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델피니아 전기 15 (승리의 유혹) 지 은 이 : 카야타 스나코 옮 긴 이 : 김소형 펴 낸 이 : 김 출 판 사 : 대원씨아이 출판년도 : 2004년 4월 15일 <지은이 소개/ 카야타 스나코> 작가 카야타 스나코는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 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해 200만부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오키 마미야는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동인지 시절 작가 카야타 스나코와 알게 되면서 함께 작업을 시작해, 「델피니아 전기」의 일러스트로 주목을 받게 된다. <옮긴이 소개/ 김소형> 1975년 3월생. 이화여대 의학과 졸업. SF 판타지를 좋아함. 아이작 아시모프와 호시 신이치, 오노 후유미이 팬. 번역작 : [십이국기],[KLAN],[악마의 파트너],[델피니아 전기]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소개글, 서평> 트레니아 만에 스케니아의 대함대 국경에는 2만 명의 탄가군 집결 비르그나 요새 함락!! 왕비의 부상도 채 낫지 않은 시점에 델피니아를 둘러싼 포위망은 점점 튼튼하게 완성되어 간다. 사자왕 월은 수세에 몰리고-. 이 위기에 검은 옷의 독립기병대장은 형세를 역전시킬 ‘비장의 카드’를 뽑기 위해 단신으로 바다로 나갔다. 1장 국왕군은 3월 말에 코랄로 돌아왔다. 그때에는 이미 왕비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도 온 도시에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흥미 반, 호기심 반에서 모두 몰려나와 국왕군을 맞이했지만, 왕과 나란히 군대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왕비는 평소처럼 씩씩했다. 말 위에서 웃음을 지으며 시민들의 환성에 여유 있게 응답하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그것도 성문을 들어설 때까지 뿐이었다. 성에 돌아온 그날 밤부터 왕비는 침상에 드러누웠다. 왕비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충실한 시녀가 억지로 침상에 밀어 넣은 것이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잖아.” 왕비는 항변했지만 셰라는 물러나지 않았다. “전 이래봬도 2년 반 동안 당신 곁에 있었습니다.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 정도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왕비는 건강해 보인다. 웃음이 끊이지 않고 태연하게 말에 올라타며 허리에 검도 차고 있었다. 하지만 셰라는 그런 모습에 속지 않았다. 재차 캐묻자 왕비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몸이 좀 무겁긴 하지만,,,.” 이런 것쯤 조금만 있으면 낫는다는 소리를 채 꺼내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일류 약사로 변신한 시녀가 단언했다. “그럼 몸이 좋아질 때까지 침상에서 나오지 마십니다. 전 뭔가 도움이 될 약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왕비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의외로 얌전하게 셰라의 말에 따랐다. 자신도 평상시처럼 몸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걸까. ‘비장군이 병상에 누웠다’는 기가 막힌 소식은 궁성 전체를 발칵 뒤집었고, 친한 지인들이 차례차례 병문안을 하러 왔다. 늑대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서리궁에 찾아오려 하지 않았던 폴라조차도 단숨에 뛰어왔다. 물론 셰라는 당사자인 왕비가 말리는 것도 듣지 ㅇ낳고 구석구석까지 왕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한편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과--여기에는 이런 걸 꽂을 물건이 없을 거라면서 비슷한 크기의 꽃병까지 하인에게 운반시키며 찾아온 발로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화살 한 대에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농담인 줄 알았지만, 당신도 일단은 인간이라는 말이군. 오히려 안심이 되던데.” 함께 찾아온 부인이 남편의 농담을 나무랐다. “농담이 아냐, 사보아 공. 듣자 하니 그 암살자는 비열하게도 화살에 독을 발랐다더군. 비전하께서 생명을 건지신 건 투신의 가호라고밖에 할 수 없어.” “글쎄, 어떨까? 난 왕비의 비상식적으로 튼튼한 체질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왕비를 힐끗 바라본다. 왕비는 지루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이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아무 할 일도 없이 가만히 누워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짜증스럽게 중얼거린다. “어느 쪽도 아냐. 운이 좋았던 것뿐이니까.” “호오? 당신도 운 같은 걸 믿어?” “그야 당연하지. 단장은 안 믿어?” 태연하게 내뱉는 대답에 틸레든 기사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똑같이 전장에 서서 똑같이 싸우면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고 죽는 사람이 있다. 물론 거기에는 기량의 우열이나 전황, 배짱도 상관이 있지만 절대로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이성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독화살에 맞고서 안 죽었다는 것도 운입니까?” 왕비를 놀릴 생각만 하는 남편을 보여 부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잔소리를 하기도 전에 폴라가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로 발로를 향해 말했다. “사보아 공작님. 아무리 공작님이라고 해도 해서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비님의 부상을 농담거리로 삼지 말아주세요.” 폴라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엇차, 이거 곤란하게 됐군,,,.” “운이 좋았건 몸이 튼튼해서건,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왕비님만 이렇게 무사하시다면.” 단언하는 폴라를 보며 발로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렇겠지요. 왕비 앞에서는 사신도 겁을 먹고 도망쳐버릴 테니까요.” 발로로서는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이것 역시 왕의 애첩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보아 공작부인도 기가 막혀서 말했다. “공. 아무리 심각한 문제라도 농담으로 바꿔버리는 건 나쁜 버릇이야.” “안 돼? 왕비는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고, 얼핏 봐서는 지극히 건강해 보이잖아.”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셰라가 귀찮게 구니까 누워 있는 것뿐이지,,,.” 왕비는 불평했지만 셰라는 딱딱한 어조로 반론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정말로 건강하다면 저도 이런 말씀은 안 드립니다.” 왕비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고 이 반응을 보자 발로도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거 넘겨들을 수 없는걸. 곧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승리의 여신의 상태가 시원치 않아서는 폼이 안 나. 병사들 사기에도 안 좋다고.”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냐. 만약에 대비해서 누워 있을 뿐이라고.” 왕비는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니지만 때때로 손끝이나 발끝이 저리는 듯한 위화감이 찾아온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한 정체모를 무력감과 함께. 양쪽 모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약한 면을 보이기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폴라뿐만 아니라 로자몬드까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달래면서 왕비는 웃음을 지었다. “걱정 안 해도 금방 좋아져. 안 그러면 단장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듣기 안 좋은 말이로군. 이래봬도 난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는거야. 지금은 당신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로 이어지니까. 형님을 위해서라도 빨리 나아줘야지.” 끝의 끝까지 미운 소리만 하던 발로가 돌아간 뒤, 마치 교대라도 하는 듯이 한때의 엔도바 부인--지금은 나시아스 쟌펠 부인이 된 사람이 찾아왔다. 전혀 어울리지 ㅇ낳는, 화려한 색과 향기로 가득 메워진 서리궁을 보고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떻게 된 일이죠? 여기에 이렇게 멋진 꽃이라니,,,.” “단장이 가져왔어. 하는 짓이 여전히 화려하지. 나한테 문병 오면서 꽃이라니, 무슨 생각인지 원,,,.” “어머나,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 선물을 드리기가 곤란해지는걸요.” 웃으면서 부인이 내민 것은 작은 제비꽃 다발이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꽃 앞에서는 역시 빛을 잃어버릴 테니까,,,.” 바구니 안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작년 가을에 수확한 사과 설탕절임, 레몬 잎과 카모마일로 만든 차, 박하와 바질을 말려서 만든 향신료 등등 몸에 좋다는 음식뿐이었다. 셰라도 재빨리 카모마일 차를 끓여서 왕비와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폴라도 아직 자리에 남아 있었으므로 한참 동안 왕비를 중심으로 부드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화제가 된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전쟁 얘기를 자세하게 듣고 싶어 했지만, 왕비는 애매하게 말을 흐리면서 자신의 부상에 대해서도 일부러 농담으로 흘려 넘기려 했다. “이런 ㄱ너 모기한테 물린 거나 다름없어. 정말이야. 다음 날에는 이미 그라이아를 타고 뛰어 다녔으니까. 셰라가 괜히 난리치는 것뿐이야.” 그런 소리가 나오면 셰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던 걸로 되어 있다. 왕비 직속시녀로서 요새 안에서 하룻밤 내내 걱정하며 밤을 지새운 것으로 되어 있는 셰라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어떤 말씀을 하셔도 안 됩니다. 애초에 너무 무리하신 겁니다. 말에 타는 모습을 보여서 병사들에게 당신이 건재하다고 알리려고 하셨던 거겠지만,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니 그렇게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셰라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라티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건재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셨다는 건 그러니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요?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쉴 수 없다는 겁니까?” 폴라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적은 폐하의 공격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왕비님께서 그렇게 무리를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이 말에 셰라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왕비와 살짝 시선을 교환한다. 왕비는 눈짓으로 조용히 셰라를 타일렀다. 폴라나 라티나는 진짜 전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가혹한 현실도, ‘서로 죽고 죽이는’ 기묘한 목적을 위해 소집되어 움직이는 병사들의 심리도, 그들의 사기가 승패의 향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지휘관의 기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런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또한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왕비는 다시금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어떤 자리에서든 대장이 정신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아랫놈들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아. 조금 불편하다고 누워 있을 수는 없잖아.” 쟌펠부인이 연녹색 눈을 치떴다. “화살에 맞으신 게 ‘조금’인가요?” 국왕의 애첩 역시 필사적으로 외쳤다. “폐하의 병사들은 왕비님께서 안 계신다고 우물거릴 만큼 겁쟁이가 아닙니다!” 이 맹렬한 항의에는 왕비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 폴라 말이 맞아.” “웃을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인데 더 신중하게 생각해주셔야지요.” 폴라는 화가 나 있었다.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ㅇ르 전하려 노력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왔다. 폴라는 지금까지 왕비를 진자 승리의 여신과 마찬가지로 절대 다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터로 출정하는 국왕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무운을 빌면서도, 왕비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무의식 중에 괜찮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검도 활도 그분을 피해갈 것이 틀림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무엇인가. 왕비는 불사신이 아니었다. 화살을 맞으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피가 너무 ㅁ낳이 나면 죽어버린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온몸이 오싹했다. 심장이 멎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폴라는 전장에 선 왕비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전쟁의 여신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주저하면서 이런 말을 꺼냈다. “왕비님께서는 몸이 좋아지시면 또 전쟁터에 나가실 생각이신가요?” 왕비는 조금 놀라며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이제 금나두실 수는 없는 건가요?” 왕비는 더욱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폴라는 진지했다. “왕비님께서는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기적을 일으켜주셨습니다. 폐하도 지금은 중앙을 석권하고 계시지요. 물론 그것도 왕비님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폐하의 군세는 중앙에서도 최강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굳이 왕비님께서 전선에서 싸우지 않으셔도,,, 직접 선두에 서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너무나도 여자다운 의견이었다. 셰라는 왕비가 언제 분노를 터뜨릴지 조마조마해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왕비는 재미있어하며 대답했다. “내 상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런 소리를 하면 월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녀석도 최전선에서 싸우는데 나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입게 될지도 모르잖아.” “폐하는 괜찮습니다. 물론 걱정은 되지만, 그게 폐하의 역할이니까요.” “흐음? 그러니까, 난 지휘관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말도 안 됩니다!!” 당황하며 부정하고서 폴라는 우물거리며 덧붙였다. “왕비님은 우수한 지휘관입니다.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실 정도이니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왕비님은 이렇게나 가녀리신걸요!”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한 셰라는 발로가 돌아가 ㄴ뒤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공작은 여성에게 친절한 사람이니 대놓고 폴라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짓은 안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비는 신가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이 바라보았고 폴라는 열심히 말을 계속했다. “동물도 그렇습니다. 작은 동물은 말이나 다른 커다란 동물에 비해 약하고 조금만 다쳐도 쉽게 죽어버리지요. 새나 다람쥐 같은 경우는 어제까지 분명히 살아 있던 것이 금방 싸늘하게 식어 있곤 합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처럼 보여?” “그런 건 아니지만,,,.” 폴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왕비는 강한 사람이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검을 쥐고 싸우기에는 너무나 작고 가냘프다. 국왕이라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건장한 체구, 탄탄한 가슴, 두꺼운 팔, 그 어느 것도 폴라가 생각하는 ‘강함’ 그 자체였다. 바라보기만 해도 안심이 된다. 하지만 왕비는 다르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건장한 남자들 사이에 있으면 이 사람은 정말로 조그맣게 보인다. 훅 불면 그대로 날아가버릴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던 왕비는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멍ㅊ어하게 부상 같은 걸 당하는 게 아니었어. 폴라도 지금가지는 그런 소리 한 적이 없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끼쳤군.” “쓸데없는 걱정이 아닙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혹시 왕비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잖아?” 타이르는 듯한 웃음이었다. 폴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흠칫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걱정인 겁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큰일은 없었지만 또 화살에라도 맞게 되시면, 또 부상을 당하게 되시면, 그렇게 되면,,,.” 다음 번에는 죽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왕비는 침대 위에서 손을 뻗어 울먹이는 폴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건 누구나 품는 불안이야. 전쟁에 나가는 이상 멀쩡할 수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 국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싸우는 거야.” 폴라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폴라로서는 그런 ‘위험’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싫습니다. 저는,,,. 그런 건.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그리고 난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어.” “,,,,,,,,,.”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야. 두 번 다시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걸로 넘어가주지 ㅇ낳겠어?” “정말요?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 약속할게.” 그늘 없는 웃음이었다.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폴라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견을 굽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왕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라티나. 혹시 장미 피었어?” “장미 말입니까? 아직은 조금 이릅니다. 더 따뜻해지지 않으면 봉오리도 생각지 않으니까요. 장미가 피면 가지고 올까요?” “응. 부탁해. 빨간 게 좋겠어. 하얀 꽃하고 같이 가져와주면 고맙겠는데.” 셰라가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걱정을 하며 얼굴을 마주 본다. “하지만 병문안 선물로는 조금 화려하지 않은가요?” “라티나님의 정원에는 갖가지 색의 장미가 있습니다. 조금 옅은 색으로 하시면?” 제각각 말했지만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새빨간 걸로 부탁해. 꼭 보고 싶거든.”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절 수 없다. 라티나는 자신의 정원에 피는 장미 중에서도 가장 새빨간 꽃으로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뭐든 하얀 꽃이면 되나요?” “응. 눈송이처럼 작은 꽃이면 좋겠어. 그런 게 없으면 하얀 레이스로 붉은 장미를 감싸도 좋고.”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서리궁을 나설 때까지 셰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손님들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 당황한 듯이 주인을 돌아봤다. “어째서 그런 부탁을 하신 거죠? 그래서는 편안히 쉬지도 못하실 텐데요.” “아니, 괜찮아. 나도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ㅇ낳으니까.” 왕비는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신비로운 미소였다. “걱정해주는 폴라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 ‘왕비님’은 전쟁터에서밖에 쓸모가 ㅇ벗는 생물이야. 그리고 그 전쟁이 바로 코앞으로 닥쳤지.” 캄센에 머무르는 사이에 계절은 완전히 봄으로 바뀌었다. 병사를 움직이는 데에도, 항해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조라더스는 캄센 건에 대해 아무 개입도 하지 않았고 독단으로 병사를 일으킨 가신을 처벌했다고 나중에 알려왔지만 본심이 어떤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파라스트의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겨울 내내 오론은 파라스트 주변에 점재하는 공후국을 제압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테바 강 주변에는 델피니아나 파라스트 어느 쪽에도 따르지 않고 독립을 지키는 영지가 여럿 있었다. 그런 소국들은 지금까지 어느 쪽에도 확실하게 가담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었다가 다른 쪽의 공격을 받게 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양쪽 모두와 적당하게 외교를 펼치며 중립을 지켜왔다. 오론은 책략가이다. 그런 독립국의 제후들을 수완 좋게 농락하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조력을 약속한 나라도 상당히 되는 듯하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어느 틈엔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있던 왕비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재작년, 델피니아는 처음으로 동서 양국에게서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국왕도 포로가 되었다. 전황은 상당히 불리한 상황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월 그리크는 지지 않았다. 왕비도 용맹하게 싸웠다. 두 사람은 왕궁을 덮친 난관에 과감하게 맞섰다. 탄가와 파라스트라는 강적들을 물리치고 타우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똑같은 짓을 다시 저질러봤자 소용없다는 것은 적들도 충분히 알고 있겠지. 한참 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기며 눈만 빛내고 있는 왕비의 모습에 셰라는 숨을 삼켰다. 조용히 묻는다. “장미가 필 때까지 누워 계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무리겠지.” 냉정한 어조였다. 실제로 이변은 바로 코앞까지 닥쳐 있었다. 서리궁에 문병객들이 찾아왔을 무렵, 본궁의 어느 방에서는 베노아의 질이 국왕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국왕의 개선 축하와 왕비의 병문안이라는 명목이지만, 이 사람이 그런 이유만으로 먼 곳에서 일부러 ㅇ로 리는 없다. 그럼에도 일단 대화는 그쪽부터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왕비님께서 큰일을 당하셨다고요.” “글쎄 말이야. 그 녀석, 자기가 얼마나 중상이었는지 조금도 이해를 못해. 독화살에 맞고 생명을 건진 것만 해도 믿기 어려운 행운인데, 얌전히 누워 있던 게 겨우 사흘뿐이라고.” “그거 참,,,.” 타우의 영주는 저도 모르게 수염이 난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적도 수단을 가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겠지.” 국왕 역시 굳어진 얼굴이엇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아니, 최소한 수치가 뭔지를 아는 인간이라면 그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목적 자체는 틀리지 않았어. 왕비는 불사신이나 다름없지. 그런 비열한 수단으로 목숨을 노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인간이지만 그런 왕비가 쓰러지는 걸 봤을 때는 장군쯤 되는 사람들까지도 마치 발밑의 대지가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으니까.” 델피니아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왕비의 존재는 그렇게나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독까지도 물리칠 정도이니 과연 비장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농담만 하고 있을 수도 없겠군요. 놈들은 이번에는 폐하, 당신을 직접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국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 일족을 조종하는 자가 누구이든 간에 진짜 목적이 자신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수단을 쓸 것 없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면 좋을 텐데. 나시아스가 한때 셰라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국왕도 하고 있었다. 친밀하고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자기 대신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다. 사실 국왕이 이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평민과 신분이 높은 사람의 경우 그 목숨의 가치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귀족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무리 평민들을 희생시켜도 그 사실을 두고 고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왕쯤 되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왕은 지금까지도 그런 방식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자신의 생명 대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짓이 당연하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엇던 것이다. 왕비는, 적의 주의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면 그거야말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혼자 눈에 띄게 움직이며 적의 공격을 유도했다. “그 결과가 이거야. 리라면 절대로 부상 같ㅇ느 건 입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던 나도 나지만,,,.” 국왕의 한스러운 독백을 듣고 질은 곤란한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신에게는 국왕으로서 이 나라와 국민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이상, 잔인한 말이지만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서는 안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다른 누가 희생되더라도 당신이 살아남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좋건 나쁘건, 민중에게 지지받는 국왕의 입장이라는 건 그런 거지요. 당신도 그걸 알고 있기에 파라스트의 굴욕적인 처사를 견뎠던 게 아닙니까.” “그것 말인가,,,.” 사자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때를 떠올리고 국왕은 족므 얼굴을 찌푸렸다. 질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쓰러지면 수호자를 잃은 델피니아의 백성들이 얼마나 적에게 유린당할 것인가. 뻔뻔스럽게 침략해오는 두 대국이 얼마나 학정을 펼칠 것인가. 그런 초조함, 그 미칠 것 같은 분노가 사로잡힌 국왕을 버텨주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때도 마지막에는 결국 왕비가 날 구해줬지. 그 녀석은 빚을 갚았을 뿐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진 빚 쪽이 많아. 너무나 ㅁ낳아.” 진지하게 한탄하는 국왕을 보고 질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실례. 실은 얼마 전에 처가 물어봤습니다만,,,.” “아아, 그랬지, 참. 이런, 결혼 축하조차 안 했었군.” “그리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제 처가 하는 말이, 비전하가 폐하를 위해 싸우는 건 부인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냐더군요. 그 녀석이--애비가 저의--사랑하는 남편의 힘이 되고 싶다는 것도 같을 거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국왕은 실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뺨의 근육은 폭소를 참기 위해 부들부들 떨리고 양손의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인다. 어떻게든 이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것이다. “그대의 부인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인가보군.” 간신히 그렇게만 말할 수 있었다. 질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하하,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곤란하더군요. 도저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런 소리 했다가 잘못하면 왕비님 손에 맞아 죽겠지요. 헌데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확실하게 설명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이다. 국왕도 씁쓸하게 웃었다. “부인과 잘 지내고 있는 듯하군.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황공합니다. 아무래도 너무 젊은 마누라라 조금 부끄럽습니다만,,,.”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질 경. 부인의 결심은 실로 장하네만 이번 싸움에도 부인과 동행할 생각인가?” “어쩔 수 없습니다. 부인이 된 이상 그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말을 꺼내려는 국왕을 질이 제지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래. 그 사실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텐데.”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위험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옵니다. 비전하조차 예외는 아니었지요. 게다가 어차피 그 놈들이 상대라면 어디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질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을 이었다. “타우에 나타난 척후병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드렸습니다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의해두고 싶습니다.” “음. 죽음의 바다에서 스케니아, 그리고 북쪽에서 탄가가 올거야. 이건 틀림없겠지.” “그리고 동해안이 있습니다. 코랄에 정면으로 싸움ㅇ르 걸 수 있을 만한 해군은 적어도 중앙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미지의 대국이라면 상황이 다르지요.” 국왕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작년 식전 때 코랄에 입항했던 스케니아의 군함을 대략 살펴봤지만 상당히 훌륭했다. 선원들도 충실하게 훈련받은 듯했다. 시험 삼아 보로조프 공에게 스케니아는 어느 정도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유감이지만 중앙의 나라들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ㅇ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 시점에서 이미 스케니아 수뇌부 내부에 탄가와 동맹을 맺고 델피니아로 침공할 계획이 부상해 있었다면 적이 될 사람에게 진짜 정보를 순순히 알려줄 리가 없었다. 자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뭐든지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던 보로조프가 그 건에 대해서만은 기묘하리 만치 겸손한 태도였던 것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국왕은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방법이 없어. 불확실한 요소도 너무 많고. 특히 둘로 나뉘어 있다는 스케니아의 전력과 파라스트다.” “제가 걱정하던 것도 그 점입니다. 죽음의 바다를 넘어오는 스케니아 놈들에 대해서는 저희들 힘으로 상륙을 저지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적의 전력은 완전히 미지수입니다. 싸워보기도 전부터 우는 소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희들만으로 반드시 막아낼 수 있을지 어떨지가 문제지요.” “그때에는 근처 지방의 영주들을 원군으로 보내지. 산적의 원호 따위 절대로 싫다고 버티는 자가 있으면 왕의 이름을 걸고 내가 직접 처벌하겠네.” 월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의연한 태도였다. “타우도 지금은 델피니아의 북쪽을 지탱하는 중요한 방패야. 이 방패를 지켜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해도 좋지. 그런 중요한 때에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놈은 반역자나 다름없어.” “황공합니다.” 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사실 산적들의 군대에 원군으로 붙여진 영주들이 뜻대로 움직여줄지 어떨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것은 질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에 달려 있다. 위험한 순간 타우 군에 편입시킬 영주들의 이름을 국왕과 질이 거론하고 있을 때,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갑자기 테바 강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선단에게 펜타스가 기습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펜타스라고?” 너무나도 예상을 초월한 전개에 국왕도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수수께끼의 선단이라니, 너무 불확실한 얘기인데. 국적은 알 수 없었나?” “그, 그것이, 배 어디에도 국가를 표시하는 문장이 없다고 합니다. 그 선단은 유유히 트레니아 만을 남하해서 우리 눈앞을 지나간 것 같습니다만,,,.” “것 같다?! 파수들은 뭘 하고 있었나!” “면목이 없습니다! 선단 자체가 도저히 군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형 선박들인데다 마치 고깃배처럼 작은 배라 파수병들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이 소식은 전령을 통해서도 도착했다. 국경 부근의 요새에서 이변을 알리는 봉화가 오르고 이에 뒤따라 파발이 도착했다. 전령의 말에 따르자면 펜타스를 습격한 선단은 지휘관의 이름도 출신 국가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의 규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다. 자신들은 스케니아에 조력하는 자라고만 밝히고 그들의 요청에 의해 펜타스에 싸움을 건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들은 일제히 상륙해서 작은 섬나라인 펜타스 내부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뒤 다시 바다로 물러갔다. 배는 겨우 열 몇 척. 그 배 전부가 아까의 보고에서 들은 대로 수십 명 정도를 간신히 수용할 정도의 소형 선박이라고 했다.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그 정도의 전력에 펜타스가 무릎을 꿇었다는 말인가?” 펜타스는 문화 및 예술과 유곽으로 번영을 누리는 나라이다. 따라서 군사력과는 별로 인연이 없다. 국민들의 기질도 위로는 왕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겁이 많고 유약했다. 그 대신 그들은 벌어들인 돈을 아낌없이 방어설비에 투자했다. 손님의 안전을 확보할 수 없으면 환락도시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토, 즉 섬 전체를 방벽으로 둘러싸고 활 구멍을 설치하며,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두 개로 제한하고 우수한 용병 부대를 고용해 지금은 거의 요새나 다름없는 방어망을 자랑하고 있었다. 공격한 것은 소형 선박뿐이었다고 한다. 성을 공격하기 위한 병기 따위를 갖췄을 리가 ㅇ벗다. 국왕이 의아하게 여긴 것도 당연했다. “아시는 대로 펜타스는 환락도시로 유명합니다. 빈털터리와 정신병자 이외에는 누구나 손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방침이지요. 손님일지도 모르는데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럼 상륙한 뒤에 전투를 시작한 건가?” 국왕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환락도시이니 침입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그 좁은 섬에서 문만 닫아버리면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을 텐데. 그걸 뻔히 알면서 뭍으로 올라왔다는 얘기인가?” “아무래도 내부에 내통자가 있어서 처음부터 문을 제압해두었다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아무리 튼튼한 요새라 하더라도 입구가 열려 있어서는 소용이 없다. 침략자들은 펜타스 각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한 뒤, 펜타스 측의 용병들이 간신히 태세를 갖춰 반격을 시작하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나타났을 때처럼 재빠르게 사라진 뒤였다고 한다. “대체 무슨,,,.” 여전히 기가 막혀하는 국왕에게, 사자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펜타스는 이번 사태를 심히 우려하며 우리나라와 파라스트 측에 원군을 요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호오, 과연.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유쾌한 듯한 목소리였다. 잡병에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월 그리크와 오론을 용병으로 고용하겠다는 얘기이다. 이런 얘기를 꺼낼 경우, 즉 조력을 요청할 경우에는 부탁을 하는 쪽에서도 그에 걸맞는 각오가 필요하다. 앞으로 신하로서 섬기겠다고 약속하거나, 영토를 제시하거나, 조력의 대가로 뭔가 보수를 제공해야 한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펜타스에 그런 분별력은 없을 거라는 게 월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이번 요청에 응할 생각도 없었다. 델피니아는 금전적으로도 영토에도 충분히 여유가 있다. 그런 분내 나는 땅을 준다고 해도 처치하기 곤란한 뿐이었다. 펜타스가 공격을 받아도 델피니아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 기껏해야 사치품을 좋아하는 귀부인들이 애석해할 뿐이겠지. 아니, 통째로 누군가에게 뺏긴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영해 내에 타국의 전진기지가 생기는 셈이 되어버리므로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수께끼의 선단은 돈이 될 만한 물건과 금화만 털고서 그대로 물러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버려둬도 큰 상관은 없으리라. 자국의 위기에 대비해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자신의 피도 흘릴 생각 없이 열심히 도망치며 도와달라고 비명이나 질러대는 놈들이 재산을 조금 털렸다 한들 뭐가 어쨌단 말인가. 다행히 도와줘야 할 만한 의리도 없다.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파라스트의 동향이었다. 득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움직인 만큼 소득을 얻을 수 있느냐. 파라스트의 국왕은 언제나 그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펜타스에서도 이름 높은 가희 샬리아렌은 그런 오론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해득실은 철저하게 따지지만, 오론은 향락을 좋아하며 정에 약한 면도 있었다. 아끼던 여자의 부탁이라면, 또 펜타스의 국왕이 막대한 보수를 약속한다면 움직이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거 재미있게 됐는걸.” 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탄가와 파라스트가 다시 손을 잡느냐 잡지 않느냐, 그 사실로 이어진다. 펜타스를 습격한 배는 스케니아의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스케니아는 탄가와 손을 잡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혹시 파라스트가 탄가와 손을 잡을 생각이라면 펜타스를 덮친 외적을 못 본 척해야 할 터였다. 지금 스케니아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탄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마침 좋은 기회야. 너구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난 한동안 지켜만 보도록 하지. 하지만 질 경.” “예, 아무래도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 펜타스를 습격한 놈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게오르그의 동ㅈ고이겠지요. 그렇다면 조만간 반드시 타우에도 나타날 겁니다.” “부탁하네. 이븐에게도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고.” “그것이, 그 녀석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옛날 지인을 찾아간다면서 작년 가을에 마을에서 떠난 이후로 말입니다.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줬으면 좋겠습니다만.” 질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질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전언이 다시 날아왔다. 스케이나의 대함대가 케이파드 연안에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2장 키르탄사스는 섬 대부분이 척박한 황무지로 농작물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주 산업은 어업, 그리고 남자들의 행해술이었다. 트루디아, 마란타 등의 남쪽 나라에는 제각각 독자적인 특산물이 있다. 카카오나 후추, 찻잎 등이다. 중앙에서는 이런 특산물을 굉장히 탐내고 남쪽 나라에서는 중앙의 문화, 즉 펜타스의 사치품 종류는 간절하게 바란다. 키르탄사스는 이 양자 사이에 중개무역으로 이익을 올리는 나라였다. “대형 선박을 만드는 데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 조종하는 기술도 필요하지. 남쪽의 소국에는 그런 여유가 없으니까 다소 돈을 내고라도 우리들한테 부탁하는 게 제일 안전하고 손쉽다는 말이야. 물론 옛날에 하던 벌이만큼 짭짤하지는 않지만 수입은 꽤 괜찮은 편이야. 너도 산 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다시 바다로 돌아오면 좋을 텐데.” 허물없는 태도로 말하고 있는 것은 키르탄사스의 총독 카를로스. 예전에 해적이었던 경력의 소유자인 만큼 만사에 있어서 하는 짓이 거친 편이었다. 이븐은 그 총독의 손님으로서 경루 내내 이 섬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옛 지인의 정열적인 권유를 웃으며 흘려듣고 있다. “날 꼬셔도 괜찮아? 또 마누라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멍청아. 그러니까 바로 옆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거 아냐. 이상한 짓 하김나 해봐. 이번에야말로 쳐 죽여서 시체를 돛대에 매달아버릴 테니까.”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찌푸리자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브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그거 너무한걸. 나만 가지고 뭐라는 건 불공평하잖아. 원래 불륜이라는 건 둘 다 처벌하는 게 도리라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꼭 댁의 마니님하고 같이 죽었으면 좋겠는데.” 카를로스의 얼굴이 부젓가락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몸을 내밀며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그 마나님이 뒤에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남편을 말렸다. “이봐, 흥분하지 마. 아직도 모르겠어? 저 사람, 당신을 놀리고 있는 거야.” “시끄러워! 서방 머리끄덩이를 잡는 마누라가 어디 있어?!” “그럼 가랑이라도 잡아줄까? 죽어라 힘줘서. 그럼 다른 여자한테 한눈도 못팔게 되겠지. 가만 놔두면 금방 바람이나 풍풍 피워대는 주제에, 내가 이븐하고 좀 사이좋게 지내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자,잠깐! 뭐야, 그건?! 누, 누가 다른 여자 따위,,,.” “잡아뗄 생각이야? 최근 나 같은 건 돌아보지도 않았던 주제에. 보나마나 어디서 놀고 다녔겠지.” “바, 바, 바, 바보 같ㅇ느 소리 하지 마! 그건 너,,,. 그건, 그다지, 너,,,.” “수상해.” 총독부인은 당황하며 변명하는 남편을 싸늘하게 쳐다봤다. “역시 어딘가에 딴 여자가 있는 거야. 그렇겠지. 였날에는 이것저것 선물도 많이 해주더니 요즘은 작은 비녀 하나도 사준 적도 없고. 바깓에다 이것저것 줄줄 흘려대느라 집사람한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이거지? 좋아. 상관없어.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새 남자 찾아서 다시 시작할테니까.” “안젤리카! 잠깐 기다려!” 한심한 비명이 울렸다. 부인에게 이혼 당하게 생긴 남자에게서는 총독의 위엄도, 한 때 해적 두목이었던 인간의 풍채 따위도 완전히 날아가버린다. “아, 알았어. 뭐가 갖고 싶어? 드레스? 반지? 목걸이?” 열심히 부인의 비위를 맞추는 친구를 보면서 이븐은 웃음ㅇ르 참고 있었다. 총독 부부의 이런 대화는 일상다반사였다. 굳이 말하자면 금슬이 너무 좋은 게 문제랄까. 가을이 끝나갈 무렵 이븐이 홀연히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카를로스도 심상치 않은 눈치였다. 섬의 주민들 역시 냉담했다. 옛날에는 동업자였다고 하더라고 현재 이븐은 델피니아 국왕의 측근이다. 키르탄사스에는 과거에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자신들을 체포하거나 퇴치하기 위해 정탐하러 온 게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다. 이븐은 살기등등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총독 관저로 연행되었다. 빈말로라도 우호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태도로 차갑게 바라보는 시선을 뒤집어쓰면서도 이븐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반론했다. “델피니아가 여기를 치다니, 무슨 소리야? 이 섬은 현상범 소굴도 해적 기지도 아냐. 정식 국가잖아? ‘전쟁을 건다’는 말을 착각한 거 아냐?” 정벌과 공격의 차이는 그 대상이 독립된 존재로 인정받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타우가 좋은 예였다. 타우 사람들은 이미 먼 옛날에 국가라고 불러도 좋은 정도의 사회 체제를 갖추었지만 공공연하게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고, 다른 나라에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델피니아에 통합도리 때까지 타우는 단순한 한 지역으로, 산적 소굴로밖에 취급받지 못했다. 키르탄사스의 역사는 짧지만 그 탄생 과정은 타우와 굉장히 비슷하다. 원래부터 범죄자들이 모여서 형성된 집단이라는 점, 소수의 인간에 의한 지배 체제가 아니라 조합의 책임자라는 의미에서 지도자를 뽑는다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의 영토는 다행히도 사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중앙의 바다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강점도 있었다. 대국들의 태도도 키르탄사스에 유리하게 굴러갔다. 자신들의 영지에 인접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보다는 거래를 하는 편이 이득이었기에, 비록 역사는 짧아도 나라로서 대접해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풍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특권계층을 싫어하고 귀족이나 상류계급 따위는 증오를 넘어서 경멸까지 한다. 그러니 이븐에 대해서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이 녀석, 델피니아의 간첩이 틀림없어.” “섬의 지형이나 전력을 국왕에게 보고할 생각이겠지.” “옛날에는 총독하고 같은 갑판에 섰던 주제에 권력자에게 꼬리를 치다니, 한심한 놈.” 그런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감옥에 가둬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검은 옷의 산적은 여전히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정탐하러 온 건 맞지만 싸움을 걸러 온 건 아냐. 이런 바위투성이 땅을 손에 넣어봤자 다스리는 게 더 힘들 거 아냐.” “호오? 그럼 목적이 뭐야?” 카를로스가 호기심에서 물어보자 이븐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델피니아가 언젠가 다른 나라의 해군과 싸우게 되면 우리를 도와줬으면 싶어서 말이야. 그럴 만큼의 힘이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러 왔지. 끌어들여봤자 도움도 안 될 정도면 우리도 곤란하니까.” 카를로스는 할말을 잃었다. ‘사인중’이라 불리는 섬의 실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웃고 웃고 또 웃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이 섬이,,, 키르탄사스가,,,. 델피니아를 도와?!” “끝내주는 개그잖아!!” 특히 카를로스는 배까지 두드리며 껄껄 웃다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븐. 너란 놈도 참, 변한 구성이 없어서 정말 기쁘다.” “넌 상당히 배가 나왔지. 살 좀 빼지 않으면 안젤리카가 싫어한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래, 그랬었지! 네놈, 네놈은 내 연적이었잖아!!” 이제야 간신히 기억이 났다는 듯한 총독의 태도에 다시금 대폭소가 터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긴장은 순식간에 풀어지고 이븐은 손님으로서 총독 관저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븐은 곧 섬사람들과 친해졌다. 원래부터 이런 상황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인간이었다. 현재 이븐의 평가는 ‘임금님이 친구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거나 얘기는 통하는 녀석’으로 굳어졌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이븐은 언제나 무뚝뚝하게 반론했다. “아냐. 임금님을 친구로 사귄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친하던 녀석이 일이 어떻게 꼬이다보니 임금님 따위가 되어버렸다고. 누가 그런 귀찮은 인간하고 좋아서 사귀는 줄 알아? 한때는 정말 친구고 뭐고 때려치워버릴까 생각했지.” 그러면 남자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웃음이 들끓는다. 이븐은 이 섬에 온 진짜 목적을 카를로스에게만 말해두었다. 조만간 북쪽에서 강인하기 짝이 없는 뱃사람들이 내려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의 바다는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에 휘말린다. 그때 키르탄사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그 의사를 확인해두고 싶다고. 하지만 카를로스로서는 옛 친구의 말을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은 복 적도 없는 위협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없다. 카를로스 같은 남자에게는 상상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게다가 이븐조차도 그 강적이라는 놈들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래서는 얘기가 될 수 ㅇ벗었다. 키르탄사스의 힘에도 자신이 있었다. “굳이 말할 것까지도 없겠지만 이 근처 바다는 조류를 읽기 어려워. 그날그날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지지. 자칫 실수하면 그대로 암초를 들이받게 돼. 외부에서 온 놈들이 갑자기 이 바다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기껏해야 조류 때문에 고생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게 되겠지.” 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암초에 밑창이 나갈 만큼 큰 배가 오는게 아니라고 설명하자 카를로스는 더욱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럼 더 신경 쓸 것 없어. 그렇게 조그만 배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잘 들어. 공격력을 구비하려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한다고. 특히 바다에서 도시를 공격하려면.” “알고 있어. 투석기를 배에 탑재해야 하지. 장치를 움직이려면 사람도 필요해. 던져 넣을 돌도 있어야 하고. 작은 배에 그런 짐은 실을 수 없어.” “그렇지? 물론 조그만 배라면 이 바다에서도 이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배가 대체 뭘 하겠어?” 소형 선박에는 공격력이 없다. 또한 대형 선박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븐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뭐, 걱정하지 마. 여긴 우리들 바다라고. 묘한 외부 녀석이 기어들어오면 네가 굳이 말 안 해도 쫓아버릴 테니까.” 겨울 내내 이런 대화가 반복도리 때마다 카를로스는 호쾌하게 웃으며 단언했다. 그러던 중 펜타스 습격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아직 상세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펜타스가 어떤 놈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그 적이 바다에서 상륙했다가 다시 바다로 물러갔다는 사실을, 고기를 잡던 사람이 목격하고 알려온 것이다. 카를로스의 경악과 충격은 월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펜타스는 키르탄사스의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중앙 해역의 패자로 자처하는 키르탄사스의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엄ㅊ어난 굴욕이었다. 게다가 그 놈들은 바다로 퇴각했다고 한다. “대체 어디로 투니 거야!!” 섬 전체가 이 소식에 발칵 뒤집혀 있을 때, 다시금 새로운 이변이 발생했다. “두목! 해안으로 좀 나와봐!” 카를로스와 이븐은 함께 뛰어나갔다. 총독 관저는 섬의 반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져 있다. 이 섬은 거의 대부분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한쪽 방향만 만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만 바닥에 암초가 많아서 물길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대형선은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해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키르탄사스에는 시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다. 재빨리 사태를 깨닫고 달려온 것이리라. 카를로스는 연안을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뭐야, 이건?!” 연안에 소형 선박들이 가득 ㄸ 있었다. 근해어업, 혹은 섬과 섬 사이의 연락에나 사용되는 작은 배였다. 그런 배가 수십 척이나, 사람과 짐을 가득 싣고 있는 것이다. 마침 바람이 전혀 없었고 남자들은 지친 듯이 노를 저으면서--그럼에도 뭔가에 쫓기는 듯이 필사적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저거 레테 섬 녀석들이야!” 레테 섬은 카를로스의 옛 고향인 동시에 키르탄사스를 중심으로 하는 연합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 섬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해적질에서 손을 씻었지만, 해전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실력 있는 곳이었다. 그런 레테 섬의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해상으로 도망쳐온다. 노를 젓는 남자들 전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채 가시지 않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제일 먼저 해안에 접근한 배에서 한 남자가 바다로 뛰어내려 물을 첨벙거리며 달려왔다. 이쪽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얼굴을 싸맨 붕대에 아직도 피가 번지고 있다. “렌초?! 대체 무슨 일이야?!” 카를로스가 달려가며 외치자 상대는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레테가 습격당했어.” “뭐엇?!” 도망쳐온 배는 50척 이상. 소형 선박이라고는 해도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으니 레테 섬의 주민들 반 이상이 탈출해온 셈이 된다.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됐어?!” 카를로스의 물음에 렌초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의미는 명백했다. 카를로스는 이를 갈며 신음했다. “펜타스를 공격한 놈들인가?!” 이 말에 렌초의 말문이 막혔다. 표정을 봐서는 지금 처음 듣는 얘기인 듯했다. 하지만 렌초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우선 사람들을 부탁해. 물도 없이 도망쳐 왔어. 부상자도 있다.” 그 말이 나오기 전부터 키르탄사스의 사람들은 재빨리 움직여 무거운 걸음걸이로 힘겹게 상륙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여자들의 반 정도는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고 나머지 반수는 레테의 여자들을 위로하면서 아이들을 받아들고 달랬다. 렌초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고 카를로스와 함께 총독 관저로 향했다. 조금 뒤 총독 관저에 사인중을 비롯해 섬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실력자들이 모두 모였고, 렌초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침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자들은 오늘 아침 갑자기 레테 섬 연안에 나타났다. “대체 어디서 온 건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배였어. 소형선이라고 할 정도까지 작지는 않아. 남자 몇십 명에 무기와 말까지 싣고 있었으니까. 납작하고 긴 편인데,,, 전부 열다섯 척. 선원은 덩치 큰 남자들뿐이고 모두 무장하고 있었어.” 이쪽이 조심스럽게 배를 듸워 섬에 접근한 진의를 묻자 갑자기 즉각 섬을 떠나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면서.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해줬지. 거친 바다를 헤치며 살아온 우리들이 그딴 협박에 넘어갈 수는 없잖아.” 렌초를 필두로 하는 레테 섬의 남자들은 곧바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그들의 결의는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적의 힘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적이 타고 있는 배의 성능은 실로 경악스러웠다. 노를 젓는 남자들의 괴력도 한몫해서 마치 나는 것처럼 빠르게 해상을 달렸다. 그 속도를 이용해 이쪽의 배에 동체박치기를 하면서 동시에 화살을 쏴댄다. 레테 측에서도 필사적으로 응전했지만 해상전은 레테 측의 열세로 끝났고, 그대로 어쩔 수 없이 적에게 상륙을 허가하고 말았다. 해적의 전법은 거의 대부분이 백병전이다. 싸움이 지상전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적의 숫자는 이쪽의 1/10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자신만만하던 레테 섬의 남자들이 이 적 앞에서는 손도 발도 못 써봤다는 말이다. “우리들도 거친 싸움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그 놈들은 보통이 아냐.” 섬에 침입한 남자들은 모두 술통처럼 두툼한 몸통에 통나무처럼 굵은 팔을 지니고 있고, 그에 걸맞는 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들이 무기를 한 번 휘두르면 섬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세 명씩 날아가는 지경이었다. 그런 놈들이 몇백 명이나 한꺼번에 상륙했으니 레테의 남자들이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렌초는 저항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싸움을 계속했다가는 섬의 주민들이 모두 죽게 된다. 그들은 최후의 발버둥으로 무기를 버릴 테니 여자와 아이들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 달라, 섬을 떠날 테니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적은 의외로 순순히 이 말ㅇ르 받아들이며 그대로 전투를 중지했다고 한다. 카를로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거기서 다시 공격했으면 좋았을 것을,,,.” 렌초는 날카롭게 카를로스를 노려봤다. “그 녀석들이 이런 말을 하더군. 여자들의 목숨을 걸고 무기를 버리겠다는 약속을 어기는 남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난 말야, 패잔병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겁자의 낙인이 찍히는 것만은 사양이야.” 카를로스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놈들은 약속대로 여자들한테 전혀 손을 대지 않았어. 살아남은 일행들도 들고 갈 수 있는 만큼 재산을 들고 섬에서 나가게 해줬지. 졌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지만 적치고는 점잖은 부류였어.” 살아남은 적을 봐주는 관용과 칼같이 약속을 지키는 결벽함은 물론이고, 섬의 여자들을 다 ㄴ한 명도 유린하지 않았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얘기를 하는 렌초도, 듣고 있던 키르탄사스의 남자들도 저도 모르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정체모를 당혹감, 그리고 기묘함. 동족 여자들이 지독한 짓을 당하지 ㅇ낳았다. 그건 물론 기쁜 일이고 안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남자인 이상, 특히 전쟁터에 나가는 남자의 생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격렬한 싸움 속에서 생명을 걸고 격돌한 끝에 살아남았다. 그 해방감과 환희 속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을 품고 싶어지는 것은, 남자라는 동물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었다. 용감한 병사일수록 더운 이런 경향은 강하다. 게다가 이긴 쪽은 진 쪽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전쟁의 관례. 그런 점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 이런 얘기는 좋게 말하자면 신사적이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기묘하기 작이 없었다.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들은 촌장을 포함해 장로 다섯 명을 인질로 잡고 섬을 나서는 렌초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곧 스케니아의 군함이 올 거다. 인질의 목숨이 아깝다면 두 번 다시 접근하지 마.” 그래서 레테 섬의 주민들은 자유의 바다의 조합장 격인 키르탄사스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조각배를 타고 간신히 도망쳐온 것이다. “헛소리 하지 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를로스는 펄펄 뛰며 씩씩거렸다. 렌초나 키탄사스의 수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놈들이 펜타스를 공격한 놈들이야?” “모르겠지만 한번 싸운 뒤에는 나타나지 않았어. 펜타스를 공격했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배에 귀금속을 싣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펜타스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급하게 돌아왔다. 펜타스에서 목격한 사건보다도 돌아와서 본 섬의 상태가 더욱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그들은 렌초의 얘기를 듣고 나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럼, 역시 레테 섬ㅇ르 놈들한테 뺏겨버린 거야?!” “봤어?!” 렌초와 카를로스도 그에 지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허둥지둥하며 자신들이 살피고 온 상황을 설명했다. 펜타스를 공격한 수수께끼의 적은 지극히 당당하게 펜타스에 입국했다고 한다. 펜타스는 테바 강 입구에 위치하는 섬나라이다. 대형 ㅅ너박은 입항할 수 ㅇ벗는 구조로, 섬에 들어가려면 상륙용 배를 타거나 섬과 육지를 잇는 두 개의 다리 중 하나를 통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본래 방어를 위한 장치였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화를 불렀다. 적은 유유하게 줄까지 서가며 선착장에 배를 댔다. 선원들의 분위기는 굉장히 험악했다. 무장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주위에서는 자유전사도 드물지 않은데다 그런 남자들이 기분 전환을 위해 찾아오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게다가 섬 내부에는 실력 있는 용병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니 수많은 용병들 앞에서 소란을 부리는 바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관리는 형식적인 입국 심사만 하고 그들을 통과시켰다. 설마 몇 시간 뒤 펜타스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오르고 그 혼란을 틈타 적이 ㅁ누을 장악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스케니아에 대해 중대한 모욕ㅇ르 범했다’는 것이 공격의 직접적인 이유라고 한다. “이상한 트집을 잡으면서 스케니아의 화폐를 거절하고 장사 자체에도 말도 안되는 값을 불렀다. 우리들은 스케니아의 인간이 아니지만 그들에게 의리가 있으므로 이곳에 전쟁을 선언한다.” 원래 이런 포고는 전쟁 전에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적은 앞뒤 가리지 않고 불을 놓았다. 그들은 격력하게 저항하는 용병들을 쓰러뜨리며 섬의 입구인 문을 점거한 뒤, 일부만 그 자리에 남겨놓고 다시 마을 안으로 돌아갓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여자나 유흥객 족은 신경도 쓰지 않고 왕성으로 돌진해 성문을 부수고 돌입한 뒤 성 깊숙한 곳에 있는 후궁까지 쳐들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펜타스 국왕의 멱살을 쥐고 이렇게 선언한 다음 유유하게 물러갔다고 한다. 키르탄사스의 수뇌부 일동은 아연해져 있었다. 거의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통 공격하는 쪽에서 성을 노리는 것은, 성에 이르기까지 배치되어 있는 병력을 모조리 해치운 후의 일이다. 최후의 일격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취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라의 주인이 사는 성을 점거하는 법이다. 어지간히 압도적인 전력이 아니고서는 성은 공략하기 어렵다. 펜타스같이 유약한 나라라고 해도 그렇다. 그런데 기습전을 감행해놓고 굳이 성까지 돌입하다니. 게다가 점령도 않고 순순히 물러가다니. 하는 행동이 전혀 앞뒤가 안 맞는다.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럼 왜 공격한 거야?” “그런 상황에서는 약탈 같은 걸 하고 있을 틈도 없었을 텐데.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빼앗아간 게 아니었어?” 펜타스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어느 쪽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 ㅇ벗었다. 평소처럼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도시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오르고 엄ㅊ어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겁한 일행은 곧바로 배를 향해 뛰어갔다. 이것은 바다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의 본능이다. ‘발‘만 무사하면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군중에 휩쓸리는 바람에 항구에 나오기까지 상당히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그때 줄을 지어 배에 올라타는 사람들ㅇ르 목격햇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들이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의 첼제 투구에 몸에는 가벼운 체인메일을 걸치고 어떤 이는 대검, 어떤 이는 도끼를 들고 있었다. “한눈에 알겠더군. 놈들이 그 소동의 장본인이라는 걸. 그래서 우리도 두 패로 갈라졌어.” 습격자가 물러간다면 더 이상 전투는 없다. 그래서 반은 펜타스에 남아 상황을 파악하고 나머지 반은 바다로 나와 놈들의 뒤를 밟기로 했다. 아마도 카를로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원통함에 최소한 상황이라도 확인해야 한다는 판단이었으리라. 그렇게 바다로 나온 일행은 펜타스를 습격한 선단이 태연하게 레테 섬에 상륙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으며, 아직도 혼란에 빠져 있는 펜타스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던 일행은 수수께끼의 남자들의 재빠르고 대담한 행동에 경악했으며, 아직도 혼란에 빠져 있는 펜타스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던 일행은 수수께끼의 남자들의 재빠르고 대담한 행동에 경악하며 합류한 뒤 돌아왔다고 한다. “펜타스 녀석들은 설마 자기들을 공격한 게 겨우 몇백 명뿐이었다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을 텐데.” “레테 섬은 크게 달리진 건 없어 보였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놈들의 동료로 보이는 녀석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어.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각각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던 이븐은 처음으로 자신의 친구를 돌와봤다. “어쩌겠어, 총독 씨?” 대답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엄ㅊㅇ나게 험악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펜타스에 지켜야 할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렇게 물러빠진 겁쟁이들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 없다. 하지만 자신들 코앞에서 이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해적 국가의 자존심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 레테 섬 문제도 있었다. 렌초를 노려보며 신음하는 듯이 말한다. “조만ㄱ나 스케니아의 군함이 온다,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 대답하는 렌초의 얼굴 역시 카를로스에지지 않게 험악했다. “놈ㄷ들은 레테를 스케니아의 전진기지로 삼을 생각이야 그러는 김에 펜타스도 덮친 거겠지.” 카를로스는 다시금 신음하면서 마치 물어뜯기라도 할 것 같ㅇ느 표정으로 이븐을 쳐다봤다. “네가 겨울 내내 지겹게 말했던 놈들임에 틀림없는 것 같지만,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어째서 그렇게까지 스케니아 편을 드는 거지? 대체 스케니아는 이런 남쪽까지 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첫 번째 질문이라면, 스케니아의 선주민족. 두 번째 질문의 답은 나도 알고 싶은걸. 세 번째 답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델피니아를 공격할 생각이다. 그것도 수도 코랄을. 그렇지 않고서야 뭐 하러 레테를 점거했었어.” 키르탄사스 수뇌부 전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븐은 유일하게 냉정을 지키면서 말을 이었다. “자, 어쩔래? 이래도 아직 팔짱 끼고 구경만 할 생각이야?” “시끄러워! 물론 펜타스는 이쪽 단골손님이지만, 코랄도 정박료가 싸고 좋ㅇ느 항구지만, 군함을 상대로 대체 저 놈들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레테는 어쩔 거야. 포기할 거냐?” “하나하나 짜증나는 소리만 지껄이지 마! 이쪽은 인질을 잡혔다고!!” “ㄱ카를로스. 곧 전쟁이 시작될 거야. 공격해오는 건 스케니아, 그리고 레테를 차지한 놈들이지. 물론 표적이 되는 델피니아 역시 가만히 않아 있을 리는 없어. 함대를 이끌고 응전하겠지. 싸움터가 되는 건 이 중앙의 바다야. 난 말이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키르탄사스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는 거야.”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이븐의 푸른 눈은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말했지. 여기는 네 바다라고. 그런데 팔짱 끼고 구경만 할 거야? 그래서는 인질도 구할 수 없어. 그뿐만이 아니지. 이 전쟁에서 스케니아가 승리한다면 레테는 물론이고 중앙의 제해권은 그대로 놈들한테 넘어가게 돼. 반대로 델피니아가 이겼다고 해도 비상시에 키르탄사스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시선도 바뀌게 되겠지. 두 번 다시 중앙 해역의 패왕이라는 소리를 못하게 될걸.” 이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진실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레테 섬에 눌러앉은 놈들을 쫓아내고 싶다. 아니, 중앙 해운조합장의 체면을 걸고서라도 쫓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적의 주 전법은 빠른 속도와 기동력을 바탕으로 하는 기습전이다. 섬을 점령한 놈들만이 목적이라면 몰라도 일국의 함대까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함대가 오기 전에 레테를 되찾는 게 어때? 섬을 차지한 놈들을 쫓아내고 수비를 강화해서 두 번 다시 상륙할 수 없게 만들면 돼.” “아니, 그보다 함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선원들이 상륙하는 순간을 노려서 얏븡르 하자. 우리들은 밤에도 배를 몰 수 있으니까.” 사인중이 각각 제안했지만 렌초는 어두운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무리야. 우리들만으로는 그놈들한테 백병전을 걸어도 승상이 없어.” “무슨 소리야!” “한 번 졌다고 겁먹었어?!” “섬을 뺏긴 채로, 남자 주제에 가만있을 거야?!” 키르탄사스의 남자들 사이에서 맹렬한 항의가 들끓었다. 하지만 렌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짓 했다가 인질들은 어덯게 되는데?!” “그러니? 인질들을 죽일 틈도 없도록 속공을 걸면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뭣?!” 이쯤 되면 군사회의라기보다 말다툼이다. 레테 섬의 대표와 키르탄사스의 총독은 불꽃을 튀기며 서로를 노려봤다.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이 둘을 중재한 것은 외부인인 이븐이었다. “관둬, 카를로스. 렌초는 여기 있는 사람ㄷ르 중에서 유일하게 그 적과 직접 싸워봤어. 그놈ㄷ릉르 본 적도 없는 우리들이 실제로 피를 흘리며 싸워본 렌초한테 무슨 소리를 하겠다는 거야?” “시끄러워!! 넌 꺼져!!” “그럴 수는 없겠는데. 동해안에 스케니아의 선주민족이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죽음의 바다에도 나타날 거야. 난 그놈들의 실력을 알고 싶어. 병사 개개인의 실력은 물론이고 지휘관의 통솔력, 군대의 통제는 어떤 수준인지 레테의 대표에게 들어보고 싶은데.” 레테의 대표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이 외부인을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자네가 제일 말이 통할 것 같군. 놈들은 강해. 적 한 명에 이쪽 세 명이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됐어. 집단으로 싸우면 더욱 강해지지. 바위가 돌진하는 거나 다름없어. 무엇보다도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더군.” 이븐은 씨익 웃었다. “그런 놈들한테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멍청한 짓이겠는데.” “그래. 굉장히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어.” “조언 고마워.” 이븐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지도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려 한다. “어디로 가?!” “돌아가겠어. 타우가 위험해.” “잠깐 기다려!! 그런 법이 어딨어?!” 카를로스가 화들짝 놀라면서 외쳤다, 무의식적으로 이 외부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사인중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해적의 규정은 지극히 단순하다. 공격당하면 이쪽도 반격한다. 영역을 어지럽히는 놈이 있으면 보복을 겸해서 내쫓는다. 자신들의 이익만 지킬 수 있다면, 적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사고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 레테 섬을 공격하면 인질이 죽게 되고, 이 작은 섬은 대국의 함대와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사태는 처음이다. 아무도 명확한 대처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 그 쓸데없는 고집 좀 집어치워. 키릍나사스는 정식 국가라고. 자국의 위기에 타국과 손을 잡는 건 절대로 수치가 아니야. 당연히 전략이지. 게다가 적은 바다에서 올 거야. 동맹을 맺자고 하면 델피니아도 굉장히 좋아할 텐데.” “우리 출신이나 생각해보고 말해!! 원래 해적이었던 우리들이 무슨 낯짝으로 같이 싸우자는 소리를 한다는 거야!! 그런 체면은 집어치운다고 해도, 무슨 사정이든 간에 이쪽에서 먼저 꼬리를 칠 수는 없어!!” “그럼 델피니아가 먼저 조력을 청하면?” “그렇다면야 뭐,,, 생각해보지 못할 것도 ㅇ벗지만. 아니, 역시 안 돼! 큰 나라한테 일일이 시지 따위 받아가면서 배를 몰 수는 없어.” 합동으로 싸우게 되면 당연히 행동의 결정권은 델피니아에 있을 터. 자신들은 저쪽의 명령에 주억주억 따르는 신하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굴욕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치였다. 이븐은 씨익 웃었다. 푸른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반짝거린다. “바다 위는 너희들 무대 아니었어? 설마 이 중앙에서, 항해에 대해 키릍나사스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나라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해봤는걸.” “이 짜증나는 놈!!” 절규였다. 하지만 조금은 웃음이 담겨 있었다. “좋아, 알았다고, 저쪽에서 신청하는 거라면-우리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덤으로 적을 물리친 이후로 우리가 코랄에 입항할 때 우선권을 인정해줄 것. 그 정도라면 손 잡아 줄 수도 있어! 델피니아하고! 그거면 됐지?!” 뒤의 말은 동료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카를로스의 기세에는 차마 거스르기 힘든 박력이 담겨 있었고 모두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이븐과 카를로스는 코랄을 향해 떠났다. 다행히 순풍이 이어져 키르탄사스의 쾌속선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리며 저녁 무렵에 코랄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뭔가 상태가 이상했다. 코랄 항은 방어성채를 갖추고 있지만, 그 성벽 위를 수많은 병사들이 바쁘게 달려가고 있다. 아무래도 대량의 무기를 나르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경비선이 가까이 다가왔다. ‘배를 멈추라’는 표식의 깃발을 걸고 있다. 이쪽이 지시에 따르자 경비선은 더운 가까이 접근해 큰 소리로 입항 목적을 물었다. 상업항구인 코랄은 지금까지 입항하는 배에 대해서 이렇게 엄중한 대응을 한 적이 ㅇ벗다. 이븐은 난간에서 몸을 내밀면서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상황의 설명을 요구했다. 국왕은 친위대장이라는 직함은 충분히 효력이 있었고, 항만 경비를 맡은 관리는 당황하며 이븐에게 경례를 한 뒤 절박한 어조로 외쳤다. “서둘러 왕궁으로 돌아와주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 었었던 거야?!” “현재 코랄을 향해 스케니아의 대함대가 남하 중입니다! 지금 막 코랄에 경계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3장 사태는 심각했다. 국왕에게 도착한 보고에 의하면 함대를 구성하는 것은 투석기와 쇠뇌를 장비한 공격선에 무장범선을 합해 80척, 작업정이나 수송선까지 포함하면 백 척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국왕도 이 소식에는 머리를 싸쥘 수밖에 없었다. 월 그리크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첩자를 스케니아에 파견해두었다. 이들은 왕비의 시녀처럼 특수한 조사를 행하는 자들이 아니다. 마을의 상태르 ㄹ관찰하고 스케니아 국왕인 코리우스 2세의 정세를 파악하며 사람들의 언행을 보고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도 스케니아가 이 정도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 하나 보고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알려온 것도 탄가에 잠입시킨 첩자였다. 이런 바보 같은 경우가 어디 있을까. 이 정도 수준의 해군을 짧은 시간 내에 양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그렇게 거대한 움직임을 시민들에게 숨길 수 있을리도 없다. “설마,,, 범선이 눈에 안 들어왔을 리는 없ㅇ르 테고.” 국왕이 반신반의하며 중얼거렸다. 그럴 정도로 사태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스케니아의 함대는 동해안을 따라 착실하게 남하하며 이미 케이파드 유역을 통과했다고 한다. 바람이 이대로 불면 사흘 뒤에는 트레니아 만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미 일각의 여유도 없엇다. 즉시 응전 태세를 취해야 한다. 각지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델피니아의 전 함대를 즉각 코랄로 집결시키도록 명령하는 것과 동시에 근위병단을 총동원하고, 항만의 성채에 자재와 인력을 가득 채워 전투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적은 투석기를 탑재한, 이동하는 요새이다. 기마대나 보병대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쪽도 대형 병기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스케니아의 이름이 군사회의에 처음 등장했던 것은 이미 재작년 가을. 그 이후 월은 해군력의 증각에 힘을 기월여왔다. 가능하면 실제로는 사용하고 싶지 ???ㄴㅎ았지만 적의 함대는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규모로 나타났다. 그리고 스케니아가 이렇게 대담하게 움직이는 이상 탄가가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생각대로 대함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에 뒤이어 전령이 달려 들어왔다. 조라더스가 드디어 당장이라도 델피니아를 침공할 분위기라고 한다. 이미 3천 명의 선봉대가 편성되어 국경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후발대가 속속 편성되면서 탄가의 총 세력은 아마도 2만을 넘을 거라는 연락이었다. 역시나. 국왕의 가슴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일찍이 겪어본 적이 ㅇ벗는 긴장감, 그리고 올 것이 완ㅆ다는 일종의 각오이기도 했다. 때를 기다리던 조라더스가 드디어 움직였다. 재작년 여름에 델피니아와 화의를 맺고 캄센을 빼앗겼을 때부터, 그 가열찬 성격의 왕이 지금껏 가만히 참고만 있었다. 지난 겨울에 독단으로 출격한 부하를 저버리고 이쪽에는 변명에 가까운 사과까지 해가면서 비축해둔 군사였다. 그들이 전장에서 어떻게 싸울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억누를대로 얼눌러온 울분이 그대로 폭발할 것이 틀림없었다. 눈앞에는 스케니아의 대함대, 동쪽 국경도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격력한 초조감이 덮쳐왔다. 하지만 국왕은 그 감정을 조금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왕비가 예리하게 평했던 대로, 사람들의 위에 서는 자는 항상 아랫사람ㄷ르의 눈에 노출되며 그 기량을 평가받는다. 이런 때에 동요를 보여서는 안 된다. 국왕은 이 보고에 냉정하게 대처했다. 북부의 영주들에게 출진을 명령하는 사자를 보내고 캄센에는 후원군을 보낼 테니 반드시 국경을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일이 곤란해졌지만 주저는 하지 않았다. 또한 적에게 져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적의 함대가 코를을 향해 쳐들어오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바라던 바였다. 도시를 통째로 싸들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 국왕이 코랄을 버리는 것은 이 나라가 끝났을 때뿐이다. 적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맞서 싸워야만 한다. 그런 각오까지 품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는 이미 심하게 혼란스러웠다. 특히 심한 것이 해운성이었다. 이 부서는 코랄에 정박하는 외국 국적의 배에 대한 대응과 만 내의 치안 유지, 선원 관리 등이 원래의 업무이다. 헌데 정박 중이던 배의 책임자들이 갑자기 삼엄해진 경계에 놀라 밀려들면서 사정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유를 설명하자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며 모든 배들이 출항 준비를 시작했고, 수속 없이 출항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무허가로 출항하는 것을 가만히 묵인할 수는 없었다. 현재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너무나도 손이 딸린다며 장관도 울상ㅇ르 지었다. 중신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탄가의 군대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인데 코랄ㅇ르 노리는 대함대까지 나타났다. 출진이라고 하면 무기부터 병량까지 자력으로 조달하는 것이 보통이고,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숫자로 그 영주의 힘도 측정 할 수 있지만 바다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해전은 육상전과는 달리 지극히 전문적인 기량과 감ㅇ르 필요로 하며, 우선 선박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사설 선단을 가지고 있는 영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땜누이었다. 기사의 싸움은 말 그대로 기마로 승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델피니아가 보유하는 군함은 모두 국왕 휘하의 해군이었다. 말을 바꾸자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도 된다. 게다가 펜타스 건도 있었다. 적이 함대전만이 아니라 육상전까지도 시도한다면 그 나름의 대비를 해둬야 한다. 하지만 육상에서 할 수 있는 행동에도 한계가 있다. 결국 이쪽 역시 해상의 전력에 의존해야 하지만 자국의 해군은 적의 대함대에 맞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과연 그 공격 으로부터 무사히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용맹한 델피니아의 중신들도 이번만은 허를 찔려 불안해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이븐이 키르탄사스의 총독과 함께 왕궁에 돌아온 것이다. 중신들의 눈빛이 변한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때만은 어떠한 절세미녀보다도 무성하게 수염을 기른 사내놈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듯했다. 알현 수속을 밟는 동안에도 대신들은 일행을 지극히 정중하게 대했지만 카를로스는 그리 간단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만사에 솔직한 남자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적어도 키르탄사스를 국가로 일구어내며 총독으로 뽑힐 정도의 인간이었다. 싹싹하기 그지없는 중신들의 태도는 지금 델피니아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그런 만큼 자신들의 힘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상대가 꼭 사고 싶어한다면 비싸게 팔아주는 것이 장사이다. 덤으로 물건도 물건이니 만치 따로 꿍꿍이가 있는 손님에게는 팔 수 없다. 따라서 국왕으로부터 동맹제의를 받은 카를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얘ㅖ기는 잘 알게습니다만 먼저 보수에 대해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스케니아의 함대를 물리치는 데에 힘ㅇ르 빌려달라고 하셨지요. 그 대가로 무엇을 약속해주시겠습니까?” 워 ㄹ그리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신들이 기뻐하며 달려와 독립기병대장이 키르탄사스의 총독과 함께 돌아왔다고 하기에 당연히 얘기도 이미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혹스러워하면서 카를로스와 자신의 조정 역할로서 그 자리에 있던 이븐을 돌아봤지만, 이븐은 국왕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어덯게든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이븐이 왕궁에 돌아온 뒤, 월은 아직 이븐과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월은 카를로스가 무슨 생각으로 코랄에 찾아온 것인지, 레테 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가만히 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븐은 그런 카를로스와 월을 가만히 지켜봤다. 국왕은 자신이 시험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가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만큼 불리한 시험이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월 그리크는 월 그리크였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일관하는,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특이한 국왕이다. 월은 자신의 양식과 신조를 바탕으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금이든 은이든 토지이든 주도록 하지. 하지만 키르탄사스는 정식 국가가 아닌가. 내게서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게 아니야. 패배한 스케니아에게세ㅓ 받아내는 것이 상식이겠지.” “그 말씀은, 델피니아는 저희들의 활약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가 됩니까? 멋대로 스케니아한테 뜯으면 될 테니까?” “멋대로는 아냐. 나도 같이 받아내야지. 그런 변경의 땅 따위 받아봤자 소용도 없으니 돈으로 배상을 받을 생각이네. 그 나라의 지불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상금의 1/20을 귀국의 몱으로 하면 어떻겠나?” 카를로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상대의 신분도,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해적 시절의 말투로 돌아와 외쳐버렸다. “어이, 임금님!! 그런 법이 어딨어?! 이거 완전히 날강도 아냐!!” 너무나도 큰 고함을 듣고 국왕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들이 허둥거렸지만 국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총독. 이런 말은 실례지만 귀국과 우리나라의 인구 차이를 생각해주기 바라네. 예를 들어 총독에게 보수를 내려줘야 할 부하가 천 명 있다면, 난 그 수십 배는 되는 신하들에게 보수를 내려야 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일 위험한 역할ㅇ르 맡는 건 우리 아닙니까! 반반가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7대 3은 하자 이거요!” “그걸로는 내가 신하들한테 내릴 돈이 부족해. 1/10!” “말도 안 돼!” 두 사람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전쟁의 배상금 분배에 한동안 열중해 있었지만 카를로스가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 이런 소리 하고 있어봤자 정말로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맞는 말이야. 우선 적을 격퇴하는게 중요하지.” 월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꼭 키르탄사스의 조력을 부탁하고 싶네. 이번 일은 귀국에 있어서도 절대로 남의 일이 아니야. 스케니아의 함대는 백 척을 넘는 숫자라더군. 그 정도의 숫자가 이 먼 곳까지 나오려면 당연히 어딘가에 보급지를 만들 필요가 있어. 탄가와 손을 잡고 있다면 탄가의 영해 내에 설치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면 그렇게는 안 해. 같은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보다 두 방향에서 공격하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니까. 굳이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코랄 남쪽에 기지를 세운다. 하지만 코랄 남쪽 바다라고 하면 곧 키르탄사스의 영해지. 스케니아는 그 사실을 모르거나, 어쩌면 알아도 무력으로 입을 다물게 만들 생각일지도 몰라.” 카를로스는 너무나 놀라 말을 잃고 있었지만 월은 눈치채지 못하며 열심히, 주의 깊에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지나지 ㅇ낳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을 거야. 조만간 반드시 총독의 발치에도 불똥이 튀겠지. 그렇게 되면,,, 전쟁이 시작되면, 피해를 당하는 건 결국 힘없는 주민들이야. 그 점을 생각해주기 바라네.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우리나라와의 교역에 관해 귀국에 편의를 봐주는 정도지만,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면 힘을 합치도록 하지.” 키르탄사스의 총독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짓다가 오만하게 웃엇다. “보수는 안 주는 거 아니었습니까?” 델피니아의 국왕도 함께 웃엇다. “이런 약속을 한다고 해봤자 보수라고는 할 수 없어. 함께 싸운 상대에 대한 당연한 예의인 동시에 감사의 증표로 생각해주게. 게다가 키르탄사스의 배가 빈번하게 드나들게 되면 우리나라의 항구도 더욱 윤택해져. 서로가 이득을 보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은가.” 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키르탄사스는 뱃사람들의 나라이지만 동시에 상인의 나라이기도 하다. 상인이 토지나 재보를 원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장사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데에 더 큰 매력을 느낄 것이 당연했다. 카를로스는 한동안 말없이 월의 수려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뭔가 기묘한 동물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쩌면, 이게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수상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일부러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비아냥을 섞어 물었다. “폐하는 아까부터 계속 조력을 부탁한다 하시지만 상대는 정식 군함입니다. 우리 같ㅇ느 작은 섬의 뱃사람들이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월은 소리 내어 웃었다. “총독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 우리나라의 상선은 항해의 안전을 위해 실력 있는 용병을 호위로 태우네. 어지간한 군함에 필적하는 무장까지 갖추고 있는데, 그런 상선을 공격해서 화물을 강탈해간 이들이 바로 총독이 말하는 작은 섬의 뱃사람들 아니었나.” 카를로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목을 움츠렸다. “게다가 야간에 동쪽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건 귀국의 사람들뿐이라고 들었네. 어부들이나 선원들이야 굳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 해본 적도 없겠지. 하지만 귀국의 뱃사람들은 관청의 눈을 피해 도망치기 위해 그런 묘기를 익힐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닌가.” 불쌍하게도 총독의 목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월 쪽은 어딘가 즐거워하는 눈치마저 보엿다. “실은 그 뒤에 해적 퇴치를 전담하는 관리에게 얘기를 들어봤네만 모두 해적 카를로스의 이름은 잘 기억하고 있더군. 수많은 해적선을 거느리는 대해적에다 죽어라 생고생을 시킨 얄미운 놈이지만, 배를 조종하는 솜씨나 바다의 조류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는 면만은 엄청나다고. 분하지만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던데.” “그, 그 얘기는 그쯤 해두십쇼,,,.” 아까까지 엄청나게 고함을 치던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깃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안색은 창백해지고 식은땀까지 흘렸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국왕의 말이나 태도에 다른 뜻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협박도 아니고 옛날 일을 떠올리게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이 특이한 성격의 왕은 진심으로 이쪽ㅇ르 칭찬하는 것이다. 그 칭찬을 듣는 당사자로서는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제 충분하지 ㅇ낳습니까, 총독.” 이븐이었다. 부드러운 어조였다. “폐하께서도 이제 와서 당신들을 해적으로 체포할 생각이 없습니다. 교역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편의를 봐드릴 생각이지요.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그에 대해 미리 서약서를 받아두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조금 망설이면서 굉장히 어색한 말투로 이븐에게 물었다. “독립기병대장께서는 그, 서약서를 받아셨는?” “아니, 타우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했ㅅ브니다.” “그럼 저희들도 그걸로 충분합니다.” 카를로스는 다시금 국왕을 바라모녀, 험상궂은 얼굴에 엄청난 기백을 담아 말했다. “스케니아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적입니다. 중앙의 바다에서 쫓아내는 것 자체는 주저할 게 없습니다. 단, 제 부하는 제 명령밖에 듣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저 자신과 폐하의 의지 이외에는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이쪽 해군에 편입되어 싸우라고 말씀하시겠다면 이 동맹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물론 될 수 있는 한 협력은 하겠지만 지시는 받고 싶지 않군요. 그래도 좋아시다면,,,.” 국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총독. 내가 바라는 건 하나분이네. 이런 남쪽 땅까지 내려와서 뻔뻔스럽게 남의 영토를--아마도 타우의 금은도 그렇겠지만--빼앗으려는 날강도들을 궁시와 소뇌로 정중하게 대접해서 청저하게 때려눕힌 후 발리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카를로스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곧 제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가 서로 다툴 필요는 없겠지. 내 함대에는 절대로 그쪽을 방해하지 ㅇ낳도록, 또한 그쪽에서 요청하면 언제라도 협력하도록 잘 말해두겠네. 이거면 되겠나?”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카를로스는 국왕과 악수를 나눴고 여기서 동맹이 성립되었다. 남은 것은 양자의 정보 교환이다. 레테 섬이 이미 점령당했다는 말을 들은 국왕의 얼굴이 흐려졌다. 적어도 한때 해적의 기지엿던 섬이다. “시걀ㅇ도 물도 ㅊ우분하고 화살촉을 말들 재료도 넉넉해. 우리들은 쓴 적이 없지만 투석기에 사용할 만한 돌도 얼마든지 채취할 수 있지.” 이븐은 그렇게 설명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일 먼저 이곳을 탈환해야 하지만, 잡혀있는 인질이 문제였다. “그럼 ㅁ너저 함대를 처치하지.” 월은 ㅈ그각 판단을 내렸다. 보급기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태세를 정비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괴멸시키는 것이다. 적의 함대가 도망쳐버리면 결과적으로 레테 섬도 구할 수 있다. 카를로스도 이 의견에 찬성했다. 스케니아의 함대가 코랄 연안에 나타나면 자신들이 측면에서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레테 섬에 있는 녀석들이 어떻게 움직일지가 문제입니다만, 공격하려면 머리를 쳐야겠지요.” 시간이 없다. 카를로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키르탄사스로 돌아갔다. 스케니아의 함대가 접근 중이라느 ㄴ보고를 들은 뒤부터, 국왕은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사태를 파악하며 그 대책을 준비했다. 키르탄사스와 동맹을 맺은 시점에서 어느 정도 안도하며 조금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그때 또다시 급보가 날아왔다. 파라스트의 움직임이었다. 국왕은 벌떡 일어났다. 그 보고의 내용에는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인가?!” “틀림없습니다. 오론 왕은 펜타스의 사자에게 그따위 야만족에게 문화의 땅이 짓밟히다니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 야만족 놈들이 바로 근방의 섬을 점거해 언제 또다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며 자신이 신임하는 안테슈 장군에게 병사 5천을 맡겨 펜타스에 파견했습니다.” 국왕은 낮게 신음했다. 막 누우려던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한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국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고 검은 눈동자만이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보고를 하던 종자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주저하며 국왕의 눈치를 살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던 걸까. 마침내 국왕은 무서운 눈빛으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군사회의를 열어. 타우의 영주와 독립기병대장도 참석하도록 전해라.” 종자는 당황하며 달려 나갔다. 곧바로 재상 브룩스를 시작으로 주된 신하들이 모여들었다. 서리궁에서 왕비도 달려왔다. 국왕은 그 자리에서 현 상황을 설명하고 바다에 관해서는 함대의 집결을 기다려 응전할 것, 적이 도시 주변에 상륙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하므로 근위병단을 코랄에 대비시킬 것, 또한 후진으로 핸드릭 백작이 이끄는 영주 세력을 준비시킬 계획 등에 대해 발표했다. “그리고 문제의 동부인데, 탄가 군 상대는 우선 도라 장군.” “옛!” 장군은 즉각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장국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조금 어령누 적이야. 거기에 틸레든 기사단. 아니, 지금은 사보다 공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공과 공의 집안 사람들도 함께 출진해줄 것을 요청하네.” “알겠습니다.” 실로 유쾌한 목소리로 발로가 대답했다. 기합이 가득 들어간 탄가 군이라면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다. 국왕은 다시금 이 군세에 투입할 영주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했다. 주로 동부의 대영주들이었다. 최후로, 전군의 보급을 담당할 책임자로서 벨민스터 공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포진이었지만 심상치 않은 발표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나시아스 경.” “예?” 나시아스도 소집을 받고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지만, 설마 자신의 이름이 불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듯하다. “나시아스 경에게 특히 어려운 부탁이 있네.” “뭐든지 명만 내려주십시오.” 주군의 명령이다.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지만 국왕이 꺼낸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모나 기사단을 이끌고 이 군세에 참여해주길 바라네.” 자신의 귀를 의심한 것은 당사자인 나시아스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기가 막혀 굳어버렸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라 장군이었다. “기다려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물론 도라 장군의 무용을 믿고 있지만 적은 2만 대군이야. 이쪽도 가능한 한 위세를 부려서 적의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는 해도 탄가는 왕비의 활약에 충분히 놀랐을 테니까 어지간한 정도로는 협박이 안 되겠지. 그런 점에서 맹장도라 장군에 덧붙여서 우리나라의 자랑인 비상하는 매와 백합의 문장까지 갖춰진다면 상당히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국왕의 어조에는 어쩐지 이 생각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한 울림까지 있었지만 도라 장군은 새파랗게 질리며 진언했다. “서쪽의 방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비르그나를 비워두실 생각이십니까?!” “비르그나에는 남 포트남의 세리에 경을 배치하겠어. 경은 신중하면서도 대담하고, 절대로 혈기만 앞세우는 인물이 아니야. 딱 적임이겠지.” “폐하, 기다려주십시오. 분명히 말씀하시는 대로일지도 모릅니다. 절대로 세리에 경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오나!” 다른 사람 역시 도라 장군과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세리에 경이 뛰어난 무장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국경을 지켜온 나시아스와는 경험부터 다르다. 왕비가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나시아스는 미끼라는 거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국왕은 조금 웃으며 왕비에게 말했다. “거 듣기 안 좋은 말인데. 난 정말로 라모나 기사단의 힘을 동부에 투입하고 싶은 거야. 종제의 폭주를 막아두자는 뜻도 포함해서.” 나시아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으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폐하의 사촌동생인 이 친구의 독주를 억누르는 역할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그것만은 도라 장군보다도 제가 적임이겠지요.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자신도 있습니다. 헌데 과연 저는 뭘 위한 미끼일까요?” 저도 모르게 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 국왕 대신 왕비가 대답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끼가 되는 건 나시아스가 아니야. 텅 빈 비르그나가 미끼지. 특대형 너구리가 걸릴 거야.” 역전의 용사들도 그제야 납득한 듯했다. “그 너구리 놈이 하는 짓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안테슈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펜타스를 목표로 이동하고 있지. 일단 지금 시점에서는. 하지만 언제까지 그 움직임이 계속될지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어. 펜타스로 출병하는 척하다가 도중에 방향을 틀어서 테바를 넘어올지도 모르지.” 이 의견에 재상 브룩스가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로는 코웃음을 쳤고 도라 장군도 얼굴을 찌푸렸다. 질과 이븐은 기가 막힌 듯이 경멸의 표정조차 숨기려 들지 않았다. “불쌍하게도. 펜타스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겠군요.” “그렇다고 동정할 생각은 안 들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쯤 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악랄한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도우러 가겠다고 언질을 줘놓고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군대까지 파견해준다면 펜타스 사람들은 진심으로 기뻐하겠지. 진심으로 오론에게 감사하며 그 의협심을 칭송할 것이다. 그런데 그 구원군이라는 놈들이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자신들을 침공한 적의 편ㅇ르 들어버린다면. 자신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침략자들과 발맞춰 델피니아 공략으로 나선다면. 펜타스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론의 평판은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만다.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 오늘의 우방이 내일 다시 적이 되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세간의 눈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람은 정의를 좋아하는 동물이고 대개의 경우 영웅이 끌리게 마련이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고 해도 지나치게 더러운 수법은 쓸 수 없었다. “어차피 그 녀석이 하는 짓이니 검은 걸 놓고 희다고 우기는 짓도 손쉽게 할 거야. 보신을 위해서 동생의 목ㅇ르 베어 보낸 주제에 그것까지 미담으로 바꿔버린 인간이니까.” 브룩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럼 폐하께서는 파라스트의 원군이 펜타스로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는 가주길 바라네. 절실하게. 그러니까 시험해보는 거지. 라모나 기사단장을 일부러 비르그나에서 떼어놓고 위협을 받는 건 동쪽의 캄센뿐이라고 안심하는 척한다. 그래도 너구리 놈이 흔들리지 않고 얌전히 펜타스를 지키고 있다면 일단은 믿어도 괜찮겠지만, 아마도 그렇게는 안 될 거야.” 파라스트는 재작년 평화조약 이후로 지극히 싹싹하게 행동하며 델피니아의 좋은 이웃을 가장해왔다. 그 연극에 속아 넘어가는 척하겠다는 것이다. 근위사령관인 아누아 후작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뛰어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조금 위험한 방법이 아닐지요. 현재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절대로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지극히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지요.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너구리 구멍까지 쑤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바라는 대로 너구리가 걸려줘도, 유감이지만 사냥할 손이 부족하다. 얌전히 자게 내버려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도라 장군을 비롯한 연륜 있는 장군들도 비슷한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은 그런 이들을 달래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을 기대하는 짓이야. 내가 오론이라면 절대로 이런 기회는 안 놓쳐. 그렇지 않아도 그 놈은 침을 줄줄 흘리면서 타우를 뜯어먹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라모나 기사단이 비르그나에 버티고 서서 잔뜩 노려보고 있다고 해도 주저하지 않을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쪽에서 먹이를 걸어놓고 물어뜯기 쉽게 해서 너구리가 방심하게 만들고 싶은데. 적의 틈을 노려서 승기를 잡는다.” “하지만 완전히 적이 미끼에 걸려들었다 치더라고, 그 뒤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서쪽에 생긴 새 우방의 활약을 기대해야지.” 산세베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파라스트의 신경이 델피니아로 쏠리는 시점에서 산세베리아가 파라스트의 등을 노리기로 약속해두었다. 이 전략이 적중하면 저 오론조차도 간담이 서늘해질 터였다. 브룩스가 말했다. “문제는 그 새 우방이 정말로 폐하의 뜻대로 움직여줄까 어떨까 하는 점입니다만.” 왕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누아 후작 말을 따라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델피니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ㅇ느 지극히 휘험해. 거기에 오론이 테바를 넘어오기까지 한다면 이 나라는 동시에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되는 셈이지.” “비전하, 타우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글세 말입니다.” 베노아의 두목과 부두목이 재빨리 불평했다. 왕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사면이 전부 적에 둘러싸여 있어. 델피니아의 패배느 ㄴ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오르테스는 불리한 상대의 편을 들지 않을 거야.” 이것이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 사람을 확인한 왕비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오르테스는 지혜롭고 패기도 있다. 야심가인 동시에 인망도 있었다. 소국의 비애를 맛보고 있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든 강하게 만들려고, 속국의 굴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하지만--아니, 그렇기 때문에--언제나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그 녀석은 델피니아하고 손을 잡으면 오론의 코를 꺾어줄 수 있을 거다. 잘만 되면 파라스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쪽 편에 붙겠다고 약속한 거야.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났다 이거지. 처음하고 얘기가 다르다, 같이 죽을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손을 떼려고 할 가능성이 아주 커.” 국왕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왕비에게 물었다. “질 생각이야, 리?” “넌?” “나도 내 승리의 여신이 곁에 있는 한지지 않아.” “나도 내 발도우가 이길 때까지 물러설 생각 없어.”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동시에 씨익 웃었다. 국왕은 신나는 듯이, 거의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싶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산세베리아가 움직여줘야 하겠는데, 그걸 너한테 부탁하고 싶어. 괜찮을까?” 왕비도 국왕과 마찬가지로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우쭐해 하지 마. 그게 남한테 뭘 부탁하는 인간의 태도야?” 그렇게 말하는 왕비 쪽이 더욱 오만한 태도였다. 군사회의석에서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리까지 꼬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화내지 않았다. 더욱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부탁할게.” “좋아. 어떻게든 해주지.” 왕비 역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일부러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발로가 기가 막힌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금슬이 좋아서 다행이외다.” 다른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사리가 좋다는 거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ㅇ르 보고 있는 ㄷ스한 기분이 든다. 모두들 열심히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해군 제독이 ㄴ세르기우스만이 예외였다. 그는 쉰 살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뱃사람답게 햇볕에 그을린 피부, 어떤 폭풍에라도 견딜 수 있을 것처럼 탄탄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 당당한 체구가 비틀거릴 듯했다. 거친 바닷바람에 단련된 얼굴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문자 그대로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 불쌍하게도 이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장면을 그다지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도라 장군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되돌렸다. “어디, 그럼 탄가 쪽은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기로 하셨고,,,. 폐하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황에 달린 문제기는 하지만 우선은 코랄에 머물겠네. 여기를 뺏겨버리면 국경이고 뭐고 다 끝이니까. 세르기우스--.” “아, 옛!” 방심하고 있던 해군 제독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조만간 제독에게 나의 새 벗을 소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키르탄사스의 총독인 카를로스 경이지.” 국왕은 깜짝 놀라는 제독에게 간략하게 그들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 전쟁, 특히 해상전에 있어서는 키르탄사스와의 긴밀한 연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때문에라도 국왕이 코랄에 있어야 했다. “키르탄사스는 제독의 부하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야. 낯익은 얼굴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겠지만 그것도 모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네. 모두들 그 점을 잘 명심하도록 전해주게. 과거보다 지금 눈앞에 닥쳐오는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하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제독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알겠습니다.” “키르탄사스는 우리 편이야. 그들도 스케니아를 상대로 함께 싸울 의사를 굳혔지. 모두 그 점을 절대로 잊지 말도록 해주게.” 제독은 다시 한 ㅂ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중앙의 바다를 잘 알고 있는 뱃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힘을 빌려준다면 확실히 마음이 든든하군요.” 한 명이라도(아니, 한 척이라도) 많은 아군이 필요한 이 시점에 옛날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바보짓이다. “왕비도 파라스트가 움직일 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줘.” 왕비의 몸을 걱정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왕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결정되었다. 남은 것은 행동뿐. “그럼 출진이다. 제군들의 건투를 비네.” 국왕은 그 말과 함께 군사회의를 마쳤다. 일찍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엄ㅊ어난 전쟁의 예감에 성내의 공기도 순식간에 긴장으로 가득 찼다. 특히 삼곽에서는 하급병사가 당황하며 출진 준비를 위해 뛰어다니고 마구간이나 무기고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미 출진 준비를 마친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여기저기에서 작별인사를 나눈다. 갓난아기를 안아들고 뺨을 부비는 병사에서 출병하는 자식을 불안하게 배웅하는 나이든 양친까지. 갑옷으로 몸을 감싼 남편에게 부적을 쥐어주는 부인도 있다. 일곽의 사보자 공 저택도 출진 준비로 부산했다. 집사인 카사는 주인과 함께 출전할 사람들과 남아 있을 사람들을 바쁘게 배치했고, 시종들은 주인의 말에 안장을 얹어 마구간 밖으로 끌고 나왔다. 발로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슴에 가문의 문장이 사자가 상감된 갑옷을 두르고, 밑에 받쳐 입은 검은 옷의 양 팔에는 황금빛 넝쿨이 새겨져 있다. 허리에 찬 대검 역시 마찬가지로, 붉은 안감이 달린 검은 외투를 어깨에 둘렀다. 불타는 투지가 그대로 눈에 보일 듯이 화려하고 용맹한 모습이었다. 아들인 유리는 이제 곧 만 한 살이 된다. 최근 열심히 일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아직 뜻대로 잘 되지 않는 듯, 그럼에도 여기저기 기어다니는 것만은 보통이 아니었다. 조금만 눈을 떼도 어디론가 기어들어가는 통에 유모가 잔뜩 고생을 하고 있었다. 발로는 백은으로 장식된 갑주를 낀 손으로 아들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자, 네 어머니에게 인사하러 가볼까.” 발로는 아들을 한 손에 안고서 로자몬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딸 세일러가 있다. 하지만 로자몬드 역시 남편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시녀에게 딸을 안겨서 막 집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발로가 아들과 함께 찾아온 셈이라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로자몬드 역시 전투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흰 바탕에 옅은 보라색 옷을 걸치고, 은백색의 갑옷 가슴에는 금으로 사자 문장이 새겨져 있다. 외투도 허리에 찬 검도 은으로 통일된 눈부신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씩씩한 두 아이의 어머니는 딸과 아들을 번갈아 안아 올리며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둘 다 아직 어렸다. 양친이 이제부터 전쟁터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 턱도 없지만 부모의 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어머니 쪽은 더욱 그랬다. 마음에 걸리는 듯이 남편에게 말했다. “스케니아의 함대가 코랄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유리는 어디론가 피난시키지 않아도 되겠어?” 빌로는 말ㅇ벗이 갑주를 걸친 부인의 어깨를 안았다. 한 마디 한 마디 되뇌는 ㄷ스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나라의 해군은 강해. 코랄은 절대로 공격 받지 않을 테니까.” 로자몬드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남편의 얼굴을 보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로자몬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기를 코랄에서 피난시킨다면 다른 귀족들도 따라하게 된다. 더 아래쪽의 사람들한테까지 코랄이 위험하다는 그릇된 인상과 함께, 쓸데없는 불안을 심어주게 된다. 발로는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의 입이 이때라는 듯이 일제히 떠들어댈 거야. 사보아 공은 역시 아들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싶은 거다. 코랄이 위험하니까, 국왕이 질 것 같으니까 아들만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는 속셈이다--무례하기 짝이 없지. 난 그런 문제로 아들한테 의지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멋대로 얘기를 지어낼 테니까. 소문만큼 처치하기 곤란한 것도 없어. 진짜 군대하고 달라서 칼로 베어버릴 수도 없다고.” 로자몬드는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 행동ㅇ르 할 때에는 그런 세간의 눈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자신들 같은 대귀족의 인생이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발로는 그런 부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남자로 태어나는 것도 이럴 때에는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야. 세일러한테는 그런 걱정이 없으니까 네가 좋을 대로 해.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라코룸이나 어딘가에 맡겨두는 건 어때?” “아니. 나도 귀공의 자세를 배우도록 하지. 세일러는 여기에 두겠어.” 그들의 집에는 몇 대 전부터 대대로 종사하고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가신들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런 가신들에게 아이를 맡기고, 만일의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언급해두었다. 드디어 출발할 때가 되었지만, 로자몬드는 이번 동부 방면 작전에서 후진을 맡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출진한다고는 해도 담당하는 역할은 전혀 다르다. “그게 조금 유감이기는 하지만 전황에 따라서는 잠깐씩 그쪽 상황을 보러 갈 수도 있을 테니까.” 부하들이 말을 끌고 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발로는 그렇게 말했짐나 로자몬드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를 낮추며 말한다. “저기 말이야, 사보아 공.” “왜?”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지만, 전쟁터에서는 안 돼.” “안 된다니?” 로자몬드는 남편의 건장한 몸에 기대며 날카롭게 속삭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짓은 안 된다고.” “허. 이거 또 차가운 말을,,,.”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당연한 상식이지.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 대부분은 처자식을 남겨놓고 출진하는 거야. 지휘관인 우리들이 병사들 앞에서 들러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기에도 양향이 커.” “누가 언제 공하고 들러붙어 있겠다고 했어?” 로자몬드는 발로의 천박한 표현에 재빨리 항의했지만 상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혼자서 쓸쓸하게 출진하는 나시아스한테 자랑이라도 할 생각이야?” 이쯤 되면 로자몬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 나한테도 의리라는 게 있어. 그런 짓을 했다가 ㄴ쟌펠 부인한테 완전히 미움 사게 욀걸.” “아무 말 안 하면 부인도 모를 텐데.” “아니, 분명히 알 거야. 내가 얘기할 테니까.” 발로는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침 그때 말이 도착했다. 라모나 기사단장은 결혼을 계기로 이곽에 저택을 수여받고 비르그나와 코랄을 왕복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소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이곽의 저택에는 심부름꾼 한 명에 하인 두명이 딸려 있다. 라티나는 이들과 함께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 수 없는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기로 했다. 본래 기사단장이 출진할 떼에는 기사단의 하인이 준비를 도우러 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라티나가 나시아스의 준비를 거들었다. “원래는 혼자서 걸치는 물건이니까,,,.” 나시아스는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라티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얼굴이 굳어 있다. 이때가 올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남편은 국왕의 명을 받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전사이며, 기사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남편은 비르그나 요새를 지키는 게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캄센으로 싸우러 가게 되었다. 최전선이다. 묵묵히 갑옷을 입히고는 있었지만 손이 떨려서 뜻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라티나. 뒤는 제가 하지요.” “아뇨, 부탁해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검을 꽂은 검집도, 금속판으로 연결된 보호대도 익숙하지 ㅇ낳은 도구였지만 동시에 남편의 목숨을 지켜주는 물건이기도 했다.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확인해두고 싶었다. 간신히 갑주를 다 입히고서 어깨에 망토를 걸쳐준다. 준비가 끝나자 나시아스는 굳어진 얼굴의 부인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 죄송합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지만,,,. 저어, 한 가지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예?” 어째서 지금 이런 때에 그런 게 생각난 건지, 라티나 본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문안을 하러 비전하를 찾아뵈었을 때, 비전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윗사람이--지휘관이 정신ㅇ르 차리지 않으면 아랫사람들도 느슨해진다, 혹은 겁을 먹는다고. 그래서 비전하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면서 병사들 앞에서 말을 타셨다고요. 당신도 비전하와 같은 입장이 된다면 그렇게 하실 건가요?” 너무나도 비전하다운 태도라고 생각하면서 나시아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 지휘관의 역할입니다. 병사들은 지휘관 한 명에게 생명ㅇ르 맡기고 승리를 믿으며 싸우는 거니까요. 지휘관에게는 승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라티나의 얼굴은 아직도 딱딱하게 굳은 채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신념에 따를 뿐. “하루라도 빨리 돌아좌주세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그렇게 인사를 했다. 조슈아가 나시아스를 ㅁ자이하러 저택의 현관에 와 있었다. 부인과 작별 인사를 마친 나시아스는 조슈아의 긴장된 얼굴을 보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엄청나게 큰 공적을 세우겠다는 각오가 전신에 가득 차 있다. 단장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경례하는 순간 뭔가 하얀 것이 떨어졌다. 조슈아가 움찔하더니 바닥에 달려들 듯이 그것을 주워들어 당황하며 등 뒤로 숨겼다. 나시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까지 숨기려고 하면 아무래도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건 뭐지?” “아뇨! 그게! 이, 이건,,,.” 움찔거리면서 손을 앞으로 가져온다. 편지였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보낼 편지라고 한다. “이상한 녀석. 왜 숨기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시아스는 연민을 느꼈다. 조슈아가 아니라 조슈아의 가족들에게. 조슈아의 고향은 멀리 떨어진 곳이다. 돌아가서 작별 인사를 할 틈도 ㅇ벗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슈아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저기, 실은, 그게,,,. 자, 장래를 약속한 아가씨가 있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식을 올리자고,,,. 그, 그얘기를 부모님에게 알려드리려고,,,.” 나시아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가. 세월이 정말 빠르군. 네가 그런 나이가 되었다니. 어떤 아가씨지?” 조슈아는 부끄러워서 좀처럼 대답하려 하지 ㅇ낳으면서도 기쁨을 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는 아마색 머리카락의 하녀라면서, 개선하고 돌아올 날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이라고 했다. 패배할 가능성 따위 조금도 생각지 못하는 젊은이의 모습에 나시아스는 다시금 흐뭇하게 웃음ㅇ르 지었다. 자신의 어깨에 이 부하들의 생경과 미래가 모두 얹혀 있다. 절대로 질 수는 없었다. 나시아스는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오는 아내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출발했다. 삼곽에는 사람과 말이 가득 모여 있었다. 벨민스터 공도 있었다. 발로는 나시아스를 보자마자 서둘러 다가오더니 친구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어때? 부인과의 작별 인사는 무사히 끝냈어?” “참견이 심해, 틸레든 기사단장.” 나시아스가 따끔하게 대답하다가 생각난 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뭐,,,. 내 몸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 “느긋한 놈이군.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더욱,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해. 그렇게 생각했지.” “허허허, 그 고지식하던 라모나 기사단장이 이런 소리도 할 줄 알게 됐군. 부인의 효과는 대단하군.” 말로도 우스며 대답했다. 이런 대화도 오랜만이라 즐거워하는 것이다. “실컷 감사하라고. 내가 없었으면 넌 지금까지 독신이었을 테니까.” “좋아. 평생 고마워해주지.” 나시아스의 대답에 발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와버리면 놀리는 보람이 없다. 나시아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도라 장군은?” “아직 안 나왔어. 내 부하 하나도 아직 안 보이지만, 출발할 때까지는 돌아오겠지.” 캐리건 달시니는 누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일곽에 들어와 있었다. 누나의 거처라고는 하지만 캐리건의 신분으로는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인 만큼, 신가한 듯이 부용궁을 둘러보았다. “캐리 여기저기 한눈팔지 말고 누나 얘기 잘 들어.” 왕비도 참전하는 전쟁이다. 폴라의 표정은 진지했다. “왕비님조차도 부상을 입으실 정도니까 넌 훨씬 더 위험해. 충분히 조심하고 위험한 곳에는 절대 가지 마.” 캐리건은 기가 막혀서 반문했다. “누나. 알고 있는 거야?! 난 전쟁에 참전하는 거야. 위험하지 않은 데가 어디 있겠어?” “하지만 죽으면 어쩔 건데.” 폴라의 온몸에 엄청난 박력이 떠돌았다. 캐리건은 조금 우물거리다가 가슴을 펴고 힘차게 대답했다. “그건 그때 일이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기사가 될 수 없어. 단장도 그렇게 말할 거야.” “안 돼. 단장님이 허락하셔도 내가 허락 안 할 테니까. 넌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해.” “그렇다고 적한테서 도망다닐 수는 없잖아. 그랬다간 정말 단장 손에 죽어버릴걸.” “나도 알고 있어. 물론 용감하게 싸워서 단장님의 도움이 되어야지. 내가 말하는 건 말이야. 공적을 세우려고 혼자 사람들 눈에 띄려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바보 같ㅇ느 짓 하지 말아달라는 얘기야. 넌 그런짓 저지르게 쉬워 보이니까.” “너무해,,,.” 소년은 씁쓸하게 웃었지만 내심 뜨끔하기도 했다. 발로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캐리건 개인이 아니라, 언젠가 젊은 기사와 종자들 전원을 모아놓고 한 훈계였다. 전쟁터에서 겁을 내는 게 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모한 행동 역시 해악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진지하게 듣고는 있었지만, 단장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때때로 그런 식으로 말을 할 때가 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줄 수도 있을텐데 일부러 빙빙 돌려가면서 상대방의 이해력을 시험하는 것처럼. “이 얘기였을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이 목소리는 폴라의 귀에 닿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자라는 만큼 연장자는 나이를 먹어간다. 선대 국왕 때부터 싸워온 역전의 영웅ㄷ르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핸드릭 백작은 이미 예순 살이 넘은 나이였다. 보통이라면 이미 예전에 은퇴했을 나이이다. 지금도 기력이 왕성하고 말도 창도 완벽하게 다루고 있짐나 그런 부친의 곁에는 상당히 예전부터 아들들이 동행하고 있었다. 아들이라고는 해도 장남은 이미 서른 둘, 제일 젊은 막내아들도 스무 살이 넘었다. 그런 아들들이 갑옷으로 몸을 감싼 씩씩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곁에 함께 하니 핸드릭 백작 입장에서는 얼마나 든든할까. 아누아 후작의 장남과 차남도 각각 근위병단의 소대를 이끌고 참전한다. 이쪽은 아직 십대의 젊은이였다. 사보아 가문의 블루완드 경은 손자가 처음으로 참전한다고 한다. 손자의 나이는 겨우 13세. “우리나라의 전쟁의 여신께서 왕좌에서 쫓겨난 국왕폐하와 함께 돌아우신 후 폐하를 도와 역적 페르젠 일파를 일소하셨을 때에도 바로 네 나이였다. 비전하만큼 활약하라는 황송한 말은 굳이 않겠지만, 몸이 작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적의 화살이 피해가지는 않아. 목숨을 아끼지 말고 용감하게 싸우도록!” 아직 앳된, 사과 같은 뺨의 소년이었지만 긴장한 눈초리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라 장군은 출진을 앞둔 사람들의 풍경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군에게는 아들이 없다. 그 대신 여기사인 샤미안이 언제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허전함은 지울 수 없었다. 샤미안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다른 형제가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런 만큼 자신이 용감하게 싸우겠다고 생각해왔다. 도라 장군은 군대 대부분을 로아에 남겨두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대대적으로 출진 준비를 할 필요는 없으므로 몇 안 되는 가신들과 함께 일단 가벼운 차림으로 귀향하기로 했다. 장군 부녀가 출발하기 위해 정원에 나왔을 때, 타우의 군세를 이끄는 질이 인사를 하러 왔다. 타우 사람들의 숙사는 바로 이 근처이다. “오오, 그쪽도 이제 출발하는가.” “예. 당분간 보리 기회가 없을 듯해서 인사를 드디러 왔습니다.” “아니, 나야말로, 탄가와의 싸움은 귀공에게 있어서도 남의 일이 아니니까. 이번에도 함께 쌍루 수 없게 되어 정말 유감이오.” 질의 뒤에 애비가 몸을 움츠리며 서 있었다. 애비는 어지간히 왕궁 생활이 ㅇ나 맞는 듯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도라 부녀와 만나는 것도 결혼한 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샤미안은 애비에게 흥미를 느끼며 말을 걸었다. 질은 도라 장군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애비는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한 눈치였지만, 샤미안이 ‘부인’이라고 부르자 펄쩍 뛰어오르며 놀랐다. “저, 저 말씀인가요?!” “네. 질님의 부인 되시지요?” “저기, 그건 그렇지만, 전, 부인이라니, 그런 말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냥 애비라고 불러주시면 되는데요,,,.” 안절부절 못했다. 사실 애비는 모르고 있었다. 왕궁에 있는 동안 자신의 남편이 단순한 베노아의 두목이 아니라 타우의 영주로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도 대략은 알고 있었다. 대단하신 신분의 귀족들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까지 그런 사교의 대상이 도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샤미안은 누가 봐도 당당한 귀족의 딸.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부인’이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쓴다.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다 가슴은 두근두근 뛰어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대로 도망쳐버리고 싶은데도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뭔가 대답을 해야 한다고 초조해하면 초조해할수록 말이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소리라도 했다간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닐까. 이븐이 대화에 끼어들었을 때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왜 그래? 되게 딱딱하게 굳어 있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거!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쫄 필요 없어. 이 사람은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다루니까 평범한 귀족 부인들보다 훨씬 얘기가 통할 거야.” 이븐은 격려의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질과 도라 장군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가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느냐 등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가씨도 활을 다루시나요? 아차, 저보다 연상인데 아가씨라는 말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아, 괜찮습니다.” 이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샤미안은 당황하며 정신을 차렸다. “부인--애비 씨도 굉장히 씩씩하시니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지금 애비는 긴 소매옷 위에 가죽 갑옷을 두르고 허리에는 검, 등의 화살 통을 메고 한 손에 활을 들고 있다. 남자들과 다름없이 용맹한 모습이었다. 한편 샤미안은 여행용 승마복 차림이었다. 그래서 애비는 샤미안이 아버지를 따라 로아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실제로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조금 자랑스럽게 가슴ㅇ르 폈다. “귀부인들은 이런 행동을 조신하지 못하다고 하시겠지만 전 남편이 돌아오는 걸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기는 싫습니다. 질은--남편은 굉장히 강은 사람이지만 전쟁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고,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때에는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남편을 돕고 싶습니다. 이것만은 절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지요.” 그렇게 단언하는 애비의 얼굴에는 끝까지 남편과 운명ㅇ르 함께 하겠다는 강한 신념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함께 가는 겁니다. 이래봬도 활 솜씨에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질 근처로 다가오는 놈이 있으면 이걸로 완전히 해치워 버리겠어요.” 활을 들면서 생긋 웃었다. 너무나도 직접적인 말에 샤미안은 조금 아연해졌지만 동시에 가슴이 아파왔다. 이븐이 저쪽에서 얘기를 마치고 돌아온다. 두 사람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샤미안이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함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감입니다.” “예. 아무래도 이상한 놈들이 죽음의 바다 쪽에서 올 것 같아서 말입니다.” “죽음의 바다? 어디에 있는 바다죠?” “타우 동쪽 봉우리의 건너편인 셈이지요. 로아에서는 안 보입니다.” “그런 곳에도 바다가 있나요?” 타우 동부는 고향인 로아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바다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았다. 정체모를 바다에서 정체모를 적들이 공격해온다고 한다. 타우의 남자들은 이번 전쟁에서 그 적을 격퇴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븐은 담담하게 그런 예기를 들려주었지만 샤미안으로서는 이븐의 진심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애비도 이븐이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비에게 적의 종류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남편 곁에서 함께 싸울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질이 장군에게 인사를 마치고 재빨리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도라 장군도 삼곽에서 발로, 나시아스와 합류해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샤미안은 로아까지 이동하는 도중, 언제나처럼 아버지를 도와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저택에 도착해 애용하던 갑옷을 몸에 걸치고 검을 찬 뒤, 도저히 견딜 수 ㅇ벗게 되었다. 아버지를 찾아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습니다, 아버님.” “무슨 일이지?” “별도 행동을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장군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지만 곧바로 딸의 의도를 깨달았다.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때때로 너에게 검을 가르친 것이 실수가 아니었나 생각할 때가 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덩구 그렇구나.”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샤미안.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고 싸운다는 건 본래 남자의 역할이다. 여자인 네가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느 ㄴ없어.” 긴장하고 있던 샤미안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버님은 내란 때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남자의 역할이라고. 하지만 그건 불공평합니다. 남자에게는 자신이 정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 권리가 있는데 여자한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저 역시 제가 정한 사람이 어덯게 싸우는지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 혹시 가능하다면 미약하나마 그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검을 쥐고 싸울 줄 아는 여자로서. 도라 장군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타우를 노리는 놈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적이야. 게다가 타우의 남자들은 만사에 있어 거친 사람들이지.” “그런 점에서라면 이 로아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샤미안. 분명히 네 말대로 전쟁터에서 성별은 관계가 없어. 하지만 넌 단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식이다. 게다가 이번 전쟁에서 타우는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격전지가 될 거야. 네가 내게 손자도 안겨주지 못한 채로 세상을 뜨는 게 아닐지, 그게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단다.” 전쟁터에서 삶과 ㅈ구음은 언제나 교차하는 법이지만 자기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아무리 용감한 무장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마음은 가슴 아프도록 알고 있다.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나 강ㅎ산 적이 타우로 쳐들어온다면 더욱 양보할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면서 낮게 말했다. “아버지가 제 남편감으로 인정한 사람이 이 전쟁에서 생명을 잃는다면 같은 결과가 되겠지요.” 장군은 더욱 씁쓸하게 웃었지만 한번 뜻을 정하면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 딸의 성격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신임하는 부관 타르보의 아들과 로아의 정예 군사 백 명을 동행시키는 조건으로 타협이 끝났다. 샤미안이 로아를 떠나 타우를 향해 달려갈 무렵, 코랄에서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4장 스케니아의 함대는 총공격 직전에 사자를 보냈다. 귀국에게 직접적인 원한은 없지만 우방의 적은 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귀국을 공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자의 말에 따르자면 자신들의 전력은 델피니아의 몇 배에 이르므로 저항해봤자 소용없다고 했다.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름다운 도시 코랄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또한 국왕의 위엄과 현명한 판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빨리 항복할 것을 권한다며 열심히 말했다. 국왕은 사자를 그대로 내쫓고서 자신도 군함에 올라타 스케니아의 함대를 맞이했다. 세르기우스는 숙련된 해전 전문가이므로 국왕이 나설 자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기함에 왕의 깃발이 오르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투지는 몇 배나 높아졌다. 스케니아 함대는 사자의 말대로 숫자상으로는 델피니아의 군함을 압도적으로 상회했지만, 코랄은 그렇게 간단히 빼앗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했던 원군의 존재도 스케니아에 충격을 주었다. 카를로스도 전적으로 월을 신용한 것은 아니었다. 키르탄사스 내부에는 델피니아의 편을 드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레테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다. 지금은 눈앞의 적을 쫓아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븐 녀석의 속셈에 그대로 넘어가버린 게 분하기는 하지만 여기는 우리들의 바다, 우리 영역이야! 북쪽에서 기어들어온 외부 놈들이 멋대로 휘젓게 내버려둘 줄 알아!!” 카를로스의 포효는 섬의 남자들 전원의 의견이기도 했다. 스케니아 함대가 트레니아 만에 공격을 개시한 지 겨우 몇 시간 뒤, 키르탄사스의 쾌속정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옆쪽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크고 당당한 스케니아의 군함은 무수한 투석기를 탑재하고 있지만 그런 대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없다. 키르탄사스 측이 쏘아대는 불화살은 우스울 정도로 정확하게 명중했지만 적선도 쉽게 불타주지는 않았다. 선원들이 열심히 소와 작업을 펼쳐 불길이 퍼지기 전에 꺼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보답이라도 하듯이 바위가 빗발치듯이 날아왔다. 그러나 키르탄사스의 남자들은 교묘하게 배를 조종하며 델피니아와 힘을 합쳐 훌륭하게 싸웠다. 밤이 되어 전투가 중단되자 스케니아 함대는 만 바깥으로 물러났고, 키르탄사스의 선단은 만 내부로 들어와 닻을 내렸다. 그 뒤, 주요 인사들이 상륙해 국왕에게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렌초가 말했다. “레테 섬에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어줘서 다행이었습니다. 오늘 싸운 적들은 스케니아의 정규 해군으로 보입니다만, 놈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요.”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 정도로 다른가?” “다르고말고요. 섬을 공격한 게 오늘 싸운 녀석들이었으면, 저렇게 덩치만 크고 별 볼일 없는 놈들이었으면,,, 섬을 뺏기지도 않았을 텐데.” 세르기우스나 카를로스도 렌초의 말을 그리 진지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적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가만히 있어준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단 한 명., 국왕의 마음만은 편치 않았다. 레테 섬을 강탈한 남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현재 상태대로라면 함대전만으로도 대등한 승부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난 것은 동해안만이 아니다. 지금쯤 그 동족들이 차례로 죽음의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을 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국왕의 그런 걱정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타우는 엄청나게 고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초로 그들과 마주친 것은 타우 북쪽, 카지크의 두목 슬레이였다. 구름을 찔르 듯이 커다란 남자들을 태운 작은 배가 차례로 죽음의 바다에서 두비아 강을 타고 올라왔다. 작년 겨울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은 숫자였다. 돛을 펄럭이는 배로 강 전체를 가득 메우면서, 적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얼핏 보기에도 5,60척은 되어 보인다. 총 숫자 2천을 훨씬 넘는 대부대였다. 선단의 대표라는 남자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테바 강으로 나가는 길을 만들겠다. 협력해줘.” 덩치가 큰 남자였다. 나이는 40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젊은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과 날카롭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행동거지는 침착해 보였지만, 엄청난 위압감을 풍긴다. 슬레이는 상대에게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반문했다. “싫다면?”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눈이 말하고 있었다. 슬레이는 다시 물었다. “이런 인원이 테가 강으로 나가서 뭘 할 생각이지?” “델피니아라는 나라의 왕을 쓰러뜨린다.” “뭣 때문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면서 가만히 침묵했다. 슬레이는 그리 참을성이 많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질로부터 미리 얘기를 들었기에 일단 간격을 두고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리 기다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지나가고 싶으면 힘으로 지나가봐.” 기다리다 못해 말을 내뱉자 남자는 휙 등을 돌렸다. “기다려. 난 타우 북쪽 카지크 마을의 두목 슬레이. 당신은?” 남자는 고개만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이골.” “그것뿐이야? 소재라든가 부족 같은 건?” 대답은 없다. “하나만 더 물어보겠는데, 네가 이 드글드글 몰려온 놈들의 두목이야? 아니면 그저 심부름꾼?” “내가 대장이다. 이쪽에서는.” 즉 다른 방면에는 다른 사령관이 있다는 말이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 회담은 이골 일행이 위치하는 두비아 강과 카지크 마을의 중간 지점에서 행해졌지만, 슬레이가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도저히 인간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짐승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며 산 전체가 흔ㄷ르리는 듯했다. 뒤를 이어 배에서 내린 남자들이 일제히 돌격해왔다. 슬레이도 이런 전개는 예측하고 있었다. 적의 함성에는 조금 놀랐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카지크의 남자들을 이끌며 응전했다. 타우의 사격술은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상대는 도보로 접근하고 있으니 타우 사람들은 차례차례 적은 쓰러뜨렸다. 그럼에도 적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화살을 맞은 동료가 눈앞에서 쓰러져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적은 정면에서 해일처럼 몰려왔다. 카지크의 남자들도 필사적으로 응전했다. 화살만 쏘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도 돌격했지만, 이 공격은 이국의 남자들의 해일에 휩쓸려 그대로 꺾여버렸다. 슬레이는 이 광경에 말을 잃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놀라고만 있을 틈은 없었다. 전열을 다시 가다듬으려 했지만 너무나도 압도적인 적의 힘 앞에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당황하며 후퇴했다. 카지크에서도 이럴 때를 대비해 방어를 해두었다. 돌과 목재로 마을 전체를 둘러싸는 방어벽을 만ㄷ르고 감시 초소도 만들었다. 슬레이는 간신히 마을로 도망쳐 들어와 입구를 단단히 봉쇄하고 어떻게든 적의 공격에 버티려고 했지만 적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끝을 뾰족하게 깎은 통나무 벽도 신경 쓰지 않고,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도 굴하지 않고 차례차례 벽을 넘어들어온다. 이들 앞에서는 카지크 남자들의 필사적인 방어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적의 침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후퇴뿐이다. 방어벽에는 몇 군데 출입구를 만들어 두었고, 슬레이는 마을 전체가 포위되기 전에 여자와 아이들을 도망시키도록 지시한 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한 것을 확인하고 자신들도 마을을 버리고 도주했다. 겨우 반나절도 지나지 않는 사이에 카지크는 참패했고 마을을 그대로 적에게 빼앗겨버렸다. 카지크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인 츠이르로 피난했지만, 슬레이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싸움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타우의 산적이 채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마을조차 지키지 못한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를 깨닫고 누이와 돌체, 롬에서도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그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레이는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엄청난 놈들이야. 저건 절대로 정상이 아냐.” 슬레이 역시 레테 섬의 렌초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것을 본 것이다. 구름ㅇ르 찌를 듯한 거한들이 질풍처럼 대지를 달려왔다. 무기를 한 번 휘둘러 이쪽 사람 세 명을 날려버리면서 다시금 돌진한다. 카지크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밀정을 보내보자 그들은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며 배를 나를 길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상당한 인원이 본대에서 떨어져 산속에 들어가 대대적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정찰을 보냈을 때 타우에 사냥감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확인해두고 식량의 대부분을 여기에서 조달하기로 정해둔 듯 했다. 카지크의 치욕은 곧 타우의 치욕이다. 두목들은 곧바로 응전하기로 결정했다. 서쪽 돌체의 두목인 키니슨, 아산의 비스체스, 동쪽 아델포의 퍼잰. 이들은 거친 타우에서도 특히 용맹하며 전투에 있어서는 경이로운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끄는 남자들 역시 그랬다. 피 냄새나 생명을 건 싸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경향까지 있었다. 이때 질과 이브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자로 알려진 누이의 고드나 소베린의 마커스는 두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반격하자고 주장했지만 하루 늦어지면 그만큼 더욱 오명을 씻기 어려워진다. 비스체스도 퍼잰도 가능한 한 빨리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키니슨 역시 말없이 그들에게 동의했다. 슬레이도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세 마을과 힘을 합쳐 총 7천 명의 대부대를 결성해 카지크를 되찾기 위해 돌격했다. 하지만 이골이 이끄는 남자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카지크를 손에 넣기도 했지만 타우 굴지의 두목들이 불처럼 격렬하게 공격해도 바위처럼 꿈적하지 않았다. 방어벽 위에 떡 버티고 서서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면서, 벽을 넘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남자들을 마치 벌레라도 쳐내는 것처럼 손쉽게 떨쳐낸다.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태도였다. 거기에 산 속에 숨어 있던 복병이 피가 ㅇ러어붙을 듯한 함성을 질러대며 등 뒤에서 일제히 덮쳐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명백했다. 타우의 남자들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작은 배를 타고 온 남자들의 무용은 인간의 한계를 추워?했다. 그들은 사냥감을 찾아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굶주린 늑대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야수 그 자체였다. 아델포의 퍼잰은 이 공격에 가담한 두목들 중 제일 연장자이며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오래 끌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판단하고 우선 전열을 수습하며 후퇴했다. 다행히 적은 이쪽을 추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츠이르까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자는 다수 나왔고 사망자도 적지 않았다. 질과 이븐이 타우에 돌아와 보자 카지크는 이미 함락되고 츠이르에는 주요 두목들이 모여 연이은 패배에 이를 갈고 있었다. 문제의 적을 정면으로 공격했다는 말에 이븐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질 역시 마찬가지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금님하고 같이 싸우는 동안에 정식 군대가 싸우는 방식에 물들어버린 거야? 타우의 자유민이 정면 승부라니, 안 어울리는 짓을 했군.” 슬레이가 맹렬하게 반발했다. “마을을 뺏기고 가만히 물러나 있으라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있어도 되찾아야지. 하지만 방식이 좀 곤란했어. 우선 얘기를 들으라고. 방침을 정하자.” 츠이르의 집회장에 주요 두목이 모여들자 질은 소수로 공격하는 유격전을 제안했다. 적은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배를 끌면서 테바 강을 목표로 이동한다. 진군 속도는 단연코 느릴 수밖에 없다. “좌우에서 협공하는 거야. 지형은 우리 쪽이 유리해. 완전히 접근할 때까지 기척을 죽이고 접근해서 있는 대로 화살을 퍼부은 뒤 퇴각한다. 이렇게 반복하는 거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접근전은 절대로 피하고. 놈들이 강한 건 전술이나 조직 된 군대의 힘이 아니라 개개인의 전투력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이야. 정면으로 붙으면 이쪽이 당하게 되어 있어.” “그런 것 같더군.” 퍼잰은 분해하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전투 집단 아델포를 이끄는 두목으로서 느낀 점이 있었던 것이리라. “일국의 정규군이건 뭐건 쳐부술 자신이 있었어. 지금도 그래.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강한 적은 만나본 적이 없어.” 모두 이의는 없었다. 비스체스가 신음하며 질을 쳐다보고, 다시 이븐을 봤다. “스케니아의 선주민족,,,. 이름을 모르니까 귀찮군. 그놈들은 전부 다 저런 괴물이야?” “내가 아는 한은. 하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니야.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방식이 있지. 놈들에게 강한 육체와 완력이 있다면 우리들에게는 책략을 쓸 줄 아는 지혜가 있어. 신출귀몰한 발도 있지. 타우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다른 어떤 군대도 흉내낼 수 없는 결속력이 있어.” “그럼.” “그렇고 말고.” 두목들은 힘차게 외쳤다. 정규군의 대부분은, 장교는 별도로 치더라도 징병되어 싸운다. 지휘관에 대한 충성도 희생심도 그리 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타우의 사람들은 달랐다. 두목의 명령 하나에 바로 임기응변으로 싸운다.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걸 줄 알았다. “놈들은 분명히 강해. 아마도 이 중앙에서 그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우리 타우의 자유민뿐이겠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케니아의 수뇌진이 혹시라도 그 사실을 알고 놈들을 이리로 보냈다면 이쪽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절대로 쉬운 싸움은 아니겠지만, 타우는 우리들의 집인 동시에 우리들의 나라다. 이겨야 해. 반드시.” 다시 두목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산적으로 냉대 받았던 만큼 고향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강했다. 그런 마음은 어떠한 전투에서도 크게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 이븐도 레테 섬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설명하고 질의 작전에 조언을 했다. “유격전만이 아니라 덫이나 함정도 놓는 건 어때? 이쪽은 산적이야. 평범한 군대도 아니니 정정당당한 방법만 사용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그날 밤부터 그들은 재빨리 이 작읍을 시작했다. 테바로 향하는 길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 함정을 파고, 곰이나 사냥감을 잡을 때 쓰는 석궁을 설치했다. 이 작전은 상당히 유효했다. 이골 일행은 무거운 배를 끌고 있는데다 언제 발 아래가 무너질지, 언제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길을 만드는 작업과 동시에 함정을 제거하기 시작했지만, 물론 타우 측도 구경만 하지 않고 기회를 노려 기습을 감행했다. 이골이 이끄는 남자들은 함정을 제거하러 나온 한 명 한 명조차 무섭도록 강한 전사였다. 타우 측의 공격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타우는 처음과 달리 절대로 접근전을 벌이려 들지 않았다. 광대한 타우 산맥도 이들에게는 자기 집 앞마당이나 다름없다. 질풍처럼 나타나서 무섭게 화살을 쏟아 부은 뒤 적이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식으로, 큰 타격은 입히지 못했지만 효과적인 공격을 되풀이했다. 이골 일행은 카지크를 거점으로, 타우는 각지의 망르을 거점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싸웠다. 샤미안이 이 유격전에 참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로아의 정예를 이끄는 샤미안은 먼저 베노아를 방문했다가 이븐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한마디로 타우 서쪽이라고는 해도 광대한 지역이다. 도중에 몇 번이고 길 안내를 부탁하면서 각지를 돌아다니다 간신히 아산 마을에서 이븐과 재회할 수 있었다. 샤미안을 본 이븐은 할말을 잃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했다. 로아의 여기사는 그런 독립기병대장을 향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인사했다. “함께 싸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사실이기도 했다. 샤미안ㅇ느 단순한 호신술로 무예를 익힌 것이 아니다. 몇 번이나 전쟁에 참가했고 아버지의 진영에 ‘장식’으로만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말에 올라 검을 휘두르며 억센 남자들을 상대로 싸워왔다. 어설픈 잡병보다도 훨씬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남자의 푸른 눈이 한동안 상대의 얼굴ㅇ르 응시하더니 마침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돌아가라고 해봤자 안 듣겠지요.” “예. 절대로.” “알겠습니다. 당신의 활 솜씨는 저도 잘 알고 있지요. 기꺼이 도움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해두지요. 아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검을 뽑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이번에는 여기사의 개암빛 눈이 놀란 듯이 남자를 바라봤다. 단 한 번도 검을 겨루지 않는 전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는 적에게 이길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샤미안도 수많은 전투를 겪어본 기사로서 신중하게 반문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도 되지 않ㅇ르 정도로, 그렇게나 강한 적입니까?” “예. 유감이지만.” 무정한 말이짐나 어차피 숨겨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어설프게 돌격이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개죽음을 당하게 될 뿐이니까.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제가 도라 장군 손에 죽게 될 테니까요.” 농담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이븐은 진지했다. 지금 그들은 적의 힘을 조금씩 깎아내는 작전으로 나가고 있다. 이런 전법은 정면 대결과는 달리 생명을 걸 필요가 없으며 가능한 한 부상 없이 돌아오는 것이 우선이었다. 샤미안ㅇ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겟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전투라고도 부르기 힘든 싸움이 이어지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타우 측의 집요한 공격에 이골이 이끄는 남자들도 주의 깊에 진군을 늦추게 되었지만, 타우 역시 적을 완전하게 격파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적은 둘러 나뉘어 타우 서쪽으로 쳐들어왔다. 그 보고는 누이의 청년 중 하나가 알려왔다. 누이에서 산을 내려가 북서쪽으로 이동하면 죽음의 바다가 나온다. 이 근처는 파라스트의 영토이지만, 그 해안에 덩치 큰 남자들이 작은 배로 상륙해 배를 끌고 남쪽으로--즉 타우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해안에서 누이까지는 평지가 이어져 있지만 거리는 최소한 100카티브가 넘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고행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미 대부분을 나아가 곧 산ㅇ르 넘게 될 것 같다는 보고였다. 배는 50척, 2천 명ㅇ르 넘는 숫자였다. 우려해야 할 사태였다. 카지크에 기어들어온 적만 해도 이렇게 고생인데, 여기에 그 만큼의 원군이 가세하면 더욱 일이 어려워진다. 그런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롬의 베네사가 적에게 붙잡힌 것이다. 그녀는 마을 ㄴ마자 스무 명 정도를 데리고 함정을 설치하러 나갔다가 산 속에서 정과 마주쳐 어쩔 수 없이 응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접근전에서 적이 우세하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일행 대부분이 쓰러지고 간신히 두 명 정도만 살아서 도망쳐왔다. 롬은 발칵 뒤집혔다. “두목은 어떻게 됐어?! 당했나?!” 살아남은 남자들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만 두목은 산 채로 끌려갔을 거야.” 두 사람은 적들이 ‘여자야?!“하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여자라는 걸 보고 포로로 잡았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베네사를 ’두목‘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끌고 갔는지도 모른다. 지금 츠이르는 총사령부가 되어 질도 그곳에서 전체를 지휘하고 있다. 롬의 사람들은 서둘러 츠이르로 전령을 보냈다. 어머니의 소식을 들은 애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것도 당연했다. 애비는 남편을 돌아보며 외쳤다. “질!!” “더 말할 것도 없어. 베니는 타우의 두목 중 한 명이고 나한테는 장모님이야. 반드시 구해낸다.” 질은 포로 교환을 제안하기로 했다. 마침 타우 쪽에서도 포로를 데리고 있었다. 함정에 걸려든 젊은 남자였는데, 어쩐 이유인지 혼자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이골 측도 경계가 심해져 산 속을 돌아다닐 때에도 상당한 인원이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얘기였다. 20세 가량으로 보이는 청년은 아산으로 연행되었고 비스체스가 직접 심문을 맡았지만, 이름조차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포로로 잡은 적들은 완고해서 하나같이 다루기가 힘들었다. 전투시의 난폭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입을 다물고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름조차 밝히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또 하나, 지금까지 잡았던 포로와 다른 점은 분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 상당히 훌륭한 몸차림. 흑표범 모피가 장식된 옷에, 방패나 검에도 은으로 무늬가 상감되어 있다. 나이는 젊지만 도저히 일반 병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비스체스도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저쪽에서는 무슨 일ㅇ르 하고 있었는지, 혼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등등. 하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비스체스는 재빨리 포기하고 포로를 수용하는 오두막에 가둬두도록 지시했다. 심문에 대답은 하지 않아도, 그들은 일단 사로잡히면 예외 없이 얌전해졌다. 날뛰거나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밧줄로 묶어놓기까지 했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이때에도 비스체스는 별다른 경계심을 품지 않고 가까이 있던 부하에게 포로를 끌고 가도록 지시했다. 오두막은 마을 가장자리에 있었다. 남자는 아무렇게나 밧줄을 끌며 포로를 데리고 갔지만 채 반도 가기 전에 등 뒤에서 공격을 받고 지면에 쓰러져버렸다. 백주 대낮에 마을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습을 본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 얌전히 시키는 대로 걷고 있던 포로가 앞에서 걸어 가던 남자를 걷어찬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밧줄로 꽉 묶어두었던 포로의 두 손은 완전히 자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구속에서 벗어난 포로는 들짐승처럼 민첩하게 바로 근처에 있던 마을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습격을 받은 남자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쥘 여유조차 없었다. 물론 포로가 가장 원하던 것은 바로 그 검이었다. 걷어차여 지면서 쓰러졌던 남자가 코피를 흘리며 간신히 일어나 뒤를 돌아봤을 때, 뒤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던 포로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금 이빨을 되찾고 먹잇감에 달려들고 싶어서 날뛰는 미친 야수가 있을 뿐이었다. 귀를 찢는 여자들의 비명이 온 마을에 울렸다. 미인족 청년은 그런 여자들 쪽에는 눈도 주지 않고 남자들만 쓰러뜨리면서 가장 인적이 드문 쪽을 향해 돌진했다. 마침 유격에서 돌아온 이븐과 샤미안이 그 자리에서 그 포로와 마주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아의 여기사는 재빨리 자세를 잡고 숙련된 몸짓으로 화살을 붙잡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븐이 그런 샤미안을 어깨로 밀며 제지했다. “떨어져서 보고 있으시죠.”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공격해온 적의 일격을 검으로 받아냈다. 탈주자의 손에서 검이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이븐의 검이 청년의 가슴ㅇ르 겨눴다. 청년은 이 사태를 믿을 수 없었는지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곧 심한 굴욕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간신히 적의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나 했더니 곧바로 다시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축 늘어진 오른쪽 손이 수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븐은 조금 웃으면서 타이르는 듯이 말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둬. 넌 맨손이고 나한테는 검이 있어. 승산이 없다고. 이런 곳에서 죽으면 스오미도 데리러 와주지 않겠지?” 청년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크게 눈을 치뜨고 이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마을 남자들이 ㄷ라려왔다. “제, 제길! 이 자식!” 앞뒤 가릴 것 없이 포로를 베어버리려고 한다. 마을 안에서 검을 빼앗아 날뛰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애초에 붙잡혔다가 도망치려고 하는 포로는 그대로 베어버리는 것이 전쟁의 규율이다. 하지만 이븐은 펄펄 뛰는 아산의 남자들을 제지했다. “도망치려고 한 포로를 죽이는 건 당연해. 하지만 그 전에, 이 녀석은 어떻게 포승을 풀어낸 거지?” “그런 것--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아니, 상관있어. 포로의 무장을 해제하는 건 붙잡은 쪽의 의무라고. 그걸 게을리했다면 도망치지 말라고 해봤자 얌전히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 이븐은 청년을 붙잡도록 시키고서 포로의 몸을 샅샅이 뒤졌다. 곧바로 허리띠 뒷부분에 숨겨져 있던 새끼손가락 정도 크기의 면도칼이 발견되었다. 이븐은 면도칼을 꺼내들고서 마을 남자들에게 가벼운 비난의 시선을 던졌다. “이건 당신들 실수야. 이런 걸 남겨둘 정도면 붙잡은 쪽의 각오가 부족한 거야.” “읏,,,.” “아니, 그건, 그,,,.” 남자들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이쪽에도 실수가 있었으니 이번만은 살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븐의 주장이 통한 덕분에 청년은 다시, 이번에야말로 철저하게 묶여서 오두막으로 끌려갔다. 그러는 중 이븐은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을 모르니 불편하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난 이븐. 스샤의 숲에 사는 게오르그의 아들 이븐. 넌?” 청년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에란.” “헤에, 멋진 이름인걸. 아니, 너라면 룬그라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겠어.” 아산의 남자들은 이븐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포로는 알아들은 듯했다.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다가 진심으로 기쁜 듯이 씨익 웃었다. 에란은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ㅇ르 밝히지 않았지만 소지품을 봐서는 적진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 포로가 있었기에, 베네사가 사로잡혔다는 전갈을 들은 질ㅇ느 서둘러 이골 쪽에 사자를 보내 베네사와 이 청년을 교환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교섭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베네사는 포로가 된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츠이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에란도 지금의 적의 기지가 된 카지크로 돌아갔다. 이 청년은 풀려날 때까지 계속 이븐의 얼굴을 바라보며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우 사람들 입장에서는 손에서 떠나간 포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의 진영을 직접 보고 돌아온 여두목 쪽이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날 밤, 츠이르에는 두목들 대부분이 집합해 베네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베네사는 사로잡혓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상당한 양의 화살을 퍼부어줬지. 분명히 몇 대가 명중하는 걸 직접 봤어. 그런데 그 자식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살 대신 바위로 만들어진 건지, 그 중에 한 놈은 화살을 맞은 쪽 팔로 나한테 몸통박치기를 하더라고. 쪽팔리는 얘기지만 그 공격에 뻗어버렸지. 정신ㅇ르 차렸을 때에는 이미 카지크였어. 아마도,,, 누구네 집이었을 거야.” 아는 사람의 이름을 꺼낸다. 남자들만 있는 적 진영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베네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은 이런 상황에 처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될 일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로 계속 마을을 지휘해온 여걸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야 마흔도 넘은 아줌마니 이제 와서 정조가 어쩌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식은땀이 나던데. 근처에 있는 것이라고는 죄다 그런 괴물들뿐이었으니까. 한 번에 몇십 명 상대만은 사양하고 싶아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놀랐어. 그 놈들,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특별히 허락을 받아 이 자리에 있던 애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베네사는 딸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어깨를 쓰다듬어주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 무기를 뺏기고 집 밖에는 감시가 붙어 있었지만, 집 안에서는 자유롭게 있어도 된다고 하더군. 할 일도 없고 해서 청소나 하고 있었어. 빨래도. 주부 입장에서 남이 자기 집을 멋대로 건드리는 건 기분 나쁘겠지만,,,. 생각해보면 남편이 죽은 이래로 그런 일 해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괜한 짓을 한 건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던 남자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베니, 저기 말이야,,,. 우리들은 이래봬도 엄ㅊ어 진지하게 걱정했다고?!” 비스체스가 걱정해서 손해라도 봤다는 듯한 말투로 한탄했다. 질 역시 동감이었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래서,,, 녀석들하고 뭔가 얘기를 했어?” “조금. 그 녀석들, 여자인 내가 젊은 애들을 지휘하는 걸 보고 놀랐나봐. ‘네가 두목이냐’라든가 ‘다른 두목도 있느냐’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던데. 이제 와서 뭐 하러 그런 걸 묻나 싶기는 했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과 싸우는 지휘관의 이름도, 그 소속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얄밉지 않아? 어차피 쓰러뜨릴 테니까 굳이 알 필요도 없다는 거야. 그럼 어째서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느냐고 했더니 여자를 죽일 수는 없으니 다른 두목도 여자면 곤란하다고, 진지하게 그러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저 녀석들, 좋아서 하고 있는 싸움이 아닌 것 같던데.” “뭐?“ 쓴웃음 반 기막힘 반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바뀌었다. 특히 질은 심상치 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베네사는 곤란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디가 어쨌다는 건 아니야. 그저 내 감이지. 하지만 뭐랄까, 이번 싸움은 저쪽에서 걸어온 셈이잖아? 그럼 싸움을 거는 족에도 기세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적어도 나라면 그럴 거야. 이 개 같은 새끼들아, 거기서 움직이지 마. 내 손으로 조각내주지! 라든가 저게 보물섬이다, 털어! 방해하는 놈들은 다 죽여버려! 보통은 그런 식으로 싸우려는 기색이라는 게 있잖아.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어. 어쩔 수 없이,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 제일 처음 적과 싸워봤던 슬레이는 엄청나게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싫어서 싸우는 놈들이라고?” 돌체의 키니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눈에는 엄청난 투지로 보였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일단 싸우러 온 이상 단단히 마음먹고 철저하게 싸우려는 게 아닐까?” 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 녀석들이라면 분명히 그럴 거야.” 비스체스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발언했다. “하지만 말야, 높으신 놈들한테 고용된 병사들이라면 모두 어차피 그렇잖아.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건 아니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거 아니었어?” “문제는 바로 그거야. 타우를 덮치고 왕을 쓰러뜨리는 건 저쪽의 뜻이 아니야. 더 위쪽 녀석들의 생까이지. 그런데 녀석들은 왜 그런 명령을 따르는 걸까?” “그야 이득을 제시했거나 뭐 그런 거겠지. 네 옛 친구도 원래는 용병이었다면서?” 질을 깊이 생각에 잠겼다. 옛날, 적의 동포 중 한 명을 친구로 두었다. 물론 그 친구 한 살마을 기준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족성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젊었을 때의 질도 그랬지만, 자신의 솜씨를 파는 데에 주저는 없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도 했고, 그에 상응하는 보수만큼 싸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동료를 이끌고 다른 민족을 정복하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이다. 싸움을 걸 정도라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베네사가 말했던 것처럼 원한이든 칼싸움이든 자기들 발밑에 잠들어 있는 금맥이 목적이든, 거액의 보수를 약속받았든 어쨌든 뭔가 동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대에게서는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 그런 인상까지 풍겼다. 베네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라고 해도, 저 녀석들은 절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아마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지.” 두목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제일 싸우기 어려운 종류의 적이다. 아무리 공격해도, 아무리 피해를 입혀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 상대와 싸워봤자 이쪽이 손해였다. 사람 수라면 이쪽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인원을 총동원해서 결전을 벌이면 일단 승산은 있다. 하지만 간신히 이겼다고 해도 이쪽에는 큰 희생이 나온다. 최악의 경우 인구의 반 이상이 죽게 될지도 몰랐다. “휴전을 맺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쪽이 힘든 만큼 저쪽도 힘들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상대가 강인한 전사라 해도 분명히 한계라는 것이 있을 터. 이런 싸움이 길어지면 장교들은 몰라도 사병들은 점점 지치게 된다. 자신들을 위해서 하는 전쟁도 아니니 점점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휴전을 위해 사자를 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고 자세한 사항ㅇ르 상의하고 있을 때, 이골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에란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와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용건이었다. 게다가 이골 자신이 직접 만나고 싶으니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이쪽으로서도 반가운 얘기였다.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카지크와 츠이르는 산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트와르 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산의, 양쪽 마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고개에서 만나기로 정하고 이븐은 적의 사령관과 휴전조약을 맺는 대사로서 전권을 위임받았다. 베노아의 남자 열 명이 함께 따라갔다. 물론 그 중에는 샤미안도 끼어 있었다. 수호역으로 따라온 타르보의 아들은 맹렬하게 반대했다. 이븐도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샤미안은 잠시라도 이븐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적의 지휘관과 만나러 간다면 더욱 그랬다. 베네사 건도 있었고, 적이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 이들이라면 자기야말로 적임자라고 주장하며 동행했다. 이동하는 도중 샤미안은 계속 신경 쓰이던 점ㅇ르 이븐에게 물어보았다. “스오미라는 건 사람 이름인가요?” “아니, 사신의 이름입니다.” 나란히 말을 타고 걸으면서 이븐이 대답했다. “평범한 사신이 아니라 이쪽의 하미아 비슷한 겁니다. 전쟁을 장려하는 신의 딸로, 우수한 전사가 전투 중에 죽으면 스오미가 데리러 와준다고 하더군요. 용사만이 갈 수 있는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서.” 스오미는 죽음의 처녀, 아름다운 처녀. 어름처럼 차갑고 불꽃처럼 뜨거운 여전사. 용기를 사랑하고 투지를 아끼며 특별히 선택된 진실한 용자만을 천상의 세계로 안도한다. “아버지가 자주 그러더군요. 검을 쥔 남자라면 누구나 근가 데리러 와주기를 꿈꾼다고.” “그래서 그 청년을 말린 건가요?” “예. 이런 곳에서 자살이라도 했다가는 그 영혼은 ‘진흙의 나라’행입니다. 청상계는 꿈도 못 꾸죠.” “그럼 에란이라는 건?” “순록이라는 뜻이죠. 참고로 룬그는 늑대. 그 사람들은 강한 것, 용맹한 것을 숭상합니다. 절대로 순록이 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녀석은 꼭 젊은 늑대 같은 인상이라서요.” 샤미안은 이상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방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이 사람이 저 북방의 민족과 똑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다. 샤미안의 시선을 깨달은 이븐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집은 북쪽과 남쪽의 전설이니 신 같은 게 잡탕으로 섞여 있어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기준이 없었죠. 토지가 다르면 풍습도 다른 법이라고, 언제나 지겹게 생각하면서 자랐습니다.” 고개에 도착해 한동안 기다지라 이골 일행이 나타났다. 미리 정해둔 대로 저쪽도 열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에란의 모습도 보였다. 고개 위에는 광장처럼 탁 트인 공간이 있었다. 이븐은 다른 동료들을 남겨두고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저쪽에서도 특히 당당한 체구의 남자 한 명이 걸어왔다. 눈에 띄게 존재감이 있는 남자였다. 동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는 듯하다. 뒤쪽에 물러서 있는 남자들의 긴장된 태도로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광장 중앙에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이븐도 마을 남자들 중에서는 상당히 키가 큰 편이지만 남자는 키도 어깨 폭도 이븐보다 훨씬 컸다. 연푸른색 눈이 눈앞에 서있는 청년을 찌르는 듯이 날카롭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골이다. 네가 이븐?” “그래.” “먼저 인사를 하지. 에란은 친구가 내게 맡긴 아들이다. 반은 너희들의 실수였다고 해도, 죽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구해줘서 고맙다.” “이쪽도 고맙다고 해야겠지. 베네사--당신들한테 붙잡혔던 여두목 말이지만, 당신들의 대접은 충분히 신사적이었어. 감사하고 있어.” 쓸데없는 인사말은 완전히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이븐에게 이골도 호감을 느낀 듯 했다.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다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너, 스오미의 이름을 꺼냈다더군.” “그래. 아버지한테 들은 거지만.” “그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이븐의 표정이 살짝 이상해졌다. 일렬로 이골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 중에서 가장 젊은 청년의 얼굴을 흘깃 바라본다. “아버지 일므이라면 에란한테 말했어. 이미 죽었지만 스샤의 숲에 사는 게오르그가 내 아버지다.” 그러자 이골은 차갑게 딱 잘라 내뱉었다. “헛소리 하지 마.” 이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뭐?” “게오르그한테 너 같은 아들이 있을 리가 ㅇ벗어. 넌 어떻게 봐도 이쪽 인간이다. 눈도, 머리도, 피부색도, 게오르그의 아들이 물려받아야 할 것은 어느 것 하나 물려받지 않았어.” 이골이 단정하는 말투로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이븐은 허리에 찬 검을 빼들었다. 양쪽 등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동요했다. “움직이지 마!!” 이븐은 고함을 질러 동료들을 제지하고 이골의 등 뒤에서 ㅁ가 뛰어오려던 남자들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네 놈들 중에서 부모 이름을 두고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화가 안 날 만큼 긍지 없는 자식이 있으면 이리 나와봐!!” 남자들의 발이 멈췄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다. 가장 젊은 에란이 몸짓으로 동료를 제지하며 이골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골이 판단할 터였다. 이골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엄청나게 길고 큰 검이었다. “상대하지.” 짧게 말하고 이골이 갑자기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두 쪽이 날 만한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이븐은 이 무서운 공격을 받아내면서 손잡이를 비틀어 솜씨 좋게 흘려냈다. 이골의 검은 허공을 가른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이븐은 재빨리 발을 내디디며 비스듬히 아래쪽에서 적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골의 검이 공격을 막았다. 이븐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고, 검을 고쳐 쥔다. 이골이 덤벼들었다. 샤미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븐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븐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내란에서 함께 싸우기도 했고, 목검이지만 상대를 해줬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 적과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기에게는 절대로 검을 뽑지 말라고 했던 남자가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무서운 적과 싸우고 있다. 베노아의 남자들 역시 숨을 삼켰다. 부두목의 실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적진의 총사령관이다. 게다가 장신인 이븐도 이 적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체격 차이가 컸다.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지만 실제로는 기껏해야 2,3분에 불과했을 것이다. 거리를 떨어뜨린 이골이 무슨 생각인지 손을 들어 이븐을 제지했다. 덤으로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알았다. 이제 충분해.” “뭐가?!” 이븐은 아직 분노하고 있었지만 이골은 밝게 웃으며 아직도 검을 들고 있는 이븐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왔다.“ “미안하다, 이국의 아들이여. 검을 뽑게 만들려고 일부러 널 모욕했다. 사과하겠다.” 이븐은 아직 경계를 풀지 않았다. 탐색하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이골은 다시 한 번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넌 겉모습은 전혀 게오르그를 닮지 않았어. 하지만 낯익은 검술이군.” “아버지를 알고 있어,,,?” “스샤의 숲에 정착한 뒤의 게오르그는 몰라. 하지만 어렸을 때 함께 놀던 페르스칸프의 게오르그라면 잊을 수가 없지.” “헛소리라고 했던 말, 취소하겠어?” “당연하지. 취소한다. 미안했어.” 다시금 사과하며 이골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등 뒤의 남자들이 일제히 굳어지는 것을 봐서는 그것이 이골에게 있어서 최대의 사죄인 듯했다. 이븐은 길게 한숨을 쉬고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확인 한 번 더럽게 위험하게 하네. 그야 나한테 검술을 가르쳐 준 건 아버지였지만, 당신 공격을 내가 받아내지 못했으면 어쩔 생각이었어? 죽어버린다고.” “네가 정말 게오그르의 자식이라면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없어.” 확신에 찬 이골의 말에 이븐은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도 틀림없이 그 인간 동족이 맞는 것 같군.” 한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이걸로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이골을 따라온 남자들이 재빨리 움직이며 지면에 모피를 깔아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 한가운데에 이븐과 이골이 마주 보고 책상다리로 앉았다. 일행들은 조금 뒤에 물러서 있었고, 샤미안만이 무릎을 다소곳이 모으며 앉았다.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이븐이었다. “아버지는 자기 고향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러니 페르스칸프라고 해도 난 전혀 몰라.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스샤를 사랑했고 그 숲에서 살아가다 거기에서 죽었어. 어째서 고향을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만족하며 살아갔을 거야.” 이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븐이 말을 이었다. “고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당신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야. 지금은 이 타우가 내 고향이다. 그런 곳에 지금 당신들이 이유도 없이 쳐들어왔지. 이건 민폐 이전의 문제야. 당장 물러가주면 좋겠어.” 샤미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베노아의 남자들 역시 말을 잃었다. 아무리 약식이라고는 해도 휴전을 맺으려는 자리에서 이렇게 대놓고 말을 꺼내서는 잘 풀릴 일도 꼬이게 된다. 상대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떠나버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에는 즐거운 기색마저 떠올랐다. “난 먼저 인사를 하고 여기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너희들과 싸울 생각이 없다고도 말했지. 그래도 덤벼든 건 그쪽이야.” “물러설 생각은 없다는 말인가?” “그래.” “절대로 안 돼?” “절대로 안 돼.” 이븐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짧게 물었다. “어째서?” “,,,,,,.”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당신은 델피니아의 국왕을 쓰러뜨리는 게 목적이라고 했지만, 그게 당신 자신의 의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거라면 얘기해줘.” 이골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갑자기 다른 말을 꺼냈다. “너희들은 강하다.” “당신들도.” “여기에 올 때까지는 권력자에게 아첨하며 꼬리를 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겁쟁이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어. 너희들의 강함과 용기에 솔직하게 경의를 보낸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돼. 난 여기를 지나가고 싶은 것뿐이야. 너희들 마을에도, 동료들에게도 손을 대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굳이 자기 피를 흘려가면서 안전한 성 안에서 뒹굴거리는 왕을 지켜주고 있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븐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골. 5년 전까지라면 그걸로 충분했을지도 몰라. 타우는 당신의 뜻에 동의하며 길을 내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나만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을 거야. 델피니아의 왕은 내 친구니까.” “왕이 친구라고?” “잘 들어. 그 녀석을 당신이 알고 있는 ‘번쩍거리는 금덩이로 장식하고 잘난 척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천박한 돼지새끼‘하고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해. 게다가 난 왕을 친구로 둔 게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스샤의 숲에서 뛰어다니며 놀던 친구가 왕이 되어버렸다고. 하필이면 어쩌다 그따위 역할을 뒤집어쓰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친구는 친구야. 틀려?” 키르탄사스의 남자들에게 단언했던 것과 똑같은 소리를, 이븐은 다시금 강조했다. “델페니아의 왕비도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지만, 그 녀석은 좀 ‘이상한 임금님’이야. 사실 그런 소리를 하는 왕비 쪽도 상당히 ‘이상한’ 인간이지만. 둘 다 우리들하고 태연하게 사귀지. 혹시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옛 친구라고 밝히며 성으로 찾아가면 그 왕은 자기 발로 맞으러 나와서 당신 손을 쥐고 인사하면서 당신하고 마주 보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거야.” 어지간히 우습게 들렸는지, 혹은 믿을 수 없었는지 이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라그란에 그런 왕은 없어.” “내가 아는 한 다른 어떤 나라에도 그런 건 ㅇ벗어. 그러니까 그 녀석은 지금도 내 친구인 거지.” 무언가 무언의 뜻이 담긴 어딘가 싸늘한 어조에, 이골은 씨익 웃ㅇ섯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던 것이다. 그 왕을 평가하는 권한은 이븐에게 있다. 혹시 그 남자가 왕좌와 권력에 빠져 이골이 생각하는 종류의 전형적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면, 이븐은 절대로 ‘임금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한 명 잃게 될 뿐이다. 그렇게 선을 그어 버리고 두 번 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또 하나, 왕이 코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째서 우리를 도우러 달려오지 않느냐는 의미라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당신네 동료가 코랄 앞에서 날뛰고 있다고. 스케니아의 편을 들면서 말이지.” 이븐의 어조는 신랄했다. 비난하는 듯한 어조마저 있었다. “난 스케니아의 높은 녀석들이 어떤 인종인지는 몰라. 당신들하고 어던 관계인지도. 하지만 당신 태도를 봐서 당신들이 그 녀석들한테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알 수 있어.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 차례야. 어째서 그런 놈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싸우려는 거지?” 이골은 곧바로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마치 바위로 조각된 거인 같았다. 이골을 따라온 남자들이 두 사람 앞에 손잡이가 달린 그릇을 놓고 마개가 달린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는 술을 넘실넘실 따랐다. 이븐은 말없이 그릇을 들어 내용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도, 술은 절대로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했었지.” 이골도 웃으며 이븐과 악수했다. “이 이국의 땅에서, 스오미의 이름을 부르며 팜주에 기뻐하는 아들과 만났다. 이것도 신들의 인도일지도 몰라. 우리들과 별도로, 더 서쪽 해안으로 올라와서 이 산으로 이동하고 있는 부대가 있다.” “알고 있어.” “네 질문에는, 그들이 도착한 뒤에 대답하도록 하지.” 이븐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그릇에 담긴 술을 남김없이 비운 뒤 일어섰고 회담은 일단 끝났다. 5장 코랄의 전황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첫 전투에서는 레테 섬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던 남자들이 두 번째 전투부터는 스케니아 함대와 함께 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첫 전투에서 바라던 만큼 전과를 올리지 못한 스케니아 함대가 조력을 요청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덕에 국왕도 왕비도 코랄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전투를 삼가던 왕비도 이쯤에는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다. 국왕이 함께 군함에 올라 처음으로 해전을 체험했지만, 배를 움직이려면 사람이 필요한데다 조종이 복잡하다는 점, 무엇보다도 바람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점, 요약하자면 전투함 주제에 엄청나게 불편하고 복잡한 물건이라는 사실에 기가 막힌 듯했다. 투석기만은 확실히 굉장했다. 이것은 석궁을 몇 배로 강화한 물건으로, 탄성을 이용해 거대한 돌을 적함이나 바다에 접해있는 성채를 향해 날리는 데 이용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한 발을 쏘는 데에 아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 조준도 그리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노리는 상대가 크면 클수록 명중할 확률도 높아진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면 더 좋은 셈이네?” “맞는 말이지만 함선의 발을 묶을 수는 없어. 주함에는 노를 젓는 수부가 딸려 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범선이야.” 왕비는 해상을 느릿느릿 기어다니는--왕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함대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배의 구조에 대해 여러모로 함장에게 물어보았다. 함대전이라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서로 몸을 드러내고 싸우는 셈이다. 물론 배인 이상은 파도와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지만 속도 자체에 큰 차이는 없었다. 아니, 구조상 눈의 띄는 성능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배의 크기도 속도도 비슷하고 쇠뇌의 위력도 사정거리도 비슷하다면 남은 것은 물량전이다. 그렇게 되면 숫자가 딸리는 델피니아가 불리한 것은 명백했다. 이쪽의 배 한 척에 대해 저쪽은 두세 척이 집중해서 덤벼들었으니 델피니아 함대는 고전하고 있었다. 이쪽의 강점은 이 지역의 바다에 익숙하다는 점과 육지의 응원이었다. 바다에 면해 있는 방어성채에는 함대에 탑재된 것 이상의 투석기가 설치되어 있다. 델피니아의 함대는 성채의 원호 덕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상으로 키라탄사스의 원군은 힘이 되었다. 함대끼리의 전법이 강력한 병기로 상대를 파괴시키는 것이라면, 키라탄사스의 전법은 그 병기를 조작하는 인간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발이 빠른 배를 조종해 공격을 피하면서, 해상에서 갑판을 공격한다. 해적 출신인 이들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키르탄사스의 천적이 바로 레테 섬을 점거한 일당이었다. 키르탄사스의 배도 상당히 뛰어난 기동력을 자랑하지만 그들의 배는 더욱 빨랐다. 바람이 있을 때에는 미끄러지듯이 바다 위를 달리고, 바람이 없어도 힘센 남자들이 젓는 노는 눈부신 속도로 배를 움직인다. 상당히 가볍고 다루기 쉽게 만들어진 듯했다. 그들은 언제나 키르탄사스의 배만을 노렸지만 그 이유는 주로 배의 크기에 있었다. 델피니아의 군함이 해상에 떠 있는 거대한 성채라면 키르탄사스의 배는 해상에 떠 있는 나뭇잎이나 다름없다. 나란히 있으면 실제로 고래와 소형 상어 정도로 차이가 났다. 속도라면 저쪽이 훨씬 빠르다. 활 솜씨도 상당한 편이었지만, 예를 들어 지상에서 탑 위에 있는 적을 쏘려면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처럼 해면 위에서 군함의 갑판을 노려도 화살은 쉽게 맞지 않는다. 따라서 군함보다 훨씬 작은 키르탄사스의 소형 배를 노리게 된다. 하지만 이쪽 역시 속도가 빠르고 활솜씨에서만은 절대로 밀리지 않으므로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키르탄사스 대 레테 섬 점거대, 델피니아 대 스케니아 함대라는 도식이 성립되면서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공격해오는 적을 완전히 격파할 수는 없는 이상 델피니아 쪽이 불리했다. 이븐이 걱정했던 대로 레테 섬은 자재가 풍부하다. 델피니아가 아무리 전투를 유리하게 끌고 가도 스케니아 함대는 섬에서 보급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출격한다. 끝이 나지 않는다. 델피니아느 ㄴ해류를 파악하고 있고 방어성채에서 원호해주는 덕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셈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의 기지인 레테 섬을 습격하자는 의견도 델피니아 해군 내에서 부상했지만, 이것은 국왕이 완고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인질을 고려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이쪽의 전력이 적으면서 코랄을 비우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적이 노리는 함정이다. 카를로스가 말했다. “적을 칭찬하는 것도 웃기지만 놈들은 진짜 뱃사람입니다. 코랄 주변에는 그리 어려운 조류가 없으니 그 놈들이라면 야음을 틈타서 상륙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델피니아, 키르탄사스 연합군은 상대가 스케니아 함대만이라면 거의 호각, 때로는 우위에 설 수 있었지만 거기에 레테 섬 점 거대가 버틸 수 없었다. 대혼전에 빠져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만 내로 철수하기도 했다. 이븐은 이런 얘기를 국왕이 보낸 편지로 알고 있었다. 게오르그 아저시의 동료들한테는 혀를 내두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아직 숫자가 적으니 그 화려한 솜씨에 감탄하고 있을 수 있지만 타우를 넘어오는 군세가 여기에 가세한다면 일이 곤란해진다. 그쪽도 힘들겠지만 부디 적을 막아서 합류를 저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그 국왕다운 배짱이었지만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예측이 간다. 이 편지를 두목들에게 보여주며 이븐은 말했다. “반드시 그 녀석들하고 화해해야 돼.” 질이 끄덕였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코랄에는 스케니아의 대함대, 캄센에는 탄가의 대군. 그리고 이 타우. 이만큼 공격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할 정도야. 어딘가 한 군데라도 무너졌다가는 전부 다 휩쓸리고 말지도 몰라.” 이븐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캄센은 도라 장군이 이끄는 대군이 선전하고 있어. 그 맷돼지도 화려하게 활약하고 있다더군. 라모나 기사단장도. 여공작 씨도 있으니 그쪽은 어지간한 일은 없겠지만,,,.” 누이의 고드가 중얼거렸다. “문제가 서쪽이군.” 소베린의 마커스도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 시점에서 파라스트가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두 사람은 타우 동서를 대표하는 현자이다. 국왕은 걱정, 즉 파라스트의 군대가 테바를 넘어올 가능성을 제일 염려하고 있었다. 펜타스 국왕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걸로 더 이상 침략자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며 서둘러 오론에게 감사의 사자를 보내고, 막대한 예물을 마지는 것과 동시에 도착한 부대의 지휘관이나 작요들에게도 산더미 같은 선물과 함께 고르고 고른 미녀들로 접대하며 융숭하게 환대했다고 한다. 베노아의 두목은 턱을 짚고서 다른 손으로 수염을 꼬고 있었다. “예의바르고 솔직한 태도야. 남의 호의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군.” 그 곁에서는 이븐이, 정말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짐짓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얘기는 일단 조심하라고 누가 가르쳐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다른 두목들도 쓴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퍼잰은 중앙 지역의 지도를 펼쳤다. 타우의 측량 기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즉, 지금 테바 강 하구에 파라스트의 군사 5천이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군.” “바로 그거지.” “절호의 발판이야.” “지금까지 아무 짓도 안 한 게 신기할 노릇이야. 여기서라면 비르그나를 돌파해서 로쉐의 가도로 나와도 되고, 아니면 길츠 산맥을 우회해서 남쪽으로 나가 마레바를 공격해도 되지.” 파라스트가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던 것은 유흥 도시로서의 펜타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펜타스의 특수 기술--직물, 세공, 나전, 회화, 음악, 기예 등에서도 가장 뛰어난 물건을 펜타스는 우선적으로 파라스트에 바쳐왔다. 파라스트로서는 짓밟기보다 곁에 두고 귀여워해주는 편이 득이 되는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파라스트가 탄가와 밀약을 맺었다면 펜타스는 델피니아 공략에 절호의 발판이 된다. 이것을 놀려둘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테바 강만 되찾으면 병사를 얼마든지 이 전선기지로 보낼 수 있지.” “부러울 정도로군. 미녀와 금은보화가 가득 쌓인 사치스러운 전선기지야. 너무나 지내기 편해서 병사들도 나오기 싫어하는 것 아닐까.” 회의장 내에 웃음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것은 쓴웃음이었다. 전원의 의견은 일치했다. 펜타스는 어리석게도 새로운 침략자를 자기 손으로 불러들였다. 침략자는 ‘그때’가 올 때까지 적이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베네사가 생각에 잠기면서 중얼거렸다. “그때란 대체 언제일까.” 비스체스가 말을 받았다. “그야 북쪽에서 온 놈들이 테바 강에 득시글거릴 때 아니겠어?” 이골 측은 그 이후로 전투를 걸어오지 않았다. 이쪽도 휴전을 약속한 건 아니지만 가능한 한 움직임을 삼가고 있었다. 해안에서 상륙한 부대가 서쪽에 다가왔지만 이쪽도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저쪽에서 츠이르로 사자를 보낸 것은 고개에서 회담을 벌인지 사흘 뒤의 일이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븐을 지명하면서 카지크까지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단, 혼자서 올 것. 이븐은 주저하지 않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이골과 화해할 수 있으면 레테 섬에 있는 놈들과도 화해할 수 있을 터. 어떤 조건이든 간에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난색을 표했다. “의외로 예의바른 적이니 뭔가 속임수를 쓸 생각은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붙잡고 돌려보내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너, 임금님의 친구라고 말해버렸잖아. 곤란하지 않겠어? 딱 적당한 인질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아서 뭔가를 요구할지도 몰라.” 마커스나 비스체스도 반대했지만 이븐은 그런 걱정을 웃음으로 날려버렸다. “인질이라는 건 가족쯤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날 붙잡아봤자 이용 가치는 없다고.” 그래도 타우의 동료들은 회의적이었다. 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질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하기 힘들어. 네가 붙잡히면 나도 곤란한데다 임금님도 펄펄 뛰면서 화낼걸. 하지만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 저 아가씨한테는 뭐라고 할 생각이야? 이런 소리를 듣기라도 해봐.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주장할 게 뻔하잖아.” 집회소에서 진행되는 간부들의 회의에는 원칙적으로 두목과 각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밖에 참석할 수 없다. 샤미안은 물론 질의 부인인 애비조차도 제외되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중에 결정된 사항을 통보받을 뿐이다. 롬의 여두목이 곤란한 듯이 양손을 들었다. “하지만 카지크에서 사자가 왔다는 얘기는 이미 온 마을에 쫙 퍼졌어. 몯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다고. 그건 어쩔 건데?” 카지크가 무슨 얘기를 해온 건지, 전쟁의 향방은 어떻게 되는 건지 여자와 노약자들이 걱정하고 있다. 남자들은 어떤 지시가 내려올지 긴장하며 기다렸다. “난 내일, 혼자서 가겠어.” 이븐이 말했다. “모두에게는--저 아가씨한테도, 모레에 다시 한 번 그 고개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하면 돼.” 베네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 마음을 짓밟지 마. 나중에 우리가 원망을 듣게 되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비겁해, 베니. 저쪽은 나 혼자 오라고 요구했다고.”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완강한 어조였다. 결국 질도 포기했다. 분명히 그들과 화친을 맺을 필요가 잇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집회소 밖에서 불안해하며 기다리던 사람들을 거짓 보고로 진정시킨 뒤, 그들은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마을 주위에 경비를 세운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이븐은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쟁 중이지만 아직 마을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하얗게 낀 안개를 헤치며 마구간으로 걸어가 조용히 애마를 끌어냈다. 지금부터 말을 타고 달려가면 점심 전에 카지크에 도착한다.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이동하며 마을 변두리까지 온 이븐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여기는 경비가 서는 자리이다. 경비의 눈까지 속을 수는 없을 테니 사정을 설명하고 조용히 보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건만, 그 경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샤미안이 서 있었다. 완전히 준비를 마치고 머리를 깔끔하게 닿아, 허리에는 검을 꽂고 화살 통을 진 채 손에 활을 들고 있다. 얼굴에는 굳은 결의와 다소 비난하는 표정을 담아 똑바로 이쪽을 바라본다. 이븐은 초특급 한숨을 토했다. 말을 끌고 터벅터벅 다가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싫습니다.”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븐은 다시 한숨을 쉬고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시겠습니까? 전 교섭을 하러 가는 겁니다! 저쪽은 저 하나를 지명했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교섭만은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럼 중간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자 이븐도 짜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언성을 높이려고 했지만 샤미안이 더 빨랐다. “전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분노와 함께 매달리는, 울먹이는 듯한 외침이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아침 안개 속에서 어색하게 서 있을 때, 근처의 나무 뒤에서 눈치 없이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질이 나타났다. “엇차, 미안. 데이트 중이었어?”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븐은 엄청난 기세로 상대를 노려봤다. “얘기를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들어버리고.” 거의 살기에 가까운 분노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겠지만 베노아의 두목은 태연할 뿐이었다. “아가씨 몰래 널 보내놓고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봐. 그러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고.” “단신 대체 누구 편이야?!” “난 누구 편도 아냐. 그저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지.” 젊은이의 경쾌함과 경험 풍부한 남자의 침착함을 겸비한 두목은 애정 어린 눈으로 이븐과 샤미안을 바라봤다. “아가씨는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고, 너도 그리 싫지는 않은 눈치야. 그렇다면 결혼해도 나쁠 것 없지 않겠어? 그렇다고 임금님의 인가를 받은 도라 장군이 잔뜩 들떠서 앞뒤 가리지 않고 일을 진행하는 것도 곤란해. 이런 일에는 걸맞은 진행방식이라는 게 있지. 아가씨도 여기까지 널 따라와서 마을에서 침식을 함께 하며 우리들과 함께 싸우고 있어. 평범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게 된 셈이지. 나로서는 슬슬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니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생각은 없어.” “있는 대로 간섭하고 있잖아!” “그건 네 오해야. 오늘은 마침 날씨도 좋을 것 같아서 우리들도 밖에 나가려는 참이야. 안 그래?” 등 뒤에 우거져 있는 수풀을 향해 말을 건다. 그러자 부스럭부스럭 사람들의 기척이 생겨났다. 애비가 제일 먼저 나타났다. 베네사, 비스체스, 슬레이, 마커스 등이 차례로 고개를 내밀었고, 다시 등 뒤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 그들 휘하의 남자들이 다시금 일어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약 2천 여 명의 군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기가 막혀 굳어 있는 이븐을 향해 질은 실로 유쾌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우리들은 지금부터 소풍을 갈 거야.” “그렇고말고.” “그게 우연히 너하고 방향이 겹치는 것뿐이지. 뭐라고 불평을 들을 이유는 없어.” 슬레이와 비스체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이븐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멈춰 서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장한데다 식량까지 지참하고서, 소풍,,,?” “그야 소풍에 도시락이 빠지면 안 되잖아. 최근 이 근처도 많이 위험하니 맨몸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지?” “그럼, 그럼.” “네가 그 덩치 큰 놈들하고 어려운 얘기 하는 사이에 우리들은 마을 밖에서 성대하게 술잔치를 열고 있을 테니까. 유감이네, 못 끼어서.” “그럼 나중에 보자. 우리 먼저 갈 테니까.” 멋대로 지껄이고서 일행은 말을 끌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븐과 샤미안만 그 자리에 남겨졌다. 샤미안은 주저하면서 필사적으로 이븐의 안색을 살폈다. “저쪽이 당신 한 명을 지명했으니 끝까지 따라갈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회담이 끝날 때가지 질님과 함께 카지크 마을 바깥에서 기다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이븐은 아직도 머리를 싸쥐고 있었지만 이미 분노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말 고삐를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른 눈이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샤미안을 바라봤다. “전부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네?” “저같이 닳아빠진 녀석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겁니까?” 샤미안은 깜짝 놀랐다. 얼굴이 점점 새빨개진다. “어디라니--그, 어디지? 어디건, 아니, 그, 저기, 그런 거 물어보셔도 대답 못해요,,,!” 횡설수설하는 외침이었다. 검은 옷의 산적은 열심히 웃음을 삼키며(이 용감한 여기사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븐은 샤미안에게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언제나 그랬다. 손을 잡은 적도, 어깨를 안은 적도 없었다. 국왕의 계책에 빠져서 사실상 약혼자가 된 지금에도--샤미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그런 입장을 이용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상대의 승낙이 있었다고 해도 자기 쪽에서 결혼을 신청하지 않은 이상 이 사람과 접촉할 권리는 없다고, 이븐은 무의식 중에 스스로에게 다짐해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도라 장군의 눈은 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기사에게 요구되는 가장 모범적이고 훌륭한 태도이기도 했다. 2천 명의 인간이 몰려온 것을 보고 카지크는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얘기가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감시대 위에 갑자기 사람이 늘어나고 험악한 공기가 퍼졌지만 이븐은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 말을 걸었다. “약속대로 왔으니 들여보내줘.” “혼자라고 했는데 대체 뒤의 놈들은 뭐야?!” “구경꾼일 뿐이야. 여기에서 잔치나 열면서 시간 죽이고 있겠다는데.” 경비는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븐의 농담이 통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일단 경비가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마을 입구가 열렸다. 문 안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정렬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도 창과 대검, 도끼 등이 삼엄하게 번적이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이븐은 움츠러들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이븐이 문 안으로 사라지고서 마을의 입구가 다시 닫혔다. 표정을 굳히며 긴장하는 샤미안과 다른 동료들에게, 질은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자아, 우리는 슬슬 점심이나 먹을까.” “거 좋군. 마침 배가 고팠어.” 베네사가 대답한다. 일단 저쪽에서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나서 저마다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을 꺼냈다. 바로 눈앞에 적의 요새가 있고 엄중하게 무장한 남자들이 우글거리고 있건만 조금도 신경 쓰는 구석은 없었다. 신나게 먹고 마시며 떠들썩하게 춤추고 노래까지 부른다. 카지크의 경비는 기가 막힌 얼굴로 이 잔치를 바라보았다. 한편 마을에 들어간 이븐은 주위 상황을 살펴보면서 안내역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을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각각의 집에서 가족이 생활하고 노인들이 느긋하게 수작업을 하며, 여자들이 부산하게 일하고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노는, 그런 여유로운 풍경은 마을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국에서 온 기묘한 남자들이 씩씩하게 활보하고 있을 뿐이다. 이븐이 안내된 것은 두목인 슬레이의 집이었다. 상황이 바뀌었어도 책임자가 사는 집은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마을 중앙에 있는 큰 집이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1층 거실에서는 이미 이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한 명, 남자가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로, 앉아 있기 때문에 키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 큰 체구로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둥그렇고 목이 짧으며 전체적으로 약간 통통해 보인다. 하지만 그 몸 대부분은 튼튼한 근육이 갑옷을 이루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눈이 가늘어서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찌르는 듯이 날카롭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레오르그의 아들이냐?” 남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이븐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가는 눈을 힘껏 뜨며 이븐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유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혼자서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고 선언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난 유진. 고트의 수장이다.” 이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르풀의 수장이다. 거기 앉아.” 이븐이 그 말에 따르자 안에서 에란이 나오면서 세 사람 앞에 술잔과 안주를 차려놓고 물러갔다. 그때 이븐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히 호감이 담겨 있었다. 유진 역시 그것을 깨달은 듯 말했다. “에란에게서 너와 네 동료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전해 들었다. 네 태도는 지극히 공정하고 당당했다.” 상대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나보기로 했다고, 이븐을 지명한 이유를 설명했다. 유진은 해안에서 상륙한 이들의 지휘관이었다. 배를 들고 거의 100카티브 정도를 이동해 막 산에 접어들려는 시점에서 이골이 급하게 전령을 보냈다고 한다. “할 얘기가 있으니 와달라는 말에 와봤더니, 놀랄 수밖에 없더군. 여기에 게오르그의 아들이 있고 우리들보고 손을 털고 고향에 돌아가라는 거야.” “우리들 입장에서도, 당신들한테도 도움이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이븐도 냉정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어째서 당신들이 이런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그걸 모르겠어. 설마 스케니아에 종속하기로 맹세한 건 아니겠지?” 이국의 수장 두 명은 이 엄청난 모욕에 온몸에서 살기를 뿜으며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마치 찢어 죽일 듯한 시선 앞에서도 이븐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상대방의 반응을 유쾌하게 여기며, 그 생각을 솔직하게 표정에 드러냈다. “그렇다면 돈으로 고용된 게 아닐까 생각했어. 아버지는 많은 돈을 받고 자신의 검 솜씨를 놈들한테 팔았다고 했으니까. 한 번 받아들인 일이라면 받은 돈만큼 일하는 것도 당연하고. 그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도 때와 경우, 상대와 금액에 따라 달라지는 얘기지. 스케니아도 자기 휘하의 병사들에게 포상을 내려줘야 해. 이렇게 대대적으로 출병할 정도면 막대한 금액이 되겠지. 거기다 당신들한테까지 보수를 지불하다니, 대체 어디에서 그런 돈이 나온다지? 물론 델피니아를 정말로 정복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당신들의 활약에도 충분히 보상이 나올 거야. 하지만 우리들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아. 결국 당신들은 제일 위험한 역할을 맡아서 실컷 일만 하다가 용건이 끝나고 나면 그대로 폐기처분 될 수 있어.” 이들을 스케니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악담을 늘어놓았지만 두 사람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 녀석들의 귀는 금방 들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혀는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소리만 지껄여. 우리한테도 여러 가지로 약속은 했지만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우리도 이미 잊었다.” 이븐이 기가 막혀서 두 사람을 쳐다보자, 이골은 험악하게 눈을 빛내며 강하게 단언했다. “라그란 놈들 따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놈들의 영혼은 산 채로 더럽혀진 진흙 덩어리다. 눈에는 교활한 빛만 떠돌고 내쉬는 숨은 악취가 나고. 머리에 든 거라고는 보신과 돈벌이, 높은 사람에게 꼬리치는 것뿐이야. 진흙탕의 돼지도 놈들보다는 훨씬 깨끗해.” 유진도 그 둥그런 얼굴에 경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들도 약탈은 해. 썩어 넘칠 정도로 돈이 있는 놈들한테서. 하지만 그 놈들은 나라 하나를 통째로 먹으려고 한다. 델피니아의 왕을 쫓아내고 그 나라를 가로채서 스케니아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겠다더군. 진심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손도 쓸 수 없는 바보들이다.” 이븐은 곤혹스러워서 고개를 저었다. “잠깐,,, 잠깐만. 그럼 어째서--당신들이 그런 놈들의 앞잡이가 된 거지?” “스케니아의 앞잡이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완고한 어조였다. 이븐은 더욱 기가 막혀버렸다. 좀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달라고 외쳐버릴 뻔했지만 이븐의 입은 무의식 중에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럼,,, 누구 부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지?” 어째서 그런 질문이 떠오른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골도 유진도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했다가, 말없이 의논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란히 고개를 들더니 이골이 입을 열었다. “넌 게오르그의 아들이다. 말해도 괜찮겠지.” 유진 역시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들은 라그란 놈들 따위한테 아무런 의리도 없어. 의리가 있는 것은 벵크의 수장이다.” “??” 갑자기 모르는 사람의 얘기가 튀어나오면 알아들을 수 없다. 말없이 얘기를 재촉했다. “이미 30년도 더 지난 옛날, 벵크의 수장은 라그란의 인간에게 붙잡혔던 적이 있다. 도둑질을 했다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 재판이 열렸지만 어차피 마을 놈들이 하는 재판이니 공정할 리가 없었어. 그의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형이 확정 되었다.” “하지만 교수형을 당하기 전날, 감옥의 간수가 그의 무고함을 믿고 몰래 풀어줬다.” “그는 간수에게 맹세했지. 생명을 구해준 이 빚은 반드시 갚겠다고. 지금 자신은 아직 아무 힘도 없고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지 안ㄹ 수 없지만, 그에 걸맞는 힘을 갖췄을 때 걸맞은 방법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두 사람은 거기에서 말을 끊었다. 이븐은 얘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그 뒤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그 자리를 가득 메웠다. 마침내 이븐이 온 얼굴에 의혹을 가득 띠며 물었다. “설마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간수가 30년 만에 나타나서 델피니아로 출병해달라고 부탁했나?” “간수는 몇 년 전에 죽었다더군.” “나타난 건 아들이었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면 아들에게 갚는 것이 당연한 도리야.” 이븐은 기가 막혔지만 반발은 하지 않았다. 농담 아니냐고 웃어버리거나,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 이렇게 대대적으로 출병을 결정한 거냐고 감정에 치우쳐서 항의하는 것은 논외이다. 이븐은 이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규정과 긍지를. 또 무엇ㅇ르 중시하며 무엇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냉정하고 질문했다. “기다려봐. 지금 얘기의 흐름으로 봐서, 벵크의 수장은 그때 처음으로 그 녀석하고 만났던 거지? 정말로 간수의 아들인지 아닌지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지?” 그 젊은 남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혹시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큰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벵크의 수장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그를 묶고 있던 밧줄을 끊은 적동의 단검에 걸고, 채찍질을 당한 몸에 걸쳐주었던 토끼털 외투에 걸고 그는 너의 힘이 되어줄 거라고. 벵크의 수장은 간수의 아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30년 전 그의 밧줄을 끊었던 단검에는 적동의 장식이 붙어 있었고, 맨몸으로 도망치려던 거에게 간수가 입혀준 것은 토끼의 모피였다.“ 간수의 아들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이 혹한에서 벗어나 중앙에 새 왕국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유사 이래의 대계획이며, 나라의 미래는 곧 저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갚을 수 없었던 보은의 맹세를 아직 기억하고 계신다면 부디 힘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거절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벵크의 수장은 간수의 아들의 부탁에 응했고, 이번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븐은 낮게 신음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이유에 머리를 싸쥐고 싶어질 정도였다. 실제로 이마에 한쪽 손을 대고 혼란스러운 머리를 필사적으로 정리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도 흐트러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한 말 한 마디를 몇 ㅂ너이고 반추하며, 신중하게 물음을 던졌다. “그 간수의 아들은, 델피니아를 공략하는 데에 힘을 빌려달라고 한 거지?” “그래.” “하지만 간수의 아들이라면서? 어째서 그런, 해외 출병 같은 국가 정책에 관여하는 거지?” 신분이 낮은 이의 자식은 출세할 수 없다. 간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일국의 정세를 좌우하는 높은 관직에 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아들이 하는 말로는, 자기 집은 대대로 가난했지만 자기는 재간이 있고 운도 좋았던 덕분에 지금은 중신 중 하나를 보좌하게 되었다더군. 그 뒤는 흔한 얘기야. 윗사람이 몰아세웠는지, 전력 부족을 두고 한탄했는지는 모르지만 벵크가 용감한 부족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간수의 아들이 이쪽에 도움을 청했다.” “어차피 이번 델피니아 정벌이 잘 되면, 우리들의 힘으로 성공 할 경우의 얘기지만 간수의 아들도 틀림없이 출세할 수 있겠지.” “당신들도 그 간수의 아들을 만나봤나?” “일단은.” “어떻게 생각했지?” 두 사람은 싸늘한 경멸의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으로 볼 때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닌 듯하다. 산 채로 영혼이 석어버린 라그란 놈들과 같은 냄새가 풍겼다는 말이다. 이븐은 조금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정은 알겠어. 잘 알겠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당신들은 결국 라그란 놈들 ㄸ스대로 움직이고 있어.” “말했을 텐데, 꼬맹이.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벵크의 수장은 우리의 친구다. 존경할 만한 남자지. 그가 간수에게 빚을 졌다면 우리들은 그에게 빚이 있어.” “그런 남자의 부탁이다. 거절할 수는 없어.” 두 사람 모두 그 간수의 아들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아마 벵크의 수장 본인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해봤자 소용없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라도 은인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으며, 맹세의 말도 사라지지 않는다. 벵크의 수장은 간수의 아들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이 엄청나게 본의가 아닌 전쟁에 일족을 이끌고 참가했으며, 끝까지 그 자세를 견지하려 한다. 그렇게 싫은 약속이라면 고지식하게 지킬 필요도 없다고 입이 닳도록 설득해봤자 이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이쪽 식으로 말하자면, 맹세는 계약서를 교호나한 거나 마찬가지로 큰 무게를 지닌다. 그 이전에 이들의 신념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 이외에는. 이븐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 푸른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벵크의 수장은 어디에 있지?” “왜 묻는 거지?”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어.” 두 사람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손을 떼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어. 그에게는 스스로 한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다.” “이골. 날 흔해빠진 이쪽 사람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 아무리 본의가 아니라고 해도 한 번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정도도 아버지한테 안 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유진이 쿡쿡 웃었다. 이골 역시 유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븐은 두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생각을 정리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단, 사실상 난 이쪽 사람이기도 해. 그러니 높으신 놈들의 방식도 알고 있지. 당신들은 강해. 스케니아의 정규병 따위보다 훨씬 강하겠지. 나라면--혹시 내가 스케니아의 정권에 관여하는 관리, 중신, 뭐라도 상관없지만 아무튼 그런 입장에 있다면 이 정도의 전력을 놀려두는 바보짓은 안 해. 어떻게든 이용할 방법을 강구하겠지. 나라의 총력을 기울여서 대승부를 걸려는 시점이야. ㅁ슨 일이 있어도 이족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겠지. 그래, 말 그대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혼잣말처럼 되뇌며 중얼거리는 이븐을, 두 사람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 물음에 이븐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뜻을 굳히고 고개를 들어 똑바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혹시 간수의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면?” 두 사람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포기한 듯한 웃음이었다. “어디가 거짓말이라는 거지? 간수의 아들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정확하게 말했어.” “적동의 단검과 토끼 모피지? 간수가 그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했을 수도 있잖아.” “잊으면 안 돼. 30년 전의 일이다. 간수는 현재의, 누구나 다 아는 영웅을 구한 게 아니야. 도둑으로 누명을 쓰고 죽을 뻔한 소년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풀어준 것이다. 그런 얘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려서 어쩔 건데?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간수로서의 책임과도 상관 있는 문제야.”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간수의 아들은 어떻게 자기 아버지가 도운 소년과 벵크의 수장을 연결할 수 있었던 거지?” “14년 전쯤, 간수가 벵크의 수장을 라그란에서 봤다더군.” 벵크, 바르풀, 고트. 이것은 모두 스케니아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부터 살고 있던 선주민족의 부족명이다. 그 세력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엄청나게 용맹하기도 했다. 따라서 라그란에서도 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는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일면이 있었다. 벵크의 수장은 그때 왕궁에 초대를 받았다. 라그란의 왕ㅇ궁은 가금 이렇게 선주민족의 수장을 초대한다. 이것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뭔가 특별한 의뢰나 의논을 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 도둑의 누명을 썼던 소년도 그때에는 이미 한 부족의 수장이었다. 수많은 동료들을 데리고 당당한 차림으로 도시 한가운데를 말을 타고 행진했다. 그 모습을 간수가 보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븐이 얘기에 끼어들었다. “잠깐만.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당당해진 모습을 봤으면 그 때 간수 본인이 나설 만도 한데.” “그리고 자신이 직무를 유기했다는 사실을 자백한다? 간수는 월급을 받고 고용되어서 일하는 몸이야. 벵크의 수장도 이런 신분이 되었으니 옛날에 감옥에서 탈주한 적이 있다고 누가 뭐라고는 않겠지. 하지만 간수는 그렇게 넘어갈 수 없어.” “그게 이쪽 녀석들의 방식이잖아?” 확실히 앞뒤가 들어맞는 말이었다. 화려한 행진의 선두에서 예전에 도와줬던 소년의 얼굴을 본다. 이렇게나 훌륭해졌다는 사실에 놀라며 감탄한다. 그 소년이 저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다. 20년 전의 일이라고는 해도, 간수의 신분으로 사형수를 탈옥시켰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아들에게만 말한다. 굉장히 그럴 법한 얘기였다. 하지만 이븐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납득할 수 없어. 그래선 너무 앞뒤가 잘 들어맞잖아.” 델피니아를 쓰러뜨리고 중앙에 진출하려는 것이다. 스케니아에게 있어서도 큰 도박이었을 터였다. 우수한 전투 능력을 지닌 선주민족의 힘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을 터. “당신들은 이족 사람들하고 달리 입에 발린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아. 돈이나 물건에도 움직이지 않지. 협박도 안 통하고, 관직 따위는 말할 것도 없어. 생명을 구해준 은혜와 맹세. 그것만이 당신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지. 그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 간수의 아들은 어째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두 수장은 이상한 듯이 얼굴을 마주 봤다. “누구나 알고 있잖아?” “그건 당신네들 상식이지. 이쪽의--당신들이 말하는 ‘내쉬는 숨까지 썩어 있는 더러운 영혼을 지닌 놈들’은 그런 거 안 믿어. 놈들의 협력을 얻어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실은 옛날에 제 아버지가 저들의 수장의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지만 그것을 내세워서 저를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런 소릴 해봐. 미친 놈 취급이나 받겠지. 그렇게 옛날 일이 지금가지 통할 리가 없잖아. 혹은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는 인간도 있다고 해도 본인이 죽었으면 그걸로 끝이야. 게다가 본인이 살아 있다고 해도 보답하는 데에도 한도라는 게 있지, 일족 전체가 나서서 협력할 리가 없다고.” 유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족에서는 목숨 값이라는 게 굉장히 싸구려인가보군.”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돌려주는 것이 이들의 규정이었다. 따라서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주는 법이다. 이골이 바위처럼 커다란 손으로 깍지를 끼며 담담하게 말했다. “간수의 아들이 벵크의 수장을 속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지만, 그건 네 바람에 지나지 않아. 희망과 사실을 똑같이 여길 수는 없어.” “그냥 바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 “내 말이 옳다면? 벵크의 수장이 그 간수의 아들--어쩌면 자기가 그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에게 속고 있다면?” 두 사람은 이븐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말없이 의논이라도 하는 듯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뭔가 오류가 있다면 반드시 정정해야지. 그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이븐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간ㅇ르 줘. 내가 찾아보지.” “어떻게?” “그 녀석이 진짜인지 아닌지, 스케니아의 상층부라면 알고 있을 거야.” “물어본다고 가짜라고 대답해줄 리가 없지.” “이쪽 놈들에게는 이쪽 놈들의 방식이 있어. 혹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면 손을 떼 주겠어?” 고트의 수장은 진지하게 이븐을 바라봤고, 바르풀의 수장은 무서운 표정으로 다짐했다.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네가 어중간한 증거나 헛소리로 우리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분통을 터뜨리며 이븐이 외쳤다. “내가 그런 짓을 한다면 찢어 죽여도 상관없어! 나도 불평 안 할 테니까! 하지만 당신들도 스케니아 놈들한테 속아서 이용당하는 게 좋을 리 없잖아?!”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상당한 볼거리였다. 이 사람들의 분노를 산 인간을 무심코 동정하고 말 정도로 격렬한 표정이었다. 이들은 역시 북방의 삼림에 서식하는 늑대였다. 가증스러워 견딜 수 없는, 그대로 찢어발기고 싶은 상대를 눈앞에 두고서도 이를 악물고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서 필사적으로 굴욕감에 견디고 있는--격렬한 분노를 간직한 야생동물이었다. 이골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네가 정말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이번 일이 전부 놈들의 간계였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그의 족쇄를 끊어준다면,,,.” 유진도 둥그런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말을 받았다. “무릎을 꿇고 네 손에 키스해도 좋다.” 그 격한 기세에는 오히려 이븐이 움찔할 정도였다. 양족 모두 그런 감정을 의지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미칠 것 같으면서도. 두 수장은 살짝 드러냈던 전투민족의 혈기를 곧바로 지우고 아까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왔다. “단, 이것도 말해두지. 간수의 아들이 진짜라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얌전히 포기하도록 해.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킬거야. 물론 우리들도.” “알고 있어. 난 내 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야. 벵크의 수장은 어디에 있지?” “동쪽 해안이다.” “섬 하나를 점령했을 거야.” 철썩 소리를 내며 이븐이 이마를 쳤다. “레테 섬이야?!” 생각이 부족했다. 거기까지 생각해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벵크의 수장을 만나봐야 한다. 이 두 사람이 동의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모든 일의 발단인 그 인물의 양해를 반드시 얻어둬야 했다. 이제부터가 난관이었다. 현재 레테 섬은 스케니아의 기지가 되어 있다. 사자로서 레테에 들어가면 스케니아 함대의 책임자에게 안내받겠지.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운 좋게 그 자리에 벵크의 수장이 동석한다고 해도 설마 스케니아 인 앞에서 이 놈들의 거짓말을 폭로할 테니 그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스케니아 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벵크의 수장 본인과 직접 접촉해야 하지만, 대체 그것이 가능한 걸까,,,. 자신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팔짱을 끼고서 비지땀ㅇ르 흘리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이골이 입을 열었다. “배 한 척을 보내줘.” 이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들었다. “뭐?” “우리들 배 한 척을 테바 강까지 통과시켜줘. 그리고 넌 포로가 된다. 바르풀의 수장이 포로를 데리고 강을 내려와 섬을 점거한 벵크의 수장과 합류한다. 그렇게 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데리고 가주겠다는 거야?!” “널 확실하게 벵크의 수장 앞까지 데리고 갈 수 있는 건 나나 유진분이야. 다른 녀석들이라면 섬으로 데리고 가는 건 가능해도 나중에 데리고 나올 수 없을 테니까. 얘기를 마친 뒤에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지.” 이븐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조금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 후에는 코랄로 가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북방의 거인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때는 내가 포로가 되지.” “그건 좀 무리인데. 세 부족을 대표하는 사자는 어때?” “알았다. 유진, 뒤를 부탁해.” 고트의 수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확인했다. “여기는 어떻게 하지? 너희들이 돌아올 때까지 휴전인가?” “그래.” “그럼 보증이 필요하겠군. 만일에 대비해서 누군가 인질을 보내줘. 이쪽에서는 에란을 보내지.” 이골도 고개를 끄덕이고 이븐을 쳐다봤다. “에란은 벵크의 수장의 아들이다.” 벵크의 수장에게는 에란말고도 두 아들이 있었다. 간수가 벵크의 수장을 살려주지 ㅇ낳았다면 그들 역시 태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간수는 벵크의 수장분만이 아니라 그 아들들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특별히 데리고 있었지만, 인질로서 이 이상의 인물은 없겠지.” “괜찮아/ 당신들 마음대로 인질로 보내도?” “네게 우리를 속일 생각이 없다면 에란의 신변은 어디에 있더라도 안전할 테지.” 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두 사람과 굳게 악수를 나누고--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관습인 듯 기묘한 표정ㅇ르 지었다--이븐은 서둘러 마을에서 나왔다. 바깥에서 벌어지던 잔치는 한창 절정에 달해 있었다.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실로 난장판. 하지만 이븐이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소란이 가라앉았다. 모여든 두목들 앞에서 이븐은 지금까지의 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했고,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뭐랄까, 참. 그게,,,.” “바보같이 솔직하달까, 멍청할 정도로 의리파랄까,,,.” 베네사는 눈을 치떴고 마커스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비슷하게 불평 섞인 감상을 늘어놓았고, 비스체스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핫,,,. 정말 멍청한 얘기지만, 그런 종류의 바보는 나쁘지 않은걸.” 카지크의 슬레이도 적진을 향해 씁쓸한 시선을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바보도 그 정도까지 철저하게 바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멋져.” 그리고 베노아의 질은 모두의 의견을 종합해서 말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목숨으로 갚는다. 우리들도 그렇게 해왔잖아. 이 사람들은 맹세에 묶여 있어. 우리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이쪽이 아니야. 이 사람들을 여기까지 끌어낸 놈들이다.” 이븐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네 의견에 찬성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가 이상해.” “그렇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게 스케니아의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저 사람들은 신이 나서 스케니아한테 덤벼들 테니까.” 베노아의 두목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엄청난 공격을--스케니아 군에 벌어질 참극을 기대하는 듯이. “정말 굉장할 거야. 어차피 자업자득이지만. 별로 동정할 생각은 없는걸.” 마커스도 말을 받았다. “어디, 그럼 누구를 인질로 보내지? 저쪽은 총사령관의 아들을 보내겠다는 거잖아.” 이족을 신용하며 그 정도의 인질을 보낸다면 이족 역시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어중간한 인질을 뽑을 수는 ㅇ벗다. 이족의 지휘는 일단 질이 맡고 있다. 질의 가족이라고 하자면 애비가 되겠지만, 질은 지휘관이라고는 해도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는 존재는 아니다. 게다가 저쪽은 이쪽의 내부 사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누가 중요 인물인지, 누가 권한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두목--마을의 대표가 20명이고 그중에서 지금은 질이 제일 높다고 설명하고 애비를 보내면 될까?” “아니, 그보다 두목 중 하나가 가는 편이 저쪽에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동감이야. 저 녀석들한테 질 이름을 대봤자 느낌이 안 올 테니까.” 그리하여 전원이 제비를 뽑기로 했다. 베네사가 사람 수만큼 풀을 뽑아서 제비를 만들려고 할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 역할, 제가 맡겠습니다.” 샤미안이었다. 전원이 얼어붙었다. 베네사는 모처럼 만든 제비를 놓쳐버렸다. “장난하는 게 아냐!!” 제일 먼저 일어서며 소리를 지른 것은 물론 이븐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당신은 타우의 인간도 아니라고!! 외부인이잖아!!” 샤미안은 맑은 눈으로 이븐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절대로 절 저버리지 않겠지요?” 그럴 수는 없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도라 장군과 국왕의 손에 살해당할 것이다.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이런 경우에는 적의 입장에서 가장 가치있는 인간을 보내야 합니다. ‘가치’라는 건 이쪽 진영이 그 사람을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의미를 가리키지요. 또 하나는 물론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들이 제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최종 목적은 폐하겠지요. 폐하의 측근인 조정 중신의 딸인데다, 폐하께서도 저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계신다고 말하면 그들에게 필요한 인질의 조건에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침착한 말투였다. 남자들은 기가 막혀서 주저하며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질 역시 초조해진 듯이 식음땀을 흘리면서 샤미안을 타일렀다. “잠간 기다리십시오. 분명히 당신 말도 맞습니다. 맞기는 맞지만 아버님의 허락도 없이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장군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샤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역시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저들과 화해할 필요가 있지요. 저쪽에서도 소중한 인물을 인질로 보내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 역시 제 아버지가 맡긴 인물--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 동등한 교환이 되겠지요. 아버지도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살아오신 분입니다. 분명히 이해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화를 내실 리 없습니다.” “아니, 하지만,, 이봐, 어이!” 어떻게 좀 해보라고 이븐에게 눈짓을 한다. 그 이븐은 오늘 아침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엄청나게 길게 한숨을 쉬고서 거의 신음에 가깝게 말했다. “저기 말입니다, 아가씨. 당신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당신을 인질로 잡혀두고서 제가 속 편하게 나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샤미안은 조금 주저했지만, 결코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이븐님은 저들 선주민족을 위해 스케니아의 거짓말을 밝히러 가시는 거지요?”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저도 안전합니다. 당신이 그들을 속이려는 게 아니라면, 저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밝혀주신다면, 우리 편에 인질로 올 에란이 무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안전할 겁니다. 전혀 위험할 리가 없지요.” 의연한 태도의 바탕에 깔린 것은 이 남자에 대한 신뢰였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 반드시 자신을 구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이었다. 검은 옷의 산적은 피부색과는 대조적인 밝은 금발을 마구 휘젓다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아아악,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항복!!” 이게 무슨 뜻인지는 샤미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깜짝 놀라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 이븐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샤미안에게 말했다. “미래의 여백작님께 여쭤보겠습니다만, 이 산적의 청혼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영문을 모른 채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븐은 더욱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저쪽에 인질로 가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제 성질로는 말입니다. 내 여자도 아닌 사람을 인질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제 신념에 어긋나니까요. 내 여자라면 직접 이렇게 물을 수 있지요.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반드시 구해줄 테니까 날 믿고 기다려달라고. 어떻습니까?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선명하게 빛나는 바다빛 눈동자가 똑바로 샤미안을 응시했다. 샤미안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고는 생각하지만 도저히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샤미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주위에 있던 두목들도 기가 막혀서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마침내 질이 웃음을 터뜨리며 애비에게 말했다. “너, 같이 가주지 않겠어? 오랫동안 머물게 될지도 모르니 난 좀 쓸쓸해지겠지만, 이븐의 마누라한테도 얘기 상대가 필요하겠지.” “좋아.” 질의 젊은 부인도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당신이 가라면 어디든지 갈 거야. 하지만 나 없는 사이에 바람이라도 피웠다간 큰일 날 줄 알아.” 이븐은 그제야 처음으로 샤미안을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고 빨갛게 물든 얼굴을 응시했다. “돌아오면 도라 장군께 정식으로 얘기를 드리고 식을 올리지요. 괜찮을까요?” 샤미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미소지은 얼굴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지크의 경비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갑자기 눈앞에서 엄청난 갈채가 터져 나왔으니 말이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인질 교호나이 이뤄져 에란은 타우 사람들과 함께 츠이르로 가고 샤미안과 애비는 카지크에 남게 되었다. 그때 이븐은 유진에게 말했다. “애비는 내가 아버지처럼 따르는 남자의 부인이야. 즉 어머니나 다름없지. 그리고 샤미안은 내 마누라다. 그러니 정중하게 대해줘.” 두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말이었다. 6장 이븐을 태운 배는 확실히 빨랐다. 단숨에 테바 강을 내려가 동해안으로 나와 레테 섬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이동하면서 펜타스 앞을 통과하게 된다. 한바탕 충돌이 있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파라스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텐데도 검문다운 검문조차 없었다. 레테 섬에 도착하자 바르풀의 수장이 직접 찾아온 것을 본 선주민족 남자들이 당황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이븐은 포로로서 연행되었다. 양손을 밧줄로 묶인 채로 작은 창고로 끌려가 갇히게 되었지만, 그 짧은 틈에도 섬의 동태를 살피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생각대로 스케니아 함대와 선주민족은 함께 레테 섬을 점거하고 있어도 거의 왕래가 없는 듯했다. 벵크의 수장이 나타난 것은 해가 저문 뒤였다. 직접 등불을 들고 이븐의 손을 묶은 밧줄을 끊은 뒤, 이븐을 마주 보며 바닥에 앉았다. 50대쯤으로 보이는 벵크의 수장은 이골의 동족치고는 의외일 정도로 마른 체격이었다. 키도 그렇게 크지 않다. 중키에 중간 체격, 얼핏 보기에는 허약해 보이는 용모였다. 하지만 눈빛이 다르다. 분위기가 달랐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관록이 있었다. 이븐은 보는 시선도 날카로웠다. 그다지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뼛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따뜻함 역시 담겨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군.”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뻣뻣해진 손목을 문지르면서 이븐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어보았다. “이골이나 유진도 똑같은 소리를 하던데,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 “우리들은 모두 페르스칸프의 숲에서 함께 놀던 사이야. 게오르그는 그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아서 우리들한테는 형님 같ㅇ느 존재였지. 고향을 떠날 때까지 계속.” “페르스칸프라,,,. 아버지 고향의 이름은 지금 처음 들어봤어. 어떤 곳이지?” “스샤와 굉장히 비슷한, 울창한 삼림이다.” 이븐은 깜짝 놀랐다. 눈을 껌벅거리며 눈앞의 인물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당신, 스샤에 대해 알아?” 벵크의 수장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븐.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널 잘 알고 있다. 그 눈 색에 머리색, 피부색가지 더하면 못 알아볼 수가 없지. 당시에도 상당히 화려한 배색이다 싶었으니까. 내 이름은 우클릭이다.” 이븐도 더욱 놀라면서 외쳤다. “우리 집에 팜주를 가져다주던 그 술집 아저씨?!” “게오르그가 그렇게 말하던가?” “응. 언제나 맛있는 술을 가져다주는 건 고맙지만 저 녀석도 꽤 성공하는 바람에 자주 올 수 없게 된 것 같다고.” 벵크의 수장은 유쾌하게 웃었다. “정말 페르스칸프의 곰다운 말이로군. 자기야말로 고향을 뛰쳐나가서 단 한 번도 얼굴조차 안 비치던 주제에.” 조금 운을 떼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말을 잇는다. “이골에게 들었다. 네가 내 은인을 의심하고 있다고.” 이븐 역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의심하고 싶어질 거야. 당신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아? 그저,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으니까--당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그 녀석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거 아냐?” 벵크의 수장은 살짝 눈을 감으면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븐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어. 당신은 이해할 수 있어. 그 간수의 자식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전쟁에까지 끼어들게 된 셈이지만, 그거야 당신 자유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째서 이골이나 유진까지 끌어들인 거지?” 빠직, 불꽃이 튀었다. 벵크의 수장의 전신에서 형용할 길이 없는 차가운 살기가 치솟았다. “내가 좋아서 이런 싸움에 그들까지 끌어들였을 거라고 생각하나, 애송이?” 이븐도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설마. 그러니까 묻는 거야. 역시 그 은인이, 당신한테 그러라고 강요한 거야?” 험악한 기세가 사라졌다. 벵크의 수장은 다시금 반쯤 눈을 감으며 침묵했다. 우울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한 한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고 부탁해서,,,.” “바로 그거야. 거기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들려줬으면 좋겠어. 그 녀석, 정확히 뭐라고 말했지? 그때 어떤 식으로 얘기했는지, 어떤 단어를 썼는지 기억해?” 심상치 않은 열기를 띠며 묻는 이븐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벵크의 수장은 은인의 아들이 한 말을 들려주었다. “저희 군대에 가세해주신다니 정말로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는 조금이라도 많은 전력이 필요합니다. 부디 당신의 힘으로, 바르풀과 고트의 수장도 함께 참여해주시도록 설득해주십시오. 당신이 그분들의 생명을 구해주신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부탁하면 그 분들도 거절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래주시기만 하면 저희는 벵크, 바르풀, 고트, 가장 용맹한 부족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됩니다.” 이븐은 기가 막혀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시나. 이건 수상하다 정도가 아니잖아. 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는 거야? 혹시 당신이 그 사람들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거, 누구나 다 아는 얘기야?” 벵크의 수장도 고개를 저었다. “나 자신은 그런 소리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도움을 받은 경우라면 몰라도, 누구를 도와줬다고 자랑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부족 내에서도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 두 사람은 술에 취하면 반쯤 장난으로 내 이름에 건배를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당신도 그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는 말?” “몇 번이고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다보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법이야.” 이들은 젊었을 때 라그란에 고용되어 함께 싸웠고, 수장이 된 이후로도 적대하는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 “둘 모두 친구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전사들이야. 그런 녀석들이 너희 동료들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더군. 조금 의외였다.” 우클릭은 웃음을 머금은 말투로 말하고서 옛 친구의 아들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이 싸움을 그만두게 하고 싶은가 보더군. 그러기 위해서 내 은인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증명할 생각이지?” 이븐은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조금,,,. 당신들이 화낼 것 같은 방법이라, 말하기가 좀 곤란하긴 한데.” 벵크의 수장은 날카롭게 이븐을 응시했다. 자세하게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이븐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고, 얘기를 들은 벵크의 수장은 안색조차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파렴치하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혹시라도 당신의 은인이 가짜라면 그게 훨씬 더 파렴치하잖아?” 계획이 결정되고, 이븐은 그날 밤 이골과 함께 레테 섬에서 떠났다. 타우에 있어야 할 이븐이 갑자기 이국의 거인을 데리고 돌아오자 국왕은 깜짝 놀랐다. 그 거인이 적의 지휘관 중 한 명이며, 레오르그 아저씨의 옛 친구라는 사실에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골 역시 이븐이 거침없이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눈ㅇ르 치떴지만, 국왕까지 나오게 되자 차마 입도 다물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이븐이 말했던 것처럼, 이 왕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골의 손을 덥석 잡고 친밀하게 말을 걸었다. “기쁜 일이야. 정말 오랜만에 아저씨하고 같은 냄새를 지닌 사람하고 만나게 되었는걸. 가능하면 이런 식이 아니라 다른 기회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이런 소리 해봤자 소용없지. 어쨌거나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 않겠나?” 과연, 듣던 대로 상당히 특이한 놈이군. 이골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지만 국왕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왕비도 그 자리에 동석했고, 이븐은 주군 부부 앞에서 신나게 배를 채우면서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선주민족이 이 전쟁에 참전한 이유를 듣자 국왕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나도 아버지에게 엄하게 교육받았지. 은혜를 입으며 ㄴ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 곁에서 왕비도 말했다. “하긴 너, 나한테도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고마워했었지. 보통은 ‘생명의 은인이라도 이건 안 돼’라든가 ‘괴물’이라고 소리치면서 도망가 버리는데.” 그러자 국왕은 목소리를 낮추며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지금이니까 말하는 건데 실은 아주 조금 그러고 싶었어.” “그래? 왜 도망 안 갔는데?” “네가 없었으면 그 시점에서 최소한 세 번은 죽었을 테니까. 그만큼 신세를 진 은인을, 아무리 특이하다고 해도 괴물이라고 부르는 건 완전히 인간 말종이잖아. 그래서 좀 무리하면서 참았지.” “하기사 너, 얼굴 완전히 새파래졌었지.” “하지만 아버지의 교육이 옳았어. 그때 도망가고 싶은 걸 참으면서 은의를 되씹고 있었던 덕분에 이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승리의 여신을 얻게 되었으니까.” 국왕은 일단 말을 멈추고 이골 쪽을 바라봤다. 북방의 거인은 말없이 식사를 들었지만 한족 눈썹이 미묘하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국왕과 왕비가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그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악을 억누르는 걸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우클릭 경의 은인이라는 사람, 아무래도 수상할걸. 우선 그 태도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은혜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보답을 바란다는 말이잖아? 자기가 도와준 것도 아니면서.” “그 점이 제일 뻔뻔스러워.” 왕비도 맞장구쳤다. 이븐은 서둘러 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월. 그 건으로 조금 필요한 게 있어.” “돈?” “그리고 사람. 스케니아의 내부 사정도 자세하게 알아두고 싶어. 저쪽 선원 중에서 포로로 잡힌 녀석 없어?” “대략의 사정은 파악해놨지만.” 적 함대의 사령관은 두 명. 윈드라스와 장센이다. 백 척을 넘는 대함대는 다시 그 두 사람이 이끄는 두 개의 함대로 나뉘어 있고, 교대로 이족을 공격한다. 배의 손상이나 병사의 피로를 줄이고 가능하면 빨리 승패를 내기 위해 서로 경쟁을 키려는 상층부의 의도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기함에는 서기가 딸려 있고, 양족 사령관의 공격이 어떠했는지 등을 왕궁에 보고한다. 기합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골. 문제의 간수의 아들 이름이 어떻게 되지?” “크라티우스.” “윈드라스 제독의 배에 타고 있는 서기로군. 상당히 유능한 아첨꾼이라고 들었어.” 국왕이 설명했다. “누구한테 아첨을 한다는 거야” “그야 물론 제독인 윈드라스지. 서기라는 건 지휘관의 공적이나 실수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게 임무지만, 크라티우스가 작성한 서류에 윈드라스 제곧이 저지른 실수는 하나도 적혀 있지 않다더군. 선원들 사이에 평판이 대단하더라고.: :참고로 장센의 서기는 어떤 이름이지?“ “데미안.” “현재 윈드라스와 장센 중에 어느 족이 더 활약하고 있지?” “윈드라스야. 그것도--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지만, 윈드라스가 출격하는 때에만 레테 섬에서 원군이 오더군. 크라티우스가 승선하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이븐은 이상한 듯이 물었다. “거 이상한걸? 그 남자가 우클릭한테 한 요구는 스케니아가 승리하도록 힘을 빌려달라는 거잖아? 자기가 타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을 텐데.” “아니, 난 아마도 장센 제독 쪽이 그들의 원호를 거절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대규모 선단을 이끄는 입장에서 선주민족의 조그만 배에 의존해버리면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성과를 올릴 수 없으면 자존심이고 권위고 다 소용없을 테니까. 슬슬 레테 섬의 우클릭 경에게 울면서 매달리든가, 아니면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크라티우스한테 부탁하거나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장센과 윈드라스 사이가 나쁜 건 당연하다고 해도,,,.,장센 제독은 크라티우스한테도 상당히 감정이 있겠군?” “당연하겠지. 그 이상으로 데미안이 크라티우스를 죽어라 싫어하나봐. 같은 서기관이면서 본국은 저 녀석 의견만 중시한다고, 상당히 뒤틀려 있다던데.” 왕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양쪽 다 똑같군.” “음. 나도 말이야, 어떻게 그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 수 ㅇ벗을까 여러모로 궁리는 해봤지만 결국 전과를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단결하고 있어. 어설픈 짓을 했다가는 즉시 상층부에 보고가 올라가 버릴 테니까. 우선 우리들을 쳐부순 뒤에 자기들끼리 다투든가 말든가 할 생각이겠지.” 이골이 낮게 웃었다. “적의 지휘관 앞에서 잘도 지껄이는군.” “아, 이거 실례. 손님을 혼자 내버려뒀군.” 국왕은 웃음을 지었지만 이골은 웃지 않았다. 날카롭게 국왕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소위 말하는 야만인은 쓸데없이 말을 돌리지 않는다. 날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이 없으니까 그러는 건가? 아니면 진지로 돌아간 뒤에 내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일부러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건가?”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깔깔 웃으면서 말한다. “저기 말이야, 덩치 씨. 우리 왕은 확실히 바보이기는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아. 게다가 이븐이 레테 섬에 갔다가 멀쩡히 돌아왔는데 어째서 당신이 여기를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이븐한테 실례잖아.” “글쎄 말이야.” 검은 옷의 독립기병대장도 조금 발끈하며 말했다. “당신은 날 믿고 우클릭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줬어.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무사히 돌려보내겠어. 이 바보가 그 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물고 늘어지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린다. 스케니아의 내부 사정 역시 당신이 안다고 그리 곤란할 것도 없는 얘기잖아.” “멋대로 죽이지 마. 어쨌거나 이골 경에게 실례했군.” 국왕이 불평하면서 다시금 이골에게 사과했다. “처음 만나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해져서,,,. 아무래도 이골 경을 보고 있으면 게오르그 아저씨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아.” 이쁜 듯이 말하는 국왕을 보고 이번에는 이골이 눈을 치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이상하다 정도가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국왕은 최후까지 이골을 정중하게 대접했고 이븐이 항구가지 배웅을 나왔다. 그들을 태운 배에는 사자의 깃발이 걸려 있으니 트레니아 만을 지나가도 공격을 받을 염려는 없지만, 만일에 대비해서였다. 항구에서 헤어질 때, 이븐은 이렇게 말했다. “한동안 레테 섬에서 기다려줘. 준비가 끝나면 바로 알리러 갈테니까.” 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나 개인으로서는 네게 기대하고 싶어. 저 묘한 왕과도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중간한 기대는 금물이다. 기대와 현실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어.” 이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런 철학의 소유자였다. 혀만 놀리면서 이러니저러니 설득하려 해도 절대로 넘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겉보기에 하얗게 보이는 것이 실은 까맣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납득해줄 터였다. 이골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븐은 곧바로 싯서스를 향해 달려갔다. 낮에는 잠들어 있는 이 도시도 저녁이 되면 생생하게 살아난다. 큰 거리에서는 술을 파는 가게나 도박장, 물론 ㅊ아부가 있는 가게도 일제히 문을 열고 점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닌다. 이븐은 그런 가게 중 한 곳의 뒷문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한 소녀가 개점 준비를 하고 있다가 이븐의 얼굴을 보고는 반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알아서 가게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이븐은 이런 종류의 여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발로는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처럼, 물장사를 하는 여자들도 이븐에게서 다른 남자들과 다른 뭔가를 감지하는지도 모른다. 곧 안쪽에서 여자가 나왔다. 한눈에도 싯서스의 여자답게 물장사에 걸맞는 매력을 풍기고 있었지만, 이븐을 바라보는 눈에는 장사와 상관없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어머나, 굉장히 오랜만이잖아?” “조금만 도와줘, 콜비타.” 갑자기 본론부터 꺼내는 이븐을 보며 콜비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야?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응, 상당히 복잡한 일이 있어서. 당신들 힘을 빌리고 싶어.” “호오?” 콜비타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틀어 올린 흑발이 한 줄기 흘러내려 살짝 목에 걸쳐졌다. 이 여자는 옛날에 이 가게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여주인이 되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손님들 사이에서는 이미 마흔이 넘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서른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미모였다. “일단 앉기나 해. 한잔 살 테니까.” 준비된 술에 입도 대지 않고서 이븐은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다. “한동안 가게를 닫고 딴 곳에서 장사를 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공짜로 부탁하는 건 아니니까 보수는 충분히 지불하겠어.” 콜비타도 상당히 흥미가 끌린 듯했다. “꽤 큰일인가보네.” “부탁해. 마누라 목숨이 달려 있어.” “어머나, 세상에!! 기가 막혀. 한동안 안 보이나 했더니 결혼까지 했어?” 콜비타는 짐짓 과장스럽게 놀라는 척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또 괜찮은 남자 하나가 목줄을 매게 생겼네, 아까워라. 당신도 일부러 그런 소리까지 할 것 없었잖아?” “숨기는 건 불공평하잖아. 아니면 결혼해버린 남자한테는 흥미가 없어?” 콜비타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른 남자들이라면. 하지만 당신은 달라. 우리 애들도 그렇게 말할걸?” 물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태연하게 술잔을 비우고서 홍등가에서 살아가는 여자의 얼굴이 되어 생긋 웃었다. “그래서 누구를 꼬시는 건데?” “얘기가 빨라서 좋군.” 이븐도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밀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그즈음 성에서는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일곽을 둘러싸는 제 1성벽 여기저기에는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먼 곳의 이상을 조금이라도 빨리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눈이 좋은 병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근무를 선다. 거기에서 본궁으로 전령이 달려간 것이다. “보고드립니다! 큰일입니다!” 보고를 들은 관리도 새파랗게 질리면서 곧바로 국왕에게 달려갔다. “폐하!! 신호가--붉은 연기가 올랐습니다!!” 파라스트의 참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신호가 오른 지 약 하루 뒤, 파발이 도착했다. 사자의 안색 역시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비르그나는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함락. 5천 명의 병사를 데리고 싸우던 세리의 경은 간신히 탈출했지만, 현재 서쪽 국경지대에는 총 1만 8천의 파라스트 군사가 쳐들어와 비르그나를 거점으로 공격을 펼치고 있다는, 델피니아로서는 최악의 보고였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느냐고, 이미 사건이 벌어진 뒤에 추궁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관료들과 고위 각료들은 졸도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전령을 추궁했다. 무슨 착오가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르그나 함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펜타스에 주둔하고 있던 파라스트 군대의 야습이라고 했다. 파라스트 측은 달이 없는 밤을 골라서 등불도 없이 비르그나의 방벽에 접근해 사다리와 밧줄을 걸고 너무나 손쉽게 방어벽을 넘어 요새에 잠입했다. 비르그나 쪽에서는 설마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펜타스에 진입한 파라스트 군대는 계속 얌전하게 펜타스를 지키고 있었다. 일부러 비르그나에 사자를 보내 인사까지 했다. 비르그나 쪽에서도 그들의 상태를 살피러 펜타스에 사람을 보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 만치 지휘관이고 일반 병사고 매일같이 산해진미와 미녀를 즐기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도저히 전쟁을 하러 나온 군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국왕은 그들의 동향을 철저하게 주의하라고 세리에 경에게 신신당부해두었다. 물론 세리에 경도 경계는 하고 있었겠지만 완전히 늘어진 적의 모습을 보고서도 계속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무장은 그리 많지 않다. 일반 병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파라스트는 정말로 펜타스에 원군을 보낸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적어도 델피니아에 적의가 있는 건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방심해버렸다. 아니, 적이 일부러 방심하게 만든 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라모나 기사단이라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날 밤의 경비도 거의 명목뿐인 부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국왕은 이를 갈았다. 그렇게나 방심은 금물이라고 말해뒀음에도 이런 실책을 저질러버렸다. 하지만 세리에 경을 책망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국왕은 곧바로 손을 썼다. 가능하면 자신이 직접 출격하고 싶었지만 지금 국왕이 코랄을 비울 수는 없다. 트레니아 만에 적의 함대가 시시때때로 오가는 상황에서 국왕이 코랄을 비운다면, 일반 병졸이나 시민들은 국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오론이 노리는 바였다. 국왕은 적병의 상륙에 대비해 교외를 지키고 있던 핸드릭 백작에게 5천의 병사를 맡기며 비르그나를 탈환하도록 명령했다. 사실은 왕비에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현재 왕비는 성 안에 없다. 이미 어제 성을 출발한 상태였다. 그리고 캄센에 전령을 보냈다. 돌아오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런 얘기는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어차피 병사들까지 알게 되는 법이다. 전령의 입으로 듣거나 가족이나 지인이 편지로 알리기 때문이다. 그런 경로로 처음 알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도 심하게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지휘관이 직접 사실을 밝히고 병사들의 동요를 최소한으로 억누르기 위해서였지만, 확실히 상상 이상의 타격이었다. 캄센에 진을 치고 연일 탄가군과 싸우던 나시아스는 순식간에 핏기를 잃었다. 부관인 가렌스도 마찬가지였다. “비르그나가--!!” 그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밝힌 도라 장군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폐하의 계획으로는 일부러 귀공들을 비르그나에서 떨어뜨려 파라스트의 방심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지만,,,. 방심을 유도한 건 적도 마찬가지였네. 세리에 경은 창칼로 싸우기 전에 두뇌전에서 패배했어.” 발로가 코웃음을 쳤다. “잔머리는 너구리 놈 쪽이 더 잘 돌아간다는 말이 되겠군.” “음. 하지만 핸드릭 백작이 이미 비르그나로 향하고 있네. 백작이 반드시 비르그나를 탈환해줄 거야. 우리는 지금까지처럼 이 국경을 사수해야 해. 귀공들도 병사들에게 그리 전해주기 바라네. 특히 동요가 퍼지지 않도록.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만 모쪼록 신중하게 행동해주게.” 국왕이 무엇을 가장 걱정하는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비르그나가 함락되어도 이쪽의 전황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 비르그나를 함락한 적이 이리로 달려오는 것도 아니지만, 이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철벽의 요새였던 비르그나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의 공포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틸레든과 라모나, 양 기사단장은 기합을 넣고 장군의 막사에서 물러났지만 나시아스의 표정은 어두웠다. 비르그나는 그에게 있어 특별한 장소였다. 기사가 된 이래 계속 지켜왔던 요새가 지금 적의 손에 떨어졌다. 견딜 수 없는 울분에 온몸이 떨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얘기지만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자신의 요새를 지켰더라면 이렇게나 간단하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텐데. “얼굴이 어두워.” 갑작스러운 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말하는 발로 자신도 결코 밝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비아냥이 섞인 웃음만은 여전했다. 씨익 웃으며 말한다. “지휘관이 그런 표정 지으면 어쩔 건데. 이런 때에는 말이야, 핸드릭 백작이 비르그나를 탈환하는 건 자명한 이치이며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믿는 거야.” 나시아스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겠지. 알고는 있어. 그렇게 생각해야겠지만,,,.” “더 어두워졌어.” 발로가 진지한 얼굴로 따끔하게 말하자 그 이상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수도 ㅇ벗었다. 나시아스는 마소를 지으며 지금의 심경ㅇ르 솔직하게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미안해. 지금가지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말이야,,,.” 서쪽 국경을 수비하는 것은 결코 평탄한 임무가 아니었다. 일자리를 잃은 용병이 영내로 침입해 약탈을 하는 경우도 있다. 파라스트가 침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라함 경의 배신도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언제나 냉정하게 대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비르그나를 빼앗겼다는 얘기를 듣고서 이런 기분이 될 줄은 나도 몰랐어.” “구체적으로는 어떤 기분이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어. 그저 분하다든가 화가 난다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군. 소중하게 길러온 딸이 불량배들한테 유린당한 것처럼, 정말 견디기 힘들 기분이야.” “뭔 소리야. 딸도 없는 주제에.” 발로는 웃어 넘겼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 나시아스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 손으로 복수해주고 싶은 기분은 알겠지만 지금은 참아. 네 표정, 네 한숨 하나하나가 병사들에게 전염된다. 지금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할 때야.” “미안,,,.” 나시아스도 발로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제각각 진지로 돌아갔다. 그 무렵, 도라 장군은 두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두 통의 편지를 다시 한 번 펼쳐보고 있었다. 한 통은 질이 보낸 편지였다. 북방민족의 사정과 샤미안이 인질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븐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얘기 등이 쓰여 있다. 또 한 통ㅇ느 타르보의 아들이 보낸 편지였다. 거의 질의 편지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그에 더해 질의 부인도 함께 인질이 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도라 장군의 얼굴에 고뇌가 스쳤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충실한 부관이 천막에 들어왔다. 장군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다. 타르보 역시 아들이 보낸 편지로 샤미안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제까지라면 아가씨도 무모한 짓을 하신다고 웃어넘길 수 있었겠지만 비르그나가 함락된 지금 샤미안의 운명도 바뀌어 버렸다. 파라스트의 움직임에 따라서 어쩌면 생명도 위험해진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해봤자 소용없다. 장군도 딸에 대해서는 발로나 나시아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장군 곁에 있어온 부관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부관 역시 도라 장군의 마음ㅇ르 고통스러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 적의 움직임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왜 그러지?” “비르그나가 함락되었다는 얘기는 적도 이미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전혀 움직이려는 기세가 없습니다.” 장군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비르그나의 상황을 탄가가 알게 된다면 사기가 올라가지 않을 리가 없다. 기세 좋게 덤벼든다면 몰라도 오히려 조용한 상태라면 의심해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내려. 오늘 밤쯤에 야습이 있을지도 몰라.” 생각대로 그날 밤 탄가 측이 야습을 걸어왔다. 이쪽도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만큼 훌륭하게 맞서 싸웠지만, 병사들은 아직 동요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평소때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겠지만 어둠에 흔들리는 횃불과 적의 함성, 금속이 부딪히는 격렬한 소리에 몸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조금씩 적의 기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지휘관이 도라 장군이 아니었다면, 용감하기로는 델피니아 제일인 틸레든 기사단이 없었다면, 냉정하고 침착한 라모나 기사단의 활약이 없었다면 델피니아 측은 그날 밤 패배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간신히 캄센을 사수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전황이었다. 한편 비르그나에서는 핸드릭 백작이 도착하기 전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타우에서 파견된 2천의 군사가 파라스트를 공격한 것이다. 사실 타우의 본진은 변함없이 스케니아의 선주민족을 견제하고 있다. 이쪽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타우를 후원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서부 영주들의 군대였다. 그 중에는 한대 알고트의 영주였던 그라함 경도 있었다. 지금은 타우에 귀속된 몸이지만 경에게 있어 파라스트는 자신을 속여 주군을 배신하게 만든,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숙적이었다. 질은 타우 방면의 사령관으로서 파라스트의 토벌을 그들에게 명령했지만 그런 명령이 ㅇ벗어도 그라함 경은 혼자서 돌격했을 것이 틀림없다. “쌓이고 쌓인 이 몸의 분노를 받아라!!” 경은 기뻐 날뛰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하짐나 파라스트의 행동은 무섭도록 빨랐다. 펜타스에 주둔하던 군세가 비르그나를 점거하는 것과 동시에 아비용에서 떠난 군세가 로쉐의 가도를 확보하고 테바 강을 탈환한 것이다. 델피니아는 강의 각 요소에 관문을 설치해 강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 관문은 남김없이 불타버렸고 담당 관리는 내쫓기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 대신 파라스트의 군대가 강을 경비하기 시작했고, 아비용에서는 대량의 군대가 차례로 도착했다. 그라함 경은 처음 펜타스에 주둔하던 5천 명의 군대만을 상상하며 신나게 달려왔지만 이 전황을 보고 완전히 경악했다. 아비용에서 비르그나까지, 완전히 하나의 직선을 이루며 파라스트의 관리 하에 놓여버린 것이다. 아무리 복수의 일념에 불타고 있는 그라함 경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멍청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이 굵은 선을 끊어놓으려고 해도 겨우 2천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제나 신중하게 전쟁에 임하는 오론치고는 참으로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오론 본인은 어째서인지 출진하지 않았다. 안테슈 장군을 선봉으로, 신임하는 장군들에게 이 대대적인 침공 작전을 맡겨두고 본인은 아비용 성에 가만히 틀어박힌 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델피니아에 풀어둔 간첩의 보고 때문이었다. 비르그나가 함락되자마자 왕비가 홀로 코랄을 떠나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후하게 장식된 아비용 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궁에서 오론은 전쟁의 흥분에 몸을 떨고 있었다. 적어도 오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혹시 이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반드시 채찍의 보답을 해주겠다고 기합을 넣고 있다. 지금 오론이 있는 곳은 그 이후 특별히 제작한 거실이었다. 방의 세 면은 벽으로 둘러싸여, 출입구는 한 군데밖에 없다. 개중 두 벽은 화려한 장막으로 가려두었지만 그 뒤에 숨겨진 방에서 지금도 무장한 병사들이 숨을 죽이고 대기하고 있다. 그밖에도 천장에 공간을 만들어 여기에도 호위병을 배치할 수 있게 해두었다. 또한 이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하나뿐이고, 튼튼한 잠금쇠가 달린 강철 문이 세 군데에나 설치되어 있다. 성 내부에 요새를 만든 것이나 다름ㅇ벗다. 거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여러 명의 여자들을 곁에 두었다. 애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일의 경우에 방패로 쓰기 위해서였다. “곧 5월,,,.” 뒤룩뒤룩 살찐 오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왕비의 암살을 의뢰한 것은 재작년 가을. 그들은 2년 후 여름가지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대답했다. “여름,,,, 올 여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갑자기 주군이 소리를 지르자 곁에 있던 여자가 흠칫 놀라면서 몸을 움츠렸다. “왜 그러십니까? 여자의 질문에, 파라스트의 국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든 술잔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붉은 연기가 오른 날, 왕비는 성을 나섰다. 종자 한 명 이외에는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아직 문제의 소식은 성 안에서도 극히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왕비가 어디 나들이라도 나가는 걸로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타고 있는 말은 그라이아가 아니므로 왕비는 말에 고삐를 매어두었다. 이곽을 내려가는 도중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외출하시나요, 비전하?” 모자를 쓴 라티나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본궁으로 올라가는 도중이었던 듯하다. 왕비도 말 위에서 라티나를 향해 웃으며 이 사람에게만 진짜 사정을 밝혔다. “싸우러 가는 거야.‘ “예엣?! 하지만 혼자서?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요?” “조금 특이한 싸움이야. 한동안 못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것을,,,.” 라티나가 내민 것은 한 송이의 장미였다. 선명한 붉은색 장미를, 거미줄처럼 섬세한 흰색 레이스로 감싸 장식했다. “막 한 송이가 피어서,,,.” 왕비는 웃음을 지으며 장미를 받아들었다. 말 그대로 피처럼 붉은 색이다. 꽃잎은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새하얀 레이스와 잘 어울린다고, 정말로 아름답다고--스스로도 의외였지만 왕비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예쁜걸.” “마음에 드시나요?” “응. 고마워, 정말 멋진 선물이야.” 왕비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서 가슴에 두른 천 사이에 그 꽃을 꽂았다. 전체적인 인상이 상당히 부르더워진다. “전쟁이라면, 캄센으로 가시는 건가요?” 라티나가 물어본 것은 물론 남편 안부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려는 생각에서였지만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반대쪽이야. 나시아스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다음 기회에 전해줄게.” 왕비가 말의 배를 걷어차자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함께 따라오던 젊은 종자가 라티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왕비의 뒤를 따랐다. 오론과는 반대로, 왕비가 코랄 성을 나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왕비가 말을 타고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왕비를 배웅했다. 왕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던 거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거적을 말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간다. 거지는 시내의 어느 저택 뒷문으로 다가가 가련한 목소리로 구걸을 했다. 장작을 패고 있던 하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거지를 쫓아내려 했지만, 마침 그때 저택에 묵고 있던 젊은 남자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어이, 기다려봐. 그렇게 험악하게 쫓아내면 너무 불쌍하잖아.” “하지만 이런 놈들은 한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서,,,.” “괜찮아. 자, 받게.” 젊은 남자가 동전을 꺼내서 거지에게 던져주었다. 하인은 별난 짓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따라서 거지가 동전을 받아들고 절을 하면서 소리 없이 뭔가를 속삭였다는 사실은 깨달을 수 없었다. 젊은 남자는 그대로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2층으로 올라가자 민스와 반츠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움직이는군.” 레티시아는 유쾌하게 말하면서 하인에게 미리 준비해두었던 비둘기를 날리도록 명령했다. 기품 있는 집사 같은 차림의 민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은 건 계획대로군.” “그건 그렇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 또 덤이 따라붙었나봐.” “그 마을 출신 떨거지 말야?” “응. 아무래도 그게 자꾸 방해를 한단 말이야. 해치워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민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것 없잖아. 중요한 일을 앞둔 시점인데.” “그러니까 더욱 처리해야지. 더 이상 실패할 수는 없으니까. 나도 위치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 되면 네 차례군, 반츠아.” 반츠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가도 괜찮겠어?” 고양이 눈의 청년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되게 겸손한 척하네. 그건 원래 네 사냥감이잖아. 왕비를 처치하기 전에 미리 떼어내서 없애주면 나도 고맙겠어.” 키 큰 청년은 말없이 일어나 소리 없이 방에서 나갔다. 반츠아는 입구에서 방 안을 돌아봤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이번만큼은 고맙다고 해둬야겠군.” “잘 다녀오라고.” 7장 오르테스는 중앙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4월 초순, 코랄 만에 스케니아의 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화삼국 중에서 눈에 띄게 풍요로워진 델피니아를 다른 두 나라가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케니아라는 나라까지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이후의 전황은 눈에 띄게 델피니아 측에 불리해졌다. 얼마 전 파라스트까지 행동을 개시해 비르그나가 함락되었다. 지금 코랄도 함락 직전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쪽도 다시 입장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린다 왕비가 말했던 것처럼 오르테스는 무엇보다도 안전을 중시하는 왕이었다. 싸움에 질 상대의 편은 들지 않는다. 설령 편을 들고 싶다고 해도 현재 오르테스는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 파라스트에서 친선의 명목으로 보내온 대사가 성 내부의 상황은 물론이고 오르테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종주국의 사자이니 당연히 오르테스도 정중하게 대접했다. 부임해온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중앙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하도 알고 계시겠지만, 델피니아는 부당한 욕심을 부리며 오론 폐하의 중재가 있었음에도 자기 것도 아닌 타우의 금맥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타우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은 수많은 서류에도 명백하게 남아 있으니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입니다만, 동생 분의 일이 있었기에 오론 폐하도 한 번은 델피니아의 요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래대로 바로잡으려고 해도 델피니아는 전혀 응하지 않았지요. 어쩔 수 없이 오론 폐하는 무력으로 이를 시정하려 하셨습니다. 무모하게 금맥을 탐내던 델피니아는 타우만이 아니라 나라 자체를 잃게 되었지요. 유린당할 백성들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가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네 몸이 소중하면 얌전히 있으라는 말이다. 대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폐하는 2만이 넘는 병력을 델피니아에 파견하셨습니다만 연로한 신하들 중에서는 수도의 방어가 너무 부실해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병력을 파견해버리면 아비용에 남는 군대는 겨우 1만 5천뿐이니까요. 아니, 물론 우리나라의 병사들은 단 100명만 있어도 충분히 실력을 발휘하는 용맹한 자들이지만 역시 입장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파라스트 국왕의 신변을 지키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1만 5천의 군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으니, 모반 따위 해봤자 소용없다는 의미였다. 물론 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상당히 과장한 것만은 틀림없겠지만 아무리 대대적으로 침공을 개시했다고 하더라고 저 교활한 오론이 자신의 주위를 비워둘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상당한 전력이 방어를 위해 남아 있을 터였다. 오르테스는 자신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겁쟁이는 아니었다. 이길수 있다는 승산이 있다면 오론의 등을 치는 것도 상당히 매력적인 선택이었지만, 어차피 참패할 수밖에 없다면 움직여봤자 바보짓을 뿐이다. 중신들도 오르테스의 의견에 찬성했다. 개중에서라도 리리아 왕비의 아버지인 하이온 공작은 유능한 수완과 성실성, 신중한 성격으로 왕국 내에서도 특히나 중용되는 인물이었다. 그 공작은 델피니아의 동맹 자체를 아예 파기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천명했다. “굳이 말씀드릴 것까지도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델피니아가 뭔가 얘기를 가져온다고 해도 아무 이유나 붙여서 거절하는 겁니다. 모쪼록 경솔한 행동은 삼가주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르테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장인어른은 걱정이 너무 많군. 이 상황에서 내가 그 나라 편을 들 리가 없지 않나.” “황송합니다. 하지만,,,” 공작은 불안한 듯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델피니아에서 아무 얘기도 없다는 게 조금 신경이 쓰입니다.” 오르테스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니아 함대가 나타난 지 벌써 50일이 넘었습니다. 비르그나가 함락된 날로부터도 반달이 흘렀지요. 단 한 번도, 사자조차 보내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오르테스는 코랄 성에서 만났던 델피니아 국왕 부부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좋게 말하자면 지나치리 만치 융통성이 뛰어나고 나쁘게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짜. 어느 쪽이든 간에 무슨 생각을 하는 ㄱ너지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하이온 공작은 조금 곤란해하며 말했다. “저쪽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굳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하기도 그렇습니다만, 델피니아가 다시 우세를 점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역시 뭔가 방법을 강구해두는 것이,,,.” 오르테스의 수려한 얼굴에 복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말이네, 곤란하게도 델피니아의 국왕 부처에게는 상식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아. 어떤 이유로 사자를 보내겠다는 말이지?” 하이온 공작 역시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상식과 어긋나는 쪽으로 나가볼까요. 영웅으로 이름 높으신 폐하와 비장군으로까지 칭송받는 비전하라면 이 정도의 전황 따위는 위기라고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므로 저희는 안심하고 선전을 바라며 지켜보겠습니다--라고?” 오르테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거 좋은 구실이군. 의외로 납득해줄지도 몰라.” 2층 복도에서 정원을 내려다본다. 마침 리리아 왕비가 시녀를 데리고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2층을 올려다보다가 남편과 아버지를 발견하고 인사를 한다. 이 요크 성은 평지에 세워진 성이지만 토지 자체는 광대한 편이었다. 다른 성과 마찬가지로 공무를 집행하는 외부와 내부의 후궁으로 나뉘어 다양한 수목과 색색 가지의 꽃이 넓은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다. 리리아 왕비는 공작가의 딸로 태어나 왕비가 된 이후로는 더욱 외부와 인연이 멀어진 상태였다. 그녀가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성의 정원을 산책할 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비를 뒤를 따르던 시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요즘 어쩐지 성 안이 소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파라스트에서 사자가 온 뒤로는 폐하도 바쁘셨으니까.” 중앙의 소동도 이들에게는 먼 나라의 일에 불과하다. 실제로 리리아 왕비나 이 시녀는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따라서 파라스트의 사자가 왜 성에 체재하고 있는지 역시 알지 못했다. 산책로를 한 바퀴 돈 왕비가 성 안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시야 구석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왕비는 신경이 쓰여 그쪽을 돌아보았다. “?!” “비전하, 왜 그러시지요?” 왕비가 갑자기 발길을 멈추자 시녀가 이상한 듯이 물었다. 리리아 왕비는 서둘러 시녀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먼저 돌아가서 차 준비를 해줘.“ “네? 하지만, 비전하께서 혼자,,,.” “괜찮아, 곧 갈 테니까.” 시녀는 조금 주저하다가 얌전히 왕비의 지시에 따랐다. 혼자 남은 왕비는 산책로 반대편에 있는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여기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게다가 입술에 손을 대고 ‘조용히’라고 신호까지 보냈다. 살짝 나무를 짚으며 수풀 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다. 역시 착각이었을까 생각하는 순간,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났다. “잘 지냈어?” 리리아는 펄쩍 뛰어올랐다가 당황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린디에타 왕비님! 아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그린디에타 왕비였다. 시종 같은 차림으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서 있다. 산세베리아의 왕비는 우아한 동작으로 무릎ㅇ르 굽히며 인사했다. “잘 와주셧습니다.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남편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기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어라, 못 들었어?” 그린다 왕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고 리리아 왕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뭔가 큰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진 것이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린다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곧 돌아갈 테니까.” “어머나, 하지만 그래서는,,,.” “괜찮아. 오늘 난 유괴범이니까 오래 있을 필요가 없거든.” “유괴범?” 리리아 왕비는 깜짝 놀랐다. 심상치 않은 단어였다. 뭔가 착각이 아닌가 생각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그, 누군가를 유괴하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응.” 너무나도 밝고 명랑한 그린다 왕비의 표정에 리리아 왕비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어떤 분을 납치하시려는데요?” 그린다 왕비는 씨익 웃으면서 리리아 왕비를 가리켰다. 밤이 되자 요크 성은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무리도 아니다. 왕비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최후까지 함께 있던 시녀는 비전하께 특별히 이상한 점도 없었고 수상한 자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며, 거의 반 광란 상태가 되어 주장했다. 오르테스는 물론 경비병을 총동원해서 성 안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왕비는 발견할 수 ㅇ벗었다. 결국 왕비는 성 안에 없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르테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어째서 리리아가 이런 형태로 왕궁에서 모습을 감춰야 하는 건지,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었다. 하이온 공작을 불러서 둘이서 면담을 했다. “장인어른께는, 뭔가 짐작 가는 구석이 없으신가? 리리아가 반드시 혼자서 가고 싶어할만한 장소라든가, 뭔가,,,.” 역시 흙빛에 가까운 안색이었지만, 공작은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시녀 한 명도 없이 외출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차도 말도 사용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딸의 의사로 나갔다면 자기 발로 걸어서 나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요. 절대로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누군가가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르테스는 낮게 신음했다. “이 성 내부에서?” “믿기 어렵지만 실제로 왕비의 모습이 사라졌으니,,,.”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오르테스의 수려한 얼굴이 고뇌로 일그러졌다. 리리아가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다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런 형태로. 하이온 공작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폐하. 이 성내에서 딸--왕비를 납치했을 정도면 흔해빠진 불량배일 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뭔가 요구를 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원통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적이 어떤 자인지, 어디로 도망쳤는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래서는 추적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공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오르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격렬한 번뇌와 고민에 현기증마저 들었다. 온몸의 힘이 전부 빠져버린 것 같았다. 그런 상태였기에 정원에 면한 발코니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유괴범의 요구를 말해도 좋을까?”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히 하이온 공작은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보다도 먼저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주군이 강하게 제지했다. 이런 곳에서 들을 수 있을 리가 ㅇ벗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절대로 잘못 ㄷ르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창가르 ㄹ바라보자 예상대로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인간이 거기 서 있었다. 오르테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그린디에타 왕비,,,.” 신음에 가까운 주군의 목소리에 하이온 공작은 말문을 잃었다. 공작은 주군과 침입자를 번갈아 바라봤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있을 리가 ㅇ벗었다. 오르테스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어째서 이 자리에 계신 건지, 지금의 말씀은 무슨 뜻인지 들려주시기 바라오.” 살기어린 질문에 그린디에타 왕비는 씨익 웃었다. “유괴범으로서의 요구라고 했잖아. 빨리 추격대를 보내줬으면 좋겠어. 백주대낮에 왕비가 성에서 납치됐는데 남편인 국왕이 대대적으로 추적대를 조직해서 유괴범을 쫓는다고 누가 의심하겠어? 시끄럽게 잔소리나 해대는 감시역이라고 해도 말이지.” 오르테스는 말문을 잃었다. 단정한 얼굴이 점점 상기되었다. “그 때문에,,,. 내가 병사를 일으키게 만들려고 내 처를?!” “넌 작년에 월과 동맹을 맺었을 때 왕비를 인질로 맡기겠다고 약속했어. 난 그 약속대로 했을 뿐이야.” 오르테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그때,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어도 이미 부인은 저쪽 손에 넘어가 있다. “지금에야말로 동맹의 증거를 보여주실까. 오론의 관심은 완전히 델피니아에 향해 있어. 서쪽 국경은 텅 빈 거나 다름없다고.” 오르테스는 험악한 표정으로 왕비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처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린다 왕비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오르테스에게 던졌다. 서둘러 봉인을 뜯고 내용을 살핀 뒤, 오르테스는 낮게 신음하며 편지를 장인에게 넘겼다. 하이온 공작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제가 탄 마차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여행이라 많이 힘이 드는군요. 모쪼록 이 편지를 가지고 간 분께 편의를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 이건,,, 딸의 필적입니다.” 공작은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한편 오르테스는 느닷없는 침입자에게 흥분하며 외쳤다. “일국의 왕비씩이나 되는 분이 유괴?! 어째서 리리아한테 이런 편지를 쓰게 만든 건가!!” “착한 부인이더군. 남편과 월이 동맹을 맺었을 때부터 해둔 약속이었다고 하니까 그 편지를 써줬어. 당신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더니 미안하게 생각했나봐.” 그린다 왕비는 유쾌하게 웃고서 그 녹색 눈으로 오르테스의 온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언제까지고 이 변경에서 썩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야. 오론의 병력의 대부분을 델피니아 침공으로 돌렸어. 그런데 넌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볼 생각이야?” 계속되는 충격에 심하게 동요하면서도 오르테스는 오르테스였다. 이런 말 정도에 간단히 흔들릴 만한 인간은 아니다. “아무리 델피니아와 금맥에 눈이 어두워 있어도, 그 오론이 전투력 전부를 파견할 리가 없어. 아무리 무능한 왕이라도 자기 주위만은 철저히 방어하게 마련이지. 게다가 그 정도로 신중한 인물이,,,.” “맞는 말이야. 1만 5천은 뻥이지만 대충 5천 정도는 남아 있지. 단, 그 병사들은 전부 아비용 성의 근위병단이야. 하나 더 말해두자면, 그 군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아비용 성의 삼중방벽에서 나오지 못해.” “,,,,,,?” 이상한 소리였다. 분명히 근위대라면 주군을 지키는 것이 임무겠지만 상황이 변하면 포진도 변하게 마련이다.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는 성격의 존재는 아니다. 얼굴 가득히 의심의 표정을 짓는 오르테스와는 대조적으로 왕비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오론은 날 무서워하고 있거든. 다름에는 채찍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완전히 겁에 질려 있어. 그러니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군대는 곁에 남겨둬야 해. 당연히 바깥이 비게 되지.” 왕비의 녹색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장난스럽게 위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알겠어? 테바 강과 반대쪽 국경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도, 영내에 누가 침입해도 오론은 군대를 움직일 수 없어. 당연히 침입자를 격퇴할 수도 없지. 델피니아로 보낸 대부대를 도로 불러들이지 않는 한은.” 산세베리아 국왕은 한동안 침묵했다. 하이온 공작 역시 아가의 충격에서 회복되어 이번에는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아연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긴 침묵 뒤에 오르테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서쪽에서 침입한 누군가는 결국 파라스트로 돌아온 대군의 맹공을 받게 되지. 도저히 승산이 없고.” “큰 것을 손에 넣으려면 때로는 다소 도박도 해봐야지.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건 실제로 붙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지상에 강림한 승리의 여신이라도?” 이 비아냥에 왕비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움직여보지 그래. 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승리의 여신도 되고 재앙 덩어리도 돼. 날 믿는다면 하미아가 네게 미소 짓겠지만 의심하면 승리도 도망쳐버리지.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월이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라고. 그 녀석은 이 괴상한 승리의 여신 덕을 제일 많이 본 인간이니까. 내 덕택에 다시 왕좌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녀석이라고. 한 번 믿어 봐도 손해 볼 건 없지 않겠어?” “,,,,,,.” “오론은 그리 간단하게 침공군을 불러들일 수 없어. 하고 싶어도 못하지. 모처럼 비르그나까지 확보해놓고 도로 철수하려면 애초에 침공을 시작한 의미가 없으니까.” 오르테스의 눈이 흔들렸다. 어떤 길이 최선인지, 그에 동반하는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필사적으로 가늠하려 하고 있다. 그린다 왕비가 갑자기 등을 쭉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날씬하고 작음 몸이 갑자기 커져 보였다. “동맹자로서 말하겠다. 델피니아 왕비 그린디에타 라덴은 국왕 월 그리크의 이름 하에 산세베리아 국왕 오르테스에게 조약의 이행을 요구한다. 파라스트의 주의가 동쪽으로 쏠려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적의 등을 쳐줄 것. 이를 위반했을 경우 두 번 다시 부인과 만날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하도록.” 이 협박에 오르테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처를,,, 죽이겠다는 건가!!” “설마. 돌려주지 않을 뿐이야. 리리아는 귀여우니까 계속 코랄에서 보호하도록 하지. 남편이 보고 싶다고 울지도 모르지만 그건 절대 내 잘못이 아니야.” 씨익 웃는 얼굴도 얘기하는 내용도 단연코 남자였다. 그러나 모습이나 목소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인 것이다. 오르테스와 하이온 공작은 정체 모를 현기증을 느꼈다. 자칫하면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발코니에 발을 올리면서 왕비는 다시금 강조했다. “잊지 마. 부인을 납치한 범인은 동쪽으로 도주했어. 서둘러 쫓으며 아직은 늦지 않아.”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 왕비의 모습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르테스는 머리를 싸쥐며 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 이상 서 있을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하이온 공작은 딸의 안부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일념으로 발코니로 달려가 눈에 힘을 주며 ㅈ어원을 훑어봤다. “폐하! 빨리 추격을,,,!” “소용없어,,,.” 얼굴을 덮은 손 틈으로 억누르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비용 성에도 숨어 들어갔던 인간이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이온 공작 역시 숨을 삼켰다. 주군의 앞임에도 상관 않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하여 천장을 응시한다. 공작은 주군과 마찬가지로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저 자가,,, 델피니아의 왕비입니까?” “그렇다,,,.” 일국의 왕과 그 중신이 머리를 싸쥐며 그저 신음할 뿐이었다. 한심한 얘기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행동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일으키느냐가 큰 문제였다. 마침내 오르테스는 마음을 다잡고 진지한 얼굴로 공작에게 말했다. “장인어른께서는 저 왕비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글쎄요,,,.” 왕의 오른팔로까지 불리는 이 공작이,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ㅁ소하고 있었다. “뭐랄까, 그게,,,. 실로 씩씩한 분이로군요.” “명언이야.” “저분이 하신 말씀이 정말입니까? 오론 폐하가 거성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이,,,.” 오르테스는 생각에 잠겼다. 오론이 저 왕비를 두려워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이온 공작이 다시금 신음했지만, 이것은 이미 탄식이 아니라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실로--저 사람이야말로 승리의 여신의 화신이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치고는 좀 지나치게 미인이기는 하지만,,,.” 중얼거리다가 오르테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인어른. 난 도박은 좋아하지 ㅇ낳아. 특히 일국의 운명을 건 도박 따위는 말도 안 되지.” “예.” 두 사람은 힘차게 일어섰다. 아무래도 그린다 왕비의 기개에 감화받은 듯했다. 오르테스는 거실에서 나오자마자 한밤중임에도 큰 소리로 출진을 명했다. “말을 내와! 움직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나를 따르라!!” 왕비의 실종에 당황하며 전전긍긍하던 성 전체가 일제히 긴장을 더했다. 한편 요크 성에 파견되었던 파라스트의 대사는 이 소동에 경악하며 오르테스에게 간언했다. “기다리십시오, 오르테스 전하. 이건 어찌된 의미의 출진이십니까?!” 그 목소리에는 비난과 협박이 담겨 있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어찌 이런 경솔한 행동을! 현명하신 폐하의 판단이라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오론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이니 만치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오르테스는 언성을 높이며 대사의 말에 반박했다. “당신들 짓인가?!”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냐니, 저녁 무렵부터 벌어진 소란을 모르신다는 겁니까? 내 처가 누군가에게 납치당했습니다! 그것도 이 성 안에서! 게다가 이 서간가지 날아왔습니다. 직접 보십시오!!” 리리아 왕비의 편지를 보고 대사의 안색도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오르테스는 더욱 사납게 대사를 몰아붙였다. “마차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전 지금까지 오론 폐하께 순종해왔습니다. 폐하의 온전에 감사하며, 파라스트의 비호와 온정하에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론 폐하는 이런 제 마음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마, 마, 말도 안 됩니다!! 폐하의 심정을 알겠습니다만 말씀을 삼가십시오! 오론 폐하가 유괴 따위를 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저는 전력을 다해 처를 되찾겠습니다. 간섭하지 마십시오!!” 그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준비를 마친 무장들이 차례로 보고하러 달려왔다. 오르테스 역시 재빨리 전투복을 걸치고 말에 올랐다. “오론 폐하께는 사자를 보내 사정을 설명하겠습니다! 이 오르테스, 처를 빼앗기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오르테스는 힘차게 선언하고 말의 배를 박찼다. 말을 탄 기사 50명 정도가 그 뒤를 따른다. 다시 그 뒤로 준비를 마친 부대가 차례로 출발했다. 요크에서 파라스트와 인접하는 국경까지는 약 180카티브. 아무리 서둘러도 사흘이 걸리는 거리지만 오르테스는 달리고 또 달려 이틀 뒤 밤에는 이미 국경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일단 멈추고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파라스트 영내로 들어갔다. “산세베리아 왕비를 납치한 범임이 이 근처에 숨어 있으므로 수색을 하겠다!” 이러한 구실과 함께 주요 영주들의 저택과 대부분의 요새를 빠짐없이 공격했다. 유순한 양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산세베리아의 행동에는 파라스트 서부의 영주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조공국 주제에 건방지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털어버리려 했지만 산세베리아의 군대는 본래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저 전체적인 숫자가 파라스트와 비교하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얌전히 있었을 뿐. 그런 마음은 죽누 이상으로 병사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사사건건 종주국의 권위를 내세우며 전쟁이나 노동을 강요했다. 하지만 완전 남이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며 머리를 밟아대는 데에 기분이 좋을 인간이란 없었다. 지금까지의 자세와 정반대의 방침을 취한 국왕에게 쾌재를 부르는 이도 있어도 불만으로 여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병사들은 공격 명령이 나오자마자 파라스트 서부를 신나게 휘저었다. 당연히 이를 막을 힘이 없는 서부의 영주들과 각 요새의 책임자들이 증원을 해달라고 아비용 측에 부탁했다. 오론은 쾌히 부탁을 받아들였지만, 근위병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오론은 겨울 사이에 함락시켜둔 공후국에 출병을 요청했다. 본래 델피니아와 싸울 때 이용하려고 끌어들인 나라였지만 그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비용 성에는 현재 5천의 병사가 대기하고 있다. 근위병으로는 너무 많은 숫자지만 오론은 최소한 이 정도의 군대를 데리고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이런 태도가 사람들의 불만을 살 거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보수를 약속하며 여러 공후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파라스트 서부의 국경선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지 사흘째 낮, 그린다 왕비와 리리아 왕비를 태운 마차가 그 격전지에 접근했다. “어머나, 불이 났어요.” 평범한 평민 처녀 같은 옷을 입은 리리아 왕비가 먼 곳을 보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지붕이 달린 짐마차였다. 침대와 필요한 가재도구를 실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게 만든, 유랑민들이 이용하는 물건이다. “당신 남편이 활약하고 있는 거겠지. 상당히 겁을 줘놨으니까.” 그린다 왕비가 중얼거렸다. 이쪽은 평소처럼 시종 같은 복장이다. 마부석에 앉아 느긋하게 걸어가는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곧 작별이야. 그간 불편하게 해서 미안.” “아닙니다.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때때로 유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걸요. 물론 그린디에타 왕비님께라면, 이지만요.” 그린다 왕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요크에서 닷새 만에 국경에 도착했다. 오르테스의 군대는 처가 탄 마차를 추월해버린 것이다. 이 짐마차는 겉은 평범해 보이지만 실어둔 물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것들뿐이었다. 다기는 은제, 깃털이 들어간 비단 침구에 진짜 유랑민이라면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목욕통까지 마차 밑에 구비하고 있다. 최고급 비누도 있었다. 식량 역시 소금에 절인 고기, 훈제 요리, 벌꿀에 절인 과일, 남국의 향신료 등등 리리아 왕비가 익숙해져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만을 엄선해서 실어두었다. 앞서 가던 셰라가 돌아와 마부석에 있던 왕비와 합류했다. “여기서 5카티브 앞에 오르테스 전하의 진영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럼 거기까지 보내줄까, 아니면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나을까?” “당신은 얼굴을 비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분명히 화내고 계실 테니까요.” “오르테스가 나한테?” 왕비는 웃음을 짓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강조했다. “리리아에 대해서 화난 건 아니겠지?” “예, 그야 물론...” “걱정하고 있어?” “아뇨. 당신이 데리고 있는 거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셰라는 파라스트 서부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공후국의 원군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테바 강 주변에는 델피니아나 파라스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작은 공국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하나, 무스카리 공국이 천명의 군대를 데리고 산세베리아로 접근하고 있다. “좀 두들겨줄까.” 왕비는 작에 중얼거리고서 다시 셰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신은 변함없이 말이 가는 대로 느긋하게 나아간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길 반대편에서 군대가 달려왔다. 얼핏 200명 정도의 소부대였다. 그 부대의 대장은 짐마차 옆에 말을 세우고서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사람을 일부러 불러오다니 유괴범치고는 배짱이 대단하시구먼요.” 달튼이었다. 왕비는 셰라에게 이 남자를 불러 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러니까 저보고 리리아님을 폐하가 계신 곳으로 모셔가라 이겁니까?” “그것도 있지만 그 전에 일 좀 하지 않겠어?” “헤에?” 무스카리 공국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왕비가 말했다. “너하고 네 부하를 좀 빌렸으면 좋겠어.” 달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이십니까?” “그런데?” “당신, 딴 나라 왕비 아닙니까.” “오르테스는 아직 텔피니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얘기를 안 밝혔나? 그렇다면 확실히 좀 곤란하겠지만...” “아닙니다. 출진하자마자 바로 병사들에게 얘기가 있었습니다. 큰 승리를 얻기 위해서 때로는 도박도 필요하다고요. 도저히 우리 전하가 하실 만한 소리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 델피니아와 동맹을 맺었다면서요.” “그럼 잘됐군. 너희들 뒤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무스카리 놈들한테 알려주자고.” 왕비에게도 계산이 있었다. 무스카리의 장병들은 자신들과 관계도 없는 싸움에 끌려온 것이다. 직접 전쟁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긴장도 경계도 하지 않을 터였다. 왕비는 그런 시점에서 기습을 하자고 제안했고, 달튼 역시 기막혀하면서도 그에 동조했다. 이 남자 역시 이런 의미로는 상당히 특이한 인간이었다. 주군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타국의 장수와 손을 잡고 전투를 하려 하는 것이다. 왕비와 달튼은 200명이라는 소부대의 특성을 살려 은밀하게 적에게 접근한 뒤, 무스카리 측이 휴식을 하며 식사를 준비하는 순간을 노려 습격했다. 반쯤 나들이라도 나온 기분으로 제각각 주저앉아 식사를 하던 무스카리의 병사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그린다 왕비는 그 혼란 한가운데를 단숨에 휩쓸고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똑바로 적의 대장을 목표로 달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대장의 목을 베어버렸다.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왕비가 엄청난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지상에 현신한 하미아와 싸워볼 용기가 있는 인간은 앞으로 나와라!!”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젊은 여자다. 저 모습만 봐도 확실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대체 누가 이런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델피니아의ㅡ 비장군!!” 그 시점에서 달튼이 이끄는 부대가 적을 덮쳤다. 숫자는 1/5에 지나지 않지만 기세가, 기합이 달랐다. 무스카리의 군대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싸움 뒤, 달튼은 리리아를 데리고 오르테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부인을 만난 오르테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동시에 리리아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건 그 사람이 입힌 옷인가?” “예. 정원 구석에서 이 옷으로 갈아입으라면서. 그 뒤에 그분과 함께 성문으로 나왔습니다.” 오르테스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문지기를 책망할 수는 없었다. 이런 차림이면 설마 왕비였을거라고는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꾸짖을 생각은 없었지만 기가 막혀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순순히 따라간 거지? 사람을 불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리리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유괴된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부르려고 하면 폐하의 곁에 돌려보내주지 않겠다고 협박을 당해서...” 리리아는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전하. 저는 정치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전하가 델피니아와 맺은 조약은 전하께 있어서도 산세베리아에 있어서도 굉장히 소중하고 의의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수단은 난폭하더라고, 이것은 반드시 전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저는 그 말씀을 믿고 그분을 따라갔습니다.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한 짓이 틀렸습니까?” 오르테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엄청나게 비정상적이고 상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다 짜증나기 그지없는 사람이지만, 믿어도 좋을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난 아직 여기서 할 일이 있으니 먼저 성으로 돌아가. 아버지께서 걱정하고 계시니.” “예.” 리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절을 하고 물러났다. 옷차림은 평민이나 다름없어도 몸가짐은 지극히 우아했다. 오르테스는 그런 처를 사랑스럽게 느끼면서 부인이 자신의 곁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리리아는 여전히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며 의지하고 있었다. 본래 부인이라는 것은 이래야 하는 법이다. 델피니아의 국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인간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오르테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아마도 ‘어째서’ 라는 이유 같은 것은, 그 두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리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도 지금까지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한참 뒤에 그린다 왕비가 리리아를 위해 준비한 마차를 검사하면서 오르테스는 다시금 델피니아의 왕비가 얼마나 성의를 다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달튼 역시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말입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무스카리 놈들을 공격한 겁니다. 자기 모습과 이름, 그리고 저 기량이 얼마나 위력을 가지는지 다시금 실감할 수밖에 없더군요. 무스카리의 병사들에게 가능한 한 자신의 인상을 뚜렷하게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게 싸웠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면 다른 소국들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얘기인가?” “그렇겠지요. 저쪽에는 전쟁의 여신이 붙어 있다, 파라스트의 꼬임에 넘어가서 델피니아와 싸우기로 약속했어도 실제로 그 사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 싸울 생각이 나겠습니까?” 달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왕비한테 도박을 건 게 정답이었습니다. 진짜로 전쟁의 여신이더군요.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같이 싸워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달튼의 말이 옳았다. 델피니아의 비장군의 이름과 그 용맹한 모습은 엄청난 위협이었던 듯, 이후로 다른 공후국들은 오론의 지시에 응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8장 중앙 지역의 전황이 일변한 시점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펜타스였다. 자기들을 비호해야 할 오론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침략자들의 편으로 돌아서서, 자세히 사정을 들어보니 저쪽이 화내는 것도 당연하다며 펜타스에서 군대를 철수해버린 것이다. 그 대신 밀려 들어온 것이 스케니아의 대함대였다. 일전의 덩치 큰 남자들과 달리 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으로 질이 나빴다. 펜타스의 유력자들은 파라스트의 장병에게 미녀와 산해진미를 제공했지만 적어도 공짜는 아니었다. 엄청나게 싼 값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청구서를 내밀고, 파라스트 역시 제시받은 금액은 확실하게 지불했다. 그런데 스케니아 사람들은 돈을 내려 하지 않았다. 장교에서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실컷 먹고 마시면서 원하는대로 여자를 안고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악이나 무용쯤 되면 말할 것도 없었다. 술자리에 불러내서 신나게 즐기고서 은화 한 푼도 내지 않는 것이다. 곤란해진 가게 주인들이 상부에 진정서를 올렸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우리들은 탄가, 파라스트와 동맹을 맺고 델피니아를 대신해 중앙의 한 축을 맡기 위해 찾아왔다. 그런 우리들이 조금 편의를 본다고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아무래도 펜타스를 자기들을 위해 세워진 유흥 시설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 섬의 번영은 대화삼국, 특히 파라스트의 비호에 의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파사르트가 이 섬의 주인인 셈이 아닌가. 우리는 파라스트와 동맹을 맺고 파라스트의 동의하에 이 섬의 출입을 허가받았다. 게다가 우리가 이 섬을 전화로부터 지켜주고 있으니 섬의 주민들은 우리에게 협력해 주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게 당연하다.” 이것이 스케니아의 주장이었다. 농담이 아니다. 분명히 대화삼국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고 파라스트의 비호도 있었다. 하지만 펜타스의 번영은 펜타스 자신이 쌓아온 것이었다. 이런 손님은 발로 차서 내쫓아버리고 싶다는 게 본심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백 척 이상의 대함댈르 이끌고 있다. 스케니아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까불면 밟아버리겠다고 은연 중에 협박하는 셈이었다. 그들의 횡포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펜타스의 가장 큰 상품은 누가 뭐라 해도 여자이다. 특히 일반 창부와는 완전히 별도로 관리되며 살아 있는 보석이자 지고의 꽃이라고까지 칭송받는 최고급 창부. 오론의 애인인 샬리아렌도 그랬지만, 가희나 무희라 불리는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그 이름을 얻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엄선된 미녀들이다. 새장 속의 새이지만 펜타스 내에 호사스러운 저택을 가지고 각국의 대사를 초대하며 파티를 열 정도의 생활을 누렸다. 가희나 무희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인격을 지닌 개인으로 존중받으며, 상대를 고르는 권리도 이들에게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매력이나 열의, 성의를 이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녀들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신분이 높고 재산이 많아도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스케니아 함대의 장교들은 그런 규칙조차 안중에 두지 않았다. 앞을 다투어 이들의 저택을--여자 본인까지 통째로--‘접수’해버렸다. 그들은 이 저택에서 나와 해안에 정박한 함선에 올라타고, 코랄에서 싸우고 온 뒤에는 집 주인이라도 되는 양 당당히 돌아왔다. 여자들을 상대로 술잔치를 열고 곁에서 시중을 들게 시킨다. 교양도 없고 품성도 안 좋은 남자들이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나오는 데에, 그런 여자들이 격렬하게 분노했으리라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로 남자들을 화나게 하지도,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반기는 척하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의 인간 관계를 샅샅이 파악하고 여자들끼리 힘을 합쳐 스케니아 내부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몇 번 함선의 함장은 이번 싸움의 승리는 자기 덕분이라고 하셨다던데요. 나으리께서는 어떻게 활약하셧나요? 들려주세요.” “그 함선의 항해장이 배를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건 자기고 함장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고 큰소리를 쳤대요. 그런 소리가 함장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겠어요.” 서로의 경쟁 의식을 부추기고, 자기 ‘남편’이 그 함장과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우월감에 불을 붙였다. 남자 쪽에서는 자기 주위에 있는 여자들이 뒤에서 손을 잡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군에 불리할 만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 다루는 데에 도가 튼 여자들에게는 변변히 놀아 본 적도 없는 촌뜨기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렇게 스케니아 내부에 불화의 씨앗을 착실하게 뿌렸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펜타스의 여자들을 모욕한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 골수에 사무치게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가 먹는 음식에 독약을 섞었다. 이것 역시 상의해가며 계획적으로 실행한다. “한꺼번에 너무 ㅁ낳이 죽으면 의심을 받을 테니 조금씩 해야지요.” “게다가 증상이 똑같아도 곤란해요.” “그렇지요. 누가 어떤 약을 쓸지 미리 정해둘까요?” “저기, 꼭 바로 죽일 것 없이 미치게 만드는 정도라도 상관없지 않겠어요?” “어머, 그거 재미있겠네요. 꼭 그렇게 해봐요.” “그렇군요. 그거라면 훨씬 간단하겠어요. 우리들한테야 환각제 따위 전혀 안 들으니까요.” “머리가 이상해져서 아예 갑판에서 뛰어내리면 속이 시원할텐데.” 우아하고 요염한 미녀들의 기품 잉ㅆ는 대화였다. 데리고 있는 여자들이 이렇게 나오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케니아 함대 내에서는 몸의 이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윈드라스 제독의 서기 크라티우스는 이 사태를 걱정하며 제독과 상의했지만 그 제독 본인도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크라티우스는 더욱 걱정하며 계속 마음에 걸리던 문제를 상사에게 털어놓았다. “식사에 독이 든 게 아닌지 확인은 시키고 계시겠지요?” “물론이지. 나만이 아니야. 모두들 그 정도는 확인하고 있을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해전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 섬에 돌아오면 몸이 안 좋아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크라티우스 자신도 상당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크라티우스는 25,6세 정도로, 전형적으로 출세욕에 불타는 남자였다. “뭐, 음식이 몸에 안 맞는 거겠지. 살면서먹어본 적도 없는 진귀한 음식들만 나오니까.” “하지만 만일의 경우라는 것도 있습니다.” “자네도 끈질기구먼. 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시녀나 심부름꾼이 아니라, 여자 자신이 직접 음식을 먹어보게 시키고 있네. 독 따위 들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제독도 크라티우스도 모르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가희나 무희로 행세하는 여자들은 말 그대로 가시가 있는 장미. 독약을 취급하는 것도, 몸을 미리 독에 단련시키는 것도 수련의 일환이었다. 또한 윈드라스 역시 자기 여자에게 여러모로 들은 소리가 있다보니 크라티우스를 보는 눈이 고울 수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 테바 강으로 내려오기로 한 증원군은 어떻게 된 건가? 벌써 도착해 있어야 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재촉하고 오는 길입니다.” 벵크의 수장 우를릭은 아직 레테 섬에 있었다. 윈드라스 제독과 장센 제독은 교대로 코랄 만에 출격하고 있지만, 펜타스에서는 식량 보급은 가능해도 자재 보급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양 함대는 트레니아 만으로 출격하는 길에 레테 섬에 들르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반나절 전, 크라티우스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우를릭을 몰아세웠다.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북쪽에서 오기로 했던 수장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벌써 예전에 합류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말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보여준 활약에는 물론 감사하고 있습니다만 벵크의 해상 전술은 거의 전설로까지 불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기대하던 만큼의 성과가 안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대국의 함대가 상ㄷ이니 당신들도 손쓰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너무 뜸ㅁ나 들이지 말고 꼭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벵크 선단의 실력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벵크의 수장은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크라티우스는 그 모습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정말 다루기 힘든 야만인들이지만 쓸모는 있습니다. 섬도 확보했지 않습니까. 키르탄사스가 끼어든 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글쎄 말이야. 그 녀석들, 상당히 귀찮게 굴더군. 녀석들한테 키르탄사스를 상대하게 맡기면 우리들도 마음껏 움직일 수 있을 게야.” “그리고 북쪽으로 돌아서 간 녀석들은 그--타우인가 하는 쪽의 세력을 눌러두기 위해 파견했던 거니까요.” “흐음, 듬직하지 못한 놈들이야. 그런 것쯤 순식간에 해치워버릴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나.” “예, 그야,,,.” 사람을 사람으로도 안 보는 듯한 바르풀과 고트의 수장들의 오만한 태도를 떠올리며 크라티우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벵크 놈들도 키르탄사스를 견제하는 데에는 쓸 만합니다만 델피니아의 군함과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죄다 말뿐이었는지 별로 대단하지는 못하더군요. 백작이 그 녀석들을 너무 높게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함대는 함대로 상대해야 하는 법이야. 델피니아의 함대와는 우리가 승부를 짓지. 놈들은 열심히 원호나 하면 돼.” “그런데 아까 드리던 말씀입니다만,,,.” 크라티우스는 말을 되돌렸다. “사기를 북돋우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단계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큰 활약을 한 자와 게으른 자에게 똑같은 포상을 내리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지게 됩니다. 공적이 없는 자는 상륙하지 못하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과연. 그것도 일리가 있군. 섬 녀석들도 병사들의 횡포가 너무 심하다고 싫어하는 눈치니까. 즐거움을 모두 빼앗아 버릴 수는 없지만, 이런 종류의 유흥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입장에 선 사람한테만 허락해도 충분하겠어. 장센에게도 말해두지.” “그 장센 제독 본인이 제일 먼저 상륙불가가 될지도 모릅니다만. 같은 제독이면서 윈드라스 제독님에 비해 전과가 너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상당히 초조해하는 듯합니다.” 크라티우스는 아첨을 할 셈이었지만 윈드라스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마치 자기가 있는 덕에 제독도 이렇게 득을 보고 있지 않느냐고 생색이라도 내는 듯이 들렸던 것이다. “얘기해두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윈드라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말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저택에서 돌아오는 길에 크라티우스는 계속 혀를 차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근 제독과 사이가 불편해졌다. 뭔가 문제가 있었나 생각해봤지만 특별히 짚이는 구석은 없다. 크라티우스는 비굴할 정도로 아첨이 심한 인간으로, 제독의 저택에 갈 때에는 일부러 마차조차 타지 않고 걸어갈 정도였다. 크라티우스는 불편한 심경으로 자신의 저택에 돌아왔다. 그 역시 무희 중 한 명을 ‘접수’했던 것이다. 가희며 무희가 사는 고급 주택들은 펜타스의 특정 구역에 몰려 있으므로 도보로 이동해도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으신가봅니다, 나으리.”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천박한 목소리였다. 언제나 크라티우스를 따라다니는 호위병 두 명이 한발 다가왔다. “엇차차,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전 그저 나으리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얼핏 보기에도 불량해 보이는 사내였다. 지저분한 옷차림에다 등도 구부정하다. 크라티우스는 경멸의 표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돈은 못 주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 “그럼 그 덩치 큰 야만인들한테 가볼깝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짓을 해서 곤란해지는 건 나으리 쪽일 것 같아서 먼저 이쪽으로 찾아왔는데 말이지요.” 그대로 지나치려던 크라티우스의 ㅂ라길이 멈췄다. 남자는 가련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크라티우스는 날카롭게 남자를 노려보고서 신중한 몸짓으로 문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신호했다. 남자는 굽실굽실 절을 하면서 지시에 따랐지만 크라티우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벌벌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만두십쇼. 이런 엄청난 곳에 발을 들이는 건 사양이니깝쇼. 나으리께 받을 것만 받고 나면 그대로 돌아가고 싶어서 말입니다. 저 언저리의 숲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남자는 현관 근처에 무성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단풍나무 쪽으로 크라티우스를 유인했다. 이 저택의 정원은 자연의 숲을 그대로 살리는 형태였다. 크라티우스는 호위병을 대동한 채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디, 그 얘기라는 걸 들어볼까.” “헤헤, 하지만 저 뒤의 나으리들이,,,.” “네가 신경 쓸 것 없어. 빨리 말해.” “헤헤, 그게 말입니다. 나으리께서도 이렇게 펜타스 최고의 여자까지 자기 걸로 만들었으니,,, 그게 참 부럽습니다. 저 같은 녀석한테는 손도 안 닿는 절벽 위의 꽃이니까요. 하지만, 그, 쉽게 말하자면 이겁니다. 나으리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호화롭게 지내고 계시지만 트레니아 만 밖에서 정박하고 있을 때에도 이래저래 재미 보시지 않았습니까. 육지에서 배를 타고 장사하러 오는 여자들이 있었지요?” “있었고말고.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런 여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니다.”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그게, 그 중에 한 명이 제 정부였거든요. 꽤 괜찮은 여자인데 말입니다. 그년이 우연히 윈드라스 제독님을 상대하게 되어서 말입죠. 뭐, 코랄에서 싸움이 워낙 잘 풀리다보니 제독님도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이것저것 얘기를 하셨다 이겁니다. 나으리나, 나으리를 은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그 멍청한 야만인들에 대해서도 말이죠.” 땀과 때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에 비열한 표정이 스쳤다. “정말 놀랄 얘기더군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생명의 은인의 아들을 돕는다니, 저도 입이 닫히지가 않더라 이겁니다. 하지만 제독님은 더 놀라운 얘기도 하셨습니다. 그 인간이 어디서 갑자기 이런 얘기를 물고 왔을 때에는 무슨 헛소리냐고 비웃었지만 이렇게나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다고요. 뭐라더라, 이름까지 들었는데,,, 아, 파로트 백작이다. 무슨 수단을 쓴 건지, 그 백작이 야만인 대장의 옛날 사연을 끄집어내서 나으리를 골라다 생명의 은인의 자식으로 만들었다고,,,. 정말입니까?” 크라티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제독도 입이 너무 가벼우시군. 너도,,,.” “엇차차,,,.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소릴 떠들고 다닐 생각이야 저도 없습죠. 헤에에, 받을 것만 받으면 말입니다. 거, 그렇지 않습니까. 야만족이 알게 되면 곤란한 얘기 맞지요?” “흥.” 다시금 코웃음을 치면서, ㅡ라티우스는 두 호위에게 신호를 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호위병들은 검은 손잡이를 쥐며 발을 내디뎠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단풍나무에 뒤를 가로막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런 법이 어딨어! 돈 몇 푼만 쥐어주면 될 걸 가지고! 그럼 비밀도 지켜질 거 아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절규했다. 그러나 크라티우스는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혀 모르나보군. 너한테 푼돈을 쥐어주면 그 가벼운 주둥아리가 완전히 닫힌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영원히 입을 못 열게 만들어버리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싸게 먹혀.” “비, 빌어먹을,,,. 그럼 역시 넌 새빨간 가짜 맞지?!” “그렇고 말고. 파로트 백작은 유능한 관리라서 말이야. 쓸데 없는 잡일이나 처리하고 있는가 했더니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고 오더군. 나도 설마 간수의 아들인 척하게 될 줄은 몰랐어. 우연히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백작도 상당히 연출이 뛰어나더군. 해야 할 대사까지 나한테 일일이 지도했을 정도니까.” 남자의 공포에 찬 비명과 절망적인 표정에 만족하며 크라티우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을 인간에게 무슨 소리를 해도 큰 상관은 없다. “그럼,,, 진짜 간수의 아들은 어떻게 한 거야?!” “처음부터 없었어, 그런 건. 간수는 독신인 채로 죽었다. 생전에 벵크의 수장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친구한테 얘기했을 뿐이지. 그렇기에 회의장에서 백작이 그 건을 제안했을 때에는 모두가 비웃었던 거야. 그런데 설마 이렇게나 뜻대로 잘 굴러가줄 거라고는. 무슨 소릴 꺼내도 꿈쩍도 않던 야만족들이 지금은 실로 협조적이야. 다루기는 까다로운 놈들이지만 협력은 아직 필요하고 이용 가치도 충분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네 놈이 살아 있어서는 곤란해.” 두 사람의 호위에게 눈짓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두 명의 검이 떨어지기도 전에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남자의 등이 곧게 펴지면서 때 투성이의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눈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한다. “들었지?” 이븐이 단풍나무 주위에 조성된 관목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동시에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일어섰다. 이골과 우를릭이었다. “---!!” 크라티우스의 얼굴이 밀랍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호위병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자들 역시 침입자임에는 틀림없으므로 그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골은 한 손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남자의 얼굴에 오른손 주먹을 날렸을 뿐. 그 일격으로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고, 남자는 그대로 뻗으며 숨을 거두었다. 우를릭은 귀찮다는 듯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한 번 휘둘렀다. 막 덤벼들던 호위병의 머리는 다음 순간 몸에서 떨어져 땅 위로 굴러갔다. 크라티우스는 더욱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발이 말을 안 듣는 듯하다. 두 수장이 크라티우스를 바라보는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우를릭이 이골을 ㅇ로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게 양보하겠다. 받아줘.” 이골 역시 우를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받을 수 없어. 이건 네 권리다.” 우를릭은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와 유진에게 끼친 폐는 아무리 보상하려 해도 갚을 수 없어. 그러니 네게 양보한다.” 이골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받은 굴욕은 우리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야. 이 녀석을 찢어 죽일 권리는 네게 있다. 유진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이 진지한 의논을 듣고서 크라티우스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이골이 재빨리 움직였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동작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크라티우스의 옷깃을 붙잡고 한 번 휘둘러 땅에 패대기친다. “으악!!” 이골은 땅에 부딪힌 크라티우스의 머리를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가 몇 대 부러진 듯했다. 그런 크라티우스에게 우를릭이 다가와 처절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 이 빚을 어떻게 갚아줄까.” “저, 저, 저는,,, 그, 그저, 그저,,, 시키는 대로,,,. 사, 살려,,, 살려주십,,,.” 부러진 이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우를릭이 크라티우스에게 몸통박치기르 ㄹ먹여 입을 다물게 만들었고, 이골이 손을 놓자 크라티우스의 몸은 털썩 땅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수장은 친구의 아들을 돌아보았다. 콜비타와 그녀의 동료들은 정말 훌륭하게 일해주었다. 실제로는 윈드라스 제독 혼자만 떠든 것이 아니다. 다른 한 명의 제독인 장센, 그 서기 데미안, 그 밖에도 여러 명의 장교들에게서 단편적인 정보를 알아내어 최종적으로 이븐이 정보를 모아 추리를 덧붙여 하나의 얘기르 ㄹ완성했던 것이다. 물론 그대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이븐이 지어낸 얘기 아니냐고 하면 그것뿐, 증명할 길이 없었다. 진짜 증거는 크라티우스 자신의 입에서 들을 생각이었다. 이븐은 상대가 생각대로 걸려들어준 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지저분한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슬쩍 냄새를 맡아본다. 부랑자에게서 얻은 옷가지였다. 덤으로 이 연극을 위해 열흘이나 목욕을 하지 않았다. “냄새가 매어버릴 것 같아,,,.” 그렇게 중얼거리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깨닫고 이븐은 씽기 웃었다. 우를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리 카지크에 연락해서 네 부인과 의붓어머니를 풀어주라고 전하겠다.” “나도 에란을 돌려주라고 연락하지. 그럼 당신들은 이제부터 어쩔 셈이야?” “넌 어쩌길 바라지?” “어,,,?” 이븐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은 따뜻했다.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 같은 시선이었다. 이골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동료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나, 아니면--이라고 물은 거야.” 우를릭 역시 웃고 있었다.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모두 네 아버지에게 빚이 있어. 지금은 너 자신에게도 빚을 졌지. 넌 우리들에게 뭘 바라지?” 이븐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활짝 웃었다. “당신들이 바라는 게 곧 내 바람이기도 해. 트레니아 만에 있는 놈들을 한 척도 남김없이 쳐부숴주자고.” 두 수장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국의 아들이여. 게오르그에게 갚아야 했던 빚을 지금 네게 갚겠다.” “이제부터 네 친구는 우리의 친구, 그리고 너의 적이 우리의 적이다.” 엄숙한 선서였다. 그리고 이 맹세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지금에야말로 나와 유진의 동료들을 통과시켜주면 ㅈ호겠어. 라그란의 함대 따위 눈 깜짝할 사이에 침몰시켜주지.” 이골은 엄청난 소리를 꺼냈다. 우를릭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했다. “하지만 섬에서 온 녀석들은 상당히 강해.” “걱정 마. 그쪽은 나랑 아는 사이니까. 당신들이 스케니아와 싸운다면, 그리고 레테 섬에서 철수해준다면 녀석들도 당신들하고 함께 싸울 거야.” 이븐이 보증하자 우를릭의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우리들의 상대는 라그란 놈들이 타는 저 큰 배뿐인가?” “그래. 100척이 넘는 대함대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우를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좋아. 그거라면 식은 죽 먹기군. 안 그래, 이골?” “그렇고 말고. 한 척도 남김없이 고기밥으로 만들어주지.” 그렇게 작은 배로 군함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래도 뭔가 승산이 있는 듯했다. 최후로 우를릭은 기절해 있는 크라티우스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운 뒤, 상대에게 의식이 없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결의를 담아 말했다. “네가 그렇게나 보고 싶어하던 우리들 벵크의 진짜 싸움을 보여주마.” 9장 테바 강이 파라스트의 세력하에 놓였기 때문에 이븐과 이골은 육로로 출발해 겨우 이틀 만에 타우에 도착했다. 이 결과에 양 진영 모두가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ㅇ벗다. 어제까지의 적이 오늘은 같은 편이다. 이골과 유진의 동료들은 타우의 자유민들의 협력을 얻어 배를 끌고 갈 길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일했다. 돌아오자마자 이븐과 두 수장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동해안으로 나가기 전에 우선은 테바 강이 중요해. 특히 로쉐의 가도의 일부가 강에 걸쳐 있어. 여기는 강의 관문인 동시에 녀석들에게도 중요한 보급로야. 분명히 경계가 삼엄하겠지.”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문제였지만 야만족 수장 두 명은 진지하게 물었다. “다리째로 부숴버리면 안 돼?”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어. 여기만 되찾으면 델피니아 측에도 유리하게 돌아가. 질, 들은 대로 여기는 이제 걱정 없어. 당신은 동료들을 이끌고 핸드릭 백작 쪽에 합류해줘.” “알았다. 서쪽 녀석들은 캄센으로 보내지. 그쪽도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고 하니까.” 이븐은 고개를 끄덕이고 카지크에서 돌아온 샤미안에게 말했다. “당신도 도라 장군한테 돌아가십시오.” 샤미안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이븐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부탁이니까 얘기부터 들어주시지요. 당신, 해전 경험은 없지요?” “배에 타본 적이라면 몇 번 있습니다.” “안 왜요, 안 왜. 그 정도로는 아무 도움도 안 되니까. 이번 싸움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 겁니다. 초보자까지 업고서 싸울 수는 없어요. 미안하지만 이번만은 정말 방해가 됩니다.” 질 역시 이븐을 거들었다. “저 사람들의 배는 정식 함선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저들의 전술도 평범한 해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자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어라, 되게 겁먹었나보네.” “헛소리 하지 마. 너야말로 중요할 때 실수나 하지 마.” 이븐은 반드시 이들과 함께 가야만 했다. 키르탄사스와 화해를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코랄 만의 함대를 해치우고 나면 저도 캄센으로 갈 테니까요. 먼저 가서 기다려주십시오.” 결국에는 샤미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자신은 해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루 이틀 사이에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도움이 되는 곳에서 싸우는 편이 낫다. 두 사람은 가볍게 키스한 뒤 서ㅉ고과 동쪽으로 헤어져, 이븐은 이골의 배를 타고 다시 테바 강을 따라 내려갔다. 돛을 펼친 배가 주르륵 행렬을 이룬다. 가늘고 긴 소형선이기는 해도 100척이 넘는 대선단이었다. 당연히 파라스트의 보초에게 발견되어 공격을 받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골도 유진도 강으로 나온 뒤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특별히 뭔가 지시를 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바르풀과 고트의 남자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로쉐의 가도의 일부인 요새를 되찾을 때만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 다리는 강의 수면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세워져 있고, 다리 양 끝에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델피니아와 파라스트의 국경이었던 시절에는 이곳에서 출입국 심사를 행했지만, 지금은 양족 모두 파라스트의 군사들이 꽉 들어차 있다. 다리 위에도 병사들이 배치되어, 아래를 지나가는 선단을 향해 활과 돌, 끓인 기름을 퍼부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골과 유진은 다리를 무시하고 제각각의 요새를 공격하도록 말없이 지시했다. 바르풀과 고트의 남자들은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강기슭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애벌레에 덤벼드는 개미 떼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강가에 오르고 말았다. 요새 쪽에서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빗발처럼 화살을 퍼부으며 응전했지만 요새의 벽 틈으로 쏘는 화살보다 이들의 발이 더욱 빨랐다. 요새는 돌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문은 목제이다. 물론 철재를 덧대어 보강한 튼튼한 문이지만 억센 남자들은 도끼를 치켜들고 문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요새를 제압해 버리고 다리 족으로 눈을 돌린다. 다리 양쪽에서 바윗덩어리 같은 남자들이 돌진하며 적을 남김없이 쓰러뜨렸다. 이 엄청난 기세에 버틸 수 있을 리가 ㅇ벗었다. 파라스트의 병사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어디로도 도망칠 길이 없었기에 스스로 강에 뛰어들었다. 정말 이 정도라면 다리를 통째로 부숴버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두 요새를 격파해버린 뒤 남자들은 또다시 가파른 경사면을 타고 강으로 내려와, 원래대로 배에 타고 하구를 향해 이동했다. 코랄에서는 서쪽에서 돌아온 왕비가 새로운 전법을 펼치고 있었다. 범선은 돛이 없으며 움직일 수 없으므로, 그 돛을 태워버리자는 말이다. 작은 술통에 기름을 채워서 부서지기 쉽게 조작해둔 뒤, 돌 대신 투석기에 얹어서 쏘는 것이다. 명중하면 기름이 주위에 퍼지고, 불화살을 쏘면 적함은 그대로 불덩어리가 된다. 단, 물론 상대도 이동한다. 기름통을 쏠 수는 있어도 불화살이 쉽게 맞아주질 않았다. 짜증이 난 왕비는 열심히 기름통을 쏘라고 명령한 뒤 카를로스의 배로 뛰어들었다. “에에엣,,,, 비전하!” “이쪽이 속도는 더 빠르지?” “아, 예.” 키르탄사스의 총독은 완비의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서 왕비를 태운 채 적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귀찮은 놈들도 없었고 마침 바람도 딱 좋았다. 키르탄사스의 남자들은 적함을 향해 신나게 불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왕비가 쏘는 화살은 반드시 돛에 명중해, 범선 몇 척이 당황하며 돛을 접게 됭섯다. 카를로스 역시 이 틈에 어떻게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전 함대의 반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레테 섬ㅇ르 점거한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동료의 배가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카를로스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두목! 놈들이 왔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뭐엇?!” 당황하며 망원경을 붙잡고 서쪽 바다를 살핀다. 무의식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새파란 바다 위에 새하얀 돛이 빛나고 있었다. 뱀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독특한 선수가 나란히 늘어서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다. 말 그대로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최소한 100척 이상은 된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숫자가 튀어나온 거냐고 소리치려던 카를로스의 옆에서 왕비가 외쳤다. “이븐이야!” “옛?!” “이븐이 타고 있어, 저 배! 붉은 선수상이 달린 배야.” 카를로스는 당황하며 다시 망원경을 들고 살펴보았다. 아직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카를로스도 바닷사람이니 만치 시력에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왕비는 망원경도 필요없을 정도로 눈이 좋은 듯하다. 배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븐도 이쪽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 공격하지 마!!” 카를로스도 동료들을 제지하며 그들을 기다렸다. 붉은 선수--정확히는 붉은 바탕에 금으로 말의 머리를 장식한 선수상이었다. 테두리를 금으로 두른 검은 배와 돛에 붉은 용이 그려진 배가 나란히 카를로스의 기함에 접근했다. 카를로스는 매섭게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왕비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븐이 저쪽을 우리 편으로 만들었어. 그러니까 카를로스도 화해에 응하라고.” “그리 쉽게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레테 섬은 어쩌라는 겁니까? 남자의 반수가 죽었습니다.” “그건 저쪽 역시 마찬가지야. 아무 피해도 없이 끝나는 전쟁이라는 건 없어.” “싸움은 저쪽이 걸었는데 말이죠.” “그럼 언제까지 싸움을 계속할 건데? 반이 아니라 키르탄사스의 사람이 전부 죽을 때까지?” “,,,,,,” “싸움이라는 건 그런 거야. 어느 시점엔가는 반드시 적과 대화를 시작하고 싸움을 멈추게 되지. 넌 지휘관으로서 저 사람들하고 화해하고 부하들을 납득시킬 의무가 있어. 그게 두목의 역할이잖아?” 카를로스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쯤이야 얘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옛ㄴ라부터 몇 번이고 경험해왔던 일이니까. 해적으로 휘젓고 다니던 무렵, 목숨을 걸고 싸우던 상대와 나중에 화해하고 손ㅇ르 잡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미묘하게 상황이 다르다. 카를로스는 그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쪽이 우세였으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겠지만, 계속 저놈들한테 밀리기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화해를 하려니 조금 화가 나서 말입니다.” 카를로스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지만 음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원한을 품는다기보다 분하다는 느낌일까. 카를로스는 싸움터에서 전력을 다하며 살아온 남자였다. 이런 인간은 어두워질래야 어두워질 수가 없다. 몸도 마음도 날카롭게 단련되어 모든 면에 있어서 날카롭고 거칠었다. 질투마저도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이다. 그리고 당당히 이쪽 배에 올라탄 인간들 역시 카를로스와 동류였다.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놈들의 발은 우리들이 묶겠어.” 이골이 말했다. “적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당신들이 공격해줘.” 유진이 말을 받았다. “레테 섬 일로 원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짜 적은 저 큰 배에 타고 있는 놈들이야. 도저히 협력하지 못하겠다면 억지로 부탁은 안 할 테니, 우리들 방해는 하지 마.” 우를릭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수염에 뒤덮인 카를로스의 얼굴이 분노한 나머지 시뻘겋게 변했다. 왕비 역시 기가 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거 참, 얘기하는 게 어쩌면 이리 서툴까나,,,.” 하지만 그러 ㄴ왕비 자신도 입버릇 나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인간이다. 게다가 유진과 우를릭은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어이, 당신들. 함대의 발을 묶겠다고는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정말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말이야.” 일부러 양하는 듯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어디 실력을 보이라는 듯한 어조였다. 이븐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카를로스도 마다 사나이야. 당신들이 충분히 실력을 보여주면 납득할 테니까. 지금 상태에서는 그저 허풍으로밖에 안 들릴 거라고.” “꼬맹이 주제에 입은 살았군.” 이골이 유쾌하게 웃었다. “좋고말고. 보여주지. 단, 어느 정도 숫자가 모일 때까지만 잠깐 기다려. 여기에 있는 건 놈들의 반밖에 안 되니까.” “곧 나머지 반이 펜타스에서 올 거야. 우리들이 더 이상 그 놈들 편을 안 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이지.” 유진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선원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두목!!” 그 뒤는 들을 것도 없었다. 스케니아의 함대는 선주민족의 배신(?)을 깨닫고 곧바로 결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왔다, 드디어 왔다!!” 선주민족들이 흥분하며 외쳤다. 세 수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를릭이 입을 열었다. “우선 포위부터 하지.” 발길을 돌려 자신의 배로 내려가려는 순간, 카를로스가 혀를 차며 제지했다. “기다려. 그 작은 배로 군함 백 척을 포위하겠다는 거야??”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헛소리 하지 마. 여기는 내 구역이야. 가만히 구경이나 하라는 거야? 우리들도 함께 싸운다.” 왕비가 말을 이었다. “포위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월한테도 협력하라고 하지.” 각각 담당할 구역과 수순을 결정한 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이븐은 카를로스의 배에서 델피니아의 군함으로 옮겨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월은 그들이 이쪽 편으로 붙었다는 사실을 굉장히 반가워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태도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뭘 할 생각이지?” “그건 모르겠지만 이런 소리를 하던데. 고트의 흑선, 바르풀의 붉은 용, 그리고 바다의 분마 벵크의 싸움을 잘 봐두라고.” 함대를 둘러싸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칼르로스의 머릿속에는 이 지역의 해류가 전부 들어 있다. 바람의 풍향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깃발을 사용해 신호를 보내며 델피니아의 함대와 키르탄사스의 배, 그리고 북방민족의 배는 스케니아의 함대를 포위했다. 그런데 스케니아 함대는 이 움직임에 대해 실로 무신경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크라티우스가 종적을 감추는 동시에 레테 섬에서 선주민족들이 사라져버렸으니 속임수가 들통 났다는 정도는 깨달았겠지만, 설마 이들이 델피니아 편에 붙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듯했다. 게다가 두 제독은 선주민족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전진기지를 확보하고 키르탄사스를 제압한 시점에서 이미 이들은 충분히 써먹은 셈이다. 물론 이들이 손을 뗐으니 조금 일이 복잡해질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전 함대를 출동시킨 것이다. 나뭇잎처럼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배 따위야 무시하고 걷어차 버리면 충분하다. 스케니아인들에게 있어 위협은 델피니아와 키르탄사스의 함대일 뿐이었다. 오늘이야말로 적의 함대를 돌파해 코랄을 손에 넣겠다고 결의를 새로이 하며 열심히 앞으로 전진 했다. 하지만 진짜 위협은 그들의 발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스케니아 함대 주위에 포진한 뒤, 세 수장은 지금까지의 과묵한 태도를 아낌없이 걷어 치워버렸다. 맹렬하게 호령한다. “노를 잡아라!1” 그 신호와 동시에 선주민족의 배는 스케니아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누가 뭐래도 속도부터 다르니 둘 사이는 점점 좁혀졌다. “작살을 쏴!!” 배 위의 남자들이 집어든 것은 고래를 잡을 때 쓰는 작살이었다. 하지만 목표는 고래가 아니다. 생물도 아니었다. 거대한 스케니아 군함의 옆구리였다. 엄청난 괴력을 자랑하는 선주민족들이 던진 작살은 손쉽게 선체에 꽂혔다. 이 작살에는 두꺼운 밧줄이 달려 있었다. 튼튼하게 박힌 작살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밧줄을 쥐었다. “엇차!!” “여이차!!” 구령과 함께 그들은 밧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노가 더욱 강하게 파도를 헤쳤다. 결과적으로 이골 일행이 탄 배는 점점 군함 쪽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흔들리는 파도 위, 게다가 상대도 움직이고 있건만 거의 선체끼리 맞붙게 되었다. 다음에 등장한 것은 자루가 긴 거대한 곡괭이였다. 덩치 큰 남자들은 그것을 눈앞의 벽--스케니아 군함의 선체를 향해 휘둘렀다. 불안정한 발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작살에 연결된 밧줄과 함께 자신들의 배와 적은 군함을 완전히 고정해 버렸다. 최종적으로 선주민족은 아무렇게나 도끼를 휘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군함에 구멍이 나면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살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또다시 곡괭이가 활약했다. “어이차!!” “영차!!” 두 남자가 교대로 곡괭이를 휘둘렀다. 목표는 아직 구멍이 안 뚫린 벽. 목재가 소리를 내며 삐걱거린다. 게다가 부서지기 전에 다시 작살의 밧줄을 조종해 쏟아져 들어가는 물살을 피하고 능숙하게 작살을 회수한다. 최후로 군함의 벽을 노로 치면서 군함에서 떨어졌다. 곧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든다. 고트의 흑선, 바르풀의 붉은 용, 그리고 바다의 준마는 평범한 피라미가 아니었으며 고래의 몸통을 뜯어내는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키르탄사스의 방해로 쓸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스케니아 측은 곧바로 자기들의 발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바다 위에서 선체에 큰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다. “”절대로 놈들을 접근시키지 마라!!“ 모든 배의 함장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절규했다. 급속히 다가오는 가느다란 배를 향해 화살을 쏴대고, 선체에 들러붙는 시점을 노려서 돌과 끓인 기름을 퍼부었다. 하지만 선주민족들은 둥근 방패로 머리 위를 방어하며 변함없이 작업을 계속했다. 스케니아는 적의 배에서 도망치려고 대열을 흐트러뜨렸으며, 함대끼리 당황해서 움직이다가 충돌하기까지 했다. 이 역시 이쪽의 생각대로였다. 고트의 흑선은 억세었다. 바르풀의 붉은 용은 뛰어난 파괴력을 보였다. 바다의 준마는 그 이름대로 신속하게 다음 목표를 처치하고 또 다른 목표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가차 없이 도끼를 휘둘렀고 그때마다 스케니아 쪽에서 아비규환의 비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엄청난 공격에 경악한 것은 스케니아만이 아니었다. 델피니아 함대의 세르기우스 제독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문을 잃고 망원경을 떨어뜨렸다. 승무원들도 간담이 서늘해진 듯, 움직이는 것조차 잊고 입을 쩍 벌리며 멍청하게 서 있었다. 키르탄사스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장난이 아닌데,,,?!” 카를로스의 비명이 이들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했다. 모두 다 아연한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진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바다 위에서 적함의 선체에 도끼질을 해? 그러나 실제로 눈앞에서 선주민족들은 적함을 부숴대고 있었다. 저래서는 아무리 물을 퍼내도 손쓸 길이 없다. 반드시 가라앉게 된다. 아니, 가라앉기야 하겠지만--. “거짓말!! 이런 거, 말도 안 돼!!” 키르탄사스의 제독은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함께 승선하고 있던 남자들 역시 ㅁ어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기함에 타고 있던 국왕과 이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물론 이쪽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편이었지만. 최상급의 무예를 감상하듯이 선주민족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엄청난걸,,,.” “굉장해,,,.” 그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감탄에 한숨을 뒤섞어서 바라보다가 국왕이 제정신을 차렸다. “안 돼, 안 되지.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뭘 하나! 지금이야말로 기회가 아닌가!!” 이븐도 외쳤다. “맞아! 기름을 퍼부어! 놈들은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갑판의 병사들이 그 고함에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범선은 절호의 표적으로 전락했다. 키르탄사스 측도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쪽만 신나게 싸우게 놔둬서야 이쪽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실력을 드날릴 때였다. 불화살은 재미있을 정도로 차례차례 명중했다. 기름을 흠뻑 뒤집어쓴 적의 배에 곧바로 불길이 올랐다. 현재 스케니아 함대의 약 반수는 불길을 뿜으면서 거의 대부분이 항해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양 제독이 타고 있는 기함은 노를 저어 이 혼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전에 델피니아의 함대가 잽싸게 앞을 가로막았다. 적이 도망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쫓기 시작해서는 늦는다. 진로를 예측하고 미리 돌아온 것이다. “적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다. 이 틈을 놓치지 마!!” 상대측의 동요가 이쪽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육상전도 해전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델피니아의 해군은 지금가지 거의 구경만 하고 있었던 만큼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신나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제독이 탄 기함이니 만치 상당히 끈질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항할 태세였다. 월 그리크는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을 격려했다. “물러서지 마! 반드시 여기에서 숨통을 끊어버려!!” 왕비가 이 움직임을 깨달았다. 카를로스의 엉덩이를 걷어차다시피 하며 사진을 따라오게 한 뒤, 눈앞의 스케니아 군함을 노려보며 말했다. “카를로스는 옛날에 해적이었지? 다른 배로 옮겨 탈 때는 어떻게 해?” 카를로스는 지휘를 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십쇼!! 우리들도 군함에 덤벼본 적은 없다고요!!” “그러니까 옮겨 탈 때 어떻게 하는데?”“ “우선 현을 가까이 댑니다! 하지만 군함은 너무 높아요!!” 수장들의 배도 뒤를 따라왔다. 양 제독의 기함은 노를 젓는 수부를 태우고 있으며 범선과는 달리 배 양쪽에 수많은 노가 설치되어 있어 파도를 젓는다. 이것 때문에 간단히는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놓칠 생각은 없는 듯 점점 속도를 높이며 왕비가 타고 있는 카를로스의 배를 향해 다가왔다. 곧바로 물방울을 튀기며 붉은 용이 그려진 돛이 카를로스의 돛과 나란히 섰다. 왕비는 뱃전으로 몸을 내밀면서 바르풀의 수장을 향해 외쳤다. “이골!” “여어, 이상한 왕비!” “그리로 갈 테니까 비켜!” “뭐?!” 왕비는 즉시 갑판을 박차고, 나란히 달리고 있던 바르풀의 배로 뛰어내렸다. 갑자기 위에서 사람이, 그것도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내려오자 노를 잣고 있던 남자들이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왕비는 스케니아의 기함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뒤쪽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안 왜. 노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어.” “근처에 가기만 하면 돼. 그 뒤는 내가 할 테니까.” “뭐?” “빨리!” 바르풀의 수장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들에게 눈짓을 한다. 키르탄사스의 배도 작은 편이지만 이 배는 거의 아슬아슬하게 수면을 스치며 바다 위를 달려갔다. 그에 비해 스케니아의 기함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커다란 산. 왕비는 이골을 올려다보며 솔직하게 칭찬했다. “잘도 이런 걸 상대로 싸우는걸!” “저 노만 없으면 이것도 가라앉힐 수 있겠지만, 대체 어쩔 생각이야?” “작살 좀 빌릴게.” “뭐?” 이번에야말로 이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빌린다고는 해도 그렇지 가느다란 팔로 뭘 어쩌겠다는 건가. 평범한 남자라도 간신히 두 팔로 들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왕비는 그 강철 작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렸다. 단, 목표는 상당히 위--거의 선미의 장식 근처였다. “하앗!!” 기합과 함께 날아간 작살은 멋지게 뱃전에 박혔고, 기가 막혀 하는 남자들을 내버려둔 채 왕비는 밧줄을 붙잡고 다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이봐--!!” 바르풀의 남자들도 경악했다. 순간적으로 바다에 빠지는가 싶더니 왕비의 몸은 경이로운 완력으로 밧줄을 타고 쑥쑥 올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선미에 들러 붙었다. 왕비는 밧줄 하나에 의지하며 군함의 선체를 타고 올랐다. 곧바로 뱃전에 손ㅇ르 얹고 그대로 적함으로 뛰어들었다. 경악한 것은 그 적함과 격렬하게 공방을 펼치던 델피니아 측 기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군 제독 세르기우스는 또다시 망원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쫄딱 젖기는 했지만, 다소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저 금발과 체격만은 절대로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고, 고, 공격 중지!!” 세르기우스는 절규했다. 그 시점에서 기함은 적함을 향해 기름통을 투척해대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이 그 명령을 취소했다. “공격 속행!! 상관하지 말고 계속 던져!!” “폐하!! 기다려주십시오! 적함의 갑판에 비전하가, 비전하가 계십니다!! 보십시오!!” 발광 직전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지만 경악스럽게도 국왕은 씨익 웃을 뿐이었다. “나도 봤어. 걱정하지 마. 일부러 노려서 던진다고 해도 맞힐 수 있을 인간이 아니니까.” 이븐이 냉정하게 말을 덧붙였다. “동감입니다. 어디, 대체 뭘 할 생각일까요?” 스케니아 기함 쪽에서는 혼자서 자신들의 배에 돌입한 왕비를 보며 기막혀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 갑자기 외부인이 나타날 리가 없는데. 왕비는 망연자실하게 얼어붙어 있는 적을 밀쳐내고 걷어차면서 뱃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뱃머리에 도착하자마자 돛을 지탱하고 있는 밧줄을 끊어버렸다. “으아아아악!!” “위험해!!” “도망쳐!!” 갑판은 혼란에 빠졌다. 두꺼운 통나무와 튼튼한 베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갑판에 떨어진다. 갑판을 뒤흔드는 격렬한 충격에 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선내의 수부들이 불안해져서 손을 멈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왕비의 목적이었다. 적 기함 근처에 있던 수장들은 노가 멈췄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즉각 자신들의 일을 시작했다. 돛을 떨어뜨린 왕비는 국왕이 타고 있는 기함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뭔가를 열심히 재촉하고 있다. “뭐지?” “뭐라는 걸까요?” 국왕과 이븐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주종이 나란히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왕비는 짜증이 나는 듯 불타고 있는 적함 쪽을 가리켰다. “아, 그런가! 불화살!” “엇차차, 까먹고 있었다.” 당황하며 석궁에 불화살을 장착해 발사했다. 왕비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왜 이리 멍청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그 틈에 뒤에서 덤벼드는 적병을 베어버리면서) 갑판에서 뛰어내렸다. 아래에는 벵크의 배가 있었다. 왕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우를릭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른 한 척의 적 기함에 마찬가지로 올라탔다. 델피니아 함대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바다 위에서도 승리의 여신은 역시 건재했다. 왕비의 발은 적병이 가득한 갑판 위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면서 일격에 적을 베어 넘기며 공격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델피니아의 병사들은 왕비의 활약에 흥분하며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국왕의 허가도 있었으므로 왕비가 타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아낌없이 바위와 기름과 불화살을 투척한다. 승리의 여신이 자기 편의 공격에 쓰러질 리가 ㅇ벗다. 그 순간 병사들은 모두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왕비는 이쪽 기함도 돛을 떨어뜨려 수부들의 손을 멈추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적함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여기저기에 부서진 적함의 파편이 떠 있다. 그 중 하나를 붙잡고 수면에서 첨벙거리고 있으려니 국왕의 기함이 다가왔다. 갑판병이 밧줄 사다리를 던진다. 왕비는 자력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갑판에 내려서자마자 국왕에게 불평을 해댄다. “너 말야, 조금은 공격도 봐가면서 하라고.” 아무래도 ‘원호공격’이 조금 지나쳤던 듯하다. “미안.” 국왕은 사과를 하면서도 완전히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전신이 쫄딱 젖은 왕비의 몸을 번적 안아든다. 그을음과 기름에 더러워지고 소금물에 젖어 있어도 그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적어도 국왕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너, 혼자서 군함 두 척을 가라앉힌 거야.” “혼자가 아니야. 이골하고 우를릭이 도와줬잖아. 너도.” “리. 너 정말 최고야. 너 같은 왕비를 가진 복 많은 왕은 세상에 둘도 없을 거야. 있을 리가 없잖아.” 국왕은 진심으로 말하면서 왕비를 꼭 끌어안았다. “너, 그런 소리를 잘도 뻔뻔스럽게,,,.” 기가 막혀하면서도 왕비는 얌전히 국왕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국왕이 감격에 겨워 왕비를 끌어안은 채 놔줄 생각을 않자 견디다 못한 왕비는 버둥대기 시작했다. “어이, 놔! 야!!” 왕비가 정강이를 힘껏 걷어차자 국왕은 펄쩍 뛰어오르며 걷어차인 다리를 안고 신음했다. “어이, 너야말로 좀 봐가면서 해!” “내가 할 말이야, 힘만 더럽게 세 가지고!”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맨손으로 군함을 가라앉힌 인간이?!” “숨을 못 쉬면 나도 죽는다고!!” 세르기우스 이하 갑판원 전원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못 본 척하고 있었다. 한편 이 모습에 키르탄사르와 선주민족의 남자들은 말문을 잃었다. 수면 가까이에 있던 이 남자들은 적함의 갑판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쥐면 부러질 것처럼 저 가느다란 팔이 자기 팔보다도 더 굵은 강철 작살을 손쉽게 던져 적의 선미에 명중시키는 광경은 보았다. 휘청거리는 밧줄 하나에 의지하며 산더미만한 적함 꼭대기까지 손쉽게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그 작은 몸이 갑판 위로 사라지는 순간, 돛대가 떨어지고 아군 기함의 집중 공격까지 더해졌다. 그럼에도 왕비는 상처 하나 없이 적함에서 멀쩡하게 탈출했다. 카를로스 이하 키르탄사스의 남자 전원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북방의 남자들 역시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서운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을 이 남자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유진과 우를릭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엄숙하게 되뇌었다. 그리고 이골은 후일 이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아 생전에 눈앞에서 스오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10장 스케니아 함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대승리를 거둔 월 그리크는 재빨리 논공행상에 들어갔다. 가신들의 활약에 대해 포상을 내리는 것은 물론, 최대의 공로자인 키르탄사스의 북방민족의 수장들을 정식으로 초대해 만찬을 열고 갖가지 선물을 내렸다. 수장들에게는 아름다운 보검과 희귀한 보석, 금은 세공품을, 그밖에 부족의 남자들에게도 충분히 나눠줄 수 있을 만큼의 은화를 보냈다. 카를로스에게는 그런 세공품이 아니라 타우에서 채굴된 금과 은을 듬뿍 보냈다. “따로 포상은 안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카를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국왕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카를로스를 돌려보냈다. “이건 친구에게 보내는 위로금이다. 레테 섬을 재건하려면 여러모로 자금이 필요할 테니까.” 북방의 수장들은 격식을 차려야 하는 궁전 내에서는 그리 편안하게 지낼 수 없는 듯했다. 국왕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지만 그들은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감스럽기는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대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므로 언제까지고 붙잡아둘 수도 없었다. 국왕은 자세를 바로 하며 다시금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직 캄센과 비르그나 쪽이 소란해서 충분히 대접도 할 수 없지만 꼭 다시 와주시길 바라오.” 그러자 이골과 유진이 얼굴을 마주 봤다. 우를릭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 캄센이라는 곳은 어떻게 가나, 국왕. 게오르그이 아들이 결혼하는 자리에 참석했으면 좋겠는데.” 그 자리에는 물론 이븐도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국왕은 눈을 빛내며 이븐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결혼? 샤미안 양하고?!” “네가 주선해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이 자리에는 고지식한 중신들도 없으므로 이븐의 말투도 완전히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왜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했어!” “왜냐니, 그야 네가,,,.” 이유를 말했다가는 굉장히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다. 두 수장의 입에서 자세한 사정이 흘러나왔고, 특히 샤미안을 인질로 데리고 있던 유진은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괜찮은 아가씨더군. 용기도 있고 심성이 곧은 처녀야. 이 녀석의 부인이 되어준다니 나도 정말 반가워.” 그러자 이븐의 소꿉친구를 자칭하는 국왕이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다. 국왕은 즉각 이렇게 선언했다. “좋아. 코랄도 대승리를 거뒀으니 캄센으로 출격하지.” 나쁜 예감은 적중하게 마련. “어이어이, 월,,,.” 이븐이 머리를 싸쥐며 항의하려 하자 국왕은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네가 말릴 권리는 없어. 캄센에서 병사들이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코랄이 대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은 곧 저쪽에도 도착할테니 도라 장군이라면 더욱 힘내서 싸우겠지만, 조라더스도 그만큼 필사적으로 덤비겠지. 전쟁이라는 건 이성만으로 풀리는 게 아니야. 식량이나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남은 건 기합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겠다는 건데, 뭐가 이상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일단 앞뒤는 맞는다. 국왕의 주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말은 해도 탄가 방면은 도라 장군에게 맡긴 셈이지. 비르그나 문제도 아직 남아 있어. 나 자신이 캄센에 오래 머물면서 지휘를 할 수는 없지만 병사들을 격려하는 의미에서도 국왕이 얼굴을 보이는 건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굳이 말하자면 전방 위문이지. 안 그래, 리?” 묵묵히 식사를 들던 왕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런 구석은 정말 임금님다운걸. 반론할 여지조차 없는 어거지야.” 물론 이것은 왕비 나름의 칭찬이었다. 이븐은 더욱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싸쥐면서 다시금 강조했다. “그럼, 임금님. 어디까지나 목적은 전방 위문이라 이거지요?” “물론이지.” “마침 가는 김에 신하의 결혼식에 참석해볼까나, 따위 생각은 요만큼도 안 하는 거 맞겠죠?” “당연히.” 국왕은 더욱 당당하게 가슴을 쭉 폈고, 이븐은 기가 막혀서 그런 주군을 빤히 쳐다봤다. 수장들은 테바 강과는 정반대 방향을 향해 출항했다. 폴리시아에서 동해안을 향해 흘러가는 페스카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캄센이 나온다. 낯선 배가 대량으로 나타나면 캄센에서도 경계할 테니 왕비가 이쪽에 동석하기로 했다. 국왕은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캄센으로 향했다. 캄센에 주둔하던 병사들의 기쁨은 상상 이상이었다. 실제로 코랄에서 대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은 큰 의의를 지닌다. 궁지에 몰려 있던 병사들은 죽었다 살아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스케니아의 대함대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으로 상황은 예전과 마찬가지. 탄가와 파라스트만이 상대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탄가는 스케니아 함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지금까지의 공세에서 갑자기 수세로 돌아섰다. 그에 비해 델피니아 군의 사기를 점점 높아져, 승리가 바로 눈 앞에 있다고 누구나 확신하고 있었다. 도라 장군 역시 웃으며 국왕을 맞이했다. “코랄에서 큰 승리를 거두셧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음. 하지만 아직 비르그나가 남아 있으니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 샤미안 양은?” 장군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폐하. 노파심에서 충고 드립니다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특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난 정말로 전방 위문을 하러 온 것뿐이야. 하지만 친애하는 샤미안 양이 결혼을 한다니 정말 기쁜 일이네. 나한테는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까.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뭐, 이런 상황이니까요.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전쟁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요. 저도 불안해서 신랑이 도착하는 대로 식을 올리자고 했더니 혼례의상이 필요하다며 로아의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호오,,,.” “그 아이 어머니 유품이기도 하니까요,,,.” 용맹하기로 이름난 도라 장군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장군. 실은 그 일로 할 말이 있는데.” “예?” “결혼 축하 선물을 하고 싶어. 원래는 샤미안 양에게 보내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좀 있다보니, 일단 부친인 장군이 받아줬으면 하는데.” “어떤 물건입니까,,,?” “이것은 영애의 결혼 축하인 동시에 감사의 의미도 있네. 벨민스터 공하고는 여기로 오기 전에 이미 얘기가 끝났어. 폴리시아 평원을 받아줬으면 좋겠네.” 도라 장군도 숨을 삼켰다. 폴리시아는 원래 영주였던 베링저 가문의 혈통이 끊어진 뒤로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끊이지 않아 선대 국왕이 중재에 들어가, 결국은 벨민스터 가문이 관리만 맡고 수익의 일부를 베링저의 친족들에게 보내기로 정해졌다. 즉 벨민스터 가문은 국왕의 명령으로 문제의 토지를 맡고 있을 뿐 소유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물론 베링저의 친족들에게도 소유권은 없었다. 따라서 국왕이 새 관리자를 선택해 폴리시아를 수여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저 왕국의 곡물 창고로까지 불리는 광대한 토지이므로 어설픈 인물에게는 선 뜻 맡길 수 없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도라 장군의 억센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졌다. “특혜는 안 된다고 그렇게나 말씀드렸건만,,,.” “장군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게야. 그 땅은 영민들의 자치의식이 강하고 전통적으로 관리를 싫어하는 분위기라 경영이 어렵지. 게다가 베링저의 친척들이 여지껏 권리를 주장하면서 수익의 분배를 놓고 벨민스터 공과 수시로 문제를 일으켰어. 공도 혈연이 있는 사람들이다보니 대놓고 뭐라고 하기도 힘든 모양이더군. 어차피 말로 타일러봤자 물러날 사람들도 아니니, 장군이면 딱 적임이야.” 국왕의 얼굴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지만, 장군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하오나 폐하. 저는 그 관리를 딸에게 맡기려고 생각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그건 상관없네. 장군에게 준 토지이니 알아서 해야지.” 두 사람은 캄센 요새의 어느 방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로아에서 돌아온 샤미안이 얼굴을 내비쳤다. 도라 장군은 서둘러 국왕이 보낸 선물에 대해 얘기했고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영지를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샤미안은 이 과분한 선물에 깜작 놀라며 저도 모르게 반론했다. “하지만 아버님,,,.” “영지의 관리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폴리시아는 국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일등급 토지입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편이,,,.” “폐하의 심정을 헤아려 드려라. 폐하께서는 말이다, 정말은 이 포상을 네 신랑에게 주고 싶으신 게야.” 샤미안은 깜작 놀라며 국왕을 보았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결혼을 축하하네.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그대와 내게 있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부부가 된다니 나로서는 두 배로 기쁜 일이야. 영원히 행복하도록. 그 녀석은 어지간해서는 한 군데에 정착할 수 없는 녀석이지만 모쪼록 잘 부탁하네.” “어머나, 폐하. 그런,,,.” “이번 전쟁에서 그대의 남편의 활약은 정말로 뛰어났어. 아무리 큰 포상을 내려도 부족할 정도지. 나도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물로 그 활약에 보답하고 싶네.” 도라 장군도 말했다. “하지만 사위도 그 성격에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러니 명목만은 나한테 보내는 걸로 해두시는 게야. 나는 관리를 네게 맡기겠다. 사위는 영지 관리 따위 단연코 사양이라고 난리 치겠지만 의논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언젠가 너희들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 물려주면 된다.” 샤미안은 그래도 불안한 표정으로 국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국왕은 씨익 웃고만 있었다. 마침내 왕비도 그 자리에 찾아와 샤미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다가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전쟁터에서 결혼식을 올려도 되는 거라면, 그런 때만은 국왕과 왕비도 참석해도 상관없는 거 아냐?” 도라 장군이 재빨리 반박했다. “어떠한 상황이든 간에 특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가는 곧바로 신하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고, 불평 불만을 선동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명군은 신하들을 공평하게 대접하는 법입니다.” “예, 예, 예.” “게다가 오늘 밤 열리는 피로연에는 양대 기사단장에 제 수하들도 다수 참석합니다.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는 해도 탄가가 야습을 걸어올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두 분께서는 이 요새 안에 계셔야 합니다.”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국왕과 왕비는 집이나 지키고 자기들만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겠다고? 그거야말로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데,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국왕이 천천히 선언했다. “아니, 정말 너무해. 불공평해.” “폐하.” 도라 장군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몇 번이고 말씀드립니다만 어떠한 이유가 있든 간에 특혜는 불가합니다. 부디 삼가시기 바랍니다. 비전하도 아시겠지요?”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봤다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참석자만 해도 엄청난 규모였다. 틸레든, 라모나 양대 기사단의 단장부터 시작해 벨민스터 공도 폴리시아에서 찾아왔다. 거기에 스케니아의 선주민족들의 수장들, 타우에서도 주요 두목들이 나란히 참석했다. 식은 가까운 오리고 신전에서 올려졌고, 곧바로 주연이 벌어졌다. 연회장은 캄센 지방의 호족의 저택이었다. 코랄에서 거둔 승리에 대한 축하연도 겸해서 종자나 시종들에게까지 빠짐없이 조금씩이지만 술이 돌아갔고, 겨우 몇 카티브 떨어진 곳이 전쟁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떠들썩한 피로연이 되었다. 신부는 조금 고품스럽고 하얀 혼례의상을 걸치고 머리에는 작은 흰 꽃을 꽂았다. 평소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 샤미안이지만 오늘만은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붉은 입술과 잘 어울려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보는 사람마다 멍하니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신부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차림인 신랑은 술자리에서 틸레든 기사단장의 장난감이 되어 있었다. “정말 경사야. 독립기병대장. 귀공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부인이지만 어쨌거나 축하는 해두지. 하지만 이제부터가 큰일일 거야. 장인어른 되실 분이 저 도라 장군이니, 앞으로 이상한 가게에는 발도 못 들이겠어.” “쓸데없는 참견이야! 어이, 라모나 기사단장. 웃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아하하, 내버려두십시오. 이 녀석, 저 아름다운 사람이 누군가 한 명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이러는 겁니다.” “뭐어?” 새신랑은 씨익 웃고서 발로에게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부인께 말해버릴까요?” “상관없어. 다행히 내 부인은 마음이 넓어서 말이지. 깐깐한 장인도 없고.” “글쎄 어떨까. 부인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포기하신 게 아닐까요. 장난이 지나쳐서 이혼당하지 않게 조심하십쇼.” “어라, 누구 얘길 하는 거지?” 두 사람의 독설도 여전했다. 곁에서 나시아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전쟁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이니 내키는 대로 마실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한편 신랑은 발로의 관대한 부인과 얘기를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신부 곁에 애비가 함께 앉아서 이런저런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함께 인질이 된 이후로 애비는 귀족 여성이라도 샤미안에 대해서만은 상당히 격의 없이 대하게 되었다. 샤미안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한다. “정말 예뻐요. 과연, 정말 나하고는 출신이 다르구나 싶을 정도로.”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자유민의 부인이 되는 거니까요. 앞으로도 여러모로 배워가야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둬야 하니까.” 그 자리에 남장 차림의 로자몬드가 신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최고 공작, 그것도 왕국의 동쪽을 대표하는 대공작이다. 도저히 대화를 나눌 용기가 없는 듯 애비는 당황하며 도망가 버렸다. 이상한 듯이 애비의 뒷모습을 바라모면 로자몬드가 물었다. “지금 계시던 분, 질 경의 부인이 아니신지,,,?” “예, 애비 씨입니다.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지만 앞으로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시겠다고요.” “호오,,,. 거 반가운 말인걸. 분명히 이런 분위기는 참석하면 할수록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로자몬드는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샤미안도 웃으며 인사를 받고서 조금 불안한 듯이 말을 꺼냈다. “로자몬드님. 실은 폴리시아 일로 상의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벨민스터 공작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폐하께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나도 놀랐지만 최고의 인선이야. 그대의 아버님이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지.” “아니, 그것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이 사람이 그 땅을 관리하며 지켜왔으니 뒤를 이을 자로서 분명히 말해둬야 했다. “아버지는 제게 관리를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대에게?” “예.” 로자몬드는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이번 얘기 자체가 굉장히 갑작스럽기는 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국왕의 직할지이므로 누구에게 수여하든 국왕의 마음이고, 그럴 권한도 있다. 하지만 로자몬드의 기분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에 대해 미리 사정도 설명해두었다. 그러자 국왕은 딱 잘라 단언했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으니 묻지 말아주게. 하지만 그대는 정통 후계자에게 넘겨주고 싶다고 했지. 이 선택이야말로 그 바람에 걸맞은 최선의 해결책이야.” 로자몬드는 전혀 사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국왕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로자몬드는 웃음을 지으며 신부에게 말했다. “걱정해봤자 소용ㅇ벗어. 아버님께서도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실 테니까. 혹시 필요하다면 나도 조언하도록 하지.” 신부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미소를 지었다. 로자몬드의 시선이 움직이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민족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질을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이다. 원래는 분명히 자신의 동족인데도 저런 야만족과 마음이 잘 맞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이쪽에 맞춰서 행동할 술도 안다. 어느 쪽이 진짜 저 사람의 본성일까. 그것은 이미 저 사람이 걸어온 길이 증명하고 있었다. “샤미안.” “예?” 로자몬드는 뭔가 말을 걸려다 그만두었다. 곤란한 일이 있으면 질에게 도움을 ㅊ어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런 행동은 오히려 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폴리시아 말인데, 차라리,,,. 남편하고 공동 경영하는 쪽은 안될까?” 얼버무리면서 말하자 신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산에 틀어박혀서 저대로 안 나오지 않을까요.” “어라라, 곤란한 남편이군.” 베노아의 질은 비르그나의 전황을 보고하는 역할을 겸해서 이 자리로 달려왔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이골, 유진과 재회하게 되었다. 질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우를릭을 소개받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이런. 네가 벵크의 수장이었어?” 우를릭 역시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친구들이 고생하고 있던 것도 납득이 가는군. 상대가 너였으니 말이야. 조던.” “지금은 질이다.” “이름을 바꿨어?” “그런 거지. 미안하지만 질이라고 불러줘.” 우를릭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ㅇ벗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치가 슬슬 끝나갈 무렵, 수장들이 한 발 먼저 돌아가면서 신랑이 배웅을 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와 교대하는 듯이 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던 나시아스가 말로의 곁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속삭인다. “어이, 발로,,,.” “응?” “곤란한걸. 이렇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은 했었지만,,,.” “확실하게 말해봐. 무슨 일이야?” 우물거리는 말에 짜증이 난 발로가 묻자 나시아스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면서 속삭였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 발로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곧바로 나시아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나시아스에게 다시 확인한다. “일단 숨어는 있는 거겠지?” “그게 참,,,. 가능한 한 눈에 안 띄려고 애는 쓰고 있는데,,,. 보기 안됐더군.” “알았다. 그럼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헤에, 보기 드물게 관대한 판단이군?” “신하의 의리지. 오늘만은 못 본 척해드리겠어.” 이븐은 세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와 문까지 이어지는 어두운 길을 함께 걸어갔다. 밤이 되어서도 초여름의 바람은 상쾌했다. 지금까지 술 냄새로 가득 찬 방이 있었으니 더욱 상쾌하게 느껴진다. 세 사람 모두 오늘 밤은 강에 정박해둔 배에서 쉬고 내일 산을 넘어가겠다고 한다. 이골이 헤어질 때 이븐에게 말했다. “페르스칸프의 숲을 보러 한번 와. 고향에는 게오르그의 동생들도 자식들도 있다. 그들의 맏형이자 네 큰아버지는 지금도 여러모로 얘깃거리가 되어 있지. 그 아들과 만날 수 있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야.” 이븐은 살짝 미소짓다가 진지한 눈빛으로 조용히 물었다.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이골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 증명했고 내가 직접 확인했다. 넌 그 남자의 영혼도, 우리들이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정신도 분명하게 이어받았어.” 우를릭도 입을 열었다. “핏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지. 넌 게오르그의 자식이다. 게오르그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유진도 두 사람의 말에 동의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래서는 평범한 도시 놈들이나 다를 게 없잖아.” 이븐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븐의 앞날을 축복했고, 이븐 역시 무사한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혼자 남은 새신랑은 바로 저택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바로 근처의 큰 나무를 걷어차며 말했다. “적당히 해두고 나와, 너희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 사이에서 왕비가 거꾸로 매달린 자세로 나타났다. “네놈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국왕과 왕비의 취미가 훔쳐 듣기라니, 국민들이 알면 통곡할 거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어조가 아니었다. 표정도 말투도 상당히 험악했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단, 지금의 얘기를 훔쳐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꿉친구를 빤히 바라보면서 이븐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 결혼 축하 선물이라는 건.” 혼례석상에서 신부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이븐은 혀를 찰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막 식을 올린 부인 앞에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을 수는 없다. 너무나 큰 실례가 아닌가. 게다가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에는 이븐도 진심으로 감탄하며 눈을 치뜨고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잊고 넘어갈 수도 없지만.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왕비가 말했다. “얘기를 할 거면 우선 숨자. 발견되면 곤란하니까.” “멋대로 숨어 들어온 주제에 잘도 지껄이네.” 말은 이렇게 했어도 확실히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곤란했다. 세 사람은 남의 시선을 피해 잡목 뒤로 이동해 검술과 담 사시에 마침 적당한 공간을 발견하고 앉았다. 왕비는 처음부터 구경꾼 역할이었다. 왕비의 눈앞에서 격렬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국왕은 상당히 저자세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정당성을 필사적으로 주장했다. “너한테 준 게 아냐. 영애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도라 장군한테 보낸 거라고. 내가 불평을 들을 이유는 없는걸.” 이븐은 그런 주장을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어이, 임금 씨. 하나만 가르쳐줄까? 그런 걸 두고 궤변이라고 한다고.” “영지는 부인이 관리한다고 하잖아. 넌 모르는 척해도 되는 거 아냐?” “문제가 달라. 나야 물론 누가 안 시켜도 그럴 생각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ㅎ지 않아.” “네가 언제 남의 눈 따위 신경 쓰고 살았어?” “자꾸 말 돌리지 마. 난 말이지, 샤미안하고 결혼할 생각은 있어도 귀족님이 될 생각은 없다고. 그런 토지 따위를 억지로 안겨주는 건 절대로 사양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왕비는 한숨을 쉬며 건물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 국왕에 그 신하라고나 할까. 필사적으로 포상을 내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국왕도 국왕이지만, 죽어라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신하도 보기 드문 물건이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국왕의 입장이 약했다. “부탁이니까 네 자신의 가치와 공적을 조금 자각하라고! 넌 한 때 타우 사람들을 설득해서 델피니아에 편입시켰고, 이번에는 키르탄사스에 북방 호족까지 우리 편으로 만들었어. 너 혼자서! 그 덕분에 스케니아 함대를 격파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넌 혼자서 코랄을 대승리로 이끌었다고!” “시끄러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들이 숨어 있던 풀숲 근처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거 참 곤란하게 됐군. 새신랑은 어디로 꺼진 거야? 신부가 찾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곤란한 듯이 말했다. “그만둬, 발로.” “아니, 이래서는 곤란하잖아.” “금나두라고 했잖아. 경사스러운 자리인데.”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이렇게 얌전히 입 다물고 있잖아.” “그 태도의 어디가 얌전하다는,,,.” 나시아스가 발로의 팔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세 명이 숨을 죽이고 있자 끝으로 나시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정말입니다. 신랑도 빨리 돌아와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다시금 술기운을 가장한 발로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하의 의리라는 것에도 한도라는 게 있다 이겁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목을 움츠리고 있던 세 사람은, 발로와 나시아스의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곧바로 토론을 재개했다. “어쨌거나 코랄만이 아냐. 이골 일행과 타우가 전면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그 결과 테가 강과 로쉐의 가도를 탈환하고 파라스트의 보급로를 끊은 것도 네 노력 덕분이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 마음이 풀리겠어.” “그러니까, 그건 그냥 우연이라니까.” “아냐. 인맥도 당당한 능력이야. 때로는 금맥 이상의 힘을 지니지. 넌 계속해서 든든한 아군을 만들어주면서 나한테 아무 보답도 못하게 할 생각이야? 너무하잖아.” “이번에는 울면서 매달리겠다는 거냐? 다음에는 무릎이라도 꿇고 빌 생각이야?” “좋고 말고. 무릎을 꿇든 물구나무서기든 뭐든지 다 해주지. 그걸로 네가 납득해준다면.” 원래부터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국왕은 곧바로 지면에 양 손을 짚으려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왕비가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이븐. 어지간하면 포기하지 그래. 폴리시아를 정말로 주고 싶은 상대는 이븐이 아니야. 앞으로 태어날 아이한테지.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그게 싫단 말이야, 난.” 벌레라도 씹은 듯한 얼굴이었다. “내 몸에 누구 피가 흐르고 있든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야. 좋아서 이런 핏줄로 태어난 게 아니라고. 애초에 난 완전히 혈통을 남기기 위한 종마나 다름없어. 비슷한 소리를 하면서 집에서 가출한 인간도 저기 있기는 한데,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해가 가,,,.” 국왕과 왕비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금까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고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던 이븐이 어느 정도 심경의 변화를 보인 것이다. 어쩌면 이 사람들이라면 말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뭔가 생각난 듯이 이븐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참. 굳이 말하자면 질한테 주는 게 제일 맞는 거 아냐?” “가능할 리가 없지.” 국왕이 재빨리 부정했다. “질 경은 이미 타우의 영주야. 거기에 이런 땅까지 수여해봐. 난리가 날걸.” “정말,,,. 그렇다고 어째서 내가,,,.” 기세가 꺾인 새신랑이 한숨을 쉬었다. 왕비가 이상한 듯이 물었다. “이븐은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진짜 아버지가 질--조던이라는 사실.” 산적의 푸른 눈이 처음으로 반짝 빛났다. “내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 너한테는 또 한 명의 하버지가 있다고 어렸을 때부터 계속 말했었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왕비도 감탄했다. “그거,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물론.‘ 국왕이 웃음을 지었다. “정말 아저씨다운걸.” 이븐도 미소를 지었다. “난 신경 쓰지 않았어. 나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래도 상관없었지. 평생 만나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법이야.” “그게 세상일이지. 실제도 나도 이렇게 국왕이 되어 있을 정도니까.” “잘도 지껄이네.” 소꿉친구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 왕비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팔짱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피가 이어지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는 얘기인가.” “뭐야, 왕비 씨. 되게 진지하게 말하네?” “아니, 신기한 우연이구나 싶어서.” “하지만 리. 22년간--그 뒤로도 계속, 그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지금의 날 만들어준 건 아말록이니까.” “이하동문.” 이븐도 웃었다. “난 아버지에게 숲에서 지내는 방법부터 수영, 검술까지 모두 배웠어. 네 말대로야, 리. 문제는 핏줄이 아니야. 누가 날 지금의 나로 만들어 주었는가지.” “음. 질 경도 같은 생각이겠지. 하지만 네게 베노아를 물려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잖아?” “글쎄, 어떻게 될지.” 씁쓸하게 웃으면서 새신랑은 거기에서 얘기를 끊었다. “그럼, 난 슬슬 가볼 테니까.”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새신랑에게 왕비가 주문을 했다. “저기, 샤미안한테 잠깐 이쪽에 와달라고 말 좀 전해줄래?” “에?” “난 샤미안의 혼례의상 차림을 보러 온 거라고. 아니, 반드시 꼭 보고 싶어. 그런데 조금도 가까이 갈 수가 없으니까,,,.” 국왕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 샤미안 양만이 아니야.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더 좋겠어. 밤바람을 쏘이고 싶다든가, 아무튼 이유를 붙여서 데리고 와주지 않을래?” “거 멋진걸. 신랑이 신부한테 그런 말을 하면 설마 방해하는 사람도 없겠지.” “음. 그런 데에 참견하는 건 실례니까.” “너희들 말야,,,.” 이븐은 더욱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자기들 입장을 좀 자각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탁해.” “나도 부탁할게.” 새신랑은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도 참 무르단 말야,,,.”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피로연 자리로 돌아갔다. 11장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일단 해보면 될 것 아닙니까.” 상큼하게 말하는 젊은 남자를, 탄가 군의 장교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곳은 캄센에서 서쪽으로 5카티브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장교는 이곳에 있는 버려진 성채를 간단히 수선해서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탄가 방면에 소속되어 얼마 전 여기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코랄에서의 승리에 힘을 얻은 델피니아가 기운을 되찾아버려, 아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도 상당히 수세에 밀린 상태였다. 그런 때에 이 남자가 소개장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소개장을 쓴 사람은 장교가 신뢰하는 어느 무장이었다. 명장으로 이름 높은 사람으로, 배짱도 지략도 갖추고 있으며 신분도 높다. 장교는 그 사람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사람 본인의 필적이었다. “분명히 이 소개장에는 당신한테 협력해라, 이자의 능력은 신뢰할 만하다고 쓰여 있지만,,,.” 아무리 신뢰하는 사람의 말이라고는 해도 장교의 얼굴에는 의심의 빛이 가시지 않았다. 상대의 용모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너무 젊은데다 도저히 책략가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이 남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델피니아를 쓰러뜨리고 싶다면 우선 왕비를 쓰러뜨려야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장교 입장에서야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왕비는 승리의 여신으로 불리며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는 활약을 보이고 있어.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지.” “알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는 양손을 쥐며 진지하게 말했지만, 어딘가 재미있어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거의 괴물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서족에서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확실히,,,.” 장교의 표정도 씁쓸했다. “그 왕비가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병사들이 겁을 집어먹을 정도니까. 이건 소문이지만, 오론 왕은 왕비의 환영에 겁을 먹은 나머지 최근에는 헛소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 안되기는 했어. 지략으로 유명한 그 오론 왕이.” “이족 임금님은 어떠십니까?” “조라더스 폐하는 그런 겁쟁이가 아니시네.” 딱 잘라 단언했지만 사실 이 장교도 알고 있었다. 지금 조라더스와 오론의 관심은 델피니아 국왕 월 그리크가 아니라 왕비 그린다에게 쏠려 있다.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직접적인 상대는 월 그리크와 델피니아의 군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끝없는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그 왕비인 것이다. 탄가의 군대가 그린다 왕비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겁을 먹는 거소가 반대로, 델피니아의 병사들은 ‘왕비님이 계시는 한 우리들은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실로 손쓸 길이 없는 상대였다. 젊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실패할 셈치고, 어떠십니까? 시험 삼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일이 잘 풀려서 왕비를 사로잡게 되면 어떤 포상이든 바라는 대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붙잡아? 산 채로 사로잡겠다는 말인가?!” “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입만 가지고 떠들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승산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부디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 “하, 하지만,,, 내 독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여기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뿐이야.” 왕비를 사로잡으려면 병서 천 명 가지고는 부족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남자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병사만 조금 빌려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장교는 어느 새 얘기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머리 속에서는 허풍만 늘어놓는 상대를 믿을 수는 없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일단 들어나볼까 싶어진 것이다. 남자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12장 루퍼세르미 라덴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떴을 때 또다시 평소와 같은 광경이 펼쳐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새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들어보자 따뜻한 빛이 느껴졌다. 대지와 신록, 꽃의 향기가 난다. 부드러운 바람이 피부를 스치며 흘러간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한동안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주저하며 눈을 뜨다가 갑자기 환희에 찬 나머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늘이 파래!! 눈이 시릴 듯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시야 가득히 햇빛이 쏟아진다.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대로 하늘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눈 닿는 곳에는 끝없이 신록이 펼쳐져 있었다. 완만한 언덕과 숲. 그 사이로 이어지는 새하얀 길. 점점이 보이는 작은 집.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두 팔을 펼쳤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세상에는 이런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주저 앉아서 지면에 두 손을 짚었다. 부드러운 풀이 나 있는 대지에 이마를 대며 마침 거기에 피어 있던 사람스러운 꽃을 향해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고마워.” 틀림없다. 그 아이는 이곳에, 이 푸른 하늘 아래의 어디엔가 있는 것이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리면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더 이상 얼굴은 못 봐도 상관없다는 기분마저 들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허리춤을 뒤적여 카드를 꺼냈다. 제각각 다른 문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십 장이 한 세트를 이루는 물건이다. 점성술사가 사용하는 카드와 굉장히 비슷했다. 그것을 능숙하게 섞고 지면서 늘어놓는다. 표정도 손놀림도 점성술사와 다를 바 없었다. 마침내 그는 땅에서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 저편에서 짐마차를 탄 농부가 다가왔다. “안ㄴ여하세요.” “헤에, 안녕하쇼.” 저도 모르게 따라서 인사를 한 농부는, 자신에게 말을 건 젊은 남자의 특이한 차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로 묶은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고 몸에 걸치고 있는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소매도 없고, 바지도 안 입고 있다. 검은 천 한 장을 몸에 두르고 허리끈을 묶은 걸까. 남자의 가는 허리에 검이 매달려 있는것이 굉장히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덤으로 맨발이었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임금님이 계시는 큰 도시가 있지요?” “아, 코랄 말인가?” “코랄이라는 이름이군요. 그 도시, 여기에서 걸어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으음, 걸어서라,,,. 어른 남자면 아마도 한 열흘 정도 아닐까나.” “감사합니다.” 남자는 지극히 정중하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 따라서 농부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자 상대가 지면서에 뭔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말라빠진 나뭇가지다. 팔 정도의 길이였다. 농부가 보는 앞에서 허리의 검을 뽑아 가지를 쳐내고 대충 똑바르게 다듬는다. 남자는 한족 끝을 땅 위에 세우고 다른 한쪽 끝을 손으로 쥐었다. “어느 쪽으로 가면 될까?” 이 말과 함께 손을 놓는다. 어린애들이 흔히 하는 장난이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갈까를 결정하는 것이다. 막대기가 털썩 쓰러졌고, 농부가 지금 막 온 쪽을 가리켰다. 남자가 막대기를 집어 들고 농부를 향해 생긋 웃었다. “안ㄴ여히.” 그 미소에 농부의 가슴이 뛰었다. 어째서인지 얼굴까지 빨개졌다. 젊은 남자는 그런 농부를 내버려두고, 농부가 오던 길--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