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델피니아전기16 <전설의 종언> 지 은 이 ; 카야타 스나코 옮 긴 이 : 김소형 펴 낸 이 : 김인규 출 판 사 : 대원씨아이 출판년도 : 2004년 6월 15일 <지은이 소개/ 카야타 스나코>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델피니아> 외에는 <키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저드> 등이 있다. <옮긴이소개/ 김소형> 1975년 3월생 이화여대 의학과 졸업. SF와 판타지를 좋아함. 아이작 아시모프와 호시 신이치, 오노 후유미의 팬. 번역작 : <십이국기> , , <악마의 파트너>, <델피니아 전기> <차례> 1장부터 13장까지. <소개글>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 셰라는 리의 배웅을 받으며 북쪽으로 향한다. 마침내, 반츠아- 그리고 파로트 일족과의 사투가 벌어질 때가 온 것이다. 한편 셰라와 따로 행동하던 중 기사단원 천 명의 목숨과 교환조건으로 포로가 되어 의식을 잃은 전쟁의 여신을 향해, 레티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다. 갈고 또 갈아온 필살의 무기를 손에 들고. 1장 소꿉친구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했던 국왕은 일단 코랄로 돌아오기로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탄가 군의 기세는 예상대로 상당히 약해져 있다. 솔직히 이대로 국왕이 진격해 결정적인 승리를 취하는 게 상식이지만, 그리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비르그나는 여전히 안테슈 장군이 이끄는 파라스트 군에 점령당한 상태이다. 이를 탈환하러 떠난 핸드릭 백작은 용맹함과 뛰어난 전술로 국내외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예순 살을 넘은 노령이지만, 불처럼 뜨거운 투지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아들 세 명도 당당한 무장으로 성장해, 아버지를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다. 그런 핸드릭 백작이라고 해도 비르그나 탈환은 쉽지 않았다. 요새에 틀어박힌 적을 공격하는 것은 야전에 비해 몇 배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파라스트 군은 수비전에 있어서는 중앙 제일의 실력을 자랑하는데, 그런 파라스트의 손에 비르그나라는 철벽의 요새를 내주고 만 것이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백작이 있는 지혜와 힘을 총동원해 매일같이 요새를 공격하고 있지만 순순히 함락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국왕과 왕비는 샤미안의 혼례의상 차림을 실컷 구경한 뒤, 어두운 밤길을 나란히 걸어 캄센 요새로 돌아오는 도중 그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테바 강을 확보할 수 없는 게 아쉬워. 이븐이나 이골 일행이 파라스트 군을 내쫓아줬지만, 적지로 변한 비르그나와 파라스트 본국 사이에 있는 요새인데. 파라스트 군은 거기까지 들어와서 확보했다고.” “상황이 달라. 우선 요새 자체의 규모부터 너무 다르다고. 저장된 식량이나 무기의 양 역시 엄청나게 차이가 나. 나시아스는 유능한 지휘관이니까. 몇 년은 요새 안에서도 버텨도 될 정도의 자원이 비축되어 있어. 하지만 테바 강의 요새는 애초에 국경의 관문으로 사용하던 시설이야. 튼튼히기는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포위전에 버틸 수 있는 구조는 아니라고.” 이쪽의 영토로 만들었을 때 그 점을 개조해 두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테바 강이 통째로 이 쪽의 영토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 이상 파라스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파라스트의 무장은 모두 농성전의 달인이야. 이 쪽이 바라는 실책은 저질러주지 않겠지.” “뭘 바라는데?” 달도 없는 어두운 밤, 등불조차 없이 성큼성큼 걸으면서 왕비가 말했다. 국왕은 왕비만큼 밤눈이 밝지 않다. 옆에서 걸어가는 왕비의 기척을 살피면서 그 움직임에 따라 발을 옮기고 있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재주이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남녀의 목소리 사이로 터벅터벅 발소리가 울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귀신이라도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하겠지. “이를테면 일부러 가짜 소문을 퍼뜨려서 적을 동요시키는 거야. 병사들의 가족들이 사로잡혔다든가, 본국이 위험하다든가, 그 상태에서 내통할 인간을 찾아서 이 쪽 편으로 돌리고 싶기는 한데.... 몇 번이고 말하는 거지만 상대는 농성전의 달인이야. 요새에 틀어박혀 외부의 아군과 연락이 차단당한 상태에서, 적에게 포위까지 당해 극도로 긴장해 있는 병사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어. 이 쪽이 이런 저런 수단을 써서 저 쪽을 동요시키려고 해도, 놈들은 그 이상으로 병사들의 동요를 막는 데에 익숙하다고 봐야지.” “그럼 뭘 할 수 있지?” “제일 확실한 건 성채를 파괴하는 거지만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시간도 너무 걸려. 무엇보다도 비르그나에 구멍을 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네가 가서 직접 해결할 거야?” “그건 핸드릭 백작한테 맡겼어. 난 그저 캄센이나 비르그나 양 쪽 모두 움직이기 쉬운 위치에서 대기하고 싶은 것뿐이야.” 어느 쪽에서 상황이 악화되어도 바로 달려가기 위해서. 등불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참. 국왕이라는 것도 참 귀찮은 직업이야. 난 어쩌지? 여기서 도라 장군이라도 도울까?” “음” 국왕도 일단 대꾸는 했지만 건성이었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이봐, 리. 스케니아는 그걸로 정말 손을 뗄 거라고 생각해?” 왕비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코랄의 해전은 이쪽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아닐 것 같아?” “음.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네 시녀의 옛 주인이 마음에 걸려.” “이븐이 알아온 그 얘기 말이야?” “우를릭 일행을 끌어낸 건 파로트 백작 한 명의 힘이었다더군. 어떤 수단을 쓴 건지 30년 전 일까지 조사해서.” 그렇게 말하며 국왕은 왕비를 흘끗 쳐다봤다. 왕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간수는 거의 아무에게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파로트 백작은 그 사실을 알아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던 걸까. 사실 두 사람에게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자아를 가지고 존재하지만 보통 사람은 존재를 알지 못하는-파토르의 유령. 그 들이 백작을 위해 움직였다면, 그리고 그 백작이 국가로서의 스케니아에 따르고 있다면 엄청난 일이다. 그들은 어디에라도 잠입할 수 있다. 어떠한 비밀 회담이라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고, 어떠한 중요 서류라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마법가의 현자의 말에 따르자면 그런 행위는 본래 금지되어 있다더군. 그런 존재는 어둠 속에 있어야 하며 외부의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짚이는 데가 있어. 스케니아에 보냈던 간첩들 중 누구 하나도 함대 제조의 움직임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지.”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없어. 지금도 정기 보고는 빠짐없이 하고 있어.” “그렇다면 전원이 스케니아 쪽으로 돌아섰든가, 아니면....” “이미 예전에 모두 죽었고, 내 손에 도착하는 보고서는 전부 다 가짜든가.”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봉화나 전령을 제외한 통신 수단이라면 종이에 문자를 기록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본인인지 아닌지의 확인 역시 그 서면에 남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필적은 굉장히 중시되며 이를 판단하는 사람의 눈 역시 지극히 엄격했다. 편지라는 것은 보존이 가능하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꺼내 들고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며 예전에 받았던 편지와 대조해 볼 수 있다. 지인의 필적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 인물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단언 할 수 있을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이에 기록된 문자에서 쓴 사람 특유의 개성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국왕과 그 측근이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가짜 편지를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계속해서 보고서를 보내면서 전혀 들키지 않았다니, 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파로트 일족이라면 그 정도 재주는 부릴 수 있는지도 몰라.” “그런가.” 왕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셰라와 인연이 있는 그 검은 남자도, 예전에 성 내부의 자작가에 당당하게 손님으로 체제 했었다. 가짜 소개장 한 통으로 그 남자는 자작가의 사람들을 전부 속여 넘겼던 것이다. “파로트 일족이 그 기술을 스케니아 안에서만 사용하고 있다면 이 쪽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겠지. 하지만 동맹을 이유로 탄가에까지 힘을 빌려주고 있다면 조금은 재미없는 상황이 되는 거야.”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국왕의 걱정이 사실이라면, 현재 델피니아가 점하고 있는 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정보를 쥐는 자가 승리를 쥐는 것이다. 그 정보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건 네 생각이 지나친 것뿐인지도 몰라. 케이파드 쪽 보고는 정상적으로 잘 오고 있잖아.” “그건 그래.” “스케니아 역시 코랄에서 그렇게나 쓴맛을 봤는데, 이미 탄가와 동맹을 파기했는지도 몰라.” “음.” 입으로는 긍정하면서도 국왕은 수긍하지 않았다. 왕비의 말투에도 확신은 없다. 그저 단순한 가정인 동시에. 소망이 뒤섞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근거 없는 추측을 전제로 하고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캄센 요새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 국왕이 입을 열었다. “나도 하나만 가정형으로 얘기하지. 탄가와 스케니아의 관계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고 치자. 그리고 파토르 백작이 탄가를 위해서도 움직인다고 치고, 스케니아의 경우도 있고 하니 지금 케이파드에 간첩을 보내봤자 그다지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반드시 확인해봐야만 해. 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임무야. 반 듯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인물을 고르자면 넌 누구를 추천하겠어?“ 왕비는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우문이야. 나나 셰라, 둘 중 하나밖에 없잖아.” “그럼 네 시녀를 보내지.” “네 맘대로 출장 보내지마. 그 애는 내 시녀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길게 설명까지 하고 있잖아.” “내가 가면 될 일이야.” “넌 안돼. 논외라고.” 요새까지 돌아오자, 채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리면서 크리산스 기사단장 컨프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다. 컨프리는 란바에서 여기까지 출동해왔다. 요새의 책임자인 도라 장군이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적이지만 요새를 비우게 되어 장군 대신 요새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특히 국왕 부부에게서 절대로 눈을 떼지 말라고 장군도 누누이 강조했고, 컨프리 자신도 그럴 셈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렇게나 당당하게 밖엣 돌아온 것이다. “밤늦게 수고하는군.” “신부가 굉장히 예쁘던데.” 덤으로 이 느긋하기 짝이 없는 인사까지 붙어 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리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주군과 그 왕비였다. 도라 장군이라면 엄청나게 고함을 질렀을지도 모르지만, 컨프리로서는 그저 행동이 너무 지나치시다고 간신히 한마디를 던질 수 있을 뿐이었다. 방어벽 위나 정원 여기저기에 크게 불이 피워져 있어 요새는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왕비를 위해 준비된 방은 2층에 있었으므로 창문을 열면 요새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모닥불이 바람에 흔들릴 마다 불꽃이 공중 속으로 흩어진다. 아주 잠깐 동안 어둠 속에 흔적을 남기고는 사라져가는 붉은 난무. 셰라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나타났다. 독특한 은발을 흰 천으로 감싸고 깔끔하게 시종 차림을 하니 상당히 관록있는 시종처럼 보인다. 주인을 기다리는 것 역시 시종의 일 중 하나이다. 시종으로 모습을 바꾼 셰라는 왕비가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옆방에서 기다리다가 주인이 돌아온 기척을 알아채고서, 아마도 밤길을 걸어서 돌아왔을 주인을 위해 따로 시키기도 전에 술상을 준비한 것이다. 국왕도 술안주에 손을 뻗었다. 샤미안의 혼례의상차림은 충분히 눈요깃감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연회였던 만치 국왕의 위장 사정은 상당히 빈한해져 있었다. 세라가 재빨리 준비한 요리는 벌꿀을 발라 구운 닭고기 절임과 얇게 썬 보리빵에 치즈. 국왕 부부의 만찬치고는 빈약한 메뉴였지만, 두 사람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식탁용 ud에 담아온 과일주도 다투듯이 집어 들며 비워버린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셰라는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국왕과 왕비가 자기 손으로 술을 따라 먹는 걸 멍청하게 보고만 있다니 종자로서는 완전히 실격이다. 알고는 있지만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더 가져올까요?” 급사가 체념하며 말하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해.” “셰라가 만들어 주는 건 뭐든지 맛있는 걸.” “구운 것뿐인데요? 누가 해도 맛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왕비 말대로야. 이런 주둔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맛이라고.” “그러니까 셰라를 빼가면 내가 곤란해. 맛있는 걸 못 먹게 된다고.“ “요약하자면 너, 네가 가고 싶다는 거지?” 국왕이 케이파드로 파견될 첩보임무에 대해 얘기하자 셰라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제가 가야지요.” “내 밥은 어쩌고?” 왕비가 진지한 얼굴로 우스운 불평을 해댔다. “이런 건 저 같은 인간이 해야 할 임무입니다. 당신께는 당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음. 왕비는 일단 여기에서 대기해줬으면 해. 파로트 백작이 탄가에서 손을 뗐다는 확신이 서면 단숨에 공격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면 섣불리 움질일 수 없으니까.” 왕비는 살짝 놀리는 듯한 어조로 공격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만 있는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지는 않아. 아니면 이 나라 임금님은 이기고 싶지 않은가보지?” “나의 하미아치고는 말이 너무 심한걸. 당연히 이기고 싶지. 그러기 위해서라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다가 자멸하는 꼴만은 반드시 피해야 해.” 국왕이라는 것은 군사와 정치의 최고 책임자이다. 어느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고,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자신의 지도력과 지배력으로 중신들을 납득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정해 명령할 수 있다. 그 대신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혼자서 모든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런 성질의 자리이다. 국왕은 파로트 백작의 존재를 가볍게 볼 생각이 없었다. 바르풀, 고트 그리고 벵크-스케니아의 선주민족들은 무섭도록 강력한 존재였다. 이븐의 엄청난 노력 독분에 간신히 그들과 화해하고 이쪽 편으로 끌어딜일 수 있었지만, 만약 그들이 계속 스케니아의 편을 들고 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파로트 백작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시만 내렸을 뿐. 거액의 보수 대신 은혜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 대신 전사의 긍지를 내세워서 그들의 의사를 짓밟고 자유를 빼앗아 그들과는 아무 원한도 없는 델피니아와 전력을 다해 싸우게 만들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으로 유도해낸 것이다. “자신의 병력은 아껴두고 가능한 한 남이 싸우게 만든다. 다른 세력과 연합해서 싸울 때의 정석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무서운 수완이지. 계속해서 그런 놈하고 손을 잡고 있다간 탄가도 어떻게 조종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마치 탄가의 앞일을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국왕을 보고, 왕비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옆집 사는 것도 인연인데, 충고해주지 그래?” “나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탄가도 탄가 나름대로 스케니아를 이용할 생각이겠지. 과연 정말로 이용당하는 게 어느 쪽일지 굉장히 신경도 쓰이고, 그에 따라 싸워야 할 상대도 달라질 xpslRK." 국왕도 한없이 진지하게 대답하고서 셰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셰라는 보라색 눈동자를 살짝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니아가 코랄에서 참패당한 것에 질려 탄가와 손을 끊어 버렸는지, 중앙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고 오면 되겠지요?” “그래. 가능한 한 빨리.” “알겠습니다.” 할 일이 정해지자 셰라는 빠르게 움직였다. 뒷정리를 끝내자마자 첩보활동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한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아 있다. 요새 안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게 모닥불이 피워져 있어 대낮처럼 밝지만, 조금만 떨어지면 새까만 어둠이 펼쳐졌다. 보통 사람들은 외출을 삼가는 시각이지만, 밤길을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는 것은 셰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배저오딘 방을 나와 출발하려 할 때, 이미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왕비가 복도에 서 있어TEk. 셰라가 채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낸다. “무리는 하지 마. 백작이 탄가 편을 들고 있다면 케이파드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네 동료들일 테니까.” “조심하겠습니다.” 조용히 대답했다. 파초트 일족의 실력은 셰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과 같은 마을 출신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자신이 있다. 실제로 4대 1로 싸워도 전혀 밀리지 않았따. 하지만 문제는 그 위에 있는 녀석들. 예전에 아란나를 암살하러 왔던 이들처럼 파로트 일족의 이름에 강렬한 자부심을 품고 있는 행동원들이다. “실은 너 혼자 보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따라오면 제가 곤란합니다. 높으신 분은 간첩 흉내 따위 내시지 않는 법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군사를 이끌고 나오시면 됩니다.” 왕비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그렇지만, 뭐든지 다 너한테 의존하면서 다들 귀찮은 일은 너한테만 미뤄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구.” 셰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국왕이 왕비를 두고 늘 하는 말 그대로였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한 나라의 지배자라는 위치에서 몇만이나 되는 군사의 정점에 선 강력한 힘을 지닌 몸이면서도 절대로 그런 사실에 교만해지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는 누군가를 사지로 내몰기 전에 스스로 먼저 움직인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도구라고 생각하시고 써주시면....”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셰라. 어지간히 학습 좀 하는게 어때. 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안 좋아해, 정 싫으면 안 가도 돼. 이런 말로 부족하다면 ‘가지 마’ 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고.” 셰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요.”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얘기가 아니야.” “리. 당신이야말로 모르고 계십니다. 저는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가는 게 아닙니다.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오히려 보람까지 느끼고 있을 정도인걸요?” 왕비는 말없이 셰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짐승처럼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예리한 눈빛이었다. 셰라는 불편핮지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신이나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당신께는 주인을 따르는 개와 다를 바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틀림없이 제 의지입니다. 이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아니, 충분해.” 왕비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개 같다고는 생각 안 해. 이를테면 월은 내 동맹자인 동시에 친구이지만, 친구가 기뻐할 만한 일이라면 나도 기쁘지. 단지 넌 무리하다가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야.” “저라고 언제까지나 옛날 그대로는 아닙니다. 이래뵈도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선, 당신이 남한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요?“ 셰라는 기가 막혀서 반문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물든다던가. 막 왕비 밑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에는 어딘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하는 구석이 잇었지만, 최근에는 이 정도 소리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말을 마치고 출발하려다가, 셰라는 갑자기 왕비를 돌아봤다. “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왕비는 이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셰라도 , 언제나 죽음을 바로 곁에서 느끼며 살아가는 생물이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아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죽여왔고, 반대로 살해당할 뻔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캄센도, 동쪽의 비르그나도- 싸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죽음이 충만해 있다. 특별히 진귀하달 것도,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왜 그런 걸 묻지?” “별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물어보고 싶어진 것뿐이지요.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업습니까?” “두렵다, 라....” 왕비가 살짝 웃었다. 놀리는 듯한 시선으로 셰라를 바라본다. “아무리 무서워해봤자 살아있는 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죽게 돼.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뿐이지.”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는 편이 득일까요?” “난 그렇게 생각해. 중요한 건 언제 죽느냐가 아니야.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가느냐지.” “....... ” “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그러니 않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후회는 안 해. 지금까지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며 살아왔지만 언젠가는 내가 죽을 차례가 올 지도 모르지. 그것 뿐이야.” 딱 잘라서 말하고 왕비가 반문했다. “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지?” 셰라가 대답하기까지는 긴 침묵이 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까지 생각했지요. 모든 속박에서 풀려나 훨씬 높은 곳으로 가게 될 테니까. 전 그렇게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 앞에 성령이 존재했으니까요. 의심 따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예 논외였지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지.” “예.” 대부분의 성령은 파로트 백작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환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생명보다도 명령을 우선시하도록 세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리는 건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된다. 그것만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운명이다.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길거리의 거지에게도, 귀족에게도, 국왕에게도. 아무리 두려워해도, 아무리 꺼려해도, 아무리 도망치려고 발버둥쳐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다음에 그 여자가 나타나면 물어보지 그래?” “모아라님 말인가요?” “꽤 괜찮던데, 내 취향은 아니지만. 케이파드에 나올지도 모르잖아.” 셰라는 살짝 굳어진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취향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겠지만, 왕비의 말대로 였다. 그 여자는 육체가 사라진 지금도 그렇게 살아있다. 예전에 그 남자가 말했었다. 파로트 일족에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죽은 뒤에도 의식은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많은 편이라고. 셰라의 뇌리에 캄센의 숲에서 만났던 소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굴 자체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얼굴 이외의 부분은 없었으므로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목 위만 보더라도 살아 있을 때에는 분명히 아름다운 소녀였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소녀의 푸른 눈은 한없이 어두웠다. 모이라의 검은 눈동자도 그랬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오한이 들 정도로, 마치 황천의 입구가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런 모습으로 ‘살아’ 왔던 걸까. 아무 것도 건드릴 수 없게 된 이 세계를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 행복한 걸까요.” “응?” “그 사람들은 육체가 사라진 지금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살아가는 영혼과 우리들처럼 죽으면 그대로 사라지는 영혼은....” 어딘가 불편한 듯한 어조였다.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조차 없었다. 성령은 셰라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감히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인 동시에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희미한 빛 속에서 나타나 짧지만 의미 있는 말을 남기곤 했다. 성령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그 말을 가슴깊이 새기곤 했다. 성령의 말은 난해한 신탁처럼, 때때로 장로가 물음을 던져도 조금씩 요점이 어긋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대답만 돌아왔다. 장로는 이 쪽의 이해력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수수께끼를 던지는 거라며 긴장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셰라는 의심하는 법을 알고 있다. 생각하는 방법을 익혔다. 다리에스에 나타난 성령들은 이쪽의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의 지능이 없었던 것이다. 주인인 백작의 명령대로 밖에 움직일 수 없고 예정 밖의 사태가 일어나면 대응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장로는 어린 저에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거기서 끝이라고. 아무리 위대한 업적은 이룬 사람이라도 죽음을 맞으면 모든 것이 그만이라고. 육체도 정신도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그 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지만 그 분들은 다르다고. 육체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존재가 되어서 우리들을 인도해주고 계신다고.”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그 남자는 말했다. 마을에 나타나는 성령은 멋대로 지어낸 환상에 불과하다고, 상부의 인간들에게 조종되는-자신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꼭두각시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다. 장로가 말했던 그런 것도 존재했다. 모이라나 그 소녀처럼.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영혼은 생전 그대로 남아있다. 완전히 독립된 인격과 의지를 가지고, 뛰어난 두뇌와 깊은 지성을 지니고 있다. “죽음이란 건 무엇인지, 죽은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물인 이상 언젠가 반드시 죽음이 찾아오지요. 하나의 종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강한 미련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도 있지요. 병이나 가난에서 해방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이든 안식이든 저승의 입구든 영혼의 소멸이든. 분명히 뭔가 종결이 있을 겁니다.” 말을 계속하면서 셰라는 점점 초조해졌다. 말하고 싶은 것이 채 반도 표현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셰라가 받은 교육이나 수련은 주어진 명령에 완벽하게 순종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신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남에게 설명하거나 주장하는 훈련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성령은 어째서 진실한 의미에서 죽지 않았느냐 하는 거야?” “그것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형태로 종결을 뛰어넘은 셈이지만....” 또다시 말이 막혔다. 사실 말로 하기에는 어려운 애기였다. 그들은 정말로 지금 그 상태로 행복한 것인지,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영혼을 현세에 남기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정말로,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존재라는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머릿속에는 막연하게 그런 종류의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도저히 입 밖에는 낼 수 없었다.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겠지. 그렇게 오랫동안 유령 짓 하면서 질리지도 않는지 나도 꼭 물어보고 싶어.” “오래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여자 눈 봤지? 아마 상당히 됐을 거야. 50년이나 100년 정도로 그렇게 바닥없는 늪 같은 눈이 되진 않아. 적어도 200년 이상은 된 유령이겠지. 술도 기껏해야 100년 정도가 한계인데 대단하긴 해.” 심각한 공기를 간단하게 날려버리는 거야 왕비의 장기엿지만 셰라는 또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거기서 술 얘기가 나오는 겁니까?!” “보통 몇 년 짜리 라고 하면 술 밖에 없잖아.” 태연한 대답에, 그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겠습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해버렷군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라기보다는 거의 내뱉듯이 대답을 던지고서 셰라는 휙 등을 돌렸다. “셰라.” “뭡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자 생각지도 못하던 진지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꼭 살아서 돌아와. 유령이 된 너하고 재회해봐야 하나도 안 기쁘니까.“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표정이 거기에 잇었다.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미소와 몇 만의 대군을 이끄는 강렬한 눈동자. 아마 어떠한 미인이라도 보일 수 없을, 날카롭게 빛나는 검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걱정스럽게 세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셰라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짧은 대답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앞으로 2시간만 지나면 사람들이 일어나서 바쁘게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하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침묵에 잠겨 있다. 열기와 활기가 넘치는 평소의 광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불이 꺼진 아궁이는 완전히 싸늘하게 식어잇다. 밖으로 나오면 여기저기에 모닥불이 피워진 화려한 정원이 있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이 여럿 서 있었다. 하지만 불이 밝으면 밝을수록, 가까이에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면 안심할수록 방시하게 된다. 어둠 속의 존재는 더욱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셰라는 소리 없는 바람처럼 매끄럽게 이동했다. 그늘에서 그늘로 나아가면서, 병사들이 얘기를 나누는 쪽으로 작은 돌을 던진다. “뭐야?” 두 사람의 신경이 오른쪽으로 쏠린다. 그 틈에 셰라는 두 사람의 왼쪽을 지나 방어벽으로 달려가 검을 짚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방어벽 위에 가볍게 착지한다. 다음 걸음에는 이미 방어벽을 차고 밖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바로 옆을 지나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2장 얼마 전부터 코랄 성의 북쪽 탑에는 특이한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다. 아직 소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젊은 청년이다. 죄목은 성의 곽문을 백주 대낮에 당당하게 무단으로 통과하려한 것. 처음 체포된 상황부터가 상당히 특이했다. 그 남자는 시민들에게 통행이 허락된 곽문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 문지기 앞에 서서 겁없이 백아의 문을 뚫어져라 올려다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문지기 역시 이 수상한 인물을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삼곽과 이곽을 가르는 이 문까지는 일반 시민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 단, 노점상이나 거지는 예외이다. 성안에서 상행위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무리 잘 봐줘도 거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거기 지나가시는 나으리’ 하며 오가는 행인을 붙잡지는 않았지만 행색은 완전히 거지 그 자체였다. 더러운 누더기 한 자안 걸친 차림으로 신발도 없다. 맨발에 진흙이 말라붙어 있는데다 온몸니 먼지투성이였다. 특이한 점은 마치 여자처럼 길게 기른 머리를 하나로 묶어서 늘어뜨리고 있는 것과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검, 그리고 지저분한 모습이면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은-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 쪽 손에 지팡이 대신 쥐고 있는 막대기. 수상한 남자는 그 막대기를 문 앞에 똑바로 세우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놓았다. 쓰러진 막대기는 곽문을 가리켰다. 문지기가 보고 있는 앞에서 세 번 정도 더 시도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여기야.” 남자는 조그맣게 중얼거리고서 당당하게 곽문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문지기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게 수상한 인물을 붙잡았다. 일반 시민이 곽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통행증이 필요하다. 통행증을 꺼내라, 통행증이 없다면 들여보내줄 수없다며 앞을 가로막았다. 거지 차림의 남자에게는 물론 통행증 따위 없었지만, 무장한 문지기가 몰아세워도 겁을 먹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먼지로 뒤덮인 얼굴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 안에 찾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곽문을 통과하려 했던 것이다. 이 쯤 되면 완벽하게 왕성 불법 침입 죄. 남자는 즉각 체포되어 삼곽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사실 문지기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이상한 놈들이 늘어나는 법이니, 감옥에서 머리를 잠깐 식히는 게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불쌍하게도, 여기가 좀 안 좋은 거 아냐?” 문지기 중 한 명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보여도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에서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죄수란 신기하다기보다도 기분 나쁜 존재였다. 삼곽은 거대한 병영이자 마굿간인 동시에, 성을 유지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쥔들 사이의 분쟁이나 다툼도 일어나곤 한다. 그런 종류의 소동을 잠재우기 위해 삼곽에는 경비를 전담하는 관리와 감옥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남자는 이 곳의 다인실에 수용되었지만, 사건은 바로 그 날 밤에 터졌다. 조용한 감옥 안에서 갑자기 엄청난 비명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나으리! 나으리! 일어나주십쇼! 나으리!‘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이었다. 간수는 보나마나 또 죄수들끼리 싸움이라도 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부스스 일어나 등불을 들고 소동이 일어난 다인실을 들여다 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죄수들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제각각 얼굴이나 팔을 붙잡고서 고통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꿈틀거렸다. 멀쩡해 보이는 것은 일곱 명의 죄수들 중 두 명 뿐이었다. 하지만 이 두사람의 모습은 엄청나게 대조적이었다. 한 사람은 늙은 하인. 술에 취해서 길가에 드러누워 잇다가 여기에 수용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감방에 들어오는 것 조차 모를 정도로 만취해 있었지만, 취기도 완전히 달아나 버린 듯 했다. 철창에 매달려 부들부들 떨다가 관리를 보자마자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내보내주십쇼! 딴 감방에 넣어 달라구요! 이, 이런데 있다간 저 괴물한테 죽습니다!” 늙은이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그 거지 차림의 청년이었다. 좁은 감방 바닥에 남자 다섯이 쓰러져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고 있다. 문제의 남자는 쫙 찢어진 자신의 옷을 펼쳐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 저 녀석이 이 사람들을 쓰러뜨렸다구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 순간까지만 해도 늙은이의 머리는 아직 술기운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갑자기 격렬한 소리와 비명이 들려와 정신을 차려보자 덩치 큰 남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기분 나쁜 눈을 늙은이에게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등골이 다 오싹합니다.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딴 방으로 보내 주십쇼! 저런 괴물하고 같이 있는 것만은 싫다구요!” “알았다, 알았어. 옮겨줄 테니까 좀 기다려.” 흥분한 늙은이를 달래면서 간수는 동료를 깨워 의사를 데려오게 했다. 여기에 수감되어 있는 이들은 벌금이나 가벼운 벌칙 정도로 끝날 가벼운 죄인들뿐이다. 그런 이들이 감옥 안에서 죽기라도 했다가는 관리자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의사의 진찰 결과, 쓰러져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늙은 하인은 갓 들어온 남자가 혼자서 한 짓이라고 말했지만, 간수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이들은 하나같이 근육질에 덩치 큰 남자들이었고, 새로 들어온 쪽은 선도 가늘고 유약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본인도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 사람들이 날 건드리려고 했으니까.” 저항한 것뿐이라는 말이다. 온화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간수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짓는다. “바늘하고 실, 없을까요? 이거 꿰매고 싶은데.” 죄수를 심문하던 간수는 아직 잚은 남자였지만 상대의 웃음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말문을 잃고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된 건지, 어째서 그렇게나 가슴이 뛰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감옥 안에서 소란을 일으켰으니 상세하게 취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름과 사는 곳을 묻자 남자는 간수에게 받은 바늘을 솜씨 좋게 놀리면서 대답했다. “루.” 하지만 그것뿐, 그 이상의 정보는 얻어낼 수 없었다. “태어난 곳은 본쥬이의 바다 속.” “여긴 사람을 찾으러 온 것 뿐 인데요.” 같은 소리만 늘어 놓는 것이다. 결국 간수는 심문을 포기하고 이 죄수를 독방에 쳐넣었다. 이대로 풀어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놔둘 수도 없었던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놈들이군. 일년 내내 여자 구경도 못하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감방 안에서까지 그 짓이야?” “그 녀석이 그렇게 괜찮게 생겼어?” “아니, 완전히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구. 좀 씻겨놓고 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사양이야.” “당연하지. 아무리 얼굴이 반반해봤자 남자잖아?” “정신나간 것들이지. 남자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반격에 쓰러지다니, 거 쪽팔려서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어?” 간수들 사이에서 이 사건은 절호의 웃음거리 였다. 그러나 다음 날 밤, 이 웃음도 사라지게 되었다.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동료 간수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전날 밤에 루를 심문했던 젊은 간수였다. 허가가 없으면 건드릴 수 없는 독방 열쇠를 몰래 들고 나와서 감옥에 침입해 죄수를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과도 전날 밤과 마찬가지였다. 그 기묘한 죄수는 자신을 덮치려는 간수를 손쉽게 쓰러뜨린데다가, 활짝 열린 감옥 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태연하게 사람을 부르기까지 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여기 다친 사람이 있는데 데려가 주시겠어요?” 달려온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말문이 막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죄수는 감옥 문이 열려 있는데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고, 간수는 반쯤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 죄수의 발치에서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었으니까. 감옥의 책임자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죄수들끼리 충돌이 있었다면 몰라도 죄수를 관리하는 입장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권한을 악용해 죄수를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쉽게 넘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각한 직권남용이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이 사건을 보고하겠다. 각오하고 있어!” 상관의 엄중한 선언에 문제의 간수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무단으로 열쇠를 꺼내간 것도, 남자 죄수에게 손을 대려고 했던 것도 인정하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 놈이 요술을 썼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즉 그 죄수에게 홀렸다는 말이다. “전 아내를 맞은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전 절대로 죄수에게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것도 남자한테!‘ 반쯤 미친 듯이 호소했다. 물론 처벌을 피해보려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잇겠지만, 혹시 간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역시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일이다. 주술이나 요술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 역시 범죄인 것이다. 감옥의 책임자는 직접 루라는 이름의 죄수를 취조했다. 심문은 감옥 안의 어느 방에서 이루어졌다. 두 손울 앞 쪽으로 묶인 죄수는 맨 발로 끌려 나왔고, 책임자는 엄격하게 죄수를 몰아세웠다. “네가 요술을 써서 그 남자를 유혹했나?” 루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것뿐인가? 그 밖의 할 말은 없어?” “요술을 썼느냐는 질문에, 안 썼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변함없이 느긋하고 평온한 어조였다. 삼곽 감옥의 책임자는 그런 죄수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살 남짓. 우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눈을 끌었다.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이목구비는 상당히 단정하다. 그러나 직무에 성실하다는 평판을 단번에 떨어뜨리고 갓 결혼한 부인을 울리는데다 복무 위반으로 엄벌에 처해질 것을 뻔히 알변서도 손을 대고 싶어질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도망치지 않은 건 칭찬할 만해. 하지만 간수에게 부상을 입힌 죄는 무겁다.” 이 협박에 죄수는 곤란한 듯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으면 그대로 깔렸겠지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둬도 튼 상관은 없지만, 저한테도 사정이 있어서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말도 또박또박하고 침착했다.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실성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엇다. 책임자는 다시 죄수의 신원을 조사하도록 명령한 뒤 압수한 소지품을 가지고 오게 햇다.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점쟁이가 쓰는 것 같은 카드 한 세트와 단검 한 자루, 은반지를 끈에 꿰어서 목에 걸고 있었다고 한다. 단거 자체는 굉장히 훌륭했고, 은반지에도 섬세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거지나 다름없는 인간의 소지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단검을 손에 쥐고 뽑아보려던 책임자의 표정이 살짝 변햇다. 검이 조금도 뽑히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건? 녹 슨 건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아니면 뽑을 수 없어요.” “뭐?“ “잠깐 줘 봐요.” 청년은 묶인 손을 내밀었고 책임자는 홀린 듯이 단검을 건네주었다. 주인의 손에 돌아가자마자 검은 부드럽게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은백색 검이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 사이에 긴장감이 퍼져갔다. 무기를 손에 든 죄수가 날뛰는 게 아닐까 경계하고 있었지만, 루는 뽑아낸 단검을 얌전히 탁지 위에 내려놓앗다. “흐음, 멋진 검이군.” 날카롭게 빛나는 검날에 끌려, 손에 쥐고 자세히 살펴보려던 책임자의 표정이 또 바뀌었다. 손잡이를 쥘 수는 있다. 하지만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당황하며 양 손으로 고쳐 쥐고 혼신의 힘을 짜내도 꼼짝도 하지 않앗다. 엄청난 중량이 탁자에 딱 들러 붙어버린 것 같았다. 팔 길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검인데도 인간이 자신을 들어 올리려는 노력을 완고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 이, 이건 대체?” “이건 저 밖에 못 씁니다. 딱 한 명 예외는 있지만.“ 루는 다시 말문을 잃은 책임자는 처음으로 죄수의 눈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잔잔한 바다 같은, 흐릿한 거울 같은, 생물로서의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의 푸른 눈동자였다. 책임자는 크게 숨을 들이켯다. 다른 감방으로 옮겨달라고 난리치던 늙은이가 느끼던 그 공포를 바로 지금 감옥의 책임자도 맛보고 있었다. 기묘한 얘기지만 그와 동시에 관능을 강하게 건드리는 자극이 느껴졌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으면서도 저 피부에 접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덮쳐왔다. 문제를 일으켰던 부하는 자신은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미친 듯이 항변했지만, 딱 그런 심정이었다. 동성을 상대로 이런 충동을 느껴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머릿속 한 구석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살짝 드러난 목덜미나 가슴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청년의 유연한 사지가 갑자기 향기를 뿜는 듯한 기분이 든다. 조악한 누더기에 가려져 있는 저 몸이 어떤 선을 그리고 있는지 신경이 쓰이고 쓰여서 견딜 수가 없다. 신음하기 시작한 책임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루가 말했다. “몰라요?” “뭐, 뭐, 뭘...?” ‘이것하고 똑같은 물건을 가진 사람이 여기에 있을 텐데. 본인 밖에 뽑을 수 없고 본인 밖에 쓸 수 옶는 검. 혹시 짐작 가는 구석은 없나요?“ 이 시점에서 책임자의 안색은 완전히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옆에서 대기하던 경비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짐작 가는 구석 정도가 아니다. 본인 밖에 다룰 수 없는 ‘왕비의 검’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경비병은 불안하게 상관의 안색을 살폈고, 그 덕에 책임자는 간신히 스스로를 억누를 수 있었다. “이, 있다면, 어쩔 건데?”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이미 입장은 완전히 뒤집혔다.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죄수였고, 거꾸로 책임자 쪽이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루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요염한 미소였다. “전 그 사람을 만나러 왔습니다.” 곧바로 루의 신병은 북쪽 탑으로 옮겨졌다. 왕비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당황한 책임자가 그 쪽으로 떠 넘긴 것이다. 이런 사태는 삼곽을 담당하는 일개 관리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죄수를 강제로 넘겨받은 일곽에서도 마찬가지엿다. 정문의 관리와 일곽 내의 경비는 다섯 개의 근위 군단이 교대로 맡고 있다. 그 날의 담당은 제 1군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권한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태가 생기면 곧바로 국왕에게 보고하게 되어있지만 지금은 국왕도 왕비도 성을 비운 상태이다. 대체 이 죄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담당자들 사이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제 1군 단장의 지시를 받든가, 아니면 차라리 성재의 책임자인 재상에게 알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고지식한 루카난 대장이 사태를 수습했다. “곽문을 통행증 없이 통과하려 한 인간이다. 설령 비전하와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의 경계를 맡은 인간에게 미리 통보가 없었던 이상 죄를 물어야지. 비전하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북쪽 탑에 수감할 수 밖에.” 그런 짓을 했다가 정말로 왕비의 지인이라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고 동료들은 두려워했지만 루카난 연대장은 코웃음을 쳤다. “난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뿐이야. 무슨 벌을 내린다는 거야?” 루카난 연대장 역시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왕비를 정말로 화나게 만드는 사태만으 피하고 싶었으므로, 일단 이 ‘손님’의 대우에는 신경을 쓰도록 북쪽탑의 담당자에게 지시해 두었다. 죄수 본인은 이런 경위를 전혀 알지 못했다. 루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삼곽의 감옥에서 북쪽 탑으로 옮긴 것이다. 구석에 짚이 깔린 것 뿐인 삼곽의 감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제대로 된 방이었다. 간수들은 이 죄수에게 목욕을 시키고 입을 옷까지 건네 주었다. 당사자인 루는 이 대우에 감사하지도, 간수들에게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얌전히 시키는 대로 욕실에 들어가 온 몸의 때를 씻어냈다. 목욕을 마치고 나자 숨이 막힐 정도로 깨끗한 피부가 드러났다. 아기처럼 곱고 부드럽고 새하얀 피부였다. 더운 물로 살짝 상기된 얼굴에 매끄러운 흑발이 흘러 내린다. 양 팔을 들어올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는 동작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어도 본능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죄수를 감시하던 간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시선을 뺏기고 있자, 젖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말햇다. “너무 쳐다보지 않는 게 좋을텐데.” 간수들 중 한 명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다른 한 명은 초조함을 숨기기위해 언성을 높였다. “너, 네 놈, 역시 요술을...!” “안 썼다니까요.” 여전히 웃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옷을 걸치고 물기를 머금어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는다. “전 아무 짓도 안했지만 저한테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걸려들어서 이상해지지요. 그러니까 너무 가까이 오지 않는 편이 좋아요.” 진지하게 충고하고서 태연히 독방으로 돌아간다. 따라가던 간수 쪽이 기가 막힐 정도로 초연한 태도엿다. 아무리 봐도 죄수의 태도는 아니다. 내일의 운명을 비관하는 것도, 반드시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항ㄴ 인상을 준다. 실제로 루 자신도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고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따위는 전혀 상관 없었다. 독방에는 침대도 있다. 루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회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 하늘에는 태양이 있다. 그걸로 충분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더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파트너가 바로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넘칠 정도였다. 짚을 깐 감방이라고 해도 너무나 편안한 느낌이었다. 루는 행복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푹 잠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3장 도라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델피니아 군은 탄가에 침입해 캄센 북쪽 5카티브 위치에 진을 쳤다. 단숨에 너무 많이 진격하는 건 위험하지만, 기세를 타고 있는 상태에서 한군데에 계속 주둔하는 것도 다른 의미로 위허하다. 사기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군의 목표는 탄가가 국경 방어를 위해 쌓아놓은 요새였다. 옛날에 캄센 요새도 그랬지만, 2년 전 데피니아가 탄가로부터 빼앗았다. 그 뒤 조라더스는 캄센에 대항하기 위해 이곳 자하니에 새로 요새를 쌓았다. 이 곳을 탈취하면 델피니아의 동쪽 국경은 란바에서 캄센, 거기서 자하니까지 비약적으로 확장된다. 탄가 중앙부로 쳐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발판으로 꼭 손에 넣어두고 싶은 요새였다. 거꾸로 탄가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넘겨줄 수 없는 요새이기도 했다. 미리 대량의 무기와 병량을 운반해뒀겠지. 적은 요새를 철저하게 방어하며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녹음이 우거진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평지를 자하니 요새가 가로막고 있다. 케이파드로 가려면 이 곳을 지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다른 길로 우회하려면 험준한 산길과 언덕을 넘어가야 하니 일이 커진다. “어디, 비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라 장군이 공격 방침을 묻자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일일이 물어볼 필요 없어. 지휘관은 장군이니까. 난 철저하게 돕기만 하겠어.” “호오, 그거 참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두렵기 그지 없다의 착오가 아닐까. 틸네든과 라모나 양 기사단장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명하게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장군의 계획은?” “예, 저희들은 폐하로부터 너무 깊숙한 곳까지는 진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 자하니 요새에서 그런 사정까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을 무시하고 요새의 측면을 지나가 보려고 합니다.” 왕비가 큭큭 웃었다. “눈 앞에-서 그런 상황이 요새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겠군.” “그렇지요. 도발이라는 걸 알고는 있어도, 요새 안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바보 같이 가만히 있다가는 적의 침입을 용인하게 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는 본국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되는 상황에서 구경만 하는 셈이 되지요. 조라더스왕의 성격이라면 그런 신하는 즉각 무능하다고 판단할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려 들 겁니다.” “그 대신 이쪽은 이동 중에 적의 공격을 받게 돼.” “위험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틸레든과 라모나 기사 단장에 천하무적의 조력자까지 함께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겁니다.” 농담 같은 어조지만 장군은 진심이었다. 도라 역시 오랫동안 맹장으로 이름을 떨쳐온 사람이다. 굳이 이유를 구구절절 읊어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진심으로 그 방법으로 자하니의 군사들을 끌어내어 쳐부술 생각이었다. 물론 다른 계산도 있었다. 자신들이 여기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 그 기세는 반드시 서쪽에 있는 노영웅에게도 힘이 될 터. 그리하여 도라장군은 1만의 대군을 이끌고 자하니 요새의 옆을 통과하려 했다. 마치 요새 안에 틀어박혀 있는 탄가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이 대군에 너희들이 덤벼봤자 어차피 승산은 없을 거라고 얕보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요새에서는 델피니아 군의 움직임이 훤히 잘 보였다. 자신들이 어떤 지시를 받았든 간에 그대로 적이 지나가게 내버려뒀다가는 무장으로서도 부하로서도 실격이다. 요새 전체를 흔드는 듯한 함성과 함께 활짝 열린 성문에서 병사들이 뛰어나왔다. 긴 대열의 허리를 끊어 구멍을 내고, 선두와 후미가 다시 뭉치기 전에 요새로 물러나려는 계산이 틀림없었다. “건방지게!” 소리를 지르며 발로가 뛰쳐나갔다. 거대한 매의 문장이 펄럭이며 사냥감을 덮쳤다. 흰 백합 문장도 재빨리 뒤를 따른다. 두 사람과 함께 왕비도 뛰어 나왔다. 그 날 왕비가 타고 있는 말은 평소의 말이 아니었다. 장군에게 빌린 건장한 갈색 말에 고삐를 채워 타고 있었다. 도라 장군은 한 때 국왕에게, 용사 한 명만으로는 절대로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 한 명을 쓰러뜨릴 수 없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그 신념은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었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두에 선 용사의 활약이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힘이 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전두에 선 용사가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진다. 두 기사단장은 그 점에 있어서 완벽한 인물이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형세 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적에게 포위되고 말 상화에서 종횡무진 말을 달리며 제각각 자신의 부하들을 독려하고, 밀어닥치는 탄가병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발로가 공격하면 나시아스가 방어를 맡고, 나시아스가 위험해지면 발로가 원호에 나서는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었다. 지형 면으로는 탄가 측이 유리했다. 돌격한 타이밍 역시 마찬가지 이다. 하지만 지휘관의 기량과 용병술은 델피니아 측이 훨씬 뛰어났다. 양군은 조금씩 휴식을 취하며 하루 종일 싸웠고, 델피니아는 점점 탄가를 몰아세우다 마침내 요새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게 만들었다. 도라 장군도 퇴각의 종을 울리도록 했고, 델피니아 측은 요새 서쪽에 보이는 언덕 기슭에 진을 쳤다. 저녁 해가 자하니 요새의 뒤에 펼쳐진 산 반대편으로 사라져 간다. 병사들이 막사를 세우고 불을 피우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타르보가 장군에게 물었다. “야습을 하시겠습니까?”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전투는 이 쪽이 우세했다. 그 기세를 타고 야습을 거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적 역시 경계하고 있을 터였다. “예” “정찰은 어떻게 됐나?” “그것이, 실은 비전하께서 자청하셔서..., 지금 요새의 상황을 살피러 나가셨습니다.” 타르보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소녀와 함께 싸워 국왕이 옥좌를 되찾은 지 어언 6년. 로아 사람들은 오랜만에 그 소녀와 다시 함께 싸우고 있다. 2년 전의 결혼식 소동 때에는 배치가 달랐기 때문에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예전 같은 신분이 아니니 바보 같은 행동은 삼가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자신은 원래 이렇다면서 억지로 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분도 전혀 변하질 않으셨더군요.” “글세 말이네....” “하지만 말 입니다.... 변함없이 씩씩하게 전쟁의 여신으로 활약해 주시는 것도 좋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슬슬 삼가셔야 지요. 누가 뭐래도 그 분은 델피니아의 다음 국왕이 될 분을 낳아 주실 몸이니까요.” 국왕부부의 실태를 모르는 타르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런 소리를 해댔다. 도라 장군은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타르보, 목숨이 아깝다면 그 말은 절대로 비전하 앞에서는 하지 말게.” “알고 있습니다. 이런 건 여성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일 테니까요. 제 조카도 결혼한 지 7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서 굉장히 괴로워했습니다. 이 타르보, 절대로 비전하의 괴로움을 더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도라 장군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했다. 여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타르보의 의견은 왕비에게 환상을 품고 있는 델피니아 국민 전체의 의견이기도 했다. 일부러 환상을 깨뜨릴 필요는 없다. 그 날 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식사를 들었다. 낮의 전투에서 이 쪽이 우세했던 덕에 분이기도 매우 밝았다. 왕비는 특히 발로와 나시아스의 활약에 대해 칭찬했다. “로자몬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분명히 단장한테 더 반해 버렸을거야.” 완전히 빈말도 아닌 듯 했지만 , 틸레든 기사 단장은 씨익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더 반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처는 제게 완전히 홀딱 빠져 있으니까요.‘ 왕비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바지만 , 이 기사 단장은 국왕과는 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그런 소리 해도 괞찮겠어, 단장의 바람기에 질려서 이미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후후후, 뭘 모르시는군. 왕비야 아직 부부간의 심오한 이치를 모르시겠지만, 제가 처를 사랑하는 만큼 처도 절 사랑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소리를 뻔뻔스럽게 잘도 하네. 단장, 의외로 애처가였어?” “의외라니, 실례군요. 젖 진짜 애처가입니다.” “좋을 대로 지껄여.” 왕비가 먼저 손을 들어버렸고, 나시아스는 웃음을 참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왕비는 캄센에 올 때 라티나가 나시아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 답장은 (참으로 황공하게도) 국왕이 거지고 코랄로 돌아갔다. 라티나는 남편의 무사를 기원하는 말은 썼지만 전황에 대한 질문이나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그 주제를 피하고 있는 듯했다. 나시아스 역시 쓰지 않았다. 로자몬드와는 달리 라티나에게는 전장의 상황이나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쓸데없이 걱정만 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이 살아서 돌아 가기만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북부의 영주들 중 한명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장군님의 사위 분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안 보이는 듯합니다만.” “아, 그건 저도 묻고 싶었소,” 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려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던 듯하다. “사위라면, 여기는 손이 충분할테니 괜찮겠다면서 타우로 물러갔네.” “부인도 함께 말입니까?” “남아 있으라고 해봤자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어차피 신혼이니까.” 장군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발로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 놈, 대체 타우에 무슨 볼일이 잇다는 거야. 저쪽 전황은 분명히 마무리 됐을 텐데.” “그 싸움의 흔적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어서 말이야. 손이 아무리 잇어도 부족할 정도라더군,” 다음 날부터 도라 장군이 이끄는 델피니아 군은 자하니 요새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도 몇 번 있었지만 탄가 군은 불리해 질 때마다 요새로 도망쳐 버렸다. 델피니아 측도 요새를 완전히 공략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자연스럽게 서로의 허점을 노리며 대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던 중, 장군이 파견한 첩자가 신경 쓰이는 보고를 했다. 이 곳에서 서 쪽으로 20카티브 정도 떨어진 곳에 낡은 요새가 있는데, 거기에 탄가군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수는 약 500명 정도로 보였습니다.” “500? 원군 치고는 너무 적은데.” “부근에 사는 주민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수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 군대가 자하니를 공격하기 조금 전부터 부대가 대기하다가 어느 틈엔가 숫자가 줄어 있었다고.” 장군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자하니 요새와 싸우게 되었다는 정보가 닿기 전에 국경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부대겠지. 그런데 도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자하니 요새와 델피니아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그대로 고립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자하니 요새를 원호하는 것이 아군으로서의 도리겠지만 상대는 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다. 반면에 저 쪽은 그 10분의1에 지나지 않는 인원. 도저히 승산이 없어서 눈치만 보는 사이에 잡병들이 도망쳐버려. 처음보다 수가 더 줄고 말았다는 말이겠지. “전의를 상실했다고는 해도 바로 근처에 있는 적을 내버려둘 수는 없지. 바로 처리해야겠는걸.” 장군은 고민하다가 이 역할을 발로에게 맡겼다. 누가 뭐래도 큰 매의 문장에는 그만큼의 효과가 있었다. 발로 역시 쾌히 웃으며 요청을 받아들였다. “역시 처리해 둬야겠지요. 하지만 제가 나설 것까지도 없을 겁니다. 아스틴에게 병사 천 명을 맡기려고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확실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아스틴은 틸레든 기사단의 반수를 이끌고 서둘러 문제의 요새로 출동했다. 기마병과 보병 반씩으로 구성된 부대이다. 기수가 들고 있는 큰 매의 문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날카로운 창끝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한 눈에 보기에도 용맹하고 정연한 모습이었다. 이 보고를 했던 도라 장군의 첩자가 길 안내를 맡아 정오가 되기 전에 문제의 요새에 도착했다. 요새는 작은 숲 안에 있었다. 버려진 지 상당히 오래된 곳인 듯 이끼가 낀 돌담 여기저기에 담쟁이가 들러붙어 있다. 너무나도 고색창연하고 빛바랜 요새였다. 하지만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낡은 방어벽 위에도 보초가 보이지 않고 , 요새 전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허어?” 아스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적이 이쪽의 위용에 완전히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뭔가 계략이 있어서 숨을 죽이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요새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바로 근처의 숲 속에서 일하고 있던 나뭇꾼에게 물어보자,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탄가 군은 약 두 시간 전에 황급하게 떠낫다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요새의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안에 들어가 조사해보자 분명히 조금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정작 적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달려온 기사단원들은 이 광경에 맥이 빠져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말도 안되는군.” “여기까지 헛걸음을 한 건가.” “겁쟁이들. 그 정도의 근성도 없으면 애초에 농성 따위 하지를 말 것이지.” 아스틴도 그 의견에 동감이었지만, 그의 임무는 이 요새에 틀어박혀 있는 적을 물리치는 일이었다. 싸우지 않고 임무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운은 없다. “좋아. 일단 여기서 휴식은 취하지. 식사를 한 뒤 물러난다.” 아스틴은 오랫동안 발로의 오른팔로서 기사단의 부관 직을 수행해왔다. 적이 다시 돌아올 경우를 염두에 두고 경비 이외의 척후병까지 내보낸 뒤, 요새 밖에서 부대 전체가 휴식을 취했다. 적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군대를 운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이다. 사람도 말도 물을 마시지 못하면 죽어버리게 되므로. 이번에는 요새 주위의 숲 속에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므로 그 물을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요새 안의 우물 쪽이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때에도 아스틴은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먼저 짐을 끄는 말에게 물을 먹여보고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군마와 병사들이 식수로 썼다. 숲은 신록으로 반짝이고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로 근처에서 격렬한 전투가 오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방어벽 위에 서 있는 경비병이나 주위에 파견한 척후병 어느 쪽에서도 특별한 이상이 있다는 보고는 없다. 양 쪽 모두 먼저 식사를 마친 병사들과 교대해 식사를 들게 했다. 상황을 확인한 뒤 아스틴은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평소 같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대열을 이뤘겠지만, 한판 전투를 벌일 각오로 왔다가 맥이 풀려버린 탓인지 잘 훈련된 틸레든 기사단원 조차도 반응이 둔해져 있었다. 단장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불벼락이 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던 아스틴은 말에 오르려고 했다.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평소처럼 지면을 박차고 단숨에 안장 위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스틴의 몸은 여전히 지면에 있었다. “응...?” 놀라움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풍경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하늘이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정면에 있던 큰 나무가 진흙을 이겨놓은 것처럼 일그러지고, 잎사귀가 우거진 나뭇가지가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린다. 믿을 수 없었다. 숲 속에 있는데도 마치 폭풍을 만난 배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면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 잡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흔들리고 있는 것은 대지가 아니라 아스틴 본인이었다. 아스틴만이 아니다. 천명의 틸레든 기사단원은 차례로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서 있는 것은 밀 뿐이었다. 하지만 말들 역시 한 번 싸움이 붙는다면 평소처럼 달려 다닐 수 없는 상태였다. 기사단원 전원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뒤, 숲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 두 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ks 사람은 곧바로 북족을 향해 달려갔다. 일부러 물러간 탄가군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한 명은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기사단원들 사이로 걸어가 쓰러진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무장한 기사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종자나 하인들의 얼굴을 잡아든다.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반쯤 뒤지고 돌아다니다 기사단 전원에게 약을 먹인 장본인은 목적하던 인물을 찾아내어 끌어냈다. 본진에 남아있던 왕비 앞으로 아스틴이 보낸 원호 요청이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적은 한 번 치면 날아갈 만큼 적은 인원이지만 투지가 대단해서 자하니에서 원군이 올 거라고 믿고 끝까지 나울 태세다. 이대로 정면으로 충돌하면 틀림없이 이쪽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렇다면 황공스럽지만 비전하께서 이족에 와주셔서 요새를 넘기도록 적을 설득해 주실 수는 없겠는가. 이 요새의 인간들도 비장군의 이름에 공포를 품고 있을 것이 틀림없으니 직접 비전하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 포기하고 항복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가장 피해 없이 적을 항복시키는 방법일 거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틀림없는 아스틴의 필적이었다. 왕비는 이 요청에 납득했다. “한심하게 우는 소리를 하다니.” 아스틴의 상사인 발로 역시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결사의 각오로 요새에 틀어박힌 병사들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는 만치 왕비가 가서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방법은 엇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당신한테 부탁했다는 게 제인 마음에 안 들지만, 부탁해도 되겠소?” “단장이 갔다간 쓸데없이 피만 더 흐를 것 아냐. 뭐, 어떻게든 해봐야지.” 왕비는 그 말과 함께 서쪽으로 떠나갔다. 말이라면 아주 잠시 동안 달려가는 걸로 충분한 거리이다. 편지를 가지고 온 종자가 길을 안내했고, 왕비는 하인 한 명만 대동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왕비는 본진에 돌아오지 않았다. 4장 코랄에 돌아온 국왕은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신하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중요 사안들을 해결하고, 얼마 전의 해전으로 피해를 입은 해군을 보강하도록 지시를 내리며 그 비용을 준비하도록 타우에 의뢰했다. 타우 사람들은 지독할 정도로 완고하게, 국왕의 지시가 아니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편지일 경우에도 국왕의 서명이 있으면 얼마든지 금은을 보내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재무장관의 요청이든 뭐든 간에 들은 척도 않는 것이다. 또한 비르그나를 공략 중인 핸드릭 백작이 보낸 보고도 도착해 있었다. 파라스트 군이 테바 강 건너편에 나타나 잔을 쳤다고 한다. 숫자는 약 3,500 정도. 당장 쳐들어올 기색은 없어 보이며 현재 그 쪽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산세베리아가 잘 움직여주고 있나보군.” 월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론이 이 상황에서 단숨에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등 뒤에 걱정거리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전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온 힘을 다해 돌격하는 도중에 등을 찔리면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경계만 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로써 핸드릭 백작도 섣불리 우직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비르그나를 공격하면 강 건너 편의 적이 덤비고, 강 건너 편을 공격하려고 하면 비르그나에서 덤벼 온다. 현재는 무의미하게 서로를 노려만 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백작은 편지 속에서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이대로 놔 둘 수는 없다. 뭔가 손을 쓸 필요가 있엇다. 솔직히 국왕 자신이 출진해서 단숨에 승부를 지어버리고 싶지만, 등 뒤를 신경써야하는 것은 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더 약한 나라였다면 병력을 나눠서 제각각 싸워볼 수도 있겠지만 탄가도 파라스트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민한 끝에 비르그나 주변의 영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려 백작을 원호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비르그나를 빼앗긴 세리에 경이나 한때 큰 잘못을 저질렀던 그라함 경에게는 선봉에 서서 간 건너편의 적을 물리치도록 명했다.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는 한편 핸드릭 백작에게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다시금 명령해 두었다. 아누아 후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왕은 사람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두 사람 노두 크게 기뻐하며 다른 이의 몇 배는 활약하겠지. 그런 두 사람이 원한에 불탄 나머지 폭주해버린다 하더라도 뒤쪽의 본진에 핸드릭 백작이 버티고 있는 한 큰 일은 나지 않을 터였다. 사안들이 대략 해결되었을 무렵, 브룩스가 찾아왔다. 왠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폐하 바쁘신 중에 실례합니다.” “으.” “북쪽 탑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만. 조금 신경이 쓰이는 기묘한 죄수를 수감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묘하다니?”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브룩스의 지시를 받은 시종이 앞으로 나와 국왕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단검 한 자루와 끈에 꿰인 은반지 하나였다. 국왕은 그 물건을 보다가 다시 브룩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브룩스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이 검은 뺄 수 없습니다. 저도 시험 해 봤습니다만, 무슨 짓을 해도 검 집에서 빠져나오지 않더군요.” “뭣?” “반지 쪽이 더 기묘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끈에 걸려 있습니다만 손가락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국왕뿐 아니라 아누아 후작까지 기가 막혀 버렸다. “말도 안돼!” “시험해 보십시오.” 아누아 후작은 국왕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쟁반위에 놓여 있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 가볍게 묶여있는 끈의 매듭을 풀고 반지를 손바닥에서 굴려 보았다. 눈높이로 들어올려 찬찬히 살핀다. 상당히 정교하게 조각이 새겨져 있는 납작하고 폭이 넓은 반지. 우락부락한 후작의 손위에 놓이자 더욱 가녀린 인상을 주는 귀여운 물건이었다. “제 손이면 새끼손가락이나 간신히 들어가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왼 손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려던 후작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 딱딱한 감촉이 손끝을 막고 있다. 놀라서 다시 살펴보았다. 손가락이 통과할 자리에 얇은 유리라도 끼워져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다. 그렇다면 끈이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국왕도 반지를 받아들고 손가락에 끼려 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면 손끝이 아파 온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 했다.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는 국왕에게서 다시 반지를 받아든 브룩스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들었다. 새의 깃털로 장식된 우아한 필기구이다. 그 펜촉을 반지에 건다. 반지는 자연스럽게 펜촉을 통과헤 미끄러지다가 손잡이 끝에서 펼쳐지는 깃털 부분에 걸려 멈췄다. “이렇게 펜이나 가는 나뭇가지 같은 물건은 쉽게 통과 합니다 .만. 사람의 손가락만은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간수의 보고에 따르자면 소유주인 죄수의 손가락만은 받아들인다더군요. 이 단검도....” 브룩스의 어조는 거의 탄식에 가까웠다. “본인만 뺄 수 있다고 합니다. 단, 빼는 것과 동시에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워져서 다른 사람은 들어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더군요. 주인인 죄수의 손에 들어가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국왕은 이마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그 사람이 북쪽 탑에 들어와 있는 거지?” “처음에는 통행증 없이 곽문으로 들어오려고 하기에 구속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간수를 폭행, 거기에 요술을 사용한다는 혐의까지 더해져서 북쪽 탑으로 이감했다더군요.” “요술?” “예.” 북쪽 탑으로 옮긴 뒤에도 이 죄수를 둘러싼 소란은 끊이질 않았다. 이미 간수 세 명이 사고를 일으켰다. 세 명 전원이 본래 동성애 쪽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고, 삼곽의 간수와 마찬가지로 절대 그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죄수가 요술로 자신을 조종한 거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북쪽 탑에서도 난감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비전하의 지인일지도 모르니 섣불리 처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대로 놔둬서는 탑의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거라고 책임자가 한탄하더군요.” 국왕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자신을 데리러 사람이 온다. 그럼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왕비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 했다. 그 때가 온 것일까. 브룩스는 조용히 서서 국왕의 판단을 기다렸다. 아누아 후작도 걱정스럽게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 죄수가 스스로 왕비의 지인이라고 하던가?” “아닙니다. 그것이.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서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더군요.” “알았다. 내가 확인하지. 데리고 오게.” “예” “혹시라도 포박 따위는 하지 마. 혹시 정말로 왕비의 지인이라면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국왕은 알현실 중 하나에서 그 죄수와 만나기로 했고, 브룩스와 아누아 공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국왕 앞으로 끌려와서도 죄수의 태도는 전혀 변함없이, 여전히 초연할 뿐이었다. 국왕이 직접죄인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죄수를 데려온 측근들이 죄인의 어깨에 막대기를 대며 무릎을 꿇으라고 재촉했지만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일어선 채로 국왕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우와, 진짜 잘생겼네.” 뒤 쪽에 있던 종자와 시종들이 말을 잃고 핼쑥하게 질리는 가운데, 국왕은 옥좌에 앉은 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거, 고맙군.” 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 지 죄수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이, 이,...!” 측근 중 한 명이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죄수를 향해 막대기를 내리치려고 했다. “그만!” 국왕은 날카롭게 외치고, 떨어져 있으라고 손짓으로 지시했다. 강한 제지를 받은 측근은 막대기를 거뒀지만 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경죄에 해당되는데다 죄수인 주제에 구속도 당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특별 취급을 하는 건지, 대체 이 죄수의 정체가 뭔지 무언 중에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정을 듣지 못했으니 무리도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쪽에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그 전에 확인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렇게 가는 몸으로 건장한 남자들을 손쉽게 쓰러뜨렸다는 사실부터가 믿기 어려웠지만, 왕비의 전례도 있고 하니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직무에 충실해야 할 관리가 몇 명이나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기에 국왕도 일단은 경계하고 있었지만 ,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국왕도 미인이라면 상당히 면역이 되어 있는 편이다. 이를테면 정장 차림을 한 왕비는 주위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박력있는 미인이고, 보는 이 마다 저도 모르게 숨쉬는 것 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 시녀는 또 다른 분위기로 , 탄식이 나올 정도로 가련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피부색 자체는 놀랄 정도로 하얗다. 그와 대조적으로 새까맣고 풍성한 머릿결이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자연스럽게 서 있는 모습도 남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강렬하게 끌어들이는 종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점점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눈을 깜박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쪽을 바라본다. 살짝 몸을 움직이며 자세를 바꾼다. 그렇게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뭔가 향기로운 기운이 풍겨나며 이 남자의 전신을 감싼다. 달콤한 향기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아마 깨닫지 못한다면 별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척을 깨닫고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점점 나타나는 표정의 변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억지로 조종하는 위험한 종류는 아니었다. 적어도 남자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관능적인 육체로는 보이지 않는다. 국왕은 고향의 숲을 떠올렸다. 한 겨울에만 접할 수 있는 차갑고 맑은 공기와 푸르게 빛나는 은세계를 떠올렸다. 트레니아의 푸르른 파도와 하늘의 색을, 그 사이로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을 떠올렸다. 남쪽에서 수입된 형형색색의 유리, 첫눈에 가려 살짝 보이던 붉은 나무열매, 온갖 아름다운 것들에서 느꼈던 빛을 이 죄수에게서 보고싶었다. “난 월 그리크 로우 델핀. 이름을 듣고 싶군. 이국의 손님.” 국왕이 묻자 죄수는 큭큭 웃었다. “이상한 나라네. 여긴. 범죄자를 상대로 임금님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해?” “그 점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기 바라네. 곽문을 통과하려면 미리 약속을 하거나 통행증이 있어야 해. 규정을 어기면 법에 저촉되니, 문지기가 경을 체포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조치였네. 하지만 그 뒤의 사건에 대해서는 내게도 책임이 있어. 여자 죄수도 수감할 경우가 있으니 죄수의 관리나 대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네만 아무래도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야.” 국왕이 죄수를 상대로 ‘경’이라는 존칭을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례 중의 이례였다. 흑발의 젊은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신경 안 써. 언제나 있는 일이니까.” “실례지만 경은 그런 장사를 하는 건가?” “그럼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간수한테 돈을 받았겠지.” 국왕은 손을 탁 쳤다. 실로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 “과연 , 맞는 말이야.” 죄수는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고 웃으면서 왕비의 입버릇이기도한 그 말을 꺼냈다. “굉장히 특이한 임금님인걸.” “자주 듣는 말이야. 하지만 경도 특이한 죄수인 걸. 듣자하니 맨 손으로 간수를 쓰러뜨리고 감옥 문이 훤히 열렸는데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더군. 왜지?” “필요 없으니까.” 너무나 자연스럽고 경쾌한 어조였다. “난 루, 이름은 루커스 라비. 사람을 찾고 있지요. 여기에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임금님한테 부탁하고 싶은데, 한동안 감옥에 넣어주시지 않겠어요?” 느긋하게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북쪽 탑은 여관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좀....” 귀엽게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죄수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다. 고약한 농담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 듯 하다. 국왕도 기가 막힌 듯 했다. “왜 그렇게 까지 감옥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지?” “이 성 안에 만 있을 수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 없습니다. 우연히 끌려온 곳이 감옥이니까 기왕이면 좀더 있을 수 없을까 해서.” 역시 여관으로 여기고 있다.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힌 데다 간수들 까지 그런 짓을 하는 상황인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경에게 무례한 짓을 한 자들은 요술에 현혹된 거라고 입을 모아 주장하고 있더군. 정말인가?” 안했다니까요. 그런 짓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 감옥에 남아 있고 싶은데요. 간수를 유혹해서 탈옥할 거라면 또 모르지만.“ 논점이 완벽하게 어긋나 있다. 그럼에도 묘하게 대화는 성립되었다. 국왕은 그 이상 탐색을 포기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던데. 그 사람의 이름은?” “모릅니다.” “응? 찾는 사람의 이름을 모르다니?” “물론 알고는 있지만 , 으음.... 그러니까 지금은 어떤 이름을 쓰고 있는지 몰라서, 그게 곤란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생긋 웃는다. 전혀 곤란해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러니 정체가 파악이 될 리 없지. 국왕은 문제의 검과 반지를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 대, 상당히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있더군. 반지는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고, 검은 빠지질 않아. 본인만 쓸 수 있는 물건이라고?” “그게 요술을 쓴다는 증거라도 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냐. 그저, 세상에 이런 검이 두 자루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죄수는 눈을 크게 떴다. 놀라울 정도로 깊고 한없이 맑고 푸른 눈동자였다. “그럼 임금님, 다른 한 자루를 아는 거야?” “잘 알고 있지.” 자신의 힘으로는 검집에서 뺄 수 없는 단검을 쓰다듬으면서 국왕은 말했다. “왕비가 이것과 똑같은 검을 가지고 있어.” 흑발의 청년이 움찔 몸을 굳혔다.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이해가 안되는 듯 했다. “왕비?“ “그래.” “그러니까, 임금님의 부인?” “그렇지.” “본인 밖에는 뽑을 수 없는 검을 가지고 있고?” “그것만이 아니야. 실로 재주가 많은 검이라 말이지. 단검이 되엇다가 장검이 되었다가 자유자재로 변해. 검집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러고 보니 본체도 날았던 적이 있군 이 반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칠 수도 있어.” 아름다운 죄수는 가만히 굳어 있었다. 그 때까지의 느긋한 태도는 온데 간데 없고,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다. 마침내 고개를 들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 나라에서는 남자들 끼리도 결혼 할 수 있다든가?” “물론 못하지.” 국왕은 진지하기 짝이없는 얼굴로 딱 잘라 대답했다. 죄수도 조금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사람이 달라. 내가 찾고 있는 건 누구 부인이 될만한 애가 아니니까.” “왕비의 이름은 그린디에타 라덴이라고 하네.” 이번에는 죄수의 얼굴 전체에 경악이 퍼져갔다. 국왕은 거기에 다시 확인 사살을 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일까?” 루는 한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 이름과 현재의 지위가 어지간히 의외였던 듯 말도 안나오는 눈치였다. 다시 긴 침묵이 흐른 뒤 주저하며 묻는다. “그 왕비님.... 혹시 눈부실 정도로 밝은 금발에 , 엄청나게 선명한 녹색 눈에 , 입만 다물고 있어주면 엄청 귀여운데 입만 열면 튀어나오는 소리가 엄청 험하고, 화가 나면 맹수보다 상대하기 힘들어지는 사람?” “정답이야.” 국왕도 가슴을 딱 펴며 잘라 말했다. “완벽하게 왕비의 특징이다. 거기다 덧붙이자면 왕비는 자유의 침해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민감해. 따라서 경을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이 왕비에게 알려지면 광장ㅎ 곤란해지지. 아니, 곤란하다 정도가 아니야. 이런 부탁을 할 자격은 없지만 , 사람하나 살려주는 셈 치고 말을 맞춰 주기 바라네.” 적어도 그런 문제를 두고 역설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하물며 국왕이 입에 담아도 좋을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러나 본인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그 한탄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루는 아직도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럼 그 애..., 지금은 여자애인 거야?” “적어도 외모만은 완벽한 여자야. 아무리 나라도 남자를 왕비로 삼는 취미는 없으니까.” 멍하니 서 있던 죄수는 마침내 쿡쿡 웃기 시작했다. 한 번 웃음이 터지자 멈추질 않는 듯 했다. “헤에, 그렇게 된 거야? 여자애로....” 어깨를 부둘부들 떨면서 계속해서 웃었다. 긴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것을, 국왕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왕비 자신도 몇 번이고 했던 말이지만, 이 죄수에게 있어서 리는 소년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은 이 죄수에게 잇어서 의외의 사태이기는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듯 했다. 그런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이 죄수도 그리고 왕비도. 루는 한참 뒤에 간신히 웃음을 멈췄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맨 발로 옥좌에 앉아 있는 국왕 곁으로 걸어갔다. 종자들이 움찔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국왕은 몸짓으로 그들을 제지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수는 아무 주저 없이 국왕 앞까지 걸어왔다. 왕비보다는 키가 크다. 남자로서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키도 아니었다. “그럼 다시 자기 소개를 해야지. 종족을 나타내는 내 이름은 루퍼세르미 라덴.” “라덴?” “응, 라의 일족이라는 뜻. 루퍼세르미는 빛과 어둠. 그리고 그린디에타는 하얀 태양. 설마 그 애 남편하고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맑고 커다란 눈이 국왕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결혼식, 했어?” “음.” “그 애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음, 한바탕 난리가 난 뒤에.” “나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명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 세상에서 제일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신부엿겠죠?” “정확해.” “하지만 임금님, 그래도 괜찮아요?” “무슨 뜻인지?” 작은 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같은 동작으로 국왕을 올려다보면서 루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왕비님은 절대로 왕자를 낳아주지 않을 텐데. 그래도 좋아요?” 국왕도 미소를 지었다. “잘 알고 있군.‘ “그야 당연하죠. 몸이 여자가 됐다고 알맹이까지 바뀔 리가 없는데. 손가락 하나도 못 대게 할 걸 뻔히 알면서 결혼했어요? 아니면 결혼만 해버리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든가?” 국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내가 아니야. 주위 사람들 쪽이지. 기대해봤자 소용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포기를 못하더군.” “그야 포기할 수가 없겟죠. 보통 왕비님이라는 건 왕자를 낳기 위해 있는 거니까.” “음, 우리나라 이외의 왕비들은 전원 그 사명을 지고 잇지. 하지만 나한테는 따로 부인이 있으니까.” 루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리고서 또다시 한참 동안 쿡쿡 웃었다. 부드럽게 울리는, 경쾌한 목소리엿다. “그 애, 정말 운이 좋았네.. 전혀 모르는 세계에 혼자 떨어져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나 같은...?” “그 애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요.” “설마 , 왕비의 아버지라면 닮고 싶어도 닮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에 퍼진 것은 의외의 눈빛, 납득 그리고 눈앞의 국왕을 다시 보게 된 시선이었다. “그 애,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임금님한테 애기했나요?” “음, 조금은.” 실은 모습도 봤지만 , 여기서 그런 얘기까지는 할 수가 없다. 루가 국왕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뭔가 그리운 이를 보는 듯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역시 닮았어. 겉모습이 아니라 성격이 똑같은 걸요.” 국왕 역시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감상하고 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푸른 색인가. 이 남자의 모습과 마찬 가지로 아무리 쳐다보고 았어도 질리지 않는다. 생명을 지닌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였다. “라비 경이야말로 왕비와 굉장히 닮았는걸. ” 국왕의 말에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서가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어떤 점이?” “일단 난 동성애 취미가 없지만....” 국왕의 갑작스러운 말에 시종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니 경에게 무례한 짓을 한 간수들의 심라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경이 굉장히 아름다운 것만은 사실이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꽃이 만발한 것처럼 화사해. 왕비도 그렇지. 게다가 왕비는 일단 여자이고, 누가 봐도 절세의 미녀라 할 만큼 아름다워. 하지만 도저히 쓰러뜨려서 올라탈 생각이 안 드는 거야. 그런 짓 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거라는 문제도 있지만, 내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그 녀석을 여자라고 여길 수가 없어.” “정확해요,” 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감탄하는 듯한 말투였다. “인간 중에서 때때로 임금님처럼 감이 좋은 사람이 있어. 겉보기에는 여자애라도 알맹이가 전혀 다르다는 걸 임금님은 느낄 수 있다는 거지.” “그럴지도 몰라.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한 마리의 금빛 야수로 보여. 씩씩하고 긍지 높은, 마음을 빼앗겨 버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나하고는 다른 생물이니까.” 신비로운 분위기의 죄수는 다시금 활짝 웃었다. 무심결에 숨을 들이키게 될 정도로 눈을 뗄 수 없는 미소였다. “그 애 정말 운이 좋았구나.” 다시 한번 말한다. 국왕은 한때 왕비의 기억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인물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어린 시절의 왕비가 그 사람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사람과 기억 속의 인물을 비교해보려 했지만, 그 때 보였던 것은 인상적인 흑발과 미소 짓고 있는 입가뿐이었다. 딱 잘라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왕 역시 이 청년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자체가, 주고 받는 대화가 즐거웠다. 부드럽고 평온한 분위기에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신기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요술의 일종일지 모르지만 , 이런 요술이라면 대환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국왕과 죄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어디, 우선 방을 준비해야겠군. 왕비의 지인을 감옥에 넣어둘 수는 없으니, 갈아입을 옷도 좀 더 괜찮은 물건으로 가져오게 하지.‘ “이거라도 별 상관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루는 투박한 죄수복을 펼쳐 보았다. “아니, 그렇게나 잘생긴 얼굴인데 허접한 옷을 걸치게 놔두기는 아까워. 여자 옷이라도 입혀보고 싶을 정도라고.” 또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차마 그렇게까지는 웃을 수 없었는지, 대담한 죄수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거의 계속해서 웃고만 있던 것이다. 열심히 웃음을 억누르면서 장난스럽게 국왕을 바라보며 묻는다. “임금님, 정말 남자는 취미 없어요?” “없어. 아, 그렇지. 곧바로 들어오라고 왕비에게 편지를 보내야겠군.” “편지?” 루가 반문했다. 의아한 듯한 표정이었다. “음, 왕비는 지금 캄센에 있어. 아무리 빠른 말을 타도 사흘은 걸리는 곳이니까, 한동안 기다려주기 바라네.” 처음으로 루의 분위기가 변했다. 국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진지하게 놀라고 있었다. “빠른 말로 사흘?” “음, 진군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더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먼 곳에 있나요?” “그렇지. 뭐 잘못됐나...?" 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하기 힘든 곤혹감에 바닷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서 말로 사흘이라면 상당한 거리일 텐데, 막대기는 몇 번을 시험해 봐도 이 성을 가리켰다. 이 성이 그 아이가 돌아올 장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일까.... 가슴이 뛰었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5장 앞장서던 틸레든 기사단의 종자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 뒤를 따라서 달리던 왕비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삐를 당겨 말을 새웠다. “왜 그래? 요새는 아직 멀었을 텐데.” “그것이....” 종자는 묘하게 말을 우물거렸다. 아직 숲 속, 길다운 길도 없다. 안내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방향 감각이 예민한 왕비라고 해도 요새까지 찾아갈 수 없다. 왕비를 따라왔던 하인도 수상하게 생각하며 뭔가 말하려고 하던 그 순간. “위험해!” 왕비가 외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숲 속에서 날아온 화살 두 대가 하인의 가슴에 꽂혔다. 하인의 몸은 곧바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장에서 떨어졌다. 즉사였다. 숲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두 명이 아니다. 얼핏 세어 봐도 스무 명은 넘는 탄가군 병사였다. 틸레든 기사단의 종자로 변장했던 탄가병이 말을 돌려 왕비의 앞을 가로 막았다. “무기를 버려주실까?” “시키는 대로 얌전히 버릴 거라고 생각해?” 차갑게 내뱉기는 했지만 왕비도 당장 검을 빼 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안내해온 가짜 종자는 틀림없이 틸레든 기사단의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우연히 한 사람이 습격을 당해서 옷을 빼앗긴 건지, 아니면 아스틴 일행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굳이 확인할 것까지도 없었다. 탄가병들이 숲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낸다. 뒤쪽으로 결박을 당하고 입에 재갈이 물린 남자 두 명이었다. 왕비의 눈이 스윽 가늘어졌다. 틸레든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스틴 웰러 그리고 견습 기사인 캐리건 달시니였다. 양쪽 모두 재갈 때문에 왕비를 앞에 두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미칠 듯이 눈을 피했다. 캐리건은 거의 울다시피 하고 있었다. 종자로 변장했던 탄가병이 지휘자인 듯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른 기사단원 역시 이런 상태로 한 곳에 모아두었습니다. 주위에 기름을 잔뜩 뿌려두었으니 이 쪽에서 신호만 보내면 천 명의 기사단원들이 그대로 불덩이가 됩니다. 당신이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해도 늦기 전에 그 사람들을 구해낼 수는 없겠지요.” “......” “비장군 , 이건 거래입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전투력을 잃은 기사들의 희생도, 델피니아 인들의 피도 아닙니다. 당신을 가능하면 상처없이 모셔가고 싶을 뿐이지요. 당신이 항복해주신다면 그들의 목숨은 보장합니다.” 왕비는 싸늘하게 반문햇다. “너희들이 정말로 다른 단원들을 붙잡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지?” “이 두 명에게 물어보시면 되겠지요. 바로 조금 전까지 거기에 있었으니까. 병사 중 한 병이 캐리건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팔은 아직 묶인 채이다. 간신히 말은 할 수 있게된 캐리건이 눈물 어린 눈빛으로 명령했다. (거짓말이라고 해!!) 직접 말로 하는 것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전해져오는 명령이었다. 설령 천 명의 동료가 희생되더라도 왕비를 적에게 넘길 수는 없다고 아스틴의 눈이 웅변하고 있었다. “아....”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오열이 새어나와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한심한 꼴이 되어 있는 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낮, 그 낡은 요새를 출발 하려던 순간 갑자기 정체 모를 현기증이 덮쳐온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다. 거기서 의식이 끊겨졌고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둡고 좁은 건물 안에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리고, 숨 막힐 정도로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힘없이 쓰러져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몸이 심하게 무거웠다. 캐리건은 일어나보려 했지만 오른 팔과 왼쪽 다리가 제각각 다른 동료의 손발과 함께 묶여 있어서 도저히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거기다 주위에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참 뒤 모습을 보인 탄가병이 캐리건 한 명을 동료들 사이에서 끌어내 부단장과 함께 여기까지 끌고 왔던 것이다. “비... 비전하....” 캐리건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스틴이라면 태연한 얼굴로 이놈들이 하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붙잡힌 건 우리 둘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겠지만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캐리언에게- 게다가 정식 기사도 아니다.- 그런 연극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피가 스며 나오도록 입술을 악 물면서 갈라지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캐리언이 말했다. “이, 이 녀석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시, 실수를 해서, 부단장까지, 붙잡혀서....” 왕비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교섭을 제의한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포로가 되면 전부 풀어주겠어?” “부단장은 지금 석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기사단원도 구할 수 있겠지요. 단, 이 소년은 조금 더 데리고 있어야겠습니다. 그 밖에도 기사단원들 중에서 열 명 정도를 동행시키겠습니다. 설명할 것도 없겠지만,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보증입니다.” 여유 있게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솔직히 말을 꺼낸 쪽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델피니아의 비장군이 세운, 도저히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공훈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이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탄가병들은 왕비를 난폭하고 사나우며, 승리라는 두 글자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무자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엇다. 그 비정한 전쟁의 여신을, 설마 이 정도 미끼로 함락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희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당신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델피니아를 승리로 이끌어 온 당신만 붙잡을 수 있다면 , 델피니아도 지금까지의 기세는 발휘할 수 없겠지요. 필연적으로 우리나라가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비겁자의 불명예쯤 기꺼이 뒤집어 쓸 수 있습니다.” 왕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과연. 이놈들- 아니, 탄가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델피니아의 국왕인지를 잊고 자신만 없애버리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델피니아의 운명은 그걸로 끝이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다. 바보 같은 얘기였다. 델피니아는 월 그리크의 나라이지, 자신의 나라가 아니다. 자신은 그저 그 남자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엇을 뿐. 처음에는 사로잡힌 아버지를 구하고 싶다는 소원을, 그 다음에는 왕으로서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고 싶다는 소원을. 그러기 위해 싸웠고 결과적으로 몇 번인가 승리한 것뿐이건만 이 녀석들은 그런 사실 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왕비를 인질로 잡았다고 해서 그 남자가 얌전히 적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리 없다. 하물며 이 놈들의 의도대로 당황하거나 겁을 먹고 탄가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득실을 따져봐야겠지. 틸레든 기사단의 약 반 정도가 자신과 교환해서 살아날 수 있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눈 앞에서 캐리건이 죽어버리면 뒷맛이 안 좋다. 왜 하필 이 소년을 미끼로 내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 죽게 내버려둘 수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폴라를 볼 면목이 없어지고 만다. “알았어. 투항하지.” “비전하!!” 캐리건의 비명은 절규에 가까웠다. “안 됩니다. 그런...!!” 죽기는 싫었다.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목숨 대신 왕비를 적의 손에 넘겨주다니 말도 안 된다. “안 돼! 안 된다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입 다물게 해.” 병사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고 캐리건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려TEk. 교섭 대표는 일단 중요한 안건을 해결하고 나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아까보다도 더욱 기낮ㅇ된 얼굴로 말한다. “말에서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허리의 검과 머리장식을 넘겨 주시기 바랍니다.” 왕비는 순순히 말에서 니렸지만, 검은 그렇다 치더라도 머리 장식을 넘기라는 요구에는 머리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어째서?” “정말로 실례입니다만, 이 안에 들어가 계셔야 하겠기에....” 탄가병 두 명이 나와 검은 가죽으로 싸인 통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내가 짐짝이야?” “충돌이 발생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교섭을 맡은 남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적국의 인간이라고 해도 일국의 왕비를 이렇게 대접해도 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작전을 지시한 젊은 군사는 이 조건을 절대로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상대는 왕비인 동시에 우수한 전사입니다. 무장을 해제했다고 안심하고 마차에 태웠다가는 그대로 마차를 탈취해서 도망쳐버릴 게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함정을 쳐서 간신히 붙잡았는데 도망쳐버리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시야를 빼앗고, 자유롭게 몸을 쓸 수 없게 해야 합니다.” 나이는 젊지만 실력만은 확실했다. 청년이 시키는 대로 일부러 요새에서 도망쳤다가 연락을 받고 돌아와보니 틸레든 기사단원들이 무방비 상태로 뻗어 있었다. 이 광경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문은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마비약의 양을 조절해서 우물물에 타두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은 한 명도 남김없이 쓰러져 있고 말도 전부 비틀거리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미묘한 조절이 가능했던 걸까. 그 뒤 몽롱하게 취해 있는 기사단원들을 요새 안으로 옮겨 한 명도 남김없이 손발을 묶은뒤 기름을 뿌렸다. 이 작업을 마치느라 한밤중까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이 일 역시 군사의 주장대로 되었다. “동료들이 정말 통구이가 되어 죽을 거라고 믿게 만들지 못하면 왕비 역시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탄가병은 아스틴의 몸에 새 밧줄을 두르고, 그 끝을 근러의 나무에 묶은 뒤 조금 EJfdjwls 지면에 단검을 꽂았다. 발을 뻗으면 어떻게든 가까이 가져올 수 있다. 탄가병이 이 자리를 떠나면 아스틴도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겠지. 강적인 틸레든 기사단의 부단장을 쉽게 놔주기는 아깝지만 이것 역시 군사의 강경한 지시였다. “한꺼번에 전부 다 손에 넣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실패합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왕비 한 명뿐입니다. “그럼 종자를 놔주고 부단장을 연행하는 건?” “안됩니다. 지휘관을 석방하는 여유를 보이지 않으면 왕비도 이 쪽을 신용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얌전히 포로가 되어주지도 않겠지요, 아시겠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왕비를 포기하고 천 명의 기사를 태워 죽일지- 단, 그 경우 왕비와 국왕과 기사단장의 복수가 누구를 향해 떨어질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아니면 천 명의 기사를 놔주고 왕비를 상처없이 손에 넣을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아, 알았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 왕비라면 평범한 기사 5천 명분의 가치가 있지요. 쓸데없는 미련은 버리십시오.” 그런 이유로 교섭을 맡은 남자는 왕비만 포로가 되어준다면 충분하다고, 설마 모종의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도 산 사람을- 그것도 천 명이나- 태워 죽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원하고 잇었다. 왕비는 의외일 정도로 순순히 허리의 검과 머리 장식을 탄가병에게 내밀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왕비를 둘러싸고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뒤쪽으로 결박을 당한 왕비는 가죽 통 안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묶여있는 캐리건과 아스틴에게 다가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사람 모두 재갈이 물려있다. 아무 말도 못한 채 필사적인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미안함과 괴로움에 미칠 듯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죽지 마. 둘 다.”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지면에 억지로 무릎을 꿇은 자세로 탄가병이 어깨를 누르고 있어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엇다. 결박당한 왕비는 그들의 눈 앞에서 자기 발로 가죽 통 안으로 걸어 들어가 주저 앉았다. 뚜껑이 닫혔다. 탄가병은 다시 그 위에 몇 겹이고 꼼꼼하게 사슬을 묶었고 , 사슬을 막대기에 끼워 두사람이 가죽통을 들어 올렸다. 교섭을 맡은 남자는 몸이 떨려 오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엇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비장군이 지금 자신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왕비를 목적지까지 보내야 한다. 그에 관해서도 군사는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모처럼 붙잡았어도 전선에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도망칠 우려가 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찾으러 오라고 델피니아 군을 부르는 거나 다름없지요. 적절한 장소로 옮겨야 합니다.” “맞는 말이야. 당장 케이파드로 보내지.”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의 성까지 나르려면 산길을 아무리 서둘러 가도 최소한 나흘은 걸릴 겁니다. 하지만 나흘 내내 통 안에 넣어둔 채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안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그렇다고 도중에 통 밖에서 휴식하게 하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설마 , 아무리 비장군이라고 해도 무기를 뺏기고 결박까지 당한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나?” “상대를 인간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합니다. 상대는 전쟁의 여신이지요. 지금까지 어떤 기적을 일으켜왔는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 “묶어뒀다고 안심하고 뚜껑을 열었다간 그대로 끝입니다. 호랑이를 산에 풀어놓는 셈이지요. 그 자리에서 호송대가 전원 살해당한다 해도 전 전혀 놀라지 않을 겁니다.” “그,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는....” “전선에서 떨어진, 견고한 방어 시설을 갖춘 성채.... 그렇군요. 보나리스 정도로 보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과연.” 보나리스는 지하니에서 72카티브 떨어진, 탄가 남부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영주는 따로 없고, 나라에서 보낸 관리가 운영을 맡고 있다. “특정 영주의 소유지로는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묘한 생각을 품는 인간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었으니까요. 저희들의 고생도 무시하고 자기가 사로잡은 양 으쓱대면서 폐하께 보고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보나리스로 보내서, 당신이 직접 그곳 담당자에게 얘기하면 공적은 당신 한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래, 과연 맞는 말이야.” 교섭 역을 맡았던 남자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병 차림을 하고는 있지만, 이 남자도 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 낡은 요새에 부임한 장교였다.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면 단숨에 보나리스까지 달려가십시오. 몇 번이고 똑같은 부탁을 드리게 됩니다만, 절대로 도중에 쉬거나 하면 안 됩니다.” “그, 그건 무리야! 말이 못 버티잖아?!” “그러니 미리 말을 준비시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말의 발이 느려지면 바로 새 말로 갈아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말하는 거지만 보나리스에 도착하기 전에 통의 뚜껑을 열었다가는 다 끝입니다.” “하지만....” “그리고 보나리스 성에도 미리 사자를 보내서 만전의 태세를 갖추도록 전해주십시오. 평범한 포로들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저 왕비를 안전하게 붙잡아둘 수 없습니다. 호송을 마치자마자 도망쳐버렸다간 웃음거리도 안 됩니다.” “음, 그러고 보니....” “포로 쪽은 다소 늦어도 상관없지만, 이쪽은 가능한 한 빨리 보나리스로 보내주십시오. 특히 저 금발 꼬마 쪽은 반드시.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어떤 부대가 파견될 지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만, 설마 틸레든 기사단이 와줄 거라고는....” “그런데 그 자는 어떤 인물이지? 왕비 앞에 끌어내는 거라면 아무라도 상관없었을 텐데.” 이 군사는 기사 단원 중에서 굳이 그 소년을 골라내어 부단장과 함께 왕비 앞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그 자는 델피니아 국왕의 애첩의 남동생입니다.” “호오? 그거 처음 듣는걸. 하지만 그렇다면 왕비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존재가 아닐텐데.” 남편이 총애하는 여자의 남동생이다. 장교는 다른 나라에서라면 당연하게 통용될 상식대로 물엇다. 군사는 왠지 웃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월 왕에 대해서는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애첩에게 있어서는 귀여운 남동생이니까요. 어떻게든 구해달라고 국왕에게 매달릴겁니다. 왕비와 함께 잡아 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음, 과연 그렇군....” 군사의 지혜 앞에서는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군사가 말한 계획 그대로 진행되었다. 장교도, 가죽 통을 짊어진 병사들도 땀투성이가 되어 미리 약속한 장소로 열심히 이동했다. 그 곳에는 미리 준비한 말과 잠차가 대기하고 있다. 가죽 통을 화물차에 조심스럽게 잡아맨 뒤 장교는 말에 올라탓다. 갈아탈 말은 도중에 몇 마리고 준비해두었다. 저녁 무렵에는 보나리스에 도착할 수 있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적에 가슴을 부풀리며, 장교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스틴이 자유를 되찾은 것은 탄가병들이 사라진 뒤 약 15분 정도가 경과한 시점이었다. 밧줄로 묶인 몸을 힘껏 뻗어서 지면에 꽂힌 단검을 신발 끝으로 끌어당기고, 간신히 뒤로 묶인 손에 쥔 후 밧줄을 잘랐다. 너무 서두르다가 손까지 조금 베였지만 그런 것을 상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쪽으로 가면 부하들이 붙잡혀 있는 요새, 동쪽으로 가면 도라 장군이 있는 본진이다. 아스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동쪽으로 달려갔다. 탄가병도 말을 두고 갈 정도로 친절하지 는 않았기에, 자신의 발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달리고 또 달려 본진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보고했다. “뭤?!” 발로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지만, 그 뒷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총대장인 도라장군도 경직 상태. 나시아스는 완전히 창백해지고 말았다. 아스틴은 침착하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지만, 말 사이사이로 어깨가 가쁘게 들썩이고 전신에서 강렬하게 땀냄새가 났다. 고개를 움츠린 채 단 한 번도 단장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렇게 보고를 마쳤다. “비전하께서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부하들은 아직 구속당한 채 요새에 남아있습니다. 전부 제 책임입니다. 죽으라 명하시면 기꺼이 그에 따르겠습니다.” “이 멍청아!” 발로가 일갈했다. “네놈을 죽인다고 왕비가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으면 진작 내 손으로 네 목을 땄을 거다! 그런 잠꼬대나 지껄일 틈이 있으면 썩 그 못난 부하들이나 데리러가!!” 아스틴은 잠시 굳어 있다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둘러 백명 정도를 이끌고 다른 부하들이 갇혀있는 요새로 달려 간다. 도라 장군은 서둘러 편지를 썼다. 가능한 한 전속력으로 코랄에 전하라고 엄명한 뒤 , 바로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발로, 나시아스, 세 명의 북부 영주들을 앞에 두고 장군은 이를 갈며 말을 시작했다. “놈들이 비전하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 알 수 없는 이상, 한스럽지만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소.” 전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많은 수가 있었으면서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다고 변하는 건 KAN 것도 없어.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자, 자하니를 함락시키는 것이다.” “아, 아니, 장군.” 북부 영주 중 한 명인 츠이타의 프라이슬리 경이 창백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비전하가 적의 수중에 있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여쭤보겠네만, 프라이슬리 경은 놈들이 비전하를 자하니로 끌고 갔다고 생각하시나?” 가죽 통 하나 쯤 등에 지고 숨어드는 건 손쉬운 일이겠지만 ,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요.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그 비전하를 저희들 눈 앞에 놔두는 건 도망쳐 달라고 부탁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고 말고. 어디로 끌고 갔던 간에 자하니 만은 아닐 게요. 하지만 탄가 어디엔가 있는 것 만은 확실 하지요. 그렇다면 조만간 비전하를 되찾을 거점으로 라도 자하니는 반드시 손에 넣어 두어야 합니다.” 국왕의 지시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코랄에서 대답이 돌아오는 것은 엿새 뒤. 그 때 자하니를 함락시키라는 지시가 나오면 엿새라는 시간을 헛되이 써버리는 셈이 된다.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가 나온다면 그 ‘현재 위치’를 조금이라도 케이파드에 가까운 곳으로 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명령이 있을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만은 확실하네. 폐하는 절대로 자하니를 공격하지 말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아. 비전하가 적의 손에 붙잡혔다고 해서 몸을 사릴 분이 아니시니까.” 발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손을 써둔다면 지금입니다. 자하니 놈들은 아직 왕비가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테니까요.” “음, 알았으면 이미 한참 전에 신나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겠지. 눈치를 채고 사기가 오르기 전에 쳐부수는 편이 나아.” 도라 장군의 의견에 결국 모두가 납득했다. 전략상 유리한 점도 물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만히 버티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무인으로서의 고집이, 왕비를 빼앗긴 충격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델피니아의 공격은 처절할 정도로 과격해졌다. 특히 엄청났던 것은 멍청하게 함정에 걸려들어 한심하게 뒹굴고 있던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왕비가 스스로 적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텔레든 기사단원들이었다. 전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를 했고 덕분에 발로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굳이 후진에 서라는 명령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그런 한편 점호를 통해 빠진 사람의 명부를 만들었다. 캐리건을 포함해 젊은 종자와 신입 기자들만 열 명 정도 사라져 있었다. “신경 쓰이는데.” “예....?” 단장의 속삭임을 들은 아스틴이 반문했다. 그는 아직도 상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째서 캐리건이었을까? 너라면 알겠어. 내 부관이니 분명히 효과가 있겠지. 하지만 네가 왕비에게 살려달라고 구걸할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누군가 어린 녀석을 같이 데려가는 편이 좋겠지. 그것도 알겠어. 하지만 아무라도 상관없었을 텐데, 왜 굳이 저 당근머리로 했느냐는 거야. 우연일까?” “효과적이기는...했습니다. 비전하께서는 그 녀석을 귀여워하셨으니까요.” “탄가 놈들이 어째서 그런 걸 알고 있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스틴은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있었다. 내엊ㅇ한 판단력으로 이름난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잘 들어, 아스틴. 형님의 분노나 부용궁 사람들의 한탄은 내가 다 막아주겠다. 그러니 넌 왕비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다시 왕비와 재회했을 때 어떻게 사과할 것인가만 고민하면 돼.” “아, 예....” “울지 마. 나잇살이나 먹어서.” “옛!” 등이 아프기도 했지만, 아스틴의 얼굴에 간신히 희미한 혈색이 돌아와KT다. 후진으로 돌려진 부하들이 항의를 하러 찾아왔다. 이쪽 역시 필사적이었다. 저마다 자신들을 공격에 참가시켜달라고 애원한다. 자하니 요새는 갑자기 분위기가 변한 델피니아 군에 놀라며 방어 태세로 들어갔다. 이 기회를 꼭 이용해서 불화살을 요새 안으로 쏘고, 혼란을 틈타서 내부로 들어와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불화살을 쏘는 역은 내가 맡지. 황공하게도 왕비님께서 구해주신 목숨이다. 절대로 헛되이 하지 마!” 그렇게 명령한 발로는 남은 반수를 이끌고 진지에서 뛰쳐나갔다. 가죽 통에 갇힌 왕비는 양발을 쭉 뻗어 열심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 속에서 심하게 흔들리기까지 하니, 이러고 있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예전에 단장이나 셰라한테 했던 짓의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말발굽 소리와 뭔가의 바퀴소리가 들린다. 짐차 같은 걸로 옮기고 있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말의 발이 느려지면 바로 새 말로 바꾸고 있다. 틸레든 기사단을 인질로 삼은 솜씨도 그랬지만, 참으로 용의 주도했다. 한편 왕비를 사로잡은 장교는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서둘러 말을 달려 몇 시간 뒤 간신히 보나리스에 도착했다. 보나리스 성에서는 그들의 도착을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인 뮤렌 본인이 직접 아들을 맞이했지만 그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왕비는 데려온 장교와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땀에 젖어 숨을 헐떡이고 있다. “뮤렌 경이십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우어경. 그럼 이것이...?” “그렇습니다. 이 안에....” 두 사람은 신중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면서, 그 엄청나게 귀중한 화물을 돌아보았다. “먼저 안으로.... 뒤는 이쪽에서 알아서 하겠으니 바우어 경은 우선 휴식을 취하십시오.” 보나리스는 좁은 분지에 파인 이중의 해자 안에 세워진 성이었다. 성주인 뮤렌은 아직 서른 살 정도의 젊은 나이였지만 조라더스 왕의 신임을 받아 성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만사에 빈틈이 없고 재간이 있는 남자였다. 병사들에게 지시해 미리 준비해둔 방으로 가죽 통을 옮기게 한다. 그리고 뮤렌은 신임 집사와 다시 수순을 확인했다. “설마 정말로 왕비를 포로로 잡을 수 있을 줄은.... 정말 꿈만 같습니다. 저 뚜껑을 열어봤더니 아무것도 없더라는 악몽만은 없더라는 악몽만은 사양이지만....” “때에 맞춰 창문을 막아둘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인품 좋은 초로의 집사는 뮤렌의 혼잣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집사는 아니다. 집사로서의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는 있지만, 실은 조라더스의 밀명을 받고 이곳에 파견된 인물이었다. 보나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이 집사는 뮤렌에게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조라더스의 옥새가 찍힌 명령서를 보여주며 얘기했다. “조만간 이 성에 델피니아의 비장군이 포로로 잡혀 이송될 겁니다. 저는 그 포로가 도망치는 것을 막고, 그 준비를 갖추기 위해 이곳에 파견되었습니다. 부디 협력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뮤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국왕의 명령서는 진짜였다. 명령서에는 이 서류를 지참한 자의 지시에 따르라고 적혀 있었다. 반신반의하면서 자하니에 파견된 바우어와 연락을 취하고 말을 준비했다. 또한 이 집사는 왕비를 데려온 뒤 조치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신분이 신분이니 만치 지하 감옥에 처넣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창문이 있는 방에 놔둘 수는 없다. 그리하여 보나리스 성에서는 서둘러 탑의 방 하나를 골라 창문을 막아버리는 공사를 했다. 그밖에도 갈아입을 옷이나 시중을 들 시녀를 준비하는 등의 사소한 구석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럼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을 대면하시겠습니까?” “내가 혼자서?” “예. 뮤렌 경이 성주이시니까요. 저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집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뮤렌 역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를 가둬둔 가죽 통은 평소에는 창고로 사용하는 1층의 작은 방에 넣어두었다. 방 안에도, 바깥의 복도에도 부장한 병사들을 배치해두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뮤렌은 가죽 통의 뚜껑을 열도록 명령했다. 두 병사가 가죽 통의 뚜껑을 열고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밖에 보이게 되었으니 바로 뛰쳐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뮤렌은 가죽 통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말했다. “잘 와주셨습니다. 저희들 일동은 진심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많이 답답하셨겠지요. 부디 거기에서 나와주십시오. 밭줄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절대로 일어나는 걸 도우려고 다가가서는 안 된다. 자기 발로 일어나기를 기다리라는 것도 집사의 지시였다. 가죽 통의 흔들리는 통 안에 들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왕비는 손쉽게 일어나며 말했다. “대단한 환영이군.”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접대하게 될 뮤렌이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다가 뮤렌은 놀라며 말했다. “밧줄을 풀 필요가 없었군요. 어떻게 푸신 겁니까?” “애초에 헐렁하게 묶었던 거겠지. 멋대로 풀리던데.” “허어, 그거 참....”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뮤렌은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웰츠야, 보나리스야?” 뮤렌은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주위의 병사들은 그럴 수 없었다. 웰츠는 여기로부터 동남쪽으로 10 카티브 떨어진, 여기와 마찬가지로 왕의 직할지였다. 계속 통 안에 갇혀 있었으니 바깥 경치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뮤렌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누구 지시로 날 이리로 데로온 거지?” “그야 물론 주군의 명으로....” “멍청한 소리. 내가 통 안에 들어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어. 어떻게 케이파드에 있는 조라더스와 연락을 취했다는 거야?” “그것은.... 비전하를 모실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은 저희들의 판단입니다. 곧 틸레든 기사단 분들도 도착하실 겁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뮤렌은 왕비의 말투에 놀라고 있었다. 가녀리고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거친 말투가 더욱 기괴하게 들린다.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으면서 왕비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말에서 내려 이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상당히 긴 거리에 걸쳐 석조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전에 다리를 내리는 소리도 들렸다. 평범한 요새나 막사가 아니라 정식 성채인 것이다. 말의 속도와 달려온 시간으로 판단해보건대 이동할 수 있는 큰 성, 또 아까 병사들의 반응으로 봐서 아마도 보나리스로 끌려온 거겠지. 그건 상관없다. 여기가 어디든 간에 자기 한 사람만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마 정말로 캐리건 일행까지 끌려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만 무사히 붙잡고 나면 다른 이들은 쓸데없는 짐 덩이에 불과할 텐데. 적당한 곳에 버리고 갈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유도하기 위해 순순히 투항했건만 놈들은 왕비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듯하다. 캐리건 일행도 이성에- 그것도 아마 지하 감옥에- 유폐된다면 상당히 일이 복잡해진다. 적어도 혼자만 날름 도망 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힘드셨겠지요. 목욕물을 준비 시켰으니 여독을 푸십시오.” “그보다도 뭔가 먹고 싶은데.” 알고 있습니다. 식사도 곧 준비될 겁니다만, 그 전에 먼저 욕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옷도 갈아입으셔야지요.“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목욕을 권하는 것은, 신체 검사를 겸해 몸에 걸치고 잇는 것을 전부 압수 하겠다는 속셈이겠지. 적지 한가운데에 끌려왔으니 쓸데없는 반항은 소용없다. 왕비는 순순히 욕실로 들어가기로 했다. 방 밖으로 나오자 정면에 보이는 긴 복도 가득 무장한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 거창한 광경에는 왕비 쪽이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굳이 입밖에는 내지 않았다. 왕비는 말없이 뮤렌의 뒤를 따라갔다. 동상처럼 직립한 병사들은 말없이 각자의 위치에 서 있었지만 눈 만은 흥미진진하게 왕비를 주시하고 잇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델피니아는 철천지 원수, 그 중에서도 가장 용맹을 떨치는 -바꿔 말하면 탄가 입장에서는 가장 저주스러운 인간이 눈 앞에 서 있는 셈이건만, 이것이 건장한 남자라면 몰라도 젊은 여자쯤 되면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어려웠다. 포로쯤 되면 특히 더. 왕비가 눈 앞을 지나가고 나자 병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봤어?” “응, 놀랐는걸.” “정말 아름다워....” “겉모습에 속지 마. 저 괴물한테 대체 몇 명이나 죽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걸. 저 가는 팔로....” “그러니까 괴물이지.” 욕실은 같은 건물 안에 있었다. 여자 두 명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양 쪽 모두 중년으로 굳은 표정이다. “여기서부터는 저희들이 시중을 들겠습니다.” 뮤렌을 두고 와비는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방에 욕조를 준비하고 막은 쳐두었을 뿐이었다. 좁은 방에 수증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밖에도 목욕물에 일부러 떨어뜨린 것인지 인공적인 꽃냄새가 진하게 떠돈다. 왕비는 얼굴은 찌푸렸다. “물을 갈 수 없을까? 코가 썩을 것 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렇게 항의 했지만 여자들은 상대도하지 않았다. “코가 썩다니,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최고급 향료입니다. 악취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말을 붙일 여지도 없었다. 인질 입장에서 이 이상 고집을 부릴 수도 없다. 왕비는 어쩔 수 없이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물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목욕을 마친 후 여자들은 갈아입을 옷을 내밀었지만, 이것이 또한 왕비가 가장 싫어하는 여자용 드레스 였다. 조금 넓게 목 둘레를 파고 , 소매는 손목까지 덮었다. 등에서 끈을 묶어 크기를 조절하게 되어있는 새하얀 드레스였다. 아낌없이 천을 사용해 만든 치맛자락이 바닥에 살짝 끌린다. 이것이 다른 귀부인이었다면 세심한 배려에 감사했겠지만 리에게는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옷은 완전히 처분해버린 듯하다. 장화 대신 예쁘장한 구두를 신기고, 지금까지 가슴에 감고 있던 붕대까지 풀어버렸다. 이런 것은 귀부인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말이다. 덕분에 가슴 주위가 불안정해서 움직이기 불편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의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몇 번인가 여장을 한 경험이 있는 만큼, 왕비도 여자 복식에는 조금 지식을 갖게 되얶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은 어떻게 생각해도 평범한 옷이 아니다. 고급 비단에 옷자락에는 레이스 장식, 가슴과 소매에는 은실로 자수를 놓았다. 혼례의상으로도 충분히 입을 수 있을만한 드레스였다. 여기는 분명히 전투용 성채일 텐데, 어째서 젊은 여자가 입는 이런 옷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누군가가 입었던 흔적도 없었다. 어디서 조달한 옷이냐고 묻자, 여자들 중 키가 큰 쪽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딸이 결혼식 때 이으려던 옷입니다.” “그래?” 왕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어째서 혼례가 중지 되엇는지도, 딸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여자를 자극한 듯 했다. 여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자의 눈동자에는 한껏 억누르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딸은 자살했습니다. 결혼식 전 날에 결혼하기로 한 상대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절망하고, 델피니아와의 전투였지요. 당신이 죽인 겁니다. 딸도, 사위도.” “그만둬, 게르테.” 다른 여자가 조용히 말렸지만 게르테는 오히려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도 말해주란 말이야. 로니아, 아들도 남편도 델피니아 손에 죽었다고.” “꼴불견이니까 그만 둬.” 로니아는 조용히 상대를 제제했지만. 목소리는 얼음 같은 증오가 스며들어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게르테 이상으로 왕비를 증오하는 듯했다. 왕비는 두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할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금방 겉으로 표출될 정도로 자신을 증오하면서 그 증오스런 상대를 앞에 두고 태연하게 목욕 시중을 들었다. 그게 가능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차라리 숨겨둔 단검으로 자신을 죽이려 덤벼드는 쪽이 납득이 간다. 긴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나한테 입히면 딸이 화내는 거 아니야?” 게르테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딸의 원한이 그 옷에 깃들어서 당신을 죽여 버릴 수 있다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처절한 원한이 깃들여 있었지만 왕비는 상대하지 않았다. “복수라는 건 그런 기적을 기대하는 게 아니야. 하려면 더 확실하게 해야지.” 태연하게 대답하고 드레스 자락을 확 움켜쥔 뒤 왕비는 욕실에서 나왔다. 마음 속으로 비열한 수단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전쟁에 있어 승패나 생사는 당연히 따라다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이라고는 해도, 그 그늘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이 있다. 미망인이 된 것도 , 자식을 잃은 것도 이 여자들 만은 아니다. 델피니아에도 몇 천 명이나 되는 게르테와 로니아가 존재한다.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지만 , 하필 그런 여자들을 골라서 자신을 시중들게 하다니 너무 비열한 방법이었다. 갑자기 뇌리에 뭔가가 반짝였다. 비열한 방법...., 자신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상황.... 아스틴과 함께 끌려 나온 캐리건- 지금까지 생각도 해보지 못했지만 , 그게 정말로 우연이었을까. 탄가인과 교섭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교섭을 맡았던 남자가 누군가의 대리인에 불과했다면. “이 쪽으로 들어오십시오.” 다시 뮤렌의 안내를 받으며 긴 나선형 복도를 올라가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막혀 있어서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침대 말고는 식사용의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을 뿐인 간소한 방이었다. 식사가 운반 되ㅏ었다. 이런 때에도 왕비의 식욕은 건재했다. 묵묵히 5인분 이상의 식사를 해치웠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무장을 한 병사들이 방 주위에 빽빽하게 배치되어 왕비를 감시하고 있었다. 식사하기에 그다지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왕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먹어둘 수 있을 때 먹어두는 것이다. 다음에 언제 식사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이번에는 탑의 옥상으로 안내 되었다. 바로 눈 앞에 뾰죽뾰죽한 벽이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고, 뒤를 돌아보면 원추형의 지붕이 보인다. . 사람이 지나 갈 수 있는 탑 주위 통로에 감시대를 겸하게 만든 공간 이었다. 가죽 통에 들어갔을 때는 점심 전이었는데 , 지금은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시야 전체에 벽처럼 우뚝 선 산맥이 이어져 있다. 바로 아래에 성채 내부가 보였다. 성 밖에는 해자가 있다. 이 성이 서 있는 곳만 간신히 평지를 이루는 분지인 듯했다. 뮤렌은 성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리켰다. “저 쪽을 봐주십시오. 아직 멀리 있지만 곧 보일 겁니다.” 지금도 잘 보였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왕비의 눈은 이쪽을 향해 이동하는 십여 기의 인마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성문 가까이 오자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캐리건을 포함해 열 명 정도가 결박을 당한 채 말을 타고 이었다. 모두 왕비도 아는 얼굴이엇다. 일행이 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뮤렌은 왕비를 재촉하며 다시 아까의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찾아왔을 때에는 술잔이 얹힌 쟁반을 들고 있었다. 왕비의 예민한 후각은 그 술잔에서 풍기는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예감이 적중한 데에 가볍게 한숨은 토한다. 지겨울 종도로 잘 알고 있는 냄새였다. 오랫동안 맡고 있으면 머리가 마비될 것 같은 고혹적인 향기,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어린 향기였다. 6장 반나절 만에 보나리스까지 달려온 셰라는 날이 밝은 뒤 더욱 속력을 올렸다. 케이파드까지는 성인 남자라도 닷새는 걸리는 거리지만, 행동원이라면 이틀 정도로 충분히 달려갈 수 있다. 험준한 지형이므로 통과할 수 있는 길도 제한되어 있지만, 전에도 지나가본 적이 있어서 이미 익숙랬다. 인적이 업슨 산길에서는 바람처럼 달리고, 남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처럼 인근 주민으로 위장하며 나아가 해가 저물기 조금 전에 잠시 동안 수면을 취했다. 이 앞에는 펜체라는 큰 마을이 있다. 이 곳을 우회하려면 길도 없는 산 속을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정도 쯤 되는 규모면 반드시 문지기가 있으므로 통행증이 없으면 지나갈 수 없다. 셰라는 사람들이 집 안에 들어가는 밤을 기다려 마을 쪽으로 통과할 생각이었다. 해가 저무는 것과 동시에 훌쩍 일어났다.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변장용 옷은 꾸러미로 만들어 등에 진다. 셰라 같은 사람에게는 밤 쪽이 훨씬 움직이기 편하다. 다행히 달빛도 어두웠다. 잽싸게 움직이며 멀리 불이 밝혀진 마을 쪽으로 접근햇다. 펜체를 통과해서 동쪽으로 꺾어지면 케이파드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이 길 역시 이곳저곳에 관문이 있으므로 밤 사이에 가능한 한 나아가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셰라의 발이 뚝 멈췄다. ‘......?’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길의 좌우에는 어두운 숲이 있을 뿐. 부엉이가 울고 동물들이 조용히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온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밤의 풍경이었다. 전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워봐도 전혀 이상한 구석은 없다. 그런데도 분명히 무언가가, 이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주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런 감각을 가볍게 넘겨서 일이 잘 풀렸던 적은 없다. 셰라는 살짝 숨을 죽이고 몸을 낮췄다. 무엇이 숨어 있는지 정체를 살펴보려 했지만, 그 전에 저쪽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잘도 눈치챘군.” 아무 억양도 없는 목소리에 셰라는 살짝 놀랐다. 위험을 느낀 것은 전방이었건만, 목소리가 들여온 것은 등 뒤였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ㅖ라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의 목소리였다. 언제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그 남자였다. 뒤를 돌아보려다 간신히 스스로 제지했다.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위험은 정면. 등 뒤가 아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길 한가운데에 남자가 나타났다. 생각대로 음성의 소재를 숨기는 기술이었다. 셰라도 몸을 일으키며 상대가 어떻게 나오려는지 살펴보기 위해 말했다. “비켜줘. 당신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으니까.”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도 이 남자는 언제나 진심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자신을 상대로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역시 그래주기를 바랐다. 지금 자신은 중대한 임무을 지고 있다. “비켜주는 건 상관없지만. 그 전에 하나만 묻고 싶어.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뭐?” “넌 왕비를 따르기로 했지. 그 왕비가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어?” 셰라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런 일은... .”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어?” 재미있어하는 듯한 반츠아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정체로를 위기감이 전신을 휩쓴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이 남자가 이런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셰라가 알고 있는 한 왕비를 쓰러뜨릴 가능성이 있다면 가능한 인물은 단 한명.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레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네가 방해가 되나봐. 나도 내 손으로 널 처분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은 없지. 서로 이해가 일치했다는 말이야” “.......” “네가 왕비 곁을 떠나는 때를 기다렸다가 레티가 함정을 파기로 했지. 난 네 뒤를 따라 산세베리아까지 갔지만, 거기서는 손을 쓸 수 없었어. 언젠가 반드시 케이파드를 조사할 거라고 생각하고 반달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을ㅡ 어떻게 했어?!” “글쎄? 그건 레티의 임무야. 어떻게 했는지는 나도 몰라. 적어도 독은 썼다는 것 같더군.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도 목을 베어 버리면 죽겠지” 그 이상 들을 필요는 없었다. 셰라의 손이 연속해서 납구슬을 던졌다. 물론 그 정도의 공격에 당한 반츠아가 아니다. 손쉽게 구슬을 피했다. 그러나 납구슬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셰라가 돌진하며 검을 휘둘었다. “에잇!” 절묘한 타이밍이었지만 남자는 이 일격을 가볍게 피하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서로의 위치가 바뀐다. 이번에는 셰라가 펜체 마을을 등에 지고, 반츠아는 델피니아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 “싫다면?” 변함없이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셰라 쪽은 여유가 없었다. 살기를 뿜으며 외쳤다. “힘으로라도 통과하겠어!”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반츠아가 웃는 듯한 기척이 났다. 흥분하는 셰라는 비웃는 듯한 혹은 네가 그럴 힘이 있겠느냐고 깔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어두운 미소를 남기며 반츠아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셰라는 재빨리 왼쪽으로 뛰었다. 간발의 차이로 바로 지금까지 셰라가 서 있던 자시에 납구슬이 날아왔다. 격렬한 공방에 부엉이와 밤새들의 울음소리도 뚝 멎었다.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가느다란 그믐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마침내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숲은 다시 살아나며 떠들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셰라는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필사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기척을 죽이는 가장 큰 기본은 호흡을 죽이는 것이다. 숨을 죽이지 못하면 기척을 숨길 수 없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그것만으로도 적에게 위치가 알려지고 만다. 행동원들의 싸움, 그 진가는 언제나 상대를 허를 찌르는 데에 있다. 이 어둠은 자신의 모습을 상대의 눈으로부터 감춰주지만, 동시에 상대를 발견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이렇게 나무가 밀접한 곳에서는 납구슬을 사용할 수 없다. 은선도 나무에 걸려버린다. 승부는 접근전으로 결정된다. 어떻게든 이쪽의 위치가 알려지기 전에 상대의 위치를 파악해 선공을 하지 않으면.... 그 생각만을 하고 있을 때,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나직하니 울려왔다. “마을을 잃었을 때를 기억해?” 움찍했다. 이런 때에 갑자기 무슨 소리를 꺼내는 건가 싶었지만, 그럼에도 몸이 긴장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어가는 편이 행복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전신의 피부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잔뜩 흥분했던 머리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살기조차 얼어붙었다. “우리들은 분명히 도고에 불과했지만, 거기에는 도구 나름대로 살아가는 보람이 있었어. 이뤄야만 할 임무가 있었지.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성령들은 친절하게도 이제는 아무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다 내 자유라고들 하지만....” 반츠아 역시 어둠 속에 숨어서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입술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웃음이 떠오른다. “생각하지 않는 버릇이 들고 말았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우리들은 그런 생물이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명령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라고? 바보 같은 얘기야. 뱀에게 하늘을 날라고, 나비에게 헤엄을 치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지.” 결과적으로 지금의 자신은 그저 숨을 쉬고 살아만 있을 뿐. 아무 목표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이 매일매일을 보냄,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상태를 사람들은 ‘자유’라고 부르는 듯하다. 그렇다면 자유라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상태인가. 돌아갈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것을 바랐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선배들처럼 기술을 연마하며 행동원으로서 살아가고, 사명을 다하며 죽고 싶었다. 그것만이 지상의 행복이었건만. 그러나 한번 풀려버린 주술은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반츠아는 파로트 백작을 새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백작은 수많은 마을과 마을의 종사들 위에 군림하며 당당한 관록을 겸비하고 있다. 그 지도력도, 통솔력도, 남을 매료하고 압도하는 힘도 날들 이상이었다. 레가의 종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결국 이것도 일족의 행동원들을 통솔하는 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지도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억지로 자신의 손에 떨어지지, 귀찮지 짝이 없는 ‘자유’라는 것에 대처하기도 싫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심심풀이로 백작의 ‘의뢰’를 받아 몸을 움직이고 있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마을을 잃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던 게 있지” 반츠아는 한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셰라는 몸을 숨긴 채, 싸움조차 잊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들은 아무래도 뼛속부터 어둠에서 살아가는 생물인 것 같아. 단순히 사람은 죽이고 싶은 거라면 군대에라고 들어가서 전장에 나가면 될 것을 그쪽으로는 전혀 흥미가 없지. 물론 출세나 명예도 관심이 없어. 중요했던 건ㅡ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건 주인인 종사에게 인정받는 것, 그 애정을 얻는 것이었다. 이건 너밖에 할 수 없다며 거창한 임무을 부여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고, 그 임무를 확실하게 해결하고 평가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어 ” 나무 뒤에 숨은 채 셰라는 마음 속으로 반츠아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오로지 그 순간에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노리는 상대의 주변을 조사하는 데부터 시작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일의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모든 장애물을 없애고 완벽하게 목표의 숨통을 끊는 그 순간-. 그 순간 동시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도 생겨나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명령을 완수해낸 기쁨과 황홀한 쾌감은 노무나 강렬했다. 목소리에 기쁨이 스며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성과를 보고할 때는 얼마나 자랑스러웟던가. “알 수 없는 건, 계속 마음에 걸리던 건 우리들의 그런 성질이야. 마을의 행동원 전원에게 공통돠?,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복종성. 한 사람 한 사람 성격은 다르면서도 그 점에 있어서만은 완벽하게 똑같았어. 절대로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인간은 없었지. 임무에 실패해서 생명을 잃는 동료를 보면서도, 수행이 아무리 가혹해도, 누구 하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어.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지. 아무리 형식에 맞춰서 키워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똑같이 자라날 수 있는 건지가 계속 신경 쓰였어. 우리들은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성질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을의 교육에 의해 억지로 그런 식으로 자라나게 된 건 지, 아니면....” 언제부터인가 셰라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 이상 듣는 것이 두려웠다. 싫어 , 그만.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종사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판별했는지 모르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처음부터 포함시키지 않았는지도 몰라.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들의 교육이 이렇게나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한 건 , 마을 사람들 전체가 아무 생각 없이 종사를 따르는 것은 우리들이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누군가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생물로 태어났기 때문인 게 아닐까 하고.“ 어둠에 지배된 숲 속에 , 형을 언도하는 것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만일 그렇다면 네 행동도 간단히 설명할 수 있어. 마을을 잃은 너는 무의식중에 강한 지배력을 지닌 인간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그 왕비가 있었지. 넌 기쁘게 거기에 달려들어 복종을 맹세한 셈이야. 자신의 의지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핏기가 점점 빠져 나간다. 호흡을 고르는 것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셰라에게 잇어 지금의 말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럼 얘기는 간단해. 왕비가 죽으면 또 새 주인을 찾으면 돼. 넌 지금까지와 전혀 다름없이 살아 갈 수 있어, 행복해 질 수 있겠지. 널 지배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으니까.” “닥쳐!” 창백해진 얼굴로 셰라가 외쳤다. 그럴 리 없다. 아무라도 상관 없다니. 그럴 리가 없다. 그 사람을 마을 놈들과 똑같이 여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의지여야만 했다. 절대로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던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끌려간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로 왕비를 인정하고 무인으로 선택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것 조차도 마을의 교육으로 만들어진 제2의 본성이었다면 대체 자기 자신의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언제자 그랬다. 언제나, 이 남자는 자신을 암흑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그렇고 말고. 난 너의 그림자이니까.” 남자는 마치 이 쪽의 마음이 보이는 듯이 말햇다. “그리고 넌 내 그림자야. 한 때 내가 가려던 길을 필사적으로 따라오고 있지.” 셰라 쪽이 아주 조금 빨랐다. 앞으로 한 바퀴 구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리검을 피하고 , 한 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적의 검을 받아냈다. 위에서 검을 내리 친 반츠아 쪽이 훨씬 여유 있었다. 상대의 힘에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셰라는 스스로 몸을 굴리며 오른쪽 발을 차올렷다. 오른쪽 팔을 걷어차일 뻔한 반츠아는 살짝 혀를 차며 뒤로 뛰어 물러났다. 다시 거리가 벌어진 채 서로 마주 본다. “어째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셰라가 외쳤다. 거의 비명이나 다름없었다. “알고 있을텐데. 넌 죽지 않았어.” “그건 달라! 난 성령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자살하지 못한 것 뿐이야!! 너야말로- ! 너야말로 죽지 않았으면서....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 반츠아는 일족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 있다. 주입받은 사명감도 선민의식도, 신으로 숭배하던 성령도,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종사의 말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같은 상처를 품고 있는 이의 질문에도 그 단정한 얼굴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어. 너와 싸우고, 널 내 손으로 쓰러뜨릴 수 잇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째서야?! 너하고 싸워야 할 이유는 없어!!” “내게는 있어.” 반츠아가 무정하게 대답했다. “그래, 널 가지고 시험해 봐야지.” 정말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의 실을 조종하는 주인을 잃어도, 혼자 남겨져도 살아갈 수 있는지. “직접 증명해봐. 그럴 수 없다면 여기서 죽어.” 셰라의 온 몸이 다시 긴장했다. 지금까지의 반츠아와는 다르다. 뚜렷하게 어둠을 통해 느끼는 이 압박감, 이 살기. 적은 진심이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린다.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 승산은 없다. 힘도 기량도, 경험까지도 이 남자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 사실은 셰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를 쓰러뜨리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죽을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을 구하러 가야.... 거기까지 생각하다 다시 몸이 굳어졌다. 자신은 그 사람을 걱정하고 있다. 무사히 있어 달라고 기원하고 있다. 터질 듯한 초조감을 느끼고 있다. 이 감정 조차도 거짓이라는 건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 주입 된 습관대로 현재의 ‘지배자‘에 충성을 바치고 있을 뿐이라는 건가. 생명이 걸린 승부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면 , 결과 따위는 뻔하다. 어둠 속으로 비상하는 부엉이처럼 반츠아가 셰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셰라는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피한 수 없었다. 왼쪽 어깨에 통증이 달린다. 치명상은 아니다. 가볍게 스쳤은 뿐이다. 이대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일단 물러나 대책은 세워야 한다. 두 번째 공격이 날아오기 전에 셰라는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문제는 적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 였다. 이대로 단숨에 달려가야 할지, 아니면 숲 속에 몸을 숨기는 게 좋을지 서둘러 어깨의 상처를 지혈하면서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왕비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 남자 역시 기척을 죽이고 접근하는 실력은 대단하다. 거꾸로 말하자면 남의 기척을 찾아내는 솜씨 역시 뛰어나다는 말이다. 몸을 숨길 만한 덤불이나 풀숲은 얼마든지 있지만 , 어지간히 완벽하게 호흡을 숨기지 않으면 저 남자의 추적을 완전히 따돌릴 수 없다. 그 때 셰라의 귀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늦은 시각에 말을 달리는 소리였다.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니다. 남자의 기척에 조심하면서 길로 돌아와 보자 숲 저편에 횃불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그 뒤를 잇는 바퀴 소리. 말이 아니라 마차였다. 그것도 여러 대가 대열을 이루면서 펜체로 향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주신 구원이었다. 이런 밤중에 달리는 마차라면 당연히 지붕이 붙어있다. 셰라는 길가에 몸을 숨기고 마차의 대열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선두는 횃불을 운반하는 말 두 필. 그 뒤를 이어 지붕이 달린 마차가 네 대. 마지막 마차가 지나가는 순간 셰라는 뛰어 올라 부드럽게 마차 지붕에 착지했다. 한편 첫 공격으로 셰라를 쓰러뜨리지 못한 반츠아는 사냥감이 보인 기대 이상의 저항에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걸까. 은색 꼬마는 필살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재미있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실력이 좋아졌다. 어지간히 왕비의 영향을 받았거나 단련을 받은 듯, 에브리고에서 처음 싸워봤을 때와는 완전히 반응이 달랐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걸....” 낮게 중얼거리며 뒤를 쫒기 시작했다. 별로 서두를 필요도 없다. 이 곳은 숲 속, 아무리 솜씨 좋게 숨어 있어도 살아있는 거라고는 동물 밖에 없어야 할 곳에 사람의 기척이 섞여 있으면 반드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셰라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반츠의 귀에도 들려왔다, ‘......?’ 어둠 속을 달려오는 격렬한 바퀴 소리, 말들이 달리고 있다. 반츠아는 마차가 달려가는 모습을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조용히 잠든 가운데 불이 환히 밝혀진 집이 있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 아마도 촌장의 집인 모양이다. 현관 문이 활짝 열린 채 수많은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드나든다. 막 손님이 도착한 듯 했다. 맞이하는 쪽도 뭔가 바쁘고 당황스러운 분위기이다. 달려온 사람들도 집안 사람들과 별로 얘기를 나누지 않고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한밤중에 달려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집주인이나 일족의 장로가 용태가 좋지 않아 근처에 사는 친척들을 불러 모은 것이리라. 은색 꼬마는 마차에 올라타 자신의 추적에서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고 반츠아는 판단하고 있었다. 집 옆에는 네모진 작업용 마당이 있고, 그 마당의 삼면을 둘러싸는 듯이 긴 창고 세 채가 디귿자로 세워져 있다. 집보다도 더 큰 창고였다. 그 정도 쯤 되니 갑자기 찾아온 여러 대의 마차와 말을 손쉽게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부유한 농가에서 일해 본 경험은 없지만, 창고 내부가 어떤 구조일지는 대략 예상할 수 있었다. 말에게 먹일 목초와 사료, 깎아들인 양털을 쌓아두는 다락, 수확한 보리를 저장하는 공간과 탈곡장, 농사이 사용하는 도구등. 최소한 그 정도는 창고 안에 있을 터였다. 가축의 수나 수확량에 따라 창고의 크기도 달라지지만 어쨌거나 상당히 넓은 창고이다. 손님들은 창고에서 나와 현관으로 들어갔지만, 아마 뒷문도 창고와 통해 있을 것이다. 목표물은 창고 안은 물론이고 저택 안 까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이다. 숨어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아직은 저택의 사람들이 깨어있다. 반츠아는 한동안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마차가 창고로 들어설 때, 셰라는 마차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달라 붙어 있었다. 마차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밝은 곳에서는 그대로 들키고 만다. 천장에 몸을 고정하는 것과 같은 요령으로 마차 바닥에 붙어 있으려니 상처를 입은 왼쪽 팔이 아파왔지만 , 그런 데에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도착한 창고의 크기로 봐서는 상당한 명문가인 듯 했다. “길이 안 좋아서 말이죠. 이렇게 늦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했습니다.‘ “그래서 , 용태는 좀 어떻지요?” “지금은 안정되었습니다만, 아마도 길지는....” “이 쪽으로 오십시오. 다른 분들은 모두 도착하셨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마중하러 나온 사람들이 말을 종합해 보면 이집안의 당주가 갑자기 쓰러져 위독해지는 바람에 재산 문제도 있고 해서 인족이 전부 모인 듯 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진 뒤 , 셰라는 개구리처럼 달라붙어 있던 마차 바닥에서 떨어져 소리없이 땅으로 내려왔다. 창고 안을 한 바퀴 살핀 후 목초 저장소 안쪽에 숨어들어간다. 다행히 짐은 무사했다. 셰라는 상처를 치료하고 차분하게 약을 발랐다. 이 정도라면 2,3일이면 다 났겠지. 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팔이 통째로 떨어져나갔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 운이 좋앗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어쨋거나 위기는 넘겼지만 그 남자는 아마도 이 집까지 따라와 자신을 찾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아까 상황을 봐도 이번만은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햇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다. 알 수 없는 건 ,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왕비에게 이런 소리를 하면 그 사람은 또 다시 기가 막혀서 말하겠지. “암살 같은 위험한 직업을 가진 주제에 그 느긋한 소리는 또 뭐야?” 왕비의 목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셰라가 지금까지 맡았던 임무에서 성공은 있었어도 실패는 없었다.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장애 요인을 제거하는 방법은 알거 있지만, 자기보다 강한 동업자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믐 아무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 남자는 자신보다 강하다. 정상적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이란? 셰라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함정.... 뭔가 함정이 될만한..., 어떤 함정...?’ 구멍을 파거나 무기를 날리는 장치를 만들 만한 시간은 없다. 우선 그런 정도에 걸려줄 거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조잡한 장치가 아니라 좀더 심리적인 허를 찌를 수 있는 것.... 해치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누구나 허점이 생긴다. 그 틈을 이용해서.... ‘허수아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일 지도 모른다. 그 남자라면 자기가 여기에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쯤 이미 눈치 챘을 게 분명하다. 자신이 나오는 걸 기다리든가.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 ‘오늘이야....’ 근거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이 창고 전체를 하나의 함정으로 만들고, 적당한 사람을 약으로 재워 미끼로 쓴다. 수면제로 잠든 인간의 호흡은 행동원이 가사 상태를 위장할 때와 매우 비슷하고 거의 기척이 나지 않는다. 마른 풀 같은 걸로 덮어버리면 거기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행동원 중에서도 그 정도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라면 반드시 눈치챌 것이다. 셰라가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공격하는, 그 틈을 노린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미끼에 , 자신이 미끼 이상으로 완벽하게 호흡을 죽이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후자는 지극히 어렵다. 그 남자의 눈을 속일 자신은 없었지만 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미끼를 조달하기 위해 셰라는 다시 변장을 하고 창고에서 나왔다. 바로 오른 쪽에 집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 내부의 조명이 그대로 흘러나온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 집안의 하인들만으로 이런 숫자가 될 리는 없다. 멀리서 찾아온 친척들이 함께 데리고 온 심부름꾼들까지 합쳐서 혼잡할 것이 틀림없다. 셰라는 태연한 얼굴로 뒷문으로 들어서서 볼일이 있는 척하며 2층으로 올라가 심부름꾼들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대로 주인들의 시중을 드느라 심부름꾼들의 짐은 그대로 놓여있었다. 적당한 짐 안에서 여자 옷을 슬쩍해 갈아입고 머리카락은 늘어뜨렸다. 이것으로 집안 어디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방을 나오자마자 중년의 심부름꾼과 마주쳤지만 셰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상황아 상황이니 만치 집 안에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 역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잠깐, 이봐요. 이런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손이 많이 부족하니까, 빨리 아래쪽 일을 도와서 사람들에게 가벼운 식사와 차를 대접해드려.” “예, 알겠습니다.” 셰라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집 안에서 움직이기에는 여자 쪽이 훨씬 편리하다.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다른 심부름꾼들과 적당히 얘기를 나눠 얼굴을 익히고, 몇 번이고 위 아래를 왕복하면서 이 집에 대해 정보를 모았다. 문제의 미끼로 어떤 사람을 택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운 좋게 마침 딱 어울리는 인물이 있었다. 이 집에는 혼기를 맞은 딸이 있다. 지금 쓰러진 사람은 처녀의 할아버지라고 한다. 양친과 함께 병실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간병을 했다고 하니 슬슬 방으로 들어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니 않을 것이다. 환자도 조금 상태가 안정되었고, 시각도 이미 한밤중을 지나 있었다. 약 두 시간 정도만 지나면 이 집도 다시 조용해 지겠지. 그 남자가 행동을 시작한다면 아마도 그 때일 것이다. 셰라는 약을 넣은 카모마일 차를 가지고 와서 딸에게 권했다. “아가씨, 차라도 드세요. 피곤하실 테니까....” “응, 고마워.” 18, 19세 정도로 보였다. 늘씬하고 키가 큰 편이다. 체격도 조건에 딱 맞았다. 노인을 간병하느라 완전히 지쳐 있던 것이리라., 처녀는 맛있게 찻잔을 비우고서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아가씨 쉬시려면 방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걱정하는 척하면서 다른 심부름꾼의 손을 빌려 초녀를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제가 돌보고 있을게요.” 같이 도와 아가씨를 옮긴 심부름꾼은 그런 셰라의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 농가나 상점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왕궁에서 일하는 셰라는 격부터가 달랐다. 수없이 모여든 친척들의 이름과 얼굴도 금방 외우고, 불평을 해대는 and년 부인과도 친절하게 얘기를 나눈다. “저렇게 젊은에 참 제대로 된 아이로군,” 모여든 친척들도, 그 집의 가족들도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전혀 모르는 얼굴이지만 누군가 데려왔을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 신경 쓰지 않았다. 셰라는 그 심리를 거꾸로 이용해 기가 막힐 정도로 대담하게 행동했다. 남은 건 사람들이 잠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처녀를 창고로 옮기고, 만일에 대비해 몇 가지 장치를 한 뒤 가능하면 그 남자를 창고로 꾀어내는 것뿐. 남은 문제는 얼마나 호흡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이다. 자신의 위치를 간파당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운 좋게 미끼에 달려든다고 해도 그 순간을 높쳐버리면 낚시와 마찬가지로 미끼만 빼앗기게 된다. 몸이 싸늘해졌다. 생각을 멈추고, 셰라는 무서운 것이라도 모듯이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처녀의 얼굴이 보인다. 미끼로 사용하면 이 아가씨는 자기 대신 그 남자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이 시점까지 계획을 세워 준비하면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손 발이 무거워진다. 가슴 언저리에 무거운 돌을 채워 넣은 듯 불쾌하고 몸서리쳐지는 기분이 온몸을 휩쓸었다. 셰라는 지금까지 암살 임무에 표적 이외의 사람을 말려들게 만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비의 종자로서 전장에 나가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과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병사를 베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된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걸까. 어째서 그 남자와 싸워야만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셰라의 내면에서 소용돌이 친다. 이것은 바츠아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그 남자는 그렇게나 강한데도. 그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잇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까? 그렇게 자문하면서도 셰라는 그 물음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물어봤자 소용없는 것도. 자신 역시 한때 왕비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다. 그 때 자신은 대체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기가 막히는 동시에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건가.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어째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건가. 오히려 그렇게 묻기까지 했던 것이다. 반츠아는 말했다.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생물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전혀 변하지 않을 리가 없다. 실제로 지금의 자신은 분명히 예전의 인형같던 자신과는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태연하게 희생시키는, 이 점만은 예전보다 더 나빠진 게 아닐까. 어쩌면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게 아닐까? 조금이라도 빨리 주인의 곁으로 달려가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뿐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걸까. 이런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을 느끼는 쪽이 이상한 걸까. 셰라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얼굴을 덮었다. 너무 무겁다. 모든 것이 전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선택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집의 조명이 꺼지기 시작하자 반츠아는 천천히 행동을 개시했다. 이미 한밤중을 한참 넘긴 시각이다.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이동 하면서 불이 꺼진 방으로 향했다. 2층 이라는 것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가볍게 뛰어올라 창틀에 매달린 뒤 , 두꺼운 덧문 너머로 방안의 상태를 신중하게 살폈다. 조용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구를 이용해 빗장을 내렸다. 방안으로 숨어든 뒤 원래대로 빗장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깨어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중환자가 있으니 모두가 다 잠들 수는 없기 마련이다. 반츠아는 셰라와 달리 모습을 숨긴 채 집안을 탐색햇다. 아직 몇 명이 일어나 있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집안을 이동한다. “아가씨가 방에 없다고?” “예, 어떻게 된 걸까요. 바깥에 나가셨을 리는 없는데....” “설마. 다시 한 번 찾아봐.” “하지만 아까 봤을 때는 방에서 곤히 잠들어 계셨는걸요. 그런데도,,,,” “주인님 상태가 걱정돼서 다시 일어나신 거 아냐?” “아뇨, 마님께서도 모르신다고....” “이런, 골치 아프게 , 아가씨도 참, 하필 이런 때에....”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그야 , 이 시각에 방에 없다면 그다지 큰 소리로는 말할 수 없는 곳에 계시겠지. 아마 남자 분 방에.” “예엣?!” “쉬! 바보야, 넌? 그리 크게 말해서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그런, 이런 때에....” “그러니까 너무 소란 피우지 말도록 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라고.” “예....” 그런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서둘러 한 바퀴 훑어보았지만 역 시 집 안에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집안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창고.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본채보다는 창고 쪽이 양 쪽 모두 움직이기에 유리할 것이다. 지금의 반츠아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핏속의 검은 소용돌이였다. 은색 꼬마는 지겹도록 ‘왜’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 질문은 오히려 반츠아가 하고 싶었다. ‘다소 솜씨가 좋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 뛰어나도, 그게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지...?’ 빈츠아에게는 해야 할 일이 없다. ‘힘’이 있어도 할 일이 없다. 그래서는 전혀 의미가 없지 않은가. 우스운 얘기다. 반츠아가 이 정도로 뛰어난 행동원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실력의 소유자였다면 이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런 자들에게는 그 날 그 날 살아남는 것이 지상과제이며, 자신의 기량에 의문을 품을 여유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틈이 있다면 기술을 닦는 데에 전념했을 터였다. 자신을 멋대로 조종하던 실이 그리워지는 동시에 가증스럽기도 했다. 이제 와서 다시 꼭두각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자력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이런 목숨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존재해봤자 과연 의의가 있는 것일까. 그 은 색 꼬마를 놓고 확인해보고 싶었다. 셰라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 곳은 마구간과는 별도의 건물이다. 사방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오면 발소리를 죽여도 반드시 알 수 있다. 문제는 상대가 이쪽의 존재를 눈치 채는가 아닌 가 일 뿐. 반츠아는 본체에서 가장 가까운 창고로 들어섰다. 물론 조명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 한동안 입구 근처에서 머무르며 주위에 놓여있는 농기구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어둠에 눈을 익혔다. 예상했던 대로 이 곳이 마차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손님들의 마차가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 건너편은 마구간 겸 외양간으로 , 돼지도 기르고 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동물들에게 먹일 목초를 보관하는 다락이 있었다. 창고 2층에 마른 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반츠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 졌다. 뭔가가 있다. 동물의 기척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사람의 기척이었다. 반츠아는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았다. 훌쩍 뛰어 목초 보관소로 올라갔다. 물론 발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목초 더미에 수리검을 던져 넣으려 하던 순간 반츠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은색 꼬마는 자신이 어떤 상대인지 뻔히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단순하게 숨어있을 수 있을까. 아가씨가 방에 없다.... 어느 틈엔가 부터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가사 상태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지만, 약으로 혼수상태에 떨어져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목초 안에 있는 것이 그 처녀라면 목표는...? 어둠에 익숙해진 반츠아의 눈이 시야 구석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수리검을 던졌다. ‘......?!’ 흠칫했다. 반응이 이상하다. 사람에는 맞지 않았다. 반츠아가 비틀었던 몸을 원래대로 돌리려 한 것과 목초더미가 흩어진 것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 속력으로 뛰어나온 셰라의 검이 반츠아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앗...” 비명을 지른 것은 셰라 쪽이었다. 긴 은발이 어깨 높이에서 뚝 끊긴 채 흩어져 있다. 짧아진 머리 끝이 창백한 뺨에 걸쳐졌다. 믿을 수 없었다. 이 쪽의 목표대로 일이 굴러가 주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손에 전해지는 감촉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이고 경험했던 감촉이건만 몸이 떨려 온다. 심장이 조이는 듯했다. 호흡이 가빠진다. 바로 지금 여기까지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엄청난 짓을 저질러버린 것 같은, 그런 공포를 느꼈다. 반츠아 역시 경악으로 눈을 치뜨며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충분할 정도로 정통으로 들어갔다. 아마 칼끝은 등을 관통했을 것이다. 셰라가 검을 빼기 전에 반츠아의 손이 엄청난 힘으로 셰라늬 오른손 손목을 쥐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몸을 꿰뚫은 검의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 였다. 그에 비해 셰라는 벌벌 떨고 있었다. 검의 손잡이를 꽉 준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만, 자신이 누군가의 지배를 필요로 하는 생물이더라도 , 그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도 상관없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남자의 손가락에 주어지는 힘을 아프도록 느끼면서 셰라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두 번 다시 ... 어느 누구도 따르지 않아. 새 주인 따위 필요 없어. 바라지도 않아. 그 사람이 최후의 주인이다.” “그럼 왕비가 죽으면?” 셰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자신에게만 그런 어려운 문제를 풀라고 강요하지 말아주기를 바랐다. “그런 건 그 때 생각하겠어!” 어린아이가 고집부리는 거나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셰라는 한없이 진지했다. 그 밖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반츠아가 미소지었다. P라가 처음으로 보는 만족스런 웃음이었다. 싸움에 피해 죽어가면서도 그 표정만은 신비로울 정도로 온화했다. 반츠아는 최후 까지 일족의 주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미로인 동시에 , 끈질기게 따라붙는 거미줄 같은 낙인이었다.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기분 마저 들었다. 아니, 진심으로 그 주박에 대항하려고 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처음부터 반쯤 포기한 듯한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박은 절대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았다. 한계가 있던 것이다. 그 증거를 보여주는 인간이 지금 눈 앞에 있다. 처음으로 자신이 목숨에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쁘지는 않아....” 그것이 반츠아가 남긴 최후의 말이었다. 새벽 햋빛 속에서 셰라는 반츠아의 시체를 숲 속에 묻엇다. 창고 안에 남겨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셰라는 그 집의 딸을 미끼로 쓰지 않았다. 그 남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비어있는 손님방에 재워 두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아가씨는 눈을 뜨고서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하지만 비겁한 방법으로 살아남아 봤자 의미가 없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흙탕물을 마시고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한이 있어도, 남의 구두를 핥아서라도 살아남을 수 잇지만 그것만은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스스로 잘라낸 머리카락을 땋아서 창고 기둥에 걸어놓고 , 바람에 흔들리도록 벽에 작은 구멍을 뚫은뒤 자기 자신이 미끼가 되었다. 그 머리카락은 반츠아와 함께 묻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운에 맡긴 승부였다. 지금도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 때 반츠아가 건초더미에 수리검을 던져 넣었다면,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은 반츠아츼 얼굴은 한없이 평온했다. 최후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살아 있을 때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반츠아의 몸에는 셰라의 검이 꽂힌 채였다. 그 자리에서 뽑으면 출혈이 심했다. 그런 흔적을 남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짧아진 셰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뺨에 걸치는 머리끝도 , 가벼워진 머리의 느낌도 상당히 어색했다.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이렇게 머리를 짧게 잘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말의 쓸쓸함과 은밀한 결의를 가슴속에 담고 셰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더 이상 여자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긴 은발과 애용하던 검, 지금까지의 자신을 남자와 함께 매장한 뒤 셰라는 반츠아가 가지고 있던 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다시금 격렬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무엇이 반츠아를 죽였는가. 물론 직접 손을 쓴 것은 자신이다. 이 손으로 그 남자의 목숨을 빼앗았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가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그 남자가 싸워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무의미한 살상을 해야 할 이유 따윈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셰라와 같은 경험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간이었다. 유일하게 동포라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무엇이 그 동료를-어떤 의미로는 셰라 자신이기도 한 그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이 분노, 이 격렬한 증오를 누구에게 돌려야 할 것인가. 누구에게 부딪쳐야 할 것인가.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모든 사건의 원인, 모든 것의 근원,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 잇다. 절실하게 잘 알고 있다. ‘리,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명령을 어기겠습니다. 당신은 몇 번이고 저를 부하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 말씀에 의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왕은 케이파드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레티시아의 동향도 신경 쓰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의 자신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펜체를 통과한 뒤 셰라는 동 쪽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북 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7장 “어서 드십시오. 피곤하실 테니 조금 수면을 돕는 물건을 조합했습니다. 푹 쉬실 수 있을 겁니다.” 뮤렌은 솔직하게 잔 안의 내용물이 수면제라고 말했지만 ,왕비는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뮤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잇는 인간은 없다. 예전에 달튼도 말했던 것처럼, 야생 호랑이를 마주 보고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이 없는 것과 마찬 가지 였다. 뮤렌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돌바닥 위에 머리를 조아리며 필사적으로 말한다. “이런 물건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이라 불리는 분. 당신의 존재는 이 튼튼한 성벽 안에서도 저희 병사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돕는다 생각하시고 한동안 잠들어주시도록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왕비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재워놓고 죽이려고?”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뮤렌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연극은 아니다.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기,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말씀은 도저히 비장군의 말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당신은 이 성의 손님이십니다. 어째서 저희가 그런 수단을 써서까지 이 성에 찾아와 주신 당신의 생명을 노려야 한다는 겁니까?” “손님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것도 예의 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걸.” “그, 그것은... 부디 용서를.... 저희들로서도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은 그..., 인간의 상식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계시므로....” 왕비는 또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이 녀석들의 생각이야 분명 그렇겠지. 자신이 멀쩡히 일어나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 차라리 재워두는 편이 안심이라고. “이 약, 누가 준비했지?‘ “저어....” “이 성의 인간이 아니지?” “아니. 그것은....” “그 자가 너희들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겟지만 그 녀석은 처음부터 내 목숨이 목적이야.. 자신은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 너희들을 이용해서날 붙잡는 데 성공햇다는 말이지.” 그리고 자신은 거기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는 말이다. 왕비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하긴 해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끝까지 투항을 거부하면 천명의 기사단원이 산 채로 통구이가 되었을 것이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다면 몰라도, 포로가 되어 그런 식으로 죽어버리면 개죽음일 뿐이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자기 한사람만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 최악의 경우라도 살해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계산했건만 상대 쪽이 한 수 위였다는 말이다. 레티시아와의 승부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두뇌 싸움에서 언제나 밀리고 있다. “죽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마실 수는 없겠는걸.” “아니, 기다려주십시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이 약탕은 제 집사가 조합했습니다. 젊었을 때 남쪽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어서 진귀한 약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뮤렌은 곁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집사를 불러오도록 명했다. 집사는 한 눈에도 인품이 있어 보이는 키가 큰 초로의 남자였다. 동작도 세련되고 부드럽다. 우수한 집사는 언제나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법이지만 이 남자 역시 그랫다. 그러므로 뮤렌으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듣고 그 얼굴에 경악과 곤혹이 표정이 떠오른 것은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며, 암살자라는 혐의를 받은 인강으로서는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엇다. “이, 이건 정말로 뜻 밖입니다. 저는 그저....” 그렇게 말하려다 아직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 왕비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보나리스 성의 집사인 민스라고 합니다.” 온화한 미소나 지극히 정중한 말씨. 어디를 봐도 숙련된 집사 그 자체이다. 왕비는 민스를 똑바로 쳐다 봤다. 이 시선을 받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다면 굉장히 의심스럽겠지만 집사는 불편한 듯이 몸을 움찔거렸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 약, 네가 만들었냐?” “예, 하지만 맹세코 몸에 해로운 약초는 넣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러우시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마셔보겠습니다.” “난 독이라고 한 적 없어. 하지만 상당히 특이한 약초를 섰었는걸.” “예, 그것은 양귀비라는 약초입니다. 중앙에는 별로 알려져 잇지 않지만, 마란타 남쪽 지방에서는 진정작용이 있어서 흔히 사용하곤 하지요. 저는 젊었을 때 마란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만, 그 나라의 의술은 이 곳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래서 굳이 이걸 조합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편히 쉬실 수 있는 약을 만들라고 성주께서 명령하셔서....” 민스는 어째서 자신이 심문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 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뮤렌의 눈치를 살핀다. 그 완벽한 연기 뒷면으로, 민스는 동료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만큼 호마를 먹여두면 아무리 약이 안 듣는 왕비 씨라도 잠들게 될 거야. 어떻게든 스스로 마시도록 잘 설득해줘.” 레티시아는 진지하게 강조했고, 민스는 조금 기분이 상했었다. 의심받을 만한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이겠지만, 가짜 경력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 쯤은 손쉬운 일이다. 민스는 일족 중에서도 노련한 행동원 이었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마음 속까지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런 자신을 두고 갓 일을 시작한 신참이라도 대하듯 지시하는 품이 불쾌했던 것이다. “굳이 그런 소리까지 할 필요 없어. 겉모습대로 안전한 인간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면 되겠지.” “믿어줄 경우의 얘기지만 .” “그거 넘겨들을 수 없는걸. 내가 왕비를 속일 수 없을 거라는 말이야?” “호마까지 끄집어내면 네가 아무리 능숙하게 연기해도 무리야. 그 왕비 씨는 내 냄새를 기억하고 있느니까.” 민스는 기가 막힌 수 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군. 그럼 다른 걸 쓰면 될 거 아냐. 요는 잠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마 다른 약은 안 들을거야.” “레티. 너 대체 무슨 속셈이야?” 숙련된 행동원인 민스조차도 레티시아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럼 내 역할은 뭐지? 정체가 들통날 걸 뻔히 알면서 호마를 꺼내놓고 왕비가 스스로 마시게 만들라는 말이야?” ‘바로 그거. 이해가 빠른 걸.’ “적당히 해둬. 굳이 손을 쓸 이유가 없잖아..” 탄가 측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놔둬야만 방심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최후까지 이쪽의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될 텐데. “보나리스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인질까지 성에 수용한 뒤면 들켜도 별로 상관없어. 오히려 들키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만큼 왕비 씨의 호감을 샀다는 자신은 있으니까 말이야.” “뭐, 뭣...?” “됐으니까 내가 부탁하는 대로만 잘해줘.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물러서지 말고 요구를 내세워. 절대로 타협하지 말고. 너무 저자세로 나가도 안 되지만 , 인질을 방패로 협박하는 건 더 금물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 줘.” 말투는 느긋하면서도, 레티시아는 민스의 재능을 믿고 이역을 맡기려 했다. 그리고 민스는 뮤렌에게 왕비와 어떻게 교섭을 진행해야할지 세밀하게 지시했다. 도망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워두는 편이 낫다는 말은 분명히 뮤렌이 먼저 꺼냈지만, 그 말을 하게 만든 것은 민스의 수완이었다. 눈치 채지 못하게 마련된 무대 위에서 뮤렌은 연출가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즉, 필사적으로 왕비에게 매달렸다는 말이다. “굳이 말씀드린 필요도 없는 얘기입니다만, 인질이라는 것은 살려두고 이용하는 법입니다. 당신의 목숨은 반드시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 “그래도 싫다면?” 뮤렌은 여전히 저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어두운 기척이 더해졌다. “그렇다면 정말로 본의가 아니지만 , 이 잔을 드셔주실 때까지 사로잡힌 자들의 손가락은 하나씩 베어내겠습니다.”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민스는 경악했다. 대사가 다르다. 얌전히 들어 준다면 인질을 풀어주겠다고 하기로 했는데 , 너무나 태연한 왕비가 얄미워서인지 이 쪽의 우위를 과시하고 싶어진 건지 멋대로 각본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 연출의 변경이 줄거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왕비를 겁먹게 만들려 했던 뮤렌의 의도는 완전히 정반대의 효과를 불렀다. 왕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낮게 웃었다. “과연, 그런 얘기인가. 처음부터 그 사람들을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지? 아니면 이미 죽인 건가?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얌전히 있을 이유도 없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정말로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경비병들이 재빨리 무기를 쥐었다. 민스는 더욱 당황했다. 장난이 아니다. 레티시아조차 지금까지 계속 고전을 거듭했던 여자다. 무기를 들고 덤비면 오히려 그 무기를 빼앗아 더욱 날뛸 것이 뻔했다. 아니, 머릿수에는 이길 수 없으니 보통은 이 쪽이 이기게 된다. 왕비가 아무리 맹렬하게 저항해도 결국 힘이 다해 쓰러지게 된다.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에는. 일덴의 행동원들은 초인적인 힘으로 피떡이 되어버렸다고 하던가,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성령들조차도 두려워하며 접근하려 들지 않는 존재.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고생하는 거잖아.’ 레티시아의 중얼거림이 뇌리에 떠오른다. 민스는 크게 당황하는 척하며 왕비의 앞을 가로 막았다. “비장군님, 기다려 주십시오. 부디 섣불리 행동하지 말아주십시오. 지금 얘기는 성주님의 실언입니다. 천지신명에 맹세코 그 분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럴 거잖아?” “예...?” “여기에 얌전히 있어봤자 그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당해. 그럼 내가 얌전히 있어봤자 의미가 없잖아?” 진심으로 이상하게 여기는 어조였다. 살려낼 수 없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왕비는 곧바로 일의 우선 순위를 매겨 버린 것이다. 무사히 돌려보내준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생명을 걸고 지킬 가치가 있다. 하지만 결국 살해당할 거라면 포로들은 아직 살아만 있을 뿐이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죽은 자는 자신의 발을 묶는 족쇄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다. 실로 그답지 않은 일이지만 , 민스는 정체모를 오한을 느꼈다. 뮤렌이나 다른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뭔가 다르다. 사람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자신들과 다르다. 민스는 정신을 차리고 지극히 침착하게 말했다. “용서해주십시오.... 성주님의 실언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분들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성의 손님이십니다. 저희 탄가의 긍지와 명예를 걸고, 손님께 그런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왕비는 가만히 민스를 응시했다. 전신을 꿰뚫는 듯한 선명한 녹색 눈으로. “그런 의미에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부디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저희들의 생명줄 입니다. 월 폐하의 분노로부터 몸을 지키는 의미에서라도, 전쟁을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라도 이 성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불쾌하실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만 부디 이것을 들어 주십시오. 제 생명을 걸고라도 기사단 여러분을 곧바로 놓아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왕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또다시 우선 순위가 바뀐다. 그 사람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날뛰는 것은 피해야 한다. 다시금 쟁반 위의 술잔을 쳐다보았다. 야생동물과도 같은 왕비의 감은 , 이 안에 든 약 자체는 독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마실 수도 없는 미묘한 상황. 그러나 이 약을 마시면, 마신 뒤 의식을 잃으면 아마도 두 번 다시 눈을 뜰 수 없겠지. 잠들어 있는 인간을 죽이는 것쯤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 대상이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이라고 추앙받는 왕비라고 해도. 왕비는 의약에 대해서는 거의 지식이 없다. 이 약탕이 얼마나 강한 효능을 지녔으며 얼마나 효과가 오래 지속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독약 만이 아니라 , 가지고 있는 수면약이나 마취약을 전부 다 내놓게 해볼걸...‘’ 셰라와 시험해봤던 ‘독약 맞히기 놀이’를 떠올리고, 훈련 부족을 통감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왕비는 기묘한 기분으로 술잔을 바라봤다. 캐리건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폴라의 눈물 역시 마찬가지 였다.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다. 목숨이 아깝다면 그 때 캐리건을 져버렸겠지만 ,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자신의 생명은 지금 그 남자의 수중에 들어있다. ‘그것도 좋겠지....’ 왕비는 마음을 다졌다. 처음부터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는 목숨이었다. 가능하다면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파트너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이것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저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국왕이었다 월 그리크는 적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여기에 붙잡혀 있는 한 괴로워 할 것이다. 불리한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죽어버리면 그 문제도 해결되지만, 탄가가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 국왕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댄다면?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 말려든 기사단원들도 어떻게든 해 줘야 한다, “그럼 포로가 전원 석방되는 걸 확인한 뒤에 마시겠어.” “비장군님, 그것은....” “너희들이 바라는 건 내가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이잖아? 이걸 마시면 난 틀림없이 움직이지 못하게 돼. 그 전에 먼저 기사 단원들을 풀어줘도 될 거 아냐.” “물론 맹세코 기사단원들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당신께서 이 약을 드신 뒤의 일입니다.‘ “순서가 반대야.” “아닙니다. 비장군님, 그거야말로 저희들이 드릴 말씀입니다. 당신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잴 수 없는 분. 저희가 무기를 맡고 이렇게 엄중한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어도 당신이라면 투신의 힘을 빌려 언제라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승리의 여신의 화신이라면 그 정도는 간단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저희들의 걱정거리입니다. 당신만 저희들 수중에 머물러 주신다면 기꺼이 기사단 분들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하오나 그 분들을 풀어버린 뒤 당신이 모습을 감춰버리시면 저희들은 주군 조라더스 왕께 두 번 다시 고개를 들 면목이 없어집니다.” “그, 그렇습니다.” 뮤렌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왕비는 싸늘한 눈으로 뮤렌을 흘겨봤다. “넌 입 다물고 있어.” “그, 그거 너무하시는군요. 저는 이 성을 책임지고 있는 성주입니다.” “성주든 대신이든 상관없어. 너, 그 사람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했지. 그런 협박을 하는 인간을 어떻게 신용하란 말이야?” 의연하기 짝이 없는 왕비의 태도를 보면서, 민스는 그제야 레티시아가 햇던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것은 거래이다. 거래의 기본은 신용. ‘대금을 받고서 물건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지. 그래서는 거래가 아니라 그저 사기일 뿐이니까. 쉽게 속일 수 있는 상대라면 아무리 속여도 상관없지만 그 왕비 씨는 그게 안 통한다고.’ 상대를 신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어려운 거래도 성립된다. 왕비는 처음부터 그들 열 명의 목숨을 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어린애 같은 걸까, 아니면 기가 막힐 정도로 교활한 걸까. 그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왕비는 당당하게 교섭의 자리에 섰지만 탄가 측에는 이런 교섭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민스가 할 수밖에 없다. 민스는 고정관념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거래는 보통 성립되지 않는다는 상식을 지금만은 잊어버려야 한다. “비장군님.”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말씀하시는 대로 거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또한 우위에 있는 이가 먼저 다소 양보를 해주어야만 입장이 약한 쪽도 안심하고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당신께 그 양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입장이 우위라고?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혼자 이 많은 적병 사이에 갇혀 있는 내가?” “예.” 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진지하게. “결정하시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먼저 조건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 이상 저희들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잠에 떨어진 뒤에 너희들이 약속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님과 맺은 약속입니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키겠습니다.” 이런 말이 설득력을 지니는지 아닌지는 전부 말을 꺼낸 본인의 태도에 달려 있다. 지금 민스는 완전히 탄가인 집사가 되어 있었다. 탄가인이라면 왕비를 도망치게 할 수 없지만 절대로 죽일 수도 없다. 탄가의 압도적인 우위와 승리를 보장해주는 인질이다. 이 정도의 포로를 붙잡아놓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채로 죽여버리면, 조라더스로부터 격하게 질책을 받는 정도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죽음으로 보상하게 된다. 왕비가 이 성에 얌전히 있어준다면, 가능한 조건은 전부 양보할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왕비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고 기사단원들도 풀어줄 생각이었다. 왕비는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그런 민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뮤렌을 돌아봤다. “너도 같은 의견인가?” “그야 물론....” “아무리 신뢰할 수 없어도 일단은 네가 책임자니까 너에게 말해두지. 난 지금부터 한잠 잘 테니까,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기사단원들을 석방해.” “예, 옛. 맹세코 그렇게 하겠습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뱀 앞에 묶인 개구리 같은 표정이었다. 왕비는 그래도 봐주려 하지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뮤렌을 노려본다. “알겠어?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과 맺은 약속을 어기면 그때는 각오해두라고. 설령 그때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지옥 바닥에서라도 돌아와서 네 목을 따주겠다. 그뿐만이 아니야. 탄가 전체에 영원히 저주를 걸어줄 테니까.” “마, 마, 말도 안 됩니다.” “비장군님. 절대로 그런 짓은....” 뮤렌도 민스도 안색이 확 변하면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필사적으로 맹세했다. 그 필사적인 말을 듣는 건지 아닌 건지, 왕비는 아무렇게나 잔을 들어올려 내용물을 전부 비웠다. 자기 발로 침대로 걸어가 자리에 눕는다. 긴장하며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 전원이 기가 막혀버렸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해결된 걸까 의아해하는 동시에, 이걸로 정말 가장 어려운 난관을 돌파해낸 건지 확신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잠들어 있는 맹수를 쳐다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침대를 살펴보자, 일단 눈을 감았던 왕비가 상체를 일으키며 불평했다. “뭐 하고 있어. 썩 나가지 않고. 여자가 잠자는데 남자들이 늘어서서 구경하는 게 아냐.” 국왕이 들었다면 이런 때만 여자인 척하지 말라고 불평을 던졌을 것이다. 뮤렌은 당황하며 병사들을 바깥으로 물러나도록 지시하고, 문밖에 보초를 세우도록 했다. 민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속의 생각은 달랐다. 이겼다. 왕비와의 꼬리잡기에서 드디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곧 왕비는 깊은 잠에 빠졌다. 길고 어려운 여정이었지만 이제 모든 것의 결말이 난다. 은밀한 만족감과 승리감을 맛보면서 민스는 정중하게 절을 하고 누워 있는 왕비의 방을 나오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왕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레티한테 잘 부탁한다고 전해.” 민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발을 멈추지도, 몸을 경직시키지도 않았다. 태연하고 방에서 나와 문을 닫기는 했지만, 민스의 얼굴은 격렬한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흠칫 뒤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오랫동안 ?ㅠ아온 수련 덕분이었다. 하지만 민스가 받은 충격은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정말로 다 알고 한 말일까. 술잔의 내용물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면서 그렇게 태연하게 마셨다는 건가. 그런 게 과연 가능한 걸까. 민스는 왕비를 호송해온 일행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방으로 가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병사 한 몀을 흔들어 깨웠다. 그 병사는 번쩍 눈을 뜨고 낮게 속삭였다. “어떻게 됐어?” 다른 병사들은 아직 강행군의 피로가 회복되자 않아 완전히 뻗어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두어 시간만 쉬면 충분했다. 이 남자는 동료들 중 한 명인 개스퍼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호송대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뭔가 착오라도?” 개스퍼의 질문에 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순조로워. 지금까지는.” 민스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일 아침 기사단원들이 풀려난다는 얘기도. “레티가 계획한 거래까지는 무사히 끝났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책임은 내가 지겠어.” 개스퍼에게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8장 붉은 장미와 하얀 방울꽃이 시선을 끈다. 깔끔한 방 안에서 그 곳만이 화려했다. 온 방 안에 꽃향기가 가득 차 있다. 루는 꽃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큰 꽃병에 꽂혀 장식된 호화로운 생화. 아름답다. 하지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그 아이가 지잰다는 이 방에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뒤를 돌아보자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심부름꾼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루는 일부러 물어보았다. “이 꽃 안 좋은 거 아닌가요?” “장미를 싫어하시나요?” “아니, 난 좋아해요. 하지만 여기 왕비님은 싫어하지 않을까 해서.” “아뇨, 좋아하십니다. 출정하시기 전에도 붉은 장미를 가슴에 꽂고 가셨는걸요.” “정말로?”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때는 한 송이 밖에 피지 않아서.... 장미는 지금이 제 철이니까 돌아오셨을 때 바로 보실 수 있도록 이렇게 꽂아두었습니다.” “이 꽃은 당신이...?” “예, 저희 집 정원에서 키운 꽃입니다. 나시아스 잔펠의 처 라티나라고 합니다. “난 루퍼스 라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왕궁에 나타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궁정 귀부인의 주목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북 쪽 탑에서 본궁의 객실로 이동한 바로 당일, 왕비의 옛 애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왕궁 전체에 쫙 퍼졌다. 라티나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지만 흥미는 있었다.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 하고 잇다가 직접 보게 되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실례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치떴다. 긴 검은 머리에 매끄럽고 새하얀 피부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그렇다고 이 이궁에서 근무하는 소년처럼 여자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뭐랄까,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두 사람만 있다는 사실에 초조해 하면서 라티나는 서둘러 말했다. “루퍼스님. 오후에 열리는 폴라님의 다과회에는 참석하시는지요?” 남자라서 이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종류의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라티나 자신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어색한 기분이었다. “님 까지는 필요 없어요, 저도 갑니다. 초대 받았으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대한 것은 국왕이다. 한 번 느긋하게 루와 얘기를 나눌 시간을 마련하고 싶기도 했고, 폴라와 루를 만나게 해줄 생각도 있었다. “가능한 한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조금 늦어질지도 몰라. 그 때는 손님을 이쪽으로 오게 할 테니 난 상관하지 말고 먼저 시작해줘.” 국왕은 폴라에게 그렇게 부탁했고, 폴라는 그 전 날부터 열심히 다과회를 준비했다. 왕비가 어렸을 때부터 사귀어온 친구라고 하니 조금이라도 대접이 소홀해서는 안 된다. 오후가 되자 아란나도 준비를 도우러 왔다. 라티나도 일단 자택에 돌아가 자신이 가꾼 생화를 안고 찾아왔다. 이제는 모두 가까이에 살고 있는 이웃인 셈이다. 아란나와 라티나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이기도 하다. 폴라도 소 귀족 출신이다 보니 두 사람과 마음이 잘 맞았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란나는 ‘왕비의 친구’에 심상치 않은 흥미를 보였다. 라티나가 그 사람과 만났다는 말을 듣자 눈까지 반짝이며 물었다. “어떤 분 이었지요?” “음.... 아름다운 분이더군요. 굉장히.” 라티나가 우물거리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조금.... 뭐라고 해야 할까, 특이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비전하도 그 점에 있어서는 상당히 특이하신 분이니까요.” “그렇지요. 비전하의 친구 분쯤 되시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더 놀라울 거예요.” 바쁘게 일하면서 아란나도 동조했다. 폴라는 거실 창을 깨끗하게 닦고 있었다. 커튼걸이에 조화와 나무열매, 말린 덩굴을 장식하며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오늘도 화창한 날씨였다. 부용궁의 정원에도 꽃이 한창이었다. 폴라는 이 곳에 올 때까지 식량이 될만한 야채밖에 키워본 적이 없었지만, 바로 근처에 잔펠 부인이 살고 있다보니 여러모로 배우게 된 것이다. 잔디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고 , 화단에는 선명한 빛깔의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 있다.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 공기에 꽃향기가 그윽하게 감돌았다. 사실 이런 날에는 테라스로 나가 차를 들고 싶었지만, 잠깐이라도 문제의 손님을 보려고 하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새하얀 레이스를 깔고 , 네 귀퉁이에 추 대신 장식을 단 뒤 라티나가 가져온 생화를 테이블 위에 장식했다. 창가 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 폴라는 문득 얼굴을 들었다가 숨을 삼켰다.. 폴라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만나보는 천사였다. 첫 번째는 왕비, 그 사람은 전장에서 빛나는 수호 천사 같았다. 그런데 이번의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었다. 등에 펼쳐진 새하얀 날개가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천사는 창틀에 걸터앉아 막 들어오려던 자세 그대로 생긋 웃었다. “여기가 부용궁?” “아..., 네! 그렇습니다.” 당황하며 대답했다. 다시 상대를 똑바로 쳐다봤지만 날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폴라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째서 착각을 한 걸까. 기분 탓? 아니면 역광 때문이었을까? 폴라의 가슴은 아직도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임금님은 일이 바빠서 조금 늦는다던데요.” “아, 옛. 일부러 알려주시기까지..., 죄송합니다.” 부엌에서 나오던 라티나는 어느 틈엔가 거실에 들어와 있는 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아란나도 거실로 나왔다. 서로 소개를 마치고 차를 들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보다 더 예쁜 남자 분은 처음 뵈어요.” 이것이 아란나의 감상이었다,.(아란나는 아직 셰라가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본인을 눈앞에 두고 당당하게 ‘정말 아름다우시네요.’라고 감탄하며 그 미모를 황홀하게 감상한다. 그러나 아란나의 경우는 순수하게 아름다운 대상을 평가하는 것뿐, 이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아란나는 남편 피사로만을 사랑하고 있다. 아니, 자신은 피사로의 부인이라는 확고한 신념아래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남자는 남자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머리, 빗질하기 힘들지 않으신가요?” “괜찮으시다면 언제 한 번 땋아 봐도 괜찮을까요?” 흥미진진하게 이런 질문까지 던지는 것이다. 루도 웃으며 말을 받아주었다. “머리를 땋는 건 여자들뿐이잖아요? 아란나는 오빠 머리카락까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나요?” “아뇨, 땋는 것까지는 시켜주지 않아서요. 빗질까지는 시켜줬지만.” “그야 남자라면 보통 싫어하니까.” “어머나 하지만 가장 무도회라도 하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살짝 화장을 해서 비단 드레스라도 입으시면 엄청난 미녀가 되실 텐데요.” “여자들은 그런 놀이 좋아하지요. 하지만 남자들이 따라붙으면 제가 곤란해요.” 실로 즐거운 분위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곁에서 보고 있던 라티나는 시누이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높여 존경하기로 했다. ‘강해....’ 이 강인하, 이 현실성. 과연 두 아이의 어머니. 폴라는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직접 만든 과자에 가벼운 요리를 대접하고 있었다. 건포도가 든 빵, 잼을 곁들인 비스킷,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를 넣은 쿠키 등등. 루는 정말로 신나게 다과를 들고 있었다. 케이크에 이르러서는 전 종류를 더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폴라의 요리 솜씨를 칭찬했다. “맛있어요. 과자 만드는 솜씨가 정말 좋네요. 이렇게 맛있는 과자는 먹어보기도 정말 힘든데.” “저어..., 혹시 단 걸 좋아하시나요?” “굉장히.” “어머나, 실수했네요. 그럼 더 많이 만들어 둘 것을. 왕비님께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그만....” 루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얘한테 과자는 먹여봤자 소용없어요. 뭘 만들어 줘도 ‘달아!’ 한 마디로 치워버리니까.” “그렇지요. 솜씨를 부린 보람이 없어서....” 고개를 힘껏 끄덕이다가 폴라는 갑자기 말을 돌렸다. “과자를 직접 만드시나요?” “만들죠. 요리도 하는데 . 괜찮으면 저녁 식사에 뭔가 만들까요?” “말도 안 됩니다! 손님께 그런 일 시킬 수는 없어요!” 폴라는 당황하며 외쳤지만 루는 유쾌하게 웃었다. “임금님이 총애하는 분이 만들어 준 과자 쪽이 더 엄청난데요.” 맞아 맞아, 아란나와 라티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폴라 본인뿐이었다. “하지만 전 이게 유일한 장점인걸요.” 청소나 세탁 같은 건 하인들에게 시키고 있지만, 바느질을 원래부터 좋아하던 폴라는 매일같이 뭔가를 만들고 있다. 식탁에 깔린 멋들어진 레이스도 폴라의 작품이었다. 그때야 국왕이 나타났다. “이런, 늦어서 미안, 내가 소개했어야 하는데.” 폴라는 국왕을 위해 남겨둔 과자와 차를 가지고 왔다. “슬슬 왕비한테 보낸 편지가 도착할 때가 되었지만, 그 쪽은 최전선이니 바로 몸을 뺄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서쪽과 동쪽에 있는 나라들과 동시에 전쟁이라....” 루는 감개무량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보통 협공을 당하면 압도적으로 불리할텐데 잘도 버티고 있군요.‘ 폴라가 힘차게 말했다. “당연합니다. 델피니아에는 왕비님이 - 승리의 여신이 계신걸요.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발끈 열을 내어 말하는 모습을 보고 국왕이 미소를 지었다. 루도 웃었다. 의외였지만,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른 같은 표정이었다. 국왕을 바라보며 묻는다. “지금의 전황은 어떻죠?” 처음 만났을 때의 리와 마찬가지로 , 루 역시 이 세계의 정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흐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전력 자체는? 세 나라 모두 마찬가지?” “그런 셈이지. 굳이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조금 우세해. 타우라는, 다른 두 나라가 예상조차 못하던 전력을 소유하게 된 만큼 병력의 수는 다른 나라보다 앞서 있어. 하지만....” 싸움은 머릿수만으로 결정 나는 게 아니다.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서 꼭 결정적인 승리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설명을 하기도 전에 루가 말했다. “기동력은 말과 사람의 발, 무기는 검인가. 그럼 분명히 작전에 따라서 어떻게든 될 수 있겠는데.” “예외도 있어. 비리그나가 그렇지. 그 튼튼한 요새 안에 틀어 박혀 있으면 손쓸 길이 없어. 게다가 농성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 방어가 견고하기로 유명한 파라스트 군이니까.” “파라스트의 임금님은 어떤 지도자?”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너구리.” 그럼 탄가의 임금님은?“ “미친 천재.‘ 이것이 솔직한 평가였다. 선대까지는 국토 자체는 넓어도 각지의 영주들에 의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대화삼국이라는 것도 명목뿐인 가난한 나라였다. 조라더스는 그 험악한 산지에 위치한 나라를 스스로의 힘으로 대국으로 만들었다. 오론 역시 견고한 군대와 약삭빠른 태도, 거기에 뛰어난 모략으로 착실하게 세력을 넓힌 실력자였다. “그럼 델피니아의 임금님은?”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곰이라더군. 왕비가 그러던데.” 루는 푸른 눈동자를 신비롭게 빛냈다. “그럼 그 임금님들이 없어지면, 세 나라는 모두 지금까지처럼 싸울 수 없다는.?‘ “탄가와 파라스트는 그렇겠지. 오론의 후계자로 내정된 왕자는 아버지에게서 전혀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인물이야. 조라더스의 자식들도 특별히 우수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아무래도 대화삼국은 후계자에 관해서만은 운이 없는 모양이야.” “너무 운이 좋아도 문제 아닐까나.” “흐음?”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자리를 빼앗아버릴 정도로 우수한 후계자는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너무나 태연하게 하는 말을 듣고 , 국왕은 잠시 동안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루의 눈은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임금님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피가 이어진 후계자에게 확실하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배자라는 사실이고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는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용서치 않는 사람. 얘기를 듣자하니 탄가나 파라스트의 임금님은 후자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자기 대에 자기 나라를 가장 강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지요. 그런 임금님에게는 후계자도 그저 도구일 뿐 이예요. 연약한 후계자라면 야 상관없겠지만, 자기 위치를 넘보는 인간이어서는 곤란하니까. 하지만 말이죠,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구요. 개성이 강하고 유능한데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만한 실력도 있고 사람 다루는 요령도 잘 알고 있으면서 임금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 말이죠. 그 정도 실력이 있으면 귀찮은 늙은이 따위는 쫓아버리고 빨리 왕좌에 앉고 싶어 할 테니까. 그런데 권력욕이 강한 아버지는 적어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 줄 생각이 전혀 없죠. 그게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너무 잘난 왕자는 당연히 방해가 되는 겁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으니 처치해버리는 거지요. 양쪽 임금님도 아직 자식까지는 죽이지 않았나요?” “아니, 최소한 오론은 이미 했어.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월은 아연해서 대답했다. 부드럽고 소년처럼 선이 가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루는 혼잣말처럼 계속했다. “그렇게 개성이 강한 임금님은 가신에게도 의지하지 않지요. 중요한 결정은 맡기지 않아요. 자기가 모든 일의 중심이라는 게 전제이니까. 필요한 건 적절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지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자기 손 발처럼 움직여 줄 사람은 필요하지만 다른 머리는 필요가 없다. 그런 식이면, 당사자인 임금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네요. 특히 어느 한쪽이 죽거나하면 그것만으로도 전황이 확 바뀌고 마니까. 물론 그런 우연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입이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국왕은 흑발의 젊은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거 정말 놀랐는걸. 실례지만 처음에는 머리가 조금 모자란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혹시 엄청나게 내숭을 떨고 있었던 건가?” “그 말, 언제나 남한테 듣고 있으니까 한 번쯤 남한테 해보고 싶었던 것 아닌가요?‘ 핵심을 찔린 국왕이 말을 잃자. 루는 쿡쿡 웃었다. “처음엔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까요. 임금님이 이렇게 속편한 사람이면 괜찮을까 하고.” “경에게 그런 말을 들으려니 조금 마음이 아픈 걸.” “내 태도도 죄수로서는 완전히 실격이었죠. 다른 임금님 같았으면 사형이나 채찍형, 최소한 추방형쯤은 내렸을 텐데.”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내가 왕비 손에 죽게 될거야.” 루는 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입가를 가린채 키득거리며 웃고 있다. “멋진 걸, 이 임금님. 넝말 최고야.‘ “하지만 난 내숭 떨 생각 따위 조금도 없어. 그런 말을 종종 듣는 건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정말 바라는 바가 아니야.” “나도 그래요. 평소에는 멍한 주제에 어쩌고 자쩌고 , 바보인 척 하면서 방심하게 만든다는 식으로 불평을 해도 내가 의도한 건 아니니까요.” “글세 말아야. 의식적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하고 있었겠지.‘ “그렇죠?” 느긋한 대화였다. 예의바르게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듣고만 있던 여자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식은 땀을 흘렸다. 왕비와 국왕의 대화 역시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오곤 하지만, 어쩌면 이 쪽이 그 이상으로 무서운 대화일 지도 모른다. 루는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국왕을 쳐다봤다. “하나 더, 델피니아는 임금님이 없어져도 괜찮은가 봐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어.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국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까. 자랑스러운 내 종제지.” “하지만 임금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보통 왕자님이 뒤를 잇는 거 아닌가요?” “어쩔 수 없지. 난 아직 자식이 없으니까.” 그 이상은 언급을 피했다. 지금은 당사자인 폴라와 외부인인 아란나도 함께 있다. 자세한 얘기는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서 하기로 했다. 루는 본궁의 방 하나를 배정받아 손님으로서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는 거의 들어가지 안았다. 왕궁이 상당히 마음에 든 듯 항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다. 이 날도 그랬다.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고 훌쩍 밖으로 나가 버렸다. 국왕은 여자들에게 그 손님의 인상에 대해 물어봤지만, 세 명 모두 의견이 전혀 달랐다. 라티나는 특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무섭다... 고는 할 수 없지만 , 뭔가 이상한 존재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아란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경계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분이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절대로 무서운 건 아닙니다. 그 분은 부드럽고 온화한 분이시지요. 그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 마치 나무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예기를 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 그런 느낌이랄까요.” 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저분의 등에서 천사의 날개를 봤는걸요. 기분 탓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평범한 인간과 다른 분위기니까요.” 국왕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하지만 나무가 말 좀 한다고 별로 피해가 오는 건 아니잖아?” “바로 그겁니다!” 갑자기 라티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국왕이 놀랐다. “뭐가?” “분명히 그런 문제인 겁니다. 폐하는 나무가 사람의 말을 해도 , 움직인다고 해도 폐하께 피해가 가는지 아닌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해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 이상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한 분이시지요.” “은근히 말을 돌려서 둔하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하지만 폐하. 저는 나무가 말을 하면 무섭게 느껴질 겁니다. 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태연하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다른 나무들처럼 가만히 있어줄 수 없겠느냐고 빌고 싶어질 겁니다. 그 분을 보고 느낀 것은 바로 그런 답답함이었습니다.” 폴라는 천사라고 하고, 라티나는 말을 하는 나무라고 평했다. 한편 루를 보고 이성을 잃은 간수들처럼. 그 날 밤, 국왕은 일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집무실에 매여 있었다. 심야가 되어서야 집무실을 떠날 수 있었지만, 약속대로 거실로 찾아갔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실은 코랄 성이 자랑하는 정원에 접해있어 이 계절에는 상쾌한 밤공기를 즐길 수 있었다. 방을 사용하겠다고 미리 전해 두었기에, 시종들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국왕을 맞이했지만 정작 손님은 아직 거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국왕은 정원을 향해 배치한 의자에 앉아 시원한 과실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국왕도 그 손님에게 큰 흥미가 있었다.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할 얘기도 있었다. 아무 기척도 없다가, 정원 쪽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둠이 분리되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국왕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초여름 밤, 가지를 활짝 펼친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난 그 인물은 주위의 식물들과 완전히 동화되어- 아니, 지배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밤하늘 아래에서 이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마치 딴 사람처럼 인상이 달랏다. 눈은 밥의 바다처럼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입가에도 요사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입술은 낮에 봤을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몸이 천천히 이 쪽으로 다가온다. 국왕의 곁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국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술잔을 손에 든 채 눈앞에 선 상대를 올려다보며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뭐랄까.... 천사는 천사인데 , 경은 검은 천사로군.” 붉은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밤이니까요. 지금은 나의 시간, 나의 세계니까.” “이 쪽으로 앉으시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종자들을 물러나게 한 뒤 둘만 남고 나서도, 국왕은 곧바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루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술을 마시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병 두개가 비어버렸다. 그렇게 마시고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국왕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상당히 강한 걸.” “술?” “단 것은 좋아한다고 들었지만, 설마 술도 잘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말이야.” “임금님도 상당히 센걸요.” “그러고 보니... 경을 보고 이성을 잃는 건 남자들만이 아닌 듯하더군, 시녀장이 한탄하던데.” 궁정 내부의 경영을 전부 책임질 정도로 유능하고 책임감도 강한 시녀장이 그런 불평을 터뜨리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누가 손님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느냐 하는 문제로 시녀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질 정도라고 하니 엄청나다고 할 수 밖에.“ 루는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그 애가 없어지고서 한동안 이상해졌을 때라면 이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걸요.” “그건... 더 심한 경쟁의 표적이 된다는 말인가?” “전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으니까요.” 국왕은 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엇지만, 부드러운 미소는 여전히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더군. 아무래도 경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나봐.” 검은 천사는 살짝 웃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임금님 눈에는 어떻게 보이죠?” “말 했을 텐데. 왕비와 닮은, 나와는 다른 생물로 느껴져.” “임금님은 왕비를 좋아하나요?” “그 정도 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겠는데.” “그리고 왕비도 임금님을 좋아한다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설 자리가 아닌데.” 깜짝 놀랐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며 곁에 앉아있는 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왕비가 날 좋아하는 지..., 어떻게 알 수 있지?” “그애가 싫어하는 사람하고 결혼까지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아니지만.... 경도 알고 잇는대로 우리들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야.” “하지만 임금님한테는 따로 부인이 있지요. 따라서 그 아이가 임금님한테 미안하기 생각할 필요도 없고 , 임금님이 갑자기 덮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고. 응, 정말 딱 맞는 남편감인걸.”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얘, 자기가 만지는 건 좋아하는 주제에 남이 만지는 건 싫어하니까요.” “만지는 걸 좋아해?”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라면.” “호오....” “임금님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되는데.... 몸도 딱 건장하잖아요. 베개 대신으로 베고 자거나 하지 않던가요?” “그러기는 했지.” 흑발의 청년은 키득키득 웃었다. “자기 아버지도 자주 베고 자곤 했죠.” “나도 경에게 한가지 물어봐야 할 일이 있어,” 국왕은 마음을 굳히고 말을 꺼냈다. “경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지?” “친한 친구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아니, 내가 묻고 있는 건 발견한 뒤의 일이야. 경은 왕비를 되찾으려고 온 게 아닌가?” 루는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되찾다니, 누구한테서, 어떻게?” “.......” “그 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될만한 얘가 아니예요. 난 그 애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럼, 그..., 왕비가 ...,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이대로 여기서 지내겠다고 하면?” “별로 상관없지 않아요? 그럼 나도 계속 여기에 같이 있으면 되는거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대답에 국왕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루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으니까 걱정 말아요. 이대로 왕궁에 식객으로 눌러앉을 생각은 없으니까. 으음, 점이라도 쳐서 생계를 유지하면 되겠네요.” “후우....” 국왕은 그답지 않게 긴 한숨을 내쉬엇다. “”이거, 곤란한 걸....“ “어째서 임금님이 곤란하다는 거죠?” 이상한 듯이 묻는다. 아무래도 루는 자신이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듯했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국왕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지금 궁정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경이 왕비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쫙 퍼져있어.” 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무서운 상상을 잘도 하네.” “동감이야.” “헤에? 그럼 임금님은 지금 부인의 애인하고 같이 술을 마시고 잇다는 말?” “그런 셈이겠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걸.” 루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우리들은 서로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망가진 기계 같은 거니까.” “왕비는 고장 따위 난 적 없는데.” “그럼 그건, 내기해도 좋아요. 임금님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 “임금님을 보고 있으면 그 얘 아버지가 떠올라요. 곁에 있기만 해도 안심할 수 있는- 조금 다른가. 이쪽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숲 속의 나무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해도 해가 없다면 내버려 두는?” 파란 눈이 또다시 동그래졌다. 국왕이 아까 라티나와 나눴던 얘기를 들려주자 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들 전부 대단하네요. 남편들 얼굴도 꼭 보고 싶어지는걸요. 폴라의 남편은 여기 있지만 , 다른 두 사람은 어떤 사람?” “여자에 흥미를 보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그 남편까지 신경을 쓰는 거지?” “나한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생활이 충길하다는 말이잖아요? 부인이 건강하고 밝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좋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겠죠.” 국왕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아란나 양의 남편이라면 곧바로 만날 수 있어. 단, 라티나의 남편은 함께 전선에 나가 있어서 말이야. 왕비에게 돌아오라고 한 상황에서 나시아스 경까지 불러들일 수는 없어.” “라티나는 혹시 임금님의 애인이었나요?” “옛날 일이야. 지금은 나시아스의 부인이지. 어떻게 알았지?”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놀라며 묻자 루는 놀리듯이 생긋 웃었다. “경칭 없이 불렀으니까.” 국왕은 무심결에 자세를 고쳐 앉으며 불평했다. “정말 경은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로군. 이래서는 마음 놓고 세상 얘기도 못하겠어. 왠지 속고 있는 기분까지 드는걸.” “거 듣기 거북하네요. 내가 언제, 뭘 어떻게 속였다는 거죠?” 술잔에 술을 부으면서 루가 얼굴을 찡그렸다. “게다가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데. 여자들 말을 들어보니 처음에는 공주로 데려왔다가 나중에 결혼했다면서요?” “음, 엄청난 아수라장이 벌어진 뒤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애한테 반한 거죠?” “이상한가? 난 왕비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저....” 루는 다시 채운 술잔을 물이라도 마시는 듯이 단숨에 비워버리고 내려놓았다. 새하얀 얼굴이 국왕 쪽을 가만히 바라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볼 듯이 선명한 눈빛. “대놓고 묻자면 임금님은 어디까지 알고 있죠?” “어디까지라니...?” “그 아이는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라요. 임금님은 그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지요?” 국왕은 입을 열려다 주저하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이봐, 라비 경. 나도 묻고 싶네만, 내가 경에게 그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말하면 실례겠지만 경은 그 정도로 신용할 수 있는 상대일까?” 예기치 못한 역습에 루가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 참, 어느 쪽이 방심할 수 없다는 건지. 이러니 탄가나 파라스트의 임금님도 고생할 만하지.” “그러지 않았으면 델피니아는 이미 먼 옛날에 반으로 나뉘어서 두 나라에 병합되었을 거야. 이봐-, 라비경.” “루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왕비가 말이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신의 검도 생명도 파트너의 것이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은 내게 빌려주겠다고.” “.......” “분명히 왕비 때문에 놀란 적은 많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던 적도 한두 번은커녕, 한 쪽 손만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난 몇 번이나 왕비 덕에 목숨을 건졌어. 얼마나 날 도와줬는지 다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아. 수치도 은혜도 모르는 인간으로 타락하고 싶지 않다고.” 정신을 차려 보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국왕 곁에서 루가 낮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 애가 그렇게 말했군요. 임금님을 위해 싸우겠다고....” “나도 맹세했어. 검과 전사의 영혼을 걸고.” “그럼 나도 임금님을 믿을 수 있겠군요.” 갑작스러운 결론에 국왕은 깜짝 놀랐지만, 루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 애가 임금님을 위해 검과 목숨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도 그러기로 하지요.” 국왕을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그 아이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위해 생명을 걸어줄 테니까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지요. 왕비 대신은 될 수 없겠지만.” “아무도 왕비를 대신할 수는 없어. 우선 경의 조력을 필요로 할만한 일은....” “곧 그렇게 될걸요.” “뭣?” “임금님이 말했었죠? 왕비는 자유의 침해라는 점에 대단히 민감하다고.” “그랬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쇠사슬에 묶인 국왕을 본 순간의 타오르는 듯이 격렬하던 왕비의 분노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루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내게 있어서도 중요한 건 그것뿐이니까. 그 아이가 자유롭게 지내는 것, 행복해 지는 것, 정말 중요한 건 그것 뿐이에요.” 시선을 떨어뜨리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매끄러운 흑발은 목 뒤쪽에서 하나로 묶여 있지만, 한 가닥만 가늘게 땋아 앞 쪽으로 늘어뜨렸다. 새끼손가락 정도 굵기의 긴 다발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루가 말했다. “나쁜 예감이 들어요.” “음?” “어젯밤, 뭔가가 일어났어요. 이게 없었으면 또 머리카락이 난리를 쳤겠죠.” “뭐라고...?” “얼마 전에 왕비에게 큰 부상 같은 것 없었나요?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큰 부상.” 말을 잃은 국왕의 얼굴이 곧 대답이었다. 눈빛으로 어떻게 안 거냐고 묻자 상대는 살짝 웃었다. “나와 그 애는 말이죠. 그런 의미로 이어져 있어요.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죠. 그런데 곤란하게도 뭔가가 막혀 있다구요.” 한숨을 쉬면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왼쪽 목덜미에서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의 끝을 거의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그 아이와 만날 때까지 이것도 자를 수 없어요. 그런데 아무리 시도해 봐도 길안내는 이 성에서 더 이상 움직이질 않죠.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국왕은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 주게.” “왕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탄가에 인접한 국경을 넘어선 곳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지만....” “음, 그게 무슨?” “거기에는 이미 없어요.” “뭣?” “그렇지 않다면 델피니아군의 군세도 괴멸 되었든가. 그 정도로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요.” 국왕의 안색이 변했다. 도저히 넘겨들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라비경. 농담이라도 그런 얘기는....” “농담이 아니예요. 아마도 곧 전령이 도착하겠죠.‘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찬 어조였다. 그리고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네 병째를 비웠을 때 시종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도라 장군이 보낸 전령이 급히 알현을 요청한다는 소식이었다. 서간의 내용을 확인한 국왕의 안색도 살짝 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는다.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즉각 주요 가신들을 소집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날아온 소집이다. 그것도 국가의 경영에 관여하는 이들 대부분이 본궁의 회의장에 소환된 것이다. 하인들이 서둘러 불을 밝히고 가신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국왕은 전원이 모일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만큼 가신들의 불안과 긴장은 커져갔다. 이렇게 거창한 방식은 국왕답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사태라는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음에도, 마침내 나타난 국왕의 입으로 도라 장군이 보낸 서간의 내용을 들은 가신들은 거의 기절할 정도로 경악했다. 노신들에서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 나쁘게 흔들리는 촛불빛이 그들의 공포를 더욱 자극한다. 표면상으로나마 간신히 평정을 지키고 있던 것은 극히 소수의 몇 명뿐이었다. 개중에는 몰래 끼어든 루도 있었다. 하지만 루의 얼굴도 심각하게 굳어졌다. 누구보다도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은 국왕이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여든 가신들은 최초의 경악에서 풀려나 저마다흥분하며 의견을 말했다. 대부분이 왕비에 대한 비난이었다. “무슨... 짓을! 지휘관이 할 행동인가!” “그 분이 잡혀 있으면 싸울 수도 없어!” “경솔한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소! 병사들과 교환해서 군대를 이끄는 자가 자신의 신병을 적에게 넘기다니, 말도 안돼! 우리들이 모셔온 비장군은 그렇게나 어리석은 분이었던가!” “조용히.” 그 한마디에 잔뜩 흥분햇던 가신들의 입을 다물었다. 국왕은 신하들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팔짱을 풀며 조용히,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제군들은 모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델피니아의 군대는 왕비가 없으면 싸울 수 없나? 사로잡힌 왕비가 비웃을 일이야.” “하오나 폐하!” “조용히 하라고 했네.” 이 자리에서 평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국왕 한 사람 뿐이었다. 가신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다. 그렇게 가장하고는 있지만 가장 강렬한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불안과 초조. 귀찮기만 하던 왕비가 델피니아에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존재가 되어있다. 가신들은 아직껏 반감을 품으면서도 왕비에 대해 일종의 신앙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왕비의 성격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절대로 약한 자를 내버려 둘 수 없는 의협심 덩어리나 다름없지. 그렇기에 아무도 편들지 않는 버려진 왕 따위에게 힘을 빌려줬던 거야.” 국왕의 말에 가신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고, 어떤 이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어떤 이는 시선을 피했다. 그 때 , 이 자리에 있는 인간 대부분은 국왕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설령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페르젠 세력에 고개를 숙이고 그와 영합해 국왕 축출 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때 내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 영지는 물론이고 따르는 가신이나 병사 한 명도 없이, 남을 고용할 돈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왕비는, 그 때 발도우의 딸은 이 월이 이길 거라고 판단하고 도와준 게 아니야. 홀로 남은 국왕을 가엾이 여기며, 죽게 내버려두면 뒷맛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힘을 빌려주었다. 그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포로가 된 기사단원들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겠지. 탄가 놈들은-, 왕비가 자신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천 명의 틸레든 기사단원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을 거야.” “.......” “왕비의 결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우리나라의 유능한 젊은이가 한 명씩 헛되이 죽어갔겠지. 그걸 막고 싶었을 거야.” 도라 장군의 편지는 황급한 필체였다. 인질로 잡힌 기사단원의 성명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안에 캐리건 달시니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한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신음 했다. 왕비가 어떤 생각으로 행동 했는지, 누구를 감싸려고 했는지는 명백했다.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어. 그렇기에 젊은 병사들을 동생처럼, 자기 자식처럼 여기며 귀여워했지. 탄가는 절대로 왕비를 죽이지 않아. 아니, 죽일 수 없어. 반드시 살려두고 이용할 거다. 절대로 죽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는 자와 반드시 살해당하게 될 자. 이 차이를 왕비는 충분히 알고 있어. 그렇기에 스스로 적의 포로가 되었다. 살해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자신의 목숨으로 천 명의 젊은이들을 살려낸 것이다.” 국왕은 그 자리에 참석한 중신들을 한 바퀴 돌아보고서 의연한 태도로 단언했다. “그대들 중 누가 왕비의 결심을 비웃을 수 있겠나! 이 희생을 우습게 여기는 자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옛!” 가신단 전원이 바닥에 엎드리며 대답했지만, 그럼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앗다. “하오나 폐하. 저희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황하지 마. 그거야말로 적이 노리는 바다. 조만간 자세한 소식이 도착하겠지. 잘 들어라. 나 역시 한 때 파라스트의 인질이 되었던 몸. 그 때 나를 구해주었던 것은 왕비였다. 이번엔 내 차례야. 반드시 왕비를 구해내겠어.” 그 때 왕비는 누구보다도 먼저 국왕을 구해내려 했다. 델피니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르다. 왕비가 포로가 되었어도 국왕이 건재하다. 왕비가 의도했던 대로 중신들의 동요를 억누르고, 어디까지나 의연한 자세로 탄가와의 협상에 나서도록 지시했다. 중신들이 돌아간 뒤, 국왕은 엄청난 기세로 루를 몰아세웠다. “왕비는 어디에 있지?” 그 녀석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왕비는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이 이방인은 자기가 찾는 인물이 델피니아의 왕비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이 코랄 성에 나타났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바로 조금 전에 왕비의 몸에 이변이 생겼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국왕의 질문에 루는 고개를 저었다. 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땋은 머리를 손가락에 감으며 말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 정도밖에 알 수 없어요. 이걸 해방하지 않는 한은.” “그럼 빨리 그걸 해방해줘!” “임금님은 이게 왜 있다고 생각하죠?” 그 목소리가, 폴라가 천사 같다고 평하던 모습이 엄청난 박력을 띠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까 봉인한 겁니다. 이 성이나 임금님의 나라 절반이 날아가도 상관없다면야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국왕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자객을 눈 깜짝할 사이에 피떡으로 만든 왕비의 힘을 직접 보았던 만큼, 도저히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도움이 안 되는 내게 의지하기보다 이 도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거리를 찾아가보는 게 djm때요? 그기라면 장소를 찾아내는 것도 가능할 텐데.” “마법가! 어째서 경이 그것을....” “저렇게나 대놓고 기운을 흘리고 있으면, 힘이 봉해져 있어도 느낄 수 있어.” 새삼스럽지만 국왕은 이 방의 손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역시 자신이나 왕비보다도 마법가에 훨씬 가까운 성질을 지닌 사람인 걸까. 처음 인상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변함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다. “왕비가 있는 곳을 알아내면 그 뒤에는 어쩔 생각이죠? 거기가 어디든 간에, 어차피 적진 한가운데일 텐데.” “나 개인으로서는..., 나라의 반을 주더라도 왕비를 되찾고 싶어.” “그건 임금님으로서 실격이야.” “알고 있어!” 격렬한 갈등에 국왕도 언성을 높여버렸다. 탄가가 왕비를 내세워 어떤 요구를 해올지는 대략 상상이 간다. 먼저 국경에서 군대를 퇴각시키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탄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국왕은 낮게 신음했다. 그것만은 불가능하다. 설령 왕비와 교환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넘길 수 없다. 고뇌하는 국왕을 가만히 바라보다 루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소중한 것은 무엇?” 국왕은 그제야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듯이 루를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금님에게 있어서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것은 무엇? 왕비를 포로로 잡은 탄가가 우쭐해하며 임금님에게 요구할 물건은 대체 무엇?” “타우다.”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그것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탄가는..., 조라더스는 틀림없이 왕비와 교환 조건으로 타우를 양도하라고 요구할 거야.” “그건 넘겨줄 수 없고?” “불가능해.” “왕비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충격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국왕에 qlgol 루는 지극히 침착해 보였다. 아니, 완전히 태연한 것처럼 보였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국왕도 짜증니 날 수 밖에 없었다. “경은 상당히 침착해 보이는군. 왕비가 적에게 붙잡혀 있는데.” “임금님이 그러지 않았나요? 탄가는 절대로 왕비를 죽일 수 없다고.” “.......” 그러니까 자신의 신병과 천 명의 기사를 바꿨다... 감동적인 연설이었지만, 임금님이 말하는 왕비는 내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아이는 정말로 인간을 싫어하고 싫어하고 싫어해서....“ 어조에 엄청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닌데. 누군가 특별히 소중한 사람이라도 있던 것 아닌가요?” “정답이야.” 캐리건에 대해 얘기하자 루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죽고 싶어하는 성질이 또 나왔군.” “죽고 싶어해?” “자기 생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관심이 없어서ㅓ 언제나 조마조마 했지요.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곧바로 죽어주겠다고 기다리는 것 같았으니까.” 국왕은 기가 막혀서 반문햇다. “그거야말로 대체 누구 얘기야? 내가 알고 있는 왕비는 항상 목숨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것이 왕비의 입버릇이었다. 그것은 다시 한 번 파트너와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지만, 루는 더욱 곤혹스러워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해두겠지만,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건 내 쪽입니다. 탄가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은 해야지요. 임금님은 교섭 자리에 나가서 왕비를 되찾기 위해 할 일은 해야지요. 타우를 넘기지 않으면 왕비가 살해당합니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임금님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국왕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신음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는 사실 조차 잊고 있었다. “타우를 넘길 수는 없어.... 절대로!” “그럼 그 밖에 왕비를 되찾을 방법을 찾아봐야지요.”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에 국왕이 놀라버렸다. 기가 막혀서 반문한다. “화내지 않는 건가...?” “어째서?” 고요한 밤의 바다 같은 눈이 이 쪽을 바라본다. 그 얼굴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임금님이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애도 분명히 소중히 여기고 있을 테지요. 자신과 교환 조건으로 타우를 넘긴다면 가장 화내는 건 그 애가 아닐까?” 국왕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라면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에 자신이 없었던 것도 분명했다.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왕비를 구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내던져도 좋아. 하지만 타우 만은 안돼. 그 곳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땅이야.” 국왕을 믿고 중요한 비밀을 밝히며 델피니아의 영토가 될 것을 받아들여준 사람들이다. 스무 개의 마을과 스무 명의 두목, 그 곳에서 살아가는 몇 만 명의 사람들의 생활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었다. 농지를 양도하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다. 농민이라면 지배자가 바뀌어도,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어도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물론 세율이나 닙세 방법 등은 달라지겠지만, 농사로 지내는 매일매일의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새 지배자 입장에서도 지금까지 그 땅에 살고 있던 농민들을 쫓아내고 새로 농민을 데려오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농업에 종사하게 놔두는 편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타우의 경우는 다르다. 탄가가 원하는 것은 땅 속에 잠들어 있는 귀금속 뿐이다. 타우 사람들은 그 작업에 강제로 차출되어 단순한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는가. “임금님이 대신 인질이 된다면 그 애는 더 화낼 겁니다. 그 아이의 나쁜 버릇이지요.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아마 자기 한 명이 희생되어서 천 명을 구할 수 있다면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죠.” “음, 바로 그거야.” “조금 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했는데도 전혀 나아지지를 않아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슬퍼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조금은 자각했으면 좋겠다구요.” “정말 동감이야.‘ 두 사람 모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면에서 뜻이 맞아버린 셈이다. “그럼 이걸로 목적이 생겼어. 왕비를 되찾을 때까지 내가 임금님의 힘이 되지요. 내 검을 걸고 맹세해도 좋아요.” “마음은 고맙지만... 경은 전사인가?” “전사로 안 보여요?” “음, 아무리 잘 봐줘도 마법사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거 실망인데요. 이래뵈도 꽤 강한데, 나.” 이런 말투로 웃으면서 얘기를 해봤자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루는 단검을 빼들고 손잡이를 국왕에게 내밀며 말했다. “왕비를 찾을 때까지, 임금님은 이 검의 주인입니다. 검과 전사의 영혼을 걸고 맹세하지요.” 즉 소유주인 루 자신도 국왕의 이지에 따라 검을 들고 싸우겠다는 말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당혹함이 밀려왓다.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날 위해 싸워준다고 해도 경에게 보답할 길이 없어.” 루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마음 속 깊이 각인되어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미 충분히 보답했어요.” “.......” “아까 얘기 말인데, 그 아이는 검이 없어도 싸울 수 있어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죠 알고 있나요?” 국왕은 심호흡을 했다. 아직 주저는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왕비의 이 말인가?” 복잡한 미소가 루의 얼굴에 퍼져갔다. “역시 알고 있었군요.” “결혼식 전 날 왕비가 스스로 보여줬어.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면서.” “그래도 결혼식은 예정대로 치렀나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건 사실이야. 무섭기도 했지. 하지만 그 녀석이 내게 해를 끼친 적은 한 번도 없엇어. 언제나 듬직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가까운 동맹자였지. 왕비가 된 뒤로도 그 사실만은 변함없어.” ‘한 번도 싸운 적 없나요?“ “없어. 아니. 왕비 손에 죽을 뻔한 적은 한 번 있군. 그러고 보니 그 때의 원인은 바로 경이었지.”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루에게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수면제를 먹여서 재웠다고 했더니 뒤집힐 듯이 놀란 듯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경의 기분은 나도 알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적어도 ‘용케 죽지 않았군요.’라든가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했나요.’라고 물어주길 바라네.” “그 정도로 끝날 리가 없잖아요! 우와아 -, 정말 놀랐다. 그애 , 그렇게나 임금님이 소중한 거군요. 호오..., 정말....” 완전히 감탄한 눈치였다. “그럼 아예 정말 부인이 되어버려도 좋았을텐데.” 국왕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루에게 딱 잘라 말했다. “하나만 충고하겠지만, 왕비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따귀가 날아올 거야.” “설마, 주먹하고 발차기하고 검이 같이 날아오죠.” 태연하게 대답한다. 견디다 못한 국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이상한 인간이 나타났다 싶었던 것이다. 얼마나 든든한 우리 편이 되어줄 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왕비가 없는 현재 이런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어서 마법가로 가보기로 할까.” “응, 장소 정도는 알아놔야죠.” “하지만 경이 말한 대로 그 거리는 모습을 감추고 있어. 언제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아마 내가 안내할 수 있을 거예요. 가죠.” 두 사람은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국왕과 특이한 손님은 조용히 잠든 코랄 거리로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갔다. 9장 그린다 왕비가 약탕을 마시고 잠든 날 오후, 왕비를 포획하는 계획을 세운 군사가 보나리스에 나타났다. 물론 바우어는 맨발로 뛰어나가다시피 하며 그를 환영했고, 뮤렌도 일부러 현관까지 마중하러 나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번 작전에서 보여주신 예리한 통찰력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 같은 분이 계시다는 걸 알지 못햇다니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폐하도 기뻐하시겠지요.” “아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군사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젊다는 말은 들었지만, 뮤렌이 의외라고 여길 만큼 몸집이 작고 선이 가는데아 깜짝 놀랄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었다. “왕비의 상태가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한동안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물론이고말고요. 필요한 만큼 지내십시오. 성 내부는 민스가 안내드릴 겁니다.” 그리하여 군사와 집사는 예의바르게 첫 인사를 나눈 후 왕비의 상태를 살피러 이동했다. 보나리스 성은 이중의 성벽으로 싸여 있고, 제각각의 공간에 탑이 있다. 왕비가 잠들어 있는 곳은 중심부를 둘러싸는 네 개의 탑 중 붉은 탑이다. 탑의 내부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왕비가 있는 곳은 3층, 1층과 2층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며 탑의 입구는 안과 밖에서 이중으로 자물쇠가 걸려있다. 양쪽의 자물쇠를 함께 풀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상당히 엄중하군요. 역시 도망칠 우려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니,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특수한 향을 피워서 계속 재워 놓고 잇습니다. 앵속(양귀비, 양귀비과의 2년초. 관상용이나 약용으로 재배되며 열매의 즙은 아편의 원료가 된다.)이라고 합니다만....” “앵속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남쪽 지방에 살았던 적이 있으니까요. 거기서는 일상적인 기호품이었지만....” “아아, 그러시다면... 안에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제가 들어가도 괜찮다면.” 병사들의 시선 사이로 그런 대화를 나누며 2층으로 올라간다. 놀랍게도 좁은 나선 계단 여기저기에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고 왕비가 있는 방 앞에도 불침번이 있엇다. 집사에게 인사를 하며 살짝 비킨다. 집사와 함께 따라온 열쇠 담당이 방이 문에 걸려있던 자물쇠를 열었다. 이제야 간신히 잠들어 있는 왕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을 열자 정면에 잠들어 잇는 왕비가 보였다. 오른쪽이 머리, 왼쪽이 발, 길게 풀린 머리가 침대 위로 흘러내리고, 팔은 아무렇게나 내뻗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투명하리 만치 새하얗게 보인다. “숨은 쉬고 있겟지요?” “물론입니다. 향 때문에 혈색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 뿐입니다. ” “상당히 진하게 피워두었군요. 저도 꽤 익숙한 편인데, 저까지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보통 인간들과는 다른 분이니, 이 정도로 해두지 않으면....” 방안에는 기묘한 향기가 가득차 있었다. 자세히 보면 옅은 안개 같은 것이 떠돌고 잇다. 발생원은 방 입구 오른쪽에 있는 작은 탁자, 정확하게는 그 위에 놓인 향로였다. 앵속은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이 연기를 맡으면 현기증이나 환각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집사와 군사는 태연하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이상 왕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발치에는 새하얀 선이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경계선이라는 말이다. 뮤렌은 이 선을 그은 뒤, 이 경계선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는 자는 누구든 간에 곧바로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단순하지만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방문은 열려있다. 무장한 병사들이 기묘한 향기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두 사람의 등을 지켜 보고 있다. 병사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레티시아가 말했다. “경비가 엄청난 걸.” “덕분에 눈 앞에 있는데 손도 못 내밀고 있어,” 민스도 낮게 대답했다. 향로를 피우는 것은 민스의 역할이지만, 방에 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경비병들이 함께 따라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본다고 해서 왕비에게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누가 저지른 것인지를 숨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왕비가 잠든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뮤렌은 몇 번이고 자신의 손으로 왕비의 얼굴에 거울을 대어보며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했다. 뮤렌 이외에 이 방에 들어올 이유가 있는 것은 향을 피우는 민스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비가 죽어버리면 민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성 전체에 알려지고 만다. 암살에 성공했어도 현장에서 도망칠 수 없으면 임무는 실패이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레티지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고양이 같은 눈을 지닌 청년은 왕비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건은?” “지하.” 두 사람은 탑에서 나와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벽에 걸린 횃불 이외에는 한낮에도 불빛이 전혀 없는 곳이다. 대부분의 성이 그렇듯이, 보나리스 성도 1층에서 반지하에 걸쳐 창고가 있었다. 보리나 면화, 술과 기름이 담긴 통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그 아래쪽에 감옥이 있었다. 그냥 감옥이라고 해도 여러 종류가 있다. 넓은 지하 동굴의 구석에 말뚝을 박고 쇠사슬로 죄인들을 묶어두는 단순한 것에서, 두터운 문을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독방까지. 두 사람은 그런 독방 중 하나로 들어섰다. 그 곳에 붙잡혀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왕비의 검과 머리 장식이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탁자 주위에 박힌 말뚝에 밧줄은 둘러놓았다. 지금은 병사의 눈도 없으므로, 민스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있지. 그 왕비 씨의 초능력 중 반 정도는 아마도 이것들이 한 짓이야.” 민스는 날카롭게 레티시아를 노려봤다. “아는 게 있으면 숨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째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거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대처할 수 있었을텐데.” “반쯤이라고 했잔아. 게다가 이런 그저 감일 뿐이야. 꼭 들어 맞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일덴 녀석들을 처치한 힘이 나머지 반이라면 어쩔 건데?” “이상한 핑계나 늘어놓을 여유가 있으면 일이나 썩 마쳐. 성주가 이미 케이파드에 전령을 보냈으니.” 이 정도의 거물급 인질이니 조라더스는 당연히 왕비를 케이파드로 옮기라고 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성의 인물들은 몰라도, 레티시아나 민스는 그 명예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왕비를 처치할 장소로 이 보나리스를 선택한 것이다.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 가짜 편지를 만들어 탄가인들의 편인 척하고, 뜻대로 적의 진지에 숨어들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남은 것은 이쪽의 정체가 탄가 측에 알려지기 전에 왕비의 숨통을 끊고 탈출하는 것뿐. “뭐,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고. 저 인해전술을 정면 돌파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저 소란은 대체 뭐야?” 지하 한쪽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신음 소리에 훌쩍이는 소리, 때로는 뭔가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까지 섞인 비통한 울림이었다. 민스는 그쪽을 흘깃 보고 대답했다. “틸레든 기사단 녀석들이야.” 레티시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풀어주라고 했을 텐데.” “했지. 오늘 아침 일찍. 하지만 탄가 영토를 델피니아 병사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싫어도 눈에 띄게 되어 있어. 영민의 통보를 받고 출동한 성의 경비대가 포획해서 이리로 끌고 왔지. 그런거야.” “어이, 이봐. 난 어떻게 되어도 몰라.” “뭘 두려워하는 거지? 어차피 오늘 밤에는 숨통을 끊어버릴텐데. 죽은 사람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레티시아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령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파로트 일족답지 않은 말인걸. 뭐, 죽는 거야 내가 아니라 너니까 큰 상관없지만.” 레티시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성을 세울 때의 토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지면에 말뚝이 박혀 있고, 거기에 쇠사슬이 달려 있다. 사슬 끝에 연결된 철제 고리가 사람의 목에 걸려 있다. 이것은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하층의 인간에게 사용하는 가장 굴욕적인 취급인 동시에 가장 생환 가능성이 낮은 감옥이기도 했다. 대부분 이렇게 묶어놓은 채 식사도 주지 않고 그대로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숫자는 열 명 전원. 모두 목에 걸린 쇠사슬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신음하며,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쓸모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힘이 다해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레티시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이래서야 무슨 일이 있어도 왕비에게는 보여줄 수 없겠다는 생각이 하나, 그와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도 왕비가 잠만 자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의식이 없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에는 정말로 일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검과 머리장식이 놓인 곳으로 돌아왔다. 민스는 이미 위로 돌아가 있었기에 레티시아는 혼자였다. 입을 열어 자신의 친구를 불러보았다. “아가씨?” “뭐야. 다시 말해두겠지만 난 심부름꾼이 아냐.” 소녀의 목은 공중에 나타나자바자 매섭게 레티시아에게 불평을 퍼부었다. “감시해달라더니, 저런 건 보고 있어도 아무 의미도 없잖아. 시간 낭비였다고.” “그럼... 위험하지는 않은 거지?” “죽은 것처럼 얌전히 자고 있어!” 레티시아는 소녀의 기세에 당황하며 상대를 달랬다. “알았어, 미안. 이게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얼굴만 있는 소녀는 능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냥 물건이야. 자유의지도 없고. 아마 주인이 옆에 없어서 그렇겠지만.” “왕비가 이 물건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말이야?” “잘 모르겠어. 알 수 있는 건 지금 이것들이 죽어 있다는 것뿐. 아무 것도 안 느껴져.” “지금은, 말이지? 정작 숨통을 끊으려고 할 때에 이 검이 멋대로 날아와서 내 등에 푹 꽂히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서 그러는데.” 얼굴만 있는 소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단언했다. “그건 시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 “거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는걸.” 레티시아는 유쾌하게 웃었다. 자기 자신의 목숨도 그에게 있어서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저 왕비만큼 재미있는 장난감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것도 오늘 저녁으로 끝인가 생각하면 조금 씁쓸해지기까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놀이는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므로. 케이파드 성은 보나리스에서 보낸 보고에 발칵 뒤집혔다. 마치 전쟁이 다 끝난 듯한, 과장스럽게 말하자면 축제라도 벌어진 분위기였다. 특히 조라더스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바우어에게는 바라는 대로 포상을 내리겠다고 전해라. 무장들은 모두 바우어를 본받도록! 뮤렌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재워두다니, 정말 묘안이야.” 보나리스에서 조라더스에게 보낸 서간에서 집사의 역할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름 아닌 집사 본인이 말렸기 때문이다.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이 일을 돕기 위한 것. 명을 내린 폐하 본인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굳이 알리실 것 없습니다.” 집사는 바우어에게 작전을 지시한 군사에 대해서도 편지에는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바우어가 이 작전을 수행하고 뮤렌이 그를 도운 셈이 된다. 조라더스가 기뻐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디, 그럼 델피니아의 애송이에게 연락을 해야겠군. 우선은 당연히 자하니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겠지만, 덤으로 타우 전체를 양도하라고 해볼까.” “알겠습니다.” 곁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재빨리 서기를 불렀다. “북쪽의 동맹자에게도 사자를 보내. 코랄 만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게 추태를 보였지만 승리가 눈앞에 있다. 나중에 따돌림을 하고 싶지 않거든 빨리 출진하라고 전해.” 조라더스의 가신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스케니아까지 불러들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묻겠네만, 왕비를 인질로 붙잡혔다고 델피니아가 얌전히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나?”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폐하께 거스르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 , 그건 몰라. 델피니아의 애송이 놈은 때로는 서쪽 늙은이 이상으로 교활하게 구니까. 손은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지.” “네에....” “잊지 마.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타우를 되찾아 영원히 우리나라의 영토로 복속시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델피니아를 약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다시 되찾을 수 있는 체력을 남겨둬서는 안 돼. 그 역할을 북쪽 동맹자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가신이 입을 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만, 델피니아의 기적의 근원인 왕비가 우리 손에 떨어진 이상 승리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원군 따위 부르지 않아도 우리 힘만으로 충분히 짓밟을 수 있을 텐데요. 스케니아 측도 타우의 금에 큰 미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을 빌려준 것을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몫을 내놓으라고 나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상관없어. 북쪽 동맹자는 델피니아 대신 대화삼국의 한 축을 맡게 할 터이니. 힘을 빌려준 데에 걸맞은 영예지.” “그걸로 수긍하고 물러날까요?” “불만을 표시하면 시페라스와 브로테아에 금을 주고 화해하면 돼. 델피니아를 쓰러뜨린 우리나라와 북해의 삼류 국가, 어느 쪽을 편드는 게 유리할지 모를 만큼 어리석은 나라는 아니니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스케니아를 막는 든든한 방어벽이 되어주겠지.” 가신들의 얼굴에서 의혹이 사라지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굳이 이쪽에서 요청할 것까지도 없었다. 그 무렵 스케니아는 이미 2차 출격을 결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랄 만에서 겪은 참패 소식이 스케니아의 왕도 라그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패전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였다. 대형 전함 대부분이 침몰되고 소형 선박밖에 남지 않은데다 날씨가 좋지 않아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백 척 가량의 대 함대를 투입 했는데도 완전하게 격파당해 버렸다면, 보통은 적의 힘을 깨닫게 된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대응을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스케니아의 왕 코리우스2세는 완벽하게 상식이 결려된 국왕이었다. “뭣?! 그렇게 많은 함대를 보내도 부족해? 그럼 다음에는 2백 척을 보내.” 태연하게 이런 소리까지 해대는 상황이다. 군사회의에 참가햇던 파로트 백작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얼굴에 ‘아직도 할 생각인가’ 라고 쓰여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백작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중신들이 코리우스2세의 결의를 말리기는커녕, 저마다 그에 찬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추운 대지를 떠나 중앙에서 군림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전쟁이 필요하다는 얘기겠지요.” “그만큼 얻는 것도 클 겁니다. 타우 산맥은 거의 대부분이 금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탄가와 손을 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고 말고요. 탄가와 파라스트 양국보다 혁혁한 전과를 올려야만 우리에게도 그 광맥을 차지할 권리가 생기는 겁니다.” “금맥도 그렇습니다만, 델피니아의 무역항 코랄만은 꼭 우리 나라가 손에 넣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느긋한 생각인가. 자신들이 얻은 보물을 완전 남에게 나눠줄 정도로 탄가나 파라스트가 인심 좋을 리 없건만, 거기까지 읽을 수 없는 것이 스케니아라는 나라의 순진함이었다. 대국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만큼 자재와 인재만은 충분했으므로, 사고 방식부터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싸움에 이겨서 금화 백 장의 배상금을 얻어도, 전쟁 중에 금화 2백장을 소비하면 적자가 난다. 그러나 코리우스2세나 중신들은 승리에만 열중한 나머지 이런 계산을 따져볼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 뿐이 아니다. 탄가, 파라스트에 자신들까지 가세하면 반드시 이길거라는 단순한 발상, 그 보답으로 타우 광맥의 공동 소유권을 주장해도 받아들여질 것이 틀림없다는 착각, 양쪽 모두 지극히 희망적인 예상에 불과했다. 이렇게 유치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조라더스나 오론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지가 없건만, 코리우스2세나 중신들은 자신들의 예상이 현실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스케니아의 군사력과 공헌도를 과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작은 혀라도 차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군사회의를 지켜보았다. 백작은 코리우스2세의 비서인 셈이었다. 코리우스2세는 귀찮은 사안들을 솜씨좋게 처리하는 백작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고, 동시에 유능한 관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케니아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외국과의 전쟁, 그것도 대화삼국의 하나로 올라설 수 있다는 절호의 미끼 앞에서는 백작이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었고, 지금은 거의 발언권조차 없었다. 군사회의는 매일같이 이어졌다. 대규모의 군사 파견이 정식으로 결정되엇고, 그 날 심야에 왕궁 근처에 있는 파로트 백작 저택에서도 중요한 회의가 열였다. 백작 이외에 집안의 관리를 담당하는 집사, 서류 업무와 회계 등을 맡는 서기관, 그리고 정원 청소를 맡은 늙은 하인 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서기관이 침착하게 말햇다. “이 땅에 잠입한 첩자들은 전부 체포당했고, 군함 건조 소식을 알리려는 움직임도 막았습니다. 벵크, 바르풀 등의 선주민족 회유책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간부들의 실책으로 선주민족들이 사실을 눈치챘고, 그 결과로 함대 전멸....” 집사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 “게다가 요즘 왕궁에서는 그 책임을 백작께 묻는 경향이 강해지고 잇습니다. 그런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다루기 힘든 선주민족을 괜히 끌어들였다가 일이 이렇게 복잡해졌다면서요.”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백작의 입장이 불편해진 것 만은 사실이었다. 일국의 중신이라는 입장은 진짜 정체를 숨기는 데에는 상당히 좋은 위장이 되어 주었다. 때때로 그 들의 일에 권력이 필요해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스케니아가 쓰러져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강력한 아군이 될 수 있는 선주민족을 끌어들일 방법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 수단을 제대로 살려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데에 질리지도 않고 또다시 대대적으로 병력을 파견하려고 한다. “제 정신이 아니로군요.” “어쩌시겠습니까?” 집사와 서기관이 물은 것은 백작이 아니었다. 정원 청소를 맡은 하인 쪽이었다. 그리고 하인인 아토스는 그제야 처음으로 백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스케니아가 델피니아 애신 중앙을 제패하다니, 어차피 이뤄지지 않을 꿈입니다. 백작께서 그런 무모한 꿈에 어울려야 할 이유는 없지요. 저희들은 본디 어둠 속에 존재하는 일족으로 서로 이득이 잇었기에 지금까지 이 공생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우리들의 진짜 목적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특히 지금은 큰 사안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왕궁의 소동보다도 그 쪽에 신경써야 하겠지요.‘ 백작은 부드럽게 미소 지엇다.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티시아가 드디어 왕비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호오....“ “그거 정말 잘 됐군요.” “그리고 그 일보다, 저는 조금 더 코리우스 전하 편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작의 발언에 다른 세 사람은 일제히 입은 다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말은, 델피니아의 운명도 기울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백작께서도 그 왕비가 델피니아의 힘의 원천이라고 믿고 계시는 겁니까?” 백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렇게까지는.... 하지만 왕비에게 성령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요.” 일족의 장로들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왕비의 신변을 조사하려고 해도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 들이 지배하는 ‘성령’은 심하게 지능이 저하된 하급 령들로 , 그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수행 중인 아이들 앞에서 기억한 대사를 그대로 읊거나, 은밀하게 열리는 회의를 훔쳐듣고 그 내용을 전하기에는 충분하다.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잇는지를 조사하는 데에도 쓸모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쪽에서도 사정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 왕비의 어떤 점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지 자세하게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능과 독자적인 판단력이 필요하다. 하급 령들이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편, 높은 지능을 유지하고 잇는 진자 성령들은, 그 왕비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을 남긴 이후로 아무리 백작이 불러내려 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수장의 뜻이라면 어떠한 명령에라도 따르는 것이 저희들의 규율입니다만....” 아토스가 말했다. “심심풀이치고는 조금 지나치신 게 아닌지요. 그 분들이 그렇게나 경원하고 있는 상대입니다. 게다가 델피니아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상대. 어째서 일부러 그 왕비에게 관여하려 하신 겁니까?” “확인해보고 싶엇습니다. 제게 있어서도 그 분들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그 분들이 그렇게나- 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만- 두려워하는 상대의 힘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그 분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왕비 역시 육체를 지닌 생물인 이상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과연 심장을 꿰뚫어도 죽지 않을지 시험해 보려는 생각이었지요.” 한 때의 스승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소년다운 호기심이로군요. 덕분에 레티시아만큼 실력잇는 행동원을 2년 동안이나 쓸 수 없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백작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그는 일족의 수장이지만 군림자는 아니다. 일족은 백작의 말에 따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자신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단, 성령들이 두려워하는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그 왕비가 댈피니아의 병사들에게 큰 지주가 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왕비를 잃는 것은 국왕에게 있어서 큰 손실일 테니까요.” “스케니아에도 아직 승산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작의 결의를 듣고 다른 세 명도 고개를 끄덕엿다. 수장이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태도를 정했다면 그에 따르는 것이 일족의 의무이다. “그렇다면 궁정에서 실추된 백작의 권위를 되살려야 하겠군요‘ 집사가 태연하게 말했다. 정권 다툼이라는 것은 결국 얼마나 국왕의 총애를 얻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로 판가름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국왕이 아끼는 인간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그 대신 백작을 믿게 만들면 된다. 국왕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면 궁정에서 발언도 강해지게 마련이다. 단순한 도식이었다. 실제로 그 정도는 매우 손쉬운 일이다. 현재 코리우스 2세의 신임을 얻고 있는 인물이 실책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도, 국왕의 총애를 겨루는 자들을 모두 탈락시키는 것조차 파로트 일족에게는 간단했다. 회의를 마친 뒤 하인은 저택의 비밀 통로를 지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아토스는 일족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지만 , 표면적으로 정원사로 행동하고 있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매일같이 빗자루를 들고 정원을 청소하며, 정원 구석에 있는 초라한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었다. 집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대부분의 가정에선ㄴ 용무가 일어날 때를 대비해 불을 켜두지만, 신분이 낮은 이에게는 그런 데에 쓸 기름조차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익숙한 곳이므로 어둠에도 상관없이 침대를 향해 걸어가던 아토스는 등 뒤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흠칫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날카로운 검이 등에 꽂히고 , 그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하인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는 해도 암살자 일족의 장로인 아토스엿다. 자신이 이 정도의 기습에 당했다는 사실이 맏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계속 이 습격자는 자신의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발버둥치지 않고 아토스는 침착하게 물엇다. “누구냐?” ‘너무 차갑잖아. 그 때는 손녀라고 불러줬으면서.“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아토스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호오, 너였나....”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셰라는 상대의 등에 단검을 꽂은 채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악물었다. “한동안 잠들게 해주지.” 오른 손으로 단검을 쥔 채 왼 손으로 적이 목을 노렷다. 그러나 수도를 휘두르기 직전에 아토스가 조용히 말했다. “백작은 지금 예배당에 있다.” 셰라의 움직임이 멈췃다. “날 기절시킬 필요는 없어. 만나러 가도록 해. 그러려고 돌아왔겠지.” “아니야....” “백작께서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아니야! 난 백작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왔어!” 어둠 속에 아토스의 낮은 웃음 소리가 울렸다.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멍청한 소리.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손 주제에 어떻게 머리를 죽인다는 말이지? 쓸데없는 짓이야.” 이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 용기가 꺾인다. 백작을 쓰러뜨리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 그 결의가 흔들리게 된다. “쓸데 없는지 어떤지는,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어.” “호오.... 씩씩하군. 어디 한 번 해 보실까.” 여전히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셰라는 견디지 못하고 아토스의 목에 수도를 내리쳤다. 상대가 조용히 바닥에 쓰러진다. 만일에 대비해 뒤쪽으로 손을 돌려 결박해 두었다. 겨우 그 정도만으로 셰라의 호흡은 심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 때문이 아니다. 이 정도의 작업으로 지칠 리가 없다. 이제부터 자신이 하려는 짓에 대한 정신적인 부담에서 오는 피로감이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백작은 모든 종사들을 다스리는 인간이다. 셰라에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 주인의 주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물러나려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아토스의 집에서 이어지는 비밀 통로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서재엿다. 전에 와봤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앗다. 단,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끄러지듯이 실내로 발을 들였다. 서재와 이어지는 방도 확인해봤지만 역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택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이곳밖에 알지 못한다. 그때도 이 서재밖에 보지 못했으니, 저택의 구조 따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백작을 찾아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행동은 너무 위험이 크다. 누가 뭐래도 암살을 생업으로 하는 일족의 총수가 사는 저택이다. 도처에 보안을 위해 뭔가가 장치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게 타당하다. 게다가 저택 내부를 경비하는 사람들도 평범한 병사들이 아니라 암살 훈련을 받은 행동원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혼자서 싸워봤자 승산은 없다. 아토스는 백작이 예배당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백작의 충실한 부하이다. 불법침입자에게 주인이 있는 장소를 순순히 가르쳐줄 리는 없지만, 셰라가 백작을 따르기 위해 돌아왔다고 착각하고 했던 말이니 만치 정말로 예배당에 있을지도 모른다. 셰라는 일단 예배당으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예배당의 위치는 저택의 외견으로 대충 짐작이 간다. 저택 북쪽에 세워진 높은 탑이었따. 단, 예배당으로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이다. 보통은 채광을 위해 장식창을 달고 위치도 햇볕이 잘 들도록 남쪽이나 동쪽을 택하는 법이건만, 이탑은 북쪽을 향해 세운데다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아토스의 말대로 백작이 혼자 예배당에 있는 거라면,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 건물 북쪽으로 통하는 문이 딱 하나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어보자 나온 짧은 복도의 양쪽 병에 촛대가 설치되어 있고, 정면에 다시 문이 보였다. 틀림없이 이 건너편이 예배당이다. 셰라는 심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복도를 지나 조심스럽게 문을 확인했다. 자물쇠는 걸려 있지 않다. 문 반대편에는 셰라가 여태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엇다. 암흑 속에서 , 지상에는 촛불이 일렁이며 빛나고, 공중에는 색색의 빛구슨이 떠다니고 있다. 그리고 제단 앞에 파로트 백작이 서 있었다. 무의식 중에 자신을 침입자로 간주해주기를 빌고 잇었다. 그러나 백작은 뒤를 돌아보고 셰라를 알아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말햇다. “잘 돌아왔다.” 따뜻한 목소리였다. 길을 잃은 병아리를 다시 자신의 날개 아래에 부드럽게 거두는 듯한 어조엿다. 셰라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토스의 집에 숨어들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백작과 싸우기 전에 먼저 싸워야만 할 상대가 있었다. 자기 자신이다. 그 남자가 말했던 복종성이 셰라의 발복을 잡는다. 이 사람과 싸워서는 안된다고, 그런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 셰라 자신도 의지도 무시하며 멋대로 외치고 있다. 이것은 기량이 어쩌거 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백의 승부였다. 살인이라면 지겹도록 해왔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잇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만큼의 기개와 결의가, 쓰러뜨릴 수 잇는 의지가 자신에게 있을 것인가. 셰라가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디디려할 때, 마치 노리기라도 한 듯한 절호의 타이밍으로 백작이 말햇다. “왕비가 죽었기 때문에 돌아온 거냐?” 상대의 첫 공격에 치명타를 입고 셰라의 심장은 거의 멎어버릴 뻔했다. 자신의 발로 서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셰라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거짓말....” “거짓이 아니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거나 마찬가지지. 레티시아가 왕비를 붙잡았다. 이번만은 왕비도 도망칠 길이 없을게야.‘ 거칠어지는 호흡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으면서 셰라는 고개를 저었다. “글세, 어떨까? 그 사람은 강해. 죽이려고 한다면 쉽게 죽을만한 사람이 아니야.” “호오? 그럼 내기를 해볼까. 왕비가 죽으면 넌 바로 내게로 돌아오는 게 어때? 아니, 애초에 승부가 안 되겠군. 어차피 내 승리다.” “닥쳐!” 그렇게 외치면서 셰라는 검을 들었다. 반츠아의 검이었다. 이것만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셰라의 결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백작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살짝 웃음을 지었다. “과연 반츠아를 쓰러드렸나.” 셰라는 아무 말없이 한 걸음 나섰다. “훌륭해. 그 남자를 잃은 건 아쉽지만, 그 대신 너를 얻게 되었으니 기쁘다.”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 말을 듣고 기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질타하며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제단까지 이르는 길은 한없이 멀고,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느리고, 어색한 걸음이지만 절대로 멈추지 않앗다. 납구슬의 사정거리까지... 조금만 더.... 백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셰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냐?” 셰라의 발걸음이 멎었다. 숨겨둔 납구슬을 막 꺼내들었던 소 끝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백작은 미소 짓고 있었다. 셰라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자신에 찬 미소엿다. “벌써 19년인가. 갓 태어난 아기 하나를 다리에스에 맡겼지. 은발의 남자아이였다.” “.......” “나도 한 때는 행동원으로 활동했으니까. 너의 어머니는 기품 있고 아름다운 귀족이었다.” “마침 잘 됐군. 내게는 아들이 없어. 스케니아의 총신이라는 자리를 유지하려면 ‘파로트 백작’에게도 후계자가 필요하지. 널 내 아들로서 공표하겠다. 네 활약에 따라서는 일족의 실권을 돌려줄 수도 있어. 열심히 노력 하도록.” 얼어붙어 있던 셰라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면서 마침내 웃음을 지었다.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지만 그렇게 웃음을 짓고서야 처음으로, 상대를 비웃어주고 싶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셰라는 또렷하게 말했다. “내게 그런 것은 없어.‘ 냉담한 목소리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그저 명령에 따르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도구. 바로 너희들이 그렇게 가르쳤어.” “그렇고 말고. 넌 지금도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아.” 백작 역시 싸늘하게 대답했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지배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만이 너를 구원하고 이끌어갈 수 있어. 그런 나를 향해 무기를 들다니, 어리석은 것!” 백작의 일갈에 셰라는 겁을 먹었다. 궤변에 불과하다는 것 쯤 알고 있으면서도 온 몸이 굳어버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것은 주술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수에 스미도록 주입당한 교육이 저주처럼 아직까지 살아있다. 전신의 기능을 빼앗고 심장을 조인다. 자신을 붙잡고 놔주지 않으려 한다. 백작은 그런 셰라의 반응을 보며 미소지엇다. 자애로 가득한 따뜻한 웃음이었다. “알고 말고. 이제야 두려워진 거겠지?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행동하다니, 네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야. 괜찮다. 이제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 없어.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그저 임무를 완수하는 기쁨만 맛보면 된다. 그것만이 너의 진실한 모습, 너를 가장 충실하게 채우는 유일한 길이니까.” 다정한 목소리. “자, 무기를 버려라. 그리고 내게 복종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지는 든든함,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따뜻함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따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위엄이 있었다. 예전의 셰라라면 그 ‘힘’에 무릎을 꿇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악물면서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런 수법에 넘어갈 수 없다. 경우에 따라 채찍과 사탕을 구사한다. 심하게 질책해 위축시킨 뒤 따뜻하게 대한다. 그것이 조교의 기본. 자신을 계속 뜻대로 조종해왔던 놈들의 대장다운 행동이 아닌가. 셰라는 열심히 되뇌었다. 자신은 더 이상 의지가 없는 인형이 아니다. 이 남자가 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도구가 아닌 것이다. 그 남자에게 맹세햇다. 두 번 다시 아무도 섬기지 않겠다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 남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면서 셰라는 말했다. “무기는 버리지 않아.... 이걸로, 널, 쓰러뜨린다.” 처음으로 백작의 표정이 변햇다. 모처럼 손을 뻗어 주었건만 스스로 뿌리치는 어리석은 자를 보고 혀를 차는 듯한, 멀;꼭지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주제에 무슨 소리냐고 비웃는 듯한 얼굴. “할 수 있을까, 네가?” 셰라의 등에 식은 땀이 흐른다. 여기 서 있는 자는 파로트 일족의 최고봉. 그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이다. 승산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다. 설령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 남자의 생명을 지고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짧았던 그 인생이 무언가를 위해 존재했는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는지. 결국 일족에게 희생되어 그 손바닥 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죽었는지, 아니면.... 목숨을 걸었던 그 질문의 대답이 걸려있다. 다시금 마음을 다졌다. 이제야 결심이 섰다는 것을 스스로도 자각하면서. 백작은 변함없이 의연하게 서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편안한 실내복 뿐. 무기는 물론이고 몸을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완전한 맨 몸으로 보인다. 하지만 셰라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백작이라면, 본거지에 있다고 해서 맨 손으로 돌아다니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셰라 자신도 해 본 적이 있다. 긴 머리카락 사이에 은 선을 숨기고, 서리궁 여기저기에 무기를 감춰 두었다. 아마 백작도 마찬가지겠지. 그렇지 않다면 무기를 지닌 호위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터였다. 왼 손으로 납 구슬을 쥐었다. 셰라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백작을 향해 그 무기를 던지는 순간이야말로 셰라가 지금까지의 자신과 결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다. 그 남자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다. 그런 결의가 셰라의 몸을 움직였다. 백작은 몸을 살짝 숙이며 납 구슬을 피했다. 피하는 것과 동시에 촛대가 놓여있는 탁자를 쓰러뜨렸다. 조명은 제단의 양 쪽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지만, 백작의 동작으로 양 쪽 모두 쓰러져버린다. 촛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굴러갔고, 그 충격으로 촛불이 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 떠돌던 빛구슬도 꺼지는 듯이 사라졌다. 예배당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이 예배당에는 참례자용 의자가 없다. 텅 빈 석조의 공간이 펼쳐져 있을 뿐. 셰라는 몸을 낮추며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 서 있으면 공격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섣불리 이동할 수도 없었다. 자신들의 무기 중 하나인 은 선은 지극히 가는 검이다. 자칫하면 스스로 이동하던 기세에 손이나 발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왜 싸우려는 거지? 네가 지키려는 그 주인은 곧 이 세상을 떠날텐데.” “안 믿어.” 셰라는 딱 잘라 말했다.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눈앞에 그 사람의 시체가 누워있다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적이 하는 말을 신용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안위는 델피니아로 돌아간 뒤에 확인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 적을 죽이고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니석은 것. 그 왕비도 불사신은 아니야.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지?” “나도 그렇게는 생각 안 해.”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몸이라고 왕비는 딱 잘라 말햇다. 아마도 그것이 진실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그런 믿음이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그 사람이 죽어버릴 리 없다고. 바보 같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어째서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감정을 그 사람에게 품고 잇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신뢰일 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변함없이 빛나주고 잇으면 자신도 똑바로 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백작은 아직도 뭔가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셰라는 더 이상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척을 죽이고 조금씩 이동하면서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 백작이 잇는 곳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햇다. 무거운 긴장감이 온 몸을 덮친다. 미칠 듯이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싸우면서, 셰라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어둠 속에서 서로 움직임을 살피면서 노려만 보고 있어봤자 승부는 나지 않는다. 저택 사람들이 이상을 깨닫고 달려와 버리면 더욱 승산이 없어진다. 위험을 각오하고 덤벼야 할까, 아니면 상대가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려야 할까.... 그 격렬한 갈등이 정점에 달했을 때, 문이 열렸다. 복도에 설치된 촛불의 빛이 눔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불빛을 향해 납구슬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연 것이 백작 자신이라는 사실, 이것이 백작의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이 닫힌다. 주위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순간적으로 빛을 보아버린 셰라의 눈이 다시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 몇 초 동안 백작보다 행동이 늦어질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몇 초 사이에 백작은 완전히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터. 어둠이 기분 나쁘게 부풀어 오르며 공격해 온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엇다. 전신이 식은 땀에 젖어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왕비의 말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달은 태양을 돕고 태양은 달에 힘을 부여한다.) ‘리...!’ 태양은 달에게 힘을.... ‘저에게 힘을!!’ 문이 닫힌 뒤로부터, 아마도 눈 깜빡일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이 언제 납 구슬을 피했고 어떻게 백작의 검을 피했는지, 어느 틈에 검을 휘둘렀는지 그 일련의 동작을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해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렷을 때는 검을 휘두른 뒤엿다. 분명히 뭔가 반응이 느껴졌다. 검이 무언가를 베는 감촉을 느끼고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다른 검이 허공을 가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 그 이상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엇다. 무의식 중에 몸을 움직였다. 그믐밤보다도 어두운, 돌 벽으로 둘러싸인 암흑 속에서 상대의 모습을 보는 것은 무리다. 의지할 것은 기척뿐이었다. 폭풍처럼 덮쳐오는 것이 단검인지 검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받아내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한 순간도 발을 멈출 수 없었다. 팔을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오랜 수련으로 쌓인 모든 경험을, 공격을 피하며 반격하는 본능적인 반사를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펼쳐내고 있었다. 생각하고 나서 반응할 여유는 없었다. 이런 연속 공격은 공격하는 측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인 이상 호흡이 따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반드시 틈이 생긴다. 그 순간이 유일한 반격의 기회였다. 하지만 공격할 기회가 보이지 않고 영원히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숨이 가빠지고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적의 공격이 멈춘 순간, 셰라의 체력도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반격 따위 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셰라는 쓰러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추스르며 아마도 최후가 될 공격을, 어둠 속의 기척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돌진하며 휘둘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자 양 손으로 검을 꽉 쥔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폭풍 같은 적의 공격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그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걸까.... 아군을 부르러 간 걸까, 아니면 그 밖에 뭔가 함정이라도 준비하고 있는 걸까.... 갑자기 주위가 밝아졌다. 색색의 빛 구슬이 차례로 머리 위에서 나타나며 암흑을 거둬간다. 도깨비불의 불빛을 받아 모자이크 문양의 마름다운 바닥이 드러났다. 그위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극한의 피로에 흐릿해진 머리로, 셰라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엎드려 있다. 저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저런 자세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재서 일어서지 않는 걸까. 백작의 몸 주위에 퍼져가는 붉은 피. 자신이 쥐고 잇는 검의 끝에서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건만, 싸움이 끝났다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멍하니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무릎이 푹 꺾였다. 셰라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검에 기대어 헐떡였다. 온 몸이 이미 한계를 넘어 있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서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쓰러진 것이 자신이 아니라 백작이었던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호흡이 조금 가라앉고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다가가 백작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라고 자칭한 사람의 시체를 앞에 두고 셰라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꼭두각시였을 시절에 느꼈던 성공의 기쁨도, 만족도, 나중에 깨닫게 된 살인의 죄책감도, 이겼다는 실감조차도 나지 않았다. 마음이 어디론가 분리되어버린 것처럼. 그렇기에 어느 틈엔가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조명을 든 사람이 조용히 예배당으로 들어왔고, 셰라는 그제야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바라봤다. 아토스였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의 시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분노도 충격도 느끼지 않는 듯, 셰라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적어도 저택에 불법 침입해 자신들의 주인을 죽인 인간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쳐 있는 셰라의 머리로는 이 전개에 따라갈 수 없었다. 이상한 듯이 아토스를 바라볼 뿐. 어째서 이들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걸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걸까. “훌륭하십니다. 이것으로 당신은 저희들의 수장이 될 자격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 “수장을 쓰러뜨린 자가 다음 수장이 되는 것이 일족의 규정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파로트백작의 이름으로, 일족의 수장으로 군림하시는 겁니다.” 셰라는 더욱 이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았다. 말이 머릿속에서 공회전을 거듭하며,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아토스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대를 바꿀 때라고 판단되면, 저희들은 각지의 마을에서 우수한 행동원을 선출해, 상대가 누구인지 말해준 뒤 수장과 싸우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규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이지요. 어렸을 때부터 주인의 명에 충실하게 따르도록 교육받고 복종하는 법밖에 배우지 않은 행동원은 상반되는 명령에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과 공포를 느끼고 대부분 심한 공황 상태에 빠져 자멸합니다. 그런 중압감을 견딜 수 있는 자, 자아의 붕괴를 억누르고 스스로를 정복할 수 있는 자, 종사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지배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쓰러뜨릴 수 있는 자야말로 진실로 강한 의지를 지닌 자로 인정받아 일족을 다스릴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백작을 쓰러뜨리기로 결심하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수백 년에 걸치는 일족의 역사 속에서, 이런 행동이 가능한 행동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진심으로 당신을 새 수장으로서 환영합니다.” 긴 침묵 뒤에, 셰라는 갈라진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수장...?” “예, 그것이 선대 수장을 쓰러뜨린 자의 임무입니다. 각지의 마을과 종사들을 포함해, 저희 일동은 당신의 뜻에 복종하겠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셰라는 아토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상대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이래할 때까지, 그들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런 교체극이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는 사실은 깨달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로 얼룩진 검을 내린 채 셰라는 다시 침묵했다. 길고 긴 침묵이었다. 장로들은 셰라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침내 셰라가 입을 열었다. “내 명령에 따르겠다고...?” “당신 스스로가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것이 저희들 일족입니다.” 아토스를 포함한 다섯명의 장로들은 조용히 셰라의 말을 기다렷다. “그럼 죽어.” 셰라는 아무 주저없이 그 말을 내뱉었다. 얼굴을 들고 똑바로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보랏밫 눈동자에 확고한 의지를 담고, 또렷하게 말했다. “파로트 일족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것을 처분해. 이 저택도, 마을도, 너희들 자신도. 오늘로서 암살자 파로트는 전 대륙에서 소멸한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마.” 막 자리에 오른 수장이 이런 무모한 명령을 내려봤자 장로들이 따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맹렬하게 반발할 것 쯤은 뻔히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 목적을 위해 여기에 왔으니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반대하는 목소리는 전혀 없었다. 경악의 비명도, 낭패도, 충격도, 새 수장이 이런 소리를 내뱉는 것이 의외라는 표정조차도 없었다. 아토스도, 다른 네 명의 장로도 공손하게 절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즉각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대체 자신이 어떻게 그 저택을 빠져나왔는지,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셰라는 황야 한 가운데 서있었다. 처음으로 레티시아와 싸우고 반츠아의 도움을 받아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그 장소였다. 할 말만 간신히 남긴 뒤 미친 듯이 달렸다. 두먼 다시 그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자신은 동포를 죽였다. 한 때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 마을의 행동원들, 종사들, 약사들을, 한 마디 말로 전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후회는 없었다.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그래야만 했으므로. 그들은 암살자로서밖에 살아갈 수 없다. 결코 다른 존재는 될 수 없다. 그 존재 의의조차 없음에도. 인간은 스스로 생각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때로는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는 경우도, 판단을 번복하는 경우도, 고민한 끝에 새 인생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행동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그런 것은 아무도, 단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셰라는 울고 있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얼굴을 적시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쥐며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울었다. 목놓아 울었다. 누군가 끝내야만 했다. 지금의 셰라는 알 수 있다. 그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막을 내려야만 햇다. 가슴이 저리도록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째서 자신이어야 했을까.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역할을, 괴롭고 아픈 역할을 자신이 맡아야만 했을까. “너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단다.”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보자, 공중에 상반신만 떠있는 여자가 보였다. “모이라님....” 검은 성령은 미소짓고 있었다. 깊은 슬픔과 자비, 조용한 기쁨이 뒤섞인 신비로운 미소였다. “네가 아니면 아무도 할수 없었다. 고생했구나.” 셰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입니까, 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니라도, 반츠아라도, 그남자라도 상관없었을 텐데....” “아니, 그렇지 않아. 반츠아는 백작에게서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혐오하고 비웃으면서도 백작의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밖에 아무 길도 없고, 그밖에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 “오랫동안, 정말로 긴 시간 동안 기다렸다. 이 숙명에서 해방시켜줄 누군가를 무력하게 기다렸지. 반츠아가 나타났을 때 이번에야말로.... 라고 생각했지만 레티시아도 그랬었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네가 나타났다.” “무슨... 뜻이지요?” “오랜 전설이야. 우리들은 낮에도 밤에도 스며들 수 없는 황혼의 일족이라는,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과 교류를 피하며 뒷세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뭐, 이건 선조들 중 누군가가 암살업을 수월하게 하려고 가져다 붙인 얘기겠지만, 하지만 전설 쪽은 정말이야. 우리들은 본래 하늘에 빛나는 달이었지만, 어떤 사정으로 지상에 떨어지게 되었다더군. 그래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 “비록 지금은 땅바닦을 기고 있어도, 언젠가 그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태양을 얻어, 어둠의 인도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 달이 된다. 긴 방랑의 여행도 그것으로 종결된다는 얘기야.” “.......?” 셰라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어딘가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달과 태양 그리고 어둠...... “전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우리들은 계속 ‘달’이 될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태양’을 선택할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몇백 년 동안 기다렸지. 억지로 강요된 주인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 할 수 있는 자, 자유를 잃고 주술에 매여 죽은거나 다름없이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되살아날 수 있는 자를. 그것이 너다.” 셰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제 힘이..., 아닙니다.” 지면에 놓인 검을 꽉 진다. 이것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다.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길이 오르는구나.” “네...?” “백작의 저택이 타오르고 있어. 파로트 일족의 역사도 오늘로 끝이다.” 짧아진 은발이 푹 수그려졌다. 다시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저택의 사람들이 어째서 네 말을 따랐다고 생각하지?‘ “그것은....., 그러는 것이 의무였을 테니까요.” “아니야, 그들은 행동원이 아니야. 행동원을 길러내는 사람들이다. 아니, 새로운 수장까지 길러내는 이들이기도 하지. 그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수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 단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 “......?” “네가 해낸 바로 그것이다. 예전 수장을 쓰러뜨리고 막 새 수장이 된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로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으면, 그 명령이 어떤 것이더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절대 규정이었지.” “하지만 그런 거라면 더욱,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 이상의 주인을 죽인, 그것도 이제부터 네가 수장이라는 말을 들은 행동원이야. 지금까지 명령에 따르는 것밖에 몰랐던 이가 갑자기 명령을 내리는 입장에 놓인 거지.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르면서, 새로운 수장에 걸맞은 행동을 배울 때까지는 그저 부서진 인형에 불과해.” “........” “넌 그렇지 않았어. 수장을 쓰러뜨리자마자 바로 일족의 소멸을 명했지. 그런 게 가능한 행동원은 단 한 명도 없었어.물론 반츠아라고 해도 불가능 했겠지.” “레티시아는 어떻습니까?” 그 남자가 할 수 없을 리 없다. 그 정도의 기량으로 백작을 쓰러뜨릴 수 없을 리가 없건만, 모이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일족이라고 할 수 없어. 처음부터 그저 손님에 불과했지. 실력은 있어도 자신이 막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어.” 셰라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렇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신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손님, 지금은 뭘 하고 있습니까?” “주인이 신경 쓰이나?” “예.” “그럼 돌아가서 직접 확인하도록 해.” 셰라는 일어섰다. 조금 주저하다 여자에게 묻는다. “모이라님.” “뭐지?” “반츠아는... 그 쪽에 있습니까?” “글세.... 만나고 싶어?” “아뇨.... 그저, 전하고 싶은 akff이....” 여자는 낮게 웃었다. “죽은 자에게 할 말은 남은 자의 가슴 속에 묻어두는 법이야.” “네에....” “뭐, 상관없겠지. 내키는 김에 들어주마. 무슨 말을 전하고 싶지?” “예. 그, 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여자는 더욱 유쾌하게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그런 얘기라면 더욱 더 직접 해야지. 네가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은 못 넘어. 조만간 싫어도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셰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중하게 절을 한 뒤 여자에게 등을 돌리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반신만 있는 여자는 셰라의 등을 흥미롭게 바라봤지만, 뻔히 알면서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상당한 심술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때 멀리 떨어진 보나리스 성의 어느 방에서는 레티시아가 막 왕비의 급소를 찌를 바늘을 신나게 갈고 있었으니까. 그는 의식이 없는 상대의 숨통을 끊는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 저항도 주저도 느끼지 않는다. 무예 승부가 아니므로 정정당당 따위 따져봤자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목적을 완수하는 것. 다른 행동원과 레티시아는 그 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윗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상관없고 칭찬의 말도 필요 없다. 스스로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벽하게 마치는 것 자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의 숨통을 끊기 직전에야 드디어 이 순간이 찾아왔다는 감개와 kgaRp 기분이 고양되는 것을 느낀다. 이번에는 더욱 즐거웠다. 레티시아는 왕비를 좋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죽여왔던 어떠한 상대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던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상대였다. 그것도 오늘 밤으로 끝나는가 생각하면 상쾌하면서도 아쉬운 기분이 든다. 바늘 끝을 정성스럽게 숫돌에 대고, 만지기만 해도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날카롭게 다듬었다. 그런 레티시아를 향해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어이, 젊은이.” “방해하지 마, 할아범. 지금은 바빠.” 레티시아는 얼굴도 들지 않고 대답했지만, 공중에 떠 있는 노인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낮게 웃음을 짓는다. “늙인이 충고는 들어두는 게 좋아. 그 준비, 필요 없을 테니까.” “흐응?” 그렇지 않아도 강렬하게 빛나고 있던 눈이 더욱 빛을 더했다. 양반다리를 한 자세로 공중에 떠 있는 노인-일족의 인간들은 오크 노인이라 부르고 있다-은 기뵤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더 일할 필요가 없어졌어.” “흐음?” “백작이 조금 전 죽었어.” 성령인 그들에게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며칠이 걸려ㅕ 이동할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노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레티시아는 손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변함없이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묻는다. “그 아가씨가 상상 이상으로 애썼나보네.” “그래.” “반츠아는 어떻게 됐어?” 고양이 눈의 청년은 기가 막힌다는 듯했다. 그런 것쯤 굳이 말하지 않ㅎ아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할아범. 내가 붇는 건 그런 게 아냐. 그 녀석 나름대로 수긍하면서 죽었느냐고.” “아마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지.” “그거 잘됐네.” “새 수장은 일족을 이어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 저택은 물론이고 모든 마을을 폐기하라고 명령했지.” “그럼 살아남은 건 나 혼자인가?” “그래. 지금쯤은 각지의 마을에도 연락이 갔을 게야. 아직 이 세상에 있는 자도 차례로 죽음을 택하겠지. 여기에도 한 사람 더 있었지만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성에서 나가더군. 지금쯤 어딘가에서 목이라도 긋고 있을 게야.” 민스가 성을 나간 것은, 외부인 앞에 시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파로트의 교육이었따. 예외적으로 죽지 않은 것은 셰라나 반츠아 정도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을을 잃고 종사를 잃은 것마이 아니라, 죽으라는 명령이 분명하게 내려온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명령에 거스를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없다. 의문을 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가련하고 비참한 생물이었다. “자네는 어쩌겠나?” “글세, 어쩔까나.” 잘 갈린 바늘을 들고 날을 확인한다. 레티시아는 웃고 있었다. 정말 이 왕비에 얽힌 일은 어떻게 굴러갈지 예상도 할 수 없다. 이번에야말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제 와서 갑자기 전개를 읽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예 이대로 일이 흘러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나에게 따라 죽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10장 그즈음 국왕과 루는 마법가의 노파 앞에 앉아있었다. 곧 여름이 되는 계절이건만, 노파는 변함없이 검은 천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노파 앞의 화로에 걸린 냄비에서 부글부글 소리가 난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단, 검은 두건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노파의 눈이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국왕의 곁에 앉아있는 루를 향해, 보기 드물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허허, 설마 살아서 시화의 이를 만나보게 될 줄은....‘ 노파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왕비가 처음 이 곳에 오셨던 날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수다. 태양이 떨어지다니 무슨 일인가 했지. 과연.... 이러니 당신한테는 왕비가 왕비한테는 당신이 서로 필요할 수 밖에.“ 감탄하고 있는 노파를 보며 루가 웃었다. “눈이 좋은 사람이네.” “그거 황공하다고 하고는 싶지만..., 바보가 아닌 한 알 수밖에 없지.” 국왕이 기막혀하며 끼어들었다. “기분이 상하는걸. 지금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못 알아들었으니, 바보 소리를 들은 셈이 되는데 말이야.” “호오, 이거 실례. 왕은 몰라도 되는 얘기유. 마법을 익힌 자라면 그렇다는 의미니까.” 국왕은 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왕비와도 또 다른 생물이라는 것 같네만, 현자께서는 알아볼 수 있겠나?” “그럼. 왕 곁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야. 그럼 뭐냐고 물어봐도 곤란하지만..., 몇백, 아니 몇천 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지. 허나....” 노파는 즐거워 보였다. “이 분은 아무래도 아직 여물지 못했구먼. 정말 젊어. 왕보다도 훨씬 젊겠는데.” “정답.” 루도 웃음을 지었다. “우리 일족은 원래 오래 살지만, 난 동료들 중에서 제일 어리니까. 나이도 겉모습 그대로예요. 임금님보다 훨씬 연하.”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 이 얼굴에 실은 120세라거나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던 참이다. “현자여, 사정은 지금 설명한 대로네만, 왕비가 있는 곳을 점쳐주지 않겠나.” “내가 굳이 점칠 것까지도 없수다. 오히려 이 분이 모른다는 사실 쪽이 의외인데.” “반은 이거 때문이지만.” 목덜미를 타고 뻗어있는 머리다발을 들어 보인다. 너무 세게 당기다가 뿌리족의 피부까지 당겨져서, 루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호오, 그게 봉인인 게로구먼.” “응, 동료들이 덤벼들어서 땋아줬어요. 위험해서 가만 놔둘 수 없으니까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 못한다고.... 어차피 필요 없을 거라면서.” “맞는 말이구먼.” “길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어서 곤란했는데요.” 노파는 이가 빠진 입을 흐물거리며 웃었다. “다 보고 있었수다. 당신은 막대기를 쓰러뜨리면서 왕궁까지 도착했지요. 그래도 못 찾았다고?” “그래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도 없는 코랄이 종점이라는 걸요.” “그럼 카드를 써보는 건 어떠신지? 그거라면 봉인과는 관계없을 텐데.” “그건 왕한테 맡기는 게 어떨까?” 노파의 말에 루는 카드를 꺼내들고 능숙하게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색색가지의 카드를 노려보면서 말한다. “산 속의 평지, 수많은 탑, 탄가의 임금님이 보기 좋게 남서쪽, 임금님이 있는데 없는 곳. 알겠어요?” “아니.” “왕이여. 그래서는 해볼 건덕지는 없수다. 조금 더 머리를 쓰시게.” “하지만 이런 수수께끼는 내 전공이 아니야.” “아니, 지극히 명쾌하외다. 왕이 있는데도 없는 곳이라는 건, 그 장소는 왕의 소유지이지만 왕이 살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즉..., 아, 직할지인가?!” “왕이 보기에 남서쪽, 케이파드에서 남서쪽이라는 말이우. 그 방향에서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면서 탑이 많이 있는, 조라더스왕의 직할지라면....” “보나리스다.” 국왕은 단언했다. 매우 가능성이 높은 장소엿다. 케이파드까진, 너무 멀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개인의 영지에 놔둘 수는 없을 터. 그럴 듯하다고 수긍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불평을 했다. “라비경.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점을 쳐주길 바라네.” “그러니까, 난 이 쪽 세계의 지형은 전혀 모른다구요.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이런 것 없어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정말, 이것만 없었어도....” 또다시 짜증스럽게 땋은 머리카락을 당겼다. 노파는 미소를 짓다가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그것만은 그만두시면 좋겠구먼. 이 거리를 대표하는 인간으로서 작은 희망을 말씀드리자면. 가급적 빨리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되찾아서 이 곳을 떠나주시길 바라우.” “내가 있으면 그렇게나 폐가 되나요?” “아니, 왕비만큼 심장에 나쁘지는 않수다. 나도 굳이 말하자면 어둠에 속하는 인간이니까, 지금은 편안한 존재로 보이지만....” 노파는 의미있는 웃음을 지었다. "왕비하고 만난다면, 그리고 당신의 그 봉인이 풀려버린다면... 뭔 일이 있어도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드는구먼.“ “그렇게 안되게 빌어줘요. 나도 별로 자신이 없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대화를 듣던 국왕은 무심코 노파에게 물었다. “이 분이 그렇게나 요주의 인물인가?”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외다. 왕비와 마찬가지지요. 그 사람도 평상시에는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일단 화가 나면 엄청나게 변하니까.” “글쎄.... 내가 알 수 있는 건, 이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는 왕비 이상으로 주위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뿐이라우. ” 국왕은 눈을 부릅떴다. “그럼 엄청나게 위험 인물 아닌가.” “본인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루가 침착하게 대화를 가로 막았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안전 장치로 필요하다구요.” “그럼 왕비를 빨리 찾아야겠군.” “기사단 사람들도 되찾아야겠죠.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놔두고 혼자서만 나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국왕은 길게 한숨을 쉬고, 노파에게 방해해서 미안 햇다고 사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도 국왕의 뒤를 따라 일어났지만, 노파는 두 사람이 집을 나설 때 루에게만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밝히는 건 하나면 충분해. 태양이 둘 있어봤자 곤란하다고.” 흑발의 청년이 조금 웃었다. “알고 있어요. 뭐든지 적당한 게 좋은거죠.” 국왕에게는 또 하나, 무거운 의무가 남아 있었다. 폴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날도 늦었는데 내일 하면?” “곧 내일이야.” 그 말대로 날은 이미 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기요, 임금님.” “뭐지?” “왕비와 폴라의 남동생, 어느 한 쪽을 택해야만 할 상황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 거죠?” “당연하지. 왕비다.” “.......” “이건 국왕으로서의 판단이야. 일개 병사와 왕비는 비교 대상도 안돼. 하지만...” “폴라의 남편으로서는 힘든 판단이군요.” “아니, 말해둬야 해.” 두 사람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용궁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날이 거의 다 새어 있었다. 부용궁에서는 국왕이 없을 때에는 심부름꾼이 아침 식사를 만든다. 이것은 시녀장의 필사적인 부탁이기도 했다. 폐하의 식사를 직접 만들고 싶은 마음은 안다. 하지만 직접 먹을 식사라면 일을 시켜주는 의미에서라도 심부름꾼이 만들게 해달라는 말이다. 그 날 아침, 심부름꾼인 메리가 평상시처럼 아침 준비를 하려고 일어나보자 부엌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손님이 부엌에서 식칼을 쥐고 있고, 거실에는 국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놀라서 굳어있는 메리를 보고 루는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어....” “저번에 먹었던 과자의 답례로 아침 식사를 만들 테니까.” ‘하, 하지만....“ ‘괜찮으니까 조금 더 자도 되요.“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로 교묘하게 메리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솜씨 좋게 일하고 있을 때 폴라가 일어났다. 부엌을 들여다본 폴라가 기겁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루퍼스님?! 뭐, 뭐 하고 계시는 건가요?!” 루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하냐니, 밥 하는데.‘ “그건 보면 압니다! 저, 저기 메리는... 어디에.....” “아, 쉬라고 했어요. 곧 다 되니까 임금님 얘기 상대라도 해 드려요.” “에엣?!” 폴라는 당황하며 거실로 뛰어가려다, 급속히 방향을 돌려 찬장으로 달려들었다. 서둘러 식기를 꺼내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한 집안의 주부’로서 손님에게 부엌을 맡겨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그렇게 아침 식사를 들었다. 달걀을 넣은 야채수프와 과일 소스를 곁들인 핫케이크가 메뉴였다. 식사 중에는 국왕도 루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지 않고 요리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다. “점도 대단하지만, 경은 요리사로도 상당한 실력인걸.” 국왕의 칭찬에 폴라도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거들었다. “예, 정말 맛있어요.” 식사를 마친 뒤 폴라가 직접 차를 끓여왔다. “다음에는 꼭 제가 만든 요리도 들어주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 부엌에 계셔서 정말 놀랐답니다.” “어제는 밤을 세웠으니까.” “예...? 주무시지 않으셨나요?” 루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차 한 잔을 비운 뒤, 폴라에게 인사를 하고 그대로 부용궁에서 떠나갔다. “루퍼스님?” 폴라는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어 손님의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당황스러운 눈으로 국왕을 돌아보았다. 국왕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뜻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얘기가 있어.” 국왕의 태도에 폴라는 조금 김장했다. 굳은 얼굴로 국왕을 올려다보다가, 얘기의 내용을 들으면서 점점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새파랗게 질려 굳어버린다. “그럼..., 그렇다면, 캐리는....” “괜찮아. 소중한 인질이니까 무사하고 말고. 하지만 한동안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것만은 각오해줘. “예,예....” 간신히 대답은 했지만, 폴라는 떨고 있었다. “그렇...지요. 저, 전쟁이니까.... 인질이 될 수도, 있는거지요....” “폴라.‘ “괘, 괜찮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그 아이는..., 죽은 게 아니니까....” 억지로 웃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커다란 갈색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국왕은 그런 폴라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폐하....” “내가 해줄 수 있는 약속은 이것뿐이야.”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저 폴라의 남편일 뿐인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반드시 동생을 구해주겠다고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나 국왕인 이상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만은 맹세해. 가능한 최선을 다하겠어. 난 왕비도 캐리건도 잃고싶지 않아.” 폴라는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로 충분했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이 부용궁을 떠난 뒤, 폴라는 새파란 얼굴로 거실 안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자신의 동생을 보호하려다 왕비까지 붙잡혔다. “바보! 캐리.... 넌 정말 바모야!”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건만. 부들부들 떨면서 저도 모르게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팔로 몸을 꽉 끌어안았지만 여전히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춥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얼굴을 들어보자 또다시 창가에 천사가 있었다. 부드럽게 거실로 내려 온다. 루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폴라를 안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부엌에 가서 뭔가를 하더니 곧 술을 가지고 왔다. 따뜻하게 김이 날 정도로 데운 과일주였다. “마셔요.” “가, 가,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폴라가 잔을 다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루가 말했다. “동생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임금님께 매달리지 그랬어요.” ‘안 됩니다. 그런 짓은....“ “어째서?” “그런...! 그런 소리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무리하지 말아요.” “.......” “정말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폴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쩌면 이 사람이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걸까 싶기까지 했지만, 남자라고 믿어지지 않는 새하얀 얼굴 어디에도 폴라를 놀리는 기색은 없었다. “왕비님은... 둘도 없이 소중한 분입니다. 도, 동생의 목숨과 바꾸다니, 절대로 그러셔서는 안 될 분입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단 하나뿐인 동생이다. 폴라는 전쟁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동생 같은 일개 병사는 인질 교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왕비라면 교섭의 여지도 있다. 중신들도 왕비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겠지. 그러나 동생은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폴라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엇다. 인질의 취급은 그를 사로잡은 자의 재량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국왕도 파라스트에 붙잡혔을 때 심한 고문을 받았다. 지금쯤 동생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온 몸이 공포에 휩싸인다.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로 오열이 새어 나왔다. 그런 폴라의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팔의 감촉이었다. 자신이 루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도, 어째서인지 뿌리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자신은 국왕의 애첩이고, 국왕 이외의 남자에게 이런 행동을 허락 해서는 안 된다. 폴라를 안고 있는 남자 쪽도 얼마나 무거운 벌을 받게 될지 알 수 없건만, 루의 손은 부드럽게 폴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폴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품이 너무나도 포근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것을 녹여주는 듯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느껴진다. 정말로 천사의 날개에 감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귓가에서 속삭이는 위로의 말조차도 그대로 마음 속에 울리는 것은 왜일까. “왕비가 살아 있다면 동생도 살아 있어요. 먼저 동생분을 죽여버렷다가 왕비가 도망치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울지 말고. 뱃 속의 아기한테 안 좋으니까.” 폴라는 깜작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바다보다도 푸르른 눈이 웃고 있다. “모르고 있었나요?‘ 자신의 얘기라는 것을 깨닫고 폴라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아기라니,그..., 정말인가요?!” “그거, 나한테 물어도 될만한 말은 아니지요?” 루의 목소리에 살짝 웃음이 섞였다.] 폴라는 또다시 굳어버렸다. 남자에게 이런 얘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아직 임금님도 모르는 거네요?” 그 한 마디에 제 정신으로 돌아와, 폴라는 당황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저, 루퍼스님.” “루라고 불러도 돼요.” “아뇨, 루퍼스님. 부탁입니다. 한동안... 최소한 왕비님의 안부를 알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 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폐하께서도 분명히 기뻐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왕비님의... 왕비님과 동생의 안부가 확실해 질 때까지 부탁드립니다. 부디 비밀로 해주십시오.” 울던 것조차 잊어버리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천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탄가에서 출발한 사자는 경이적인 속도로 코랄 성에 도착했다. 왕비가 붙잡혔다는 전령이 도착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참으로 성질이 급한 조라더스다운 방식이다. 사자는 델피니아 영내에 들어와서도 빈번히 말을 바꿔 타며 계속 달려온 것이 분명했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국왕과 중신들이 있는 알현실에, 화려한 차림새로 자신 있게 들어온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찾아온 목적을 고했다. “타우 산맥에 살고 있는 무법자들의 폭거가 나날이 격심해지고 있으므로, 저희 주인 조라더스는 타우에 군대를 파견하실 계획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귀국에 피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도적을 정벌하는 것뿐. 현명하신 폐하께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지만, 만일에 대비해 귀국의 영토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을 허락받고 싶습니다.” 왕비의 목숨이 아까우면 이 움직임을 못 본 척해라, 즉 타우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국왕은 비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땅에 무법자가 살고 있다니 처음 듣는 얘기인데.” “아니지요.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타우 산맥에 존재하는 산적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거 이상한 말을 하는군. 내가 아는 한 타우에 산적은 없어. 그 땅은 우리나라의 영토이고, 정식 영주에 의해 정상적으로 통치되고 있지.” 사자는 깜짝 놀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에도 그대들이 타우를 공격하겠다면 그건 침략이지. 나는 국왕으로서,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의 군주로서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할 것이야.” “폐하. 기다려주십시오. 황공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우리나라는 귀국의 비전하를 손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으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물론 알고 있고말고.” “그러시다면 더욱 이 건에 대해 어느 정도 편의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비전하의 신상에도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호오, 재미있군. 왕비를 어쩌겠나?” 국왕의 날카로운 눈빛에 압도된 사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외교석상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패배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왕비가 귀국의 신세를 지고 있다더군. 그 점에 대해서는 조만간 조라더스 왕에게도 인사를 하려 생각하고 있었네. 왕비도 그 성격이니 상당히 폐를 끼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어째서 타우를 정벌하겠다는 얘기가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폐하, 하오나....” “조라더스에게 전해. 난 왕비를 사랑하지만 그에 얽매여 대사를 그르칠 생각은 없어. 왕비의 신병을 구속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차지하려 드는 건 너무 뻔뻔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하물며 타우와 왕비를 고환한다는 따위는 아예 말도 안 돼.” “그 말씀을 비전하께서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실는지요?” 윌은 웃었다. 사나운 짐승 같은, 제왕의 웃음이었다. “사자께서는 우리나라의 하미아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하군. 그 비장군이 불운이 닥쳤다고 남편에게 매달리거나 목숨을 구걸할 거라 생각하나? 그렇다면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왕비는 내 태도를 칭찬하면 칭찬했지, 절대로 비난한지 않을 걸세.” 캐리건을 택하고 왕비를 저버릴 수 없는 것처럼, 왕비를 택하고 타우를 저버릴 수도 없다. 설령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아무리 초조해도. 국왕은 의연한 태도를 지켰다. 그에 비해 탄가의 사자는 말문이 막혀 당황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윌의 승리였다. 중신들 사이에 서 있던 재상 브룩스는 무표정을 가장하며 마음속으로 국왕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었다. 지금 국왕의 심경을 브룩스만큼 잘 알고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2년 전에는 자신이 바로 저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왕비 이외에도 기사단원 몇 명이 귀국의 신세를 지고 있을 테니 그에 대해서는 재상과 교섭해주게.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나는 일이 많아서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국왕은 차갑게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인질이 붙잡혀 있는 이상 이쪽의 입장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면 교섭 자체가 난항을 겪게 된다. 장기전이 될 거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먼저 강한 태도를 보인다.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양보할 수 없는 것을 확실하게 전해두고, 그 뒤는 저쪽의 반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국왕은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 중 하나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루가 카드를 펼치고 있었다. 최근 국왕은 언제나 루를 곁에 두고 의견을 묻고 있다. 가신들 중에서는 이런 비상시에 점쟁이에게 의지하다니 국왕도 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냐고 쑥덕거리는 자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잘 맞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늘 탄가의 사자가 찾아올 거라는 점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국왕이 방에 들어와도 루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흥미진진하게 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여러모로 오고 있네요.” “여러모로...?” “응, 여러모로요. 일단 임금님의 소중한 뭔가가 오고 있어요.” “허어...?” 유일하게 곤란한 것은 그 추상적인 표현이었다. 애초에 점술이라는 것은 그런 법이지만, 이 점쟁이는 처읍부터 이쪽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둘도 없는 것.... 이거, 보석일까?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런 만큼 임금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소중하고 둘도 없는 존재. 그리운 기억으로 추상되는 것.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분위기네요. 그게 엄청난 기세로 이쪽으로 달려와요. 뭔기 알겠어요?” “그건....”? 굉장히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대답하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거의 문짝을 걷어차는 듯한 기세였다. 문 저편에, 한눈에 보기에도 험악한 기색의 이븐이 서 있었다. “이거로군....” 국왕의 작은 중얼거림은 루에게도 이븐에게도 들리지 않은 듯 했다. 애초에 이븐은 루의 존재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국왕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인사고 뭐고 다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각오를 들어두고 싶어.” 푸른 눈이 찌를 듯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에 따라 우리들도 태도를 정하지.” 국왕의 눈빛 역시지지 않게 날카로웠다. “각오라니, 무슨 각오지?” “넌 왕비를 위해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가, 뭘 넘겨주고 뭘 넘겨주지 않을 것인가. 어디 말해보라고.” 국왕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너쯤이나 되는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왕비 한 사람을 놓고 탄가가 요구하는 건 타우 전체야. 그런 고환에 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럴 경우에만 상식을 들고 나와도 네가 말하면 전혀 설득력이 없어, 임금 씨.” 이븐은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 “백 보 양보해서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고지식한 중신들은 어떻게 판단할까?” “무슨 영문도 모를 소리를.... 그들에게 있어서도 타우는 중요한 돈줄이야.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왕비와 교환하자고 해봤자 수긍할 리가 없잖아.” “정말 그럴까? 그냥 쉽게 타우라고는 불러도 넓은 땅이야. 전부 넘겨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광맥을 포함하는 땅 일부를 넘겨주고서 먼저 왕비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녀석이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 녀석은 이 나라의 기적의 상징이야. 그게 적의 손에 들어 있는 상태로는 움직이기 힘들겠지. 왕비가 돌아오면 전쟁에도 이길 수 있다. 타우는 일단 포기하더라도 왕비가 돌아오면 반드시 되찾을 수 있다. 특히 저쪽에 먼저 반이나 일부라도 좋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어.” “.......” “하지만 그래선 곤란해. 우리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다.” 국왕은 손을 들며 잔뜩 성이 난 소꿉친구를 제지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기합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타우의 자치를 약속했다.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자치령인 이상 멋대로 양도할 수도 없지; 설령 조라더스가 무슨 소리를 하든간에. 내 가신들이 뭐라고 주장하든 간에. 게다가 그 조라더스가 일부만 받아먹고 만족할 인간이라고 생각해?” 이븐은 그래도 시선을 늦추지 않았다. 조용히 말한다. “그 녀석이 죽게 되더라도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죽인다고 얌전히 죽을 왕비가 아니야. 너도 그렇게 말했을 텐데.” “전장에서라면 그렇지. 나 따위가 걱정할 필요도 없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 “그때 널 묶고 있던 건 쇠사슬이지만, 지금 그 녀석은 더 처치 곤란한 것에 묶여 있어. 난 말이야, 그 녀석이 스스로 그 사슬을 끊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다면 자력으로 탈출할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지.” “거기까지 들어버렸나....” 이븐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휘저었다. “그 멧돼지 자식, 더 빨리 그걸 하란 말이다. 왕비가 붙잡혔을 뿐이라면 누가 이런 걱정을 하겠어. 탄가 놈이 명복을 빌며 성대하게 잔치라도 벌렷겠지. 어쨌거나 그 소식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반드시 네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여서 말이야.” “처음부터 결심은 하고 있어. 타우는 넘기지 않는다. 어떻게든 왕비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그러러면 그 견습기사도 구해야 하잖아?” “알고 있어.” “어쩔 생각이야?” “우선은 탄가가 다음에 무슨 요구를 해올지 기다려봐야지. 지금 막 사자와 면접을 마쳤으니까.” 그래서/ 저 쪽은 뭐라고 했는데/“ “타우의 산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귀국의 영토를 어지럽히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더군.” 이븐은 팔짱을 끼며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 또 그런 말장난인가.” “글세 말이야.” 일단 강하게 나가기는 했지만, 국왕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덤으로 이븐의 걱정이 현신이 될 경우도 생각해둬야만 한다. 왕비가 붙잡힌 뒤로 가신들의 불안과 낭패는 국왕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시민들의 동요도 심했다. 이븐이 말했던 것처럼 ‘승리’ 그 자체를 탄가에 뺏겨버린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왕비가 가신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존재였는지, 백성들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 두 사람사이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요, 거기 벌꿀색의 예쁜 오빠.” 이븐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처음으로 루의 존재를 깨닫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 이븐은 비아냥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 물어보겠습니다만, 펜타스의 남창관에 놔두면 제일 잘 나갈 것 같은 형씨. 지금 혹시 날 부른 겁니까?” “그래요,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루는 묘한 표정으로 이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지한 의문이 섞인, 어쩌면 그 이상으로 험악하기까지 한 눈빛이었다. “여기 왕비님하고 무슨 관계죠?” “무슨 의미야, 그건?” “그러니까, 얼마나 사이가 좋으냐구요. 알기 쉽게 말하자면... 바람을 피웠다든가?” 이븐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치뜨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국왕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루를 손가락질 하며 조용히 말했다. “이 새끼, 콱 죽여버려도 돼?” “아니, 기다려 잠깐만!” 국왕은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한 대화에 넋을 놓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라비 경. 대체 무슨 말인가? 이븐은 나와 리의 소중한 친구야. 지금 그 말은 명백한 모욕이네. 이븐이 경과의 결투를 허락해달라고 요구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실언이야. 지금 바로 사과하게.” “착각이라면 사과하겠지만, 그 전에 확인하게 해줘요. 정말로 그 애하고 아무 접촉도 없엇다면, 어째서 그 애 흔적이 남아 있는 거죠?” “흔적?” “이 사람 몸 절반- 왼쪽에. 특히 얼굴하고... 팔 언저리.... 이건 뭐죠?” 이븐은 흠칫했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본다. 루는 이븐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살짝 손을 뻗어 몸 부문을 훑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애, 대체 당신한테 뭘 했죠?” “그 전에 내가 묻고 싶은데, 당신 대체 뭐야? 어째서 그런 걸 알 수 있는 거지?” 첫 대면임에도 이븐의 말투는 잡아먹을 듯이 사나웠다. 그러나 루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건... 설명하자면 얘기가 아주 엄청 길어져서 귀찮으니까 생략하고 싶은데, 안 될까나?” “어이, 이거 새로 유행하는 농담 같은 거야?” 국왕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덮어 버렸다. “라비 경, 소개하지. 이 쪽은 타우의 이븐. 내 소꿉친구다. 이븐, 이쪽은 루퍼스 라비경. 다른 이름은 루퍼세르미 라덴이라는 듯 해.” 이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시금 루를 쳐다보는 눈에는, 이 남자가 흔히 내비치지 않는 싸늘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과연 그 녀석의 동족인가.” “아하하, 그 얼굴을 보니 당신도 날 왕비의 애인이라고 생각 했군요.”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그런 생각은 안 해. 그 녀석은 애인씩이나 만들 녀석은 아니니까. 그저 왕비를 낚아채갈 도둑놈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저기 말이죠. 그건 그 애가 얌전히 도둑한테 업혀가 줄 경우의 얘기라구요. 싫어하는 그 애를 어떻게 데리고 가란 말인가요? 절대로 억지로 끌고 가지 않을 거고, 하고 싶어도 못해요.” 루는 지친 듯이 말했다. 이븐도 그 말에는 표정을 풀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렇군. 덤으로 진짜가 등장하기도 전에 탄가 놈이 채어 가버렸으니.” “그래요, 그거.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하자고요. 그 전에,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주시겠어요?” 루는 아무래도 그 ‘흔적’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국왕도 당사자인 이븐도 그런 흔적이 있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이븐은 기분 나쁜 듯이 자기 왼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적 따위 전혀 없어 보이는데, 당신 눈에는 어떻게 보이지?” 루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요. 정말 아주 희미하지만.... 그래도 이건 그 아이의 흔적이에요.” 이래서는 입을 다물어봤자 의미가 없다. “어쩔 수 없지. 실은....‘ 국왕이 사정을 설명하려고 할 때,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샤미안이다. 국왕은 당황하며 말을 삼켰고, 이븐도 재빨리 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눈짓을 보냈다. 루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샤미안의 얼굴에도 불안과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폐하, 이번 일은 정말로....” “음, 미안.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서....” “아닙니다. 저어, 폴라님께서는 어떠신지...?” “꿋꿋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전쟁과는 연이 없는 여자야. 괜찮으면 위로하러 가주지 않겠나.” “저라도 도움이 될 수 잇다면 기꺼이.” 유부녀가 되어서도 여전히 간편한 남자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묻는듯한 시선을 국왕이 아니라 이븐에게 던지는 것을 보면 역시 부부라고 할 수 밖에. 이븐이 앞으로 나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 족은 루퍼스 라비씨. 왕비의 옛 친구라는군. 그리고 이쪽은 샤미안. 내 마누라다.” ‘잘 부탁해요. 헤에, 부인이 미인이네요.“ “어머나....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샤미안도 타우 사람?” “아뇨. 저는 로아 출신입니다. 성은 도라입니다. 남편은 타우 사람이지만....” 샤미안은 웃음을 지으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나눴다. 남자치고는 너무 긴 머리나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얼굴에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태도였다. 루도 웃음을 지었다. “좋은 신랑이네요.” “네...?” “이 예쁜 오라버니 말이에요. 입은 거칠지만 좋은 남편인 것 같네요.” 이븐이 기가 막혀서 끼어들었다. “이봐. 섹시한 형씨. 적당히 해둬. 나한테는 이븐이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나한테도 루라는 이름이 있는데 말이에요.” 웃으며 대꾸한다. 이븐은 그래도 공격을 멈추지 않앗다. 가슴팍에 걸려있는 머리카락을 향해 아무렇게나 손을 뻗었다. “사내 자식이 왜 이렇게 머리를 기른 거야. 덤으로 또 이 쥐꼬리 같은 건 뭐고? 내가 확 잘라 줄까?” “아야야...! 당기지 말아요. 피부가 당겨서 아프니까.” “그야 그렇겠지. 불편하지? 확 잘라버리는 편이 좋겠지?” “안 된다니까! 쓸데없이 기르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부적 대신이니까.” “호오? 뭔가의 주술이야, 이게?” “그래요. 그러니까 자를 순 없다구요.” “흐음?” 와궁을 완전히 뒤집어놓고 있는 손님과 태연하게 놀고 있는 소꿉친구를 보며 국왕은 존경스럽다는 시선을 은밀하게 보냈다. 샤미안은 남편의 너무나도 대담한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일단은 미소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산적 생활에도 상당히 익숙해 진 듯했다. 타우의 정세에 대해 조금 얘기하다가 샤미안은 방을 떠났다. 바로 부용궁에 들르겠다고 한다. 같은 여자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잡히니 폴라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샤미안이 떠난 뒤 이븐은 살짝 한 숨을 쉬었다. “깜짝 놀랐네.” “으음.” 국왕은 다시 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왕비와 약속했지만 경에게는 숨겨봤자 소용이 없을테니 말해두겠네. 단, 이거 샤미안 양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얘기야. 그 점은 알아 두게.” 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븐이 말을 시작했다. “내 왼 쪽 눈하고 왼 팔은 한 번 완전히 못쓰게 되었어. 눈은 망가지고 팔은 절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그런데 그 녀석이 돌려준 거야.” “돌려주다니. 그 아이가... 낫게 해줬다는 말?” “뭐, 그런 셈이 되겠지.” 이 때 얼굴에 나타난 충격, 마치 공포라도 느끼고 있는 듯한 경악은 국왕과 이븐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잠깐..., 잠깐만요. 절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팔을 고쳤다니, 어떻게?!” 두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 봤다. “어떻게라고 물어봐도, 글쎄...?” “뭔가 빛나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몸이 뜨거워지나 싶더니 갑자기 통증이 사라졌어. 그 때 난 한 쪽 눈이 먼 상태라 잘 보이지 않았다고.” “두 눈을 뜨고 있던 나라고 큰 차이는 없어. 게다가 넌 피투성이였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아있었다고 해야 하나.” “음. 나한테도 그렇게 보였어.” “잠깐만요....” 루는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목에 걸고 있는 은반지를 쥔다. “이게 없는데 힘을 썼다고요? 어째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상당히 무모했지. 그 왕비가 한동안 몸이 안 좋아서 침대에 누우ㅓ있을 정도이니.” “설마... 그런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건 아니겠죠?”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한 번 뿐이야. 리가 자기 입으로 말했지. 누가 부탁한다고 해도 이런 짓 두 번은 못한다고.” “신이라도 해낼 수 없는 기적이었으니까. 그런 게 아무 때나 가능한 거면 온 나라의 중환자나 부상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걸.” 왕비는 그런 자선 따위 할 생각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것이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이면 내버려뒀을 거라고도 했다. 루 역시 그 점이 이상했던 듯했다. “이런 소릴 하면 굉장한 실례가 되겠지만..., 어째서 당신만 특별히 취급한 걸까요?” “이유는 아까 본 이븐의 마누라야.” 국왕의 말투와 이븐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다 루는 또다시 놀란 듯 했다. “설마 부인이 벤 거예요?” “그거라면 특별히 난리칠 것도 없지. 부부싸움이 조금 과했다는 정도로 끝났을 테니까. 물론 그 때는 아직 내 마누라가 아니엇지만 ,” “그건 사고 였어. 우연이 겹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였지.” “반 이상은 내가 멍청해서 생긴 일이고.” “하지만 tial안은 그걸로 수긍하고 넘어가지 못햇을 거야. 저 사람이라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갔을 테지.” “그럼 그 아이는 tial안 때문에?” “아마도.” 이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한 번은 포기했던 팔과 눈이 돌아온 셈이니 나로서야 득본 셈이지만. 그러고 보니 그 소동의 원인이었던 예쁘장한 총각은 어디 있어? 그녀석하고 같이 붙잡혔나?” “아니, 셰라에게는 다른 일을 부탁했어.” “예쁜 총각?” “그래. 예쁜 은발에 ..., 당신하고 나란히 서 있으면 잘 어울릴 정도로 예쁘게 생겼지.” 이븐은 다시금 상대의 매끄러운 사지와 고운 피부를 찬찬히 감상했다. 감탄한 듯 말한다. “아니, 차라리 왕비까지 더해서 세 명이 나란히 서 있으면 상당히 멋지겠는걸. 금색, 은색, 검은색 3종 세트로. 안그래, 월?” “음, 충분히 눈요깃거리가 되겠어. 라비경의 머리는 평범한 흑발하고는 달리 마치 별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눈부시니까.” “헤에에? 야생 임금님이 웬 일이래? 거 되게 시적인 표현이잖아.” “놀리지마. 나도 쑥스러우니까.” 아까까지의 험악한 공기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소꿉 친구들 간의 대화였다. 루는 뭔가를 떠올린 듯이 펼쳐두었던 카드 앞으로 돌아왔다. “은발의 총각이라.... 이거 말일까요? 북쪽에서 달이 돌아온다.” “북쪽? 동쪽이 아니고?‘ “북쪽이에요. 그것도 상당히 먼 곳. 엄청난 속도로 돌아오고 있어요.” “호오...?” “그리고..., 임금님 하나 더 묻고 싶은데 이게 뭔지 알겠어요? 동북쪽에 잠든 척하는 호랑이가 있는데 엄청 화가 나 있네요.” 국왕과 소꿉친구는 다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리고 검을 든 꽃? 꽃이 검을 들고 있어? 이게 뭘까나. 하지만 잠든 척하는 호랑이하고 싸우는 꽃은 사이가 좋은가 보네요. 같이 돌아올 거예요.” 이븐은 상황을 망각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한편 국왕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말도 안돼. 귀환 명령은 내린 적이 없는데 , 그 두 사람이 자하니를 내버려두고 멋대로 돌아올 리가 없어. “하지만 돌아와요. 바로 당장은 아니지만, 그 호랑이하고 싸우는 꽃이 돌아올 때까지 사태의 진전은 바랄 수 없음. 다음 사자는 커다란 재앙. 서쪽에 주의할 것. 변심의 위험.... 별로 좋지않네요.” 점을 마친 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곳이 중요한 무대라는 말인데. 그런데도 주역인 그 아이는 없고.... 정말 이상하네요.” 11장 그 다음 날, 셰라는 코랄로 돌아왔다. 백작을 쓰러뜨린 뒤 경이로운 속도로 캄센으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왕비는 그 곳에 없었다. 게다가 그제야 간신히 퍼진 소문에 의하면 탄가군에 붙잡혔다고 한다. 레티시아가 뭔가 함정을 팠을 텐데 탄가의 포로가 되었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일까. 아예 케이파드로 이동해서 자세하게 조사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인질의 취급이나 교환쯤 되면 정식 외교 문제가 된다. 그리고 교섭을 담당할 사람은 당연히 국왕이다. 셰라는 무단으로 말 한 필을 빼내어 코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말에 타고, 때로는 말과 함께 달렸다. 그렇게 셰라가 왕궁에 도착했을 때는 캄센을 통과한 지 이틀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언젠가의 결혼식 때에도 이렇게 강행군을 했었다. 그 때는 완전히 지쳐 떨어져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았건만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기력이 충만해있다. 전신에서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그것이 왕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셰라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왕궁에 들어가려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렸다. 이래서는 시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신원을 보증해 줄 왕비도 없다. 벽을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아직 한낮이고, 밤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어쩔 수 없이 국왕이 파견한 첩자 중 한 명이라고 말을 둘러대며 면회를 신청했다. 국왕도 셰라의 귀환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셰라는 현재 왕비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국왕은 보나리스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도, 캐리건을 포함한 기사단원 열 명이 함께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도, 캐리건을 포함한 기사단원 열 명이 함께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도 숨김없이 말했고, 셰라는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보나리스는 스케니아에서 돌아오는 여정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눈치 채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인이 거기에 붙잡혀 있는 것도 모르고 그 근처를 지나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상으로 놀랐던 것은 시간의 경과였다. 국왕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펜체에서 그 남자와 대치하고 있을 때 왕비는 아직 자하니에서 날뛰고 있었다고 한다. 적에게 붙잡힌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라는 말이다. 한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때, 그 남자의 말투로 이미 왕비의 몸에 이변이 일어난 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돌아오지 않고 북쪽으로 달려갔건만.... 자신의 실수다. 그 때 사적인 원한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으면 이런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셰라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멋대로 행동한 탓에 케이파드의 상황은 살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적의 첩자가 암약할 걱정은 없다. 파로트 일족은 멸망했다. 지금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었을 테니까. “아니.... 그보다도 네가 돌아오면 물어볼 게 있었는데.” “예?” 국왕의 말투와 표정에서 셰라는 민감하게 무언가를 느꼈다. 정체모를 긴장이 닥쳐온다. 그런 셰라를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국왕은 무서운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보나리스에 숨어들어서 캐리건을 포함한 포로 전원을 죽이고 올 수 있겠나?‘ 셰라는 무심결에 눈은 치떴다.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지만 크게 숨을 들이키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할까?” “아니, 가능합니다. 저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짓밟는 짓이다. “그럼 왕비를 탈출시키라면?” 셰라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뜻이 있다면 그분은 혼자서 이미 예전에 나오셨을 겁니다.” 왕비를 구하려면 함께 잡혀있는 포로들을 구해야만 한다. “그럼 포로들을 탈출 시키는 건 가능하겠나?” 세 번째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아무리 애써봐도 불가능했다. 자신의 일족- 이제는 혼자뿐이지만- 이외의 초보자에게 그런 짓은 무리다. 발을 옮기는 법, 숨을 쉬는 법만 해도 훈련을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는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그런 특수한 기술을 익히지 못 했더라도 최소한 왕비의 반만큼이라도 연기력과 기지가 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어설픈 애송이들만 붙잡혀 있는 상황이다. “유감이지만 저 혼자서 열 명이나 구해낼 수는 없습니다.” 왕비는 예외 중의 예외다. 따로 훈련한 것도 아니건만 경이로울 정도의 무술과 호흡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연기의 달인이기도 했다. 불안해진 셰라는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폴라님의 동생 분을 희생시킬 생각이십니까?” 평소에는 서글서글한 호남으로 보이는 델피니아의 국왕은 때때로 엄청나게 다른 얼굴을 보이곤 한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야. 내 바람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해내는 것이다. 그게 제일 이상적이야.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왕비와 기사들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문제이지. 그렇다면 대답은 정해져 있어.” “.......” “같은 이유로, 왕비를 구하기 위해 타우를 내팽개치는 것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폐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하면서 이론적으로 상황을 판단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 사람이 캐리건 일행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 사람의 존재가 무언가의 장애물이 된다면... 포기하시겠습니까? 국왕 역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건 정말로 최후의 , 최악의 수단이지만....” “폐하 자신은 어떠십니까. 그 사람을 잃어도, 그래도 괜찮으신겁니까...?!” 국왕은 잔혹한, 그럼에도 어딘가 달래는듯한 웃음을 지으며 셰라를 바라봤다. “군주라는건 말이지, 그리 간단히 자신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야. 적어도 난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다. 때로는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소를 희생하지 않고서 대를 살리는 것이 최선이지만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만은 단언할 수 없지. 때로는 대를 살리기 위해 소를 희생시켜야만 할 경우도 있어.” 셰라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그건..., 그 사람이 이렇게나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지 않았더라면 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리 본인이야. 그러니까 그리 순순히 적에게 잡힌 거지. 설사 자신이 포로가 되어도 아직 내가 있다고 계산한 거겠지.” “.......” ‘난 왕비의 신뢰에 응해야만 해. 한탄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의연한 태도였다. 셰라는 처음으로 이 사람의 자질을 보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왕좌에 앉게 되어, 바라지도 않는 왕국의 운명을 떠안고서도 이 사람은 진정한 국왕이었다. 그리고 왕비는 이 국왕의 가장 큰 이해자인 것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 뭔가 잘못되었다. 국왕이 그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도, 그 사람이 희생이 된다는 것도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떻게든... 기사단 분들만이라도 구출할 수 없겠습니까. 그렇게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 사람을 구해 오겠습니다.” “그럴 생각으로 교섭을 진행하고 있어. 하지만 곤란하게도 내 입으로 얘기를 꺼낼 수는 없어.” “예...?” “일반 병사의 인질 교환에 일일이 국왕이 나서는 건 이상하니까. 그런 문제는 더 사무적으로 처리되기 마련이야. 그래서 재상이 여러모로 손을 쓰고 있지만. 놈들은 현재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딴청을 피우고 있어. 아마도 캐리건이 폴라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내 쪽에서 말을 꺼내게 만들려는 거겠지.” “하지만....” 어째서 이쪽에서 말을 꺼내면 안 되는 건지 묻자.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몸값을 제시하는 건 인질을 잡은 쪽의 자유야. 그런데 놈들은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지.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런데 이쪽에서 먼저 ‘얼마라면 지불하겟습니다’ 따위로 말을 꺼내는 건 너무 위험해.” 셰라는 심하기 초조했다. 역시 이런 교섭이 되면 자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대로는....” 견디다 못해 말을 꺼내려 한 순간. “왜 그러지? 무슨 움직임이 있었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흑왕이....” 왕비의 애마가 갑자기 일곽에 나타나 손도 댈 수 없을 정도로 날뛰고 있다고 했다. “사, 사로잡으려고 햇습니다만 그. 비전하의 애마인지라 너무 거친 수단은 취하지 못하고, 벌써 몇 사람이 걷어차여 날아갔습니다.” 왕비가 없을 때 찾아 왔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말이 그렇게 까지 흥분하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국왕은 서둘러 본궁 앞의 정원으로 나가보앗다. 과연 시종 보고대로 흑왕이 날뛰고 있었다. 잔디밭이 엉망진창이 되어있다. 근위병과 하인들이 말을 둘러싸려 했지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좋은 말은 사람들을 가까이 접근시키지 않았다. 저금 떨어진 곳에 구경꾼들이 몰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셰라는 나설 수 없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죠/“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눈 앞에 있는 얼굴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새하얀 얼굴과 검은 머리, 깊고 푸른 눈에 숨을 삼킨다. 루도 살짝 눈을 치떴다. 생긋 웃으며 말한다. “북쪽에서 돌아온 달님?” “저어....‘ “난 루. 잘 부탁해.” “저는 셰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건 무슨 소동?”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날뛰는 말이 아니었는데.... 어쩌면 왕비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게 그 애의 말이야?” 왕비를 두고 ‘그 애’라고 부르다니, 셰라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의 말이라기보다 친구입니다. 그라이아라는 이름의....” 상대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는 걸 보고 셰라 역시 놀랐다. “그라이아라고?” “예....” “이런이런....” 루는 살짝 고개를 젓다가 훌쩍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위험해!‘ “물러나 있어!” 살기등등한 병사들이 저마다 소리치며 제지하려 했지만 루는 솜씨 좋게 그 사이를 통과했다. 당당하게 서 있는 말을 향해 입을 연다. “그라이아.” 친한 친구라도 부르는 것 같은 어조였다. 놀랍게도 미친 듯이 날뛰던 말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루는 아무 주저 없이 말을 향해 다가갔다. 말의 상태는 아직 안전하다고 하기 힘들다. 눈에는 험악한 빛이 감돌고 호흡도 거칠건만 거침없이 손을 뻗어 말의 목을 두드려 준다. “괜찮아. 괜찮아. 그 아이는 아직 무사하니까....” 청년이 두어 마디를 속삭이자 말은 완전히 얌전해졌다.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듯이 콧등을 부벼댄다. 구경꾼들은 경악했다. 흑왕은 왕비 이외의 인간에게는 타는 것은 물론이고 만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다른 사람은 따르지 않는다. 그런 말이 긴 머리의 청년을 따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흑왕이 왕궁에 올 때면 언제나 머무는 마구간이었다. 마치 사이좋은 친구들이 얘기라도 나누는 것처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날 밤, 셰라는 서리궁에서 루와 만났다. 국왕에게서 이 사람이 왕비가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왕비가 이 자리에 없는 이상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예전 파라스트의 요술사들이 왕비를 속인 적도 있다고 했다.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지만, 국왕은 틀림없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셰라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인상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한낮에 성령이 나타난 게 아닐까 했을 정도로. 루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쟌펠 부인이 꽂아둔 장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는 진홍빛 꽃도 검붉은 색으로 보인다. 루의 발치에 늑대가 웅크리고 잇엇다. 흑왕과 마찬가지 였다. 왕비 이외의 사람은 절대로 따르지 않던 거대한 회색 늑대가, 지금은 지극히 얌전하게 앉아 자신을 쓰다듬게 놔두고 있다. “당신도 동물과 얘기를 할 수 있나요?” 셰라가 묻자 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의 친구라면 나한테도 친구야. 그것 뿐.” “왕비님이 걱정되지 않으시나요...?” “걱정이야. 걱정스럽고 걱정스러워서 미칠 것 같아.”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셰라는 부엌으로 들어가 마실 것을 두 잔 만들어 왔다. 하나를 루에게 내밀고 자신도 그 곁에 앉았다. 건방진 짓이라는 자각은 있다. 자신은 심부름꾼이고 이 사람은 왕궁의 손님이니 이렇게 경솔하게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건만, 어째서인지 곁에 있고 싶었다. “임금님한테 들었는데, 셰라도 그 아이한테 물렸다면서?” “예, 제가 맛있다고 하시더군요.” 셰라는 진지하게 대답했지만 그게 어지간히 우스웠는지 루는 큭큭 웃음을 흘리다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빛났을 때도 옆에 있었다고?” “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달은 태양을 돕는 존재니까.” 셰라는 어색하게 곁을 바라봤다. 햇빛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곳은 밤의 실내인데 어째서 검은머리가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낮에 봣을 때와는 인상이 전혀 달랐다. 점점 더 성령처럼 느껴진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돌아와 줘서 다행이야. 셰라가 있는 것과 없는 건 전개가 전혀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아닙니다. 전 언제나 제일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 무력함이 한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걸 제일 강하게 느끼고 있는 건 왕비일 거야.” “.......”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들이 조급해할 상황이 아니야. 그래서는 구할 수 있을 사람도 못 구하게 될 테니까.” 셰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군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루도 자신의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이거 맛있는데, 한 잔 더 만들어주겠어?”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린다 왕비가 탄가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라스트 국왕 오론은 기뻐 날뛰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미 처치한 거나 다름없다. 가장 신경스이는 존재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몸을 움츠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오론이 제일 먼저 하 행동은 산세베리아와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다. 너무나도 오론다운 수법이다. 앞 뒤의 적을 상대로 싸우려면 전력이 분산되어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서부 일대에 침입한 산세베리아 군을 완전히 괴멸시키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서부 일대에 침입한 산세베리아군을 완전히 괴멸시키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우선 산세베리아와 화평을 맺은 뒤 델피니아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 완전히 뭉개버린다. 그 뒤에 느긋하게 산세베리아를 처리하면 된다. 그런 오론의 속셈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오르테스는 이 평화조약에 응하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분통이 터져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제안을 거절하면 파라스트는 진심으로 산세베리아를 공격할 것이다. 게다가 델피니아의 응원도 기대할 수 없다.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지금의 오르테스에게 가능한 것은 단 하나.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어두어 이후에 대비하는 것 뿐이다.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뻔히 알고 있다. 델피니아를 처치하고 나면 오론은 반드시 산세베리아에 이를 들이덴다. 알고 있지만, 약소국인 산세베리아에게는 평화조약에 응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델피니아가 쓰러지면 더욱 심한 굴욕이 기다리고 있다. 다시 파라스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르테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방법이 없군....”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지친 목소리였다. 그러나 주군의 생각과는 반대로, 측근인 달튼은 간단히 델피니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자에게 붙는 것이 약소국의 지혜입니다. 지금은 파라스트에 굴복할 수 밖에 없지요. 이 상황에서야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괴로울 때일수록 승리의 여신님을 믿어보십시다.” 게다가 왕비까지도 달튼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린디에타 왕비님이, 그렇게나 강하신 분이 언제까지고 적의 포로로 계실 리가 없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탄가는 그 분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겠지요. 그 때가 오면 폐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델피니아의 우방이 되어주십시오.”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남편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일도 없던 리리아 왕비가 어딘가 침통한 , 필사적인 표정으로 부탁했다. “그 사람은 델피니아 하나만이 아니라 우리나리의 운명까지도 등에 지고 있는건가....” 그러나 오르테스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그 오만하리 만치 아름다운 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힘겨운 싸움이라도 승리로 이끈다는 하미아처럼, 이 산세베리아에도 승리를 가져다 주길 바랐다. 어떤 의미로는 오론 이상으로 왕비가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이가 있었다. 조라더스의 후계자 나젝크 왕자였다. 왕자는 그린다 왕비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왕자가 왕비를 원망한다는 것 자체가 방향이 한참 틀어진 얘기지만, 그런 만큼 뿌리 깊고 격렬한 증오가 되어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원한을 풀어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상대는 부왕의 포로이다. 왕자가 멋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건방진 계집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손으로 치욕을 안겨주지 않고서는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그런 왜곡된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던 왕자는 여러모로 고민 끝에, 마침내 한 가지 생각을 해내고서 곧바로 부왕에게 달려가 면회를 요청했다. 같은 성 안에 있어도 국왕의 거성과 왕자의 거처는 따로 분리되어 있다. 절차를 밟지 않으면 부자가 얼굴을 마주할 인도 없는 셈이지만, 그것이 평범한 왕가의 방식이다. 그 때 조라더스는 거실에 앉아, 불쾌한 기분으로 델피니아가 보낸 대답을 듣고 있었다. “왕비가 인질로 잡혀 있는데 , 상당히 고집스러운 대답이로군....” “그렇사옵니다....‘ “왕비 한 명과 타우를 교환할 수는 없다고?” “예..., 그 뿐만 아니라, 왕비는 귀국에 손님으로서 체제하고 있으니, 타우가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면서....” 달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필사적으로 달려 돌아온 사자는, 주군의 안색을 살피면서 신중하게 대답햇다. “물론 허세입니다. 하지만 월 왕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체면이 있겠지요. 타우 전역을 양도하는 게 무리라면 광맥의 장소를 지정해서 일부를 요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과연 그 조건에 코랄의 멍청이가 응하려 들까?” 사자는 할 말을 잃고 시선을 피했다. 월 왕의 완고한 태도를 직접 눈으로 보았기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조라더스는 무섭게 눈을 빛내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시종 하나가 들어와 나젝크 왕자가 부왕에게 면회를 요청한다고 전한 것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조라더스는 생각도중에 방해를 방아 더욱 불쾌해졌지만 일단 들여보내도록 지시햇다. 진이나서 들어온 나젝크 왕자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한 뒤, 그린다 왕비에 대해 언급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포로를 제게 주십시오.” 조라더스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이 왕자에게 , 자신의 피를 잇고 있다는 이상의 가치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조라더스였다. 화를 낼 기력조차 잃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멍청아, 정신 나갔느냐. 그 자는....” “아버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 포로는 원래 출신을 따져보자면 옆 나라 국왕의 양녀였습니다.” “그래서?” 나젝크 왕자는 침으로 입술을 축이면서 부친의 눈치를 살폈다. “옆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의붓아버지와 양녀의 결혼 따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왕의 핏줄도 아닌 자를 왕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은 절대로 인정될 수 없지요. 듣자하니 델피니아인들은 그 여자를 왕비로 모시며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만 웃기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의 법률을 보자면 그 여자는 왕비는 물론이고 본래 출신조차 알 수 없는 미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아버님쯤 되시는 분께서 그런 자를 이웃 나라와의 교섭에 이용하다니, 탄가 국왕의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왕의 얘기 상대를 하고 있던 탄가의 중신들이 무심코 얼굴을 찡그렸다. 천박한데에도 정도가 있다. 왕비의 존재는 델피니아에 있어서 그런 가벼운 의미가 아닌 것이다. 홀로 수만 명의 군사를 움직이고 사기를 고무시키며 국가 그 자체에 영향을 주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나젝크 왕자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술은 그럭저럭 뛰어나지만 이 인간이 탄가의 차기 국왕이라고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중신들은 조라더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이 짧은 아들에게 주군이 일갈을 퍼부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조라더스는 갑자기 표정을 부드럽게 풀더니 기분 나쁠 정도로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젝크, 훌륭하구나. 잘 말해 주었다. 과연, 그 여자가 왕비라는 것은 명목에 지나지 않지. 굳이 교섭에 쓸 것 까지도 없어....” “옛” “좋다. 너에게 내려주마.” “감사합니다! 빨리 저 건방진 년에게 노예에 걸맞은 예절과 주인에 대한 말버릇을 가르치겠습니다.” “헛소리!!” 조라더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의 눈빛은 왕자의 심신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멍청한 것이! 한 번 칭찬을 하면 몇 배는 바보짓을 저지르니 원! 누가 네 장난감으로 주겠다고 했나?” “에, 에?”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던 나젝크는 아버지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생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 여자는 누구나 인정하는 델피니아의 왕비야. 하지만....“ 조라더스가 씨익 웃었다. “네 말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국왕이 양녀를 두는 것도, 양부가 양녀와 결혼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아. 즉, 우리나라의 법으로 볼 때 그린디에타 라덴은 왕관도 남편도 없는 독신이다. 나젝크가 남편이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중신들 전체가 경악했다. 무엇보다도 나젝크 본인이 가장 놀랐다. 올해로 24세가 되는 나젝크 왕자는 한 번 결혼 했지만, 그 부인은 1년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후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분명히 독신임에는 틀림없다. “아, 아버님....?”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그 여자를 나젝크의 처로 삼겠다고 델피니아에 청했었지. 그 때 델피니아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월 왕과 위장 결혼을 시키면서까지 우리나라의 국혼 신청을 거절했다. 그 빚을 갚을 좋은 기회가 아닌가.“ 델피니아 인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소리였다. 그러나 조라더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델피니아는 자국의 법률에 따라 일을 진행시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그대로 하도록 하지. 나젝크, 이것은 짐의 명령이다. 그린디에타 라덴을 처로 맞아 성대하게 혼례를 올리도록.” “하, 하오나....” 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젝크는 그저 굳어 있을 뿐이었다. 중신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중 한명이 간신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왕비를 방패로 타우를 양도받기는 힘 들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코랄의 멍청이 놈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나?” 아직도 얼어잇던 사자는 주군의 물음에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옛.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타우를 양도받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어.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유용하게 이용해야지. 델피니아 인은 그 여자를 하미아 이상의 승리의 여신으로 여기고 있다. 그 신앙 때문에 우리나라가 델피니아를 침공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 놈들은 어째서 그 여자를 받들까? 자국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에 숭배하는 거다.” 중신들도 그제야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확실히 명안입니다. 델피니아 왕궁도, 백성들도 탄가 왕지의 처가 된 여자를 왕비로 인정하지는 않겟지요. 그렇게 발표하기만 해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조라더스는 더욱 유쾌하기 웃었다. “누가 발표만 하겠다고 했나? 나젝크에게는 다행히 정처가 없어. 그린다는 내 아들의 정실이 되어 내 손자를 낳아주어야 한다. 아들이 태어나면 내 손으로 확실하게 교육해서 훌륭한 기사로 만들어 주지. 언젠가 델피니아를 섬멸하는 전쟁의 선봉에 세우겠어.” “과, 과연....” “타우와 교환할 수 없다면..., 측실이 아니라 정실로 들이는 거라면 각국의 비난도 피할 수 있습니다.” “적국의 왕자를 낳은 여자라면 더더욱 전쟁의 여신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지겠지요.” 조라더스의 최종적인 목적, 즉 델피니아를 약화시킨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불확실한 타우에 집착하는 것보다 왕비에 대한 델피니아 인들의 신앙을 실추시키는 편이 훨씬효과적이다. 믿고 의지하는 왕비에 대한 신앙에 금이 가고 그 가치가 떨어진다. 군대의 사기가 저하한 틈을 타서 단숨에 공격하면 된다. 하지만 델피니아도 의외로, 왕비를 빼앗길 정도라면 차라리 타우를 양도하려고 할 지도 모릅니다.“ “그 때는 어떻겠습니까?” 중신들의 의무에도 조라더스는 웃음을 지었다. “좋은 일이지 않나. 나젝크의 아이를 밴 여자를 돌려보내면 된다.” 이 왕의 사고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발어이다. 인질은 단순한 도구라고- 아니, 도구 이하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이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조라더스는 아직도 굳어있는 나젝크를 향해 싸늘하게 웃으면서 다시금 강조했다. “잊지 말거라. 이 결혼은 그린다 쪽에서 바랐던 게야. 귀국의 왕비는 우리나라의 왕자에게 반해 왕자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매달리고 있다고 델피니아에 전할 테니, 너도 그리 알고 마음껏 귀여워해 주거라.” 저..., 그 여자를, 제, 처로...?“ “그렇고 말고, 오래 데리고 있을 필요도 없어. 분명히 네 부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아이만 베게 하면 충분하다. 그러고 나면 네가 바라는 대로 노예로 만들어도 좋고, 그대로 데리고 있어도 상관 없어. 네가 좋을대로 하거라.” “하, 하지만, 정실로 맞아들이면.... 그, 노예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새 부인을 얻을 수도 없고....” 땀투성이가 되어 변명하는 나젝크 왕자를 보고 조라더스는 혀를 찼다. “바보 놈, 필요가 없어지면 행실이 부정하다고 내치면 될 게 아니냐.” 어째서 그 정도 일도 생각할 줄 모르느냐고, 기막혀하는 말투였다. 두 번째의 사자는 ‘커다란 재앙’이라고 루가 점쳤던, 바로 그대로였다. 저번 사자로부터 열흘 뒤. 탄가의 사자는 경이로운 속도로 다시 코랄에 나타나 국왕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제멋대로이고 후안무치한 말에는 중신들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코랄 성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노성이 울렸다. “헛소리도 작작 하시게!!” 재상 브룩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비전하께서 나젝크 왕자와 결혼?! 잘도, 잘도, 그런 헛소리를...!” 온화한 성품의 재상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잇다. 사자는 부드럽게 반론했다.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나라의 법률에 비추어볼 때 월 폐하와 그 분의 결혼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분이 탄가인 남편을 얻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소!‘ “곤란하군요. 오해가 없도록 말씀드립니다만, 이 결혼은 그 분 쪽에서 청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비전하를 이곳으로 모셔 와서, 그 분의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씀해 주시도록 부탁드리오!” “아니지요. 한 때 남편이라 불렀던 폐하의 앞에서 자신의 변심을 고하기에는 그 분으로서도 죄책감이 크실 테니까요.” “우리가 그런 궤변에 납득할 거라 생각하시나!” 브룩스의 일갈에 사자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이 두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궤변이라 하셨습니다만, 그린디에타님이 우리나라의 손님이 되신 지로부터 이미 반 달 이상이 지났습니다. 돌아가실 뜻이 있었다면 전쟁의 여신으로 불리시는 그 분께서, 저희들이 아무리 붙든다 한들 돌아오시지 못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그 분이 자신의 의지로 저희 나라에 머물고 계시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아무리 그 분이라도 견고한 감옥 안에 갇혀서는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겠지요. 당신들이 멋대로 구속해두고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 그 분의 뜻이라니, 잘도 말씀하십니다....” 브룩스의 어조는 분노를 넘어 저주에 가까운 신음이 되어 있었다. 주르륵 늘어선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욕설은 퍼붓지 못했지만 누구 할 것 없이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려보는 시선에 찔려 죽을 것 같은 기세이다. 사자는 그래도 겁먹지 않았다. 한없이 뻔뻔스럽게, 당황하는 척하며 말을 잇는다. “여러분이 분노하고 한탄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분의 변심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그 분은 한때의 약속을 떠올린 것만이 아니라, 나젝크 왕자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 처가 되는 데에 의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 있는 어조였다. 연극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설령 바닷물이 끓어 넘치고 대지가 갈라지는 한이 있어도, 천지가 뒤집히고 태양이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린다 왕비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단언할 수 있었다. “사자여. 그 대가 읊은 거짓말을 믿을 수는 없소이다.” “정말로 유감입니다만, 제가 드린 말씀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 쪽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회견 내내 국왕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붙잡힌 기사단원들을 돌려주실까. 설마 그들까지 탄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처로 맞을 결심을 했으므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사자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에 대해 귀국의 재상의 요청에 따라 조사해 보앗습니다만, 해당하는 기사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뭔가 착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그 중 한 명은 내 애첩의 동생이네만, 그래도 모르겠다는 건가?” 순간 사자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도저히 연극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그것은....” “기사들은 왕비와 함께 포로가 되었네. 사랑스러운 애첩의 동생이니 몸값을 낼 생각도 있네만, 끝까지 모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 “하아..., 정말로....” “다시 한 번 묻겠네. 붙잡힌 것은 왕비뿐이고, 보나리스에 다른 기사들은 없다는 말인가?” 사자는 경악을 드러내고 말앗다. 국왕이 보나리스의 지명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이었다. 그것은 극비사항으로, 특히 델피니아 쪽에는 절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델피니아의 가신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왕비가 어디에 붙잡혀 있는지 아무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태도는 당당했다. 넘겨짚어 본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무엇보다도 사자가 보인 희미한 동요가 국왕의 말을 긍정하고 있었다. 사자는 즉시 표정을 되돌리며 얼버무렸지만, 국왕은 그 이상 흥미가 없는 듯했다. “수고했네.” 그 말과 함께 유치한 연극으로 가득한 회견을 마쳤다. 사자가 물러나자마자 중신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알현실에는 고함이 가득 찼다. “그 무슨... 파렴치하고 불결한 짓인가!” “이는 절대로 비전하의 뜻이 아니야. 하지만 그 사자의 태도로 봐서는 완전히 빈말만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 강제로 농락할 생각이다.” “말도 안돼. 암사자를 덮치는 거나 다름없다고?!” “검을 들고 전장에 선 거라면 몰라도, 지금 그 분은 맨몸이야. 게다가 탄가 놈들의 수중에 있지.” “에에잇! 그런 미친 짓을 허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던 대신들의 시선이 국왕을 향해 모였다. 누구보다도 분노해야 할 사람이, 아까의 회견 중에도 지금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폐하?!” “이대로 내버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된 이상 출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하께서 보나리스에 붙잡혀 계시다는 사실은 틀림없을 터이니...!!” “안 돼.” 국왕의 엄숙한 목소리가 소란을 진정시켰다. “대군을 이끌고 가면 교섭의 여지가 있다고 가르쳐주는 거나 다름없어. 조라더스는 그 대신 타우를 양도하면 왕비를 돌려주겠다고 하겠지.” “하오나 폐하!” “본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폐하께서 왕비를 빼앗긴 왕으로 오명을....” 한 사람이 분노하며 그런 말을 꺼내자, 다른 사람이 맹렬하게 반론했다. “아니, 기다려! 그랬다가는 탄가의 속셈에 그대로 넘어가버리는 셈이 되지 않나!!” “그럼 손가락이나 빨면서 지켜만 보자는 말씀이시오?” 저마다 목청을 드높이며 의견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신들의 제일 뒤에 서 있던 루는 옥좌로 다가가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나젝크 왕자라는 건 어떤 사람?” 국왕은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냉정하게 대답했다. “기사로서는 그럭저럭 쓸 만하고, 왕권을 이을 후계자로서는 낙제점, 인간으로서의 품성은 천박하고 졸렬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남자지.” “그럼 그 아이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게 될 리가 없겠네요.” “없지.” 말수는 적었다. 그러나 루는 국왕의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면서 손등에 혈관이 떠올라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왕 역시 옆에 서 있는 사람으로부터 요기에 가까운 살기가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종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말씀드립니다. 사보아 공작 발로님, 라모나 기사단장 나시아스님이 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종을 밀어젖히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형님! 그 파렴치한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발로의 첫 발언이었다. 말을 잃고 있는 가신들을 흘끗 둘러보며 성큼성큼 옥좌를 향해 걸어왔다. 국왕은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고 미소지은 듯 했다. “어째서 돌아왔지? 귀환 명령은 내린 적이 없는데.” “명령 위반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탄가의 사자를 자처하는 파렴치한이 자하니를 통과하면서 저희들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입으로 직접 말할 용기는 없었는지 나중에 하인을 통해 전달했습니다만. 그 내용이라는 것이....”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더럽다는 듯한 얼굴이다. 나시아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했다. “적의 간계에 휘둘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도라 장군과 상의해서 저희들이 확인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경거망동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꾸짖음도 달게 받을 생각입니다만, 이 기만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싸움이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자히니에 주둔하던 델피니아 군의 동요가 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얘기를 병사들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놈들이 큰 목소리로 외치고 다녔으니까요. 귀를 막로 있어도 들렸을 겁니다. 게다가 저희들 앞으로 서간까지 보냈지요. 바란다면 그린디에타 라덴과 나젝크 융크의 혼례식에 정식으로 초대하겠다는 헛소리를 말입니다.” 발로가 이를 가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침묵하는 가신들을 대표해 브룩스가 말했다. “비전하께서는 승리의 여신의 화신이라 불리는 분이십니다. 패배와도 굴욕과도 연이 없는 분이시지요. 그렇게나 긍지 높은 분께서 이런 비열한 수단에 치욕을 입고 견딜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그 분은 스스로 목숨을....” 브룩스의 불안에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동요했다. 누구나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너무나도 불길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던 말이었다. “아뇨.”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전원의 시선이 일제히, 국왕의 곁에 서 있는 청년을 향해 쏟아졌다. 발로와 나시아스는 처음보는 인물이다. 누구냐고 묻는 것보다도 먼저 루기 말했다. “죽을만한 여유가 있으면 그 아이는 그 왕자를 찢어죽일 겁니다. 굴욕과는 연이 없어요? 설마, 그 아이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지독한 꼴을 겪어봤습니다.” 국왕을 돌아보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그 맹세, 철회해도 괜찮겠어요?” “날 위해 검을 휘두르겠다던 맹세?” “그래요. 지김 임금님은 움직일 수 없죠?” “혼자서 갈 생각인가?” “혼자가 아니에요. 그라이아가 있으니까.” 다른 중신들이 멍하니 굳어있는 가운데, 두 사람은 한참동안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마침내 국왕이 입을 열었다. “상관없겠지. 서약을 철회하게.” “고마워요.” 루는 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알현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당연히 도중에 서 있는 발로와 스쳐 지나가게 된다. 틸레든 기사단장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기다려! 넌 누구냐?” “이름은 루. 여기 왕비님의 파트너이고, 지금은 옛 애인. 돌아와 줘서 다행이에요. 잠든 척하는 호랑이 씨. 싸우는 꽃 씨도.” “뭐?” 기막혀하는 두 사람에게 루는 웃으며 인사했다. “뒷일을 잘 부탁해요.” 두 사람으로서는 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 또 다시 시종이 달려왔다. 나쁜 소식이었다. 파라스트가 산세베리아에 평화 조약을 제의하고 산세베리아가 그에 응했다는 소식이었다. 알현실에 있던 사람들은 아까의 기묘한 청년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다시금 흥분했다. “산세베리아의 애송이 놈이!” “아마도 비전하의 일을 들은 거겠지. 허 참, 변심도 쉽게 하는군.” 점점 더 심각한 사태였다. 등 위의 걱정거리를 잠재운 오론은 틀림없이 전력을 다해 델피니아를 공격할 것이다. 브룩스가 고뇌에 찬 얼굴로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비전하를 구하지 않고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니, 사방이 막힌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전하를 탈환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국왕은 그럼에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저었다. “왕비를 걱정하는 그대들의 마음은 기쁘지만 탄가가 노리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네. 절대로 군대를 움직여서는 안 돼. 이것은 국왕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네. 이 이상 소란 부리지 마.” “폐하?!” 모두 경악했다. 특히 두 사단장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재상 브룩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씀은..., 아무리 폐하의 말씀이시라 해도 따를 수 없습니다.!” 비명을 질렀지만 국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상 할 말은 없었다는 듯이 외투를 집어 들고 물러났다. 알현실에서 나온 국왕은 바로 마구간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루가 재갈을 손에 든 채 흑왕과 마주 보고 있었다. “네 친구가 억지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의 부인이 될 지도 몰라.” 인간에게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태도였다. “대체 이런 거, 배역부터가 엉터리잖아. 그 애가 사로잡힌 공주님역이라고? 정말 웃기지?” 즐거운 듯이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지만 표정은 달랐다. 붉은 입술에 싸늘하고 기분 나쁜 미소가 새겨져 있다. 별빛 아래에서 이 사람을 봤을 때 국왕은 검은 천사라고 평했지만, 그와도 달랐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는 이 청년의 얼굴은, 지금 칠흑의 날개를 지닌 전쟁의 천사로 변해 있었다. 실제로 루는 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봉인만 없었더라면 이 일대를 날려버렸을 정도로. 그 아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거라면 자신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그 아이의 의지를 무시하며 억지로 능욕하려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검은 천사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곤란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는 걸.” 그 이상으로 그 아이가 얼마나 미쳐 날뛸지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껏 황야를 달리는 동물들은 그런 말의 의미도, 그런 단어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그들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그 일상이 침해되었을 때이다. 사람에게 붙잡혀 쇠사슬로 묶이고 창살 안에 갇혔을 때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유를 갈망한다. 스스로의 몸을 태울 듯이 자유를 갈망하며 모든 생명을 폭발시킨다.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이거 물어주지 않겠어? 난 그 아이만큼 말을 잘 타지 못해. 물론 그 아이하고 다시 한 번 만날 때까지만 이면 충분하니까 부탁해.” 흑왕은 고개를 홱 돌린 채 기가 막힌다는 듯이 루를 흘겨보다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 지 스스로 재갈을 입에 물었다. 마구간지기가 기겁을 하고 있을 때 국왕이 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보나리스는 조라더스가 자랑하는 튼튼한 성채야. 혼자서 가봤자 어떻게 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런 건 가 보고 나서 생각하죠.” 능숙하게 고삐를 잡고 적당한 안장을 골라 말의 몸에 동여 매면서 루는 말했다. “임금님은 하늘이 회색으로 보인 적이 있나요?” “응?” “흐린 날씨도 아니고 비도 안 오는데 칙칙한 회색 뚜껑이 무겁게 덮인 것 같은 하늘 말이에요. 밤도 그렇죠. 별도 달도 빛나고 있는데 썩어버린 곡기가 몸 속 까지 시커멓게 물들이는 그런 느낌.” “.......” “그 아이가 없는 세상은 내게 있어서 그런 곳이에요. 그러니까 갈 겁니다.” “.......” “그 아이가 강제로 싫어하는 남자의 노리개가 되다니 말도 안되요.”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말도 안돼.” 마구간 바깥으로 그라이아를 데리고 나와서 루는 국왕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그럼, 먼저 가죠.” 왕비이외의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던 말 위에 뛰어올라 솜씨 좋게 고삐를 쥐며 달려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국왕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표정이 굳어진다. 이번에는 부용궁으로 이동했다. “폐하, 저어. 무슨...?” 폴라가 놀라며 뭔가 물으려는 것을 가로막고 국왕이 말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 “예.” “혹시 내가 왕좌에서 쫓겨나기 되면, 그래도 날 따라와주겠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극단적인 말을 꺼낸 국왕을 향해 잠시 동그랗게 눈을 뜨다가 폴라는 즉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다음 날 아침 식단을 고르는 만큼도 망설이지 않았다. 왕관에도 옥좌에도 흥미는 없었다. 국왕의 총애를 받고 싶다고도, 애첩의 지위를 바란 적도 없었다. 폴라가 사랑했던 것은 기름의 답례라며 직접 장작 패는 도끼를 쥐었던 지방 귀족 청년이었으므로. “전 당신의 부인입니다.” 월 그리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이 부인조차도 왕비가 자신에게 선물한 거나 다름없었다. “폴라가 그렇게 말해주면 얘기는 간단해. 이 월, 평생에 딱 한 번 내 멋대로 행동하겠어.” “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 이상의 질문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만큼 폴라는 남편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국왕이 다음으로 찾아간 것은 이븐의 집이었다. 열흘 정도 전에 이븐은 tial안과 함께 왕궁으로 달려왔다. 그렇다고 타우의 공동 숙소에 묵을 수도 없으니 국왕이 임시로 지낼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븐은 그 이후 계속 왕궁에 머무르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탄가가 다음에 어떤 요구를 해 올 것인지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해 두기 위해서엿다. 당연히 아까의 회견장에도 있었지만, 눈에 띄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곽에 마련된 저택으로 찾아가 방문을 알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 본궁의 알현실에 있었으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븐은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스샤의 숲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무법자로 살아왔던 이븐은 거처에 심부름꾼 따위를 둔 적이 없다. 하지만 부인인 tial안은 백작가 출신이고, 귀족이 사는 큰 저택은 여러모로 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저택에도 심부름꾼이 몇 명 일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국왕의 방문에 당황하면서도 이븐에게 그 소식을 알렷다. 이븐은 안 쪽 방에 힘없이 앉아잇었다. 국왕의 얼굴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 아마도 찾아 올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던 듯 했다. 심부름꾼이 물러가고 둘만 남자, 이븐은 국왕의 멱살이라도 쥘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월리, 너 설마 이대로 주저앉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여기 오지도 않았어. 부탁이 있다. 내 일생 일대의 부탁이야. 들어주겠어?” 이븐은 조금 놀라다가 씨익 웃었다. “어디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지.” 12장 날이 저문 뒤 발로의 저택에 나시아스가 찾아왔다.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특히 지금은 매우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현재 상황과 국왕의 태도에 대해 상의하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며 발로는 친구를 맞이했지만, 나시아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는 아직 안오셨나?” “무슨 말이야?” “여기로 와 달라는 전언을 받았는데....” 나시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로도 이상하게 여겼다. 무단으로 남의 집에 사람을 부르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닐 텐데.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 심야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야 국왕이 나타났다. “여어, 늦어서 미안해. 둘 다 있었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국왕의 차림은 확 바뀌어있었다. 몰래 성 밖으로 나갈 때처럼 자유전사의 차림을 하고 있다. “늦은 시각에 놀라게 해서 미안해. 발로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네만, 들어주겠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들겠습니다만....” “고마워. 그리 어려운 건 아니고 이걸 받아주면 좋겠어.” 국왕이 내만 것은 커다란 부대였다. 탈곡하기 전의 보리를 담아두는 물건이다. 안에 뭔가 이것저것이 들어있는 듯했다. 발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종류의 상황에서는 그다지 좋은 추억은 없다. 신중하게 자루를 받아들었다.생각 외로 묵직하다. “?” 내용물을 확인하려던 발로의 손이 얼어붙었다. 표정까지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자루 안에서 발로가 꺼낸 물건을 본 순간 나시아스의 얼굴 역시 굳어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술안주를 가져온 집사 카사의 손에서 은쟁반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유리잔이 박살나는 요란한 소리가 심야의 거실에 울렸다. 숙련 된 집사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카사는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 주..., 주인님.... 그것은....” 그리고 발로도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을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형님, 이게 뭡니까?” “보는 그대로, 왕관이지.” 국왕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과거의 전투에서 획득한 보석들이 빼곡하게 박힌 이 나라 최고의 보물이다. 그러니 이것은 대관식 이외에는 반출이 금지되어 있고, 대관식이 해해지는 야니스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을 텐데. “제가 여쭤버는 건, 그 왕관이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자루 안을 들여다보던 발로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왕관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자루에 손을 집어넣어 하나하나 탁자 위에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해 카사의 안색도 점점 새파래졌다. 깨진 유리조각과 엎질러진 술을 치우러 왔던 하인조차 그 광경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대관식에서 국왕이 몸에 차는 황금으로 상감된 검과 박차, 금실과 은실로 수놓인 외투, 색색가지의 보석이 박힌 팔찌, 반지, 보석, 옥새, 왕비의 관.... 황공하기 짝이 없는 물품의 나열에 하녀들이 기겁하며 멈춰 섰다. 뭔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하녀들이 보기에도 분명 했다. 카사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나시아스의 얼굴도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리 담는 자루 부대에 아무렇게나 담아 올 물건이 아니다. 발로는 그제야 내용물이 사라진 자루를 차분하게 거꾸로 들어 먼지를 털어 보인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형님?” “보는 대로야. 아무 말 말고 받아주기 바라네.” “이 요란한 물건들을 제게 주시겠다고요?” “그래, 덤으로 옥좌도 얹어주지.” 말투만은 농담 같았다. 발로도 기가 막혀서 뭔가 말하려다 국왕의 진지한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국왕은 고뇌가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해. 너한테 밖에 맡길 수 없는 일이다.” “형님 아시겠습니까? 제가 이런 것들을 바랏다면 먼 옛날에 형님께 독이라도 먹이든가, 그 뭐라는 일족에 주문해서 깨끗하게 형님을 처치한 뒤 합법적으로 손에 넣었을 겁니다! 사람이 필요 없다는데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다니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이겁니다!” 나시아스는 신음하며 얼굴을 가렸다. 사보아 가문의 하인 일동은 주인의 폭탄 발언을 필사적으로 ‘못 들은 척’ 하고 있다. 단 한 명, 국왕만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 처음부터 그랬어. 넌 처음부터 내게 몇 없는 아군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은혜라고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편들만한 가치가 있엇으니까 편을 들었지요. 그것 뿐입니다.” “모두가 나를 사기꾼으로 매도하고, 천박한 서자라 욕하는 가운데 친절하게 대해준 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넌 모를 거야. 네 친절에 기대어서 지금까지 수없이 억지만 부려왔지.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다. 받아줘.” “형님은 정말 중요한 순간에 사람 말을 안 듣는군요. 옥좌를 저한테 넘겨버리고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옛 애인한테 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왕비를- 아니 나의 동맹자를 구하러 간다.” 발로는 날카롭게 국왕을 노려 봤다. 국왕은 웃음을 지었다. “난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국왕인 상태로는 일이 잘 풀릴 수 없어. 내가 국왕인 이상 리도 왕비일 수밖에 없어. 탄가는 거물급 인질이라며 기뻐하고, 이 나라도 어떻게든 왕비를 되찾으려 발버둥만 치면서 움직임을 제한당하겠지. 그럼 차라리 리를 포기하면 돼. 그럼 델피니아도 훨씬 움직이기 쉬워질 테니까.” “.......” “그 델피니아의 지휘를 맡는 게 꼭 나여야 할 필요는 없어. 안그래?” 발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의 무모함과 비상식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건만, 기가 막혀서 제대로 말도 나오질 않는 것이다. “일단 앞뒤는 맞는 말입니다만, 대체 이건 어떻게 들고 나오신 겁니까? 야니스의 제사장이 반출을 허가한 겁니까?” “아니,. 그건....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 깊이 알려고 들지 말아 줬으면 고맙겠는데....” “받는 쪽에서는 꼭 깊이 알아둬야 겠습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왕관을 떠넘긴다고 퇴위한 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그걸 좀 어떻게 해서, 억지로라도 퇴위한 걸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뒤는 너에게 일임할 테니.” 발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형님. 당신은 근본적으로 남에게 부탁하는 태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덤으로 말씀드리자면 신하를 써먹는 방법도 모르시는군요. 왕위에 앉은 채로는 단독 행동을 할 수 없다. 왕비를 구하러 갈 수도 군대를 움직일 수도 없다. 거기까지는 저도 잘 알겠습니다.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거창한 방법을 동원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중병이라든가 아무튼 그런 사정으로 자리에 눕고, 그 사이에 국왕 대행이 되는 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서는 리가 왕비라는 사실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않고서는 탄가를 공격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국왕은 곤란한 듯이 웃었다. “일시적으로 네게 왕위를 맡기고, 용무가 끝나면 돌려달라는 말이 더 하기 힘드니까. 사보아 일족의 어르신들도 원한을 품을 테고, 숙모님쯤 되면 저주를 퍼부을 거야. 무엇보다도 넣라면 나보다도 훌륭한 왕이 될 게 틀림없어.” “제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건 너답지 않게 소극적인 대답인걸.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델피니아의 국경이 대폭적으로 바뀌게 돼.” “그럼, 제가 나중에 왕위를 돌려드릴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국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처음부터 넘겨 줄 생각으로 꺼낸 말이니까.” 발로도 웃어버렸다.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싶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제가 이것을 받았다고 해서 즉위한 게 되지는 않습니다. 대관식에는 나름대로의 수순이 있지요. 결제 의식을 마치고 즉위를 선언한 뒤, 만물의 섭리를 주관하는 야니스의 신전에서 신관의 축복의 말과 함께....” 비상사태니까 그런 귀찮은 일들은 생략하자고. 요는 네 머리에 왕관만 올라가면 되는 거지만, 신전까지 갈 시간도 없으니까. 아-, 왔군.“ 국왕이 뒤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현관에 아무도 없기에 멋대로 들어왔습니다.” 국왕처럼 보리를 담는 부대자루(특대형)를 등에 지고 있다. 발로와 나시아스 그리고 하인 일동이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독립기병대장, 그건 뭔가?” 이븐은 어색한 듯이, 웃음을 참는 듯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루 안의 내용물을 바닥 위에 꺼내놓았다. 안에서 굴러나온 것은 인간이었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밧줄로 꽁꽁 묶인 야니스 신전의 제사장이다.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녀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런 상황의 사람을 보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겁을 먹게 마련이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여자들만이 아니었다. 카사도 작게 비명을 지르고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물론 카사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시아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고, 발로도 말을 잃었다. 웃고 있는 것은 국왕뿐이었다. “멋져. 너라면 데리고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너 말이지. 이건 확실하게 말해서 범죄라고.” “그렇게 말하자면 나도 완벽하게 보물 도둑이야. 칼을 들이대고 협박해서 강탈해 왔으니.” “그리고 난 유괴범이지. 이래선 도저히 왕비더러 무모하다고 비난할 수 없잖아.” “비난이고 뭐고, 그 녀석이 견본이니까.” 두 사람이 장난에 성공한 아이들 같은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나시아스는 서둘러 제사장의 몸에 묶인 밧줄을 끊고 재갈을 푼 뒤 상처를 치료했다. 발로는 들으라는 듯이 길게 한 숨을 쉬었다. “이런 것까지 왕비를 따라할 필요는 없을텐데....” “하지만 발로, 이게 의외로 효과적이라고.” 이븐도 끄덕였다. “그럼, 그럼. 어차피 형식상의 문제니까. 요는 이 높은 사람이 당신 머리에 왕관을 올려놓고, ‘그대의 치세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하고 말해주면 되는 거잖아?” “말이 지나쳐, 독립기병대장. 하지만 이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나.” 발로는 포기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이것이야말로 질풍과 같은 행동력을 자랑하는 틸레든 기사단장이다. 그리하여 사보아 가의 거실에서, 실로 간략하고 변칙적인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물론 제사장은 맹렬하게 반대했다. 자신은 침실에서 자다가 잠옷 차림 그대로 끌려왔다. 그것만으로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그 주범이 국왕이라니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대관식이라는 것은 새 국왕의 즉위가 전제되며, 새 국왕이 즉위하기 위해서는 전 국왕이 사망하거나 퇴위할 필요가 있다. “애, 애..., 애초에 이런 대관식은 전례가 없었습니다! 대관식이라 하는 것은 국왕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그, 그것을..., 이, 이건 신의 위신에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분노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울먹이는 제사장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하며 달래려 했다. 국왕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외운 대로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발로는 무서운 기세로 몰아쳤다. “왕관을 물려 줄 사람과 넘겨 받을 사람이 합의 했으니 아무 문제 없지 않나.” 나시아스는 애원했다. “왕국의 존속이 걸린 비상 사태입니다. 부디 신념을 굽혀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븐은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지적했다. “야니스가 어떤 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 상당히 멋진 신전이던데요. 당신 방도 바닥부터 천장까지 번쩍번쩍, 눈이 부실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헌금이 쌓이는 것도 이 도시에 힘이 있고 번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전이라는 건 헌금을 바치는 신도가 없으면 유지되지 않지요. 사람들이 헌금을 하려면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탄가나 파라스트가 이 나라에 쳐들어와서 제멋대로 휩쓸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델피니아의 백성들은 침략자에게 짓밟혀 고통 받고 있을 테고, 신전까지 신경 쓸 여유도 없어지겠지요. 우선 탄가나 파라스트가 이 땅을 정복하면 당신도 그걸로 끝입니다. 탄가에는 탄가의 파라스트에는 파라스트의 사제들이 있을 테니까요. 현재의 지위와 신전의 존속을 바란다면 지금은 몰상식한 임금님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 설득이 효력을 발휘했다. 제사장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어하면서도 어쨌거나 월의 퇴위와 발로의 즉위를 인정하고, 발로의 머리 위에 왕관을 얹은 뒤 월이 말하는 ‘암기한 문구’를 엄숙하게 읊었다. 야니스의 제사장으로서 발로의 즉위와 치세에 축복을 내린 것이다. 이 상황을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고 있던 사보아 가문의 하인들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눈앞에서 자신들의 주인의 머리 위에 왕관이 있다. 물론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곳은 장대한 신전이 아니다. 왕궁에 있는 옥좌의 방도 아니었다. 주인님은 이걸로 국왕이 된 걸까? 주인님이 국왕이 된 거라면, 벨민스터 마님이 왕비가 되시는 걸까? 아니, 애초에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월 그리크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걸로 내 종제는 델피니아의 국왕이 되셨다,. 제사장과 나시아스, 이븐, 그리고 당신들이 증인이네.” 카사가 창백한 얼굴로 한 발 나섰다. “폐,폐하, 하지만, 이, 이 대관식은..., 과, 과연, 그..., 합법적인 겁니까?” 그런 집사의 말을 발로가 귀찮다는 듯이 가로 막았다. “할아범, 늙은이는 물러나 있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금은 내가 이 델피니아의 국왕이니까. 그렇지요,형님?”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하지만....” “응?” “이걸로 지금의 당신은 내 주군이 아니게 된 겁니다. 그저 사촌 간으로 돌아온 셈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차마 못했던 말을 해두겠습니다만....” “네?” 발로는 팔짱을 끼고 가슴을 쫙 펴며 단언햇다. “당신의 바보짓에는 동서고금의 어떤 약도 치료도 다 소용 없어. 아마 내 평생을 두고 두 번 보기도 힘들, 구제할 길도 없는 완벽한 바보야.” 월도 상처 입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발로, 그렇게까지 힘줘가며 강조할 건 없잖아....” “아니, 아직 안 끝났어. 당신의 바보짓을 두고 할 말이라면 하룻밤 내내 계속 해도 다 못한다고.” 무섭게 사촌 형을 노려보는 발로를 보며, 나시아스는 물론이고 이븐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발로는 곧바로 성으로 들어가, 중신들을 옥좌의 방으로 소집했다. 얼마 전과 마찬가지로 심야의 갑작스러운 소환이었다. 게다가 옥좌의 방은 국내의 공식 식전에 이용되는 대형 홀이다. 가신들은 황급히 달려왔지만, 옥좌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완전히 경악해 버렸다. 왕 이외의 사람이 옥좌에 앉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벌에 처해지게 된다. “사보아 공, 제 정신인가!” “이건 대체 무슨 짓이오?!” 저마다 의문과 비난의 말을 퍼붓는다. 물론 그런 비나에 기가 죽을 발로가 아니다.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할 것 없네. 월 그리크는 퇴위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지금 즉위한 델피니아의 새 국왕 노라 발로다. 옥좌에 앉는다고 해서 뭐가 문제지?” 전원이 다시금 기겁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전개에 혀가 얼어붙어버린 듯했다. 옥좌의 방은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가신들이 충격에서 회복되기 전에 발로는 어떻게 된 사정인지를 설명하고, 잠옷위에 가운을 걸친 제사장도 앞으로 나와 바로 조금 전 대관식이 거행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옥좌에 앉아 느긋하게 등을 기대던 발로는 가신 일동을 돌아보았다. “월 그리크는 동맹자에 대한 신의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일개 전사로 되돌아갔으며, 따라서 나 발로가 국왕으로서 행동하겠다.” 대다수의 가신들은 아직도 경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중신들 중에서도 담력이 잇는 사람들은 회복이 빨랐다. 아누아 백작이 입을 열었다. “국왕으로서 행동하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우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탄가를 섬멸해야지. 놈들은 더럽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단으로 우리나라를 모욕했다.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말겠어. 월 그리크가 퇴위한 이상 그린디에타 라덴도 더 이상 왕비가 아니다. 탄가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내가 그에 응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나제크 융크는 그녀를 능욕할 생각인 듯하지만 말도 안 되는 착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겠지. 난 그린디에타 라덴을 걱정할 생각 따위는 없어. 타우와 교환하자는 말도 안되는 교섭에 응할 생각도 없네. 그 녀의 문제는 그 녀 자신과 퇴위한 자유 전사에게 맡기고 나는 국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어. 우선 보나리소를 정복한 뒤 그대로 케이파드를 향해 진군한다.” 브룩스가 미소 지었다. 그 밖에도 예전부터 국왕의 뜻에 심취해 있던 가신들 몇 명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하자면 발로는 본래 월 그리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발로도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즉위가 합법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뻔히 알고 있다. 그저 말을 맞추기 위한 연극일 뿐이다. 이런 바보짓을 하면서 까지 탄가의 제약으로부터 델피니아를 해방시키려 한 사촌 형은 정말로 구제할 길이 없는 바보였다. 한편 가신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간신히 발로의 진짜 의도와 ‘국왕’의 의향을 이해하고 눈을 빛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도 있다. 그런 이들은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기다려주십시오! 서쪽에 큰 불안을 안고 있는 지금, 보나리스로 출격이라니요!” “너무나도 경솔한 행동입니다!” “교섭에 응할 생각이 없다고 하시지만, 그것은 국왕의 판단에 따라야 할 문제입니다! 애초에 발로님은 정식 수속을 밟아서 즉위하신 겁니까?!” 발로는 경멸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봣다. 어디에나 이렇게 머리가 나쁜 인간들은 있게 마련이다. “같은 소리를 몇 번이고 하게 만들지 마. 월 그리크는 퇴위했다. 그에 따라 그린디에타 라덴도 더 이상 왕비가 아니야. 탄가에게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전해. 그리고 바로 지금부터 나 노라 발로는 보나리스를 공격한다!” “발로님.... 아니, 폐하! 그 곳은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탄가 중앙 지역입니다!” 발로는 이 의견을 무시하고 탄가로 출진할 무장의 이름을 열거했다. 사보아 일족을 총동원한데다 동부와 북부의 유력 영주들의 이름도 다수 섞여 있었다. 이러면 총 세력이 가볍게 3만을 넘었다. 그렇게 다시 가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뒤, 태연하게 말했다. “총 3만의 군대로 진격한다. 지휘는 내가 맡겠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고 해.”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왕국을 대표하는 공작인 발로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하, 하지만 보나리스로 출격하시면 서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산세베리아에게 맡기겠어.” “무모합니다! 그 나라는 이미 파라스트 쪽에 꼬리를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꼬리를 말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델피니아룰 향해 흔들게 만드느 거다. 오래 흔들고 있을 필요도 없어. 전 왕비와 왕위에서 물러난 자유전사 그리고 내가 조라더스를 쳐부술 때 까지만 이면 충분해. 누군가 그 쪽을 설득할 만한 사자를 보내야 하는데....” 브룩스가 앞으로 나서며 절을 했다. “그 역할, 부디 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가신들이 깜짝 놀랐다. “재상?!” “당신이 직접?!”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산세베리아로 가려면 지금은 적지가 되어있는 파라스트를 가로질러야 한다. 들키기라도 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역할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산세베리아가 끝까지 델피니아로 돌아서는 것을 거부하고 파라스트에게 복종하려 든다면 그 자리에서 인질이 된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순례자로 변장하고 가지요. 젊었을 때 몇 번이나 해봤던 짓입니다.” “하, 하지만..., 폐하께서 출병하시고 재상까지 나라를 비우면 이 코랄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자라고 있으니까요.” 여태껏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브룩스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준비해 두었다. 브룩스는 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희미하게 웃음이 어려 있었다. 발로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알았네. 재상에게 부탁하도록 하지.” “반드시 사명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잘 부탁하제.” 그리고 발로는 세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탄가 방면의 포진, 파라스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서부 방면의 포진, 그 구성까지 세세하게 구두로 읊고, 서기관이 필사적으로 그 내용을 받아 적었다. 5백 명 이상의 병사를 거느린 자는 아무리 작은 영토의 영주라도 전부 소환된 것이다. 온 나라의 병력을 동서로 나누는 대규모 출진이었다. 특이한 점은 근위병단이 서족으로 출병한다는 점이었다. 코랄에는 치안 유지를 위해 제5군을 남기고, 나머지 네 분대는 비르그나 앞에 포진하도록 명령햇다. “재상의 실력은 믿고 있지만, 설득에 성공하기 전에 파라스트가 진격해 올 가능성도 있어. 비르그나가 적의 손에 있는 이상 파라스트가 테바 강을 넘어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길츠이 산맥 동쪽까지는 넘어오게 만들지 마.” 저도 모르게 복종해버리게 되는 압도적인 기백과 명령을 내리는 호흡은 피를 이어받은 인물답게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발로는 왕관 바로 옆에서 태어나 자라온 인간이다. 비뚤어진 성격 탓에 받아들 생각은 없었지만, 사용법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발로는 지금의 역할을 즐기고 있었다. 당당한 말투나 자신에 찬 행동도 진짜 이상으로 진짜다운 ‘국왕’을 연기하고 있었다. 최후로 발로는 이븐을 바라봤다. “그런데 독립기병대장, 아니, 타우의 차기 영주라고 불러야 할까. 국왕으로서 그대에게도 협력을 요청하고 싶네.” 이븐은 사보아 저택에서 주고받던 편안한 말투를 싹 지우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타우가 국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단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당신이 아니지요. 협력은 불가능합니다.” “이거 곤란한 걸. 그럼 타우는 향후 델피니아와 결별할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타우에 있어서도 델피니아에 있어서도 손해뿐인 판단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협력을 약속한 국왕이 델피니아에서 떠났으니까요.” “그럼 그 인물이 돌아오면 타우도 원래대로 우리나라의 영토로 돌아와 주겠나?” “난리통에 슬쩍 왕관을 차지한 가짜 왕이 시키지 않아도 우리들은 우리 방식으로 국왕을 되찾겠습니다.” 그 가짜 왕의 즉위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주제에 잘도 이런 소리를 지껄인다. 발로는 씨익 웃었다. “그 불손한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 대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가짜 왕 폐하께서도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하십시오.” “산적 두목이 시키지 않아도 잘할 테니 걱정 마시도록.” 발로의 비아냥에 이븐은 슬쩍 웃고서, 한 쪽 손을 들어올리며 옥좌의 방에서 물러났다. 밖은 아직 어둡지만 바로 타우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발로는 힘차게 손뼉을 치고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가신들에게 호령했다. “자! 제군들은 뭘 어슬렁거리고 있는겐가! 출진은 내일 아침이다! 바로 준비에 들어가!” 지당한 말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사람들은 당황하며 제각각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옥좌의 방에서 뛰쳐나갔다. 남은 것은 옥좌에 앉아있는 발로와, 그 옥좌를 지키는 듯이 시립하고 있던 나시아스 뿐이었다. 발로는 즐거운 듯이 쿡쿡 웃었다. “평생에 한 번 정도는 국왕 흉내도 나쁘지 않은 걸.” 회견 중에는 한 마디도 발언하지 않았던 나시아스도 소리 없이 웃었다. 발로의 말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뭔가 떠오른 듯한 웃음이었다. 발로가 나시아스에게 물었다. “뭐야?” “아니....” 말을 흐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웃음을 짓고 있다. “옛날 일이 생각났던 것 뿐이야. 그런가.... 뒤르와 폐하께서 서거하신 직후, 레온 왕자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의 일이군.” “그 바보가 그렇게 그리워?” “그립고말고. 오랜만에 옛날 꿈을 떠올렸어.” 나시아스는 친구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왕관을 쓴 너를 보는 게 그 무렵의 내 꿈이었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 물론 그런 소리를 입밖에 냈다간 그애로 반역죄가 된다. 레온 왕자는 전 국왕의 아들이며 , 발로는 조카에 불과하므로, 왕관은 능력이 아니라 혈통에 의해 물려받게 되는 것이므로, 그러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것은 니시아스만이 아니었다. 특히 젋은 세대 사이에서는 발로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열광적으로 드높았다. 만약 월 그리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 장면이 현실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런 쓸데없는 꿈을 꾸고 있어?” “아니, 그 꿈은 지금 이루어졌어.” “호우, 그럼 그 다음의 꿈은?” “넌?” “어이, 너, 국왕에 대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오랜 친구 사이이다. 발로가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시아스도 그 장난에 맞추어주었다. 우아하게 절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현 폐하께서는 어떠한 이상을 품고 계시는지요.” “이상과 꿈은 달라. 바라는 것을 현실로 만들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호오ㅡ 그거 꼭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간단해. 북쪽으로 가서 그 자유전사를 끌고 돌아온 뒤 다시 옥좌에 앉혀놓고 나는 두 번 다시 너에게 존대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몸이 된다. 단순한 꿈은 아니야. 반드시 실현하고 말테니까. 너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도 이게 최초이자 최후가 될 거다.” 나시아스는 열심히 웃음을 참으면서 가능한 한 진지하게 대답했다. “미력하나마 폐하를 돕겠습니다. 저도 당신께 존댓말을 쓰려니 상상이상으로 기분이 나쁘군요.” “너, 불경죄야.” “모쪼록 뜻대로 하십시오.” 13장 왕비를 케이파드로 호송하라는 지시에, 뮤렌은 바로 군사와 상의했다. 원래는 집사와 상의해야겠지만 집사는 왕비를 재운 직후부터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집사가 없는 이상, 향을 어떻게 가감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어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 군사가 도움을 주었다. 그 역시 예전에 남쪽에서 공부를 했다면서, 그 이후 왕비의 관리에 대해서는 군사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왕비가 보나리스에 붙잡힌 지 이미 한 달 반이 지났다.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왕비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첫 일주일 동안은 식사조차 주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나? 혹시 이러다가 죽어버리면....” 뮤렌이 불안해하며 묻자, 군사는 자신있게 고개를 저었다. “저 왕비의 몸은 특별합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어버릴 정도로 다뤄야 딱 적당하겠지요.” 일주일 뒤부터 하루에 한 끼씩 식사를 주고 있다. 식사 때마다 뮤렌도 함께 입회해 왕비를 데리고 나왔다. 방 안에서 식사를 시켰다가는 식사 시중을 드는 여자들까지 전부 쓰러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반달이 지나던 어느 날 , 왕비를 케이파드로 호송하라는 조라더스의 명령서가 뮤렌 앞으로 날아온 것이다. “어떻겠나? 왕비도 최근에는 완전히 얌전해 졌어. 큰 어려움 없이 호송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글쎄, 어떨까요?” 작은 몸집의 군사는 매끄러운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앞으로 반 달 정도는 더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데요. 폐하께서는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왕비를 보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실은....‘ 뮤렌이 사정을 설명하자 고양이 같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 왕비를 나젝크 왕자의 심부로?”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왕궁에는 내 인지도가 많아. 그 사람들이 몰래 알려주었지. 그러니 절대로 실수는 용납할 수 없어.” “그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 델피니아가 새파랗게 질려서 타우를 줄 테니까 왕비를 돌려달라고 말하게 유도하려는 작전인가요?” 뮤렌은 싱긋 웃었다. “과연 그 대는 다르군. 하지만 폐하의 생각은 한 단계 위라네. 델피니아의 승리의 여신을 우리나라로 끌고 오려는 생각이시지. 친구들의 얘기로는, 이미 케이파드에서 성대하게 혼례 준비를 하고 있다나 봐.” “하지만 왕비가 허락하지 않을텐데요.”] “그러니 빨리 보내라는 게야.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상당한 말괄량이라고 들었으니 조교가 필요할 거라고....” “그야 그렇겠지. 오리고 신의 제단 앞에 선 신부가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내뱉어버리면 큰 일이니까요.” “그런 일이라면 호송은 거절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대신 나젝크 왕자님께서 이리로 와주시도록 하지요.” “허어..., 무슨 뜻이지?” “즉, 폐하께서는 이 결혼이 어디까지나 왕비의 뜻에 따른 거라고 해두고 싶으신 거지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왕비를 보내면 자기 혼자서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모습이 남의 눈에 띄게 됩니다. 왕비 역시 도중에 정신을 차리고 반항할 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의 입소문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왕비의 뜻이 아니다, 억지로 강요된 결혼이라는 소문이 탄가 내에 퍼지면 델피니아에 까지 조만간 새어나가게 됩니다.” “그야 분명히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있겠나? 처음부터 그 점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니지요. 표면상의 이유를 진짜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조교’를 왕자께서 직접하시는 거지요. 남녀 사이의 이치는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저 왕비가 왕자께 어떤 감정을 품고 있던 간에, 매일 같이 품에 안기다보면 또 다른 감정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왕지님께 반해 몸도 마음도 바치도록 될 때까지 충분히 귀여워해주는 거지요.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러 이 성을 나설 때에는 두 사람이 사니좋게 말을 타고 케이파드까지 가는 겁니다. 누가 봐도 왕비의 변심과 왕자의 애정은 확실하겠지요.” 뮤렌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과연 그렇게 잘 풀릴까...?” “그건 왕자께서 하시기에 달렸지요. 전쟁터에서 용맹한 기사라고 들었습니다만, 밤일 쪽은 어떠실까요?” “으음, 뭐 , 한창 나이시니까....” “그럼 왕자님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십시다.” 군사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밤이 되자 군사는 익숙한 검은 옷을 걸치고 왕비가 잠들어 있는 탑으로 숨어들었다. 경비는 어제나처럼 엄중했지만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몽견초를 태워 경비병들의 의식을 둔하게 만든 뒤 그들의 눈앞을 그림자처럼 지나가 철사 하나로 문에 걸린 자물쇠까지 열어버린다. 문 방재편에도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가볍게 밀자 아무 어려움 없이 문이 열렸다. 낮에 반대편 자물쇠에 장치를 해두어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둔 것이다. 나선계단에 서 있는 병사들도, 왕비의 방 앞에서 불침범을 서던 병사도 눈을 뜬 채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것이 꿈을 본다는 몽견초의 이름의 유래이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군사는 왕비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암흑이었다. 물론 촛대도 있지만 이것은 낮에만 사용한다. 창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이 방은 낮에도 조명이 필요했다. 미리 준비해온 부싯돌로 초에 불을 붙이자. 희미한 불빛 사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왕비의 모습이 드러났다. 살짝 눈을 뜨고 있다. 초점은 흐릿했다. 머리맡에 사람이 서 있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민스가 먹인 호마는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혼수 상태에 빠져 그대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 이후로 반달 내내 호마의 연기를 맡고 이TEk. 눈을 뜨고 있어도 이미 의식이 마비되어 있을 터였다. 레티시아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왕비의 목을 살짝 건드렸다. 독사의 dlQKf이다. 건드리는 것의 목숨을 남김없이 빼앗는 살인자의 손이 기분 나쁠 정도로 부드럽게 왕비의 목덜미를 쓰다음었다. “당신, 정말로 이 약점만은 치명적이야.” 불쌍히 여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일이라면 간단히 처치할 수 있지만. 이렇게....” 레티시아의 손이 목 뒤로 기어 들어가 후두부의 급소를 가볍게 눌러TEk. "여기를 바늘로 찌르면 끝이야. 하지만 더 이상 ‘일’도 아닌데 어떻게 할까나.“ 우울한 듯한, 즐거운 듯한 어조였다. 원칙적으로 파로트 일족은 받아들인 일은 반드시 끝까지 수행한다. 설령 암살을 실행하기 전에 의뢰자가 죽어버린다고 해도. 대가를 받은 이상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파로트 일족의 영업 방침인 동시에,. 그런 태도로 확고한 신용을 쌓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에게 그런 원칙 따위는 상관없다. 이번 일을 레티시아에게 의뢰한 것은 파로트 백작이었다. 그 백작이 죽었으니 임무도 소멸한다. 그것이 레티시아의 사고방식이다. 왕비의 금발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으면서, 레티시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내 손에 죽는 것과 나젝크인가 하는 바보 왕자의 노리개가 되는 것, 어느 쪽이 좋아?”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흐릿한 왕비의 눈은 이런 질문에 대답할 만큼 의식이 남아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비는 힘겹게 얼굴을 찡그리며 갈라진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했다. “일단..., 바보 쪽이야.” 레티시아도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대답을 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당신, 그런 취미가 있었어?” 바로 조금 전 뮤렌에게 남 녀의 이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설교하면서도 실은 온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미져로 보이는 왕비도 레티시아의 눈에는 여자는 물론이고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걸 능욕하겠다니 대체 어쩌자는 심산인 건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가 막혔다. “너한테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그럼 죽이게 해줘.” “싫어.‘ “어째서/” “먼저 바보를 죽이겠어.” 초점도 맞지 않는 눈으로 띄엄띄엄 말했다.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가 바로 옆에 있건만 왕비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아무리 약에 절여 있어도 다소는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식은 땀을 흘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왕비의 목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 “이봐, 왕비 씨. 알고 있어? 이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그 입도 더 못 지껄이게 돼.” “하려면 빨리 해.” “알았어.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나.” 레티시아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남편이나 아가씨가 얌전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조금 시간을 벌어두었지. 조라더스가 코랄로 편지를 보낸 게 어제라고 치자면, 잔뜩 화난 당신 남편하고 아가씨가 달려올때까니는 한 열흘 정도 걸릴까?” “.......” “바보를 이쪽으로 보내도록 편지를 보냈어. 사자에게 돈을 쥐어주고 일부러 천천히 가게 시켜뒀으니 운이 좋으면 시간에 맞추겠지.” 왕비는 미동도 하지 못하는 채로 살짝 웃었다. 레티시아도 웃고 있었다. “내가 왜 당신을 안 죽이는지 이상해?” “조금..., 이거 네 짓이지?” “그게 말이야, 당신네 아가씨 때문에 직장을 잃었어. 그 아가씨가 반츠아를 죽이고, 백작까지 죽여버린 뒤에 일족을 전부 폐기시켰다던데.‘ 왕비는 살짝 눈을 부릅떴다. 여전히 흐릿란 눈이지만 거기에 드러난 감정은 틀림없는 놀라움이었다. 레티시아는 손가락으로 왕비의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묘할 정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네 아가씨는 반츠아를 구해줬어. 그 녀석은 인생에 질려 있었지. 계속 살아가는 게 지겨우면서도 자살도 못해. 그렇다고 자기보다 한참 실력이 떨어지는 상대의 손에 일부러 죽어줄 마음도 없었지. 그런 구석은 역시 행동원다웠어. 쓸데없이 실력이 뛰어나니까 자존심이 허락을 않는거야. 나야 일도 아닌데 일부러 죽여줄 만큼 사람 좋은 성격도 아니고.” “.......” “그러니까, 이건 그 보답.” 레티시아는 손끝으로 왕비의 입술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왕비는 눈을 뜬 채 입맞춤을 받다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 거의 범죄에 가까운 수단으로 억지로 왕위를 내던진 월 그리크는 전력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애인이 먼저 도우러 가게 놔둬서는 남편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농담이지만 시간이 없는 것만은 정말이었다. 나젝크 왕자가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그 가슴을 헤집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떠난 그 청년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 어두운 밤, 발치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하며 달려가던 중, 뒤쪽에서 격렬한 말발굽 소리가 따라왔다. “폐하!‘ “오오, 그대로군.” 은발의 소년이 따라왔다. 조금 머리가 짧아진 것만으로도 소녀로는 보이지 않게 된 얼굴이 외친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래!” 밤길 행군이라면 셰라의 특기다. 정상적인 기사들은 알지 못하는 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길의 상태는 빈 말로라도 좋다고는 하기 힘들었지만. 때로는 짐승이나 지나다닐 것 같은 산길도 있었지만 월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셰라 또한 필사적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허락할까보냐!“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밤이 밝아올 무렵, 두 사람은 앞서 달려가던 그라이아를 따라잡았다. 사실 흑왕의 발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루는 지금까지 전력으로 달리지 않고 두 사람이 따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했다. 뒤를 돌아보며 웃는다. “왔군요.” “당연하지!‘ 갑자기 청년이 속도를 높였다. 말을 잘 못탄다고 했던 주제에 상당히 화려한 손놀림이었다. 나란히 달려가면서 루가 말했다. “사로잡힌 공주님을 구하는 건 왕자님의 역할이니까요! 조금 나이가 들고 애까지 딸리기는 했어도!” “애는 안 딸렸어!” “부인 뱃 속에 있잖아요!” “뭐!” 국왕은 경악햇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정말이야?! 난 그런 소리 못 들었어!” “착한 부인이던데요. 왕비와 동생의 안위가 확실하게 결정될 때까지 숨겨달라면서. 이뵈요-! 왕비를 도우러 간다고 말하고 왔어요?” “걱정할 것 없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폴라는 날 믿고 있으니까.” “우와아, 이 임금님 진짜 뻔뻔스러워!” “난 더 이상 국왕이 아니야.” “바보같은 소리하지 말아요. 임금님은 일이 끝난 뒤에 다시 왕궁에 돌아가게 될테니까.‘ “그것도 점인가?” “그럼요!” “그럼 치는 김에,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없을 지도 점쳐줘!” “무서워서 그런 짓 못해요!” 두 사람은 전 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셰라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은 아직 멀었다고 반성했다. 갑자기 생각이 나 외쳣다. “폐하 폴라님께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분도 분명히 기뻐하실 겁니다!”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입으로 전해주겠어!” “환상적인 본처와 첩의 관계네요!” “부럽지?!” “자기 입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다지 진지함이 느껴지지 않는 대화지만 말의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말의 발이 느려질 때마다 아직 국왕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초소에 들러 새 말을 조달했다. 점점 세 사람의 말수가 줄어든다. 그들이 간신히 폴리시아를 통과할 무렵. 늦어진 편지를 받아든 나젝크 왕자가 의기양양하게 케이파드를 출발했다. -17권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