러내리는 콧물을 쩝쩝 마셔대던 시절의 제미니가 그랬지. "킥, 키킥! 우헤헤… 쿨럭! 우하하…핫!" 기억해둬. 제미니. 네 애인은 말이야, 대륙의 위기를 구한답시고 이름 없는 황야와 거친 산, 그리고 지하의 아름다운 미궁을 헤메고 다녔지. 한 마디로 철이 없었어. 익숙한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낮 동안 두 손으로 신의 작업을 흉내내어 빛을 세공하고 황혼이 피어오르는 시간이 되면 저녁식사 메뉴를 최대의 고민거리로 생각하며 살았어야지. 어울리 지 않게시리. 그리고, 이스트 그레이드의 황야에 드러누워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정말 어처구니없는 작자 아니야? 하하하. 세상의 여자들 에게 말해줘. 철부지 애인은 감당할 도리가 없는 것이니 절대로 사귀거 나 하지 말라고. 다시 넥슨의 얼굴을 본다. 그의 얼굴에 맺힌 서리들. 새벽이 멀지 않은 시간이군. 시간은 날 떼어 놓고 잘도 흘러가버리는군. 난 여기 멈춰섰고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 쓴 것인가. 졸린다. 졸린다. "후치야!" 당신도 죽었어요? 어젯밤 오크들이 칸 아디움을 야습했지. 어제? 뭐가 어제지? 이제 시간이라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는데. 그렇잖아 요, 네리아? "후치야! 후치야!후치야!"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사람에겐 그 이름의 소유권이 영원하라. 내 이름 은 태어날 때부터 내 것 아니었지. 난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 내 이 름은 항상 다른 사람의 것. 그래요. 나는 떠나가고 내 이름만 당신들 옆 에 남게 되겠지. 드래곤 로드는 틀렸어. 우리는 불사의 생명이 아니야. 우리의 이름이 불사일 뿐이지… "후치야!" 주위는 따스하고 안온한 느낌이었다. 한없이 포근하다.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중량감 상실. 그런데 누군가 내 몸을 주 무르고 있다. 겨우 내 몸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군. 그거 좋은 느낌인걸. 거기, 그 위쪽을 좀 더… 허공에서 일렁거리는 붉은 머리. 아름답게 흔 들리는군. 그리고 그 아래에 보이는 좁은 이마, 커다란 눈, 굳이 튀어나 왔다고 말하기엔 좀 모자라게 튀어나온 광대뼈. 참 예쁘장한 저 얼굴은… "네리아?" "어마! 후치! 일어났구나! 우아아앙!" 커억! 네리아는 곧장 나에게 쓰러졌고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을 강하게 압박한다. 네리아는 날 껴안은 채 펑펑 울면서 볼을 비벼대고 있었는데, 그거 기분 나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숨쉬기가 곤란한걸. "수… 숨막혀욧!" 네리아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로워 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네리아는 내 볼을 끌어당기더니 숨막힐 정도 로 키스를 퍼부어온 것이다. "읍! 으으읍! 그만 해요!" "살았구나! 요 미운 것! 살아났어! 우아앙! 이 이쁜 것아! 우아앙!" "미운 거에요, 이쁜 거에요?" "둘 다야!" "여기는 어디지요? 만약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라면 괜히 눈길을 피하면서 '너도 짐작할 텐데?' 하는 식의 눈짓은 하지 말고 똑바 로 말해주길…" "정신 차리는 절차가 뭐 그렇게 복잡해!" 엑셀핸드의 호통 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역시 얼굴이 벌겋 게 된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애써 감추려드는 엑셀핸드의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선 엑셀핸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은 채 서 있는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니? 다행이구나." 그 때 아프나이델의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다고요? 후치가요? 일어났어요?" 아프나이델은 힘차게 달려온 레니에 의해 옆으로 밀쳐지면서도 빙글빙 글 웃었다. 레니는 날 내려다보더니 곧장 시트 위로 몸을 던지면서 울음 을 터뜨렸다. "우아아앙! 얼마나 걱정했다고! 살아났어! 이 나쁜… 아냐. 살아줘서 너무 기뻐. 으아아앙!" 어떻게 해야 되지? 난 난감한 얼굴로 내 가슴 위에 얹힌 레니의 붉은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레니의 머릿결을 쓸 어내리자 그녀는 눈물로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날 쳐다보았다. "레니…" "응. 후치야." "…푸흐, …킥, 푸하하핫! 눈물 좀 닦고 말하자! 우헤헤헤헤! 아이고, 죽겠네!" "뭐…야? 이 나쁜 놈아!" "아, 아, 아냐. 농담이야. 으킬킬킬킬! 제, 오, 제발! 그 눈물 좀 닦 아. 얼굴이, 얼굴이이이! 크학, 핫하하하!" 레니는 내 가슴에 힘껏 두 주먹을 꽂아넣었지만 그걸로 내 웃음이 멈춰 지진 않았다. 살아났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유쾌했다. 레니는 내 가슴을 두드리다가 자기 손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침 대에서 굴러떨어지도록 웃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둘러보자 내가 누워있는 곳이 어느 방 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꽤나 깔끔하고 정결해보이는 것이 여관의 방 같은 곳 은 아니었다. 채광이 좋은 창이라든가 커텐, 벽도제의 모습이라든지 기 둥의 모습을 봐도 분명 큰 저택 안이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내가 누 워있는 침대 옆에는 긴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긴의자에는 제레인트가 길게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카알과 샌슨, 길시언, 운차이는 또 어 디 있는 거지? "프하, 하아. 좀 진정하고.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무 슨 일이 있었어요, 네리아?" 네리아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 그녀도 레니를 보면서 꽤나 웃었다. 그 래서 레니는 지금 몹시 부어있는 상태다. -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응. 오늘 아침 우리들이 성 밖으로 나갔다가 구덩이 속에서 널 발견했 어. 자칫 지나칠 뻔했지 뭐니.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낀 데다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렇게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으니. 하지만 엑셀핸 드님이 네 신음 소리를 들었거든." "아… 고마워요. 엑셀핸드." "별 거 없어. 그렇게 커다랗게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는데 드워프라면 당연히 들어야지."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때 문득 생각나는 것 이 있었다. "어, 잠깐. 그럼 여기가 칸 아디움의 성 안이에요?" "그렇지. 여긴 시장님의 저택이야." "잠깐, 잠깐! 어젯밤에 오크들이 야습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갑자기 엑셀핸드는 잔인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핫하하하!' 그 리고 아프나이델도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야습한 오크들 중에서 살아남은 놈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일걸." "예?" 아프나이델은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어제 오후와 어젯밤 사이에 일어났 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니와 네리아는 침대에 앉았고 엑셀핸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아프나이델의 이야기를 거들었다.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19. "후치가 낙오되었어!" 샌슨의 고함 소리. 샌슨은 급히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한참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을 급정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행이 멈춰선 것은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밖에선 오크들이 무섭게 육박하고 있었 다. 카알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경비대원! 성문을 닫아! 어서!" 샌슨은 기가 막힌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아니, 안돼! 닫지마!" 샌슨은 그대로 도로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카알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샌슨은 그대로 밀고지나갈 듯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 자식들은 구하면서 후치는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건 절대로 안됩니 다!" 그러나 카알은 꿈쩍도 하지 않을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지금 성문이 열리면 칸 아디움의 시민들은 어떻게 되지?" 샌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힘없이 말에서 내렸고 성문은 닫히고 말았다. 네리아는 성문쪽으로 달려가서는 잠긴 성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앗! 시민 따위 알게 뭐야! 어서 성문 열어! 열어줘요!" 경비대원들이 무거운 얼굴로 네리아를 외면했을 뿐 성문은 열리지 않았 다. 네리아는 통곡했다. "후치야아악! 아악! 후치얏!" 길시언은 눈물을 뿌리며 성벽 위로 올라갔고 샌슨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비통한 얼굴을 한 채 망연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운차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꼿꼿이 선 채 지푸라기를 주워모아 검을 닦아내고 있었지만 그 손 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알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성문 밖에서는 내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곧이어 오크들의 환성이 울려퍼지면서 내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네리아는 성문을 긁으며 비명을 질렀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카알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 았다. 그 때였다. 길시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후치는 죽지 않았소!" 네리아와 샌슨은 놀란 얼굴로 성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성벽 위 로 올라간 길시언이 성벽 바깥을 기리키며 숨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크들에게 체포되었소! 하지만 아직 살해당하지는 않았어!" "뭐라고!" 이 때 일행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살아있다 는 소식에 놀란 나머지 모두들 하슬러와 쟈크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성 벽 위로 줄달음질친 것이다. "설마… 카알도?" "그래. 카알씨도 정신없이 성탑 계단을 뛰어올랐지. 그 굉장한 속도를 봤어야 하는데. 하하."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엑셀핸드가 다시 수염을 쓸어내리 며 말했다. "난 아래쪽을 보고 있었지. 성벽 아래쪽에서 카알과 샌슨, 길시언, 그 리고 운차이와 네리아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어. 하슬러와 쟈크는 재빨리 달아나버리더군. 아래쪽을 향해 고래고 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 전부였지."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엑셀핸드님께서 '저 놈들 잡아라!'하고 고함을 지르시길래 고개 를 돌려보니까 그 사람들은 시내쪽으로 달아나고 있더군. 경비대원들이 쫓아가긴 했지만 놓치고 말았어. 경비대원들이 시내를 샅샅이 수색했지 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어." "흠. 그 쟈크는 원래 도둑이니까 숨는 데는 재주가 있겠지요. 하슬러도 만만찮은 사람이고." 네리아가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응. 우리들은 네 생존 소식을 듣고는 순간 갈팡질팡해버렸거든. 난 내 려가서 하슬러랑 쟈크를 쫓아야될지, 성벽 위로 올라가서 네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해야 될지 혼란스러웠어. 카알 아저씨마저도 어리둥절한 얼굴 이 되었다고." "그것 참.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카알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답게 그 행동에 많은 시간을 들이진 않았 다. 욕설 몇 마디를 하늘로 띄워보낸 다음 카알은 성벽 위로 올라와 날 관찰했다. 내가 오크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바짝 긴장해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렸다. 마침내 나와 넥슨이 오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카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죽지 않았으니 됐어. 구출하면 돼." 마치 스스로에게 확신을 시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일단은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 그렇게 일행이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 오후가 빠르게 지나갔다. 황혼이 어스름하게 펼쳐질 무렵, 성문 위의 경비대원은 밖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를 발견했다. 화살에는 편지가 묶여져 있었고, 그래서 병사는 그 편지를 전투 지휘소인 야전 막사로 가져왔다. 우리 일행들은 야전 막 사에 몰려 있다가 크레블린 대장과 함께 그 편지를 보게 되었다. 크레블린 대장은 편지를 읽어내려가다가 몹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궁금한 얼굴로 초조하게 기다렸고 그러자 대장은 편 지를 카알에게 건네었다. 카알은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나는…? 괴물 초장이라고 썼다가 그 위에 줄을 그었군. 으흠. 어쨌든 나는 후치다. 달아난다. 밤에 성문을 열어라. 내가 들어간다." 순간 작전 지휘소는 엄청난 정적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 정적이 깨어진 것은 제레인트의 폭발적인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푸흐히어히아히에에에!" 제레인트는 그렇게 인간의 웃음소리 같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고 길시언 은 운차이의 어깨를 쾅쾅 두드렸다. 운차이마저도 고개를 조금 돌린 채 쓴웃음을 지었으며, 네리아는 얼빠진 얼굴로 카알에게서 편지를 빼앗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품위없게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 만 당시엔 아무도 그를 허물할 생각을 못했다. 샌슨은 의자에 주저앉아 서 숨을 제대로 못쉬면서 웃었고 아프나이델은 테이블을 짚은 채 헉헉거 리며 웃었다. 레니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저, 그럼 후치가 달아난 거에요?" "크카카카카! 레, 레니양! 요건 오크의, 오크의 솜씨올시다. 하하하하 하!" 제레인트는 의자에 쓰러지 듯이 앉으며 말했다.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위를 살폈다. "예에…?" 카알은 이마를 짚고 웃으며 말했다. "허, 허허, 프허허. 오크들 주제엔… 괜찮은 작전이군. 하지만 그… 떨 어지는 문재가 큰 일이로군. 헛허허." 네리아는 아직 미심쩍은 얼굴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샌슨에게 내밀었 다. "샌슨, 샌슨! 이거 후치 글씨 아니지?" "글씨 볼 필요가, 크힉! 어디 있냐. 그래, 어디, 어디 보자. 크히히히 히! 오, 맙소사. 이건 후치 글씨 아냐. 그래도 오크치곤, 치곤, 꽤나 훌 륭한 글씨… 푸하하하!" "후치가 아니에요? 앙! 난 모르겠어요. 설명 좀 해주세요." 레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주위의 웃음 소리가 더욱 커지게 만 들 뿐이었다. 레니는 볼이 부은 채 주위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카알이 간 신히 진정하면서 말했다. "오크들은, 우리로 하여금 후치가 달아났다고 생각하게 만드려는 겁니 다. 레니양. 그래서 밤중에 성문을 열어젖히게 하려는 거지요. 그리고 성문을 열면 곧장 뛰어들겠다는 것이 오크들의 생각일 겁니다. 괜찮은 작전이에요. 아니, 훌륭한 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다만, 다만…" 카알은 네리아가 들고 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불쌍한 문재가… 핫하하하!" 그 때까지도 웃지 못하고 있던 크레블린 대장도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 다. 아넨드씨의 경우엔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우와! 그거 교활한 방법이네? 오크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 을 정도야." "오크들에게 조금이라도 글쓰기 재능이 있었다면 위험했겠지요. 하하 하." "아니, 후치가 조금이라도 글쓰기 재능이 엉망이었다면 위험했겠지요. 이힛히히히!" 일행은 그렇게 오크의 계략에 대해 실컷 비웃었다. 일행이 더 웃을 힘 도 없을 만큼 웃어버리고난 다음, 카알은 곧 작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밤중에 성문을 열어줍시다." 크레블린 대장은 신나게 대답했다. "에! 알겠습니다. 오크들의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대장님께서도 이미 이해하셨을 테니 제가 더 드릴 말은 없 군요. 허허. 대장님께서 알아서 부대를 배치해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들도 대장님을 돕지요. 시켜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크레블린 대장은 쾌활한 동작으로 일어나 경비대원들에게 달려갔다. "아이고… 맙소사." 내 감탄사에 엑셀핸드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네리아는 깔깔거렸고 아프나이델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뒷일은 간단했지. 크레블린 대장은 성문 주위의 모든 주민들을 소개시킨 다음 집집마다 병사들을 매복시켜두었 지. 아넨드씨와 카알씨의 지휘 하에 병사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것야." "이 친구도 꽤 활약했지. 하하하!" 엑셀핸드의 말에 아프나이델은 겸연쩍게 웃었다. "별 말씀을. 그래. 나도 성문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대로에 약간 손을 봐두었지. 하지만 다른 분들이 더 고생을 했지.경비대원들은 저녁도 굶 어가면서 성내에 함정을 팠거든. 사수들도 모두 지붕이나 옥상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굉장한 잔칫판이었지. 그 다음은 간단해. 밤중에 누군가 성문을 두드리게 된… 하하하! 그 때 정말 대단했지." "대단했다고요?" "샌슨과 길시언이 성문 주위에 대기하고 있었거든. 밤도 꽤 깊었을 무 렵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는 거야. 샌슨은 웃음을 참으며 질문했지. '후치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성문 두드리는 소리만 더욱 커 졌어. 샌슨과 길시언은 성문의 가로대를 치워버리고는 재빨리 물러났 지." "그리고는 오크가 밀어닥친 거군요?" "그래. 맞았어. 오크들은 함성을 지르며 물밀듯이 밀어닥쳤어. 녀석들 은 작전이 성공했다고 여겨서인지 무서운 기세로 들어오더군. 그런데 선 두에 있던 놈들은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한 거야. 성내에 아무도 없었거 든." "흐음." "그래. 무리 전체가 거의 다 들어오고나서야 오크들은 뭐가 잘못되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하지만 뒤에서 밀어부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멈추 지도 못했어. 그 때 선두의 오크들이 함정에 빠지기 시작한 거야. 그리 고 매복해있던 경비대원들은 오크들의 뒤를 치고 들어가 성문을 봉쇄해 버렸지. 오크들은 미친듯이 저항했지만 이미 기세가 꺽여있었어. 사방의 집 위에서는 불화살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경비대원들이 튀 어나오는 거야. 오크들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경비대 원들이 지리에도 훨씬 익숙했거든. 아넨드씨의 말마따나 자기 집 안마당 에서 싸우는 셈이었지. 오크들은 함정쪽으로 밀려나거나 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놀라지마. 엑셀핸드는 골목 하나를 맡아서는 오크 32 마리를 베어넘겼지." "33 마리야!" "엑셀핸드… 마지막 녀석은 길시언이 쓰러트린 오크 아니었습니까?" "녀석은 일어나려고 했다고!" "휴우. 하하, 예. 알겠습니다. 33 마리야. 후치." "흠. 자네의 그 굉장한 불꽃들은 왜 말하지 않는 건가, 아프나이델?" "예? 하하. 뭐 다른 분들의 활약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요. 안티고어 시장님은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할 테니 민가에 신경쓰지 말라고 명령 했거든. 주민들은 미리 귀중품들을 가지고 대피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경비대원들은 오크들을 집안으로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식으로도 꽤 많 이 쓰러트렸지. 그 불꽃과 함성,곳곳에서 나타나는 경비대원들의 창과 밤하늘을 뒤덮을 듯이 날아드는 화살, 그리고 밟는 땅마다 꺼지는 함정 들 속에서 오크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긴 어려웠겠지." "아… 굉장했겠군요." "응. 날이 밝을 무렵엔 칸 아디움으로 돌진한 오크들 중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정도였지. 몇 마리들이 살아남아서 시내를 도망쳐다니고 있어서 카알과 나머지 사람들이 경비대원들과 함께 추격에 나섰어. 우리 들은 널 찾으러 밖에 나갔다가 구덩이에서 널 본 것이고." 아.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래서 밤하늘에 그토록 불길이 솟아올랐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럼 넥슨은… 벌써 묻었어요?" "응? 넥슨?" 아프나이델은 갑자기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왜 저러는 거야? "어, 내 옆에 있던 넥슨의 시체 말이에요." "뭐야? 시체라니?" 순간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뭐야? 지금 아프나이델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프나이델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널 발견했을 땐 넌 혼자 구덩이 안 에 있었어. 어떻게 거기까지 달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넌 굉장 한…" "뭐라고요? 그럴 리가! 넥슨이 없었다고요?" 난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어제 밤 오 크들이 야습을 위해 떠나간 다음 나와 넥슨이 오크들의 진지에서 함께 달아난 일, 중간 쯤에 구덩이를 발견하고 그 속으로 쓰러지듯이 들어간 일, 끝내 견디지 못한 넥슨이 죽어버린 일, 그리고 나 또한 죽음을 기다 리고 있었던 일. "넥슨이 죽은 것이 확실해?" "…모르겠어요. 난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요. 맥박을 확인하거나 호흡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창백한 얼굴과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보면 서, 그렇게 믿었어요. 그래서 하슬러의 환상…?" 다시 한 번 머리끝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일행들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머릿속으로 하슬러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느라 거의 그 얼굴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만일 내 생각과는 달리 넥슨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우리 일행들은 하 슬러와 쟈크가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슬러와 쟈크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크와 인간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소란스러운 틈 을 타고 성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구덩이에서 나와 넥슨을 발견하고는 넥슨을 데리고 갔을 수도 있다. 만일 넥슨이 이미 죽 었다면 그들이 넥슨을 데리고 갔을까? 생각하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도망자의 몸이고 시체 하나를 들고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면 칸 아디움의 사람들이 알아서 매장해줄 테니까. 그렇다면 넥슨은 살아있었던 것이구나! 가능성이 있다. 나도 살아있으니까 넥슨도 살아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는 사흘 동안 45 펜큐빗을 달려서 몸의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그렇지 만 시체를 들고 달아날 녀석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럴 땐 무슨 말을 해 야 되지? "다행이군…"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20. 샌슨은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내 등을 철썩 때렸다. "괜찮아. 귀 하나 없어졌지만 여전히 미남이야. 오, 유피넬이여. 오늘 도 거짓을 말한 저의 입을 용서해 주십시오… 낄낄낄." 샌슨은 그 따위 헛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렸다.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주 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면서 난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어깨에 숄 을 두르다가 풀죽은 내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괜찮아. 머리를 조금 더 길러서 덮으면 되겠네. 음… 여자면 이런 거 라도 줄 텐데. 둘러볼래?" 레니는 어깨에 두르던 숄을 흔들어보였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 그런데 보기 끔찍하지?" "음… 사실대로 말해서 좀 그렇긴 해.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더 경 력있고 실력있는 모험가처럼 보여. 매력 있어." "그래? 좋아. 그럼 반대쪽도 잘라내지, 뭐." 난 힘없이 웃어주었고 옆에서 걷던 네리아는 손을 뻗어 내 귀 - 가 있 던 부분을 쓰다듬었다. "소리는 잘 들리니?" "조금 이상하긴 해요. 이쪽으로는 소리가 잘 모이지 않나 봐요." "소리가 모여? 무슨 말이니?" "네리아. 귓바퀴가 왜 달려있는지 몰라요? 귓바퀴는 소리를 모아서 고 막으로 보내주기 위해 달려 있다고요." "어머나… 유식하네, 후치는." 날 치료하기 위해 힘을 많이 써서 졸도 비슷한 잠에 빠져있던 제레인트 는 눈을 비비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 귀를 재생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수도에 가게 되면 큰 신전에 들러보자구.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디바인 파워가 막강하다 고 들었어." "예. 참! 제레인트, 고마워요." "아…함. 괜찮아. 뭐. 솔직히 말하자면 네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걱정 이 좀 되었었지. 하지만 이렇게 일어나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구나. 하하 하." 카알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문 앞에 서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네드발군. 각오 단단히 하게." "각오라고요?" 카알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빙긋이 웃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 혔다. 문이 열리면서 햇살이 무자비하게 쏟아져들어와 눈이 부셨다. 그 리고 느닷없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네드발이다!" "괴물 초장이 만세!" "유피넬의 이름으로! 괴물 초장이 만세!"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데. 난 기막힌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짙푸르렀다. 가을의 하늘치고도 최고로 맑은 하늘이었다. 앙상 해진 나뭇가지들에서도 열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상쾌한 오 후였다. 바람마저도 오늘은 모래를 나르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시장님의 관사 앞 넓은 공터에는 지금 시민들이 빽빽하게 모여서 있었 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저 대단찮은 공터에 칸 아디움의 시민들이 모 조리 몰려들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칸 아디움의 시민들 전부가 모 여든 것 같은걸. 사람들은 모두 땟국물에 젖어있고 옷차림도 흐트러져 있었다. 아낙네들은 머리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채 어깨 위로 흐르게 내 버려두었고 사내들은 턱의 수염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모습들이다. 어제 낮과 밤 동안 오크들과 싸우고 그 뒷처리들을 하느라 고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 었다. 그들은 모두들 입이 터져라 외치고 노래 부르고 비명과 함성을 질 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만은 또렷하게 알 아들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이었다. "후치 네드발 만세! 만세!" "후치 네드발! 괴물 초장이 만세!" 난 기막힌 얼굴이 되어 카알을 돌아보았다.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 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이 광란스러운 소음 속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멋적은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흔들어주었고 그러자 시 민들은 우레같은 함성으로 대답했다. 시민들을 가로막고 있는 경비대원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 다. 수많은 소녀들과 처녀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오려 들었고, 그런 아가씨들에게 냉정하게 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저 젊은 경비대원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비대원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중이었고 경비대원들에게 밀려나면 서도 소녀들은 고함을 지르며 웃어대었다. "네드발씨잇! 후치 네드발씨! 사랑해요!" "이쪽 좀 봐줘요! 후치잇! 후치잇!" 에고에고…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다. 대륙 최고의 미녀 100명은 아니 지만 어쨌든 저 많은 처녀들이 내 옷깃이라도 만져보려고 애쓰는 장면이 니까 이대로 죽어도 좋겠군. 난 얼빠진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내들은 좀더 경의가 담긴 박수를 쳐보내면서 말했다. "용감하오! 소년! 소년의 기백이 우리를 살렸소!" "최대의 경의를 그대에게! 후치 네드발 만세!" 그리고… 그리고 내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다리뼈가 부러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 쏘아보았다. 미안해, 친구들. 어쩔 수 없잖아. 걱정말 라고. 내가 떠나면 저 소녀들에게 다시 도전해봐. 오늘만은 날 용서해주 고 말이야. 사실 그 사내아이들도 질시와 분노보다는 경외감쪽에 더 많 은 표정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인파를 뚫고 안티고어 시장과 크레블린 대장 등의 인원 이 나타났다. 안티고어 시장은 시민들이 열렬히 휘두르는 주먹에 턱을 한 방 맞아가면서 힘들게 걸어왔지만 만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는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섰고, 난 참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멀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럴 땐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되는 것이 자? 누가 좀 이 상황을 설명해 줘! 안티고어 시장은 팔을 들어올렸고 그 러자 시민들의 소란이 사그라들었다. 굉장한 침묵 속에서 시민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시장은 땀을 닦아내더 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 네드발공." "아? 예? 아, 예. 안티고어 시장님." 정말 싫다… 으. 저렇게입을 꽉 다물고 있는 시민들의 침묵 사이로 이 렇게 얼빠진 대답을 해야 되다니. 시장님의 미소가 더욱 커졌지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의 이 사랑스러운 도시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우타 크와 챠넬의 일이 우리 앞에 현실로 되살아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 오!" 뭐라고? 난 당황한 얼굴로 시장을 바라보았지만 시장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러나 우타크와 챠넬의 저 믿어지지 않는 위업도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는 후치 네드발공의 일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일일 것이니. 우타크와 챠넬은 위대한 전사들이었건만 적진에 뛰어들 때 그들은 서로에게서 위 안을 얻었으리라. 하지만 용맹한 후치 네드발공은 그 어린 나이에도 불 구하고 단신으로 1,000명의 적들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그들을 기만 하였으니, 이 놀라운 업적 앞에서는 여덟 별에게 바쳐진 모든 헌사를 합 쳐도 오히려 모자라다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여러분!" "으와아아아!" 시민들은 함성으로써 안티고어 시장의 연설에 맞장구쳤고 난 현실에 작 별 인사를 보내려드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 이야? 난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그저 빙긋 이 웃으면서 내 눈길을 회피했다. "전사들의 전설을 믿지 못하는 의혹 많은 자라 하더라도 오늘의 이 태 양 아래엔 전설들과 노래속의 업적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보라! 우리 앞 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1,000 명의 적들을 단신으로 격퇴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이는 가장 전설 같은 전설보다 더욱 전설 같음이나,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현실이니! 이 어찌 놀라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 최 고의 경의 속에 그를 있게 하라, 칸 아디움의 수호자 후치 네드발 만 세!" "으와아아아! 후치 네드발 만세! 칸 아디움의 수호자 만세!" 아이고, 맙소사… 아무래도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책임있는 대답을 해야 될 사람들이 꽤 있을걸? 어디 두고 봅시다, 카알. 시민들은 이제 나에게 연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후치 네드발공! 한 마디 하시오!" "후치 네드발공! 칸 아디움의 수호자!" 시장은 웃으면서 날 조금 앞으로 나오도록 밀어내었다. 난 거의 비틀거 릴 뻔하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잡고는 시민들 앞에 섰다. 와! 떨리는 위 치다. 난 저 엄청난 환호의 물결 앞에 단신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팔을 휘두르고 박수를 치고… 어쨌든 동 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찬양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순박한 사람 들.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갔다면 세 걸음도 걷기 전에 잊어버릴 나 같은 꼬마에게 지금 그들은 열성적인 환호를 보내고 있다. 난 말하다가 웃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저를 칸 아디움의 수호자라고 불렀지만, 그 명예 로운 호칭은 엉뚱한 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잠시 당황을 의미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난 목소리 를 좀 더 높여서 외쳤다. "이 도시를 정녕 사랑하고, 오늘 사랑했던 것처럼 내일도 사랑하며 이 도시를 일구어나갈 여러분들이야 말로 칸 아디움의 수호자입니다! 여러 분들이 지켜낸 도시이며, 여러분들의 자랑인 이 도시가 앞으로도 영원히 번영하길 기원합니다! 칸 아디움 만세!" 그러자 사람들은 만족하면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우와아아! 칸 아디움 만세!" "후치 네드발 만세!" "괴물 초장이 만세!" "후치 네드발씨-! 사랑해요!" 그만해, 관두자고. 하지만 속마음과는 상관 없이 난 영원히 게속될 것 같은 저 환호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시민들은 거의 폭동을 일으킬만큼 흥분해서는 우리 일행을 어깨에 태우고는 칸 아 디움의 시내를 돌았다. "어떻게 된 거죠?" 시장님이 우정의 선물로서 내어준 마차 속에서 난 시트에 고꾸라진 채 말했다. 칸 아디움의 시민들의 어깨를 타고 시내를 돌았던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지만 굉장히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 광란스러운 행진이 끝나자마 자 우리들은 안티고어 시장님의 작별과 칸 아디움의 시민들의 열렬한 환 호를 받으며 화려하게도 칸 아디움을 떠나올 수 있게 되었다.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도 썩 겸연쩍은 일이었지만 안티고어 시장의 작별에는 놀랍 게도 6두 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에. 6두 마차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정말 말 6 마리가 매어지는 마차는 처음 보는군. 그렇지만 칸 아 디움의 시민들도 우리 일행들이 6두 마차에 5 마리의 말과 1 마리의 황 소를 묶는 모습을 보고 꽤나 놀랐을 것이다. 어쨌든 경비대원들은 마차 에 산더미 같은 보급품을 실어놓았고 우리들은 멋진 모습으로 칸 아디움 의 성문을 나설 수 있었다.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카알은 책을 내려놓으면서말했다. "이야기가 간단해서… 시민들에겐 그게 정말 기분 좋은 이야기 아닌가? 병사들에게 설명하기도 간단했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덴산의 거인 이야 기를 따와서 자네가 오크들에게 일부러 잡힌 다음 그들을 함정으로 끌어 들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기로 하고는 서로 입을 맞추었지. 자네의 명성이야 이미 유명하니까 이야기를 꾸미기도 쉽더군." "맙소사. 아니, 왜지요?" 카알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일이 필요했다네. 네드발군." "떠들썩하게 즐거워할 일이오?" "그렇다네. 오크들은 물리쳤지만 사실 저 도시는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네. 뭐, 오크들이 사용하던 무기나 갑옷 같은 것은 충분한 전리품이 라기에는 좀 모자라지. 사람들의 머리가 차가워지면 그들은 전사한 경비 대원들이나 오크들이 끼친 피해를 생각하며 슬퍼하겠지. 그래서 그들에 게 뭔가 크게 즐거워하고 환호를 지를 수 있는 일이 필요했네.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니 더욱 좋은 일이고." "음… 그래도 거짓말이잖아요." 당신은 국왕이 당신을 핸드레이크라도 되는 양 꾸미려고 했을 때 크게 화를 냈잖아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멈추었다. 하지만 카 알은 내 목구멍에 있는 말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 나로서도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네. 하지만 안티고어 시장 님이 그것을 요구했고, 그 뜻에 삿된 구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만 허락했지. 저 시민들은 적어도 내일이나 모레까지는 크게 즐거워할 수 있을 테고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시장님의 위무 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겠지." "흐음." 그 때 갑자기 내 옆에 앉아있던 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네리아 언니!"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에서 네리아의 머리가 거꾸로 나타나 있었 다. 네리아는 밀어닥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말했다. "기분 좋은 일이잖아, 후치야. 그리고 덕분에 이런 마차도 하나 얻었 고." "조, 조심해요! 지금 달리는 마차라고요!" "까르르… 괜찮아." 네리아는 다시 몸을 들어올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이구, 수명 짧아 졌겠다. 지붕 위에서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생각은 어때, 운차이? 너도 마차 여행이 편하지 않아? 고삐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등자에 신경쓸 필요가 있나?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을 즐기기만 하면되고. 여행이란 이런 거지, 뭐." 그러자 곧 운차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샌슨! 귀찮게 굴면 지붕에서 던져버릴 거라고 전해줘!"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샌슨은 운차이의 말을 전해주는 대신 낄낄거 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대답은 샌슨의 옆에 앉아있던 길시언이 대신 하는 모양이었다. "운차이는 조용한 마차 여행을 원한답니다. 네리 아." 그 대화를 들으며 마차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미소를 지 었다. 카알 옆에 앉아 있던 엑셀핸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난 정말 마음에 드는군." 엑셀핸드는 시트 위에 두 다리를 다 올려놓고는 기분좋게 말했다. 아프 나이델은 웃으면서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저도 마음에 듭니다, 엑셀핸드. 말에 타는 것이 힘든 것은 드워프나 마법사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껄껄껄!" 마차는 신나게 굴러갔지만 요동은 거의 없었다. 꽤나 훌륭한 마차인가 보네. 지금 5 마리의 말과 1 마리의 황소가 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흐 음. 썬더라이더는 그렇게 끼워놔도 말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 다. 굉장한 황소야. 아, 원래 말이지. 어쨌든 6 마리나 되는 말이 끌고 있는 것이라 마차는 무서운 속도로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지평선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흰 구름들이 게으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졸음을 불 러왔다. 난 시트에 몸을 파묻으면서 말을 꺼내었다. "그럼 말이지요. 이제부터 마차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재 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지요." "재미있는 이야기? 그게 뭔데? 난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써." 반쯤 졸고 있던 제레인트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난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덟 종족과 여덟 별에 대한 이야기." 마차 안에 있던 일행은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난 특히 엑셀핸드 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폈지만 엑셀핸드는 그저 심드렁한 의문을 담은 표 정이었을 뿐이었다. 엑셀핸드가 표정을 저렇게 잘 관리할 리야 없으니 아무래도 그 역시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엑셀핸드는 300년 전 에도 살았었잖아? 이상하네.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어서 해보게. 네드발군." ================================================================== 11.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21. 난 되도록 말 한 마디도 빠트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말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차 안의 사람들의 표정은 숨쉴 사이없이 바뀌었다. 아프나 이델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해 있었고 제레인트는 숨을 헐떡거렸 다. 엑셀핸드는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투덜거렸고 카알 은 자기 얼굴에 무엇무엇이 달려있는지 잊어먹기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턱과 관자놀이, 코 등을 만져대었다. 어느새 이야기가 끝났다. 창밖을 바라보니 지평선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구름의 모양은 꽤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난 일행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본 다음 이야기를 마쳤다. "이 정도면 넥슨이 한 말은 전부 다했어요." 일행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카알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 간을 문지르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운명을 결정하는 보석이라고…? 그것 참. 그리고 그게 왜 있는지도 모 른다고?" "예. 적어도 넥슨의 말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 존재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는데요." "그래? 흐음. 이상한 일이군. 그렇다면 그 별들은 유피넬과헬카네스의 손길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말인데. 만일 그 별들이 유피넬과 헬 카네스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지." "왜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없는데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제레인트가 대신했다. "어, 그거야 만일 그 별들이 실재하고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힘으로 만 들어진 사물과 같은 것이라면 그 존재 이유를 설명 못할 까닭이 없잖아. 물론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럴 경우 그 별들 역시 다른 사 물들과 마찬가지이므로 분명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거든? 따라서 굳이 우리는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식의 말을 할 필요는 없 는 것이 된다고." 제레인트의 말을 듣다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세상에 이유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모두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레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 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말했다. "그래! 정확한 말이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힘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 들 중엔 이유없이 태어나는 것이 없지. 따라서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른다 는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넥슨이 해 준 말이에요." "그래? 음. 재가 프리스트도 프리스트니까." 카알은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짓다가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 저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엑셀핸드는 잔뜩 노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참. 기막힌 말이군!" "기막히다고요?" "그럼! 그렇다면 뭐야? 드래곤 로드는 우리 드워프들을 얼마든지 멸망 시킬 수도 있었지만, 다만 세상의 균형을 위해 우리를 내버려뒀다, 뭐 이런 말이야?" "그런 말인 것 같습니다." "난 저런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네! 물론 우리 드워프들이 전승지식이 나 학식에 대해 뭐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저런 이야 기를 태어나서 처음 듣는구만." "그러시다고요… 음. 네드발군? 당시 넥슨의 상태는 어떤 것처럼 보이 던가?" "그의 상태요? 저랑 마찬가지였지요. 아, 아니 저보다 더 지쳤을 거에 요. 무슨 수로 그렇게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작자들은 정말 사흘 동안 우리 뒤를 추적해왔나봐요." "그래? 음. 그럼 치밀한 거짓말을 구사할 수는 없는 상태라는 말인가?" "그렇게 물어오신다면, 그래요. 그리고 내 생각인데요, 넥슨처럼 기억 이 불분명한 사람이 과연 능숙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잘못된 기억을 가질 수는 있겠지. 책에서도 그렇지만, 중간 부 분이 빠져버리면 전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는 일이 많다네." 책이라는 말에 엑셀핸드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잘못된 기억에서 나온 이야기가 그렇게 명료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긴 어렵겠지요. 음. 네드발군. 그러니까 그 여 덟 별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써 넥슨이 말한 것은, 첫째,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둘째, 드래곤 로드의 모든 종족 지배. 맞는가?" "그렇지요." "여덟 별이 누구누구더라…" "제로딘, 캄드리, 일스, 라인버그, 우타크, 챠넬, 멜다로, 허즐릿입니 다." 카알이 말하자마자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카알은 빙긋 웃었다. "예. 여덟 별이 그 여덟 명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란 말인가." "예. 그 사람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다고 해도 다른 이야기를 많이 들 을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그 사람이 말한 것은 그게 전부에요. 아, 핸 드레이크가 실망한 것으로 보아 일곱 개의별은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말 도 있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핸드레이크가 실망했다라… 그가 실망했다? 무엇에 대해 실망했을까?" "핸드레이크가 실망할 일이 있어요? 그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도와 드래 곤 로드를 물리쳤어요. 그리고 바이서스를 건국했고. 도대체 그만한 일 을 이루어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실망할 수 있지요?" 아프나이델과 제레인트는 동시에 그럴듯한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엑셀핸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아버렸고 카알은 조 용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일이없어져서 레니와 함께 스무고개 놀이나 말잇기 놀이라도 할까 생각할 무렵, 카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첫번째 증거 말인데…"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난 피식 웃어버리고는 카알 을 바라보았다. "첫번째? 첫번째라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말씀인가요?" "응. 그래. 그 비유는, 언뜻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상한 말 이지." "어째서 이상한 말인데요?" "왜냐하면 그 여덟 별이 제로딘, 우타크, 캄드리, 라인버그, 챠넬… 또 일스와 허즐릿, 멜다로의 여덟 명이긴 하지만, 사실은 기사들은 모두 아 홉 명이거든." 제레인트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예? 아홉 명이라니… 핸드레이크를 포함해서 말입니까?" "아니지요. 핸드레이크는 기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간과하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예?"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어라? 숨겨진 기사가 하나 있었단 말인가? 카알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도 기사였지 않습니까? 그 스스로도 기사 중의 기사라고 자부하셨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아프나이델은 얼빠진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고 제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이고 맙소사. 그렇군! 누가 뭐라고 해도 루트에리노 대왕 자 신도 기사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넥슨의 말마따나 루트에리노 대 왕은 기사도 맹신자인데 말이야. 카알은 침착하게 말했다. "따라서 그 별이라는 것이 기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엄밀하게 말해 서 아홉 별이라고 불러야 정확한 것이 됩니다. 루트에리노 대왕 자신은 항상 다른 기사들을 친구로 대했지 상명하복의 주종관계로 인식하기를 꺼려했으니까… 그래야 더 그 분의 성격에 맞는 일이 됩니다." "맙소사! 그렇군요. 아홉 별이라고 불러야 되는군요." 그 때 레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지만 보통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요. 레니양. 그래서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은 것 입니다. 하지만 네드발군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 여덟 별이라는 명 칭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겨지는군요. 어쩌면… 그 여덟 별에서 루트에 리노 대왕이 빠져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식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인지 도 모르지요.아홉 별이라고 부르는 대신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 라는 식으로." "음. 그럴 듯합니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후치의 말이, 아니 넥슨 의 말이 맞다면… 이렇게 된 것이군요? 루트에리노 대왕과 여덟 기사들 은 원래 자신들 아홉 명을 가리켜서 여덟 별의 추구자, 에잇스타시커라 고 불렀는데, 그 명칭이 와전되어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라고 불 리게 된 것이군요?" 제레인트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은 빙그레 웃었다. "예. 하지만 이건 억지로 끼워맞춘 말이 될지도 모르지요. 넥슨의 말 이외엔 아무 증거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진실성이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대왕의 성격을 생각 해보자면…" 아프나이델 역시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그리고 두번째 증거. 드래곤 로드의 전종족 지배… 글쎄. 이건 굳이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하는 신비의 보석이 없어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 은데. 드래곤 로드의 강력함이야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엑셀핸드는 꾹꾹 눌러참았다가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보게! 카알. 지금 자네는 그 웃기는 이야길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 같구만?" 카알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오.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 위해 고찰해보고 있는 중입니 다." 엑셀핸드는 굵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카알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 그 놈의 혀 잘도 돌아가는군. 하지만 그거 정말 웃기지도 않는단 말일세!" "웃기기로 말한다면야…" 카알은 갑자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카알의 시 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카알은 혼잣말을 하듯이 가락을 붙 여서 말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구름이 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뭐라고?" 엑셀핸드는 콧잔등을 한 방 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당황한 얼굴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과연 또다른 구름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 알은 변함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흙이 있지요? 왜 저녁이면 가라앉고 말 태양이 저렇게 힘겹게 솟아오르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많은 나비와 그 많은 꽃 들은 어쩌자고 세상을 저토록 어지럽혔을까요? 가을이 다가오면 모두 시 들고 사라져버릴것들이? 어쩌자고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죽어버릴 운명의 자손을 힘겹게 키워내는 것일까요?" "여, 여보게?" "별은 또 왜 그렇게 많다는 말입니까? 땅 아래 보석은 왜그리도 많지 요? 새들은, 저녁에 둥지로 찾아들 새들은 왜 아침이면 깃털에 묻은 이 슬을 흩뿌리며 날아오르는 것이지요? 양치기는 피리를 불어 모아들일 양 들을 왜 풀어놓는 것이지요?" 엑셀핸드는 입을 딱 벌린 채 카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알은 변함없 이 창턱에 팔을 괸 채 약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는 다시 바드처럼 웅얼거렸다. "소멸의 축복을 받지 못한 신들은 우리를 경배할까요?" "예?" 제레인트의 숨막힌 반문이었다. 그러나 카알은 그것도 무시해버렸다. "웃기기로 따진다면 이 만물, 이 세계보다 더 우스운 것이 어디에 있을 까요." 마차 안에는 카알 이외에 다섯 명이나 되는 일행들이 있었지만 그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카알은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렇게 밖을 쳐다보았다. 마차바퀴 구르는 소리, 그리고 지붕 위에서 운 차이를 괴롭히고 있는 네리아의 목소리만이 가늘게 들려왔다. 카알은 갑자기고개를 돌리더니 히죽 웃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보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난 스스로 놀랄만큼 차분하게 대답했다. 카알은 여전히 그, 약간은 바 보처럼 보이는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그렇지. 네드발군. 범부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현자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하지요." 카알은 기분좋게 웃더니 시트 속으로 몸을 파묻으며 팔짱을 끼었다. "넥슨의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카알은 그 말을 작별 인사로 남기면서 자신의 사색 속으로 침잠해버렸 다. 좌중의 한 사람이 자기 속으로 몰입해버리니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제각기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난 지루한 심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베어져나간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 했다. 음. 꺼끌꺼끌한 느낌이 참 괴상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군. 그 때 레니가 내 팔꿈치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후치야. 그게 무슨 말이니?" "응?" "바보도, 범부도, 또 현자도 모두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고?" "하하하…" 갑자기 아그쉬의 그 멍청한 인용이 생각나서난 웃어버렸다. 그러자 레 니는 눈살을 찌푸렸고 난 즉각 사과했다.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서 웃었어. 그 이야기는… 말 그대로지." "말 그대로라고?" "그래." "뭐가 그래?" "그냥 그래." 레니는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말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난 학교 같은 것 다닐 여유가 안되었단 말 이야. 그러니까…" "나도 학교는 구경도 못해보고 자라난 사람이야. 그냥 생각해봐, 레니. 이건 별 것 없는 말장난이야." 레니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난 말장난은 같이 웃을 수 있을 때만 좋아해." "하하. 그러니? 음. 앞을 보면서도 뒤에 따라오지도 않는 추적자를, 혹 은 자신의 과거, 어제의 실수 따위를 생각하면서 진구렁탕에 발을 빠트 리는 사람이 있다면 넌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를 거지?" "바보…지?" "그래. 바보는 마치 곰곰히 생각하기만 하면 지나간 실수가 바로잡아질 것처럼 믿지.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완전히 고정된 것인데 말 이야." "그럼 범부는?" "범부도 어떤 의미에선 바보와 마찬가지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실수를 생각해서 앞으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범부, 보통사람일 뿐 이지. 하지만 범부라고 해봐야 결국은 그 사람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존 재하는 것이야. 바보든 범부든 과거라는 시간의 산물이지. 바보는 그것 에 매달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서 배운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의 저 감춰진 시선을 느끼는 것은 퍽 유쾌한 일 인걸? 두 사람은 모두 안듣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고 두 사람 모두 능숙한 거짓말쟁이나 사깃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자신의 행동을 잘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레니는 한참 고민 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그 풀려버린 표정 그대로 말했다. "그럼… 현자는?" "현자는 과거의 시간과 상관없는 존재가 현자야. 그는 현명하므로 과거 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미래를 깨달을 수 있지. 사실 이런 사람은 드 물지. 핸드레이크나 그렇게 불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역사 책을 읽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왜냐하면… 그들 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생각하니까. 여기서는 사실 '앞' 이라는 말과 '뒤' 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거야. 음, 그러니까 레니, 넌 지금 나의 앞을 보고 있지?" "그렇지."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내 앞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볼 수 있다면 넌 현자인 셈이지." "아… 그래?" "그래." 레니는 입술을 잡아당기면서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감고 있는 카알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카알의 입 술 가장자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는 폭소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파묻고는 꽉 틀어쥐었다. 우헤헤헤! 지붕 위에서는 나이크호크가 간첩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가운데, 사색에 잠긴 여섯 명을 태우고 두 명의 전사가 모는 마차는 신나게 신나게 달려 갔다. 해가 지는 방향, 저녁의 고향으로. 그러나 가장 무서운 드래곤의 아침을 향해. ================================================================== 12. 불길한 예언……1.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되는 존재들에게 고한다. 우리들의 약속된 휴식인 죽음은 문 밖에 도래하여 우리를 기 다리고 있으나 오늘 그대의 손엔 이 책 한 권이 쥐어져 있음 이니, 그대는 이제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농락할 준비가 된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그대에게서 사라지도록 하게 하 라. 그대는 이제 시간을 벗어난 존재이니…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1 권. P. 10 (770년 돌로메네 作) 마부석에 앉아 있던 샌슨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지 싶어 바라보니 샌슨은 손을 들어 왼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또 그 녀석들이야." 샌슨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니 왼쪽 으로 한 9,000 큐빗쯤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 솟아오른 작은 점들이 몇 개 보였다. 이 막막한 황야에서 저렇게 작은 것을 보고 있자니 눈이 가 물가물해진다. 난 함께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 이는 언덕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시 앞을 보면서 투덜 거렸다. "젠장. 덥치려면 그냥 덥치던가 아니면 몰래 따라오던가. 저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뻔히 보이는 위치에서 사라지지도 않고 가까이 오지도 않 고." 샌슨 역시 언짢은 표정으로 괜시리 채찍을 휘둘렀다. 천천히 걷고 있던 말들은 갑작스런 명령에 당황하여 대오를 흐트러뜨릴 뻔했지만 그들을 선도하는 썬더라이더의 지휘 하에 곧 일사불란하게 마차를 끌기 시작했 다. 마차를 끌기 위해 훈련된 적도 없는 말들치곤 꽤나 잘 달리고 있단 말이야. 운차이는 하던 일, 그러니까 나이프로 나무토막을 깍는 일을 다시 시작 했다. 마차가 갑자기 속력을 높이자 그의 다리 사이에 놓여있던 나무 부 스러기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러나 운차이는 그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이프를 놀려대었다. 굉장하군. 홀릴만한 솜씨야. 운차이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녀석들. 어떻게 야생마를 붙잡았을까." 내 옆에 엎드려서 발을 까딱거리면서 운차이의그 굉장한 작업을 구경 하던 네리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 작자들이라면 자이펀 간첩으로 하여금 여자에게 말을 하게 하는 일 도 가능할걸?" 운차이는 나무토막을 다듬던 손을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네리아를 지 긋이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엎드려 턱을 고인 자세로 눈을 치켜떠서 운차 이를 마주보았다. 운차이는 다시 고개를 숙여 나무토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치. 웃기지도 않는다고 전해줘." 난 말을 전해주지 않았다. 귀찮은 일이야. 지붕 위로 올라오면 재미있 을 것 같아서 올라왔더니 네리아와 운차이 사이에 끼어 피곤하기만 하 다. 네리아는 몸을 뒤집더니 내 허락도 없이 내 다리를 베고 누워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리가 어어얼마나 떨어져 있니, 후치야?" "한 9,000 큐빗 정도. 능선을 따라 우리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오고있 군요." "그럼 우리 보라는 듯이 달린다는 거네?" "그렇지요." 네리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카락 때문에 눈을 깜빡거리면서 말했다. "운차이야, 운차이야. 저 친구들 짐은 있니?" 운차이는 나이프를 멈추더니 네리아를 향해 눈을 힘껏 부라렸다. 하지 만 네리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미 두 손으로 눈을 가린 후였다. 그녀는 그렇게 눈을 가린 채 혀를 낼름거렸다. "안보이네, 뭐? 마음대로 눈을 부라리라고. 에헤헤헤…" 운차이는 씩씩거리더니 다시 나이프를 들고 나무토막을 뚫어지게 보면 서 거칠게 말했다. "짐은 무기와 작은 꾸러미 몇 개뿐이라고 전해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아, 그러니? 꾸러미라. 어디서 여행물품을 구했을까?" 운차이는 이를 북북 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우리는 작은 마을 한 두 개를 지나왔잖아요. 저 친구들도 우리 뒤를 곧장 따라왔으니까 아마 그 마을들 어디에선가 구했겠지요." "음. 그렇구나. 그런데 어쩌겠다는 걸까? 저렇게 멀리 떨어져있지만 확 실히 보이는 곳에서 계속 어정거리고 있으니 말이야." "음. 이상하지요. 넥슨이 원하는 것이라면 레니겠지요. 우리들을 죽이 고 싶어하지만 그건 감정이 개입되는 문제고. 뭔가 의미를 가지고 할만 한 일이라면 우리들에게서 레니를 납치하는 것이겠지요?" "그래그래." 네리아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난 다시 왼쪽 멀리로 희미하게 보이 는 그 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몰래 따라오는 것이 좋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운 차이?" "왜?" 운차이는 나무토막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난 뭐라고 말 하려다가 다시 운차이의 손놀림에 매혹되어버렸다. 히야! 그거 참. 어떻 게 달리는 마차 위에서 저렇게 나무를 깍을 수 있을까? 운차이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는듯이 쉽게쉽게 손을 놀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나무토막 속에 숨겨져있던 조각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게 도대체 무얼까? 지금 봐서는 아무래도 뭔지를 모 르겠는걸. "불렀으면 말을 해." 운차이는 다시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해서 난 그게 나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 혹시 저 친구들이 왜 저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짐작할만한 거 없 어요?" 운차이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들고 있던 나이프를 휙 던져서 마차 지붕에 꽂았다. 그리고는 깎고 있던 나무토막을 품 속에 넣더니 갑자기 마차 옆으로 몸을 날렸다. "으악! 운차이!" 아래, 즉 마차 안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운차이는 지붕 가장자리를 쥐고는 마차 옆으로 상반신을 거꾸로 내린 것에 불과했다. 아이고, 떨어지는 줄 알았네! 운차이는 그런 불편한 자세로 마차 안을 향해 말했다. "야, 드워프. 담배 좀 줘." 곧 아래에서 엑셀핸드의 진노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놈! 카리스 누멘의 모루와 망치 사이에 넣고 석달 열흘 두드려 버릴 녀석! 네놈이 떨어지는 줄 알고 간떨어질 뻔 했잖냐!" "간 떨어져봐야 그 짧은 몸통 안에서 어딜 가겠어. 담배나 줘." 곧 마차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붕 아래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외침 소리들이 들려왔다. "으악! 엑셀핸드! 참아요!" "그, 그 도끼! 그 도끼! 여긴 실내입니다!" "으아아아! 테페리여!" "아빠! 어, 어멋! 아 빠!" 마차가 뒤집어질 정도의 요동이 일어나더니 잠시 후 운차이는 무표 정한 얼굴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입엔 파이프가, 손엔 담배쌈 지가 들려져 있었다. 네리아는 누운 채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운차이는 담뱃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바람을 등지고서는 주의깊게 파이 프를 채웠다. 그리고나서 그는 파이프를 입에 딱 물더니 그제서야 자신 이 간과한 사실을 알아차린 표정을 지었다. 난 그가 무엇을 간과했는지 를 지적해주었다. "그거 어떻게 불 붙일 생각이지요?" 운차이는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다시 파이프를 손에 들었다. 그 때 네리 아가 자신의 대거를 뽑더니 운차이에게 건네었다. 운차이는 의아한 표정 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헤죽거리며 말했다. "손잡이 잘 봐. 발화장치가 있어. 너도 간첩이니까 더 설명 안해도 되 지?" 아, 참. 그랬지. 네리아의 대거엔 그런 장치가 있었지. 운차이는 네리 아가 내민 대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서툰 손놀림으로 그것을 받아들 었다. 잠시 후 그는 대거 손잡이를 어떻게 돌리는 듯하더니 곧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그는 잠시 대거를 바라보더니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나에게 건네었다. "돌려줘. 음. 그리고 고맙다고 전해줘." 이거야 정말… 난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내 손보다 더 빠르게 네리아의 손이 튀어나갔다. 네리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한쪽 눈 을 찡긋했고 운차이는 헛기침을 몇 번 뱉었다. 마치 담배 처음 피기라도 하듯이. 운차이는 지붕 뒤쪽에 묶여있던 짐들에 등을 기대며 파이프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연기는 순식간에 마차 뒤로 날아가버렸다. "저친구들이 저런 짓을 하는 건, 시위라고밖에 볼 수 없지." "시위라고요?" "그래. 방심하지 마라. 언제든지 공격하겠다. 뭐 그런 시위지. 지금 저 쪽에선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럼 우릴 죽이려드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 요?" "그렇진 않다. 살기는 당장 죽이려들 때만 느껴지는 것이다." "아, 그래요?" 네리아는 좀 더 잘 듣기 위해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되었다. 운차이는 네 리아를 못본 적하면서 계속 말했다. "지금 저 녀석들은 우릴 죽일 마음이 없지. 지금은 말이야. 하지만 마 음 속으로야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기로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마음 속의 생각이나 사상 등이 행동으로 전환되기 직전, 그러니까 내면이 외면을 건드리기 시작할 때 기의 발출이 일어나 게 된다." 이 무슨 오크 밀알 헤아리는 소리냐? 난 얼떨떨한 얼굴로 운차이를 바 라보았지만 운차이는 평온한 어조로 계속 설명했다. "간단히 말하면 내면의 힘이 외면으로 나오려 할 때 몸 주위의 기가 밀 려나온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다. 잡담 제하고. 저 친구들에게 공격 의사는 없다. 그러니 시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 "음. 그럼 왜 저런 시위를 하는 걸까요?" "부르는 거다." "불러요?" "우리를 부르는 것이지. 계속 우리의 신경을 건드려댈 것이다. 이건 시 작에 불과해."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그렇지. 운차이? 당신 저기까지 들리도록 고함 지를 순 없어요?" "너무 멀어." "음. 어차피 오늘 저녁이면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게 될 텐데요, 뭐. 저렇게 쫓아오는 짓도 더 못하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수도 가까운 곳에 서 돌아다니긴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오늘 오후로군." "예?" "아냐." 운차이는 파이프를 꺼내더니 담뱃재를 바람에 다 날려보내었다. 그는 파이프와 담배쌈지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쑤셔넣더니 다시 나이프와 나 무토막을 붙잡았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넥슨 일행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저렇게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달릴 수 있다니. 게다가 수완도 좋지, 어떻게 야생마들을 붙잡았을까? 겨울철이 되면서 북부대로에서 뛰놀던 야생마들은 남하를 한다고 한다. 아마 그렇게 남하한 야생마를 붙잡았겠 지. 하지만 녀석들을 길들이는 것, 그리고 넥슨의 경우엔 상태를 회복하 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을 텐데 저렇게 우리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를 앞지르고 있다고 말해야 되나? "앞으로 달려가는데?" 샌슨이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저 먼 언덕 쪽에서 어른거리고 있던 까만 점들은 갑자기 속도를 내면서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이렇게 먼 거 리에서도 저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속도를 내고 있 는 것이 분명하군. 세 개의 검은 점은 확실히 눈에 뜨이는 속도로 죽죽 나아갔다. 샌슨 옆에 앉아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던 길시언은 그 모습 을 보더니 크게 감탄했다. "저게 바로 바람의 아들, 야생마다! 아아! 하지만 썬더라이더, 넌 저들 보다 훨씬 더 커다란 엉덩이를… 이봐, 관두자고! 이 용광로에 쑤셔박을 녀석아!" 길시언의 아름다운 감탄은 버릇 없는 마법검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 다. 그 때 마차 옆의 창문에서 카알의 얼굴이 불쑥 나왔다. 카알은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마치 잘 보인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척 올리고는 말했다. "우릴 앞질러가고 있나, 네드발군?" "그래요. 카알." "그래? 음. 조심해야겠군. 저 친구들이 우릴 노리려면 오늘 오후밖엔 시간이 없을 테니까. 우리 앞길에 뭔가 고약한 계책을 준비해둘지도 모 르겠군." "카알이라면 세 명의 인원으로 달리는 마차를 붙잡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겠어요?" "생각 좀 해봐야 대답할 수 있겠군." 카알은 그 말만 남겨두고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난 저 앞으로 사 라져가는 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 점들은 꽤 앞선 위치를 달려가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들의 뒤로 일어나는 먼지구름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굉장한 속도를 내고 있는 모양이군. 그 굉장한 속도는 야생마가 내는 것인가, 아니면 넥슨 당신이 내는 것 인가. 난 넥슨 본인이라도 대답하기 곤란할 질문을 잠시 떠올렸다. 어느덧 넥 슨 일행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잔뜩 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일 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대단히 고약한 일을 당해버린 느낌이 든단 말이야. 우리는 그날 오후 내내 넥슨의 습격을 대비하며 어깨를 바짝 긴 장시키고 있었지만 서녘 하늘의 구름들이 보랏빛으로 물들 무렵이 될 때 까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깨가 꽤나 아팠다. 게다가 마차 지붕 위는 확실히 두 번 다시 선택할만한 장소도 아니었 다. 하루 종일 황야에서 몰려오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끝에 지금 내 몸엔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먼지 구름이 일어날 만큼의 먼지가 쌓였다. 난 맥 빠진 동작으로 먼지를 털어내었다. 풀썩풀썩. "켁, 켁! 숨막혀. 그러지 마." "그러지 말기는요. 네리아도 좀 털어요. 붉은 머리가 지금 회색 머리가 되어 있다고요." "자기 전에 씻을 수 있겠지, 뭐." "그건 가능하겠어요. 바이서스 임펠입니다." "다 왔어? 어디? 와!" ================================================================== 12. 불길한 예언……2. 네리아는 지붕 위라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 동작으로 벌떡 일어났다. 난 어깨를 털어내면서 눈 앞으로 점점 더 커져오는 바이서스 임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래쪽에서 제레인트는 창문 밖으로 상반신을 거의 다 내밀 고는 팔을 휘드르며 환성을 질렀다. "이야아아! 바이서스 임펠! 나 제레인트가 간다앗! 멀고 험난한 길을 달려, 숱한 모험과 재난을 뚫고서, 마침내 내가 간다!" 제발… 시내에 들어가서까지 저러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제레인트의 반 대쪽 창문으로는 레니가 몸을 내밀고 있었지만 레니의 경우엔 아무런 말 도 없이 그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을 뿐이다. 난 레니의 정수리를 내 려다보며 말했다. "어때, 레니야?" 레니는 잠시 날 올려다보더니 다시 바이서스 임펠을 바라보며 쌕쌕거리 는 숨소리를 내다가 간신히 말했다. "너무… 글쎄.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지금은 너무 크다는 생각 밖엔 안드는걸."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바이서스 임펠의 모습은 두번째로 보는 나에게도 굉장한 장관이었다. 한없이 많은 지붕들과 번쩍이는 탑, 아름다운 건물 들과 신전, 끝없이 늘어선 대로들은 지평선까지 계속 이어져있는 듯했 다. 그리고 그 장대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그 굉장한 높이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이 긴 길이 때문에 낮아보였다. 나는 그랜드스톰의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 한참 동안 머리를 움직여야 했다. 분명히 외성쪽에 붙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임펠리아는 도시 중앙쪽 가까이 있을 텐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도시 중앙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전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이서스 임펠은 내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 지 펼쳐져있었고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곳은 중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외곽쪽이라고 불러야 될만한 곳이었다. 석양을 받아 아스라이 황금빛으 로 빛나는 임펠 리버의 모습은 바이서스 임펠이라는 저 미녀의 머리에서 지평선을 향해 늘어트려진 금발머리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저, 저게 뭐야? 도시에 불이 난 거야?" 레니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 때 바이서스 임펠의 가 로등들이 켜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로들을 따라 천천히 점멸하듯이 피어나는 가로등들은 마침내 별의 강을 이루었다. 환한 빛덩어리들이 대 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모습, 가로세로로 늘어서 불타오르는 저 모습 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난 자신도 모르게 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불장대야." 성문 통과에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제레인트와 레니는 외국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계속 싱글벙글거림으로써 성문 경비대원 들이 엄한 표정을 짓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레니의 경우 엔 성문 경비대원들의 관심을 끄는 데도 실패해버렸다. 내가 경비대원이 라도저런 소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진 않겠다. 게다가 길시언이 경비대원들에게 몇 마디를 하자 그들은 당황한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궁 성까지 안내하겠다는 성문 경비대장의 말을 점잖게 거절한 다음 우리들 은 시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성문을 들어서자 저녁이면 오히려 더욱 부 산해지는 바이서스 임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레인트는 그대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다. 마 차가 성내로 들어서자마자 제레인트는 모든 방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으와! 후치! 저 불장대, 저 불장대!" "가로등!" "아, 그래. 가로등. 저 가로등은 매일 마법사들이 와서 켜는 거냐?" "영원히 켜져있는 거에요. 낮에는 덮어두는 거지요. 그리고 제발 목소 리 좀 낮추면…" "맙소사! 저 건물 높이 좀 봐! 이층, 사층… 오층이야! 어떻게 오층짜 리 건물이 있을 수가! 테페리여, 하늘 아래 어찌 저런 것이! 으아! 카 알, 카아아알! 저게 뭐지요? 저기, 언덕에 있는 저, 저, 저!" '그랜드스톰입니다.'라는 카알의 대답은 매우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래 도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좀 나은 팔자지. 마차 지붕 위에 올라앉은 나와 네리아, 운차이는 시민들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도 없단 말 이야. 난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매우 비통한 표정을 지어보였 다. 마치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저 행인들이 우리가 간질 환자를 옮기고 있다고 여기곤 우리 처지를 동정해줄 듯이. 하지만 행인들은 우리쪽으로 많은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네리아는 지붕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게으른 동작으로 사방을 둘러보았 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지?" "예." 확실히 뭔가 좀 이상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이다. 저번에 우리들 이 찾아왔을 때는 트윈문의 축제였기 때문에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 만 그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조용하다. 거리를 걷는 인파들 의 모습도 내 기억에 비쳐봐서 1/5도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찾 아왔을 땐 그렇게도 내 눈을 즐겁게 해주던 그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다 들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리고 골목골목을 돌 때마다 들려오던 노랫소 리와 웃음소리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소란스러운 일행이 탄 6 두마차라면 제법 구경거리가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거의 신경 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신경 을 써야 될지 모르는 것이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엔 어디서든지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이렇게 희한한 것은 처음 본다는 듯이 넋을 빼놓은 채로 가로등을 바라보는 사람, 주위의 위 용에 짓눌려 잔뜩 위축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그러고보니 긴 여행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가방이나 짐꾸러미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걸어가는 부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꼬마들은 온몸에 먼지가 켜켜히 쌓인 채 피로에 지쳐 꿈결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이 아니다. 저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그리고 왜 수도로 온 것일까? 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당신 떠나올 때도 이랬어요?" 운차이는 찌푸린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다가 음산하게 말했다. "아니." "그럼 바이서스 임펠이 갑자기 이렇게 음산하게 바뀌었다는 건가요?" "전쟁이니까." 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드디어 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모양이네. 그 오랜 전쟁에 도 끄떡없던 이 도시도 이젠 전쟁의 폭풍 속에서 혼자 꽃을 피울 수는 없는 거야." "시적이군요." 제레인트와 레니는 시내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난 불안했다. 국 경까지, 아니 전선까지 굉장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도시에도 전쟁의 여 파가 밀어닥친다는 것인가? 교역이 중단되고 젊은 남자들이 전선으로 달 려가버린 여파가 이제서야 이 거대한 도시의 위용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것인가? 저녁별들이 가로등 위의 어둠 속으로 무리지어 움직일 무렵, 유니콘 인 의 말구종은 이제는 정말 더못참겠다는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하게 되었 다. "맙소사! 이, 이, 이번엔 6두 마차입니까!" 제레인트는 이 해괴한 인사에 대해 몹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우리 는 별 설명을 하지 않았다. 말구종은 여관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주인님! 주인님! 나와보세요! 놀랄 거에요!" "뭐야, 이 녀석아.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 거야." 여관 주인장 리테들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길시언이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여! 오래간만입니다. 주인장!" 리테들은 튕겨지듯이 뒤로 물러나다가 그대로 뒷통수를 건물벽에 들이 박고 말았다. 그래서 오래간만의 재회는 먼저 리테들씨의 뒤통수에 대한 심심한 애도의 표현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돌아오셨군요! 이건 또 뭡니까? 이런 6두 마차라니? 다음에는 유니콘이나 드래곤을 타고 오실 겁니까? 굉장한 마차군요! 엘프 마부는 없는 겁니까? 아, 옛어르신들 말씀대로 세 집 처녀가 애를 낳으면 놀랄 일도 없는 법이라지요. 어서들 들어오십시오. 맙소사! 당신들이 돌아왔 다니, 이 근처의 소문 좋아하는 패거리들은 모조리 몰려들겠군요! 우리 는 아직도 그날 밤의 이야기를 즐겨한답니다. 식사, 술, 침대, 욕탕, 화 장실 어느 쪽입니까?" 길시언은 싱글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받은 손님들은 대개 무슨 대답을 합니까?" "보통 앞의 두 개올습니다. 하지만 몹시 푸르죽죽한 얼굴을 한 채 짓눌 린 음성으로 다섯번째를 지정하시는 손님들도 계시지요. 와하하!" 난 아프나이델이 몹시 푸르죽죽한 얼굴을 한 채 짓눌린 표정을 하고 있 는 것을 깨닫고는 그 대신 리테들씨에게 다섯 번째도 있다고 말했다. 아 프나이델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세번째야. 마차 때문에 멀미가 나려고 해." 아프나이델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서 엑셀핸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키가 크고 깡말라서 더욱 껑충해보이는 아프나이 델이 탄탄하고 작달막한 엑셀핸드의 부축을 받아 여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여관의 하인 하녀들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잠시 후 레니와 네리아는 시간이란 원래 욕탕에서는 흐르지 않는 것이 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욕탕에 틀어박혀 있게 되었다. 우리들은 먼지투성 이가 된 옷을 조심스럽게 벗어던지고 얼굴과 팔 등을 대충 씻은 다음 홀 로 내려왔다. 홀은 고요했다. 카알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홀을 둘러보더니 맥주잔을 들고 온 리테들씨에게 말했다. "손님들이 적은 것 같군요." "말도 마십시오. 이런 시절에 여행을 하는 여행자가 진짜 금테 두른 여 행자지요. 이 자식아! 그 접시는 거기가 아니야! 아, 실례했습니다. 요 즘은 저도 괜히 까탈을 부리는 일이 많군요. 원참. 여관업으로 밥먹고 산지도 30년이 넘었지만 올해 같은 불경기는 보다보다 처음입니다." "전쟁 때문입니까?" "아니, 여러분들은 도대체 어딜 가 계셨던 겁니까?" 리테들씨는 우리들에게 맥주잔을 돌리더니 벽난로에 장작 하나를 던져 놓고는 불쏘시개로 잠시 벽난로를 뒤적거려 공기가 통하도록 했다. 그리 고나서 그는 파이프를 꺼내어 물고는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홀 안 엔 거의 손님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지라 주인장은 마음대로 게으 름을 부리고 있었다. 리테들씨는 파르스름한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내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좋아하는 축들도 있긴 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이건 아침에 일어나고 낮에 일하며 저녁 시간엔 맥주 한 파인트로 잠을 청하는 것을 생활의 도리로 생각하는 사 람들에겐 어려운 시절입니다." "전쟁이 많이 어렵습니까?" 리테들씨는 잠시 콧등을 만지작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면서 은근한 태 도로 말했다. "오시면서 피난민들을 혹 보셨습니까?" 피난민? 아, 그 이상한 여행자들. 그 사람들이 피난민이었나?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여행에 지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랬군요. 역시 피난민들이었 군요." "사우스 그레이드는 지금 완전히 쑥대밭이랍니다.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돌아온 여행자에게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곳에선 대로변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면 100명쯤 되는 피난민을 볼 수 있답니다.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대요." 길시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렇게 심각합니까?" "말도 마십시오. 요즘 이 도시 인구가 두 배는 늘어난 느낌입니다. 여 러분들은 밤에 오셔서 잘 못보았겠지만 말입니다, 낮에 어디 성문 근처 에 서서 구경해보세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어 디서 오나 싶게 꾸역꾸역 몰려듭니다." 길시언은 이를 꽉 깨물면서 신음처럼 말했다. "이런…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것 참.전쟁 일어난 것은 꽤 되는데 왜 갑자기 피난민들이 발생하는 것이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카알도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리테들씨는 잠시 주위를 둘 러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이건 모두들 쉬쉬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아무래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전선에서 지골레이드가 없어진 모양입니다요." 리테들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들이 충분히 놀랄 시간을 주려드 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리테들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카알은 말했다. "그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예? 아니, 혹시 전선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아니오. 여행 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그래서 지금 전선에서는 조금도 전진을 못하는 상 태, 아니 뒤로 밀리지 않고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우스 그레이드의 분위기가 굉장히 나빠요. 주민들이 피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요." "음.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면 마구 밀리는 상태란 말입니까? 지키기 급급하다는 말은 아직까지는 그렇게 심하게 밀리고 있다는 말은 아니겠 지요?" "예.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단순히 전쟁이 악화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 민들이 그렇게 피난을 올 리는 없을 텐데요. 뭐… 설령 완전히 패배하기 직전이라고 해도 어차피 주민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자이펀인들의 앞뒤없는 살륙에 대한 소문이라도 퍼진답니까?" 리테들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아뇨. 단순히 전쟁에서 밀리는 것 뿐이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답니다. 앞뒤없는 살륙이 문제가 아니지요. 녀 석들이 그렇게 신사적일까요? 놀라지들 마세요." 운차이는 눈을 찡그린 채 리테들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리테들 씨는 흥분해서는 그 눈길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낮지만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펀인들이… 악마를 불러낸대요!" "악마라고?" 운차이의 눈이 번득였다. 우리들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한 얼굴로 리테들씨를 바라보았고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그는 무시 무시한 어조로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예. 무시무시한 악마랍니다. 시뻘건 몸에 쉬꼬챙이 같은 꼬리를 하고 온몸엔 벌레가 들끓는 악마랍니다. 그 악마는 구름이 별을 가리는 캄캄 한 밤중에 살그머니 바이서스군 진영으로 날아온답니다. 그래요. 몇몇 눈밝은 병사들이 분명히 목격했지요. 그리고 그 악마는 바이서스 진영을 고래고래 저주하고는 자신의 비밀 암호를 남겨둔답니다요. 다음 날 아침 이면 태양이 갑자기 불길로 바뀌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팔팔하던 병사들 이 픽픽 쓰러져나간답니다. 종군 프리스트들마저도 질병에 걸려 쓰러진 대요. 이 무슨 괴악한 일이랍니까." 리테들씨는 이번에야말로 하는 표정으로 우리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 았지만 아쉽게도 우리들은 이번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신 땅이 꺼 질 것 같은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운차이의 경우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그 눈밝은 병사들이란 주로 보초를 서면서 유달리 졸기를 잘하는 병사라든지 몽유병 증세가 있는 병사, 혹은 허풍을 잘 치는 병사겠지. 젠장. 자이펀놈들은 그 질병의 무기, 신의 권능을 훔쳐 만든 인간의 무 기를 실전배치한 모양이군. 길시언은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카일램 트리키공이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언제인데… 아직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군요. 제기! 그 귀족원에 푸르고 아름다 운 소나무여. 관둬! 장난칠 기분 아니야! 제기랄. 그 귀족원에 건의 서 류가 들어가면 곰팡이가 피기 전에는 절대로 결재가 안나옵니다. 현실감 각 없고 느려터진 작자들 같으니." 카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현실적인 일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각이라 할지라도 무슨 대 책이 있겠습니까." 리테들은 당황한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 별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악마의 이야기는 시민들 대부분이 아는 겁니까?" "예? 아, 시민이라고 해서 귀가 없는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진료소에 다니는 부인네들이라든지 궁내부원들의 입에서 줄줄 새어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피난민들의 입에서도 나오고요. 사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이서스 임펠 시민이란 국왕이 입고 있는 속옷이 며칠째 입고 있는 것 인지도 맞출 수 있는 자들이라고." 길시언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았고 그래서 난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했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제레인트가 지나가는 말 처럼 말했다. "민심이 어지럽겠군요." ================================================================== 12. 불길한 예언……3.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리테들씨?" "아, 그렇지요. 난리도 아닙니다. 도둑 길드에선 반역을 일으켜 도둑들 의 시체가 교수대에 주렁주렁 매달리질 않나, 전선에선 지골레이드가 달 아나버리고, 자이펀인들은 악마를 불러낸다는데다가, 피난민들은 꾸역꾸 역 몰려오고, 또… 이 모든 사태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요." 리테들씨는 상당히 애써서 비장미 넘치는 얼굴을 만들어낸 다음 그 얼 굴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우리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가 부활한답니다!" "푸흡!" 엑셀핸드의 반응은 기어코 리테들씨를 만족시켰으리라. 리테들씨는 저 런저런… 하고 말했지만 상당히 악질적으로 즐거워하는 얼굴이었으니까. 엑셀핸드는 마시던 맥주를 턱수염에 온통 쏟아놓고는 입을 딱 벌렸다. "이보시오! 거 무슨 이야기요?" "정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갈색산맥에 잠들어있던 드래곤 로드가 부활한데요. 드래곤 로드는 얼마 있지 않아 깨어나서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나라를 산산조각내버릴 거라고들 합니다." 갈색산맥의… 드래곤 로드? 아, 크라드메서겠지. 정말 소문이라는 것은 대책이 없는 것이로군. 우리들이 다시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면서 리테 들씨는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분노한 얼굴로 말했 다. "아니, 지금 절 실없는 헛소리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들 하시는 겁니 까?" "아니오.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은 믿을 수 없군요." "하지만 이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잠시만 시간을 내어 시내 를 돌아다녀 보십시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오히려 너무 냉정하게 말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실 겁니다. 왠 미치광이 같은 소문에는 말입니다, 드 래곤 로드가 999 마리의 드래곤과 함께 바이서스 임펠로 날아올 날이 멀 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디 그것뿐인 줄 아십니까?" 순간 카알의 눈이 번뜩였다. 카알은 날카로운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 면서 뭔가 묻는 듯한 눈짓을 했고 그러자 길시언도 날카로운 얼굴로 자 신의 몸을 구석구석 내려다보더니 근심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카알은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쉬었다. 으으. 실없는 왕자님 같으니라고.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소문 유포입니다." "예? 소문 유포라니… 아니, 이런, 빌어먹고 저주받을!" 길시언은 태이블을 쾅 내리쳐서 리테들씨를 찔끔하게 만들었다. 운차이 는 파이프를 꺼내어들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꽤나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양인걸." 난 운차이가 '놈들'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했다. 난 그의 얼굴을 살펴보 았지만 그 얼굴엔 뭔가 내심을 짐작할만한 표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샌 슨은 당황한 얼굴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래서 내가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이런 황당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자이펀 간첩들이 헛소문을 유포시키 는 거야. 민심을 혼란시키는 거지." "우와! 그렇구나, 후치!" 반응은 엉뚱하게도 제레인트에게서 터져나왔다. 샌슨은 대신 말없이 자 신의 이마를 딱 올려붙였다. 꽤 아플 텐데. 리테들씨는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다시 카알을 바라보았다. "예? 가, 간첩이라고요?" "예. 자이펀 간첩들이 바이서스 임펠에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별로 놀랄 일도 아닙니다. 간첩들이 적국의 수도에 있다는 것은. 게다가 그 소문들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그럴듯한 근거도 있는 것들이니. 이거, 참." 내 말을 정정. 아까의 그 병사들이란 보초서면서 졸거나 몽유병이 있거 나 허풍을 친 것이 아니라 사실 병사의 탈을 뒤집어쓴 자이펀 간첩이었 으리라. 정말 '이거, 참.'이다. 길시언은 흥분한 자세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난 지금 당장 임펠리아에 좀 가봐야겠습니 다." "아, 예. 거기서 주무시겠습니까?" "아니오.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돌아와서 여러분들에게도 전해드리겠습 니다. 그런데 카알.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예? 음. 그러고보니 일스 사절 건에 대해서도 사죄를 해야 되고. 알겠 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지요. 다른 분들은 어쩌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느긋하게 다리를 펴고 쉬고 싶다는 대답을 했지만 제레인트는 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본 끝에 그와 함께 여관을 나서게 되었다. 그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으며 리테들씨는 이미 불 꺼진 파이프를 손에 든 채 멍한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파이프에 다시 담배를 채우고는 엑셀핸드에게 담배쌈지를 던 져주면서 말했다. "저녁 메뉴는 뭐지?" 우리들이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여관에 새로 들어오는 손님은 보 이지 않았다. 정말 수도의 사정이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인걸. 대신 초라 한 몰골을 한 돈 없는 피난민들이 몇 번 얼굴을 들이밀었을 뿐이었다. 리테들씨는 우리들에게 그가 악당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성인(聖人)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상대의 몰골을 봐가면서, 눈살을 찌푸리며, 때론 여관비를 인하해주곤 했지만, 무료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실히 말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샌슨은 성질을 부렸다. "에이, 참! 보고 있기 짜증나네!" 그러더니 샌슨은 곧 주머니를 뒤져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어 리테들씨 에게 건네주었다. 리테들씨는 놀란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어 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거면 오늘 하룻밤은 충분하겠지요? 돈 있는 사람에겐 돈 받고, 없는 사람은 그냥 좀 재워줘요. 손해는 안보시겠지요?" 손해? 저 보석이면 이 여관을 한 달은 빌릴 수 있을 게다. 리테들씨는 입이 쫙 벌어져서는 샌슨에게 굽신거렸고 샌슨은 겸연쩍은 얼굴이 되었 다. 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아까워?" "전혀." 그러니 샌슨 퍼시발이지. 하하하! 엑셀핸드는 일찌감치 침대에 곯아떨 어져 있는 아프나이델을 위해 커다란 접시에 음식을 이것저것 담은 다음 술병도 하나 꿰찬 채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간신히 목욕을 마친 레니는 소리소문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사라져버렸지만 네리아는 맥주잔을 붙잡 고는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우리와 어울렸다. 나와 샌슨, 네 리아, 그리고 운차이는 유니콘 인의 넓은 홀을 독점한 채로 앉아서는 이 야기를 나누었다. 네리아가 입에서 맥주잔을 떼놓으며 말했다. "카아… 샌슨이 정말 그랬어?" 난 제대로 닦지도 않은 그녀의 머리에서 물방울이 맥주잔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느라 대답을 놓쳤다. 네리아는 의자 뒷다리로만 균형을 잡은 채 앉아서는 빨간 귓볼을 만지작거리면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그 시선을 무시하면서 맥주잔만 기울였다. 네리아는 싱긋 웃고서 다시 샌슨 에게 말했다. "수도가 그렇게 엉망이라구?" "그렇다더군." "다른 건 몰라도 지골레이드가 없어져서 전선에서 밀린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걸." 그러자 샌슨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맨 할슈타일이 왜 지골레이드를 놔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운차이는 돌맨으로 하여금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일까?" "후작에게 찾아가 물어볼까?" "그랬으면 좋겠군." 운차이는 네리아와 샌슨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낮부터 주 물럭거리던 그 나무토막을 붙잡고 나이프를 놀려대고 있었다. 그의 나이 프가 은빛을 발할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나뭇조각이 테이 블 위로 튀었다. 샌슨은 그 작업을 바라보다가 운차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네 의견 말이야. 그럴 듯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데가 많아."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운차이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샌슨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뭐 특별히 어쩌라는 것은 아니야. 토론을 좀 하고 싶다는 거지." "난 관심없으니 내버려둬." "원 참 딱딱하게 구네. 그런데 그건 도대체 뭐야?"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샌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때 난 네리아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리아는 천장을 보며 말했다. "후치야." "예." "이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예?"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일들이 모두 순조롭게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니? 우리들 모두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까?" "미래요? 난 그 친구와는 소원한 관계인데." "그럼 넌 어떻게 되겠니?" 난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주위 사람들의 숨소리, 벽난로에서 장작이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운차이의 손에서 들려오는 서 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글쎄요. 갈색산맥으로 가서, 크라드메서를 만나고, 그와 레니가 계약 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그리곤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드래곤 로드 에게 얻은 보석이 있으니까 아무르타트에게 몸값으로 주고… 억류된 사 람들을 되찾아올 수 있겠지요." "그리고 모두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맥주 한 모금이 필요한 대답인 것 같군. 그래서 난 다시 길게 한 모금 마신 다음 대답했다. "그렇게 되긴 어렵겠지요. 우린 너무 큰 일에 휘말려버렸으니까 예전에 살아가던 방식으로 내일을 살아가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어차피 침대에 서 눈 뜰 때부터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힐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 "예… 먼저 자이펀의 일. 이 전쟁 말이에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 든 그 일부에 대해서라도 알게 되었으니까 그 전쟁에 대해 계속 생각하 게 되겠지요. 과연 바이서스가 계속 평화로울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지 금으로선 대단히 위험한 셈이잖아요." "또 있니?" "넥슨의 일. 넥슨은 과연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고나면 모든 것을 포기할까요? 그 자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은 바이서스에 대한 증 오심뿐이고… 그 남자의 인격 전체의 주춧돌로 남은 것이 그 증오심인 것 같아요. 음… 이런 것 같아요. 사랑과 증오는 둘 다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어요.그리고 그 반응을 통해 자신을 찾을 수 있 지요." "무슨 말이니?" "핸드레이크의 말이지요. 나는 단수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 아무 런 감정도, 관계도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감 정과 관계는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축적되는 것 아닐까요. 뭐, 그걸 개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되는 것 같아. 음, 그런데?" "그런데 넥슨은 그것을 잃었어요. 음… 영원의 숲이 생각나네요. 영원 의 숲에 들어가면 자신이 사라진다고 했어요. 그런데 숲에 들어가지 않 았던 그 친구들도 기억을 잃지요?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말이에요. 영원 의 숲에서는 '자신'이 없어지지요. 여기서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이 몸 안에 있는 '나'와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나' 전체를 합친 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요. 핸드레이크의 말처럼." "그런데 그것이 넥슨의 일과 무슨 상관이지?" "예…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지요. 관계 중에 대표적인 것이라면 아마 사랑과 증오겠지 요. 그런데 사랑과 증오 중에서 더 빠르고 손쉬운 것은 증오지요. 사랑 은 어차피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증오는? 아주 쉬워요." "그래서?" "넥슨은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는 화를 내는 편이 쉽다는 것을 알테지 요." "넥슨은 모두들 미워함으로써 거꾸로 모두를 미워하는 자신, 뭐 그런 자신을 찾으려 한다는 거야?" "내 생각일 뿐이에요." 네리아는 조용히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히죽 웃더니 맥 주거품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는 조금 휘저은 다음 거품이 묻은 손가 락을 입에 넣고서 빨았다. 손가락을 빼면서 네리아는 혼잣말처럼 말했 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 "세상이 한 인생에 대해 부리는 횡포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까?" "비웃어주지요." "뭐라고?" "비웃어준다고요." "…그래." 샌슨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운 차이는 여전히 나무토막을 깎고 있었고 난 초에서 흘러내리는 촛농을 바 라보았다. 삐이걱. 문이 열리면서 낯선 얼굴이 들어선다. "원, 참! 장사 안되는 날이로군." 들어선 남자는 통자루 같은 외투에 귀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쓴, 적당히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뭔가 커다란 나무궤짝 같은 것을 멜빵으 로 매고 있었다. 입구에서 몸을 툭툭 털자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났다. 이 여관의 손님인가? 여관 주인장 리테들씨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며 말 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 하나 주슈. 얼마요?" "혼자십니까? 그럼 독실에 식사제공, 하루 1셀입니다." 남자는 거창한 외투를 들어올리더니 바지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기 시작 했다. 한 웅큼의 동전을 꺼낸 남자는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는 동 전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으니 정수리 가까이까지 벗어진 이마 가 드러났다. 저래서 모자를 쓰는 모양이군. 동전을 세던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리테들씨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뭐, 상관없겠지. 샌슨이 오늘 저녁 이 여관을 통째로 빌려 무료개방해버 렸으니까. 그래서 리테들씨도 저렇게 웃는 것일게다. 별로 할 일이 없었던 난 그 남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자는 내 시선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날 보더니 갑자기 리테들씨에게 손가 락을 하나 세워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쇼." 그러더니 남자는 리테들씨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더니 곧장 우리 테이블 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우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남자 는 등에 진 나무궤짝을 텅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두 팔을 극적으로 벌리면서 말했다. "생각해보시오!" "예에? 생각이오?" 샌슨은 얼떨떨한 어조로 대답했고 그러자마자 남자는 재빨리 말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운명인가! 그러나 나 타로메 슈 암파린은 만인에게 봉사함으로써 두 어깨에 짊어진 이 숙명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알아내었소. (네리아를 슬쩍 보고나서.) 아름다운 레이디는 올 봄엔 낭군님을 만나게 될지 고민하겠지. 그리고 (샌슨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용맹한 전사께선 언제나 이름을 드날리게 될지 궁금하게 여기겠지. 그러나 미래를 가린 장막은 아침 안개와도 같 아 두껍디 두꺼우면서 모든 것이 희미한 법. 그러나 걱정마시오! 여러분 들은 오늘 저녁 인생에서 보기 드문 행운을 만난 셈이니, 여러분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여기 타로메슈 암파린이 여러분들을 찾아왔 소이다!" 리테들씨는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지만 샌슨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 었다. "점을 보세요?" "예끼! 미래를 보는 고상한 이 몸의 사명을 한낱 거리의 점복술사와 연 관짓지 마시오. 나 타로메슈 암파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피넬과 헬카 네스의 따님이신 시간의 원수. 여러분들의 미래에 끼쳐칠 인생의 횡포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댓가가 단돈 20 퍼셀이라면 믿으시겠소?" 이번엔 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맞춰보세요. 우리가 암파린씨에게서 점을 볼까요, 보지 않을까 요?" "20퍼셀만 내거라. 그럼 맞춰보지." 제법이네? 난 웃으면서 주머니를 뒤져 10퍼셀짜리 동전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암파린씨는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테이블에 올 려놓은 동전을 잡아 튕겨올렸다. 그런데 동전이 다시 내려올 때 암파린 씨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 것 같더니 갑자기 그는 두 손을 쫙 펼쳐보였 다. 동전이 어디로 갔지? 샌슨은 와! 하는 표정으로 암파린씨를 바라보 았고 암파린씨는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맞춰보세요." "뭘 말이냐?" "예? 우리가 당신에게 점을 볼지, 보지 않을지를 말이죠." "물론 점을 보지. 이미 내게 돈을 내고 묻고 있지 않느냐? 하하하!" 난 이마를 딱 쳤다. 맙소사. 암파린씨는 싱글거리더니 말했다. "자, 그렇다고 해서 코 묻은 돈을 그냥 착복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 아. 잠시만 기다리거라." ================================================================== 12. 불길한 예언……4. 암파린씨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울긋불긋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 드 한 무더기를 꺼내었다. 그는 곧 현란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뒤섞기 시 작했다. 리테들씨도 흥미가 동한 표정을 짓더니 우리들과 합석했다. 암 파린씨는 카드를 꼼꼼하게 섞은 다음 한 무더기로 만들어 테이블에 거꾸 로 올려놓았다. "카드점이에요? 처음 해보는 건데." "그래? 왼손으로 치거라." "친다고요?" 네리아가 말했다. "적당히 덜어서 옆에 내려놓으라는 말이야." 난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자 암파린씨는 옆에 내려놓은 무더기 위에 원 래 무더기를 올려 놓더니 그대로 놓고는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암파린씨는 카드를 들고는 한 장씩 거꾸로 내려놓기 시작했다. 먼저 3장을 나란히 놓더니 그 다음 2장을 내려놓았다. 그 다음은 4장을 내려놓고는 다시 2장을 내려놓아 모 두 11장이 되도록 했다. 한 장 한 장을 내려놓을 때마다 암파린씨는 알 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진지한 동작으로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장을 좀 떨어진 곳에 따로 내려놓았다. "자. 이건 엄숙한 작업이오. 한 소년의 미래가 걸린 작업이니까 모두들 함부로 소란을 떨거나 하지는 말아주시오. 자네 이름이 뭐지?" "후치. 후치 네드발." "좋아, 네드발군. 앞에 세 장은 자네의 과거를 나타내는 거야. 어디 펼 쳐 보게. 아, 그런데 말이야. 뒤집는 방향도 중요하거든? 좌우로 뒤집을 지 앞뒤로 뒤집을지 잘 생각해서. 물론 왼손으로만 해야 되네." 난 왼손으로 앞에 놓은 3장의 카드를 뒤집었다. 한 번은 좌우로, 다른 두 번은 앞뒤로 뒤집어놓으니 테이블 위에는 먼저 우스꽝스럽게 생긴 광 대, 황야를 질주하는 전차, 힘센 장사의 그림이 나타났다. 마지막 힘센 장사의 그림은 뒤집혀 있었다. 암파린씨는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카드를 바라보았다. "광대와 전차, 힘… 힘이 역방향이고 세번째? 이 놈 봐라? 여자가 많 지?" "예?" "으하하하!" 난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마구 웃고 있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테이블을 꽝꽝 두드리면서 말했다. "크핫하! 정말 용하네요." 네리아 역시 배를 잡고 웃고 있었고 암파린씨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그 나이라면 괜찮아. 유혹에 약한 성격에 여자가 많으니 고민이 좀 되 겠지만, 자넨 팔자는 한 여자가 꽉 붙들고 있으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 많은 여자가 다 소용이 없군 그래.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겠 어. 자넨 만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지만 단 하나, 여자에게만은 굴복하기 쉬운 운이라구.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콰당! 기어코 샌슨은 의자채로 넘어가 버렸다. 샌슨은 허우적거리며 일 어났지만 거의 실신할 정도로 웃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더뎠 다. "크힉, 크히히히!" 네리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난 언짢은 목 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여자에게 굴복하진 않았어요. 그 다음 두 장은 뭔데요?" "이거 말인가? 이건 자네의 현재를 나타내지. 역시 주의깊게 뒤집어보 게나." 현재라고? 어디 보자. 난 이번엔 둘 다 좌우로 뒤집어놓았다. 샌슨과 네리아가 웃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가운데 나타난 것은 초생달의 그림이 었는데 땅이 위로 간 것을 보아 뒤집힌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장은 역 시 뒤집혀진 남자의 그림이었는데 남자는 뭔가 예복 같은 옷을 입고 있 었다. 암파린씨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이거 봐라? 자네, 여행의 목적이 거의 달성되어가는 순간이군 그래? 그런데 뒤집혀진 하이 프리스트? 자네 여행의 목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자가 지금 자네 곁을 떠나있군." "가장 중요한 자가 없다고요?" "그래. 게다가 두번째라… 그 자를 찾지 못하면 거의 성공에 가까운 자 네 여행이 어쩌면 실패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네. 그 자는 자네 여행의 열쇠를 쥐고 있군, 그래." 어라,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걸. 어디 보자. 이제 바이서스 임펠까지 돌아왔으니 갈색산맥으로 안전하게 가기만 하면 내 여행은 거의 끝난 셈 이다.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뭐 하나 걱정할 것이 없군.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다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레니지. 그런데 레니는 지금 이층에서 잘 자고 있잖아.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샌슨은 궁금한 얼굴로 말했다. "암파린씨. 이 친구의 여행 목적은 제 여행의 목적과 같은데 말이지요. 뭐 일행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람들은 다 함께 있는데 요?" "하하하! 대개 뼈저린 실패란 완전무결한 준비를 갖추었다고 믿는 사람 에게 찾아오는 법이야. 분명히 자네들은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어. 아, 이미 만났는지도 모르지만 모르고 지나쳐버렸을 수 도 있지. 어쨌든 빨리 그 자를 찾는 것이 좋을 거야. 현재로선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 만큼 실패의 위험도 높아. 한 마디로 다른 모든 조건들이 완수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그것 참… 그럼 그 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어요?" 내 질문에 암파린씨는 세번째 열의 카드를 가리켰다. "자네의 미래를 보세나." 세번째 열에 있던 네 장의 카드를 뒤집었다.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왕 으로 짐작되는 남자, 뒤집혀진 두 명의 연인의그림, 그리고 수레바퀴처 럼 생긴 알 수 없는 바퀴 그림과 추악하게 생긴 악마의 모습이었다. 암 파린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드들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네리아는 재미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나왔어요? 후치는 내 아들이 되는 거에요?" "악! 네리아, 제발!" "뭐 어떠니. 그런 좋은 운이 나오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잖아?" 우리가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운차이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나무토막을 깎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점을 친다고 해도 자신 만은 나무를 깎고 있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암파린씨는 턱을 만지작거 리더니 말했다. "일단 자네의 그 중요한 사람은 만날 가능성이 높아. 안심해도 좋겠 군." "그래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과 만났을 때 자네의 선택이 중요해지는군." "선택이라구요?" "그래. 그 자는 지금 자네에게 찾아오고 있어. 분명히 만나게 될 거야. 그런데 자네의 선택 여하에 따라 그 자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오히 려 방해를 받을 수도 있어. 자네의 강력한 행동력과 자넬 괴롭히려는 운 이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거든. 지금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자네에게서 손 을 뗀 상태야." "예? 제가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말씀이세요?" "아냐, 아냐. 이 친구야. 보통 모든 사람들이 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구. 그들이 직접 개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웅 들에게 일어난 사건일 경우에나 그렇단 말이야. 하하하! 이 친구야. 아 니 어떻게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인간사에 마구 끼어들 것이라고 생각하 는 것인가?" "아… 그런 뜻이에요?" 암파린씨는 날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넨 대단히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것이야. 자네의 현재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 조력자가 자네의 미래에선 자네의 옆에 있게 될 것이네. 모든 준비는 완료되겠지. 그리고 그 시점에서 유피넬과 헬카네스도 자네에게선 손을 뗄 거야. 자넨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 그 중요한 선택을 수행해야 되겠지." 암파린의 진지한 말투 때문에 테이블은 순간 조용해졌다. 촛농 떨어지 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 때 암파린씨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 다. "하하하, 걱정 말게! 자네를 책임진 그 여자의 운이 썩 좋아. 그 여자 의 운 덕분에 자네도 운이 필 가능성이 높은걸?" 웃어야 되나… 제미니. 네 운이 좋댄다. 하하하. 악! 나도 모르게 제미 니가 내 팔자를 꽉 붙든 여자라고 생각해버렸어! 샌슨은 크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임마! 크하하하! 기분 좋겠다? 제미니 덕분에 네 운도 좋다잖아?" 내 어깨를 두드리는 저 샌슨의 손을 더도 말고 딱 10분 동안만 깨물어 주고 싶다. 샌슨을 향한 내 모든 사랑을 담아 손뼈가 으스러지도록. 으 으으! 네리아는 생긋 웃더니 말했다. "그럼 나머지 두 장은 뭔데요? 그리고 저기 있는 한 장은?" "아, 이거 말인가? 잠시 기다려보게. 자, 네드발군? 나머지 두 장도 펼 쳐보세나. 그런데 말이야, 이 번엔 두 장 모두가 아니라 딱 한 장만 뒤 집을 수 있다구. 알겠어?" "한 장만이오? 어느 거요?" "바로 그걸 선택하게. 둘 중 하나를 자네가 선택한 다음 뒤집어야 되 네. 물론 방향도 잘 결정해서." 허엇. 이거 참. 눈감고 짚어볼까? 에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겨우 카 드점일 뿐인데. 난 오른쪽 것을 뒤집어놓았다. 테이블 위에 드러난 카드 는 탑을 쓰러트리는 드래곤의 카드였다. 드래곤의 공격에 의해 탑은 반 쯤 무너지고 있었다. 어라? 무너지는 탑이라니. 난 카드를 흘깃 보았다 가 암파린씨를 쳐다보았다. 암파린씨는 빙긋 웃더니 말했다. "탑이잖아? 하하." "왜 그러시죠?" "축하하네. 자네에겐 내 조언이 적절했군." "적절했다고요?" "그래. 이제부터 조언하지. 자넨 두 명의 인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 되게 되어있어. 첫째, 자네의 사랑은 한 여자가 가지고 있어. 요건 어쩔 수 없을 거야. 그 여자는 자넬 꽉 틀어쥘 테니 반항할 생각 하지말고 순 순히 받아들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둘째, 자네가 지금 하 고 있는 모험은 한 조력자… 어떤 열쇠보관자가 책임지고 있지. 그 자를 찾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 때 자넨 생각을 잘 해야 되네. 셋째, 내 조언은 자네에게 유익할 것일세. 이 패는 내 예언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야." "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두 장 중에 하나만 선택하게 하는 거지 요?" "이거? 이건 특별한 사람들만 펴볼 수 있는 패야. 하지만 자네에겐 필 요가 없지." "그래요? 궁금하네요." "하하. 알아서 될 게 있고 알면 안되는 것이 있는 법일세. 자네에겐 이 패가 허락되지 않았어." "그럼, 저기 따로 떼어놓은 패는 뭔가요?" 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카드를 가리켰다. 암파린씨는 히죽 웃으며 카드들을 쓸어모았다. "그것도 비밀. 자넨 알면 안되는 것이지." "그것 참…" 그 때 네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동전 두 개를 내어놓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좀 봐줘요." 암파린씨는 씨익 웃더니 두 개의 동전 중 하나만 집어들면서 말했다. "얼마든지. 그리고 하나는 가져가시오. 미인은 항상 내 약점이란 말이 야." 네리아는 환호를 지르며 동전 하나를 가져갔고 샌슨은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은 죄로 네리아에게 꽤나 꼬집혔다. 암파린씨는 조금 전과 같 은 순서로 카드 11 장을 늘어놓고는 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 1 장을 놓았 다. 네리아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아, 두근거린다. 어디, 첫번째 것은 내 과거라고요?" "하하. 펼쳐보시오." 네리아가 펼쳐든 카드는 뒤집혀진 힘, 수레바퀴, 그리고 뒤집힌 탑이었 다. 암파린씨는 빙긋 웃더니 말했다. "그 영업 별로 재미없었겠소?" "예?" "아가씨가 해온 일은 아가씨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야. 직업 바꾸 는 것이 좋겠어. 취향에도 안맞고 적성에도 안맞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 는…" "큰 문제는?" 네리아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암파린씨도 진지한 목 소리로 대답했다. "솜씨가 뒷받침되지 않거든." 이번엔 나와 샌슨이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킬킬킬킬!" 네리아는 입 을 딱 벌리고 암파린씨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을 보다가 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우헤헤헤헤! 아저씨 정말 잘맞추네요!" "뭐야! 야! 후치!" "오우, 제, 제발… 크하하! 꼬, 꼬집지 좀 말아요. 으킬킬킬!" "이… 씨! 나 그래도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하다고요!" 네리아의 앙칼진 대답에도 불구하고 암파린씨는 유들거리며 말했다. "아마 아가씨만 그렇게 생각할 거요. 하하하." "아저씨 순 엉터리야. 어디, 두번째 것은 현재라고요?" 네리아는 화난 동작으로 두번째 열의 카드를 재빨리 뒤집었다. 나타난 것은 뒤집힌 광대와 별이 그려진 카드였다. 별이라…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 암파린씨는 내 망상에도 상관없이 말했다. "흐음. 도와주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좋수다. 그 마음 계속 간직하는 것이 좋겠군." "예? 아, 예… 예?" ================================================================== 12. 불길한 예언……5. 네리아는 당황한 듯이 이상한 대답을 해버렸다. 암파린씨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이 소년과 같이 여행해서 그런지 비슷해. 지금은 그런대로 만족 할만한 결과이긴 해. 하지만 아가씨 자신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군." "좋은 사람들… 그래요?" "그래요. 하하." 네리아는 곰곰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 자기 헤죽 웃더니 세 번째 열을 가리켰다. "이건 제 미래라고요?" 암파린씨는 미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카드를 조심조심하면서 뒤집었다. 그녀는 완전히 열중하고 있는지 머릿카락이 흘러내려 코를 간지럽히는데도 아무 느낌을 받지 못 하는 모양이다. 나타난 카드는 뒤집혀진 하이 프리스트, 뒤집혀진 악마, 그리고 어새틱처럼 보이는 낡은 옷의 프리스트와 연인의 모습이었다. 암 파린씨는 손바닥을 딱! 쳤다. "굉장하군!" "예? 뭔데요? 좋은 거에요?" 네리아의 다급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암파린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 속 카드를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안절부절하다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암파린씨가 말했다. "그 남자 잡아요!" "예?" "그 남자 잡아요. 갈등할 필요 없어. 그 남자는 아가씨 천생연분이야. 쓸데없는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아가씨 자신을 비하할 필요도 없고. 결국 그 남자는 어쩔 수가 없이 아가씨 거야. 그 남자는 이 어린 친구보다 더 심하게 붙잡혀있는걸?" "아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몰라? 골치아프군. 아직 아가씨는 모르는 모양이군. 상관없지. 암. 미 래란 원래 그런 거요. 어느날 아침 눈을 뜰 때 침대 옆에, 과거 같으면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남자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서도 '어서 일어나세 요, 여보!'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어쨌든 아가씨는 확실한 남 자가 있어. 그리고 그 남자 절대로 포기하면 안돼요. 자신이 그 남자에 비해 모자란다거나, 나 같은 여자 사랑해줄 리가 없어… 하는 생각은 절 대로 할 필요없어. 다시없는 바보 같은 생각이지." 암파린씨의 말을 듣고 있는 네리아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 다. 네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그 때! 오, 젠장. 샌슨이 입 을 열어버렸다. "이봐요. 그 불쌍한 남자가 도대체 누군지는 알 수 없어요?" 샌슨은 아마 오늘 밤새도록 쥐어뜯긴 손등을 아파하며 베개를 눈물로 적시게 될 터이다. 네리아는 마지막 카드 두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선택해야 되죠?" 암파린씨는 샌슨의 손등에 난 굉장한 상처를 바라보고 있느라 잠시 대 답을 못했다. 그래서 네리아는 암파린씨의 허락도 없이 마지막 카드를 골라 뒤집었다. 목 매달린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네리아는 카드를 보더니 움찔했다. 목 매달린 남자? 반역을 일으켜서 교수대에 걸린 도둑 길드원들? 암파린씨는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아가씨 패는 희한하군. 이 패가 쓰일 일은 잘 없는데." "예?" 암파린씨는 아무 대답 없이 따로 떼어둔 카드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잠시 카드 뒷면을 슬슬 문지르면서 말했다. "이건 사실 내 카드거든. 엉터리 점술가라면 고객의 운명에 대해 통달 한 척하지만 사실 운명을 본다는 것은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오. 예언자와 대상 간의 문제지. 나는 단수가 아니지 않소?" 어라? 핸드레이크의 말이잖아? 내가 놀라서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암 파린씨는 조용히 그 '자신의 카드'라는 것을 뒤집었다. 나타난 것은 여 왕으로 짐작되는 여자의 모습이었는데 뒤집혀 있었다. 암파린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리아는 뒤집힌 여왕의 카드를 바라보 다가 반쯤 웃으며 말했다. "어머, 여왕님이네…?" 그러나 네리아의 밝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암파린씨의 얼굴은 어두워 졌다. 암파린씨는 손을 모아 손가락을 하나씩 꺾기 시작했다. 우둑, 뚜 두둑. 그는 그렇게 크게 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마지막 카드를 뒤집어요." "예?" 암파린씨는 네번째 열에서 아직 뒤집히지 않은 카드를 가리켰다. 네리 아는 당황한 눈으로 그 카드를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 생각은 하지도 않 은 채 암파린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지요? 후치는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잖아요?" "아가씨 운이 다른 사람 운과 같을 수 있나! 어서 뒤집어요!" 암파린씨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강한 힘이 담겨있었다. 네리아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암파린씨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내뻗었다. 마치 뱀이나 벌레 시체 같은 것에 손을 가져가듯이 흠칫거리면서. 그 때 였다. "건드리지 마." 네리아의 손이 확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테이블에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나무토막을 깎고 있 는 운차이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잠시 운차이의 말의 내용보다는 그가 네리아에게 말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 때 운차이의 입술이 다시 움 직였다. "마지막 숨겨진 카드는 천기다. 건드리지 마." 두 번이나! 운차이가 두 번이나 네리아에게 말했다. 물론 운차이는 시 선을 나무토막에 고정시킨 채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태도로 말했지만 저 건 분명히 네리아에게 하는 말이다. 네리아는 마치 뜨거운 것에라도 닿 은 듯이 손을 가슴 앞에 꼭 모아쥐고는 뒤집힌 카드와 운차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이 열렸을 때 난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숨소리처 럼 가늘다는 사실에 놀랐다. "운차이… 저건 건드리면 안되는 거야?" 운차이는 조용히 나무토막을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손에 든 나이프는 테 이블에 집어던졌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리테들씨의 미간이 찌푸려 졌지만 운차이는 상관하지 않고 암파린씨를 쳐다보았다. 그가 조용히 입 을 열었을 때 나는 두 번째로 놀랐다. "Sfrumn forghseer. Ne brai can-fabul ren jian pnahe?" 테이블 주위의 시선이 이번엔 다급하게 암파린씨에게로 돌아갔다. 그리 고 암파린씨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 때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리테들씨 말마따나 세 집 처녀가 애를 낳으면 놀랄 일도 없는 건가? "Ren… Savnak." "Ahn choudar, sfrumn forghseer. Pnahe un kmaru." 암파린씨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암파린씨는 곧 다급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우리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황급히 일어나서 나무궤짝을 다시 둘러메었다. 그가 테이블 위의 카드들을 쓸어모으려 할 때였다. "건드리지 말아요!" 탁! 암파린씨의 손은 다른 손에 의해 허공에서 붙잡혔다. 암파린씨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은 네리아였다. 네리아는 그의 손목을 꽉 감아쥔 채 운차이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이것봐. 나도 좀 알고 싶어. 그리고 당신, 돈을 내었으니 끝까지 해야 지요. 안그래요?" 네리아는 암파린씨에게 붙임성있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암파린 씨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이건 내 실수였소. 사과하겠소. 이 패는 저 소년과 마찬가지 로 볼 필요가 없는 패라구요." "난 신경쓰지 않아요. 그러니 이유는 말해주고 가야지요." "이유? 그런 거 없어요. 아무 쓸모가 없는 거라고!" 네리아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암파린씨를 쏘아보았고 그는 네리아의 그 런 눈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하지만 그가 뭔가 수단을 강구하기도 전 에 네리아의 손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네리아는 남아있는 손으로 재빨리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어머? 이게 뭐야?" 테이블 위에 드러난 것은 마법사였다. 누가 보더라도 마법사라고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의 남자였다. 남자는 무 시무시한 시선을 약간 기울인 채 손에 든 지팡이를 부러져라 꽉 틀어쥐 고 있었다. 네리아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마법사네? 에비! 꼭 리치몬드 같네. 이건 무슨 뜻…?" 네리아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왜 저러는 거지? 난 네리아의 시선을 따 라가다가 파랗게 질려버린 암파린씨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암파린씨는 더듬더듬 말했다. "아, 좋은 패요." "좋아요?" 설마? 저런 얼굴로 말했다간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도 꼭 아버 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으로 알아듣겠는걸? 그러나 암파린씨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말했다. "암, 좋아요. 정말 좋군. 이 패는 원래 그 이상은 말해줄 수가 없는 패 요." 그렇게 말하면서 암파린씨는 재빨리 손을 잡아뺐다. 네리아는 무의식 중에 그의 손을 놓치고는 다시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암파린씨는 재빠 른 동작으로 카드를 쓸어모았다. 그러더니 곧장 카드들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박으며 몸을 돌렸다. 어라? 가는 거야? 그러나 암파린씨는 멀리 가지 못했다. 어느새 샌슨이 롱소드를 뽑아든 채 그의 앞을 막아서 있었기 때문이다. 샌슨은 씨익 웃으며 롱소드를 왼 손 손바닥에 탁탁 부딪히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러시지? 이 여관에서 잘 생각이 아니었소?" 암파린씨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왜, 왜 이러는 거요?" "어, 샌슨. 왜 칼을 뽑아들고 그러는 거야?" 샌슨은 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선을 암파린씨에게 고정시키고 말 했다. "설명은 해주시고 가셔야지." "저, 저 패는 원래 그 이상 설명해선 안되는 패요!" 샌슨은 우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인간도 저런 우아한 동작이 되 긴 되네? "아니아니. 난 엉터리 카드점 따위 관심없어요. 하지만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단 말이야. 자이펀어를 말하는 점쟁이라… 수상한 일이지. 점쟁이라 면, 그거 직업도 좋지. 마음 내키는대로 돌아다니고 아무 곳에나 얼굴을 내밀어도 의심받지 않을 좋은 직업이야. 게다가 점을 치는 척하면서 은 근슬쩍 헛소문을 말하기에도 좋은 직업이고. 이건 내 생각이긴 하지만 요즘 이 도시엔 사막에서나 불만한 바람이 너무 많이 불고 있다는 느낌 이 든단 말이야. 헛소문도 너무 많고. 당신 생각은 어떻소? 미래를 보신 다는 타로메슈 암파린 선생." 와라락! 난 어느새 의자를 박차고 바스타드를 뽑아든 자세였다. 네리아 는 어디선가 대거를 뽑아들고는 리테들씨의 앞을 가렸다. "주인 아저씨. 내 뒤에 꼭 숨어있어요!" 리테들씨는 과연 노련한 여관주인답게 날렵한 동작으로 네리아의 등 뒤 에 숨어버렸다. 암파린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 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거 보시오, 여러…" "섣불리 움직이지마! 그냥 베어버릴지도 몰라!" 샌슨의 고함소리에 임파린씨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그는 후들거 리는 무릎으로 간신히 서있었는데 저게 만일 연극이라면 정말 자이펀의 간첩교육은 굉장한 것이리라. 난 일단은 경계하면서 말했다. "조금 전 샌슨이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요? 오직 입술만 움직 여서 우리를 납득시켜 봐요. 다른 건 절대 움직이며 안돼!" 그러나 암파린씨는 바로 그 입술을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다. 그의 입 술은 몇 번이나 움직이려는 듯이 꿈틀거렸지만 도무지 제대로 된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때 운차이가 말했다. "칼 치우고 보내줘." "뭐야?" 운차이는 별 관심도 없는 태도로 싸늘하게 말했다. "저 남자가 간첩이라면 내가 먼저 알아차렸을 거야. 보통 떠돌이 점쟁 이일 뿐이야. 자이펀어를 할 줄 알고 카드 해석도 자이펀식으로 하는 걸 로 봐선 자이펀에 들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이펀인은 아니야. 어투 가 전혀 틀린걸." 어투? 어투라. 하긴 운차이가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자이펀어이긴 하지만 차라리 바이서스의 억양이 강했으니까. 하지만 그 건 혹시 개개인의 어투 문제가 아닐까? 샌슨은 절대로 암파린씨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말했다. "확실해?" 운차이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샌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확실하다고 말하면 믿을 것인가?" "믿겠어." 샌슨의 대답은 내 생각보다는, 그리고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되는데, 운차이의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나왔다. 아주 쉽게 믿겠다는 이야기를 하네? 운차이도 원래 간첩이었는데 말이야. 운차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확실해." 샌슨은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암파린씨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얼 굴로 샌슨을 바라보다가 샌슨의 롱소드가 검집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면 서 탁! 하는 소리가 날 때 곧장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암 파린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정문 쪽으로 달려나가버렸고, 그가 돌 풍처럼 사라질 때 밀어젖힌 문짝이 강력하게 되튕겨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콰당! "어, 이런… 사과도 못했는데." 샌슨은 거칠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리아는 히죽 웃더니 샌슨 을 손가락질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저 친구 원래 저런 거지? 원래 아무 말이나 잘 믿지?" "좀 그런 편이지요." "바보가 원래 그래." "뭐야앗!" 네리아는 샌슨에게 혀를 낼름거린 다음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워 앉으 며 타로메슈 암파린 선생이 떨어트리고 간 모자를 주워올렸다. "이 날씨에 그 머리로 돌아다니려면 추울 텐데." 네리아는 그 모자를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는 운차이를 바라보기 시작했 다. 운차이는 어느새 나무토막을 다시 깎고 있었고 네리아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꽤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운차이를 바라보았으며 그러자 운차이는 돌연 고함을 빽 질렀다. "후치! 이 여자 왜 이러는 건지 좀 물어봐!" "그 마지막 카드는 왜 보면 안돼?"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있거든 올라가 베개에 머리박고 자라고 전해줘!" "그 마지막 카드는 왜 보면 안돼?" "이… 잇!" "그 마지막 카드는 왜 보면 안돼?" 운차이는 더 이상 고함을지르지는 않고 그저 화난 동작으로 나무토막 을 깎아대었다.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거세게 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네 리아 역시 고집스러운 얼굴을 두 손으로 고인 채 운차이를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나와 샌슨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우리들의 뒤통수를 향해 다시 네리아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마지막 카드는 왜 보면 안돼?" ================================================================== 12. 불길한 예언……6.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오래간만에 편한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 니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희한하게도 잠이 깨버렸다. 침 대가 너무 편한 것도 문제군.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은 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본다. 눈을 떠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꼭 생각해봐야 된다는 것도 참 웃기 는 일이다. 자신의 집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고민 같은 것은 전혀 이해를 못하겠지. 하지만 매일같이 새로운 잠자리에서 잠이 들고 낯선 곳에서 눈을 뜨는 사람은 꿈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올 때 마다 그것을 곰곰히 생각해봐야 되는 법이지. 그리고 요즘의 내가 그러 하다. 잠에서 깨면 즉시 생각을 해본다. 내가 어디에 있지? 바이서스 임펠의 유니콘 인 2층 침실. 이 다음은 깨어난 이유를 생각해보는 순서다. 그거? 그야 오래간만에 마신 맥주 때문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신호가 저 아래쪽에서 전해져왔 기 때문이지. 헤헤헤. 화장실에 들러 몸을 가볍게 하고 오자 샌슨이 이를 가는 소리가 요란하 게 들려왔다. 다시 침대로 들어가기 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 를 돌렸을 때는 바이서스 임펠에서만 볼 수 있는 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창문을 통해 가로등의 빛이 새어들어오는 것이다. 붉은 기운들이 안개처럼 퍼져나가 어둠을 희석시키고 거기엔… 비가 오네? 창문으로 다가간다. 차라라락. 대로에 그려지는 둥근 파문들. 지붕들 윗쪽으로 튕겨오르며 그려지는 희미한 하얀 물방울의 안개. 긴 어둠 속의 여행에 반쯤 졸고 있다가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붉은 범위 내로 흘러들어온 빗방울들은 화 들짝 놀라면서 몸을 비튼다. 그 순간의 반짝임은 아쉬울 정도다. 가로등 아래에 무수한 빗방울들이 무도회를 열고 있다. 무도회의 주된 테마는 중력과의 대화. 하하하하. 아름답군. 어라? 그런데 운차이는 어디 있는 거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램프를 켜들었다. 램프 불빛이 켜지자 샌슨은 몸 을 뒤척거렸고 그래서 한 손으로 불빛을 가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계단 을 내려오니 홀에서 새어나오는 불그스름한 빛이 보인다. 홀 안에 들어 서자 셔츠 바람으로 손을 덜덜 떨면서 나무를 깎고 있는 운차이의 모습 이 보였다. 이 추운 밤에 왜 저렇게 입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그 옆을 보자 난 그의 겉옷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겉옷은 테 이블 위에 엎드려 잠들어있는 네리아의 등 위에 덮여 있었다. 네리아는 잠이 든 채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말하고 있었다. "음냐, 쩝. 마지막 카드… 안돼?" 아이고 맙소사 . 그녀의 얼굴 옆에는 빈잔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꽤나 마신 모양이군. 운차이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잠든 네리아를 바라보 며 진저리를 치더니 그제서야 홀로 내려온 날 발견했다.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났냐." "아아아아함. 왜 아직까지 안 자는 거에요?" "어떤 여자가 내 옷을 가져가선 일이나지도 않잖냐!" 운차이는 울화가 터진다는 듯이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져간 거에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걸?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운차이는 코를 벌름거 리며 말했다. "그럼 이런 데서 쓰러져 자고 있으니 옷을 내놓으라고 외치는 것과 다 를 바가 없잖아." "깨워서 방에 보내면 되잖아요." "어떻게 깨우라고?" 그야 몸을 흔들거나 귀에 대고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 깨우지? 난 고개를 가로젖고는 네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운차이에게 잘 보 라는 듯이 손을 쫙 펼쳐보이고는 네리아의 등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아우우움… 씨이. 졸려… 밥 안먹어." "밥이 아니라 올라가 침대에서 자라는 거에요." "침대? 올라가?" 네리아는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아직도 사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멍 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로 엉금엉금 올라가더 니 그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곤 운차이의 겉옷을 마치 시트 라도 되는 양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맙소사, 네리아!" 운차이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 같으면 들어서 침대에 던져버리고 오겠어." 엑셀핸드에게 한 것처럼? 난 잠시 찌푸린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네리아를 흔들어깨웠다. "아이, 씨이이… 그러지 마." "그러지 않는게 아니라 어서 일어나 방으로 올라가서 자요!" 네리아는 이제 테이블 위에 앉아서는 주위를 둘러본다. 푸석푸석한 얼 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네리아는 자신이 앉아있는데도 주위가 이상스레 낮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더니 두손 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난 영문도 모른 채 네리아가 시키는대로 뒤로 돌아 네리아에게 등을 보이게 되었다. "업어라." 맙소사… 등으로 네리아가 덥쳐오는 것이 느껴진다. 네리아는 두 팔을 축 늘어트린 채 내게 업혔고 그래서 난 허리를 앞으로 숙여 네리아가 떨 어지지 않도록 해야 되었다. 그녀를 업고나서 난 운차이를 쳐다보았고 운차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웃고있는 것이다. 뭐가 우스우셔? 나는 별 말도 하지 않은 채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루 종일 마차 위에서 뒹굴어놓고선 뭐가 피곤하다고 맥주 몇 잔에. 아, 뭐 마차 여행 자체가 힘든 것이기도 하지만. 축 늘어진 네리아를 몇 번씩이나 추슬려 올리면 서 간신히네리아의 방 앞에 도달한 다음 문을 연다. "어머! 후치…니?" 방 안에 누워있던 레니가 날 보고선 기겁을 한다. 아차. 노크부터 했어 야지. 난 고개를 흘깃 돌려서 업고 있는 네리아를 가리켰고 레니는 테이 블 위의 초를 켜려고 했다. "아냐. 초는 켜지마. 눕히고 나갈 거야." 레니가 바라보는 가운데 네리아는 마치 내 딸이나 된 듯이 눕혀주는대 로, 덮어주는대로 얌전히 잠들었다. 레니에게 인사하고 문을 닫고 나오 면서 나는 키득 웃었다. 제미니. 우리도 나중에 딸을 낳으면 네리아 같 은 딸을 낳는 것이 어떨… 으와랏차차! 데굴데굴, 쿠당탕탕! 아흑! 엉덩 이야. "…아직 계단 내려오는 것이 미숙하군." 운차이의 싸늘한 비평 속에 난 몸을 일으켰다. 음. 계단 내려오는 법을 좀 연습해야 되는 모양이군. 쳇. 이건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 벌이야. 엉덩이도 쑤시고 다리도 아파서 난 일단 침실로 돌아가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위에서 갑자기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고함을 지른 것은 갑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롱소드 하나만 달랑 들고 나타난 샌슨이었다. 샌슨은 후다닥 계단을 내려오던 잠이 덜 깬 얼 굴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곧 황급히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말했다. "쉬잇! 방금 뭔가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야. 모 두들 무기를 잡아!" 으으으. 난 그를 무시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난 태평하게 의자에 앉으면서 운차이에게 질문했다. "아하암. 지금이 몇 시쯤 된 거지요?" "자정은 지났다." "여기 계속 있었어요? 카알과 길시언, 제레인트는 아직 안돌아왔어요?" "안돌아왔다. 그들을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주인장도 들어가버리더군." "아, 그래요. 음… 비가 오니까 임펠리아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올 수 도 있겠네요." "그렇겠지." 샌슨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그러나 아직까지도 경계 자세를 흐트리지 않은 채 주위를 쏘아보았다. 사실을 말해줘야 되겠군. "그건 내가 낸 소리야." "이이잇!" 샌슨은 내 정수리를 쥐어박음으로써 자신의 수면이 방해받은 데 대한 복수를 완수했다. 그리곤 롱소드를 테이블 위에 집어던지며 의자에 앉았 다. "카알과 다른 사람들이 아직 안왔다고? 좀 기다려봐야 되겠군." 운차이가 깎고 있는 나무토막은 이제 어느 정도 모양을 잡아가고 있었 다. 그것은 어떤 웅크린 동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웅크린 사람처럼 보이 기도 했다. 어떤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무조각이기 때문에 복잡한 동 작을 취하지 않고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할 모양이다. 저게 무슨 동물, 혹은 사람일까? "그 마지막 카드의 의미가 뭐지요?" 운차이는 나이프를 멈추더니 날 흘깃 바라보았다. 샌슨은 팔짱을 끼더 니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나도 역시 그를 따라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친절한 마음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해줘요. 만일 친 절한 마음으로 말할 범위를 넘어가는 굉장한 비밀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좋고." 운차이는 나무를 계속 깎으면서 말했다. 이제 세부조각이라 그런지 나 이프의 움직임은 작고 세밀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카드 자체는 어느 나라에 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점복술 사 자신을 위한 카드를 따로 떼어놓는 그 방식은 자이펀식이지. 아까 그 떠돌이는 아마 떠돌아다니다가 자이펀에도 굴러들어간 모양이다. 하지만 토박이는 아니야. 말투가 낯설더군." "흐음." "정확하게 자이펀식으로 하려면 마법사나 여왕 등은 빠지고 다른 카드 가 들어가야 되지만 의미는 대충 통하지. 그리고 카드는 별로 중요한 것 도 아니고. 사실 카드 따위, 아무 종이에 글자만 적어 사용해도 상관은 없어. 예지력은 카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점복술사에게서 나오는 것 이니까." 샌슨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그래? 그런데 운차이 너도 옛날에 그 영업을 했나?" "유목 생활을 했었지. 사막의 밤은 지루하다. 그래서 옛이야기와 그런 점은 지루한 사막의 밤을 보내는 데 좋은 오락물이지." "아하." "어쨌든 처음 것이 과거의 걸어온 3장, 그 다음은 현재의 2장, 그리고 나머지가 다가올 미래의 4장인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왜 똑같이 3장씩 하지 않는 거지요?"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쓸데없이 복잡한 의미가 있다. 과거의 3장 은 잊혀진 것, 기억하는 것, 잊혀지지도 기억하지도 않은 것을 나타낸 다. 현재의 2장은 한 사람의 겉과 속을 나타낸다. 미래의 4장은 원하는 일, 원하지 않는 일, 원하지 않지만 해야 될 일, 원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나타낼 거야, 아마." "아하? 마지막 2장은?" "예언이라는 행위가 그 인생에 끼쳐진 영향을 판단하는 것이다. 선택된 카드는 그 예언이 쓸모있는 것인지, 쓸모없는 것인지, 혹은 예언 때문에 크게 바뀌게 될 것인지 등을 나타낸다. 그 카드의 의미는 상당히 복잡 해." "내 경우엔 쓸모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죠?" "그래. 아니, 그것보다는 나쁠 것은 없다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낫겠 지." "그런데 네리아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패를 뒤집은 걸로 봐선 예언이라는 행위를 통 해 커다란 영향이 발생한 것일 거야. 엉터리 점복술사는 그 점을 간과해 서 마치 예언이라는 것이 아무런 영향도 없이 인생에서 따로 떨어져 관 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 예언은 인생에 있어 커다란 사건이다. 미래를 아는 것이니 그렇게 큰 사건도 드물지. 따라서 그 영향도 고찰해야 돼. 그리고 마지막 카드는 그런 것을 나타내고." 샌슨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영향을 주는 걸 못보게 하는 거야?" "그 영향이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다." "뭐?" 운차이는 테이블 위의 나무부스러기를 모아 벽난로에 집어던지고는 다 시 말했다. "간악한 녀석. 그 점복술사의 패는 여왕이었지. 자이펀식이라면 여왕이 아니라… 어흠. 어쨌든 보통의 경우 여왕은 애정어린 선물, 관용, 가정 의 평화 등 좋은 의미의 패지. 하지만 뒤집혀 있었어. 게다가 점복술사 자신의 패였지. 그럴 경우에는 비정한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나 타낸다. 왕의 결정은 그래도 돌이킬 여지가 있지만, 여왕의 결정은 영원 히 안바뀐다고 하지." "헤에?" "여자는 남자보다 더 다정한만큼 더 비정할 수도 있는 법이지." 운차이는 웃지도 않는 딱딱한 얼굴로 저 말을 했다. 허, 그것 참.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운차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까 그거 웃기네. 운차 이는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것이 나왔다면, 예언은 포기해야 돼. 그 행위의 위험성이 너무 커. 점복술사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고 희망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돼. 그런데 그 고약한 녀석은 예언의 부작용을 자신이 덮어쓰는 것이 무서워 네리아에게 패를 뒤집게 하려 했지. 예언의 부작 용은 원래 점복술사가 책임져야 되는 부분인데도." "부작용이라고? 뭐, 뭔데? 심각한 거야?" "그런 게 있어. 설명이 너무 길지만." "흐음. 그럼 그 마지막의 마법사는 어떤 의미였지요? 네리아가 뒤집은 것 말이에요." 운차이는 잠시 나무토막을 깎는 일을 계속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때리는 빗방울의 모습을 보았다. 타닥, 탁, 탁. 빗 소리에 섞여 운차이의 말이 들려왔다. "마법사는 원래 새로운 경험, 기회, 행운 등을 나타내지. 적어도 뒤집 히지 않은 마법사는 말이야." "그런데요? 아까 그 카드도 뒤집히지 않았잖아요?" "그렇지만 그 경우에는… 그 예언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야. 마법사는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저울눈을 속이는 자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요?" "아니, 잘못되었다는 정도면 차라리 낫지. 그저 예언이 틀렸다는 것이 니까. 하지만 마법사가 개입하게 된 이상 미래가 제멋대로 가버리게 될 거야.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인생에서 일어 나는가 싶은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지. 예언이라는 그 행위 때문에 말이 야." "예?" 난 입을 딱 벌린 채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내게 시선을 보내 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암파린이란 녀석은 시퍼렇게 질려버린 거지. 그 영향은 그 녀석에게도 가게 될 것이거든. 예언은 점복술사와 당사자 모두에게 영향 을 주게 되어 있어. 절대로 일방적일 수가 없지." "야, 자, 잠깐만. 그럼 그거 지독하게 나쁜 일만 생긴다는 말이야?" 샌슨의 당혹한 목소리에도 운차이는 별 표정없이 대답했다. "아니. 굳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 을 수가 있는가 싶은 행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의미니까. 어쨌든 점 복술사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쓸데없이 에언을 해서 골치아픈 사태 가 되어버린 셈이지." "그래요? 그럼 행운일지 불운일지 알 수 없는 거에요?" 운차이는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마법사란 사람들이 원래 그렇지. 그 작자들의 머릿속에 무슨 생 각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터인데도 주위에 커다란 영향을 줘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후치." "예?" "그따위 점복술 그렇게 믿을 건 없어. 그저 의미가 그렇다는 거지. 믿 지 않는 자에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나에겐 나름대로 다른 종류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엉터리 방식을 보고 화를 내었지만, 그걸 믿 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은 아니다." "아… 예. 고향의 것이기 때문에?"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운차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난 잠자코 기다렸으며 잠시 후 운차이는 차 분한 음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미래가 완전한 선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또다른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 죽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불멸의 운 명을 가진 신은 우리를 부러워할지도 모르지." 어라? 이건 언젠가 카알이 한 말과 비슷한데? 운차이는 내 놀란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말일 거야, 아마." "그래요?" 빗방울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 하다. 타당, 타당, 타당. 샌슨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핸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자이펀에서도 유명한 모양이지요?" "그래. 뭐라고 해도 가장 강력한 상대와 싸워 이긴 자니까." "드래곤 로드?" "응." 운차이는 점점 세밀해지는 작업에 신경을 쓰느라 불분명한 목소리로 대 답했다. 난 그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금 물러났다. 맥주통이 어디 있더라? 아, 저기 있군. "맥주 줘요? 샌슨은?" "아니. 안자고 술 마실 거냐?" "난 줘." "카알과 다른 사람들 올 때까지 기다려보려고." "그래?" 벌컥. 말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궁성에 갔던 사람들인가? 아니었 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암파린씨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는 굳어버렸다. 샌슨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시 오셨소? 잘되었군요. 아까는 사과도 못했는데." "어… 아까 모자를 두고 가서 말이오." 암파린씨의 몸은 비에 젖어 후줄근해진 모습이었고 특히 그 머리는 번 들거리고 있었다. 난 주위를 둘러보다가 벽의 옷걸이에 걸려있는 그의 모자를 발견했다. 내가 모자를 들어내어 그에게 다가가자 암파린씨는 불 쑥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때 샌슨이 내 손에서 모자를 집어가면서 말했다. "이거 보세요. 여관비도 없잖아요? 아까 오해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 로 오늘 하루 숙박비 계산해주고 싶은데.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지요?" 암파린씨는 놀란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래요? 정말입니까?" 보나마나 온갖 여관과 여인숙을 돌아다녔겠지, 뭐. 샌슨은 고개를 끄덕 이고는 고함을 질러 리테들씨를 불렀다. 잠시 후 리테들씨는 가벼운 옷 차림으로 하품을 하면서 나타났다. "이 분에게 방 하나 내어주세요. 우리가 사과의 의미로 숙박비를 대신 치를 테니까… 아까 보석으로 충분하겠지요?" "아함. 그래요? 물론 충분하지요. 여봐요. 따라오시오. 저녁 식사 들겠 소?" 암파린씨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리테들씨 역시 고개 를 끄덕였다. "따라와요. 방에 가서 짐 풀어놓고 내려와 식사를 하시도록 하죠. 하지 만 시간이 시간이라 제대로 된 식사는 안되겠소." "아, 뭐라도 상관 없소. 끼니만 때우면 되니까. 어, 친절한 전사분, 고 맙소." "뭘, 천만에요. 그리고 난 샌슨 퍼시발입니다." 암파린씨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그 때 그의 시선이 운차이와 마주쳐버렸다. 암파린씨는 황급히 외면하더니리테들씨 를 따라 올라갔다. ================================================================== 12. 불길한 예언……7. 잠시 후 암파린씨는 젖은 옷도 갈아입고 늦은 저녁식사긴 하지만 (야식 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어쨌든 저녁식사도 마치고선 쭈뼛거리며 운차이와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말을 꺼내길 어려워했 지만 맥주 한 잔을 마시고나자 그런대로 편하게 말하게 되었다. "어, 나 타로메슈 암파린은 말이야, 항상 사람들의 인정에 감동하지! 내가 이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 사람 때문이야. 저 언덕을 넘으면 누가 살고 있을까, 오늘 저녁 인에서는 어떤 여행객들을 만나게 될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 꽉 들어차서는 내 다리를 가만 두지를 않아 요. 하하하!" 암파린씨는 맥주잔을 기울이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나도 뭔가를 해줘야지, 공짜는 싫어. 어이, 퍼시발씨? 뭐 원하 는 거 없소? 행운의 부적 어떤가? 헤게모니아의 무녀의 마을에서 가져온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오. 붉은 사막에서만 나는 독사의 꼬리도 있지! 이건 기나긴 여행에서 특히 요긴한 것인데, 독사의 꼬리에서 나오는 강 한 힘이 괴물들을 쫓아준다네. 그리고 정말 희귀한 오우거 털가죽도 있 는데 말이야, 자네가 원한다면 내 특별히 염가봉사…" 오우거 털가죽? 틀림없이 돼지나 양의 털가죽이겠지. 설마 암파린씨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오우거를 때려잡았을까. 샌슨은 관심이 동한다는 표 정이었지만 내가 먼저 끼어들었다. "하하… 샌슨은 그런 것들엔 별로 관심없으니 대신 내 부탁 하나 들어 줄래요?" "그래? 말만 하게!" "야! 내가 언제 관심이… 웁!" 난 샌슨의 입을 틀어막은 채 빠르게 말했다. "내일 아침 네리아가 일어나거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해주겠어요? 그러니까 그 마지막 패가 엄청나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결 국 거짓말을 하라는 것인데, 가능할까요?" 암파린씨는 코를 후비적거리며 날 바라보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오늘 저녁 잠자리만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공부까지 시켜주는 군! 자네 말이 맞아." "예?" 암파린씨는 엄숙한 얼굴로 손에 붙은 코딱지를 튕겨버리며 말했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말이야, 결국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덜어주는 것으로 족해. 맞는가 틀리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부끄러운 노릇이야! 이 나이 되어서까지 어린 후학에게 배워야 되다니! 물론 선현들께선 80살이 넘어도 8살짜리 꼬마에게 배울 것이 있 다 하셨지만. 음. 알았네. 걱정말게." "아,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부탁할께요." "전혀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네." 암파린씨는 그렇게 말하곤 과묵하게 앉아서 나무만 지겹도록 깎고 있는 운차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퍼시발씨는 나보고 간첩이 어쩌니 했는데, 당신 들이야말로 저 자이펀인과 왜 함께 다니는 건가? 아, 의심한다는 것은 아니고, 저 전사분 때문에 나처럼 간첩이라는 의혹을 뒤집어쓸지도 모르 잖아?"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아냐, 아냐. 사과도 자꾸 하면 값어치가 떨어진다오. 난 그냥 내 경험 을 통해 자네 일행도 공연히 그런 오해를 받지 않는가 걱정이 되어서 말 이야."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운차이는 진짜 자이펀 간첩이니까." "아, 역시… 뭐야?" 암파린씨는 고개까지 끄덕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들을 바라보 았다. 운차이는 피식 웃었고 샌슨은 히죽 었으며 설명했다. "하하하. 원래 간첩이었지만 전향했습니다. 국왕 전하의 목숨을 구한 공이 있거든요. 또 그의 신병은 국왕의 형님이신 길시언 왕자님이 책임 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괜찮은 거지요." 암파린씨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난 유쾌 한 심정으로 그 표정을 즐겼다. 흐음. 암파린씨는 이제 우리들을 굉장한 모험가로 보시겠지? 만일 우리들이 바이서스의 왕자와 드워프들의 노커 와 자이펀 간첩에 드래곤 라자가 한 세트를 이룬 일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암파린씨의 얼굴은 어떻게 될까? 난 암파린씨처럼 예언가는 아니지 만 그가 대단히 놀라게 될 것이라는 점은 얼마든지 예언할 수 있겠군. "국왕 전하의 목숨을 구했다고? 아니, 자네들 국왕 전하를 만나보셨는 가?" 만나보셨는가? 말이 좀 희한하군. 샌슨은 우쭐한 표정으로, 하지만 겸 손한 어투로 말했다. "예? 아, 예. 간혹 만나지요. 지금도 우리 일행 중 몇 명이 임펠리아에 전하를 뵈러 갔거든요. 그래서 이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아마 비가 와서 천천히 올 모양인가 봐요." 암파린씨는 이제 경악을 넘어서 약간 공포까지 가미된 표정으로 우리들 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런데 갑자기 암파린씨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 다. "그래? 그럼 말이야… 아냐. 음… 이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뭔데요? 말씀해보세요." "허어, 이것참. 먼저, 절대로 오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겠나? 화를 내지도 말고 말이야."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오해하지 않도록, 화를 내지도 않도록 말씀하세요. 말씀하시는 것은 암파린씨 자신이잖아요? "아, 그렇긴 하지. 웃기는 약속을 하라고 했군. 음, 그러니까 말이야. 일단 난 미래를 보네." "예. 그러시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를 보기도 바쁜데, 참 피곤한 직업이실 듯해요. 진심으로 위로를…" "아냐, 아냐! 제발 나 말 좀 하세." "아, 그러세요." 암파린씨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맥주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거나 옷 소매를 바로잡거나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아까 저녁의 리테들씨와의 대화에서도 이미 판명되었듯이 우 리들은 왠만한 일에는 놀라기도 힘든 모험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말해주 고 싶군, 그래. 암파린씨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요 며칠 동안은 사우스 그레이드를 주로 돌아다녔지. 거기는 지금 엉망진창이라네." "그런가요? 음, 풍문에 듣긴 했습니다만." "그래. 하지만 풍문으로 듣는 것 정도로는 모자라지. 가을에 거둬들인 곡식이 가득 쌓인 창고에 불을 지르는 농부들의 모습을 자네가 봤어야 되는데."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샌슨은 누가 보면 유니콘 인에 광산이 두 개 생겼다고 생각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가 간신히 말을 만들어내었다. "불을 질러요? 농부가? 곡식에요?" 이건 진짜 트롤 산수 공부하는 소리다. 드워프가 보석을 때려부순다고 하는 말만큼이나 웃기는 말이잖아? 농부가 곡식에 불을 질러? 운차이마 저도 나이프와 나무토막을 내려놓고서는 팔짱을 낀 채 암파린씨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암파린씨는 손짓발짓을 하면서 말했다. "전선 지휘관들은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기 시작한 거지. 여차하면 사우 스 그레이드는 일격에 점령당할지도 모른다 이 말이지. 그 경우 꽉꽉 들 어찬 곡식창고는 그대로 자이펀군의 병참이 되지 않는가? 물론 곡식창고 에 불을 지르는 농부의 심정은 그 자식을 태워죽이는 심정이겠지. 평소 같으면 아무리 전쟁이라도 그건 말도 안되는 말이야. 하지만 사우스 그 레이드의 그 순박한 농부들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 자이펀인 들이 불러낸다는 악마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샌슨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내 얼굴도 비슷하겠지. "예. 들어봤어요. 제기랄… 그것 때문에 사우스 그레이드의 농부들이 모조리 겁을 집어먹은 겁니까?" "그렇다구. 그래서 군에서는 어음, 그러니까 손해배상 증서를 발행해서 농부들의 피난을 독려하고 있지." "손해배상 증서요? 그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랬나? 흠. 간단한 것이야. 파괴된 전답과 곡식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손해배상할 테니 곧장 사우스 그레이드를 떠나라, 이 말이지. 그 증서라 는 것이 정말 걸작인데, 손해배상 기간이 무기한으로 되어있어. 한 마디 로 언제 갚아줄지 모른단 말이야. 후치 자네가 그 농부들이라면 이 말을 듣고서 웃기지 말라고 그랬겠지? 하지만 정말 눈뜨고 보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구. 악마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 에서 말이야, 농부들은 배상증서를 받기도 전에 서둘러 집에 불을 지르 고 피난을 준비하는 실정이라네." 맙소사… 지옥이군. 사우스 그레이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공포 에 휩싸여 있는 모양이군. 난 혀를 세차게 찼다. 쯧쯧! 그 자이펀의 무기는 질병을 유발시키는 무서운 파괴력에다가 공포라는 더 무서운 부수 효과까지 발휘하는 모양인걸. 난 막연히, 지금쯤 카알 일행은 임펠리아의 고대광실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상스러운 욕설을 고 래고래 퍼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떠올린 생각이지만 다시 생 각해봐도 별로 틀린 생각일 것 같지는 않다. 카알은 아마 닐시언 전하의 머리 끄덩이를 붙잡고 싶다는 듯이 손을 떨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겠지. "뭐요? 피난이라고? 배상 증서? 웃기는 소리! 질병이 발생해도 아무 문 제가 없단 말입니다! 도시 가운데를 조사해서 디바인 마크만 회수하면 전체 의식이 무효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사람 몇 명이 하룻밤 만 조사하면 돼요! 왜 공문을 발송하지 않는 겁니까?" 정말 왜 공문을 발송하지 않는 거지? 그게 무서운 무기이긴 하지만 대 책이 전혀 없는 무기도 아닌데. 사태를 충분히 설명한 공문을 각 도시와 영지로 발송시켜 이해시키면… 아… 이런 젠장! 충분히 이해시킬 시간이 없겠군. 사우스 그레이드는 주로 농토로 이루어져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사람들이 좀 듬성듬성하게 떨어져 살고 있지! 아마 우리 고향이 있는 웨 스트 그레이드만큼이나 사람들이 흩어져 사는 곳이 있다면 사우스 그레 이드가 바로 거기일 것이다. 이런 골치 아플 데가 있나! 만일 우리가 겪었던 그것, 일스에서 이루어진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이 실 전 배치 직전의 실험이었다면, 어디 보자. 그 때가 11월 12일이니까 겨 우 이 주일 전이군. 시간이 너무 촉급했어. 우리는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의 가장 긴박한 순간을 여행중이었기 때문에 우리 시간 감각과 실제 시간 감각이 혼동되는걸. 젠장. 카알은 나보단 현명하니까 시간 감각을 혼동하지는 않았겠지. 닐시언 전하의 머리 끄덩이는 전폭적으로 안전하 다.(장담은 못한다. 카알 대신 길시언이 붙잡고 흔든다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니까.)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떠올린 다음, 난 우울한 얼굴로 암파린 씨를 바라보았다. "사우스 그레이드는 지옥 같겠군요." "정확한 표현이야. 후치. 정말 지옥 같지. 그런데 그런 광경을 보고 있 으니까 말이야. 도대체 이 나라의 운세가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궁금해지 더라고." 샌슨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 나라의 운세라고요?" "그래. 바이서스의 운세. 그게 궁금해졌어. 그래서 난 바이서스의 운세 를 점쳐보았지. 적당한 바위산에 들어가서는 하룻밤 동안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점에 점을 쳐보았지." "오… 나라에 대해서도 점을 칠 수가 있습니까?" "아니, 아니. 그건 힘들어. 난 그 정도는 안돼. 그래서 난 바이서스 왕 가의 운명에 대해 대충 점을 쳐보았지. 다른 점복술사가 보면 사기라고 말할 만큼 변칙적인 방법이었지만 나로선 자신을 위해 하는 예언이기 때 문에 절대로 속임수를 쓰지는 않았네. 그리고는 말이야, 도저히 바이서 스 임펠로 찾아오지 않을 수 없더라고. 여기 와봤자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혹은 내 예언을 도대체 누구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 싶었지 만 그래도 찾아오지 않고는 못배기겠다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전하를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군! 그것참,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 지만 말이야, 지금 미래를 본다는 내가 운명의 기묘함에 놀라고 있다 네!" 일렁거리는 촛불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질문을 꺼내기가 두려 워져서 암파린씨를 바라보지 않았다. 샌슨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질문을 하고 말았다. "바이서스 왕가는 어떻게 됩니까?" "이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불충죄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그러 니 입조심해주게." "알았어요. 어떻게 됩니까?" "정말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지?" "말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됩니까?" 암파린씨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더 참지 못하겠다 싶을 무 렵, 암파린씨는 입을 열었다.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는 끝나게 되네." ================================================================== 12. 불길한 예언……8. 다시 촛불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자정도 넘은 시각. 밖에서는 빗방울들 이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빗방울을 맞으면 오히 려 따스한 느낌이 든다더군.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느낌이 있다고 하 지. 물론 내 느낌은 아니야. 세상에 둘도 없이 해괴한 감각을 가진 제미 니의 느낌이지. 어린 시절 제미니는 비만 오면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 다. 왜 그렇게 비를 맞고 있냐고 물어보면 한다는 말이 '따스하니까.' 에구.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 비를 그토록 맞고 난 다음날은 틀림없이 감기에 걸려 콧물을 줄줄 흘리는 주제에 비가 따스하다니. 길시언, 설마 동생의 머리 끄덩이를 붙잡고 흔들고 있지는 않겠지요?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만 제외하면 점잖은 사람이니까 그러지는 않겠 지. 아무래도 닐시언 전하의 머리 끄덩이는 여전히 안전한 것 같다. 아, 이런. 한 사람을 생각못했군. 제레인트? 천만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 람은 닐시언 전하 자신이다. 닐시언 전하가 자신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형님! 이 우제를 꾸짖어주십시오! 가련한 백성들이, 저 가련한 백성들이…! 으아아아!' 가능성이 있군. 충 분히 가능성이 있다구.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는 끝난다고? 나라로서의 바이서스가 아니라,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라면, 그건 바이서스 왕가를 말하는 것이지. 왕가가 끝장난다 고? 농담이 심한걸. 샌슨은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로 암파린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네요." 내 대답은 암파린씨를 실망시켰으리라. 암파린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어느새 다시 나무토막과 나 이프를 들고 있었다. 사각, 사각. 그리고 난 빈 맥주잔의 바닥에 엉겨붙 은 거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더 마실까? 아냐. 관두지. 내일도 말을 달려야 되는걸. 이제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이틀도 안남았을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대략 한달쯤이라고 말했으니 정확히 이틀 후라고는 볼 수 없긴 하지. 어쩌면 일주인 쯤 후에 일어날지도 모르고 벌써 깨어나 있을 지도 모르지. 아,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 느껴본 소문의 위력으로 보건대 크라드메서가 깨어났다면 벌써 바이서스 임펠은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어수선해야 되겠지. 안마시는 것이 좋겠군. 부지런히 달려가야지. 카알 일행은 아마도 바이 서스 임펠에서 자고 올 모양이다. "이것봐. 못믿겠다는 거야?" 암파린씨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태평하게 대답 했다. "아뇨. 믿어요. 한 천년이나 만년 쯤 지나면, 아냐. 백년도 못갈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언젠가는 바이서스 가문도 끝이 나겠지요." 샌슨은 내 말에 킥킥 웃었고 암파린씨는 역정을 내었다. "그런 당연한 말을 예언이라고 하지는 않네!" "그래요?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세요?" 암파린씨의 입이 딱 굳어버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난 내 머리에 서 나오는 말인지, 내 뱃속에서 나오는 것인지(내 뱃속이라면 그건 술기 운에 나오는 말이다.) 확신할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이거 보세요. 암파린씨. 아까도 이 주제에 대해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예언이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고 다가오는 미래를 대 처할 수 있는 희망을 주면 된다고 보는데요. 암파린씨가 말한 그런 식의 예언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쓸모가… 없다고?" "그래요. 하등 쓸모가 없어요. 뭐, 내 생각이긴 하지만, 그게 예언이라 는 것의 갈등 소지인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이야?" 그래. 나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틀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군. 내가 겪은 일, 내 곁에 다가오고 떠나 갔던 사람들의 모습은 그저 지나간 일상사는 아니었지. 샌슨의 눈빛이 묘하다. "예언은 미래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현재에요. 아 무리 미래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속한 것이라고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마디로 믿으면 그만이고 믿지 못하면 안믿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지 요. 미안한 말이지만, 좋은 일이라면 믿겠어요. 만족감은 있을 테니까. 만족감 하나 때문에 믿겠어요. 하지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예언은 믿 지 않겠어요. 뭐라 해도, 현재를 사는 것이니까." "훌륭해." 그 대답은 나무를 깎고 있던 운차이에게서도,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암 파린씨에게서도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대답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길 시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길시언의 등 뒤론 제레인트와 카알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들 비에 젖어 서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길시언의 허리에서는 프림 블레이드가 웅웅거 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면서 암파린씨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길시언은 얼굴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면서 다 른 손으론 칼자루를 쥐고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용히 해. 내가 말할 테니." 프림 블레이드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길시언은 안으로 들어섰고 암파 린씨는 의자에 못박힌 듯이 딱딱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 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옷걸이에 걸린 수건을 발견해서는 머리를 닦기 시 작했고 카알은 침착하게 테이블에 앉았다. 길시언은 시선을 암파린씨에 게 똑바로 고정시킨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밖에서 듣고 있었소. 좋은 예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하 지만 우리 가문이 끝난다는 말을 들으니 어쩔 수가 없더군요." "우리… 가문?" "길시언 바이서스라고 합니다. 이 분들의 일행이며, 바이서스의 왕자입 니다. 왕자라고 해봤자 궁성에서 나온지 오래 되었으니 대단할 것도 없 소만." 와라락! 암파린씨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퍽! 소리가 나도록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길시언은 제레인트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머리에 덮어쓰면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요, 선생. 이렇게 추운 날에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은 고통스러 운 일이니." "저, 전하. 소인의 불, 불충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불충? 그런 거 없어요." "예?" "일어나시오. 난 조금 전 여기 있는 후치가 말한 바대로 따를 생각입니 다. 당신 말을 믿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나 스스로 믿지 않는 말에 대해서 화를 낼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길시언은 더할 나위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물에 빠진 생쥐꼴에다 머리 엔 수건을 덮어쓴 채 난폭하게 머리카락을 닦아내고 있긴 하지만, 최소 한 조금 전 자기 가문이 홀라당 망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치곤 저렇게 태 도가 고상할 수가 없다. 카알은 빙긋이 웃었고 제레인트 역시 미소를 지 은 채 테이블에 앉았다. "거기 계속 꿇어앉아 있을 필요는 없소. 일어나 앉던가, 아니면 올라가 서 잠을 청하시오. 늦은 시간이니까." 암파린씨는 얼떨떨한 얼굴로 길시언을 올려다보았지만 길시언은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머리와 팔을 닦고 있었다. 암파린씨는 머뭇거 리며 일어나더니, 아마 밤인사가 아닐까 생각되긴 하지만 정확히 뭐라고 말한 건지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는 황급히 올라가버렸다. 암파린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발걸음이 급해서 그렇겠지. 오늘 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이런 여관에 들어오다니 내가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하하. 카알은 암파린 씨가 사라진 계단쪽을 바라보다가 길시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뭐,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네드발군?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자나 보지?" 난 카알의 질문을 듣고서 더 이상 암파린씨의 예언에 대해서는 거론하 지 않기로 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심드렁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어땠어요? 생각만큼 멋지던가요?" 제레인트는 어느 새 맥주잔 세 개를 채워와서는 카알과 길시언에게 돌 리면서 말했다.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 하, 그것 참. 퍽이나 웃기는 말이지만 말이야, 굳이 임펠리아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난 드래곤 로드의 대미궁과 비교 하겠어." "대미궁과? 헤에. 그 말은 엑셀핸드 듣는 곳에선 하지 않는 것이 좋겠 군요. 하지만 대미궁에 비교한다는 것은 좀 어이가 없는데요? 임펠리아 가 멋진 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대미궁에…" "멋진 성? 지금 그냥 멋진 성이라고 했나? 천만에! 그 궁성은 신을 찬 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꽃이라니! 후치 넌 대미궁 어디에서 살아숨 쉬며 피어나 자라나는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냐?" "아… 없지요." 제레인트는 힘찬 동작으로 맥주잔을 기울이고서는 그 중 상당량을 옷 앞섶에 흘리고나서 턱을 쓰윽 닦았다. "커어! 그 화단 위로 밤비가 내리는 광경은 죽을 때까지 못잊을 거야. 후우. 이건 테페리의 가호야. 내가 임펠리아에 찾아가는 시점에 밤비를 내려주시다니. 그야말로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이 아닌가!" "하하. 축하하지요."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제레인트는 비가 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날씨를 맑게 해주신 테페리에게 감사했을 거야. 흐음. 난 성직자의 모범 적인 표본 같은 성직자에게서 고개를 돌려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피곤한 모양인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눈 사이를 꽉 누르고 있었다. "전하를 만나보셨어요, 카알?" 카알은 그대로 눈을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음? 어, 만나보았네. 참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네." "누가 머리 끄덩이를 잡아당겨… 아, 아니에요. 말이 헛나왔어요." 카알은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윽. 아무래도 암파린씨와 이야기 를 하면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군. 카알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 다. "사우스 그레이드쪽은 지금 거의 공황에 가까운 사태가 일어나는 모양 이야." 샌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은 이미 들었어요. 아까 그 점쟁이는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올 라온 모양입니다." "그래? 흐음. 그쪽은 농가가 많지. 바이서스 식량 생산량의 절반 이상 이 그곳에서 나오니까 바이서스의 식량 창고라고 할 수도 있는 곳이거 든. 닐시언 전하는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자 곶간을 털린 것을 본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더군." 곶간을 털린 사람이라. 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머리 끄덩이는 확실히 안전… 내가 자꾸 왜 이러지? 카알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 지금은 11월 하순이지. 조세 마차는 이미 수송을 마친 시점이 라 정부 보유 곡식은 그런대로 충분하다고 하시더군. 하지만 보리 농사 는 포기해야 되겠지. 잔혹한 겨울이 될 것 같군. 어쩌면 잔혹한 봄이 이 어질지도 모르고. 세이크럴라이제이션에 관한 헛소문 때문에 민심은 흉 흉하기 짝이 없고… 비밀 이야기지만 닐시언 전하는 반란의 위험에도 촉 각을 곤두세우고 계시는 것 같더군." "반란? 제에기. 하긴 모두 어려울 때 협동하자는 것은 어디까지나 말뿐 이지요. 반란이나 폭동은 왜 모두가 어려울 때 일어나야 되는 건지." "좋은 비평이야. 퍼시발군. 해답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 어쨌든 닐시언 전하에게 있어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지골레이드를 대체할 전력이더군. 모든 사태가 거기서 비롯되었어. 물론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의 문제가 남 긴 하지만그건 저쪽에서 시도한 것이니 당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지골 레이드의 공백은 심각해. 그건 우리쪽의 문제니까."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을 저주하고 있으시지 않던가요?" 길시언은 쓴 웃음을 지었고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네드발군."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뭐라고 그런데요?" "그게 말이지, 이 모든 사태 중에서 최고로 웃기는 국면인데, 할슈타일 후작은 돌맨 할슈타일과 공식적으로 의절(義絶)했다네." "의절? 가문에서 쫓아내었다고요?" "그래. 지골레이드의 계약 해제는 돌맨의 단독소행이라는 것이야. 드래 곤과 라자의 관계에 대해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이 많긴 하지. 돌맨은 오로지 지골레이드가 불쌍해서, 그러니까 전선에서 싸우면서 동시에 해츨링도 키우는 그 모습이 불쌍해서 게약을 해제해버 렸다는 거야." 아무리 많이 마셨다지만 지금은 한 잔 더 마셔야되겠다. 난 맥주잔을 채워와서는 테이블 위에 탕! 내려놓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네요?" "말해보게. 나에게 지도자의 기쁨을 선사해주게." 길시언과 샌슨, 그리고 제레인트도 호기심 동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더우기 운차이는 나무를 깎는 동작을 멈춤으로써 나에게 경의를 표현했다. 진지하게 듣겠다는 말이지. 난 호흡을 조절하고나서 말했다. "만족하실 거에요. 첫째. 돌맨 할슈타일은 천하에 다시없는 멍청이다. 그런데, 몇 살이죠?" "15살." "그럼 멍청이로군요. 지골레이드를 풀어주면 당장 바이서스군이 죽어나 갈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면서 단지 불쌍해서 풀어줬다면, 그건 멍 청이지요." "두번째는?" "할슈타일 후작의 지시를 받고 행동한 것이지요. 운차이의 가정이 맞았 다는 것입니다." "좋아. 훌륭해. 그럼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그건 간단하지요. 하나만 알면 충분해요. 현재 돌맨의 신병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요?" 카알은 기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무슨 수도원이더라? 아, 아미앙스 수도원일 거야. 검 과 파괴의 레티를 섬기는 수도원인데 사우스 그레이드에 있다더군. 그 수도원에서 보호 상태지. 돌맨 할슈타일은 지골레이드를 풀어 준 다음 전선에서 달아나다가 거기로 들어갔다더군. 그런데 말이야, 이 레티의 수도원의 원장이 할슈타일 후작의아내의 동생, 그러니까 처남이 되지." "그럼 돌맨 할슈타일은 할슈타일 후작의 손아귀에 있는 셈이로군요?" "그렇지." "국왕은 수도원장에게 그 신병 인도를 요구하지 않았구요?" "수도원… 신전이란 참으로 간섭하기 골치아픈 공간이지. 언젠가 후작 이 말하지 않았던가? 전통적으로 통치권은 신권의 경계를 존중하는 법이 라고. 물론 그 반대로서도 마찬가지지. 성직자들은 신을 섬기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는 국왕의 통치권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없지만, 자존심의 범위 내에서 존경과 사랑을 표하기는 하는 법이지." "어려워요. 간단히 말해서 둘 다 서로를 지나치게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대방을 견제하긴 하지만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을 정도 로?"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복종대상이 다르니까." 샌슨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중요범죄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신병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 까요?" "바로 그게 안된다니까, 퍼시발군. 그 꼬마는 신전의 보호를 요구하며 들어온 상태거든. 이 상황에서 수도원으로서는, 자신이 복종하지도 않는 지상의 군주의 명령에 따라 신의 보호를 요구하며 들어온 꼬마를 내어주 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허… 그것 참." "그리고 국왕으로서도 함부로 그런 신권의 경계를 건드릴 수는 없거든. 그런 식으로 신권이 침해당하게 된다면 모든 신전들이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리가 없지. 다른 신전에서 격렬하게 들고 일어날 거란 말이야. 그 상황 전체는 '신의 품을 찾아든 어린 소년을 지상의 군주에게 빼앗긴' 것이 된단 말이야. 평소라면 어느 정도 원활한 막후 교섭 방법이 있겠지 만 현재는 전시란 말일세. 신전들과 대립함으로써 불안한 민심을 더 자 극할 수는 없는 법일세." 묵묵히 듣고 있던 길시언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제에엔장! 그 할슈타일 후작, 속에 능구렁이가 10 마리는 들어앉은 그 노인네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바지를 벗겨 채찍으로 후려치 고 촛농을… 죄송합니다. 임마! 제발 레이디답게 품위있게 말하라고!" 운차이는 쓰게 웃은 다음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크라드메서를 몹시 탐내고 있단 말이군요. 국왕의 비 위를 건드려가면서까지 돌맨을 빼돌릴 정도로." "그렇소. 운차이씨의 가정이 틀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하지만 당신의 가정이 정확했던 모양이오." 샌슨은 곰곰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정리해볼 테니까 맞는지 좀 말해주십시 오. 그러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지골레이드를 놓아줌으로써 자이펀으로 하여금 바이서스를 집어삼키게 하고, 그 다음 자유로와진 돌맨 할슈타일 은 크라드메서와 계약을 맺게 한다? 그렇게 되면 드래곤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니만큼 자이펀에게 이 나라가 넘어가도 그 가문의 영화는 계속될 테니까… 게다가 자이펀으로서는 지골레이드를 빼냄으로써 도와준 할슈 타일 후작을 홀대하지는 못할 테고. 일석이조를 노린다는 말입니까?" "정확하네. 퍼시발군." "내 이 늙은 여우를!" 샌슨은 그대로 입에 롱소드를 물고 할슈타일 후작 저택으로 찾아갈 듯 한 태세였다. 나는 샌슨은 입에 롱소드를 물어도 어울릴 거라는 망상을 조금 하다가 카알에게 말했다. "후작이 레니를 찾으면 안되는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응?" "할슈타일 후작에게 그런 반역의 기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랜 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는 할슈타일 후작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지요? 그래서 후작이 아니라 우리가 레니를 찾게 한 것이고… 이후의 결과는 뻔하겠군요?" 카알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맥주잔에서 터지는 거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레니는 크라드메서와 함께 전선으로 가게 되겠군요? 지골레이드 대신 에." ================================================================== 12. 불길한 예언……9. 카알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고 길시언과 샌슨은 입을 딱 벌린 채 내 얼굴과 카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운차이는 그 모든 사람 들과 독립된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니, 하 늘이 아니라 천장이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반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뭔가 기도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카알은 맥주 한 모금을 느리게 느리게 마시더니 말했다. "반역의 기미는… 있었지. 아니,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지. 300 년의 기간이 지났고, 할슈타일 가문은 바이서스 왕가에게 유용성을 잃어 가고 있었으니까. 주인을 바꿔버리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지." 나는 잠자코 카알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은 카알이 말을 해야 되는 시 점이다. "아마 후작 자신으로서도 그것은 최후의 계획이었을 거야. 그의 첫번째 계획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그것,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재창조해서 계속 가문의 영화를 이어나가자는 것이었겠지. 드래곤 라자만 계속 배출 된다면 할슈타일 가문의 영화는 영원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말만큼 쉬 운 일이 아니지. 역시 드래곤 로드가 정한 것을 거스르기는 어려운 일이 었을 테니까." 카알은 다시 한숨을 쉬었고 그 시간 동안 샌슨과 길시언은 다섯 번 이 상 숨을 들이쉬었다. 술 때문인지 벽에 있는 촛불의 빛이 일렁거리는 것 같군. 난 조용히 카알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주인을 늑대에게 넘겨주고 그 공에 대한 선물로 주인의 뼈다귀를 기대하는 사냥개가 되는 것… 추악한 일이지만 생각해볼 수는 있는 일이지." 길시언의 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를 부득부득 갈 고 있는 저 입 속에서는 불꽃이 튀는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눈에서는 확실히 불꽃이 튀고 있다. 지금 운차이에게 물어보면 '길시언 은 할슈타일 후작에 대한 살기를 마구 뿜어내고 있다.' 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카알은 결심을 굳힌 얼굴로 말했다. "그렇네. 네드발군. 그 날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 '후작이 붉은 머리 소녀를 찾으면 그 소녀의 신방은 자이펀에서 차려질 것이다.'라고." 빠박! 누구의 이빨이지? 어쨌든 누구 것인진 모르겠지만 분명히 누군가 의 이가 부스러졌을 것이다. 길시언과 샌슨, 둘 중의 하나일 텐데. 길시 언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레니를 자이펀에 선물로 넘긴다는 말씀입니까? 자신의 딸을?"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할슈타일 후작가 는 자이펀 왕가와 연결되는 것이니까. 거기서는 왕이라고 하진 않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리고… 이 전대미문의 신부의 지참금은 놀 랍게도 바이서스라는 나라가 되는 것이고." "오, 이런, 맙소사!" "글쎄… 좋은 의미로 볼 수 있을까?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딸에게 한 나라의 왕을 신랑으로 맺어주는 셈이지. 아냐, 두 나라의 왕이 되겠군. 자이펀과 바이서스 두 나라. 물론 이런 신부를 거부할 사람은 없지. 드 래곤 라자이기 때문에 크라드메서라는 무시무시한 드래곤이 따라가게 되 고, 그 지참금은 나라 하나. 꽤나 비싼 신부인 셈이지. 신부의 아버지가 목에 힘을 줄 수 있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군." 카알은 마치 동네 처녀가 시집가는 것인 양 가볍게 이야기했다. 어처구 니없는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길시언은 기어코 고함을 질러버렸 다. "이런 괘씸한! 할슈타일 후작을 체포해야 됩니다! 지골레이드도 없는 이상, 더이상 후작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반란입니다!" "증거가 있소?" "증거요? 증거가 필요합니까? 알았습니다. 목부터 잘라내고나서 증거를 찾도록 하지요!" "길시언…" "제길, 이렇게 추악한 이야기는 듣다듣다 처음 들어봅니다! 이 나라가 그 가문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입니까! 무려 300년에 걸친 은혜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배신하는 사냥개가 된다고요? 그리곤 십수 년만에 찾아낸 딸은 얼굴도 모르는 저 사막의 왕에게 시집보내버린다고요?" "이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오. 물론 하이 프리스트는 많은 정황과 증거 에 의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긴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소. 함부로 단 정을 지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에이익!" 길시언은 포효하듯이 외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맥주잔이 잠시 요동을 쳤고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난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카알." "응? 네드발군?" "그런 일 대신 카알은 레니에게 무슨 일을 해줄 거지요?" "뭐라고?" "할슈타일 후작의 계획 대신에… 카알은 레니에게 어떤 일을 해줄 거지 요? 이건 내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는데요. 난 레니가 크라드메서를 진정 시킨 다음 델하파의 항구로, 진짜 아빠에게로 돌아가게 되기를 기대했어 요.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샌슨은 당혹한 얼굴이 되었다. 카알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전선에서 지골레이드의 공백이 크니까…" 난 카알의 어눌한 말도 싫어. 난 그의 말을 잘라들어가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레니는 크라드메서와 함께 전선으로 가야 되는 것은 아니겠 지요?" 카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촛불빛마저 줄어드는 지독한 침묵의 시간이 다가왔다. 난 이 침묵이 싫어. "약간 취한 김에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난 레니의 의지에 반하는 일에 는 절대 찬성하지 않겠어요. 레니는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와 함께 떠나왔어요. 레니는 그저 자신이 믿는 아빠가 대 륙이 위험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 리와 함께 온 거에요. 하하하. 역시 취하면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를 하 게 되는군요." "네드발군. 그건 잘 아네." "잘 안다고요? 그럼 걱정하지 않겠어요. 저어언혀! 걱정하지 않아요." "이봐, 네드발군…" 와라락! 의자에서 일어나는 내 동작이 좀 거칠었던 모양이다. 의자는 뒤로 굴러가다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카알은 입을 다물었다. 주위의 사람 들이 날 저렇게 바라보는 것은 정말 싫어. "미안하지만 너무 졸려서 더 못듣겠어요. 취기도 오르고. 좋은 밤 되길 바래요." 그리고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까지 뛰어올라왔다. 쾅쾅쾅쾅! 계단 을 어떻게 뛰어올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어느새 내 방문 앞에 서있었 다. 문득 왼쪽의 방을 본다. 저 방 안에 레니와 네리아가 잠들어있다. 난 잠시 레니의 얼굴을 떠올 려본 다음, 웨일즈 본야드, 그 고래뼈로 장식된 멋진 펍을 떠올렸다. 난 방문을 열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순간 짜릿한 취기가 올랐다. 음… 자다가 일어나서 마신 술은 더 빨리 취하는 모양이지. 밤새도록 비가 내렸고 내 꿈 속에까지 비가 내렸다. "왜 비를 맞고 있어?" "빗속에 있으면 따스하거든." 몸은 다 커버린 제미니. 하지만 얼굴은 일곱이나 여덟 살 쯤의 제미니 다. 뭐 특별히 괴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17세의 몸이 7살 때처럼 껑 충껑충 뛰어다니고 있으니 얼굴이라도 저래야 어울리지. "비에 젖으면 춥지 않아?" "응응, 비에 맞은 다음 비 안오는 곳으로 가면 춥겠지. 하지만 지금은 따스해." "운차이는 그런 경우를 가리켜 해파리라고 말하던데." "먹는 거야?" "몰라.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진 않았어." 사방은 운차이의 사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빗방울 색깔이 자주빛이었 다. 퍼플레인 인 데저트(Purplerain in Desert)… 무슨 노래 제목 같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낙타와 전갈이 불만족스러운 소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울뱀은 어디 있는 거지? 촤르르르… 방울 소리가 들렸다. "제미니! 방울뱀이 근처에 있어!" "소리뿐이라면 상관없지." 어쩌자고 저렇게 이쁜 소리만 할까. 괘씸한 것. 난 몽롱한 걸음걸이로 제미니에게 다가갔다. 제미니는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내 느긋 한 걸음걸이로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푸석, 푸석.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라붙은 모래가 내 발길에 따라 흩어져 날아갔다. 사방엔 자주빛 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니는 사막의 여왕이 되겠지?" 제미니의 질문. 어느새 그 얼굴은 네리아가 되어 있었다. 빨강머리는 똑같았지만 그 얼굴은 네리아의 얼굴이었다. 흠. 이제야 그런대로 몸과 어울리는 얼굴이로군.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구의 소녀가 사막으로 시집가면… 말라죽어버리겠지요. 이 굉장한 모래는 항구의 소녀의 몸에서 물기란 물기는 다 짜내어버릴 거에요. 소 녀는 울 수는 있겠지만, 그 눈물도 모두 모래 속으로 사라져버리겠지 요." 네리아의 얼굴은 이제 레니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빨강머리 는 똑같았지만. 레니는 처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다 안개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갈매기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으 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같이 떠나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아버지와 날 떼 어놓을 수는 없어요.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내가 한 말은 아닌데. 하지만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니까. 크라드메서는 브레스를 내뿜었다. 안개와 갈매기 울음소리, 그리고 회색빛 하늘이 오그라들었다. 남은 것 은 말라붙은 잿더미와 모래뿐이었다. 그리고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붉은 색 태양. 자줏빛의 빗방울들은 사라져버렸고, 크라드메서의 머리에는 할 슈타일 후작의 얼굴이 달려있었다. "아빠 말을 들어야지."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아빠 말을 들어야지."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엄마 말을 들어야지." 뭐라고?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엄마 말을 들어야지! 어서 일어나, 후치!" "도대체! 네리아는 아리따운 처녀로서의 야망도 없어요? 엄마라니! 이 렇게 징그러운 아들을 그렇게 원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 겨지지 않아요?" "저 녀석은 일어날 때 항상 시끄럽군!" 엑셀핸드의 불평 소리와 함께 새날이 밝았다.(카리스 누멘이여!) 난 침 대에서 충분히 일어났다고 생각하고는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려다가 내가 반쯤밖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리를 하 늘로 차올리며 다시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네리아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어서 일어나! 이 조숙한 술주정뱅이야. 어서 출발해야지! 갈색산맥이 너에게 찾아와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물을 끼얹 어 버릴 거야!" "침대가 젖을 텐데?" "무슨 상관이람. 이대로 떠날 테니 침대 다시 사용할 일도 없잖아?" 리테들씨가 저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아우우웅! 기지개를 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으로는 겨울아침의 낮은 태양 이 겨우겨우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창문으로부터 반대쪽 벽을 향해 밝은 광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내 옆에 있는 네리아의 얼굴과 다리는 잘 보이지 않고 그 가슴과 팔만 보였다. 물론 그 뒷쪽으로 엑셀핸드의 얼굴 은 잘 보였다. 괴상한 구도다! 난 진저리를 치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반쯤 졸면서 걸어가다가 벽을 들이박고는 주위의 시선을 무마하 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벽에 키스해버렸다. "잘잤어, 벽아?" 아무래도 주위의 시선이 더 괴상해진 것 같은데? 으음. 난 별 일 없었 던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어났어요?" "물론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서, 씻고, 옷 입고, 짐 챙겼어. 아직 하지 않은 일은 아침 식사와 벽에 굿모닝 키스하는 것뿐인데… 그 거 꼭 해야 되는 거야?" "정신건강과 피부미용에 좋대요." 네리아는 벽에 키스했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배를 잡고 웃었다. 엑 셀핸드가 별 미친 것들을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나 는 그냥 히죽 웃으면서 짐을 챙겼다. 짐 다 챙기고 아래로 내려오니 우리 일행들은 이미 테이블을 잡고 모여 앉아 있었다. 샌슨은 아침부터 매우 바빠보였는데 어제 샌슨의 은혜로 이 여관에서 투숙하게 된 피난민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샌슨은 잠시 그 인사에 대답하다가, 결국 고개를 뒤흔들고는, 한손에 롱 소드를 쥐고 다른 손엔 길시언을 쥐고 뒷뜰로 달려가버렸다. 그래서 유 니콘 인의 아침은 살벌한 기합소리와 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평화롭게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아침이야. 식당에 주저앉아서 주방에서 풍겨나오는 구수한 냄새에 넋을 빼앗긴 채 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밑 이 움푹 들어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자, 어젯밤에 내 가 뿌린 씨는 오늘 아침 어떤 꽃이 되어 피어날까? 카알은 네리아와 함께 들어온 레니를 바라보았다. "아, 레니양. 잘 잤어요?" 따스한 인삿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야. 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태평한 얼굴로 잡지를 읽고 있었다. 저건 어디서 가져온 거지? 아, 홀에서 가져왔나보군. 제레인트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니는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네. 모두들 좋은 밤 되셨어요? 어, 샌슨 오빠랑 길시언씨, 아프나이델 씨는요?" 음? 그러고보니 아프나이델은 어디로 갔지? 제레인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의 두 사람은 지금 대무를 빙자한 난동을 부리고 있는 중이고, 마지 막 사람은 메모라이즈 중입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시간을 많이 잡 아먹는군요." 그러자 엑셀핸드가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그런데 자넨 아침 기도를 안하는 건가?" "예? 하하! 살아가는 모습이 곧 기도입니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아침 밥을 먹고, 그 은혜가 신께서 내린 것임을 알며, 그에 대해 감사하게 여 길 줄 알면, 그게 기도지요." "편리한 논리군. 하하하!" 그 때 아프나이델이 조금 피로한 얼굴로, 하지만 밝은 얼굴로 내려왔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침식사도 날라져왔다. 난동을 부리고 있던 두 사람을 불러들여 식사를 마치고나서, 우리들은 리테들씨에게 도시락을 부탁한 다음 홀로 몰려나와 식후의 휴식을 즐기 기로 했다. 곧 바쁜 길을 떠날 것이니 잠시의 시간이라도 느긋하게 보내 는 것이 낫겠지. 카알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레니양. 그리고 침버씨. 수도에 들리자마자 바로 떠나게 되어 안스럽 게 생각합니다만." 늦은 아침기도를 드리던 제레인트는 (아침 기도를 빼먹을 수는 없어서 식후에 대충 하고 때워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뇨, 하하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쁜 일이 있을 땐 모든 것에 욕심낼 수는 없지요." 레니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 갈색산맥으로 가서 그 드래곤을 만나고나서 말이죠, 다시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올 거지요? 그리고 그 때는 시간이 많겠지요?" 덜커덩 하는 소리는 내 가슴에서 났다. 하지만 카알의 가슴에서도 비슷 한 소리가 났을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카알은 커피잔을들어올리며 - 즉, 효과적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 - 말했다. "예. 시간이 많겠지요." "음… 그러면 그 때는 좀 차분하게 구경할 수 없을까요? 지금은 그 드 래곤이 일어나기 전에 가야 되는 거니까 급한 거겠지만, 돌아올 때는 천 천히 구경 좀 해보고 싶어요. 제레인트씨는 궁성도 구경했다고요?" "아, 굉장한 밤이었습니다!" "저도 깨워서 데리고 가시지. 음, 음. 돌아올 때 궁성도 구경할 수 있 을까요, 카알 아저씨?" "아, 예. 물론이죠. 그럴 수 있겠지요." 카알은 커피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난 좀 잔인한 계산을 깔면서 말했다. "그 때는 내가 책임지고 수도 구경시켜줄께. 레니." "그래? 부탁해!" 레니는 활짝 웃으며 말했고 동시에 카알은 커피잔 속의 세계에 대한 탐 구를, 길시언은 벽도제의 질감과 색깔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흐음. 왜들 그렇게 눈길을 돌리시는 거지? 그 때 샌슨이 입을 열었다. "저, 레니." "왜그래요, 샌슨 오빠?" 아! 난 한 사람을 잊고 있었다. 가장 막강한 추진력과 그 추진력을 더 욱 빛나게 하는 무모함을 골고루 갖춘 전사의 표상이여! …젠장. "레니도 기억하겠지? 그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 말이야." "예? 예. 물론 기억하지요. 그런데요?" 샌슨은 내 원망스러운 눈길을 무시하면서 헛기침을 좀 한 다음 계속 말 했다. "그 블루 드래곤은 원래 우리나라의 전선에서 싸우는 드래곤이었거든." "예.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 드래곤이 달아나버려서 바이서스는 현재 위험한 상태거든. 너도 오늘 아침 주방에서 피난민들을 보았지? 지금 전선에서 크게 밀리 고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계속해서 피난민들이 발생하고 있어." "네… 안좋은 모양이네요." 레니는 안스럽다는 듯이, 하지만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샌슨은 머리를 벅 벅 긁어대며 카알을 흘깃 바라보았고 그러자 카알은 포기한 듯한 목소리 로 말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겠소?" ================================================================== 12. 불길한 예언……10. "카알!" 레니는 내 고함소리에 놀라 물컵을 엎지를 뻔했다. 카알은 날 향해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게. 난 레니양의 의사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네. 설마 레니양의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네드 발군?" 난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 레니는 불안한 얼굴로 우리들을 둘러보고 있었고 그 얼굴은 정말 보고싶지 않았다. 카 알은 침착하게 말했다. "조금 전 퍼시발군이 설명한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 바이서스로서는 지 골레이드라는 강력한 드래곤을 잃은 상태요. 그래서 자이펀과의 전쟁이 매우 곤란한 상태지. 하지만 우리 여행이 무사히 끝난다면, 우리는 크라 드메서라는 새로운 드래곤을, 게다가 드래곤 라자가 함께 하는 드래곤을 만나게 되오." 레니는 멍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파랗게 질려버리며 말했 다. "지금… 그 지골레이드라는 드래곤 대신 크라드메서를 원하시는 거에 요? 지골레이드가 달아나버렸으니까, 대신 크라드메서를?" "그런 셈이오." "그럼,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전 아빠에게 돌아갈 수 없는 거에 요?" 카알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크라드메서와 우리 바이서스를 연결해주어야 되니까… 레니양도 계속 우리 곁에 남아있어야 되는 거지요." "싫어요!" 레니는 벌떡 일어났다.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보았지 만 레니는 그 시선에도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싫어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레니양. 당시에는 지골레이드의 손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건 약속은 약속이에요! 그 드래곤의 라자만 되어주 면, 그러면 난 아빠한테 돌아갈 수 있다고 했잖아요!" 카알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우울한 얼굴을 테이블로 고정시킬 뿐이었다. 그러자 레니는 더욱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설마, 설마 절 이대로 잡아두실 거에요? 나 혼자서는 못돌아가니까, 데려다주지 않기만 하면 못돌아가니까, 그러니까…" "레니양." 길시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엄숙한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절대로 레니양의 의사를 반대하거나 레니양의 자 유를 억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명예를 걸고 맹세해도 좋습니다." 그 말보다는 그 엄숙한 태도가 10 대의 소녀에게 확실한 반응을 불러일 으켰다. 길시언처럼 원할 때마다 왕자의 위엄을 동원할 수 있으면 참 편 리하겠어. 레니는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길시언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레니양이 우리나라를 위해 크라드메서와 함께 전쟁에 참가해준다면 우리는 레니양의 아버님을 이곳으로 모셔오겠 습니다." 레니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를… 여기로요?" "그리고 아버님껜 바이서스의 왕가가 국가의 은인으로 대우하여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대우를해드릴 것입니다. 레니양은 아버님과 함께 이 도시에서 원하시는 만큼 윤택하고 풍족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 아빠랑 바이서스 임펠에서 살게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 밖에 없습 니다만, 만일 토지나 재산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제공할 것입니다. 작위 를 원하신다 해도 가능합니다. 국가의 은인이시니 공신으로서의 대우가 가능할 것입니다." "에에?" 레니는 길시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난 왠지 길시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길시언은 합리적으로 사리에 맞게 말을 하고 있었고 그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항구의 소녀는… 젠장.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싫어요." 오, 맙소사! 레니는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로 거절을 표시했고 길시언의 표정은 급소를 맞은 전사처럼 바뀌었다. 네리아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레니야! 뭐하는 거야? 굴러들어온 복을 차내는 거니?" 레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싫어요, 네리아 언니. 여긴 언니들의 나라지 내 나라가 아니에요. 굴 러들어온 복을 차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지상 어디를 돌아다 녀봐도 내 방 내 침대만큼 평안한 장소는 없어요. 난 하녀를 부리거나 커다란 저택에서 으리으리한 식기로 식사를 하는 일에는 관심없어요. 그 리고 레이디라 불리면서 콧대를 세우는 일에도 관심없어요. 그건 일스식 도 아니고, 뱃사람식도 아니에요. 물론 전 뱃사람이 아니지만, 저도 짠 내나는 바람맞으며 자라난 계집애고, 일스의 여자답게 항구에서 수평선 으로 떠나간 선원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될 거에요." 네리아는 입을 딱 벌리고 레니를 바라보았으며 레니는 얼굴을 붉혔다. 제레인트가 특히 감동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얼굴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그리고 그건 헬턴트식도 아니야. 우리나라의 고민 은 우리나라에서 해결해야 돼. 그리고 레니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야. 그녀는 항구의 소녀라고! 크하하하! 하지만 이거 정말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헷갈리긴 하는데. 지골 레이드가 없어서 지금 우리나라는 위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은 우리나라를 통째로 들어 자이펀에 가져다바칠 태세고. 만일 크라드메서만 있으면 이런 위기 쯤, 입김에 꺼지는 촛불만큼이나 가볍게 사라져버릴 수 있을 텐데. 으으음. 길시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레니양… 우리나라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레니양만이 우리나라를 도울 수 있습니다." 아아!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인가? 레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게나 위험해요? 이 나라가?" "그렇습니다. 난 지금 단순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부탁하는 것이 아닙 니다. 전쟁의 승리는 전쟁을 일으킨 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는 이 나라의 존속을 걸고 레니양에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들과, 죄없는 어린아이들의 이 름으로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건 틀림없이 프림 블레이드가 불러주는 대사일 것이다. 장난을 잘 치 지만 역시 착한 마법검답게 주인을 잘 모시는군. 레니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내가 레니라도 왕자의 부탁, 게다가 저토록 위엄있으면 서도 동시에 간절한 부탁에 대해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못하겠다. 젠장. 그 때 카알이 말했다. "이 나라의 존속을 건다는 것은 좀 지나친 말이군요." 길시언의 얼굴이 홱 돌았다. 카알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공백이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나라의 존속이 위험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길시언. 과장은 삼가하도록 하시지요. 레니양에 게 부담을 주지 마십시오." 카알 만세!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셨군요?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는 없지만 난 레니가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싫다. 단순히 어린 계집 아이라서 그럴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제니미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레니는 델하 파의 항구에서 그녀의 아버지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았었다. 그러나 그녀 는 우리 부탁 때문에 그 행복한 집을 박차고 우리를 따라와주었다. 그녀 에게 보답은 못할 망정 점점 더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은, 기본적인 도리 로서 싫다! 길시언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카알…" 그러나 카알의 얼굴은 단호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 바이서스는 가장 우수한 마법의 전통이 이어지 는 나라입니다. 빛의 탑은 아직까지 참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빛의… 탑이오?" "그렇습니다. 마법사 길드원들은 전쟁의 소란 속에서도 연구활동을 계 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처신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 가 있다면, 그리고 왕가의 이름으로 부탁한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놓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힘이 남아있는 한 바이서스의 존속 위기를 거론하는 것은, 글쎄요. 마법사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요?" 카알은 침착하게, 끝에 가서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길시언은 한 숨을 쉬었다. "듣고보니 옳은 말입니다. 부끄럽군요. 어린 소녀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웅변을 토했다니." "그 웅변 실력은… 아닙니다." 카알은 짖궂은 미소를 지었고 길시언의 얼굴은 붉어졌다. 킥킥. 그래. 그 웅변실력은 길시언의 것이 아니라 프림 블레이드의 것이겠지. 레니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차분하게 말했다. "레니양.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심사를 어지럽게 해 미안합니다. 우리나 라가 그토록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레니양이 원하지 않는 일을, 우리들을 위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레니양이 길시언이 말한 그런 대우를 원한다면 길시언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를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없이 거절해도 상관없습 니다. 레니양의 의사대로 하세요.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려도 우리는 그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레니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카알의 말을 듣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 했다. "저, 저, 이 나라가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요? 확실한 거죠?" "확실합니다. 아프나이델씨에게 물어볼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프나이델은 기겁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카알 은 잔잔한 미소를 띠운 채 말했다. "빛의 탑은 바이서스가 무너져도 참전하지 않고 있을까요?" "예? 아, 뭐 그렇지는 않겠지요. 빛의 탑은 바이서스라는 국가에 소속 된 공공단체가 아니라 탈국가적 단체이긴 합니다만, 바이서스 정부로부 터 상당한 보조금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에, 뭐라 해도, 그러니까 … 간단히 말해서 핸드레이크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한 빛의 탑이 바이서 스를 외면할 리는 없습니다.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길시언은 그 얼굴에 희망을 떠올렸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물어볼까요. 빛의 탑이 참전한다면 지골레이드의 공백을 메꿀 정 도는 될까요?" 아프나이델의 얼굴에서 자존심의 빛이 반짝였다. 그는 어깨를 펴며 당 당한 자세로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공백을 메꾼다고요? 하하하. 빛의 탑에 가서 그렇게 말 씀해보시지요. 물론 요즘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나 무지개의 솔로쳐의 시대는 아닙니다. 그리고 빛의 탑의 고명하신 마스터들은 너무 돌아버렸 기 때문에 국가간의 전쟁이나 세상살이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골레이드의 자리를 메꿀 정도가 되냐고 물어본다 면 마스터들께서는 크게 진노하실 테지요. 그리고 진노한 마스터들 앞에 선, 설령 지골레이드 자신이라 하더라도 언사를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점만은 지골레이드의앞에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카알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들에게 그 웅변실력을 사용하길 권하 고 싶습니다만." 길시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권고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지만 레니양." "예? 예?" "내가 제안한 것들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아니! 천천히 생 각해보아요.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레니양이 직접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 지 않지요.그러니 레니양은 전선의 늑대 같은 병사들의 환호… 미안합 니다. 이 녀석아! 에, 어쨌든 레니양은 안전한 겁니다. 그리고 아버님께 도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저 정도는 봐주지. 이 나라에 대한 걱정에 뼛속이 타들어갈 것 같은 왕 자님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니까.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 때문에 격조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크라드메서가 레니의 도움을 통해 바이서 스를 지켜준다는 것은 왕자님으로서 당연히 바랄 수 있는 일이겠지. 레 니는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길시언은 더 빠르게 말했다. "당장 대답할 필요는없습니다. 생각해봐요. 뭣하다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고향에 돌아가서 아버님과 의논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레니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저, 그래도 되요?" "물론이지요." "감사합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 12. 불길한 예언……11. 인원이 많다보니 도시락의 부피도 엄청났다. 하지만 마차에 실을 것이 니 부피는 전혀 문제가 안되지. 유니콘 인 밖에는 어느새 주위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꽤나 몰려와있었다. 언젠가 유니콘 인에서 하늘을 나는 공포의 기사들과 싸운 모험가들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쫘악 퍼진 것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몰려든 인파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갑 자기 그 인파 가운데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여봐요! 당신들 갈색산맥으로 드래곤 로드를 잡으러 간다며?" 허! 참 기막힌 소문의 위력이로군. 우리 일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제레인트가 재빨리 응수했다. "그래요! 드래곤 로드에게 뭐 전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죽이기 전에 전 해주겠소! 하지만 장담은 못해요! 우린 눈깜빡할 사이에 드래곤 로드를 처치할 작정이거든?" 와-!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난 어이가 없는 얼굴 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프리스트가 거짓말해도 되요?" "재미있잖아?" 으윽. 할 말 없다. 난 머리를 휘저으며 도시락 바구니들을 마차에 실어 올렸다. 큼지막한 바구니를 한 손에 세개씩 들고 나르는 내 모습을 보면 서 몰려든 인파는 제레인트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된 모양이다. 그 중 어 떤 자는 제레인트에게 다가와 드래곤 로드의 비늘 하나를 기념품으로 가 져와달라는 황당한 부탁까지 했던 것이다. 저 사람들은 300년 전 루트에 리노 대왕이 드래곤 로드와 싸우던 시절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들인가? 저런 황당한 말을 믿고 있다니. 아, 프리스트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 람이 더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반론은 테페리의 프리 스트 제레인트 침버에겐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만약 드래곤 로드가 저 말을 들었다면 대미궁에서 제레인트를 살려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겠군. 제레인트가 우리 일행들에 대한 허무맹랑한 전설을 만들고 있는 동안 출발 채비가 완료되었다. 엑셀핸드는 제레인트의 목을 붙잡아 끌어올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는 얼굴을 하더니 대신 그의 로브 자락을 끌 어당겼다. "이것봐! 출발 안할 거야?" "아, 예. 출발해야지요. 아만다! 그동안 잘 있어요! 고트라드씨, 사미 엘씨도! 하하하! 히드클립씨! 언더힐씨!" 허허, 참.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사귀었군. 제레인트는 그 외에도 꽤 많은 이름을 불렀고 몰려든 사람들은 모두 제레인트에게 열렬한 작별 인사를 보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대한 환송 - 우리에게라기보다는 제레인트에게 보내는 것이지만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출발했다. 맙소사. 꼬마들은 마차 뒤를 따라 달리며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샌슨은 킬킬 웃 으며 말했다. "일단 시장쪽으로 가야 되는데,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갈색 산맥에 도착하자마자 크라드메서가 일어나주면 좋겠지만, 어쩌면 며칠을 계속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 혹은 며칠 동안 크라드메서의 레 어를 찾아 돌아다녀야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치 식량을 준비해가기로 했다. 이런 대인원이 일주일을 먹을 식량이니 만만치 않겠 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리 주시지요. 내가 몰고 갈 테니." 길시언이 고삐를 잡고 곧 마차는 덜커덩 소리를 내고는 출발했다. 나는 오늘도 마차 지붕 위에 앉았다. 왜냐하면 시내 구경이니까. 그리고 네리 아와 운차이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지붕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저렇게 서 로 아웅다웅하면서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다니. 아웅다웅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나 보지? 그 때 유니콘 인에서 아래옷만 입은 남자 하나가 손에 든 윗옷을 마구 휘저으며 달려나왔다. "여보시오! 이봐요, 잠깐! 잠깐 멈춰요! 원 참 일찍들도 출발하네!" 아침 햇살이 그 머리에서 눈부시게 반사되는 암파린 선생이었다. 길시 언은 황급히 마차를 멈추게 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인파들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암파린씨는 마차의 벽을 짚고서 헉헉 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주위에 몰려선 인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고 개를 돌리며 킥킥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면서 윗옷을 입었다. "아니, 이렇게 서두르시다니오. 왜 그러십니까?" 카알은 마차 문을 열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암파린씨는 얼굴 뿐만 아니라 그 이마와 정수리 부분까지 벌개져서는 지붕 위를 향해 황 급하게 말했다. "아, 저, 아가씨? 빨강머리 아가씨!" 네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내가 말해주어야 했다. "옷 다 입었 으니 고개 돌려요." 네리아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왜 그러세요?" "떠나기 전에 꼭 해 줄 말이 있었소. 어제 아가씨가 뽑은 그 패 말이 오." "예? 아, 그거요?" "그래요! 그거 최고의 운이오. 저 분 말마따나 천기를 누설하게 되는 일이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젠장, 아가씨처럼 미녀라면 난 천기 누설죄로 벼락 맞아도 좋아. 아가씨는 말이오, 앞으로 상상도 못할 행운을 가지게 될 거요!" 아이고… 세상에. 난 네리아를 외면하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운차이 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네리아는 놀람 반, 기쁨 반의, 어쨌든 희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예? 아, 그래요? 그렇다구요? 아, 고마워요! 그런데 이렇게 급하 게 나오시다니, 아, 정말 고마워요!" "천만에! 와하하! 길을 떠나시는 거요? 그럼 그건 행운을 찾아가는 길 일 거요! 가슴을 활짝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오! 가장 행운을 많 이 실은 바람이 아가씨에게 불 거요! 복된 길 되실 거요!" 길시언은 싱긋 웃고는 다시 고삐를 잡아챘다. "이랴!"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네리아는 계속해서 뒤를 향해 손을 저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암파린씨! 암파린씨도 항상 즐거운 여행 되세 요!" "핫하하! 즐거운 여행을!" 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똑바로 앉은 네리아는 무릎을 모아 감싸쥐더니 킥킥 웃기 시작했다. 흠. 그래도 부탁해두길 잘했군. 운차이 는 내게 재미있는 의미가 담긴 것 같은 미소를 짓더니 나무토막을 깎아 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이후로도 혼자서 킥킥 웃기를 계속했다. 잠시후 마차는 유니콘 인을 멀리 남겨두고는 시내 중심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음. 확실히 시내라서 볼거리가 많군 그래. 지붕 위에 앉기를 잘 했어. 아무리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불길한 전선 소식과 헛소문이 돌아다니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바이서스 임펠은 300년 동안 굳건이 영화를 지켜온 바이서스의 수도다웠다. 쌀쌀한 초겨울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주로 아침과 오전 업무에 바쁜 사람들이 었다. 우유 수레를 몰고다니며 고함을 지르는 우유 장수의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울렸다. 아침 옷 배달을 위해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옆에 끼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처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겨드랑이에 커다란 책을 낀 채 어딘가의 학교, 혹은 사숙으로 걸어가는 젊은 학생들의 바쁜 걸음. 그런 학생들의 얼굴 중엔 불카하게 취한 얼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 다. 아마 군대와 학교 양쪽을 두고 고민하느라 술을 가까이 하게 되는 거겠지. 옆구리에 연장이나 도시락 등을 낀 채 일터로 나가는 노무자들 의 걸음은 유쾌했고 길거리에 늘어선 빵장수들은 소리높여 그런 노무자 들을 유혹했다. 거의 건장한 어른 팔뚝만한 빵을 휘두르며 악다구니를 지르는 아낙네의 빨간 얼굴에선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 같은 것은 느껴볼 수가 없었다. "꿀빵이오! 꿀빵! 한입만 먹으면 하루 종일 든든한 꿀빵이오!" "여봐요, 학생! 달콤한 살구빵이 있어요! 당근빵 하나 먹으면 추위도 수십 펜큐빗 밖으로 달아난다오!" 음. 아무래도 전통과 관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빵장수들의 유혹도 엄 정한 법도에 따라 시행되는 모양이다. 덩치로 밀어붙이는 계통의 거대한 빵들은 주로 노무자를 그 대상으로 삼았고 입에서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맛을 무기로 삼은 계통의 아기자기한 빵들은 수염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 지만 아직 어린 티가 줄줄 흐르는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것 같았 다. 낄낄거리며 그 광경을 구경하는 내 눈에 파란 머릿수건을 쓴 조그만 소 녀 하나가 들어왔다. 소녀도 아마 빵을 팔려고 나온 모양인지 팔에는 커 다란 바구니를 걸어매고 있었다. 하지만 수줍은 것인지 앞으로 나서지 도, 고함을 질러 손님들을 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심을 굳힌 듯이 입을 조금 열었다가 곧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다행히 그 때 앞에서 다른 마차들이 몇 대 굴러와서 정체를 일 으켜서 우리 마차는 천천히 굴러가게 되었고 난 재빨리 지붕 옆으로 몸 을 내밀면서 외쳤다. "아가씨! 거기 머릿수건 두른 아가씨! 빵 파는 겁니까!" 소녀는 이 뜻밖의 행운에 놀라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날 바 라보았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날 부른 거 에요? 난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빵 주고 내 돈 사가지 않을래요?" "예? 아, 예? 쿠키… 드시겠어요?" 길시언은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곧 마차를 서행시키기 시작했다. 왕자 님. 복 받으시지요. 그런데 빵이 아니라 쿠키인가? 그것도 좋지! 조금 전 아침식사를 든든히 한 참이니. 소녀는 마차 옆을 따라 황급히 걷기 시작했고 난 한 손으로는 마차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붕 가장자리 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손으론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고함질렀다. "그 바구니채로 팔아요! 어차피 긴 여행이 될 테니까! 얼마면 되겠어 요?"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난 그녀의 옷이 먼지와 흙 등에 엉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아침인데 왜 저렇게 옷이 지저분한 것이지? 게다가 아무리 보아도 여행복처럼 보이는 옷이다. 두꺼운 외투에 나막신까지. 소녀는 바쁜 걸음으로 마차를 따라 걸어면서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바, 바구니채로요? 아, 이, 이거 하나 1퍼셀인데…" "바구니까지 2셀이면 되겠어요?" "예? 아, 그건 너무 마, 많은데요?" "모자란 것은 아니죠? 그럼 됐어요! 치마 잡아 올려요!" "예? 치마…요?" 소녀는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간신히 내 말을 이해했 다. 난 동전 두 개를 아래로 떨어트려주었고 소녀는 치마를 들어올려 그 동전들을 받아내였다. 좋았어! 그리고 소녀는 바구니를 두 손으로 들어 위로 올려주었고 난 간단히 그 바구니를 낚아 올렸다. 주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서서 구경하다가 미소를 짓거나 박수를 쳤다. 소녀는 제자리에 서서는 숨을 쌕쌕 몰아쉬며 동전들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외쳤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추우니 빨리 들어가봐요!" 난 낄낄 웃으며 다시 지붕위에 똑바로 앉았다. 네리아는 피식 웃더니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마음이 움직인 거니? 확실히 여자에 약하네." "관둬요. 피난민이에요." "응?" 난 다시 한 번 그 소녀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피난민들이 몰려들긴 하는 모양이네요. 옷도 남루한 여행복이고, 아직 장사에도 서툴어요. 아마 바이서스 임펠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저런 장사를 시작해본 거겠지요." "그런 거니? 음… 그래도 너무 많이 줬어. 저 애가 매일 그런 행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 어쩔래?" "그런 걸 기대할 정도로 멍청하다면?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께서 저 소녀에게 매일같이 나 같은 행운의 소년을 보내주시 겠지요. 그 멍청함에 대한 보답으로." 나무토막을 깎고 있던 운차이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네리아가 쿠키 하나를 꺼내어 들고는 위로 던졌다가 입으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더 니 운차이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네리아는 그 얼굴을 보더니 볼을 크게 부풀렸다.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입에 쿠키가 가득 들어차서 말을 못하는 모양이다. 난 킬킬 웃으며 바구니를 마부석쪽으로 보내었다. "샌슨? 먹을래?" "쿠키? 별 생각 없어." "아니, 쿠키 말고 바구니 말이야." "크악!" ================================================================== 으… 슬럼프, 슬럼프! #7305 이영도 (jin46 ) [D/R] 불길한 예언.....12 01/23 01:11 393 line DRAGON RAJA 12. 불길한 예언……12. 바구니가 지붕 위와 마부석을 돈 다음 난 창문을 통해 마차 안의 사람 들에게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마차 안에서는 제레인트의 환호 소리가 들 려왔지만 잠시 후 제레인트는 기막힌 목소리로 외쳤다. "엑셀핸드! 그렇 게 많이 집어가면 어떻게 해요!"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시장에 도착했 다. 시장의 분위기도 확실히 수도의 시장다운 분위기였다. 이곳에 없는 물 건이 있다면 그건 아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일 거야. 온갖 과일과 음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 군침이 돌았다. 왠 사내 는 자신이 오늘 완전히 망하기로 결심했다고 외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들의 발길을 유혹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저 사내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계속 망할 생각이겠지. 하하하. 그 옆에선 다른 사내 하나가 한 술 더 떠서는 자신은 오늘 물건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참이라고 떠 벌이고 있었다. 저 남자는 아마 틀림없이 고향이 바이서스 임펠일 거야. 운차이는 그리움에 사무치는 얼굴로 어느 포목장수가 휘두르는 포목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칙칙한 표정을 지어요?" "칙칙한… 젠장. 저건 무명이다." "무명? 목화에서 만들어낸다는 천 말이에요?" "아는게 많구나. 목화는 뜨거운 태양빛을 받으며 자라나는 식물이지. 저걸 이 북부의 땅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하." 운차이는 은은한 눈빛으로 그 무명을 바라보며 마치 졸린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새해가 오면 저걸로 Guavrawn을 만들어 입었지… 자이펀 처녀들은 모 두 정숙해서 집 밖으론 그 얼굴을 절대 내보이지 않아. 그렇지만 사람들 은 Guavrawn에 새겨진 수예를 보고 처녀의 솜씨와 인품을 짐작할 수 있 지. 어느 집 처녀의 바느질은 성급하다, 혹은 어느 집 처녀의 바느질은 따스하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바느질이… 따스해요?" "그런게 있나 보더라. 난 잘 모르지만." 하지만 난 잘 모르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 집에서 바늘을 붙잡고 손가 락을 찔리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그래봐야 바느질하지 않으면 도저히 걸치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일 때만 마지못해 하는 바느질이긴 하지만, 그래도 바느질이 따스해? 허, 그것참. "따라서 자이펀 처녀들은 Guavrawn 수예를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기 때 문에 연말이면 그런 난리도 드물지. 고운 색실은 모조리 동이 나고 바느 질 솜씨가 좋은 부인네들은 극진히 대접받으며 집집마다 모셔져간다." "아하? 대단하겠네요? 아니, 잠깐! 그럼 처녀들 대신 부인네들이 바느 질을 한다는 건가요?" 운차이는 의아한 얼굴로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규방의 일에 간섭할 수 없어. 그래서 처녀가 바느질을 하는 것인지 불려간 부인네가 바느질을 한 것인지는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 지." "에엣?" "하지만 대개의 경우 부인네는 지도를 하고 처녀가 손수 바느질을 한다 고 알고 있다. 부인네들을 초청할 때도 이렇게 하지. '미욱한 여식의 손 길이 둔하니 부인의 민활하신 손길을 견식하여 그 우둔함을 깨우칠 수 있도록, 부인께서 저희 누옥에 잠시 왕림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 하겠습니다.' 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짓지마. 바이서스어잖 아. 어쨌든 그것은 처녀의 자존심 문제이고, 설령 바느질이 누구의 솜씨 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다시없이 무 례한 행위지. Guavrawn 수예에 관련된 재미있는 옛이야기도 많다. 헤어 진 애인을 수예 솜씨로 다시 찾는 이야기라든지 손을 다친 처녀를 위해 거미가 수예를 대신해 준 이야기라든지." "우와! 해줘요!"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그리고 일이 있잖아." 일? 장 보는 일? 쳇. 그 때 네리아가 말했다. "헤에… 얼굴도 못본 채,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그까짓 수예 솜씨 하나 만 가지고 여자를 골라야 되다니, 자이펀 남자들도 불쌍해." 그러자 운차이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듯했다. 하도 격렬한 변화라서 나도 네리아도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운차이를 바라 보았다. 운차이는 네리아를 씹어삼킬 듯이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돌리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수예는 처녀의 고귀한 덕목이라고 전해줘, 후치. 아름다운 용모나 눈 을 어지럽히는 몸매 따위보다는 훨씬 고귀한 것이라고." "라는데요?" "헤? 그게 뭐 덕목씩이나 된다는 거야?" "자기가 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 일을 비난하는 것은 다시 없는 바보라 고 전해줘, 후치." 이번에는 전해줄 새도 없었다. 네리아가 날카롭게 말한 것이다. "뭐야? 누가 못한다는 거야! 그까짓, 바늘에 실 꿰서 천이나 집적거리 는 거 누가 못해!" 운차이의 외면한 옆얼굴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상당히 경멸섞인 미소였 다. 운차이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음흉한 미소만으로도 수십 마디의 말을 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네리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바뀌었다. "너 지금 난 죽었다 깨도 수예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죽었다 깨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고 전 해줘." 운차이의 대답은 평온했지만 네리아의 눈썹은 더욱 곤두섰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어디 두고봐!" 뭘 두고 보란 말이지? 네리아는 갑자기 마차 위에 묶어던 짐더미 중에 서 말들을 마차에 매어두느라 필요가 없어진 안장들을 뒤적거리면서 말 했다. "후치야! 바늘이랑 실 어디 있어?" "윽. 설마 이 위에서? 그리고 뭘 바느질할 생각인데요?" 그러자 네리아는 고개를 돌리더니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 술이 슬그머니 올라감과 동시에 난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안돼요!" "안되긴 뭐가 안돼. 소매 하나만 찢어. 내가 깜쪽같이 집어줄게." "안돼요! 다가오지 마세요! 꺄아악! 이거 놔줘요." 윽. 좀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저건 내가 한 말이 아냐. 나와 네리아 는 얼빠진 얼굴로 동시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곳엔 왠 소녀 하나 가 건장한 남자들에게 손목이 잡힌 채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소녀를 끌 고 가려는 남자들은 모두 3 명인데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에 검을 지니고 있었다. 소녀는 반항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고 주위의 상인들이나 시장 손님들은 놀라면서 물러났을 뿐 소녀를 도와줄 기색은 없어보였다. 난 즉시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쿵! 아이고, 발바닥이야! 뒤에선 네리 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소녀들을 위한 행운의 소년, 또 한 번 나가… 벌써 갔네?" 검을 빼들지는 말자.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본 후에 행동하는 거야. 함 부로 말이나 행동을 꺼내서는 안되겠지. 난 재빠른 걸음걸이로 남자들에 게 다가가서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거봐요. 당신들 연애 한 번도 못해봤지요?" 이 정도면 퍽 정중하잖아? 하하하! 소녀를 붙잡고 있던 남자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만 다른 두 남자들은 어이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중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털복숭이 남자가 말했다. "뭐라고?" "에스코트 솜씨가 별로인 것을 보고 알았지요." 주위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털복숭이 남자는 기막힌 표정으로 날 보더니 히죽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군. 꼬마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꺼져라." 난 다시 뭐라고 한 마디 해주려 했다. 그 때 털복숭이 남자 뒷편으로 끌려가던 소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라? 저 얼굴은 어디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어디더라? 그 때 내 뒷쪽에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 다. "꼬마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면, 난 어떻습니까?" 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샌슨을 보면서 휘둥그레진 털복숭이 남자의 눈을 보면서 즐거워하기 위해서였다. 털복숭이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 니 말했다. "공연한 일에 끼어들지 마! 나설 데가 있고 나서지 않을 데가 있다." 그러자 다시 다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 하지만 저 목소리 는 나서면 안되는데! "난 지금껏 나서는데 있어 허락을 받은 적이 없소. 왜냐하면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야, 이 자식아!" 역시. 주위의 구경꾼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것을 보면서 난 길시언과 일 행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를 잠시 고민했다. 털복 숭이 남자는 화를 내어야 될지 웃음을 터뜨려야 될지를 고민하는 얼굴이 었고 그 와중에 샌슨과 길시언은 각자 내 좌우에 섰다. 음. 그래. 후치 와 두 별이다. 크하하! 그 때 세번째 별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어라? 저 소녀는… 에포닌 할슈타일?" 카알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맞았어! 에포 닌 아가씨. 디트리히 할슈타일의 누나였지? 언젠가 유니콘 인으로 우리 들을 찾아왔던. 그런데 저 소녀가 여기서 뭘하는 거지? 털복숭이 남자는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아니, 네 녀석들이 어떻게 아가씨를 알고 있는 거냐?" 아가씨?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너희들, 할슈타일가의 종복인가?" 이 말에 털복숭이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 모두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털복숭이 남자는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다. 남자는 길시 언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뉘신지요?" 킥킥. 갑자기 말투가 점잖아지는군. 이 친구들 할슈타일 가문의 아랫사 람들인가 보군. 길시언은 팔짱을 끼더니 털복숭이 남자의 얼굴을 비스듬 히 쳐다보았다. 길시언이 팔짱을 끼자 프림 블레이드는 심심해졌는지 갑 자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들은 털복숭이 남자 는 얼굴 색깔을 바꾸는 신묘한 재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털복숭이 남 자가 창백한 얼굴로 목에 걸린 어떤 말을 꺼내놓으려 애쓸 때 길시언의 입이 먼저 열렸다. "난 길시언 바이서스라고 하는데." "전하!" 세 명의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었다. 퍼퍼퍼벅! 누가 보면 꽤나 연습한 동작이라고 생각하기 적당한 모습이었다. 주위의 구경꾼들 은 시장의 소란 때문에 길시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의아한 얼 굴로 무릎을 꿇은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이 무릎을 꿇자 길시언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포닌은 남자들이 무릎을 꿇느라 자유로와졌지만 잠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한 채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모두 일어나시오." "부, 불충을…" "일어나라고 했잖소." 길시언의 위압이 담긴 목소리에 남자들은 모두 벌떡 일어났다. 카알이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당신들이 할슈타일 가문의 사람들이라면, 왜 이런 시장바닥에서 에포 닌 아가씨를 끌고 다니는 거요? 이해되지가 않는데." 그 때 에포닌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남자들은 에포닌을 붙잡으려 했지 만 의외의 상황이라 손을 쓰지 못했다. 에포닌은 길시언의 앞에 쓰러지 듯 무릎을 꿇으며 길시언의 다리를 붙잡았다. 길시언이 당황한 얼굴로 내려보는 가운데 에포닌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왕자님이시죠? 궁성을 떠나 방랑하신다는 길시언 왕자님이시죠? 그 리고, 당신은 그 영지의, 디트리히가 갔던 그 영지의 전권대리인이시 죠?" 길시언과 카알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포닌은 말했다. "절 좀 구해주세요! 저 사람들이 절 데려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제발, 왕자님!" 왕자님이라는 말에 주위의 구경꾼들은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하지 만 나는 에포닌의 말에 더 놀랐다. 자기 집의 하인들에게서 도망가려는 아가씨라고? 털복숭이 남자의 눈에 순간 번뜩이는 빛이 지나간 것 같다. "전하. 저는 할슈타일 가문에 봉사하는 사무엘 드라이첵이라고 합니다 만. 이건 할슈타일 집안의 일이니 전하께선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길시언은 아직까지도 당황한 얼굴로 에포닌을 내려다보다가 사무엘씨를 바라보았다를 반복했다. 에포닌은 길시언의 다리를 마구 잡아당기며 외 쳤다. "전 싫어요! 절대로 그 집엔 돌아가지 않겠어요!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 요! 그런데 뭐가 할슈타일 집안의 일이라는 거에요? 말도 안돼요!" "아가씨!" 사무엘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때 길시언이 손을 들어 사무엘의 말 을 막더니 에포닌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에포닌은 흐느끼며 일어났고 길 시언은 잠시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 에포닌양을 좀 부탁할까요?" 네리아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에포닌을 끌어당겨 안았고 길시언은 그 앞을 막아섰다. 사무엘의 얼굴이 사나워졌 다. "전하!" "누가 주인이냐?" "예?" "네가 주인이냐, 아니면 이 어린 아가씨가 주인이냐? 난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강제하는 법도는 듣지 못했다. 전후사정은 네 말마따나 할슈타일 집안의 일일 테니 내 알 바 아니지만, 난 이런 하극상은 보아넘길 수 없 다. 나라 안의 모든 예법을 감독할 책임이 있는 왕가의 사람으로서도, 한 자루 검을 쥐어 약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기사로서도." 사무엘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다른 두 남자가 굳은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나섰고, 나와 샌슨도 길시언의 옆으로 바싹 붙었 다. 하지만 길시언은 두 팔을 벌려 나와 샌슨을 밀어내듯이 하면서 앞으 로 나섰다. "말해라! 누가 주인이냐?" 사무엘은 사나운 눈으로 길시언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전하. 물론 전 에포닌 아가씨의 아랫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전 후작님 으로부터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제 의지는 곧 후작님의 의지입니다. 설마 전하께선 어버이가 그 딸의 아랫사람이라고 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이번엔 길시언의 입이 막히고 말았다. 이런, 이런. 안되겠군. 그 때 카 알이 재빨리 치고 나섰다. "이것 봐요. 내가 한 마디 할까요?" 사무엘은 눈자위를 희번득거리며 카알을 쏘아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았다. 카알은 그를 마주 쏘아보며 말했다. "길시언 전하께선 할슈타일 후작 가문의 가정내 문제에 대해 간섭하시 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한당 같은 남자 네 명이 스스로를 후작의 하인이라 말하면서 에포닌 아가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 는 장면을 보아넘기실 수는 없지요. 섣불리 이 말 저 말을 다 믿을 수야 없지 않겠소? 따라서 전하께선 후작님께 직접 에포닌 아가씨를 넘겨드려 야 안심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것이 평소 후작님에 대해 신뢰와 애정을 지녀오신 전하께서 취하실 당연한 행동이지요." 크핫! 멋져! 사무엘은 입을 딱 벌린 채 카알을 바라보았지만 카알은 쉴 새 없이 말했다. "따라서 전하께선 에포닌 아가씨를 보호하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일정 이 바쁜 관계로 후작님을 직접 찾아뵙고 아가씨를 보내드릴 수는 없겠군 요. 미안하지만 가서 후작님께 전해주십시오. 바이서스의 왕자 길시언 바이서스 전하께서 에포닌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겠다고. 물론 할슈타일 후작님은 바이서스의 왕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을 가지신 분이니, 길시언 전하께서어버이인 자신만큼이나 극진한 애정으로 에포닌 아가씨 를 돌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실 거요. 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들의 바쁜 일정이 끝나는대로 에포닌 아가씨는 후작가에 돌아가게 될 것입니 다. 에포닌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그보다 빨리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직 아가씨의 뜻이지요. 후작이 여기 계시지 않는 이상 전하께선 아가씨의 의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후작이라 하 더라도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말씀하실 거요." 사무엘은 완전히 입이 막혀버린 듯했다. 그가 더듬거리며 뭐라고 말하 려 했지만 카알은 잠시의 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럼, 수고들 해주기 바라오." 카알은 그렇게 말하면서 재빨리 네리아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그대로 에포닌을 감싸안은 채 마차로 걸어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납치극이었고 사무엘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광경을 바 라보기만 했다. 네리아가 마차의 문을 열었을 때에서야 사무엘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이건 도대체… 응?" 사무엘의 말이 뚝 끊어지면서 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 졌다. 무슨 일이야? 뒤를 돌아보니 마차에선 레니가 고개를 조금 내밀고 있었다. 레니를 보고 놀라다니? 으악! 이런, 빌어먹을! "제기랄!" "왜 그래, 후치?" 샌슨이 물어왔지만 대답해줄 틈도 없었다. 사무엘은? 과연, 사무엘은 길시언에게 후다닥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 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에포닌 아가씨를 잘 부탁드리 겠습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예법이고 뭐고 완전히 무시하면서 말한 다음 길시언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대로 나머지 남자들을 인솔해서 바빠 걸어갔고 길시언과 카알은 멍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더 이상 에포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젠장! 저 친 구는 지금 당장 할슈타일 후작에게 달려가 레니의 일을 말하려는 거겠 지. "뭐야, 저 친구? 포기가 빠른데?" 길시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게 아니지요. 왕자님. 후작은 이제 레니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군. 레니라는 이름이야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붉은 머리 10대 소녀와 함께 있다 는 것은 알게 될 테고, 그러니 레니가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 쯤은 간 단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행동으로 나오게 될 까? ================================================================== 후치 네드발 주인공이자 화자. 매우 낙천적이며 밝게 살려고 한다. 어머니를 어렸을 때 아무르타드에게 잃고, 아버지 역시 포로로 잡혀 있다. 헬텐트 초장이 후보로 살고 있다가 마법의 가을을 맞이하여 카알과 함께 여행을떠나게 되고, 대륙의 존망이 걸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어려서부터 카알 의 집에 많이 놀러다닌(?) 관계로 깊지는 않으나 여러 방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말싸움해서 거의 지지 않는다. 노래를 잘 부르며, 만 드는 데도 소질이 있다. (이미 '성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아소리 요란한데 …'와 '50명의 아이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이라는 명곡을 만든 바 있다.) 자칭+타칭 제미니의 나이트. 타이번에게서 받은 OPG와 술집 해너 아주머 니에게서 얻은 바스타드로 무장하고 있으며, 오크들 사이에는 '괴물 초 장이'로 공포의 대상이다. 현 국왕인 닐시언에게 약관의 기사라는 호칭 받았으나 본인은 거의 무시하고 지낸다. 캇셀프라임 왕의 드래곤으로 아무르타드를 공격하기 위해 헬턴트로 파견되었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도 못하고 패퇴해 버린 화이트 드래곤. 민트를 첨 가한 고기만을 먹는 괴팍한 식성을 가지고 있다.(고기라 함은 쌈장을 듬 뿍 찍어 상추로 싸서 한입에 먹는 것이 최고다!) 디드리히 할슈타일 캇셀프라임의 드래곤 라자. 아직 어린 꼬마이다. 드래곤 라자로서의 힘 은 미약하지만 캇셀프라임과는 상당이 사이가 좋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캇셀프라임과 함께 헬턴트로 왔으나 현재는 행방불명. 드래곤 라자 의 피를 잃어버린 할슈타일에서 사들인 양자이다. 누나인 ?????가 있다. 드래곤 라자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매개체. 직접적으로 드래곤에게 명령을 하지는 않는다. 즉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연결을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물일 뿐 이다. 드래곤 라자의 기운은 일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드래곤이나 같은 드래곤 라자만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만일 드래곤 라자를 잃은 드래곤은 폭주를 해 버린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년전의 크림슨 드래 곤, 크라드메서의 사건이 유명하다. 300년 전에 드래곤 로드 편에 선 할 슈타일 가문에게 드래곤 로드가 300년동안 그 핏줄에게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도록 했다. 물론 드믄 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 중에도 드래곤 라 자가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 수는 극히 드믈고, 힘도 그리 강하지 못하다 고 알려져 있다. 제미니 스마인타그 헬턴트에 사는 붉은머리 소녀, 숲지기의 딸이다. 쉽게 말하는 "말괄량 이"이다. 후치 네드발의 레이디. 술을 한잔만 마시면 이상한 웃음소리를 낸다. 누구의 눈으로 보면 귀엽고 발랄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하 여간 그렇다... 아무르타드 50년전부터 헬턴트를 괴롭히는 블랙 드래곤. 쉽게 말해서 나쁜 드래곤 이다. 현재 헬턴트 영주와 휴리첼 백작을 인질로 10만셀의 보석을 요구 하고 있다. 헬턴트 자작 헬턴트 영지의 영주로 세상에서 가장 싼 땅의 영주이다. 다른 귀족들과 는 달리 영주민들을 끔찍히 생각하는 착한 귀족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 들을 아무르타드에게 잃고는 아무르타드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결국에는 포로로 잡히고 몸값을 요구받게 된다. 카알 헬턴트 현재 헬턴트 가문의 전권대리인. 영주인 헬턴트 남작의 배다른 동생이 다. 멋있는 중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칭 독서가로 정치, 외교, 박물 및 사기에까지 대단히 박학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독설가이기도 하 다. 후치의 말싸움 능력은 거의 이 사람에게 영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싶다. 수준급인 궁사이기도 하며 현재 그룹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영광의 7주 전쟁 바이서스의 건국왕인 루트에리노 바이서스가 대마법사 헨드레이크의 도 움을 받아 드래곤 로드 사이에서 벌어졌던 7주 동안의 대 전투. 이 전쟁 에서 루프에리노 건국왕은 깊은 상처를 입으나 결국 드래곤 로드를 쓰러 트리고는 바이서스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설 로 내려져 오고 있지만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할슈타일 가문 인간이면서도 기사로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드래곤 로드의 편에 섰던 북방의 가문. 영광의 7주 전쟁에서 상처입은 드래곤 로드를 구출해 내고 드래곤 로드에게 300년동안 그 핏줄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축복을 받았다. 바이서스가 건국된 이후 계속 저항해 오다 바이서스 제 4 대 국왕인 에리네드에게 굴복당한다. 그 후, 드래곤 라자가 배출되는 가문으로 바이서스에 복속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다 드래곤 라자가 약속한 300년이 지난 후, 더 이상 드래곤 라자를 배출해 낼 수 없게 되자 드래 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모은다. 센슨 퍼시발 27세. 헬턴트 경비대장, 대장장이집 첫째 아들로 타자 공인 지정 오우 거이다. 음식물에 대한 무한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전형적인 단무지이 다. 대 라이칸스롭용인 은제 코팅 롱소드를 사용하며 대단한 실력과 무 한한 체력을 자랑한다. 강직한 전사이긴 하지만 고향에 두고온 한 처녀 를 생각하는 순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타이번 마법사. 나이는 불명. 눈이 안보이며 전신이 마법적인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몸의 문신이 마법서의 역할을 한다. 발록을 마음대로 불러낼 정도 로 대단히 강한 마법사이지만 그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바이서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헬턴트에 오게 되고, 임시 경비대장역을 맞게 된 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OPG(Ogre Power Gauntlet) 장갑인데 이 장갑을 끼는 사람은 비약적으로 힘을 증가시켜주는 마법 아이템이다. 즉 오우거의 힘을 낼 수 있다는 말인데, 체력이나 정력, 달 리기 등의 능력은 높여주질 못한다. 단지 힘만 세질 뿐이다. 주의할 점 은 OPG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절대로 오우거를 만나면 안된다는 점이 다. 만일 OPG를 끼고 있는 것을 오우거가 보게 된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피해를 입는 오우거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을 죽을 때까지 공격할 것이다. 사라만다의 심장 사라만다의 몸 속에 있는 보석 종류의 돌이다. 이 사라만다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불길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심지어 레드 드래 곤의 화염 브레스에도... 하멜 집사 헬턴트 영주의 집사이다. 전형적인 마음씨 착한 집사 할아버지의 모습. 오크(Orc) 대표적인 인간형 몬스터의 하나로 인간 형태의 모습에 돼지 얼굴을 하 고 있는데, 인간들보다는 약간 작다. 말을 할 때 주로 "르, 취익~" 이런 소리를 내며 콧물과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 주로 무리를 지어서 움직 이며 주로 밤에 행동한다. 하지만 낮에는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햇빛을 싫어한다는 것이지 햇빛을 받으면 재가 된다거나 하지는 않 는다.(드~씨 일가처럼) 우르크(Urc) 같은 변종들은 낮에도 별 무리 없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닌다. (우르크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 일단 오크들은 대부분의 인간형 몬스터가 그러하듯이 생산에 대한 개념이 없 다. 단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인간들에게서 약탈을 하거나 인간 기술자 들을 납치해서 자기들이 필요한 물자를 만들게 한다. 바깥으로 나돌아다 니는 것들은 거의 다 수컷이며 암컷들은 동굴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또 오크는 대단히 복수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자신들의 암컷이 해를 입는다면 물불을 안가리고 복수해 온다고 한다. 어느 정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의 몬스터보다는 엘프나 드워프같은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것이 낫다. 개중에는 아주 드물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오크들도 있으며, 어떤 오크들은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르크(Urc) 오크의 일종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투사 우르크라고 부르는데, 보통 오 크보다는 훨씬 더 키도 크고 강하다. 낮에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다 른 오크들에게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동료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종족이다. 엘프(Elf) 숲의 종족, 유피넬의 어린 자식으로 불린다. 드래곤 라자에서 나오는 엘프는 일반적인 환타지와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 엘프들은 유피넬의 어 린 자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분쟁도, 싸움도 없으며 어떠한 정치체 계나 교섭체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환타지 소설에는 엘프의 우두 머리나 정치 체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부족 협 의체나 의회 같은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환타지 소설에 서 나와 있는 엘프들과는 달리 말을 타고 다닌다. 대부분 자신의 머리카 락으로 만든 활을 가지고 다니며 마법(특히 정령 마법)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번에 두가지 이상의 다른 속성의 정령을 불러 내서 그 힘을 융합할 수 있다고도 한다. 현재 엘프 종족들 사이에 어떠한 일이 계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이루릴 세레니얼 120세, 모든 엘프가 그렇듯이 키가 큰 미인이다. 대마법사 헨드레이크 를 찾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나왔다가 후치 일행과 동행하게 된다. 처음 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적응을 못했지만 여행을 통해 점차 인간을 이 해하게 된다. 엘프 사이에 어떠한 중요한 임무를 띄고 헨드레이크를 찾 아 여행하고 있다. 12인의 다리 휴다인 강의 계곡에 걸려져 있는 다리로 꼭 12명이 같이 건너야 하는 마법의 다리이다. 200년 전에 타이번이라는 마법사가 이곳에서만이라도 어떠한 종족도 싸우지 말고 건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전해 진다. 계곡 양쪽 끝을 마법이 걸려 있는 뗏목이 왕복하는 구조이다. 건 너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떠한 종족이든지 12명이 모두 모인 다음 다리 앞에서 "약속대로 여기 12명이 모였습니다. 계곡을 건너도록 해주세요" 라고 말하면 된다. 엑셀핸드 아인델프 가장 존귀한 자란 뜻인 드워프족의 노커이다. 300살이 훨씬 넘었다. 배 틀엑스를 사용하며 오크를 끔찍히 미워한다는 일반적인 드워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갈색산맥의 드워프 광산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의 정체가 크림슨 드래곤인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사운드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크 라드메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드래곤 라자를 찾기 위해 후치 일행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드워프로는 아주 드물게 말을 탈 줄 안다. 듀칸 버터핑거 호비트. 레너스 시에 살고 있는 자칭 소유권 이전 전문가. 감방을 비롯 한 레너스 시청의 모든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레너 스시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갖히게 된 후치 일행을 도와준다. 트롤 인간형 몬스터. 대개 5.5큐빗에서 6큐빗 정도의 키에 엄청난 힘을 가지 고 있다. 왠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시켜버리기 때문에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공격해야 한다. 대개 가족/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것 같으며 언어 구사능력은 없고 지능수준도 낮은 편이다. 유스네 레너스시에 있는 12인의 여관이라는 여관의 소녀. 당차고 억척스럽고 당차지만 모험자와 마을 소녀의 장밋빛 환상에 빠져들기도 하는 순정파 소녀이기도 하다. 쉐린 12인의 여관의 주인. 유스네의 오빠이다. 험악한 인상이지만 마음씨는 착하다. 음식 솜씨가 기가막히다. 특히 흑맥주가 일품이다. 실리키안 남작 레너스 시에 살고 있는 귀족. 투기장과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투기장에서 몬스터와 싸우게 한 다. 시청 사람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먹여서 영향력도 막강하다. 쉽게 말 하는 나쁜 귀족의 전형. 그런데 과연 진짜 남작인지도 의심스럽다. 아프나이델 실리키안 남작 밑에 있던 젊은 마법사. 마법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뛰 쳐나와 실리키안 남작 밑에서 가짜 대마법사 흉내를 내면서 살고 있다가 후치 일행을 만나 마음을 고쳐 먹고 새 삶을 산다. 클래스 3의 러너로 그리 높은 수준의 마법사는 아니지만 이 세상의 마법사가 대개 그러하듯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왕궁 수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제자이 다.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 신림지(神臨地), 신이 임한 땅이라는 뜻으로서 어떠한 특정한 신의 기 운만이 왕림한 땅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자이펀에서 개발한 특수병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 세이크리드 랜드는 질병의 신인 게덴의 힘을 이용해 서 마을 중앙에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묻기만 하면 그 지역 전체를 온갖 질병이 창궐하게 만들 수 있는 공포의 병기이다. 에델린 미드 그레이드의 치료하는 손 에델린으로 유명하다. 코스모스와 폭풍의 신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Pristess, 여사제)이다. 놀랍게도 그녀는 트롤이다. 어렸을 때 어떤 마법사에 손에 넘어가 마법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에델브로이의 신전에 맡기어져서 프리스티스가 되었다. 강력 한 디바인 파워를 가지고 있다. 바이서스 전역을 순례하고 있다. 터커 올헴 모험가 겸 용병. 칼라일의 영지에서 후치 일행과 만난다. 발록이 지키 는 아비스의 미궁을 들어갈 정도로 실력있는 전사이다. 사만다 크레틴 호비트와 갈림길의 신인 테페리를 모시는 프리스티스이다. 터커 일행이 다. 테페리의 권능은 갈림길에서 드러난다. 어떤 양갈래길, 해야 할 때 나 하지 말아야 할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테페리는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미궁을 돌아다닐 때 큰 도움이 된다. 크라일 왼손의 크라일이라고 미드 그레이드의 유명한 모험가이다. 그의 싸움방 식은 특이하다. 모든 싸움은 왼손으로만 하고 오른손의 팔치온은 결정타 를 먹일 때에만 쓴다. 펠레일 터커 일행의 젊은 마법사. 아주 순진한 청년이다. 여자 손목도 못잡아 본(여자 손목만 못잡아본?)나이에 비해 박학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특 히 지형 및 기후, 지질학에 뛰어난 조예를 가지고 있다. 게덴의 세이크 리드 랜드가 된 칼라일 영지에서 후치 일행과 함께 모험을 한 후, 부모 를 잃은 50명의 아이들을 돌보기로 하고 칼라일 영지에 남는다. 노래 '50명의 아이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의 주인공 운차이 칼라일 영지에서 세이크리드 랜드 실험을 수행하던 자이펀 간첩. 살기 를 다스릴 줄 아는 아주 뛰어난 전사이다. 칼라일 영지에서 후치 일행에 게 붙잡혀 자이펀의 세이크리드 랜드 실험에 대한 증인이 된다. 나중에 바이서스로 전향하게 되고, 국왕 암살사건에 공훈을 세운 뒤로 길시언에 게 자유를 얻고 후치 일행에 합류한다. ================================================================== 12. 불길한 예언……13. "사무엘이 레니를 보았다고?" 카알은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렇지만 후작은 지금 당장 무슨 행동을 취할 수는 없을 거야. 여기는 왕자님이 있으니까.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장을 본 다음 떠나는 것이 되겠군. 서두르세!" 곧 칼잡이들은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마냥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마 이 시장 상인들로서는 굉장한 행운의 날일 거라고 생각되는데, 우 리는 급히 서두르느라 물건 가격을 가지고 흥정하기는커녕 거스름돈도 제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샌슨은 밀가루를 사면서 보석을 꺼 내어 식료품상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에구. 저런 식으로 탕진하다 간 대미궁에서 가져온 보물이라고 해도 감당을 못하겠군. 다행히도 우리 들 중엔 내일 세상의 종말이 다가와도 오늘 시장에서 물건값을 깎아놓고 볼 사람이 있긴 하지만. "농담하지 말아요! 파운드 당 50퍼셀이라고? 이런 냄새나는 고기에 30 퍼셀 이상 주면 무덤 속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날 거야. 30 퍼셀로 해줘요. 예? 거기 있는 거 한꺼번에 다 살 테니까 좀 깎아줘요 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부리나케 물건들을 나르고, 아무렇게나 돈을 던 져주었지만, 네리아가 따라 뛰어다니면서 우리들의 헤픈 돈계산을 관리 했기 때문에 우리는 간신히 파산하지 않은 채 시장 보는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마차 위에는 짐이 가득가득 실렸고 샌슨과 길시언, 운차이는 커 다란 밀가루 부대나 야채더미 등을 급하게 지고 나르느라 몹시 지쳐서는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마차 를 출발시켰다. 이랴! 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는 카알이 에포닌에게 이것저것 묻 고 있었고 에포닌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래요. 디트리히가 실종되고나서, 전 견디기 어려웠요. 전 매일 저녁 디트리히와 만나서, 자기 전에 한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서, 그래서 그 집안에서도 울지 않고… 참고 견딜 수 있었어요. 하지만 디트리히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전 그 집안의 싸늘한 사람들을 더 견딜 수 없었어요.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하지만 전 디트리히가 없는 그 저택에서는 도저히…" "그랬습니까? 음… 의좋은 남매셨군요." 아아. 그런 것이었군.낯모르는 후작가에 입양되어간 남매는 서로에게 말고는 위안받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군. 레니는 동그란 눈으로 에포닌 의 옷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입술을 오므렸다. 음. 이 상한 느낌이 드는데. 여긴 할슈타일 후작의 친딸과 의붓딸이 같이 있는 데 그 옷차림으로 보면 에포닌이 친딸이고 레니가 의붓딸인 것처럼 보이 는군. 헷. 에포닌은 후작 저택 안에서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닌가 싶은 화 려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물에 젖었다가 아무렇 게나 말린 것처럼 보이는데? 에포닌은 슬픈 얼굴이었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트리히는 그래도 캇셀프라임의 라자였어요. 사랑해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후작님은 디트리히에겐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전 디트리히를 따라간 귀찮은 혹이었을 거예요. 보기 싫던 참에 이렇게 나와줬으니 후 작님은 무척 기뻐할 거에요."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아니, 그럴까요? 조금 전에는 하인들이 찾아와 아가씨를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에포닌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앙칼지게 말했다. "체면 때문이지요!" "예?" "체면 때문일 거에요! 저도 알아요. 뮤닌 선생님이 말해줬어요. 뮤닌 선생님은, 그러니까 아이들의 가정교사였어요. 뮤닌 선생님이 다 말해줬 어요! 날 쫓아내면, 할슈타일 후작가에서 쓸모없는 수양딸을 가혹하게도 쫓아냈다는 말이 나올 테니까, 그러니까 밉살스러워도 쫓아내지 않은 거 에요!" 뮤닌 선생이라는 작자는 어린애들에게 아무 이야기나 직설적으로 하는 성격인가 보군. 카알은 에포닌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예. 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후작가에는 돌아가지 않 을 겁니까, 할슈타일양?"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에포닌의 고함소리는 마치 뾰족한 것이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카알은 당황해서 사과했다. "아,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에포닌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더하려는 듯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그 집의 것이라면 아무 것도 필요없 어요. 이름도, 음식도, 옷가지도, 아무 것도 필요없어요!" 아프나이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 작은 소녀가 흥분해서 고래고래 고 함을 지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카알은 멋적은 어조로 말했다. "예… 그럼 에포닌양.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후작가를 나올 거라면 … 어떻게 생각할진 모릅니다만, 세상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 다. 에포닌양 나이의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에포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불안한 눈으로 마차 안의 사 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나름대로 따스한 표정을 지어주었지만 에포 닌은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었을 뿐이다. 방금까지 그렇게 흥분하던 기 색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에포닌은 두 손을 치맛자락 속에 파묻으며 말했다. "전…무섭지 않아요. 어제 오후에 전 정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 때 후작님이 제 옆을 지나쳤어요. 전 인사하려고 했지만, 후작님은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고는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어요. 그 때였어요. 도 저히 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전 그래서, 그대로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 고는 후작가를 도망쳐나왔어요 . 어젯밤은 마시장에 숨어들어가 말들이 먹다 남긴 건초더미 속에서 잤어요. 비가 와서… 건초 더미는 축축하고 무거웠어요. 그 속에서 온갖 생각을 다했지만, 견딜 수 없다고는 생각하 지 않았어요. 전 견딜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말했어요. 예. 전 견딜 수 있어요." 아. 그래서 옷꼴이 저 모양이군. 카알은 동정을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고생하셨겠군요. 하지만…" 에포닌은 더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세요?" "예? 아, 우리는 갈색산맥으로 갑니다만."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않을 거에요? 거기… 헬, 헬?" "헬턴트 말입니까? 물론 돌아갈 겁니다. 갈색산맥의 일이 끝나는대로." "그럼 저 좀 데려다주세요. 전 디트리히를 찾겠어요." 카알은 어두운 얼굴로 에포닌을 바라보았지만 에포닌은 당당하게 말했 다. "전 돈을 가지고 있어요. 디트리히를 찾으며 여행을 다닐 정도는 돼 요." 그렇게 말하면서 에포닌은 품 속에서 둘둘 말린 손수건을 끄집어내었 다. 손수건을 풀어헤치자 그 안에는 보석과 장신구 몇 가지, 그리고 금 화들이 나타났다. 흐음. 후작가에서 가지고 나온 것인가? 그 집안의 것 은 필요없다고 말하더니, 필요에 따라 굽힐 수도 있는 편리한 주장이었 군. 대미궁에 들어갔던 내가 보기엔 어떤 값어치 있는 보물이라기보다는 조 그만 허영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런 허영도 아무데서나 펼쳐보였다간 당장 어느 계곡의 잊혀진 시체가 될지도 모르겠지. 아니, 이 계집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후작가를 나온 거야? 우리를 만나서 천만다행이군. 못된 놈들이라도 만났다간 큰일날 뻔했잖아. 카알은 어두 운 낯빛으로 그 보석들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도로 넣어두세요. 보물이 몸을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여행을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예? 아, 위험하다고요? 음. 무사를 고용할 생각이었어요." 아아… 옛날 이야기를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군. 떠돌이 고용무사와 은 밀한여행 중인 리틀 레이디. 하하하. 젠장. 카알은 저 이야기를 들으면 서도 웃지 않았다. 그는 다만 눅눅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무사? 글쎄요. 나쁜 생각도 아닙니다만 좋은 생각도 아닙니다. 아가씨 에게 행운이 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잘못 골랐다 간 어느 고갯길에서 강도로 돌변할지도 모르지요. 아가씨처럼 집도 절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확실한 소녀는 나쁜 사람들이 가만 둘 리가 없지 요." 에포닌은 풀 죽은 얼굴이 되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했다. "이거저거 따지면서 행동할 순 없어요. 운에 맡기고 행동할 때도 있는 거에요." 에포닌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처세 술, 아마도 틀림없이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책에서 읽은 것이 분 명한 처세술을 말했다. 카알은 이마를 벅벅 긁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 했다. "아가씨의 다른 친척은 없습니까? 몸을 의탁할만한 곳이 없을까요?" "예? 그런 건…" 카알은 침착하게 말했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를 후작가에 도로 데 려다드리지요." "예? 싫어요!"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후작가에서는 멸시를 받으셨다고요? 아가씨 를 동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가씨를 세상에 내보내면 목숨이 위 험합니다. 아가씨는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난 뻔히 알면서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포닌은 최소한 할슈타일 저택에서는 호의 호식할 수 있겠지. 음. 이건 레니가 드래곤 라자로서 호의호식할 수 있 는 경우와는 좀 다르군. 레니는 델하파에 아빠가 있고 가정이 있지만 에 포닌의 경우에는… "싫어요! 그 집엔 돌아가지 않겠어요. 싫다구요! 절 아, 아빠한테 데려 다주세요. 예? 제발!" "예?" 에포닌도 레니의 경우와 같군. 아빠라고? 에포닌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 였고 카알은 의아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이… 할슈타일 후작님 말고요?" "진짜 아빠요! 진짜 아빠에게 좀 데려다주세요. 카알 아저씨는 친절한 분이시죠? 이거 다 드릴께요. 제발 절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 에포닌은 손수건 채로 카알에게 내밀려고 했지만 카알은 손을 저어 그 것을 사양했다. "그건 넣어두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친부께서 생존해 계십니까?" "예." "어디에 계신데요?" "그건…" "에포닌양?" "저도 몰라요." "예?" 에포닌은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엄마가 죽고나서… 아빠는 매일매일 술을 마셨어요. 너무너무 슬퍼하 셨지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디트리히와 함께 절 할슈타일 가문에… 넘 겼어요. 디트리히를 내놓는 조건으로 저도 함께 데려가게 했어요. 아, 절 싫어해서 그러신 것은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아빠는 디트 리히와 저 모두가 후작가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 신 거에요. 후작은 돈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아빠는 돈을 사양하고는 절 디트리히와 함께 보내셨어요." 카알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디 계신지 모르다니오?" "우리가 떠나올 때… 아빠도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나셨거든요." 아이고, 맙소사. 그럼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문제잖아? 카알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친부님의 함자가 어떻게 됩니까?" "그란 하슬러. 하슬러씨에요. 궁성 경비대원이셨던 하슬러씨요." 에포닌은 마차 안의 일행들이 모두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자신 을 쳐다보는 것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카알은 잠시 주먹으로 입을 틀 어막고 있다가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 휴리첼의 마부인 하슬러 말입니까?" 에포닌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예? 어, 넥슨씨와 늘 붙어다니는 그 과묵한 마부 말씀이세요? 그 분 이름도 하슬러인가요?" 제레인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카알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한 목소 리로 말했다. "아, 동명이인이었군요. 예. 그 마부의 이름도 하슬러입니다. 희한한 우연이군요." 허, 그것 참 정말 희한하네. 카알은 이제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 다. "그럼 친부께서 어디 계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래가지고 서야 내가 어떻게 아가씨를 데려다줄 수 있겠습니까?" 에포닌은 그만 울어버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카알은 난처한 듯이 고개 를 가로젓더니 다시 질문했다. "그럼 아버님의 친구나, 뭐 소식을 알만한 사람도 없습니까?" "어… 모르겠어요. 전, 전 그런 것은 잘 모르겠어요. 아빠는 친구를 사 귀지 않았어요." "답답한 노릇이군요." 정말 답답하다. 의붓아버지는 싫다. 친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난 잠시 마음 속으로 세상에 저 어린 소녀를 모시 고 대륙을 방랑하며 잃어버린 아버지와 동생을 찾는 여행을 함께해 줄 인정많은 고용 무사가 남아있을지를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그 때 아프나 이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 생각이지만 물어볼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 에포닌양의 친부에 대해서 말입니까?" "예. 이곳에서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습니다." ================================================================== 12. 불길한 예언……14. "절 만나러 오셨다고요? 아, 전하!" "오래간만이오, 아프나이델공. 일어나시오." 궁성 경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은 몸을 일으키면서 반가운 얼굴이 되 었다. 우리 모두를 주욱 둘러보던 조나단 아프나이델의 시선이 아프나이 델에게서 잠시 멈추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고 조나단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조나단은 아프나이델에게 특별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고 대신 팔을 펼치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군요. 어서들 앉으시지요. 이 런. 자리가 모자라군요. 하하." 우리는 언젠가 한 번 들렀던 경비대장실에 주욱 몰려 앉았다. 방은 넓 고 소퍼도 커다랗지만 우리 인원이 오죽 많아야지. 11 명이나 되는 대인 원이 자리를 잡고 앉는 데에만 해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넓은 경비대장 실이 비좁게 느껴지던 시간이 잠시 흐르고, 모두가 자리에 앉고 나자 길 시언은 웃으며 말했다. "아프나이델공. 공의 안부도 묻고 시사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야 행실 바른 왕자라는 말도 안되는 헛소문… 젠장. 에, 그런 평을 듣겠지만, 시 간이 없으니 그냥 건너뛰겠습니다." 조나단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 생각입니다만 왕자님께서 행실 바른 왕자라는 평을 받기 위 해 특별히 애쓰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조나단은 웃지도 않고 점잖게 말했으며 엑셀핸드는 폭소를 터뜨렸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웃음이 간신히 잦아들고나서 길시언은 머리를 긁적 이며 말했다. "오늘 찾아온 것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카알?" "아, 예. 저, 아프나이델공. 혹 경비대장의 일을 맡으신지 오래되셨습 니까?" "제법 되었지요, 헬턴트공. 그러니까 저 녀석을 거두어들일 때니까요." 저 녀석이라는 것은 아프나이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프나이델은 잔 잔한 미소를 지었고 조나단 역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 놈을 데리고 살려니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었지요. 그래서 궁성 경 비대장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마법사들은 매어있는 것을 싫어해서 이 직업은 구하기가 쉬웠지요. 그 때는 잠시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저 녀석이… 탑메이지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커버렸군요. 가슴 뿌듯하군요." "스승님!" 아프나이델은 비명처럼 말했고 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조나단은 싱 긋 웃으며 말했다. "왜? 좋은 호칭이라고 생각하는데. 하하하! 아, 참. 대대로 임펠리아의 경비대장은 마법사가 맡는다는 것은 잘 아시겠지요?" "아, 예. 핸드레이크가 임펠리아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 지요." "잘 아시는군요, 헬턴트공. 그런데 그것은 왜?" "그럼 혹시 경비대원들 중에 그란 하슬러라는 대원이 있었는지 기억하 십니까?" 카알이 질문을 꺼내자 에포닌은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조나단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란 하슬러? 하슬러라… 아, 그 핫소드(Hot sword) 그란 말이군요. 예. 기억납니다." "에! 그게 아버지의 별명이셨어요! 핫소드 그란!" 조나단은 에포닌의 고함 소리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아가씨는?" 카알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빠르게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의 영애 되십니다… 친부는 바로 그 그란 하슬러씨고 요." 조나단은 순간 이채로운 눈빛을 지었지만 별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핫소드라니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조나단은 손을 모아 입 앞에 세워보였다가 웃으며 말했다. "퍽 오래된 일입니다만 아직 기억이 생생하군요. 그 친구의 검은 엄청 나게 빨랐습니다. 궁성 경비대원들끼리는 매일 대무를 하지요. 하지만 핫소드 그란의 경우엔 대무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란의 검 을 받아낼 수 있는 대원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연습은 커녕 상대가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대무에서 제외되곤 했지 요. 아, 고참 대원을 찾아가 물어보면 아직 그 친구의 전설을 이야기하 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카알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이 왜 경비대원을 그만둔 것인지는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아내가 죽고나서 실의에 빠져 지내던 모습뿐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만두었다고 기억 합니다만." 긴장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에포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카알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를 잘 아는 친구라든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이 에포닌양은 자신의 친부를 급히 찾고 있습니 다만." "그렇습니까? 허, 이런. 그 친구는 사람을 별로 사귀지 않았어요. 과묵 한 성격이었고 사교적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경비대원들은 별로 없을 텐데요." "그렇습니까…." 카알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에포닌은 풀죽은 얼굴 을 하고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고 일행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모두 입 을 다물었다. 그 때였다. 길시언이 그 고요 속에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 어나더니 말했다. "에포닌양. 일단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군요." "예? 옷이요?" "그렇습니다. 옷이 젖어서 좋지 않군요. 그리고 활동하기에도 좋지 않 을 테고. 날 따라오세요. 내 누이에게 찾아가서 옷을 좀 갈아입도록 하 지요. 아, 레니양? 레니양도 같이 가겠습니까? 네리아양도 좋다면…" 네리아는 사양했다. 에포닌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 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저도… 가도 되나요?" "물론이지요. 어서 따라오세요." 레니도 발그레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지 금 옷이 뭐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카알은 의아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 보았지만 길시언은 재빨리 말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두 아가씨가 어떤 모습으로 나 타날지 기대하시며 기다리는 것도 좋습니다. 하하하!" 왠지 길시언답지가 않네? 그러나 길시언은 에포닌과 레니를 데리고서 재빨리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고나자 엑셀핸드가 투덜거렸다. "뭐, 어디 찢어진 것도 아니고 약간 지저분하다는 것뿐인데. 옷은 무슨 옷. 모두들 바쁜 일정인데 말이야!" 그러자 조나단은 빙긋 웃었다. 그는 엑셀핸드를 향해 목례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드워프의 노커여. 왕자님의 행동을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사실은 제 가 왕자님께 부탁했습니다." "예?" 카알이 놀란 목소리로 물어보았을 때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으며 말했 다. "메세지 스펠이었군요? 스승님." "그렇다. 제법이구나. 아, 제가 왕자님에게 메세지를 보내었지요. 그래 서 왕자님이 에포닌양을 데리고 나간 겁니다. 혹 에포닌양이 의심할까봐 레니양도 같이 데리고 나간 것이고요." "무슨… 에포닌양이 들으면 안될 이야기라도?" "그렇습니다, 헬턴트공. 비밀히 말씀드릴 것이 있지요. 핫소드 그란은 몇 년 전, 절 찾아온 적이 있었지요." 카알은 놀란 얼굴이었지만 별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조나단의 이야기 를 기다렸다. 조나단은 손가락을 깍지끼더니 참시 침묵했다. 그는 그렇 게 깍지낀 두 손을 턱밑에 받치더니 눈을 감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 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눈을 뜨며 엉뚱한 말머리를 꺼내었다. "에포닌양의 아우 되는 디트리히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 지요. 할슈타일 가문이 아닌 다른 혈통에서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는 것 은 드문 예입니다만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뭐야, 이건? 대단한 뉴스인데?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골레이드의 라자였던 돌맨도 그런 경우입니다. 양자로 입양 된 거지요." 잘 아는 이야기를 들으려니 좀이 쑤시는군. 난 조나단의 느릿한 말투를 꾹 참으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조나단의 말투는 점점 느려졌다. "그런데 디트리히의 경우에는 양자로 입양할 수가 없는 조건이었습니 다. 친부가 엄연히 살아있었고, 또한 임펠리아 경비대원이었으니까 지체 도 그런대로 있는 집안이지요. 전사로서는 최상급 전사라고 할까요?"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조금 전 그란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은 들으셨지요? 그란의 아내, 그러니까 에포닌과 디트리히의 어머니였던 그 여인은 마가 릿이라고 했지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름답고 품위있는, 자상한 여 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 보지. 난 심드렁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 런데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카알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는 눈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고 있었고, 게다가 주먹은 꽉 움켜쥐어 하얗게 변해 있었 다. 저 모습은 마치, 마치… 내가 그의 모습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고 있을 때 그는 그 모습에 무섭도록 어울리는 극도로 불안한 목소리로 말 했다. "설마… 자연사가 아닙니까?"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화창한 날, 장을 보기 위해 나섰다가 대로에서 괴한들에 의해 난 자되었습니다. 즉사했지요.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제기랄!" 카알은 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샌슨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카알을 보 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나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내가 죽고나서 그란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는 경비대원의 일에도 제대로 종사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취해있거나, 취하지 않았을 땐 술을 마시고 있었지요. 그런 상태로 다른 경비대원을 구타해서 커다란 사건을 만든 적도 있습니다. 당시 전 아무런 사정을 몰랐습니다. 그저 아내가 죽어 자포자기한 상태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가 사고를 일으켜도 크 게 벌하지 않았지요. 그란이 경비대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 가 그런 식으로 낙심해서 인생을 마구 굴리는 것이 보기 언짢아서 사정 을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허락해주었지요. 그 다음 그란은 에포닌과 디트리히를 할슈타일 후작에게 넘기고는 수도를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절 찾아온 것이지요." 카알은 질린 얼굴이었다. 왜 저러시는 거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카알은 그런 질문을 받을 자세가 아니었다. 카알은 계속해서 추궁하는 표정으로 조나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조나단은 잠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핫소드 그란은 다른 사람에겐 들키지 않게 은밀히 찾아와서는 제게 부 탁을 했습니다. 옛 상사에게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제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부탁한 셈이기도 하지요." "무슨 부탁이었습니까? 마법입니까?" "그렇습니다. 핫소드 그란은 자신의 얼굴을 바꿔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얼굴을?" "예. 간절히 부탁했습니다만 저로선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얼굴을 바꿔달라고 말하니, 혹시 어디선가 커다란 사고라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의심도 되었지요. 그래서 이유를 말해서 날 납득하게 하라고 말 했습니다. 그러자 그란은 몹시 갈등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열더군요. 디트리히와 에포닌을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더군요." 카알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아들딸이 보고 싶다고? 제레인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조나단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니, 보고 싶으면 찾아가서 보면 되잖습니까? 어이가 없네 요? 뭐, 자기 아들딸을 남에게 맡겼으니 그 애들에게 미안하기야 하겠지 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까지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카알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침버씨… 아마 그란 하슬러씨로서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을 겁니다." "예? 목숨이오?" 제레인트는 입을 쩍 벌렸고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신대로입니다. 그란은 협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디트리 히를 내놓으라는 협박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공포를 주기위해 그 아 내를 죽인 것입니다. 지독한 일이지요." 머리 속에 벼락이 친 거야.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머릿속이 이럴 수 가 있나. 믿을 수 없어. 그런 말은, 그런 말은 믿을 수 없어! 말도 안돼. 네리아 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은 채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심지 어 아프나이델의 눈에서조차 지독한 살기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카알 이외의 다른 일행들은 이제서야 서늘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 은, 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라고! 조나단의 낮으막한 목소리는 무시무시하게까지 느껴졌다. "예. 그렇습니다. 할슈타일 후작은 디트리히를 가지기 위해서 그란을 협박했겠지요. 물론 그란은 버티려했을 겁니다만, 아내의 죽음 앞에선 그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가 가슴속으로 흘린 눈물은 피눈물이 었겠지요. 그리고 아들딸의 모습을 먼빛으로나마 보기 위해선 목숨을 걸 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제레인트는 크게 헐떨거리며 말했지만 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엑셀핸 드 역시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혁대의 버클을 부서 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샌슨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런 추악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렇소, 퍼시발공." "아니, 전 믿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믿을 말이 따로 있지요! 그건 말 도 안됩니다! 꼬마를 아들로 삼기 위해 그 부모를 죽인다고요?" 조나단은 침울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그랬소. 도저히 못믿겠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란은 쓰게 웃더 군요. 그토록 무서운 웃음은 생전 처음 보았소." 샌슨은 불을 토하 듯이 외쳤다. "그럼! 그럼 대장님께서는 왜 잠자코 계셨습니까! 왜 할슈타일 후작을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란이 증언을 했다면, 그렇다면 확실한 것 아닙 니까! 설마, 설마 목숨이 아까워서 그랬습니까?" 조나단은 더 못참겠다는 어조로 외쳤다. "이거 보시오, 퍼시발공! 그렇게 서툴게 행동했을 거 같소? 천만에! 협 박은 모두 익명이었고 무엇 하나 증거 될 만한 것은 남지 않았소! 그란 이 자신의 아내가 죽은 상황에서 그 생각을 못해본 줄 아시오? 그란은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는 직접 그를 죽일 생각도 했다고 했소. 하지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 게다가 아들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소!" "이런, 개 같은!" 쾅! 샌슨은 테이블을 부서져라 내리쳤다. 손에 이상한 느낌이 와서 내 려보니 난 소퍼의 가장자리를 부숴놓은 상태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 어올려보니 꽉 쥔 주먹 속에는 소퍼에서 뜯겨진 가죽이 한 웅큼 잡혀 있 었다. 손가락을 펴는 단순한 동작이 극히 어렵게 느껴진다. 투둑, 후두 둑. 꽉 쥐어져있던 가죽은 구겨진 모양 그대로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가 죽이 뜯길 때 함께 뜯겨나온 솜과 헝겊 등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아래 에 떨어져 널브러진 소퍼의 파편을 바라보면서 점점 눈 앞이 어지러워지 는 것을 느낀다. 조나단은 소퍼에 등을 기대고선 얼굴의 땀을 닦아내었다. 그는 우리 모 두를 주욱 둘러보고는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기는 일이오… 그래. 할 말은 없소. 내가 과연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그란을 도왔던 것인지 자신할 수는 없소. 어쩌면 나 역시 할슈타일 후작을 무서워한 것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정말 어떤 방법도 떠 오르지 않았소." 카알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믿겠습니다." "고맙소. 후우, 죄와 벌이 같이 다니지 않는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소. 죄 지은 자는 벌받지 않고 그 피해자는 아내를 잃은 데다가 아들딸도 뺏기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 의 목숨도 위협받고 있었소. 그가 섣불리 입을 열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슈타일 후작을 단죄할 증거는 없었지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오. 그란은 그래서 수도를 떠났던 것이었소. 하지만 아들딸의 모습이 도저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거요." "그래서 얼굴을 바꿔달라고 말한 것이었군요. 먼빛으로나마 마음껏 자 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카알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쉬어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니, 내가 너무 흥분해서인지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 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울었습니다…" "예?" 조나단은 먼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 자신을 보내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 다. 아프나이델은 그런 스승의 얼굴을 보면서 깊은 슬픔을 되씹는 표정 이 되었다. "그를 부여잡고, 어른이 되고나서, 인간사를 벗어나 마나에 내 애정을 바치고나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오히려 날 위로하더군요. 허허허. 그가 가장 괴로울 때는 그를 이해하지도 못한, 그리고 그의 슬 픔을 알게 되고도 아무런 일을 해주지 못한 이 눈 먼 상사를, 그가 위로 했단 말입니다." "마음이… 아프셨겠군요." 조나단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조용히 현실로 돌아왔 다. 난 그가 마나에 애정을 바친 이후로 두번째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조나단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 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전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임시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환상을 이용해서 간단히 할 수 있는 마법입니다만 얼굴을 영원히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별별 실험을 다 해보고 온 갖 수단을 동원한 끝에 겨우 얼굴을 바꿔놓을 수 있었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은 계속 생기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핫소드 그란은 그렇 지 않아도 적은 말수가 더욱 적어지게 되었지요. 목소리 때문에 원래 정 체가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맙소사! 일행은 모두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다. 카알은 아랫입술을 깨 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넥슨 휴리첼의…?" 조나단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슬러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지요. 그 사람과는 여러 번 마주쳤으니까 요." "그렇습니까? 아, 여러분들은 넥슨 휴리첼의 반역을 알아내신 분들이니 당연한 일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넥슨 휴리첼의 심복인 하슬러가 바로 핫소드 그란, 그란 하슬러입니다." ================================================================== 12. 불길한 예언……15. 창밖에선 꽃나무들이 계절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아름답게 망울져 피어 나고 있었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데미 공주님의 손길은 저 아름다움을 피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방 안에는 아름다움이란 없다. "이건 지금껏 저와 그란 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에포닌양 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전 몹시 놀랐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인지 도 모르겠군요." "잘된… 일이라고요?" "부탁하겠소, 헬턴트공. 에포닌양이 친부를 찾는다면 그녀를 할슈타일 후작의 손에서 빼어내주시오. 할슈타일 후작도 그녀에게는 별 관심이 없 을 거요. 드래곤 라자는 디트리히였으니까." "그녀는… 이미 할슈타일 저택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더욱 잘되었군요. 그녀를 어디 한적한 수도원 같은 곳에 데려다주시겠습니까? 그랜드스톰 같은 신전이라도 좋겠군요." "수도원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전 지금 당장은 그란과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멍청 한 작자는 하필이면 넥슨 휴리첼 같은 이리를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에, 지금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곧장 교수대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 만 에포닌이 할슈타일 저택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란은 어떻게든 절 찾아올 것입니다. 그럼 제가 그에게 전해주겠습니다." "전해준다고요?" "예. 에포닌이 어디에 있는지 전해주겠습니다. 그러면 그란은 에포닌을 데리고 어딘가로 떠나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요. 그의 불행은 하나 같이 그의 책임 밖의 일이었고, 이젠 그는 너무 오래 미뤄두었던 행복을 되찾 아야 합니다." 카알은 침울한 눈으로 조나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엉뚱 한 말이 나왔다. "그는 반역자의 수하 아닙니까?" "예?" "그는 반역자의 수하라고 했습니다. 넥슨 휴리첼의 다시없는 심복이니 까요. 그런데 아프나이델공은 궁성 경비대장이십니다. 그가 찾아오면 체 포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조나단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카알을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격하 게 고개를 젖더니 말했다. "그 자에겐 죄가 없소! 죄가 있다면 그 넥슨 휴리첼에게 있을 뿐이지! 그란은 양심에 따라 주인을 섬겼을 뿐이오. 난 그렇게 믿소!" 카알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를 신뢰하시는 모양이군요." "신뢰하오!" 조나단은 짧고 강하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보다 부드럽고 침착한 목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 자의 고통을 알고, 그 슬픔을 아오. 아니, 안다고 생각하오. 그란 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오. 사실 디트 리히가 실종되고나서 난 몇 번이나 할슈타일 후작을 찾아가려고 마음먹 었소. 에포닌을 돌려받기 위해서 말이오. 하지만 나에겐 마땅한 구실이 없었소. 그래서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까지 늦어버린 거요." "알겠습니다. 이제 저도 그란 하슬러를 신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카알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나단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카알은 말했다. "에포닌양은 저희들이 보호하겠습니다. 안전하고 좋은 장소를 찾게되 면, 에포닌양이 안심하고 있을만한 장소를 찾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의 여정이 바빠서 이만 일어나봐야겠군요." "예? 아, 알겠소.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럼." 카알은 손을 내밀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조나단은 그 손을 보더니 역시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카알은 그의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에 대해 알면 알수록 보다 뜨거운 적의를 느끼게 되는군 요."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피넬의 저울대는 길지만 헬카네스의 추는 무겁소. 할슈타일이 얹은 무게는 너무도 무겁고, 난 그의 최후에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어줄 거 요. 지금은 그 때를 생각하며 참고 있을 수밖에 없군요." 조나단이 갑자기 표시한 맹렬한 적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어지게 만들 었다. "멋지네요? 아가씨." "아, 이젠 그냥 에포닌이라고 불러주세요.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그래요? 하하. 알았어. 에포닌." "난 어때, 후치야?" "남자 친구 있어? 없다면 내가 도전해보고 싶은데." 레니는 웃으며 주먹을 들어올렸고 난 피하는 척하며 낄낄 웃었다. 에포 닌과 레니는 모두 데미 공주님이 준비해준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도대 체 데미 공주님은 어떻게 저런 옷을 가지고 있었을까? 두 사람 모두 여 행에 대비해서인지 두꺼운 셔츠에 바지, 그리고 자켓과 외투를 입고 목 도리와 장갑까지 갖춘 채 나타났다. 저렇게 차려입으면 따스하고 좋긴 하겠지만 어째 옷들이 하나같이 공주님이 가지고 있을 옷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이 내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이거 말이야? 사실은 내 옷이었어." "예?" "어릴 때 저런 옷을 입고 담을 넘었지. 저건 9살 때 입던 거고, 저건 14살 때 입던 거군. 데미가 아직도 저 옷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 데." 오, 그렇게 오래 된 옷이 저렇게 깨끗해? 데미 공주님의 손길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군. 에포닌과 레니는 각자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 보았다. 길시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입던 옷 물려줘서 미안하오, 아가씨들. 다음에 내가 옷 한 벌씩 선 물할 테니 지금은 참고 마차에 올라줘요. 벌써 해가 높으니." 길시언은 손을 내밀어 레니를 부축하는 시늉을 했고 레니는 방긋 웃으 며 길시언의 손을 붙잡으며 마차에 올랐다. 카알은 에포닌에게 몸을 돌 리며 말했다. "에포닌양. 할슈타일 가문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에포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일단 우리와 동행하도록 합시다." "정말이요? 고맙습니다!" 에포닌은 곧장 카알에게 달려들어 키스라도 할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 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아가씨가 마음 편히 지낼 장소를 물색해보겠습니다. 그 동안만 우리와 동행하는 겁니다." 에포닌은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귀찮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은 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우리 목적을 알지도 못하고 거기엔 상관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일이 끝날 때까진 아가씨를 어딘가 안전한 곳에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예… 거두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카알은 고개를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도중 아가씨의 친부님의 소식도 계속 알아보도록 하 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님의 소식을 가지고 아가씨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요." "예?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그러지요." "정말… 아무런 면식도 없는 저에게… 감사합니다." 카알은 잠시 에포닌을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분을 잊었던 일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아뇨, 그건…" "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야기는 긴 편이 좋습니다만 행동은 빠 른 것이 나을 때가 많지요. 아가씨가 내 제안에 찬성한다면, 이만 출발 하고 싶습니다만." "아, 예. 저… 정말 고맙습니다." 카알은 빙긋 웃더니 길시언의 흉내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에포닌은 활 짝 웃으며 카알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마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그대로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씨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임펠 리아를 빠져나왔다. "아아아! 길시언 왕자님! 식사 준비 끝났단 말입니 다! 밥 한 술 뜨지도 않고 떠나는 겁니까! 또 이러실 거라면 다시는 오 지 마세요! 늙은 궁내부원 가슴에 더 못질하지 말고! 왕자님이야 편할 때 왔다가 마음대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귀족원이나 국왕 전하께서는 절 가만두시질 않는단 말입니다!" 길시언은 따스하게 고함 질렀다. "다음엔 궁내부장에게 뭐 선물이라도 하나 사들고 오겠소!" 난 다시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지붕 아래쪽에서는 네리아와 레니, 그리고 에포닌까지 합세해서 뭐라고 웃으며 떠들었다. 주로 네리아가 에 포닌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 떠드는 모양이다. 그리고 네리아가 마차 안으로 내려가는 대신 카알이 마부석으로 나왔다. 카알은 마부석에 앉은 채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든 모양이다. 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어쩔 생각이세요, 카알?" 카알은 마부석에서 고개를 돌려 지붕 위의 날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인가, 네드발군?" "에포닌 말이에요. 어디에 데려다줄 생각이신데요?" "그랜드스톰을 고려해보긴 했는데, 글쎄. 수도에 있으니 마땅치는 않 군. 후작의 입김이 닿는 장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가까워. 수도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이 좋겠는데." "우리는 지금 갈색산맥으로 찾아가는 중이잖아요. 크라드메서를 만나기 위해. 그런데 중간에 시간을 지체할 수 있나요?" "모르겠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럼, 크라드메서의 일이 끝날 때까지 에포닌을 계속 데리고 있을 생 각인가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길시언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카알은 그에게 조 나단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잠시 후 길시언은 허옇게 질려버린 얼굴로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할슈타일 후작은, 디트리히를 빼앗기 위해 그 어머니를 죽이 고, 그 아버지는 폐인 비슷하게 만든 셈이군요?" 카알은 마차 뒤를 흘깃 돌아보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길시언은 마치 생명이 없는 무엇이 쓰러지는 듯한 무력한 동작으로 좌 석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 다. "이 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죄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러 나 받을 벌은 하나도 받지 않았습니다. 난 도저히 이 자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카알은 길시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전 한 가지가 궁금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넥슨과 할슈타일은 왜 반목하는 걸까요?" "예?" 카알은 천천히 과거를 회상시키는 어투로 말했다. "그 때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할슈타일 후작의 집에서 넥슨의 비밀서류 를 훔치던 때.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이 그 서류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지요? 그는 넥슨에게 반역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를 막기 위해 서류를 가져가던 사절을 붙잡아 서류를 빼앗았다고 말했습 니다." "예. 그렇게 말했지요."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넥슨은 이리라 할 만한 자입니다만, 그렇다 면 할슈타일 후작은 승냥이라고 해야겠지요. 넥슨이 드러내놓고 반역 의 도를 실행한다면 할슈타일 후작은 은근히 반역의 계책을 세워보며 혼자 히죽 웃는 자입니다. 물론 그 의도의 불순함이나 사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슈타일이 넥슨을 저지해야 될 필요 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독수리와 들개는 동업자라고 하지 않습 니까?" 독수리와 들개는 같이 시체를 먹는다. 길시언은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 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내 보기엔 두 승냥이 싸움에 바이서스라는 고깃덩이가 너덜 너덜해지는 듯합니다." "전하." 길시언은 이제 더 이상 화 낼 기운도 없다는 듯이 축 늘어진 채로 웅얼 거렸다. "넥슨의 경우엔 차라리 낫지요. 아직도 그 음흉한 야심으로 크라드메서 를 노리고 있긴 하지만 여러분 덕택에 패퇴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여러분 들과 나 모두가 현재까진 그를 억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슈타일이라 는 승냥이는 눈이 넷 달린 놈인 모양입니다. 놈은… 지골레이드를 풀어 줌으로써 바이서스를 약화시키고, 돌맨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역시 크 라드메서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결정적으로 책잡힐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자는 위험부담을 덮어쓰지 않으려드는 소악당 같군요. 진짜 악당보다 더 음험하고 파렴치한 놈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 "뭐?" 운차이의 말이었다. 길시언은 뒤를 돌아보았고 나도 운차이를 바라보았 다. 운차이는 태평한 모습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길시언은 섬쓺한 눈 초리로 운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슈타일이 악당이 아니란 말이냐?" "아니. 내가 말한 것은 돌맨에 대한 것이다." 길시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돌맨?" "그래. 할슈타일 후작이 크라드메서를 노리고 있긴 하겠지만, 돌맨은 아냐. 돌맨은 불안한 카드지. 그에 비하면 레니는 으뜸패라 하겠고." 갑자기 왠 도박사 같은 말이냐?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말 하려 했지만 운차이는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나이프와 나뭇토막만 내려 다보면서 말했다. "감시하는 자들이 있군. 저쪽 왼쪽 골목 어귀… 멍청하게 쳐다보진 않 겠지." 순간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목을 간지럽히는 옷깃의 느낌마저 낯설 게 느끼며 나는 조용히 바스타드를 등에서 풀어서 다리 앞에 내려놓았 다. 지붕 위에 앉은 채로 바스타드를 뽑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리곤 기 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멍청하게도' 왼쪽 골목 어귀를 바라보았다. 운차 이가 혀를 찼지만 이미 늦었다. 젠장! 눈이 마주쳐버렸어! 골목 어귀엔 한 사나이가 무심한 얼굴을 한 채, 그냥 지나가던 인파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소가 섞인 6두 마차를 보 는 시선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고 흠잡을 데라곤 전혀 없는 시선 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주위에도 많이 있어서 유난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슬그머니 시선 을 돌렸고 그 시선의 회피는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카알은 팔짱을 끼더니 옆건물의 빗물받이 통에서 아직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은 이미 사무엘에게 보고를 받은 모양이군요." 길시언은 어젯밤에 내린 비 때문에 대로에 만들어진 물자국들을 재미있 다는 듯이 바라보며 역시 무심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올까요." "일단 대로에서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문 밖에서 우릴 공격할까요?" "그래줬으면 좋겠습니다. 피를 보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길시언은 짧고 잔혹하게 말했다. 카알은 고개를 조금 숙이는 것으로 당 혹감을 표시하며 말했다. "전하?" "길시언입니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카알과 길시언의 대화가 끝나자 샌슨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들에게 투덜거리며 고삐를 놀렸다. "에라, 이 자식들아. 여행은 시작도 않았는데 벌써 게으름을 부리냐?" 샌슨의 말을 마지막으로 마부석의 세 남자는 다시 조용한 침묵 속으로 들어갔고 지붕 위의 운차이도 한결 같은 태도로 나무를 깎았다. 오전의 햇살이 따갑게 내려쬐고 있었다. 사각, 사각. 운차이의 손놀림 에 따라 티끌들이 긁혀나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젠장. 난 왜 저렇게 침착할 수가 없는 거지? 자신도 모르게 다시 그 남자를 바라보다가 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기 직전, 골목 어귀에 서있던 남자는 골목 안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 12. 불길한 예언……16. 마차는 분주히 바이서스 임펠의 낮을 달려 이윽고 성문에 이르렀다. 임 펠 리버 위에 걸려있는 다리로 나서자 황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것이 있어 바람의 차가움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 창문으로 네리아가 고개를 내밀면서 말했 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머나? 왠 사람들이?" 임펠 리버에 걸려있는 다리는 소규모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려고 들었고 그 래서 지금 다리 입구에서는 작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소 경비대 원들이 모조리 몰려나와 바이서스 임펠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원이 모자란 것인지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동안에 늘어서버린 인파들 가운데서는 고함 소리와 거친 명령, 간혹 욕설들이 들려왔다. 그 불안스러운 소음들 사이로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 소리도, 그리고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의 숨죽인 목소 리도 애처롭게 들려왔다. 그리고 지평선쪽으로도 어제 밤새도록 걸어온 것이 분명한사람들의 모습들이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가족들 이나 친지들인지 4, 5명, 혹은 8, 9명 등으로 무리를 이루어 걸어오고 있었는데, 소달구지에 가족들을 태운 채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었 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인 채 두 발로 힘겹게 걸어오는 사람들도 꽤 있 었다. "이런… 피난민들이군." 카알은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길시언은 그만 목이 꽉 막힌 표정 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소처럼 눈을 껌뻑거리며 그 모 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비대원들은 들어오려는 사람들만 해도 제대로감당하지 못하고 있어 서인지 나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경비대원 하나가 우리 를 담당했지만 그 대원은 두어 마디도 묻지 않았다. 6두 마차가 통과하 는 동안 다리는 잠시 통행 금지가 되었고 그래서 피난민들은 옆으로 물 러난 채 조용히,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다렸다. 샌슨은 황급히 마차를 다리에서 빼내었고 추위에 지친 피난민들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다시 경 비대원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찾아왔던 고요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다시 다리 입구에서는 거친 소음만이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되었다. 길시언은 간신히 입을 열어 샌슨에게 말했다. "잠시… 마차를 세우시오." "알겠습니다." 샌슨은 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길 옆으로 마차를 빼내어 정지시 켰다. 그러자 길시언은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더니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가서는 다리에서 소란을 부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뒷모습뿐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그의 등에서 시선을 돌려 지금도 계속 불어나고 있는 피난민들의 행 렬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행렬이라고 표현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한 무리 한 무리가 대인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경비대원들은 신 경이 곤두선 채 피난민들을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 이었다. 길시언은 갑자기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난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의 뒤를 따랐다. 내 뒤를 이어 운차이도 뛰어내렸고 마부석에 앉아있던 카알도 따라내렸다. 그러나 길 시언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갔다. 그는 다리에 멈춰서서는 경비대원들을 주욱 둘러보더니 한 경비대원을 붙잡고 말했다. "누가 지휘자요?" 경비대원은 잠시이상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몰려드는 피난민 한 가족을 조사하던 참이라 별 말 하지 않고 손가락을 뒤로 젖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마에 주름살이 깊이 패인 중년 병사 하나가 역시 다른 무리 하나를 맡아서는 조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소? 총인원은? 영주의 증명서는 물론 있겠지요? 없다고? 젠 장! 이름과 성별, 나이를 모두 말하시오. 특징도. 무기를 소지한 자는 없소? 이걸 왜 하냐고? 좋은 질문이군,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 니까! 이런, 제기랄. 누군 당신네들 추운데 세워놓는 것이 재미있어서 이러는 줄 아시오? 탈영병이나 간첩이 숨어들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오! 나도 죽을 맛이오!" 길시언은 그 말을 듣자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는 뒤로 돌아서더 니 우거지상을 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카알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길시언?"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조사를 간략화할 수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들 이 추운 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하지만 물어볼 필요가 없을 듯하군요. 저 병사 역시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군요." 카알은 몰려든 인파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추위와 피로 에 젖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일상적인 여행자들과 달리 저 피난민에는 어린애나 노약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힘든 피난길에 지 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길 옆에 만삭이 된 부인 을 눕혀놓고는 부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부인은 진통이라도 느끼는 것인 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입을 꽉 다문 아낙네와 칭얼거리 는 딸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 아낙네는 딸의 칭얼거림에도 상관하지 않고 산모에게 다가가서는 남자와 함께 산모를 돌보기 시작했다. 딸은 어머니 가 떠나자 곧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 소리에 다른 꼬마들 도 울기 시작했다. 더 참지 못한 몇몇 남자들이 고함을 버럭 질러대기 시작했고 어머니들은 황급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자녀들을 부둥켜안았다. 그 중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국왕의 이름을 저주하는 아낙네의 모습 도 있었다. 길시언의 얼굴은 갈수록 참혹해졌다. 카알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조사를 간략화할 수 없다면, 그럼 대신 다른 것을 좀 물어봐주시겠습 니까?" "예?" 잠시 후 초소 경비대장의 반신반의하는 표정 속에 허락이 떨어졌고 우 리들은 즉각 주위를 돌아다니며 잡풀과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아 작은 개 미집 정도로 보이는 장작 더미를 만들어내었다. 네리아가 자신의 단검을 이용해서 그 장작 더미에 불을 붙이자 미약한 연기와 함께 작은 불길이 일어났다. 피난민들은 저 작자들이 도대체 무슨 불장난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프나이델은 몰려든 모 든 피난민들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휘젖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 아무리 추운 날씨 때문에 심사가 사나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겠지. 그리고 아 프나이델의 캐스팅이 끝나자 찻주전자 하나 끓이기에도 모자라 보이던 불길이 삽시간에 10 큐빗 정도까지 솟아올랐다. 게다가 어찌나 뜨거운지 10 큐빗 이내로는 접근도 못할 정도였다. 피난민들은 놀란 얼굴로 불길 을 바라보았고 우리 일행 중에서도 레니와 에포닌은 입을 딱 벌리고는 다물 줄을 몰랐다. 어쨌든 몰려든 피난민들은 곧 그 불길 주위로 몰려들 어 추위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손을 탁탁 털더니 이마를 닦으면서 말했다. "저 불길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만." "상관없습니다. 해가 좀 더 높아지면 온기도 되살아날 테니까요."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히죽 웃고는, 경비대원들에게 계속해서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던져넣으라고 말한 다음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피난민들에게 서 도망쳐 마차쪽으로 달려가버렸다. 길시언도 보다 밝은 얼굴로 마차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까지 산모를 돌보고 있던 제레인트와 네리아가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른 다음 우리는 그 신나는 불길을 뒤로 한채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 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깎고 있던 나무토막을 던져 둔 채 파이프를 피우고 있던 - 조금 전 불길을 일으킬 때 불을 붙여둔 파이프 였다. - 운차이는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 다. "웃기는 점을 발견했다." "예?" 운차이는 다시 파이프 부리를 물고는 조금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일행은 멈춰서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군." "예? 아… 하하하." 운차이는 파이프를 손에 들고는 그 부리를 이빨에 딱딱 부딪히면서 하 나씩 열거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너희 일행은 칼라일 영지에서도 제멋대로 멈춰섰고,(딱) 칸 아디움에서도 그대로 멈춰섰다.(딱) 오늘 아침엔 에포닌 때문에 미적 거렸고,(딱) 방금 전에는 피난민들 때문에 멈춰서는군.(딱)" "그렇게 주욱 열거했으니, 이젠 결론을 말해봐요?" "글쎄.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다 라는 결론이 어떨까." 카알은 주의를 환기시키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낮고 빠르게 말했다. "중요한 점을 지적해줘서 고맙소, 운차이씨. 어쨌든 급한 것은 급한 것 입니다. 오늘은 11월 26일… 바로 한 달 전, 10월 27일에 우리는 그랜드 스톰에서 그 말을 들었습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한 달 가량 남 았다는 말 말입니다. 정확하게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예상일을 굳이 말하자면 바로 내일입니다. 퍼시발군? 우리가 갈색산맥에서 바이서스 임 펠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렸던 것 같은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크라드메서가 갈색산맥에 있다는 것만 알지 정확하게 어디 있 는지는 모르잖아요." 내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카알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렇지. 하지만 그건 천천히 걱정할 문제고, 지금 당장 걱정해 야 될 문제는 세 가지야." 길시언과 내가 바라보는 가운데 카알은 잠시 고개를 들어 쉼없이 다가 오는, 하지만 영원히 다가오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이전에 그를 발견할 수 있는가. 둘째, 사라졌던 넥슨 일행은 우리가 바이서스 임펠을 나서면 다시 덮쳐오겠지. 그들의 방해를 어떻게 따돌리는가. 셋째, 이제 할슈타일 후작도 움직이 기 시작할 것이 확실하니, 그의 방해를 어떻게 따돌릴 것인가." "그걸로 끝이에요?" "끝이냐고? 네드발군, 장난치지 말게. 이건 단기적인 문제야. 중장기 문제로 넘어가면 더 골치 아파. 할슈타일 후작의 음모 때문에 약화된 바 이서스의 국방력 문제, 자이펀에서 사용하는 질병의 무기에 대한 대책. 일단은 두 가지뿐이지만 보통 큰 문제들이 아니군." "그걸로 끝이에요?" "응? 뭐, 그외에도 많지. 오늘 아침에 생겨난 에포닌양의 문제만 하더 라도…" "또?" 카알은 그제서야 눈치를 채었다. 그는 히죽 웃더니 말했다. "올해 말까지 웨스트 그레이드,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 끝없는 계곡에 서 아무르타트를 만나야 되지." 난 헤헤 웃고 말았다. 이왕이면 아무르타트의 일을 이 모든 일에 대한 우선순위라고 말해주었으면 더 좋겠는데. 하지만 그건 너무 큰 희망이고 입밖으로 내긴 좀 뭣한 소망이라서 난 그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 나 길시언은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여행의 목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카알께서는 다른 모든 일이 미완되었을 경우에라도 연말이 다 가오면 웨스트 그레이드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카알은 길시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 손 닿는 일, 제 손을 필요로 하는 일, 제 손에 맡겨진 일을 해야 되니까요." 길시언은 잠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카알처럼 영원히 다가오지만 절대로 도달할 수는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 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말입니다. 레니양에게 했 던 부탁을 그대로 카알에게도 하고 싶군요." 카알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길시언. 당신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난 헬턴트 마을의 독서가입니 다. 그리고 마차 위의 이 소년은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이며, 지금 우리 모두를 태운 마차의 고삐를 쥔 저 청년은 헬턴트 마을의 경비대장 입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헬턴트도 없어질 겁니다." "설령 헬턴트가 없어진다 해도 나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반면, 내가 없어지면 헬턴트도 없는 것입니다. 헬턴트는 나의 헬턴트이고, 바이서스 는 나의 바이서스이니까요." "…나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까?" "글쎄요. 제 말에서 희망을 찾아보십시오." 이건… 정말 무슨 문답이 이 모양이지? 난 길시언이 대답하지 못할 거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시언은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우. 헬턴트의 카알 대신, 바이서스의 카알을 믿어보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멈추었다. 헤엣? 괴상한 대화로군. 마차는 지평선을 향해 완전한 직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섯 마리의 말 과 한 마리의 황소는 거칠 것 없는 평야를 만나 마음껏 다리를 놀려대고 있었다. 한 달 전 우리는 이 길을 거꾸로 달려오고 있었지. 두 개의 달 이 동시에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아! 그럼 오늘은 한 개의 보름달과 한 개의 반달이 떠오르겠군? 오늘 밤에 무슨 달이 떠오르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살아 서 달을 볼 수 있기만 하다면야 반달이 뜨던 보름달이 뜨던, 쥐 파먹은 팬케익처럼 생긴 달이 뜨건 무조건 감사하게 여겨야 되겠다. "매직 미사… 어쿠!" 아프나이델은 또다시 캐스팅을 끝내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졌다. 떨어진 다! 제길, 안돼! "아프나이델!" 난 아프나이델의 팔을 부여잡고는 힘껏 당겼다. 급하게 당기느라 힘이 너무 들어갔다. 마차 옆으로 떨어지던 아프나이델은 잠시 허공에 뜬 모 양이 되었다. 그리곤 그대로 허공을 반바퀴 돌아 다시 마차 위에 내려꽂 히고 말았다. 쩍! 아프나이델은 여름날 돌 맞은 개구리처럼 지붕 위에 네 활개를 펼치고 엎어졌다. 난 그가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가지 않도록 무릎으로 그의 등을 찍어누르며 외쳤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요!" 말하면서도 그가 고마워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과연 그는 전혀 다른 말을 외쳤다. "으아아아! 후치, 왼쪽!" 아프나이델은 짓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왼쪽?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맹렬하게 달리는 마차 옆으로 나란히 달리는 말이 보였다. 두두두두두! 말의 갈기가 정신없이 흩날린다. 그리고 그 안장 위에 앉아있는 복면 전 사는 마차 창문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애쓰고 있었다. 지붕 아래에서는 레니의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꺄아아! 저리 치워! 이거 놔! 으아아악! 아빠앗!" 난 바스타드를 위로 들어올렸다. 검집째로 후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팔을 들어올린 순간 몸의 균형을 잃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지붕을 짚어야했다. 다음 순간 마차 문이 벌컥 열려버렸다. "으 아아아!" 마차에 매달리려던 복면 쓴 남자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낙마한 남자는 삽시간에 뒤쪽으로 멀어져갔다. 덜컹덜컹! 마차문은 요란 하게 흔들렸고 문을 걷어찬 엑셀핸드는 다시 문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 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남자 하나가 맹렬하게 말을 몰면서 달려왔 다. 남자는 검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후치잇! 나 잡아!" 네리아는 지붕 위로 몸을 던졌다. 주루루룩! 그녀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지기 직전 그녀의 허리띠 뒤쪽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지붕 위로 어 깨를 내밀더니 두 손으로 쥔 트라이던트를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부우 우웅! 접근해서 엑셀핸드를 공격하려던 전사는 네리아의 트라이던트를 피해 다시 멀어졌다. 난 몸을 휙 돌려 아프나이델에게 엉금엉금 기어가 며 외쳤다. "아프나이델! 어서 캐스팅해요! 어서!" 부탁은 했지만 이건 말도 안된다.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마차 지 붕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위아래 이가 부딪혀 모조리 뽑혀 나갈 지경이다. 말도 제대로 안나오는데 캐스팅을 하라고? 아프나이델은 고개 를 가로저었다. "못해, 불가능, 우와아!" 콰광! 무엇에 걸린 것인지 마차가 위로 떠올랐다. "우오우, 제에에기 랄!" 충격으로 몸이 떠오르면서 지붕 위에서 튕겨져나갈 뻔했다. 아무렇 게나 허우적거리던 손에 밧줄이 잡혔다. 지붕 위에 짐을 매어둔 밧줄이 다. 밧줄을 잡아채는 순간 팔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며 위로 떠오르는 아프나이델의 어깨를 왈칵 잡아당겼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호되게 마차 지붕에 부딪혔다. "으윽!" 그 때 운차이 의 힘겨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이이익!" "맙소사, 운차이!" 운차이의 머리가 지붕 오른쪽 가장자리 옆으로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 다. 그는 지붕 가장자리에 팔목을 걸친 채 마차 옆에 매달려있었던 것이 다. 마차는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고 운차이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마차 안에서 제레인트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으아악! 운차이씨! 잠깐, 문을 열어…" "안돼! 문 열지 마!" 지금 문을 열면 운차이는 그대로 문에 밀려 떨어져나갈 것이다. 난 생 각할 틈도 없이 몸을 구부렸다. 밧줄에 발목을 걸고 그대로 몸을 날린 다. 퍽! 배가 지붕에 부딪히며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내뻗은 손에 온차이 의 손등이 만져졌다. "됐어! 잡았어!" 그 때였다. 운차이의 등 뒤로 마 차 옆에 붙어선 전사 하나가 보였다. 전사는 한 손으로 고삐를 몰아쥐더 니 다른 손으로 등 뒤의 검을 뽑기 시작했다. 그대로 마차에 매달린 운 차이를 베어버릴 태세다. ================================================================== 12. 불길한 예언……17. "안돼!" 인정사정없이 운차이를 끌어올린다. 파아악! 그 순간 운차이는 발을 굴 러 마차 옆벽을 걷어차며 솟아올랐다. 운차이는 지붕 위에 떨어졌고 전 사가 휘두른 검은 마차 옆벽을 뚫어버린다. "꺄아아악!" 마차 안에서 에 포닌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 그러나 검이 마차 옆벽을 뚫으면서 탁 걸려 버리자 전사의 손목이 뒤로 거세게 젖혀진다. "크아악!" 전사는 검을 놓 치고는 다시 옆으로 멀어졌다. 검은 그대로 마차 옆벽에 꽂혀 덜렁거렸 다. "꽉 잡아!" 이번엔 샌슨의 경고가 있었다. 쿠광쾅! 마차바퀴가 부서 져나가는 줄 알았다. 다리가 부웅 떠올랐지만 제각기 손으로 뭘 붙들고 있었던지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마차는 옆으로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다가 용케 균형을 잡고 달려간다. 힝힝힝힝! "샌슨! 마차가 팬케익이냐! 뒤집지 마!" 마부석에 있던 샌슨은 채찍을 벼락처럼 휘두르며 응수했다. "그 말은 저 자식들에게 해! 팬케익에 개미새끼 몰려들 듯이 달려들잖 아!" 몇 명이 떨어져나갔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전사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 다. 다행히도 기사(騎射)에 능한 작자는 없는지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 다. 하지만 전사들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간신히 벌려놓은 거리 는 무정하게도 좁혀졌다. 운차이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아프나이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밧줄을 붙잡은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거칠게 멱살이 잡혀올려지자 당황한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 이는 신기할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아프나이델, 이 병신아! 지금 마법사가 필요하단 말이야!" 젠장, 원할 것을 원해야지! 이 지경에 어떻게 캐스팅을 하라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망연하게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이를 갈았다. 운 차이를 말리려 들 때 달려오던 전사들은 다시 우리 옆으로 붙어섰다. 네 리아가 기합을 질렀다. "이야아아! 꺼져, 이 자식들아!" 트라이던트가 무섭게 휘둘러졌지만 전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란히 달렸다. 그래서 트라이던트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게 되었고 네리아는 자 칫 그대로 마차 옆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달려오던 놈들은 곧 우리 앞 쪽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다가 놈들은 흘깃 옆을 보며 거리를 재었다. 마 부석으로 뛰어들 작정이야! "너, 이름이 사무엘이었나!" 길시언은 방패는 포기한 채 한 손으로 마차 모서리를 잡고 일어났다. 다가오던 전사는 흠칫하더니 역시 한 손으로 고삐를 몰아쥐면서 다른 손 으론 복면을 확 끌어내렸다. 드러난 얼굴은 과연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그 전사였다. 그는 복면을 집어던지더니 롱소드를 뽑아들면서 맞받아 외 쳤다. "그렇다! 길시언, 이름만큼의 솜씨인지 두고 보지!" "유언이 조악해!" 길시언은 마차 옆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매서운 기세로 프림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카카캉! 사무엘이 휘두른 검과 프림 블레이 드가 부딪히면서 바위에 벼락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불꽃이 튀면서 다 가오던 사무엘은 팔을 떨면서 다시 멀어졌다. 하지만 길시언 역시 균형 을 잃으며 다시 마부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 드디어 간절히 기다리 던 소리가 들려왔다. "파이어볼!" 푸화화각! 마차 뒤로 불꽃의 구가 쏘아져나갔다. 달려오던 전사들은 날 아오던 화염의 공을 피하려다가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파 이어볼이 꽂혔다. 콰아앙! 맹렬한 불의 폭풍이 일어났고 말들은 다리를 부러트리며 뒹굴었다. "푸르힝힝!" 말 위의 전사들은 몸에 불이 붙은 채 마치 불새처럼날아올랐다. 불새의 비약은 짧았고 잠시 후 전사들은 그 대로 땅에 얼굴을 박으며 나가떨어졌다. "으아아아!" 그들은 땅에 부딪 힌 충격도 잊어버린 채 불을 끄기 위해 뒹굴어야 했다. "우와아아! 탑메이지!" 고개를 돌려보니 아프나이델은 다리를 짐더미 속에 박은 채 몸을 고정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운차이가 등으로 그의 상체를 받쳐주고 있었다. "하면 되잖아?" 운차이는 씩 웃으면서 말했고 아프나이델은 간신히 고개 를 끄덕였다. 옆을 돌아보니 사무엘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손을 돌려 사무엘을 겨냥했고 그러자 사무엘은 기겁하면서 멀어졌다. 그러나 달려오는 복면 전사들은 도대체 끝이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물리친 녀석이 적어도 예닐곱 명은 되는 거 같은데 아직도 그 두 배는 되는 인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경장을 한 전사들에다가 말들도 모두 우수한 놈들이었는지 무서운 속도를 내고 있었다. 죽죽 달려온 전사들은 다시 마차 옆으로 다가섰다. 이제 지겨워! 그리고 사무엘 녀석도 다시 악에 받힌 표정을 짓더니 마차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놈은 지붕 위로 뛰어들거나 마부석으로 뛰어드는 대신 이번엔 마차 바퀴를 노려치기 시 작했다. 챙캉! 검이 마차바퀴에 부딪히면서 마치 회전숯돌에 검을 들이 댄 것처럼 검이 진동한다. 파바바밧! "이런, 안돼!" 네리아는 기겁하면서 트라이던트를 찔렀다. 사무엘은 다시 멀어졌지만 곧 다시 다가서며 뒷바퀴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자 다른 복면 전사들도 반대쪽으로 돌면서 반대쪽 바퀴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만 일 저 자식들이 바퀴살 있는 곳에 검이라도 찔러넣으면 끝장이다! 그 때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다. "후치! 밀가루!" 뭐? 밀가루? 아, 그래! 난 지붕 위에 있던 짐더미에 무지막지하게 손을 밀어넣은 다음 밀가루 부대를 끄집어내었다. 한 개당 얼마였더라? 지금 은 우리 목숨 값이다! 난 그대로 밀가루 부대를 높이 들어올렸고 그와 동시에 운차이의 손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파아악! 부대가 쩍 갈라 지면서 삽시간에 밀가루 부대가 가벼워졌다. 그리고 마차 뒤쪽으로는 밀 가루 구름이 만들어졌다. "으아아아!" 마차 바퀴를 노리던 사무엘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는 팔을 휘젖다가 그 대로 낙마해버렸다. 데구르르! 사무엘은 마치 튀김옷을 입힌 튀김거리 같은 모양이 되어서는 땅에 나뒹굴었다. 난 밀가루 부대의 끄트머리를 잡고 좌우로 미친듯이 휘저었다. 달리는 마차에서 뿌려진 밀가루는 거센 안개의 흐름이 되어 복면 전사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달려오던 말들은 비명을 지르며 속도를 급하게 줄였으며 전사들은 욕짓거리를 뱉어내었 다. 난 안타까움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 후추 없었나? 겨자는?"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웃었다. "꺄하하하!" 전사들은 할 수 없 이 밀가루 구름을 피해 옆으로 우회했다. 다시 거리는 우스우리만큼 벌 어졌다.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한결 느긋하게 캐스팅할 수 있었다. "이칭(Itching)!" "이힝힝힝!" 가장 가까이 달려오던 말 하나가 갑자기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 치 야생마처럼 날뛰는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기수는 그대로 떨어져버 렸다. 기수가 떨어진 후에도 말은 계속 앞다리를 들었다 뒷다리를 걷어 찼다 하면서 날뛰었다. 재갈을 문 입에서는 거품이 비어져나왔다. 뒤를 따라오던 다른 전사들도 그 말의 발광에 방해를 받게 되었다. 전사들은 말의 발광에 당황하여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 중 하나는 발광하는 말 의 뒷다리에 걷어차이고 말았다. 곧이어 이중 삼중으로 말들이 부딪혔고 전사들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날아가야 했다. 으아아아! "어? 저 말이 왜 저래요?" 내 놀란 질문에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안장 아래가 미치도록 가려울 거야." 네리아는 이제 지붕 위에서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웃고 있 었다. "까하, 이하하하하!" 전사들이 잠시 속도를 늦춘 사이에도 샌슨은 말들의 가죽을 발라낼 것처럼 채찍질을 해대었다. 황소와 말들은 질풍처 럼 달렸고 전사들의 모습은 이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이윽고 전사들은 추적을 단념하며 멈춰섰다. 부상자가 너무 많은 것이 다. 네리아는 지붕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트라이던트를 머리 높 이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야야야야야야!" "Uoz - Halishmaaaaa!" 동시에 운차이도 롱소드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괴성을 질렀다. 아프나 이델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도 서로를 놀란 눈으 로 바라보았다. 난 피식 웃고는 뒤를 향해 외쳤다. "가서 후작에게 물어봐! 실패한 부하는 무슨 벌을 받는지!" "후작의 부하들이었다고요?" 에포닌은 숨막히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난 에포닌을 돌아보려다가 자칫 손에서 힘을 뺄 뻔했다. "야, 야! 이 자식들아! 누굴 죽이려고!" "임마! 후치이! 힘 빼지마! 어, 어어!" 엑셀핸드의 공포에 질린 고함소리와 샌슨의 비명소리에 놀라 나는 다시 마차를 들어올렸다. 끄으으응! 마차는 다시 올라갔고 옆에서 나와 함께 마차를 들어올리고 있던 길시언과 샌슨은 입을 쩍 벌린 채 수명이 상당 히 짧아졌다는 식의 투덜거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헤헤. 투덜거릴 정 도면 아직 기운이 남아있군, 그래? 엑셀핸드는 지금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가서는 끙끙거리며 뒷바퀴의 차 축과 굴대를 조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우리를 추적하던 할슈타일 후작 의 전사 중 하나가 마차 뒷바퀴를 공격한 것이 아무래도 탈이 난 모양이 다. 달려오는 동안 계속해서 마차바퀴가 덜컹거리는 데다가 마차가 똑바 로 가질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 식사도 할 겸 마차도 손 볼 겸해서 잠시 멈추어섰다. 앞바퀴가 굴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다음 나와 길시언, 샌슨, 그 리고 운차이가 마차 뒤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을 자리가 그것밖엔 안되었 으니까. 아프나이델이 마차에 마법을 걸어 조금 가볍게 만든 다음 네 명 이 마차 뒤쪽을 들어올렸고 엑셀핸드는 카리스 누멘에게 가호를 빈 다음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곤 버팀대가 되어 멍청하게 서있어야 되는 것이다. 사방이 모조리 지평선인 평야 가운데라서 도대체가 마음이 안정되지 못 하는 장소였다. 바람도 한 번 불어젖히려면 상당한 각오를 하고 나야 불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였다. 갈색산맥은 이제 우리 앞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미한 얼룩처럼 지평선 위로 떠올라 있었고 게다가 그 위로 솟아오른 기막힐만큼거대한 뭉게구름 때문에 산 맥은 짓눌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황량한 평야 가운데서 마차를 세 워놓은 다음, 드워프의 노커가 아래로 기어들어가 마차축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마차를 들어올리고는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면, 주위가 산만해 지는 것은 당연하잖아? "설마? 전 믿을 수, 믿을 수 없어요. 후작님이 저, 절 되찾기 위해 전 사들을 보냈다고요? 말도 안돼요!" 에포닌의 당황한 목소리에 이어 카알의 낮은 대답이 이어졌다. "아니오. 에포닌양에게는 미안하지만 후작은 우리 일행을 노리는 겁니 다. 에포닌양은 도움보다는 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났군요." "예? 아니… 여러분들이 왜 후작에게…" 잠시 에포닌의 말이 멈춰졌다. 그러다가 귀가 번쩍 트이는 말이 들려왔 다. "레니 언니가?" 에포닌의 당황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난 뺨을 마차에 갖다붙인 채 마 차를 들어올리고 있어야 했다. 에구, 궁금해라. 다행히도 에포닌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레니 언니가? 아니면, 네리아 언니에요? 이런! 후작님이 찾고 있던 그 붉은 머리 소녀가?" "레니양입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후작님의 부하들이 쫓아오는 것이군요!" 좋아.에포닌. 잘 알아차렸군. 할슈타일 후작은 레니를 빼앗아가기 위 해 우리를 쫓아오는 것이지. 그 때 레니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저… 제… 그러니까, 저의…" "아버님이시죠. 아, 그러니까 친부님입니다." "그래요? 으음…. 그런데 왜 점잖게 찾아오시질 않고… 아, 저, 왜 저 렇게 칼잡이들을 보내서…? 절 강제로 데려가시려고… 그러시는 건가 요?" 레니의 목소리는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카알의 얼 굴이 보고 싶군. 그 친부에게서 딸을 데리고 달아나야 되는 독서가의 얼 굴 말이야. 으으. 나도 취미가 좋지 못하군. 놀랍게도 카알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할슈타일 후작도 드래곤 라자를 필요로 하니까요." "예에? 그럼… 여러분들과 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목적은 좀 다르지요. 우리는 레니양이 크라드메서 를 진정시켜주기만을 바랍니다. 그 다음엔 레니양의 뜻대로 델하파의 항 구로 돌아가게 해드릴 겁니다. 하지만 후작은 아마 아버지로서 양육권을 주장하겠지요. 그래서 레니양과 함께 크라드메서도 수중에 넣으려는 겁 니다." 맙소사!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갑자기 길시언과 샌슨이 힘을 빼 는 바람에 마차가 조금 내려갔다. 나와 엑셀핸드가 바락바락 악을 쓴 다 음에야 길시언과 샌슨은 다시 마차를 들어올렸다. 가가가각. 마차가 들 려올라가면서 앞바퀴쪽에서 신음 소리 같은 불길한 소음이 들려왔다. 마 차의 무게가 모조리 앞바퀴에 실리고 있으니 그렇겠지. "정말이에요? 어, 아버지라면서요?" 레니의 기막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에포닌이 대신했다. "후작님은 나쁜 사람이에요." "에포닌?" "아, 언니는, 저, 후작님의 딸이지만, 저… 미안하지만 말할 것은 말해 야겠어요. 후작님은 디트리히나 돌맨 말고 다른 아이들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어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자기 방이나 사무실 같은 곳에 다가오면 무섭게 화를 내었어요. 후작님보다는 하인들이나 가정교 사가 오히려 우리들을 더 따뜻하게 대해줬어요. 할슈타일 후작님은 내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어요. 우리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거 에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나, 나 정말 떨려요. 하지만, 미안하지만 후작님은 딸이라서 언니를 찾는 것은 아닐 거에요. 카알 아 저씨의 말이 맞을 거에요." "딸이라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정말 그런 거에요, 카알 아저씨?" 카알의 대답은 한참 후에 들려왔다. "딸로서 찾는 것이라면 그렇게 칼잡이들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달아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 레니의 신음소리가 짧게 끝나고나서 더 이상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한쪽에서 식사 준비 중인 제레인트와 네리아의 소근거림이 들려왔 을 뿐이다. 레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때 밑에서 엑셀핸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음. 아프나이델! 들어와서 이것 좀 봐주게! 큰 수리 안하고 끝낼 수 있겠어." 아프나이델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더니 마차를 들고 있는 네 명에게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평소 저한테 감정 가지신 분 있습니까?" 다행히 고장은 크지 않았다. 차축과 바퀴 연결 부분이 조금 헐거워진 것이었는데 엑셀핸드의 손재주와 아프나이델의 마법이 잠깐 작용하자 곧 수리가 끝났다. 우리는 엑셀핸드가 안전하다고 말하자 완전히 믿기로 했 다. 엑셀핸드 자신이 탈 마차인데 얼마나 꼼꼼하게 보았을까. 하하하. "들고 있느라 수고했습니다. 식사들 하세요." 제레인트와 활기찬 고함 소리에 버팀대 역할을 하던 네 명은 땀을 닦으 며 음식에 다가갔다. 겨울 날씨에 땀 흘렸다가 식으니 선뜻선뜻하군. 카 알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미안하지만 서둘러 식사를 끝내어주시오들. 아까 따라오던 그 자 들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입에 빵을 우겨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은 막막한 지평선, 바람이 불 때마다 듬성듬성 남아있던 겨울 잡초 들이 휘파람을 분다. 말라붙었지만 아직 뽑히지는 않은 풀들이 바람을 거스르며 기이한 소리를 낸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이 마차에 닿자 마부석에 앉아 있는 레니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를 하느라 땅에 앉아있었고, 그런 자세로 바라보자니 마차는… 마 치 지평선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다란 지평선과 그 위에 얹 혀진 작은 마차,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작은 레니, 그녀의 머리 위 론 끝없이 하늘이 펼쳐져있었다. 소화 안되는 모습이군. 레니의 옆에선 네리아가 마차 옆벽에 등을 기댄 채 서있었다. 네리아는 발치를 내려다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레니 에게 이야기를 거는 모양이었다. 레니는 조용히 앞만 바라보다가 간혹 입을 열어 네리아의 이야기에 대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 모두 가 작아서 내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당신도 샌슨이나 엑셀핸드 옆에서 식사를 해보라. 뭐 들리는 것이 있는지. 더군다나 난 지금 그 둘 사이에 끼어 식사를 하고 있단 말이야. 운차이는 어느새 식사를 깔끔하게 마치고선 일어나서 뒤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는 카알이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할 때까지 한참 동안 동쪽 지평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적자들이 보입니까, 운차이?" "반 시간 정도 거리… 달려오고 있습니다." 반 시간 거리라면, 맙소사. 4, 5 펜큐빗은 될 텐데. 운차이는 눈을 반 쯤 감고는 동쪽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으키는 먼지 구름의 크기로 봐선, 부상자들이 다시 합류한 것이거 나, 아니면 인원이 충원된 듯하군요. 거의 이십 명 남짓?" 카알은 굳은 얼굴로 일어나며 말했다. "서두릅시다." ================================================================== 12. 불길한 예언……18. 굉장한 속도로 돌아가는 마차 바퀴는 땅을 파고들 것만 같다. 아니, 땅 위로 날아오를 것 같다. 쿠르르르. 난 마차 바퀴에서 눈을 떼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감당할 수 없이 넓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은 겨울밤, 벽난 로 속의 장작개비에서 비쳐나오는 붉은 빛으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 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온몸이 붉게 물든 채 짐 더미에 기대어 나무토막을 깎고 있었고 그 뒤로는 마차의 그림자가 한없 이 길게 뻗어있었다. 동녘하늘은 이미 암청색으로 어두웠지만 평야는 붉 게 빛나고 있어 하늘보다 땅이 더 밝아보였다. 그리고 그 밝은 땅으로 길게 뻗은 그림자는 기괴하게 보였다. 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할까요? 해 지기 전에 메드라인 고개에 들어서기는 어렵겠습니 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내 힐난 섞인 말에 샌슨은 씩 웃었다. 물론 해 지기 전에 들어서기는 어렵겠지. 지금 벌써 해가 지고 있으니까.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 앞으로 하루 종일 쉴새없이 달아나던 태양은, 마침내 기나긴 하루의 여 정을 마치고 갈색산맥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붉은 석양을 피하기 위해 카알은 눈썹 위쪽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별로 효과적일 것 같지는 않다. 태양은 정면에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카알은 한참 그 렇게 바라보더니 샌슨에게 말했다. "저기…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저것은 닐 드루카 봉우리 아닌가?" "예. 하지만 평지에선 멀리 있는 것도 가까워보이는 법입니다. 저렇게 보이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은 달려가야 될 겁니다." "흐음. 해는 곧 질 텐데. 그럼 야영을 준비해야 되는 건가?" "하지만 속도를 조금 더 높이면 해가 지고나서 세 시간 내에 메드라인 고개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달빛도 괜찮을 테니까 8시나 9시 쯤에 는 어쩌면 메드라인 고개의 레인저들이 머무는 바라크를 찾을 수 있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잠자리 준비할 시간 같은 것은 필요없어질 테니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카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 메드라인 고개의 레인저 대원들에게 신세를 지기로 하지.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내일 새벽녘에 출발하면 되겠군." "예, 알겠습니다. 자, 미안하지만 다시 수고들 해줘!" 샌슨은 천천히 걸으며 쉬고 있던 말들에게 사과하고는 곧장 말들을 독 려하기 시작했다. 말들은 앞으로 죽죽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마차는 급격 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탄 마차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핏빛으 로 불타오르고 있는 태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음. 어쨌든 오늘 밤에는 침대 신세를 질 수 있겠군? 다행이야. 운차이의 낮은 외침 소리 가 들린 것은 그렇게 급격하게 출발한 직후였다. "오른쪽 전방, 잘 봐!" 뭐지? 난 운차이가 말하는대로 오른쪽 전방을 바라보았다. 전방을 보기 위해선 카알처럼 이마에 손을 올려야 했다. 오른쪽 전방은 약간의 구릉 이 져 있는 언덕 지형이었는데 지금 저 멀리 언덕 꼭대기에 검은 점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있는 그 그림자들은 시커멓고 거대하게 보였다. 모두 셋이었다. "뭐지? 피난민일까?"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때 내 눈에도 그림자들에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저 그림자들은 뭔가 반짝이는 것을 들고 있었다. 게다가 덩치가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말에 올라타있는 모양이다. "반사광이야." "검이군!" 그 때였다. 그림자들은 언덕을 따라 달려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 려옴에 따라 그들은 언덕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버려 보이지 않게 되었 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언덕 아래쪽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 었다. 그들은 모두 말에 타고 있었으며 손에는 번쩍이는 검을 들고 있었 다. 불길한 추측이 들기 시작하는걸? 운차이는 그 놀라운 시력으로 내 추측을 뒷받침했다. "넥슨이군." "빌어먹을! 에, 그러니까, 그러므로!" 샌슨이 좀 더 심한 욕설을 하기 위해서 생각에 잠겼을 때 카알이 침착 하게 말했다. "마차를 세우게. 퍼시발군." 샌슨은 끝내 목에 걸린 욕설을 말로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대신 급하게 고삐를 당기며 마부석 옆에 있던 제동기를 확 끌어당겼다. 끼기기긱! 제 동기에 걸린 바퀴들에서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고 말들은 거친 투레질 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힝힝힝힝힝!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바퀴가 멈춰버린 마차는 땅을 긁어대며 굉장한 흙먼지와 돌멩이를 튀겼다. 갑자 기 마차 차체 전체가 옆으로 쓰러질 듯 크게 기우뚱거렸고 그와 동시에 마차 안에서는 여러 명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테페리여! 실제로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전 제레인트 침버라고…" 하지만 마차는 간신히 전복되지는 않고 옆으로 크게 틀면서 급정거했 다. 끼야아가각! 귓속을 파고드는 격렬한 소음이 갑작스레 그치고나자 어느새 마차는 멈추어서있었다. 마차 뒤로는 네 개의 바퀴가 땅을 헤집고 할퀸 호선들이 그로테스크하 게 그려졌다. 이제 마차는 옆으로 선 채 달려오는 세 명을 마주하게 되 었다. 길시언과 샌슨은 아래로 뛰어내렸고 카알은 날랜 동작으로 지붕 위로 기어올라왔다. 나와 운차이는 아래로 뛰어내리며 카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탑메이지, 밖으로 나오시오."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며 아프나이델이 뛰쳐나왔다. 아프나이델은 달려오 는 세 명을 보더니 눈을 찌푸리며 거리와 방향을 재었다. 하필이면 우리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는지라 그들은 붉은 석양을 등지고 있었다. 아프나 이델은 역광에 눈을 찌푸리면서 캐스팅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지붕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카알은 아프나이델을 제지했다. "아니, 아직 공격하지 마시오, 저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정면으로 공격해올 이유가 없소. 대화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운차이가 사납게 말했다. "검을 빼들고 있습니다!" 달려오는 세 명의 등 뒤로는 시뻘건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 다. 그들은 우리쪽으로 엄청난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그 그림자를 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은 등 뒤의 태양빛을 받아 몸서리쳐지도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카알은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 공격의도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잠시 기다립시다. 저들이 자살하 려는 것이 아니라면 왜 상대도 되지 않는 전력으로 공격해온다는 말입니 까?" 석양 탓인지, 흥분 탓인지, 어쨌든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던 샌슨은 기 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상대도 되지 않는? 글쎄요, 카알. 저로 하여금 카알이 벌써 치매에 걸 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지는 마십시오. 저들은 모두 후치와 같은 괴력을 낸다는 사실을 주지시켜드릴까요?" 일행이 모두 샌슨을 돌아보며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퍽 슬픈 일이었다. 카알은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안심하게. 아직은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하지만 제아무리 괴력 이라고 해도 저렇게 달려오다간 공격당하게 될 거야. 저들에게 마법사가 없는 이상…" 카알의 말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카알은 뭔가 잊어먹은 것이 있다는 식의 얼굴이 되어 멍하니 달려오는 넥슨 일행을 바라보았다. 마차 위 지 붕에서 회청색 하늘을 등진 채 황혼의 붉은 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카 알의 모습이 왠지 고독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차 문이 벌컥 열 리면서 제레인트가 구르듯 뛰어나왔다. 제레인트는 그대로 앞으로 뒹굴 듯하다가 운차이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는 운차이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말도 안돼! 지금은 낮인데 어떻게 시오네가!" 내가 고함을 지른 순간 카알도퍼뜩 정신을 차리며 활과 화살을 들어올 렸다. 하지만 시오네는 낮에 돌아다닐 수 없어!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이 를 악물면서 외쳤다. "바로 그 낮이 우릴 떠나는걸." 그렇게 말하며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손을 들어올렸다. "매직 미사일!" 평야 위에 눈부신 빛의 화살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서녘 하늘을 배회 하는 붉은 구름 속에서 매직 미사일은 차가운 흰 빛을 뿌리며 무자비하 게 날아갔다. 명중. 그러나 넥슨 일행은 한결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자 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도 붉다. 운차이는 천천히 검을 들어 앞에 세웠다. 그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어조의 말이 들려왔다. "하슬러… 대단하군." 아프나이델은 이를 꽉 깨물면서 다시 캐스팅에 들어갔다. 바쁘게 움직 이는 손과 팔, 그리고 숨가쁘게 이어지는 스펠. 순간 태양이 진다. 잔광 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동녘에서 번져나온 어둠이 머리 위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밤이 다가온 것이다. "시오네와 합류하기 위해 먼저 달려온 것이군." 모두 짐작할 수 있는 일을 차분하게 말하는 운차이가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운차이는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길시언 과 샌슨도 달려나갔다.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잔뜩 찌푸려 잇몸을 다 드 러낸 채 캐스팅을 마쳤다. "디그!" 파아아앗! 넥슨 일행의 앞쪽에 삽시간에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선두에 달려오고 있던 자는 그대로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이힝힝힝힝! 그러나 다음 순간 기수는 거세게 몸을 뒤틀었다. 땅에서 솟 아나듯이 말이 솟구쳐올랐다. 그리고 뒤를 이은 자들은 그대로 구덩이를 우회하여 달려왔다. 이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선두에 선 자는 넥슨 휴리첼. 태양을 등진 그의 얼굴은 시커멓다. 검은 옆으로 곧게 들고 한 손으로 고삐를 거머쥔 채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 뒤의 하슬러와 쟈크는 검을 뽑아들지 않은 상태였다. 카알은 활을 들어올렸지만 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침착하게 말했을 뿐 이다. "모두들 마차를 등지시오." "예?" "마차를 등지시오. 그럼 돌격을 멈출 수밖에 없겠지." "달려나가서 저지해야 됩니다! 마차가 공격 당하면 발이 묶입니다!" 카알의 붉은 얼굴이 좌우로 흔들렸다. 카알은 지붕에서 마부석으로 내 려오더니 그대로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오는 세 그 림자와 침착하게 움직이는 카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상당히 기괴한 기 분에 젖어들었다. 카알은 우리들 옆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앞으로 나섰 다. 달려오고 있는 모습들은 무섭도록 커지고 있었지만 카알은 운차이를 흘깃 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멈추라고 말해주십시오." 운차이는 롱소드를 가슴 앞에 단단히 세우더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멈춰라아아!" 메아리는 없었다. 사방이 평평한 평야였으니까. 그래서 운차이의 커다 란 함성은 그 끝이 급속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달려오던 놈들은 분 명히 들었을 것이다. 길시언은 중얼거렸다. "경고는 했어. 이제 알아서 멈춰야 돼." 놀랍게도 넥슨 일행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최고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던지라 멈추기가 쉽지 않았는지 넥슨은 급하게 고삐를 잡아 당겼다. 넥슨이 타고 있던 말은 거세게 발길질을 하면서 멈춰섰고 그 뒤 의 두 명도 마찬가지로 멈춰섰다. 그러나 넥슨과 카알의 거리는 불과 10 큐빗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넥슨은 잠시 말을 달래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말은 왔다갔다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넥슨은 침착하게 고삐를 당기 면서 말의 갈기를 쓸어주고 있었다. 그는 낮고 빠르게 되뇌었다. "침착해, 침착해. 잘했어. 정말 잘 달렸다. 그러니 이젠 침착해."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서녘을 등지고 있는 넥슨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러나 그 얼굴이 따스해보이는 것이 다. 그 순간 넥슨은 두 명의 동료도, 그의 앞에 서있는 여러 명의 적대 자들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보내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탄 말에만 올 곧은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샌슨도 그런 느낌이 든 모양이다. 그는 넥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 거렸고, 그러다가 다시 넥슨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카알은 똑 바로 선 채 넥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오래간만이오. 넥슨." 넥슨의 말은 이제 진정했고 넥슨은 한 손에 감아쥔 고삐를 옆으로 늘어 트리고는 카알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캄캄했고 그래서 그의 표 정은 알 수 없었다. 난 그의 다른 손에 들린 검에 신경을 집중했지만 카 알은 검은 쳐다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카알은 계속해서 한 일주일만에 만난동네 청년에게 거는 말투로 말했다. "잘 지냈소?" 넥슨의 대답은 좀 지체되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다지… 완전히 조각난 사내는 어떻게 지내야 잘 지내는 것인진 모르 겠소. 어쨌든 내 생각엔 조각난 것치곤 괜찮은 것 같소." 뭔가 세상이 날 배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것인가 싶 어서 주위를 돌아보니 샌슨이나 길시언의 얼굴도 집이 불탔다는 소식과 불탄 잔해를 뒤적거리다가 뒷마당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동시 에 들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카알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요. 여전히 생각은 변치 않았습니까? 난 당신이 생각할 시간이 충 분했다고 믿는데." 넥슨은 이번에도 피곤한 듯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은… 나에겐 고문이오. 하나의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으 로 넘어가는… 그 단순한 즐거움이 나에겐 더 이상 남지 않았소. …하나 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뒤이어 나타나는 거대한 공허가 나를 미치게 만들 뿐이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카알은 달군 나이프로 버터를 자르 듯 똑바로 질문했다. "세상과 함께 파멸할 거요?" 넥슨의 대답은 다시 지체되었다. 넥슨이 말하는 동안 하슬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쟈크는 네리아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오네는 어 디 있는 것일까? 넥슨은 말했다. "한 가지 점에선 당신이 맞았소. 대미궁에서 당신은 나의 증오를 무의 미하다고 말했지요. 그 증오심은 이제 나와 관련없는 과거의 다른 넥슨 의 것이라고. 그렇소. 내 속에 있는 증오는 타인의 것이오. 그리고 타인 의 증오심을 자신의 가슴 속에 계속 담아두는 일은… 너무 힘들더군요." 카알은 빙긋 웃었다. 넥슨은 그 미소를 보며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걸 이해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내가 달려오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이고." 웃고 싶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될지 모 르겠다. 여전히 편하게 말을 하고 있는 카알이 신기하게 보였다. 아니, 카알과 넥슨 모두가 왠지 자이펀보다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도 개척되지 않은 저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든가. "…자신은 없었소. 자아의 기반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라면,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겠지요. 오로지 그것에 매달리던가, 아니면 그 것마저 버리던가." 넥슨은 말하지 않았고 카알은 천천히 자신의 말을 설명해나갔다. "생각을 했소. 당신의 입장이 되어보려 했지요. 난 바이서스의 카알이 고, 헬턴트의 카알이고, 우리 형님을 존경하는 동생 카알이며, 여기 있 는 후치군의 늙은 친구인 카알이지요. 그 중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해보았소." 넥슨은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쩔 거 같았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말해 상상할 수 없었소.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난 당신과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소. 아니,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이 이런 경험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실제로 영원의 숲에서 분리된 채로 살아나온 자 는 당신뿐이니까." "그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난 이거 하나는 깨달을 수 있었소. 난 과거에서 왔고, 미래를 향해 가고 있지만, 그것은 둘 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넥슨의 검은 이제 옆으로 늘어트려져 있었고 그 주인의 관심을 전혀 받 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구부린 손가락에 걸려 있는 어떤 물건이 었지 적을 겨냥한 무기가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면, 특별히 없어진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오. 영원의 숲은 사기요." "사기라고?" "그렇소. 사기요. 마법사들이 항상 벌여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마법들처 럼? 하하하."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볼쌍사납게 바뀌는 것을 보면서 카알은 밝게 웃었 다. 그는 다시 잔잔하게 말했다. "그런 점에선 기적을, 현실을 마구 파편으로 만들고 이해불가능한 것으 로 퇴행시키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직자들도 별로 할 말은 없을 거요." "아니, 카알…?" 제레인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카알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물론 우리보다 높은 의지, 높은 힘을 가진 무엇이 되려 할 수도 있소. 우리가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신이 되려 할 수도 있겠지 요. 마나와 기적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길을 닦는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신이 되고 싶지 않은 자도 있는 거요." ================================================================== 12. 불길한 예언……19. 넥슨은 마상에서 은은한 눈빛으로 카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다 낮은 무엇이 된 자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당신의 의지를 나에게서 구하지 마시오. 모든 것과 함께 자멸할 거요? 그것은 조각난 넥슨으로서는 임무 완수가 되겠지. 물론 그것은 완수이자 동시에 자멸이니 화려한 실패인 셈이기도 하고. 그것마저 버릴 거요? 그 럼 당신은 세상에서도 드문 신생아가 되는 것일 테고." "신생아?" "다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서는, 배우고 익힌 말로써 그것을 찬미할 수 있겠지. 혹은 혐오할 수도 있겠 고." 넥슨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 라 나와 샌슨은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넥슨은 그런 우리를 보지도 않 은 채 말했다. "달려오면서 생각했소." 넥슨은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당신들 중 누구라도 과거의 나에 대해 말한다면, 그렇다면 난 과거의 나로서 당신네들을 공격하고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당신들 손 에 죽어도 좋고." 쟈크의 표정이 기이하게 바뀌었다. 저 어두운 얼굴에서도 그 표정의 변 화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넥슨은 여전히 잠꼬대같이 희미한 어투 로 말했다. "난 당신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자라는 것이 견딜 수 없었소. 또한 과거의 불쌍한 사생아인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에 빗대 어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것도 견딜 수 없었소. 난 세상에서 단절된 존재 였고,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날 인지하고 날 노려보고 있었소." 넥슨은 갑자기 히죽 웃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껏 과거의 나의 행적, 과거의 어떤 원한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소. 내가 모르는 그 이야기들을 당신 역 시 거론하지 않았소. 당신은 말과 행동 모두를 일치시켜서 현재의 나만 을 바라보았소." 넥슨은 갑자기 고개를 내려 카알을 쏘아보았다. "내가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소?" 뭐라고? 어, 그거 나도 궁금해. 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시선을 돌려 하슬러와 쟈크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말했다. "대부분은 당신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던 결과였고, 보다 직접적인 증 거는 당신이 저 둘과 계속 함께하는 것을 보고서였소. 그리고 칸 아디움 에서 네드발군이 살해되지 않은 것에서 확실히 깨달았소." 뭐? 사, 살해? 카알! 무슨 끔찍한 이야기를? 그 때 카알의 이야기를 듣 던 넥슨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하늘은 삽시간에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고 넥슨의 모습 전체는… 마치 퇴락한 건물의 잔해처럼 무겁고 음침하게 보였다. 카알은 또렷하게 말했다. "우리가 과거의 당신에 속한다는 이유로 우릴 공격한다면, 저 둘이야말 로 우리들보다 훨씬 더 과거의 당신에 밀접한 자들이오. 그러나 당신은 저 둘을 계속 친구로 대했던 것 같소. 그리고 칸 아디움의 그날 새벽, 당신은 아마도 당신 종복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을 거요. 그 때 당신 옆에 는 무력한 모습의 네드발군이 누워있었을 거요. 그러나 네드발군은 우리 들이 찾아갈 때까지 살아있었소. 그것은 당신이 네드발군을 가만 놔두고 떠났다는 이야기지." 으아, 맙소사! 죽을 뻔했구나. 난 눈을 들어 새삼스러운 눈으로 넥슨을 올려다보았다. 넥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녀석도 알겠지만, 그 땐 나 역시 혼수상태에 가까웠소.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지." 넥슨의 목소리는 마치 지독한 개구쟁이가 욕설이나 꾸중 대신 생애 최 초로 칭찬을 받게 되어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분명 화난 듯했지만, 그래서 그만큼 친근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 야. 넥슨의 목소리가 친근하게 느껴지다니. 카알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당신은 새로운 넥슨으로 살아갈 거요?" 순간 넥슨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그의 검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자 목 뒤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넥슨은 고개를 가로저으 며 말했다. "당신네들은 공격하지 않을 거요. 난 당신네들을 모르기 때문에 당신들 에 대한 증오를 지켜나가는 것은너무도 힘겨워. 하지만 바이서스는, 그 리고 할슈타일은 내게 핏값을 지불해야 하오. 그것은 현재의 나도 똑똑 히 기억하는 것이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잇는 하나뿐이자 가장 중 요한 연결고리지." 카알이 놀란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길시언의 발이 크게 앞으로 나갔다. 놀랍게도 길시언은 넥슨이 타고 있는 말에서 3 큐빗도 안되는 거리까지 다가섰다. 만일 넥슨이 치고들어온다면 막아내기도 급급한 위 치였다. 그는 넥슨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이서스가 너에게 무슨 핏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거지?" 불안하게도 넥슨의 손이 계속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 땀이 배는걸? 난 미끄러워지는 바스타드를 단단히 감아쥐었다. 넥슨은 길시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이서스는 내 육친의 피를 받아내었고, 따라서 난 바이서스의 피를 받아낼 것이다. 손에 마법검 하나 들어 옛이야기의 모험가 흉내를 내고 주색잡기에 빠져들기 위해 궁성을 나선 왕자는 안심해도 좋아. 그런 자 의 피는 필요 없으니까." "뭐라고?" 길시언의 입에서 숨 막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난피냄새를 맡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길시언은 애 써 차분하게 말했다. "네 육친의 피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라. 마땅하게 설명할 기회 를 준 다음 이 모욕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지." 길시언의 목소리는 딱딱 끊어지고 있었다. 반면 넥슨은 길시언의 분노 를 느끼면서 점점 잔혹한 얼굴이 되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옛날 유니콘 인의 하늘 위로 나타났던 때의 얼굴이 되었다.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죽였어…" 길시언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멍청한 자식! 기억을 못하는군. 로넨 휴리첼 백작은 죽지 않았어! 그 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그 스스로가 자원한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바이서스의 죄가 되는 것이냐!" 넥슨의 얼굴은 이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돌조각의 얼굴처럼 보였 다. 그의 얼굴에는 사람의 얼굴이라면 당연히 나타날 복잡한 표정이 전 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하나의 단순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적의였다. "로넨? 내 의붓아버지 말이군. 에포닌의 의붓아버지 할슈타일처럼…" 앞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나 곧 그 뒤의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 고 나의 시선은 넥슨에게서 하슬러로 급격하게 움직였다. 이미 어두컴컴 해지는 하늘 아래 하슬러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슬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의 시선은 다시 넥슨에게로 돌아갔다. 길시언은 어이가 없는 투로 말했다. "무슨 말이냐! 네가 어떻게… 네가 양자라고? 아냐! 그렇지 않아. 넌 양자가 아니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넥슨의 얼굴에선 이제 미소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적의를 누그러트리기는 커녕 한결 더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양자? 물론 아니지. 난 그의 아내의 아들이니까." 그의 아내의 아들이라고? 그게 그 말이잖아? 아니, 잠깐. 그렇다면 그 의 아들은 아니라는 말인가…? 정수리의 머릿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밀려들면서 자칫 검을 놓칠 뻔했다. '휴리첼 가문의 불명예는, 그 까뮤가 수치스럽게 죽었고 그 때문에 크 라드메서가 발광하게 되어 미드 그레이드를 쑥밭으로 만들었다는데 있 지. …밀통을 하다가 여자의 남편에게 칼맞아 죽었거든.'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돌아가셨다고! 형제의 손에 죽음을 당했 …!' 카알은 두 손을 동시에 들어올리려다가 다시 떨어트리며 말했다. "당신은 까뮤 휴리첼의 아들이오?" 넥슨은 길시언을 쏘아보면서 카알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까뮤 휴리첼과 아멘가드 휴리첼의 아들이오." 길시언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카알은 길시언을 쳐다보며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고 길시언은 머리를 내두르 며 말했다. "아멘가드 휴리첼은… 로넨 휴리첼 백작의 부인입니다." 넥슨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 난 형의 아내를 사랑한 동생의 핏줄이오. 그리고 형 에게 죽은 동생의 핏줄이며, 아버지의 원수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난 자요.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를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요." 귓속이 윙윙거리는 느낌이 든다. 입안이 바싹 마른 느낌이 드는데도 신 기하게도 침을 삼킬 수 있었다. 겨울 저녁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볼은 불 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그래서 지독하게 아팠다. 카알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려 말했다. "아버지, 로넨 휴리첼을 사랑한다고?" 넥슨의 눈에서 뿜어나오던 빛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난 그 분께는 원한이 없소." "왜지요?" "그 분은 죽은 아우 대신 날 끔찍하게 위해주셨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되살아났다 하더라도 자신을 죽인 형의 처사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소." 넥슨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담담했다. 카알은 진 저리를 치고나서 말했다. "당신의 가족사의 불행… 뭐라 할 말은 없소. 그것에 대해 특별히 평가 하고 싶지도 않고." "평가? 이 지독하게 추잡스런 이야기에 걸맞는 평가는 바이서스어에는 없을 거요. 자이펀어에는 있을까?"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차분하게 넥슨을 쳐다보았을 뿐 이다. 카알은 헛기침을 심하게 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바이서스의 죄란 말이오? 당신의 불행에 대해 선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왜 그 댓가로 바이서스가 핏값을 지불해야 된 다는 거요?" 넥슨은 묵묵히 카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포기한 듯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모르겠소!" "모른다고?" "하지만 확실한 이유가 있소. 분명해요. 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 게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건 많은 부분들이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 야. 하지만 그 이유들로부터 도출된 결론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단 말 이오." "결론… 이라면?" 갑자기 넥슨은 길시언을 쏘아보면서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바이서스는 전 대륙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죄를 지었소! 현자 핸드레 이크를 우롱하고 일곱 별을 파괴했소! 만약 루트에리노의 마법의 가을이 끝나지 않았던들, 여덟번째 별, 드래곤의 별마저 파괴되었을 것이오!" 카알은 흠칫 하다가 재빨리 냉정을 되찾으면서 튀어나가려던 길시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길시언은 카알의 손을 사납게 뿌리쳤지만 카알은 다 시 한 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길시언은 카알에게 붙잡힌 채 넥슨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다른 행동으로 접어들진 않았다. 카알은 크게 심 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 그 여덟 별의 이야기는 전에도 네드발군의 입을 통해 듣긴 들었소. 하지만 난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떤 문헌에서도 그런 기록은 읽지 못했소. 여덟 별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넥슨은 카알과 길시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시 선은타고 있던 말의 갈기로 떨어졌다. 그는 저녁 바람에 휘날리는 말갈 기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그것은 별이자 이슬이오. 강력한 힘이자 헐벗은 노예이며 봄날 아지랑 이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결국엔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는 것이 오." "시간 앞에 모든 것이 그렇지 않소?" "아냐, 틀려요…. 시간 앞에 모든 것은 무엇이어야 되지. 유피넬과 헬 카네스조차도 행동하고 이바지함으로써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겨울 평원에 서있는 거야, 신전 고당에 서있는 거야? 넥슨은 갑자기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물으니 대답해보시오. 엘프 라자는 왜 없는 거요?" "뭐요?" "어째서 드워프 라자는 없는 거요?" 우리는 기막힌 표정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마차에서 내려선 엑셀핸드 는 벨트에 손가락을 걸치더니 외쳤다. "이 놈아! 우리 드워프는 얼마든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도 모 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대개들 그러하더군. 의사소 통에 골치아픈 일은 없더라구. 그런데 왜 라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냐?" "그렇소? 그럼 호비트 라자는? 페어리 라자는 어떻소?" 샌슨이 더 못참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이 자식아! 나 원 참, 하하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러나 넥슨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오크 라자는 어떻소?"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떠들어대려고 할 때 제레인트가 앞으로 나섰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벌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막더니 그 손을 허리에 얹 고나서는 넥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왜 드래곤 라자뿐이지?" "뭐요?" "왜 드래곤 라자뿐이지? 엘프 라자도 없고 드워프 라자도 없어. 오크 라자도 없지. 왜 드래곤 라자뿐이지?" "그거야… 드래곤은 자신들보다 저급한 다른 생물들과 의사 소통을 하 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럼 인간과 드워프, 인간과 엘프는 모두 평등한가 보군?" 제레인트는 주춤하더니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는 오른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제레인트는 오른손으로 턱을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글쎄. 당신의 말을 듣고 있자니 평등하다는 말이 혼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군요." "좋은 현상이오. 루트에리노와 여덟 별의 위대한 업적이 있으니 모든 것은 마땅히 혼란스러워야하오." 저 친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나에게 설명 좀 안해 줄 건가? 그 때 넥슨은 고개를 휙 돌리더니 우리 뒤편을 바라보았다. "추격자들이 있군." 놀란 우리들은 제각기 마차를 돌아 달려가서는 뒤를 바라보았다. 동쪽 지평선에서는 지금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름달은 곧은 지평선에 허리를 걸어올리고 있었고 그 밝은 반원을 배경으로 작고 검은 점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들이 달의 창백한 얼굴에 얼룩이 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잇!" 샌슨의 신음소리에 이어 넥슨의 말이 이어졌다. "누구요? 아니… 멍청한 질문이군. 할슈타일이지?" 누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 넥슨의 말에 고개 를 끄덕인 모양이다. 넥슨은 갑자기 마차 옆으로 달려나갔다. 카알이 당 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넥슨!" 넥슨은 말을 옆으로 돌렸다. 이제 넥슨은 우리들과 보름달 사이에 선 채로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의 입이 움직였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얼마 남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후작이 직 접 오겠군. 후작은 나에게 지불하지 않은 계산서를 가지고 있소." 넥슨의 얼굴은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희미한 푸른 기가 도는 밤하 늘은 너무 어둡고 보름달의 빛은 너무 강렬하다. 넥슨은 여전히 그림자 로 선 채 말했다. "따라오겠나, 하슬러, 쟈크?" 우리는 말 한 마디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여전히 뒤에 서있던 하슬 러와 쟈크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 다. 그러나 하슬러의 말이 움직이면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슬러 는 넥슨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 때 네리아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안돼요! 당신은 가면 안돼, 하슬러!" 하슬러는 멈칫 했다. 달빛이 그의 어깨에 부서지며 외로운 사내를 더욱 고독한 모습으로 있게 만들었다. 네리아는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안돼, 당신은, 당신은 안돼요! 우리가 에포닌을 데리고 있어요!" 하슬러의 그림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 마디의 말도, 한 동작의 흐 트러짐도 없이 하슬러는 달빛 내리는 땅을 밟고 굳어 있었다. 그 때 마 차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에포닌이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에 포닌의 얼굴엔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설마?" 에포닌은 단지 두 마디만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것은 주위에 있던 모든 사나이를 전율하게 만들었지만 한 사나이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하슬러는 다시 몸을 돌려 넥슨에게로 걸어갔다. 남겨진 에포닌은 젖은 눈망울을 달빛에 반짝거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냐. 저 사람은…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이상한 말을 하 지 말아요… 이상한 생각이 들게 하지 말아요." 하슬러의 등이 흔들린 것일까, 내 눈이 흔들린 것일까? 보름달은 미친 듯이 부풀어올랐고 까마득하던 검은 점들은 여전히 꼬물거리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넥슨의 그림자에서 그 머리 부분이 좌우로 흔들렸다. "돌아가라, 하슬러." 하슬러의 음영은 넥슨의 음영을 바라보았다. 넥슨의 보이지 않는 입에 서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봉사엔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너의 소망을 들어줄 수 없 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길드를 잃었고, 힘을 잃었 고, 나 자신을 잃었다." 잠시 평야를 스치는 바람만이 절대의 힘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하슬러 가 입을 연 순간 바람 소리도, 풀잎의 휘파람 소리도 다 사라져버렸다. "나는 잃지 않으셨습니다." "아빠!" 에포닌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 그러나 하슬러는 여전히 고개 돌리지 않 았다. 그는 넥슨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시죠. 주인님." 넥슨은 벌컥 화를 내려는 듯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팔은 반 도 올라오지 못했다. 넥슨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쟈크를 바라보았 다. "쟈크?" 우리 뒤편에 서있었던 쟈크는 달빛에 우울한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썅, 마스터. 이제 위대하신 넥슨 대왕과 약간 덜 위대하신 쟈크는, 날 샌 거죠?" "그래. 날샜다." 쟈크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니미, 우리 아버지가 항상 말하길 하드 베팅은 신세파탄의 지름길이라 했죠. 그리고 또 말하길 거물들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고도 말했 어요. 퇘!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자기 말도 못지켰어요. 뭐, 항상 그랬 긴 하지만. 그리고 난 아버지를 본받는 착한 아들이란 말이야. 이랴!" 쟈크는 말을 달려나가게 하더니 하슬러의 옆, 넥슨의 반대편에 섰다. 넥슨, 하슬러, 그리고 쟈크 세 남자는 이제 달빛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쟈크의 약간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갑시다, 엉터리 반란자 양반. 우리 아버지도, 우리 할아버지도 죽게 만들었으니, 당신 관뚜껑은 내가 덮어줘야하지 않겠어. 그러려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녀야 될 테고. 제길, 내 신세가 왜 이리 따분하게 되었담. 언젠가는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를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진하게 키스해 버릴 희망으로 살아가던 바이서스 임펠의 잘나가던 쟈크였는데." 넥슨의 그림자가 조금 흔들렸다. 웃음을 터뜨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웃 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는 마차 벽에 힘없이 등을 기댄 채 멍한 얼굴로 쟈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쟈크의 목소리는 계 속 이어졌다. "갑시다, 마스터. 하지만 노인은 필요없다고 보는데. 특히 애 딸린 홀 아비는. 우리 상큼한 미혼끼리 같이 가도록 하십시다." "좋은 생각이다." 쟈크의 손이 하슬러의 어깨를 잡아누르는 순간 넥슨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퍽! 둘 사이에 끼어있던 하슬러는 그대로 넥슨의 롱소드 폼멜 에 목 뒤를 찍히고는 안장에 풀썩 쓰러졌다. 쟈크는 작게 환호를 질렀 다. "야호! 하슬러 아저씨도 잡을 수 있군, 그래? 역시 눈빛만으로 통하는 마스터와 길드원에겐 누구도 못 당해. 하하하!" 쟈크는 그렇게 환영받기를 갈망하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중얼 거림만 남겨놓고는 가볍게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넥슨은 잠시 안장 에 쓰러진 하슬러를 내려다보더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름달은 이제 땅을 박차고 올랐으며 넥슨의 얼굴은 여전히 깜깜했다. "하슬러를 데리고 가시오. 그리고 나 예언 하나 하지. 이 모든 일이 끝 날 무렵이면, 당신들은 나보다도 훨씬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잘 알게 될 거요. 그러니 지금은 아무 소리 하지 마시오." 넥슨은 그대로 몸을 돌린 다음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로 몇 마디를 더 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당신들이 꼭 행복해지지는 않을 거 요." 우리는 모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넥슨은 불길한 예언을 남기고는 먼저 달려간 쟈크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막 하룻밤의 여정을 시작 한 달은 사위를 은광으로 물들이기 시작했고, 그 아래 두 남자의 그림자 는 월광에 녹아가듯 흔들리며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 13. 대마법사의 만가……1. …따라서 우리 시대의 마법이라는 것은 선학들의 어깨에 올 라타는 재주 외엔 아무 재주도 갖추지 못한 불민한 후학의 모습에 지나지 않으니, 마나는 흩어져 갈 길을 모르고 학통 은 흩어져 희미하기만 하다. 마법서는 수없이 출간되어 나오 지만 마법사는 드물다. 마법사들은 마법서의 미궁에 빠져 헤 메다가 (물론 그 안에서 길을 찾아내는 마법사는 극히 드물 다.) 피로한 눈을 들어 저 영광의 시대, 대마법사 핸드레이 크와 무지개의 솔로쳐의 시대를 향수에 젖어 바라본다. 대마 법사의 이름은 이제 마법사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마법이 세계 를 질타하던 시대의 대명사처럼 바뀌었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34 권. P. 330 (770년 돌로메네 作) "쉿! 조용히 해!" "어? 어라, 뭐냐?" 난 샌슨을 옆으로 끌어당겨 내가 숨어있던 건물 그림자 속으로 데려왔 다. 샌슨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후치?" "저기." 내가 가리킨 곳을 본 샌슨은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말했다. "응? 하슬러와 에포닌인가?" "그래. 조용히!" 샌슨은 이제 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바라크의 그림자 속에 숨어 벽 에 등을 단단히 붙이고는 선 채로 죽은 시체의 흉내를 내는 것 말이다. 나와 샌슨은 그렇게 나란히 선 채 에포닌과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오늘 밤을 유숙하게 된 바라크는 메드라인 1-4…어쩌구 하는 번 호를 가지고 있는 장소였지만 나로선 그 번호 못 외우겠다. 어쨌든 그 바라크는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 하슬러와 에포닌은 달빛을 받 으며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절벽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 누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숨 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샌슨이 다가왔던 것이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달빛을 받아 뼈처럼 하얗게 빛나는 산등 성이와 봉우리들의 모습이 펼쳐지고있었다. 위이이잉. 산 사이로 부는 바람은 절벽 아래를 지나며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쌀쌀하 다는 말로는 모자란 감이 많은 겨울 밤의 겨울 산이다. 짙은 구름들은 달빛을 가렸다 드러내었다 하며 떠갔다. 굉장한 바람도 불고… 비가 올 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하슬러가 팔을 들어올렸다. 아마도 에포닌의 어깨를 감싸안으려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포닌은 흠칫 하면서 옆으로 조금 몸을 틀었고 그러자 반쯤 올라가던 하슬러의 팔은 힘없이 도로 떨어졌다. 난 안타까 운 심정으로 혀를 차다가 너무 큰 소리를 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으윽! 혀 깨물 뻔했어. 내 옆에서 그 광경을 함께 보고있던 샌슨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근거렸다. "야, 저 사람들 언제부터… 으아!" "조, 조용히 해! 왜 그래?" 샌슨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내 엉덩이에 북슬거리는 것이…" "나다. 그러니 어서 내 얼굴 앞에서 이거 치워라." 샌슨은 기겁하면서 비켜나더니 말했다. "엑셀핸드? 당신도 숨어계셨어요?" 엑셀핸드는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뭐라고 투덜거렸다. 그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30분 정도." 운차이의 목소리를 듣자 샌슨은 다시 기겁하더니 내 옆을 돌아보았다. 내 옆의 그림자 속에 서있던 운차이는 입술 사이로 가늘게 새는 웃음을 웃었다. 샌슨은 기막히다는 투로 말했다. "어라? 너도 있었냐? 이 그림자 속에 도대체 몇 명이나 숨어있는 거 야?" "글쎄? 나도 모르겠네. 나도 지금까진 엑셀핸드가 있는 줄은 몰랐거 든?" 네리아의 대답에 샌슨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라? 네리아도 숨어있 었나? 위를 올려다보니 바라크의 낮은 지붕 - 산 속의 매서운 바람을 견 디기 위해 크고 두쿰하고 완만하게 만들어진 지붕 끄트머리에서 앞뒤로 흔들리는 다리 두 개가 보였다. 윽. 저 위에 앉아있었나? "여보게들. 좀 조용히들 하세나." 아이고! 카알의 소근거리는 목소리다. 옆을 돌아보니 카알은 바라크의 창틀에 팔을 고이고는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날 보더니 입 앞에 손가락까지 세워보였다. 그제서야 서로의 확인을 끝낸 여섯 명의 염탐자 들은 다시 조용히 두 부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벌컥! 으아아! 기절하는 줄 알았네. 느닷없이 바라크의 문이 열리더니 뭔가 허연 것이 앞으로 휘익 뛰쳐나온것이다. 그것은 밤바람을 맞으며 나풀 거리는 허연 천 같은 것이었는데 아래엔 제레인트의 다리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허연 천은 제레인트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들 봐요! 날씨가 굉장하군요. 부녀간에 정다운 이야기 나누는 것 도 좋지만 이거라도 덮고 이야기 나누시죠?" 제레인트는 하슬러와 에포닌에게 다가가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는 들고 간 시트를 하슬러에게 건네었지만 하슬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 자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에포닌의 어깨에 시트를 덮어주었다. 옆에 있던 샌슨이 숨넘어가는 숨소리를 내었다. 난 숨을 몰아쉬면서 소 근거렸다. "샌슨… 혹시 발 근처에 뭐 떨어진 거 없어?" "응?" "내 심장 말이야." "아, 조금 전에 밟아 터뜨린 게 그거였나?" 우리가 이런 몽환적이고 몰가치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에포닌은 제레인트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제레인트." "아니, 천만에. 하하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밤 이 추우니 빨리 들어오세요."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 팔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부르르 떨면 서 걸어오던 제레인트는 바라크의 옆벽에 몸을 붙이고 딱딱하게 굳어있 던 우리들을 발견했다. 제레인트의 눈이 커졌다. "어라? 여기서 뭣들…?" 그 순간 우리 일행들의 행동은 정말 눈물겨웠다. 샌슨은 입을 뻐끔거리 며 미친듯이 손을 좌우로 흔들었고 엑셀핸드는 두 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마구 휘저었다. 운차이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두 손으로 입을 틀 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끙끙거렸고 카알은 황급히 창문 속으로 들어가다 가 뒤로 넘어진 모양이다. 쿠당!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면서 카알의 신 음소리가 들렸다. 제레인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더 니 대단히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는 겁니까? 말씀해 보시오, 산들이여!" 으윽! 염탐자의 수호자 제레인트는 참으로 갸륵한 열정을 담아 외쳤다. "말해보시오, 별들이여! 바람이여!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창세기 이후로 그곳에 계속 계셨으니 말없는 그대들은 그 눈 으로 많은 것을 보았겠지요. 그러니 이제 말씀해보시오! 하하하! 에포닌 양! 정말 좋은 밤 아닙니까! 이것이 기도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에포닌은 멍청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돌아보았지만 에포닌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레인트는 열병 걸린 사람처럼 웃으면서 바라크 안으로 들어갔다. 우하하! 콰당. 문 닫히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6 인의 염탐자들의 동작도 딱 굳어 버렸다. 우리는 한참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었다. 다행히 에포 닌과 하슬러는 별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다시 아까의 모습으로 돌아갔 다. "허어억… 기절하는 줄 알았네. 아무래도 안되겠어. 그만 조용히 들어 가자구." 샌슨의 말에 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하슬러가 저대로 에포닌과 달아나면 어떻게 하지?" "응? 어, 글쎄. 하슬러가 달아나봐야 어디로 갈까?" 다시 창문으로 슬그머니 머리를 내민 카알은 샌슨의 말에 흥미가 있다 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멀리 절벽 끄트머리의 부녀를 바라보더니 이 마에 늘어진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냥 달아나버리면 차라리 낫겠는데." 잠시 밤의 음향만이 바라크 주위를 가득 메웠다. 샌슨은 모든 이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말에 대한 부연설명이 필 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응. 에포닌은 아버지를 만났으니 됐고, 하슬러는 딸을 찾았으니 됐잖 아. 그냥 달아나서 아무도 모르는 데서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뭐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샌슨, 샌슨은 말이야. 멋져." "나도 그게 고민이야." 샌슨은 우쭐거리는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위에서 듣고 있던 네리아는 살폿 웃더니 트라이던트를 아래로 내려 땅에 세우더니 그것에 매달려 주 루룩 미끄러져 내렸다. 재주도 좋아. 네리아는 창문 옆에 등을 기대더니 창문으로 머리를 내민 카알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냥 내일 아침에 헤어지면 안돼요, 카알 아저씨?" "하슬러씨와 에포닌양 말이오?" "예. 뭐… 내가 돈 좀 낼께요. 두 사람 새출발할 자금 정도는 낼 수 있 어요. 하슬러는 유명한 칼잡이였으니 어딜 가도 안전할 테고. 두 사람 조용히 보내주면 좋겠네, 좋겠네." "글쎄. 네리아양.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로선 저 둘이 그걸 원한 다면 특별히 강제할 권한은 없잖소? 하슬러가 우리 포로이거나 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건 저 사람들의 자유요. 그리고 네리아양의 말마따나 도움을 주는 것은 네리아양의 자유이고." 카알의 잔잔한 말에 네리아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고보니 하슬러의 입장이라는 것이 희한하군. 하슬러는 넥슨이 '버리고' 간 그의 종복이지. 말하자면 주종관계에서 풀어줘버린 것이고 우리에게 그에 대 한 체포권 같은 것은 없다. 물론 따지고들면 하슬러는 국왕의 적이고 따 라서 우리의 공적이긴 하지만… 운차이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반란자이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들려온 운차이의 말은 그림자 사이로 부는 산바람 같았다. 낮지만 매서운 소리. 카알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도둑을 교수대에 매다는 법은 있어도 도둑할 때 쓰던 망치나 지렛대 따위를 매다는 법은 없잖소." 네리아가 갑자기 큭큭거렸다.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망치를 생각했 겠지. 그러나 운차이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하슬러는… 도구가 아닙니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넥슨의 말을 따 른 자입니다." "그걸 알아봅시다." "예?" 바라크 전체는 거대한 단일 건물이지만 그 내부는 가운데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벽들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가 제공받은 방은 여행 자들이 쉬어가곤 하는 방으로 건초가 깔린 침대들과 작은 테이블, 그리 고 벽난로 외엔 특별한 가구는 없었다. 그저 벽에 여러 개의 못과 선반 이 있어 짐을 걸어두거나 얹어두게 되어있는 것이 전부였다. 저장된 건초들 - 겨울 동안 바라크에서 키우는 말들의 식량으로 쓰기 위해 저장되어있던 것들 - 이 풍부한 모양인지, 레인저 대원들은 우리들 을 위해 침대에 새 건초를 깔아주었다. 길시언은 왕자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는 없다고 점잖게 말했지만 레인저들의 대장은 겨울 여행에 나선 모든 여행객들은 응당 그런 대접을 받아야 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써 길시언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레니와 에포닌은 길시언을 무안하게 만들었던 그 건초 위에 누 워서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벽난로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는 서로 바짝 붙은 채 지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네 리아는 벽난로 바로 앞에 오도카니 앉아서는 두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 다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슬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슬러는 피로한 시선으로 잠든 에포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맞은 편에는 카알이 앉아서는 하슬러와 에포닌을 번갈아 쳐다보 았다. 레인저 대장에게 중부대로를 지나는 피난민들의 동향에 대해 물어 보러 간 길시언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침대에 걸터앉거나 벽에 기 대어선 채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알이 입을 열었다. "하슬러씨. 따님과는 이야기가 잘되었습니까?" 하슬러는 무안하게시리 입을 다물고 있었고 카알은 잠시 턱을 긁적거렸 다. 조금 후 카알은 다시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 두 분이 들어오던 모양을 보니 퍽 정겨워 보입디다만…" 조금 전 하슬러는 에포닌의 어깨에 손을 짚고 에포닌은 하슬러의 다리 에 바짝 붙은 채 바라크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은 카알의 말마따나 정겹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에포닌은 바라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 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눕혔고 하슬러 역시 그런 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냥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는 두 부녀는 지금까지 저 자 세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게 정겹냐? 하슬러는 이번에도 입이 굳었다는 시늉을 했고 카알은 당혹스러워했다. 아프나이델이 갑자기 미소를 지어 고개를 돌려보니 제레인트가 카알에게 응원을 보내는 장면이 눈에 들어 왔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휘두르며 입모양만으로 외치고 있었다. '과묵 하다고 해서 어려워할 필요 없어요! 카알! 저 사람은 도움을필요로 할 겁니다!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 흥분된 얼굴을 보다가 난 급하게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막았다. 제레인트의 응원에 고무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말할 구실이 생각난 것 인지 카알은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하슬러씨? 당신의 상사이자 친구였던 조나단 아프나이델 경비대장께서 나에게 말하시길…" "대장님은 잘계시오?" 하슬러의 퉁겨지는 듯한 질문에 카알은 잠시 당황했다. "예? 아, 잘 있습니다. 당신과 따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어쨌든 그 분이 말씀하시길 당신과 에포닌양은 어딘가 평 화롭고 조용한 땅을 골라 정착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불 행은 하나같이 당신의 책임 밖의 일이었고, 당신은 너무 오래 미뤄두었 던 행복을 되찾아야 된다고 하시더군요." 하슬러는 고개를 숙이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느릿하고 작은 동작이었지 만 절망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무거운 동작이었다. 하슬러는 한참 후에야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사람이 옛이야기처럼 살 수는 없소." "글쎄요. 그리고 모두들 행복했답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결말이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만." "내 딸에게 도망자의 생활을 선물하란 말입니까." "…물론 당신은 반란자였고 남은 여생 동안 법망을 피해다니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요. 아니, 아마 그게 확실할 거라고 생각되오. 하지만 당 신은 뛰어난 전사고 대륙의 서부는 아직도 미개척지나 마찬가지요. 황혼 의 고향으로 달아난다면 추적의 손길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 데." "내 딸의 장래는?" "따님은 그 아버님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으로선 에포닌양에게 그것보 다 더 큰 선물을 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에포닌양의 장래는 그녀의 책 임입니다. 그리고 장래를 걱정할 정도가 될 때면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 을 겁니다. 시간이 베푸는 망각의 선물은 만인에게 평등합니다. 하슬러 씨의 일은 잊혀지겠지요." ================================================================== 13. 대마법사의 만가……2. 하슬러는 그 짧은 몇 마디를 꺼내놓느라 힘을 다 소진한 것처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카알은 잠시 테이블에 팔을 기대 채 하슬러를 바라보다 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그럼 어쩔 생각입니까? 하슬러씨." 하슬러는 대답하지 않았고 네리아의 눈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벽난로 앞에 깔린 털가죽에 앉은 채 두 다리를 무릎 밑에 모은 자세로 말했다. "이봐요,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혹시나 넥슨을 끝까 지 도와서 반란을 성공시켜 출세해보겠다는, 그래서 에포닌을 레이디로 만들겠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관두시라고 말하겠어요." 하슬러는 우울한 눈빛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다시 다리를 좌우로 내리더니 무릎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당신 말고는 다 잘 아는 사실인데, 넥슨은 이제 글렀어요. 그 멍청이 쟈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잖아요." 쟈크의 이름을 말할 때 네리아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떨림 같은 것이 느 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희미하게 사라졌고 네리아 는 계속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에포닌은 레이디엔 관심없었어요. 그대로 할슈타일가에 눌러앉 아 있었으면, 흠, 기분이야 좀 나빴겠지만 그래도 할슈타일 가문의 영애 로서 좋은 가문에 시집도 가고 장차 레이디라고도 불렸을 거에요. 하지 만 에포닌은 거기서 나왔잖아요? 당신이 아빠라면 딸의 마음은 이해해야 되잖아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카알의 점잖은 입으로는 나오지 않았을 시 원시원한 말들은 날 상쾌하게 만들었다. 하슬러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네 리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씩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갑자기 발딱 일어서더니 침대로 다가갔다. 네리아는 한 손을 펼쳐 누워있는 에포닌을 가리켰고 하슬러의 얼굴에선 마치 메두사의 얼 굴이라도 보는 듯한 딱딱한 공포가 나타났다. 네리아는 잠든 에포닌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딸이에요. 시대의 풍운아나 위대한 반란자 같은 아버지는 관심없 는, 그저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원하는 딸이라구 요. 내 말 이해 못하겠어요?" 하슬러의 머리가 조금 좌우로 흔들렸다. 이해하오. 그러자 네리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서는 말했다. "그럼 뭐가 어려워요? 얼굴 좀 뜯어고쳤지만 에포닌은 아빠를 알아보아 요. 아까 당신이 입을 열자마자 에포닌이 당신을 알아본 것 기억하지요? 그럼 그것도 문제가 안돼요. 조용한 곳에 숨어서 머리를 식히면서 당신 의 책임을 다하라구요. 에포닌의 아빠로서의 책! 임!" 네리아의 입에서 나온 책임이라는 말은 형체를 가지고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이 다가 왔다. 하슬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이미 아버지이기를 포기한 자요. 협박에 몸을 사렸고, 더러운 욕망 에 내 자식들을 내어준 자요." "그럼 시정해요!" 네리아의 대답은 눈깜짝할 사이에 나왔다. 그러나 하슬러의 대답은 더 욱 느려졌다. "무슨 말인지 잘 아오… 하지만 주인님을 포기할 순 없소." "넥슨 휴리첼 말입니까?" 제레인트가 갑자기 끼어들자 고함을 빽 지르려던 네리아는 입을 다물었 다. 하슬러는 피로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당신은 지금 자신을 300년전의 할슈타일공과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주인이 어떤 지경이든 끝까지 주인으로 모신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 기사도 멍청이와는 비교하지 마시오!" 하슬러를 알게 된 이후로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으막했지만 제레인트의 입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처절했다. 제레인트는 입을 벌린 채 하슬러를 바라보았고 하슬러는 찡그 린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카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주인은 당신이 떠나기를 원한 걸로 알고 있소만." "압니다. 하지만 충성은 나의 것이고 복종도 나의 것이오." 카알은 하슬러의 찌푸려진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를 그토록 따르려는 겁니까. 그가 이루어주기로 약속했던 당신의 소망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슬러가 고개를 홱 들어올렸을 때 나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며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는 짓씹어뱉 듯이 말했다. "할슈타일의 패망. 그 피의 단 한 방울도 남겨지지 않는 완전한 파멸!" 카알은 다시 입을 열기 위해서 꽤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되었다. 하 슬러의 지독한 분노의 여파는 저 두려움 모르는 드워프의 노커 엑셀핸드 마저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으며, 엑셀핸드는 창백한 표정으로 하슬러를 훔쳐보고 있었다. 카알은 말했다. "내가… 당신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말이 안되는 소리겠 지요." 하슬러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눈길을 회피하 면서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나이델공에게… 당신의 아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할슈타 일에 대해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하다라. 당신은 당신 입으로 말한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당신은 내 분노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는데."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말해드리리까?" 하슬러는 갑자기 침대를 쏘아보았다. 어라? 갑자기 에포닌과 레니는 왜 저렇게 쏘아보는…레니? 하슬러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레니를 가리키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계집애는 할슈타일의 딸일 거요. 맞소?" 순간 네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바뀌었다. 네리아는 재빨리 침대 옆으로 달려가 에포닌과 레니를 가로막았다. 하슬러는 네리아를 쏘아보다가 앞 으로 한 발 내딛었고 그러자 네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슬러를 올 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두 팔을 좌우로 벌렸고 하 슬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때였다. "멈춰." 벽에 기대어 꼼짝않고 서있던 운차이의 몸에서 그 입만 살아있는 것처 럼 말소리가 들려왔다. 운차이는 기대선 자세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하슬러를 노려보며 말했다. "허튼 짓 할 생각마라." 하슬러는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이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려들 때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은가." 그러나 운차이의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선 입 술만이 외롭게 움직였다. "핫소드 그란이라고 불렸다더군." 순간 운차이의 입술에서 사납고도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북부의 미련한 곰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렸다는 것, 나한텐 안통해." 하슬러는 피식 웃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으며 운차이는 바라보지도 않 은 채 말했다. "네 과대망상은 타이밍을 잘맞췄다. 난 지금 아무 짓도 할 생각이 없으 니까." 누가 한숨을 쉰 것일까? 아프나이델 아니면 그 옆에 앉아 있던 샌슨일 텐데. 내 한숨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한숨까지 들을 수가 없잖 아. 하슬러는 테이블에 앉으면서 카알에게 말했다. "난 지금 저 게집애가 내 딸과 함께 누워있다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오." "레, 레니양에겐 아무런 잘못도…" 질려있던 카알의 입에서 힘들게 말 비슷한 뭐가 새어나왔다. 하슬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카알은 입술을 깨물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 다. 인간이 뿜어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가 간신 히 풀려난 네리아는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운차이는 그런 네리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프나이델이 서툴게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을 때 하 슬러는 말했다. "그렇소. 난 할슈타일의 이름이 붙은 핏줄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버 리고 싶소. 그가 내 가족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나도 그 가족에 대해 증 오를 느낀다는 것,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의 증오가 망칠 수 있 는 것은 당신의 몸 뿐일 거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후작을 어 떻게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넥슨이라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선 후작 을 어떻게 할 수 없소. 현실을 생각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현실을 생각했다면 반란에 끼어들지도 않았소!" 카알의 입이 굳어버렸다. 하슬러는 불길을 토하듯 말했다. "할슈타일은 내 발 앞에 비굴한 생명을 던지게 될 것이오. 그렇게 만들 겠소."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서툰 동작으로 네 리아를 위로하던 아프나이델이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네리아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말한 것이 틀림없다. 하슬러는 말했다. "용서하라고?" 아프나이델은 네리아의 어깨를 조금 쓸어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하슬러의 타오르는 눈빛에 맞서,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왜 그래야 되지?" "저 또한 용서를 받은 자일 뿐 누굴 용서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정확 하게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유피넬의 저울대가 곧다고 말하는 이유 가 뭐겠습니까?" 아프나이델의 조용한 어투는 하슬러로 하여금 그의 원래의 침묵으로 돌 아가게 만들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제레인트 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레인트씨에게 물어볼까요." "예? 예? 저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 쏠리자 제레인트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짢은 기억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넥슨 휴리첼씨는 언젠가 제레인트씨 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기억합니까?" 어, 어? 그렇군. 대미궁에서 제레인트는 넥슨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다. 드래곤 로드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눈을 동그 랗게 뜨면서 말했다. "아니,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지요. 독특한, 겪기 어려운 경험이니까 요. 하하." "그럴 테지요. 그런데 오늘 저녁, 당신은 그에게 아무런 분노도 표현하 지 않더군요." 조금 전과 다른 눈빛이 제레인트에게 집중되었다. 제레인트는 뒷머리를 긁기 시작했고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를 용서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예… 굳이 말하라면, 뭐 그런 거겠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를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비한 시선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바보처 럼 웃더니 말했다. "내가 워낙 고매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이봐요, 엑셀핸 드.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요. 좀 그쳐주시겠습니까? 아, 고맙습니다. 뭐,에, 특별히 증오를 느낄 필 요가 없었다고 말하면 설명이 될까요?" "설명해주십시오, 프리스트." 아프나이델은 정중하게 말했고 제레인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다시 뒷머리를 마구 긁어대더니 말했다. "뭐, 그의 변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변한 모습이오." "예. 신이 우리를 굽어살피시긴 합니다만, 우리 자신이 신인 것은 아닙 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래서 실수를 하고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들이 달라질 것을 알지 않습니까? 우리 수명이야 짧다면 짧지만, 사 실 굉장히 오래 사는 거라고 보여지는데요, 엑셀핸드! 그런 식으로 웃지 말라니까요! 어, 그 긴 시간 동안 변화가 일어날 시간은 충분하고, 그러 니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는 법입니다. 그게 신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인 걸요." "가장 큰 차이라고요." "예. 신은 변화할 수 없지만 인간은 변화할 수 있지요." 잔잔한 감동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신은 무한하고 따라서 불변한 존재입니다. 변화하면 신이 아니시죠. 그러나 인간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인간을 대할 때 상대가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뭐, 그런 정 도면 설명이 될지요." "물론 설명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프리스트."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정중하게 말했고 제레인트는 크게 당혹한 표정으 로 웃었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하슬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슬러는 침중한 표정을 한 채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할슈타일이 개심하기를 바라란 말이오?" "어렵습니까?" 하슬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운차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의 형형한 눈빛에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하슬러는 두 손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물에 빠진 개 모양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주인도 당신들을 용서했지." 하슬러는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 주인도 바이서스와 할슈타일은 용서하지 못했소." 카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주인이… 왜그리 바이서스와 할슈타일을 증오하는지, 당신은 말 해줄 수 있소? 그것은 당신 주인이 말하던 그 여덟 별이라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요?" "관련? 모든 것은 여덟 별과 루트에리노의 마법의 가을에서 비롯되었 소." 하슬러는 냉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둘 그 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13. 대마법사의 만가……3. 탁탁탁탁탁. 핸드레이크는 무서운 기세로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순간적으로 계단 따 위 집어치우고 단숨에 텔레포트 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으면서 두 다리만 사용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핸드레이크는 상대로 하 여금 자신을 가로막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만이 이 침입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므로.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저들이 자신, 핸드레이크를 막 을지 알아보고 싶기도 하였다. 지하실의 음습한 냉기가 피어올라 그의 입에선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 다. 계단을 다 내려온 핸드레이크는 커다란 철문을 응시했다. 그 앞에는 두 명의 기사, 일스와 허즐릿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서라, 누구냐?" 일스와 허즐릿은 황급한 속도로 계단을 내려온 자를 향해 각자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침입자가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보고서 허즐릿은 바 닥에 놓여있던 램프를 위로 들어올렸다. 램프 불빛에 드러난 핸드레이크 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허즐릿은 숨막힌 신음을 흘렸다. "핸드레이크공? 아니, 여긴 어떻게…" 핸드레이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스와 허즐릿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면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잔뜩 짓눌린 목소리가 핸드레 이크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당신들이 수문장 노릇하고 있다면, 문 뒤에 있는 것은 뭘까." 허즐릿은 당황한 표정으로 핸드레이크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일스는 검을 여전히 핸드레이크의 심장으로 겨냥한 채 싸늘하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핸드레이크." "그래야할 이유를 세 가지만 대어보시오." "말장난하고 싶은 기분도, 그럴 상황도 아니오. 당신더러 이곳에 와달 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돌아가시오." 핸드레이크는 거칠게 말했다. "와달라고 한 사람도 없지만 오지 말라고 한 사람도 없어. 아니, 말을 정정해야 되겠군. 오지 말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없애버리겠어." 일스의 검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포 때문이 아니다. 그가 마음을 결정함에 따라 교묘하게 흔들리는 검끝으로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고급한 기술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단련된 전사 일스. 그 는 지금 '핸드레이크를 죽일' 심산인 것이다. 사태를 보고있던 허즐릿이 기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핸드레이크공! 당신이 불쾌하게 생각할 것은 잘 알지만 우리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대왕의 명령에 따라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오. 대왕께서 당신마저 막을 생각은 아니시겠지만, 우리는 자의로 대왕 의 명령을 해석할 수는 없소. 그러니 부디 돌아가주시오." 허즐릿은 팔을 좌우로 펼쳐보이면서 간곡하고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 나 핸드레이크의 싸늘한 얼굴은 변합이 없었다. "조금 전 위대하신 일스공이 말씀하셨듯, 말장난할 기분도, 그럴 상황 도 아니오. 난 안에서 당신네들이 뭘 하고 있는지 봐야겠소. 검을 검집 에 꽂은 채 죽겠소, 아니면 손에 들고 죽겠소?" 이 폭언은 허즐릿의 입을 딱 벌리게 만들었고 일스로 하여금 사나운 고 함을 지르며 달려들게 만들었다. "히야압!" 일스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핸드레이크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일스의 검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중심을 잃은 일스는 무 릎을 호되게 땅에 부딪혔다. "큭!" "우아아!" 허즐릿은 비명인지 기합인 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를 지르며 핸드레이크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순간 그의 몸은 허공에서 덜커덩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즐 릿은 거꾸로 벽쪽을 향해 날아가버렸다. "아아아!" 콰광! 벽에 부딪힌 허즐릿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눈이 찢어져 라 부릅 뜬 채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혀를 깨물어버렸는지 그의 입에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땅에 쓰러져있던 일스는 욕설을 내뱉으 며 대거를 뽑아들어 핸드레이크를 찌르려 했지만 다음 순간 폐부가 갈라 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으으아아아! 내, 내 팔! 우아아!" 일스는 팔꿈치까지 시커멓게 타들어간 자신의 팔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광경을 보던 허즐릿은 피 섞인 함성을 지르며 벽에서 몸을 떼어내려고 했지만그의 몸은 벽에 완전히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았 다. 핸드레이크는 일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사답게, 주군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시오. 우정을 맹세한 전우와 함께." 말을 마친 핸드레이크는 손을 휘저었고 일스는 그대로 날아가기 시작했 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날아간 일스는 철문을 사이에 두고 허즐릿의 반 대편 벽에 달라붙었다. "크헉!" 두 명의 기사는 마치 문의 좌우에 새겨 진 조각처럼 자리잡았다. 허즐릿이 턱턱 막히는 숨소리를 내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핸드레이크는 두 기사에겐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문으로 다가섰다. 두 손으로 문을 밀어붙이려던 핸드레이크는 잠시 주춤했다. "마법이?"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있는 일스를 쏘아보았다. 일스는 팔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히죽거리며 말했다. "더, 더러운… 마법이 걸려, 이, 있지. 크흑! 미친 개는, 미친 개로 사, 상대하는 법…." 핸드레이크는 단번에 일스의 목을 비틀어버리려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 들었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철문을 쏘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조 금 달싹거리고나자 곧 육중한 철문이 부르르 떨러기 시작했다. 허즐릿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철문을 바라보았다. 무게가 수천파운드는 될 저 철문이 마치 풀피리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문에서 는 강렬한 폭음이 들려왔다. 꽈과과광! "맙소사…!" 벽에 붙어있던 허즐릿은 신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 핸드레이크의 앞 을 가로막던 철문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벽에 띄엄띄엄 걸려있는 횃불이 으스스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핸드레 이크는 무서운 눈으로 앞을 쏘아보며 걸어갔다. 그가 걸어감에 따라 그 림자가 어지럽게 겹쳐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인간의 솜씨다. 주위를 둘러보던 핸드레이크는 확신을 굳혔다. 이것은 드워프의 솜씨가 아니라 인간의 조악한 솜씨이다. 조악하긴 하지만, 그 것은 저 드워프의 정교하고 화려한 손에 비추어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며 실제론 굉장한 건물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간들이 이토록 거창한 지하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까? 잠시 후 핸드레이크의 앞에 세 갈랫길이 나타났다. 정면으로 통하는 길에 한 명의 기사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열발짝 쯤으로 좁혀졌을 때, 저편에서 딱딱하면서도 차분한 목소 리가 들려왔다. "역시 당신이었군. 허즐릿과 일스는?" 질문을 던져온 것은 육중한 할버드를 지팡이처럼 가볍게 짚고 선 라인 버그였다. 핸드레이크가 일으킨 소란은 드워프가 아니라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핸드레이크는 대답없이 계속 걸어갔다. 라인버그 역 시 꼼짝도 하지 않고 할버드를 짚고 선 채 다가오는 핸드레이크를 쏘아 보았다. 두 사나이 사이로 숨막히는 정적,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나직한 발자국 소리만이 흘렀다. 그 때였다. "죽어랏!" 화산이 터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왼쪽 통로에서 무지막지한 도끼가 날 아들었다. 캄드리는 일생 최고의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고 매처럼 날카로 운 그의 겨냥은 정확하게 핸드레이크의 머리를 치고 들어갔다. 휘이익! 그러나 도끼는 허공을 가로질러 벽에 부딪히며 맹렬한 불꽃을 튕겼을 뿐이다. 벽을 후려친 캄드리는 손목이 박살나는 고통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쿠아아아!"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핸드레이크의 자취를 쫓으며 라인버그가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라인버그의 눈이 빈틈없이 통로를 살 폈지만 어디에서도 핸드레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캄드리를 부축하기 위해 왼편에서 모닝스타를 들고 뛰쳐나오던 멜다로가 라인버그 를 흘깃 바라보았다. 라인버그는 멜다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멜다로는 비명을 질렀다. "라인버그!" 순간 사태를 알아차린 라인버그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의미없는 비명을 던지며 몸을 날렸지만 라인버그는 이미 틀렸다는 생각 을, 몸을 던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죽기 직 전엔 일생이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헛소리. 콰당! 부딪히는 감촉도 못느 끼겠지. 그의 기대완 다르게 라인버그는 땅에 쓰러져 뒹굴었다. 땅은 확실히 있 었고 부딪힌 몸은 엄청 아팠다. 그러나 라인버그는 재빨리 굴러일어나서 는 할버드를 낮게 휘둘러 몸의 중심을 잡고 자신이 서있던 장소를 노려 보았다. 그곳엔 핸드레이크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서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라인버그는 짧고 강하게 말했다. 핸드레이크는 곧 멈춰섰다. 그것은 명령을 이해해서였다기보다 는 그 철저한 명령형, 아무런 불안도 의심도, 심지어 명령권자의 권위조 차도없는 완벽한 명령에 대한 반사작용 같은 것이었다.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돌렸고 바로 그 순간 캄드리가 욕짓거리를 뱉어내 며 도끼를 집어던졌다. "우리야압!" 그러나 떨리는 팔로 집어던진 도끼 는 과녁과 엄청난 거리를 둔 채 빗나갔고 핸드레이크는 꼼짝도 하지 않 고 캄드리를 쏘아보았다. 그의 턱이 스르르 움직이자 모닝스타를 어깨 위로 들어올리려던 멜다로의 팔이 그대로 굳었다. 멜다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 지 못했다. 그 때 라인버그가 말했다. "당신은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야만인의 기술도 배울 기회가 있었겠지. 남쪽 야만인의 눈빛을 다루는 기술 아니오?" "살기라고 하지요." "그렇소? 놀랍군. 전사들만이 그것을 다룰 줄 안다고 들었는데." "정신을 단련하는 자들이 다룰 줄 아는 거요. 우리나라의 전사라면 그 건 어렵겠지. 그런데, 날 계속 방해할 겁니까?" "가시오. 우린 당신을 막을 수 없소." "뒤를 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라인버그의 얼굴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불쾌감이 떠올랐다. 라인버그 는 신음을 토하며 앞으로 달려나가려드는 캄드리를 말리며 차갑게 말했 다. "기사답게 뒤를 치지는 않겠소." 핸드레이크는 찌푸린 눈을 한 채 입으로만 웃었다. "당신들은 이미 내 뒤를 쳤지 않소. 날 빼돌리고 이런 어두컴컴하고 냄 새나는 쥐구멍에 모여드는 것으로서." 멜다로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핸드레이크가 몸을 돌린 순간 캄 드리는 더러운 욕설을 뱉으며 라인버그의 팔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 갔다. 그러나 채 세 걸음도 딛기 전에 캄드리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쓰 러지고 말았다. 쿠당탕. 라인버그가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핸드레이크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쌀쌀맞게 말했다. "캄드리는 죽지 않았소. 기사로서의 캄드리로 말하자면 죽은 것보다 더 못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통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캄드리는 바닥을 후 려치며 눈물섞인 고함을 질러대었다. "흐크아악!" 그 옆에선 라인버그가 침통한 얼굴을 한 채 핸드레이크가 사라진 통로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 다.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걸어갔다. 투닥, 투닥, 투닥.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생물, 그러면서도 민첩하고 부드러운 생물 특유의 가볍고도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 작했다. 잠시 후 핸드레이크의 앞쪽 허공엔 붉은 눈이 나타났다. 붉은 눈은 적어도 5 큐빗 쯤 되는 곳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 아래로 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한 냄새가 풍겨온다. 곧 그 생물은 지하 통로가 무너질듯한 괴성을 질렀다. "캬라라라라라!" 포효는 몇 초 정도였지만 그 울림은 한참 동안이나 되울려 지하 통로를 가득 메웠다. 생물은 검은 두 팔을 좌우로 벌렸다. 벌린 두 팔에서 대거 같은 손톱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톱은 좌우의 벽에 긁혀 귀를 찢는 마찰 음과 불꽃을 튀겼다. 까가가각! "캬라라라라라!" 생물은 곧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걸어갔다. 파아앗! 통로에는 핸드레이크만이 남았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 었다. 핸드레이크는 한결같은 속도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정면에 화려한 장식이 된 아치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 아래로 장엄한 문 이 나타났다. 핸드레이크는 아치의 장식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인간, 인간. 오로지 인간만이 새겨져 있었다. 검을 들고 포효하는 남자, 남자의 손에 이끌리는 아름다운 숙녀. 드래곤을 밟아죽이는 전사 와 신의 진리를 깔아뭉개는 현자들의 모습. 핸드레이크는 거칠게 문을 밀어젖혔다. 실제로든 마법으로든 잠겨있지 않은 문이었다. 문은 좌우로 튕겨지며 불길한 충돌음을 길게 울렸다. 밀 폐된 지하실이라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핸드레이크는 방안을 쏘아보았다. 방안의 광경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사면을 둘러싼 벽에는 화 려한 테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테피스트리에는 상상할 수도 없이 화려 한 그림들이 그려져있었다. 땅을 파헤치는 인간, 바다를 정복하는 인간, 성탑 위에서 대지를 굽어보는 인간, 피의 전장을 달리는 인간, 인간을 노래하는 인간, 인간을 찬미하는 인간, 인간, 인간, 인간. 모든 장식과 조각에 반드시 나타나는 엘프, 드워프, 드래곤, 페어리 등 의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드래곤은 있었다. 힘줄이 불끈 ?은 전사의 주먹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축소되어 마치 날개 달린 강아 지처럼 보이는 드래곤의 목이 거머쥐어져 있었다. 드래곤은 길게 혀를 빼문 채 늘어져있었고 전사는 자신이 쥔 이 경이로운 전리품에 대해서는 싸늘한 시선 하나 보내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 리고 아름다운 숙녀는 그 전사에게 찬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현기증을 느끼며 방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초록색 제단이 있었다. 푸른색 비단이겠지만 이 횃불빛 아래에서는 불 길한 초록색으로 보였다. 그리고 제단 주위엔 세 명의 인간과 한 명의 페어리가 있었다. 제단 앞에 서있던 제로딘과 차넬은 검을 뽑아들고는 문쪽을 바라본 채 서있었다. 그리고 제단 뒤편에는 핸드레이크의 꿈의 성취를 지불하기로 하고 그의 인생을 산 자가 서있었다. 핸드레이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트에리노." 제로딘과 차넬은 기다리던 말이 나오지 않자 잠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 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분노한 얼굴로 검을 꼬나들었다. 하지만 핸드레이 크는 그들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제단 뒤의 남자, 루트에리노 바 이서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제단 귀퉁이에 앉아있는 페어리를 바라 보았다. "다레니안." 다레니안의 얼굴은 파리했다. 그녀의 뒤를 후광처럼 빛나게 했던 날개 가 사라지고나서 그녀의 얼굴에 미소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다레니안 은 핸드레이크를 향해 힘들게 미소지어보였다. "안녕, 핸." 다레니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 마법은, 당신 신발의 끈도 잡아당기지 못하는군."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 은 제단 위로 옮겨졌고, 거기엔 파괴된 보석들이 흩어져있었다. 핸드레이크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챠넬이 헛기침을 뱉었다. 점잖은 헤게모니안족답게 협박의 말이나 욕설 등은 입에 담지도 않는 챠넬로선 최고의 협박인 셈이다. 핸드레이크가 발걸음을 멈추고 챠 넬을 쏘아본 순간, 루트에리노의 입이 열렸다. "검을 치워라. 제로딘, 챠넬." 챠넬은 곧 공손한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제로딘은 주춤거 리며 말했다. "전…" "치우도록." 제로딘은 이를 악물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땐 눈 깜빡일 시간도 아쉽 다. 그런데 검을 집어넣으라니. 그러나 제로딘은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 다. 명예를 담은 그 얼굴이 자랑스럽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앞으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제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단 위에는 보석의 파편들이 흩어져있었다. 본래 휘황한 빛을 내뿜었 을 이 보석들은 산산히 조각나 이제는 하찮은 돌멩이보다 못하게 보인 다.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손을 뻗어 파편 하나를 집어들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묵묵히 파편을 쳐다보는 핸드레 이크를 바라보았다. 챠넬은 공손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눈으로 핸드레 이크의 동작을 감상하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로딘은 핸드레이크의 동 작 하나를 놓칠새라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었으며, 다레니안은 동정 심 담긴 젖은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트에리노 는… 그는 피로한 음성으로, 하지만 흥분을 지울 수 없어 미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핸드레이크." "여덟 별 모두?" 핸드레이크는 여전히 파편을 바라본 채 말했다. 루트에리노는 입을 다 물었고, 그러자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들어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그 는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려 파편을 움켜쥐면서 다시 말했다. "여덟 별 모두를 파괴했습니까?" "핸드레이크."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휙 돌려 다레니안을 바라보았다. 다레니안은 그의 타오르는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당신이?" 다레니안은 젖은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광포해지려는 심정을 가다듬으며 - 제단 위에 놓인 다레니안을 움켜쥐어 올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다시 한 번 질문했 다. "당신이 이들을 도운 거요?" 다레니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도와주었어요. 당신에 비하면 풋내기 마법사이긴 하지 만, 그래도 나 역시 마나에 안겨있어요." "어째서요." 다레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핸드레이크의 눈썹 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느닷없이 두 주먹을 들어올 렸다. "어째서! 으이익!" 쾅! 핸드레이크의 주먹은 다레니안의 바로 앞을 때렸다. 핸드레이크의 고함소리에 놀란 제로딘의 손이 칼자루쪽으로 움직였다. 제로딘은 칼자 루를 움켜쥐었다가 챠넬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칼자루를 놓았다. 핸드레이크는 제단을 짚고 선 채 머리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 카락이 앞으로 늘어져 얼굴을 가렸지만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페어리의 눈에 잘 들어왔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처절하게 파괴되어버린 것을 본 사내의 슬픔. 다레니안은 더이상 날아오를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비통하게 여기며 대신 걸어가서 핸 드레이크의 주먹을 쓰다듬었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주먹 앞에 앉아서는 그 떨리는 주먹 위에 힘 없이 상체를 얹었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주먹 위에 엎드린 다레니안을 내려보며 말했다. "어째서 그런 거요…." ================================================================== 13. 대마법사의 만가……4. 다레니안은 작은 얼굴을 들어 핸드레이크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았 다.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다레니안은 진저리를 치고나서 말했다. "당신이 여덟 별을 원하는 것은 잘 알아요, 핸. 당신이 얼마나…" "어째서 그랬냐고 물었소." 더할 수 없이 차가운 질문. 다레니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으흐흑!" 다레니안은 갑자기 흐느끼며 다시 핸드레이크의 주먹 위에 엎드렸다. "미안해요, 핸. 미안해요." 핸드레이크는 덜덜 떨리는 아랫턱을 고정시키려 애쓰면서 두 손으로 다 레니안을 감싸올렸다. 핸드레이크는 두 손바닥을 모아 그 위에 다레니안 을 앉힌 채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제로딘과 챠넬은 우울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루트에리노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자신의 가슴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요정의 여왕을 바라보며, 핸드레 이크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말했다. "다레니안. 당신은 페어리의 여왕이오. 페어리족의 운명이 당신의… 손 에 달려있소." 자칫하면 날개에… 라고 말할 뻔했다. 핸드레이크는 이를 악물면서 되 도록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당신은 많은 힘을 잃었소. 당신 한 개인으로서도 불행이지만, 당신 종 족 전체로서도 불행이오. 그런데 왜 당신 종족을 번영하게 할 수 있는 힘을 포기한 거요?" 다레니안은 대답을 못했다. 흐느껴 우느라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다. 핸드레이크는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다레니 안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들어 루트에리노를 바라 보았다. "어째서입니까." 루트에리노는 굳은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마주보았다. 핸드레이크는 다 시 한 번 질문했다. "어째서입니까. 여덟 별을 파괴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왜 인간 들을 포기한 것입니까?" "난 인간을 포기한 적 없네." "그렇다면 왜! 왜 창조와 생성을, 악의 치유와 오롯한 즐거움을, 우리 에게 발전과 사랑을 무상으로 영원히 선사할 힘을 파괴했다는 말입니까! 왜 우리가 신이 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단 말입니까!" "여덟 별은 우리에게 공포와 억압을 줄 수도 있네. 드래곤 로드가 어떻 게 우리를 다스렸는지를 자네는 잊었단 말인가?" 핸드레이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당신은 검을 무서워합니까!" "무서워하네." "뭐라고?" 핸드레이크는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루트에리 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넨 검을 쥐어본 적이 없으니 모를 테지. 검사는 검을 무서워하는 법 부터 익혀야 하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도 필요한 행위지. 검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자는 검사가 아니야. 칼잡 이일 뿐이지. 자네에게 묻겠네. 자넨 마나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가?" 핸드레이크는 꼿꼿이 서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무릎을 걷어차인 기분을 느꼈다. 루트에리노. 드래곤의 억압 아래내일의 의미를 잊은 채 살아가 던 인간을 결집시키고 마침내 드래곤 로드를 북방으로 쫓아버린 남자. 그의 청춘을 가져다 쓴 남자. 그 위엄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핸드 레이크는 이를 사려물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옳지만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말을 배신하고 있소. 검사 는 검을 두려워할 줄 알기에 검을 허리에 찰 수 있는 것이오! 여덟 별이 악용되는 것이 무서워 파괴하다니, 그것은 검이 무서워 검을 차지 않겠 다고 말하는 검사와 뭐가 다르단 말이오?" 루트에리노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그는 제단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는 편한 자세가 되었다. 그는 한가로운 동작으로 제단 위에 흩어진 파편 을 툭툭 건드리다가 조금 전 핸드레이크가 그랬듯이 그 중에 한 파편을 집어올렸다. 루트에리노는 파편을 눈 앞으로 가져와 유심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덟 별은 너무나 무서운 힘일세." 핸드레이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움켜쥔 채 흐느끼고 있는 다레니안의 작은 떨림이 그의 신경을 미치도록 자극했지만 핸드레 이크는 꾹 참으며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왜 우리가 이런 힘을 가져야 되지? 우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네. 우리 의 힘으로 우리의 내일을 개척할 수 있단 말일세. 내가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고 인간의 내일을 연 것은 여덟 별의 도움이 아니었네. 그리고 나 의 자손들도, 인간의 자손들도 인간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열어나가야 하네. 여덟 별의 도움이 아니라 그의 두 손으로…" "헛소리!" 루트에리노는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핸드레이크는 뭔가 단단한 것을 토해놓듯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힘겹게 말했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만을 위해? 이 거창한 인간의 신전을 온세계에 강 요할 것이란 말이오?" 핸드레이크는한 손으로 다레니안을 받쳐올린 채 다른 손을 휘저어 주 위를 가리켰다. 루트에리노는 뚫어지게 핸드레이크를 쏘아보았다. "그토록 작은 머릿속에 세계를 우겨넣고는, 세계를 마치 자신의 장난감 처럼 대하겠다는 말이오? 제멋대로 세계의 칫수를 재고! 제멋대로 세계 의 무게를 재어! 제멋대로 세계의 가치를 매길 거란 말이오? 당신의 힘? 당신의 손? 웃기지 마시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 고 인간을 구원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지독한 과대망 상은 처음 보는군!" "핸드레이크!" "입닥치고 들으시오! 당신에게 말대답하라고 부탁한 적 없어!" 루트에리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핸드레이크는 미친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구원하긴 뭘 구원해! 당신은 세계의 가장 최상단에 위치하던 드래곤 로드를 없애버렸을 뿐이오! 정점을 없애버렸을 뿐이지 구조를 바 꾸진 않았다고!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 위치에 들어갈 작정이라면 당신 은 아무 것도 바꾼 것이 없게 돼! 그 오랜 전쟁과 그 피가 모두 쓸모없 는 것으로 바뀌는 거야!" 핸드레이크는 다시 제단 위에 놓인 파편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당신이 한 소행이 모두 똑같아! 당신은 없애기만 할 뿐이야! 없애고, 죽이고, 지워버리고! 드래곤 로드가 우리를 지배했기에 당신은 드래곤 로드를 쫓아버렸어! 여덟 별은 우리를 무한에 접근시킬 수 있을 테지만 당신은 그것을 파괴해버렸어! 파괴, 파괴, 파괴! 당신은 생성과 치유를 알지 못해. 없애버릴 뿐이야! 질식할 것 같이 지독한 현실만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해!" "핸드레이크, 자넨 너무 흥분해서…" 핸드레이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호흡을 고르지도 않고 곧장 루트 에리노의 말을 잘라들어갔다. "유피넬은 저울을 들고 있지 검을 들고 있지 않아. 유피넬은 보다 큰 악에 대해 보다 큰 선을 베풀지, 악을 없애버리지는 않는단 말이야. 그 러나 당신은 없애버릴 뿐이야. 악의 가치도 모르는 머저리!" "핸드레이크, 자네!"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 같으니! 당신은 여덟 별을 파괴함으로써 불쌍 한 여덟 종족을 영원히 위험에서 구출했다고 믿고 있겠지? 여덟 별이 다 시 드래곤 로드 같은 자에게 들어가 그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바뀔지도 모르는 위험에서 말이야. 따라서 당신은 자신이 여덟 종족으로부터 영원 히 칭송받을만하다고 믿고 있겠지? 그 둔해빠진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군!" "핸드레이크! 더이상 그 따위로 말한다면 나도 더 참을 수 없네!" "계속 이 따위로 말할 테니까 잘 듣고 참아야될지 말아야될지 판단해! 하지만 경고하겠는데, 참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야. 당신이 드래곤 로 드에게 한 짓을 그대로 나 또한 당신에게 할 수 있어. 아니, 더 쉽지! 당신은 드래곤 로드가 아니니까." 루트에리노의 얼굴은 그저 굳어버리는 정도였지만 제로딘의 얼굴은 창 백하게 바뀌어버렸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핸드레이크의 도움이 있어서 간신히 드래곤 로드를 북녘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라 면 손가락만 움직여서도 루트에리노 대왕을 없애버리고 이 나라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로딘은 다시 한 번 서서히 손을 칼자루로 옮겨가 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흥분해서 떠드는 마법사라면, 제아무리 대마법사 라 하더라도 전사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제로딘은 우울한 결 과에 대해 에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련된 손길은 그의 고뇌에도 상 관없이 지하의 어둠속에서 뱀처럼 움직여 칼자루를 쥐었다. 핸드레이크는 외쳤다. "왜! 왜 날 배신한 거요!" 루트에리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제단에 한 손을 짚고 다른 손으론 이마를 감싸면서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넬 배신한 것이 아니야. 우정은 친구의 잘못을 시정해주는 것이고,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바로 배신이야. 자넨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 어."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럼 왜 진작 내 잘못이라는 것을 시정해주 시지 않았지? 왜 드래곤 로드가 쓰러지고 바이서스가 건국될 때까지 날 내버려두고서는 이제서야 내 잘못이라는 것을 시정해주시겠다는 거지? 그 동안은 날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우정이라는 것 정말 유용하 군. 필요에 따라 표현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우정이군?" 루트에리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뭐라해도 그가 핸드레이크를 이용 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 로드의 신비스러운 지배를 연구하던 젊은 마법사 핸드레이크는 신이 지상을 떠나기 전, 지상에 남겨진 종족을 위해 베푼 마지막 선물인 여덟 별에 대해 밝혀내었다. 그것은 순전히 미약한 증거와 그의 사고의 도약 속에서 만들어진 가설이긴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젊은이 특유의 무 모함으로 자신의 가설을 신뢰했다. 바로 이 여덟별이 드래곤 로드의 지 배의 근간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막강한 힘과 공포는 가지고 있었지만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오롯한 지배는 그 개인의 힘과 공포로서는 이루 어지지 않는다. 여덟 별이야말로 그의 지배의 신비였던 것이다. 젊은 이상주의자 핸드레이크는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이 여덟 별이 신 의 마지막 선물, 남겨진 종족들이 신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깨 달은 것이다. 만일 여덟 별만 손에 넣는다면 모든 종족은 상상할 수도 없는 번영과 행복, 상호이해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덟 별을 손에 넣으면 엘프와 드워프도 더이상 반목하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심 지어 오크도 인간의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여덟 별은 모든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종족의 가치관과 내일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의 힘만으로 드래곤 로드에게서 이 여덟 별을 강탈할 수는 없 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때, 그는 중부대로의 원정에서 저 유명 한 만남, 즉 하룻동안 세 번에 걸쳐 루트에리노를 만나게 된다. 당시 루 트에리노는 훗날 여덟 별로 불려질기사들 중 우타크와 차넬을 만나기 위해 중부대로를 왕복하고 있었다. 세번째 만나게 되었을 때, 루트에리 노는 핸드레이크에게 흉금을 털어놓게 되었다. 핸드레이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개념이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그보다는 다른 종족들로 하여금 서로를 이해하고 반목없는 번영을 구가하게 할 수도 있는 힘을 자신의 지배를 위해 사용한다는 이 유로 드래곤 로드를 증오했다. 그리고 루트에리노는 인간을 지배했기 때 문에 드래곤 로드를 증오했다. 그 성격은 달랐지만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의 증오의 대상은 같았고, 그들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루트에리노는 핸드레이크에게 여덟 별의 소유권을 약속했고 핸드레이크는 대신 클래스 9의 마스터인 자신을 통째 로 루트에리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거짓이었다. 루트에리 노는 핸드레이크로부터 그 여덟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것 을 파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렇다. 이것은 우정에 대한 배신이고 신뢰를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루트에리노는 가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덟 기사들 에게 여덟 별의 추구자라는 이름까지붙여서 핸드레이크를 믿게 만들었 다. 철저한 기만. 그리고… 긴 시간, 그 수많은 유혈과 고통의 세월. 무수한 영웅의 승리 와 무수한 영웅의 몰락. 비극과 더 지독한 비극들을 지나서, 마침내 루 트에리노는 드래곤 로드를 몰아내고 인간의 속박을 풀어주었다. 실로 수 백년만에 인간은 드래곤 로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으로서 대지 를 밟고 설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루트에리노는 슬픈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자넬 이용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네. 내 생각과 자네의 생각이 달 랐지만 난 그것을 말하지 않았지. 하지만 난 다시 한번 그 이름으로 부 르겠네, 친구여!"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의 부름에 대한 대답으로 죽일 듯한 시선을 보 내었을 뿐이다. 루트에리노는 흠칫했다. 문득 루트에리노는 저 황량한 암흑의 들판에서 드래곤 로드와 맞써싸우던 떠올렸다. 그 때도 이와 같 은 공포를 느꼈다. '아냐.' 루트에리노는 이를 악물었다. '그 때보다 더 한 공포다.' "친구여. 제발. 난 인간이 세상의 왕노릇하기를 바란 적은 없네. 단지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의 손으로 일어서길 바랐을 뿐이야. 드래곤 로드의 지배하에서도 평화는 있었네. 마법은 발달했고, 삶에 불편은 없었어. 하 지만 그것은 드래곤 로드라는 엄격한 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짓 된 평화였어. 우리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성인이 되어야 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야 해. 그래서 난 우리를 지배하는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서게 만든 것이네. 그리고 보게!" 루트에리노는 격정을 담아 외쳤다. "이제 영원토록 우리는 우리의 두 손으로 우리의 앞날을 설계할 수 있 게 되었네.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해. 그리고 우 리도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드래곤 로드처럼 너무나 강대한 적은 이 제 더이상 남지 않았네. 우리 모두는 이제 영원한 성인이 되었단 말일 세! 하지만 단 하나의 적이 남아있었네. 그것이 바로 여덟 별이란 말이 야!" 루트에리노는 제단 위에 놓여진 파편을 가리키며 외쳤다. "왜 우리가 저런 힘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가! 왜 우리가 어린애들처럼 수상쩍고도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앞날을 지배받아야 된단 말인가! 우리 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설 수 있네. 왜 우리가 저런 화려한 목 발을 쥔 채 서야 된단 말인가!" 루트에리노는 가슴을 크게 벌렁거렸다가 다시 날카롭게 말했다. "저것은 드래곤 로드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네. 드래곤 로드는 단순히 지배하기만 했지만, 저것은 우리를 무엇으로도 만들어버릴 수 있단 말일 세! 우리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단 말일세! 우리가 영원히 세상의 아이 로 남게 되도록 만들 수 있단 말일세! 나는 그것을 구원했단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그만 숨이 막혀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마법사와 전사의 차이인가?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고,자 신의 다리로 걷는 인간? 어처구니없는 환상. 말도 안되는 환상이지. 저 것이 무시무시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와 검을 다루는 전사의 차이였단 말인가? 멍청한! 마법사는 마나를, 외부의 강력한 힘을 다루기 때문에 저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전사는 자신이 쥔 검 한 자루로 자신을 이끈다고 믿지. 그래서 검을 자신의 힘이라고 믿고 있 는 것이지. 기가 막히도록 유아독존적인 환상. 검이라는 것은 광부에 의해 캐내어져 수렛꾼에 의해 운반되어 대장장이 에 의해 만들어지고 상인에 의해 팔려서 전사에게 쥐어지는 것이다. 세 상에 자기 손으로라는 것은 없다! 어처구니없는 환상이다. 가증스러울 정도의 자기애, 타인을 이해할 줄 모르고 타인의 존재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망상이다. 자신의 힘? 그렇다면 그대는 그대를 위해 피를 흘려준 저 숱한 바이서스의 병사들의 목숨은 어떻게 되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 지독한 망상으로, 모든 존재들의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는 문 을 제멋대로 닫아버린, 자신의 판단 하나만을 믿고 모든 피조물의 희망 을 뭉개버린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 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말하 고 있다. 핸드레이크는 더이상 말도 하기 싫은 느낌을 받았다. ================================================================== 13. 대마법사의 만가……5. 카알의 눈에서 벼락이 친 걸까? 아니었다. 굉음과 함께 창밖에 번개가 친 것이다. 콰르르릉! "꺄아아악!" 네리아는 곧장 옆에 있던 운차이에게 매달렸다. 정신없이 하슬러의 이 야기를 듣고 있던 운차이는 네리아의 습격에 대비하지 못하고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 뭐냐? 이거 놔!" 그러나 네리아는 죽기 전엔 떼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달려들었고 운차이는 노호성을 지르며 팔 을 들어올렸다. "이, 이걸!" 그는 그대로 네리아의 뒷통수를 내려칠 기 세였다. "어, 어?" 아프나이델은 뜻모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운차이는 팔을 들어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팔을 부르르 떨었다.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운차이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손은 계속해서 운차이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운차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리고 네리아 는 운차이의 무릎 위에 엎드린 채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조 금 전에 듣던 이야기 속의 핸드레이크와 다레니안이 떠오르는데. 운차이는 가슴에 매달린 네리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꽈 광! 다시 벼락이 치자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고서는 멈추었던 눈물을 다 시 터뜨렸다. 운차이는 눈을 최대한 찡그리며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가 입을 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난처한 목소리가 나왔다. "젠장. 이 여자, 벼락을 무서워하는 거냐?" 샌슨은 그만 고개를 돌리며 킥킥 웃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 다. "무지무지하게 무서워해요. 그런데, 때릴 거 아니죠?" "젠장! 여자를? 부탁이니 좀 떼어내어다오!" 글쎄. 그게 가능할까? 과연 운차이로부터 네리아를 떼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벼락은 점점 잦아들고 있었고 네리아는 미친듯이 매달렸 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다 큰 처녀를 사내 다루듯이 마구 다룰 수도 없 는 노릇이잖은가. 제레인트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달라붙었지만 도저히 될 일이 아니었다. 난 그만 두 손을 들고 항복해버렸다. "운차이. 어쩔 수 없어요." "이, 이거 봐!" "조언밖엔 줄 게 없네요.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쌍하게도 공포에 질린 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버려요." "제기랄… 이봐, 아프나이델! 이 여자 어떻게 재워버릴 수 없냐!" 아프나이델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메모라이즈한 마법은 아까 낮의 싸움에 다 써버렸는 걸요. 그리 고 내 생각에도 후치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불쌍한 자에겐 도움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겠습니까." 운차이는 그만 기운빠진 얼굴을 하고선 벽에 등을 기대었다. 운차이가 몸에 힘을 빼자 네리아는 더욱 바싹 달라붙었고 운차이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등에 손이라도 얹어주게. 불쌍하게 떨고 있잖은가." "…닥쳐, 이 드워프야. 상관하지마." 그러나 운차이는 흠칫거리며 손을 네리아의 등에 얹었다. 벌컥화를 내 려던 엑셀핸드는 그 광경을 보고선 그만 웃어버렸고 천장을 바라보던 운 차이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카알은 예의를 담아 그 광경을 못본 척하면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폭풍인가… 이 계절에는 드문 일인데.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주시겠 습니까, 하슬러씨."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가슴에 붙은 다레니안의 흐느낌이 줄어들기 시작 한 것을 느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미 래를 개척한다고? 그렇게 확신한다는 말입니까?" 루트에리노는 순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네, 핸드레이크. 확신하네. 인간은 드래곤 로드의 지배도, 여덟 별의 도움도 필요없네." "그것이 과연 마법사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한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 지 의심스럽군요." 핸드레이크의 말투는 조용하고 평온했지만 루트에리노의 낯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핸드레이크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 투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는 서로를 돕는 법이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른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오. 세상에 오직 하나, 미련한 전사들만 그 사실을 알 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래서 자신의 다리로 걷고 자신의 손으로 성취 한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틀렸소. 나는 단수가 아니오. 그 단순 한 사실도 모르는 병신 같은 작자야." 조용한 말투 때문에 마지막에 붙은 욕설은 좀 늦게 영향력을 나타내었 다. 제로딘도, 챠넬도, 루트에리노도 너무 늦게 그 욕설을 깨닫게 되어 적절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여덟 별의 존재 하나도 수용할 수 없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당신 을 건네고 동시에 그것을 건네받을 줄도 몰라서 그것을 파괴해버린 당신 이,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지극히 의문이오." 루트에리노는 잠시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 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에겐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루트에리노 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손에 얹힌 다레니안에게 말했다. "다레니안. 당신이 저것을 파괴했을 테지요. 남부의 야만인들의 말로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소. 당신이 저것을 다시 복구할 수는 없습니까?"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는 무서운 음성으로 말했지만 핸드레이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를 향해 콧방귀를 뀌어보이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우정은 사라졌소, 바이서스씨. 날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휴리첼씨라 고 불러주길 바라오." "뭐요!" 꽈과광! 굉장한 벼락이 쳤지만, 그래서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음 속에서도 카알의 경악에 찬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려왔 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 중 이야기를 하던 하슬러와 착란 상태에 빠져있 던 네리아를 제외하곤 모두들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카알은 테이블 모 서리를 꽉 움켜쥔 채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휴리첼, 휴리첼이라고? 핸드레이크의 성이 휴리첼… 핸드레이크 휴리 첼이란 말이오?"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넥슨 휴리첼의…?" "가문은 같소.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결혼하지 않았소. 따라서 직계조상 은 아니오. 핸드레이크의 공훈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백작의 지위를 얻 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오. 다만 휴리첼 가문은 개 국공신이었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오. 당시에도 휴리첼가는 무골집안이었 고,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문을 떠났으니 까. 이후론 그는 거의 휴리첼이라는 성을 쓰지 않았소." "그렇소? 그런데, 넥슨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소? 아니, 당신은 도대체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요?" 카알은 긴장된 표정으로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하슬러는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천히 듣고 있으면 다 알게 될 거요." "아, 알겠습니다. 들려주십시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작디작은 얼굴이 눈물에 젖어 더욱 애처롭게 보였다. 핸드레이크는 좌절에 찬 표정이 되어 다시 한 번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짓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바이서스씨의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다레니안. 당신은 왜 그를 도 운 거요? 저 자의 이야기를 믿게 된 거요? 저 자의 화려한 말 뒤에 숨겨 진 시커먼 속셈을 몰랐단 말이오?" 루트에리노는 이 방약무인한 어투에 대해서 크게 노했다. 하지만 그는 꾹 참았으며 동시에 챠넬과 제로딘에게도 참고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었 다. 핸드레이크는 그런 눈짓과 세 사람의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에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는 조용히 다레니안을 올려놓은 손바닥을 자신 의 얼굴 가까이까지 들어올렸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와 얼굴을 마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눈가를 닦 아내면서 말했다. "시커먼 속셈? 난 그런 거 몰라요. 내가 그를 도운 것은…" 다레니안은 갑자기 핸드레이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당신 때문이에요." 핸드레이크는 어차피 어떤 대답을 들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대답에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런 대답은 정말 기대할 수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 는 상태에서 멍청한 목소리로 댓구했다. "나 때문에?" "그래요. 핸.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은 세상 만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어요. 당신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자신으로서 살지 않았어요. 그날 밤의 대화를 기억하나요?" "그날 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반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밤… 당신은 모든 것에 당신을 주려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핸드레이크는 입을 다물고 다레니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아직도 당신의 말을 단어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해요. 당신은 이렇 게 말했어요.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는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 는 핸드레이크, 바이서스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 상 최초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드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 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 야 합니다.' 라고 말했지요." 날개를 잃은 요정의 여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말을 들으며, 핸 드레이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핸드레이 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난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나의 신념이오. 그런데 그것이 왜…" 다레니안은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난 그렇게 많은 핸을 알지 못해요."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작디 작은 얼굴에 가득한 슬픔과 동시에 도전적인 자존심, 긍지 등이 어우러져 나 타나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그 작은 입술을 조금 떨다가 말했다.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핸이에요. 그런데… 그런 당신이 여덟 별을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뭐요?" "당신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세상 만물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 지는 당신이? 인간 하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자신을 분열시키는 당신이? 당신은 아마도 페어리의 핸드레이크, 엘프의 핸드레이크, 드워프의 핸드 레이크, 호비트의 핸드레이크… 심지어 오크의 핸드레이크가 되겠지요. 수없이 많은 핸드레이크로 불어나 산산히 흩어져버릴 거에요. 국화의 꽃 잎을 뜯어본 적이 있나요? 한 잎, 한 잎을 뜯어내고나면, 마침내 아무 것도 남지 않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너무나분해되고 흩어져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거에요. 죽을 때까지 자신으로서 살 수 없을 거에 요."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다레니 안의 말을 기다렸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핸, 누구도, 어떤 종족도 당신에게 자신을 돌봐달라고 요구하지 않았 어요. 고귀한 엘프도, 자존심 강한 드워프도, 저 추악한 오크도… 어떤 종족도 당신에게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자신을 버려가면서 그들을 위해 애쓰려는 거지요? 자기가 있지 않고서는 타인도 없는 거에요. 그런데 왜 자기로서 살지 않는 거지요?"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타인 속에 있을 때 자신도 있다 는 것을."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글픈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순이에요. 타인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가 있음으로 해서 존재하 는 거에요.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그리고…" 다레니안은 갑자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서 말했다. "나무를 사랑하는 정원사가 가지를 쳐내듯, 우정과 사랑은 상대의 잘못 된 것을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에요. 아름다운 파괴지요. 그래서 난 여 덟 별을 파괴했어요."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극히 원시적이고도 잔악한 생각이라 자신이 먼저 놀라버리고 말았지만, 핸드레이크는 갑자 기 날개를 잃어 도망가지도 못하는 다레니안을 앉힌 채 '손바닥을 붙여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핸드레이크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 때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니… 일곱 별이군요. 드래곤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으니까." 순간 핸드레이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들어 루 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습니까?" 루트에리노는 눈살을 찌푸린 채 핸드레이크를 마주 보았다. 핸드레이크 는 재촉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드래곤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군요. 그렇지요?" 루트에리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드래곤의 별은 드래곤 로드가 가져갔네. 그날 내가 부상을 입 지만 않았어도 그를 물리치고 그것마저 획득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난 그를 끝장내지 못했고,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드래곤의 별을 가지고 도망쳤네."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제로딘 과 챠넬은 당황한 시선으로 그의 등을 쫓았고 루트에리노는 짧고 격하게 말했다. "어딜 가려는 건가?" 핸드레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레니안을 쥐어올린 두 손을 가슴에 꼭 붙인 채 핸드레이크는 지하 제단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나서기 직전, 핸드레이크는 잠깐 멈추어섰다. 그는 몸을 돌린 채 말했다. "적어도 한 종족에겐 희망이 남아있군요." "뭐라고? 설마, 자네!" 루트에리노는 제단을 돌아 달려나가려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핸드레이크 의 로브 자락이 크게 떠올랐다. 그는 몸을 돌려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 다. 제로딘과 챠넬은 뛰어오려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린 채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의 속셈은 능히 짐작할 수 있소. 바이서스씨." ================================================================== 13. 대마법사의 만가……6. 극히 차가운 말투였다. 루트에리노는 핸드레이크를 안 이후로 처음보는 그의 얼굴에 당황했다.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인간의 세상… 우린 엘프들이나 드워프들처럼 오래 살지도, 놀라운 기 예나 근면함을 갖추지도 못했지.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선 겨우 3, 40년에 불과한 시간만이 주어져있지. 그래서 우리는 무서운 생존력과 종 족번식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선대의 일을 후대에 넘겨주는 것으로서 엘프나 드워프들의 장수에 대항할 수 있지. 우리야말로 영원불사의 존 재… 잘 알 테지. 당신이 자주 한 말이니까." 루트에리노는 경악했다. 핸드레이크는 차분히 루트에리노 자신도 정확 하게는 깨닫지 못했던 그의 속마음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눈엔 다 보이는 듯하군. 엘프의 별이 없는 이상 엘프들은 자신의 조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 함몰되어 버리겠지. 드워프의 별이 없는 이상 드워프들은 자신의 독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탈락되어 버 리겠지. 페어리들의 여왕은 날개를 잃었으니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버리겠지." 핸드레이크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턱 아래에서 눈을 부릅뜨 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다레니안의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며 핸드레이크는 말했다. "호비트들은 자신의 소심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잊혀지겠지. 오크들? 어쩌면 우리와 가장 유사한 우리들의 형제인 그들은, 아쉽게도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지. 발전할 수 없는 종족이지. 이제 몇 백년 내에 대륙은 인간 소굴이 되고 말겠지. 저 테피스트리에서처럼, 세상을 자신 의 장난감으로 다룰 수 있게 되겠지. 우리 후손들이 부르는 인간 만세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군.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불길한 예언을 말하는 까마귀처럼 새되고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들의 단점, 우리들의 약점을 시정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어. 당신과 당신의 핏줄에 영원한 저주 있기를! 우리는 영원히 인간으로 남게 되었어!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어버렸어! 더군다나 비교할만한 다른 종족들이 모조리 대륙에서 사라 져버릴 테니, 자신의 오만과 오류를 알아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겠지. 이 영원한 잘못, 영원한 실패작, 영원한 시행착오의 종족을 만 들어낸 그대의 위업에 경배를 드리지. 축하하오, 바이서스씨!" 루트에리노는 아무런 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다만 입을 벌린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영원히 한 자리에 고정된 인간으로서 영 원히 높은 곳을 바라보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대 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날개잃은 요정의 여왕을 가슴에 꼭 붙인 채, 그 녀의 흐느낌을 조용히 달래며,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를 떠났다. 제레인트의 긴 한숨 소리는 300년 전의 세계를 떠돌던 내 정신을 다시 현실로 호출하는 신호였다. 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메드라인 고개, 그 위의 바라크 속에 있는 후치 네드발로 돌아왔다. 카알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채 두 손으로 볼을 감싸쥐고 있었다. 마 치 눈 앞에 놓인 촛불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켜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꽈 과광! 벼락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방 안은 하얗게 바뀌더니 기어코 지붕 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짚을 덮고 그 위에 밧줄을 얽어매고 다시 짚을 덮는 식으로 몇 겹에 걸 쳐 두껍게 만들어진 지붕이었기에 굉장히 아늑한 느낌을 주는 방안이었 다. 하지만 맹렬한 빗방울의 소리와 천둥 소리, 그리고 모진 바람 소리 속에서 나는 마치 야외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는 운차이의 무릎 위에서 눈물 콧물로 범 벅이 된 얼굴을 아무렇게나 던진 채 기절한 것인지, 잠든 것인지, 어쨌 든 정신을 잃고 있었다. 운차이는 여전히 서까래가 노출된 지붕만을 쏘 아보고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은 천천히 네리아의 등을 애무하듯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네리아의 호흡과 똑같은 속도로 움직였 다. 보고 있자니 나까지 졸릴 지경인걸. 카알은 촛불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떠난 것입니까?" "그렇소." "그리곤?" "그는 그 길로 북쪽을 향해 떠났소.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종족을 찾아 서." 하슬러는 잠시 자신의 말을 음미하는 듯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 했다. "하나의 종족… 모든 종족들이 운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조리에서 유 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종족을 찾아 떠난 것이오." "모든 종족의… 부조리라." 하슬러는 우울한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과연… 그렇소. 엘프는 선량하고 강하고 지혜롭지만 자신의 조화 때문 에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닌 존재… 드워프는 인내심 강하고 끈질기고 단 호하지만 자신의 외곬수 때문에 세상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는, 산속이나 지하에서만 자신들끼리 살아가는 존재…" 엑셀핸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대신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카알은 여전히 누구에게 도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자신에게 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얼핏 보면 무모할 정도의 상상력을 갖추었지만, 그 번식력과 그 상상력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자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숲을 걸어 오솔길을 만들고, 하늘을 바라보 아 별자리를 만들고, 땅을 굽어봄에 울타리가 생겨나고, 바다를 헤치면 항로가 생기게 만드는, 독존적인 존재." 엑셀핸드는 길게 연기를 뿜었다. 침대 귀퉁이에 앉아있던 제레인트는 카알의 말을 곱씹으며 웅울거렸다. 듣기 싫을 정도로 웅얼거리는걸. 아 프나이델은 꼿꼿이 선 채 카알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뭔가 를 말하고 싶은 투였지만입을 다물고 있었다. 카알은 한가롭게까지 들리는 말투로 하슬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대미궁의 드래곤 로드에게 간 것이군요." "그렇소." "그리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드래곤 로드 역시 핸드레이크의 제안을 거절 했던 것 같소. 핸드레이크는 드래곤의 별을 이용하여 드래곤들을 완전무 결한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자신을 제왕의 자리에서 쫓 아낸 남자에게 드래곤의 운명을 판가름할 수 있는 보석을 건네준다는 것 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오." "이해됩니다." "그래요. 이 과정에서 핸드레이크가 재미있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 지만 그건 불명확하오. 어쨌든 그 이야기에 따르면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의 별을 여러 개로 분열시켜 다른 종족의 별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을 했다 합니다." "영원의 숲!" 또 벼락인가? 아냐. 아프나이델의 비명 같은 고함 소리였다. 그와 동시 에 침대 귀퉁이에 불안하게 앉아있던 제레인트가 미끄러지며 바닥에 엉 덩이를 찧었다. 쿠당. 그러나 제레인트는 고통의 소리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얼빠진 얼굴로 테이블 위의 하슬러와 아프나이델을 번갈아바라 보았다. 하슬러는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소. 하지만 모든 것은 불명확하고 희미합니다. 과연 핸드레이크가 드래곤의 별을 여러 개로 분열시킬 목적으로 영원의 숲을 만들었는지… 글쎄올시다. 나로선 아무 것도 확언할 수 없소." 아프나이델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하슬러는 한결같이 침착 한 태도로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핸드레이크가 대미궁에서 나올 때 드래곤 로드의 공포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있던 대미궁의 오크들을 풀어주었다는 이 야기오. 오크들은 그곳에 붙잡힌 채로 드래곤 로드의 가축처럼 살고 있 었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들 역시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지성을 가진 존재 로 여기고는 방해와 폭력을 무릅쓰고 그들을 모두 자유롭게 만들어주었 답니다. 그래서 대륙의 오크들이 갑절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말이 있긴 하오." 꽈광! 이번엔 진짜 벼락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벼락 이 쳤다. 번갯빛의 하얀 잔광 속으로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왜 통로에 죽어있지? 통로라는 것은 죽어있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지.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이 통로를 지나다니던 다른 오크들에게 걸리적거 렸을 텐데 왜 그대로 놔두었지?' '어? 그렇네요. 음. 뭔가 난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내분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상하군. 드래곤 로드가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는데.' 대미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오크의 뼈다귀들. 뭔가 커다란 싸움이 일어 났던 것 같은 흔적. 핸드레이크가 오크들을 데리고 나오려 할 때 찬성하 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갈렸겠지. 그리고 싸움을 일으켰을 테고. 지하에 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번개가 쳐 세상이 하얗게 변했을 때 눈 앞에 칸 아디움의 황야에서 검은 투구의 오크 아그쉬가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취잇취이이익! 화렌차와! 오크의 친구인 성자 핸드레이크가 나를 돌보 신다!' 그랬던 것이군. 그래서 대미궁에는 오크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 던 것이군. 원래 드래곤 로드의 공포 때문에 잡혀있던 오크들은 핸드레 이크의 도움으로 모조리 도망쳤고, 그 이후로 다시는 오크들이 그 무서 운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였군. 그래서 아그쉬 녀석은 핸드레이크를 성자라고,오크의 친구라고 불렀던 것이었군. 하슬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그는 에포닌에게 짙 은 우수가 담긴 시선을 보내면서 말했다. "어쨌든, 일곱 종족은 자신의 별을 잃었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 대는 법을, 서로와 교류하는 방법을 익혀야 되었소. 인간이 가장 빨랐 고, 호비트, 드워프의 순서로 서로가 다른 종족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 소." "엘프는?" 하슬러는 말을 이으려다가 카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말해보시오." 카알은 우울한 얼굴로 하슬러를 마주보았다. 그는한숨을 쉬듯 말했다. "엘프는 원래 조화롭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웠겠지요. 그들은 조화 때문에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기 어려웠을 거요. 그래서 상 대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극히 어려웠겠지요." "정확하오." "그리고 오크… 오크들은 폭력과 증오로서 다른 종족들과 관계지어지게 된 것이오?" "그렇소. 그것은 오히려 강렬하고 빠른 관계라 할 수 있지요. 역시 핸 드레이크의 말마따나 오크는 인간들의 형제인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습니까." 하슬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단정짓듯 말했다. "그러나 드래곤은 유일하게 자신의 별을 가진 종족으로 남게 되었소. 다른 종족들은 모두 별을 잃어 자신의 부조리를 안게 되었지만, 그래서 서로에게 자신을 열어보이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 얼마씩을 희생 해야 되었지만, 드래곤만은 자신의 별을 지켰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전 에 가까운 종족으로서 남게 되었소. 오로지 드래곤만이 다른 종족의 도 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불완전한 다른 종족과 교류하지 않는 종족으 로 남게 되었소." 카알은 충격을 받은얼굴로 낮게 질문했다. "그래서 드래곤 라자가?"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드워프 라자도, 오크 라자도 없지만 드래곤 라자는 있소. 왜냐하면 드래곤만이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기 때 문에. 그래서 우리들 불완전한 인간들이 완전에 가까운 저 드래곤과 교 류하기 위해선 드래곤 라자가 필요한 것이오." 콰과광! 덜컹덜컹. 폭풍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문이 세차게 덜컹거렸다. 쏴아아아! 굉장한 빗소리와 함께 바라크 안으로 매서운 바람과 빗방울이 들이치기 시작했 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은 당장 꺼졌고 벽난로의 불빛만이 남았 다. 벽난로의 불꽃도 바람 때문에 크게 흔들려 방 안은 어둠 속에서 무 시무시한 그림자들이 광란하는 악몽으로 바뀌고 말았다. 난 재빨리 달려가서 문을 붙잡아 다시 닫았다. 와! 굉장한걸? 문을 밀 어붙이는 바람의 힘은 마치 여러 명의 인간들이 밀어붙이는 듯한 느낌마 저 주었다. 아니, 문 스스로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반항하려 드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간신히 문을 닫고나자 그 짧은 시간 동안 몰아친 비바람 때 문에 난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라보자 난로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쓰러진 초를 더듬어 세우고는 파이프를 이용해서 다 시 초에 불을 붙이는 엑셀핸드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방 안이 밝아졌 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카알과 하슬러만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고뇌에 빠진 얼굴 을 한 채 주위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테이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문을 밀어붙이는 힘이 더 강해진 것을 느꼈다. 어, 어? 이거 장난 이 아니네? 문을 걸어잠궈야 되겠군. 쾅쾅! 어라? 그 바람소리 마치 노 크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뭐야! 어서 문 여시오! 얼어죽을 지경이오!" 난 당황한 얼굴로 문을 열어 길시언을 맞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서 내가 맞이한 것은 길시언으로 짐작되는 '무지무지한 속도로 뛰쳐들어 오는 시커먼 무엇'이었다. "으, 으아아앗! 추워라. 에, 에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위계승권을 걷어차버린 완고한 남자답 게, 길시언은 문과 벽난로 사이에 섬쓺할 정도로 정확한 직선을 그리며 삽시간에 방을 가로질렀다.(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곤 묻지 마라. 나도 모르겠다.) 벽난로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속 도로 달려가서 그 앞에 주저앉은 길시언의 모습은 볼만했다. 완전히 젖 어버린 데다가 두 팔을 감싸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몸에서 뚝뚝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아랫턱과 윗턱을 맹렬하게 부딪히던 길시언은 주위 를 둘러보다가 그제서야 벽에 기대어 앉아서는 무릎에 기절한 네리아를 올려둔 운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길시언의 눈이 커다랗게 바뀌었다. "어, 어라? 보기 좋은, 우에취! 광경이군, 운차이. 훌쩍. 언제부터 그 렇게 가까워진 거지?" 운차이의 얼굴이 팍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렸 다. 난 수건을 찾아 길시언에게 건네면서 네리아가 번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 그래? 에취! 그럼 숙녀를 잘 모시, 모시, 에취! 이런." 길시언은 젖은 갑옷을 뜯어내듯이 벗고서는 셔츠까지 벗어서 물기를 짜 내었다. 수건으로 상체를 대충 닦고나서 그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는 셔 츠를 들고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그 때까지도 아무도 입을 열 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무슨이야기들 나누고 계셨던 겁니까? 훌쩍, 혹시 내 험담이라 도 하고 있었습니까?"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시언은 앞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먼저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 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천천히 앞이야기를 들려드리면 될까요?" "예? 아, 얼마든지. 좋을대로 하십시오." 길시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길시언에게 목례하고는 하슬 러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시겠소?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그 런 이야기들을 알게 된 것인지 궁금한데요." 하슬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시오네에게서 들었소." "시오네? 그 뱀파이어 말이오?" "그렇소." 아무래도 하슬러는 잠시 분위기가 소란스럽게 바뀌자 원래의 성격, 그 러니까 과묵한 성격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이다. 다시 아까처럼 말을 술술 꺼내려면 퍽 힘든 모양이지? 카알은 인내심있게 말을 걸었다. "시오네가 어떻게 그 과거의 이야기를 아는지는 혹시 모릅니까?" 하슬러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아야 되는 이유를 모르겠소." 카알은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하슬러는 길시언을 흘깃 바라보더니 잔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주인의 증오는 이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소? 루트에리노 바이서스 는 모든 자유로운 종족의 내일을 없애버린 자요. 모든 종족의 공적이 지." "뭐라고?" 쿠다당.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길시언의 반문이 터져나왔다. 길시언의 목소리는 그의 경악을 담아 굉장히 높은 소리로 울려나왔다. 거의 비명이나 다름없었다. 카알은 찌푸린 얼굴로 하슬러를 바라보다가 다시 길시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길시언은 여전히 한 손엔 자신의 셔 츠를 든 채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있었다. "이 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반역자답게 왕가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하슬러는 적의가 충만한 눈으로 길시언을 노려보며 말했다. "왕자님. 진실을 말하는 것이 능멸하는 것이라면, 난 지금 바이서스 왕 가를 능멸하고 있소." 길시언은 손을 들어올리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도 셔츠를 쥐고 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거친 동작으로 셔츠를 내팽개치고는 허리에 찬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멈추면서 말했다. "뭐가 진실이라는 거냐! 대왕께서 자유로운 종족들의 내일을 없애버렸 다고? 모든 종족의 공적이라고? 네가 지금 분명히 그렇게 말한 거냐?" "그렇소. …심지어 인간마저도." "뭐라고?" 하슬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난 양쪽을 빠르게 살핀 다음 가슴을 벌렁거리며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길시언쪽을 선택했다. 싸움이 나면 길시언부터 말려야 되겠는걸. 난 천천히 자리에 서 일어났다. 샌슨쪽을 바라보니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 다. 그는 눈동자만 움직여 눈짓을 보내었다. '길시언을 말려.' 난 고개 를 살짝 끄덕였다. '알았어.' 하슬러는 이제 똑바로 서서 길시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인간마저도. 다른 모든 종족들이 용서한다 하더라도 인간들, 동족들의 내일마저 없애버린 점에서 루트에리노는 용서받을 수 없소. 왕자님." ================================================================== 13. 대마법사의 만가……7. 길시언은 타오르는 눈으로 하슬러를 쏘아보며 빠르게 말했다. "설명해라." "길시언.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카알은 안타까운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길시언은 카알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슬러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 지만 팔짱을 낀 채 호기로운 태도로 길시언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여덟 별을 파괴했으니까." "여덟 별이 대체 무엇이길래! 보석 따위 비싼 돌멩이가 무엇이길래!" "우리를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보석." 하슬러의 대답은 평온했지만 길시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슬러를 바 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몇 번 적시고나서야 간신히 대답했다. "무엇으로든?" 하슬러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대담했다. "영원한 부조리, 영원한 패러독스, 영원히 반복되는 비극을 모조리 소 멸시킬 수 있는 보석입니다. 우리를 불사의 생물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무한을 생각하는 유한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의 부조리라면. 우리의 성 (性)을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 되어야 살 수 있는 존재가 남 성과 여성으로 나뉜 것이 우리의 패러독스라면. 심지어 우리를 신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신을 꿈꿀 줄 아는 인간인 것이 우리의 비 극이라면." "뭐라고?" 길시언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칼자루로 향하던 길시언의 오른 손은 어느새 허벅지쯤으로 늘어트려져 있었다. 다행이군. 당장 칼부림 날 일은 없겠는데. 나의 작은 안심과는 상관없이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 젓다가 말했다. "날더러 지금 그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라는 거냐?" "진실을 믿을 줄 안다면, 제 말도 믿을 수 있을 거요, 왕자님." 길시언은 갑자기 눈을 부릅 떴다. 그는 하슬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 했다. "그 보석이 네가 말한대로의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없애버리 는 것이 낫다. 대왕께선 현명하셨다." 하슬러 역시 길시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이제 담담한 표 정으로 말했다. "아니, 없애버리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라 없애버려야 된다. 왜 우리가 우리 아닌 다른 자가 되어야 된단 말인가. 난 자신을 바라볼 줄 몰라서 자신이 다른 것 되기를 바라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런 바보 여서는 안되고." 하슬러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한숨의 끄트머리에 혼잣말 하나를 달았 다. "핏줄의 힘은 무섭군."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벗은 상체를 내려다보 더니 집어던진 셔츠를 다시 주워올리며 말했다. "난 그런 자들을 안다. 자기자신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자가, 자신 스 스로도 감싸안을 줄 모르는 자가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다른 자 되기 를 원하는 것이다. 그 주제에 관해서라면, 운차이에게 물어보면 그들 종 족 사이로 전해내려오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겠지." 여전히 무릎에 네리아를 얹힌 채 (만일 누군가 나서서 네리아를 치워주 지 않으면 운차이는 오늘 밤새도록 저런 자세로 있게 될 것이 확실하 다.) 천장을 노려보던 운차이는 피식 웃었다. 불만족스러운 소년의 이야 기였지. 길시언의 이야기든 하슬러의 이야기든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 긴 어려웠지만 왠지 길시언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더 끌리는 것 같은데. 그러나 하슬러는 별로 끌리지 않는 모양이다. "왕자님. 당신의 이야기를 듣자니 저 역시 어떤 자들이 떠오르는군요." 길시언은 삐딱한 눈길로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자신만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다고 생각하고 타인이라 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작자들이 있소. 그런 자들은 타인이라는 것이 도 대체 뭔지,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도 대체 모르오. 자신을 희생할 줄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희생에 대해서는 아예 이해하질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마음대로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 는 작자들이오. 혹 머리로는 알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모르오. 다른 사람 들도 자신과 똑같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알며… 가족들을 사 랑하는…" 하슬러의 말끝은 희미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는 뜨거운 눈으로 침대 위 에 누운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누구도, 설령 프림 블레이드라도 이 침묵에는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슬러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힘없이 카알을 바라보며 말 했다. "날 어쩔 생각입니까." 카알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먼저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다시 하 슬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시언이 아니라 바이서스 전하께 묻겠습니다. 그 반란 혐의에 대해서 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국왕의 적인 그란 하슬러를 어떻게 하실 작정 입니까." 길시언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셔츠를 내려다보더니 탁탁 털어 서 꿰어입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셔츠를 다 입고 나더니 옷의 주름을 펴 고 솔기와 소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카알은 조용히, 하지만 끈끈 한 시선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길시언은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여기 레인저 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내일 아침 하슬러를 수 도로 연행할 대원을 몇 명 차출해달라고 말입니다." 하슬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카알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한결같은 시선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 했다. "그러실 겁니까." "예. 반역은… 내가 아무리 궁성과 연을 끊은 자라곤 하지만 반역자를 사사로이 방면할 수는 없습니다." 카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반역자의 경우 그 가족에게서도 죄의 고리를 벗길 수 없을 텐데요. 에포닌 하슬러양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카알은 태평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길시언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한가롭게 파이프를 피우면서도 간혹 파이프 위로 길시언을 향해 번쩍이는 눈빛을 보내었다. 아프나이델은 그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제레인트의 경우엔 아예 드러내놓고 길시언을 간절하게 바라보 았다. 길시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찬가지로…" 하슬러의 눈이 번뜩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카알은 말했다. "압송됩니까?" "그렇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카알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길시언은 다음 말 을 꺼내놓기가 상당히 힘들어졌다. 그는 떨뜨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에포닌양은 할슈타일 가문에 양녀로 있었고, 그러니까 이 사 건과는 아무런 영향이 없음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합니다. 나는, 에, 그 러니까 편지를 쓸 생각입니다." "편지라고요." "예. 그란 하슬러와 에포닌 하슬러 부녀에 대한… 그러니까 진정서 같 은 것을 쓸 생각입니다. 닐시언 전하에게 그들의 죄를 보지 말고 그들 자체를 살피기를 간청할 작정입니다."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샌슨은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왕자님. 그게 당신의 최선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겠 습니다요. 이왕이면 앞으로 당신께서 궁성과 연을 끊었다는 거짓말 좀 그만하면 더 좋겠는데 말이야. 쳇. 갈데없는 왕자님 같으니라고. 오늘 아침 임펠 리버의 당신 모습, 기억에 생생한걸요? 하슬러는 슬픈 눈빛으로 다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조 용히 일어나더니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 다. 그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하슬러는 손을 뻗더니 에포닌의 이 마를 덮은 머릿결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에포닌은 뭐라고 잠꼬대를 웅얼거리더니 몸을 뒤척이다가 한 손을 시트 밖으로 내놓았다. 하슬러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에포닌의 손을 잡 았다. 마치 건드리면 그대로 손자국이 나버릴 순금덩이라도 잡아올리듯, 하슬러는 부드럽게 에포닌의 손을 잡아올려서는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는 에포닌의 손을 자신의 이마로 가져왔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에포닌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댄 하슬러의 분위기는 성직자만큼이나 경 건했고, 그 옆에 앉아있는 제레인트가 오히려 칼잡이나 술주정꾼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하슬러를 바라보는 제레인트의 따뜻한 눈길은 나로 하여 금 그가 프리스트임을 잊어먹지 않도록 해주었다. 하슬러는 에포닌의 손을 꼭 감아쥔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왕자님. 이 애만은… 눈감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길시언은 찌푸린 눈으로 하슬러의 등을 바라보았다. 촛불빛을 등진 하 슬러의 얼굴은 캄캄했다. 단지 그의 넓은 등만이 발갛게 떠오를 뿐이었 다. 길시언은 뭔가 쓴 것을 맛보는 얼굴로 말했다. "에포닌을 놔줄 거라면 당신도 놔줬을 거요. 당신은 넥슨의 종복으로서 의 활동 이상을 한 적이 없소. 하지만 법 앞에 만인은 똑같은 대우를 받 아야 하오. 법이 그 시녀로서 봉사하는 정의에 비추어보아도 마찬가지 고." 하슬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굳어버 린 듯했다. 바람 소리는 격렬하게 온 산을 흔들었다. 이 두껍고 튼튼한 바라크 안 에 앉아있지만 어디선가 새어들어온 바람은 초의 불꽃을 일렁거리게 만 들었다. 난 가만히 초를 바라보았다. 누가 옳은 것이지? 루트에리노 대왕과 길시언, 그리고 핸드레이크와 하슬러. 누가 옳은 것 일까? 인간의 부조리라고. 글쎄. 세상에 부조리없는 생물이야 없잖아. 물에서 떠나면 죽어버리는 개구리도 물 속에선 빠져죽는다. 그러니까 나 와서 개골거리지. 완전한 것이 어디 있겠어?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아이는 커서 어른이 되고 시간이 있는 한 어떻게든 변화해야 되지. 그렇다면 영원히 자신의 부조리를 안고 산다는 것도 고려해 볼 문 제야. 엄연히 있는 시간을 무시하고 사는 자가 정말 바보지. 변화가 피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발전과 퇴화 중에선 발전이 낫지 않을까. 우리는 신이 되어야 되는 거 아닐까. 촛불은 쉼없이 깜빡거렸다.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는군. '초가 이야기한다고요?' '봐. 입을 움직이고 있잖아. 초는 깜빡거리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거 야.' '아버지. 아무런 걱정마세요. 내일 카알을 모시고 올 테니까요. 카알은 약학에도 능숙하니까… 악!' '욘석아! 입을 꽉 다물어. 그래야 들을 수 있어. 초의 이야기를 말이 야.' 좋아, 해볼까? 난 입을 꽉 다물고 내 코에서 나는 호흡소리에서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하지만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내 맥박소리 에서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촛불의 불꽃만을 바라보았다. 초가 대답해주었다. 이봐, 넌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이자 빛의 세공사다. 잠자코 내 자 태를 감상해. 그리고 다음에 나 같은 멋진 빛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라 고. 쟈크의 말도 기억나지 않아? 하드 베팅은 피하는 법이고, 거물들의 일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야. 맙소사. 아버지! 왜 초는 멍청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해주지 않았 어요? 이 멍청한 초야. 넌 틀림없이 제조과정에서 엉터리 밀랍이 들어갔 을 거야. 지방 덩어리에 뼛조각이 섞혀들어갔거나… 아니면 파라핀을 제 대로 녹이지 못해서 불균질 상태일 거다. 이봐, 들어보라고. 넌 자신을 태워서 빛을 만들어. 그렇다면 인간도 자신을 태워서 뭔가가 되어야 되 지 않겠어? 타는 것이 두려우면 영원히 빛을 만들지 못한다는 초장이 농 담도 몰라? 으윽. 아버지껜 죄송한 말이지만 초와 이야기를 나누니 수준이 강등되 는 느낌이군. 제레인트는 신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보았다. 두 눈엔 벽난로의 불빛을 담아 반짝거 리는 제레인트의 얼굴. 난로의 불길은 산사의 생활을 하며 검게 탄 그의 얼굴을 희한한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게다가 조금 전의 대화는 그의 얼 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놓은 듯하다. 제레인트는 말없이 바닥에 무릎 을 꿇은 하슬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시언은 방금 말린 셔츠가 불편하다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얼굴을 좀 만지작거리고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운차이는 원래 간첩이었소. 간첩도 사면되는데 반 역자라고 해서 특별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거요." 의도야 좋았지만, 길시언의 말은 하슬러를 안심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 라 운차이마저도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안하니만 못한 말이지, 뭐. 엑셀핸드의 파이프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카알이 입을 열었다. "하슬러씨." 하슬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알은 목소리를 더 높일 듯이 가슴을 펴다가 그냥 조용히 하슬러의 등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에포닌의 이마를 쓸어주고는 에포닌의 손을 조심스럽게 시트 안으 로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아버지! 저걸 좀 보라고 요! 매일 아침 날 걷어차서 깨우는 거 이젠 지겹지 않아요? 아버지 구해 드리고나면 먼저 이 광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려드려야겠다. 하슬러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카알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심정이 괴롭겠지만, 이왕이면 아까의 이야기를 다 듣고 싶소." 하슬러는 그저 조용히 테이블만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지 루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뒤틀며 하품을 간신히 참아넘기는 샌슨의 모습 이 보였다. 카알은 이야기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선택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은 뭐라 말할 수가 없군 요. 어차피 과거의 일. 300년 전의 일이니만큼 거기에 대해 뭐라 화를 낸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될 것 같소.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일 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시오네에게 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시 오네는 어떻게…" "생의 모든 희망이 파괴되고." 하슬러는 갑자기 터지 듯이 말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엑셀핸드는 파이 프를 떨어트릴 뻔하다가 간신히 잡아내었지만 불행하게도 손가락을 파이 프 속에 집어넣고 말았다. 그는 울상이 되어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고 하 슬러는 헛기침을 좀 한 다음 다시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생의 모든 희망이 파괴되고, 남은 하나의 희망마저 거절당한 핸드레이 크는 자포자기하게 되었소.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마법의 연구에 정진했 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내다시 피한 바이서스에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마법 연구에만 골몰했소." 길시언은 무릎에 팔꿈치를 얹은 채 하슬러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카알 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 바이서스 건국 초기의 핸드레이크의 활동은 거의 드물지요. 그 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업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그 래서 아직껏 그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보다는 전설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지."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예. 심지어 빛의 탑의 기록에서도 핸드레이크의 일은 잘 나타나지 않 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는 마법 연구에 골몰하느라 국사나 길드의 일에 대해선 관심도 두지 않은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 겠군요." "짐작하신다고요?" 아프나이델은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고 하슬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카 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파괴된 여덟 별을 대신할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어내려는 것이었겠지요." 뭐? 클래스 10의 마법? 맞아! 그렇구나.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프나이델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 맞았어!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진다. 이루릴의 말에 의하면 클래스 10의 마법은 세계창조였다. 핸드레이크는 여덟 별로써 모 든 존재가 완전해지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 여덟 별은 파괴되었 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는 여덟 별 대신 모든 존재가 완전할 수 있는 세계를… 직접 창조하려 했던 것이었겠지! "세상에, 이토록 야심만만한 사나이라니!" 내 감탄성에 아프나이델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어? 어? 후치. 무슨 말이지? 클래스 10이라니? 게다가 내가 아니고 왜 네가 놀라는 거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은 불확실할지 몰라도 네가 마법 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는데?" "아프나이델은 마법사 맞으니까 겸양하지 않아도 돼요. 난 클래스 10이 라는 말에 놀란 것이 아니라 핸드레이크의 꿍꿍이 때문에 놀란 것이고." "꿍꿍이?" 난 어깨를 으쓱였다. 뭐라고 설명해주기가 어려운 말이니까. 핸드레이 크는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뜯어고치려고 든 자란 말이야! 드 래곤 로드로 하여금 꼬리를 말고 달아나게… 잠깐, 드래곤이 하늘을 날 땐 꼬리를 말지 않던가? 그럼 그대신 아무 거나 말고 달아나게 만든 작 자답게 이 황당한 남자는 스스로 신이 되려했었다고! ================================================================== 13. 대마법사의 만가……8. 하슬러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천천히 해드리리다. 지금은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만." 하슬러는 카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어쨌든 그는 바이서스 임펠에는 거의 머물지 않고 다시 세계 를 주유하는 생활을 계속했소.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정체를 숨긴 여행 이었지. 때론 가명을 쓰고, 때론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고… 이 과정에서 그가 만나고 때론 지도하기도 했던 마법수련사들이 훗날 빛의 탑을 이룩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남부대로의 솔로쳐가 핸드레이크를 만난 이야기는 유 명하지요." 아프나이델은 내가 설명해주지 않아서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자신의 대선배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곧 반색을 하며 다시 하슬러와 카알의 이야 기에 빨려들어갔다. 길시언은 의자를 거꾸로 돌리더니 등받이 위에 턱을 올려놓고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 때 저 먼 자이펀에도 갔던 모양이오." 천장을 바라보던 운차이는 이 말에 고개를 내렸다. "세계를 제멋대로 돌아다닌 자였으니 별로 이상할 것은 없소. 그런데 그는 언젠가 자이펀과 사우스 그레이드의 접경지에 위치한 아비스의 미 궁에 들어갔던 모양이오." "아비스의 미궁에!" 손가락을 빨고 있던 엑셀핸드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슬러는 차가 운 눈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지만 엑셀핸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가 아비스의 미궁에도 들어갔단 말인가! 맙소사! 그렇다면 그는 우 리 드워프들 중에서도 한 명도 없는 2대 미궁의 침입자란 말인가!" "2대 미궁의 침입자?" 엑셀핸드는 수염이 모두 곤두설만큼 흥분해서는 말했다. "그는 대미궁에도 들어갔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는 대미궁과 아 비스의 미궁 양쪽에 모두 발을 들여놓았다는 말이지 않나! 맙소사. 이건 드워프의 수치로군. 드워프들도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인간이 해내다 니! 물론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니까 가능한 일일 테지만, 정녕 놀라운 일 이군!" 하슬러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소, 노커여. 조금 전 카알씨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로 바꿔버리는 존재요. 어떻게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종족이 지. 어떤 미궁도, 어떤 산악, 어떤 바다도 인간의 발 앞에 점령되지 않 을 수 없소. 당신은 말 위에서도 불안해하지만, 우리는 하늘도 정복했다 오. 마법사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지." "끄으으응!" 엑셀핸드는 끔찍한 신음을 흘렸지만 별 말은 하지 않은 채 다시 주저앉 아 파이프만 뻑뻑 피워대기 시작했다. 마치 말 같지 않아서 댓구도 하고 싶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슬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테이 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핸드레이크는 아비스의 미궁도 정령했소. 시오네를 만 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으니까." 카알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시오네가 핸드레이크를 만났다고요?" 시오네가? 아, 잠깐. 시오네는 뱀파이어지. 그러니까 그 수명은 무한이 라고 할 수도 있지. 최소한 그녀의 그 끔찍한 생명의 원천인 피가 공급 되는 한 그녀는 영원히 사는 셈이지. 맞아! 가능해! 300년 전의 인물과 만나는 것도 가능한 일이군!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혼란스러운걸. 현재 가 제멋대로 과거와 연결되어버리니 시간 개념이 엉망이 되잖아. "그렇소. 시오네는 뱀파이어였지 않소? 아비스의 미궁이야말로 그녀에 게 어울리는 장소지. 그녀는 그곳에서 감히 아비스의 미궁에 도전하는 인간들을 자신의 제물로 삼아 불유쾌한 삶을 이어나가는 몬스터였소." 놀랍게도 하슬러는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었다. 동지 아니었던가? "그녀는 그 안에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소. 드래곤 로드가 세계를 지배하다가 핸드레이크와 루트에리노의 손에 의해 쫓겨났다는 사실 같은 것은 전혀 알지도 못했소. 그녀는 공허하고 암흑 만이 가득한 아비스의 미궁을 모든 세계로 여기고 살았던 비참한 괴물이 었소. 핸드레이크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도 시오네는 아무 꺼리낌없이 그 를 공격했지." "맙소사… 그래서?" "시오네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밖에. 핸드레이크는 간단히 그녀를 제압해버렸소." 아프나이델은 히죽 웃었다. 자신의 대선배의 위업을 듣는 일이 그를 즐 겁게 만드는 모양이다. 난 빙긋 웃고는 다시 하슬러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녀를 없애버리지 않았던 모양이오. 그 비참함 을, 미궁 이외에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이외에 모든 것은 먹이로만 생각하는 비참한 몬스터를 동정한 것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소. 시오네 도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들려주지 않았으니까. 어찌되었건 시 오네는 핸드레이크 본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들을 듣게 된 모양이오. 아마 도 함께 다닌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정확하겐 모르겠소." "그렇습니까." 카알은 평온하게 말했지만 아프나이델은 격정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말 했다. "그렇다면, 에, 그러니까 시오네는 핸드레이크의 전인인 모양이군요! 알려진대로 무지개의 솔로쳐가 핸드레이크의 마지막 전인인 것이 아니라 시오네가 바로 핸드레이크의 마지막 제자였군요?"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씨. 당신 생각으론 시오네가 핸드레이크의 제자라 할만한 실력이었다고 봅니까?"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여가며 말했다. "예… 사실 마법 사용자들 중에서 인간 마법사들만큼 우수한 실력을 갖 춘 자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인간들은 빛의 탑을 이용하거나, 뭐 기타등 등으로 선학께서 후학에게 지식을 전수해주고 후학을 단련시켜주시니까 요. 아, 저 조화로운 엘프에겐 마법의 전승지식이 대단합니다만, 뱀파이 어는? 글쎄요. 뱀파이어는 누구에게 마법을 배우겠습니까? 시오네의 실 력은 분명 보통 뱀파이어에게 기대될 수 있는 정도보단 훨씬 숙련되고 고급한 마법 사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시오네는 그런 이야기를 아는 것이었군요. 그 리고 시오네가 당신 주인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준 것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난 항상 주인의 곁에 있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같이 들 을 수 있었소." "그랬군요…" 카알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들려줄 말은 다했소. 됐소? 그럼 난 이만 자고 싶은데. 내일은 수년만에 내 딸과 함께 걸을 수 있을 테니 푹 자두고 싶군요." 하슬러는 별 표정없는 얼굴로 길시언을 흘끔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어 두운 표정으로 하슬러를 바라보았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하슬러는 몸을 던진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듯한 동작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샌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성격에 맞지않게 너무 말을 많이 해서 피곤한 모양이야." 별로 귀담아 들을 말도 아니었고, 샌슨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는 역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난 카알의 얼굴을 살폈다. 카알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벼락이 칠 때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한 망령처럼 보였지만 난로의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정반대로 뭔 가 세상을 위한 따스한 계획이라도 세우기 위해 고심하는 사람처럼 보였 다. 난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봐야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요." "응? 뭐라고 했나, 네드발군?" "웃긴다고요. 핸드레이크가 어쨌건 루트에리노 대왕이 어쨌건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데요?" 길시언은 등받이에 올려둔 자신의 머리를 내 쪽으로 움직였다.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넨 그 두 분들이 모두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고 여겨지는 모 양이지?" "어… 물론 핸드레이크는 아직도 이름이 자자한 대마법사고, 루트에리 노 대왕도 뭐라 흠잡을 데 없는 모범적인 영웅이시지만, 두 사람이 세상 을 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글쎄? 최소한 루트에리노 대왕께선 드래곤 로드의 세상을 자유 종족들 의 세상으로 바꾸시지 않았는가?" "카알. 능청을 떨어서 제자를 시험에 빠트릴 생각인 모양인데, 마음에 도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뭐가 드래곤 로드의 세상이고 뭐가 자유 종족들의 세상이라는 거에요?" 카알은 대답없이 그저 벌쭉 웃었다. 길시언은 등받이 위를 줄타기 하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조금 흔든 다음 말했다. "후치. 그렇게 생각하냐? 드래곤 로드의 세상도 아니었고, 자유종족의 세상도 아니라고?" "세상은 세상이에요. 누가 이 세상을 가지고 나의 세상이니 어쩌니 생 각하겠다면, 난 말릴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나완 아무 상관없어요. 그 걸 주장함으로써 날 귀찮게 굴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이냐?"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다는 거죠. 인간만큼 많은 세상이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핸드레이크의 세상은? 글쎄요. 뭔가 크게 개선해야 될 세상이었던 모양이죠. 여덟 별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루트에리노 대왕의 세상은? 아마 자기 다리로 걸으면 충분한 세상이었나 보지요. 도움 같은 거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인가 보지요." "…네 세상은 뭐냐?" "제 세상이요? 글쎄요. 대왕님의 세상쪽이 좀 마음엔 들어요" "대왕의 세상이?" "예. 세상이 자기 다리로 충분히 걸을 수 있는 편이 좋지, 지독한 부조 리로 가득 차서 사는 게 곧 고통인 세상이라면 그거 어디 살 맛 나겠어 요? 게다가 난 핸드레이크처럼 대마법사도 아니니까 여덟 별 같은 것을 찾아서 세상을 뜯어고칠 능력도 안되는 걸요. 그러니 세상은 적당히 노 력하면 자기 다리로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편으로 남는게 좋지요." 카알은 촛불에서 고개를 조금 돌려 그의 볼만이 발갛게 빛나고 있을 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음흉스럽게도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길시언은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세상의 원래 모습이야 어쨌든, 불합리하든 합리적이든, 개선해야 될 필요가 넘치든 그 자체로 완벽하든 너완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냐? 세상 의 진실보다는 너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예. 그래요. 페어리퀸의 말을 좀 바꿔 말해볼까요? 페어리퀸은 자기가 있고 타인이 있다고 했어요. 난 이렇게 말하지요. 자기가 있어야 세계도 있다고. 그런데 난 지금 몹시 졸리고, 따라서 날 세계와 단절시켜서 수 마(睡魔)의 나라로 보낼 생각인데요." 길시언은 갑자기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는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목 뒤 로 손을 깍지끼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길시언은 다시 고개를 내려 날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긴 하루였다. 그리고 피로한 사람들의 대화 주제론 너무 무겁기 도 하고. 쉬도록 해라." 고맙다고 말해야 되나? 내가 자고 싶어서 자는데 말이야. 하하. 밤새 내리던 비는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가까운 산들의 녹색은 촉촉하게 젖어 반짝였고 조금 떨어진 산들은 회 청색으로 아련히 사라져갔다. 산자락자락마다 감고도는 아침안개의 희뿌 연 흐름 속에 대지는 잠겨 보이지 않았다. 안개 위로 산봉우리와 산등성 이만이 흘러 떠가는 듯했다. 머릿카락을 촉촉히 젖어들게 만드는 빗방울들. 검푸른 아침 공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빗방울들이 스며들듯 떠가듯 그렇게 내 리고 있었다. 난 잠시 고개를 돌려 내 어깨의 갑옷 가죽에 맞아 튕겨오 르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엔… 미안했어." "잊었다고 전해줘." "라는군요." "저… 불쾌했을 텐데, 끄, 끝까지 신경써줘서 고마워." "마지못해 한 일이지 본심으로 한 일이 아니라고 전해줘." "라는군요." "…그렇게 정떨어지게 말하지 마." "특별히 정붙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전해줘." "그런데 내 생각에도 그렇게 말… 알았어요!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라는군요, 젠장."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은 자칫 무서운 일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바라크를 나서서, 볼에 엉겨 붙는 빗살 속을 걷는 일까지는 별로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느낀 것이라 고는 촉촉한 싱그러움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난 절벽 언저리의 바위 위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운차이를 발견하게 되 었다. 여기서도 내가 위기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운차이 는 어새틱이라도 되는 양 바위 위에 그럴듯한 자세로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고 난 그저 그의 옆에 앉아 함께 산자락과 아침 안개를 내려다보았 다. 아, 운차이는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산자락과 아침 안개, 그리고 대 기 속으로 녹아가는 듯한 빗방울은 나 혼자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 문이 열리며 네리아가 나온 것이다. 네리아는 나와 운차 이를 보더니 흠칫했다. 그러다가 네리아는 천천히 걸어왔고 난 그때서야 뭔가 불안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난 도망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네리아는 날 사이에 두고 운 차이와 떨어져 앉아서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운차이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말을 전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없는 무정물 흉 내를 내어야 되는 것이다. 젠장. 고요한 아침이다. 귀밑머리에 엉겨드는 미세한 빗방울들은 선뜻하면서 따스하다. 그리고 희푸른 산과 언덕들 주위로는 안개들이 꿈결 속의 무 엇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무정물 흉내를 내어야 되다니 정말 신세 고약하기 짝이 없군 그래. 네리아는 다시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기분 많이 나빴어?" ================================================================== 13. 대마법사의 만가……9. 운차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라는군요.' 라고 말하 려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네리아가 이상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에휴. 운차이는 눈을 감은 채 여전히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네리아는 입 술을 깨물더니 운차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쏘아보는 것은 좋은데, 네 리아. 당신과 운차이 사이엔 내가 끼어있다고. "기분 더러웠어?" 네리아는 뾰족한 목소리로 말해버렸다. 음. 그래. 말해버렸다고 표현하 는 것이 정확하겠는걸. 운차이는 여전히 바위보다 더 바위스러운 자세로 앉아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 롭게 바뀌었다. "역겨웠어? 구역질이 났어?" 아이고, 젠장! 사람을 정말 난처하게 만드는군. "네리아. 말이 좀 심하군요. 설마 운차이가…" "끼어들지마!" "예…" 제길! 그럼 이왕이면 난 좀 빼놓고 말할 것이지, 애먼 사람을 가운데 끼워놓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말싸움이라니. 그 때 바위가 말했 다. 아니, 운차이가 말했다. "별로. 측은했을 뿐이다." "라는군… 이 아니라!" 으아아, 맙소사! 난 내 귀가 들은 말이 의심스러워 네리아를 돌아보았 다. 그리고 네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보고서야 내 귀의 성능에 대 해 안심할 수 있었다. 음. 좀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들을 건 제대로 듣고 있군 그래. 그런데 정말 운차이가 저렇게 말했나? 네리아는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어? 어, 저, 운차이?" 운차이는 눈을 꾹 감은 채였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는 것인지 의심스러 울 정도로 조금씩 움직여가며 말했다. "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생 각한다." 네리아는 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러더니 네리 아는 두 손을 꼭 마주쥐었다가 다시 손을 들어올려 허공을 더듬었다. "저, 저,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 맞아?" 운차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이제 손을 입 앞에 모 으더니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측은했어? 저, 멍청하게 번개 같은 거 무서워하고 그런다고… 바보처 럼 보이지 않았어?" 운차이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네리아를 바라보 며 쌀쌀맞게 말했다. "내가 여자에게 말을 못한다고 날 바보라고 생각했나?" 너무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서 오히려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히 네리아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리아는 다시 정신없이 손을 휘젖기 시작했 다. 조금만 지나면 아마도 청회색 아침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 어,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런 적 없어. 그러니까…" "널 바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네리아는 운차이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마워!" 그녀는 그대로 운차이에게 다가갈 것인지 아니면 몸을 돌려버릴 것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좌우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운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고 그러자 네리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급한 발자국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다. 탁탁탁탁탁. 그리고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동시에 엑셀핸드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악! 내 코!" "꺄하하하하! 누가 그렇게 문 뒤에 서 있으래요? 좋은 아침이에요! 으 음!" "어, 어! 뭐야? 뭐하는 거야? 아니, 잠이 덜 깼어? 아침부터 이 늙다리 드워프가 인간 미남자로 보인 거야?" "꺄하하하! 엑셀핸드 볼 너무너무 탱탱하네. 드워프는 나이 먹어도 그 런가 보죠? 그런데 수염 좀 깎는 게 어때요? 키스할 때 너무 간지럽네 용!" 고개를 돌려보니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네리아의 뒷모습과 자신의 볼을 쓰다듬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엑셀핸드의 모습이 보였다. 엑셀 핸드는 극히 의심스러운 얼굴로 문 안쪽을 바라보더니 곧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손을 들어 귀 옆에서 수직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묻는 듯한 눈길을 보내었고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때 절벽 저쪽의 내리막길에서 누군가가 안개 사이로 올라오는 모습 이 보였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바라보니 안개 사이로 나타난 그림자는 아는 사람이었다. "카알?" "오, 일찍 일어났군, 네드발군." 카알은 뒷짐을 진 채 한 손엔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이리저리 휘저으며 느긋하게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어깨 부분이 적당히 젖어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 운차이가 눈을 뜨면서 돌아보았다. "이제 오십니까. 산책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예. 산속이라 그런지 아침 공기가 참 상쾌하군요." 산책? 어, 카알도 참. 여행 중에 무슨 산책을 다녀왔다는 거야? 게다가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산길에서 산책을 하다니. 카알은 내게 뭐 라 말을 건네려다가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엑셀핸드의 모습을 보았 다. "아인델프님? 아침부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 때 바라크 안쪽에선 샌슨의 당혹한 신음 소리와 뭔가 우당탕퉁 탕거리는 소리, 그리고 레니의 기겁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 언니! 뭐 하는 거에요! 하지 마요!" "일어나! 잠꾸러기야. 햇님이 아침 산책을 시작했단 말이야! 꺄하하하!" 거짓말이다. 온통 구름이 낀데다가 비까지 오고 있어 해는 구경도 할 수 없는걸. 그리고 제레인트의 넋이 나간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으허, 으허허허! 어흐?" 무서운 기세로 엑 셀핸드를 밀어젖히며 튀어나오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카알은 대경실색한 얼굴로 운차이와 날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래서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려 운차이를 뚫어지게 노려봄으로써 카알 역시 운차이 만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운차이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먼산을 바라보 기 시작했다. 뒤에선 여전히 괴상망측한 소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메드 라인 고개의 활기찬 아침이 시작되었다. 세상은 복된 것이야. 푸하하. "아침에만 저런 거요, 아니면 하루 종일 저 상태요?" 메드라인 1-4… 어쩌고의 레인저 대장 카무이 라다는 두 손 위에 턱을 올리고 앉아서 운차이를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거나 간혹 입을 가리고는 '킥킥킥!' 하는 톱날 긁는 소리를 내며 웃음으로써 운차이의 평화로운 아침식사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네리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 했다. 그러자 샌슨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침에만 저렇게 양호한 편입니다, 대장님." "…이해했소." "킥킥킥!" 이번엔 네리아가 아니라 레니였다. 레니는 먹던 빵을 두 손으로 꽉 움 켜쥐고는 웃음을 참기 위해 턱을 가슴에 박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빵을 입에 물고 부르르 떠는 항구의 소녀라. 우리 일행의 품위가 전폭적으로 하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군. 길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입은 웃 으면서 라다 대장에게 말했다. "어젯밤의 폭풍이 꽤 심하던데요." 라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조끼에 갈색바지를 입고 머리는 정 수리까지 벗겨진 것이 레인저의 대장이라기보다는 마음씨 좋은 농부처럼 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강건하면서도 질겨보이는 팔뚝이라든지 허리에 차고 있는 폭 넓은 숏소드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이, 마치 몸의 일부분처럼 매달려있는 것을 보면 과연 레인저의 대장이구나 하는 생각 이 들게 만드는 남자엿다. 그는 산바람을 많이 맞아서 생긴 것이 분명한 눈가의 주름을 조금 찌푸리면서 말했다. "예. 왕자님. 하지만 새벽에 나가본 대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길이 유실 되거나 한 일은 없답니다. 혹시라도 조난자가 발생했을까봐 열심히 살펴 본 결과니까 안심하셔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예. 그런데 어젯밤에도 여쭸던 일입니다만, 목적지가 어떻게 되십니 까? 목적지는 갈색산맥 안에 소재한다고 하셨는데, 갈색산맥 내부에 무 슨 용무가 있으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산맥 안의 일이라면 저희 대원들 을 파견해드릴 수 있습니다. 쓸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요." 그러자 곧장 엑셀핸드가 들고있던 술잔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 했다. "아니, 카무이. 지금 날 못본 척하는 건가? 내가 이 친구들을 안내하고 있잖은가?" 음. 광산에서 일하는 드워프들의 노커인 엑셀핸드가 갈색산맥의 레인저 대장과 아는 사이라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 라다 대장도 웃으며 대답했 다. "엑셀핸드. 지하에서라면 난 언제든지 당신에게 길잡이를 맡길 겁니다. 하지만 산봉우리 위나 숲 속에서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만은 피 해다닐 겁니다. 혹시 그런 곳에서 길잡이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달갑잖 은 일행을 대하는 레인저의 예법대로 당신을 묶어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보렵니다." "핫하하하!" 제레인트는 엑셀핸드의 무서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터뜨려버렸 다. 엑셀핸드는 헛기침 소리를 좀 내고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걱정 말게. 날 묶기 전에 자네 턱부터 쪼개놓을 테니 고려하실 필요는 없네. 게다가 자네의 왕자님을 숲으로 끌고가서 나 몰라라 할 일도 없으 니까 안심해도 되겠지. 우리 용무가 지하에 있다면, 자넨 누구에게 길잡 이를 맡기겠는가?" 라다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에? 허허. 물론 지하에서라면 내 부하 열 명보다도 당신을 더 신 뢰할 것입니다만. 그런데 혹시 드워프들의 광산에 용무가 있으신 겁니 까?" "비슷한 곳에 있네. 어쩌면 정반대가 될지도 모르지만." 라다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우리 일행들은 엑셀핸드의 말을 알아 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크라드메서는 땅 속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하늘로 날아오를 테지. 그 때 샌슨이 말을 꺼내 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퍼시발군?" "만일 레니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말입니다. 우리도 뭔가 안전 대책을 강구해 두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레니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꽤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걸요." 어, 어? 그런가? 만일 레니가 크라드메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크 라드메서는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드래곤인 셈이고 따라서 마음대 로 우리를 공격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샌슨의 말을 듣고 놀라버린 레니는 입에 빵을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 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제레인트는 스푼을 테이블에 떨어트리며 웃었다. 아프나이델은 스푼을 주워 제레인트에게 건네면서도 불안한 얼굴로 카알 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물론 그런 걱정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 떨까." "반대로라니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대륙 전체가 어차피 지옥으로 바뀌지 않겠는 가."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카알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건 담담하게 들어 줄 내용이 아니잖아. "어느 황야나 깊은 계곡으로 달아나서 기구한 생명을 이어갈 수는 있겠 네만, 글쎄. 그렇게라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거 정말 비참하겠는걸." "그렇군요." 샌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 던 우리들의 일의 무게가 뒷덜미를 콱 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실패하면,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죽지는 않 을지 몰라도 최소한 300년 동안 유구하게 내려오던 나라는 철저하게 파 괴될 것이고 문화와 역사, 전통, 모든 것이 소멸될 것이다. 목숨 외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목숨은 남겠지만 그것은… 저 넥슨과 같다. 우 리를 이루고 있던 모든 선조의 소산들이 파괴되어 살아있는 것이지만 존 재하지는 않는 자가 되는 것, 300년 전 드래곤 로드의 지배기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숨결소리 하나하나가 아프게 들려왔다. 귀가 잘려버린 것 때문일까. 그 렇지 않았다. 저마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한숨소리들. 이건 성공해도 좋고 실패하면 다음에 도전하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망친 양초처럼 모조리 부숴트려 다시 녹여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이다. 실패하면 그걸로 끝장이다. 왜 지금까지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길시 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갑자기 카알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사는 게 좋지?" 샌슨은 멋적게 웃었고 다른 사람들도 간신히 얼굴을 좀 폈다. 엑셀핸드 는 팔짱을 낀 채 테이블을 바라보며 웃었고 제레인트는 맑은 눈으로 천 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다만 우리들의 이 황당한 대화에 넋이 빠져버린 라다 대장만은 아직도 경황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카알은 침착하게 말했 다. "난 드래곤의 레어에 대해서는 책에서 읽은 것밖엔 없다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것은 대개 잘 은폐되어 있지만 안은 넓고, 음… 당연한 말 이지. 안은 넓어야 되겠지. 그리고 드래곤이 움직여야 되므로 그렇게 복 잡한 구조나 갈림길은 없다고 알고 있네."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드래곤들은 트롤이나 오우거, 혹은 자이언트 들을 노예로 삼아 레어를 지키게도 합니다만 수면기에 들어가있는 드래 곤이라면 그 노예들은 다 달아나버렸을 겁니다. 따라서 별다른 방해는 없을 겁니다. 드래곤에게 붙잡혀있는 몬스터들의 수효도 적을 테고. 따 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라드메서뿐일 겁니다." "조건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군요. 어쨌든 접근해서 주변 정황을 잘 관 찰한 다음 안전을 도모해봐야겠다… 라는 소극적인 생각 외엔 없는데 말 이야. 퍼시발군. 난 차라리 자네에게 묻고 싶은데. 우리들 중에 드래곤 과의 전투를 경험해보신 분 또 있습니까?" 길시언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잠깐, 그렇다면 샌슨은 드래곤과 싸워본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이 놀란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했을 때 라다 대장이 더이상 못참겠다는 어조로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이거 아무래도 내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왕 자님께서는 지금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 드래곤을 찾아가는 것으 로 생각되는데, 맞습니까?" "드래곤 슬레이어? 당치도 않습니다. 난 루트에리노 대왕의 후예지만 그 분의 용력까지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분처럼 좋은 동료분들은 가지 고 있습니다만."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말했고 일행들 모두에게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세 사람만 빼놓고. 네리아는 여전히 운차이를 바라보며 방글거리고 있 었고 그래서 운차이는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마지막으 로 레니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다 대장은 여전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제가 들은 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드래곤의 레어라니, 그리고 전투? 레어를 지키는 트롤과 자이언트? 이게 다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길시언은 팔을 뻗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레니를 가리켰 다. "여기 있는 이 아가씨는 드래곤 라자입니다. 우리는 드래곤 라자의 계 약을 위해 드래곤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빗방울은 더이상 내리지 않았고 회은색 구름들이 갈라진 틈 사이로 희 미하게 황금빛 햇살이 떨어져내려 먼 산들을 물들여놓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자 대기의 곳곳이 빛살로 구분지어져 신비로운 광경이었 다. 대지는… 마치 황금색 얼룩무늬가 있는 검은 천자락처럼 보였다. 바라크 앞에는 어젯밤 동안 푹 쉰 말들이 마차에 매어져 달려가고 싶다 는 듯이 푸르릉거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마차 앞에 서서는 레인저 대원 들과 하슬러, 에포닌과 작별을 나누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 우습겠지요, 하슬러씨." 하슬러는 과연 대답하지 않았고 카알은 그저 미소지었다. 한 편에선 길 시언이 중대범죄자인 그들을 되도록 불편함이 없이 수도까지 호송하라고 말함으로써 라다 대장을 어이없게 만들고 있었다. "레인저 대원들은 잔혹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들어 알고 있소. 산등성이 를 걷고 호수에 팔을 씻는 사람들이니까. 따라서 죄수들에게 쓸데없는 고통을 주지는 않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저 소녀는 죄수가 아니 라 죄수의 딸이라는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서찰은 죄수의 범죄행위에 대한 길시언 바이서 스의 고발장과, 그리고 정상 참작을 요청하는 진정서요. 모두 전하께 친 전으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분부 시행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하슬러와 에포닌은 건장하게 생긴 레인저 대 원 두 명 사이에 끼어 서 있었다. 에포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후 작의 저택이 싫어서 도망나왔다가 만난 아버지가 하필이면 반역자라니. 그래서 지금 그 아버지와 함께 수도로 호송당하게 되다니. 판단을 잘못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에포닌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팔을 꼭 붙든 채 서 있었고 하슬러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의 옆에 서있는 레인저 대원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마 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은걸. 그 때였다. 카알이 조심스럽게 네리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네리아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네리아의 얼굴이 환해지더 니 네리아는 웃으며 하슬러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푸른 이불은 세 명이. 날개는 그 아래에 있어요." 지금 네리아가 캐스팅을 하고 있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못 알아들을 말을 하네? 하슬러는 네리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네리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에포닌을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레인저 대원들에게 말했다. "잘 좀 부탁해요? 어린 소녀도 있으니까 너무 급하게 걷지 말아주면 고 맙겠네요." "예? 아, 예." 레인저 대원들도 그들의 대장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에포닌에게 말했다. "에포닌. 어렵게 만난 아빠니까 아빠 옆에 꼭 붙어다녀야지?" 에포닌은 의아한 얼굴로 네리아를 올려다보았지만 네리아는 그저 웃기 만 했다. 인사가 끝나고나서 하슬러와 에포닌을 남겨두고 우리는 모두 마차에 올랐다. "이랴." 샌슨의 호령과 함께 썬더라이더가 길게 울었다. "음메!" 그리고 마차는 거침없이 출발했다. 달가닥 달가닥. 절벽 위에서 다시 대로로 내려가는 급한 길을 따라 마차는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 13. 대마법사의 만가……10. 여전히 마차 위에는 나와 네리아, 그리고 운차이가 앉았다. 운차이는 또다시 나무토막을 깎아대고 있었다. 이제는 완연하게 드러난 그것은 무 슨 말이나 낙타? 어쨌든 그런 날렵해보이는 네발짐승의 모습이었다. 도 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지? 네리아는 운차이의 손동작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지만 운차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난 마차의 흔들거림 때문에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을 주의깊게 잡고는 네리아에게 말했다. "네리아. 아이고, 턱이야. 아까 그거 무슨 말이에요?" 말을 하려니 정말 힘드네. 경사 급한 산길을 내려가는 마차는 쉼없이 덜컹거렸다. 네리아는 그저 날 보며 헤죽 웃었다. 그 때 마차는 다시 길 로 접어들었고 좀 편하게 앉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운차이가 말 했다. "그건 도둑 속어인 듯한데." 네리아는 손뼉을 짝 치면서 말했다. "맞아맞아. 운차이. 뜻도 알아?" 운차이는 떨뜨럼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고, 시야에서 멀어진 바라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길 옆에 있는 절벽 위로 바라크는 외롭게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몇 명의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도 레인저 대원들이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모 양이다. 갑자기 햇빛이 허공을 가로질러 바라크를 비추었다. 비에 젖어 검게 보 이는 절벽 위로 바라크의 젖은 지붕이 마치 황금덩이처럼 빛났다. 운차이는 뒤를 돌아본 채로 말했다. "세아름짜리 소나무 아래에…" "예?" "세아름짜리 소나무 아래에, 도망가는데 도움될 물건이 있다는 뜻인 것 같다." "뭐라고? 도망?" 길시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이라고? 어? 아침에, 카알이 삭책을, 산책을 갔다왔지? 어라? 난 운차이를 바라보며 의혹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운차이가 아침에 그러고 앉아있었던 것은 망을 봐준 거에요?" 운차이는 싱긋 웃었고 난 기막힌 심정으로 마부석에 앉아있는 카알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말도 안되는 말을 힘들게 만들어내면서 떠들기 시 작했지만 카알은 앞만 바라본 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아이고, 저 너구 리! 길시언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면서 떠들기 시작하자 카알은 앞만 바라본 채 나직하게 말했다. "왕가가 할슈타일가를 제어하지 못했고, 할슈타일가는 하슬러가를 괴롭 혔고, 하슬러가는 넥슨가에 들어가 반란에 휘말려들고, 왕가는 하슬러가 를 벌주려하니, 헬턴트가는 하슬러가에게 왕가 대신, 그리고 할슈타일가 대신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오. 죄송합니다. 더 할 말은 없는데." 길시언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무엇을 남겨두셨습니까?" "무기는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식량과 돈 조금, 그리고 편지를 남겨두 었지요." "편지요?"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남긴 글을 그대로 반복하듯이 말했다. "이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 에포닌 을 잘 키우도록 하십시오. 다시는 넥슨이나 할슈타일의 일에 관련되려 하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십시오. 만일 그 일에 관련되려들면 에포 닌양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잡아 재판을 받게 하겠소. 아버지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일을 하는 것보단 감옥에 잡혀있는 편이 에포닌양에게 도 움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 그럼, 행복을."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썩 괜찮은 판결입니다, 카알. 국왕의 법정에 가서도 죄인에 대한 그만 한 동정은 보기 어려울 겁니다. 훌륭한 재판관이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것인가? 그러나 길시언의 얼굴에 그런 기색은 없었다. 카 알은 겸연쩍게 대답했다.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비에 젖은 나뭇잎들과 가지에서 빗방울들이 찰랑거리며 떨어져내렸다. 숲이 워낙 거대하다보니 길을 가로지르는 개울도 몇 개 생겨나 있었고 군데군데 흙이 무너진 곳도 보였다. 걸어가기 힘든 흙탕길이지만 아침나 절이라 말들은 기운차게 걸어갔고 마차바퀴는 흙탕물을 찰박거리며 잘도 굴러갔다. "이 계절에 내린 비치고는 꽤나 많아. 음." 네리아는 마차 지붕 위에 배를 깔고 누운 채 마차바퀴가 지나가면서 파 문을 일으킨 물구덩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길시언 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난민들이 걱정이오." 네리아는 고개를 돌려 길시언을 흘끔 바라보더니 다시 길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차피 집 버리고 나온 피난길은 고생이지요, 뭐. 이런 비 때문에 특 별히 더 감상적이 될 필요는 없어요." "하긴. 옳은 말이오, 네리아양." 다시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마차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산 길을 쉼없이 굴러갔다. 카알은 지리한 표정을 짓더니 마차 뒤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아인델프님!" 잠시 후 엑셀핸드가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데굴데굴 굴 러가는 마차 바퀴를 보더니 머리가 어지럽다는 표정을 짓고나서 말했다. "왜 그러나?"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사운드가 들렸다는 그 광산은 정확하게 얼마쯤 남았습니까?" "아, 거기? 음. 여기선 설명하기 어렵고, 요정의 여왕의 성이 있는 레 브네인 호수를 지나고나서 설명하는 편이 낫겠군. 인간들은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서 말이야. 대충 위치를 말하자면 갈색산맥의 최고봉인 자날 한타의 서쪽 사면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자 길시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드워프들의 통행로 말씀이군요. 나도 몇 번 지나다녀본 적은 있습 니다. 낮에 나온 박쥐만큼이나 길눈이 어두워… 관둬! 에, 그러니까 중 부대로에서 급히 북부대로로 빠져나갈 때 유용한 길이었지요." "그래? 그렇다면 광산으로 가는 길도 알고 있는가?" "아니오. 광산에 들릴 일은 없었으니까요. 가장 중요한 보물은 손에 쥐 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 거짓말! 웃기지 말아! 에, 그러나 그 길까지라 면 내가 안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군. 그럼 자네가 인도하시게나." 엑셀핸드는 다시 머리를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고 길시언은 샌슨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아 마차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말들은 기운차게 걸어가 마 침내 메드라인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숲 사이로 레브네인 호수가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가 닿을 듯한 거리였지만 내리막길인데다가 비가 내려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지라 길시언은 마차를 천천히 굴러가게 했다. 그래서 메드라인 고개 위에서 레브네인 호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실컫 감상할 수 있었다. 난 아래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제레인트! 나와보겠어요? 페어리퀸의 성이 있는 레브네인 호수가 보이 는데…" "뭐야! 윽!" 제레인트는 마차 밖으로 급히 머리를 내밀다가 길 옆에 뻗어나와있는 나뭇가지에 머리를 긁혔다. 마차 안에서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제레인트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더니 곧 환한 얼굴이 되었다. "허! 허! 저게 호수야, 바다야?" 하긴, 산 속이긴 하지만 고개를 돌리다보면 간혹 수평선도 보이는 곳이 다. 수평선과 산봉우리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어 디에 있을까? 우리 마차는 그 거대한 레브네인 호수로 내려가는 완만한 곡선로를 따라 굴러내려가고 있어서 호수까지 내려가는 데는 시간이 한 참 걸릴 것 같았다. 제레인트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곧 마차 문을 열고 천천히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영차! 이크. 진흙이네?" 그는 로브자락을 양손으로 거머쥐어 올리더니 진흙탕길을 반쯤은 미끄 러지면서 겅중겅중 뛰어내려가기 시작했고 네리아와 나는 마차 위에서 그 광경을 보며 쓰러질 정도로 웃었다. 운차이마저도 나무토막을 내려놓 더니 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우리들의 웃음 소리를 듣고 마차안에 있던 사람들은 머리를 내밀었다. 레니는 제레인트가 로브자락을 날개처럼 거머올리고 뛰어가는 모습을 보 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 산 속에서 저렇게 혼자 가시게 내버려둬도 되겠어요?" 네리아는 정신없이 웃으며 대담했다. "하아, 하아. 괜찮아, 괜찮아. 키기기긱! 여긴 몬스터가 없어요. 레니 양." "몬스터가 없다고요?" 네리아는 배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닦으면서 말했다. "여긴 다레니안의 영토이기 때문에 몬스터는 들어오지 못해." "그래요? 그럼 사람은 들어가도 되요?" "그래, 사람은… 어랏?" 네리아는 갑자기 당혹한 표정을 지었고 그 때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 다. 이크! 여기선 저렇게 경망스럽게 뛰어가면 안되는 곳이잖아? 난 다 시 제레인트를 돌아보았다. 제레인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마구 뛰어가 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레니안의 영토이기 때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중히 허락을 구한 다음 조용히 지나가야 되는… "침버씨! 멈춰요!" 카알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굉장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 우리들의 정신을 완전히 빼놓았다. 먼저, 제레인트가 카알의 고함 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다가 그대로 진흙 탕길을 밟고 주루룩 미끄러져버렸다. "으아악!" 그는 그대로 호수쪽으로 향하는 급한 경사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그만 웃어버렸다. "푸하하!" 그런데 그와 동시에 길시 언이 황급하게 마차를 급출발시켰다. "젠장, 들어가면 안돼! 이랴아! 하 아!" 마차가 급출발하면서 몸이 뒤로 젖혀지는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파바밧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길시언이 마차를 급히 출 발시킨 이유는, 제레인트가 다레니안의 영토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붙잡 기 위해서… 그런데 그 순간 말들 사이에서 커다란 빛이 터져나와서 머 릿속이 하얗게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뭐, 뭐야!" 눈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난 마차 지붕 위라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휘둘렀다. "으아악!" 샌슨의 고함 소리와 함께 말들도 비명을 지르 기 시작했다. "힝힝힝힝힝!" 마차가 거세게 흔들리더니 곧 겁에 질린 말들은 격하게 출발했다. 쿠르 르르르! 돌멩이와 진흙이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마차는 무서운 속도 로 달리기 시작했다. 손이 빠져나가라 휘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잡지 못했고, 나와 운차이는 뒤로 휘청 넘어지다가 짐더미에 등을 부딪 혔다. "커헉!" 그리고 바닥에 배를 붙이고 있던 네리아가 주루룩 미끄러 지더니 우리들 위로 덥쳐왔다. "케엑! 네리아!" "아, 난 괜찮아." "난 괜찮지 않아요! 엉덩이 치워요!" 눈 앞에 별이 돌면서 난 무의식적으로 네리아를 밀어내었다. 그런데 힘 이 좀 많이 들어갔는지 네리아는 데굴데굴 앞으로 굴러가버렸다. "아악! 후치 이 자식아!" 네리아는 간신히 떨어지지 않고 지붕 가장자리를 붙들 었다. 콰과과과! 마차 굴러가는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 같다. 난 도대 체 왜 말들 사이에서 빛이 터져나왔는지 보기 위해 손을 휘저어 일어나 려 했다. 하지만 몸은 짐더미 속에 박혀있었고 다리는 하늘로 올라가 있 었다. 게다가 급하게 달리는 마차 위라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 카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엇? 말이 여섯이야!" 그야 6두마차니까 당연하… 잠깐! 말은 다섯이잖아? 그 때 운차이가 마 치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몸을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공중에서 놀 라운 동작으로 몸을 안정시키더니 마차 바닥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부드럽게 균형을 잡았다. "운차이! 나 좀 꺼내줘요!" 그런데 운차이는 내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렇게 구부 린 자세로 앞을 보면서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썬더라이더가…?" 그러나 다음 순간 운차이는 황급하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지붕 위에 엎드려눕더니 마부석쪽의 가장자리를 붙잡으며 외쳤다. "멈춰! 제레인트를 깔아뭉개겠어!" "으아아앗!" 길시언의 기합 소리와 함께 마차가 거세게 요동했다. 그리고 카알의 고 함소리도 들려왔다. "제동기를 당기면 안돼! 퍼시발군! 이 속도에서 당기면 마차가 뒤집 혀!" "옆으로 틀어! 옆으로 틀어! 제레인트, 일어낫!" 운차이의 고함 소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들은 그 고함 소리에 놀랐는지 더욱 격하게 달려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절반쯤 일 어나던 나는 다시 짐더미속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걸음마는 16년 전에 졸업한 줄 알았는데!" 그 때 마차바퀴가 무엇에 걸렸는지 터덩! 소리를 내면서 마차와 내 몸 이 함께 떠올랐다. "으아앗, 새가 부럽지 않아!" 다행스럽게도 격한 충 격 때문에 내 몸은 짐더미 속에서 튕겨져나와 있었다. 난 재빨리 몸을 앞으로 던졌다. 가슴에 부드러운 충격이 다가왔다. "꺄악! 후치, 임마! 좋으면 말로 해!" 나는 네리아를 깔아뭉개며 운차이 옆에 나란히 눕게 되었고 그리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은 머리 끝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다. 네리아가 아래에서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비켜날 생 각조차 하지 못했다. 호수가 온통 터져나가는 듯했다! 저 넓은 레브네인 호수 곳곳에서 쏟아져나오는 붉은 섬광은 하늘을 찌 르며 솟아올랐다. 붉은 빛살들은 숨쉴 사이없이 계속해서 뿜어져나왔다. 언젠가 한 번 본 장면이지만 굉장한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면은 거칠게 파도치고 있었으며 붉은 섬광은 이제 갈대밭처럼 빽빽하게 뿜어 져나와 눈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 내 아래에 깔려있던 네리아 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 13. 대마법사의 만가……11. 고개를 내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말이 여섯 마리였다! 조금전까지 말들 사이에 끼어있던 황소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너무 말 같이 생겨서 오히려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 생긴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슈팅스타보다 더 거대한 그 몸은 에보니 나이트호크보다도 더 새카만 털빛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목 뒤에서 흩날리고 있는 갈기는 타오르는 은백색이 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색 번개… "썬더라이더?" "썬더라이더!" 길시언이 비명을 지르며 내 의심을 확인시켜주었다. 말들은 썬더라이더 의 갑작스러운 변신 때문에 일어난 빛과 호수에서 뿜어져나오는 붉은 섬 광 때문에 굉장히 겁을 집어먹었는지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쿠 르르르르! 그리고 저 앞에는 미끄러지는 것을 멈춘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일어나려고 비칠거리고 있었지만 다리가 부러진 것 인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서 다시 진흙탕에 얼굴을 갖다박고 있었다. 휙휙 지나치는 좌우를 보자 왼쪽은 나무가 꽉 들어찬 숲이었고 오른쪽은 호수로 통하는 격한 사면이었다. 젠장! 마차를 틀 길이 없어! "테페리여!" 제레인트는 쓰러진 채 고함을 지르더니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마부 석에 앉아있던 샌슨은 욕짓거리를 뱉어내더니 기어코 제동기를 당겨버렸 다. 끄끼기기긱! 뼈를 긁는 소리가 들리면서 말들이 휘청거렸다. "이힝 힝힝!" 바퀴가 멈춰버림에 따라 말들은 몸이 뒤로 당겨지게 되었다. 말 들 중 몇 마리는 그대로 주저앉기도 했다. 마차는 뒤집힐 듯이 요동을 쳤으나 간신히 뒤집히지는 않았다. 눈썹이 뽑혀나갈 정도로 맹렬히 달리 고 있던 속도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그 속도 때문에 마차는 바퀴가 멈 춰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흙탕길을 미끄러져내려갔다. 좌우로 정신없이 휘청거리며 미끄러지는 마차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다리가 좌 우로 심하게 요동쳤다. 주루룩, 주루룩! "으아아아!" 난 차라리 네리아 위에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네리아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으니까. 지붕 가장자리를 부서져라 움켜쥐면서 차마 바라보고 싶 지 않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이제 코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그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 을 가린 채 똑바로 누워있었다. 그의 두 손만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안돼!" 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말들은 그대로 제레인트의 위를 지나가 버렸고 마차 역시 좌우로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지나쳐갔다. 이런, 제기 랄! 그 때 운차이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죽었어! 난 이빨을 마구 부딪히면서 힘겹게 고개를 돌려 마 차 뒤쪽을 바라보았다. 끔찍하게 짖이겨진 시체… 가 없네? 뒤로 남겨진 것은 마차가 미끄러지면서 땅을 파헤친 무시무시한 궤적뿐이었다. 난 다 시 고개를 돌렸고, 그 때 운차이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운차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다음 순간 내가 생각 해도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제레인트! 거기서 뭐해요?" 제레인트는 호수 상공에 떠있었다. 당신 정체를 이제야 밝히는군! 원래 새였지? 아니, 젠장! 운차이와 내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제 레인트는 고함을 질렀다. "우오오, 너무 높아!" 제레인트는 그렇게 고함 을 지르며 날개짓을 시작했다. 아니, 그건 날개짓이 아니라 그냥 팔을 마구 휘저음에 따라 로브가 펄럭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제레인트는 다행 히도(?) 그대로 호수 수면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인간 임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안도의 기분이 드는 이유가 뭘까? 풍덩! 제레인트는 쏘아져올라오는 붉은 섬광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 로 멋지게 잠수해들어갔다. 물보라가 거세게 튀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쿠쿠쿵! 그 때 좌우로 비틀거리며 미끄러지던 마차가 드디어 무엇에 걸 려버린 모양이다. 콰아아앙! "앞으론 마차 안타겠어어어어!" 엑셀핸드의 비명 소리와 함께 마차는 그대로 부웅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차는 말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다시 호되게 땅에 부딪히 면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말들은 마차의 회전에 쓸려들 어가며 비틀거렸고 마차는 시작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회전을 멈추었 다. 젠장! 그럼 왜 돌기 시작했어! "으아아아!" 난 그대로 마차에서 튕겨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 "하늘을 나는 기분이야!" 볼을 스치는 맹렬한 바람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시간은 느려지기 시 작했고 난 차라리 느긋한 기분을 느끼며 비행의 경험을 음미했다. 내 몸 은 붉은 섬광들 사이로 유연하고도 아름답게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갔다. (아, 훗날 내 비행을 관찰하던 운차이의 증언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그야말로 볼품없이 나가 떨어졌다고 한다.) "풍덩!" 캐액!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동시에 어깨와 배가 누군가의 주 먹으로 맞은 것처럼 아파왔다.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맛은 괜찮은 편 이었지만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손끌, 발끝이 뜨거워지고 발가 락은 꽉 오므라들었다. 물 속에 왠 별들이 저렇게나 많이 떠다니는 거 지? 팔다리는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뻣뻣해졌고 위와 아래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군가 내 머리를 쓸어내리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면서 난 물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주위는 완전히 환상적이었다. 눈 바로 아래에서 출렁거리는 물결, 그리 고 츠핏! 츠핏!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뿜어져올라가는 붉은 섬광,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평생 동안 개울보다 더 큰 물에는 들어가보지 못한 사 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큰 산중호수에 빠지게 되었을 때 마 주치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지. "어푸! 웁! 사람, 살려!" 입은 다물 수가 있지만 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코로 들어오는 호숫물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결은 계속 위아래로 움직여 물속 과 물 바깥이 번갈아 보였다. 물 위로 올라왔을 때는 붉은 섬광이, 그리 고 물 아래에서는 짙은 보라색의 섬광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숨이 차올라서 말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레니의 목소리가 멀리, 아련하게 들려왔다. "후치이이! 헤엄쳐! 머리를 억지로 물 밖으로 내려고 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젠장! 입장을 바꾸자고! 내가 밖에서 그렇게 외쳐줄 테니까 레니 네가 여기 들어와 있어보란 말이야! "우푸우! 풋! 케겟! 사람 살려! 나 헤엄 못쳐!" 그 때 누군가가 내 귀 옆에서 정겹고도 황당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 다. "그런 거 같군. 그건 다른 때라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은 별로 문 제가 되지 않겠는데?" 고개를 돌렸다. 응? 고개를 돌렸다고? 고개를 돌려보니 물 위에 앉아 손에서 뿜어나오는 은은한 빛으로 다리를 치료하고 있는 제레인트의 모 습이 보였다. 어라? 그러고보니 난 물 위에 앉아서 칭얼거리는 꼬마처럼 다리를 뻣대며 팔을 휘젖고 있었다. 난 얼빠진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고 제레인트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날 마주보고 있었다. 제레인트가 말을 꺼내려하기 직전, 내가 먼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사람은 원래 물 위에 떠요?" 제레인트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식과 경험이 아무리 다른 거라지만 이건 좀 심한 거 같다?" 난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보았다. 마치 풀밭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난 물 위에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불안한 손길을 내려 물을 만져보다가 손이 물 아래로 쑥 들어가는 것을 보고선 기겁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이상하네? 물인데? 난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어 가랑이 사이를 만 져보았지만 여전히 손은 익숙한 느낌을 주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러나 내 몸은 물 위에 앉아있었다. "상황만 좋다면, 이유 같은 거야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죠?" "명언이다! 좋아. 따지지 않겠어." 제레인트는 이 이해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따지고들지 않을 것을 엄숙하 게 선언했다. 난 고개를 돌려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샌슨과 길시언은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아 무래도 현실처럼 보이는 문제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는지 쓰러진 말들에게 다가가 악전고투를 하면서 말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말들은 두 사람이 풀어주자 곧 기운차게 일어났다. 흥분해서 조금 날뛰는 말도 있 었지만 심하게 다친 말은 없는 듯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쓰러진 마차 옆에는 네리아가 레니를 끌어안은 채 서 있었고 그 옆에선 카알이 땅바닥에 네 다리로 선 채 우리들에게 기막힌 시선을 보내고 있 었다. 운차이는 창문을 통해 마차 안에 있던 아프나이델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마차 밖으로 힘들게 나오다가 우리 모습을 보고선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레인트와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프나이델을 보면서 히죽 웃고 말았다. 뒤이어 엑셀핸드가 머리를 문지르면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장 비명을 질렀다. "이봐! 거기! 거기이!"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설명을 요구하지 말아요! 우리도 잘 모르니까!" 그러자 엑셀핸드는 자신의 수염을 쥐어뜯으면서 말했다. "멍청아! 뒤를 보란 말이다!" 뒤? 나와 제레인트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다음,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으아아, 제기랄!" 무슨 배짱으로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제레인트와 난 벌 떡 일어나서는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했다. 물 위에 앉을 수도 있는데 설 마 달리지는 못할까 등의 합리적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뒤의 광경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커서 눈에도 다 들 어오지 않는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으아아, 안돼!" "오지마! 오지마!" 제레인트는 파도를 향해 말하면 알아듣기라도 할듯이 그렇게 외치며 달 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말도 안되는 소리를 외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는 수면을 달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또다른 사실 한 가지가 확실했는데,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저 급격한 파도 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멈춰."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도저히 안되겠다, 제미니, 날 잊고 좋 은 남자를 만나… 등의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 는 달려가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린 채 고개만 다시 뒤로 돌렸다. 이런, 조금 전과 똑같은 동작이잖아?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돌리는 동안 먼저 제레인트의 질린 얼굴이 보였고, 그 다음 제레인트와 난 나란히 뒤의 광 경을 보게 되었다. 파도는 멈추어있었다. 멈추어 선 파도는 우리들 바로 뒤에서 딱딱한 벽처럼 서 있었다, 높이 는 대략 20 큐빗 정도. 그러나 그 표면에선 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 다. 그리고 그 파도의 가장 위쪽, 포말이 하얗게 일어나는 부분에는 무언가 작은 반점 같은 것이 보였다. 난 얼굴에 묻은 물과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고는 다시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 때 파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 작했다. 제레인트와 난 여전히 사람은 원래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 실을 무시하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서서히 낮아진 파도는 이제 내 가슴 높이 정도의 높이가 되었다. 이제 는 파도라기보다는 좀 커다란 물결, 아니 물기둥? 그 정도로 보이는 크 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첨단 부분에 있는 물체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작은 인간 형체였다. 마치 인형처럼 보이는… 그런데 그 것은 살아있었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지만 그 형체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이라도 시키듯이 말을 꺼내 었다. "고맙다는 말 쯤은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의심스러운 시선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던 그 형체가 똑똑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빛 옷으로 성장한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는데 키는 내 손바닥에 조 금 못미치는 크기였다. 물빛 머리카락이 순간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작은 여자는 파도를 마치 의자나 되는 것처럼 다리를 꼰 채 타고 앉아서 는 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연한 질문이 나왔다. "다레니안… 이크! 페어리퀸이십니까?" 아차, 무릎! 말을 꺼내고나서야 난 수면 위에 무릎을 꿇었다. 느낌이 너무 이상한걸. 바닥에 무릎이 부딪히는 느낌이 와야되는데 물이라서 그 런지 부딪히는 느낌은 들지 않고 대신 첨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겁 한 나머지 일어날 뻔했지만 다음 순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레인트가 나보다는 좀 더 조심스럽게 무 릎을 꿇고나서야 그 작은 여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래. 내가 요정의 성 레브네인의 성주이자 페어리의 여왕 다레니안이 야." 역시 날개가 없군. 그런데 난 이 경악할만한 상황에서 왜 이런 생각을 떠올릴까? 광막한 수평선을 바라보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해서 곧장 빠져들 것 같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어려웠고, 게다가 고 개를 들어 요정의 여왕을 올려다보기도 어려워서, 도대체 시선 간수할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되느냐 하는 고민은 시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다레니안이 먼저 말을 꺼내 었다. "이루릴은 어디 있지?" 난 고개를 들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이루릴이 어디 있냐고요?" 윽!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해버렸다. 다레니안은 놀란 눈으로 날 내 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 질문이 그렇게도 부당한 것이니?" "아, 아뇨.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에, 정신이 없어서… 용서해주십 시오." "아, 그래? 미안하군. 먼저 이름을 묻고… 친해지기 위해 이야기를 좀 나눠야 되는 거지?" "예? 예?" 다레니안은 내 당황스러운 반문은 듣지 못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말했는데. 다레니안. 그렇게 부르면 될 거야." "아, 예. 전 후치 네드발이라고 합니다.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입 니다. 예. 아, 헬턴트라는 것은 저희 인간들이 부르는 마을 이름으로서 그 소재는 저 중부대로가 웨스트 그레이드를 만나게 되는, 아, 웨스트 그레이드라 함은 역시 저희 인간들이 부르는 땅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서…" 페어리퀸 다레니안은 나로 하여금 인류의 모든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 식을 마구잡이로 늘어놓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횡설수설을 똑바로 잘라들어왔다. "아니. 그건 궁금하지 않아. 후치 네드발이니? 후치라고 부르면 되겠 지?" "예! 감사합니다!" "그래? 뭐가 감사하다는 거니?" 윽! 실수했다. 다레니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재빨리 머리를 굴린 다음 제레인트를 무섭게 노 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제레인트 침버입니다! 테페리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레니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레인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테페리께서 요즘 다리가 불편하신가?" 제레인트는 울음을 터뜨리려는 것인지 기절하려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 한 표정을 지으며 다레니안을 올려다보았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 리다가 다시 말했다. "아냐, 아냐. 테페리께서는 신이신데…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인간이 나 오크, 드워프들의 경우였던 것 같아. 그렇지? 이상하네." "아,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저, 제가 테페리를 모시는 프리스트라는 뜻 입니다." 다레니안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멍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 그렇구나. 혼란스럽네. 헬카네스가 우리 만남을 주재하시는 모양이지." 그런가 보다. 정말 무슨 만남이 이렇게 괴상망측할 수가 있는지. 수면 위에서의 만남, 이라고 하면 그거 왠지 배가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기잖 아. 그런데 배는 구경도 할 수 없는걸. ================================================================== 13. 대마법사의 만가……12. 주위의 붉은 섬광들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 전의 소란이 남겨놓은 잔잔한 파문과, 넓은 수면 위에서 조그맣게 솟아 올라 너무 이상하게 보이는 물결, 그리고 그 위의 다레니안 뿐이었다. 다레니안은 제레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붉은 빛을 뿜어 놀라게 한 것 같은데. 그건 허락없이 들어오려는 자가 있으면 그냥 나가게 되어 있거든." "예? 죄송합니다!" 제레인트는 코가 땅에 닿을 듯이, 아니 코가 물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 였다. 그러나 다레니안은 제레인트의 사과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이 번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어. 그런데 기억에 있는 얼굴들이 보이더 구나. 언젠가 이루릴과 함께 여기를 지나갔었지?" "예. 그렇습니다. 아, 그 때 저희들을 도와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대단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응… 그래서 이루릴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까 하고는 너희들에게 신 경을 쓰고 있었어. 그래서 제 때에 도울 수 있었지." "아, 정말 감사합니다." 다레니안은 싱긋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루릴은 지금 어디에 있지? 보이지가 않네." "예? 아, 이루릴 세레니얼양은 저희들과 함께 여행 중이었지만 잠시 자 신의 용무 때문에 지금은 저희들 곁을 떠나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저희들도 모릅니다." "그래? 알겠어. 그럼." 다레니안은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나와 제레인트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우린 동시에 다레니안을 올려다보았고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가라구. 계속 여기 있을 거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아쉬운걸? 요정의 여왕을 만났는데 그냥 이렇게 헤어져야 되다니. 난 좀 더 말을 끌어볼 욕심으로 다레니안에게 말을 걸었다. "저, 구해주신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이루릴에게 무슨 전할 말씀이라도 없으십니까? 이루릴은 다시 저희들을 찾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러니? 영원히 헤어진 것이 아니라?" "예? 잠시 헤어진 것뿐입니다만?" "그녀가 그렇게 말했어?" "예.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다레니안은 이해못할 말을 마치고나더시 이젠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다시 무릎을 꿇었지만 파도 위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생 각에 잠겨있는 페어리퀸을 올려다보면서 거의 넋이 나가버린 얼굴이 되 어 있었다. 다레니안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이루릴을 만나거든 그 소용없는 추적을 그만두라고 전해줘." "소용없는 추적이요?" 다레니안은 놀란 눈으로 우릴 내려다보았다. 엄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 하나하나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몸 전체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페어리는 원래 그런 가? "너희들은 모르니? 함께 있었는데? 다시 만날 거라며?" "예?" 다레니안은 정말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 고 그래서 갑자기 내가 정말 희한한 것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다레니안 은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아, 그래! 말하지 않았구나? 호호호." "예?" "맞아. 너희들은 인간이었지. 엘프가 아니니까, 이루릴이 말하지 않았 다면 너희들은 알지 못했겠지." 아니, 그게 아닌데? "저, 그런데 이루릴은 자신의 추적에 대해 저희들에게 조금 들려주었습 니다만. 저희들이 알기로 이루릴은… 핸드레이크를 추적하고 있는 것입 니다만. 그 추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핸드레이크의 이름이 말해졌을 때 다레니안의 얼굴이 어떻게 바뀌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난 조심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말해졌을 때 다레니안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 다. 그녀는 심드렁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었니? 그래. 그 추적을 그만두라고 말하려는 거야." "그, 글쎄요. 제가 알기로 그녀는 열심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그 말을 전해주면서 왜 소용없는 추적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비난은 듣고 싶지 않은데요. 이유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이유? 이유라. 이루릴은 그런 것 궁금하게 여기지 않을 텐데." 다레니안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고 그래서 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제가… 궁금합니다만." "그래? 너완 상관이 없는 일 아니니?" "예? 예.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고 궁금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은 아니잖 습니까? 뭐, 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상관이 생기고 관계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았다. 그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붙은 눈, 코, 입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날 내려다보는 것은 얼굴 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레니안은 말했다. "핸 같구나." 사람은 깜짝 놀랐을 때도 털을 곤두세우는 고양이나 귀를 쫑긋거리는 말처럼 몸의 일부분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장 떨어질만큼 놀랐지만 난 평온하게 대답해버렸다. 그래서 더 놀랐 다. "무슨 말씀이신지?" "핸도 그랬지. 뭐든지 관심 있어하고 자신은 상관도 없는 모든 종족의 일에 끼어들고." 다레니안은 여전히 대단찮은 얼굴을 한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앞 3큐빗 정도에 신장 반큐빗짜리 페어리가 파도 위에 앉아서는 날 그렇 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우스운 남자야. 자기도 돌볼 줄 모르면서." 다레니안은 미소까지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나 대신 카알이 여기 빠졌다면 좋을 텐데. 그 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다른 피조물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쏟는 것과 똑같은 애정을 표시했다 는 것은, 칭송받을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다레니안을 올려다 보며 맑게 웃고 있었다. "핸드레이크의 일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기를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 사실에 구속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가 당연히 가지고 태어나는 그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에서, 전 핸드레이크의 행동을 우습다고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높 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페어리퀸은 우울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늑대가 양에게 동정심을 가지면 어떻게 되지?" "예?" "대답해봐. 늑대가 양에게 동정심을 가지면, 그렇다면 늑대는 어떻게 될까?" 다레니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했다. 제레인트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 더니 이윽고 힘없이 대답했다. "굶어… 죽겠지요." "응. 거미가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에 매혹을 느끼면 어떻게 되지?" "죽게 될 겁니다." "그래. 땅속을 다니며 뿌리를 캐어먹는 땅강아지가 자신은 보지도 못한 꽃잎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한 번도 꽃을 본 적이 없을걸. 하지만 누군가가 땅강아지에게 지금 그대가 파먹고 있는 뿌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의 뿌리라고 알려주면, 그래서 땅강아지가 꽃 의 모양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동경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제레인트는 이제 고개를 똑바로 들어 다레니안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죽을 겁니다." "꽃은 그걸 알지도 못하겠지?" "그럴 테지요." "늑대의 경우를, 거미의 경우를, 땅강아지의 경우를, 넌 뭐라고 표현하 겠니?" "멍청하다고 말하겠습니다." 제레인트는 침착하면서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온몸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칭송하지 않을 거니?" "아뇨. 그건 어리석은 경우입니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게 태어났습니 다. 그리고 거미는 나비를 잡아먹도록 되어있지요. 또한 땅강아지는 꽃 에 신경쓰지 않고 뿌리만 캐어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 닙니다." "왜 그렇지? 인간은 어떻게 다르다는 거니?" "늑대는 양을 동정하지 못하게 태어났습니다. 거미도, 땅강아지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들은 원래 자신의 제물에 대해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 다. 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내가 끼어들었다. "예. 헬카네스의 빚음에 따라 우리들은 남과 달라지려는 존재가 되었지 만, 유피넬의 힘은 우리를 남에게 전달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쪽의 관심을 받습니다." 제레인트는 웃으며 날 바라보다가 다시 다레니안에게 고개를 돌려 정중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원래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물결치는 파도에서 쉼없이 물방울 이 치솟아 올랐지만 다레니안에게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레니 안은 손을 뻗어 파도의 하얀 포말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말했다. "너희들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니?" "아뇨. 우리의 마음은 넓지 않습니다. 엘프나 당신같은 페어리에 비한 다면 우리는 소견머리없고 터무니없이 속좁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는 우리를 나눠줌으로써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핸은 그 멍청한 일에 만족감을 느꼈던 것이니?" 제레인트는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몰라했다. 그래서 내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정도로." 갑자기 다레니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짓말이야!" 다레니안의 외침 소리와 함께 물기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이 앉아있는 부분만 제외하고 모든 호수가 날뛰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호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나 하나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어!" 다레니안의 작으면서도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지듯 울려나왔다. 소용 돌이는 하늘까지 솟아오를 정도로 거세게 물결쳤다. 다레니안과 우리 두 명이 있던 장소 주위로 무서운 소용돌이가 뿜어져 올라가 주위는 물의 벽이 형성되었다. 귀가 멀어버릴 정도의 물소리. 몸이 그대로 소용돌이 속으로 찢겨 흩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레니안은 이제 파도 위에 똑바로 선 채 두 주먹을 하늘로 뻗어올리며 외쳤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너희들은 엘프들처럼 나눠주는 종족이 아니야! 너희들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길, 꽃잎을 사그라들게 하고 구름마저 그을리는 미친 불꽃일 뿐이야! 세상의 모든 것 속에 너희들을 투영함으 로써,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야!" 과우우우! 이제 주위의 공기들마저 소용돌이와 함께 돌기 시작했다. 제 레인트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난 한 손으로 그 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물결이 요동을 쳐서 나 역시 똑바로 서있기 어려웠다. 다레니안의 머리카락은 모두 하늘로 곤두서있었고 그녀의 얇 은 옷은 회오리 속에서 찢어질 듯이 펄럭거렸다. 다레니안은 그 작은 몸 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무서운 비명을 질렀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이야!" 제레인트는 팔을 들어 바람을 막으면서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로 외 쳤다. "아닙니다!" 지지직! 지직! 호수 상공에서 불꽃들이 튕기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사 이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번갯불에 의해 가로로 찢어지고 세로로 갈라지 고 있었다. 번갯불이 소용돌이의 첨단을 가격할 때마다 굉음이 울려퍼졌 다. 쾅! 콰과광! 호수 전체가 그대로 주위의 산을 집어삼키며 하늘로 솟 아오를 것 같았다. 지직, 지지직! "아닙니다! 우리는… 어엇!" 제레인트가 말을 꺼내려 할 때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회오리 바람이 마침내 나와 제레인트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난 물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친듯이 주위를 돌아보며 붙잡을 것을 찾았다. 그 때 제레인트가 내 팔을 꽉 붙잡으면서 헐떡거리며 외쳤 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이 핸드레이크를 태웠잖아!" 제레인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내 입에 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고함소리였다. 주위의 소용돌 이 소리도, 번개의 굉음도,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 소리도 순간적으로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팔이 아파서 돌아보니 제레인트가 내 팔을 꽉 붙잡은 채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려 다레니안을 쏘아보 았다. 다레니안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사방으로 나풀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두 팔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라고?" "당신이, 당신이… 후욱! 당신이 핸드레이크를, 태웠잖아! 핸드레이크 의, 일생의 소망이던 여덟 별을 파괴했잖아!" 다레니안은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막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는 내 얼굴을 뚫 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핸드레이크에게 무엇을 주었어!" 다레니안은 입을 틀어막고 있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난 다시 한 번 고 함을 질렀다. "당신은 무엇을, 후우욱! 무엇을 주었냐고! 핸드레이크를 도운 적이 있 어? 그를 이해해보려 한 적이 있냐고!" "아아악!" 다레니안은 비명을 지르며 파도 위에 무릎을 꿇었다. 발이 떠올라서 공 중에서 볼품 사나운 꼴로 허우적거리면서도, 난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쉬 고는 외쳤다. "당신 멋대로 핸드레이크를 평가하고! 그의 소망을 평가하고! 그를 좌 절하게 만들었잖아!" "아악! 그만해!" "그의 투쟁이 소용없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제멋대로 그를 드래곤 로드 에게 넘기려고 했고! 그의 소망이 부질없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여덟 별 을 파괴하고!" "아아악! 아아아아악! 듣지 않겠어! 그만해!"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난 멈추 지 않았다. 제레인트가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허우적거렸지만 난 그것도 무시하면서 고함질렀다. "당신이 그의 무엇이길래! 당신이야말로 핸드레이크를 집어삼키려고 들 었잖아! 핸드레이크를 핸드레이크로 있게 만들지 못하고! 당신의 핸드레 이크로 있게 만들려고 했잖아아!" 갑자기 다레니안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작은 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뿜어져나와 내 눈을 태우는 것 같았다. 다레니안은 날 쏘아보면서 말했다. "내가 그의 무엇이냐고?" 난 입을 열려고 했지만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몸은 낙엽처럼 흩 날리고 있어 사방이 빙빙 돌고 있었고 하늘과 땅의 자리바꿈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번갯불이 하늘을 쪼갤 때마다 세상은 하얗게 바뀌 었고 다음 순간 지독한 암흑이 찾아왔다. 순백색과 검정색은 서로를 끊 임없이 침범했다. 그 혼란스러운 세상의 가운데, 그 중심에서 페어리퀸 이 죽일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왜 내가 그의 무엇이어야 하지?" "그… 그럼… 왜 그를… 그토록 괴롭… 혔어!" 다레니안은 퍼렇게 질려버렸다. "그를 괴롭혀?" "그의… 모든 것을… 파괴했잖아…" "거짓말! 핸드레이크는 날 비난하지 않았어! 그가 비난한 것은 루트에 리노야!" 이런 멍청한! 이게 정말 페어리들의 여왕에게서 나올 말인가? 아니면 페어리라는 것이 원래 이 모양인가? "그건… 그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뭐라고?" "이해할… 수… 어떻게… 그토록 지극하게… 비록 방법은 틀렸지만… 그렇게 위해주는… 자신을 위해주는… 사랑하지 않을 수…" 너무 오래 돌았다. 균형감각은 모조리 사라지고 지독한 어지러움과 희 미해지는 세상만이 남았다. 하지만 난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300년 간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 내 것도 아니지만, 나완 아무런 상관도 없지 만, 이 지독한 오해의 고리를 벗겨야 한다. "핸드레이크는… 당신을… 이해… 한 번도… 당신의 행동에 대해… 묻 지 않았겠지… 비난하지도, 의미를 묻지도… 그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 문에…" 너무 오래 버텼다. 세상은 이제 까맣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깨어나면 짙푸른 물속일까? ================================================================== 13. 대마법사의 만가……13. "정통 드워프식으로 할까?" 엑셀핸드의 목소리. 그리고 네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드워프식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양념은 하지 않고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는데, 그대로 굽는 거야. 너무 바삭바삭하게 굽지는 않고 씹히는 맛이 충분히 남아있도록." "좀 불안하네요. 엑셀핸드가 씹히는 맛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 도를 말하는 거예요?" 탁탁거리는 모닥불의 소리 사이로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제가 함께 여행해봐서 잘 압니다. 거의 날것이나 다름없는 수 준이지요." "휴우. 차라리 내가 할래요. 하필이면 우리들 중 일류요리사들이 모두 사라졌담." "왜 그래? 언니는. 왜 난 생각도 하지 않는 거야?" 레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난 입술을 슬그머니 올렸다. 네리아는 자 기가 요리를 못하니까 다른 여자도 요리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지. 하 하하. "어? 아, 그래! 너 요리할 줄 아니?" "그럼. 뭐, 우리 아빠는 내가 만든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건 아빠라서 하는 말일 거야. 하지만 우리 집에 온 손님들도 먹어보고 괴로워하진 않았어." "다행이구나. 그럼 레니에게 맡길게." 음. 나와 제레인트가 없어지면 우리 일행의 최대 문제는 요리사 부재가 되나 보군. 그것참.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때 샌슨이 말했 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빠 져죽은 거 아닐까?" "샌슨! 그런 소리 하지마!" "어, 네리아. 그러니까…" "아프나이델이 절대로 호수 안에는 없다고 했잖아! 틀림없이 다레니안 이 데리고 있는 거라고. 확실해!" 어라? 이게 무슨 말들이야? 그 때 발자국 소리와 함께 길시언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샌슨. 난 도저히 못하겠소." "길시언." "샌슨이 대신 가서 카알 좀 끌고와 주시오.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 고 있어."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간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 게 보이진 않지만 카알도 은근히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털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며 눈을 뜨자 땅바닥에 주저앉 은 길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모닥불빛은 그의 얼굴을 검붉게 물들여놓았 다. 그리고 맞은 편에는 샌슨과 네리아 등이 앉아 있었고 모닥불 주위로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의 모습도 보였다. 샌슨이 고개를 돌려 멀리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난 샌슨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았다. 멀리 레브네인 호수가 보이고, 그리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휘우듬한 그림자가 보였다. 카알인가? 떠오르는 달이 호수 수면을 은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카알의 어깨에 는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카알은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검 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그의 뒷모습뿐이다. 샌슨은 한 숨을 쉬다가 아프나이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빠져죽은 것은 확실히 아니죠?" 모닥불 옆에 앉아있던 아프나이델은 피로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호수 전체를 관찰해보았지만 두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습니 다. 따라서 호수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빠져죽었다면, 설령 죽었다 해도 흔적은 남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요." "설령 제레인트의 디바인 파워의 경우엔 그가 사망했을 경우라면 약화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후치의 OPG의 경우는 그의 생존유무와 상관없 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 제 가 못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역시 다레니안이 그 둘을 데리고 있다는 결론으 로 돌아오게 되는군요. 흐음." 길시언은 다시 카알의 등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그런데 페어리퀸께서는 그들을 얼마나 데리고 있을 생각인지…" "돌려보내주실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 때 레니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정의 나라로 붙잡혀간 사람들은, 저… 그러니까…" "수십년만에 돌아온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야? 돌아와보니까 세상은 바 뀌어 있고 자기 자식들은 모두 호호 할아버지나할머니가 되어있고?" "진짜 그래요?" "내가 잡혀가봤니. 그걸 알게.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옛날 옛적 에, 이런 말로 시작한다고. 며칠 전에, 가 아니라." 네리아의 힘없는 대답에 레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 금 사람을 옆에 놓고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거야?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샌슨의 어깨를 잡아당기려 했다. 그런데 내 손은 그의 어깨를 그대로 지 나쳐버렸고 난 기절할만큼 놀라버렸다. "히익!"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그냥 손이다. 그리고 샌슨의 어깨는 그 냥 어깨고. 난 다시 조심스럽게 샌슨의 어깨를 짚으려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익숙한 느낌이 올 때까지 손가락을 뻗어보았지만, 손가락 끝에는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이익!" 난 흡사 주먹질을 하듯 손을 쭉 내밀었지만 주먹은 그대로 샌슨의 몸을 지나칠 뿐이었다. 게다가 샌슨은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 모양이다.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의 촛점은 내가 아니었다. 난 그녀에게 후다닥 다가가서는 그녀 의 얼굴 바로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네리아! 평소에 하고싶은 말이었는데, 당신 정말 미인이에요! 내가 평 소에 얼마나 거짓말이 하고 싶었는지 잘 알겠죠?" 그러나 네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 었다. 뭘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레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 재료들을 힘없이 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오, 젠장! 아프나이델. 미안하지만 당신이 틀렸어요. 난 죽었나봐요. 음. 그렇게 나쁘진 않네요. 생사의 갈림길이 뚜렷하다 보니 이야기를 전 할 수야 없지만, 그래도 친구들의 모습은 생전처럼 볼 수가 있군요? 뭐, 이 정도라면 고마워할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기뻐하죠, 뭐." 말을 꺼내놓고보니 정말 웃기는 상황에 웃기는 말이로군. 난 미소를 지 었다. 그런데 내 넋두리는 나 스스로를 웃겼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사람 하나도 웃겼던 모양이다. "파핫하하하! 후치, 왜 오랜 세월에 걸쳐 그 효능이 입증된 믿을만한 방법을 사용해보지 않는 거야?" "볼을 꼬집는 거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보자 길시언의 등 뒤에서 배를 잡고 웃는 제레 인트가 보였다. 제레인트는 짖궂은 얼굴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신 해줄까?" "정중히 사양하지요. 우리 안죽었어요?" "내가 알기론, 그래." "넌 죽지 않았어. 느끼지 못하겠니?" 제레인트의 말 꼬리에 붙어 또다른 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조금 들어올 리자 낮은 가지에 앉아 있는 다레니안의 모습이 보였다. 다레니안은 나뭇가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 었다.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나무 위였지만 다레니안의 모습 은 똑똑히 보였다. 난 동료들의 모습을 주욱 돌아보고나서는 다레니안을 바라보았다. "뭐, 죽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죽었다는 실감은 오지 않더군 요. 그런데 그렇다면 여긴 도대체 어디지요?" 다레니안은 레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계집아이가 말한대로 요정의 나라지." "요정의 나라? 그런데 이건 현실과 똑같잖아요?" "똑같다고? 현실의 사람들은 널 느끼지 못하잖아?" "어, 그렇긴 하네요. 그렇다면 요정의 나라라는 것은 뭐지요?" 다레니안은 웃으며 말했다. "요정의 나라는 현실의 나라 바로 이웃에 있어. 어쩌면 가장 멀리 떨어 져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사실 현실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을 그대로 사 용하면 관념이 이상하게 변질되지. 하지만 너희들의 언어는 모두 너희들 의 현실에만 맞도록 되어 있으니 설명해줄 길이 없구나." "그래요?" "후치야! 이것봐!" 제레인트의 고함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난 곧 쓰러질 듯 이 웃게 되었다. "푸흐허으우하하핫!" 길시언은 우리들에 대한 걱정으로 근심스럽고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모닥불의 이글거리는 붉은 빛이 그의 얼굴을 더욱 고뇌에 찬 무엇 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슴 부분에서 제레인트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있는 것이다. 제레인트는 길시언의 가슴으로 머리를 내민 채 나에게 윙크를 해보였고 그 광경은 괴기스럽다기보다는 폭소스러웠 다. 내가 정신없이 웃는 것을 보며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길시언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말했다. "이게 요정의 나라야. 우리 이웃. 하지만 우리 차원과는 다른 차원이 고. 페어리는 우리가 땅을 걷듯이 차원 사이를 걸어다니지. 그랬다고 들 었어." "하하하. 너무 어려워서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 차원은 뭐고 다른 차원은 뭔지. 난 차원이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는데요." 레니가 재료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제레인트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흠흠. 설명해주길 바라는 거야?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는걸." 난 고개를 돌려 다레니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페어리퀸께서는 어떻게 그 나뭇가지에 앉아있을 수 있지요?" "후훗. 인간다운 의문이구나. 설명해주기가 어렵네. 눈에 보이는 것으 로 판단하려들지 말라는 말밖엔 해줄 말이 없구나." 다레니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나뭇가지에 앉은 자세 그대로 허공 을 떠오기 시작했다. 날개도 없는데? 아, 여긴 요정의 나라였던가? 잠 깐, 그렇다면? "나도 날 수있어요?" "해보렴." "우아아악!" 뭐야! 뭐! 위로 떠오르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레브네인 호수가 불쑥 내 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난 산봉우리들 사이로 떠올랐다. 산봉 우리들이 내 시야에 있었던 것도 잠시, 난 갈색산맥의 산봉우리들이 발 아래 까마득하게 사라질만큼 솟아올라버렸다. 저건 중부대로인가? 밤인 데도 불구하고 산맥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뻗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몇 군데 횃불이 일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이 밤에 중부대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나 보지? 그리고 잠시 후 미드 그레이드에서 무수하게 많은 반딧불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이서스 임펠이 보였다. "우와아아아!" 그러나 곧 모든 산맥과 강, 그리고 대지가 모두 평평하게 바뀌고 주위 의 하늘은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하늘 저편으로는 푸른 선이 주욱 그어져 있었고 그 위로 붉은 기운들과 푸른 기운들이 뒤 섞이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멀리 동쪽으로는 둥글고 새카만 지평선(지 평선이 둥글어?) 뒤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양빛이 뿜어져나오 는 순간 눈이 부셨다. 뭐야, 이건! 밤인데 왜 태양이 떠오르는 거야? 위 를 보자 별들이 무시무시한 빛을 내뿜었다. 땅에서 바라보는 그런 별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정색 하늘에서 창백하게 불타오르는 별 들이었다. 으아아아! 별에 부딪히겠다! ================================================================== 13. 대마법사의 만가……14. "반대로! 거꾸로! 돌아서!" 뚝.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상승이 갑자기 멈추자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서어어얼마아아!" 우아아앗! 올라올 때와 똑같은 속도로 이제 땅이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 다! 이런 제에에에기랄! 굉장한 속도로 떨어지면서 나는 다시 바이서스 를, 그리고 미드 그레이드를, 여전히 횃불빛이 일렁거리고 있는 중부대 로를, 그리고 레브네인 호수를 보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우리 동료들의 정수리들이 보이고 그 사이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제레인 트의 얼빠진 얼굴이 보인 순간, 난 땅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우이야아앗!" 내 머리 박살나겠다! 그러나 내 몸은 아무 데도 걸리지 않은 채 그대로 물 속으로 들어가듯, 아니 그냥 허공에서 떨어지듯 땅 속으로 쑥 파고들 어갔다. 마치 갑자기 시트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주위가 삽시간에 시커 멓게 바뀌었다. 아무런 빛이 없어서 주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간혹 뭔가 흙덩어리나 바위처럼 보이는 윤곽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빛 한 점 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저런 것이 보이는 것일까? 그냥 내가 그런 것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런 윤곽들을 보면 서 내가 무지무지한 속도로 떨어져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주위가 붉게 변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내 가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확실히 뭔가 빛이 나고 있는 것이다. 놀 라움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지만 더 강해진 붉은 빛을 볼 뿐이었 다. 그리고 그 붉은 빛 속에서, 난 주위에 바위도, 흙도, 아무 것도 없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 맙소사!" 주위는 온통 용암이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용암들.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그리 고 물결치는 용암들이 보였다. 난 끓는 수프 속에 던져진 야채가 된 기 분이었다. 주위는 온통 이글거리는 용암의 스프였다. 그리고 난 벌겋게 녹아 꿈틀거리는 용암 속으로 떨어져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노랑색, 붉은 색, 그리고 황금빛의 흐름들이 폭발하듯 요동치며 꿈틀거 리고 있었다. 한 줄기 노란 흐름이 쉬익 지나쳤다. 그리고 황금의 얼룩 처럼 보이는 무늬가 잠시 거대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주위 는 붉은 색조로 바뀌어 버렸다. 눈이 타버리는 것같은 빛들. 도대체 얼 마나 떨어져내리고 있는 것일까? 작열하는 용암들은 이제 흰색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아앗!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떨어질 일이 아니잖아? 난 다 시 악을 질렀다. "땅으로! 땅으로 가잔 말이다! 지표로!" 순간 난 지표에 서있었다. 난 떨어지는 것에 대비하는 자세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무릎을 구부리 고 아래로 팔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갑자기 땅 위에 서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난 옆에서 들려오는 제레인트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버렸다. 굴렀어? 잠깐. 내가 지금 땅에 빠져들어간 것이 아니라 구른 거야? 난 얼빠진 얼굴로 위를 올려다 보았고 다레니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레니안은 말했다. "그냥 평소대로 생각해. 넌 걸어다닐 때 땅이 꺼져들까봐 주의하면서 걷지는 않겠지?" "평소대로요?" "그래. 그냥 그렇게 걸으면 돼. 날려고들면 날 수 있고, 땅속으로 들어 가려들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으니, 땅을 밟으며 걸으려들면 걸을 수 있어. 그러니까 결국 평소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지. 테페리의 프리스트 는 너처럼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을 수…" "우아아악!" 제레인트는 비명 소리만 남겨두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제레인트는 제자리에 서게 되는 데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 다. 그 동안 질러댄 그의 비명 때문에 고막이 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 었다. 하지만 익숙해지고나자 제레인트는 정말 재미있는 재주를 보여주 기 시작했다. "후치야! 이것 봐라!" "어지러워요. 제레인트.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는 지금 허리 아래는 땅 속에 묻어둔 채 마치 개울 속을 걷듯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모양이야. 나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시도할 때마다 땅 속으로 대책없이 파고들거나 기겁한 나머지 하늘로 솟 아오르는 일을 반복하게 될 뿐이었다. 난 도대체 '땅에 허리를 반쯤 파 묻고 뻔뻔스럽게 걷는다'는 상상을 정확하게 할 수가 없었다. 말로는 되 지만 그 모든 상황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기 로 했고, 그래서 난 땅 위에 서있을 수 있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땅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생 각을 할 때마다 내 몸은 현실감각을 잃고 그대로 땅 속으로 잠겨들곤 했 으니까. 그래서 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마구잡이로 말을 시 작했다. "페어리퀸. 그런데 우리들을 언제 돌려보내 주실 거죠?" 절대로 옆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 옆에선 제레인트가 머리를 땅으로 향한 채 거꾸로 떠서는 허공을 밟으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속이 이상해 지는 것 같아. - 난 다레니안에게 물어보았다. 다레니안은 날 지긋이 바 라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설명해줘." "설명하라고요?" "내가 핸을 태워버렸다고? 그런데 핸은 날 사랑했다고? 넌 어떻게 그 때 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유를 말해줘." 뭐라고 말해야 되지? 난 잠시 대답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난 누 운 채로 떠서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제레인트를 보며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는, 마구 말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예. 난 핸드레이크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속마 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정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 게 하며 사는 거니까요." "그렇게 하며 산다고? 엘프들처럼 되려고?" "엘프? 예. 우리는 서로간에 약속된 조화는 누리지 못하니까, 뭐 상대 의 의중을 짐작해보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애쓸 수밖에 없지요. 내가 욕 설을 하면 상대는 기분 나쁠 것이다 라는 수준 낮은 것부터 시작해서… 더 복잡한 개념과 사상을 나누려고 애쓸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넌 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거니?"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진 모르겠지만, 난 핸드레이크처럼 인간입니다. 따라서 페어리인 당신보다는 그를 이해하기가 쉬울 거라고 말할 수도 있 습니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엔 300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 은 아니겠습니다만." 다레니안은 잠자코 날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돌려 우울하게 저녁식사 를 하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풀죽어있는 모습들을 보자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카알은 일행들이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면서 여 전히 수면만을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난 카알쪽으로 걸어갔다. 옆에선 두 팔을 수평으로 든 채 허공에 떠서 빙글빙글 돌고있던 제레인 트가 그대로 빙글빙글 돌면서 따라왔다. 윽. 잠자리 같군. 아니,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군.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다니는 생물은 전혀 없으 니. 난 카알의 얼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모닥불을 등지고 앉은 카알의 얼굴은 침침한 어둠으로 젖어있었다. 그 는 다리를 감싸안은 채 구부정하게 앉아서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수면처럼 가늘게 떠져 있었고 호수에서 불 어오는 싸늘한 바람은 그의 머릿결을 떠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추위 때 문에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에서 그의 입술만이 움직이며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제레인트가 내 옆으로 내려왔다. 제레인트는 카알의 입술을 주의깊게 바라보더니 그입술 모양을 하나씩 하나씩 따라하기 시작했다. "오… 우이오. 아에…안?" 난 착찹한 심정으로 말했다. "돌려주시오. 다레니안." "아, 맞아. 그렇군. 아라이…이? 부영이 아라이으테이?" "살아있지? 분명히 살아있을테지?" 그 때 머리 위쪽으로 다레니안이 천천히 날아왔다. 난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모르시겠어요?" "뭐라고?" "지금 카알의 말, 그의 마음, 짐작할 수 없냐고요!" 다레니안은 여전히 허공에 뜬 채 카알의 얼굴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는 너희들을 그리워하고, 또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 같구 나." "그래요! 왜 그럴까요?" 다레니안은 다시 카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 제레인트, 그리고 요정의 여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알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앉아서는 대답없는 수면만을 향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잘 아시는군요. 당신도 짐작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렇 잖아요?"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어떤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요?" "변화?" "우스운 말이지만, 카알에 대한 동정심이, 그리고 우릴 돌려보내주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느냐고요?" 다레니안의 얼굴을 본 순간 난 그만 고함을 지르고 싶어졌다. 다레니안 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래. 이게 페어리다. 이젠 확실해지는군. "너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구나. 그는 허공을 향해 말하고 있는데, 내 가 왜 그런 마음을 느껴야 되는 거지?" 이거였어. 난 대답하지 않고 다만 속으로 외쳤다. 바로 이거였어. 그 래. 그녀는 핸드레이크의 정열에 동참하지 못해서 그를 이해하지 못했 지. 아니, 이건 이해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야. 단지 그 뜨거운 마음을 느끼고, 함께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런 사소한 공명을 그녀는 하지 못했 을 거야. 오로지 머리로서만 핸드레이크를 이해하려고 했고, 그래서 끝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방해한 것이겠지. "그래도 핸드레이크는… 이해해주려고 애쓰는 모습만으로 당신을 사랑 했겠지요." 제레인트가 무의식중으로 꺼낸 말은 다레니안으로 하여금 한참동안 입 을 다물게 만들었다. 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허공에 다 리를 꼬고 앉아서는 오른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말했다. "아냐. 그는 원래 만물을 사랑했고, 당신 또한 사랑했겠지. 큰 사랑이 었을 거야." "뭐라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맞아. 스스로를 단수로 생각할 수 없는 남자였지. 소유욕과 별 차이없 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았겠지. 후, 후후, 하하하! 이건 정말 웃기는 일 입니다, 다레니안! 그는 누구도 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당신에게 주었 는데, 당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니." "무슨말을 하는 거야!" 제레인트는 즐거운 얼굴로 다레니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뭐?"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자신 을 이해해달라고 간곡하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혹은 당신에게 무엇이 되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변화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 까?" 다레니안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번도 없었겠지요. 우리들이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파괴입니다. 상대에 대한 적극적 파괴행위지요. 그 점에선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우린 불길일지도 몰라요." "파괴라고?" "그래요. 상대를 원래의 모습으로 있게 만들지를 못하지요. 어떻게든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려 애씁니다. 상대가 스스로의 즐거움, 스스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 와 함께 있음으로써 즐겁고, 나와 함께 함으로써 기쁘기를 바랍니다. 상 대가 알고있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이 점에선 사랑과 증오는 거의 같아요. 어쨌든,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니까요." "난, 난 네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뭐?" 제레인트는 엄숙하게 말했다. "짝사랑이지요." 윽.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 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뭔지 아십니까?" "난, 난…" "상사병이올시다." 도저히 못참겠다. 난 맹렬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몸 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동안에도 제레인트는 계속 웃지 도 않은 채 말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아프지요. 참 글러먹은 문제입니다. 짝사랑 을 하면 그냥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 될 문제인데 말입니다. 상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꼭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해야 된단 말입니다. 상대도 날 봐주었으면, 날 생각해주었으면, 날 사랑해주 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이 나버 리지요. 고약하다면 고약한 것이고, 동정하려고 들면 정말 동정받을 일 이라고 생각되는군요." ================================================================== 13. 대마법사의 만가……15. "도, 도대체 무슨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조금 꺾더니 다레니안을 삐딱하게 바 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그 점에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사랑은 어쩌면 모든 종족에 있어서 마찬가지의 불길일지도 모르겠군 요. 당신은 그가 변화하기를 바랬을 겁니다. 맞습니까?" "변화…?" "만물을 사랑하는 핸드레이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핸드레이크가 되기를 바랬을 겁니다. 당신은 세계를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겁니다. 사실 누가 그런 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당 신은 제멋대로 그가 변화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그의 모습으로서 있게 허락하지 않고, 그를 파괴해서 재조립하려고 했을 겁니다. 맞습니까?" 다레니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창백한 얼굴로 제 레인트를 마주볼 뿐이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의 모습에 맞추어 당신의 사랑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당신 의 사랑에 맞추어 그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들은 바로 는 그렇습니다." 다레니안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럼 네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진정한 사랑은 뭐지?"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건 무관심하고 뭐가 다르다는 거지? 상대를 그 냥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그건 무관심하고 뭐가 다르단 말이야!" 다레니안의 작은 몸 전체가 분노로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담 담하게 말했다. "그 두 가지는 구별하기 어렵겠지요. 나로선 확신은 없습니다. 신이 우 리를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무관심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 려운 것과 비슷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관심했 는지, 아니면 자신을 마구 변화시키려드는 당신의 모습마저도 포용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마저도 북방으 로 쫓아버릴 정도의 남자였습니다. 그건 잘 아실 테지요. 직접 보셨으니 까. 그런 자가 왜 시시콜콜 자신을 방해하는 당신은 그대로 내버려두었 을까요?" "뭐야?" 이번에는 다레니안의 몸 전체가 경직했다. 제레인트는 차분하게 말했 다. "그는 간단하고도 불쾌하지 않은 방법으로 당신을 제어할 수 있을 남자 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당신을 그대로 내버 려두었을까요? 그런 실수 때문에 결과적으로 핸드레이크는 일생의 목표 를 파괴당하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뼈저린 실수일까요? 그러나 여덟 별이 파괴되던 날, 그는 당신을 소중히 가슴에 안은 채 사라졌다고 들었 습니다." 다레니안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 뀌었지만 하던 말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 날, 핸드레이크는 당신을 포옹한 채 루트에리노의 곁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 던 것입니까?" 다레니안은 제대로 서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난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추락하는 그녀를 두 손으로 받아내었다. 받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려고 들면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난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다레니안을 받쳐들었다. 다레니안은 내 손바닥 위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핸…" 귀가 빨개지는 것 같군. 내가 핸드레이크가 된 것 같잖아?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려 했지만 그 때 제레인트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말 하지 마. 다레니안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작은 눈물이 엄청나게 뜨거워 나 는 놀라고 말았다. 다레니안은 울먹이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난 잠자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난 걷고 있었다. 좌우는 돌벽이었고 간혹 매달려있는 횃불이 돌벽과 바닥에 타원형의 빛 을 뿌리고 있었다. 횃불이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싸늘한 기분이 드는걸. 저벅저벅. 바닥도 돌인가 보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내 신발이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내 옷은 또 왜이래? 난 길다란 로브를 입고 손 에 다레니안을 든 채 돌로 된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이제 내 손바닥 위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입고 있는 옷이 달라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 한 순간 그녀는 내 턱 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화를 내는 건가요? 실망했어요?" 저벅저벅. 발자국소리만 텅빈 통로에 울려퍼졌다. 다레니안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통로의 공허가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난 계속해 서 걷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요!" 다레니안은 앙칼지게 말했다. 그 때 비로소 내 입이 열렸다. "성에 돌아가거든…" 어라라?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러나 내 입은 계속해서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그렇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성에 돌아가거든,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구축하 시오." 다레니안은 입을 쩍 벌리더니 힘들게 말했다. "뭐라구요?" 이런! 난, 난 17살짜리 더벅머리의 초장이가 아니었다. 난 길다란 로브 를 입고, 우수에 젖은 눈으로 다레니안을 내려다보는 나는, 인간의 몸에 담긴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한없는 힘을 가진 나는, 나는 대마법사 핸 드레이크였다!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그 어떤 것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방어벽을 만드시오." "무슨 의미인지…?" 난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좌절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허탈감, 그리고 배신감. 어떻게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우정은 금 이 갔고 일생의 노력은 무의미해졌다. 그런데도 내가 쓰러지지 않은 것 은 계속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멈춰서서 목놓아 울고 싶지만, 주저 앉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 다. 후치 네드발이었다면 이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핸드레 이크였다. 그래서 나는 걸어갔다. "이번엔 당신을 고이 보내주겠소." "이번엔?" "하지만 다음 번에 당신을 만나면 죽여버리겠소." 다레니안은 창백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난 핸드레 이크의 살의도 느낄 수 있었다. 느끼고 있는 내가 못견딜 정도로, 미쳐 버릴 것 같은 살의였다. 게다가 성취될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까운 살의였 다. 죽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살의와 또다른 감정, 두 가지 감정이 뒤 섞여 머릿속이 그대로 터져버리는 듯했다. "뭐라고…?" "그러니, 살고 싶다면 당신은 날 막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 벽을, 미친 드래곤이라도 돌파할 수 없는 그런 방어벽을 만드시오. 일러 두겠는데, 난 미친 드래곤보다 더 무서워질 수 있소. 적어도 지금의 내 느낌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소." 내 메마른 목소리는 통로의 공기를 울리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의 조각, 던져진 파편 같았다. 하지만 다레니안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갑자기 다레니안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외쳤다. "지금 죽여요!" 난 고개를 내려 내 모든 희망을 꺾어버린,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페어 리퀸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바닥 위에 앉은 다레니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면서 외쳤다. "지금 죽여요! 그렇게도 내가 밉다면, 그렇게도 내가 싫다면, 죽여버려 요! 왜 놔두겠다는 거에요!" 난 눈 앞이 뿌옇게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보 같은 요정의 여왕이여. 내가 당신을 죽인다고? 내가 당신을 미워한 다고? 다레니안은 내 턱을 향해 계속 고함을 질렀다. "왜! 왜 살려두겠다는 거에요! 그리고 다음 번엔 죽여버린다고요? 그냥 지금, 당신의 손에 죽게 해줘요! 당신의 사랑 속에 죽지 못하니, 당신의 증오 속에 죽겠어요. 당신 손으로 날 죽여줘요!" "아니, 지금은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왜죠?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면서요!" "그럴 수 없소. 지금의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소." 갑자기 다레니안이 조용해졌다. 난 조금 더 걸어가다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살기? 어떻게 된 일이지? 난 고개를 내렸고, 순간 무시무 시한 것을 보고 말았다. 다레니안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은 퍼렇게 바뀐 채 그녀의 이에 짓눌려있었다. 다레니안은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 더니 날 겨냥했다.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지만 난 그 동안 아무런 말 도 못했다. 다레니안의 입이 힘들게 열렸다. "페어리들 때문이지요?" 뭐라고?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죽으면, 페어리퀸인 내가 죽으면 페어리들에게 치명적인 해가, 치명적인 해가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요? 그 것 때문이지요?"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다레니안의 몸 때문에 내 손바닥마저도 떨렸다. 난 침을 삼키고나서야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그 말도 맞소. 다레니안. 하지만…" "페어리 따위 집어치워요!" 뭐라고? 그게 당신이 한 말인가? 그게 페어리퀸인 당신의 입에서 나오 는 말인가? 그게 모든 차원을 자신의 마당처럼 누비고다니는, 신의 차원 까지 마음대로 거니는 페어리퀸이 하는 말인가? 다레니안은 미친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이 험하 게 흩날렸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페어리 따위, 집어치워요! 당신 뜻대로 해요! 날 죽이고 싶나요?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요! 그들과 날 단절시키겠어요. 페어리들은 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어요. 이제 안심하나요? 아무런 걱정이 없을 테지 요? 그렇다면 마음놓고 날 죽여요!" 다레니안은 이제 내 손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는 두 팔을 좌우로 벌려 가슴을 펴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턱이 도도하게 올라와 있었 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입술에서 이제 한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줘요." 젖은, 그리고 잔뜩 쉰 목소리. 요정의 여왕이여. 다레니안이여. 당신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군요. "그럴 수 없소." 다레니안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뭐라고 말하려다 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레니안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왜죠? 왜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요? 난 당신의 소망을 파괴했어요. 난 당신을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죽이고 싶도록 밉잖아요!" 내가 왜 당신에게 가장 강한 방어벽을 만들라고 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내가, 혹시라도 내가, 내 손에 당신의 피를 묻이는 일이 생길 것을 두려 워한다는 것을모른단 말인가? "으흑, 흑. 날, 날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게 하더니, 이제 그 손으로 죽여달라는 소망도 들어주지 않는 건가요? 왜 그래요! 왜!" "난 그럴 수 없소. 왜냐하면…" 난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억눌 려졌던 뜨거움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난 더운 김을 뿜어내며 말 했다. "왜냐하면… 난… 내가…" 난 갑자기 입이 굳는 것을 느꼈다. 뭐지? 도대체 뭐지? 이 소름끼치는 느낌은? 살기다! 이런, 젠장! 어디 지? 그 순간 왁자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일스,멈춰! 어억!" "핸드레이-크!" 고함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리고 눈 앞으로 돌진해들어오는 일스 의 모습, 그리고 그 뒤에서 뒤로 넘어지는 라인버그의 모습이 보였다. 라인버그는 하슬러의 손에 부축되면서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일스를 잡아! 붙잡아!" "이 마법쟁이! 오늘이야말로 죽이겠다!" 일스는 검끝을 똑바로 겨냥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기사들은 저마다 당황해하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들이 잡기엔 너무 늦었 다. 난 다레니안을 공중으로 띄워올렸다. 일렁이는 횃불이 눈 앞을 어지 럽게 만들고 있었다. 제기랄! 지금 다레니안을 보내고나면 일스의 검을 막을 시간이 없다. 하지만 고민과 상관없이 내 입은 내 심정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요정의 성으로!" "핸!" 다레니안은 비명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스는 무시 무시한 웃음을 띄었다. 그의 검이 횃불빛을 받아 번뜩이는 모습이 눈 앞 을 가득 채웠다. 이런, 젠장!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여기 있는 이 핸만 사랑해요. 내가 그를 도운 것은… 당신 때문이에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죽여줘요. 왜냐하면… 난… 내가… 난 호숫가의 풀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믿을 수 있겠어? 산속에서 파도소리를 들 을 수 있다니. 손바닥 위에 있던 다레니안은 이제 몸을 절반쯤 일으킨 채로 울고 있었 다. 그리고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제레인트는 아 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그저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웃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늘어트린 채 흐느끼며 말했 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다레니안은 몹시 흐느꼈다. 난 목이 메이는 느낌을 받으며 다레니안을 내려다보았다. 다레니안은 여전히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차라리… 죽여줘요. 당신이…" 난 타들어가는 듯한 입술을 힘들게 열었다. "난 그럴 수 없소. 왜냐하면…"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나 와 다레니안뿐이었다. 다레니안은 흠칫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가냘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낸 다 레니안은 내 얼굴을 똑똑히 들여다보기 위해 애썼다. 입술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다레니안의 눈은 어느새 다시 눈물이 글썽해졌지만 그 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내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헬턴트 마을의 17살짜리 초장이 후보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난 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난… 내가…" 제레인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날 내려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다레니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 올려다보았다. 난 요정의 나라에 무릎을 꿇은 채, 300년 전에 다른 사람이 꺼내려다가 끝 끝내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러나 반드시 했어야 될 말을, 조용한 확신 을 담아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 13. 대마법사의 만가……16. 싸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에 일어난 머리카락이 베어져나간 귀부분을 간지럽혀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레니안은 손바닥이 타오르는 것 같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양초를 들고 있는 것 같은걸. 불 이 꺼진 채 300년 동안 싸늘하게 식었던 아름다운 양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촛농이 내 손바닥 을 태우며 내 가슴도 태우는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마워…" 다레니안은 두 마디를 어렵게 꺼내놓고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뒤로 돈 채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정말 재주가 탁월해. 제레인트는 그대로 새카만 밤하늘로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난 다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레니안은 내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더니 내 엄지손가락을 붙들고 일 어났다. 그녀는 내 엄지손가락을 무슨 기둥처럼 기대어 선 채 울었다. 목이 뜨거웠지만 겨우 말했다. "선량한 마음에서 나온 친절로 받아들여주시겠다면…"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다른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물빛 머릿결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는 흠칫했 지만 곧 움직이지 않고 내 손길을 내버려두었다. 300년 전의 어떤 손길 에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난 그가 지금 여기와서 보더라도 화내지 않게 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릿카락을 쓸어내렸다. 다레니안은 몸을 돌리더니 내 엄지손가락에 등을 기대어 섰다. 난 다른 손을 치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대로 내 엄지손가락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 속에도 핸이 있나 보구나." 대답하지 않았다.다레니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핸은… 모든 것 속에 그를 남기려 했으니, 네 속에도 핸이 남아있겠 지. 아니, 너나 그 프리스트의 말대로라면 그게 원래 인간인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어." 다레니안은 다시 입을 다물고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닦아내더니 배시시 웃었다. "이런, 부끄럽네. 내가 페어리퀸이라고 믿어지지 않지?" "아뇨. 믿습니다. 당신은…" 이 말을 해야 되나? 고민은 깊었지만 결심은 빨랐다. "당신은 핸드레이크의 다레니안입니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조금 움직여 내 얼굴올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바라보는 나마저도 웃고 싶게 만드는 밝은 웃음이 떠올라있었다. "후훗. 핸의 말투. 네 속에 있는 핸이 이제 똑똑히 보여." "뭐라 말해야 될지… 감사합니다." "저 호수를 보렴." 다레니안은 검은 호수를 가리켰다. 난 다레니안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그녀를 손에 올려놓은 채 카알을 지나쳐 호숫가를 향해 걸어 갔다. 철썩거리는 물이 호숫가의 모래를 적시고 있었다. 백사장처럼 보이는 걸.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모래 위로 난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 후 발목이 물에 들어가는 느낌이 왔다. "우습지? 난 저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어. 날 사랑하는 자로부터 날 지 키기 위해. 하지만 사실 상처입고 괴로워한 것은 핸이었어. 그런데 내가 그에게서 도망을 친 거야. 저 호수엔 300년간의 오해가 쌓여있지. 그런 데도 저렇게도 맑게 출렁이는구나." 다레니안은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녀를 손바닥에 올 려놓은 채 수면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다레니안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 했다. "저길 봐. 나와 핸이야." 다레니안이 가리키는 것은 수면에 어리는 두 개의 달이었다. 하나는 셀 레나의 보름달이었고 다른 하나는 루미너스의 초승달이었다. 그 둘은 물 결 위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처럼 보였 다. 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레니안은 수면의 달빛만 바라보며 말했 다. "저 보름달은 나야. 아무 것도 나눠주지 않은 채 가득 차서 더 이상 아 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정의 여왕. 그리고 저 초승달은 핸처럼 보 이는구나. 다 나눠줘 버리고 저런 모습으로, 하지만 곧 다시 부풀어오를 핸이야." "당신은… 글쎄요. 말하긴 우습지만, 절 받아들였습니다." "넌 특별할 거 같아." "글쎄요. 모든 이가 다 특별하겠지요." "그래? 후후. 인간아. 인간으로 서고 인간으로 말하는구나? 너희들은 모두 하나이며 모두가 특별하다는 말이겠지?" 다레니안은 농담을 건네듯 말했고 난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다레니안은 고개를 돌려 우리 동료들을 주욱 둘러보다가 카알에게 시선을 멈췄다. 카알은 정말 대단한 고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 아서는 수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손가락으로 턱을 탁탁 두드 리며 말했다. "저 남자는 너희들을 무척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것 같아. 그리고 내가 그의 소망을 받아들여 너희들을 풀어준다면, 그는 나에게 고마워하겠지. 그리고 난 그의 고마움을 느낄 때 기쁘겠지. 그게 인간식 이지?" "그런 것 같… 그렇습니다." "알았어. 돌아가렴." "아, 저, 그런데 그 프리스트가 날아가버려서, 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말씀을 좀 물어보면 안될까요?" "뭐가 궁금하니?" 다레니안은 살짝 날아올라 다시 내 눈 앞에 섰다. 휴우. 이제 팔 좀 내 리게되었군. 난 슬그머니 팔을 내리며 물었다. "이루릴에게 뭐라고 전하면 좋을지요?" "아, 쓸모없는 추적. 음. 이젠 쓸모없는 추적이 아냐. 나 역시 핸을 만 나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예. 그런데 아까는 왜 쓸모가 없다고 하신 것인지요?" 다레니안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 마치 잠꼬대처럼 들리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핸에게서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울 작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 니?"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난 핸이 그 마법을 만들어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가 과연 그런 마법을 만들어내었다면, 사용할 수 있을까?" "예?" 다레니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난 페어리야." 물론 그렇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지? "차원의 경계는 나에겐 별 의미가 없어. 너희들이 말을 타고 국경을 넘 듯, 난 차원을 넘어다니지. 조금 전 네가… 과거의 나와 핸을 보았던 것 도… 내가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차원으로 도피했기에…" 다레니안은 말꼬리를 흐렸고 난 시선을 조금 돌렸다. 그런데 도대체 차 원이라는 것이 뭐야? 그건 시간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 내 상황 을 보자면 그건 공간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다레니안은 거 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말했다. "만일 그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었다면 난 거기로 갈 수 있어." "가실 수 있다고요?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에?" "그래. 그럴 수 있겠지." "그렇다면, 페어리퀸께서 하시는 말씀은, 페어리퀸께서는 그런 차원은 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까?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를 못보 셨다고요?" "그래. 난 보지 못했어.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핸드레이크 는 모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 수… 난 끝까지 그를 방해하고 있어." 다레니안은 고개를 돌렸다. 모순이라고? 모든 모순에서 자유로와지기 위해 신세계를 만들어내려 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 자체가 모순이라 고? "저,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레니안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차원을 건너다녀. 핸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면, 난 거기에도 갈 수 있어. 그런데 내가 거기에 가게 되면 나라는 존재 때문에 이 세계와 그 세계가 연결되고, 결국 새로운 세계가 아니게되지." "예… 에?" 다레니안은 싱긋 웃었다. "너희들이 알아듣게 말하는 것은 어렵구나. 그렇지. 너희 나라 바이서 스는 국왕이 우두머리가 되지?" "예? 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스 공국, 거기는?" "일스 대공이 우두머리가 됩니다만." "일스는 루트에리노에게 공을 인정받아 그렇게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게 새로운 나라일까? 육로로 이어져 있고 누구든지 오 갈 수 있잖아. 너희들이 말하는 나라라는 것은, 음. 그렇지. 너희들끼리 정해놓은 이야기일 뿐이잖니. 결국 광대무변한 땅에 금을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지. 일스 공국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선을 없애버려도, 일스의 세금이 바이서스의 국왕에게로 간다는 것 외에는 달 라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겠니?" "아. 알겠습니다. 금을 그어놓은, 그러니까 국경선을 그어놓았을 뿐 똑 같은 대륙에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상이 다른 것은 아니라는?" "그래. 그런데 핸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야. 그런데 난 거기에 갈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군요. 대충 알 듯합니다." 대충 알 듯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모르겠다는 말이다. 으윽. 이 이야 기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는 토론을 좀 시켜보아 야겠는데. "그럼 페어리퀸께서는 핸드레이크가 절대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돼." "하지만 이루릴은 현명한 엘프입니다. 저야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 는 일이긴 하지만, 이루릴은 페어리퀸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모순을 생각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이루릴은 확신을 가지고 추적하 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난 모르겠어. 핸이 그런 모순마저도 뛰어넘고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 들어내었는지, 그리고 만들어내고도 아직 사용하질 않아서 내가 못 본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난 존재 자체가 끝끝내 핸을 방해하게 된다는 죄 의식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다른 이유에서도 그것을 반대 해." "왜입니까?" 다레니안은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그녀는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난 엘프들이 다 이 땅을 떠나버리는 것이 싫어."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다레니안의 말은 그대로 내 마음이다. 왜, 무엇 때문에 저 아름다운 종족이 이 땅을 떠나야 된단 말인가. 지 평선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너머에 모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평선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너머에 미지가 있기 때문이고. 어쨌든 무 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 너머에 아무 것도 없다면 그 건 아름다울 까닭이 없다. 이 대륙이 아름다운 이유는, 뭐 여러 가지 이 유가 있겠지만 엘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상당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왜 그들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야 된단 말인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겠지. 이루릴은 그들 스스로가 견딜 수 없 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이 땅에 남아 불행하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 이나 불행일까. 다른 모든 종족들은, 어쨌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핸드레이크가 틀린 것일까? 불행이든 부조리든, 우리는 살아가고 있어. 아무튼 현재로선 그렇다. 난 핸드레이크만큼의 위대한 지혜를 가진 현자는 아니라서 미래가 어떻 게 될지는 모르겠다. 나도 범부인가 보지. 젠장. "알겠습니다. 이루릴에게 그대로 전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아, 그리고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리치몬드가 핸드레이크입니까?"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너도 조금 전에 느끼지 않았니?" 느꼈다고? 아, 그래. 난 조금 전 다레니안을 손에 든 핸드레이크였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레니안은 300년 동안 핸드 레이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오해는 오해로 남았던 것이지. "알겠습니다. 그 대답은 이루릴이 스스로 구해야겠군요." "리치몬드라는 자가 핸드레이크라고 주장했었니?" "아, 그렇진 않습니다. 단지 이루릴이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다레니안은 대답하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고, 곧 어두운 밤하늘에서 멋들어지게 날아오는 제레인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푸핫하하!" 그는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고 왼팔은 옆으로 쭉 뻗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다리는 뒤로 길게 뻗고 왼다리는 살짝 구부려 왼발로 오른쪽 무릎 안쪽을 받친 자세로 날아오고 있었다. 완전히 익숙해졌구나! 제레인트는 그야말로 유성처럼 밤하늘을 날아오고 있었다. 다시 우리 세계로 돌아가 면 제레인트는 아쉬워서 어떻게 할까? 하하하. 제레인트는 우리 머리 위까지 우아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더니 공중제 비를 틀고는 그대로 두 팔을 좌우로 펼친 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 다. "멋집니다!"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는데도 제레인트는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황급히 다레니안에게 말했다. "저, 우리들을 빨라 돌려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 왜 그래요, 제레인트?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할슈타일 후작 일행이 쫓아오고 있는 모습을 봤다. 거리가 가까워!" "이런!" 아차, 까먹었다. 중부대로에 그 횃불! 이 밤에 움직이고 있었지. 이런, 그렇다면 후작 일행이구나! 다레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선선히 허락했다. "알겠어.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구나. 좋은 만남, 가슴 깊이 간직할 께. 너희들을 페어리의 친구로 받아들이겠어. 이 호수는 너희들에게 언 제든지 열려있을 거야. 언제라도 이 호수를 다시 찾아올 땐 나에게 들려 줘. 그리고 너희들이 도움이 필요할 땐 페어리들이 도와줄 거야." "아,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나와 제레인트는 나란히 다레니안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다레니 안은 가만히 고민하는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후치. 네 덕분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취미가 생긴 것 같 애.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니?" "예? 아. 그렇습니다." "내가 도와줄까?" "예? 그래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니? 알았어.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니?" ================================================================== 13. 대마법사의 만가……17. 샌슨의 눈을 가린 다음, 난 기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게?" 샌슨은 눈이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달인다운 정확하고 절도있는 동작 으로 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우물거리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칠 기분 아냐, 후치. 지금 후치들이 어떻게… 으악!" 샌슨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네리아는 벌떡 일어나다가 냄비를 걷어참 으로써 엑셀핸드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들었다. 엑셀핸드는 분 명히 30초 정도는 다시 나타난 나와 제레인트보다는 엎어진 냄비에 더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탄성을 질렀지만 그 탄성은 저 멀리서 들려온 카알의 비명소리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카알? 괜찮아요?" 길시언의 황당한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알은 다시 일어나 역시 무 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저러다가 또 넘어지실라. 몇 번 휘청거렸지만 다 행히도 카알은 제대로 달려와서는 내 얼굴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어댈 수 있었다. "네드발군! 네드발군! 정말 네드발군 맞는가?" 난 카알의 손아귀에 의해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외쳤다.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흔들면 우리 아버지께서도 내가 후치라는 것 못알아보게 될 거에요… 어지러워요!" "맞군! 네드발군이야! 다행이야! 오, 다레니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 다!" 카알은 날 부둥켜안고는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다음 카알은 네리아에 게 날 빼앗겼고 네리아는 카알보다 더 열렬한 동작으로 빙빙 돌았다. 제 레인트 역시 비슷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 10 분 동안은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녀야했다. 말들까지도 우리들 끌어안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시간이 지나가고, 난 간신히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었다. 아,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레인트는 내 설명의 상당 부분에 걸 쳐 보충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이고 그런 필요성을 느낄 때마다 곧잘 끼어들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들도 상당 부분에 걸쳐 다시 설명하 게 하거나 이야기를 앞으로 돌아가게 만들어대었다. 제레인트가 하늘을 날아다니던 광경에 대한 설명은 엑셀핸드와 레니로 하여금 눈이 휘둥그 레지게 만들었다. 차원이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는 카알과 아프나이델만 이 고개를 가로저어며 몇 마디 질문을 했을 뿐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 외에 는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와 다 레니안의 이야기는 네리아와 레니의 귓볼을 발갛게 만들었고 그녀들의 입술을 조금씩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제레인트의 이야기에 서는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후작이 오고 있단 말이군."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긁적거렸다. 길시언은 이를 드러내며 나 에게 물어보았다. "페어리퀸께 이곳에서 싸움을 벌여도 좋냐고 물어보았나?" "윽.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았어요. 우리가 달아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았죠." "달아나? 흐음. 제레인트씨.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길시언은 이미 상대를 '적군'으로 간주한 모양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아군'이 되어버리는 모양이고. 흐흠. 제레인트는 난처한 표 정으로 말했다. "횃불의 숫자는 약 10여 개입니다만, 모두 횃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 이지는 않던걸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보았습니다. 아, 말씀드렸다시피 요정의 나라에서는 바로 옆에까지 다가가도 현실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전 옆에까지 다가가 관찰해볼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더군 요." 바로 옆에까지 다가가서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 카알과 아프나이델을 제 외한 다른 일행들은 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 도저히 이해를 못하 는 모양이다. 제레인트는 그가 후작의 일행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가 어 떤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무슨 농담을 걸었느냐에 대해 장황하 게 말하려 했지만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일행의 제지에 의해 간신히 본 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우두머리는, 에, 그러니까 일행 중간쯤에서 말을 타고 호위가 따르며, 복장이 좀 화려한 것으로 보아 우두머리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 남자는 날카로운 얼굴에 드문드문 새치가 섞인 짙은 갈색 머리더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슈타일 후작이요. 갈색보다는 밤색에 가깝지. 역시 그가 직접 오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군요. 어쩐지 섬짓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부 져보이는 전사들이 모두 말을 타고 있었는데 37명이더군요. 모두들 중무 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장들이 굉장하던 걸요. 이루릴양의 무장보다 더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겠더군요." "이상하군… 후작의 사병은 모두 30명 아니었던가? 어제 낮에도 상당수 가 부상을 입었을 텐데 어떻게 37명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 있지?" 길시언의 말에 운차이가 피식 웃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 같으면 30 명 이상 되는 사병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고다니진 않겠 어." "그렇군! 비밀리에 키워둔 것이군! 이 놈이!" 길시언은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비밀리에 키워둘 작정을 했다면, 째째하게 10명, 20명을 키우지 는 않았을 테지요. 못돼도 100 명은 넘게 준비했겠지요. 아, 1,000 단위 까지 올라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정도의 인원을 들키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까. 후작에게 군권에 관련된 권한이 있습니까?" "아니. 군무에 관련된 부분은 없습니다. 드래곤 라자의 가문이니까요." "그렇겠군요. 으음." 그 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으로…" "또 다른 사람? 더 있다는 말입니까?" "예. 두 사람이 더 있더군요. 그 둘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더군요. 넥 슨 휴리첼과 쟈크였습니다." "이런… 젠장! 잡혔군!"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 사람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더군요." "크게 다쳤어요?" 조용히 듣고 있던 네리아가 갑자기 질문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옷이나 겉모습은 엉망이었지만 움직임을 보아하니 그렇게 다친 것 같 지는 않았습니다. 다그쳐대는 후작의 사병들에게 반항할 정도더군요. 그 넥슨은 재가 프리스트라면서요? 아마 치료를 했던 모양입니다." 네리아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둘의 몸에 묻은 피를 보아하니 꽤 많은 인원을 쓰러트린 모 양입니다. 후작의 일행이 37 명이었지만 말들의 숫자는 훨씬 더 되던 걸 요. 뒤를 따라오는 수레에 실린 짐도 꽤 많았습니다." 카알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된 것이군요. 37 명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우리들과의 교전, 그리고 어제 넥슨과 쟈크와 교전하면서 많 은 인원이 쓰러져서 그 숫자가 되었다, 이 말입니까?" "예.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 둘은 모두 단단히 포박당해 있었고 무장과 OPG는 모두 빼앗긴 모양입니다. 그들의 OPG 중 하나는 후작이 끼고 있었 는데 다른 하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흐음. 꽤 세밀하게 관찰하셨군요. 훌륭하십니다." "하하, 뭘요. 바로 옆에 다가가도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쉬운 일이었습 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길시언을 보면서 말했다. "예. 아무래도 교전할 필요는 없겠군요?" "없겠습니다. 젠장." "그럼 준비를 합시다." 서둘러 저녁식사를 마치고나서 뒷정리를 끝내었다. 뒤집혀진 마차를 다 시 세울 수는 있었지만 바퀴축이 크게 부러져 있었고 바퀴도 두 개 박살 이 나서 타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을 풀어내어 짐을 실은 다음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오늘 밤에 달려버리면 내일 낮에 말들 은 지쳐버릴 테니까. 마차에서 짐을 꺼내어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썬더라이더의 갈기 를 쓸어내리고 있는 길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길시언은 애정이 가득 담 긴 눈으로 말없이 썬더라이더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썬더라이더 역시 커 다란 목을 움직여 길시언의 머리에 비벼대었다. 길시언의 밝은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운차이가 다가왔다. "이봐, 후치." "예?" 운차이는 별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가 깎고 있던 나무조각이었는데 이제는 완성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웅크리고 있 는 말의 모습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는 의아한 눈으로 운차이를 올려 다보자 운차이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낙타를 깎아볼까 했는데, 맘이 바뀌었어." 난 무슨 말인지 몰라서 손에 그 말 조각을 든 채 운차이를 올려다보았 다. 운차이는 헛기침을 좀 하더니 말했다. "제미니를 깎아 보았는데, 별로 안비슷하군." 제미니? 난 손에 나뭇조각을 든 채 운차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갑 자기 고개를 돌려 썬더라이더를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여전히 그 옆에 선 채 썬더라이더를 애무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썬더라 이더가 제미니로, 그리고 길시언의 모습이 나로 보였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젖어있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며, 난 운차이에게 감 사했다. "고마워요, 운차이. 잘 간직할게요." 운차이는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돌리려다가 불쑥 말했다. "돌아와서 기쁘다. 계속 지붕 위에 앉아서 말만 바라보고 있는 짓, 이 젠 그만해." 아… 그거였군. 내가 계속 마차 지붕 위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 군.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운차이는 그 날카로운 눈으로 정확하게 알아보았던 것인가. 섬짓할 정도로 날카로운 저 눈으로? 쳇. 나도 모르 는 속마음이 들키니 이거 제법, 아니, 꽤나 부끄러운걸. 난 멋적게 한 마디 했다. "어차피 이젠 마차도 없는 걸요." 운차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짐더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난 그 뒷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카알의 모습이 보였다. 카알이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난 재빨리 손을 들어올리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했다. "부탁인데,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아시겠지요?" "아, 그래. 네드발군. 그런데 그동안 정말 가슴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까요!" "음. 그래. 그런데 그 조각품은…" "카아아알!" 카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난 화난 동작으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 조각을 배낭 속에 던져넣었다. 깨지면 큰일이잖아? 카알은 웃음을 멈추 더니 길시언과 썬더라이더를 보면서 다른 말을 했다. "썬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렸으니, 그건 리치몬드가 죽었다는 말인가?" "아, 그렇겠네요?" 무심결에 카알의 말에 대답하다가 순간 섬뜩한 기분을느꼈다. 카알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 얼굴에는 별 표정이 떠올라있지를 않았다. "이루릴이?" "그럴 수도 있겠지, 네드발군. 아니면 지골레이드가 리치몬드를 처치했 을 수도 있고." "흐음." 쾅! 쾅! 하는 소리가 났으면 제격일 텐데. 아프나이델이 마법을 걸어버 린 공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이렇게까지 소리가 들 리지 않도록 해야 되나? "소리를 들려줄 필요는 없지. 우리 위치를 알려주게 되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갑자기 이 꼴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것이 좋지 않겠 어? 하하하." 좀 더 고상한 이유와 좀 덜 고상한 이유가 손을 잡은 모양이다. 어쨌든 카알과 제레인트는 그런 소리들을 하면서 우리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난 다시 한 번 엑셀핸드의 도끼를 힘차게 당겼다가 나무에 박아넣었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울려퍼지지 않지만 도끼에서 전해져오는 충격은 확실히 느껴진다. 음. 기이한 기분이야. "넘어간다!" "와, 와, 와! 레니! 피해라!" "난 여기 있어요, 네리아 언니."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에서 뒷짐을 진 채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던 네리 아는 호들갑을 떨면서 쓰러지는 나무를 피했다. 재미있나? 곧 나는 다른 나무로 다가갔고, 네리아는 그 나무 앞에서 얼씬거리기 시작했다. 네리 아는 나무가 쓰러지려고 하자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해내었 고 나무가 쓰러지는 순간 날렵하게 피했다. 그리곤 쓰러진 나무 옆에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쉬고는, 다시 날 졸래졸래 따라오는 것이었 다. "신경 쓰이니까 그러지 말아요!" "재밌는데." 말을 말자. 어쨌든 잠시 후, 우리가 타고오던 마차와 10 여개의 통나무 가 어우러져 호숫가의 통행로는 완전 봉쇄되게 되었다. 통나무를 다 쌓 아올리고나자 아프나이델도 마차에서 걸어나왔다. "준비 끝났습니다." 아프나이델은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작업도 이제 슬슬 끝나가는군. "이만하면 됐어요?" 카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난 도끼를 어깨에 걸어매 고 통나무 무더기를 우회해서 내려왔다. 흐음. OPG를 가진 일행이 아니 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통나무를 가지고 길을 막아버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한편에선 샌슨과 길시언이 포도주통을 가운데 놓고 앉아서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길시언은 갑자기 솟구치 는 흥취를 감당하지 못했는지 술잔을 든 손을 밤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올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13. 대마법사의 만가……18. 흰 얼굴의 가인이 밤산책을 나섰지. 별의 노래에 홀렸다가 눈을 돌리니 뒤를 쫓는 남자가 가인을 부르네. 부끄러워 몸 돌리다 손수건을 흘렸네. 떨어진 손수건 물결에 두둥실 이슬 머금은 햇살이 무서워 가인은 서쪽으로 황급히 달려가고 뒤쫓는 사랑, 단검을 흘렸지. 손수건과 단검만 호수에 두둥실 훌륭하군, 훌륭해. 하늘의 두 개의 달과 호수의 두 개의 달을 가지고 아주 멋진 연상을 해내었군. 좀 다듬어줄 필요가 많긴 하지만 연상 자체 는 훌륭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마셔대면 나무에 뿌릴 거 다 없어지겠어요." 난 말을 꺼내놓고는 허락이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매정하게 술통을 들고와버렸고 길시언의 노래에 박수를 치던 샌슨은 울상이 되어버렸다. 난 눈 딱 감고 나뭇단에 포도주를 부었다. 아이고, 그런데 아깝기는 하 다, 이거. 그런데 드워프의 노커는 어딜 갔지? "엑셀핸드는?" 놔두고 떠나겠다는 엄포가 동원되고나서야 엑셀핸드가 못마땅한 얼굴로 마차에서 나왔다. 아프나이델이 불안한 얼굴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지만 엑셀핸드는 그저 킥킥 웃을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잔을 비우 고 입술을 닦던 샌슨이 말했다. "할슈타일 일행이 불쌍하군." 말은 저렇게 하지만 동정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 으니 말과 표정이 안맞잖아. 킥킥 웃고 있던 엑셀핸드는 아쉬운 표정으 로 마차를 돌아보며 말했다. "허엇, 참!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근사한 작업을 할 수 있을 텐 데." "아, 충분합니다. 더 수고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 쩝. 음? 이게 무슨 냄새지?" 잠시 후 남은 술을 몽땅 통나무에 부어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별로 어 려울 것도 없는 내용을 대단히 박력있게 항의해대던 엑셀핸드가 마지막 으로 입을 다물고나자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호숫가를 걸어가기 시 작했다. 샌슨과 길시언의 경우엔 이왕 버릴 술 입가심이나 하자며 마신 술이 과해 좀 휘청거리며 걸었다. "흠, 흐흠, 루루루." 샌슨의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으며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과 호수에서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 풀잎 사이사이로 싱그러운 밤 내음이 풍겨나오는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호숫가를 따라 한참 돌아가다 가 언제 호수를 떠났는지도 모르게 산등성이로 올라오게 되었다. 밤하늘로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은 검은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우리 머 리 위로 펼쳐졌다. 셀레나의 보름달빛이 있는데다가 중부대로의 길이기 때문에 밤길을 걷는 것은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일행들은 모두 조용 한 숨소리만 내면서 산길을 거슬러올라갔다. 갑자기 운차이가 말했다. "저기." 고개를 돌려보니 호수는 이제 발 아래로 꽤 멀리까지 보였고 옆에서 튀 어나온 봉우리들에 의해 그 모습이 많이 가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메드라인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는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길시언은 신 음을 흘리며 말했다. "꽤나 빨리 쫓아오는데. 훈련이라면 질색… 훈련이 잘 된 전사들인 모 양이군." 카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만한 인원들이 레인저들의 눈에 들키지 않기는 어려웠을 텐 데요." "후작이 있으니, 어떻게든 둘러댈 수는 있었겠지요." "그렇군요. 자, 레니양.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쉬기 좋은 좋 은 위치기 있습니다. 거기까지 올라가서 쉬도록 하지요." "아, 하악, 하악. 예." 레니의 숨가쁜 대답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다시 묵묵히 올라갔다. 올 라가면서 간혹 고개를 돌려 바라볼 때마다 횃불들은 재미있을 정도로 죽 죽 다가오고 있었다. 상당히 빠른데. 밤중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시 무시할 정도야. 말들의 터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조용한 일행들의 발자국 소리. 산 속의 밤은 모든 소리를 선명하게 울리게 하고 있었다. 내 눈길을 잡 아끄는 것은 썬더라이더였다. 썬더라이더의 시커먼 몸은 조금도 반사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의 갈기는 달빛을 받아 환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레니의 숨소리가 더욱 거세게 바뀌었을 무렵, 길시언이 일행들을 멈추게 했다. "여기서 쉬도록 합시다. 새벽이 올 때까진 잠시 눈을 붙여두도록 하지 요." 우리가 멈춘 곳은 레브네인 호수에서 한 3,000 큐빗 정도 떨어진 곳이 었다. 산 속에서 밤길을 걸은 것치곤 우리들도 꽤 빨리 걸어왔는데. 길 에서 약간 벗어난 공터에 자리를 잡고 말을 묶어둔 다음,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모두 하나같이 호수를 내려다보기 좋은 위 치에 자리를 잡았다. 하하하. 난 산의 사면에서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가 앉았다. 바 위 위에 자리를 잡자마자 뒤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나도 올려줘." 레니의 목소리였다. 난 손을 내려 레니를 붙잡아올렸다. 레니 는 바위 위에 앉자 내게 어깨를 기댄 채 저 아래의 호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행들도 모두 바위나 나무에 기대어앉아서, 혹은 네 리아 같은 경우에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나와 레니가 앉아있는 곳은 산의 사면에서 튀어나온 바위라 허공에 앉 아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산들은 우리 뒤로 불쑥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별들 사이에 앉아있는 것 같은데? 가을보다는 겨 울에 가까운 날씨에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허공의 자유 로운 악사는 풀잎과 나뭇가지를 악기 삼아 멋진 야상곡을 만들어내고 있 었다. 우서석 우서석 위이이잉. 갑자기 어깨가 눌리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레니가 작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졸리지 않아?" 레니는 옷소매로 눈을 비비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냠, 쩝. 그래도 보고 싶은걸. 잠 못잘 거야." 레브네인 호수의 표면은 시커먼 주위의 산들 사이에서 유달리 반짝거렸 다. 멀리 호수 반대편으로 나란히 내려오던 횃불은 호숫가로 내려오다가 잠시 멈췄다. 잠시 후 횃불은 모두 일렬로 늘어섰다. "뭐하는 걸까?" "음. 호숫가로 들어오기 전에 페어리퀸에게 허락을 구하는 거야. 눈 크 게 뜨고 봐." 잠시 후 호수 가운데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아 거울처 럼 반짝이던 호수가 갑자기 거대한 꿈틀거림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윽고 호수 가운데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져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산중의 호수에서 검은 밤하늘을 향해 쏘아져올라가는 붉은 광선 은 오금이 저리도록 환상적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횃불이 갑자 기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난 그들의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었 다. 정중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의 표시가 나왔으니 꽤나 당황 하고 있겠지? 하하하.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와아… 저건?" "통과할 수 없다는 거지. 다레니안께서 우릴 도와주시는 거야." "음. 그럼 아까 낮에 우리는?" "우리? 우리야 사고 때문에 아무런 허락을 구하지도 못한 채 마구 들어 갔으니까 거부의 붉은 색이 나온 거야." 횃불들은 심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붉은 광선은 아래 부분부 터 희미해지면서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버렸고 호수는 다시 검게 변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무슨 말들을 나누고 있을까? "어떻게 할까요?" "아무리 후작이라도 다레니안의 의지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 지만 한 번 시도해볼 수야 있겠지요." 길시언의 질문에 카알의 대답이 들려왔다. 흠. 그렇긴 하지. 머뭇거리고 있던 횃불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다 레니안의 의지의 강도를 시험해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횃불이 다시 호 수 옆의 길로 들어서자, 호수가 갑자기 터지듯 요동쳤다. 퍼퍼퍼퍼펑! 호수에서는 낮에 본 것과 같은 수백 가닥의 붉은 광선이 쏟아져 올라갔 다. 조금 전 고요하게 올라간 한 가닥의 붉은 광선이 신비로웠다면 이것 은 공포스러웠다. 호수 위에 수백 개의 파문이 그려졌고 물보라가 솟구 쳐 올랐다. 호수가 뒤집어지는 굉음은 우리들이 서있는 장소까지 들려왔 다. 곧 호숫가에 있던 숲에서 어린 소녀의 비명 소리 같은 소리들이 들려오 기 시작했다. 꺅꺅꺅! 폭발음과 불빛에 놀란 새들이 잠에서 깨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검은 그림자들이 무수히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 치 숲이 통째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푸드드득! 츠핏, 츠핏, 츠핏!솟아오른 붉은 광선들은 그대로 호수의 수면에 비쳐 물빛을 기괴하게 변화시켰다. 수면 전체에 붉은 선이 수평으로 마구 그 어지는 모습 때문에 호수는 달아오른 석쇠처럼 보였다. 그리고 주위의 나무들이 붉게 비쳐서 가을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와우우우!" 오른쪽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 위에선 커다란 부엉이가 울듯이 네리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호숫가의 길로 들어서려던 횃불들은 황급히 뒤 로 물러났다. 하하하. 횃불들이 굉장한 속도로 멀어지자 붉은 광선은 다 시 하나 둘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횃불들이 필요할 듯한 거리보다 훨씬 더 많이 물러났을 때 붉은 광선은 모두 사라졌다. 횃불은 호수에서 충분 히 떨어진 거리에 모여서더니 다시 불안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후작은 지금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까? 정중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레니안이 허락하지 않으니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금 부하 들과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나무 위에서 네리아가 킬킬거리는 웃음 소리 외에는 모두들 조용했다. 모두들 후작의 다음 행동을 궁금하게 여기면서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레니는 내 팔을 부둥켜안고는 볼을 내 어깨에 비비고 있었 다. 꽤나 졸린 모양이야. 꽤 긴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별로 많은 시간이 지나진 않았 을 때, 횃불들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호숫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 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는 간신히 확인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뭘까? 카알은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 부탁해보려는 건가." 다른 횃불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후작의 부하들은 짓눌리는 듯한 공포와 명백한 충성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들은 떨면서 후작의 등을 바라보고있을까? 따로 떨어져나 온 횃불은 이제 호수의 물결이 주위의 모래를 적시는 부분까지 와 있었 다. 그 횃불은 그곳에서 멈추어섰다. 운차이는 낮은 목소리로 모두가 짐 작하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밤색 머릿결에 새치머리, OPG. 저건 후작이군." "히에엑? 저게 보여요?" "횃불을 들고 있으니까." 아니, 어둠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말은 거리를 말한 거라고. 원참. 이 거 리에선 횃불들도 가물거리는 별빛처럼 보일 지경인데 말이야. 다른 사람 들이 모두 탄성을 올리고나서 다시 잠잠해졌을 때까지 후작은 여전히 호 숫가에 서있었다. 뭔가 꽤나 기다란 말을 하는 모양이지? 후작은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갑자기 등 뒤에 있던 횃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횃불들은 이제 다시 열을 맞추어서 두번째로 호숫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오던 속도나 조금 전의 속도에 비교해볼 때는 엄청나게 느린 속도였다.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 실한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호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호수에서는 아무 런 움직임이 없었다. 거세게 움직이던 파도도 잠들었고 날아오르던 새들 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금자리로 날아들었다. 고요뿐. 다레니안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호숫가를 따라 걸어오는 횃불들만이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레니가 하품에 섞어 말했다. "아함. 다레니안께서… 가만히 계시네?" "그래. 거부도 없지만 허락도 없어. 후작 부하들은 꽤나 마음이 무거울 걸." "흐음. 쩝. 그도 그렇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횃불은 다시 멈추어섰다. 횃불들의 움직임이 조 금 활발해지는 것을 보면서 바위 아래에 기대어 서있던 엑셀핸드가 킥킥 거렸다. "자아, 어서 와랏!" 음. 원초적이군. 레니는이제 똑바로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녀는 자꾸 바위 끄트머리로 나가려 해서 주의를 좀 주어야 했다. 횃불이 멈춰선 것은 우리들이 마차를 세워둔 장소였다. 아마도 길이 막 힌 것을 보면서 화를 내고 있겠지? 일행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 다렸다. "퍼퍼펑!" 폭음, 호수에 거센 파도가 일어날 정도의 폭음이 들려왔다. 맙소사! 도 대체 무슨 조치를 해놓았길래? 아무리 고요한 산 속이라지만 어떻게 이 렇게 떨어진 위치까지 폭음이 들려오는 것이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치밀어오른 불꽃은 이제 수십 큐빗 높이로 뿜어올라 자욱한 연기 를 날렸다. 솟아오른 검은 연기에 불기운이 어려 밤하늘에 기괴한 무늬 를 만들어내었다. 연기와 불티가 멋들어지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호숫가의 새들에게는 참으로 약오르는 상황이겠군. 새들은 요란한 불평 을 퍼부어대면서 다시 날아올랐다. 꺅꺅꺅꺅! 호수 수면에도 붉은 불기둥의 모습이 길게 어리었다. 아프나이델의 얼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왜 저렇게 폭발력이 센 거지? 엑셀핸드!" "아, 드워프의 술책이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니오? 저런 무시무시한 폭발이…" 엑셀핸드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만 거창하게 나게 한 거야. 특별히 다치는 일은 없을걸? 뭐, 설령 불이 붙었다 해도 바로 옆이 물이잖아. 괜찮아. 염려없어." "이런, 정말 안전한 겁니까?" 엑셀핸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상당히 젠 채하는 목소리로 말했 다. "살아있는 자들 중 누가 죽음 앞에 안전할 수 있지? 음핫하하하!" "이이이런…" 마차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횃불은 이리저리 황급하게 움직이고 있었으 며 뭔가가 물로 뛰어드는 소리도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풍덩, 풍덩. 말 들의 비명소리와 사람의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보 자, 내가 쌓아둔 통나무가 못되도 10 개는 넘을 텐데. 그 많은 통나무들 과 마차에 불이 붙어 호수 옆에는 불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쿠르르릉! 갑자기 산 전체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구잡이로 쌓아놓았던 통 나무들이 불타오르면서 무너지고 구르는 모양이다. "와와와와와!" 네리아의 기괴한 고함소리와 함께 이번엔 호수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다레니안, 감사합니다! 횃불들이 놀라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호수 에서는 광선 대신 물기둥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솟아오른 물기둥들 은 불길에 붉게 물들어 뭐라 말할 수 없이 기괴한 모양이 되었다. 그 물 기둥들은 허공에서 자유롭게 꺾어지더니 그대로 후작 일행들을 향해 화 살처럼 쏘아져갔다. 운차이가 상당히 싸늘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제레인트는 안달복달하면 서 질문했다. "어떻습니까? 어떻게 되고 있는데요?" 음. 그래도 프리스트라는 사람이 저렇게 저열한 관심을 보이시다니. 운 차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불에 그을리고, 폭발에 놀라 넘어지고, 날아오는 물기둥에 맞아 나가 떨어지고 있지. 방패로 막으려는 멍청한 녀석도 보이는군. 그 방패와 함 께 날아가버리는데?" 운차이는 차분히 설명하다가 일행들이 모두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행들을 돌아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 다. "타인의 재난은 역시 즐거운 것이군." 일행들은 헛기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횃불들은 호수 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거의 메드라인 고개를 도로 넘어가버릴 듯이 달려 가고 있었다. 불길은 하염없이 타오르고 있었고 다레니안은 마지막으로 깔끔한 뒷처리를 보여주었다. 고오오오오! "무슨 소리야?" "파도다!" 호수 반대편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수 전체가 뭍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싶은 굉장한 파도. 파도는 그대로 달아나고 있던 횃불들을 뒤쫓아갔다. 오, 페어리퀸, 저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 다가가는 파도에 비해볼 때 달아나는 횃불은 너무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거침없이 달려간 파도는 호숫가를 강타했다. 쿠왕쾅 쾅! 그것은 마치 맹수가 아랫턱을 휘둘러 희생물의 몸에서 고기를 떼어 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파도는 땅을 후려쳤고, 후작 일행들의 뒷부분에 있던 불행한 몇몇 병사들과 함께 땅의 일부분을 떼어가버렸다. 온산이 진동하는 굉장한 소리가 한참 동안 울렸다. 이제 메드라인 고개의 중턱까지 도망쳐버린 횃불들은 여기저기로 뛰어 다니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그 모습을 보면서 결코 친절하 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 다시 우리 뒤를 쫓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군요." 나무 위에 앉아있던 네리아는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대로 가지를 잡고 빙글 돌더니 아래로 내려섰다. 카알은 운차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의 피해상황은 어떻습니까?" "1/3 정도는 불에 그을렸고, 1/3 정도는 물에 맞았군요. 그리고 그 사 람들 중 상당수가 물에 쓸려가 버렸고. 지금 나머지 일행들이 물에 빠진 자들을 구하고 있소. 부상자는 꽤 보이지만 사상자로 보이는 자는 없소. 물에 빠진 자들은 실종자라고 해야 될지." "흐음. 익사자들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좀 모진 말 같습니다만 그건 페어리퀸께서 결정할 일인 것 같군요. 두 번이나 거부 표시를 했는데도 들어왔으니 다레니안께서 적절한 응징을 하실 겁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운차이씨. 넥슨과 쟈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카알의 질문에 운차이는 다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 참 동안 굳어버린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멍청하긴. 못달아났군. 잡혀들 있소." 카알은 다행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럼 안전하다는 말이군요. 자! 그럼 여러분. 이만 잠자리에들 드 십시다. 후작 일행에게도 좋은 밤이 되길 바라긴 어렵겠지만." 곳곳에 서서 아래의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웅성거리며 잠자리로 몰려들었다. 난 고개를 돌려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 우리도 이제 내려…가려면 먼저 잠에서 깨어야겠네?" 음. 항구의 소녀는 저런 폭음과 불꽃, 그리고 범람하는 호수의 굉음 속 에서도 얼마든지 잠들 수 있나 보군. ================================================================== 13. 대마법사의 만가……19. 그런데 어떻게 한다? 이렇게 피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 깨우려니 안스럽 군. 그런데 갑자기 귓가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야." 안 자고 있었나? 잠꼬대인가? 둘 중 어느 것인지 알기 위해서라면 간단 한 방법이 있지. "왜 그래?" "별이 참 곱지?" "윽. 별은 원래 참 고운 거야. 레니의 눈이 보고 있어서 더 예쁘긴 하 겠지만,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거지?" "…나, 말을 잘 못꺼내겠는데. 음. 저게 우리 아버지니?" "…그렇다고 생각해.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레니는 머리를 더 세게 누르며 물어왔다. 헤. 그런다고 내 어깨가 아프 겠니. "확실한 거야, 아니야?" "내 생각이지만 그건 아무도 확인할 수 없어. 너도 알다시피 넌 아주 어릴 때 아버지와 헤어진 거야. 그리고 후작은 네 얼굴도 보지 못했고. 아, 제레인트에게 물어보는 것이 차라리 낫겠는데." "신께 개인적인 용무를 물어보고 싶진 않아." "그래? 어, 신께서는 우리들의 개인사에 관심이 많으실 텐데?" "다른 방법은 없어?" "다른 방법? 글쎄. 아, 어떤 여행자가 널 델하파의 항구로 데려갔다고 그랬지? 해답이 있다면 그 여행자가 가지고 있겠지. 그 외에 다른 사람 은 없어."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아, 네리아가 들려줬어." "그래?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줬는데?" 레니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질 러놓은 불길은 거대한 통나무를 송두리째 태우며 기세좋게 춤추고 있었 다. 바람이 차다… 왠지 신경쓰이는 바람이다. 레니는 그 바람에 자신의 대 답을 실어보냈다. "다 들려줬어. 전부 다." "그래?" "이상해. 난." "뭐가?" 레니는 여전히 머리를 내 어깨에 얹은 채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저 분은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인 거지? 그럼 난 지금 우리 아버 지를 골탕먹이는 일행에 속해있고, 그리고 여기 전망 좋은 곳에서 우리 아버지가 골탕먹는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어. 이 정도면 기분이 이상해도 괜찮은 거 아냐?" 윽. 그런 식으론 생각해보지 못했는걸. 맞는 말인데. "미안해." "뭐가? 후치가 미안할 것은 아무 것도 없잖아." "그래도 미안하고 싶어지는걸." 다레니안. 죄송합니다. 난 뻔뻔스러웠어요. 우리 인간도 결국 다른 사 람 속을 그렇게 잘 알 수는 없는 것인가 보지요. 그러니까 예의범절이라 는 잘 조율된 형식도 있는 것이고. 내가 느꼈다고 생각한 핸드레이크도 전부 엉터리일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어떻게 핸드레이크가 될 수 있을 까. "기분이 나쁜 거니?" "모르겠어. 난 이렇게 생각해. 아빠는 델하파에 계신 그 분이 나의 아 빠야." "찬성해줄게." "푸훗. 고마워. 하지만 저기서 우리들을 쫓아오는 사람이 내 아버지라 는 사실도 틀린 것은 아니잖아. 사실을 모른 척해야 될까? 글쎄. 그건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옳은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잖아?" "그래. 후작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옳은 일에 대한 것은, 글쎄." "응?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야?" "아버지는…" 난 잠시 말을 멈추고는 멀리 떨어져있는 레브네인 호수를 바라보았다. 불길이 그 수면에 이글거리고 있어 주위에 펼쳐진 산들은 검게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횃불들.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고 부상 자들을 치료하느라 정신들이 없겠지. "난 길시언을 왕이라고 생각해." "무슨 말이지?" "길시언을 왕이라고 생각한다고. 물론 실제의 왕은 닐시언 전하고 길시 언이 왕의 홀을 들고 있거나 비단에 둘러싸여 왕좌에 앉아있는 것은 아 니지만, 나에게 있어 길시언은 왕이야. 이해하기 어렵지?" "어려워." "동감이야." "애개?" "하하하. 그래. 나도 이해하기 어려워. 흠. 그런데 말이야. 내가 보기 엔 길시언이 왕이고 왕다워. 모르겠어. 닐시언 전하를 많이 사귀지 못했 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 보고 내가 왕으로 생각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으니까, 난 계속 길 시언을 왕으로 생각하겠어. 부탁이니까 이유를 물어봐줘." "이유가 뭔데?" "그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이 나라의 백성, 아니 그의 친구라도 좋고. 어쨌든 그가 사랑하는 사람 들, 그리고 거대한 위험이 있을 땐 언제든지 그 사이에 서려는 사람이 야. 그는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지." "등을 보여준다?" "등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하지? 그래. 앞에 서야 돼. 앞에 서서 이끌 고, 앞에서 오는 위험과 불안을 묵묵히 막아줘야 돼지. 그게 등을 보여 주는 거야. 그리고 등에는 표정도 없어. 따라서 사람들을 속일 수도 없 지. 그런데 길시언은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고, 거기에 덧붙여 더 중 요한 문제는, 자기가 그렇게 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야. 그래서 난 길시언을 왕으로 생각해." 레니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내 볼을 바라보았다. 뭐지? 고개를 돌려 똑 바로 바라보자 레니는 다시 앞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반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아니지?" "엥? 어, 어, 이봐! 내가 닐시언 전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길시언 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뭐 그런 평가할 말도 찾기 골치아픈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지?" "아냐! 어, 그러니까 말이야. 이건 내 마음의 문제야. 내 생활의 문제 가 아니고. 내 생활이야 기반이 딱 잡혀있으니까 특별히 고민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지금 당장 결혼해도 아내를 먹여살릴 자신은 있다구." "후후훗! 제미니양은 좋겠네…." 바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우으으윽. "악! 네리아가 그것도 이야기했어?" "말했잖아. 다했다니까." "어쨌든,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고삐를 잡아 돌리자구. 흠. 어쨌든 길시언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의 문제야. 그건, 글 쎄. 신앙과 비슷한 것일까? 마음의 안정을 위해 신앙을 가지는 거지, 생 활을 위해 신앙을 가지는 것은 아니잖아?" "흠. 겉으론 닐시언 전하의 충성된 신하. 하지만 속으론 길시언이야말 로 나의 왕. 정확하니?" "차갑도록 정확해. 아니, 정확해서 차가운가 보지." "그런가.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면 되묻지는 마."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니는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실제의 아버지와 내 마음의 아빠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인 거니?" "고민을 안할 수는 없지만 시간 정하고 장소 정해서 본격적으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거지. 내가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빨리 대답 해. 아름다우신 레이디. 귀양이 어느 가문의 기쁨인지를 여쭤볼 영광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레니는 웃었다. 밝은 웃음이다. "전 델하파에서 웨일즈 본야드라는 상호 아래 식품업을 하시는 그레이 든씨의 여식입니다." "고민 끝?" "당분간은. 고마워." "천만에. 당분간이라는 그 유동적인 시간 단위가 이번엔 꽤 길어졌으 면 좋겠는데." "꽤 길어야 될 거야. 일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한 집안에 아이는 둘 있을 수 없다." "무슨 뜻이지?" "어떤 사람에게 자식이 생기면, 그 사람은 더이상 누구의 자식이 아니 라 누구의 어버이로 통하게 된다는 말이야. 이봐요, 후치 아버지! 이런 식으로." "아, 그래? 그럴 듯한 말이네. 그럼 레니는 시집간단 말이네?" "어마, 아냐! 시집 안 갈 거야! 난 오랫동안 그레이든씨의 여식으로 있 겠다는 말이라구! 그래서 길어야 된다고 말한 것이고." "바이서스의 속담엔 이런 말이 있어. 세상에 믿을 말 많지만, 늙은이 이제 죽어야겠다는 말, 장삿꾼 이문 없다는 말, 그리고 처녀가 시집 안 갈 거란 말은 절대 믿을 수 없다고." "난 안 간다구!" "누가 뭐래?" "안 간다니까!" "강한 부정은 긍정과 일맥상통하고 이웃지간이며 10년 전에 헤어진 쌍 동이 형제라던데?" "후치야!" "알았어, 알았다고! 꼬집지 말아, 내 살결이 얼마나 연약한… 으악!" 한참을 쥐어뜯긴 다음에야 난 레니에게 넌 피곤하며 따라서 지금 당장 잠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간신히 납득시킬 수 있었다. 레니는 마치 잊어 먹었다가 생각난 듯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내려줘." 난 레니의 손을 붙잡으며 그녀가 내려가도록 도와주었다. 땅에 내려선 레니는 치마를 정리하더니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내려와?" "아, 난 여기서 불침번 서야지. 길시언이나 샌슨은 모두 취해버렸는걸. 먼저 자도록 해." 레니는 모조리 자리 깔고 누운 우리 일행들을 돌아보더니 다시 위를 올 려다보며 말했다. "거기 굉장히 추울 텐데. 불침번 설 필요 있을까? 그냥 내려와서 자." "하하. 괜찮아. 졸리면 가서 운차이나 네리아를 깨우지 뭐. 걱정말고 가서 누우렴." "그러지말고 그냥 자지 그래." "그냥, 생각 좀 해볼 것도 있고. 염려마. 여기서 얼어죽을 생각은 없으 니까. 별로 춥지도 않은 날씨인걸." "…빨리 내려와야 돼?" "응." ================================================================== 13. 대마법사의 만가……20. 레니는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 리가 들리고나서 곧 주위는 고요해졌다. 난 바위 위에 앉은 채 무릎을 당겨 가슴에 안았다. 음. 괜찮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군. 꽤나 싸늘한 바 람인걸? 으으으. 자, 머리 좀 휘두르고. 목도 좀 꺾고. 으랏차! 호수 건너편에 있는 횃불들을 굽어보았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이리저리 일렁거리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인지 커다란 모닥불을 지 피는 모습도 보였다. 꽤나 먼 거리다. 운차이는 어떻게 저렇게 떨어진 곳을 볼 수 있을까. 할슈타일 후작은 레니의 아버지고, 레니는 그레이든씨의 딸이고. 이 앞 뒤의 말이 서로 나뉜 채 바이서스와 일스로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문제 가 없었다. 하지만 레니가 바이서스로 오게 되고, 후작을 먼빛으로나마 보게되면서 그녀가 이 문장을 인식하게 되자 문제가 발생해버리는 것이 다. 내가 옳은 조언을 한 것인지 모르겠군. 자, 다레니안 앞에서 잘난 척하던 후치는 어디로 갔지? 인간은 뭐라고? 하하하. 자, 생각을 해보자고. 레니는 아직 뚜렷하게 뭘 기획하는 것은 아니다.그녀의 행동이나 말을 요약해보면 이런 거지. '왜 싸워야 되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라는데.' 이렇게 되는데 여기서 레니는 아직 할슈타 일 후작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 레니가 하고 있는 고민은 그래 도… 하는 수준인 것이다. 흠. 그렇게 보인다. 모닥불이 잘 붙은 모양이군. 메드라인 고개의 일부분이 바알갛게 물들 고 있다. 넥슨의 아버지는? 갑자기 이 문제가 생각나는군. 넥슨의 아버지는 누구 지? 넥슨은 까뮤 휴리첼의 아들이고, 동시에 로넨 휴리첼의 아들이다. 넥슨은 그것을 구분지을 줄은 알지만 거기에서갈등을 느끼지도 않는 모 양이다. 그렇다면 레니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으로선 그래 도… 하는 수준의 고민이고 그 고민을 계속 감싸안고 부풀리지 않는다 면, 곧 그런 고민 잊게 되지 않을까. 쳇쳇쳇. 내가 레니의 속마음을 어떻게 안담. "후드드득." 무슨 소리지? 날개짓 소리라기엔 좀 이상한 소리다. 마치 날기가 몹시 힘든 새가 날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밤눈이 어두운 밤새인가? "핫하하하." 밤눈이 어두운 밤새라. 그거 웃기는 말이군.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추 위가 느껴지질 않는다? 이게 뭐지? 눈 앞이 갑자기 밝아지는 것 같다. 이상하군. 밤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게 중요하나? 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지. 저 얼굴은 뭐지? 아름다 워, 아름다워. 내 눈 앞엔 어느샌가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일어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알았어. 일어나지.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누구지? "바위를 내려오세요." 바위를 내려간다고. 그래. 내려가야지. 내가 왜 바위 위에 있는 것이 람. 어서 내려가자. "이리 오세요.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어요." 저 여자는 언제 바위 위에서 내려왔지? 눈빛이 아름다운 여자다. 밤하 늘을 그대로 몸에 두른 것 같은 아름다운 검은 옷. 그리고 달빛에 떠오 르는 하얀 얼굴은 달맞이꽃처럼 보이는걸. 아름다운 얼굴이야. "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세요?"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가 없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럼, 제게 오세요." 아아, 시오네. 당신이 이다지도 아름다웠던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목구멍은 꽉 막히고 숨결이 너무 뜨겁다. 손끝에 감각이 없어.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인가? 아름다워, 아름다워. 난 어느새 시오네의 앞에 서 있었다. 시오네의 반짝이는 눈이 날 똑바 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뺨은 달빛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다. 싸아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릿결을 떠오르게 만든다. 더욱 깊어진 얼굴의 음영은 그녀의 얼굴을 한없이 애처롭게, 그리고 서글프게 만든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무엇에 외로워하고 있는 것일까?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밤이군요." 그녀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혀 그녀의 눈을 한없이 투명하게 만든다. 그녀는 추운 듯 외로운 듯 두 손을 모아쥔 채 내게로 한 걸음 다가온다. 세상을 가로지르는 한 걸음. 그녀의 한 걸음 속에 달빛이 부서지고 세계 가 열린다. 달빛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저토록 시퍼런 달빛이라니. 달빛 에서 굉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모두들 외로운 거죠." 그래. 너무 길고 너무 외롭다. 그러면서도 삶을 바쁘게 만드는 백만 가 지 쓸모 없는 일들 때문에 마주보고 웃을 시간도 없다. 하지만 내가 앞 에 있잖아요, 시오네. 당신은 외로워하지 말아요. 내 입에서 말이 들려 온다. "외로워하지 말아요. 우린 하나니까." "그런가요? 절 받아들여주겠어요?" "난 이미 당신을 받아들였어요. 핸드레이크가 다레니안을 받아들였듯 이, 핸드레이크가 바로 당신을 받아들였듯이. 그러지 않으면…" 잠깐. 이 기분은 뭐지? 시오네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진다. 뭔가 잘못 말했나? 그녀는 이제 대 단한 사고를 저질러버리고는 아직 벌을 받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 로 날 바라본다. 창백했지만 부드러워보이던 얼굴이 이젠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다. 대단히 나쁜 일을 저지른 느낌. 차라리 다 말해버리고 용서 를 받고싶은 지독한 욕구가 느껴질 때. 어린 시절, 제미니와 놀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 시절의 대화가 그렇듯이 대개 앞뒤도 안맞고 내용도 없는 말다툼이었으니까. 홧김에 제미니의 얼굴을 쥐어박았다. 그 래봐야 깡마른 꼬마의 주먹이 얼마나 아팠겠냐마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 었던 봉변을 당한 제미니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난 너무 놀라고 당황 해버려 덩달아 울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제미니를 달래지도 못했고, 제 미니는 눈이 시퍼렇게 부은 채 엉엉 울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난 목에서 오리 소리가 날 때까지 울고는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집에 돌아왔다. 저녁도 먹지않고 잠든 그 날 밤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되어 자기 집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꼬마였으니까. 꿈속에서 제미니 아 버지가 영주님의 성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발 이 땅바닥에 붙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곧 대노한 경비대원들이 아 무르타트를 잡기 위해 준비해둔 무시무시한 비밀무기를 질질 끌면서 걸 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경비대원들의 어깨가 마치 웨어울프의 그것처럼 보였다. 난 대로에 붙박혀버린 채 몸이 부서져라 떨면서 그 무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게 뭔지는 몰랐다. 대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 자 그곳에는 무덤이 보였다. 묘비명은 제미니 스마인타그. 내가 제미니 를 죽였어.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직도 굴러오고 있는 비밀무기와 눈이 튀어나올 듯이 화난 경비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제미니를 죽였어! "제미니!" 다음 순간, 난 뒤로 튕겨지듯 물러나며 바스타드를 뽑아들 수 있었다. 얼마나 빠르게 뽑아들었는지 순간적으로 손끝에 몰린 피 때문에 손이 아 파왔다. "시오네!" "두 번째가 내 이름이야." 시오네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다시 뒤로 더 물러났다. 고함 을 지를까? 일행을 깨우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시오네는 검을 뽑아들지 않았을 뿐더러 뽑아들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난 잠시 당황해서 그녀의 얼굴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핏기없는 푸른 입술은 물이 말라버린 강바닥처럼 이리저리 갈라져있었다. 그리고 병자처럼 하얀 볼. 눈은 퀭하게 들어가 으시시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망할 꼬마놈." 시오네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마치 습관적으로 나오는 듯한 그런 어 투였다. 감정을 전달하는 목적은 깨끗이 사라져있었다. 시오네는 계속해 서 그런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진 말아. 해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는걸. 난 그녀의 촛점없는 눈을 피해 약간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날 어떻게 했던 거죠?" "알려줄 의무가 있나? 신경쓰지마. 이미 망쳤으니." "그럼 이렇게 묻지요. 뭣때문에 우릴 찾아온 거지요?" 시오네는 갑자기 몸을 돌려우리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소리 를 낮추어 말했다. "괜찮다면 좀 떨어진 곳에서 말하고 싶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 할 곳에서."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시오네는 왼손으로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의 끝자락을 잡아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러자 왼쪽 허리에 찬 레이피어가 눈에 잘 들어왔다. 이건 뭐 지? 지금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러나 시오네는 왼손을 그냥 늘어 트리더니 낮게 말했다. "네게 해를 끼치진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약속이 깨지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다는 것은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 감스럽다는 말 대신 놀랍다거나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써야 되겠죠?" "말장난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 꼬마!" 시오네는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너희 일행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있어! 잠자 코 내 말을 따라. 그렇지 않겠다면!" 갑자기 시오네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제길! 너무 떨어졌어! 좀 더 가까이 붙어있어야 했는데! 난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시 오네가 더 빨랐다. 화르르르! 시오네의 들어올린 손바닥 위에 붉은 화염의 공이 생겨났다. 저건 뭐 지? 파이어볼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상체 를 앞으로 숙였다. 아무 소식이 없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시오네는 손바닥 위에 불의 공을 띄워둔 채로 말했다. "잠자코 따라오지 않겠다면 이걸 곧장 던지겠어." 빌어먹을! 난 바스타드를 거세게 검집에 꽂아넣은 다음 팔짱을 꼈다. "좋아요. 됐어요? 이제 그거 치워요." 너무 빨리 대답했나? 시오네는 눈을 조금 깜빡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손 을 내렸다. 그녀가 손을 내리자 화염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시오네 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어리석은 짓 말고." 좋아, 따라가지. 이 어두운 밤, 뱀파이어의 등 뒤를 따라 깊은 숲속으 로 들어간다, 이 말이지? 음란한 느낌이 드는군 그래. 다행히도 시오네는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섰다. 그래서 잡 다하면서도 음란무쌍한 상상은 그다지 오래 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우리 일행드에게서도 별로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하지만 조용히 말을 나누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내 어깨는 건드리면 우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나갈만큼만 긴장해 있었다. 시오네는 망토를 들어올리더니 길 옆의 가파른 사면에 대충 주저앉았 다. 흐음. 예의상 마주앉아주지 않을 수는 없군. 난 무례하다는 말을 듣 지는 않을 정도로, 하지만 최소한 팔 두 개 거리는 떨어진 거리를 두면 서 시오네와 마주앉았다. 오우, 젠장. 이 수상쩍기 그지없는 밤에, 수상 쩍기 그지없는 고개에서, 수상쩍기 그지없는 뱀파이어와 마주앉아 있다 니! 내일 아침엔 내 머리에 구멍이 7개에서 9개로 늘어날지도 모른단 말 이야. 잠깐. 목은머리에서 제외되나? 온갖 상상을 다해보다가 난 시오네의 첫마디를 놓쳤다. "뭐라고요?" 시오네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으르렁거리는 것처 럼 느껴지지?) "용건만 간단히 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네가 이런 식이라면 간단하긴 글렀군." "아, 미안해요. 착실하게 듣지요." "좋아. 도와줘." "좋아요. 잠이 잘 안오나요? 자장가의 레퍼토리는 좀 약한 편이지만 그 래도 듣기 괴롭지 않을 정도론 불러줄 수 있어요." "…그게 아니야." "그래요? 아, 말하기 곤란하면 안해도 되요. 알았어요. 망 봐드리죠. 어서 가서 해결하고 오세요. 이런 캄캄한 밤에, 게다가 산속인데 누가 훔쳐볼까 무서워하다니. 오래 참았어요? 얼굴빛이 안좋네." 쉬이익! 레이피어가 빠르게 다가왔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 다! 내가 이 바스타드를 휘두른 것이 벌써 얼마인 줄 알아? 샌슨류 중단 막기! 챙! 시오네는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바스타드에 걸린 레이피어 를 옆으로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내 입장이 되긴 어렵겠지만, 생각해봐요. 이 멋진 보름달밤에 뱀파이 어와 마주앉아있으면서 농담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난 벌써 고래고래 비 명을 지르며 달아날지도 몰라요. 아시겠어요?" 여기서 기름 젖기로 변형하면 그럴 듯할 텐데. 그러나 시오네는 내 말 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피어를 빠르게 회수했다. 우리 둘 모두 앉은 자리 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시오네는 갑자기 움직이느라 흐트 러진 머릿결을 뒤로 쓸어넘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했 다. "꽤 발전했군." "동료들이 좋으니까." "후. 농담은 이제 그만해. 용건을 말하겠어." "듣지요." "도와줘. 넥슨을 구하고 싶어." 난 바스타드를 빼어든 김에 그대로 들고 있기로 결심했다. 바스타드를 아래로 내리는 동작이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면서 난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을? 왜냐고 물어도 될까요?" "말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이상해요. 당신은 자이펀의 간첩으로서 넥슨이 반란을 일으키 도록 도와주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넥슨은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는데. 그걸 모르나요?" "그래서?" "뭐. 당신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것 뿐이지요. 그런데 나로 말할 것 같 으면, 난 넥슨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걸요. 그 사람의 옛날 일은 이제 다 잊었어요. 그 사람은 바이서스의 왕가를 싫어할 이유가 있 더군요. 이해는 하지만 동조할 수는 없고, 따라서 넥슨에게 감정을 낭비 하진 않겠어요. 게다가 아직 새로운 우정이 생겨난 것은 더더욱 아니니 까.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내가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없는 데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뭐라고요?" 시오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인지 판 단한 다음 들어줄 테니까." "계약을 하자?" "그래." "그쪽 조건을 말해봐요." "후작 일행을 교란시켜줘. 그 동안 내가 넥슨을 구할 수 있도록." ================================================================== 13. 대마법사의 만가……21. 시오네는 내 태도와 똑같이, 그러니까 아무런 수식어도 감정도 없이 말 했다. 재미있군. 이것도 그런대로 재미있는데? 어디 보자. "당신 정도면 간단하게 넥슨을 구할 수 있지 않아요?" "30 명이 넘는 전사들은 감당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모두 깨어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우리들이 솜씨를 부려서 지금 저쪽에는 부상자들이 꽤 될 텐데. 무슨 이유가 있는 거죠?" 시오네는 이제 끔찍스러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을 보내어왔다. 하 아. 마음을 가라앉히자. 되도록 굽히지 않는 자세로 있고 싶었지만, 난 어느새 시선을 돌려 시오네를 외면하고 있었다. "난 저기서 힘을 쓸 수 없다." 시오네는 맥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시오네 맞나? 난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레브네인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을 쓸 수 없다고요? 저기서는? …다레니안의 영토에서는?" "그래." "그럼 내일 하죠?" "내일은 늦어." "왜 늦지요?" 갑자기 시오네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로 추정되는 표 정이 보였다. 미소를 짓는다고? 이건 무슨 의미인 거지? "후작 일행이 너희들을 쫓아오는 줄 아나?" 뭐야? 이게 무슨 말이지?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맞아.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야. 후작은 그 계집애를 원하고 있으니까. 후작의 준비성은 정말 대단해." "맞아요. 대단해요. 그럼요!" 내가 야유하는 태도로 동조하자 시오네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미소를 거두었다. "무슨 뜻이었죠?" 시오네는 갑자기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일이 되면 돌맨 할슈타일도 이 갈색산맥에 도착할 거야. 난 어제와 오늘 새벽에 걸쳐 그들을 감시했지. 그들은정확하게 드워프의 통행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어. 내일이 되면, 너희들이 드워프의 통행로에 도달하 게 되면 너희들은 돌맨 할슈타일과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만 나게 돼." 그래? 그렇다고?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데? 시오네는 내 얼굴에서 멍 한 표정만 발견하게 되자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멍청한 꼬마. 후작은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의 예정일에 맞추어 돌맨 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거야. 아미앙스 수도원에서 돌맨이 프리스 트들과 함께 비밀리에 출발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야. 그들은 이미 사흘 전 사우스 그레이드를 빠져나왔다." "그래서…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맺게 한다? 그것이 후작의 계획 입니까?" "그래. 제법이군." "그래요? 흐음. 고마운 정보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뭐라고?" "우린 사실 누가 라자가 되든 상관없어요. 라자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 기죠. 이왕이면 저 고약하기 짝이 없는 할슈타일 가문의 사람은 피하고 싶어요. 그건 후작을 즐겁게 만드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여건이 안좋다 면 그쪽 사람이라도 할 수 없죠. 우리는 크라드메서가 발광한 채 활동기 에 접어드는 일을 막으려는 거에요." 시오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날 바라보았다. "할슈타일은 상관이 없고? 그가 크라드메서라는 힘을 가지게 되어도 상 관이 없다는 말이니?" "뭐, 좋진 않겠죠. 하지만 미친 드래곤보다는 아무래도 인간쪽이 감당 하기 쉽겠죠." "감당하기 쉽다고? 하핫!" 시오네는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크게 웃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웃 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오네는 한참 동안 그런 자세로 어깨를 들썩 거리더니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 같으니."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 초 만들 줄 알아요?" "시끄러워. 꼬마야. 불쌍해서 알려주마. 후작이 감당하기 쉬울 거라고? 저 할슈타일 후작이?" "…놀랄 준비는 끝났어요. 그럼, 이제 놀랄 말을 해봐요." "후작에게 왜 라자가 필요하지?" "예?" "후작 자신이 라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데 왜 라자들을 모아들이려 하 는 거지?" "그거야 라자의 혈통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죠." "멍청하긴! 크라드메서의 이야기를 하는 거야. 크라드메서를 손에 넣기 위해 후작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10년도 전에 잃 어버린 딸을 찾고, 드래곤을 가지고 있는 돌맨에게 계약을 파기하게 했 어. 그걸 모르나?" "알고는 있는데…" "왜 그래야 하지? 후작 자신도 라자다. 잠깐, 그걸 몰랐나?" 뭐야? 어, 후작이? 음. 그렇긴 하지. 언젠가 후작의 저택에서 넥슨의 문서를 훔쳐내려고 했을 때다. 내가 부끄럽게도 후칠리아로 변장했을 때 후작은 내 손을 잡아보고는 내가 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었다. 라자가 라자를 알아보는 거니까, 그렇다면 후작은 라자라는 말이네? "알아요. 할슈타일 후작도 라자지요." "알고 있군. 그런데 왜 후작 자신이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지 않는 거 지?" "예?" 놀랄 준비를 해두었지만, 너무 놀라게 되니까 준비가 소용없어지는데? 이건 정말 생각 못해본 문제다. 후작도 드래곤 라자다. 그런데 왜 후작 스스로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지? 왜 레니를 찾고, 왜 돌맨을 불러들이는 거지? 왜 그러는 거지? 시오네는 갑자기 몸을 돌려 다시 레브네인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어. 어쨌든 내일이 되면 저 일행에는 레티의 프 리스트들이 더해진다. 그렇게 되면 난 도저히 침투할 수 없게 돼. 따라 서 기회는 오늘 밤뿐이다." "…." "이봐, 듣고 있어?" "잠시 기다려요! 당황했단 말이에요. 좀 침착해질 시간을 가지고 싶다 구요!" "뭐야?" "젠장. 어이가 없네. 간단한 문제인데 생각해보질 못했어. 으으음. 당 신 말이 맞아요. 왜 후작은 직접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지 않으려는 거 지요?" 시오네는 불만스럽게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봐! 너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날 도와주지 않겠다면 너희 일행 에게 잠든 채로 죽을 수 있는 행운을 선사하겠어. 빨리 대답해." 이익! 이 괴물이 지금 날 협박하고 있단 말이지? 내가 너따위 뱀파이어 의 협박에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아? "어떻게 도와주면 되죠?" 사람은 모름지기 둥글게 살아야 하는 법. 으으윽. 쳇. 신세 한 번 고약하군. 이 밤중에 뱀파이어의 협박 때문에 산책을 나서야 되다니. 달들은 이제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있었지만 밤하늘은 여전히 파르스름 하다. 우리가 불을 질렀던 마차와 통나무들도 이젠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불길은 내게 좋은 목표가 되어주었다. 여기가 우리 고향의 사바인 계곡이라면 이까짓 산길, 눈 감고도 내려갈 수 있어. 하지만 여긴 우리 고향에서 터무니없이 멀고, 우리 제미니에게 서도 터무니없이 먼… 콰당! 너 때문이야, 제미니. 아이고, 무릎이야. "조용히 해, 멍청한 꼬마놈." 그게 후작 일행들에게 들킬까봐 비명도 못지른 채 조용히 속으로만 투 덜거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야?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당신을 멍청한 뱀파이어라고 부르겠어요." 시오네는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걸어가버렸다. 난 무릎을 문지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꽤 많이 내려왔네? 내려오는 길이라서 퍽 빠 른 모양이군. 산등성이는이제 호숫가의 평지를 만나 갑작스럽게 경사를 잃고 있었 다. 호수의 반짝이는 물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다레니안. 오늘 참 당신 의 영토에서 여러 번 소란을 부리게 되어 죄송하군요. 먼 산의 봉우리들 이 감싸고 있는 수면은 달빛을 받아 희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서 와!" 시오네는 낮게 윽박질렀다. 저 여자 골탕 좀 먹여줄까보다. 젠장. 불타고있던 마차와 통나무들의 잔해가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시오네는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좋아. 여기서 헤어지자." "왜요? 더 들어가지 않고?" 시오네는 맹렬하게 쉬잇거렸다. 꽤나 화가 난 모양인데. "투구걸이로도 못쓸 머리 같으니. 이 이상은 다레니안의 영토이다. 들 어가기 위해 허락을 구하고, 하늘로 광선을 쏘아올라가게 해서 저 녀석 들에게 눈치를 채게 만들자는 거냐?" 아, 그래? 그런데 그건 당신 사정이야. 내 사정은 아니지. 난 어깨를 으쓱인 다음 말했다. "신호는?" "그런 건 없어. 속으로 300까지 센 다음 시작해." "아, 문제가 있는데. 난…" "100이 넘어가면 못센다는 말이냐?" 어라? 시오네가 어떻게 농담을 알아듣는 거지? 난 눈이 동그래져서 시 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시시껄렁한 농담 따위 집어치우고 어서 시작해." "좋아요, 뭐. 잘해봐요." "너나 잘해." 시오네는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잠시 후 난 저 편 후작 일행의 횃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날아가는 박쥐 한 마리를 보며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넷, 일곱, 스물 아홉. 젠장. 백 이십 구, 삼백." 다 셌지? 그럼 좀 쉬어볼까. 난 바닥에 주저앉아서 은빛 양탄자처럼 보 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에게 뭐라고 귀뜸이라고 하고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시오네는 그런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넥슨을 구해? 으음. 마음이 무겁지는 않다. 하지만 유쾌한 기분도 아니다. 저 멍청한 넥슨은 왜 할슈타일에게 덤벼든 것일까. 그가 원한을 가진 것은 바이서스 왕가 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따위 원한 때문에 얼마 남지도 않은 자신을 저렇게 마구 다루다니.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복수에 몸을 태운 다는 것인가? 부나비의 화려한 최후. 쳇. 그러고보면 바이서스 왕가라는 것에 대한 원한도 참 그렇군. 까마 득한 자신의 조상을 배신한 것에 대한 원한이라는 말이지. 그래. 핸드레 이크는 핸드레이크 휴리첼이라고 했지. 어라? 아차! 시오네게 그걸 물어볼걸! 핸드레이크가 누구냐고 물어봤어야 되 는데. 아깝다. 어디 보자. 그럼 시오네는 자신의 스승의 멀고 먼 후손을 구하려는 건가? 음. 맥락은 맞아떨어지지만 개연성은 부족한걸. 사제 관 계의 의리란 말이지? 타이번은 드래곤에게 마법을 쓰는 것은 사조에게 덤비는 꼴이 되기 때 문에 싫다고 말했었지. 그렇다면 시오네도 스승의 후손이라서 넥슨을 구 하려는 걸까? 으. 이 가설이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려면 비약을 꽤나 심 하게 해야 될 것 같은걸. 삼백쯤 되었을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다레니안께서 나와 의 우정을 기억하시는지 알아볼 차례로군. 헤어진지 몇 시간밖에 되지않 았으니 아직까진 기억하시겠지? 난 천천히 호숫가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달빛 참 좋군. 모래가 아니라 은가루를 밟는 것 같은데. 난 고개를 돌 려 뒤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나온 발자국은 검게 그늘이 져서 길게 이어 지고 있었다. 호수는 조용했다. 다레니안께서는 허락없이 들어오면 붉은 광선은 저절로 나오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말은, 다레니안께서 날 보고 계시는 거겠 지? 좋아. 한 마디 하지. 난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향해 선 채 말했다. "페어리퀸 다레니안.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찾아왔습니다. 절 기억해주시고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혼자서 터덜 터덜 걸어와서 참 의아하게 생각되시죠? 하지만 부탁이니 아무런 움직임 도 보여주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호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혹 물고기가 튀어오르는지 퐁당!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수면에 작은 파문이 그려지는 것 외에는 고요하기 짝 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전 저기 할슈타일 후작에게 볼 일이 있습니다. 후작 에게 참으로 긴요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이 걱정되는군요. 염치없는 부탁입니다 만, 절 좀 지켜주시겠습니까?" 다레니안의 우정을 믿었기에 난 꺼리낌없이 시오네를 따라나설 수 있었 다. 다레니안은 나와 제레인트를 페어리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지. "만일 절 지켜주시겠다면 그 허락의 뜻을 어떻게 표현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저기 후작 일행에게는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요." 난 잠시 기다렸다.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아래를 내려보자 작은 파 도가 모랫벌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파도가 다시 호수 로 물러가고나자 젖은 모랫벌에 글자가 씌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도와줄게.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렴, 요정의 친구여.' 난 활짝 웃으며 호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레니안." 좋아! 이젠 됐군. 그럼 후작에게 참으로 긴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되 는 건가? 그러나 난 후작 일행의 모닥불이 비치는 곳까지 걸어가는 대신 제자리에 서서 두 다리를 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조용한 밤이야. "하아알슈타아아일 후자아악!" 후자아악… 후자아악… 메아리도 멋진걸? 아이고 목이야, 켈록켈록. 난 기침을 좀 한 다음 눈에 힘을 주면서 모닥불빛이 비치는 곳을 쏘아보았 다. 과연 모닥불 옆에 작은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횃불에 불을 붙인 거겠지? "들려주우울 마아알이 있다아아!" 있다아아… 있다아아… 메아리 정말 멋있어. 그런데 갑자기 새들의 비 명소리가 들리며 메아리의 끝부분이 지워져버렸다. 에이, 아쉽네. 꺅꺅꺅꺅! 새들은 이제 정말 불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래고래 지 저귀고 있었다. 음? 말이 좀 이상하군. 고래고래 지저귄다고? "크라드메서의 비밀을 알려주마!" 숨이 가빠서 말을 길게 못끌겠군. 그래서 대신 짧게 끊어서 강하게 말 하기로 했다. 메아리와 새들의 비명소리가 어우러져 호수 주변은 굉장한 소란이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도 아스라하게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일행들이 내 고함소 리에 기겁해서들 일어나는 모양이다. 아아, 이런. 피곤할 텐데 잠을 깨 웠군. "크라드메서는 사실 드래곤이다!" 난 참놀라운 사살일 잘 말한다니까. 내 입이 자랑스러워. 그런데 다레 니안께서는 지금 내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얼이 빠져계 시지는 않을까? "또한 헬턴트 마을의 파라핀 양초는 개당 2퍼셀이다! 파라핀 양초 하나 로 우리 영주님의 땅을 몽땅 사버리고도 반토막은 남는다구!" 횃불들은 이제 꽤 많은 수로 불어나있었고 좀 웅성거린 다음 그들은 고 갯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도 더욱 커 졌다. 새들은 이제 다 날아올라 하늘에서 떠들고 있었다. "이 정도로 놀라지 않겠다면! 놀라 넘어질지도 모르는 비밀을 알려주 마! 성밖 물레방앗간의 처녀의 실명이 오늘 여기서 공개된다! 그 처녀의 이름은…" "그거 말하면 넌 다 살았다고 샌슨이 전해달라는군!" 윽. 운차이의 그 굉장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운차이는 고함을 지르긴 질렀지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모양인지 아주 기이한 고함소리를 내었 다. 그건 그렇고 저건 내가 매일 하던 역할이었는데 오늘은 역할이 바뀌 었군 그래. ================================================================== 13. 대마법사의 만가……22. 횃불들은 주춤거리면서 달려왔다. 거리는 꽤나 멀긴 하지만 그래도 아 까 산 위에서 보던 것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보니 횃불들 하나하나 가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검은 산에 살짝 찍어둔 점처럼 보이던 것들이 불꽃 모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저 녀석들은 이 호수 근처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겠지. 버텨보자. "네 놈은 누구냐!" 과연 횃불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은 호수를 아직도 한참 남겨놓은 거리였다. 대략 대여섯 개 정도 되는 횃불들은 고갯길을 중간쯤 내려오 기는 했지만 호수에서는 수십 큐빗이나 남겨놓은 위치에서 멈추어선 채 고함을 질러왔다. 난 피식 웃고는 고개 중간쯤을 향해 마주 고함질러주 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지금까지 누구 뒤를 쫓는지도 모르면서 쫓 아온 것은 아니잖아!" 횃불들 쪽에서 잠깐 대답할 말이 막혀버린 모양이다. 그 때 횃불들 가 운데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네드발!" 후작의 고함 소리는 단숨에 짜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꽤나 살 벌하게 들리는 목소리인걸. 그런데 고요한 호수의 넓은 수면 위로 고함 소리가 오가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썩 좋은 밤입니다. 후작나리!" 확실히 그래. 난 허리에 손을 짚고선 채 유쾌한 기분으로 횃불들을 바 라보았다. 그것들은 참 바보 같은 꼴로 고개에서 웅성거리고 있었고 난 다레니안의 보호 아래 완전히 안전하다. 이 정도면 내 콧대가 하늘을 찌 를 듯하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멍청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겨! 화살꽂이가 되고 싶냐!" 운차이의 고함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한 내 콧대를 무참하게 뭉개버렸 다. 아이고, 맙소사! 그 생각을 못했다! 난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 불빛 이 비치는 거리에서 물러났다. 젠장, 그러고보니 아직도 불기운이 남아 있는 장작더미 옆에서 내 모습을 다 드러내어놓고 있었잖아. 횃불들 가운데서 하나가 고갯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건 뭐하는 거 지? 그 때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지금 내려오고 있는 것이 할슈타일 후작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레니안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군! 그래서 저 호수 속에 틀어박 힌 멍청한 요정이 우리들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고. 오만가지 종족들이 모인 떨거지들, 거기 그대로있어라. 혼자 내려가겠다!" 이것 봐라? 입이 꽤나 거칠군. 지금 다레니안에 대해 뭐라고 말한 거 지? "이것봐! 내가 달빛 아래 만나고 싶은 것은 절세의 미녀지, 내일 아침 당장 저승꽃이 필지도 모르는 중늙은이는 필요없다구! 내려오실 필요 없 어!" 내 대답을 듣고 카알은 아마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후작은 어떤 표정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 횃불은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 다. 그런데 정말 혼자서 내려오고 있네? 어디, 대화라도 나눠보겠다는 건가? 좋지. 해 줄 말은 무궁무진하거든. 난 알싸한 긴장감을 느끼며 당 당하게 섰다. 그 때 뒤쪽에선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들이 달려내려오는 것인가? 그러자 후작은 잠시 멈추어섰고 고갯길 중턱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작의 부하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작은 곧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 다. "난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혼자 내려가는 것이다! 호수의 요정 이든 떠돌이 거렁뱅이 왕자든 짖어대지 말고 잠자코 기다려!" 뭐야? 얼씨구? 이젠 정말 나오는대로 지껄이는데? 후작이 외친 것과 동 시에 등 뒤에선 샌슨의 짓눌린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이 놈! 입을 조심해! 이랴아!" 그런데 정작 떠돌이 거렁뱅이 왕자라고 불린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 는군. 하도 기가 막혀서 그러는 것인가? 타가닥, 타가닥! 경사진 길을 내려오는 말들은 불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난 뒤를 돌 아보지 않고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후작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저 소악당이 이제야말로 가면을 벗어던지고 흉악한 본심을 드 러내겠다는 건가? 이상하군. 지금껏 그렇게도 안전하게 행동해오던 작자 가 말이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이제는 가면을 벗을 시기가 되었다 는 것인가? 이힝힝힝! 아이고, 깜짝이야! 목 바로 뒤에서 말울음소리가 들려서 기 겁하는 줄 알았다. 곧 정수리쪽에서 달갑지 않은 충격이 느껴졌다. "이 자식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샌슨이었다. 난 참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샌슨을 돌아보았다. 젠장. 협박을 당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시오네가 왔어." "뭐야? 어디?" "시오네가 와서 날 협박했어. 그래서 이 짓을 해야만 했어." "후치…" "좋아, 좋아! 젠장. 설명은 나중에 반드시 하겠어. 그리고 지금은 한 가지만 생각해줘." 난 지을 수 있는 한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신뢰감 넘치는 목 소리로 말했다. "샌슨이 아는 후치는 앞뒤없는 일을 하는 멍청한 소년인가?" "물론 그래." "샌슨, 제발!" 샌슨의 옆으로 길시언과 운차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제각기 날렵 한 동작으로 타고 온 말에서 뛰어내렸다. 운차이는 말에서 뛰어내리고보 자 어느새 그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다. 신기하네. 내리면서 검을 뽑아든 것인가? 샌슨 역시 롱소드를 뽑아들면서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눈 앞의 상황이 급하니 잠시 기다리지. 후치 네드발! 하지만 넌 나중에 설명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난 나중에 치도곤을 안겨줄 작정 이라는 것은 기억해둬." "좋아, 좋아.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야. 지금은 조용히 있자구." 길시언이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자 가슴이 저릴 정도로 맑은 소리가 스르릉! 하고 울렸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늘어트린 채 내게 다가 왔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내 얼굴을 흘깃 바라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후치 네드발." "예, 길시언." 내 대답이 불안에 젖어있지 않았다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자의 목소 리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 좋겠어. 꺼리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표정을 마주하니까 불안하잖아. 길시언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이 고약한 사태에 대해 설명은 나중에 듣지. 하지만 한 가지는 지금 당장 감사해야겠군." "감사라고요? 뭐지요?" 길시언은 고개를 휙 돌려 고갯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숲의 나무들에 가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내려오던 횃불은 이제 고갯길을 다 내려 와 호숫가의 길로 접어든 채로 서있었다. 후작은 지금 우리들의 인원이 늘어난 것을 보고 망설이는 것인가? 길시언은그 횃불을 쏘아보면서 말 했다. "저 놈이 마각을 드러내게 해 준 것. 이제 저 놈은 더 이상 바이서스의 왕가를 섬기는 자로 남지 않겠다고 공언한 셈이지. 이제 난 저 놈을 반 드시 벌하겠다." "길시언을 돕겠습니다." "음." 난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스르르 옆으로 다가온 운차이 는 아무 말 없이 태평한 자세로 섰다. 난 샌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 거야?" 샌슨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어. 하지만 카알이 알아서 더 내려올 것인지 결정할 거야. 말이 얼마 없어서 여기까지 내려오면 달아나기가 빡빡하거 든." "아, 그래?" "그래. 이 자식아. 쓸모없는 충돌은 피해야 될 거 아냐! 저쪽 인원은 많이 손상되었다지만 아직은 위험할 정도야. 피를 보지 않으려고 지금껏 달아나고 있었는데, 그래, 네가 이 밤중에 나서서 싸움을 걸어? 네가 도 대체 정신이 있는 녀석이야, 없는 녀석이야? 너 혹시 몽유병 아니야?" "이유가 있다니까!" "젠장. 그 이유는 꽤 거창해야 될 거야. 틀림없이." 샌슨은 그렇게 말을 뱉어내더니 길시언에게 말했다.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이는데요. 후치도 안전하니 이대로 물러나도 괜 찮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다레니안을 무서워해서 쫓아오지 못할 겁니 다." 길시언은 지긋이 앞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저렇듯 내려왔으니… 예상치 못한 일인데다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기회는 기회요. 이야기는 몇 마디 들어봐야겠소." 프림 블레이드가 꽤나 잠잠하군. 이 긴장되는 분위기에선 프림 블레이 드도 입을 다무는 것인가? 후작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봐, 다시 말한다. 싸우려는 것이 아니며, 혼자서 내려가겠다! 공격 하지 말도록!" "공격하지 않겠으니 내려왓!" 길시언은 패악스럽게 마주 고함질렀다. 그러나 호수 끄트머리까지 다가 와있던 후작은 더이상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은채 고함을 질렀다. "기사의 명예로 맹세하겠나!" "네게 기사의 명예는 과분해! 나의 검의 명예에 걸고 맹세하지!" 길시언의 대답은 우리들로 하여금 웃음을 참기 힘들게 만들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명예라고? 저런 태연한 얼굴로 그런 말을 참 잘도 하시는군. 그러나 후작은 자신의 검에 걸고 맹세한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 다. "좋아. 지금 내려가겠다. 너희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대기해라!" 뒤의 말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외치는 말인 모양이다. 어쨌든 그 말을 던지고나서 잠시 후 후작은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샌슨은 갑자기 운 차이를 돌아보았다. "이봐. 너 눈 좋지. 혹시 몰래 따라내려오는 녀석 없어?" "없어. 후작뿐이다." "그래? 음. 후작뿐이라고. 배짱이 좋은걸." 우리쪽으로 곧장 걸어오고 있던 후작은 호수가 눈 앞으로 펼쳐지자 갑 자기 멈춰섰다. 다레니안에게 허락을 구하려는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말은 우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호수의 다레니안! 또다시 붉은 광선 따위를 쏘아올릴 생각을 하고 있 다면 집어치우시오! 이건 인간끼리의 대화요. 그러니 체통을 생각해서 잠자코 있으시오! 요정 주제에 인간사에 끼어들어 저런 떨거지들을 보호 하느라 나와 내 사람들의 통행을 부당하게 가로막았으니 체통이랄 것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맙소사. 저 인간이 완전히 돌았구나! 우리 네 명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호수로 돌아갔다. 호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이 화를 내는 것인가? 순간 등 뒤로 후다닥 물러나는 발소리. 뭐지? 운차이의 짓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미련한 곰들 같으니. 호숫가에서 물러섯!" "뭐어?" 울림소리.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울림소리. 그것도 도저히 울릴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성이라든지 산 같은 거대한 것들이 저 뿌리부터 울리는 듯한 소리. 흔들린다! 발이 흔들려! 그리고 레브네인 호수를 둘 러싼 산 전체가 울리고 있었다. 콰-콰-콰-콰아앙! 위 아래 턱이 부딪혀 깨지는 기분이 든다. 콧구멍이 막혀버리는 느낌. 샌슨의 알 수 없는 고함 소리에 귀가 터져나가는 것 같다. 길시언은 호 수를 바라본 채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기어코 넘어지는 길시언. 그 는 다시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 세상에!" 시뻘건 광선이 호수 전체에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호수 수면 전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껏 보던 붉은 빛다발이 아니었다. 호수 전체가 마치 거울이 되어 햇빛을 반사하듯이 직경 수천 큐빗의 붉은 광선이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마치 화산이 터지는 듯한 섬광. 호수 주변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져버렸고 옆을 돌아보니 샌슨 의 얼굴은 피빛이었다. 아니, 찌푸린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핏빛으로 백열하고 있다. 대지는 오늘 그녀 자신의 일부분을 파괴해버리려고 옹골찬 결심을 해버 린 모양이다. 산들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쩡-! 쩡-! 맙소사, 산 이 갈라지려는 것인가! 그릇처럼 생긴 호수 주변의 지형은 울림소리를 수 배로 증폭시키고 있었다. 쩡-! 쩡-! 그리고 호수에서는 말도 못할 정 도로 거대한 빛이 쏘아져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위아래로 너무 흔들려 멀미가 나려고 한다. 샌슨은 무릎을 꿇은 채 검 을 위로 들어올리고 뭔지 모를 용서의 말을 마구 외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으악!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그럴게요!" 정도의 수준이라 듣고 있 으면 기분이 이상해지기 때문에 (샌슨이!) 새겨들을 말도 아니고 주위의 혼잡스러운 상황은 새겨들을 상황도 아니다. 길시언은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꼴불견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열하는 땅 위로 그의 등 뒤로 끝없는 그림자가 늘어진다. 그 때 운차이가 날카 롭게 말했다. "가운데! 가운데!" "가운데?" "잘 봐! 빛 가운데! 다레니안이다!" 뭐라고? 빛 가운데라니? 이처럼 거대한 빛 어디에 가운데가 있다는 거 야! 빛은 그대로 하늘을 꿰뚫어버렸고 밤하늘은 미친 듯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장담하지만 이 울림소리는 최소한 바이서스 전체에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은, 맙소사! 바이서스 전체가 아니라 자이펀이나 헤게모니아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쯤 쿨쿨 자고 있을 제미니는 보지 못하겠지만, 헬턴트의 경비대원들은 난리가 났겠지. 저 아찔할 정 도의 광선은 밤하늘을 찔러올리는 볼의 검처럼 보이겠지. 쿠왕쾅쾅쾅! 다레니안이다! 볼 수 있었다. 피빛 광선의 가운데 수면 위에서 30큐빗 쯤 떠오른 곳에 서 걸어오고 있는 다레니안이 보였다. 아니,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니 다. 그녀는 후작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빛 속에서 더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 주위에 엉기어 거대하게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간신히 그녀라는 것 을 알아볼 수 있을 뿐 그녀의 모습 자체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 러나 그녀는 한결같은 속도로 붉은 빛 속을 가로질러 후작에게 다가갔 다. 후작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은 이미 땅에 떨어져 타 오르고 있었다. 집어던져버린 것인가? 그의 손이 칼자루로 옮겨진 것을 보니 그런 것 같은데. 기괴한 붉은 빛으로 호수 주변은 대낮처럼 밝아져 있어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옷과 몸 전부가 붉은 빛으 로 물들어있었다. 가장 짙은 석양 속에 서있어도 이보다 더 붉지는 않으 리라. 할슈타일을 꼿꼿이 선 채 다레니안을 마주보았다. 다레니안은 할슈타일 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정지했다. 불 속에서 타오르는 또다른 불. "할슈타일.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는가." 이건… 맙소사, 이건 다레니안이 하고 있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호수 전체가, 아니 레브네인 호수와 그 둘레를 둘러싼 산 전체가 말을 하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저 어마어마하게 많은 호숫물과 붉은 광 선, 그리고 나무와 바위, 흙, 그리고 웅혼한 산맥이 후작에게 말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후작은 인간이다. 혼자서 세계를 상대할 줄 아는 인간. 그에겐 종족의 이름도 필요없다. 드워프가 종족으로서 바위산에 구멍을 뚫는가? 호비트가 종족으로서 아 름다운 정원과 밝은 미소를 만드는가? 인간에게는 그런 것도 필요없다. 인간은, 인간은 개인으로서 세계를 상대할 줄 안다. 그리고 후작은 후작 으로서 세계를 상대할 줄 안다. 왜냐하면 대자연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릴 수 있으니까. 다레니안은 안돼. 후작은 굳이 당당해질 필요도 느끼 지 못하는 모양인지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세계에 대한 도전. 저 간단한 긍정은 세계를 짓밟아 뭉갠 인간의 말이 다. 루트에리노 대왕이여, 기뻐하시라! 당신으로부터 300년, 별들이 파 괴되고 300년이 지나, 이제 저토록 비정하리만큼 간단한 한 마디가 지금 세계를 박살내고 있으니. ================================================================== 13. 대마법사의 만가……23. 다레니안은 말했다. "300년 동안 이토록 방자한 자는 처음 보는군." 그러나 그것은 다레니안의 말이었다. 호수의 말도 아니고, 산의 말도 아니었다. 후작에 의해 다레니안은 다레니안으로 끌어내려진 것이다. 지 금 그녀가 당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전의 그녀에 비해볼 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가련하게 보였다. 하늘로 쏘아져올라가는 불꽃도 이 젠 더 이상 눈을 아프게 만들고 내 모든 존재를 태워버릴 것처럼 느껴지 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저 밝은 빛일 뿐이다. "여기는 내 영토다. 내 영토에서 내가 주인 노릇하지 못한단 말인가." 논리, 그래. 서툰 논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인간의 논리. 개인과 개인의 논리. 페어리퀸의 입에서 나오고보니 그럴 수 없이 불쌍하게 들 리는 논리. 다레니안이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후작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주장하시오. 무시할 테니." 이제 논리마저도 깨어져버렸다. 다레니안은 이제 불길을 휘몰아쳐 후작 을 박살내어버릴까? 아니면 폭포같은 물기둥이 그를 휩쓸어가버릴까? 다레니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떨림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네 속에도 핸이 있구나." 길시언과 샌슨도 이제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레니안과 후작만을 바라보았다. 뭐라고도 말하기 싫은 장면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산의 울림도, 대지의 울림도 잠잠해졌다. 광폭하게 쏘아져올라가는 광 선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이제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있었다. 굳 이 말하자면 밝아서 보기 좋다는 것 정도랄까. 맙소사, 저 무지무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의 상징이었던 빛이 이제는 고작 조명이 되어버렸나? 카알, 좀 말씀해보세요.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됩니까? "네 속에도, 숨가쁠 정도로 맥박치는 핸이 있구나." 꽤나 멀었지만 할슈타일 후작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후작은 약간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핸? 핸드레이크 말이오?" "그래, 인간아. 너의 입으로 담기엔 너무나 고귀한 이름. 그러나 네 속 에도 핸이 있구나." 후작의 눈에서 순간 몸이 아플 정도로 사나운 미소가 비쳤다. 그는 교 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속에 핸드레이크가, 아니 핸이 있다고? 내게서 핸의 모습을 느낀단 말이지?"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였을까? 대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 시 할슈타일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 속에 있는 핸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내 앞에서 비키시 오! 그리고 날 방해하지 마시오!" 저 찢어죽일 녀석이잇! 지금 저 녀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악 독한, 말할 수 없이 악독한! 다레니안은 말없이 후작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 타오 르는 진홍색의 불길도 여전했지만 그녀에게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봐요, 다레니안! 지금은 화를 내도 돼! 저 유언할 새도 없이 죽어버려 야 적당할 녀석이 지금 당신과 핸드레이크의 관계를 자기 수단으로 사용 하려든단 말이야! "알았어." 다레니안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아. 오오, 안돼! "그러면 안돼!" 나도 모르는 새 고함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샌 슨이 기겁하면서 귀를 막았지만 난 그에게 사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한 발짝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면 안돼요! 저건 핸드레이크가 아니야! 저 작자의 속에 있는 핸드 레이크를 인정하는 것은 핸드레이크를 모독하는 거에요!" 후작은 마치 뱀처럼 민첩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다레니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후치. 난 느낄 수 있어. 어쩔 수가 없는걸." "어쩔 수가 없다니오! 뭐가, 뭐가 말씀이세요!" "네가 가르쳐 준대로야. 그게 너희들이잖니." 엑셀핸드가 어느새 내려온 것인가? 누가 도끼머리 같은 걸로 내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게 우리다. 다레니안 속에 있는 핸드레이크도, 내 속에 있는 핸드레 이크도, 그리고 할슈타일 속에 있는 핸드레이크도 모두 진짜. 영원의 숲 에 들어간 사람은 그 친구들도 잊어먹게 되지. '아직까지 그걸 모르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 는 것이 아니라구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 요. 그것이라고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구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드래곤 로드에게 했던 말이 단어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진짜 핸드레이크다. 그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다레니안…!" 목이 잠겨들어가는 듯하다. 누가 내 어깨를 짚었다. 누구지? "후치." 고개를 돌려보자 길시언의 침착한 얼굴이 보였다. "네 이야기, 그리고 페어리퀸과 후작의 이야기 모두 이해하긴 어렵지 만,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구나." "길시언." "페어리퀸의 뜻대로 하시게 내버려두렴." "페어리퀸의 뜻대로…" "그래. 내 듣기로, 정확한진 모르겠지만, 페어리퀸께서는 후작의 저 고 집있고 자신만만한 모습에서 300년전, 자유롭게 태어난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불태웠던 한 대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하구 나. 그의 당당함과, 그의 자신만만함, 그리고 그의 굳은 의지를 보시는 것 같은데… 맞아? 아, 고마워. 프림." 프림 블레이드가 먼저 대답한 모양이군. 난 잠겨드는 목으로 힘들게 침 을 삼키며 길시언의 붉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로선 연상하기 어렵지만, 페어리퀸께서 그렇게 느끼신다면 내버려두 는 것이 좋겠다. 후치." "그게 옳은 걸까요?" "페어리에겐 뭐가 옳은 거지?" 다시 뒷통수를 두드려맞는 느낌이 든다. 확실해. 어디선가 몰래 내려온 엑셀핸드가 폴짝폴짝 뛰면서 내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페어리에겐 뭐가 옳은 거지? 차원을 건너뛰고 세계를 건너뛰는 페어리 에겐 뭐가 옳은 것이지? "알 수 없지요." "그래. 우리 생각이나 우리 관념 같은 것을 무리하게 그녀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 "고마워요, 길시언. 당신은 역시…" 나의 왕이에요. 뒷말은 삼켜버리고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길시언은 되묻지는 않았다. 다레니안은 이제 호수 중심부까지 물러나고 있었고 후작은 꼿꼿이 선 채 우리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작의 부하들은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메드라인 고개에 뱀이 기어내려오는 것처럼 횃 불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붉은 광선도 이제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는 않았 다. 다레니안은 무슨 뜻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맙게도 다레니안은 곧 장 호수가 울리는 그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오는 자들은 돌아가!" 꿈틀꿈틀 내려오던 횃불들은 질겁하면서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레 니안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 영토 안에서 폭력을 쓰는 자는 영원히 인간 세상에서 그 흔적을 찾 을 수 없을 거야.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 하는 경고다. 검에서 손을 떼 라!" 떼라! 떼라! 떼라! 산울림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풀이 울렸다. 길시언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예의를 담은 동작으로 정중하게 프림 블레이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그의 동작을 따라 우리들도 각자의 무기를 다시 꽂아 넣었다. 모두들 정중한 동작이라서 절거렁거리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 았다. 후작은 고개를 홱 돌려 호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걸어오기 시작 했다. 다레니안의 중재에 의해, 완전히 비폭력적인 회담을 하게 된 건 가? 운차이는 그런 회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 되더니 옆으로 걸어 가서는 적당한 바위를 골라 앉아버렸다.길시언은 다가오고 있는 후작만 을 똑바로 노려보았고 그래서 나와 샌슨은 왠지 조금 왜소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아무래도 길시언과 후작이 이야기를 나눠야 될 듯하니까. 호수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은 이제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잠시 앞이 캄캄 할 정도였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자 조금 전처럼 달빛을 받아 푸르 게 빛나는 호수와 검푸른 숲과 산의 그림자들이 보였다. 달빛을 밟으며 걸어오던 후작은 대략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걸어왔다. 바람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리고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내려오는 것 인지 숲 속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잠시 후, 후작의 발걸음 소리 와 미미한 파도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후작은 갑자기 어두워져서인지 고개를 앞으로 조금 내밀어 길시언의 얼 굴을 살폈다. 보름달빛이라 서로의 얼굴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다. 과연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태자인가." 마구 나오는군. 길시언은 잠시 지체했다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렇다, 할슈타일."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시언의 뒤에 있던 우리들을 주욱 훑어보았 다. 그는 기분나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궁성 밖으로 나간 주제에 무리는 이끌어보고 싶었던 모양이군. 졸개들 을 졸래졸래 따라오게 하면서 꽤나 잘 도망치던데." 저 놈잇! 샌슨의 입에서 뭐가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시 언은 호흡을 좀 고르더니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라. 내 친구들은 네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 는 졸개와는 다른 사람들이니까." 하핫! 좋아요, 길시언. 몰래 사병을 기르고 있었던 사람에겐 썩 적절한 대답올시다. 후작은 두 팔을 조금 펼치더니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군. 도대체 왜 궁성의 일에 간섭하는 거지?" "뭐라고?" "왜 왕가와 귀족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란 말이냐? 자신의 능력에 닿지 않는 일에 손을 뻗는 것은 옳지 않아. 너의 그 냄새나는 방랑자의 생활 에나 관심을 쏟으란 말이다, 길시언. 이정표와 오늘 밤 먹거리에 대한 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피자는 도피 자답게 구는 것이 좋은 거야. 왜 세상의 일에 간섭하려는 거냐? 예의도 모른단 말이야?" "난… 궁성과 왕가의 일에서 도피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고향은 그 곳이다." 후작은 한 손을 허리에 짚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네 방에 못질을 하고 달려나간 것을 자랑할 생각인가 보군. 그건 자기 장난감을 자기가 생각하는 한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겨놓고는 아침에 집을 뛰쳐나가는 코흘리개의 야망찬 발걸음보다 더 웃기는 것이 었지." "주인의 식기 내용물에 군침을 삼키는 하인의 말치곤 너무 길군." 할슈타일의 독설에 대해 길시언도 독설을 구사할 생각인 모양이다. 반 란자에 대한 이 은유에 대해 할슈타일은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주인이라고? 네가 말하는 주인이라는 것이 뭔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 군. 그건 대마법사의 마법 장난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서스 왕가를 말하 는 것이냐? 아니면 떠돌이와 산적, 그리고 북부의 야만인을 끌어모아 만 든 이 구멍쥐의 소굴같은 나라를 말하는 것이냐?" "바이서스가 구멍쥐의 소굴이라면, 그 구멍쥐의 소굴에 빌붙어 300년 동안 제 살을 키워온 고슴도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양쪽 모두 표면적으론 침착해보였다. 하지만 둘 모두 서로의 본론은 꺼 내지도 않고 저런 가멸찬 독설만을 꾸준히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속 으론 꽤나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다. 후작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내 딸을 돌려줘." 길시언은 턱을 쑥 내밀면서 말했다. "그 전에 네가 받을 죄를 먼저 인식시켜주어야겠다." "내가 받을 죄?" "바이서스 왕가의 은혜를 감히 잊은 배덕자! 왕의 경비대원과 그의 가 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 그리고 왕의 드래곤을 사사로이 방면한 것! 그리고 분명 금지되어있을 대규모의 사병 육성!" 길시언은 하나하나의 죄목을 짚으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후작은 무반응으로써 길시언의 말을 달밤의 개짖는 소리로 만들어버렸 다. 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더 있나? 혹시 떠올리지 못한 모양인데, 조금 전부터 왕실 모독죄도 저지르고 있었다." "네 놈의 죄가 어디 그뿐이겠느냐! 하지만 지금껏 말한 것만 해도 널 세 번은 교수형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니 바이서스 왕가의 응징은 그쯤으 로 해두겠다!" "그걸론 모자라!" 이건 누구의 목소리지? 넥슨이잖아! 시오네! 해냈구나! 후작과 우리 일행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 의 별들 사이로 높게 떠있는 팬텀 스티드들의 모습이 보였다. 두 마리의 팬텀 스티드위엔 각자 넥슨과 시오네, 그리고 쟈크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핫! 해냈군!" 내 웃음 소리에 샌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날 바라보았지만 운차 이가 먼저 빠르게 말했다. "네가 소란을 떨고 시오네가 구하는 양동작전이었냐?" "예! 그래요." 운차이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조그만 꼬마 녀석이… 적국 간첩과 함부로 그렇게 손을 잡으면 못쓴 다." "협박받아서 한 거라니까요! 협력하지 않으면 잠든 우리 동료들을 다 죽이겠다고 말했어요!" 샌슨은 이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운차이는 씩 웃더니 다시 위를 올 려보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었겠군. 알았어." 후작은 이를 악물면서 고개를 돌렸다. 메드라인 고개에선 횃불들이 우 왕좌왕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서야 넥슨의 탈주를 알아차린 모양이군. 하늘에 떠있는 팬텀 스티드들은 호수의 경계에서 꽤나 떨어진 위치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시오네는 정말 이 호수 근처에는 다가오지 못하는 것 인가, 아니면 조심하는 것인가? 넥슨은 조금 숨찬 목소리였지만 날카롭 게 외쳤다. "바이서스 왕가는 빠져! 저 늙은 구렁이에겐 내가 받을 빚이 있다!" 길시언은 의아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넥슨 휴리첼! 네가 받을 빚이 무엇이란 말이냐? 독수리와 들개는 동 업자가 아니었던가? 같은 반역자들끼리 서로를 증오하는 까닭을 모르겠 군." 넥슨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후작이 말했다. "돌아와, 넥슨." "닥쳐! 이 더러운 놈!" 후작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마치 말썽만 부리는 학생을 앞에 둔 선생 같은 얼굴이었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네가 어떻게 해서 태어날 수 있었는지 모른단 말 이야? 멋대로 철부지 짓을 하다가 산산조각난 주제에 끝까지 나에게 반 항하려는 거냐?" ================================================================== 13. 대마법사의 만가……24. 뭐야? 어, 어라?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넥슨의 미친 듯한 고함 소리 가 호수 전체에 울려퍼졌다. "개만도 못한! 더러운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 샌슨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들개와 독수리가 싸우는 것은 대개 썩은 고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여기선 썩은 고기보다 더 복잡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고마워. 다음에도 종종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줘." 샌슨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후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인 거지? 우리는 모두 잠시 잠자코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들이 입을 다문 사이에 후작은 다시 차라리 친근하게 들 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 넌 기억하고 있을 거야.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을 누가 살려줬나? 조각나버린 네 머릿속에선 그것도 사라져버렸다고는 말 하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꺼낼 리가 없으니까. 대답해 보아라. 누가 널 살려줬는지." "개자식! 누가 우리 아버지를 죽게 했어!" 뭐야? 까뮤 휴리첼의 죽음 말인가?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네놈이 우리 아버지를 죽게 했어!" "그렇지 않아, 넥슨. 그건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곧 알려질 사실이었 다. 까뮤는 네 아버지이긴 하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선택 한 멍청한 자였을 뿐이야. 넘볼 수 없는 것을 넘보았지 않느냐. 형의 아 내를 건드려 인륜을 파괴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파괴한 자였어. 그는 그 죄를 받아 죽었을 뿐이야."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잠깐, 조금 전 후작이 그렇게 말했나? 길시언이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후작이 그 밀통을…" 로넨 휴리첼에게 고자질했구나! 맙소사, 그렇게 된것이었군! 할슈타일 후작이 아멘가드 휴리첼과 까뮤 휴리첼의 밀통을 알아차리고는 로넨 휴리첼에게 귀뜸한 것이었군. 그래 서 로넨 휴리첼은 까뮤를 죽여버리게 된 것이고. 넥슨은 목이 터져라 고 함을 질렀다. "웃기는 소리! 넌 우리 아버지를 시기한 거야!" "넥슨!" "할슈타일 가문의 그 누구도 라자가 될 수 없었던 크라드메서를, 우리 아버지 까뮤 휴리첼이 라자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아버지를 시기 한 거야! 그리고 크라드메서를 도로 빼앗기 위해 우리 아버지가 죽게 만 든 것이고! 인륜 좋아하시네. 네놈의 더러운 속셈을 치장하는 데 고귀한 말을 써먹지 마!" 이런… 말도 안나오는… 샌슨, 뭐라고 이 상황을 속시원하게 표현할 말 같은 거 없을까? 그러나 샌슨도 입을 쩍 벌린 채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 었다. 오히려 운차이가 눈을 있는대로 찌푸린 채 말했다. "Kjaeri, Talkomana ziishinu vohai…" "무슨 뜻이에요?" 운차이는 내 질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그저 이 지독한 이야기 에만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들개와 독수리의 소란 같군! 그 때 할슈타일 후작이 다시 외쳤다. "나오는대로 지껄이지 마라! 이 녀석, 아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 이군!" "뭐야?" "로넨 휴리첼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부인까지 죽이려 했을 때 그녀를 구한 것은 나였다. 그래서 네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 내가 없었다면 네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겠나! 그런데 내가 까뮤 휴리첼을 시기했다고? 아멘가드를 구함으로써 너 또한 구해낸 내가 말이냐?" "핫하하하!" 넥슨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화를 낸다거나 어이없어하는 것 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껄껄 웃다니? 넥슨은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그렇다!" "네가 우리 어머니를 구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네가 살아있는 것 아니냐!" "교활한 여우가 자기 꾀에 빠졌군. 멍청이, 난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 었어! 그 때의 상황이라면 우리 어머님께서 이미 들려주셨단 말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넥슨을 쏘아볼 뿐이었다. 넥슨은 잔혹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내가 직접 말해볼까? 우리 어머니를 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때 옆에 있었다는 말이지! 즉, 네 놈은 우리 아버지가 그 형의 칼에 맞아죽는 것을 방관한 다음 우리 어머니를 구해 낸 것이다. 내 말이 틀렸나!" 할슈타일 후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찌푸린 얼굴로 허공을 쏘아볼 뿐이었다. 넥슨은 길게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유도 말해볼까?" "그럴 필요 없어." "핫하하! 난 그것이 궁금했었어! 네가 왜 우리 어머님을 구해내었는지 말이야.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로 오랫동안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만" "결국은 네놈이 모으고 있는 드래곤 라자 꼬마들이 내겐 좋은 힌트가 되어주었지. 그리고 하슬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선 완전한 확신을 얻었 지!" "그만 두라니까!" "드래곤 라자의 혈통 창조!" 혈통 창조? 드래곤 라자의? 어, 그거야 할슈타일 후작의 유명한 악행이 잖아.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을 왜 말하는 거지? 후작은 짜증스 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어느새 기운 달은 넥슨의 등 뒤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넥슨은 이제 달 을 보고 우짖는 한 마리 늑대처럼 보였다. 그는 길게 울듯이, 그러나 웃 으며 외쳤다. "핫하하하! 디트리히를 손에 넣기 위해 그 어머니를 죽였듯, 날 얻기 위해 우리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이겠지? 넥슨 휴리첼이라는 당대 최고 의 드래곤 라자의 핏줄을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잖은가!" 엑셀핸드. 부탁이니 이제 뒤에서 내 머리를 때리는 짓은 그만 둡시다? 그러나 엑셀핸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렇다면 왜이리 머리 가 아픈 거람. 관자놀이는 누가 짓눌러대고 있는 것 같았고 이마 한가운 데에서는 소나무라도 하나 자라나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뿌리들이 파 고들어…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는군. 샌슨은 칼을 뽑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기 위해 애쓰느라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칼을 뽑아들어 후작을 후려쳐버리고 싶다는 말이겠지? 그 거야 내 마음도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구, 샌슨. 다레니안의 경고가 아 니었다면 난 당장 후작을 무릎꿇려놓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등에 그의 죄를 모조리 새겨주겠어. 지독한 인간 같으니! 사람을 뭘로 취급하는 거 야! 샌슨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후자악! 저 말이 사실인가앗!"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밤하늘에 떠있는 넥슨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뭘까. 길시언은 목이 메이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내 말을 정정해야되겠군. 네 녀석에겐 교수형은 너무 자비롭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후작의 머리가 휙 움직였다. 후작은 이제 희번 득거리는 눈으로 길시언을 쏘아보았다.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야수가 노려보는 것 같은 시선. 그는 입매를 들어올렸지만 웃는 것은 아니었다. "거지와 부랑자들의 왕자께서 황송스럽게도 내 죄값을 평가해주시는 건 가?" 놀랍게도 길시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나는 유피넬의 저울대 노릇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자질밖에 갖추 지 못한 자다." 길시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그것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제방 같은 단단함이었을 뿐이다. 그 목소리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힘은 몸이 아프도록 실감나게 느껴졌다. 길시언은 말했다. "하지만 난 바이서스다. 그리고, 이제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에게 존 문한다." 후작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쇳 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릿! 네가 네 여동생처럼 재가 프리스트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네 가 어떻게 아샤스께 직접 존문한다는 말이냐! 피 대신 구정물이 흐르는, 바이스서의 이름을 가진 그 몸에 어떻게 신을 담겠다는 말이냐! 헛소리 를 지껄이지 맛!" "피 대신 구정물이라고?" 길시언은 검을 쥐었다. 운차이가 빠르게 다가서며 말했다. "당신은 맹세했어. 그리고 다레니안의 경고를 잊지 마." "크으윽!" 길시언은 고함을 질렀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할슈타일은 낮은 웃음 소리를 내었다. "후후후. 맹세를 지켜라, 아샤스의 기사. 아샤스의 영광을 지켜라." 길시언은 목의 핏대를 모조리 곤두세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슈타 일을 바라보았다. 제길, 저 놈은 자신이 무방비상태로 내려왔다는 것을 이용하는군. 그 때 허공에 떠있던 넥슨이 속시원한 한 마디를 외쳤다. "할슈타일. 난 맹세한 기억이 없다." 후작은 다시 당황한 얼굴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그는 뒷걸음질치며 위 를 올려다보았다. 넥슨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시오네라고 했던가? 내 동료라고 했지? 내 몸을 구해주었다면 이제 내 의지도 구해다오. 저 쓰레기를 파멸시키도록 도와다오!" 그러나 시오네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넥슨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뭘 하는 거야!" 그제서야 시오네는 낮게 대답했다. 간신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넥슨. 난 저 호수로 다가갈 수 없어. 저곳은 페어리퀸의 영토야." "빌어먹을! 허락을 구하면 되잖아!"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어쨌든 난 다레니안의 영토에 다가갈 수 없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 계획 때문에라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 어." "네, 네 계획?" 시오네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뭐라고 짧은 몇 마디를 말했고 그러자 팬텀 스티드들은 아무런 울음소리나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넥슨은 발악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날 도와줄 수 없다면 내려줘! 네 도움 따위는 필요없으니 내 려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시오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팬텀 스티드 들을 돌렸고 유령의 말들은 산으로 가려진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 다. 넥슨의 고함소리가 계속 울려오는 가운데 그들은 완전히 산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멀건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운차이가 짧고 강하게 말했을 때였다. "칫! 가버렸군." 아, 물론 넥슨은 갔지? 그러나 고개를 내려보자 운차이가 말한 것이 넥 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어느 새 호숫가를 떠나서 고개를 되짚어올라가고 있었다. 운차이는 갑자기 살 벌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더니 낮게 웅얼거렸다. "쫓을까." 길시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없이 찌푸린 눈으로 고개를 바 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샌슨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길시언과 후작을 번갈 아 보는 사이에 후작은 이미 고갯길을 꽤나 올라갔다. 너무 늦었군. 지 금 쫓아가봐야 후작의 부하들과 만나기밖에 더하겠어. 길시언은 그 당연 한 사실을 지적했다. "아니. 돌아가자." 말을 마치자마자 길시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썬더라이 더쪽으로 걸어가려다가 갑자기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호수쪽을 향해 똑바로 서더니 말했다. "오늘 저녁, 여러번에 걸쳐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페어리퀸. 후작을 저지해주시고, 후치를 도와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페 어리퀸의 이름에 영원한 영광 있기를." 길시언은 그렇게 말하더니 무거운 동작으로 썬더라이더 위에 올라탔다. 그 다음 내가 호수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핸드레이크의 다레니안." 더 할 말은 없군. 나도 뒤로 물러났다. 지금껏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샌 슨은 머쓱한 표정이 되더니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에, 고맙습니다!" 샌슨은 그렇게만 말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운차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샌슨의 등 뒤에 올라탄 채로 우리 일행에게 돌아가기 시작 했다. 샌슨의 등 뒤에 앉아 고갯길을 올라가면서 난 뒤를 돌아보았다. 호수에 서 뿜어올라오던 붉은 광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레브네인 호수 는 그저 고요한 밤의 산중호수였을 뿐이다. 검게 반짝이는 잔잔한 수면 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의 그 엄청난 소란은 현실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고갯길을 올려다보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후작 일행들의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지피고 있던 모닥불을 꺼버리고 모두들 횃불을 드는 모양이다. 곧장 우리들을 뒤쫓아올 생각인가? 그러나 잠시 후 횃불들은 메드라인 고개를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작이 돌아가는데?" 내 말을 들은 샌슨은 잠시 슈팅스타를 멈추고는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길시언이 말했다. "페어리퀸 때문에 호숫가의 길을 이용할 수 없으니 호수를 우회하려는 모양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어쩔 수 없겠지." "아, 그런가요." 끝까지 쫓아오겠다는 말이지. 하지만 우회로를 이용해야 될 테니 빠르 게 쫓아오지는 못하겠지. 좀 느긋할 수는 있겠군. ================================================================== 13. 대마법사의 만가……25. 느긋할 수 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먼저 시작한 것은 샌슨이었다. 샌슨은 논리적이고도 이성적인 대화라는 고상하고도 품위있는 수단을 깨끗이 무시해버리고는 내 팔다리를 꺾어대 기 시작했다. 그리고 샌슨에게서 팔다리가 꺾여지면서 카알의 점잖게 탓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정신건강에 대단히 해로운 경험이었다. 제길, 사춘 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연약한 청소년의 가슴에 일생 남아있을 앙금을 남기면 어쩌려고옷! (아이, 닭살스러워라.) "협박당했… 흐어아각!"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네 독단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뭐라고 특별히 변명할 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먼. 네드발군. 물론 자네의 그 때 그 상황을 유추해보자면 자네의 그 불유쾌하면서도 당황스 러운 상황에서는 차분한 생각과 충분한 고려가 동반되기에는 어려운 점 이 많을 것이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 라도 자네의 결정과 그 결정에 따라 발생하게된 그 이후의 해괴망측하고 도 놀라운 사건들의 연속 안에는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구해보자면 자네의 결정은 여 러 가지 각도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제발 그렇게 긴 문장으로 말하지 말라구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잖 아. 게다가 카알이 길게 말하면 길게 말할수록 샌슨의 공격도 길어지잖 아요! "흐험, 참, 그거. 요 녀석아! 요령도 없었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깨 워놓고 볼 일이 아니냐?" 얼씨구, 엑셀핸드까지.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그만하지요, 카알, 엑셀핸드. 후치도 협박 때문에 한 짓이 아니겠습니 까. 그리고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괜찮지 않을까요." 아프나이델! 아프나이델! 내가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에게 최고품질의 초 10 상자 정도 선물할 용의가 있어요! 그러나 카알은 매정 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일행들이 아까 저녁에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서 간신히 후작과의 거리를 떨어트려 놓았다는 점을 생각해봐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네 드발군은 그 수고로움을 완전히 무로 돌릴지도 모르는 일을 저질렀단 말 입니다." "협박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제 용서하시죠." "음… 알겠습니다. 퍼시발군? 이제 그만 네드발군을 풀어주도록 하게." 그러자 샌슨은 콧소리가 많이 섞인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지? 이거 놔라, 임마! 콧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쑤셔넣지 말란 말 이다!" 내가 어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인가? 흠. 난 잡아당기고 있던 샌슨 의 코를 놓아주면서 외쳤다. "그럼 샌슨도 내 귀 놓으라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게 모양이 이 상해지겠잖아!" "개성있게 만들어줄 수 있었는데." "다시 집어넣을 거야!" 잠시 후, 간신히 두 헬턴트 사나이는 필사의 사투(?)를 멈추고 원래의 우애어린 관계로 돌아갈 것을 굳게 맹세했다.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 고 있던 세번째 헬턴트 사나이는 한숨을 쉬면서 마법검의 왕자에게 말했 다. "그래도 네드발군 덕분에 많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겠군 요." "예. 그렇습니다." 길시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카알은 날 바라보면서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돌맨 할슈타일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단 말이지. 그리고 내일쯤 조우하게 될 거라고?" "예. 시오네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후작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후작에게 크라드메서 를 내어줄 수는 없게 되었군. 이제 목표가 두 가지로 늘어난 셈인가. 크 라드메서가 발광하지 않도록 라자를 연결시켜준다. 그러나 후작과 관계 된 인물은 저지한다." 카알은 그렇게 정리해보더니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무릎을 모으고 는 그 위에 우울해보이는 얼굴을 얹어두고 있었다. 카알은 어렵사리 말 을 꺼냈다. "레니양." "예."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뭐 특별히 더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 까?" "아뇨. 그런 건 없어요." 레니는 마치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친부의 말과 행동에서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일까?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예. 그럼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일을 도와줄 거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레니는 잠시 대답을 보류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조금 들어올리더니 주위에 둘러앉은 우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길 이 서로 모르는 척하면서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던 나와 샌슨에게 마지막으로 머물고나서,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저건 무슨 의미이지? 앗! 딴 생각하다가 샌슨에게 두 번 연속 옆구리를 찍혔다! 에잇, 난 재빨리 세 번 연속으로 샌슨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 자 샌슨은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내 옆구리 를 네 번 연속으로 찔렀다! 이이이잇! "할슈타일 후작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저에게 부탁을 하고 이 곳까지 절 데리고 온 것은 여러분이에요. 그리고 제가 하겠다고 한 일은 끝까지 하겠어요." 레니는 최대한 빠르게 말했다. 듣고 있던 네리아는 씨익 웃더니 레니의 어깨를 안았다. "자랑스러워, 레니." "네리아 언니." 아… 우리는 왜 저처럼 우애로울 수가 없을까. 왜 나와 샌슨은 서로를 포용할 수 없단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야. 그럼. 시정해야 돼. 우리는 서로를 포용해야 돼. 그러나 먼저 샌슨의 옆구리를 가차없이 다섯 번 찌 르고 난 다음에. 결국 샌슨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내 목을 조르기 시작 했고 난 그의 다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구르는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카알이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모두들 피곤할 테니 잠시 눈을 붙입시다. 후작 일행들이 호수를 우회해서 다가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쯤 늦어질 겁니다. 원래는 이틀 쯤 늦어지지만 저 사병들은 훈련 이 썩 잘되어 아마도 네 발로 걸을 테니 두 배로 빠른… 죄송합니다. 임 마!" "아, 예. 그럼 쫓기는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겠군요. 모두들 쉬도록 하 십시다. 하지만 내일은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합시다. 돌맨 할슈타일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우리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기는 어려울 테니, 어떻 게든 그들을 피하도록 하십시다." 제레인트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그런데요. 이 갈색산맥이 넓긴 하지만 끝까지 그들을 피할 수 있 겠습니까? 뭔가 대책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 침버씨. 우리가 성공한다면 그들은 달아나야 되겠죠." "예? 아… 그렇군요!" 그래, 우리가 성공한다면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는 거지. 그럼 할슈타일 후작이고 돌맨이고간에 모조리 달아나기 바쁠 테지. 하하하. 샌슨의 아래에 깔린 채로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자 샌슨은 더 욱 집요하고도 냉혹한 공격을 퍼부어왔다. 맙소사! 계집애들도 아닌데 꼬집냐!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 그 어두운 배후의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전해져내려온 가장 무서운 공격을 받아보아라! "으핫하하하! 그만, 그만 간질어, 헥, 우키키키! 으칼칼칼!" 카알과 길시언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꿈 속인가? 그렇진 않았다. 왠지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 유로서는 조악하지만 어쨌든 나는 자면서 뒤척거리다가 눈을 뜬 것이고 그 때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아있는 카알과, 그리고 그 옆에서 그를 비 스듬히 바라보고 있는 길시언을 보게 된 것이다. 다시 잠들려고 할 때 길시언이 말했다. "대마법사는 무엇을 원한 것일까요." 그는 프림 블레이드를 옆에 세워두고는 두 손으로 작게 피워둔 모닥불 을 쬐고 있었다. 카알은 장작 하나를 집어 불 속으로 던지면서 대답했 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든 종족들이 자신의 부조리를 벗어나게 되는 것을 원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저녁 페어리퀸이나 할슈타일과 이야기를 나누 면서,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잠이 들려다가 다시 깨어버리는데. 길시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걸. 난 눈을 살짝 감으면서 숨소리를 고르게 하며 두사람의 말을 들었다. 카 알은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기분을 느끼셨습니까." "종족의 부조리라는 것이 과연 뭔지를 말입니다. 난 오늘 저녁 할슈타 일과 페어리퀸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대립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카알 도 보았지요?" "예." "다레니안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아, 거리가 멀어서 그 때 의 대화는 듣지 못했겠군요." "아뇨. 아인델프님이 다 전해주었습니다. 아인델프님은 드워프의 굉장 한 청력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카알도 다레니안이 물러난 그 말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으셨겠군요?" "예." 길시언은 앉은 자리가 불편하다는 듯이 몸을 좀 뒤척이다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야 핸드레이크를 초상화로밖에 보지 못했고, 그리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하는 식으로 전해들은 작은 일화들에서 간신히 그 대마법사의 거대한 윤곽의 일부분을 추측할 정도입니다. 하지 만 그래도 다레니안이 할슈타일에게서 핸드레이크의 모습을 느낀다는 것 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지요. 길시언과 마찬가지로 인간 아닙니까. 페어리 퀸께서 왜 그렇게 느끼시는지 짐작하기는 지난한 노릇입니다." "예. 나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 었던 것은 말입니다, 그것이 페어리의 부조리냐하는 것입니다." "페어리의 부조리라고요?" "부조리라면 너무 어감이 강하고, 단점 정도로 할까요. 어쨌든 그것이 우리와 페어리 사이의 이질점일까요? 그녀는 세계를 건너뛰고 차원을 건 너뛰면서도 우리가 바이서스와 일스를 보면서 느끼는 정도의 이질감밖에 는 느끼지 못할 겁니다. 맞습니까?"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예. 그렇다면 그녀는 너무 거시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어서 우리 인간 들, 이 개개인 같은 미시적인 존재들을 서로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 는 것이 아닐까요? 할슈타일과 핸드레이크라니,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글쎄요." "동의하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는군요?" 길시언의 말에 카알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핸드레이크가 과연 미시적인 존재인지를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 길시 언." "인간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 세계를 재편성해버리겠다는 그 굉장한 야심, 신이 되 려고든 터무니없을 정도의 상상력, 그리고 드래곤 로드를 쫓아버릴 수 있는 그 추진력. 멋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점에선, 비록 방향은 다르긴 합니다만 할슈타일 후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뭐라고요?" 모포 아래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발에서 발가락들이 꽉 오므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카아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카 알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도 한 잔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되니 짐 보따리를 풀면 곤란하겠지요." "카알, 저…" "전 페어리퀸의 입장이 되어보려한 것뿐입니다. 조금 전 제가 핸드레이 크를 거론하면서 말했던 그의 특징들을 기억하시겠지요? 이제 할슈타일 로 바꿔볼까요?" "예?" "드래곤 로드가 정한 드래곤 라자의 시한을 제멋대로 늘려버리겠다는 그 굉장한 야심, 라자의 혈통을 모아 새로운 종족 - 예. 난 새로운 종족 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혈통에 의해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무 방하겠지요. - 새로운 종족, 드래곤 라자를 만들어내겠다는 그 터무니없 을 정도의 상상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한 점 꺼리낌없이 파괴 해버릴 수 있는 그 추진력." "카알…!" "페어리퀸께서 할슈타일의 모습에서 핸드레이크를 느꼈다 해도, 난 이 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부한 말이 좋은 설명이 될까요. 핸드레이크와 할슈타일은 서로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양 극단에 서 있다 해야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닮은꼴이라고 느껴집니 다." "이해는 됩니다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페어리퀸 보시기엔 그럴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편하자고 만들어낸 윤 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분께서 보시기에…" 길시언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파격적인 말이로군요, 카 알. 젠장. 나쁜 꿈을 꾸게 될 것 같은데. 세계로부터 내가 서서히 빠져나올 때, 카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세레니얼양은 핸드레이크를 추적하고 있지요. 그가 죽지않았다고 생 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 이제 그녀에게 찬성할 수가 없게 되었습 니다. 대마법사는 죽었습니다." "예? 아니, 무슨 말씀인지?" 길시언의 당황한 목소리에 대한 카알의 대답은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지 는 목소리였다. "칸 아디움의 안티고어 시장은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 는 우리 나라의 가장 소중한 뿌리이자 긍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대왕은 한 인간이 아니라 이 나라 자체였고 저 대마법사는 우리의 정신 그 자체였지요. 나 또한 지금껏 그렇게 알아왔고 그렇게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카알?" "대마법사는 죽었습니다. 한 인간인 핸드레이크가 있을 뿐입니다. 여덟 별을 추구했지만, 그 또한 스스로의 부조리를 안고 걸었던 인간일 뿐이 지요. 대왕과 마찬가지로. 이제 더 이상 내게 우리의 정신 자체이며 우 리의 전설이던 대마법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들었던 그에 대한 모 든 이야기, 전설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된 그의 만가일 뿐입니다. 우리들 은 대마법사의 만가만을 되풀이해서 불러왔을 뿐이고, 단 한순간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서야 그를이해하고 그 를 사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난 눈을 감고 3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 핸드레이크를 봅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1. …그러나 드래곤 라자가 보여주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하 여 많은 이들이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착각하고 있다. 이 드래곤 라자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훗날 그들의 재앙이자 바이서스의 재앙인 저 갈색산맥의 크라드메 서의 라자 살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온몸을 불태 워 바이서스를 구하고자 했던 바이서스의 진정한 은인인 저 할슈타일 후작, 300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내려온 라자 가문 의 수장마저도 간과한 단 하나의 사실이 있었으니…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3 권. P. 527 (770년 돌로메네 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입으로 숨을 쉬면 안된다. 코로 숨쉬어야 된다. 하지만 산에서 불어오 는 바람은 얼음장 같았고 코는 이미 얼어붙은 것 같다. 지금 콧김을 세 게뿜으면 아마 얼음 조각들이 더많이 튀어나올 거야. 계속해서 차가운 공기가 들어간 목에서는 피맛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젠장. 지독한 산바 람이야. 절벽 옆을 따라 난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위쪽으로 까마득한 절벽, 반대쪽은 아래쪽으로 깍아지른 벼 랑. 그리고 멀리 산봉우리들과 바위, 숲, 그리고 구름들. 어쨌든 높은 산지에서 볼만한 것들은 다종다양하게 펼쳐져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으니 벼랑쪽으로 다가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 는가. 따라서 떨어질 염려를 할 필요는 없다… 는 생각은 웃기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거세게 부는 바람에 빨려들어가는 기 분을 느끼며 그대로 벼랑쪽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한 손을 바위벽에 붙인 채 손바닥이 쓸리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걸어야 했다. 쓸리는 것 은, 어쨌든 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계속 들어올리고 있는 팔은 추위와 피로 때문에 곱아드는 느낌이 온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지쳐서 저절로 아래로 늘어지는 손을 힘 들게 들어올려 바위를 짚는 것은 이제 의지나 힘보다는 습관성에 가깝 다. 지금까지 걸어왔고, 멈추지는 않았으니 그저 걸어가는 것. "태양은 말이지," 앞에서 꿋꿋이 걸어가던 엑셀핸드가 난데없이 말한다. "이보다도 훨씬 더 높은 등반을 매일 한다구." 꽤나 쉬어버린 목소리다. 난 피식 웃으며 다시 레니를 추슬러올렸다. 레니는 내가 추슬러올리는대로 맥풀린 몸을 맡기더니 내 귀에 대고 힘없 이 말했다. "미안해, 후치." "괜찮아. 말을 끌고 오는 것보다야 레니를 업고 걷는 것이 미관상으로 도 훨씬 보기좋고 기분도 좋은 일이야. 아, 이런. 너무 속보였나?" "후치…" "그런데 밧줄이 아프거나 하진 않아?" "아니, 안아퍼. 전혀." 레니는 밧줄과 망토를 이용해서 내 등에 업혀있었다. 산 속의 길을 걸 으며 두 손을 쓰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짜낸 방법이다. 어머니들이 아기를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처럼 난 망토와 밧줄을 적당히 이용해서 레니를 내 어깨와 허리에 묶어버렸다. 그래서 배낭은 가슴 앞에 매고 바 스타드는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레니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녀 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은 허리나 다리를 파고들어가는 느낌이겠지. 사 실 나도 OPG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내려앉는 느낌이거든? 하지 만 난 더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뒤쪽에선 말을 끌고 갈색산맥을 올라오는 사람들이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지친 채 올라오고 있었다. 말들도 역시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아, 말은 원래 말을 하지 않던가? 말들은 온몸이 하 얀 거품으로 뒤덮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고 있었다. 썬더라이 더를 제외한 모든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는 점에서 길시언은 자 랑스러워 해도 좋을 거야. 말들이 저렇게 지치지만 않았어도 레니를 말 에 태우고 올 수 있었을 텐데, 덕분에 내가 레니의 말 노릇을 하고 있잖 아. 사실 길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시무시 하고 내려다보는 절벽은 현기증이 날 정도이긴 하지만, 어쨌든 길 자체 는 평탄하고 완만한 것이다. 게다가 엑셀핸드는 우리 일행을 생각해서 가장 쉬운 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급한 경사나 계곡 같은 것 을 만나지 않는 대신 추위에 떨면서 완만한 경사를 지겹도록 올라간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걸어온 것이 벌써 여섯 시간째다. 돌맨 할슈타일과 레티의 프리 스트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꼭두새벽에 출발했다. 새벽녘에 걷 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짐은 모두 말 여섯 마리에 나눠실었기 때문에 가뿐하게 몸만 가지고 걷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엑셀핸드는 갑자기 길에서 벗어나더니 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도 아닌 계곡과 능선 사이를 넘어지고 걸리고 하면서 힘들게 걷다가 조금 후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나자 우리들이 중부대로를 왼쪽으로 까마 득하게 내려다보는 위치에 올라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샌슨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저게 중부대로야? 우와, 높이도 올라왔네?" "흐음. 이곳이 드워프들의 통행로로 접어드는 지름길이라네. 중부대로 로 해서 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거든." "아,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 중에 드워프들의 광산에 갈 수 있는 것입 니까?" "못되도 정오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대충 아침 요기를 하 고 출발하세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중부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서, 땔감을 구할 수 없어서 불 도 피우지 못한 채 차가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운차이가 갑 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중부대로쪽에 사람들이 보이는군." 아래를 내려다보자 과연 조그맣게 꼬물거리는 붉은 반점들이 보였다. 온통 회색이나 갈색, 초록색 등의 땅에서 붉은색 옷은 잘 보였다. 그런 데 운차이는 그 옷과 그 얼굴까지 대충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꼬마가 보이는군. 15, 6세 쯤 되어보이는데. 가벼운 갑옷. 무장은 단 순해.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 희한하 군. 모두들 머리를 바싹 깎았는데. 아주 짧아."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입니다. 돌맨의 일행이군요. 으음. 인 원이 얼마나 됩니까?" "…30 명. 돌맨까지 31명이오." "그래요.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자 엑셀핸드는 기분좋게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됐군! 저 녀석들은 이 지름길을 모르거든. 그래서 훨씬 더 서쪽으로 간 다음 자날 한타봉으로 들어오는 드워프들의 통행로로 접어들게 될 거 야. 대략… 여덟 시간이나 아홉 시간 쯤 앞서게 되겠군." "좋군요. 우리가 앞서고 있다는 말이네요? 힘이 나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엑셀핸드는 갑자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얼 떨떨한 표정을 짓자 엑셀핸드는 이렇게 말했다. "두 시간 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두고보겠네." 그리고 두 시간은 커녕 한 시간도 못가서 모두들 말에서 짐을 풀어내어 어깨에 매어야 했다. 말들이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대단히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다시 다섯 시간 후, 난 갈색산맥의 수목 한계선 근처에서 등에 완전히 지쳐버린 레니를 업은 채 절벽 옆의 길을 걸어가 고 있는 것이다. 엑셀핸드는 기분좋게 말했다. "후치, 정말 강단이 대단하군? 인간치곤 정말 괜찮아. 한 사람까지 업 고서 말이야." "불쌍해보인다면 나 대신 레니를 업어주시죠?" "그래줄까?" "굳이 레니의 다리를 땅에 질질 끄는 것으로써 자신의 드워프다움을 느 껴보시고 싶으시다면야…" 나와 엑셀핸드의 농담을 듣고 있던 레니가 다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 다. "미안해, 후치. 너무… 무겁지?" "아냐. 천만에. 레니는 너무 가벼워. 살 좀 불려야 시집가겠는데." "시집 안… 간다니까!" "그 말이 아냐. 지금으로선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갈 확률이 높다는 말이지. 살 좀 더 붙이고, 좀 포동포동해져야 사랑받겠다? 왠지 장작개 비를 등에 맨 듯한…" "…후치이잇!" "오우, 오! 안돼. 당기지마! 이런, 귀 잡아당기지 마! 절벽이 옆이야! 균형 잃으면 떨어지다구!" "꺄아악! 후치! 흔들지마! 꺄아악! 꺅!" "레니, 제발! 눈, 눈 가리지마!" 우리가 이런 괴상망측한 구경거리를 제공한 덕분에 일행들은 모두 크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멀리멀리 울려퍼졌다. 잠시 후 우리들은 다시 고요 속에서 자날 한타봉을 올라갔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을 돌이켜봐도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떠 오르는 것이라곤 오로지 지겹도록 다리를 움직이던 느낌 뿐이다. 아, 굉 장한 추위도 기억난다. 간혹 우리들을 둘러싸서 꿈속을 걷는 기분에 빠 져들게 만들던 짙은 구름들도 기억나고, 구비구비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기막힌 산봉우리의 모습도 기억나고, 고산지대라서 볼 수 있는 말라붙은 고목의 모습도, 그 아래 힘들게 자라나는 이끼들… 기억나는게 꽤 많네? 레니를 업고있던 등은 따스했지만 얼굴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얼어붙어서 상당히 희한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기억나는군. 그렇게 또다른 구비를 하나 돌았을 때, 갑자기 눈 앞이 크게 펼쳐지며 우리 앞에는 분지가 나타났다. "우와?" 내 목에 머리를 파묻은 채 거의 까무라쳐있던 레니가 놀라서 머리를 드 는 것이 느껴졌다. 레니 역시 짧게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우와?" 자! 지금부터 여기 서서 올라오는 일행들을 감시하자. 그들도 모두 '우 와?'라고 말할까? 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우와?" 샌슨… 역시 나의 헤아림을 벗어나지 못하는군. 껄껄껄. 우리들은 앞으 로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분지의 끄트머리에 일렬로 서서 눈 앞에 펼쳐진 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희한한 장소였다. 계속되는 절벽과 산봉우리들 사이에 이런 지형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했다. 언뜻 보기에 분지는 꽤나 넓었 는데 거의 우리 고향 헬턴트 마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지금껏 올라오 면서 바위의 회색에 익숙해진 눈은 눈 앞에 펼쳐진 풀들의 현란한 초록 색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분지 주위의 산봉우리들이 바람을 막아줘서인지 이곳에는 안개 비슷한 그 구름들도 없었고 나무들도 모두 꼿꼿이 자라나고 있었다. 분지라기보 다는 일종의 계곡이라고 불러야 될까? 옆에서 튀어나온 봉우리들 때문에 분지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분지에서 옆의 산봉우 리들을 만나는 위치에는 거대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려가지 않을 거야?" 엑셀핸드의 말이 떨어지고나서야 우리들은 간신히 분지로 내려섰다. "아, 후치. 이젠 내려줘." 레니를 내려주고나자 정말 날아오를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따스하게 보호되던 등허리가 선들선들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흐 음. 상쾌하군. 말들은 풀을 밟게되자 다시 기운을 내는 듯했다. 그 점에 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한없이 올라오기만 하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바야흐로! 평지를 걷고 있는 것이다. 다리가 그대로 없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우리가 들어온 분지의 입구에서 아래쪽으로는 길이 나있었다. 길 옆으 로는 키가 작고 억센 풀들이 빽빽하게 나있었다. 간혹 바위들 사이에서 멧토끼 같은 것이 훌쩍 뛰는 모습도 보였다. 멧토끼라. 크라드메서의 배 를 채우려면 토끼가 몇 마리가 필요할까? 그런 생각에 잠겨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다. 갑자기 앞에서 걸어가던 제레인트가 멈춰섰다. 뭐지? 갑자기 왜 길을 막고 멈춰서는 거야? 제레인트를 돌아보자 그는 우리 정면의 숲 사이로 드러나보이는 거대한 절벽을 바라본 채굳은 얼 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쩍 벌어져있는 것을 보고는 난 크게 놀라 버렸다. 아니, 왜 이러시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그대로 그 절벽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거대한 절벽의 아랫쪽에 는 굉장히 커다란 굴이 뚫려있었다. 히야. 그 동굴 진짜 크네. 그 크기 로 말할 것 같으면 드래곤이라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 정도… 마음대 로 오갈 수 있을 정도… 정도…? 그 때 제레인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레어닷!" 으악! 크라드메서의 레어다! 일행들은 일대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몸을 숨겨! 몸을 숨겨!" 일행들의 소란 속에서 길시언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는 검을 뽑 아들고는 길에서 벗어나 나무에 몸을 붙였다. 말들의 요란한 비명 소리. 엠뷸런트 제일은 발길질을 하다가 샌슨을 걷어찰 뻔했다. 샌슨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아버렸지만 "아이고!" 곧장 몸을 굴려 일어나 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카알은 길 옆으로 후다닥 달리다가 넘어질 뻔했 다. "으악!" 그런데 쓰러질 뻔한 카알을 네리아가 간신히 부축하는 모습 뒤로, 난 아주 이상한 것을 보고 말았다. 아프나이델이 얼굴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선 운차이가 싸늘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상황에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 지? 그 때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드디어 참지 못하 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핫하하하하!" 뭐야? 아프나이델이 돌았 나? 너무 무서운 일을 당해서 순간적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거나… 다 음 순간 일어난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 거대한 동굴에서 동굴의 크기에 비해 볼 땐 우스꽝스럽게 작아보이 는 세 명의 드워프들이 달려나온 것이다. 우리들이 모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동굴에 서 달려나온 드워프들은 우리들쪽으로 열심히도 달려오고 있었다. 굉장 한 속도. 드워프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달 려오고 있었다. 그 때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엑셀핸드?" 엑셀핸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동굴에서 달려오는 드워프들 쪽으로 마주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지? 제레인트가 사태를 알아차린 사람 특유 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크라드메서에게 쫓기는 거야!" 이런, 젠장! 길시언은 이를 갈면서 외쳤다. "이런, 엑셀핸드를 도와! 드워프들을 구해!" "젠장! 준비도 못하고 바로 싸움이냐!" 샌슨과 길시언은 곧 검을 하늘에 휘두르며 달려갔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아프나이델은 이제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난 아무래도 사태가 이상하다 고 보고는 운차이를 살폈다. "운차이? 가야죠?" "왜." "어, 어, 드워프들을 구해야…" "뭐로부터." 어, 어라? 왠지 할 말이 없어지는 기분이 든다? 크라드메서로부터라고 대답하면 창피를 톡톡히 당할 것 같은 기분이… 그 때 아프나이델이 겨 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저, 저건 드워프들의 광산이야. 킥킥킥!" 뭐라고? 그 때 저편에서 엑셀핸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오래 간만이야, 친구들!" 으으윽. ================================================================== 14. 정답이 없는 선택……2. "그렇다면 지금은 폭풍 전의 고요, 뭐 그런 겁니까?" 아프나이델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알은 얼굴 앞에 두 손 을 모으더니 합장한 손으로 이마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난 고개를 돌려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는 절벽에 뚫려있는 거대한 광산에서 허겁지겁 달려나온 드워 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광산에서 일하다가 바로 달려나 왔는지 이마에 희한하게 생긴 상자를 붙인 채였다. 그 상자는 이마에 대 고 가죽끈 같은 것으로 머리에 묶게 되어 있었고 그 안에선 빛이 새어나 오고 있었다. 캄캄한 광산 속에서 사용하는 조명인가 보지? 그들의 몸에 도 뭔가 알 수 없는 장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희한한 광부용 장비들보다 더 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그들 의 얼굴이었다. 그것참.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겠는데. 양지기가 아닌 바에야 양떼 들이 모두 똑같아 보이듯이, 나에겐 드워프들이 모두 똑같아 보인단 말 이야. 똑같이 작은 키에 똑같이 다부진 몸매, 똑같이 늘어트린 수염 (광 산에서 나온 드워프들의 경우엔 수염이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 좀 달랐지만.) 입고 있는 옷마저 똑같았다면 도저히 구분하지 못했을 것 같군.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자 역시 서로에게서 미미한 차이는 느낄 수 있었 다. 처음에는 똑같은 목소리로 들렸던 그 목소리들도 이제는 그런대로 각자의 성격을 담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드워프 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대화를 나누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는 것이 지루해진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피로한 얼굴을 한 채 바위에 앉아있다가 내 얼굴을 마주보고는 어슬픈 미소를 짓는 레니가 보였다. "힘들지?" 레니는 간신히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쓰러진 사람의 모든 징후를 보여 주고 있었다. 레니는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숨가쁘게 말했다. "힘들어." "다리 주물러줄까?" "하아, 하아. 그럼 좋지." 레니는 바위에 앉은 채 다리를 쭉 뻗었다. 으윽. 사양할 줄 알았는데. 난 레니의 옆으로 다가가 OPG를 벗고는 그녀의 깡마른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레니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아흐흑, 아흐흐흐! 하악, 아후우!' 곧 맥빠진 동작으로 머리를 푹 숙였다. 레니의 비명소리 에 놀란 제레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왔으니까, 더 힘들 일은 없을 거야." 레니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으면서 말했다. "다왔긴 하지만, 후우, 후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긴, 진짜 그게 문제는 아니다. 갈색산맥의 북쪽 경계에 있는 자날 한타봉의 서쪽 사면, 드워프들의 대 광산 입구 가까운 곳에 지쳐버린 채 앉아서, 우리는 지금 크라드메서를 추적할 길이 막혀버렸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엑셀핸드와 드워프들 을 바라보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다시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웨이크닝 사운드가 멈춰버려서 더이상 위치를 추정해 볼 수가 없게 되 었답니다. 아무래도 크라드메서는 이제 웨이크닝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 한 모양입니다.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답니다. 드워프들은 지금까지 들려온 웨이크닝 사운드로서 크라드메서의 레어를… 꽤나 좁은 반경 내에 설정할 수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도를 작성했다는군요. 허 엇? 맙소사. 반경 1펜큐빗 정도랍니다." 카알은 갑자기 히죽 웃으며 실없는 말을 했다. "나도 한 때는 드워프어를 공부해볼까 했지요. 결국 욕심만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런데 아프나이델께서는 어떻게 드워프어를 아는 겁니까?" 카알은 적당히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아프나이 델은 얼굴을 붉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지금 마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텅즈(Tongues)마법으로…" "흠. 아인델프님께서는 드워프어를 사용해서 말씀을 나누시잖습니까." 일부러 자기들 말로 하고 있는 것이니 엿듣는 것은 조금 무례한 것이 아니냐는 카알의 점잖은 질책은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시뻘겋게 변하게 만들었다. "예. 엿듣는 것이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어차피 엑셀핸드님이 전해주실 말이니까."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조금 전의 자세로 돌아가버렸다. 절벽 옆의 이 광산은 분지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에 속해 있었다. 그래 서 고개를 조금 돌리면 분지 바깥에 펼쳐진 갈색산맥 지대 전체의 조망 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웅혼한 산맥과 봉우리들, 시야 닿는 곳 모두가 산봉우리였다. 마치 어마어마하게 큰 쟁기로 마구 파헤쳐버린 땅처럼 주 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평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갈색산맥인가? 공기가 희박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맑아서 그런 것인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들도 손에 잡힐듯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 에 산봉우리들은 터무니없이 멀어진다. 지상의 아기자기한 사물에 익숙 한 눈으로 바라보기엔 촛점을 맞추기가 어려운 곳이다. 한 점에 촛점을 맞춘다 해도 그것은 사실 점이 아니라 집채만한 산인 것이다. 산, 산, 산. 지평선은 사라져버렸다.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도는 구름들은 마치 산들이 너울을 쓴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경악해버릴 광경에서 고 개를 돌려 보다 안심되고 내 수준에 맞는 사물인 사람들을 본다. 운차이는 가엾게도 기가 팍 죽어버렸다. 그는 갈색산맥의 조망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래 쪽의 분지만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그 옆에선 샌슨이 지금 무슨 대화 가 오가는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운차이를 향해 이죽거리고 있었다. "이봐, 운차이. 괜찮은 경치잖아. 한 번 고개를 들어보라고." "시끄러." "여기까지 어렵게 올라왔는데, 좀 봐두는 게 좋잖아?" "이 자식아! 날 귀찮게 하지마!" 운차이는 이를 북북 갈더니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허, 참. 네 리아는 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운차이. 정말 왜 그러는 거야? 왜 산들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거지?" "내 사정이니까 신경 끊어!" 네리아의 눈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녀는 욱 하면서 앞으로 한 발 내딛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젖고는 조금 전보다 더 상냥하게 말했다. "알았어. 운차이가 불편하다면 굳이 볼 필요야 없겠지. 미안해." 운차이는 고개를 조금 들어 이상하다는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난 소리없이 이죽거렸다. 아이고, 저걸 이해 못해? 사막 에서 태어나서 지평선을 바라보며 산 사람이 갑자기 이런 고지대에 올라 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어. 수평선을 보며 자라난 항구의 소녀인 레니는 운차이를 잘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후아, 후아. 나도 사실 저 광경, 무서울 정도야. 이쪽을 보는 게 편 해. 후아아… 운차이 아저씨 마음을 알겠는걸." "무섭다고?" "응. 저렇게 많은 산봉우리들이 내 발 밑으로. 히유우우. 멋있긴 하지 만, 헤엑. 너무너무 끔찍하기도 해. 하늘에 떠있는 것 같아." "끔찍하다고? 흐음. 그렇게까지 심한 건가?" 그 때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운차이에게서 굉장히 울리는 신 음소리가 들려왔고 난 더 이상의 의심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운차이를 바라보고 있던 카알이 이 사태를 간단한 말로 정리해주었다. "가벼운 고소공포증이로군." 그러자 네리아는 까르 르 웃었다. "헤에, 헤. 난 낙뢰공포증이고 넌 고소공포증이니? 까르르르!" 흐음. 이상한 곳에서 동질감을 느끼는군? 잠시 후 엑셀핸드는 광산에서 달려나온 드워프들을 돌려보내고는 우리 들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간신히 운차이는 정신이 빠져나가버릴 듯한 거 친 산악과 산봉우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들의 풍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엑셀핸드는 별 말은 하지 않은 채 우리들을 인도했다. 우리들이 도착하 자마자 황급히 달려나왔던 그 드워프들은 절벽에 거대하게 뚫려있는 광 산으로 뛰쳐나왔던 것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들어갔지만 엑셀핸드는 광 산 입구 옆으로 나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분지 안쪽으로 걸어갔다. 제 레인트가 의아한 듯이 질문했다. "어, 광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엑셀핸드는 무슨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지 처음에는 제레인트의 질문을 제대로 듣질 못했다. 그래서 제레인트는 한 번 더 질문해야했다. "응? 아, 그래. 광산은 작업터지. 물론 저 아래에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저택과 방, 그리고 자네들에게야 장엄의 홀보다 못하게 보이겠지만 우리 들 보기엔 훨씬 아름다운 홀도 있긴 하지. 그렇지만 우리들의 친절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네들을 저 아래로 데리고 내려가는 것은 자네들에게 너 무 힘든 일이 될 걸세. 저 안은 어둡고 가프르거든. 다행히도 우리들은 지하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들을 위해 지상에 오두막을 몇 개 마련해두었 지." 그 때 길시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두막이라고요? 저게 말씀입니까?" 길시언이 가리키던 방향을 보자 나는 곧 얼이 빠져버렸다. 네리아는 손 뼉을 치며 말했다. "와아아앗! 굉장해!" "뭐어야, 이건. 빛의 탑 아냐? 엑셀핸드! 그래서 그 때 놀라지 않았던 거군요?" "뭐? 아, 그 엉터리 환각 말인가?" 엑셀핸드가 말한 그 오두막이라는 것을 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이서스 임펠에 있던 그 황당무계한 건물, 빛의 탑이었다. 건물들은 분지 옆의 산비탈을 따라 제멋대로 쌓여져있었다. 건물들 사 이로 길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어떤 길은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어 떤 길은 다른 건물의 아래에 있는 기둥들 사이로 나있는 식이었다. 게다 가 어떤 길은 허공에 놓인 다리로 이어져있었다. 수많은 계단들과 다리 가 있어서 간신히 돌아다닐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 식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건물들은 모두 크기가 다른 사각형이었는데 어떤 건물의 경우에는 아래에 있는 건물들보다 더 튀어나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산의 비탈에 서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견 무질서하게 보이는 그 건물들이 모두 아름다워보이는 것이 다. 카알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항상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제 포기해야 되겠군." 엑셀핸드는 싱긋 웃음으로써 카알의 칭찬에 대답했다. 제레인트는 감탄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정말 신기한 마을이군요. 물기가 없어요." "예?" "물, 그러니까 급배수 시설이 안보인다고요. 식수는 떠서 나를 수도 있 겠지만 배수는 어떻게 하는 건지? 어디 물 흐를 만한 곳이 안 보이는군 요?" 그러자 엑셀핸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행이 어리둥절해 하자 아프나이 델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나는 전에 여기 와보았습니다. 생각해보시죠. 여기는 드워프들이 만든 도시입니다. 당연히 배수로는 지하로 나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보시면 알겠지만 급수시설도 모두 지하에 되어 있어 물을 떠나를 필요는 없습니 다." "예? 아니, 어떻게?" "산 위에 저수지를 만들고 거기서 지하를 통해 이 도시로 물이 내려오 게 하는 거랍니다." "아, 놀랍군요." 일행이 탄성을 터뜨리자 엑셀핸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 했다. "자, 자! 설명보단 직접 보는 것이 낫겠지. 말들은 저기 보이는 저 건 물에 매어두면 되네. 마굿간일세."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굿간이요?" "왜 그러나? 아, 그래. 하하하. 우리야 말은 없지만 노새는 이용하니 까." 그래서 우리들은 일단 노새를 매어두는 그 마굿간으로 걸어갔다. 마굿 간은 낮은 위치에 있는데다가 다른 건물들에 비해 월등히 커서 그 위로 다른 건물이 몇 개 얹혀져 있었다. 안에는 광물을 실어나르는데 사용하 는 것으로 짐작되는 노새들이 많이 매어져있었는데, 마굿간 하면 연상되 는 지저분함은 눈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히야. 드워프들은 마굿 간도 정말 멋들어지게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단단한 석조건 물이었고 안에는 포석까지 깔려 있었다. (하긴, 돌로 되어있어야 위에 있는 건물들의 하중을 견디겠지.) 그리고 마사 하나하나가 모두 벽돌로 구분되어져 있었고 안에는 짚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광은 만족스러운 수준이었고 답답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더더욱 놀라 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풍이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 시언은 감탄했다. "이래서야 임펠리아의 마굿간이 부럽지 않겠는데!" 흠. 드워프들은 모두 뛰어난 건축가라더니 사실인가 보군. 우리들은 크 게 감탄하면서 지친 말들을 매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굉장한 마을인데. 그런데 이 멋진 마을엔 왜 드워프들이 하나도 없지? 손님용이라더니, 드 워프들은 모두 지하에 사나? 마침 네리아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 말했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지? 다들 일하러 갔나?" "어, 잠깐. 저기 하나 보이는데." 샌슨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자 좀 높은 곳에서 한 드워프가 집 앞에 있 는 넓직한 마당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마당이 라는 것이 사실 다른 건물의 옥상이긴 했지만. 어쨌든 마당인지 옥상인 지 구분하기 어려운 곳에서 파이프를 피우고 있던 그 드워프도 우리를 발견했다. 파이프를 손에 든 그 드워프는 손을 들어올리며 텁텁한 목소 리로 외쳤다. "여어, 망녕난 엑셀핸드 아닌가? 돌아왔구먼?" 윽! 이, 이게 뭐야? 난 카알에게 대단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기 시 작했고 그러자 카알은 당황해버렸다. "아니,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건가, 네드발군?" "노커는 가장 고귀한 드워프라면서요?" "물론 그러하네." "그럼 저 드워프는 굴을 너무 많이 파서 불쌍하게도 머리가…" "아, 아닐세. 네드발군. 어째 자네는 그 모양인가. 왜 고귀한 것을 대 하는 예절에서 인간과 드워프가 똑같으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아, 아! 하하하. 하아?" 씨이. 그게 또 그런가? 우리 일행들이 카알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동 안 엑셀핸드는 위쪽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이 좋은 낮에 손에 연장 대신 파이프나 들고 있어? 이 미친 드워프 같 으니!" 샌슨은 알았다는 듯이 기품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함으로써 우리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분도 상당히 고귀하신 드워프인가 보군요." 그 러자 엑셀핸드는 콧소리를 심하게 내고는 말했다. "뭐, 고귀해? 웃기는 소리! 아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가서 직접 만 나보면 알게 되겠지. 이 정신나간 드워프의 상징 같은 놈아! 거기서 꼼 짝말고 기다리거라!" 엑셀핸드는 우리들을 인솔해서 올라가기 시작했고 위쪽의 그 드워프는 두 다리를 딱 벌리고 선 채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네리아와 운차이는 가파른 계단을 사뿐사뿐 잘도 올라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올라가기가 꽤 힘든 계단들이었다. 이런, 젠장. 드워프들의 다리 길이에 맞춰져 있 어 계단이 너무 낮잖아. 낮은 계단으로 높게 올라가려니 자연 계단폭이 좁고 경사가 가파르다. 이리저리 꺾이는 계단을 오르고 구름다리를 하나 건너자 그 드워프가 서있던 마당/옥상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드워프는 히죽히죽 웃으며 우 리 일행들을 관찰하더니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이봐. 이 인간들이 크라드메서를 때려잡으러 온 용사들인가?" ================================================================== 14. 정답이 없는 선택……3. 크라드메서를 어쩐다고? 우리들이 이 감당하기 버거운 누명(?)에 당황 해하자 엑셀핸드는 이를 가는 것 비슷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 놈. 요 미친 녀석!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크라드메서를 잡겠다고?" 그 드워프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귀를 좀 후비더니 태평하게 말했다. "어디 보자. 모두 아홉 명인가? 하하하! 인원도 딱 맞는구만 그래. 저 기 저 소녀를 제외하면 이게 바로 크라드메서의 파멸을 위해 결성된 엑 셀핸드의 여덟 별이로구만?" 윽. 당신이 제외한 그 소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는지? 엑셀핸드는 이제 자신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진노한 목소리로 외쳐대었 다. "이 놈아!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냐?" "아니지. 저 소녀도 포함한 다음 저 마법사를 제외하면 되겠군? 저 마 법사는 핸드레이크의 역할을 하면 될 테니까. 완벽하군." "어어억! 무시당했다! 네 놈에게!" 아프나이델은 너무 거대해져버린 자신에 대해 당황해하고 엑셀핸드는 깡그리 무시되어버린 자신에 대해 화내는 동안 카알이 먼저 친근한 목소 리로 말했다. "저는 카알 헬턴트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일하프 크루겐. 바일하프나 바일, 아무 쪽이나 좋을대로 부르면 되 네. 이 광부들의 낙원에서 히터(Heater)의 일을 맡고 있다네." "아, 그러시군요. 히터님이시군요." 히터라고? 노커는 두드리는 사람이라지만, 그렇다면 히터는 뭐하는 사 람이지? 두드리기 전에 가열하는 사람인가? 윽. 그건 대장장이식 생각… 잠깐. 그렇다면 그게 바로 드워프식 생각이잖아. 히터 바일하프 크루겐 은 우리들과 주욱 인사를 나누고는 말했다. "자네 일행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 반갑구먼. 그 동안 얼 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이제 여기서 푹 쉬면서 그 동안의 고통을 있 게." "예? 고통이라니오?" "아, 상대가 앞에 있으니 말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엑셀핸드와 함께 다 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내 충분히 짐작하네." 엑셀핸드는 이제 실성한 듯이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마구 당기고 있었 다. "허, 허허허! 허어으악!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이 발생한 것이 렸다!" 이게 무슨 기합이지? 어쨌든 엑셀핸드는 그렇게 외치더니 곧 빠르게 움 직였다. 드워프와 불의 카리스 누멘이여!당신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 이 말할 수 있나이다. 엑셀핸드가 정말로 '민첩하게' 몸을 날린 것입니 다! 엑셀핸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바일하프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그의 뒤를 붙잡았다. 물론 바일하프도 드워프답게 땅딸하고 굵은 허리를 가지 고 있어 엑셀핸드의 짧은 팔로 껴안기엔 좀 어려웠기 때문에 엑셀핸드는 그를 껴안는 대신 한 손으론 뒷덜미를 쥐고 다른 손으론 벨트 뒤를 붙잡 아 통째로 위로 들어버렸다. 휘익! "굉장해!" 레니는 크게 벌린 입을 재빨리 두 손으로 가렸다. 위로 들어올려진 바 일하프는 숨가쁜 목소리로 외쳤다. "헤에엑! 이, 이 망녕난 드워프가!" "이 놈! 내가 첫번째로 두드린다는 거 모르냐! 네 녀석의 몸으로… 크 억!" 아이고, 맙소사! 바일하프는 들어올려진 채 그대로 팔꿈치를 뒤로 날려 엑셀핸드의 콧잔등을 찍어버렸다. 엑셀핸드는 무너져버렸고 그대로 바일 하프의 뚱뚱한 몸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바일하프는 엑셀핸드를 깔아뭉 갠 채 누워서는 계속해서 그를 뭉기적거리며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런. 미안하군. 자네가 첫번째로 두드려야 되는데. 실수로 내가 먼저 두드려버렸는걸? 하지만 히터인 내가 열받기도 전에 자네가 먼저 열받아버렸으니 공평한 거겠지? 하하하!" 키 큰 인간들이 얼빠진 얼굴로 내려다보는 가운데 땅딸막한 드워프 두 명이 포개어져있는 모습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웃기는 기분을 들게 했 다. 엑셀핸드는 충격과 압력 때문에 잔뜩 짓눌린 신음소리만 겨우 내었 다. "이, 이 놈…!" 일행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로 바일하프와 엑셀핸드 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만은 다시 카알에게 의혹에 가득찬 눈길을 보내 었다. "노커… 정말 고귀한 드워프라는 거 맞아요?" "흠, 커흠! 음. 물론이지! 당연하다네!" "왠지 신빙성이 없게 들리는데요." 어쨌든 우리들은 바일하프 크루겐이 앉아있던 마당을 지나 건물로 들어 가게 되었다. 바일하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자네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 건물을 치워두었네." "아니, 혼자서 말씀이세요? 이 큰 건물을?" "응? 하하. 물론 아니지. 젊은이들과 부인네들은 일을 마치고 다들 자 기 일터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네. 그리고 내가 자네들을 맞이하고 돌봐 주기 위해 남았고." "그런데 저희들이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고보니 아까 동굴에서 뛰쳐나온 드워프들도, 그리고 이 바일하프씨 도 우리가 도착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눈치인걸? 바일하프는 고 개를 기분좋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 노커 엑셀핸드가 자네들을 데리고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해도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시간을?" 바일하프는 파이프를 맛있게 피우며 말했다. "어제 레브네인 호수쪽에서 올라가는 빛을 보았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 지만 페어리퀸이 굉장히 화가 나게 만들어버린 모양이더군. 엑셀핸드가 돌아올 때가 거의 되었고, 또 레브네인 호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 왠지 예감이 이상해서 내가 다른 드워프들에게 준비해두라고 일렀다네. 사실 유사시에 호수까지 내려가볼 생각이었다네. 그런데 자네들이 올라 오는 것이 멀리서 보이더군." "아아.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자네들의 일 맞는가? 페어리퀸을 화나게 만든 것." "저희들이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은 아닙니다만,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은 맞습니다." 카알의 대답에 바일하프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 이야기는 천천히 듣도록 하지. 방은 많고 모두 잘 치워두었 으니 마음에 드는대로 골라가지게." 음. 정말 방이 많긴 하네. 꽤나 커다란 건물인걸. 안에 있는 가구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드워프용이 아니라 인간용이라서 불편할 일은 없 었다. 통로의 크기나 방의 크기 모두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모 양인데. 일행들이 모두 방을 잡고나자 바일하프는 욕탕과 식당의 위치를 가르쳐준 다음 말했다. "씻고 와서 음식을 드세나. 그리고 그 때까진 일 이야기는 하지 말고. 아, 망녕난 드워프. 네 녀석은 식당이 먼저일 테지?" "이 놈아, 당연하지! 하루 종일 산을 탔단 말이다." 뭐가 당연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산을 탔으니 좀 씻어야 되 는 거 아닌가? 어쨌든 우리들은 방들 앞으로 길게 나있는 복도를 따라 복도 끝에 있는 욕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놀랍지도 않은데. 욕탕도 석조로 되어 있있다! 그래, 안 놀라겠어! 내 개념으로 욕탕이라 는 것은 거대한 나무물통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몇 사 람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석조 욕탕을 만들어두었다. 저기에 어 떻게 더운 물을 채웠을까? 어, 어라? 그러고보니 물 끓이는 아궁이도 없 잖아? 그럼 어떻게 물을 쓰라는 거지? 그런데 힘겹게 옷을 벗고 앙상한 몸을 드러낸 아프나이델은 일단 부르르 떨더니 욕탕 끝으로 터덜터덜 걸 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벽에 달려있는 이상하게 생긴 쇠붙이를 만지 작거렸다. 뭐야? 아프나이델이 손을 어떻게 움직이자 쇠붙이 끝에 달려 있는 대롱에서 뜨거운 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헤에에? 마법이에요?" "응? 하하. 마법이 아니라 기술이다. 이걸 돌리면 뜨거운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 와? 그거 신기하네? 길시언과 카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프나이 델의 주위에 우르르 몰려서서 그신기한 대롱을 감상했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진 대롱이었는데 벽에 붙어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바퀴가 달려있 었다. 그런데 그 바퀴를 돌리자 물이 나오고, 반대로 돌리면 물이 그치 는 것이다! 우화, 그거 정말 신기하네. 그러나 카알이나 아프나이델은 이게 신기하지도 않은지 구경하지도 않 고 그대로 목욕통 안에 들어가더니 곧 죽은 사람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목욕통 안에서 눈을 감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린 것이다. 제레인트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샌슨이 정중하게 물장난을 요구했음 에도 불구하고. "받아랏, 후치! 핫하하하!" 난 그것을 사양해야 되었다. 그 세 사람이 익사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으니까. 완전히 늘어져버린 운차이 역시 욕탕에 들어가자 그제서야 화색이 돌아 왔다. 하지만 그는 간혹 바퀴달린 물대롱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 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요?" 운차이는 수면으로 눈만 내민 채 살벌한 시선으로 바퀴 달린 물대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고 그러자 머릿카락이 그 의 얼굴에 착 달라붙은 가운데 그의 눈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낮고 음산하게말했다. "저거, 단단히 고정되어 있겠지?" 갑자기 길시언이 욕탕 바닥에 미끄러져버렸다. 왜 저러는 거지? 길시언 은 어푸거리면서 간신히 물 위로 머리를 내밀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차마 운차이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은 채 그 를 외면하면서 히죽거렸다. "하, 하하. 운차이. 뜨거운 물이 만들어지는 곳은 다른 곳이다. 좀 떨 어진 보일러에서 물을 끓이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곳과 저 수도꼭지 사 이에는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고. 저 수도꼭지는 그 파이프의 끝에서 물 이 나오게 했다 말게 했다 하는 조절장치일 뿐이야." "…알고 있었어." 입은 열 때 유용할 경우가 많지만, 때론 닫고 있을 때 얻는 것이 많을 수도 있어. 히히히. 나도 OPG를 다시 끼고 저걸 떼어내 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쨌든 그 거대한 몸을 마구 움직이며 물장난을 심하게 치던 샌슨에게 점잖게 설교를 내리고 있던 카알이, 설교를 하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가 익사할 뻔한 사고만이 있었을 뿐, 아무도 익사시키지 않으면서 무사 히 목욕을 마쳤다. 아, 사고는 하나 더 있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네리아와 레니가 들어간 쪽에서 앙칼진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라! 흘러라! 쏟아져라! 줄줄 새라! 이이… 또 뭐 없니, 레니?" "터져라?" "맞아맞아. 드워프들이니까 좀 과격한 걸 좋아할지도 몰라. 터져라, 물! 안 터지는데?" 모두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할 수 없이 내가 문 밖에서 고 함을 질러주었다. "그 위에 있는 바퀴를 돌려봐요!" "꺄아아악!" 쿠당, 쾅쾅. 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도 또 한참동안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 끝에 네리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허리야… 응? 뭐야. 안 들어온 거야?" "후아, 후아. 밖에서 말한 거에요. 괜찮아요?" "후치잇! 간 떨어질 뻔했잖아! 이걸 돌려? 안 돌아가잖아!" "반대쪽으로 돌려보면 어떻겠어요, 레니 언니?" "어멋! 어, 어엇! 쏟아진다! 이거 어떻게 멈추는, 앗, 뜨거! 어푸! 어 푸! 코에 물 들어갔다! 레니! 도와줘!" 으으윽. 일행들은 모두 욕탕쪽에서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알은 심히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내게 말했다. "네드발군. 난 항상 자네에 대한 나의 신뢰를 표현할 길을 모색해왔지. 이제 이 뒷수습을 부탁하는 것으로써 내가 자네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겠네!" 그리고 카알은 총총히 걸어가버렸으며 나머지 일행들도 배신스럽게도 모두 뒤를 따라 총총히 걸어가버렸다. 으윽. 욕탕 밖에 서서 친절하게 수도꼭지 사용법을 외쳐주고 있어야 된단 말이지. 겨우 레니와 네리아 모두 뽀송뽀송한 얼굴로 욕탕에서 나오고, 그래서 우리 세 명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이미 얼큰하게 취한 엑셀핸드가 우리들 을 맞이했다. 식당은 커다란 발코니가 달린 넓은 공간이었다. 발코니쪽에서는 갈색산 맥의 봉우리들이 끝없이 늘어선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운차이는 발코니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방 가운데로 커다란 직사각형 의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있었지만 드워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 참 희한하네. 사람들이라면 몰려 와서 구경을 한다거나 이야기를 걸거나, 하다못해 환영이라도 할 텐데 여기 드워프들은 모두 일만 하나 보군. 일행들은 이미 식사 중이었고 바일하프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 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면서 엑셀핸드와 정겨운 악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카알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면 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이건 잘 모르겠군. 드워프 방식의 지도라서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걸. 퍼시발군? 자네가 대충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샌슨은 맥주를 주욱 들이키고나서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군사지도와 특별히 다른 점은 없습니다. 이쪽이 북쪽입니다. 그걸 모르셔서 어려우신 겁니다. 여기가 우리가 있는 자날 한타봉 서사면이므 로 보시는 바와 같이 추정 지역은 이 점을 중심으로 한 직경 1 펜큐빗의 원을 그리게 되는 거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단지 북쪽을 찾는 것이 어 려운 겁니다. 음하하하!" 카알은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퍼시발군. 한 번만 더 묻는 걸 용서해주게. 우리가 여길 샅샅이 뒤져 크라드메서를 발견하려면 시일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아, 그걸 물으신 겁니까? 에, 그러니까 능선이 요렇고… 보급도 시원 찮고 지대도 고약하군요. 이 절벽들의 경우엔 조사하는 것이 만만찮겠는 데요. 근사치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순 없겠습니다만 이 정도라면 1, 2 개월 정도 걸린다고 해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카알은 머리를 좌우로 가로젖더니 힘없이말했다. "자네에게 힌트를 줄 수 있어 기쁘네, 퍼시발군. 상대는 크림슨 드래곤 이야. 따라서 그의 레어는 드워프나 호비트들의 굴처럼 작은 굴이 아닐 세. 아주 큰 굴이 필요할 거야. 그리고 레어에서 나와 돌아다닐 때도 상 당히 넓은 공간이 필요할 걸세. 내 말 이해했는가? 좁은 절벽 사이라든 지 숲이 너무 밀생해서 거동이 어려운 곳은 제외해도 된다는 말일세. 아 무르타트의 레어가 있는 끝없는 계곡을 연상해보겠나?"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1 시간이면 됩니다." 콰당! 오래간만에 만난 드워프의 맥주에 취해있던 엑셀핸드가 뒤로 넘 어져버렸고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엑셀핸드는 씩씩하게 일어나더니 테이블로 돌진했다. 순간!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휙 그려졌 다고 느꼈을 때 이미 엑셀핸드는 테이블 위에 완전무결한 개구리 자세로 올라타앉아 있었다. "어디야? 자네 말은 이 지역에서 크라드메서가 있을만한 곳은 한 군데 뿐이라는 말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짐작하는 거지? 너 누구냐?" "많이 취하셨군요. 에, 설명하지요. 전, 아, 전 샌슨 퍼시발입니다. 에, 저는 언젠가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의 레어 근처에 접근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전 카알이 말했듯 이 드래곤의 레어이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든 이착륙에 수월하도록 주 위에 갑자기 솟아오른 산봉우리 같은 것은 없어야 됩니다. 하지만 다른 생물이나 인간들의 접근이 쉬운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몸이 걸어다니려면 나무가 너무 많으면 곤란하겠지요.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아마 오랫동안 수면기에 있었을 테니 자라지 않던 나무들도 자라났을지 모릅니다. 자, 그럼 간단합니다. 하늘로 트여있는 지형. 하지만 접근이 어려운 곳. 커다란 굴이 있을 수 있는 지형이며 동시에 수령이 짧은 나 무들, 즉 양수림(陽樹林)이 조성된 곳이지요. 여깁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4. 난 샌슨이 짚은 곳을 바라보며 '내 생각과 같군!'이라고 외치려 했지만 네리아가 질문해와서 그러지 못했다. "후치야. 양수림이 뭐니?" "아프나이델에게 물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크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말합니다. 숲은 먼저 양수림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아래에 음수(陰樹), 그러니까 그늘에서 잘 자라는 나무들이 조성되지요. 그래서 음수들이 충 분히 자라나면 먼저 있던 양수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의 분포를 보고 숲의 나이를 짐작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 다. 이 경우엔 드래곤의 수면기를 짐작하는 방법이 되겠지요." "헤에?" 네리아가 만족했기 때문에 난 샌슨이 짚은 곳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과 같군!' 이라고 외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실망해야 되었 다. 난 지도를 볼 줄 모른단 말이야. 하지만 길시언은 한 손으로 턱을 쓸어만지면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이 지형은 그렇게 생겼긴 한데. 거대한 생물이 자유롭게 움직 일 수 있겠고. 그리고 날아오른다고 볼 땐, 주위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 던 상승에 방해될 지형은 없군." 음. 내가 말하려던 것보다 훨씬 멋있게 말하는군. 엑셀핸드는 테이블에 서 뛰어내리더니 곧장 배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가세!" 바일하프는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바로 잡으러 가는 건가? 그럼 오늘 저녁엔 드래곤 파이를 맛볼 수 있 겠군." "이, 이이, 이이익! …잠깐. 내가 대답하면 무시하지 않을 거지?" "아, 아니지. 나도 함께 가볼까? 드래곤과의 싸움이라는 것은…" "이 놈이 또 무시했어!" 바일하프는 낄낄거리더니 우리 일행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접근하기 쉬운 곳이 아닐세. 푹들 쉬고 내일 아침에 단단히 채 비를 갖추고 출발하세. 말은 아마 놓고 가야할 테고, 식량이나 다른 준 비물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보게. 무기는 어떤가? 드래곤 슬레이어로 불릴 만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드 워프제 무기들이 꽤 있다네." "또, 또 무시했어억!" '노커의 절규' 라는 제목을 붙이면 그럴 듯한 장면을 배경으로, 카알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해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크라드메서가 우리를 해칠까 걱정하고 있지요." "뭐라고?" "우리는 크라드메서에게 라자를 연결지워주기 위해 찾아가는 것입니 다." "라자? 드래곤 라자 말이야? 누가 라자인데?" "여기 있는 레니양입니… 레니양?"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있던 레니는 깜짝 놀라더니 곧 의자에서 일어 나 황급히 바일하프에게 인사했다. 바일하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 했다. "레니? 페어리퀸 말인가?" "예?" "레니라면, 그건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가운데에 있는 이름이잖아. 본명 은 혹시 다레니안 아닌가?" "아, 아뇨.애칭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레니에요." "그래? 허헛. 그거 좋은 이름이군. 그럼 다레니안의 애칭인 레니가 아 니라, 레니의 애칭인 렌이라고 부르면 되나?" "예? 렌이요? 좋으실대로. 아, 아니, 그냥 레니라고 불러주세요. 전 그 런 이름은 익숙하질 않아서요. 부르셔도 못알아들을지도 몰라요." "알겠네. 그래. 아가씨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는 건가?" "예? 예. 그래요. 그런 것 같습… 그렇습니다. 제가 크라드메서의 라자 가 되어요." 바일하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니를 바라보았고 레니는 얼굴이 빨개 진 채 머뭇거리더니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네리아는 레니의 목을 감 싸안으며 웃었다. "롄? 그거 괜찮네. 까르르르. 그럼 난 넬인가? 넬이라고 불러봐. 운!" 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동시에 운차이에게 집중되었다. 운차 이는 창백한 얼굴로 몰려든 시선을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서 궁시렁거렸다. "운이 뭐야…." 샌슨은 피식거리며 말했 다. "바일하프씨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그 덩치 커다란 녀석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말일세. 크라드메서는 웨이크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 같은데, 아프나이델. 그럼 도대체 얼마 후에 깨어나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정확하겐 알 수 없습니다. 엑셀핸드? 웨이크닝 사운드가 멈춘 것은 언제랍니까?" 테이블에서 내려오고 있던 엑셀핸드가 대답했다. "어? 어. 그건 어제 저녁이었다고 하더군." "어제 저녁이라고요. 그럼… 크라드메서의 나이를 알면 좋지만 그건 모 르고. 안전하게 하루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루요? 그럼 오늘 저녁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하지만 그건 안전하게 생각한 것이고, 아마 크라드메서는 나이가 대단히 많은 드래곤일 테니까 그렇게까지 빠르게 일어난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겠지요. 게다가 그건 단지 깨어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겁니 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프나이델은 손을 모으더니 천천히 말했다. "깨어났다고 해서 바로 날아오를지 말지는 크라드메서의 마음대로잖겠 습니까? 어쩌면 깨어나서 그대로 누워있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서 바로 일어날 수도 있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 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요. 어쨌든 활동기에 접어들었다 해서 레어에서 꼭 나오지는 않고 그대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나와서 가까이에 있는 드워프들의 광산을 덮칠 수도 있겠고, 그대로 바이서스의 하늘을 유린하기 시작할 수도 있겠죠. 그건 그의 의사에 대한 문제로군요. 하지만 긴 수면기를 방금 끝내었으니 아 무래도 영양 보충이 시급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프나이델의 말투는 평범했지만 방안의 온도는 제법 내려가는 것 같았 다. 길시언은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안전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찾아보는 것이…" 일행의 눈썹이 모두 힘없이 내려갔다. 드워프의 광산으로 찾아오는 동 안 모두들 너무 지쳐버린 것이다. 모두들 말은 하지 않은 채 카알만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결국 카알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드래곤과 라자의 계약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크라드메서가 만일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그를 붙잡는 것은 어렵겠지요. 하지만 오 랫동안 수면기에 있었던 크라드메서가 곧장 날아오르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제멋대로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카알은 일행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고나서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모두들 쉬도록 합시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건… 글쎄요. 대 단히 중요한 만남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허겁지겁 달려오는 데만 급급했 습니다. 우선 시간이 우리들을 채찍질했고, 그 다음 여러 가지 방해들이 우리들을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차분히 생각해볼 여유 같은 것은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달려온 덕분에 결국 우리들은 이곳에 도착했고, 크라드메서는 이제 지척에 있습니다." 일행 모두의 얼굴에 짙은 감정의 그림자가 지나쳤다. 그래, 길었어. 그 렇지만 결국 여기까지 온 거야. 우리들 중 한 사람도 헤어지지 않고, 아, 이루릴이 없군.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 중 하나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서로를 도와가며 여기까지 왔군. 우리는 이제 마지막 고비, 목적 달성의 최후의 순간에 와있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카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 팔을 조금 벌리더니 말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일행들에게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카알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정은 특별히 고맙다는 말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거라고들 하지만, 전 여러분들이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와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는 아 닙니다. 그 험난한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자질과 능력을 보여준 것이며, 각 개인의 자질과 능력은 모두가 특별한 것이며 원래 존중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카알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자 괜히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난 여러분들이 모두 끝까지 서로를 믿고 주저함이나 두려움을 보여주 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어떤 역경보다도 동료의 좌절이나 실패가 더 우리를 아프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강인한 여러분들은 한번도 좌절하거나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레니마저도 어느새 눈을 크게 뜬 채 카알을 바라 보았다. 카알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 리가 조금 젖어있는 것 같았다. "퍼시발군의 지혜에 의해 그의 소재를 찾아내는 것도 해결되었습니다. 시간은 지켜졌고, 우리는 여기 있으니, 이젠 우리들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려봐야 될 때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오늘, 남은 반나절 동안 우리들 모두 마음을 정리하고 그 중요한 만남에 대처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하하… 어쩌면 내일의 만남은, 우리 모두의 남은 평생 동안 기억될 만남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각자의 방식으 로 우리들을 되새겨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길시언은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는 내일 크라드메서를 만나는 겁니다. 우리 시대 최강의 드래 곤을 만나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의 신화를 만나는, 그런 기분이 드는데요?" 제레인트의 말에 아프나이델이 드물게도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몇백년 후엔 우리들은 신화의 등장인물이 되어있을지도 모릅니 다." 제레인트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갑자기 허리를 펴더니 근엄하게 말했 다. "이제부터 말을 조심해야 되겠군. 후대의 사람들이 날 이 일행의 어릿 광대로 평가하는 것은 반갑지 않은걸." 하하하… 웃음이 번졌다. 신화? 글쎄. 난 오늘 신화의 정의 하나를 내 릴 수 있겠는걸? 아버지의 일상은 아들의 신화가 되는 거야. 일행들이 제각기 방으로 돌아가고나자 식당안에는 늦게 나타난 나와 네리아, 레니 외에 샌슨과 엑셀핸드, 그리고 바일하프와 카알이 남게 되 었다. 샌슨과 엑셀핸드는 서로 상대의 입 안에 든 것만 빼놓고는(확신할 수는 없지만.) 모조리 빼앗아 먹으려들고 있어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 고 카알은 지도를 바라보며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 고 바일하프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의자에 비스 듬히 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히터라. 그럼 조금 둘러보면 혹시 드워프들의 쿨러(Cooler)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의 머리를 식혀주마!' 내가 왜 이럴까? "바일하프씨?" 바일하프는 파이프를 손에 들더니 난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왜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저 굉장한 구경거리에서 자네에게 고개를 돌 려야 될 정도의 이유가 있어야 될 거야." "인간과 드워프의 음식 쟁탈전이 굉장해보이는 것은 차라리 슬픈 일이 에요. 바일하프씨. 질문이 있는데요?" "자네가 질문을 가지고 있다면 난 아마도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 뭔 가?" "저, 히터가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것은 불쾌한 일인가요?" "응? 아냐. 그렇진 않네. 히처? 말 그대로지. 난 덥히는 드워프야." "주로 어떤 것들을 덥히는데요?" 히터 바일하프 크루겐은 싱긋 웃더니 말했다. "생활." "생활?" "그러니까, 저 망녕난 엑셀핸드 녀석은 노커지? 저 놈은 우리 드워프들 모두의 정신적인 문제를 책임지지. 자네들 인간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인 문제라고 해도 좋겠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이 행동은 어떻게 올바르고 저 행동은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등을 결정하는 녀석이 야. 저 망녕난 녀석이 노커라는 드워프들의 비극에 대해 잠시 묵념을." 바일하프는 묵념하는 대신 날아온 맥주잔을 유연하게 피하더니 계속 말 했다. "그리고 난 여기 갈색산맥의 대광산의 생활에 대해 책임지지. 겨울 식 량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손님 맞을 방은 치워져 있는가, 어느 드 워프에게 뭐가 부족하고 그건 어떻게 마련해주는가. 뭐 그런 문제를 책 임진다네. 드워프들의 행운에 대해 잠시 함께 기뻐하세나." "네 놈이 갈색산맥의 히터라는 것은 갈색산맥이 생겨난 이래 최대의 비 극이다! 푸하하하!" 엑셀핸드는 자신의 말이 재치있었다고 생각하고는 득의만만해 하고 있 었다. (물론 그 행동의 결과로 샌슨에게 마지막 시드 케익을 빼앗기는 뼈아픈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대답을 잘 해주는 드워프를 만난 김에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나 좀 물어봐야겠군. 난 고개를 갸 웃거리며 말했다. "노커… 히터… 음.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많네요. 그런데 혹 시 라자는 없어요?" "뭐?" 카알이 지도에서 고개를 들며 턱을 고인 채 우리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 껴졌다. 바일하프는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았다. "라자, 드래곤 라자요. 난 그게 좀 궁금했거든요." 테이블 위에 놓인 컵과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그 빈 자리에 팔을 괴고 몸을 앞으로 숙여 바일하프를 바라보았다. 바일하프의 얼굴은 담배연기에 가려 어렴풋하게 보였다. "드워프님들에게 드래곤 라자가 있었다면 크라드메서가 깨어난다고 해 서 엑셀핸드가 수도까지 라자를 찾으러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마 드 래곤 라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기는 하는데. 라자가 있다면 여기 드워 프들과 크라드메서가 바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바일하프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라자가 없다는 말이군요?" ================================================================== 14. 정답이 없는 선택……5. "하하하. 여보게. 인간 친구. 내 한 가지 예를 들어볼 테니 생각해보겠 나? 자네들에게는 구두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나도 한 명 알고 있다네. 믹 더 빅이라던가. 그런데 말일세. 그렇다면 호비트에게도 구두장이가 있을까?" "예? 어… 없겠죠?" 호비트야 발가죽이 어마어마하게 튼튼하고 털이 수북하게 나있어 어떤 땅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구두가 필요없잖아. 바일하프는 다 시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지. 자네들에게는 초장이라는 것이 있지?" 힉!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바일하프는 말했다. "그렇다면 엘프에게도 초장이가 있을까?" "예? 어, 글쎄요? 엘프는… 엘프는 밤눈이 좋으니까, 초는 필요없겠 죠?" "그래. 음. 밤눈이 좋다라. 사실 이렇게 말해야 되겠지. 엘프들은 촛불 이 필요해지는, 그러니까 주위와 부조화를 이루는 일이 없다고. 정령을 한 놈 불러버리면 되겠지? 그 친구들은 아마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내겠 지." 아, 그래. 몇 번 보았어. 이루릴이 윌 오 위스프를 불러내어 마법책을 읽는 것. 바일하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에게 구두장이나 초장이가 있다고 해서 호비트나 엘프에게도 있 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네들에게 라자가 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종족들 에게 라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된다네." "그게 그런가요? 하지만 구두나 초는 없어도 되는 이유가 있는데, 라자 는 무슨 이유죠?" "자네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지 않나? 하하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난 고개를 돌렸고, 재미있다는 식의 미소를 짓는 카알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카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 무가 된다.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인간이 별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한 마디 추가해볼까. 엘프는 빛의 정령을 불러내고, 인간은 초를 만든 다. 아아. 그거군. 갑자기 발코니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와서 레니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소리지? "이랴아, 하아!" 길시언의 목소리잖아? 난 샌슨이 잠시 발코니쪽에 정신을 판 사이에 재 빨리 그의 앞에 놓여있던 병을 나꿔채들고는 발코니쪽으로 걸어갔다. 아 래가 멋지게 조망되는 장소였다. 난 발코니의 난간에 엉덩이를 올려놓고 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시언이 썬더라이더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분지를 달려가고 있었다. 왜 저러지? 그러 나 순식간에 분지 저편으로 달려가던 길시언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방향 을 바꾸는 것을 보고는 그저 몸을 푸는 정도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긴장감을 가라앉히는 방법으로 식탐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참 모범적인 전사의 긴장 해소법을 보여주고 있군 그래. 샌슨. 이리 와서 좀 보고 배우라구. 그러나 샌슨은 엑셀핸드와 날카로운 눈길을 교환하느 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관두지. 썬더라이더는 은빛 갈기를 휘날리며 검은 화살이 되어 땅 위를 날아갔 다. 그 뒤로 은가루가 떨어져내린다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어보이는데. 길시언은 한 손에 든 프림 블레이드를 옆으로 늘어트리고는 고삐를 느슨 하게 쥔 채 달려갔다. 프림 블레이드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분지 전체를 비출 듯 굉장한 빛을 뿜었다. 어느 각도에선 길시언이 말이 아니라 빛을 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칼이 아니라 빛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새 내 곁으로 다가온 바일하프가 난간에 팔을 올려놓고는 나 와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굉장한 검이군. 마법검인가?" "에고소드에요." "그래? 내가 말에 대해 아는 척하면 우습겠지만, 저 말도 상당해보이는 데." "썬더라이더. 북부대로의 황제라는 별명이 있다던데요." "핫하. 황제라고? 그렇단 말이지? 마법검에 명마라. 저 길시언은 드래 곤 슬레이어가 될만한 자질로 보이는데. 누군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겠 다고 말했을 때 상대를 웃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꼽아보라면 저 친구 는 들어가겠어. 혹시 저 친구 그런 야망으로 여기 온 것 아닌가?" 바일하프는 정말 크라드메서를 때려잡고 싶어하는 건가? 난 샌슨에게서 획득한 술병의 내용물의 냄새를 조금 맡다가 대답했다. "그의 속셈이야 모르지만 지금껏 겪어봤던 것으로 보아 그런 야망은 없 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건 우리들의 의뢰주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도 하고." 바일하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들의 의뢰주?" "아, 우리는 에델브로이의 총본산인 그랜드스톰의 의뢰를 받아 레니를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도록 하는 거에요." "뭐야? 엑셀핸드의 의뢰가 아니라?" "하하. 아네요. …우와!이거 뭔데 이렇게 독하죠?" 이거 앞이 핑 돌 정도인데? 샌슨이나 엑셀핸드가 벌컥벌컥 마시길래 아 무 생각없이 마셨다가 큰일날 뻔했다. 난 머리를 심하게 젖고는 술병에 서 관심을 돌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질주, 흙먼지가 흩날리고, 도약, 대지로부터 자유롭다. 선회, 물처럼 유연하지만, 가속, 밤하늘을 찢어내는 은빛 번개. 저게 정말 여섯 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온 말이냐고 누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난 대답할 말이 없어 곤혹스러워지겠는걸. 겨울산의 맑고 시린 공기에 노출된 나무들은 회색의 돌처럼 보였다. 그리고 수십 큐빗 높이로 자라난 침엽수들은 상 상의 지평을 넘어서는 웅장함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로 길시언 은 말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랴아! 하아, 하!" 침엽수들 사이로 부는 가장 강인한 바람이로군. 커하! 아무리 독해도 한 모금 마셔줘야 되겠는데. 길시언, 등을 보여주는 나의 왕을 위해. 크라드메서라는 것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구체화되기 시작하는군. 오늘은 11월 28일. 정확히 한달하고도 하루 전인 10월 27일, 우리는 그 랜드 스톰의 장엄한 후원에 모여앉아 크라드메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 다. 그 때의 크라드메서는 그냥 크라드메서였다. 크림슨 드래곤, 라자를 잃고 발광했었으며, 미드 그레이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현재 라자가 없는 상태에서 수면기에 들어가 있지만, 곧 깨어날 드래곤. 놀랄 정도로 단어들은 충분했다. 하지만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지척에 두고 그를 만 나기 위해 먼저 자신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단어들은 아무리 찾 아봐도 보이지 않고 감정들만 뭉게뭉게 일어난다. 뭐라 표현할 말이 없 다.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만이 남아있었다. 이제 그는 기나긴 수면기 를 끝내었고, 우리는 한달을 보내었다. 그와 우리들 사이에는 거리도 사 라지고 시간도 사라졌다. 이제 그와 우리들만이 남았다. 머리가 뜨거워지는데. "야호!" 무턱대고 아래를 향해 고함을 질러보았다. 길시언은 썬더라이더를 멈춰 세우더니 위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손이 올라오더니 쾌활한 동작을 취했 다. 프림 블레이드가 번쩍였고, 그는 다시 썬더라이더를 달리게 했다. 그의 뒤로 가을내 쌓여있던 낙옆들이 평화를 잃고 날아올랐다. 그 낙엽 들의 폭풍 속으로 길시언은 사라져갔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어이, 샌슨? 우리도 저런 거 해볼까?" "읍, 읍! 켈록. 뭐라고?" "대무 말이야, 대무! 몸 좀 풀어두자고."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하러? 소화하러?" "칵! 그게 아니고 내일은 어쩌면 멋진 싸움판이 될지도 모르잖아?" "난 드래곤 퇴치법 제 4 장 크림슨 드래곤에 관하여, 뭐 이런 책은 읽 은 기억이 없는데." "그래서? 다 포기하고 입만 즐거우면 그만이다?" 샌슨은 피식 웃더니 다시 엑셀핸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파이 접 시를 자기 앞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내일이 지나고나면 다시는 입을 즐겁게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잖아?" 갑자기 레니가 포크를 씹고는 신음을 흘리며 입을 가렸다. 아이고, 저 웬수! 샌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레니를 바라보았고 네리아는 눈길로 샌슨 을 마구 꾸짖어대었다. 샌슨은 네리아의 눈길에 두드려맞으며 말했다. "어, 어, 레니. 그냥 해 본 소리라고. 나랑 후치는 원래 서로 짖어대는 거지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았어?" 짖어대다니. 으윽. 난 그런 기억 없어. 레니는 입에서 포크를 천천히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역시 침착한 동작으로 입가를 닦고서는 샌 슨을 바라보았다. "저도 알아요. 샌슨 오빠. 위험한 거죠?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건데 안 전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지도를 바라보던 카알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샌슨은 카알을 돌아 보며 애타는 눈길을 보내었지만 카알은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결국 샌슨은 다시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안전하다고 말할 수야 없지." 레니는 샌슨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가슴에 파묻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고 네리아는 이제 샌슨을 겨냥해서 나이프를 집어던질 자세였다. 네 리아는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지 않게 외쳐대었다. '이 미련퉁이야! 다 큰 어른이 꼬마 겁주냐? 오히려 꼬마가 겁먹지 않도록 해줘야 되는게 당연하잖아!' 샌슨은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고개를 숙인 레니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겁나요. 많이." 샌슨은 입술을 조금 내밀더니 말했다. "나도 그래." "예?" "나도 그렇다고. 드래곤을 찾아가는 것은 이번이, 에. 세번째인가? 처 음엔 아무르타트고, 그 다음은 드래곤 로드. 그리고 크라드메서야. 와 하! 나도 꽤나 경험이 많군 그래. 어쨌든 이번이 세번째이지만 나도 좀 겁이 난다고. 그러니까 너도 겁나는 거 당연해." 레니는 샌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좋죠?" "도망치면 되잖아?" 네리아, 지금이에요! 던져요! 그 나이프를 샌슨에게 던지라고! 젠장, 저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레니는 눈이 동그래져서 샌슨을 바라보 았지만 샌슨은 목전에 도래한 위기도 깨닫지 못한 채 빙긋 웃었다. "도망쳐요?" "응. 그런데 도망에는 두 가지가 있어. 앞으로 도망치는 것과, 뒤로 도 망치는 것. 그러니까 레니는 앞으로 도망치면 돼." 레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로 도망치는 것은 알겠는데 앞으로 도망치는 것은 뭐에요?" 샌슨은 지금 레니에게 일일이 대답해주면서 과연 행복할까? 샌슨이 레 니와 말을 나누는 사이에 빠른 속도로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난 이런 의문을 떠올렸다. 엑셀핸드, 그만해요! 샌슨은 슬 픈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더니 들고 있던 포크를 위로 들어올리며 말했 다. "음. 레니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이건 군대 같은 데서 간 혹 들을 수 있는 농담이야. 신병들이 처음으로 전투에 배치될 때 말이 지, 녀석들은 전쟁에 질려버려 돌격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무기고 뭐고 집어던지고 달아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 그 때는 명령이고 뭐고 아무 런 소용이 없어. 그래서 고참병들은 신병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지. 도 망치려면 앞으로 도망치라고." "왜지요?" 샌슨은 포크로써 지휘봉을 삼아 가상의 부대를 지휘하는 시늉을 해보였 다. "그래야 도망을 쳐도 아군 안에 있게되니까. 보라구. 아군은 앞으로 달려가는데 혼자 뒤로 도망치면 어떻게 되지? 낙오되잖아. 그럼 시선을 끌게 되고 화살 맞기도 쉬워. 하지만 앞으로 도망치면 계속해서 아군 안 에 있게 돼. 그래야 자기 맞을 화살을 다른 아군이 맞아줄 수도 있고 말 이지. 알겠지?" 레니는 샌슨의 설명을 들으면서 배시시 웃더니 미덥지않다는 듯이 말했 다. "헤에? 그 말이 통해요?" "믿긴 어렵겠지만 그거 낙오병이나 탈주병 줄이는 데는 썩 효과가 있는 말이야. 우리는 몰려다니는 성질이 있는 종족이거든? 와하하!"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도망치고 싶댔자 나 혼자서는 도망도 못 치니까, 차라리 친구들 옆에 남아있는 것이 났다는 말이죠?"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고." "헤에. 퍽도 안심되네요. …샌슨 오빠는 날 지켜줄 거죠?" 샌슨은 손에 든 포크를 가슴 앞에 세워보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후치보다 더 열심히 지켜줄 거야." "잠깐! 거기서 내가 왜 등장하는 거지? 비교할 걸 비교하라고! 레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는 것 중에는 말이야, 듣는 순간 찡! 하면서 아, 쓸데없는 말을 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말이 있거든? 조금 전에 샌 슨이 말할 때 찡! 하는 느낌이 오지 않았어?" 레니는 방그레 웃더니 맑은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찡!" 윽. 쓸데없는 말을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바일하프는 입을 과격하게 벌리고 웃어대기 시작했고 카알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재미도 있으시 겠어들. "보라! 서풍이 나를 부른다! 하늘 아래 외길. 테페리는 갈림길이지만 테페리는 갈림길이 아니다. 재 속에서 태어나 영원으로 회귀하는 불사조 의 비행처럼 나는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우리 시대의 전설이자 우리 시 대의 악몽 크라드메서를 향해!" 옆에서 걷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제레인트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 다. 난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래서요?" "어떠냐고?" "정말 자서전에 그걸 쓰실 생각이세요?" 제레인트는 히죽 웃더니 말했다. "몰라. 자서전은 앞으로 3, 40 년 후에나 쓸 생각이니까 그 동안 마음 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떠냐고?" "테페리는 갈림길이지만 테페리는 갈림길이 아니다… 라는 게 무슨 말 이에요?" "응? 아, 그거? 테페리는 갈림길의 신이지만 갈림길은 영원히 갈림길로 남을 수 없다는 뜻이야. 시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려워요." "뭐가 어렵냐? 네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걸어가는 동안 갈림길 을 수십, 수백 개를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네가 출발해온 곳에서 목적지까지의 여정을 지도에 좌악! 그린다고 생각해봐. 그건 하나의 선이 되겠지? 좀 구불구불할지는 모르지만 말이 야." "어… 그렇겠네요?" "그렇지. 갈림길은 양쪽 다 가볼 수 없다는 뜻이야. 결국 갈림길이 아 니게 되지. 그게 테페리의 딜레마야. 그랑엘베르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 영원히 순결한 것은 결국 아무 것도 남길 수 없어. 순결한 여자는 아이 를 못 낳고 순결한 대지는 곡물을 못낳지. 시간 앞에 모든 것의 가치는 소멸하는 법. 아아, 이건 네게 좀 어렵겠구나. 하하하! 그런데 어땠어?" "좋다고 생각돼요." "그런데 표정이 영 아니다?" 제레인트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고 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제레인트는 이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 다.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제레인트는 벌쭉 웃었다. 그 때 내가 질문했다. "겁나지는 않아요?" ================================================================== 14. 정답이 없는 선택……6. 제레인트는 발 아래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돌멩이는 길다란 풀들 사 이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 저편 어딘가에서 풀들에 가려진 바위에 맞았는 지 탱! 하는 소리를 울렸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들어올려 뒤통수를 받 친 자세로 날 바라보았다. "겁나냐고? 왜?" "…당신은 테페리의 프리스트니까 자기가 걷는 길에 아무런 공포가 없 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난 테페리의 은총을 받은 몸이 아니라서 좀 겁 이 나는데요." "네가 오고 싶어서 온 길이잖아? 왜 겁이 난다는 거지?" 난 가슴 앞에 있는 바스타드의 소드 벨트를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말했 다. "아무리 그래도 긴장감은 어쩔 수 없어요. 크라드메서를 만나잖아요. 물론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쳇! 크라드메서가 아무 리 잘나봤자 날 죽이기 밖에 더하겠냐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무섭 고 긴장되는 걸요." 제레인트는 이제 손을 내리더니 이마를 벅벅 긁었다. "이봐, 이보라구. 무서워하는 것까진 좋아.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 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어. 그런데 말이야, 넌 그 공포나 긴장감 때문에아무 일도 못할 지경이야?" "예?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래. 내 보기에도 넌 현재 태연해뵈는데. 이봐요, 아프나이델. 당신 은 지금 어떻지요?" 갑자기 질문을 받자 아프나이델은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로브 자 락 아래로 팔을 모으더니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긴장됩니다. 아무 일도 못할 지경은 아니지만." "그래요? 그럼 상관없잖아요. 긴장이 되든 말든, 평소 하던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거 아무 문제가 없는 셈이네요? 아프나이델 당신도 그렇고 후치도 그렇고. 그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잖습니까?" 제레인트는 왠지 나와 다른 나라 사람처럼 느껴지게 말하는데. 아, 참. 제레인트는 나와 다른 나라 사람이었지. 일스의 국민이니까. 하지만 그 건 땅에 대충 그어놓은 선의 이쪽에 사느냐 저쪽에 사느냐의 문제이고. 제레인트는 왜 저렇게 아무 걱정도 불안도 없는 거지? 골치 아프군. 난 고개를 들어 길시언이 어디쯤 있는지 찾아보았다. 길시언은 이제 산등성이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힘도 좋아. 말도, 기수 도. 둘은 지금 일체가 되어 분지 주변을 둘러싼 산을 짓쳐올라갔다가 돌 격하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투다닥, 투다닥! 검은 썬더라이더가 은빛 갈기를 휘날리며 점점 거대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제레인트는 눈물이라 도 줄줄 흘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트에리노 가문에서 300년이 사라진 거 같아!"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었다. 정말 보기 괜찮은 광경이긴 한데 아쉽지만 여기까지 온 목적이 있는지라 아프나이델은 손을 들어올렸다. 길시언은 우리 모습을 보자 곧 고삐를 잡아당겼다. 힝힝힝! 썬더라이더는 거창하게 투레질을 하더니 멈춰섰다. 길시언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썬더라이더의 목을 쓸어주었다. 그 역시 땀에 젖어 머릿카락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턱 아래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 고 있었다. 길시언은 한 손으론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쥐고 다른 손으론 얼굴을 닦으면서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휴우. 더운데요. 무슨 일입니까?" 아프나이델은 자기는 춥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려보이고는 말했다. "아, 바일하프님의 전갈입니다. 그렇게 말을 달리는 것은 긴장감 푸는 데도 좋고 몸 푸는 데도 좋겠지만 분지라서 말소리가 너무 울리니까 적 당히 해주었으면 좋겠다는군요. 땅 아래에서 일하는 드워프들이 깜짝깜 짝 놀란답니다. 드워프들이야 귀가 밝고, 게다가 썬더라이더의 발굽소리 는 다른 말에 비해 유별나게 크지 않습니까." 길시언은 자기 이마를 탁 치더니 말했다. "아. 그래요? 그렇군요. 그 생각을 못했어요. 그렇잖아도 그만 달릴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항문에 와닿는 충격을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 죄 송합니다. 야아앗! 에, 말 달리는 것도 지루해지던 참이었거든요. 대무 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프나이델과 제레인트의 눈이 모두 나에게 돌아왔다. 뭐야? 이 눈길로써 말하고 싶은 바가 뭐냐고?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한 판 뛸까, 후치?" 길시언과 대무라고? 날 죽여라, 죽여! "정중히! 사양하겠어요." "왜 그래. 나쁠 거 없잖아. 운동도 되고." "운동이라면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충분히 했다고 봐요. 고마운 말씀이지 만 사양하겠어요." "흐음. 네가 사양하면 남는 것은 샌슨과 운차이뿐인가. 샌슨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잡아먹다가 잡아먹혀버리고 말았죠." "취했단 말이군. 운차이는?" "모르겠는데요." "그럼, 운차이나 찾아볼까?" 우리 네 명은 건물로 돌아왔다. 길시언은 썬더라이더를 다시 마굿간에 넣어두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 운차이의 방을 두드렸다. 그러나 운차이 는 방 안에 없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욕탕으로 수도꼭지를 떼러갔나?" 내 의문에 길시언이 진심으로 우려의 표정을 지은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음. 그러나 운차이는 다행히도 욕탕에 없었다. 방들을 돌아다니 며 운차이의 모습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은 점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간첩이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렸 나? 그러나 운차이의 방 안엔 그의 짐이 그대로 남겨져 있어 그런 의문 은 가능성이 희박해보였다. 마굿간에 앰뷸런트 제일도 그대로 묶여 있었 다. 그렇다면 어디로 달아난 것은 아닌데.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산을 내려가는데 앰뷸런트 제일은 별로 필요가 없다. 산을 다 내려가면 필요해지겠지만 그 동안에는 버거운 짐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 면 그의 짐도 하산하는데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짐이 없다면 훨씬 빨리 내려갈 수 있겠지? 어쩌면… 생각하기 싫은 가설이긴 하지만, 어쩌면 운차이는 크라드메서 와 만나기 싫어서 달아났을 수도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여기서 운차이가 달아나면 우리들은 그의 뒤를 쫓지 못한다. 산을 도로 내려가 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고 게다가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그에게 주의를 돌릴 수도 없다. 나와 길시언, 제레인트, 아프나이델이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운차이의 방문을 노려보고 서 있었을 때였다. "운차이야! 응? 여기서 뭣들 해요?" 통로 저편에서 나타난 것은 네리아였다.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운차이씨가 보이지 않는군요." "없어요? 어디 갔나?"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는데요." 네리아는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더니 갑자 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디에도 안보인다고요?" "예." "설마? 짐은 그대로 있어요?" "그대로 있습니다." "무기는요?" 응? 무기라고? 우리는 다시 운차이의 방에 들어갔다. 그의 롱소드는 없 었다. "무기야… 허리에 차고 있을 테니까 그와 함께 있겠죠." 아프나이델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리아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 막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달려가버렸다. 우리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 서로를 힐끔 바라보고는 말없이 흩어졌다. 모두들 네리아처럼 한 번 더 샅샅이 운차이를 찾아보기 위해 흩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운차이!" 하는 식으로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불렀을 때 대답이 없으 면 기분이 어떨까. 조용하지만 열렬한 수색이 계속되었다. 한 시간 후에 나는 그 괴상망측 한 건물들 사이에서 아프나이델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아프나이델은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들도 못봤다는데요." 내 대답에 아프나이델은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들은 그대로 다시 헤어져 수색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30분 후, 태양이 분지 서쪽의 봉우리 를 쓰다듬기 시작할 때 난 우리들이 있던 건물의 넓은 마당에서 카알에 게 붙잡혔다. 붉은 색으로 물든 마당의 한가운데서 카알은 검붉은 모습으로 꼿꼿이 선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군, 네드발군. 모두 푹 쉴 줄 알았는데 자네와 몇몇 사람들이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 그런데 아무도 말은 하지 않는걸. 도대체 무슨 일인가?" "운차이가 안보여요." "뭐라고?" 난 짜증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운차이가 안보인다고요, 젠장. 아무리 돌아다녀도 운차이가 보이지 않 아요."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 마당 끝으로 걸어갔다. 마당이라지만 다 른 건물의 옥상이라 그 끝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고 난 그 끝에 주저앉 아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웃기게 쌓여있는 건물들 사이를 뛰어다니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더니 맥이 쭉 빠진다. 제기랄! 정말 엉망진창으로 쌓아둔 건물들이다. 카알이 등 뒤로 걸어오 더니 말했다. "혹시 그의 짐이나 말이 없어졌단 말인가?" "짐하고 말은 그대로 있어요. 무기는 없고. 그런데 이 산을 내려가는데 그 짐이나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응? 응… 하긴 그렇군. 말은 어차피 탈 수가 없고 짐은 몸을 무겁게 할 테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카알의 목소리는 낮았다. 난 발 아래 희한하게 쌓 여있는 건물들을 내려다보았다. 드워프들의 저 걸작 건축들이 석양을 받 아 붉은 색으로 물들어간다. 불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는데. "운차이는, 어차피 길시언에게 복속된 몸일 뿐이죠?" "그런 셈이지." "그러니까, 우리들처럼 그랜드스톰에서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제레 인트처럼 즐거울 것 같아서 동참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마지못해 끌려온 거죠? 그렇죠?"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는걸." "맞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난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요." "운차이씨는 과묵한 편이니까." "맞아요. 입이 무거워요. 하루에 몇 마디 꺼내놓지도 않는 말들엔 독기 가 묻어있고요. 제길, 그래도 달아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요." 카알은 갑자기 등 뒤에서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내 옆에 섰다. 그는 하 늘을 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네드발군. 자네는 그를 잘 아는가?" "예? 글쎄요. 내가 그를 잘 아느냐고요?" "그래." "…잘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언젠가, 이라무스시였던 것 같 군. 세레니얼양이 운차이씨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네. 달아날 거냐고. 그때 운차이씨는 뭐라고 대답했지?" 이라무스시에서? 어, 그래. 운차이 에게 씌울 족쇄나 수갑을 구하려고했을 때. 운차이는 뭐라고 대답했지? "기회만 오면 달아날 거라고…" "그래. 그는 스스로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었네. 기회만 오면 그는 달아 날 거라고 말했지." "하지만 그 때하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지?" 카알은 그대로 붉어지는 하늘만 바라보며 말했다. 난 카알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때는… 우리와 그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가 전향하지도 않았던 때잖아요. 하지만 그는 이제 바이서스로 전향했잖아요. 달아날 필요가 없는데요." "자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게나." 마음 속에 있는 말? 마음 속에 있는 말이라고. "이제는… 그와 우리는 친구잖아요." "운차이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우리가 동료라고 말한 적이 있 다는 말인가?" 카알은 놀랍게도 잔혹한 사실만을 말했다. 난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어요." "그럼 자네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 것 아닌가." "예.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니라고 생 각해요. 제길, 그럼 나와 카알은 동료에요? 썅!" 카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멀건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거 꼭 말해야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 아니에요? 공증인 세워서 게약서 만들고 도장이라도 찍어놔야 서로 친구고 서로 동료에요? 그렇지 않잖아요!" "부부도 결혼 선서는 한다네." "맙소사, 카아알!" "농담이라고 생각되는가?" 갑자기 카알은 고개를 아래로 내려 날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 로 말했다. "그와 우리 사이에 우정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네. 하 지만 그 우정이라는 것이 있다고 볼 때, 그게 서로를 구속할 권리까지 있다는 의미인가? 운차이씨가 우리와 함께 있어 행복하지 못하고 떠나고 싶다면, 우리는 존재하는지조차도 의심스러운 우정의 이름으로 그를 붙 잡아야 하는가?" 뭐라고? "우리가 그의 주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왜 그렇게 화난 거지, 네드발 군? 운차이씨가 달아났다면,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그는 간첩이었고 전 향해서 고국에도 돌아가지 못해.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과거를 잘 아는 사 람이야. 그가 고국을 버린 것처럼 우리들도 버리고, 어딘가 아무도 모르 는 곳에 가서 새롭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인가? 왜 그가 우 리와 함께 저 위험스러울지도 모르는 크라드메서 방문을 함께 해야 된다 고 말하는 거지? 우정의 이름으로?" 말이 턱 막힌다. 난 카알의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질려버리고 말 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무의식중에 말하고 있었다. "그의 속에 있는 나의 이름으로." 카알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난 말했다. "그래요. 운차이 속에 있는 나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하길 요구하겠 어요. 우리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멧토끼같은 생물이 아니잖아요. 운차이 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도 허락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운차이는 내 속에 있는 그의 이름으로 나에게 요구할 수 있을 거에요. 무슨 일이든지! 우정이 왜 구속이 아니라는 거에요. 사랑이 왜 구속이 아니라고! 마치 자유롭게 팽개칠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난 입술을 적셨다. 카알의 딱딱한 얼굴은 이제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 다. "핸드레이크를 보세요! 다레니안에 대한 사랑이 그의 족쇄였고 그의 수 갑이었어요. 그가 그 사랑을 후회했을까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난 운차이를 친구로 생각했고, 따라서 마음대로 달아났다는 점에 대해서 화를 내겠어요! 당연하게! 한 점 의혹도 없이!"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젠장, 엿같은 기분이군. 다리는 피로하고 머리는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다. 끝내주는데. 그 때 갑자기 카알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드발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자는 어떤 사람이지?" 뭐야?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카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 다. 그는 그대로 걸어가버렸고 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현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그 때 등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껴왔던 거지만, 카알은 좀 음흉스러운 데가 있는걸." 케엑! 앞으로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아 몸을 돌렸다. "운차이?" 운차이가 등 뒤에 서있었다! 그는 손에 롱소드를 쥔 채 땀에 젖은 모습 으로 서있었는데 차가운 얼굴엔 왠지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엄청난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내 목에서 아주 평온한 목소리가 튀어나왔 다. "어디 갔었어요?" "분지 끝에." "예? 아니, 거긴 왜…?" "고지대의 풍경에 익숙해지려고. 지금껏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던 길 에 너와 카알이 보이더군." 아이고, 맙소사! 잠깐, 그럼? "그럼, 그럼 언제부터 등 뒤에 서있었던 거에요?" "너와 카알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뭐야? 그럼 처음부터 다들었단 말이야? 잠깐, 현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현자는…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이런, 젠장! 카알은 처음부터 우 리 등 뒤에 운차이가 서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군! 운차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에게 말하는 척했지만, 아무래도 카알은 나에게 말한 것 같군. 음흉 한 사내야." 이런… 다음 순간 나는 저돌적인 자세로 건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 다. "카아아아알! 바지 속에 있는 거 확인해야겠어요! 분명 꼬리가 있을 거 야!" "네, 네, 네드발군?" ================================================================== 14. 정답이 없는 선택……7. 엑셀핸드와 운차이는 마당 끝에 나란히 앉아서 파이프를 피워물고 있었 다. 네리아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석양을 마주보고 있었 기 때문에 그들은 두 개의 길고 땅딸막한 그림자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 의 뒤로 역시 긴 그림자와 훨씬 더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엑셀핸드는 바닥에 앉아서는 굵직한 왼팔로 짤막한 상체를 받친 채 오 른손으로 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체격이 날렵한 운차 이가 미끈한 왼팔로 엑셀핸드에 비해 볼 때만 약간 말라보이는 상체를 받친 채 역시 오른손으로 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석양을 바라보는 그 그 림자들은 참 행복해 보였고 동시에 웃겼다. 창틀에 팔을 기대고 그 모습을 보던 네리아가 허리를 일으켰다. "저 둘, 희한하게 어울린다. 그지?" "똑같이 파이프 애용자니까." "아니아니. 그런 점도 있지만 저 모습을 보라고. 왠지 형제처럼 보이잖 아." "앞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일 거예요. 그렇지만 동시에 할아버 지와 손자의 키가 바뀌었다고도 느껴질 거라고요." "에에에! 그런데 넥슨이랑 샌슨은 어딜 갔지?" "바일하프와 함께 무기를 구경하러 갔어요. 제레인트도 따라갔고." "무기?" "드워프제 무기. 아무래도 두 사람은 손에 들 수 있는 한 무기를 들고 갈 생각인가 봐요." 네리아는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대가 옆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흐으응. 제아무리 무기를 들고 가봐야 크라드메서가 후욱! 해버리면 다 타버릴 텐데." 석양 때문에 주황색 페이지로 된 책을 넘기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리아양을 안심시켜드릴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전 각오를 단단 히 하고 있답니다." "각오라고요?" 아프나이델은 테이블 위의 두 손을 깍지끼더니 말했다. "예. 전 내일 아침에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스펠들을 메모라이즈 할 생각입니다. 물론 크라드메서는 드래곤이고 저 같은 풋내기 마법사와 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을 가졌을 테니 공격 마법은 별로 외 우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 내일 일행들을 보호할 스펠들을 메모라이즈할 생각입니다." "크라드메서가 후욱! 해도 막을 수 있어요?" "한 두 번은… 어떻게 가능할 거라고 믿습니다. 네리아양까지 믿어주실 진 모르겠습니다만." "아프나이델이 막을 수 있다고 말하면 난 믿을래요." "감사합니다." 아프나이델이 보던 책을 보던 - 그래, 본 것이다. 읽을 수는 없었다. - 내가 말했다. "마법은 원래 드래곤의 것이라죠?" "응? 아, 그래. 후치. 그러니 내가 마법으로 드래곤을 공격한다는 것은 까마득한 사조에게 덤비는 꼬락서니지. 막기나 잘 막을 수 있다면 좋겠 구나." 타이번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네리아는 대거를 꺼내어들더니 촛대에 꽂혀있던 초에 불을 붙였다. 아직은 주황색 빛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산 지의 밤은 빨리 찾아오겠지. 아프나이델은 말했다. "아직 밝은데 왜 초를 켜십니까?" "책 보기 어렵지 않아요? 밝은 데서 봐야죠." "하, 이런. 감사합니다." 네리아는 테이블 위에 팔을 고이더니 나처럼 아프나이델의 책을 보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멋적은 표정을 지었지만 네리아는 미간을 찌푸 리며 말했다. "우… 와. 이게 도대체 글이에요, 그림이에요? 이게 뭔데요?" "스펠들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스펠들을 적어둔 것이죠. 그리고 제가 써둔 주석들도 있고. 그런데 말입니다, 원래 마법사의 스펠북은 보면 안 되는 것인데요?" "어, 그래요? 미안해요." "하하하. 아뇨. 괜찮습니다. 그건 다른 마법사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 다. 주문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 마법사가 아니 라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상관없습니다. 혹시 마법사가 될 생각 있으십니까?" "아, 아. 그런 생각은 없어요. 머리도 나쁘고… 그런데 사용할 줄 아는 스펠이라면서 그렇게 꼭 적어둬야 되는 거에요?" "네?" "응응. 그러니까 말이죠. 어떤 도둑이 소매치기를 한다고 해요. 그 도 둑은 소매치기 하는 법을 적어두고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소매치기를 하 지는 않아요. 자기가 할 줄 아는 것인데 왜 그렇게 적어둬야 되는 거지 요?" "하하. 그게 그렇습니다. 보통의 기술과 마법은 성질이 다릅니다. 그러 니까 마법이죠." 난 빛이 없이 타오르는 초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프나이델은 몸에 스펠을 새길 수 없어요? 아, 물론 미관상 좋지 않 겠지만 중요한 거 몇 개만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두면 편리할 거라고…" "뭐야?" 아프나이델은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왜 이러는 거지? 아프나이 델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 몸에 새기다니?" "몸에 스펠을 문신으로 새기는 것 말이에요." "무녀들의 문신주문술 말이냐?" "예?" "그건 헤게모니아의 무녀의 마을의 무녀들이 사용하는… 그러니까 대단 히 진귀한 방법인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예? 아, 저, 그렇게 하고 다니는 마법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 마법사가 아니라 무녀겠지." "마법사인데요?" 아프나이델은 이제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후치. 그 수법은 무녀의 마을에서만 전해지는 거고 무녀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겐 시술해주지 않아. 그런데 마법사라니.무녀겠지? 여자 아니 었어?" "남자인데요?" 아프나이델은 다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는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가 로저었다. "그럴 리가… 남자 무녀인가? 자, 잠깐. 남자 무녀라니. 그게 말이 되 나?" "무녀가 아니라니까요. 마법사고, 남자에요. 간단히 말하면 남자 마법 사라고 할 수 있고 더 쉽게 말하면 마법 쓰는 남자죠." "그럼 무녀들의 문신주문술이 마법사에게 시술되었단 말이야? 그건 말 도 안돼!" "말은 안될지 몰라도 기억은 남아있는데요." "그것 참. 신기하군. 아, 그래! 후치. 속은 걸꺼야. 그냥몸에 아무 문 신이나 새겨두고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일 거야." 그것 참 끝까지 안 믿네. "주문을 외울 때 문신이 번쩍번쩍 빛을 내던데요? 아, 그리고 어차피 그 마법사는 장님이라서 마법책을 볼 수도 없어요. 그래서 몸에 새겨둔 문신으로 마법을 쓴다던데요?" 아프나이델은 이제 관자놀이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 자, 장님 마법사라고? 농담이 심하구나. 차라리 장님 전사라면 믿 어도 장님 마법사라니?" "역시 쉽게 말하자면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마법을 쓰는 남자라고…" "이봐요, 후치! 장님은 오브젝트를 설정하지 못해. 마나는 넌인텔릭이 고 마법은 의지를 따르는 법이야. 그리고 의지가 오브젝트를 결정하는 것이고. 파이널 챠크라에서 알파 급수는 오브젝트 설정을 기본으로 한단 말이야.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메터리얼 문제야. 오브젝트가 설정되지 않 은 상태에서는 알파 급수 전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고 인카운터 아웃이 된단 말이야." "아, 미안해요. 지금이에요?" "응?" "지금 박수 치면 되요?" 네리아는 두 손을 올리더니 거창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나와 아프나이델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자 네리아는 동그란 눈으로 우 리를 바라보더니 검지손가락을 빨면서 말했다. "지금이 아닌가 보네?" 아프나이델은 피식피식 웃더니 곧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팔짱 을 끼더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나직한 목소리로 우리들 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목표 감지에서 차지하는 시각의 중요성을 차치하면 개념 배반이라고까 지는 할 수 없겠지만 모호성에 근거한 대상설정임은 틀림이 없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 관점인 현대의 마학에서 공감각적인 대상 설정이 이단적 접 근 방식으로 취급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겠지만 공감각적인 대상 설정으 로도 개념 배반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현대 마학의 패 러독스에의 하나의 탈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언명이 주창된지 어언 34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대상 설정 방식은 접근 난이도에 관한 문제에 기 인한 것이 틀림없는 나태함에 의해서 시각적 목표 감지를 포기하지 못하 고 있음이 작금의 현실이므로 이 때의 감각 부조화가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는…" "네리아. 내 의뢰 받아들이겠어요?" "무슨 의뢰야?" "어디 가서 마침표 좀 훔쳐와요." "성실한 나이트호크는 그런 거 안훔쳐." 그 때 돌발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프나이델이 무 한대로 뱉어내는 말의 홍수에 휩싸여 익사해버렸을 것이다. 엑셀핸드가 분지 전체가 울릴 정도의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나와 네리아는 아프나 이델에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마당으로 나왔 다. (물론 아프나이델은 우리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당으로 걸어가니 엑셀핸드와 운차이 커플의 시커먼 그림자가 더욱 진 하게 보였다. 엑셀핸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고 운차이도 피식거 렸다. 무슨 일이지? 그들의 뒤로 다가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오오…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우리쪽을 올려다보더니 곧 네리아에게 외쳤다. "하하하! 트라이던트의 제레인트라고 불러줘요!" 네리아는 헤죽헤죽 웃으며 거의 혼절할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레 인트는 드워프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밀리터리 포크(Military fork)를 가져와서 네리아처럼 자세를 잡고는 트라이던트라고 우기고 있 었다. 세상에, 흉측하기도 해라. 성직자가 저런 끔찍한 무기를 들고서 자랑스럽게 웃고 있으니 눈 뜨고 못봐주겠다. 네리아는 참담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걸 가지고 크라드메서를 어떻게 해 줄 작정인데요?" "겨드랑이까지는 안올라갈 테고, 발바닥을 간지럽힐까요?" 난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 옆에 있던 샌슨과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 언은 원래 가지고 있던 무장 이외에 커다란 크로스보우와 콰렐 통, 그리 고 스피어 몇 개를 들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 샌슨도 커다란 할버드 하 나를 어깨에 매고 스피어 몇 개를 묶어서 등에 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래도 내일 크라드메서와의 회견 자리에서 회담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크라드메서에게 빗발 같은 창질을 해댄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다. 응? 어… 그렇군. 레니가 라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라면, 정말 바일하 프씨의 말대로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것도 고려해봐야 되는 문제로군? 라자가 없는 상태에서 미친 드래곤이 활동기에 접어든다 라. 그렇다면 활동기에 들어가기 전에 없애버려야 되는 것이군. 길시언 과 샌슨은 그럴 각오를 했나 보군. 레니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어떤 수단으로서도 크라드메서를 진정시킬 수 없는 것이 확실해지면, 그를 죽 인다. 그게 가능하냐가 문제지만. 카알은 길시언과 샌슨의 생각을 눈치챈 듯했지만 그에 대해 별 말은 하 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짐이 많으면 힘이 많이 들겠소.' 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엑셀핸드의 경우엔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보라구, 젊은 친구들. 자넨 젊은 드워프들보다 더 무모하군. 정말 한 판 붙어보고 싶다, 이 말인가? 크라드메서와?" 샌슨은 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가져가보는 겁니다." 그리고 길시언은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준비가 모라자서 패하는 경우는 있어도 준비가 과해서 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에겐 레니양이라는 평화적이고도 젖내나는 무기가… 레니 양, 미안해요. 이 빌어먹을 자식아! 후우, 후우! 아, 흠. 어쨌든 레니양 이라는 평화적이고도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무기가 있긴 합니다 만, 보다 좋지 않은 결과, 그러니까 크라드메서가 악성 변비일 경우를 대비하여 상당량의 관장약을… 그만하겠습니다." 길시언은 조용히 검집을 풀어 두 손으로 검집을 쥐더니 그대로 위로 들 어올려 무릎에 대고 부러트릴 자세를 취했다. "우아아아악!" 나와 샌슨 이 동시에 달려들어서 간신히 그를 말려놓았다. 운차이는 피식거리더니 롱소드를 꺼내들면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야, 드워프." "뭐냐? 담배?" "아니. 칼 좀 갈아다오." "이놈아! 난 네 녀석의 증조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칼을 갈았다. 예의 범절을 좀 가르쳐줄까!" "그 때부터 칼을 갈았다면 드래곤의 비늘도 벨 수 있을 정도로 갈 수 있겠군. 부탁해." 엑셀핸드는 씨근거렸지만 운차이에게서 검을 받아들고는 숯돌을 꺼내었 다. 그 때 운차이가 말했다. "날만 예리하게 살면 돼. 두 번 다시 못쓰게 되어도 좋으니까." "뭐라고?" "말했잖아. 단 한 번만 정통으로 벨 수 있으면 된다. 검이 너무 약해지 더라도 좋으니 날만 예리할 수 있다면 완전히 못쓰게 만들 정도로 갈아 놔도 좋아. 내일이 지나면, 어쨌든 다시는 검을 쥐지 않을 테니까." 방 안이 고요해졌다. 제레인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리고 레니는 눈을 깜빡거리며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려 누구와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엑셀핸드가 말했다. "내일이 지나면 다시는 검을 쥐지 않는다고?" "죽으면 못 쥐고, 살면 안 쥔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8. 어두운 방 안에 제각기 다른 표정들이 떠올랐다.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네리아는 볼을 쓰다듬으면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알았다, 요놈아. 하지만 드워프 앞에서 아는 척은 하지 마라." 엑셀핸드는 씨익 웃었다. "제대로 갈 줄 모르는 녀석이 날을 망치는 것이지. 드워프에게 뭐라고 하는 거냐? 떽! 드워프가 갈아놓은 검은 수십 수백 번을 후려쳐도 끄떡 이 없어야 되는 법이다.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냐? 최고로 갈아놓을 테니 염려하지 마라." "믿겠어." 엑셀핸드는 기운찬 동작으로 숯돌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곧 엑셀핸 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투덜거려야 했는데, 샌슨과 나도 검을 뽑아들고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칼 갈 일이 없는 카알은 지도를 펼쳐놓고 바일하프와 의논을 하고 있었 다. "그럼 소요시간을 대략 5 시간 정도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지형은 노출되어 있겠지만 접근할 수 있을 때까진 접근해봐야겠군요. 멀 찌감치서 당해버리면 곤란할 테니까요." "가까이 접근하면 뭐가 유리해지나요?" 네리아의 질문에 카알은 레니를 흘깃 보다가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경우를 기억하십니까?" "악! 그 벼…락을 뿜는 드래곤!" "예에. 그는 레니양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래곤에게 숙명 으로 지워진 언약이라고. 그 말은, 어쨌든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를 만났 을 경우 공격에 앞서 라자의 계약의 의사 타진을 먼저 해보아야 되는 의 무 비슷한 것이 있다는 말로 생각되는데요." "음. 그런가요?" "예. 따라서 크라드메서에게 레니양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일단 안전하게 계약의 단계 로 접어들 수 있겠지요. 그 전, 그러니까 크라드메서가 레니양의 모습을 확인하기 직전까지가 가장 위험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리고 계약의 단계가 끝났을 때가 위험하겠지.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말이야. 그러나 카알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래곤은 눈이 좋아요?" "뭐… 하늘을 나는 생물은 대개 눈이 좋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드래곤의 시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퍼시발군? 자네가 말한 이 지점에 동굴이 있다면 여기 쯤으로 생각되는데, 맞는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펠레일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음. 그 외의 땅은 동굴이 있기 어렵겠군요." "그래. 알았어. 그럼 우리는 여기 서남 방면에서부터 접근해가는 것이 좋겠군. 계곡을 따라 접근하는 거야. 협소한 지형이지만 그만큼 은밀하 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 날이 어두워져도 바일하프 외에 다른 드워프들은 만나지 못했다. 드워 프들은 모두 지하에 집을 가지고 있어 일이 끝나도 여기에는 올 일이 없 다고 한다. 바일하프 역시 지하에 집이 있지만 우리들을 돌보기 위해 여 기서 묵기로 했다. 드워프들은 호기심이 없나? 우리 영지에 캇셀프라임 이 왔을 땐 영지의 주민들이 다 몰려나와서 구경하고 환영을 했는데. 우 리들도 그들을 위협하는 크라드메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찾아온 중요손님 인 셈인데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지? 넓은 마을에서는 우리가 있는 건물에서만 빛이 흘러나왔다. 창밖을 바 라보면 기분이 묘해졌다. 산비탈을 따라 제멋대로 쌓여있는 건물에 달빛 이 쏟아져 푸르스름하게빛나는 모습. 인공적인 빛은 우리들이 있는 건 물에서 흘러나오는 촛불빛 외엔 전혀 없다. 눈을 들어보면 산으로 둘러 싸인 좁은 하늘에 역시 작아보이는 달이 떠있다. 고요하고 광막한 분지 의 달밤이었다. 분지엔 달빛이 담겨 넘쳐나고 있었다. 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유가 뭘까? 갑자기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침대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지? 옆에서 샌 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뭐냐, 후치냐?" 샌슨은 뒤척거리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 되는 줄은 알겠지만 자둬라." "아." 이상한 대답을 하고나서도 난 침대에 눕지 않았다. 잠시 후 샌슨의 숨 소리가 느릿해졌다. 다시 방 안은 고요해졌다.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달 빛만 가득한 방.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난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젠 장. 드워프들이 침대에 깨진 그릇조각이라도 넣어뒀나? 그럴 리야 없지. 그런데 왜 눕고싶지가 않은 거지? 내일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인가? 아냐. 그렇진 않아. 지금껏 실감을 느끼진 못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살려고 갈색산맥을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뭐 특 별히 바뀐 것은 없다. 난 도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10초도 지나기 전에 난 다시 일어나 앉았다. 샌슨은 이번엔 눈 을 뜨지 않았고 그래서 난 홀로 어두운 방 안과 달빛이 흘러들어오는 창 문을 쳐다보았다. 드워프들의 유리창은 아름다웠다. 정신을 사납게 하는 바람 소리도 없었다. 춥지도 않았다. 젠장. 너무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 다는 것 때문인가? 웃기는 소리잖아. 제길. 크라드메서 때문인가? 넥슨 도, 할슈타일 후작도, 핸드레이크도… 잡다한 것들 다 사라져버리고 이 제 크라드메서만 남았기 때문인가? 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크라드메서 새끼, 사람을 빡돌게 만드는군. 잠도 못자게시 리." 어라? 내 말투가? 이건… 헬턴트 시절로 돌아간 것이군. 내 말투가 헬턴트 초장이 시절로 돌아가버렸어. 그 동안 우리 마을 사 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람들, 우아한 사람들을 만나고 돌 아다니면서 까맣게 잊어먹었던 말투가 다시 되돌아왔잖아. 쳇. 반갑군. 그런데 왜 지금 내 말투가 돌아온 거지?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젠장.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달빛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쏟아져내리던 달빛 은 침엽수들의 잎들 속에 잠겨 사라졌다. 허공만이 밝았다. 바스타드를 들어 뽑아보았다. 엑셀핸드가 갈아둔 칼날이 달빛이라도 갈 라놓을 것처럼 빛을 뿜었다. 해너 아주머니. 몸 지킬 생각이나 하라고요? 하하하. 어쩌면 말입니다. 난 이 칼로 바이서스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덕분에 정말 잘 쓰 고 있습니다. 난 겁집은 던져두고 바스타드를 든 채 방을 나왔다. 마당으로 나섰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마당이 마치 눈밭처럼 보였다. 발을 대기가 부끄러울 정도군. 난 마당이 부서질까봐 조심스럽게 밟고 나왔다. 음. 마당은 마당이다. 익숙한 감각이 발로 전해져왔고 몽상적인 분위기에서 약간이나마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싸늘한 추위가 느껴졌 다. 입고 있는 옷이라곤 셔츠 한 벌에 바지뿐이다. 하지만 바람이 별로 없 어서 다행이군. 다만 고지대의 공기가 목 뒤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였다. 난 목 뒤를 좀 주무르고 바스타드를 위로 세워보았다. 좁은 하늘에 떠있 는 한 조각 달을 겨냥했다. 조이스씨는 지금 달을 보고 있을까? 그 무뚝뚝한 대장장이는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서 달 보고 있을 새는 없겠지. 하지만 그 딱딱한 얼굴 뒤에서 당신의 아들인 샌슨의 걱정을 하 고 계시겠지. 걱정말아요, 조이스씨. 샌슨은 지금 잘 자고 있어요. 저 멋진 사나이는 내일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는데도 쿨쿨 잘 자고 있다고 요. 하하하. 바스타드를 옆으로 휘두른다. 쉬익. 분지의 검은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갈라지는 느낌.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터너, 이 다음에 어떻게 했지요? 뒷발의 무릎을 구부리며 자세를 낮춘다. 낮아진 바스타드를 허리의 탄력 을 이용해 당긴다. 몸은 제멋대로 회전하도록 내버려두고, 이윽고 끌어 당긴 바스타드를 다시 뿌린다. 은빛 섬광이 암흑을 물들인다. 아버지. 지금 회색산맥에서 달을 보세요? 크라드메서? 흥, 걱정마세요. 아버지 도 드래곤에게 잡히고 자식도 드래곤에게 잡히면 후세 사람들이 네드발 가문은 드래곤의 저주를 받았다고 할 거에요. 하하하. 우리 가문은 원래 저주나 축복 같은 것들하고는 사이가 안좋잖아요. 그런 건 거물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고, 초장이 네드발 가문은 헬턴트 영주님께 초나 바치며 살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어쩌다가 부자가 모두 드래곤을 찾아가게 되었 죠? 우습잖아요. 걱정마세요. 당신의 주정뱅이 아들놈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헬턴트로 돌아갈 거에요. 옆으로 세 걸음. 도약. 막고 튕겨 솟구쳐 오르게 하고. 돌려베기. 끊어치고, 끊어치고, 끊어치고, 끊어치고. 몸을 격하게 움직일 때마다 셔츠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합 은 없다. 발도 가볍게 미끄러진다. 다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셔츠 가 펄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바스타드가 뿜어내는 파열음뿐이다. 이윽고 다시 바스타드를 내려 허리 앞에 놓고 중단 겨누기. 제미니. 내 꿈 꾸고 있을 거지? 어차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미안하지만 셔츠 아래의 너, 혹은 치마 아래의 널 상상해봐도 좋을까? 아마 눈 앞에서 이런 말을 했 다간 따귀를 얻어맞겠지. 야, 야! 어차피 너 옷 아래에 뭐 굉장한 거라 도 가지고 있어? 나니까 그런 거라도 궁금하게 여겨주는 거 아니야? 윽. 상상의 제미니에게 발등을 밟히는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는걸. 좋아. 일단은 셔츠 첫번째 단추까지만 상상을 전개하면… 으윽. 이 계집애는 상상 속에서도 정말 아프게 꼬집네. "후치?" "으아악! 잘못했어!" "응?" 레니는 눈이 동그래져서 날 바라보았다. 와, 정말 놀랐다! 똑같은 붉은 머리, 하필이면 이런 상상을 할 때 나타날 게 뭐야. "아, 딴 생각하고 있었어." 정문으로 나타난 레니는 머리에 숄을 둘러쓰고 어깨엔 외투까지 커다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도 추운지 입 앞에 손을 모으곤 입김을 호호 불고 있었다. "추워?" "넌 땀 나니? 음. 그렇게 칼 휘두르니까 땀 날 수도 있겠네." "왜 나온 거야?" "그냥… 잠이 안 와." "아, 그래?" 레니는 내쪽으로 걸어왔다. 음. 하얀 마당을 밟으며 걸어오는 붉은머리 소녀. 으으… 제미니가 생각난다. "구경해도 돼?" "응?" "구경해도 되냐고. 연습하고 있었잖아. 나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 "연습은 무슨. 내가 뭐 전사라고. 그냥 잠도 안오고 해서 땀 빼면 잠이 올까봐." "응응. 계속해봐." 레니는 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마당 저편, 그러니까 아래로 떨어지는 위치까지 걸어가 섰다. 달빛 속에 그녀는 어둡고 밝다. 작아보 이고 커보인다. 참 이상하네. 거 참. 보고 있으면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지? 에라. 앞으로 뛰고, 좌우로 베고, 다시 뛰어 좌우로 베고, 돌려 위 막고 내려 치고, 옆으로 뛰며 다시 사선으로 베고. 구경꾼도 있으니 묘기나 한 번. 오래간만이다, 일자무식 무한대! "후와아아!" 마당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계속 올려베며 달렸다. 붕붕붕붕붕! 한 스 무 번 올려베었나? 아이고, 내 허리! 윽. 머리가 어지럽다. 다시 구경꾼 을 의식해서! 휘청거리는 것이 마치 기술인 것처럼 위장하고, 바스타드 를 대각선 위로 올리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아이고, 어지러워. 그러나 눈으로는 그윽한 눈빛을 뿜어내기 위해 애쓴다.(사실 마당이 세 개로 보 이니 자연스럽게 그윽한 눈빛이 나올 거야, 음.) 짝짝짝. 레니의 작은 손에서 작은 박수소리. "멋져!" "어땠어?" "응? 어… 뭐랄까. 후치 주변이 온통 번쩍번쩍했어. 마치 후치에게서 빛이 뿜어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 계속 둥글게 올려베었으니 반사광이 꽤나 요란했겠군. 레니는 손을 내밀었다. "잡아봐도 돼?" 하, 하하! 난 피식피식 웃으며 바스타드를 건네주었다. 레니는 멋모르 고 한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에 바스타드를 들려주었다. 레니의 팔이 우 스꽝스러운 동작을 취하며 아래로 휘익 처졌다. "어머!" 레니는 발등을 찍을 뻔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새침하게 말했 다. "후치 땀이 묻어서, 미끄러워." 아, 그래? 하하하. 레니는 바스타드를 들더니 상단 겨누기의 자세를 취 했다. 말이 좋아서 상단 겨누기씩이나 되지 엉덩이는 뒤로 툭 튀어나와 있고 다리는 모으고 서 있어 눈뜨고 못봐줄 장면이다. "나 어때?" "그럴듯해." 그랑엘베르여. 유피넬은 아마도 내 따끈따끈한 거짓말을 주워 잘 식힌 다음 그의 저울에 올릴 테니까 당신이 어떻게 좀 잘 말해줘요. 내가 여 기서 '눈뜨고 못 봐주겠어.' 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요. 레니는 생긋 웃더니 얍! 하면서 바스타드를 앞으로 내밀어 찌르기를 시 도했다. 다리는 여전히 모아져 있었고 허리는 뒤로 쭉 뺀 자세로 상체만 앞으로 숙이며 검을 흔들거리는 것도 찌르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찌른 거야?" "응? 응… 몰라. 그냥 찔렀어." "그래? 그럼 말해주겠는데, 상대의 경우 가벼운 찰과상을 입힐 수 있었 다면 퍽 다행이고 너의 경우엔 빈틈을 노출시킨 대가로 끔찍한 일을 당 하게 되었어. 도둑 키스에서부터 가슴에 구멍이 나는 일까지 아무 거나 당할 수 있게 되었는걸." 난 역시 진실과 사이가 좋단 말이야. 레니는 혀를 낼름거리더니 바스타 드를 돌려줬다. "흐음. 칼싸움 잘 하는 거 자랑 아니야." 난 바스타드를 돌려받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맞아. 자랑거리에는 초를 잘 만든다거나 음식을 잘 만든다거나 하는 것이 포함되지. 아아! 난 자랑거리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야. 심지어 난 애인도 너무 예쁘… 들었냐?" "들었어. 히히히." "할 수 없군. 사실대로 고백하지. 내 칼은 사실 프림 블레이드처럼 마 법검이었어." "헤에. 못믿겠는데?" 레니는 헤죽거리더니 다시 마당 끝으로 물러났다. 응? 뭐지? 레니는 날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더 안할 거니?" "아아. 됐어." 난 레니 옆으로 걸어가서는 바스타드를 마당에 꽂아두고는 아래를 내려 다보며 앉았다. 레니는 잠시 주저하더니 머리에 덮어썼던 숄을 내리며 말했다. "이거라도 어깨에 둘러. 춥잖아." "하하. 아냐. 괜찮아. 땀 흘린 뒤라서 춥지 않아." 그러나 레니는 끝끝내 내 어깨에 숄을 둘러주고는 목 앞에서 묶어버렸 다. 으으윽. 아버지. 당신 아들네미가 지금 계집아이 숄을 어깨에 두르 고 드워프들의 마당에 앉아서 달을 보고 있답니다. 뭐, 나쁘진 않네요. ================================================================== 14. 정답이 없는 선택……9. 레니는 내 옆에 주저앉더니 말했다. "어, 저. 후치야?" "응?"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기분이 무거운 거 같 아서 묻지 못했거든." "나에게 물어봐." "나… 말이지. 내일 크라드메서를 만나고, 어, 그러니까 드래곤 라자의 계약을 하고나면 어떻게 되는 거니?" 난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파란 볼을 한 채 분지 아래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달을 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되다니?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거 아냐? 넌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응.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그건 상징일 뿐이야. 그런데 그 상징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지." "그럼 나 정말 아무 일도 안해도 되는 거지? 그냥 찾아가서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응. 그래." "그렇지 않아." 대답한 것은 레니가 아니었다. 난 후다닥 일어나면서 동시에 땅에 꽂아둔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그 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레니는 놀라서 일어났고 난 그녀를 가리고 섰다. 레니의 손톱이 내 셔츠를 파고드는 것 이 느껴진다. 시오네였다. 팬텀 스티드를 탄 채 분지 위 허공에 떠있었다. 우리들이 산비탈 위의 건물에 서있어서 얼굴 높이는 비슷했지만 어떻게 뛰어서 노려볼 만한 거 리는 아니었다. 제길. "시오네." 재빨리 시오네의 양 옆을 살폈지만 넥슨이나 쟈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혼자 온 것인가? 난 바스타드를 시오네에게 겨냥했다. 하지만 시 오네는 자신을 향한 검 끝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말했다. "어제는 고마웠다, 후치." "빨리도 왔군요." "날아오니까." 어째 대화가 상당히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군. 난 코를 쓱 닦 고는 말했다. "당신, 우릴 공격할 건가요?" "아니. 지금으로선 그럴 생각이 없어." "고맙군요." "고마워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고마워해. 잠시 후 그럴 생각이 떠오를지 도 모르지만." "고맙지 않군요." 등 뒤를 부여잡는 레니의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윽, 레니. 옷 좀 그만 잡아당겨. 목이 졸려오잖아. 시오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어디에 있지?" "내가 먼저 묻지요. 아까 끼어들 때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그걸 알려주면 크라드메서의 위치를 말할 텐가." 시오네는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던져놓고는 말했다. 흐음. 그거 재미있 는 조건이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크라드메서의 위치를 모른다는 데 있 지. "난 크라드메서의 위치를 몰라요." 시오네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다른 자들에게 물어봐야겠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고? 이런, 안돼! 난 곧장 뒤로 돌아 레니를 끌어안았다. "꺄아아악!" 난 레니와 함께 나 동그라졌고 우리들이 서있던 위치에서 뭔가가 파팍! 튀는 소리가 들려왔 다. 땅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밧줄이 마당에 떨어져있었다. 밧줄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건 아프나이델이 쓰 던 그 마법이군! "빠르군." 시오네의 평이었다. 헹! 우릴 인질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다 고? 웃기시는군. 난 레니를 재빨리 일으키며 말했다. "건물 안으로 도망… 아니, 내 등 뒤에 있어!" 다시 고개를 돌려 시오네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대로 팬텀 스티드 위에 탄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바스타드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저 여자가 우리 일행을 좌절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레니를 해치는 것이 겠지. 그래서 난 레니를 가로막고 섰다. 난 시오네를 노려보며 외쳤다. "당신, 크라드메서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도대체 당신의 목적은 뭐야?" "너와 함께할 목적이 아니다." "그래? 그렇다고? 하지만 당신은 핸드레이크의 전인이잖아! 도대체 이 나라에 대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그러는지 알아야겠어!" 시오네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검고 풍성한 머리로 거의 가려져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입매만이 겨 우 보일 정도였으니까. 시오네는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전인이라. 넌 누구의 전인인가?" "뭐라고?" 시오네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빠르게 말했 다. "넌, 아니 너희 일행들은 크라드메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나에게 드 래곤 라자를 넘겨라.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가서 라자의 게약을 실행하겠 다. 후치, 넌 어제 너의 목적은 크라드메서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 다. 내가 대신 해주겠다는 거야." 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내 대답은 바로 튀어나갔다. "일어나!" 우리 일행들에게 외친 소리였다. 곧 건물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 리며 불빛이 비쳐나오는 것도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아 랫입술이 아파오는 것으로써 내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시오네는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고약한 꼬마놈… 그 소녀는 죽이지 않는다. 걱정마라." "뭐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죽어라, 꼬마야." 시오네가 손을 휙 쳐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어제 당신 도와줬잖아!" "그래서?" 시오네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캐스트를 시작했다. 이런, 우라질!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에 시오네는 빠르게 캐스트를 마치고 손을 내렸 다. 그녀는 내게 똑바로 손을 겨냥했고 난 그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몸이 굳어버렸다. 이런, 피해야 되는데, 피해야 되는데! 레니가 등 뒤에 있 어! 어떻게 하지? 시오네는 외쳤다. "파워 워드 킬!" 빌어먹을, 죽었다! 아, 아니, 죽을 것이다. 언젠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난 눈을 껌뻑거리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머리 끝이 주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벌써 죽었나? 난 이 미 죽었다는 것도 모른 채 이렇게 영혼으로 서서 시오네를 바라보고 있 는 것인가? 그러나 시오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냐!" "나, 난 후치 네드발인데…" 대답하면서도 이건 아무래도 합당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내 이름이 궁금한 것은 아닐 텐데? 그 때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푸르스름한 막을 볼 수 있었다. 어두컴컴해서 잘 보지 못했던 것이 이제서야 보이는 것이다. 이게 뭐지? 그 때 등 뒤에서 제레인트의 헐떡 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절할 정도로 멋진 타이밍을 보여준 나의 이름은 제레인트!" "옷이나 입고 나와야죠!" 네리아의 비명 소리. 곧이은 제레인트의 유쾌한 대답. "옷 입고 나왔으면 후치 못 구했습니다! 하하하!" 우하, 허, 하! 살았다. 제레인트가 날 구했구나! 그러나 시오네는 잠시 주저하지도 않고 곧장 캐스트에 들어섰다. 그녀는 그대로 내게 손을 뻗 으며 외쳤다. "클라우드 킬!" "후치, 숨을 멈춰!" 아프나이델의 찢어지는 고함 소리. 시오네의 내뻗은 손에서 달빛 아래 회색에 가깝게 보이는 연두색 구름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뒤로 물러나야 되는거 아닌가? 그러나 레니는 내 등 뒤에 매달려있었고 난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멈춰야 돼! 연두색 구름은 순식간에 내 눈앞 까지 다가왔다. 아, 안돼! 왜 하필이면 지금 재채기가 나오려고 하는 거 야! 에, 에, 에… "에취!" 맙소사! 내가 재채기를 하자 무서운 바람이 일어났다. 쏴아아아! 내게 로 밀려들어오던 연두색 구름들이 그대로 시오네쪽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내가 이렇게 강인한 콧바람을 가졌었나? 정녕 OPG의 숨겨진 비밀은 코의 힘을 강력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는가! 내가 이런 싸가지 전무한 상상 을 하는 동안 연두색 구름은 시오네를 덥쳤고 시오네는 황급히 위로 떠 올랐다. 독구름은 팬텀 스티드의 발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뒤 에서 샌슨의 기막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대단합니다!" "아, 아니… 제가 아닌데요?" "예?" 무슨 말이야? 그러나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뒤로 돌아 레니를 들어올렸다. 레니는 질겁했지만 난 그대로 레니를 허리에 낀 채 죽어라 고 달려서 건물로 돌아갔다. 건물에서는 길시언과 샌슨이 손에 손에 검 을 든 채 달려나오고 있었다. 난 레니를 내려놓으며 그대로 몸을 돌렸 다. 레니는 황급히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시오네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팬텀 스티드를 천천히 몰아서 우리들의 머리 위로 다가왔다. 길시언이 고함을 질렀다. "너!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거냐!" "드래곤 라자." "내어줄 수 없다!" "네 의사는 상관없어. 난 데려갈 테니까." 길시언은 눈에서 불똥을 튀겼지만 시오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캐스 트를 시작했다. 이런, 젠장! 또 마법이야? 그 때 카알이 뛰쳐나왔다. 카 알은 땅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의 손엔 롱보우가 걸려져있었고 시위는 한껏 아래로 당겨져있었다. 카알은 외쳤 다. "멈춰!" 그러나 다음 순간 팬텀 스티드를 탄 시오네가 네 개로 불어났다. 히이 익! 밤 하늘에 네 명의 시오네가 네 마리의 팬텀 스티드를 탄 채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다. "미러 이미지(Mirror image)!" 카알은 당황해서 일어나더니 롱보우는 그대로 위로 겨냥한 채 등 뒤의 아프나이델에게 물었다. "어느 게 진짜요?" "모릅니다. 저건 알 수가…" 그 때 네 명의 시오네가 동시에 말했다. 맙소사, 진짜 네 명이 말하는 것 같잖아! "드래곤 라자를 내어놓아라." "허튼 소리!" 어느 새 달려나온 엑셀핸드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카알은 그대로 롱 보우를 하늘로 들어올린 채 고함을 질렀다. "왜! 왜 레니양을 원하는 거요?" 네 명의 시오네가 동시에 대답했다. "알 바가 아니다. 내어놓지 않으면 함께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더니 네 명의 시오네는 동시에 캐스트를 시작했다. 잠시 후 네 명 의 시오네는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올렸고 그 손들 위에는 시뻘겋게 타오 르는 불공이 떠올라있었다. 제길, 또 저거야! 카알은 황급히 외쳤다. "모두들 안으로…!" "안으로 도망가봐야 소용없다. 이 마을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잖아도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우리들은 시오네의 말에 완전히 굳어버렸다. 시오네들은 손에 불공을 띄워둔 채 말했다. "다시 말한다. 드래곤 라자를 내어놓아라. 다음 번은 없다. 거절할 경 우 그대로 던지겠다." 이, 이런! 카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들어올린 롱보우의 시위가 부르르 떨렸다. 설마, 도박을? 카알은 넷 중 아무 거나 노려서 쏘아버릴 생각인가? 그러나 카알은 그러지못했다. 그 의 활이 천천히 내려오는 순간. "가장 오른쪽!" 고함소리가 들려온 순간 카알은 그대로 활을 들어올려 시위를 놓았다. 탱! "아아악!" 가장 오른쪽에 있던 시오네의 팔에 화살이 맞은 순간 다른 세 명의 환 상도 그대로 손을 들어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네 명의 시오네의 손 위에 만들어졌던 네 개의 화염구는 모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누구지? 누가 우리를 도운 거지? 네 명의 시오네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 며 앙칼지게 외쳤다. "이… 잡스런 신의 지팡이!" 제레인트가 놀란 눈을 했다. 자, 잠깐. 그건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아니 었는데? 그 때 저편 어둠 속에서 조금 전에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흉측한 짓을 그만 둬요. 뱀파이어." 이윽고 마당 저편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은 키가 6큐빗에 가까운 거대한 그림자였다. 커다란 로브가 길게 늘어져있었고 그 어깨는 샌슨과 길시언의 어깨를 합쳐놓은 것 비슷하게 보였다. 펠레일은 기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난 반가움에 고함을 질렀다. "에델린!" ================================================================== 14. 정답이 없는 선택……10. 이윽고 에델린은 마당에 올라섰다… 고 생각되었지만 그러고도 한참 동 안 올라왔다. 키가 너무 커. 감각이 잠시 혼동을 일으킨 사이에 에델린 은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거대한 그 몸은 전에 헤어졌을 때보다 더 커진 느낌도 들었다. "가만 있어!" 시오네는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거칠게 잡 아당겼다. 이차원에서 소환된 저 유령마가 에델린에게 겁을 집어먹는 것 인가? 팬텀 스티드는 뒤로 물러설 듯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다리 부분이 희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친다는 느낌이곧바로 다가왔다. "에델린!" 샌슨의 고함소리에 이어 카알도 외쳤다. "에델린양!" "오래간만이군요, 여러분." 에델린은 고개를 조금 숙여보이며 인사했다. 우리 셋 외에 다른 사람들 은 모두 떨리는 아랫턱을 가누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난 반가움에 그녀에게 다가서려고 했으나 에델린은 팔을 들어올려 날 제지 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저쪽과 애기를 마무리짓도록 해야겠습니다. 후 치." "예! 예. 예?" 발음은 똑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세 가지 종류의 말을 해버렸다. 좀 더 길게 말할 수 있는 침착성과 심적 여유를 가졌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 겠지 '물론 당신의 요구에 따라 기다린다는 것은 저의 기쁨입니다! 하시 던 이야기는 마무리짓는 것이 당연합니다. 잠깐만, 시오네와 할 말이 있 으시다구요?' 그러나 에델린은 그 무지막지한 스텝을 짚으며 마당 저편 으로 걸어갔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샌슨?" "엄호한다." "좋아." 나와 샌슨이 왼쪽으로, 그리고 길시언과 운차이가 오른쪽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로 다른 사람들의 머리쯤 되는 곳에 가슴이 오는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티스가 기둥만한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는 것이다. 하하하! 왠만 한 녀석들이라면 벌써 달아나야 될 상황에서 시오네는 달아나지 않음으 로써 자신이 왠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시오네는 손을 들어 에델린을 겨냥하면서 말했다. "치료하는 손?" "그렇습니다." "칼라일에서 봤었지. 오랫만이군." "그렇군요." "나타난 목적은?" "당신과 여기 이 분들 모두에게 용건이 었어요." "나에 대한 용건은?" 이런, 왠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트롤과 뱀파이어는 마치 서로 에게 따분한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인간 이 아니긴 하지. 어쨌든 에델브로이의 딸이라는 의미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트롤 프리스티스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전언입니다." "전언? 누구의?" "핸드레이크께서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헉! 뭐야? 지금 에델린이 뭐라고 말했지? 뒤에서 숨죽인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아프나이델! 당신도 들었소?" 시오 네 역시 크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오네는 입술 양 끝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미소를 짓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소 나는 시오 네의 송곳니를 볼 수 있었다. 멋진데? 기능적인 스타일이야. "핸드레이크는 죽었어." 뭐야? 뭐라고? 시오네의 말은 우리를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 서 뭔가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과연 다음에 입을 연 것은 에델린이었다. (에델린은 사람이 아니라 트롤이다. 하하하!) "아뇨. 죽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핸드레이크는 죽었어!" "그는 당신에게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닥쳐! 핸드레이크는 죽었어!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어! 내가 그를 죽 였어!" 맙소사! 가면 갈수록사람 어지럽게 만드는군.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 기들이지? 에델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극심한 상처를 입긴 했습니다만 살아났고 아직 살아있지요. 어쨌든 그의 말을 듣지 않으실 겁니까." "…짖어봐!" "알겠습니다. 그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오네의 얼굴이 달빛보다 더 하얗게 변했다. 검은 머릿카락 사이로 보 이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밀납처럼 보였다. 그녀는 핏기없는 입술을 벌 려 말했다. "뭐라고?" "그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그리고 이제는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당신에게 어울리 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고도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그대로 전해드리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델린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높낮이도, 음색도. 트롤 특유의 거친 음색도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일 뿐, 혹시라도 에델린 자신의 말로 착각하게 되면 곤란 하므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말하겠다는, 그런 식의 어투였다. "내 딸아." 기절할 뻔했다. 아슬아슬했어. 거의 기절할 뻔했다니까. 샌슨을 보니 꼿꼿이 선 채로 눈을 뜨고 기절해있었다. 확실해!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괴롭히는 것이 딸들의 숙명이라지만, 이건 심하 지 않느냐? 좀 봐다오. 네가 다른 집의 딸들처럼 남자친구 문제 같은, 어찌보면 퍽 즐거운 문제로 아버지를 괴롭히게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 겠다. 혹은 죽어도 시집가지 않고 아빠랑 살겠다는 말로 아비의 복장을 즐겁게 뒤집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너무 과욕이겠지. 너와 나 사 이는 그렇게까지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부녀관계는 아니었지. 그러나 네 게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겠다. 내게 아버지의 자질이 부 족한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니라." 길시언은 기어코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꾹! 히꾹! 아이고, 맙소사! 에 델린은 웃지도, 음색을 좀 낮추지도 않은 채 저 말을 그대로 했다! 뒤에 선 엑셀핸드의 기막혀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허, 허허, 허? 허." 그러나 시오네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밀납 같은 얼굴은 억지로 표정을 가져다 붙여도 곧 떨어져버릴 것 같은 딱딱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 델린은 한가롭게 게속 말했다. "그래서 난 너에게 간섭을 하지 않으려고 했느니라. 넌 똑똑한 아이고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한다고 믿었거든. 하지만 요새 듣자니 네가 요즘 참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구나. 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 만 난 널 잘 안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네가 깨닫지 못하는 네 속마음 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단다. 넌 믿을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그게 바 로 아버지란다.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좋겠다는 것이 아비의 의견이 다." 허어, 허어! "날 믿는다면 나에게 찾아와다오. 그리고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되면 내게 찾아와서 날 이해시켜다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네가 많이 그립 구나. 네 동생에게 말을 전하니, 동생과 함께 날 찾아오도록 해라. 그 럼, 언제나 널 사랑하는 아빠가." 운차이마저도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으으으으음…" 에델린은 말을 마치고 시오네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전했어요, 언니." 그게 결정타였다. 뒤에서 끔찍한 신음소리와 함께 뭐가 주저앉는 소리 가 들리더니 곧 네리아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괜찮 아요? 에그! 눈을 그렇게 뒤집으면 이상해 보이잖아요." 그리고 제레인 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앗! 카아알? 진작 말씀하셨어야지요. 간질 증 상이 있으셨군요? 잠시 치료를 위해 팔을 좀 묶어야…" "침버씨!" 바람이 불고, 달빛은 교교하고, 주위는 고즈넉하여, 초겨울밤을 미화할 수 모든 종류의 수식어가 허락될 듯한 멋진 밤인데, 사람들은 당황해버 렸다. 이 넓고 공활한 장소, 많은 사람들과 여러 종족 중에서 시오네와 에델린만이 침착해보였다. 시오네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너와 나 사이에 그런 우스꽝스러운 관계가 성립되지?" 에델린은 따사롭게 으르렁거렸다. "아버지가 같으니까요." "뱀파이어와 트롤 자매라고?" "예." 뱀파이어와 트롤 자매? 아아, 그래? 그럼 그 아버지는 대마귀 같은 사 람이어야 될꺼야. 발록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세 명이 나란히 서있 으면 누구라도 정겨운 한가족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으으윽. 시오네는 여전히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핸드레이크가 아니라면 이런 천치 같은 말을 전하게 했을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네 말대로 아직 살아있는 것이었군." "예. 언니." 시오네는 한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양쪽에 풍성한머릿결이 있어 한 손바닥으로 완전히 가려진다. 시오네는 손바닥 뒤에서 말했다. "그는 원래 희귀한 것, 이색적인 것을 좋아했지. 그래, 너 따위 괴물도 딸이랍시고 거두어들였다는 것, 다른 사람도 아닌 그니까 믿어야 되겠 군. 그 자는 뱀파이어를 딸이라고 생각하는 천치니까. …어디에 있지?"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에델린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시오네는 거칠게 대답했다. "너 따위와는 1분도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디에 있지?" 에델린은 구슬픈 표정으로 송곳니를 번뜩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알려줄 이유가 있는가?" "아버지니까요." "죽여버리겠어." 시오네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고 에델린은 아연한 얼굴로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 자매의 웃기는 점은, 아니 대부분의 자매가 그렇던가? 동생이 언니를 억누를 가능성이 무지무지 높다는 점 이다. 동생은 프리스티스니까 뱀파이어 언니 쯤 간단히 터닝할 수 있을 테고 힘으로 싸워봐도 트롤이니까 간단히 박살을 내어버릴 수 있겠지. 아아! 말을 하면서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아앗! "제 아버님이시지만 언니의아버님이시기도 합니다." "시제를 똑바로 사용해. 아버지였었지. 한 때 그렇게 믿었었지." 에델린의 큼지막한 들창코가 슬픈 듯이 벌렁거렸다. "아버지는 아직도 언니를 딸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비록 언니가 아버 지에게 그런 짓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조금 전 제 가 전해드린 말을 들어보았으니 알 수 있지 않으세요? 거기 어디에 자신 을 해꼬지했던 딸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드러나던가요?" 내 정신의 강인함이여! 이 황당무쌍한 대화 속에서도 아직 제정신을 유 지하고 있다니. 시오네는 자기 동생의 우람한 송곳니에 비하면 훨씬 작 은, 하지만 더 날카로와 보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쉭쉭거렸다. "해꼬지라고? 웃기는 소리! 그가 어떻게 지금껏 그 썩어빠진 입을 놀릴 수 있는데! 어떻게 아직껏 할딱거리며 살아숨쉴 수 있는데!" 뭐야! 귀밑머리가 모두 곤두서는 느낌이 든다. 지금 시오네가 무슨 말 을 하는 거지? "내가 그에게 영생을 주었다. 불멸을 주었다! 어떻게 그것이 해꼬지라 는 말이냐!" 영생을 주었다고? 시오네가, 핸드레이크에게 영생을 주었어? 뱀파이어 인 시오네가… 샌슨은 내가 하고 싶었던, 그렇지만 차마 입이 벌어지지 않아서 못꺼내었던 말을 간략하게 정리해주었다. "물었군." 시오네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눈은 이제 검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닥쳐!" 그러나 샌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네가 핸드레이크를 물어버린 것이군?" "두번째다. 닥쳐!" 샌슨은 차분하게 말했다. "세번째로 말할 기회를 주지. 그래서 핸드레이크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 군. 핸드레이크는 아비스의 미궁에서 널 건져내었다고 들었다. 죽이지도 않고 데리고 다니면서 마법을 가르쳐줬지. 그런데 그 댓가로 넌 그를 물 어뜯어버린 것이군?" 시오네는 세 번 말하는 취미가 없나 보다. "파이어볼!" 푸화하학! 허공을 날아온 파이어볼이 우리들 앞에 작렬했다. 눈을 감을 사이도 없었다. 거대한 화염구는 우리 앞 4 큐빗 허공에서 폭발해버렸 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미친 바람이 불었다.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옆을 보자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에델린이 보였다. 그녀의 두 손에서는 은은한 빛이 어려있었다. 시오네는 에델린을 쏘아보며 앙칼 지게 외쳤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는지 볼까?" 에델린은 구슬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이러지 마세요." 시오네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에델린을 쏘아보았다. 에델린은 탐탁찮 은 동작으로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도로 나온 그녀의 손 에는 그 거대한 손에 비해볼 때 극히 작아보이는 동그란 쇠테 하나가 들 려져있었다. 그 가운데는 일견 복잡해 보이는 도안이 들어있었다. 코스 모스였다. 시오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델브로이의 디바인 마크인가? 에델린은 그것을 꺼내어들더니 팔을 그대로 늘어트린 채 말했다. "언니… 천천히 생각해볼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에델린은 시오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겠지요. 너무 뜻밖의 일일 겁니다. 불쾌할지 모르지만, 뱀파이어의 행동 원리가 조용하지만 처절한 집념과 타오르지만 어두운 정열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난 언 니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않겠어요. 차분히 생각해보세요." 시오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아올랐나?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 오네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의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너!" 에델린은 손을 들어올렸다. 디바인 마크를 든 손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오네를 말리듯이 가볍게 빈손을 들어올렸다. 시오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하세요. 지금은… 더 말하면 감정만 앞세우게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잠시 헤어지도록 합시다, 언니.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생 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제로 돌려보내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시오네는 에델린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눈을 내려 다른 손에 들린 디바 인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쉬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팬텀 스티드를 천천히 뒷걸음질치게 했다. 허공에서 그대로 뒤로 물러나며, 시오네는 우리들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들!" 무슨 뜻이지? 그녀는 허공 속을 향해 뒷걸음질로 사라져가며 외쳤다. "꺼지기 위해 타오르는 불꽃! 너희 필멸자들은 항상 그랬어! 좌절하기 위해 달려가는 녀석들!" ================================================================== 14. 정답이 없는 선택……11. 시오네는 팔을 거칠게 휘두르며 외쳤다. "죽을 수 있으면서! 죽을 수 있으면서 그 삶을 값지게 쓰지 못해! 너희 놈들은 파멸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해서 목적도, 의미도 없이 달려간다. 파멸하기 전에 뭐든지 이룩하면 된다고 믿고! 닥치는대로 아 무 일을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아둔한 멍청이들!" 길시언이 마주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마! 네가 불멸자라고 믿느냐! 필멸자의 생명에 기생하여 사는 주제에!" 이제 제법 멀어져버린 시오네에게서 작지만 강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놈들은 세계에 기생하지 않느냐!" "우리는 세계를 가꾸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돌려준다! 넌 뭐냐? 넌 필멸 자들에게 뭘 준단 말이야! 더러운 흡혈귀, 입을 함부로…" 그 때 운차이가 길시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길시언은 운차이의 손을 뿌리쳤다. 운차이는 손을 치워주면서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떠들어. 옆에 동생이 있으니." 길시언은 당황하면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델린은 뒤로 사라 져가는 시오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은 이해하기 어려웠 지만 그 눈빛은 슬퍼보였다. 시오네는 이제 완전히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시오네가 나타났을 때부 터 숨을 죽이고 있던 밤하늘의 별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에델린 은 갑자기 두 손을 올려 가슴 앞에 모으더니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에델린은 거대한 몸을 돌리 더니 우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레니는 새파래져버렸다.) "인사가 늦어 죄송하군요, 여러분. 전에 뵌 분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게시는군요. 전 에델브로이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에델린이 라고 합니다." 네리아는 상당히 주저주저하면서, 레니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에델린 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제레인트는 거의 껴안으려들지나 않을까 의심될 정도로 열렬히 악수를 청했다. 그는 에델린의 큼지막한 손을 두 손으로 쥐고 흔들면서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제레인트 침버라고 합니다.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 을!" 에델린은 지나친 환영에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예, 예.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제레인트는 열정이 담겨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전오늘 신의 사랑의 광대무변함 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에델브로이의 은총이시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장관이었던 것은 엑셀핸드와 에델린의 악수 장면 이었다. 엑셀핸드는 온화한 표정으로 발뒤꿈치를 중후하게 들어올렸고 에델린 역시 화사한 표정으로 허리를 압도걱으로 숙였다. 엑셀핸드는 웃 으면서도 조금 떨뜨럼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참, 많이도 자랐군! 네가 나와 키가 비슷했던 것 기억나느냐?" "예. 엑셀핸드. 제가 그 때 많이 무례했지요?" "하하! 다락 귀신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서 기웃거리던 네 모습을 보고 기겁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이젠 혹시라도 지하에서 만난다면 도 끼부터 들어올리고보겠군. 얼굴 좀 단단히 익혀놔야겠다." 상대의 감정을 별로 배려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지만 에델린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인사가 끝나고나서 일행들은 건물로 들어와 식당으로 모였다. 바일하프는 그제서야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타나더니 에델린의 모습을 보고선 먼저 기겁했다. 전후설명을 듣고 난 바일하프는 감탄하면서 말했 다. "이런, 이게 그 에델린인가? 엑셀핸드! 너와 키가 비슷하다면서!"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게냐, 요 미친 드워프야! 트롤은 자라지 않는 줄 아느냐!" 두 드워프들의 설전은 일행들의 눈총 속에 사그라들었고 모두들 의자를 잡아앉았다. 에델린의 경우엔 맞는 의자가 없어서 그냥 물통 하나를 뒤 집어놓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일렁거렸고 일행은 아직 남아있 는 흥분과 무한한 의문 속에 말없이 에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촛불빛 때문에 생기는 얼굴의 음영은 그들의 표정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동시에 깊어지게끔 하고 있었다. 에델린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카알씨. 그리고 샌슨과 후치. 모두들 건강한 것을 보니 기쁩니다. 그 리고 운차이씨도." 운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아, 예. 코다슈씨 외에는 모두들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코다슈 씨는 칼라일 영지에 남기로 했습니다." "코다슈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델린은 고개를 돌려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될지 막막하군요. 어쨌든 일단 설명해보 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길이시죠?" "예. 어떻게 아셨는지요." "전 여러분들을 찾아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갈색산 맥 아래 이라무스시에 이르렀을 때 에델브로이의 신전에서 하이 프리스 트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께 전후사정을 모두 전해들은 다 음 전 이라무스에서 이곳으로 곧장 걸어온 것입니다. 중간에 레티의 프 리스트들과 조우할 뻔했기 때문에 야음을 틈타 걸어오느라 지금에서야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저희들을 찾아오셨다고요?" "예… 카알. 제가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들으셨지요?" "예. 칼라일 영지에서 들었지요. 에델린양을 키워주시고 마법으로써 말 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그 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드디어 찾으신 겁니까?" 카알은 네리아나 레니, 제레인트, 길시언 등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서술 적으로 말했다. 에델린은 행복한 표정 - 일 거라고 생각되는 - 으로 말 했다. "예. 만났습니다." "대단히 축하드릴 일이긴 합니다만, 그에 앞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 군요. 그 마법사가… 핸드레이크입니까?" 에델린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만나뵙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핸드레이크, 역시! 일행들은 바짝 긴장해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 린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저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듣고 알아차 리셨지요.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고, 믿게 되고나서는 참 많이 울었답니 다. 아버지께서 제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에델린의 커다란 얼굴에 있기 때문에 작아 보이는 그 눈에 눈물이 그렁 해졌다. 일행들은 숙연해졌다. 에델린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카 알은 따스한 눈으로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허헛, 참. 세레니얼양이 여기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루릴? 아, 그렇군. 이루릴은 핸드레이크를 찾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이 자리에 없군, 그래. 에델린은 잠시 후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만, 일단 여러분들의 소중한 시 간을 빼앗지 않도록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께서 지금껏 알고 계시는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전해드려야겠군요. 놀라지 마시길. 저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별이란 사실…" "여덟 종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의 보석이었지요." 에델린은 입을 쩍 벌린 채 카알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어떻게 알고 게신 것입니까?" 카알은 팔을 조금 벌려보이며 말했다. "저희들은 대미궁에서 드래곤 로드도 만났고 레브네인 호수에서 페어리 퀸 다레니안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습니다." 카알은 그리고나서 지금껏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데미 공주님의 이야기에서부터 하슬러의 이야기, 다레니안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요약해 서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에는 카알의 시각이 조금씩 배어있었지만 카알 은 되도록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중간중간에 제레인트와 나 의 부단한 방해를 받아가며 카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 려주었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여러분들은 핸드레이크가 생존해있다는 이야기에 놀라지 않으신 것이군요." 카알은 눈을 조금 내리깔면서 말했다. "세레니얼양은… 그렇게 믿고 있었지요. 세레니얼양은 핸드레이크를 추 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껏 반신반의하고 있었지요. 300년 전 의 인물이라니. 핸드레이크와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는 먼먼 과거의 일이라는 생각은 태어나서 지금껏 굳어왔던 생각이었지요. 깨트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믿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생존해계십니다. 300년 전의 인물인 저희 아버지께서 지금껏 생존해계시는 이유는… 조금 전 저희 언니와의 이야기를 들어 대충은 짐 작하실 겁니다." "예. 그럼, 참, 이거 어떻게 질문해야 될지…" 카알은 허둥거리며 손을 들어올려 휘젖기까지 하다가 겨우 말했다. "핸드레이크는 현재 뱀파이어인 것입니까?" 누군가 참새 깃털을 하나 가져와 떨어트리면 그 충격음 때문에 우리 모 두가 쓰러져버릴지도 모른다. 카알의 질문에 대한 에델린의 대답을 기다 리면서 우리들은 고드름만큼이나 긴장했다. 에델린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직껏 살아계시죠." 가슴 한 구석에서 뭔가가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라고? 그 때 뭔가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난 내 심장 이 무너진 줄 알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길시언이 피로한 얼굴로 의자 등 받이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는 파리한 얼굴로 말했다. "맙소사… 이런 비극이!" 아프나이델은 망연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핸드레이크 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바이서스의 숨은 아버지인 핸드레이크가 뱀파 이어가 되었다고! 네리아는 파랗게 질려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가, 바이서스의 아버지가! 페어리퀸, 아아, 다레니안이여! 다레니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 나 슬퍼할 것인가! 300년의 오해가 비로소 풀렸는데 핸드레이크가 뱀파 이어가 되었다니! 이루릴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또 얼마나 놀랄까? 그러나 더 큰 비극이 눈 앞에 있었다.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뱀파이어 라는 것을 알게 된 에델린은 어떻게 된단 말이야! 그 아버지를 사랑한다 고 말해야 될 것인가? 프리스티스인 그녀가? 샌슨은 무거운 한숨을 토했 다. "저 빌어먹을 뱀파이어, 그 여자가! 제기랄!" "그의 노고, 그의 열정이 이렇게 보답받게 되다니! 그 현명하고 모든 종족을 사랑했던 선량한 인물에게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비극이란 말인 가!" 길시언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제레인트는 입술을 깨물면서 커다란 소 매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에델린은 아무런 표정없이 길시언을 바라 보았다. 그 때 카알이 말했다. "비극?" 그것은 그저 길시언의 말을 따라하는 듯한, 어떻게 듣자면 익살스럽게 도 들을 수 있는 한 마디였다. 하지만 카알의 그 한 마디는 왠지 우리들 모두에게 냉수 한 양동이를 퍼붓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카알 은 길시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비극이오?" 카알은 다시 말했고 방 안의 공기는 갈색산맥의 실프들이 모조리 몰려 와 장난을 치는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피부가 스멀거리는 느낌, 뭔가 크게 당했다는 느낌, 머리 뒤끝이 곤두서는 느낌. 길시언은 입을 쩍 벌 리고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 때 난 고개를 돌려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약간 슬픈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는… 트롤 프리스티스! 난 턱을 한 방 맞은 표정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알고 있었어! 카알은 나른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받쳤다. "뭐가 비극이죠? 참새가 참새라서 비극이오? 뱀이 뱀이라서 비극이오?" "예?" 길시언에게 거울을 가져다주고 싶다. 그는 절대로 거울 속에 비친 얼굴 이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들겠지. 도저히 못견디겠다. "푸핫하하핫!" 카알을 향해 있던 일행들의 괴상한 시선이 이젠 그 강도를 두 배 쯤 높 인 채로 나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카 알은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후치?" "파하하핫! 하핫! 인간, 인간! 우하하하!" 죽어도 그 이상의 말을 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난 눈물을 좍좍 뽑으 며 웃었다. 맙소사, 길시언! 나의 왕이여, 그런 표정이라니! 운차이, 당 신은? 난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어둠 속에 서서 일행을 바라 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항상 불만족스러운 소년의 이야기 를 들으며 자라난 자이펀의 전사는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핫! 참새가 참새라서 비극인가? 뱀이 뱀이라서 비극인가?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라서 비극인가? 네리아가 내게 다가와 부드러운 동작으로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후치.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야…" 맙소사, 그녀는 내가 잠깐 정신이 이상해진 줄 알고 있었다! 미치겠네, 으킬킬킬! 카알이 에델린에게 말하는 나직한 목소리는 내 웃음소리 가운 데서도 잘 들려왔다. "후치군을 좀 도와줘야겠군. 에델린양, 핸드레이크께서는 뱀파이어이 며, 그리고 절대로 사람을 해쳐서 피를 빨거나 하지는 않겠죠? 이렇게밖 에 말할 수 없는 내가 좀 슬프지만, 당신이 사람을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는 것처럼?" 에델린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킬킬킬킬! 장탄식을 뽑아내던 샌슨과 길시언은 바일하프에게 재빨리 시선을 보내었다. '혹시 이 건물 안에 내가 들어가 숨을만한 쥐구멍이 없겠소?' "이상하군요. 여러분들은 인간들인데. 여러분들은 운명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종족인데말입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의 입에서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말이 나오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에델린은 꾸짖는 기색도 없이 고요히 말했지만 길시언과 샌슨의 얼굴은 벌개져버렸다. 길시언은 간신히 목소리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카알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겁니까?"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왠지 핸드레이크는 자신이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핸드레이크로 남았을 거라고 생각되더군요. 설사 그는 자신이 드워프가 되었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마법을 못 쓰는 대신 그의 손과 도구로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갔을 인물이니까요. 그 집념만으로 여러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아니었습니까." 레니가 찬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도 별로 기뻐할 겨를이 없 었다. 난 이제 너무 웃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키, 키키, 키리리킥킥!" "뭐…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뱀파이어 가 되어서도 흡혈의 충동을 이기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지켜나갔을 거라 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 습니까. 하지만…" 카알은 울림이 별로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원래 불가능이라는 말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대마법사를 믿었던 것이군요!" 길시언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핸드레이크를 믿었습니다." 길시언과 샌슨은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말했다. "놀랍군, 후치. 자넨 우리들이 어리석게도 간과한 사실을 바로 알아차 린 모양이군." 샌슨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저 녀석은 카알의 눈빛만 봐도 카알의 생각을 다 알아차릴 녀석이니까 요." 난 여전히 웃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눈 앞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그 래? 그렇게들 생각하셔? 천만에. 난 길시언과 샌슨의 실수 때문에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으헷헤헤! 이거였어. 난 이제 루트에리노 대왕을 '알 았고' 핸드레이크를 '느꼈다.' 이것이었나? 대왕이시여! 이것이었군? 핸 드레이크! 이게 바로 인간의 신전, 인간의 신화라는 말인가? 불가해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인간화. 세이크럴라이제이션은 인간의 무기가 되었고! 핸드레이크가 뱀파이어가 된 것은 다시없는 커다란 비극이고! 펠레일은 50명의 꼬마들에게 자기를 바치고! 핸드레이크는 여덟 종족에게 자신을 바치고! 푸핫하하하! 당신들 모두 갈데없는 머저리들이었어!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머 저리 영웅들이여! 아, 아. 아마도 영웅들은 대개 머저리여야 할 거야. 그래야 만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우하하하! 그런데 말이 야, 머저리 영웅 나리들. 당신들은 기막힐 정도로 닮은 꼴이었단 말이 야! 당신들의 우정에 영원한 경의를! 당신들 정말 멋져! ================================================================== 14. 정답이 없는 선택……12. 에델린은 빠르게 설명했다. "시오네 언니는 분명 아버지를 사랑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버지는 언 니를 아비스의 미궁에서 나오도록 해주었으며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그 분의 마지막 전인으로 삼으셨지요. 모든 종족에 대한 당신의 차별없 는 사랑을 언니에게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오네 언니도 분명 그것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워했을 거라고도 믿습니다." 에델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사랑이라는 것이 정녕 어떤 것인지 저는 파악하기 힘들군요. 그리고 그 점에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시오네 언 니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소유욕…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될까요. 뱀 파이어의 사랑, 피에 대한 갈망, 생명에 대한 애정은 성도착자의 그것과 비슷하다던가요." "어머!" 레니는 기겁해서 화다닥 물러나며 자기 얼굴을 가렸다. 나도 편한 기분 은 아니었다. 으으음. 내 얼굴이 너무 빨개지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말이 야. "그리고 저의 아버님께서 노쇠하여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시오네 언니가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과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아버지께서도 잘 말씀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에델린은 말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나나 레니 때문이겠지. 하지만 에델린. 사실 이 방 안에서 당신의 이야기 뒷면의 이야기를 눈치 못챌 사람이 있다 해도 난 포함되지 않아요. 유혹했겠지. 아마 핸드레이크는… 그걸 생각하기만 해도 머릿속이 이상 해지는 것 같아. 시오네는 인간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바라봐온 핸드레 이크를 아버지로서, 그리고 동시에 남자로서… 그리고 그는 지독한 성욕 의 노예가 되어 하늘과 땅이 통째로 바뀌는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시오네 에게 물려버렸겠지. 그것이 뱀파이어의 방식이니까. 그리고 나도 언젠가 당할 뻔했던 것이고. 그것은… 부녀가 아니었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부녀 의… 관두자! 젠장. 핸드레이크의 전언에서 나타나는 그 과장된 부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군. 아마 나 외에도 그걸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실내의 분위기는 상당히 끈적하면서도 우울하게 바뀌었고, 그래서인지 에델린은 서둘러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뱀파이어의 생을 얻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대마 법사셨던 아버님께서는 뱀파이어의 부작용을 상당 부분 이겨내셨습니다. 정확하게 어떻게 이겨내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께서는 햇빛 아래 에 노출되셔도 상관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흡혈의 역구도 상당히 억제하 실 수 있으시답니다. 라이칸스롭은 대개 달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 지요. 뱀파이어들도 대부분 보름달이 뜰 때 흡혈의 욕구를 강하게 느낍 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한 달에 한 번은 찾아오는 그 욕구도 상당히 억눌렀다고 하시더군요. 도저히 참지 못할 경우엔… 동물을 이용하신다 고 하시더군요." 조금 전부터 레니는 파랗게 질려있었다. 에델린은 레니의 얼굴을 보더 니 생긋 웃었고 그러자 레니도 힘없이 웃었다. 에델린은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차후에 훨씬 더 길게 할 시간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카알은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예. 저희들에게 용무가 있다고 하셨지요?" "예. 아버님, 그러니까 핸드레이크께서는 여러분들의 여행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다. 물론 옆에서 보는 것처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 분에게는 나름의 방법이 있으시니까요." 난 아프나이델을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투시 마법 쯤은 그분께는 우스운 일이실 테니까요. 하아… 그 분이 아 직 살아계시다니."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절 보내어 여러분들을 돕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용무가 있는데, 아버님께서는 절 통해서 제 언니와, 제 동생에게 각자 말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순간 우리들은 어리둥절해버렸다. 카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시오네… 양을 말씀하시는 것일 텐데, 동생은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델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왠지 그 시선이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짐작이 가는 듯했다. 난 에델린의 시선을 보기도 전에 먼저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레니안의 애칭을 가진 소녀. 에델린은 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대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방 안은 단지 괴괴한 고요만이 가득했 다. 그 가운데서 프리스티스가 드래곤 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구의 소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트롤을 바라보았다. "레니양." 갑자기 레니의 입이 열렸다. 그것은 폭발과도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도대체 저에게 아빠를 몇 명이나 만들어 주시려는 거에요! 전 그레이든씨의 딸이에요. 제발 저에게 더이상의 아 빠를 주지 말아요! 다른 아빠는 필요없어요!" 사람들은 당혹한 눈으로 레니를 바라보았다. 우리들이 그녀에게 아빠를 강요하고 있었나? 레니는 부당한 취급에 항의하듯이 말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앙칼지게 말했다. "전 행복했어요!" 그녀는 자기 말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곧 레니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멋진 옷, 맛있는 음식, 으리으리한 집… 그건 행복이, 행복이 아닐 거 에요. 제가 행복했기 때문에 전, 전 잘 알아요. 전 행복했어요. 아빠만 있으면, 아빠만 있으면 계속 행복해요. 다른 아, 아빠는 필요없어요!" "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레니양은 일스의 그 주 점 주인 그레이든씨의 딸입니다."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든씨가 핸드레이크입니까?" 레니 외에는 아무도 샌슨의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 해보면 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레니는 놀란 눈으로 에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으으윽. 태어나서 지금껏 함께 살아온 아버지 아닌가. 에델린은 당황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떻 게 보면 우스운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레니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레이든씨는 당신을 누군가에게서 맡아 키웠습니다." "전… 어떤 여행자가 절 아빠에게 맡기고…" 그 때 카알이 끼어들었다. "그 여행자가 핸드레이크입니까? 그러니까 레니양을 일스까지 데리고 간 여행자가 바로…" "그렇습니다." 맙소사… 핸드레이크, 정말! 너무하는군! 300년 전의 시간 속에서 일으 킨 일들만 해도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인데 지금, 그러니까 현재에까지! 이 시대마저도 당신의 시대인가? 우리는 아직 당 신의 아이들인가! 젠장, 집어치워! 에델린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방 안의 누구도 내 얼 굴을 보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 때론 불량품이 아닌가 싶은 헬턴트 사 나이가 날 흘깃 바라보았다. 그와 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난 목에서 튀 어나오는 말을 삼켰고 카알은 미소를 지었다. 에델린은 레니에게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레니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받은 갑작스러 운 충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고 나에게 그녀는 거의 정신을 가누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연 순간 난 그녀가 역시 항구의 소 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핸드레이크씨에겐… 아빠를 만나게 해주셨으니 감사해요. 제가 어떤 아버지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죠. 하지만 바로 웨일즈 본야드의 그 레이든씨를 제 아빠로 있게 해주셔서, 전 그것에 감사해요." 레니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말했다. 네리아는 발그레한 볼로 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겠어요. 무슨 말이죠?" 에델린 역시 미소를 지었다. "길시언! 그만 인상 좀 풀어요!" 길시언은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삭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 한다. 간신히 썬더라이더가 제모습을 되찾았는 데, 그런데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와 함께 할 수가 없다니!" 아, 물론 길시언이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썬더라이더에 올라타 프림 블 레이드를 빗겨들고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라도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그랬겠다. 아아악! 제 미니, 미안해! 네가 멋진 말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야! 너도 정말 멋진 말이었다구. 하지만 너라도 이런 고지대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테지. 그 리고 썬더라이더도 마찬가지. 아직 캄캄한 새벽이다. 고지대의 분지인 이곳에 햇살이 닿으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될 것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싸늘한 새벽 공 기가 볼을 할퀴었고 발바닥에 닿아오는 서리의 뽀드득거리는 느낌이 오 싹함을 더한다. 꽤 추운걸. 일행들이 들고 있는 횃불들은 주위로 약한 빛을 던지고 있었지만 분지 전체는 거대한 암흑으로 우리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샌슨은 빙긋빙긋 웃으며 횃불을 들어올리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짐을 점 검했다. 이틀치 식량은 각자가 챙겨들었다. 하지만 칼잡이들은 무시무시 한 무장을 들고 있었다. 운차이는 자신의 롱소드 외에 아무 것도 들지 않았지만 길시언과 샌슨은 각자의 원래 무장에다가 모두 여남은 개가 넘 는 스피어를 매고있는데다가 석궁과 활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운차이 는 싸늘하게 말했다. "반나절도 가기 전에 지쳐 쓰러져버릴 거다. 곰단지들." "나중에 무기 빌려달라고 하지 마!" 샌슨의 유치한 고함소리에 운차이는 피식 웃었다. "무기는 생명이다. 넌 생명도 빌려주냐?" 샌슨은 할 말이 없어졌다는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내었다. 끄으응. 제레인트는 자신의 지팡이와 함께 부득부득 그 살벌한 밀리터리 포크를 들고나왔지만 지금 그 두 개를 모두 가슴에 품은 채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꽤나 추운 날씨거든. 네리아는 그런 제레인트를 보 면서 히죽 웃더니 레니의 목을 끌어안았고 레니는 손을 모은 채 네리아 에게 안겼다. 레니의 얼굴은?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별다른 표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네리아에게 안겨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니? 괜찮은 아침이지?" "응? 아, 그래. 좋은 새벽이야." 난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카알은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약간 떨어진 계단에 앉아있었다. 아 무리 살펴보아도 지금부터 최강의 크림슨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 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느긋한 표정은 그를 그저 밭일을 나가기 위해 일꾼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리며 추위 속에 앉아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 들었다. 난 코를 훌쩍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에델린 의 거대한 몸이 보였다. 에델린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냥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그 옆에는 엑셀핸드 의 작은 몸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형형 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도낏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때 약간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약간 피로하지만 맑은 목소리. 난 고개를 들어 게단 위를 올려다보았 다. 으으응? "아니…?" 계단 위쪽에는 손에 횃불을 든 그림자가 서 있었다. 헐렁한 로브와 망 토가 새벽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림자는 꼿꼿하게 서있 었다. 횃불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리고 있는 데다가 후드를 내려쓰고 있 어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짙은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공중에 떠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장엄하고 강력해보이는 모습을 본 순간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핸드레이크?" 마법사는 갑자기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 대단한 영광이걸?" "아프나이델? 메모라이즈 참 오래 걸리네요." "아, 미안. 긴장이 되서 말이야. 그리고 신경을 좀 많이 썼거든." 그제서야 아프나이델은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보이자 아래에 있던 일행들은 놀랐다. 아프나이델은 로브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려 팔뚝을 거의 다 드러낸 모습이었다. 손목엔 무슨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리고 허리 역시 밧줄 같은 것으로 질끈 묶고 있었다. 그 밧줄 에는 여러 가지 주머니와 함께 대거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망토는 어 깨에서 고정시켜두어 모두 등 뒤로 넘겨버린 자세였다. 대단히 전투적인 - 마법사치고는 - 모습이었다. "춥지 않습니까?" 샌슨은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프나이델은 조용히 고개를 가 로젓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허허? 그것참. 얼굴마저도 바뀐 것처럼 보이 는데? 메모라이즈를 방금 끝내서 그런지 그의 얼굴엔 약간의 피로가 떠 올라 있었지만 그는 온화하면서 동시에 당당한 얼굴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아프나이델이 입을 열었다. "추위가 문제는 아니죠." 그래? 아, 그래. 추위가 문제가 아니군. 샌슨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곧 추위가 그리워지겠군요." 히하하.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추위를 느낄 새가 없는걸. 가슴 속이 마 구 쾅쾅거려서. 그러고보면 제레인트는 정말 대단해. 저렇게 추위를 느 낀다는 것은 아무런 긴장감도 없다는 뜻인가? 그 때 카알이 몸을 일으켰 다. 동시에 에델린도 앞으로 걸어나왔다. 카알은 우리들 모두를 주욱 둘러보았고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예의바르 게 카알의 말을 기다렸다.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가슴은 싸늘하게, 동시 에 불타오르는 듯했다.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귀에 들려올 것 같았 다. 기나긴 여정, 그것은 그저 여정이었다. 목적은 아직 먼 곳에 있었고 따 라서 크라드메서는 없는 것과 비슷했다. 그저 이곳까지 오는 것만이 중 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군. 출발하는 거야! 우리는 오늘 그를 만날 것이다. 사상 최강의 크림슨 드래곤! 화염의 창! 크라드 메서를 만나러! 우리들의 눈이 모두 번쩍거렸다. 카알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그의 입에서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왔다. "어, 춥네요. 빨리 갑시다?" "…출발!" 길시언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떼자니 멋적다는 듯이 고함을 질러버렸고 우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어정어정걸어가기 시작했다. 과장 되게 말하자면 맥풀려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째 우리 세 명이 헬 턴트 마을을 떠나올 때보다도 더 평범한 발걸음이군. 크라드메서 드래곤 라자 호송단의 여행 마지막 날은 그렇게 상당히 조촐하게 - 좋은 말로 해서 그렇고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무신경하면서도 무의미하게 시작되 었다. 쳇. 그럴듯한 출정의식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좀 멋진 대사나 격 려사 한 마디라도 하고 떠나면 안되나? 하하하하! ================================================================== 14. 정답이 없는 선택……13. "왼쪽! 왼쪽을 쳐! 후치!" "누구 왼쪽? 저 녀석? 아니면 나?" "이런, 젠장! 농담할 기운 있으면 휘둘러!" 운차이는 달려들면서 온몸으로 롱소드를 휘둘러내렸다. 그러나 그 때문 에 순간적으로 등을 노출시켰다. 그 등으로 거대한 그리폰(Griffon)이 날아들었다. "운차이이!"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를 두 손으로 잡으며 뛰어올랐다. 세상에! 그녀는 그대로 앞쪽의 그리폰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운차이의 등 을 노리는 그리폰의 머리를 공중에서 찔러버렸다. "케에에엑!" 정수리를 찍혀버린 그리폰은 부리에서 피를 토했다. 그러나 네리아 역 시 말도 안되는 동작을 취한 댓가로 공중에서 대책없이 떨어지고 있었 다. "꺄아아악!" 쿠당! 데구르르! 네리아는 어깨로 떨어지더니 그대로 몇 번 구르며 날 아가버렸다. 그녀는 우리들이 서있던 언덕에서 아랫쪽으로 굴러가 보이 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젠장! 왜 하필이면 이 언덕 위에 그리폰 둥지들 이 몰려있는 거야! 그리폰들은 우리 일행 중에 엑셀핸드의 모습을 보자 그대로 발작하면서 날아올라 하늘이 새카맣게 보이도록만들었다. 임마들아! 지금은 너희놈 들 보물엔 관심없어! 저 자식들도 네발이 달린 주제에 성격은 까마귀를 닮아서 반짝거리는 보물을 무지무지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드워프들과는 사이가 나쁠 수밖에. 그래서 그리폰들은 무조건적으로 공격을 개시했고 우린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리아앗!" "후치, 조심해!" 제레인트의 고함 소리. 순간 눈 앞이 까맣게 변한다. 밤이냐? 역시 겨 울이 다가오니 낮이 짧아지는… 아니, 젠장! 덩치가 황소만한 그리폰이 태양을 가리며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흉맹스러워보이는 발톱들이 불 을 뿜었다. "발톱 소제 좀 해라! 누우며 일자무식!" 난 옆으로 몸을 날리며 올려쳤다. 그리폰의 발은 내 어깨 위를 지나쳤 고 놈이 내 위를 지나치는 순간 난 녀석의 뒷다리를 베었다. 케에엑! 피 가 팍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다. 시시해보일 정도로 매끈하게 잘려진 상 처와 찔끔거리듯 나오는 핏방울뿐. 그러나 그리폰은 중심을 잃으며 땅에 나동그라졌다. 콰과광!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흙이 마구 튀었다. 놈은 곧 날개를 퍼득이며 몸을 뒤집은 것이다. 고양이 같은 날렵한 동작. 덩치가 황소만하다는 것 만 빼고는 아름다울 정도군. 놈은 그대로 뛰어오르더니 쓰러진 내게 달 려들었다. 놈의 앞발 두 개와 부리가 세 개의 칼날처럼 날아왔다. 젠장! 그래봐야 넌 새대가리야! "맛 좀 보자!" 죽을 힘을 다해 허리를 튕겼다. "키에엑!" 난 그리폰의 가느다란 목을 물어뜯었다. 가느다란? 뭐, 비슷한 크기의 다른 생물에 비해볼 때 독수 리 목이라 가늘긴 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리폰의 앞발이 내 가슴을 후 려쳤다. 가슴이 터지는 이 기분! 사랑에 빠져버렸나봐. 지독한 노린내와 함께 먼지맛이 났다. 그리고 코로 깃털이 파고들어 재채기가 나려고 한 다. 하지만 난 녀석의 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폰은 머리를 미 친듯이 휘저으며 계속해서 내 가슴과 복부를 할퀴어대었다. 이 망할 놈 아! 나도 두 손은 자유로워! 이 썩을 녀석, 네발짐승이 날개는 왜 달고 다녀? "읍읍읍읍!" 젠장! 기술 이름이 안나간다! 어쨌든 기름젖기! "케이이이엑!" 놈의 날개와 앞다리 둘, 그리고 뒷다리 하나를 베고나서도 난 녀석의 목을 물고 있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거의 닿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난 입안 가득히 들어온 피와 살덩이를 뱉어내었다. 퇘! 이거, 내 사회적 지 위에 손상이 가는 명장면이겠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레인트!" 그리폰 한 마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제레인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제 레인트는 등 뒤로 아프나이델과 레니를 감싸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비 명을 질렀다. "달아나요!" 그러나 제레인트는 눈을 감으며 무릎을 꿇더 니 밀리터리 포크를 올려세웠다. "테페리여! 당신 뜻대로!" 오, 맙소사! 테페리의 프리스트의 옳은 선택! 제레인트가 들어올린 밀 리터리 포크는 기가 막히게도 날아드는 그리폰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리 폰은 급히 피하려했으나 앞발 안쪽을 깊숙히 찔리면서 포효했다. 그리고 그 때 옆에서 길시언이 방패 채로 몸을 날려 그리폰에 부딪혀들어갔다. "우아아아!" 그리폰은 나가떨어졌고 길시언은 두 팔을 벌리며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폰은 별 충격도 없다는 듯이 다시 훌쩍 뛰 어올라 길시언을 덥쳐들어갔다. 길시언은 하늘에서 날아드는 그리폰의 발톱을 방패로 막아내었다. 콰드득! 카가가각! 방패와 발톱이 부딪히면 서 쇠 긁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걸렸어!" 길시언은 그대로 뒤로 쓰러질 듯이 보였지만 간신히 뒷다리로 균형을 잡고는 프림 블레이드를 크게 휘저었다. 방패를 치고 다시 날아오르려던 그리폰의 허리가 싹둑 갈라져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 다른 그리폰 하나 가 달려들면서 길시언의 등을 후려쳤다. "크어어억!" 길시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엔장! 큰일이다! 그리폰은 그대로 부리 를 들어올려 길시언의 목을 찍으려들었다! "카리스 누멘의 이름으로!" 콰드득! 살이 몸속으로 말려들어가며 뼈가 박살나는 기이한 소리. 엑셀 핸드가 휘두른 배틀 액스는 그리폰의 등을 거의 쪼개어놓았다. 좋아! 그 런데 네리아는? 난 내가 물어뜯은 그리폰을 뛰어넘어 네리아가 날아간 쪽으로 달려갔 다. 젠장! 언덕 아래에서 그리폰 두 마리가 쓰러진 네리아를 노리고 있 었다. 네리아는 다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주저앉은 채 트라이던트를 휘젓 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네리아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 랐다. 그리고 그 표정은 그리폰으로 하여금 결단의 순간을 앞당기게 한 모양이다. "캐아악!" 그리폰 하나가 달려들었다. "아아아악!" 이런, 안돼! 그 때였다. "Peca!" 무섭도록 빠른 뭔가가 달려든 그리폰의 옆구리를 찔러들어갔다. 달려들 던 그리폰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율했다. 운차이였다. "아아아아아!" 운차이는 그리폰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넣은 채 그대로 앞으로 밀어붙이 고 있었다. 좌르르륵! 그리폰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네리아를 비켜갔고 운차이와 그리폰은 함께 나동그라졌다. 그 때 뒤에 있던 그리폰이 뛰어 들었다. "운차이!" 네리아의 비명소리가 들린 순간 쓰러졌던 운차이가 뱀처럼 머리를 쳐들었다. 너무 빨랐다! 운차이가 고개를 든 순간 달려들 던 그리폰이 급히 멈춰섰다. 마치 벼랑으로 달려가던 말처럼 그리폰은 황급히 앞발을 꿇어버렸다. "Ahn choudar!" 그리폰은 잠시 어쩔 줄 몰라했다. 그걸로 충분! 난 놈의 뒤에서 달려들 어 날개를 후려쳤다. "캐애액!" 이런, 맙소사! 놈은 날개를 퍼덕이더니 마치 싸움닭처럼 훌쩍 뛰어올라 피했다. 네 발 달린 닭도 있냐! 놈은 그 대로 자세를 낮췄다. 이 놈아, 그럼 나도! "채썰기! 우아아아!" 탕, 타당, 탕탕탕! 바스타드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어오른다. 칵! 왜 하나도 안 맞아! 열 번도 넘게 땅을 후려쳤지만 놈은 낮은 자세 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모조리 피해버렸다. 그거 다리네 개에 날개까 지 달려서 무지 빠르네? 어엇! 놈은 갑자기 머리를 뒤틀더니 내 바스타 드를 쳐내었다. 놓쳤다! 이런, 젠장! 칼 없으면 몸으로 때우지! "에라, 뚜껑덮기!" 난 두 손을 얼굴 앞에 엇걸어 눈을 가리며 뛰어올랐다. 놈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난 그대로 놈을 깔아뭉개어버렸다. 케에에엣! 가 슴 아래에서 무섭게 꿈틀거리는 놈의 힘이 느껴진다. 난 되는대로 고함 을 지르면서 고개는 가슴에 박은 채 녀석의 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데다 (눈을 뜨고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머리를 후려치는 그리폰의 날개와 몸을 할퀴어대는 발톱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놈이 날뛰어 도대체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손끝에 아주 미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매끄러우면서 촉촉한… 눈알이다! "케에에엑!" 내 손가락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다니? 녀석의 눈을 찔러버리고나서 다시 뒤로 물러나자 머리를 휘저으며 발광하는 그리폰의 모습이 보였다. 바스타드, 바스타드 어디로 갔지? 그러나 놈의 다른쪽 눈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하필이면 그쪽 눈에 들어간 것이 땅에 주저앉아 있는 네리아였 다. 그리폰의정신없는 목동작이 멈추었고 네리아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폰은 땅을 걷어찼다. 그리폰이 뛰어오른 순간 다시 뭔가가 굉장한 속도로 움직였다. "아아아…압!" 네리아의 비명 소리는 희한하게 틀어막히고 말았다. 네리아에게 달려든 운차이가 그대로 네리아를 가슴에 끌어안은 것이다. 덕분에 그의 등은 그리폰의 앞발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제기랄, 안돼! 순간, 쌔애애액! "케ィ!" 달려들던 그리폰은 단말마를 외치며 그대로 나동그라져 굴러가버렸다. 스피어에 맞아 굴러가는 그리폰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언덕 위쪽에선 샌슨이 또다른 스피어를 뽑아들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걱정마. 샌슨. 난 괜찮으니까. 샌슨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르친 보람이 없다." 으윽. 잠시 후, 칼잡이들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아프나이델이 간신히 마법을 사용하여 그리폰 한 마리를 구수한 냄새가 날 때까지 구워버리고 카알이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대자 놈들은 물러났다. 언덕 위에선 엑셀핸 드가 아프나이델의 손을 잡고서 그 짧은 다리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 었다. "이히호! 히호, 히호!" 네리아를 안고있던 운차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무뚝뚝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네리아가 운차이를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운차이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다. 일어나." 네리아는 고개를 들더니 운차이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운차이는 얼굴 을 찌푸리면서 하늘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라니까." 그녀는 코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 아파." 운차이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말했다. "부러졌나?" "몰라. 아파. 못일어나겠어." 운차이는 뭐 씹은 얼굴이 되더니 네리아를 부축하려했다. 그러자 네리 아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아악!" "뭐, 뭐야?" "어깨, 어깨도… 아까 떨어질 때…" 운차이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네리아의 허리를 감 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네리아는 절뚝거리긴 했지만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고마워." "이젠 빚은 없다." "빚? 무슨 빚?" "아까 내 등을 구한 것."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발목의 통증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 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흐응. 만일 아까 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운차이는 네리아를 안 구했 을까나?" 운차이는 잠시 멈춰서 자신의 팔 안에 있는 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네 리아는 자신의 발끝만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은 확실하다. 그렇잖다면 왜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고 있을까. "모르겠다." 운차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네리아를 옮기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헤죽 웃었다. 흐음. 두 사람 모두 난 신경도 안쓰는 모양이군? 산봉우리들 사이로 희뿌옇게 물결치던 안개들은 다 사라졌다. 이렇게 높은 곳이 미치도록 더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치도록 덥다. 햇살은 무자비할 정도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햇빛을 가 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일까?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은 계속해 서 셔츠 앞섶을 적셔왔다. 하지만 거의 똑같은 비율로 - 왠지 누군가가 잘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 이 들 정도로 - 추위가 우리를 유린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코나 입술 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마디로, 개판이다. 그 지독한 더위/추위만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것은 아니다. 전방으로 나섰던 칼잡이들은 모두 그리폰의 부리와 발톱에 할퀴고 찢겼으며 날개 에 맞아 멍도 좀 든 상태였다. 이제부터 내 앞에서 깃털 같이 부드러운 어쩌고 하는 친구가 있다면 난 그 친구를 그리폰 깃털로 작신 두드려줄 용의가 있다. 그리폰의 쇠망치 같은 날개에 맞았던 머리가 아직도 쑤신 다. 머리 안찌그러졌나? 제레인트가 킬킬거리며 물어왔다. "죽을만해?" "삶은 아름다워요." 내 대답이 끝나고나서 제레인트는 곧장 내 가슴과 배의 상처들을 치료 하기 시작했다. 그리폰의 발톱은 하드 레더를 버터처럼 갈라놓았다. 갑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내 뱃가죽이 비슷한 경우를 당했겠군, 젠장. "아아아악! 잘못했어요!" 저쪽에서는 네리아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네리아의 어깨 를 맞추고 있던 에델린은 이 불가해한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 다. 뭘 잘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에델린은 다시 그 강력한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네리아의 탈골된 어깨를 맞추었고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고함 을 지르다가 샌슨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말았다. "갈색산맥의 몬스터들 전부가 꽃다발이라도 들고 위문오기를 바라는 거 야앗!" "이잇! 아파서 눈물이 찔끔거리는 사람한테 웃기는 소리 좀 하지마! 절 대로 그런 일은 없어!" "뭐야?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이 계절엔 꽃이 없어!" 샌슨은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칼잡이들이 모두 늘어진 김 에 자연스럽게 휴식시간이 되었다. 카알은 화살들을 주워모으며 투덜거 렸다. "벌써 정오가 가까운데 반도 못 왔어. 겨울철에 무슨 몬스터들이 이렇 게 많은 거지?" 땀을 닦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대답했다. "크라드메서 때문이 아닐까요?" "크라드메서 때문에?" ================================================================== 14. 정답이 없는 선택……14. "예. 그의 활동기가 다가오면서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것 아닐까요? 드 래곤 피어는 꼭 물질적인 거리와 시간의 차원에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 라고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드래곤의 웨이크닝 을 감지하고 몰려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계절에 이렇게 많은 몬스 터라니요. 게다가 그리폰들이라니. 전 이 놈들을 생전 처음 봅니다. 아, 제가 견문이 어둡긴 합니다만…" 그러자 방패를 손질하면서 숨을 고르고 있던 길시언이 대답했다. "난 대륙의 이곳저곳, 사람들 발길 드문 곳도 제법 많이 돌아다녔지만, 그리폰을 실제로 보고 싸워본 것은 이게 처음입니다. 첫번째로 만났을 때 강한 동료들이 있으니 나도 썩 운이 좋은 편이군요." 일행들은 잔잔하게 웃었지만 곧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대략 대여섯시간 예정을 하고 온 길인데 새벽에 출발해서 정오가 될 때 까지 전체 여정의 반도 못왔다. 산에 익숙하지 못한 레니나 아프나이델 등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초겨울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난폭하 게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때문이다. 세상에, 그리폰떼라니! 카알은화살 하나를 손에 들고 이마를 톡톡 치면서 일행들을 바라보았 다. 바람이 그의 머릿카락을 잠시 어지럽게 흩날리는 가운데 그는 씩 웃 었다. "힘드시죠?" 길시언도 피식 웃었다. "우리가 여기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그런 말도 나올 듯하군요." 카알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왜 이러고 있죠?" 바람이 분다. 산등성이가 바람에 몸을 떠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오네의 말대로, 파멸하기 전에 뭐라도 이루면 그만이라고 믿기 때문 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럼 우리가 왜 이러고 있죠? 왜 산등성이를 타고, 언덕을 넘고, 계곡 을 가로지르고,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겁니까?" "산등성이가 있고, 언덕이 있고, 계곡이 있고, 몬스터가 있고… 그리고 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제레인트는 추위 때문에 두 팔을 로브 자락에 파묻으며 말했다. "간단하고 품위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멋있지 않 습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호감이 가진 않지만 사실이니 부정할 수도 없군요. 농부는 밭을 갈아 대륙을 구하고, 어부는 고기를 낚아 대륙을 구하니까." 제레인트는 입을 쩍 벌렸고 그 다음엔 벌쭉 미소를 지어버렸다. "그렇죠,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하." 도대체 뭐가 저리들 즐거운지 모르겠군. 당연한 말을 하며 즐거워하는 취미는 없어. 난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요! 아직 길은 먼데, 걷지 않고 짧아지게 만들 방법은 없으니까." 일행들은 각자 웃으며 일어났다. 우리는 다시 갈색산맥의 봉우리들 사 이로 난 좁은 계곡과 능선을 가로질렀다. 가을 동안 쌓였던 낙엽들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헐 벗었지만 그래도 숲은 울창했고 그 사이로 길 비슷한 것은 없었다. 짐승 의 길은 몇 개 보였지만 그건 사람이 제대로 걸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낙엽더미 속을 걸어가거나, 겨을이 라 물이 말라버린 강바닥을 건너거나, 커다란 바위를 기어오르느라 낑낑 거렸다. 때론 완전히 노출된 고원 위를 힘겹게 걸어갔다. 사방 어느 산 봉우리에서 바라보더라도 곧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 기 분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인원들이 많아서 우리들은 큰 걱정은 하지 않 았다. 산에 사는 짐승들은 대개 무리를 크게 짓지 않는 법이니까. 일행의 모습은 봐줄 만하다. 모두 옷 몇 군데 찢어지지 않은 곳이 없는 데다가 칼잡이들은 곳곳에 붕대를 둘러매고 있다. 그리고 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땀에 푹 절어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별 말 없이 꾸준히 걸어갔다. 땀을 뻘뻘 흘려대며, 감아둔 붕대가 풀어져내리는 것을 다시 묶으며. 고행이랄까?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바닥에 빨간 융단이 깔린 길이 있기를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우리 가 기대한 것은 가혹한 역경과 고난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원정이자 귀 향이고 도전이자 해후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니다. 귀를 아무리 곤두세워도 풀벌레 소리 하나 들을 수 없었지만, 설령 어 느 미친 벌레가 겨울의 찬가를 불러젖힐지언정 장대한 바람 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황량하고 거 친 산의 노래만이 들려온다. 오르고, 내려가고, 굽이쳐 돌아, 앞으로 걸 어간다. 산과 우리들뿐.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능선 하나를 타고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운차이?"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네리아의 목소리. 뭐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 는 제자리에 서서 먼 곳에 눈을 주었다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 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말했다. "날 부른 것 같은데." 순간 나와 제레인트, 그리고 샌슨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네리아가 또 화를 바락바락 낼 것인가? 그러나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들어올려 먼 곳을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뭘 본 것 같은데, 좀 봐줘. 저어어기." 운차이는 고개를 돌려 트라이던트의 방향을 따라갔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산봉우리들이 겹쳐쌓이며 사열하는듯 길게 늘어선 방향이었는데 우 리들이 걸어가는 방향에서 분수령과 만나게 되는 산맥이었다. 운차이는 잠시 후 말했다. "붉은 로브.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다." 일행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멈춰섰다. 갑자기 몸을 숨기고 싶은 기분 이 드는데? 하늘이 너무 넓어. 카알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라고요? 얼마나 멉니까?" "꽤 멀군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저 앞의 분수령에서 저 친 구들과 조우하게 될 것 같다는 점이오." "아, 그래요." 길시언은 팔에 감아둔 붕대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방해해올까요?" "십중팔구 그럴 것 같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운차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볼 수 있을까, 운차이?" "저 프리스트들도 너희들과 시력이 비슷하다면 보긴 어렵겠지." "아, 그래. 그럼 다행이군… 혹시 동작도 알아볼 수 있나?" "어렵다." 카알은 턱을 쓸어만지다가 말했다. "만나게 된단 말이지." 우리는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노려보았다. (사실 노려보고 있는 것은 운차이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보이는 척하는 것이겠 지.) 카알이 갑자기 말했다. "저쪽에도 라자는 있지요. 그리고 우리들도 라자를 가지고 있고. 그런 데 말입니다. 만약의 만약을 생각해서, 레니양이 혹 거부될 경우를 생각 한다면 돌맨이 필요해질지도 모르지요. 만일 우리가 먼저 갔는데 거부되 었다면 돌맨 할슈타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돌맨이 먼저 도착해서 성공 한다면? 그것 참 판단하기 쉬운 일이 아니군요." 목 뒤에 가득한 땀을 닦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말했다. "후우, 후우. 판단하기 어렵다고요?" "우리가 먼저 도달하기 위해 속력을 높여야 되는가, 아니면 뒤에 도달 하도록 속력을 떨어트려야 되는가. 그 둘 중에서 말입니다." "어, 글쎄요? 먼저 가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부될 경우가 문제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두 가지 조건이 결합 된 네 가지 상황이 되는 건가요? 우리가 먼저 크라드메서를 만나는 경 우, 레니양이 선택되면 우린 성공, 선택되지 않으면? 그럴 경우 크라드 메서는 우리들을 대상으로 활동기에 들어간 기념식을 벌일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우리 다음 번으로 돌맨이 시도해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우리는 이미 죽었겠지. 으으윽. 카알은 계속 말했다. "저쪽 일행이먼저 크라드메서를 만나는 경우, 돌맨이 선택되면, 어쨌 든 크라드메서는 안정되겠지만 할슈타일 가문의 죄악을 단죄하기가 힘들 어지겠군. 따라서 절반의 성공. 그러나 돌맨이 실패하는 경우? 우리가 두번째로 시도할 수 있겠지요." 흐음. 그렇긴 해. 우리에겐 레니가 있지만 저쪽엔 돌맨이 있지. 돌맨은 역대 최악의 드래곤 라자라고 들었는데, 레니는 과연 어떨까? 그러고보 니 레니의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 건지를 모르겠군. 분명 돌맨이 우리 들보다 앞서 성공해버리면, 그 가문을 건드린다는 것은 확실히 어려워지 겠지. 전쟁통이니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속한 가문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쯤은 나도 짐작할 수 있다구. 샌슨은 잠시의 짬이 나자 곧 바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길시언은 스피 어 하나를 지팡이처럼 짚고 섰다. 두 사람은 짐도 많이 들고온데다 그리 폰들과 싸우느라 제법 지쳐버린 상태였다. 카알은 일행을 주욱 둘러보더 니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 "우리 안전만 생각한다면 난 저 일행을 먼저 보내버리고 싶군요. 저 친 구들이 성공하면, 크라드메서는 안정되겠지요. 하지만 저 친구들이 실패 하면 그 다음에 우리가 시도할 수 있겠지요. 꽤 이기적으로 들리죠?" 아프나이델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런 말이 대개 그렇듯이,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만 동시에 솔깃하게 들리는군요." 카알은 쓰게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솔깃하군요." 그럼 발걸음을 조금 늦추는 것이 좋을까? 그렇잖아도 그리폰들과의 전투 때문에 피로한 상태다. 제레인트와 에델 린이 있어 부상은 거의 치료되어 있지만 피로감은 남아있었다. 상처에 감아둔 붕대엔 피와 땀이 배어 굳어버려서 거북하기 짝이 없었고. 좀 쉬 었으면 좋겠군. 저 녀석들이 먼저 간다면, 절반의 성공 아니면 절반의 실패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간다면 완전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 따라서 굳이 앞서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겠지. 순간 나는 몸이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논리라니? 아니,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냐. 감정의 문제야. 그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이건 헬턴트식도 아니야!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난 카알을 노려보았다. 카알은 걸음을 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그저 제자리에 서서 침울하 게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번에는 길시언을 노려보았다.등 을 보여주는 나의 왕이여, 당신은? 그러나 길시언은 내 시선은 알아채지 도 못한 채 묵묵히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길시언은 말했다. "운차이 덕분에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군요. 먼저 보낼까요?" 당신이? 당신이 다른 사람의 등을 보면서 걸어가겠다고? 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순간 알아차렸다. 맙소사, 크라드메서가 우리를 표백시키고 있어! 크라드메서에게 다가갈 수록, 거리가 줄어들고 접촉이 다가올수록 우린 우리 본래의 모습을 드 러내고 있는 것인가? 나마저도 그게 솔깃하게 들려온다고! 돌맨 따위, 죽든 말든! 돌맨이 성공하면 어쨌든 절반의 성공, 실패하면 알 바 아님! 레니가 성공하면 완전한 성공, 실패하면 우리는 사망. 돌맨을 먼저 보내 버려! 젠장! "그럴 순 없어요." 내 입이 지금 뭐라고 말했나? 에이, 설마? 이런 시점에서 함부로 열릴 정도로 내 입은 제멋대로가 아닐 텐데. 그러나 일행들은 날 바라보고 있 었다. 음. 내 입은 제멋대로였군. "그냥 가요." 얼씨구, 잘 한다! 요 망할 놈의 입! 길시언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꺾은 채 날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후치?" "글쎄요. 제가 똑바로 알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우린 방해자나 경쟁자 에 대해 그렇게 신경쓰지 않고 달려왔던 것 같아요. 더군다나 마지막 순 간에 양보하기 위해 지금껏 달려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목 숨이 위험하니까? 설마요. 그랬다면 우리 여정은 오래 전에 끝난 이야기 일 텐데요." 카알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길시언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봐.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걸어왔고 우리가 피곤하면 멈 췄어요.다른 사람이 시켜서 달린 적도, 그리고 눈치를 봐가면서 멈춘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우리 스스로만을 한계로 생각해왔으 니까, 남은 여정도 끝까지 우리 자신만을 한계로 생각하며 걸어가고 싶 어요. 그런데 난 아직 내 한계에 부딪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러니 다 른데 신경 쓰지말고 그냥 걸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한 곳에 다른 사람 먼저 들이미는 거 보기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내 입은 미쳤어, 쳇.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주위의 일행 을 둘러보았다. "혹시 한계에 부딪히신 분 계십니까?" 잔잔한 미소뿐, 다른 대답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길시언은 기대고 있던 스피어를 발끝으로 톡 걷어차서는 한 바퀴 빙글 돌려 어깨에 매었 다. 상쾌한 동작이다. "그럼, 후치의 말대로 지금껏 걸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걸어갑시다." 길시언이 미소를 남기고 몸을 돌렸을 때다. 길시언은 갑자기 멈칫했다. 그리고 일행들도 모두 멈추었다. 뭐지? 아 주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그 때 운차이가 말했다. "바람이 없다." 바람이 없어? 어, 어라? 그러고보니 이 고지대에서 바람이 없는걸? 주 위는 고요하다. 말할 수 없이 고요하다. 그리고 그 고요 사이로 내 심장 박동이, 옆에 있는 레니의 가느다란 호흡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적. 꽈르르릉! "끼아악!" 레니! 옆사면으로 굴러떨어지려던 레니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나 도 균형을 잃었다. "이런, 제기랄!" 나와 레니는 허우적거리다가 서로 겹쳐서 쓰러져버렸다. 콰당! 윽. 부드럽고도 물컹한 느낌. 레니, 어쩔 수 없었잖아? 왜 이리 난동을 부리는 거야? 그러나 내 아래에 깔린 레니 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순간 레니가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설마? 샌슨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땅이 흔들린다!" "뭐라도 잡아! 앉아! 엎드려!" 쿠르르릉! 아프나이델은 다리를 희한하게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엉덩방 아를 찧어버렸다. 모든 것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린다. 두두두두두! 우두두두두! 난 머리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말도 안되는! 산 봉우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좌르르르, 좌르르르르! 오오옷, 제기 랄! 돌멩이들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15. "꼼짝마!" 난 레니의 머리를 가슴에 움켜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세상이 캄캄해지 면서 내 턱에 떨고 있는 레니의 이마가 닿았다. 레니, 내가 샌슨보다 열 심히 지켜줄께. 퍽!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젠장, 머리를 더 숙여야겠는데. 머리에 맞았다간 그대로 골로 가시겠어? 두두두두! 갈색산맥 전체가 끓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격렬한 진동. 퍽! 퍼벅!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어깨와 등을 치고 지나갔다. 사지가 제 멋대로 춤을 추는 가운데 충격이 올 때마다 레니를 더욱 바싹 끌어안는 다. 아래에서 기어코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 후치야? 후챠?" 그러나 아래에 깔려 있어서 레니의 목소리는 숨차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 다. 그리고 시작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흔들림이 멈췄다. 좌라락. 좌락.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잠시 조용해지자 난 머리를 들었다. 일행들은 모두 나동그라져있었다. 땅이 거칠게 흔들려서 제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길시언은 나와 레니가 있던 곳 조금 위까지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고 샌슨은 우리 발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다. 네리 아는 땅에 트라이던트를 박아넣고 그것에 의지하여 앉아있었다. 모두들 먼지를 덮어쓰고 군데군데 돌멩이에 맞아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프나이델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레인트의 외침소리도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괜찮습니까? 이런, 부어오르는군요. 잠시." "아, 아뇨. 제레인트. 괘, 괜찮습니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 제가 대충 손을 보지요." "허어, 이런!" 다른 사람들은? 에델린은 돌멩이 몇 개 맞는 것쯤은 아무런 상관이 없 다는 얼굴로 카알과 엑셀핸드를 가리고 앉아있었고 그 둘은 에델린의 가 슴에 안겨 있었다. 모자상? 차라리 욕을 해라. 운차이는 놀랍게도 허리 를 조금 낮춘 채로 두 발로 서있었다. 날렵하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넘 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 눈길을 따라 나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과 바위가 마구 흘러내린 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고지대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아랫쪽 저지대와 게곡들 쪽에서는 먼지구름이 자 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얗게 일어나는 먼지구름은 산등성이를 향해 거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부터 원래는 상당히 날카로 왔겠지만 지금은 조금 둔하게 들리는 충격음들이 들려왔다. 쿠르르르릉. 조금 가까운 곳에서는 뿌리째 뽑혀 흔들거리는 나무들도 보였다. 난 레 니가 일어나도록 비켜앉았다. "후치야, 후챠! 괜찮아?" 레니는 곧장 내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난 손을 들어 흔들어주려다 어깨가 뻐근해서 대신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의 표정 아냐? …그런데 허락도 없이 내 몸 함 부로 만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어, 어." 그러고도 레니는 한참 내 몸을 군데군데 더듬었다. 쳇. 그런데 다른 사 람들은?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여어! 카알! 괜찮아요? 운차이는? 샌슨, 일 어나봐!" 저 아래까지 굴러떨어져있던 샌슨이 끙, 하는 신음을 토하며 간신히 몸 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머리를 험하게 좌우로 흔들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그는 계속 흔들리던 머리를 간신히 붙잡았 다. "너무 세게 흔들었나 보군." "머리 괜찮아?" 샌슨은 허리멍텅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당신 누구시죠?" "…괜찮은 모양이네." 운차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약삭빠르게 넘어져버려서 아 프나이델 외에는 별로 다친 사람이 없었다. 아프나이델은 넘어질 때 손 을 잘못 짚었는지 손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마법사는 운동신경이 느려 서 큰일이라는 엑셀핸드의 투덜거림에 아프나이델은 씩 웃었다. 그는 손 목을 휘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리고나더니 말했다. "엑셀핸드. 당신은 넘어질 때도 다른 사람보다 다칠 일이 적지 않습니 까. 하하하." 카알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여기가 지진이 많은 곳입니까?" "아니, 난 이곳에서 지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네." "그렇다면…" 아프나이델이 카알의 말을 받았다. "크라드메서겠죠. 아마 곧 일어날 모양입니다. 잠버릇이 깔끔하다고는 못하겠군요." 모두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카알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갑시다." 그리폰들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에다 흙먼지가 더해져 일행들의 몰골 은 초췌하기 짝이 없다. 길시언의 회색 머릿결은 먼지를 뒤덮어써서 거 의 백발 비슷하게 바뀌어 있었고 엑셀핸드의 하얀 턱수염은 먼지를 뒤덮 어써서 회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희한하네. 네리아는 어깨를 마구 털어 내리며 말했다. "점점 가까와져오는데." 네리아가 말하기 전에도 일행 모두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오른편으 로 멀리 떨어진 능선을 걷고 있던 붉은 복장의 무리들의 모습이 점점 커 지고 있었다. 지금 저들과 우리들의 직선거리는 약 1,500 큐빗? 저쪽 무 리와 우리 일행은 똑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평행선이 아니다. 저쪽 무리가 걷고 있는 능선과 우리들이 걷고 있는 능선은 같은 분수령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걸어갈수록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들도 이 미 늦어버렸다고 생각하여 뻔뻔스러우리만큼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간의 직접적인 공격 거리는 되지 못하지만 모습은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길을 걸어가고 있자니 이젠 정이라도 붙일 수 있을 지경인걸. 서로간에 아무런 말은 없었지만 만날 것은 전제되어 있었다. 우리가 시 험삼아 속력을 조금 높이면 곧 저쪽에서도 속력을 높여온다. 그리고 속 력을 조금 늦추면 저쪽 역시 속력을 늦춘다. 서로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거리에서 매복이나 암습 따위는 눈감고 아웅하는 짓이 된지 오래라 이미 고려대상도 안되고 그렇다고 경쟁적으로 달려가기엔 산길은 너무 험하다. "만나게 된단 말이지. 싸우게 될까." 제레인트의 혼잣말에 카알이 대답했다. "무익한 싸움인 것은 저쪽과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해보고 싶은데요." 길시언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는 우리를 종말처리하고 싶은 상당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예… 우리가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할슈타일 후작에 대한 고발은 당연. 그러므로 저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 인적 드문 갈색산맥 안에서 할슈타일 후작에 대해 으르렁거리는 폐태자와 그의 졸개들을 처리해버리 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요." 카알은 차갑게 말했고 곧 샌슨이 콧김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먼저 가자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앗습니다. 먼저 저 분수령에 도달하여 위치를 잡고 다가오는 저 친구들을 성대하게 맞이 해주는 겁니다. 저 산꼭대기의 지형은 괜찮은 편입니다." 카알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꽤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퍼시발군. 마치 지형이 유리하니까 싸움을 벌이겠다는 말처럼 들리는 군. 싸움의 이유가 먼저 명확해야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인간들은 이길 수 있으면 이유엔 신경쓰지 않고 동족을 공격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종족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미안하네. 내가 좀 피로해서 신경이 날카로와졌어. 어쨌 든 지금으로선 저 일행들과 싸우고 싶은 욕구는 없네. 저 친구들과 우리 들이 상반되는 목적으로 크라드메서를 찾아가는… 경쟁자적인 입장인 것 은 확실하지만." "그러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세. 저 프리스트들도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 니. 우리와 똑같은 속도로 걷고 있지 않는가." 샌슨은 조금 투덜거린 다음 다시 입을 다물고 걸어갔다. 이윽고 레티의 프리스트들과 우리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 을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엑셀핸드는 도끼를 가볍게 들었고 길시 언 역시 등에 매고 있던 방패를 손으로 바꿔들었다. 저쪽의 일행들은 특 별한 변화없이 그냥 걸어왔다. 우리들쪽이 조금 빨리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대로 아무 말없이 산 정상에 서서 다가오는 프리스트 들을 기다렸다. 모두들 빨간 로브를 입고 있는 가운데 한 명만이 가벼워보이는 라이트 레더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정도에 약간 창백 해보이는 얼굴이 이채롭다. 등에는 롱소드를 매고 있었고 두 다리 뿐만 아니라 손까지 이용해서 산을 걸어오고 있었다. 돌맨 할슈타일인가. 나 머지 프리스트들은 모두 빨간 로브 아래에 갑옷을 받쳐입었는지 어깨와 가슴이 상당히 거창해보였다. 그리고 간혹 로브 자락 사이로 검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와있는 모습도 보였다. "프리스트들인데… 갑옷에 검까지 가지고 있군요?" 난 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약간 뒤쪽에 서있던 제레인 트가 대답했다.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니까. 저 친구들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전사쪽에 가깝다고 들었어. 교리연구나 경전봉독보다는 체력단련과 검술 훈련을 더 많이 한다지." "그래요? 흐음. 성직자같진 않군요." "뭐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어. 입으로 하는 기도만이 기도는 아니야. 신 앞에 우리 사는 모습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바로 기도라 할 수 있어. 그러니 검술훈련과 체력단련도 기도라 할 수 있겠지." 제레인트의 말에 네리아와 레니가 탄성을 질렀다. 길시언은 피식 웃더 니 등에 매고 있던 스피어 하나를 꺼내어 지팡이처럼 짚고 섰다. 그리고 샌슨은 롱소드를 뽑아들고 검집을 배낭과 함께 뒤에 팽개쳐둔 가벼운 차 림으로 내 옆에 섰다. 운차이는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없이 서있었고 그의 발치에서 네리아가 바위에 앉아 있었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짧 게 쥐고는 날부분을 한가롭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트라이 던트의 날부분만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래에서 다가오는 레티의 프리스 트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목소리로 말해서 무리없이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카알이 입을 열었다. "황량한 산 위에서 의외의 만남이군요. 여행자들에게는 그것이 일상이 던가요. 칼날 위에 실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름의 영광에 의지하여."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별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조용히 멈춰섰다. 사실 당황했다면 더 웃기는 광경이 되었겠지. 우리들은 아까부터 서로를 의식 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우리들은 아랫쪽의 프리스트들보다 대략 10 큐빗 쯤 높은 위치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리스트들중에 한 명 이 앞으로 나섰다. 바싹 자른 짧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들어가고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 얀 머리에 비교할 때 그을린 얼굴은 유달리 시커멓게 보였다. 짧은 목과 넓은 어깨가 인상적인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리없이 그 얼굴에 연결지을 수 있는 텁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 웃기시는군. 창조가 닿을 수 없는 미를 찬미하며."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프리스트를 영접하기라도 하듯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지나치게 앞으로 나서지는 않은 위치에서 카알은 말했 다. "카알이라고 부르십시오." "귀하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소. 현명함의 기사 카알 헬턴트공. 난 레 티의 보잘 것 없는 검 중에 하나요." "반갑습니다." 어라? 이름이 저건가? 레티의 보잘 것 없는 검? 그 때 제레인트가 속삭 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름이 없어요. 파 괴신을 섬기는 자가 자아를 구축할 수는 없다는, 뭐 그런 복잡한 의미가 있지요." 아, 그래?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꽤나 불편하겠군. '어이, 눈가에 별 모양의 점이 있는 형제가 속이 좋지 않다는군. 초조해지면 코 후비는버 릇이 있는 형제를 불러다주게. 그 형제가 사팔뜨기에 말버릇이 이상한 형제를 치료했었지?' 난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그 이름없는 프리스트 들을 내려다보았다. 카알은 돌맨 할슈타일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레티의 보잘 것 없는 검 중에 하나에게 말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레티의 빛나는 검들이 하나의 검광으로 모여들어 이 황량한 갈색산맥을 여행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무례가 되지 않겠습니 까?" "당신 말은 우리가 여기서 낯짝을 드러내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는 것 같은데. 맞소?" "…의미를 말하라면, 그렇군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거리는 집어치웁시다, 현명함의 기사.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우리는 크라드메서에게 드래곤 라자를 연결짓기 위해 이 곳으로 온 거요. 돌맨 할슈타일공을 말이오." 어라, 꽤나 말투가 무례하군. 저게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화법인가? 난 카알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들려온 카알의 목소리에 나는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다. "투미한 저의 식견에도 불구하고 제 짐작이 맞다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 군요." 카알은 온화하고도 화려하게 말했다. 큰일이다, 젠장! 산을 많이 타서 피로해진 나머지 짜증이 났나봐. 저쪽의 백발 프리스트는 아무 것도 눈 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그쪽도 우리와 마찬가지 아니오? 비록 수단이 서로 다르지만." "명민하신 지적입니다. 레티의 영광이시군요." "좋소. 깨놓고 이야기 합시다. 우릴 방해할 거요?" "제 동료들의 의향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전 평소 레티의 프리스 트들의 덕망과 명성에 대해 깊은 호의를 가져왔던 자올시다. 제가 레티 의 프리스트들의 행동을 방해해야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로군요." 레티의 보잘 것 없다는 검께서는 잔인하게 웃었다. "하하하! 좋은 관점이오.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카알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아, 골치 아파! 샌슨의 얼굴을 돌아보자 그 역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눈썹을 치켜뜨 고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프나이델은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량을 베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 다. "좋아. 그럼 그쪽의 드래곤 라자의 신병을 우리가 맡게 해주시오." 길시언의 입에서 이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레니는 파랗 게 질렸고 네리아가 그녀의 어깨를 감았다. 그러나 카알은 한 점 표정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저희들과 함께 있는 드래곤 라자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크라드메서가 라자도 없이 활동기에 접어드는 것은 바람직하 지 않잖소.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돌맨 할슈타일공께서 실패하거든 다른 대안이 있어야하지 않겠소? 이리 보내시오." "글쎄요… 저희들이 모셔가면 되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모셔온 것도 우 리니까."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수고했다고 말씀드리지. 그러니 나와 흥정 따 위 할 생각은 마시오! 우리 앞에 있는 것이뭔지 모른단 말이오? 크라드 메서요!" 카알은 더욱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알기는 뭘 알아! 입으로 아는 것? 머리로 아는 것? 닥치시오. 국왕께 명예의 호칭을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지 마시란 말이오. 드래곤이라는 이 름만 들어도 벌벌 떨고 말 엉터리 모험가 주제에 함부로 중요한 일에 끼 어드는 법이 아니오. 대륙의 위기라는 말, 말로서는 상상해볼 수 있겠지 만 과연 당신들 같이 서녘의 오지에서 달려나온 촌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우리 모두가 서녘의 오지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자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눈이 멈춰진 곳은 길 시언이었다. 그는 길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그래. 당신은 길시언 폐태자의 일을 말하시고 싶은 모양이군. 왕자와 함께하는 일행이라는 말인가 보지? 왕자여! 말해보시오. 당신은 국가 수호의 의무를 팽개치고 달아난 자요. 당신의 어깨에 매어진 의무 를 저버리고 들판과 산의 야만스러운 아름다움에 취해 달려간 자요. 당 신이 과연 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할 자라고 말할 수 있소?" 길시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다 시 입을 다물고 그저 묵묵히 프리스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레티의 프리 스트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드워프의 위대한 노커여. 당신의 땅굴과 당신의 망치에 경배를 보내지. 하지만 당신은 말할 수 없을 것이오. 당신이 광 산과 대장장이의 일 외에 어떤 것에 식견을 갖추고 있는지. 자신의 분수 를 넘어서는 일에 손대는 것은 당신과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위명을 쌓아 온 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오. 드래곤의 일은 당신네 광부 족속이 담 당할 일이 아니오." 엑셀핸드는 씨근거리며 뭐라 말하려했지만 그전에 먼저 레티의 프리스 트가 말을 해버려서 엑셀핸드는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들 집도, 명예도, 지위도 갖추지 못한 떠돌이들 아닌가? 우스운 일 아니오, 헬턴트공? 이런 방랑자 무리가 대 륙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나서다니." 카알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역시 말귀가 통하는군. 그러니 드래곤 라자를 우리에게 넘기고 당신네 들은 천천히 우리 뒤를 따라오시오." "뒤를 말씀입니까?" "그렇소. 당신네들이 얼마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 손을 댔는지 알 수 있도록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겠소. 당신네들이 보는 것이 당 신들을 가르치게 되겠지. 알았다면 즉시 내가 말한대로 시행하시오." 카알은 인자하게 웃었다. 아아아, 이제 끝장이야! "귀하의 엉덩이가 얼마나 멋있는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댁의 엉덩이를 감상해주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군요." ================================================================== 14. 정답이 없는 선택……16. 엑셀핸드가 혀를 깨물고는 끔찍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네리아는 볼을 잔뜩 부풀리더니 곧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하!" 레니와 아프나이델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카알을 바라보았고 제레인트 는 배를 잡고 뒹굴 준비를 갖추었다. 레티의 백발 프리스트는 잠시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렸 다. 대략 다섯 호흡 쯤? 레티의 보잘 것 없는 검께서는 대략 그 정도 시 간을 끌고나서야 간신히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카알은 두 팔을 정열적으로 펼쳤다. "참으로 복된 만남이올시다!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는 돌대가리는 만나기 진귀한 것이지요." "너 이놈! 뚫린 입이라고 감히…" "뚫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혀있는 그 귀를 잘 판 다음 내 말을 똑똑 히 들으시지, 레티의 보잘 것 없는 칼토막 선생." 백발 프리스트는 그야말로 입이 콱 막히고 말았다. 아마 저 나이 되도 록 이렇게 험악한 말은 처음 들어보셨을 테지. 뒤쪽에 있던 레티의 프리 스트들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로브를 차례대로 등 뒤로 넘겼다. 그러자 곧 갑옷과 번쩍이는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우리쪽에서도 모두들 검손잡이를 쥐었다. 카알은 또박또박 말했다. "먼저, 난 당신 뒤를 따라가며 엉덩이 감상해주고 싶은 생각 전혀 없 어. 둘째, 그쪽의 드래곤 라자를 우리에게 보내준다면 숙식 제공하고 안 전하게 크라드메서에게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제의하지. 셋째, 당신네 들은 신을 섬긴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할슈타일 후작을 섬기니까 후작 에게 전해주시오. 지은 죄에 대해 준비되어야 할 벌이 너무 많아서 간추 리는 작업이 필요해질 지경이니 좀 도와줄 수 없냐고. 받고싶은 벌을 우 선적으로 줄 수도 있거든." 세상이 모두 발 아래로 보이는 바위 위에 꼿꼿이 선 채, 카알은 내용상 험담이지만 어조상으로는 험담이 아닌 말을 험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발 프리스트는 울림이 꽤 많이 섞인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싸우고 싶다는 게냐?" 카알은 피식 웃었다. "성직자 주제에 세상의 일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진 것만 해도 고약한 경우거늘 그에 더불어 폭력 성향까지 갖추고 계시는군." "뭐라고?" "이 답답한 작자, 잘 들으시오. 성직자란 무엇이오?" 백발 프리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레인트와 에델린은 모두 움찔하면 서 카알을 바라보았고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알기로 성직자는 만인의 종복이라고 아는데? 신은 만인의 어버이, 인간은 신의 아들, 그리고 성직자는 인간의 종복 아니었던가? 신께서 성 직자들이 만인의 지도자 노릇하기를 바라신 적은 없겠지. 신께서 성직자 에게 바라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 만인을 섬기는 것 아니오?" 백발 프리스트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늘어서있던 다른 프리스트들의 얼굴에선 갑자기 불안한, 그러면서도 불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잘 정리된 고요함은 그대로였지만 왠지 그 표정들에서 수근거리는 듯한 분위기가 풍겨나왔다. 카알은 말했다. "성직자가 신의 선량을 섬기길 거부하고 그들을 지배하길 바란다면 그 것은 더이상 성직자가 아니오. 언사를 주의하시오, 레티의 프리스트! 싸 우고 싶냐고? 양지기가 양에게 화를 내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단 말이 오?" 제레인트와 에델린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통해 카알의 말이 꽤 나 옳은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 프리스트들은 로브만 입었다뿐이지 사실 칼잡이에 가깝다며? 백발 프리스트는 험한 눈으로 카 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 다했소?" "다했다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레티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당신 말을 취소할 기회를 주겠소. 어쩌시겠소?" 이건 정말 칼잡이 중에서도 저질 칼잡이로군. 카알의 말을 전혀 알아듣 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데. 카알은 차라리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백발 프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까? 모욕이라고?" "명백한 모욕이오." "어째서 그런지 말씀해보시오." "우리들을 만인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싶어하는 성직자로 치부하지 않았 소! 물론 우리는 신 앞에서만 허리를 굽히지만, 그렇다고 만인을 다스릴 생각을 한 적은 없소! 게다가 레티가 아니라 할슈타일 후작을 모신다고 말씀하셨소. 성직자에게 그런 모욕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이곳에 오신 이유는?" 백발 프리스트는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면서 말했다. "장난치는 거요? 돌맨 할슈타일공을 크라드메서에게 안내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렇다면 그 의무나 충실히 수행하시오! 레니양을 탐낸다는 식으로 말 하지 말고! 어떻게 우리에게 레니양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말이 오? 레니양은 우리의 부탁에 의해 저 먼 땅에서 이곳까지 오시었소. 다 시 말하자면 우리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서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우리에게 레니양을 내놓으라고 말하는군. 마치 레니양이 우리 소유의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약 지금이라도 레니양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난 그녀를 크라드메서에게 데려갈 수 가 없소. 그리고 애초에 약속했던 바대로 그녀를 다시 그녀의 고향으로, 그녀의가족에게로 데려다주어야 하오. 그런데 내가 어찌 당신에게 그녀 를 내어주고 말고 한단 말이오!" 백발 프리스트도 이 말에는 입이 막히고 말았다. 레니는 글썽이는 눈으 로 카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티의 보잘 것 없는 검은 한참 후에야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어, 그건 내 실수였소. 크라드메서의 위기 때문에 머릿속이 꽉 찬 상 태였단 말이오. 그렇다면, 에, 그렇다면 레니양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이겠군. 그렇겠지?" 어라?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러나 카알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렇소. 신 아래 평등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 정할 당연한 자유가 있소." "그렇다면, 비켜나주시오." 백발 프리스트는 강하게 말했고 카알 역시 거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어찌나 거칠게 홱 몸을 돌리는지 나는 카알이 쓰러지는 줄 알고 놀랐다. 몸을 돌린 카알은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겁먹은 눈으로 카알을 마 주보았지만 카알은 미소띤 얼굴로 말했다. "저 프리스트께서 레니양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들어주시죠. 다른 말은 할 것이 없고, 레니양 스스로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저, 저, 카알 아저씨…" "괜찮아요, 레니양."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니를 위로하는 표정을 지었다. 레니는 입술 을 꾹 깨물더니 앞으로 조금 나서서 아래에 있는 프리스트에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높은 곳, 거기서도 산 정상의 바위 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말 할 수 없이 외로워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레니의 빨강머리는 힘없이 나풀거렸다. 레니는 바지 옆의 두 주먹을 꽉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씨가 드래곤 라자요?" "예, 예. 그, 그렇습니다. 레니예요." 백발 프리스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레니를 올려다보았다. 젠장, 상점에 서 물건 고르는 장사치의 눈길처럼 보이는걸. 어디 안보이는 곳에 흠집 은 없나? 어디 보수한 부분은 없는가? 갑자기 그런 말도 안되는 말들이 떠올랐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레니는 백발 프리스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꼬고 있었다. 이윽고 백발 프리스트는 입을 열었 다. "아가씨가 누구의 딸인지는 잘 아시겠죠?" 레니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백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저의 아버님은 일스의델하파의 항구에서 웨일즈 본야드를 경영하고 계시는 그레이든씨세요." 좋아, 멋지다! 레니는 한 번의 떨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줄줄 말했다. 백발 프리스트는 당황한 눈으로 카알과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러 다가 그는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일행들은 야비하게도 아가씨에게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 정당하 지 못한 일이야. 아가씨는 그보다 훨씬 고귀한 가문의 따님이시오." 제레인트가 벌쭉벌쭉 웃기 시작함으로써 백발 프리스트를 의아하게 만 들었다면 운차이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하품을 해버림으로써 백발 프리스 트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레니는 턱을 들어올리더니 약간 토라진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 분들을 함부로 말씀하시지 마셨으면 좋겠네요." "뭐라고? 아가씨. 아가씨는 잘 모르고 있어요. 저 일행들이 어떤 사람 들인지." 우리 일행이 어떤 사람들이냐고? 독서가, 초장이, 경비대장, 도망친 왕 자, 전향한 간첩, 클래스 3 마스터 마법사, 가장 고귀하다는 드워프, 돈 이 너무 많아서 도둑질에 대해서는 잊어버린지 오래된 도둑, 죽었다 살 아나도 바뀐 게 없는 프리스트, 이빨이 멋진 트롤 프리스트. 이 정도면 멋진 일행 아니야? 레니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저 일행들은 아가씨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한 마디도 알려주지 않았단 말이오. 아가씨의 정당한 아버님으로부터 아가씨를 빼앗기 위해…" 레니는 턱을 올린 자세 그대로 도도하게 말했다. "설마 그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할슈타일 후작이 라자의 혈통을 위해 하녀였던 저의 어머니를 건드려 절 낳았다는 음탕한 이야 기?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 크라드메서 때문에 절 되찾으려 한다는 칙칙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 지 모르겠네요." 백발 프리스트는 입을 쩍 벌렸고 그 표정은 우리들을 퍽 유쾌하게 만들 었다. 그런데 레니의 이야기에 유쾌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우리 일행 뿐 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붉은 로브를 걸친 프리스트들 무리 가운데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큭큭큭."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숨죽여 웃는 사람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어? 웃 고있는 사람은 어린 소년, 돌맨 할슈타일이었다. 저 꼬마가? 돌맨은 주 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얼굴을붉히며 고개를 숙였 다. 백발 프리스트는 헛기침을 하더니 레니를 올려다보았다. "그 이야기를 아시오?" 레니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지만 당당하게 대답했다. "불행하게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잊고 싶은 과거의 이야기라 고 생각해요." 백발 프리스트는 다시 기운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진실을 거부할 수는 없는 법이오. 자신의 숙명을 거부하는 것은 더더 욱 옳지 않은 일이고. 더군다나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를 빼앗긴다는 것 은 말도 안되오. 아가씨는 고귀한 혈통의 후계자요. 위대한 바이서스의 존경받는 귀족으로서의 삶이 아가씨의 권리란 말입니다. 일스 같은 곳에 서 생을 마구 살아갈 필요는 전혀 없소." 레니는 마지막 말에 눈썹을 곤두세웠다. "전, 전 제가 감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싫어해요. 되도록이면 감정을 드 러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말을 하고 싶을 때도 되도록이면 입을 다물 고 있자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작 해야할 말도 안하는 경우가 많아요. 손해보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전 제 신조를 지키고 싶어요." 그랬나? 어째 레니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 생각했었지. 레니는 잠시 주먹으로 입을 가리더니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제 평소의 신조를 굽혀야겠네요. 프리스트께선 무슨 권 한으로 일스를 그렇게 험담하시는 거죠?" "예?" "프리스트께서 바이서스를 위대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처럼 저도 일스를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아가씨는 일스의 국민이 아니오!" "아니, 전 위대한 일스의 국민이에요!" 아아, 일스여! 그대는 자랑스러워해도 좋으리라. 여기 일스의 작은 애 국자가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 30명 앞에서 당당히 그대의 이름 을 찬미하고 있음이니! 쿠하하하! 레니와 마찬가지로 소금기 어린 바람 을 맞으며 살아온 제레인트는 누가 건드리면 그대로 눈물이 툭 터져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일스가 바이서스의 아들 나라 같은 거라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 지만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함부로 험담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리고, 나라와 나라의 관계라면 더욱 그럴 거라고 생각되네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오? 아가씨는 할슈타일 후작의 따님으 로…" "프리스트님이야말로 제 말을 못알아들으세요! 전 그레이든씨의 딸이에 요! 프리스트님은 가지고 계시는 그 검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 으세요?" "뭐라고?" "프리스트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검은 프리스트님의 것이잖아요! 그 검 을 만든 대장장이의 것이 아니라! 절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제 아 버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요. 후작님께서는 저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 을 한 번도 주신 적이 없어요. 전 말하겠어요.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 만, 만일 유피넬과 헬카네스라 하더라도 우릴 돌보지 않는다면 인간들의 어버이가 아니에요!" 괴, 괴, 굉장하다! 레니가 저렇게 과격한 데가 있었나? 원래 조용하던 사람이 폭발하면 더무서운 법이라는 거룩하신 상식론은 역시 진리였나? 레니는 프리스트를 상대로 신성모독이 될지 모르는 말을 함부로 말해버 렸다. 뭐, 내가 보기에도 전문적인 신학으로 전개될 수준의 말은 아니지 만, 그래도 저게 예사 말인가? 백발 프리스트는 뒷통수를 두드려맞은 사람의 표정을 정확하게 구사하 고 있었다. 손을 뒷통수로 가져가기만 한다면 정말 그럴 듯할 텐데. 그 는 얼빠진 얼굴로 레니를 올려다보다가 곧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이, 이… 고약한 물이 들었군!" 레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술에 상처가 나지 않을까 보는 내 가 겁이 날 정도였다. "일스 따위, 해적이나 진배없는 뱃놈들 소굴에서 짠내나 맡으며 자라났 으니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더라도 더렵혀지지 않을 수 없을 터. 자 신의 신분도 깨닫지 못한 채 막되먹은 불신자의 소리나 지껄이다니. 개 탄스러운 일이로고!" ================================================================== 14. 정답이 없는 선택……17. "말씀 함부로 하시네요. 일스가 해적 소굴이라고요? 그럼 당신네들은 신성 산적떼들이에요?" 바야흐로 카알이 일행 최고의 독설가의 위치를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닥쳐라!" "내 말이 틀렸어요? 이런 산 위에서 서른 명이나 되는 칼잡이들이 지나 가는 여행자를 멈춰세우고는 여자를 내놓아라! 라고 말하면 그게 산적이 아니고 뭐에요?" 푸하하, 푸하! 아이고, 아이고 죽겠다. 레니는 깜찍한 얼굴로 백발 프 리스트의 으르렁거림을 흉내내었고 레티의 프리스트들마저도 황급히 고 개를 돌렸다. 백발 프리스트는 콧김을 풀풀 뿜어내면서 자신이 간신히 성질을 억누르고 있음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네 타락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마. 레니 할슈타일!" "자기가 이름이 없다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요! 레 니에요, 레니! 할슈타일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샌슨이 두 팔을 들어올린 채 만세 를 외치려드는 네리아를 말리고 있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살벌한 눈으로 레니를 바라보더니 카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레니는 더이상 상대할 수 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헬턴트공, 당신! 어린 소녀에게, 백지 상태나 다름없는 소녀에게 마구 잡이로 당신의 조야하고 야비한 지식을 우겨넣은 모양이군. 용서받지 못 할 일이라는 거 모르겠소?" 그러나 카알은 자신의 옛 영화를 잊지 않았다. 정통 독설가의 기본 요 건. 무슨 말을 할 때든 낮고 잔인하게 말할 것. 카알은 이마에 '잔인' 이라고 써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신의 가장 참된 선량을 백치 취급하시는군. 우린 다시는 그 시절 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어린이야말로 가장 신에 가깝다는 것 쯤은 수련 사 시절에 충분히 배웠을 줄 아는데. 성실치 못한 수련사였던 모양이군 요." 레티의 프리스트들 가운데서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웃음소리를 재료로 삼아 나는 눈 앞에 있는 백발 프리스트의 과거 수련사 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이상 입 섞어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어! 얌전히 드래곤 라자를 내놓으시오. 강제를 동원하기 전에!" 오호라, 이제 마각을 드러내신다는 건가? 샌슨은 이를 드러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고 운차이는 팔짱을 풀었다. 네리아는 화려한 동작으로 트라이던트를 돌려잡으며 씩 웃었다. "성직자를 두드리면 천벌을 받는지 안받는지 볼까?" "이, 이 고약한!" 그 때 길시언이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티의 보잘 것 없는 검이여. 지금 레티의 종단 전체의 의지로서 바이 서스 왕가를 치겠다는 것이오?" 백발 프리스트는 이제 자신의 피부의 매끄러움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 다. 파리가 없는 계절이라는 것이 좀 아쉬운걸. 하얗게 질려버린 저 얼 굴에서 파리가 미끄러져 실족하는 광경을 보고 싶은데. 길시언은 더욱 음성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말해보시오. 난 당신 말마따나 태자의 자리를 걷어차고 야만스러운 황 야의 아름다움에 취해버린 자이지만 왕자의 자리를 포기한 적은 없소. 그것은, 역시 당신 말마따나 내가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니까. 따라서 지 금의 상황은 신권이 속권의 경계를 무시하고 왕가의 존엄을 침해하겠다 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얼마 걸고 내기할까? 저건 프림 블레이드의 대사임에 틀림없어. 길시언 은 검손잡이를 꽉 쥔 채로 느릿하게 말하고 있거든. "기, 길시언 왕자?" "정확한 호칭에 감사하겠소. 자, 이제 당신의 의도를 내게 말해보시오. 레티의 검은 바이서스 왕가를 겨냥하는 거요?" 양쪽 일행이 모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실제로 쥐가 죽은 것 은 아니다. 쥐뿐만 아니라 아직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피냄새는 나는데. 늘어선 프리스트들은 모두 무서운 눈으로 우릴 올려다보고 있었다. 짧 게 깎은 머리, 굳게 다문 입술,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뒤로 넘겨버린 로브 아래로 갑옷과 검이 삼엄한 빛을 뿜고 있다. 그들은 왕족을 바라보 는 눈길로는 최하급에 속하는 눈길로 길시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길시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발 프리스트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길시언은 백발 프리스트에게 선택 가능한 두 가지 상황을 제시해버렸 다. 교묘한 화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는데요, 왕자님? 보통은 선택 가 능성이 하나뿐인 제안을 해야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한 것이거 든. 그렇잖아요? 이런 말 우습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밀어붙여버리셨어. 왕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카알을 졸라서 당신을 헬턴트 명예 주민으 로 추대하게끔 하고 싶은 걸요. 백발 프리스트에게 가능한 첫번째 선택은 품위있는 태도로 왕가의 존엄 을 인정해주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저들에게 명예로운 양보를 제안할 수 있겠지. 30 명이나 되는 검과 파괴의 프리스트들로 하여금 우 리 뒤를 따라오게 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레니와 크라드메서의 계약 을 먼저 시도해볼 수 있겠지. 단, 이 경우라면 우리가 성공하는 즉시 할 슈타일 후작께서는 꼼짝달싹할 수 없이 반역자가 되시고 왕실여관 0층에 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시겠지. 그 다음 둘째, 왕가의 존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는 것처 럼 행동하는 것. 그렇다면검과 파괴를 상당히 좋아하는 30 명의 프리스 트들이 일제히 우리들에게 달려들게 되겠지. 우리가 인적 드문 이 갈색 산맥에서 모조리 몰살당하면 할슈타일 후작에 대한 고발인은 사라지게 되니까. 단, 이 경우라면 싸움의 와중에서 돌맨 할슈타일이나 레니의 목 숨을 안전하게 담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크라드메서는 자유롭 게 깨어나 바이서스를 향해 상당히 뜨거운 감정 표현을 해버릴 수 있게 되겠지. 아, 난 너무나도 냉철무쌍해. 그리고 냉철한 사람들은 항상 고민이 많 아. 으으윽. 나머지 우리 일행들도 제각기 냉철함을 과시하며 각자의 무 기를 불끈 쥐고는 백발 프리스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30 여명의 프리스트 역시 모두들 칼자루를 꼬나쥔 채 백발 프리스트의 대답만 기다 렸다. 양쪽이 모두 수틀리면 치고들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가운데 백발 프리스트는 힘들게 침을 삼키고나서 말했다. "왕자여. 레티의 검은 왕가나 그의 백성을 향해 돌려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처음으로 왕가를 겨냥할 거요?" 백발 프리스트가 가까스로 만들어낸 대답은 무참하게 뭉개져버렸고 카 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껄끄러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나, 그 질 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나 모두들 성격이 너무 극단적이야, 젠 장. 어쨌든 양자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열심히 쥐를 죽이고 있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목소리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지금 왕가는 레티의 검을 협박하는 것인가!" 프리스트들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짧게 깎은 금발머리 에서 이마를 가로질러 흉터가 멋지게 나있는 프리스트였다. 길시언은 곧 장 욱하는 표정으로 그 프리스트를 쏘아보았지만 달려나온 금발 프리스 트는 계속 외쳤다. "이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완벽한 협박이오! 길시언 왕자! 지금 당 신은 레티의 영광을 무시하며 그 프리스트를 억압하려 드는…" "닥쳐라!" 백발 프리스트는 일갈로 금발 프리스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금발 프리스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뒤쪽에 서있는 프리스트들이 모두 짓눌린 동조의 표정을 띄 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말했다. "이는 부당한 일이오! 인간의 왕이 프리스트를 협박할 수는 없는 노릇 입니다! 왜 저런 무례한 언사를 용납함으로써 파괴신 레티의 검날을 무 뎌지게 만드는 겁니까!" 그 때 또다른 젊은 프리스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레티의 입이여. 이것은 레티에 대한 도전 의사의 표명입니다." 백발 프리스트의 눈썹이 몹시 곤두섰다. 또다른 프리스트 하나가 앞으 로 나서려고 했을 때 백발 프리스트는 고함을 빽 질렀다. "모두들 제자리에서 꼼짝말고 입들 닥쳐라!" 샌슨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스트의 화법치고는 수 준급이야." 옆에서 아프나이델이 킥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백발 프리스트는 자신의 무리를 장악하기 위해 애쓰느라 우리쪽에 신경 을 쓸 여유가 없었다. "누가 이 무리의 입이냐! 너희들 모두가 레티의 팔이지만 입은 하나! 내가 레티의 입이다! 종단에 대한 반역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것이냐!" 뛰쳐나온 프리스트 두 명은 억울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저 말에 는 댓구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른 프리스트들 모두가 불만에 찬 한 숨이나 투덜거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백발 프리스트는 그들 모두를 쏘 아보았고 마침내 소란이 조금 가라앉고나자 다시 우리에게로 고개를 돌 렸다. 백발 프리스트는 입술이 하얗게 변하도록 굳게 다물고는 길시언을 올려 다보았다. 길시언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기가 무거 워지는 느낌은 잠시. 레티의 입이라는 백발 프리스트는 입을 열었다. "더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겠소. 길시언 왕자.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 답을 해드리지." 길시언의 눈에 섬광이 튀었다. 동시에 뒤쪽에 있던 프리스트들이 모두 허리를 낮추는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살벌한 기분이 드는걸. 저쪽엔 칼이 30 개고 이쪽엔 몽둥이나 도끼, 트라이던트나 밀리터리 포크가 있 긴 하지만 칼은 4 개 뿐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호 흡을 가다듬고나서 차갑게 말했다. "만일 바이서스 왕가가…" 하지만 백발 프리스트는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비명소리? 아니다. 울음소리다. 하지만 꼭 처절한 비명소리처럼 들렸 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에 모두들 기절할만큼 놀라버렸다. "삐이이이익!"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했다. 하늘 높은 곳에 청회색의 정 적 가운데로 하늘의 중심을 찾는 자가 있었다. 세계의 중심을 찾아 외롭 게 빙글빙글 돌면서 날카롭게 좁혀들어가는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다시 한 번 모든 하늘과 그 아래 대지를 향해 포효했다. "삐이이이익!" 포효소리만이 계속해서 되울리는 가운데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운차이는 입을 열었다. "독수리다. 이 계절에 희한하군." 운차이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가 저 새들의 제왕을 보면서 길시언이 느낄 감정, 혹은 다른 이들이 느낄 감정을 짐작해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 겠지. 하하하! 30 명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한결같이 창백해진 얼굴 때문에 시체를 모아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공포를 넘어선 공포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독수리…? 독수리라고?" "설마? 설마, 독수리가?" 짓눌린 신음소리와 불안과 의심에 가득찬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프리스 트들은 모두 뒤로 한 두 발짝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엔 이 사태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 광경 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도록 저려온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맥박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쿵! 쿵! 길시언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잔뜩 잠긴 목소리로 운차이에게 물었다. "독수리? 독수리가 확실한가?" 길시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운차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 했다. "그래. 독수리다. 그런데 너희 북부 미련퉁이들은 독수리 공포증이라도 있나?" 길시언은 운차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고개를 돌려 백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백발 프리스트는 이를 악문 채로 독수리와 길시언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고 뒤로 물러나던 프리스트들의얼굴에는 이제 공포의 빛이 떠오르 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를 놓고 있었다. 그리고 돌맨 할슈타일은 정도를 넘어선 불안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핫! 저 나이에 손가락을 빨고 있다! 길시언은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몸짓으로 소리높여 외쳤다. "영광의 아샤스의 전령이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 내려다본다…! 길시언의 목소리는 갈색산맥 전역에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산울림과 어지러운 머리 때문에 제대로 서있기가 힘들 지경이다. 길시언은 두 팔 을 들어올렸다가 손을 내려 백발 프리스트를 겨냥했다. 설령 검을 겨냥 했다 하더라도 저 프리스트의 얼굴이 저만큼 하얗게 변하기는 어렵겠지. 길시언은 외쳤다. "영광의 창공에 한 줄 섬광이 되어! 만물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저 제왕 앞에 말하라! 그대는 바이서스 왕가에 대해 참람 된 검을 겨눌 것인가!" 마치 나도 그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이 독수리가 울부짖 었다. "삐이이이익!" 제레인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카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뭘 못 믿어요! 하늘에 선 독수리가 울고 땅에선 길시언이 운다. 이거예요, 카알! 백발 프리스 트는 가엾게도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 커걱, 그, 그것이, 그것은…" 나의 왕이여! 신의 영광이 독수리의 모습이 되어 지상에 나타나 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 어떤 보석관이 저 영광의 관에 비할 수 있 을까! 산 정상의 바위를 딛고 선 길시언은 영광의 7주 전쟁에서 방금 돌 아온 고대의 영웅처럼 보였다. 세류델헨 왕자 앞에 아샤스가 나타났을 때가 저러했을까? 루트에리노 대왕의 핏줄은 살아있었고, 맥박치고 있었 다! 백발 프리스트는 마침내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는 다 포기해버린 목소리로 울부짖듯이 말했다. "그 날개에 뿌려진 햇살처럼 정의롭게! 왕자여. 바이서스 왕가는 인간 의 왕입니다!" 털썩. 레티의 프리스트들 중 하나가 그의 대변인을 따라 무릎을 꿇었 다. 뒤이어 그 옆에 있던 프리스트가, 그리고 또다른 프리스트가. 이윽 고 모든 프리스트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금발 프리스트 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 다. 돌맨 할슈타일은 이미 오래전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시리도록 맑게 울려퍼졌다. 30 여명의 프리스트들 은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길시언을 경배하고 있었다. 제레인트는 희열 에 들뜬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우리는… 우리는 신의 것… 그러나, 그러나 우리가… 우리가 세상에 있으려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이 몸을 통해… 따라서… 이 몸의 주인인… 나의 왕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어라… 신께 우리의 사 랑을… 바쳐 영생을 구하고… 나의 왕께 경배를 바쳐… 명예를 오롯이 하라." 카알은 낮게 신음을 뱉었다. "맙소사! 멜다로의 노래 아닙니까?"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책에서 봤었지요." "아아, 그래요. 으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성직자라기보다는 전사에 가깝단 말이죠." 창공의 독수리는 계속해서 영광의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의 꼭대기에 선 길시언은 타오르는 눈으로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경배를 받 고 있었다. 엑셀핸드와 운차이, 그리고 레니는 이 사태를 도저히 이해하 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심하게 꼬고 있었고운 차이는 코방귀를 뀌었다.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머나 하는 소리 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저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바이서스의 국민도 아닌 제레인트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책에서 본 것만 가지고 이해하는 것인가? 아, 참. 그는 원래 감 동을 잘하지. 난 점점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거칠게 닦았다. 으윽, 제기 랄. 속눈썹이 눈알을 찔렀어. 그래서 눈물이 나오잖아. 칫! 갑자기 거의 100%의 확률로 예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는, 그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든 영원히 우리를 감동시킬 것이다. 대왕이 드래곤 로드를 무릎 꿇게 만들 었듯이, 지금 그 핏줄이 30명의 파괴신의 프리스트들을 무릎 꿇게 만들 고 있는 것이다. 아, 정말 싫다! 코끝이 찡해오잖아. 샌슨은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야, 야. 이거 정말, 가슴이 뛰어서 못견디겠다. 눈물이 나려고 하는 데." 나 역시 잠겨드는 목으로 힘들게 말했다. "참아봐. 이 순간에 눈물을 보이면 후대에 그 무슨 개망신이겠어." "그래, 후치. 알았어." 샌슨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목을 가다듬었고 그래서 난 눈물을 찔끔거리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길시언은 가슴을 활짝 편 채 독수리의 눈매로 아래를 굽어보며 말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18. "그대들의 정신의 지배자의 권한에는 경의를 바친다. 그러니 이제 그대 들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왕족의 말을 들어라!" "전하!" "난 여기 계신 레이디를 크라드메서에게 안내할 것이다. 그대들은 나와 내 친구들을 방해할 것인가?"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들의 신에 대한 경의로써 그대들을 방해하지 않 겠다. 그대들은 자의로써 돌맨 할슈타일공을 모시고 크라드메서를 찾아 가도록.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경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대륙의 선량한 만민을 위해!"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 말씀의 공정함이 아샤스의 영광을 드높일 것입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미앙스 수도원의 현명한 프리스트들에 대해…" "엎드려!" 뭐지? 고함 소리. 그리고 방패를 들어올리며 몸을 굽히는 길시언의 모 습. 그러나 길시언의 동작은 중간에 멈춰버렸다. "삐이이이익!" 독수리 는 하늘이 찢어져라 울었다. "운차이!"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다. 운차이의 찌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약간 높게 들어올린 그의 팔도. 그 팔에 는 화살이 꽂혀있었다. "으윽, 젠장…" 운차이는 허물어졌다. 그러자 그의 팔에 가려져있던 레니의 파랗게 질 린 얼굴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이 황급히 레니를 끌어당기며 동시에 길시 언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텍트 프럼 노멀 미사일!" 그와 동시에 거칠게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타탕! 탱! 허공에서 화살이 튕겨올 랐다. 제기랄! 누군가 우리에게 사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엎드려! 엎드리라고!" 샌슨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급히 몸을 던졌다. 어디지? 제길! 여기는 사 방이 노출된 산꼭대기잖아! 다시 한 번 화살이 부딪힐 때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화살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뒤쪽 방향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일행들은 바위 뒤로 몸을 숨겼고 난 바위 위로 머리를 내밀어보았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그 동안에도 화살은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화살들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무시한 채 우리쪽을 향 해서만 날아오고 있었다. 등 뒤에서 카알이 이를 갈면서 외쳤다. "빌어먹을! 할슈타일 녀석이!" "운차이! 괜찮아요?" 제레인트의 고함소리에 이어 운차이의 불만에 찬 대답이 들려왔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제기랄. 팔에 화살을 맞았는데." 개 같은 후작놈과 그 졸개 녀석들이! 우리 아래쪽에 있던 레티의 프리 스트들은 황급히 몸을 돌리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로 연초록색의 막이 생기더니 그들 전체를 둘러싸서 그들을 보호했다. 길시 언은 바위 위에 서서는 프림 블레이드를 위로 들어올린 채 우리들을 보 호하고 있었다. 샌슨은 땅을 기어서 운차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재빨리 대거를 꺼내더니 칼집 채로 운차이에게 내밀었다. "물어." 운차이는 대거의칼집을 물었다. 그러자 샌슨은 곧장 운차이의 팔에서 화살을 잡아뽑았다. 선혈이 튀어 샌슨의 얼굴을 물들였지만 운차이는 신 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만 칼집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레인트, 부탁합니다." 샌슨은 화살을 집어던지더니 다시 바위 위로 기어올라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아프나이델이 올라왔다. 난 바위 위에 엎드린 채 팔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안보여!" 젠장! 숲속에 숨은 채 산 정상을 향해 쏘아붙이고 있어서 녀석들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내리면서 우리 옆에 엎 드렸고 그러자 화살들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거나 바위에 맞아 튀어오 르기 시작했다. 타당! 탕! 아프나이델은 독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레니양을 겨냥했습니다. 우연일까요?" 길시언은 바닥에 엎드린 채 주먹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가 대답을 거부하자 샌슨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맙시다." "좋습니다. 달아날까요?" "뒤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것은 싫은데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막아주지 않을까요?" 아프나이델은 턱으로 바위 아래의 프리스트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선 채 연초록색의 방어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 들쪽을 향하는 화살은 거의 없었다. 샌슨은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는 한통속이었잖습니까." 제기랄! 그러고보니 감동 때문에 잠시 잊었던 사실이다. 아미앙스 수도 원은 사실 할슈타일 후작의 주구였었지. 저 친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 도 레니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 한다? 아 프나이델은 프리스트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재까진 그들은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그것은 침착한 것이라기보다는 갑작스런 상황에 서 행동을 결정할 수 없어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카알이 우리 옆으로 기어올라왔다. "위치를 포착했습니까?" "머리도 못내밀 지경입니다." 그러자 카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곧 달려오겠군요. 아프나이델, 준비하십시오." "예? 아, 무슨 준비를?" 그리고 화살의 소나기가 멈추었다. 곧이어 정상 아래쪽에서 요란한 함 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산등성이를 따라 전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렇게 중장비를 갖춘 전사들이 날렵하게 산을 달려온다는 것은 거짓말 같다. 샌슨은 나를 돌 아보더니 말했다. "아무 바위나 집어던져!" "…날 거인이나 투석기 같은 걸로 생각하나 본데, 그거 보기는 좋겠지 만 잠시만 기다리자구."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드디어 행동에 들어갔다. "경계 태세!" 백발 프리스트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차랑, 차라랑! 레티 의 프리스트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연초록색 방어 막 속에서 은백색 검광이 눈을 어지럽힌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눈깜짝 할 사이에 10 명씩 3 열로 섰다. 달려오던 전사들은 당황하며 멈춰섰다. 전사들 역시 검을 겨눈 채 프리스트들과 대치를 이루었다. 양쪽의 거리 는 30 큐빗 쯤. 그리고 전사들 사이에서 후작이 걸어나왔다. 후작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눈썹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고 관자놀이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눈이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 다. 그런 파격적인 얼굴을 한 채 후작은 외쳤다. "뭣하는 것인가!" 백발 프리스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것이오, 후작. 지금 뭣하는 것입니까?" "너! 날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말조심하시오. 아미앙스 수도원은 우정으로서 후작가를 대해왔습니다. 우정에는 친구의 과오를 막는 것도 포함됩니다." 상황이 의외의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카알은 박수를 치고 싶다는 얼굴 로 헤벌레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후작은 분통을 터뜨렸다. "과오? 과오라고! 네놈이 날 배신하려는 것이구나! 왕가에 빌붙을 셈이 로군!"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어깨가 동시에 꿈틀거리는 듯했다. 백발 프리스트 는 아랫턱을 불쑥 내밀었다. "우리는 레티를 섬깁니다." "조금 전 그를 경배한 것은 뭐란 말이냐!" "레티는 우리들에게 속권의 지배자에 대해 거부할 것을 명하지않았습 니다. 신성함을 경배할 줄 알았던 기사 멜다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의 종복인 우리들은 신의 자식인 세상의 선량들을 받들어 모십니다." 하하! 저 백발 프리스트 의외로 능글맞은 데가 있군. 저 말은 조금 전 카알이 들려준 말이잖아. 후작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제 나의 적이냐?" "아니, 당신도 신의 선량이십니다. 우리는 레티의 적 이외에 그 누구도 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켜라! 저 일행부터 해결한 다음 너희들의 일을 해결해야겠 다." 백발 프리스트는 이제 팔짱을 끼었다. 로브의 소맷자락이 흘러내리면서 얼굴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팔뚝이 드러났다. 히야, 그 팔 뚝 정말 끝내주네. 무슨 기둥을 두 개 겹쳐놓은 것 같군. "어쩔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백발 프리스트의 말에는 아무리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도 파악할 수 있 는 명백한 시비조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은 마음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왜 말해야 되는가?" "조금 전 당신들은 검을 뽑아들고 돌격했었소. 저 일행을 공격할 작정 이오? 말해두겠는데, 레티의 검 앞에서 부당한 살해는 절대로 용납 못하 오. 파괴의 권한은 레티에게 있소." 후작 주위에 서있던 전사들에게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상황이 이 상하게 돌아간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파괴신의 프리스트들이 앞을 가로 막고 있는데 무모하게 돌진해버릴 수 있는 사람은 헬턴트 독서가와 폐위 당한 태자 외에 누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카알, 나 당신 존경해요. "날 가로막겠다면 너희들이라고 따로 취급하진 않겠다!" 음, 존경할 사람이 하나 늘었군. 젠장. 후작은 단호하게 말해버렸고 전 사들의 얼굴에는 아찔한 표정이 떠올랐다. 반면 레티의 프리스트들 사이 에서는 피식거리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앞에 나서있던 백발 프리스트마 저도 고개를 조금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프리스트들이 왜 웃는 거지?" "자신이 있나 보지." 우리 옆에 나란히 엎드려있던 길시언이 낮게 말했다. "저 프리스트들에게 전투 기술은 그들의 신앙이자 그들의 기도니까. 저 들은 꿈속에서조차도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고 투쟁을 계속하지. 그래서 아침이 되면 침대에서 몇 명은 죽어나온다는… 이건 내 말이 아냐." "아, 예. 알고 있었어요." 아프나이델은 손을 비비더니 손가락을 꺾었다. "됐군요. 저 프리스트들이 뒤를 막아줄 모양입니다. 야박하게 들리겠지 만 이대로 몸을 돌리는 것이 어떨까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시간을 끌 어주는 동안 크라드메서에게 찾아가는 겁니다." 카알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저 두 무리가 격돌하게 되면 사상자가 많이 생길 텐데." "그러니까 더욱 빨리 가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성공해버리면 후작은 더이상 방법이 없으니 쓸모없는 싸움을 계속하려들 리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덤벼들긴 어려운 상황처럼 보이는군요. 후작의 전사들은 겁을 집 어먹고 있습니다." 카알은 눈살을 더욱 찌푸리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제레인트가 치료를 끝내고 운차이의 팔에 붕대를 매고 있었다. 운차이는 아무런 표 정도 없이 붕대를 뺏아들었다. "내가 하겠어." 제레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붕대를 빼앗아 운차이의 팔 을 감았다. 그 때 에델린이 위로 기어왔다. 에델린은 우리 옆에 힘들게 몸을 숨기더니 말했다. "돌맨 할슈타일도 데리고 가야 합니다." "돌맨을?" "예. 레니양이 거절당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돌맨 역시 데리고 가야 됩 니다." 돌맨은? 아래를 내려다보자 레티의 프리스트들 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돌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후작 일행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자기 주위의 프리스트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때 할슈타일 후작이 위를 올려다보며 패악스럽게 외쳤다. "길시언 왕자!" 길시언은 움찔했다. 그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샌슨이 재빨리 그의 어깨 를 잡아내렸다. 길시언은 샌슨에게 어깨를 잡힌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시언 왕자! 당신은 내 딸을 데리고 있고! 그리고 너 레티의 땡초! 넌 내 아들을 데리고 있다! 유괴범들끼리 잘들 어울리는군!" "말 조심햇!" "입 조심하시오!" 길시언과 백발 프리스트가 동시에 외쳤다. 길시언은 기어코 샌슨의 손 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제길. 화살이 날아오더라도 프림 블레이드 가 보호해주겠지. 길시언은 바위 위에 꼿꼿이 서서 후작에게 외쳤다. "너 이놈, 썩어빠진 반역자야! 누가 네 딸이란 말이냐! 레니양에게 물 어보지. 레니양! 당신 아버지는 누굽니까!" 오, 맙소사. 난 눈을 질끈 감았고 카알도 신음을 흘렸다. 길시언. 당신 에겐 그런 잔인한 질문을 할 절실한 필요성이 없을 텐데. 레니는 아직 소녀야. 자신의 아버지의 면전에 대고 직접 부정하는 일을 시켜야되겠 어? 레니는 하얗게 된 얼굴로 길시언을 올려다보았다. "저, 저, 길시언… 왕자님?" "말하는 겁니다, 레니양! 당신 마음에 있는대로 말하면 돼요! 저 자의 얼굴에 대고 똑바로 말해주시오! 당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레니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만해요!" 길시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두 손으로 얼굴 을 가린 채 무릎을꿇었다. 털썩. "그만해요, 제발. 이젠 그만해요. 아버지는, 흑, 아버지는, 내 아버지 는 그레이든씨에요. 이제 더이상 그런 질문 좀 하지 말아요. 흑, 으흑!" "…레니야." 네리아는 울상이 되어 레니를 껴안았고 레니는 네리아에게 안겨 서럽게 울었다. "어어어! 어어어! 난, 난 모르겠어요. 자꾸, 자꾸 이상한 아버지를 만 들지 말아요. 난, 난 머리도 나쁘고, 단순하게 살았어요. 드래곤, 으흑! 드래곤 라자 같은 거, 사실 난 싫어요! 그런 거, 그런 거 모르겠다고 요!" "쉬이… 괜찮아, 레니야. 쉬이. 기억하렴. 어제 에델린이 해준 말을 기 억해. 핸드레이크가 뭐라고 말했었지?" "어어엉! 난 모르겠다고요!" 레니는 이제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개 같은! 개 같은 상황이야! 난 이 상황이 싫어! 길시언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 다. "레, 레니양?" 그 때였다. 뭐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뭐였지? 공간 전체가 한꺼 번에 얼어붙는 듯한 느낌.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지극히 밝은 오후. 그리고 그 오후를 가로질러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독수리의 울음소리였다. "삐이이이익!" "커허억!" 길시언이 갑자기 두 팔을 들어올렸다. 뭐하는 거지? 길시언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댕그렁! 프림 블레이드가 떨어졌 고 곧 웅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쓰러진 길시언의 등에는 화살이 꽂혀있었다. "길시언!" 샌슨이 비명을 지르며 길시언의 팔을 끌어당겼다. 난 반사적으로 머리 를 돌렸다. 저 아래쪽에는 손에 석궁을 들고 있는 후작의 모습이 보였 다. 저 놈이! 길시언이 등을 보였을 때 쐈어! "너 이 새끼! 등을 쏴?" 난 곧장 옆에 있는 큼직한 바위를 들어올렸다. 카알이 찢어지는 목소리 로 외쳤다. "네드발군! 안돼!" 그러나 늦었다. 난 이미 후작을 겨냥해서 바위를 집어던졌다. 바우우웅! 바위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후 작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전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으아아악!" 콰과광! 재수없는 전사 하나가 바위에 치어 튕겨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위는 그대로 사내를 깔아뭉개고는 산비탈을 따라 맹렬하게 굴러갔다. 콰드드득! 바위는 나무 몇 개를 부러트리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난 고개 를 돌려 후작의 모습을 찾았다. 후작은 한쪽 무릎을 꿇은채 석궁을 당 기고 있었다. 어딜! 후작은 콰렐을 장전하면서 손을 들어 외쳤다. "돌격!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벤다! 계집애를 제외하고 모두 쳐라!" 전사들은 쓰러진 사내의 처참한 모습을 보더니 곧 눈을 뒤집으며 달려 들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죽여!" 백발 프리스트 역시 검을 휘저으며 외쳤다. "방어막을 강화한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부우우웅! 강렬한 진동음이 들려오면서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감싸고 있 던 연초록색 구가 더욱 진하게 바뀌었다. 전사들은 초록색 반구를 후려 쳤으나 검은 속절없이 튕겨났다. 탕! 타당! 전사들은 욕설을 퍼붓더니 곧 고개를 돌려 우리쪽을 올려다보았다. 카알은 활을 꺼내어들면서 외쳤 다. "아프나이델! 저지하시오!" ================================================================== 14. 정답이 없는 선택……19. 길시언! 이런! 샌슨은 길시언을 황급히 끌어당기다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길시언과 함 께 나동그라졌다. 샌슨은 아예 뒤로 누워버렸다. "으윽, 제길! 잠시만 부탁한다, 후치!" 샌슨은 고함을 지르더니 길시언을 품에 안은 채 위험하게도 머리를 아 래로 하고는 거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주루루룩! 아아, 저 멍청한 오우거! 등가죽을 홀라당 벗기우고 싶어서!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아프나 이델은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나 역시 바스타드를 휘두르며 아프나이델 의 뒤를 따랐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공격하고 있던 전사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낼 수 없게 되자 욕짓거리를 외쳐대며 우리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이 고 함을 지르려는 찰라, 아프나이델은 품 안에서 뭔가 하얀 것을 꺼내어 공 중으로 휙 집어던졌다. 하얗게 비산하는 가루 속에서 아프나이델은 외쳤 다. "컨퓨즈 랭귀지(Confuse language!)" 아프나이델이 손을 위로 뻗어올리는 순간 전사들은 움찔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아프나이델? 어떻게 된 거에요? 뒤따 라 뛰어올라온 운차이는 아프나이델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아프 나이델은 그저 지친 얼굴로 땀을 흘리며 전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전사들은 흉흉한 눈으로 아프나이델을 노려보 았다. 그 중 특히 거칠어보이는 전사 하나가 외쳤다. "라쳐 고말지보 정사!" "야뭐?" 저, 저 자식들 외국에서 수입한 전사들인가?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 았다. 왜냐하면 외치고나서 그대로 달려들려했던 그 전사는 자신이 한 말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멈춰버렸으므로. 그리고 다른 전사들 도 너무 당황해서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운차이의 눈꺼풀이 꿈틀했고 아 프나이델의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 "야거 한 고라뭐 금지 너, 깐잠? 래이뭐 이말 내, 라어?" "다이법마! 어렸걸 에법마!" 그 때 아프나이델이 고개를 조금 뒤로 돌리며 외쳤다. "길시언씨는!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차, 샌슨과 길시언은? 난 또다른 바위 하나를 집어들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에델린이 쓰러진 샌슨에게서 길시언을 가볍게 들어올리더니 그 품에 안았다. 길시언의 등으로 옮겨간 그녀의 손이 콰렐을 뽑아내는 것 이 똑똑히 보였다. "크으윽!" 길시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그대로 에델 린의 가슴에 고개를 떨구었다. 제기랄! 죽은 건가? 에델린은 그렇게 길 시언을 감싸안은 채 그 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옆에 있던 제레인트가 위를 바라보며 외쳤다. "지금은 못 움직입니다!" 아프나이델은 입술을 깨물었고 카알이 화살을 잔뜩 먹이며 외쳤다. "젠장! 운차이씨! 네드발군! 시간을 벌어줘! 아프나이델씨! 계속 혼란 시키십시오!" 그 때 드디어 아래의 전사들도 당황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말 따위 집 어치우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티융! 카알이 쏘아붙인 화살이 한 녀석의 투구를 맞춰날렸다. "으아악!" 그 사이에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한손을 품에 넣고 다른 손으론 허공에 그림을 그려대었다. 난 손에 들었던 바위 를 집어던지고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바위였다. 산정 상이라 바위가 그렇게 많지 않아. 제기랄! 뭘 집어던지지? 그 때 운차이 는 아래를 보며 씩 웃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니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겠군." 고함 소리만을 남기고 운차이는 벼락처럼 뛰어올랐다. 운차이! 돌았어 요? 운차이는 검을 세워든 자세 그대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카카캉! 첫 번째 충돌. 맨 앞에 오던 전사는 운차이의 검을 여유있게 받아내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얽혀버린 검을 거칠게 옆으로 눕히더니 그대로 무릎을 세워 상대의 낭심을 쳐올렸다. 끔찍해! 상대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허 리를 숙였다. 그 뒤에선 다른 전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운차이는 쓰러지려던 상대의 멱살을 침착하게 잡아 올렸다. "크욱!" 운차이는 사내를 방패로 삼아 뒤에서 오던 공격을 막아내었다. 뒤에서 공격하던 사내의 눈이 커지는 순간, 운차이는 손에 든 사내를 앞으로 밀 어버렸다. 죽은 사내와 살아있는 사내가 엉켜 쓰러졌고 운차이는 옆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질려버린 내 귀에 아프나이델의 고 함이 들려왔다. "후치! 날 믿고 너도 앞으로 뛰어라!" "다음부턴 그냥 뛰라고 말해요옷!" 난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오우, 제기랄! 그런데 아프나이델 을 어디까지 믿어야 되지? 도대체 어떻게 해주겠다는 건지? 전사들은 무 서운 기세로 산등성이를 올라오고 있었다. 저 많은 전사들 앞으로 달려 나가다니, 내가 미친 거야, 아프나이델이 미친 거야? 바람이 볼을 가르 고 땅이 발 아래로 다가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지무지하게 많은 상념 이 떠올랐다. 전사들의 얼굴도, 그리고 초록색의 막에 둘러싸인 채 그들 을 지나쳐 달려가는 전사들을 보며 당황하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얼굴 도 잘 보였다. 털썩. 난 달려오던 전사들 바로 앞쪽의 땅에 섰다. 전사들은 외쳤다. "다졌라사!" "야거 간 로디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런데 이상했다. 전사들은 날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 솔직히 말해 꽤나 겁에 질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 전사들은 내게 시선을 집중시키 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은… 날 못본다! 인비지빌리티로구나! 난 고개를 돌려 아프나이델에게 눈을 찡긋해주려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 고는 대신 손가락을 꺾었다. "좋아, 신사분들! 몹시 아프게 해드리지!" 전사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기겁한 표정을 지었고 난 그 얼굴들을 바라 보며 상당히 우쭐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리곤 곧장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의 다리를 잡아올렸다. 전사들은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는 그들의 동 료를 보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난 들어올린 사내의 항의를 무시하 고 "아아으! 려살람사!" 그대로 그를 옆의 동료들을 향해 던져주었다. "크아악!" 전사들은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며 한 덩어리가 되어 날아가버렸 다. 난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은 전사 중 하나가 미친듯이 검을 휘저어대어서 자칫하면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 후와, 이 자식이! 난 바스타드를 휘두르며 전사들의 무기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크헉! 으아아! 전사들은 비명을 올리며 검을 놓쳤다. 아무리 검을 꽉 쥐고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의 공격으로부터 검을 지키기 는 어렵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다른 전사들이 운차이의 공 격을 힘겹게 받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위에서 카알이 고함질렀다. "네드발군! 운차이씨의 그림자가 되어라!" 상당히 시적인 분부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난 운차이와 검을 부딪히 던 남자의 등 뒤로 다가서서 상대의 다리 뒤를 걷어차버렸다. 남자는 벌 렁 쓰러져버렸고 운차이는 그대로 상대의 턱을 걷어차면서 그 뒤의 남자 를 찔렀다. 나와 운차이가 한 곳에 모이고나자 카알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퓽퓽퓽! "악! 다이살화! 여숙!" 전사들은 기겁하면서 몸을 숙였다. 난 그 광경을 보며 입이 쩍 벌어져 있었으나 운차이는 그 사이에도 쉴새없이 상대를 베어넘겼다. 미치겠다! 저게 사람이야? 눈 앞의 사내, 가슴을 찌르고, 검을 빼는 동작 그대로 옆을 베고, 몸을 숙여 반대쪽 공격을 피한 다음, 허리를 튕겨세우며 상 대의 턱에 박치기, 처절한 비명과 함께 휘청거리는 상대에게 다시 찌르 기. 순식간에 운차이 주변의 사내 세 명이 쓰러졌다. 운차이가 물이 새 듯 스르르 빠져나오고나자 세 구의 시체는 차례로 포개어졌다. 참다못한 난 고함을 질렀다. "운차이! 적당히 해요! 그 정도 실력이면 죽이지 않아도…" 퍽! 턱에서 강렬한 느낌이 오면서 동시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었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정신을 잃은 것일까? 그러나 운차이의 말이 바로 들려온 것을 보아 정신을 잃은 것은 극히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닥쳐.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운차이는 그 말만 남기고 내 옆을 스르르 지나쳤다. 그리고 곧 등 뒤에 서 비명 소리와 살이 찢어지고 베어져나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난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운차이는 내 턱을 치고, 그리고 날 비켜서 빠져나갔다. 날 볼 수 있다 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 의문은 머릿속 한 구석으로 잠시 치워졌다.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운차이는 지금 죽음을 생각하면서 싸우고 있단 말이지? 저 좋은 솜씨에 도 불구하고? 하지만 난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없다. 죽음은 내게 일상 사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헬턴트의 공기 속에서, 모든 죽음은, 별 것 아닌 에피소드. "당신은 죽일 권리가 없어!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어하니까!" 고함이 먼저였는지 몸을 돌린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몸 을 돌렸고, 허공에서 들려오는 내 고함소리에 놀란 전사를 향해 주먹을 날렸으며, 주먹을 날려놓고 보니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정확히 맞추었 을 때, 즉 공격이 목표물에서 정확히 멈추었을 때 파괴력은 최고가 된다 는 헬턴트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의 증언에 따라 복부를 맞은 전사는 그 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의 전사 서넛을 쓰러트리며 날아가버렸 다. 또다른 사내의 머릿카락을 잡아 그 목을 뒤로 홱 젖혀버리면서 상대 의 다리를 걸던 운차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살 권리가 죽일 권리야, 멍청아." "빌어먹도록 잘 알아요! 하지만 그건 내 식이 아니야! 그런 슬픈 방식 은!" 다리가 걸린 남자는 쓰러져버렸고 운차이는 쓰러진 남자를 뛰어넘으며 그 복부에 검을 꽂았다. 남자는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가 뻣뻣해져버렸고 운차이는 또다른 남자를 향해 달려들며 중얼거렸다. "네 식으로 삼으라고 한 적 없어." "좋아, 아주 좋아요! 헬턴트식을 보여드리지. 에라라라라!" 나는 제미니가 죽고나서 싹 잊은 채 마차 위에 앉아있었고, 당신은 제 미니를 깎아주었지. 하하! 그게 당신과 내 차이야. 갑자기 다가드는 사 내. 사내의 검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노려친 것치곤 꽤 무섭게 날아왔 다. 아마 내 발자국이나 인기척을 노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어설펐고, 난 비어버린 사내의 명치를 걷어찼다.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졌다. 운차이, 그거 알아요? 내가 왜 꼭 이렇게 외치는지? "죽어보자!" 내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상대에게도 죽음을 강요할 수가 없어. 헬턴트식이지. 멍청한 헬턴트 자작님께서 다스리는 멍청한 헬턴트 영지의 멍청한 헬턴트 사나이들의 방식이라고. 하지만 당신 말도 맞아. 상대를 죽이는 것은, 난 살겠다는 의미지. 우라질! 왜 그걸 확인시켜주냐고! 이 숨가쁜 싸움터에서! 나 화난 상태 니까 내 앞에서 모두 비켜! ================================================================== DRAGON RAJA 14. 정답이 없는 선택……20.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백발 프리스트의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강한 명령은 시기를 정확 히 잡은 명령이었다. 정말 싸움이 멈췄거든? 비록 무기를 내려놓은 사람 은 아무도 없었지만. 운차이는 자신의 업적들 사이에 선 채로 입가에 튄 피를 핥았다. 그것 은 운차이의 피가 아니다. 사내들은 운차이의 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는 그를 반포위한 채 늘어서있었다. 그러나 사내들은 보이지 않는 나의 존 재 때문에 더욱 무서워하고 있었다. 난 조용히 운차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요." 운차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던 후작이 괴성을 질렀다. "이이잇! 멍청이들, 누구의 명령을 듣는 거냐!" 후작은 그대로 석궁을 들어올렸다. 운차이는 옆으로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정말 빠른걸? 자, 잠깐! 그런데 운차이가 비켜나면 내가 과녁이 된다고! 그런데 다음 순간 괴상한 소음 과 함께 후작이 비명을 질렀다. "우아아앗!" 탱! 후작은 석궁을 떨어트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떨어진석궁 의 활줄은 끊어져있었고 그 위에 걸려있던 콰렐은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 났다. 후작은 끊어진 활줄에 맞은 손을 부여잡은 채 레티의 프리스트들 을 노려보았다. 백발 프리스트였다. 그는 들어올린 오른손을 후작에게 고정시키고 얼굴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옆에 서있던 다른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기겁했다. "레티의 입이여! 무슨 짓을!" 백발 프리스트는 아무 대답없이 후작을 뚫어지게 노려보았고 후작은 이 를 갈며 검을 뽑아들었다. "파괴의 권능 따위에 목숨을 거는 멍청이들! 뭘 부순 거냐!" 무슨 말이지? 백발 프리스트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전사들과 우리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백발 프리스트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어져있었다. 손가락이 있어야할 자리에서는 방금 잘라낸 것처럼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 었다. 전사들은 신음을 흘렸고 운차이는 고개를 약간 가로저었다. 레티 의 프리스트들은 부산하게 짐을 뒤져 약병과 붕대 같은 것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 친절한 사람,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 명해줄 사람 없나? 할슈타일 후작은 눈길로 사람을 죽이는 법의 시범을 보이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는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으로 백발 프리스트를 쏘아보았 다. 검을 쥔 그의 손이 흠칫거리는 것은 너무 잘보였다. 그러나 백발 프 리스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 손 하나를 포기했으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소." 후작의 손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백발 프리 스트의 왼손을 싸매는 동안에도 백발 프리스트는 후작에게 눈길을 고정 시킨 채 조용히 말했다. "간단한 일이오. 당신 뇌를 파괴시키면 되지. 사실 손가락이 아니라 손 톱 하나 정도 희생해서 당신을 죽일 방법도 많았어. 심장에 구멍을 내준 다거나 당신 연수를 없애버리는 방법도 있소. 조금 전엔 너무 급해서 그 렇게 정확한 조작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해." 후작은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난 파괴신의 공포에 두려 워하는 철부지 꼬마가 아니다. 아무리 레티의 프리스트라 해도 보이지도 않는 상대 몸 속의 장기를 파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잘 안다." 백발 프리스트는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당연하지.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그런 믿음을 시험해보겠 소? 난 시도해볼 용의가 있소. 실패해도 난 손톱 하나 잃는 정도니까. 하지만 당신 몸 중의 어느 부분은 파괴될걸. 내가 노린 것이 아니더라도 어느 부분은 사라질 거란 말이야. 당신에게 행운이 충분하다면 손톱이나 맹장 정도가 없어질 수도 있겠지. 당신에게 별다른 행운이 없다면 눈이 나 척추 한 마디 쯤 없어질지도 몰라. 당신에게 악운이 가득하다면 고환 이 없어질지도 모르지. 하하하. 당신의 행운을 시험해볼까?" 백발 프리스트의 차분한 말이 끝났지만 후작은 이를 드러내었을 뿐 대 답하지 않았다. 나 같았어도 고환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시험 같은 것은 받지 않겠… 어흠! 흠. 어, 어쨌든 저 프리스트는 샌슨 말대로 성직자의 어투로는 수준급의 어투를 구사하는군. 백발 프리스트는 혀를 차며 말했 다. "쳇. 그까짓 활줄 하나 파괴하려고 손가락을 날리다니 아깝게 됐군. 어 쨌든 섣부른 짓 하지 마시오, 후작."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에게는 갈림길의 권능이 있었지. 그렇다면 저건 레 티의 프리스트들의 권능인가? 후작은 이를 박박 갈아대었지만 움직이지 는 않았고 그 사이에 백발 프리스트는 빠르게 말했다. "레티의 검들이여. 저 두 무리 사이를 가로막아라. 움직이는 자는 공격 하도록. 그리고, 그 위의 마법사! 내가 안전을 담보할 테니 소년의 모습 을 도로 드러내시오!" 뒤쪽에서 아프나이델의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그러니까 레티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겁니까?" "맹세하지. 지금부터 여기 있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투쟁 행 위는 레티에 대한 도전이며, 그 투쟁을 막지 못하는 것은 레티의 모욕이 오. 됐소?" "예, 수락합니다."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들리고나서 난 곧 몸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내 몸이 드러나는 것이 잘 보였다. 와! 갑자기 부끄럽다! 난 운차이의 옆에 다가섰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주르륵 움직여서 우리 둘과 아직 서 있는 전사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서있지 못하는 전사들은 쓰러진 채 신 음을 흘리거나 일어나려고 비칠거리고 있었다. 운차이는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바로 곁에 있는 나도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 "일행에게까지 물러난다. 후치." 난 고개를 끄덕여보일까 하다가 그냥 물러났다. 후작의 전사들은 움찔 거렸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도 제지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려 세 개나 되는 무리가 모여있었고 분위 기나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도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될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와 운차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후작은 주위의 분위기가 어떠했든 자신이 할 행동은 한다는, 참 으로 경하할만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 멈춰!" "얼마 줄 거야!" 내 재빠른 대답에 후작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미소 를 지었다. "뭐라고?" "나 당신 명령 들을 이유 없어! 명령 듣는 대신 얼마 줄 거야? 저 닭대 가리 전사들보다 낮은 가격으론 안돼!" 기어코 실소해버리는 프리스트도 보였다. 후작은 노기등등한 얼굴로 산 위를 노려보다가 백발 프리스트를 향해 외쳤다. "도대체 어쩔 생각이냐! 네 생각을 말해라.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면 난 내 뜻대로 행동하기 위해 너에게 이렇게 물어야겠다. 죽어서라 도 날 막겠냐고!" 백발 프리스트는 다 싸매고 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해버리고 싶은 생각도 꽤 강하군, 후작." "뭐라고?" "당신이 저 일행을 모조리 죽이면서까지 크라드메서를 손에 넣으면, 그 크림슨 드래곤을 가지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단 말 이오. 후작. 스스로를 구속할 줄 모르는 자에게 보통 사람도 도저히 구 속할 수 없는 힘이 넘어가는 것은 고려해봐야 될 일 아니겠소?" "이 놈! 지금 라자의 가문을 업수이 여기는 것이냐! 너 따위 땡초가 할 슈타일 가문이 드래곤을 다스릴 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바로 그렇소." 할슈타일 후작은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이 일어 나는 동안 운차이와 나는 다시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정상에선 카알과 아프나이델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말했다. "당신 가문은 드래곤을 다룰 줄 아는 라자의 가문이지. 하지만 내 보기 에 당신은 드래곤을 잘 다루지 못해. 캇셀프라임은 상대가 되지 않는 드 래곤에게 보내어져 생사불명이 되었고 지골레이드는 달아나버렸지. 나였 다면 지골레이드를 아무르타트에게 보내고 캇셀프라임은 지골레이드의 빈 자리를 담당하게 했을 것이오." 후작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지금껏 잔뜩 일그러졌던 표정 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레 티의 프리스트들은 여전히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엄격한 얼굴 이 쉴새없이 후작과 백발 프리스트 사이를 오가고 있어 엄격한 분위기를 많이 희석시키고 있었다. 카알은 신음을 뱉었다. "그렇군… 맞았어!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에게 캇셀프라임은 상대가 되기 어렵겠지. 보다 안전하게 하려면, 저 분의 말대로 하는 것이 훨씬 낫겠지." 어어? 이거 참. 자랑스러워해야 되나? '우리 고향 드래곤은 말야, 국왕 의 드래곤 쯤은 아침 식사 전의 운동거리로 잡을 정도거든. 아핫하하!' 으윽. 여기까지 오고보니 아무르타트도 고향 친구처럼 느껴지는군. 말도 안되는 감정인걸. 백발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놀랐소? 성직자의 로브를 걸친 칼잡이의 생각으로 믿어지지 않으시겠 지. 사실 이건 하이 프리스트의 생각이셨소." "그놈잇!" 후작은 잇소리를 내었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며 백발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백발 프리스트는 말했다. "그렇소. 출발하기 전, 하이 프리스트께선 은밀히 날 부르셨소." "뭐라고 지껄였나!" "말씀 조심하시오, 후작.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당신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나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라고 하셨을 뿐이오. 그리고 그 때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주셨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젠 정확하게 알게 되었소." "뭐냐!" "그 분께선 우리들의 여행을 축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돌맨 할 슈타일이 크라드메서와 계약을 맺는 것은 매우 종요한 일이다. 드래곤이 하나도 없는 지금의 바이서스의 상황에선 더욱 그러하다. 여러분들의 여 정에 레티의 축복이 함께하길. 간단하고 단조로와보이는 말씀 아니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분께서 그런 단순한 말 속에 중요한 의미를 담아두 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바로 '지금의 바이서스엔 드래곤이 하나도 없 다.'는 사실 말이오." 따딱! 뭔 소리야? 고개를 돌려보니 아프나이델과 카알의 이마가 벌겋게 바뀌어있었다. 두 사람은 이마를 너무 세게 쳤나 보다. 아차! 그런데 길 시언은? 어디 보자. 지금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전사들을 막아줄 테니 풋내기 칼잡이는 없어도 되겠군. 난 몸을 돌려 우리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일행들은 둥글게 모여서 있었고 그 사이로 들어가자 길시언의 초췌한 모습이 보였다. 길 시언은 바닥에 엎드려있었고 에델린이 그 커다란 손으로 길시언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네리아와 레니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길시언의 치료를 바라보고 있었고 엑셀핸드는 눈살을 크게 찌푸 린 채 주먹을 폈다놨다 했다. 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어떻죠?" "안좋아." 제길!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다른 사람도 아닌 제레인트가 말이야. 샌슨은 바위 같은 얼굴을 한 채 길시언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 다. 에델린은 땀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고 그 손에서는 굉장한 빛이 뿜 어져나오고 있었다. "으음…" 길시언이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우리들 중 가장 날쌘 사람과 두번째로 날쌘 사람이 누군지 드러났다. "좀 어떤가, 길시언!" 엑셀핸드는 길시언 옆에 팍 엎드리더니 그에게 키스라도 할 듯이 얼굴 을 바싹 붙인 채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네리아는 엎드린 엑셀핸드의 등 위에 엎드려서 길시언을 내려다보았다. 길시언은 머리를 부들부들 떨 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리는? 쿨럭, 쿨럭!" 무슨 말이지? 사람들은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레니가 다급하게 외 쳤다. "독수리! 독수리 말이에요?" 뭐, 독수리? 아! 독수리가 어디로 갔지? 일행들은 이제 모두 목을 길게 빼서 하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네리아가 외쳤다. "저기! 저기 돌고 있어!" 네리아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대단히 높은 곳에서 빙글빙글 돌고있 는 검은 점이 보였다. 네리아는 다시 엑셀핸드의 등에 턱을 찔러대며 길 시언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지금 저 위에서 돌고 있어요, 길시언. 독수리는 왕자를 내려다보고 있다고요!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구요!" 길시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런가. 쿨럭! 일어나야… 아샤스에게… 쿨럭!" 난 환한 얼굴로 에델린을 보았다. 그러나 에델린은 무표정하게 손을 들 어올렸다. 그녀가 손을 치우자 드러난 길시언의 등엔 상처가 없었다. 그 저 살결이 약간 푸르스름하게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나은 거 아냐? 에 델린은 말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길시언.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길시언은 두 팔을 끌어당겼다. 놀랍게도 그는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샌슨이 그를 부축해서 길시언은 간신히 일어나 앉아서 에델린을 바라볼 수 있었다. "쿨럭! …이제 괜찮은 거요?" 에델린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한 치료를 다했고 상처는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당장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요양을 취하셔야 됩니다. 계속 여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길시언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생각에 잠겼다. "쿨럭! 크음. 치료가 끝났다면… 요양하는 것 만큼 빨리 회복되진 않겠 지만, 쿨럭!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되겠군요. 그렇잖습니까?" "앞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일 기회가 있을까요." "하긴 그렇군요. 치료하는 손이여. 쿨럭." 에델린은 고개를 돌려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 분을 옮기겠습니다. 이 분의 체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저니까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드워프들의 마을이니 그곳까지 엑 셀핸드님께서 안내해주시면 되겠군요. 여러분들께서는 이대로 나아가십 시오."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뒤쪽엔 기분나쁜 녀석들이 있는걸. 이곳은 산 위라서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아, 이런. 후작의 전사들이 있었지. 우리는 불안한 눈으로 산정상을 올 려다보았다. 이 위치에서는 카알과 아프나이델, 그리고 운차이의 등 외 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백발 프리스트와 후작은 아직도 설전을 나누는 모양이지만 자세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어 떻게 길시언을 빼낸다? 길시언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에델린은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길시언?" "쿨럭, 쿨럭. 어차피 이곳에서…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휴우. 후우 우." 길시언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침착하게 말했다. "이대로 가야겠습니다. 에델린. 쿨럭, 크라드메서와의 일은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 중엔 끝날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되면 후작의 방해 도 없을 테니, 쿨럭! 여러분 모두와 함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법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길시언은 이제 벗어둔 갑옷을 들어올렸다. 샌슨이 황급히 그의 갑옷을 들어 길시언에게 입혀주는 동안 길시언은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니까요. 그리고, 크흠! 어쩐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독수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쓰러질 일 은… 없을 겁니다." 에델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독수리를 보던 에델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샌슨은 길시언의 허리를 안아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길시언은 조용히 샌슨을 밀어내었다. "괜찮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니까. 쿨럭, 크허음. 후치? 후작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어떻게 되었지?" "보시다시피 계속 말싸움 중이죠.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길시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바뀌어있었고 숨소 리에는 물 끓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네리아는 울상이 된 채로 길시언 을 바라보았지만 길시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 다. "좋아. 이대로 출발하지." ================================================================== 14. 정답이 없는 선택……21. "예?" 길시언은 스피어 하나를 다시 지팡이처럼 들었다. "이대로 걸어간다. 어차피 우리 목표는 저쪽이니까. 쿨럭. 후치, 저 위 의 세 명에게 들키지 않도록 빠져나오라고 전해라. 출발합시다, 여러 분." "아, 아니. 길시언…" 에델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시언은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 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샌슨과 제레인트는 당황하여 그를 부축하려 했지 만 길시언은 고집스럽게 자기 발로 걸어갔다. 제길! 등에 콰렐을 맞은 사람이 고집은! 네리아와 레니는 눈가를 닦으며 그 뒤를 따랐고 엑셀핸 드는 끙! 하는 신음을 뱉으며 걸어갔다. 에델린은 나에게 말했다. "위의 세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빠져나오라고 전해요. 하지만 후작이나 프리스트들이 쫓아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그들을 지연시킬 무슨 방법이 없는지를 물어보세요." "알았어요, 그럼." 에델린은 일행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고 난 다시 몸을 돌려 산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에선 카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위 위로 올라서자 카알은 나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됐는가, 네드발군?" "길시언은 요양해야 된대요. 하지만 지금은 몸을 빼낼 수가 없으니 일 을 끝마쳐버리고 쉬겠답니다." "몸을 빼내…? 아, 그렇군. 후작이나 프리스트들이 있었지." "예. 그래서 저 사람들 싸우는 틈에 이대로 크라드메서를 찾아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저 자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요?" 카알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선 여전히 프리스트들 과 전사들이 대치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백발 프리스트와 후작이 험한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헛소리를 계속 들어줄 수 없다. 당장 비켜라!"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하시오! 당신은 분명 바이서스의 전력을 약화시켜 왔고 조금 전엔 길시언 왕자를 이유없이 공격하기까지 했소." "발칙한 놈! 아미앙스 수도원이 언제부터 왕가의 개가 되었단 말이냐!" 백발 프리스트는 숨을 크게 몰아쉬는 것으로 끝내었지만 주위의 다른 프리스트들은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검끝으로 후작을 겨냥하 며 사납게 외쳤다. "주의하시오, 후작! 레티를 모욕한 자로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 소!" "언사를 주의하지 않아서 죽게 된 자들의 인명록에 당신 이름을 올리고 싶은가!" 후작이 울컥하면서 대답하려 했을 때 백발 프리스트가 손을 들어올렸 다. 그러자 흥분해서 날뛰던 프리스트들은 검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무시무시한 얼굴은 전사들을 오그라들게 만들고 있었다. 백발 프리스트 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했다. "그렇소. 우리들은 한 때 당신의 개였지." 프리스트들은 입을 쩍 벌렸다. "레티의 입이여!" "오늘 여러 번 말하게 되는데, 입들 닥쳐랏! 누가 대변인이란 말이더 냐!" 프리스트들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백발 프리스트는 빠르게 말했다. "이 말로써 난 파문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레티 앞에 떳 떳하게 말할 수 있소. 아미앙스 수도원은 후작의 주구였소. 국왕에 대한 범죄자인 돌맨 할슈타일을 사사로이 보호함으로써 국왕과 대립했소. 그 렇소. 난 사사로이라고 말했소. 그것은 레티의 뜻이 아니었으니까." 돌맨 할슈타일은 아직 프리스트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는 점차 험악 해지는 주위의 분위기 속에서 기절하고픈 표정을 지었지만 행동을 취할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발 프리스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당신의 주구로 남지 않겠소." "그래?" "그렇소! 난 레티만을 섬기기 위해 레티의 종단에 귀의한 몸이오. 이것 은 내 원래 위치로의 귀환이오! 난 지금부터 레티의 뜻에 따라서만 행동 할 것이며, 이런 내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설령 신께서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오!" 만인과 신, 그리고 온세계에 대한 백발 프리스트의 선언이 끝나고나자 후작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같잖은 레티의 뜻이라는 것이 뭐지?" "당신을 저지하겠소." "어떻게 그게 레티의 뜻임을 알았지?" "조금 전, 길시언 전하의 머리 위 저 창공에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난 레티에게서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얻었소." 할슈타일 후작은 이를 북북 갈면서 낮게 말했다. "왕가의 후광에 넘어가 어제의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겠단 말이지?" "뭣이!" 젊은 프리스트들은 다시 발작 상태로 들어가려했다. 하지만 백발 프리 스트는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제의 주인이라는 그 말에 반대하지 않겠소. 조금전 말했듯이 분명 아미앙스 수도원은 할슈타일가의 개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빨의 문제라면, 그것은 분명히 그렇소! 난 이제 전하께 존문하고 당신의 처리 방식을 얻겠소. 당신은 레티에 대한 반역자가 아니라 왕가에 대한 반역자이니, 왕가의 의사를 존중하여 당신을 처리해드리지."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은 이제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크에 가까운 모습으 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 한다? 백발 프리스트가 존문해야 할 왕자께서는 이미 꽁무니를 뺀지 오랜데. 백발 프리스트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 존문코자 하오. 할슈타일 후작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카알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하께선… 부상 때문에 지금은 일어나실 수 없소." "이런! 위중하시오?" 카알은 미간을 조금 찡그리더니 빠르게 말했다. "등에 화살을 맞은 것이니 좋다고 볼 순 없소. 그리고 레티의 프리스트 여. 왕자님께 존문할 필요가 있겠소? 그는 바이서스의 왕자를 공격한 자 요." 카알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뻗어 후작을 가리켰다. 후작은 뭐 씹은 얼굴을 한 채 카알을 노려보았고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헬턴트공. 그럼 이제 형제들에게 묻겠다." 백발 프리스트는 다른 프리스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프리스트들은 굳 은 얼굴을 한 채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내 뜻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우리 종단의 수치는, 그것이 수치라는 이유로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분명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레티에게만 그 순결한 몸을 바치고 레티의 적에게만 그 용맹한 검을 겨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잊은 채 후작의 주구 노릇을 행하며 그 의 아들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왕자의 일행에게 참람된 검을 겨냥했 다. 난 이제 그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오 를 시정하려 한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프리스트들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정적이 점점 깊어가고 있을 때 금발머리의 프리스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요? 후작은 하이 프리스트 의 인척이 되십니다. 우리가 신을 받들듯이 하이 프리스트를 공경해야 됨은 당연합니다." 백발 프리스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설령 하이 프리스트 본인이라 하더라도! 삿된 야망으로서 바이서스의 안위를 흔들리게 함은 용서받을 수 없다! 바이서스가 아니라 그 땅에 살 고 있는 신의 선량들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레티의 입이여. 당신 뜻이 제 뜻입니다." 그러자 다른 프리스트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저 사람들 행 동하는 것은 정말 빠르군. 군말이 적은걸.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전사들에게 무장을 버리도록 명령하시오. 우리는 당신을 체포 하여 국왕에게 당신의 신병을 넘기겠소. 국왕께서 길시언 왕자를 공격한 당신의 죄에 대해 처벌하시겠지." 후작은 낮게 대답했다. "다 지껄였느냐?" "뭐라고?" "이제 다 지껄였냐고 물었다." "…다 지껄였다면?"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는 아무에게나 짖어도 크게 흉이 되지 않는다. 원래 천성이 그렇게 되어먹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이 아무에게나 짖어대는 것은 크게 흉이 될 일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백발 프리스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도저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조심해 요!"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지만 너무 늦었다. 운차이가 혀를 차는 소리가 끔찍스럽도록 크게 들려왔다. 카알은 앞으로 달려나갈 듯이 움찔 거렸다. "꼼작말아요,프, 프리스트님." 이런, 제기랄! 어느새 백발 프리스트의 뒤로 다가서있던 돌맨 할슈타일 이었다! 그는 백발 프리스트를 뒤에서 붙잡고는 그 목에 대거를 들이대고 있었 다. 왜 저 자식을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짓도 하지 않던 모습 때문에 저 자식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질 못했어. 젠 장. "너 이 놈!" 프리스트들이 고함을 지르며 돌맨을 겨냥했지만 돌맨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우, 움직이지 말아요! 그어버릴 꺼야!" 이런. 저건 경고도 아닌 발악이야.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돌맨 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백발 프리스트를 붙잡고 있었고 흥분해버린 15세 소년의 손에 대거가 쥐어진 사태를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러나, 물러나라고요!" 돌맨의 패악스러운 고함소리에 프리스트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뒤로 한 두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돌맨은 몸이 부서져라 떨면서 계 속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가, 가까이 오지마!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의 권능, 그 권능 나에겐 못써요! 난 드래곤 라자예요! 드래곤 라자라고! 날 다치게, 다치게 할 순 없어요! 크라드메서가 있어! 크라드메서에겐 라자가 필요해요! 그러 니까 날, 날 다치게 하는 것은, 그런 것은…" "그만. 돌맨." 후작이 조용히 말하지 않았다면 돌맨은 언제까지라도 떠들고 있었을 것 이다. 돌맨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벌벌 떨면서 백발 프리스트를 더욱 거 세게 부여잡았다. 칫! 인질보다 인질범이 더 떨고 있군. 후작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걸어왔지만 프리스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돌맨의 손은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까지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백발 프리 스트는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 걸어오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백 발 프리스트의 바로 앞까지 걸어오더니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다, 돌맨." 그리고 그는 곧장 손을 휘둘렀다. 짝! 메아리가 들려올 지경이다. 백발 프리스트의 뺨은 벌겋게 변했다. "아무에게나 짖어대는 개는 매밖에 얻을 것이 없다. 땡초." 백발 프리스트는 무서운 눈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쏘아보았고 다른 프리 스트들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돌맨을 건드릴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후작은 말했다. "모두들 검을 내려놓아라." 프리스트들은 순간 반항할 듯한 눈으로 후작을 쏘아보았다. 후작이 거 친 표정으로 다시 외치려 할 때 아프나이델은 이를 악물면서 낮게 말했 다.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요? 어쩌지요?" "작별인사 없이 헤어지는 겁니다." "예?" 카알은 그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이제 후작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 지고. 이제 방법은 우리가 먼저 크라드메서에게 가는 것뿐입니다. 속히 움직여야…" "쏴버리시오." 운차이의 낮은 목소리가 카알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카알은 탐탁찮은 얼굴로 운차이를 돌아보았고 운차이는 냉엄한 얼굴로 말했다. "도박이오. 돌맨을 쏴버리시오. 상처입은 길시언을 데리고 우리가 먼저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까." 도박? 도박이라고? 레니를 믿어야 된단 말이지? 그러나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도박은 못합니다. 레니양이 거부당할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레니양과 돌맨은 다쳐서는 안됩니다." 운차이는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카알은 그대로 달려가버렸다. 아 프나이델도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고 운차이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휙휙 뛰어갔다. 내가 몸을 돌리는 순간, 뒤에선 검을 떨어트리는 절그렁거리 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이 없어! 우리 네 명은 그 소 리를 신호로 삼아 죽어라고 달리고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정상에서 내려 왔다. 눈 앞으로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숲이 들어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 려보자 정상으로 머리를 내미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여왔다. "저기 달아난다!" 녀석들의 외침에 뒷통수가 선뜻해졌다. 카알은 계속 달리면서 외쳤다. "네드발군! 나무를! 그리고 아프나이델씨!" 더 이상 말은 필요없었다. "으아아압!" 난 달리면서 그대로 나무를 들 이박았다. "멧돼지가 따로 없어." 운차이의 소감이 낭랑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무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달리면서 중 간중간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며 캐스팅했다. "디그!" 콰과광! 우리 뒤로 흙더미가 폭발하듯이 솟구쳤다. 흙이 파헤쳐지면서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고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은 거창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끼기기기… 타당!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독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캐스팅했다. "디그!" 아프나이델은 계속해서 땅을 파헤쳤고 나 역시 어깨가 부서져라 나무를 쓰러트렸다. 엘프들이 우리 소행을 봤다간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버렸을 거야. 잠시 후 우리가 달려온 뒤쪽으로는 오우거 수십 마리가 야유회를 연 듯한 자취가 길게 남겨지게 되었다. "저, 저 미친 녀석들!" 쫓아오던 전사들은 욕짓거리를 퍼부어대었지만 아프나이델은 멈추지 않 았다. "파이어볼!" 아프나이델이 던진 불의 공은 쓰러진 나뭇더미에 작 렬해서 불의 벽을 형성했다. 화르르르! 불의 벽 너머에서 전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운차이는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 멍청한 마법사 녀석아! 산불을 내다니!" 어라? 운차이가 사실은 엘프였나? 왜 산불에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지? 땀을 닦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눈을 소같이 뜬 채 운차이를 바라보 았다. "아니, 왜…" "지금 바람이 어느 쪽이야!" 바람? 바람이라. 카알과 나,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잠시 불안한 표정을 교환하며 모두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우리들은 손가락을 공중에 세워들었고, 곧이어 서로 비통한 표정을 교환하고나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이, 이런.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을 못하고…" "떠들 시간 있으면 달려요!" "워터볼? 워터볼 같은 건 없냐? 엉터리 마법사야! 파이어볼이 있으면 워터볼도 있어야 될 거 아냐!" "그런 마법은 아직껏 연구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자였던 시절에도 소 방대원으로의 활동기간은 짧았던 터라 이런 상황에서의 대처방법은 터득 하지 못했습니다. 후회가 막심하군요." "정말 후회해야 마땅할 거야." 꽁무니에 불이 붙을 지경인데도 정말 대화는 매끄럽군, 그래. 하필이면 바람은 우리 등 뒤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을 만난 산불은 삽시간 에거세게 타올랐고 불길은 곧장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맙소사, 거짓말 같아! 무슨 산불이 이렇게 빨리 번지는 거야? 아무리 나무를 많 이 쌓아두었다지만! 우리는 숲 사이로 네 마리 사슴처럼 날렵하게 달려 갔다. 그러나 사슴처럼 우아하지는 못했다. "앗뜨뜨뜨거!" 죽어라고 달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목 뒤가 엄청나게 뜨거웠다. 운차이는 숲 속을 나는 매처럼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에서 아프나이델은 로브 자 락을 양손으로 거머쥔 채 해괴망측한 모습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웃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와 카알 역시 양 옆으로 다가오는 불길에 기겁하 면서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눈 앞으로 먼저 가던 우리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일행들의 황당한 표정 사이로 엑셀핸드가 먼저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앗!" "산불입니다!" "그럼 저게 들불이냐?" 우리가 상당한 당황 속에서 이런 몰가치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불길은 게속해서 다가왔다.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고 레니는 발 악하기 시작했다. "어으, 언니이이! 같이 가요!" 샌슨은 날렵한 동작으 로 길시언에게 등을 돌려대었다. "업히십시오!전하의 다리가 되겠습니 다!" 박력은 있지만 어째 어울리지는 않아. 길시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가오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는 격한 기침을 뱉었고 프림 블 레이드가 길게 울었다. 웅웅웅웅! 그 때 에델린이 걸어나왔다. 오, 에델린! 에델브로이의 따님이시여! 우 리는 눈물이 나올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대한 몸은 그대로 에델브로이의 축복처럼 보였다. 우리의 간절한 시선 속에 에델린 은 다가오는 불길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잠시 후 그녀의 늠름한 목소리 가 울려퍼졌다. "컨트롤 웨더(Control weather)!"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구름 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구름은 정말 새떼나 된 것처럼 삽시간에 움직였고 하늘은 컴컴해졌다. 곧이어 천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꽈르르릉! "꺄아아아악!" 네리아의 구성진 비명 소리가 들리고나서 곧이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 다. 비는 후두두둑 과정을 건너뛰고 곧장 쏴아아아 과정으로 넘어갔다. 그야말로 퍼붓는 듯한 소나기가 내렸다. 콰콰콰콰콰! 비는 갈색산맥을 평지로 만들기로 작정한 듯이 쏟아졌다. 불길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 다. "으아아아! 에델브로이에 영광 있으라!" 제레인트는 빗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샌슨은 자기의 망 토를 벗어 길시언에게 덮어주면서 말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그렇게 말하니 좀 이상합니다?" "핫하하하! 테페리께서는 그렇게 째째하지 않으십니다!" 제레인트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통쾌하게 웃더니 곧장 에델린 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이제부터 테페리의 영광을 보여드리죠!" 그리고 제레인트도 곧장 기도에 들어갔다. 우리는 반쯤은 기대하면서, 동시에 반쯤은 불안감을 느끼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날씨를 도 로 맑아지게 만들지는 않겠지? 제레인트는 외쳤다. "어스퀘이크(Earthquake)!" 어, 어, 어어엇!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땅이 진동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시언이 비틀거리자 샌슨은 재빨리 그를 붙잡았 다. 천둥소리에 반쯤 정신이 나가있던 네리아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더 니 땅 위에서 헤엄치기 시작했고 레니는 황당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 았다. 네리아는 비가 너무 쏟아지자 여기가 물속이라고 착각해버린 모양 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은 왜 일으키는 거지? 그러나 곧 나는 제레인 트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쿠- 쿠- 쿠아아앙! 산이 진동했다. 아프나이델이 마구 파헤친 땅에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 고, 거기다가 지진이 더해지자 곧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산이 무너진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22.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산이 쪼개졌다. 비에 젖은 흙이 촛농처럼 스르르 움직였다. 비는 사정없이 흙을 쪼개어 나갔고 흙이 움직임에 따라 산에는 거대한 금이 좍좍 그어지기 시작했 다. 그리고 나무들과 바위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이윽고 그것들은 격렬 한 충돌을 일으키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콰앙쾅쾅쾅! 바위더미와 흙더미가 무서운 힘을 자랑하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사 이사이로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나무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쓸려내려 갔다. 나무 뿌리는 하늘을 향하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은 불티처럼 흩날렸 다. 산 정상과 우리가 있던 숲사이의 능선이 그대로 함몰되며 좌우로 떨 어져나간 것이다. 흙과 나무들이 마구 뒤섞이며 계곡으로 폭포수처럼 쏟 아져내려갔다. 콰르르릉! 계곡에서 귀가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털썩. 엑셀핸드는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런, 저 키에 땅에 앉으면 빗물이 무지하게 입에 튈 텐데. 그는 젖은 수염을 힘없이 쓸어내 리며 말했다. "제레인트… 자네 우리 광산 근처엔 오지 말게나. 암반 사고는 무서운 거야… 아무렴…"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완전히 얼이 빠진 채 빗물이 입에 들어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탑메이지라는 호칭은 제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테 페리의 복음을 전파할 테니 당신이 산을 가르는 탑메이지가 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레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우리들은 제레인트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 빗물이 흘러내려 그의 얼굴은 조각처럼 보였다. 설마? 너무 굉장한 힘을 사용해서 어떻게 된 것은? 에델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레인트의 어깨 를 건드렸다. "제레인트씨?" 에델린은 턱을 한 방 맞을 뻔했다. 제레인트가 느닷없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린 것이다. 에델린은 당황하며 비켜났지만 제레인트는 거 기엔 신경쓰지 않고 얼굴에 빗물을 튕겨가면서 하늘을 향해 외쳤다. "테페리여! 정말 이러실 겁니까! 우핫하하하! 너무너무 좋아서 죽겠다 고요! 난 당신 뜻을 실천하는 것이 몸살나게 좋다고요! 우킬킬킬킬!" 에델린은 가지런한 이빨을 다 드러내놓은 채 당황했다. 쿠르르릉! 어, 혹시 테페리의진노가 아니었을까? 벼락이 사정없이 쳤지만 제레인트는 펄쩍펄쩍 뛰면서 젖은 로브를 흩날리고 있었다. 카알만이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혹시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은 모조리 광신도가 아닐까? 콰광! 으 악! 잘못했어요, 테페리여! "그대를 찬미할 내 입을 열어주소서! 나의 이정표이신 테페리여! 아싸 아싸! 그대의 길잃은 방랑자를 궁휼히 여기사! 마침내 첫별을 하늘에 떠 올리시니! 우랏차차! 신심은 거룩한 흐름으로 회귀하여!" 제레인트는 펄쩍펄쩍 뛰면서 노래를 불러대었다. 난 카알을 돌아보았고 카알은 떨뜨럼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자도 광대를 공경하거늘… 찬송가도 무도곡이 될 수 있겠지…" 꾸르릉! 천둥 소리는 하늘을 찢고, 콰가가각! 지진 소리는 땅을 갈랐 다. 그리고 네리아의 비명 소리는 내 고막을 박살낼 지경이었다. "꺄아아악! 꺄아아악! 꺄아아악!" 네리아는 이제 땅에 누운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고 레니는 기겁 하며 그녀를 일으켜세우려 애쓰고 있었다. 운차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보면서 말했다. "왠 까마귀야." "이렇게 예쁜 까마귀를 봤냐! 꺄아아악!" 운차이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젓더니 레니를 도와 쓰러진 네리아를 험하 게 일으켜세웠다. 네리아는 일으켜세워지자마자 두 팔 두 다리 다 사용 해서 운차이에게 감겨들었다. 운차이는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 으며 외쳤다. "이거 놔!" "꺄아아악!" 스피어에 기댄 것으로 모자라 샌슨의 팔에 안겨있던 길시언이 신음을 흘렸다. "쿨럭! 크르르. 이건… 맙소사. 내가 그덴산에 와있었… 쿨럭!" "핫하하하! 예, 길시언! 저와 에델린,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힘을 합하 면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위업을 꿈꿔보는 것도 헛된 희망은 아닐 것입 니다!" 한 손을 들어올린 채 멋진 스핀을 하고 있던 제레인트가 신나게 외쳤지 만 에델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길시언에게 다가갔다. "이런, 잘못했군요. 비를 내리게 하다니." 아차, 환자! 제레인트는 날뛰던 동작을 멈추고는 다급하게 길시언에게 다가왔다. "아, 이런! 괜찮으십니까?" 샌슨의 것이라 엄청나게 큰 망토를 둘러쓴 길시언은 파랗게 질린 얼굴 이었지만 힘들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 괜, 괜찮습니다. 쿨럭! 어, 어쨌든 저 지경이 되었으니 후작의 졸 개들은… 쫓아오기 힘들겠군요. 다행, 커허험! 쿨럭쿨럭! 다행입니다. 그럼 어서 출발하지요." 그리고 길시언은 망토를 벗어내며 샌슨의 팔을 밀어냈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갑시다, 샌…" 샌? 그거 애칭인가? 그게 아니었다. 길시언은 뒷말을 잊지 못하고 그대 로 무릎을 꿇어버렸다. 철퍼덕. 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기, 길시언 왕자니임!" "이런, 길시언!" 맙소사! 길시언은 무릎을 꿇은 채 헉헉거리더니 곧 숨이 끊어질 듯한 기침을 해대었다. 쿠울럭, 쿨럭 어커허허험! 그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기 시작했다. 땅을 적시는 빗물 위로 핏방울은 불길하게 번져나갔다. 제레 인트와 샌슨이 황급히 그를 일으켜세웠지만 길시언은 다리가 풀려버렸는 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카알은 에델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상이 완치되신 것이 아닙니까?" 에델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샌슨은 길시언을 안았고 제레인트는 급 히 두 손을 모으더니 길시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에서 하얀 빛 이 떠올랐고 길시언의 젖은 옷에서는 하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길시언은 기침을 멈추었지만 샌슨의 품 안에서 맥없이 늘어져있었다. 에델린은 낮게 말했다. "사실 그렇습니다.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폐 안에 혈액이 남아있을 겁니 다. 그래서 기침을 저렇게 하시는 겁니다. 울혈 때문에 폐수종 증세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점점 압박될 겁니다. 그래서 요양을 말했던 것입니다." 에델린의 침착한 설명은 듣고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파랗게 질리게 만들 었다. 하지만 카알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폐수종 때문에 다리가 풀린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에델린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손을 로브 자락 속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콰렐이 들려 있었다. 으응? 길시언을 저격했던 그 콰렐인가? 그런데 콰렐을 보고있던 카알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설마? 그 화살을 보관하고 있으셨다면…" "예. 해독제를 만드는데 쓰려고 보관하고 있었지요." "이런! 독화살이었군요!" 히익? 독이라고? 샌슨은 놀라서 길시언을 놓칠 뻔했다. 네리아를 매달 고 있던 운차이는 눈살을 꿈틀거리더니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는 네리아 를 번쩍 들어 떼어내서 옆에 세워놓으며 말했다. "이제 천둥 안 친다. 벼락도 안 친다. 비만 온다. 알았지?" "아, 아, 알았어. 훌쩍, 비만… 온다. 크응." 네리아는 벌벌 떨었지만 간신히 두 다리로 섰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하 게 좌우를 돌아보았고, 결국 자기 가슴까지나 올까말까한 엑셀핸드에게 답싹 안겼다. 엑셀핸드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운차이는 에델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콰렐 좀 보여주겠습니까." 에델린이 콰렐을 건네자 운차이는 빗물을 피해 조심스럽게 콰렐을 관찰 했다. 그는 콰렐을 코끝에 대고는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리고는 혀를 내밀더니 콰렐 끝을 핥았다. 엑셀핸드를 깔아뭉개고 있던 네리아는 그 광경에 기절하려고들었고 카알은 숨막히는 목소리로 외쳤 다. "운차이씨?" "퇘!" 운차이는 재빨리 침을 뱉더니 얼굴 근육을 경련시켰다. 그는 화살을 다 시 에델린에게 돌려주면서 좀 불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싸구려군. 혀가 얼어붙으려 하는데." "운차이씨, 괜찮은 겁니까?" "교육받을 때 항독 처치도 받았으니까. 난 여러 가지 독에 대해 면역이 오." "아, 예. 그런데 싸구려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운차이는 카알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봐, 길시언. 내 말에 대답해. 시야가 흐려지거나 하지는 않아? 호흡 은 어떤가?" 근심스러운 시선 속에서 길시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올리면서 말했다. "시야는 괜찮아… 호흡은… 가슴이 아픈걸. 쿨럭! 다리에 힘이 안들어 가는 것이… 안타까운데." 웅웅웅웅웅! 프림 블레이드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운차이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가슴 아픈 건 폐를 맞아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 다리가 풀리는 것은 독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마비일 것이다. 네가 맞은 건 싸구려 화 학독이다. 후작이 암살자나 간첩이 아닌 바에야 생물독 같은 건 못 구하 지. 걱정마. 시야도 괜찮다면, 죽지 않아. 그런 독에 숨 넘어가면 가만 두지 않겠어." 어째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협박에 길시언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 운차이는 길시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건강한 몸이니까 어떻게 버틸 거요. 일단 이 비를 어떻게 하지. 에델 린?" 에델린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아, 다시 바꾸는 것은…" 운차이는 시간낭비할 필요없다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알겠소. 메모라이즈 문제겠지. 그럼 옮깁시다. 후치? 네가 길시언을 업고 가운데 서라. 나와 샌슨은 뒤를 경계한다.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으 니 후작 패거리들이 따라붙으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네리아와 엑 셀핸드, 카알이 앞을 맡고. 비가 없는 곳에 가서 길시언을 눕혀놓고 생 각하지." "알았어요." 샌슨이 길시언의 갑옷을 벗기고는 조심스럽게 내 등에 업혀주었다. 길 시언은 맥없이 내 등에 뺨을 붙였다. "수고하는군, 후치. 쿨럭!" "하하!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OPG가 있는데요, 뭘. 아주 가벼워 요. 걱정마세요!" 길시언은 쿨럭거렸을 뿐 대답은 없었다. 정말 내 말이 기운차기를 간절 히 소망한다. 확실히 별로 무겁진 않았지만 체구가 좋은 사람이라 업고 균형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난 기운차게 그를 추슬러올리며 말했다. "자, 출발하지요!"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산비탈은 걸어다니기 곤란했 지만 모두들 망토나 후드 등을 머리에 눌러쓰고 조급하게 걸어갔다. 흙 탕물이 철벅거리는 소리, 거친 호흡소리, 간혹 발이 미끄러지면서 들려 오는 짧은 비명소리. 그리고 길시언의 호흡소리. 싸르르르. 얼굴에 와서 감겨드는 빗방울 소리는 미세한 은가루를 철판 에 떨어트리는듯하다. 그 사이로 들려오는 가냘픈 호흡소리. 시이익, 시이익. 길시언은 젖은 얼굴을 내 목 뒤에 기대고 있었고 그래서 난 그 의 호흡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가냘팠다. 고요한 달밤, 가장 약 한 바람이 가장 가녀린 갈대를 간지럽힌다면 이런 소리가 들려올까. 프림 블레이드의 울음 소리. 웅웅웅웅웅. 길시언이 꿈틀거렸다. "그래… 괜찮아. 이 녀석아. 네 울음 소리는, 쿨럭! 이렇게 오랫 동안 들었는데도 왜 정이 안 드는지. 쿨럭, 쿨럭! 응? 아… 뭐 그렇게까지야. 하하하. 손? 손이 없는 대신 멋진 칼날이 있잖아… 괜찮아. 안 죽어." 길시언이 한 손을 내리는 바람에 균형이 흐트러져 자칫하면 미끄러질 뻔했다. 다시 발을 골라딛으며 빠르게 걸어간다. 옆에선 레니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는 앞쪽에서 부산하게 걷고있던 엑셀핸드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많이 남았어요?" 엑셀핸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며 말했다. "이 속도라면 약 30분 정도." "좋아요." 입술에 부딪히는 빗방울 때문에 숨이 가쁘다. 후우욱. 하지만 쾌활하게 말한다. "길시언! 들었죠? 이제 30분이래요. 30분만 있으면 되요. 불편하지 않 아요?" "업혀가는 중이잖냐. 쿨럭, 나야 편하지. 킥킥킥. 어째 우습다는 생각 이, 어쿠르, 어허허흠!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우스워요? 뭐가요?" "이 나이에… 내 나이 반 쯤 되는 꼬마에게 업혀다니는 것." "하하하!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좋죠. 길시언." "미리 경험해?" 빗물이 눈에 들어갔어. 칫. 눈물이 나오잖아. "예. 길시언이 이 다음에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아들도 얻고…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나면, 그 땐 말이죠. 장성한 손자들이 거동이 불편한 길 시언을 업어주겠지요?" "하, 하, 하하하." ================================================================== 14. 정답이 없는 선택……23. 길시언의 몸이 들썩거렸다. 비에 젖은 그의 몸이 묵직하게 내게 달라붙 었다. "그러니까 미리 경험해보는 거죠." "장성한 손자가… 쿨럭. 날 업어주려면, 도대체 몇 살까지 살으란 말이 냐." "50년만 기다리면 충분할 듯한데요? 어라, 많이 남지도 않았네요?" "그래그래. 하하, 하. 얼마, 클, 크르, 얼마 안 남았구나. 조만간, 조 만간 너 같은 손자 녀석 하나 가질 수 있겠구나." "나 같은 손자? 그렇다면 늙으막에 찾아온 행복인 거죠." 샌슨은 갑자기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이상해? 누누히 강조하지만 내 입은 진실을 단속하는 데 있어 취약하단 말씀이야. 비에 젖은 내 앞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또르르. 발에 부딪 힌 돌멩이가 굴러가다가 고인 물을 튀긴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 때문에 산들의 장엄한 머리들은 비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주위는 온통 회색. 그리고 발 아래로 운무가 널리널리 퍼져있다. 마치 하늘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부턴 내리막길이야. 조심들 하게. 구름이 꽉 끼어있으니 앞 사람 잘 보고 따라오라고." 엑셀핸드가 그렇게 말하며 산허리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희뿌연 안개 속을 걸어갔다. 안개는 산 아래에서 피어올라 주위를 온통 뒤덮었다. 보이지 않던 곳에 서 갑자기 나타나는 검은 나무들, 그리고 미끄러운 풀잎. 바로 앞을 걸 어가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은 명확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앞을 걸어가는 네리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릿카락은 이미 흠뻑 젖어서 빗물 은 머리속으로 스며들지도 않은 채 그냥 흘러내렸고 하얗게 꿈틀거리는 주위의 풍경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꿈속의 인물들처럼 보였다. 에델린의 거대한 체 구는 안개 속에서 더욱 거대하게 모였지만 엑셀핸드의 모습은 더 작아보 였다. 희한하네. "축축, 답답, 찝찝." 네리아의 투덜거림이 이상한 울림과 함께 들려왔다. 안개 속이라서 그 런 건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안개가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들은 넓은 분지의 초입에 들어와있었다. 엑셀핸드의 턱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이 자란 풀들은 겨울이라 노랗게 말라붙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모두 젖어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빛나는 시체…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말이 떠오른다. 머리 위로 내려온 구름 때문에 분지는 한없이 넓어보였다. 좌우론 갈색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들이 있을 것이 뻔하지만 지금 그 봉우리들은 모두 구름 속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아스라하게 먼 곳에 커 텐처럼 늘어선 절벽의 모습이 보였다. 회색의 하늘 아래 거뭇한 환상처 럼 보였다.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았어도 일행의 발걸음이 모두 멈춰졌다. 샌슨이 입 을 열었다. "저기. 저 절벽이야. 동굴이 있다면, 그러니까 커다란 동굴이 있으려면 저기 저 절벽이지. 그리고 충분히 넓은 평지. 좋은 조건이지." "그, 그럼 여기, 이 분지가, 분지가…" 네리아가 더듬거리며 차마 꺼내지 못하던 말을 운차이가 매듭지었다. "크라드메서의 앞마당." 운차이의 말을 끝으로 모두들 일렬로 늘어선 채 눈 앞에 펼쳐진 평야와 거뭇한 절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찌푸린 하늘에선 이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른 풀잎에 빗방울이 튀어 투명한 물가루들이 뽀얗게 튀어오른다. 젖을대로 젖은 머리는 관자 놀이에 달라붙어 미끄러지고 있다. "내려다오." "길시언?" "괜찮으니… 내려다오." "난, 난 괜찮은데요. 무겁지 않아요." "내려." 길시언을 내려놓았다. 샌슨과 제레인트가 그를 부축하려고 다가갔으나 길시언은 손을 들었다. 그는 다시 고집스럽게 스피어를 잡아 짚고는 꼿 꼿하게 섰다. 이마를 타고내리는 빗물이 창백한 그의 입술을 적신다. 길 시언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어커험… 마침내 왔군요." 카알이 그에게 다가갔으나 길시언은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는 아스라 한 절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카알이 그를 불렀다. "길시언." 카알의 부름에 길시언은 퍼뜩 정신을 차리는 표정이었다. 그는 길게 한 숨을 쉬더니 잔기침을 했다. 일행들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길시언 은 가슴을 펴며 말했다. "레니양." "예, 예? 왕자님?" "뭐라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군요. 쿨럭, 큭. 힘든, 힘든 여정이었 을 겁니다." "예? 아… 저, 그런데요. 전, 에, 저로선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제 나 이 정도의 계집애가 이런 대모험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일 거잖아요? 데 려다주시고, 에, 그리고 보호해주신 여러분들이 고마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젠 더 도와줄 수 없습니다." "예?" 레니는 동그란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스피어를 목발처 럼 짚은 채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말했다. "우리들 중 아무도, 클럭, 아무도 라자는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드래곤과 라자의 계, 어흠! 계약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 저도 모르는데요?" "예. 하지만 크라드메서가 알 겁니다. 그러니 방식이나 절차를 모른다 고 거,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쿨럭. 레니양의 마음가짐입니다." "마음가짐…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레니양이 주체라고 생각하십시오. 크라드메서는 사, 쿨럭, 사실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볼일이 없습니다. 크라드메서가 과, 관심있어 할 사람은 오직 레니양뿐입니다." "예…." 대답하는 레니의 눈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길시언은 힘들게 숨을 고 르며 더 말하려 했지만 카알이 재빨리 말했다. "길시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이렇습니다, 레니양. 크라드메서라고 해 도 라자의 계약을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저 지골레이드의 일 을 기억할 테지요?" "예? 아, 예." "지골레이드도, 해츨링을 잃었던 그 슬픔 속에서도 레니양을 존중했습 니다. 인간이라면 그것은 어렵겠지요? 자식이 죽었는데 계약 같은 것을 하고 있을 경황은 없겠지요. 하지만 드래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 절 대로 겁을 먹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요. 크라드메서는 레니양을 존중할 것입니다." 카알의 말이 끝나자 길시언은 파리하게 미소지었다. "아, 내,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대로입니다." 레니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자님." 길시언의 미소가 더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길시언입니다. 레니양." 레니는 갑자기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 다부진 표정이 갑자기 저렇게 바뀌니 그거 귀엽네.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깨문 채 길시언을 올 려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저, 버릇없다고 하지 마세요.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카알이 먼저 끼어들었다. "왜지요, 레니양?" "독수리가…" 레니는 더이상 말을 잊지 못했고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길시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길시언은 하얀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 고, 그에 따라 우리들도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 하늘을 검게 재단하는 독수리가 보였다. 길시언은 깊은 눈길로 독 수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역시…" "예?" "쿨럭, 역시, 난 엉터리 방랑자인 모양입니다. 레니양마저도… 알아보 는군요. 하지만 이 일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쿨럭, 길시언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래. 당신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왕. 우핫하하! 난 너무너무 눈이 정확 해. 일행은 모두 미소를 지었고 길시언은 말했다. "난 길시언으로 여러분을 만났고, 최소한 이 모험의 마지막까지는, 크 험! 여러분의 길시언이고 싶습니다." 카알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길시언의 뜻을 존중하지요. 사실, 그건 제 뜻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는 피식 웃어 버렸고 덕택에 샌슨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은 나 외엔 아무도 못봤 다. 으으윽. 샌슨에게 설명이라도 해줘야겠군. 난 길시언에게 심술돎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길시언?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길시언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화낼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래?" 난 대답 대신 노래를 시작했다. 방에 못질을 하고 떠났던 왕자. 못질은 왜 했지? 왜 했을까? 돌아가야 되는 왕자. 방랑자의 먼지는, 어울리지 않았던 선택. 길시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궁휼한 사람들에 눈시울을 적셨지. 눈물은 왜 흘리지? 왜 흘릴까? 이바지해야 되는 왕자. 버리고 떠나도, 가슴은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바이서스의 적에게 가장 뜨거운 분노. 검날은 곧다. 시리도록 푸르게 꺾일 줄 몰랐던 왕자. 방랑자의 신발엔, 그를 담지 못하네. 창공에서 들려오는 독수리의 소환에 잊혀졌던 모습이 떠오르네. 돌아오라, 돌아오라! 용기로 검을 쥐고 지혜로 방패 들어 왕자여, 돌아오라! 그대 마음 깃든 그 곳으로!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제레 인트는 그냥 웃었다.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쿨럭. 제목이 뭐냐?" "황소와 마법검의 왕자를 위해. 부제로는 '바이서스 왕가 300년의 역사 에서 가장 웃기는 가출을 했던 한 왕자를 그리며.' 정도로 붙일까 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차라리 돌아온 탕아라고 붙이지 그러, 쿨럭! 그러냐." 제레인트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눈을 닦으며 말했다. "하아, 하. 그럼, 그럼 이 일이 끝나시면?" "돌아가서, 크르… 닐시언 전하를 도와볼까 생각합니다." 제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방랑자였을 때 멋있었던 것만큼 궁성에서도 멋있 으실 겁니다." "고맙군요. 그런데 제레인트는 어쩔 생각이신지." "저요? 뭐, 평생 쓸 돈도 있겠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죽을 때까지 유람 이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순간 일행들은 모두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레인트를 곁눈질했고 제 레인트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그는 떨뜨럼한 목소리로 자신 의 말을 정정했다. "유람을 빙자한 포교 생활." 모두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하! 하!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헬턴트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실 거죠?" 카알이 '헬턴트분(어흠!)'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전 이 일이 끝나면 제레인트씨를 따라다녀야겠군요. 마법 수행을 계속하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레인트가 먼저 외쳤다. "좋습니다! 우리, 핸드레이크처럼 300년 쯤 후에 수많은 일화로써 후대 인들을 헷갈리게 만들 팀을 만들어봅시다! '잠에서 깨어난 미친 드래곤 을진정시키며 그들의 첫번째 모험이 시작되었다…' 어떻습니까?" "하하하…" 아프나이델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지만 제레인트는 두번째 모험으로는 발록을 때려잡으러 아비스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내어 아프 나이델로 하여금 제레인트와 팀을 결성하는 데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만 들었다. 샌슨은 고개를 돌려, 항상 그렇듯이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 치에 묵묵히 서있던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야, 괴물 눈알? 넌 어쩔 생각이냐?" 운차이는 콧김을 팅 뿜어내더니 낮게 말했다. "눈 앞의 일이나 끝내고 이야기하지." "녀석은, 정떨어지게시리. 말하는데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미적거리는 거, 이해는 하지만 어 리석다." 일행은 불편한 눈으로 남부의 전사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이마를 타 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정말 더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후작은 입에 거품을 물고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길시언은 빨리 일을 끝내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어서들 움직이지." 엑셀핸드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운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네놈 혀엔 독이 묻어있지만 지금 말은 마음에 드는군. 어서들 움직이 지, 인간 친구들. 아, 트롤 성직자분도." 에델린은 미소를 지었고 길시언은 말했다. "갑시다." 일행은 출발했다. 엑셀핸드를 위해 나와 샌슨이 앞으로 나서서 긴 풀을 밟아 쓰러트리며 길을 내었다. 잠시 와삭거리는 소리와 물방울 튀는 소 리, 풀숲 속에 생겨나있던 물웅덩이에서 들려오는 첨벙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주위에 습기어린 색채를 더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까. "이 일이 끝나면, 너희 북부놈들처럼 연애나 한 번 해볼까…" 갑자기 들려온 운차이의 중얼거림에 카알은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와 샌슨은 풀밭을 뒹굴며 웃었다. "우힛히히힛!" "우켈켈켈켈!" 그런데 왜 운차이가 아니라 네리아가 웃고 있는 우리들을 죽일 듯이 쏘 아보았을까? ================================================================== 14. 정답이 없는 선택……24. "제, 제발 조심햇! 드래곤은 시력이 좋다고!" 샌슨의 고함 소리에 무심코 일어났던 네리아는 기겁하며 웅크리고 앉았 다. "뭐, 뭐가 발 밑에서 꿈틀거렸단 말이야!" 네리아가 가리키는 곳에는 젖은 나뭇가지 하나가 구르고 있었다. 난 고 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젖어서 나뭇가지가 미끄러진 모양이네요. 그런데 드래곤의 청력이 어 떤지는 모르겠지만 샌슨처럼 떠들면 겨울잠 자는 뱀이라도 알아듣겠는 데." "아, 아차! 그래. 모두들 입도 다물자." 샌슨은 자기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앞으로 나섰다.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는 정찰조로 크라드메서의 레어를 찾아보기 위해 일 행보다 앞서서 달려나왔다. 일행들은 길시언과 함께 뒤에서 천천히 걸어 올 것이다. 네리아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씨잉. 아프나이델이 있잖아. 그냥 마법으로 팍! 드래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면 되는 거 아냐?" 샌슨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드를 암살하러 갈 때 마법으로 드래곤 로 드를 찾아내었냐?" "무슨 말이야?" "크라드메서도 드래곤이니까결국 마법사라고 보고, 그렇다면 아프나이 델과 크라드메서 중에서 누가 더 우수한 마법사겠냐? 아무래도 크라드메 서겠지? 그렇다면 실력이 더 떨어지는 마법사가 고위 마법사를 추적하려 고들면 그 추적 자체에서 역탐지를 당할 빌미를 만들게 된다고. 무슨 말 인지 모르겠어?" "와? 샌슨 맞아?" "크아아악!" "땅 속의 뱀, 땅 속의 뱀!" "아, 아차!" 일행들이 우리를 못보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정찰 조'냐? 전쟁놀이 하는 어린애들이라도 우리들보다는 더 군사적으로 훌륭 하겠는걸. 어쨌든 우리들은 다시 손이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히고 는 풀숲 사이를 조용히 헤치며 나아갔다. 잠시라고 말하기엔 길고, 한참이라기엔 짧은 시간이 지나고나서 샌슨은 멈추었다. "절벽이 가까운데." 우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눈만 풀 위로 내민 채 절벽을 바라보았 다. 이제 절벽과의 거리는 약 500 큐빗 정도? 비에 젖은 절벽은 촛점을 맞추어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커멓게 보였다. 네리아는 감탄하는 표정으 로 절벽을 바라보았다. "햐. 이거. 꼭 드래곤 로드가 있던 그 절벽 같다?" 흐음. 그러고보니 정말 대미궁이 있던 영원의 숲의 그 절벽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 아냐. 그것보다는 조금 작다. 하지만 낮은 하늘 때문에 정말 거대하게 보였다. 특히 좌우로 뻗쳐진 절벽의 폭은 한 눈에 다 들 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절벽을 관찰하던 샌슨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 보자. 쳇. 뭐가 보이냐, 후치?" "별로. 온통 시커먼 절벽, 그리고 시커먼 하늘밖엔 안보이는데." 샌슨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쳇… 만일 내 예상이 틀리면,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 다는 결론인데 말이야." 뭐야? 어라. 그거 정말 그렇네. 이젠 최후의 순간이라서 시간이 없으니 과오를 시정할 수도 없는데. 난 코를 쓱 닦고 말했다. "괜찮아. 샌슨의 예상이 맞을 거야. 아직까지 단정하진 말자구." "뭐가 보여야 확신을 가지지. 이건 온통 시커먼 바위 밖엔 안보이는 데."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네리아가 절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온통 까맣잖아. 동굴이 있어도 잘 안보이겠는데. 구름도 심하게 끼어 있고." "더 접근해보자." 샌슨은 다시 허리를 숙인 채 걸어나갔다. 다시 풀이 헤쳐지는 단조로운 소리만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이미 옷은 젖을대로 젖어서 젖은 풀잎이 오히려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다. 네리아는 다시 불평했다. "추워." 샌슨은 멈칫 하더니 다시 나아가며 말했다. "나도 떨리긴 해. 하지만 추위 때문은 아냐." 흐음. 난 추위와 크라드메서 양쪽 때문에 두 배로 추운데. 갑자기 엉뚱 한 생각이 떠오르는데. 크라드메서의 음식물에 대한 매너는 어떨까? 인사는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누구요?" 인사로서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인사다. 목소리 자체도 별 감정이 없이 무색에 가까운 음조였다. 샌슨은 기겁하면서 일어나 칼자루를 움켜 쥐었으나 뽑아들지는 않았다. 나도손을 어깨로 가져갔다가 다시 내려버 렸다. 얼이 빠져있던 우리들을 대신해서 네리아가 말했다. "누구냐고 묻는 당신은 누구죠?" 우리 앞 20 큐빗 정도의 거리에서 바위 위에 앉아있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간단한 하드 레더를 입고 있는 모범적인 전사의 모습이었다. 마 치 긴 여행 도중에 잠시 노변에 앉아 쉬고 있는 듯한 피로한 모습이었 다. 걸치고 있는 옷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흠뻑 젖어있었고 그 수준에 서는 나나 샌슨보다 오히려 더 떨어지는 정도였다. 하드 레더는 어찌나 낡았는지 가죽이 옷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바위에 기대어놓은 거대한 투 핸드 소드가 잠시 눈을 끌었을 뿐 무장도 그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사를 자세히 바라보자 곧 놀라움이 다가왔다. 전사는 샌슨과 거의 비슷한 체격이었다! 4 큐빗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넘 을 듯한 신장. 긴 다리를 마음대로 집어던진 자세로 앉아있었지만 그 다 리라는 것이 네리아의 허리보다는 확실히 굵은 것이었다. 네리아도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감탄했다. "세상에! 하늘 아래 저런 인간이 또 있네?" "무슨 뜻이야?" 샌슨의 질문에 네리아는 현기증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다른 것 을 보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전사의 발치에는 거대한 시체가 누워있었다. 처음에 전사의 막강한 체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전사의 발 치에 있는 그 거대한 체구 때문이었다. 6 큐빗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거 대한 체구가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위의 풀들에는 그 몸에서 튄 듯한 핏방울들이 비에 젖어 기괴한 무늬를 그리면서 흘러내리고 있었 다. 오우거였다. 도대체 뭘로 어떻게 공격하면 저 지경이 되는지 짐작할 수 도 없었다. 오우거의 허리는 처참하게 뜯겨져 나갔는데자상이라고 보기 엔 상처가 너무 거칠다. '투 핸드 소드로 후려치고 다시 그 상처를 모닝 스타 같은 걸로 짓이겨놓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끔찍 한 상상이 지나갔다. 하지만 투 핸드 소드는 있지만 모닝 스타는 없는 데. "내가 먼저 질문했으니까 먼저 대답을 듣고 싶소만." 그런데 그 목소리 정말 신경쓰이네. 뭐라고 특징을 잡아 설명할 수 없 는 희한한 무색의 음색. 네리아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비슷한 사람끼리 대화하라는 듯한 그 시선에 샌슨이 말했다.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만. 그런데… 그 오우거 는 당신 작품입니까?" 남자의 얼굴에 순간 의아한 표정이 지나쳤다. 그는 샌슨의 질문에는 대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크라드메서?" "예." "크라드메서를 만난다고?" "왜? 이상합니까? 어라? 이, 이런!" 샌슨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크라드메서의 앞마당' 이라고 샌슨 이 짐작한 곳에서 태평하게 바위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나 와 네리아는 실망이 가득한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기가 아닌가?" 아이고 맙소사! '여기가 아닌가?' 라고?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해가며 죽을 둥 살 둥 찾아왔는데 '여기가 아닌가?' 라고? 그럼 끝인가? 구름낀 하늘에 별이 보인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일이! 그렇게 오랫동안 걸어와서는 마지막에 엉 뚱한 곳에 도착했다고?" "아아, 실망!" 네리아는 주저앉을 듯한 표정이었다. 샌슨은 얼굴을 마구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아닌데… 여기 아니면 다른 장소는 불가능한데. 드워프들이 웨이크닝 사운드를 들었다는 걸로 봐선 이보다 더 먼 곳일 수가 없단 말이야. 이 상한데." 그 때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왜? 누구처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어 서요?" "어? 당신 크라드메서가 뭔지 압니까?" 샌슨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남자는 어슬픈 미소 같은 걸 지으며 말 했다. "알지. 그런데 당신은 항상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모양이군." "어? 아. 아닌데. 우리는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아요. 잠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저 절벽이 크라드메서가 있는 곳이 맞단 말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드메서가 있었던 곳이지. 당신네들은 정확하게 찾아왔소." 남자의 대답은 우리들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샌슨은 입을 쩍 벌렸 고 네리아의 얼굴은 하얗게 바뀌었다. 설마… '누구처럼 드래곤 슬레이 어가 되고 싶으냐'고? 샌슨이 내가 꺼내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던 질문을 했다. "당신이? 크라드메서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당신이 크라드메서를 죽였습니까?" 남자는 다시 피로해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저 강건한 모습, 피로해보이 는 얼굴. 그리고 크라드메서가 있는 곳에서 태평하게 바위에 앉아 쉬고 있다면? 바닥에 쓰러져있던 오우거의 시체가 다시 한 번 눈길을 사로잡 았다. 정녕코 우리의 모험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가장 웃기는 결말 을 맞이하고 말아버린 것인가? 죽도록 고생해서 도착했더니, 세상에는 모험가들이 많고도 많아서, 그들 중 다른 모험가가 이미 크라드메서를 죽인 후였다. 뭐, 이런? 주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해야 되는 옛날 이야기 에서라면 기가 막혀 나오기 어려운, 하지만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아닌 현실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는…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죽이려고들면 얼마든지 죽일 순 있지만, 그렇게하진 않았소." 이 남자 우리들의 정신을 어떻게 만들어버리려고 작정한 것인가? 죽이 려고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난 남자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크라드메서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요?" "물론. 자네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세상에서 나보다 더 쉽게 크라드메서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아, 아니. 우리들은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건 꿈꾸지 않아요. 우리들 은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요. 당신이 크 라드메서를 죽이지 않았다면, 크라드메서는 지금 어디에 있는거죠?" 남자는 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자의 계약?" "예. 우리는 크라드메서에게 드래곤 라자를 짝지어주기 위해 죽을 고생 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누가 라자인데? 내가 보기에 자네들 중에 라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데?"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우락부락하게 생긴 전사 에 풋내기 전사 (실제정체 : 초장이 후보)에 나이트호크가 하나 있지만 라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겠지. 그 때 샌슨이 오랜 당황에서 깨 어나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크라드메서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윽. 정말 질문 한 번 빠르군. 나와 네리아는 창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 고 남자는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로 서원한 전사인가? 그 대답은 이미 했었고 내 질문은 이번에도 대답을 얻지 못했는데." 그러나 샌슨은 남자의 핀잔에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다. 샌슨은 환호 를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는 얼굴로 외쳤다. "우리와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동행?" 남자는 이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난 샌슨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샌슨이 먼저 내 팔을 붙잡으며 빠르게 말했다. "야, 야. 후치야.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어. 만일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크라드메서는 굉장히 위험하잖아? 그런데 저 전사 는 크라드메서를 죽일 자신이 있다잖아? 그렇다면 게약이 성공하지 못했 을 경우 저 전사가 크라드메서를 죽이면 되잖아?" 난 조금 전 네리아가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샌슨 맞아?" "무슨 뜻이야?" "아, 아니. 그거 정말 말은 되는데. 하지만 저 사람 호언장담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거야?" "어? 어라? 그렇네. 네 말이 맞아!" 샌슨은 고개를 돌리더니 당당하게 외쳤다. "이봐, 당신! 우리가 그 허황된 말을 믿을 것 같은가!" 으으윽. 정말 창피스럽다. 네리아는 나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놔두고 떠나자.' 흐음. 정말 둘만 놔둬도 황당한 대화는 끝없이 잘 이어질 것 같긴 같아.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야. 하지만 난 세상 어느 누구에 대해서라도, 설령 드래곤 로드의 앞이라 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세상에 나보다 더 쉽게 크라드메서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없소." 샌슨은 다시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다, 당신이 크라드메서의, 그러니까 무슨 약점 같은 거라도 알고 있단 말입니까?" 남자의 얼굴에 순간 살벌한 미소가 지나쳤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소?" 그러나 샌슨은 그 살벌한 미소에 전혀 기죽지 않고 외쳤다. "하하! 당신도 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습니다! 이젠 피장파장이지 요?" 으윽. 네리아. 어서 놔두고 가지요. 덩치 큰 사람들은 다 저런가? 남자 는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딱 소리나게 쳤다. "하하하. 이런. 미안하게 됐군. 그래… 난 그의 약점 같은 것은 모르겠 소. 그런데 미안하지만 당신 정체부터 정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당 신네들은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하겠다고 말했는데, 내 식견이 모 자라 그런지 몰라도 당신네들 중에 라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는걸. 그런 데 드래곤 슬레이어는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하고." 샌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아, 라자는 뒤에서 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찰을 위해 먼저 온 것 입니다." 남자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런가? 그럼 좀 더 즐거움을 가져도 상관없겠군." "즐거움?" 남자의 얼굴에 겸연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웃음은 순진했다. 저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가 순진할 수 있다니. 샌슨이 저렇게 웃는 것 을 보면 속이 뒤집히고 말 거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하마트면 폭소 를 터뜨릴 뻔했다. 남자는 발치에 있던 오우거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우리쪽을 바라보 았다. "오랜 습관이오." "오우거를 죽이는 거요?" 샌슨, 제발! 나와 네리아가 샌슨에게서 한 두 발짝씩 멀어지는 것을 보 며 남자는 웃었다. "아니. 대화 말이오. 원래의 나였다면 당신들을 보자마자 죽어벼리는 것이 당연했겠지. 그게 순리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샌슨도 '아, 그러셨군요.' 하는 식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우 리 셋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남자는 바위에 앉은 모습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말했 다. "미묘한 단어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감정, 말할 때 떨리는 눈빛, 상대의 마음 속을 알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담겨 있는. 당 신들처럼 정감있게 말하는 종족은 아무도 없지. 엘프의 대화에선 당신들 같은 불안감이 없어. 물론 지적으로야 가장 즐거운 대화상대이긴 하지 만. 오우거? 욕지기나는 놈들이지. 오크나 드워프 따위는 말할 것도 없 고." 엑셀핸드가 여기 있었다면 배틀 엑스가 날아갔을 거라는 망상을 하는 동안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랫동안 잊었던 즐거움이지… 그가 있을 땐 항상 대화를 나누곤 했었 어." 오랫동안 잊었다고?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일까? 그리고 '그' 라는 것은? 몸이 조금 전부터 무시무시하게 떨리고 있다. 난 침을 삼키 며 눈 앞의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자? 아냐. 이젠 다른 대명사 를 사용해야 되겠지. '그것'은 웃으며 말했다. "라자가 오고 있다면, 당신들이 라자의 동행이라면 내버려둘 수 있으니 다행이군. 괜찮겠다면 라자가 도착할 때까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데." 샌슨도 드디어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는 덜덜 떨면서, 그러나 아직껏 미심쩍음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이 가장 쉽게 크라드메서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살보다 더 쉬운 살해는 없지. 상대가 도망가거나 반항할 일은 없지 않소." 네리아가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크, 크라드메서!" ================================================================== 14. 정답이 없는 선택……25. 크라드메서는 고개만 조금 움직여서 네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샌슨은 이를 악물었다. "저, 정말 크라드메서입니까?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폴리 모프한 거란 말입니까?" 그럼 폴리모프한 거지 뭐야? 샌슨의 저 쓸데없는 질문에 대해 크라드메 서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아, 저… 당신은 수면기에 있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혹시 오래 전에 깨어났던 것입니까?" 최초의 경악이 사라지고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충격을 잊기 위해 일 부러 그런생각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냥 바위 위에 앉 아있는 전사에게 말을 걸듯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사실 눈에 보 이는 모습은 확실히 그렇다. 크라드메서도 드래곤이 인간에게 하는 말이 라기보다는 우연히 만난 여행자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말했다. "일어날 준비는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지. 자네들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네.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 그러 니까 조악하지만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말이 적절하겠군. 그런데 조금 전 에 굉음이 들리면서 산맥이 크게 진동하더군. 그 순간 의식이 완전히 돌 아오면서 또 하나의 생이 펼쳐지더군." 진동? 아! 샌슨의 등 뒤에 숨어있던 네리아가 탄성을 질렀다. 조금 전 제레인트의 활약 때문이었구나. 이런, 크라드메서가 이 일을 알게 되면 혹시 안면방해로 우리들에게 화를 내진 않을까. 크라드메서는 빙긋 웃으 며 자신의 발치에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레어에서 나오는데 이 놈이 내 보금자리로 들어오더군. 아마 내가 수 면기에 접어든 동안 내 레어를 자기 보금자리로 쓰고 있었던 모양이야. 날 알아보지도 못하고 공격하더군. 결국, 이번활동기는 살해와 함께 시 작하게 되었지. 좋지 않은 출발이야." 좋지 않은 출발? 어어, 그거 정말 살벌한 말이다. 대단찮은 내용이지만 크라드메서가 말하니까 살벌하게 들린단 말이야! 샌슨은 턱을 심하게 떨 다가 말했다. "저, 화를 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아직 믿기 어렵습니다." "내가 크라드메서라는 사실 말이오?" "예? 예. 그렇습니다. 당신의 어투도 그렇고… 왜 인간의 모습으로 폴 리모프하신 겁니까?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그래서 그 오우거도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어라? 질문의 예리함이 번뜩이는 빛을 발할 정도인데? 크라드메서의 얼 굴에 일순 희미한 슬픔 같은 것이 지나쳤다. 와! 진짜 인간이라도 저런 그럴듯한 표정은 어려울 텐데? 크라드메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표정 을 지었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한걸. "그건 나의 추억 때문이오." "추억이오?" "별로 설명하고 싶진 않소." 크라드메서여. 당신은 알지 못할 테지요? 당신은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정중하게 대답해도 듣고 있는 우리들은 무시무시한 공포 를 느낀다는 것 말이야. 크라드메서는 질려서 아무 말도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우리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떻게 날 찾아온 것인지? 왕가의 심부름꾼으로는 보 이지 않는데. 아, 먼저 그걸 물어봐야 되는군. 올해가 몇년이오?" "예? 아, 예. 바이서스력으로 315년입니다." "그래? 바이서스력이라면, 바이서스는 아직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말 이군?" "예? 아, 예. 바이서스는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자칫 파괴할 뻔… 으 악! 죄송합니다!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고, 에, 그러니까." 샌슨은 손을 마구 휘저어대었고 네리아는 샌슨의 갑옷 등에 손톱자국이 나도록 할퀴어대었다. 크라드메서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건 사실이었고 내가 한 일이니 부정할 필요는 없소. 그런데 315년이 라… 그렇다면 겨우 21년인가." "예?" "내 수면기 말이오. 흐음. 그럼, 아직도 바이서스가 왕가란 말이군?" "예? 아, 예." 크라드메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 독수리께서 저렇도록 날고 계셨군." 독수리? 아. 크라드메서도 독수리를 보고 있었군. "창공의 제왕께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날아다닌다고 생각했지. 그 분의 가피력이 함께 해야 될 사람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래서 왕 가의 인물,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찾아오고 있을 거라고 판단했 었소. 그런데, 당신네들 중에 누가 왕가의 사람이오?" "아, 왕자님께서는 뒤에서 라자와 함께 오고 계십니다." "그렇소? 왕자라. 왕가에 왕자가 둘 있었지. 길시언과 닐시언이었던가. 길시언은 왕이 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닐시언인가?" "아, 아닙니다. 닐시언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저희들과 함께 계신 분은 길시언 전하입니다." 샌슨의 대답에 크라드메서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길시언이 왕이 되지 않았다고? 이상하군. 궁정 반란이라도 일어난 거 요?" "아뇨.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길시언께서는 왕위에 관심이 없으셔서 궁 성을 나와 야인으로 계시는 겁니다." "그렇소? 그것 참. 똑똑한 왕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왕위를 버리다 니. 젊은 날의 치기인가." 하마트면 그렇습니다! 라고 외칠 뻔했다. 우리의 왕자님께서는 사실 왕 위에 있어야 되는 사람이란 말이야. 어울리지도 않게시리 방랑자 흉내를 내고 있지만. 크라드메서는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길시언은 왕위에 돌아가기 위해 라자를 데리고 날 찾아온 것이오? 내가 닐시언을 왕위에서 쫓아내어주길 바라는 것인가?" "예? 아, 아닙니다. 에… 이걸 어떻게 말해야 될지. 하하하. 그것참." 샌슨은 크게 당혹해서 웃어버렸고 크라드메서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이것 참, 어떻게 말해야 되지? '당신이 미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라자 로써 당신을 묶어두기 위해 왔습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가장 불쾌함이 적은 방식으로 말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될까? 네리아가 불쌍한 우리들을 구원했다. "라, 라자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네리아는 샌슨의 등 뒤에서 그렇게 외쳤고 크라드메서는 어이없는 표정 이 되었다. "이보오, 레이디. 대답은 고맙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말 하지 말고 앞으로 나와서 말해주는 것이 레이디다운 행동이 아니겠소?" 네리아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하고 걸어나왔다. "네, 네리아입니다. 좋은 날씨죠?" 으윽! 굉장한 인사로군. 크라드메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보더 니 곧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아하! 레이디 네리아께서는 흐린 날씨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 네리아의 얼굴은 발개졌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당신들 예법에 어두웠군. 인간처럼 보이지만 내가 인 간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 그러니 내 허물을 용서해주시 오. 난 크라드메서라 하오." "샌슨 퍼시발입니다!" 뺐겼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난 드래곤 하나와 인간 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예의에 어두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후치 네드발입니다." "네리아, 샌슨, 후치라. 그렇게 부르면 되겠지. 반갑소. 그런데 내가 라자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라고? 그건 아마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라 자가 필요한 것은 당신네들 인간이 아니오." 크라드메서는 점잖게 네리아의 거짓말을 질책했고 네리아의 얼굴은 이 제 단풍빛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샌슨이 굉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아아. 저 얼굴은 왠지 불안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전 이것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물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도주 준비! 틀림없이 샌슨은 크라드메서를 화나게 만들 테고, 우리 는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다가, 결국 힘이 빠져 크라드메서의 브레스를 맞아 사망하게 될 테고, 대륙은 만신창이가 될 테고, 그 와중에 대륙의 모든 팬케익은 새카맣게 타버릴 것이고, 양초는 모조리 다 녹아버릴 테 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어떤 질문이오?" "제 동료 중에 견식이 넓은 프리스트가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당신 의 웨이크닝을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크라드메서가 어 떤 드래곤인데 벌써 활동기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나는 것일 것이다." "어머나?" 네리아는 기막힌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여가며 말했다. "전 그 말이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허허? 놀랍다! 제레인트가 했던 말이야. 그래. 델하파로 가던 도중에 그가 했던 말이지. 샌슨. 사람 놀라게 만드는데? 크라드메서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샌슨은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게속 말했 다. "솔직히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당신은 조금 전 당신이 수면 기에 들어간 것은 겨우 21년 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드래곤의 일 반적인 수면기간은 대충 어떻게 되는 건지…?"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대충 활동기의 1/3 정도 되오." "그렇습니까? 그럼 크라드메서께서는 앞으로 얼마나 활동하게 되실지?" "설명하지 않았소? 수면기는 활동기의 1/3 정도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60 여년 정도 되겠지." 샌슨은 당황해버렸다. 크라드메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당신들처럼 수면 기간과 활동 기간이 일정하진 않소. 수면한 것 만 큼 활동한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더 오랫동안 수면했다면 더 오랫동안 활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내 생은 60 여년 정도일 것 같소. 그리고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겠소." 긍정한다고? 샌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겨우 21년이라면 내 나이 정도의 드래곤으로서는 짧은기간이지. 이렇 듯 빠르게 의식이 돌아온 다른 이유는 모르겠소. 조금 전의 괴상한 진동 은 내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고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니 이유가 될 순 없고. 결국 내가 유피넬의 법칙에 따라 라자의 존재를 느낀 것이겠지. 다른 이유는 댈 수 없으니 그 이유를 받아들여야 될 듯하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난 당신들과 함께 있다는 그 드래곤 라자가 유피넬이 정한 내 짝이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겠군. 그 라자는 어떤 사람이오?" 샌슨은 웃으며 말했다. 흐음. 이젠 웃을 기분도 드는데? "16, 7세 가량의 소녀입니다. 이름은 레니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대륙 을 샅샅이 뒤져 간신히 찾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우쭐한 얼굴로 말하면 꼭 진짜 같잖아, 샌슨. 샅샅이 뒤지기는 뭘. 이루릴이 알려줘서 간단히 찾아내었지.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였 다. "하긴. 그러고보니 300 년의 기한이 다 지났군. 요즘은 라자의 혈통이 많이 부족하겠구료?"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금껏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너무 다른데. 이렇게 평화로운 대화라니. 목숨을 걸고 찾아온 셈인데, 이렇게 허허거리며 반 겨주는 드래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단 말이야. 허허거리는 드래곤은 말했다. "인간 여러분들의 심려가 크시겠소." 으윽! 갈수록. 그리고 샌슨도 정말 심려가 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라자의 혈통이 단Ł된 사태 때문에 참으로 불쾌한 사 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라자의 희귀성 때문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 는 괴이쩍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크라드메서는 거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해할 듯하오. 귀한 것은 탐욕을 부르고 탐욕은 재앙을 부르는 법이지. 보석의 희귀성 때문에 드워프와 드래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 리는가 하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소." 아아. 아무르타트도 저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가오는 여행자들을 따 스하게 맞아주고 이렇게 우리들의 일에 신경을 써준다면! 네리아는 이제 불안을 거의 잊은 얼굴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저, 크라드메서님. 저번 라자가 죽은 일에 대해서는, 이제 화를 내시 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이고! 아무리 분위기가 평화스럽다고 해도 그런 질문을 하다니! 샌슨 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난 네리아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온갖눈짓을 다했지만 네리아는 날 보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네리아를 똑바로 바라 보며 말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요, 레이디? 당신의 육친이 죽었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떻겠소?" "어머! 죄송합니다!" 네리아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크라드메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네들은 모르겠지만, 그건 말이오. 육친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오. 라자는, 바로 나요. 라자가 죽는 것은 내가 죽는 것과 마 찬가지요. 드래곤은 죽음에 대해 잘 몰라. 하지만, 하지만 라자가 죽을 때, 드래곤은 죽음을 경험해. 당신네들은 모르지." 크라드메서의 음성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 껴진다. 이 날씨에 땀이라고? 크라드메서는 바위에서 일어났다. 맙소사, 미치겠어! 저 덩치가 일어나는 모습은 무슨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 다. 샌슨이 움직일 때는 그런 느낌은 별로 없었는데? 아아! 크라드메서 의 움직임은, 그 원래 정체의 중량감을 담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똑바 로 일어서더니 팔짱을 끼고 턱을 고였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그래. 절대로 모를 거야. 까뮤는 그러더군. 인간은 죽음을 알기 때문 에 죽음을 잊고 산다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면서 10 년 앞을 내다본다던 가? 그래.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걸 모를 거야. 자기의 한 부분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감각. 파괴되는 자신을 바라보는 감각 말이야. 알 리가 없 지." 네리아는 다시 샌슨의 등 뒤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 양이다. 크라드메서는 우울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상상할 수 있겠소?" 네리아는 그만 굳어버렸다. 크라드메서는 왼손을 허리에 얹고 오른손을 얼굴 앞에 들어 손가락 하나를 펴보엿다. "당신들은 죽기 직전, 단 한 번밖에 느껴볼 수 없는 감각이야. 하지만 난 살아서 느꼈지."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기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불길한 어 떤 사건의 조짐처럼 느껴진다. "당신들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군." 어, 어? 설마 바지를 적신 것은 아니겠지? 기어코 샌슨의 손이 칼자루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말로는 뭐라고 하던가… 끝내준다고 하나? 정말 끝내주는 감 각이야. 하하하." 웃었다! 크라드메서는 웃고 있었다. 샌슨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크라드 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장할 감각은 못돼. 그 사건에 대해선 그만 말했으면 좋겠군." 털썩. 크라드메서는 다시 바위에 앉았다. 비는 그쳤지만 내 몸에선 김 이 풀풀 피어날 정도로 더운 땀이 흐르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심드렁 하게 말했다. "당신 일행들이 퍽 늦는군." "제가 보고 올께요!" 네리아는 고함 소리만 남겨두고는 곧장 달아났다. 다행히도 비명을 지 르지는 않았지만 네리아는 풀을 마구 헤치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달 려갔다. 와사사사삭! 샌슨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크라드메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라드메서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더니 곧 웃기 시작했다. 그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허허허. 이런. 좋아.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 ================================================================== 14. 정답이 없는 선택……26. "예?" "당신 일행을 마중하러 가자는 말이오. 샌슨. 꼭 여기서 기다려야 될 필요는 없지 않겠소?" 크라드메서는 바위에 기대어 둔 투 핸드 소드를 들어올리더니 어깨에 턱 걸쳤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어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샌슨과 나는 동시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고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식으로 일행에게까지 걸어가려면 힘들지 않겠소?" 맞아. 뒤로 걸어갈 수야 없지. 샌슨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맞이해주시겠다니.그럼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샌슨과 난 동시에 몸을 돌렸다. 순간 뒷통수가 선뜩해지면서 무작정 앞 으로 달려가고 싶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욕구가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고 싶다, 정말! 샌슨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럼, 갑니다."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 걷기 시작했다. 음. 거창한 출발이다. 곧 나와 샌슨은 목 뒤의 털을 모조리 곤두세우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여차하면 앞으로 달려갈 듯한 자세로… 볼품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아아아, 이거 정말! 뒤에서 들려오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때문에 머리 끝이 모두 곤두설 것 같군. 분명 평화로왔는데 말이야. 네 리아가 엉뚱한 질문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참 따사로왔는데 이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군. 응? 따사로왔다. 따사로왔다? 이상하군. 언젠가 제미니에게 한 말이 있지. 드래곤 라자가 없는 드래곤은 인간과 아무런 의사를 나누려 하지 않고 보는 족족 죽여버리는 법이라고.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왜 우리를 정겹게 맞아준 것일까? 그건 전혀 드래곤답지 않은 행동인데. 그것은…! 머릿속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듯이 달려가고 싶은 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저히 발걸음을 떼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리에서 힘 이 죽 빠져나가며 마치 쥐가 난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난 절망적인 눈 으로 옆을 걷고 있던 샌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샌슨은 앞만 보면서 걸 어가고 있었다. 이 오우거, 제발! 난 지금 엄청난 것을 알아차렸단 말이 야! 제발 네 눈을 보라고! 하지만 샌슨은 뒤에서 걸어오는 크라드메서 때문에 고개를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알려줘야 되는데, 이건! 크라드메서는 미쳤어! 그래. 크라드메서는 완전히 돌아버린 거야. 21년 동안 잠들었다지만 21 년 전의 광증은 그대로 남아있었어. 그래서, 그래서 인간을 마치 드래곤 처럼 대하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지. 저 완전한 종족이, 불완전한 우리 들과 대화를 즐긴다고? 라자가 없으면 서로 대화도 안되는 것이 우리 두 종족의 관계잖아? 그런데 조금 전 우리들은 라자도 없는 크라드메서와 대화를 나눴어! 그리고 네리아의 질문 때문에 일어났던 그 괴상한 감정 의 변화, 그건 정신질환의 증거야. 오, 맙소사! 우리는 미친 드래곤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거라고! 안돼. 이건 도저히 안돼! 미친 드래곤을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데려 갈 수는 없어. 혹시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해? 멈춰야 돼. 하지만 어떻게? 머리에서 김이 오르는 것 같다. 이루릴, 주전자와 머리의 공통 점이 뭔지 알아요? 몸을 돌리며 바스타드를 뽑고,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크라드메서!" 모든 것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분지 전체가 침묵으로 잦아드는 가운데 내 목소리만이 산울 림이 되어 메아리쳤다. 난 초장이야. 하지만 초장이라도 드래곤 슬레이 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샌슨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은 동료 를 둔 불행한 상황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후, 후치?" 난 바스타드를 크라드메서의 가슴에 겨냥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칼끝이 고정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멈춰서서는 의아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왜 이러는 거지, 후치?" "난, 난 끔찍한 상상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하지만 끔찍한 상상도 때론 도움이 될 때가, 그럴 때가 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상상 을 믿어봐야 될 때가 있어요." "후치! 무슨 횡설수설을 하는 거야앗!" 샌슨은 날 잡아먹을 듯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크라드메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크라드메서는 미쳤어. 나의 이 정신 사나운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니. "무슨 상상을 한 거지, 후치?" "굉장히 끔찍한 상상이죠. 난 당신의 정신이 이상할지도 모른다고 상상 했어요." "불쾌한 말이군. 하지만 끔찍한 상상이라고 말했으니 용서하겠네. 그렇 게 의심하는 이유는?" 침을 삼키려고 아무리 애써도 침이 고이질 않았다. 입안은 바싹바싹 말 라가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비가 멈춘 거야! 지금 심정으로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빗물이라고 받아마시고 싶은데! "일단, 21년 전 당신이 광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파괴행 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어요." "그건 확실해." 크라드메서는 순순히 시인했다. 입안은 말라가는데도 턱 아래로는 땀이 흐른다. "그리고, 두번째로 조금 전 당신과 우리들이 나눈 대화를 지적하겠어 요." "그 대화의 내용 중 특별히 이상한 거라도 있었나?" "아뇨. 대화 자체! 당신은 지금 라자가 없는 드래곤이에요! 그런데 우 리 인간들과 당신이 '대화'를 나누었어요. 이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 요! 단 한 가지, 당신이 미친 거라는 설명 외에는!" "으으읍!" 샌슨은 괴상한 숨소리를 내더니 뒤로 물러나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는 롱소드를 뽑아들고는 내 옆에 섰다. 크라드메서는 우울한 시선으로 샌슨 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날 향해 말했다. "이거 너무 끔찍한 경우다만 어쩔 수가 없군. 네 녀석이 꺼낸 말이니 네 녀석이 끝까지 책임을 져라. 네 주장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든지, 아 니면 틀리다는 거라도 확실하게 증명해. 난 말 같은 거 잘 못하는 거 알 지? 네게 맡기지. 하지만 네가 벅차할 경우엔 내가 도울 것이다." "알았어." 난 크라드메서를 쏘아보며 - 솔직히 너무 힘든 일이었다. 구두장이 믹 더 빅이라면 또 몰라도,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이 드래곤을 쏘아본다 는 것은 바드들의 상상력으로도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장면 아니야? - 말 했다. "자,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한 번 미쳤었고, 그리고 조 금 전에는 정신질환이라는 설명 외에는 설명이 안되는 괴상한 행동도 보 여줬어요. 이제 묻겠어요. 당신은 정상입니까?" 크라드메서는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금 이 순간에는 절대로 그의 얼굴에 떠올라서는 안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 올랐다. 크라드메서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후치. 질문이 잘못됐군. 내가 미쳤다면 미쳤다고 대답하겠나?" "그, 그런가?" 샌슨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샌슨은 발악하듯이 낮게 외쳤 다. (샌슨은 그게 된다. 발악하듯이 낮게 외치는 거. 정말 존경스럽다.) "그런가라고? 야, 이 자식아! 그런가라고?" "조, 좀 기다려봐! 날 믿고! 에, 그렇다면, 크라드메서. 당신 행동을 설명해보겠어요?" 샌슨은 '널 믿을 바엔 낮에 나온 박쥐가 겨울 수박을 파먹는다는 이야 기를 믿겠다!' 등등으로 낮게 외치고 있었지만 나와 크라드메서는 한 마 음 한 뜻으로 샌슨을 무시했다. 크라드메서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미 설명했는데. 오랜 습관이라고." "말이 안되잖아요!" "왜 말이 안되지?" 크라드메서는 전혀 화를 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말을 이 어나갈 분위기는 된다, 이거지? "당신은 드래곤 아닙니까? 드래곤이 왜 우리들같은 불완전한 종족과 대 화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거지요? 당신은 그래도 어느 정도 완전에 가까 운 종족이잖아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크라드메서는 조금 전부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표정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대답만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미쳐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크 라드메서는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내가 자네 들과 대화를 나누면 안된다는 거지? 자네는 프리스트라는 사람을 알 테 지. 프리스트는 신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그런데 드래곤이 인간과 대화를 나누면 안될 까닭은 없을 것 같은데." 어라? 왠지 카알이 말하는 거 같다? 정신 바짝 차리자. "아니, 당신 말은 온당하지 못해요. 프리스트들은 신의 뜻을 펴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죠. 결과적으로 프리스트들은 갓 라자(God raja)인 셈이 지요. 우리 인간들과 신을 이어주는 사람들이니까." 크라드메서는 미소를 지었다. "갓 라자? 그럴 듯한 말이군. 후치." "그렇다면 다시 묻겠어요. 당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나요?" "있을 것 같다." "그럼 해보세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나 후치 네드발,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가 화염의 창,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에게 검을 겨눈 채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윽박지를 수 있었다는 것. 바드들은 다 뭐하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장면을 봐야 될 거 아냐? 크라드메서는 어깨에 걸쳐 두었던 투 핸드 소드를 내리더니 지팡이처럼 땅에 짚었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라드메서는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샌슨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끔찍 하게 크게 들렸다. "했던 대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군. 습관이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주겠어요?"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은 것?" "자네들은 인간이야." 고맙군요, 17년만에 처음 알았어요, 내가 인간이었다니! 등으로 빈정거 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크라드메서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 다. "그리고 난 드래곤이지."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말했다. "어쩔 생각이지?" "예?" "자네가 말한대로 내가 미쳐버렸고, 21년 전처럼 모든 것을 파괴시키길 바란다면, 자넨 어쩔 거지? 자넨 인간이고 난 드래곤이다. 날 죽일 수는 없을 텐데. 죽어서라도 날 막을 텐가? 결국 날 막지는 못할 테고 공연히 죽기밖에 더하겠나. 내가 정상이 아니라면, 어쩌겠다는 말이지?" 고개를 숙여버렸기 때문에 크라드메서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크라드 메서가 정상이 아니라면? 난 크라드메서를 바라본 채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이 살아나면, 제미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다. 바람은 풀을 간지럽혀 기이한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후우우웅. 히이이잉. 이윽고 샌슨은 딱딱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하동문이다." "아니? 샌슨? 제미니에게 관심이 있었어?" "그게 아니란 것 잘 알잖아!" "하하하하!" 꼭 크라드메서 앞에서 이런 수준 미달의 대화를 나눠야 되나? 하지만 이게 헬턴트식이라고. 우린 별로 고상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아. 하지만 죽음을 비웃어줄 순 있지. 킥킥킥. 샌슨과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 둘은 동시에 검을 세워들었다. 크라드메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 기나긴 여정 끝에, 결국 이렇게 둘이 서게 되는군. 레브네인 호수는 아름다웠고, 바이서스 임펠은 화려했지. 델하파의 항구의 바람은 우울했 고, 영원의 숲은 신비로왔다. 대미궁은 외롭고 쓸쓸했지. 그리고, 그리 고 우리 둘은 결국 여기까지와서 이 시대 최고의 드래곤을 겨냥한 채로 서 있게 되는군. 헬턴트 경비대장과 헬턴트 초장이 후보는 동시에 말했 다. "그래도 막겠습니다!" 적막 속에 바람 한 올이 분다. 풀잎의 정수리들을 스치던 바람은 크라드메서의 주위로 다가와 잠시 지 체하는 듯했다. 바람은 크라드메서를 존중하여 조용히 멈추었다. 다시 적막.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왜지?" 샌슨은 빙긋 웃었다. "우리 죽음으로 동료들의 도주 시간은 버니까요." 그래. 어차피 살 수 없다면, 우린 앞을 가로막고 뒤를 생각할 도리밖 에. 언제 어디서나 헬턴트 사나이들의 최후의 방식은 한결 같지. 크라드 메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 생각했소. 당신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군." 무슨 말이지? 그리고 다음 순간 폭풍이 몰아쳤다. 과과과과아! "으아악!" 쩡! 고막이 찢어지는 파열음. 쩡! 쩡! 그리고 눈을 뜰 수 없는 맹렬한 바람이 불어왔다. 벽에 부딪히는 느낌의 바람 때문에 결국 주저앉고 말 았다. 내 엉덩이! 그 와중에도 파열음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쩌엉! 풀 잎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올랐다. 위위위위윙! 폴조각들의 회오리가 피 어올라 산 채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든다. "이런!" 풀잎의 회오리는 상공 수백 큐빗까지 솟아올랐다. 분지 전체가 하늘을 그리며 날아오르려드는 것 같다. 풀잎과 흙들이 기둥을 이루었다. 거세 게 회전하는 회오리 기둥. 그리고 그 회오리의 중심에는 크라드메서가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맙소사!" 크라드메서는 구름 사이에서 머리를 내린 채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하늘에서, 그래. 하늘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보려다가 그대로 뒤로 누울 뻔했다. 타오르는 선홍색의 몸, 그리고 머리 에서 목을 따라 흐르는 검은 색의 복잡한 띠무늬. 그리고 발끝도 검어 석탄처럼 보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작열하며 불타오르는 석탄처럼 보인 다. 이건 언젠가 한 번 당했던 일이지만, 왜 드래곤이라는 친구들은 도 통 익숙해지기 어려운 거지? 사교성이 떨어지는 친구들이야. 풀과 흙덩 이들은 이제 멀리멀리 날아가고 깨끗해진 하늘에서 크라드메서가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지골레이드보다 더 크네?" 샌슨은 간단히 소감을 말했다. 샌슨, 사랑해! 어떻게 아직 주저앉지 않 은 거지? 난 재빨리 일어나앉았다. 그 때 크라드메서가 말했다. "당신들의 죽음으로 동료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이를 너무 깨물어서 잇몸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크라드메서의 목소리 는 일년 동안 몰아칠 폭풍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크라드메서 는 다시 말했다. "이제 내 모습을 똑똑히 보고 말해보게나. 과연 자네들의 그 목숨을 던 진다고, 동료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화려한 자살은 이제 불가능하 오. 좀 덜 화려한 자살이라도 좋은가? 무의미한 자살이라도 좋은가?" "화려한… 자살?" "물론입니다! 벌써 구했어요!" 내 반문을 지워버리며 샌슨이 외쳤다. 샌슨은 롱소드를 위로 휘두르며 외쳤다. "이제 우리 동료들은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럴 테지. 운차이가 아니라도 저 모습은 모두의 눈에 들어올 거야. 샌 슨은 외쳤다. "이제 당신이 우리들을 공격한다면…" 갑자기 샌슨의 말이 안 이어진다. "당신이… 우리를 공격하면… 그 광경은 우리 동료에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동료들이 과연 달아날까? 크라드메서의 공 격은 분명히 그들의 눈에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달아날까? 왠지 그 사람들은 '급히 레니를 데리고 달려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우리 들을 구한다'는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크라드메서는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볼 수 있겠지? 우리 일행 들을 볼 수 있겠지? "내가 당신들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위험을 피해 달아 날 거란 말이오?" 그 대답은 샌슨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풀을 헤치는 소리가 거세게 들려오면서 크라드메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퍼시발구-운! 네드발구-운!" 웃자, 웃어. 어허, 어허허! ================================================================== 14. 정답이 없는 선택……27. "멈추시오!" 카알은 두 팔을 휘저으며 풀숲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다가 그는 풀잎에 발이 걸려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악!" 쿠당탕! 그러나 카알은 앞으로 한 번 구르더니 번개 같은 동작으로 다시 일어나며 외쳤다. "크라드메서! 멈추시오! 라자가 왔소! 아이고, 무릎이야." 카알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릎을 문지르면서도 저 대사를 당당하게 말 했다. 왜 우리 고향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희한한 동작을 잘 하는 거지?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당당하게 말한다는 것은 꽤나 난이도가 높을 거 같은데. 뒤이어 제레인트가 휘익 뛰쳐나왔다. 제레인트는 마치 크라드메서를 막 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린 채 고함을 질렀다. "잠깐! 성급함은 드래곤과 인간 모두 경계해야 될 악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라자가 왔습니다! 기대하시고 고대하시던 라자가 도착 했습니다!" 이, 이 황당한 내 동료들. 그리고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가 보다 품위 있게 천천히 걸어나왔다. 아프나이델은 별 말 없이 두 손을 모아쥔 채 크라드메서를 흘끔 바라보고는 곧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태연한 안색과 달리 그가 입을 열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사했군요. 다, 다행입니다." "왜 안 달아났습니까!" 샌슨의 외침에 엑셀핸드는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우리는 계약을 하러 온 거지, 크라드메서를 구경하고 달 아나려고 온 것은 아닐세." 이윽고 네리아와 운차이가 레니를 가운데 둔 채로 걸어왔다. 네리아는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할 정도였지만 레니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런 데 레니는 우리들보다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서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 았다. 일행들이 놀라서 레니를 바라보는 가운데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드래곤 라자로군." "그렇습니다." 레니의 대답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무서워하던 레니가 왜 저렇게 태평한 거지? 그녀의 표정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 려운 기이한 표정이었다. 그 때 운차이의 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에델린 이 길시언을 부축한 채 걸어나왔다. 크라드메서는 중얼거렸다. "트롤 프리스티스?" 에델린은 다른 손으로 젖은 후드를 천천히 뒤로 넘기고는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크라드메서." "어떤 손길이 그대를 그렇게 이끌었소?" "당신도 짐작하실 분입니다. 트롤을 신의 지팡이로 이바지하게끔 만드 려고 결심하실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핸드레이크로군." "그렇습니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군. 그런데 크라 드메서도 핸드레이크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그는 다시 길시언 에게 말했다. "당신이 길시언 바이서스인가." "쿨럭! 예… 그렇습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고개를 조금 낮추더니 길시언을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길시언은창백한 얼굴이나마 당당하게 마주보려고 애썼다. 크라드 메서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군. 저 독수리는?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온 아샤스의 전령이오?" 뭐야? 일행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길시언은 차분히 대답했 다. "저로선, 쿨럭!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쿨럭." "알았소. 당신들의 목적은 라자의 계약이겠지?" 카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안돼요!" 일행들의 눈길이 각자의 의심을 담은 채 내게 쏟아졌다. 난 고개를 들 어올려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며 외쳤다. "먼저, 먼저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우린 크라드메서와 계약을 맺으러 온 것이지, 미친 드래곤을 우리나라로 끌고 가려고 온 것은 아니에요!" "네, 네드발군?" 카알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난 카알에게 고개를 가로저 은 다음 다시 크라드메서에게 외쳤다. "제가 지금 엄청난 무례를 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 잘 알아요. 하 지만 제 의심이 온당하다고 느껴진다면 절 용서하시고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이건 초장이 후보에지나지않는 17세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 박이야. 하지만 내겐 으뜸패가 있다고. 여기 드디어 드래곤 라자가 도착 했어. 레니가 왔다고. 그렇다면, 크라드메서가 미치지 않았다면 내가 무 례하다는 이유만으로 날 죽이려들지는 않겠지. 그의 라자가 될지도 모르 는 소녀가 내 동료니까. 그리고 만일 그가 정말로 미쳤다면? 어차피 그 럴 경우엔 아무 도리가 없다. 크라드메서는 대답했다. "내 정신은 곧고 올바르다." 샌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샌슨. 물레방앗간 아가씨의 얼 굴을 봐서라도 제발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줘. 미친 사람이 자기가 미쳤 다고 대답하는 거 봤어? "그렇다면 조금 전의 당신 행동은 뭐지요? 어떻게 우리와 '대화'를 나 눈 거지요? 조금 전까지도, 아니, 지금까지도 당신은 라자가 없는 드래 곤인데!" 카알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는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 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드메서는 대답했다. "그렇다. 난 자유로운 드래곤이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느릿하게 말했다. "자유보다는 구속을 더 사랑하게 된 드래곤이다." "예?" "너희들의 구속을 동경하게 된 드래곤이지." 무슨 말이지? 당신이 우리들처럼, 불완전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면서 완전해지는 것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당신은 완전에 가까운 자 아니었나? "나는…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는 독백처럼 말했다. "만물의 관조자로서 남아야 될 자. 행동하는 저울대로 있어야 할 자. 그러나 너희들은 나마저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너희들은 날 변화시켰지. 루트에리노가 행사하는 손길은 시간을 문지방처럼 뛰어넘지." 크라드메서는 하늘을 향해 말했다. "종족의 의미로서 드래곤은 죽었어." "도대체 무슨…" "그만." 크라드메서는 나직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더이상 말을 꺼 낼 수 없었다. 크라드메서는 레니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라자의 운명을 가진 소녀여." "예. 크라드메서님." 돌아본 레니의 모습은 상상을 뛰어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니는 약 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슬픈 듯한 미소였지만 분명 미소다. 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몇 번 죽었다 깨도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못할 거라는 사실 말이야. 레니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우리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 다. 한두 걸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들은 완전히 제외되어버렸 다. 마치 주인 어르신과 손님의 대화에 놀라 황급히 물러나는 하인이 되 는 기분인걸. 이제 분지엔 크라드메서와 레니만이 남겨진 것처럼 보였 다. 크라드메서는 서조리듯이 말했다. "반갑군. 오느라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레니는 고개를 숙이지도,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그대의 숙명과 내 숙명이 여기서 만났으니, 그대는 드래곤 라자가 되 어 나를 저 인간들과 연결지어줄 수 있다. 그대는 정당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혹은 그대와 나 양자의 요구에 의해서 우리의 숙명이 서로 다른 길로 갈려질 때까지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대의 임무 에 대해 이해했다면 그 임무를 받아들이겠는지 말해보라." 레니는 따스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뒷부분의 말에 우리들은 크게 놀랐다. 레니는 흔들림없 이 말했다. "당신은 받아들이겠습니까?" 아아, 그래. 맞아. 상호 동의였었지. 레니, 꽤나 똑똑하네? 카알이 한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 는 대답했다. "받아들이지 않겠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놀랍게도 엑셀핸드였다. "왜! 왜?"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아직도 머릿속이 멍하다. 지금 크라드메서가 뭐라고 말했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요, 크라드메서!"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땅바닥에 주저앉은 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네 리아는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팔을 휘저어대다가 운차이의 다 리를 붙잡고는 거기에 매달려 덜덜 떨었다. 하지만 운차이는 네리아를 내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린 채 크라드메서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참지 못하고 외쳤다. "어째서! 당신은 그랬잖아요. 레니가 어쩌면 유피넬이 정한 당신의 짝 일지도 모른다고…." "유피넬이 정한 것이지 내가 정한 것은 아니다." 크라드메서의 대답은 단조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대답할 말이 없다. 세 상이 유피넬이 정한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 헬카네스가 있으니까.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가 있으니까. 카알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예?" "정말 나를 위대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하오? 나를 존경하는 거요?" "당신은 존경받을만한 위대한 생물이지 않습니까. 심원한 지혜, 그 지 혜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강력한 힘.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갖춘 자입니 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라자를 통해 나에게 도달하려는 것이오, 아니면 라자 를 통해 날 그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오?" "예?" 어, 어라? 이건 생각도 못했던 질문인데? 아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 어. 드래곤 라자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크라드메서 는 말했다.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접촉하게 되면, 분명 변화는 일어나는 법이오. 당신은 인간이니까 그 사실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설마 당 신은 서로가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며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자인 거요?" "아니오.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잘 아는군. 난 더이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소. 더이상 인간과 관계되지 않겠소. 이미 충분히 인간화되었으니까. 조금 전, 저 소년이 지적한대 로, 난 그대들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까지 당신들을 닮아버렸지. 라자가 없이도 말이오. 대화라. 굉장한 일이지. 말해보시오, 인간이여. 저기 있 는 전사는 자이펀인으로 보이는군.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열사의 바람이야."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운차이를 지적했다. 우리들은 당혹해서 운차이와 크라드메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운차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크라드 메서를 올려다보았고 크라드메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펀 전사. 당신은 바이서스 여성과 대화할 수 있소?" "…할 수 있습니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소. 그 옆의 여인, 당신에게 기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난 당신들보다 더 빨리, 훨씬 많은 생각 을 할 수 있거든. 자, 이제 묻겠소. 자이펀 전사여. 당신은 변화하지 않 았소?" 운차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서운 얼굴. 그는 갑자기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네리아는 젖은 눈을 커다 랗게 뜨며 운차이를 올려다보았다. 운차이는 고개를 조금 가로젖고는 다 시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변화했습니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조금 움직이더니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거의 인간처럼 보이는군. 프리스티스여." "그렇습니까? 이 외모에도?" "난 드래곤이오. 외모는 나에게 별로 의미가 없소. 당신 스스로가 대답 해보겠소? 당신의 행동거지는 트롤의 것이오, 아니면 인간의 것이오?" 에델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당신도 변화한 것이군." "아뇨. 전 태어날 때부터 인간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닮게 된 것이죠.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피의 본능은? 프리스티스여. 신이 세상을 만들고 종족을 구분지으실 땐 태어나면서 그 종족임을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드셨지, 자라나면서 종 족성을 띠도록 창조하지는 않으셨소. 당신은 트롤로서 태어났고, 인간 때문에 변화한 존재요." 에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조금 숙였다. 크라드메서는 뒤 로 조금 물러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자 머리는 보이지도 않고 대신 다리와 가슴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루트에리노여…" 크라드메서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대의 행동은 순간이었지만, 그 영향은 3 세기를 넘어서도 계속, 아 니 더욱 커져만 가고 있소." 카알이 앞으로 나서며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다. 크라드메서의 가슴 위 로부터 갑자기 그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돌아가시오." "예?" "돌아가시오. 계약은 거부되었고 난 당신들에게 볼 일이 없소." 카알마저도 더이상 말을 꺼낼 엄두가 안나는 모양이다. 그는 뭐라고 외 칠 듯이 팔을 들어올렸지만 곧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그는 격하게 고개 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최후의 최후에, 크라드메서로부터 거절을 당하다니? 그 질주와 그 모험, 그 역경들은 다 뭐가 되는 거지? 이대로 돌아가야 되는 건가? 크라드메서가 거절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아냐. 뭐, 특별히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어. 우리가 왜 레니를 여기까 지 데리고 왔나. 크라드메서가 다시 한 번 바이서스를 파괴할지도 모른 다는 걱정 때문이잖아. 하지만 지금 크라드메서의 모습에선 그런 걱정은 왠지 잊어버려도 상관이 없을 것 같군. 그렇다면, 비록 우리 노력은 수 포로 돌아갔지만 목적은 달성된 것인가? 그 때였다. "크라드메서님." 레니였다. 어느새 레니는 앞으로 더 걸어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뒤 로 한껏 젖힌 채로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긴 목을 우아하게 휘어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말했다. "어제 저녁, 전 핸드레이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핸드레이크의?" "예. 핸드레이크님은 저기 계시는 에델린을 통해서 제게 말씀을 전하셨 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아가는 것 때문에 제게 조언을 주시려고 하신 거 죠." "어떤 조언이지?" 어? 그 말을 하려고? 그 웃기지도 않는 에델린의 전언을? 아프나이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바뀌었다. 레니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더니 곧 길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레이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가 되는 거, 별로 대단하 게 생각하지 마라. 친구를 하나 사귄다고 생각해. 비록 그 친구가 덩치 가 좀 주체못할 정도로 크고 트림을 잘못하면 불덩어리가 튀어나오는 습 관이 있지만, 친구 사이에 그 정도는 눈감아줘야지." 아아앗! 예상이 틀렸어. 샌슨이 크라드메서를 화나게 만들 줄 알았는 데, 생각지도 못한 레니가 그러다니! 제레인트는 이 와중에도 고개를 돌 리고 킥킥거리기 시작해서 주위의 거센 항의성 눈총의 과녁이 되었다.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크라드메서는 아무 말없이 레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그대로 레 니를 밟아버리는 것은? 내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할 때 레 니는 말을 이어나갔다. "전 그 말씀이 그저 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럼 그게 농담이지 뭐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레니? 레니는 고개 를 조금 가로젓더니 두 손을 위로 조금 들어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크라드메서님. 전 라자가 맞는 모양이에요. 지골레이드를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당신의 감정이 느껴져요. 혹시…" 감정을 느낀다고? 레니가 크라드메서의 감정을 느낀다고? 레니는 말했 다. "외롭지 않으세요?" ================================================================== 14. 정답이 없는 선택……28. 퐁. 길다란 풀잎에 영글었던 빗방울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위는 고요하고 하늘을 받치고 선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를 내려다본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들었다. 퓨우우욱! 휘몰아치는 강품이 다시 온몸을 덥쳤다. 극한 혼란, 일행들 이 내지르는 아비규환 속에서 정신이 나가버리는 혼란을 겪는 동안 폭풍 은 사라졌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크라드메서는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으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도 워낙커서 아직도 레니는 머리를 한껏 든 채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레니는 놀란 눈으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크라드메서님?" 크라드메서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라자여. 폴리모프라는 재주지. 드래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단다."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저, 전 어린 계집애라…" "그리고 내 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 라자지. 그렇잖은가?" 레니는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제레인트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흥분해서 헐떡거리고 있었다.아프나 이델과 엑셀핸드는 거의 같은 크기로 입을 벌리고 있었고 카알은 경탄스 러워하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우리 일행을 주욱 둘러보고는, 다시 레 니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대 앞에서는 내 감정에 대해 거짓말 할 수가 없지. 불공평한 일이지 만, 라자여. 원래 숙명이라는 것은 공평이라든지 불공평이라는 말이 닿 지 않는 영역에 있는 것이지." 레니는 눈만 살짝 들어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았다. "외롭냐고 물었는가?" "예…" "알고 있는 사실, 이미 짐작하는 사실을 묻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대화 방식이지,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대화방식은 아닐세. 라자여." "…그렇네요. 물어볼 필요가 없군요. 당신은 외로우세요." "어느 정도로?" "사무치게." 크라드메서는 미소 띤 얼굴을 조용히 가로저었다. "틀렸어. 레니양. 내 외로움은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기엔 너무 크지만, 드래곤이라는 그릇에는 충분히 담을 수 있는 것이지." "드래곤이시라서, 더 잘 견딘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 레니는 입가로 주먹을 가져갔다. 그녀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 을 내리깔았다. 눈을 내리깐 채로, 레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크라드메서는 별 말 없이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허어, 이것참. 아까부 터 윗분들의 화난 대화를 듣는 아랫사람의 기분이 뭔지 정말 실감하는 데? 레니는 말했다. "거짓말이세요. 당신은 외로움을 느낄 수 없는 드래곤이에요. 드래곤이 라서 더 잘 견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드래곤이라서 더 아프게 느끼시는 거에요. 당신은…" "라자여." "인간을 사랑해요." 크라드메서의 말에도 불구하고 레니는 칼로 자르듯 말했다. 크라드메서 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레니의 말은 크라드메서의 입을 다물게 한 것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멍해진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상념들이 와글거 린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드래곤이? 어떻게? 그들이 보기엔 한없이 어 리석고 가냘픈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을?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레니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와 레니 의 눈 높이가 비슷해졌다. 레니는 얼굴을 붉혔지만 이번엔 고개를 숙이 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니양." "예." "생각해보아요. 레니양. 보다 저급한 것이, 보다 단순한 것이 보다 고 급한 것에, 보다 복잡한 것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 면 필멸자들은 당연히 불멸자를 사랑하는 법 아닐까?" 그것인가?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들은 불멸의 종족. 나 같은 초라한 드래곤이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종족 아닌가." 우리가 불멸의 종족이라고? 당신이 초라한 드래곤이라고? 레니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정신없이 크라드메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까뮤 헬턴트가 타이번과 함께 날 찾아온 날이 바로 어제 같군." 타이번! 헬턴트 사나이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레니를 바라 보고 있던 크라드메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런 결말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지. 레니양. 나 는 자네 인간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예상할 수 없었어. 까뮤와 함께 했던 날들에 대 해 그리워하고 인간들의 모습을 동경하게 될 줄은. 내가 인간을 사랑하 게 될 줄은. 하지만 이젠 똑똑히 이해한다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면서 웃었다. "강물이 바다를 그리며 달리듯, 난 인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지." 크라드메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카알을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었소.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접촉하게 되면, 분명 변화는 일 어나는 법이라고. 바다를 그리워하며 달려간 강물은 결국 바다가 되어버 리지. 그대들은 나에겐 너무 벅찬 존재들이었고, 라자가 찾아옴으로써 난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소. 한 때는 당신들과 관련지어지고도 나 스 스로를 지킬 자신이 있었지. 그래서 까뮤와의 계약을 받아들였었고. 그 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보시오." 크라드메서는 하늘을 향해 말했다. "난 정신적 호메오스타시스를 잃어버렸소." 저런! 그걸 잃어버리다니. 이름이 저렇게 긴 걸 봐서 퍽 중요한 것인가 본데. 그러나 카알은 알아듣는 모양이다. 이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한결 바라보기 편한 크라드메서를 향해, 카알은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 다. "믿기 어렵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생물이십니다." "아니오." 크라드메서는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단정하는 것이나 다 름없었다. "보시오. 이 가증스러운 자기 확인을. 샌슨? 당신은 조금 전에 내게 물 었소. 내가 왜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당 신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 안에서 수음을 해본 적이 있다면 내 행동을 이해할 것이오." 켁! 저런 뻔뻔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다니. 길시언의 기침 소리가 갑자 기 높아졌고 네리아와 레니,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질겁하면서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굴을 붉혔다. 그 와중에도 제레인트와 에델린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에델린은 이해하지만 설 마… 제레인트? 샌슨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 말씀이 좀 고상하면 좋겠군요?" 크라드메서는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네들의 예법이나 윤리에 대해선 이해는 하지만 감정은 느끼기 어려우니 용서하시오. 난 당신들이 마치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 처럼 굴며 공공연히 행동하거나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는 것들에 대해 이 해하기 어렵소." 샌슨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어㎎든 이건… 그렇소. 자위 행위나 마찬가지요. 아무도 없는 이 분지 에서, 난 인간의 모습을 해보며 자기 확인을 해볼 수밖에 없게 되었소. 드래곤으로서의 내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말이오. 당신들이 날 얼마만큼이나 바꿔버렸는지 보시오." 갑자기 난폭한 감정이 느껴진다. 목에서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건 배신감이 로군. 그래. 우습지도 않지만 이건 배신이야. 그만큼의 공포, 그만큼의 역경을 참아내면서 마침내 만난 드래곤이, 그 드래곤이 겨우 이런 드래 곤이었나? 대륙을 박살내는 드래곤의 공포, 만인을 떨게하는 드래곤, 어 떤 이에겐 나라를 배신하고 육친을 도구로 이용해서라도 만나야 할 드래 곤이란 게 겨우 이건가? 할슈타일 후작. 차라리 당신이 불쌍하군. 당신 이 그토록이나 가지고 싶어한 드래곤이 어떤 드래곤인지 보란 말이야. 자기 연민에 빠진 드래곤이라고옷! "그래서요?" 내 입이란 놈은 항상 말썽이야. 크라드메서는 날 돌아보았다. "그래서요? 더이상 인간과는 관련되지 않겠다는 건가요? 우리들이야 어 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고 내팽개친 채, 이 깊은 산 속에서 위대하신 드 래곤답게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는 심원한 성찰과 자기 관조를 계속하며 억겁을 희롱하시겠다는 건가요?" "후치. 자네는 나를 오해하고 있어." "오해라. 훌륭한 관계지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오해가 생기는 법인 데, 드래곤과 인간 사이에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웃기는 일 일 거에요. 그런데 당신의 공포는 뭐죠?" "공포라고?" "뭘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 인간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약한 모습인가 요?" 아버지. 어쩌면 헬턴트 초장이의 대가 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 만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속에 못 담아두는 것은 네드발 가문의 전통 아닌가요? 샌슨이 바람처럼 몸을 날려 내 입을 틀어막을 때까지 난 크라 드메서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샌슨은 뒤에서 날 끌어안으며 외쳤 다. "이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리셨죠? 예! 생각하신대로입니다. 이 녀석이 바로 돌아버린 인간의 대표적 예입니다. 음핫하하하!" "웁! 웁! 이이웁!" "으아악!" 샌슨은 깨물린 손을 절절 흔들다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다리를 높 이 들어올렸다. 난 옆으로 피했고, 샌슨은 허공을 차면서 뒤로 나동그라 지고 말았다. "아이고!" "작작 좀 해! 난 질문했고, 대답을 들어야겠어!" 샌슨은 주저앉은 채 옆의 풀을 거칠게 뜯어 나에게 확 집어던지며 외쳤 다. "이 얼빠진 녀석아! 맘대로 해!" 샌슨이 집어던진 풀조각들은 바람을 타고 떠올랐다. 난 다시 몸을 돌려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분다. 분지 가득한 풀잎이 파도를 쳤다. 사르락거리는 메마른 풀잎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풀잎의 파도 위로 떠다니는 은초록빛 반점 속에서 그와 나는 서로를 똑바로 응시했다. 흐린 하늘 아래 크라드메서 의 얼굴은 하얗게 보였다. 그의 앞머리가 바람에 쓸려 그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크라드메서가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려든다고 느껴지는 순간, 크라드 메서는 말했다. "나의 약한 모습이네." 일행들의 숨소리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더 이상 자네들을 동경할 경우, 난 나의 정체성을 잃고 자네들의 관점 에서 세상을 보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네. 그것은 크림슨 드래 곤의 규칙을 기본부터 파괴하는 일이지." "균형을 지키는 것? 선악의 균형을 지키는 것 말씀입니까?" "그래." "왜죠? 당신은 당신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수많은 드 래곤이 드래곤 라자와 함께 했지만, 전 지금까지 사람을 동경해서 사람 처럼 되어버린 드래곤의 이야기 같은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드래곤 은 항상 드래곤으로 남는…" "자넨 또 나에게 인간의 관점을 강요하는군." "예?" "수많은 드래곤이라고? 고작 300년의 기간 아니었던가? 그건 우리들에 게는 한 계절 정도의 의미밖엔 없다네. 어쩌면 이것이 드래곤이라는 종 족의… 마법의 가을일지도 모르지." 마법의 가을! 너무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머리 끝이 좍 곤두선다. 마법의 가을이라 고? "루트에리노에서부터 닐시언까지의 바이서스 왕가의 역사는, 드래곤들 에게는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작은 일화에 불과하다네. 하지만 그건 마법 의 가을이라고 할 수도 있는, 다른 30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300년 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될 테지." 그래. 그럴 수 있어. 드래곤이니까. 60년 정도를 하루처럼 살아가는 드 래곤이니까. 생각해보면 정말 길지도 않은 세월이었군. 바로 내 옆에 300년 전의 드워프가 있잖아? 그리고 300년 전의 대마법사는 아직껏 살 아서 우리들의 여행에 영향을 주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지. "난 지쳤다네. 후치. 선악의 중심점을 찾는 것만도 내겐 벅차. 인간이 라는 짐까지 떠맡은 채 세상의 중심으로 있을 자신이 없네." 크라드메서의 깊은 눈빛 속에서 드러난 것은, 불굴의 종족이 느껴야했 던 막대한 피로의 증거인가? 인간의 수십 배의 연륜, 수십 배의 지혜, 그리고 수십 배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느껴야했을 수십 배의 고통과 갈 등. "하지만…" "네드발군." 고개를 돌렸다. 카알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하게나." "예? 카알!" "크라드메서님은 원래 세상을 관조하시는 크림슨 드래곤이시지." 카알은 드래곤을 바로 앞에 두고 3인칭으로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재주 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그 행동의 강인함에 있어서는 무적에 가까운 위력을 가지신 분이 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 분의 본래 성품은 아니네. 그 분의 스스로를 다 그치는 모습을 보고 배우게나. 선악의 중심에 자신을 둔다는 것은… 글 쎄. 극한으로 치닫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야. 하지만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양쪽의 극한으로 달려가는 것보다 두 배로 힘든 일이지. 양쪽을 모 두 경계해야 되니까." 크라드메서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고 난 입을 다물었다. 그래. 크라드메 서는 가장 힘든 드래곤일 거야. 레드 드래곤은 자기 욕심대로 살면 그만 이겠지. 골드 드래곤은… 역시 자기 욕심대로이다. 선한 행동을 하고 싶 은 욕심. "저 분은 사랑하시는 인간의 곁을 떠나서까지 자신의 중도를 지키려고 하신다네. 난 그 중도성에 대해선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려고 애쓰시는 저 분의 모습에는 찬성하겠네." "쿠, 쿨럭, 카알…" 이번엔 길시언이 카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 다. "길시언. 당신의 마음은 압니다. 당신은 지골레이드의 실종으로 약해진 바이서스의 국방력을 위해 저 분의 도움을 원하시겠지요. 하지만 내 생 각을 말하라면, 저 분의 뜻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카알은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깊은 눈으로 카알을 마 주보았다. "크라드메서님. 저 소년이 말했듯이, 우리는 당신이 혹시 과거의 그 때 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혼란을 겪으시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당신을 찾 아온 것입니다." "그렇소?" "예. 그래서 당신이 바이서스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드래곤 라자의 계약을 맺어 당신을 설득해보려고 찾아온 것입 니다. 하지만 전 이제 당신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29. 카알의 말에 엑셀핸드까지도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크라드메서는 말했 다. "약속드리겠소. 난 21년 전과 같은 광증으로 바이서스를 파멸하려들지 는 않겠소. 오히려 여기 있는 길시언에게 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오. 사과를 받아주겠소?" 길시언은 이를 악문 채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사과를 받아주는 대신 라자의 계약을 맺자!' 고 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나의 왕께서는 조용히 말했다. "사과하실, 쿨럭. 필요없습니다. 까뮤는, 까뮤는 인간의 일 때문에 죽 었습니다. 오, 쿨럭! 오히려 인간으로서 제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 카알은 만족한 얼굴로 두 손을 조금 벌리며 말했다. "라자의 계약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들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크라드메서님." "먼 길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 때 제레인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뒷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어, 크라드메서님. 저 말입니다. 옛이야기에서 선량한 모험가들이 위 대한 드래곤을 만나면 대개귀한 선물이나 뭐 축복 같은 거라도 받지 않 습니까?" 으으윽! 이런 개망신이! 제레인트, 그렇게까지? 당신 대미궁에서 보물 많이 챙겼잖아? 크라드메서마저도 좀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제레인트 를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당황하여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제레인트는 웃 으며 말했다. "하하하! 전 오늘에서야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크라드메서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축복하 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샌슨과 아프나이델, 그리고 난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크라드메서는너 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 생각엔 말이오. 인간은 특별한 축복이 없어도 될만큼 훌륭 한 생물이오. 왜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가 모두 그대들을 바라보겠소?" "바로 그걸 확인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델린이 말했다.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여. 중도를 지키시는 그 노고를 어떻게 위로해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감사하오. 어려운 수행의 길, 트롤의 발걸음으로 더욱 어려울 듯하지 만 에델브로이가 항상 그대를 이끌어주길 바라오." 에델린은 환히웃었다. 음. 이제 에델린의 저 웃는 표정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샌슨은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 서쪽으로 한 번 여행오시겠습니까? 저희 고향 마을에는 말입니다. 아무르타트라는 아주 고약한 블랙 드래곤이 살거든요? 그 놈은 정말 세 상의 선악의 균형을 깨도 이만저만 깨는 녀석이 아니라서…" "퍼, 퍼시발군!" 카알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크라드메서는 허허 웃었다. "여보시오, 샌슨. 미안하지만 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동족의 영역 권을 존중해주고 싶소. 그리고 선악의 기준은 내게도 따로 있소만." "아, 아차!" 드래곤의 악덕에 대해 드래곤에게 고자질하려고 들던 샌슨은 황급히 입 을 틀어막았다. 엑셀핸드는 빙긋 웃으면서 샌슨의 허리를 툭 쳤다. 그리 고는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했다. "큼, 크험. 크라드메서여. 난 드워프의 노커로 엑셀핸드 아인델프라 하 오. 우리에겐 특별한 문제가 있거든." "말씀해보시오. 노커여." "갈색산맥에는 드워프들의 터전이 있단 말이오. 당신께서 이제 활동기 에 들어섰으니, 다시 하늘을 날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보석을 잡수셔야 되지 않소? 그래서 여기 인간들과는 또다른 특별한 걱정이 있단 말이오. 당신이 여기서 살겠다면, 어, 서로 화목을 다지는 차원에서 우리들이 보 석을 선물할 용의는 있소. 물론 당신이 우리를 공격하여 빼앗으면 더 쉽 게, 더 많이 얻으실 수 있울 거라는 점은 인정하겠지만…"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의 걱정은 이해하지만 잘못 알았소. 엑셀핸드. 하늘을 날기 위해 보석을 먹진 않소." "뭐라고?" "나도 보석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무거운 보석을 먹고 하늘을 날 순 없 소. 당신이 굳이 선물하고 싶다면, 당신들에겐 그다지 가치 없는 광석인 황화철, 황화동 정도를 선물해주면 좋겠군." "황화철? 아니… 황산이라도 만드시게?" 그 때 아프나이델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는 자기 행동에 스스로 놀 라더니 급히 허리를 굽히며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알 듯합니다.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황산을 이용해서 수소를 만 드시는 겁니다. 묽은 황산과 금속과의 반응에서 수소 채집이 가능할 겁 니다. 그걸로 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체중을 줄이시는 것이겠지요." 엑셀핸드는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못알아들은 거겠지. 하하하. "그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선물할 수 있소." "고맙군요. 나 또한 이웃의 예의를 잘 지키도록 노력하겠소."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엑셀핸드는 잠시 당황하더니 곧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는 크라드메서의 손을 마주잡았다. 물론 엑셀핸드는 품위있게 발돋움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점이 다시 확인되었다. 카알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볼까요?" 일행은 모두 크라드메서를 향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주욱 늘어섰다. 흐음.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잘 움직이네. 하하하. 그런데 그 때 한 사람만이 일행과 다른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레니였다. 레니는 안절부절하는 얼굴로 크라드메서와 일행을 번갈아 쳐 다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카알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양?" "저, 저 카알 아저씨? 이제 돌아가는 거에요? 이대로?" "그렇습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아뇨… 잘못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저도 물론 돌아가고 싶어요. 아 빠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왠지 이렇게 돌아가면 안되 는 거 같아서…" 카알은 의아한 표정만 지을 뿐아무 말없이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그는 고개를 돌려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일이라면 드래 곤 라자가 잘 알겠지. 그렇다면 거꾸로 드래곤 라자의 일은 드래곤이 가 장 잘 알겠지? 크라드메서는 다시 레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레니를 올려다보았 다. 레니는 눈을 내리깔고는 손톱만 깨물면서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피했 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레니양." "크, 크라드메서님!" 레니는 고개를 들어 갑자기 외치더니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크라드메 서는 참을성있게 레니의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레니는 띄엄띄엄 말을 시작했다. "당신을 이렇게 혼자, 혼자 내버려두고 가면… 어, 저, 말이 안되는 거 같지만, 꼭…" "꼭?" "어린애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 같은…" 레니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발갛게 된 볼을 거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운차이는 신음을 흘렸고 어느새 운차이의 팔을 껴안고 있던 네 리아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크라드메서는 그러나 화를 내지 않았다. "레니양. 선량한 마음 고맙게 생각하겠네. 하지만 레니양이 느끼는 나 의 외로움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난 이렇게 보여도 레니양의 나이보다 수십 배나 더 살아온 드래곤이지." "제, 제가… 무례한가요?" "아니. 레니양이 드래곤 라자라는 것, 그리고 선량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니까 무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오히려 고맙다고 느끼지. 원 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게." "예?" "드래곤 라자와 드래곤이 만남일세, 이것은. 비록 계약은 성립되지 않 았지만, 특별한 인간, 세상에서 드래곤을 이해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인간을 만난 기념으로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군. 원하는 것이 있 는가?" 레니는 눈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원하는 거? 그런 건 없어요. 전 당신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서 생 각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크라드메서는 따스하게 웃더니 천천히 두 팔을 펼쳤다. 레니의 눈이 한 없이 투명해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툭. 레니의 하얀 볼 위로 눈물이 또르르 굴렀다. 기어코 레니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크라드메서에게 달려 들었다. "크라드메서님! 와아아앙!" 크라드메서는 거대한 팔을 부드럽게 움직여 레니를 안았다. 레니는 크 라드메서의 목을 껴안은 채 목놓아 울었다. "안돼, 안돼! 너무, 너무 슬퍼요. 어흑! 그렇게 슬픈 건 싫어요! 크라 드메서님은 그렇게 슬퍼하면 안돼요! 크라드메서님 같은 고귀하시고 위 대한 분이, 그렇게 선량하시고 마음이 넓으신 분이! 불공평해요, 이건 불공평하다고요! 와아앙! 선악을 지킨다고, 그것 때문에 크라드메서님이 왜 이렇게 외로워해야 돼요! 그런다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잖아요!" "레니양, 레니양." 크라드메서는 별 말 없이 단조롭게 레니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불렀다. 레니는 숨이 막히도록 울었고 크라드메서는 그녀를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츰, 레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레니양." "크라드메서님. 전, 전 당신의 라자가 되고…" 벼락이 친 것인가, 아니면 길시언의 눈에서 빛이 번득인 것인가? 판단 을 내리기 어려웠다. 레니는 숨이 막혀 꺽꺽거리느라 말을 제대로 못 이 었다.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두 팔로 레니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크흐흑!" 그의 입에서 폐부를 쓺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니는 아무 말도 하 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숙인 채 부르르 떨었 다. 잠시 후, 조금 안정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제발 그만해. 라자여" "크라드메서님?" "난 거부의 뜻을 밝혔다. 라자여. 제발 이 이상 날 유혹하지 마라." 크라드메서의 목소리는 미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레니는 눈물로 범 벅이 된 얼굴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레니는 다시 앙탈을 부리며 크라드메서에게 안기려고 들었지 만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는 크라드메서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인 그에게서 상당히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가 이래서는 안돼. 우리는 상호동의하는 관계야. 저 엘프들처럼 한없이 자신을 바꿔가며 조화를 이루지도, 혹은 인간처럼 한없이 타인을 바꿔가며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라자여, 눈물을 멈춰라." 레니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머리가 마구 나풀거렸다. "이대로 당신을 두고가면 전 일생 동안 후회할 거예요!" 레니의 외침소리는 처절했다. 저게 겨우 열대여섯 되는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크라드메서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혼잣말하듯 이 말했다. "그래. 드래곤 라자라 해도 결국 인간이지. 하하하. 이 어린 소녀마저 도 위대한 드래곤에게 자신을 투영하려고 드는군. 저열한 욕망이 아닌, 순수한 애정과 궁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는 유혹. 그래. 라자여. 당신 은 드래곤이 불쌍해서, 돌보아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다는 것이지? 그런 데 이 유혹 아닌 유혹보다 더 웃기는 것은 뭔지 알아? 내가 그것을 받아 들이고 싶다는 거지." 크라드메서의 어깨가 한 번 거칠게 진저리쳤다. 갑자기 한없이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인간들을… 모조리…" 크라드메서는 말을 끝맺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 다. 형체를 가지고 피부를 찢어 뼈를 긁어내는 듯한 공포 때문에 주위의 아무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레니의 몸부림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크라드메서의 두 팔에 붙잡힌 채 레니는 꺽꺽거리는 숨소리만 내면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일어났다. 그는 레니의 어깨를 놓으면서 일어났다. 그 간단한 동작이 왜 저렇게 무서워 보이는가? 그는 화산이 폭발하는 기세로 일어났다. 그의 옷자락 전체가 아우성을 쳤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가라!" 모든 사람들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엑셀핸드는 뒤로 걷다가 아프나 이델에게 부딪혀 함께 나뒹굴기까지 했다. 네리아는 기어코 기절해버렸 고 운차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랫턱을 떨고 있었다. 크라드메서의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그 이름대로 선홍색의 빛이 뿜어져나왔다. "가라! 이것은 조화의 적 헬카네스께서도 거부할 수 없는 크림슨 드래 곤의 명령이다. 물러가라!" 하늘이 갈라지며 신이 얼굴을 내밀고 명령한다 해도 지금처럼 살 떨리 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뼈라는 뼈들은 모조리 덜그럭거렸고 그대로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은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아돈다. 선과 악 의 균형을 지키는 크림슨 드래곤의 명령이 떨어졌다. 보이지도 느껴지지 도 않는 바람이 우리들을 뒤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레, 레, 레니야앙!" 카알은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거렸다. 레니는? 오, 맙소사! 저 항구의 소녀는 온몸을 떨면서 크라드메서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었 다. 앞뒤로 휘청거리는 몸은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레니는 온 얼굴을 찡그린 채 크라드메서의 명 령에 저항하고 있었다. 레니를 데려와야… 세상에! 앞으로 한 걸음 내딛 는 것이 이토록이나 어려운 동작이었나? 이 멍청한 다리야, 먹여준 밥값 은 해라! 겨우 다리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발걸음을 떼고 나자 무의식 중에 나머지 동작들이 완성되었다. 난 레니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아올렸다. 레니는 크라드메서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소진해버렸는지 내 팔에 안기자마자 까무라쳐버렸다. 난 그녀를 안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일행들도 내가 레니를 안아들자마자 그대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제레인트의 처절한 비명소리,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엑셀핸드의 고 함 소리도 들려왔다. "비켜, 비켜어어!" 그렇게 외쳐봤자 엑셀핸드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뒤쳐지고 있었다. 네리아를 어깨에 둘러맨 운차이마저도 엑셀핸드를 훨씬 앞질러 아프나이 델의 앞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길시언을 둘러맨 에델린 이 겅중겅중 달려가고 있었다. 와사사사삭! 거대한 바위가 뭉개고 지나 간 것처럼 풀밭에 길이 만들어져버렸다. 사방으로 풀잎이 나부껴 폭풍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 때였다. 도망가다가 반드시 뒤를 돌아보는 멍청한 동물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 고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람도 그런 동물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난 멈 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크라드메서는 폭풍이 치는 풀밭 속에 외로이 서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단지 그의 호통에 놀라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는 미력한 생물들에 대한 비웃음이나 경멸도 없이 서 있었다. 아니, 표정은 있었다. 자신이 쫓아버린 생물들에 대한 슬픈 애정. 갑자기 레니의 감정 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렇게 위대한 자가, 그의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하는 자들을 스스로 쫓아내어야 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니. 눈물을 쏟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달아나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뜻을 존중해서, 그에게 더이상의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눈 앞은 뿌옇게 변해갔고 볼을 스 치는 차가운 바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풍덩, 풍! 물웅덩이를 밟 으며 일행들이 일으키는 물방울이 허공을 비산한다. 눈물을 너무 흘려 콧속이 묵직하다. "크흐흐흑!" 이건 아프나이델의 울부짓음인가. 그는 달리면서 소맷자락으로 눈을 닦 고 있었다. "울지마! 이 멍청아, 울지 말라고!" 엑셀핸드가 젖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하, 하, 하지만 엑셀핸드…" "네가 울면 나도 울고 싶어지잖아, 이 멍청한 놈아아앗!" 엑셀핸드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쳐대었다. 샌슨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외쳐대고 있었고 카알은 오열했다. 그리고 운차이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달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바뀌며 주위에서 외치는 고함 소리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창백한 오후. 하얀 아우성 위로. 하나의 검은 비명이 뚝 떨어졌다. 검은 얼룩이 주위로 번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에델리인! 모두 엎드려!" 샌슨의 고함 소리다. 고함이라기보다는 포효에 가깝다. 난 레니를 안은 채 뒤로 누워버렸다. 하늘은 미칠 것 같은 하얀색이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선들이 휙휙 지나갔다. 난 태평한 기분으로 하늘에 그려지는 검은 선들을 바라보았다. 참 빠르군. 레니의 얼굴이 턱 바로 위에 떨어져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하얀 얼 굴에 붉은 머릿카락이 제멋대로 붙어있었다. 난 한가로운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릿카락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느껴졌다. 뭐지? "머리 숙여! 머리 숙여! 풀밭으로 숨어어!" 카알의 계속된 다급한 고함 소리. 하늘을 가르고 있던 저 검은 선은, 화살? "후작 패거리다아앗!" 샌슨의 분노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언! ================================================================== 14. 정답이 없는 선택……30. 레니를 내려놓고 몸을 튕겨세웠다. 휘익! 머리 바로 옆으로 화살이 지 나쳤다. 으악! 난 일어섰던 것만큼 빠르게 다시 앞으로 엎어졌다. 순간 적으로 풀밭 저멀리서 일렬로 선 채 화살을 쏘아대는 몇 명의 전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일행들은? 주위의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엎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는 온통 키 큰 풀밖에 보이지 않았다. 화 살이 날아다니고 있어 머리를 들어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일행을 찾아야 되나? 그러나 난 고개를 돌려 풀밭 가운데 누워있는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를 옮겨야 돼. 레니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니를 어떻게 옮기지?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레니, 레니야!" 난 레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으음…" 레니는 신음을 토할 뿐 눈을 뜨지 않았다. 난 레니를 더 격하게 흔들어대었다. "레니, 제발 정신 차려!" 그 때 아련히 먼 곳에서 카알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드발군! 레니양을 보호해! 저 놈들은 레니양이 있는데도 화살을 쏜 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등에소름이 좍 돋았다. 그렇군! 후작은 지금 자신의 딸이 있음에도 불 구하고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이런, 제기랄! 슉슉슉! 화살은 쉼없이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움찔거리 며 머리를 숙인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레니를 흔들어댄다. 아냐, 큰 소리를 내면 안돼. 난 레니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말했다. "레니잇!" "으음… 크라드메서님? 후치?" 레니가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찌푸리더니 누워있는 자신의 위에 엎드 린 내 모습을 못믿겠다는 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무슨 짓이야!" "제발 상황에 안어울리는 짓 좀 하지 마! 그리고 소리 내지마!" 그제서야 레니도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살을 본 모양이다. 레니는 퍼렇 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난 옆으로 기며 속삭였다. "내 뒤를 따라와. 절대로 머리 들지 말고, 알았어?" 레니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은 배를 땅에 붙인 채 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쪽으로 가야 되지? "크어억!" 너무 놀라서 턱을 땅에 부딪히고 말았다. 바로 앞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눈을 꽉 감자마자 무서운 공포가 다가왔다. 아냐. 누워서 눈 감고 죽기를 기다릴 순 없지. 난 다시 눈을 떴다. "운차이!" 운차이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롱소드에 찔린 전사의 배를 걷 어차고 있었다. 그 옆에선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를 꼬나든 채 외쳤다. "일어나! 후치! 놈들은 돌격하고 있다. 화살은 쏘지 않아!" 좋아, 그렇다면! 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레니!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있어! 흩어지면 널 보호하지 못해!" "아, 알았어." 레니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때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 분지 전체가 고함 소리로 가득차는 것 같았다. 바스타드를 꼬나들고 앞 을 바라보자 달려오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풀밭 곳곳에서 일어나는 동료들의 모습도 보였다. 샌슨은 롱소드를 작대기처럼 휘두르 며 일어나서는 무시무시한 욕짓거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카알이 활을 당기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풀 위로 머리와 손만 들어올린 채 외쳤다. "파이어볼!" 불덩어리가 풀들의 머리를 그슬리며 날았다. 아프나이델은 이상하게도 파이어볼을 대단히 낮게 쏘았다. 그 때문에 파이어볼의 궤적에 놓여있던 풀들이 화악 불타올랐다. 전사들이 놀라며 파이어볼을 피한 순간 아프나 이델은 다시 캐스트했다. "거스트 오브 윈드!" 아프나이델이 두 팔을 휘두르자 맹렬한 바람이 달려오는 전사들쪽으로 불었다. 바람을 만난 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탑메이지 만세! 당신 불장 난은 언제 봐도 최고야! 비에 젖어있던 풀들은 무서운 연기를 내뿜었고 불 붙은 풀조각과 연기들이 바람에 휩싸여 달려오던 전사들을 덥쳤다. 불티와 눈을 아프게하는 연기 속에서 전사들은 허둥거렸다. "케엘록! 콜록! 뭐, 뭐야! 연기다! 콜록!" "으악, 눈! 내 눈!" 운차이는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풀들이 그를 위해 옆으로 비켜주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움직임. 운차이의 앞을 가로막은 풀들은 전혀 꺾이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옆으로 미끄러 져나갈 뿐. 그리고 저쪽에선 샌슨이 완전히 반대되는 동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예 분지를 갈아엎어라, 엎어. 샌슨은 풀을 마구 헤치며 달려 갔다. "받아랏!" 느닷없이 연기 속에서 전사 하나가 뛰쳐나오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운차이는 휘둘러져오는 검을 받아 아래로 눌렀다. 아니, 누르자마자 다 시 롱소드를 올려쳐 비어버린 전사의 턱을 갈라놓았다. 전사는 얼굴에서 폭포 같은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졌다. 내가 그를 따라 달려갈 때 운차 이는 그대로 멈춰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후치. 나는 네 살 궁리를 대신 해주지는 않는다." "부탁한 적도 없어요!" "좋아. 알아서 잘 싸워."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군요! 이야아아!" 난 운차이의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휘둘러져오던 롱소드를 후려쳤다. 롱 소드는 단숨에 박살이 나며 은빛 칼조각들이 허공을 갈랐다. 전사의 질 린 얼굴. 지체없이 바스타드를 다시 당겨보지만 전사는 손에 쥔 칼자루 를 집어던지며 뒤로 도망친다. 난 도망가는 전사에게 고함을 질렀다. "갈 테면 가라! 나 싫다고 가는 친구 붙잡진 않아!"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외치며 다음 상대를 찾았다. 그러나 앞을 보자마자 곧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대여섯 명은 넘는 전사들이 롱소드 를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너 이 자식! 꼼짝마!" 선두에 선 자가 괴성을 질렀다. 히야, 그 검광 한 번 살벌하네? 난 무 뚝뚝하게 대답했다. "괴물 초장이는 자기보다 못한 자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난 그렇게 외쳐주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레니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레니! 레니! 나 꼼짝말라는 저 친구의 명령을 무시했어! 나 냉혹하지? 멋있지?" 그리곤 그대로 몸을 숙여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허리를 돌리자마자 마 구 집어던진 돌멩이가 요행히도 선두의 전사의 가슴을 맞췄다. "커허헉!" 전사는 숨 넘어가는 고함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갈빗대 몇 개는 나갔을 거다. 뒤에서 달려오던 나머지 전사들이 기겁하는 모습은 잠시, 그들은 욕짓거리를 뱉으며 쓰러진 전사를 우회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다시 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하나 더 있다!" "으아악!" 전사들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 순간 나와 네리아, 그리고 운차이 는 머리를 숙인 전사들을 향해 육박해들어갔다. 전사들은 당황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으나 선수를 제압당해 근근히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바 스타드를 막은 전사는 박살나는 자신의 검을 보며 외쳤다. "이 새끼, 사람이야?" 난 씨익 웃어주려고 했지만 녀석은 부러진 칼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이 런, 제엔장!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칼은 왼쪽 어깨를 스쳤고 곧 눈앞에 불이 튀는 아픔이 느껴졌다. "아아악! 후치!" 레니의 비명 소리에 더 놀라버리면서, 난 오른손으로 바스타드를 쥔 다 음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바우우웅! 아쉽게도 전사는 뒤로 피했지만 곧 녀석과 그 옆에 있던 다른 전사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바스타드에서 나는 소리에는 나도 놀랄 지경이었 으니까. 주위의 풀들이 모두 똑같은 높이로 잘려진 것을 보며 전사들은 기겁했다. 와? 바스타드로 풀도 자를 수 있네? 네리아는 그대로 경직된 전사들을 향해 트라이던트를 두 손으로 쥐고 휘둘렀고 전사들은 가슴과 얼굴 등에 상처를 입으며 비명을 토했다. 그리고 운차이가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Peca!" 잠시 전사들의 가운데서 번갯불이 튀고나서, 운차이가 반대편으로 빠져 나오자 대여섯 명의 전사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우리 세 명은 다시 레니를 보호하는 위치로 몰려들었다. 네리아가 내게 외쳤다. "괜찮아?" "팔은 안잃어먹었어요!" 대답은 기운차게 해주었지만 왼쪽 어깨는 불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몸의 왼쪽 전체가 후들거리며 떨릴 정도였다. 난 이를 악물고 오른손에 쥔 바스타드를 힘있게들어올렸다. 그 때였다. 눈 앞의 연기 속에서 하 얀 빛이 뿜어져나왔다. 카카각!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바스타드는 빛을 막아내었지만 오른팔은 어깨까지 부러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크흐헉! 난 간신히 쓰러지지 않은 채 뒤로 여러 걸음 물러났다. 발뒷축이 뭉개진 거 아냐? 팔은 마치 바위를 친 것 처럼 떨려왔다. 이거 사람이야? 왼팔에 이어 오른팔까지 후들거리니 주 정뱅이가 따로 없군. 눈을 깜빡여 눈에 고인 눈물을 짜내자 눈 앞에 선 자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밤색 머리, 그리고 드문드문 섞인 새치. 그 아래 딱딱한 얼굴에서는 타 오르는 두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거 정말 미치겠군! 난 바스타 드를 들어 상대의 가슴을 겨냥하며 외쳤다. "어릴 때 눈빛이 나쁜 소년이라는 말 많이 들었겠군요. 가슴에 지워지 지 않는 앙금이죠? 하하하!" 할슈타일 후작은 입매를 일그러트리더니 일그러진 입술 그대로 말을 꺼 내었다. "버릇없는 꼬마놈. 죽음을 재촉하는군." 후작에게 해 줄 뭔가 더욱 인상적이고 들어서 기분 지저분할 말을 생각 하는 사이에, 운차이가 스르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 내게 말한 거야, 아니면후작에게 말한 거야? 운차이는 설명하지 않고 롱소드를 들어 후작을 겨냥했다. 후작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녀 상봉을 막는군…" 부녀 상봉이라고?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려있는 레니의 얼굴이 보였 다. 네리아가 레니의 앞을 가로막더니 외쳤다. "부녀 좋아하시네! 화살을 쏘아대놓고선 부녀라고?" 후작은 피식 웃었다. 그 때 운차이가 그대로 후작을 바라보면서 말했 다. "레니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 후치, 네리아. 걸리적거린다." "우, 운차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물러나." 네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레니의 팔을 잡아끌면서 뒤로 물러 났다. 나는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일행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아프나이델과 카알이 매직 미사일과 화살을 마구 날리고 엑셀핸드와 샌슨이 비록 덩치 는 다르지만 장작 쪼개는 듯한 동작의 유사성에서는 구별할 수 없을 정 도로 무식하게 전사들을 공격해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제레인트가 기도에 빠진 채로 주위에 방어막을 만들어 일행을 보호하는 모습도 보였 다. 샌슨은 전사 하나를 기세좋게 걷어차며 외쳤다. "후치! 네리아! 이쪽으로 와!" 네리아는 레니의 손을 잡아끌며 저쪽의 일행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멈칫했다. 어, 운차이 혼자 후작을? 후작은 OPG를 가졌는데? "이야아압!" 할슈타일 후작의 고함소리에 놀라 고개를 다시 돌렸다. 카캉! 후작의 검을 막아내는 운차이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후작의 검을 막아내었다 고? 운차이는 후작의 검을 튕겨내고는 칼자루로 후작의 손목을 내리찍었 다. 후작은 신음을 토하더니 발을 빼내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달려들 었다. "머리 조심!" 그렇게 외치며 다리를 노리고 베어들어갔다. 미안, 후작. 그러나 후작 은 검을 아래로 내리쳐 내 바스타드를 땅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검이 묶였다! 순간 옆에서 운차이가 괴성을 지르며 롱소드를 찔렀다. 후작은 내 검을 풀어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나와 운차이는 나란히 서서 후작 을 겨냥했다. "걸리적거린다고 했잖아!" 운차이가 쉭쉭거렸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 후작은 운차이의 검 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검을 부러트리지 않다니, 좋은 솜씨군." 운차이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말투는 변함없었다. "당신 주의를 끌어본 거야. 할 말이 있거든." "뭐지?" 운차이와 마찬가지로 후작은 냉담한 얼굴 그대로였다. 둘 다 바이서스 사람으로는 안보이는군. "우리는 이미 라자의 계약을 시도했고, 실패했다." 후작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는 달려가는 레니의 뒷모습을 흘 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라자의 계약에 실패했다고?" "그래. 크라드메서가 받아들이지 않았어."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맙군. 편안히 죽여주지." "아직 들려줄 말이 남았어." "말해봐." 운차이는 옆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차! 다른 전사들! 후작의 전사들은 후작이 혼자 나와 운차이와 대적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쪽의 우리 일행 들을 내버려둔 채 달려오고 있었다. 이, 이거 여기서 계속 후작과 이야 기할 분위기가 아닌데? "크라드메서는 앞으로도 절대로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인간과 관련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포기하라." 그리고 나도 옆에서 외쳤다. "이봐! 당신 희망은 크라드메서뿐이잖아! 돌맨이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지 않으면 당신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거 아냐? 하지만 그건 글렀어! 그러니 더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고! 나 같으면 기회가 있을 때 꼬리를 말고 도망치겠어!" 내 외침의 절반쯤은 후작에게보다는 달려오고있는 전사들을 향한 것이 었다. 다행히도 전사들은 내 외침소리에 놀라 멈추어섰다. 그들이 서로 를 향해 불안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건방진 드래곤 같으니…" "뭐야?" 기가 막히는군, 정말! 할슈타일 후작은 완전히 돌아버린 거 아냐? 그 때였다. 달려오던 전사들 가운데서 기겁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늘! 하늘에!" 뭐? 하늘? 난 주위를 재빨리 살핀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찌푸린 하늘은 그대로였다. 벌판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의 모습을 얼마 쯤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회색 연기가 잠시 갈라지자 그 사이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새? 아냐. 다리가 넷 달린 새도 있나? 그 때 운차이가 으르렁거렸다. "팬텀 스티드, 넥슨!" 뭐야? 넥슨? 아니, 팬텀 스티드라면 시오네의 짓일 텐데 어떻게 대낮 에? 구름이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있어 햇빛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칼라 일 영지에서도 시오네는 대낮에 나왔었지. 아무리 그래도 낮인데! 구름 만 갈라지면 햇빛이 나올 텐데, 시오네! 무슨 도박을 하려는 거지?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인 당황에 빠져 하늘만 올려다보는 가운데 팬텀 스티드 는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팬텀 스티드가 하강하자 그 위에 타고 있는 넥슨과 시오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쳐 곧장 날아갔다. 그 방향은… 크라드메서? 그 때 운차이가 낮게 외쳤다. "빠져나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운차이와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후작과 전사 들을 내버려두고 우리 일행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작과 그 때까지 남아있던 예닐곱 명의 전사들은 팬텀 스티드를 바라보느라 우리들을 제 지하지 못했다. 일행들이 몰려있던 곳으로 달려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땅에 쓰러져있는 에델린의 모습이었다. "에델린!" 에델린은 땅에 누운 채 가슴을 부여잡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체 곳곳에는 길다란 화살 여러 개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에델린의 곁에 무릎을 꿇고 화살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제레인트가 반 색을 하며 외쳤다. "후치! 잘됐다. 어서 이것 좀 뽑아! 살이 자꾸 재생이 돼서 내 힘으론 못뽑겠어!" 난 레니를 내려놓고는 에델린의 곁에 앉았다. 에델린은 내 모습을 보더 니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난 턱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이를 악물어요, 에델린." 에델린은 이를 악물고 눈까지 감았다. 난 화살을 부여잡고는 단숨에 뽑 아올렸다. 팍! 살이 찢어지면서 선혈이 튀어올라 얼굴과 손을 적셨다. 네리아의 신음소리. 난 화살을 팽개치고 에델린을 살폈다. 에델린은 신 음을 흘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에 주저앉아 있던 길시언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델린, 에델린! 나 때문에 이런, 쿨럭!" 에델린은 눈을 감은 채 약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길시언. 자, 후치? 계속해요." 길시언을 안고 달리던 에델린은 길시언을 보호하느라 화살을 이토록 맞 은 모양이다. 난 심호흡을 하고서는 곧 다음 화살을 잡아뽑았다. 팍! 다 시 에델린의 살이 찢어지며 속이 뒤집힐 것 같이 피가 튀어올랐다. 내가 하고 있는 짓이지만 정말 치료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을 찢는 것인지 구 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레니는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곧 다섯 개나 되는 화살을 모두 뽑았고 에델린의 상체는 너덜너덜해졌 다. 옆에선 레니가 펑펑 울고 있었고 네리아 역시 그에 뒤지지 않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제레인트가 기도를 시작하려 했지만 누워있던 에델린 은 손을 가로저었다. "화살을 제거했으니 이젠 괜찮습니다. 트롤이니까요." 제레인트는 탄복한 눈으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과연 에델린의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에델린은 일어나 앉더니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후치. 그런데, 오늘은 비를 내리게 해서 여러 가지로 고생 이 많군요." 아, 넥슨! 난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 갑자기 하늘 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아아드메서어!" 넥슨의 처절한 고함소리. 놈들은 어느 새 크라드메서가 있던 곳 상공까 지 날아가있었다. 이윽고 그는 온 분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그 가 외치는 순간 분지에 있던 우리들과 후작 일행들은 모두 아연한 기분 에 휩싸였다. "나는 까뮤 휴리첼! 당신의 라자가 되겠다! 거부 없이 받아들여라!" 라자라고? 넥슨이? 카알은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릴 듯이 머리를 잡아당 기기 시작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후작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 며 하늘을 노려보는 것이 똑바로 보였다. 그 때 어디선가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멀어서 가늘게 들리지만 강인한 힘이 담긴 크라드메서의 목소리였다. "거부한다." 좋아! 역시 크라드메서는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군. 일행들은 뭔지도 모를 안도감에 빠져 서로의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넥슨은 다 시 외쳤다. "그렇다면 다시 밝히겠다! 나는 당신의 라자였던 까뮤 휴리첼의 아들 넥슨 휴리첼이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 죽음은 정당한 죽음이 아니며, 따라서 당신과 아버지의 계약은 파기된 것이 아니다!그리고 내 가 아들로서 그 유산을 이어받는다! 당신은 거부할 수 없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31. 벌판에 붙었던 불은 이제 사그라들어 회색 연기만이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작 일행과 우리 일행의 거리는 약 60 큐빗 정도. 그러나 우리들은 그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완전히 무시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아프나이델이 신음했다. "아버지의 채무는… 아들에게 이어지는가." 채무? 글쎄. 채권이라고 해야되지 않을까? 앉거나, 혹은 멍하니 선 일 행들은 하늘만을 쳐다보는 채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 때 네리아 가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 레니는 멍한 미소를 지은 채 하늘에 떠있는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의 불과 연기도, 흉흉했던 싸움도 모두 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미소는 희다. 레니는 멍한 미소 그대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의 속삭임은 너무 가냘팠다. 레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도 레니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신비한 미소만 지으며 속삭였다. "받아들여요… 받아들여요… 크라드메서님…" 레니? 난 당황하여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 때 다시 넥슨의 고함 소리가 들려와서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 그의 외침에는 다급함이 담겨있었다. "대답해라, 크라드메서! 그대가 우리 아버지에게 충실하기로 맹세했다 면, 그 죽음으로 그 맹세를 도외시하지 말라! 당신의 충실함은 아버지의 생존 여부에 관계없이 항상 같음을 증명하라!" 그 때였다. "…까뮤?" 잔뜩 쉰 듯한 목소리. 실제론 맑고 강한 크라드메서의 목소리 그대로였 지만 그 음조는 왠지 잔뜩 쉬어버린 것처럼 들려온다. 무색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엔 생동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혼란에 휩싸인 생동감이었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까뮤? 까뮤. 네가 어떻게 살아있지?" 숨막히는 정적. 혼란에 휩싸인 드래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주위를 고 요하게 만드는 지독한 박력이 있었다. 그러나 넥슨은 외쳤다. "당신은 내게서 그를 느끼는가! 그렇다! 나는 까뮤 휴리첼의 아들 넥슨 휴리첼이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숨 때문에 호흡이 잘 안된다. 머리가 어지럽다. "그런가. 까뮤의 핏줄이군. 너에게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의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다!" 바람조차 멎어버린 분지. 연기만이 조용히 피어오를 뿐 그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은 완전한 정적 상태에서, 후작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녀석을 쏴!" 고개를 돌리자 황망히 활을 들어올리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남아 있던 전사들 중에 활을 가진 자는 세 명. 어, 어라? 어떻게 해야 되지? 후작을 내버려둬야 되나? 아니면 넥슨을 보호해야 되나? 카알이 외쳤다. "아, 안돼. 멈춰…" "카알!" 길시언의 무서운 고함 소리. 웅웅웅웅! 프림 블레이드의 울음소리가 끔 찍스럽게 들려왔다. 검을 들고 있어? 일행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눈으 로 길시언을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든 채 두 다리 로 서있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채색의 얼굴 위로 비오듯이 땀을 흘 리고 있었지만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꼬나든 채 카알을 노려보고 있 었다. "기, 길시언?" 길시언은 어깨로 숨을 쉬며 힘겹게 외쳤다. "으컴! 무례를 용서하시오! 쿨, 쿨럭! 넥슨이 라자가 되는 것은 막아 야, 막아야 됩니다!" 카알이 대답하기도 전에 공기를 찢는 파열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슝 슝슝! 나는 길시언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쏘아진 화살들은 모두 팬텀 스티드를 빗나갔다. 후작의 노한 고함소리 가 들려온다. "이 병신들! 저것도 못맞춘단 말이냐! 계속 쏴!" 전사들은 다시 화살을 걸기 시작했다. 그 때 길시언이 외쳤다. "쏘시오, 카알!" "예?" "당신은 명중시킬 수… 커헉!" 길시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웅웅웅웅웅! "왕자님!" 레니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길시언은 레니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 놓더니 격렬하게 기침을 토했다. "쿠, 쿠울럭! 쿨럭! 커허헉!" 레니의 옷에 피빛 반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레인트가 곧 기도에 들어갔다. 길시언은 온몸을 들썩거리며 기침을 토했다. 갑자기 길시언은 고개를 들 어올렸다. 그의 입가로 붉은 선혈이 한 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알… 넥슨을 막아주시… 쿨럭! 그는 바이서스의 반역자… 당신이 바이서스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그 땅에 사는 만민을 위해 서라도…" 카알은 굳은 얼굴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개는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안됩니…" "매직 미사일!" 카알의 대답을 지워버리며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급하 게 몸을 돌렸지만 이미 아프나이델의 손에서는 하얀 빛화살들이 날아가 고 있었다. 그 방향은 허공에 떠있는 팬텀 스티드였다. 카알이 외쳤다. "안돼!" 후작의 전사들이 쏘아댄 화살을 뒤따라잡으며 빛화살은 무시무시하게 흐린 하늘을 태워들어갔다. 슈슈슈슝! 그러나 그 때 팬텀 스티드에서 날 카로운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파아악! 느닷없는 폭발음 속에서 외침 소 리는 사라졌다. 불꽃이 폭발하며 구름 아래 또 하나의 태양이 뜨는 듯했 다. 불꽃이 사방으로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폭발의 잔 재가 사라진 곳에서는 팬텀 스티드가 그대로의 모습으로 떠있었다. "이이익! 시오네!" 아프나이델은 이를 갈면서 다시 캐스트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카 알이 아프나이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프나이델은 허둥지둥 균형을 잡으며 커다란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빠르게 말했 다. "안돼, 공격해선 안돼! 크라드메서의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오!" 아프나이델은 당황해버렸다. 카알은 뭐라고 말할지 모르는듯 입술을 달 싹거리다가 갑자기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양! 지금도 크라드메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까?" 나는 레니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레니의 얼굴은 극도의 괴로움으로 떨 리고 있었다. 붉게 파도치는 머릿결 아래로 파란 이마가 끔찍한 대비를 이룬다. 길시언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레니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네리 아가 허둥지둥 레니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레, 레니야?" 갑자기 레니의 눈이 극도로 커졌다. 그녀의 붉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난 헛바람을 삼켰다. 레니의 입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 감히 누굴 쏘는…" "멈춰! 사격 중지!" 후작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레니는 말을 멈추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서는 전사들이 놀라며 활을 내리는 모습 이 보였다. 카알은 그 광경을 보며 낮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후작도 라자였지. 대답이 나왔군. 크라드메서는 넥슨에게서 까뮤의 모 습을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앞에서 까뮤를 두 번 죽일 수는 없 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는 육친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렇다 면 까뮤 휴리첼의 아들인 넥슨은, 동시에 크라드메서의 아들인 것인가? 어쨌든 그의 죽음은 크라드메서의 분노를 불러올 거라고 생각할 수 있 지. 21년 전처럼…" "카, 카알! 오, 맙소사!" 샌슨의 기겁한 목소리. 고개를 한껏 들어올리고 있던 길시언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레니의 무릎에 머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그는 오열했다. "아샤스여… 바이서스는 어떻게 되라는 겁니까! 아샤스여!" 길시언은 레니의 옷을 부여잡으며 온몸을 떨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 경 련은 곧 딱딱하게 굳어있던 레니에게까지 전해졌다. 레니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길시언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와, 왕자님…! 으흑!" 기어코 레니도 길시언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 지? 넥슨은 바이서스에 대한 철저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 산산히 파괴된 그에게서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목적 잃은 증오심 뿐이다. 그러 나, 그러나 그는 크라드메서의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다. 크라드메서의 눈 앞에서 과연 그를 죽여도 되는가? "크라드메서의 대답에 달렸군." 엑셀핸드가 배틀 엑스의 도낏날을 만지작거리며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침착한 얼굴과 달리 엄지손가락을 너무 세게 눌러서 손에서 피가 나고 있는데도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그의 손을 툭 쳤고 엑셀핸드는 질끔 하 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사위가 고요해지면 서 모두가 크라드메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크라드메서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짙은 먹물 같은 고요 속에 길시 언과 레니의 숨죽인 울음 소리, 그리고 길시언을 치료하는 제레인트의 기도소리만이 낮게 들려왔다. 너무 긴장한 탓인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 고 고개를 돌렸다. 후작 일행은? 그들 역시 아무런 말없이 허공에 뜬 넥 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의 얼굴은 굳을대로 굳어져 귀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분지 위에서 아예 낮잠을 자버리기로 결심했나 보다. 젠장! 크 라드메서, 빨리 대답해요! 무슨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빨리나 듣자구요! 당신은 60 년이 하루일지 몰라도 우린 평생이라고요! "드래곤과…"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관자놀이를 뭘로 찌르는 듯한 저린 감각이 느껴졌다. 크라드메서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는 상호 동의하에 계약한다. 둘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나는 까뮤 휴리첼과 계약했을 뿐 그 가문과 계약한 것이 아 니다. 넥슨.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너는 내게 권리가 없다." "좋았어!" 아프나이델이 오른주먹을 딱 소리 나도록 왼손바닥에 치며 나직하게 외쳤다. 그러나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넥슨이 외쳤다. "나를 보면서 이야기햇!" "드래곤에게 명령하지 말아라, 넥슨." 크라드메서의 목소리에는 우리들을 쫓아낼 때와 같은 무한의 힘은 없었 다. 반면 넥슨의 목소리에는 점점 강한 힘이 실리고 있었다. "웃기지마! 내가 원한다면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도 명령하겠다! 나를 봐!" "넥슨, 넌 네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 는다." 그 순간 넥슨의 반응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의미? 킬킬킬! 계속 웃기는군! 정말 웃겨!" 크라드메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넥슨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킬킬거리더 니 말했다. "의미에 신경쓰며 사는 사람도 있나? 3대 욕구엔 의미 추구욕이라는 것 은 없어. 인간을 설득하기 위한 말로 의미 따위 쓰지마! 인간은 모두 버 러지야. 먹고 자고 성교하면 만족하는 것이 인간이야!" 넥슨은 미친 듯이 외쳐대었다. "절식하는 녀석들은 존경받지. 웃기는 짓거리! 대자연을 마구 파헤쳐 산더미처럼 음식을 쌓아놓고 먹지 않겠다는 건 기만이야! 절식하는 동물 도 있나? 잠 안자고 일하는 놈은 우수하다고 하지. 하하! 잠 안자고 일 해서 뭘 할 건데? 잠 자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생각 뿐이잖아? 순결을 맹세하는 개자식들은 자신이 퍽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순결을 맹세하는 동물도 있나? 그러나 강간하는 동물도 없어! 인간의 모든 예절과 문화와 역사는 3대 욕구의 절제로 요약돼! 그것도 추잡한 욕구를 감추기 위해 철저히 기만되고 화려하게 포장된, 그것들은 오래 전 두 발로 일어서 하 늘을 보게 될 때 이미 죽어버린 한 짐승, 인간이라는 짐승의 장식된 수 의(壽衣)야!" 넥슨은 인류의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다음 측은하다는 투로 크 라드메서에게 말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위대한 드래곤이여! 버러지를 설득하기 위해 의미 같은 너무 고귀한 도구를 선택하지마. 의미? 그건 배부를 때 소화시키기 위해 해보는 몽상에 불과해. 배 부르고 더 이상의 욕구가 없어지고 아무 것도 추구할 것이 없으니까 왜 이다지도 할 게 없는 건가 궁금하게 여기 는 것이, 그것이 존재 의미의 추구라는 최후의 질문의 케케묵은 정체야! 그러니…" 넥슨은 숨가쁘게 말을 맺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단숨에 외쳤다. "위대한 크라드메서! 이 벌레, 그 중에서도 산산히 박살난 벌레가 명령 한다. 날 봐!"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들어 넥슨을 보는 걸까? 이 위치에서는 크라드메 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과 레니가 느꼈던 것이 정 확하다면, 그렇다면 크라드메서는 까뮤의 아들 넥슨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을 가지고 있겠지. "그것이 네가 발견한, 혹은 발명한 너의 종족의 정체인 모양이군." 따스함? 크라드메서의 목소리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어떤 설명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따스함이었지만 왠지 적절했다. "그렇다면, 그 허무에 되울려오는 너의 말의 메아리는 무엇일까. 넥슨. 너는 왜 거기서 그렇게 고함 지르고 있는 것이지?" 아아, 헬턴트 마을이 그립다. 단순히 우릴 괴롭히던 아무르타트. 이해 하기 편해 사랑스러운 그 순수한 악의 이름이 그립다! 아무르타트는 나 의 것. 나의 고통이고, 나의 괴로움이고, 나의 증오다. 하지만 크라드메 서는, 그리고 넥슨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내 이해를 넘어서는 곳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넥슨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크라드메서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는 않았다. "너의 비뚤어진 애정까지도 그의 것을 닮았군." "애정이라고?"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나에게서 구하지 말아라, 넥슨. 그것은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대화 방식이 아니다." 크라드메서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 절대의 부드러움 속에서 동시에 무력감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분지 전체로 번져가는 그 무 력감은 강한 전염력이 있었다. 그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아보라면 넥슨과, 할슈타일 후작? 할슈타일 후작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그 눈은 사납게 번들거 리고 있었다. 분노? 아니다. 저것은 분노의 눈빛은 아냐. 멍청이 후치 야. 지금 후작은 뭔가를 노리고 있어. 그런데 그는 뭘 노리고 있는 것일 까? 갑작스럽게 후작은 외쳤다. "당신의 뜻을 밝혀라, 크라드메서!" 일행들은 당황해서 모두들 후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곳 에서 크라드메서의 반문이 들려왔다. "할슈타일 후작이오?" "그렇다!" "여기까지 찾아온 자들이 꽤나 많군. 그런데, 나의 뜻?" "그렇다! 말장난은 그만하고 당신의 뜻을 밝혀랏! 저들의 말을 듣자니 당신은 다시는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잖은가?" "닥쳐, 후작!" "그렇다." 넥슨의 외침과 크라드메서의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후작은 곧장 말 했다. "들었나, 넥슨! 크라드메서는 절대로 라자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포기 하고 내려와라, 이 멍청한 녀석!" ================================================================== 14. 정답이 없는 선택……32. 이상한걸. 정말 이상해! 후작이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저 놈은 돌맨 을 크라드메서의 라자로 만들지 못하게 되니까, 아예 누구도 크라드메서 의 라자가 되지 못하게 하려고 저러는 것인가? 하지만, 하지만 후작은 크라드메서가 없으면 곧장 바이서스 왕가의 반역자인데? 반역자가 힘을 가지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지? 그 때 넥슨이 외쳤다. "할슈타일 후작! 끼어들지마! 크라드메서, 날 똑바로 보고 내 질문에 대답햇!" 후작은 눈을 들어 넥슨을 쏘아보았다. 넥슨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크라드메서는 대답했다. "아니, 난 물어봐야되겠다." "뭐야?" 버서석, 버석. 풀잎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공중에선 넥슨 이 외쳤다. "크라드메서! 어딜 가는 것이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크라드메서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인가.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풀잎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위로 크라드메서의 가슴이 나타났다. 지친 얼굴. 땀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릿카락들이 얼굴을 조각조각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라드메서의 얼굴은 서로 다른 얼굴의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이 점점 커졌다. 크라드메서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걸어오면서 말했다. "이 사태는 몹시 이상하군. 후작이 바이서스의 왕자를 공격하는가 싶더 니, 곧이어 내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 나타나서는 바이서스의 왕가에 허 락을 구하지도 않고 나의 라자가 되려 하는군. 그런데 드래곤 라자의 가 문의 수장이었던 자는 그를 저지하려고 들고 있고.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신네들은 서로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멈춰 섰다. 우리 일행과 후작의 무리들은 모두 멈춰선 채 눈 앞까지 다가온 크라드 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와 우리와 후작 일행은 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풀들이 파도치고 있었고 뿌연 연기는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고 있었다. 넥슨은… 넥슨과 시오네, 그리고 팬텀 스티드는 그 삼 각형에 포함되지 못한 채 허공에 떠있었다. 왠지 이 위치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기분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난 꼭 그런 기분이 들어. 어린애들끼리 금지된장난을 치는 장소에 느닷없이 어른이 나타나 서 눈썹을 약간 들어올린 채 '너희들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라고 물 어보는 것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느낌인 것일까? 그래서 아무도 크라드메서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마랏!" 후작의 고함소리. 크라드메서는 흠칫 하면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 다. 후작은 저 위대한 크림슨 드래곤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 지 않는 것일까? "넌 라자가 없다! 인간의 일에 대해 알려고들어선 안돼!" 크라드메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정말 어른스러운 미소였 다. 갑자기 후작의 모습이 '우리 노는데 끼어들지 말아요!' 라고 외치는 꼬마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렇소?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 "넌 물을 수 없어!" "허락해달라고 한 적 없소." 크라드메서는 우아하게 말했지만 그 말은 후작의 입이 콱 막혀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후작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크라드메서를 쏘아보 았다. 크라드메서는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300 년 동안 이 질문은 던져질 필요도 없었소. 바이서스 왕가가 인간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며 동시에 만인으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드래곤들이 바이서스 왕가를 보살피는 것이 곧 인간을 보살피는 것이었소. 루트에리노 대왕은 드래곤 로드의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이어 받았고 그것은 인간들 모두가 인정했던 바요. 비록 근자에 들어와 자이 펀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양국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 지만." 운차이가 크라드메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드래곤 로드의 지배를 받은 바 없소. 그러니 대왕이 그를 몰아 내고 대륙의 새로운 주인으로 행세했다 한들 우리가 알 바 아니오." 크라드메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은 맞소. 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이 지배당할 정도의 세력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잖소. 드래곤 로드께서는 열사의 사막에서 생존 자 체를 힘겹게 유지시키는 당신들을 지배하려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소. 그리고 당신네들이 뭐라고 말하든, 바이서스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김으 로써 발생하게 된 유민들이 당신 나라로 유입되면서 당신들이 국가로서 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될 거요." 운차이는 이를 드러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그런데… 이제 묻겠소. 루트에리노 대왕 이후 3세기인 바로 이 시점에 서, 대륙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기려드는 것이오? 바이서스 왕가는 도전 받고 있는 것이오?" "물론이지!" "닥쳐엇!" "그렇다!" 후작의 대답과 길시언의 노호성, 그리고 넥슨의 고함 소리가 잇달아 터 져나왔다. 후작은 무서운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고 길시언은 일어나 후작에게 달려들려고들었다. 샌슨이 재빨리 그의 겨드랑이를 껴안지 않 았다면 길시언은 그대로 달려가다가 앞으로 고꾸라져버렸을 것이다. 그 리고 넥슨은 그 양쪽을 모두 쏘아보고 있었다. 그 때 크라드메서가 말했다. "이제야 나는 확신할 수 있구료." 뭘? 크라드메서. 뭘 확신하십니까? 그 때였다. 갑자기 레니가 신음소리 를 내었다. "허억…." 황급히 몸을 돌리자 허공에 뜬 넥슨을 바라본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레니, 왜? 그 때 레니는 천 천히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당황하며 레니를 받아안았다. "레니, 레니야?" 그 때 다시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넥슨 휴리첼. 네가 바로 잔혹한 저울대의 주인께서 정한 나의 짝이었 군. 바로 이 시점에, 루트에리노 대왕 이후 3세기가 되는 이 시점에 말 이야. 내가 틀렸던 것이군. 지금 나는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되 는군." "뭐라고!" 후작은 찢어지는 고함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고함소리는 울림이 되 기도 전에 넥슨의 웃음소리에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크하하핫! 정확한 선택이다, 크라드메서!" 잔혹한 저울대의 주인, 오, 유피넬! 정녕 유피넬 당신은 크라드메서의 저울 반대쪽에 넥슨을 두셨습니까! "에델브로이여." 에델린의 짓눌린 신음 소리가 더할 수 없는 음산함으로 다가왔다. 네리 아의 무릎에 누운 레니의 입에서 가녀린 신음이 들려왔다. "그럼 아, 안돼요… 제가 틀렸어요. 크라드메서님… 제발!"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녕 나의 라자가 되고 싶은가, 까뮤의 아들 넥슨 휴리첼?" "그렇다!" "그래. 이것은 드래곤에게 숙명으로 지워진 언약이며 나는 그것을 거부 하지 않는다. 네가 불러일으키는 이 지독한 애정 앞에 무릎을 꿇는 나를 인정한다."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행들은 레니 곁으로 몰려 들었다. 레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 하게 굳어있는 볼에는 솜털이 모두 곤두서있다. 네리아는 황망히 레니를 추슬러올리려 했으나 레니는 자꾸 힘없이 미끄러져내렸다. 그 때 카알이 손을 들어 네리아를 제지하더니 레니의 얼굴에 얼굴을 바싹 가져가며 다 급하게 말했다. "레니양? 레니양!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러나 레니는 카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감 은 채 머리를 힘없이 좌우로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안돼!"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갑자기 올라왔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들 었다. 난 덜덜 떨리는 턱을 부여잡았다. 레니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 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듯이 손을 휘젓고 있었다. "안돼, 안돼요! 받아들여서는 안돼요… 이 참을 수 없는… 파멸…! 비 명과 붉은 피… 불공평한, 이유없는, 목적없는… 아아아… 보고싶지 않 아요, 싫어요! 싫어! 끔찍해요. 제발, 제발 그래선 안돼요…! 무서워 요…" 그 때 단숨에 내어지르는 듯한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그대를 받아들이겠다." 암흑. 갑자기 위도 아래도 없는 암흑 속에 서게 되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지금 서있는거야, 물구나무 서있는 거야? 중량감이라는 것은 세계 최고 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중량이라니, 그게 뭔데? 빛은 고색창 연한 전설 속에서나 등장했던 엉터리 같은 이름. 빛이라고? 아아, 그런 것. 들어본 기억이 나는군. 소리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노력? 관둬. 소리 따 위. 있어야 할 위치에서 보석이 번득였다. 왜 저 위치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것은 거기에 있었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 아니, 없었다. 있었다. 있으니까 없었다. 아름다웠다.다 용서 가 된다.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상대를,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유혹할 수 없다 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1,000 개의 이슬을 모아야 돼. 그것은 조각상의 마음에도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의 묘약. 그런데 말이야, 문제는 1,000 개는커녕 100 개도 모으기 전에 태양은 이슬을 태워버리고 바람은 이슬을 훑어버린다는 거지.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합심해서 모으는 것은 마법에 관계된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소용이 없어. 좌절한 사랑의 주인공에게 남겨진 최후의 희망이 있지. 정녕 그의 짝사 랑의 상대가 유피넬이 정한 그의 짝이라면, 하늘은 어느 날의 다음 날이 거나 혹은 어느 날의 전날임이 분명한 어느 날, 1,000 개의 이슬을 다 모을 때까지 태양도 뜨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아침을 만들어주신다는 거야. 저기 백만 개의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 보석이 빛을 뿜고 있었다. "드래곤의 별인가?" 어디서 들려온 것이지? "카알? 어디 있어요?" 주위를 돌아보아도 카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간 거 지? 이슬 모으러 갔나? "후치? 임마! 후치야! 어디 갔어? 대답해!" 샌슨의 절절한 고함 소리. 그런데 부르는 사람은 어디로 간 거야? "아름답다… 정말!" 엑셀핸드. 그래요. 아름답죠? 당신은 저런 보석을 캐어내고 다듬어 본 적이 있나요? "다들 어디 있어요? 제발… 얼굴을 보여줘요! 어디로 간 거에요? 등 뒤 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지 말아요!" "네리아, 네리아!" "후치? 후치! 어디 있어? 이리 나와!" 여기에요! 라고 고함 지르려다가 무척 웃기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딘데? "내가 죽었나? 이게 죽음인가?" 아프나이델의 말에 곧 길시언이 대답했다. "쿨, 쿨럭. 걱정 말아요. 안심하시오. 모두들 안심해요. 아무 일도 없 을 겁니다." "길시언? 길시언.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에델린. 아무 걱정 말고, 쿨럭.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요. 내가, 내가…쿨럭!" 나의 왕께서는 보이지 않는 동료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환자가 다른 사람 걱정하고 있는 겁니까? "여! 다들 괜찮은 거군요? 헤이, 운차이씨?" "살아있어.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시끄럽게 부르지마, 제레인트." "아, 나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좋습니다. 어, 그런데 레니양?" "레니? 레니야?" "레니양! 어디 있는 겁니까? 대답해요!" 암흑. "안돼… 늦었어…" "레니양? 쿨럭!" "늦었어요…왕자님. 크라드메서는… 드래곤의 별이 바라보는 가운데…" "드래곤의 별! 저것이 드래곤의 별이 맞습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알 수 있어요… 난 알겠어요. 드래곤의 별은… 라자의 계약의 볼모…" "볼모? 인질이라는 겁니까?" "증거… 인질… 무의미한 것들이 의미를 가질 때까지 모여서… 아냐. 모인다고 의미가 생기는 것일까… 무의미와 불가지의 차이는 뭘까… 인 간에겐 같지 않을까…" "레, 레니양?" 그 때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시간은 우리의 언약의 현을 연주할 것이다. 비비고 할퀴고 뜯을 것이 다. 바람. 뜨거운 바람이 차가운 나뭇가지를 스칠 때 들려오는 소리만 빼고, 모든 바람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바람의 자유의 댓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을 때까지 언약의 공증인이자 전달자 노릇을 해야 된다는 것. 바람은 너의 말을 전한다. 바람은 나의 말을 전한다. 그래서 바람은 자 유롭다. 질시어린 양심으로부터도, 그리고 언약의 파괴자에게서도." 크라드메서의 말이 끝나자 곧 넥슨의 말이 이어졌다. "시주할 것운 고 언괴나뭇가 들은 간은 약의 현을 연자유롭게 태어바 람. 의 댓가는 무엇인가. 그것지 언약의 공릇을 해야 된다지를 스칠 때 는 것. 을 전한다. 바약의 파람은 나의 말을 전한은 죽을 때까다. 그래 우리의 언서 바람려오는 소리만 빼고, 모람증인이자 전달자 노바람은 너 의 말은 자유롭다. 든 바질시어린 양심으이다. 비비고 할뜨거운 바람이 차가로부터도, 그리자에게서도. 난다. 바람의 자유퀴고 뜯을 것이다." 잠시 후 크라드메서는 노래를 시작했다.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 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 넥슨의 노래도 시작되었다. 계란색 겨울 아침의 서릿빛 물빛 여인의 입술색 눈을 감을 때 보이는 색 황금색 100년 묵은 저택의 창문에 쌓인 먼지색 아기의 볼빛 긴 밤을 지새우고 맞이하는 아침 햇살이 속눈썹에 부서지는 색 땀에 젖은 옷 겨 드랑이의 반달 모양 땀무늬의 거무튀튀한 색 석양의 하늘에 쏘아진 화살 끝의 은적색 마침내 찾아온 봄의 첫번째 꽃잎을 뜯어먹는 뱀의 눈동자색 크라드메서의 노래와 넥슨의 노래가 점점 조화를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응결되기도 하고 주춤거리며 서로를 밀어낼 듯하다가 끝끝내 서 로를 포옹하며 둘의 노래는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회 색들이 돋아오른다. 번져가는 회색의 물방울들은 빛도, 어둠도, 모든 것 을 물들인다. 그러나 번져가는 회색은 그 절대의 정복의 끝에서 단말마 를 내뱉으며 다시 회귀한다. 모든 것은 색깔의 영토가 지배한다. 색깔의 바글거림에선 톡 쏘는 듯한 맛이 난다. 소리 없는 음악을 배경으로 멈춰 진 춤이 펼쳐진다. 너무 긴 순간을 태워가며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크라드메서의 지쳐버린 목소리가 공허하게 퍼져나간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33. 갈색산맥의 분지. 바람이 불고. 풀잎은 서로를 부르며 서로에게서 떠나 가고 있었다. 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이는 굳은 채로 서있었다. 레니를 안아올리려든 네리아도, 레니의 얼굴 가까이 몸을 숙이던 카알도,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길시언도, 길시 언을 부축하고 있던 샌슨도, 길시언을 치료하던 제레인트의 기도성도,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엑셀핸드도, 상처를 어루만지던 에델린도, 검을 꽉 부여잡은 운차이도, 덜덜 떨고 있던 아프나이델도, 그리고 나 역시. 후작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벌리거나 혹은 눈을 부릅뜬 채 전사 들은 넥슨과 크라드메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팔짱을 낀 채 허공을 노려보는 후작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최소한 그의 부하들처럼 겁을 먹고 있지는 않 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후작을 바라보던 내 귀에 넥슨의 폭발적인 웃 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핫하하하!" 넥슨의 웃음소리와 함께 몸이 다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난 휘청거 리는 무릎을 간신히 똑바로 세웠다. 주위에서 경직에서 풀려난 일행들은 한숨이나 짧은 비명들을 토해냈다. 그 때 넥슨은 웃음을 멈췄다. "성립되었다고? 성립되었어? 그래? 그럼 난 당신의 라자인가?" 넥슨의 웃음소리는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였다면 더할 수 없이 순진 한 그 기쁨만으로도 동조해주고 싶은 기분이 마구 샘솟아날 듯한 그런 웃음소리였다. 저 순진무구한 웃음소리.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말한다! 크라드메서! 내 첫번째 요구는 이것이다! 할슈 타일 후작을 없애라!" 후작을? 난 다시 후작을 쳐다보았다. 후작을 둘러싼 전사들은 한 점 흐 트러짐 없이 그대로 서있었으나 그 얼굴은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데… 후작은? 후작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작은 팔짱을 풀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후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의 눈 빛이 내 눈을 통해 들어와 머릿속을 날카롭게 쑤셔대는 것처럼 느껴졌 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도대체 뭐야? 왜 후작은 저 말에 겁을 집어먹 지 않는 거지? "넥슨 휴리첼. 오해하고 있었구나.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크라드메서는 어린이를 타이르는 어른의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은 당황 했다. "뭐라고?"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아니, 잠깐만. 저건 누구나 잘 아는 이 야기지. 그런데? 드래곤 라자는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지. 드래곤 라자 는 아무 일도…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카알이 튕겨져오르며 외쳤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자신의 말의 여운을 귀담아듣는 듯했다. 샌슨이 놀라서 말했다. "예? 카알?" "그래, 그랬어!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 드래곤 라 자는 인간과 드래곤을 이어준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도 인간이다! 그런 데 왜? 그것이었군! 할슈타일 후작이 지금껏 그 자신이 크라드메서의 라 자가 되는 쉬운 방법을 무시하고 돌맨이나 레니를 노린 것은, 후작이 절 대로 라자가 되지 않으려 했던 까닭은…!"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해서는 안된다." 아프나이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마무리지었다. 그거였군! 할슈타일 후작 자신이 드래곤 라자였는데, 왜 그는 오래전에 헤어졌던 레니를, 지골레이드의 라자였던 돌맨을 크라드메서에게 짝지으 려 한 것인가? 왜 스스로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려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드래곤 라자는 관계일뿐이니까! "관계의 수준으로만 떨어지게 되니까. 관계는 둘만 있으면 되는 거야. 부부를 말하려면 남편과 아내를 말하면 돼. 다른 건 없어. 인간과 드래 곤이 드래곤 라자를 통해 관계지어진다면, 그렇다면 드래곤 라자는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 드래곤 라자는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카알의 숨가쁜 말은 넥슨의 비명소리에 파묻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산울림은 넥슨의 경악을 희석시키며 동시에 확대시키고 있었다. "크라드메서! 당신의 라자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인가!" 넥슨은 피를 토하듯 외쳤지만 크라드메서는 냉랭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 온하게 대답했다. "무시하는 것이다. 가련한 라자여." "무시…라고?" "넌 네가 원한 것의 본질을 몰랐다. 드래곤 라자의 말에는 원래 의미가 없다. 나는 이제 라자를 가진 드래곤으로서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라자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 비록 자신의 손발을 사랑하는 것 처럼 너를 사랑하기는 하겠지만, 손발이 머리를 향해 입을 열어 명령할 수는 없지 않을까." "무, 무슨! 그건 억지다! 나도 인간이잖아!" "아니, 너는 드래곤 라자다. 너는 드래곤 라자일 뿐이며, 그것도 계약 을 했으며 그 당사자인 드래곤이 생존해 있는 드래곤 라자다. 이제 네가 너의 숙명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려면, 계약을 취소하든지 날 죽이는 도 리밖엔 없겠지. 하지만 난 계약을 취소하지 않을 것이며,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넥슨은 온몸을 뒤흔들며 계속해서 외쳤다. 저러다가 자칫하다간 팬텀 스티드 위에서 떨어지겠다. "틀려! 틀려! 그렇지 않아! 네 말대로 난 너의 드래곤 라자다! 내가 너 의 손발이라면, 그렇다면 난 바로 너다! 내 요구는 바로 네 의지잖은 가!" "넌 나인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지." 크라드메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풀들의 머리 위로 높게 솟아오른 그의 모습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풀의 파도 위에서 흔들리지 않 는 고목처럼 보인다. "넌 나이며 동시에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인 넥슨은 될 수 없다. 넌 드 래곤에게만 속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만 속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는 둘 모두의 것. 그것이 너의 선택의 진실이다. 그것이 드래곤 라자의 진 실인 것이다. 넥슨, 넌 드래곤 라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종류의 인간이라 는 점에서도 너의 아버지를 닮았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고, 고개 돌려! 내, 내가 왜 인간인 넥슨이 아니라는! 너, 너에겐 드래곤 라자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야 돼! 날 무시할 순 없다고! 날 돌아봐!" 그러나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넥슨의 말을 무시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리겠다는 의미인가? 그는 그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넥슨. 어떤 실이 엉켜 운명이라는 천에 이런 무늬가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유피넬이 정한 나의 짝이며 동시에 헬카네스의 손길이 머물러 만들어진 나의 불완전한 짝이군."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불완전한 짝이라고? 그것은 영원의 숲에서 세 번이나 거푸 죽었던 넥슨 을 가리키는 말인가? 다급하게 크라드메서를 부르던 넥슨이 갑자기 굳어 버렸다. 그의 하얀 얼굴이 눈에 잘 들어온다. 크라드메서는 계속해서 마 치 혼잣말 하듯 등 뒤의 넥슨에게 말했다. "네가 왜 전체가 아닌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이제 말해주겠다. 넌 드래곤 라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후까지 남겨진 너의 마지막 일부까지도 파괴해버렸다." "뭐라고?" 라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 시 바라본 넥슨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정말 넥슨이 말했나? "그래. 넌 이제 없다." "없다고?"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드래곤과, 인간과, 드래곤 라자가 있었지. 하지만 계약은 끝났고, 이제는 드래곤과 인간만이 남았다. 드래곤 라자 넥슨 휴리첼. 넌 없다. 그러니 더 이상 나로 하여금 허공에 대고 말하게 하지마라." 넥슨이 없다고?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난 인간과 관계를 맺겠소." "예?" 카알의 반문에 크라드메서가 카알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을 때, 갑작스런 후작의 외침이 들려왔다. "당신의 복수에 나를 동참시켜주기를 바란다!" "할슈타일!" 길시언이 악에 받힌 고함소리를 지르며 휘청거리며 달려나가려했다. 난 후작을 노려보았다. 저 교활한! 정말 빠르군, 후작! 샌슨이 다시 길시언 의 겨드랑이를 안아올렸으나 길시언은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반역자! 악취나는 그 입을 다물엇! 쿠훌럭!" "길시언, 길시언! 제발 진정해요. 흥분하면 독이 더 퍼진다고요!" "독! 그래, 독! 너 이 놈, 후작. 네 놈은 독이야앗! 쿠르… 쿨럭쿨럭!" 길시언은 내장을 다 쏟아낼 듯이 기침을 토했지만 후작은 길시언의 외 침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며 빠르 게 말했다. "크라드메서. 당신이 잃은 것을 기억하라. 드래곤은 인간이 받은 축복 은 받지 못했다. 넌 잊을 수가 없는 존재다. 그러니 21년 전의 너의 감 정은 어제의 감정처럼 생생할 것이다. 당신은 라자를 잃었다." "당신 때문이잖아!" 이번엔 레니를 무릎 위에 놓아둔 네리아가 외쳤다. 후작은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네리아를 노려보았다. 네리아는 바닥에 앉은 채로 고래고래 외 쳤다. "후작 당신이 그 불륜을 고자질해서 까뮤가 죽도록 만들었잖아! 뻔뻔스 럽게! 까뮤 휴리첼은 당신 때문에 죽은 거잖아!" "닥쳐랏, 더러운 암캐!" 곧 네리아의 눈썹이 하늘로 올라갔다. "뭐야?" 곧이어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네리 아는 참신한 시각과 독특한 비유 능력을 기반으로 한 풍부한 비속어 구 사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몹시 붉히며 네리아를 외면했으며 제레인트는 아무 말도 못들은 척했다고만 말하겠 다. 한참 후에야 후작은 음산하게 말했다. "입이 더러운 계집이로군." 네리아는 당장 말하지는 못하고 다만 숨을 씨근거리며 후작을 노려보았 다. 욕설을 너무 많이 말해서 숨이 가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후작과 네리아의 설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크라드메서만을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가 라자를 가지자마자, 그렇게 되자마자 우리는 그와 관계를 맺기 위해 또 싸우는 것인가?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을 보면 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크라드메서는 여전히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서있었다. 땅을 향한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떠있던 넥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핏줄의 아버지를 잃었고, 자라나서 다시 키워준 아버 지를 잃었고, 영원의 숲에서 자신의 3/5를 잃었던 넥슨이, 이제 최후로 드래곤과 계약함으로써 다 없어졌단 말인가? 왜 이 모양이지? 왜 넥슨은 오로지 파괴되어온 것이지? 그러고보니 나와 우리 일행들도 그의 것을 파괴했군. 우리는 그의 길드를 파괴해버렸었지. 왜 그는 저토록이나 파 괴된 후에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일 이것이 유피 넬이 정한 것이라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넥슨은 말도 제대로 못꺼낸 채 그저 망연히 크라드메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식이 담긴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크라드메서를 보고 있 었지만 촛점이 맞지 않는다. 죽은 자에게도 살아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살아있을 때의 감정, 추억, 그의 얼굴에 남겨져 그가 지내온 세월 을 증명하는 세월의 풍상. 하지만 넥슨의 얼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텅 비어버린 얼굴. 크라드메서의 말보다, 나는 넥슨의 얼굴을 봄으로써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죽었다. 그리고 넥슨을 바라보았기에 난 시오네의 행동을 볼 수 있었다. "넥슨, 조심햇!" 발악같이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카아알! 아프나이델! 누구든지 시오네를 쏴요!" 순간 고개를 들어올리는 크라드메서. 누군가가 터뜨린 비명소리. 혼란. 난 위만 보고 달려가다가 풀에 다리가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땅에 호되 게 부딪히고, 별이 깜빡거리는군. 몸을 다시 일으키는 순간, 크라드메서 의 파랗게 굳어버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넥슨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영원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은 그를 붙잡으려드 는 것 같았고 땅은 그를 피하려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를 아 래로 내리밀고 있었다. 넥슨은 몸부림 한 번 없이 고요히 떨어졌다. 털썩! 넥슨은 내 바로 앞, 크라드메서와 우리 일행, 그리고 후작 일행 이 만들고 있던 삼각형의 중앙에 떨어졌다. 몸이 한 번 거칠게 요동하다 가 그는 똑바로 누웠다. "꺄아아아악!"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 난 벌벌 떨면서 넥슨의 모습을 바라보았 다. 그다지 높지도 않은 위치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기 괴한 각도로 뒤틀려있었다. 죽었다. 절대로 살아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의 입에서 피거품이 비어져나오는 것이다. 꾸르르륵. 넥슨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다. 그의 몸 주위로 흘러나오는 붉은 피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를 지 탱하고 있던 마지막의 마지막 희망까지도 스스로가 파괴해버렸다는 절망 감 때문일까? 그의 몸은 뼛조각 하나까지 박살이 나버린 듯했다. 피칠갑 을 한 얼굴에서 하얀 눈동자가 희한하게 번들거린다. 눈물이 흐르고 있 나? 죽어서 우는 것인가? 뒤로 튕겨지듯 일어나며 하늘을 본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시, 시오네엣!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팬텀 스티드 위의 시오네는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삐를 한 손에 몰아쥐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 에는 넥슨을 찔렀던 그 대거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제야 끝났군. 그 때 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 기 어려웠겠지. 고맙다, 꼬마." "이, 이, 배, 뱀파이어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 하는 거야!" 시오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대거가 그녀의 입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오네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대거를 핥기 시작했다. 대단히 느린 속도로 대거가 그녀의 혀 위를 미끄러진다. 넥슨 의 피가 시오네의 혀를 타고 그녀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순간 참을 수 없 는 욕지기가 느껴졌다. 허리를 숙이고 확 토해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시오네는 대거를 다시 품 안에 집어넣더니 먼곳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 어올렸다. 그리곤 여전히 먼곳을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말했다. "후치. 머리가 좋은 꼬마로 알고 있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크 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맺게 하고, 그의 라자를 눈 앞에서 죽이는 것. 어렵지 않잖아?" "오, 맙소사!" 제레인트가 헐떡이며 말했다. 난 입을 열었으나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 았다. 힘들게, 너무나 힘들게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를 본 다. 크라드메서는 하얗게 굳어있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34. 대마법사에게 딸들이 셋 있었네. 마법사가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싸늘한 죽음이 그녀들을 찾아왔지. 누가 있어 그 죽음을 애도할까? 갑자기 시오네는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호흡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 한 고요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바스락거리듯 떨리며 울려퍼졌 다. 처음엔 불성실한 맏딸이, 그 다음엔 되먹잖은 트롤 차녀가. 풋내나는 막내딸은 가장 마지막에. 차례차례 죽어갔지. 태어날 때처럼. 크라드메서의 하얀 얼굴과 시오네의노랫소리를 들으며 세상이 빙글빙 글 도는 것을 느낀다. 트롤 차녀는 에델린이고 막내딸은 레니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맏딸은? 시오네는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랫소리도 점점 가늘어졌다. 맏딸의 이름은 바이서스. 드래곤에게 잡혀가서 콱 깨물렸지. 트롤 차녀의 이름은 에델린. 폭풍의 신이 그녀를 데려가 콱 깨물었지. 막내딸의 이름은 레니. 어느 뱀파이어에게 콱 깨물렸지. 하이호오. 웃자. 무덤 주위를 돌고. 관 위에는 시든 꽃잎을 뿌리자. 애도의 종소리 땡땡땡. 한숨은 길고 태양은 진다. 대마법사에게 딸들이 셋 있었네. 마법사가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싸늘한 죽음이 그녀들을 찾아왔지. 싸늘한 무덤만 세 개 남았네. 시오네는 이제 회색빛 구름이 머리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버렸다. 맏딸의 이름은 바이서스. 핸드레이크가 만들어내다시피 한 이 나라. 드 래곤에게 잡혀가서 콱 깨물렸다고?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맺게 하고, 그의 라자를 눈 앞에서 죽이 는 것. 어렵지 않잖아?" 크라드메서의 눈 앞에서 그의 라자의 죽음을 보여준다고? 라자를 잃은 드래곤은 어떻게 되더라? 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에는 한 가닥 희 망을 담은 채 크라드메서를 바라본다. 그러나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본 순간,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희망까 지도 사라져버렸다. 바위에 눈 코 입을 달아놔도 지금의 크라드메서의 얼굴보다는 훨씬 인 간미가 있을 것이다. 크라드메서는 그저 한없이 하얀 얼굴로 넥슨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넥슨의 몸에서 번져나오던 피가 이제 거대한 원을 그 렸다. 크라드메서는 걷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철퍽철퍽철퍽!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피를 밟으며 점점 빠르게 걸어왔다.마지막 순간 그는 거의 미끄러지듯이 넥슨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날아오른다. 단숨에 크라드메서의 무릎 아래가 피에 젖어든다. 천천히 움직인 크라드메서의 손이 넥슨의 볼에 닿았다. "넥슨?" 넥슨의 볼을 만지던 크라드메서는 흠칫 하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을 눈 앞까지 들어올렸다. "눈물?" 크라드메서의 손가락 끝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크라드메서는 자신 의 손을 보더니 다시 얼굴을 아래로 내려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 눈물을 흘리는 거야? 살아있는 것인가? 그렇지?" 크라드메서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 굴을 깊이 숙여 넥슨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느끼는 것이군. 넥슨?" 크라드메서는 이제 머리를 천천히 움직여 넥슨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 다.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넥슨? 넥슨… 넥슨?" "으흑!" 네리아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무릎에 엎드린 레니의 등 위로 몸을 던졌다. 네리아는 레니를 그러안으며 울기 시작했다. "크흑!" 제레 인트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 보였다. 목안이 왜이다지도 답답한 것이지? 그리고 이 뜨거운 것은 도대체 뭐지? "넥슨…" 크라드메서는 더욱 낮게 속삭였다. 산들바람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 그러나 넥슨은 흰자위를 보인 채 죽어있을 뿐이었다. 그의 잎에서 왈칵 거리며 피가 흘러나온 순간 나는 그가 살아있는 것인 줄 알고 고함을 지 를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라드메서가 넥슨의 가슴을 짚은 것 때문이 었다. 크라드메서는 넥슨의 가슴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크라드메서는 숨 쉴 사이없이 넥슨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점 점 높아졌다. 그리고 넥슨의 가슴을 흔드는 그의 손길도 점점 강해졌다. 넥슨은 이제 팔다리를 흉하게 휘저으며 들썩거렸다. 그의 몸이 들썩임에 따라 바닥의 피웅덩이가 질퍽거렸다. 핏방울이 튀어올라 크라드메서의 상반신을 물들였다. 크라드메서는 피에 젖은 채 외쳤다.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슨! 넥…" 크라드메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아아아… 으어어…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그의 목이 그대로 뒤로 꺾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라드메서 는 고개를 젖혔다. 그는 하늘을 향해 고함질렀다. "으와아아! 으와아아아앗!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악…!" 목이 터져나갈 듯이 지르던 크라드메서의 비명이 갑자기 멎었다. 크라 드메서는 넥슨의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넥슨의 가슴에 얹고는 꼼 짝도 하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한껏 젖혀진 그의 얼굴도 그대로였다. 입은 커다랗게 벌어져있었고 두 눈은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하늘 을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 아냐. 붉은 색이다. 핏빛 눈물. 피눈물. 크라드메서의 눈에서 흘러나온 두 줄기 붉은 피는 하얗게 굳어있는 그 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 곁을 지나 턱선에 이른 핏물이 잠시 멈 칫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던 핏물이 몰리면서 핏줄기는 잠시 멍울져 커지다가 툭 떨어지듯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핏줄기는 이제 목으로 흘 러내렸고 빠르게 그의 갑옷 속으로 사라졌다. 크라드메서는 절규하는 모습 그대로 조각이 되어버린 듯했다. 눈꺼풀 도, 그의 입도,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의 눈에서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크, 크, 쿠르, 크으…" 크라드메서의 입에서 의미없는 말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후작이 외쳤다. "뒤로 물러낫!" 망연히 고개를 돌려 후작을 본다. 후작은 이미 등을 보인 채 줄달음질 치고 있었고 그 전사들도 하나 둘 걸음을 떼기 시작하더니 곧 굉장한 속 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알? 계속 여기에…" 샌슨이 평소 목소리보다 반 정도 낮아진 음색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가세!" 카알은 그렇게 말하며 곧장 몸을 돌렸다. 네리아에게 부둥켜안겨 있던 레니가 몸부림을 쳤다. "안돼요, 비정해요옷! 어떻게 내버려두고…" "살아야 하오!" 카알은 그렇게 외치며 곧장 나와 샌슨에게 눈짓했다. 샌슨은 레니를 달 랑 들어올렸으며 나는 길시언을 들어올렸다. 제레인트는 에델린의 지팡 이라도 되어주기 위해 황급히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쳤지만 에델린은 팔 을 빼며 스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 다음 순간 우리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크라드메서와 넥슨의 시체만을 남겨두고. 그리고, 많이 달려가지도 못했다. "크롸라라라라라!" "으아아악!"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길시언을 어깨에 둘러맨 채 달리던 나는 다리가 풀려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운차이가 재빨리 날 부축했다. "정신 차려!" 운차이는 거칠게 외치며 날 부여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다리가 휘청거 린다. 입을 열어 외친다. "소용없어요! 도망가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크라드메서 에게서 도망을…" "닥쳐!" 운차이는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어딜 당겨? 길시언만 아니었으면 당장 당신 턱을 날려버렸을 거야! "어차피 인생의 경기장에서는 아무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순 없다! 그 건 그 경기의 규칙이야! 규칙을 수용하고 끝까지 달려!" 난 멱살이 잡힌 채로 발악했다. "젠장, 고상하게 죽자고요! 그 경기장의 최후의 우승자는 결국 죽음이 잖아요! 경기는 끝났어요. 승자에게 경의를 표하자고요! 패자의 자존심 은 지키겠어요!" 운차이는 순간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난 그를 똑바로 올려 다보았다. 그의 핏발 선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괴상하다. 운차이의 눈빛 이 흔들렸다. 순간 크라드메서의 포효가 다시 분지를 가로질렀다. "크롸라라라라!" 나와 운차이를 앞서 달려가던 다른 일행들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 다. 하나 둘 고개를 돌리는 일행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야. 달려가봐야 뭐하겠어. 살아야 한다고? 물론이지. 죽는 순간까지 내 뜻대로! 난 머리를 거칠게 당겼다. 운차이는 내 멱살 을 놓쳤다. "난 크라드메서를 보겠어요! 최소한 뒷통수에 브레스 맞고 죽진 않겠다 고요! 내 눈으로, 내 죽음을 마주보겠어요!" 운차이의 무시무시한 눈길은 내 몸을 후벼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난 살아난다!" 운차이는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운차이?" 샌슨의 말이 들려 왔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길시언을 내려놓았다. "길시언? 난 달아나지 않겠어요. 죄송합니다만 데려다드릴 수가…" "네 곁에 있겠다."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 길시언의 얼굴은 이제 투명해보일 정도였다. 길시언은 갑자기 격한 기침을 쏟으며 주춤거렸고 난 그를 부축했다. "아샤스여…" 길시언의 시선을 따라간 내 눈에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비춰졌다. 드래 곤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분지가 언제 이렇게 좁아졌지? 저 산이 왜 저렇게 낮아진 거야? 크라드 메서는 긴 목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려 우리들에게 붉은 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홍색의 거대한 몸과 길다란 목, 그 목을 타고 흐르는 검은 줄 이 그대로 크라드메서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크라드메서는 한 그루 의 붉은 나무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 갑자기 그 나무의 가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검은 가지, 차츰 붉은 부분이 드러난다. 크라드메서는 양쪽으로 날개를 활짝 폈다. 뒤의 산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아, 아니다. 아직도 펼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다 펼쳤다고 느꼈을 때 크라드메서는 그 날개의 절반 도 펴지 않은 것이었다. 맙소사, 드래곤을 보살피시는… 드래곤을? 잠 깐, 그러고보니 드래곤의 신은 없잖아? "크롸라라라라!" 이제서야 크라드메서는 300 큐빗은 족히 넘을 그 날개를 모두 펼쳤다. 목을 타고 흐르는 검은 선은 날개로 이어져 점차 복잡해졌다. 마치 나뭇 잎의 엽맥처럼 복잡해지던 검은 선은 날개의 끝부분을 칠흑의 색으로 물 들이고 있었다. 이제 그의 몸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날개를 간신히 받치 고 있는 가느다란 검날처럼 보였다. 검날? 그러고보니 가느다란 목은 검 신이고, 가슴은 가드, 그리고 모아선 앞다리는 손잡이처럼 보였다. 칼날 에서 거대한 불꽃이 일렁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밤하늘 속에서 타오르는 홍적색의 검… 크라드메서였다. "숨 쉬는 자! 숨을 멈춰라!" 으아악! 크라드메서의 포효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와 길시언은 한덩어리 가 되어 뒤로 나가떨어져버렸다. "오우, 제에기랄!" 땅을 뒹굴면서 무수 히 많은 풀들이 세상을 뒤덮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정신없이 뒤섞여 흐르는 초록색 풀의 모습뿐. 풀들의 아우성 소리와 미친 듯한 바람소리.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날 때리는 것 같다. "크으으윽!" 얼마를 뒹굴었는지도 모르겠다. 턱을 사납게 땅에 부딪히며 나는 간신 히 굴러가던 것을 멈췄다.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보니 앞으로 몸을 숙인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제레인트는 폭풍우를 정면으로 받는 사 람처럼 왼팔을 얼굴 앞에 들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 진짜 폭풍 이 불고 있었다. 제레인트의 머리가 모조리 떠올라 뒤로 날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억지로 뜨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땅을 걷는 자! 걸음을 멈춰라!" 주루룩! 맙소사, 저건 말이 안돼! 제레인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 그대로 뒤로 세발짝 정도 미끄러졌다. 콰당. 기어코 제레인트는 앞으로 쓰러졌다.손을 땅에 짚는 동안 다시 뒤로 미끄러졌다. "이익!" 제레인트는 풀을 그러쥐며 미끄러지는 것을 멈췄다. 난 옆의 풀을 잡아 채며 다른 팔로는 길시언의 허리를 붙잡았다. 길시언은 기침도 제대로 토하지 못하며 헐떡였다. "수, 숨을 쉴 수가아…" 빗발처럼 날아다니는 풀들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어댄다. 머릿카락이 뭉텅이로 뽑혀나가는 기분이 든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바람 속에서 주위를 힘겹게 돌아본다. 모두들 풀이나 서로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오, 맙소사. 이 정도일 줄 은 몰랐어! 엉터리야! "세상을 보는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휘몰아치던 바람은 멎었다. 허공에서 갈갈이 찢기고 있던 풀잎들은 꿈 속에서 떨어지는 물체처럼 고요히 떨어져내렸다. 늦은 봄 떨어지는 꽃잎 처럼 초록의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졌다. 제레인트는 머리를 쓸어넘기 며 주위를 살폈다. "바람이… 그쳤다?" "후치! 길시언! 모두들 괜찮아요?" 샌슨이 뒤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체구가 커서인지 다른 사람 보다 더 많이 밀려나있었던 모양이다. 옆에선 네리아가 땅에 박아둔 트 라이던트를 뽑아내고 있었다. "영차!" 저기에 매달렸던 모양이지? 제레 인트는 뒤집어진 로브를 바로입느라 정신이 없었고 에델린은 그 광경에 서 점잖게 눈을 돌리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아프나이델을 부축하고 있었 다. 그 때 카알이 외쳤다. "레니양?" 레니? 레니가 어디 있지? 뒤를 아무리 돌아봐도 레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바람에 날아가버렸나? 풀에 가려서 안보이는 건가? 난 제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때 길시언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반대쪽이다." 반대쪽? 난 다시 고개를 돌려 크라드메서를 향했다. 레니는 크라드메서쪽을 향한 채 똑바로 서있었다. 레니는 바람의 영향 을 전혀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지? 그 때였다. 레니가 갑 자기 주저앉았다. "레니?"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갔다. 크라드메서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꼼짝 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왜 저러는 걸까? 레니의 어깨를 짚었다. 순간 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이크! 너무 세게 짚었나? 그건 아닌데? 난 기겁하면서 레니를 바라보았 다. 레니는 혼란에 빠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니?" 레니는 내가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크라드메서의 눈치를 보면서 레니에게로 다가왔다. 레니 는 멍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고마웠어." "응?" "고마웠어. 후치. 다른 여러분들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몸이 굳어버렸다. 걸어오던 네리아는 레니의 말을 듣는 순간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레니는 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모두 죽을 거에요." 그 순간 크라드메서는 날개를 치기 시작했다. 풀의 파도 속에 드문드문 서있던 일행들은 모두 꼼짝도 하지 않고 크라 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펄럭, 펄럭. 저 거대한 날개가 움직이다니. 델하 파의 항구에서 보았던 범선들의 돛은 비교도 안되는 거대한 날개가 어떻 게 움직인단 말이야. 하지만 크라드메서의 날개는 우아하게 움직였다. 비상은 순식간이었다. 날개치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싶더니 어느새 크라드메서는 땅을 박차 고 날아올랐다. 눈은 크라드메서의 비상을 바라보면서 머리는 수많은 생 각들에 내어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모두 드 래곤에게 잃게 되셨어요. 어쩌면 당신께서도 그렇게 되시겠죠. 제미니, 정말, 정말 지금 누군가가 날 너의 곁으로 옮겨주고 이야기를 건넬 시간 을 더도 말고 5분만, 아니 1분만 준다면 그에게 내 무엇이라도 줄 텐데. 이루릴. 이 세계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크라드메서에 의해 파괴된 땅에 는 엘프의 손길이 필요할 거에요. 제기랄! 왜 꼭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 사람들은 주위에 없는 거지?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우리 머리 위로 엄습해들어왔다. "크롸라라라!" 하늘을 날던 크라드메서가 갑자기 거세게 날개를 휘저으며 속도를 늦췄 다. 난 크라드메서의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은 보 석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입안에서는 불길이 일렁거렸다. 이제 최후인 가? 그냥 서서 죽다니 조금 싱겁군. 이런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17 년을 살아왔는가? 고개를 돌려본다. 제레인트는 뭔가 빠르게 기도하고 있었 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캐스팅하는 모습도 보였다. 길시언은 힘겹게 프림 블레이드를 들어올리고 있었고 카알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고 있 었다. 그래. 이왕 죽을 거, 손에 칼을 쥐고 죽자. "그래도 내 인생은 괜찮았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든 순간 하늘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 14. 정답이 없는 선택……35. 백색. 하늘을 가득 메운 백색의 섬광 때문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귀는 너무 높은 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완전히 먹어버렸다. 그래서 완전한 고요 속에서 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그저 하얗기만 한데? 그 때 하얀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날아갔다. 날아가는 듯 했다. 내 눈이 본 것은 그저 하얀 빛이 사라지며 검붉은 무엇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 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롸라라라라!" 빠르게 움직이던 것은 크라드메서였다. 속도를 늦추며 브레스를 쏘려던 크라드메서가 갑자기 속력을 높이며 우리 머리 위를 그대로 지나친 것이 다. 곧 그의 뒤를 따라오던 바람이 거세게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난 바람 에 밀리면서도 눈 앞의 광경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믿을 수 없는 대파괴의 모습이었다. 검게 타버린 땅. 저 자리에 풀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 었다. 풀 한 포기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타버렸다. 그리고도 모자라 땅 은 수백 큐빗에 걸쳐 파헤쳐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우리 앞쪽으로 저런 자국이 생긴 거지? 그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진다 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리는 순간 이번에는 푸른 것이 머리 위 를 휘익 지나쳤다. 그리고나서 이번엔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도저 히 견디지 못하고 나와 길시언은 한덩어리가 되어 앞으로 쓰러졌다. "으으윽!" 그대로 땅을 한 바퀴 굴렀다.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 저편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지는 크라드메서의 뒷모습이었다. 그럼 반대쪽에서 날아오던 것은 뭐였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하 늘 반대편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지는 푸른 물체가 보였다. "쿨, 쿨럭! 저건?" "맙소사… 맙소사!"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던 푸른 몸 체는 거대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에 반경 수천 큐빗에 달하는 원호를 그리며 다시 우리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똑같은 원호를 그리며 날아오 는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보였다. 저 둘이 만들어내는 원은 혹시 갈색 산 맥 전체를 뒤덮지 않을까? "크롸라라라!" 크라드메서가 거칠게 포효했다. 그러자 맞은 편에서도 포효소리가 들려 왔다. "캬아아아아!" 네리아의 얼굴은 볼만했다. 그녀의 얼굴엔 공포 반, 그리고 기쁨 반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정신없이 움직이 며 더듬더듬 말했다. "벼, 벼, 벼… 벼락 드래곤?" "지골레이드다!" "어떻게 된 거야? 지골레이드가 여기 왠 일이지?"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이 얼빠진 얼굴로 지골레이드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지골레이드는 거대한 날개를 모조리 펼친 채 무서운 속도로 하 늘을 미끄러져오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크라드메서가 미끄러져내리고 있었다. 어라? 이, 이런! "길시언. 나 지금 몹시 좋지 않은 처지에 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모종의 행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길시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서 달리자는 말을, 쿨럭. 너무 길게 하는군." 이런, 제에엔장! 크라드메서와 지골레이드가 맞닥드리게 되는 곳은 바 로 우리 머리 위잖아? "우와아아앗! 달아나아!" 샌슨이 목놓아 외치자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어,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달아나? 달아나야 돼. 조금 전까지야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말 이야. 이제 지골레이드가 왔잖아? 그리고 크라드메서를 공격하고 있다. 내 인생은 그런대로 괜찮았고, 아직 마침표는 찍지 않아도 될 거 같다. 그러니까… 그런데! 이 광활한 분지에서 어디로 달아나야 되지? 그 때였 다. "이쪽으로!" 무시무시한 목소리.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지. "운차이? 안 달아났어요? 거기서 뭐해요?" 멀리서 운차이가 손짓하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다. 다음 순간 난 운차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 고 길시언을 어깨에 둘러맨 채 달려가고 있었다. 곧 등 뒤에서 일행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와아아! 드래곤들의 싸움이라니!" "제레인트! 정신 차려요! 달리라고요! 그렇게 뒤돌아보지 말고!" "아, 예… 우와…? 굉장하다?" "아프나이델! 저 녀석 엉덩이에 불 좀 붙여라!" "에, 엑셀핸드님. 지금은 달리기도 바빠…" "정말… 멋진… 으악! 무슨 짓입니까, 네리아!" "빨리 안 달리면 또 찌를 거에요! 어서 달려욧!" "좋았어! 잘했어요, 네리아양! 계속 찔러욧!" "카아아알!" 음. 고개를 돌려보자 거꾸로 쥔 트라이던트로 소 몰듯이 제레인트를 몰 아오는 네리아의 모습과 그 옆에서 박수를 치며 달려오는 카알이 보였 다. 다시 운차이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엎드려!" "이런, 길시언! 날 욕해도 좋아요!" 난 또다시 길시언을 밀어넘어뜨리며 그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쓰러지는 거지? 그 순간 머리끝이 곤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앗!" "크롸라라라라!" 뭔가가 충돌하는 굉음, 그리고 격렬한 날개짓 소리. 누운 채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반대편 하늘로 날아가는 크라드메서의 모습 이 보였다. 그런데 지골레이드는? 지골레이드 역시 반대편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행이 아주 이상했다. 비틀거리며 당장이 라도 떨어질 듯 힘겹게 날아올라가는 것이었다. 운차이가 이를 갈며 외 쳤다. "제길! 날개를 당했어! 모두 일어나 달려! 어서 이쪽으로!" 두 드래곤이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동안 우리들은 죽을 힘을 다해 달렸 다. 나는 길시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 길시언 역시 짐짝 취급을 당하 면서 몸에서 힘을 쭉 뺐기 때문에 그를 들고 뛰는 것은 쉬웠다. 크라드 메서와 지골레이드가 하늘을 돌아 반전하는 동안 우리들은 거의 분지 끝 까지 달렸다. 분지 끝에는 절벽이 보였고 그 가운데 약간 갈라진 곳이 보였다. 운차 이가 발견한 것이 저건가? 운차이는 그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다른 생각할 여유 없이 절벽 틈으로 뛰어들었다. 왠지 고양이와 개 싸움을 보 고 도망치는 쥐가 되는 기분이야. 지금 들어가는 곳도 꼭 쥐구멍 같고. "와랏찻차차!" 마지막으로 제레인트와 네리아가 뛰어들어옴으로써 일행들은 모두 절벽 틈으로 숨었다. 절벽 틈은 좁은 입구에 비해 볼 때 꽤나 깊숙했다. 여긴 인간은 들어오겠지만 드래곤은 못들어오겠군. 됐어! 일행들은 모두 숨넘 어갈 듯 헐떡거리며 주저앉았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집어던지더니 펑펑 울면서 운차이에게 안겼다. "와아아앙! 운차이!" 운차이는 쓴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바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후우, 후우우. 도망치던 것 아니었나?" 운차이는 네리아를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나에겐 너희 북부 미련둥이처럼 죽음 앞에서 몸에 힘이 빠지는 약점은 없다." "그래? 그런데 왜 돌아왔지?" "…여길 발견해서." "그래, 그래! 여길 발견해서. 웅웅. 우리들 모두 살려주려고?" 네리아는 콧소리를 심하게 내었다. 운차이가 얼굴을 구기면서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앗!" 아차, 지골레이드는? 난 길시언을 내려놓으며 다시 하늘을 살폈다. 우리 일행들은 절벽 틈 사이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드래곤의 싸움을 바라보았 다. 개와 고양이, 그리고 쥐구멍에 숨어서 지켜보는 쥐떼들. "저거, 위험하겠어?" 아프나이델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두 마리의 드래곤은 서로를 향 해 맹렬히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골레이드의 속도는 느렸고 그 날 개에선 뒤로 길게 피구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붉은 강이 흐르 는 것처럼 보였다. 숨을 몰아쉬던 카알 역시 절망섞인 탄식을 뱉었다. "후우, 우… 이런, 안되겠어. 저래가지고서야." 그 때였다. 크라드메서를 향해 매끄럽게 날아들고 있던 지골레이드의 목 뒷부분에서 뭔가 하얀 빛이 엉겨들기 시작했다. 엑셀핸드가 기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후욱, 후욱. 드, 등에 저거 뭐야?" 순간 지골레이드는 날개를 크게 비틀었다. 지골레이드는 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느리게 날아오던 지골레이드는 쉽 게 몸을 틀었지만 크라드메서는 그대로 날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구름이 붉게 일렁거렸다. 구름이 왜? 구름을 뚫고 불덩어리들이 떨어져내렸다! "미티어 스웜이다!" 아프나이델이 외쳤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불덩어리들은 정확하게 크라드메서의 진로 앞쪽으로 떨어져내렸다. 슝슝슝슝슝슝! 크라드메서의 속력까지 계산한 정확한 공격이다. 속도를 추스리지 못하고 날아들던 크 라드메서는 곧장 미티어 스웜의 비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됐어! 저 속도에선 못피해!" 샌슨은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뻐하며 외쳤다. 그 때 크라드메서는 갑자 기 날개를 뒤로 한껏 젖혔다. 크라드메서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졌 다. "통과할 속셈인가!" "설마?" 크라드메서는 좌우 날개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불덩어리들의 비 사이를 비행했다. 콰앙, 쾅쾅쾅쾅쾅! 불덩어리들이 땅에 부딪히며 분지는 무서 운 폭발로 가득차버렸다. 하늘로 치솟는 빛과 화염, 그리고 흙과 돌덩어 리들. 운차이가 고함질렀다. "이런! 더 안쪽으로!" 분지에서 튀어오른 바위들이 우리가 숨어있던 절벽을 타격했다. 쿠왕쾅! 절벽 전체가 울렸 다. 그러나 크라드메서는 유연하게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불덩어 리를 피하며 그 파도치는 폭발 위를 날고 있었다. 기막혔다! 200 큐빗은 족히 넘을 저 몸이 찌르레기라도 된 것처럼 날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저 몸이?" 제레인트가 당장이라도 다시 분지로 달려나갈 듯이 움찔거리며 소리지 르는 순간, 급격히 솟아오르던 지골레이드의 목 뒤에서 이번에는 불의 강이 뛰쳐나갔다. 푸화하하학! 폭 수십 큐빗은 되는 불의 강은 마치 하늘에 붉은 융단을 까는 것처럼 좌악 뻗어나갔다. 크라드메서는 미티어 스웜이 쏟아지는 지 역을 거의 빠져나왔지만 지골레이드의 등에서 뛰쳐나간 불의 강은 바로 크라드메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됐다! 됐어! 이번에야말로 절대 못 피해!" 샌슨이 날뛰며 박수를 친 순간, 하늘을 가로지르던 크라드메서의 몸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블링크?" 크라드메서의 몸은 불의 강 바로 위에 서 나타나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이런 억장 무너지는 경우가 있나! "샌슨! 다음에 지골레이드가 공격할 땐 조용히 있어!" "알았어…" 목표를 잃은 불의 강은 그대로 하늘을 가로질러 건너편 산봉우리에 작 렬했다. 꽈르르릉! 산봉우리가 거대하게 울렸다. 그리고 산 전체가 불타 기 시작했다. 쿠-쿠-쿠르르릉! 천둥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불타오르던 산봉우리가 서 서히 붕궤되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얼 빠진 얼굴로 불타며 파괴되는 산봉우리를 보며 말했다. "빛의 탑의 명예를 걸고! 난 저걸 모르겠어. 저, 저건 도대체 무슨 마 법이지?" 그 때 같은 곳을 바라보던 카알이 펄쩍 뛰었다. "이야아아!" 카알은 기쁨에 몸을 떨면서 괴성을 질렀다. 아이고, 맙소사. 카알! 드 디어? 카알은 지골레이드를 바라보며 커다랗게 웃었다. "으핫하하하! 내가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소! 전에 봤던 것이거든? 저 건 샐러맨더와 실프의 무도회요!" "예? 아니…!" 카알은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꼭 미친 사람처 럼 보이는데? 하지만 나 역시 입술을 벌벌 떨면서 운차이의 대답을, 그 기쁜 대답을 기다렸다. 운차이는 지골레이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 다. "맞소. 그녀요." 샌슨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루릴!" …설마 이루릴이 이루릴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 14. 정답이 없는 선택……36. "콰르르르르!" 하늘을 미끄러지던 크라드메서는 갑자기 수직으로 솟구쳐오르기 시작했 다. 하늘로 똑바로 쏘아올려진 화살처럼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구름을 뚫 고 사라졌다. 그러자 지골레이드는 이제 땅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저러다 부딪히겠어!" 지골레이드는 배에 풀이 닿을 듯이 분지 위를 미끄러졌다. 지골레이드 의 비행에 휘말린 풀들이 뿌리채 뽑히며 그 뒤를 따라 떠올랐다. 제레인 트가 펄쩍 뛸듯이 외쳤다. "크라드메서의 장기, 아니, 크림슨 드래곤의장기인 급강하 공격을 피 하려는 겁니다! 크림슨 드래곤의 공격 방식은 하늘에서 쏘아지는 벼락처 럼 내려꽂히며 공격하는 것! 우와, 미치겠어!" 아프나이델이 허연 얼굴을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크림슨 드래곤은 가장 높이 나는 드래곤이니까요. 게다가 구름 때문에 크라드메서를 볼 수 없지요. 그래서 공격 못하도록 저공비 행하는 것이군요." 그래? 야, 이거 인간들끼리 칼 들고 싸우는 것은 싸움 축에도 못끼어들 겠군. 대왕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저런 생물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 운차이가 느닷없이 외쳤다. "내려온다!" 그 순간 구름이 인정사정없이 찢어지며 크라드메서가 다시 나타났다. 크라드메서는 지골레이드의 뒤쪽에서 나타나 그대로 지골레이드를 향해 쏘아져내려갔다. 저러다 둘 다 땅에 부딪히겠어! 그러나 크라드메서는 내려꽂히면서 브레스를 뿜었다. 저 영리한 놈! 카알은 졸도하고픈 표정 으로 말했다.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에 의해 던져진 길이 수천 큐빗짜리 불의 창이 땅을 향해 비 스듬히 내려꽂혔다. 지골레이드는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으나 워낙 낮게 날고 있던 터라 움직일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캬아아아앗!" 크라드메서가 뿜어낸 화염의 창은 지골레이드의 날개를 완전히 관통했 다. 지골레이드가 땅에 닿기 직전, 그의 목 뒤에서 검은 점이 위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지골레이드는 화염에 휩싸이며 그대로 땅에 추락했다. 격렬한 화염이 불타고있던 분지 위로 지골레이드의 푸른 몸이 나뒹굴었 다. "케에에엑!" 왠만한 성채만한 불덩어리가 산에 부딪혔다. 불타는 지골레이드를 받아 들이며 갈색산맥 전체가 진저리를 치며 신음을 흘렸다. 산에 부딪힌 지 골레이드는 굴러가는 것을 멈추었으나 그 위로 절벽이무너지기 시작했 다. 콰-콰릉, 콰르릉! "안돼!" "캬, 캬아악!" 지골레이드는 날개를 퍼덕이며 일어나려고 애썼으나 그 위로 무너지는 바위는 엄청났다. 잠시 후 지골레이드는 불에 타고 바위에 짖이겨진 처 참한 모습으로 나동그라졌다. 브레스를 뿜었던 크라드메서는 땅에 부딪 히지 않기 위해 다시 날개를 떨치며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지골레이드의 목 뒤에서 뛰쳐나온 검은 점은 그대로 분지 위의 하늘을 날았다. 그것은 잠시 멈춰 지골레이드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곧 우리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폐허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파괴된 분 지 위로 한 마리 제비처럼 날아온 검은 점은 이윽고 이루릴의 모습으로 커졌다. "이루릴!" 이루릴은 분지 위에 살짝 내려섰다. 우리가 숨어있는 절벽 틈의 입구에 해당하는 위치에 선 그녀는 땅에 닿자마자 우리들을 주욱 둘러보더니 모 든 사람들을 향해 굉장히 빠르게 인사했다. "여러분들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지금, 충족된 그리움 속에서 저는 기쁩니다." 백 마디 말이 필요없었다. 나는 도무지 무슨 말로 대답해야 될지 모른 채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 그리고 깊은 눈매를 보자 목이 콱 막혀왔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모양이지? 카알이 간신히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니얼양! 돌아왔군요!" 이루릴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약속했던대로… 리치몬드는 핸드레이크가 아니었습니다." "잘왔네! 정말 반갑구먼!" 엑셀핸드도 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곧 이루릴은 수많 은 인사에 일일이 대답하느라 곤욕을 치러야했다. 네리아는 이루릴을 껴 안고 팔짝팔짝 뛰었고 샌슨은 혼자서 팔짝팔짝 뛰었다. 하지만 쓰러진 지골레이드와 하늘을 돌고 있는 크라드메서 때문에 우리들의 재회 인사 는 상당히 빨리 끝났다. 이루릴은 한참 후에야 쿨럭거리고 있던 길시언 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길시언? 상처를 입으신 건가요?" 길시언은 미소를 지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아니. 쿨럭! 독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콜록. 그런데 썬더라이더의 저주가 풀렸습니다만. 으큼, 리치몬드는?" "네. 리치몬드는 죽었습니다. 지골레이드가 그를 살해했습니다." 으윽! 이루릴은 어떻게 저렇게도 예쁘게 살해가 어쩌니 할 수 있단말 이야! 우리의 이루릴이 돌아왔다는 것이 이제서야 확실히 실감나는군. 이루릴은 하늘을 흘깃 바라보더니 이번엔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우리 모두와 떨어진 위치에 홀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망연한 얼 굴로 바위에 앉아 크라드메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루릴은 그 모습을 보더니 빠르게 질문을 시작했다. "크라드메서의 행동은 라자가 있는 드래곤의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군 요. 그렇다면 크라드메서의 저 행동은 계약의 실패에 관련된 것입니까?" 어, 어?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러나 우리들 중엔 이루릴만큼이나 함 축성있게 사정을 설명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와 할슈타일 후작의 대립을 틈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된 넥슨이 시오네에 의해 살해당했소." "왜죠?" 아이고… 이루릴이 맞군! 카알은 빠르게 대답했다. "직접 설명을 들은 바는 없지만 아마도 크라드메서를 미치게 만들기 위 해서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21 년 전의 비극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것일 게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일이군요." "그런데 지골레이드는?"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네? 보시는 바와 같이 몹시 다쳤습니다만." 으윽. 엑셀핸드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끙 하는 신음을 흘렸고 아프나 이델은 엑셀핸드의 어깨를 짚었다. 카알은 이 급박한 와중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지골레이드가 여기 왜 왔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그를 타고서 온 것인지도." "그렇습니까? 그는 후작에게 받을 빚이 있어 오던 도중이었습니다. 전 그에게 편승했죠." "빚? 어떤 빚입니까?" 이루릴은 대답하려다가 흠칫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하 늘을 가로질러 다시 땅으로 내려꽂히고 있었으며 그 앞에는 쓰러진 지골 레이드가 있었다. 지골레이드는 몸부림을 치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무너 진 바위덩어리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크라드메서는 거침없 이 날아들었다. 이루릴은 황급히 운차이쪽을 쳐다보았다. 운차이는 절벽 반대쪽을 조사 하고 있었다. 반대쪽에 혹시 길이라도 있을까? 하지만 반대쪽엔 까마득 한 산봉우리가 보일 뿐인데. 이루릴은 손을 반쯤 들어올리다가 내게 고 개를 돌렸다. "후치? 크라드메서에게 멈추라고 말해달라고 운차이씨에게 전해주겠어 요?" 큭! 나와 샌슨은 곧 입을 틀어막으며 바람새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운차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날더러 미친 드래곤을 저지하라고 하는 거요?" 이루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예전에 제가 알던 운차이가 아니군요?" 운차이는 이루릴의 말에 쓴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운차이는 표표히 분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분지쪽으 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미친 드래곤이 인간의 말을 들을진 모르겠지만, 뭔가 생각이 있는 것 이겠지. 그렇잖소?" 운차이는 절벽 틈의 입구에 가까이 가서 멈춰서더니 곧장 숨을 들이켰 다. 우리들은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크라드메서어! 멈춰라아앗!" 절벽을 울리게 만드는 운차이의 고함 소리였지만 폭발음을 계속 듣다보 니 운차이의 고함 소리도 별로 크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크라드메서 는 멈추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운차이의 말을 깨끗이 무시해버리면서 쓰러진 지골레이드에게 날아들었다. 퍼더덕, 퍼덕! 크라드메서는 날개를 거세게 휘저으며 곧장 지골레이드의 위로 다가들었다. 그 순간 이루릴은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자신의 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령이여, 무한의 형태로써 종속되어 마침내 종속을 벗어나는 형태없는 형태여! 그릇된 진실과 참된 거짓의 이름을 부여한다!" 이루릴의 낭랑한 서조림이 끝나자 곧 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는 보통 내린다고 표현하지. 하지만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비는 올라 가고 있었다. 아직도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는 분지에서 하늘로 물방울들 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분지를 적셨던 빗물은 조금 전의 폭발과 불 때문에 모두 증발해버렸을 텐데? 그러나 분지 전체에서 똑같은 속도 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분명 물방울이었다. 어떻게 저 화염 속에서 물방 울들이? "크롸라라라!" 순간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온 포효소리에 등골이 쭈뼛해졌다. 분지 저 쪽에서 또다른 드래곤이 나타났다. 거대한 붉은 몸에 검은 줄무늬, 그리고 목놓아 울부짓는 강맹한 모습, 크라드메서잖아? "크롸라라라!" 이크? 또? 다시 고개를 돌리자 분지를 둘러싼 절벽 위에서 고개를 내미 는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보였다. 지골레이드를 공격하려던 크라드메서는 새로이 나타난 '자신'을 보면서 동작을 멈췄다. 그는 굳어버린 채 분지 를 주욱 둘러보았다. "크롸라라라!" "콰르르르르!" 곳곳에서 크라드메서가 나타났다. 크라드메서는 본격적으로 긴장하며 머리를 낮추었다. 그는 이리저리 머리를 휙휙 돌려대었다. 그 장중한 체 구에도 불구하고 크라드메서는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맹수처럼 보였 다. 제레인트는 숨넘어갈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헷헤헤헤! 크림슨 드래곤의 프라임 미팅이다!" 엑셀핸드는 관자놀이에 지렁이 같은 혈관을 드러내며 제레인트를 바라 보았다. "웃냐? 웃어?" "그럼 저런 광경을 본 최초의 인간으로서 울까요? 크핫하하하!" "최초의 드워프는 울고싶단 말이다!" 제레인트는 저 광경을 보고 종단의 모든 성직자들이 모이는 프라임 미 팅을 연상하는 모양이군. 나도 저런 여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건 내 머리로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라고. 그런데 눈 앞에 이런 모습이 펼쳐진단 말이야. 샌슨은 눈을 소 같이 뜨면서 웅얼거렸다. "열 하나? 열 하나군." 대상물의 덩치나 위암감과 숫자를 빨리 세는 샌슨의 능력 사이에는 별 상관이 없는 모양이군. 분지를 가득 메운 11 마리의 크림슨 드래곤이라 니!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의 멱살을 잡을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건 캐스팅할 수 없어요! 저런 크기론 도저히 마나 억제가 안돼! 시 전자의 의지가, 아니, 아무리 당신이 엘프라도 저런 사이즈로 마나 억제 를 할 순 없어요! 저건, 저건 환영이 아니죠?" "죄송합니다. 환영입니다." 이루릴은 정말 미안한듯이 말했고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기세가 등등해 져서 마치 채권자나 된 것처럼 이루릴을 윽박질렀다. "어떻게 저게 환영입니까!" "보세요. 실프가 언딘의 거울을 하늘에 띄워올려요. 그리고 윌 오 위스 프는 자신이 그러모은 빛을 그 거울에 던져요. 마나가 아니라 정령들의 힘이랍니다." "아…!" 아프나이델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루릴을 바라보더니 다시 분지를 바라 보았다. 그는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나는 그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마법사 관두겠어… 정령사가 더 전망있겠는데?" 아프나이델이 그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전망을 타진하고 있는 동안에 도 크라드메서는 새로이 나타난 자신을, 그것도 10 개나 되는 자신을 바 라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만일 그에게 털이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그 털은 모두 꼿꼿이 곤두서있을 거야. 이루릴은 가만히 서서 분지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영원의 숲에서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 여러분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시더군요." 카알은 뭔가 말할 듯한 얼굴로 이루릴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없이 이루릴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드래곤에게도 혹시 그런 경향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습니다. 이 건 저에겐 독특한 경험이군요. 엘프에게 반신반의라는 감정은 낯설어요. 하지만 전 반신반의하면서 시도했습니다. 효과가 있군요. 드래곤과 인간 을 잇는유피넬의 저울대는 가장 길기에…" "드래곤이… 인간의 반대쪽 극단이라는 말씀입니까?" 카알의 질문에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에 델린이 말했다. "라자는 드래곤과 인간을 관계짓지 않습니까." 모두가 에델린을 돌아보았다. 에델린은 우울한 얼굴로 분지를 바라보면 서 말했다. "하나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 하나로 존재하는 드래곤… 유피넬과 헬 카네스의 관심을 동시에 받는 인간… 아무런 신도 가지지 않는 드래곤… 아버지께서는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 에델린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 그건 핸드레이크잖아? 갑자 기 그 양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카알은 이마에 세로주름을 만들면서 에델린을 쏘아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는 왜 드래곤 라자를 만들어내셨을까요." ================================================================== 14. 정답이 없는 선택……37. 크라드메서가 포효했다. "크롸라라라!" 포효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크라드메서는 돌진했다. 발자국 소리는 없었다. 크라드메서는 날개를 떨치며 앞으로 휘익 날듯이 뛰었다. 그 앞 에는 이루릴이 만들어낸 또다른 크라드메서가 있었다. 가짜 크라드메서 는 맹렬하게 울부짖으면서 달려오는 크라드메서를 피했다. 그리고 곧 다 른 가짜 크라드메서들이 일제히 크라드메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충돌과 포효, 그리고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 땅은 단숨에 파헤쳐져 솟 아오르는 흙덩어리들이 폭풍을 일으켰다. 11 마리의 크림슨 드래곤이 일 제히 난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 광경은 보는 사람의 심장까지 얼어붙 게 만드는 공포가 어려있었다. 제레인트는 헐떡이며 말했다. "열두 드래곤과 핸드레이크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분지 엔 드래곤이 열둘이란 말입니다! 지골레이드까지 치면!" "그럼… 핸드레이크는 저런 것을 상대했단 말이로군요." 아프나이델의 신음은 드래곤들의 포효에 휩싸여 알아듣기 어려웠다. 이 루릴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역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군요. 당신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겠지만." "세레니얼양?"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잠시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카 락이 다시 물결치며 이루릴은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지골레이드를 구해내도록 하지요." 이루릴은 갑자기 눈을 감더니 조용히 말했다. "지골레이드? 당신을 옮기겠어요. 지금 당신의 모습 그대론 제가 옮길 수 없으니 폴리모프하세요. 바위가 무너질테니 셋을 셀 때… 하나, 둘, 셋." 잠시 후 지골레이드의 모습이 사라지며 바위더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라드메서들이 벌이고 있던 난투의 격렬한 소음 속에서 바위더 미가 무너지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루릴의 앞쪽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나타나자마자 신음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허억!" 왠지 마법사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푸른 로브를 걸치고 있었고 손엔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날카롭게 생긴 눈매가 지금은 고통 때문에 일 그러져있었다. 그의 양쪽 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지팡이에 의지해서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황급히 그의 곁에 무릎을 꿇으며말했다. "지골레이드십니까?" 지골레이드는 파리한 얼굴을 돌려 제레인트를 사납게 바라보았다. 제레 인트는 찔끔하면서 무의식중에 뒤로 조금 물러났다. 지골레이드는 사나 운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질문이군. 성직자." "아, 하하. 그렇군요. 어디 치료를…" "네가? 나를? 머리를 박살내어 죽일 놈 같으니라고!" 지골레이드는 그야말로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호의를 베풀려던 제레인트는 뜻밖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진 얼굴로 지골 레이드를 마주보았다. 그 때였다. "그는 라자가 없는 드래곤이니까요…." 지금껏 고요히 앉아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던 레니의 입에서 희미한 말 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리 모두는 레니를 바라보았지만 레니는 아무런 표 정도 없이 크라드메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무표정한 얼 굴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가 왜 인간의 호의나 사랑을 받아야 할까요. 지골레이드는 라자가 없는데. 그는 아무런 관계도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죠." "그, 그런가?" 제레인트는 당황한 목소리로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그 때 이루릴이 말 했다. "레니양. 지골레이드의 라자가 되지 않겠어요?" 뭐야? 레니가 지골레이드의? 지골레이드는 흠칫하면서 이루릴을 올려다 보았다. 레니는 여전히 크라드메서만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녀가 이루릴 의 말을 듣기나 한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이루릴은 계속 말했다. "당신이 그의 라자가 된다면 지골레이드께서는 여러분들과 관계를 맺으 실 수 있겠죠. 여러분들의 호의와 관심 속에서 그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겠죠. 육체적인 상처도, 그리고 정신적인 상처도." 정신적인 상처? 아, 해츨링을 잃은 것 말인가? 그러나 지골레이드는 무 서운 얼굴로 말했다. "내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은 한 가지뿐이다. 할슈타일 후작의 죽 음!" 뭐라고? 할슈타일 후작의 죽음? 어,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 모두는 이 루릴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골레이드보다야 이루릴에게 대답을 요구 하는 것이 안심스러웠으니까. 이루릴은 말했다. "리치몬드는 살해되기 전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할슈타일 후작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자였습니다. 졸개라고 표현할까요. 어쨌든 그는 후작의 명령에 따라 지골레이드의 해츨링을 살해한 것입니다." "예? 아니, 왜…?" "지골레이드께서는 해츨링 때문에 인간을 떠나려하셨으니까요. 후작은 해츨링이 없어지면 지골레이드께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 니다." "…맙소사!" 머리가 어지럽다. 할슈타일 후작, 할슈타일 후작! 도대체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양심의 한계를 넘어가버린 당신에게 불가능한 일이 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루릴은 씁쓸하게 말을 계속했다. "아마도 크라드메서와의 계약이 실패할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 각됩니다. 준비성이 철저한 인간입니다. 레니양을 찾아 크라드메서와 계 약하려는 것이 그의 첫번째 계획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들 의 방해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카알이 기막힌 얼굴로 그 말을 이었다. "그래서… 후작은 지골레이드의 라자였던 돌맨을 빼내었군요? 하지만 돌맨도 실패했을 경우, 지골레이드를 다시 되찾겠다는 것이군요? 그래서 지골레이드를 떠나게 만들었던 원인인 해츨링을…" 지골레이드가 음산한 목소리로 카알의 말을 잘랐다. "그만. 입들 닥쳐." 카알은 찔끔하면서 입을 닫았다. 지골레이드는 지팡이에 기대며 힘들게 일어났다. 그는 일어서며 크라드메서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격렬한 충격 속에서 아득히 잊엇던 굉음과 포효소리가 갑작스럽게 더 크 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나는 그 상상할 수도 없는 크기의 폭력과 파괴를 바 라보며 말을 잊었다. 분지의 싸움은 무자비하고도 흉흉했다. 모든 크라드메서들이 노리며 공 격하는 것을 보면서 어느 것이 진짜 크라드메서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짓쳐오르는 흙덩어리와 불길 속에서 크라드메서는 지옥을 펼쳐내고 있었 다. 그 자신과 똑같은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오히 려 냉정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동작으로 크라드메서는 환영을 공격 하고 있었다. 넓고 길다란 날개는 그대로 두 개의 검처럼 움직이며 환영 을 후려치고 있었고 그 장대한 목은 화살처럼 날아가 환영의 목을 물어 뜯었다. 환영의 드래곤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토하며 쓰러져갔다. 그들은 쓰러지면서 곧장 안개처럼 바뀌어 사라져갔다. 남는 것은 반짝이는 물방 울들 뿐. 그 물방울들은 짧은 순간 반짝이다가 곧 불길에 휘말려 사라져 갔다. 이루릴은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언딘의 거울은 그의 모습은 비출 수 있었도 그의 광기는 비출 수 없군 요." 지골레이드는 지팡이에 기대선 채 몸을 떨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다. 환영들은 필사적으로 크라드메서를 공격했지만 크라드메서는 자신 의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아니,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난폭해지 고 강력해지는 것 같았다. 분지 주위의 산들과 절벽은 이미 상당부분 파 괴되어 무너지고 있었고 불길은 더욱 거세어졌다. 지골레이드는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 내 라자가 되겠는가?" 레니는 그 때까지도 멍한 얼굴로 크라드메서의 싸움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지골레이드는 힘들게 말했다. "내 라자가 되어라. 그럼 난 이 상처를 치료하고 그와 맞써 싸울 수 있 다. 지금의 그는 무수한 상처를 입은 몸, 나로서도 감당해볼만 하다." 레니는 입 외에 다른 부분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왜…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거죠?" 지골레이드는 쓰게 웃었다. "미친 드래곤은 너희들만의 공포는 아니다. 크라드메서는 공평한 자. 너희들만이 그의 파괴의 대상이 될 거라고 믿는가? 인간 본위라는 말이 사용되면 적절할 듯하군." "그런가요. 그는 만물의 공포인가요. 시오네는 왜 저런 걸 만들어내었 을까요…" 레니는 그대로 굳어버린 조각처럼 보였다. 지골레이드는 초조하게 말했 다. "레니, 시간이 없다. 대답해라. 내 라자가 되겠는가?" 레니가 지골레이드의 라자가 된다고? 어, 잠깐. 길시언을 바라보자 과 연 그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알이 입을 열었 다. "레니양." 모든 사람들이 카알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레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녀가 과연 크라드메서를 보고있는가도 의심스러웠다. 크라드메서는 격렬 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으니까. "레니양. …괜찮은 거요?" 레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걱정되는데. 레니는 왜 저렇게 꼼짝도 하지 않는 거지? "레니양. 뭐, 레니양의 자유 의사지만 말이오. 난 하라고 권하고 싶은 데." "왜죠, 카알 아저씨?" 레니의 대답은 툭 떨어트리는 듯한 것이었다. 카알은 잠시 당황해서 레 니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레니양도 봤겠지만, 넥슨은 성공하면서 동시에 좌절했고 그의 목숨을 잃었소. 할슈타일 후작은 라자의 운명을 피하면서 라자의 힘만을 얻으려 고 했소. 그들은 모두 라자의 힘을 원했고, 하나는 진실을 몰랐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알고있었다는 차이뿐이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진실은 뭐지요?"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요. 그겁니다. 그런데 레니양은 무엇을 원하지요?" "무엇? 제가 원하는 것이오?" "그래." 레니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고는 말 했다. "아빠… 보고 싶어요." "그래요. 어, 레니양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레니양은 넥슨과도 다르고 할슈타일 후작과도 다르지요. 레니양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니 까, 에, 그러니까 레니양은 라자의 진실로부터 자유로워요. 하지만 주위 의 사람들을 볼까요. 레니양이 지골레이드의 드래곤 라자가 된다면, 지 골레이드께서는 지금 당장 치료를 받으실 수 있소. 그리고 길시언께서 는, 항상 이 나라를 걱정하시는 길시언께서는 지골레이드가 돌아오심으 로써 안심하실 수 있을 거요." 하아. 카알은 교묘하게 지골레이드를 끌어들이는구만. 지골레이드는 길 시언을 흘깃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잔기침을 하면서도 지골레이드의 시 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지골레이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길시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광경을 보다가 난 다시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이건 잔인하기 짝이 없어. 난 이걸 이해할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도 계속 말해야 되나? 제레인트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 다. "레니양, 레니양. 레니양이 지골레이드의 드래곤 라자가 되면 크라드메 서도 물리칠 수 있잖아. 그러면 레니양은 대륙을 구하는 거라고. 알겠어 요? 레니양이 이 땅을 구한단 말입니다." 네리아는 레니가 앉은 바위에 나란히 앉으면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 했다. "그래. 레니야. 그리고 우리들도 모두 살아나는 거야. 응?" "그만 하죠." 사방의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목 이 자꾸 쉬어온다. 침이라도 확 뱉어버렸으면. "그만들 하죠. 레니는 드래곤 라자잖아요. 그러니 그만 하자고요. 레니 도 이해하니까." "네드발군?" "레니는 드래곤 라자라고요… 젠장! 난 잘 비유를 못하겠는데 말이죠, 어떤 부모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다고 쳐요. 그 중 한 아들은 완전히 미 쳤다고 치고. 그런데 이웃에서 정상적인 아들을 시켜 미친 아들을 죽이 라고 권한다면, 그 부모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 비유치곤 조악하지만, 이해는 되시겠죠?" 카알은 입을 쩍 벌리고 날 바라보았으며 아프나이델은 반대로 입술을 깨물면서 바라보았다. 다채로운 시선들 속에서 지골레이드의 시선이 독 특했다. 그는 입술 끝을 조금 들어올리며 말했다. "언젠가 내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려고 들었던 그 소년이 그대로 살아 있군."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일까? 난 우울한 시선으로 그 시선을 마주 본 다음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 눈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외에는 호 흡조차도 없는 무생물처럼 보였다. "레니. 잔인한 말들이지만, 어쨌든 그래. 드래곤 라자의 진실이니 뭐니 하는 말로 치장해봐야 소용없어. 쳇. 내가 넥슨이 된 것 같군. 넥슨 녀 석이 나한테 씌었나? 그 작자의 죽음에는 애도객도 없군. 어쨌든, 아무 도 말하지 않으니 내가 말하겠는데…" 코 한 번 들이키고, 자. 레니. 이건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에게는 너무 힘든 말이란 말이야. 책임질 수 없는 말이고 권위도 있을 수 없는 말이지. 하지만 말하겠어. "미안해. 이런 아픔으로 널 데려와서." "…으흑!" 레니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리아는 당황하며 그 녀의 어깨를 그러앉았지만 레니는 몸부림치며 네리아의 손길을 밀어내었 다. 난 참담한 기분을 곱씹으며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포효소리. 그리고 폭발음과 파열음들이 사정없 이 서로를 찢어발기고 있었건만, 분지의 싸움은 이제 극도의 잔인함을 넘어서 차라리 무감동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자신을 죽여가면서도 전혀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루릴. 당신 행동은 맞아들어갔지만 그 의미는 당신 말 대로 전혀 달라요. 우리는 자신 밖에 있는 자신을 무서워하죠.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해보이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아니 까, 그래서 완전한 것처럼 보이는 '자신'을 만나게 되면 곧 스스로가 가 짜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빠져들어요. 하지만 드래곤은 자신 밖에 있는 자신을 귀찮아하죠. 그건 존재할 수 없는 거니까. 그건 너무 더울 때 입 는 털옷 같은 것이고 낡아버려서 집착도 모두 증발된 옛감정 같은 거겠 죠. 비록 상상의 한계를 비웃으며 진행되는 저 거대한 폭력의 크기에도 불 구하고, 그 본질은 그 정도뿐이겠지. 크라드메서, 당신은 청소할 때 너무 시끄러운걸. "레니. 할 수 없어." 내 목소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껄끄러운 목소리가 목에서 흘러나 왔다. "결과가 잔인하다는 이유로 선택을 미룰 순 없을 거야. 아픔만 길어지 고 깊어질 거야. 지금 크라드메서의 환영도 거의 사라져가. 정말 최강의 크림슨 드래곤이군. 10 개나 되는, 자신과 똑같은 드래곤을 저렇게 물리 치다니." "…아름답지?" "응? 아. 응." 레니는 눈물을 닦으며 다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너무 아름답지? 저 아름다운 자가 왜 죽어야 될까? 인간 때문에…" "뱀파이어 때문이야. 레니." "인간 핸드레이크 때문이야. 인간 넥슨 때문이고." "…미안해." "인간이 다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세계는 저 아름다운 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닐까?" 지골레이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린 말이다. 소녀. 크라드메서는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넌 드래곤 라자로서 드래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있지만, 크라드메서는 지금 드 래곤도 아니다." "그래요?" "그래. …더 이상 선택을 미루지 마라. 레니. 테페리의 성직자가 들려 줄 말이 있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기겁하면서 지골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예?" 지골레이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자 기 이마를 딱 쳤다. "아, 그래. 레니양. 어, 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뭐 그 런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하지만 말이야. 모든 선택은 원래 정답이 없는 선택이야." 테페리의 신전, 두 개가 모두 열리던 그 문이 생각난다. 레니는 물끄러 미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마음가는대로 선택해요. 레니양. 크라드메서를 위해 세계를 포기할 수 도 있어요. 좀 끔찍스럽지만,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죄의 댓가로 우리가 파멸되는 거니까. 레니양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레니는 아무 대답없이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헛기침을 하 고서 다시 말했다. "반대로 세계를 위해 크라드메서를 포기할 수도 있고. 크라드메서의 비 극은 그 혼자서 안고 파멸해버리라는 거지. 넥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 고 우리 모두가 유피넬의 이름 하에 그러는 것처럼. 어떻게 하겠어요?" 레니는 입을 열었다. "나는…"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 …그리하여 휴리첼 가문의 최후의 라자는 쓰러졌다. 넥슨 휴리첼을 납치하여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나라를 전복하려 했 던 정체불명의 무리는 아직껏 역사의 베일 속에 숨어 그 정 체가 묘연하다. …죽음으로써 넥슨 휴리첼의 계약을 막아 나 라를 구한 할슈타일 후작 역시 행방불명되었고 12 년 후 왕 자로 추서… 전쟁은 바야흐로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바이서스 - 자이펀 전쟁의 최후의 몇몇 시기는 그 이전의 군소 전쟁과 비교했을 때 많은 점에서 차별되는 독특한 전쟁이었다. 위대 한 종족 드래곤의 힘이 더이상 인간의 전쟁에 그 힘의 그늘 을 드리우지 않았던 것이다. 자이펀의 악몽이었던 지골레이 드, 캇셀프라임의 이름은 공포의 전설로 그 영광을 누리게 되었…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책임짓게 된 전쟁으로써 이 시 기, 우리는 바이서스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날 이름, 영 웅 샌슨 퍼시발과 대현자 카알 헬턴트를 만나게 된다. …드 래곤 슬레이어 루트에리노 대왕과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이 름을 잇는 이들의 등장은 당대인들의 무수한 관심을 집중시 키는 기이한 것이었으니… 그리하여 귀족들은 영웅 샌슨 퍼 시발과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이름 하에 일치단결하여 바이 서스 왕가의 어전에 그 검을 바쳤다. 그것은 루트에리노 대 왕의 영광에 기생하던 대왕의 종속물인 바이서스 왕가가 국 가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며 이로써 바이서스는 비로소 근 대적 의미의 왕국으로 일어날 수… 이전의 바이서스가 루트 에리노 대왕이라는 영웅의 조직화된 추모자들의 집단이라는 애덜튼 드리어즈의 언명은 참으로 되새겨볼만한 것이니… 었 으나 닐시언 대왕의 시기부터 진정한 영웅은 사라지고 진정 한 국가가 일어나게 된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츄발렉의 도움으로 출 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제 29 권. pp. 12 - 134 (770년 돌로메네 作) 겨울 밤의 숲은 어두웠다.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모닥불빛에 붉게 물들었다. 난 몸에 두 르고 있던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주전자를 들었다. 찻잔에 물을 따 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따르르르. 차 향기를 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숲. 별로 볼 것이 없지. 코를 얼게 만드는 싸늘한 바람이 불며 잠시 모닥불에서 불티가 튀어오른다. 온통 시커먼 숲속에서 눈에 들어오 는 것은 바알갛게 타오르는 모닥불빛, 그리고 밤하늘에 번뜩이는 별빛. 그리고 번쩍이는 글레이브의 반사광. "에휴…" 한숨부터 나온다. 멍청한 녀석들. 도대체 실수에서 배울 줄을 몰라. 비 반사 처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재만 좀 바르면 되는 거 아냐. 난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며 말했다. "어이, 오크들. 같이 마실래?" 곧 숲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취이이익! 들켰다!" "무, 무서운 놈. 어, 어떻게? 취익, 취이이익!"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하지.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 르는 찻잔을 들어 입김을 후후 불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들 사이에서 오크들의 모습이 하나 둘 나타났다. 후루룩거리며 차 를 몇 모금 마시는 사이에 대략 60 개 쯤 되는 글레이브가 번쩍거리는 빛을 뿜게 되었다. 흐음. 그런대로 정확한 숫자로군. 모두들 좋은 덩치 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고르고 고른 놈들인 모양인데. 오크들은 글레이브를 마치 활이나 되는 것처럼 내게 겨냥하고 있었다. 30 큐빗 쯤 떨어져서 글레이브를 겨냥하고 있으니 활이라고 할밖에. 난 모포를 내려놓고는 찻잔을 든 채 천천히 일어났다. 삽시간에 나와 오크 들의 거리는 50 큐빗 정도로 떨어졌다. …못말리겠군. "던질 거냐?" "취, 취익? 뭐라고?" "후룩. 흐음. 그 글레이브 던질 거냐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멀리서 어떻게 날 공격할래?" 오크들은 커다란 딜레마에 빠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딴에는 기습을 하겠다고 몰래 다가오다가 습격하기에는 먼 거리에서 발각되어 공격하지 도, 달아나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난 태연하게 모닥불에서 불 붙은 장 작을 하나 꺼내어들었다. 오크들은 흠칫거렸지만 난 아랑곳 않고 장작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오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놈들 중 하나가 눈에 익 었다. "아그쉬? 반갑군." 검은 투구를 쓴 아그쉬는 글레이브를 사납게 휘둘러대었다. "취, 취이익! 괴물 초장이!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네 놈을, 취익! 끝장 내어주겠다!" "아, 그래. 그럴 속셈이었군. 빨리 하지 그래? 밤이 깊었으니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아그쉬는 휘두르던 글레이브를 늘어트리고는 눈을 심하게 껌뻑거리며 어이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장작을 다시 내려놓고는 차를 마시 며 아그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그쉬는 간신히 할 말을 떠올린 모양이다. "어, 취익! 잠깐! 나머지 놈들은 다 어디 있지?" "후루룩. 쩝. 나머지?" "괴물 눈알! 그리고 엘프, 취익! 트라이던트를 든 여자! 활쟁이! 취이 이익! 오우거 전사! 취익!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냐!" 난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 나머지라고 하길래 혹시 그 사람들이 들킨 것인 줄 알았지." "취익? 들키다니?" "내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 말이야." 아그쉬는 잠시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등 뒤에서 부스 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은, 그리고 나머지 오크들 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긴장된 그들의 손에서 글레이브가 미세하게 떨렸다. 저벅저벅. 발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난 자들은 내 옆에 주욱 늘어섰다. 인원이 정말 많기도 많군. 난 좌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개하지. 왼쪽부터 네츄, 빌츄, 하이츄, 파빌츄. 그리고 다시 여기서 부터 날라츄, 리츄, 도츄, 스마락츄, 한탈츄, 기츄, 에츄! 훌쩍. 마지막 은 아냐." 기츄는 킬킬거렸다. 으윽. 내가 오크가 된 것 같군. 이 사람들의 이름 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인지. 아그쉬는 입을 쩍 벌리고 우리들을 바라보았 다. 기어코 그의 입에서 무서운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부, 부, 취, 북부 목동!" 리츄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이야, 이거 오크가 5, 60 마리는 되겠는데? 북부의 방목장 근처에선 저 녀석들 구경한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안 그래, 한탈츄?" 한탈츄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놈들은 요즘 우리 소를 습격하러 오지를 않으니까. 우리가 너무 거 칠게 대해서 그럴까? 어쨌든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가운데." 그리고 하이츄는 싸늘하게 웃으며 큼직한 숏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래. 그리고 이걸로 오크 가죽을 벗겨본 것도 너무 오래 되었어." 하이츄가 검을 뽑아드는 것이 신호가 되어 다른 목동들도 모두 검을 뽑 아들었다. 스릉, 스르릉. 60 마리의 오크들은 백옥 같은 피부를 과시하 며 떨기 시작했다. "제, 젠장! 취이익! 북부 목동이 여기 왜! 취칙!" 찻잔을 마저 비우고 천천히 아래에 내려놓는 동안 오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그쉬는 좌우를 보더니 발작하듯이 외쳐대었 다. "이 놈들! 괴, 괴물 초장이와, 취익! 북부 목동이라고 해도, 취이이익! 우리는 저 녀석들의 다섯 배다! 떨지마라! 취치칙!" 멍청하긴. 다섯 배가 아니라 여섯 배야. 아쉽게도 아그쉬의 용기는 아 무 효과를 얻지 못했고 오크들은 당장이라도 달아날 듯한 모습이었다. 누가 고함이라도 한 번 지르면 곧장 줄행랑을 놓을 태세군. 안되겠어. 좀 부드럽게 대해야겠는데? 자, 목을 조금 떨면서 애틋하게. "아아, 사랑하는 오크 제군들." 아마도 아그쉬가 기절하지 않은 것은 오크이기 때문이리라. 리츄는 딸 꾹질을 시작했고 날라츄는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펼쳐보였다. "그대 멋진 이빨의 친구들이여. 아아,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잠시 그 걸음을 멈추고 이 몸의 말을 좀 들어주오." "후, 후치? 조금 전에 마신 게 뭐지?" 하이츄의 겁에 질린 질문이 나오자 빌츄는 내가 내려놓은 찻잔을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난 그들을 무시하면서 아그쉬에 게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잠시만 내 말을 들어보오. 우리들의 불운한 관계는 너 무 오래되었고 그 청산의 시기는 오히려 늦은 바가 되었으니, 이제라도 그대들과 나의 관계에 한 조각 봄의 향기와도 같은 아름다운 빛을 던지 는 것이 어떠하겠소?" "르! 뭐, 무슨 말이냐?" 이것도 꽤나 힘든 일이군. 슬슬 본론을 말해야 되겠는데. "야, 야. 간단하게 말할 테니 잘 들어. 너희들도 가장 힘 좋은 녀석들 끌어내서 이 계절에 돌아다니면 곤란한 점이 많을 거 아냐? 월동준비에 차질이 클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겨울을 날 식량을 주겠 다. 대신 우리 관계는 잊자." "뭐야?" "뭐라고?" 리츄와 아그쉬가 동시에 외쳤다. 두 사람이 어릴 때 헤어진 형제라도 되나? 음. 이 의문은 가슴 속에 파묻어두어야겠군. 난 리츄를 향해 어깨 를 으쓱여 보인 다음 아그쉬에게 말했다. "소가 400 마리다. 어때? 400 마리의 소를 줄 테니까 이제 날 그만 쫓 아다녀라." 오크들의 뒷걸음질이 멈췄다. 아그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 사백? 취익! 취익! 소 사백 마리라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리츄가 북부 방언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아! 그럼 너 오크 주려고 우리 소를 산 거야? 말도 안돼! 오크 놈들에게 우리 소를 준다고?" "이봐요. 내가 대금 지불했으니 그건 내 소잖아요.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 오크놈들에게, 오, 맙 소사, 쌩그렐이여!" 리츄는 두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절규했다. 난 피식 웃으며 바이서스 임펠의 스트레이트 헤븐에서 리츄를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리츄는 스트레이트 헤븐에 죽치고 앉아서는 하트 브레이커를 죽을둥 살 둥 마셔대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지골레이드가 전선에서 사라져 그 식 량으로 쓰려고 했던 400 마리의 소를 계약 파기 당했다는 것이었다. 게 다가 세피아파인 고개에서 시간을 지체하느라 계약 기간에 늦어서 보상 금 같은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소를 모두 사겠다고 제 안했을 때 리츄는 내 발등에 키스라도 할 태세였다. 지금 저러는 것은 그저 오크에게 소를 넘기는 것이 속상해서 해보는 짓이지 진심은 아니겠 지. 맞장구를 좀 쳐줘야겠는데? 난 팔짱을 끼고 약간 전투적인 눈길로 리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게 마음에 안든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지불한 보석 돌려주고 소를 끌 고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면 되겠군요?" 과장된 동작을 취하고 있던 리츄는 찔끔하면서 날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능글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 실수.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가봐야 어차피 그 소는 못팔 테니까. 으음. 북부까지 저 많은 소들을 끌고가야겠군요? 어려울 텐데. 어려워. 이젠 소 뜯을 풀도 거의 없어졌으니까. 아마 가는 길에 다 죽게 될지도 모르지. 음.안타까운 일이야. 오크들은 당신들 뒤만 졸래졸래 따라가면 소 400 마리를 그냥 얻겠는데? 그럼 나는 돈 굳어서 좋고, 오크들은 소 400 마리를 얻어서 좋고. 당신들은 좀 손해를 봐서 가슴이 아픈…" 아그쉬는 귀가 번쩍 뜨인다는 얼굴이었다. 리츄는 두 손을 내저으며 말 했다. "알았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라! 이 고얀 녀석." "좋군요. 그럼, 아그쉬?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시지?" 아그쉬는 급반전한 사태에 잠시 어이가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잠깐. 그런데 저 놈이 내 제안을 무시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파 악할 수 있을까? 즉, 1) 아그쉬는 내 제안을 무시한다. 2) 나는 리츄에 게 보석을 돌려받고 소들을 돌려준다. 3) 리츄와 목동들은 소들을 데리 고 북부로 돌아가야 한다. 4) 가는 도중에 소들은 다 죽어버릴 테니, 5) 오크들로서는 목동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좋다! 취익!" …화렌차여. 정말 수고가 막대하십니다. 저 놈들을 돌보실 수 있다는 거,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역시 신이시라 뭐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오크들에게 소를 모두 넘겨주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먼저 소들을 숨겨둔 계곡으로 60여마리의 오크들을 데리고 가는 일이 문제였 고 - 목동들은 자신들의 여섯 배나 되는 수효의 오크들을 능수능란하게 겁주고 있었고 그래서 오크들은 머뭇거리며 따라왔다. - 계곡에 도착하 자 리츄가 시간을 무진장 끌기 시작했다. 리츄는 400 마리나 되는 소들 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들었던 것이다. "좀 그만 해요, 예?" "잠깐. 잠깐만. 저 녀석은 내가 받아낸 놈이야. 그 때 난산이었거든. 내가 저 녀석 어미 몸 속에 손을 집어넣어 저 녀석 몸에 밧줄을 묶고는 끌어내어야 했단 말이야. 아이고, 이 놈아! 오크에게 끌려가게 될 줄 알 았다면 그 때 그냥 널 포기하는 건데!" "…알았어요. 끝났어요?" "자, 잠깐! 저 녀석, 저 부룩소 녀석! 저 놈이 늑대에게 잡혀갈 뻔할 걸 내가 구해낸 걸 생각하면…" 리츄는 부룩소를 끌어안고 온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밤이라서 소떼들은 별 소리없이 고요했고 리츄의 웅얼거리는 소리만이 낭랑하게 울려퍼졌 다. 오크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지만 나머지 목동들이 모두 살벌 한 시선으로 오크들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그저 조바심만 내면서 취익거 렸다. 아그쉬는 아예 바위에 걸터앉아서는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아그쉬 는 계곡을 가득 메운 소떼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드래곤에게 잡아먹히든 오크들에게 잡아먹히든, 어차피 저 소들 최종 목적지는 누군가의 입 속이잖아. 똑같은 걸 가지고 참 희한하게도 구분 한다. 드래곤에게 잡아먹히면 좋은 거고 오크에게 잡아먹히면 안좋은 건 가? 결국 여명이 희뿌옇게 번져갈 때 쯤에야 리츄가 물러났다. 아마 졸음을 더 못견딘 것이겠지. 리츄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다시 처량한 눈길로 계곡을 가득 메운 소떼들을 바라보았다. "잘 가… 잘 가…" 닭 되겠군, 정말! 아그쉬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제 가도 되나, 취이익?" "아, 그래. 오래 기다리느라 수고했다. 약속은 지켜야 돼?" "취이익! 물론이지! 복수는 종결되었다!" "좋아, 좋아.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는데." "칙! 뭐라고?" "이봐, 너희들 겨울철 날 양식도 얻었으니, 너희들 동굴에 붙잡혀있는 기술자들을 모두 풀어줘라. 어때?" 아그쉬는 사나운 눈길로 날 쏘아보기 시작했다. 헤헷. 네가 날 눈길로 어쩌겠다고? 이봐. 난 12 마리의 드래곤들의 싸움을 두 눈으로 봤던 자 야. 아그쉬는 으르릉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에엑! 좋다!" "좋아. 됐어. 그럼 리츄씨?" 리츄는 그 때까지도 궁상스러운 얼굴로 소들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한 번 더 불러야했다. "뭐?" "소떼들을 몰아서 오크들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오크 들이 기술자들을 모두 잘 풀어주는지 감시하고." "뭐, 뭐, 뭐야? 우리더러 오크 놈들 뒤치닥거리까지 하라고?" 목동들은 모두 씨근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하하. 누군가에게 배운 수법 이지. 직접 배운 것은 아니지만. 이건 타이번 하이시커라는 작자의 수법 이야. 억지로라도 함께 행동하게 만드는 것.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저 오크들이 저많은 소떼를 어떻게 데리고 가겠어요? 소떼에 게 밟혀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그리고 저 소들도 당신들이 데리고가 야 안심할 테고. 자, 이걸로 내 조건은 끝입니다. 그리고 소떼들을 끝까 지 몰아다주고 오크들의 동굴에 납치된 기술자들이 풀려나는 것을 감시 해준다면 내가 내놓았던 보석과 똑같은 보석 하나 더 내놓을 수 있는데. 어떻겠어요?" "뭐야? 하나 더?" 난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를 하나 꺼내어 위로 던졌다 받았 다를 반복해보였다. 목동들과 오크들의 눈이 똑같이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두 무리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 우 강렬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 번째인가 위로 던졌을 때 리츄는 공중에서 다이아몬드를 확 낚아채 었다. 난 씩 웃었고 리츄는 뭐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다고! 제길, 돌아가자마자 쌩그렐에게 푸닥거리라도 부탁해야 겠군. 이번 여행은 저주받은 게 틀림없어." "하하. 수고해주세요." 난 목동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아그쉬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목 동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인사를 받았지만 아그쉬는 아예 날 보지도 않은 채 목동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말로 돌아왔다. 아, 이거 정말. 말의 키가 워낙 커서 등자에 발을 얹는 것이 쉽지 않은 데. 아무래도 등자끈을 좀 조절해야되겠어. 난 말 위에서 다시 한 번 계 곡을 주욱 둘러보았다. 서로 불편한 시선으로 마주보고 있던 목동들과 오크들의 등 뒤로는 400 마리의 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 반대편, 그러니까 동쪽 에서는 아침놀이 바알갛게 물들고 있었다. 소들의 강인한 어깨가 붉게 물들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는가 보지? "자, 그럼 난 갑니다? 화목한 여행길 되세요!" 그 때까지도 아그쉬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리츄가 어깨를 축 늘어트 리더니 날 돌아보았다. "악담을 해라, 이 녀석아! 잘 가라!" 다른 목동들도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난 크게 웃으며 등 자를 살짝 걷어찼다. "가자, 썬더라이더!" "이힝힝힝힝!" 썬더라이더는 맹렬히 울부짖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치렁치렁한 은빛 갈기가 흩날리며 삽시간에 계곡이 등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난 중부대 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야, 이 속도는 아무래도 익숙해지려면 시간 이 꽤 걸리겠어? "자, 썬더라이더! 오늘 하루, 또다시 태양과의 경주다. 달려라, 서쪽으 로!"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쳐도 죽지 않고서는 인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 럼, 아무리 썬더라이더라 해도 태양을 앞서 달려갈 수는 없었다. 으음. 어째 비교가 우울하다? 난 내 생각에 스스로 우울해하면서 이라무스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피곤하군. 역시 여행은 동료들과 함께 해야 돼. 혼자 하는 여행은 훨씬 더 빨리 지치게 되는 것 같아. 자기 혼자서 자신을 감당해야 되니까. 동 료들이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감당해주고 서로가 서로를 나누니까 힘들 것도 없겠지. 드래곤은 도대체 어떻게 '혼자'서 '혼자'를 감당하는 것일 까? 확실히 우리들과 드래곤은 반대쪽 극단임에 틀림없는… 젠장. 쓸데 없는 생각을. 망할 드래곤 녀석들, 망할 인간들. 휘우우웅. 싸늘한 바람이 이라무스시의 밤길을 스치고 지나갔다. 탈가닥, 탈가닥. 썬더라이더의 발소리도 왠지 무겁게 느껴진다.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겨울의 짧은 해는 이미 진지 오래다. 두꺼운 창문들과 투박한 문들은 모 두 굳게 닫혀져 방랑자의 시선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주위는 고요하 고 캄캄하고 무엇보다도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길을 물어볼 사 람이 없어서 기억을 더듬어 찾느라고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그래서 '트라모니카의 바람' 앞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으슬으슬 떨리는군. 불쌍한 방랑자를 위해 따스한 스튜 라도 좀 남겨두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썬더라이더를 멈추고 내려설 때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년! 어딜 도망가, 어딜! 죽어라, 이 년! 죽어!" "아아아악! 삼촌,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에 이어 뭐가 깨지는지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요란 하다. 난 말에서 내려선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채 주점 안에서 들려오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 화적 같은 년아! 오갈데 없는 것을 거둬 키워주고 입혀줬는데, 은 공을 갚을 생각은 안하고 장사 훼방을 놔? 너 오늘 죽어봐라. 에이익!" "아아악!" "그만해요, 마스터. 그러다가 애 죽겠어요!" "그래, 애 완전히 잡겠네. 그만하지?" "놔라, 이것들아! 놔! 이런 년은 죽어야 해! 에라이, 정신나간 년아! 네가 그러고 있는다고 그 잘난 서방이 돌아올 것 같애? 왜 손님을 못받 겠다는 거야, 왜!" "아악! 꺄아아악!" …우울한 기분이 싹 가시게 해주는군. 정말 고마운데? 대신 다른 감정 이 뭉클뭉클 일어난다는 점이 문제지만. 난 다시 썬더라이더에 올라탔 다. 썬더라이더가 의아한 듯이 푸르릉거렸다. 말 위에 똑바로 앉은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그리고 바스타드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멋진 소리가 들리는군. 바스타드를 앞으로 들어 트라모 니카의 바람의 입구를 겨냥했다. 후우, 후우. 이봐, 주인장. 당신은 오늘 영업 시작하고나서 가장 화려 하게 들어오는 손님을 맞게 되었어.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맞이하는 마 지막 손님이 될지도 몰라. 내일 아침까지 이 여관 건물이 남아있을 거라 고는 장담할 수 없거든. 난 썬더라이더의 배를 걷어찼다. "이랴아아앗!" "이힝힝힝힝!" 트라모니카의 바람의 스윙 도어를 박살내며 말에 탄 채 홀 안으로 뛰어 드는 짧은 시간 동안, 난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 하나를 흘려보냈다. 차라리 드래곤처럼 혼자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디 봐. 어디…" "아야야야…" "아, 미안미안.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봐. 이거 바르면 금방 나을 거 야." 메리안의 이마에 힐링 포션을 살살 펴발랐다. 상처를 입자마자 치료하 는 것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흉터가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이거 정말 불 안하군. 메리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어깨 를 흠칫거렸다. 온통 박살이 난 홀 안에서 변변한 의자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니었다. 그래서 난 술통을 가져와 메리안을 앉히고는 그 상처를 치료했 다. 세상에 부지깽이로 계집애 이마를 갈기는 개자식이 있다니. 그것도 자기 조카를. '자기 조카딸의 이마를 부지깽이로 갈길 수 있는' 작자가 고함을 질렀 다. "훠이! 훠어이! 저리가, 이 놈의 말아! 이, 이, 이거보십시오, 나으리! 다, 당근이 다 떨어져가는데요?" "그래? 당근이 다 떨어지면 다른 거라도 깨물겠지." "나, 나으리! 아이고, 제, 제발! 훠이, 훠이이!" "이봐. 그건 말이라고… 황소였던 적은 있지만 최소한 닭은 아니었어. 훠이가 뭐람." 주인장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부림을 쳤다. 지금 이 비인간적인 작자 의 상황을 볼 것 같으면, 온몸이 묶인 채 벽에 있는 횃불걸이에 걸려있 었는데 그 혁대에는 내가 주방에서 가져온 당근 몇 개가 걸려있었다. 그 리고 썬더라이더가 그 앞에 서서는 우아한 자세로 당근을 베어먹고 있는 것이었다. 쩝쩝 소리가 커질수록 주인장의 얼굴에선 빠른 속도로 핏기가 빠져나갔다. 난 붕대를 꺼내면서 진심어린 목소리로 주인장을 위로했다. "말한테 거시기를 깨물리는 경험은 예사롭지 않은, 상당히 오랫동안 뇌 리에 남는 기억일 거야. 몸부림치지 말고 순순히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 이시지? 당신은 새로운 체험에 대한 호기심도 없어?" "나, 나으리! …으악!" 부우욱!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깨물렸나? 만세를 외쳐주기 위해 고개를 돌려보니 바지춤이 반쯤 뜯겨진 주인장의 모습이 보였다. 바지춤이 찢어지면서 당근들이 전부 떨어져서 썬더라이더는 머 리를 숙인 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헤이, 주인장. 괜찮아. 바지만 찢어진 거야. 거시기는 아직 괜찮은… 응? 어라? 이봐, 기절한 거야?" 주인장은 입에서 거품을 보골보골 뿜어내면서 기절해 있었다. 메리안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바지춤이 찢겨진 채로 벽에 걸려 기절한 남 자'를 오랫동안 안쓰럽게 바라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큭!" "어, 어. 웃지마. 붕대 감아야 된다고. 자, 그리고, 음. 붕대 묶고… 됐어. 자, 어때. 괜찮아?" 메리안은 눈을 뜨더니 이마에 칭칭 감긴 붕대를 살짝 만지며 눈썹을 찌 푸렸다. "아파? 어, 못견디겠어? 잠깐. 어디 깨지지 않은 술병이 없나?" 진통제 대신으로 쓸 술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메리안은 이마를 만지던 손을 내려 내 손을 붙잡았다. 햐, 이거 손등에 촛농 떨어지는 것 같은데? 무슨 손이 이렇게 뜨거운 거야? "메리안?" "후치… 후치…?" 메리안이 내 손을 끌어당김에 따라 내 몸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잠시 후 난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숙인 채 술통에 앉아있는 메리안에게 안겨있는 모습이 되었다. "메리안?" 메리안은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진짜구나… 진짜 돌아왔어. 고마워." "고맙긴 뭘. 더 빨리 돌아오지 못해서 미안하지." "빨리 돌아온 거야. 그럼. 정말 빨리 돌아온 거라고." 난 메리안의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그녀를 살짝 밀어내었다. "머리를 그렇게 자꾸 내 어깨에 비비적거리면 상처 덧나는 것도 문제거 니와 시집갈 때 핸디캡으로 작용할지도 몰라?" "…어차피 술집 계집애인걸." "오늘까지는 그래." "응?" "내일 설명해줄께.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배가 고파 죽겠다. 점심도 걸렀는데 너무 움직였어. 어디 깨지지 않은 그릇이 없는지 살펴봐야지." "아, 내가 해줄께." "이봐, 이봐! 날 좀 믿어봐. 난 상당히 쓸만한 요리사라고? 엘프도 내 요리에 넘어갔다면 믿을 수 있겠어?" 메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피식 웃었다. "아, 그 때 그 분. 술꾼들에게 별별 모험담을 다 들어봤지만 엘프에게 음식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아, 그래? 나도 처음이었어." 난 씩 웃으며 아궁이를 조사했다. 간신히 불은 피울 수 있겠군. 아무런 죄책감 없이 테이블과 의자를 박살내어장작을 만들었다. 메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와지끈뚝딱거리는 소음이 잠시 일어나고나서 곧 아궁이에는 새빨간 불 꽃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난 재료를 찾아 흥얼거리며 다듬기 시작했 다. 메리안이 피식 웃었다. "정말 칼질 잘하네." "그래? 하하. 내 칼질은 말이야. 검의 신 레티의 프리스트들도 인정해 준 것이거든?" "레티의 프리스트? 호호." 농담인 줄 아나보군. 하지만 정말이라고. 검의 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온몸으로 내 검을 인정해주었단 말이야. "제기랄!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다아!" 샌슨의 고함 소리는 온 산에 올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운차이는 롱소드를 뽑으며 낮게 말했다. "가르쳐줘서 고맙군." 운차이의 핀잔에 샌슨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위 를 올려다보았다. 후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 는 언덕 뒤쪽에서는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하나 둘 검을 뽑아들며 나타났 다. 이윽고 언덕 위에서는 후작과 30여명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서있었다. 길시언은 으르릉거렸다. "쿨, 쿨럭! 너 이놈, 후작! 죽을 자리를, 죽을 자리를 찾아왔나…?" 후작은 길시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프리스트 들에게 말했다. "처치해. 한 놈도 남겨선 안돼."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대답이 없었다. 후작은 그대로 언덕 뒤로 사라졌 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천천히 우리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카알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들, 무슨 속셈인가! 왜 후작의 명령을 듣는 것이오!" 그들은 아무 대답없이 계속해서 걸어왔다. 그 때 아프나이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안 보입니다." "예?" "레티의 입… 그 백발 프리스트가 안보입니다. 혹시 인질로 붙잡혀있는 것 아닐까요?" "아!" 정말이다. 그 꼬장꼬장하게 생긴 백발 프리스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 다면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어쩔 수 없이 덤벼드는 것인가? 그렇다면… 카알은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당신들! 그렇다면 우리들과 협력해서 인질을 구하도록 하십시 다. 어떻소?" 프리스트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 중 금발 프리스트가 앞으로 나서더니 음울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길시언 바이서스." 길시언은 험상돎은 얼굴로 바라볼 뿐 대답하지않았다. 금발 프리스트 는 씁쓸하게 말했다. "저희들은 할슈타일 후작을 선택했습니다." "그래, 알겠다." 다행이군. 길시언은 알았다니. 그런데 난 모르겠단 말이야. 난 길시언 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적의 때문에 난 헛바람을 삼켰 다. "쿨럭. 우리들만 모두 처치해버리면 된다는 말이군? 그럼 할슈타일, 쿨 럭, 후작의 죄상을 증명할 자가 없어지니까…"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나라를… 위한?" "당신네들이 수도로 돌아가게 되면 왕가와 후작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오. 그러나 후작은 귀족원의 원로이며, 따라서 왕가와 귀족 원 전체가 서로 대립하게 될지도 모르오. 전쟁 중인 나라 안에서는 바람 직하지 않은 일이지요." 길시언이 고함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시언은 격한 기침 을 토했고 대신 카알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반란은 연좌죄이니만큼 아미앙스 수도원도 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이오?" "…솔직히 그런 점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진 않겠소. 생각해보시오. 왕 가가 귀족원과 종교계와 대립하는 일이 지금의 이 나라에 어떤 도움이 될 것 같소? 천만에. 오히려 극도의 혼란만을 가져올뿐이오. 왕가는 현 재 자이펀과의 전쟁만 해도 힘겹게 버티고 있소." "비, 빛의 탑은 가만 있을 것 같소?" 아프나이델이 온힘을 짜내어 외쳤으나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 때문에라도 더욱 당신네들은 돌아가서는 안되오. 당신은 마법사이 며, 길드원일 테지? 당신이 빛의 탑으로 돌아가 사건의 전모를 말하게 되면 지금껏 고요히 있었던 빛의 탑이 이 대립에 참가하게 되겠지. 그러 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거요." 아프나이델은 입을 쩍 벌린 채 프리스트를 마주보았다. 금발 프리스트 는 피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의 노커이신 엑셀핸드 아인델프 역시. 이 나라 안의 드워프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면 바이서스는 안팎으로 뒤흔들리게 되 오." 엑셀핸드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할슈타일 녀석을 눈감아 주는 꼴을 보느니 바이서스를 뒤 집어 엎을 것이라는 점은 잘 안다는 말이로군?" "드워프시니까." 그 때였다. 길시언이 말했다. "그래서…" 길시언의 얼굴은 더이상의 핏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변 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격렬한 기침 이후로 그가 더이상 콜록 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시언은 차분하게 말했다. "어차피 폐태자, 그리고 나머지들도 모두 볼품없는 모험가들이니, 그런 작자들이 나라를 뒤흔들게 내버려둘 필요는 없다, 이 말이겠군?" "비정하게 결론짓는 취미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네 놈들이 왕가를 그 정도로 업수이 여기느냐."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하게 말했다. "바이서스는 국왕의 나라가 아니오. 그 영토 안에 엘프나 드워프들처럼 국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종족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미 그 갈등을 내포 하고 있었소. 진정한 왕은 제 4 대 에리네드 대왕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 지 않았소. 바이서스는 귀족들의 나라란 말이오." "너희들은 내게 경배했지…" 길시언의 말은 낮았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검에 찔린 표정이 되었다. 그 는 관자놀이를 부르르 떨면서 길시언을 내려다보았다. "그 때문인가. 그 때문에 그렇듯 왕가를 무시하려고 애쓰는 것인가?" "당신이 정의라는… 것은 인정하오. 그리고 우리가 하려는 일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도…" 금발 프라스트는 힘들게 말을 꺼냈다.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그 의 어깨가 내 눈길을 붙잡는다.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곁에 힘이 함께 있을 때에만 그 아름다 움이 살아나는 덧없는 이름이오. 길시언 바이서스." "네놈들은 인간의 정의에서 자유롭단 말인가. 신의 검이라서?" "그렇소. 당신 말대로 당신네들은 모두 볼품없는 모험가들이오. 귀족원 들이 과연 궁성 밖을 떠돌아다니다 돌아온 악명높은 왕자와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를 방랑자들의 말만 믿고 명망 높은 귀족인 할슈타일 후작가를 핍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바이서스를 혼란에서 막으려는 것이오." "그, 그건 사실이잖아요! 후작이 한 짓은 모두 사실인데…" 네리아가 애처롭게 외쳤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을 뿐 이었다. "사실 유무는 아무 상관이 없소." "예?" "레이디. 아마도 당신 동료들은 당신의 순진함에서 매력을 느낄 것이라 추측합니다." 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을 가늘게 뜨면서 금발 프리스트를 노려보았다. "…멍청하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시네요. 무슨 뜻이죠?" "그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왕가의 명령에 의해 명망 높은 귀족이 처형 되는 것은 귀족원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란 말이오. 그것은 귀 족원이 왕가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귀족들은 모두 이런 전례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귀족들은 할슈타일 가문과 같은 명문가 가 간단히 처리되는 전례를 만들게 되면 왕가는 언제라도 귀족들을 마음 대로 핍박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여기게 될 거요."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기사 중의 기사인 국왕이고 태어 나면서부터 국왕의 기사인 귀족들이라고? 말이 좋다! 서로 조금이라도 틈을 안보이려고 들고, 권력의 한 조각이라도 뺏기지 않으려고 견제하 고! 그리고… 그리고 넌 또 뭐냐? 신에게 바쳐진 몸으로서 아주 자상하 게 정치학에 대해 설명해주는 너 성직자는 도대체 뭐냔 말이다! 너 그거 모르지? 네리아에게 설명해주는 그 태도가 상당히 많은 것을 설명한다는 것! 금발 프리스트는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크라드메서를 저지하려다가 죽은 것으로 처리해주겠소. 나라의 은인으로 말이오. 최소한 당신들의 명예는 빛날 것이오." 금발 프리스트는 로브 자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곧 번쩍이는 롱소드가 그의 손에 들려진 채로 우리를 겨누게 되었다. "자살을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요?" 나와 샌슨, 그리고 운차이가 동시에 검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카알 은 뒤로 빠지며 활을 들었고 아프나이델은 곧장 캐스팅을 시작했다. 네 리아는 트라어던트를 들어올렸다. 금발 프리스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통이 없도록 단숨에 목을 쳐줘라."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3. "이 자식들!"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간 순간 난 내가 오묘한 자세로 허공에 머 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비행의 감각을 제대로 음미 하기도 전에 바닥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콰당! 아이고, 머리야.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나자 무척 재미있어하는 시선이 날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묘하게 일어나네?" 창문에서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아침 햇살 속에서 미소를 짓고있는 메리 안이었다. 메리안은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바닥에 주저앉은 날 내 려다보고 있었다. 꿈이었군. 제길, 지독한 꿈이야. 머리 안팎이 모두 쑤 시는군. 후우우. 난 한 손으론 머리에 난 혹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손으론 차가운 방바닥 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자는 거 보고 있었어." "하하. 내가 이렇게 볼만하게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메리안은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자면서 계속 끙끙거리더라. 악몽 꾼 거야?" 악몽이라면 악몽이고. 난 맥없이 웃으며 메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옆에 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볼에 코의 그림자가 예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메리안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기억은 밤의 제왕이고 꿈으로 현신할 때 만물을 지배한다는 이론을 몸 으로써 실험하고 있었지." "…악몽 꿨다는 말이지?" "요약을 잘하는구나." 메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서면서 말했 다. "일어났으면 씻고 내려와. 그리고 내려올 때는 옷 제대로 입어야 돼?" "…으윽. 볼 거 다 보고나서 말하는 거야? 의외로 응큼한 데가 있네." 메리안은 문밖에서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전에도 본건데 뭐. 어서 내려와. 경비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어." "경비대원?" 옷을 챙겨입고 계단을 내려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계단참에 서서 홀을 내려다보았다. 홀은 어젯밤의 난동의 흔적이 아직껏 남아있었다. 햐. 내가 한 짓이지 만 정말 시원스럽게도 박살내어놨다.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주위 를 둘러보니 그 폐허 속에서 이라무스시의 경비대원들로 추측되는 사람 들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엉망진창이 된 홀을 둘러보며 기막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벽에 걸어두었던 주인장은 바닥에 주저앉 아서는 끙끙거리며 경비대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몇몇 경비대원들 은 홀 한 구석에 서있는 썬더라이더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히야, 이거 굉장한 말이네?" 그리고 다른 경비대원 중에 하나는 우그러진 청동 촛대를 들어올리며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뭘로 치면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들 출동 한 번 빠르네. 어젯밤에 소란을 부렸는데 오늘 아침에서야 출동이라고? 그 때 바닥에 앉아있던 주인장이 외쳤다. "저, 저기! 저기 내려왔소!" 그제서야 경비대원들은 어둑어둑한 계단참에 서있던 날 발견했다. 경비 대원들은 일순 당황하며 할버드를 꼬나들었다. 절거럭거리는 소리를 들 으며 아래로 내려서자 그 중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투 로 말했다. "뭐야? 이거 새파란 꼬마잖아?" 흐음. 계단참은 어둑어둑해서 내 모습을 잘 못봤던 모양이군. 다른 대 원들도 기막힌 표정으로 나와 주인장을 번갈아바라보았다. 주인장은 끙 끙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우두머리는 꼬나들고 있던 할버드를 늘어트리더니 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참. 이런 난동을 부린 녀석이 달아나지도 않고 자고 있다는 것도 못미더웠는데, 그 범인이 이런 꼬마라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 그 남자의 턱을 만지작거리는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 아침 일찍 출동하느라 수염 깎을 틈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난 후 치 네드발이라고 합니다. 좋은 아침이죠?" "어디서 헤헤거리는 거야? 너 이 놈, 혼자냐?" 거 참 인사가 고약하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두머리는 고개 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좋아. 일단 본부로 연행한다. 무기를 내놔." 무기를 내놓으라고? 그거 좋지. 난 신중한 표정으로 혀를 길게 내밀어 그 상하운동 성능을 시험했다. 즉, 혀를 낼름거렸다. 갑자기 조롱을 받 게 된 우두머리는 입을 조금 벌리며 얼빠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 혀가 내 최강의 무기거든. 세 치 혀가 검을 이기는 법이죠." "이 자식이!" 남자의 주먹이 곧장 앞으로 날아왔다. 딱! 흐음. 샌슨의 그것에 비해보 면 이 정도는 간지러운 정도군. 남자의 주먹이 회수되는 순간 난 싸늘하 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쳤죠?" "뭐야?" "그 쪽이 먼저 쳤다고. 그러니 이건 정당방어야." 놀란 남자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난 곧장 남자의 멱살을 붙잡 아 위로 들어올렸다. 주위의 비명 소리와 그보다 훨씬 절절한 남자의 비 명 소리를 들으며 난 남자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가 나도록 돌린 다음 바닥에 고이 내려놓자 남자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는 엉덩방아 를 찧었다. 쿵.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 했다. "저, 저 자식!" 경비대원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할버드를 들어올리는 순간 난 팔짱 을 끼면서 외쳤다. "국왕의 기사를 공격하는 것은 반란이다!" "뭐…야?" 경비대원들의 손에 들린 할버드가 멈칫하더니 그들의 안색이 각자의 체 질에 따라 다채로운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난 킬킬거리며 주머니에 쑤 셔박아둔 훈장을 꺼내어 얼굴 앞에서 대롱거렸다. 훈장을 바라보던 경비 대원들의 안색은 보다 거무죽죽하게 변해갔다. 그 거무죽죽한 안색들을 향해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이봐요. 저 으리으리한 말만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런 난동을 부리고도 태평한 걸 봤으면 진작 눈치를 챘어야지. 뭔가 믿을 만한 권력이 있으니까 요런 꼬마가 까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에이, 빌 어먹을 권력! 걸레처럼 쓰면 쓸수록 지저분해지는 것이 권력인데 가지고 있으면 꼭 쓰게 되더라고. 카아아, 퇘!" 경비대원들은 내가 던져준 의문에 버거워하며 힘들게 질문했다. "구, 국왕의 기사? 귀족…이십니까?" "아아, 정말 익숙치 않은 이름이지만, 어쨌든 다시 내 소개를 하지. 네 드발 백작가의 후치 네드발이오." 아버지! 기뻐하십시오. 이건 네드발 백작가 최초의 선언이올시다. 그리 고 네드발 백작가가 국왕을 대신하여 행한 국민에 대한 최초의 봉사이 고. 국왕의 국민인 메리안을 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음하하하! "난 국왕의 기사로서 국왕을 대신하여 조카딸을 괴롭히는 악덕 여관 주 인을 응징했지. 이 작자가 조카딸을 혹독하게 부려먹었던 것에 대해서는 동향인들인 당신들이 더 잘 아시겠지요? 자, 이제 묻겠는데, 국왕의 기 사인 날 공격함으로써 왕가에 대해 반역하시겠소?" 주저앉아있던 경비대원들의 우두머리가 못이라도 깔고 앉은 것처럼 부 리나케 일어났다. 절도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붙이는 그의 모습에서는 조 금 전까지만 해도 균형감각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즉각 여관 '트라모니카의 바람' 영업주를 체포 하여 유소년 약취의 죗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음. 이럴 땐 후치식으로 대답하면 안되겠지? 난 네드발 백작가의 초대 백작으로서 근엄하게 말했다. "훌륭한 경비대원의 자세요. 이라무스시의 앞날이 밝소. 내 잠시 후 시 장님을 찾아뵙도록 하지요." 장담하는데 제미니가 지금의 날 봤으면 웃다가 까무러쳐버렸을 거야. 하지만 경비대원 우두머리는 다시 한 번 이마가 부서져라 경례를 붙였 다. "필승! 아, 아니, 감사합니다!" 잠시후 여관 주인장은 파김치가 되어 경비대원들에게 끌려갔고 난 거 꾸로 놓은 술통에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그 광경을 감상하며 낄낄거 렸다. 경비대원들과 주인장이 다 나가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 홀 한 구석 에서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메리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메리안?" 메리안은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어깨를 흠칫 하더니 곧 고개를 내리깔 았다. "배, 백작님…" 으윽. 아무래도 '양초의 기사'라든지 '오크의 비극'은 어울려도 '후치 백작님'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난 다리를 들어 술통 위에서 반 바퀴 휘익 돌았다. 윽! 엉덩이야. "이봐, 그렇게 부르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메리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렇다고 백작님이라는 거 알았는데 계속 후치야, 하고 부를 순 없잖 아." "음, 그런가? 이제 한 번 불렀으니 됐어. 다시 후치라고 불러." "그래. 후치야.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백작이 된 거? 설명하면 길어. 그냥 나라에 공을 세우고 작위를 얻었 다고 말하면 간단하겠지." "놀랍네… 정말. 넌 여기 다녀가는엉터리 모험가 100 명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대단한 모험가인가봐. 진짜 모험가." 난 한쪽 눈을 찡긋한 다음 메리안에게 손짓했다. "하하. 자, 그럼 거기 앉아봐." "응?" "거기, 응. 그 의자는 아직 괜찮겠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앉아봐. 아침은 뭐 먹을까 등의 복잡미묘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안심하고." 메리안은 헤죽 웃으며 의자를 가져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말하기 전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침나절이라 목이 칼칼한데. "내가 네게 기회를 줄 수 있어. 나도 참 많이 컸다. 다른 사람에게 인 생이 전환될 기회를 줄 수 있게 되다니. 흠. 기회를 포착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네가 알아서 잘 판단해." "기회라고? 무슨 말이니?" "응. 먼저, 네가 이 도시를 떠나기 싫다면 이 가게를 네 소유로 옮겨줄 수도 있어. 아, 절대 불법적인 일은 아냐. 내가 이 가게를 사서 너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네가 여관 경영에 자신이 없다면, 하긴 네 나이엔 어렵겠지. 넌 다른 보호자를 찾을 수 없지?" "응…" "애인은?" 메리안은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 내가 아주 훌륭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 그 사람에게 널 맡길 까 하는데. 뭐 별로 부자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성격은 참 좋아. 호강 하게 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은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야." "지금 중매하는 거니?" "오우, 천만에. 보호자가 될 사람을 찾아주는 거라니까. 네가 충분히 성장해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널 부탁할 작정이야. 하 하, 이거 참. 이런 말은 늙수그레한 사람이 해야 어울릴 말인데 너랑 비 슷한 나이의 남자애가 말하니까 꽤 이상하게 들리지?" 메리안은 살폿 미소를 지었다. 난 마주 웃어주면서 말했다. "그도저도 싫고 네게 어떤 다른 복안이 있으면 말해봐. 내가 도와줄께. 일단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야. 어때?" 메리안은 다시 입술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좀 불분명하게 들렸다. "난 모르겠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이해해. 천천히 생각해봐. 난 지금부터 시장을 찾아가서 내 신분을 밝 히고 주인장의 처벌을 의논할 생각이거든. 그 동안 생각해보렴." "알았어. 참, 아침은 먹어야지?" "괜찮아. 시장 관사에 쳐들어가서 얻어먹지, 뭐. 이라무스 시장님에게 네드발 백작을 대접할 기회는 주자고." "아, 아. 그렇구나. 백작님이시니까…" "퍽 웃기지? 하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도시나 영지에 들리면 그 시 장이나 영주에게 꼭 인사를 하는 것이 예법이라더군. 아, 그래. 같이 갈 래?" "아, 아니. 난 괜찮아. 그러니까 이건 백작님이 시장님을 찾아가는 길 인 거지?" "뭐… 그렇지." "알았어. 내가 감히 어떻게 따라가겠니. 호호. 그런 미안한 표정 짓지 마. 잘 이해하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난 대답하는 대신 술통에서 뛰어내리며 입에 손가락을 꺾어넣었다. 휘 이익! 홀 구석에 서있던 썬더라이더는 기특하게도 곧장 걸어왔다. 말에 올라타 문을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메리안은 횡뎅그레한 홀 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서는 많은 당황과 감탄이 섞여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홀 가운데 외로이 앉아있는 모습, 마치 지금의 그녀 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군. 안쓰러운데.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 른 희망은 날 뿌듯하게 만들었다. 하하, 저 희망의 원인은 바로 나일 테 지? 메리안, 걱정마. 내가 널 도와줄게. 어젯밤의 내 생각은 잠시 보류야. 우린 드래곤처럼 살 순 없어. 최소한 메리안은 그럴 수 없어. 타인의 친절에 저렇듯 기뻐할 줄 아는 것을 보 란 말이야. 이루릴이 도와주든 말든 신경 안쓰던, 그리고 제레인트가 도 와주려고 하자 화를 벌컥 내던 지골레이드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메리안은 인간이니까. 폐허 속에서도 희망으로 웃는 인간 메리안은 손을 들었다. "잘 다녀와." 난 마주 손을 흔들어 준 다음 신나게 출발했다. "이랴아! 가자아, 썬더라이더!" 윽! 실수다. 신바람이 나서 그냥 달려왔어. 난 시청이 어디 있는지 모 른다고!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4, 찾아간 날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라무스시의 시장님은 며칠전 자 이펀이 사용하는 디바인 웨펀(세이크럴라이제이션을 사용하는 파괴 작전 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나보다. 신의 무기라고? 인간의 무기야, 인간의.) 을 주의하라는 공문을 받아보고서는 분기탱천, 그 즉시 가문의 보검을 어깨에 둘러매고 자원입대해버리셨다는 것이다. 지금쯤은 남쪽으로 가는 지원군에 포함되어 씩씩하게 행군하고 계실 거라는 말에 나는 질문했다. "시장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현재 시장 대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시청 총무부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65세십니다." "…대단한 노익장이시군요." 시장실의 모습도 그 시장 되는 사람의 인격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 만한 모습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방패와 검은 지금 당장 들고 싸우러 나가도 될만큼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장식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장실 한쪽 구석에 잘 보이지 않게 치워두었지만 야전 침대임에 분명한 침대의 모습도 보였다. 큼직한 책장 옆에 놓인 나무통에는 서류 두루마 리 대신 콰렐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게시장실이야, 아니면 레인저들의 바라크야? 우리 나라는 확실히 기사도의 나라야. 아, 실수. 귀족들만 빼 고 말이야. 쳇! 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 자제 되시는 분들이 말리지도 않았습니까?" "아버님은 말린다고 들으실 분이 아니라서요." 땡, 땡!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난 황급히 고개를 숙였 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시장님이 아버님 되시는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네드발 백작님. 자랑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걱정 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이해합니다.제 아버지도 자원입대병이시거든요." "그렇습니까? 아, 혹시… 아닙니다." "예?" "혹시 아버님께서 전사하셔서 그 나이에 백작 지위를 계승하신 것은 아 니신지…" "예? 하하. 아니에요. 전 신흥 귀족입니다. 제가 네드발 백작가의 초대 백작이지요." 시장 대리는 고개를 숙이더니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마 당황한 얼굴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흠. 뭘 그런 거 가지고 놀라시나. 시장 대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나서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허허, 믿기 어렵군요. 그 나이에 전쟁에서 공을 세우신 것도 아니실 텐데." "공이라면 공이고… 뭐 그런 일이 있었지요. 자세한 것은 국가 기밀에 관련되어 자칫 미묘한 사태를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는지라 알 려드릴 수 없군요." 보라, 헬턴트 주민들이여! 우하하하! 내가 말이야, 헬턴트 초장이 후보 인 내가 말이야, 약간 피로해보이는 듯하면서 동시에 긴장된 얼굴로 '국 가 기밀에 관련된 일이라… 미묘한 사태를…'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듣고 있는 이라무스 시장 대리께서는 잔뜩 긴장해서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단 말이지. 손에 든 찻잔을 테 이블에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냥 허공에 띄워두고서 말이야. 우리 영지의 주민들을 모조리 여기 불러왔으면 좋겠네. 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리며 다시 기품있게 말했다. "저희 아버님은 드래곤의 포로로 잡혀있다는 것 이외에는 자세한 것을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시장 대리께서는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버리셨다. 이제 난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며 드래곤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네 드발 백작인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불행을 가지고 제가 장난을 치는 거 용서해주세요. 곧 구해드릴께요. 예? 시장 대리와의 회견은 그런대로 적당한 수준에서 품위있게 마무리지어 졌다. 메리안의 삼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미성년자를 보 호하는 국법과 이라무스 시의 시 조례에 따라 시장 대리께서 알아서 처 리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시청의 관사에서 유숙하라는 부탁을 정중히 거 절하고 메리안에게 돌아왔다. 메리안은 문밖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호기심많은 시민들이 몰려서 그녀에게 어젯밤의 사건 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메리안은 꽤나 당황스러운 얼굴로 시 민들에게 설명하다가 간신히 날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후… 백작님!" …아무래도 백작이라는 거 별로 좋지 않아.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 렇게 부른다는 거 이해하지만 이게 도대체 뭐람. 메리안과 나 사이에 엄 청난 거리감이 발생해버리는 것 같잖아? 메리안을 둘러싸고 있던 시민들 은 먼저 썬더라이더를 보고 놀란 다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난 별 말 없이 썬더라이더에서 내려섰다. 메리안은 고개를 숙이더니 다 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청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난 얼굴을 구기면서 메리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녀의 입매가 조금 올라가 있는 것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아, 그래? 그 렇다면 나라고 질 순 없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레이디 메리안 만세. 그렇습니다, 레이 디. 레이디를 음해하던 악덕 영업주는 정의와 국법의 이름에 의해 처단 될 것입니다. 레이디 메리안의 명예 영원하시길." 메리안은 황당한 시선으로 날 올려다보았고 난 주위에 보이지 않도록 재빨리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무래도 나나 메리안이나 이 배역에는 별 로 어울리지 않는거 같아. 앞치마를 두른 채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메리 안이 '레이디 메리안'에 안 어울리는 거나, 타고 있는 말이 멋진 것 외 에는 후줄근한 옷에 새집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내가 '네드발 백작'에 안 어울리는 거나 거의 비슷하단 말이야. 주위의 시민들이 경외스러워하 는 이유는 오로지 내 멋드러진 태도와 썬더라이더의 멋드러진 태도 때문 일 것이다. 아, 어쩌면 후자에 더 큰 비중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메리안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안으로 드시지요, 백작님." "감사합니다." 나는 메리안을 따라 홀 안으로 들어서서는 곧장 문을 닫아서 바깥의 시 민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곧 얼굴을 있는대로 구기 면서 메리안을 바라보았다. 메리안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떡하니. 국왕의 기사에게 덤비는 것이 반란이듯, 국왕의 기사 에게 적합한 예를 표현하지 않는 것도 왕실 모독이 되는 거 아냐?" "…아침 먹었어?" "응." "점심 먹었어?" "뭐? 아직 점심 때도 아니잖아?" "아하, 안먹었군. 그래서 그렇게 말을 잘하는 거였구나." "후치!" 난 피식 웃었다. 역시 저렇게 불러줘야 내 존재 확인이 된다니까. 우하 하.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테이블 위에 아침엔 못보던 보따리가 있는 것 이 보였다. 메리안은 내 눈길을 따라가다가 그 보따리를 보고는 생긋 웃 었다. "저건 뭐지?" "내 짐. 간단하지?" "…알았어. 특별히 만나볼 사람 있어?" "아니, 없어. 그런데 질문이 있어." "훌륭하군. 질문도 있고 그 질문을 들을 사람도 있고. 성직자들보다는 훨씬 나아. 성직자들은 질문을 엄청나게 던지지만 해답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던데. 하하. 이 멋진 상황을 축하하며, 무슨 질문이니?" "왜 나한테 잘해주니?" "응?" 메리안은 시선을 내리더니 짐보퉁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짐을 싸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난 너에게 친절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애. 후치는 왜 나를 위해 싸우고 내 미래를 보호해주려고 하 는 거지?" 시시한 질문이군. 난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글쎄. 절벽에서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는 아기를 보고 들고있던 계란 바구니를 집어던지고 달려가는 처녀의 이유는 뭘까?" "응?" "말해봐. 계란 바구니 속의 계란을 다 깨어버리면서 아기에게 달려가는 이유는?" 메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어, 뭐, 계란보다야 아기가 더 소중하니까?" "그런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뭐 그것도 괜찮네. 맞다, 맞아. 나도 내 수고로움보다는 메리안이 더 소중하니까야. 난 널 돕는 것이 특 별히 고생스럽거나 힘들진 않아. 야, 그런데 내 대답, 내가 들어봐도 좀 몰인정하게 들린다?" 메리안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헤엥. 그럼 무지무지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면 날 돕지 않았을 거란 말이네?"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음. 만일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이었다든 가, 내 모든 미래가 박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되는 일이었다 든가. 그럴 경우라면 난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어. '메리안과의 우정은 별 거 아니야. 내가 더 중요해.'라고 말이 야. 그리고 스스로 그 결정에 만족해하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 난 내 수고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할 만하니 까 하는 거야. 난 어리석은 폐태자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관두지." "응? 무슨 말이니?" "아냐. 별 말 아니야. 설명이 됐다면 그만 나갈까." 메리안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보따리를 들어올렸다. 흐음, 정말 시원스 러운 출발이야. 그녀는 가게를 한 번 돌아본다든가 하지도 않고 곧장 문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난 당황해서 그녀를 불렀다. "어, 이봐, 메리안. 종업원 우두머리라든가 하는 사람 없어? 이 가게 그냥 내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잖아. 주인도 없는데…" 메리안은 문 바로 앞에서 멈춰서더니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난 이 가게에 별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데. 넌 느끼나 보지?" "나야 상관없지만 네가 혹시… 네 삼촌이잖아." "이까짓 가게 어떻게 되든 말든. 내 가게는 아냐. 뭐 다른 하인들이 알 아서 잘 할 거야. 어제는 네가 무서워 다 도망갔지만 얼마 안 있으면 다 시들 몰려오겠지. 우리 삼촌만 풀려나면." "알았어, 좋아. 그럼 나가지." 그래. 하인들은 다시 몰려들겠지. 주인에게 권위가 돌아온다면. "다시 몰려들 거라고요?" "그래. 그렇게 만들겠네." 카알은 피로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느리게 말했다. "귀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 거야. 귀족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오만과 독선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는 근거 없는 우월의식이지. 정 녕 우월한 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게 되네. 하지만 실속 없이 우월의식만 가진 자는 폭력적으로 바뀌게 되지. 그런 폭력은 일견 강력해 보이지만 더 큰 폭력 앞에서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 지. 난 핸드레이크가 그러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행동할 것이네. 카알 헬턴트의 이름이 공포의 이름으로, 마주보기 두려울 정도의 후광으로 빛 나는 이름이 되게 만들겠네." 저게 카알 맞나? 난 놀라움에 젖어 카알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 오두막에서 책이나 뒤적거리고 있던 그 허허 웃던 독서가의 모습인 데? 그러나 카알은 매서운 눈으로 말했다. "그들이 국왕에게 매달리게 만들겠네. 귀족? 귀족이라 해도 국왕 앞에 서는 다른 국민과 똑같은 국민으로 있게 만들겠어. 그들의 오만과 그들 의 위세를 산산히 박살내어놓겠네." 별로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난 역시 창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길시언이 카알에게 준 빚은 너무 큰가 보군요."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인한 자지. 그 사람은… 잔인하도록 위대한 자였지. 위대함은 뛰어 난 무용이나 높은 지식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위대해야 돼. 그럴 수 있는 자가 위대한 자지. 난 길시언을 보고서야 그것을 알 수 있었네. 사람들이 멋모르고 말했던 것이 진실이었어. 그가 왕이 되었 어야 했는데…" "그럼 후작은 어떻게 처리하실 거죠?" 카알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줘야지." "말도 안됩니다!" 샌슨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와 카알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샌슨 을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게 새로 나온 벌이라도 되는 겁니까? '조국의 영웅'이라는 이름 의 형벌이 새로 생겼습니까?" 재미있는 추측이네. 샌슨은 너무 흥분해서 침을 튀겨가며 말하고 있었 다. 네리아 역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샌슨이 말하자 자리 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좋은 사람들이야. 난 이마를 짚으 며 웃었고 카알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퍼시발군. 난 그 의미 그대로 말한 거야." 샌슨은 보다 높은 목소리로 고함을 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다가 흠칫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난 웃는얼굴로 고개 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샌슨은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냉혹하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서 너보다 똑똑한 사람의 말을 기다려. 가만히 있으면 절 반이나 가지."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의자를 주워 똑바로 앉아서는 카알을 바라보았 다. (그런데 왜 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설명해주시죠." "알았네. 그 금발 프리스트가 말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할슈타일 후작 만큼의 명문가도 처리될 수 있다면 귀족들은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한 말 말이야." "예? 아, 예. 그런 말이었죠." "이 나라의 왕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일세. 사실 하나의 나라 안에 권력이 너무 많아. 종교계는 신성불가침인데다가 너무 많아. 그리고 마법계는 단일구조이긴 하지만 너무 강력해. 핸드레 이크나 솔로쳐가 좋은 전통을 남겨둬서 아직껏 마법사들은 상아탑의 고 상한 학자로 있는 것을 좋아해서 다행이지만. 드래곤은… 드래곤들은 드 래곤 라자에 의해 인간과 그런대로 괜찮은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망 정이지, 드래곤들의 힘은 왕가의 치명적 해가 될 수 있는 것이었지. 그 리고 엘프와 드워프들도 왕권에 전혀 예속되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행동 하고 있고.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온 나라 이지 않은가?" 샌슨은 얼굴을 노랗게 되어 숨을 몰아쉬었다. 카알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때… 나도 청운의 꿈을 품었던 적이 있지. 하지만 이 나라는 너무 전망이 없었어." "카알?" 카알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어쨌든, 권력집중이 안된 나라는 골칫거리야. 한 가정으로 생각해도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문제지. 한 가정의 가장이 가장으로 섬겨지지 못 하면 어떻겠는가? 그 식솔들이 그를 비웃을 수밖에. 이 나라에서는 지금 귀족들이 왕가를 비웃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요?" "그리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 이후 300년, 바이서스 왕가는 자이펀과의 전쟁이라는 최고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 거지. 우리가 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우연이 산재한 것이 역사인 것 같지 만 그 뒤에는 면밀한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 법일세. 자이펀과의 전쟁, 할슈타일 후작이나 넥슨 휴리첼의 반란 음모,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라자 혈통의 단절… 이 모든것은 간단히 요약되네. 바이서스는 흔들리 기 시작한 거지. 대왕과 대마법사가 쌓아둔 토대는 이제 그 힘이 약화되 기 시작했어. 이제 우리 불민한 후손들은 영웅시대의 유산을 다 탕진한 거지." 꿀꺽. 침을 삼키는 것이 왠지 중노동처럼 느껴지는군. "이런 상황에서 할슈타일 후작을 반란죄로 처리하면, 그 진위야 어쨌든 지간에 귀족들은 크게 동요할 거란 말일세. 할 수 없지.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그래서 할슈타일 후작은 오로지 왕가를 위해 순교하게 해드려야지. 이 점, 중요하네. 할슈타일 후작은 나라와 국왕을 위해 순 교해야 되는 거야. 그럼 다른 귀족들에게도 비슷한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지. 봐라, 할슈타일 후작도 그랬다. 너희들도 국왕께 충성해라. 이해 되는가?" "아이고 맙소사… 머리가 아픕니다." "물론 전면적으로 그렇게 요구할 순 없지만 경향성은 만들어낼 수 있 지.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고. 이제 새로운 힘이 바이서스에 도입되어 야 해.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 힘 말일세. 인간적인 힘, 영웅의 환상은 긴긴 여름날의 백일몽이었고, 이제 곧 혹독한 겨울이 오게 되겠지. 영웅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우리를 키워왔고 자라나게 했고 의식의 지 평을 열어주었던 영웅시대의 유산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새로이 도약해 야 될 시점에 온 것이지. 바이서스의 마법의 가을일세." 카알의 단점 중에 하나야. 듣는 사람을 너무 높게 평가해주곤 한다니 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간신히 할 말을 생각해냈다. "그럼… 알겠습니다. 할슈타일 후작은 절대로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 면 안되는군요?" "정확하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선 안돼. 그래 서 오늘 급히 모이라고 한 걸세. 지금 당장 그 작자를 추적해야 돼."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5. 겨울 햇살이 뽀송뽀송하다. "너무 더워… 이거 벗어도 되겠어." 메리안은 뒤집어쓰고 있던 외투를 벗느라 꿈지럭거렸다. 메리안의 시선 이 목 뒤로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데. 난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그래. 허, 흠. 겨울 날씨가 이래서 참 다행이야. 여행하기 좋지?" "무지무지하게 추울 거라고 겁주더니…" 모험가의 허풍은 무죄야. 제발 그런 눈으로 쏘아보지 말라고. 난 오만 가지 허풍을 다 동원해서 메리안을 겁줬었다. 살을 도려내는 추위 속에 서,며칠씩 굶어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잠자리에 들지만, 뒤를 따라오는 몬스터들의 피에 젖은 이빨을 경계하면서 그나마 편하게 잠들지 못하는 공포스러운 밤… 그러나 네 곁엔 사상 최대의 모험가가 함께 하니 그를 믿고 따르라. (존경하는 후치님, 당신만 믿겠어요. 정도의 감정이 담긴 시선을 기대했다는 사실까지 말해야 할까?) 그런데 이라무스시를 떠나고도 이틀이 지나는 동안 날씨는 쾌청하기 짝 이 없었고 세 때 꼬박꼬박 챙겨먹어 배는 부르고 몬스터는 커녕 토끼새 끼 하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상 최대의 모험가는 졸다가 말 에서 떨어질 뻔해서 그 뒤에 타고 있는 레이디에게 엄청난 구박을 들은 지 10분도 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도대체 뭐 이래? 졸려 죽겠네. 이 때 산적들이라도 우르르 나타나서 '가진 것 모조리 다 내놓고 목숨 하나 만 가지고 지나가세요.'라고 친절하게 권해주면 얼마나 놓을까. "가진 것 다 내놔!" "만세!" 내 외침 소리는 산적들과, 메리안과,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길 양편에서 우르르 나타난 남자들은 얼굴에 '당황'이라고 써 붙인 모습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뭔가 변명을 해야 한다는 참을 수 없는 강박관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7명밖에 안돼!" 내 두 번째 외침에는 별로 호소력이 없었고 산적들과 메리안은 보다 깊 은 의문 속으로 침잠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 본질을 오도하는 말 을 해버린 것 같군. 난 썬더라이더에서 내려섰다. 안되겠어. 내 인격을 급부상시켜야겠다. 나는 비장한 시선으로 메리안을 바라보았다. "메리안, 그대로 타고 있어. 내가 널 지켜주겠어. 만일 내가 죽으면 썬 더라이더가 널 안전하게…" "후치! 이 바보야, 왜 말에서 내려! 같이 도망가야지!" 윽. 메리안,제발! 내가 이 정도로 몸부림을 치면 뭔가 호응이 될만한 말을 해줘야지. "남자애는 이런 순간에 그렇게 말하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남자애들은 다 여자애들에게 멍청하다는 말을 듣는 거야! 그 리고 네가 한 말과도 다르잖아!" "내가 한 말?" "그래! 할 만하니까 한다는 말 말이야!" "…가끔은 자기 신념과 틀린 일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그리고 이번에 는 내 신념에 틀린 행동은 아니야." "무슨 말이니?" "싸울 만하니까 내려선 거야. 내 말을 그렇게 못 믿어? 난 레티의 프리 스트들과도 검을 나눠봤다니까. 이런 유랑민들 7 명 쯤은 별로 안 무서 워!"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와 메리안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설전을 지켜보 던 남자들은 '유랑민'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당신들!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여기까지 피난왔다가 먹고 살 일이 아무 래도 난감하다 싶으니까 산적 영업을 개시해보는 거겠지? 그것도 이번이 첫번째지?" "어, 어?" "어떻게 알았냐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첫번째인 줄은 어떻게 알았냐고? 긴장감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지." 손에 괭이나 삽, 낫 등을 들고 있던 남자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뒷걸 음질을 치고 있었다. 자, 잠깐. 뒷걸음질은 원래 숨길 수 없는 것이었 나? 어흠!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 싸움입니까?" 남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난 측은함을 느 껴 검을 늘어트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늘어선 일곱 사나이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움푹 들어간 볼엔 땟국물이 흐르고 있고 볼과 턱엔 정리되지 못한 수염들이 덩어리져 있었다. 옷은… 기울 시간도 여유도 없었는지 찢어진 채로 걸치고 있는, 저것은 옷이라기보다는 누더기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 허기져 쾡한 눈에는 번들거리는 살기가 느 껴졌다. 저 사람들로서는 이판사판이겠는데. "제길, 쳐!" 사나이들 중 그래도 꽤나 강단있어 보이는 남자가 앞장서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사나이들도 악에 받혀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우 아아아!" 아이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공격할 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어.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내는 소리는 고작해야 "흡!" 하는 호흡 고르는 소 리뿐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작자들은 비명도 안지른다. "이 자식아, 그렇게 치면 나 죽잖아!" 샌슨은 고함을 지르며 목을 향해 날아오던 롱소드를 튕겨올렸다. 상대 는 검을 회수하는 대신 뒤로 뛰어 거리를 만드는 것으로 방어를 삼고 손 은 이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 성직자는 운차이의 모습을 놓쳤다. 운차이는 그 옆을 지나가다가 한 대 치고 지나 갔고 성직자는 곧장 허물어졌다. 운차이가 달려든 곳에서는 덩치가 예사롭지 않은 프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거인 프리스트는 두 개나 되는 롱소드를 부여잡은 채 운차이 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차이는 날아오는 두 개의 검을 한 번에 튕겨내면서 피식 웃었다. "쌍검? 그건 우리 나라에선 전설 속에서도 이미 사라진 느려터진 기법. 낡은 것에 집착하는 악취미의 댓가를 받으시지." 몸이 검을 인도했다. 운차이의 몸이 상대를 지나치고 검이 그 뒤를 따 라 움직였던 것 같다. 내 눈엔 그거밖엔 안보였다. 그리고 상대는 검을 떨어트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 다. "넋 빼놓고 있지마! 어느 칼이 네 모가지 가져가는 줄은 알아야 될 거 아냐?" 이크! 난 바스타드를 휘저으며 뒤로 뛰었다. 탱! 오, 이런! 날카로운 떨림이 손목을 지나 어깨까지 흔들리게 만들었다. 상당히 정확하게 친 모양인데? 숨을 고르고 앞을 보자 검을 꼬나든 채 날 마주보고 있는 금 발 프리스트가 서있었다. 난 무턱대고 외쳤다. "더 세게 쳐봐!"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 놈, 나한테 속았다! 타당! 금 발 프리스트의 검은 간신히 막아내었다. 그리고 검이 부딪히는 순간 힘 을 살짝 뺐다. 그러자 상대는 곧장 앞으로 밀어오기 시작했다. 씩 웃고, 곧장 앞으로 밀어붙였다. "이야아아아!" 금발 프리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곧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지 만 난 죽어라고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 자식아, 네가 검을 빼내면 내 가 죽는데 왜 놔주냐? 삽시간에 금발 프리스트와 나는 밀고 밀리면서 열 걸음 쯤 달려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열 걸음을 밀리면서 안 넘어 져? "이래도 안 넘어져!" 내 발은 상대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다리 를 빼먼서 피했고 난 허공을 걷어차며 금발 프리스트를 놔주고 말았다. 단 두 걸음. 그러나 금발 프리스트에겐 두 걸음으로 충분했다. 그는 다 시 세차게 찔어들어왔다. 이런, 젠장! "내가 더 길어!" 트라이던트가 번쩍이는 순간 금발 프리스트는 찔러들어오던 검을 옆으 로 뿌렸다. 트라이던트의 창날과 롱소드가 부딪혔고 난 뒤로 넘어지면서 그대로 뒤로 굴러일어났다. "네리아! 사랑해요!" "난 항상 그게 문제야! 너무 사랑스럽다니까! 까하하하!" 네리아는 그렇게 내 정신을 완전히 빼놓고는 트라이던트를 찔러대기 시 작했다. 금발 프리스트는 이를 사려물면서 찔러들어오는 트라이던트를 내려쳤다. 콰각! 트라이던트가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또다른 성직자가 달려들어 트라이던트를 밟았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놓치고서 뒤로 물러났다. 젠장! 상대가 너무 많아! 샌슨은 세 명의 상대를 붙잡고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운차이는 포위되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자기 실력을 다 소모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 었다. 이미 메모라이즈했던 마법을 다 쓴 아프나이델은 몸으로 싸우겠답 시고 땅에 떨어진 스피어를 주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첫번째 공격 은 드워프들의 노커를 기겁하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이 자식아, 똑바로 쳐! 누구 눈알을 뽑으려는 거야?" "이, 이크! 죄송합니다. 아, 이거 생각 외로 무거워… 엑셀핸드!" "응?" 엑셀핸드는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레티의 검이 그의 어깨 를 지나쳤고 엑셀핸드는 몸을 돌리다가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핑그르르 돌면서 넘어졌다. 아프나이델은 발악하며 스피어를 휘둘렀지만 상대는 가볍게 아프나이델의 스피어를 잘라버리고는 아프나이델을 걷어찼다. 아 프나이델은 엑셀핸드의 옆에 쓰러졌다. "크흑! 엑셀핸드님, 죄송합니다…" 엑셀핸드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레티의 성직자는 그의 가슴을 밟았다. 젠장! 트라이던트를 놓친 네리아는 괴성을 지르며 엑셀핸드에게로 달려갔다. 달려가던 네리아의 팔이 빙글 움직이면서 대 거들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엑셀핸드를 밟은 채 롱소드를 들어올리던 성 직자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카알이 날린 화살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성직자는 가슴에 화살을 맞은 채 뒤로 넘어졌다. 좋아, 저기는 일단 카알과 네리아에게 맡겨두자! 난 다시 고개를 돌려 금발 프리스트 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을 땐 후치 네드발이라고 외치며 죽어라! 그가 널 죽인다!" 금발 프리스트는 매섭게 웃으며 베어들어왔다. 날아오던 검을 튕겨내었 지만 금발 프리스트의 롱소드는 회초리처럼 튕겨지며 다시 날아왔다. "크으윽!" 허벅지가 꿰뚫리는 아픔을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 갔다. 원래 무릎이 없었던 것처럼 무릎이 제멋대로 꺾였다. 난 무릎을 꿇으면서도 바스타드를 휘저었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손목만 조금 움직여 서 내 검을 옆으로 날려버렸다. 난 이를 갈면서 검을 들어올리는 금발 프리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검이 정상으로 올라간 순간 나는 눈을 질 끈 감아버렸다. 이젠 끝장이군. 그러나 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이상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그 이상한 발걸음소리는 내 옆을 지나쳐 내 앞에서 멈췄다. 난 눈을 떴 다. "길시언?" 길시언이 힘들게 다리를 움직여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길시언의 등을 올려다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면서 난 아무 말도 못했 다. 저 멀리서 네리아가 발악하듯 외쳤다. "미쳤어! 어서 비켜요!" 길시언은 들은체 만체하며 프림 블레이드를 들어올렸다. 우우웅! 금발 프리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은 죽음이오." 길시언은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천천히 말했다. "좋은 죽음 따위는… 없어. 멍청아. 좋은 삶이 있을 뿐이지." "그렇소?" "이 순간… 나는 살아있다." 길시언이 웃고 있는 모양인지 그 어깨가 들썩거렸다.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당신은 이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가고 있군. 이 순간이 그대에게 행복했으면 좋겠소." 그리고 금발 프리스트는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져오기 시작했다. 다른 프리스트들은 착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길시언의 몸은 움직 이지 않았지만 그의 어깨는무섭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안돼. 앞으로 나 서야 되나? 길시언을 밀어내어야 되나? 그러나 난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나의 왕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가가가! 뭔가 번쩍이는 것이 급속하게 하늘로 쏘아져올라갔다. 난 망연히 그 빛 을 따라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검은 점이 보였다. 그 동그라미를 향해 쏘아져올라가며 번쩍이는 것은… 프림 블레이드? "삐이이이익!" 독수리의 울음 소리는 처절했다.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 속에서 터져나 갈 듯이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내렸다. 금발 프리스트의 검은 길시언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클, 쿨럭." 길시언은 기침을 토했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주위의 싸움을 전 혀 느끼지 못한 채 그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금발 프리스트는 낮게 말했 다. "용서하시오. 왕이 되셔야 했을 분이여." 금발 프리스트의 검이 뽑혔고 길시언은 무릎을 꿇었다. 팍. 허공으로 튕겨져올라갔던 프림 블레이드가 길시언의 옆에 꽂혔다. 우우우웅! 프림 블레이드는 그대로 땅에서 뽑혀나올 듯이 웅웅거렸다. 길시언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대로 앞으로 쓰 러지려나? 그러나 길시언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무릎을 짚 고 떨리는 오른손은 프림 블레이드를 향해 뻗었다. 금발 프리스트는 차 가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살아있어." 숨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며,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쥐었 다. 그는 프림 블레이드를 지팡이삼아 일어나려고 했다. 금발 프리스트 는 고개를 가로젖더니 서서히 롱소드를 들어올렸다. "이 자식아, 멈춰!" 난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 다. 결과적으로 난 땅에 호되게 볼을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다. 볼이 그대 로 벗겨지는 아픔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난 허겁지겁 눈을 비비며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우울한 눈으로 금발 프리스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금발 프 리스트의 검은 천천히,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검은 정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길시언은 눈을 감지 않았고 그 때까지도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말했다. "잘 쉬시오."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뒷쪽에서 무서운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금발 프리스트는 비명 소리에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정말 제아무리 검의 달인인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라도 고개를 돌려 확인하게끔 만드는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린 성직자들은 이 제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 때문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모래가 날리면 모래폭풍이지. 그럼 저건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사람폭풍?" 성직자들이 폭풍우치고 있었다. 말이 꽤나 이상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 도 없었다. 성직자들은 제멋대로 날려올라가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운차이가 미끄러져들어왔다. 운차이는 강맹한 동작으로 금 발 프리스트를 쫓아내고는 길시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그제서야 잠 시 멈추며 사람폭풍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즐거워 못견디겠다는 듯이 외 쳤다. "카알! 당신을 존경해도 되겠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활에 화살을 먹인 채 서있던 카알은 얼떨떨한 표정 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외쳤다. "핫소드 그란과 쟈크요! 당신이 세아름 소나무 아래에 숨긴 게 뭔지 알 겠군요!"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6. "OPG라고?" "응. 하슬러를 체포했을 때 그의 OPG도 뺏았거든? 그런데 카알은 하슬 러에게서 빼앗았던 OPG를 숨겨두었던 거야. 뒤에 무기는 숨겨두지 않았 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카알은 태연하게 대답하더라고. OPG는 무 기가 아니지 않냐고." "헤에… 하긴 그 하슬러라는 분, 딸까지 데리고 맨손으로 레인저들한테 서 도망갈 수야 없었겠지." "그렇긴 해." 메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쥔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난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쥔 채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이 정도면 괜찮 은 광경이지. 말의 고삐를 쥔 채 걷고 있는 미남 전사. 그리고 그 말 위 에 앉은 아리따운 레이디. 그리고 그 뒤로 졸졸 따라오고 있는 유랑민들 의 무리. 우리를 습격했던 남자들은 모두 퍼렇게 된 눈이나 절뚝거리는 다리를 한 채 부인이나 다른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좀 심하 게 쥐어박았나? 남자들의 가족들도 모두 초라한 모습이었다. 나와 남자 들의 싸움이 끝날 때 쯤해서 우루루 몰려나온 그 가족들은 남자들을 죽 이지 말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내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었다. 지 금도 내 뒤를 따라오고는 있지만 몹시나 불안한 눈들을 하고 있는 그 사 람들을 향해, 난 짐짓 쾌활하게 외쳤다.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밭들이 보이지요?" 남자들과 그 가족들은 길 주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밭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따라서 밭을 둘러보았다. 추수가 끝난 밭에는 밀 짚단과 그루터기들이 어지럽게 나있었다. 그 때 밭을 둘러보던 내 눈에 한 무리 의 사람들이 보였다. 저 멀리 좀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대략 20명 정도 되 어보였다. 그들은 커다란나무에 밧줄을 묶어 당기고 있었다. 나무를 뽑 아내려는 것인가? 난 썬더라이더를 끌고 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랑민들은 잠시 주저하다가 곧 내 뒤를 따라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영차! 영차! 흐음. 확실히 나무를 뽑아내려는 모양이군. 아마 밭이라도 개간하 는 모양이지? 그 사람들도 다가가는 우리들을 보았는지 일손을 멈추었 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 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군?" 어라? 저게 누구더라? 그런데 목소리는 기억나는데. 땀에 절은 셔츠를 입고 이마를 닦으며 걸어오고 있는 시커먼 얼굴의 사람은… "펠레일?" "야아! 이게 누굽니까. 후치군이군요! 반갑습니다." 펠레일은 거의 뛰듯이 달려와서는 내 손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난 펠레일이 내 손을 흔들도록 내버려둔 채 당황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 반갑습니다, 펠레일.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 습니까?" "노동의 흔적이지요. 하하하!" 소매를 둥둥 걷어붙인 펠레일의 팔은 시커멓게 그을려있는 데다가 힘줄 이 멋지게 솟아나 있었다. 그러고보니 목이나 가슴도 좀 두꺼워진 것 같 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까무잡잡하게 바뀐 그 얼굴 때문에 펠레일의 인 상이 꽤나 낯설었다. 난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 하하… 요즘은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죠?" "하하, 무슨 소리를! 전 이 근방에서 꽤나 유명해졌습니다. 칼라일의 펠로우메이지 펠레일." 칼라일의 펠로우메이지 펠레일? 그렇다면 스네어 트레일의 다크 메이지 리치몬드도 스네어 트레일의 땅을 갈고 있던 농부 아니었을까? 어쨌든 내가 데리고 간 유랑민들은 펠레일과 칼라일 영지의 주민들에 의해 환영받았다. 그날 저녁, 유랑민들은 굉장한 식사 매너로서 나로 하 여금 엑셀핸드의 추억에 잠겨들게 만들었다. 식사가 끝나고 유랑민들을 임시 거처에 재우는 일까지 마치고나서 난 펠레일의 집으로 초대되었다. 나와 메리안이 자리에 앉자 펠레일은 기분좋게 웃으면서 낯선 남자를 하나 데리고 왔다. "이 분, 기억나십니까?" 난 잠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새로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더라?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벽 난로에 나무를 집어던졌다. 난 멍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팔짱을 낄 뿐 별 말이 없었다. 펠레일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코다슈씨입니다. 왜 그 때 운차이와 함께 있던 간첩들 기억 안 납니 까?" "아! 에델린이 말하던 그 분이군요. 여기 남았다던…"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건 아마 인사인가 보군. 허허. 운차이 보다 더한 사람일세. 메리안이 그에게 인사했지만 코다슈씨는 깨끗이 무 시했다. 메리안은 얼굴이 발갛게 되었고 난 고개를 가로저었으며 펠레일 은 다시 킥킥거렸다. 펠레일은 술병과 간단한 음식들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내어놓고는 자리 에 앉았다. "자, 이거 환영식으로는 조촐하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예. 갑자기 쳐들어와서 폐가 많았지요?" "아뇨. 사람들이 오는 것은 퍽이나 반가운 일입니다. 후치군도 알다시 피 이 영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펠레일은 말끝을 조금 흐리며 코다슈씨의 눈치를 살폈지만 코다슈씨는 팔짱을 낀 채 벽난로만 쏘아보고 있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예. 저도 아마 그럴 거라고 믿고 저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괜찮다면 이곳에 정착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만." 펠레일은 두 팔을 벌리며 환영한다는 몸짓을 했다.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집도 얼마든지 있고 밭도 많습니다." "다행이군요. 내일 말해주면 좋아하겠군요." "예. 그런데 지금까진 좀 경황스러워 말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군요. 다 른 일행분들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여기 코다슈씨는 특히 운차이씨의 안부를 궁금하게 여기셔서 모셔왔습니다." "아, 예. 궁금하시겠지요. 이야기가 퍽 길어요." "좋군요. 겨울밤은 길고, 장작은 충분합니다. 피로에 젖은 몸을 의자에 누이고 눈보라를 피해 마을에 찾아든 모험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겨울 밤의 즐거움이라고 핸드레이크는 말했지요." "핸드레이크… 그 사람의 이야기도 나오게 되겠군요." "예?" 겨울밤은 길고 어두운 통로 같다. 밀폐된 느낌. 맑고 상쾌한 여름밤에 비해볼 때 겨울밤은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다. 벽난로의 장작들이 허물어지며 불티를 날렸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며 그 어둡고 긴 통로를 여행해왔지만 겨울밤의 끝은 아직도 요원하다. 난 벽난로에서 날리는 불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나무 말인데요." "예?" "아까 그 밭의 나무. 이상하더군요. 왜 밭 가운데 나무가 있었죠?" "아, 그 밭은 새로 개간하는 밭이었습니다." "그런가요." "예. 후치군 덕분에 그 나무를 뽑아낼 수 있어서 정말 고맙군요. 남자 들이 너무 적어서 말입니다. 마법으로 뽑아낼까 고민하고 있었지요. 사 실 요즘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기 때문에 메모라이즈할 새도 없 습니다만." "도움이 돼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사람도 적은데 왜 밭을 새로 만드는 거죠?" "그래야 외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유효 경지가 많다면 말입 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유민들이 많이 생깁니다." "세이크럴라이제이션 때문에요?' "예. 다행히 우리 영지는 그 일을 먼저 겪어서 공문이 오기 전부터 대 처 방식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근방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대마법사 펠레일이 수호하는 땅이라고요." 난 빙긋 웃었다. "그리고… 실제 이유는?" 펠레일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핏 웃었다. "긴 겨울철, 영지의 주민들이 일도 없이 앉아있으면 청승맞으니까요. 뭔가 합심해서 일할 것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밭 개간하는 것은 디그 스 펠을 몇 번 쓰면 간단한 일이죠. 하지만 보십시오. 어린 꼬마들까지 달 려들어 돌멩이를 주워내고 아녀자들도 치마폭에 돌멩이를 주워담아 나르 면서 모두가 밭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에도 마법을 쓰는 것 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했죠. 내가 나서서 뽑아버려 오히려 안됐군요." "아뇨. 후치군은 이 영지의 은인 중에 한 사람 아닙니까. 주민들은 즐 거워할 겁니다. 돌아온 영웅의 멋진 행적, 겨울철 내도록 이야깃거리가 되겠죠." "으악!" "대충 짐작이 갑니다.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거대한 말을 타고 돌아 온 후치 네드발은, 칼라일 영지에 이르자마자 밭을 일구기 위해 고생하 는 주민들을 위해 숲을 뭉개버렸다… 는 식으로." "나무 하나인데요?" "영웅담은 대개 그렇게 발전하게 된다는 거 알지 않습니까?" "제발… 앞장서서 막아주세요. 그런 이야기." 펠레일은 큭큭 웃더니 노동 때문에 노곤해진 몸을 주욱 펴면서 지나가 는 말처럼 말했다. "후치군이 타고 온 말… 썬더라이더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펠레일은 잔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은빛 갈기의 흑마니까. 길시언 전하께서는 돌아가신 겁니까?" 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샌슨에게 프림 블레이드를, 그리고 내게는 썬더라이더를 남 겨줬어요. 펠레일이 말한 영웅담의 발전 양상에 따르자면, 뭐… 수십년 후 쯤 이런 전설이 만들어지겠군요? 바이서스의 왕자이자 위대한 모험가 길시언 바이서스, 그가 최후의 순간에 남긴 두 개의 보물은 그와 생사고 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이 각자 하나씩 가져갔다. 만일 그 두 개의 보물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열국을 질타하고 백세를 호령하리라." 펠레일은 이번엔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고 코다슈씨도 미소를 지었다. 난씁쓸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의 촛불은 가녀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는 연기. 길시언은 가슴을 그러쥔 채 곧 끊어질 듯한 호흡을 힘들게 유지했다. 네리아는 그를 부둥켜 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고 카알은 마치 프리스트 나 된 것처럼 모든 신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카알이 외치는 기도는 내용상 저주가 없다 뿐이지 거의 저주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는 지금 모 든 신들을 향해 길시언을 살려내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제길! 왜 하필이면 에델린도 제레인트도 모두 여기에 없는 거지? 왜 하필이면 지금! 길시언은 힘들게 말했다. "카알… 죽은 자의 부탁은… 평생의 빚이 되지요… 난 간교한 자… 그 래서 당신에게 평생 벗어나지 못한 짐을… 부여하고자 하오…" "길시언! 길시언!" "부탁이오… 바이서스를… 지… 켜… 허어억…" 길시언은 피리 소리를 내며 호흡을 들이켰다. 카알은 피에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안돼, 안돼오! 이렇게 죽을 순 없어엇!" "이기이익!" 길시언은 이를 악물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듯 한 몸부림. 그의 가쁜 호흡이 조금 평온해졌다. 그는 카알에게 말했다. "부… 탁하…" "알겠소! 알았단 말이야! 일어나시오, 일어나!" 길시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난 무릎 위에 떨어져 바지에 젖은 자국을 만들어내는 내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 때 길시언의 손가락이 힘 들게 움직였다. "프…"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자신의 허리였다. 프림 블레이드? 난 떨 리는 손으로 힘들게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가느 다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 흐윽." 프림 블레이드는 숨죽여 울듯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자꾸만 미끄 러지는 길시언의 손을 잡아 프림 블레이드를 쥐어주고는 그 손을 꼭 붙 들었다. "프…림." 프림 블레이드는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죽는 거야?" 길시언은 힘없이 턱을 끄덕였다. 프림 블레이드는 애써 고통을 참는 목 소리로 말했다. "힘들면 말하지 마. 아. 그, 그러니까 말이야. 난 많은 주인의 죽음을 봐왔어. 칼을 쥔 사람은 꼭 죽게 마련이더라? 웅. 그러니까 이건 익숙 해. 익숙하단 말이야." "다… 행이…" "다행이지! 그럼.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아무렇지도… 이 바보야!" 길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묘… 묘…" "묘? 무슨, 아, 묘비에 그렇게 새기라고? 바보, 여기 잠들다? 물론이 야! 너 같은 바보 자식은 죽어서도 망신을 당해야 돼! 이 멍청한 자식! 죽어, 죽어랏! 나쁜 놈, 이 나쁜 놈아! 우아아아앙!" 프림 블레이드는 목을 놓아 울어젖혔다. 길시언은 힘들게 말을 이어나 갔다. "새, 샌슨… 프림을… 프림을 부, 부탁…" "길시언!" 샌슨은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철푸덕 무릎을 꿇었다. 길시언 의 눈동자가 이번엔 나에게 향했다. "후, 후… 써, 썬더라… 너…"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길시언은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세, 세… 힘을 합… 만족…" 그리고 길시언은 숨을 거두었다. 네리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길시어어언!" "무슨 의미일까요, 후치군?" "예? 아. 예. 저도 여기까지 오면서 줄곧 생각해봤던 질문이네요. 대충 짐작은 해요." 펠레일은 푸근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눈을 가늘게 뜬 채 촛불을 바라보았다. "카알에겐 그의 남은 평생을 지배하고 말 부탁을, 그리고 샌슨에겐 프 림 블레이드를, 그리고 나에겐 썬더라이더를 줬지요. 그는 우리 세 명에 게 그의 일부분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겠죠. 아마도 우리 세 명이 서로 힘을 합쳐 이 나라를 돌보라는 뜻일 거에요. 나와 샌슨은 카알의 보좌로 선택된 것이겠죠." "그렇군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손가락을 꺾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음. 거기엔 죽는 순간에 나온 길시언의 유머 감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 거에요. 샌슨은 이제 프림 블레이드 덕분에 꽤나 지혜롭고 말 잘하는 기사로 알려지겠죠?" "하하하… 그럼 후치군의 경우는?" "마찬가지죠. 샌슨을 태우게 하려니 썬더라이더가 너무 불쌍하다는 의 미일 거에요. 물론 제가 말을 잃었던 것도 이유는 되겠죠." "그렇군요." 짜작, 자자작. 벽난로에서 불타던 나무가 다시 쓰러졌다. 코다슈씨는 묵묵히 불쏘시개를 들어 벽난로를 헤집었다. 불티가 조금 튀어올라 코다 슈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다슈씨는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술잔만 비 우고 있었고 펠레일은 마치 카알처럼 마셨다. 나 역시 잔을 천천히 비우 고 있었고, 마지막 사람은조금 전부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졸고 있었 다. 메리안은 장거리 여행에 익숙하지 않아서 꽤나 피곤해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은 고요했다. 마치 길시언을 애도하 는 분위기처럼 되어버렸군. 휘우우웅. 창밖을 지나는 겨울 바람 소리는 야만적일 정도로 거칠었다. 다시 테이블 위의 술잔을 붙잡던 코다슈씨는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꺼냈 다. "그래서, 운차이는?" 난 술잔을 내려놓고는 이마를 딱! 소리 나도록 쳤다. "하하! 그거 아세요? 지금 3 시간만에 처음 나온 말이라는 거?" 코다슈씨는 볼에 까슬까슬하게 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펠레일은 빙긋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겁니다. 처음엔 하루에 한 두 마디 듣기도 어려웠 지요." "짐작이 가요. 운차이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코다슈씨는 여자에게 말 걸게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여자? 무슨. 남자에게도 아직 말을 잘 안 겁니다." "휘유우. 더 심하군요." 펠레일과 내가 그를 혀 위에 올려놓고 가로세로로 마구 자르는 동안 코 다슈씨는 천천히 술잔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그는 털털한 목 소리로 말했다. "운차이는 어떻게 됐지?" 난 두 팔을 들어올려 항복했다는 시늉을 했다. 펠레일은 빙긋 웃더니 테이블에 팔을 괴고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갖췄다. 난 팔짱을 끼고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을 쫓아갔어요."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7. "그 역할은 내 것이군." 조용히 벽에 기대어 서있던 운차이가 갑자기 던진 말이었다. 카알은 젖 은 눈으로 운차이를 돌아보았지만 운차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샌슨은 황급히 말했다. "무, 무슨 말이야? 네가 후작을 잡겠다고?" "그래." 네리아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자신의 발만 내 려다보았다. 그 때 카알이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워프들의 마을이었지요. 당신은 다시는 검을 쥐지 않겠다고 말씀하 시지 않으셨소?" 운차이는 눈을 들어 카알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카알 역시 그를 마주보 았다. 운차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생의 묘미 중 상당 부분은 반전에서 오니까." "위험하오. 당신이 어떻게…" "엉큼한 소리 관두시오. 카알. 어차피 날 염두에 두고 있을 거 아니오. 샌슨이? 천만에. 저 멍청이는 안돼. 후치가 해야 된다고 말하지는 않으 실 테지?" 카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샌슨은 '내가 어째서 멍청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려다가 내게 발등을 밟히고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 었다. 운차이는 눈썹을 가운데 모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핏값은 받아내야 밤에 잠이 잘 오는 더러운 성격이라서." 길시언의… 핏값 말이군. 길시언이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고 그의 신병 을 책임졌었지. "OPG를 가진 후작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약하게 말하던 카알은 네리아의 얼굴을 보고서는 흠칫 하며 말을 멈췄다. 그는 당황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고, 그 러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난 답답한 느낌을 받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멋진 임펠리아의 방 안이 왜이렇게도 어두컴컴한 거지. 잠시 후 운차이는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예?" "후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된다고 하셨소. 그 날, 길시언 이 죽던 날…" 운차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머지 우리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가장 빠른 속력으로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왔 소. 하지만 충분히 빠르다고는 할 수 없을 테지. 후작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이곳에 도착했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귀족원을 장 악할 무슨 방법을 강구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후작은 아직껏 모습을 드 러내지 않고 있어. 카알. 당신에겐 무슨 정보가 있는 거요? 닐시언 국왕 과 꽤 오랫동안 이야기하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별 정보가 없습니다. 국왕 전하와 나눈 이야기는 주로 길시 언 전하의 사망 소식과 그간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모래 찾기군. 할 수 없지. 어이, 핫소드."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던 하슬러는 눈만 움직여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따라올 거지?" "따라가? 웃기는군. 후작은 내 것이다. 하지만 네녀석이 날 따라오는 것은 말리지 않겠어." "그래? 네 딸네미는 어쩔 거야?" "어디… 적당한 수도원에라도 맡길 생각이다. 지금으로선 그랜드스톰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군." "나도 갈래!" 갑자기 터져나온 네리아의 고함 소리에 샌슨은 황급히 창문을 바라보았 다. "날씨는 맑은데?" "천둥이 아냐. 네리아가 고함지른 거야." 샌슨과 나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네리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카알이 입을 쩍 벌린 채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네리아는 운차이 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들을 따라오겠다는 이야기야?" "그러엄! 물론이지." "이유가 뭐야?" "당연하잖아. 좋은 동료들을, 그러니까 떠돌이는 따라다녀야 되는 법이 라고. 목적지가 없으니까, 에, 난 지금은 별 목적지가 없거든? 한 곳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은 성격상 맞지 않으니까, 에, 가벼운 여행 정도인 셈인데, 그렇지. 여행이야. 음. 난 목적지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렇잖아? 뭐 내가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말이 야. 여행이라고. 그렇잖아?" 이번엔 내가 카알을 바라보았다. "자이펀어죠?" "그건 아닌데. 접한 적이 없는 희귀한 언어로군." 나와 카알의 농담에도 네리아는 신경쓰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놀랄 일 뿐이로군. 운차이는 화를 내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듣게 말해." "다 말했잖아?" "다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전달되는 건 하나도 없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난 목적지도 없고, 돌아다닐 생각이니까, 이왕이면 쎈 사람 들하고 같이 다니면 좋잖아? 그럼 안전할 테고 말이야." "그런데?" "남부 최고의 검사하고 북부최고의 검사가 같이 다니는 길이라면 무지 무지하게 안전할 거 아냐?" 운차이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슬러를 곁 눈질하며 말했다. "웃기는군. 저 핫소드 자식이 북부 최고라고? 바이서스의 검술, 싹수가 노랗군." "이 자식아, 네 경우를 남에게 덮어씌우지 마라." "그까짓 OPG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의 한계를 느껴보고 싶냐?" "이거 벗고 나무 작대기 들어도 네 녀석 정도야 식후 운동거리지." "할래?" "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곧장 임펠리아의 뒷뜰로 달려나가 버렸다. 나와 카 알,샌슨, 그리고 네리아 등 남겨진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발코니 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구경은 해야 될 거 아냐? 코다슈씨는 바짝 흥분해서 말했다. "어떻게 됐어? 응? 운차이가 이겼지?" 펠레일은 어이없는 눈으로 흥분한 코다슈씨를 바라보더니 곧 너털웃음 을 터뜨렸다. 코다슈씨는 헛기침을 시작했고 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아뇨." "뭐라고? 그럼 그 핫소드인가 하는 녀석이?" 코다슈씨는 더욱 흥분해버렸고 난 이번에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뭐라고? 그럼 누가 이겼단 말이야?" "데미 공주가 이겼죠. 두 사람은 뒷뜰에서 참 볼만하게 싸우다가 데미 공주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싸움을 멈추게 되었어요. 꽃과 나무와 풀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 존재를 느끼기 어려운 것들의 고귀함 과 소중함에 대한 장시간의 설교가 결정타였지요. 두 사람은 완전히 뻗 어버렸고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쳇. 끝까지 싸웠다면 운차이가 이겼을 거야." 펠레일은 이제 배를 움켜쥐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큭, 예. 크크큭! 아, 그렇게 해서 다들 헤어지게 된 것이군요." "예. 운차이와 하슬러, 그리고 네리아는 후작을 쫓아가게 되고 뭐 그렇 게 다들 헤어지게 되었지요. 난 우리 일행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죠.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들을 가지고서." "아, 그렇군요." "그리고 도중에 여기 메리안과 아까의 그 유랑민들을 만난 것이고. 아, 메리안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난 말을 멈추고 잠들어 있는 메리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메리안 은 꼼짝도 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있었다. "펠레일. 당신이 이 애의 보호자가 되어주지 않겠어요?" "예?" "51 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이 되시라는 거에요. 음, 꼬마로는 좀 크지만. 뭐 다른 유랑민들 받아들이듯이 이 애도 좀 받아달라는 말이 죠. 여기서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 애는 아직 자기 손으로 자신을 돌 볼 정도는 못되니까 펠레일이 보호자가 되어주면 더 좋고요. 이를테면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인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후견인이라… 갑작스럽군요. 물론 전 이 아가씨의 교육과 장 래를 책임질 정도의 역량은 되지 못합니다만." "예. 이 영지를 돌보는 것만 해도 힘겨우실 거라는 것은 잘 알아요.금 전적인 거라면 제가 메리안의 몫으로 충분한 돈을 내놓겠어요. 그저 메 리안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달라는 것 뿐이죠. 아, 당신 제자로 삼 아주면 안되나요? 후견인이 아니라 사부님이 되시는 거 말이에요." "하하하, 후치군. 이 아가씨는 마법사가 되고 싶어합니까?" "아뇨. 그건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위대한 펠로우메이지의 곁에 있 게 된다면 마법사가 될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요." 펠레일은 위대한 펠로우메이지라는 말에 한참 동안 웃고나서 말했다. "제자라… 어쩐지 쑥스럽군요. 전 아직 제자를 둘만한 처지가 못됩니 다. 실력도, 연륜도 일천하지요. 차라리 코다슈씨의 제자는 어떨까요?" 땡그랑! 나와 펠레일은 어안이 벙벙해진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바라보았다. 코다슈씨는 떨어뜨린 술잔을 주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하 얗게 된 얼굴로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그의 입이 열렸다. "웃기지마." 펠레일의 눈동자가 아주 기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고 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오갈 데 없는 소녀를 내팽개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후치군." "아, 아? 예…"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코다슈씨가 굉장한 속도로 말했다.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데 말이야, 펠레일.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 지? 이봐!" 펠레일은 코다슈씨를 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뭐, 이 마을에 성인 남성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부 양가족들이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그 중 몇몇은 부양가족들을 잃거나 해서 식구 하나 쯤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후치군이 생각한대로 저 같은 경우도 있고…." 코다슈씨는 이제 나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그럼! 이 펠레일 자식은 가족은 절대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까 한 명 쯤 받아들이는 거 아주 쉬운 일이라고!" "예? 아, 왜 가족을…" "언제 나라에서 영주를 내려보낼지 모른다는 거야. 이 자식은 나라에서 영주만 내려보내면 곧장 여길 떠날 생각이거든? 그래서 가족을 안 만들 고 있어." "예. 코다슈씨가 말씀하셨듯이 전 언제 여기를 떠나게 될지 모르는 사 람입니다. 누군가의 후견인이 될 자격은 못되지요?" 말을 마친 펠레일은 빙긋 웃으며 코다슈씨를 바라보았고 코다슈씨는 적 의가 충만한 눈으로 펠레일을 마주보았다. 메리안을 여기 두고 떠나면 몇 년이 지나고나서 난 마법검사의 전설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한 손으로는 마법을 쓰고 다른 손으론 자이펀 검술을 쓰는 신비롭고 우아한 강철의 레이디 메리안… 관두자, 관둬. 메리안에게 퍽도 어울리겠다. 그 런데 말이야. 이번엔 내가 이 두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 차례로군. "아, 그 영주 말이죠? 그 사람이라면 벌써 왔어요." "뭐? 무슨 말이야?" "무슨 말입니까, 후치군?" "당신들 앞에 있잖아요. 후치 네드발 백작. 그리고 상속권자를 잃은 칼 라일 영지를 계승하게 될 자. 영주가 부임했으니까 이제부터 이 영지의 이름은 네드발 영지입니다." 펠레일과 코다슈씨는 입을 쩍 벌린 채 날 바라보았고 난 어깨를 으쓱였 다. "아, 잔혹한 영주와 혹독한 정치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마세요. 네드발 영지의 영주는 부임한 바로 다음 날 영지를 떠날 생각이니까. 그가 생각 하기에 가장 훌륭한 대리인들에게 자신의 영지를 맡기고. 영지의 주민들 은 아마 영주가 부임했는지도 모를 거에요. 전설의 영주가 될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런데 왜 이렇게도 난 전설이 될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거지?" 펠레일의 입이몇 번 뻐끔거렸다. 난 잠시 기다린 다음에야 그의 말 비 슷한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대리인… 섭정이 되는 건가? 어쨌든 그 섭정들의 이름을 알려 주 시겠습니까? …영주님?" "펠레일과 코다슈. 마나와 살기가 수호하는 멋진 영지가 될 거라고 생 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 이러면 되겠군요. 제가 메리안의 후견 인이 되지요. 그리고 그 후견인의 의무도 …섭정이라고요? 아, 예. 그 사람들에게 몽땅 떠넘기면 되겠군요." "마치 방금 생각난 것처럼 말하는데… 정말 방금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겁니까?" "코다슈씨의 경우는 방금 떠올린 거죠. 나머지는 지금까지 오면서 계속 생각한 거에요. 내 영지의 주민들에겐 나보다 펠레일이 더 익숙하고 친 근하겠죠? 내 영지의 주민들을, 그리고 나의 피보호자인 메리안을 맡아 주겠어요?"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8. 코다슈씨는 험상궂은 얼굴을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펠레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펠레일은 일하다가 긁힌 상처인 듯한 팔의 상처를 긁적거리며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질문했다. "왜죠?" "예?" 펠레일은 눈을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예전에 보았던 펠레일을 볼 수 있었다. 험한 노동마저도 빼앗아가지 못한 그의 눈빛 속 에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후치군에게는 영주의 지위에 이끌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두려워서?" "바보 같은 말입니다. 지위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어차 피 사람들은 평생동안 변화하며 사는 겁니다. 초보 마법사 펠레일이 펠 로우메이지 펠레일이 되듯이? 하하하. 사람은 동적 생명체입니다. 후치 군이 그걸 모르지는 않겠죠. 영주의 지위를 포기할 수 있는 그 행동력을 볼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을 때 갈팡질팡할 수는 있겠지만 쉽사리 포기하지는 못 합니다." "지금의 내가 보다 마음에 드니까?" "비슷한 말을 바꿔 말한 것에 불과하지만 어감은 좋군요." "전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을 만났어요." "들었습니다." "크라드메서는 치열하게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더군요. 미치도록 사랑하 는 인간과 관계를 끊으려고들면서까지. 그런데 왜 인간은 변화하려고 할 까요? 적당히 자기 모습에 만족할 순 없나요?" 느닷없이 코다슈씨가 입을 열었다. "유배된 자신을 알기에…" "예?" "신에 의해 유배된, 대지에 버려진 자신을 알기에." 너무 무거운 분위기인데. 나와 펠레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다슈씨를 바라보았다. 코다슈씨는 잘 안 이어지는 말을 억지로 잇듯이 말했다. "우리 말에 환골탈태라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인데요?" "별 의미 없어. 한 인간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는 거야. 육체와 정신 이 완전히 바뀌는 걸 의미하지. 그런데 그 뉘앙스가 재미있지. 환골탈태 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좋은 기분이 들게 된다." "좋은 기분… 변화했기 때문에?" "그래. 우리가 변신의 기능을 두려워하고 경외스러워하듯. 헤게모니아 의 무녀들이 흰 가면을 쓰는 것, 자이펀의 제사에서 얼굴에 그림을 그리 는 것, 다 변신이지. 뱀파이어가 시시한 흡혈 몬스터와달리 몬스터들의 귀족인 이유는? 불사체라든가, 생명을 빨아내는 흡혈, 다 무섭지만 뱀파 이어의 초절적 공포는 역시 그 막강한 변신 능력이겠지. 변신은 무섭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것이지." 펠레일은 그윽한 눈으로 코다슈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다슈씨는 무겁 게 말했다. "쳇. 신으로 변화하고 싶은 거야. 영원한 욕구불만의 종족 같으니라 고." "자이펀인도… 우리와 별 차이는 없군요. 역시 변화를 높게 치는군요. 엘프는 조화, 인간은 변화인 셈인가요." "그래. 그러므로 자네가 말한 두려워서라는 이유는 말이 안된다. 혹시 네가 너희나라 귀족의 악덕이나 악행 때문에 환멸감을 느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쁜 방향의 변화라고 해도, 변화 자체의 매력 때문에라도 포기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겠지요." "왜 변화를 포기하지? 그게 펠레일의 질문인 것 같군." 정말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생각을 위해선 안주를, 그리고 그 생각을 풀어낼 매끄러운 혀를 위해선 술 한 잔을. 카! "말씀하신대로… 전 귀족에 대해선 많은 실망을 느꼈어요. 우리 영주님 은 도대체 무슨 축복을 받아 태어나신 분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렇 다고 유치하게시리 저런 더러운 귀족 따위는 되지 않겠다! 고 주장하지 는 않겠어요. 말씀하신대로 변화 자체의 매력은 변화 이후의 모습에 대 한 불안보다 더 큰 것이 보통이니까 그건 거짓말이 될 공산이 크겠죠." "그래서?" "하하하. 코다슈씨. 난 바이서스 국민이라고요. 바이서스 국민의 정신 과 사상을 지배하는 것은 누구죠?" 코다슈씨는 그저 묵묵히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펠레일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바로 그 짝이죠. 루트에리노 - 핸드레이크페어. 아마도 사상 최 강의 페어가 아닌가 싶군요. 1+1이 2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는 것을 확 실히 보여주는, 바로 그 분들 때문이죠." "가는 거야? 어, 가?" 난 웃으며 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쪽에선 펠레일과 코다슈, 그리고 메리안이 서있었다. 영지의 다른 주민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살짝 떠나 는 작별이다. 슈는 한 손에 내가 선물한 인형을 들고 다른 손으론 내 바지의 혁대를 쥐고 있었다. 난 허리를 숙여 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슈는 얼굴을 찌푸린 채 날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이 말했다. "또 와?" "슈가 멋진 어른이 되면 돌아올께." "어른? 몇 밤 자면 어른 되는데?" 계산을 좀 해봐야겠는데. 난 잠시 눈썹을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 곧 대 답이 나왔다. 난 역시 비상해. "백 밤." "백 밤? 백 밤만 자면 되는 거야?" 슈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저렇게 물어서 내 양심을 몹시 아프게 만들었 고, 그래서 난 양심의 고통에 떨며 말했다. "응. 물론이지! 그러면 돼.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 특히 펠레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히죽 웃고 서는 슈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가르쳐준 노래 잘 기억하지?" 슈는 간지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떠나고나서 곧 다른 아이들한테도 가르쳐야 돼?" "알았어." 긴 겨울 동안, 펠레일은 영지 곳곳에서 들려오는 50명의 꼬마들과 대마 법사 펠레일의 노래를 들으며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하하하. 난 다시 한 번 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메리안이 다가왔다. 메리안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이 가만히 내 얼굴만 바라 보았다. 난 웃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메리안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힘없이 웃으며 그 손을 마주쥐었다. "펠레일씨가 널 잘 보살펴줄 거야. 말씀 잘 듣고 슈처럼 멋진 어른이 되면 좋겠어." "그래? 음… 나도 백 밤만 자면 어른이 되는 거야?" 윽! 메리안 너마저도 나의 양심을 공격하는 거냐! 할 수 없군. "틀림없이 그럴 거야." 또 거짓말을 말했어. 으으. 펠레일과 코다슈씨와도 인사를 나눈 다음, 난 썬더라이더에 올라탔다. 슈는 품에 인형을 꼭 끌어안고는 날 바라보고 있었고 메리안은 그저 떨 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할 말도 생각 안나는군. 그래서 난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만 휘저어주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가자, 썬더라이더. 해를 따라 서쪽으로… "야이, 후치 자식아! 백 일 후엔 어른이 되어서 너 찾아갈 거야!" …출발하기도 전에 낙마할 뻔했다. 난 그렇게 메리안의 앙칼진 작별인 사를 들으며 네드발 영지를 떠났다. 그리하여 영주는 떠나고 대대로 네 드발 영지는 섭정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그 영지의 주민들은 언젠가 그들 이 위기에 닥쳤을 때 그들의 영주가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는 전설의 시작인 것이다. 하하하! 이봐요, 내 영지의 주민들이여. 난 우리 헬턴트 영주님만한 그릇은 못 되지만, 그래도 대왕과 대마법사가 바이서스에 선물한 것과 같은 것을 당신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정도면 영주의 책임은 다한 거 아닙니까? 행복하세요! "임마. 넌 발이 너무 빠르다. 그거 아냐? 난 분명 오늘 저녁 때 쯤 도 착할 것으로 생각했단 말이다. 이게 뭐야? 햇님은 아직 떨어질까봐 무서 워하지 않아도 되는 높이라고.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도착하니까 지나가 기도 그렇고 안지나가기에도 그렇잖냐." 썬더라이더는 대답이 없었다. 하긴 말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드는 내 가 웃기는 놈이지. "흠. 호스 라자(Horse Raja)가 있었다면 난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 을까? 어떻게 생각해? 관두자. 네가 너무나 훌륭한 주인을 모시게 되어 넘치는 부담감을 감당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안 듣는 것이 낫겠 어. 나의 겸손한 성격이 훼손될지도 모르거든? …이 놈이! 너 지금 고개 를 흔들며 푸르릉거린 행동의 의미가 뭐냐?" 역시… 우수를 벗삼아 여행하는 모험가는 자신 속의 고독을 달래는 방 법을 알고 있는 법. 내가 그 좋은 예지. 가만 놔둬도 혼자 잘 노는 성격 이라고. 그리고, 조만간 혼자가 아니게 될 테니 모험가의 발걸음은 가벼 운 법이지. 레너스시의 외곽은 겨울 향취가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볼을 발갛게 물들게 만드는 겨울 바람은 벌판을 거침없이 내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야를 순시하고 있던 한 무리의 경비대원들은 먼저 입을 쩍 벌린 다음 눈을 가늘게 떴다. "좋은 아침이죠? 레너스시의 경비대원이십니까?" 경비대원들은 이제 피식 웃었다. 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 그렇다. 그런데 넌 뭐냐? 무슨 심부름이라도 다니는 길이냐? 그런 데 왠 무장에 짐은 그렇게 많고?" "저, 모험가처럼 보이지 않아요?" "글쎄. 그 말은 모험가의 말처럼 보인다만." 윽! 경비대원들 틈에서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나이가 들어보이는 병사 하나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런 거짓말이 꼭 하고 싶다면 턱 밑에 말꼬리라도 좀 잘라 붙이지 그 러느냐." 미치겠군. 뭐 특별히 신분 이야기 할 것도 없으니 그냥 통과할까? 그 때였다. 경비대원들 중 하나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가는 눈으로 날 쏘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자신 의 머리를 탁 쳤다. "야! 너, 너, 너!" "예? 저, 저, 저요?" 흉내를 내서말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병사는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 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고함을 질렀다. "너, 그 오우거 슬레이어!" "어? 잠깐, 잠깐. 난 특별히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한다는 평은 듣지 못 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빠지는 수준도 아니니까… 그런데 누구시더라?" 오우거 슬레이어라는 말에 다른 경비대원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함 을 지른 경비대원을 바라보았다. 그 경비대원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 더니 말했다. "임마, 기억 안 나? 난 실리키안 남작의 사병이었다. 대마법사 아프나 이델한테 죽을 뻔했을 때 네가 그 엘프와 함께 날 구해줬잖아!" "한스덱! 와, 경비대원이 됐군요!" 한스덱은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다른 경비대원 하나가 고함 을 질렀다. "너, 너 이 자식! 그러면 그 때 그 엘프를 빼내서 도망갔던… 머리 잘 굴리던 그 꼬마!" "윽. 혹시 당신, 그 때 그 지하감옥의 간수였어요?" 두번째로 고함을 질렀던 그 경비대원은 재빨리 손에 든 할버드를 두 손 으로 꼬나들어 날 겨냥했다. "요 놈! 겁도 없이 여기로 돌아와? 이봐! 이 꼬마, 탈옥범이다. 체포 해!" 다른 경비대원들은 갑작스런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나 와 그 병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할버드가 올라오 는 것을 보며 난 재빨리 외쳤다. "이봐요! 그 때 우린 억울하게 갇혔던 거잖아요! 그리고 분명히 우린 죄수 명부에도 없을 텐데? 날 체포해서 데려가면 재판을 할 겁니까, 어 쩔 겁니까? 만일 재판을 하면 그 때 당신네 시청에서 억울한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사실이 낱낱이 까발겨질 텐데 그거 정말 볼만하겠군요." "뭐… 아차!" 경비대원들의 할버드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경비대원 은 이를 갈더니 다시 외쳤다. "이 자식! 억울하게 갇혔든 어쨌든 그래도 넌 탈옥범이야. 억울하게 갇 혔던 것은 참작이 되겠지만 탈옥에 대해선 벌을 받아야해! 그리고 레너 스시 경비대원을 구타한 것에 대해서도!" 주위의 경비대원들은 다시 할버드를 들어올리기 시작했으나 나 역시 재 빨리 외쳤다. "뭐 이렇게 답답한 사람이 다 있나… 당신 지금 무효강금에 의해 발생 한 무효탈옥에 대한 무효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무효체포를 하려는 건가 요?" "뭐라고?" "아, 쉽게 말하지요. 내가 억울하게 갇혔던 것이라는 명제를 수용하면 내 강금은 무효가 되고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가 무효가 된다면 탈옥 역 시 무효가 되는 것이니까 탈옥에 대한 벌을 받으라는 것은 무효 사실에 대한 벌을 받으라는 말이 되는 것이므로 역시 그 벌은 무효형벌이 되는 것인데 당신이 나로 하여금 무효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날 체포하려고 드는 것 역시 무효가 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당신이 수행하려드는 행위는 무효형벌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내 주장이 니 의심되는 점이나 반대 의견 있다면 말해보시고 그런 점이 없다면 그 렇다 아니다 둘 중에 하나로 셋 셀 동안에 대답해보세요. 하나, 둘." "그렇다!" 레너스시의 외곽, 그런대로 황량한 아름다움이 있는 겨울 벌판은 잠시 고요의 영토가 되었다. 무턱대고 고함을 질러버린 그 병사는 긴장된 시 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윗입술 위에 송글송글 맺친 땀방울을 닦아내 며 말했다. "아니다… 인가?" 할버드들의 고갯짓은 이미 멈춰져있었고 싸늘한 적막만이 우리를 휘감 아 돌았다. 좀 도와줘야겠군. 킥킥. "이봐요. 괜한 짓 하지 말자구요. 그 때 나랑 내 동료들이 당신을 쥐어 박아가며 탈출한 것은 내가 사과하지요. 하지만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 황인데 일단 빠져나가고봐야 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억울하게 갇혀 재 판도 못받을 지경인데 당신이라면 가만히 있겠어요? 우리가 억울하다는 것은 시청에서도 잘 알고 있는 일일 텐데." 경비대원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경비대원 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난 고함을 지른 경비대원에게 고 개를 숙여보이고는 말했다. "그냥 잊읍시다. 뭐, 당신이 손해보는 느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라 고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에 대해 사과 이상의 뭐 다른 걸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사과하겠습니다요. 예?" 결국 지하감옥의 간수였던 그 경비대원은 뻣뻣한 목으로 사과를 받아들 였다. 그들과 헤어지기 전, 나는 이 추운 아침에 뭣하러 도시 바깥을 돌 아다니느냐고 질문했고 그 대답은 우울한 것이었다. 사우스 그레이드의 유민들이 조직적인 산적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외곽을 순시한다는 것 이다. 사람들도 참. 곧 끔찍한 겨울이 올 텐데 산적질이라니. 펠레일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후적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활동이라고 비판했 겠지. "원래 남부 녀석들, 피가 끓을 정도로 정열적인 거야 유명하지 않냐. 100 명의 데스 나이트 이야기에 나오는 그 아가씨 모르냐? 그래서 그 친 구들은 겨울 채비니 뭐니 하는 것도 신경 안 쓰는 모양이다." "에휴… 시청에선 무슨 대책이 없어요? 유민 흡수 정책 같은 것." "유민 흡수? 아,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냐? 어려워. 일손이 많이 필요한 계절이라면 모르지만 이 겨울철에 인력 소모가 뭐그리 많겠냐." "어? 레너스시는 농업보다는 상업인구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휴다인강이 얼면 상거래도 어렵거든. 아직은 안 얼었지만… 어쨌든 그 점에선 농업도시나 마찬가지야." "으으.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래. 어쨌든 그 사람들 도시로 끌어들여봐야 밥벌이도 없으니 꼼짝없 이 거지 신세지. 못 끌어들여. 아, 경비대원 일이라면 턱없이 모자라지 만 유민들을 데려다 경비대원으로 쓰기도 어려워. 대민 봉사할 만한 품 성도 못되고, 실력도 그렇고." "경비대원이 모자라다고요?" 동절기에는 시민들도 별 일이 없기 때문에 경비대원 숫자를 채우는 것 은 쉬운 경우가 태반이지만, 어이없게도 이번 겨울에는 경비대원이 꽤나 모자라다는 것이 경비대원 한스덱의 대답이었다. 유민들이 그렇게나 극 성인가? 하긴 본격적으로 눈발 날리기 시작하면 산속에서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닐 테니 산적질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겠지. 어쨌든 그래서 경비 대원은 많이 모자라고 한스덱도 그래서 경비대원에 들어왔다고 한다. "참 수고가 많습니다. 이거 받아두겠습니까?" 한스덱은 내가 내민 금화를 받아들고는 입을 쩍 벌렸다. "응? 어라, 왠 금화냐?" "순찰 끝나면 어디 따뜻한 펍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세요. 내 사과의 표시고, 동시에 여러분들의 수고에 대한 격려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 네요." 경비대원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한스덱은 감탄한 표정으 로 금화를 보더니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건 뭐야. 이런 금화는 처음 보는데? 뭐가 이렇게 두꺼워?" "아, 그거 300년 전의 금화라서 그래요. 괜찮아요. 재무부 장관한테 물 어봤는데 그건 액면가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고 그러던데요. 그리고 고 서적이나 유물 수집하는 사람에게 팔면 액면가의 몇 배도 받을 수 있다 더군요." 한스덱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다른 경비대원들도 일치단결하여 입을 벌렸다. 입김 때문에 안개가 서릴 정도로군. "히야, 300년 전의 금화? 재무부 장관? 너 정말 멋진 모험이라도 했던 모양이구나?" "하하하. 무지개의 솔로쳐가 그랬잖아요? 생존한 모험가들은 모두 부자 라고." 모험가들은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고, 따라서 생존한 모험가들은 목숨을 가지고 돌아왔으니까 부자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필요 없다…는 말이다. 한스덱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 피식 웃었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9. 음. 언젠가 탈옥했던 곳인지라 위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뿌듯 하구나! 난 레너스시의 시청 건물을 바라보며 감회에 빠져 망연히 서있었다. 그 래. 여기였어. 음. 그 날 밤 나와 카알, 샌슨, 그리고 이루릴이 살금살 금 기어나왔었지. 그리고 저쪽으로 엑셀핸드와 버터핑거가 있었고. 주위 의 시민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나는 한참 동안 시청 정문을 바라보았다. 결국 보다못한 정문 경비대원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이,꼬마. 왜 시청 앞에 그렇게 서있는 거냐? 시청에 볼 일이라도 있는 거냐?" 정문 경비대원의 질문에는 '네까짓게 시청에 무슨 볼 일이 있겠냐?' 하 는 느낌이 많이 섞여 있었다. 난 그를 향해 방그레 웃어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예. 들어가야죠." "뭐야? 들어온다고? 하하! 그럼, 레너스 시청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 다. 안에다 어떻게 알릴깝쇼?" 이런 상황 별로 마음엔 안들어. 정문 경비대원의 죄는 무지밖엔 없단 말이야. "네드발 백작가의 후치 네드발이 찾아왔다고 전해주시면 고맙겠네요." "뭐야?" "음. 다시 말하죠. 네드발 백작가의 후치 네드발이 여행 도중 레너스시 를 지나게 되어 그 시의 책임자되는 분께 안부 인사라도 여쭙기 위해 방 문하는 길이라고 전해달라는 말입니다." 경비대원의 얼굴엔 먼저 불신감이 가득 피어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 그 의 얼굴엔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즉시 그는 몸을 돌려 안으 로 들어갔다. 거의 달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두르는 모습 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청 건물 안에서는 낯익은 얼굴이 달려나왔 다. 그는 정신없는 걸음걸이로 달려나오더니 곧 내 앞에 서서는 입을 쩍 벌렸다. "너! 너 그 때 그 꼬마!" "오, 이게 누굽니까. 실리키안 남작님! 하하하!" 아하. 실리키안 남작은 시청을 위해 일하고 있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 군. 어쨌든 실리키안 남작과 나는 오래간만에 만나서 화려한 인사를 나 누게 되었다. 물론 그는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보여준 훈장과 썬더라이더 등을 보고서는 내가 백작임을 완전히 믿 게 되었기 때문에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날 맞이하게 되었다. 허허. 참. 지위라는 것은 웃기는 거라니까. 그의 안내를 받아 시장실을찾아뵙자 늙수그레하고 인상 좋게 생긴 시 장님이 나를 맞이했다. 나와 실리키안 남작, 그리고 시장님은 서로 통성 명을 하고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 동안에도 실리키안 남작은 계속해 서 나의 급격한 신분상승에 감탄했다. "놀랍군요. 참 굉장합니다. 어떻게 백작의 지위를 얻으신 것인지." "아, 이거 참 기분이 낯설군요. 실리키안 남작님이 이렇듯 정중하게 말 씀해주시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발 남작님이란 말씀 좀 그만하십시오. 너무 짓 궂으십니다." 레너스시의 시장님은 나와 실리키안씨의 대화를 들으며빙그레 웃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두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지난 번 저희 도시에 들리셨을 때의 일,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아아, 몇 번씩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괜찮습니다. 아, 그런데 그 듀 칸 버터핑거라는 호비트는 아직 이 도시에 있습니까?" "아뇨. 그 사건 이후로 달아나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아, 참 실리키안씨. 아프나이델이 당신에게 안부를 전 해달라더군요." "예? 아프나이델을 만나셨습니까?" "만난 정도가 아니죠. 아프나이델은 여길 떠나서 수도에서 저희 일행이 랑 만났지요. 그리고 함께 꽤 많은 모험을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 겁니까? 혹시…?" "죽었냐고요? 아뇨. 지금 그는 대미궁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예?" "이야아아! 그래, 한 녀석도 없단 말이야! 안내는 해줘야 될 거 아냐!"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에 카알은 질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인델프님. 저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바이서스 임펠로 달려가야 됩니다. 후작이 저희들보다 먼저 도착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 릅니다." 그러자 엑셀핸드는 노기가 등등해서 말했다. "이런,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바일하프! 네 녀석이 노커 해라!" 바일하프씨는 파이프를 물어뜯고는 입을 잡고 펄쩍펄쩍 뛴 다음에야 간 신히 말했다. "이 놈아.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엑셀핸드는 온통 붕대에 감긴 몸을 깨끗이 잊은 채로 기세등등하게 말 했다. "난 지금부터 영원의 숲으로 간다! 반드시 이 두 눈으로 대미궁을 봐야 되겠어. 인간들도 들어간 곳인데 내가 못들어간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어쨌든 돌아온다고는 기약할 수 없으니 네 녀석이 노커를 하란 말이다. 그게 싫다면 네 녀석이 알아서 회의를 하든가 해서 새로 뽑고." "엑셀핸드님. 혼자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나이델의 조용한 목소리에 엑셀핸드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프나 이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뭐야?" "저도 드래곤 로드를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엑셀핸드님 혼자 그런 몸 으로 가시게 할 수야 없지요. 그리고 대미궁에 있다는 그 엄청난 서적과 마법 물품 같은 것에 끌린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군요." "그래! 역시 네 녀석뿐이다, 이 놈아. 푸하하하!"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으며 카알을 바라보았다. "약도라도 대략 그려주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영원의 숲에서 일어나는 그 자기 분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두 분이서 가신다면 저도 안심이군요. 퍼시발군? 자 네가 지도를 그려드리게. 지형을 잘 기억할 테지?" "예. 알겠습니다." "지도 그릴 필요 없어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쟈크의 것이었다. 일행은 쟈크를 바라보았고 하슬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나도 거기 들어가봤으니까. 내가 안내하지요." 엑셀핸드는 펄쩍 뛸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갸웃거 리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쟈크씨?" "이유? 뭐, 돈이죠." "돈이오?" "마스터는 죽었고, 수도로 돌아가봐야 교수대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고, 좋아하는 여자는 날 바라봐주지도 않으니… 신세 따분하죠, 뭐." 네리아는 흠칫하면서 쟈크를 바라보았지만 쟈크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운 도둑질이니 계속 그 짓이나 하는 수밖에. 대미궁에서 돈이나 실 컷 가져와서 길드나 다시 세울까 생각 중이죠." 네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쟈크. 드래곤 로드가 가만히 자기 보물을 내어줄 것 같니? 우린 그 분 의 허락을 얻었으니까 그걸 가져온 거라고." 쟈크는 찌푸린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헹.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도 정말 갈 데까지 갔군. 나이트호크가 허락 이 어쩌니 하는 말을 다 하시네? 주인한테 허락받고 물건 가져오는 도둑 도 있나?" "이 자식아! 그게 어디 보통 주인이야? 드래곤 로드라고!" 쟈크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말했다. "썅. 그럼 난 드래곤 로드 것을 훔친 도둑이 되는 거지, 뭐. 이왕 이 짓 해먹으면서 제대로 깃발 휙휙 날리려면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 겠어?" 순간 네리아의 눈 속 가득히 불안감이 나타났다. 네리아는 입술을 잔뜩 오므렸다가 쟈크에게 말했다. "너 이 자식…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거야?" 쟈크는 눈을 크게 뜨고 네리아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눈은 가 늘게 바뀌었다. "킥킥! 웃기시네?" "뭐야?" "얼씨구, 누님. 정말 못봐주겠네. 지금 날 실연의 아픔 때문에 자살하 려고 드는 골빈 자식 취급하는 겁니까? 정말 갈 데까지 갔군요. 나 그런 데 전혀 관심없어. 오히려 떵떵거리며 돌아와 나 싫다고 떠난 여자 후회 하게 만들어 주자는 주의지. 그리고 그 때문에 떵떵거릴 준비하러 떠나 는 것이고." 네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쟈크는 짓궂게 웃으며 코를 쓱 닦았다. "아시겠어?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요.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 쟈 크가 부활할 테니까. 그 때 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을걸?" "자식아, 후회는 누가 후회를…" "후회하게 될걸?" 갑자기 쟈크의 몸이 앞으로 휘익 미끄러졌다. 네리아의 눈이 커졌지만 그 이상의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다. 쟈크의 팔이 네리아의 몸을 완전무 결하게 감싸안았고 곧 방안의 사람들 모두의 시선 속에 쟈크는 네리아에 게 입을 맞췄다. 으악! 네리아는 몸부림을 치려는 모양이지만 쟈크 역시 OPG를 끼고 있어서 도 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듯했다. 우리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그 모 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네리아는 쟈크의 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네리아는 풀려 나고도 한참 동안 멍한 눈으로 쟈크를 바라보았고 쟈크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킥킥킥! 내 소망은 달성이야.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진하게 키스해버리는 거." "너, 너, 너 이 자식…" "어허! 허락받고 훔치는 도둑은 없어. 입술 훔칠 때도 마찬가지지. 핫 하하! 기다려요, 누님! 난 포기 안해!" 그리고 쟈크는 방을 뛰쳐나가버렸다. 남겨진 우리들은 도대체 네리아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모두 애꿎은 천장이나 바닥을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들 모두도 밖으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짜식이 양치질이나 좀 하고 키스를 하던가 하지…" "대미궁이라니… 그게 정말 있는 것이군요! 놀랍습니다." 시장님과 실리키안씨는 한참 동안이나 감탄했고 곧 보다 경외스러운 시 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멋적기 짝이 없는 노릇이로고. 시장님은 한참 후 에야 경탄의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백작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래, 여행길은 순탄하신지요? 레너스시에 도움이라도 요청하실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보십시오. 네드발 백작님." 윽. 닭살스럽기 짝이 없군. 빨리 용건을 말하고 나가야겠다. 난 탁자 아래의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예… 부탁이랄 것까지는 없고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군요, 시장님." "무엇입니까? 말씀해보시죠." "요즘 들어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대량 발생한 유민들 때문에 고초가 심 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시장님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예. 정말 난감한 일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들도 바이서스의 국민인데, 어떻게 도시로 유입시키 면 안되겠습니까?"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인원이 어디 한 둘이라야지요. 레너스시의 시 민으로 등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 많은 인원들의 일자리나 잠자리를 해결할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쟁 때문 에 오른 세금도 세금이거니와… 다들 고통스러운 시기지요. 어쨌든 시청 재정으론 그 많은 유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예.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레너스시에서 대규 모 사업이라도 벌이면 어떻겠습니까?" "대규모 사업이라고요?" "예. 유민들을 인부로 고용해서 사업을 벌이면 그들의 호구지책은 마련 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농번기도 끝났고, 또 듣자니 휴다인 강이 얼면 상거래도 적다고 하던데요. 따라서 시민들 중에서도 인원을 뽑을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동절기니만큼 시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 거나 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건 펠레일이라는 마법사에게 배운 수법이지. 일거리를 만드는 방법 말이야. 그런데 난 왜 마법사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으면서도 마법은 하 나도 쓸 줄 모르는 거지? 실리키안씨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 고 시장님의 눈은 반대로 가늘어졌다. "예. 흔히 사용되곤 하는 방법이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너스시에는 지금 당장 그 많은 유민들을 끌어들일 만큼의 대규모 공사를 벌일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재원도 없고요. 네드발 백작님과 그 일행분들이 커다란 선물을 주셨는데도 이런 말씀 드리자니 참 면구스럽습니다만." 어라? 내가 레너스시에 무슨 선물을 했던가? 아! 그 투기장. 맞아. 실 리키안씨의 소유였던 그 투기장을 시청에 넘겨줬었지. 난 쓴웃음을 짓고 실리키안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군요. 실리키안씨." 실리키안씨는 풀죽은 미소를 지었다. 난 다시 시장님을 바라보며 말했 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전에도 이곳을 지나친 적이 있어서 아는 것입 니다만 저 휴다인 계곡에는 유명한 다리가 있지 않습니까?" "12인의 다리 말씀입니까?" "예. 그런데 그것이 꽤나 불편한 다리이지 않습니까? 12 명이 모여야만 지나다닐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합니다. 아쉬운대로 이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 옆에 새로운 다리를 하나 놓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예?" "12인의 다리 옆에 새로운 다리를 하나 만드는 겁니다. 시시한 나무 다 리가 아니라 몇 백년이 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한 돌다리를 놓는 거 죠. 그 계곡에 다리를 놓는 정도의 일이라면 상당한 공사가 아니겠습니 까? 어쩌면 겨울 동안 계속 할 수 있는 공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정 도의 공사라면 상당히 많은 유민들을 인부로 고용할 수도 있을 테고." 시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 다리라… 물론 그렇겠지요. 그건 엄청난 공사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사를 무슨 재원으로 감당하겠습니까?" 난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간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툭. 조 그마한 주머니에 비해 꽤나 묵직한 소리가 나자 시장님은 얼떨떨한 표정 으로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내가 열어보라는 시늉을 하자 시장님은 그것 을 열어보았고, 곧 시장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실리키안씨는 놀 라서 그 주머니를 들여다보았고 그의 얼굴은 곧 하얗게 변했다. "그 정도의 보석이라면 공사를 감당할 수 있겠지요?" "마, 마, 맙소사…!" 시장님은 그 말만 남기고 기절해버렸다. 아이고, 맙소사! 잠시 시청이 떠들썩해지는 소란이 있은 후 시장님은 간신히 정신을 차 렸다. 의외로 심장이 약한 시장님인가 본데. 뭐, 시장실로 몰려든 다른 시청 직원들도 보석을 보고 연쇄 기절이라도 일으킬 듯한 표정을 지었 다. 시장님은 간신히 위엄을 되찾아 질문했다. "도, 도, 도대체…" 위엄만 되찾았지 화술은 되찾지 못하신 모양이다. 으윽.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보석을 구했냐고요? 그야 대미궁에서…" "아, 아, 아니, 도, 도, 도대체…" "아닌가? 그럼 도대체 왜 레너스시에 이런 도움을 주느냐고요?" 시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시청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날 쏘 아보았다. 어라, 그거 기분이 괴상하네. 너무 큰 친절이라 의심부터 앞 서는 모양인데. "뭐 저도 좋은 일이니까 그렇죠." "예?" "레너스시에서 서쪽으로는 황량한 웨스트그레이드잖아요. 아직까지도 별로 개척이 안된 땅. 하지만 12인의 다리의 교통이 더 편리해지면 웨스 트그레이드로 넘어오는 상인들도 많아질 테고 그럼 웨스트그레이드도 좀 더 발전할 수 있겠죠?" "아… 예. 그렇군요." "그러니까 이건 제 고향을 생각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레너스시의 유민들도 처리하고. 일석이조인 셈이죠."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난 잠시 동안 시장님과 시청 직원들의 열렬한 감사 인사에 시달리게 되 었고 곧이어 그 다리의 이름을 네드발교(橋)라고 붙이겠다는 말에 기막 혀해야 했다. 난 상당한 노력 끝에 그냥 휴다인 다리라고 붙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기도 쉬울 거라고 납득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밟고 다니는 것은 관심 없어. 푸하하! 어쨌든 샌슨, 결국 내 말이 맞게 되었지? 휴다인 계곡의 휴다인 강이라면 휴다인 다리가 되어 야 된다고. 어쨌든 그 모든 소란이 끝난 다음에야 난 내 마지막 용건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용건은 시장님을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0. 레너스시의 시청 앞에선 진귀한 장면이 벌어져 오가는 시민들을 당혹케 했다. 시장님과 시청직원들이 이 추운 겨울날에도 불구하고 우르르 쏟아 져나와 한 모험가를 붙잡으려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모험가는 나다. "이대로 떠나시다니오,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식사라도 한 끼 하시지 않고…" "아, 괜찮습니다. 급하게 만나볼 사람이 있거든요." "약속을 조정하실 수 없겠습니까?" "뭐 꼭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괜찮다면 시간을 아끼고 싶군 요." "아무리 그래도 도리가 아닌지라…" 뭐 이런 식의 대화가 한참 오간 다음, 난 간신히 시장님과 시청직원들 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참, 부탁한 것은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시장님은 울상이 되었다. "네드발 백작님의 부탁이긴 합니다만… 그게 참 짐작하기가 어려운 일 이군요. 경비대원들을 모조리 풀어서 탐색해보겠습니다만." 난 잠시 얼이 빠진 채로 그 광경을 상상해보았고, 곧 시장님과 나 모두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킥! 그거 봐줄 만하겠네. 그럴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흐음. 나중에 오후 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난 시청을 떠나왔다. 레너스시 경비대원들은 오늘 참 황당한 한 나절을 보내게 되겠군. 잠시 후, 나는 상가거리를 이리저리 돌아가다가 12인의 여관이 있는 골 목길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아직 마음 속에 회의가 남아있는데. 과연 유스네를 만나봐야 될 것인가? 유스 네에게 나는 떠나간 방랑자인 셈이니까 꼭 돌아와 줄 필요는 없을 거 같 은데 말이야. 흐음. 이 노릇을 어찌한다. 특별하게 만나볼 이유가 있지 도 않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그냥 이대로 돌아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경비대원들에게, 그리고 시청에서도 내 이름을 다 말했으니 내가 레너스시에 들렸다는 소식은 분명히 유스네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에 들렸으면서도 한 번 찾아오지도 않고 지나갔냐고 화 를 내게 되면? 그런데 화를 낼까? 겉으로야 화를 내겠지만… 글쎄올시다. 인생이 옛이 야기는 아니지만 그 비슷하게 꾸며나가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 후치 네 드발에 대한 유스네의 추억이 그 이별 장면으로서 완결이라면 쓸데없는 막간극, 아니 막후극이 되나? 어쨌든 그걸 삽입시킬, 아니 붙일 필요는 없겠지? 한 모퉁이만 돌면 되는데. 나는 12인의 여관이 있는 골목 바로 바깥에 선 채 바로 그 한 모퉁이를 돌지 않고 있었다. 이거 고민되네. 그 때였다. "유스네! 어이." 고함 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고삐를 확 끌어당기며 몸을 옆으로 눕혔 다. "히히힝." "쉿! 조용히 해!" 썬더라이더를 달래며 부리나케 뒤로 돌아 달렸다. 조금 지나자 또다른 골목이 보였고 난 그 속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어두운 골목이다. 휴우. 그렇게 나는 골목에 숨어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왜 부르는 거야? 외상값이라도 갚아주려고?" 이 목소리… 톡 쏘는 목소리. 유스네의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먼 느낌의 다른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원 계집애, 어지간히 쏘아댄다. 그게 아니고 말이다. 쉐린이 주문한 것들 20일까지 되겠다고 좀 전해다오." "20일? 그럼 너무 늦어! 지금 재고품이 간당간당하단 말이야. 죽어도 18일까지야. 알겠어?" 잠시 후 오른쪽에서 손에 빨래 바구니 비슷한 커다란 바구니를 든 유스 네의 모습이 나타났다. 난 급히 머리를 옆으로 치우다가 담벼락에 머리 를 박고는 소리 없는 비명을 좀 질렀다. 다행히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청년 하나가 걸어오며 불평스러운 표 정으로 말했다. "좀 억지를 부릴 걸 부려라. 지금 중부대로 사정이 얼마나 엉망인 줄 몰라? 곳곳에서 산적들이 출몰하고 있다고. 전쟁이 말도 아닌가봐. 그래 서…" "몰라! 나 무식해! 나 무식해서 그런 거 모르니까 무조건 18일까지야." "그런 어거지가 어디 있냐? 네가 투정부린다고 세상 일이 다 해결되는 줄 아냐?" "난 해결될 수 있는 일에 투정 부려. 해결 안 되는 일이면 거들떠 보지 도 않아. 그러니까 18일이야. 하늘이 두쪽나도. 알았지?" 킥킥. 난 어두운 골목에 몸을 숨긴 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광경을 감상했다. 유스네의 뒤를 따라오던 그 청년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 다. "나 이것 참…" "좀 봐주라. 응? 응? 18일까지 안되면 장사 놀아야 된다고. 그게 말이 돼? 눈이 쌓여서 겨울 상단이 지나가려면 아직아직 멀었단 말이야. 오빠 나 나나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12인의 여관 주인이 굶어죽어?" "안보여? 볼 홀쭉해진 거?" 유스네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볼을 홀쭉하게 만들어보였다. 청년은 그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원 계집애도 고집 하나는. 어떻게 알아봐 주기는 하겠지만 기대는…" "창고 치워놓고 있을게!" "이봐, 유스네!" "걱정마, 걱정마. 18일날 물건 안 들어오면 치워놓은 자리에서 혀 깨물 고 죽어버리지, 뭐? 굶어죽는 거보단 나을 거야. 알았지?"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그래가지고 시집이나 갈지 정말 의문스럽 다." "시집? 어, 너 지금 나를 연애 한 번 못해본 여자로 생각하는 거 아니 지? 나한테도 멋진 과거가 있다고! 그러니까…" "그만해라, 그만해! 한 번만 더 들으면 100 번이다." "어? 너한테도 들려줬어?" "레너스 시에서 그 위대하시다는 네 애인 이야기 안 들은 사람은 귀머 거리 론 밖에 없을 거야. 레너스에 도착하자마자 트롤 일곱 마리를 쓸어 버리고 실리키안 남작 때문에 억울하게 갇히게 되자 감옥 벽을 부수고 뛰쳐나와 실리키안 남작 저택을 박살내고 그 투기장은 통채로 시청에 선 물해버리고. 뭐 빠진 거 있냐?" 써, 썬더라이더. 나 좀 잡아줘… 아, 넌 팔이 없지? "빠진 거 있지! 너희 촌 무지렁이들은 죽었다 깨도 상상못할 정도로 중 요한 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룻밤 휴식도 못하신 채 늦은 밤에 떠 나시고." "아, 그래. 궁금한 거 있다. 그 날 밤에 너와 그 위대하시다는 그 분, 키스라도 했던 거냐?" "이 저질! 생각하는 게 그런 거밖에 없지!" 유스네는 바구니를 휘둘러 멋지게 청년의 가슴을 후려갈기고는 몸을 홱 돌렸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곧 껄껄거 리기 시작했다. 유스네는 걸어가다가 갑자기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분은 자기 이름을 주셨을 뿐이야! 멍청아. 넌 그런 고상한 행동도 모르지? 아는 거라고는 끌어안고 입 맞추고 하는 거밖에 모르지?" "그래, 인석아. 나 무식하다." 청년은 두 팔을 들어올리면서 계속 낄낄거렸다. 그리고 나도 숨죽여 낄 낄거리기 시작했다. 좋아. 알겠어. 이젠 확실히 결정했다고. 난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내가 숨어있던 골목에 반 대쪽 출구가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오후가 될 때까지 어디서 시간을 때운담? 12인의 여관에서 그 멋진 흑맥주나 좀 마시면서 시간 때우려고 했더니, 쩝, 아쉽게 됐네. 꽤나 싸늘한 날씨로군. 그런데 좀 더 속력을 내지 않으면 휴다인 고개 에 채 올라서지도 못한 채 밤을 맞이하겠는데? 태양은 이미 서쪽을 과녁 으로 삼아 빠른 추락을 결심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썬더라이더는 지칠 줄도 모르고 달려갔다. 이 녀석은 혹시 원래가 지친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난 괜스레 미안해져서 말했다. "썬더라이더, 임마. 이게 다 네가, 발이 너무, 빠른 탓이다. 결국 레너 스시에서, 하루쯤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달려가게, 되었단 말이야. 불만 있냐? 불만 있으면, 말해봐. 말 못하지? 푸하하하. 그럼 어서가자!" "이힝힝힝!" 위이이이잉! 고갯머리를 쓰다듬는 겨울 바람은 앙상한 겨울 가지들을 짓밟아 뭉개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무니안의 가슴에 발 붙이지 못하 는 저 바람은 대지에 발 붙인 나무들에게 항상 질 수밖에 없다. 결국 최 후에 이기는 것은 나무다. 움직이지 않는 바람은 없으니까. 변화하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까. 바람은 영원히 시무니안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시무니안 의 가슴에 몸을 누이고 약속된 휴식을 받을 수 있다. "썬더라이더, 바람을 앞서라!" 정신없이 흔들리던 허리와 어깨가 이젠 차라리 정지해버린다. 무서운 속도 속에서 몸은 흔들림을 멈추었고 나는 휴다인 고개 위를 유영하고 있다. 썬더라이더의 발굽 소리도, 귓가를 매섭게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 리도 사라져버리고. 주위는 한없이 고요하다. 그리고 내 몸은 멎어있다. 결국 이거야. 움직이는 바람은 없지. 변화하는 인간은 없지. 상대적으로 말하면 간단한 것이 될까. 움직인다는 것은 멎어있는 상태 에 대비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멎어있는 바람은 없다. 따라서 움직이는 바람도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고정된 본질을 가졌을 때만이 설명될 수 있는 말이지. 하지만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변화하는 인간은 없다. 그리고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는… 쿠쿠쿠쿠쿵! 겨울철인데도 휴다인 계곡의 수량은 많이 줄어들지 않은 모양이다. 휴 다인강은 여전히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주위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고 있 었다. 바람마저도 휴다인강에 경의를 표하며 그 수다스러운 입을 벌리지 못하는 계곡. 그리고 그 계곡 위 허공엔 아무 것에도 고정되지 않은, 하 지만 허공에 고정된 12인의 다리가 떠있었다. "이힝힝힝!" 썬더라이더가 급히 멈추면서 투레질을 좀 했다. 그리고 나는 재빠른 동 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면 서 고정된 그 다리를 바라보았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움직여도 꼼짝을 하지 않 는, 마치 세상의 중심이나 된 것처럼 가만히 허공에 멈추어있었다. 그리 고 그 너머, 지금 이마를 따사롭게 내려비치고 있는 태양이 향하고 있는 땅, 웨스트그레이드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회색산맥의 산봉우리들과 고원들 틈으로 멀리멀리 보이는 웨스트그레이 드는 석양의 땅이었다. 청회색의 산과 봉우리들 사이에 번뜩이는 황금의 땅. 바알간 대지의 모습이 이채롭다. 저녁의 땅, 귀환의 땅. 결국 나의 모든 것은 저기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군.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을 타고 출발했을 때의 내 모습 그대로. 동쪽과 북쪽과 남쪽에서 겪었던 모든 추 억들은 그곳에 남겨두고 결국 같은 모습, 같은 발걸음으로 서쪽으로 돌 아가게 되는 것인가. 태양. 아침에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을 약속받았고 그래서 곁눈질할 사 이없이 서쪽으로만 달려간다. 후치 네드발. 미친 척하고 동쪽으로 달려 가보았지. 하지만 결국 태양을 따라 돌아오게 되는군. 하하하! "쓸데없는 망상들. 이것도 휴다인 계곡 이쪽에 남겨두자. 이제 돌아가 는 거야." 나는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쥔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약속대로 여기 12명이 모였습니다. 계곡 좀 건너갑시다. 예?" 다리는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속이라는 것이 없는 움직임은 최면적이야. 다리는 정지상태에서 서서 히 속도를 높인다거나 하지도 않고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저 녀석도 변화를 모르는 다리로군? 정지, 똑같은 속도, 그리고 다리는 내 앞에 정지했다. 난 썬더라이더를 끌고 다리에 올랐다. 다리는 충실하게도 나와 썬더라 이더가 올라탈 때까지 기다린 다음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서쪽을 바라보았다. 썬더라이더 녀석은 내 기 대를 물리치지 않고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서있었다. 멋진 녀석. 그래서 난 아무런 부담없이 서서히 다가오는 계곡 반대편과, 그리고 그 너머 반짝반짝 빛나는 웨스트그레이드의 파편을 볼 수 있었다. 다리는 고요히 멈추었다. 으잉? 벌써 끝이야? 왜 이 다리는 탈 때마다 한 번 더 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게 되는 거지?할 수 없 지, 뭐. "내리자, 썬더라이더." 나와 썬더라이더가 내리자마자 다리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는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는 척하기 시작했다. 난 다리를 향해 피식 웃어주고는 썬더라이더의 안장 뒤에 실린 짐 중에 서 상자를 꺼내었다.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것을 열었다. 잠시 고요했지만 곧 바깥의 냄 새를 맡은 쥐들이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10 마리의 쥐들은 찍찍 거리는 소리만 남겨두고서는 순식간에 주위의 숲으로 뛰어가버렸다. 녀 석들, 작별 인사도 안하네. 하하하. 이 추운 계절에 10마리의 쥐를 잡겠답시고 건물 천장과 지하를 뒤지고 다니느라 수고하신 레너스시 경비대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난 잠시 동쪽을 향해 서서는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저 다리에게 쥐처럼 작 은 생물까지도 인식하게끔 만들어둔 타이번 하이시커씨를 향해서도. 경례를 마치고, 난 다시 썬더라이더에 올라탔다. 이거 추위가 예사롭지 않군. 대충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때는 단풍잎이 떨어지는 계절 이었고 지금은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있지만 말이야. "가자구! 썬더라이더! 이젠 계곡도, 다리도, 도시도, 영지도, 아무 것 도 필요없어. 그냥 헬턴트 마을로, 돌아가면 된다고! 그리고, 그 너머, 그 너머로!" 썬더라이더의 배를 걷어찼다. 썬더라이더는 곧 맹렬한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난 반짝거리는 웨스트그레이드를 향해 있는 힘껏 고함질렀다. "아무르타트, 기다려라!" 아침 바람은 이슬의 임종을 정확히 지켰다. 겨울 아침의 게으른 태양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위는 그 런대로 환하다. 이슬을 말려버린 바람이 다시 불 때마다 밀기울 같은 흙 먼지가 일어난다. 텁텁한 먼지들이 푸르른 겨울 아침의 대기 속으로 사 라져간다. 그러고보니 이 굵고 거친 먼지마저도 반갑군. 미드그레이드나 이스트그레이드의 먼지는 밀가루나 모래 같았지. 웨스트그레이드의 토양은 메마르다. 동부의 땅의 흙들, 특히 기억나는 것은 영원의 숲의 흙이 잘 기억나는 데, 비옥도가 지나쳐서 끈적할 정도였었다. 그리고 이스트그레이드의 칸 아디움 주변의 흙먼지들은 곱게 빻은 밀가루들에 노란 물을 들인 것 같 은 먼지였다. 하지만 웨스트그레이드, 내 고향의 땅은 메마르다. 흙알갱이는 그렇게 가늘지 않지만 비옥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다. 뭐 그래서 가벼운 쟁기를 사용해도 충분히 갈아엎을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그래, 그렇다고. 이 땅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말이야, 그 사람들은 농기 구에 대해서는 커다란 부담이 없을 거란 말이야. 말 여러 마리 세워서 탠덤 하네싱(Tandem harnessing)으로 십자쟁기 끌게 할 필요도 없어. 소 한 마리면 이 땅은 갈고도 남거든? 난 썬더라이더의 은빛 갈기를 헤집으며 말했다. "어이, 한 때 소였던 말로서 한 마디 해봐라. 말이 왜 소보다 비싼 거 냐?" 썬더라이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 놈. 살살 약이 오르지? 하하하. 뭐 말이 더 힘도 좋고 속력도 빠르고. 달리는 속도야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일하는 속도도 말이 훨씬 빠르지. 그리고 먹는 것도 고급이니까 더 비싼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이 땅에선 말이 아니라 소로도 충분하거든? 물? 물이야 많아. 회색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강물들은 맑고 차갑지. 중부대로는 정확하게 이 땅까지 이어져있고 말이야. 땅도 얼마나 많은 가. 사우스그레이드의 유민들을 모조리 여기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왜 대륙의 서부는 개척되지 못하는 거지. 이봐요, 카알. 어차피 북으로는 헤게모니아가 막고 있고 남으로는 자이 펀이 막고 있지 않습니까? 동쪽으로는 바다가 떡하니 막고 있고. 그러니 까 말입니다. 이번 전쟁은 결국 바이서스로 하여금 서부 진출의 필요성 을 느끼게 만드는 전쟁이 될 거라고 보는데. 카알 당신 생각은 어때요? 드래곤들도 없어진 마당에 바이서스가 자이펀을 합병하거나 하기는 어렵 지 않겠어요? 결국 대답은 서부 진출이라는 말입니다. 하! 하! 하! 하지만 나 후치 네드발은, 서부 탐사 같은 것 때문에 등에 해를 진 채 이 땅으로 걸어온 것은 아니지. 그런 시시한 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 다고. "어머? 어머?" 그래, 바로 이거라고. 아직 검푸른 으스름이 남아있는 서쪽 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소녀. 어 깨를 두른 쇼올 끄트머리를 가슴 앞에 모아쥔 채 서 있지. 그녀의 뒤는 검푸른 하늘이지만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그 얼굴은 희다. 아침 바람이 그 빨강머리를 짓궂게 휘날리게 만들지. 그리고 난 이제 등 뒤에서 떠오 르는 햇빛을 받으며 그 소녀에게로 걸어가고 있어. 언덕 위의 소녀는 조용히 서서 날 기다리고 있어. 입술을 꽉 깨문 채. 빨간 머릿결은 어지럽게 날리고 있고 어깨의 쇼올도 살짝살짝 떠오르고 있지만 소녀의 하얀 얼굴은 꼼짝도 하지 않아. 난 손을 들어올리지. 아 마 내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거야. 등 뒤의 태양 때문에 내 얼굴은 시커멓게 보일 테지? 하지만 소녀의 눈은 점점 동그랗게 변해간다. "후치?" 하하하. "후치?" 하하하하. "후치!" 물 속에 빠졌다가 급히 뛰쳐나와 몰아쉬는 숨처럼, 참을 수 없는 외침 이 가슴에서부터 치밀어올라온다. 난 목이 아니라 가슴으로 외쳤다. "제미니!" 썬더라이더에서 뛰어내린다. 박명의 서녘하늘을 이고 서 있는 언덕으로 달음질쳐 올라간다. 나부끼는 붉은 머리. 치마가 찢어질 듯 뒤로 부풀어 오르고. 놓쳐버린 쇼올은 등 뒤로 날아오른다. 하얀 쇼올은 서녁 하늘로 깃발처럼 나부껴 올라간다. "후치야아!" 숨이 막히도록 격렬한 충돌. 가슴에 제미니를 안은 채 그대로 빙글빙글 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동쪽 하늘의 밝은 아침놀과 거무스름한 서녘 하늘이 번갈아 자리바꿈을 한다. 극명과 극암이 회전하지만, 코 아 래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붉은 머리카락의 폭포뿐이다. 그리고 귓가 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뚫고 제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 줄 알았어! 응! 응! 올 줄 알았다고! 후치, 후치, 후치!"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내가 고 향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게 누구인 줄은 벌써부터 알 고 있었지. 제미니의 어깨에서 날아오른 하얀 쇼올은 어지러이 춤추며 한없이 날아 오르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쇼올은 영원히 춤추고 있었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1. 315년 12월 18일 날씨? 흥! 날씨가 중요한가? 기억 안 나! 타이번씨의 말이 맞았다. 너무 놀랐다! 타이번씨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후치의 말마따나 노인이 지나온 1년 은 어린애나 청년의 1년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일까? (그 러고보니 돌아온 후치는 어려운 말을 잘 한다. 이상하게 바 뀐 거 같다.) 어제 저녁 일기에 전술한 바와 같이… 킥킥. 이건 그제 내가 돌아오던 날의 일기로군. '전술한 바와 같이' 라 고? 하하. 제미니. 나 따라서 어려운 말 쓰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 런데 그 전날 저녁 일기엔 뭐라고 썼는데? 어디, 앞으로 넘겨보자. …오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타이번씨를 만났다. 타이 번씨는 산트렐라의 노래로 향하다가 내 발자국 소리만 듣고 (정말 놀랍게도!)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미니? 오늘도 후치 기다리다 온 거냐?" "산책다녀온 거에요." "꼭 한쪽 방향으로만 산책을 다니는구나?" "사람마다 좋아하는 산책로가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 아, 참. 저녁 산책 말고 아침 산책은 어떠냐?" "아침 잠이 많아서…"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좋아하던 그 산책로로 나가 봐." 아. 하하하. 그렇게 된 것이군. 난 침대 위에 드러누운 제미니를 바라 보며 킬킬거렸다. 제미니는 쌔근거리는 숨소리만 내면서 뒤척거리지도 않고 잠들어있었다. 참 고요하게도 자는데. 어디 보자. 다시 다음 날 일 기로 넘어가볼까? 내가 돌아오던 날이지? …나는 타이번씨의 말대로 아침에 동구밖 언덕 위로 나가보 았다. 날씨는 무지무지 추웠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시리지 않 았다. 해가 떠올라 눈이 부셔서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 때 도 이상하게 얼굴이 돌려지지 않았다. 그 때 햇님의 얼굴 앞 으로 새카만 그림자가 보였다… "이힛히히히! …냐아암, 쩝." 기절하는 줄 알았네. 아이고, 이 망할 계집애야! 난 투덜거리며 제미니 가 걷어차버린 시트를 끌어올려 다시 목까지 올려 주었다. 이렇게 추운 데 배 내놓고 자봐라.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그래, 옆에서 권하는대 로 넙죽넙죽 받아마시더니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지! 그리고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제미니의 일기를 들어올렸다. 315년 12월 19일 꽤 추웠지만 구름은 별로 없었고 화창했던 것 같다. 이 못된 후치! 그래, 우리 집엔 찾아오지도 않아? 후치는 오늘 아침부터 언덕 위의 성에 틀어박혀서는 오후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오후에 경비대원 터거씨가 마을로 내려온 김 에 후치 소식을 물어보았다. 터커씨는 이렇게 말했다. "응? 아, 집사님한테 그 동안의 일 보고하느라 그러는 걸 거야.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타이번씨와 집사님, 그리고 후치만 안에 틀어박혀 있어. 뭐라고 말이라도 좀 전 해줄까?" 아직까지도 화가 나 죽겠네. 무슨 말을 전하란 말이야? 저 녁이 될 때까지 언덕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았지만 후치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후치가 저녁 무렵에 타이번씨와 함께 카알씨의 집으로 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화가 나도 꾹꾹 참고 있었지 만 저녁 식사 시간에는 무의식 중에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다 가 어머니한테 크게 꾸중을 들었다. 속상해서 밥맛도 없어 저녁을 안 먹었더니 배가 너무너무 고프다. 지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일기를 쓰고 있다. 요녀석, 후치. 내일 두고 보자! 어디서 귀까지 잘라먹고 돌아와서는 얼굴도 안 보여줘? 망할 녀석! 왜 몸을 함부로 굴리냐고! 하하하. 그래서 오늘 저녁 그렇게 신나서 술을 마셔댄 것이로군? 흐음. 난 제미니의 일기를 덮어두고는 제미니가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른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장소, 즉 제미니의 침대 밑에 다시 숨겨두었다. 요 녀석아. 네가 침대 밑에 네 일기랑 기타등등 여러 가지 너의 보물들을 숨겨두는 거, 너희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모르 지? 다시 한 번 제미니의 시트를 정돈해놓고 나는 제미니의 방을 나왔다. 밖에서는 제미니의 어머니께서 제미니의 아버지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 가려고 애쓰고 계셨다. 제미니의 어머니는 날 보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아이고, 후치야. 좀 도와줘.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시고 온 거람? 도대 체 해너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제미니의 아버지 스마인타그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뭐라고 중얼거리기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하하. 제가 오늘 저녁에 해너 아주머니 술창고를 거의 비워버렸거든 요." "세상에. 후치 너 정말 손 크구나? 아무리 젊은 혈기라지만 그렇게 헤 프게 쓰면 못써요. 아니, 내 정신 좀 봐. 이 양반 좀 들어다주겠니?" 난 웃으며 스마인타그씨를 들어서 방 안으로 모셨다. 스마인타그씨를 침대에 눕혀놓고 밖으로 나오자 스마인타그 부인은 물잔을 내밀었다. 스 마인타그 부인은 안쓰러운 눈으로 내 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미니에게 듣긴 들었다만, 귀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냐?" "꿀꺽꿀꺽. 이야기하면 길어요. 여행 중에 오크놈들하고 싸울 일이 있 었는데 그 때 베었죠." "저런, 큰일날 뻔했구나. 젬이 어제 저녁에 얼마나 울었는지." "울어요? 이런, 하하하…" "울다가 울다가 잠이 들어서 밤새도록 잠꼬대를 하는데. 그래도 살아서 돌아왔으니 다행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더구나. 그래서 난 네가 완전히 반 병신이 되어 돌아온 줄 알았단다. 그 정도는 괜찮지. 듣거나 하는데 이 상없니?" "예. 까딱없어요." "그래. 여기까지 저 정신나간 부녀 데리고 오느라고 정말 수고했다, 후 치야. 그런데 넌 별로 취하지 않은 거 같네?" "아, 예. 전 많이 안 마셨거든요. 사실 술 마실 틈도 없었어요. 계속 이야기만 하느라고." "이런, 주정뱅이들이 먼 길 다녀온 사람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했구나. 며칠 푹 쉬어야 될 텐데 어제는 집사님에게 보고하느라, 그리고 오늘은 주정뱅이들에게 끌려다니느라 고생했네. 그리고 우리집 양반이랑 젬이랑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내, 방 치워줄 테니 여기서 자고 가렴." "아, 괜찮습니다. 어머님. 피곤하지 않아요. 집에서 쉬고 싶네요." "그러니? 그래도 늦었잖니. 집까지 돌아가려면 피곤해서 되겠니?" "하하. 눈 감고도 다니는 길인데요. 몇 달 떠나있었다고 우리 집을 못 찾아가겠습니까?" 그렇게해서 난 제미니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스마인타그씨의 집을 나왔 다. 헬턴트 마을이 10 년 동안은 떠들썩할 큼직한 술판을 벌였는데 난 별로 마신 것이 없군. 억울해라. 그러나 고향의 공기부터가 날 취하게 만드니 술 못 마신 것 쯤은 참아주지. 어쨌든 내일 아침에 해너 아주머니는 홀 가득 널브러져 있는 주당들 정리하느라 꽤나 고생하겠는데. 사람들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황당해했다. 내 이 야기는 많은 부분 삭제된 이야기였다. 들려줘선 안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섞여있으니까. 게다가 카알이 말했듯 우리 영지는 아무르타트와의 균형 을 이룬 마을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할슈타일 후작의 야심이라든지 넥슨 의 비극, 크라드메서의 고뇌 같은 것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했 기 때문에 그 부분들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 걸쳐서 빼버렸다. 하지만 남은 이야기만으로도 헬턴트의 주민들을 당혹시키기에는 충분했 다. 그들은 요즘 미드그레이드 쪽에서 들려오는 세이크럴라이제이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들었었고, 내가, 헬턴트의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 이 그것을 두 번이나 경험했으며 그 시작부터 잘 안다는 사실에 경악했 다. 그들은 아련한 기억 속에서 간신히 대미궁에 대한 기억을 건져낼 수 있었으며 내가 그곳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에 기막혀했다. 하지만 그들이 대미궁에 들어가기 전에 밧줄을 밖에 묶어두고 들어갔으면 길 찾느라 고 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핀잔을 줬을 때는 나도 기막혀서 어쩔 줄을 몰랐 다. 이 사람들의 머릿속의 대미궁이라는 것은 곰굴보다 조금 더 큰 구조 인가 보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난 썬더라이더를 작업장에 묶어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컴 컴했다. 집밖으로 새어나오고 있던 불빛은 벽난로에 피워놓은 장작불의 빛이었다. 그리고 벽난로 정면의 침대, 아버지가 쓰시던 그 침대에는 시 커먼 그림자가 앉아있었다. 타이번이었다. 타이번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후치냐?" "예. 오래 기다리셨어요?" 촛불이라도 켜놓고 있지 그랬냐고 말하려다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타 이번이 필요한 것은 빛이 아니라 벽난로의 온기였겠지. 하하. 난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타이번은 여전히 벽난로를 향한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반쯤 남겨진 술병이 세워져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자 타이번은 싱긋 웃더니 술 병을 들어 정확하게 나에게 건네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팔만 뻗어 서. "귀신 같네요. 정말 안 보이는 거 맞아요?" "흐음. 누군가가 술병을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소리가 들리더라 구."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우와! 뮤러카인 사보네다! 하하하. 난 입을 닦고는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병을 도로 내밀었다. 하지만 타이번 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 없네. 자네가 다 마시게." 참 굉장하다, 굉장해. 술병 속의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라도 들으셨나? 난 킬킬거리며 탁자 위에 술병을 세워놓았다. 타이번은 물끄러미 벽난로 를 바라보며, 아니, 그냥 그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말했다. "허, 참. 먼지 타는 냄새가 굉장하군." "오랫동안 불을 안 피웠으니까요. …핸드레이크." 핸드레이크는 무표정했다. 시력이 없기에 눈꺼풀은 그냥 고요히 감겨 있어 흡사 깊은 생각에라도 잠겨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벽에는 나와 핸 드레이크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일렁거릴 뿐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고 요한 밤이었다. "어제 들려줬던 이야기에서 자네가 대충 짐작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다. 왜 오늘에서야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냐?" "제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래? 으흠. 혹시 다른 사람에게 말했느냐?" "글쎄요. 카알은 아마 짐작할 거에요. 내가 아는 건 카알도 거의 다 아 니까. 샌슨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겠죠. 그런데 에델린이 여기 다녀갔을 텐데 다른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더군요?" "음. 그 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그의 눈꺼 풀이 열리며 하얀 눈동자가 드러났다.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앞으로도…" "비밀이겠죠. 알았어요." "똑똑한 조수 녀석이로군. 하하. 사물을 보는 눈은 잃어버렸지만 사람 보는 눈은 그대로 남아있단 말이야." "그 눈은, 뱀파이어의 부작용인가요?" "비슷해. 무리하게 낮에 돌아다니다가 시력을 많이 잃었지. 몸도 엉망 이 되었고. 무녀의 마을에서 문신 시술을 받은 덕분에 몸은 그런대로 되 찾았고 흡혈도 꽤 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눈은 완전히 거덜났지. 여기, 왼쪽 가슴… 심장쪽에 있는 문신은 뱀파이어의 봉인이야." "흐음. 무녀들은 별 희한한 재주가 다 있네요. 그런데 그거 여자만 받 는 거라고 하던데?" "예외는 다 있잖아." "아, 예. 그렇죠." 핸드레이크는 몸을 쭉 펴면서 말했다. "그럼, 어제 듣던 이야기나 계속 들었으면 하는구나. 레니는 무슨 선택 을 했지? 네가 이렇게 돌아온 것을 보니 레니는 지골레이드를 선택한 모 양인데." 난 피식 웃으며 다시 술병을 들어올렸다. 헤헷.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못마셨던 술을 여기서 다 마시게 되겠군. "내가 말하기 전에 당신이 말해보세요." "뭐?"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레니를 델하파로 데려갔 던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핸드레이크는 두 손을 깍지끼더니 무릎에 올려놓았다. 마치 자신을 정 리하는 듯한 동작이군. "몇 가지 해명되어야 될 게 있다고요. 당신이 델하파로 데리고 간 것은 어린 레니지요. 그런데 레니의 어머니는 요 근래까지 살아있었지요. 그 럼 당신은 레니의 어머니로부터 그녀를 빼앗아서 데리고 간 것입니까?" "전혀 사실과 틀리다. 조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 너무 늦지 않았나 불안한데." "씨이. 그럼 설명해주세요."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없어. 내가 만났던 것은 레니야. 우연히 한두 살 정도 되는 레니를 만나게 되었지. 그 옆에는 어머니는 없었고. 내 추 측이지만, 아마도 레니의 어머니 되는 여자는 후작에게 아기를 빼앗길까 봐 임신하자마자 후작의 저택을 나와버린 모양이다." "이상하군요. 후작의 저택에 남아있었다면 결국 후작의 딸이 될 테고 그럼 레니의 미래는 괜찮은 것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덩달아 그 여자도…" "아냐.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틀려. 후작이 필요한 것은 라자의 혈통 을 가진 자식이지 아내가 아니야. 아내는 이미 있었으니까. 아마 자식만 빼앗기고 그 불쌍한 여자는 쫓겨나게 되었을걸. 생각해보게. 정식 부인 이 아니라 하녀를 통해 자식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밝혀지면 후작가의 명 예는? 또는 라자의 명예는 어떻게 될까?" "이런 제에기랄…" "그래서 임신 사실을 숨기고 후작의 집에서 빠져나온 것일 테지. 하지 만 그 여자는 그렇게강한 여자는 못되었을 게고. 그래서 결국 레니를 후작 저택 앞에 버려둔 것이었겠지." "아하.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래. 난 후작의 저택 앞에서 레니를 주웠다. 보기 딱해서 데리고다녔 지. 델하파까지 어떻게 흘러갔는데 그 때 급히 남쪽으로 내려갈 일이 있 었어. 시오네 녀석 때문이었지. 그 녀석의 정보를 붙잡았거든. 그래서 레니를 델하파의 그 주점에 맡기고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갔던 거다." "흐음. 이제 알겠군요." "그러니까 레니가 무슨 선택을 할지 내가 짐작하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말이야." "그래요?하지만 당신이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면서요?" 핸드레이크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난 불빛을 받아 마치 반지 처럼 빛나는 술병의 주둥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 내가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 니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기막힌 말이 바로 이것이라고요. 이 모든 사 건은 결국 드래곤 라자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핸드레이크가 바로 드래 곤 라자를 만들었다니. 바이서스의 은인이었던 핸드레이크가 바이서스의 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던 사람이라니." "요놈아. 눈 앞에 있는 사람을 3인칭으로 말하지 마라. 여행 돌아다니 다가 못된 물만 들었구나." "아, 죄송합니다. 나 지금 무지무지 혼동되는 머리를 부여잡고 헬턴트 마을까지 힘들게 참아가며 온 뒤라서 그래요. 그리고나서도 또다시 이틀 이나 참았기 때문에 지금 머리 속에서 폭발할 정도라고요. 그럼 뭐죠? 당신이 드래곤 라자를 만들어내었다면, 당신이 할슈타일 가문의 부흥의 원인이고, 크라드메서의 비극의 원인이고, 드래곤 라자들의 슬픔의 원인 이고… 젠장!" 쾅!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고 탁자는 단숨에 박살나버렸다. 하지만 핸 드레이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박살난 탁자의 조각들을 벽난로 안 으로 차넣었다. "설명해보라고요! 왜 드래곤 라자를 만든 거죠?"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2. "짐작하는 바라도 있는 거냐? 자네가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그 런 생각이 든다." "물론 짐작하는 바가 있어요." "말해봐." 탁자가 없어지니 술병 내려놓을 곳이 없군. 난 술병을 든 손을 의자 옆 으로 늘어트린 채 맥풀린 모습으로 앉았다. 하지만 핸드레이크의 앉은 자세는 아까부터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내가 주정뱅이가 된 것 같군. 모습도,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별이 몇 개죠?" "여덟 개지." "그렇지요. 여덟 별. 드래곤, 인간, 엘프, 드워프, 호비트, 페어리, 오 크. 나머지 하나는 모르고. 어쨌든 드래곤의 별만 남았지요. 그런데 정 말 드래곤의 별만 남았나요?" "뭐?"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별… 그건 어떻게 된 거죠?" 핸드레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난 핸드레이크의 화법에 말 려들어버렸군. 핸드레이크는 아까부터 나에게만 말을 시키고는 대답하고 싶은 부분에서만 대답하고 있어. 아, 좋으실대로. 난 떠들 테니까. "좋아요. 일단 알려진 종족들의 알려진 별 중에서 남은 것은 드래곤의 별뿐이죠. 그리고 내가 들어왔던 이야기가 옳다면, 별이 사라진 종족들 은 그 불완전성을 영원히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보다 완전한 종족인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선 라자가 필요하다 는." 다시 술병을 들이킨다. 하지만 목이 마르다. "퍽 웃기는 이야기죠." "웃긴다고?" "그건 조건일 뿐이에요. 이유가 아니라." "설명해봐." "조건과 이유는 다르죠. 우리가 완전에 가까운, 우리의 반대쪽 극단인 드래곤과 교류하려면 드래곤 라자가 필요하다. 이건 조건이죠. 하지만 드래곤과 교류할 필요는 뭐죠? 행동은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유에서 나오는 거죠. 식탁이 잘 차려졌다고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거에요. 우리가 드래곤과 교류할 조건은 드래곤 라자 로써 갖추어졌다고 보고, 그런데 교류할 필요성은 뭐죠?" 다시 한 모금. 위대한 크라드메서를 위해. "난 크라드메서를 만났지요." 핸드레이크는 그 하얀 눈으로 장작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눈 은 새빨갛게 보였다. 문득 뱀파이어라는 것은 핸드레이크에게 얼마나 어 울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크라드메서는 라자의 계약을 꺼리고 있었어요. 그 때 나는 깨닫게 되 었죠. 크라드메서는 이렇게 말했죠.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접촉하게 되 면, 분명 변화는 일어나는 법. 바다를 그리워하며 달려간 강물은 결국 바다가 되어버리지. 인간들은 그에겐 너무 벅찬 존재들이었고, 라자가 찾아옴으로써 그는 막다른 길에 몰리고 말았다." 술이 다 떨어졌나? 하지만 정신은 맑기만 하고 목은 바싹 타오르는데. 난 술병을 거꾸로 쥐고 한참 흔들어서 마지막 몇 방울을 입에 떨어트렸 다. 입술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군. "인간은 드래곤 라자를 통해 드래곤을 변화시킬 수 있지요." 그래. 바로 이거야. 드래곤의 별이 보호하는 드래곤들이었지만 인간은 라자를 통해 드래곤에게 접근할 수 있지. 그리고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행했던 일을 드래곤에게도 행할 수 있게 되었지. "간단한, 너무나 간단한 것이죠. 인간들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변 화시켜왔던 자들이지만, 저 위대한 종족, 자신의 별을 끝까지 지켜온 종 족인 드래곤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드래곤 라 자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드래곤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거죠." 난 비어버린 술병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 만세." 핸드레이크는 말하지 않았다. "이거 보세요. 내가 선창했으면 당신도 따라하라고요. 루트에리노 대왕 만세! 마침내 드래곤마저도 인간의 신전에 바쳐지게 되었도다! 인간의 발길이 닿으매 숲에는 오솔길이 생기고 인간의 눈길이 닿으매 밤하늘엔 별자리가 생기는도다. 인간이 비웃으매 엘프는 자멸할 것이며 인간이 깔 보니 드워프는 퇴화할 것이다. 자신의 별을 지닌 드래곤은 인간의 손길 에서 안전하리라 믿었으나 드래곤 라자 있으매 마침내 그 별의 보호도 퇴색하였음이니. 두 발로 서서 하늘을 쏘아보는 저 인간은 마침내 드래 곤 라자로써 별의 보호를 깨트리고 드래곤마저 굴복시켰도다. 인간 만 세, 루트에리노 대왕 만세! 하하하하!" 위이이잉! 바깥의 바람들이 내 웃음소리에 호응하듯 거칠게 불었다. 굴 뚝 위로 연기가 역류되는 것인지 벽난로의 불길이 기이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불길의 흔들림에 따라 벽에 떠오른 핸드레이크와 나의 그림자들 도 기이한 춤을 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핸드레이크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처음 오두막 안으로 들어올 때부 터 지금껏 핸드레이크의 음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으으으아!" 난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머리를 가슴에 파묻은 채, 난 길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으후후후… 후우우…" 그렇게 머리를 늘어트린 채, 발끝을 바라보며 나는 힘없이 말했다. "이루릴이라는 엘프가 말했죠." 발 옆으로 뻗어나가는 긴 그림자가 불길의 일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그리고 내 다리의 명암도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다리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후우우. 조화를 이루려면 서로 달라야 한다고. 엘프들은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 때 난 당신의 계획이, 당신의 야망이 말도 안된 다는 것을 깨달았죠. 혹은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고." "어떻게 다르지?" "당신은 모든 종족들을 완전으로, 그들의 부조리를 뛰어넘어 신께로 인 도하려고 했어요. 낭만적이고 야심만만한 계획이죠. 하지만 그것은 논리 적으로 말이 안되요. 완전성은 불완전성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난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손에 무엇을든 듯한 모 습을 취했다. "똑같은 두 개의 돌멩이가 있어요. 무게도, 색깔도, 질감도 다 똑같아 요. 그렇다면 그것들에 대해서 무겁다, 혹은 가볍다는 말을 할 수가 없 어요. 두 개의 돌멩이의 무게가 서로 다를 때 하나는 무겁다, 혹은 다른 하나는 가볍다고 말할 수 있죠." 난 다시 손을 내렸다. 어차피 핸드레이크는 보지 못하는 것.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동작이었을 뿐이다. "완전성도 마찬가지에요. 서로 다른 점이 있을 때만이 하나는 완전하 다, 다른 하나는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초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심지가 빠진 초가 완전한 것인지 불완 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아니, 원래 세상에 있는 초라는 초가 모두 심지가 없다면 사람들은 심지가 없는 초가 완전한 것이라고 믿었겠죠. 비교해볼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에." 완전이라는 거, 결국 존재하는 것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건 벌써 불안하다. 무의미한 것들이 의미를 가질 때까지 모인다는 것이 가 능한가? 무의미한 것들이 모인다고 의미가 생기는 것일까? 천만에. 존재 하는 모든 것들은 불완전하고, 그것이 제아무리 모여봐야 완전해질 수 없다. 완전은 유일자의 의미이자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은 여덟 종족을 모두 완전으로 이끌려고 했지요. 만일 당신의 계 획대로 되었다면 여덟 종족은 똑같은 것이 되고 말겠죠. 그렇다면 거기 에는 완전이 없어요. 신들마저도 자신을 구현하기 위해 서로 달라져야 되는 우리 세상에서는. 유피넬과 헬카네스!" 유피넬과 헬카네스. 항상 복수다. 단수가 없다. 유일자라는 것은 없다. "유피넬은 헬카네스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헬카네스는 유피넬이 없 으면 존재할 수 없지요! 유피넬은 조화이기 때문에 혼돈을 갖지 못해서 불완전하고, 헬카네스는 혼돈이기 때문에 조화를 갖지 못해서 불완전하 지요. 따라서 당신의 계획은 엉터리예요. 혹은 당신 스스로가 완전의 의 미를 잘못 알았다든가. 당신의 계획을 굳이 실현시켰다면 당신은 유피넬 과 헬카네스도 뛰어넘는 종족들을 만들어내어야 되지요." 핸드레이크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난 다시 질문했다. "존재는 구별이고 구별은 다른 점이 있을 때 가능해요! 하지만 다른 점 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상관없어요. 무엇이 무엇과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하지 않다는 말 이에요. 당신은 죽었다 깨도 여덟 별의 종족들을 완전으로 이끌 수가 없 어요. 설령 그 별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내 말이 맞나요?" "맞아." "자신의 실패를 곱씹으면서 우울해하시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없어." "좋군요. 지금은 감정에 푹 빠진 대화 원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된 것 인지 사실만 말씀해주시겠어요? 당신이 드래곤 라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당신의 이상을 포기하고 당신 자신이 인간의 편에 서겠다는 선언의 의미 인가요? 대왕에 대한 회귀인가요?"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볼 수도 없는 천장을 물끄러 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로군. "인간에 대한 판단 오류였지.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반 드시 헤어날 수 없는 덫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고. 자네가 판단해보게." "들려주세요." 핸드레이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1 분 가량 핸드레이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 그는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300 년을 거슬러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드래곤 라자를만든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내가 드래곤 로드를 찾아갔 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그 이야기는 들어 알겠지?" "예. …루트에리노 대왕에 의해 별들이 파괴되었을 때." 하마트면 페어리퀸 다레니안에 의해서… 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말 한 거나 다름없어. 핸드레이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으니까. 난 헛기 침을 좀 하고서 핸드레이크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별들이 파괴되고나서 나는 하나 남은 드래곤의 별을 손에 넣기 위해 드래곤 로드를 찾아갔지. 물론 이 때까지는 자네가 말한 그 완전성 의 불합리성을 모르고 있었다네. 난 하나 남은 드래곤들만이라도 완전으 로 이끌어주고 싶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의 최강의 적을 찾아갔던 것이지. 하지만 자네가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다면 그 때 나는 혼자서 찾 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야." "어? 혼자 찾아가지 않았어요?" "천만에. 난 혼자서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분명히 바이서스 임펠을 떠나 단신으로 대 미궁을 향해 찾아갔는데. 할슈타일공이 지키고 있는 그 북방의 대미궁으 로… "…할슈타일공!" "맞았어." "그랬군요. 당신은 혼자서 드래곤 로드를 만나지 않았어요. 할슈타일공 의 안내를 받아서 대미궁으로 들어갔었지요. 마치, 마치 인간이 라자를 통해 드래곤과 이야기하듯이!" "그렇지. 옛기억이 생생하군. 말하자면 할슈타일공은 드래곤 라자의 가 문의 시조이자 최초의 드래곤 라자였던 셈이지. 인간 핸드레이크와 드래 곤 로드를 연결시켜준." "굉장한 곳이군요. 할슈타일공." 지하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어지기 어려울 만큼 넓고 높은 통로들을 바 라보며 핸드레이크는 유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앞에서 횃불을 들고 걸어 가는 할슈타일공의 어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횃불의 불빛이 다가감에 따라 뒤로 물러나는 그림자 속에서는 간혹 무시무시한 눈빛들이 번득였 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통로이거나 혹은 곁으로 갈라진 골목 등에서 끔 찍스러운 비명소리나 포효소리들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대미궁에 거주 하는 오크들이나 혹은 다른 몬스터들일 것이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태 평하게 걸어갔다. "역시 드워프가 만들어야 뭐든 제대로 된단 말입니다."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 대왕과 다레니안이 별을 파괴하던 그 지하 제 단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지만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할슈타일공은 별 대답이 없었다. "아직 많이 남았습니까?" "이제 초입이오." "와하! 역시 드워프들이 만든 곳답군요. 난 사실 이제 거의 다왔을 거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소?" 할슈타일공은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말하고는 쉼없이 걸어갔 다.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고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한 10분쯤 걸어갔을까. 핸드레이크는 가고일의 것으로 짐작되는 날카로 운 포효소리를 들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만일 당신이 없이 나 혼자 여기로 들어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횃불이 갑자기 멈추었다. 할슈타일공은 멈춰서서, 하지만 뒤로 돌지는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라도 죽고 말았을 거요. 반드시!" "그렇게 믿습니까?"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소. 난 지금 시신을 안내하는 기분을 느 끼고 있소. 당신은 정말 드래곤 로드의 앞에 가서도 당신이 죽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거요?" 할슈타일공은 여전히 등만 보인 채 말했다. 핸드레이크를 이미 죽은 사 람 취급하는 것일까.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씨익 웃었다. "알 수 없지요." 할슈타일공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할슈타일공이 직접 안내하는 길 이었기에 중간에 나와 방해를 하거나 하는 자는 없었다. 간혹 경비로 짐 작되는 가고일이나 트롤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은 지나가는 할슈타일 공과 핸드레이크를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중앙 폭포에 이르렀다. 할슈타일공과 핸드레이크는 폭포 뒤의 통로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폭포 뒤에서 중앙호수쪽으로 걸어나오면서 핸드레이크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중앙 호수의 맑은 물 속에는 드래곤 로드의 거체가 잠겨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날개를 접고 꼬리를 단단히 말아붙인 그 거대한 몸은 호수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호수 주위를 둘러 싼 거대한 원형통로 곳곳에 피어있는 횃불과 천장에 떠있는 기괴한 빛무 리들 때문에 중앙 호수는 낮처럼 밝았고 그래서 할슈타일공은 들고 온 횃불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는 핸드레이크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일단 이곳에 서 있으시오. 폭포 뒤에 말이오. 당신의 모습을 갑자기 보여드려서 그 분의 진노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소." 핸드레이크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할슈타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러자 핸드레이크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슈타일공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호수 가장자리에 가까이 서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드래곤 로드여. 당신의 종 할슈타일이 뵙고자 청합니다." 잠시 후 드래곤 로드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부지불식간에 '헛'하는 감탄사를 내면서 입을 쩍 벌렸다. 어깨 위에 올려둔 드래곤 로드의 그 길다란 목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중앙호수 전체로 거대한 파문이 그려졌다. 쏴 아아아. 드래곤 로드의 길다란 목이 물 위로 완전히 올라오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았다. 그토록 천천히 움직였건만 호숫물은 몸 서리를 치며 출렁거렸다. 워낙 크기 때문에. 마침내 드래곤 로드의 머리가 호수 위로 완전히 솟아올랐다. 그 목의 절반 이상이 물 아래에 잠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 위로 올라온 드래곤 로드의 머리는 바라보는 핸드레이크의 목이 꺾일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 었다. 드래곤 로드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할슈타일 공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할슈타일인가." "평안하시온지오." "어리석은 질문이군, 할슈타일이여. 간특한 루트에리노의 발톱이 나에 게 남긴 상처를 모르는가?" "죄송합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부정을 의미하는 약한 동작이 었지만 숨어서 보고있는 핸드레이크로서는 대미궁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 정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아니. 비유가 잘못되었군. 루트에리노 자신이 핸드레이크의 발톱인가. 하하하. 그렇다면 핸드레이크의 발톱이라고 말해야 옳겠군." 그 때 핸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똑똑히 울렸다. "글쎄요. 제 발톱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발톱은 저에게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드래곤 로드." 할슈타일공은 기겁하면서 일어섰다. "핸드레이크! 내 나오지 말라고…!" 핸드레이크는 폭포 뒷쪽에서 걸어나오며 드래곤 로드를 올려다보았고 드래곤 로드는 그 거대한 목을 뻣뻣이 세운 채 핸드레이크를 내려다보았 다. 중간에 선 할슈타일공은 좌우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잠시 후 드래곤 로드의 말이 울려나왔다. "왜 할슈타일을 먼저 보낸 것인가. 내 분노를 조금이라도 모면해보려는 것이었나?"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럴 것같더군. 네가 이 곳 카르 엔 드래고니안에 몰래 들어올 수 있 을 것이라고는 너도 믿지 않았겠지." "물론 그러실 테지요. 루트에리노의 검이 아무리 날카로왔다 한들 당신 의 힘까지 어쩌지는 못했을 테니까." 드래곤 로드의 머리 각도가 아주 조금 바뀌었다. "루트에리노의 검이라고 했는가? 자네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지?" 할슈타일공은 그만 당황해버렸다. 핸드레이크도, 드래곤 로드도 벌써 오래 전부터 서로간의 만남을 대비해온 사람들처럼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핸드레이크의 말대로라면 드래곤 로드는 최소한 핸드레이 크가 대미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저토록 침착한 것인가? 핸드레이크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좋은 대화를 위해, 제가 당신과 대적했던 일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둡 시다. 나도 당신이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한 일을 잠시 접어둘 테니." 드래곤 로드의 눈매가 급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드래곤 로드는 얼굴 전 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를 내며 말했다. "건방진 놈…! 그러면 그까짓 페어리의 일로 나에게 힐난하기라도 하겠 다는 말이더냐?" "물론. 만일 다레니안이 죽었다면 이 대미궁은 세상에서 없어졌을걸."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3. 나는 물끄러미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고 핸드레이크는 그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이라고… 이 놈아! 그 눈길은 뭐냐? 너도 참 네 나 이에 안 어울리는 꼬마로다. 보통의 꼬마라면 이런 이야기에 신이 나서 비명을 질러야 정상인데 넌 왜 그런 눈빛이냐?" "마치 내 눈빛이 보이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난 발에 걸리는 사내애들과는 다르니까. 후치 네드발이거든요. 세상에 후치 네드발은 나 하나밖에 없지요." "그 풋내나는 자신만만함은 또래의 녀석들과 비슷한데. 카알이 참 이상 하게 교육시킨 모양이군." "어쨌든, 그 부끄러운 말을 들은 드래곤 로드는 아마도 크게 웃었을 테 지요?" "이 놈이! 난 발에 걸리는 마법사와는 다르다. 핸드레이크라고. 세상에 핸드레이크는 나밖에 없다." "윽. 좋은 받아치기였어요. 그러고보니 당신이 대마법사였다는 것을 잊 었군요." 대마법사의 말은 조용한 어투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상당한 가능성이 담긴 협박이었다. 따라서 할슈타일공은 질려버렸고 드래곤 로드는 크게 분노했다. "네 이놈!"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빠르게 말했다. "방문 목적은 싸움이 아니오. 만일 원한다면 상대해주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좋은 대화를 위해 그간의 일은 잠시 접어두고 싶다는 것이 내 요청입니다." 드래곤 로드는 아무 말 없이 핸드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할슈타일공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핸드레이크를 쏘아보았지만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만을 올려다보았다. "말해보아라." 드래곤 로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핸드레이크보다 할슈타일공이 더 깊은 안도를 느꼈다. 할슈타일공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보며 핸드레이 크는 미소지었다. "루트에리노는 당신에게서 회수한 별들을 파괴했소." "알고 있다." "알고 계셨습니까? 으음. 한 때 그 별들의 소유주셨으니 무슨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나는 루트에리노와 결별했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이하군. 너와 그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루트에리노의 목적은 당신의 패퇴, 그리고 내 목적은 당 신에게서 여덟 별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손을 잡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덟 별을 왜 원하는 것이지? 네 목적이 세상에 대한 지배라면 이렇듯 찾아온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할슈타일공이 입을 열 었다. "드래곤 로드. 제가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라." "저 자가 원하는 것은 별들을 통한 종족의 완성입니다." 드래곤 로드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 "종족의… 완성?" "그렇습니다. 여덟 별들은 종족의 창생사멸을 결정할 수 있지 않습니 까?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여덟 별을 손에 넣어 대륙의 모든 종족들이 그 스스로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불합리성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 기를 원한 것입니다." "할슈타일공을 먼저 설득했던 것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할슈타일공이 대미궁으로 나를 안내해준 거지.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나를 그 안으로 안내해 줄 마음을 먹었겠는가. 내가 드래곤 로드를 암살하려고 찾아간 것일지도 모르는데." 음. 일리 있는 말이로군. 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할슈타일공을 통해서 드래곤 로드에게 당 신의 뜻을 전한 셈이군요?"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좀 비약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드래곤 로드 는 내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할슈타일공의 말이라면 들어줄 가능성이 있지." "역사상 최초의 라자? 하하.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비웃었네." 핸드레이크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하마트면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핸드레이크는 아쉽기 짝이 없다는 듯이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제기랄. 정말 대미궁이 무너져라 웃어젖히더라고. 그리고 그 웃 음은 나에게 있어 선물인 셈이었지. 난 그 웃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 었으니까." "뭘 깨달으신 거죠?" 핸드레이크는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꼬마는 훨씬 간단하게 깨달은 것. 하지만 나는 깨닫 기 못했던 것이지. 세상에 완전은, 어떤 절대적 의미는 없다는 것 말이 야." "흐음. 너무 빨리 넘어가서 잘 모르겠어요." "어, 간단한 거지. 나나 루트에리노가 덤벼들기 전, 여덟 별은 다 누구 의 것이었지?" "드래곤 로드의 것이었죠?" "그래. 그렇다면 드래곤 로드처럼 지혜로운 자가…" "그거군요!" 의자에서 일어날 뻔했다. 난 당황해서 손을 마구 휘저어대다가 간신히 말을 만들어내었다. "그거군요! 만일 드래곤 로드가 그걸 원했다면, 드래곤 로드가 만일 당 신과 같은 소망을 가졌다면!" "그렇지. 부끄럽게도 그걸 파악하지 못했어." "핫하하하! 핸드레이크여, 핸드레이크여!" 핸드레이크는 무릎이 꺾이는 느낌을 받았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몸을 얹어두는 것은 지금껏 그가 겪어야했던 그 어떤 마력 수련보다도 더 어 려운 것처럼 느껴졌다. 대미궁이 그의 어깨 위로 전부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현기증을 느끼며 위를 바라보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 다. "자네 소원대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내가 왜 여덟 종족을 신으로 이 끌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이 불합리성의 판테온으로 남겨지기를 바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핫하하하핫!" "드, 드, 드래곤 로드여…" 드래곤 로드는 이제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하는군, 핸드레이크여. 그렇다면 뭔가? 내가 나의 지배를 받는 것 들의 영원한 자기모순을 즐기는 지배자였다는 말인가? 그건 자네들 인간 들에게나 어울리는 말 아닌가? 그러고보니 내 수집한 책들 중에 그런 말 이 있더군. 우민 정치라고 하던가. 하하하. 정말 너무하는군! 기르는 개 도 영리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법인데, 내가 왜?" 핸드레이크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잠시 후 드래곤 로 드는 보다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비록 지혜로우나 자네 종족의 시야를 벗어날 정도는 되지 못했 네. 아니, 자네가 지혜로와지기 위해 쉼없이 받아들였던 자네 종족의 시 각들이 자네를 그렇게 이끈 것일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자네는 자네 종 족의 시각에서 날 바라보는 우를 범했네. 아마도… 나를 그런 존재로 보 았나 보군. 모든 종족들을 신으로 이끌 수 있는 별을 자신의 지배욕의 충족을 위해서만 사용한다고. 아마 그랬을 테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이해하네. 자넨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 간단한 행동을 못한 것에 불과하네. 날 이해하기 위해 핸드레이크 자네를 보았 다면 이런 희극은 없었을 테지. 그것은 자네 종족들에게는 항상 어려운 일인 듯하더군. 자네 종족들은 타인 속에 들어가려고만 애쓰더군. 만물 을 자기처럼 변화시키면 세상이 이해하기 쉬운 것이 될 거라고 믿는 모 양이더군.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역시…" "부정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하하하." 털썩. 핸드레이크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레이크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미안하군." 핸드레이크는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이제 아무런 증오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루트에리노의 배신으로 희망을 걸어볼 기회를 잃었겠지. 하지만 그 희망은 아직껏 자네를 지탱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이젠 그 희망 자 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군. 안된 일이야." "화려한… 복수셨습니다. 드래곤 로드여." "그런 셈이로군. 이것이 어느 정도의 복수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네. 어 느 정도 자네 종족을 이해하고 있으니." "예… 당신은 나의 전체를 부정해버리셨고, 그것을… 나로 하여금 받아 들이게 하셨으니까." 드래곤 로드도, 할슈타일공도, 그리고 핸드레이크도 모두 입을 다물었 다. 대미궁은 무거운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사나이 의 뼈저린 좌절이, 한 드래곤의 원하지 않았지만 완성된 복수가, 그리고 또 다른 사나이의 관조가 있었다. "그랬군요…" 난 휘둘리는 머리를 붙잡으려는 듯이 이마 양쪽을 붙잡으며 말했다. 조 용히 앉아있던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조금 더듬 거리더니 곧 부젓가락을 쥐었다. 핸드레이크는 벽난로를 뒤적거려 장작들을 뒤집었다. 불티가 어지러이 날렸지만 핸드레이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부젓가락을 난로 옆에 세워두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드래곤 로드로서도 여덟 별로부터 그 이상의 힘을 끌어낼 수는 없었던 게야.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지배에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 네. 그것이 여덟 별의 한계는 아니겠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 이 우리 세계를 무시한 완전을 꿈꿀 수 없는 바에야 어떻게 그 별들로부 터 신에게의 길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예. 그랬던 것이군요. 그래서 당신은 클래스 10의 마법을…"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확 굳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입천장 쯤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이 세계의 모습 자체가 우리를 신의 길에서 가로막고 있었네. 그래서 나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서 내 이해의 폭을 넓혀볼까 생각했지. 자못 거창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지." "…실패하셨죠?" "실패했어. 다레니안이 말해주던가." "예." "그건 완전성에의 도전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었네. 그것을 깨닫 는 것은 훨씬 간단했었어. 시오네가 그것을 알려주었지." "시오네가…?"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괴로움에 떨렸다. 그가 시오네의 이름을 말할 때 는 300년의 시간을 통해 울려온 메아리가 함께 했다. "그래. 나는 두 번이나 다른 종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지. 내 곁에 두고 그 자라나는 모습을, 그 지성이 발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던 시오네의 욕망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래서 이런 모습이 될 수밖 에 없었고, 또한 클래스 10의 마법은 허튼소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네. 세계 창조? 미치광이의 광언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볼 줄 모르 면서 남을 자기라고 착각하듯이! 이 세계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또다 른 세상을 꿈꾸는 자아도취의 몽상가!" 300년의 울분, 300년의 좌절이 올올이 펼쳐졌다. 그래서 나는 감히 아 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턱없이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어트렸다. "…그럼 드래곤 라자는 무엇입니까?" 핸드레이크는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자네의 음험한 추측과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일세.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목적 그대로의 것이야." "인간과 드래곤의 교류요?" "그래. 난 나의 잘못에서 배울 수 있었지. 현명한 드래곤들은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네. 그리고 드래곤들은 우리를 그들의 거 울로 삼고. 그것은… 의지할 데 없이 버려진 고아들이 서로를 부둥켜안 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네." "신이 되지 않은 드래곤과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이? 대지에 버려진 종족 들끼리?" 드래곤의 신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쪽의 보살핌 을 받는다. 드래곤과 인간은 극단적인 반대항들이다. 그 거리만큼의 애 정이 우리를 연결지었고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부르게 만들었겠지. 핸드 레이크는 이를 사려물면서 인정했다. "비슷해. 나와 드래곤 로드는 우리 양 종족의 아픔을 뼛속까지 느꼈고 그래서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구축할 수 있었네. 우리들은 둘 다 신이 될 수 없었지. 12인의 다리를 아는가?" "…당신이 만드셨죠?" "그래. 드래곤 라자는 그것과 비슷해. 우리와 드래곤 사이의 교류의 물 꼬를 강제로 열어놓은 것이었네. 그리고 드래곤 라자를 만들기 위해 드 래곤의 별이 동원되었네." "아, 그래서…" "자네는 보았겠지. 크라드메서와 넥슨의 계약에서." "예." "드래곤 로드와 나는 할슈타일공의 위치에 주목했던 것일세. 그래서 드 래곤 라자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게지. 드래곤의 별을 이용하여 모든 드래곤을 운명에 예속시켰네. 그들이 드래곤 라자를 통해서 반드시 인간과 교류해야 되는 운명에 빠지게 한 거지."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걸세. 이후 나는 이름을 바꾸고 행동하면서 모든 종족들이 서로를 돌아보게끔 하려고 애써왔네. 인간이 신이 될 수야 없겠지만 보 다 나아질 수는 있겠지. 적어도 다른 종족들을 바라볼 줄 알게 되면." "당신이 드래곤 로드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오해했던 것…" "맞았어. 나는 다른 인간들이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를 원 했던 걸세. 하이시커? 하하. 나는 높이 추구하는 자였지. 12인의 다리를 만든 것, 시오네를 받아들인 것, 크라드메서와 까뮤의 계약, 모두 마찬 가지야. 그 외에도 자네는 모르는 꽤 많은 일들을 했었네. 내 딴에는 타 인을 이해해보겠답시고 꽤나 여러 가지로 설쳐대었다네. 하지만 이미 말 했듯 나는 내 곁의 시오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지." 일생에 걸쳐 좌절만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수 배나 되는 일생을 살아 오면서 좌절만을 겪어야 했던 마법사가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 아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눈 앞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휴리 첼 가문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그 까마득한 조상인 핸드레이 크 휴리첼도, 그리고 넥슨 휴리첼도, 까뮤 휴리첼도. 그리고, 핸드레이 크는 그의 마지막 좌절을 아직 듣지 못했다. "그래서… 에델린의 경우에는 겁부터 집어먹었던 거야. 말을 할 수 있 게 만든 다음 곧장 그랜드스톰에 맡겨버렸지. 그 애는 차라리 뻔뻔스럽 게 신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었지. 아니, 그걸 간절히 바랐다고도 할 수 있겠군. 어버이가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껴보려고드는 것처럼. 시오 네…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버지 곁에서 자라난 시오네의 경우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것일세. 시오네의 행동은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아이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지. 그 애에겐 타인을 자신으로 만들 권능이 있으니까. 시오네, 그 아이는 인간 인 핸드레이크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나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이해하려 고 들었으니까. 하하하." "핸드레이크…" "참으로 기박할 정도로 실패뿐인 인생이란 말일세… 하… 하하하… 그 리고 드래곤 라자마저도…" 드래곤 라자마저도!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드래곤 라자마저도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소박한 이해와 상호발전이겠지. 모든 종족을 신으로 이끈다는 거창한 계획에 비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소 박한가. 하지만 인간은 드래곤 라자를 드래곤 지배의 도구로 변질시켰 다. 아니, 그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까. 시오네처럼, 모든 것을 자기화시켜서 이해하는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드래곤마저도 인간화시키는 것일까? "크라드메서는 어떻게 되었지?" 핸드레이크는 이제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입술을 깨문 채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후치. 내가 까뮤 휴리첼을 끌고가서 크라드메서 에게 라자의 계약을 강제했었네. 크라드메서는 말이야. 지금이나 그 때 나 항상 자유로운 드래곤으로 남기를 원했었지. 하지만 나는 그의 중용 과 균형, 그의 자기 절제가 탐났네. 그래서, 그래서 인간들이 그의 중용 과 균형, 그의 관조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그의 선을 배우게 되기를 원했 던 거야. 그래서 크림슨 드래곤, 선악의 균형을 지키는 크림슨 드래곤에 게 찾아가 억지로 까뮤와 계약을 맺게했네. 말해주게. 크림슨 드래곤 크 라드메서는 어떻게 된 거지?"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은 이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턱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며 꽉 막힌 목을 통해 애써 침을 삼켰다. "크라드메서는…"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4. 레니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러나 레니의 입은 거기서 멈췄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조금도 조바심이 담기지 않 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았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혀끝이 타들어가 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골레이드님을 선택하면… 크라드메서님은 확실히 죽는 거죠?" 지골레이드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간단한 동작이 그에 게는 너무나 힘겨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레니는 지골레이드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드메서님이 원하는 것이에요." 뭐야? 크라드메서가 원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레니는 질문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지골레이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당신의 라자가 되겠어요." "좋아." 다시 무한의 어둠과 공간 상실, 그리고 기묘한 빛들의 혼란이 있은 후 에, 내가 정신을 차려보자 지골레이드는 이미 드래곤의 모습올 바뀌어 분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고 레니는 극도로 하얀 얼굴로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제레인트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날아가는 지골레이드를 향해 기도문 을 외쳤다. 제레인트의 손에서 쏘아져나간 빛은 날아가는 지골레이드를 통째로 물들였다. 장관이었다. 제레인트의 작은 몸에서 나온 빛이 분지 전체를 뒤덮을 듯 거대하게 날아가는 지골레이드를 뒤쫓고 있었던 것이 었다. 제레인트의 몸은 이제 미친듯이 경련하고 있었고 그의 관자놀이에 는 굵은 혈관이 솟아올랐다. "이야야야야야야!" 감히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제레인트는 맨손으로 무너지는 탑을 막 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 했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한다는 말이 이토록이나 허황된 말이었던가? 드래 곤, 저 마법의 극을 달리는 자가 어떻게 성직자에게…" 어라? 그러고보니 그렇네? 드래곤은 분명히 마나를 다루는 존재니까 신 력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여야 되는 거 아냐? 그 때 제레인트의 옆에 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에델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프나 이델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절 보세요." "예?" "전 마법에 의해 말을 하게 된 트롤입니다. 그리고 전 지금 신의 지팡 이 노릇을 하고 있지요." 아이고 맙소사! 그러고보니 에델린은 마력과 신력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잖아! 우리들 은 모두 어이없는 얼굴로 에델린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이를 악물 면서 물어보았다. "그럼,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오. 인간의 경우엔… 그 양자를 하나로 모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예?" "신력은 높이 올라 귀의하고 마력은 넓게 퍼져 지배하니까요." 에델린의 모호한 대답을 들으며 아프나이델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는 애타는 얼굴로 뭔가를 질문하려 했지만 그 때 지골레이드의 포효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아!" 그리고 그 때 크라드메서는 마지막 환영을 물어뜯고 있었다. 크라드메 서는 그 와중에서도 침착했다. 그는 물어뜯고 있던 환영을 통째로 휘둘 러 날아오는 지골레이드를 향해 집어던졌다. 산덩어리만한 환영은 허공 에서 물방울로 바뀌어 비산했으며 지골레이드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공격목표를 놓쳤다. 그 짧은 틈을 타서 크라드메서는 날아올랐다. "크롸라라라!" 크라드메서의 비상은 날아오른다기보다는 강하게 쏘아져올라가는 듯했 다. 맙소사, 저렇게 날아서 날개 부러지지 않나? 크라드메서는 그대로 물방울들을 뚫으면서 지골레이드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러나 지골레이드 는 아슬아슬하게 크라드메서의 공격을 피하면서 더 높이 날아오르기 시 작했다. 마침내 지골레이드와 제레인트를 잇던 빛의 끈은 끊어졌고 제레 인트는 마치 말에게 걷어차인 사람마냥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오우우웃!" "제레인트!"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제레인트에게 달려갔지만 그의 외침 소리가 들려 온 순간 우리들은 제레인트에 대해 완전히 무시해버리기로 묵시적으로 약속해버렸다. "와우, 여러분이증인입니다! 꼭 말해줘야 돼요! 내가 드래곤을 치료했 다고!" 크라드메서는 허공에서 지골레이드를 놓치고는 비틀거렸다. 그는 그대 로 분지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위로 치솟아올랐 다. 곧 지골레이드와 크라드메서는 다시 구름 위로 사라져버렸다. 그 광 경을 보던 샌슨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약해졌어, 확실히! 환영들과의 싸움 때문에 많이 지친 거야!" "그래? 그런가?" "예, 카알. 확실히 몸짓이 다릅니다! 이제 잘만 하면… 후치! 길시언의 스피어들을 받아!" "뭐야? 오, 맙소사, 그 말 취소해줘!" 내 고함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길시언은 등에 지고 있던 스피 어 뭉치를 풀어 내 앞에 집어던졌다.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그 눈매를 본 순간 난 고개를 끄덕이며 스피어들을 받아들었다. 샌슨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스피어들을 풀어헤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런 짓까지 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할 수 없 지. 지골레이드를 돕는다! 알았지, 후치?" 난 악에 받혀서 외쳤다.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꼭 말해줘야 돼요! 내가 드래곤에게 창질을 했다고! 오, 맙소사. 내가 미쳤다는 것이 이렇게 들키게 되기를 원하지 는 않았어!" "이 자식아. 그럼 나도 미쳤다는 말이잖아." 운차이는 피식거리며 스피어를 들어올렸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옆으 로 물러난 가운데 나와 샌슨, 그리고 운차이는 땅에 스피어를 꽂기 시작 했다. 그리고나서 우리들은 스피어를 하나씩 든 채 구름을 겨냥하여 섰 다. 세 명 다 나란히 스피어를 든 오른팔을 뒤로 당기고 왼팔을 앞으로 들 어올려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무서운 조화를 이루고 있 었다. 그리고 우리 옆에서는 이루릴과 아프나이델이 캐스팅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옆을 흘깃 돌아보자 입술을 꾹 다문 채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샌슨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이 잠시 내 눈을 사로잡았을 때 운차이가 외쳤다. "내려온다! 방향은 오른쪽! 날 따라 던져!" "이야아아아!" "하아아아아!" 운차이가 집어던진 스피어의 뒤를 따라 나와 샌슨의 스피어가, 그리고 무시무시한 스펠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른쪽 하늘에서 느닷없이 구름을 뚫고 나타난 크라드메서는 무수한 공격을 받으며 허공에 멈춰 비틀거렸 다. 스피어를 집어던진 우리들은 명중 여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재빨 리 주위에 꽂아두었던 다른 스피어들을 뽑아들어 마구잡이로 집어던졌 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이루릴과 아프나이델은 마법을 쏟아부었다. 허공에 뜬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마치 바람에 의해 찢어질 듯 나부끼는 깃발처럼 느껴지는 순간, 구름을 뚫고 지골레이드가 그 위로 덥쳐들었 다. "캬아아아아!" 그 순간, 나는 크라드메서의 눈을 보았다. 그 눈에서는 조금의 광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골레이드가 크라드메서의 목을 물어뜯을 때도, 샌슨 의 기괴한함성이 울려퍼졌을 때도, 그리고 레니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를 때도 나는 그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크라드메서니이이임!" 난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말했다. "…죽었어요. 자살이죠." "자…살?" "예. 카알은…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살이에요. 크, 크극. 아마 그로서는… 자 신이 자살한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한 행동임에 분명하지만…" "으… 으허허헉!" 핸드레이크는 죽음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박 고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핸드레이크의 비명 소리와 더불어 바깥의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어졌 다. 난 계속해서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예.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불사의 존재지 만, 또다른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친지의 죽음도, 애인의 죽음도… 드래곤은… 드래곤은 그럴 수 없었어요. 넥슨을… 그 파괴된 넥슨을 자신의 라자로… 자신의… 라자…로" 난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었다. 한참 호흡을 고르고나서야 남은 말을 다 뱉어낼 수 있었다. "세 번에 걸쳐 죽었던 넥슨을 자신의 라자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크라 드메서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겠지요. 까뮤의 죽음과 넥슨의 죽음 을 통해 두 번 죽었던 크라드메서, 아니, 영원의 숲에서 세 번이나 죽었 던 넥슨을 받아들였으니 크라드메서는 다섯 번이나 죽었던 것일까요? 결 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드래곤은 그걸 견딜 수 없었을 거 에요." "크라아아드… 메서! 으크흐흑!"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오열하는 핸드레이크를 보면서도 난 아무 런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눈을 너무 거칠게 비벼서 눈 언저리가 화끈 거린다. 벽난로에서 뿜어져오는 열기가 뜨거운 얼굴을 더욱 뜨겁게 만든 다. 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예. 그래요. 하지만 드래곤은 아니에요! 우리의 반대쪽 극단인 드래곤은 아니었다고요! 그들은 단수에요. 그들에게 드래 곤 라자를 맨 것은, 결국 그들의 독자성을 파괴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드래곤에게까지 우리들을 투영해버린 거죠! 배워? 우리가 드래곤에게 배 워요? 하하하! 그래요. 드래곤은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 요. 하지만 우리는 드래곤의 제자가 될 수 없었어요!"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엇! 으크흐흑!" 핸드레이크의 오열. 인간을 신으로 이끌 수도, 인간을 세계로 이끌 수 도 없었던 마법사의 오열이 날카로운 쇠붙이의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우 스스. 벽난로의 장작은 거센 불길에 쓰러졌다.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어 깨는 인간이라는 불길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군. 그런데 누가 내 눈 앞에 초를 켠 거야? 아니, 낮이 밝은 것이구나. 난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이런. 내가 바닥에 드러누워있었군. 아이고, 삭신이야. 몸을 일으키려 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여기가 어디지? 어라, 어디서 많이 보던 천장이다? 그리고 주위의 가구들도 왠지 눈에 익숙한 것들이로군? 여기 가 어느 여관이길래… 윽. 우리 집이다. 아이고 머리야.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바닥에 앉은 채 몸을 돌리다가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핸드레이크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머리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겨울의 낮은 햇살이 그의 은빛 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 의 주위 전체에 빛이 어려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그 림자로 물들어 어두웠다. 설마 밤새도록 저렇게 하고 있었던 것인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다리를 힘들게 움직여 일어났다. 똑바로 서는 순 간 머리가 울려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 때 핸드레이크는 말했다. "일어났느냐."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똑바로 섰다. "어, 자고계신 줄 알았어요. 설마 밤새도록 그렇게 앉아계셨어요?" 핸드레이크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마 치 손만 살아있는 것 같군. 이윽고 핸드레이크는 지팡이를 쥐고는 일어 났다. "시내로 나가보자꾸나. 후치. 난 줄곧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아침을 먹 었지. 같이 가서 식사하자구." "아, 예. 먼저 좀 씻고…" "그래라." 핸드레이크는 내가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는 동안 마당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우리집 마당에 사람처럼 생긴 나무가 났다고 여 겼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장을 뒤지다가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 고보니 몇 달 전의 기억이군. 아버지가 떠나시기 며칠 전 밤이었지. 아버지는 뭘 쓰시다가 장 위에 올려놓으셨지? 난 장 위를 더듬어보았다. 잠시 후 나는 장 위에서 먼지 를 뽀얗게 뒤집어쓴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치 보아라. 네가 발견한 이 문서는 내 유언장이다. 유언이랍시고 쓰기 는 쓰는데 별로 할 말도 없군.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제대 로 돌보아주지도 못한 채 이렇게 떠난 아버지를 용서해라. 그리고 네까짓게 용서 안하면 어쩔 거냐? 난 이미 죽었단 말 이다. 앞이 막막하고 워낙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그건 대수롭잖은 것이다. 별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보고 싶을 때 내 얼굴을 못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나누지 못한다는 것 뿐이지,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다. (짜식아. 죽 은 사람이 뭐 특별히 마음 바뀔 일이 있겠냐? 하하하.) 하지만 부탁이니 넌 빨리 날 잊어다오. 네 가슴 속에 남겨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죽은 자가 산 자 의 인생에 너무 간섭하는 거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를 죽지 못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날 조용 히 잊혀지게 해다오. 네가 내 추억을 부여잡고 있어봐야 네 감정만 피곤한 일이다. 어차피 죽는다. 조용히 받아들여라. 이왕이면 웃으며 날 질투해줬으면 더 좋겠구나. 이제서야 모 든 고통과 번민에서 영원히 자유로와진 네 아버지를 말이다. 하하하. 네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그 사실은 내가 죽었다고 해서 특별히 바뀔 것도 없다. 그러니 즐겁게 살아라. 그러면 나 역시 죽어서도 즐거워할 테니까. 안녕. 아이고 아버지… 난 아버지의 유언장을 부여잡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내 손에 잡힌 유언장이 부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충 준비를 마친 나는 핸드레이크의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말 을 건네기도 전에 핸드레이크는 발걸음을 뗐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 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핸드레이크는 나보다도 더 익숙한 걸음걸이로 숲 사이를 걸어갔다. 얼 마나 걸었을까? 핸드레이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무장은 왜 한 거냐?" "예?" "갑옷 소리에 검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까지 요란하구나. 고향에 돌아와 서 밥 먹으러 가는 길이지 않느냐?" 윽. 그러고보니 난 모험 다닐 동안 입었던 하드레더에 바스타드 소드까 지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손에는 OPG까지 끼고 있군. 난 멋적은 어조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냥 버릇이 돼서 그래요. 여행 다니는 동안 무장을 옆 에서 떼어놓지 않았거든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없으면 허전하네요." 핸드레이크는 빙긋 웃었다. 저 웃음은 뭐지? "애정은 속박인 게냐?" "머리 꼬리가 남아있어야 소고기인지 말고기인지 알죠." "별 말 아니다. 어서 가자꾸나." 그것 참. 별 말 아니라고 하니까 더욱 무슨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말 이 되는데 그래. 핸드레이크는 그저 웃을 뿐 더이상 다른 말을 할 기색 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내게 건네어진 과제인가 본데. 아무래도 어제의 핸드레이크가 아니다. 그렇다면 타이번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는데. 300년의 좌절의 아픔은 핸드레이크가 가져가고 이제 내 눈 앞에서 걸어가는 것은 타이번일 뿐인가? 희한한 일인걸. 산트렐라의 노래에서는 주당 처리 작업이 한창 중이었다. 해너 아주머 니는 익숙한 동작으로 주정뱅이들을 일으켜세우거나 물을 끼얹거나 더 독한 술을 건네어주거나 하면서 홀 가득 널브러진 주정뱅이들이 겨울 아 침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 있었다. 그 분주 한 작업 속에서도 해너 아주머니는 홀로 들어서는 나와 타이번을 향해 쾌활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아, 오늘은 후치도 함께 식사하는 건가요?" 타이번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꽤나 분주한 모양이군.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게나. 아 직 이른 시간이니까." 타이번은 홀 한 구석의 테이블에 좌정했고 나는 해너 아주머니를 도와 서 주정뱅이 처리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어젯밤의 그 광란스러운 파 티의 잔해들을 피해다니며 주정뱅이들을 일으키는 동안 나는 틈틈히 타 이번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타이번의얼굴은 평범할 뿐이었다. 정말 술집 한 구석에서 조용 히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노인네의 얼굴, 그러니까 평생 동안 계속해온 아침 식사라는 습관에 대한 약간의 지루함이 포함된 고요한 행복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타이번이 앉은 테이블에는 겨울 아침의 낮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주위를 떠도는 금빛 먼지들은 그의 평화스 러운 모습을 더욱 희미하고 더욱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타이번의 반응이 어떨 것인가 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지만 무반응일 것이라고는 상상하 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산트렐라의 노래에서의 아침 식사가 끝나고나서 나와 타이번은 다시 성 으로 들어갔다. 성내는 이미 분주했다. 아무르타트에게 가져다 줄 보석 이 도착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아무르타트가 있는 끝없는 계곡으로 출발해야 되기 때문이다. 성내를 뛰어다니는 경비대원들의 모습이라든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하멜 집사의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굴러 다니는 마차들의 수레바퀴 소리, 겨울철이라 마굿간으로 옮겨졌다가 방 금 끌려나와 기운이 넘치는 말들의 모습, 모두들 신나보이는군. 타이번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하멜 집사를 간신히 붙잡았다. "여, 집사님.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아, 예. 경비대원들의 차출은 이미 끝났고 성을 비우는 동안의 업무도 정리해두었습니다. 겨울철이라 별 업무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하하. 차 출된 경비대원들은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포함되었던 인원들을 주축으로 편성했지요. 경험이 충분한 사람들이니만큼…" 흥분한 하멜 집사는 끝도 없이 말을 계속하려 들었다. 타이번은 싱글거 리며 그의 설명을 들었고 나는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성의 안뜰, 즉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황량한 성이었나? 허, 이거 참. 내 눈이 높아진 모양이군.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벼라별 신기한 것을 다 봤더니 우리 성이 너무 황 량하게 보이는데. 헬턴트성의 모습은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친근함으로는 충분히 가릴 수 없는 옹색함이 있었다. 하긴, 영주 부재의 성이니 뭐 그 리 좋은 모습으로 있을 수 있을까. 응? 어라,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이 드 는걸? 그런데 그게 뭐지? 난 눈을 멍하니 뜬 채 다시 성의 곳곳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한 번 지나간 생각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짜증나네, 이거. 에이. 중요한 생각이면 다시 떠오르겠지, 뭐. 난 포기하고는 경비대원 들을 도와 짐 꾸리는 일을 거들었다. 아무르타트가 설마 포로들의 편의 까지 봐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만큼 그 포로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려면 꽤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겠지.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5. "나도 간다니까아안!" "안돼."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해!" "안돼." "와, 우화, 후아. 정말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할 줄은 몰랐어…" 제미니는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입을 짝 벌렸다. 그러나 제미니가 그 정도로 포기했다면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제미니 는 입술을 꼭 깨물면서 말했다. "모험인지 뭔지 떠나더니 귀까지 잘라먹고! 이번엔 모가지라도 잘라먹 고 돌아올지 어떻게 알아? 안돼, 안돼. 절대로 혼자서는 못 보내!" 모가지가 어쨌다고? 계집애, 말버릇 하고는. 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서 썬더라이더의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원, 녀석. 키도 크 다. 머리 낮춰, 임마. 썬더라이더는 어깨가 높아서 재갈 물리는 것 뿐만 아니라 안장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이거야, 원. 뱃대끈 맬 때 편한 점은 있지만. 임마. 너도 낙타처럼 무릎을 턱 꿇을 줄 알면 편할 텐데. 하하하… 하… …불안하다! 왜 이렇게 고요한 거지? 난 입술을 꽉 깨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 해 애썼다. 하지만 너무너무 불안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썬더라이더 의 푸르릉거리는 소리뿐이다. 왠지 그 소리마저도 괴기스럽게 들리는데? 눈을 질끈 감고 버텨보려고 애썼지만 주위를 엄습하는 공포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도저히 더 참지 못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미…" "키야아아아!" "우와아아악!" 기괴무쌍한 포효(?)에 이어 눈 앞으로 제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돌 격해오는 순간 나는 엉겁결에 몸을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어 무엇 인가가 내 어깨를 짚으며 뛰어오르는 느낌.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을 때 는 이미 제미니는 썬더라이더에 올라타있었고 놀란 썬더라이더는 투레질 을 하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이힝힝힝!" "엄마야아아아!" 제미니는 자지러지면서 썬더라이더의 목에 매달렸지만 그것은 썬더라이 더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썬더라이더는 버둥거리면서 갈 팡질팡 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려! 제미니, 내리라고오! 이런, 아, 아냐! 멈춰! 내리지 말고 멈춰! 으아아, 엉덩이를 들지 마!" "살려줘! 후치야, 살려줘! 꺄아아악!" "고삐! 고삐를 잡아! 고삐를 잡으라고! 이 망할 계집애야, 그건 갈기잖 아! 그건 귀야! 고삐라고, 고삐이이! 제기랄, 아무 거나 꽉 붙잡아! 썬 더라이더 이 자식! 제미니를 떨어트리면 스테이크로 만들어버릴 거야아 아아!" "이힝힝힝힝!" 그리하여 아무르타트 교섭단 일행에는 헬턴트 영지 숲지기의 딸 제미니 스마인타그양이 포함되게 되었다. 아무르타트 교섭단이 출발한 것은 12월 20일, 화창한 겨울 아침이었다. 그리고 끝없는 계곡까지의 여정은 현재로서는 10일. 내가 썬더라이더를 타고 달리면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나 혼자서 그 많은 포로들을 인솔해서 돌아올 수야 없으므로 꽤 많은 인원들이 함께 출발하 게 되었다. 그래서 여정을 단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쩐지 시간이 빡빡 하군. 아무르타트가 이틀이나 사흘 정도 기다려줄 아량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니, 기한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려줄 참을성만이라도 가지고 있으 면 감지덕지해야 되나? 제길. 게다가 나에겐 시간에 대한 걱정 뿐만 아니라 다른 걱정거리도 있었다. "아, 참새다." "뭐라고? 에이이익! 받아라, 일자무시이익!" 우리 일행 앞으로 멋모르고 날아내려온 참새는 내 고함 소리에 기겁하 며 포로롱 날아올랐다. 바스타드를 들고 헉헉대는 나를 향해 타이번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참새가 그토록이나 위험한 생물이었는지는 몰랐는데." "호, 혹시 식인 참새 아닐까요?" "…후치. 제발 좀 진정해라. 제미니는 침착한데 네가 왜 그리 긴장해있 는 거냐." "우힛히히히!" 터커의 괴이한 웃음 소리를 들으며 난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제 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무정하게도 까르르 웃어대었다. 으윽. 내 가 누구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데. 하긴… 그래. 타이번의 말이 맞아. 아무리 제미니가 우리 일행에 섞여있다지만 내가 왜 이렇게 바보처럼 긴장해있는 거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타이번도 있고 터커가 인솔하는 경비대원들도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은 없을 거야. "아, 토끼다." "우아아아! 제미니, 내 뒤로 숨어! 기름 젓기이이!" 경비대원들은 이제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고 터커는 제대로 웃지도 못했 다. 너무 웃어서 현기증을 느끼는 모양인지 터커는 마차 위에 뛰어올라 짐더미 위에 누워버렸다. "우킬킬킬! 그럼 저건 식인 토끼인가 보지?" 난 맥빠진 동작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다시 꽂아넣으며 도망치는 토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차 위의 제미니는 깔깔거리며 달아나는 토끼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얀색이네. 겨울이라 털갈이를 마친 모양이야. 예뻐라." 아, 그렇군. 그러고보니 토끼든 뇌조든 털갈이를 마칠 시기인데. 하지 만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아서 잿빛 땅 위로 달려가는 토끼의 모습은 선명 하게 보였다. 하멜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첫눈이 늦는데." "다행이죠. 억류되었던 사람들 데리고 올 때 편할 테니까." "으음. 그러고보니 그것은 참 다행이로구나. 난 겨울 날씨치고는 너무 따스해서 내년 농사 걱정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하멜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정말 감개가 무량하구나." "예?" 하멜 집사는 주위의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야. 난 평생 이 영지 내에서만 살아왔단다. 철들면서부터 아버님 을 도와서 성의 일을 돌보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성내의 일뿐만 아니라 영지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단다. 하하. 네가 보기엔 우습겠지만 나로선 이건 일생일대의 모험이란다. 어쩐지 짜 릿한 휴가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구나. 물론 휴가치고는 별로 좋은 내용 의 여정이 못되지만 말이야." "아하. 그러시군요." 음. 그렇기도 하겠네. 하긴, 내가 별난 거지. 이 정도 나이의 꼬마가 그토록이나 많은 모험을 치러내었다는 것이 말이야. 거기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난 뒤를 주욱 둘아보았다. 터커가 지휘하는 경비대원들이 30 여명, 그리고 말과 노새들이 잔뜩이 다. 포로들을 태울 동물들이다. 그리고 다시 그 뒤로 열 대의 마차가 있 었다. 마차들은 모두 보급 마차로서 아무르타트에게 붙잡혀있던 포로들 을 수송하기 위한 보급 물자가 가득 실려 있었다. 돌아올 때 쯤이면 마 차가 비기 시작할 테니 포로들을 실을 수도 있겠지. 첫번째 마차의 짐더 미 위에는 타이번과 제미니가 걸터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웃다가 지친 터커가 드러누워 있었다. 단촐한 일행이야. 어차피 이 이상 인원들을 차 출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영지의 사정이긴 하지만. 끝없는 계곡으로 향하는 동안 타이번의 모습은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아니, 제미니가 관심 밖일 경우에 한해서만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말 해야 정확하겠군. 어쨌든 제미니가 더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동 안 나는 타이번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고 타이번은 그런 내 시선을 느 끼는 것인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태도로 있었 다. 떠가는 구름을 보며 흥얼거리는 타이번의 모습이라든지 옆을 걸어가는 경비대원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그의 모습들에서는 어떠한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블랙 드래곤을 찾아가는 일행의 일원이라고 보기엔 너무 태평해보인다는 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300년 동안 그 누구도 범 접하지 못할 위명을 쌓았던 마법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점도 나에게 는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다른 경비대원들이라든지 하멜 집사, 그리고 제미니의 경우에는 그의 대범함을 존경하는 정도로 그의 태평함을 이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석양이 내릴 때, 혹은 아침에 일어나 짙은 안개 속을 걸을 때 타이번의 모습은 나에게 기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서쪽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타이번은 항상 불 같이 타오르는 석양을 정면으로 받게 되었고 그럴 때의 그의 얼굴은 퇴락한 건물, 거미줄마저 도 옹색하게 걸려있는 퇴락한 신전의 쓸쓸한 전경처럼 보여 나를 안쓰럽 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차들의 덜그럭거리는 바퀴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몽환적인 아침 안개 속에서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타이번을 바라볼 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외면해야 되었다. 타이번은 자신을 바라보고,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들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오가는 말이라고는 일상적인 말 뿐이었다. 모닥 불을 켜놓고 모여드는 밤의 모임에서도 타이번이 먼저 잠들거나 내가 먼 저 잠드는 일은 있어도 우리 둘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타이번씨는?" "잠드셨어요." "아, 그래?" 하지만 일행 중 최고연장자와 최고연소자 사이에 오가는 이 기이한 침 묵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에는 그 색깔이 너무 희미했다. 주위는 온통 짙은 색뿐이었으니까. 웃고 떠들지만 천천히 바라보면 느낄 수 있 는 일행들의 불안함, 짙어만가는 겨울의 향취 때문에 황량함이 물씬 배 어나오는 주위의 정경, 모두 짙은 빛깔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짙게 우리들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아무르타트의 공포의 색깔이었다. "아무르타트의 별명 중에 석양의 감시자라는 말이 있지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하멜 집사의 질문에 타이번은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했다. "아마도 모든 것에는 멸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자라는 뜻이겠지요. 공정 함도, 친절도, 사랑도, 관심도 질릴 때가 있는 법이지. 하지만 불균형, 불평등, 증오, 오해도… 역시 끝은 있는 법 아니겠소. 아무르타트의 이 름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영원을 맹세할 수 없겠지. 영원한 사랑, 영원한 충성… 모든 것은 부질없다고 말해버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아무르타트 겠지요." "우울하군요." 새로운 아침마다 더욱 매서워지는 겨울의 추위는 일행들을 의기소침하 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멜 집사는 성안에 있을 때의 그의 모습을 잊어버 릴 정도로 쾌활했으며 그 점에서는 제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은… 나이도 많이 다르고 사고도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이 여정의 불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닮았던 것이다. 하멜 집사의 경우에는 비로소 영주님을 구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평 생 처음으로 영지의 바깥에 나가는 데서 오는 흥분 때문에 아직 불안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미니는 여행의 위험이라든지 영지 바깥 의 공포 등에 대해서는 모호한 의식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미니의 곁에 있는 경비대원들의 모습이라든지 나의 모습 같은 것들은 그녀에게 모호 한 공포보다는 훨씬 강력한 친숙함, 그리고 안도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 래서 제미니도 불안을 몰랐다. "꺄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 "뭐, 뭐야? 이런! 제미니? 아, 알았어." 얼굴이 벌겋게 된 내가 중얼거리며 물러나자 숲 속에서 옷을 갈아입던 제미니는 더욱 뽀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가지마! 무섭단 말이야아아!" 경비대원들의 요란한 웃음소리. 저건 불안이 아니라 투정이지. 으으윽. 어쨌든 일행 중에 쾌활한 사람이 둘이나 있다 보니 전체 일행들의 발걸 음도 퍽 가벼웠다. 몬스터나 여행자 하나도 만나지 못하는 겨울 여행은 그렇게 계속되어 마침내 아흐레째의 하루도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르타 트는 그 때까지도 아무런 움직임, 어떤 기별도 보내어오지 않았다. 일행 들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있었지만 아흐레 동안 계속된 지루함 때문에 그 긴장감도 그다지 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어코 도착했다 는 안도감 때문에 차라리 즐겁게 아흐레째의 야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일은 드디어 끝없는 계곡에 들어서게 된다. "무덤이라고요?" "그래. 아무리 봐도 무덤인데. 이상한 일이군." 터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 정말 이상한걸? "여기는 인가하고는 무지무지 떨어진 곳인데… 누가 무덤을 썼을까요? 모험자들이라도 이 근방에는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데."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것 참. 끝없는 계곡에서 무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뼈다귀라면 이해가 가지만 무덤이라니." 척후조로서 일행보다 앞서 달려온 나와 터커, 그리고 몇 명의 경비대원 들은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끝없는 계곡 입구를 관찰하다가 눈에 잘 뜨 이는 자리에 만들어진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게 정말 무덤 인가? 너무 멀어서 뭔지 잘 구별도 안되는데 말이야. 게다가 아침 나절 이라 군데군데서 피어오르는 안개들 때문에 더욱 집중하여 보기가 어려 웠다. 그 때 다른 경비대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어이, 터커. 저기." 나와 터커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계곡 안쪽 가득히 피어있는 안개들 의 흐름 사이 사이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처럼 생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모두 헐벗은 계절이라 파악할 수 있기는 했지만 가득 흐르는 안개 때문에 인간인지 오크인지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터커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라니? 끝없는 계곡에 무슨 사람?"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더욱 해괴한 목소리를 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 무덤에 참배하려는 것인가? 사람 맞나 보네?" 사람처럼 보이는 그 반점은 분명한 걸음걸이로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으로 보 아… "어?" "왜 그래, 후치?" "저 걷는 모습이 왠지 익숙한데요." 터커는 얼떨떨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 다. "나도 익숙하군. 분명히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민 다음에는 반드시 오 른쪽 다리를 내미는데. 왼쪽 다리를 두 번 내밀거나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걸음마는 확실하게 익힌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어." "다음부터 농담을 말할 때는 '이제부터 농담을 말하겠습니다.' 라고 말 하고나서 할께요. 지금은 농담이 아니라고요." "그래? 하지만 뭐 특별히 이상한 걸음걸이도 아닌데…" "어어어!" 다음 순간 나는 우리들이 숨어있던 바위 무더기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비대원들은 기겁하면서 날 말리려고 들었지만 이미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곧 우유빛 안개가 거침없이 나를 휘감아돌았다. 무덤까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무덤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모습 도 순식간에 커졌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도 순식간에 커졌다. 그는 믿 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난 제자리에 멈춰선 채 무덤을 가운데 두고서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 라보았다. 그 역시 얼빠진 얼굴로 날 마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 당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 아 닙니까?" "그러시는 어르신께서는 혹시 저 같이 멋진 사나이를 만들어내어 대륙 을 구하신 분 아니십니… 악! 왜 때려요?" "대륙을 구해?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구할 생각을 한 모양이군. 그것만 으로도 퍽 기특하고 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너무 상심말거라, 아들아."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될 일인데 말이죠. 지금 아버지의 모습에 선 어떤 급박한 위기감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 모르세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필설로 형언못할 고생을 해온 제가 바보가 되는 느낌이라고요." "오오오, 더욱 자랑스럽구나! 그걸 인정하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말이 야." "그거?" "바보가 스스로를 바보라고 인정하는 것." "아버지이이!" 나와 아버지가 이런 너무나 감동적으로 해괴망측한 상봉을 하는 동안 터커와 다른 경비대원들도 안개를 헤치며 우리 가까이로 걸어왔다. 그 동안 나와 아버지는 서로 손을 맞잡고 세상에서 보기드문 진귀한 춤을 추어대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터커는 웃음을 간신히 참 으면서 힘들게 말했다. "이, 이, 이거 말씀입니다. 네드발씨." 무덤 앞에서 복잡한 스텝을 구사하고 있던 나와 아버지는 그제서야 서 로 떨어졌다. "오오, 자네도 왔는가, 터커군?" 아버지는 정말 품위가 뚝뚝 떨어지는 태도로 말했다. 비록 그 옷차림은 집 떠날 때 입고 게셨던 옷 그대로라 걸레짝이나 다름없었고 좀 야위어 진 얼굴도 세수를 제대로 못하셨는지 엉망이었지만. 터커는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예, 예. 아무르타트에게 억류되었던 포로들을 돌려받기 위해 온 것입 니다." "아, 그래?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데리고 왔는가?" "예? 아, 글쎄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희들이 후치의 뒤를 따라왔다고 해야 될 겁니다. 후치는 영지 바깥으로 달려나가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 석을 구했으며 여기까지 우리들을 인도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두 손 으로 내 볼을 움켜쥐며 앞으로 확 끌어당기셨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좌 우로 흔드시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왜 터커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부탁한 거냐." "아버지. 저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 눈꼽만큼도 들지 않으시는 거에요?" "정말인 모양이군?" 아버지는 확실히 눈치가 빠르시다. 내가 누구 아들이야? 아버지는 고개 를 심하게 가로젓더니 말했다. "아무르타트가 말한 기막힌 손님이라는 것이 바로 너구나. 정말 기막히 군." "예?" 아버지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선택되었군. 그것 참. 기막힌데." "저도 함께 기막혀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버지." 다른 경비대원들도 모두 우리 주위로 늘어서서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 다. 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흐음. 아무르타트는 여러분들을 마중하라고 날 내려보낸 거요. 여기까 지 내려오면서도 왜 내가 선택되었는지 의문스러웠거든? 그런데 이젠 알 겠군." "나… 때문에요?" "그런 것 같다.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데." 이거야, 원! 그럼 아무르타트는 우리들이 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행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어떻게 된 거 지? 마법인가? 잠시 후 뒤에 따라오던 일행들도 모두 도착했고 아버지는 우리 인원들 의 수를 보면서 크게 감탄했다. 그리고 제미니는 우리 아버지를 보자마 자 달려오다가 땅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미니는 무릎의 상처에 도 굴하지 않고 한쪽 다리를 든 채 깡총깡총 달려왔다. "후치 아버님!" "어이구, 맙소사! 이게 누구야? 제미니 아냐? 너까지 온 거냐?" 아버지는 두 손을 바지에 닦고는 제미니의 손을 잡아주려 하셨지만 제 미니는 눈물이 글썽해져서는 아버지에게 와락 매달렸다. "와아아! 기뻐요. 무사하신 거 보니까 정말 기뻐요!" 아버지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며 제미니의 어깨를 토닥이셨다. "허허, 그래. 고맙구나. 후치가 그 동안 말썽 많이 피우지 않았냐?" 그리고 잠시 후, 제미니가 아버지를 풀어주자마자 하멜 집사가 곧장 아 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허리도 꽤 중후하게 떨렸다. "네드발씨! 네드발씨 아니오! 반갑소. 살아있었구려!" "예. 포로로 잡혀있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하멜 집사에게 붙잡혀 휘둘리면서 간신히 말했다. 하멜 집사 는 아버지를 풀어주며 불안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 영주님은 어떻게 되시었소? 무사하시오? 혹시 이 무덤이 영주님 의…" 하멜 집사는 불안한 눈으로 무덤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웃으 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영주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사령관 휴리첼 백작도 무 사히 잘 계십니다. 뭐 고블린들에게 붙잡혀 있는 생활이 그렇게 유쾌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육체적으로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더군요." "아아, 다행이군요! 다행입니다! 아… 그렇다면 이 무덤은 뭡니까? 그 리고 네드발씨는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거죠?" "이 무덤은…" 아버지는 다시 무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무덤 맞군. 꽤 작고 볼품없는 무덤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 셨다. "이건 그 왜 캇셀프라임, 그 화이트 드래곤의 드래곤 라자였던 소년의 무덤입니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6. 아버지는 말씀을 끝내시고는 곧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내가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면서 무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디트… 리히! 디트리히 할슈타일!" "어라? 네가 어떻게 그 소년의 이름을 아느냐?" 아버지는 의아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난 착잡한 얼굴로 무덤을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타이번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타이번의 속마음을 짐작해보는 것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번에 들으시면 틀림없이 중노동이 되실 길다란 이야기가 있어요. 그 런데 이게… 그 디트리히의 무덤이라고요?" "그래." "그러면… 그 때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임이 싸우는 도중에 죽은 건가 요?" 아버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애도 우리와 같이 포로가 되었단다. 하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이렇게 되었지." "아. 드래곤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못 버티고 죽은 것인가 보군 요." 아버지는 이제 경악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아, 미안합니다. 내 아들놈과 워낙 닮아서 그만…" "저 후치 맞으니까 그만하세요." "내가 장 위에 올려놓은 게 뭐냐?" "유언장 정말 멋지게 쓰셨더군요." "그래? 이거 정말 놀랍군. 네가 어떻게 짐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짐작이 맞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 사이에 누군가가 죽게 되면 남아있 는 한쪽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고 하더라." 문득 아버지의 눈에 따스한 눈빛이 지나갔다. 그래. 그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내가 타격을 입을까봐 남겨두신 그 유언장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사령관께서 그렇게 말해주더구나. 드래곤이라면 미칠 것이고 사람이라 면 못견디고 죽어버리는 법이라고 설명해주더군. 그래서 디트리히는 오 래 못버티고 죽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몇이서 여기에 묻었지." "아. 그랬군요." 아, 사령관… 까뮤 휴리첼의 형이자 넥슨의 아버지인 로넨 휴리첼 백 작. 이런! 그러고보니 난 넥슨 휴리첼의 사망 소식을 그 아버지에게 어 떻게 전해야 될지에 대해 생각해두지 못했군. 이 일을 어찌한다? 그냥 카알에게 맡겨버릴까? 그 때 나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게속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 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하멜 집사가 기어코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런데 네드발씨!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냔 말입니다!" "예? 예? 아, 예. 하하하. 전 아무르타트의 명령을 받아 여러분들을 마 중하러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을 이 안쪽까지 안내할 겁니다." "아무르타트에게요?" 내 질문은 아버지를 크게 웃게 만들었다. 그것 참. 아무리 봐도 몇 달 동안 드래곤의 포로로 잡혀있었던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별로 나빠지 지 않은 혈색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서는 정신적인 여유 같 은 것이 느껴졌다. 미소띤 얼굴로 나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확실히 그 랬다. "아들아. 너구리도 자기 굴의 위치는 숨겨두는 법이다. 드래곤이 자기 의 레어를 함부로 공개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안내할 곳은 고블 린들이 우리를 가두어둔 장소이지 아무르타트의 레어가 아니란다." "아, 그렇군요. 그럼 어서 올라가지요." 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여유는 우리 모두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들은 위험한 장소에서 반가운 길앞잡이, 아니 그것보다는 든든한 길 앞잡이를 만난 기분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흐음. 그 분이 17년 동안 같은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 버지를 뭔가 전설적인 길앞잡이, 선도자로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참 기이하군. 그 때 제미니가 갑자기 내 귀에 대고 말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저, 후치야?" "이크! 아이고 깜짝이야. 그런데 왜?" "네 아버지, 좀 이상하다?" 제미니는 턱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 했다. 흐음. 그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느끼기엔 어떤 것이 이상한지 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난 기대감을 가지고 제미니를 바라보 았다. "뭐가 이상한데?" "왠지 자신만만해 보이시고… 음. 네 아버님은 원래 그러셨지만 말이 야.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조심하라든가 내가 안내할 테니 걱정하지 말 라든가, 뭐 그런 말씀도 안하시네? 여긴 아무런 위험도 없는 곳인 것처 럼 행동하셔. 여기는 아무르타트의 집인데도 말이야." 난 잠시 놀라움을 담은 시선으로 제미니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제미니는 발로 날 걷어차려다가 치마를 완전히 뒤집을 뻔하고는 기겁했다. "그 시 선 뭐니! 어, 어머, 어머나!" 다행히도 제미니는 급히 치마를 쓸어내려 낯뜨거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제미니를 향해 웃어준 다음 다시 앞에 있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 다.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길시언? 내 앞에서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아버지의 등에서 길시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설마, 아버지가? 말도 안돼. 아버지는, 어, 물론 내게는 소중한 분이시지만 솔직히 17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온 나에게 위대함을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은 아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관두자. 그냥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서 그런 걸 거야. 난 고개를 가로젓 고는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붙잡아 끌고왔고 아버지는 썬더라이더를 보시 고는 크게 놀라셨다. "허어. 이거 굉장한 말이구나?" 나는 웃으며 썬더라이더에 오른 다음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제 뒤에 타세요." "설마… 이 말 네 거냐?" "예. 선물 받았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흔드시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도저히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도대체 누가 너 에게 이런 말을 선물했다는 거냐? 아무래도 네게 들을 이야기가 꽤 많겠 구나. 음. 그건 천천히 듣도록 하자." 아버지는 위태로운 몸짓으로 썬더라이더에 오르셨다. 그리고는 곧 쾌활 하게 말씀하셨다. "자, 올라갑시다." 아버지의 기운찬 말씀은 당연한 명령처럼 일행들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제미니와 타이번은 다시 마차에 올랐고 하멜 집사와 경비대원들은 말에 올랐다. 마차바퀴가 구르고 말과 노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금 아무르타트의 대리인이며, 또한 우리들의 보호자였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 아버지의 저 이상한 자신감, 아니 안정감을 설명할 수 있을까? 희한하군. 끝없는 계곡에도 길 비슷한 것은 있었다. 아마 고블린이나 오크들이 사 용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되는군. 어쨌든 아버지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그 길을 걸어올라가셨다. 아침 안개는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고, 그래서 양 편으로 주욱 늘어선 드높은 계곡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끝없는 계곡은 누군가가 큰 마음 먹고 회색산맥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다 가 실패한 듯한 모습이었다. 웨스트그레이드를 가로지르는 회색산맥은 끝없는 계곡에 이르러 거의 절단될 뻔하다가 아주 간신히 끊어지지 않고 반대편으로 다시 이어져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끝없는 계곡은 땅 아 래로도 꽤 깊이 들어간 위치였다. 그래서 좌우로 이어지는 절벽들은 굉 장한 높이였다. "어라? 이거 어떻게 된 거냐?" 절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볼 사이도 없이 아버지의 우악스러 운 손이 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귀! 임마, 귀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눈도 참 밝으시다, 정말. 아들의 등 뒤에 타고나서야 겨우 발견하신 모 양이지? 난 아버지의 손에 부여잡힌 머리를 빼내려고 낑낑거리며 대답했 다. "오크들과 싸우다가 베인 거에요." "뭐야? 오크?" "예. 보석을 구하는 모험을 하는 동안… 제발 그만 흔드세요! 현기증 나요!" "이런. 아, 알았다. 이거야 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한참 동안 내 머리를 부여잡고 자세히 관찰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난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끝없는 계 곡의 전경을 감상해야 했다. "도대체 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닌 거냐?"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구하러 여기저기 돌아다 니다가 오크들과 싸우게 된 거에요." "그래? 아이고… 정말 다행이다! 귀만 베이고 말았으니." "조금만 더 흔드시면 가능할 거에요." "가능하다니?" "아들의 목을 뽑아놓는 거요." "아, 알겠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내 머리를 놓으셨다. 그로고도 한참 동안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셨다. 이런. 뭔가 말을 돌릴 필요가 있을 거 같군. 난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휘유우. 정말 굉장한 높이군요." "아… 그렇지? 정말 드래곤이라도 하나 살고 있어야 어울릴 듯한 곳이 지 않느냐?" "흐음. 정말 그렇네요. 그런데 아버지, 그 동안 많이 불편하셨지요?" 잠시 후에야 등 뒤에서 아버지의 대답이 들려왔다. "불편이라. 글쎄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난 불편 을 별로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것보다는 흥분이 더 강했기 때문에 몸의 불편함이라는 것은 별로 신경쓸 일이 못되었어." "그러셨어요? 흐음. 어떻게 흥분이?" "드래곤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것 때문이지. 정말 희한한 경험 아니겠 냐?" 난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버지의 말을 곱씹었다. 썬더라이더는 기운찬 동작으로 계곡 사이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길 옆으로는 계곡 을 따라 흐르던 강의 자취가 있었지만 겨울철이라 그런지 강물은 말라있 었다. 난 강바닥에 뒹구는 바위들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마른 단풍잎 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조금 전부터 느끼는 건데요." "뭐냐? 하고 싶은 말이?" "아무르타트를 퍽 친숙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니, 꼭 친숙하다 기보다는… 저, 글쎄요.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에 대한 증오심은 확실히 없어지신 것 같은데요." "그러냐?" "그래요." "당연하다. 넌 모르겠지만 네 아버지는 드래곤의 곁에 있어봤던 사람이 니까."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은 드래곤 로드와 이야기를 나눠봤고 지 골레이드의 앞발을 막아내었으며 크라드메서에겐 스피어도 집어던져봤답 니다. 난 속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드래곤의 곁에 있었다는 것이… 어떤 건데요?" "내 복수심이라는 것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 "예?" 아버지는 다시 침묵하셨다. 내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간신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후치야. 만일 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면 넌 절벽을 증오하겠냐?" "예?" "아니, 내가 홍수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다면 넌 홍수나 강물에 게 복수하려고 들겠냐?" "어, 그럴 일은 없겠지요." "그래. 나도 그걸 깨달았다. 내가 헬턴트 마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아 무르타트와 꽤나 먼 거리를 두고 있을 때는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르타 트가 정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웠단다, 후치야. 하지만 그 전투 이후로 긴 시간 동안 아무르타트의 곁에 있으면서, 난 네 어머니의 죽음과 아무 르타트를 연결짓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더구나." "아무르타트가 절벽이나 홍수처럼 느껴지신다는 거에요?" "그런 것 같아. 아무르타트에겐 인간적인 복수심을 적용하기가 힘들어 지더라. 아무르타트는… 글쎄다. 나 같은 것이 증오하거나 사랑하거나 해봤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어. 네가 듣기엔 퍽 이상하게 들리겠지 만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느낀다." 문득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 리지 않고 눈 앞의 길만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의 저런 느낌 은? 간단한 대답이 떠올랐다. 아무르타트는 라자가 없으니까 그렇다. 라자가 없는 아무르타트는 인간 과의 교류가 불가능하다. 교류라는 것이 단순히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전달까지도 포함하는 형이상학적인 거라면… 아버지가 말 씀하신 예가 도움이 되는군. 절벽이나 홍수 같은 것에 감정을 전달할 수 는 없지. 우리는 절벽이나 홍수 따위와 교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냐. 이건 이상해. 핸드레이크나 드래곤 로드의 경우에서도, 우리들과 크라드메서의 경우에서도 모두 라자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감정을 충실하게 주고받았었지. 엇? 아냐. 그렇군. 그 드래곤들은 모두 인간들과 꽤 오랫동안 사귄 적이 있는 드 래곤들이지. 따라서 인간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었던 드래곤들이지. 하지 만 아무르타트는 아직껏 인간과의 교류를 절대로 실행하지 않았던 드래 곤이지. 그렇다면? "케르르르르!" 케르르르, 케르르르르!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 때문에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계곡 내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이긴 한데 워낙 메아리가 심 하게 울려 퍼져서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뒤에서 경비대원들의 단속적인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타이번의 힘찬 외 침이 들려왔다. "모두들 진정해! 가만히 있어." "케르르르르!" 앞서의 외침 소리에 대답하는 듯한 기괴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이번에 는 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퍽 가까운 곳이다! 두 번째 외침 소리의 산울림이 울려퍼질 사이도 없이 세 번째 외침이 뒤따랐다. "케르르르르!" "케르르르르!" 계곡은 외침소리로 가득차버렸다. 터커와 경비대원 몇 명이 앞으로 달 려나와 내 옆으로 늘어섰다. 터커의 빠른 지휘에 따라 그들은 모두 포챠 드를 옆으로 빗겨들고 돌진 자세를 갖추었다. 케르르르! 케르르르! 터커 는 포챠드를 안장 옆으로 늘어뜨린 채 앞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지 같은 지형이군, 젠장. 그런데 저건 구호인가?" "그런 것 같군요. 신호를 주고 받는 것처럼 들리죠?" 내 추측에 대한 대답은 터커가 아니라 등 뒤에서 날아왔다. 철썩! "햐! 이 놈 제법이다. 어떻게 알았냐?"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하시고 있는 거라고요. 자신의 지난 날에 비추어 그 자식을 이해하려드 는 것 말이에요. 도대체 아버지의 아들이 저 정도 암구호도 이해못할 거 라고 믿으시는 거에요?" "그러는 너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범하고 있구나. 자신이 아버지의 지나온 나날로서는 이해하기불가능할 정도로 똑똑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것 말이다. 하하하. 그래. 저건 고블린들의 구호다. 가만히 기다려." 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뭐라고 반박하는 대신 양쪽의 절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케르르르, 케르르르! 귀가 멍멍할 정도의 소란 속에서 이윽고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7. 회색과 검은 색이 뒤섞인 양쪽 절벽은 바위덩어리들이 켜켜히 쌓인 모 양이었다. 그리고 그 회색의 커텐처럼 늘어선 절벽 곳곳에서 고블린들의 회색빛 몸이 불쑥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케르르르, 케르륵! 한 두 녀석 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절벽 양쪽의 험한 지형들에서 나타난 고블린들은 적게 보아도 100 마리는 훨씬 넘었다. 이런, 젠장! 정말 좋은 위치를 잡 고 있군. 고블린들이 나타난 곳은 모조리 높은 절벽의 틈새나 선반처럼 생긴 바위들 위였고, 결국 계곡의 바닥에 있는 우리들로서는 절벽을 기 어오르지 않는 이상 어떻게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위치였다. 케르르, 케르르르르륵! 터커는 입술을 굳게 깨물면서 포챠드를 늘어트렸다. 페가서스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저 위로 돌격할 수 있을까.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 했다. "할 수 없군. 뒤로 전해. 모두 자리에 대기. 동요하지 말도록." "케르르르르!" 계곡을 메워버린 함성 속에서 우리들은 굳은 얼굴을 한 채 한 자리에 서있었다. 케르르르! 머릿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군. 난 제미니의 모습 을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함성이 멎었다. 어디서 무슨 신호라도 내린 걸까?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내 눈이 왼쪽 절벽으로 향했을 때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오른 파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 절벽의 꼭대기에서 왠 고블린 하나가 파이크를 곧게 세워들고 서있 는 것이었다. 워낙 높은 곳이라 고블린의 모습은 간신히 식별할 정도의 크기였다. 저 녀석이 지휘자인가? 계곡이 무너져라 함성을 내지르던 고 블린들은 이제 입을 다문 채 제자리에 우뚝 섰다. 왼쪽 절벽의 꼭대기에 있던 그 고블린은 들고 있던 파이크를 내려 우리 를 겨냥했다. "케라, 케륵! 보석을 가져왔느냐?" 고블린의 목소리는 끝없는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터커는 입을 쩍 벌렸고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라? 저 녀석 말을 꽤나 잘 하네? 아버지?" "응? 아, 그래. 아마 아무르타트가 어떻게 손을 쓴 거겠지. 아무르타트 는 벼라별 희한한 마법을 다 쓰더라." "아, 그런가? 음… 터커?" 터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돌았다. 뒤에서는 하멜 집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절벽 위에 늘어선 고블린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터 커는 입을 다문 채 몇 번 손짓으로 하멜 집사를 부르다가 결국 포기했 다. "하멜 집사님?" "응? 어, 응. 알았네. …자네가 하게." "예? 예, 알겠습니다." 터커는 포챠드를 옆에 있던 경비대원에게 넘겨주고는 말에서 뛰어내렸 다. 우리 모두들과 절벽 위에 늘어선 고블린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터커는 롱소드를 뽑아들고는 우리 앞으로 걸어갔다. 검을 뽑아들고는 있지만 위 에서 공격이라도 시작하면 터커는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난 슬며시 고개를 돌려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타이번은 묵묵히 마차 위에 앉아 있 었고 그 옆에는 제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타이번의 귀에 대고 뭐라 고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음. 제미니가 타이번에게 상황을 설 명해주고 있나 보군? 그 때 앞으로 걸어나간 터커가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 아무르타트가 요구한 보석을 가져왔다. 그러니 포로들을 내놓 아라!" "케라, 켁, 켁! 이후우!" 지휘자 고블린은 이상한 함성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파이크를 휘둘렀 다. 그것이 무슨 신호였던 모양인지 갑자기 양쪽 절벽에서 몇 마리의 고 블린들이 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놈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계곡 바닥에 뛰어내리더니 파이크를 꼬나든 채 우리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갑자기 터커는 롱소드를 위로 쳐들었다. 뭐지? 나야 알 도리가 없어 가 만히 서 있었지만 다른 경비대원들은 재빨리 반응했다. 경비대원들은 모 두들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나가 터커의 뒤쪽에 주욱 늘어섰다. 그러자 다가오던 고블린들이 멈춰섰다. 터커는 위를 향해 고함질렀다. "이건 뭐냐!" 절벽 위의 지휘자 고블린은 잔뜩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케, 케! 멍청한 놈! 우케르, 보석들을 그들에게 건네라!" "웃기는 수작 하지마. 포로가 먼저다! 포로들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보 석을 내놓을 수 없다!" "이 놈잇! 케르륵! 네 놈들을 모두 죽이고, 케르, 켁! 보석을 가질 수 도 있다!"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말해두겠는데 만일 너희들이 우리들을 공격하 면 아무르타트는 보석 구경도 못하게 된다. 그럼 아무르타트가 너희들을 가만 내버려둘까?" 터커는 참으로 뻔뻔스럽게 저런 거짓말을 했다. 뭐 그 보석들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지만 고블린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아무리 썬더라이더를 탄 나라고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지휘자는 잠시 주저하면서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케리, 켁! 보석을 가져오지 않았단 말이냐?" "가져왔어. 하지만 우리들을 죽이면 보석은 사라진다!" "어째서!" 터커는 잠시 말이 막힌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거짓말의 단점은 바로 이거지. 할 수 없군. 난 재빨리 썬더라이더에서 뛰어내렸다. "어라, 후치야?" "아버지. 그 위에 가만히 계세요. 이거 잡으시고. 하지만 절대로 고삐 를 움직이지는 마세요.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되요." 아버지는 당황해서 내가 건네어주는 고삐를 붙잡았다. 난 그렇게 아버 지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드린 다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터커가 날 돌아보았지만 난 그에게 미소만 지어주고는 경비대원들의 앞으로 걸어나 갔다. 눈 앞에는 황량한 계곡의 모습이 펼쳐져있었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좌우의 절벽에 빽빽하게 들어찬 고블린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내 려다보는 가운데 걸어가자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난 고블린 들이 날 확실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선 다음 고함을 질렀다. "이봐! 이거 보이냐?" 난 눈 앞에 있는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고블린들은 아무런 대 답이 없었고 난 어깨를 으쓱인 다음 천천히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그리 곤 곧장 바위를 후려갈겼다. "케륵! 케르르륵!" 케르르륵! 케르르륵! 계곡 곳곳에서 고블린들의 비명이 터져나오자 곧 산사태라도 난 듯한 산울림이 뒤를 이었다. 우와,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 군. 물론 바위는 산산조각나서 자갈이 된 후였고 나는 되도록 태연한 표 정을 지으려 애쓰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으윽. 그래도 역시 손이 아 파. 난 일그러진 얼굴이 고통 때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찡그리며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우릴 공격하면 그 보석들도 모두 이렇게 박살내어…" "후치야! 손 괜찮아?" "꺄아악! 후치야! 손, 손!" "…박살내어버릴 테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이 산산조각난 바위가 보 인다면…" "이 놈아! 고삐 이거 놔도 되는 거 아냐? 젠장, 손 괜찮냐니까!" "집사님! 하멜 집사님! 붕대, 붕대랑 약이랑 어디에 두었어요? 예?" "…그러니까 이 산산조각난 바위처럼 내 손은 괜찮으니까 제발 그만하 는 보석도 박살나지만 내 손은 박살이 안 난다! 으아악! 머리가 박살날 것 같아!" 이래가지고서야 내가 고블린들에게 무시무시하게 보여질 수 있을지 정 말 의심스럽군.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하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내 외침 소리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고블리들이 안쓰러웠던 것 인지 터커가 나 대신 고함을 질렀다. "그래! 우릴 공격하면 보석은 모두 파괴된다! 그럼 아무르타트는 너희 들을 가만 놔둘까? 어림없지! 그러니 순순히 포로들을 먼저 내놔! 그러 면 보석을 내주겠다!" 계곡의 바닥에 내려왔던 고블린들이 당황한 몸짓으로 절벽 위를 바라보 기 시작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절벽 곳곳에 서있던 고블린들은 모두 절벽 위에 있던 고블린만을 바라보았다. 지휘자 고블린은 정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모양인지 두 손으로 파이크를 들어올린 채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키기이이익! 키켁, 케륵! 케르륵! 키기이이익!" 지휘자의 흥분은 곧 다른 고블린들에게도 전염되는 모양이었다. 다른 고블린들도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찡그리며 파이크를 휘저어대었다. 놈들 은 흥분한 동작으로 우리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대었고 파이크를 집어던 질 듯이 흔들어대었으며 심지어 서로들을 향해 으르릉거리기까지 했다. "케르라, 키, 키, 크ィ!" "키리리리리! 키리리리리!" 한 녀석이라도 흥분을 감당하지 못해 파이크를 던지면 곧 모든 녀석들 이 공격을 시작할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를 때 마다 뒷통수가 선뜻선뜻했다. 뒤를 돌아보니 제미니는 이제 타이번의 로 브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들어 타이번을 당황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타 이번은 제미니를 간신히 뿌리치면서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왔다. "주위가 꽤나 시끄럽군." 타이번은 그렇게 말하더니 지팡이를 앞으로 뻗어 조심조심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재빨리 타이번에게 다가가 팔을 부축했다. "고마워." 타이번은 보이지도 않는 눈을 찡긋해보였다. 갑자기 떠오르는 미소를 감당할 수 없어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흐음. 이 미소는 보이지 않겠지. 타이번은 걸음을 멈추더니 내 팔을 놓고는 자신의 로브 자락을 거머쥐었 다. 타이번은 느긋한 동작으로 로브 앞자락을 부여잡아 허리 뒤로 돌려 허 리띠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펑퍼짐한 소맷자락은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두 팔에 가득한 문신이 잘 드러났다. 타이번은 팔을 몇 번 돌리 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안색이 나쁜 친구들." 자! 이제 너희들 퍽 바쁘게 되었다. 하하하. 난 고블린들을 향해 미소 지어주었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너희들 앞으로 나선 인물은 바로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란 말이다. 너희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겠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자기 팔을 잡아뽑아놓을 듯이 설치고 있던 고블린 지휘자는 고개를 홱 돌려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타이번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계속 말했다. "좀 조용히들 해주겠나? 내가 말을 해도 이렇게 떠들면 자네들이 내 말 을 들을 수 없을 것 아닌가." 타이번의 침착한 목소리는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었다. 담담한 사 실의 토로였다. 사람들이 몰려서 떠들어대고 있는 곳, 그러니까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회의장이나 시장 바닥이나 제미니가 울음을 터뜨린 장 소 같은 곳에서 저렇게 말했다가는 조용히 묻혀버리기 딱 적합한 말투였 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조용해졌다. 우리 일행은 당황해서 사방의 절벽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절벽에 늘 어선 고블린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래서 회 색빛 절벽 위에 늘어선 회색 고블린의 모습은 무수히 많은 조각들처럼 보였다. 고블린들보다는 차라리 매섭게 몰아치는 계곡의 거친 바람이 훨 씬 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올리 며 다시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잠시만 그렇게 있어주면 내가 한결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거 야. 자네들도 편하게 들을 수 있을 테고." 타이번은 이죽거리는 기색 하나도 없이 저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어 떻게 된 걸까. "여보게. 자네들에게는 포로 따위 별로 필요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 는 보석을 건네주려고 작정하고 온 거야. 서로 얼굴붉히거나 화낼 일은 전혀 없어. 먼저 내놓느니 나중에 내놓느니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자네들은 보석을, 그 리고 우리는 포로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일세. 그러면 자네들은 아무 르타트에게 보석을 가져다줄 수 있으니 좋고, 우리들은 가족들을 고향으 로 데려갈 수 있으니 좋은 거야." '그렇잖은가?' 나는 타이번이 그런 말을 뒤에 붙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이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타이번은 이제 고개를 조금 숙 이며 말했다. "자네들은 우리보다 훨씬 숫자도 많고 그래서 우리보다 힘도 세지. 그 러니까 우리는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자네들이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겠 나? 하지만 자네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우리로서는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겠지. 자네들은 너무나 강하니까." "켁!" 지휘하던 고블린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다른 고블린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지휘자 고블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 어보이더니 타이번을 향해 짖어대었다. "케르륵, 키켁! 뭐, 우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키키, 킥!" "그래. 그러니까 자네들이 먼저 포로들을 내어주면 좋겠네. 우린 약속 을 어길 수가 없으니까 약속을 지킬 거야. 하지만 자네들은 약속을 어길 수 있으면서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게나." "우리는! 케르, 켈켈! 약속을 지킨다." "그것이 자네들의 영광에도,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명예에도 도움이 되 는 일일 걸세. 부탁할까?" 지휘자 고블린은 대답하는 대신 다시 파이크를 들어올려 위아래로 흔들 었다. 그러자 게곡 바닥에 있던 고블린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좌우 로 올라갔다. 난 녀석들이 올라갈 때 무슨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고 블린들의 동작이 워낙 민첩한데다가 위장이 잘 되어 있어 그들이 어떤 길로 절벽을 오르내리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참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난 타이번이 핸드레이크, 즉 클래스 9의 마스터이며 300년 이상 마법을 갈 고닦은 대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타이번은 고블린들을 몰살 시키거나 무서운 마법으로 위협하는 대신 은근히 그들을 추켜세워주며 협상을 했다. 저건… 젠장. 복잡해지는 머리 때문에 나는 찌푸린 눈으로 타이번의 등을 바라보았 다. 하지만 설마 핸드레이크가 눈이 보이더라도 등 뒤에 있는 나의 시선 을 알아챌 리야 없겠지. 바보짓 그만두자. 고블린들이 다시 절벽을 올라가자 지휘자 고블린은 파이크를 돌리면서 외쳤다. "켈, 켈, 케르카, 켁!" 경비대원들은 완전한 긴장상태로 주위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 는 것이지?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의 세모꼴로 생긴 커다란 바위를 봐라, 후치야." 오른쪽 절벽에는 계곡을 향해 커다랗게 돌출해있는 바위가 있었다. 아 버지의 말씀대로 위로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뾰족해지는 세모꼴의 바위였 는데 높이가 7, 80 큐빗은 될 것 같은 커다란 바위였다. 저게 왜? 바위 뒤에서 사람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영주님!" 하멜 집사는 곧장 계곡의 험한 바위 위를 마치 한 마리 산양처럼 달려 가기 시작했다. 터커는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사님, 멈추십시오! 섣불리 움직이면 고블린들을 흥분시킬지 모릅니 다!" 계곡을 달려가던 산양은 이제 고슴도치가 되어버렸다. 으윽. 하멜 집사 는 완전한 고슴도치 자세로 바위 위에 팍 웅크렸다. 체신머리 없다고 욕 할 수도 없는 것이,절벽 위에서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던 고블린들이 험 악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위 뒤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처럼 낡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데다가 땟국물이 질질 흐르고 수염이나 머리 등은 엉망진창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그런대로 온전한 사람들 중 에서 영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주님은 반가운 얼굴로 걸어왔다. 바위 위에 완전히 업드려있던 하멜 집사는 고개만 좀 들어올려 영주님을 바라보았다. "여, 영주님!" "하멜, 하멜인가! 고맙군, 반갑네! …그런데 자네 뭘 흘렸나?" "영주님!" 하멜 집사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고함을 빽 질렀다. 영주님은 웃으며 하멜 집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멜 집사를 일으킨 영주 님은 곧 그를 포옹했다. "아, 하하하.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반가워서. 정말 고마워." 영주님의 백발은 멋지게 흩날리고 있었다. 단정한 하멜 집사의 모습과 지저분한 영주님의 모습은 정말 방랑하는 왕과 그를 기다리던 충신의 모 습으로 보여 모자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포로들도 모두 웃으며 걸어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터커 아냐?" "세로! 살아있었구나, 세로!" "그래, 임마. 네 여동생 시집도 못간 과부로 만들지는 않…" "죽어랏!" 포로들과 우리 일행들의 상봉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만남을 말해보라면 역시 경비대원 세로와 터 커의 상봉일 것이다. 그들의 엉망진창인 모습과는 달리 포로들에게는 여 유가 있어보였다. 놀랍게도 포로들은 나나 제미니의 모습에 놀라는 여유 까지도 보여주었다. "어라? 이게 누구냐. 너 초장이 네드발씨의 아들인…" "예. 후치 네드발이에요." "네가 여기 왠 일이냐? 어라? 저건 또 뭐야. 숲지기 딸 아냐?" "제미? 제미구나. 아니, 네가 여기 왜 온 거냐?" "후치 감시하려고요." "후치가 고블린 미녀에게 한 눈이라도 팔까봐?"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제미니가 저렇듯 능글스럽게 내 인격을 깔아뭉개고 있는 동안 난 주위 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약간 떨어진 곳에 몰려 서있는 사람들과 그 중 앙에 서있는 키 큰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수도에서 온 병사들과 로넨 휴리첼 백작이었다. 그들은 푸근한 눈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재회 장면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소외된 위치를 감 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서있는 로넨 휴리첼 백작은 절벽에 늘 어선 고블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포로들과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상봉을 즐거워하는 사이를 빠져 나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8. 수도에서 온 병사들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내 길을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난 그들을 살짝 비켜 로넨 백작에게 다가갔다. 로넨 백 작은 더벅머리 꼬마애가 다가오는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에게 용무가 있는가, 소년?" 난 잠시 로넨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군. 나는 넥슨과 닮은 점을 발견해보려다가 포기하고선 낮게 말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로넨 백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귀를 들이대었다. 주위의 병사들은 이 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와 로넨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로넨 백작의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끝까지 조용히 들어주십시오. 저는 수도에서 로넨 백작에게 전할 말을 가지고 온 사람 입니다." 로넨 백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허튼 소리 하지 말라는 식 으로 벌컥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증거를 원하실까봐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그와 당신, 그리고 까뮤 휴리 첼과 아멘가드 휴리첼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놀라 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백작님이 포로로 억류당하신 동안 아드님이신 넥 슨 휴리첼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크흠!" 로넨 백작은 갑작스런 기침을 내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한 것일 까? 그는 주위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주위를 비워다오. 이 소년과 나눌 중요한 말이 있으니." 병사들은 별 말 없이 절도있는 동작으로 나와 백작 주위에서 멀어졌다. 우리 일행쪽을 흘깃 바라보니 그들은 아직도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중이 었다. 잘됐군. 백작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대로 정리가 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넥슨은?" 그는 넥슨을 사랑했던 것일까? 넥슨의 말을 생각해보면 백작은 동생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넥슨을 잘 보살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넥슨 에 대한 일을 먼저 물어오고 있다. 난 고개를 조금 숙이며 전하고 싶지 않았던 소식을 말했다. "죽었습니다." 로넨 휴리첼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넥슨 휴리첼은 반란죄로 사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군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는 반란을 위해 삼촌의 드 래곤과 라자의 계약을 맺으려다 사고를 만나 살해당했습니다." "그런…가." "이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당신은 수도로 돌아오면 안됩 니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날 길도 수도에만 있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시 겠지요?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이름을 사용하며 수도로 돌아와서는 안된 다는 말입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수도로 숨어들어가십시오. 지인들이 있다 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기 어려우 시겠지만 수도에서 당신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 다. 카알 헬턴트씨를 찾아가십시오." "카알 헬턴트?" "모르시는 이름일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카알 헬턴 트씨가 자세한 전후사정을 들려주고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그랜드스톰 으로 찾아가서 하이 프리스트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럼 하이 프리스 트가 카알 헬턴트씨를 만나게 도와줄 것입니다. 야박하게 들리실지 모르 겠습니다만 헬턴트 마을에도 들리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정이 복잡해지니까요." 백작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윗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가 그의 손에건네었다. 내 손에서 그의 손으로 보석과 금화가 든 주머 니가 옮겨진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백작은 눈으로 감사의 인 사를 보내었다. "잘 들으십시오. 네리아가 무서워하는 것은 벼락이고 오크가 무서워하 는 것은 괴물 초장이입니다. 암호를 물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백작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하기에는 나의 분위기가 너무 엄숙했다. 그 래서 백작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리아가 무서워하는 것은 초장이고 괴물이 무서워하는 것은 벼락 오 크라고?" "…바뀌셨습니다.네리아가 무서워하는 것은 벼락이고 오크가 무서워하 는 것은 괴물 초장이입니다." "…암호 좀 쉬운 걸로 정하지 그랬나. 음. 기억했네." "다행이군요. 그럼 용무는 끝났습니다." "고맙네." "천만에요.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나는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백작은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왜 날 돕는 거지?" 난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백작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지가 않았다. "휴리첼 가문의 비극은 이제 그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난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백작의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저희 영지를 도와주신 분이 어떤 분인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일러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커서 백작님처럼 훌륭한 무인이 되었으면 좋겠군 요. 하지만 어림없겠지요?" 백작은 어슬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에 힘들게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세상엔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긴 하네. 원하지 않는 비극은 베개 머 리맡까지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법이고.하지만 내 충고 는 별로 필요없는 것일세. 자네에겐 두 다리가 있으니 자네의 길을 걸어 갈 수 있고, 자네에겐 두 팔이 있으니 적을 위한 검과 레이디를 위한 꽃 을 들 수 있겠지. 전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자네가 다 가지고 있 다네. 그러니 걱정말게." 난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주위의 고블린들에 별로 신경쓰지 도 않은 채 재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난 절벽 위의 그 지휘자 고블린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파이크를 집고 서있었 다. 문득 그덴산의 거인이 루트에리노 대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러하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덴산의 거인은 우타크와 챠넬에게 속 아넘어간 미련한 존재로 알려져있지. 하지만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덴산 정상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을 바라보았을 때 정말 조금도 떨리지 않았을까? 속아넘어간 것 때문에 미칠듯 분노하고 있는 거인이 내려다보고 있을 때? 관두자. 한참 요란하게 떠들고 있던 하멜 집사는 그제서야 영주님을 풀어주었 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닦아대면서 내게 손짓을 했다. 난 그 에게 고개를끄덕여준 다음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이봐! 보석은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다른 사람들은 계곡을 빠져나가도록 해다오!" "케르, 켁! 무슨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보석을 건네어 주겠다는 말이야. 알았냐?" 가까이 있던 로넨 백작뿐만 아니라 영주님도 크게 놀랐다. 하지만 누구 보다도 놀란 것은 아버지였다. "아, 이, 이 녀석아! 보석 어디 있냐? 내가 남아서 건네어줄 테니까…" "아버지, 저보다 말 잘 타세요?" "뭐야?" "제가 아버지보다 말은 잘 타요. 만일 사고가 나도 저라면 몸을 빼내기 가 쉽다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 녀석아. 그래도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내게 보석을 넘기고…" "그만하자고요. 우리가 더 지체하면 고블린들이 화를 낼 거에요. 아들 을 한 번만 믿어보세요. 여기까지 오면서 집사님과 터커, 모든 사람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에요." "내 아들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 사람 있죠." "그게 누군데?" "저요." "…젠장." 아버지는 하실 말씀이 없으신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투덜 거리시기를 멈추지 않았다. 풀려난 포로들도 모두 떠드는 것을 멈춘 다 음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영주님은 다급하게 집사님에게 질문 했다. "정말인가, 하멜? 후치가 남게 되기로 약속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멜 집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영주님은 고개를 심하게 갸웃거렸다. 그 때 타이번은 주위 모든 방향을 향해 말했다. "나도 여기 남을 것이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길. 이곳은 마법사가 필 요한 곳 아니겠소?" 그러자 주위의 안색들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아마 저 사람들은 내가 타이번의 기수 노릇을 하느 라 남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터 커는 일행들의 소란을 재빨리 진정시키기 위해 외쳤다. "자! 풀려나신 분들은 마차 위에 오르십시오.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도 록 하십시다. 후치는 안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위의 사람들은 그래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면서 쉽게 마차에 오르지 못했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그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내 눈이 제 미니에게 멈추었을 때 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제미니는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남겠다고 고함을 지르시다가 겨우 터커에 의해 끌려갔 다. 아버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시간을 끄니까 고블린들이 점점 짜증을 내는 것 같지 않아요? 난 쓸데없 는 생각을 집어치운 다음 제미니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뱃속 깊숙한 곳까지 숨을 들이마쉰 다음 단숨에 고함을 질렀다. "야이 망할 계집애야! 타이번을 태우고 가는 것까지는 별로 무리가 없 지만 너까지 태우면 빨리 달릴 수가 없다고!" 계곡 아래쪽으로 사라지는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미니는 내 고 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미니는 헤죽 웃으면서 말했다. "나 가벼운데." "그래도 한 사람 몸무게가 늘어나는 거잖아! 게다가 한 사람 엉덩이도 늘어나는 거고! 말 위에 세 사람이 앉는 것이 쉬운 일인 것 같아?" "네가 안아라?" "…고삐는 어떻게 잡고!" "어, 흔히 그러잖아. 타이번씨는 뒤에 태우고 나는… 네가 겨드랑이에 날 끼우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으면 되잖아. 나 불평 안할 테니까 걱정 하지 마." "흔히 그러기는 누가 흔히 그래! 그건 옛날 이야기에서나 그렇고!" "응? 그럼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니?" 제미니는 아주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저렇게 물어왔다. 왠지 고함을 빽빽 지르는 것이 바보처럼 여겨지는데. "이봐, 제미니. 어, 그러려고 들면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OPG도 끼고 있으니까 네 몸무게가 그렇게 부담되는 것 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한 손으로 말을 조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니란 말이다!" 거짓말이다. 으윽. 말 위의 싸움이라는 것은 어차피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다른 손에 검을 쥐는 것이니까. 제미니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정말 그래?' 라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어왔다. 제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난 얼굴을 구기면서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없군. 젠장. 이미 업질러진 물이니까." "헤에. 잘 부탁해?" "그만해!" 우리들의 이 웃기는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 타이번은 바위 위에 앉아서 태평하게 앉아 있었다. 고블린들이 보기엔 눈뜨고 못봐줄 장면이겠군. 말싸움을 벌이는 소년 소녀와 그 옆에 앉아 쉬고 있는 장님 노인이라니. 그들이 우리들을 제대로 된 인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지휘자 고블린은 고함을 질렀다. "키, 케륵! 보석은 어디 있느냐? 만일 거짓말이라면, 케르르르! 말해주 겠는데 지금 당장 저 놈들을 쫓아가는 것은 간단하다! 켈, 켈, 케륵! 게 다가 아무르타트께서 너희 영지를 가만 내버려 둘…" 난 손을 휘저어 고블린 지위자의 외침을 막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전해주겠어." 고블린들은 으르릉거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난 사방에서 내려꽂히는 그 들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썬더라이더로 걸어갔다. 썬더라이더. 여기까지 이 무거운 것 가지고 오느라 정말 수고했다. 난 안장에 매달아 둔 보석 주머니들을 풀어내었다. 모두 5 개. 난 그것 들을 들고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 앞쪽의 커다란 바위쪽으로 걸어갔 다. 내가 바위 위에 주머니를 내려놓자 고블린 지휘자는 고함을 빽 질렀 다. "크카각! 날 속여?" "속이기는 누가 속여!" "그럼 그게 보석이란 말이냐! 키케르! 보석이 그렇게 가벼울 리가 없 다!" "멍청아. 내가 엄청나게 힘이 센 거야! 네가 말했듯이 너희들을 속이면 아무르타트가 우릴 가만 내버려둘 리가 있겠냐! 아니, 내려와서 이걸 확 인해보면 될 거 아냐! 난 물러나 있을 테니까!" 고블린 지휘자는 한참 동안 날 내려다보았다.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파 이크를 들어올려 신호를 보내었다. 아까처럼 좌우에서 몇 마리의 고블린 들이 뛰어내려왔다. 난 뒤로 물러서서 제미니와 타이번을 가리면서 섰다. 계곡 바닥에 내려 온 고블린들은 파이크를 들어 우리를 겨냥하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놈들 은 마치 소나 개를 위협하듯이 쉭쉭거리며 파이크를 내찔러왔지만 난 팔 짱을 낀 채 가만히 서있었다. 지리한 시간이 흐른 다음, 고블린들은 내가 내려놓은 주머니에 접근했 다. 놈들은 주머니 옆에 주욱 늘어서더니 먼저 그들 중 하나가 파이크를 거꾸로 든 다음 주머니를 툭 건드렸다. 하지만 주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 았다. 녀석들은 서로를 바라본 다음 조금 더 세게 주머니를 찔렀지만 주 머니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파이크로 주머니를 찌르던 고블린은 그제서야 파이크를 옆에 내려놓더 니 주머니로 다가섰다. 놈은 서툰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고 그 동안 제미니는 내 목 뒤에 김이 서릴 정도로 입김을 불어대었다. "빨갛게 익지 않았냐?" "뭐?" "내 목 뒤가 빨갛게 익지 않았냐고. 그렇게 붙어서서 헉헉거리니까 너 무 뜨겁잖아." "아, 미, 미안해, 후치야. 하지만 나 무서워서…"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남기는 왜 남아. 그러니까 얌전히… 악!" 난 제미니에게 꼬집힌 허리를 문지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구, 요 귀여운 계집애! (긴장이 너무 심했나? 내가 왜 이러지?) 그 때 좌르르!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침내 고블린은 주머니 하나 를 힘들게 연 모양이다. 놈의 서툰 손놀림 때문에 주머니 속에 있던 보 석들이 일제히 쏟아지면서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었다. 고블린들은 질겁 하며 물러나더니 곧 입을 쩍 벌렸다. 온통 무채색인 끝없는 계곡의 정경 속에서 보석들은정말 눈이 아플 정 도로 빛을 뿜어대었다. 타이번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고블린들이 얼떨결 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렸을 정도였다. 주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고블린들 은 멍한 눈으로 보석을 바라보았고 절벽 위의 고블린들도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끼… 끼깃!" "크케르… 케르르르르!" 주머니를 둘러싼 고블린들이 기어코 파이크를 위로 들어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곧 절벽 위의 고블린들도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리고 절벽 아래쪽에 있던 고블린들은 제자리에 서있지 못하고 아래로 뛰 어내려오기시작했다. "케르르르르! 우케르르르!" "케ィ! 키, 키키키켁!" 귀가 먹어버릴 정도로 요란한 함성이었다. 절벽 곳곳에 있던 고블린들 은 모두 어마어마한 함성을 내질렀고 달려내려온 고블린들은 아귀처럼 보석에 달려들었다. 주위가 너무 요란해서 낮게 속삭이는 제미니의 목소 리를 거의 못들을 뻔했다. "저 고블린들 왜 좋아하지? 저건 아무르타트 거잖아?" "단순하다는 증거지, 뭐. 지금은 좋아하는대로 내버려두지. 괜히 좋은 기분에 찬 물 끼얹지는 말고." 그 때 절벽 위에서 모든 함성을 억누르는 괴성이 터져나왔다. "케라라락! 건드리지 마!" 지휘자 고블린이었다. 지휘자 고블린은 다른 고블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더 고함을 질러야 했다. "케라라락! 크케라라라락! 손대지 마! 만일 삼키는 놈이 있다면 배를 갈라놓겠다! 케케케켓!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네놈들 모두를 배를 갈라놓 을 거다!" 웃기는 협박이군. 마치 저 보석이 전부 몇 개인지 알기라도 한다는 듯 이. 하지만 그 협박은 보석을 들고 미쳐 날뛰던 고블린들의 동작을 멈추 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게다가 제미니를 겁주는 데도 충분했다. "후치야, 후치야! 이제 가자. 보석은 다 줬잖아? 고블린들이 알아서 챙 겨갈 거잖아?" 제미니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칭얼거렸다. 그리고 그 때 타 이번도 바위에서 일어났다. "그래. 후치. 이만 나가보자. 재물이 있는 곳에는 재앙이 있게 마련이 야. 따라서 재물 근처에서는 도망치는 편이 낫지." 재앙? 과연 몇몇 고블린들이 불만스러운 으르릉거림을 내기 시작했다. 지휘자 고블린의 말에 반항이라도 할 듯이 파이크를 거칠게 흔들어대는 고블린의 모습도 보였다. 절벽에 늘어선 고블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상한 눈짓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 자 고블린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외쳤다. "이 미친 놈들! 카랏! 모두들 꼼짝마라! 아무르타트가 가만 있을 거 같 으냐? 네놈들이 보석에 침을 흘렸다는 것을 알게되면, 케르르르르! 아무 르타트가 네놈들 머릿가죽을 벗기실 거다! 킥, 슈, 케키르! 아니, 아무 르타트는 눈빛만으로 네놈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의 배를 갈라 보석 을 내어놓게 만들 거다!" "그 말엔 전폭적으로 찬성이야." 타이번의 중얼거림이었다. 타이번은 이미 제미니의 부축을 받아 썬더라 이더에 오른 다음이었다. 난 그들을 한 번 돌아본 다음 다시 주위의 절 벽을 돌아보았다. 아무르타트의 이름을 빈 협박은 확실히 먹혀드는 모양 인지 고블린들은 이제 수상한 짓을 그만두었다. 비록 기뻐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휘자 고블린은 그런대로 고블린들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모 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 용건을 말해도 되겠군. 젠장. 이 용건 때문에 나 혼 자서 남고 싶었는데. 제미니 뿐만 아니라 타이번도 여기 없었다면 좋았 을 텐데. 난 속으로 투덜거린 다음, 조용해진 계곡을 향해 외쳤다. "이봐! 약속대로보석은 내어주었다!" "좋아! 케르, 켁! 꺼져라! 내 부하놈들이 인간 고기맛을 떠올리는 데까 지는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헤에. 꽤나 무서운 말이군. 그런데 말이다! 나에겐 다른 용건이 있는 데!" "키키키르! 용건이라고!" "그래! 나는 아무르타트를 만나고 싶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19. 계곡을 가득 메운 불길한 침묵은 제미니의 울음소리에 의해 깨졌다. "우왕! 타이번씨! 저 녀석 좀 어떻게 해주세요! 조금 전에 한 말 들으 셨죠?" "아, 그, 그래. 제미니. 그런데 좀 흔들지 말아주겠나? 난 장님이라고. 말 위에 있는 장님을 그렇게 흔들어대는 법이 아냐." "아,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저 완전히 돌아버린 녀석 좀 어떻게 해 달라고요! 이잉!" 완전히 돌아버린 녀석이라고? 내가 도대체 왜 제미니에게 미쳐있는 것 일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이 봐, 후치 네드발. 너 정말 팔자가 따분무쌍하다. 제미니가 너를 걱정해 서 저렇게 말하는 것은 알겠는데 말이야, 저렇게 말해가지고서 어디 걱 정하는 것처럼 보이겠어? 저런 계집애 따위 걷어차버려.' 뭐라고? 닥쳐 랏! 제미니를 험담하지마! 더이상 입을 그런 식으로 놀리면 내가 너를… 맙소사, 제미니. 네가 맞았어. 난 완전히 돌았나봐. 그리고 그 사실은 고블린들의 태도에서도 확실히 증명되었다. 고블린들 은 미친 놈 보듯이 날 바라보았던 것이다. "뭐, 케레레, 뭐라고?" "아무르타트를 만나고 싶다고!" "누가?" "내가!" "누구를?" "아무르타트를! 그리고 혹시 '어쩐다고?'라고 물을 거라면 미리 대답하 지. 만나겠다고!" "왜?" 확신하는데 저 고블린은 틀림없이 고블린들 중에 천재에 해당하는 녀석 일 것이다. 내가 인간들 중에서 바보에 해당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것보다는 저 녀석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편이 낫겠어. "너희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아니다! 내 용건은 아무르타트에게 있지 너희들에게 있지 않다. 아무르타트는 자신에게 돌아와야 되는 것을 그 수하가 가로채는 것에 대해 관대하다는 말이냐!" 고블린들의 지휘자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서있었다. 그 틈을 타서 타 이번이 내게 말했다. "후치, 잠시만. 아무르타트에게 무슨 볼 일이 있다는 건가?"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수많은 고블린들이 손에 무기를 든 채 내려 다보고 있는 장소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웠다. 타이번의 얼 굴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번의 눈은 희다. 모진 풍상이 그의 얼굴빛을 검게 물들여왔고 목에 서 거뭇하게 올라오는 문신이 그 어두움을 더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희게 빛나고 있는 눈은 섬쓺한 것이었다. 나는 힘들게 침을 삼킨 다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알려줄 일이 아닙니다. 내 용건은 아무르타트 에게만 있으니까요." 타이번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그러나 침착하게 말했다. "그 용건이 뭔지 모르니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어. 하지만 넌 위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거냐?"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드래곤에 대해서는 철자만 알고 있는 소년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드래곤과 직접 만나본 소년의 생 각이지요." 제미니는 이제 타이번에게 매달리던 짓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내게로 달려들더니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후치야, 후치야! 그러지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왜 그러는 거야? 아무르타트를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제미니. 날 믿어달라고 말하면 어쩔래?" "널 믿느니 내 코가 더 높아질 거라고 믿겠어!" "음? 글쎄다. 너 별로 코가 낫지는 않은데? 아니, 딱 적당하다고 생각 해." "고마워… 아, 아니! 어쨌든 나 절대로 너 못믿어! 어서 돌아가자, 응! 제발 이러지마-아! 그렇게 벌쭉벌쭉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 어서 취소 하란 말이야!" 그래도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으니 히죽히죽 웃는 도리밖에. 어떻게 하면 제미니에게 내 결심이 굳은 것이며, 내가 아무르타트를 만나는 것 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 좋은 방법이 떠올랐 다. 난 제미니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다음 진지한 얼굴로 제미니를 바 라보며 말했다. "제미니. 어떻게 하면 너에게 내 결심이 굳은 것이며, 내가 아무르타트 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납득 안 할래!"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나 보다. 이그! "야! 이! 고집 센! 계집애야! 난 하늘이 두쪽나도 아무르타트를 만나보 고서야 돌아갈 거야. 그만! 일부러 울려고들지 좀 마! 얼굴 펴! 너 울어 도 나는 고개도 안돌릴 거야. 그럼 너도 괴롭고 나도 괴롭기만 할 뿐 아 무 것도 건질 게 없으니까 울지마. 알았어?" 제미니는 입을 쩍 벌리고 날 올려다보았다. 요, 계집애. 눈이 동그래져 서 그렇게 올려다보니 마음이 다 풀어져버리는군. 제미니의 입술이 몇 번 오물거리더니 간신히 말 비슷한 것이 나왔다. "울어도?" "그으으럼!" "정말?" "저어엉말!" "와아아아앙!" "으아! 제미니, 잘못했어. 용서해줘!" 제미니는 가장 편한 자세로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채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갖가지 귀여운 짓을 해야만 했다. 타이 번은 묵묵히 자신의 소외된 위치를 감수했지만 고블린 지휘자는 그러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함을 빽 질렀다. "케르! 케르! 이놈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키키키깃!" 간신히 제미니를 진정시켜놓고 - 그 동안 나는 겉으로는 제미니에게 꽤 많은 거짓말을 했고 속으로는 그랑엘베르에게 엄청난 저주를 퍼부어대었 다. - 난 이마를 닦으며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 의견 조정이 잘 안되어서 말이야.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했는데? 괜찮다면 지금 당장 아무르타트에게 가서 전해." "케? 전하라고?" "그래. 후치 네드발이 아무르타트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아무르타트는 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가 날 모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 도 좋아." 아무르타트는 분명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나를 지명하여 아버지를 내려보내 우리들을 맞이하게 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 일행 중에 나 같은 꼬마가 있으니까 그 아버지를 보낸다는 것은 이유로 서는 많이 모자란다. 결국 그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니, 그가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난 그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니까. 드 래곤 라자? 그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어! 그 때였다. "이키후!" 절벽 위의 고블린 지휘자가 크게 메아리치는 함성을 질렀다. 그놈은 함 성을 지르면서 동시에 파이크를 거세게 휘저었다. 그러자 맞은 편에서 다른 고블린이 대답하듯 외쳤다. "이키후!" "이키후!" 몇 번 더 대답이 뒤따르고나서 고블린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절벽 위에 있던 놈들 은 절벽 뒤로 걸어가버렸고 절벽의 틈 사이에 서있던 놈들은 빠르게 위 나 아래로 움직이더니 계곡 안쪽으로 뛰어갔다. 굉장한 몸놀림들인데. 고블린들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달려갔다. 잠시 후 보석을 가지러 온 놈들을 가장 마지막으로, 계곡에 빽빽히 들 어차있던 고블린들은 언제 나타났냐는 듯이 사라졌다. 이게 뭐야? 아예 상종을 안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블린들의 지휘자는 제자리에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 다. 놈은 절벽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놈이 절벽을 찰 때마다 돌멩이가 몇 개 튕겨지고 작은 바위들이 흔들거렸지만 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런 식으로 놈은 몇십 초도 걸리지 않아서, 나라면 내려오는 데 한 시간 은 걸렸을지도 모르는 절벽을 다 내려왔다. 그러더니 그 놈은 파이크를 한 손에 늘어트린 채 천천히 내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놈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그 발놀림은 흐느적 거리는 것 같았지만 튼튼했다. 놈은 그렇게 가볍게 뛰면서 계곡 바닥에 널려있는 바위들 위를 지나 내게로 다가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제 미니는 그제서야 고블린을 본 것인지 후다닥 일어났다. 고블린 지휘자는 15 큐빗 쯤 되는 거리에서 멈춰섰다. 바닥에 내려온 것을 보니 확실히 지휘자 노릇을 할만한 녀석이었다. 왠 만한 오크보다도 더 큰 덩치였으며 그 몸에서 느낄 수 있는 탄력성이나 강인함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대단히 질겨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크켁!" 고블린이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자 제미니는 기겁하면서 내 팔에 안겨들 었다. 그러나 놈은 들고있던 파이크를 옆의 땅에 박아넣을 뿐이었다. 그 리고는 놈은 두 팔을 앞으로 모아 팔짱을 꼈다. 이게 뭐지? 아, 무장은 치우라는 말인가? 난 천천히 바스타드를 검집에 꽂아넣고는 똑같이 팔짱 을 꼈다. 덕분에 제미니는 내 팔을 놓치고는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타 이번이 뒤에서 걸어오더니 제미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미니는 흠칫했 지만 타이번은 따스하게 말했다. "가만히 기다려, 제미니.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고블린 지휘자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더니 놈은 갑 자기 눈을 감으며 턱을 조금 들어올렸다. 저것도 턱이라고 불러줄 수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으응? 놈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아무런 바람도 없었는 데 놈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흔들렸다. 잠깐. 그러고보니 바 람이 안 부네? 왜 이렇게 주위가 고요한 거지? 고블린의 떨림은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멎었다. 놈의 눈이 다시 열렸을 때 나는 운차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찔릴 것처럼 예리한 눈빛. 고블린은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날 만나고 싶다고 했나?"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고블린의 몸처럼 작은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있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하마터 면 팔짱을 풀어버릴 뻔했지만 간신히 손가락으로 양쪽 팔을 꽉 움켜쥐어 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고, 팔이야! 제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숨막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목소리가 바뀌었어?" "쉿. 제미니. 아무르타트야." 제미니는 눈을 심하게 껌뻑거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르타트가 고블린이었어?" 타이번은 괴상한 기침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고 난 고개를 푹 떨구었 다. 그리고 고블린은 폭소를 터뜨렸다. "핫하하하!" 제미니는 고블린의 웃음소리를 듣더니 더욱 놀란 표정이 되어버렸다. 타이번은 간신히 그 괴상한 기침을 멈추고서는 제미니에게 설명했다. "마법이야, 제미니. 아무르타트가 마법을 써서 저 고블린을 통해 말하 는 거야." "그래요?" 제미니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난 힘들게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고블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반갑습니다. 위대한 드래곤 아무르타트.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넌 내 어머니의 원수야." 제미니는 뜻모를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절해버렸지만 타이번이 용케 그 녀를 부축한 모양이다. 그 동안에도 난 고블린의 눈에서 감히 고개를 돌 리지 못했다. 그것은 아무르타트의 눈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랜 침묵 후 고블린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난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것이 네 용건인가?" 난 한참동안 호흡을 가다듬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저 침착하고 준엄한 목소리에 대해 열뜬 바보의 목소리로 대답하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나는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만큼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오. 이것은 당신에 대한 용건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용건입니 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깊은 숙원을 풀어본 것이지요. 당신이 내 어머니의 영전에 사죄하는 것까지 바랄 수는 없겠지만, 당신에게 직 접 당신은 내 어머니의 원수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확실히 너 자신을 위한 용건일 뿐이군." 반응하지 않는다. 확실히. 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숙여보였 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럼 제 용건을…" "돌아가라." "예?" 난 당황해서 얼굴을 들어올리다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고블린의 얼굴에 서 빛나는 아무르타트의 눈이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한 것이다. 네 용건에는 관심이 없 다. 지금 당장 돌아가라. 네가 입을 닥치도록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 가 있다. 네가 스스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과 내가 널 죽여버리는 것. 난 양자 중 어떤 것이든 상관이 없지만 너로선 상관이 많을 것 같군." 고블린의 몸에서 울려져 나오는 아무르타트의 명령은 준엄했다. 난 얼 굴을 찡그려보려고 애썼다. 안되었다. 팔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소용 없 었다. 그야말로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난 눈알만 굴리면서 고블린을 바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타이번의 말에 의해 나는 그 무서운 경직에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 다. "아무르타트."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았다. 태풍이 불면 나무는 쓰러지는 법이다. 하지만 똑같은 정도의 태풍이 양쪽에서 동시에 몰아치면 나무는 곧바로 서 있게 될 것이다. 나는 타이번의 말에서 고블린의 몸을 빈 아무르타트 와 거의 같은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이 소년의 용건이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박정하게 거절하는 것 은 너무 성급하지 않겠소?" 고블린은 우울한 눈으로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타이번은 한 손으로 지 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론 제미니를 안아든 채 당당하게 고블린을 향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고블린은 나를 상대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 을 정도로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아무르타트는 말했다. "성급함이라는 말을 드래곤에게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성급한 행동이 아 닐까 생각되오만." 되오만? 알고 있군, 역시! 아무르타트는 타이번이 핸드레이크임을 알고 있었어.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누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 소. 따라서 나는 당신이 당신의 주장을 철회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데." "나는 강요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오." "잘됐군. 나 또한 강요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요. 물론 살다 보면 부득이한 경우라는 것이 왕왕 발생하기도 하지만." 흐음. 협박을 하고 있어. 목이 뒤로 꺾여버릴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도 난 고블린과 타이번을 바라보며 그 뒤에 있는 아무르타트와 핸드레이크 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무시무시한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불안한 느낌은 목에 걸린 뼛조각 같군. 혹시 핸드레이크는 이 장소를 다른 장소로, 여기 있는 사람과 드래곤을 다른 사람과 다른 드래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갈색산맥에서 의 까뮤와 크라드메서. 그리고 회색산맥에서의 후치와 아무르타트. 쳇. 우습지도 않은 착각이군. 핸드레이크, 당신은 아직도 드래곤을 붙잡으려 고 들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르타트도 크라드메서처럼 될지 모르는데? 그러나 나는 타이번을 저지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무르타트로 하여금 내 말을 듣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타이번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둘의 모습에서는 이제 내 눈으로도 느낄 수 있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 다. 타이번은 산트렐라의 노래에 앉아있을 때 만큼이나 여유로와 보였지 만 고블린의 표정에는 꽤나 그럴 듯한 불안감과 증오가 나타나고 있었 다. 거의 인간처럼 보일 지경이군. 그 때 고블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당신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블린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말 사람 같은데. "나에게는 석양의 감시자라는 이름이 있소." "그건 알고 있소만?" 고블린은 천천히 뒤로 걷기 시작했다. 타이번은 그 미세한 발자국 소리 를 들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고블린은 뒤로 물러나면서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나는 석양을 감시하며 석양에서 감시하오. 내 앞에서 만물이 끝나고, 동시에 만물의 끝에서 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소. 나는 유피넬과 헬카 네스의 딸인 시간의 충실한 종이오." "…그런데?" 고블린은 뒤로 걷다가 그대로 훌쩍 뛰어 바위 위에 섰다. 고블린이 바 위 위에 섰을 때 들려온 낮은 소리 때문에 타이번은 움찔했지만 그가 뭐 라고 말할 기회는 없었다. 고블린은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나의 기다림은 이미 길었거늘, 당신의 황혼은 너무 길군." 순간 타이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0. 그의 얼굴이 굳은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장님처럼 몇 번 주춤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진짜 장님이긴 하지만 지금껏 그는 전혀 장님처럼 행동하지 않았는데? 나는 황급히 그 에게 다가가서 제미니를 받아들었다. 내가 제미니를 받아들자마자 타이 번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쥐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지팡이에 기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바위 위에 선 아무르타트는 침착 하게 말했다. "왜 당신은 당신의약속된 휴식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이오?" "나, 나는…" 300 년 전 드래곤 로드 이후로, 사람이든 드래곤이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간에 핸드레이크의 다리가 이 정도로 흔들리게 만든 자가 또 있을까? 아무래도 아무르타트가 300 년 만에 처음으로 그것을 성공시킨 것처럼 보였다. 당황해서 두 사람을 바라보느라 자칫 제미니를 놓칠 뻔 했다. 난 제미니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다음 다시 고블린을 바라보 았다. "인간에게 있어 충실한 생에 대한 보답은 약속된 휴식이오. 그것은 인 간에게 주어진 선물. 당신들은 죽을 수 있고, 죽을 때를 모르오. 드래곤 도 그러한 선물은 받지 못했소." 드래곤 로드의 말이었지. '나는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 같은 것은 받지 못했다네.' 고블린의 얼굴에 번뜩이던 아무르타트의 눈은 이제 타이번을 꿰뚫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의 말이었지. 우리는 단수가 아니다. 그 복수성에서 비롯되는 불 사성은 죽음과 망각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겠지. 시간의 종인 나는 잘 알 고 있소. 죽음을 무시하는 자가 인간이오? 단수로서 불사하고 있는 당신 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소?" "아니오." 부러질듯 흔들리는 지팡이에 힘겹게 기대어 선 장님 노인의 말치고는… 꽤나 침착한 대답이었다. 타이번은 그 불안스러운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 어떻게 들으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오. 뱀파이어, 아니 뱀파이어라고도 할 수 없을 거 요. 나는 죽은 채로 사는 자요." 타이번의 눈꺼풀이 심하게 껌뻑거렸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꽉 누르면서 말했다. "내 눈은 석양을 보지 못하오. 그래서 나는 밤 속에서 황혼을 살아가 오." 아무르타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끝없는 계곡 사이에 길게 뻗어있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하 늘이 마치 끝없는 계곡을 덮고 있는 천장처럼 보인다. 그러고보니 이곳 은 꼭 동굴 같은 곳이로군. 그 때였다. 갑자기 계곡 한편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날이 밝은지는 이미 오래되었 지만 워낙 깊은 계곡이라 이제서야 태양의 모습이 하늘에 나타난 것이 다. 절벽 위는 순식간에 금실처럼 반짝거렸고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고 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계곡이 밝아지면서 바위 위에 서있던 고블린의 모습도 보다 환하게 비춰졌다. 고블린은 태양이 떠올랐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일까? 지금 고블린의 눈은 아무르타트의 눈이기 때 문일까? 만물에게 공평한 태양은 300 세의 마법사에게도 그 아름다운 빛 을 똑같이 내려비췄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타이번은 그것을 느끼 지 못했다. 그래서 고블린과 타이번, 그리고 제미니에게는 희한한 공통 점이 있었다. 높은 절벽이 감추고 있던 태양이 이제서야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느끼면서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독특한 위치도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후 태양을 뒤 따라 나타난 구름이 해를 가려버렸다. 계곡은 다시 어둡고 음침한 신비 를 간직한 동굴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 때 아무르타트는 말했다. "당신의 눈이 밤을 보게 되면, 나를 찾아오시오. 지금은 당신과 내가 함께할 시간이 아니오. 그리고…" 바위 위에 선 고블린은 고개를 내리지 않은 채 나에게 말했다. "후치 네드발. 너와 내가 함께할 시간도 아니다. 물러가라. 이 고블린 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때가 되면 일어날 것이니." 고블린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렸다. "카아…" 잠시 후 고블린의 몸이 갑자기 무너졌다. 털썩. 나는 뜨거워지는 눈 주위를 비빈 다음 바위 위 의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고블린은 바위 위에 쓰러져 입에서 길다란 침 을 흘리고 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입이 아주 어렵게 열렸다.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는 없었다.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는 없었고, 다만 바위 위에 늘어져 있는 고블린이 있을 뿐이 었다. 아무르타트는 나를 거부하고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지 만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말하지 못했는데. "으…음." 내 품에 안긴 제미니가 약한 신음소리를 내는 순간, 나는 제미니를 꽉 끌어안았다. 제미니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그 목에서 느껴지는 조금 비릿한 듯하면서도 약한 소금기가 어린 냄새를 맡으며 나는 간신히 고함 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어깨가 부서질 듯이 떨려왔다. 누군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미니의 눈이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붉 어진 얼굴에 떨리는 미소를 담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내 등 뒤로 돌아와 마구 떨리고 있는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쓸어내 리고 있었다. 충혈되어 발갛게 도드라진 그녀의 입술이 떨리듯 열렸다. "후치야…" "제미니. 나는…" "괜찮니이? 괜찮은 거지?" "말을, 말을 못 했어. 아무르타트에게 꼭 할 말이, 그런 말이 있었는데 … 아무르타트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어." 제미니는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러자 그녀의 머리가 내 턱에 톡톡 부딪혔다. 그녀는 그렇게 질책하듯 이마로 내 턱을 톡톡 건드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바보 후치야. 걱정마. 다 괜찮아. 아무르타트는 알 거야." "아무르타트가?" "그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상심해하지마. 헤에. 안 어울린다, 너?" "치. 네가 어떻게 알아? 아무르타트가 어떻게 내가 할 말을 짐작한다는 거야?" "짐작하지 못할 거라는 증거도 없지. 그렇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할 말이 없어." "그럼, 그럼. 그런데 나는 할 말이 더 있는데." "뭔데?" "나 지금 숨막혀… 이 바보야! 그만 좀 놓으라고!" 제미니가 내 정강이를 걷어차고나서야 나는 '후치 네드발군이 제미니 스마인타그양을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는 상황' 에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으랏찻차차차!" 나는 거의 내팽개치듯 제미니를 놓아주었다. 제미니는 재빨리 뒤로 몇 걸음 걷더니 어깨에 힘을 지나치게 넣어서는 옷맵시를 고르기 시작했다. 탁탁탁! 저러다가 옷 찢어지겠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제미니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타이번은 장님이니까 결과적으로 이건 아무도 못 본 것이 된다. 틀림없다. 아이고, 살았다. "이제 고개를 돌려도 되나? 포옹은 끝났어?"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옷을 찢어먹을 듯이 쓸어내리던 제미니는 흠칫 하더니 눈을 부릅 뜬 채 로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최선을 다했다는 점 만으로도 무서 워보여야 할 제미니의 표정은 눈이 보이지 않는 타이번에게는 아무런 효 과도 주지 못했고 눈이 보이는 나에게는 웃음을 일으켰다. "으핫! 제미니, 그런 얼굴, 그런 얼굴!" "뭐야! 왜 웃는 거야, 웃지마!" "아, 아냐. 이힛히히히! 이건 웃는 것이 아니라고, 으헷헤헤! 나 안 웃 어, 킬킬킬킬!" 잠시 후 그윽한 표정으로 내가 제미니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는 광경 을 감상하는 척하고 있던 타이번이 말했다. "돌아가세. 주인이 가라고 하면 예절바른 손님은 나가야지." 나는 썬더라이더에 타이번과 제미니를 태운 다음 느긋하게 걸어가기 시 작했다. 이런 길에서 우리 세 사람이 모두 썬더라이더에 올라타면 썬더 라이더는 10 년 쯤 후에 관절염에 시달리게 될지도 몰라. 끝없는 계곡은 길었고 그 위를 뒤덮은 구름은 점점 짙어졌다. 아까 내 가 봤던 것이 진짜 태양인지도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그러나 그 끝을 향 해 걸어가면서 점점 계곡은 넓어졌고, 그래서 음침한 동굴처럼 보이던 끝없는 계곡은 이제 범상한 사물의 느낌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더군 다나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에 즐거워진 제미니가 계속 떠들어대고 있어서 내가 아무르타트가 있는 끝없는 계곡을 걷고 있는 것인지 우리 마을 대로를 걷고 있는 것인지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있잖아, 후치야. 아버지 돌아오셨는데 뭐 만들 거니? 나도 도와줄게. 맛있는 걸 만들자. 응? 네 아버지는 몇 달 동안이나 사람이 먹는 음식 같은 걸 못드셨을 거잖아. 아버지께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뭐니?" "우리 아버지? 물." "이이이! 불이 닿는 것 말이야! 아, 불이 안 닿는 것도 있지만 겨울이 니까…" "끓인 물." "몇 대 맞을래?" "…두 대면 되겠냐?" "아니, 세 대!" 제미니는 계속 수다스러웠지만 반대로 타이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 다. 나는 주로 제미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타이번을 관찰했고, 결 과적으로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타이번은 그제서야 애잔한 즐거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외롭지 않아. 바로 옆에 또다른 장님이 있으니까." 제미니는 까르르 했고 나는 으르릉 했다. 그런 식으로 올라올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계곡의 끝에 도달했을 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계곡은 계 곡일 따름이었다.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가 있는 곳이라는 무서운 이 름은 눈 앞에 펼쳐진 정경에 어울리지 않았다. 겨울의 계곡일 뿐이다. 겨울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저게 그러니까, 에. 분명히 내가 아는 거 였는데? "어머? 눈이다?" 역시 나보다는 제미니가 확실히 사람을 잘 알아본다. 사람뿐만이 아니 라 다른 것도. 음. 맞았어. 저거 이름이 눈이었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단순히 눈이라는 것으로는 모자라. 그러니까 다른 말이 필요한데… 다시 한 번 제미니가 나를 도왔다. "와! 첫눈이다!" 제미니! 요 깨물어주고 싶은 계집애야! 맞았어. 첫눈이다. 하늘에서 하 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미니의 외침을 들은 타이 번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와 제미니는 동시에 입을 다문 채로 타이번의 손에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쩌면 썬더라이더까지도? 우리들의 소망을 들은 것인지, 가볍게 떨어져내리던 눈송이 하나가 천 천히 타이번의 손으로 향했다. 제미니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눈을 동그랗 게 떴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기 시작했다. 떨어져라! 그대로! 아, 이런. 흔들리지 마! 조금 왼쪽으로, 우와, 옆에서 입김이라도 불까? 그 렇지! 됐어. 그대로 떨어져라. 이젠 바람 불지마! 마침내 타이번의 앙상한 손에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고 타이번은 손가락 끝을 움찔했다. 그리고 나와 제미니는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만세라도 외치고 싶어지는데. 눈송이는 타이번의 손에 닿자마자 빠르게 녹았다. 타이번은 천천히 손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그 손바닥을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그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구나. 눈님이 오시네." 타이번의 말이 마치 허락이나 되는 것처럼 눈송이는 더욱 소담스럽게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정확히 지적 할 수 없는 하늘의 한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눈송이가 퍼져나 가고 있었다. 얼굴에 닿는 눈송이 때문에 볼이 선뜻했다. 고개를 내려 다시 끝없는 계곡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커텐처럼 끝없는 계곡을 가리는 눈송이들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제미니는 말 위에 앉은 채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제미니는 두 손바닥을 모아 그릇처럼 만들고는 눈송이를 담아 모으려고 들고 있었다. 기어코 눈송이 몇 개가 그녀의 모아쥔 손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제미니는 재빨리 손을 얼굴 앞으로 당겼다. 제미니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손바닥 을 내려다보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손바닥의 눈송이들은 녹은 모양이 었다. 제미니는 눈을 찡그리더니 손바닥으로 양 볼을 문질렀다. "앗, 차거!" 그럼 눈 녹은 물이 뜨거울까. 이런, 계집애. 제미니도 자기 말에 스스 로 웃더니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와아, 멋있다. 후치야. 네 아버지 돌아오시게 된 것을 축하해주는 것 같잖아?" "돌아오시게… 그래. 이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제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응? 어, 그렇지. 첫눈을 맞으며 돌아가는 거지." 첫눈을 맞으며,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떨어지는 단풍잎을 맞으며 집을 떠났지. 어두운 숲속, 발걸음마다 부서 지는 낙엽의 사스락거림을 들으며 산과 들, 그리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 지만 어디로든 이어지는 길 위를 배회했지. 맑고 싸늘한 가을 밤하늘 아 래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 고향을 가리키는 별자리를 더듬어보았던가. 그리고 이제 첫눈이 내리는군. 그래. 이젠 끝이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어어이!" 터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먼저 떠난 우리 일행들은 계곡 바깥에 모여 서 있었다. 제미니는 두 손을 모아 나팔처럼 만들더니 마주 고함질렀다. "오오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계 곡 바깥에 서있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쪽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나는 달려오는 아버지를 향해 미소지으며, 동시에 떠나간 내 한 시절을 향해 미소지었다. 내 마법의 가을은 끝났다. "그럼, 네드발 백작님이로군요." "예. 그리고 영주님에게만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아이고, 영주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말씀 낮춰주세요." 의자에 앉은 영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 끝에 기침이 뒤따라서 보는 나를 안쓰럽게 만들었다. 강금생활 동안 초췌해진 영주님 의 몸은 아직껏 살이 붙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 하멜 집사를 좌절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쿨, 쿨럭. 으음… 그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느냐?" "예.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앞으로도 계속?" "예. 비교가 이상하지만, 카알이 그랬던 것처럼 신분을 숨기고 살고 싶 습니다." "왜지? 네가 백작이 되었으니 네 영지로 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보다 편 하게 모실 수도 있을 텐데. 그러고보니 국왕께서 하사하신 영지에 대한 책임은 어쩔 테냐?" "그 영지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보살피고 있습니다." 나는 펠레일과 코다슈씨에 대해 영주님에게 설명드렸다. 영주님은 의자 에 편히 기대신 채 즐거운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고개를 끄덕 이셨다. "만일 제가 다스렸다면 그거야말로 국왕 전하와 제 영지의 주민들에 대 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거겠죠. 17살짜리 전직 초장이인 영주라니, 우 습잖습니까? 제가 영주가 된다면 주민들이 밤에 쓸 초야 얼마든지 대줄 수 있겠지만." 영주님은 잔잔하게 웃으셨다. "훌륭한 영주로고. 자신의 재능의 한계를 잘 알고 있고 그 재능을 넘어 서려고들어 주민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있으니."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네 아버지에게도 숨길 작정이냐?" "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제보살핌을 필요로 하게 될 때까지는… 제 생 각만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아버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 는 것이 더 좋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훌륭한 영주님이 다스리는 영지에 계시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천천히 탁자를 또각거리시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 보았다. 창밖에는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원래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우리 영주님의 집무실이었지만 하멜 집사의 필사적인 노력이 깃들어 꽤나 안온하고 따스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1. 귀를 기울이면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가 끝나 고, 영주님은 무릎에 올려둔 모포를 끌어당기시며 피로한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글쎄다.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네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그래서 세월이 너에게 답을 주지 않을까 하는 일반론 외엔 줄 것이 없구나. 일 단은 너를 돕겠다. 정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지금까지처럼… 제가 영지의 주민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신 분상 가져야되는 여러 가지 의무나 권리에 대해 영주님께서 도와주셨으 면 합니다." "너는 우리 영지의 은인이자 나의 은인이니 너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 다. 하지만 영주의 의무를 대신하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겠구나. 네가 영지에 대해 가져야 되는 책임은 그 훌륭하다는 청년들 에게 맡겨두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네가 수도나 국왕에 대해 가 져야 되는 책임은 어쩌겠느냐? 하다못해 곧 있으면 다가올 신년 인사 같 은 것도 있는데. 어전에 찾아가 국왕께 인사를 드려야되지 않겠느냐? 사 소한 일이지만 꼭 해야되는 일이기도 하지." "예.그런 것들도 있다더군요.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만, 저, 영주님도 그 때는 수도에 올라가시죠?" "그렇지." "저, 그 때 저를 수행원으로 삼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영주님은 미소를 지으셨다. 강금 생활 동안 더욱 깊어진 그 눈가의 주 름살이 굵게 패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네가 공무상 수도로 가야 될 때마다 내가 너의 위장을 도와줘야 된다는 말이군?" "예. 죄송한 부탁입니다만…" "아니, 괜찮다. 어차피 영주가 수도까지 가야할 일은 자주 발생하지는 않으니까." "그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러지. 그게 네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다." "감사합니다." 영주님은 잔잔히 웃으시며 다시 모포를 끌어올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 나 벽난로로 다가갔다. 벽난로의 장작들을 뒤적거려 불길을 일으키고 있 을 때 등 뒤에서 영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구나. 왜 네가 백작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돌려보니 영주님께서는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영 주님은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쿨, 쿨럭. 으으음… 네가 영지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봐 영주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구나. 그 훌륭하다는 청년들이 있으니 그들을 네 가신으로라도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그들과 협조 하여 네 영지를 보살필 수 있을 테니." "그렇긴 합니다만. 저, 창문을 닫을까요?" "아니. 괜찮다. 바람은 별로 안 부는구나. 조용한 눈이라 보고 있으니 즐겁군." "예…" "네가 경계하는 것은 영주의 책임이 아니라 영주라는 지위 그 자체인 모양인데, 맞느냐?" 나는 영주님의 백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도 볼 수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영주가 되므로써 제가 변하 게 되는 것이 싫습니다." "왜 변하고 싶지 않은 거냐. 지금의 네가 좋기 때문에?" "물론 저는 지금의 제가 좋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영주가 되면, 그 때는 영주인 저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비교적 낙천 적이라 어떤 상황이든 대개 좋아해버리고 맙니다." "너는 영주가 되어도 그 상황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게냐?" "예." 영주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셨다. 영주님은 의자 등받이에 관자놀이를 기대며 나를 비스듬하게 올려보셨다. "그렇다면 네가 영주가 되지 않으려드는 이유는 갈수록 모호해지는구 나. 어떤 상황에 처하든 특별히 두려워하는 것도, 꺼리낄 것도 없다면 특별히 영주가 되지 않으려드는 이유는 무엇이냐?" 나는 천천히 걸어가 다시 영주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조금 비스 듬히 앉아서 영주님이 아니라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았다. 마치 꿈 꾸듯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영주님에게 질문했다. "영주님. 먼저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영주님께서는 아무르타트 정벌에 실패하셨습니다. 이제 제 10 차 아무르타트 정벌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영주님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영주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기 때 문에 그 정적의 시간은 꽤나 지리했다. 잠시 후에야 영주님께서는 말했 다. "아니다. 현재로서는 그런 생각은 없다."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르타트 정벌을 또다시 기획했다가는 영지를 도탄에 빠트리게 되지 않겠느냐. 국왕께 상주드려 캇셀프라임까지 불러왔건만 성공하지 못했 다. 만일 성공하려면 캇셀프라임보다 더 엄청난 준비가 필요할 텐데, 그 런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 "그것뿐입니까?" "말하고 싶은 바가 있거든 말해보거라." 나는 고개를 돌려 영주님의 눈을 마주보았다. 비록 움푹 들어간 눈이지 만 영주님의 눈은 맑았다. 카알의 형님이시지. 그래. 비록 배다른 형제 라고는 하지만 영주님은 카알의 형님이야.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영주님은 한 영지를 평생 다스려온 분이시지. "저희 아버지도 아무르타트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가지셨던 분입니 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그 복수심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무르 타트를 증오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주님께서도 이제 더 이상 아무르타트를 증오하시지 않게 되신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 니다만." 영주님께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다. "정확하다." "그렇습니까." "어떻게 들릴지 의심스럽다만, 나는 이기적인 자였다. 겉으로야 이 영 지를 위협하는 아무르타트를 없애는 것이 이 영지를 위하는 일이라는 식 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속였지만…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내 가 원한 것은 아무르타트의 파멸이라기보다는 내 복수심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 복수심만 표현된다면 나로선 아무르타트가 죽든 말든 상관 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창을 들어 돌진했었다. 그리 고 이제 만족감을 느낀다. 늙은이의 망령이 정도가 지나친 것 같구나." "아니오. 그것은 제 아버지도,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버지 는 아무르타트가 절벽이나 강물처럼 느껴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 고 저는 그의 면전에서 그를 가리켜 제 어머니의 원수라고 고함질렀습니 다. 하지만 그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변화라고?"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자 눈 에 피로가 느껴졌다. "제 여행 동료 중에 제레인트라는 프리스트가 있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재담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은 짝사랑이고 가장 무서운 병은 상사병이라더군요. 그 두 가지는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듯하다." "사랑은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복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수는 상대를 파멸시키려는 것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상대를 변화시 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복수심을 전달시켜서 상대가 현상태에서 파멸 상 태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모든 복수자가 복수 대상을 죽이기 전에 구차하게 자신의 이유를 설명해주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하하… 그래. 옛이야기에서는 항상 그렇더구나." "예. 복수자의 말 중에 흔한 말이 있습니다. 내 손으로 끝내야 한다, 혹은 내 눈으로 직접 녀석의 파멸을 봐야겠다.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이 나 늙어죽는 것은 못 봐준다. 흔한 이야기죠. 자신에 의한 상대방의 변 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예.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저희 아버지가 말씀하신 절벽이나 강물처럼, 아무르타트는 인간이 변 화시킬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전 그 자의 면전에 대고 '당신은 살인자 다.' 라는 식으로 말해줘봤습니다만 소용없었습니다. 만일 사람 대 사람 이었다면 '당신은 살인자다.' 라고 말해주면 '내가 왜 살인자냐?' 는 식 으로 반응할 겁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뻔뻔스럽게 반 응할 수도 있겠지만 속사정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그렇다.' 는 식으로 반응했습니다. 마치 제가 '하늘이 푸르다.' 고 말 하자 '그렇다.' 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래가지고서는 짝사랑이나 상사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상대가 변화하지 않으면 복수 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것 과 비슷할까요. 무슨 짓을 해도 수백년 전에 죽은 자가 어떻게 변할 리 가 없으니까요." 영주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내가 내 영지의 17 세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 구나. 하하하. 네 생각은 그럴 듯하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언젠가 카알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말이었지?" "그는 우리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은 아무르타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 이야기는 들어보았다. 주로 내 복수를 말리고 싶을 때 그가 잘 하던 말이었다." "그랬군요. 어쨌든… 용서하시길. 그것은 거만한 말이었습니다." "거만하다고?" "그것은 조화가 아닙니다. 강물이 흐르다가 흙덩이나 바위를 만나면 깨 어버리고 흐릅니다. 하지만 도저히 깰 수 없는 어마어마한 바위나, 아니 산이 가로막는다면? 강물은 돌아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강물이 자 존심이 있다면 말하겠지요. 나와 산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산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하하하…" 나는 불길에 쓰러지는 나무토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카알이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르타트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한 것입니다."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발 사이로 하멜 집사의 외침이 아스라하게 들려왔 다. 아마도 안뜰에 쌓이는 눈을 어떻게 치워보려고 경비대원들과 함께 분투 중인 모양이다. 하지만 눈 오는 날 들려오는 소리가 다 그렇듯이, 하멜 집사의 고함소리도 포근하게만 들려왔다. "우리가 변화했다고 했느냐." "예. 그리고 그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적어도 인간이 대지 위를 걷게 된 이후로는." "뭐라고?" 다시 영주님을 돌아보다가 나는 영주님의 모포가 거의 무릎 아래로 떨 어져내릴 지경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잠시 일어나 영주님의 모포를 다시 올려드리고나서 말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는지. 인간이 별을 보면 별자리가 생기고, 인간이 숲속을 걸으면 오솔길이 생긴다는." "그래. 들어보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변화시킵니다. 정녕 저 드래곤마저도 마찬 가지입니다. 저는 인간 때문에 변화해버린 크라드메서라는 드래곤을 압 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고, 인간화되어버렸지요. 그리고 그 때 문에 그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상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말이더냐?" "인간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주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만 인간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루트에리노 대왕께서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고나서 바뀐 것이 무엇입니 까? 그 전에는 드래곤이 인간을 지배했고, 지금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합 니다. 하지만 그 때도 인간은 인간이었고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자체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보다 높은 문명을 가지게 되었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문명은 변화가 아닙니다. 문명, 법, 도덕, 사회, 철학, 국가… 모두 인간의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가 변한 것이지 인간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더 발달했을까요? 아니오. 전 사가 보다 예리한 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 전사가 발달한 것은 아 닙니다. 그 전사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도구인 문명 이 발달했다고 해서 우리가 발달한 것은 아닙니다. 역사라는 것은… 인 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구의 변화를 기술해온 것입 니다." 그래. 그리고 그것이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문제였지. 루트 에리노 대왕은 드래곤의 지배가 없어지면 우리는 만물을 변화시키며 발 달할 것이라고 믿었지. 그는 문명과 발달을 혼동한 것이었어. 그리고 핸 드레이크는 모든 종족을 발달시키려고 했지. 하지만 변화할 수 없는 인 간으로서 변화를 꿈꾸었으니 그는 모순을 내재하고 출발한 것. 그 닮은 꼴의 머저리 영웅들. "하지만 대륙의 서쪽, 이곳에서 인간은 그 종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서운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무르타트가 바로 그것이죠." "아무르타트가…" "그렇습니다. 아무르타트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화시킬 수 없 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우리 헬턴트의 주민들이 변화했습니다. 그 변 화의 모습은 저로서는 정확하게 묘사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은 인간에게 일어난 최초의 변화이고, 따라서 비교해 볼 다른 대상이 없 습니다. 제가 아직 나이 어리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복수 를 포기하는 영주님과 저의 아버지, 그리고 저의 모습을 볼 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아무르타트가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글쎄요. 그가 했던 말들 중 몇 가지가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석양의 감시자, 즉 모든 것의 마지 막에 서서 기다리는 자입니다. 변화의 종결점에서 기다리는 자, 즉 그 자체로서 더이상의 변화 가능성이 없는 최후를 의미하는 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는 인간이 가지는 복수심이라는 것을 이 해는 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마치 절벽이나 강물처럼. 그러니 우리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헬턴트 주민다운 선택입 니다. 이 대륙의 다른 땅의 사람들이라면 좌절한 복수에 괴로워할지도 모릅니다만, 영주님. 복수를 완성시키지 못하셔서 괴로우십니까?" 영주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너와 같다." "예. 저도 제 어머니의 복수를 완료하지 못했습니다만 괴롭지는 않습니 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니까요." 영주님은 깊게 한숨을 내쉬셨다. 그 긴 한숨 끝에 영주님은 몇 번 가볍 게 잔기침을 하시고는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셨다. 이제 눈은 창턱에도 쌓여 창턱 아래는 하얀 솜을 깔아둔 것처럼 보였다. 털썩, 지붕에서 눈 이 떨어져내리며 잠시 창문 아래에 작은 폭풍이 일어났다. "삽이 모자라요!" "에이, 치우면 뭐해요. 다시 쌓일 텐데." "이놈들아. 어차피 다시 배 고파질 텐데 밥은 왜 먹냐?" 눈송이들 사이로 하멜 집사의 날카로운 지적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 를 이어 경비대원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포근한 웃음소리다. 영주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했다. "그래서였구나. 내가 이토록 평온할 수 있었던 것은. 고맙다."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네가 어떤 지위에 있어도 마찬가지라는 것 때문이구나. 네가 설령 국 왕이 되어도 너는 후치 네드발이며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로 있어도 여전 히 후치 네드발이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럼, 공연히 익숙하지도 않은, 별로 반가울 것도 없는 영주, 안되어 도 무방하겠지. 그것은 네게 공연한 소란 이상의 의미가 없겠구나." 영주님의 말은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의 대화가 영주님께는 너무 피곤했던 것일까? 나는 미소를 지었고 영주님도 미소를 지으셨다. 바깥에 가득 쌓인 눈에서 비쳐들어오는 하얀 빛 때문에 영주님의 깊은 주름살이 더욱 두드러졌다. 영주님은,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제 둘 다 겨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다시는 봄을 맞이하지 못하겠지. 우리는 아무르타트처럼 변화해버린 것일까. 석양에 서 있는 그처럼. 혹 시 드래곤 로드와 접촉했던 루트에리노 대왕은 드래곤처럼 변화된 것이 아닐까? "루트에리노 대왕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입술이 열리고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아무르타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지 못하고 첫눈을 맞이하신 대왕처럼… 저도 이제 하늘이 땅에게 던지는 선물 중 가장 포근한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울하군 요." 영주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고개를 돌려보니 영주님은 내리 는 눈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싱긋 웃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의 불을 보살핀 다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영주님, 푹 쉬시길.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2. 성 안뜰로 내려서자 눈싸움에 몹시 심취해있는 경비대원들과 그 옆에서 고함을 꽥꽥 질러대고 있는 하멜 집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놈들아! 네녀석들 나이가 몇 살인데 눈싸움을, 으윽!" 경비대원 세로가 집어던진 눈덩이가 하멜 집사의 안면에 정확하게 날아 갔다. 집사님은 얼굴을 감싸며 웅크렸고 세로는 기겁하면서 외쳤다. "으아, 집사님! 괜찮으세요?" "…받아랏!" 이윽고 하멜 집사는 무서운 속력으로 눈덩이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제 3 자적 위치에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멜 집사의 공격에는 매 서움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하멜 집사의 넘치는 의욕은 가져가지 못 했는지 몰라도 그 팔다리의 힘은 꽤나 가져가 버렸던 모양이고, 경비대 원들은 여유있게 집사님의 공격을 피해내었다. 하긴 헬턴트 경비대원들 이 제대로 피하지 못할 정도의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얼마 되지 않겠지. 나는 그 포근한 정경을 바라보며 가슴 깊숙이 찬바람을 집어넣었다. 몸 속이 전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면서 머리 뒤까지 시원해졌다. 반드시 봄이 오기 때문에 겨울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야. 새벽이 오기 때문에 밤 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듯이, 그리고 반드시 백작이 될 수 있으니까 후 치 네드발이 잘난 것이 아니듯이. 하하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 워. 욕구불만의 종족들이여, 그대들의 주위를 보라. 미래는 아무르타트 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현재는, 지금 내 눈 앞으로 날아오는 저 눈덩 이처럼 아름다운…? 퍽! "어라? 저게 누구야? 아, 후치구나?" …그리고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야지. 미래를 위해 감정을 속이면 안돼. "받아라아앗!" 아마 오늘자 경비대 일지에는 '헬턴트 경비대, 후치 네드발의 공격에 의해 재기불능의 완패를 당함.' 이라고 기록되게 될 거다. 나는 경비대 원들을 주축으로 해서 결여된 예술성과 무시된 상식성을 자랑하는 10 큐 빗짜리 눈사람을 만들어놓고는 하멜 집사에게 상당한 치하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마굿간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말들이 뛰놀던 운동장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그 하얀 눈 위로 말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나는 어지럽게 난 말들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보태면서 운동장 옆에 있던 마굿간으로 들어섰다. 마굿간 건물 안은 컴컴했다. 외풍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을 모두 닫아 두어서 사물이 잘 식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캄캄한 건물 안에서 한쪽에 피어있는 모닥불만이 바알갛게 빛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오넬이 앉아 있었다. "누구냐. 후치?" "예. 뭐하세요?" 나는 오넬의 곁으로 다가가 모닥불에 손을 쬐었다. 오넬은 모닥불 옆에 앉아서는 손에 두꺼운 헝겊 같은 것을 들고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자세 히 보니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 신발을 만드는 거야. 눈이 내리니까." "어, 누가 급하게 말을 탈 일이라도 있어요?" "하하하, 이 녀석아. 말 달릴 때 말 신발이 왜 필요하겠냐. 이건 운동 시킬 때 신기는 거야. 말 입는 옷도 저기 있잖냐." "이런 날씨에 운동을 시켜요?" 오넬은 주머니칼로 실을 탁 자르더니 그 말 신발이라는 것을 눈 앞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말이라는 놈은 말이다. 달리지 않으면 병이 생기는 법이다." "아, 그래요?" "음… 됐다. 한 번 신겨보자. 이건 썬더라이더의 것이야. 다른 말들은 다 자기 신발이 있었거든." "아, 그랬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뭐." 우리 집에는썬더라이더를 둘 곳이 없어서 썬더라이더는 성 안의 마굿 간에 들어와있었다. 나와 오넬은 함께 일어나 썬더라이더를 향했다. 썬더라이더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 번 기운차게 울어젖혔다. 오넬은 빙 긋 웃으며 말했다. "썬더라이더, 퍽 심심했지? 자, 이제 너도 한 바퀴 돌아봐야지." 오넬은 썬더라이더의 발을 들게 하고는 그 양말 비슷하게 생긴 신발을 신기려 했다. 그런데 썬더라이더는 자꾸 몸을 틀면서 오넬의 손을 피했 고 하마터면 오넬은 썬더라이더에게 손을 밟힐 뻔하기도 했다. 결국 오넬은 고개를 갸웃거러더니 그런 자신이 우습다는 듯이 실실 웃 어버렸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거 참. 아직 낯이 설어서 그런 모양이다. 네가 해 볼래?" 그러나 내가 덤벼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썬더라이더는 거북하다는 듯이 자꾸 몸을 틀면서 내 손길을 피했다. 짜증이 난 나머지 녀석을 뒤집어놓 고 강제로 신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오던 도중 간신히 녀석의 사정을 눈치채었다. "잠깐, 오넬씨. 북부대로는 여기보다 더 춥겠죠?" "어? 그렇겠지." "그럼 이 녀석은 원래 추위에 꽤 강할 거예요. 원래 북부 출신이거든 요." "그래? 허허, 그럼 이건 없어도 되겠네. 괜한 짓을 했군." 오넬은 피식 웃으며 썬더라이더의 목을 쓸어내렸다. "알았다, 알았어. 이 녀석아. 그럼 넌 그냥 나가봐도 상관없다는 말이 지?" "아, 그래요. 오넬씨. 운동시키신다고 그랬지요? 제가 타고 한 바퀴 돌 아봐도 되겠어요?" "음… 그래라.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지는 말고. 몸이 너무 젖으면 아무 리 북부산 말이라고 해도 감기에는 걸릴 테니까 적당히 달리게 해라." 가볍게 뛸 생각이라서 안장도 승마용의 가벼운 것을 얹었다. 모험 다닐 때 쓰던 안장은 무시무시한 거였는데. 나는 오넬에게 망토를 하나 빌린 다음 썬더라이더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이 녀석아. 너야 추위에 까딱없 다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눈이 내리는 헬턴트 영지는 고요했다. 며칠 째 계속 내리는 눈에도 지겨워할 줄 모르는 것은 어린 꼬마들 뿐 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골목길에서 뛰어나왔다가 골목길로 뛰어드는 몇 몇 꼬마들 이외에는 대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소복히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꼬마들은 눈발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키 큰 그림자를 보고는 크게 놀랐지만 그것이 썬더라이더를 탄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는 크게 감탄했다. 난 아이들에게 몇 마디 던져주고는 마을 바깥으로 천 천히 걸어나왔다. 보이는 것은 길뿐이었다. 하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과 하얀 눈으로 뒤덮인 땅, 게다가 제 흥에 겨워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지평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간혹 외로이 서 있던 나무가 눈덩이의 무게를 이 기지 못해 제 가지를 부러트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질 뿐 사위는 고요했 다. 눈이 쏟아지는 날씨에 교외를 어정거리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 다. 등 뒤에서는 마을에서 들려오는 꼬마들의 까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 지만 눈 앞으로는 희고 막막한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 그리고 그 위로 눈송이들이 게으르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정경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력이 흘러넘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망토 위로 쌓이는 눈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퍼부어댄 끝이라 눈은 하늘거리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꽤 오랫동안 걸 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르지만 발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뚜렷한 이유도 모르면 서 썬더라이더의 고삐를 놓았지만 썬더라이더는 그대로 걸어갔다. 그리 고 나는 썬더라이더가 정확하게 걷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며 안심했다. 문득,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썬더라이더의 발 뒤로 마을까지 주욱 이어져 있는 곧은 발자국이 보였 다. 사실 마을의 모습은 희미했지만 그 발자국의 끝에는 분명 마을이 있 을 것이다. 좋아. 안심이야. 나는 다시 무작정 떠나려는 것은 아니야. 마을과 썬더라이더를 잇고 있는 발자국은 헬턴트 영지와 나를 잇고 있는 끈처럼 보였다. 저 끈이 있는 이상, 무작정 달려나갈 일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완전히 썬더라이더에게 맡겨둔 다음 느긋하게 앉 아서 기다렸다. 나는 안전해. 그러니, 이제부터 겨울의 하얀 들판이, 저 초절적으로 매력적인 들판이 무엇을 줄지 기다려보자고. 마침내 하얀 배 경 속에서 불쑥 언덕이 나타났다. 지평선의 모습조차 희미하던 참이라 언덕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머릿속의 지식으로 간신히 눈 앞의 언덕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미니가 나를 기다리던 언덕이었다. 언덕 위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아무런 명령 없이도 썬더라이더는 멈췄다. 나는 약간의 멋적음을 느끼 면서 썬더라이더에서 내렸다. 뽀드득. 뽀드득. 땅에 쌓인 눈이 짙은 한 숨을 내쉬는 것을 들으며 나는 언덕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리고 하느적거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이루릴은 언덕을 걸어내려왔다. 어깨엔 언제나처럼 묵직한 배낭이 맞춤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허리 옆 으로 달그락거리는 에스터크는 마치 그녀의 허리에 매어둔 방울처럼 보 인다. 이제 막 출발한 듯하면서 동시에 기나긴 여정의 끝에 도착하는 것 같은, 상쾌하면서 피로하고 가벼우면서 착실한 걸음걸이로 그녀는 걸어 왔다. 그녀의 걸음이 멈춰지고나서야 나는 우리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 을 깨달았다. 만일 그녀가 멈추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걸어가 그녀 와 부딪히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눈이 흩날리는 언덕을 걸어내려오는 엘프는 순간 속에 비끄러매어진 영원 같았고 도달할 수 없는 환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들은 서로의 입매에 매달린 미소를 볼 수 있 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허둥지둥 멈춰서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살폿 웃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는 아쉬울 정도로 눈이 쌓여있었다. 더군다나 자 켓이나 바지에는 거의 눈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발디딤이 가볍기 때문일 까? 나는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벌써 허벅지까지 눈덩이를 덕지덕지 붙이게 되었는데 말이야.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가느다랗기 때문에 추워보이는 손가락 이지만 손 안에서는 따스했다. 아니, 내 손이 차가워져 있기 때문에 그 렇게 느낀 것일까. "잘 찾아오셨군요. 좋은 여행이셨습니까?" 이루릴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녀의 머리에 얹혀져 있던 눈 들이 가볍게 흩뿌려졌다. 붙어있던 것이 아니다. 얹혀져 있던 것이다. "예. 찾아오는 것은 쉬웠어요. 후치가 흔적을 많이 남겨두어서." "예? 아, 하하하." "칼라일 영지의 펠레일씨는 당신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루릴은 우려를 담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식이기에? 설마… "레너스시의 유스네양이 당신을 죽여버릴 거라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만." "아, 예. 그, 그럴 테지요. 으윽. 얼굴도 안보고 지나쳤으니까. 아, 유 스네가 한 말은 농담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루릴." "농담인가요? 아아, 다행이군요!" 웃지도 못했다. 이루릴의 밝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죽었다 살 아난 것처럼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어버렸으니까. 나는 열적은 기분에 망 토의 눈을 털어내며 질문했다. "저, 그런데 레니와 제레인트는 일스에 잘 도착했습니까?" "예. 두 분 모두 잘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우리가 할 일인데…"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잖아요?" "이루릴이 친구여서 고맙고 기뻐요." 이루릴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다시 생긋 웃었다. "저도 고맙고 기쁘네요. 후치." 정취가 다르다. 그래. 바로 곁에 마법이 걷고 있으니 겨울 들판의 마력 은 완연히 수드러들 수밖에 없지. 그래서 주위는 이제 물씬 풍기던 마력 대신 고요함이 약간 지나친 엄숙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루릴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어느 새 우리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썬더라이 더는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어깨 너머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핏 웃어버렸다. "쳇. 저런 녀석이 명마라니, 믿을 수 있겠어요?" "예?" "조금이라도 훈련된 말이라면 기수가 내린 상태에서는 함부로 움직이면 안된다는 것 쯤은 안다는 말입니다." "네… 그렇게 훈련시키나요?" "예. 아마 제멋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큰 이유겠지요. 물론 기수가 말 찾을 때 편하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아. 알겠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름답군요. 웨스트그레이드에는 항상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나요?" "예. 회색산맥 때문인 것 같아요." "언딘은…" "예?" 이루릴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하지만 부드 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처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손짓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녀가 눈송이의 궤적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눈송이 하나가 땅에 떨어지지 못한 채 그녀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하마 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이루릴의 손이 느리게 움직이며 작은 눈송이를 따라간다. 그러나 눈송 이가 이루릴의 허리 쯤까지 내려왔을 때 이루릴의 손은 잽싸게 움직여 그 눈송이의 아래를 스치고 지나가 다시 올라간다. 마치 빠르게 물을 떠 올리는 것처럼. 그러자 그 손이 지나치면서 일으킨 세찬 바람을 따라 눈 송이가 다시 위로 솟구친다. 잠시 눈송이가 거꾸로 이루릴의 손을 따라 올라간다. 그 순간 이루릴의 손은 다시 느려졌고 눈송이는 바람의 구속에서 벗어나 다시 유유히 비행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루릴의 손가락은 마치 피리를 연주하는 바드의 손가락을 연상하게 만드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눈송이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루릴의 손은 단 한 차례로 눈송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눈송이는 녹아버렸거나 부서졌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눈송 이로하여금 손가락 사이를 비행하게 만들었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치는 새처럼 눈송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가락들을 피해 비행했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오로지 이루릴의 정교하고 날렵한 손놀림으로만 이루어지 는 것이었다. 이루릴은 호흡하는 일처럼 여상스럽게 그런 일을 하며 내게 말했다. "실프의 가장 기승스러운 노여움이 있을 때는 샐러맨더도, 노움도 숨을 죽입니다. 하지만 언딘만은 저 포근함으로 실프를 달래지요. 고요하군 요." 그래.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씨다. 내가 실프라도 눈송이가 애처로 워 바람 불지는 못하겠다. 이루릴은 갑자기 손을 뒤집었으며 그녀의 손 주위로 비행하던 눈송이는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이루릴의 중지 와 검지 사이로 천천히 떨어져내렀다. 무의식 중에 입이 열렸다. "당신은 핸드레이크를 찾아서 클래스 10의 마법을 익히려는 것이 목적 이었지요?" "아시다시피 그렇습니다." "그거 포기하세요." "알겠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하마터면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이루릴은 허우적거리 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난 그녀를 안심시킬 여유를 갖 지 못했다. "이, 이루릴,저, 알려줄 게 있는데 말이죠.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 다고 믿는 말을 건넬 때에도 상대의 거부 반응을 예상해서 거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준비를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요." "그렇습니까." "왜 질문하지 않지요?" "질…문이오?" "왜 클래스 10의 스펠을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루릴은 잠시 미안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정성껏 궁금한 표 정을 지으며 말했다. "녜, 후치. 왜 클래스 10의 스펠을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인가요?" "…아니, 관두지요. 저 때문에 궁금하지도 않은 것 일부러 질문하실 필 요는 없어요. 그런데 내가 좀 궁금한데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거 죠?"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3. 고아한 성품을 가진 이루릴은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바보를 바라보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바보가 되는 기분이 었다. "후치와 함께 보낸 저의 시간은 후치의 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 "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나요?" "어, 저, 아니죠.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당신 속에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 "그럼, 당신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과 함께 하면서 보아온당신의 모습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이 필요할까요. 묻 겠어요, 후치. 자신의 행동을 자신에게 설명해야 됩니까?" "…예. 우리는 그래요. 일생을 함께 보내온 부모의 말이라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되죠. 자신의 말이나 행동도 마찬가지예요.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됩니다." "그런가요." "우리는 불안하니까…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요." "아니오. 당신은 나에게 당신들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방식을 선물했어 요. 고마워요." "다행이군요. 휴우. 쩝, 그럼 이루릴. 이제 클래스 10의 스펠을 찾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죠? 계속 이 땅에 남아있을 건가요?" 이루릴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녀의 머릿결 위에 얹히는 눈송이들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 인 채로 가로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위가 낮은 엘프입니다. 제 수탐이 실패했음을 보고하는 것으로써 제 소임은 끝날 것 같습니다. 제 수탐의 과정과 그 결과를 심사하고 대안을 생각하는 의무는 제게 있지 않습니다." "지위… 엘프들은 조화로운데 왜 지위가 있는 거죠?" "세계는 조화롭지만 동서남북은 있지요. 후치. 짐작해 보자면… 바이서 스 임펠은 동쪽에 있나요? 하지만 제레인트씨라면 바이서스 임펠은 서쪽 에 있다고 말하겠지요. 그런 차이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릴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런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나는 기쁜데요? 당신들이 세상을 떠나지 않게 되었 다는 것 말이예요." 이루릴은 빙긋 웃었다. "저도 기쁘군요.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신다고요?" 어느새 이루릴의 걸음은 멈춰져 있었다. 그래서 당황한 내가 반문했을 때 나와 그녀의 거리는 대여섯 발자국 이상 떨어져있었다. "아니, 저, 좀 지내시다가 가지 않고…" 말해놓고나서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런 멍청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행히도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님으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처지가 마땅치 못하군요. 저는 여기서 체재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 바쁜 일이 있는가 보네요." "그렇습니다. 레브네인 호수가 얼기 전에 페어리퀸에게 돌아가봐야 됩 니다. 그녀를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음? 얼음이 문제가 될 줄은몰랐군요. 그거, 이루릴의 마법으로 그냥 부숴버리면 되지 않나요?" 이루릴의 얼굴을 보고서는 내가 과연 말을 잘 한 것인지 잘못 한 것인 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루릴은 잠시 후 별로 달라지지도 않은 어조 로 말했다. "후치. 친구의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손님은 없을 것 같아요. 페 어리들은 당신들이 말하는 어투로 '물'이라든가 '얼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죄송합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루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나는 황급하게 말했다. "그럼, 저, 이루릴. 귓가에 햇살을…" 이를 악물고 그야말로 간신히 말했다. 그래서 내 목소리는 작별 인사라 기보다는 결투 신청으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지금까지의 시간도 이미 너 무 길었다. 그녀를 더 붙잡아서는 안 된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그 녀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루릴의 모습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마법을 쓰는 건가? 나는 일렁거리는 이루릴의 모습을 보며 힘들 게 말을 짜내었다. "햇살을…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하던 이루릴이 살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의 가슴 위로 소담스럽게 늘어진 머릿결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자신의 머릿카락으로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수도 없이 많은 머리카락들이 눈가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매끄럽고 가는 머리카락들이 수없이 눈 주위를 훑어내리는 느낌 을. 터무니없이 난폭해지고 싶고, 동시에 터무니없이 차분해지는 그 시 간은 가장 짧은 영원이었고 가장 긴 순간이었다. "웃으며 떠나게 해주겠지요?" 난 눈을 질끈 감아서 마지막 눈물을 짜낸 다음 눈을 떴다. 이루릴의 하 얀 얼굴에 어리는 미소, 그리고 그 하얀 얼굴 앞으로 스쳐 떨어져 구분 이 잘 안되는 눈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난 웃어요. 웃겠어요." "고마워요." 이루릴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얼굴 근육을 힘들게 움직이며 웃음을 지어보였 다. 천천히 멀어지던 이루릴은 살짝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띄고 돌아와 마침내 행복하기를." 웃으며 떠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미소를 띄고 돌아올 수는 없을 거야. 가슴 속에 복받치는 것을 간신히 끌어내리느라 웃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하얀 눈발 사이로 빛나던 이루릴의 검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 게 되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이놈, 썬더라이더!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여기서 좀 이러고 서 있는다 고 그렇게까지 툴툴거리냐? 며칠째 내린 눈 때문에 하얗게 변해버린 헬턴트 영지의 지붕들 위로 날 카로운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왔어! 그가 왔어!" 양조장의 막내 아들 미티가가장 먼저 발견했다. 그러자 몰려서있던 사 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사람들의 얼굴에서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떠올랐다. "왔구나!" "우와아, 왔어! 드디어 그가 왔어!" 남자들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괴성을 질렀지만 여자들은 그보 다 더한 괴성을 질렀다. 깜짝 놀란 강아지는 대로의 끝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집 앞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아기 젖 먹이고 있던 아주머니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나 보다. "후치다! 후치 네드발이 왔어! 이제 됐어!" "후치! 후치! 후치이이!" 소녀들은 자지러질 듯이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고 그러자 머리가 좀 굵 은 사내아이들의 눈은 전부 소녀들의 흩날리는 치맛자락으로 집중되었 다. 말들은 히힝거렸고 대로의 끝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던 강아지는 이제 달리던 목적을 잊어버리고는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늘을 날아가던 참새마저도 나의 등장을 축복하듯 힘 차게 똥을 내갈겼다. 대로는 그야말로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어갔 다. 절대로 거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 나 같이 고아한 인품을 가진 사람에 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내 발걸음은 너무나 당당하단 말이야. 아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겸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턴트의 자랑스러운 시민들이여. 무슨 역경이 당신들의 앞을 가로막 았는지 모르나 이제 내가…" "뭐?" 이크! 이게 아니구나. 사람들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떠오르기 직 전, 나는 빠르게 말했다. "아, 아니, 이런. 조금 전에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말이 잘못 나왔어요. 저, 그런데 무슨 일인데요?"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원래의 반가움과 감격이 되돌아왔다. 그 리고 그들을 힘겹게 헤치면서 터너가 걸어나왔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걸 어나온 터너는 이마의 땀을 거칠게 훔치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후, 후욱. 이제야 와주었구나, 후치!" "예. 터너. 늦어서 죄송합니다." 터너의 머릿결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그 코에 위치한 두 콧구 멍에서는 사태의 불길함과 위험을 나타내는 증거, 즉 피처럼 붉은 코피 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나서야 간신히 말했다. "후우. 헬턴트의 안보를 책임지는 경비대장 대리로서 부탁한다! 후치 네드발.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너에게 위험을 떠맡기는 것 같 아 미안하지만…" 나는 떨리는 턱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간신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이 있는데요." 터너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네가 자랑스럽게 죽어갔다고 전해주겠다. 다른 것 은?" "…그걸로 충분해요." "그럼, 부탁한다!" 나와 터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이제 비장함이 흘 러넘치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들은 좌우로 갈라졌고 그 사이로 산트렐라의 노래가 나타났다. 나는 터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터너는 차마 하기 힘든 말을 꺼내듯 몇 번이나 주저하더니 기어 코 말했다. "제미니가…" 제미니가? 설마? 나는 침을 삼켰다. 터너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 었다. "취했어." "…맙소사! 왜! 도대체 누가!" 그러자 터너는 두 눈에 가득 분노를 담고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 곳 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나처럼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복장이나 허리에 찬 검, 그리고 걸치고 있는 하드레 더가 길이 잘 든 것으로 보아 영락없는 모험가였다. 터너의 뒤를 이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 사람에게 집중되자 그 모험가의 두 뺨은 창백해져버렸다. 터너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저 사람이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제미니에게 몇 잔 건네었던 모양이야. 하필이면 해너 아주머니는 뭘 만드느라 그것을 못봤 고." "이런, 안돼…" 이윽고 나 역시 주위의 모든 사람의 뒤를 이어 그 모험가를 쏘아보기 시작했고 그 모험가의 얼굴에서는 이제 핏기가 다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변하고 보니 더 미인인데? 그 모험가는 20대 중반을 넘겼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처음 봤을 때는 이루릴이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을 정도로 새카만 머릿결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는데 그 신장에 이르러서는 데미 공주께서 헬턴트 영 지에 왕림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가능할 지경이었다. 꽤나 장신 인데다가 잘 짜인 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 허리에 매인 롱소드가 이 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차면 좀 거북하게 보이는 것이 롱소드인 데. 내가 바라보자 그 여자 모험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들게 말했다. "나, 난 아무 것도 몰라서…"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바로 그 때 찢어지는 비 명소리가 들려왔기에 그 말은 꺼내어놓지 못했다. "꺄아아악!"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달려나오는 해너 아주머니 의 모습이 보였다. 해너 아주머니는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지 못한 듯 이 마구 달려오다가 터너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터너는 해너 아주머니를 붙잡으며 그대로 눈 내린 대로 위를 좌악 미끄러져나갔다. 콰당탕! 잠시 후 터너는 대로 위에 크게 드러누워버렸고 해너 아주머니는 그 위에 오 도카니 앉아있게 되었다. 혼란에 빠져있어서 자신이 넘어진 줄도 모르던 해너 아주머니는 자신이 타고 앉아 있는 상대가 터너인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의 멱살을 붙잡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돼! 그것은 절대 안돼! 막아줘, 터너, 터너! 제발 막아줘요!" 터너는 눈구덩이 속에 머리를 박은 채 씩씩하게 외쳤다. "맞습니다! 그건 막아야 됩니다. 그럼요! 그리고 그것이 뭔지 알게 된 다면 후치가 반드시 막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뮤러카인 사보네, 뮤러카인 사보네! 타이번씨가 다 거덜내고나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간신히 구해둔 건데! 제미니가 그걸 발견했어. 아아, 그게 없어지면 난 죽어버릴 거야!" 아이고, 하필이면 제미니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 그래봐야 제미니는 뮤 러카인 사보네 이외엔 제대로 이름을 아는 술도 없지만, 어쨌든! 안되겠 어. 저 모험가는 조금 있다가 닥달해야겠군. 나는 허리를 낮추면서 돌격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 때 나를 쏘아보고 있는 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조금 움직이자 여왕과 같은 도도함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 미니의 모친, 스마인타그 부인이 보였다.나는 그녀에게 묻는 듯한 시선 을 보내었고 스마인타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정하게 말했다.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도 좋아." "진심이십니까?" "네게 시집보내면 되니까." "안녕히 계세요. 읽던 책이 있어서… 으아아! 터너! 이거 놔요! 내가 미쳤다고 그 계집애를…" 결국 나는 터너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산트렐라의 노래에 진입하게 되었다. 아이고 맙소사! 눈 앞으로 다가오는 산트렐라의 노래의 정문이 마치 임펠리아의 성문처럼 보였다. 나는 슬며시 뒤로 고개를 돌렸고, 그 러자 터너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부부는 서로의 행동을 책임지는 법이야." "누가 들으면 제미니가 내 아내인 줄 알 거 아니예요!"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건데, 뭐." 딱 한 사람만 빼놓고 모든 사람들이 터너의 말에 깊은 동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가련한 나의 청춘이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은 그 이름 모를 여자뿐이었다. 그 여자는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이제 산트렐라의 노래의 정문은 대미 궁의 입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긴 저 안에 취해버린 제미니가 있으 니 대미궁만큼이나 무서운 곳이지.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바로 그 순간 무시무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히히힛! 히힛!" 순간 다리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돼. 정 신차려, 후치! 이 미친 자식아. 제미니가 아무리 졸라대었다고는 하지 만, 그런다고 제미니에게 OPG를 주다니 그런 미친 짓이 세상에 어디 있 단 말이냐. 이건 네가 책임져야 될 일이야.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좋았어!" 나는 일생의 힘을 끌어모아 산트렐라의 노래를 향해 돌격했다. 남달리 혀가매끄러운 음유시인이 있어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드래곤 로드를 향 해 돌격하는 루트에리노 대왕의 모습을 여기에 비교했을 것이다. "죽어보자!"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4. "어머나! 이 상처 좀 봐. 아프지 않아?" "누가 들으면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만든 줄 알겠어." "이… 씨. 사과했잖아! 자꾸 미안하게 만들래?" "사과고 뭐고 간에 그거 어서 내놔." "응? 아이, 다른 사람들도 다 보는데 어떻게 입술을 주니?" "우습지도 않은 말로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내놔!" 제미니는 궁시렁거리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 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 후치야. 며칠만 더 가지고 있으면…" "칵!" 결국 제미니는 투덜거리며 OPG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옆의 의자 에 앉아있던 터너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헬턴트 마을의 위기는 사라졌어. 비록 그 댓가가 가혹하긴 하지만. 아이고, 내 눈! 눈 주위가 퍼렇게 되었을 거야. 젠장. 터너는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 해너 아주머니가 뮤러카인 사보네가 작 살나기 직전 제미니를 말리는 데 성공한 나의 공적을 높이 사서 하사하 신 공짜 맥주다. - 근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네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이 영지의 안녕질서를 위험에 빠트린 데 대한 책임을 물어야 겠지만, 당신으로선 알지 못하고 한 행동이며, 또한 질서 파괴의 상당 부분이 이 영지의 주민에 의해 이루어진 점을 참작해 당신에겐 죄를 묻 지 않겠습니다." 비록 콧구멍을 막은 채 말해서 코 막힌 목소리였지만 터너의 표정은 헬 턴트 경비대장 대리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 얼굴에 가득한 근엄성은 여 자로 하여금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가공한 것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터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닙니다. 농담한 겁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예? 아, 예. 예…" 여자는 아직까지도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터너는 그 모습을 보더니 다시 한 번 웃고는 맥주잔을 마저 비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난 가서 좀 누워야겠다. 아까 제미니가 집어던졌을 때 허리가 좀 삐끗 한 모양이야." 제미니는 빨개진 얼굴을 숙이며 가늘게 말했다. "죄송해요오…" "괜찮아, 괜찮아. 후치 잘못이지 뭐. 아, 그렇지. 제미니. 부탁이 있는 데." "예?" "술 좀 줄여라." "…예." 누가 들으면 제미니가 끔찍한 주정뱅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제미니는 저지른 소행이 있는지라 화도 못 내고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터너는 다시 크게 웃었지만 곧 자신의 허리를 부여잡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터너가 나가고나서 나는 다시 OPG를 끼고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 다. 제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혼잣말로 궁시렁거렸지만 나는 싹 무시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손 을 바라보았다. "그거 혹시 OPG인가요?" "예? 아아, 잘 아시는군요. 관록있는 모험가이신가 보네요." "모험가? 아아, 모험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못되지요. 그런데 당신이 야말로 관록있는 모험가인가요? 미안하지만 나이로 볼 때는 그렇게 생각 되지 않는데, 그런 희귀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으니…" "아, 제가 관록있는 마법사를 하나 알거든요. 그 사람에게서 얻었지 요." "마법사? 이름이 뭔가요?" "저요? 아니면 그 마법사요?" 여자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보니 퍽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 고 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뜰 때는 그런 인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희한한 얼굴이었다. 원래 웃을 때나 놀랐을 때도 날카롭게 보이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만 이여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아, 둘 다 알려주면 좋겠군요." "저는 후치 네드발, 초장이입니다. 아까 사람들이 외치는 것을 들으셨 죠? 그리고 제게 이걸 준 사람은 타이번이라고 하는 마법사이고요." 내가 대답을 끝내자 여자의 눈은 다시 가늘어졌고 그러자 원래의 날카 로운 표정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펍 안에 있 는 사람은 현재 나와 제미니, 그리고 그 여자뿐이었다. 어라? 그러고보 니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모두들 제미니가 부끄러워할까봐 자리를 비켜 주기라도 한 것인가? 아냐. 그렇지만 이런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 무도 한 잔 하면서 떠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군. 부 엌 쪽에서 해너 아주머니가 뭐라고 흥얼거리는 것을 제외한다면 펍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 여자는 주위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나자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이번이라고 했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 사람은 어디 있죠?" "예? 아, 저기 숲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자기 집에 있습니다만. 아니, 자기 집은 아닌가?" 자기 집은 아니지. 카알의 집이니까.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맥주잔을 들어올렸고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가요. 그런데 타이번이라. 그 사람의 본명인가요?" 맥주잔을 씹어먹을 뻔했다. 뭐야? 본명이라고? 설마 이 여자는 핸드레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 가? 난 여자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 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 전체에는 화사한 미소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되도록 느리게 맥주잔을 내려놓은 다음 음색에 주의하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건 본명이아니라 별명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그걸 어떻게 짐작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 때 가만히 있던 제미니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후치야. 타이번씨의 이름이 별명이라고?" "응? 아아, 어, 그래. 그건 별명이야." "그래? 어어. 아, 그런데 저는 제미니라고 하는데요. 당신 이름은 뭐 죠?" 제미니는 여자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으하하! 역시 제미니다. 그렇잖아 도 질문하고 싶었던 거야. 여자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만 지은 채 고개를 조금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검은 머릿결이 아찔하도록 물결쳤다. "리타라고 불러주면 되겠군요." "리타? 리타. 예. 리타씨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타이번씨랑 잘 아세 요?" 오오! 갈수록! 제미니는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모두 대신 물어줄 모양 이군. 리타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아뇨. 잘 알지는 못합니다."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말일까? 만일 거짓말이라면 이 리타라는 여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난 다시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잠시 그런 생 각에 빠졌다. 그 때 제미니는 다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짐작하시는데요?" "예감이랄까요. 이름으로는 좀 이상해서." 제미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미니는 곧 나를 돌아보았 다. 나는 맥주잔을 내리며 말했다. "나?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어." "헤에. 그래? 그럼 타이번씨의 본명이 뭔데?" 제미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큰일이군. 제미 니는 타이번의 본명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한 모양인데. 리타라는 이 여자는 왜 괜히 그런 말을 꺼낸 거야. "제미니. 별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본명을 밝히기 싫은 이유가 있다는 거 아닐까?" "귓속말로 해." "…칵! 그 다른 사람에는 당연히 너도 포함된다고!" "너는?" "물론 나도 포함되지만 난 똑똑하니까 알아차린 거잖아! 게다가 나는 그의 뜻을 존중하여 누구에게도 말 안할 테고!" "나도 똑똑해. 후치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거 아니까. 그리고 타이번씨 의 뜻을 존중해서 누구에게도 말 안할 테니까 말해줘. 자, 요 귀에 대 고." "…그리고 누구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 안할 거라고 하면 다 말해줄 거 지? 그 사람 귀에 대고?" 제미니는 새실새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많이 궁금하지는 않은 모양이 군. 그렇잖으면 훨씬 더 졸라대었을 텐데. 제미니가 크게 하품을 할 때 그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다가 물릴 뻔한 다음, 나는 리타를 바라보 며 말했다. "리타씨? 예. 그런데 이 도시에는 어쩐 일이신지? 만일 서쪽으로 오신 거라면 여기서 끝이에요. 서쪽으로 더 나아가도 마을이 몇 개 있기는 하 지만 모험가의 흥미를 끌만한 것은 없는데요." "글쎄요. 사람을 만나는 것 가체가 커다란 도전이자 모험 아닐까요. 저 에게 지혜와 사상을 베풀어주실 분이 커다란 도시의 광장에 서 계시리라 고 믿지는 않아요." "아아, 그렇네요. 원하시는 것이 지혜인가요. 폭넓은 사고나, 시각 같 은 것?" "그렇습니다." "그럼 타이번씨를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 분은 관록이 깊 고 많은 것을 보고 들으신 분이니까." 리타는 히죽 웃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맥주를 마시 지는 않고 그 가장자리의 거품을 살짝 핥고서는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어떨까요." "예?" "후치 네드발. 당신에게 지혜를 구해보면 어떨까요. 나 리타에게 지혜 를 선물하지 않겠어요?" "예? 아아, 리타씨는 현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지혜를 청한다는 이치의 신봉자이신 모양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해요.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의 지혜가 있을 뿐이지요. 현자가 어린 아이의 지혜를 배워 익히면 현자 가 아니라 어린 아이가 되겠죠." "글쎄요. 현자와 어린 아이도 교류는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상호 발전도 이루고…? 쳇. 아, 미안해요. 당신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좋지 못한 추억이 하나 떠올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리타는 일견 무의미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 다. 제미니는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인지 양쪽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리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초 만드는 방법이라도 알고 싶으세요?" "초? 아니오." "그럼 뭐가 듣고 싶으세요? 전 아는 게 없어요." "그래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지요." "친절?" "근래에 들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 하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해보세 요." 순간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내 눈은 재빨리 제미니를 향했다. 제미니는 이제 두 팔을 테이블에 포 개고는 그 위에 엎드려 잠들어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내 눈이 이번에 는 펍 곳곳을 향했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해너 아주머니의 흥얼거림 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가녀린 소리가 들려와서 창문을 바라보자 지붕에 쌓여있던 눈들이 녹아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물방울들이 길에 쌓여있던 눈에 부딪히면서 아주 약한 소리를 내고 있는 모양이다. 주위를 주욱 살피던 눈이 마침내 리타에게 돌아갔다. 리타는 여전히 무의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있는 것은 그 입술 뿐이었다. 그 시선은 연마된 칼날처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 시선을, 저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에서 본 적이 있었지. 일어서야 하나? 아냐. 볼품없는 일이 되겠어. 그래서 나는 가볍게 고개 만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리타는 눈꼬리를 조금 꿈틀거렸을 뿐 별다른 표정 없이 내 말을 기다렸 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 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암파린씨. 당신이 말한 것이 이것입니 까? '자네의 현재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 조력자가 자네의 미래에선 자네 의 옆에 있게 될 것이네. 모든 준비는 완료되겠지. 그리고 그 시점에서 유피넬과 헬카네스도 자네에게선 손을 뗄 거야. 자넨 오로지 자신의 힘 과 지혜로만 그 중요한 선택을 수행해야 되겠지.' 확실히 그 조력자는 인간이군요. 하하하. 설마, 설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이제 선택을 해야 되는군요. 유 피넬과 헬카네스의 도움도 없이. 나는 선택했다. 벌컥! 테이블에 업드린 채로 불안하게 잠들어있었던 제미니는 타이번이 문을 열어Ч히는 소리에 기겁하면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의자채로 뒤 로 넘어갈 뻔했지만 내가 재빨리 손을 뻗어 의자를 붙잡아 그런 일은 일 어나지 않았다. 타이번은 펍 안으로 뛰어들어오며 그대로 외쳤다. "어디 있어!" "바로 발 앞에!" "뭐? 으아!" 300 년의 마법 수련이 허황되도다. 타이번은 의자에 발이 걸려 그대로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바이서스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가 멋드러진 동작으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우울한 기분을 느꼈 다. 제미니를 똑바로 앉힌 다음,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기 어려워 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당신이 그러면 어떻 게 해요?" "뭐? 아, 그래. 맞아! 나는 장님이었지?" "다음부턴 잊지 않으시도록 조심하세요." 타이번은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며 벌쭉 웃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웃음을 싹 지우더니 내 어깨를 마구 잡아당기며 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 있냐고! 이 코에 콧물 대신 촛농 묻은 꼬마 녀석아, 어디 있어?" "당신 손 안에." "그 여자 말이다!" "제미니? 타이번이 널 찾으시는 것 같은데…" "으아아아아악! 파워 워드 히컵(Power word hiccup)! 파워 워드 스니즈 (Power word sneeze)!" "으아악!" 타이번의 특기는 주문의 연결이라고 했었지. 그건 그렇고 의외로 잔인 한 면이 있는데. 나는 딸꾹질과 재채기를 동시에 하는 것이 이다지도 괴 로운 일이라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마, 맙소, 딸꾹! 맙소사, 에츄! 이, 이런 잔인한, 딸꾹! 에취!" 결국 3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히 늘어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내 모 습을 보면서 자지러지듯 웃어대던 제미니 역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는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파워 워드 헤모호이즈(Power word hemorrhoids 絶對命令痔疾)를 쓰겠다고 으름장을 탕탕 놓던 타이번의 모습은… "당신은 악마야!" "파워 워드 임포텐…" "무엇이든지 물어만 주십시오." 타이번은 내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으며 맥없이 말했다. "그 여자, 벌써 갔어?" 타이번의 하얀 눈은 내 가슴 쪽을 향해 있었다. 내 키를 짐작하긴 하겠 지만, 그래도 정확하게 시선을 주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정신없이 웃던 제미니도 그제서야 눈을 닦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 나 잠든 사이에 가신 모양이네?" "그래." 타이번은 씁쓰레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안 돌아오는 거야?" "그런 말은 없었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제길… 할 수 없군! 내가 찾아가봐야겠어. 어이, 조수. 겨울 여행이 다." "겨울 여행?" "목적지는 너도 짐작할 테지. 눈이 안보이는 것이 오늘처럼 안타까울 때가 없군." 글쎄. 적어도 내가 아는 경우 중에 당신이 오늘만큼이나 안타까워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우가 하나는 있지. 아마 그 때 까뮤 휴리첼은 타이번 의 눈 노릇을 하면서 갈색산맥을 걸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게다가 말이야, "타이번. 당신은 볼 수 없는 사실 한 가지 말해드릴까요?" 나는 몹시 당기는 뱃가죽의 고통에도 불구하며 씨익 웃었다. 나는 눈이 보이거든? 타이번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되물어왔다. "그게 뭔데?" "지금 창밖으로는 입을 딱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제미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타이번은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는 보 이지도 않는 그 하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타이번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펍 바깥 으로 뛰쳐나갔다. 아, 장님치고는 꽤 빨랐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그 때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르타트다!" 제미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나에게 돌렸다. 나는 이번에는 그녀의 얼 굴을 보면서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제미니의 눈이 살폿 가늘어지는 순 간, 그녀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 어, 후치야. 리타라는 이름은…?" "물론 아무르타트의 애칭이지. 재미있는 센스지? 자, 제미니. 나가서 구경하자고. 아무르타트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야. 그리 고 지금 안 보면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미니에게 팔을 내밀었다.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테니까. 가실까요, 레이디?" ================================================================== 15.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25. 거리는 온통 하얀 눈이 내려있었다. 그리고 그 순백의 공간 속에 점점 히 흩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입 을 열지 않고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 고 있는 것이 더욱 그렇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 는 사람들. 타이번은 애처러운 얼굴을 한 채 거리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역시 다 른 사람들처럼 하늘을 바라보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하늘의 이쪽과 저쪽을 쉴새없이 오가고 있었다. 타이번에게로 다가서려고 했을 때 펍의 문 기둥을 부여잡고 있던 제미니가 속삭였다. "이, 있어?" 아, 그래. 하늘을 봐야지.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눈을 내리퍼붇고 난 뒤 지친 것처럼 게으르게 흐르는 회은빛 구름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구름의 단말마는 소리도 없다. 갈라진 구름 들의 긴 틈 사이로 블랙 드래곤의 거체가 고정되어 있었다. 거칠 것 없는 하늘을 흐르고 있던 구름들이 아무르타트에 부딪히자 마 치 짜증을 부리듯 그녀의 날개를 휘감아돌았다. 그러나 아무르타트는 꼼 짝도 하지 않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구름들의 흐름 때문에 아무르타트의 전체 모습을 확 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하늘의 상당 부 분을 가리고 있었다. 어떤 횃불을 가져다 비춘다고 해도 그 반사광을 얻 기 어려울 것처럼 새카만 날개는 놀랍게도 네 개. 그 날개의 폭은 엄청 났지만 그 길이는 더욱 엄청나서 저 몸을 지탱하는 날개치고는 가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르타트의 모습은 긴 목과 긴 꼬리를 더해 서 마치 수레바퀴처럼 보였다. 바큇살이 여섯 개인 수레바퀴. 크라드메서와는 달라. 크라드메서의 모습에서는 균형잡힌 힘이 있었다. 그 한량 없는 힘이 더하고 뺄 것 없이 완벽하게 정리된 몸에 잘 갈무리 되어 있었던 크라드메서의 모습에서는 품격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르타 트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모습 역시 크라드메서처럼 더하고 뺄 것이 없 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더하고 빼봤자 정리가 안되는 몸이었으니까. 아 무르타트의 몸은 그녀의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마구 소용돌이쳐 폭발하다 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 날개들은 너무 강해 보이고 너무 길어 보인다. 마치 그녀의 몸이 감당하지 못한 맹렬한 힘이 몸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잘 연마된 검의 차가운 매서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아무르타트의 모습은 하얗게 끓는 쇳물의 역동성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녀가 허공에 멈춰선 채 헬턴트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모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꼬리 한 번만, 날개 하나 만 휘저어도 여기 서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게 되지 않을까. 나는 제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저히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으니까. "응, 있어." "얼마나 높이?" 조금만 기다리면 기둥을 쥐어뜯는 제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 르겠는데. "대략… 1,000 큐빗 정도?" 고개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고 있던 타이번은 귀가 솔깃하다는 표정 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미니는 여전히 나무 기둥을 긁어내리며 속삭였다. "어, 어, 어느쪽인데?"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운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몸놀림을 보면서 대충 의 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 나와서 보는 것이 낫지 않겠어?" "싫어!" "글쎄, 제미니. 아무르타트가 헬턴트 영지를 식탁으로 삼고 싶어한다면 그 안에 있는다고 해서 특별히 안전할 게 있을까? 내 옆으로 와." 제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는 드디어 문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뽀드득. 제미니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기겁하더니 곧 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탁탁탁탁. 쓰러질 듯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달려온 제미니는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면서 말했다. "어, 어, 어느쪽이야?" "고개를 들어봐." "히이잉. 나 꽉 잡아. 기절할지도 몰라." 제미니는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자마자 고개를 들어올리던 속도보다 수십 배는 빠른 속도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기절했어?" "후아, 후아,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 "응?" "잉, 저러면 저렇다고 말해줬어야지." 말도 안되는 투정을 다 부려라, 으이그. 나는 제미니의 어깨를 바싹 끌 어당기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아무르타트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네드발. 너희는 어떻게 작별하지?"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대장장이 조이스가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 였다. 대로의 분위기가 일대 혼란으로 진행되지 않는 까닭은 위압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까. 주저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사람들 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이번은 그제서야 아무르타트 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여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상대에 따라 다르지요." 제미니는 내가 대답을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듯이 헐 떡거리며 내 허리를 꽉 잡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쳐준 다음 계 속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등 뒤, 언덕 위의 성쪽에서 아스라하게 발소리와 고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마도 경비대원들이 달려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르 타트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추억 속에서 즐거울 것입니다. 당신 속의 나를 아껴주시길." 아무르타트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 겠지. "알았다. 내 속에 함께 하는 너를 잘 보살피겠다. 이제 너와 나의 길이 갈렸군." 하지만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의 말대로라면, 그녀와 나의 길은 갈렸지만 그 길 중 어느 것에도 정답은 없을 것이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굳은 채 서 있던 헬턴트의 주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아무 르타트의 네 개의 날개가 가멸찬 동작으로 떨쳐졌다. 순간, 그녀의 몸은 쏘아진 화살처럼 튕겨졌고 짜증을 부리듯, 투정을 부리듯 그녀의 몸에 엉기던 구름들은 갈갈이 찢겨졌다. "가네?" 제미니는 쇼올처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내 팔을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아무르타트는 서쪽으로 맹렬히 날아갔고 그녀의 뒤로 구름들이 거대하게 찢어졌다. 그러자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후치!" 타이번이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르타트의 모습을 놓 치기 싫어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후치, 그에게 무슨 말을 했지?" "특별한 말은 없었지요. 그저 내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들려줬지요. 그리고…" "그리고?" "극서를 향해 떠나달라고 말했어요." 이것이 나의 선택이다. 옆에 없어서 듣지 못했던 타이번과, 잠들어 있 어서 듣지 못했던 제미니는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타이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 뭐, 아니 무슨 뜻이지?" "나는 그래도 인간을 사랑하니까요." "그래서! 헤,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을 괴롭히지 말고 떠나라고, 떠나라 고 했단 말이더냐! 이 철부지 꼬마 녀석잇!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 고…" "조용히 들으세요. 타이번." 타이번이 입을 닫은 것은 내 협박성 담긴 어투 때문이라기보다는 너무 흥분해서 할 말을 잘 떠올리지 못한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아 무르타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드래곤이지요. 적어도 드래곤으로 서 사물을 바라보는 드래곤을 찾아보라면 그녀가 마지막이지요."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아무 르타트의 뒷모습을 보다 오래 보려고 서쪽으로 달리기도 했다. 대로는 서서히 소란스러워졌지만 동시에 서서히 고요해졌다.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저도 인간이니까요. 그렇지만 정답은 없으니까요." "무슨 말이지?" "앞으로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 완전한 인간의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드래곤 라자가 없으니 드래곤은 우리들의 흐름에서 떨어져나갔 고, 드워프들은 그들의 광산으로 도피한지 이미 오래되었지요. 그리고 엘프들은 이제 그들의 숲에서 나오기 더욱 어려워지겠지요." 이루릴을 떠올리면서 침착하게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인간은 저지당한 발전을 이제서야 이룩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아 무르타트는 방해가 되겠지요. 따라서 나는 우리 자손들을 위해 장애물을 치워준 것이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타이번을 쳐다보았다. "300 년의 꿈은 끝났어요." 타이번은 그 입술이 하얗게 변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의 드래곤 라자는 없어요. 드래곤 라자는 드래곤을 강제 적으로 인간과 교류짓게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드래곤을 보호한 거나 마찬가지지요." "보호라고?" "예. 레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느꼈지요. 드래곤 라자는 보다 직접적인 교류의 손길이 다가서는 것으로부터 드래곤을 보호했지요. 장 장 300 번의 가을이 흘러가는 동안. 하지만 더이상의 라자는 없고, 이제 인간은 드래곤에게도 직접 다가서겠지요. 그리고 마침내 모든 종족을 인 간화시켜버리고 나서야 우리들은 미래를 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하게 되겠지요." "미래를…" "타이번, 모든 숲을 태워버린 불길은 죽는 법 아닐까요. 우리들의 폭주 를 견제하던 엘프라는 언덕도, 드워프라는 바위도, 그리고 드래곤이라는 절벽까지도 모두 파괴되고 나면 우리들, 시무니안의 아들들은 거침없이 달려가겠지요. 마부 없는 마차처럼." "그러기에 그를 붙잡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신이 될 수 없다 면, 우리들은 서로를 비춰볼 거울로서 함께…" "크라드메서의 실수로 모자라세요!" 타이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 불쌍한 마법사 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크라드메서, 그 최강의 드래곤도 두 번만에, 라자의 죽음을 겨우 두 번 버티고는 자살했어요. 아무르타트는? 아무르타트, 그 시간의 종이자 석양의 감시자는 어땠어요? 드래곤 라자가 없었기에! 아무르타트는 드래 곤 라자가 없었기에 지금껏 간신히 보호되어왔어요! 하지만 동시에 드래 곤 라자가 없으므로 그는 보호받지도 못해요!" "후, 후치…" "동업자 선생!" "뭐라고?" "동업자 선생! 당신과 루트에리노 대왕은 인간이라는 초를 만들지 않았 습니까? 우리는 불길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불길이니까 스스로마저도 태워버리는 초가 되겠지요. 우리가 이룩하는 번영은 목적 잃은 폭주가 되고 말 테죠! 그래서 나는 이제 아무르타트를 도피시키겠어요." 타이번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피라고?" "예! 나는 그녀를 인간의 석양으로 도피시키겠어요. 그리고 그녀로 하 여금 거기서 인간을 기다리게끔 할 생각이에요. 우리가 스스로를 바로잡 아 새로운 종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면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수 도 있겠지요. 그럴 가능성은 있지요. 그녀가 우리에게 베푼 선물이 있으 니까.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아무르타트의뒷모습을 쫓았다. 참을 수 없는 격정에 목이 메이지만, 나는 간신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에게 우리 의 미래를 들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놓치고 석양을 향해 치달아간다면, 또다른 자신을 모두 잃고 죽음을 향해 치달은 넥슨처럼, 자신을 모두 나 눠주고 죽어버린 길시언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자신만을 부 여잡은 채 멸망을 향해 치달아간 할슈타일 후작처럼, 우리가 석양을 향 해 치달아간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 때였다. 아무르타트의 비행에 따라 길게 찢어지던 구름들이 마침내 하늘 양편으로 모두 갈라졌다. 보랏빛 하늘의 모습은 어두웠으나 아무르 타트의 비행을 쫓는 내 눈은 석양을 볼 수 있었다. 불길처럼 붉은 석양,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검은 몸은 불덩어리처럼 타오르면서 태양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어깨가 시려왔다.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이 그제서야 눈 앞을 어지럽혔다. 나는 바짝 굳어버린 제미니의 손을 잡아올려 입김을 불어주 었다. 나는 제미니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타이번에게 말했 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황혼에 서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기다려온 아무르타트의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녀가 우리 헬턴트에 베 푼 것과 같은 것을, 우리의 자손에게 베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반대 로 인간의 황혼과 함께 그녀도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녀를 보내고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녀를… 그녀를 우리 자손들에게 선물한다는 말이냐?" 타이번은 이제서야 300 년의 피로를 한꺼번에 느끼는 것처럼 메마른 목 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정답은 없지요. 아까 말했듯이 나는 우리 자손을 위해 장애물을 치워 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 자손을 징계할 교사를 미래로 파견한 것 일 수도 있어요. 그것은 시간이 결정할 일이지요. 그러니…" 제미니는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 역할은 여기서 끝났어요. 첫눈을 그 만가로 삼아 떠나간 내 마법의 가을처럼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죠." 나는 고개 돌려 타이번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을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