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델피니아 전기 18 아득한 별의 흐름에 (하) 지은이 : 카야타 스나코 옮긴이 : 김소형 출판사 : 대원 씨 아이 출판년도 : 2004년 8월 15일 <지은이 소개/ 가야타 스나코> 1992년 ‘델리피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했다.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리피아 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이다. <옮긴이 소개/ 김소형> SF판타지를 좋아하고 아이작 아시모프와 호시 신이치, 오노 후유미의 팬이다. 번역작으로는 ‘십이국기’, ‘KLAN’, ‘악마의 파트너’, ‘델리피아 전기’ 등이 있다. <사진설명> 황폐하게 펼쳐진 배경을 뒤로 하고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앞뒤로 서 있다.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작가 후기 역자 후기 <소개글, 서평> 일본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된 인기 판타지소설. 능동적인 매력을 지닌 여주인공과 간신들로부터 탈주한 젊은 왕, 자신감에 넘치는 과격한 공작 등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문체는 경쾌하고 깔끔하며, 전체적으로 탁 트인 듯한 통쾌함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동물들 사이에서 자란 '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이세계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만난 윌의 목숨을 구해준 뒤, 그와 동반하게 되는데 윌은 델피니아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나 지금은 쫓기는 신세. 훗날 '사자왕'과 '희장군'이라 불리게 될 두 사람의 여정이 시작된다. 1장 요크성은 막 한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백아의 건물이 낮게 늘어선 가운데 정원에 설치된 분수와 작은 시냇물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여름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과 물의 궁전. 그 궁전에 델피니아의 재상 브룩스가 손님으로 머물고 있다. 코랄을 출발한 지 11일 뒤, 브룩스는 간신히 이 요크에 도착해 산세베리아 국왕 오르테스를 알현하고 델피니아와 다시 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귀국의 현 상황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파라스트와 다시 손을 잡으신 것도 당연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오나 기탄없이 말씀드리자면 파라스트의 오론 전하는 지혜와 무용으로는 유명한 붕이지만 신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귀국과 화의를 맺은 것도 우리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였지요. 델피니아에 승리를 거두고 나면 오론 전하는 곧바로 산세베리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드실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저희 폐하의 좋은 벗이 되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파라스트와 막 화친을 맺고 오론의 요청에 따라 지금이라도 군대를 파병하려고 하던 요크 성에 들어와 이런 소리를 했으니 엄청난 배짱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산세베리아로서는 이 시기에 델피니아와 접촉하는 것이 치명적일 수 있었고, 델피니아의 사자와 만났다는 사실이 오론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파라스트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오르테스는 격식대로 정장을 갖추고 알현실에 나타나 이 우수한 외교관과 대면했다. “재상이 직접 오시다니 황송하오.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그렇게 말하면서 오르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델피니아 분들께는 날개라도 달려 있습니까?” “분들-이라는 것은, 저 이외에 누가...” “귀국의 비전하 말입니다. 스케니아와 한창 해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분명히 우리나라에 오셨던 분이 어느 틈엔가 코랄에 돌아가셨더군요.” “허허, 그것 참...” 바로 그 왕비가 문제였다. 왕비가 탄가에 사로잡혔다. 그 사실만으로도 파라스트는 기뻐 날뛰었고, 산세베리아는 델피니아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며 서둘러 파라스트와 화친을 맺어버렸다. “비전하는 지금 탄가에 계신 듯하더군요.” 지극히 자연스럽게 오르테스가 그 문제를 언급하자 브룩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얘기를 진행했다. “파라스트와의 화친은 일시적인 방어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와 함께 망할 것인가, 우리나라와 함께 번영할 것인가. 전하께서는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산세베리아의 젊은 국왕은 브룩스의 발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가신들과 혐의해야 하니 한동안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으로 첫 번째 회담은 종료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안내인을 따라 성 안을 나아가면서 브룩스는 마음속으로 투옥을 당하든 고문을 당하든 상관없으니 제발 목숨만은 남겨주기를 빌었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죽어버리면 오르테스를 설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망이 좋은 객실로 안내해 훌륭한 옷을 준비해주었으며 공손한 급사들이 최고의 음식을 대접했다. “귀국과는 달리 이런 시골이라 음식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식탁 가득 산해진미를 펼쳐놓는다. 정성이 가득한 대접이지만 문 밖에는 보초가 서서 브룩스를 감시하고 있었다. 방에서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편지를 보내는 것도, 외부인과 접촉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대우만 좋을 뿐 실질적으로는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브룩스는 의연한 태도를 지켰다. 브룩스의 첫 임무는 상대가 얘기할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것. 설득이고 외교고 상대가 얘기를 할 생각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교섭의 자리만 가질 수 있다면야 귀빈실이건 감옥이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지나치리만치 극진한 대접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할 의사는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귀를 기울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 표명으로 봐야 할까. 비르그나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사로잡힌 왕비도, 왕좌를 박차고 뛰어나간 국왕도 마음에 걸리지만 산세베리아의 움직임에 가장 영향을 받는 것은 비르그나를 공격하고 있는 델피니아 군이다. 여기에 오기 전 브룩스는 잠시 비르그나에 들렀다. 근위사령관인 아누아 후작도 함께였다. 비르그나 탈환을 맡은 핸드릭 백작은 브룩스나 아누아 후작과 오랫동안 교분을 나눠온 사이였다. 탄가의 주장을 듣고 핸드릭 백작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말할 것까지도 없다. 비르그나 공격은 변함없이 난항을 겪고 있었다. 테바 강 바로 저편까지 파라스트 군이 들이닥친 상태이다. 그곳은 현재 델피니아 령이지만 2년 전까지는 파라스트의 영토였다. 저쪽 입장에서 보면 자기 손바닥처럼 훤한 땅이니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핸드릭 백작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테바 강에 걸린 다리를 빼앗기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아누아 후작은 그대로 핸드릭 백작을 원호하기 위해 비르그나에 남고 브룩스는 단신으로 산세베리아를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산세베리아가 이 방문을 환영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적지인 파라스트를 가로질러야만 한다. “이게 살아서 마지막으로 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노영웅은 서로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술잔을 나눴다. 오르테스가 나타난 것은 브룩스가 화려한 감옥에 갇힌 다음 날이었다.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하오.” “아니, 말도 안 됩니다. 마음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미소지으면서 대답했다. 결코 비아냥이 아니었다. 알현실에서 그대로 감옥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빈객 수준이 불만스럽게 여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문밖에 있는 보초는 신경 쓰이지 않으신지?” “저 때문에 고생하더군요. 굳이 지킬 필요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귀국의 대답을 얻기 전까지는 나라에 돌아갈 수 없으니 굳이 보초를 두시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오르테스의 수려한 얼굴에 의심이 스쳤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동맹을 거정당하고 성에서 쫓겨난 브룩스가 곧바로 파라스트로 달려가는 경우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거기서 산세베리아의 오르테스가 델피니아를 따르기로 약속해주었다. 이런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면 큰일이다. 델피니아의 재상 브룩스는 국왕의 우수한 보좌역인 동시에 뛰어난 외교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궁지에 몰리면 그런 짓까지 저지를지도 모른다. 오르테스는 경계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꺼냈다. “그럼 브룩스 경. 유감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귀국의 편을 들기 어렵다고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브룩스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서는 외교관이라고 할 수 없다. 표정을 굳히고 힘차게 말했다. “전하. 모쪼록 불리한 선택은 하지 않으시는 편이....” “물론 그럴 생각이외다. 허나....” 오르테스는 길게 한숨을 토했다. “파라스트와 델피니아. 어느 쪽을 선택해야 확실하게 우리나라를 위하는 길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고민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가둬뒀으니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는지도 모르지만, 일국의 국왕의 발언이라고는 생각하지 힘들 정도고 솔직한 의견이었다. 말을 바꾸자면 그만큼이나 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재상께서 말씀하신 대로 파라스트가 제안한 화칭은 일시적인 화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론이 산세베리아를 멸망시킬 생각이라고 단언할 수만도 없지요.” “우리가 얌전하게 있으면, 파라스트도 복종을 맹세시키는 것만으로 넘어가준다면 굴욕적이지만 나라를 지킬 수 있소.” “반대의 경우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안전한 쪽을 선택했다고 생각했건만 나중에 생각지도 못한 함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맞는 말이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괜한 걱정일 수도 있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위험의 유무가, 함정이 나타날지 아닐지 여부가 전부 오론 왕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무용도 지략도 뛰어나기로 유명하지만 신의만은 없는 국왕이다. 입으로 한 약속은 물론이고 서면으로 맺은 약속조차도 신용할 수 없다. 그러나 오르테스 또한 국왕. 오르테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재상은 마치 월 왕은 신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브룩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밞아버려도 상관없는 약자와 맺은 약속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왕이라면, 필요한 산대와 맺은 관계는 절대로 틀어지지 않게 노력하는 것 역시 왕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귀국의 조력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승리한 뒤에도 후방에서 파라스트를 견제해주셔야 하지요. 일시적인 필요에 의래 귀국과 손을 잡은 뒤, 우리나라를 쓰러뜨린 후에는 그대로 버릴 생각인 파라스트와는 전혀 사정이 다릅니다.” 오르테스는 반쯤 감탄하면서도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과연 그 왕에 그 부하라고 해야 할까. 이래서는 필요한 동안에는 소중하게 여기지만 필요 없어지면 버리겠다는 점에서 파라스트와는 전혀 다를 게 없다. 보통 그런 얘기는 속으로 생각은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법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밝혀버리다니 말도 안 된다. “계속 손을 잡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보장을 어느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단 한 가지를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는 물론이고 제 주군도 귀국과의 우정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이 산세베리아에 이용 가치가 오랫동안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이신지?” “기탄없이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전하, 어떠한 우정이라도 서로에게 이득이 없으면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굳이 금전이나 물질적인 이득만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손을 잡아주신다면 서로가 얼마나 마음 든든할지 그 점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르테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 개인으로서는 인간적으로 오론 왕보다 월 왕 쪽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허나 왕 된 자가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국가의 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지요. 물론 재상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대체 어찌하는 게 좋겠소?”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외교 자체보다도 오랫동안 델피니아의 국왕을 보좌해온 재상과의 대화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 말대로 아무도 앞날은 읽을 수 없습니다. 잘해보려고 선택한 정책이 기대한 만큼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거다 싶었던 인재가 예상만큼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지요. 정치라는 것은 전부 일종의 도박 같은 걸지도 모릅니다.” “승부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만 도박과는 다릅니다.” 브룩스가 응수했다. “흔히 말하는 도박에는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완전히 운에 맡길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행하는 정치도 일단 시행한 뒤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도박에 비하면 훨씬 많은 판단 자료가 있지 않습니까?” 부드럽고 정중하면서도 강경한 태도였다. 밀고 또 밀어댄다. 시선을 고정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한때 큰 승부에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선왕이었던 형님 대신 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커다란 승부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그 정도의 일을 해냈을 리가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동맹자를 모으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짠 뒤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을 터. 그리고 최후의 최후에 승부를 건 것이다. 오르테스는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재상도 언제나 그렇게 승부에 가까운 결단을 내려왔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지금까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도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브룩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제 일생을 두고 가장 큰 도박은 6년 전 주군이 데려오신 어린 소녀를 믿었던 겁니다.” “.......” “저도, 제 친구들도 대체 폐하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실례가 되겠지만, 과연 제정신이신 걸까라는 고민마저 했습니다. 하오나 그 뒤의 일은 전하께서도 아시는 대로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 탄가에 잡혀 있지요.” “폐하께서 이미 구출하러 가셨습니다.” 브룩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반드시 왕비를 구출해내고 말겠다고 단언하는 듯한 태도였다. 오르테스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델피니아의 국왕과 왕비.... 자신과 리리아와는 전혀 다른 관계. 어떤 의미로는 그렇게나 잘 어울리는 부부도 없겠지만 그 정도로 이색적인 왕비도 달리 없으리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 사람만 무사하다면....” 브룩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내밀며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시종이 들어와 하이온 공작이 면회를 요청하고 있다고 알렸다. “공작이?” 그만 반문하는 어조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작 자신이 여기로 오지 않았느냐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하이온 공작은 오르테스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가신인 동시에 왕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회견장에 찾아온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시종도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전하께서 꼭 와주시기를 바란다며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재상, 미안하지만 실례하겠소.” 오르테스는 가볍게 사과하며 자리를 떠났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별실로 가보자 살짝 긴장한 표정의 하이온 공작이 오르테스를 맞이했다. 공작은 40대 중반의 남자 한 명과 함께 있었다. 볕에 그을린 피부에 튼튼해 보이는 체격은 누가 봐도 농부였지만 옷차림만은 꽤 고급이었다. 꽉 쥐고 있는 모자에도 깃털장식이 달려 있다. “전하. 이자는 요크 교외에서 목장을 경영하는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말씀드린 적은 없지만 예전부터 저와 친분이 있습니다.” 가르시아는 모자를 양손으로 꼭 쥐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산세베리아 왕가는 서민들과 그리 격리된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성 안쪽까지 들어와 자국의 왕을 직접 만나게 된 상황에서 평민이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르시아의 집안은 원래부터 상당히 유복한 편입니다. 가업은 목장 경영이지만 대대로 교육에도 열심이라 가르시아의 아버지도 파라스트까지 유학을 다녀왔을 정도입니다. 집안 사람들도 모두 글자를 배웠지요. 그 덕에 가르시아의 형제들은 이곳저곳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서로 근황을 편지로 전하는 데에 아무 불편이 없을 정도입니다.” “장인어른? 상당히 서론이 긴 듯하네만?”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이 점을 설명해둬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부터가 본론입니다. 가르시아의 여동생 중에서 탄가로 시집을 간 아가씨가 있습니다. 제다라고 합니다만, 보나리스 서쪽 20카티브 정도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 여동생이 5년 만에 친정 나들이를 했습니다. 한동안 여기서 머물다가 돌아갈 때에 친정에서 비둘기를 받아갔지요.” “비둘기?” “저쪽에 도착한 뒤 편지를 써서 날리는 겁니다. 가르시아의 집에서는 우편말고도 전서구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슬슬 감이 온다. 게다가 공작의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 비둘기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왔나?” 하이온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르시아에게서 가느다란 종이 조각을 받아들어 오르테스에게 내밀었다. 얇은 종이에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오르테스의 얼굴에서 점점 혈색이 사라졌다. 최후에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보나리스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였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 여기는 보나리스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 큰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오늘 저쪽에서 온 행상인이 예기해줬는데 보나리스 성이 델피니아의 왕비님 때문에 무너졌대요. 전쟁의 여신님이 천벌을 내렸다고. 현실의 광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고 하더군요.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보나리스 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커다란 성이에요. 그 성이 단 하루 만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게다가 그 전투에서 임금님까지 전쟁의 여신님의 분노를 받아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델피니아의 군대는 케이파드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임금님이 돌아가시고 케이파드 성까지 뺏겨버리면 탄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정말 무서워요. ” 오르테스는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문자는 읽을 수 있다. 깨끗한 필체였다. 말의 의미도 알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도저히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도저히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자 오르테스의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이마를 누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뒤 얼굴을 들고 공작에게 물었다. “장인어른. 대체 이 편지를 어떻게 해석하라는 겐가?” “저도 그 점을 전하께 여쭤보러 왔습니다.” 하이온 공작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오르테스는 가르시아를 날카롭게 노려보면서 엄하게 힐문했다. “이 편지의 주인-그대의 여동생은 어떤 여자인가? 보나리스에서 전투가 한 번 벌어진 정도를 가지고 멋대로 착각하고 살을 붙였을 가능성은?” 가르시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전하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저도 압니다. 여자들 중에는 쓸데없이 망상하기를 좋아하면서 자기가 정말 본 것과 봤다고 착각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 아이는 아닙니다. 몸을 움직여 일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자기 머릿속에서 얘기를 꾸며내서 쓸 만큼의 재주 따위는 부리려고 해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남에게 들은 예기라면 들은 그대로밖에 쓸 줄 모르는, 그런 애입니다.” 가르시아의 말 구석구석에서는 착실하고 순박하지만 상상력은 부족하고 고지식한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그 행상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가 하는 점인데....” 소문이라는 것은 사람의 입에서 입을 타고 퍼지는 동안 점점 거창해지게 마련이다. 이 편지는 거의 전언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혹시 이 편지가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편지에 적힌 날짜는 7월 4일. 비둘기는 하루에 수백 카티브를 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렇게 이틀 뒤에 산세제리아에서 편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정보를 파라스트가 입수하려면 앞으로도 며칠은 더 걸릴터. 이 편지를 받아든 가르시아의 어머니나 가족들에게 사건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외국의, 본 적도 없는 임금님이다. 큰일이 났구나 싶기는 해도 크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걱정하는 것은 편지를 쓴 딸 쪽이었다. 임금님이 죽고 탄가가 델피니아에게 패배하면 탄가로 시집간 딸의 생활은 어떻게 될 것인가, 원가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가족들의 관심은 모두 거기에 쏠려 있었다. 가르시아 혼자만이 좋지 않은 예감에 편지를 하이온 공작님께 보여야겠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하이온 공작에게 달려온 것이다. 가르시아는 지금까지도 여동생에게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공작에게 전하곤 했다. 사실 여동생은 그저 평범한 촌 아낙네에 불과하므로 편지의 내용도 일상 생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 편지로부터 탄가의 정황을 엿볼 수 있었다. 밀을 가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마가 되었다. 올해는 사과가 풍작이었다. 그 정도의 정보에 불과하지만 하이온 공작은 언제나 실제로 현지에 사는 사람의 목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오늘 가르시아가 들고 온 것도 그런 소식이려니 생각했다가 이 편지를 보고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경악. 곧이어 등골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와 함께 흥분으로 몸이 떨려왔다. 비둘기라니, 참으로 절묘한 방법이다. 또한 다행스럽게 비둘기가 있을 때에 이 사건이 그 여자의 귀에 들어와주었다. “한시라도 빨리 전하께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수고하셨소, 장인어른.” 오르테스는 다시 가르시아 쪽을 쳐다봤다. “그대도 정말 수고해주었어. 이 오르테스, 진심으로 감사하네.” “예, 옙. 정말 황송합니다....” “이 편지는 한동안 내가 가지고 있겠다. 괜찮겠나?” “예, 그야 물론....” “당분간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 남에게 얘기해서는 안 되네. 자칫 남에게 말했다가는 그대의 가족들까지 위험해져.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도 잘 얘기해두게.” 엄격하게 명령한 뒤 오르테스는 가르시아에게 포상을 내려 돌려보냈다. 둘만 남은 뒤 오르테스는 장인에게 물었다. “장인어른의 의견은?” “솔직히 말해서 그 왕비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다면 웃어넘겼을 겁니다.” 딱 잘라 말하고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전부 사실이라면 그린다 왕비는 스스로 탄가의 손에서 도망쳐서 보나리스를 파괴한 뒤 조라더스 왕을 죽이고 월 왕과 나란히 케이파드로 진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역대의 영웅 열 명이 모여야 가능할 업적을 혼자서 해치워버린 셈이지요. 허나....” “그 왕비라면 정말 할지도 모르지.” “그렇습니다.” 그린다 왕비가 현재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왕비에 관한 탄가의 주장이 어떠한지는 공작도 알고 있다. 브룩스는 그런 일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고만간 탄가가 파라스트에게 얘기를 전하면 파라스트를 통해 산세베리아도 알게 될 테니 어차피 숨겨봤자 의미도 없었다. 왕비를 구하기 위해 국왕이 단신으로 탄가로 떠났다는 사실까지 남김없이 모두 밝혔다. “재상이 이 사실을 알면 굉장히 기뻐하겠지요.” “설마. 바로 말할 수는 없어. 거보라는 듯이 협력을 요구할 테니.” “그럼 전하께서는 델피니아에 협력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거꾸로 질문이 날아오자 오르테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리 단순하게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 편지만으로는 조라더스가 정말 죽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다. 그런 예는 실제로 흔히 볼 수 있다. 전투라는 극한 상태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다. 접근전에서는 특히 더욱 그렇기 때문에 조금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적을 죽이면서 자신이 살아남든가, 적에게 죽든가, 병사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적을 베어 넘긴 다음 순간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 곁에 있던 동료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다음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를 벗어나 형삭만이라도 승리를 서두면 얘기는 자연스럽게 과장되기 마련이다. 패배한 쪽은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다 듣게 되고, 얘기 속에서 적의 대장이 죽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무장의 생사, 특히 총대장의 생사는 그 수급을 눈앞에 놓고 확인할 때까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병법의 원칙일 정도였다. 게다가 상대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탄가 국왕. 아무리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이라 해도 그리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되던 생각이 오르테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델피니아와 손을 잡아야겠지요.” 산세베리아 국왕의 장인은 즉시 대답했다. “브룩스 경의 말로는 약 3만의 군대가 탄가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의 군대가-그것도 월 왕과 그린다 왕비, 두 영웅이 지휘하는 군대가 케이파드로 진격하고 있다면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조라더스 왕뿐입니다. 그 조라더스 왕이 죽었다면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나젝크 왕자나 케이파드에 남아 있는 무장들은 두 사람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지요.” “아니, 알 수 없어. 예전에도 먼 거리를 달려와서 참가한 북쪽 나라가 있었지. 탄가와 동맹이 아직 유기되고 있다면....” “또 끼어들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은 있어.” 이렇게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확인하고 나서 움직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파라스트로부터는 한시라고 빨리 증원을 보내라는 재촉이 빗발치고 있었다. 다름 한편으로 델피니아의 재상 역시 조금도 무러설 기색이 없다. 반드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오르테스는 가신들을 소집해서 편지의 내용을 밝히고 의견을 구했지만 전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약소국인 간세제리아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타국의 슬하에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어느 나라의 비호를 받을 것인가, 굳이 종속되어야 한다면 어느 나라의 왕을 선택해야 하는 가의 문제에 직면했다. 기왕이면 더 나은 쪽. 산세베리아의 가신들은 조금이라도 거 유리한 쪽을 읽어내는 데에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머리를 싸쥐고 말았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노신 중 한 명이 비지땀을 흘리며 말했다. “문제는 이 편지가 사실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하는 접입니다.” “바로 그렇네.” “조라더스 왕이 정말로 죽었다면 물론 델피니아와 다시 우호를 맺어야 합니다. 그에 관해서는 모두 이견이 없겠지요. 두려운 것은 파라스트를 배신한 뒤에 실은 조라더스 왕이 사라 있었을 경우입니다.”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초의 예정대로 파라스트 아래에 들어간 뒤 조라더스 왕을 쓰러뜨린 델피니아 군이 파라스트를 공격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원이 다시 침묵했다. 어느 쪽 역시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은 가신들 뿐만은 아니었다. 오르테스 역시 주저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진퇴양난의 상황을 타개한 것은 아래쪽 좌석에서 울린 목소리였다. “어느 쪽이든 문제는 델피니아의 왕비 씨입니다. 아닙니까?” 주의 깊게 말을 고르고는 있지만 살짝 비아냥이 섞인 수상한 분위기가 담긴 어조였다. 달튼이다. 산세베리아의 군대에는 규율이 엄격하고 훈련이 잘된 정규군이외에 유목민이나 용병 출신을 모아서 만든 부대도 존재했다. 달튼은 그런 부대를 총괄하는 역할이었다. “그 분이 무사하다면 델피니아에 붙는다. 아니라면 파라스트에 붙는다. 그런 거겠죠.” 너무 직접적인 의견이었지만 오르테스도 동의를 표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렇지.” 파라스트보다는 델피니아 쪽이 훨씬 신용할 수 있다. 그 느낌만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그저 왕비가 문제였던 것이다. 델피니아의 비장군. 그 나라를 몇 번이나 승리로 이끌어온 영웅. 그 사람이 탄가에 붙잡힌 상태로는 델피니아에 승산이 없다. 함께 쓰러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자 달튼은 쓴 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럼 얘기는 간단합니다. 아군인 척하면서 파라스트 군에 합류했다가 그 편지가 사실이라고 확인한 시점에서 델피니아에 붙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중신들은 눈을 부릅떴다. 오르테스조차도 말을 잃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석연치 않은 듯 확인했다. “그럼?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확인하면 그대로 파라스트의 편을 들자는 겐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왕비가 붙잡힌 채라면 델피니아는 탄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겠나?” “적어도 굉장히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의 임금님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비님을 아끼고 있으니까요.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요.” “왕좌를 내던지고 구하러 갈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거꾸로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탄가에 승산은 없습니다. 저는 나젝크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탄가의 차기 국왕이 아버지만큼 뛰어난 인물이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그 두 사람과 맞설 수 있을 만큼의 그릇은 아니겠지요.” “요새도시 케이파드와 조라더스의 중신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말인가?” 달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발언을 피하는 달튼 대신 다른 중신들이 일제히 난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비열한....” “우리나라의 위상이 추락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아무리 약소국의 숙명이라고는 해도 정도라는 게 있어. 그래서는 다른 나라들로부터 비겁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네.” 그러나 달튼은 태연하기만 했다. “비겁과 전략은 종이 한 잔 차이입니다. 게다가 그런 소릴 하자면 남의 나라의 왕비를 강탈하는 쪽이 더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극히 옳은 말이다. 중신들도 할 말이 없었다. 브룩스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오르테스도 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달튼은 계속 말을 이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어제까지의 아군이 적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당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등을 돌리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비겁하지 않겠지요.” “그대는 즉,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보나리스의 패전도, 조라더스의 죽음도.” “뭐, 그저 시골에서 퍼지는 소문치고는 도가 너무 심하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그 마을은 보나리스에서 20카티브밖에 안 됩니다. 분명히 아주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사흘이고 나흘이고 걸리는 곳도 아니지요. 말이라면 잠시만 달려가도 충분한 거리입니다. 완전한 헛소문이 전해졌을 거라고도 생각하기 힘들지요.” “어디까지나 추축이고 확신은 없다는 거지?” 오르테스가 묻자 달튼은 또다시 진심을 감추려는 듯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야 그렇지요. 전 천리안이 아닙니다. 비둘기 같은 날개도 없지요. 그 왕비 씨가 포로가 되었다고 들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던건 있습니다. 그 왕비라면 절대로 그대로 끝날 리가 없다고.” 오르테스도 동감이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기백, 그 실력. 찌르는 듯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가 하면 갑자기 장난스럽게 웃는 녹색의 눈동자. 신기했다. 어째서 자신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 번 그 뻔뻔스러우리만치 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일단 뜻을 정하고 나면 오르테스도 형을 몰아내고 왕좌를 손에 넣었을 정도로 결단력 있는 인간이다.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방법으로 가볼까.” “파라스트 군에 합류하시겠습니까?” “이 이산 기다리게 했다가는 오론 왕이 이쪽으로 군대를 보내버릴지도 모르니까. 한껏 기분을 맞춰줘야지.” 살아남기 위해 강한 상대와 손을 잡고 가능한 한 모든 주위 상황을 이용하며 목숨을 부지해온 나라의 사람들이다. 국왕의 판단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남은 것은 델피니아의 재상을 어떻게 하느냐인데.... 어찌하겠나? 왕비의 안부와 조라도스의 생사가 확실하게 가려질 때까지 왕궁에 손님으로 머물게 한다든가?” 이것은 가신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하이온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도 차라리 그 편지의 내용을 전하고 거래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의를 베풀어두자는?” “예. 아직 파라스트는 물론이고 델피니아마저도 손에 넣지 못한 정보입니다. 왕비가 정말로 해방되었다면 델피니아는 제일 먼저 알려준 우리들에게 감사할 것이고, 반대로 조라더스가 살아 있다고 확인되었을 때에는 그 정보가 거짓이었다고 사과한 뒤 우리나라의 입장을 이해해주기를 부탁하고 그대로 파라스트의 편을 들면 됩니다.” “그거 참... 상당히 약은 방법이군, 장인어른.” “저는 우리나라에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전하께서야말로 배신할 예정이면서 출진하려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장인에 그 사위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방침은 결정되었다. 이 회의 직후, 파라스트에서 또다시 보낸 사자가 출진을 재촉하러 찾아왔다. “귀국께서 출진해주지 않으시면 델피니아 공략이 불가능하여 저희 주군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 산세베리아 군이 선봉이라는 말이다. 비르그나를 탈취하려는 핸드릭 백작, 그에 합류한 아누아 후작과 코랄의 근위병단. 어느 쪽도 강적이었다. 그런 강적과 정면으로 부딪히면 자신의 군대고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산세베리아를 방패로 이용하려는 것이 오론의 계획이었다. 적의 힘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만든 뒤 버릴 생각인 것이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산세베리아의 국왕과 중신들은 지극히 정중하고 싹싹하게 파라스트의 사자를 접대했다. 현재 이 요크 성 안에 델피니아의 재상이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최고의 대우로 사자를 접대한 뒤, 내일 아침에라도 군대를 정비해서 출발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돌려보냈다. 2장 결전이 치러진 다음 날 낮, 벨민스터 가문의 군대 3천 명이 보나리스에 도착했다. 그들 또한 붕괴된 보나리스 성을 보고 경악했으며 왕비가 풀려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게다가 어젯밤 전투에서 델피니아가 탄가에 승리하고 조라더스 왕까지 죽였다고 한다. 상당한 고전을 각오하고 달려온 응원 부대는 이 의외의 전개에 기가 막힐 정도였지만 단 한 명, 대장인 로자몬드만은 때에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혈색을 잃었다. “그 중요한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 군대를 끌고 여기까지 온 건가. 로자몬드는 아군의 승리를 기뻐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마음을 졸이며 국왕에게 달려갔다. 그때 월은 조라더스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격식에 맞는 화려한 장례식은 치를 수 없지만 탄가의 예식 절차에 따라 장례를 행하고 시체는 돌관에 넣어 가까운 오리고 신전에 안치했다. 조라도스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실은 월 그리크도 그랬다. 죽은 자의 명복을 빌어줄 생각도 없다. 아무리 정중하게 매장한다 해도 이쪽이 죽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의 관례에 따라 월은 일국의 수장으로서 죽은 자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했다. 더구나 국왕의 시체쯤 되면 더더욱 아무렇게나 다룰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탄가의 백성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게 된다. 반대로 죽은 이를 예의바르게 대접하면 인정 많은 임금님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의 시선도 호의적으로 변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숙적을 처치한 셈이지만 승리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나 이 남자,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죽이지 않았으면 자신이 죽었다. 그저 그것뿐. 게다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조라더스가 쌓아올린 최대의 요새 케이파드 성을 격파해야 한다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진지로 돌아오자 어젯밤에 거둔 승리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병사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마구와 무기를 손질하고 제각각의 공적에 대해 열심히 자랑하면서. 개중에서도 가장 큰 화제는 물론 왕비였다.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의 왕비가 보나리스 성을 부수고 조라더스를 죽였으니 병사들이 왕비에 대해 말할 때의 어조나 표정은 단순히 자랑스러워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열을 띠고 말하면서도 왠지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 초월적인 힘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을 느끼는 이마저 있었다. 국왕이 지나가자 병사들은 서둘러 일손을 멈추고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수고하네.” 병사들에게 위로의 말을 던지면서 본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왕비가 국왕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장례식은 다 끝났어?” “음.” 원래대로라면 실제로 조라더스를 죽인 왕비도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아침 식사 중에 국왕이 참석할 구 있겠느냐고 부탁했지만 왕비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참석했다가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폭언을 내뱉을지도 몰라, 난.” 곁에서 청년이 쿡쿡 웃었다. 지금 루의 신분은 용병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이 국왕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파격에 가까운 대접이지만 어젯밤 이 사람이 왕비와 함께 얼마나 활약했는지는 진지의 전원이 직접 지켜보았다. 또한 왕비는 물론이고 국왕도 이 사람에게 굉장히 의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두들 이 사람이 국왕의 천막에 들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고도 못 본 척하게 되었다. “그렇게 싫어할 건 없잖아. 그 임금님,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 사기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치명상을 입혀놓고서도 루의 어조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무서울 정도였다. 왕비는 솔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괜찮은 사람이야? 제멋대로 이유만 가져다 붙이면서 남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잖아.” “그치만 임금님이잖아? 임금님은 아랫것들의 사정 따위는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법이야. 그런 것까지 신경 쓰려면 임금님 짓 따위 어떻게 하고 살겠어.” 월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배자란 그런 생물이야.”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는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비난을 받더라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위에 선 인간의 역할이었다. 다른 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은 필수지만 남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간단힌 그에 좌우되어 뜻을 바꿔버리는 인물에게 지배자가 될 자격은 없다. 한번 마음이 약한 인물로 여셔지면 금방 모두가 얕보게 된다. “우연히 이런 상황이 되어서 내가 그 사람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그 임금님도 탄가 사람들한테는 좋은 임금님이었던 것 아닐까?” “그렇고말고. 백성들의 공포를 사면서도 탄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상업을 발전시키며 백성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했어. 그것만은 분명해.” 국왕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 왕비가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마치 조라더스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 같네?” “아니,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없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수급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가슴 졸이고 있었지. 나의 전쟁의 여신 덕분에 그 바람도 이루어졌고.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그럼 조라더스를 죽였다고 내가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지?” 아직도 놀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 국왕이 기가 막혀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참 나. 미안하고 뭐고 큰 공적이잖아.” “네가 되게 아쉬워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쉽더라.... 그렇군, 아쉬운 것만은 분명해. 하지만 후회도 안 해. 조라더스의 죽음을 애도할 생각도 없어. 이게 전쟁이니까. 육식동물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서 있는 이상 결국 한 마리밖에는 살아남을 수 없어. 그런 거지.” 왕비는 웃으며 국왕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청년은 그런 두 사람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괜찮구나, 이 임금님....” “그지?”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왕비를 향해 청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 아까워. 에디의 남편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가만 안 놔뒀을 텐데.” “루퍼.” 갑자기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청년도 바로 눈치를 챈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 짓도 안 해. 농담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어제 일도 있는데 넘겨듣기 힘들어. 난 그렇다 쳐도 이 녀석은 폴라의 남편이니까 절대 이상한 짓 가르치지 말라고.” “네.” 갑자기 말투까지 바꿔가며 얌전하게 대답한다. 왕비는 여전히 날카롭게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뭐랄까.... 자기 아들한테 안 좋은 여자가 접근하는 걸 보고 잔뜩 설교하면서 아들에게서 손을 떼라고 협박하는 아버지 같은걸.” “이렇게 덩치 큰 아들을 둔 적은 없는데.” “나도 유혹의 마수로부터 지켜줘야 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다구.” 이번에는 국왕과 왕비가 마주 노려본다. 노려보면서 웃고 있었다. 국왕은 청년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러모로 얘기는 들었지만, 도저히 내 눈에는 그렇게까지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둔탱이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 그렇게 남의 말이 안 믿어지면 내가 허락할 테니 한번 손대봐.” “벌건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게다가 몇 번이고 말하는데, 난 남자한테 손대는 취미 없어.” “그런 것치고는 여자인 폴라한테 손대는 데에도 더럽게 시간이 걸리더란 말이지.” 이 말에는 국왕도 발끈해버렸다. “너, 남의 고뇌를 두고 그렇게밖에 말 못해?” “사실이잖아. 나나 카린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기나해?” 아침 식사 자리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루는 식사 시중을 들던 셰라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이 부부, 언제나 이런 식이야?” “예. 대부분....” 셰라도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때 국왕이 폴라의 임신에 대해 말하자 왕비는 기막혀하며 외쳤다. “너, 어째서 빨리 말하지 않은 거야?!” 국왕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재회하고서 지금까지 그런 얘기까지 하고 있을 만한 여유가 언제 있었다는 거야?” “좋았어. 그럼 빨리 케이파드를 처리하고 코랄로 돌아가야지.” 왕비가 갑자기 기합을 넣었다. 셰라가 대충 예상을 하고 있던 대로 국왕보다도 왕비 쪽이 훨씬 더 기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왕은 식사가 끝난 후 조라더스의 장례식 뒤처리를 하러 나갔고 왕비는 진영 내를 둘러보기 위해 진지에 남았다. 두 사람이 다시 본진에 돌아왔을 때, 발로와 로자몬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벨민스터 가문의 여주인은 왕비를 보자마자 얼굴을 밝혔다가 바로 표정을 거두며 월 앞으로 걸어왔다. 긴장된 표정으로 깊이 고개를 숙인다. “이 중요한 때에 늦게 도착하게 되어 진심으로 부끄럽습니다.....” 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이겼으니까. 완벽한 대승리였지. 게다가 아직 케이파드가 남아 있어.” “옛! 그때야말로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월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지금 국왕은 그대의 부긴이 아닌가.” 로자몬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그건 단순한 구실이었을 텐데. 조라더스를 쓰러뜨린 지금까지 연극을 계속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데 아직껏 왕관을 돌려드리지 않았다는 말인가. 엄청난 비난과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을 받자 발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몇 번이고 돌려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도저히 들을 생각도 안 해. 형님 고집도 보통이 아니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국왕으로 만들고 싶으신 것 같아.” 이것은 발로 나름대로의 농담이었지만 고지식한 로자몬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해왔던 것이다. 로자몬드는 무서운 기세로 남편을 몰아세웠다. “사보아 공! 그 말, 도저히 넘겨들을 수 없어! 설마 진심으로 모반할 생각은 아니겠지?!” 발로가 과장스럽게 눈을 치떴다. “본인 앞에서 뭔 소리야? 안심해. 난 자는 척하는 호랑이라더군.” “뭐?” “스스로 왕관을 차지할 생각은 없고 그것을 다루는 데에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맡겨두는. 난 네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제야 로자몬드도 남편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런가. 두 분께 동시에 왕관을 돌려드리려고....” “그런 거지. 가지고 왔지?” “물론.” 서둘러 왕관을 가져오게 하려 했지만 월 그리크는 부드럽게 로자몬드를 제지했다. “그런 것보다 지금은 케이파드가 먼저야. 조라더스가 죽었으니 남은 사람들도 분명히 동요하고 있겠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발로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기당하신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하나만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케이파드를 함락시키고 나서, 당장은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다시 왕관을 받아주실 뜻은 있으신 겁니까?” “나야 그대가 가지고 있어줘도 전혀 상관없지만....” “공교롭게도 저는 상관이 있습니다. 제 처자식까지도.” 일만 표면상으로는 전혀 심각함이 없는 대화이다. 그때 로자몬드는 왕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은 홍조를 띠었고 눈가에 눈물이 어려 있다. 그대로 손이라도 덥석 잡아버릴 듯한 게 보기 드물게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계속 걱정하고 있었습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승리의 여신이십니다.” 만일의 경우에는 왕비의 대역까지도 맡아야만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려왔다. 그런 만큼 이렇게 무사한 왕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래 기쁨과 안도감도 컸다. “와줘서 다행이야. 호자몬드가 늦으니까 단장이 심심해하더라고. 내 파트너까지 꼬시려고 하던데.” “파트너...?” 마침 그 자리에 이번 승리의 주역이기도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고 왕비는 서로를 소개해주었다. 사실 이 전투에서 청년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밝힐 수 없다. 그것만은 발로도 모른다. 델피니아 진영에서도 셰라와 국왕, 왕비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청년은 남장 차림의 아름다운 여공작에게 생긋 웃으며 인사하고 장난스러운 눈으로 발로를 바라봤다. “이렇게 예쁜 부인이 있는데 호랑이 씨가 말이죠, 제가 여자였으면 애인으로 삼고 싶다는 소리를 하잖아요.” 물론 발로도 이 정도로 꿈쩍할 인간은 아니다. “당연하지. 남자를 애인으로 두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 얼굴에 몸만 여자였다면 흠잡을 데가 없을 텐데.” 태연하게 대꾸한다. 그러나 로자몬드의 반응은 달랐다. 이 사람의 미모를 보고 흥분하는 것도 아니었고 편안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싸늘하게,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눴다. 왕비와 친한 사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훨씬 더 싫은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주군의 앞에서 물러나 남편과 둘만 남게 되자 벨민스터 가문의 여주인은 그 이유를 이런 식으로 말했다. “비전하의 친구 분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군. 대체 뭐야. 저건? 도저히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잖아. 너무 나약해서 기분 나빠.” 발로는 폭소했다. 배를 끌어안고 신나게 웃으면서 몸을 돌려, 부인이 당황하며 말리는데도 방금 나온 국왕의 천막으로 돌아가 이 말을 전해버렸다. 물론 왕비 역시 폭소했다. “루퍼를 두고 그런 말을 한 여자는 처음이야. 굉장하네, 로자몬드.” 로자몬드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무섭게 남편을 노려봤다. 물론 그 자리에는 비방을 당한 당사자도 있었지만 기분이 상한 기색은 없었다. 청년은 침착하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유감이네요. 저, 미움받게 된 건가요?” 여공작은 얼굴을 붉힌 채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절대로 싫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금은 남자다운 구석도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단숨에 말해버리고 인사를 한 뒤 로자몬드는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발로가 웃으며 뒤를 따른다. 국왕이 보고 있으려니,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로가 로자몬드를 붙들고 뭔가 말하고 있었다. 로자몬드가 화를 내며 뭐라고 하는 것을 열심히 달랜다. 저럴거라면 처음부터 화내게 만들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저러는 구석이야말로 발로의 성격이겠지만. 이런 말다툼을 즐기는 걸지도 모른다. 왕비가 씨익 웃으면서 청년에게 물었다. “어쩔래? 너무 나약해서 기분 나쁘다는데.” 루는 감탄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와아, 신선해. 감동적일 정도로 신선한 반응이야. 좋은 부인을 뒀구나.” “로자몬드는 저래봬도 단장한테 푹 빠져 있으니까.” “응, 알겠어.” “어쩌면 로자몬드에게 있어서 남자의 가치는 강함, 즉 단장이 기준일지도 모르지. 그럼 루퍼가 눈에 찰 리도 없고.” “아아, 상처 받았어.... 나도 나름대로 꽤 강한데.” “하지만 외견만으로는 전혀 강해 보이지 않지. 아마 그게 문제일 거야.” “호랑이 씨나 임금님처럼 한눈에 보기에도 씩씩하고 어깨랑 체격이랑 떡 벌어져야 한다는 말?” 청년이 웃었다. “정말 계속 생각하는 건데. 임금님만이 아니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굉장히 괜찮아. 에디가 6년이나 지낼 수 있었을만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얼굴을 마주 보며 싱긋 웃는다. 국왕이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애인에게 질투하게 되는 게 이런 때지. 경은 내가 알지 못하는 왕비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임금님은 내가 모르는 에디를 알고 있잖아요. 언제 정보 교환하지 않을래요?” “아, 그거 좋군. 경이 살던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꼭 들어보고 싶네.”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전쟁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느긋한 대화였다. 해가 저물 무렵 타우의 주력이 도착했다. 식량 대신 소와 돼지, 양을 끌고 합류한 것이다. 군대가 도착한 건지 목장이 이사해온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이 군세를 이끌고 있던 것은 베노아의 질을 선두고 하는 아산의 비스체스, 롬의 베네사, 돌체의 키니슨 등 주로 서쪽의 유력자들이었다. 각 마을에서 제공할 수 있는 동물을 전부 긁어모아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물론 이들 역시 보나리스를 보고 경악했다. 이미 이 절차는 델피니아 진영의 일상 생활이 되어 있었다. 경악하며 굳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도착한 이들이 앞을 다투며 사정을 설명해준다. 이런 무용담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다.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도 있다. 보나리스 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조라더스 왕을 쓰러뜨린 전투에 대해서라면 손짓 발짓해가며 신나게 떠들 수 있었다. 타우에서 도착한 증원부대도 벨민스터 군과 마찬가지로 이 사살-그 강적 조라더스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에 다시금 경악했다. 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반드시 왕비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와봤더니 이미 한참 전에 발로 뛰쳐나와서 성은 산산조각을 내놓고, 덤으로 조라더스까지 죽여버렸다고? 거참, 대단하군.” “글세 말이야. 거기다 케이파드로 진공?” 비스체스 역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했다. 부서진 보나리스 성의 잔해를 바라보면서 계속 고개만 젓는다. “저 왕비 씨가 있는 한 델피니아에 패배는 없겠어.” 아산의 두목답지 않은 말이었다. 해놓고서 자기도 쑥스러웠는지 당황하며 말을 덧붙인다.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병사들도 싸울 맛이 날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총 세력 1만의 델피니아의 군은 케이파드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케이파드 측에서 보나리스의 패전과 조라더스의 전사에 대해 알게 된 것 역시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탄가 국내에는 치밀한 전령망이 국축되어 있다. 특별히 엄선된 준마를 탄 전령들이 차례로 교대하며 밤낮없이 달려 만 하루 만에 이 소식을 케이파드에 전한 것이다.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조라더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대군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케이파드를 떠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탄가군은 보나리스에서 대참패를 맛보고 주군은 영영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기겁을 할 노릇인데, 탄가 국왕을 쓰러뜨린 델피니아 군이 케이파드를 향해 달려 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탄가는 용맹한 국민성으로 유명한 나라, 조라더스를 따라 출진한 이들말고도 뛰어난 무장들이 아직 수도에 남아 있었다. 거성을 지키던 중신들도 전란의 시대를 헤치며 살아남은 강자들뿐이다. 경악하면서도 이 위기에 대처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쯤은 잘 알고 있었다. 중신들은 서둘러 주요 인물들을 모아 조라더스의 장례식을 치렀다. 시체조차 없으니 형식에 불과한 절차지만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서는 왕관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즉위식을 치렀다. 그리하여 그날 탄가 국왕 나젝크 융크가 탄생했다. 조라더스의 죽음을 가장 복잡한 심경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마 나젝크였을 것이다. 부왕에게 칩거를 명령받고 이를 갈며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데 갑작스럽게 비보가 날아왔다. 나젝크는 부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따뜻하게 대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언제나 엄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나젝크를 바라보는 조라더스의 눈은 언제나 싸늘했고 깔보는 듯한 분위기까지 담겨 있었다. 옛날부터 부친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대체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까지 마음에 안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젝크가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조라더스의 반응은 왠지 냉담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해주시지 않는다. 그런 불만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젝크는 부왕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거역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서운 부친이었기에. 그런 무거운 돌이 갑자기 머리 위에서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아니,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보나리스 건으로 조라더스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실패를 용서치 않는 조라더스라면 죽음을 명령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비보를 전해 들은 것이다. 안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말의 안도가 사라지고 나자 갑자기 불안이 밀려 왔다. 엄격하고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었지만 어쨌거나 탄가를 여기까지 성장시킨 것은 조라더스의 힘이다. 그 아버지 대신 자신이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중압감에 휩싸였다. 격렬한 흥분과 동시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남이 지적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나젝크는 현재 두려웠다. 그러나 고민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델피니아 군이 온다. 게다가 아버지의 원수는 바로 그 계집. 델피니아 왕비의 창이 부왕의 가슴을 꿰뚫었고, 그 수급을 델피니아 왕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맹렬한 분노가 솟구쳤다. 아버지의 부음에 안도감까지 느낀 주제에 제멋대로라고 해도 어쩔수 없지만 양쪽 모두 한 점 거짓 없는 본심이었다. 그린다 왕비는 왕이 된 나젝크에게 있어서 생애 최대의 상처,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바윗돌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 아버님의 원수는 반드시 갚고야 말겠어!” 설령 허세라 하더라도 총대장이 적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며 조금도 겁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케이파드에 남아 있는 기사들에게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 전원이 힘을 내어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었다. 스케니아의 군대가 케이파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함대 증설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동맹에서 탈락될까 두려워한 스케니아가 보낸 증원부대였다. 그 수는 약 8천. 탄가 입장에서 이렇게나 반가운 얘기는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그런 촌구석 군대 따위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방해만 될 뿐이라고 입을 모아 욕하던 것은 싹 잊어버리고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태도를 취하며 사자를 보내 바로 합류해 달라고 연락했다. 국왕이 된 나젝크를 중신으로 군사회의가 열렸다. 탄가 수뇌부는 델피니아 군의 도착을 아무리 빨라도 닷새 뒤로 읽고 있었다. 무장들에게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델피니아 군이 밀려올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이쪽에서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과 스케니아 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견고한 케이파드 성에서 응전해야 한다는 의견. 여기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국왕의 역할이다. 선왕도 그랬지만 탄가의 새 국왕은 소극적인 정책 따위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응원을 기다리다니, 무슨 약한 소리! 놈들은 한 번 이겼다고 우쭐해져 있을 터. 선왕을 잃은 우리가 기죽어 움츠러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다. 그 허점을 노린다!” 방어보다 공격을 즐기는 탄가의 무장들은 이 의견이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신속하게 준비를 마치고 출격에 나섰다. 양 군이 충돌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 케이파드와 보나리스의 중간 지점이었다. 델피니아 군은 1만, 탄가 군은 1만 2천. 양쪽 모두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기합에서는 서로에게 뒤지지 않는다. 탄가 군에게 있어서 델피니아는 조라더스와 보나리스의 원수. 무슨 짓은 해서라고 여기에서 설욕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탄가의 체면은 완전히 땅에 떨어진다. 탄가는 델피니아만 못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델피니아가 노리는 점이었다. 조라더스를 쓰러뜨려도 탄가와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이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로서의 탄가로부터 반드시 항복 선언을 받아내야만 한다. 델피니아는 먼저 보병을 내세웠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전법이다. 먼저 활로 교절하고 창으로 싸운 뒤, 최후의 최후에 자웅을 겨뤄야 할 때가 오면 기마대가 돌격한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는 것을 보고 탄가 쪽에서도 보병을 내보냈다. 방패를 든 보병들이 조금씩 앞으로 나왔다. 조금만 더 접근하면 적이 활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시점에서, 후방에서 버티고 있던 델피니아의 본대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수백 마리의 말을 전장 쪽으로 풀어놓았다. 탄구 군은 경악했다. 눈앞에 적의 보병이 있다. 그런데 그 뒤에서 기수도 없는 말들이 지축을 울리며 밀려오는 것이다. “엣?!” “무, 무슨 짓을?!” 무슨 꿍꿍이일까. 저래서는 탄가 군이 쓰러지기 전에 델피니아의 보병들이 말떼에 짓밟혀버린다. 그러나 델피니아의 선봉은 평범한 보병이 아니었다. 등 뒤에서 밀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자 팔에 활을 걸고 방패를 버린 후, 달려오는 말의 안장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은 델피니아 군에서도 기마와 사격이 뛰어난 로아와 타우의 사람들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궁기병으로 돌변한 델피니아의 선봉 부대는 전장을 달려가면서 탄가 군을 향해 비처럼 화살을 퍼부었다. 전원이 궁술의 달인인데다 기마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들이다. 탄가 군의 선봉을 완전히 격파하고 깊이 들어가지 않은 채 재빨리 물러났다. “이놈들!” 나젝크는 격분했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일어서서 고함을 지른다. “저따위 적, 당장 쳐부수고 말겠다!” 지휘를 받은 기마군단이 일제히 돌격했다. 기마부대의 돌격은 위력이 엄청나다. 강철 갑옷을 걸친 인마가 대지를 뒤흔들며 달려가는 것이다. 마음이 약한 병사는 이 모습만으로도 도망쳐버린다. 특히 탄가의 중장기병은 그 숫자와 질 어느 쪽으로도 무적을 자랑했다. 델피니아 군이 저항해봤자 얼마나 버티겠냐고 생각하며 힘차게 돌격하자 델피니아 군은 이 적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바로 후퇴했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썰물처럼 퇴각한다. 탄가 궁은 더욱 용기를 내었다. “가라! 놓치지 마!” 나젝크 역시 승리를 확신하며 말 위에 뛰어올랐다. 본래 총대장이라는 것은 군대의 선두에 서서 아군을 격려하는가, 제일 뒤에 위치한 본진에서 작전을 지시하는 법이다. 물론 나젝크는 전자였다. 군대의 선두에 서서 달려갈 때 나젝크는 격렬한 흥분과 함께 황홀감을 맛본다. 반드시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하늘도 땅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손 안에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곤 했다. 그러나 델피니아 군은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것으로 보이던 군세는 좌우로 크게 나뉘어 돌격해오는 탄가의 기마군단을 우회하는 형태로 지나치고서 양쪽 옆에서 협공했다. 강철 갑옷을 걸친 중장기병과 보병이나 다름없는 궁기병, 어느 쪽의 움직임이 더 빠를지는 설명할 것도 없다. 무적을 자랑하던 탄가 기병이 델피니아 군의 화살과 창 앞에 무릎을 꿇고 차례차례로 말에서 떨어진다. 여기서 지휘관이 냉정하게 지시를 내리면 다시 태세를 정비할 수도 있겠지만 돌격대 사이에서 달리고 있던 나젝크에게 그런 분별력은 없었다. 승리를 방해당해 완전히 머리끝까지 화가 나버렸다. 크게 우회해서 달리는 적군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발견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거기냐, 계집!” 나젝크는 분노한 나머지 군세를 재정비하는 것도, 지휘를 내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왕비를 쫓기 시작했다. 대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런 대장의 모습을 본 병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아무리 뛰어나 작전을 세워도 병사가 무능하면 전투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병사가 강해도 지휘관이 멍청해서는 군대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나젝크를 보좌하던 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원한에 불타는 나젝크를 필사적으로 말리면서 냉정하게 전투를 지휘하도록 부탁했지만 애초에 전투가 벌어지는 한가운데에서 그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또한 델피니아 군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아무렇게나 흩어져 전장을 달리던 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대열을 정비해 하나로 뭉쳐 돌격해왔다. 적인 탄가 기사들조차 경탄할 정도고 완벽한 호흡이었다. 이런 점만을 봐도 현재의 탄가 군과 델피니아 군의 질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렇게나 압도적인 군대를 왕과 왕비가 함께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네년!” 다시금 미친 듯이 뛰어나가려는 나젝크는 주위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보십시오! 이쪽의 전력은 처음의 반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일단 물러날 때라고 생각합니다!” 기사들의 말대로였다. 병사가 없어서는 싸울 수 없다. 나젝크는 거의 미친 듯이 외쳤다. “겁쟁이들! 전투는 이제부터다! 어째서 도망치나?! 어째서 도망치는 게야?!” 그런 소리를 하는 사이에도 델피니아 군이 밀려온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만 이틀에 걸쳐 추격전이 벌어졌다. 보나리스에서처럼 델피니아 군으로서는 반드시 나젝크의 목이 필요했지만 탄가 군도 그것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후퇴를 되풀이해 간신히 케이파드로 도망칠 수 있었다. 3장 “옛날 얘기라도 해볼까요.” 케이파드를 행해 추격전을 벌이던 첫째 날 밤, 야영 중에 갑자기 청년이 말을 꺼냈다. 보나리스 전투의 뒤를 이은 승리에 델피니아 군은 크게 힘을 얻었다. 천막 입구를 닫아두어도 모닥불을 둘러싸고 떠들썩하게 소란을 부리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루는 조라더스가 애용하던 수금을 손에 들고 있었다. 보나리스 전투에서 탄가 군은 진지의 설비 대부분을 버리고 도주했다. 델피니아 군은 그 물자를 그대로 손에 넣었던 것이다. 식량은 물론이고 천막과 기물, 아마 예비로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들까지 남아 있었다. 뛰어난 장수는 전투가 끝난 뒤 곧바로 포상을 내려 병사들을 위로하고, 더욱 용감하게 싸울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월 그리크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각각 공적에 따라 탄가 군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검과 갑옷을 내리면서, 이 수금만은 특별히 루에게 주었다. 이 청년이 정말로 뛰어난 연주자라는 말을 셰라에게 들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수금을 든 청년은 국왕의 요청에 따라 그 자리에서 한 곡을 연주했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멋진 연주에 녹아날 듯이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살벌한 전장에서 작업을 하던 병사들이 남김없이 손을 멈추고 홀린 듯이 그 노래를 들었다. 지금도 한 곡을 연주하면서 음유시인처럼 얘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직 별들이 태어나기 전, 신들 사이에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신들은 어느 쪽이 세상을 지배할지를 놓고 겨루었지요.” 그때 국왕의 천막에는 국왕과 셰라밖에 없었다. 왕비는 마침 자리를 비웠다. “별리 태어나기 전인가. 상상도 못하겠는걸.” 국왕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웃었다. 목소리의 여운에 살짝 도취되면서. “신들도 지배권을 놓고 싸우거나 하는 건가?” “그랬나봐요. 굉장히 옛날 일이라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새하얀 손가락이 천천히 현을 퉁긴다. “새 긴들이 옛 신들을 쓰러뜨린 뒤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려 했습니다. 옛 신들의 대표자였던 세 신에게 부탁해서. 그것이 어둠의 신과 태양의 신, 달의 신.” 셰라가 흠칫 놀랐다. 국왕이 이상한 듯이 묻는다. “부탁해서?” “혹은 명령해서.” “하지만 그거 조금 이상하지 않나?” 국왕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옛 종족을 멸망시켜놓고서 그 옛 종족의 우두머리만은 살려두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니, 살려두기만 한다면야 이해할 수 있다. 적의 실권을 빼앗고 유폐시키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나 새로이 다스림을 펼치면서 자신들의 손에 패배한 상대방의 힘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족을 멸망시켰다면 그 우두머리는 죽이든가 추방하거나 하지 않아? 나라를 멸망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야. 멸망한 나라의 국왕은 바로 왕좌에서 추방당하게 마련이지.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서 안심할 수 없어. 신들끼리의 싸움은 좀 다를까?” “다르지 않아요. 원래대로라면 다 죽여 버리고 싶었겠지요. 그럴 수 없었던 건 세 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죠. 세 신이 없으면 생명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생명?” “네. 임금님이나 동물들, 이 숲과 대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생명.” 국왕도 왕비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흥미가 끌린 듯이 계속 귀를 기울인다. “어둠은 태양과 달을 얻고서 비로소 생명을 키운다던가. 예전에 왕비가 말한 적이 있어.” “세 명 중에는 어둠의 신이 제일 연장자였기 때문에 새 신과의 교섭은 모두 어둠의 신이 맡았습니다. 하지만 힘을 내세워 승리한 이와 패배한 이 사이에서 교섭이 될 리가 없지요. 승리한 신들은 오만하게 명령하고 어둠의 신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얘기다. 루는 한 마디 한 마디 음미하는 듯이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어둠의 신은 다른 두 신의 안전을 조건으로 전면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계에 새 생명이 충만하도록. 하지만” “하지만?” 국왕이 반문할 때 왕비가 돌아왔다. 입을 다물어버린 청년을 보고 이상한 듯이 묻는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그 얘기를 하던 중.” “아, 그 신화? 그냥 옛날 얘기잖아.” “하지만 셰라가 있으니까. 우연치고는 너무 잘 들어맞지 않아?” 청년과 왕비의 시선을 받은 셰라는 당황했다. 어째서 여기서 자신이 문제가 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왕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나치게 잘 들어맞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옛날 얘기가 정말이라면 나하고 셰라가 애인 사이여야 하잖아. 난 그럴 생각 없다고. 혹시 셰라. 너, 내 애인이 되고 싶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말에 셰라는 펄쩍 뛰었다. “잠깐! 잠깐만요! 대에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불쌍하게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왕비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태양의 신과 달의 신은 연인 사이였어. 태양과 달의 사랑의 도피라고 하자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신화에서는 그래. 두 사람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어둠의 신은 새 신들에게 협력을 약속했지. 그런데 새 신들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해놓고 어둠의 신을 속였어.” “속여?” “그래. 두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자유를 위해 도망쳤지만 새신들은 그대로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지. 지금도 흔히 있는 얘기야. 지배할 수 없다면 아예 죽여 버리는 거지. 두 사람은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랬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어둠의 신은 미쳐버렸지요. 옆에서 보기에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분노하며 새 신들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언젠가 반드시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폭했어요. 그리고 그 시체에서 지금의 시계가 생겨났지요.” 청년의 하얀 손가락이 낯선 선율을 연주한다. “어둠의 신은 새 신들을 저주하며 죽었습니다. 태양도 달도 곁에 없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불완전한 세계밖에 만들 수 없었고요.” “불완전?” 청년은 깜짝 놀라는 셰라를 향해 웃었다. “물론 이곳은 굉장히 아름다운 세계야. 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렇지 않아. 대기로 둘러싸인 요람 아에서밖에 생명이 살 수 없으니까.” 셰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하는 듯이 국왕을 바라봤지만 국왕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옛 신들은 멸망해버렸고?” “한 명도 남김없이. 너무나 오래 전 얘기라 이름도 모를 정도지만요.” “그럼 그 옛 신들을 멸망시킨 새 신의 이름은?” “라의 일족.” 셰라가 숨을 삼켰다. 국왕이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얘기는 신화였던 게 아닌가? 혹시 실화?” “신화가 정말 있던 얘기여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나요?” “아니, 하지만 실화라면 좀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법도한데.” “그러니까 옛날 일이에요. 라의 일족을 인간들이 보기에는 불로불사에 가까울 정도로 수명이 길지만, 그런 라의 일족에게조차도 까마득한 옛날 일이니까.” “이 세계의 창조라. 거창한 얘기지만....” 국왕은 이 사람 특유의 날카로운 감을 발휘해 물었다. “하나만 더. 경은 그 세 신들 중 한 명의 환생인가?” “자신은 전혀 자각이 없어요. 하지만 일족들은 그렇게 생각했나봐요. 자기들에게 해를 끼칠 나쁜 존재라고. 덕분에 태어났을 때부터 감시가 붙었을 정도니까.”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한테 당시의 기억이 없는 것만은 분명해.” “나도 없어. 물론 셰라도 기억에 없겠지. 안 그래?” “그러니까... 무슨 얘기인지는 알아들었는지만, 어째서 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도 곤란하건만, 청년은 전혀 상관없이 얘기를 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죽은 어둠의 신의 분노가 너무나 격렬했기 때문에 라의 일족은 겁을 먹었습니다. 세 신이 되살아나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 거라고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지요. 별이 태어나고 사라질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고, 세 신들에게 잔혹한 짓을 한 당사자들도 이미 없는데....” “그런데도 아직 두려워하고 있다는 겐가?” “조금 곤란하게도, 그 뒤로도 몇 번이고 그 신드로가 비슷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까. 그때마다 전전긍긍했다나봐요. 하지만 세 사람이 한 시대에 동시에 존재했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 셰라를 보면 아마 굉장히 놀라겠죠.” “잠깐만요! 대체 왜 제가?!” 흥분하며 언성을 높이는 셰라에게 왕비가 설명했다. “문제는 네 외모야.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 그게 달의 신의 특징이니까.” “지금까지 몇 번이고 나타났지만, 언제나 그랬어. 태양의 신은 금발에 녹색 눈, 어둠의 신은-.” “검은머리에 푸른 눈인가.” 국왕이 대신 말했다. “과연. 너무 잘 들어맞는군. 하지만 신의 환생이라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경과 왕비는 뭐 그렇다 쳐도, 셰라는 아닌 것 같은데.” “환생하고는 좀 달라요. 그럼 뭐냐고 물어도 설명할 길이 없기는 하지만....” 청년은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자신이 누구의 환생이다 같은 소리를 한 사람은 없어요. 그저 조금 다른 사람들과 다를 뿐, 그 신들의 인격이 그대로 재생되는 건 아니니까. 물론 태어나기 전의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고.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극히 단편적인 희미한 기억뿐이고. 환생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일부를 이어받았다는 느낌일까요?” “그럼 셰라는 더 상관없을 텐데.” 당사자인 셰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언젠가 그가 나타난다-. 검은 성령의 말이 생생하게 뇌리에 되살아났다. 우리는 먼 옛날 하늘에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지상에 떨어져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태양을 얻어 어둠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 달이 된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은발에 보라색 눈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청년은 생긋 웃었다. “응. 그러니까 이건 그냥 옛날 얘기. 셰라한테 뭔가 짚이는 게 없으면 그걸로 끝이야.” 깊은 바다 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셰라의 몸이 굳어버렸다. 게다가 왕비의 녹색 눈동자까지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왕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쿡쿡 웃었다. “하지만 셰라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꺼먼 녀석이잖아?” “리! 무슨 말씀이세요!” “이, 이건, 어쩌다보니....” 당황하며 변명하려 했지만 왕비는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전사가 서로의 검을 교환하는 건 그 상대에게 목숨을 맡긴다는 증표야. 나하고 루퍼처럼.” “저 그 상대를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런 건 관계없어. 어쩌면 그 녀석도 성령이 되어서 이 근처 어디서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만 하세요. 저한테는 안 보입니다!” “꼭 안 보이는 게 유감이라는 것 같잖아?” “리!” 청년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것만 봐도 환생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에디는 날 파트너로 골랐고, 셰라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멋대로 결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말해도 셰라의 의견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왕비가 청년을 향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걸 두고 골랐다고 해? 난 갑자기 이름을 받으라고 강요당한 것 같은데.” “강요라니 너무해!” “그치만 그렇잖아.” “분명히 ‘이 이름으로 불러도 돼?’ 라고 물었다고, 난.” “이유도 안 밝히고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면 ‘별로 상관없는데?’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잖아.” “점점 더 심하잖아.” 혼자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 세 신들이, 환생이든 일부를 물려받았든 간에 한 자리에 모이면 뭔가 큰일이 일어나는 건가?” “일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 세상이 멸망하고 자신들도 죽게 될 거라고 불안해하지만, 이렇게 세 명이 모여 있어도 아무 일도 없잖아요?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전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셰라가 포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국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경들을 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지금 얘기도 그렇고. 신화라기보다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권력다툼 같은 기분이 들어.” “맞아요.” 루가 재빠리 대답했다. “바로 그거죠. 옛날 옛날에 두 나라가 싸웠다. 한쪽이 멸망하고, 이긴 나라는 진 나라의 왕족에게 강제로 협력을 요청했다. 진 나라의 왕은 아끼는 왕자와 공주-이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지만-의 안전을 대가로 힘을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 긴 나라의 임금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두 사람을 죽여 버렸다. 진 나라의 임금님은 이긴 나라의 사람들을 저주하며 죽었다. 그래서 엄청난 저주가 걸렸을 거라고 생각한 승전국이 사람들은 별이 태어나고 사라질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주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거죠.” 왕비가 웃을 참고 있다. 하도 대충대충 끼워 맞추는 설명에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국왕은 여전히 고래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라의 일족 사람들은 어째서 그 죽은 왕과 경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거지? 그저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이라는 이유만으로?”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 핵심을 찌른 듯했다. 청년은 말없이 고래를 숙였고 왕비가 날카롭게 국왕을 쳐다봤다. “......?” 뭔가 해서는 안 될 소리를 한 것 같긴 했지만, 어째서 그렇게 비난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다른 사람들하고 좀 달랐으니까.” “그건 나도 충분히 알겠네만?” “그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라의 일족 중에서도 특이하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난 경밖에 모르니까 경이 다른 동족들과 얼마나 다른지 알 턱이 없어.” “정말 그러네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고립될 이유도 없고 뭐가 정상이고 뭐가 이상인지 따위도 상관없어질 텐데 말이죠.” 국왕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립당했었나?” “아뇨, 이건 그냥 해본 말.” 얘기는 거기에서 끝났고 청년은 수금을 내려놓고 천막에서 나갔다. 이틀 뒤, 델피니아 군은 케이파드에 도착했다. 케이파드 성은 보나리스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해자도 방벽도 없는 성이지만 성 그 자체가 굉장히 튼튼하게 지어졌다. 성벽 중간중간에 적을 격퇴하기 위해 설치된 방어벽이 발코니처럼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만만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머리 위에서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게 된다. 그 성 주위로 도시가 펼쳐졌다.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보호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부주의해 보이지만, 조라더스의 철저한 통제정치 덕에 이 마을 을 덮치려는 간 큰 강도는 지금까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델피니아 군이 밀려오자 케이파드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이곳의 주민들은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당당하게 출진해서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는 자국의 군대 자체였다. 그런데 전쟁의 신처럼 강하던 조라더스가 죽고, 뒤를 이은 나젝크도 벌벌 기면서 도망쳐 돌아온데다 적군이 바로 앞까지 달려온 것이다. 월 그리크는 마을 근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약탈을 엄격하게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포상은 내가 내린다. 케이파드 성을 함락하고 나면 공적에 부응하는 보수를 충분히 내릴 테니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절대로 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 이 명령을 어기고 마을을 어지럽히며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는 절대로 봐주지 말고 목을 베어라.” 무장들을 모아놓고 엄격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철저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 덕인지 케이파드의 주민들은 마을 밖에 진을 친 델피니아 군의 눈치만 살필 뿐 특별히 도망치려고 하는 기색은 없었다. 적군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자마자 재빨리 장사를 하려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식랭과 술, 소모품 등을 들고 팔러 온 것이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공성전을 각오한 케이파드 성 측이 서둘러 준비를 하면서 지금까지의 방침과는 달리 식량이나 필요한 물자를 주민들에게서 강제로 징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왕 조라더스와 달리 나젝크는 민중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할 필요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왕가는 그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있다. 따라서 물품을 거두는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조라더스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짓이었다. 성에 대한 불만과 의혹이 생겨난 것도 당연했다. 그에 비해 델피니라 군은 행패를 부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말이나 꺼내볼까 생각한 상인들의 대표가 직접 진지를 방문했다. 월 그리크는 그런 상인들과 직접 얘기를 나누고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다. 주민들이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에서 내려오는 요청에는 시큰둥하게 대응하거나 있으면서도 없다고 속여두고 나중에 델피니아 진영에 물건을 가지고 오는 상인들이 속출했다. 그 움직임을 알게 된 나젝크는 격노했다. “천박한 것들! 아버님의 은혜도 잊고, 탄가 인의 긍지조차 버리고 델피니아 군에 꼬리를 쳐?!” 그러나 아무리 전쟁 중이고 성이 적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에게는 그날그날의 생활이 있다. 같은 물건이라고 비싸게 사주는 쪽에 파는 것이 당연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아군에게 거저 뺏길 바에는 적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편이 당연히 낫다. 케이파드 성은 초조하게 스케니아 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렸으니 이제 기대할 것은 원군뿐인 것이다. 그렇게 델피니아 군이 주민들에게 식량을 사들이는 것을 지켜보던 나젝크의 머릿속에 어떤 계략이 떠올랐다. 상인 중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서 독을 섞은 음식을 팔도록 시켰던 것이다. 거액의 보수를 약속받은 상인은 독이 든 술통을 수레에 싣고 델피니아 진영을 찾아갔다. 진영은 마치 시장 같은 풍경이었다. 밀 부대에 갖가지 고기, 호두와 버섯, 산채 등등 다양한 물건을 들고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 물건들을 확인하고 값을 매기는 것은 베노아의 두목 부부의 역할이었다. “밀 열 부대에 금화 한 장? 은화 열 장에 살게요.” 열심히 값을 깎는 질 옆에서 애비는 아낙네가 가져온 버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단 실재로 물건과 돈을 교환하기 전에 반드시 거치는 절차가 있었다. 애비는 조금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이쪽도 부탁드려요.” 곧바로 왕비가 달려왔다. 저쪽에서 고기의 냄새를 맡고, 이쪽에서는 산나물을 갉아먹으며 바쁘게 돌아다닌다. 왕비는 통 안에 가득 담긴 버터를 살짝 핥아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괜찮아.” “예.” 왕비와 코앞에서 예기를 하게 된 애비는 긴장해서 뻣뻣하게 인사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째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애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것도 국왕의 엄명이었다. 식량을 살 때에는 반드시 왕비에게 확인을 받고, 왕비가 허락하지 않는 식량은 설령 밀 한 부대, 토끼 한 마리라도 진영에 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비전하! 잠깐 괜찮겠습니까?” 이번에는 질이 왕비를 부른다. “알았어, 알았다고. 지금 간다니까....” 만 명의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도 전시 중의 병사 만 명이니만치 평상시에 비해 소비량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난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해서 중원 부대가 달려오고 있다. 그렇게 되면 타우 사람들과 함께 이동해온 목장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식량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만, 감시역이 왕비 한 명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어째서 전투 중보다 더 바쁜 거야?” 왕비는 투덜거리면서 술통의 포도주를 확인하러 왔다. 술은 병사들 입장에서 가작 기대되는 물품이다. 그것도 상당한 분량이었다. 이미 수많은 병사들이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오 주위에서 술통을 바라조고 있다. 술을 팔러 온 것은 건장한 체격의 50대 상인이었다. “코랄에 공급되는 술보다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탄가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술은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강렬한 맛이 있습니다. 저희 가게에서도 특별한 물건이라....” 싹싹하게 웃으면서 상품을 선전한다. 맛보기용으로 가져온 술통은 밀봉되어 있었다. 다른 통과는 달리 내용물을 마시려면 뚜껑을 부숴야 한다. 왕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좋은 술이군. 다른 것도 전부 같은 물건이야?” “물론입니다. 직접 보시면 아시겠지요.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만든 술입니다.” “그건 그렇겠지. 통이 똑같으면 보통은 알맹이도 똑같으니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왕비는 술통 하나를 주먹으로 쳐 뚜껑를 부쉈다. 상인은 깜짝 놀랐다. 과격한 행동도 그렇지만, 여자 손으로 친다고 깨질 리가 없는 뚜껑이 너무나 간단히 부숴져 버렸다는 사실에도. 왕비는 살짝 냄새를 맡아보고 상인을 돌아 봤다. “마셔봐.” “예...?” “같은 술이라고 했지? 그럼 네가 마셔봐.” 산인의 안색이 변했다.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왕비는 날카로운 녹색 시선으로 가차없이 상인을 꿰뚫었다. 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질의 얼굴도 굳어지며 자연스럽게 상인의 뒤쪽으로 돌아가 퇴로를 막고 혀를 차며 말했다. “기가 박히는 놈이군. 마시지도 못할 술을 팔러 와?” “흐윽...!” 견디지 못하고 상인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자신은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면서. 이렇게 되면 주위에서 보고 있던 병사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살기가 감돌았다. 검을 빼든 자도 있었다. “우리들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이려고?!” “미친 놈! 죽여 버린다!” 그런 병사들을 왕비가 제지했다. “조용히 해! 질. 이 녀석한테 한 통 값만 지불하고 돌려보내.” 베노아의 두목은 한쪽 눈썹만 살짝 찡그렸을 뿐 곧바로 의도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칫 독이 든 술을 마실 뻔했던 병사들 쪽은 그리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렇고말고요! 너무 대처가 무릅니다!” 왕비는 금방이라도 상인을 죽여버릴 듯한 기세로 흥분하는 병사들을 쓰윽 돌아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내 결정에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럴 만한 배짱이 있을 리 없다. 이 사람에게 거역하려면 국왕만큼 심장이 강하거나 독립기병대장이나 틸레든 기사단장만큼 얼굴 가죽이 두꺼워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도라 장군만큼 완고하기라도 해야 하지만, 일개 병사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였다. 왕비가 자신을 살려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상인이 굽실굽실 고개를 수그리며 감사하자 왕비는 씩 웃으며 상인에게 말했다. “돌아가면 네 바보 같은 주인한테 전해. 이 왕비가 있는 한 델피니아의 병사들에게 독을 먹이는 건 무리라고.” 산인은 벌벌 기듯이 도망쳤다. 이 사건 이후로 병사들 사이에서 왕비의 평판은 더욱 높아졌다. 반대로 케이파드 성은 이를 갈며 분해했지만, 그래도 성에서 나와 싸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더 악랄한 수단으로 나왔다. 주민들 사이에 소문을 흘린 것이다. 그린다 왕비가 보나리스에 붙잡혀 있는 동안 나젝크의 밤시중을 들었다는 소문을. 이런 소문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종류이다. 게다가 나젝크가 그럴 목적으로 보나리스로 갔다는 것도, 도망쳐 돌아올 때까지 이틀 이상 간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 아주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이 소문으로 뜨거워졌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행상인의 입을 통해서 델피니아 군까지 소문이 전해지게 된다. 물론 아무도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는 음지에서 속닥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자신들의 왕비에 대해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 델피니아 군의 반응은 격렬했다. 병사들 전원이 펄펄 뛰며 흥분하기에 이르렀다. 국왕은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 섣부른 생동은 금지한다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가만히 넘어갈 수 없었다. 병사들은 흥분하며 자신들의 지휘관에게 제발 싸우게 해달라고 매달렸고, 각 지휘관들은 다시 자신들의 상사에게 호소했다. 물론 국왕도 측근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독이 든 술 다음에는 이 소문. 너무나도 악랄합니다. 폐하께서야 따로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이 이상 공격을 않고 있으면 적에게 얕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까지 꺾이게 됩니다.” 도라 장군 역시 엄청난 기세로 국왕에게 공격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조라더스도 그렇고 저 아들래미도 그렇고, 왕비의 정조를 무기로 들고 나오는 것말고는 싸울 줄도 모르나?” 왕비 본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소문이 여자에게 치명적이라는 것,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굴욕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그 바보가 손을 댔나 안 댔나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점. 나젝크가 자신을 욕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국왕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지 않은가. 왕비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혹시 내가 저 빌어먹을 새끼한테 무슨 짓을 당했으면 전황이 달라지는 거야?” “당연합니다! 병사들의 사기 문제입니다!” 발끈하며 단언하는 도라 장군을 보고 왕비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뭔 짓을 당했으면 왕비로서의 내 가치는 엄청나게 떨어졌을 거라 이거지?” 본인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장군은 심하게 동요했다. 얼굴을 붉히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군의 갈등을 바라보면서 왕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참 큰일이네. 체력적으로도 남자보다 훨씬 약한데, 좋아서 강간당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폭력에 지는 건 용서도 안된다니.” 그러자 연애 방면의 프로인 발로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말을 반박하자는 건 아니지만, 왕비. 제대로 된 남자라면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폭력 따위는 안 써.”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도 그 말 좀 전해주겠어?” 회의장에 웃음이 퍼졌고 국왕이 입을 열었다. “일단 적이 우리를 도발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우리를 화나게 만들어서 저 성을 향해 돌격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이런 소문까지 흘리는 거지. 하지만 저 성에 정면으로 돌격하면 이쪽의 피해가 너무 커지게 돼. 반대로 이쪽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탄가 군을 저 성에서 끌어내고 싶어하고. 안 그런가?” 전원이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의 말대로 저 성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어리석을 짓이다. 국왕은 모두의 표정을 살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나젝크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인간이야. 곧바로 성을 뛰쳐나와서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농성을 선택한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예상대로 스케니아의 원군 8천이 지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더군.” 회의장 전체에 동여가 스쳤다. 이 정보도 셰라가 가져온 것이었다. 스케니아 군은 현재 케이파드에서 20카티브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거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소 정지했다. 분명히 탄가 쪽에서는 일각이라도 빨리 와달라고 재촉하고 있을 텐데 조금도 움직이려 들이 않았다. 셰라는 그 이유를 이렇게 평가했다. “두려움 반, 욕심 반인 듯합니다.” 스케니아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이것이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문제였지만-멀리 북쪽에까지 유명한 영웅 조라더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델피니아가 그렇게나 강했던가, 그렇게 강한 상대와 싸워도 괜찮을까 등등 새삼스럽게 겁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 탄가가 그렇게나 힘든 상황이라면 이쪽도 큰 위험을 감수하며 도와주려는 거니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약속받지 않고서는 수지가 안 맞는다는 욕심이 들었다. 탄가를 도와주는 대가로 어떤 조건을 내세울지를 놓고 회의가 한창이라는 것이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그런 바보 같은 토의나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얘기지만, 델피니아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남은 건 어떻게 탄가 군을 성에서 끌어내느냐 하는 점인데, 놈들이 절호의 구실을 만들어줬어.” 국왕은 원가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한 듯이 웃으면 말했다. “아무래도 왕비의 협력을 받고 싶은데.” “응?” 국왕이 생각해낸 ‘작전’을 듣고,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 전원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어졌다. 발로와 이븐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고 나시아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라 장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벨민스터 공은 왠지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로버렸다. 루가 감탄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악해.... 그거, 좀 불쌍하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이 경우는 자업자득이니까. 또한 그렇기에 더욱 효과적이라고도 할 수 있어.” 국왕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왕비가 기막혀하며 입을 열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을 동정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너 참 잘도 그런 생각을 해내는구나?” “이것도 전략의 일종이야. 해주겠지?” “그야 굳이 해달라면 못할 거도 없지만, 왠지 닭살이 돋는걸.” “제발.” “두드러기도 날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꼭.” “하지만 정말 이런 도발에 넘어올까?” “난 틀림없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국왕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델피니아 군에 움직임이 있었다. 전체의 반 정도가 본대에서 떨어져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케이파드 성에서도 이 움직임은 훤히 잘 보였다. “아마도 스케니아 군의 존재를 깨닫고 그쪽을 견제하러 갔을 겁니다.” 중신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나쁜 얘기는 아니다. 이걸로 전투가 벌어져서 스케니아가 이겨준다면 더욱 좋다. 표면적으로는 탄가가 궁지에 몰린 듯이 보였지만, 중신들은 상황을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케이파드는 그리 쉽게 함락할 수 있는 성이 아니다. 거기다 델피니아 군도 장기전은 할 수 없을 터. 이렇게 버티면 버틸수록 서쪽의 파라스트가 점점 델피니아를 잠식한다. 언젠가 반드시 코랄에서 전령이 도착한다. 그러면 월 그리크는 여기에 노려서 공격하면 지금 싸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게 전투를 전개할 수 있다. 조라더스 때부터 국왕을 보좌하던 가신들 중에서도 특히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무조건 돌격하려는 나젝크를 필사적으로 달래고 있었다. 새 왕이 선왕과 비교해 무용은 어떤지 몰라도 생각은 훨씬 부족하다는 사실은 누가 보기에도 분명했다. 나젝크 자신도 남들이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국왕이라는 자부심도 있다. 그렇기에 적군이 반으로 준 것을 보고 바라지도 않던 기회라고 생각하며 병사를 불러 모아 공격하려 했다. 측근들은 당황하여 이를 제지했다. “참으십시오! 굳이 지금 싸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유리해집니다! 여기서 가만히 버티고 있으면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바로 눈앞에 적이 있다! 그렇데 한 번도 싸워보지도 않고 숨기만 해?!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하는 짓이 아닌가!” “폐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여러 명이 달려들어 잔뜩 흥분한 나젝크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델피니아 군이 교외에 주둔하게 되고서부터 이런 대화는 한두 번 반복된 게 아니었다. 그때 전령이 달려왔다. “서둘러 망루로 와주십시오!” 망을 보고 있던 병사가 뭔가를 발견한 듯했다. 나젝크와 측근들은 성의 정면에 있는 망루를 향해 달려갔다. 이 위치에서는 케이파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로 눈 아래에 성문으로 이어지는 튼 거리가 뻗어 있었다. 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동시에 케이파드에서 가장 큰 거리였다. 길 양쪽에 빽빽하게 상점이 늘어서 있지만, 여기에 점포를 하릴 수 있는 것은 성에도 출입할 수 있는 대상인뿐이었다. 바로 그 길 한가운데로 말을 탄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 양쪽에서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면서 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마치 새 신부 같은 차림이었다. 전신을 새하얀 드레스를 감싸고 하얀 베일을 쓴데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당당한 흑마의 고삐를 쥔 채 귀부인답게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아 있다. 시종 한 명도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성문 앞까지 도착한 뒤, 그 사람은 우아하게 베일을 걷어 올리고 발코니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건강하셨나요, 나젝크 왕자. 아니, 지금은 폐하인가요?” 당사자인 폐하의 안색은 시뻘건 정도를 넘어서 시꺼멓게 변했다. 성문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챈 것이다. “활을 가져와!” 미친 듯이 외쳤지만 측근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그를 말렸다. 상대는 비무장 상태의 여자. 온 마을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무장도 안 한 여자를 쐈다가는 씻을 수 없는 수치다. 그린다 왕비는 표정만은 지극히 품위 있고 싹싹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죽어라 욕을 퍼부으며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저를 부인으로 삼아주신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정말 기쁩니다. 우선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요.” 여자 말씨가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 사람은 왕비 한 명뿐일 것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지극히 청초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보이지만. 이 연출은 국왕과 발로가 고안해 대사 하나하나까지 전부 지도했다. 평소처럼 남자 말씨로 퍽퍽 내뱉는 것보다 이쪽이 효과적일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서둘러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회상의 천을 사들이고 셰라와 루, 샤이만이 필사적으로 바늘을 놀려 드레스를 완성한 것이다. 로자몬드는 거들지 못했다. 그쪽은 바느질과 연이 없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익숙하지 않은 귀부인식 승마로 악전고투하면서(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은 채 발코니 위의 나젝크를 향해 명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쭤보겠어요. 제가 물어뜯어드린 왼쪽 귀는 좀 어떠신가요?” 시커멓게 물들어 있던 나젝크의 얼굴이 이번에는 창백하게 변했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한다. 이러다 졸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왕비는 우아하고 상큼하게 미소지었다. “지개 밤시중을 들었다고요? 세상에, 어쩌면 그리 뻔뻔스럽게 잘도 지껄이실까. 시중은커녕 당신은 뇌진탕을 일으켜서 완전히 뻗어 계시지 않으셨던가요. 설마 잊었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왕비의 맑은 목소리를 정적에 잠긴 거리 구석구석까지 맑에 울렸다. “조라더스 폐하도 불쌍하게, 어쩌다 이런 아들을 두시게 된 걸까요. 전투 중에 제가 목숨을 빼앗기는 했지만 구분은 적어도 당신보다는 훨씬 훌륭한 국왕이셨습니다.” “네, 네년. 나만이 아니라 아바마마까지 우롱해?!” 분노한 나머지 나젝크는 미친 듯이 발코니에서 몸을 내밀었고 측근들은 당황하며 나젝크의 몸을 붙들어야만 했다. 왕비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사람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나, 화나셨나요? 하지만 당신이 대체 뭘 할 수 있지요? 맨몸의 여자 한 명이 무서워서 부하들 등 뒤에 꼭꼭 숨어 계시는 분이.” 말을 돌리고, 왕비는 몸을 뒤틀어 위쪽을 올려다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구혼은 정식으로 거절하겠어요. 제게는 남편이 있답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저의 발도우가요. 제 남편을 당신과 비교하는 것 따위,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비교하는 것조차 남편에게 실례가 외는걸요, 그럼 안녕히!” 말을 내뱉고 경쾌하게 말을 타고 달려간다. 조금도 서두르는 기생이 없는, 결코 귀부인의 승마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우아한 리듬으로. 그와 동시에 나젝크는 발코니에서 몸을 돌리며 외쳤다. “성문을 열어!” 바로 성의 정원으로 달려가 애마를 끌어낸다. 가신들은 필사적으로 말렸다. 이건 명백하게 적의 도발이라고 간언했지만 이미 어떠한 설득도 소용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남자라고 할 수 없다. “비켜! 방해하는 놈은 내 손으로 죽인다!” 정말 누구라도 죽여 버릴 듯한 가세로 나젝크는 군대를 이끌고 성문으로 뛰쳐나왔다. 거리에 모여 있던 인간들이 지금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생각하면 분노로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시민들 전원의 눈알을 뽑고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젝크가 성문을 나섰을 때 왕비의 모습은 상대가 성분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장 위에 똑바로 고쳐 앉았다. 말의 배를 박차며 단숨에 속력을 높인다. “놓칠까보냐!” 질주하는 나젝크의 뒤를 따라 병사들이 달려온다. 그 수는 약 5천. 5천 명의 군사가 지축을 울리며 왕비를 쫓아온다. 그러나 왕비가 타고 있는 것은 어떠한 군마보다도 뛰어난 로아의 흑왕. 탄가군은 필사적으로 추격했지만 조금도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왕비는 자신을 따라오는 탄가 군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유유히 도망치며 교외의 초원까지 끌어내었다. 물론 그곳에는 투지로 가득 한 델피니아 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파드를 눈앞에 두고서 지금까지 전투를 금지당했다. 게다가 벨민스터 가문의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전투였다.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산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었다. 이 기세에는 탄가 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기세가 움츠러들었다. 아주 잠시 동안의 일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델피니아 군은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다. 인마의 파도가 해일처럼 탄가 군은 행해 밀어닥쳤다. 성난 파도처럼 그린다 왕비를 쫓아오던 탄가 군은 이번에는 제방이 되어 그 해일에 맞서야 했다. 그동안 왕비는 델피니아 군과 합류해버렸다. 탄가 군의 선두에 서 있던 나젝크는 다시금 이를 갈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왕비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적과 응전하지 않으면 목숨마저 위험해진다. 본진과 합류한 왕비를 향해 루가 달려와 검과 갑옷을 건넸다. 갑옷이라고는 해도 가죽으로 된 가슴받이 정도에 불과했지만. 왕비는 새하얀 드레스 위에 가죽 갑옷을 걸치고 검을 빼들었다. 실로 정쟁의 여신 같은 모습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정말 기어나왔어.” “그야 어쩔 수 없겠지. 남자의 체면이 산산조각 났는데.” “남자들도 큰일이네.”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 바보의 목이나 가지러 가볼까.” 흑왕의 고삐를 풀어준 뒤 귀찮은 듯이 말하며 왕비도 돌격에 참가했다. 그 왼쪽에 루가 함께 있다. 국왕이 총지휘를 위해 후방에서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이 두 사람은 최강의 콤비였다. 두 사람의 말은 한참 뒤늦게 출발했음에도 무서운 속도고 다른 이들을 따라잡아 군대를 이끄는 형태가 되었다. 그대로 적병들이 가장 밀접해 있는 쪽으로 뛰어든다. 돌격당한 탄가 기사들은 재빨리 흩어져 두 사람을 포위하며 둘러쌌다. 마치 개미 떼처럼 두 사람을 향해 들러붙었지만 둘은 끈질긴 개미 떼를 쳐내며 차례로 쓰러뜨렸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델피니아 군에서도 굴지의 용사들뿐. 그런 용사들에게도 이 두 사람의 활약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거리가 벌어진다. 어설프게 다가갔다가는 자신들까지 죽게 될 것 같을 정도였다. 두 사람이 가는 곳에는 소용돌이가 친다. 모든 것을 휘몰아쳐 쓰러뜨리는 질풍이. 탄가 군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돌격을 시도했지만 리와 루는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며 돌파구를 열었다. “비전하를 따르라!” 뒤를 따라 델피니아 군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탄가 군을 갈라 놓는다. 이렇게 되면 탄가 군이 버틸 방법이 없었다. 밀리기 시작하는 군대가 다시 기선을 잡으려면 괴로운 상황을 견디며 그를 뛰어 넘어야 하며, 그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우수한 지휘관인 것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지도력을 지녔던 조라더스는 이미 사라졌다. 그저 각 무장들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걸고 자신들의 부하를 지휘하며 제각각 싸우고 있을 뿐. 월은 그런 정황을 전부 읽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아군이 불리해지면 재빨리 원군을 보내고, 탄가 군에 틈이 생기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는, 완벽하리만치 냉정한 지휘를 펼쳤다. 탄가 군이 밀리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이 격전 중에 총대장인 나젝크는 혈안이 되어서 왕비만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전투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아군이 점점 밀려가는 전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전령이 지시를 받으러 달려와도 알아서 어떻게든 하라고 고함만 지르고 있어서는 부하들도 손을 쓸 길이 없었다. 나젝크가 용맹한 전사인 것만은 틀림없다. 델피니아의 기사들이 몇 명이고 자신의 이름을 대며 앞으로 나와 나젝크를 쓰러뜨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나젝크의 창에 쓰러져갔다. 강한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인간은 유능한 누군가의 지휘 아래에서 도구로 이용될 때에는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하겠지만 전체의 지휘는 맡길 수 없다. 너무나도 위험하다. “어디냐, 계집!” 분노에 불타는 나젝크는 피로조차 느끼지 못했다. 좌우로 날뛰며 다니고 있을 때, 등 뒤에 창이 꽂혔다. “커헉?!” 나젝크는 건장한 몸을 고통으로 뒤틀며 뒤를 돌아보았다. 창을 던진 상대를 찾으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왕비가 직접 숨통을 끊으려고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 비겁한...!” 피거품을 뿜으면서 창을 쥐었지만 왕비는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적진 깊숙이 혼자 뛰어 들어와 무방비로 들을 노출하고 싸우면서 뒤를 공격하는 게 비겁하다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착각이다. 왕비는 나젝크에게 몸통박치기를 먹여 말에서 떨어뜨렸다. 나젝크가 지면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왕비도 흑왕에서 뛰어내려 칼을 뽑아들었다. 탄가의 국왕은 공포와 분노를 만면에 드러내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너 같은 놈은 어디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도 비겁하다고 외치겠지.” 중얼거리면서 왕비가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른 순간 나젝크의 목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왕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짧게 혀를 찼다. 정말이지 끝까지 멍청한 인간이었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에게 손을 대려고 했던 주제에, 그건 비겁하지 않다고 주장할 생각인 걸까. 시종이 나젝크의 목을 주워 올려 적장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큰 소리로 외쳤다. 보통은 적장을 쓰러뜨린 왕비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는 것조차 바보스러웠다. 그러나 전투는 종결지어야 한다. 왕비는 큰 소리로 외쳤다. “네놈들의 총대장은 죽었다. 아직도 싸울 셈인가!” 탄가 군의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부왕에 비해 못난 인간이라 하더라도 총대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총대장이 죽어버린 이상 이미 통제를 잃어버린 탄가 군이 전투를 계속하기란 무리였다. 병사들은 앞은 다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델피니아 군은 어째서인지 뒤를 쫓지 않았다. 적어도 곧장 쫓지 않았다. 그 틈에 탄가 군의 패잔병들은 필사적으로 달리고 또 달려서 간신히 성까지 도착했다. 성을 지키고 있던 이들도 조마조마해하면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나 빨리 지고 돌아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행히 델피니아 군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둘러 격자를 끌어올리고 무거운 성문을 열어 동료들을 수용했다. 요새로서의 기능을 지니는 성은 전투에서 지고 돌아온 병사들을 재빨리 수용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적이 패잔병들과 함께 밀려 들어올 때이다. 그럴 때에는 불쌍하지만 동료를 버릴 수밖에 없다. 문을 열면 적까지 함께 들어와버린다. 마침내 델피니아 군이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직선으로 성문을 향해 달려온다. 아군은 아직 계속해서 도망쳐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 이상 성문을 열어두는 것은 자살 행위, 성을 지키던 책임자는 문을 닫도록 명령했다. 부하들이 기계 탑으로 달려가 육중한 철격자를 내리려 한다. 그러나 이미 성 안으로 피난해 있던 패잔병들이 갑자기 방해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성문 주위에 진을 쳤다. “네, 네놈들!” “배신이냐?!” 허탈해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다시 전장의 공기가 감돈다. 문을 되찾으려 덤벼들었지만 이 수십 명은 배신자가 아니었다. 이것도 월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도주하는 탄가 병사들 사이에 델피니아 병사들이 끼어 있었다. 겨우 몇십 명에 불과했지만 고르고 골라낸 정예부대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만큼 용맹성에 있어서도 탄가 병사들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델피니아 군이 시가지를 통과하며 일직선으로 달려온다. 성의 병사들은 더욱 당황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델피니아 군은 활짝 열린 문으로 당당하게 침입했다. 이렇게 되면 형식적인 저항조차 소영이 없다. 탄가 군은 차례로 적에게 투항했고 성은 델피니아 군에 제압되었다. 그 즈음 케이파드 북쪽에서 벌어진 스케니아 군과 델피니아 군의 전투도 승부가 가려졌다. 어차피 예상 밖의 사태에 당황하며 동요하는 군대와 기합이 잔뜩 들어간 군대의 싸움이다. 처음부터 승패는 정해져 있던 거나 다름없었다. 숫자만으로 따지자면 스케니아 군이 3천 명 많았지만, 그것만으로 떨어지는 사기를 보충할 수는 없었다. 결국 스케니아 군은 겁을 먹은 병사들을 채 통제하지 못하고 점점 델피니아 군에 밀리다가 이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모국까지 도망쳐 일의 전말을 코리우스 2세에게 보고했다. 전령의 보고로 조라더스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던 코리우스 2세도 케이파드가 델피니아 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에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는 델피니아 대신 중앙으로 진출하려던 장대한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린다. 서쪽에서는 파라스트가 유리하게 전투를 전개하고 있지만, 스케니아와 교섭하던 것은 탄가였다. 굳이 말하자면 조라더스가 다스리는 탄가였다. 그 조라더스가 죽고 탄가는 델피니아에 복속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태에서 코리우스 2세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곤란하게 됐군.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들만으로 델피니아를 공격해볼까.... 아니, 그러려면 무엇보다 군함이 부족해. 차라리 탄가를 포기하고 델피니아에 동맹을 제시하게나....” 이런 때에 가장 국왕의 힘이 되어야 할 중신들은 제각각 자기 주장만 펼치고 있다. 어떤 자는 스케니아가 독자적으로 금광맥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자는 그보다도 무역항인 코랄을 빼앗자고 주장했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한 듯했다. 어쩌면 방침을 결정한 뒤에 대책은 나중에 짜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국왕도 어느 의견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스케니아에서는 이렇게까지 회의가 혼란스러워지는 일이 없었다.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코리우스 2세의 상담역인 동시에 둘도 없는 오른팔이던 파로트 백작. 얼마 전 백작의 저택에서 불이 나 저택은 완전히 불타고 백작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신하 한 명의 죽음에 지나지 않는 이 사건은 이누 스케니아라는 나라가 걸어갈 운명을 크게 바꾸었다. 국왕이 무모한 일을 하려고 해도 말려줄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국왕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부드럽게 회의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아까운 남자를 잃었어....”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코리우스 2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아마도 코리우스 2세의 본심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이 잃은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가 깨닫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4장 나젝크의 동생 중 비퍼스라는 왕자가 있다. 케이파드 성을 함락시킨 월 그리크는 성내의 혼란을 가라앉힌 뒤 즉각 비퍼스를 새 국왕으로 세웠다. 월은 탄가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 이상 전쟁이 계속되지 않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것은 탄가의 중신들에게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얘기였다. 왕가의 존속은 물론이고 탄가라는 나라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정통 왕가의 혈통인 왕자를 왕으로 삼을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서둘러 일이 진행되었다. 새 국왕 비퍼스는 현재 19세. 갑자기 떨어진 왕좌에 앉게 된 비퍼스의 첫 역할은 종전 협정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협정은 탄가에 굉장히 불리한 조건으로 맺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자하니까지는 델피니아의 영토가 되고, 당분간 정치를 행하는 비퍼스의 보좌역을 델피니아의 사람이 맡게 되었다. 최초로 보좌역을 맡은 것은 도라 장군이었다. 월에게는 아직 서쪽과의 전투가 남아 있다. 이 전투에 라모나 기사단장을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틸레든 기사단장도 동행을 희망했다. 타우 남자들은 전쟁터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부여도 이런 일에는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도라 장군이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다. 월은 장군에게 5천 명의 병사를 맡겨 케이파드의 치안과 전후 처리를 명령했다. 5천이라고 하면 적은 것 같지만, 잘 통제된 천 명은 통제되지 않은 만 명도 이길 수 있는 법이다. 그만큼 특정 의지로 뭉친 집단의 힘이라는 것은 얕볼 수 없다. 현재 탄가에 도라 장군이 이끄는 5천 명의 군대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의 집단을 조직할 힘을 지닌 인간은 없다는 것이 국왕의 판단이었다. 도라 장군은 이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질 경을 함께 남겨주시지 않겠습니까.” “혼자서는 자신이 없나?” 국왕이 놀리는 듯이 묻자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명령만 하신다면 저 혼자만으로도 이 케이파드를 통제해 보이겠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는 가능한 한 이 나라 백성들과 알력을 일으키지 않기를 원하고 계시지요.” “그렇네만.” “저희 로아 사람들은 본래 유목민이었지만 왕가를 모신 세월이 길었습니다. 그런 만큼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탄가는 마을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산지에서 자연과 싸우며 살아가는 거친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게 두렵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과 다뤄야 할지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 경이라면 최적이지요. 게다가 베노아의 사람들은 질 경에게 굉장히 충실하니, 질 경이 하지 말라고 명령만 하면 무단으로 마을을 강탈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당한 말이었다. 산의 남자들, 바다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만 이런 이들을 통괄하려면 무조건 명령만 내려서는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괜찮겠군. 질 경에게 남아달라고 부탁하지.” 그리하여 베노아에서 온 천 명도 그대로 남게 되었다. 단, 이븐만은 국왕과 함께 서쪽으로 가기를 원했따. 델피니아 군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국왕이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혹은 명령도 떨어지기 전에 각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라 장군과 질이 남아서 케이파드를 지켜보고 있는 한 자신까지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고 이븐은 판단했다. 그보다 서쪽에서 중요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출발 직전, 월은 막 탄가의 국왕이 된 비포스를 불러 단둘이서 면담을 했다. 승전국의 국왕과 패전국의 국왕이다. 게다가 비퍼스는 월의 뜻에 따라 왕이 된 입장이므로 표면적으로는 같은 국왕이어도 절대로 대등할 수 없었다. 비퍼스는 혼자서 회담 장소로 찾아왔다. 가신들은 심히 걱정하며 최소한 방 앞까지만이라도 함께 따라 오겠다고 했지만 소년 왕 자신이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 국왕이 자신의 성 안에서 걸어다니는 것이 어째서 위험하다는 거냐고 반문하면서. 월의 앞에 나타난 비퍼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한 뒤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아직 소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나이이다. 얼굴에 잔뜩 나 있는 주근깨 때문에 더욱 앳되어 보였다. 그러나 맑고 깊은 회색 눈동자는 아무 두려움 없이 똑바로 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혈색이 좋고 건강해 보이는 소년이다. 아직 몸이 마른 것은 나이가 나이이니만치 어쩔 수 없지만 조금만 지나면 금방 당당한 사나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새 국왕은 왕자 시절에 부왕이나 가신들로부터 전혀 기대를 받지 못했다. 아니, ‘얼간이’나 ‘멍청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 왕자는 전투에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전투에 참가해도 제대로 공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 중앙을 석권하고 있는 영웅의 앞에 서서 아무 주저 없이 정면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소년이 겁쟁이일 리가 없다. 월은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이 국왕으로 세우게 된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단순히 침착한 것만이 아니다. 건실한 성격과 굳은 심지, 의연한 위엄까지 느껴졌다. 굉장히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내일 이 땅을 떠납니다.” “알고 있습니다. 가신들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의 보좌역으로 로아의 도라 장군과 타우의 영주를 남겨 두겠습니다. 당분간의 정책은 그 두 사람과 상의해서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지극히 조용하고 침착한 어조였다.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분해하면서 억지로 참고 있는 기색도 없다. 월은 살짝 웃었다. “저는 당신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형의 원수입니다. 많이 원망스럽겠지만....” 그러자 비퍼스는 고개를 저었다.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당신과 싸워서 패배했지요.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전쟁이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송합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은 운명이 언젠가 당신에게 찾아오지 않는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모쪼록 조심하시기를.” 비아냥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비퍼스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지만, 원수 사이에서 이런 말이 아버지와 형을 죽인 상대에 대한 항의처럼 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월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승전국이라고 해도 언제나 이기기만 하는 나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저 역시 패배는 사양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나라, 내 국민들을 위해서, 그러니 저는 전쟁 자체를 없애버릴 생각입니다.” 비퍼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상대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당신을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충고-아니,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무슨 부탁이신지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저는 당신의 아버지 조라더스 왕과 형 나젝크 왕자를 쓰러뜨렸습니다. 당신은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건 제게도 굉장히 고마운 일이지만 탄가 사람들의 심정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를 원수로 여기며 국내 정치에 대해 델피니아의 인간이 간섭하는 걸 불쾌하게 여기고 반기를 들려는 이가 반드시 있겠지요, 그런 이들이 우두모리로 세울 만한 인물이라면 당신이나 당신의 숙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월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끊었지만 비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곤란한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월을 바라본다.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기 곤란합니다만....”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대답을 들으려는 건 아닙니다. 제 부탁은 질 것 같은 싸움이라면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겁니다.” 비퍼스는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월은 더욱 진지하게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당신이- 탄가 사라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저를 쓰러뜨리기 위해 병사를 일으킨다.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렇기에 진심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반기를 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부탁이니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를 충분히 따져본 뒤에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비퍼스의 눈이 점점 더 동그래졌다. 지금은 입까지 쩍 벌리고 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나서 소년 왕은 처음으로 놀라움과 낭패감을 드러내며 반문했다. “월 폐하?” “싸움을 걸어온다면 저는 언제라도 응합니다. 그것이 내 나라를 지키는 길이니까. 탄가사람들도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려 한다면 단순한 충동이나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병사를 일으키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전쟁을 시작하려면 계획을 꼼꼼하게 검토해 준비하고, 이 정도라면 반드시 델피니아를 이길 수 있다는 승산이 선 뒤에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저도 전력을 다해 상대하겠습니다.” 뻔뻔스럽다고 해야 할까. 기가 막히는 것을 넘어서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말이지만 웃을 얘기가 아니었다. 비퍼스는-주위 사람들에게는 멍청이 소리를 듣고 있어도 최소한 죽은 형보다는 훨씬 현명한-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것과 동시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상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협박이 아니다. 의중을 떠보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다. 쳐봤자 한 줌도 안 될 연약한 상대와 정식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런 깃은 해봤자 뒷맛이 씁쓸하다는 제왕의 배려였다. “충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겠는가?” “예. 폐하가 말씀하신 대로 불만을 표하는 자들에게는 제가 직접 묻겠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참을 수 없느냐고. 불가능하다면 승리하기 위해 어떤 계책을 가지고 있는지, 그저 불평 불만을 늘어놓기만 해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분명히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월 역시 자신보다 열 살 이상이나 어린 소년 왕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이 나라 사름들에게 있어서 원수라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당신과도 이런 형태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가능하면 탄가와는 친밀한 벗으로 지내고 싶었습니다만....”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퍼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한 끝에 흐트러짐 없는 의연한 태도로 말한다. “분명히 당신은 아버지와 형의 원수이지만, 그것은 정정당당하게 싸운 전쟁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나라의 존속을 인정해주셨지요. 전쟁에 패한 자로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기쁨입니다. 그 관대한 조치에 감사할지언정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소년 왕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조용한 미소였다. “저야말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우리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쌓아주신다면 꼭 폐하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월은 가만히 소년을 바라봤다. 월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그래주시겠습니까?” “저 같은 애송이에게는 분수에 맞지 않는 영광이겠지만....” 델피니아의 국왕은 고개를 젓고 탄가 국왕의 손을 쥐며 힘차게 말했다. “감사하오.” 깜짝 놀란 비퍼스는 손을 붙잡힌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사람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 정말로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어지지가 않았다. 델피니아의 월 그리크는 갓 서른 남짓의 젊은 나이에 이미 전설이 된 인물이다. 서자 출신으로 국왕이 된 것만이 아니다. 내란으로 왕좌에서 쫓겨나고, 국내의 귀족들은 반기를 들고, 결과적으로 파라스트의 포로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역경을 언제나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온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전사인 동시에 용병술도 뛰어나다고 한다. 전장에 선 월 왕의 당당한 모습은 투신 발도우가 강림한 것과도 같다는 평판이었다. 그 영웅이 이렇게나 인간미 넘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비퍼스의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직접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당하고 훌륭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친밀하지는 않았다. 조라더스 또한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퍼스를 무시하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비퍼스 왕. 또 한 가지 충고를 드려도 괜찮겠는지?” “물론입니다.” 얼굴을 든 월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당신의 마음가짐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합니다. 그러나 탄가 사람들 앞에서는 그 마음을 숨겨두십시오. 델피니아에 호감 따위는 전혀 없고 패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주위에서 그렇게 생각하도록 행동하십시오. 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욕을 퍼부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몸을 지키는 길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월을 계속 말을 이었다. “아까의 충고도 잊지 마십시오. 부왕을 추모하는 전쟁을 바라신다면 저는 언제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상대에게 감복하면서 비퍼스는 깊이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형과 이 국왕은 왕으로서의 깇이가 달랐다. 회견을 끝내고 심야의 복도로 나온 비퍼스를 그린다 왕비가 맞이했다. “여어.” 허물없는 웃음이었다. 케이파드의 사람들은 델피니아의 자랑하는 영웅 중 한 명인 월 왕의 승리의 여신을 이번에야 처음 보는 셈이다. 물론 보나리스에서 봤던 이들도 있지만, 보나리스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은 왕비가 왔다는 말에 벌벌 떨며 절대로 왕비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다. 탄가에서도 손꼽히는 무장과 기사들도 마주쳤다가는 재앙이 떨어진다며 필사적으로 도망다니고 있었다. 비퍼스는 그런 공포를 느끼지 않았기에 자신과 나이가 같은 승리의 여신을 냉정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왕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림에 먼저 놀랐다. 남장 미녀라고 하기에 절도 있는 군복 차림을 연상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아무렇게나 틀어올리고 사냥꾼이나 입을 것 같은 옷을 걸친데다 화장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같은 남장이라도 이번에 처음 보게 된 벨민스터 공작 쪽이 기품이나 행동거지를 봐도 훨씬 왕비다워 보였다. 케이파드 성의 시종과 하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도 저건 문제다. 너무나도 품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러나 비퍼스는 그런 의견에 쉽게 찬성할 수 없었다. 정말로 품성이 결여된 왕비라면, 싸우는 것만이 장점이라면 그 월 왕이 어째서 그렇게나 왕비를 존중하는 걸까. 왕의 보물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고명한 이들이 어째서 왕비에 대해서라면 저렇게나 공손하게 행동하는 걸까. 비퍼스는 왕비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자신이 보아온 여성들과는 전혀 이질적은 아름다움이었지만 눈을 확 끄는 매력이 있었다. 일종의 고고함마저 느껴졌다. 비퍼스 쪽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제게 원가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용무랄 것까지는 없는데, 너한테 해둘 말이 있어서.” “예.” “원망할 거라면 날 원망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비퍼스에게 왕비는 부드럽고 침착하게 말했다. “원망할 거라면 날 원망해. 월을 원망할 필요는 없어. 네 아버지를 죽인 것도, 형을 죽인 것도 나니까.”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전쟁에서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원망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이래서는 입장이 반대 아닌가.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남편과 말을 맞춘 게 아닐까 싶었지만 보석처럼 맑고 흔들림 없는 녹색 눈을 보니 아무래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신을 원망해도 괜찮으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건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 날 아버지의 원수라고 증오해도 돼.” “.......” “하지만 난 내일 여기서 출발한다. 죽이려면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그걸 말해둘까 싶어서.” 비퍼스는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과연 그 남편에 그 부인. 아까도 했던 말이지만 검을 든 자들이 맞서 싸운 결과일 뿐이다. 게다가 비장군에 대해 들려오는 수많은 소문이 진실이라면 어차피 여기서 검을 뿝아도 자신이 죽게 될 뿐이다. “비전하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십니까?” “아니. 그런 거,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지.” “다행입니다.” 정말로 안도하는 듯한 비퍼스의 대답에 왕비는 재미있어하며 물었다. “싸움이 싫어?” “아니오. 이래봬도 실력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검술 연습도 꾸준히 해왔고 어렸을 때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싸워서 져본 적도 없었지요. 그저....” 비퍼스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 시상은 말할 수 없다. 탄가에 태어난 왕자로서 그것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왕비는 비퍼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전쟁은 싫은 거구나?” “가능한 한 안 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쪽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목소리에 힘을 담아 대답한다. 그린다 왕비는 앞으로 탄가를 지고 갈 소년 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감이라고는 터럭만큼도 가질 수 없던 나젝크에 비해, 같은 아버지 아래에서 용케 이렇게까지 다른 자식이 태어났다고 감탄이 절로 났다. “굉장히 좋은 방침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네 어디가 얼간이라는 거지?” “아버지는 쓸모가 없는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 분이었으니까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쓸모도 없다? 되게 단순한 사고 방식이잖아.”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정의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패권을 쥐고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안정된 세계를 만든다는 이상입니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적대하는 자나 거역하는 자는 철저하게 뿌리를 뽑았지요. 그 방침을 어떤 의미로는 옳았고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식은 너무나 강제적이었습니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원한뿐이니까요.” 부왕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소년은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걸까. 비퍼스는 굳은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왕비는 앞으로 나아가 비퍼스의 정면에 섰다. 숨결이 닿을 정도도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왕비의 얼굴에 소년 왕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왕비는 그래도 상관없이 다시 나아가 상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하고 있는 탄가의 국왕에게 승리의 여신은 씨익 웃어주었다. “너, 좋은 임금님이 될지도 몰라.” “.......” “내가 이런 소리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월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 “당신의 남편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두 분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의 남편을 모범으로 삼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글쎄, 그건 어떨까. 그걸 보고 배운다고 해도 똑같이 따라 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거야.” 왕비는 거기서 대화를 마치고 국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장언한 복도에 홀로 남겨진 비퍼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짧은 순간, 물어뜯길지도 모른다는 이유 모를 공포가 엄습했던 것이다. 닫혀버린 문을 힐끔 쳐다보고 조금 아쉬운 기분에 잠겼다. 저 사람들과 이런 형태로, 원수로서밖에 만날 수 없다니. 그 사실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문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하고 비퍼스는 그 자리를 떠났다. 방 안에서는 국왕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온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활짝 열린 창으로 청량한 여름의 밤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왕비는 말없이 국왕에게 다가가 그 옆에 섰다. 호화 찬란한 케이파드 성은 발코니까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국왕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 나라에 저런 왕자가 있었다니....” “무슨 착오가 아닐까 싶은 절도지. 도저히 그 조라더스의 씨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왕비의 평가는 현실적이기 그지없었다. “이봐, 리.” “응?” “이 나라의 국왕을 두 명이나 죽여놓고서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건 너무 뻔뻔스러울까?” “아니. 그 녀석도 진심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정말 다행이야.” 국왕은 조용히 말했다. 탄가와 델피니아 사이에 전쟁이 없어진다면 그 소년 왕은 둘도 없는 이웃이 되어줄 터. 그런 반면 부왕과 형을 죽이지 않았으면 저 왕자와-지금은 국왕이지만-만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다. 나젝크는 그렇다 치더라도 조라더스는 속임수로 쓰러뜨린 거나 다름없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고는 하지만 뒷맛이 씁쓸하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월은 그러한 마음의 고통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한 인간이었다.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양심과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가능하면 다른 형태로 만나고 싶었지만....” 왕비가 손을 뻗어 국왕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지.” “응.” “그 녀석, 꽤 착해 보이던데. 귀여워해주라고.” “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해주고 싶어.” “나도 안심했어. 이제 탄가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까. 남은 건 서쪽이다.” “음.” 발도우와 승리의 여신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델피니아의 군은 케이파드에서 출발했다. 행군하는 대열 어디에서도 전쟁에 승리하고 개선하는 군대의 들뜬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기백마저 어려 있었다. 델피니아 군은 왔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속도로 무섭게 돌진했다. 그 와중에서도 월은 이곳저곳으로 전령을 보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군대에게 일의 전말을 설명하고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주일 뒤, 델피니아 군은 바로 다음 날이면 코랄에 도착할 수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사실 코랄에 들르지 않고 바로 서쪽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코랄에는 병사들의 가족이 있다. 잠깐이나마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것은 너무 가혹한 짓이었다. 또한 왕비를 무사히 탈환했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확실하세 알려둬야 할 필요도 있다. 국왕은 군사회의를 열고 하루 동안 코랄에 머물겠다고 전했다. 그러자 이븐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들은 한 발 먼저 서쪽으로 가겠습니다. 타우 사람들은 코랄에 볼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주면 정말 고맙겠어. 나도 곧바로 따라가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지요, 폐하께서는 뭣보다도 부용궁부터 들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간다고 했다가는 비전하 손에 죽게 될걸요.” “당연하지.” 왕비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회의장에 웃음이 가득 찼다. 사람들이 제각각 천막으로 돌아간 뒤 국왕은 왕비를 상대로 한동안 술을 마셨다. 평소처럼 셰라가 시중을 들고 있다. 옆에서는 루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국왕의 천막에 있는 것은 이들 네 명뿐. 그때 국왕의 마음은 비르그나로 날아가 있었다. 탄가와 싸우는 동안 억지로 마음속에 담아만 두었던 문제들로부터 이제야 해방되었다.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서쪽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전투의 준비는 발로가 대신한 셈이지만, 국왕은 그 판단을 전면적으로 옳다고 보았다. 근위병단의 대부분을 서쪽에 쏟아 부은 것도, 산세베리아를 움직이기 위해 재상 브룩스가 직접 움직인 것도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조치였다. 문제는 재상의 설득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 과연 산세베리아를 움직일 수 있었는지 하는 점이다. 비르그나에 도착한 아누아 후작이 보내온 편지에는 요새에 틀어박힌 파라스트 군의 움직임이나 공방전의 상황, 그리고 브룩스가 홀로 파라스트를 횡단하는 경로로 산세베리아를 향해 떠났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편지의 날짜는 6월 말일. 비르그나에서 산세베리아까지 말을 타고 달리면 닷새 정도 걸린다. 왕복에만도 열흘. 게다가 저쪽이 바로 재상을 만나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고, 어쩌면 지금까지 성 안에 억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7월 하순. 재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슬슬 원가 보고가 도착할 때인데. 국왕은 안절부절 못하며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곧 비르그나에도 전령이 도착할 거야.” 술잔을 기울이며 왕비가 말했다.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인 것 같아서 국왕은 조금 놀라며 왕비를 바라봤다. “내가 무사하다는 편지는 이미 한참 전에 닿았을 거고. 게다가 탄가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이 도착하면 핸드릭 백작이나 아누아 후작도 기운내서 비르그나를 되찾아줄 거야.” “하지만 재상이 걱정이야.” 국왕은 쉽사리 납득하지 않았다. 산세베리아 이쪽에 붙느냐 파라스트에 붙느냐에 따라 전황도, 싸울 상대도 달라진다. “게다가... 게다가 말이야, 핸드릭 백작도 아누아 후작도 내가-우리들이 이렇게까지 빨리 탄가를 쓰러뜨리고 개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어차피 원군은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안 했는지도 몰라.” “쓸데없이 걱정만 하면 대머리 된다?” 왕비가 기막혀하며 놀렸지만 국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만 기울인다. 비르그나까지 적과 마주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동쪽까지 파고들어와 있을까. 국왕의 머릿속은 그런 걱정으로 가득했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우리 안에 갇힌 곰이 어슬렁어슬렁 초조하게 돌아다니는 거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왕비는 조용히 술을 마시다 쿡쿡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묘하게 눈을 빛내며 말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응?” 갑작스러운 말에 국왕은 살짝 눈을 치떴다. 왕비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아무 짓도 안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비르그나가 어떤 상황인지 보여줄게.” “리?” “에디.” 국왕이 반문하는 것과 동시에 청년이 왕비를 나무랐다. 수금을 퉁기던 손을 멈추고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곤란해, 그건.”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왕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서 그 반지를 바꿔 꼈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셰라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언제 주위가 어두워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긴장했지만, 이번에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국왕과 왕비는 의자에서 내려와 깔개를 깐 지면에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의 눈앞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반짝반짝 빛나는 안개가 떠도는 수경이 나타났다. 마치 큰 세면기를 바닥에 놓아둔 것 같은 느낌이다. 국왕은 눈을 치떴다. “이것도 네 마법이야?” “그런 셈이지.” 신기한 듯이 수경을 들여다본 국왕은 처음에는 부옇고 하얗게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낯익은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핸드릭 백작! 아누아 후작!” “소리쳐도 저쪽에는 안 들려.” “이거..., 이거, 현실이야?!” “그래. 지금 현재 비르그나 진영의 상황이야. 장소는-이런, 상당히 밀려버렸네. 비르그나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그때 왕비의 눈을 본 셰라는 온몸을 떨었다. 전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아니, 동공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눈 전체가 녹색 불꽃처럼 빛나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말로 보고는 있는 건지, 진심으로 공포를 느꼈다. 국왕조차도 숨을 삼키며 긴장했다. “저쪽 목소리를 가져와 볼까?” 왕비의 말과 함께 수경 안에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비르그나 탈환도 도저히 무리입니다.” 아누아 후작의 얼굴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핸드릭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며칠사이에 10년은 더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최소한 비전하만이라도 무사하시다면....” “뭐엇?!” 국왕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대신 수경 안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다 들려왔다. “산세베리아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소식이 적힌 편지도 직접 제 눈으로 확인했지요.” 브룩스였다. 그 얼굴을 본 국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무사히 돌아왔군.” 국왕의 심경과는 반대로 수경 속의 핸드릭 백작과 아누아 후작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패전을 각오한 장수처럼 비장한 표정이다. “하지만 편지의 날짜를 믿자면 이미 한참 전에 탄가로 가신 폐하로부터 뭔가 연락이 왔어야 합니다.” “저도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국왕은 펄쩍 뛰었다. 한쪽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다. “어떻게 된 일이야! 전령이 도착하지 않은 건가?!” 국왕은 보나리스가 함락된 바로 그날에 코랄과 비르그나로 전령을 보냈다. 무사히 왕비를 탈환했고, 탄가 남부의 중요 거점인 보나리스를 격파했다고. 그로부터 벌써 반달 이상이 지났다.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경 속의 사람들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분명히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것이다. “산세베리아는 비전하께서 무사하시다면 이쪽에 귀속될 것을 약속했습니다만, 이대로는 파라스트 군 4만 이외에도 산세베리아 군까지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4만이라고?!” 국왕이 다시 펄쩍 뛰었다. 수경 속의 대화가 진행될 때마다 흥분하며 일어나려 한다. 왕비는 국왕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국왕이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자니 아누아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오론 왕도 이번만은 필사적입니다. 그분은 본래 신중하고 세심하며 주도면밀하고 확실한 전법을 즐기는 성격이지요. 이길 수 없는 전쟁은 아예 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무모한 방법으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전쟁은, 오론 왕만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 오론 왕은 왕국의 모든 전력을 이곳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오론 왕 자신은 아직 출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걸립니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낼 셈이겠지요.” “저도 그리 생각하오. 아마도 오론 왕이 도착하자마자 일제히 공격을 걸어올 겁니다.” “재상. 당신도 이제 산세베리아 진영을 방문하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브룩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실전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지만 외교 문제라면 얘기가 다르다. 지금도 직접 나서서 산세베리아와 은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것쯤은 코랄을 나설 때부터 각오했습니다. 그 나라가 비전하의 신상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비전하께서 무사하다는 확실한 소식이 도착했다고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다소 비겁한 수단이지만 그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간만에 브룩스 경의 실력을 발휘하시렵니까?” “예. 온 힘을 다해서 설득하고말고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산세베리아를 함락시켜 보이겠습니다.” “그거 든든합니다.” 노영웅은 힘없이 웃었다. 역경에 처해서도 결코 우는 소리는 하지 않는, 그것이 이들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나고 공중에 떠 있던 수경이 모습을 감추었다. 국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경치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왕비를 향해 소리쳤다. “리!!” “뭐야?” “저쪽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이쪽에서 목소리를 보낼 수는 없어?!” “할 수 있어. 단, 할 생각은 없어.” “왜?!” “금기니까.” 열을 내는 국왕과는 대조적으로 왕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짓을 해서는 안 돼. 규정이니까.” 국왕은 머리카락을 마구 휘젓다가 왕비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비르그나의 상황을 이쪽에서 내가 보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할 셈이야?!” “그런 건 그냥 기분 탓이라고 넘어갈 수 있다고!” 국왕의 손을 떨쳐내려 발버둥치면서 왕비도 외쳤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흔히 볼 수 있지만 왕비를 몰아세우는 국왕이라는 것도 상당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간신히 국왕의 손에서 도망친 왕비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네가, 지금 여기서, 비르그나의 상황을 봤다, 그런 증거가 어디 있어? 말해봤자 누가 믿고? 그런 광경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누아 후작과 핸드릭 백작이 지금쯤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산세베리아는 이쪽으로 돌아설까 어쩔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걸로 충분히 말이 돼.” 국왕은 온몸을 잔뜩 부풀린 채 신음했다. 이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요소가 전부 갖춰진 상황이다. 소중한 아군이 곤경에 처해 있다. 한시라도 빨리 원군이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발도 쓸 수 없는 최악의 상황. “이쪽에서 목소리를 보내면 그 사람들도 눈치챌 수밖에 없어.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를 들었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대화를 나눴다. 그런 건 이 세계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수백 카티브 거리를 넘어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 따위.” “그걸 어떻게 좀 할 수 없느냐고, 어떻게?!” 국왕도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서 청년이 끼어들었다. “임금님이 확실히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곤란해도 꿈의 계시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뭐?!” 허를 찔린 국왕이 반문하자 청년은 다시 말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똑같은 꿈을 꾸게 하는 거야. 왕비는 무사하다고. 우리들은 조라더스를 쓰러뜨리고 케이파드를 함락시킨 뒤에 지금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한가?!” “가능해요. 게다가 그렇게 하면 그저 우연으로 지나갈 수 있죠. 엄청나게 억지스러운 우연이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신빙성도 있고요. 잠에서 깬 뒤에 세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꿈을 꾼 셈이 된다는 단순히 꿈에 불과하다고 넘어가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적어도 기운은 잘 거라고 생각하는데.” 국왕이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다. 그걸고 충분해. 부탁하네.” 그러나 왕비는 곤란한 듯이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 그건 해본 적 없는데.” “이걸 풀어주면 내가 할게.” 목을 따라 흘러 내료온 머리가닥을 잡아당기며 루가 말했다. 서둘러서 풀 필요는 없었기에 결국 이 ‘봉인’은 지금까지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왕비는 곧바로 머리를 풀기 시작했지만 쥐꼬리 정도의 두께를 꼼꼼하게 땋아놓은 물건인지라 누가 보기에도 상당히 손재주가 필요했다. 게다가 복잡하게 뒤엉켜서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살살 좀 하라니깐....” “누구야? 이거 땋은 게. 되게 복잡하게 해놨네.” 왕비는 투덜거리면서 머리 가닥과 난투를 벌였다. 간신히 풀어내자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복을 문지르며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와아, 시원해졌다.” 그동안 국왕은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하려는 기척이 없다. “라비 경!” “서두르지 말아요, 먼저 저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으면 꿈을 꾸게 만들 수도 없잖아요.” “그럼 오늘 밤 중으로 반드시 해주겠나?” “약속할게요. 왕비가 무사하다는 사실, 조라더스를 쓰러뜨리고 케이파드를 제압했다는 사실, 곧바로 그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전하고, 일어나고 나면 다른 두 사람에게고 꼭 꿈 얘기를 하라고 하지요.” 국왕은 그 말을 듣고서야 다시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무릎을 치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래서는 산 채로 말려 죽이는 거나 다름없잖아. 저쪽 상황은 송에 잡힐 듯이 알 수 있는데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왕비도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까지 전령이 도착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파라스트 군이 4만? 기가 막히는군. 어디서 그만큼을 끌어낸 거야?” “이번에는 아비용을 들여다볼까?” 왕비가 말하자 국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황하며 양손을 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필요 없어. 봐도 아무 대처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아.” “너다운 말이야.” 유쾌하게 웃는 왕비를 보며 국왕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리. 지금 생각난 건데....” “뭐야?” “보나리스를 부수기 전에 넌 날 데리고, 그-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식으로 움직였지?” “성벽 앞에서 해자 건너편으로 날아간 것?” 그거야말로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국왕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넌 그렇게 사람을- 물건이라도 상관없지만,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시킬 수 있는 거야?” “응.” “그건, 그,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가능한 거야?” “거리는 관계없어. 같은 공간 내라면 어디든지.” “그럼, 이를테면 예를 들어서, 지금 여기에서 비르그나로 날 보내거나....” 왕비는 웃었다. 어딘가 씁쓸한 듯한 웃음이었다. “가능해. 너 하나만이 아니라 군대 만 명이라도 보내려고만 하면 보낼 수 있어.” “하지만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짓이고?” “그렇지.” 국왕은 깊이 한숨을 쉬고 다시 무릎을 두드렸다. “불편하잖아!” “글쎄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고 왕비는 반지를 다시 왼손에 끼었다. “규정은 그릇되지 않다고 생각해. 너무 편리하게 아무 거나 다 할 수 있는 것도 오히려 문제니까.” 국왕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가 곧바로 왕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며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너의 힘은 실제 전쟁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겠어.” “그렇고말고. 적의 포진은 훤히 다 보이고 적의 전략도 그대로 파악해. 거기다 아군이 불리해지면 언제 어디서든 병사를 보내버리고. 이래선 정면으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잖아?” 왕비는 반지를 낀 손을 퍼덕퍼덕 흔들었다. “이런 건 없어도 전혀 상관없어. 실제로 6년 내내 안 쓰고 살았으니까. 단 한 번, 네가 파라스트에 잡혀서 행방을 알 수 없었을 때만은 정말 이게 그리웠지만.” 그럼에도 결국 왕비는 자력으로 국왕을 구해냈다. 국왕도 극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냈다. “내가 이런 걸 쓰지 않아도 넌 이겨. 비르그나도 반드시 되찾을 수 있어.” “어째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거지?” “뻔하잖아. 넌 나의 발도우니까.” 국왕도 그제야 웃음을 지었다. 왕비를 향해 머리를 숙인다. “고마워.” “루퍼가 보여주는 꿈이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음. 기대하고 있다. 난-마법 따위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보통 사람으로서는-아무리 서둘러도 비르그나까지 사흘은 걸릴 테니까.” “나흘이야. 부용궁에 들러야지.” “리!” 지금 상황에서 그럴 여우가 어디 있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왕비는 진지했다. “그냥 지나가는 건 내가 허락 안 해. 목에 밧줄을 묶어서라도 끌고 갈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쩔 거야?!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 사이에 재상이나 백작이 전사하시라도 하면! 난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돼!” “그럼 묻겠는데, 여기서 폴라하고 만나지 않고 그대로 서쪽으로 가서 어쩌다보니 체류가 길어지고, 이것 역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얘기지만 홀로 남아 있던 부인이 초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아이와 함께 죽어버렸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쩔 거야?” 기가 막히는 예시였다. 움찔 말이 막혔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국왕은 발끈하며 말했다. “실제 눈앞에 있는 위기하고 만일의 가능성을 똑같이 놓지마!” “실제 눈앞에 있는 위기하고 만일의 가능성을 똑같이 놓지마!” “아버지가 죽었던 날 아침, 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 “눈앞에 있는 위험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가능성도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그리 다르지 않아. 잘 들어, 월. 어딘가 번 곳에 원정 중이라면 몰라도 여기서 아주 잠깐이면 돼. 코랄 시민도, 왕궁을 지키고 있는 신하들도 국왕이 돌아오기만 기다로 있을 테고, 폴라는 처음으로 엄마가 되는 거야. 네게-아버지가 될 남자에게 격려라도 함 마디쯤 듣고 싶을 거 아냐. 그야 너무 먼 곳에 있으면 태어날 때까지 만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겠지만, 몇 번이고 말하는 건데 조금만 돌아서 가면 돼. 여기서 돌아서 가는 만큼 나중에 죽어라 달리면 될 거 아냐.” 왕비가 열심히 설득하자 국왕도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누가 남편인지 모르겠다니까....” “너하고 폴라는 유감스럽게도 언제나 함께 지낼 수 있는 부부가 아니니까. 나라면 남편이 바로 근처까지 왔다가 들르지도 압ㅎ고 가버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면 당장 이혼할 거야.” 심각한 대사에 국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분명히 그렇군. 내게 있어서도 첫 아이니 함께 기뻐해야지.” “그래. 그게 남편의 의무라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한밤중에 셰라는 갑자기 눈을 떴다. 셰라의 천막은 용무가 있으면 바로 부를 수 있도록 국왕의 천막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국왕이 부른 건가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그런 기척은 없었다. 어쩐지 신경이 쓰여 천막 밖으로 나와 보았다. 맑은 밤하늘 가득 별이 빛난다. 가도를 따라 야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위 경관이 탁 트여 있지만 군데군데 까만 산 그림자에 가려 별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왼쪽에 파키라 산맥이 보였다. 낮에는 푹푹 찔 듯이 더워도 밤이 되면 상당히 선선해진다. 발치의 풀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천막은 너나할 것 없이 조용히 잠들었다. 연이은 강행군에 지쳐 푹 잠들어 있는 걸까. 어디선가 얘기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목소리지만 남들 몰래 숨어서 얘기하는 눈치는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보자 야영지 구석에 왕비와 그 청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째서 아무 말도 않는 거지?” “뭔가 말해야 하는 거야?” 바람 탓인지 목소리가 뚜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이래서는 꼭 훔쳐 듣는 것 같지 않은가. 알고는 있지만 자리를 뜨기도 어려웠다. 두 사람 사이에 떠도는 공기가 왠지 묘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비르그나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라스트만은 어떻게든 해놓고 싶어.” “응, 괜찮아.” 청년은 조용히 대답했다. 절대로 재촉은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가만히 서 있을 뿐. 그러나 침묵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은 왕비 쪽이었다. 무겁게 입을 열고 천천히 말한다. “비르그나를 되찾고, 파라스트를 쓰러뜨리고, 오론은 꺾고 나면....” “응.” “함께 돌아가자.” 청년은 말없이 왕비를 응시했다. 의외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응.” “정말?” “마법가의 할멈이 그랬어. 내가 여기에 있으면 이 세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 “그러니까 돌아가겠어. 난 루퍼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상관없어.” “나도 그래.” “.......” “에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좋아. 그러니까 여기서 계속 살아도 난 전혀 상관없어.”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남을 수는 없어.” “어째서?” “아무튼 안 돼.” “저쪽에 돌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알고 있어? 넌 다시 한 번 열세 살부터 다시 살아야 해.” 왕비가 청년을 바라봤다. “기억도?” “.......” “여기서 지냈던 기억도 없어져?” 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도 네게서 빼앗을 수 없어. 알고 있잖아.” “그럼 상관없어. 다시 한 번 열셋부터 남자인 리로 살아갈 수 있는 거라면, 원래 그랬어야 하는 거니까 오히려 잘된 거지.” 청년 쪽을 조금 곤란한 듯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겉모습은 열셋이면서 알맹이가 열아홉이라는 말이 되는데.” “어차피 겉으로는 몰라. 게다가 금방 신경 안 쓰게 되겠지. 겉보기에는 열일곱이고 알맹이는 스물셋이라면 그리 이상하지 않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무슨 문제인데.” “어, 완전히 포기한 거야?” 청년은 왕비를 가볍게 흘겨봤지만 왕비는 어깨만 으쓱하며 웃었다. “금방 익숙해져. 여기서 지낸 6년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는걸.” 시원시원한 말투였다. 아무 미련도 없는 것처럼 들렸지만 청년이 조용히 물었다. “그 얘기, 임금님한테는 했어?” 왕비는 다물었다. 처음으로 왕비의 얼굴에 고뇌가 떠올랐다. “아직 안 돼. 최소한 비르그나는 처리한 뒤에....” 이번에는 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슬슬 돌아갈까? 그 사람들한테 꿈을 꾸게 해줘야지.” 열심히 듣고 있던 셰라는 조용히 발길을 돌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천막으로 돌아와 이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까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시계로 돌아간다. 왕비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드디어 그 말이 현실이 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셰라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던 자신에게 왕비가 했던 말. ‘두 번 다시 여기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혹시 그 말이 정말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걸까. 셰라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더운 여름 밤인데도 어쩐지 추운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이븐이 이끄는 부대가 국왕군에서 떨어져 한반 먼저 서쪽으로 향했다. “나한테 따라잡히기 전에 핸드릭 백작하고 합류해줘.” 반쯤 으르렁거리며 협박하는 듯이, 어찌 들으면 애원과도 비슷한 어조였다. 푸른 눈의 산적은 조금 놀라다가 곧바로 씩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타우 자유민의 이름을 걸고, 하루 늦게 출발한 부대 따위한테 따라잡히는 짓은 안 해.” 그런 이븐의 등을 든든한 마음으로 배웅하고 국왕은 점심 무렵 코랄에 입성했다. 시민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수도로 돌아온 영웅을 최고의 찬사와 환희로 맞이했다. 왕궁에서는 신전장관과 시종들이 서둘러 축하연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준비도 다 마쳤다고 한다. 아직 큰 문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축하연 따위에 참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거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인데 아무 축하고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식전이 시작되기 전, 국왕은 그동안 코랄 성을 지키고 있던 가신들을 불러 치하했다. 국왕이 왕좌를 버리고 떠난 뒤 얼결에 즉위한 발로마저 병사를 이끌고 수도를 떠났고 뒤를 맡을 재상조차 없었다. 나라를 정상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사람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반란이 일어났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 위기를 무사히 잠재운 것이 재상이 키워온 젊은이들의 활약이었다. 윈코트는 30대 중반, 에멜리온은 갓 서른 살이 된 청년이지만 둘 모두 오랫동안 브룩스 아래에서 일하면서 브룩스의 인맥을 그대로 이어받고, 바로 곁에서 재상의 업무 방식을 배우면서 꼼꼼하게 교육받은 덕에 실력만은 확실했다. 부재 중의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자 역시 평온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던 듯했다. 특히 발로의 즉위에 대해 귀족들 사이의 반향이 컸고 불온한 움직임도 생겼다고 한다. “건방진 질문입니다만 현재 왕관은 어느 분의 것입니까?” 윈코트가 주저라며 물어본 것도 단순한 탐색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발로 쪽의 혈통이 정당하다면 왕관은 이대로 둬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에서 강하게 돌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사보아 가문의 영달을 시기하는 자는 이를 모반이라고 단정하며 사보아 공은 제1급 중범죄자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간신히 표명적인 분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또다시 충전하시기 전에 부디 그 점만은 명확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절실한 부탁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사보아 가문의 친척들도, 그 경쟁 상대로 한참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재상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간신히 양쪽의 움직임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그 마음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고했네. 제군들의 활약이 나라를 구한 거나 다름없어. 진심으로 감사하네.” 국왕은 진심으로 그들의 활약을 칭찬하며 포상을 내렸다. 수도가 비어 있는 사이에 반란도 폭동도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유명한 적의 지휘관을 죽인 것 이상의 공적이었다. 역시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왕의 의식은 이미 멀리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발치의 문제도 미뤄둘 수는 없었다. 그 뒤 주요 가신 전원을 소집해 축하연을 여는 자리에서 국왕은 간단하게 첫 인사만 했다. 젊은 신하들이 왕관의 소재를 확실하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린 셈이고, 물론 그럴 필요도 강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월 그리크는 누가 진짜 국왕인지 따위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주요 가신들이 모두 늘어선 코랄 성의 대연회장에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했을 뿐. 사자의 문장이 수놓인 예복과 붉은 외투를 두르고 가장 상좌에 왕비와 함께 나란히 앉아 가신들을 날카롭게 둘러보면서 높이 술잔을 들며 선언했다. “우리 군에 승리를 내려주신 투신 발도우와 누구보다도 나의 승리의 여신에게 이 축배를 바친다.” 연회장은 대환성에 휩싸였다. 차례로 축배를 들며 소리 높여 외친다. “만세!” “월 그리크 폐하 만세!” “델피니아에 영광을!” “우리들의 승리의 여신께!” 환성의 중심에 월 그리크가 있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이 이상 왕관이 누구의 것이냐고 따지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모반자일 것이다. 열광하는 장내를 일단 진정시킨 뒤 월은 말을 이었다. “서쪽의 비르그나에서는 우리들의 동포가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탄가에 승리를 거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도 지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분발하며 비르그나를 되찾고 파라스트를 격퇴하겠지. 둘도 없는 구경거리야. 나는 그것을 특등석에서 바라보러 가겠네. 그 광경을 직접 불 수 없는 제군들이 딱하지만.” 환성과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국왕의 말에 모두 마음을 놓은 것이다. 국왕이 실제 어떠한 심경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4만의 대군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충실한 신하들을, 친구들을 얼마나 미칠 듯이 걱정하고 있는지 누구 하나 알지 못했다. 아니, 적어도 한 명만은 알고 있다. 왕비는 살짝 국왕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국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네만 나는 여기서 실례하겠네. 인사를 해야 할 곳이 있어서.” 사람들은 아쉬워했지만 성으로 돌아온 국왕이 애첩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하다. 단, 왕비가 함께 동반한다는 것이 이 나라의 특이한 점이지만. 국왕과 왕비는 함께 축하연 자리에서 빠져나와 부용궁으로 향했다. 이미 저녁 무렵이 되어 있었다. 폴라는 두 사람이 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듯 반색을 하며 뛰어나왔다. “왕비님! 왕비님! 어서 오세요!” 폴라는 대담하게도 왕비에게 안겨 목을 꽉 끌어안으며 외쳤다. 왕비도 웃으며 폴라를 안아주었다.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뱃속의 아기는 어때? 폴라만큼 건강할까?” “네!” 왕비가 탄가에 잡혀 있는 동안 폴라는 계속 왕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왕비가 동생의 생명을 구하는 대신 적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도 고뇌의 원인이었다. 왕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래서야 누가 남편인지 궁금해진 정도였다. 완전히 소외되고 만 국왕은 곤란한 듯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그제야 폴라도 국왕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왕비에게서 떨어져 무릎을 꿇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폐하. 개선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정말 다행인걸. 한참 못 본 사이에 완전히 날 잊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했다고.” “설마요!” 폴라는 얼굴을 붉히면서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했지만 거실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루였다. 이 사람은 국왕의 신하가 아니므로 축전에 참가해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그래서 먼저 부용궁에 찾아와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폴라가 직접 만든 요리래요.” “그거 기대되는걸.” 홀몸이 아니면서도 폴라는 변함없이 열심히 일했다. 차를 끓이고 다과를 내오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쪽을 확인하는 듯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러는 사이에도 쉴새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조금 흥분한 기색마저 엿보였다. 폴라로서는 오랜만에 국왕과 왕비가 함께 찾아와주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안심이 되는 동시에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도 가만히 있을 구사 없어서 다람쥐처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다못한 청년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무리하면 몸에 안 좋은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쯤. 전 건강한 게 장점인걸요.” “숨까지 할딱거리면서 무슨 소리예요? 일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좀 천천히 해도 되잖아요?” 분명히 루의 말대로 폴라는 쌕쌕거리며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국왕이 몇 번이고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지만 좀처럼 앉으려 들지 않는다. 결국에는 왕비까지 나서서 간신히 폴라를 자리에 앉혔다. “우리들은 내일 다시 출격해.” “그러니 천천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야.” 왕비와 국왕이 입을 모아 말하자 폴라는 걱정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렇게 왕비님과 폐하가 함께 계시니 이번 전쟁은 빨리 끝나겠지요?” 국왕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빨리 끝내버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제일 먼저 안아줘야지.” 폴라는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폴라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단순히 국왕의 아이를 잉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기의 아버지가 아이의 탄생을 기뻐해준다. 그 사실이 그저 기뻤다. 그 이상으로 왕비도 함께 기뻐해준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실은 조금 불안했다. 왕비는 언제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월의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했지만, 누가 뭐래도 국왕의 정실은 이 사람이었다. 폴라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애첩이 왕의 아이를 낳는 것을 와비님이 불쾌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걱정하고 있던 것도 분명했다. 그저 그것 하나만이 계속 두려웠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두 사람이 오기 전에요, 캐리건이 왔었어요.” 루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상당히 재미있었던 듯하다. 국왕에게 특별히 허가를 얻어 부용궁으로 찾아온 동생을 보자마자 폴라는 얼굴을 붉혔다. 앞치마를 꽉 쥔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캐리건도 불편한 듯 가만히 서 있었지만 그런 동생을 향해 던진 폴라의 첫 인사는 이것이었다. “바보!!” 감옥에서 고통을 견디며 살아남은 캐리건에게 이 말은 상당히 야속하게 들렸다. 원망스러운 듯이 누나를 바라보며 호소했다. “너무 하잖아, 누나! 나도 죽을 고생을 하면서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고?! 좀 뭔가 달리 할 말은 없어?!” 소년의 말도 옳았다.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살아서 무사히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폴라는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열심히 그 눈물을 닦으면서 힘을 짜내며 외쳤다. “정말 너란 애는! 바보! 누나를 걱정시키는 건 그렇다 쳐도 왕비님까지 말려들게 만들다니! 너 때문에 폐하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얼마나 큰일이 났는지 알기나 해?!” 캐리건도 발끈하며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뭐야. 꼭 살아서 돌아온 게 잘못 같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보기 흉하게 포로 따위 되지 말고 명예롭게 전사나 하는 편이 나았다 이거지?” “멍청아.” 이번에는 뺨을 맞았다. 루의 설명에 의하면 부용궁 전체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고 한다. “분명히 손바닥 자국이 한참 남아 있을걸요.” 루는 감탄한 듯이 말하자 폴라는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뒤에 폴라가 말이죠, 동생을 꼭 끌어안고 그러더라고요. 너한테는 살아서 돌아올 의무가 있다. 하지만 와비님과 폐하께 또다시 이번처럼 폐를 끼치면 절대로 가만히 안 놔둔다고. 정말 험악하던데요. 캐리건도 완전히 기가 죽어서 한 마디도 말대답을 못하더라고요. 정말 그렇게 무소운 줄은 몰랐는데, 진짜 놀랐어요.” 폴라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버리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한편 청년 쪽은 열심히 감탄했다. “여자가 이 정도 강하지 않으면 안 되죠. 이 정도라면 뱃속의 아기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거예요.” “저, 저는... 절대로 폐하의 아이에게 매를 들지....” 몸을 조그맣게 웅크린 채 폴라가 모깃소리처럼 조그맣게 말했지만 이 말에는 왕비가 반대했다. “아니. 어리광만 받아주면 곤란해. 나쁜 짓을 하면 확실하게 꾸짖어야지. 국왕의 자식이라면 더더욱. 남자아이라면 그애가 다음 임금님이 될지도 모르니까.” 국왕이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게 어려운 문제야. 나로서는 발로 경의 아들 우리에게 물려줘도 전혀 상관없지만....” 강아지 같은 눈으로 국왕을 올려다보면서 폴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발로 경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점이지.” 왕비가 기가 막혀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이상한 얘기지. 정통 혈통의 귀족 후계자와 국왕의 서자. 보통은 양쪽 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왕좌를 획득하려고 혈안이 되어서 싸우게 마련인데....” 청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기, 에디.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임금님의 애첩한테 아이가 생겼다고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그 아이가 남자애면 다음 임금님이 될 거라는 소리를 하는 왕비님 쪽이 훨씬 더 이상해.” “정말 그렇습니다.” 폴라가 심각하세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전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실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주로 폴라가 그동안의 일을 열심히 얘기하고 다른 세 명은 듣는 쪽이었다. 폴라 자신은 전쟁이나, 특히 왕비가 어떻게 보나리스에서 탈출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듣고 싶어 지만 국왕도 왕비도, 청년까지도 전쟁의 여신의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왕비는 폴라의 아기가 신경 쓰였는지 열심히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건? 그, 임신한 여자가, 입맛이 없다든다....” “그게, 전혀 없습니다. 스스로도 기가 막힐 정도로 건강한걸요. 왠지 굉장히 배가 고파서 계속 먹기만 하고....” “그럼 아들일까?” “리. 벌써부터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 난 아들이건 딸이건 좋으니까.” “폴라는?” “저는....” 국왕의 유일한 애첩은 조금 당황하며 대답을 주저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딸이기를 바랐다. 딸이라면 왕좌를 두고 이러니저러니 복잡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국왕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아들의 탄생을 바라지 않는 국왕 따위 있을 리 없으니까. “저도... 그, 어느 쪽이든.... 이것만은 태어나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러자 왕비가 청년 쪽을 쳐다봤다. “루퍼, 좀 봐주지 않을래?” 청년이 곤란한 듯이 웃음을 짓자 국왕도 놀라며 물었다. “점으로 태어날 아이의 성별까지 알 수 있나?” “이건 점이 아니에요. 직접 보는 거니까.”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런 의미에서는 눈이 별로 좋지 않아요. 에디 때에도 착각했을 정도인걸요.” “착각?” “여자애라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그때는 여자애로 보였으니까.” 폴라가 깜짝 놀랐다. 흑발의 청년을, 금발을 틀어 올린 왕비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게 왜 착각이지요? 왕비님은 당연히 여자 분이신데요.” 왕비도 청년도 웃기만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국왕만은 지금의 말을 진지하게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즉 이 청년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의 왕비를 보았다는 말이 되는 걸까.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쓴웃음을 짓는다. 이 왕비에게 어머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늑대의 모습을 한 의붓아버지 얘기밖에 들어본 적이 없고, 아마도 하늘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태어나는 방식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왕비와 루가 나란히 있으면 정말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단순히 미남미녀가 한 자리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공기 색까지 바뀌는 듯했다. 국왕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셈이지만 폴라는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라티나가 여기 있었다면 루만이 아니라 왕비에게서도 기묘한 감각을 느꼈겠지만 폴라는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루퍼라니, 특이한 애칭이네요. 저도 긇게 불러도 괜찮을까요? 루퍼님이라고.” 폴라의 말에 청년은 생긋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에 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슴스럽게 반문했다. “안...되나요?” “절대 안 돼요.” “어머나....” “그건 나도 전부터 신경 쓰이던 건데.” 삶은 송아지 고기를 맛나게 뜯으면서 국왕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불러서는 안 된다는 걸 보면 안 된다는 걸 보면 그 이름에 원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 “특별히 없어요. 본명이라는 것뿐. 하지만 그건 굳이 예를 들자면 폴라 이외의 여자가 임금님에게 ‘여보’라고 부르는 셈이랄까....” “루퍼....” 왕비가 머리를 싸쥐었다. “좀 제대로 되어먹은 예는 못 들겠어?” “어쩔 수 없잖아. 인간들한테는 이런 풍습이 없으니까. 특정 개인에게만 허용된 호칭이라고 하자면 이게 제일 알기 쉬울 테고.” 청년은 폴라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부인 이외의 여자가 부인이 있는 남자한테 ‘여보’라고 부르는 건 곤란하겠죠?” 폴라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 것도 없었다. 곤란하다 아니다 이전의 문제였다. “결혼을 했다는 건 아니지만 우리들은 검과 이름을 교환했어요. 그리고 그 이름은 에디말고는 어느 누구도 보를 수 없죠. 라덴거 루퍼 루퍼세르미. 그게 내 정식 이름이에요.” “하지만 왕비님은....” “라덴거 에디 그린디 에타.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그 첫 이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꺼내지 않지요. 정해진 사람말고는 그렇게 부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요.” “내게 있어서는 그저 형식에 불과한 이름인데,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지금은 다른 사람한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어.” “나도 마찬가지야.” 폴라는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루퍼’와 ‘루퍼세르미’는 같은 이름처럼 들리는데요....” “그게, 굉장히 차이가 나거든요.” “예....” “에디 이외의 사람한테는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아요. 이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내게 그걸 지킬 권리가 있으니까, 절대로 부르지 말아줘요.” 말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폴라는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푸른 눈동자-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 그런데도 왠지 오싹해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꼭 당신을 그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고집하면,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 어떻게 할까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금도 곤란해하는 기색이 없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할지, 귀찮게 매달리는 상대를 어떻게 처리할지 이미 정해둔 듯한 태도였다. 살기마저 어린 미소를 지으며. 왕비가 부들부들 떨며 웃음을 참고 있다. 그 표정을 봐서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폴라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평화로운 식사 자리와는 안 어울리는 얘기일 것이다. 식사를 끝낸 뒤 왕비와 청년은 서둘러 부용궁에서 떠났다. 하룻밤밖에 함께 있을 수 없는 부부의 집에 오래 머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다. “내일은 일찍 출발할 테니까 지각하지 마.” 국왕에게 다짐을 해두고 돌아가면서 왕비는 두 팔을 벌려 폴라를 끌어안았다. 단순한 인사치고는 조금 열렬한 포옹 뒤 폴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왕비가 말했다. “잘 지내.” “예...?” “튼튼한 아기 낳고.” “왕비님?” 폴라는 눈을 치떴다. 왠지 마음에 걸리는 말투였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듯이 들렸던 것이다. 부용궁에서 나온 왕비는 루와 헤어져 서리궁으로 올라갔다. 평소대로라면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셰라가 먼저 서리궁에 들어가 준비를 해두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서리궁은 컴컴한 채였다. 머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에 셰라는 공공연하게 서리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서리궁에는 지금도 쟌펠 부인이 꽃을 장식하러 온다. 게다가 사흘에 한 번 정도로 심부름꾼들이 청소를 하로 온다. 전혀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왕비가 돌아온 이상 설령 하룻밤만 머문다 하더라도 아래의 본궁에서 세탁한 침대보와 안주거리, 아침 식사 재료 등을 가져와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셰라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셰라가 비전하의 시중을 든다고 본궁에 얘기하면, 그것만으로도 수상하게 여기고 만다. 그렇다고 본궁 사람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게 비품이나 안주를 들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왕비도 굳이 서리궁을 고집하지 않아 셰라는 루와 함께 다른 이궁에서 쉬도록 조처했다. 광대한 코랄 성 내에는 사용되지 않는 이궁이 얼마든지 있었다. 루는 곧바로 그곳으로 돌아갔지만 왕비는 잠깐 둘러보겠다고 얘기해놓고 서리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어두운 거처를 보고 조금 웃으면서 왕비는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도 없는데 짙은 꽃향기가 떠돌았다. 라티나가 꽂아둔 장미의 향기였다. 왕비는 장미 한 송이를 빼들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루브람 숲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사냥꾼들조차 밤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 울창한 숲도 왕비에게 있어서는 익숙한 놀이터에 불과했다. 찾던 상대와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골디.” 왕비가 막 서리궁에 왔을 때는 아직 새끼였던 회색 늑대도 지금은 완전히 관록이 붙은 무리의 지도자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회색 늑대는 왕비에게 달려와 친밀하게 입을 핥았다. 왕비도 인사를 했다. 상대의 몸을 쓰다듬어주면서 숲의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여기저기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응하는 듯이 거대한 회색 눅대가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눅대 울음소리를 기분 나쁘다며 싫어하지만 왕비에게는 친밀한 동료들의 합창이었다. 하나하나를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왕비도 그 합창에 참가했다. 높게, 낮게, 몸을 쭉 뻗으며 소리를 내지른다. 숲 속에서 그에 응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셰라는 배정된 이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왕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셰라의 신분으로는 국왕 부부와 함께 만찬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셰라는 왕비의 종자 대접을 받고 있다. 셰라의 식사 등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주는 것은 평소는 본궁에서 일하는, 셰라와도 아는 사이인 시녀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들과 함께 왕궁의 뒷소문 얘기로 꽃을 피우던 왕비의 시녀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셰라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뺨을 빨갛게 붉힌다. 젊고 잘생긴 기사라고 생각하면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뭔가 복잡한 심경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계속 여자 차림을 하고 지내느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의 시선은 받아본 적이 있어도 이런 식으로 여자들로부터 관심에 찬 시선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한참 뒤 루가 혼자서 돌아왔다. “그 사람은?” “자기 거처로 올라갔어.” “하지만 거기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꼭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있는 게 아닐까?” 시녀가 들어와 자기 전에 뭔가 드시겠느냐고 물어왔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름다운 기사가 두 명으로 늘었으니 젊은 시녀들이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뺨을 붉히고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말을 걸 때에도 목이 메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어색했다. 셰라는 사양했지만 루는 브랜디와 우유를 넣은 차를 부탁했다. 시녀들이 나간 뒤 루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셰라를 바라봤다. “실은 직접 하고 싶은 거지?” “예. 아까부터 계속 부엌이 신경 쓰여서....” 셰라도 웃었다. 아무래도 시중을 받는 입장은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시녀가 쟁반을 들고 왔을 때, 파키라 산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여왔다. 마실 것을 가져온 시녀가 몸을 떨었다. “어머, 기분 나빠....” 여기서는 충분히 먼 거리이건만 그래도 무서운 듯했다. 시녀가 물러가고 나서 셰라는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귀에는 그저 늑대의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루에게 물어보았다. “저건 그 사람이겠지요?” “응. 작별 인사를 하고 있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것이 어떤 작별인사인지 신경이 쓰였다. 또 멀리 나가니까 인사를 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인지.... 셰라는 몸을 떨며 용기를 쥐어짰다. 이런 일로 혼자 고민해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왕비가 돌아오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왕비는 그날 밤 이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숲 속에서 지내기로 결심한 듯했다. 5장 날이 빨리 밝는 여름인데도 아직 어둠이 깔려 있을 무렵 국왕의 군대가 왕궁 앞에 전부 모였다. 병사들의 가족도 배웅하로 모여들었다. 폐하와 비전하가 돌아오셨으니 이번 전쟁도 이길 것이 분명하다고는 하지만,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전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비는 가족의 심경이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라모나 기사단장의 부인은 매우 걱정스러워 보였다. 비르그나는 남편에게 있어서 특별한 애착이 있는 땅이다. 파라스트 군에게 빼앗긴 채 참고만 있다가 드디어 되찾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조용하던 남편이 보기 드물게 투지와 결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모쪼록 무모한 행동만은 하지 않아주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하게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어머나, 비전하. 안녕하세요.” 라티나는 서둘러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적에게 사로잡히셨다고 듣고 계속 걱정했습니다만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탄가에서 보여주신 활약을 남편에게 듣고 과연 비전하다우신 일이라고 감탄했답니다.” 출전을 앞두고 하는 인사치고는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겨우 하룻밤 성에 머물고 곧바로 다시 출격하다보니 어젯밤은 모두가 귀중한 시간을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왕비는 함께 있던 검은 말에게 뭔가 말을 하고 먼저 보냈다. 검은 말은 타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유유히 걸어가 대열의 제일 앞에 섰다. 그곳이 왕비의 자리다. “어머나, 영리하기도 해라....” 라티나는 감탄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언니, 비전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아란나가 달려왔다. 오빠를 배웅하러 온 것이다. 왕비를 본 아란나는 매우 기뻐했지만 이미 시간이 없었다. 곧 출발해야 한다. “이번에 돌아오시면 꼭 얘기 많이 해주셔야 해요.” “응, 그렇군.” 왕비는 미소지으며 라티나와 아란나를 각각 끌어안고 말했다. “둘 다 건강하고.” “비전하?” 라티나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란나는 좀더 확실하게 불평했다. “어머, 너무 하세요, 비전하. 왠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같잖아요.” “그래?” “그럼요.” 아란나는 물러나려 들지 않았지만, 그때 출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왕비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애마를 향해 달려갔다. 평소처럼 대열의 선두에 서자마자 곧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전장으로 향하는 친지를 배웅하는 자리이니 불안한 것도 당연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의 불안이 엄습했다. 이 군대는 화물 부대를 포함해 거의 대부분이 기마병이다. 정규 부대를 보내는 것보다는 국왕 자신이 한시라도 빨리 현장에 도착하는 쪽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보병은 나중에 뒤를 따라올 터. 배웅하는 가족이나 구경하러 나온 시민들에게서 큰 환성이 울리고 그 사이로 국왕 부부가 유유히 말을 타고 나아갔다. 오늘은 둘 모두 화려한 갑옷을 걸치고 있기에 한층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두 사람의 뒤에서 셰라와 루가 따라가고 있었지만, 루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가볍게 말을 달려 국왕의 옆으로 다가갔다. “임금님, 잠깐 괜찮아요?” “오오, 무슨 일인가?” “비둘기와 밀, 뭔가 짚이는 거 없나요?” 국왕은 날카롭게 청년을 바라봤다. 대환성 속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왕비에게도 들린 듯 낮게 웃음을 지었다. “루퍼. 앞머리를 너무 생략했어. 그게 뭐와 관계 있는 거지?” “이쪽 소식을 알리는 편지가 서쪽에 도착하지 않은 원인하고 관계가 있어.” “뭣?!” 국왕이 청년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경의 점인가?” “같이 나온 패는 질투와 물욕. 어느 쪽도 그다지 좋은 패는 아니에요.” “배신은 아닌 건가?” 왕비가 끼어들었다. “양쪽 모두 쉽게 배신으로 이어지지.” “그래요. 나도 그게 걸려요. 아무래도 이건 누군가 배신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 그거 굉장히 안 좋은 얘기인데. 비둘기와 밀? 비둘기와 밀....” 중얼거리던 국왕의 몸이 갑자기 흠칫 굳어졌다. 마을을 나올 때까지는 점잖게 말을 몰았지만 교외로 나오자마자 단숨에 속력을 높였다. 왕비도 재빨리 국왕을 따랐다. 후속 부대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속력을 높이며 그 뒤를 따라왔다. 로쉐의 가도를 오가던 상인들이 멍하니 지켜볼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국왕은 하루 종일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말을 달려 저녁 무렵에야 간신히 야영을 지시했다. 계속 맑은 날씨가 이어져 길도 공기도 완전히 건조해진 상태였다. 전원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화물 부대는 재빨리 진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막사가 설치되자마자 주요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발로, 나시아스, 아스틴과 가렌스, 로자몬드 등이 속속 국왕의 천막으로 찾아왔다. 전원이 모인 뒤 국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배신의 조짐이 있다.” 신하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말이다. 경악과 긴장이 모두의 얼굴에 스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어떤 식으로 배신했다는?” 국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루를 바라봤다. “오늘 아침 내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들려주게.” 거기서 로는 점의 결과를 설명했고 들은 모두는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발로는 대놓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형님께서는 그 점을 믿으시는 겁니까?” “틀려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하지만 라비 경의 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네. 게다가... 비둘기와 밀, 혹시 그게 정말이라면....” 이번에는 청년 쪽이 물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거죠?” “로쉐의 가도에는 일정 거리마다 초소가 설치되어 있어. 급한 연락의 경우 초소에서 초소로 사람과 말이 교대하면서 전달하는 식이지. 그게 전령이 한 명 계속 달려가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니까.” 물론 사자 한 명이 계속 달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한 편지나 전달 사항리라면 전자가 훨씬 빠르다. 특히 가도를 따라가는 경로라면 반드시 초소를 지나가게 된다. “각각의 초소는 그 토지의 유력자가 관리하고 있지만.... 그중의 한 명인 멘도사 경의 문장이 밀을 문 비둘기야.” “임금님이 서쪽으로 보낸 편지는 전부 거기를 지나가나요?” “그래. 코랄 서쪽의 모든 초소를 통과해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멘도사 경이 관리하는 초소를 거치게 되지.” 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꽝이네요. 이쪽이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전부 거기서 막혀버려요.” 여기서 다시 발로가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려주시오, 루퍼스 라비. 물론 귀공이 뛰어난 검사라는 사실은 인정하오. 허나 점 따위로 인간의 행동을 판단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는가. 멘도사 경이 모반을 했다고 말하려면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야 하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청년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증거요? 하지만 대체 어떤 게 호랑이 씨가 말하는 확실한 증거라는 걸까요? 그런 거,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을 텐데.” “뭐라고?” “이를테면 파라스트의 임금님의 필적을 똑같이 흉내내서, 협력해주면 이러이러한 보수를 약속하겠다고 쓰고 인장을 찍은 물건을 멘도사 경의 편지함에 넣어두면 완벽한 증거가 완성되겠죠.” 발로는 혀를 찼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우감이지만 진담이에요. 난 그저 증거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고요.”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단장. 믿기 힘든 건 알겠지만 루퍼의 점은 절대로 틀리지 않아.” “절대로라고요?” “그래. 카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확증이 없으면 애초에 멘도사 경의 문장이 나올 리 없어.” 자신과 박력이 넘치는 왕비의 발언이다. 사람들은 반쯤 압도되면서도 당혹스러워하며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이번에는 로자몬드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비전하, 그것만으로는....” “알고 있어. 근거가 점뿐이면 체포할 수 없지. 분명히 뭔가 증거를 잡을 필요는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국왕도 동조했다. “예를 들어,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서야. 만에 하나 멘도사 경이 적의 편을 들고 있자면, 그게 사실이라면 비르그나 탈환군과의 연락은 완전히 끊겨 있다는 말이 돼. 아니, 어쩌면 비르그나 탈환군 안에도 경의 손길이 닿아 있는 거야. 도저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어.” 멘도사 경의 영지는 비르그나에서 동쪽으로 약 50카티브 떨어진 위치에 있다. 국왕이 보낸 편지는 마지막에 반드시 이곳을 통해 핸드릭 백작이 포진하고 있는 전장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은 비르그나에서 싸우고 있는 백작 일행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황에 대해 보고하는 편지는 멘도사 경의 영지를 거쳐 왕궁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만큼 중요한 요지의 관리를 맡고 있는 인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적과 내통하고 있다면 엄청난 일이다. 그렇게나 중요한 역할을 맡길 정도로 월은 멘도사 경을 신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충격도 컸다. 이런 종류의 배신은 대놓고 반기를 드는 것보다도 더욱 질이 나쁘다. 이번만은 루의 점이 틀려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이븐의 부대가 멘도사 경의 영지를 통과했을 텐데. “내일이면 멘도사 경의 영지를 통과하니 그때 확인해봐야겠군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 확인하실 생각입니까?” 발로가 물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국왕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따로 계책은 없어. 다른 경우라면, 좀더 시간이 있다면 뭔가 손이라도 써보겠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핸드릭 백작과 합류하는 게 제일 중요해. 이대로 spa도사 경의 관할 초소로 들이닥쳐서 저쪽이 어떻게 나오나 봐야지.” 평소의 국왕답지 않은 무모한 작전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지만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신임하던 사람을 의심하기는 싫지만, 지금까지도 라비 경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무시할 수는 없어.” 그러자 청년이 조용히 말했다. “자멸하고 싶으면 무시해도 전혀 상관없어요.” “또 그런 차가운 말을.” “난 임금님의 신하가 아니니까요. 이 군대가 절벽을 향해 행진한다고 해도 도와야 할 의무는 없죠. 그저,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난 가능한 한 임금님을 돕고 싶어요. 그러니까 충고했지요. 그 충고를 임금님이 어떻게 활용할지, 어떻게 받아들일지까지는 관여할 수 없어요. 난 그저 내가 아는 걸 말할 뿐.” 평온하고 조금 곤란해하는 듯한 어조이지만, 말하는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싸늘하고 냉정하게 내치는 거나 다름없다. 왕비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혹시 루퍼가 아무것도 없는 평지를 가리키면서 저기는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한다면 난 얌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설 거야. 그런데 인간은 ‘어디가 위험하다는 거야?’라면서 쓱쓱 걸어가다 구멍에 떨어지는 거지.” “그리고 크게 다친 뒤에 ‘어째서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은 거야!’라고 화내고. 이해가 안 돼. 분명히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참으로 기묘한 대화이다. 일동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국왕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만, 과연 이 사람답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점도 그 결과도 라비 경에게 있어서는 확연한 사실인데,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뿐인데 의심받는 건 부당하다는 말인가?” 청년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생각도 안 해요. 난 믿어달라고 하지 않아요. 믿지 않는 그쪽이 나쁘다고도 하지 않아요. 무엇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그 사람 자유니까.” 점쟁이치고는 실로 달관의 경지에 이른 태도이다. 분명히 이런 얘기는 받아들이는 쪽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하지만 라비 경. 우리는 라비 경과는 달리 거짓말을 한다네. 믿고 싶다고 생각해도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하는 소리를 들이면 바로 믿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믿어달라고는 안 해요. 거짓말 정도는 나도 하니까. 누구나 그렇지 않아요? 언제나 참말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지요.” “그럼 손쓸 길이 없어. 뭐가 거짓말이고 뭐가 참말인지 난 구분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국왕은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왕비 때에도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해대는 소녀였다. 태도도 건방져서 처음엔 머리가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월 그리크는 리를 믿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 소녀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생판 남인데도. 아무 이득도 없는데 자기 목숨까지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몇 번이고 월을 구해주었다. 그 고귀한 행동, 그 위연한 정신을 생각하면 다소 행동이 특이한 게 뭐가 어쨌다는 건가.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은 금전을 내리는 것도, 후하게 대우하는 것도 아니다. 이 소녀의 행동을, 말을, 그 영혼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것. 이후 6년 동안 국왕은 그렇게 행동했다. 그런 왕비가 전폭적인 신뢰를 주고 있다면 아무리 이상해 보이고 불가능한 ldf로 생각되어도 이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나시아스가 딱딱한 표정으로 의견을 말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지만 만일 멘도사 경의 배신이 사실이라면 폐하의 연락은 전혀 서쪽에 닿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핸드릭 백작도, 아누아 후작도 비전하가 무사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국왕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아스의 걱정이 사실 그대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말해봤자 아마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점도 바로 그거야.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서 힘이 되어주어야 하네. 우리들은 내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 초소에 들른다. 아마도 거기는 멘도사 경의 심복이 관리하고 있겠지. 우리 일행을 대접하겠다고 나서겠지만 모두 세심하세 주의를 기울이며 절대로 방심하지 말도록. 단, 병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이쪽이 상대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저쪽도 꼬리를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다.” 국왕은 그것으로 군사회의를 마쳤다. 다음 날도 아침부터 달리기 시작해 햇볕이 강해지는 오후 즈음에 문제의 초소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초소가 그렇듯이 약 200명 정도의 병사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말 도둑을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발로는 병사들을 남김없이 소집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렇게 최소한 필요한 숫자는 반드시 남겨두게 된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초소를 지키는 병사들은 지극히 한가로워 보였다. 햇살 아래에서 하품을 하며 초소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국왕군이 도착한 것이다. 잠들어 있던 초소는 순식간에 눈을 떴다. 현재 이 초소의 책임자는 멘도사 경의 가신이라는 초로의 남자였다. 곧바로 달려나와 국왕의 말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말한다. “폐, 폐하! 오오, 비전하까지!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희색이 만면에 가득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소리일 터였다. 국왕군이 그 자리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기로 하자 초로의 남자는 솔선해서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국왕과 왕비를 안내하고 심부름꾼에게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핸드릭 백작님 휘하로 달려가 전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인미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바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감동하면 열심히 말하는 태도에 거짓은 거짓은 없어 보였다. “수고하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타우의 군대가 오지 않았나?” “예, 물론 오셨지요. 그때 비전하께서 무사하시다는 말도 전해 들었지만, 직접 제 눈으로 볼 때까지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독립기병대장은 언제쯤 여기에 들었지?” “예, 어제 저녁 무렵입니다. 여기서 쉬고 가시라고 권했지만 밤이라도 상관없으니 핸드릭 백작님과 합류하시겠다면서 그대로 출발하셨습니다.” “그런가.” 국왕은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의 불길한 점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판단하고 마친 심부름꾼이 가져온 찬 과실주 잔을 집어 들었다. 땀이 줄줄 흐르는 더운 날씨에 필사적으로 행군해 온 것이다. 단숨에 술잔을 비우려는 국왕의 손을 누군가 붙잡았다. “리?” 왕비는 오른손에 자신의 술잔을 든 채 왼손으로 국왕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 표정, 그 동작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국왕만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연해하면서 막 입에 대려 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초소의 책임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자세한 얘기를 들어봐야겠군.” “예...?” “이 술을 내게 먹이려고 한 건 네 생각이 아닐 터이다. 누구의 지시지?” “에, 에...?” 남자는 아직도 사태가 잘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이 남자 자신마저도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왕과 왕비의 표정을 보면, 그 어조를 들으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명확했다. 남자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간다. 국왕은 전신을 분노로 가득 채우며 찌를 듯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어제 정말로 타우의 군대가 여기에 왔나?” “아, 예, 예. 그렇습....” “그들에게도 이 술을 먹였나?!” “아, 아닙, 아닙니다. 그저, 그....” “무슨 짓을 했나?!” 사지의 포효화도 같은 일갈이었다. 책임자의 공포는 정점에 달했고, 완전히 얼어버려 혀까지 굳은 듯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왕비가 검의 손잡이는 쥐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빨리 말해. 아니면 지금 여기서 죽고 싶어?”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협박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야 말하는 쪽이 백 배 낫다. 공포와 초조함에 굳어져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간신히 토해낸 말에 의하면, 이 남자는 타우 측 군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핸드릭 백작 일행은 파라스트 군의 기세에 조금씩 밀리면서 여기서 북쪽에 있는 언덕에 진을 치고 있지만, 이븐 일행에게는 훨씬 서쪽인 비르그나 근처에 아군이 진을 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곳에는 파라스트의 부대가 버티고 있다. 하필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이었으니 이븐이 그곳에 도착할 때에는 이미 해가 진 뒤였을 것이다. 야영장의 조명을 보고 아군이라고 생각하면 접근했다가는 적의 총공격을 받게 된다는 말이었다. 국왕은 남자의 멱살을 붙들었다. 건장한 전신에서 불꽃이라도 튀길 듯한 기세로 외쳤다. “안내해!” 이미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국왕은 먼저 500명 정도의 소부대를 편성해 초소를 감시하도록 배치했다. 이 일을 멘도사 경에게 알리려는 움직임을 봉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배신자 본인도 내버려둘 수는 없다. 핸드릭 백작의 부대에 어떤 짓을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곧바로 처분해버리고 싶었지만 적의 주력과 맞닥뜨렸을 이븐 일행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국왕은 남자를 태운 말의 재갈에 밧줄을 연결해 직접 쥐고서는 전력을 다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발로도 나시아스도 로자몬드도, 루의 점이 이렇게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을 보고 경악했으며, 그 이상으로 이 비열한 수법에 분노했다. “보통 일이 아냐, 샤미안 양이 밀짚머리하고 같이 있단 말이다!” 발로가 외쳤다. 국왕이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필사적으로 말의 속도를 높였지만 너무 무리해서 달리면 말이 지쳐버린다. 절박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저 달려갔다. 비르그나에서 몇 카티브 떨어진 위치에서 국왕은 진군을 정지하고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목적은 적의 주력을 쳐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력과 싸웠을 이븐 일행을 발견하고 합류하는 것이다. 자신들까지 파라스트의 주력과 충돌해버려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 자리에 정지한 국왕군은 슬슬 밭일을 마치고 집데 돌아가려 하던 농부들을 불러 세워 어젯밤 이 근처에서 전투가 없었느냐고 물었지만 농부들은 모두 고개만 갸웃거렸다. 전혀 그런 기색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5카티브 정도만 떨어져도 주위는 조용해진다. 어쩌면 이븐 일행은 더 서쪽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국왕은 다시 척후병을 몇 명 파견했다. 나시아스는 타우의 부대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척후를 보내던 국왕에게 이 기회에 비르그나를 정찰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조만간 반드시 싸우게 될 상대에, 무슨 일이 있어도 되찾아야할 진지입니다. 적의 경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맞는 말이네만 라모나 기사단장이 직접 갈 필요는 없어.” 국왕은 나시아스를 만류했다. 지휘관 본인이 직접 적의 진영을 정찰한다는 것 자체도 드문 일이지만 특히 지금은 위험성이 너무 크다. 그러나 나시아스의 결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반드시 자기가 가야 한다며 꿋꿋하게 주장했다. “황송하오나 비르그나는 폐하께서 맡기신 이래 제가 관리하던 요새입니다. 저 이상으로 비르그나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없습니다.” 한번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다. 최후에는 결국 국왕이 손을 들었다. “알았다. 허락하지. 단, 절대로 무리는 하지 마. 반드시 요새 축에 발각되기 전에 돌아오도록.” “알겠습니다.” 절을 하고 바로 출발하려는 나시아스를 왕비가 불러 세웠다. “굳이 혼자서 갈 필요는 없지? 몇 명 데리고 갈 거 아냐?” “예, 물론입니다.” “그럼 내 종자 한 명을 같이 데려가. 머리카락이 은색인 녀석.” 나시아스는 살짝 웃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히 빌리겠습니다.” 왕비도 왕비 나름대로의 공략법을 검토하고 있는 듯, 셰라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고 나시아스와 함께 내보냈다. 지시를 내린 뒤의 총대장은 상당히 속이 타는 입장이다. 언제 어떤 보고가 들어올지 알 수 없으니 멋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다. 아무리 불안해도, 아무리 초조해도 가만히 버티고 있어야만 한다. 총대장에게는 그러한 재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대장이 불안해하거나 짜증을 내고 있으면 병사들에게도 그 분위기가 전염되므로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월 그리크는 싹싹하고 명랑한 성격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심각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병사들 앞에서 짜증을 부리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준비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월의 눈에 비치는 것은 눈앞의 풍경이 아니었다. 말채찍을 쥔 손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국왕의 곁에 왕비와 루가 있었지만 둘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 모두 똑같은-화가 잔뜩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나가기 직전인 사자를 붙잡고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왕비가 국왕의 머리 너머로 청년에게 눈짓을 한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앉아 카드를 꺼내 들었다. 변함없이 시선을 앞쪽으로 고정한 채 국왕이 물었다. “장소를 알 수 있겠나?” “좀 기다려요.” 카드를 뒤집기 시작하다가, 바로 웃음을 짓는다. “점칠 것까지도 없네요. 저쪽에서 찾아와요.” “정말인가?!” 바로 그 외침과 동시에 척후병 중 한 명이 자유민 복장을 한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국왕과도 안면이 있는 아델포의 델리였다. 표정이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막 헤쳐 나왔을 거라는 국왕의 추측대로였다. 거칠게 천막을 걸어 들어온 델리는 국왕의 앞에서 떨고 있는 멘더사 셩의 가시능ㄹ 보자마자 엄청난 고함을 질렀다. “너 이 자식, 잘도 거짓말을 했겠다!” 검을 뽑아들려는 것을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며 제지했다. 국왕도 끼어들어 델리를 달랬다. “이 남자는 배신자지만 아직 처형할 수 없어. 그보다도 어서 얘기해주게. 어젯밤 파라스트 군과 전투가 있었나?” “예. 이 자식 때문에 족을 고생을 했습니다요.” 델리는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별로 얘기고 자시고 없습니다. 이 자식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적의 정면에 대가리를 쑤셔박아버렸지요. 빌어먹을, 멍청하기 짝이 없었지.” 국왕의 초소를 책임지는 인간의 말은 이러했다. 어제 핸드릭 백작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이러저러한 장소에 한동안 주둔하실 거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도착하면 백작님도 근위사령관님도 얼마나 기쁘고 든든하시겠습니까. 어서 서두르십시오. 그런 말을 의심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븐도 타우의 남자들도 아군이 있는 지점을 향해 기세 좋게 달려갔고 야영지의 불빛을 발견한 것은 거의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그런데 부두목-독립기병대장 말입니다만, 그 사람이 참 감이 좋아서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다면서 조금 살펴보는 게 좋겠다더군요. 그때 부두목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으면 이쪽 피해는 엄청났을 겁니다.” “그래서 이븐은?” “얘, 무사합니다. 뭐, 우리들도 행군이 너무 길어져서 좀 지쳐 있던 참이라 평소보다 고생은 했지만, 우리들을 상대로 야전을 벌이다니 규율만 중시하는 병사들한테는 무리지요.” 타우의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머릿수 앞에는 버틸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타우의 남자들은 적에게 굴하지 않고 훌륭하게 싸워내며 철수해 지금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지을 치고 있다고 한다. “이쪽 상황을 전혀 모르겠더라 이겁니다. 초소에서 들은 얘기하고 이렇게까지 다르다면 저희들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원....” 최후의 말은 불평에 가까웠다. 국왕은 진영을 수비할 병사들을 남기고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적지 한가운데에 타우의 부대만 놔둘 수는 없다. 멘도사 경의 가신도 당연히 함께 연행했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닐 그 남자에게 왕비는 차갑게 말했다. “이븐이 무사했다는 사실을 신에게 감사하도록 해. 그 녀석한테 무슨 일이 있었으면 편하게는 못 죽었을 테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타우의 부대는 비르그나 동쪽으로 7카티브 정도 떨어진 숲 속에 포진하고 있었다. 가도에서 멀리 떨어져 길다운 길도 없었지만 그쪽이 타우 사람들한테는 유리했다. 국왕이 델리와 합류하고서 이븐을 만날 때까지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건만 긴 여름 해가 이미 비르그나 저편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델리도 그렇게 말은 했지만 부상자가 상당히 나온 듯했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븐은 횃불 아래에서 동료와 뭔가 얘기를 나누다가 국왕의 얼굴을 보자마자 힘없이 웃었다. “여어.” 이때만은 국왕도 안도감을 드러냈지만 즉시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피해는?” “가볍지는 않아.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 그 초소, 네 관할 아냐?” “면목이 없어.” 국왕은 신음하며 대답했다. “내부의 적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 탓이야. 샤미안 양은?” “다리를 좀 다쳤지만 별일은 없어.” 이 말을 들은 왕비는 곧장 샤미안을 만나러 갔다. 샤미안은 이 진영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다. 상당한 불편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국왕은 재빨리 사정을 설명했다. “큰 타격을 입게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동해야겠어. 문제의 배신자가 아직 비르그나 공격군과 함께 있어. 가능하면 바로 합류하고 싶은데 부상자들은 움직일 수 있겠어?” “타우의 남자를 얕보지 마.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놈들은 짐차로 나를 테니까.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우리들도 돕지.” “당연하지. 지금 적이 덮쳤다간 다 끝이야.” 날카롭게 말하고 이븐이 고함을 질렀다. “어이! 지금부터 바로 이동한다! 부상자 운반 작업을 서둘러!” 여기저기에서 대답이 울렸다. 멀쩡한 사람도,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일제히 작업을 시작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이븐이 소꿉친구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에 불꽃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국왕폐하. 그 멘도사인가 하는 배신자 놈의 목을 따는 역할은 물론 제게 명령해주시겠지요?” 싫다고 하면 그대로 이쪽을 먼저 베어버릴 기세였다. 국왕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반드시 네게 맡기겠어.” “그리고 또 하나.” 이븐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부하 관리 정도는 좀 제대로 해! 이쪽은 자칫하면 죽을 뻔했다고!” 국왕은 말없이 그 질책을 받고 있었다. 이런 때에는 아무리 열심히 사과해도 변명으로 들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어서 간신히 한 마디만 할 수 있었다. “미안해.”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은 국왕이다. 이런 배신자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다. 아니, 그 청년이 없었다면 지금껏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친구의 얼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이븐의 푸른 눈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주먹으로 가볍게 월의 얼굴을 친다. “이번만은 용서해주지. 자, 이동이다!” 짐차와 들것은 준비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지시를 하고 이븐은 몸을 돌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군더더기가 없는 동작이지만 왠지 몸이 무거워 보였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이븐을 불렀다. “이븐, 너도 부상당한 거 아냐?” “어제 싸움에서 멀쩡하게 버틴 녀석 따위 없어. 그냥 좀 까진 것뿐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며 이븐은 부상자들을 수용한 천막 중 하나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갑작스러운 왕비의 문병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린 샤미안이 있었다. 샤미안은 오른쪽 대퇴부에 화살을 맞았다. 다행히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여기서 무리하면 걸울 수 없게 된다. “이제부터 이동할 건데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나중에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오겠어?”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대답이야 뻔하다. 생각대로 샤미안은 딱 잘라 말했다. “이 전도 부상으로 말에 목 탄다고 했다가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로아의 수치라고요.” 왕비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런 다리로 말에 탔다간 상처가 덧나.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닙니다, 비전하. 전 괜찮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런 곳에서 누워 있으니 안장 위에 있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왕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샤미안에게 손을 빌려죽 말 위에 오르는 것까지 도와줬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샤미안은 내내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안장에 올라서도 왼쪽 발은 등자에서 떼어놓고 있었지만 샤미안에게 안장 위는 더없이 편안한 장소였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달려나간다. 분노로 불타는 국왕군과 타우의 남자들은 하나로 뭉쳐 핸드릭 백작이 있는 북쪽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핸드릭 백작이 초소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말을 정말이었다. 원군을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초소의 책임자는 백작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도 말고 있었다. 국왕의 곁에서 말을 달리며 왕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여럿이서 한꺼번에 달려가면 배신자가 도망칠지도 몰라.” “알고는 있지만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핸드릭 백작과 아누아 후작이 이렇게나 고전하면서 척후병도 파견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럴 리는 없겠지. 그 사람들이라면 몇 카티브 바깥까지 정찰을 보낼지도 몰라.” “척후병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진지에 다가가려면 10카티브 정도 앞에서 발을 멈추고 인원수를 작게 나눠서 그들과 접촉해야 해. 하지만 병사들을 보낸다고는 해도 멘도사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할 때 적절하고 대처할 수 없지. 어차피 나하고 네가 가면 큰 소동이 날 거고.” 국왕의 말이 옳았다. 밤하늘 아래를 계속 달려서 약 두 시간 후, 멀리 야영지의 불빛이 보였다. 척후병과조 조우했다. 횃불의 빛을 받아 간신히 보이는 사자 문장의 깃발을 확인하고 척후 쪽에서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국왕이 직접 출진했다는 말을 들은 병사들은 기뻐 환희에 날뛰며 곧바로 명령했다. 이런 때에 어설프게 들떠서 방심했다가는 적의 기습을 호용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국왕은 마침내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비르그나 탈환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탈환을 명령받은 군대로서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원군이다. 게다가 국왕이 직접 출진한 것은 물론이고 왕비까지 있었다. 틸레든 기사단장이 있다. 벨민스터 공작이 있다. 그리고 라모나 기사단이 있었다. 한밤중의 진영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병사들은 환희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으며 무장들까지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중에는 그라함 경도, 세리에 경도 있었다. 국왕과 왕비, 그 뒤를 따르는 주요 지휘관들을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서둘러 본진으로 gis했다. 환영 인사 따위를 하고 있을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 것 따위가 없어도 이 소동으로 모두들 두 사람의 도착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아누아 후작은 울음 반 웃음 반의 표정으로 멈춰 서 있었다. 핸드릭 백작은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흘러넘치는 눈물조차 닦으려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한 것은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굳은 어조로 물었다. “그대들이 무사해 무엇보다 기쁘네. 하지만 재회를 기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멘도사 경은 어디 있나?” 세 사람은 국왕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굴을 마주 봤다. “멘도사 경이라면 척후 역할을 자청해서 아까 출발한 참입니다만....” 국왕은 그 대답에 이를 갈았다. 국왕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아마도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이쪽에서 추격하려 해도 이미 늦은 밤이다. 저쪽이 조명을 꺼버리면 이쪽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라비 경!” “네~에.”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 이 사람은 언제나 반드시 왕비의 곁에 하게 있다. “부탁해. 위치를!” “네네. 알았어요.” 청년은 본진의 책상 위에 카드를 펼쳤다. “서남서로 5카티브. 아직 모르고 있어요.” “나한테 맡겨주실까.” 이븐이 나섰다. 청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휙 돌리며 동료들을 불러 모은다. 국왕이 당황하며 말했다. “이븐, 잠깐 기다려!” “나한테 맡겨준다고 했잖아?” “물론이야. 하지만 먼저 자백을 받아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산 채로 데려와줘. 심문이 끝나면 반드시 네게 넘길 테니까.” “살아만 있으면 돼?”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해. 숨만 붙어 있는 걸로는 의미가 없어.” “주문 한번 더럽게 까다롭네.” 타우의 남자들은 기세 좋게 본진을 박차고 나갔다. 핸드릭 백작 일행은 멍하니 이 전개를 지켜보았지만 이들도 전장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니만치 상황을 눈치챘다. 노백작은 국왕에게 인사하는 것도, 왕비의 무사를 축하하는 말조차도 잊어버린 채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물었다. “설마, 설마 멘도사 경이 적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래. 그대들은 왕비의 무사를 알리는 편지도, 내가 탄가를 제압했다는 연락도 받지 못했지?” 그러자 세 명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왕비의 곁에 있는 흑발의 청년을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바라본다. 국왕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 아누아 후작과 브룩스는 이 청년을 알고 있다. 왕궁에서 이미 얼굴을 마주쳤을 터. “아닙니다, 그게....” “너무나도 믿기 어려운 일이라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미 청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소 낭패스러운 듯 말하자 핸드릭 백작이 마음을 굳히며 말했다. “폐하. 늙은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젊은이를 알고 있습니다.” 루는 미소를 지으며 핸드릭 백작에게 인사했다. “현실에서는 처음이죠. 지난번에 꿈속에서 만났지만.” 백작은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누아 후작도, 브룩스도 숨을 삼켰다. 반면에 국왕은 기쁘게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네. 정말 이 사람들에게 꿈을 보여줬군.” “임금님. 난 거짓말은 가끔 할지 몰라도 약속은 어기지 않아요.” “미안. 의심했다는 건 아니야.” “충분히 안 믿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아니, 정말 미안해.” 웃으면서 진지하게 사과를 했다. 핸드릭 백작은 의심스럽다는 듯 청년을 바라봤다. “남의 꿈에 드나들 수 있다니 이 젊은이는 요술사입니까?”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국왕이 망설이고 있자 왕비가 한 마디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내 파트너야.” 그리고 백작은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납득해버렸다. “과연. 비전하의 친구 분이셨군요.”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다-왕비의 동료라면 당연하다-상식 따위는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결론이지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는 했다. “라비 경이 그대들에게 보여준 꿈은 모두 사실이야. 왕비는 이렇게 여기 함께 있네. 이미 탄가 국왕 비퍼스와 종전 협정을 맺었고 탄가는 더 이상 우리나라의 적국이 아니야. 남은 것은 파라스트 뿐이다.” 세 사람은 다시 기쁨과 안도와 흥분을 드러내며 저마다 축하 인사를 했다. 특히 브룩스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 꿈을 꾼 이래 계속 걱정하고 있었습니다만 이걸로 산세베리아도 우리 편이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응? 아직도 설득하지 못했다니 재상답지 않은걸.” 국왕의 말투는 비난이라기보다 야유에 가까웠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그 나라도 워낙에 수바가 단단해서 마치 철별의 숫처녀 같더군요. 한심한 말이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라고 해도 쉽사리 따라갈 수는 없다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노영웅 두 명이 친구의 농담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나 소리 내어 즐겁게 웃어본 것이 얼마만일까. 국왕과 왕비는 주요 무장과 영주들을 불러 모아 다시 한 번 똑같은 얘기를 했다. 국왕군이 이미 탄가를 쓰러뜨렸다는 말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장병들의 사기는 단숨에 높아졌다. “이제 이길 수 있어!” “그렇고말고! 비전하께서 돌아오셨다!” “승리의 여신께서 우리들과 함께하신다!” “파라스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병사들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타우의 남자들이 돌아왔다. 두 피의 말 사이로 누군가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양쪽 손목에 제각각 밧줄을 묶어 좌우의 말에 탄 기수가 제각각 밧줄을 붙잡고서 나란히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다. 사이에 묶여 있는 것은 틀림없는 멘도사 경이었다. 머리가 바위에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 양팔을 고정시켰지만 머리 이외의 부분은 지면에 질질 끌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아니, 얼굴 역시 심하게 얻어맞아 부어오르고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무참한 모습이지만 이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말에 태우기조차 싫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밧줄로 묶어서 땅바닥에 질질 끌고 오다가는 본진까지 돌아오기 전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취급이 되었으리라. 본진까지 포로를 끌고 온 이븐은 국왕을 쳐다보며 귀찮은 듯이 말했다. “아직 살아 있어. 말도 할 수 있고.” “훌륭해.” 어차피 시간을 들일 생각은 없다. 피투성이가 되어 떨고 있는 멘도사 경을 향해 국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 파라스트와 내통했나?” “폐하..., 폐하. 이, 이건 대체....” “언제부터 오론과 내통하면서, 어떤 정보를 흘렸지?” “뭐, 뭔가 착오입니다....” “네 가신이 파라스트 군 쪽으로 타우의 부대를 유도한 것도 착오인가?” “아, 아무것도, 저,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네 가신이 내게 독을 먹이려고 했던 것도 착각이라는 건가?” “도, 독이라고요?!” 멘도사 경은 진심으로 경악한 듯했다. “그, 그럴 리 없습니다! 그 남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이, 이건 뭔가 착오입니다.” 이미 여기까지 꼬리가 드러나고서도 배신자는 추악하게 발버둥쳤다. 부하가 한 짓은 곧 주인이 한 짓.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해봤자 넘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가신이 국왕을 독살하려 시도하고 이븐에게 거짓말을 한 시점에서 이미 멘도사 경은 죽을죄를 지은 셈이다. 그럼에도 산 채로 붙잡으라고 지시한 것은 파라스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쪽으로 얼마나 손을 뻗고 있는지, 멘도사 경 이외에도 배신자가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대로는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븐에게 인도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아픈 맛을 보여서 자백시키는 게 좋을까. 국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루가 앞으로 나왔다. “배신할 생각은 없었던 거죠?” 이 아름다운 청년이 누구인지 경은 물론 알지 못했지만 물에 빠진 인간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게 마련이다. 지푸라기 정도가 아니라 광명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 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님한테서 온 편지는 분명히 여기에 도착했어요. 그저 당신의 지인이-아마도 상당히 최근에 지인이 된 사람이 왕비에 대한 편지를 가지고 싶어했겠지요. 굉장히 열렬하게, 그렇게 중요 기밀인 것도 아니고, 왕비가 무사하다는 사실만 쓰여 있는 편지이니 별 생각 없이 가벼운 기분으로, 용돈도 조금 벌 겸 그 사람에게 넘겨줬다. 그것뿐이죠?” “예, 예....” 경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도 측근들도 숨을 삼키며 청년을 지켜봤다. “하지만 곤란하게도 편지를 사들인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보낸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초소를 지키던 가신에게 접근해서 독이 든 술을 건넸죠. 물론 독이 들었다는 소리 따위는 뻥긋도 않고 이건 특별한 술이니까 폐하와 비전하께서 찾아오시면 이걸로 대접하라고 멘도사 경이 지시했다는 말과 함께. 덕분에 왕과 왕비는 자칫하면 독살당할 뻔했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국왕 부처 독살의 주범이 되는 거예요.” 멘도사 경이 비명을 질렀다. “나, 난, 난 그런 거 몰라!” “하지만 타우 사람들을 일부러 골탕 먹인 건 당신 지시였죠? 어째서 그런 짓을 했죠?” “그, 그건....” “맞혀볼까요? 배신할 생각으로 한 짓은 아니었죠? 당신의 영지는 타우 근처에 있으니까 타우 사람들과도 뭔가 문제가 있었겠지요. 얼마 전까지도 산적이었던 주제에 천한 것이 임금님의 소꿉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임금님의 관심을 받고 있다. 타우 놈들만 파라스트하고 싸워보라지. 그 정도 심술에서 한 짓이었죠?” 아무래도 루의 말이 정곡을 찌른 듯 멘도사 경은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청년은 매력적으로 웃으면서 취후의 일격을 날렸다. “잘 모르나본데, 보통은 그런 걸 두고 배신이라고 해요.” “아냐! 독이 든 술 따위 난 전혀 몰라!” “그럼 편지를 사들인 사람은 어째서 그런 걸 준비했을까나? 당신이 넘겨준 편지를 보고 그 사람은-그 사람의 주인은 왕비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죠. 임금님이 이리로 달려올 것도 알고 있었어요. 일이 귀찮게 되기 전에 처치해야 하지요. 봐요, 전부 당신 탓이잖아요.”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도 한심한 이유에 머리가 아파올 기경이었다. 화낼 기력조차 솟아나지 않는다. 멘도사 경은 소심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타우 사람들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라함 경처럼 대놓고 국왕에게 간언할 용기는 없었고, 하물며 반기를 들 용기는 더욱 없었다. 어차피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인데 소 시원하게 심술이나 부려주자. 그 정도 생각이었으리라. 편지에 대해세도 마찬가지이지만, 대체 해도 될 짓과 안 될 깃의 구별조차 못하는 건가. 그 자리에는 아직 합류하지 않은 나시아스를 제외한 내부분의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지만 전원이 씁쓸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국왕과 같은 심정을 맛보고 있는 것이리라. “이븐, 아니 독립기병대자. 약속대로 이 남자의 처리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국왕은 지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부탁하겠어. 이 남자에게는 네가 직접 손을 쓸 만큼의 가치도 없어.” 이븐도 지친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폐하. 이런 놈을 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열 내고 있던 제가 멍청이 같아서 말이지요.”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에게 눈짓을 한다. 타우의 남자들은 곧바로 멘도사 경을 붙들어 일으켜 본진에서 끌고 나갔다. 본인은 죽어도 배신 따위 한 적 없다고, 그런 엄청난 짓은 안했다고 마지막까지 울며 발버둥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떤 생각에서 한 짓이건 간에, 아군인 척하면서 이쪽 진영에 붙어서 뒤로는 몰래 국왕의 편지를 파라스트로 빼돌린 행동이 어떻게 배신이 아니라는 건가. 발로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루퍼스 라비, 그 남자의 생각을 요케도 알아냈군? 그것도 점인가?” “굳이 성까지 다 붙여서 딱딱하게 부를 것 없어요. 저런 종류는 점까지 필 것도 없죠.” 루는 서글프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되뇌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나은 편이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배신한 적 따위 없다는 것도 아마 본심일걸요. 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요. 어차피 국왕과 왕비는 곧 이리로 올 테니 그걸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잖아. 대략 그런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일동은 다시금 씁쓸하게 말을 삼켰다. 특히 핸드릭 백작, 아누아 후작, 브룩스는 더욱 그랬다. “생각지도 목한 구석에서 뒤통수를 맞았군.” 핸드릭 백작이 신음하자 아누아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배신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도저히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비전하를 걱정했는지, 얼마나 무사하기를 빌었는지 멘도사 경은 알고 있었을 텐데.” “글쎄 말이오. 게다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는 거 역시 악의가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브룩스도 보기 드물게 분노를 드러내었다. 왕비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오론은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이미 한참 전에 알고 있었다는 걸까?” “나도 그게 신경 쓰여.” 국왕도 거들었다. “네가 무사하다는 것도, 우리들이 곧 이리로 달려올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 그리고 백작 일행이 왕비가 무사한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어째서 총공격을 걸지 않은 거지?” 이만큼이나 정보를 쥐고 있으면서, 게다가 군대의 수는 4만. 오론은 신중한 왕이지만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는 단숨에 승부를 거는 왕이기도 했다. 게다가 현재 델피니아 군은 파라스트 군에 밀려서 후퇴를 거듭하며 기도에서 멀리 떨어져 동북쪽으로 쫓겨오고 있던 것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다니 정말로 오론답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면 뭔가 움직일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전원이 생각에 잠겼다. “산세베리아가 배신할까봐 경계하고 있는지도?” “아니, 그렇다면 전열에서 빼내어 후방에 배치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도 산세베리아는 선봉을 맡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아무도 파라스트 국왕이 공격을 망설이고 있는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국왕이 논의를 중지시켰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들끼리 고민한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닐 테니. 날이 밝으면 이동한다. 그 전에 리-.” “왜?” “정조 관념이 철저한 처녀를 설득해줘. 재상한테는 차갑게 대해도 네가 나서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그 나라 입장에서는 너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마의 왕지님이니까, 움직일 생각이 없는 굼뜬 공주님을 썩 납치해서 와줬으면 좋겠어.” 이 농담에 왕비는 눈을 반짝이며 웃다가 여봐란 듯이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거긴 왕이고 신하고 귀여운 맛이 없아. 나도 어차피 꼬셔야 한다면 더 귀여운 여자 쪽이 좋다고. 차라리 리리아를 업어올까?” “아니, 안 돼. 그 사람은 유부녀잖아.” 이 대화를 듣던 일동이 폭소했다. 고지식한 벨민스터 공까지도 웃음을 참으려 애썼을 정도였다. 국왕은 일단 회의를 해산하고 핸드릭 백작과 아누아 후작, 브룩스를 따로 남겨 전황 설명을 들은 뒤 샤미안을 문병하러 갔다. 다리를 다쳤다는 말에 걱정했지만 의외로 건강해 보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 당연히 있어야 할 이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샤미안 양, 남편은 어디에 있지?” “그게, 곁에 있으면 제가 푹 쉴 수 없을 테니까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겠다면서....” 이븐이 어디에 있는지 샤미안도 모른다고 한다.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샤미안의 천막에서 나온 국왕은 안면이 있는 타우 사람들의 천막을 하나하나 뒤지면서 이븐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정체모를 초조감이 더욱 강해졌다. 시종들에게 이븐이 오지 않았느냐고 확인하고 있을 즈음 한참 전에 산세베리아 진영으로 출발했을 거라고 생각하던 왕비가 찾아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잠깐 이리 와봐.” 심상치 않은 기생이었다. 불안한 가슴을 안고 따라가보자 왕비는 루퍼를 위해 준비된 천막으로 국왕을 안내했다. 그 안에 이븐이 쓰러져 있었다. 눈을 꽉 감고 바닥에 누워 있다.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피에 물든 붕대가 보였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걱정하던 바로 그 불안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있다. 이븐은 창백하게 질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곁에 루가 무릎을 꿇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청년의 어깨 너머로 국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돌아와 봤더니 여기 쓰러져 있었어요.” 청년은 옆구리 말고도 몸 여기저기에 손을 대며 반응을 살펴보았다. 어깨나 다리를 건드릴 때마가 의식을 잃은 이븐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 다친 게 언제였죠?” “어젯밤.” “그럼 최소한 20시간은 지났을 거야.”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청년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바로 조금 전까지 멀쩡한 척하면서 걸어다녔던 건가요? 상식도 없는 사람이네. 한참 전에 쓰러졌어야 했는데.” “이븐은 경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태는 어떤가?” “어쩌기는요. 보는 대로 중상이죠. 곤란하게 됐는걸요. 이런 곳에서는 제대로 된 약도 도구도 구할 수 없는데.” 이 청년은 의술에도 조예가 있는 듯했다. 왕비가 물었다. “목숨에 지장은?” “가만히 누워 있으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정말 생명도 위험해질 수 있어.” “그런가....” 국왕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히 동작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이븐도 눈치챌 여지를 주지 않았다. 어째서. 화가 끓어오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하는 건가. 기가 막혔지만 결국 한숨만 흘러나왔다. 아마도 이 남자는 멍청하게 적의 함정에 빠져 동료들과 아내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 분노로 간신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왕비가 복잡한 얼굴로 국왕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쩔 거야? 내일 아침에 이동해야 하잖아.” “여기 남겨둘 수밖에 없겠지.” “타우 사람들도?” “그 사람들은 이븐이 같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전력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씁쓸한걸.” “으음.... 하지만 출발을 늦출 수는 없어. 비르그나를 살피러 간 나시아스도 신경 쓰이고.” “하지만 놔두고 간다고 하면 엄청 화낼걸?” “별수 없어. 생명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이 대화를 듣던 흑발의 청년은 하나로 묶고 있던 머리를 풀면서 피투성이가 된 붕대 위에 손을 얹었다. “루퍼?” 왕비가 놀라며 청년 쪽으로 몸을 돌렸다. 파트너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이다. “잠깐 기다려. 그런 법이 어딨어.” “에디도 이 사람을 고쳐준 적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럼 어차피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마찬가지야.” 특별히 원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뭔가가 빛나지도, 주위의 온도가 변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븐의 몸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븐의 상태가 명백하게 변했다. 고통스럽게 내쉬던 호흡이 조용히 가라앉고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다. 루는 곧장 손을 떼고 원래대로 머리를 묶었다. 어쩌면 이 머리카락이 왕비에게 있어서 반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국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눈으로 왕비를 보았다. “리, 네 파트너라는 사람은, 혹시... 굉장히 대충대충인 성격인거야?” “정확하게 파악했는걸.” 왕비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때 그때 필요하면 얼마든지 주장을 바꾸니까. 입장뿐만이니라 인격까지. 그래도 앞뒤가 안 맞는 짓은 안 하지만.” “앞뒤가 들어맞는 대충대충? 들어본 적도 없군.”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임기응변이라든가 좀더 좋은 표현도 여러모로 있을 텐데.” “그럼 그 임기응변이라는 걸로 비르그나에 틀어박혀 있는 파라스트 군대를 통째로 요새 밖으로 옮기는 건 어때? 한 명도 안 다치고 이길 수 있는데.” “그건 금지 사항이라고 했잖아.”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거지? 난 전혀 모르겠는데.” 머리 위에서 오가는 대화에 루는 어깨까지 떨며 웃고 있다. 그 청년의 아래쪽에서 지친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남의 머리 위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불만으로 가득 찼으면서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어조였다. 그리고 이븐은 곧바로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깨달았다. 엄청나게 아파야 할 몸이 아무렇지도 않다니 이변임에 틀림없다. 이븐은 자신의 곁에 않아 있는 청년을 올려다보고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당신이야?” “쓸데없는 짓이었나요?” “설마.... 고마워.” 왕비가 물었다. “대체 어째서 여기 쓰러져 있던 거야?” “남들 앞에서 쓰러지면 소란이 날 거 아냐. 월의 천막까지 갈 생각이었어. 거기서 안심하고 뻗을 생각이었는데 볼썽사납게 거기까지 몸이 못 버텼거든.”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어지러워져서 끝내 버티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천막 안으로 숨어들었다는 말이다. 청년은 직무에 충실한 간호사처럼 이븐을 나무랐다. “한마디 해두겠는데 말이에요. 이 상처로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쓰러졌어요. 그런데도 오늘 아침까지 계속 말을 타고 달려 다녔으니, 허세도 어지간히 해두지 않으면 정말 죽는다고요.” “그건 어쩔 수 없어. 허세는 타우 남자의 신조니까.” 남자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처럼 익숙한, 흐르는 듯이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에디, 더운물을 가져와.” “더운물?” “그리고 수건도. 저 피를 닦아내야지. 그리고 부인한테 가서 갈아입을 옷도 받아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왕비가 천막에서 나갔다. 셰라가 없기 때문에 왕비가 이런 일까지 하는 듯하다. 시종에게 시켜도 충분할텐데, 왕비는 친밀한 사람에 관한 일에서만은 절대로 남에게 맡기려 들지 않았다. 이븐은 아까까지 중태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펄펄하게 윗도리를 벗었다.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지만 상처가 있던 부분을 만져보고 짧게 혀를 찼다. “어이, 섹시한 형씨.” “역시 화가 났나요?” “그런 게 아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기껏 낫게 해준 사람한테 이런 건 벌받을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음에 안 들어.” “그런 표정이에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좋은 일이잖아.” 국왕이 묻자 이븐은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 좋은 일이라고. 너무 편리해서 이상할 지경이야. 이건.”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눈짓으로 묻자 이븐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너도 네 몸으로 직접 맛보면 말게 될 거야. 나도 너도 스샤의 산 속에서 구르면서 자랐지. 어렸을 때에는 온몸에 상처가 끊이지 않았어. 아버지는 상처 치료나 약초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잘 듣는 약이라도 순식간에 상처가 낫는 일은 없었어. 아니, 낫는다는 따위의 정상적인 말로는 표현이 안 돼. 처음부터 상처 따위 아예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고. 그럼 바로 조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통증은 뭘까, 내 착각인가, 꿈이라도 꾼 걸까. 그런 기분이 들어.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건, 믿어야만 하는 건 내 감각이야. 내가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몸으로 확인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내 몸인데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분명히 내가 확인하고 느꼈던 사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질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 거기까지 말하고 이븐은 미안한 듯이 루를 바라봤다. “모처럼 고쳐줬는데 제멋대로 지껄여서 미안. 기분이 상했다면 용서해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당신의 상처를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겠네요. 기분이 상했을 거라니, 전혀 아니에요.” 이븐은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루는 거기서 말을 마쳤다. 기분 나쁠 정도로 이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조면서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RJ낸다. “여긴 마치 보석함이나 무슨 보물 광맥 같네요.” “뭐어?” “임금님도, 당신도,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잘도 모였구나 싶을 정도로 예쁜 사람들만 있어요. 그 애가 필사적으로 당신들을 지키려고 할 만도 하죠.” 국왕은 큰 몸을 움직여 청년과 이븐 사이에 앉았다. 루는 그런 국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코랄에 도착할 때까지 델피니아의 비장군에 대한 소문을 꽤 많이 들었어요. 어떤 전쟁이라도 반드시 이기게 만드는 델피니아 임금님만의 승리의 여신이라고. 아직 젊은 사람인데도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아름답다, 출신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그게 그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얘기의 주인공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인간을 위해 싸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국왕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비는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차갑지도 매정하지도 않아.” “알고 있어요. 그 애는 다정한 성격이죠. 굉장히 다정해요. 그걸 망쳐버리는 건 언제나 인간 쪽인걸요. 하지만 임금님은 달라요. 벌꿀색 오빠도 그렇고요.” “나도? 기분 나쁘다고 했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도망치지 않았잖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갔어요. 아니면 이용할 생각부터 하죠. 이거 편리한걸, 써먹을 수 있는 동안에 실컷 이용하자, 부상병들을 모아다가 전부 다 고치게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죠.” 국왕이 손을 탁 쳤다. “그건 생각도 못 했는걸. 효과 만점의 만능 구급약이잖아. 부탁하면 해줄 수 있나?” 말을 꺼내자마자 이용하자는 얘기가 나와버렸다. 루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면 고개를 저었다. “사절할게요. 임금님이라면 상관없지만.” “하지만 형씨. 나나 이 녀석은 괜찮고 부상병은 치료할 수 없다는 건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 말이지?” “그런 거, 당연히 편애잖아요.” “편애?” “그래요. 좋아하는 사람은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 도와요. 이쪽도 벌을 받을 각오로 하는 짓인데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무시하는 거죠. 안 되나요?” 이렇게까지 딱 잘라 말해버리면 반론의 여지도 없어진다. 두 남자는 팔짱을 끼며 신음했다. “으음....”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뭔가 좀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물론 당연히 그런 기준으로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되죠.” 진지하게 고민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루는 아까처럼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둘 모두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너 말야, 대체 그게 뭐야?!” 이븐이 고함을 질렀다. 드디어 호칭이 ‘너’로 떨어져버렸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는 절대 안 돼요. 보나리스를 부순 것도 그래서였죠.” “그만, 됐어. 너희 나라의 법률 따위 전혀 흥미 없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준 건 고맙지만 하나만은 분명히 해둬야겠어. 저 녀석은 계속 고향에서 자기를 데리러 오면 자기 세계로 돌아갈 서라고 했어. 넌 저 녀석을 데리러 온 거야? 데리고 돌아가 버릴 생각이야?” 준엄한 물음이었다. 국왕 역시 계속 신경 쓰고 있건 점이기도 했다. 조쪽과 이쪽의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들은 뒤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말했을 텐데요. 난 그저 저 애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여기에 남을지 돌아갈지는 그 애 자신이 결정할 문제죠.” 지극히 맞는 말이었지만 이븐은 물러나려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소꿉친구를 향해 창끝을 돌렸다. “넌 어때, 월?” “왕비가 친정에 돌아가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하지만 하늘나라와 이 하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나봐. 그게 조금....” 이븐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푸른 눈을 크게 치뜨며 묻는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 무슨 소리야?” “리가 그렇게 말했어. ‘루퍼 입장에서 난 아직 열세 살 그대로야’ 라더군. 아무리 이상한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문제야. 예를 들어 왕비가 고향에 돌아가서 사흘을 지낸다면 그 사이 이쪽에서는 2년이 경과하는 거야.” 흑발의 청년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임금님. 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우선,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가 문제라고요.” 넘겨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븐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여기에 온 건데?” “그야 표식이 있었으니까. 절대로 알아볼 수밖에 없는 표식이.” 심애임에도 아직 떠들썩하게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쪽에서 온 타우의 부대와 틸레든. 라모나 기사단의 병사들이 탄가의 공방전이나 케이파드를 함락했을 때의 정황을 열심히 설명하고 서부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열심히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왕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은 생각에 잠긴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를 테면 여기 강이 있다고 쳐요. 맑은 물이 흐르는 큰 강에 작은 물고기들이 수없이 헤엄치고 있어요. 그중에 딱 한 마리만 금색으로 빛나고요. 그 금색 물고기를 낚는 거죠. 어망으로 떠내도 좋지만 다른 물고기는 한 마리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게 절대적인 조건이에요. 몇백 마리의 물고기 사이에서 그 고기만 낚아내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두 남자는 조금 멍해졌지만 청년은 진지했다. 국왕이 잠깐 생각하다 진지하게 대답했다. “해본 적이 없으니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낚시꾼의 솜씨에도 좌우되는 게 아닐까?” “맞아요. 내 동료 중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낚시꾼이 덤벼들어서 저쪽 시간으로 열흘 걸렸죠.” “.......” “거기까지는 괜찮아요. 노리는 물고기는 금색으로 빛나고 있어서 절대로 못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그렇데 그 물고기를 잡아보니 입가에 빛나는 돌이 박혀 있고 그 돌을 빼냈더니 물고기는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강에 다시 던져 넣었다, 그럼 똑같은 물고기를 다시 낚을 수 있을까요?” 이 예시가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충분히 이해되었을 즈음 청년이 말을 덧붙였다. “그 아이가 사라져버린 이 세계를 다시 한 번 저쪽에서 연결하는 건 몇백 마리나 되는 물고기 사이에서 단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낚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솜씨가 좋은 낚시꾼이라도 무리일 거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은 지금의 예를 되씹어 보았다.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똑같은 짓을 해보라고 시킨다면 무리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무슨 관계인지가 확실하게 납득되지 않았다. 국왕이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뭔가 그 대신 표식을 붙일 수는 없나?”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물고기를 원래처럼 금색으로 빛나게 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죠. 하지만 물고기는 강 속을 헤엄치고 있지요. 자유자재로. 그것만 노려서 낚으려고 해서도 그리 쉽게 잡혀줄 거라고만은 할 수 없어요. 강도 언제나 평온한 상태일 거라고는 할 수 없죠. 갑자기 범람할지도 모르고요. 그런 식으로 저쪽 시간으로 열흘이 흐른다면....” “이쪽에서는 6년이 지난다는 건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몰라요. 그것만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저쪽의 열흘이 언제나 이쪽의 6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죠. 저쪽에서 하루가 흐르는 사이에 여기서는 10년이 지날지도 모르고, 거꾸로 이번에는 이쪽의 하루가 저쪽의 10년이 될지도 몰라요.” “즉, 경이 말하고 싶은 건....” 국왕은 입술을 축이고 신중하게 말했다. “왕비가 고향에 돌아간 뒤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인가?” “그런 거죠.” 이븐이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얘기가 안 되는군. 폭동 날걸....” 왕비가 여행을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발표했다가는 델피니아의 국민들의 절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출국을 저지하려 할 터. 국왕도 복잡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리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거야. 돌아갈 때는 말없이 가버리겠지.” “어이, 월. 바보 갚은 소리 하지 마. 포기할 생각이야?” “울면서 가지 말라고 매달려봤자 생각을 바꿀 녀석이 아니잖아.” “그렇다고 마누라가 가출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는 서방이 어딨어?” “리는 처음부터 말했어. 언젠가는 돌아갈 거라고. 뻔히 그걸 알면서도 계속 도움을 받았지. 아무리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고 꽁꽁 묶어서 가둬둘 수도 없는 거 아냐.” 게다가 가둬둔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 반지가 있으면 왕비는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모습을 감춰버릴 것이다. 반지를 빼앗는다고 해도 왕비의 뜻이 확실하다면 이 청년이 손을 빌려줄 것이다. “어이, 열어줘.” 천막 밖에서 왕비의 목서리가 났다. 국왕이 일어서서 입구를 열어주었다. 왕비가 한 순에 더운물이 든 대야를 들고 다른 손에는 이븐의 옷과 수건을 안고 들어왔다. 과연, 이러니 입구를 열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늦었잖아?”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샤미안이 죄송해서 안 된다면서 옷을 꺼내주려고 하지 않잖아. 나라고 좋아서 사내놈 속옷 따위 가지러 간 것도 아닌데.” 이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미안하게 됐는걸.” 마치 약속이라고 한 것처럼 지금의 얘기는 왕비 앞에서 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이해가 성립했다. “어디, 사내놈이 옷 갈아입는 게 보고 싶지 않으면 모두들 좀 나가주시겠습니까?” “허락도 없이 굴러들어온 주제에 되게 제멋대로잖아?” 왕비가 기가 막인 듯이 말했지만 이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김에 형씨, 여기서 재워주기까지 했으면 고맙겠는데.” “상처도 나았는데 부인 천막에서 자면 되잖아요?” “그 부인도 부상을 당해서 말이야.” 이븐은 신발을 벗고 일어서서 바지에 손을 걸치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뭘 보고 있는 거야?” 국왕과 왕비는 당황하며 천막 밖으로 나갔지만 루는 복잡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긁적였다. “저기, 그러니까 혹시 만능 구급약의 출장 서비스를 바라는 건가요?” “그 소리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부인 얼굴을 보면 이 얘기를 할 자신이 없으니까 여기서 자게 해달라는 거야. 섹시한 형씨.” 옷을 갈아입던 손을 멈추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로서는 마음이 복잡하다고. 너나 리의 마법은 굉장히 편리해. 편리하기 짝이 없지.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그 덕을 본 내가 이런 소리 해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지금 현재 중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사람한테 그 소릴 해봐. 내 주장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가 낫고 고통도 사라진다. 그게 어디가 나쁜 거냐고 반문하겠지.”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지 않아. 마누라는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는데 나 혼자만 깨끗하게 나아놓고서, 스스로도 지독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부탁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의 뒤편에는 이런 힘에 무조건 의지하기 시작했다가는 정말로 위험해진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샤미안의 부상은 이런 힘에 의지하지 않아도 곧 나을 거라는 적절한 판단도 있었다. 이세계에서 온 청년은 이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반한 듯한 웃음이었다. “당신을 존경해요.” 갑작스러운 말에 이븐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쪽 역시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지금은 이렇게 잘난 척하고 있지만, 마누라의 부상이 더 심했다면 수치고 뭐고 다 내던지고 고쳐달라고 애원했을 테니까.” “그건 남편이라면 당연한 거죠. 안 그러는 쪽이 이상해요. 그럼 다 갈아입으면 불러줘요.” 천막 밖으로 나간 청년은 별리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정말 여기 사람들은....” 왕비가 웃으면 청년을 바라봤다. “괜찮지?” “너무 괜찮을 정도야. 어쩌지. 이러다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될 것 같다’ 가 아니잖아?” 놀리는 듯한 어죠였다. “이미 한참 전에 좋아하게 된 것 아냐?” “그럴지도 몰라.” 국왕이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아니, 라비 경. 그건 곤란해. 저 녀석한테는 샤미안 양이 있어.” 신혼 가정에 파란이라고 날까봐 걱정하는 국왕을 부며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난 부인 쪽도 좋아하니까.” 왕비도 말을 거들었다. “루퍼는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수중하게 여기니까 걱정하기 않아도 가정 파탄 따위 없어. 실제로 아말록도 그랬지.” 국왕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 라비 경이 네 양아버지를...?” “계속 좋아했어. 그지?” “아말록은 정말 보석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인간 이외의 존재가 푸른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며 웃었다. “예시가 안 좋아서 미안하지만 인간 사회는 사막하고 비슷해요. 어디에나 비슷하게 생긴 모래알이 가득 모여서 언덕을 이루고 있죠. 하지만 그 안에 때때로 정말 보기 드물게 빛나는 게 섞여 있죠. 보석처럼, 금덩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이 있어요. 에디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어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뭐가 기준이냐고 묻는다면 신분도 재산도 재능도 용모도 아니야. 그 사람의 도량, 그릇이 문제니까.” “하지만 네 아버지도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잖아?” 국왕의 말에 청년은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임금님,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임금님 같은 보통 사람에 비해서 이상한 거나 기묘한 존재에 대해서오 관대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닌가?”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동족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사는 생물은 인간에서 개미에 이르기까지 전부 자기들 이외의 생물에 거부 반응을 보여요. 그 점만은 늑대인간이건 라의 일족이건 다를 게 없죠. 실제로 아말록의 아들은-에디의 의붓동생이 되는 셈이지만, 겉보기에는 아버지를 꼭 갊은 검은 늑대가 될 수 있어도 날 무서워했으니까.” “그건 루퍼가 겁을 줬으니까 그랬지.” “겁준 적 없어. 아주 조금 힘을 썼을 뿐이지. 그런데 남의 얼굴을 볼 때마다 펄쩍 뛰며 도망다니잖아. 정말.... 차라리 임금님 쪽이 훨씬 나아.” “그야 월은 정말로 겁먹을 줄 아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뻔뻔스럽고 튼튼한 게 장점이니까.” “그거 칭찬이야?”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열세 살까지의 리가 정말로 저쪽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는 실감이 들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그런가. 라비 경은 왕비의 양아버지 일가와 그렇게나 친한 사이였나.” “제일 가까운 친구였죠. 그 사람 아들도 태어났을 때부터 봤고요.” “나로서는 경이 말하는 그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보통 말하는 ‘좋아한다’는 감정과는 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야 당연하죠. 인간의 애정은 상대를 획득하는 게 목적이니까. 하지만 난 좋아하는 사람이 나한테 홀딱 빠지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댄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인간이라고 매료시킬 수 있는 청년에게 있어서는 상대를 매혹시키는 쪽이 당연하므로 굳이 시험할 생각도 없다는 듯하다. “난 인간에게 해가 된다는 것 같으니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섣불리 접할 수 없어요. 마음에 드는 걸 전부 내 걸로 만들고 싶었다면 훨씬 옛날에 에디를 유혹했겠죠.” “으아아, 그건 사양이야.” 왕비가 과장스럽게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 역시 장난에 불과했다. 눈이 웃고 있었다. “굳이 유혹할 필요 따위 없잖아. 난 루퍼가 좋으니까. 하지만 그런 짓 하려고 들면 기분 나쁘니까 못하게 할 거야.” “너무해.” “어디, 나도 유부남이나 꼬시러 가볼까.” “산세베리아의 임금님?” “응. 그 사람도 꽤 루퍼 취향일 것 같은데. 게다가 부인이 굉장히 귀여워.” “탄가의 새 임금님도 귀여웠지.” “그건 상상도 못했던 숨겨진 보물이었고. 그럼 아침까지는 돌아올게.” “결과 기대하지.” 이 일련의 대화를 듣던 국왕은 자신의 시각을 고쳐야 할 필요를 느꼈다. 사랑스러운 구석은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 같다고 느꼈지만 그렇게 무해한 존재가 아니었다. 더 커다랗고 더 위험한, 전혀 종류가 다른 두 마리의 생물이 눈앞에서 우아하게 몸을 뻗고 있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왕비가 경을 두고 파트너라고 부를 만하군.” 동료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연인도 반려도 아니지만,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 청년이 쿡쿡 웃었다. “그 애.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죠?” “그런 얘기라니?” “날 좋아한다는 말.” “으음. 내 입장에서는 좀 복잡한 감상이지만.” “그런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남편도 굉장하지만요.” 웃으면 어깨를 으쓱하고 루는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당해날 수 없는 걸지도요.” “......?” 묘하게 감상에 젖어 있는 듯한 목소리. 국왕이 말을 꺼내기 전에 루가 입을 열었다. “혼자서는 심심할 텐데, 여기서 쉬다 갈래요?” “아,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네. 안주도 가져오게 하지.” 이미 잠 따위는 다 달아난 뒤였다. 옷을 갈아입은 이븐도 끼어들었다. 몸을 닦아낸 대야의 물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벗어놓은 옷과 붕대도 피를 빨아들여 묵직하게 처져 있었다. “네가 몸 속의 피까지 채워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때에는 당연히 마셔야지.” 비상식적인 논리를 펴면서 세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였다. 어차피 진영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으니 말릴 사람도 없었다. 불쌍한 것은 하필 이런 때에 척후나 보초를 맡게 된 운 없는 병사들과 혼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왕비뿐이었다. 산세베리아 진영에서도 델피니아 본진의 심상치 않은 소란은 파악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경계는 엄중해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진영이 지금은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진영과는 다른 방향에서 다수의 원군이 도착한 것 같다는 것은 척후병의 보고로 알고 있었지만, 이 어두운 와중에 물론 델피니아 쪽 척후도 방심하지 않고 눈을 빛내고 있으니 누가 도착했는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국왕 오르테스는 달튼과 단둘이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까지 산세베리아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아무리 파라스트가 후방을 맡고 있다고는 해도 그 핸드릭 백작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분투하고 있었다. 산세베리아의 병사들은 굉장히 강했다. 그러나 그 강함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의지와 자존심을 건 결사의 각오에서 나오는 강함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울분을 씹으면 전장에 서 있다. 자신들의 나라가 약한 탓에, 힘이 없기 때문에 대국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신경 쓸 것도 없는 존재로 취급받으며 파라스트의 화살받이가 되어 이렇게 이만 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은 절대로 버러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산세베리아 기사들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훌륭하게 싸울 수 있는지 이 전투에서 확실하게 보여주고 말겠다고 굳게 결의하고 있었다. “제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지금 우리 병사들은 개개인의 실력만 놓고 따지자면 탄가 병사에도 결토 뒤지지 않습니다.” 달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더 아까운 겁니다. 파라스트의 속셈대로 이용당하는 게. 어차피 그 너구리 놈은 우리들만 먼저 죽여라 싸우게 만들어서 상대방의 힘을 약하게 만들려고 하는 걸 텐데요.”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약소국의 숙명이다. 델피니아에서도 손꼽히는 영웅을 상대하면서 병사들이 느끼는 부담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 점은 필사적으로 싸워온 델피니아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군 모두 지쳐 떨어질 때쯤, 뒤에서 가만히 구경만 하던 파라스트가 일어나서 제일 맛난 부분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이다. 오르테스는 수려한 얼굴에 우울함과 희미한 분노를 나타내며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정정당당한 수법은 아니지만 효과적이긴 해.” “예. 뭐. 자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그게 현명한 방식이겠지요.” 달튼도 비웃음을 지으며 응수했다. 대놓고 화를 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오론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자신들의 입장이 저주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 시종 한 명이 당황하며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고한다. “전하. 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브룩스 경인가?” “그, 그것이....” 시종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금색 소용돌이가 천막에 뛰어 들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빛덩어리는 대담하게도 자리에 앉아 있던 오르테스의 멱살을 붙잡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적당히 좀 해둬. 이번엔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오르테스는 말을 잃었다. 말뿐이 아니라 몸과 생각의 자유까지 빼앗긴 상태로 그저 멍하니 자신의 멱살을 잡아 들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인간처럼 망연자실하게. 그리고 자연이 낳은 아름다운 미(美)를 바라볼 때처럼 도취하며. 경직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주군 대신 달튼이 시종을 물러나게 했다. 오르테스도 시야 가장자리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리리아 말인가. 그린디에타 왕비.” “그래.” 멱살을 놓으며 리도 웃음을 지었다. “언제까지 너구리 배 위에서 춤추고 있을 거야. 우리들은 내일 비르그나를 되찾으러 갈 생각인데 넌 어쩔 거지?” 오르테스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동이지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재상의 세련된 외교술에 비하자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교섭이다. 무섭도록 단도직입적인데다 요점밖에 말하지 않고, 게다가 이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유쾌해서 오르테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간신히 웃음이 가라앉고서 다시 상대를 올려다봤을 때에는 개운한 기쁨이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린디에타 왕비.” “뭐야?” “부탁이 있는데....” “그러니까 뭐냐고?” “비르그나를 되찾으면 술이나 한번 같이 마셔볼 수 없을까?” “어려울 것 없지.” “그럼 내일 아침.” “해뜨기 전에 출발이야.” “알았소.” 할 말만 남기고서 휙 몸을 돌려 왕비는 천막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달튼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웃음을 지으며 고래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거 참, 저 왕비도 뭐라고 해야 할지. 나잇값도 못하고 반해 버릴 것 같습니다.” “동감이야.” 오르테서는 엄숙하게 말했다. 이 반응에 달튼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놀라움을 표현하자 오르테스는 만족스럽게 술잔을 들어올렸다. “건배다. 저 왕비와 우리들의 승리를 위해서.” “저도 들겠습니다.” 6장 다음날 새벽 델피니아와 산세베리아의 연합군은 진군을 개시해 오후쯤 비르그나에 도착했다. 총 2만 이상의 대군이다. 전원이 전의로 불타고 있었다. 월 그리크는 비르그나 요새의 북쪽에 진을 치고 요새의 동향과 테바 강의 다리를 확보하며 진을 치고 있는 파라스트 본진 양쪽을 살피기로 했다. 먼저 정찰을 다녀온 나시아스와도 무사히 합류했다. 나시아스는 어젯밤 내내 비르그나의 상황을 관찰했다고 한다. “엄청난 동원 태세더군요. 성벽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모닥불을 피워두고 밤새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는 듯했습니다.” “흐음....” 국왕은 신음했다. “어디, 어떻게 할까? 정면으로 공격을 해봤자 시간 낭비야. 가능한 한 피해 없이 되찾기 위해서는 또 금쥐와 은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맡겨둬. 지금은 검은 쥐도 있으니까.” 왕비의 말에 그 검은 쥐가 발언했다. “탄가가 써먹었던 수법은 어떨까? 수면제나 비슷한 뭔가로 병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안에서 문을 여는 건?” “하지만 문제는 그게 가능한가 하는 거지.” “할 수 있지?” 청년은 왕비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고, 왕비는 셰라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할 수 있지?” 셰라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인해전술로 침입자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침입하기에는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국왕은 그밖에도 첩자를 파견해 파라스트 군 본대릐 상황을 살폈지만 지금은 일단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고 한다. 과연 오론다웠다. 적의 대군이 갑자기 나타났어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자극을 받아 호전적인 태도로 돌변하지도 않았다. 침착하게 적을 경계하며 이쪽의 허점을 노린다. 정면의 적과 싸우는 도중에는 옆이나 뒤가 무방비해지는 것이 군대의 구조이다. 델피니아 군이 비르그나 요새를 되찾느라 정신을 팔고 있는 틈에 뒤를 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협공은 전쟁의 정석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델피니아 군 쪽에서는 비르그나 요새를 공격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적의 본진을 향해 움직이는 것도 위험하다. 곧바로 요새에서 파라스트 군이 달려나와 협공을 퍼붓게 된다. 즉 월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파라스트 군 본진이 눈치채기 전에 비르그나 요새를 되찾아야만 할 상황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상대가 4만의 대군이라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 거의 승리한 거나 다름없었다. 파라스트는 파라스트대로 델피니아를 먼저 움직이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월 그리크가 도착한 뒤로 파라스트의 본진은 빈번하게 요새와 연락을 취하며 물자를 보급해댔다. 이렇게 매일같이 물자와 병사를 보급할 필요가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행동은 완전히 델피니아를 도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보초들도 허술하기 짝이 없고 대낮부터 술이 오가며 동료들과 잡담만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바로 이 수법에 세리에 경이 넘어갔었다. 펜타스에 주둔하고 있던 파라스트 군은 매일같이 술과 여자에 빠져 여념이 없었기에 이 정도라면 걱정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경계를 풀었다가 허를 찔렸다. ‘그 수법에는 안 넘어가.’ 월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비르그나에 도착한 이래 단 한 번도 전투가 없었다. 슬슬 사기에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월은 적의 작전을 알고 있다. 오히려 적이 방심하게 만들려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거기까지 알지 못한다. 폐하께는 싸울 의지가 없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당분간은 싸움이 없을 거라고 방심하는 자도 나왔다. 하지만 다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라스트 본진은 아직 진짜 본체가 아니다. 지휘권은 쥐고 있는 것은 오론 휘하의 무장으로, 정작 오론은 아직 아비용 안에 있었다. 이 국면에서 어째서 나오지 않는 건지, 뭔가 나올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건지-. 말을 바꾸자면 오론이 나오는 순간 일대 결전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요새 탈환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된다. 무슨 짓을 해서라고 오론이 등장하기 전에 요새를 되찾아야만 한다. 산세베리아의 오르테스는 자신들이 미끼가 되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월은 정중하게 사절했다. “귀공의 조력은 아비용 공격 때에 기꺼이 부탁하겠네. 비그르나는 본래 우리의 요새, 우리 힘으로 되찾는 게 당연하겠지. 잘 보아두시게.” 계속 싸우느라 피폐해진 산세베리아 군에 이 이상 무리를 강요할 수는 없다. 금쥐, 은쥐, 검은 쥐는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상의하다가 결정을 본 듯했다. 나시아스가 호출되었다. 국왕과 금쥐, 은쥐, 검은 쥐, 거기에 백합의 기사단장까지 모여 회의를 계속했다. “문제는 약의 양입니다. 저 안에 최소한 5천 명은 있을 겁니다. 그만큼의 인간을 재우려면 상당히 많은 양이 필요합니다.” 셰라가 문제점을 제시하자 왕비가 반문했다. “전원을 한꺼번에 다 재우는 건 확실히 무리 아닐까? 요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굳이 수면제가 아니어도 마비제라든가 설사약 같은 걸로, 좀더 구하기 쉬운 건 없어?” 셰라가 기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사약이라면 바로 입수할 수 있고 양도 그리 많이 는 필요하지 않은 종류가 있습니다만....” “그만 하십시오.” 나시아스가 짜증스럽다는 듯, 동시에 완고한 태도로 셰라를 제지했다. 왕비를 바라보면 정중하게 말한다. “황송하오나 그 제안은 요새의 책임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전하께서도 조금은 뒷일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설사약을 먹이면 대체 어떤 참상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더렵혀진 요새라면 되찾는다고 해도 아무런 명예도 되지 않습니다.” 실로 준엄하고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왕비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가 알았다는 듯이 그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분명히 전원을 재우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할 필요는 없겠어....” 나시아스의 눈썹이 꿈틀 떨리는 숭간 루가 선수를 쳤다. “알고 있어요. 꽃님의 요새를 망치는 짓은 안 할 테니까요. 그런 게 아니라 발상을 조금 바꿔보는 게 어떻겠어요?” 묘하게 진지하면서도 마치 재미있는 장난거리를 생각해낸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모두를 가까이 불러 모아 목소리를 낮추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 루의 제안을 들은 왕비는 폭소를 터뜨렸고, 국왕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도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일동의 시선이 셰라에게 향했다. “어때? 구할 수 있겠어?” “예, 그거라면....” 나시아스만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루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닙니다. 수단으로서는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탈진해 있던 나시아스는 간신히 고개를 들며 왕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곤란하군요. 이분은 예전의 당신과 똑같습니다.” “예전?” “예. 이 비르그나에 폐하와 함께 찾아와 처음 만나 뵈었을 때의 당신과 꼭 닮았습니다.” “지금 나하고는 안 닮았고?” “그건... 그때와 비교하자면 비전하께서도 상당히 난폭, 아니 용맹해지셨으니까요.” 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꽃님에게는 지금의 에디보다 내가 더 귀여워 보인다는 말인가요?” “그 ‘꽃님’이라는 호칭은 그만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나시아스가 씁쓸하게 웃자 왕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파트너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걸 두고 보통 귀엽다고 해?” “안 귀여워?” “별로.” 왕비는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청년이 울상을 짓는다. 국왕은 웃음을 참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지, 사이가 좋은 거야 바람직한 일이지만 우선 비르그나부터 어떻게 해보지. 셰라-.” “예.” “준비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지?”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이틀 뒤로 하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파라스트의 보급 부대는 여봐란 듯이 비르그나 요새를 방문했다. 이쯤 되면 참을성 승부이다. 델피니아 군도 상당한 인내력을 강요당하는 상태였다. 적의 부대가 눈앞을 당당하게 통과하며 점령당한 자국의 요새로 들어가는 꼴을 손가락만 빨면서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혈기왕성한 틸레든 기사단이나 자신들의 요새를 적에게 빼앗긴 라모나 기사단은 울분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양 기사단의 지휘관은 매일같이 돌격하고 싶어하는 단원들을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오늘도 파라스트의 보급 부대는 당당하게 비르그나에 들어간다. 짐차에 쌓아올린 나무통과 부대자루, 건초, 사료 등이 그득그득 늘어섰고, 요새 측은 아군임을 확인하고 다리를 내려 그들을 맞이했다. 요새 안에서 시종들이 달려나와 화물을 분류하며 무기나 방어구는 병사들에게 분배하고 술통과 식재료는 창고로 가져갔다. 일을 마친 시종들이 물러난 뒤. 본래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창고 안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나무통 중 하나가 조용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일 위쪽에 적재된 기름통이었다. 희미한 소리와 동시에 통의 옆면이 열렸다. 뚜껑이 아니라 몸통 부분의 판자가 툭 떨어지면서. 통을 고정하고 금속 테가 슬슬 미끄러졌다. 통 안에 숨어 있던 셰라가 소리 없이 빠져나와 나무통 더미 위에 서서 자신이 빠져나온 통의 판자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것으로 아까처럼 아무 이상도 없는 통으로 보인다. 셰라는 창고 바닥에 조용히 착지했다. 무사히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도 탈출할 수 있도록 조작해놓은 통이라고는 해도 모근 방향이 화물로 막혀버리면 탈출에 상당히 애를 먹게 된다. 이 잠입 방법은 왕비가 제안했다. 스스로 통 속에 갇혀본 경험에서 나온 듯했다. 왕비와 루는 전날 밤 파라스트 진영에 잠입해 오늘 비르그나로 운반될 기름통 하나를 셰라가 들어갈 통과 바꾸어놓았다. 비르그나 요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지만 요새의 구조는 나시아스가 상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주의 깊게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부엌으로 이동했다. 비르그나 요새의 이변은 그날 저녁, 모두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일어났다. 보급이 충분한 덕분에 병사들의 식사도 상당히 풍요로운 편이다. 그날 저녁 일반 병사들의 식단은 소고기와 야채를 넣은 스튜, 장교들은 향초를 채운 오리 통구이였다. 교대로 식사를 들고 다시 각자 배치된 장소로 돌아온 병사들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웃기 시작하자 뒤를 따르는 듯이 차례로 웃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 전체가 폭소의 합창에 휩쓸려버렸다. 이렇게 되면 경비가 문제가 아니다. 무사한 사람들은 기막혀하면서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는 동료들의 어깨를 흔들고 뺨도 쳐봤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몇 명인가는 간신히 도와달라고 말하면서도 데굴거리며 웃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보기에도 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군의가 불려왔지만 진찰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이건 버섯입니다. 독버섯입니다!” “뭣?!” 간신히 피해를 모면한 지휘관도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그런 게 병사들 입에 들어간 거냐?!” 말해봤자 소용없는 질문이다. 이렇게나 대량으로, 동시에 중독자가 발생했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저녁 식사뿐이다. 요리사가 호출되었지만 오늘 저녁 식단에 버섯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용한 재료는 소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뿐입니다. 버섯 따위는 한 조각도 안 썼는데 하물며 독버섯이 들어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중독된 병사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으니 멀쩡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간신히 배치 장소에서 이동시켰다. 그러나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교들이 한꺼번에 이상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을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과 현기증을 호소했다. 한 명, 두 명씩 가슴은 부여잡으며 픽픽 쓰어진다. 마치 야전병원이나 다름없는 참상이었다. 모두 끙끙대며 몸부림을 쳤다. 군의는 당황하며 장교들을 진찰하고 남은 음식을 조사했다. 곧바로 오리 뱃속에 채운 향초 사이에 다량의 독초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강 정도는 아니었지만 증상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이었다. 요리사는 반쯤 미친 듯이 날뛰면서 절개로 그런 물건은 넣지 않았다, 섞여 있었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리가 없다고 호소했지만 지금은 책임을 추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동료들을 간병하고 그런 한편으로 요새 외부의 경비를 강화했다. 이런 판국에 적의 기습을 받았다가는 절대로 버틸 수 없다. 인원이 부족해진 공간을 보충하기 위해 황급히 성벽 위에 모닥불을 늘렸고 무사한 자들은 횃불을 들고 평소보다 분주하게 순찰을 돌았다. 경비 상태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였지만 실상은 눈코 뜰 새 없는 난장판. 그 와중에 서쪽 성벽에 서 있던 병사 한 명이 묘하게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횃불을 흔들었다. 크게 원을 두 번, 마치 누군가에게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아직 앳된 나이의 병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요새 전체에 큰일이 났으니 여기는 내가 지키겠다며 다른 병사들을 안심시켜 교묘하게 다른 곳으로 보내면서. 십여 분 정도 기다리던 중, 병사의 뒤쪽 벽에서 사람의 손이 나타났다. 그 손은 아무 어려움 없이 몸을 끌어올려 순회로 위에 쓰윽 내려놓았다. 금쥐와 검은 쥐였다. “수고했어.” “역시 셰라야.” 두 사람은 파라스트 병사로 변장하고 있던 은쥐에게 짧게 인사를 한 뒤, 함께 요새의 정면을 향해 움직였다. 둘로 나뉘어서 도개교를 조작하는 기계 탑에 숨어든다. 한밤중인데다 환자가 대량 발생한 탓에 기계 탑에는 경비가 거의 없었다. 겨우 남아 있던 몇 명을 쓰러뜨리고 세 사람은 도르래의 손잡이에 달려들었다. 굵은 쇠사슬이 둘둘 감겨 있다. 이 쇠사슬이 저 육중한 도개교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좌우의 탑에서 각각 성인 남자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어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지만 한쪽은 루, 다른 한 쪽을 왕비와 셰라가 담당하고 있었다. 왕비의 완력이야 정평이 나 있고 루는 그런 왕비가 ‘한 손으로 사람 목도 날릴 수 있다’고 공언한 완력의 소유자이다. 겨우 세 명의 손에 의해 꽉 감겨 있던 강철 쇠사슬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일단 가속이 붙기 시작하면 아무도 멈출 수 없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사슬이 걷잡을 수 없어 풀려나가고 다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앗!” “아, 안 돼! 다리가!” “말도 안 돼! 누가 물을 내린 거야?!” 내부의 사람들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당황하며 기계 탑으로 뛰어왔지만 이미 거대한 도개교는 완전히 내려와 해자 건너편을 연결하고 있다. 해자 건너편에 조용히 숨어 있던 델피니아 군, 정확하게는 라모나 기사단원들은 바로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원이 일제히 일어섰다. 함성조차 지르지 않는다. “파라스트 본영에서 눈치채게 해서는 안 돼. 가능한 한 신속하게 요새를 제압하도록.” “맡겨주십시오. 여기는 저희들의 요새입니다.” 나시아스의 명령에 가렌스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라모나 기사단은 단장 이하 전원이 하나가 되어 그리운 보금자리를 되찾기 위해 돌격했다. 물론 나른 부대도 뒤를 따르며 정문을 확보했다. 전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단 하나뿐인 문을 델피니아 군이 확보한 상황에서 파라스트 군은 도망칠 수도, 원군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전투를 지휘해야 할 장교들은 식중독으로 드러누워 있다. 전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델피니아 군은 거의 피해 없이 비르그나 요새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파라스트 본영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두 색으로 칠해진 방패가 그려진 자국의 국기가 휘날리던 비르그나 요새에 지금은 사자의 옆얼굴과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하는 문양의 깃발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새 주위에는 델피니아와 산세베리아 군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설마.... 델피니아가...?” “하지만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요새에서는 끊임없이 자국의 병사들이 나와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힘없이 터벅터벅. 들것에 실려 오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본영의 총지휘는 오론이 신임하는 명장 뒤메르그가 맡고 있었다. 역전의 용사인 뒤메르그조차 이 사태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믿어지지 않았다. 아연해진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고 입술을 와들와들 떨면서 요새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과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군 별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본진에 도착한 병사들은 원통한 표정으로 어젯밤의 싸움에 대해 남김없이 보고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델피니아 군은 자신들을 풀어주며 환자들을 데려가도록 허락해줬다고 한다. 그때 월 그리크는 파라스트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제군들의 군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싸우고 싶지 않은 자는 빨리 전선에서 도망치도록.” 뒤메르그 장군은 자신의 귀를 위심했다. “어젯밤에 요새를 갓 탈환한 상태에서 바로 공격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 위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요새 쪽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화물 부대가 재빨리 천막을 치우며 뭔가를 준비한다. 아침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정연하게 대열을 짜기 시작하며 명백하게 전투 태세를 갖췄다. “건방진!” 뒤메르그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부상자를 후열로 보내고 즉각 응전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쪽의 총숫자는 적의 두 배이다. 요새를 빼앗겼다고는 해도, 델피니아 측이 사기가 올라 있다고는 해도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싸움을 펼칠 수 있을 터. 그러나 이날만을 기다리며 지금까지의 굴욕을 견디던 델피니아 군에게 수적인 열세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선봉을 맡은 틸레든 기사단, 그 보좌로 나선 라모나 기사단 양쪽 모두 처음부터 후퇴 따위는 염두에도 주지 않고 용맹하게 돌진했다. 그 좌우로 근위병단과 벨민스터 세력이 버티고 있다. 본래 상식적으로 이런 대열은 피해야 하는 법이지만 마치 모든 부대가 저마다 선봉을 다투는 듯이 한꺼번에 거의 일직선으로 늘어서서 파라스트를 향해 달려온다. “저런 대형은 어딘가 한 군대만 뚫리면 끝이야!” 뒤메르그는 그렇게 외치며 선봉의 진형을 쐐기 모양으로 조정해 근위병단 쪽을 뚫으려 했지만, 델피니아 군은 거꾸로 그런 파라스트 군을 포위해버렸다. 돌풍 같은 기세로, 바람을 타고 들불이 퍼지는 것처럼. 이미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델피니아의 대열을 꿰뚫으려던 파라스트의 쐐기는 좌우로 적에게 둘러싸여 산산조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델피니아는 더욱 기세를 높이며 뒤메르그 장군이 있는 본진을 향해 돌격했다. 달리면서 대열이 바뀐다. 이번에는 델피니아 군이 날카로운 쐐기 모양으로 늘어서며 파라스트를 덮쳤다. 그러나 뒤메르그도 그리 손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파라스트 군의 강한 저항에 격한 난전이 시작되었다. 국왕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냉정하게 전황을 지켜보다가 곁에 있던 왕비에게 말했다. “산세베리아 쪽에 전언 부탁해. 옆쪽을 쳐서 협공해달라고.” “알았어.” 물론 왕비도 그저 전령 역할만 하러 간 것은 아니다. 국왕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왕비는 파트너와 함께 산세베리아 진영으로 달려가 국왕의 말을 전한 뒤, 애마의 기수를 돌려 혼전의 중심을 향해 뛰어들었다. 달튼이 이끄는 산세베리아 군이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은 간신히 공격을 버티던 뒤메르그 측의 옆구리에 맹렬한 일격을 먹였다. 역전의 명장도 이 공격까지는 버텨내지 못했고 견고한 수비와 남카로운 공격이 조금씩 둔해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월 그리크가 말에 뛰어오르며 영주들을 둘어봤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맹렬하게 달려갔다. 핸드릭 백작, 세리에 경, 그라함 경, 그 밖에도 함께 대기하고 있던 영주들의 군사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대지를 뒤흔드는 기세로 돌격했다. 기습을 당한 영향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 이런 맹공까지 받게 되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름난 무장과 기사들이 차례로 쓰러져가는 모습도 병사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점차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에에잇! 버텨! 버텨라!” 뒤메르그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여기에서 대열이 흩어지면 흐름을 되찾을 수 없다. 패주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필사적으로 분전했지만 델피니아 군은 그 이상으로 격렬하게 파라스트 군을 몰아세웠다. 명장 뒤메르그도 그 이상 버티지 못하세 되었다. 이 이상 전투를 속행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가 갈리도록 분했지만 어쩔 수 없이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놓치지 마!” 델피니아 군이 재빨리 뒤를 쫓았다. 차라스트의 후진은 델피니아 군을 저지하려고 결사적으로 분전했다. 수비전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파라스트 군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여 아무리 공격해도 철벽 같은 방어는 쉽게 뚫리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에 도망치는 적을 너무 깊숙한 곳까지 쫓아가는 건 금물이지만, 델피니아 군은 망설임 없이 파라스트 군의 뒤를 쫓았다. 조금씩 물러가는 적을 조금씩 집요하게 추적하는 지루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은 그날 밤에야 아비용에 있던 오론의 귀에 들어갔다. 뒤메르그가 보낸 전령이 서둘러 달려온 것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오나, 이렇게 된 이상 폐하께서 와 주시는 것 이외에는 이길 방법이 없다고 장군이 전했습니다.” 전령은 헐떡거리며 단숨에 정황을 설명했다. 명장 뒤메르그는 최소한 전군이 패주하는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냈다. 적에게 밀리고는 있지만, 여기서 오론이 직접 출진하면 충분히 전황을 뒤엎을 수 있다. 전령에게 들려 보낸 편지에서도 필사적으로 그렇게 호소했으며 전령 역시 열띠게 장군의 말을 전했다. “델피니아의 국왕과 왕비가 나란히 출진했습니다. 장군으로서도 병사들이 겁을 먹는 것만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실로 면목이 없는 부탁이오나 폐하께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장군은 몇 번이고 강조했습니다.” “음.” 오론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전령을 물러나게 했다. 안주를 준비시키고 언제나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음식에 독이 안 들었는지 확인한 뒤, 그 여자들끼리 물리쳐 혼자 남았다. 물론 방문 밖에는 엄중하게 경비를 세워두었지만. 혼자 남은 오론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온몸이 식은땀에 젖고 술반을 쥔 손도 부들부들 떨려왔다. 믿을 수 없었다. 비르그나 요새를 겨우 하룻밤 사이에 빼앗기고 4만의 대군이 전장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후퇴하고 있다. 오론은 신중한 인간이었다. 아직 아비용에는 5천 이상의 병사가 남아 있다. 이 전력과 함께 자신이 전선에 합류하면 충분히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공격에 나선 이상 델피니아의 애송이놈도 반드시 아비용을 함락하려 할 터이다. 그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그 왕비 때문이었다. 오론은 그린다 왕비가 죽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암살자에게 부탁했던 기한은 바로 올해 여름까지. 그 올해 여름이 서서히 지나려고 하고 있다. 탄가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야 간신히 밤에도 발을 뻗고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장에서라면 아무리 강한 적도 두렵지 않다. 반드시 격파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왕비에게만은 오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법칙이 통하지 않았다. 그 법칙이란 단 한 명의 인간이 만 명의 군대에 필적할 수는 없다는 신념이었다. 겨우 한 명이 철통 같은 경비로 둘러싸인 아비용 성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리가 없어야 했다. 그 왕비라면 양쪽 모두 손쉽게 해낼 수 있으리라.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확실하세 승부를 걸어야 할 때에는 얼마든지 강인해지는 오론이지만 그 왕비와 전장에서 맞설 생각만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아무리 경계를 강화해도 본진까지 마음대로 숨어 들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오론답지 않게 몸을 도사리며 암살자 일족에게 맡긴 의뢰가 처리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만일에 대비해 델피니아의 초소 하나에 손을 써서 왕비에 관한 연락이 오면 바로 입수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실제로 부하는 은밀하게 월 왕의 친필 서신을 오론에게 보내왔지만 그 내용이라는 것이 또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조라더스가 수중에 넣은 포로를 놓치는 실수를 했다는 것만 해도 믿어지지 않는데, 보나리스는 붕괴되고 조라더스까지 전사한데다 국왕 부부는 케아파드를 제압하고 이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온몸이 떨려왔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괴물임에 틀림없다. 일이 이리 된 이상 효과가 있을 만한 방법이라면 뭐든지 시도해봐야 했다. 일국의 왕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독이 든 술까지 준비했는데도 왕비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비르그나를 탈환하고 뒤메르그를 몰아세우며 4만의 군대에도 상관없이 아비용을 향해 쳐들어온다. ‘대체 암살자 일족인가 하는 놈들은 뭘 하고 있는 게야.’ 절대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오론은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 혹시나 싶어 암살을 의뢰하도록 시킨 가신 게스켈을 불러다 문책해봤지만 한번 의뢰를 맡기면 그 이후로는 접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의 실적은 하루 이틀에 쌓아올린 게 아닙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백년도 더 전부터 계속되었다고 하지요. 그동안 그들이 한번 수락한 의뢰를 수행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따라서 의뢰를 받은 뒤에 다시 의뢰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없습니다.” 게스켈 역시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절대로 실패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암살의 보수도 전부 선불로 지불한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오래 끌고 있지 않은가. 묵묵히 술잔을 비우던 중,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태연하기 그지없는, 야우와 비웃음이 뒤섞인 어조였다. 절대로 자신의 주군을 상대로 쓸 수 있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론은 경악하며 술잔을 떨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을 부르려 하자 상대는 당황하며 그를 말렸다. “엇차,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부탁합니다.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오론은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남자 한 명이 유령처럼 문 쪽에 서 있었다.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남자의 기술 자체가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체격의 영향도 있을지 모른다. 굉장히 선이 가늘고 몸집이 작으면서도 날렵한 분위기가 족제비과의 동물을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오론은 언제나 휴대하는 검의 손잡이를 쥐며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냐?!” “폐하께서 찾고 계시는 파로트 일족의 인간입니다.” 말은 공손하게 하면서도 만면에 슬슬 웃음을 짓고 있다. 기가 막혀 검을 쥔 손의 힘이 살짝 풀어진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는 가볍게 오른 앞에 내려섰다. 날카롭게 빛나는 고양이 같은 눈이 파라스트의 국왕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오론은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숨을 삼켰다.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이 남자가 바로 그 암살자의 일족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무, 무슨 용무인가....” 간신히 위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방 안에 자신을 지키는 호위병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오론이 한 마디만 외치면 열두 명의 병사들이 뛰쳐나와 이 남자를 죽일 수 있다. 오론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가슴을 폈다. “실은 폐하께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레티시아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폐하께서 의뢰하신 건은 실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려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뭐, 뭐, 뭐라고?!” 오론은 경악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인가?! 한번 받은 의뢰는 반드시 수향하는 것이 자네들 일족이지 않나!” “파로트 일족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파로트 일족은 멸망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한 겁니다. 폐하의 의뢰처럼 아직 완수되지 않은 일도 여럿 있지만 그 의뢰를 마칠 사람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론은 말없이 상대를 노려봤다. 천천히 기분 나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럼 너 뭐지?” “아까는 파로트 일족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은 고용되어서 일했던 것뿐입니다.” “호오...?” “저는 일족의 수령에게서 일을 받았습니다. 그 수령이 죽은 지금, 굳이 의뢰를 수행해야 할 위무는 없지요. 전 그런 입장의 인간입니다.” 레티시아는 계속 웃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웃음이었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관심이 없는, 나른한 가운데 무서울 정도로 강한 힘이 담긴 웃음. 자조적이던 반츠아의 웃음과도 다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러니 폐하.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그 왕비가 알아서 죽어줄 거라고 기대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것만은 알려드릴까 해서 말이죠.” 인사 대신 고개를 까딱하고 레티시아가 등을 돌렸다. 당당하게 문으로 나가려 한다. “기다려.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고용하지.” 일부러 모습을 보이며 주인을 잃었다는 말을 꺼내는 걸 보면 그것이 목적일 터였다. 여기까지 숨어들었을 정도면 실력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전 이 일을 그만뒀습니다. 이제 와서 돈에 팔릴 생각은 없는데요.” “이 아비용 성의 가장 핵심부까지 잠입해놓고 모슨 헛소리를....” “별로 어려울 것도 없던데요? 그 왕비 씨한테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남자의 말이 오론으르 자극했다. 자신의 거성(居城)은 온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시에 철벽의 방어를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여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애송이가 어디 술집이라도 들어오는 듯한 태도로 먹대로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오론은 검을 쥔 채 뒤쪽의 벽으로 달려가 그곳에 걸려 있는 끈을 당겼다. 여기저기에 방울이 울린다. 그와 동시에 오론이 고함을 질렀다. “나와!” 마치 마술처럼, 벽을 덮고 있던 화려한 장막 뒤쪽에서 엄중하게 무장한 병사들이 뛰어나왔다. 이쪽은 경장 차림이다. 정식 병사가 아니라 첩자로 일하는 이들이었다. 단검과 수리검 들을 들고 있다. 전부 열두 명. 그에 비해 상대는 겨우 한 명이다. 뛰어내린 병사들이 청년을 향해 단검과 수리검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벽에서 뛰어나온 병사들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오론도 병사들도 다음 순간 그 청년이 조각나 죽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던진 단검이 채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남자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 영문을 모른 채 달려오던 병사들의 얼굴이, 그 표정 그대로 몸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이 천천히 기울면서 바닥에 쓰러지는 찰나에 남은 여덟 명도 공격을 받았다. 어떤 이는 작게 비명을 지르고, 어떤 이는 신음하고, 가슴에서 목에서 피를 뿜으며 차례로 쓰러졌다. 그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병사들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너무나도 간단하게 힘없이 쓰러졌다.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아도 현실은 현실. 오론이 고르고 고른 정예병 전원이 순식간에 열두 구의 시체로 변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여전히 정중하게 그지없는 태도로 인사를 하고, 남자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때의 왕비와 마찬가지였다. 경비병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을 복도가 너무나도 조용했다. 오론은 방 안에 가득 찬 피 냄새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 사이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과연 이것이 파로트 일족. 직접 눈앞에서 봤음에도 사람이 한 짓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비틀거리며 검을 고쳐 쥐고 오론은 남자의 뒤를 쫓았다. 상대가 얼마나 엄청난 실력인지 직접 확인했으면서도 남자를 쫓을 수 있었던 것은 아까의 방울 소리를 듣고 달려올 다른 병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거실은 다른 구획과 엄중하게 격리되어 있다. 세 겹으로 자물쇠가 걸린 문으로 둘러싸인 구획을 백여 명의 병사들이 지키며 방울이 울리면 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수상한 인물은 물론이고, 미리 얼굴과 이름을 확인한 당직 병사 이외에는 모두 무단으로 베어버려도 상관없었다. 방울이 울리면 제일 먼저 문을 잠가 침입자의 퇴로를 봉쇄한다. 또한 다른 구역까지 경보가 전달되어 성 전체에서 병사가 달려오도록 안배해두었다. 어떤 침입자건 절대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일말의 기대를 걸며, 자신의 병사들이 그 남자를 죽여주었기를 무의식 중에 기대하며 방에서 나온 오론은 또다시 망연자실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복도에 깔린 아름다운 융단 위에 병사들의 시체가 빽빽하게 놓여 있다. 그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융단을 붉게 물들인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병사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의 냄새가 생생하게 코를 찔렀다. 채 숨을 거두지 못한 몇 명의 몸도 꿈틀꿈틀 경련하다 곧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오론의 입에서 공포의 비명과도 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남자가 방을 나선 순간부터 자신이 뒤를 따라 나온 시점까지 채 1분도 경과하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 사이에 이 많은 수를 죽였다는 말인가. 이 수를 죽였는데도 바로 근처에 있던 자신에게는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니,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이 열려 있다. 이중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는 두 명의 책임자가 나눠서 보관한다. 절대로 열려 있어서는 안 될 문이 셋 다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저편에서 병사들이 달려온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의 경보는!” 용맹하게 달려온 병사들도 현장을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으악!” 무리도 아니다. 동료들의 시체가 빽빽이 깔려 있는 것이다. 병사들은 창백하게 질리며 눈빛으로 자신들의 주인에게 설명을 부탁했지만 오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을 꽉 쥔 채, 자신이 검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떨고만 있었다. 아비용 성은 발칵 뒤집혔다. 막 조용히 잠들려던 성 전체가 완전히 눈을 뜨고 평소의 배 이상 모닥불을 피우며 성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대대적으로 수색을 펼쳤지만 암살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술집이나 매춘굴의 손님들이 성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쑥덕거렸다. “대체 뭐지?”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거리의 여자들 곁을 레티시아가 태연하게 걸어간다. 어떻게 탈출한 건지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떠들썩한 번화가의 입구에서 레티시아는 발길을 멈추며 빙긋 웃었다. “여어.” 아는 사람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말을 들은 쪽은 어깨만 으쓱하며 기가 막혀서 말했다. “너무 일을 크게 벌이네....”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어? 델피니아 군은 아직 한참 동쪽에 있을 텐데.” “묘한 점괘가 나왔기에 신경이 쓰여서 잠깐 날아왔지. 그랬더니 이 꼴이 나 있고.” “헤에, 너, 그 몸으로 날 수도 있는 거야?” “원래는 규칙 위반이야. 그러니까 이런 어디까지나 비상 수단.” 루는 평소처럼 일반 병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 얼굴과 뒤로 흘러내리는 검은머리. 그 모습은 화려한 밤의 어둠 그대로인 동시에 극히 이질적인 정취를 띠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쪽을 돌아본다. 고양이 눈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너 같은 게 이런 데 서 있으니 꼭 남창이 손님 잡으려는 것 같은걸. 그런 것치고는 옷이 좀 재미가 없지만.” “유감이지만 파는 물건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거 아까운걸. 꽤 비싸게 팔릴 텐데?” 자신이 죽였던 상대가 눈앞에 멀쩡하게 나타났는데도 레티시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뻔뻔스럽게 이런 농담까지 던진다. 대담한 것은 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번 자신을 죽였던 인간과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성에 찾아간 거지?” 남자는 다시 한 번 여윈 어깨를 으쓱했다. 될 대로 되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너무 심심해서. 그냥 변덕이야.” “변덕?” 이쪽 역시 상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심심하면 빨리 그 아이하고 결판이나 지으면 될 텐데.” “이쪽이 그럴 생각이어도 그쪽이 바쁘셔서 말이야. 나하고는 잘 안 놀아준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 “여기 임금님의 운명이 결정될 때쯤엔 그 아이도 이 세계에서 사라질 테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던 레티시아는 마침내 피식 웃어버렸다. “되게 이상한 녀석이야, 넌.”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냐?” 루는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그 동작의 의미를 레티사가 눈치챘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수백 년간 내려온 암살 기술을 계승한 최후의 인간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가볍게 한 걸은 내디뎠다. “차라리 당신하고 놀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는데....” 그 말 뒤에 담긴 뜻을 알면서도 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짝 웃는다. “그만둬. 이번에는 얌전히 칼에 맞아줄 수 없으니까.” 그 목소리, 눈빛, 그리고 전신에 e도는 기척. 보통 사람은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변한 구석 따위 전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그에 답했다. “과연, 겉보기하고는 틀리겠어.” “태양 씨가 그런 소리 할 입장이야?” “레티시아, 레티라고 불러.” “난 루.” “이건 필요 없어?” 품에서 그 단검을 꺼내 보이자 루는 더욱 즐겁게 웃었다. “물론 필요해. 필요는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자기 손으로 해결할 생각이니까 그 아이의 즐거움을 내가 뺏을 수는 없어.” “헤에, 그거 고마운걸.” 이쪽도 웃음을 지었다. “뭐, 일단 이 동네 너구리부터 요리하라고, 왕비 씨한테 인사 잘 전해줘.” 대화를 마치고 레티시아는 한 송을 들어올리며 골목 앞을 지나갔다. 레티시아의 여윈 등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루는 벽에 등을 기대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용하기 힘든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정말 여기 사람들은....” 막 묶은 머리를 다시 풀고서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다음 순간 청년의 모습은 골목에서 사라졌다. 7장 사흘 동안 델피니아 군은 파죽지세로 로쉐의 가도를 진격하며 차례로 파라스트의 요새를 제압했다. 파라스트가 자랑하는 강력한 방어선도 이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뒤메르그 장군은 몇 번이고 요새를 거점으로 태세를 정비하려 했지만, 델피니아 군의 추격은 그 이상으로 신속하고 격렬했다. 그렇게 점점 아비용에 접근하고 있었다. 오론은 이 시점이 되어서야 무거운 몸을 일으켜 휘하의 병사 5천을 거느리고 후퇴를 거듭하고 있던 군세와 합류했다. 국왕의 가세로 파라스트 군은 다시 용기를 되찾았고, 무너져 가던 태세도 즉각 되살아나 후퇴에서 전진으로 입장이 돌변했다. 델피니아 군도 오론 자신이 상대라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다. 후속 부대와 연락을 더욱 긴밀히 하며 마침 그 시점에서 제압한 에스판이라는 요새를 거점으로 이쪽도 태세를 정비했다. 망가진 방어구를 손보고 부상병을 후방으로 보냈으며 다친 말을 후방에서 보낸 새 말과 교체했다. 정성스럽게 무기의 날을 세우고 화살을 보급한다. 최후로 병사들 자신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했다. 양군이 충돌한 것은 에스찬의 서쪽, 잔디가 우거진 완만한 구릉에서였다. 본래는 소와 말을 방목하는 아름다운 토지이다. 파라스트 군은 언덕 중 하나를 골라 본진을 설치했다. 델피니아도 이에 대항해 언덕 위에 본진을 폈다. 한동안 그렇게 대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파라스트 쪽에서 먼저 행동을 시작했다. 방패를 든 보병 부대가 빽빽하게 늘어서서 조금씩 다가온다. 창끝조차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정연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날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장관이었다. 그 뒤에는 궁병 그리고 석궁 부대가 따라온다. 명백히 여기서 결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과연, 그 너구리 놈도 참을성이 다한 모양이군.” 월 그리크의 웃음에도 엄청난 기백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델피니아 군을 격퇴하고 자랑스럽게 아비용으로 개선할 생각이겠지만, 적의 생각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것은 양쪽 모두 마찬가지였다. “전진!” 호령과 함께 델피니아 군의 보병들이 앞으로 나서고, 언덕과 언덕 사이의 좁을 평지에서 양 군이 격돌했다. 격렬한 싸움이었다. 파라스트 군은 본래 방어전에 강하기로 유명하지만 이날만은 더욱 처절한 기백이 느껴졌다.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꽃을 튀기며 델피니아 군을 공격했다. 월 그리크는 그 집요한 공격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장병들의 기개도 그렇지만 오론의 용병술도 명백히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전혀 꿍꿍이가 느껴지지 않는 불꽃 같은 공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상대해주지!” 델피니아 군도 하나가 되어 외쳤다. 파라스트 군의 맹공을 라모나 기사단이 막아내고, 틸레든 기사단은 그 두 배는 될 법한 기세로 적을 공격한다. 근위병단을 구성하는 네 개의 군단이 앞을 다투며 전장으로 달려갔다. 파라스트에 원한을 품고 있는 산세베리아 군의 활약도 뛰어났다. 타우의 부대도 타격에서 회복되어 거침없이 적을 휘저었다. 개중에느 샤미안도 있었다. 다리의 부상도 거의 회복된 지금은 언제나 남편의 왼쪽이나 뒤쪽에 위치하며 활을 연사했다. 샤미안의 교묘한 활솜씨는 단 한 명의 적에게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의 여기사 로자몬드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국왕의 휘하에 있었다. 벨민스터 가문의 사자 문장을 금으로 상감한 은제 갑옷과 은백색 외투를 두르고, 좌우에 종자를 대동하며 멋들어진 백마에 타고 있다.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씩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뭐래도 왕비일 것이다. 왕비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델피니아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진다. 병사들이 고전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와 적을 날려버리고, 이름을 대며 도전하는 적의 기사에세 창을 먹인다. 일대 일이라면 어떠한 용사도 왕비와 대적할 수 없었다. 아니, 여럿이 한꺼번에 갈려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전군이 하나가 되어 분전한 결과, 파라스트 군도 힘이 다했는지-혹은 아비용에 틀어박혀 태세를 정비할 속셈인지 갑자기 전장을 포기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추격해! 놓치지 마!” 핸드릭 백작이 소리 높여 외친다. “아비용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해!” 아누아 후작의 명을 받고 흩어져서 싸우던 네 군단이 즉각 집결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반응한 것은 국왕이었다. 애마에 올라타 군대의 선두에서 파라스트 군을 뒤쫓는다. 평탄한 들판이 이어지는 지형에서는 태세를 회복하려 해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오론은 여기까지 오면서 도중에 있는 요새의 병사들까지 깡그리 모아온 듯, 어느 요새에도 들르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적의 기세에 눌린 상태에서 조그만 요새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는 지도 모른다. 델피니아 군도 요새는 무시하고 그대로 적의 뒤를 쫓았다. 텅빈 요새에 신경 쓰고 있을 틈은 없었다. 파라스트 군은 휴식도 취하지 않고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했고, 델피니아 역시 쉴 틈조차 없이 진격했다. 그렇게 하루가 걸릴 거리를 몇 시간 만에 주파해 멀리 북서쪽에 아비용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일이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오론이 훨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서쪽으로 향해 일직선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델피니아 진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기뻐하며 쾌재를 불렀다. “봐라! 파라스트 왕이 아비용을 포기했다!” “겁먹었구나!” 병사들은 일제히 기세를 올리며 오론의 뒤를 쫓으려했지만 군대의 핵심을 이루는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발로는 혀를 찼고 나시아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스쳤다. 노영웅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선두에 서서 달리던 국왕은 고삐를 당기며 말을 세웠다. 국왕의 얼굴 역시 굳어 있었다. “전군 정지!!” 고함을 지른다. 종자들이 당황하며 정을 쳤다. 진군 정지를 알리는 그 신호는 푸르른 구릉 지대 전체에 날카롭게 울렸다. 오론의 뒤를 따라서 진군하던 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온다. “아침부터 이동이 너무 길었다. 병사들을 조금 쉬게 하도록.” 혈기왕성한 무장들은 조금만 더 가면 적의 국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상황에서 무슨 말씀이기냐고 불만을 호소했지만 국왕은 완고하게 휴식을 명령했다. 물론 역전의 영웅들은 그렇게까지 단순하지 않았다. 아누아 후작, 핸드릭 백작, 발로, 나시아스 그리고 이븐. 그리고 산세베리아의 오르테스. 모두가 속속 국왕의 진지로 모여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요, 이 움직임은.” 발로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아비용 정도의 요새를 저렇게 쉽게 버리는 걸까요.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핸드릭 백작의 말에 국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론은 도망친 게 아니라 자기 뒤를 따라오도록 유도한 거야. 그건 틀림없어. 그렇다면 이대로 순순히 적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수는 없지.” “예.” “하지만 아비용을 버리는 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누아 후작이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아비용은 중앙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동시에 일류 요새였다. 여기에서 농성전을 펼치면 아무리 대군이 쳐들어와도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 국왕이 말없이 자신의 승리의 여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왕비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왕비의 힘에 겁을 먹고 성 안에 틀어박혀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걸까. 아니, 성벽 안쪽으로 도망쳐 들어간 병사들이 안심하고 방심하는 만큼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 청년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뭐, 뭔가 함정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겠죠. 하지만 그 함정이 아비용 쪽인지, 오론을 쫓아가는 쪽에 있는지를 모르겠어요.” “라비 경의 점으로도 예측할 수 없나?” “그러니 이건 점칠 것까지도 없다는 말이죠. 뻔히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카드도 반응하지 않아요.” 일리 있는 말이다. 그리고 역전의 용사인 이들의 눈에도 뻔히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었다. 아비용을 이대로 내버려두고 지나갈 수는 없다. 만일 성 안에 복병이라도 숨어 있다가는 오론을 쫓아 남서쪽으로 진격하다 등 뒤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아비용이 먼저로군요.” 핸드릭 백작이 발언했다. 국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가장 지당한 선택이었다. 난항을 예상했던 아비용 공격은 의외일 정도로 너무나 손쉽게 처리되었다. 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오론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델피니아 군이 공격을 감행했을 때까지도 그들은 오론이 사라져간 방향을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주군의 행동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델피니아 . 산세베리아 연합군 쪽이 당황할 정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비용의 문을 열어젖히고 그 기세 그대로 아비용 성을 덮쳤다. 남아 있던 것은 제대로 된 병력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제압을 쉽게 해준 요건 중 하나였다. 아마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은 남김없이 데리고 출진했던 게 아닐까.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노인과 부상병뿐. 아무리 아비용 성이 견고한 방어를 자랑하는 성이라도 이래서는 손을 써볼 길이 없다. 너무나도 손쉽게 적의 침입을 허용하고 성문을 열어버렸다.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월 그리크는 아비용 성에서 개선 파티를 열었다. 장병들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들떠버렸다. 이곳은 적지이고 적의 대장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마음을 놓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월 그리크가 엄하게 명했지만 이런 대승리 앞에 들쓴지 않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야전 중에는 상당히 고생했지만 이렇게나 손쉬운 공성전을 처음이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성문이 열린 것이다. 파라스트의 군대가 원래 이렇게 약했던가 하며 적을 얕보는 마음까지 생겨났다. 병사들은 오론이 도망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왕의 숨통을 끊는 것쯤은 손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만큼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월 그리크는 그리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아비용 성에는 수많은 부녀자가 남아 있다. 심지어 오론의 가족까지 있었다. 물론 성인이 된 아들들은 각각 영지를 부여받아 그곳에 있겠지만, 십여 명에 이르는 애첩과 왕의 피를 이은 어린 아이들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겁을 먹고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계략으로 도망친 거라면 그 전에 가족을 피난시켰을 겁니다. 저 오론 왕도 이번만은 손쓸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장수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월은 그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븐을 불러 마을의 정황을 알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임무에 이븐 이상의 적임자는 없다.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던 것은 이븐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동료들을 이끌고 밤거리에 나가 여기저기를 조사했다. 화려한 번화가도 평소처럼 떠들썩하지 못했고, 숨을 죽인 해 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민가가 대부분이었지만 최소한 어딘가에 복병이 숨어 있을 리는 절대로 없다고 이븐이 단언했다. 국왕은 더더욱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정말로 겁을 먹고 도망간 걸까?” 그런 생각조차 들었지만 그 오론이 그럴 리 없다고 바로 부정하게 된다.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오론이 이 도시를 버리고, 설령 표면상이라고 해도 도망치는 척하는 이유가. 하지만 지금은 이 이상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도망치는 오론의 군대를 이쪽의 척후가 뒤쫓고 있다. 남은 것은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기다리는 일뿐.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지휘관들을 모아 간단한 축하연을 열었다. 적의 본성을 제압해놓고 이것조차 하지 않는 것은 체면 문제이다. 두 명의 노영웅과 두 명의 기사단장, 벨민스터 공, 산세베리아 국왕 그리고 각자의 심복들을 불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오르테스가 월에게 말을 걸었다. “축하드립니다, 월 폐하.” “감사합니다. 당신께도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진심으로 기뻐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걸지, 그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 왕이 무슨 속셈으로 도망쳤는지 말입니까?” 오르테스의 표정 역시 복잡했다. 오론이 아직 남아 있다. 쉽게 기뻐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만은 월과 같은 생각이었다. 동시에 오르테스에세 있어서는 오랫동안 품어온 절실한 소망이 반쯤 실현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파라스트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식 독립국가로 선다는 숙원이-. 그 탓인지 오르테스는 보기 드물게 술에 취해 살짝 눈가를 붉히고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께도, 당신의 승리의 여신께도.” “이쪽이야말로 파라스트의 서쪽에서 당신 같은 우방을 얻을 수 있어 진심으로 기쁘고 든든합니다.” 월도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왕비의 모습은 없었다. 그것이 신경 쓰였다. 느긋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유감스럽지만 축하연은 서둘러 막을 내렸다. 국왕이 복도로 나오자 시종이 달려왔다. 왕비가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길을 들리려 했지만 이비 왕비가 이쪽에 모습을 보이는 참이었다. 셰라도 함께였다. 첩보 활동에서 셰라를 능가하는 인간은 없다. 다른 척후들도 아직 이쪽을 향해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조만간 다른 사람들도 보고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셰라가 입을 열었다. 아비용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친 오론은 델피니아 군이 뒤를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후퇴를 멈추고 여기에서 남서쪽으로 10카티브 정도에 위치한 요새오 들어갔다. 오론은 그곳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자를 내보냈다. 마치 지방 도시로 거점을 옮긴 듯한 상황이었다. 오늘 밤에는 그 이상 특별한 움직임을 없었고, 그대로 그 자리에포진하는 것을 확인한 뒤 돌아왔다고 한다. 국왕은 더욱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왕비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통은 네가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해야겠지만.” “보통은 그렇겠지." 아니면- 두 사란을 동시에 생각했다. 자신들은 그 왕의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걸까. 남들 이상으로 교활한 지혜와 책략을 지닌 파라스트 국왕도 결국은 겁을 먹은 걸까? “마음에 안 들어.” 국왕의 말에 왕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맘에 안 들어. 이성에 손쉽게 들어왔을 때부터 더럽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쨌거나 끝났구나.” “이런 나의 하미아치고는 너무 성급하잖아.” 왕비의 말에 흠칫 놀라면서도 국왕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들이 서 있는 복도 바깥쪽에서 떠들썩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갑자기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왕비는 모닥불로 밝혀진 내원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건 오론을 궁지에 모는 것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질 리는 없어.” “나도 반드시 이길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끝났다는 거야. 내가 할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계속 시선을 피하던 왕비가 처음으로 국왕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고향에 돌아가겠어.”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이 말이 나올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듣고 나니 역시 가슴이 아팠다. “리, 지금 가려는 거야? 이걸로 이별인 거야?” “아니, 조금만 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여기에 들어왔을 때부터 뭔가가..., 뭔가 마로 안 되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비상시에 이렇게 심각한 얘기를 꺼내는 인간이 어딨어?” “언제 꺼내도 어차피 어느 정도는 슬퍼할 거잖아.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마. 전투에 집중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걸 뻔히 아는 녀석이 어째서....” 국왕이 투덜거렸다. 더욱 뭔가 말해주려 했을 때, 다시 시종이 국왕을 부르러 왔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군대의 총대장은 항상 바쁜 법니다. 왕비와 셰라만이 복도에 남겨졌다. 곁에서 지금의 대화를 듣던 셰라도 벅잡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까. 이사람 역시 지금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아닐 텐데,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면서.... “어째서 이대로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거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셰라는 깜짝 놀랐다. 자신인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읽히고 만 듯란 느낌이 들었다. 어느 틈에 나타난 건지 루가 복도의 난간 위에 앉아 있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인간이다. “에디. 난 네 뜻을 존중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저쪽으로 돌아겠다면 말리지 않아. 하지만 델피니아의 왕비님이 애인하고 같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말이 나돌 것 같거든.” “나하고 사랑의 도피, 하기 싫어?” “그런 얘기가 아냐. 네가 임금님을 배신하는 셈이 될 것 같다는 말이지.”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월은 월, 루퍼는 루퍼야.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어.”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루는 열심히 말했다. “어차피 길어봤자 너도 앞으로 100년 이상은 못 살아. 그 정도쯤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같이 살면 되잖아.” 셰라도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왕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 있어봤자 할 일이 없는걸.” “.......” “난 여기에서 전쟁의 여신으로 불리고 있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고마운 여신님이라고. 하지만 조만간 그 전쟁도 없어질 거야. 싸움이 없는 세상에서 전쟁의 신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겠어.” “에디, 여기 사람들이 너한테 바라는 게 정말로 그것뿐이야?” “.......” “여기에 왔을 때부터 델피니아의 승리의 여신에 대한 소문은 상당히 자주 들었어. 설마 그게 네 얘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여기 사람들은 임금님만큼이나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자 왕비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는 거야.” 은쥐와 금쥐가 이상하게 여기며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비는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몸,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어? 나이는 지금 이대로.” “물론 가능하지만....” 청년은 당황하며 반문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여기 사람들이 네가 누군지 모르게 되고 말잖아?” “그야 그렇겠지. 같은 열아홉이라도 여자가 아닌 남자라면 같은 인간이라고 믿어달라는 게 무리지. 그러니까 난 그 몸으로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나서겠어. 이런 ‘왕비’여도 필요하냐고.” 청년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싸쥐었다. “너, 그런 주제에 잘도 남을 두고 인간형 최종병기니, 파괴의 대마왕이니 지껄이는구나. 말도 안 되는 필살기를 끄집어내는 건 오히려 네 쪽이잖아.” “일부러 사람들을 떨쳐내려고 그러는 건 아냐. 이런 엄연한 사실이니까. 인정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를 심판에 맡기는 것뿐이야. 대답은 정해져 있겠지만.” “여자 몸이 지겨워졌어?” “그런 문제가 아냐. 이 몸은 가짜야. 진짜 내가 아니라고.” “가짜라고까지 할 건 없지 않아? 어떠한 몸이라도 에디는 에디인걸.”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막 이 몸이 되었을 때는. 손도 발도 원래 몸이나 다름없이 움직이고 머리도 멀쩡해. 그렇다면 어차피 큰 차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큰 착각이었어. 이 몸으로 한 난 남들 앞에서 루퍼를 끌어안을 수도, 키스할 수도 없어. 서리궁으로 부를 수도 없고 같이 목욕을 할 수도 없어. 내가 여자니까, 국왕의 부인이니까. 그리고 루퍼가 남자로 보이니까 그런 짓 따위 꿈도 꿀 수 없다는 거야.” “에디, 그건 네가 나빠. 임금님하고 결혼까지 하니까 일이 이렇게 복잡해진 거잖아.” “반성하고 있어.” 왕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나야. 남자여도 여자여도, 어떤 겉모습이라도. 하지만 델피니아의 사람들은 ‘왕비’한테밖에 용무가 없어. 필요한 건 이 여자의 몸뿐이지.” 냉담한 어조였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 청년이 왕비를 위로했다. “임금님은 달라.” “알고 있어. 월은 달라. 아마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그 녀석만은 평소처럼 웃으며 ‘이거 놀랐는걸’이라고 해주겠지.” “그럼 남자인 리가-그렇게 되고서도 왕비로 남아 있기는 곤란하겠지만 친구로서 남는 건?” 왕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남자로서는 월 곁에 있을 수 없어. 그 녀석은 국왕이라고. 여자니까, 왕비니까 그 국왕과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었었던거야. 남자는 그럴 수 없지. 어디까지나 국왕의 신하여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당장 불경죄 감이지. 이븐도 남들 앞에서는 월에게 고개를 숙이면 정중하게 행동하는걸.” “하아....” “단장과 로자몬드도 입을 모아서 말하던데. 내가 남자였으면 절대로 국왕 근처에는 놔두지 않는다고. 난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있다나봐. 모든 충성도 인망도 국왕 한 사람만을 향해 모여야 하는데 그 옆에 나 같은 인간을 놔두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인망이 둘로 나뉘고, 국왕에게 붙는 사람과 나에게 붙는 사람들이 나뉘어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게 된다고. 두 사람 모두 왕좌라는 걸, 지배자의 권력 구도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이야. 그 부부가 각자 다른 자리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더군. 묘하게 암시적이었어.” 녹색 눈동자가 모닥불의 빛을 받아 빛났다. “난 월과 지배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할 생각 따위 털끜만치도 없어. 하지만 tm 녀석의 신하가 될 생각도 없다고.” 루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마법가의 노파가 말했다. 태양이 둘이어서는 곤란하다고. 그 남자는 틀림없이 이 세계에 빛을 비추는 존재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면 더욱 찬란하게 빛나며 후세에까지 그 이름을 남기게 되리라. 리는 그 이상으로 빛을 발하는 존재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왕비라는 입장이니까, 국왕과 일심동체니까, 국왕의 주권을 침해할 이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왕비가 왕비가 아니게 되어버리면, 그 대신 나타난 인간이 국왕에게 아무 배려도 없이 정치와 군사에 있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인간이라면 무엇보다도 국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즉 남자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신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도 당연한 듯이 왕국의 안정을 위해 네게 그걸 요구할 거하는 말인가....” “난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 형식적이라고 해요. 월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건 확실하세 말해뒀어. 그 녀석은 그래도 좋다고 했지. 난 델피니아가 두 조각이 나건 어쩌건 전혀 상관이 없지만 월이 곤란해지는 건 싫어.” “그럼....” “알고 있어. 이 몸 그대로 ‘왕비’라는 최적의 장소를 확보해두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겠지. 대부분의 델피니아 인은 내가 그러길 바라겠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시간이 흘러가기를.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이 몸은,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아깝잖아. 그렇게 괜찮은 사람인데.” “잘도 지껄이네. 너도 아말록한테 실비를 소개했던 주제에.” “그건 그렇지만....” 루의 말꼬리가 조금 흐려졌다. “그치만 역시 동족 여자하고 이어지는 편이 좋잖아. 실제로 아말록도 실비하고 결혼해서 행복해졌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녀석은 폴라하고 같이 행복해지면 돼. 난 더 이상 필요 없어.” “임금님이 그 소리 들으면 뭐라고 할까?” 왕비는 곤란한 듯이 웃었다. 조금 씁쓸한, 하지만 그 남자라면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만 있던 셰라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돌아가실 거라면 저도 함께 데려가주십시오.” 푸른 눈과 녹색 눈이 한꺼번에 휘둥그레졌다. “데려가주십시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감정에서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냐. 두 번 다시 여기로는 돌아올 수 없으니까.” “상관없습니다. 제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지요. 미련이 될 만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왕비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셰라가 제지했다. “이전에 제가 그렇게 말했을 때, 당신은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하셨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별로 재미있을 것도 없는데?” “가보지 않으면 그런 모르는 겁니다. 게다가....” 셰라는 조금 주저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역시 한 명 정도는 옛날 추억을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저는 지난 3년간의 당신 이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일이 있었지요. 폐하나 다른 분들, 여기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그리워졌을 때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저여서는 안 되겠습니까?” 루가 감탄하며 눈을 치떴다. 왕비는 조금 기가 막혀하며 팔짱을 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여기서 사람을 데리고 가기는....” 고민하며 말하는 옆에서 청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저쪽하고 상의해보자. 저쪽이 안 된다고 하면 무시하면 되지.” “그거, 보통 상의라고 해...?” 왕비는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청년을 바라봤고, 셰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자신은 이 사람들에게 흥미가 있다. 이 사람들을 계속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힘이 되고 싶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셰라에게 충분한 이유였다. “그럼 어쩌지? 지금 바로 되돌릴까?” 루의 물음에 셰라는 조금 당황했다. 남자가 된 왕비의 모습 따위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왕비는 막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마치 짐승 같은 동작으로 휘 뒤를 돌아보고서 엄청나게 험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이 냄새는?” 그와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셰라와 루도 얼굴을 마주 본 후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왕비는 긴 복도를 달리고 계단으로 올라 전망대 중 하나로 뛰어나갔다. 시야 가득히 거대한 성의 뒷면이 펼쳐져 있다. 삼중의 방어벽 너머로 아비용 시가지도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여기에도 서 있던 보초가 갑자기 달려나온 왕비를 보고 깜짝 놀란다. “저, 저기, 비전하...?” 왕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성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몸을 휙 돌리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루와 셰라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쪽조차 쳐다보지 않고 국왕을 찾아 뛰어갔다. “월!” 국왕은 오론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 성을 지키려고 남아있던 파라스트의 가신과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달려온 왕비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 “왜 그래?” “여기서 나가!” “뭐?” “진짜 멍청한 짓이었어! 이 성에서 나가자고! 빨리!” 왕비가 고함을 지르는 바로 그 순간. 성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처음 불리 붙기 시작한 것은 나무통이었다. 본성의 지하에서, 숙사의 부엌에서, 마구간 구석 등등 성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올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불이 번지면 성 전체에 쳐놓았던 천막에도 옮겨 붙었다. 엄청난 대화재였다. 성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성문을 향해 몰려들었다. 아비용은 성채도시이다. 성에서 빠져 나와도 도시 전체를 튼튼한 벽이 둘러싸고 있다. 불타는 성 안보다는 도시 쪽이 훨씬 안전할 터였다. 그런데 밤의 어둠을 찢고 도시 외곽에서 함성이 올랐다. 아비용 시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 정도로 큰 소리였다. 높이 휘날리는 깃발에 그려진 문장은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나뉜 방패-오론의 문장이었다. 오론이 진영을 편 요새는 겨우 십여 카티브 떨어져 있을 뿐이다. 조금 시간을 뒀다가 달려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아차!” “갇혀버렸어!” 병사들은 심하게 동요했다. 적이 공격해와도 아직 도시의 외벽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 그런데 파라스트 세력이 곧바로 도시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에 적의 첩자가 있던 것이 틀림없다. 델피니아 군은 궁지에 빠졌다. 등 뒤에는 불타는 성, 정면에서는 적이 덤벼들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공포였다. 병사들 전원이 초조함과 정말에 빠져 정신없이 도망치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장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혼란을 진정시키고 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효력이 없었다. 파라스트 군이 달려온다. 불타오르는 자신들의 성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완전히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가운데 행동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국왕은 홀로 자신의 애마에 올라타고는 혼란에 빠진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도, 밤하늘을 더욱 검게 물들이는 연기도, 코를 찌르는 냄새조차 국왕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듯했다. 흔들리는 불꽃이 국왕의 건장한 모습을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비추었다. “오론 놈. 아끼는 성을 포기하고서라도 내 목을 취하겠다는 건가.” 월은 신음했지만 그 얼굴에는 분노보다는 다른 감정이 떠올라있다. 어쩌면 적에 대한 감탄이라도 표현하는 것이 제일 걸맞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주위에서 차오르는 불길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의 적이 지금 정면에서 이쪽을 향해 덤벼온다. 그렇다면 그에 상대할 뿐. 너무나도 차분한 태도였다. 완전히 낭패하고 있던 병사들은 그런 국왕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 차츰 정신을 차렸다. 부끄러워하며 무기를 쥐고 불을 보고서 놀라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며 전투 태세에 들어간다. 파라스트 군이 아비용 성의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델피니아의 사자. 불길을 등에 업고 무너져가는 성을 발치에 끌며 처절한 웃음과 함께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으면 어디 해보라는 듯이. 단 한 사람의 모습에 파라스트의 군이 압도되었다. 소중한 성을 희생하면서까지 판 함정이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뜨려야만 할 적을 바라만 보며 주저했다. 그 틈에 월 그리크가 돌격했다. 순식간에 적의 선봉을 쓰러뜨리고 대열을 무너뜨린다. 뒤를 따라 성문 안쪽에서 제정신을 되찾은 병사들이 달려나왔다. 각 지휘관들도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그 뒤를 이었다. 오론의 군사는 불길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성만 태운 게 아니다. 델피니아 순을 쓰러뜨리고 이 자리에서 자웅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델피니아 군은 완강했다. 좀 전까지의 공격과 수비가 역전되어 미친 듯이 달려드는 파라스트 군에 대항해 끈질지게 버텨냈다. 사기전은 하룻밤 내내 계속되었고 아비용의 주민들은 그 날 내내 잠들지 못했다. 성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불리 번질까 걱정하며 집에서 뛰쳐나왔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아는 사람의 집 문을 두드려도 열어줄 리가 없다. 전투를 피해 다니고 불길을 피하며 도시 여기저기로 쫓겨 다닌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 안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석조 건물은 그리 간단히 무너지지 않는데다 바로 집 밖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적을 욕하는 외침과 신경질적인 말의 울음, 칼을 맞은 사람의 비명, 그런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방어구가 울리는 소리, 검과 검이 부딪히는 격한 소리에 계속 겁을 먹으며 온 가족이 함께 떨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 그 소란도 간신히 가라앉았다. 주민들은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봤다. 장려하던 성은 시커멓게 불타 있었다. 길바닥 여기저기에 시체가 굴러다니고 마을 전체에 아직도 적병이 어슬렁거린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임금님이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하게 낙담했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상황이 아니다. 남은 적병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하며 눈치만 살폈다. 델피니아 군은 불리 꺼진 뒤 전체에 조사했다. 심하게 낙담했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상황이 아니다. 남은 적병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하며 눈치만 살폈다. 델피니아 군은 불이 꺼진 뒤 성을 전제를 조사했다. 온몸이 시커멓게 변한 츠이르의 브란이 국왕의 앞에 나무통 하나를 턱 내려놓았다. “이것 좀 봐주십쇼.” 화재 속에서도 운 좋게 불타지 않고 남았던 물건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발화하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통 안에 조금 작은 통이 들어 있고, 작은 통 안에는 기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큰 통의 안쪽에 가늘게 짠 도화선이 빙빙 둘려 있다. 월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도화선 끝에 불을 붙여 한참 시간이 지나면 안쪽 통에 든 기름에 불리 붙도록 장치해놓고 출진한 것이다. 그러나 델피니아 군은 불꽃과 연기 속의 격전에 훌륭하게 버텨냈다. 적의 뜻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파라스트 군을 완벽하게 격퇴했다. 추격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사실상 승리한 셈이다. 반대로 오론이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이렇게까지 큰 희생을 치렀는데도 델피니아 군을 격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론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적을 뒤쫓아야 한다. 절대로 놓칠 수는 없다. 국왕은 부하들에게 물었다.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얼마나 있지?” 화재가 났을 때 침착하게 성을 나와 적과 싸울 수 있었던 덕에 피해는 예상 이상으로 가벼웠다. 불과 적의 기습에 당황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아. 뒤처리가 끝나면 오론을 뒤쫓는다.” 월은 주민들에게 협력을 요구하며 먼저 마을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교외에 매장했다. 그리고 화재 피해를 입은 아비용의 관리를 당분간 벨민스터 공에게 맡기기로 했다. 동요하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불타버린 성을 정리하고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고 도시로서의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그와 함께 비르그나까지 이어지는 보급선도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상당히 큰일이지만 대영주인 로자몬드는 이런 종류의 사무 처리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델피니아 군은 피해를 입지 않은 병사들을 모아 아비용에서 출발했다. 오론은 계속 남서쪽으로 도망갔다. 설마 파라스트에서 탈출하려는 생각일까 싶었지만 결국 변경의 도시 모자이에서 발을 멈췄다. 오론은 미리 남서쪽에 위치하는 나라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란타나, 클랜, 아란타 등등 협력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남김없이 도움을 요청한 뒤 그들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거점을 모자이로 옮긴 것이다. 모자이의 동쪽 10카티브 위치에 키아라는 작은 요새가 있다. 월 그리크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모자이에 자리를 잡은 오론을 견제하며 후방에서 아군이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올ㄴ도 마찬가지였던 듯, 동맹국을 재촉해 군세를 모아들였다. 오론이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은 다름 나라들이 보기에도 명백했다. 불리한 쪽에 손을 빌려주기는 아무래도 위험 부담이 크다. 군대를 움직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게 분명했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오론은 녹록하지 않았다. 교묘하게 설득한 건지, 어떤 보답을 약속했는지, 어쩌면 양쪽 모두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총 1만 5천의 군사를 제공받는 데 성공했다. 오론은 농성전을 평칠 생각이 없었다. 바로 키아를 향해 진군애호는 것을 보면 야전으로 승부를 지을 생각인 듯했다. 월 또한 이 작은 요새에 틀어박혀 파라스트가 다가오기만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모자이와 키아 사이에는 전투하기에 딱 적당한 장소가 있었다. 진지로 삼을 만한 언덕이 있고 시야가 탁 트여 병사들을 움직이기에 적합한 완만한 지형이다. 아마도 최후의 결전장이 될 이곳은 월과 리에게 있어 그리운 장소이기도 했다. 계절은 봄. 그때는 꽃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들판이었다. 8장 결전을 앞두고 기합이 잔뜩 들어간 장수들과는 반대로 국왕의 마음은 복잡했다. 왕비가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한다. 아마도 이 전투가 끝나면, 오론을 쓰러뜨리면 자기 말을 실행할 것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왕비의 모습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이쪽에서는 손쓸 길이 없다. 왕비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게 일상을 보냈다. 자기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큰일을 앞두고 다른 이들을 동요시키지 않으려는 것이리라. 스스로도 한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국왕은 그렇게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알고는 있었으면서도 정작 눈앞에 그때가 닥쳐오니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마음을 안고 결전에 임해봤자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이거야말로 적이 노리는 바였다. 드디어 요새를 나서서 결전의 장으로 향하기 전날, 국왕은 그 청년을 불러보았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무슨 말을 물어보고 싶은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왕비와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국왕의 예상과는 달리 청년도 곤란해하고 있었다. 왕비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얘기하고 한숨을 쉰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알겠어요. 어느 틈엔가 왕비는 국민 모두의 것이다, 우리들 거다 하는 식으로, 표현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델피니아 인들의 그런 착각은 그 아이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이니까요.” 국왕은 노골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비를 놓고 그렇게까지 대담한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인간은 우리나라에 단 한 명도 없을 텐데....” “하지만 왕비님의 불륜과 왕비님이 나라를 버리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겠지요?” “바람은 허용 범위야. 이혼이 곤란했을 뿐이지.” “이혼만 안 되나요? 정말 마음이 넓은 임금님이라 다행이네요.” 심각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이래봬도 심각했다. “그런 귀찮은 문제만 없으면 여기가 그 아이에게 훨씬 살기 편한 곳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가?” “그래요. 그 아이, 나하고 만날 수 없으니까 저쪽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였잖아요?” “흐음....”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랬다. 왕비에게 있어서 고향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 청년을 의미했다. 태어난 고향 자체가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경의 입장에서 왕비는 어떤 존재이지?” 질문의 의미는 조금 확실하지 않지만, 청년은 국왕이 어떤 것을 묻는지 바로 알아챘다. “우린 서로 닮은꼴이에요. 서로 자신의 진짜 동족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이죠.” “호오....?” “임금님은 내가 다른 라의 일족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볼 수가 없으니 모르겠다고 했지요. 굳이 말하자면 보통 사람과 에디만큼 달라요. 그러니까 동료들도 날 무서워했죠.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 않은 편이지만.” 이 청년의 어디가 그렇게나 무서운 건지,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국왕은 알지 못한다. 알 수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묘한 얘기로군. 왕비와 보통 사람을 비교해봤자 의미가 없지 않나?” “있어요. 그 아이는 인간이니까.” “뭐?!” “그 아이는 인간이에요. 당신의 동족이죠.” 국왕은 멍하니 얼어붙었다. 무슨 소리인 걸까. 왕비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리가 없다. 저런 인간이 존재할 리 없다. 그러나 청년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돼!” “적어도 그 아이의 부모는 보통 사람이에요. 그러니 몸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나.” “부모오?” 무심결에 청년의 말을 되풀이했다. 왕비에게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왕비가 즐겁게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검은 모피가 멋진 아버지뿐이었다. 그렇기 말하자 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부탁한 거예요. 아말록은 아무 사정도 모르고 그 아이를 양자로 받아줬죠. 하지만 에디에게는 친부모가 있어요. 그 아이를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가 존재한다고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정리하며, 정리가 되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신히 질문을 던졌다. “그... 그 부모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가?” “물론.” “왕비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라고....” “물론 알고 있지만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 “그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아말록뿐이에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죠.” “뭐엇...?” “그 아이는 뭔가의 착오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부모에게서 그 아이를 거둬서 아말록에게 맡겼죠.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말록은 고아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를 키웠어요.” “어째서 그런 짓을?!” 국왕은 비난에 찬 소리를 질렀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사람으로 자라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어째서 경은 일부러 왕비를 이단자로 만든 건가!”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침착했다. 연민이 담긴 눈초리로 국왕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여기에는 아이가 바뀌는 옛날 얘기 같은 게 없나요?” “뭐...?” “나쁜 요정이 있는데 마음에 든 인간의 아기를 납치해 가는 거예요. 그 대신 전혀 귀엽지 않은 자기 아기를 인간 부부에게 떠넘긴다는 얘기.” “경이 그 나쁜 요정이라는 말인가?” “그 아이에 관해서는 그런 셈이지요. 부정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저쪽에서는, 지금은 몰라도 옛날에는 그런 옛날 얘기를 믿고 있었지요.”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왕은 말없이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물론 요정이 정말로 아이를 바꿨을 리가 없지요. 이 옛날 얘기는 말이죠. 부모가 아이를 버릴 때의 변명으로 이용되었어요. 이렇게 못난 애가 내 자식일 리가 없다. 이렇게 기분 나쁜 깃을 하는 아이가 우리들의 친자식일 리가 없다. 그러니까 버려도 된다, 이건 우리 애가 아니니까. 아니, 인간이 아니니까. 이선 나쁜 요정의 자식이니까 버려도 전혀 상관없다, 그런 논리죠.” “.......” “그 아이를 그대로 친부모 손에서 자라게 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됐을 거예요.” “아니, 하지만!” “아서도 마거릿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히 마음이 넓은 편이었지요. 그러니까 최후에는 간신히 그 아이를 받아들여줬을지도 몰라요. 하지만요, 임금님.” 진지한 얼굴로 청년은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가 큰일이에요. 친부모에게 괴물 취급을 받으며 자라나야 할 아이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봐요.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죠. 누군가가 지켜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시기에 자신을 지켜줘야 할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고 꺼리며 증오하기까지 하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죠? 간신히 살아남는다고 해도 상처를 입게 되죠.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국왕은 신음했다. 이기 갈리는 듯했다. “그래서 리에게 어울리는 양부모를 찾아줬다는 건가...?" “그래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어딨어! 그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야! 외부인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외부인?” 어째서인지 유쾌하게 반문하고서 청년은 완전히 어뚱한 말을 꺼냈다. “임금님은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 다른 일을 할 수 있나요?” “뭐?” “이를테면 오른손으로 친구한테 편지를 쓰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부하에게 명령서를 쓴다. 할 수 있어요?” “모르겠네. 해본 적은 없지만....” “혹시 임금님에게 백 개의 손이 있다고 치고, 그 손 전부가 각각 다른 작업을 하게 시킬 수 있을까요?” 멍하니 대답을 못하고 있자 계속 말을 잇는다. “당신에게는 백 개의 손이 있어요. 그 손의 길이는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벽 너머의 물건을 만지거나 멀리 떨어진 물건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해요. 물론 눈앞에서 보면서 움직일 수도 있지요. 당신은 한 손으로 음식을 입에 나르면서 다른 두 손으로 책을 들고 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다른 손으로 나무를 깎아 조각을 만들고, 다른 손은 정원의 흙을 파 화단을 만들고 있지요. 다른 손으로는 쓰러진 재목을 쌓고, 다른 쪽에서는 장작을 패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돛을 조종하고 있어요, 당연히 제각각의 손을 감독하는 눈도, 다음 순간에 어떤 움직임을 할지 판단할 뇌도 그 손의 수만큼 필요하겠지요. 제각각의 ‘자신’들에게 다른 작업을 지시하면서 제각각 다른 종류의 손을 동시에 사용해야 해요. 할 수 있나요?” 국왕은 말없이 청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한까지 느껴졌다. 흑발의 청년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193개의 손을 동시에 조종했어요. 열 살일 때에.” 국왕은 크게 신음했다. “그런... 그런 일이....” “그래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죠. 절대로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 아이는 할 수 있지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단을 바꿀 수 가 있어요. 보통 사람의 뇌에 그 정도의 정보를 흘려보냈다가는 반드시 미쳐버리겠지만요.” “미쳐...?” “온몸에 눈이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이거, 임금님은 인간이니까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얼굴 앞쪽 밖에 보이지 않는데 등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게다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상하좌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일제히 온몸으로 흘러들어오는 셈일R나.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죠.” “.......” “보나리스 때를 기억하나요? 그렇게나 엄청난 짓을 했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인간은 요 정도의 돌이 머리에 부딪히기만 해도 간단힌 죽어버리는데.” 양손으로 참외 정도의 크기를 그리며 말한다. “벽이 부서지고, 잔해가 쏟아져 내리는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치는데,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서 파괴를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쏟아지는 파편을 하나하나 받아내면서 다른 손으로 탑을 부수는 거죠. 다른 눈으로 그 안을 살피면서 사람이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누군가가 성벽에서 뛰어내리면 재빨리 받아내요. 그때만 해도 최소한 50개 이상의 눈과 손을 한꺼번에 썼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다면 반드시 사망자가 나왔겠지요.” 국왕은 머리를 싸쥐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인간은 손도 대지 않고 물건을 부술 수 없어. 적어도 난 불가능해.” “그러니까 몇 번이고 말하는 거예요. 그 아이는 뭔가의 착오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어째서?!” “그런 건 아무도 모르니 대답할 수도 없지요. 알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절대로 인간 속에 섞여들 수 없는 존재라는 것뿐.” 충격으로 마비된 모리를 그 말이 날카롭게 꿰뚫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들 속에 섞여들 수 없는 존재. 잔인한 말이었다. 가슴 아프고 서글프지만, 틀림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국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도 입을 다물었다.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여름 해가 저물기 직전의 타는 듯한 석양이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국왕의 표정은 바뀌어 있었다. 절박한 기색은 사라지고 침착하게 청년에게 묻는다. “난... 리를 일종의 늑대라고 생각했었어.” “응. 어렸을 때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 아이의 죽은 연인도 늑대였죠.” 국왕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키라 산에서 늑대들과 놀고 있는 왕비를 떠올렸지만 사이좋은 친구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을 텐데. “그건 리의 양아버지와 같은 종족의, 그러니까 인간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늑대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에요. 황야에서 태어난 진짜 늑대였죠.” “그럼 연인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번식기의 동물은 자신과 같은 종족을 선택할 텐데.” “그래요. 개는 개와, 인간은 인간과, 그게 보통이죠. 하지만 그 아이는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여자도 평범하지 않았어요. 그 아이가 자신과 다른 생물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그 아이를 선택했죠. 그 아이가 네 살 때 일이에요.” “네 살...?” “그 아이가 처음 사냥에 참가했던 것도 그때였죠. 본인은 너무 늦다고 고민하고 있었지만. 네 살짜리 인간 아이가 야생의 늑대들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뛰어다니는 걸 봤을 때는 역시 인간 사회에서 격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보았던 하얀 세계, 왕비의 마음속 풍경. 고사리 같은 어린 손. 주위의 늑대들은 굉장히 컸다. 어린 자신은 그들 사이에 뒤섞여 눈을 차고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그 여자는 무리에서도 제일 강한 암컷이었어요. 나이는 역시 네 살 정도였을까? 그 아이는 정말로 그 여자를 좋아했고 그 여자도 그 아이를 사랑했어요. 덤으로 그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몸이 자신의 애정에 응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요.” 어리니까, 성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종족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손을 남길 수 없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도-육체적으로는 불가능했죠. 그런 상대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동물의 본능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인간 아이와 암늑대가 조금 사이좋게 지낸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여자는 진심으로 그 아이를 사랑했어요. 그 아이 역시 그 여자를 사랑했죠.” “.......” “야생 늑대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정도예요. 에디에게는 정말로 짧은 시간이죠. 그 여자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을 텐데, 그 행복한 시간마저 인간에게 빼앗겼어요.” “즉 그 여자는....” “인간에게 죽었어요.” “.......”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으려고 했죠.” “.......” “그때는 아말록이 간신히 말려줬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말록까지 인간 손에 죽어버리고, 그 아이의 인간 혐오증도 결정적으로 굳어지고 말았지요.” “.......” “그것만은 확실히 실수였다고 생각해요. 그 아이가 인간들 사이에 섞여들 수 없는 것만은 어쩔 수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인간을 싫어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 아이의 가족과도-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화내지만-친하게 지내기를 바랐지만....” “사이가 나쁜가....?” 저도 모르게 물어보자 루는 국왕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을지도요?”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이었다. 그런 눈으로 정면에서 응시해오자 국왕 쪽이 어울리지 않게 초조해졌다. “그 양친은 어떤 분이지?” “좋은 사람들이에요. 정말로. 단지 그 아이에게 있어서 인간은 ‘원수’니까 더욱 완고하게 거부해왔죠. 지금이라면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임금님 덕분이겠죠.” “.......” “그래도 그 아이는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남자 왕비는 임금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분명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국왕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듣던 말인데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것만은 나로서도 도저히... 본 적도 없으니..., 상상조차 못하겠어.” 그러자 청년이 재빨리 말했다. “보여드릴까요?” “예?” “모습을 바꾸는 장면. 얼마나 인상이 바뀌는 지, 내 몸이라도 괜찮다면 보여드리죠.” 국왕은 눈을 부릅떴다.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물러날 뻔하다가 간신히 스스로를 억눌렀다. 청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눈은 진지했다.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국왕은 팔짱을 끼고 길게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그럼 잠깐 실례할게요.” 일어서서 창문을 닫는다. 방의 입구를 열고 문 앞에 서 있던 이종에게 누가 와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말해둔다. 국왕의 앞으로 돌아오더니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같은 남자의 나체 따위 재미있을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 피부색이나 매끄러운 신체의 곡선에는 충분히 사람의 눈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마른 편이지만 유연한 근육이 몸을 지탱하고 있다. 소년에서 탈피하여 막 청년의 영역에 들어가는 건강한 남자의 육체.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벗어버린 뒤 청년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푼 순간. 방 안에 아지랑이가 가득 차는 듯이 느껴졌다. 그때-왕비가 이븐의 부상을 고쳐줬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단,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서 있는 새하얀 몸이 천천히 흔들리는가 싶더니 완전히 다른 별개의 생물이 서 있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국왕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자신의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피부색은 그대로이다. 진주 같은 광택을 띤 아름다운 피부였지만 더욱 매끄러워졌고 얼굴 생김까지 달라졌다. 눈썹이 더욱 가늘어지고 눈동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서 우아하게 반짝였다. 입술은 더욱 붉고 도톰하게 변했고 턱이 가늘어지며 얼굴의 선 전체가 부드러워졌다. 목 아래쪽에서는 더욱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가는 목에 매끄러운 어깨, 날씬한 허리, 허벅지에서 발목에 이르기까지 매끄러운 곡선이 길게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새하얗고 풍만한 유방과 매끄러운 하복부가 강하게 관능을 자극했다.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공중에서 나타난 검은 천을 잡아 몸에 둘렀다. 가슴 아래쪽의 몸은 그 천으로 완전히 가려졌다. 검은머리, 푸른 보석 같은 눈, 아까까지의 청년과 매우 닮았지만 진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절세의 미녀가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어떠세요?” 이번에야말로 국왕은 펄쩍 뛰어 도망갈 뻔했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아까까지 눈앞에 있던 청년과 동일 인물이라니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말을 잃고 신음하는 국왕을 보고 그 미녀는 침착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다시 한 번 자기 소개를 할까요? 제 이름은 루퍼스 라비. 이 몸일 때에는 그냥 루라고 하지요. 남자 이름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부드럽고 요염한 여자의 목소리가 꽃잎 같은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입을 열 때마다 정말 꽃이라도 튀어날올 것만 같았다. “정말로 라비경인가?” 신 속눈썹에 감싸인 눈이 살짝 커졌다. 놀라서가 아니라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럼 여기 있는 저는 누구일까요? 임금님이 직접 눈으로 보셨잖아요?” “봤어! 물론 봤지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아까까지 청년이었던 미녀가 웃었다. “그렇군요. 당연할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그 아이가 유일했으니까.” “네.” 웃음을 거두고 국왕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친밀한 사람을 바라보는 거리낌 없는 시선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은 청년과 꼭 닮았다. 청년의 누누나 여동생이라고 하면 그대로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저희들 입장에서 육체는 옷이나 다름없으니까 갈아입는 경우도 있답니다.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었다가, 동물 모습을 할 때도 있지요. 그럼 사람들은 저희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요. 하지만 옷을 갈아입었다고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저희들은 지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절대로 착각하지 않거든요. 그 아이도 한눈에 절 알아봤답니다.” 아무래도 이 말투에는 몸 여기저기가 가려워지는 듯하다. 틀림없는 여자의 목소리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으면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겠지만 ‘원형’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그 감정을 꾹 눌러 참으며 국왕이 말했다. “경이 그, 그렇게 해서, 남자 몸에서 여자로 변한 것처럼 왕비도 남자로 변한다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죠, 그 경우에는. 태어났을 때는 남자였으니까.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여자애라고 생각했지만....” 국왕이 이마를 철썩 때렸다. 제발 좀 봐달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그게 뭐야?!" “정말이에요. 제 눈은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몸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답니다. 마거릿의 뱃속에 태양이 깃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살펴보러 찾아갔지만.... 임신 5개월 정도였을 거예요. 분명히 여자아이였지요.” “말도 안 돼!” “조금 생각했던 거지만, 그래서 그 아이는 여기에 떨어진 때 여자의 몸이 되어버렸던 게 아닐까요?” 국왕은 눈을 부릅떴다.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미녀를 구멍이 뚫리도록 응시하며 신음했다.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것말고는 설명이 안 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몸 그대로 있어도 될 것 아닌가! 굳이 바꿀 필요가 어디 있어?!” “임금님. 무책임한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태어나기 전의 일 따위는 그 아이하고는 전혀 상관없답니다. 13년 동안 남자로 살아왔는데 그 위의 6년 정도를 여자로 살았다고 해서, 그게 원래의 몸이라고 말해봤다 그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 “이 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이것 역시 분명히 제 몸의 하나니까요. 기본 형태가 있고, 거기에 남녀노소의 변화를 주는 것뿐이지요.” “아니, 그, 그렇게 가볍게 말해도 이쪽은 곤란하지만....” “임금님, 확실하게 해주세요. 그 아이는 계속 자신이 남자라고 말했겠지요?” “아니, 그런 그렇지만, 하지만....” 실물을 눈앞에서 본 충격은 차마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나리스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끙끙거리는 국왕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생긋 웃음을 짓는다. 갑자기 조금 전과 다른 어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임금님은 그 아이가 여자 모습인 채 왕비로 있어주지 않으면 마음에 안 드나요?”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 예전에도 한 번 이 청년에게서 맛봤던, 겉보기와는 달리 날카롭고 싸늘한 살기. 왕비를-왕비의 영혼을 상처 입히는 존재는 무엇이든 용서치 않겠다는 강한 의지. 오싹해지는 것과 동시에, 국왕도 그제야 긴장을 풀고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당히 동요하고 있던 듯하다. 국왕은 그제야 평소의 국왕다운 웃음을 지으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물어보겠네만, 여성을 세워둔 채로 나만 계속 많아 있는 건 아무래도 실례겠지?” “어머나, 감사합니다.” 루도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에 검은 머릿결이 새하얀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며 한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고 보니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그 녀석은-리는 여자의 육체여도 언행은 지극히 난폭하기 그지없어. 그런데 경은 어째서 그렇게, 그, 여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요염해질 수 있는 거지?” 상대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그렇게 요염한가요?” “조금 몸에 안 좋을 정도로.” “그런가요? 1인칭이 ‘저’로 바뀐 정도만으로는 그리 크게 바뀔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굉장히 달라.” 국왕은 힘차게 단언했다. “흐음? 그럼 예의는 그만 차리고 말해볼까요. 임금님도 옷을 갈아입으면 그 옷에 맞춰서 신발이나 모자 같은 걸 바꾸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나들이옷을 입고서 작업용 장화를 신는 건 이상하고, 반대로 그런 작업복에 금붙이가 달린 허리띠를 차는 것도 우습죠. 전 지금 몸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뿐이고, 그 아이는 몸이 어떻게 변하건 예전의 자신 그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죠. 그렇군요, 결국 취미 차이인 셈이에요.” 천천히 팔짱을 끼면 미녀는 딱 잘라 당언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국왕은 이마네 손을 짚으며 피식 웃었다. “그런 문제인가?” “나한테는 그런 문제예요.”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청년이 열심히 옷을 입고 있었다. 국왕을 돌아보며 생긋 웃는다. “조금 더 여자 모습으로 있는 편이 좋을까요?” “아니, 충분해.” 아쉽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국왕은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릿속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왕비의 일, 그 무보의 일, 사람의 모습이면서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생물인 이 청년의 일. “이봐, 라비 경.” “네?” “아까 얘기, 동시에 다른 손을 조종하며 제각각 다른 것을 불 수 있느냐는 얘기 말이네만.... 손은 몰라도 한 번에 두 개를 본 경험이라면 있어.” 옷을 입은 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국왕을 바라봤다. 분명히 아까의 미녀와 똑같은 얼굴이다. 그와 동시에 전혀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난 투기장 중앙에서 사자와 싸우고 있었지. 손에는 왕비의 검을 들고. 내 눈은 날 잡아먹으려는 사자와 투기장의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생물을 보고 있었어. 온몸이 금색으로 빛나는 녹색 눈의 아름다운 늑대를.” “.......” “금색 늑대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어. 날 구하기 위해 투기장을 향해서 마치 바람처럼. 그건 왕비였어.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지.” 청년은 머리를 묶은 귀 국왕의 앞으로 걸어왔다. 양팔을 천천히 내밀자 친 손가락이 국왕의 머리를 좌우에서 감싼다. 입술이 아래로 내려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알고 있었지만 국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의 입술은 국왕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신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엄숙한 목소리였다. “정말 아쉬워요. 당신이 임금님만 아니었다면 데리고 가고 싶은데.” 국왕이 조금 웃었다. 아무리 아쉬워도 자신에게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만은 절대로 불가능한 얘기였다. 셰라는 아까부터 기묘한 것을 만들고 있었다. 긴 마포 한 장을 반으로 접어서 접히는 부분에 목이 통과할 정도의 구멍을 뚫고 양 옆구리를 꿰맨 물건이다. 이것을 주문한 왕비의 말을 이랬다. “얼마나 변하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입던 옷은 아마 입을 수 없을 거야. 그렇다고 맨몸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이렇게 하면 머리 쪽으로 뒤집어쓰고 허리에 끈만 매면 어느 정도 체격에 차이가 있어도 괜찮을 거라는 말이었다. 저녁 식가가 끝난 요새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수만 명의 군대가 야영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정적이었지만, 미칠 듯한 열기로 가득 찬 정적이기도 했다. 루는 왕비의 방바닥에 백묵으로 커다란 삼각형을 그렸다. 손으로 그렸지만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그 한쪽 끝에 의자를 놓고서 루는 셰라를 불러 거기에 앉혔다. “바느질은 여기에 앉아서 계속해줘.” 왕비가 다른 한 끝에 서고 루가 남은 한 끝에 섰다. 셰라는 바느질조차 잊어버리고 물었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거죠?” “본쥬이하고 연락하려고.” 조금 놀라버렸다. 이세계로 가는 통로를 열려면 상당히 어려운 게 아닐까 생각했건만 바닥에 백묵으로 삼각형을 그렸을 뿐이 아닌가. 이렇게나 간단하게 연락할 수 있는 거라면 어째서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루가 말했다. “이건 고기 입에 낚싯줄이 걸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 실을 통하는 것뿐이야.” “......?” 더욱 이해가 안 간다. “그럼 시작해볼까.” 모리를 풀고 쓸어내리는 청년의 모습이 푸른 인광에 둘러싸인다. 그러자 바닥에 그린 삼각형이 같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셰라는 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일에는 좀더 거창한 소도구나 길고 복잡한 주문 같은 게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바닥이 빛난 것과 거의 동시에 그 빛 속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아직 젊은 20대 후반 정도의 남자였다. 굉장히 당당한 체격이었다. 덩치 큰 국왕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것이 거의 거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시바!” 왕비가 기쁨에 차 외쳤다. 남자는 깜짝 놀라며 왕비를 바라봤다. 조금 이상한 듯이 눈을 깜박거리다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리! 너였구나! 이거 정말 놀랐는걸! 어쩌다 이렇게 예뻐진 거야?!” 바윗덩어리 같은 손으로 왕비를 안아 올려 머리 위로 훌쩍 들어올린다. “와하하, 조금 무거워졌잖아!” “조금 정도가 아니잖아. 나도 벌써 열아홉인데.” “헤에에?” 남자는 조가마한 눈을 한껏 치떴다. 루가 씁쓸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성급하기는, 굳이 여기로 나오지 않아도 조금만 있으면 돌아갈 텐데, 감사역은 어떻게 된 거야?” “유감이지만 그 감사역이 바로 나야.” 왕비와 청년이 얼굴을 마주 봤다. 그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상당히 의외의 인사인 듯하다. “시베스가 감사역?!”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실은 그래. 내가 이런 일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뭔가의 착오지. 그 정도로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라는 셈이기도 해. 어디, 일단 물어는 보겠는데 너희들은 이 세계에서 어떤 짓을 했지?” 왕비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성 하나를 부수고, 사람 하나를 치료했고, 세 명 정도 피떡으로 만들었어. 그치만 그때에는 심신 상실 상태였으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한 짓은 아냐.” 이번에는 루가 셰라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아이를 데려가겠어.”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는 셰라를 보고서 남자는 깜짝 놀라면 눈을 치떴다. “이런, 이런....” 과장스럽게 머리를 싸쥔다. 단순한 한탄만은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는 왜 하필 이거냐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루, 너란 녀석은 정말, 어떻게 그리 엄청난 짓만 골라서 하는 거냐?” “안 돼?” “안 되고 자시고 난 대답할 권한이 없어. 조금 기다려봐. 어이, 형씨. 이리 좀 와봐. 이리 오라니까!”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해 외쳤다. 셰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늘나라의 사람치고는 굉장히 시끄러운데다가 품위가 없다. 빛나는 삼각형 안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쪽도 젊은 남자였다. 단, 겉모습은 상당히 다르다. 마른 편인 장신에 어깨는 떡 벌어져 있으면서도 팔다리는 가늘고 길다. 시바라는 남자가 건장함을 내세운다면 이 남자는 민첩함과 유연함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같은 색의 눈동자가 빛난다. 왕비가 또다시 의외라는 듯이 외쳤다. “데몬?” “리....” 이쪽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리고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왕비에게 매달렸다. “만나고 싶었어, 젠장.... 열흘 동안 내가 얼마나 널 그리워했는지....!” 과장스러운 재회의 인사에 왕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열흘 가지고 무슨 소리야.” “글세 말이야. 나도 몇 번이고 그 소릴 해주고 싶었다고. 그런데 네 파트너라는 놈은....” 남자는 굉장히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루를 바라봤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상당히 고생을 한 듯하다. “어쨌거나 부탁해. 빨리 돌아와달라고. 이 검은 천사는 도저히 내 손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까. 인간이었으면 한참 전에 머리가 다 세었을 거양.” “데몬은 흰 표범이 되는 거야?” “그럼 그라이아 녀석은 흰 천마가 되겠지.” 셰라는 기묘한 기분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쪽 세계에는 왕비의 친구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나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긋이 의외였다. 청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기는 일단 돌아가서 하자. 데몬, 시바한테도 말하기는 했는데 이 아이를 저쪽으로 데려가고 싶어. 괜찮을까?” 남자는 셰라를 보고 검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이쪽도 놀라버린 듯하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씩씩한 얼굴에 유쾌한 미소가 퍼졌다. “이거, 참....” 셰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왕비도 루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거야, 형씨?” “루가 하는 짓인데 아무도 반대는 못하겠지. 이 예쁘장한 꼬마를 데려갔다가 다른 녀석들이 뒤집어져도 난 몰라.” 청년이 활짝 웃었다. “난 그래서 데몬이 좋아.” “잘도 지껄이는군. 그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삼각형 안의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고 사라졌다. 인광도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루는 머리를 다시 묶은 뒤 발로 바닥의 삼각형을 지웠다. 셰라는 바로 조금 전의 일이 현실이었는지 아닌지 의심하면서 부탁받은 옷을 완성시켰다. 그날 밤, 국왕은 갑자기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뭔가가 분명히 국왕의 잠을 방해했지만 주위는 조용할 뿐이었다. 적의 야습 같은 것도 아닌 듯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국왕은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깨달았다. 머리맡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리...?” “갑자기 깨워서 미안.” 왕비는 소매가 긴 잠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언제나 틀어 올리고 있던 머리를 풀어 내린 모습이 묘하게 화려해 보인다. “잠깐 같이 와주지 않겠어?” “이런 시간에?” “귀찮게는 안 할 테니까.” 왕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고서야 왕비의 손가락에 그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다음 순간 주위의 경치가 바뀌었다. 어두운 실내는 사라지고 달빛이 가득 찬 풍경이 국왕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짙은 풀 냄새가 떠도는 상쾌한 밤공기가 전신을 감싸고, 막 바닥을 밞으려던 발은 밤이슬에 젖은 부드러운 풀을 밟았다. 국왕은 아연해하며 숨을 삼켰다. 왕비의 힘으로 ‘날아본’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달랐다. 게다가 이 풍경. 달빛을 받아 떠오르는 숲은 국왕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리운 정경이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못 알아볼 리는 없다. “스샤잖아! 어떻게 여기에?!” “한번쯤 봐두고 싶었어.” 왕비는 맨발로 풀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국왕도 그 뒤를 따랐다. 곧바로 시야가 탁 트이며 호수가 나타난다. 검은 수면에 달이 비쳐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크레나 호수....” 국왕이 감탄하며 말했다. 해가 떠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다. 이 호수는 햇빛 아래에서가 더욱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달빛을 받은 모습도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나란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침내 왕비가 국왕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내일 돌아가.” 국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괴롭지 않았다. “쓸쓸해질 거야.”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말이지....” "뭐야?“ 왕비가 이렇게 말을 흐리는 건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이다. 왕비는 길게 한숨을 쉬고서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폴라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우리들은 정식 부부잖아? 이걸로 작별이니까 한번쯤은 부부다운 일을 해보자 이거야!” 국왕은 말을 잃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눈과 턱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는 국왕에게 왕비가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사람이 모처럼 유혹하고 있는데 그 태도는 대체 뭐야?” “그, 참....” 두려웠다. 너무나도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저릴 판국에 국왕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왕비가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역시 내가 올라타야 하는 건가....” 분위기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대사였다. 국왕은 반사적으로 펄쩍 뛰었다. “잠깐-, 잠깐 기다려!!” “기다리긴 뭘. 시간이 없다고.” 왕비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도 남자를 유혹해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야.” 뭔가 착오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 반드시 뭔가 착오이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왕비는 진심으로 보였다. 국왕은 자신이 어깨를 들썩이며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위기를 헤쳐온 영웅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겉보기만으로는 왕비도 아름다운 여성이고 게다가 자신의 ‘부인’이다. 아무것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곤란했다. 국왕의 머릿속에서 아까부터 계속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번뜩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왕비가 이런 태도로 나온 건지 깨닫게 된 것이다. 신의 계시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른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국왕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어.” “월?” “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겠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어.” “월, 그건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야.” “아니! 뭐가 어쨌건! 어쨌거나 미련은 끊으려고 남을 도구로 이용하려고 해도 그렇게는 못해주겠어. 누가 그런 식으로 이용당할 줄 알아?” 발끈하며 외쳤다. 아마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애정 때문도, 최후의 추억을 위해서도 아니다. 이 세계와 연을 끊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다. 왕비는 원래 남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에 대해 연심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갑자기 선을 넘어버리면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가장 불편하고 씁쓸한 감정이 남을 게 뻔하지 않은가. 왕비는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 이런 소리를 꺼낸 것이다. 이 세계에 잇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겨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도록. 만나고 싶어도 다 분 다시 얼굴을 마주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릴 셈이다. “그렇게 멋대로 행동하지 마! 남의 마음을 짓밟는 짓은 하지 말라고!” 국왕은 진심으로 분노하며 소리쳤다. 그 험악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왕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항복하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안는 대신 팬도 좋아.” “리..., 적당히 해둬.” 기분 나쁘게 으르렁거리는 국왕을 보며 왕비가 살짝 웃었다. “난 더 이상 여기에 돌아올 수 없어.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폴라를 왕비로 삼아줘.” “리,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그렇게 멋대로 정하지 말라줘. 난 말이지-, 난 믿지 않아.” “......?” “너하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말 따위, 난 안 믿어.” “.......” “얘기는 들었어. 너도 라비 경도 다시 여기로 돌아오기는 굉장히 어렵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죽는 건 아니잖아?” 국왕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면서 열심히 말했다. “내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누군가가 죽어버리는 거야. 내게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최소한 저쪽에서 나와 주지 않는 한은 볼 수 없지.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죽는 것 이상으로 나쁜 일은 없어. 너 네 세계로 돌아가고 난 여기에 있지. 설령 우리들 사이에 한없이 아득한 별의 흐름이 놓여 있다고 해도, 둘 다 살아 있는 이상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리가 없잖아.” 왕비는 복잡한 얼굴오 국왕을 바라봤다.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앳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 국왕은 다른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리....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거야?” “.......” “여기는 네게도 살기 편한 곳이잖아. 라비 경도 여기서 같이 살아도 좋다고 했어. 그렇다면....” 왕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네가 그 말을 하면 나도 뻔히 대답을 아는 질문을 하게 되니까. 넌 절대로 못한다고밖에 대답할 깃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부탁하게 될 거야. 왕관을 버리고, 동료들을 보리고, 이 세계를 버리고 나와 함께 가달라고.” 왕비의 말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국왕의 목을 후비며 말을 빼앗았다. “돌아가야 할 이유는 한둘이 아니야. 짧게는 설명할 수 없어. 그저 이 세계에 내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돼.” “.......” “왕비님이 있으니까 괜찮다, 왕비님이라면 반드시 어떻게는 해줄 거다. 위험해, 그건. 사기를 높이는 재료나 마음의 지주가 되어주는 정도라면 상관없지만 한번 의지하기 시작하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 “게다가 루퍼를 여기에 묶어둘 수는 없어. 루퍼에게는 루퍼의 생활이 있으니까.” “라비 경은 널 자신의 태양이라고 했지만, 그럼 너에게 그 사람은 어떤 존재지?” 왕비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는 이유일까.” “.......” “그녀가 죽고 아말록이 죽은 뒤에는 더 시상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죽으면 루퍼가 슬퍼할 거야. 루퍼를 울리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살아 있는 거고.” 국왕은 그 청년의 말을 떠올렸다. 왕비는 ‘죽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연인이 죽었을 때에도 바로 뒤를 따르려고 했다고 한다. 아마 검은 양부가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것이다. “너, 다음에도 늑대들 중에서 반려를 택할 거야?” “내 반려는 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내게 폴라가 있는 것처럼 너에게도 누군가-사랑하는 누군가가 필요할 거야. 그 상대는 늑대들 중에서 구할 거야?” 왕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그때처럼 어린아이가 아니야. 지금도 그녀는 사랑하고 있지만 다른 늑대와 새로 사랑을 할 생각은 없어. 나하고 늑대들은 너무 다르니까. 지금은 알고 있어.” “.......” “그렇다고 인간은 내상대가 될 수 없어. 인간이 다른 동물과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한테 있어서 그들은 어디까지나 다른 종족이니까.”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넌 원래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왕비는 갑자기 국왕에게 물었다. “너, 너 자신이 어떤 존재냐는 질문을 들으면 어쩌겠어? 누구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음, 일단 난 전사이고 페르난의 아들이며 델피니아의 국왕이야. 더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인간 남자이지.” “난 그런 정의를 내릴 수 없어.” “.......” “아서와 마거릿은 날 두고 자신들의 아이라고 했어. 인간아이라고. 그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실을 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난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설령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그들은 내 동료가 아니야.” “.......” “그렇다고 난 아말록의 친자식도 아니지. 늑대 모습이 될 수도 없고. 그럼 넌 어떤 존재냐, 대체 누구냐고 물어보면 난 이렇게 대답해. 이름은 에디 리, 루퍼의 파트너라고.” “거기 한 마디 더 붙여.” 국왕이 말했다. “나의 동맹자라고.” 왕비는 웃었다. 웃으면ㅅ, 울 것 같은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붙여둘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편안한 침묵이었다. 마침내 왕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몸도 오늘 밤이면 작별이야. 내일이면 왕비인, 여자인 그린디에타는 사라져.” 국왕의 가슴이 살짝 아파왔다. 아까 청년의 변신처럼 눈앞에 있는 이 모습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솔직히 씁쓸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왕비가 사라져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려고 했지만, 아무리 말해봤자 납득할 리가 없으니 네가 얘기해주지 않겠어?” 그 말투에서 뭔가가 걸렸다. “리, 너 설마 나한테마저 인사도 없이 가버릴 생각이야? 그러니까 본래 모습으로라는 의미인데....” “그야 너도 자기 왕비가 남자가 된 꼴 따위 보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놀리는 듯한, 어딘가 석연치 않은 목소리였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국왕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봐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난 너의 진짜 모습을 알 권리가 있어. 아냐?” “.......” “슬프게도 난 인간이야 .육체 안에 어떤 영혼이 깃들여 있는지 따위, 한눈에 간차할 눙력은 없어. 그러니까 확인해둬야 한다고.” 왕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깨우러 갈게.” “라비 경처럼 지금 여기서 변신할 수는 없는 거야?” “난 모습을 바꿔본 것이 없어.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루퍼한테 부탁해서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바꿔달라고 했어. 원래....”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잇는다. “오늘 밤은 너하고 함께 지낼 생각이었으니까.” “그 소리는 그만 좀 해.” 살짝 흘겨보자 왕비가 웃었다. 지금까지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지냈다. 얇은 천을 몸에 두른 왕비가 국왕에게 다가와 눈앞에 섰지만 국왕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가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태양이 떠오를 때, 네가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나일 거야.” 흠칫한 순간 국왕은 원래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혼자서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몸은 밤이슬에 젖어 있고 발레 풀이 붙어 있었다. 방은 암흑에 잠겨 있었다. 아직 아침까지는 한참 남았다. 국왕은 천천히 침대 위세 엎드려 시트를 꽉 쥐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베개를 꽉 악물었다. 찢어질 듯이 팽팽하게 그래도 참아낼 수 없는 오열이 꽉 악문 잇새로 흘러나왔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설령 어떠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봐야만 핟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은 진심이다. 하지만 괴로웠다. 형용할 길이 없는 감정이 가슴을 휘저었다. 아침 따위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랐다. 9장 얼굴에 햇빛이 닿는다.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느 틈엔가 잠들어 버린 듯했다. 잠에 취한 머리 한구석에서 인간이란 상상이상으로 튼튼한 생물이라고 묘한 데에 감탄하던 국왕은 다음 순간 펼쩍 뛰어 일어났다. 방 안에 밝은 햇빛이 가득 차 있다. 날이 밝은 것이다. 결전의 아침이었다. 왕비가 이 세계와 작별을 고하는 아침이기도 했다.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햇빛이 내려쬐는 창가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다. 국왕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 사람도 창가에서 떨어져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침 햇빛이 그 사람의 온몸을 밝게 비추었다. 넉넉한 천을 머리 쪽으로 뒤집어쓰고 허리띠를 맨 것 이외에는 맨몸이다. 발도 맨발이었다. 국왕은 숨을 삼키며 뚫어져라 그 사람을 응시했다. 아직 앳된 편이지만 강항 의자가 드러나는 윤곽, 깊은 사료로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혈색 좋은 뺨, 격렬함은 간직한 차분함과 씩씩함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얀 이마를 눈과 같은 색의 보석이 장식하고, 눈부신 금발리 허리까지 흘러 내려온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가는 체격이지만 연약한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잘 조여진 건강한 몸과 탄력 있는 근육은 필요할 때에는 무섭도록 민첩하고 강하게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젊고 씩씩한 한 마리의 늑대 같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숨을 삼키고 있는 국왕을 보면 왕비와 똑같은 얼굴의 소년은 씨익 웃었다. “여어.” 국왕은 최소한 1분 이상 소년의 얼굴을 응시한 채 굳어버렸다. 숨쉬는ㄴ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소년은 곤란한 듯이 고개만 갸웃거리며 웃고 있다. 국왕의 눈앞에서 미녀로 변했던 청년과 똑같은 동작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뒤, 국왕은 간신히 숨을 내쉬며 크게 신음했다. 그리고 엄숙하기까지 한 어조로 단언했다. “천상의 모든 실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어....” 바로 어제까지 왕비였던 소년은 조금 놀라는 듯했다. 모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뭘?” “어제 너한테 손대지 않은 거 말야!” 녹색 눈이 동그래지며 기가 막힌 듯이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을 확 꺾으며 폭소했다. 격렬한 웃음의 발작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국왕은 그런 소년을 향해 발끈하며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으, 응.... 확실히 웃을 일이 아니지.” 눈가에 그렁거리는 눈물을 닦고 나서 소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국왕은 거의 탄식에 가깝게 물었다. “리..., 맞지?” “그럼 누구로 보여?”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분명히 소년의 목소리지만 틀림없이 왕비의 말투였다.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도, 그 미소도, 목소리의 억양조차 어제까지의 왕비와 다를 것이 없건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변해버렸다. 아무리 허름한 차림이어도 몸이 여자라면, 아무리 난폭한 말투여도 목소리가 여자라면 그것만으로도 여자답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시금 눈앞에 서 있는 소년과 어제까지의 왕비를 비교해보았다. 얼굴 생김을 거의 다를 게 없었다. 단, 눈높이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다. 키가 커진 것이다. 곱슬거리던 머릿결도 직모에 가까워졌다. 얼굴 윤곽이 살짝 날카로워지고 목이 두꺼워지면서 어깨도 두툼해졌다. 무엇보다도 왕비가 무거워서 불편하다던 가슴이 완전히 사라졌다. 가슴 근육으로 둘러싸인 흉판이 남아 있을 뿐. 국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년의 가슴을 만져보고 다시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아까워....” 소년은 기가 막혀서 대꾸했다. “너 말이지..., 남의 몸을 멋대로 더듬고서 하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미안하게 됐군. 미련이 많아서.” 국왕은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짙은 녹색 눈동자도 반짝이며 웃음을 지었다. 어떤 모습이라고 해도 이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히 리였다. 6년 동안 누구보다도 국왕과 가까이 있어온 영혼.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기만 했다. “너무 변하지 않아서 유감이지만, 이래선 누가 봐도 ‘왕비님’으로는 보이지 않겠지?” “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가겠어.” “알았어.” 냉정한 대화 같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곧 시종이 아침 식가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하러 올 것이다. 식사를 마치면 바로 출진이다. 언제까지고 잠옷 차림으로 서 있을 수는 없건만, 소년의 얼굴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금발의 소년은 국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밝은 웃음이었다. “혹시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한테는 남편이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겠어. 한 번도 같이 잔 적은 없지만 내 배우자는 그 사람뿐이라고.” “이. 그러다가 사귀기도 전에 차인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난 거짓말은 못 해.” 국왕도 웃으면 소년을 끌어안았다. 감촉이 정말 다르다. 탄력이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부드러운 여자의 몸과는 달리 탄탄했다. “나도 맹세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이것이 너의 진짜 모습이라고 해도 내 왕비는 너 하나뿐이야.” “너, 또 그렇게 변태 같은 소리 하는 거야?” “너야말로 남의 말 할 입장이야?” “난 여기서 떠나니까 이번에야말로 폴라를 진짜 왕비로 세워 주면 될 거 아냐.” “넌 아직도 내 마누라 성격을 모르는구나. 그런 소리 해봐. 당장 수녀원으로 달려가서 영영 안 나올 거라고.” 그제야 간신히 평소대로의 국왕과 왕비의 대화로 돌아왔다. 그때 아무 신호도 없이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이븐이 들어왔다. 아무리 소꿉친구 사아라고는 하지만 예절이고 배려고 전혀 없는 태도였다. “아직도 그런 차림이었어?” 잠옷 차림의 국왕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하다 국왕과 함께 있는 소년을 보고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왜 이런 데에 있는가 하는 의문과 분명치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뭔가 걸리는 듯한.... 소년이 선수를 쳤다. 씨익 웃으면 말한다. “남자가 되면 믿어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 이제 믿겠어?” “뭐?” “자기 소개라도 할까? 이븐, 내 이름은 그린디에타 라덴이야.” 검은 옷의 산적이 입을 쩍 벌리며 굳어버렸다. 듣고 보니 확실히 같은 얼굴이다. 진한 녹색의 눈도 눈부신 금발도 왕비 그대로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소년이다. 이런 경우는 이븐의 상식에 비추어봐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만 오랫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던 걸까. 간신히 입을 다물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이븐은 마치 구원이라도 바라는 듯한 시선으로 국왕은 쳐다봤다. “농담... 이지...?” “아니, 분명히 어제까지 왕비였던 사람이야.” 국왕은 그동안 재빨리 갑옷을 걸치고 방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국왕의 등을 향애 소년이 말을 던졌다. “내가 없어도 정신 차리고 잘해.”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국왕도 웃음을 지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출진하기 직전. 부대를 편성하던 무장들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국왕의 곁에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전하, 비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부하들의 물음에 국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반문했을 뿐이다. “왕비가 없으면 싸울 수 없나?” 무장들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국왕에게도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물러갔다. 그런 가운데 이븐만이 쓰디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이, 월. 이건 정말 곤란해.” “그렇겠지.” “그 차림으로 남들 앞에서 나섰다간 정말 폭동감이야. 누가 납득하겠어? 왕비가 남자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하지만 저게 리의 진짜 못비야. 게다가 지금 그런 문제보다 오론의 먼저야.” 이븐은 날카롭게 국왕을 노려보았지만 출발을 알리는 정 소리에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어제까지 왕비였던 소년은 한산채진 요새를 태연하게 걸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셰라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맞이했다. 루는 소파에 앉아서 쉬다가 왕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놀라서는 아니다. 루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며 흑발의 청년이 감탄한 듯이 말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굉장한 미소년이 됐잖아.” 진지한 말에 리도 웃었다. “다녀왔어.” 루도 웃으며 답했다. “어서 와.” 검은 천사가 양팔을 벌린다. 금색의 천사는 당연한 듯이 그 팔에 안겼다. 셰라는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바로 일어서며 옷을 준비했다. 이 체격이라면 루의 옷이라도 충분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이 되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어젯밤부터 계속 마음을 다졌던 덕분인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여기 있습니다.” 옷을 내미는 셰라를 보며 소년이 미소지었다. “넌 안 놀라는구나.” “아뇨. 이래봬도 충분히 놀라고 있습니다.” 지금 셰라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왕비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인상이 다르다. 그와 동시에 전혀 변하지 않기도 했다. 스스로도 지지부진한 감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가장 솔직한 느낌이었다. 병사 차림을 한 리는 그라이아를 마나러 갔다. 요새의 말들이 남김없이 출진한 가운데 구수가 없는 흑왕만이 마구간 안에 남아 있었다. 소년 모습의 리가 다가가자 이 말은 재빨리 상대를 알아보고 기뿐 듯이 콧잔등을 비벼대었다. 하지만 마구간을 지키던 하인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잔뜩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낯선 소년을 쫓아내려 했다. “이봐! 비전하의 애마에 손대지 마!” 물론 리는 그런 제지 따위는 무시하고 말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오랫동안 정말 고마웠어. 난 고향으로 돌아가. 너도 로아로 돌아가서 다음 세대를 남기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아무간의 문을 열어주었다. 흑왕은 조금 아쉬운 듯이 리를 바라보다가 자기 발로 마구간을 나섰다. 요새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흑마를 시종들이 당황하며 쫓아갔지만 어차피 쓸데없는 짓이다. 평범한 사람 손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리는 그 소란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군대가 출진한 뒤의 요새는 묘하게 조용했다. 문론 남아서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은 있지만, 대부분 전망대와 성벽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후원 쪽에는 아무도 없다. 이걸로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냈다. 단 한 가지-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지만 그것을 떠올리면서 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것은 바로 그 찰나였다. 위험을 감지한 본능이 멋대로 몸을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 몸을 피하자 바로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납구슬이 날아와 박혔다. 그 뒤를 이어 바람처럼 등 뒤로 닥쳐오는 기척. 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뽑아 막아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검과 검이 부딪쳤다. 첫 공격에 실패한 레티시아는 재빨리 뒤로 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레티시아의 손에는 그 검-파트너의 검이 들려 있었다. “너....” 리의 입에서 경악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검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소리 없는 질문에 대해 레티시아는 손가락에 감아 든 머리카락은 흘끗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소년이 된 리의 모습을 가마나히 관찰했다. 리 역시 검을 들고 숨을 가다듬었다. 의외라는 듯한 울림을 여실하게 드러내며 상대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거지? 그러자 레티시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어째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나나스러운 말투였다. “대체 어째서 내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건 그때 리 자신의 대사였다. 파트너가 모습을 바꾸고 나타났을 때, 몰라볼 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던 바로 그때의. 리도 무심결에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리에게는 죽고 죽이는 결투를 즐기는 취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와 대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루과 셰라가 따라나온 것은 그 시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투 현장에 맞닥뜨리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특히 셰라는 바로 살기를 띠며 달려가려 했지만 루가 셰라의 팔을 붙잡았다. “일대 일의 결투이니까 방해하면 안 돼.” 묘한 구석에서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하지만 셰라는 그렇게까지 느긋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저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리라고 해도 그리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런 셰라의 불안을 자극하는 듯이 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리를 해댔다. “저 아이 쪽이 불리하겠어.” “어째서요?!” “몸을 바꾼 직후니까. 최소한 하루만이라도 지났으면 모르지만 아직 새 몸에 익숙해지지 않았어.” “하지만! 여자 몸보다 힘이나 반사 신경은 이쪽이 더 뛰어날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의 몸하고는 키도 체중도, 손발의 길이나 몸의 두께도 전혀 달라.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도 제대로 살릴 수 없으면 의미가 없어.” 셰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도 모르게 뛰어나가려고 했지만 루는 셰라의 팔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놔주세요!” “안 돼.” 겉보기에는 연약해 보여도 엄청난 힘이다. 셰라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분노하며 외치는 셰라의 말에도 루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잠시 말을 끊었다가 뒤를 잇는다. “그렇게 되면 저 아이의 영혼만 데리고 돌아가면 되니까.” 셰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이 사람의 이런 구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수는 없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육체는 그저 옷가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육체까지 모두 합쳐서 저 사람인 것이다. 절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자신을 붙들고 있는 손을 공격해버릴까 생각하는 순간 루가 말했다. “지금 방해하면 저 아이가 화낼 거야.” 이 설득이 효력을 발휘했다. 잔뜩 치솟아 오르던 투지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셰라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언쟁이 벌어지는 사이에도 리와 레티시아의 결투는 계속되었다. 단, 눈에 띄는 움직임은 전혀 없다. 거리를 둔 채 가만히 서로를 노려본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이다. 동시에 빈틈이 생겨나는 가장 큰 순간이기도 하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기합을 넣어 공격하다 역습을 당하면 오히려 피해가 더 커진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저 서로 노려만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리의 이마에 비지땀이 흘렀다. 레티시아 역시 심각한 표정이다. 서로가 식은땀을 흘릴 정도의 긴장감을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상대의 허점을 찾고 있었다. 보고 있는 셰라 쪽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한없이 긴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이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상대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상식을 초월한 운동 능력을 지닌 두 사람이다. 질풍처럼 빠르게, 눈 깜짝할 사이에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다. 승부는 그 한순간에 결정났던 것이다. 기세 좋게 뛰어가다 몸을 숙인 리가 무서운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호흡이 심하게 거칠어져 있다. 그때는 이미 레티시아의 가는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묘하게 천천히 지면 위로 쓰러진 뒤였다. 움직일 수 없게 된 몸에서 점점 붉은 피가 흘러나와 지면을 물들였다. 셰라가 리에게 달려가는 것보다도 먼저 리가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의 곁에 무릎을 짚고 앉으며 신중하게 몸을 뒤집었다. 남자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조금 웃으며 자신을 벤 상대를 올려다본다. 그런 레티시아에게 리는 놀람과 약간의 분노, 비난을 담아 물었다. “어째서? 네 승리였는데....” 쓰러지는 것은 자기 쪽이어야 했다. 자신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찌르려는 순간, 이 남자가 아주 잠깐 몸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파트너의 검에 죽게 될 상황이었다. 남자는 피투성이사 되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꼴불견이지.... 진짜, 타임아웃이야....” 남자의 손에서 떨어진 검을 주워 들며 루가 말했다. “원래부터 오래 살수는 없는 몸이었어.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할 정도니까.” “뭐...,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지....” 남자는 자신의 곁에 앉아 있는 리를 보고 웃으며 피로 젖은 주먹을 들어 왕비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깝잖아. 되게 삼삼한 가슴이었는데....” “사내 자식들은 그 소리밖에 할 줄 모르냐?” 리는 기가 막혀서 대답하다 곧바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너, 나하고 같이 가지 않겠어?” “.......” “이대로 내가 진 채로 끝나는 것만은 함을 수 없어. 기분 나쁘다고.” 레티시아는 죽어가는 사람치고는 기가 막힐 정도로 유쾌하게 웃었다. “그것도 좋겠는걸. 그렇지만... 기다리는 여자가, 있어서 말이야....” 그것이 취후였다. 죽을 때까지도 이 남자는 희미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나 강렬하던 폭발력도, 병든 몸이기에 더욱 선명하던 생명의 빛도 복고 나면 모두 사라져버린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저 텅 빈 시체일 뿐. 리는 죽음 남자의 뺨에 손을 대며 루를 올려다보았다. “데려가도 될까?” “하지만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던 여자 쪽도 같이 데려가야 할 텐데, 어쩔래?” 루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낮의 햇빛 사이에서 금발 소녀의 목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 곁에 모이라도 함께 있었다. 그녀들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던 듯 두 사람은 똑바로 셰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자가 최후의 파로트 일족이니까.” “그 한 사람이 다른 세계로 떠난다면 함께 가겠어. 우리들은 파로트 일족의 성령이니까.” 당사자인 셰라만이 멍하니 굳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스윽 움직여 셰라에게 다가갔다. 당황하며 몸을 젖혔지만 그때에는 이미 성령들의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에, 에...?” 셰라는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가겠다고 해놓고 사라져버리다니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루가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기분, 아무렇지도 않아?” “에..., 무슨...?” 리는 반지를 오른손에 끼고 레티시아의 시체에 손을 올렸다. 다음 순간 시체가 사라졌다. 피의 흔적만을 남기고 눈앞에서 깨끗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리는 간신히 비명을 참아낸 셰라를 보고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그 녀석은 여기야. 일단 안에 거둬놨어.” “거둬요...?” “응. 한동안 쉬게 해주는 편이 좋으니까. 지금 두 사람은 네 안에 들어갔고.” “자..., 잠깐만요! 뭐라고요?” 셰라는 펄쩍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지만 리도 루도 태연할 뿐이었다. “너, 전혀 아무렇지도 않지> 그럼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보통 사람이라면 신경이 타서 끊어져버리겠지만 역시 셰라는 ‘달’인지도 몰라.” 셰라는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켜고 내쉰다. 이들을 따라가기로 한 이상 이 사람들에게 맞춰야 한다. 자신은 이 사람들과 함께 가겠다고,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으니까. 가능한 한 이들에게 맞춰야 한다. 주먹을 꽉 쥐며 셰라는 온 힘을 다해 기합을 넣었다. 결전은 더욱 격렬해졌다. 월 그리크가 이끄는 델피니아, 산세베리아 연합군과 오론이 이끄는 파라스트, 서남 중소국 연합군이 자웅을 가리는 자리이다. 양군 모두 3만을 넘는 대군이다. 녹색 들판은 병사들로 가득 찼다. 신호를 알리는 종과 정 소리가 끊임없이 퍼지자 군마의 발굽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전장이 이동할 때마다 남은 자리에는 점점이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지만 양쪽 모두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부상병을 수용할 여유조차 없었다. 흐름은 압도적으로 델피니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파라스트 군은 점점 밀리고 있었지만, 지휘봉을 잡고 있는 것이 저 오론인 이상 간단히 격파되지는 않았다. 밀리면서도 끈질기게 이쪽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좀처럼 승부가 나질 않았다. “이거 심한걸....” 루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리와 셰라 역시 조마조마해하면서 멀리서 전황을 지켜보았다. 세 사람은 지금 전쟁터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여기서 보고 있으려니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있다기보다 두 종류의 개미들이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셰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중에는 승부가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론이 모자이로 도망치면 오래 끌게 되겠지.” 리의 목소리에 미묘하게 초조함이 스며 있었다. 이미 이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싸움에 참가할 수도 없지만, 몸을 원래대로 돌리는 게 너무 빨랐던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전장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루가 말했다. “왕비님. 뭔가 하는 게 어때?” “뭔가라니.... 난 이미 왕비가 아냐.” “이게 최후잖아. 한 번만 왕비님의 기적을 보여줘도 괜찮지 않을까?” 긴 금발을 늘어뜨린 소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파트너를 쳐다봤다. “정말, 하는 짓하고 말이 어쩌면 그렇게 따로따로야? 그런 힘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지겹게 말하던 건 대체 누구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다고. 난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파라스트 군이 다 진 상태에서 쓸데없이 발버둥치고 있다는 건 알겠어.” “오론도 절대로 지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조만간 지게 죄겠지.” “그럼 그 패배를 아주 조금 앞당긴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쓸데없이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는.” 리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녹색 눈동자가 고뇌로 흔들렸다. “난 저 녀석의 국왕으로서의 실력을 믿고 있어. 탄가를 쓰러뜨린 것도, 파라스트를 쓰러뜨린 것도 왕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말로 임금님에 대해 실례야.” “.......” “임금님이 이길지 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런 소리는 안 해. 하지만 임금님은 파라스트에게 이길 거야. 단지 그게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 “이제 와서 규칙 위반 따위 신경 쓸 입장도 아니잖아. 그냥 콱 저질러버리면?” 한 점 흐림 없는 맑은 목소리였다. 이래서야 심각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소년은 포기한 듯이 웃음을 지었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소나기라도 내리려는 것치고는 기묘한 하늘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어둡게 변하자 양군의 병사들은 겁을 먹으며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러대던 발로도, 가렌스와 나란히 적을 쓰러뜨리던 나시아스도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화에 놀라며 잠시 공격을 늦추었다.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적을 혼란시키던 이븐도 고삐를 당겼다. 그 곁에서 함께 싸우면 샤미안도 따라서 하늘을 바라봤다. 개암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가득 한다. 샤미안은 무심결에 외쳤다. “비전하!” 새카만 하늘 가득히 왕비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가 구름처럼 하늘을 장식했다. 델피니아 군의 병사들도 경악했지만 파라스트 병사들의 두려움은 한층 컸다. “우, 우와....” “저, 전쟁의, 여신....” 얼굴에서 가슴에 걸쳐 하늘에 떠오른 왕비는 양손을 넓게 벌렸다. 왕비의 손에서 보나리스를 파괴했을 때처럼 번개가 떨어졌다. 빛의 화살이, 강력하기 짝이 없는 엄청난 힘이 파라스트 군을 향해 쏟아져내린다. 무서운 굉음과 함께 지면이 푹 파였다. 빛의 화살은 병사들을 직격하지는 않았지만 그 공격의 파동으로 날려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전장에 모여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파라스트 병사들만이 아니라 델피니아 군의 병사들까지 새하얗게 질려 당황하며 달아나려 했지만 그때 매서운 목소리가 울렸다. “움직이는 자는 벌하겠다.” 왕비의 목소리였다. 머나먼 천상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모두의 귀에 또렷하게 닿았다. 불이 붙은 듯이 달아나려던 군사들이 움직임을 딱 멈췄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왕비의 얼굴이, 그 눈동자가 파라스트의 본진에서 떨고 있던 오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파라스트의 국왕에게 묻겠다. 항복하겠는가, 아니며 나의 벼락은 맞겠는가.” 엄숙한 목소리.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게만 허용되는 오만함. 그에 비하면 인간의 위엄 따위는 어린 아기의 투정에 불과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오론도 이 권고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거슬렀다가는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용기고 투지고 다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창백하게 질린 입술로 공포로 와들와들 떨면서 오론은 힘없이 주저앉아 하늘의 왕비를 향해 엎드렸다. “하... 항..., 항복, 하겠습니다.” 잔뜩 잠긴 그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델피니아의 장수들에게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모든 이들의 얼굴에 경외와 공포가 드러나 있다. 어느 틈엔가 델피나의 병사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장수들조차 말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짚었다. 이 사태를 보며 평정을 지키고 있던 것은 국왕 월 그리크 한 명 뿐이었다. 말에 오른 채 하늘 가득히 떠오른 왕비의 모습을 친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것은 어제까지의 왕비의 모습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왕비가 국왕을 바라보며 말한다. “작별이다. 나의 반려여.” 그 말에 델피니아의 장수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가 왔으니 난 나의 시계로 돌아가겠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몸짓에 답하는 듯이 하늘 가득히 펼쳐져 있던 왕비가 조그맣게 변하며 국왕 앞에 내려섰다. 예상대로 이 왕비는 진짜가 아니다. 환상인 것이다. 국왕은 그 환상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며 불평했다. “조금 지나친 거 아냐?” 왕비의 환상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너도 설명하느라 곤란하지 않을 거 아냐.” “아, 미안. 정말 끝까지 네 신세만 지는구나.”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너니까. 난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이런 짓 따위는 안 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살짝 웃었다. 조금 주저하다 왕비가 말했다. “그럼.” 너무나도 왕비다운 인사에 국왕도 웃었다. “즐거웠어.” “응.” “또 만나자.” “.......” “반드시 다시 만나는 거야. 난 그렇게 믿고 있어.” 국왕의 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왕비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보였다. 왕비는 빛의 왕관을 국왕의 머리 위에 얹어 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천상의 모든 신들의 축복이 이 위대한 왕과 함께 하기를.” 눈을 치뜨자 왕비의 환영은 국왕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분명히 환상일 텐데도 그 입술은 따뜻했다. 언덕 위에서 리는 전쟁이 종반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라스트 측 장병들은 차례로 투항했으며 총대장인 오론에게도 더 이상 싸울 기력은 없었다. 이 상황이면 오늘 내로 승부가 나고 델피니아 쪽에서는 축하연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축하연 자리에 자신은 더 이상 함가할 수 없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역사를 만들고, 자신은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홀로 동행하기를 택한 셰라는 언제까지고 움직이려 들지 않는 소년을 이상하게 여기며 살짝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의 눈가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본 것이다. 흑발의 청년이 팔을 뻗어 소년의 금발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소년 역시 말없이 청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침내 리는 고개를 들었다. 셰라에게 손을 내민다. “가자.” 그 얼굴에는 평소처럼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루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라도 살짝 미소지으며 앞으로 운명을 함께하게 될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델피니아가 가장 번성하던 시대, 국왕은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왕의 이름은 월 그리크 로우 델핀. 이 희대의 영웅은 강적 탄가와 파라스트를 쓰러뜨리고 중앙에서 전쟁을 사라지게 만든 왕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그 국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웅에 왕비의 이름이 있다. 왕비의 이름은 그린디에타 라덴. 일설에 의하면 이 왕비는 인간이 아니라 국왕의 곁에 내려온 전쟁의 여신이라고 한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국왕에게 축복을 내리고 하늘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또한 전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다.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계도는 펼쳐보면 역대 왕복 가운데 이 왕비의 생몰연도만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 칸은 월 그리그 왕 시대부터 계속 비어 있었다. 작가 후기 마침내 이때가 왔습니다. 우선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1권부터 읽어주신 분도, 도중에서 읽기 시작하신 분도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오랫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지인에게 지적을 듣고서야 제가 이 이야기를 5년이나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만,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도 신기합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적어도 델피니아에 금쥐, 은쥐, 검은 쥐가 관여하는 것은 이 시점까지입니다. 국왕은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 세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는 앞으로 고민하게 될 얘기이지만, 지금까지도 굉장히 즐겁게 쓰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이 즐거웠기 때문에 여기까지 계속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사랑합니다. 이야기를 마친 지금도 아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있어서 정말로 실존하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람들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쓸쓸함마저 느껴집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것, 쓰려고 생각했던 것, 그것에 대해 확실하게 말로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소설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저 이 소설을 통해 제가 쓰고 싶었던 것, 느끼던 것을 읽어주신 독자 분들도 함께 느껴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격려 편지에 답장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편지 쓰기란 상당히 힘들어서 쉽게 쓰이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이 직업입니다. 아무 반응도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지지요. 보내주시는 편지나 선물들은 무엇보다도 따뜻한 격려가 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또한 5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삽화를 그려주신 오키 마미야 씨께는 특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언제나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그려주셨지요. 원고의 방향은 물론이고 마감의 향방조차 세우지 못하는 한심한 글쟁이를 끈기 있게-최후까지 끈기 있게 지탱해주신 담당님. 몇 번이고 궁지에 몰렸을 때마다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이 책을 손에 들고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8년 11월 카야타 스나코 역자 후기 길었습니다. 실은 이 결말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검은머리에 녹색 눈동자의 왕자님 운운하며 헛되이 발버둥치던 시간도 이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후속작에서도 금쥐, 은쥐, 검은 쥐의 활약은 여전히 볼 수 있겠지만 수더분한 임금님의 웃음을 보는 것은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평생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둔 채, 대륙 전체에 이름을 드날리면서도 때때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검과 전사의 영혼을 걸고 맹세를 나눈 동맹자를 그리곤 했을 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는군요. 그리고 머나먼 어느 별에서는, 마찬가지로 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평생을 두고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해주었던 인간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루가, 셰라가, 아무리 가까운 이들이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리는 월의 빈 자리를, 월은 리의 빈자리를, 그렇게 평생 마음속에 감고서 살아가야만 하겠지요. 예, 제가 열렬하게 외치던 말을 이것 하나였습니다. “리, 뻘렁 저거(<-워리) 칵 들고 가버려!!!” (나름대로 해피엔딩?) 번역을 하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과 만나 즐겁게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입니다. 금발 괴수의 변모에, 부부 만담에, 말을 잃은 델피니아 중신들의 침묵에, 흑발 괴수의 나른함에 쉴새없이 웃으며 마지막 권까지 올 수 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델피니아 전기를 맡을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멋진 작품을 써주신 카야타 스나코 선생님께 다시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사 같은 말은 했지만 아직 끝은 아닙니다. 이 뒤에는 새벽의 깡패 천사들이 이어지니까요. 만담은 계속되어야 합니다!!(의미불명) 덤) 나젝크를 케이파드에서 끌어내느라 왕비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성 앞으로 찾아왔을 때 왕비의 마지막 인사를 저는 ‘그럼 안녕히’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ではね, ごきげんよう!” 최근 남자 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마0아 님이 보고 계셔’를 아시는 분이라면 분명히 웃으실 수 있겠지요(웃음). 2004년 7월 김소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