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델피니아 전기17 / 아득한 별의 흐름에(상) 지 은 이 : 카야타 스나코 옮 긴 이 : 김소형 펴 낸 이 : 김인규 출 판 사 : 대원씨아이 출판년도 : 2004년 7월 15일 <지은이 소개/ 카야타 스나코>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 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델피니아>외에는 <키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저드>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김소형> 1975년 3월생. 이화여대 의학과 졸업. SF와 판타지를 좋아함. 아니작 야시모프와 신이치, 오노 후유미의 팬. 번역작; <십이국기>, , <악마의 파트너>, <델피니아 전기> <차례> 1장부터 8장까지 <소개글 , 서평> 리를 나젝크의 아내로 삼겠다! 승리의 여신을 능멸하여 델피니아의 전의를 깎아내리려는 조라더스의 비열한 술책에 세 사람은 말을 타고 탄가로 향한다. 왕위를 버리고 전사로 되돌아간 월. 이세계의 파트너 루,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는 셰라.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계속 잠들어 있는 리는 과연... 1장 나젝크 왕자는 6월 말의 어느 날 보나리스 성에 도착했다. 먹구름이 짙게 낀 흐린 날씨였다.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왕비를 사로잡은 바우어에게 직접 인사를 건네면서 공적을 칭찬하는 등, 지극히 호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본래 무용이 뛰어나고 용모가 번듯한 만큼 그 모습은 위풍당당하고 듬직하게 보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바로 그 순간의 하늘빛처럼 음침하게 그지없었다. 드디어 델피니아의 왕비를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가학적인 쾌감에, 왕자의 입가에는 끊임없이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 때 왕비 때문에 맛봤던 패배감과 원한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2년 전 그린다 왕비에게 받았던 굴욕은 그만큼 왕자의 가슴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자도 탄가 국내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다. 무예로는 당할 자가 없고, 군사를 지휘하는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어 탄가의 나젝크 왕자라면 아버지 조라더스에게도 뒤지지 않는 용사라고 다른 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 왕자가 수많은 부하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여자에게 맞아 쓰러진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더욱 지독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지금도 왕자의 속은 뒤집히곤 했다. 죄를 지은 노예에게 벌을 주는 방법 중 하나로 두 발목을 묶어 밧줄 끝을 매달고 달리며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형벌이었다. 그 여자는 바로 그런 짓을 자신에게 했다. 그 여자가 탄가의 왕위 계승자를 노예처럼 취급한 것이다. 당시 그린다 왕비의 나이는 17세로 외견상으로는 나젝크 왕자보다 훨씬 작고 가녀린 몸집의 소녀에 불과했다. 어린 소녀 주제에 어떻게 그런 짓이 가능했는가 하는 의문은 왕자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한 나라의 국왕이 될 자신에게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을 가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죽어도 용서치 않겠다는, 저주와도 비슷한 증오가 뜨겁게 타올랐다. 어차피 포로가 되었다고 해도 그 성격이면 절대로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지만 그런 것쯤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뜨려줄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여자에게 진짜 남자의 힘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려주고 말겠다. 부인으로 삼는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긍지도 자존심도 산산조각을 내주고 말리라.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달라고 밀 때까지 치욕을 가하며 농락해주겠다. 왕자는 그런 빗나간 결의와 함께 어두운 쾌감에 대한 기대로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결혼 상대의 억굴을 보러 들어갔지만 완전히 김이 새고 말았다. 자신이 나젝크 왕자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콧대 센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 지가 즐거움 이었건만, 델피니아의 왕비는 무력하게 누운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옆까지 왕자가 다가가도,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봐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흥이 깨져버린 왕자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뭐야, 이건?” “예, 그것이....” 뮤렌은 우물거리면서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했다. 왕자까지 쓰러지면 큰일이므로 약을 태우던 향로는 일단 치워두었다. 그러나 왕비는 오랫동안 앵속에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곧장 회복되지 못한다. 약의 영향으로 의식을 잃었다는 설명을 들은 왕자는 더욱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날보고 이렇게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여자를 안으라는 건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자 뮤렌은 식은땀을 흘렸다. 성을 책임지는 성주로서는 한심한 행동이지만, 도움을 구하며 뒤를 돌아본다. 뮤렌의 뒤에는 레트라는 이름의 군사가 서 있었다. 군사는 곤란한 듯이 웃음을 지으면서도, 부드럽게 나젝크 왕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로서는 이 분을 이 곳에 억류해두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한 짓입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바로 이 분의 의식이 돌아오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며칠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걸리지?” “그건..., 죄송합니다만 확실하게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2, 3일이면 되는 경우도 있고 열흘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여유를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젝크 왕자는 경멸과 짜증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이 무능한 놈들, 정말 기가 막히는군. 탄가의 차기 국왕이 일부러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건만 여기서 열흘을 더 기다리라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루 안에 이 여자를 써먹을 수 있게 되돌려 놔.” 오만불손한 어조였다. 왕좌를 약속받은 인간에게는 그것이 허용되는 법이다. 군사는 겁먹은 표정으로 당황하며 변명했다. “물론 당연히 서두르겠습니다. 허나 이 처치에는 극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조금씩 반응을 봐가면서 투여하지 않으면 자칫 폐인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루는 도저히 무리입니다만....” “답답하기는, 찬물이라도 끼얹어.” “그, 그것은....” “정말로 의식이 없나?” 의심스러운 듯이 왕비를 힐끔 쳐다보고서, 나젝크 왕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왕비의 뺨을 쳤다. 큰 소리가 울렸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큰 체구의 나젝크 왕자가 온 힘을 다해 후려치자 그 동으로 왕비의 가녀린 몸이 뒤집혀버렸다. 기묘하게 팔다리가 비틀린 인형 같은 자세가 되어서도 왕비는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시중을 들던 여자들은 새하얗게 질려 왕비의 팔다리를 원래대로 돌려 눕혔고, 뮤렌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호소했다. “저, 전하.... 너무 난폭한 행동은....” “흥. 자는 척하는 건 아닌 것 같군.” 어차피 자기 것이 될 여자인데 어떻게 다루건 자기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조만간 이 곳으로 만 명이 넘는 군대가 파견된다.” 왕자의 말에 뮤렌은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군사와 얼굴을 마주본다. “그 말씀은, 그, 그러니까, 델피니아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까?” 주저하며 묻자 나젝크 왕자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그 겁쟁이 왕한테 마누라를 되찾으러 올 만한 기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아버님은 그럴 생각이시다. 마누라를 빼앗기게 생겼으면 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국왕이라도 뭔가 행동을 시작할 거라고.” “설마 델피니아가 이 보나리스까지 군대를 파견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올 테면 와보라지. 내가 두들겨 부숴주고 말겠어.‘ 왕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니 시간이 없다. 그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둬야 해. 미친 듯이 달려온 델피니아 놈들에게 이 여자는 이미 자신들의 왕비가 아니라 내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지.‘ 이런 때에 여자의 몸은 상당히 편리하게 이용된다., 억지로 빼앗긴 거라고, 불가항력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다. 애초에 패전국의 공주나 총희는 승전국 지도자의 노리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관례이기도 했다. 여자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적의 포로가 되면 몸을 빼앗겨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폭력으로 자신의 육체를 유린한 남자를 따르는 것은 수치도 불명예도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신에, 세상은 다른 남자가 손을 댄 시점에서 여자는 이미 마음까지 빼앗겨버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남자의 지배를 허용했으니 그 소유물이 되어버렸으리라 단정해 버린다. 아기까지 생긴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남자는 그리 쉽지 않다.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쉽게 적에게 굴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배신인 동시에 원래 주인에 대한 불충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나 긍지가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의 시선이 그런 짓을 좋게 볼 리도 없다. 간단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치졸한 인간에 은혜도 모르는 쓰레기라는 취급을 받게 된다. 평생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지기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적의 손에 떨어졌을 때의 남자와 여자는 취급도 세상의 시각도 각각 달라진다. 그러므로 나젝크 왕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내키지 안ㄹ는다고 해도 빨리 그린다 왕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나젝크 역시 수많은 미녀를 마음껏 상대해온 인간이니 만치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고, 원래의 남편 따위는 단숨에 잊어버리게 해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왕자의 마음은 애정이 아니라 왜곡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런데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하다니.... 쓸 데 없는 짓을.” “죄, 죄송합니다....” “난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얘기가 아버님의 귀에 들어가면 네 놈들이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조라더스가 무능과 비효율을 얼마나 싫어하는 국왕인지는 자신들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뮤렌은 새파랗게 질렸고 군사 역시 몸을 움츠렸다. 왕자는 두 사람이 자신의 말에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는지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비는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 그런 왕비의 몸을 내려다보는 왕자의 눈에는 육욕이 깃들여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 여자는 자신의 마음대로, 바라는 대로 요리해 달라고 누워 있는 도마 위의 생선이나 다름없다. 압도적인 우월감에 왕자의 몸이 오싹오싹 떨려왔다. 초인적인 무용과 함께 엄청난 미모로 유명한 왕비이다.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반짝거리는 금발도, 매끄러운 피부도, 늘씬하고 매끄러운 사지도 더욱 흥을 돋워준다. ‘이거라면 데리고 놀아보는 것도 재미있겠어.’ “너희들, 하루라도 빨리 이 여자의 의식을 회복시켜. 기가 세기로 유명한 말괄량이니 길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할 게다.” “옛....” 그 날 밤, 나젝크 왕자는 결혼 축하연이라는 이름 하에 파티를 열었다. 호화로운 케이파드 궁전에는 비할 수 없지만, 이런 사태를 예상한 뮤렌이 바쁘게 움직인 덕에 상당히 고급술에 정성스러운 요리들이 준비되었다. 술시중을 드는 여자들의 미모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정원에 배치된 병사들에게까지 술을 하사하고, 보나리스 성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왕비가 갇혀 있는 탑만이 유일하게 조용했다. 보초들도 대부분 자리를 뜨는 것을 허락받아 홀에 모여들어 술판을 벌였다. 단 한 사람, 왕비를 깨우도록 지시받은 군사만이 왕비의 곁에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의식을 회복시키기 위해 뭔가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특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젝크 에게 맞은 뺨을 식혀주고 있을 뿐이다. 덩치 큰 나젝크 왕자가 힘껏 치는 바람에 왕비의 뺨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찬물에 적신 수건을 짜서 한참 동안 뺨에 대어준 뒤에야 간신히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왕비는 꼼짝도 하지 않고 레티시아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흐릿한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런 왕비를 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약을 끊으라는 명령을 받았어. 어쩔까? 호마의 효과를 중화하는 약 따위, 있으면 내가 먼저 구경하고 싶은데 말이야.” 왕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며칠 전에는 레티시아의 말에 대답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명백하게 상태가 다르다. 그 때보다 증상이 진행되어서 정말로 의식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엄청난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레티시아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왕자님도 말이지, 자기 실력으로는 상대도 못할 맹수를 데리고 놀려는 주제에 팔팔한 게 아니면 싫다고 투정이나 부리고 말이야. 얼른 고맙게 받아먹기나 할 것이지.” 왕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생기를 잃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지만 레티시아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방에서 나왔다. 어둡고 좁은 탑의 복도에서 촛불의 불빛이 흔들렸다. 홀에서는 파티가 벌어지고 있지만, 두꺼운 석벽은 그런 기척조차도 가로막고 있었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탁하게 떠돌았다. “하지만 눈앞에 이렇게 미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저 왕자 씨가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까나, 식중독에라도 걸리게 해봐?” 이것 역시 혼잣말이었다. 적어도 레티시아가 말을 내뱉었을 시점에서는 그랬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그 말에 대답했다. “이해 못할 짓을 하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목만 있는 금발의 소녀가 어두운 탑 안에 나타났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서, 이번에는 왕자에게 약을 먹이려고?” “그야 그 때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달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겠어.‘ ‘말은 그럴 듯하게 하는데, 결국 좋아하는 사람을 가만히 남한테 넘겨주는 거 아니야/“ “농담해? 좋아하는 여자라면 저런 바보 왕자가 손대는 걸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지. 눈앞에서 저렇게 뻗어 있는데. 마음만 있었으면 한참 전에 접수했어.” “어머나. 저런 상태라도 상관없어?” “어쨌거나 첫 번째잖아. 저 왕비 씨는 남편하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 뒤에 저 바보 왕자를 처치하고, 왕비 씨를 들쳐 업고 느긋하게 여기서 탈출하는 거지.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아?” 자신만만한 말투에 목만 있는 소녀는 짧게 혀를 찼다. 그렇다. 이 남자라면 그쯤은 아무런 문제없이 해 낼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도 움직이려 들지를 않는 것이다. 그럴 의지가 전혀 없으므로. “그럼 어째서 감싸는 건데?” “좋아하는 여자는 아니어도 반한 건 반한 거니까. 저런 자식의 장난감으로 던져주려니 좀 짜증이 나서 말이야.” 레티시아의 어거지에 소녀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레티. 당신, 대체 누구 편이야?” “난 일이 재미있게 굴러갈 것 같은 쪽 편.” 아마도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겠지. 레티시아는 유쾌하게 웃었다. “흥미는 있어. 저 왕비 씨, 농락당할 바에는 차라리 혀를 깨물지. 아니면 일단 몸을 허락해서 왕자가 방심하게 만든 뒤에 목을 물어뜯을지. 어느 쪽일 것 같아?” 소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팔이 있었다면 머리라도 싸쥐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정말 남자란! 시대가 변해도 어쩜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만은 변함이 없는 거야?!” “그리고 여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목만 남는 한이 있어도 질투만은 변함없지. 안 그래?” “넘겨짚지 마. 난 질투하는 게 아니라 기가 막혀서 그러는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것보다도 임금님 일행은 어디쯤까지 왔어?” “몰라, 그런 거.” “흐음?” 레티시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소녀를 바라봤다.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뭔가 주저하는 듯한 눈치였다. “왜 그래? 평소처럼 잠깐 다녀오면 될 텐데.” “안 돼. 못해. 접근할 수가 없어.” “아가씨...?” 놀라서 반문했지만 목만 있는 소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소녀의 뒤쪽으로 펼쳐진 새까만 벽돌이 조금씩 형태를 바꾸며 사람 모양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점점 긴 흑발과 새하얀 피부를 지닌 여자의 상반신이 되었다. 입을 다물어버린 소녀 대신 모이라가 엄숙한 목소리로 선고했다. “ ‘어둠’이 오고 있어.” “뭐?” “주디스한테 억지 부리지 마. 우리들을 전부 삼켜버릴지도 모르는 어둠이 다기오고 있어.” 모이라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어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동요하는 일이 없는 모이라 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금발 소녀의 목 역시 사랑스러운 입술을 꽉 다물며 긴장을 견디고 있었다. “이상해. 지금까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으면서, 이래서는 마치 저 사람의 목숨보다는 정조를 뺏기는 게 참을 수 없다는 것 같잖아.” “이번은 확실히 그런 것 같아.” “그것도 역시나 남자의 옹고집?” “아냐. 왕비가 납득하고 있는 일이라면 그 어둠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 이 성에 붙잡힌 결과 레티시아에게 목숨을 빼앗기게 될 거라는 사실도 왕비는 알고 있었어. 서로 알고 있었지. 난 말이야, 저 어둠에 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건 왕비의 생사가 아니라고 생각해. 생사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왕비가 왕비 지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에는 그 어둠이 더 격하게 반응하는 거겠지. 그런 관점에서 이번 사태는 실로 최악이고.” “나젝크 왕자가 왕비를 사랑해서 결혼을 바랐다면 좋았을 텐데.” “글세 말이야. 왕비한테야 폐도 이만저만이 아닌 감정이겠지만, 그거라면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흐름이니 그 어둠도 이렇게까지 화내지는 않았을 거야.” 레티시아는 자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뭐야? 조라더스의 정치적 전략의 결과 저 왕비 씨가 바보 왕자 손에 떨어지게 생겼다, 그래서 화가 난 누군가가 있다는 말?” “그런 거지.” “당신들이 접근도 못할 정도로?” “응.‘ “그 위험한 게, 왕비 씨 서방하고 그 아가씨랑 같이 이리로 오고 있다고?” “바로 그거야.” “각오해둬. 정말 위험하다니까.” 레티시아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아무리 강한 인물이라고 해도 성령들이 두려워할 리가 없다. 유일하게 저 왕비만은 예외였지만, 왕비도 이렇게까지 경계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둠’은 성령들과 같은 속성일 텐데. 독사가 독사를 두려워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성령들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까만 돌 벽으로 녹아들어가듯이 사라졌다. 하늘에는 은쟁반처럼 둥그런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보나리스 성이 새하얗게 빛났다. 월 그리크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 성을 내려다보았다. 분지에 세워진 성은 이렇게 산에서 바라보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면 그대로 들키고 만다. 주위가 이렇게 밝아서는 들개 한 마리만 접근해도 성에서 훤히 내려다보인다. 게다가 지금 보나리스 성은 달빛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다. 성 여기저기에 커다랗게 모닥불을 피워, 성 전체를 밝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전투태세에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나 사치스러운 짓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상당히 눈에 띄는 짓을 하는데, 왕비를 되찾으러 올 거라고 경계하고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발치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저건 연회의 조명이에요. 결혼식 축하연. 아무래도 나젝크 왕자가 도착했나보네요.” 루가 바닥에 앉아 달빛에 의지하며 카드를 펼치고 있었다. “그럼....” 말을 하려다 월의 얼굴에 고뇌가 떠올랐다. 여기까지 달려온 것도 전부 다 허사였다는 말인가. 결국 시간에 맞추지 못했던 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루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건 어디까지나 전야제니까.” “그거 다행이군... 이라고 말하고 싶기는 한데, 그렇다고 빈 말로라도 상황이 호전되었다고는 못하겠는 걸. 여유도 얼마 없을 거야.” 셰라는 식량을 조달하러 갔고, 지금 이 자리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준비했던 식량은 여기까지 달려오는 도중에 거의 다 소비해버렸기 때문이다. 원망스럽게 보나리스를 바라보고 있는 국왕의 등을 향해 목소리가 날아왔다. “임금님은 이제부터 어쩔 거죠?” “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자기 손으로 왕비를 구하고 싶은 것 아니었어요?” “지금 내가 뭘 할 수 잇다는 거지?” 왕좌를 버린 국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음이 조급한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리가 갇혀있는 장소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지금이라도 뛰어가고 싶었다. 방해하는 놈들은 전부 다 해치워버리고, 왕비의 모습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며 자신이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 격렬한 감정에 추호도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저 견고한 성에 혼자서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한 사람의 용사는 병사들을 이끄는 한 사람의 지휘관에게 대적할 수 없는 무정한 진실이기도 해. 나 혼자서 저 요새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우선 태세를 가다듬어야지.” 말은 냉정하게 하면서도 목소리는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월 그리크는 부하가 없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일개 개인의 능력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만큼 국왕으로서 자신을 의식해본 적은 없다. 자신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주는 델피니아의 용감한 기사들을, 이렇게나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발로에게 맡겼다. 월 그리크가 국왕인 채로 왕비 탈환을 위해 출격하면 탄가는 반드시 타우와 왕비의 교환을 들고 나선다. 그 교섭에 응하면 타우를 저버리게 된다. 그러나 교섭을 거부하면 왕비를 그리고 국왕을 지지하는 국민 전부를 저버리게 된다. 현재 델피니아의 여론은 왕비를 구출해야 한다는 쪽으로 급속히 모이고 있었고, 왕비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타우의 일부를 포기해도 상관없다는 쪽으로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뜨거워진 민중의 의지를 무시할 수는 없다.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는 국왕은 재위해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우를 버릴 수는 없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로에 서서 타인은 영원히 알지 못할 고뇌와 갈등에 시달렸다. 미칠 듯이 고민한 결과 국왕이 선택한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다. “임금이라는 것도 꽤 골치 아픈 장사네요.”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바로 등 뒤에 새하얀 얼굴이 있었다. 루는 어느 틈엔가 일어서서 국왕과 나란히 보나리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꽃잎처럼 붉은 입술만이 월의 심중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뿐. “때로는 약삭빠른 짓을 하지 않으면 해나갈 수가 없어요.” “그렇지.‘ 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그대로였다. 에브리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결국 자신은 도망만 칠뿐이다. 그리고 사촌 동생에게 귀찮은 역할만 떠밀고 있다. “물론 알고 있어요. 비난하는 게 아니라 칭찬하는 거라고요.” “음?” “난 이 세계에 임금님이 얼마나 여럿 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건 다른 임금님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이죠.” “구제할 길도 없는 최저, 최악의 바보밖에 못하지.” 발로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루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냥 바보는 아니에요. 그냥 바보를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따를 리가 없지요.” “.......” “당신, 꽤 괜찮은 임금님이에요. 그러니까 잠자는 척하는 호랑이씨도 손해 보는 걸 뻔히 알면서 그 역을 받아들인 거죠.” 국왕은 살짝 웃었다. “발로에게 맡긴 역할의 의미도 알고 있었나.” “그야 물론.” “점점 더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군.” “그거, 임금님이 말하면 엄청 위화감이 들거든요...?” “하지만 난 진심으로 발로에게 왕위를 물려 줄 생각이야.” “그런 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니까 다들 바보라고 하는 거 에요.” 웃음을 머금은 여유 있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 말투나 목소리의 억양에 국왕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말 자체는 부드럽지만 기가 막혀하는 듯한, 은근하게 놀리는 듯한, 그러면서도 호의를 가지고 있는 목소리. 이 어조. 틀림없이 왕비의 말투였다. 이상했다. 모습은 이렇게나 다른데도, 성격도 다르면서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왕비를 떠올리게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루는 다시금 웃으면서 국왕을 바라봤다. “이런 때에 제일 걱정해야 할 일도 임금님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무슨 얘기야?” “대개 부인을 빼앗긴 남자라면 누구라도 제일 먼저 확인 해봐야 하는 일이죠. 말로 확인해봤자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지만, 당신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몸을 빼앗겨도, 그래도 당신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부인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형식적인 질문인데요.” “우문이군.” 월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자신에게 그런 감정은 없다. 추호도 없다. “분명히 난 리가 걱정돼. 나젝크 같은 놈이 건드리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내 소유물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아이를 그런 식으로 더럽힌다는 사실 자체를 용서할 수 없어. 평소의 왕비라면 다른 남자가 자기를 건드리려는 것을 순순히 내버려둘 리가 없다. 아니, 손을 대려고 하는 시점에서 나젝크 왕자를 재기불능 상채로 떨어뜨릴 것이 뻔할 테지만, 탄가 인이 왕비를 붙잡아 가둬둔 것만으로 안심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파라스트에 붙잡혀봤던 경험이 있는 국왕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의 자신처럼 족쇄를 차고 있든가 사슬에 묶여있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몸의 자유를 빼앗긴 상황이 분명했다. 더 나쁜 경우에는 자유의지까지 빼앗겼을 가능성도 있다. 왕비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조차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문이라고 해서 꼭 몸에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다. 식사를 주지 않고, 잠을 재우지 않고, 같은 자세를 강요하며 단조로운 질문을 반복하는 걸로 충분하다. 그런 종류의 고통은 인간의 기력과 체력, 생각을 할 힘까지도 뿌리째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상식을 초월하는 체력을 자랑하는 왕비라고 해도 며칠이고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쇠약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양 쪽 모두 국왕이 자기 몸으로 직접 겪어본 일이다. 생각하기 조차 끔찍하지만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나젝크 왕자가 보나리스에 도착했다면 더욱 그 가능성도 고려해둬야만 한다. “경이야말로 어떤가?” “어떻다뇨?” “왕비의 몸에 그런 재난이 떨어진다면 경은 어찌하겠나?” “어쩌다니, 화내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어요?” “그 분노는 왕비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 장본인에 대한 게 아닌가?” “그건 애 사고 방식이 아니에요.” “음?” “그 애는 자기가 받은 모욕은 자기 손으로 갚아주는 아이니까. 그 권리를 내가 뺏을 수는 없죠.” “음.”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것 그 아버지 쪽인데요.” “응?” “파렴치한 짓을 한 장본인은 그 애한테 양보하더라도,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탄가의 임금님 쪽이에요.” 루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변함이 없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아니, 즐거워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전략의 도구로 이용되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르지요. 본인의 뜻 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결혼시키고 이혼시키고 여자 쪽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게 제일 중요한 존재 의의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용할 거라면 최소한 독신 여자를, 따로 상대가 없는 여자를 이용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일 텐데요.” “그래서 조라더스도 자기 나라의 법률까지 내세워서 리가 독신이라고 우기면서 나젝크의 정실이라는 비장의 카드로 다른 나라들의 비난을 잠재우려는 거지.” “임금님으로서는 정확한 판단이겠네요.” “그래. 칭찬할 만한 짓이냐 아니냐는 일단 제쳐두고, 전략적으로는 화가 날 정도로 뛰어나, 델피니아의 민중에게 왕비에 대한 실망감을 심어주고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수 있지. 덤으로 나에게는 왕비를 빼앗긴 왕이라는 낙인을 찍는 거야. 이거야말로 일석이조라는 거지.” “잔머리가 참 뛰어나군요.” “그것도 왕로서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야. 하지만....” “하필 그 아이를 이용하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바로 그러야.‘ 오가는 말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쓸데없는 소리까지 하지 않아도 이 호흡 역시 기억에 있다. 루의 얼굴이 흐려졌다. “최소한 내가 여기에 잇다는 것만이라도 그 아이한테 전할 수 있다면....” “음.... 하지만 어려운 일이야.‘ “아까부터 계속 불러 봐도 대답이 없어요.” 국왕은 눈을 부릅떴다. 당황하며 멀리 빛나고 있는 성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고함을 친 들 들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기적은 왕비 주위에서 언제나 벌어지곤 했다. 그렇다면 이 ‘파트너’라는 인간도 그런 종류의 기적에 익숙한 지도 모른다. 이만큼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답이 없어?” “왕비님은 녹색 보석이 달린 은색 머리장식을 언제나 차고 있지요?” “내가 아는 한 몸에서 떼어놓은 적은 없어.” “그럼 이번에는 뺏긴 거로군요.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돼요.” 루는 그렇게 단언하고 걱정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의식이 없을 지도....“ 국왕의 얼굴도 흐려졌다. 양 쪽 모두 좋은 징조라고는 할 수 없다. 리는 그 머리장식을 굉장히 소중히 여겼다. 검과 머리장식은 왕비에게 있어서 고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불렀다고 했지?” “네.” “경과 왕비는 친한 사이라고 들었네.” “네.” “그럼 당연히 서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겠지.” “그야 물론.” “경은 왕비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지?” 검은 머릿결이 뒤를 휙 돌아본다. 인광처럼 푸르른 눈이 국왕을 응시랬다. “어째서 그런 걸 묻죠?” “아니, 뭐....” 말을 흐렸다. 왕비와 한 약속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를 꺼냈다고 후회했지만 청년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똑 바로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눌리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말이야. 왕비의 마음속을 본 적 있어.” “.......” “어째서 그렇게 된 거냐 고는 묻지 말아줘. 왕비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더군. 어쨌거나 나는 어렸을 때의 왕비가 되어서 구름 위에 떠 있는 성이나 말을 하는 동물을 봤어.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이름으로 왕비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 “땅에 끌릴 정도로 긴 흑발이 인상적이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 “왕비는 그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서 그 사람은 왕비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죠?” “아니, 그건 말할 수 없어.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왕비에게 맹세했으니까.” 루는 말없이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길이 없는 표정이었다. 위압하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조용하지만 월만큼 대담한 신경의 소유자마저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서둘러 말했다. “어차피 조만간 알 게 될 테니까. 왕비가 경과 재회하면, 그러기만 하면 더 이상 서로의 이름을 봉인해 둘 필요도 없을 테니까.” 루의 눈빛이 바뀌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군요. 곧 알 수 있어요.” 두 사람 사이에서 말이 끊어졌다.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발 앞은 작은 절벽, 그 너머로 펼쳐진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나리스 성은 그 한 가운데 있었다. 거대한 모닥불도 이 거리에서 보면 작은 불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별빛 같은 느낌이었다. 수많은 불빛에 둘러싸인 성은 어딘가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셰라가 돌아왔다. 두 사람에게 말을 하려다 조금 주저하며 그대로 멈춰 섰다. 둘 모두 셰라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머나먼 저편에서 빛나는 보나리스 성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꼼짝도 않는다. 그런 두 사람의 주위를 숲의 수목이 장식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 연극의 무대처럼. 2장 남편이 찾아왔다는 전강을 들은 로자몬드는 깜짝 놀랐다. 남편은 도라 장군과 함께 최전선인 자하니 요새에 포진하고 있을 텐데.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이 진영에 나타나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다. 로자몬드는 아직 폴리시아에 있었다. 폴리시아는 샤미안의 결혼을 계기로 도라 장군에게 양도했지만, 이 곳은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다. 도라 장군 자신이 직접 통치한다면 아무 문제없지만 , 장군은 현재 그 관리를 딸에게 일임했다고 한다. 이것도 평화 시 라면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지만,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영지를 다스려본 경험이 없는 샤미안에게 폴리시아의 관리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국왕은 그렇게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샤미안 본인이 능력의 역부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지의 정식 양도는 미뤄졌고, 지금까지 대로 로자몬드가 폴리시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역시. 이런 종류의 소문은,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하층민들을 통해 퍼져간다. 이 저택에서도 하인이나 하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 뭔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로자몬드가 하인들을 다그쳤고, 그 때 처음으로 왕비에 대해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분노하거나, 왕비의 몸을 걱정하는 것보다도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지금은 적이지만, 탄가는 전통 있는 국가가 아닌가. 그런 나라가 이렇게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그렇게나 타락한 건가. 이 델피니아를, 그리고 왕비를 우롱하는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고 분개했지만, 결국 로자몬드는 이 얘기를 그저 소문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적에게 불리해질, 혹은 적을 혼란시키는 가짜 정보를 흘리는 것은 전쟁의 기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소문은 너무 아랄한걸. 비전하의 마음이 변해서 나젝크 왕자를 새 남편으로 선택했다니.... 이런 수단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할 짓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왕비가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사람은 명실 공히 델피니아의 승리의 여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되찾아야만 하지만 로자몬드는 이 폴리시아를 수호하며 후방 지원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음만 졸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사보아 공작이 일부러 전방에서 이탈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전투복 차림 그대로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벨민스트 가문의 저택은 모두 웅장하고 훌륭한 건물이지만 특히 이 폴리시아는 성곽까지 갖추고 이쪽 방면의 사령부 역할도 맡고 있었다. 발로는 기마군단만 거느리고서, 곧바로 출발할 테니까 필요 없다며 안까지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로자몬드는 시종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서 남편을 만날 때까지 최소한 5분 이상 서둘러 걸어야만 했다. 밖에서 온 손님이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작은 응접실로 달려가자 발로는 웃으며 로자몬드를 맞았다. “늦었어. 기다렸다고.” “오면 올 거라고 미리 연락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오랜만에 부인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잠깐 들른 거야. 미리 사자를 보낼 여유가 없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발로는 조금도 서두르는 눈치가 아니었다. 로자몬드 쪽이 조금 충격을 먹었다. “무슨 일이야? 급한 일이 아닌 거야?” “용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보기 드문 게 손에 들어와서 너에게 주려고 가지고 왔지.” 로자몬드는 기가 막혔다가 화가 났다. 애초에 이렇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한 애정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끝내 때와 장소도 가릴 줄 모르게 되어버린 걸까. “사보아 공! 장난에도 정도가 있네! 비전하께서 적의 손에 사로잡힌 이런 시국에 무슨 바보짓을!” 그러자 로자몬드의 남편은 오만하게 웃었다. “아니, 그건 달라. 왕비는 적에게 잡히지 않았어. 완전한 자유의 몸이지.” “그럼 비전하께서 풀려나셨나?!” 놀라움과 기쁨에 가까이 다가온 로자몬드를 향해 발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해방이고 뭐고, 델피니아의 왕비라면 내 눈 앞에 서 있어.” “뭐?” “이걸 전해주려고 왔어. 받으라고.” 그렇게 말하며 남편이 내민 물건이 무엇인지 인식한 벨민스트 가문의 여 당주는 말을 잃었다. 이런 곳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남편의 손에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그 물건을 남편은 아무렇게나 들어올려 빨리 받으라는 듯이 내밀었다. “어, 어떻게...?” 겨우 그 말만을 할 수 있었다. 공포를 숨기지 못한 채 그것을- 왕비의 증표인 왕관을 응시한다. 왕의 결혼은 계약을 관장하는 오리고 신, 대관은 만물의 섭리를 관장하는 야니스 신이 주재한다. 당연히 왕과 왕비의 왕관은 야니스 신전 깊숙이 보관되며, 대관식이 행해질 때에만 보물 창고에서 밖으로 꺼낸다. 그것이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로자몬드는 창백한 얼굴로 도움을 청하는 듯이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뭔가의 착오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최소한 자신에게 주겠다는 말만은 철회해주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발로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난 며칠 전 코랄에서 즉위해 델피니아 국왕이 되었다. 따라서 이건 당신 꺼야. 당신은 내 부인 이니까.” 발로는 담담하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로자몬드는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졸도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즉위가 인정될 리가 없다. 국왕이 왕위를 버리고 떠났다. 거기까지는 좋다. 엄청나게 비상식적이고 무책임한 짓이지만 벌을 받을 짓은 아니다. 그러나 전 국왕이 나라를 떠난 틈을 타서 남겨진 가신이 새 국왕이라 칭한다. 그것도 전 국왕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런 짓이 허용될 리가 없다. 명백한 위법행위. 아니, 누가 봐도 모반이었다. 지금의 발로는 그럴 자격이 없고 정식으로 인정된 것도 아니면서 국왕을 사칭하고 있는 셈이 된다. 몸이 떨렸다. 전신의 뼈가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국왕을 사칭하는 것은 중죄였다. 역대의 왕들에게 있어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는 것은 가장 큰 공포였기 때문에, 힘이 있는 유력 귀족이 그런 짓을 하면 상상할 수 있는 한 엄격하고 처참한 처벌을 가했던 것이다. 일족 전원을 남김없이 참살한 경우까지 있었다. 이번 경우에는 국외로 도피한 국왕의 지시를 받아서 했다고는 하지만 그 설명을 세상이 납득하고 받아들여줄 거라고만은 할 수 없다.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국왕이 나라를 떠났다는 사실과 발로가 아무리 봐도 정식이라고 할 수 없는 절차를 밟아 왕관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 뿐. 위험하다. 벨민스트라는 대 가문에서 태어난 로자몬드는 발로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사보아 가문의 영예를 시기하는 이는 수없이 많다. 그런 인간들이 이 때를 노려 일제히 규탄을 시작했다가는 발로 하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사보아 공작 가는 물론이고 부인인 자신까지도, 아니 두 사람의 소중한 자식인 유리와 세라까지 처형당할지 모른다. 부들부들 떠는 로자몬드의 어깨를 힘차게 끌어안으면서 발로가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만은 왕비인 척 해줘. 그리고 나와 함께 탄가를 공격해 줘. 델피니아 국왕의 부인은 여기에 있다고 놈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어.” “.......” “걱정하지 않아도 일이 다 마무리 되면 이런 것 따위 곧바로 형님에게 돌려주겠어. 범죄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지켜야 할 건 너와 아이들 그리고 사보아 가문만으로 충분해.”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지만 로자몬드는 꿋꿋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편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공은... 비전하께 돌려드릴 생각으로 왕관을 가지고 온 거겠지?” “당연하지. 이런 위험한 물건은 빨리 왕비한테 돌려줘야겠어. 덤으로 내가 받은 왕관까지 같이.” “이 틈을 타서..., 정말로, 왕위를 차지할 마음은, 조금도 없는 거야?” “네가 바란다면야 고려는 해 볼 수 잇겠지만, 내 마누라는 그리 멍청한 인간이 아니잖아.” 로자몬드는 웃으며 남편의 몸에 팔을 둘렀다. 로자몬드도 왕족과 혈연관계에 있는 대공작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이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뒤로는 명실 공히 당주로서 벨민스트 공작 가를 짊어진, 세간이 여자의 미덕으로 치는 순종과는 연이 없는 여자였다. 발로도 부인에게 그런 모습을 바라지 않았기에, 결혼한 뒤에도 얌전히 남편의 의사에 따르려는 자세는 한 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그런 로자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공의 부인이야. 공을 따르도록 하지.” “고마워.” “인사할 필요 없어. 분명히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야. 국민 전부를 속이는 짓이니 변명할 여지도 없는 불법행위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야. 폐하와 공이 아니었으면 이런 수단은 고려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거 실례잖아. 계획을 짠 건 전면적으로 형님이라구.” 남편의 몸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로자몬드는 낮게 말했다. “이러지 않으면, 이렇게 범죄나 다름없는 무모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탄가를 격파하지 않으면 비전하는 나젝크 왕자에게 욕을 보게 되는 거잖아.” “그래. 조라도스 민게, 그 죽일 놈이 나한테 초대장까지 보냈다고.” 발로의 목소리도 싸늘했다. “이용 가치가 있는 여자를 아들의 것으로 삼는 것까지는 좋다 쳐. 어느 나라의 왕이나 유력자도 흔히 하는 짓이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왕비를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아서 그 바보 왕자에게 던져주는 짓은 절대로 용서 못해.” “동감이야.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도 기꺼이 왕비를 지칭하도록 하지. 하지만....” 말을 하려다 주저하고 로자몬드는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어머님이 마음에 걸려. 어떤 경위든 간에 공이 일단 왕관을 손에 넣었다가 도로 놔버렸다는 사실들 알게 되면....” 발로는 코웃음을 쳤다. “미쳐 날뛰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이런 즉위는 그 자체가 범죄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신나서 고함을 쳐댈 거야. 어차피 그 여자라면 왕좌의 꿈은 유리에게 맡기고 서둘러 날 제거하려고 할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 허망했다. 발로는 로자몬드의 어깨를 양 팔로 감싸며 몸을 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난 이대로 탄가로 가겠어. 네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승부를 낼 순간이야. 벨민스터 공작 로자몬드 시릴 경.” 로자몬드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남편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난 국왕으로서 정식으로 그 대에게 출진을 요청하네. 일족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해 주길 바라겠소.” “기꺼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하고 시종을 불렀다. 이 요새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출진 준비를 명령한다. 그와 동시에 붓을 들어 몇 통의 편지를 쓴 후 신임하는 부하에게 맡겨 각 방면에 흩어져 있는 부하들에게 당장 전하도록 지시했다. 유력 귀족인 벨민스터 가문 전체를 모으면 최종적으로는 1만에 가까운 군대가 마련될 터. “가능한 한 빨리 따라가지.” “부탁해. 탄가의 공격은 이 쪽에서 막을 수 있겠지만, 혹시 그걸 넘어서 너의 부대에 직접 뭔가 지껄이는 놈이 있으면....” “알고 있어.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해야지. 델피니아의 왕비는 여기에 있다고.”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로자몬드에게는 상당한 중압이었다.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자각이 다시금 온 몸을 짓눌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래야만 진짜 국왕을, 왕비를 그리고 델피니아를 구할 수 있으므로. 굳게 결의한 로자몬드의 표정이 너무나도 비장했기 때문에 발로는 그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심각해질 것 없어. 넌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고. 이걸로 모든 게 다 원만하게 수습되는 셈이니 더 당당하게 행동해도 돼. 고지식한 벨민스터 공도 드디어 임기응변으로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된 셈이니 좋은 일이잖아?” 사람이 진지하게 고뇌하는 걸 놀리는 말에 로자몬드는 발끈해서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건 임기응변이 아니라 교활하다고 하는 거야. 내가 교활한 행동을 하게 된 건 남편의 영향이겠지. 사보아공.” “더 잘됐는걸.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에잇, 놔! 긴장할 줄도 몰라?!” 남편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안자 혀를 차며 뿌리치려 했지만 발로 쪽이 한수 위였다. 한 쪽 눈을 찡긋 감으며 지껄인다. “이런 때에 긴장감이 없는 건 형님의 영향이야.” 기가 막혀서 부인이 할 말을 찾는 사이 선수를 친다. “그럼 기다릴 테니까.” 발로는 경쾌하게 외투를 펄럭이며 응접실에서 나가버렸다. 로자몬드는 다시 한 번 혀를 차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 거렸다. “저게 옥좌에 앉았다가 정말 손 쓸 길이 없어져. 무슨 일이 있어도 월 그리크 폐하를 다시 왕위로 모셔오지 않으면....” 나시아스가 들었더라면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만한 감상이다. 그러는 사이 시종이 로자몬드에게 보고하러 달려왔다. 말의 준비는 끝났지만 주력부대가 전부 준비를 마칠 때까지는 조금시간이 걸릴 거라고 한다. “가능한 한 서두르게 해.” 그렇게 명령한 뒤, 로자몬드도 출진 준비를 시작했다. 그 때 타우도 긴박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타우를 대표하는 두목 20명 중 반수가 베노아에 모여들었다. 남은 반은 회의에 참가한 사람에게 전면적으로 결정권을 위임하는 형태로 제각각의 마을에서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20명의 두목이 월 그리크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당연한 말이지만 전원이 제각각 다르다. 두목들 중에 국왕보다 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이니, 상당한 실력자라고 평가하는 질 같은 두목이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미덥지가 못하다고 생각하는 비스체스 같은 두목도 있다. 그러나 단 하나, 그들 사이에서 일치되는 의견이 있었다. “그 임금님이라면 신용할 수 있어.” 민감한 건지, 둔감한 건지, 머리가 잘 도는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건지, 이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한 그 남자 이뇌의 다른 사람이 국왕이었다면 타우는 절대로 지금의 형태일 수 없었다. 발밑에 묻혀있는 금광의 취급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신분이나 타우가 터한 입장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결과를-물론 타우에 있어서는 지극히 불리한 결과를 맞이하고 있었으리라. 그런 의지에서 타우는 월 그리크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도움을 받았다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타우에는 아직도 그 남자가 필요했다. 산적인 자신들에게 그렇게나 친절하게 대해주고, 그렇게나 타우의 입장을 중시해주는 국왕이 더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남자를 되찾아야만 한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라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지금 우리들은 델피니아의 국민이야. 국왕에 충성을 다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베노아의 질이 천천히 말했다. 거의 대부분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이군. 그 바보, 타우의 의리를 지키려고 혼자서 보나리스로 달려가 버렸어.” “이번은 우리 차례라는 말인가.”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거야?” 서쪽의 고드와 동쪽의 퍼잰이 제각각 물었다. 탄가가 들고 나온 비겁한 수단에 대해서는 이들도 이미 알고 잇다. 하필 왕비가 인질로 잡힌 데다 탄가 왕자와 억지로 결혼까지 하게 될 상황이니, 국왕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기분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우의 군사인 마커스도 어두운 표정이었다. “얘기가 굉장히 복잡하게 됐어. 우리들은 임금님이 돌아와 주길 바라지. 하지만 그러러면 먼저 왕비를 되찾아야 해. 왕비를 되찾기 위해서는 붙잡힌 기사단원들을 구해낼 필요가 있지. 게다가 인질들이 잡혀있는 장소는 견고하기로 유명한 보나리스 성이야.” 아산의 비스체스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 듯 짜증스럽게 턱수염을 쓸어대고 있었다. “조라더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세운 탄가 남부 방어의 핵심이야. 산적에 불과한 우리들한테는 부담이 너무 크다고.” 호위를 잔뜩 대동한 상인의 행렬을 공격하는 거야 특기 중의 특기지만, 완전무장한 성채를 공격하는 건 상황이 다르다. 신출귀몰한 기동력이 그들의 주무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을 공략할 수 없다. 성을 함락시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준비와 기술, 고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무서운 것은 아니다. 싸움이 닥치면 타우의 남자들은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두려움 없이 맞서며. 어떠한 군대보다도 용감하게 싸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전력을 다해 적을 공격하면 과연 인질이 무사할 수 있겠느냐는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의문이었다. 대대적으로 공격하지 않고서는 보나리스 성에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인질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일국의 국왕이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왕좌를 내팽개쳤을 정도로 까다로운 문제이다. 타우의 두목들은 한 명 한 명이 역전의 용사인 동시에 유능한 지휘관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사태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 침묵을 이븐이 깨뜨렸다. “우리들의 상식에 얽매여서 어쩌자는 거야? 쓸데없이 고민하지 말고 행동하자고. 타우의 전투력을 전부 동원해서 국경으로 달려가는 거야.” 아산의 비스체스가 눈을 부릅떴다. “잠깐만. 어이. 설마 서쪽에서 동쪽까지 스무 개의 마을 전부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맞는데. 안 될 거 있어?” “멍청아! 가볍게 지껄이지 마!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된다고! 그 머릿수를 전부 어떻게 다 먹일 생각이야?” 출진에 드는 비용은 원칙적으로 군대의 우두머리가 전부 부담하게 되어있다. 병사들이 싸우려면 우선 밥을 먹어야 한다. 공적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수까지 고려하자면 군대를 운용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더욱 막대해 진다. 당연히 유복한 영주일수록 많은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대 영주들 에게는 있지만 타우에는 없는 것이 바로 비축된 식량이다. 용감한 걸로 말하자면 타우에 비할 이들은 없다. 우수한 군대의 조건인 기동력도, 통솔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단, 군대의 규모가 너무 커지고 싸움이 장기전으로 들어서면 그 대군을 유지할 식량을 조달할 힘이 없었다. 질이 냉정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국가와는 달리 우리들한테는 군대를 보내고 무조건적으로 식량을 대줄 농민들도 없어. 타우의 전력 전부를 모으면 충분히 2만 명은 넘겠지. 비스체스 말대로 그런 대군을 어떻게 유지하겠다는 거야? 게다가 지금 우리들은 바로 얼마 전에 우를릭 쪽하고 한 판 붙은 뒤라고.” 마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잇던 비축분도 이미 다 써버렸어. 물론 채굴한 금을 써서 식량을 사들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채굴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좋은 생각으로 보였지만 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 금에 손을 대면 우리들이 반역죄로 붙잡히게 돼. 임금님이 누구든 상관없이, 우리들은 나라와 그렇게 계약을 맺었으니까.” “그럼 어쩌자는 건데? 이번 싸움은 틀림없이 장기전이 될 거야.” 2만의 군사로 탄가를 침공하겠다는 말이다. 며칠 사이에 끝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븐은 냉정했다. “어느 집이든 우유나 달걀을 얻으려면 소나 닭쯤은 키우고 있겠지. 겨울 식량으로 돼지도 있을 거야. 그걸 제공받는 거야. 소 한 마리면 상당한 인원이 배를 채울 수 있겠지,” “그럼 마을에 남을 노인이나 부녀자들은 어떻게 되는 데?” “어차피 델피니아가 탄가에게 쓰러지면 우리들에게도 미래는 없어. 여자들은 힘들어지겠지만, 임금님이 돌아오면 그 두 배로 가축을 사 내라면 돼지.” 어거지에 가까운 논리지만, 지금의 이븐에게는 감히 반론을 꺼내기 힘들 정도의 박력이 있었다. “왕비가 붙잡힌 지 이미 한 달, 눈치는 살필 만큼 살폈다. 놈들의 속셈도 알았지. 절대로 왕비를 순순히 되돌려 줄 생각이 없다면 남은 건 실력 행사 뿐이야. 타우의 모든 힘을 집결해서 탄가를 위협 하는 거다. 순순히 왕비를 돌려준다면 다행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타우의 자유민의 실력을 직접 맛보게 해줘야지.” “하지만 보나리스 놈들도 어린애는 아니야. 그런 협박에 순순히 무릎을 꿇을까?” “2만의 군대야.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눈앞에 서 있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박을 받게 되지. 게다가 델피니아의 정규군도 있어.” 두목들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 아무도 발언하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질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놈들이 왕비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정규군과 협력해서 보나리스를 쳐부순다.” 일동은 말을 잃었다. 그것은 곧 왕비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븐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이 남자가 흔히 짓지 않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그 멧돼지 자식은 가짜 임금님 역을 맡아서 국내의 전투력을 남김없이 털어 동서에 배치했어. 코랄에 근위병단 5군이 남아있을 뿐, 중앙 지역은 완전히 텅 비었다고. 지금 우리들이 산적 짓을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실컷 털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발로는 현재 각지의 영주들에게 억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리한 출병 명령을 했다. 1,000명의 병사를 지닌 영주에게는 1,300명, 3천 명의 병사를 지닌 영주에게는 4천 명을 동원하라는 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지만 그 판단은 상당히 괜찮았지.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면서까지 인해전술로 나온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왕비를 되찾든가,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예 자기들 손으로 막을 내려버리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동쪽의 마커스와 퍼잰, 서쪽의 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편이 났겠지.” “모든 마을의 소, 돼지, 거기다 양까지 긁어모으면 한동안은 버티겠지. 닭은 괜찮아. 너무 작으니까.” 고드가 주름살투성이의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매일 아침 우유도, 겨울 식량도, 내년에 입을 양털까지 포기해야 해. 이건 확실히 비싸게 먹히겠는데.” 이들은 타우에서도 장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같은 두목이라고 해도 이들의 의견에는 회의의 동향을 좌우할 만한 힘이 있었다. 질은 동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좋겠어?” 롬의 베네사가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 녀석 말대로 어차피 우리들한테는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츠이르의 브란도 마찬가지로 씨익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부슨 일이 있어도 임금님이 돌아오게 합시다. 왕비님도 함께.” 이븐이 마지막으로 의견을 덧붙였다. “우리들이 보나리스를 공격한다고 해서 그 왕비가 얌전히 죽어 줄 리가 없어.”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지에 대기하고 있는 두목들에게 전서구가 날아가고, 베노아는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너무 어리거나 늙은 사람, 부상자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준비를 마치고 말에 뛰어오르며 온 마을의 가축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일단 할 일을 정하고 나면 타우 사람들의 행동은 지극히 신속하다. 연락을 받은 마을의 남자들도 바로 동쪽을 향해 출발했다. 대이동이 시작 되었다. 인마와 가축들이 여기저기의 마을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산길로 접어들었다. 타우라는 거대한 산을 기분으로 볼 때 그것은 지극히 미미한 움직임 이었지만 흘러나오는 행렬은 하나로 모여들며 점점 거대하게 자라났다. 그 흐름의 선두에 씩씩하게 서서 총 2만 명의 대군을 이끌며 보나리스로 향하는 것은 고드도 마커스도 포잰도, 물론 질도 아니다. 이븐이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정규군의 장수들은 화려한 갑옷으로 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위압하며 장수들은 화려한 갑옷으로 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위압하며 우두머리의 존재를 표시하게 마련이지만, 타우의 남자들이 걸친 무장은 모두 소박한 뿐이었다. 산적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 황금 투구나 문장이 새겨진 은제 갑옷 따위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럴 만 한 돈도 없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장식 따위가 없어도 타우의 남자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단, 숫자가 2만이나 되다보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일 후미는 말할 것도 없이 대열의 중간에서조차 지휘자의 얼굴은 물론이고 그림자조차 보아지 않는다. 그런 남자들은 두목의 뒷모습을 표식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며, 두목들은 이븐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속도 자체가 굉장히 빠르다. 교묘하게 말을 몰아 험준한 산길을 달려 내려갔다. 승마에 있어서는 내 노라 하는 실력의 타우 남자들이 자칫하면 뒤처질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조금 보조를 맞춰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질 정도였지만, 이븐의 바로 곁에서는 샤미안이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함께 달리고 있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말에 익숙하다고는 해도 귀족 출신에 평지에서 자라난 여자인 tial안이 남편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저렇게 힘내고 있는데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다. 남자의 체면을 걸고 어쩔 수 없이 필사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평지로 내려온 이븐은 후열이 산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조금 휴식을 취했다. 호흡을 흐트러져 있었다. 샤미안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쓸데없는 말은 전혀 나누지 않았다. 팔에 노란색 천을 감은 전령이 앞뒤로 뛰어다니며 대열을 정리하는 동안, 물을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바로 출발이다. 이븐은 다시 출발하기 직전에, 그제야 처음으로 샤미안을 돌아보았다. “가자고.” “네.” 주고받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이븐은 그 말 이후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샤미안도 말없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 앞에서 달려가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면서 필사적으로 고삐를 쥔다. 샤미안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투명한 느낌이 드는 개암 빛 눈동자는 더욱 빛을 더했고, 매끄러운 뺨은 흥분한 나머지 붉게 물들었다. 지금의 샤미안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격렬한 분노였다. 자신은 이렇게 남편의 곁에 있다. 이렇게 함께 달리며 함께 싸울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최상의 선택이었고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였다. 애비 역시 그렇게 말했다. 이것만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고. 서로 도우며, 질이 위험할 때에는 자신이 질을 지키겠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정정당당한 행동만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승리를 얻기 위해서 때로는 비겁한 짓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잘 알고 있다.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다. 만일 자신이었다면. 혹시 자신이 남편과 억지로 헤어져...., 경멸하고 싫어하는 남자에게 제공된다면.... 샤미안은 안장 위에서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아마도 살아 있을 수 없겠지. 자신만이 아니다. 애비도, 라티나도,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은 평범한 유부녀가 아니다.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의 부인-왕비다. 그런 왕비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열한 수단을 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적은 없지만 이븐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 똑바로 앞만을 노려보는 흔들림 없는 등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왕비와는 친밀한 사이였다. 아직 왕비가 아니었을 시절부터, 발도우의 딸로 불리던 소녀 시절부터 그 영혼을 잘 알고 있었다. 타우 기슭에서 델피니아의 전선 기지가 되어 있는 자하니까지는 약 100카티브. 그 거리를 이븐은 약 10시간 만에 주파했다. 크고 작은 검으로 무장하고 활을 등에 찬데다 원정에 필요한 식량이나 기타 물품까지 가지고 이 정도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경이적이라기보다도 무모한 짓이었다. 보통 행군이라면 싸울 여력을 남겨두고 이동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가장 중요했다. 자하니를 목표로 달려온 것은 타우만이 아니었다. 정규군 병사들도 속속 도착했다. 말을 묶어둘 말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븐은 자신의 말을 샤미안에게 맡기고, 몸을 추스를 시간조차 아까운 듯이 바로 장군에게 달려갔다. 성주의 방에는 먼저 찾아 온 손님이 있었다. 발로와 나시아스가 도라 장군을 앞에 두고 막 회의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막 도착한 듯, 이븐과 마찬가지로 땀과 먼지투성이였다. 코랄에서 헤어진 것이 사흘 전. 겨우 사흘 만에 제각각 대군을 이끌고 이 자하니 요새에서 재회한 셈이 된다. 자하니를 책임지고 있던 도라 장군은 국왕이 자리를 떠나게 된 전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 했다. 왕비를 적국의 왕자에게 빼앗기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의 국왕이 처한 상황자체가 큰 문제였다. “병사 한 명도 대동하지 않고 적국에 잠입하시다니....”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나시아스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를 그렇게까지 몰아세운 탄가야말로 증오해야할 대상입니다.” 이런 때라도 라모나 기사단장의 조용한 언행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사람이 보기 드물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게다가 발로 경이 즉위라고?!“ 장군의 목소리에는 비난의 울림이 섞여 있었다. 비상사태라고는 하지만 해도 될 짓이 있고 안 될 짓이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인 동시에, 그렇다면 그 왕위를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힐문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기회에 이대로 차지할 생각이 아니냐는 듯한 질문에 발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형님은 델피니아의 국왕이며 제 주군입니다. 실제로 이런 수단은 형님이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요. 저는 형님이 짜낸 연극에 가담해서 국왕이라 칭하고 있지만, 절대로 제가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득을 보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시아스가 한 말처럼 이것 밖에 방법이 없었지요. 아무리 기상천외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법적으로 죄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현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도라 장군께서도 이해하실 테지요.” 이 말에 도라 장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신속무비를 신조로 하는 틸레든 기사단이다. 왕좌가 탐났다면 훨씬 예전에 행동을 일으켰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가 국왕이라고 외쳐봤자 위법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도 없다. “그렇군. 발로 경으로서는 상당히 조악한 왕좌 탈환 극이 되겠군....” “모반을 할 거라면 더 우아한 방법으로 할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형님은 맨 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적국 한 가운데에 있지요. 일각이라도 빨리 군대를 끌고 가야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순 된 얘기지만 ‘국왕’뿐입니다.” “비르그나에도 군대를 보내셨다고 했나?” “예, 핸드릭 백작이 얼마나 버텨주실지, 재상이 얼마나 빨리 산세제리아를 함락시켜줄지 말 그대로 확률은 반반입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제가 국왕이라면 무서워서라도 이런 도박은 못합니다.” 이븐도 말을 거들었다. “저는 저대로 이 가짜 폐하가 진짜 폐하께 왕관을 반환하는 걸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장군은 그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알겠소이다. 지금은 발로 경이 국왕이고,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따르겠소.” 이렇게 되어 군대는 자하니에 주둔하고 있던 로아 측 세력과 합류해 보나리스로 출발했다. 국왕이-지금은 적지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델피니아의 진짜 국왕이-자신들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3장 그 날 보나리스 성은 농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병사가 대폭 증원되었기 때문에 성의 비축 식량을 더 늘려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증원 부대도 물론 물자를 가지고 오지만, 모든 일은 완벽하게 대비해두는 편이 좋다. 그리하여 농가에서 밀이나 사료를 조달하게 되었다. 조달이라고는 해도 강제 징발은 아니다. 정식으로 대금도 지불했다. 이것은 조라더스의 방침이었다. 탄가의 국왕은 용서가 없고 가열 찬 성격이지만, 상업을 보호하고 농민들을 구슬리는 방침 역시 뛰어났다. 세금은 물론 징수하지만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필요한 물자를 입수할 수 있는 동시에 농민들도 기뻐하며 국왕에게 감사하게 만들 수 있으니 이런 때에는 충분히 여유를 두며 채찍은 치워두고 당근을 구사하는 것이다. 농민 쪽에서도 돈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제 발로 나서서 식량과 물자를 제공한다. 인근 주민들이 차례로 성에 찾아왔다. 보리와 밀, 건초에 야채 등을 산더미처럼 실은 짐차가 줄을 잇는다. 장작이나 면화, 벌집과 약초가 담긴 바구니를 지고 걸어오는 농부도 있었다. 바깥문에는 감시를 맡은 병사가 있어서, 농민들이 가지고 온 물품을 조사해서 뭐가 얼마나 들어왔는지를 기록한 용지를 건네준다. 그 단계를 거친 뒤, 농민들은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물품을 정해진 장소로 옮겼다. 사료는 마구간, 장작은 장작더미, 곡식과 야채, 술통은 지하의 저장고 등등. 성의 각 장소에도 병사들이 서서 그건 저리로 옮겨라, 저건 여기에 쌓아라 등등 거만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외부인인 농민들이 뭔가 수상한 짓을 하지 않는 가 감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상한 짓을 하는 농민은 한 명도 없었다. 지극히 얌전히 시키는 대로 일하며, 가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면 처음에 받은 종이를 쥐고 지정된 장소에 세워진 창구로 이동해 자신이 들고 온 물품에 상응하는 대금을 받고서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간다. 하루 종일 그런 작업이 계속되었고, 해가 저물 무렵에야 성의 문이 닫혔다. 외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당연한 말이지만 몇 명의 농민이 성안에 들어갔는지, 또한 몇 명이나 밖으로 나갔는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 안은 병사로 가득했다. 병사들의 눈을 피해 이동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에 남아있을 농민도 있을 리가 없다. 백 명이 들어갔으면 백 명이 나갔을 거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인식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옳겠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예외가 있었다. 밤이 되고 성 전체가 정적에 휩싸이자 본성의 저장고 구석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 안을 가득 메운 병사들의 눈을 지금까지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그 사람은 조용히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코랄 성은 3중의 성벽 중심에 본성이 있지만, 이 성의 경우는 본성과 부성이 각각 따로 세워져 있다. 그 두 개의성곽이 접한 곳에 다리가 걸려있다. 물론 본성에는 외부로 직접 통하는 통로가 없고, 밖으로 나가려면 먼저 부성으로 이동한 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곳은 본성 쪽의 외부 정원. 본성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 정원의 중심에 해자가 있고, 그 안 쪽에 다시 성채가 세워진 것이다. 성곽 외부에도 이중으로 수로를 파두었으니, 보나리스 성은 삼중의 해자에 싸여 있는 셈이 된다. 외부 정원의 해자에는 도개교가 설치되어 있고, 다리 건너편의 문에는 철 격자까지 붙어있다. 방문한 사람이 수상한 인간이 아닌지 문지기가 확인한 뒤에야 격자를 올리고 다리를 내려 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장고에서 빠져나온 인물은 다리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옷과 구두를 벗어 뭉친 후 머리 위에 고정시키고 조용히 해자로 들어가 소리 없이 본성의 벽까지 헤엄쳤다. 살짝 몸을 틀어, 짐을 등 쪽으로 돌리고, 맨손으로 돌 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달빛 아래에서 맨 몸이라면 눈에 띄기 쉽겠지만 몸에 딱 붙는 얇은 검은 옷이 몸을 숨겨주었다. 놀랄 정도로 가볍게 벽을 오른 뒤, 경비가 주위를 순찰하는 틈을 타 벽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병사 두 명이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듯, 돌 벽을 기어 올라온 사람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재빨리 이동하는 것조차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통로 아래에 병사들의 숙소가 있다. 그 지붕위로 조용히 뛰어내려 다시 지상에 착지했다. 그제야 본성의 내원에 내려선 셰라는 호흡을 가다듬고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옷을 꺼냈다.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은 완전히 젖어 있었지만, 상관없이 그 위에 옷을 걸친다. 언제나 애용하는 검은 옷, 눈에 띄는 머리는 지금까지 계속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셰라가 잠입한 목적은 왕비가 잡혀 있는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가능하다면 오늘 밤 안에 데리고 나오고 싶지만, 그게 무리라면 최소한 상황만이라도 확인해 두고 싶었다. 잠입하기 전, 국왕은 셰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캐리건 일행을 걱정하는 왕비의 마음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도 사로잡힌 몸이면서 다른 포로를 걱정해봤자 소용없어. 불이 난 건물 안에 남겨져서 자칫하면 타 죽기 직전까지 몰린 주제에 옆집에 불이 옮겨 붙을까 걱정하는 거나 다름없지. 먼저 본인이 안전한 장소로 피난하는 게 우선이야. 탄가가 왕비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왕비도 기사단원도 풀어줄 생각 따위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왕비를 우선 되찾는다. 단원들은 그 다음이야.” 셰라 역시 그 의견에 전면적으로 찬성이었다. 왕비가 자신의 의지로 적진에 남아있는 거라면 우선 탈출하도록 설득하라는 것이 국왕의 지시였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성 안의 상황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살펴오라는 명령도 함께. 탑은 횃불의 불빛을 받아 마치 작은 산처럼 뚜렷하게 어둠 속에 떠올라 있었다. 탄가 남부 방위의 핵심이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성으로 들어가려면 이중의 해자에 놓인 다리를 건너 부성에서 본성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나가야만 한다. 그렇게까지 해봤자 겨우 본성의 외부 정원에 들어설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도개교와 격자를 지나야 간신히 본성의 내원에 도착한다. 셰라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본성의 내원이었다. 이제 남은 건 탑의 현관 뿐 이었지만, 그 곳에도 강철 격자가 가로 막고 있다. 이 관문 양쪽에는 물론 경비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셰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원에는 마구간, 가축 축사, 장작더미, 병사들의 수소 등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소동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돌파하기는 쉽다. 어딘가에 불을 지르고 병사로 변장한 뒤 정문으로 달려가 불을 끄는 데 와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굳이 부탁하러 가지 않아도 불을 보면 온 성이 당황하고 일어나 즉각 격자를 끌어올리고 진화 작업을 하러 뛰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소용이 없다. 오늘 밤은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절 수 없이 다시 벽을 오르기로 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대패로 밀어놓은 나무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성벽도 실제로는 사람이 돌을 잘라 쌓아놓은 만큼 모양이 안 맞아 여기저기 틈이 생기곤 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미약한 요철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틈새에 의지해 높은 성벽 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셰라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공교롭게도 하늘에는 달이 떠 있다. 달빛을 피해 그늘에서 그늘로 이동하면서 조금씩 탑을 향해 달려갔다. 그늘에 숨어 충분히 주위의 기척을 살피면서 막 벽을 오르려고 손을 댄 그 순간-. “안녕?” 등 뒤에서 인사가 날아왔다. 목덜미에 숨결이 끼쳤나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덤으로 엄청나게 느긋한 목소리.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본능적으로 단검을 쥐었지만 분명히 셰라가 아는 목소리였다. 주저하며 뒤를 돌아본다. 농가 청년 같은 차림을 한 루가 성벽을 올려다보며 셰라 쪽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여기, 올라갈 거야?” 머리를 싸쥐고 싶었다. 이 사람의 기척을 전혀 깨닫지 못한 자신의 미숙함을 질타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몰아세웠다. “어떻게 여기에 계시는 거죠...?!” “그야 셰라처럼 해서. 한 사람보다야 두 사람인 편이 낫잖아.” 이 얼마나 뻔뻔스러우리 만치 당당한 태도란 말인가. 이쪽이 기력을 잃고 멍하니 서 있자, 루는 ‘그럼 가볼까’하며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셰라는 기겁을 하며 루의 몸통에 매달려서 억지로 끌어내렸다. “안 됩니다! 초보자한테는 너무 위험해요!” 가능한 한 목소리를 낮추며 고함을 질렀다. 스스로도 참 불가능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한 편, 벽에 매달린 자세 그대로 지면까지 끌려 내려온 루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평했다. “잠깐, 막 벽을 오르려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쪽이 더 위험하잖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제 일입니다. 부탁이니 제게 맡겨주세요.” “그래도 큰 상관은 없지만, 지금 저 문으로 가서 난 나갈 거니까 열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냐?” 지극히 옳은 의견이다. 이런 성채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야간에는 외출이 금지되어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부 인으로 보이는 인간이 내보내달라고 해봤자 들어줄 리도 없다. 수상한 인간은 즉시 체포해 그대로 투옥해 심문하겠지. 셰라는 조심스럽게 상대를 살폈다. “저처럼 해서 들어오셨다고요?” “응, 장작을 지고 농가에서 옷을 빌려서.”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계셨던 거죠?” “저 해자 건너편에 있는 건초 보관소 안” 경악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부성 쪽에 숨어 있다가 지금 이렇게 본성의 정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게다가 여전히 성 전체가 정적에 잠겨 있다는 것은.... “해자를 헤엄쳐서 건너고 성벽을 기어올라 여기까지 오셨다는 겁니까?!” “응, 셰라가 먼저 올라가는 걸 봤거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멍청함에 수치를 느끼면서, 새삼 눈앞의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절대로 보이는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깎아지른 성벽을 맨손으로 오를 수 있을 지가 없다. 생각해보면 그 왕비가 자신의 파트너라고 부르던 인간이다. “임금님도 이건 셰라 일이니까 맡겨두라고 했지만....” “폐하는 어디에 계시지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이 덩치로 나무는 몰라도 성벽 오르기는 무리일 테니까, 라던데.” “아니, 그 분이라면 벽이고 뭐고 문제없이 오르시지만....”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겠지. 이 곳은 탄가에서도 거대한 축에 속하는 요새니까 임금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 발각 되기라도 했다가는 왕비 구출 운운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셰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은 우수한 전사이지만, 그런 만큼 이런 은밀한 잠입에는 맞지 않는다. 이런 일에는 전장에서의 용맹함과는 다른 종류의 재능이 필요했다. 두선 국왕도 왕비도 햇빛 속에 있는 편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그들에게 걸맞은 화려한 무대에서 활약해주어야 한다. 그 대신 어두운 부분은 자신이 맡는다. 그것이 셰라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당신도 기다리고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조금 신경 쓰이는 카드가 나와서.” “리에 대해서 말인가요?” 이 사람의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보나리스가 경계를 강화할 거라는 사실도, 오늘은 농민들로 가득하니 아무 문제없이 잠입할 수 잇을 거라는 사실도 모든 것이 이 사람의 점 대로였다. 하지만 정작 왕비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만은 도저히 점칠 수가 없는 듯, 본인도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긴 머리를 셰라처럼 천으로 가린 루는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잘 모르겠어. 셰라는 알겠어? 여기에는 말이지- 검은 태양이 있어.” 말문을 잃었다. 한여름이 다 되어가는 이 계절에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전신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이 거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옳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셰라가 잘 알고 있다. 이론이 아닌 본능으로. “우리 편은 아니지만 적도 아니야.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그 아이를 구출하는 열쇠도 돼.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널 혼자서 보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따라왔어.” 셰라는 심호흡을 했다.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낮게 대답했다. “실례입니다만, 해석이 틀렸습니다. 그 자는-적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 편도 아닙니다.” 우리 편은 아니지만 적도 아니다. 적은 아니지만 우리 편도 아니다. 비슷하게 들리지만 그 의미는 굉장히 다르다. 셰라는 제비꽃 색 눈동자에 열기를 띠며 성벽을 노려봤다. 그럼 반츠아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 사람은 그 남자의 함정에 빠져 적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또 하나의 점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 남자가 그 사람을 여기에 가뒀습니다.-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응, 처음엔 그랬지.” 셰라는 저도 모르게 루를 돌아보았다. 험악한 표정이 사라지고 기묘한 의문이 셰라를 점령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처음엔 죽일 생각이었어. 그건 분명해. 그런데 지금은 그런지 어떤지가 애매하거든. 거기에는 뭔가 셰라가 관계있는 것 같은데?” 둔한 통증이 스친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평생을 지고 가야할 깊은 상처. 하지만 지금은 그 고통을 뿌리쳤다.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 확실히 이상했다. 그 남자가 일족의-백작의 명령으로 그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백작도, 일족도 이미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의 점이 맞는다면 그런데도 그 남자는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표적의 신병을 확보하고서도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셈이다. 그 남자에게도 소식은 전해졌을 텐데, 그 남자는 죽지 않았다. 최후의 임무(왕비의 목숨을 빼앗는 것)를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면 임무를 포기했든가...? 어느 쪽도 일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문이 끊임없이 소용돌이 쳤지만 이미 대답은 나와 있었다. 검은 성령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자는 일족이라고 할 수 없다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본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물들어버린 인격 조작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당연히 백작의 지배도 받지 않았으며, 백작이 죽었다고 뒤를 따르지도 않았다. “루.” “응?” “아무래도 저 혼자서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간결한 질문이다. 너무나 간결해서 오히려 대답하기가 더 어려웠다. “당신이 말한 검은 태양은...너무 위험합니다. 그 사람조차 고생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지요.” “그건 대답이 안 되는데. 그것과 셰라가 혼자서 가는 게 무슨 상관이지?” 이 또한 어려운 질문이었다. 성벽 구석에서 셰라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가장 킅 이유는 이 사람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다. 그 남자와 싸우는 것은 무리다. 셰라는 겁쟁이도 아니고, 왕비를 구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각오도 되어 있지만, 그런데도 사실은 사실. 기껏해야 발이나 조금 묶어둘 수 있을 뿐이리라. 어떻게든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할 수 밖에 없지만, 최악의 상황도 예상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물론 이 사람을 그런 위험한 상황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그 밖의 이유도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의 셰라에게는 거기까지 명확하게 말로 표현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했다. “저는 당신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이 슬퍼할 겁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난 그 아이를 절대로 울리지 않아.” 다시금 경악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자신이 지금 적진에 잠입해 있고 기척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뻔했다. 기가 막혀서 뚫어져라 상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만 상대는 태연자약할 뿐이다. “하지만... 그, 그 사람은..., 울거나 하지 않습니다.” “응, 보통은 그렇지.” 짧은 대답과 함께 셰라를 향해 생긋 웃는다. “서두르자. 어물거리다가는 날이 샐 테니까.” “루, 부탁이니 제 얘기를....” “혼자서 찾는 것보다 둘이 찾는 게 빨라. 이 성, 상당히 넓잖아?” 아무리 설득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셰라는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돌벽을 붙잡았다. 마을에서 받은 훈련은 적어도 육체의 단련이라는 점에서만은 훌륭했다.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쑥쑥 올라간다. 이 벽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올라볼 맛이 있을 정도로 높았다. 상당한 높이를 기어올라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셰라의 호흡도 거칠어 있었다. 성곽의 네 구석에 테두리가 뾰족하게 솟아있는 탑이 보였다. 탑이라기보다도 별관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릴 만한 규모의 건물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셰라는 처음부터 이 탑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가둬두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 “정말 넓네.” 루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국왕의 권위를 내보이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셰라도 작게 대답했다. 옥상의 중앙에 거대한 주 탑이 서 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이 곳 밖에 없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군데군데 촛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복도 끝은 어두웠다. 이미 이곳은 보나리스 성의 가장 깊숙한 내부. 셰라가 생각했던 대로 루의 움직임은 엄청났다. 특별히 의식해서 하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전혀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로 곁에 있는데도 숨결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기척을 숨기고 어둠 속에 녹아든다는 점에 있어서는 왕비 이상으로 뛰어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충분히 전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셰라는 말했다. “일단 갈라지지요. 아마도 탑일 겁니다. 저는 남쪽과 동쪽의 탑을 찾아볼 테니....” “난 북쪽과 서쪽이네.” “어쨌거나 하나만은 다른 탑보다 경계가 엄중할 겁니다.” “그럼 나중에 여기서 다시.” 다시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두 사람은 제각각 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셰라는 우선 남쪽 탑의 입구로 이동했다. 얼핏 살펴보자 최상층은 무기고였다. 활과 화살, 석궁, 갑주 등이 주르륵 늘어서 있다. 그러나 탄가의 중장기 병이 자랑하는 방패와 창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곳에 있는 무기는 원거리용이다. 옥상으로 달려 나와 성벽 안쪽의 통로로 이동해 성곽을 향해 쳐들어오는 적에게 무기를 발사하는 것이다. 탈출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의 체력만 만전의 상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옥상을 통해 성벽의 통로까지 이동한 뒤, 성곽 밖으로 뛰어내려도 상관없다. 단, 이곳의 성벽은 코랄보다 훨씬 높다.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는 코랄과는 달리 이 성채를 지키는 것은 성벽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이래서는 그 사람도 뛰어내릴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뛰어내리는 게 무리라고 하더라도, 평소의 왕비라면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여기에 있다면 그런 예상도 단순한 희망에 불과하게 된다. 혹시 왕비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이 성에서 데리고 나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먼저 왕비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남쪽과 동쪽을 자신이 맡은 것은 둘 중 하나에 왕비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근거가 아닌 감응, 지금까지 임무 도중에 몇 번이고 느껴봤던 감이었다. 그러나 정작 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층 내려가 보았다. 위층과 마찬가지로 무기고와 창고가 있었지만 여기에도 입구는 없다. 다시 한 층을 내려가자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에서 잔치라도 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척을 느끼고 셰라는 그늘에 몸을 숨겼다. 병사 두 사람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셰라의 눈앞을 지나갔다. “언제 일어나는 걸까....” “덕분에 매일같이 술잔치니 좋잖아.” “하지만 전하도 상당히 초조해하시는 것 같던데, 원래부터 성질이 급한 분이고.” 그런 대화가 들려왔다. 왕자가 아직 그 사람을 건드리지 못했다는 말에 살짝 안도했다. 동시에 ‘언제 일어나는 걸까’라는 말이 걸렸다. 즉 왕비는 계속 잠들어 있다는 말이 된다. 그 남자가 여기에 있다면 그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왕비에게 몰래 약물을 먹일 수는 없지만, 인질을 방패로 내세워 스스로 마시게는 할 수 있다. 또한 그 남자라면 왕비조차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약물을 조합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병사는 셰라가 막 내려온 계단으로 올라갔다. 경비를 교대하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후 두 병사에 대해서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남쪽 한 귀퉁이에 견고한 철문이 있었다. 묵직해 보이는 자물쇠가 걸려있다. 철사 하나로 금방 열어버린 뒤, 흥분을 억누르려고 노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암흑, 조명이 전혀 없었다. 어둠에 익숙한 셰라의 눈은 위로 뻗어있는 나선 계단을 발견하고 재빨리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탑 내부는 3층, 각각 방이 있지만 왕비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인기척 자체가 없다. 빈 탑인 것이다. 셰라는 혀를 차고 재빨리 물러났다. 정체 모를 위기감이 끓어올랐다.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불안이 점점 현실로 닥쳐왔다. 성벽의 네 귀퉁이에 서 있는 탑이 수상하다. 그 정도는 밖에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성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였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반응이 전혀 없는 것이다. 셰라는 밀정으로서 자신의 감각에 자신을 가지고 있다. 우수한 사냥개가 냄새를 감지하는 것처럼, 그것이 암살할 상대든 구출할 상대이든 간에 같은 건물 안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방향이 느껴진다. 기척이 느껴진다고 해도 좋다. 설령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있다고 해도, 그만큼 존재감이 있는 왕지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일일까. 자신의 감각이 둔해진 게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했지만, 이 보나리스 보다도 훨씬 광대한 아비용 성에 잠입해 오론 왕의 침소까지 그 사람을 안내했던 자신이다. 요크 성에 숨어들어 리리아 왕비를 기다릴 장소를 지시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암살을 실행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잠입할 장소의 난이도나 경비를 고려해 볼 때 예전보다도 실력은 훨씬 향상했다. 더욱 격렬해지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동쪽 탑을 향해 달려간다. 도중에 발아래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쪽이 연회장인 듯 했다. 나젝크 왕자는 매일같이 결혼식 축하라는 명목 하에 주연을 열고 있다. 아까 병사의 말로 미루어 봐도 왕비는 틀림없이 여기에 있을 터. 동쪽 탑의 입구를 발견하자 그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벽에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병사 두 명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문 옆에 서 있다. 조용히 다가가 귀를 기울여 봤다, “감시도 이젠 필요 없다고 하던데....” “그래도 만일에 대비해서란다. 조심이 너무 지나친 거 아냐?” 그런 대화가 들려왔다. 셰라의 온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지금까지 느끼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격렬한 흥분을 느낀다. 그대로 뛰어나갈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탑에 침입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아마도 왕비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겠지. 단순한 추측이지만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일단 루와 합류하는 편이 낫다. 국왕과도 상의해서 왕비를 무사히 데리고 나올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리 없이 옥상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성 안이 조용하다고는 해도, 여기저기에 경비가 서 있는데도 이렇게 들키지 안ㅎ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셰라의 기술과 감각 덕분이었다. 최상층까지 올라와 약속한 장소를 향해 은밀하게 이동했다. 물론 충분히 조심하면서. 귀퉁이를 돌 때나 복도를 횡단할 때에는 특히 신경을 기울여 주위의 기척을 확인한 뒤 움직였다. 일류 행동원은 벽 반대편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있고 뭘 하고 있는지를 소리보다도 기척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그때도 셰라의 감각은 근처에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복도를 도는 순간 눈앞에 있던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만 것이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게다가 촛불을 받아 떠오른 얼굴은 하필이면 제일 만나고 싶지 않던 상대였다. 놀란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 셰라를 보고 눈을 치떴다. “허어?” 감탄한 듯한 목소리, 여기까지 잘도 들어 왔네 .하고 인사라도 할 듯 여유가 넘치는 태도였다. 그러나 셰라 쪽의 긴장감은 엄청났다. 곧바로 뒤로 뛰며 무기를 움켜쥐었지만, 무기를 쥔 손이 싸늘해지는 것을 싫어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선제공격을 할 것인가, 아니면 도망칠 것인가.... 지금 자신에게는 사명이 있다. 왕비를 구출 해야만 한다. 최종 목적을 위해 일단 물러나는 것은 절대로 수치가 아니다. 승산이 없는 싸움으로 목숨을 잃는 쪽이 훨씬 더 어리석은 짓이다. 단 하나의 문제는 이 남자가 자신을 순순히 도망치게 해줄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재수 없게도 셰라의 등 뒤에서 다른 기척이 접근해왔다. “군사님?” “무슨 일 이십니까?” 셰라는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치고 있으니 한 눈에 발견하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 곧바로 오조가 바뀌었다. “앗, 그 자는?!” “침입자?” 식은땀이 흘렀다. 등 뒤의 병사들을 처치하고 있다간 눈앞의 남자에게 당해버린다. 그렇다고 이 남자를 상대로 싸우면서 시간을 끌게 되면 뒤에 있는 녀석들이 고함을 질러 사람을 부를 것이 뻔하다. 셰라가 판단을 망설인 짧은 순간, 레티시아가 먼저 움직였다. 가는 몸이 갑자기 자세를 낮게 숙였고, 셰라의 곁으로 바람이 스쳤다. ‘어?!’ 저도 모르게 돌아본다. 셰라의 반사 신경도 보통 사람 이상이다. 눈앞에서 그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돌아봤다. 그러나 등 뒤를 본 셰라의 눈에 비친 것은 느긋하게 서 있는 남자의 등과 그 발치에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두 병사의 모습이었다. 이미 죽어 있었다. 셰라는 망연자실해서 굳었다. 그 경악이 신음이 되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한 걸까. 이 남자는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신음소리조차 없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자신의 등 뒤로 뛰어가 두 사람을 죽였다. 그것만으로도 믿기 어려운데 베었는지 찔렀는지, 어떤 무기로 죽였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한이 들었다. 지금 이 남자에게 있어서 설의 병사들은 아군일 텐데, 어째서 아군을 죽였느냐 하는 의문보다도 먼저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셰라도 이런 종류의 기술에는 숙련된 인간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들과 다르다, 결정적으로 다르다. 진짜, 태어나면서부터의 살육자. 과연 인간에게 이런 짓이 가능한 걸까.... 그 생각이 셰라의 온 몸을 꽉 묶어두고 있었다. 귀족 청년 같은 차림을 한 레티시아는 셰라를 돌아보고서 기가 막힌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머리 나쁘구나?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이럴 때에는 얼른 도망치는 거야.” 가볍게 턱짓을 한다. “봐, 금방 다른 놈들이 오잖아.”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한 밤중, 조용한 성안이다. 아까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건지도 모른다. “왜 날 놔 주는 거지...?” “그건 아까까지의 얘기, 지금은 그렇게 안 되겠어. 놔줬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곤란하거든.” 언제 어떻게 꺼내든 건지 남자의 오른 손에서 가는 단검이 빛나고 있었다. 아까는 자신을 보내주기 위해 병사를 죽여 놓고서 지금은 몰래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입을 막기 위해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제 멋대로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오히려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 난 어느 쪽으로 굴러가도 상관없으니까.” 고양이 같은 눈은 변함없이 즐겁게 웃고 있었다. 셰라는 공격 자세를 취했다. 설령 명백하게 실력에 차이가 나더라도, 승산이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 등을 돌리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베어버리겠지. 공격을 받아내기는 더욱 어렵다. 남은 수단은 단 하나,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다가 적이 움츠리는 순간을 틈타 도망치는 것이다. 납 구슬을 연속으로 던졌다. 암살자로서 셰라의 기술은 절대로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아니, 일족의 수장인 파로트 백작까지 쓰러뜨렸으니 가장 우수하다고 해도 좋다. 일련의 동작으로 단숨에 일곱 개를 던졌다. 명중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설마 혼신의 힘을 다한 자신의 공격이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적이 육박해온다. 피하려 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남자의 손에서 빛나는 단검이 자신의 몸을 찌르는 영상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셰라의 몸은 예상치 못하던 방향으로 밀려 튕겨 나갔다. “읏-?!” 벽에 부딪힐 뻔하다가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셰라가 서있던 곳에 루가 있었다. 오른 손으로 레테세아의 오른팔을 끌어안으면서, 왼손에 쥔 단검을 레티시아의 뒷목에 대고 있다. “괜찮아?” 웃는 얼굴로 대답하려던 셰라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위험한 향기가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 투둑, 돌바닥위에 검은 얼룩이 퍼져간다. 이 심야의 촛불 아래에서는 새까맣게 보이는 얼룩이지만 대낮에 보면 어떤 색보다도 선명한 붉은 색이겠지. 레티시아가 아니다. 루의 피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레티시아의 일격을 자기 몸으로 막아낸 것이다. 셰라를 밀쳐낸 무방비한 자세로, 아마도 그대로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이 살육자의 팔을 붙들어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하지만 오른 손으로 오른 손을 잡은 상황에서 레티시아는 등을 루에게 돌린 자세였지만 왼쪽은 완전히 자유로웠다. 붙잡힌 팔은 상관도 하지 않고 앞으로 뛰쳐나가며 루의 등으로 돌아 목덜미의 검을 뿌리치면서 아무렇게나 왼손을 휘둘렀다. 레티시아 정도의 숙련자라면 좌우 어느 쪽 손도 지장 없이 쓸 수 있고, 그런 사실을 전제로 옷에 무기를 장치한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단검이 루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고, 또다시 피가 튀었다. 새하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루는 물러서지 않았다. 재빨리 몸을 돌려 이번에는 정면에서 레티시아를 공격했다. 레티시아가 왼 손으로 루의 손을 붙잡았다. 상처투성이의 루도 왼 손으로 다시 레티시아의 오른쪽 팔을 붙잡았다. 멍하니 얼어붙어 있던 셰라도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이 사투리에 동참하려 했다. 그러나 루가 셰라를 막았다. 고개를 저으며 셰라를 제지하고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다. “도망쳐.” 자신은 이미 움직일 수 없으니 셰라 만이라도 탈출하라는 말이다. “못합니다...!” “도망쳐.” “루!” “빨리, 네게는 사명이 있잖아!” 사람들의 기척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발견되어 셰라까지 붙잡혀버리면 누가 왕비를 구할 수 있을까. 레티시아는 아직 루에게 붙잡혀 있었지만 저항을 그만둔 상태였다. 피로 얼룩진 루의 얼굴이 씨익 웃는다. “가라고. 이 녀석의 호의가 쓸모없어지잖아.”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이 남자만은 죽여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루와 레티시아의 몸은 따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밀착해 있다. 게다가 레티시아는 상처 하나 없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봤자 이 남자라면 루의 몸을 방패로 셰라의 검을 막아버릴 것이다. 심한 무력감을 느끼면서 셰라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반드시....”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반드시 그 사람을 구해낼 테니 용서해 달라고, 거기까지는 도저히 말로 나오지 않았다. 격한 수치심에 휩싸여 절을 하고 달려갔다. 셰라가 도망치는 것을 확인하고 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투성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검을 떨어뜨리고 레티시아의 팔을 놓으며 그 자리에 주르륵 앉아버렸다. 머리를 가리던 천이 떨어져 긴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도, 온몸 여기저기에도 피가 튀어있다. 호흡은 거칠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창백해진 피부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누가 봐도 숨을 거두기 직전의 위독한 상태였다. 자유를 되찾은 레티시아는 피에 젖은 검을 닦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싱긋 웃으며 헐떡거리는 루를 내려다보았다. 흥미와 수상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듯, 레테시아는 죽어가는 부상자에게 물었다. “너, 그거 진짜 몸이야?” 루는 미소 지었다. 검으로 베인 몸을 팔로 끌어안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일단은....” “죽기도 하고?” “아니, 안 죽어....” 간신히 벽에 기대어 자신을 찌른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루는 최후의 힘을 짜내어 말했다. “검은 태양...씨” “뭐야?‘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그럼, 이 몸..., 성벽... 바깥에 , 버려줘.” “굳이 부탁 안 해도,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시체를 안쪽 해자에 버리면 냄새가 심하니까.” 루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고마워....” 그것이 최후였다. 가슴 언저리를 누르고 있던 손이 털썩 떨어진다. 벽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레티시아와 셰라가 마주친 때로부터 지금까지, 실제로는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그제야 병사들이 달려왔다. 동료의 시체와 피투성이가 된 군사, 거기에 수상한 인물의 시체를 보고 경악하는 병사들에게 레티시아는 적당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수상한 침입자가 병사 두 명을 죽이고 자신을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싸웠다고. “오오....” “과연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하지만 이 침입자는 대체 어디를 통해서....”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곳은 본 성 성곽의 최상층이니. 아직 젊은 남자, 그것도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긴 머리를 지닌 청년이었다. 병사 세 명은 이 시체의 신원을 조사하기 위해 의복을 뒤지고 몸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었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레테시아는 루의 손에서 떨어진 단검을 조사하고 있었다. 손을 대려 하지 않고, 단검 끝으로 툭툭 건드리면서. 마치 독거미나 독사를 놓고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죽은 척하는 건지 확인 하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피에 젖은 검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소리를 울리며 돌바닥 위를 좌우로 미끄러질 뿐. 주우려고 손을 뻗었던 레티시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병사들은 시체를 살피는 데 열중하느라 레티시아의 낌새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레티시아는 병사들 쪽은 보지도 않으면서 평소 그대로의 어조로 말했다. “그 녀석, 숨은 끊어졌지?” 병사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니 못했다. 다시 한 번 똑같은 질문을 받고서야 당황하며 시체의 목에 손을 대어보고 눈꺼풀을 열어보았다. “맥도 없고 동공도 열려 있습니다. 죽었는뎁쇼.” “혹시 모르니까 완전하게 숨통을 끊어.” “예? 예....” ‘이미 죽어 있는데 뭐 하러’라고 생각하면서도 병사는 장검을 빼들고 침입자의 심장을 힘껏 찔렀다. 검을 뽑아도 피가 뿜어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시체였다. “이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전하나 성주님께 보여드릴까요?” “필요 없겠지. 살아있다면 심문이라도 하겠지만 시체는 놔둬봤자 썪을 뿐이야. 전하의 축하연을 방해할 생각도 없고, 내가 나중에 보고하지.” “알겠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성 밖에 버려버려. 그 쪽의 두 명도 같이.” “예” 전선의 요새에서는, 어지간히 신분이 높은 장교가 아닌 이상 따로 묘 따위를 세우지 않는다. 적당한 곳에 매장하는 것으로 끝이다. 이번처럼 침입자와 함께 같은 구멍에 매장되는 경우도 잇다. 병사 한 명이 떠메자 침입자의 머리카락이 길게 흔들리며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레티시아는 말했다. “그 머리, 묻어버리기는 아까운걸. 귀부인들이 보면 좋아하겠어.” 신분이 높은 여성들의 미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새하얀 피부는 물론이고 선명하고 짙은 눈썹, 깨끗한 눈매, 풍성한 머리카락도 그 대상이었다. 특히 머리카락은 점점 변해가는 복잡한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분량이 필요해진다. 자기 머리카락만으로 해결이 죄는 귀부인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불행하게도 그리 머리숱이 많지 않은 귀부인들은 색이 비슷한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덧붙여야 했다. 그래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는 처녀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곤 했다. 때로는 시체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경우도 있었다. 오싹하기 짝이 없는 얘기지만, 신분이 높은 여성들에게는 질이 좋은 머리카락을 입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 그 머리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분명히 이 정도의 머리는 상당히 보기 힘들지만, 이거 남자 아닙니까?” “질만 좋으면 문제없어.” 그렇게 말하며 레티시아는 대수롭지 않게 시체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았다. 그러면서 병사들 몰래 작은 칼로 머리카락을 한 줌 잘라내었다. “촉감이 멋져. 상당한 상등품이 나오겠는 걸.” “노예들이 기뻐하겠군요.” 시체 세구가 옮겨지고, 레티시아는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바로 조금 전에 잘라낸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다시 한 번 단검의 자루를 쥐어본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는 묵직한 철괴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것이 지금은 손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여 준다. 신중하게, 잘못 건드리면 터지기라도 할 것 같은 손놀림으로 단검을 주워 피에 젖은 칼날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리고 검 집을 찾았다. 검 집은 핏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보통은 검 집과 검을 양 손에 들고 합치는 법이지만, 레티시아는 검 집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검 집을 바닥에 둔 채, 검을 검 집으로 가져가는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검을 검 집에 넣었다. 완전히 들어간 후, 만족스러운 미소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단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감고 있던 머리다발을 꼼꼼하게 묶어서 소중하게 품 안에 보관했다. 어느 성에나 하수구 청소 등의 더럽고 힘든 일을 전담하는 최하층 신분의 인간들이 존재한다. 시체를 매장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다. 병사 두 명과 침입자 한 명의 시체는 성곽 1층으로 옮겨져 경비병의 손에서 두 여자 노예의 손으로 인계되었다. 노예들은 먼저 병사의 시체에서 쓸만한 것을 남김없이 벗겨 냈다. 갑옷이나 허리띠는 물론이고 옷과 신발까지. 그리고 작은 손수레에 세 구의 시체를 싣고 성 밖으로 향했다. 본성의 문지기도, 외성의 문지기도 이를 막지 않았다. 시체를 바깥에 버리겠다는 데 말릴 이유도 없다. 밤중이기는 하지만 철창을 올리고 도개교를 내려 손수레를 통과시켰다. 수레가 지나간 뒤 다시 다리를 올린다. 노예들은 다음 날 아침에 들여보내면 그만이다. 그럴 만큼 지금부터 할 작업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노예들은 수레를 밀고 끌며 다리를 두 개 건넜다. 보나리스는 분지에 세워진 성으로, 주위는 여름풀이 우거진 초원이다. 두 여자 노예는 적당한 곳에 수레를 멈추고 준비해 온 삽으로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그래도 묻어주기까지 하는데 원망은 못하겠지.” “그럼, 그럼. 전쟁이 심해지면 해자에 던져 넣고 끝인데.”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두 병사의 시체를 구멍에 던져 넣는다. 이제부터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젊은 남자의 시체는, 결이 곱고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것까지 묻어버릴 거야 없지.” “오랜 만에 한 벌이 하겠는데.” 두 노예는 시체를 지면에 눕히고서 머리 양쪽 옆에 주저앉아 한 가닥 한 가닥 머리카락을 뽑기 시작했다. 이것을 상인에게 팔면 상당한 돈이 들어온다. 잘라내는 것도 상관없지만 하나하나 뽑는 편이 가공하기가 훨씬 쉬웠다. 이 노예들에게 시체의 머리칼을 뽑아낸다는 음침하기 짝이 없는 작업을 끔찍하게 여길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열심히,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해를 받았다. 무성하게 우거진 풀 숲 사이에서 뭔가가 소리도 없이 뛰어나와 노예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뒷목에 타격을 받고 그대로 기절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둘 모두 갑자기 뛰쳐나온 인간의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만일 확인 할 수 있었다면 그 의외의 모습에 경악했으리라. 가는 체구에 피부가 하얀 아름다운 소년. 셰라였다. 셰라는 성곽에서 탈출한 뒤에도 본성 안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성에서 여기까지 수레의 뒤를 따라왔다. 철창이 올라가고 다리만 내려와 있으면 문지기의 눈을 피해 다리를 건너는 것 따위는 손쉬운 일이었다. 노예들을 기절시킨 뒤, 셰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체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시체는 참혹한 몰골이었다. 옷도 신발도 노예들이 벗겨내 얇은 옷 한 장만 걸치고 있는, 나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심한 상처. 심장을 찌른 자국이 있었다. 처음에 당한 상처도 굉장히 깊었다. 그런 상처를 입고서 잘도 저 남자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셰라는 소리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함께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지금은 이런 모습이 되어있다. 그것도 자신을 도망치게 하기 위해. 그저 얼굴이나 좀 알 뿐인데 어째서 이 사람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감싼 것일까. 얼굴은 깨끗한 채였다. 그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작게 기도를 올린 후, 셰라는 루의 시체를 업고 숲을 향해 뛰어갔다. 최소한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고 싶었다. 사람 하나를 업은 채로 셰라는 날아갈 듯이 빠르게 달렸다. 시체가 가벼웠던 덕도 있었지만, 곧바로 숲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매장을 하려면 숲 속이 좋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풀이 우거지고 꽃이 피며, 주위를 수목이 둘러싸고 있는 조용한 장소여야 한다. 시체를 업은 채로 밤의 숲 속을 뒤지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달빛을 받아 수풀이 빛나고 있었다. 셰라는 일단 시체를 눕힌 뒤 풍성한 검은 머리를 손에 쥐었다. 시체를 되찾으려고 결의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사람의 유품을 왕비에게 건네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노예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머릿결이었다. 잘라내기는 아깝지만, 이 사람의 유품을 남기자면 이것 밖에 없다. 등의 반 정도 높이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머리채를 잘 묶어 품에 넣은 뒤 셰라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고 와서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람의 무덤이다. 불편한 도구로 하는 작업인지라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흙은 부드러운 편이었다. 마침내 충분한 깊이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남은 것은 시체를 구멍 안에 넣고 매장하는 것 뿐. 셰라는 지금까지 작업을 하는 도중 계속 시체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한 숨 돌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흠칫했다. 루의 시체에 달빛이 새하얗게 비치고 있었다. 눈부실 정도로 밝은 달빛 때문일까, 얼굴만 보면 마치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다. 온 몸 여기저기에 있는 상처만 아니라면.... 특히 가슴의 상처가 심했다. 심장을 찌른 깊은 일격. 자신을 감싸고 대신 입은 상처 역시 상반신을 비스듬히 베여 그러고도 용케 즉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던 그 생생한 상처-가 사라진 뒤였다. 설마. 시체의 상처가 사라질 리 없다. 착각일 지도 모른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각하면서도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옷이 크게 찢어져 있는데도 그 아래의 피부에는 상처가 없다. 적어도 아까 확인했던 것처럼 심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를 봉합한 흉터처럼 희미하게 붉은 선이 남아있을 뿐. 셰라의 눈앞에서 시체의 가슴이 천천히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떨리며 손끝이 꿈틀거린다. 잠을 자다 자세를 뒤척이는 것처럼 어깨가 움찔거린다. 그것은 이미 시체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죽어있었는데, 심장에 구멍이 뚫렸었는데, 완전히 소생했다. 오른 손이 천천히 올라와 가슴을 누른다. “아야야....” 한 숨이 섞인 목소리였다. 오른쪽 어깨가 툭 떨어지고 그 대신 목이 움직인다. 바로 조금 전까지 죽어있던 사람이 얼어붙어 있는 셰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놀랐어?” 셰라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한 인간이 아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손발은 경련하고, 주위의 풍경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체가 되살아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랍니다.” 창백한 얼굴로 루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그렇네....” 힘없는 목소리였다. 소생하기는 했지만, 지쳐서 일어날 수도 없는 듯했다. 지면에 누운 채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셰라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옮겨준 거야?” 성 안에서 쓰러졌을 텐데 지금은 숲 속. 그 차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듯 했다. “당신을... 묻어드리려고....” 멍청한 소리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셰라는 묻고 있었다. “당신은... 정체가 뭐죠?” “라덴거 루퍼세르미.” “인간...이 아닌 거죠?” “응” 이렇게까지 딱 잘라서 긍정해 버리면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입을 다물고 있자 루가 말을 꺼냈다. “너희들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야. 난 말이지. 거기에서 분리된 존재니까....” “시간의 흐름을 지배받지 않아요?” “응“ “그건..., 그건, 불로불사라는 뜻입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그럼, 그... 그 사람도?” “그 아이는 아냐. 너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속에 있지. 성장하고 나이를 먹고 몇 십 년 뒤면 죽어.” “하지만, 하지만 그 사람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라덴. 인거죠? 그런데 어째서....” “그건 말 야, 이름만 같은 거야.” “......?” “라덴거 그린디에타- 라의 일족의 그린디에타. 그 아이가 여덟 살 때 일족이 부여한 이름이야. 형식만, 이름만 그렇게 받은 거지.” “.......” “정말은 동료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네?!” “그러니까, 이름만이 아니라 정말 불로불사의 몸으로 만들 수도 있었어.” “그런, 그런.... 그런 일이..., 어떻게....” 말을 못 잇고 있자,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푸른 눈이 셰라의 얼굴을 직시했다. “죽지 않는 사람에게 물리거나 피를 빨리거나 하면 그 사람도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된다. 이 세계에는 그런 전설 없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굳은 채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새하얀 손이 지면 위를 별개의 생물처럼 기어서 셰라에게로 뻗어온다. “그렇게 해줄까...?” 셰라는 뒤로 펄쩍 뛰었다. 완전히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몸이 멋대로 반응해버린 것이다. 전신에 거부 반응이 휘몰아친다. 셰라의 몸은 그 이상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상대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려 한 것이다. 멋대로 날뛰려는 자신의 몸을 의지로 간신히 붙들었다. 그 반동으로 땀이 줄줄 흘렀지만 간신히 바라는 대로 몸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거리를 두고, 낮게 몸을 숙이며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는 것과 함께 말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지금 하신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 “하나도 안 아파. 금방 끝나는데.” “아뇨.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무서워?” “그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전... 안됩니다.” 호흡이 가빠왔다. 단련된 심폐 기능이 충격을 채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왼쪽 가슴의 고동은 터질 듯한 기세로 맥동했고, 피는 피부 아래의 혈관을 타고 빠르게 흘러갔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존재, 인간이 아닌데도 인간인 척하고 있는 존재,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이다. 자객으로서의 셰라의 본능은 바로 공격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오른 손은 그 명령에 따라 단검을 꽉 쥐고서, 금방이라도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 움직임을 억눌렀다. 이 사람은 자신을 구해주었다. 설령 죽지 않는 존재라고 해도, 곧바로 살아날 수 있다고 해도, 지금 현재 이렇게나 약해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손해를 각오하면서 셰라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저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특히... 그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는 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헐떡이면서 필사적으로 말을 짜낸다. 그러는 동안에도 청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달빛을 새하얗게 반사하는 피부와 부드러운 사지를 지녔으면서도, 그 얼굴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성령들에게서 밖에 볼 수 없던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몸을 굳히고 있는 셰라를 향해,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한다. “그건, 셰라가 아직 젊으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저는... 지금은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언젠가 저 편에서 만나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라 칭했던 백작에게. 그 남자에게. 풀밭에 누워 있던 루는 즐거운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 아이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은 죽어서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그 여자?”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가 죽었거든.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된다고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다른 사람 말은 도저히 안 들으니까.” “......?” 얘기의 요점이 전혀 파악 되지 않는다. 루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동작이 둔했다.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레티시아에게 당했을 때의 출혈도 심했던 데다 격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셰라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 아니, 바로 조금 전까지는 죽어 있기까지 했다. 소생은 했다고 해도 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손 좀 빌려주지 않을래?” 셰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생명의 은인이라고는 해도 직접 만지는 데에는 저항감이 들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아무 짓도 안한다니까요. 약속해요.” 묘하게 존대 말을 쓰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진지한 얼굴로 다짐을 받는다. “정말로, 그,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거지요? 물거나 피를 빨거나....” “아아, 그건 거짓말.” “거짓말!” “사람 하나를 시간의 흐름에서 떼어낸다는 건 엄청난 일이야. 여러모로 준비도 필요하다구. 그리 간단히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뻔뻔스러우리 만치 내뱉는 말을 듣고 셰라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엄청나게 기분 나쁜 예감이 든다. 눈앞의 인간은, 어쩌면 그 사람의 동류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실로 오싹한 예감이 전신으로 퍼져갔다. “저기... 그렇지만 되살아날 수 있을 정도면 상처도 낫는 게 아닌가요?” “응 심장의 구멍은 간신히 막힌 것 같은데, 피를 너무 흘려서 힘이 없어.” 머리가 쿵쿵 울려왔다. 심장에 뚫린 구멍의 상태를 자기 입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인간이 설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는.... 현기증이 났다.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 주저하면서도 손을 빌려주려고 했다. 그 순간 셰라는 누군가의 기척을 감지했다. 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순식간에 셰라는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청년을 양 손으로 안아 올려 소리 없이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 곳에 루를 앉혀놓고 검을 꺼내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흐르는 듯이 매끄러운 동작이었다. 접근해오는 기척은 상당히 숲에 익숙한 듯했다. 그다지 기척을 죽일 필요도 느끼지 않는 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온다. 나타난 사람을 보고서 셰라는 긴장을 풀었다. 국왕이었다. 안도하는 기척을 느꼈는지 국왕은 태연하게 셰라 쪽으로 걸어와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군.” “예....”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어? 만나기로 한 장소하고 다르잖아. 굉장히 찾아다녔다고.” 바로 조금 전 까지 숲을 지배하던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셰라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펑펑 울면서 깔깔 웃고 싶었다. 이 사람은 흔들림 없는 ‘현실’ 그 자체였다. 국왕에게 매달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국왕은 그런 셰라의 표정에 놀란 듯했지만, 큰 나무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는 루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된 거야. 부상을 당했나?!” “부상이 아니에요. 아까까지 죽어 있었는걸요.”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뚜렷하게 들렸다. 국왕의 눈이 휘둥그fp 졌다. 셰라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이 시선을 보낸다. 셰라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국왕은 감탄한 듯이 말했다. “그거 편리하겠다고 해야 하나...?” “그다지 편리하지도 않아요. 아픈 건 아픈 거고, 회복도 쉽게 되지 않고, 눈을 떠봤더니 땅 속에 시체하고 같이 있는 경우도 종종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말하며 머리에 손을 짚는다. 여자 노예들이 머리를 뽑은 부분의 두피가 아파서였을 지도 모르지만, 곧 이상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어라, 머리?”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가슴에 간신히 걸칠 정도로 짧아진 것이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셰라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맛보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품으로 전해드리려고 제가 잘랐습니다.” 품에서 머리다발을 꺼내어 주저주저 내민다. “이건데... 어떻게 할까요?” 죽었던 인간 본인이 자신의 유발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고 있다. 국왕은 성 쪽을 살피면서 물었다. “그래서, 왕비는 어디 있지?” “동쪽 탑입니다. 단, 상황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최악입니다.” 셰라는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왕비는 약으로 잠들어 있는 것 같고, 아마도 포로가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약을 투여 받은 것 같다고. 얘기를 들은 국왕도 생각에 잠겼다. “그럼 아무리 왕비라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겠군.” “예, 게다가 그 남자까지 있으니....” 셰라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파로트 일족이라 칭하는 이들은, 셰라가 알지 못하는 기술을 사용하며 셰라가 알지 못하는 약초를 다룬다. 성곽에 들어가서도, 탑 아래까지 갔어도 왕비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으로 미루어 봐도, 그저 잠들어 있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사 상태에 가까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루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걱정하지 말고 데리러 가요.” 국왕도 셰라도 진지하게 루를 돌아봤다. 국왕이 조용히 물었다. “뭐라고?” “데리러 가라고요. 왕비님은 눈을 떴습니다. 자기 발로 나올 거예요.”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지?” 양 발을 아무렇게나 뻗고 주저앉아있는 청년은 웃으면서 자신의 찢어진 옷을 가리켜 보였다. “이거죠.“ “.......” “이 상처에 그 아이가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어요.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국왕의 표정이 변했다. 이 청년은 왕비의 부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알 수 있는 사이라고 했다. 루는 입 안에서 반지를 밷았다. 언제나 몸에 걸고 다니던 은반지였다. 셰라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입 안에 숨겨두셨나요?” “안 그러면 뺏겨 버리니까. 시체의 소지품 중에 돈이 될만한 건 벗겨내는 게 전쟁터의 상식이잖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셰라가 놀란 것은 이 사람이 지금까지 반지를 입에 머금은 채 아무 지장 없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루는 반지를 깨끗하게 닦은 뒤 국왕에게 내밀었다. “이거, 그 아이한테 줘요.” 성 안에 있는 왕비에게 대체 어떻게 - 국왕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반지를 줘서 뭐가 어떻게 되느냐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묻지도 않았다. 반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네.“ “오른 손에 끼라고 말해요.” “응?” “오른 손에 끼라고 해요. 그럼 알아들을 테니까.” “그렇게 전하지. 라비경은 어쩌겠나?” 루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어설 수 없어요. 나중에 가죠.” “그런데, 머리카락을 몇 올 얻을 수 있을까?” “에?” “이걸 화살에 매다는 데에 쓰고 싶은데.” “으아, 이러다 정말 대머리 되겠네....” 루는 양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모르는 사이에 상당히 뽑힌 것 같다구요. 아까부터 머리가 따끔거리는 걸요.” “노예들의 짓입니다. 바로 멈추게 했습니다만 돈벌이가 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요.” 셰라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만큼 여유가 돌아온 것이다. 유품으로 삼으려던 머리다발을 국왕에게 내밀었다. “이걸, 쓰시지요.” “음.” 국왕은 바로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셰라도 그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루가 셰라를 불러 세웠다. “셰라.” “예?” “넌 서운 쪽ㄱ에 있어. 곧 저 성에서 큰 소란이 날거야. 특히 그 아이가 그 반지를 손에 넣고 나면 반드시 성문이 열릴 테니까.” 셰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의 자유 전사와 한 사람의 전직 자객은 제각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보나리스 성을 향해 뛰어갔다. 4장 리는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흐릿한 시야에 낯선 천장이 보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 뿐. 이 천장이 어디의 천장인지, 자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몸은 위를 보고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하게 여길 만큼의 의식이 사라진 것도 이미 한참 전의 일이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몸을 구속한 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놈들. 의식을 빼앗기고 기억까지도 빼앗길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격렬하게 분노하며 저항했다.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그럴 기력이 솟아나지 않는다. 죽는 거라면 그것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평소의 왕비답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눈에 비치는 건 천장뿐. 고정된 시야에 때때로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그 중에는 레티시아도 있었다.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때는 그나마 머리가 좀 맑은 편이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떠올려본 적도 없는 이름을 꺼냈다. “탄가의 나젝크 왕자. 그러고 보니 그런 녀석도 있었지.... 그 녀석이 어쨌다고...?” 2년 전에 한 번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다. 어떻게 생겼는지 따위는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원래부터 자신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에 남는 것은 오히려 기척과 냄새. 추억 속에서 그 녀석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서 모습을 바꾸고 향수가지 뿌렸는데.” 뭔가의 놀이..., 아니 내기였다. 검은 표범의 모습을 한 친구가 놀리면서 말했다. “아무리 네 코가 뛰어나도 그 녀석의 변신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거야.” 그 때 자신은 분명히 열 살인가 열한 살 정도. “그럴 리 없어.” 발끈하며 대답했다. 그럼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자고 인간들의 파티에 데려오고 말았다. 정장 차림의 남녀 수 백 명이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꽃들이 장식되어있고, 자신이 듣기에도 기분이 좋은 음악이 흐른다. “네 파트너도 이 안에 있어. 파티가 끝날 때까지 찾아내면 네 승리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까지도 인간 남자 모습을 하고 인간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자아이 취급을 받는 건 짜증나지만 인간의 옷은 여자용이 예뻤다. 남자는 모두 검은 색뿐이라 재미가 없었다. 이런 장소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검은 모피는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구별하기 힘든 인간들이 이렇게 왕창 모여서 전부 검은 옷까지 입고 있으면 완전히 항복할 수밖에. 전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색색의 옷을 걸친 여자들 쪽을 먼저 살피게 되었다. 이 쪽도 향수 냄새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그 다양한 색채와 화려한 장신구는 충분히 구경할 만했다. 여자들 중에 한 명, 명백하게 이채로운 사람이 있었다. 눈에 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온 파티장의 남성 및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 사람 주위만 떠도는 공기가 달랐다. 목에서 어깨까지의 선이 전부 드러난, 진주처럼 광택을 띠는 피부, 눈은 짙은 자주색, 틀어 올린 금발에는 은가루를 뿌렸다. 입고 있는 야회복도 눈동자 색에 맞춘 듯한 보랏빛. 금속 장식이 반짝반짝 빛났다. 치맛자락이 끌리는 소리도 좋았다. 얇은 드레스로 감싸인 균형 잡힌 몸은 여자들 전원이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일까. 완벽하기 까지 한 우아함 앞에 주눅이 든 걸까. 나자들 중 아무도 그 여자에게 춤을 신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은 굉장히 끌리는 눈치였지만 신청해봤자 받아들여줄 리가 없다고 아예 포기하고 있는 듯했다. 모습도 움직임도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녀석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냄새도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하지만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은 향긋한 냄새가- 날 뿐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은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주저 없이 말을 걸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배우도 맨발로 도망가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틀림없이 여자 목소리로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분위기도 바꾸고 눈하고 머리색까지 바꿨는데 어떻게 알았어?” “어째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내기는 물론 자신의 승리. 흑 표범도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그 뒤, 그 녀석과 흑 표범은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또다시 주위의 이목을 모았다. 인간의 얼굴이 잘났는지 못났는지는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누가 봐도 미남미녀의 조합일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부러웠다. 춤을 추고 싶다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키가 작다는 사실이 왠지 분했던 것이다. 그러다 몇 년 뒤, 여자 옷을 입고 지겹게 춤까지 연습하게 되었으니 산다는 것 정말 모를 일이다. ‘지금이라면 키가 어울릴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충격이 스쳤다. “---?” 정체모를 격렬한 통증에 온 몸이 흠칫 떨린다. 게다가 이것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 아닌 통증. 순식간에 왕비는 정신을 차렸다. 흐릿하던 시야가 눈 깜짝할 사이에 뚜렷하게 돌아왔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떠올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솟아오른다. 입에서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뭐야, 이건?!” 절망과도 비슷한 불안감, 그리고 누운 자세 그대로 추락하는 것만 같은 불쾌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식은땀이 흐른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산 채로 동상이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왕비는 필사적으로 몸부림 쳤다. “뭐야, 지금 통증은?” 딱 한 번, 예전에도 딱 한 번 이런 기분을 맛본 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그 녀석이 총을 맞았을 때. 힘없이 허공에서 춤추며 떨어졌다. “설마... 여기 있는 거야?!” 그리고 부상을 입은 걸까. 그 녀석은 언제나 자기 몸을 아낄 생각은 않는다. 어차피 죽지도 않으니까 괜찮다면서. 장난이 아니야. 루의 몸은 다른 일족과 비교해서 굉장히 충격에 약하다. 몸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정신 쪽이었다. 갑작스럽게 심한 통증을 느끼거나 참혹하게 죽거나 해서 루의 정신이 심한 타격을 입는다면.... 수십 년, 어쩌면 수백 젼 동안 잠들어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왕비는 이를 빠드득 악물었다. 아무렇게나 뻗고 있던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평소의 왕비라면 곧바로 뛰쳐 일어났겠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사로잡혔을 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왕비 자신은 이미 완전히 파악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거의 한 달 내내 강제적으로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람의 몸은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지금 왕비의 몸은 마약에 잠식당해 있다. 이렇게 쇠약해진 몸으로는 전투는 물론이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생물의 몸은 때때로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움직일 때가 있다. 지금의 왕비가 그랬다. 음식을 먹지 않아도, 마약이 몸의 기능을 빼앗아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야만 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달려라.” 그것이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 늑대는 모두 그렇게 행동한다. 달릴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 그렇다면 일어나야만 한다. “달릴 수 있는 한은 싸워.” 그렇게도 말했다. 무엇과 싸우는가. 움츠러드는 자신의 의지와. 왕비는 먼저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온 몸 구석구석에 힘을 보내며, 신체를 활성화 시킨다. 부족한 영양분 대신 기력을 쥐어짜서 유일한 원료로 삼아 자신의 몸을 되살린다. 되살아난 후각이 기분 나쁜 냄새를 감지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냄새 중 하나, 술에 취해 자제심을 잃어버린 남자의 체취였다. 잔치가 슬슬 막을 내릴 무렵, 나젝크 왕자는 문득 생각난 듯이 왕비가 있는 탑으로 왔다.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는 했지만, 원래 성질이 급한데다 항상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왕자는 왕비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뻔뻔스럽게도 자신을 거절할 생각인 거라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식이 없는 여자라도 상관하지 않고 그냥 건드려버릴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항하는 여자를 힘으로 억누르는 것도 맛이지만, 나중에 정신을 차린 여자가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얼굴도 볼 만할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실실 웃음을 짓는다. 동쪽 탑의 입구로 가자 거기에 서 있던 병사들이 왕자를 보고 경례했다. “보초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예, 이것은 성주님의 명령으로....” “흥, 조심스럽기도 하지. 신부의 방은?” “예, 마찬가지로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방의 열쇠는 성주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열라고 해. 지금 당장.” 동쪽 탑은 제일 아래에는 병사들이, 그 위층에 왕비의 시중을 드는 여자들이 대기하고 제일 위층의 방에 왕비가 잠들어 있다. 거기로 올라올 때까지 왕자는 상당히 술을 많이 마셨지만 발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본래부터 술이 센 편이었다. 의식이 돌아온 눈동자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뭔가 위험한 빛을 띤 눈이었지만 완자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호오, 눈을 떴나. 마침 잘 됐군.” 기분이 들떠 침대 가에 앉으며 신발을 벗어 던졌다. 왕자는 한 손으로 왕비의 턱을 잡아 고개를 치켜 올렸다. 왕비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싸늘하게 왕자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귀염성 없는 여자로군.” 이제부터 맛볼 즐거움을 생각하자 왕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지만, 입을 맞추려 고는 하지 않았다. 혀라도 물렸다가는 큰일이니, 그보다도 그 전에 할 일을 썩 해치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넌 출신이 분명치 않다더군. 집안은 물론이고 부모 이름도 댈 수 없다든가.” “.......” “다른 나라에서는 몰라도 우리 탄가에서 그런 천한 인간이 탄가 왕가의 일원으로 포함되는 건 정말로 이례적인 일이야. 노예에나 걸맞은 주제에, 아버님의 온정으로 내 부인이라는 지위가 주어지는 거다. 감사하도록 해.” 검 집을 풀어낸 뒤, 왕비 위에 올라탄 왕자는 왕비의 치맛자락 사이로 손을 쑤셔 넣어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너 같은 말괄량이는 절대로 사양이지만 이것도 왕가에 태어난 자의 사명이니까.” 말은 불만스럽게 하면서도 왕자의 콧김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매일 같이 검을 휘두르고 팔다리도 다 드러낸 채 말을 타는 여자이니 어차피 몸도 뻣뻣하고 피부도 거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탄탄하게 잘 조여졌으면서도 예상 외로 탄력이 있는 몸에, 매끄럽고 고운 피부는 손가락에 착착 달라붙는 맛이 있었다. 덤으로 매력적인 향기까지 났다. 옷섶을 쥐고 억지로 끌어 내린다. 가녀린 어깨와 팔의 일부가 완전히 노출 되었다. “내 자식을 낳아. 그게 네 의무다.” 나젝크 왕자는 흥분도 숨기지 않고 그렇게 말하면서 조급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옷을 풀어 헤치고 하얗게 솟아오른 가슴에 매달렸다. 그 때까지 왕비는 나젝크 왕자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허벅지를 마음대로 쓰다듬어도, 남자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와도 가만히 있다가 왕자가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는 순간 왕자의 귓가에 나직하게 말했다. “너, 누구 허락으로 날 만지는 거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분노도 짜증도, 두려움도 경멸도,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왕비를 잘 아는 사람들이 이 목소리를 듣는다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젝크 왕자는 얼굴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흥, 곧 그런 소리도 지껄이지 못하게 될 거야.” 건장한 몸 아래에, 왕비의 가는 몸이 완전히 깔려 있다. 이 자세에서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처음부터 힘으로 여자가 남자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시 탄력 있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 감촉을 느긋하게 맛보려던 나젝크 왕자는 갑자기 절규하며 펄쩍 뛰어 올랐다. “너..., 이년!!” 비명을 지르는 왕자의 얼굴이 피에 젖어 있었다. 왕비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려고도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피투성이의 살 조각을 뱉어냈다. 나젝크 왕자의 왼쪽 귀였다. 상체를 일으킨 왕비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잘 들어, 쓰레기. 날 만져도 되는 인간은 내가 정한다.” “이 년이!” 격노한 나머지 왕자의 눈에 핏발이 서고 이마에는 혈관이 솟아올랐다. 왼쪽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왕비를 향해 덤벼든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 집을 주우려 하지 않았던 것은 비무장 상태의 여자를 벨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럴 만큼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혹은 왕비를 죽여 버리면 부왕에게 질타를 듣게 될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나젝크 왕자는 맨 손으로 왕비에게 덤벼들었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팔을 왕비가 붙잡았다. 몸의 위치가 바뀌면서 벽을 향해 왕자의 몸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나젝크 왕자의 건장한 체구가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벽에 격돌한 것이다. 엄청난 소리가 탑 전체에 진동했다. 이렇게 되면 복도의 보초도 주인의 규방이라고 모른 척 할 수 없게 된다. 병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왕비는 바닥에 떨어져있던 나젝크 왕자의 검을 주워 경비병들을 밀쳐내며 복도로 뛰어나왔다. 겨우 그것뿐인데도 왕비의 호흡은 끊어질 듯이 거칠었다. 예상 이상으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멈춰 서지는 않는다. 그대로 나선 계단을 뛰어 내려왰다. 제각각의 방 앞에는 조금씩 공간이 트여 있다. 2층 앞까지 내려오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여어, 일어났어?” 왕비는 헐떡이며 검을 축 늘어뜨렸다. 녹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며 남자를 노려봤다. “아까 말이지, 이상한 게 왔었어.” “.......” “아무리 봐도 성령인데 실체를 갖고 있는 거야. 이런 걸 들고 있던데.” 레티시아의 품속에서 그 단검을 꺼냈다. 왕비의 안색이 벼했다. 아니, 기척 그 자체가 바뀌었다. 흐트러진 머리가 곤두서면서 전신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녹색의 불꽃이 솟아오른다. 검은 머리의 청년이 육체를 가진 성령이라면 왕비는 사람의 모습을 한 짐승. 자세가 낮아진다. 눈이 더욱 위험한 빛을 띠었다. 검을 내던지지 않았던 것은 계단에서는 검 쪽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래로 내려갈 때에는 네 다리의 움직임이 제한된다. 사람으로서의 전투 법은 버리지 않았지만 왕비의 의식은 완전히 짐승으로 돌아가 있었다. 간신히 혀를 움직여 말했다. “내놔.” “싫은 걸.” 그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왕비는 말없이 덤벼들었다. 공격을 피해낸 것도 기적이건만 레티시아는 어떻게 한 건지 왕비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대로 등을 돌리고 나선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왕비는 재빨리 몸을 돌려 뒤를 쫓았다. 3층 경비병 두 명이 죽어 있었다. 아까 왕비는 밀쳐내기만 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으니 분명히 그 남자의 짓이다., 나젝크 왕자는 아직도 방구석에 기절해 있었다. 덕분에 살해당하지 않았던 셈이지만. 왕비는 그 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남자의 뒤를 쫓아 탑의 옥상까지 올라갔다. 이 곳은 보나리스 성 전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망루를 겸하고 있다. 레티시아는 왕비가 뒤쫓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러 끌어들였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싸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왕비가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망루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또 보자고.” 웃으며 그대로 뛰어내린다. 그 아래는 성곽의 옥상. 3층 정도 높이를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다시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왕비는 그 모습을 탑 위에서 바라보며 낮게 신음했다. 평소의 왕비라면 바로 뛰어내렸을 테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하늘을 본다. 아직 별이 반짝이고 있지만 한밤중은 아니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왕비는 절망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그 녀석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검까지 빼앗겨버릴 정도의 비상사태가. 여기에는 바다도 숲도 없다. 대지도 소용이 없겠지. 이런 인공물 아래의 땅은 죽어버린다. 남은 것은 하늘 뿐. 그 녀석을 만든 네 개의 요소. 대지, 바다, 숲 그리고 하늘. 하늘은 대기와도 통한다. 피부의 감각을 곤두세워봤지만 감각 자체가 둔해졌기 때문인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 녀석은 아니다. 그 녀석은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굉장히 그리운 목소리였다.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목소리. 눈을 치뜨며 주위를 둘러보려는 순간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서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바보 왕자가 다시 정신을 차린 듯하다. 아래층에 있던 병사들도 놀라 달려와 대 수색을 벌이고 있다. 조만간 여기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고 검을 문에 받쳐서 열리지 않게 고정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탑 내부에서 문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왕비 자신도 등을 문에 대고 힘껏 밀었지만 어차피 오래는 버틸 수 없었다. 그 때 국왕은 두 개의 해자 중 하나를 건너 본성의 탑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주위는 아직 어둠에 싸여 있다. 하지만 국왕의 눈은 탑 위에 서 있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의 윤곽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조용히 활에 화살을 메긴다. 거리는 약 200미터 정도. 바람은 거의 없다. 정예들이 모인 델피니아의 궁수들 중에서도 이런 거리에서 표적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국왕은 델피니아 최상급의 궁수였다. 보통 사람은 당길 수도 없을 정도로 팽팽한 현을 조용히 당긴다. 건장한 오른팔의 근육이 솟아올랐다. 신중하게 목표를 확인한다. 무심하게 쏜 화살은 공중을 가로질러 정확하게 왕비가 있는 탑의 지붕에 꽂혔다. 왕비는 문에서 떨어져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작은 것이 화살에 연결되어 있다. 국왕은 해자 가장자리까지 달려와 큰 소리로 외쳤다. “라비 경이 전해달래. 반지를 오른 손에 껴!” 왕비는 경악하며 국왕을 돌아봤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녀석이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이것을 오른 손에 끼라는 말은 곧 ‘그 힘’을 해방하라는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힘을 각성한 자신에게 그 녀석이 제일 먼저 가르쳤던 말이다. 특히 인위적으로 불가능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생명이 위험한 사태가 벌어져도, 사람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만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그것이 생물로서의 규정이라고. 아홉 살 때의 자신은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남자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포로가 된 지 거의 한 달,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다. 마약에 찌들어 피폐해진 왕비의 머리로는 그 이상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지붕을 향해 뛰어 화살을 붙잡았다. 그리운 반지는 검은 실 같은 것으로 화살대에 꽉 고정되어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사고 능력이 없어진 머리로도 분명히 일 수 있었다. 화살에 고정된 채 오른 손 가운뎃손가락에 끼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날아, 임금님이 있는 곳까지.’ 다시금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귀로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성채 바깥까지 그 거리를 날아가라고? 몸이 만전의 상태라고 해도 근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짓이다. “어째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힘을 쓰지 말라고 말리는 적은 있어도 쓰라고 시킨 적은 한 번도 없다. 문짝을 버티고 있던 검이 튕겨 나기면서 문이 부서졌다. 병사 한 명이 옥상으로 뛰어나온다. 왕비의 모습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성주님! 전하! 여기에 있습니다!” “붙잡아! 절대로 상처는 입히지 마!” “상관 말고 죽여 버려!” “고정하십시오, 전하!” 뮤렌과 나젝크가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뛰어나온 병사는 40세 전후의 건장한 남자였다. 그 뒤에 다른 한 명이 따라 나온다. 조심스럽게 검을 들면서 말을 걸어왔다. “행동이 지나치십니다. 비전하. 자.”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왕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망루의 벽을 넘어 순식간에 몸을 던졌다. 국왕은 지상에서 그 보습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왕비는 성곽 안 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향해 뛰어내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아래는 본성의 재원. 탑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것은 무리일 텐데. 지면에 떨어져 온 몸의 뼈가 조각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왕비의 몸은 말 그대로 하늘을 날아서 성벽 바로 바깥- 해자를 사이에 두고는 있지만, 국왕의 눈앞에 착지했다. 누가 봐도 절대로 인간의 몸이 낙하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하얀 드레스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새하얀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 내려오는 듯한 느낌으로. 국왕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동작도 부자연스러웠지만 뛰어내린 위치와 착지한 위치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날개로 공중을 날아서 이동한 게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 왕비는 자신의 눈 앞으로 이렇게 날아온 것이다. 경악하면서도 국왕은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내던지고 해자에 뛰어들었다. 다리까지 돌아서 건널 여유가 없었다. “리!!” 물에 쫄딱 젖은 채 왕비를 향해 달린다. 왕비는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지면에 무릎을 꿇고 양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어깨가 위 아래로 들썩인다.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이 말한다. “너, 왜 이런데 있어?” “바보야! 널 구하러 왔을 게 뻔하잖아!” 도와주러 온 보람도 날려버리는 말에 고함을 지르면서 축 늘어진 왕비의 몸을 붙잡아 세우려다 흠칫했다. 원래부터 국왕의 덩치에 비하면 작은 편이지만 너무나 가벼웠다. 몸에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국왕은 왕비를 안아들고 다시 해자에 뛰어들려고 했지만 그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너덜거리는 옷가지와 짧아진 머리는 아까 봤던 모습 그대로지만, 분명히 실체가 아니었다. 몸 반대편의 경치가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아니 우선 그 모습은 공중에 살짝 떠 있었다. “얘기라면 나중에 해줘! 지금은 바쁘다고!” 이럴 때마다 마법가의 사람들과 알아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국왕은 유령이 나타나서 춤을 추건 생령이 나타나서 욕을 하건 전혀 상관이 없었다. 말하는 해골이니, 이동하는 집이니 등등에 단련된 덕분이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소질도 있는 편이었다. 청년의 생령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들려, 왕비님? 성을 부숴.”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비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이 성을 부숴. 철저하게, 흔적도 남지 않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국왕의 팔에 안긴 채 왕비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해도 괜찮은 짓이 아니라고! 어떻게 된 거야! 아까부터 너 이상해!” “말다툼하고 있을 틈이 없어. 주저하고 있을 여유도 없고. 네가 이 성을 부수는 거야.” 손을 들어 뭔가 말을 하려는 왕비를 제지하며 루가 말했다. “좋은 걸 가르쳐 줄게. 틸레든 기사단 사람들은 아직도 사슬에 묶인 채 이 성 안에 있어.” 왕비의 안색이 변했다. 뚜렷하게 분노가 드러났다. “뭐...라고?” 한편 국왕도 신경 쓰이는 소리를 인식했다. 성 안이 일제히 소란해졌다.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를 외치는 목소리. 아마도 왕비를 붙잡으라고 명령하는 소리일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생령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왕비가 도망치면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어. 바로 처형당하겠지.” “.......” “델피니아의 군대는 여기 없어. 임금님은 혼자서 왕비를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이대로는 틀림없이 임금님까지 탄가의 포로가 돼. 아니면 살해당하겠지.” 병사가 나타났다. 국왕과 왕비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온다. 탄가 남쪽의 중추를 담당하는 요새 보나리스는 최소 천 명 이상의 군대를 갖추고 있다. 천 명이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아무리 국왕이 무적의 용사라고 해도 승산은 없다. “어쩌겠어, 왕비님.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거야? 아니면 규정을 깨고 돕겠어?” “리, 우선 도망치자.” 국왕은 싸울 생각이었지만 왕비는 혼자서는 설 수도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다. 생령에게 상관하지 않고 왕비를 안은 채 해자로 뛰어들려고 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해자의 바깥에 있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국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외벽 바로 바깥에 서 있었는데,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물이 가득 찬 두 개의 해자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달려오던 병사들도 충격을 먹었다. 눈앞에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해자 건너편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뭔가를 외친다. “이거..., 네가 한 거야?” 저도 모르게 물어봤다. 왕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억지로 국왕의 팔을 떼어내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다려, 리!” “떨어져 있어, 월.” “안 돼!” “말려들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 있어!” 바람 한점도 없는데 왕비의 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가녀린 등에서 녹색 불꽃이 솟아오른다. 이븐의 부상을 고쳤을 때 봤던 것보다 더욱 격렬하고 짙은 색이었다. 그 이상은 다가갈 수 없었다. 국왕은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아마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에 있는 인간들 중 누구도 본 적 조차 없는, 상식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시작 된다. 해자 바로 앞에서 왕비는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버티며 오fms 손을 쳐들었다. 손끝에서 번개가 날아갔다. 낙뢰와도 같은 굉음과 함께 탑의 일부가 날아갔다. 조각난 탑의 파편이 묘하게 천천히 우박처럼 성 안으로 쏟아진다. 말문을 잃고 얼어있던 국왕의 뇌리에 목소리가 울렷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조용한 목소리. 그러나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과 맺은 약속을 어기면, 그 때는 각오하라고!)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이 쪽으로 달려오려던 병사들이 저마다 안색이 변하며 발을 멈추었다. 아니, 발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모두가 이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한눈에도 새파랗게 질려 움찔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이제 와서 겁을 먹는다고 해도 전쟁의 여신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부서진 것은 성벽 상부였다. 보이지 않는 거인이 거대한 망치라도 휘두르는 듯이 벽이 팍삭 무너졌다. 마치 진흙이라도 비트는 것처럼 너무나도 손쉽게. 그 보이지 않는 거인을 왕비가 조종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걸로 보인다. 왕비는 꽉 쥔 두 주먹을 늘어뜨린 채 맨 발로 대지를 밟고 서 있다. 그 몸 주위를 질풍이 감쌌다. 절대로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다. 바람에 말려 올라가는 금발의 흔들림도 기묘했다. 마치 물 속에서 흔들리는 해초와도 같은 움직임. 하얀 드레스 자락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흔들리며 몸을 감싼다. 도저히 공기 중에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국왕은 그런 왕비에게 접근할 수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셰라가 안에 있어!” 왕비는 살짝 돌아보려다가 다시 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탑 하나가 더 부서진다. 이번에는 그 파편은 아래쪽으로 쏟아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던 거인은 주의 깊게 탑을 성에서 뽑아낸 뒤 곧장 통째로 던져버렸다. 본성과 부성을 잇는 유일한 다리가 날아갔다. 이제 본성에 있는 인간은 밖으로 도망칠 수가 없게 되었다. 주위는 전부 성벽에 둘러싸여 있고, 아까까지 다리가 있던 장소는 깎아지른 절벽이 되어버렸다. 본성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밖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리가 있던 부분에서 몇 사람이 구원을 청하며 뛰어내렸다. 그런데 너무 거리가 먼 데다 심하게 일어나는 모래먼지 때문에 뚜렷하게는 볼 수 없었지만 절벽에서 몸을 던진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거꾸로 떨어지지 않았다. 탑 위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낙하지점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던 아까의 왕비처럼 묘하게 천천히 지면을 향해 떨어지는-아니, 부드럽게 놓이는 듯이 보인다. 동시에 본성의 한 쪽에 구멍이 뚫렸다. 마치 농부가 논둑에 물꼬라도 트는 듯이 손쉽게 두꺼운 돌 벽이 푹 파인다. 그대로 필요 없는 돌을 밭에서 내던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벽을 잘라내어 버리러 간다. 목표 지점은 두 개의 해자. 성벽의 파편-이라기보다도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덩어리를 던져 넣을 때마다 하늘에까지 닿을 듯이 엄청난 규모로 물방울이 튀었다. 눈사태라도 일어나는 듯한 굉음과 아비규환의 비명이 이어졌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어떠한 공격에도 꼼짝도 하지 않아야할 성이 조금씩 무너지고 해체되어 간다. 그 때 셰라는 본 성으로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루가 말했던 대로 성 전체가 소란해지면서 성문이 열린 틈을 타 잠입해 부성 안에 숨어 있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성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지진인 줄 알았지만 지면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저 땅울림 같은 소리만 울릴 뿐. 그와 동시에 성 전체가 심하게 삐걱거렸다. “뭐, 뭐야?” “적의 공격인가?!” 그런 외침도 들려왔지만 단순한 공격으로 보기에는 적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군사들의 함성도, 말발굽이 울리는 소리도 없었다. 그 대신 압도적인 분노로 가득 찬 소리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셰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자기 혼자만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성 안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달려 나가려던 보병도, 말을 꺼내려던 마구간지기도, 전령 역의 하인 까지도 발을 멈추고 얼어붙은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바로 근처에서 산사태의 전조처럼 작은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진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창백해진 채 소리를 내는 것조차 잊고 불안에 떨며 주위를 돌아봤다.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도. 바로 그 때문에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갑자기 부성 중앙의 가장 커다란 전망대가 날아갔다. 마치 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후려친 것처럼 구조물이 사라지며 검물 전체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었다. “으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작은 돌덩이와 흙모래가 비처럼 쏟아진다. 점점 성벽에 금이 기면서, 엄청난 힘이 밖에서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하며 지상으로 피난했고,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미친 듯이 도망쳤다. 그리고 보았다. 전망대가 뜯겨나가고, 성벽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을. 공중에 떠오른 전망대가 보이지 않는 뭔가의 손 사이에서 찌부러지며 조각조각 부서져 해자에 버려지는 것을. 전원이 망연자실해 서 있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반대쪽 망루가 마찬가지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힘없이 성에서 뜯겨 나간다. “으아악!!” “도, 도, 도망쳐!”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 병사도 민간인도,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문만이 아니라, 성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서 미친 듯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다. 우선 살고 봐야 한다. 이런 상식을 초월하는 공격 앞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라는 건가. “처, 천벌이야. 발도우의 분노다!” 젊은 병사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그렇게 외쳤다. 축사에 숨어있던 셰라도 뛰쳐나왔다. 왕비는 의식적으로 성 안 쪽에는 흙덩이나 건물의 파편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는 듯하다.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벼락을 맞아 무너지는 건물을 본 적이 있다. 산사태나 순식간에 민가를 남김없이 쓸어버리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보나리스 성을 덮치는 힘은 전혀 달랐다. 엄청나게 강대하면서도 명백한 의지를 가지고 선별적으로 적을 부수고 있다. 셰라는 도망치는 병사의 머리 위로 한 아름은 될만한 돌덩이가 직격할 뻔하다가 공중에서 아주 잠시 멈추는 것을 보았다. 인간은 한 명도 죽이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러면서도 돌과 흙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건축물을 억지로 뜯어내며 부수는 것이다. 부서진 접합부에서 흙모래가 쏟아진다. 성안은 그런 먼지로 가득 하얗게 물들었다. 땅울림과 굉음, 사람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말도 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이 기괴한 광경에 놀라면서도 전혀 두렵지 는 않았다. 스스로도 아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들려, 셰라?) “---”?! 다시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에 발길을 멈춘다. 이번에는 자신에게만 들린 듯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난파선에서 탈출하려고 구명정으로 몰려드는 승객들처럼 변함없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다. (성곽 지하에 캐리건 일행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밀려드는 인파를 거꾸로 헤치며 본성으로 향하려 했지만, 다리가 없어진 상태였다. 부성에서 본성으로 가려면 이 다리나 성벽 정상- 방어벽 안 쪽을 타고 설치된 순회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순회로도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다. 발치를 살펴봤지만 이 곳은 성의 구조상 일부러 높이를 둔데다 도움닫기를 할 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부서지는 성 안에서 이 거리를 뛰어넘기란 무리에 가깝다. 해자를 내려다보고 주저하고 있을 때, 바위가 날아왔다. 조금 전까지 성벽의 일부였던 물건이다. 각이 깊어진 바위가 깊은 해자에 떨어진다. 그 옆으로도 바위가 낙하했다. 공중을 날아오는 바위와 흙덩이, 자잘한 성의 파편이 소리를 내며 해자를 매워 눈 깜짝할 사이에 다리가 생기고 말았다. 셰라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신이시여....” 그런 것 따위 믿어본 적도 없건만 무심결에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서진 성의 파편이 우연히 여기에 모여 쌓인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성과 부성을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분명히 다리였다. 파편이 쌓였을 뿐인 울퉁불퉁하고 위험한 다리지만, 일반인은 건널 수 없을지 몰라도 셰라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위를 건너 뛰어 본성으로 향한다. 본성의 성벽에도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요리사와 심부름꾼, 하녀들까지 여기저기에 뚫린 성벽의 구멍으로 기어 나왔다. 성곽의 모습은 완전히 변했다. 탑은 사라지고 건물의 한쪽 구석이 푹 파여 최상층과 무기고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무기고에 쌓여있던 갑옷과 활, 화살 등이 묘하게 천천히 지면으로 떨어져 공중에 훌쩍 뜬 채 옆으로 날아간다. 아까까지 건물이었던 것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중앙의 홀이 드러났다. 이만큼 파괴되었으면서도 책상이 멀쩡하게 놓여있다. 천장이 없어진 벽에 매달린 장막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이 쯤 되면 발이 움츠려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이런 힘이 인간을 향해 쏟아진다면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멈춰 서지는 않았다. 도개교를 지나 성곽으로 혼자서 돌입했다. 지하 감옥에는 밤낮의 구분이 없다. 하루에 한 번 주어지는 식사를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까지 짐작할 수 있을 뿐. 캐리건은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지하에 갇힌 후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일까. 목에 감긴 쇠사슬은 무겁게 어깨에 파고들었고, 축축하고 불쾌한 흙냄새가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 쇠사슬은 지면에 박힌 말뚝에 이어져 있다. 일정 범위 안에서 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포로가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흙 위에서였다. 아니, 배설까지도 이 사슬이 닿는 범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자신들이 배설한 분뇨의 악취 속에서 음식을 먹고, 또다시 배설하고, 그 옆에 눕는다. 사로잡힌 동료들과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어버렸다. 때때로 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지 마’라고 말하는 왕비의 얼굴도. 처음 사로잡혔을 때에는 이런 것 따위에 질 수 없다고 용기를 내었다. 동료들과도 서로 격려하며 힘을 북돋웠다. 며칠이 지나자 울며 소리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 잡혔다. 뿌리 쳐도 뿌리 쳐도 공포가 덮쳐왔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도, 굴욕적인 대우라도 언젠가 끝날 거라고 확신하는 한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캐리건은 알고 있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 5년, 10녀 이상 버려진 채 끝내 옥중에서 죽어가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다는 사실을. 그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았다. 마침내 공포에도 지쳐버렸다. 모든 것이 다 상관없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은 완전히 머리가 마비되어버렸다. 이상하게 흙먼지가 쏟아진다. 땅울림 같은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들려올 뿐, 어째서 그런 소리가 나는 건지 의아하게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언제나처럼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이상하게 여기면서 고개를 든다. 천사가 와준 걸까. 은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지하 감옥에 갇힌 이래 처음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나십시오. 당신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왜 은색의 천사가 화를 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눌하게 입을 연다. “못 일어나. 쇠사슬이....” “풀었습니다. 몸 어디에도 이상한 곳은 없습니다. 다치지도 않았지요. 자, 일어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생명을 구해주신 왕비님에 대한 의무입니다.” “왕비....” “그렇습니다.” “왕비.... 그렇지, 비전하는?” 저도 모르게 일어서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천장의 일부가 무너진다. 캐리건도, 쇠사슬에서 해방된 다른 아홉 명의 동료들도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광경을, 지하 감옥에 눈부시게 쏟아지는 got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성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성의 성벽도 간신히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작은 산처럼 솟아있던 성곽도 이미 원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왕비의 몸을 둘러싸는 빛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뽑아낸 탑과 망루를 향해 번개를 날리며, 성곽을 부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성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반 쯤 파괴된 건물을 완벽하게 부수려 하고 있다. 국왕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국왕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성이 붕괴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인간은 왕비의 남편이었다. 이쯤 했으면 충분할 테니 슬슬 왕비를 말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신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어도 왕비의 몸이 약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도 간신히 서 잇는 상태인 것을. 왕비에게 다가가려는 국왕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뒤를 돌아보자 루가 서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국왕도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섰다. 루는 아까까지 쓰러져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찬 걸음걸이로 왕비를 향해 다가갔다. 변함없이 왕비의 머리는 돌풍에 휘날리는 것처럼 흩날리고 녹색 불꽃이 전신을 감싸고 있다.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기척인데도 흑발의 청년은 주저 없이 다가가 뒤쪽에서 왕비를 끌어안았다. “자, 이제 그만.” 번개가 사라졌다. 휘몰아치던 머리카락이 사라락 가라앉는다. 그때까지의 참극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주의가 조용해지면서 왕비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청년이 왕비의 몸을 받아 안았다. 왕비의 몸은 등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청년의 팔에 기댄 채 간신히 서 있었다. 격노하며 나젝크 왕자를 거부하던 왕비가 이 팔에는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있다. 뒤에 있는 사람에게 힘없이 매달리면서 왕비는 말했다. “루퍼....” “응?” 그 간단한 대답에 왕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다행이다. 진짜야....” “가짜라고 생각했어?” “그치만, 이상한 소리만 하잖아. 힘을 쓰라느니, 성을 부수라느니....” 심하게 지쳐 있으면서도 왕비는 웃음을 지었다. 물론 진짜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너무나도 그 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헤어져 있는 사이에 성격이 변해버린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등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도, 기분 좋은 팔도, 향기도 기억 그대로였다. 한 쪽 팔로 왕비의 몸을 지탱하면서 루는 솜씨 좋게 다른 손으로 왕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잘했어. 착해. 아무도 안 죽였구나.” “죽일 거라면 내 손으로 죽여.”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말을 힘없이 내뱉는다. “그보다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불가능한 짓’ 인데” 두 사람의 눈앞에. 한 때 성이었던 건물의 잔해가 펼쳐져 있다. “괜찮아, 이걸로 잘된 거야.” “대체 뭐가 잘됐다는....” “그럼 묻겠는데, 그 예쁘게 생긴 형씨한테서 눈하고 팔을 빼앗아도 되겠어?” 청년의 품안에서 왕비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예쁘게 생긴 형씨’라는 말만으로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눈과 팔이라면 짐작 가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이븐 말이야...?” “곤란하잖아. 네가 일으킨 기적이 그것 하나뿐이라면 틀림없이 그런 얘기가 돼.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작은 기적이야. 원상복귀도 간단하지. 네가 준 눈과 팔을 다시 한 번 빼앗으면 돼.” “안 돼! 그 사람, 너한테도 임금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작은 기적뿐이라면 얼버무릴 수 있지만, 이만큼 엄청난 짓을 해버렸는데 은폐공작 따위 하는 것도 멍청한 얘기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네가 한 짓의 흔적을 지우려고 할 경우의 얘기지만, 다시 한 번 이 성을 세우고 해자에 물을 채워놓고서 목격한 사람들 전원의 기억을 조작해야 해. 확실히 그건 좀 무리겠지?” 남의 일처럼 말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 그리고 난 탄가의 임금님한테 볼 일이 있어.” “조라더스한테? 왜?” “죽일 거야.” 루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자님은 너에게 양보할 게 . 하지만 임금님은 안 돼. 내 손으로 죽인다.” “그건 상관없지만.... 그거하고 이게 무슨 상관인데?” “만 명의 군대가 밀려와도 꿈쩍도 하지 않을 성이 하루 만에 파괴됐어.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얘기를 부하에게 들은 임금님은 어떻게 할까? 델피니아의 월 그리크라면 아마 곧바로 믿으려 들지 않겠지. 파라스트의 오론이라면 조심하느라 절대로 접근하지 않아. 하지만 탄가의 조라더스라면....” 루는 유쾌하게 웃었다. “반드시 자기 눈으로 확인하러 올 거야.” 왕비도 웃었다. 일어선 채 일부러 뒤쪽으로 몸을 잔뜩 기대면서 어리광 부리는 것처럼 머리를 비벼댔다. “그 무지막지한 성격, 아직도 안 나았네.” “너도, 변함없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좋고 멍청해.‘ “거 미안하게 됐네.” 계속 등을 돌린 채 말하던 왕비는 그제야 몸을 돌려 거기에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계속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 얼굴이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안겨들었다. 루 역시 과장스럽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한 참 못 본 사이에 굉장한 미녀가 됐는걸.” 왕비는 쓴 웃음을 지으며 파트너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바보야. 네가 너무 늦게 온 거야. 덕분에 남자 따위하고 결혼까지 해버렸잖아.” “왜, 문제라도 있어? 좋은 남편이잖아.” “당연하지 안 그랬으면 연극이라도 결혼 따위 안 했어.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너무 늦게 왔다구.” 흑발의 청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왕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에디. 나도 물어보고 싶었어. 이것만은 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거든. 대체 넌 여기서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거지?” 왕비도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때 본쥬이에서 헤어진 때부터 자신들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루퍼는?” “이쪽에 온 건 여기 시간으로 대충 한달 쯤 전.” “한 달 동안이나 뭘 하고 있었어?” “이것 때문에.” 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머리가닥을 짜증스럽게 당기며 말한다. “널 만난 뒤에 네 손으로 풀게 하라면서. 사람을 전혀 안 믿는다니까.... 이거 때문에 코랄까지 밖에 찾아갈 수 없었어. 덤으로 코랄에 가봤더니 왕비님은 없지, 포로가 되었다는 보고는 날아오지, 정말 큰 일 이었다고.” “그런가.... 길이 엇갈렸구나.” “그 전- 네가 사라졌을 때부터 내가 이쪽으로 건너올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냐는 의미라면, 저쪽 시간으로 열흘이야.” 왕비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열흘?!” “응. 내가 제정신이었던 건 처음 사흘 정도고, 그 뒤는 며칠이 지났는지 나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왕비는 루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경악하며 되풀이 한다. “열흘...?” “응.” 루는 이상한 듯이, 조금 걱정스럽게 왕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왕비는 아무말없이 머리를 싸쥐었다. 그러니까 즉 이 녀석에게 있어서 계절은 한 번도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신과 헤어지고 다시 재회할 때까지, 그에게 있어서는 이쪽에서 지낸 시간까지 합해도 겨우 한 달하고 열흘 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어긋났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여기서는 6년이나 지났는데!!” 이번에는 루가 경악했다. “6년?!” “그래!‘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뚫어져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럼 너-열아홉 살?” “아직도 스무 살이라는 거야?!” 거의 비명에 가까운 서로의 질문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두 사람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왕비에게 있어서는 기억과 전혀 다름없는 얼굴을, 청년에게 있어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아름답게 성장한 모습을, 그저 숨을 삼키며 마주 볼 뿐. 마침내 루가 먼저 긴장을 풀며 쓴 웃음을 지었다. “상당히 자랐다 싶었더니, 거의 같은 아이가 되어버렸잖아.” 왕비는 흠칫했다. 먼 기억 속의 그 무도회가 뇌리에 되살아난다. 자신의 키가 더 크기를 바랐던 그 때의 기억. 상대는 어른이고 자신은 어린애, 그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올려다보기만 했다.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다. 아직도 자신보다 크기는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선이 맞는다. 왕비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 번 파트너의 목에 두 팔을 두르며 꼭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지금이라면 루퍼하고 춤출 수 있을까?” “상관없지만 드레스는 누가 입지?” “난 안 입어. 지겹도록 입었으니까. 하다하다 혼례 의상까지 걸쳤다고.” “그거 꼭 보고 싶은 걸. 한 번 더 입어보지 않을래?” “누가.” ‘하지만 그런 때는 혼례 의상을 입고 죽은 아버지께 인사드리는 게 보통이잖아. 아말록도 무덤 안에서 뒤집어지게 놀라겠지. 신부를 데려와야 할 녀석 본인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맞을래?” “잘도 말하네. 때릴 만큼 기운도 없는 주제에.” 말다툼을 하면서도 청년은 웃고 있었다. 왕비도 웃었다. 목에 팔을 두르고 그리운 향기를 가득 들이키면서 언제까지나 웃었다. 5장 보나리스 성에서 도망친 탄가인 들은 자신들의 요새가 붕괴되는 광경을 떨면서 바라보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니 그대로 도망쳐버리면 좋을 것을, 파괴의 대상은 성 뿐이고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인간은 강해진다. 호기심이 용솟음쳤다. 흔히 볼 수 없는 진짜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안전한 곳까지 떨어져서 불안에 떨며 모여든 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파괴 극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파괴의 폭풍이 멈추고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는 자가 있었다. “좋아, 저 여자를 붙잡아!” 나젝크 왕자였다. 이 명령에는 병사들도, 성주 뮤렌도 기가 막혔다. “전하?!“ “어물거리지 마! 저기에 있다! 보나리스를 파괴한 장본인이!” “기, 기다려 주십시오!” 뮤렌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도망쳐 나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간담이 서늘했던 것은 아마도 뮤렌 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알 수 있었다. 왕비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저런 힘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저, 저 분은, 진실로 승리의 여신이십니다. 이, 이 참상을 보십시오! 저 분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보나리스를 완전하게 파괴하셨습니다! 그런 분을 어떻게 붙잡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뮤렌은 왕자의 말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간언했지만, 나젝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닥쳐! 이런 모욕을 당하고서 얌전히 물러나라는 말이냐! 저 년의 목을 뽑아서 아버님께 바치고 말겠다!” 안색이 확 변하면서도 뮤렌은 여전히 왕자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기다려주십시오! 제발, 고정하십시오! 너무나도 무모하십니다!” 나젝크 왕자는 뮤렌의 말을 듣지 않았다. 뮤렌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짜증스럽다는 듯 걷어 차 버렸다. “이 놈, 내게 거역할 셈 이냐!!” 얼굴을 걷어차인 뮤렌은 코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왕자의 눈에는 파괴된 보나리스 성의 잔해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은 거의 매몰되어버린 해자 건너편에 조그맣게 빛나는 하얀 옷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겁먹지 마! 이런 건 그저 눈속임이야! 그 증거로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지 않나!” 병사들이 흠칫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이런 눈속임에 넘어가서 도망치는 겁쟁이는 탄가에 필요 없다! 어차피 눈속임도 끝났어! 지금에야말로 저 여자를 붙잡거나 목을 베어버려! 도망치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나젝크 왕자는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인은 물론 피투성이가 된 왼쪽 귀에 있다. 이런 기적을 눈앞에 두고서도 공포보다 개인적인 원한 쪽이 우선될 정도이니, 이기주의도 이 정도라면 실로 완벽하다. 애초에 성채를 파괴한 범인을 붙잡으라고 외치면서도 뭔가 눈속임이 틀림없다고 우기니, 스스로의 발언이 모순 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성의 병사들 중에서도 신분이 낮은 잡병들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서민이며, 서민의 생활에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 신들이 숨쉬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 있어 보나리스 성의 파괴는 신의 저주로 밖에 비치지 않았다. 신을 화나게 만들면 저주가 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때의 신들은 절대로 가차 없이 인간들을 유린한다. 명령도 무시한 채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지, 지금 장난 쳐...?” “약속을 어겼다면서.” “그야 지금은 가라앉았지만....” “무슨 약속인지 우린 모른다고.” “그럼, 어차피 위의 놈들이 멋대로 한 짓이잖아. 말려드는 건 싫어.” 이렇게 되면 아무리 위협해도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끝까지 공격을 강요하면 도망쳐 버린다. 신분이 낮은 자들은 그것이 가능하다. 저런 위험한 것에는 죽어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무장들 쪽도 마찬가지였지만, 슬프게도 이들은 왕자에게서 직접 명령을 듣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주인의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급하고 제멋대로인데다 자기체면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나면 부하를 두들겨 패는 일도 잦았다. 손쓸 길이 없는 주인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노한 신은 엄청난 저주를 내렸지만, 자신들은 어쨌건 살아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는 분명히 목숨이 날아간다. “뭘 하고 있나!! 가!!” 입에서 거품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외쳐대는 왕자를 보면, 이 이상 주저하는 것조차 위험했다. 말을 타고 도망 나온 기사들은 창백한 얼굴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한편 국왕과 왕비는 상당히 감동적인 재회의 말을 나누고 있었다. 아직도 루의 팔에 기댄 채로 왕비는 국왕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자세한 사정을 듣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부터 바보라고는 생각했지만, 너 정말 국보급 바보구나? 왕좌를 내팽개치고 오는 놈이 어딨어?” 물론 국왕은 분개하며 반론했다. “그 말은 대체 뭐야/ 게다가 너, 남의 말 할 입장이나 돼/ 내가 파라스트에 붙잡혔을 때 네가 어쨌는지 잊었어?” “그거하고 이건 얘기가 달라. 넌 국왕이잖아.” “그럼 넌 내 부인이야. 왕비라고. 그 왕비를 나젝크 따위한테 뺏기게 생겼는데 얌전히 구경이나 하란 말이야?” 여기서 루가 느긋하게 끼어들었다. “하기사 열 세살짜리 부인이면 젊기는 하네요.” “결혼한 건 2년 전이야. 리가 열일곱일 때. 아무한테도 얘기 못 들었어?” “처음엔 공주였다가 나중에 왕비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어요. 그래서 어쩌면 이 임금님은 어린애 취향인데다 엄청나게 성질이 급한 성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걸요.” “멋대로 남을 변태 취급 하지 마.” 어째서인지 불만스러운 말투로 왕비가 말했다. “난 루퍼가 더 미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소리야. 난 남자아이인 에디 밖에 모르니까. 굉장히 신선 하다구.“ 흑발의 청년은 신기한 듯이 왕비의 뺨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더니 가는 몸과 허리 언저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왕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어, 역시. 진짜 가슴이다.” 다른 남자가 이런 짓을 했다면 곧바로 철권이 날아가고 발차기가 들어간다. 반죽음당하는 게 당연하건만 왕비는 화내지 않았다. 옷자락을 쭉 당겨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들여다본다. “이 가슴 말이야. 크고 무겁고 불편해서 미치겠는데, 볼래?” “응, 볼래, 볼래.” 루는 기쁜 듯이 손뼉까지 쳐가면서 들떠 있었다. 외간 남자가 자신의 부인을 만져대는 모습을 보면서도 국왕은 화내지 않았다. 화내기는커녕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이제야 알겠어. 그대들은 그런 관계였군.” “정말 알겠어요?” “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국왕이 입을 열려는 순간, 땅이 울렸다. 돌아보자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난다. 보나리스의 잔당이 틀림없다. 아마도 기마부대가 똑바로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루가 중얼거렸다. “세상에, 질리지도 않나....” “동감이야.” 기마와 맨몸으로는 승산이 낮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숫자였다. 단, 천 명이 한꺼번에 덤벼오는 것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게다가 왕비가 함께 있다. 루가 초조하게 왕비를 흔들었다. “잠깐 에디? 에디, 에디도 참....” 국왕은 적병의 숫자를 가늠하다 물었다. “왜 그러지?” “그게... 잠들어버린 것 같아요.” 국왕도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분명히, 청년에게 기댄 자세로 왕비가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잠을 자?!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기가 막혀서 외쳤고, 청년도 곤란해 하면서 말했다. “상당히 힘들었나 봐요. 이러는 거 처음 봤는데요.” “나도 그래.”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점에서는 국왕도 청년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만은 상당히 진지했다. 청년은 잔다고 표현했지만, 왕비의 모습은 힘이 다했다고 하는 쪽이 어울려 보였다. 안색은 창백하고 생기가 없는 모습으로 축 쳐져 움직이지 않았다. 루가 말했다. “약 때문이겠지요. 냄새가 나요.” “무슨 약이지?” “몸에 안 좋은 약이라는 것만은 확실한데요. 지금까지 잘도 일어나 있었군요.” 국왕은 심각한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라비 경, 왕비를 데리고 도망치게. 뒤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적의 발 정도는 묶어둘 수 있어. 자, 빨리.” 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임금님.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이 아이는 안 자요.” “그럼 어쩔 건데? 이런 상황이면 보나리스를 파괴한 힘은 쓸 수 없을 텐데.‘ “확실히 이 이상은 곤란하죠.” “그러니까 빨리 도망치라고 하지 않나.” “두 사람이 하면 한 사람당 백 명 정도죠. 그거라면 충분히 어떻게든 돼요.” “싸울 생각인가...? 저들과?” “왕비님이 뒤를 맡겼는데 도망칠 수는 없죠.” 풀이 돋아난 부드러운 지면에 왕비를 눕히고 청년은 노도처럼 몰려오는 군대 쪽을 바라봤다. 맨 손에 맨 발인 채 가볍게 걸어 나간다. 국왕도 그를 따랐다. 흙먼지와 땅울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은 기마뿐, 약 200기 정도였다. 루는 걸음을 옮기면서 파괴된 성을 바라봤다. 뭔가를 가만히 주시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살짝 웃었다. “아, 있다.” 왼손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이리 와. 너의 원 주인에게.” 폐허 사이에서 뭔가가 반짝 빛난다. 그것은 곧바로 눈부신 빛이 되어 루의 손을 향해 날아왔다. 왕비의 검이었다. 아무 두려움 없이 검 집에서 빼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는다. 루는 자기 발로 기마군단을 향해 접근 했다. 국왕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걸어갔다. 이 무모한 두 사람과 200기의 기마군단은 폐허로 변한 부성의 외벽 바깥에서 마주쳤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행동에 들어갔다. 자신을 찔러오는 적의 창을 붙잡아 힘으로 말에서 떨어뜨린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모두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기수가 바뀌어 당황하는 말을 바로 진정시키고, 국왕은 빼앗은 창을 호쾌하게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며 창이 한 번 공중을 가를 때마다 최소한 두 명씩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루는 아무도 쓸 수 없는 왕비의 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적병의 무리에 뛰어들자마자 좌우의 적을 베어 넘긴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쓰러뜨렸다. 탄가 기병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러나 상대는 겨우 두 명. 탄가가 자랑하는 중장기 병이 이런 적에게 밀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격해!” 지휘관이 호령한다. 기마들이 두 사람을 포위하기 위해 돌격했다. 지금 적들의 모습은 정확하게는 중장비라고 할 수 없다. 갑자기 성이 무너지는 바람에 정식 장비를 걸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각각 가슴받이와 다리 보호대, 금속제 장갑에 각반을 착용했다. 그 정도면 훌륭한 무장이었다. 이쪽의 두 명은 검은 들고 있어도 비무장에 가까운 차림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말도 없었다. 한 명은 한눈에 보기에도 건장한 전사지만, 다른 한쪽은 찢어진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청년이다. 소년같은 얼굴의 청년을 얕보고 처리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한 기병들이 차례로 덤벼들었다. 명중하면 뼈도 부서진다는 평판으로 유명한 탄가의 창이다. 이렇게 물러 보이는 상대라면 단 번에 두 조각을 내겠다는 듯한 기세로 날카롭게 빛나는 창날을 휘둘러댔지만 창끝은 청년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청년의 말이 접근할 때마다 기병들 쪽이 퍽퍽 쓰러진다. 탄가 측도 겁먹지 않았다. 머릿수로 상대를 제압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훌륭하게 적의 포위를 무너뜨린다. 청년이 탄 말은 한 순간도 멈춰 서지 않았다. 검을 쥔 왼쪽 손도 마찬가지로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고 있다. 도저히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였다. “이, 이 녀석!” “강해!” 탄가 기병은 저도 모르게 고삐를 당겨 적에게서 떨어졌다. 겨우 두 명의 적을 앞에 두고, 무적을 자랑하는 탄가 중장기 병이 후퇴한 것이다. 자신도 적을 격퇴하면서, 국왕은 청년의 실력에 경악했다. 낯익은 검술이다. 왼 손이기는 하지만 왕비의 검술과 똑같았다. 적이 물러난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은 모두 말을 달리며 적을 향해 달려갔다. 나란히 달리면서 국왕이 말했다. “훌륭해.” “임금님도요.” “왕비와 같은 검술인 것 같군.” “당연하죠. 내가 가르쳤는데.” 순간 말을 잃었다. 그 말은 즉 이 청년이 왕비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쪽을 향해 덤벼오는 적 두 명을 일격으로 처리하고 나서 국왕이 볼 멘 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얘기는 더 빨리 했어야지!” “난 강하다고 말했잖아요. 안 믿은 거야 임금님 마음이죠.” 지극히 맞는 말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청년은 차례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끝을 아무렇지도 않게 후려쳤다. 그때마다 적의 창끝이 잘려나간다. “윽?!” “아, 아앗!” 당황한 기병들은 막대기로 변해버린 창을 내던지고 검을 뽑아들려고 했지만 청년이 허락하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을 타고 달려가 적을 안장에서 떨어뜨렸다. 청년의 말 모는 법은 놀라울 정도로 교묘했다. 분명히 탄가 기병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고, 그만큼 말의 움직임도 조금은 둔했다. 그에 비해 루는 얇은 천 한 조각만 걸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차림. 기동성이 뛰어난 거야 당연하다 치더라도 정말로 재빨랐다. 중량급의 국왕으로서는 따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러나 체중의 부담은 말 모는 솜씨로 보완하고 있다. 말 몰기라면 국왕도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선풍과도 같이 쏟아내는 일격의 파괴력은 청년 이상이고, 여럿이서 달려드는 탄가 병의 접근을 추호도 허락하지 않았다. 겨우 두 명의 적을 상대로 탄가의 기사들이 차례차례로 쓰러졌다. 점점 숫자가 줄어들었다. 이 기마군단에는 여러 명의 지휘관이 있다. 지휘관 한 명이 제 각각 수십 명의 부하를 지휘하고 있는 셈이지만 의외로 강한 상대에게 지휘관들도 혀를 찼다. “에 에잇, 이런 놈들은 상관하지 마!” “왕비를 노려!” 국왕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적의 지휘관을 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친다. “이런 놈들이라니, 잘도 지껄이는군! 내 이름은 월 그리크 로우 델핀. 아내를 되찾으러 왔다!” 적진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용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고한다. 전장에서 한 명의 용사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게다가 이 이름은 어떠한 구원부대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델피니아 왕?!” “설마?!” 탄기의 기사들이 동요하며 창백하게 질렸다.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대장이 혼자서 움직일 리 없다. 국왕이 있다면 근처에 데피니아 군이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들의 불안을 부채질하려는 듯이 폐허나 다름없는 보나리스 성 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셰라가 무너진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활과 화살을 모아 틸레든 기사단의 젊은이들에게 넘겨주면서 밀집해 있는 탄가 병사들을 향해 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겨우 열 명의 원호 사격이지만 탄가 기사들의 경악과 동요는 엄청났다. “복병이다!” “델피니아의 복병이다!” 지금 막 붕괴된 보나리스 성에 적의 복병이 숨어 있을 리가 없건만, 너무나 놀란 나머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냉정한 판단이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당황하지도 않았다. 루가 단숨에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적의 동요는 이쪽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 적들 사이에 뛰어들어 자신의 배는 될 만큼 건장한 남자들을 좌우로 베어 넘긴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용감한 병사라도 움츠러들 만큼 강한 실력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치 왕비가 그 자리에 서서 싸우는 것처럼 압도적이고 인상 깊은 싸움이었다. 그 뒤에 국왕이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창을 내리고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이 이상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겠냐는 듯이 눈빛으로 도발한다. “도, 도망쳐. 도망쳐?” 지휘관들이 절규했다. 굳이 시키지 않아도 겨우 두 명에게 약 반 수 이상이 쓰러져버린 것이다. 거기다 델피니아 정규군까지 나온다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탄가의 기사들은 차례로 말의 기수를 돌리며 도망쳤다. 두 사람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쫓을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만한 전력도 없다. 여기서 쫓아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루가 검을 내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역시 관록이네요.” “이런 걸 두고 허세로 이겼다고 하는 거야. 내가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국왕이 하면 꽤 효과가 좋거든.‘ 청년은 그럴 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명언이네요.” “그건 그렇다 치고, 경의 솜씨는 정말 기가 막히는 군. 왕비가 뒤를 맡긴 이유도 잘 알겠어.” “하지만 임금님. 나 혼자뿐이었다면 그 아이는 잠들거나 하지 않아요.” “그런가?” “그래요.” “왕비는 경과 굉장히 친밀해 보이던데....” “그렇지도 않아요. 그 애는 날 신용하지 않으니까.” 웃으며 머리를 흔든다. “그 아이는 날 혼자 놔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불안해해요. 임금님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그럴까?” “단연코 그래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국왕이 웃었다. “이런, 정말 큰일인 걸. 점점 남편과 부인의 애인 사이의 대화처럼 되어버렸어.” “저기요, 애초에 그런 사이의 사람들끼리 얘기도 하고 그러나요?” 진심으로 이상하게 여기는 표정이다. 국왕은 말 위에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폐허 쪽에서 셰라가 나타나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 뒤에는 기사단원들도 있었다. 모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환성을 지르면서 큰 소리로 국왕을 부른다. 국왕도 활짝 웃으며 그들 쪽으로 달려갔다. 루는 말에서 내려 왕비를 눕혀둔 쪽을 돌아봤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왕비를 지키려는 듯이 검은 말이 서 있었다. 청년은 서둘러 왕비의 곁으로 돌아왔다. 로아의 흑 왕은 지면에 누워 있는 왕비에게 콧등을 비벼대다가 청년이 다가가자 재갈이 물린 입을 쭉 내밀었다.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불평이라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자, 이거 빼. 빨리 빼. 안 빼!” 청년이 재빨리 고삐를 풀어주자 흑마는 또다시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왕비의 얼굴을 살짝 밀면서 부드럽게 목을 눌렀다.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청년도 왕비의 곁에 주조앉아 재빨리 왕비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고 손목에서 맥을 재면서 호흡을 확인했다. 왕비의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잇던 은반지를 빼어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준다. 청년은 의식을 잃은 왕비의 몸을 안아들고 국왕 일행이 있는 성의 폐허를 향해 걸어갔다. 6장 자하니 요새에서 출발한 델피니아 군은 보나리스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선두에 선 것은 이븐과 도라 장군. 보나리스는 적지에 있는 성이다. 델피니아 인에게는 낯선 것이 당연했다. 특히 언제나 서쪽 국경을 지키고 있는 라모나 기사단원들은 보나리스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도라 장군은 상당히 예전에 뒤르와 왕의 측근으로서 보나리스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성은 없었고, 막 성을 지으려고 기반을 세우는 단계였다. 이븐은 젊었을 때 대륙 각지를 방랑하면서 보나리스 성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 이제는 장인과 사위가 된 두 사람은 죽어라 말을 타고 달렸다. 후속 부대 생각은 염두에도 없다. 따라올 수 있는 놈들만 따라오라는 듯한 기세였다. “너무 무리하면 쓰러집니다. 영감님!” 이븐이 외쳤다. “이놈, 무슨 헛소리야!” 도라 장군도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고함으로 대답한다. 이런 인간들이 길을 안내하기 위해 선두에 서 있으니 뒤를 따르는 병사들로서는 불행한 상황이었다. 보병이나 화물 부대는 이미 한참 전에 시야 뒤쪽으로 사라졌다. 아니,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전력 질주를 따라올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군대의 핵심을 이루는 틸레든 기사단, 라모나 기사단, 타우, 로아의 용사들 중에서도 기마술이 뛰어난 이들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돌진했다. 그 수는 약 500기. 탄가 영내로 들어서서도 그들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따로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기세가 흐트러진 것은 곧 보나리스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이븐이 갑자기 고삐를 당기며 장군을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리십쇼, 영감님!” 이븐은 헐떡거리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전방을 노려봤다. 도라 장군도 말을 세웠다. 뒤쪽을 향해 정지 신호를 내리고 사위 곁으로 다가간다. “무슨 일인가?” “아니, 뭐가 좀 이상해요. 여기까지 왔으면 성이 보일 만도 한데....” “흐음.” 장군의 호흡도 거칠었다. 뒤따라온 부대에서 발로와 자시아스, 샤미안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두 기사단장이 물었다.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곧 보나리스야. 다 왔다고 할 수 있고, 아직 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이븐은 변함없이 복잡한 표정이었다. “역시 이상해. 전에는 여기에서 성의 첨탑이 보였는데 지금은 안보여.” 구름 한 점 없는 맑디 맑은 오후. 한 여름이 되어가는 산에서는 눈부시게 초목이 빛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분지의 입구까지 와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평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분지 자체는 상당히 광대한 편으로, 성까지는 아직 꽤 남아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발로가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말도 안 돼. 성이 사라질 리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보기 드물게 이븐의 말투가 석연치 않았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듯했다. 샤미안이 그런 남편을 걱정스럽다는 양 바라봤다. 도라 장군이 뜻을 굳히고 말했다. “어쨌거나 가보도록 하지. 이 숫자로 공격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왔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있어.” “게다가 폐하가 걱정입니다.” 나시아스도 말했다. 그들은 다시 보나리스를 향해 이동했지만 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군대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원인은 다름 아니라, 있어야 할 것-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보이지 않는 데에 있었다.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고 전원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이건?!“ 이븐이 비명을 질렀다. 발로와 나시아스도 같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말문을 잃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성이... 없어.” 그들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성의 잔해. 분명히 여기가 성이었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성곽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안 쪽에는 병사들의 숙사나 대장간 등등 성체에 필수적인 설비가 거의 멀쩡하게 남아있다. 마치 성의 외벽만 골라서 분쇄한 듯한 이 상태를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성벽은 뿌리째 부서졌고 해자는 완전히 메워지고 말았다. 파괴된 성의 파편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아마도 성문이었던 걸로 추정되는 굵은 철 격자가 무참하게 비틀려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폐허 위로 got빛이 밝게 쏟아진다. 성 안에서 사육되던 돼지와 닭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먹이를 찾아 지면을 헤집는다. 500기의 델피니아 군은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상식을 초월한 힘이 보나리스를 덮쳤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부러진 철 막대나 내부에 남아있는 시설의 상태로 봐서, 거의 지금 막 폐허가 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도라 장군이 신음했다. “그렇다면... 비전하는..., 폐하는-!!” 다른 사람도 흠칫 놀랐다. 그렇다 국왕은 먼저 여기에 도착했을 텐데. “성 안을 수색한다! 네다섯 명 따라와!" 발로가 그렇게 외치며 폐허를 향해 달려갔다. “누가 근처의 농가로 가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들어와!" 이븐은 동료들에게 정보 수집을 지시했다. 나시아스는 넋을 잃고 있는 단원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화물 부대에게 서두르라고 전해! 오눌 밤은 여기에 포진한다!” 500기의 병사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군, 이 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자리를 도라 장군에게 맡기고 라모나 기사단장과 베노아의 부두목은 발로의 뒤를 쫓았다. 해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성의 파편으로 꽉 메워져 있었다. 발치는 굉장히 불안정하지만 간신히 말을 타고 건 널 수 있었다. 두 번째의 해자를 건넜을 때, 폐허 뒤쪽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한 두 명이 아니다. 그렇다고 군대라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검을 쥐었지만 그 사람들은 주저 없이 이 쪽을 향해 달려왔다. “단장님!” “단장님!” “단장님!”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발로였다. “너희들!!” 캐리건을 포함해 틸레든 기사단의 전원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지면에는 상관도 하지 않고 한꺼번에 달려온다. 거의 쓰러지듯 발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정신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마치 미아가 된 강아지들이 간신히 어미 개와 재회해 기쁨과 환희를 전신으로 표현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기다려! 할 말이 있으면 한 명씩 해!” 어미 개라기보다 아빠 호랑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체구도 크고 힘도 관록도 겸비한 발로였지만, 이 열렬한 재회 인사에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예, 그, 우선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정말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무사합니까?” 저마다 던지는 물음에 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해. 너희들이 마지막이다. 그보다도 대체 이 성은 어떻게 된 거야? 여기에 왕비가 붙잡혀 있었을 텐데.” 무릎을 꿇고 있던 부하들은 마른 침은 꿀꺽 삼켰다. “저어, 그것이...” “저, 저희들이 말씀드리기도....” 영문을 모를 소리를 지껄이면서 뒤를 돌아본다. “자세한 얘기는, 그.... ” “저쪽에 폐하가 계시니....” “형님이?” 그 말에 곧바로 반응한 것은 이븐이었다. 단원들 쪽은 쳐다 도 안보고 폐허로 변한 성벽 쪽으로 곧장 말머리를 돌린다. “좋아, 너희들은 본대와 합류해! 그리고 이쪽으로는 아무도 접근 못하게 해!” 명령을 내리고서 발로도 이븐의 뒤를 따랐다. 나시아스도 함께. 다른 이 들의 접근을 금지 시킨 것은 국왕에게 사정을 듣는 동안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떤 힘을 사용해야 탄가 남부 방어의 핵심이라고까지 불리는 성채를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 걸까. 새삼 경악이 밀려왔다. 부서진 성의 파편은 작은 흙먼지에서부터 커다란 바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로,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본 성의 외벽이 있던 근처는 지면이 더욱 울퉁불퉁 해 져서 더 이상 말을 타고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무너진 성벽을 넘고 건물의 잔해를 밟으며 아마도 성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 곳에만 간신히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부뿐이지만 2층 부분도 남아 있었다. 바깥에서 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다. 국왕은 성곽 1층에 있었다. 원래는 창고였던 듯 통과 자루가 늘어서 있다. 안 쪽은 건물의 잔해가 벽처럼 쌓여 있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국왕은 셰라와 함께 그 벽을 조사하며 뭔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형님!” “폐하!” 충실한 신하이자 친구인 이들의 목소리에 국왕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오오, 굉장히 빨리 왔는걸.” “그렇게 느긋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 입니까?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세 명 모두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건만 국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아니, 진심으로 한 말인데. 아무리 빨리 와도 제군들이 도착하는 건 내일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과연 델피니아 전체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체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보물찾기.” 태연하게 대답한다. “마침 잘됐어. 손 좀 빌려 줘. 아마도 이 안 쪽에 금고가 있을 거야.” “금고?!” 세 명이 나란히 비명을 질렀다. “음, 대략 이 근처가 성주의 거처였을 거야. 아침부터 계속 이 주위를 뒤져봤지만 금화 한 닢도 안나왔어. 그렇다면 금고가 통째로 이 근처 어디엔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서 말이야.” “금화?!” 또다시 합창이 울렸다. 그러나 국왕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큰 성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할 거 아니야. 사용인들에게 줄 월급에, 지금이라면 군자금도 있을 테고. 금화 백 닢이나 이백 닢-아니, 물론 더 작은 단위도 섞여 있겠지만, 아무튼 상당히 모아뒀을 거야. 불난 집에서 도둑질하는 것 같아서 조금 한심하기는 하지만 그만큼의 돈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국왕은 흙먼지로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희희낙락하며 말했지만 세 사람은 말없이 미간의 주름을 눌렀다. 이븐이 한숨을 쉬고서 발로를 바라본다. “가짜 폐하,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현재까지는 아직 당신이 국왕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가짜는 붙이지마.” “아무튼 현재는 당신이 국왕이고 이쪽은 그저 자유전사라는 말이지요?” “명목상으로는 그런 셈이지.” “그럼 말입니다. 제가 이 자유전사에게 조금 따끔한 맛을 보여 준다고 해도 불경죄에는 해당하지 않겠지요?” 발로는 눈을 부릅떴다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가능한 한 위엄을 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는 말이야.” “그럼 사양 않고-!!” 말을 뱉자마자 국왕의 멱살을 붙들고 맹렬하게 흔들면서 이븐이 외쳤다. “이 멍청아! 우리는 엄청 짜증이 나 있단 말이다! 물어보는 대로 얌전히 썩 설명이나 해! 왜 성이 부서진 거야! 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리는 어쨌어! 여기 있던 탄가 놈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어?” “자, 잠깐! 기다려, 이븐!” 국왕이 비명을 지른다.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힘들잖아!” “네 놈이 우물거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마치 잡아 먹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평소라면 이런 장면에서 반드시 이븐을 말리던 발로가 팔짱을 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다, 나시아스 조차도 먼 산을 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보다 못한 셰라가 끼어들었다. “저기..., 비전하라면 지하에 계십니다.” 국왕의 멱살을 붙든 채로 이븐이 셰라를 바라봤다. “그럼 무사한 거지?” “포로의 몸이 아니라는 의미라면 무사하십니다만, 무사하다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말을 흐리던 셰라는 이븐의 푸른 눈이 위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덤벼들지도 모른다. 당황하며 설명했다. “비전하는 무사히 구출했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 성에 붙잡혀 계시는 동안 비전하는 도망칠 수 없도록 약을 투여 받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포로가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후유증입니다.” 이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듯하다. 발로와 나시아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왕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세 명 모두 왕비에게 가보려고 했지만 국왕과 셰라가 저지했다. 면회를 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그제야 이븐의 손에서 풀려난 국왕이 한 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강력한 환각 작용이 있는 마취제 같다더군. 지금 만나도 아마 그대들을 알아보지 못 할 거야.” “곧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집니다.” 비통한 표정으로 셰라가 말했다. “제가 아는 한, 호마의 마력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인간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봤다. 이븐은 비난을 억누를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너희들, 왕비가 그런 상태인데 혼자 놔두고 금고나 찾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라비 경이 함께 있어.” “......?” 셋 모두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 이름이 여기에서 튀어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상한 남자도 여기 있습니까?” “있다 뿐이겠어, 그게....” 어떤 의미로는 보나리스 파괴의 주모자라고 국왕이 막 말하려던 순간 무너진 성곽 한쪽에서 그 장본인이 나타났다. 병사들의 숙소에서 몰래 빌린 옷을 걸치고 머리는 하나로 묶은 차림이다. 허리에 검도 차고 있었다. 두 기사단장과 독립기병대장은 그 검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에 대한 언급은 회피했다. “그래서, 왕비의 상태는?” “어느 정도 안정된 편이에요.”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원래부터 새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나시아스가 긴장하면 셰라에게 물었다. “그 약이라는 건 네 동료들이 사용하던 물건인가?” “예.”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이 나타나지?” 셰라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된 사람의 증상을 두 가지 밖에 알지 못합니다. 약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약물의 노예가 되든가 폐인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셰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이 전부 자기 책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가 그런 셰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짧아진 은발을 품에 안으며 이마를 마주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그 아이는 어느 쪽도 안 될 테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국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양을 해야 한다면 왜 지하에 있는 거지?” 발로의 의분도 당연하다. 보통 환자는 공기가 좋은 곳에서 안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국왕은 심각하게 팔짱을 끼었다. “날뛰기라도 하면 위험하다는 군. 불쌍하지만 일단 지하에 가둬둔 상황이야.” 셰라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 분이 이성을 잃고 적과 아군의 구별조차 못하게 될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보통은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의 힘조차 남지 않지만 그 분은 어떨지 모르니까요. 피해가 생긴 뒤에는 늦습니다.” 루가 말을 맺었다. “위험하다 정도가 아니지요. 애매한 표현이지만 양떼 속에 맹수를 풀어놓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반드시 격리할 필요가 있어요.” 세 명 모두 말을 잃었다. 제일 먼저 사태를 이해한 것은 발로였다. 발로는 독약에 대한 지식이 다소 있다. 국왕과 혈연이 있는 대 공작 가에 태어난 인간으로서는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을 파괴하고 마음을 조종하는 약에 대해서도, 직접 사용해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알고는 있다. “그럼 언제쯤 되어야 왕비가 회복할까?” “알 수 없어” 국왕이 짧게 대답했다. 루가 그 뒤를 이었다. “약의 분량, 사람의 체질, 요인이 너무 많아요. 내일이라도 회복될지. 열흘이 걸릴지, 아니면....” 셰라가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그분 몰래 약을 먹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기사단 분들의 목숨을 내걸고 마시게 했지만.... 그 남자가 하필 호마를 사용할 줄은....” 국왕이 팔짱을 낀 채 분개하며 말했다. “그러게 그 남자를 빨리 죽여 뒀어야 했어. 이렇게 되기 전에.”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말이죠. 굉장히 강해요. 그 사람, 그렇게나 깔끔하게 칼을 맞아본 건 처음인걸요.” “아니, 라비 경도 라비 경이야. 되살아날 거라고 알고 있었으면 차라리 죽을 각오로 싸웠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소리예요! 그럴 여유가 없었다구요!” “저기, 저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되살아날 수 있다면 되살아날 거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주셨으면..., 그 때는 정말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분께 얼굴을 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억지 부리지 말라구. 그런 얘기까지 하고 있을 틈이 어디 있었다는 거야.” 이 시점에서 틸레든 기사단장과 라모나 기사단장이 나란히 독립기병대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 눈짓이 뜻을 알아듣지 못할 이븐이 아니다. 소꿉친구의 등 뒤로 돌아가 목에 팔을 확 감고 꽉 조이기 시작했다. “윽...?!” 이건 진심이다. 완전히 숨이 막혔다. 도망치려고 해도 숨을 쉴 수가 없다. 발버둥치는 국왕을 꽉 죄어 누른 채 이븐은 너무나도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선왕 폐하, 대체 언제쯤 되어야, 당신의, 친애하는, 예전 부하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실 겁니까? 이쪽도 슬슬 인내력이 다 떨어져가는 중인데 말입니다. 네?” 말투와는 정반대로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븐은 질식하기 직전에야 팔을 놓아줬지만, 물론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못했다. 국왕은 목을 붙잡고 헐떡거렸다. “죽일 셈이야?” “그건 너 하기 나름이지.” 참으로 따뜻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폐허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도라 장군과 샤미안이 달려왔다. 장군 정도라면 발로가 지시했던 접근 금지령도 무시할 수 있다. 부녀는 월을 발견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폐하!” “오오, 폐하! 무사하셨습니까!” “그다지 무사하지 못해. 당신들의 남편이자 사위되는 사람한테 막 교살당할 뻔했으니까.” 굵은 목을 문지르면서 국왕이 말하자 도라 부녀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주위의 광경에 충격과 불안을 느끼는 건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를 낮추면 묻는다. “폐하, 대체 이 상황은...?” “음, 식사는 했나? 아직 들지 않았다면 같이 점심이라도 하지.‘ “형님....” 발로가 낮게 국왕을 불렀다. “알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식사를 하면서 얘기하도록 하지. 친애하는 탄가 병사들이 식량을 그대로 남겨두고 갔으니 라비 경도 함께 들지 않겠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를 혼자 놔둘 수는 없어요. 뭔가 음식이 다 되면 가지고 와주겠어?” 셰라에게 부탁을 남기고 청년은 지하로 내려갔다. 500기의 본대도 점심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셰라는 성 안의 부엌을 빌려 재빨리 식사를 만들어 병영의 식당으로 날랐다. 샤미안도 함께 거들었다. 본성의 외곽에 있던 병영은 천장이 뻥 뚫려 눈부시게 햇빛이 쏟아졌다. 국왕은 배를 채우고 나서 오늘 아침에 벌어진 사건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도라 장군도, 발로도 그리고 왕비의 신기한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븐조차도 쉽게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저마다 반론을 펼쳤다. “폐하, 농담은 곤란합니다.” “분명히 왕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행동을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국왕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기분은 잘 알겠네. 나도 내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야.” 도라 장군은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 듯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오나... 폐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발도우의 딸로 불리는 비전하의 힘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비전하라고 해도 혼자서 이 정도까지 하실 수 있을 거라고는....” 국왕이 두 팔을 펼쳐들며 말했다. “그럼 장군,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하겠나?” 대답할 말이 없었다. 눈부시게 햇빛이 쏟아지는, 지붕이 사라진 병영. 성 안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야 할 높은 성벽도 , 병사들의 순회로도 흔적을 감추고 성 안에 있는데도 먼 초원이 보인다. 있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내가 오히려 묻고 싶네. 이 성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었어. 성곽은 산처럼 버티고 있었고, 본성은 이중의 성벽을 두르고 있었지. 수많은 첨탑과 망루가 달린 부성은 도개교와 철 격자로 무장하고, 깊은 두 개의 해자는 물로 가득 차 있어. 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바로 오늘 아침, 해가 뜨고서 채 정오가 되기 전까지 짧은 시간에 이렇게 되었어. 장군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10만 명의 군대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해도 이 보나리스 성을 순식간에 파괴하기란 불가능해. 눈을 잘 뜨고 주위를 둘러보게. 평범한 방법으로 성 하나를 이만큼 부숴버리려면 얼마나 되는 인원이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장군도, 다른 사람들도 침묵했다.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내 계산으로는 천 명의 목수가 일제히 덤벼들어도 이렇게까지 산산조각을 내려면 석 달은 걸릴 걸. 지으려면 10년, 20년이 걸리지만 부수는 데에야 그 정도면 되겠지. 하지만 성채라는 건 본래 튼튼한 게 생명이야. 거기에 병사들과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중요시 되지.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한 그 정도는 걸려. 인간이라면 절대로 이런 짓은 불가능 해.” 국왕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는 듯이 스스로에게 되 뇌이며 말했다. “왕비는 지금까지 스스로 금지하고 있던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사용했다. 그 결과가 보나리스의 이 모습이지.” 가만히 국왕의 말을 듣고 있던 다섯 명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왕비혼자서 이런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이 파괴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시아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정말로 가능하시면, 어째서 지금까지는 그 힘을 행사하지 않으셨는지.... 특히 폐하께서 파라스트의 포로가 되었을 때가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그 때야말로 신에게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건만....” “왕비는 말이지, 이런 힘을 원하지 않아. 사용하는 걸 기뻐하지도 않고. 힘을 쓰려면 여러모로 복잡한 제약도 있는 것 같고, 여기를 파괴할 때에도 사람은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어. 파편에 깔릴 뻔한 사람을 일부러 구해줬을 정도였지.” “즉, 군대를 쓰러뜨리는 건 무리겠군요?” 발로가 입을 열었다. “무리겠지.” “그거 유감입니다. 정말 아깝군요. 탄가의 군대 따위 혼자서 간단히 쓰러뜨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븐도 말을 거들었다. “아니, 차라리 케이파드로 달려가서 조라더스의 성을 산산조각 내는 건 어떻습니까?” “아, 그것도 좋군.” 두 사람 모두 이직 반신반의하는 상태였기에 이런 농담이 나올 수 있었지만 국왕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라비 경에게 따끔한 말을 들었네. 이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이고 왕비에게 있어서도 규정을 깨는 일이니 절대로 이 이상 기대하지 말라고.” 실은 그렇게 얌전한 말이 아니었다. 이 참에 케이파드 성도 부숴달라고 하고 싶다며 웃는 국왕에게 청년은 변함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미소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지금까지 평범하게 쓸 수 있는 힘만으로도 충분히 임금님의 힘이 되었을 텐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더 이용가치가 있다면, 그만큼 더 일해주지 않으면 마음에 안 차나요?” 동작도 표정도 온화하기 그지없지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척을 살짝 내비치면서.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 국왕은 조용히 대답했다. “이용 가치 때문에 그 얘를 옆에 둔 게 아니야.” “그럼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도록. 그 아이가 들으면 실망할 겁니다. 파괴력이 뛰어난, 전쟁터에서 압도적으로 힘이 되는 편리한 도구라서 데리고 있던 거냐고.” “왕비는 절대 그런 소리는 안 해.” “그래요?” “그래. 실언한 건 사과하겠어. 하지만 내켜하지 않는 리 에게 억지로 그... 그 힘을 쓰게 한 건 라비 경이 아닌가?” 이번에는 국왕 쪽이 비난하는 어조가 되었다. “어차피 한 번 뿐이면 상관없잖아요? 한 번 뿐이니까 사람들의 기억에도, 마음에도 남는 거죠,” 알 듯, 모를 듯한 청년의 대답과 함께 그 얘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도라 장군이 이상한 듯이 말했다. “아까의 그 젊은이는 누구입니까?” “그 자는 왕비의 고향에서 온, 왕비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네.”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고서 국왕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어. 왕비는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존재라고. 하지만 하늘에는 하늘의 규정이 있어. 지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떤 행동이 괜찮고 어떤 행동이 안 되는 지 하계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 그리고 왕비는 그 규정에 따라 행동할 의무가 있어.” 이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말은 하셔도 말입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비상식적이었는뎁쇼.” “맞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까지 정도의 비상식은 왕비의 규정으로는 괜찮다는 얘기겠지.” 국왕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비는 아직 모드의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상태야. 이 기적에 대해서는 제군들이 병사들에게 설명해 주게. 본론은 그 뒤야.” “본론?” “보나리스가 파괴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조라더스는 반드시 이 곳으로 군대를 파견한다.” 샤미안이 숨을 삼켰다. 도라 장군은 낮게 신음했고, 발로는 짧게 혀를 찼다. 나시아스는 냉정한 표정을 허물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워졌다. 이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보나리스 붕괴 소식이 조라더스의 귀에 들어간다. 성질이 급한 조라더스는 곧바로 군대를 파견할 것이다. “원래부터 모나리스에는 지원부대가 올 예정이었어. 탄가가 델피니아를 공격하려면 먼저 자하니를 탈환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 군대가 이미 케이파드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이 이변을 알리는 사자가 엉덩이에 불이 붙은 듯한 기세로 달려갔을 테니까. 파견된 군대와 도중에 만나게 될 수도 있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지만 빠르면 내일이라도 그 대군이 여기에 도착한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모두가 일제히 일어섰다. 발로가 말한다. “아까 형님이 말씀하신 금고, 빨리 파냅시다.” “금고가 있습니까. 그거 고마운 일이로군요.” 도라 장군이 웃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화물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까지도 이 지역에서 조달해야 한다. 길 안내를 부탁할 필요도 있다. 뻔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 이 지반 사람들의 협력 없이 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적국의 인간들. 도움을 청하고 돈을 지불하는 편이 좋지요.” “어차피 탄가의 돈이니 상관없어.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게 맞지.” 국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각각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아무리 후속 부대가 서두른다 하더라도 내일까지 도착할 수 있는 것은 기병뿐이다. 보병이나 화물부대까지 전부 도착하고 전열을 갖추려면 앞으로도 며칠은 걸린다. 혹시 기병의 도착마저도 늦어진다고 하면, 이 500기만으로 만 명의 군대와 상대해야 한다. 힘든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바구니에 담고 셰라는 지하로 내려갔다. 이 곳의 계단도 붕괴되어 걷기가 어려웠다. 원래는 한 낮에도 조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실이지만, 지금은 천장에 뚫린 구멍 덕분에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 성의 지하는 대부분이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에 남아있는 기초 부분을 캐리건 일행이 갇혀있던 것처럼 포로를 가둬두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그 밖에 독방도 마련해 두었다. 셰라는 그런 독방 중 하나에 들어섰다. 그 곳은 천장에 이상이 없는 탓에 굉장히 어두웠다.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돌계단이 나온다. 스무 단 정도 내려가면 죄수를 수용하는 방이 나온다. 흙이 그대로 드러난 채 짚조차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 싸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왕비는 그 지면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잘 단련된 셰라의 눈은 왕비의 몸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하dis 드레스는 흙으로 더럽혀지고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다. 청년은 돌계단 중턱에 앉아 있었다. 셰라가 내민 바구니를 어깨너머로 말없이 받아들고 빵을 찢어서 입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왕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셰라 역시 말없이 루보다 조금 위쪽의 계단에 앉았다, 호마에 중독 된 인간은 몇 명이고 보아왔지만 이런 증상은 처음이었다. 국왕의 말로는 성벽을 파괴할 무렵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얘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탄가 군을 물리치고 셰라가 국왕과 합류했을 때에는 이미 의식불명. 심하게 땀을 흘리며 손발이 경련하고 있었다. 왕비를 걱정하며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캐리건 일행을 억지로 떼어내고 이곳으로 옮겼다. 왕비는 다시 갇히는 게 싫었는지 심하게 몸부림쳤다. 도저히 쇠약해진 여성의 반항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쳐 날뛰어 대형 견을 붙잡아 누르는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고통스럽게 신음할 뿐,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다. 간병을 하고 싶어도 이런 금단 증상에 치료법은 없다. 본인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말 그대로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자.” 청년의 말에 제 정신으로 돌아온다. 루가 셰라를 향해 바구니를 내민다. 벌써 다 먹었나 생각했지만 바구니 안에는 반으로 가른 빵과 식은 고기가 남아 있었다. 포도주도 한 병 가져왔지만 이것 역시 반 쯤 남겨 두었다. “아직 안 먹었지?”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왕비의 곁에서 식사라니 미안해서 사양하려 했지만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먹지 않으면 몸이 옷 버텨.” 지극히 옳은 말이다. 셰라는 인사를 하고 순순히 바구니를 받았다. 국왕 일행의 식사를 준비하고 바로 여기로 오느라 따로 뭘 먹을 틈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식욕도 없었지만. 오늘 아침부터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계속 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식은 고기를 입에 넣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다시금 통감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음식을 다 먹어버렸다. 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중증인 걸. 음식 냄새에도 반응을 안 해." “식욕 따위가 있을 리 없겠지요." "평소의 에디라면 어떤 때라도 밥은 먹을 테니까." 청년이 부르는 왕비의 이름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건 애칭 같은 건가요?” “아니 본명.” “......?” 이 사람은 말 수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설명이 굉장히 불친절하다. 더 자세하게 물어보려던 순간 왕비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지금까지도 띄엄띄엄 신음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맹수처럼 포효하면서 네 발로 일어난 것이다. 놀랄 틈도 없었다. 왕비는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덤벼들었다. 단순히 출구로 향하려고 했던 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출구 앞에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격을 받은 청년과 왕비는 하나로 뭉쳐 뒹굴면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루!” 가세하려던 셰라의 움직임이 멎었다. 처음에는 일격으로 쓰러졌다고 생각했지만, 흑발의 청년은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다. 미쳐 날뛰는 맹수나 다름없는 왕비를 힘으로 누르려 한다. 물론 왕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양팔을 눌린 상태에서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상체를 일으켰다. 왕비의 이빨은 정확하게 청년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셰라도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청년은 왕비를 누르던 손을 떼고 뒤로 공격을 피한 한 박자 뒤에 왕비를 공격했다. 자세를 낮추던 왕비의 팔을 붙잡아 내던졌다. 왕비의 등이 벽에 격돌했다. 조금도 봐주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던진 위치가 낮았다고는 해도 상당한 충격이었을 텐데, 그래도 왕비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다시 네 발로 일어선다. 청년은 가차 없이 공격했다. 주먹이 날아가고, 말차기가 들어가고, 팔꿈치로 가격한다. 왕비도 교묘하게 공격을 피했다. 아니 평소보다 더 빠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짐승 그 자체의 속도로 청년의 오른팔을 문다. 거의 동시에 청년의 왼쪽 주먹이 왕비의 옆구리에 들어갔다. 왕비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팔을 놓고 뒤로 물러난다. 녹색 눈동자가 기묘하리만치 빛났다. 이미 이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다. 비슷하게는 생겼지만 전혀 다른 마음과 마력을 지닌 생물의 눈. 셰라는 파키라의 늑대를 떠올렸다. 늑대들의 눈은 다른 동물들과 달랐다.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불안감에 휩싸였다. 늑대는 사람들의 얘기 속에서처럼 흉폭한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주의 깊고 겁이 많은 구석이 특징인 생물이지만, 일단 공격에 나서면 어떤 동물보다도 맹렬하게 덤벼든다. 왕비는 그런 늑대조차도 따르게 만들 정도의 생물이지만 지금 상태로는 상당히 불리했다. 게다가 상대는 강하다. 셰라가 저도 모르게 눈을 치뜰 정도로 청년의 실력은 뛰어났다. 왕비와 맨 손으로 싸울 수 있는 전사는 국왕뿐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조금도 뒤지는 구석이 없다. 청년의 발이 왕비의 복부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순간 청년이 수도로 뒷목을 쳤다.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왕비는 다시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격렬하게 신음하고 있었다. 발작적으로 난폭해져 있는 동안,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도 그저 신음만 할 뿐, 말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계속 움직일 수 없던 셰라였지만 청년을 향해 비난하는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죽일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싸우지 않으면 이 쪽이 당해.” 계단으로 돌아온 청년도 심한 꼴이었다. 얼굴에는 찰과상, 막 갈아입은 옷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좀 전에 물린 오른 쪽 팔에서 피가 흐른다. “지금 에디는 제정신이 아니야. 알고 하는 게 아니라고.” “그건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호마의 효능과 그 영향에 대한 실험을 견학한 적이 있다. 실험대상은 어딘가의 마을에서 납치해온 남자였다. 시간을 두고 호마를 계속 투여하다가 갑자기 약을 끊는다. 약이 부여하는 황홀감과 도취감이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버린 남자는 심한 금단 증상을 보였다. 눈물과 침을 줄줄 흘리고 약을 달라고 미친 듯이 호소하면서 땅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마을의 종사들이 약을 주는 대신 내건 조건은 부인과 자식을 죽이라는 것. 남자는 아무 주저도 없이 그 지시를 실행했다. 주저 대신에, 그러면 약을 주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죽일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부인은 반 광란 상태에서 남편의 이름을 계속 외쳤다. 아이들도 울면서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래도 남자의 손가락은 처와 자식들의 목에 깊이 박혀든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자신의 육체를 좀먹는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알려고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조이기만 했다. 마침내 넘겨받은 약에 푹 취해서 제 정신을 되찾은 뒤, 그제야 처음으로 남자는 자신이 죽인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광란에 빠졌지만, 셰라는 그 뒤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실험은 거기에서 끝났다. 견학도 거기까지였다. 필요가 없어진 남자는 아마도 더 상급의 기술을 수행하던 아이들에게 다른 교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암살 방법의 수련에. 그 뒤로도 몇 명인가 증상 사례를 보았지만, 기분이 좋은 광경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셰라가 아는 사례가 일반적이라면 왕비의 용태는 굉장히 특이한 셈이다. 괴로워하고 있다. 지금처럼 발작도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일어설 기력조차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눈빛도 심상치 않다. 어떻게 봐도 중독자인데, 그럼에도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의식이 있을 것 같은, 말을 걸면 대답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약을 달라는 소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호마에 중독 되었다면 반드시 그 말이 나온다. 말하지 않으려고 해도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정상일 텐데. 셰라는 계단을 내려가려 했지만 또다시 청년이 그를 제지했다. “안 된다니까. 정말 죽어.” “당신은 멀쩡했습니다.” “난 물려도 금방 나아. 최악의 경우 죽는다고 해도 되살아나지. 하지만 셰라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어쨌거나 안 돼. 지금 저 아이에게 접근하고 싶으면, 최소한 야생 늑대 열 마리를 맨 손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여야지. 그럴 수 있다면 나도 안 말려.” 너무나도 침착해서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태도였다. 듬직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더욱 짜증스러웠다. “당신은 저 사람이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아니면, 저 사람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청년은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둘 다 아냐. 난 그저 일고 있을 뿐이야.” “뭘 말이죠?” “살아있는 한 이 아이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 “언제나 그랬어. 어떠한 때라도. 그러니까 이렇게 기다리는 거야.” 담담한 어조였다. 셰라는 그 속에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깨달았다.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계단에 앉아있다. 조금 쓸쓸해 보이면서도 의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등이었다. 그 초연한 모습에서 셰라는 일종의 감동까지 느꼈다. 왕비와 이 청년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떤 인연이든 간에 이 두 사람의 신뢰는 다른 사람이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깊다는 그 사실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폐하는 빠르면 내일이라도 결전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정확한 판단이야.”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는 이 사람이 회복하기 전에 전투가 시작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를 여기에 둔 채로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어. 즉 절대로 질 수 없지.” 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탄가 군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오고 있는지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는 너무 불리할 테니 지금 달려가서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청년은 뒤에 있던 셰라를 돌아보면서 미소 지었다. “과연 훌륭해.” 조금 당황했다. 어째서 칭찬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알고 있을 뿐이다.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 한다. 그리고 정보전의 생명은 정확함과 속도에 있다. 이 진영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적진을 살피고 옷 수 있는 것은 다는 누구도 아닌 셰라 자신이다. 실제의 전쟁터는 아니지만 자신의 싸움터가 있었다. 셰라는 금고를 발굴하려고 애쓰고 있는 국왕의 곁으로 돌아가 정찰을 하고 오겠다고 보고했다. 국왕도 그래주면 고맙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케이파드 까지 달려갔다 내일까지 돌아오기는 무리일 것 같은데.” “예. 그러니 도중에 탄가 군을 발견하면 적진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오겠습니다.‘ “음.” “적어도 제가 돌아오기 전에 탄가 군이 습격할 일이 없다고, 그렇게만 생각해주십시오.” “알았다. 부탁하지.” “그럼....” 명령이 있었던 건 아니다. 셰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인사불성 상태로 움직일 수 없었다. 명령을 받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의 셰라는 그럴 수 있었다. 7장 델피니아 군은 그 날 오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일했다. 성채로서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사용할 수 있는 자재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활과 화살을 줍고 창과 갑옷을 파내며, 건장한 남자들이 힘을 합쳐 벽을 치워내고 무제의 금고를 끄집어냈다. “비전하께서도 어차피 하실 거라면 부수지 말고 그대로 빼앗아 주셨으면 최상의 진지가 되었을 텐데요." 도라 장군이 아까워했다. 그러나 성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은 적도 마찬가지. 성채를 기점으로 하는 공방전이었어야 할 전투가 야전으로 돌변한 것이다. 타우 사람들은 특히 적극적으로 일했다. 적이 올 거라고 알고 있으므로 미리 함정을 준비했다. 말이 나아갈 수 없도록 말뚝을 박고, 밧줄로 짠 그물을 지면에 펼쳐 장치한다. 적이 이 위를 지나가려고 하면 그물이 당겨지는 장치였다. 발로에게는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짓이었다. 전사의 방식이 아니니 비겁하다는 말이다. 그런 비난을 받아도 이븐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정정당당한 싸움은 기사님들께 맡기지요. 우리들은 어쨌거나 이기는 것, 살아서 돌아가는 게 중요해서 말입니다. 조라더스가 직접 출병한다면 숫자도 엄청날 겁니다. 그 대군을 겨우 500명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수단이고 방법이고 가릴 처지입니까?” 탄가 군이 지나갈 만한 곳, 혹은 유도할 수 있을 만한 곳에 철저하게 함정을 설치해 나갔다. 그런 대규모 작업을 단시간 내에 하기에는 사람의 손이 너무 부족했기에,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지방의 농민들에게 보스를 주며 일을 돕게 했다. 그런데 농민들은 예상 이상으로 협조적이었다. 남자들은 자기들 일도 내팽개치고 저마다 앞을 다투며 일을 하는 데다, 여자들은 부탁하지도 않은 새참을 만들어왔다. 너무나 싹싹해서 오히려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일을 부탁한 타우 사람들이 기가 막혀 버렸다. 이 쪽 입장에서야 정말로 고마운 일이지만, 본래 자신들은 적인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농민들이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꺼냈다. “당신들, 그 분의 동료들이시지요?” “그 분?“ “예, 성을 부숴버린 분 말입니다.” 타우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당신들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전부 다요.” 이븐이 불려오고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델피니아 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불편해하면서도, 농민들의 대표는 열심히 얘기했다. 오늘 오전, 그들은 일제히 어느 목소리를 들었다. 괭이를 들고 밭에 나가려던 남자들도 상을 치우던 여자들도, 근처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가 귓가에서 고함을 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대표들은 왕비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되풀이 했다. “처음엔 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델피니아의 왕비님이 이 성에 붙잡혀 계신다는 사실은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요. 지상에 강림하신 전쟁의 여신 같은 분이라고 여기에서도 평판이 대단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분 목소리가 틀림없다고....” “그래서 성을 보러 와봤더니 이렇게 .... 정말 무서웠습니다.” 얘기를 하면서도 불안한 듯이 주위를 둘러본다. 정말로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보나리스의 사람들은 델피니아 군을 침략자로 간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이 외부인 들은 무서운 여신님의 동료이니,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저주를 피하려 한다는 말이다. 나중에 이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전쟁의 여신님 덕을 보게 됐어. 적지 한 가운데에서 그 지방 주민의 완전한 협력을 얻다니, 흔한 일이 아니라구.” 아주 드물게 협력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협력은 이쪽을 방심시켜놓고 가짜 정보를 흘리거나 길을 안내하는 척하며 적의 주력부대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럴 걱정이 없다는 것은 정말 고마웠다. 도라 장군도 안심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불러들여 보나리스를 둘러싸는 산길에 대해 자세하게 묻고 안내를 부탁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뒤따라오던 기마병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보나리스 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말문이 막힌 사람이 속출했다. 왕비가 보인 기적은 보나리스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델피니아인들 사이에서도 다시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해가 질 때까지 총 2천의 기마가 모였다. 보나리스의 폐허 옆에 밝게 불이 지펴졌다. 각 부대별로 진영도 세워졌다. 저녁 식사 후 월 그리크는 주요 지휘관들을 모아 군사회의를 열었다. 진영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둘러앉았을 뿐인 회의장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네일 먼저 꺼낸 말이 이것이었다. “소박한 질문이네만 전투 지휘는 내가 해도 괜찮을까? 지금은 발로가 국왕인데.”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지쳤다는 듯이 국왕을 바라봤다. “바라신다면 지금이라도 왕관을 돌려드리지요. 단, 제 심정으로서는 가능하면 왕비에게도 동시에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겁니다.” 발로는 기가 막힌다는 태도를 숨기려들지 않았다. “왕비를 되찾은 이상 당신이 국왕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고 있지 말고 썩 빨리 왕좌로 돌아와 주셔야겠습니다. 이대로는 저도, 처자식도 전부 모반죄로 사형입니다. 아니면 형님께서는 그래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국왕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처럼 이니까 한 번 쯤 국왕으로서 전쟁에 나가보는 게 어떨까 생각하는데, 어때?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벨민스터 공도 함께. 두 사람이라면 굉장히 근사한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입을 다무는 발로. 정중하게 사절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리 사촌 형이라고는 해도 이런 폭언은 용서할 수 없으니 결투를 신청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발로 대신 나시아스가 발언했다. “그것은 폐하의 작전이신지요?” “호오?” 도라 장군이 흥미 있는 듯이 물었다. “나시아스 경은 그 작전이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하나?” “상대를 혼란시킨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국왕이 둘인 군대 따위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단, 아군까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이븐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야 대혼란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결국 왕기를 들고 있는 쪽이 진짜 아니겠습니까?” 이 군의에는 틸레든, 라모나 기사단의 부단장도 참석한 상태였다. 아스틴이 입을 연다. “분명히 예비 왕기는 있습니다. 때에 맞춰서 도착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있어, 아스틴.” 발로가 날카롭게 부관을 꾸짖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진지하게 논의할 것 없다. 형님도 형님이십니다. 그 즉위는 그저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평생에 한 번 뿐이라면 재미도 있겠지만, 이 이상은 국왕역할 따위 사양입니다.” “하지만 발로, 난 분하다고. 조라더스는 그대를 두고 겁쟁이라고 평하고 있지. 왕관을 욕심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폭언을 가만 놔두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나.” 횃불에 비친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발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조라더스가 출진하면 저보고 상대하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적을 맞이하고 네가 협공을 해도 좋겠지. 혹시 조라더스가 직접 출격한다면 총 수가 만 명 아래는 안 될 거야. 그에 비해 이 쪽은 겨우 2천. 보통은 상대가 안 되겠지.” “그래서? 보통이 아닌 싸움을 하실 겁니까?” “음, 이 전력으로 조라더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싶어.” 이븐이 자신의 이마를 철썩 때렸다.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보건대 혀라도 내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듯했다. 나시아스는 실례가 되는 표정을 국왕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여버렸고, 그 곁에서는 가렌스가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듣고 말았다는 듯이 건장한 몸을 푹 움cm렸다. 틸레든 기사단의 반장과 부단장은 나란히 한 숨을 쉬었고, 도라 장군은 헛기침을 했다. “황송합니다만 그것은 보통이 아니라보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지?” 믿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진심인 듯하다. “전쟁은 살아있는 생물이야. 미리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계산해봤자 예상대로는 진행되지 않는 법이지.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슬슬 결판을 짓고 싶네. 언제나 생각하는 바지만, 조라더스가 왕위에 있는 한 델피니아와 탄가의 관계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어.” 담담한 어조였지만 국왕은 심상치 않은 결의를 드러냈다. 충분히 배짱을 갖춘 이들조차 그 기백에 줄려 말을 잃었다. “난 내 쪽에서 공격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다행히 델피니아에는 비옥한 국토가 있고, 우수한 무역 구조가 있었지. 그렇기에-국왕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하지만 탄가는 그렇지 않지. 이렇게 보면 알 수 있지만 산만 있는 나라야.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것도 이해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넘겨줄 수는 없어.” “알겠습니다.” 도라 장군이 대답하고,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는 누군가가 왕이 된다면, 조라더스-그 과기어린 정치의 천재를 왕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면 탄가와 우리나라의 관계도 변할 수 있겠지. 어차피 무모하다는 건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전투에서 조라더스에게 승리하고 싶어. 그리고 벨민스터 공과 합류해서 케이파드를 공격하겠네.” 전원이 비명을 질렀다. “케이파드를?” “후속 부대가 모이면 총 3만 명의 대군이 되겠지? 타우 사람들도 계속 따라와 줄 거고.” ‘아니, 하오나! 그 곳은 탄가의 심장부입니다. 이 보나리스 이상으로 튼튼한 요새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전투가 중요한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긴다.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조라더스를 죽여야 해.” 도라 장군의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폐하. 희망만 말하고 있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조라더스 왕은 성질이 급하지만 경솔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지휘관도 아니지요. 만 명의 군대 한가운데에서 철저하게 보호받는 인간을 어떻게 죽이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과연 한가운데에서 얌전히 있을까? 내가 조라더스를 쓰러뜨리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조라더스는 날 죽이고 싶어 할 텐데.” 이븐이 소리 없이 웃었다. “과연 그래서 두 명의 국왕입니까? 그러니까 틸레든 기사단장은 미끼라 이거죠?” 국왕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이게 미끼라면, 거꾸로 고기를 잡아먹는 미끼라고.” “예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보통 낚시에서 그렇게 위험한 미끼는 쓸 리가 없지만, 이번에는 쓸모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발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멋대로 사람을 미끼 취급하지 말아주십쇼... 라고 말하고 싶기는 합니다만, 과연, 그런 기대라면 부응해 드리도록 하지요.” 즐거워 보였다. 왕관을 양도받는 건 싫어도 이런 역할이라면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인간이다. 나시아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국왕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국왕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탄가 왕기를 노리는 것 이상으로 조라더스는 혈안이 되어서 델피니아 왕기를 노릴 거야. 왕기를 두 개 준비해서 탄가 군을 혼란시킨다.” 도라 장군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왕기를 위조하다니..., 국가로서의 품위는 조금 부족합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그러나 폐하. 케이파드까지 공격한다는 건 너무 지나친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서 쪽 문제도 있고....” “아니야, 장군. 이 강적을 쓰러뜨린 데에 만족해서 서쪽으로 가버리면 지금까지와 아무 것도 알라지지 않아. 여기에서는 굳이 전진을 택하고 싶네.” “그 결심은 참으로 든든합니다만, 현실적인 문제가 말입니다.” “도라 장군, 내게는 조라더스에게는 없는, 절대로 없는 게 있네. 뭔지 알겠나?” “폐하, 지금 그런 문제를 말씀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장군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지만 국왕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말이야, 주군에게 만에 하나의 일이 생겨서 지휘 불능에 빠졌을 때 대신 군사, 정치, 경제를 지휘할 능력을 지닌 측근이라네.” 일동은 입을 다물었다. 탄가의 국왕은 실력 제일 주의자다. 신분보다도 집안보다도 실력을 중시한다. 아끼는 가신 중에는 상당히 낮은 신분에서 발탁된 인물도 여럿 있다. 단, 조라더스가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아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 전제되는 유능함이다. 활동이 뛰어나면 보수도 듬뿍 내리는 것 역시 조라더스의 특징이므로 탄가의 무장들은 굉장히 용감하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의 마음에 들려고, 국왕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앞뒤 가리지 않고 싸우고 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대대로 왕가를 모셔온 집안의 신하와 조라더스 대에 발탁된 신참들 사이는 굉장히 험악하다고 하더군. 명문가 출신에서 보자면 국왕에게 총애 좀 받는다고 건방지게 날뛰는 천한 것이고, 신참 입장에서 보자면 별로 일도 못하는 주제에 집안 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 돌 머리라는 말이 되지. 조라더스나 되니까 그런 부하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거야. 그 핵심이 사라진 뒤에도 탄가의 무장들이 지금처럼 활약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문이지. 게다가 후계자인 나젝크 왕자는 모두 아는 대로 멍청한 인간이야. 조라더스가 살아있을 때처럼 풀릴 리가 없겠지. 왕가의 피를 잇는 자들 사이에서 후계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 추측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발로 경을 미끼로 내세워 적을 혼란시키는 것은 명안입니다만, 그것만으로는....” “걱정할 것 없어. 우리들에게는 비밀 병기가 있으니까.” “비밀 병기?” “라비 경이다. 왕비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이라더군,” 전원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침묵이 흐른다. 가렌스가 그 침묵을 깼다. 너무나도 가렌스 다운 말을 주저하며 꺼낸다. “저어, 그렇다면... 비전하보다도... 강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보통은 스승이 제자보다 강하겠지.” 시로 맞는 말이지만, 일동은 더욱 굳어졌다. “그보다도 강하다니..., 조금 상상이 안 됩니다만 그 색 기 넘치는 형씨가 말입니까...?” “사람은 겉모습만 가지고는 모르는 법이라지만 저렇게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 이븐과 도라 장군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발로가 갑자기 성곽 쪽을 쳐다봤다. “그 남자는 아직 왕비 곁에 있습니까?” “음.” “그다지 찬성할 수 없군요, 아무리 사제 관계라고 해도 왕비를 혼자 간병하게 놔두는 건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그 남자 자신이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왕비는 인사불성이지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발로의 말에 도라 장군의 안색이 변했지만 국왕은 웃어넘겼다. “그건 라비 경의 농담이야. 그 대는 현명하니, 왕비가 겉보기에는 여자라도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겠지?” “예, 유감이지만.” “마찬가지야. 라비 경은 왕비 앞에서는 남자면서도 남자가 아니야. 덩치는 저래도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놀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상당히 눈이 즐겁다고.” “폐하!” “사실을 그대로 말했는데 화를 내면 안 되지.” 도라 장군이 고함을 질렀지만 국왕도 지지 않고 말했다. 이븐은 아까부터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나시아스는 도라 장군 편을 들어야 할지 국왕을 옹호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 때 아스틴이 뜻을 굳힌 듯이 고개를 들며 국왕에게 말했다. “폐하, 저, 잠시만이라도 비전하를 만나 뵐 수는 없겠습니까?” 초조한 얼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실책 때문이다. 자신 때문에 왕비는 포로가 되고, 국왕은 일시적으로 왕좌를 포기했으며, 상관은 자칫하면 역적으로 몰릴 입장에 처했다. 자신만 정신을 차리고 적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으면.... 아스틴은 지금도 그런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왕은 도라 장군과 주고받던 언쟁을 그만두고 타이르는 듯 말했다. “아스틴, 그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 자네 하나 때문에 왕비가 잡힌 게 아니니까. 미끼로 사용된 것이 우연히 틸레든 기사단이었을 뿐이다.” “하, 하오나....”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참아주게. 왕비가 건강해지고 나면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으니까.” 국왕은 포진과 연락 방법 등을 상의하며 모두의 의견을 구하고 특별히 의문 사항이 없었기에 군의를 해산하려 했다. 그 때 어둠 속에서 조용히 접근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깨달았을 때는 바로 등 뒤였지만 국왕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기척의 주인공은 악의를 품고서 발소리를 죽이고 접근한 게 아니다. 그저 평소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꽤 빠르군.”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그렇다는 건, 좋지 않은 소식인가.” “예.” 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가렌스와 아스틴은 깜짝 놀랐다. 도라 장군도 아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수상한 인물로 판단하고 검을 쥐려 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탁 트인 평원에 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건만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막 일어나려는 두 부단장을 제각각 상사가 제지했다. 장군도 사위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셰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형태로 회의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긴박한 상황이었다. “탄가 군은 규스톡까지 와있습니다. 약 1만 5천, 조라더스가 직접 출진했습니다.” 국왕의 예상대로 조라더스는 델피니아를 침공할 목적으로 대군을 이끌고 케이파드를 출발했던 것이다. “규스톡이라면 여기서 아마도 동쪽으로 60카티브 떨어진 곳이지.” “예.” “굉장한 속력이군. 반나절 만에 거기까지 다녀온 건가.” “예.” “규스톡의 영주는 아마....” “할트만 경입니다. 조라더스의 신임을 받고 있는 무장으로, 오늘 밤도 왕은 경의 저택에 머문다고 합니다.” “흐음....” 국왕은 생각에 잠겼다. 전쟁의 상식에서 행군은 하루 25카티브까지가 한계이다. 물론 전력을 다해 나아가면 더 멀리도 갈 수 있지만, 그러면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싸울 수 있는 여력을 남겨두기 위해, 특히 보병에게 과도한 행군은 금기시 된다. 이 상식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조라더스 군이 도착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모레. 그러나 어떤 일에도 예외라는 게 있다. 실제로 국왕의 친구들은 겨우 닷새 만에 보나리스에 도착했다. 387카티브의 먼 거리를 그 짧은 시간 만에 주파한 것이다. “기마병만으로 내일 심야쯤에 야습...도 생각할 수 있겠군,” “필요하시다면 지금 다시 한 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너도 조금 쉬어둬. 내일 또 부탁할 게 있을 테니까.” 군사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다음날은 아무 일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휴식을 취한 셰라는 다시 탄가 군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갔고, 타우와 로아의 남자들 중에서 기마가 뛰어난 자들 몇 명이 정찰을 나갔다. 그 날 조라더스는 행군을 서둘러 보나리스에서 20카티브 떨어진 지점까지 이동한 뒤, 거기서 야영을 한다고 했다. 또한 힐트만 경을 비롯해 그 지역의 영주까지도 출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틀림없이 내일이 결전일 거라고 국왕은 판단했다. 아군도 계속해서 도착했다. 자하니에서는 프라이슬리 경이 부하를 이끌고 참전했고, 란바에서 크리산스 기사단이 달려왔다. 단 이 쪽도 기마뿐이기에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간신히 700기. 게다가 큰 계산 착오가 발생했다. 벨민스트의 군대가 밤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발로가 폴리시아에 들러서 원군을 요청했던 것이 사흘 전. “기만만이라도 먼저 달려와 주길 원했지만 역시 무리였나....” 국왕이 유감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원래는 열흘 쯤 걸리는 거리다. 가장 먼저 달려온 이븐과 발로 쪽이 정상이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어쩔 수 없었다. 발로가 ‘국왕’으로서 내린, 보나리스로 급행하라는 명령이 각지의 영주들에게 들어가지 않았을 지가 없다. 모두 가능한 한 서둘러서 준비를 마치고 보나리스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터. 그러나 보병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강행군은 보통이라면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이븐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장인어른 말대로 성을 남겨 뒀으면 좋았을 걸. 어째서 이렇게 까지 화려하게 부순 거지?” 델피니아 군은 아침부터 열심히 일하면서 성의 잔재를 이용해서 울타리를 쌓고, 파묻힌 해자를 다시 파내면서 임시 요새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분명히 보나리스 성을 통째로 빼앗았다면 이런 고생도 필요 없을 것이다. 모닥불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국왕이 말했다. “원인은 너야, 이븐.” 이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음, 굳이 말하자면 이 성은 너 때문에 불똥을 맞고 부서진 셈이야.” “잠깐 어째서 나 때문이야?” “전에 왕비가 빛을 내면서 네 눈과 팔을 고쳐줬었지. 그게 문제라나 봐.” “아, 그러고 보면 그 녀석, 그 때에도 그런 소리를 했었지만.... 그게 어쨌는데?” “라비 경이 그러더군. 그들에게는 그들의 규정이 있고, 왕비가 여기서 뭔가를 위반하지 않았는지 나중에 조사하게 되어 있다나봐.” “헤에?” “죄과라는 건 일의 선악을 따지는 게 아니라 법률에 저촉되는지 아닌지로 결정되기 마련이지만, 그건 천계도 마찬가지인가 봐. 네 상처를 치료해준 것도 그들의 법률로는 엄연한 위반이라 들키면 조금 곤란해진다더군.” “벌이라도 받는 거야?” “아마도. 하늘에도 일종의 사법기관이 있고 죄를 범한 자를 처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지. 그 힘..., 그것으로 지상의 상태를 변경하는 건 중대한 규칙위반 인가봐. 칼을 맞았으면 칼을 맞은 대로, 회복 불가능한 상처라면 그대로 놔둬야 하지. 원래대로 되돌리라는 지시가 내려오나 봐.” 이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고 또다시 칼을 맞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게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이 보나리스는 어떻게 되는데?” “바로 그거야. 작은 위반이라면 다시 수복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겠지. 그렇다면 사법기관이 새파랗게 질려서 포기해버릴 정도로 엄청난 위반을 저질러버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듯해. 이제 와서 보나리스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 따위는 무리지. 전쟁의 여신이 행한 기적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네 상처에 관해서도 같은 이유가 적용될 거라고. 굳이 다쳤을 때 상태로 되돌릴 필요는 없을 거라고 판단한 듯 해.” “처벌할 테면 처벌해보라고, 배 쨌다 이거지?” “그렇지.” 이븐은 한참동안 가만히 있다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거 참, 탄가 놈들한테 더럽게 미안하게 됐네.” “음, 나도 이제 와서 네 뭄과 팔을 앓는 건 사양이니까 그 판단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라비 경은 그것 말고도 조리는 게 있었던 듯해. 일부러 눈에 띄는 방법으로 보나리스를 파괴하고, 이걸 미끼로 조라더스를 끌어낼 생각이겠지.” 이븐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청난 생각을 하는 형씨로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보다 더 문제는, 분명히 조라더스는 미끼에 걸려서 성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만 오천의 군대라는 덤까지 붙어왔어. 그에 비해 우리들은 총 수가 3천에도 못 미치지.” 포기한 듯한 말투지만 오랜 친구인 이븐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렇다고 질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아냐?” “당연하지.” 국왕이 즉시 대답했다. 어젯밤에도 말한 것처럼, 국왕은 스스로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려고 생각했던 적이 없다. 단, 가만히 앉아서 죽어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결혼식을 노리고 란바를 공격했던 때에도, 스케니아와 손을 잡고 침공했던 때에도, 조라더스 때문에 계속 고생해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왕비까지 빼앗겼다. “탄가의 국왕은 포기라는 걸 모르는 인간인지 몇 번을 쫓아내도 끝내 내 영토를 노릴 생각이야.” “이렇게 척박한 땅이면 어쩔 수 없다고 네가 어제 말했잖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거기에 어울려주는 것도 슬슬 짜증이 나서 말이야.” 이븐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친구가 원해서 국왕이 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국토를 지킬 의무가 부과되고, 나라를 통치할 책임을 강요당하며 국가의 운명을 어깨에 지게 되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정말로 수지가 안 맞는 장사라고 한다. 보통 국왕이라고 하면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동시에 모든 부귀영화가 약속되고,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이 특이한 임금님은 왕위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면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국왕은 소꿉친구들을 돌아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조라더스가 엎어지면 코 닿을 곳까지 와 있어. 둘도 없는 기회니 반드시 탄가군을 격파하고 케이파드까지 진격해서 조라더스의 거성을 함락하자고. 전쟁의 여신의 기적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다.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해내겠어.” 이븐도 함께 웃었다. “그런 뻔뻔스러운 소리를 할 수 있는 게 너의 제일 큰 재능이야. 국왕으로서.” 그런 소리를 하면서 왕비의 상태를 보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들어서자 마침 캐리건이 올라왔다. 국왕을 보자 얼굴을 빛내며 경례했지만 곧바로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호소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전하를 만나 뵐 수 없는 겁니까? 저 이상한 남자는 대체 무슨 권리가 있어서 비전하를 독점하는 겁니까?” 독점이라. 어찌보면 예리한 단어일지도. 국왕은 저도 모르게 웃을 뻔하다가 일부러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째서 여기에 있지?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지금 왕비에 게 접근하는 것은 맹수 우리에 손을 집어넣는 거나 다름없다. 그 청년은 그렇게 말했고 셰라도 같은 말을 했다. 그렇다고 차마 일반 병사들에게 ‘맹수 주의’라고는 할 수 없으니 그저 왕비는 요양 중이므로 지하에 들어서지 말라고 금지해 두었던 것이다. 캐리건이 긴장하며 직립부동의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것이....” “뭐지?” “부, 부단장도...문병을 갔다고 들어서..., 저도 최소한 얼굴이라도 뵙고 싶어서....”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아스틴이 왕명을 무시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마도 발로가 일부러 자극시켰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만나게 해주었다 이거지?” “예. 마치 제가 비전하께 해라도 가하려는 듯한 태도입니다.” “호오? 그렇게나 강경하게 저지당했나. 그렇다면 아예 실력으로 나가보는 게 어때?” 움찔거리며 침착하지 못하게 시선을 돌리는 걸 보면 이미 시험해본 듯하지만 캐리건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덤벼봤자 상대가 될 리 없다. “라비 경이 검을 빼들 정도는 되었나?” 놀리는 듯이 국왕이 묻자 캐리건은 얼굴을 붉히면서 등을 쭉 펴고 힘차게 말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빼들게 만들겠습니다.” 국왕의 뒤에서 이븐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가르쳐주지 않은 건 심하지 않느냐는 웃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븐도 굳이 가르쳐 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다. 국왕은 그 청년의 정체를 일반 병사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저 새로 이쪽 세력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설명했을 뿐. “왕비를 걱정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알고 있겠지. 내일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거야.” “예! 기사단 일동, 죽을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여기서 죽어서 어쩌자는 거야. 그 괴로운 감옥 생활도 견뎠는데.” 국왕은 부드럽게, 그러나 엄격한 어조로 타일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 자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왕비를 구출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사자는 이미 보내 두었다. 이런 일은 한시라도 빨리 아군에게 알려 사기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 물론 기사단원들이 무사하다는 말도 서면으로 전했고, 사자의 입으로도 전해지겠지만 그 소식이 코랄에 도착하려면 며칠은 걸린다. 그리고 전쟁에서는 무사를 알리는 소식 직후에 비보가 날아가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다. 폴라를 울리고 싶지는 않았다. 국왕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캐리건은 긴장한 얼굴로 경례하고 자신의 진지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지하에서 청년이 나타났다. “굉장히 팔팔하네요. 저 애.” “미안하네. 접근하니 말라고 말은 해뒀네만 경을 곤란하게 만든 것 같군.” “정말 대단했어요. 내가 왕비님한테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칫하면 죽여 버릴 기세던데요.” 국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캐리건한테 경이 죽을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덤비면 받아주기도 힘들다고요. 폴라의 동생이니 다치게 할 수도 없고...“ “아니, 너무 귀찮게 굴면 좀 아픈 맛을 보여줘도 상관없네. 좋은 공부가 될 거야.” 이븐도 끼어들었다. “틸레든 부단장은 어땠지? 얌전히 물러났나?” “아뇨, 그 쪽도 상당히 끈질겼어요.” “하지만 형씨. 그 사람들 심전도 모르는 건 아니라고. 언제까지 면회 사절이야?” “슬슬 괜찮을 지도 몰라요.” “뭣?!” 국왕이 반문하자 루는 계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상당히 쇠약해져 있지만, 만날래요?” 국왕은 지축을 울리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물론 이븐도 뒤를 따라갔지만, 마침 야식을 들고 온 셰라가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몸싸움 결과 셰라는 억지로 이븐을 밀어제치고 국왕의 뒤를 따랐다. 호마의 효과를, 그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왕의 q로 뒤를 따라 독방으로 뛰어들다가 무언가와 부딪혔다. 국왕의 등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바위처럼 탄탄한 등이 조용히 뒤로 물러선다. 셰라도 자연스럽게 독방에서 밀려낫다. 왕비가 독방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 있기는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얼굴도 손발도 진흙투성이다. 너덜너덜해진 옷이 간신히 몸을 감싸고 있다. 그 처참한 모습 이상으로, 지금의 왕비에게는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살기가 있었다. 국왕도 셰라도, 뒤늦게 따라온 이븐도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숨을 삼키며 왕비를 바라봤다. 이틀 사이에 왕비가 자기 자신과 어떻게 싸웠는지는 알지 못한다. 슬슬 괜찮을 거라고 루는 말했지만 왕비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걸로 보였다. 독방에서 나온 왕비가 발을 멈췄다. 코를 킁킁거리다가 말한다. “좋은 냄새가 나.” 거의 반사적으로 셰라는 야식을 담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왕비는 바구니를 받아들고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조차 귀찮은 듯했다. 독방 안과는 달리 이 곳은 천장에 구멍이 뚫려있다. 훤한 달빛은 심야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밝았다. 달빛 속에서 왕비는 고기 파이와 생선구이 등등을 미친 듯이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셰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부엌으로 뛰어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반드시 음식이 부족할 거라고 직감했던 것이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식사를 하기에는 그리 좋은 환경 같지 않은데.” 루가 느긋하게 끼어든 것은 왕비가 먹을 만큼 먹고(셰라는 그동안 부엌까지 두 번 왕복했다.) 배를 채운 뒤의 일이었다. 셰라가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들을 도저히 맛을 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속도로 비워버린 왕비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했다. “상관없잖아. 먹을 수만 있으면.” 중독 증상으로 괴로워하던 동안의 험악한 눈빛은 사라지고 아무 지장 없이 말을 하고 있다. 최후로 포도주 잔을 내민 셰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머리, 잘랐구나.” “예.” “굉장히 잘 어울려.” ‘예....“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 남자에 대해서. 아버지라고 밝혔던 백작에 대해서. 그 백작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파로트 일족을 소멸시켰다는 것도. 어느 것 하나 후회는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셰라는 말없이 물러나며 국왕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결국 국왕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왕비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븐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국왕이 ‘남편의 권리’를 주장하며 제일 먼저 얘기를 나누겠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럼 저 둘은 뭐야?” 절대로 자리를 비키려 들지 않는 루와 셰라를 가리키며 이븐이 불만스럽게 말하자 청년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애인의 권리.” 셰라는 조금 미안한 듯 변명했다. “역시, 그, 시중을 드는 입장에서 곁을 떠날 수는 없으니....” 왕비가 그리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기에 이븐은 포기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일단 편안하게 얘기를 할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건물의 토대와 기초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먼지로 가득한 지하 감옥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즉각 왕비와 상의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총 2천, 적은 현재 1만 5천. 거기서 더 늘 가능성도 있어.” “상대는 누구야? 조라더스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 거야?” “왔고말고. 라비 경의 예측이 들어맞았어. 내일이 결전일이다.” 왕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거 다행인 걸. 간신히 시간에 맞췄구나.” 얼굴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허물없는 말투에도, 피로가 남아있는 얼굴에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싸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슬슬 잠자는 것도, 좁은 곳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지겨워졌어,”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였지만 셰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엇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의 간섭도 용서하지 않는 이 사람이 탄가의 계략에 속아 구속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국왕도 주의 깊게 말했다. “리, 분명히 아군은 상당히 불리해. 나로서도 가능하면 네 힘을 빌리고 싶어. 네가 있어주면 아군의 사기도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데 싸울 수 있겠어?” 달빛이 쏟아지는 지하에서 왕비는 국왕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탄가의 바보 왕자 놈이 이상한 소리를 했어. 난 부인으로 삼겠다던가....” “그래, 탄가는 그럴 셈이었어. 코랄에 찾아온 사자가 그렇게 밝혔지.” “이상하잖아. 난, 너하고 결혼했는데. 그걸 모를 라도 없으면서.” “탄가의 법률상으로 우리들의 결혼은 무효라나 봐. 국왕은 양녀를 들일 수 없고, 양아버지와 양녀의 결혼도 인정되지 않는다던가. 어거지지만 일단 앞뒤는 맞아.” “그렇게까지 우습게 보여 놓고서 너, 가만히 물러날 생각이야?” “아니, 나도 슬슬 지겨워졌어. 이쯤 해서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지.” “마찬가지야. 나도 스스로에게 맹세했다고. 그 썩을 새끼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나젝크 말이야, 아니면 레니를 죽인 남자 말이야?” “레티? 레티가 무슨 상관인데?”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 남자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싹 잊어버린 듯한 태도이다. 국왕은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무릎을 쳤다. “넌 그 남자한테 너무 물러!”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셰라도 끼어들었다. 주인들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끼어드는 짓이 무례하다는 건 뻔히 알고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남자에게 어떤 짓을 당했는지 잊으셨습니까? 바로 조금 전까지 호마에 중독 되어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 따져보면 그 남자 때문입니다. 그 때-성을 부쉈을 때에, 그 남자만은 놓치지 말고 죽여 버리는 게 좋았을 텐데.” 왕비도 놀란 듯했다. “너, 되게 과격해졌구나....”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녀석, 날 죽이지 않았어. 뭔가-이유가 뭐라고 했더라? 네가 실업했다던가, 아니지, 너 때문에 실업자가 되었다...고 했던가?” 기억이 상당히 애매한 듯했다. 세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그 남자는 일족의 규정에 얽매여 있지 않다. 파로트 백작이 죽은 그 시점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임무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봐주실 생각입니까?” 말투가 신랄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셰라에게 있어서는 그 남자야말로 가증스러운 적이지만 왕비는 냉정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자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해. 그 녀석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 수 없어. 그리고 눈앞에 탄가 군이 닥쳐오고 있지. 이 상황에서 적에게 등을 돌리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적을 쫓자는 거야? 그거야말로 바보짓이야.” “그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남자를 이대로 놔들 수는....” “알고 있어. 나도 결판은 낼 생각이야. 그 녀석, 루퍼의 검을 들고 가버렸어.” 당사자인 루는 지극히 침착했다. “어차피 검이라면 다시 찾으면 될 일이니까. 나도 탄가 군을 먼저 처리하는 쪽에 찬성. 여기서 등을 돌렸다가는 바보짓 정도가 아니라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거나 다름없어.” “그런 거지. 지금은 일단 그 엿 같은 놈부터 죽인다. 반드시.”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기세였다. 나젝크 왕자에 대해 언급하는 왕비의 어조는 격렬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셰라로서는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보기도 두려워서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리, 내일 전투에 나젝크 왕자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뭐?!” “정말입니다. 이 곳을 탈출해서 조라더스 왕의 군세에 합류한 것까지는 분명합니다만 케이파드를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바로 떠났습니다.” 왕비는 혀를 찼다. “이상하잖아. 아무리 멍청하고 바보라지만 일단은 탄가의 후계자잖아? 델피니아의 국왕과 왕비가 군사도 별로 없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데 이 중요한 전투에 후계를 참전시키지 않는 거야?”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리도 아니야. 널 놓친 데다 소중한 거점인 보나리스는 산산조각이 났지. 그렇지 않아도 무능한 인간을 싫어하는 조라더스인데 이건 완전히 역사상에 남을 실태야. 친자식이 아니었다면 이미 찢어 죽였을걸.” 친자식이라도 충분히 죽여 버릴 수 있는 성격의 조라더스 지만, 탄가는 이제부터 큰 싸움을 앞두고 있다. 굳이 후계자의 피를 흘려가면서 군대의 사기를 꺾을 것은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보나리스에 있던 군대는 남김없이 케이파드로 철수했습니다. 이 쪽의 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들의 공포가 다른 병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점을 걱정했던 게 아닐까요?” “아마 그렇겠지.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눈앞에서 봐놓고서 리를 향해 돌격할 수 있는 대담한 인간은 별로 없을 거야.” 왕비는 지면을 노려보면서 낮게 신음했다. “하루라도 빨리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엿 같은 새끼는 재수가 더럽게 좋네.” 얌전하게 앉아있던 루가 왕비를 나무랐다. “왕비님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거 아니야.” “이제 와서 내가 우아한 척해봤자 뭐가 바뀌기라도 해?” “그건 그렇지만, 너무 왕비님답지 않은 말버릇이잖아.” “신경 쓰지 마!” 청년은 기가 막힌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국왕을 돌아보았다. “잘도 이런 걸 왕비로 삼았네요.” “음. 반한 좀이 죄라는 거지.” “과연.” “뭐가 과연 이야!” 국왕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청년은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내일 싸움은 왕자님이 없어, 상대는 탄가의 임금님이지. 그럼 내가 할게. 탄가의 임금님은 양보하겠다고 했지?” “루퍼, 잠깐만. 분명히 양보하겠다고 했어. 하기는 했는데....” “했는데, 뭐?” “절대로 미인계로 붙잡을 생각은 마!” 국왕과 셰라는 기막혀했지만 왕비는 진지했다. 대답하는 청년 쪽도 지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다. “네가 그런 소리할 자격이 있어.?” 싸늘한 목소리. “난 지금까지 너와 한 약속을 지키면서 귀찮아도 덤벼드는 간수들을 격퇴했는데....” ‘간수?“ “응, 감옥에 있었거든. 북쪽 탑이라는 곳. 감옥치고는 밥이 맛있었어.” “왜 북쪽 탑에? 무슨 짓을 했는데?” “성에 들어가려고 한 것뿐인데.” “정면으로?” “응.” 왕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그거, 완벽한 수상한 인물이잖아.” “네가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카드도 막대기도 계속 코랄 쪽을 가리켰으니까.” “흐응?” 왕비는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청년은 그 이상 언급하지 않고 얘기를 되돌렸다. “어쨌거나 열심히 몸을 지키면서 널 찾아왔더니, 그동안에 넌 대체 뭘 한 거야? 적한테 붙잡혀서, 검은 태양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거기다가 내가 부상을 입지 않았으면 어쨌을 거야? 얌전히 탄가의 왕자님한테 잡아먹힐 뻔했잖아.” “기분 나빠! 누가 얌전히 야, 누가?!”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런 왕비를 보면서 셰라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특별히 이유는 없지만 그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왕비는 다른 일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갑자기 입을 다물고 날카롭게 청년을 바라본다. 거의 갈기가 담긴 험악한 어조로 묻는다. “루퍼, 설마 그 공격..., 일부러 맞은 거야?” “그렇다면 어쩔 건데?” 왕비의 손이 힘껏 지면을 쳤다. 셰라는 물론이고 국왕까지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얼마나 말해야 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청년의 어조도 딱딱했다. “설령 일부러 했다고 해도 비난받을 필요는 없어. 그러지 않았으면 셰라가 당했을 거야. 그 검은 태양은 천부적인 살육자야.”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알면서 어째서 얌전히 붙잡힌 거지? 우연히 사정이 도중에 바뀌었으니까 다행이었지, 자칫하면 네가 죽을 뻔했어. 약속은 어떻게 되는데? 넌 너 자신과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겠다고 분명히 약속 했을 텐데.” “아냐! 탄가뿐이라고 생각했어! 그 녀석이 얽혀있는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매리건 일행을 죽게 내버려뒀을까?” 왕비는 신음했다. 무릎을 양손으로 꽉 쥐면서 짜내는 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그밖에는 방법이 없었어.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그 말도 그대로 돌려줄게.” 청년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부탁이니까 조금 더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겨. 그런 짓까지 해서 캐리건을 살려도 네가 죽으면 아무 의미 없으니까.” 왕비도 이번에는 신음하지 않았다. 똑바로 청년을 응시하면서 조용히 말한다. “약속을 잊은 건 아니야. 일부러 죽으려고 한 것도 아니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때라는 것도 있어.” “.......” “탄가 인이라면, 날 붙잡으면 기사단원 따위는 필요 없다 여길 거라고 생각했어. 단원들이 해방되는 걸 확인하고서 도망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물론 그게 녀석이 노리는 점이었겠지만. 그 녀석, 정말 교묘하게 흔적을 숨기고 있어. 그 약이 나올 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으니까.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약을 마시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분명히 내 손으로 사형 집행서에 서명한 거나 다름없는 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캐리건 일행은 살아날 수 있었어. 여기 놈들이 약속을 어기지만 안았으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난 지금도 그릇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청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의를 구하며 국왕을 바라본다. “임금님, 뭐라고 말 좀 해 줘요.” “그러지.” 국왕이 끄덕이고서 왕비를 향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네 말에도 일리는 있어. 분명 때로는 자신을 희생해야만 할 경우도 있지. 이런 시대라면 더욱 그래. 나 역시 지금까지 몇 번이고 죽음을 각오했는지 몰라.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이론이나 계산으로는 옳다고 해도 그것과 실제 감정의 흐름은 완전 별 개의 문제야. 내가 널 저버릴 수 잇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네가 희생되어도 내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엄청난 모욕이야. 안 그래?” 왕비는 조금 웃었다. 타이르듯이 웃으면 말한다. “넌 국왕이잖아. 그런 감정으로 움직여서 어쩌자는 거야? 조라더스 녀석, 어차피 내 몸 값으로 타우를 내놓으라고 했겠지?”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내쳤어. 그랬더니 다음엔 널 나젝크의 비로 삼겠다더군.” 국왕은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왕비도 경멸과 혐오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을 책망하는 듯이 말한다. “그런 헛소리야말로 내버려두지 그랬어. 탄가의 바보 부자 놈들, 제 발로 사형대에 고개 처박는 거나 다름없었을 텐데.” 이 폭언에 국왕은 신음했다. 전신을 분노로 떨면서 왕비를 향해 손가락질 한다. “잘 들어, 리. 네가 간신히 병상에서 일어난 몸만 아니었으면 그대로 두들겨 팼어!” “이하동문.” 청년도 거들었다. “정말, 어떻게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너 대신 폴라가 탄가 왕자님한테 잡아먹히게 생겼으면 어쩔 거야? 제일 먼저 새파래져서 달려갈 주제에.” “그거야, 그건...폴라는 여자니까....” 요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왕비를 보며 국왕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이 얼마나 구해주는 보람이 없는 마누라란 말인가. 청년도 기가 막힌 듯했다. “지금은 너도 여자라는 거, 알고 있어?” 그러자 왕비는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 자식. 약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에게 올라타려고 했으니까.” 국왕이 분한 듯이 무릎을 쳤다. “그거야. 넌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보나리스에서 돌아오지 않았어. 게다가 조라더스는 널 나젝크의 처로 삼겠다고 나왔지. 무슨 일이 있을지는 대략 상상할 수 있지. 그런데 어떻게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그 빌어먹을 자식, 발정 난 수캐나 다름없던데. 귀를 물어뜯어버리기는 했지만 내 손으로 죽여 버리지 않으면 전혀 성이 안 차.” 왕비는 살기어린 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남편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난 말 야, 그 약을 마시는 시점에서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저 탄가 놈들이 하는 짓을 봐서는 내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너한테 어거지를 부려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게 걱정이었어. 그런 일로 너한테 부담을 주는 게 정말 싫었어.” “걱정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걱정할 문제가 전혀 달라.” “그래서 혹시 죽으면 네 침대 가에 나타나려고 생각했지. 놈들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탁 쳤다. “그런가.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걸. 하지만 정말로 알리러 올 수 있는 거야?” “물론 제일 먼저 가줄게. 내가 죽는다면 너만은 반드시 알 수 있어.” 문제의 초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번에는 셰라가 한숨을 쉬었지만 국왕은 진지했다. “안 나와서 다행이야.” 진지하게 말하면서 왕비의 어깨를 쓰다듬고 흐트러진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안 나와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 소식 따위 절대로 사양이니까. 그보다 네가 무사하게 있어주는 편이 훨씬 기뻐.” 왕비가 쑥스럽게 웃었다. “너, 아직도 태연하게 날 만지는구나.” “또 그 소리야? 슬슬 질렸는걸.” 국왕은 웃으면서 헝클어진 왕비의 머리를 기세 좋게 휘저었다. 왕비도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루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방해가 되는 것 같으니까 실례할게요.” 참으로 예의바른 애인이다. 왕비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로 청년을 향해 국왕이 말을 걸었다. “기다려. 라비 경. 아까 조라더스를 쓰러뜨리겠다고 했네만 정말로 할 생각인가?” “응. 안 된다고 해도 할 거예요.” “말리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미인계는 안 돼. 미인계는 절대로.” 침실에서 국왕 암살을 기도한들 쉽게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청년의 정체가 들통 나는 것. 즉 델피니아와의 관계가 표면에 드러나는 일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델피니아의 입장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긴다. “그건 즉, 델피니아 진영의 사람이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음.” “그럼 얘기는 간단하죠. 안 들키면 돼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이번에는 국왕의 팔과 격투하면서 왕비가 따끔하게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 무엇보다 입장이라는 게 있어. 국왕이 진지에서 원인불명의 급사로 죽는 건 최악이야. 제일 먼저 이쪽이 의심받게 되니까.” 청년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주문이 많네....” “애초에 이 녀석이 했던 주문이야. 나도 적의 머리를 노리는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정정당당하게 일대 일로 싸우기라도 하지 않는 한은 안 된다잖아.” “그거 참, 어려운 걸.”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파악조차 힘든 어조로 말하다, 청년은 쿡쿡 웃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입장이 설 만한 방법을 생각해보지요. 뭐, 어쨌거나 내일 전투에서 참패하지 않아야 성립되는 얘기지만요.” “누가 질 줄 알고!” 국왕과 왕비가 동시에 합창했다. 그 날 밤 제일 바빴던 사람은 아마도 셰라가 아닐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장만한 뒤 왕비의 목욕을 돕는 일이 남아 있었다. 큰 냄비에 물을 끓이고, 예비 천막에 욕조 대신 대야를 준비한다. 이 때만은 왕비도 얌전히 목욕에 동의했다. 만 이틀 내내 지하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곰팡이 냄새에 먼지 냄새, 그 전에 거기서 죽은 죄수의 시체 냄새까지 몸에 스며든 것 같아.” “좀 전까지 거기서 태연하게 식사를 드시던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데요.” 셰라는 기막혀하면서도 왕비를 대야에 앉히고 머리를 감겼다. 나체가 된 왕비의 몸은 상상이상으로 멀쩡했다. 어제 그렇게나 결렬하게 격투를 했는데 몸에 멍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안심이 됐다. 이 사람은 그 청년과는 다르다. 남들 이상으로 튼튼하지만 상처를 입으면 낫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저기, 셰라.” “예” “너, 어제하고 오늘, 계속 나가 있었지?” “예, 그렇습니다만?” 왕비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이 말을 우물거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에 내려와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 뭔가 저질렀어?” “예...?” “날뛰거나 하지 않았어?” “그건....” 그 엄청난 격투를 직접 봤던 만큼 바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전혀. 정신을 차려보니까 이틀이나 지나 있었어. 뭔가 저지르지 않았어?” “저어..., 그러시다면, 저보다도 그 분께 여쭤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솔직하게 말해 줄 녀석이 아니야.” 셰라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왕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청년에게 위해를 가한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사실을 말해버리는 거야 쉬운 일이지만 본인이 아무 자각도 없었고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일부러 말하기는 마음이 불편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천막 바깥에서 청년 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미안 이 옷을 가져와줬어. 여기 놔둘게.” 왕비가 대답한다. “그런 데에 있지 말고 들어오면 될 텐데.” “왕비님이 목욕하시는데 엿볼 수는 없잖아.” 청년은 웃고 있었지만 왕비는 그 말에 갑자기 대야에서 일어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천막 입구를 기세 좋게 열어젖힌다. “아앗...!” “비전하!!” 불행하게도 바깥에 있던 것은 청년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샤미안이 아직 있었던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도라 장군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왕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는 청년의 팔을 붙들고 천막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비전하?!” 도라 장군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이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던 국왕을 향해 호소했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합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다면 ! 저 무례한 인간을 어떻게 하십시오!” “아니, 억지로 끌고 들어간 건 왕비인데.” “그럼 비전하를 꾸짖으십시오! 아무리 형식상이라고는 해도 비전하는 폐하의 처입니다. 이건 명백하게 남편에 대한 부정행위입니다!” 불륜이라고 하지 않는 만큼은 장군도 사정을 이해하고 있지만, 국왕도 난처해졌다. 끌려들어간 청년은 청년대로 바깥의 공기를 눈치 채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셰라에게 옷을 넘겨주고 낮은 목소리로 왕비를 타이른다. “에디, 이럼 곤란해.” “어째서? 난 신경 안 써.” “나도 신경 안 써.” “나도 신경 안 써. 하지만 널 임금님의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아.” 홀딱 벗은 차림의 왕비는 이상한 듯이 말했다. “이 쪽 사람들한테 되게 신경 쓰네?”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네 입장이야. 제멋대로인 왕비님의 행동을 대부분 넘어가주는 마음 넓은 국민들이라고 해도 불륜 만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임금님이 국민들에게 사랑받는다면 더욱 그렇지.” 왕비는 마음에 안 드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며 청년을 쳐다봤다.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셰라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미묘하게 어긋나 잇다는 느낌을 받았다. 왕비는 지극히 평범히 평범하게 ‘왕비답게’ 행동하고 있다. 셰라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왕비에게 어떤 남자도 ‘이성’일 수 없다. 당연히 불륜이라는 의식도 없다. 단,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왕비는 이 청년의 존재를 특별히 여긴다. 그런 감정을 솔직하게 겉으로 드러냈을 뿐. 그에 비해 청년 쪽은 훨씬 정확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깥에는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어 재빨리 속삭였다. “그다지 나쁜 짓하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지금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아. 내일 중요한 전투가 있으니까. 임금님은 날 조력자라고 소개했지만 아무 것도 안 입은 왕비님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조력자는 군대에서 쫓겨나게 돼.” 지극히 옳은 말이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국왕의 부인’인 것이다. 알몸의 왕비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한동안 생판 남인 척하지.” “부탁해. 그리고 이거, 돌려줄 테니까.” 품속에서 머리장식을 꺼내놓고 허리에 차고 잇던 검을 풀어서 내민 뒤 천막에서 나가려고 했다. 청년의 등을 향해 왕비가 말을 걸었다. “루퍼.” 굉장히 걱정스럽고 힘없는 목소리. “응?” “나, 물어뜯거나 하지 않았어?” 청년은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걸로 공평해졌어. 잊었어? 옛날에 네 눈을 할퀴어서 자칫하면 실명하게 만들 뻔했잖아.” “바보. 대체 언제 적 얘기야?” 셰라에게는 이 대화도 이상하게 들렸다. 저 청년은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다. 상처를 입어도 바로 나을 텐데.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이 어째서 그렇게나 신경 쓰이는 걸까. 청년이 나간 뒤 왕비는 초연한 태도를 거두고 이상한 듯 말했다. “그런데 말 야. 국왕 이외의 남자가 왕비에게 접근하면 안 된다고 치면, 넌 어떻게 되는 거지?” 셰라가 흠칫 놀랐다. “그, 그건....” “그 머리로는 시녀인 척도 할 수 없잖아. 그건 정말 차별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리, 저도 이 모습으로 도라 장군을 만나 뵙는 건 처음입니다. 목욕을 마친 당신의 등 뒤에서 등장할 용기는 도저히 없는데요.“ 그만 평소에 하던 대로 목욕을 거들고는 있었지만, 바깥에 도라 장군이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궁지에 빠진 셈이다. 어떻게 나가야 좋을지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몸이 움츠려든다. 장군은 왕비의 욕실에서 나온 무뢰한에게 노성을 지르려 했지만 상대 쪽이 빨랐다.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막 지르려던 고함을 얼결에 꿀꺽 삼켜버리고 장군은 입만 뻥긋거렸다. 그 곁에서 국왕이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인다. “아니, 미안하네. 난 상관없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구석이 임금님의 대단한 점이에요. 왕비님한테도 제대로 얘기해뒀으니까요.” “고맙네.” 도라 장군은 남편과 부인의 애인이 왜 평화롭게 담소나 나누고 있는 거냐고 절규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보다도 먼저 목욕을 마친 왕비가 나왔다. 샤미안이 준비해준 옷은 샤미안 본인의 옷이었다. 같은 남장이라도 왕비가 입는 옷보다 천도 훨씬 고급이었고 장식도 붙어있다. 훨씬 화려한 인상이었다. 막 감은 물기어린 머리에 평소처럼 머리장식을 얹고 애용하는 검을 허리에 드리운 왕비의 모습에는 날카로운 기백이 있었고, 좀 전까지의 지저분한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비전하! 당신께서는 조금은 신분을 생각해주셔야...!” “지금 생각했어. 모두를 깨워라. 할 말이 있어.” 장군은 다시금 고함을 삼켰다. 델피니아의 비장군의 어조가, 기백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소집령이 떨어졌지만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궁지에 몰려있던 델피니아의 병사들이 환희에 차서 왕비를 맞아한 것은 두말 말할 것도 없었다. 가장 열광적으로 왕비를 반기는 것은 물론 틸레든 기사단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스틴과 캐리건은 다른 병사들까지 밀어젖히면서 왕비를 향해 달려왔다. 눈물을 글썽이며 왕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정말...,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아스틴은 그 말만 간신히 했고, 캐리건은 커다란 눈에 눈물만 그렁거리며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왕비가 일부러 전원을 불러 모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군의 수는 얼마 되지 않고, 적은 만 명이 넘는 대군이다. 아군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왕비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 연출은 완벽하게 들어맞았고 델피니아 진영은 갑자기 활기로 가득 찼다. “만세!!” “승리의 여신이 진영에 돌아왔다!” “내일 전투는 이긴다!” 싸우기 전부터 축배를 들 기세였다. 왕비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는 부하들을 보고 발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은 마음껏 날뛰게 놔두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발로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는 그림자기 있었다. “좋은 밤이네요, 호랑이씨.” 이 사람은 밤에는 독특한 분위기를 띤다.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여자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발로는 유쾌하게 말했다. “호오, 이거, 이거. 왕비의 애인 겸 엄청난 실력의 남창 씨가 아닌가. 무슨 일이신지?” 청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난 실력의 남창이라니, 그거 왠지 야하게 들리는데요.” “아니던가?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런 취미가 없지만 그 쪽 취미가 있는 놈들이 보면 눈이 뒤집힐 정도가 아닌가.” 본래 입이 험한 발로였지만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얼마나 화를 내는지 시험해 볼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청년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호랑이 씨는 어째서 임금님이 안 되는 거죠?” 너무나도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발로조차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비슷한 소리를 들어본 적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당연한 권리를 어째서 포기하는 거야?! 라고 열을 내며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발로는 팔짱을 끼고, 새로운 흥미와 함께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상대를 쳐다봤다. “그럼 남창은 관두기로 하고, 아름다우신 미청년 씨. 어째서 내가 잠자는 척하는 호랑이지?” “델피니아 왕가의 문장은 사자잖아요.” “사보아 공작가도 마찬가지야.” 발로의 대답에는 상관없이 청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실력으로 말하자면 사자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건 호랑이뿐이니까... 일까나?” 생긴 건 연약해 보이는 주제에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지껄인다. “왕관을 가질 수 있는데도 가지려 들지 않죠. 하지만 눈을 살짝 뜨고 어떤 사람이 어떤 식으로 왕관을 사용하는지 보고 있어요. 그게 잠자는 척하는 게 아니면 뭐죠? 그런 짓 하지 않아도 호랑이 씨에게는 충분히 힘이 있으니까 그냥 임금님이 되면 될 텐데.” 도발도 부추키는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맛난 음식이 잔뜩 쌓여 있는데 어째서 안 먹는 건지, 왜 그러는 건지 신기하게 여기고 있다. 발로는 팔짱을 낀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진심으로 재미있게 여기면서도 웃음 사이로 드러나는 기백은 호랑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10년 동안 왕좌를 거부해왔던 인간이야, 난.” “그러니까, 어째서?” “그게 궁금할 만한 일인가? 그런 소리를 멍청하게 해댔다가는 반역죄야. 그대로 즉각 죄인이지.” “반역죄가 아니면 괜찮다는 건가요?” “물론이다. 국내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이제 어쩔 수 없으니 발로 경이 나서주지 않으면 일이 수습이 안 된다고 호소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부탁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왕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럼 내란 때에 그러면 좋았을 것을.” 주모자인 페르젠이 강력하게 발로를 국왕으로 추천했다는 사실은, 당사자인 발로가 완고하게 그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과 함께 지금도 왕궁의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발로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남자의 힘으로 왕좌에 앉아서 어쩌자는 건가. 그 놈이 왕국을 가로챌 속셈이라는 거야 누가 봐도 뻔했는데.” “그런 짓은 거들 수 없다?” “당연하지. 더럽혀진 왕좌에 앉아봤자 부슨 의미가 있겠어?” 청년은 살짝 어깨를 으쓱하고 웃음을 지었다. “엄청난 처세술이네요. 사람들의 의혹에 찬 시선을 받으면서 왕좌에 앉아서 몸을 더럽히느니 신하로 있는 편이 낫다는 건가요?” 발로도 씨익 웃었다. “그건 상대에 따라 다르지. 페르젠의 허수아비가 되는 건 물론이지만, 그 레온 아래에서 얌전히 신하 노릇을 하고 있을 수 있었을지 어떨지는 스스로도 의문이니까..” “레온이라는 건 사고로 죽은 왕자님?” “그래.” “그렇게 능력이 없었나요?” “말할 필요도 없어.” 그러자 청년은 또다시 대형 폭탄을 던졌다. “레온 왕자가 국왕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런 사람한테 임금님 자리를 맡겨둘 수 없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호랑이 씨한테 왕관이 굴러왔을 테고, 죽어버려서 유감인걸요.” 발로의 표정은 상당한 볼거리였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청년을 매섭게 노려봤지만 입가에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까워.” “뭐가?” “그 대가 여자였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내 애인으로 삼았을 텐데. 그 미모에 위험한 말버릇을 그냥 내버려두기는 아까워.” “그거 유감이네요. 호랑이 씨의 애인 자리라면 저도 기꺼이 입후보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쿡쿡 웃었다. 발로는 그런 청년의 옆에 다가가, 비밀 얘기라도 하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형님에게는 특이한 재능이 있어. 자연스럽게 사람을 부리는 솜씨가 엄청나게 뛰어나지. 관리 당한다는 기분도, 지배당한다는 기분도 안 들게 말이야. 그러니까 어느 틈엔가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마는 거야. 저 페르젠이나 바보 레온은 무슨 짓을 해도 흉내도 못 내.” “호랑이 씨가 낮잠 잘 수 있을 정도로?” “그럼. 안심하고 잘 수 있어.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일 아닌가.”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지금 임금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까요.” “물론이지. 그분 말고 델피니아의 왕은 달리 없어. 나도 시켜준다면 남들 이상으로 나라를 다스릴 자신은 있지만 적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타우는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갈 거야. 형님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난 불가능 해. 그 밀짚머리에, 산적 출신의 까다로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르게 만드는 건.” 그것이 흔히 본심을 보이지 않는 발로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 임금님도 지배할 생각 따위는 없을 테죠.” “곤란하게도 그게 형님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델피니아에는 형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왕비도?” 조용히 묻는다. 지금까지의 얘기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별 것 아닌 질문 같았다. 발로는 즉답을 회피하고 가만히 청년을 바라보다가 환성이 들리는 방향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대답이다.” 그 곳에는 국왕과 나란히 서서 병사들의 열광적인 환성에 답하는 왕비의 모습이 있었다. 8장 조라더스 민게의 분노는 정점에 달해 있었다. 델피니아의 왕비를 붙잡은 시점에서 승리는 거의 확실하게 이 쪽의 것이 되었어야 했다. 여자를 아들에게 넘겨주어 ‘델피니아 왕비’에서 ‘탄가의 차기 왕비’로 바꾸고 왕비에 대한 델피니아 국민들의 신앙을 부숴버린다. 국왕 월 그리크도 부인이 인질로 잡혀있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그 뒤에는 어떻게 요리하든 이 쪽 마음대로 였다. 한 발 먼저 아들을 보나리스로 보내두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케이파드를 나섰다. 그대로 단숨에 델피니아로 쳐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승리를 향한 그 행진이 출발하자마자 헝클어져버렸던 것이다. 규스톡 마을에서 머물고 있을 때 보나리스를 책임지고 있던 뮤렌이 헐떡거리며 달려와 덜덜 떨면서 보고했다. “보나리스 성이 파괴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라더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민한 탄가 국왕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나리스는 조라더스가 15년에 걸쳐서 쌓아올린, 탄가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우수한 성이다. 견고한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많은 군대가 공격해 와도 최소 1년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장비와 군대가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그 곳에 왕비까지 인질로 잡고 있으니 델피니아가 아무리 이를 간들 섣불리 손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 성주인 뮤렌이 퉁퉁 부은 무참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건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어가 이상했다. ‘파괴되었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전쟁에 패해 도망쳐 왔다면, 이런 경우에는 보통 성을 ‘빼앗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판단 재료보다도 뮤렌의 상태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조라더스는 불쾌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설마 그대, 보나리스를 빼앗겼다는 건 아니겠지?” “죄,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부은 뮤렌은 이중의 공포에 쫓겨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왕비와 약속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성이 붕괴되는 소란 통에 군사는 자취를 감춰버렸고, 이 일에 대해서는 뮤렌이 전부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게다가 그 사실을 자기 입으로 주군에게 보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편 조라더스는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바로 지금이라도 눈앞에 있는 바보의 목을 따버릴까 싶었지만 일단은 냉정하게 물었다. “적은 얼마나 되는 대군으로 공격했나?” 이런 질문을 하는 시점에서 조라더스는 아직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잃었다는 말은 적군에게 빼앗겼다는 의미, 파괴되었다는 말은 적이 돌입할 때 성문이나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는 의미일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보나리스가 겨우 하루의 전투로 돌파 당했다면 적은 상당한 수의 군대와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건만, 뮤렌이 자세하게 사정을 설명함에 따라 조라더스의 용맹한 얼굴은 순식간에 살기를 띠었다. “천벌이라고?” 조소와 경멸이 담긴 싸늘한 목소리였다. 파라스트의 오론이 상당한 부분에서 신들을 중시하는 신앙심 깊은 인간인 데 비해, 조라더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저주도 천벌도 믿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국왕이라면 출진 전에 반드시 발도우에게 기도를 바치기 마련이지만,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신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권력을 원하는 독재자인 조라더스의 신념이었고, 언제나 그 신념을 관철하고 있다. 그런 조라더스 앞에서 신의 저주니 천벌이니 하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주군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뮤렌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비와 맺은 약속에 대해 필사적으로 말하고,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긴 결과 천벌이 내렸다고 설명했지만 조라더스는 그런 뮤렌에게 일갈했다. “어리석은 것! 약속을 어겼다고 천벌이 내린다면, 왕이고 영주고 지배자라는 이름이 붙은 인간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었을 것이다!!” 분노를 폭발시키면서도 조라더스의 머리는 냉정하게 굴러갔다. 보나리스 성이 부서지고 왕비가 도망쳤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뮤렌 이외에도 성의 주민들이 속속 탈출해 오고 있다. 도망칠 필요가 없는 요리사난 마구간지기까지 공포에 질려서.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나리스는 성으로서의 기능이 사라질 정도로 격렬한 손상을 입은 듯하다. 단, 적군의 공격 때문은 아니다. 그 모습이 이 우매한 인간의 눈에는 천벌로 보인 것이리라. 그렇다면 낙뢰나 지진, 기타의 천재지변에 의해 보나리스 성이 소실된 것이다. 조라더스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런 자연현상에 당황하며 천벌이니 저주니 난리를 피우다니, 얼마나 한심하기 그지없는가. 이 보고를 들은 뒤 한참 동안 아무도 주군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만큼 조라더스의 분노는 격렬했다. 그러나 국왕으로서 언제까지나 현 상황에 대해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대군을 이끌고 원정하는 중, 전체에 동요가 퍼지기 전에 대처해야 한다. 조라더스는 아들을 불렀다. 한 쪽 귀를 잃은 나젝크 왕자는 왕비에 대한 분노로 얼굴을 시커멓게 물들이는 동시에 부왕에 대한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설명할 길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체 무슨 말을 듣게 될지 겁을 먹으며 부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라더스는 한 숨을 쉬었다. 이것이 자신의 후계자인가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처벌하는 것도, 책임을 묻는 것도 바보스러울 정도지만 매듭은 지어야 한다. “내가 준비해준 신부는 어떻게 됐나?” “예..., 그....” “손은 대었나?” 나젝크 왕자는 몸을 떨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왕자로서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뇌진탕을 일으킨 뒤, 귀에서 흐르는 피와 심한 통증에 의식을 되찾았다. 미친 듯이 분노하며 그 무례한 여자를 탑의 옥상까지 쫓아갔다.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보고를 듣고 시체를 회수하라고 명령한 직후, 갑자기 성이 흔들렸다. 그 뒤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맑은데도 번개가 여기저기에 떨어졌다. 지면은 흔들리지도 않는데 성만이 흔들리며 무너졌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왕자는 발끈하며 외쳤다. “그런 건ㅡ 단순한 눈속임입니다.!” “난 손을 댔냐고 물었다.” 조라더스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왔다. 나젝크 왕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식은땀만 흘릴 뿐. 조라더스는 그런 아들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쓴 맛을 보여줘야 할 여자에게 거꾸로 쓴 맛을 봤는가. 탄가의 왕자쯤 되는 인간이 볼썽사납게.” “하, 하오나, 그, 그 여자는 남자의 온정 따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쓰레기입니다!” “그렇다는 것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들이라고 명한 것이다. 그런데 포로 계집 하나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데다 도망까지 쳐? 어리석은 것!” 왕자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몸 둘 바를 모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때에 쓰는 말이다. 부왕은 말을 이었다. “네 놈한테는 정이 떨어졌다. 나중에 처분을 결정하지. 그 때까지 케이파드의 저택에서 칩거하도록.” “아바마마!” 왕자는 새파랗게 질려 부왕에게 매달렸다. “그건, 그것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이 치욕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 손으로 갚아 보이겠습니다!” 이대로 물러나버리면 그 때와 똑같아진다. 2년 전, 란바 전투에서는 포로가 되어 적의 온정으로 석방되었다. 그 때에도 조라더스의 분노를 사 후방으로 물러나라는 지시를 받고 그 이 후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때의 굴욕을 갚아 줄 절호의 기회였건만, 이대로 케이파드에 돌아가면 그 때와 전혀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설령 제일 끝자리라도 상관 없습니다! 제발 군댕에 합류하게 해주십시오! 부하들의 보고로는 델피니아의 국왕이 직접 보나리스에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적의 대장을 앞에 두고 등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호소했지만 조라더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싸늘한 경멸 속에 혐오의 기색까지 드러냈다. “델피니아 왕의 참전을 언제 알았나?” “이 쪽으로 전령을 보내기 전에 부하들이 전투를 했습니다만, 그 때 분명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고ㅡ.” “왕의 존재를 알면서 그 대는 어째서 쉽게 물러났지? 어째서 추격하지 않았나? 성의 군대는 멀쩡하게 남아 있을 텐데.” “하, 하오나 국왕이 직접 출진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앗을 것이 틀림없고, 부하의 보고로는 복병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느리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보다 이 일을 한 시라도 빨리 아바마마께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멍청한 것!!” 공기가 부르르 떨릴 정도의 고함이었다. “델피니아의 동향은 내 부하들이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왕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진격했다면 나보다도 먼저 버나리스에 전령이 달려갔을 게야! 그 정도도 모르는가!” “예, 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각지에 잠입해 잇는 첩자들에게서는 아무 보고도 없었다. 그러나 설마 국왕의 이름을 사칭하는 미친 인간일 리는 없다. 조라더스는 엄청난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면서 신음하듯이 말했다. “바로 조금 전, 첩자 하나가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델피니아 왕 월 그리크가 사촌 동생인 사보아 공작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단신으로 왕비를 구출하러 떠났다더군.” “아? 아니?!” 왕자는 말을 잃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출신이 천해도 일단은 국왕이다. 정말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건가. 조라더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만치 아들에 대한 분노도 더욱 격렬했던 것이다. “네 놈 부하들이 만난 국왕은 군대 따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천재일우의 기회였건만 있지도 않은 군대를 경계하며 멍청하게 퇴각해?! 이 멍청한 것!! 네 놈한테는 정이 떨어졌다. 그 목을 날려버리기 전에 썩 물러가도록 해! 뒤는 내가 처리하겠다.” “아니, 아바마마! 제발!” “귀찮다!!” 한심한 아들에게 고함을 질러대며 쫓아낸 후 조라더스는 다음 날 아침 새로운 결의와 함께 행군을 개시했다. 국왕이 왕위를 양도한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히는 얘기지만, 이런 즉위가 위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델피니아의 국왕은 지금도 월 그리크다. 이 남자만 쓰러뜨리면 델피니아 공략은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다. 그 본인이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여기에 있다. 소중한 성을 잃은 원한은 없앨 수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들에 대한 분노도 추스를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조라더스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마치 쓰러뜨려달라는 듯이 본인까지 나왔다니 더욱 잘됐다. 여기서 월 그리크를 쓰러뜨리고 델피니아로 침공하면 오랫동안 동경하던 폴리시아 평원도, 무역항 코랄항도 그대로 탄가의 손에 들어온다. 조라더스는 의기양양하게 보나리스를 향해 진격했다. 월 그리크가 도망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국왕이라면, 그것도 왕비를 되찾는다는 목적을 달성했다면 보나리스까지 차지해놓고 등을 돌릴 리가 없다. 규스톡을 지난 지 이틀 째 낮. 조라더스가 이끄는 1만 5천의 대군은 보나리스 성의 폐허에서 채 3천에도 미치지 못하는 델피니아 군과 마주쳤다. 누가 봐도 탄가 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보나리스 주위에는 산이 둘러싸고 있다. 전쟁터가 되는 평지로 들어설 수 있는 길도 매우 한정되어 있다. 조라더스의 군세는 동북쪽으로 난 길을 통해 이 분지로 단숨에 밀려들었다. 출구는 남쪽 밖에 없다. 실은 이 출구 쪽으로 따로 군사를 보내서 퇴로를 차단하고 싶었지만, 군대라는 것이 하나로 뭉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부대를 나눠서 남쪽으로 보내려면 산을 하나 우회해야 한다. 너무 멀리 돌아가게 되는데다, 그런 움직임은 반드시 델피니아군의 귀에 들어간다. 그래서는 모처럼 포착한 사냥감도 뻔히 눈앞에서 도망쳐버린다. 차라리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단숨에 밀어붙이는 편이 낫다. 이만큼이나 전력에 큰 차이가 나는 이상 월 그리크 본인을 쓰러뜨리거나 포로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목표는 왕기, 단지 그것뿐. 그러나 바로 근처에서 본 보나리스 성의 참상은 얘기로 듣고 충분히 알고는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숨을 삼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전원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정도라면 우매한 자들의 눈에 천벌로 비쳤던 것도 수긍이 간다. 아무리 낙뢰가 집중적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국지적으로 심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도 기묘할 정도로 부서졌다. 외곽도 망루도 뿌리째 무너지고 이중의 해자는 전부 매몰되어 마치 황무지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성곽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는데도 목조 병영이나 마구간 따위는 거의 부서지지 않았으나 다는 무장들 사이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무슨....” 개중에는 명백한 경외의 울림도 뒤섞여 있었다. 천벌이라며 난리치던 동료들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자도 있었던 것이 틀림없지만, 조라더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우선 성의 폐허에 적군이 대열을 짓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펄럭이는 것은, 틀림없는 포효하는 사자의 옆얼굴과 두 개의 검이 교차하는 문장. 한 눈에 보기에도 군대의 수는 적었다. 탄가 군은 용맹하게 달려갔다. 델피니아 국왕의 목을 베거나 붙잡으면 포상은 바라는 대로, 먼저 잡는 인간이 임자이다. 전쟁의 수순으로 보자면 먼저 보병이 나아가야 하지만 각 무장들은 앞을 다투며 저음부터 기마로 돌격했다. 그런데 탄가 군이 노도처럼 맹공격을 개시하자 델피니아 군은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라기보다 너무나도 엄청난 적의 기세에 눌려 도망치는 걸로 보였다. 단, 남쪽에 뚫려 있는 길이 아니라 동쪽의 산 속으로 도망쳤다. “멍청이! 잡은 거나 다름없다!” 탄가 군은 훈련이 잘 된 사냥개처럼 적을 추격했다. 어차피 산 속에서 우왕좌왕할 거라고 예상하고 아무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일직선으로 적을 쫓아갔다. 델피니아 군은 탄가 군에 쫓겨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고개 정상까지 오르자마자 갑자기 멈춰서며 탄가 군을 기다리는 형태가 되었다. 그래도 탄가 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이쪽의 우세는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바로 눈앞에 사자의 문장이 있다. 이런 공적을 놓칠 수는 없다는 듯이 아무런 주의도 없이 다투며 돌격했다. 그 기세가 갑자기 무너지며 탄가 군의 말이 멈춘 것은 막 고개에 닿기 직전이었다. 고개 저 편으로 델피니아 군이 숨었나 싶더니 그 대신 통나무가 떨어져 내려온 것이다. 언덕 아래쪽에 있던 탄가 군은 이 공격을 정통으로 먹게 되었다. 한 아름은 될 법한 나무가 차례차례 산사태처럼 덮쳐온다. 도저히 피할 수도, 버틸 수도 없었다. 말이 날뛰며 기수를 떨어뜨렸고, 굴러 떨어진 기사들은 차례로 통나무에 깔리거나 튕겨 나갔다. 말발굽에 밟힌 자도 있었다. 간신히 피할 수 있던 것은 후방에 있던 소수뿐, 엄청난 참극이었다. 소중한 선봉부대를 이런 수단에 걸려 잃어버린 탄가 군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 비겁한 놈들!” “왕기를 내걸고 있는 놈이 그런 짓을!” 탄가 군의 격분은 물론 사자의 문장을 향해 쏟아졌지만, 다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문장이 서쪽의 산기슭에도 나타난 것이다. “에엣?!” 똑같은 깃발이다. 절대로 못 알아볼 리가 없는 델피니아 왕가의 문장. 동쪽으로 일부러 도망친 군대도 산을 내려와 대열을 지으며 멈춰 섰다. 서쪽의 군대도 마찬가지로 대열을 지었다. 어느 정도의 기마를 갖추고 당당하게 공격 태세로 돌아선다. 이렇게 되어서야 현장의 무장들로서는 대처할 길이 없었다. 생각하는 것은 사냥개의 임무가 아니다. 무장들은 새파랗게 질려 조라더스에게 달려갔다. 그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조라더스도 혀를 찼다. 몸을 숨길 요새도 없이 3천에도 채 미치지 않는 군사로 적지에 눌러앉았나 했더니 이건가. 서자 출신의 국왕에 대한 경멸감이 다시금 끓어올랐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다. 이 전투에서 조라더스가 가장 원하던 것은 이겼다는 명예도 보나리스의 탈환도 아니었다. 목표는 월 그리크를 포로로 잡거나 목을 베는 것. “소란 피우지 마. 진짜는 하나다. 건방지게도 왕기를 내걸고 잇는 가짜는 내버려둬. 먼저 어느 쪽이 진짜인지 파악해.” 척후병이 달려갔지만 실로 미묘한 문제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델피니아 인 역시 탄가 국왕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저 탑에 감겨 잇는 뱀의 깃발 아래에서 같은 문장을 가슴에 달고 눈부시게 번쩍이는 갑옷을 두른 채 진홍색 외투를 펄럭이는 인간이 탄가 왕 조라더스라고 판단할 뿐. 보통 한 군대의 대장은 눈에 띄는 차림을 한다. 탄가의 척후병도 얼굴로 찾는 게 아니라 국왕답게 훌륭한 차림을 한 인간을 찾았지만 어느 쪽에도 그럴 듯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때 서쪽 왕기 아래에는 발로가 있었다. 평소의 발로는 틸레든 기사단의 증표인 매의 문장을 애용하지만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차림으로 일개 장교처럼 보였다. 그와 똑같은 차림을 한 남자가 동쪽에도 있었지만 그 쪽은 월 그리크가 아니다. 나이와 체구가 비슷한 사람을 대신 세워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지휘를 하는 것이 그 곁에 함께 서있는 이븐의 역할이었다. 동쪽의 ‘국왕’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비해 서쪽의 ‘국왕’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스스로 군대의 선두에 서서 조라더스가 있는 후진을 향해 탄가 군의 측면에서 돌격했다. 탄가 군은 당황했다. 조라더스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대열을 변경하며 적을 막으려 했지만 발로도 만만치 않았다. “비켯, 피라미들! 네 놈들 따위가 왕의 앞을 가로막다니 우습지도 않다!” 큰 소리를 지르며 종횡무진 창을 휘두른다. 발로 역시 십대 때부터 영우이라 불렸던 기사. 보병 따위가 발을 묶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십 여 명이 창에 맞아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 솜씨를 본 탄가의 병사들이 외쳤다. “국왕?!” “이 쪽이 진짜인가!” 병사들의 움직임이 확 바뀌었다. 이 ‘국왕’을 향해 공격을 집중시키며 포위하려 한다. 그 때를 노려 이번에는 동쪽의 ‘국왕’이 움직였다. 한 손을 들었다, 앞으로 내린다. 동쪽 부대는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고, 대열이 흐트러진 탄가군의 허를 찔렀다. 이 ‘국왕’은 이븐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지만 탄가 병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군대의 대장이 가만히 전투의 흐름을 읽다가 절호의 기회를 노려 병사를 움직이는 걸로 보인다. 그 군대의 선두에 서서 실제로 지휘를 담당하던 이븐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전투에서 사기를 칠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대륙이 넓어도 이넌 짓하는 건 우리 임금님뿐일걸.” 물론 발로도지지 않는다. “실력에 자신 있는 놈은 나와라! 이 델피니아 국왕이 직접 상대해주마.” 어떻게 봐도 즐기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표정으로 소리 높여 선언한다. 탄가 측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에에잇, 어느 쪽이 진짜건 상관없다! 겁먹지 마라! 적은 소수다!” 탄가의 지휘관은 소리를 지르며 동요하는 병사들을 격려하고, 대열을 정비하려 했다. “그렇고 말고! 속지 마! 양쪽 다 쓰러뜨리면 된다! 공격해! 공격해!” 동쪽과 서쪽으로 병사를 나누면 당연히 틈이 생긴다. 조라더스가 있는 본진 주위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지만, 그 둘레는 텅 비어 있었다. 푸르른 초원 위에 본진의 병사들만이 남아있다. 적의 본진을 향해 다른 방향에서 달려드는 부대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의 문장은 하얀 백합. 앞장서서 달려가는 나시아스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는 전사야말로 월 그리크였다. 탄가 군이 활을 쏠 틈조차 주지 않고 왕기를 향해 돌격한다. 애초에 탄가 측에서는 이쪽이 진짜 국왕이라고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유명한 흰 백합의 문장을 본 탄가 병사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백합 문장의 주인인 라모나 기사단장 나시아스는, 한 때 국왕이 처형당할 뻔했을 때 국왕 대신 죽을 각오로 적진에 단신으로 잠입했을 정도고 충성이 깊은 기사라고 탄가에까지 알려져 있다. 본진을 지키는 병사는 약5천. 한편 돌격해온 부대는 간신히 3백기 근처였다. “귀찮게 시리!‘ 탄가 군은 용감하게 그에 맞섰지만, 돌격대는 정면충돌을 피했다. 기동력을 살려 본진의 체제를 흔들어 놓고, 적이 태세를 갖추기 전에 재빨리 물러난 것이다. 후퇴하면서 월 그리크는 조소하는 듯이 선언했다. “뭘 하고 있나?! 진짜 국왕은 여기 있다!” 진짜가 하는 말인 만큼 진실미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백합의 문장이 그 주위를 지키고 있다. 탄가 군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혈안이 되어 적을 쫓아왔다. 월과 나시아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숲 속으로 도망쳤지만, 이 숲은 이리 설치해둔 함정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백합 문장이 지나가자마자 나무 위에 숨어 있던 남자들이 가지에 걸쳐둔 굵은 밧줄을 들고 뛰어내렸다. 갑자기 지면에 숨겨져 있던 튼튼한 그물이 벽처럼 솟구쳐 일어나며 탄가 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적을 쫓아 전력질주 하던 탄가 군은 여기저기에 설치되어있는 함정에 걸려들었다. 곧바로 몸의 자유를 잃는다. 지금까지 도망만 치던 델피니아 군이 태세를 바꿔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무사히 남아있던 후미에서 다시 본진을 향해 전령이 달려간다. 연속되는 실태에 조라더스는 이를 갈았지만, 보기 흉하게 난리를 치지는 않았다. “과연 출신이 천한 것은 하는 짓도 다르군.” 조소하는 듯이 말했다. 조라더스는 그렇게 전쟁의 체제나 정공법에만 얽매이는 왕은 아니다. 효과가 있다면 얼마든지 계략도 사용하곤 했다. 도망치는 척 하면서 역습하는 것도, 복병을 숨겨두는 것도 이기기 위해 효과적인 전략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이건 누가 뭐래도 국왕군의 방식이라기보다 산적의 방식이다. 이런 적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월 그리크를 쓰러뜨리고 싶었다. 조라더스는 함정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휘를 했다. 어쨌거나 아군의 숫자가 적의 몇 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설령 적의 함정에 빠졌다 하더라도 거기로 원군을 보내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 그렇게 싸우면서 필사적으로 국왕이 있는 곳을 찾았다. 놀랍게도 델피니아 군에는 본진이 없었다. 군대는 약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고, 거기에 다시 몇 부대의 별동대가 멋대로 움직이는 걸로 보였다. 어떻게 군사를 통제하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지만 적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주위 지형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듯, 뒤를 쫒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간 그대로 적의 뜻대로 놀아나게 된다. 그렇게 서로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해가 저물었다. 양 쪽 모두 공격을 멈추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내일은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 조라더스는 생각에 잠겼다.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건 이쪽이 움직이지 않으면 함정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는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는 사이 델피니아의 원군이 도착하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역시 다소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빨리 결판을 지어야한다. 조라더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지를 나와 적의 상태를 살폈다. 델피니아 군도 야영 준비를 하고 있다. 충분히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는 보이지 않지만, 역시 야습을 경계하고 있는지 남쪽으로 향하는 길 바로 옆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밝게 모닥불을 지피고 보초를 세워 방심하지 않고 이 쪽을 살피고 있었다. 진지를 분산해서 야영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제각각 움직이던 부대가 하나로 뭉쳐 있다. 조라더스는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얘기는 간단하다. 오늘 밤에라도 기습을 할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부러 왕기를 두 개 준비할 정도로 약아빠진 짓을 하는 상대이다. 어쩌면 하나로 합친 순간을 노려 공격하려는 이쪽의 계산까지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두를 것은 없다. 아군도 심하게 지쳐 있으니 일단은 정찰원을 보내 적의 상황을 살피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기발한 작전에 휘둘린 탓에 조라더스도, 탄가의 장교들도 주구 하나 깨닫지 못했다. 오늘 전투에 반드시 있어야만 할 사람ㅡ왕비의 보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양 진영이 밝게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할 무렵, 왕비는 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산 속에 있었다. 아스틴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이 틸레든 기사단원. 그 중에는 캐리건도 있었다. 이 백 명은 낮의 전투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아군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가만히 숨어만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의미로 상당히 어려운 임무였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 도 듣지 못했으니 더욱 그랬다. 개중에는 참지 못하고 싸우게 해달라고 왕비에게 호소하는 병사도 있었지만 왕비는 무서운 기세로 선언했다. “멋대로 나서는 자는 내 손으로 베겠다. 뭘 할 지는 해가 지면 말할 테지 그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마!” 불만을 호소하던 병사들도 움츠러들었다. 그 들의 눈으로도 지금 왕비가 얼마나 살기를 띠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어슬프게 거스르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런 왕비를 셰라가 조심스럽게 살폈다. 왕비의 기분이 나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늘 아친, 왕비가 국왕과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밤이 되면 미인계를 걸러 갈 테니까 낮 동안에는 도울 수 없어요.” 왕비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금방 죽지는 않을 만큼만 할 거야. 죽이지는 않아.” 두 사람의 시중을 들던 셰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건 치명상을 입혀놓고서도 한동안은 살려둔다는 의미인가요?” “응, 그거라면 델피니아 군과는 관계가 없지. 요는 이 쪽이 공격할 때까지 탄가의 임금님이 아직 살아있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해주면 되는 거지?” 청년의 웃음에 왕비의 얼굴이 흐려졌다. 청년의 말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탄가의 임금님이 독재자라면 더욱더, 그 임금님이 부상을 입으면 탄가군의 통제는 흐트러질 거야. 아마 원래 실력의 반도 못 내지 않을까? 기습하기에는 딱 좋지?” 이 말 역시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즉사하지 않을 정도만 치명상을 입히고 오겠다는 말이지만, 왕비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서 미인계라고?” “화내지 마. 정말로 같아 자는 건 아니니까.” “누가 그러게 놔둘까봐!” 점점 더 불같이 화를 낸다. 셰라는 국왕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면서 끼어들었다. “하지만 루. 말씀은 쉽게 하시지만 그건 상당히 고급 기술인데요?” 새파란 눈동자가 이상한 듯이 셰라를 바라본다. “동침 직전에 도망치는 거?” “그게 아니고요! 즉사는 시키지 않고, 나중에 반드시 죽을 만한 상처를 입히는 것 말입니다.” “되게 잘 아네?” 무심한 질문에 셰라의 말문이 막혔다. 전쟁에는 연이 없는 셰라지만 ‘사람을 죽이는 법’에는 이 진영의 누구보다도 정통하다. 천천히 죽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공격을 하고서 죽기까지 수분에서 수 시간, 때로는 며칠 정도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지만 배우기만 했을 뿐 실제로 사용해본 적은 없다. 독을 먹이건 무기를 쓰건 어느 정도 봐가면서 인체를 손상시키는 셈이므로, 한동안 살려둘 생각이었어도 어이없이 바로 죽어버리거나 역으로 회복해서 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국왕이 대센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마음대로 목숨을 끊는 게 가능한가?” “사흔이고 나흘이고 살려두는 건 아니에요. 이 쪽이 공격할 때 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죠? 기습 준비를 해줬으면 좋겠어.” 마지막은 왕비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왕비는 죽어라 얼굴을 찌푸리고 팔짱만 끼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않는 걸 보면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청년이 웃으며 왕비를 달랬다. “자,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왜 미인계야?” “그게 제일 손쉬운 방법이라는 건 너도 알지? 걱정하지 않아도 미수로 그쳐둘 거야. 임금님하고 둘만 남게 되면 싹 끝내고 나올 테니.” 왕비는 그래도 토라진 채 였다. 청년을 보는 눈에 원망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린다. “에디?” 다짐하는 듯이 낮게 이름을 부르자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불만인 기색은 여전했다. “알았어. 협력할게.” 청년은 변함없이 웃음을 지으며 그런 왕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화내지 마. 원인을 따지자면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그러니까 알았다고 했잖아.” “정말?” “시끄러워. 빨리 가서 그 빌어먹을 자식 애비나 홀리고 와!” “응, 그럴게. 밤이 되면 말이지.” 참으로 느긋한 대답이다. 거꾸로 왕비는 손만 대면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청년이 나간 뒤, 국왕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너도, 라비 경도 미인계라고는 해도 조라더스가 그리 쉽게 걸려줄지 어떨지는 모른다고. 게다가 걸린다고 해도....” 셰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점이 의문입니다. 침실에서 하는 일이지요? 조라더스 왕은 경계심이 강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원정 중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암살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침실은 최적의 암살 장소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운 좋게 임무를 완수한다고 해도 그 뒤에 자신이 도망칠 만큼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 따라서 미인계를 이용한 암살은 대개 장기전이 된다. “의심받지 않도록 조금씩 독을 먹여서 병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라면 알겠습니다만....” 그만 자세한 구석까지 얘기해버리는 바람에 국왕과 왕비의 시선이 동시에 쏟아졌고 셰라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국왕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건 전문가의 의견인가?” “예, 그....” “느긋한 얘기로군. 침대 속에서 푹 찌르고 도망칠 수는 없는 건가? 그 쪽이 훨씬 간단하게 끝날 텐데.” “도망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무리입니다. 귀인의 침실은 보통 저택의 가장 안 쪽에 있고 수많은 심부름꾼들이 대기하고 있지요. 거기서 주인이 급사했다가는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한 짓이라고 자백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흐음, 과연.” “곧바로 사로잡혀서 살해당하는 걸 각오한다면야 일격에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라비 경이 적임 아닌가. 죽여도 죽지 않으니까.” “예, 그 사람이라면 죽을 걱정 없이 할 수 있겠지요.” 왕비가 차디찬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죽지 않는다고?” 셰라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능하면 국왕 위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그 국왕조차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아니, 셰라한테 그렇게 들었거든. 라비 경은 죽지 않는 사삼이라고. 심장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소생했다고, 그랬지?” “아, 예.” 왕비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안 죽는 다라. 그야 안 죽겠지. 설령 목이 날아가고 몸이 불타도 되살아나. 금방 살아날 수만 있다면야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말이야.” “.......” “이번은 운이 좋았어. 그 녀석은 칼을 맞을 거라고 알고 있었어. 셰라는 그 녀석을 우연히 숲으로 옮겼지. 덕분에 곧바로 소생할 수 있었어. 하지만 언제나 일이 그리 쉽게 풀린다고 할 수 없어. 다세 살아나는 데에 50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100년 뒤일지도 몰라. 훨씬 더 뒤가 될 수도 있지. 그래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적어도 내게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으니까.” 왕비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라져버린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왕이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무신경한 소리를 해서 미안. 아까 얘기로 돌아가지. 이것도 조금 무신경한 화제지만, 라비 경의 미인계가 정말로 성공할까? 즉 야습을 해도 괜찮겠느냐는 말인데....” “보장할 게. 죽어라 화는 나지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근거가 뭐지?” 흥미진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국왕과 셰라를 바라보며 왕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믿을 수 있겠어? 그 녀석은 마녀야.” “.......” “지금은 남자니까 마법사ㅡ아니면 악마라고 해야 할까나. 사람의 마음을 매료, 혹은 현혹해서 보는 사람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면?” 국왕은 말을 잃었다. 왕궁에서 벌어졌던 소란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당황하며 떨쳐버렸다. “아니,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당연하지. 그런 거 내가 용서 못해.” “누구에 대해 뭘 ‘용서 못 한다’는 거야?” “그런 소리 진심으로 하는 거야? 생각해 봐. 지금까지 제대로 여자에 손도 안 대던 국왕이 젊은 남자한테 홀딱 빠져서 정무도 내팽개치고 나라까지 기울게 만들었다고 폴라한테 말할 수 있어?” 국왕이 당황하며 반론했다. “잠깐 기다려! 멋대로 그렇게까지 말하지 마! 누가 나라를 기울게 만들었다는 거야?” 그러나 왕비는 날카롭게 말했다. “잘 들어, 월. 절대로 과장이 아니야. 지금은 자기 의지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지만 그 제어만 풀리면 너나할 것 없이 저 녀석에게 달려들게 돼. 루퍼 자신에게는 전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도. 걸어 다니는 마약이야. 거기에 걸려든 성직자 세 명이 자살했으니까....” 국왕과 셰라는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셰라가 물었다. “저, 그건, 어째서....” “그러니까 신에게 정절을 맹세한 몸이면서 하필이면 젊은 남자한테 빠졌다는 말이지.” “정욕을 느꼈다는?” “뭐, 그런거야.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어. 미수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려고 했던 짓을 잊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자살했습니까?”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정말 걸어 다니는 민폐덩어리라고!” 왕비의 기색은 더욱 험악해졌다. 국왕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ㅡ마성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악해 보이지는 않던데?” 왕비가 살짝 웃었다. “그 녀석 인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달라져. 때와 장소에도 좌우되지. 게다가 게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 저도 그 중 하나일지도 몰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넌 진짜로 특이한 녀석이었으니까. 나도 무서워하지 않았잖아.” “아니, 나도 나름대로 무서웠는데. 하지만... 그런가. 네 인상도 라비 경과 비슷했어. 굉장히 특이하고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데, 그렇다고 나쁜 존재는 아니야. 그런 느낌이더군.”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국왕은 엄청난 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게나 강력한 마성이라면 어떤 건지 한 번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니만 라비 경은 네 친구이니 유혹에 넘어갈 수는 없겠지.” 왕비가 짜증스럽다는 양 노려봤다. ‘너 말 야....“ “그냥 해본 말이야. 난 남자 쪽에는 흥미 없다고.” “바보야. 그게 장애가 될 정도면 고지식한 수도승들이 미친 짓을 하겠어!”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셰라가 감탄한 나머지 중얼거렸다. “그러면 최고의 암살자가 될 수도 있겠군요....” 갑자기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몸이 움츠려든다. 왕비의 시선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작게 움츠러든 셰라 대신에 국왕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군. 목표물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을 수 있다면 완벽한 자객이 될 수 있겠어.” “예. 저희들은 언제나 그 문제 때문에 고생했으니까요. 임무의 성공도 실패도 상대의 관심을 끌 수 있느냐 없느냐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부럽습..., 아, 아니,그게....” 곤란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곤란한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간다. 왕비는 완전히 전신의 털을 곤두세우며 꼬리를 잔뜩 부풀린 고양이 같은 분위기였다. 녹색 눈동자가 내뿜는 시선에 맞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는지 국왕이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왜 그렇게 까지 화를 내는 거지? 성공이 확실하다면 굉장히 효과적인 수단이잖아.” “암살이나 다름없는 수법인데,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분명히 대놓고는 말할 수 없지. 병사들은 물론이고 도라 장군이나 발로에게도 말 못해.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어. 때에 맞춰 조라더스에게 칼침을 먹여주면 이 쪽도 굉장히 편해지겠지.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접근하느냐 인데....” “우선 밤이 되기를 기다려. 그리고서 음유 시인 같은 걸로 분장하고, 어쩌다보니 전쟁에 말려들고 말았는데요ㅡ하는 얼굴로 탄가 군 진영에 섞여드는 거지.” “중요한 건 그 뒤 잖아? 조라더스 앞까지 끌려가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 녀석, 굉장히 눈에 띄니까. 수수께끼 음유 시인 때문에 진영이 소란해지면 지휘관이 수습하는 게 당연하잖아.” “흠, 그걸 노렸다가 미인계를 쓰는 건가.” 도저히 국왕과 왕비가 나누는 대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전에 국왕 군이 짤 만한 작전이 아니라고 셰라는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바보스러우리만치 솔직한 주제에 때때로 기가 막히도록 교활해진다. 이런 수단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구석을 봐도 정말 꼭 닮은 부부라는 생각이 든다. “뒤는 간단해. 절대로 죽지 않도록. 하지만 지휘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히면 돼. 델피니아가 기습을 해올 때에는 조라더스가 아직 살아있었다. 탄가 인들이 그 사실만 목격해두면 이 쪽은 의심받지 않아.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놓고 트집을 잡힐 만한 근거는 없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넌 라비 경과 연인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혹시 질투하는 거야?” 미인계에 이렇게까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역시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국왕은 일부러 그 점을 지적했다. 맹렬하게 반발할 거라는 사실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의외로 왕비는 살기를 지우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월. 이를테면ㅡ이건 정말 만약의 경우야. 어디까지나 가정해서 하는 얘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 “뭐야?“ “이븐이 똑같은 짓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쩔래? 적의 대장은 자기 같은 타입이 취향이라면서, 자기 몸을 미끼로 걸어서 적을 쓰러뜨리겠다고 나오면?” 국왕은 말없이 식탁 위에 엎드렸다. 셰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상상에 오한을 넘어서 순간적으로 냉동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국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온 몸에 소름이 돋은 상태로 외쳤다. “그만 둬!!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뭐가 어째?!” “대답해, 넌 어쩌겠어.” “어쩌고저쩌고 간에! 해가 서쪽에서 뜨는 한이 있어도! 그 자식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해!”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처음부터 가정이라고 했잖아! 나도 반 죽음당할 각오로 하는 소리야!” 왕비도 발끈해서 대답하고 난 후 다시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븐은 네 연인도 뭣도 아니다. 네가 이븐의 정조에 대해 무슨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이븐이 자기 몸으로 무슨 짓을 하든, 창녀 흉내나 내고 다녀도 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 맞지?” “어이, 리....” “정말 그래? 너, 정말로 괜찮겠어? 웃으면서 다녀오라고 보낼 수 있어? 불가능하다면 이유가 뭐지? 질투 때문이야? 대답해 봐.” 국왕은 비지땀을 흘리며 신음할 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비는 무섭게 국왕을 노려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승부가 될 턱이 없다. 국왕은 전면적으로 항복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 봐 줘!” 왕비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이론이 아냐. 물론 연애 감정도 아니야. 그저 싫다구,. 그런 짓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알겠어?” “알았어ㅡ. 아니, 굉장히 잘 알겠어. 납득했으니까.” 국왕은 힘없이 말했다. 지금의 대화로 투지고 기력이고 다 날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그 때 천막의 입구가 확 열려 세 사람은 펄쩍 뛰었다. 국왕의 천막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 없다. 예상대로 화제의 주인공이 입구로 들어섰다. “어이, 언제까지 밥 먹고 있을 거야? 슬슬 배치에 들어가지 않으면 곤란한데....” 거기까지 말하다가 이븐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세 사람을 보고 의아한 듯이 물었다. “뭐야? 셋 다 똑같이. 뭐 내 욕이라도 하고 있었어?” 세 명 모두 뻣뻣한 웃음을 짓는 것이 한계였다. 국왕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아니, 그, 모두의 상황은 어떻지?” “이미 준비 다 끝났어. 네가 마지막이다.” “아, 그런가. 그렇겠군.” 국왕은 서둘러 천막에서 나왔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아, 그럼 난 이번에는 따로 행동할 테니까. 셰라, 너도 와.” “예, 옛. 동행하겠습니다.” 왕비와 셰라도 당황하며 천막을 뛰쳐나갔다. 물론 이븐은 이들의 태도가 왜 이상한지 알 수 없었으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비는 백 명의 기습 부대를 선발해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미리 찍어 둔 산중턱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아래에서 밝게 빛나는 탄가 진영의 모닥불을 내려다본다. 백 명의 기습 부대는 제각각 숨을 죽이고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왕비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셰라 역시 시종 차림으로 검을 차고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대기했다. 주위는 이미 새까만 암흑. 병사들이 불안스럽게 왕비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까지 오면 병사들도 적진을 야습하는 게 목적이라는 사실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지만, 문제는 언제 돌입 하느냐 였다. 전원이 조심조심 왕비 쪽을 보고 있지만, 왕비는 움직일 기색도 없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다. 셰라는 왕비의 바로 곁에 있었다. 병사들의 긴장은 거의 한계에 달해 있다. 돌입할 시기만이라도 가르쳐주기를 바라며 왕비를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쀼루퉁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왕비가 왼 손의 반지를 꺼내어 오른 손에 낀다. “리, 그건....”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것은 보나리스를 파괴할 때 사용했던 그 힘을 개방하는 열쇠라고 들었다. 왼 손에 끼고 있는 한은 아무 일도 없지만, 오른 손에 끼면 성조차도 간단히 파괴하는 힘을 발휘한다고.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긴장하며 몸을 굳히는 셰라에게 왕비는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왔다. “혼자서 보자니 역시 기분 나쁘니까 너도 좀 같이 봐줘.” “네...?” 왕비의 오른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주위 경치가 지워졌다. 숲도, 인기척도, 지면까지도 사라졌다. 현실감이 완전히 없어진다. 셰라는 새까만 암흑 속에 서 있었다. 선 자세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비명이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신없이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의 온기에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돌아보니 왕비가 있었다. 주위는 암흑인데도 이 사람의 모습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눈을 뜬 채로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셰라는 무의식적으로 왕비의 팔을 꽉 붙들고 새파랗게 질려 주위의 암흑을 둘러봤다. 이것은 밤의 어둠이 아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실 같은 암흑. 하지만 그런 장소 특유의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건 뭐죠?! 모두 어디에 있는 겁니까?!” “있어. 다들 주위에 있어. 보여줄까?” 암흑이 사라지고 숲의 풍경이 비친다. 역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명 한 명의 표정이나 그 얼굴에 흐르는 땀까지 눈에 들어온다. 병사들의 옷에 붙어있는 장식의 색에서 나뭇잎의 모양까지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것 자체가 이상했다. 지금은 구름이 잔뜩 끼어 달도 없는 밤. 사람의 얼굴이나 경치가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일 리 없다. 게다가 유리 저 편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말을 잃은 셰라의 귓가에서 왕비가 속삭였다. “네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어. 지금도 숲 속에 앉아 있지. 그 옆에 나도 있어. 보기 쉽게 배경을 붙인 것뿐이야.” 그 말과 동시에 주위는 다시 암흑에 휩싸이며 눈앞에 하리 높이 정도의 수경이 나타났다. 코랄 성의 정원에 있는 작은 분수를 닮은 모양이지만, 그 수경에는 다리가 없다. 자신들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안개 같은 액체가 표면에 가득 차 있다. 흘러넘치는 안개는 순식간에 어둠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주위는 신경 쓰지 마. 저것만 보고 있으면 돼.” 말은 그렇게 해도 이 기묘한 상황 쪽이 훨씬 더 신경 쓰였지만, 수면에 뚜렷한 영상이 비치는 순간 셰라의 눈은 영상 쪽으로 쏠렸다. 그 청년이 비치고 있다. 오늘 아침과 전혀 다른 차림이다.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헐렁한 로브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기둥과 공간을 차단하는 튼튼한 막이 보인다. 천막 속 같았다. 단, 병사들이 기거하는 싸구려 천막이 아니다. 바닥에 깔린 훌륭한 융단을 봐도, 막사 안을 장식하는 호화로운 가구들을 봐도 델피니아 국왕의 천막보다 훨씬 돈을 퍼부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노래가 들려왔다. 멀리서 아주 가느다랗게 들려오면서도 형용할 길이 없는 아름다운 노래. 이런 상황인데도 셰라는 곧바로 그 노래에 매료되었다. 청량하게 울리는 고음은 아름답게 빛나는 수정처럼, 부드럽게 퍼지는 저음은 향기 그윽한 장미꽃잎처럼, 매끄럽게 선율을 자아내는 경쾌한 음률은 최고급 벨벳과도 같았다. 황홀하기까지 했다.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건지 궁금해 하며 귀를 곤두세울 때 왕비가 말없이 수경을 가리켰다. 거기에 비친 청년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모습만이 아니라 음성까지 비추다니 과연 평범한 수경이 아니었다. 감탄하면서 더욱 노래에 홀려버렸다.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거기에 수금의 울림이 더해진다. 연주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이만큼 실력이 있으면 펜타스에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조금 실례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그보다도 수면에 비치는 정경 쪽이 신경 쓰였다. 이 신비로운 거울은 루가 연주하고 있는 수금에 새겨진 문양. 즉 몇 겹으로 탑을 에워싸고 있는 뱀의 문장까지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이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탄가에서 단 한 명뿐이다. 충분히 여운을 남기면서 청년이 노래를 마치자 누군가가 감탄하며 말했다. “훌륭한 노래야.”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지배하고 군림하고 명령하는 것이 일상인 인간이 아니고서는 낼 수 없는 목소리였다. 화면이 바뀌면서 청년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가운을 몸에 걸치고 팔걸이가 달린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남자는 지배자다운 침착한 품격에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다. 탄가 국왕 조라더스였다. 얼굴을 보는 것은 셰라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직감했다. 풍채가 당당한 남자였다.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어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 보았던 파라스트의 오론 왕은 두뇌는 어쨌거나 빈 말로라도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 국왕은 단정한 얼굴에 균형 잡힌 몸이었다. 거의 쉰이 다 되어 갈 나이이건만 조금도 그런 나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상당히 멋진 남자였다. 왕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빌어먹을 새끼의 애비치고는 꽤 잘났잖아.” “예.” 여기서 나누는 대화는 저 쪽에 들리지 않는 듯하지만 셰라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천막 안에는 왕의 시중을 드는 시종도 있었다. 조라더스는 시종에게 명령해 청년에게도 술잔을 준비해주었다. 청년의 노래에 굉장히 만족한 듯 유쾌하게 웃었다. “그 대의 목소리 앞에서는 저 펜타스의 가희들도 전부 폐업할 수밖에 없겠어.” “칭찬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든 수금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과연 탄가 국왕 폐하의 소유물이군요. 멋진 악기입니다.” “마음에 들었는가.” “예, 이만큼 음을 내본 건 처음입니다.” 왕비나 국왕과 대화할 때와는 상당히 정중한 어조이지만 공손하다고까지는 힘들다. 국왕을 앞에 두고서 상당히 건방진 태도라고 할 수 있지만 조라더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시종에게 뭔가 말을 하며 물러가게 한다. 이것으로 조라더스와 청년, 둘만 남았다. 이상한 거울은 각도를 바꿔 넓은 천막의 구석구석까지 비춰준다. 조각이 새겨진 아름다운 기둥에 진홍의 외투가 아무렇게나 걸려있다. 그 뒤에 비단 이불이 깔린 침대가 보였다. 델피니아의 국왕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지면에 이불을 깔고 자지만 탄가의 국왕은 전쟁터에서도 쾌적함과 사치를 추구하는 듯했다. 손에 든 술잔도 황금을 세공한 고급품이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고 조라더스가 말했다. “마음에 들었다면 그대에게 내려주겠네.” “예?” “그 대 정도의 가인을 놓치기는 아까워. 내 밑에서 일하도록 하게.” 아까운 것은 노래 실력만이 아니다. 천천히 상대를 바라보는 조라더스의 시선에서도, 그 어조에서도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쯤은 뻔히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청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 그럴 수는....” “거절하겠다는 건가?” 조라더스는 의외라는 듯이 놀랐다. “따로 주인이 없다고 했을 텐데.” “예, 주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정인이라도 있나?” 이번에는 재미있어하는 어조였다. 탄가 국왕과 저울질할 수 있는 상대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듯. 청년은 곤란한 듯이 웃으면서 수금의 현을 살짝 튕겼다. “정인도 아닙니다. 그저 저를 노래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짐을 위해 노래하도록 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위해 노래할 뿐, 어떤 분이라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국왕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경죄에 해당한다. 예외라면 델피니아 국왕 정도일까. 조라더스도 잠시 발끈했지만 자신에게 겁도 먹지 않고 이런 소리를 하는 청년에게 더욱 흥미가 생긴 눈치였다. “주인도 아니고, 정을 통한 것도 아니라고?” “예, 입마춤 이상은 전혀.” “기가 막히는 군. 그 만큼의 실력을 멍청한 상대에게 바치고 있다는 건가?” “아니, 멍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아직 어립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아홉 살 그 사람은 겨우 두 살이었지요.” 조라더스의 날카로운 눈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스쳤다. “인내심이 대단하군. 그 사람은 지금 몇 살이지?” “열 셋이 됩니다.” “그 아이를 위해 노래하고 있다고?” “폐하께는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그 사람이 있기에 저의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꽃이 핍니다.” 그런 청년의 웃음이야말로 꽃처럼 느껴졌다. “저는 겉보기가 이러니 지금까지도 여러 분의 권유를 받아왔지만 그 사람이 굉장히 싫어합니다. 몸을 파는 짓은 하지 말라면서.” 탄가의 국왕은 쿡쿡 웃고 있었다. “과연 어린애가 할 만한 소리로군. 좋다. 그 대와 함께 그 아이까지 불러들이도록 하지.” 말을 맺고 일어난다. 기둥 뒤 쪽으로 돌아가면서 청년을 불렀다. “이리 들라.” 당연한 말을 하는 듯한 어조였다. 절대로 위압적이지는 않았지만 거부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상대의 입장 따위는 처음부터 상관 없이. 자신의 말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었다. 청년은 나무 상자에서 살짝 일어나며 곤란한 듯이 말했다. “저어, 온정은 황공하오나 저는 폐하께 귀여움을 받을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몸에 흉한 흉터가 있어서....” 조라더스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기둥 뒤로 청년을 불러들여 비단 이불이 깔린 침대 위로 앉아 말한다. “어디 보여 보도록 하라.” 옷을 벗으라는 명령에 청년은 주저했다. 조심스럽게 조라더스를 쳐다보는 얼굴에는 격한 성격의 왕을 화나게 만들지 않을 정도의 수치심과 이런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요염한 분위기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도록.” 다시 한 번 명령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신발을 곱게 벗어놓고 허리띠를 푼 뒤 조심스럽게 옷을 벗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끄는 매력에 셰라는 다시금 감탄했다. 이런 행동은 자칫 잘못하면 교태가 되어버린다. 애무를 기다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 쉽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극히 어색하고 수줍은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고의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내고 있다면 상당한 연기력이다. 조라더스는 알몸이 된 청년의 몸을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냉정하게, 그러나 열심히. 옷을 벗으라고 명한 데에는 단순한 욕망만이 아닌, 어딘가 무기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 가 확인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전문가인 셰라의 눈으로 보아도 이 사람의 몸 어디에도 무기는 숨겨져 있지 않았다. 자신이라면ㅡ? 이런 상황에서 치명상을 입히려면 어떻게 할까? 머리카락으로 목을 조르는 방법이 있지만, 이것은 도중에 그만둘 수 없다. 그저 질식할 뻔했다는 것만으로는 나중에 증상이 악화되어 죽을 리가 없다. 새하얀 피부 위에 촛불의 조명이 비쳤다. 마른 편이지만 균형 있게 근육이 잡혀있어 여자의 몸과는 다른 의미로 매끄러운 선을 그렸다. 가슴에서 배에 걸쳐서 옅은 붉은 색의 흉터가 길게 가로지르고 있다. 레티시아에게 공격을 당한 상처였다. 조라더스는 그 상처를 흥미 깊게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어째서 다친 게지?” “싸움에 말려들었습니다. 운 나쁘게 그 곳을 지나치다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이런 상처를 입고 목숨을 건졌나?” “예, 주위 사람들은 모두 포기했지만 간신히....”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마음에 들었어.” 조라더스는 건장한 팔로 청년의 몸을 안아들고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왕비는 아까부터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다. 신음도 점점 커져갔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장면이나 훔쳐봐야 하는 거지?” 셰라는 조마조마하면서 왕비를 달랬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참으십시오....” 아직은 안 된다. 조라더스가 멀쩡한 상태에서는 기습을 해봤자 실패할 것이 눈에 선하다. 셰라는 왕비와 달리 이런 장면에 내성이 있다. 청년이 어떻게 치명상을 입힐지 흥미도 있었다. 혀를 물어뜯는 방법일까. 아니면 자기 눈으로도 찾을 수 없지만 어딘가에 무기를 숨기고 있는 걸까. 혹은 이 사람도 왕비와 같은 이빨을 지니고 있는 걸까? 온 신경을 집중하며 수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침대 위에 쓰러진 청년이 부드럽게 조라더스를 밀어내었다. “폐하, 이제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역시 그만두실 수 없겠습니까? 그 사람이 화낼 걸 생각하면 굉장히 두렵습니다.” “왕의 분노보다도 말인가?” “예.” 이런 상황에서 이런 멍청한 소리를 꺼내는 인간은 아마도 이 청년뿐이었을 것이다. 조라더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청년의 턱을 붙잡아 치켜들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고지식한 인간이로다. 허나 왕의 의지보다 우선하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그 정도는 알아두도록.” “정말로 그렇습니까?” “물론이다. 왕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없어. 그 바람이 무엇이든 당연히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은 조라더스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진실이며 동시에 신념이었다. “그 대가 그리워하는 이까지 함께 거두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사양할 것 없으니 함께 데리고 와. 아이라고는 해도 세상의 순리는 알아듣게 해줘야지.” 청년은 살짝 웃었다. 조라더스의 어깨에 얹힌 오른 손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타고 오른 남자의 몸을 안으려는 듯이 옆구리에 둘러졌다. “정말로 황송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린 순간 조라더스의 안색이 급변했다. “크윽!” 채 비명조차 되지 못하는 신음이었다. 셰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거울 안을 주시했지만 알몸의 루는 천장을 향해 누워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뭔가를 하는 기색도 없다. 그러나 조라더스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안색은 새까맣게 변했고 비지땀이 흘렀다. 격렬한 통증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엄청나게 분노하며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상대의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루는 재빨리 조라더스를 걷어찼다. 조라더스의 몸이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런 짓을 당해도 곧바로 움직일 수 없는 듯 화려한 가운의 왼쪽 옆구리 부분을 누르고 있다. 희미하게 피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대체 뭘 한 걸까요?” 저도 모르게 묻자 왕비는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칼 대신 손가락을 박아 넣은 거야. 옆구리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인간의 몸을 그리 간단히 손가락으로 꿰뚫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른이 아이를 때려죽이거나 성인 남자가 여자의 뼈를 부러뜨리는 정도라면 가능하다. 수도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도 목이나 명치 같은 급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살 그 자체를 꿰뚫다니ㅡ그것도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ㅡ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퍼는 한 손으로 인간의 목도 뗄 수 있어. 저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수경의 장면이 바뀌면서 청년의 모습을 비추었다. 오른 손의 손가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정말로 손가락만으로 조라더스의 몸을 찌른 듯했다. 저 정도 깊이라면 분명히 내장까지 다쳤을 터.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한 악마는 벗어던졌던 옷을 재빨리 걸친 후 조라더스를 돌아보고 생긋 웃었다. 홀릴 듯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미안해요, 폐하. 이걸로 대가는 돌려드렸으니까.”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구와는 정반대쪽의 천막을 걷어 올리며 스르륵 빠져나갔다. 조라더스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시종들이 달려왔지만 거기까지가 최후였다. 수경을 바라보던 셰라의 눈은 지면 위를 기어가는 벌레를 인식했다. 흠칫 놀라며 얼굴을 들어보자 아까의 숲 속이었다. 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바로 근처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병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셰라는 직감했다. 자신의 몸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여기에 앉은 채로 의식만이 날아가 저 멀리 비치는 모닥불 아래에서 전개되는 광경을 본 것이다. 눈앞에 왕비가 앉아 있다. 셰라를 바라보는 녹색 눈에 격렬한 불꽃이 조용히 타올랐다. 셰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를 끼고 일어난 왕비는 당황해서 달려오는 병사에게 날카롭게 명령했다. “불화살을 쏴서 본진에 알려! 돌격한다!” 델피니아 군이 일제히 탄가 군을 공격한 것은 그 직후였다. 전쟁의 여신으로부터 언제 신호가 날아올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본진의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고 북과 종을 쳐가며 야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하게 돌격했다. 물론 기습 부대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탄가 군은 델피니아 본진의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겨 정면에 모든 주의와 경계를 기울이고 있었다. 별동대는 그런 탄가 군의 후방 쪽에서 기습을 걸었다. 머릿수는 겨우 백 명이라도 상당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이 기습 부대의 사람들은 탄가에 엄청난 원한이 있다. 틸레든 기사단의 부단장 아스틴을 필두로, 전원이 이제껏 쌓인 원한을 다 풀어버리려는 듯이 날뛰었다. 탄가 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런 때에 대장이 확실하게 지휘봉을 잡으면 바로 태세를 정비할 수 있다. 그것이 대장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 조라더스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상처의 고통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뭔가에 찔렸다는 것은 알겠지만 대체 어떤 무기를 사용한 건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조라더스는 부상의 원인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침실에서 남창이나 다름없는 음유 시인을 희롱하려다 입은 상처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다. 또한 그렇게 깊은 상처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당황하는 시종들에게 지혈을 명하고 갈아입을 옷을 준비시킨 후 애용하는 갑옷을 몸에 둘렀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장들이 지시를 받으러 차례로 밀어닥친다. 사실 전쟁을 지휘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조라더스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위엄을 갖추려고 애쓰며 말한다. “당황하지 말라. 우선 철수한다.” 이런 상처로는 어쩔 수 없었다. 무장들은 보기 드물게 소극적인 주군의 명령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즉각 왕명에 따랐다. 그들에게 있어서 조라더스는 절대적인 군주이다. 어떠한 명이라도 반드시 따르도록 철저하게 훈련된 상태이다. 게다가 이런 비상사태에서는 더욱. 주군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질 만큼의 용기를 지닌 신하는 탄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조는 용감무쌍, 충실 그리고 신속. 조라더스가 통증을 견디며 애마에 올라타자 부하들은 주군을 둘러싸며 야영지에서 외부로 돌파를 시도했다. 모닥불을 피우고는 있어도 때는 심야. 적과 아군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델피니아 군은 탄가의 움직임을 눈치 챘다. 누군가가 날카롭게 외쳤다. “탄가 국왕이 도망친다! 쫓아!” 이 말을 들은 델피니아의 장수들도 저마다 외쳤다. “국왕이 도망친다!” “적의 총대장이 도망친다!” “쫓아! 절대로 놓치지 마!” 델피니아 군은 단숨에 진격했다. 반대로 탄가 군은 크게 동요했고 혼란은 한층 가중되었다. 군대의 태반을 점유하는 병사들로서는 전략적 후퇴와 도주를 구분할 수 없다.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말았다. 이런 부분에서 눌려 버린 군대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이길 수 없다. 전략도 작전도 그를 실행하는 것은 인간. 그리고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정신력이다. 싸우기 전에 기가 꺾여버려서는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까지 간신히 대등한 싸움을 유지하던 탄가 군의 기세가 급속히 꺾였다. 심야의 어둠이 병사들의 공포에 박차를 가한다. 게다가 이런 때에 군대를 지탱해야 할 총 대장이 제일 먼저 전장을 등지고 말았다.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한 번 금이 간 댐이 결국 무너져버리는 듯한 기세로 탄가 군은 미친 듯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델피니아 군은 오망치는 병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하나, 탄가 국왕 조라더스 뿐. 그러나 열심히 도망치는 조라더스 주위에는 정예들이 버티고 있었다. 바짝 쫓아오는 델피니아 군을 향해 후열이 활을 쏘며 이 쪽의 발을 묶으려 한다. 델피니아 군도 화살을 쳐내며 필사적으로 쫓았지만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투지에 가득 차 있어도 이래서는 접근할 수 없다. 탄가 군은 그 사이에도 달리고 또 달렸다. 열심히 동쪽으로 달려간다. 케이파드로 이어지는 분지의 출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 곳만 빠져나가면 자국의 영토로 근처에는 아군도 얼마든지 있다. 뒤를 쫓던 델피니아 군도 점점 초조해졌다. “에잇! 쫓아! 놓치지 마!” 도라 장군이 우렁차게 외쳤지만, 막 날아온 화살이 장군의 수염 근처를 스쳤다. 혀를 차는 이븐의 갑옷에도 여기 저기 화살이 꽂혀 마치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었다. 발로 옆에서 달려가던 기사의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 놈들!” “이래선 결판이 안 나!” 월 또한 조라더스를 놓치는 게 아닐까 초조했다. 탄가 군으로서는 이제 살았다는 기분을 맛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패잔병이라고는 해도 국왕이 거느리는 본진이다. 한 무더기가 되어 달리는 부하들만 해도 수백 기는 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 진로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하나ㅡ아니, 둘 있었다. 구름이 걷힌다. 살짝 이지러지기는 했지만 둥근 달이 흑 왕에 탄 왕비의 보습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기습 신호를 내린 뒤 지휘를 아스틴에게 맡기고, 왕비는 곧장 이리로 달려 왔다. 다른 한 쪽은 루. 루 역시 탄기 진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미리 준비해 둔 갑옷을 입고 말을 끌어낸 뒤 여기로 달려온 것이다. 머리는 뒤쪽에서 하나로 묶고 그 위에 투구를 썼다. 이렇게 하면 바로 옆에서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아까의 음유시인과 동일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왕비가 말했다. “부상자를 죽이는 건 별로 안 내키는데.” “그럼 내가 할까? 원래 그러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아니, 따로 정하지 않는 편이 좋아. 흘러가는 대로 하자. 저 뒤 쪽 녀석들이 할지도 모르고.” 지축을 울리며 무장한 탄가 병 수백 기가 돌진해 온다. 그 엄청난 광경을 눈앞에 두고 왕비와 청년은 지극히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곧 저 맹렬하기 그지없는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어 발을 묶어야 한다. 셰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셰라는 이런 종류의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쯤 기습 부대에 섞여 후방에서 활약하고 있을 터였다. 청년이 창을 쥐며 말했다. “정말 전쟁이구나.” “여기서는 이게 현실이야.” 왕비도 창을 쥐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의연한 얼굴에 조용한 긴장이 떠돈다. “너한테 배운 검술 덕분에 굉장히 도움이 됐어.” “그거 잘됐다.” 청년이 살짝 웃는다. “이런 식으로 같이 싸우는 건 처음이구나.” 왕비도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정말 처음이네.” “부탁이니까 부상만은 당하지 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왕비의 웃음이 신호였다. 웃음을 지은 채 두 사람은 단숨에 뛰어나갔다. 탄가 군은 쫓아오는 델피니아 군, 즉 뒤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전방에 보이는 기마는 발견했지만, 알아서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칠흑의 바람처럼 달려온 사람은 그들의 앞에서 말을 멈추고 당당하게 외쳤다. “탄가 국왕 조라더스 민게! 어니로 도망치는 거냐? 델피니아 왕비 그린디에타 라덴이 널 상대하러 왔다!” 이 이름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에 물을 끼얹는 결과가 될지. 아니면 꺼져가는 촛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될지는 왕비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의 적이라도 탄가 군은 반드시 발을 멈추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장군?” “으악!”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던 군대가 일제히 정지해버렸다. 사실 어떠한 군대로도 이렇게까지 효과적으로 적의 발을 묶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왕비는 그들이 멈추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움직였다. 이름을 대는 것과 동시에 돌진한 것이다. 밤의 어둠처럼 새카만 준마를 타고 오른 손에 창을 든 채 굳어버린 군대의 중앙을 향해 돌진했다. 탄가 군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전장에서 패주하는 주군을 수호할 정도의 기사들이다. 본진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정예부대인 것이다.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왕비의 창은 바람을 가르는 듯이 적을 베어 넘기며 말에서 떨어뜨렸다. 종횡무진 말을 타고 달리면서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창을 휘두르고 자유롭게 적을 찌르며 베어낸다. 탄가 병들이 접근할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맹렬한 전투였다. 그 왕비의 곁에서 루가 말을 타고 달린다. 이 쪽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었다. 죽음의 신이 낫을 휘두르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창을 휘두르며 근처에 있던 탄가 병들을 남김없이 쓰러뜨렸다. 가녀린 외모와는 달리 엄청난 힘이었다. 계속 왕비의 왼쪽에 위치를 잡고 있다. 이렇게 되면 왕비가 오른쪽, 청년이 왼쪽에 무기를 들고 있으니 아무리 가까이에서 싸워도 창끝이 겹치는 일은 없다. 말 그대로 일심동체의 싸움이었다. 겨우 두 명의 적에게 탄가 군이 고정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질주하던 탄가 군이 발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후방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흰 백합 문장. 평소에는 다른 이들보다 부드럽고 예의바르면서도, 이런 순간에는 누구보다 무모하고 용감한 것이 라모나 기사단장이다. 거리만 좁힌다면 화살은 힘을 잃는다. 부하 몇 명을 이끌고 뛰어나왔다. “계속 가! 목숨만 아낀다면 아무 것도 못한다!” “옛!” “알겠습니다!” 무모한 명령이지만 이것이 전쟁터의 상식이기도 하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일상은 전쟁터와는 전혀 다르다. 나시아스만 아니었다. 발로도, 이븐도, 도라 장군도, 무엇보다도 월 그리크도 그런 신념 아래에서 살아가는 전사이다. 노도처럼 적을 향해 달렸다. 이 기세의 차이는 엄청났다. 튼튼한 문에 몸을 부딪치는 것처럼 탄가 군을 밀어붙인다. 적의 견고한 방어가 조금씩 흔들렸다. 목표는 물론 중심에 있는 조라더스였다. 조라더스의 주위에는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측근들이 주군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싸우고 있었다. 결사의 각오로 응전한다. 이것은 그들의 충절인 동시에 고집이기도 했다. 주군만 무사하면 자신들의 나라도, 가족도, 명예도 지킬 수 있다. 거꾸로, 주군을 지켜내지 못한 기사의 오명은 평생 이어진다. 운이 다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후까지 주군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델피니아의 국왕은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때 스샤의 젊은 기사였던 월 그리크 역시 왕을 위해 싸울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하는 입장에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젊은 월은 왕에게 도움이 되는 영광까지 꿈꾸곤 했다. 그렇기에 국왕은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목숨을, 그 무게를 뼈저리게 음미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로 전쟁터에 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것은 가응한 한 모든 노력을 다해서 피해야 한다는 것이 월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한 번 싸우게 된 이상 절대로 질 수는 없다. 국왕의 패배는 자기 한 사람만의 패배가 아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렇기에 월 그리크는 무모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조라더스의 목은 아직 인가!” 우렁차게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한다. 지금 탄가 군의 모습은 절대로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소중한 사람들까지 끌어 들여 함께 죽어가는 자신이 여기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조라더스를 쓰러뜨려야 했다. 여기서 놓쳐버리면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주군을 지키며 도망치는 탄가 군은 수 백기, 그에 비해 델피니아 군은 약 2천 이상. 그 대부분이 적을 뒤쫓고 있었다. 지금은 압도적으로 델피니아 군이 유리했다. 최후까지 주군을 보호하던 이들도 힘이 다해 쓰러졌다. 탄가 군은 극히 일부의 용감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흩어져 도망쳐버렸다. 그럼에도 조라더스는 아직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전당을 달리고 있었다. 간신히 안장에서 떨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이미 위엄이고 뭐고 남아있지 않았다. 상처의 통증으로 신음하며 창백하게 질려 쫓기는 들개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건만 지금의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걸까. 틀림없이 이 손으로 승리를 거머쥐었어야 했는데. “으악!” “커억!” 이미 익숙해진 아군의 비명이 더욱 크게 울렸다. 조라더스의 바로 곁에 있던 기사가 쓰러진 것이다. 아까 보았던 새하얀 얼굴이 눈앞에서 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그 사람을 데려 왔어요.”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그리고 금빛의 인광이 눈앞으로 뛰어 들어왔다.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녹색 불꽃과 함께. “세상 이치라는 걸 가르쳐주지!” 엄청난 기백으로 외치며 왕비가 창을 휘둘렀다. 그 말의 의미를 조라더스가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간신히 오른 손이 움직였다. 무장의 본능으로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끝이었다. 왕비의 창은 상대의 등까지 꿰뚫었고 탄가 왕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