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델피니아 전기 14 지은이: 카야타 스나코 옮긴이: 김소형 펴낸이: 김인규(발행인) 출판사: 대원씨아이 출판년도: 2004년 3월 8일 <지은이 소개/ 카야타 스나코>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 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델피니아』외에는 『키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저드』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김소형> SF와 판타지를 좋아해서 그러한 종류의 책 번역을 많이 했다. 번역작으로는 『십이구기』,『KLAN』,『악마의 파트너』, 등이 있다. <차례> 1 - 10 <소개글> 간신들로부터 탈주한 잘생기고 젊은 왕, 아름답다고까지 불리는 검술을 가진 기사단장, 온 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패기 넘치는 미남 산적, 그리고 결정적으로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과 장밋빛 대리석과 같은 피부를 가진 미소녀가 나오는 화려하고 호쾌하며 낭만적인 로망스. 일본에서 2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환타지 중의 베스트셀러로써 많은 수의 독자들이 그 매력의 첫 번째로 ‘통쾌함?을 꼽고 있다. 1장 “이 녀석은 어쩌지?” 반츠아는 얼굴을 찌푸리고 눈앞에 놓인 아이크의 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버리지? 다들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이제 필요 없잖아?” 레티시아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애석해하는 것도 아니다. 레티시아는 언제나 그랫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강하게 집착하는 경우가 없었다. 시종을 불렀다. 물론 사정을 알고 있는 인간이다. 시종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아이크의 머리를 가지고 갔지만 반츠아를 포함해 동료 전원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누가 저렇게 될지 모른다. 특히, 함께 아란나를 암살하려 햇다가 간신히 살아서 도망친 스캡은 보라색으로 변한 입술을 떨면서 레티시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 일부러 우리들을 보낸 것 아냐?” 자신들이 암살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어차피 도구인 이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이용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만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그 왕비가 인간을 먹는 맹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라나 주위에서 왕비가 눈을 빛내고 있다는 사실도, 아란나를 공격하면 왕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도 뻔히 알면서 가만히 있었다. “비열해. 너. 처음부터 우리들을 미끼로 써먹을 셈이었지.” 말 그대로 ‘미끼’였다. 이 남자는 자기들을 왕비에게 ‘먹여’놓고서 왕비의 허점을 노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비난을 들은 레티시아는 정말 뜻밖이라는 듯이 고양이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만두라고 분명히 말했어. 그 말도 무시하고 뛰쳐나간 건 너희들이잖아?” “헛소리 하지 마! 아이크하고 킴블이 죽은 것도, 네가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이잖아! 듣자 하니 뭐? 약한 것은 내버려두지 못하는 성격이라며! 듣자 하니 뭐? 그런 소리 한번도 안 했잖아! 격정에 목소리를 떨면서도 이미 힘은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겉보기에는 가늘고 약해 보이는 이 남자가. 기묘한 병까지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족의 모두가 한수 위로 치는 건지. 이 남자는 자신과 아이크의 목을 들고 가볍게 달려왔다. 이 가는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날까 경악스러울 정도의 근력과 민첩성으로. 사람을 마구 물어 죽이고 입에서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왕비오하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일부러 가지고 돌아온 아이크의 목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기도 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저쯤 되면 기량이 우월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냉혹하다거나 무관심하다는 것과도 달랐다.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 자체가 자신들과 전혀 다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원래 왕비는 네 표적이었어! 그럼 혼자서 하면 될 것 아냐! 괴물끼리 잘 어올릴 텐데!” 상인 풍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만 해. 스캡. 레티시아는 분명히 가지 말라고 충고했어. 그건 여기 있는 전원이 함께 들었어.” “그래그래. 그때 너희들 날뛰는 걸 보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었을걸?” 상인은 재빨리 말대답을 한 레티시아 역시 타일렀다. “레티. 너도 마찬가지야. 우리들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고 있는 관계지만 목적은 같아. 함께 일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줘.”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숨기다니 뭔 소리야.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것도, 짐승이라는 것도 분명히 처음에 다 말했잖아?” 이번에는 초로의 집사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네 의견을 듣고 싶은데. 스캡도 이번에는 순순히 네 말에 귀를 기울이겠지” 집사의 이름은 민스. 상인의 이름은 조슬란이다. 양쪽 모두 ‘이름 높은’ 실력자였다. 다른 한명. 어수룩한 병사는 개스퍼. 그 역시 실력자들만 모인 일족 안에서도 특히나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자객이었다. 그런 개스퍼가 복잡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다. “전쟁터에서 노린다. 그건 좋다 치더라도 정작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어? 시간이 얼마 없다고.” 민스와 조슬란은 생각에 잠겼다. 반츠아 역시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약속한 기한은 앞으로 약 1년. 대국 델피니아가 애를 먹을 만한 상대라면 탄가나 파라스트밖에 없다. 그리고 그 양국과 델피니아는 속사정이야 어쨌든간에 평화조약을 맺고 바로 최근에 국교회복 기념식전이라는 자리까지 가졌다. 조라더스나 오론도 바보는 아니다. 호시탐탐 델피니아를, 타우의 광맥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또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면 정말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만큼 준비를 갖추고 나서 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종류의 커다란 움직임은 아무리 숨겨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반드시 정보가 흘러나온다. 현재 양국에 그런 기척은 전혀 없었고 주저 없이 식전 초대에 응했다. 당분간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고 판단하는 게 타당하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기한에 맞출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1년 내에, 양국 중 어느 한 쪽과 전쟁을 해야만 한다. 그것도 왕비가 출전해야 할 정도로 큰 규모로. 완전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동료들을 보면서 레티시아는 신나게 말했다. “뭐. 내년 봄만 되면 저쪽이 알아서 잘해줄 거야. 예정대로라면 올해 봄에는 일어났어야 했어. 북쪽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한 해 늦춰진 것뿐이니까. 먼저 조라다스가 스케니아하고 짜고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쳐들어와. 델피니안의 정신이 완전히 두 나라에 쏠리 ㄴ사이에 오론이 등 뒤에서 달리는 거지. 방법 자체는 작년에 탄가와 파라스트가 손을 잡앗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시시할 정도로 고전적이지만 그게 효과가 있을 때가 의외로 많거든. 단순하게 계산해도 적이 세 방향에서 공격해오면 이쪽도 전력을 셋으로 나눠야겠지. 델피니아는 가각 1/3의 전력으로 탄가. 파라스트. 스케니아를 상대해야 해. 엄청 고전 클 거야. 그 왕비 씨도 직접 출전할 수밖에 없겠지.” 모두의 시선이 레티시아에게 모였다. 스캡이 믿기 힘든 듯이 주저하며 물었다. “정말이야?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야 그렇겠지. 극비니까. 하지만 틀림없는 정보야. 조라더스하고 오론이 직접 만나서 짠 계획이라던데.”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특히 스캡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런 정보를 어디서 손에 넣었느냐고 물어버려다가 그만두었다.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반츠아의 얼굴에는 숨기기 힘든 혐오감이 드러났다. 개스퍼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으며 조슬란은 입을 다물고 민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넌 그 사람들하고 자유롭게 교신할 수 있다고 했지.” “저쪽이 멋대로 나타나서 떠들고 가는 거야. 어진간이 심심한 가보지.” 턱을 집고 씨익 웃으면서, 레티시아는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상당히 재미있지 않아? 설마 저 두 나라가 질리지도 앟ㄴ고 이렇게나 빨리 다시 손을 잡아 줄이야. 그 왕이나 왕비도 상상조차 못하겟지, 게다가 이번에는 스케니아까지 끼어들었어. 욕심에 눈이 뒤집힌 대국이 셋이나 뭉쳐서 한꺼번에 델피니아를 공격하는 거야. 그래선 아무리 희대의 영웅이라고 해도, 지상에 내려오신 전쟁의 여신님이라고 해도 고생하지 않겠어?” “그때를 노린다는 건거.” “그래. 이래도 못 죽이면 이쪽도 간판 내려야지.” 가볍게 말하는 레티시아의 눈에는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진심으로 그 왕비와의 승부를 즐기고 있다. 동시에 그렇게 강한 상대를 자신의 손으로 쓰러뜨리는, 그 숨통을 끊을 순간을 초조하 ㄹ정도로 간절하게 기다린다. 가장 연장자인 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우선 해산하지. 조슬란도 말을 이었다. “행동 개시는 내년 봄이지? 개스퍼는 어쩔래? 이 틈에 델피니아 군에 들어가겠어?” 전쟁이 가까워지면 당연히 병사를 모은다. 그에 대비해 내부 사정을 조사해보겠느냐는 으미였지만 개스퍼는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상황이 달라. 어설프게 입대했다가 행동이 제한되면 어쩌려고, 우선 제일 말단 병사들이 드나드는 술집에라도 다녀봐야지. 그러는 편이 정보를 모으기에는 더 쉬워.” “잠깐. 굳이 그런 짓 안해도 ..” 스캡이 불만스러운 듯이 레티시아를 쳐다봤다. 이 남자는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성렬’과 대화할 수 있다. 성령은 말 그대로 신풀귀몰. 어떤 밀실이라도 마음대로 들여다보며 아무리 은밀한 대화라도 놓치지 않고 캐낸다. 어째서 그런 편리한 방법을 이용하지 ㅇ낳는 건가. 한번 날아가서 알아다달라고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렇게 말하려는 스캡을 보며 레티시아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놈들은 언제나 나타나는 게 아냐. 게집이 아니니까 오라고 부른다고 얌전히 오지도 않아. 게다가 이건 우리들 일이잖아. 인간은 말이다. 편한 것만 찾다보면 쓸 만한 게 못 돼. 자기 일은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지. 안 그래?” 그 뻔뻔스러운 말에 스캡은 발끈하며 외쳤다. “게으름 부리는 건 너야? 저번에도 그랫어! 그회라면 얼마든지 잇었는데 사이좋게 수다나 떨고 있던 게 누구야! 네 실력이라면 처리할 수 있었을 거 아냐?!” “호오. 칭찬해줘서 고맙군.” 레티시아는 웃으면서 대답햇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아니 독사처럼 날카로운 빛을 띠며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대놓고 덤벼서 죽을 수 잇는 상대였으면 이미 예산ㄹ에 죽였어. 아무리 대등한 상대라고 해도 그렇지. 분명히 네가 말한 대로 이건 내 일이지만 그 녀석만은 그렇게 쉽지가 않아. 내가 죽을 각오로 덤벼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까지 불러 모은 거잖아. 잘 들으라고. 한번만 더 이렇게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정말 그 괴물한테 먹여버린다. ” 평소의 장남스러운 말투와는 전혀 다른, 표현할 길이 없는 박력이 담긴 낮은 목소리였다. 스캡의 온뭄이 뼛속까지 저려오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숨이 막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느낌.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날카로운 이 위압감. 그때 왕비에게 느꼈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또다시 스캡의 무릅에 부들부들 떨려왓다.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겠지. 자신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은 존재. 언제 공격해올지 알 수 없는 위험한 것이 눈 앞에 잇다는 본능적인 공포. 창백해진 얼굴을 푹 수그리고 식은 땀을 흘리는 후배를 무시하며, 민스가 레티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확실하지는 않다고 했지만 너하고 왕비의 기량은 거의 비슷?고 봐도 될까?” “그래“ “왕비한테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목족을 이룰 수 있겠어?” “아주 잠깐이면 돼;” 파로트 일족 촤고의 정예는 기묘하게 눈을 빛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충분해. 녀석의 집중력. 주의력. 직감. 전투능력. 긋들을 흐트려뜨릴 수 잇다면 뭐든디 상관없어. 내가 바라는 건 녀석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순간’이야. 그 설원에서의 싸움. 왕비의 발이 덫에 걸렸던 그 순간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왕비라고 해도 한쩍 발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레티시아의 검을 피해낼 수 는 없다. 레티시아가 머리르 짜내어 대응책을 준비하고 겨울까지 기다려서 만들어낸 그 ‘무대’는 분명히 효과를 발휘했다. 그때 늑대가 끼어들지만 않앗다면 승패는 결정났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런 소리도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조슬란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우리 일을 하러 돌아가지.” 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레티시아를 최후의 카드로 돌리고 왕비의 힘을 소모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이며 멀쩡한 상태의 레티시아와 왕비를 싸우게 만드는 걸 가장 우선한다. 다른 의견은 없겠지?” 조슬란, 개스퍼. 그리고 반츠아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것 역시 무대 만들기의 일환인 것이다. 스캡조차도 창백한 얼굴로 민스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레티시아가 죽을 각오로 임무에 임하고 잇다면 자신만 살아남을 생각은 없다. 이들 모두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 임무에 실패한 채 물러날 수는 없다. 설령 죽게 되더라도. 또한 표적을 죽이지 못한 채 살아남더라도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을 지게’ 되리 것이 뻔 했다. 그들이 심각하게 의견을 나누는 방 바깥에는 다른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장소는 넓은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 위였다. “재밌어졌구먼” 대머리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유쾌한 듯이 중얼거렸다. 좌선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지만 노인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조인은 가지 위의 공중에 떠 있었다. 노인 양쪽에 떠 있는 것은 브라시아의 저택이 나타나 왕비에게 셰라를 부탁했던 두 성령이었다. 키가 큰 노파와 신관 차림의 소년이다. 노파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때의 쉰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노파의 모숩이 점점 사라지면서 긴 흑발을 나부끼는 육감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변한다. “정말 재미있어. 둘도 없는 구경거리가 되겠지.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게 유감이야.” 변신한 모이라의 말에 신솬 차림의 소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계집이 아니란다. 부리기만 하면 언제나 만나러 가주는데 너무 냉정하잖아?” 이쪽 역시 그때와는 다른 소년의 목소리였다. 묵직해 보이는 의상이 풀썩 떨어진다. 사실 그렇게 보이는 것뿐. 실제로는 모습 자체가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앳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난다. 금색 단발머리가 부드럽게 곱슬거리고 푸른 눈이 밝게 빛나는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하지만 모이라에게 공중에 떠서 표정을 바꿔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구경고 좋지만 레티가 ㅣ기면 어떻게 할거야? 그 왕비가 우리들 동료가 되는 거야 ?” “그건 무리겠지 .” 대머리 노인의 어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그왕비는 어떻게 모습을 바꿔도 태양이야. 태양이 이런 곳에서 떨어져봐. 우리들도 멀쩡하지는 못할 거야.” 모이라 역시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럼 왕비가 이기게 만들 수밖에 없겠군요. 우리들도 손을 쓸까요?” “안돼. 그런 건 불공평해.” 목만 있는 소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모이라가 그런 소녀를 놀린다. “이상한 소릴 다 하네. 주디스 넌 하루라도 빨리 레티시아가 죽기를 바랐잖아? 그럼 왕비 편을 들어주면 될 텐데.”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레티가 여기 올 때 엄청 화낼 거야. 우선 손을 빌려주려고 해도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가겠는걸.” 노인이 부엉이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겠지. 결국 우릳르은 방관자에 지나지 않아. 일이 어떻게 흘러가나 지켜볼 수밖에 없지.” 세 성령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아래쪽에서 진행되는 회의도 어느 정도 결론이 난 듯 모두가 방에서 나가고 불이 꺼졌다. 완전히 쌀쌀해진 밤의 저원을 창백한 그믐달이 비추었다. 모이라는 밤하늘을 올랴다보며 유쾌하게 말했다. “달이 달이라는 사실은 언제쯤에나 깨달을까요?” “얼마 안 남앗을 게야.” “긴 책임도 이제야 끝나는군요.” “그래. 곧.” 하인 한 명이 주인의 심부름으로 촛대를 들고 2층 복도를 걸어간다. 도중에 나무 바로 옆을 지나치게 되었다. 무슨 기척을 느낀 걸까. 하인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삑삑하게 가지를 펼치고 잇는 큰 나무를 바라봤지만 물론 있을 리 없다. 그저 나뭇가지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2장 리모나 가사단장과 엔도바 자작 미망인의 대화는 그로부터 최소한 두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얘기는 전혀 진척되는 기색이 없었다. 부인은 두 번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한 번마니라도 괴로운 경험을 이미 두 번이나 햇고, 거기에 세 번 째 남편까지 일게 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또한 니아사스는 그런 부인의 마음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니아사스 자신도 첫 부인과의 사별로 튼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향해 다가갈 수 없었다. “어쨋거나 지금 바로 출국하는 것만은 그만두십시오.” 니아사스는 간신히이 문제에 대해서만 부인의 대답을 듣는 데 성공하고 잠시 응ㄴ접실을 비웠다. 마실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대화하는 내내 하인들이 차 한 잔도 가져오지 않는 걸 보면 접근금지려이 떨어진 거겟지. 그러나 복도에 나오자마자 나시아스는 정말로 마주치기 실ㅇㄴ 것이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발로엿다. “너 이 자식, ㅐ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잇는 거야?” 험악하게 노려보는 시선에 라모나 기사단장도 바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주저하면서 간신히 반론한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바로 결론을 낼 수는 없을 테니까. 한동안 분위기를 살펴야지. ... 저 삶도 출국은 안 하겠다고 약속해줬어. 여기서 뮐 더 하란 말이야?” 그러자 발로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조소했다. “멍청한 것도 이쯤 되면 한심한 걸 넘어서 짜증나. 너, 부인이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 정말 믿는 거냐?” “...” “내기해도 좋아. 저 사람은 조만간 네 앞에서 사라질 거다. 어째서 그러는 건지 , 넌 아마 이해 못하겟지만.” 나시아스는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깢 네 놈의 자주서을 존중해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잇었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겟어, 바꿔. 내가 이야기를 하지.” “바꾸라니, 그게 무슨...” 나시아스는 주저할 수박에 없었다. 적어도 남자로서 이런 종류의 문제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발로는 가차없이 말했다. “쓸데없이 폼 잡다가 부인을 놓쳐도 된다는 거냐? 내 인내심에도 한계라는 게 잇어. 두 번 도와줄 생각은 없다고.” “난 그다지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시선을 피하는 나시아스를 보며 다시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너답지 앙ㄴㅎ은 말이로군. 라모나 기산다장. 넌 언제나 네가 뭘 할 수 있고 뭐가 불가능한지 아는 인간이었어. 자기 능력 밖이면 오기로 버티지 ㅇ낳고 언제나 순순히 남에게 맡겨왔을 텐데.” “아니, 하지만 이것과 그건>>>” “넥 허둥대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 너한테 맡겨두서는 영원히 애기가 안 끝나. 다 알았으니까 바꿔. 걱정 안 해도 최후의 말만은 네가 하게 해줄 테니까. 아무리 ?도 지금은 유부남에 애까지 딸렸는데 결혼해달라고는 못한다고. 알았으면 비켜봐.” 나시아스는 복잡한 시선으로 발로를 바라봤다. 하루 이틀 사귄 사이가 아니엇으므로 발로가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발로가 자신과 사귀면서 어느 정도 ‘져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 배려를 완전히 치워버린 발라를 정면으로 상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지금의 나시아스로서는 더더욱. 주저했지만 결국 얌전히 친구의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나시아스 대신 응접실에 들어간 발로는 살짝 열려 있던 문을 꽉 닫고 열쇠를 잠갔다. 이제부터 하 ㄹ얘기는 나시아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엔도버 부인은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로가 들오온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다. 발로는 엔도바 부니의 앞에 버티고 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부녀자를 비난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당신이 저 녀석 청혼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엇으면 애초에 쓸데없는 동정을 베풀지도 말았어야 했어. 나시아스는 남녀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수ㅅ처냐나 다름없는 놈인데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거센 대답이었다. 부인은 절대로 발로 쪽을 보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잡고 있으며 옅은 초록 색 눈에는 고통이 가득 담겨 잇다. 휘몰아칠 듯한 기세로 무섭게 말을 쏟아 부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었지오. 지금까지처럼 그분의 우정만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엇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온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다. “언제나, 언제나.... 어떻게 해야 할지. 뭐가 가장 옳은 길인지 알고 잇습니다.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마음이 외치고 있었는데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는 것쯤 알고 잇으면서 어째서 피할 수 없는 건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어째서 그런 짓을 저저질러버렷는지 - 저도 신물이 납니다. 월님. -폐하의 병을 치료하겟다고 첩자 노릇을 수락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모든 걸 망쳐버리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흐들거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린다. 발로는 그런 부인에게 조용히 물음을 던졌다. “후회하고 계십니까?” 라티나는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후회입니까?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잤다는 겁니까? 아니면 바보 같은 나시아스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결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부인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발로를 바라봤다. “그런 말씀 말아주십시오. 전 그래서 저분 앙ㅍ에서 사라지려고..., 오늘 중이라도 외국으로 나가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하지만 나시아스의 얼굴을 보고선 결심이 흔드렸지요.” 라티나는 대답하지 않앗지만, 그 침묵이 발로의 말을 웅변적으로 뒷받침했다. “엔도바 부인.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니 알고 잇을 겁니다. 사람은 항상 올바른 선택만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겠지요. 과오를 범했다면 고치면 됩니다. 당신은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잇지만 그건 너무 소극적입니다. 나시아스의 손을 잡는다는 선택도 잇지 않습니까.” 부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창백한 얼굴 위를 떠돌다 사라진다. 울어버릴 듯이 고통스러운 듯이 희미한 조바심과 함께 악 다문 입이 가늘게 떨렸다. 오랜 침묵 끝에 라티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나시아스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신이 붙어 잇는 여자입니다. 결혼은 할 수 없습니다. ” :글세, 그건 어떨까요. 당신의 사신보다도 나시아스의 운이 강할지 모릅니다. 저 녀석은 저래봐도 끈질긴 인간이니까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발로를 부인은 진지하게 고개를를 저었다. “공작님. 공작님께서는 제 마음을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겁쟁이입니다. 또다시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눈앞의 행복에서 도망치겟다는 겁니까?” 탄력있고 풍부한 저음의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울렸다. 감정이 실린 발로의 목소리는 여자들을 유헉할 때 상당히 큰 효과를 발휘한다. 엔도바 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동자가 주저하며 흔들렸다. 길게 한숨을 쉬고,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저도 바보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계집의 볼품없는 감상이겠지요.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부인은 몸을 떨었다. 무엇을 떠올리는지는 알 수 없다. 두 번 다시 열ㄹ지 않은 남편의 눈꺼풀일까. 바로 어제까지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주던 남편의 차갑게 식은 손일까... “엔도바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첫 남편을 떠올렸습니다. 약혼까지 하고 헤어진 월님을 생각햇지요. 그래도 그때는 아직 미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과거가 괴로웠어도, 아픈 추억이 잇어도 두려워하고만 잇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앞으로 행복해지면 되는 거라고 되뇌면서 그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였지요. 하지만 ...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엇는지는 공작임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운명은 제게 언제나 심술궂고 냉담했지요. 어떻게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면서 나시아스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불행한 경험은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해서 부부가 함께 하늘의 부름을 받기는 정말로 어렵지요. 아니 어느 한 쪽이 상대를 놔두고 먼저 떠나는 게 보통입니다. 당신은 괴로웠다고 했지만 정말 괴롭기만 했습니까?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까? 한 인간이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형태로 생을 마쳤는지 어차피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어물거리는 사이에도 인생은 눈 깜작할 사이에 흘러가버리지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종말이 찾아올 때까지 힘껏 살아가며 행복을 맛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또다시 남겨진 시간을 혼자 보내라는 말씀입니까?” 낮게 갈라지는 부인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때... 릭이..., 엔도바가 죽었을 때 나도 같이 죽고 싶었어. 더 이상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죽으려고 독까지 구해서... 모든 걸 다 끝내버리고 싶었는데. 그것만 마셔버리면 편해질 수 잇는데 도저히...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어. 무서워서..., 손이 떨려서. 난 죽을 만한 용기조차 없어. 텅 빈 껍질만 남아서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그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실감하고 ..., 그겋다면 두 번 다시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두 번 다시 이런 고통은 맛보지 않겟다고 맹세했으면서..., 그 맹세조차 지키지 못하고..., 전 이렇게 한심한 인간입니다. ...” 목소리가 흔들리면서 부인은 서둘러 눈가에 스며 나오는 것을 닦았다. “제 행복은 ..., 행복이라고 생각햇던 시간은 언제나 불행과 나란히 잇엇습니다. 지금 전 나시아스님을 사랑하고, 나시아스님 역시 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손을 잡을 수 잇다면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잇다면 ..., 그럴 수만 있다면..., 생각만해도 꿈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시아스님마저 잃게 된다면...? 또다ㅣ 홀로 남게 된다면..., 못합니다. 더 이상..., 더 이상은 절대로 견딜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행복이 바로 눈 앞에 잇다는 것을 알면서도, 뻔히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발로는 고개를 숙인 부인의 곁으로 다가가서 거의 끌어안듯이 몸을 숙이며 낮게 숙삭였다. “그럼 제가 당신을 죽여드리지요.” 부인이 흠칫 얼굴을 들었다. 발로의 진지한 뉸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친다. “약속하겠습니다. 절대로 당신 혼자만 살아남게 만들지 않겟다고. 결국 당신이 고민하는 건 그 때문이겟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인생을 보내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자기 힘으로는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죽고 싶으면서도 용기가 부족해서 결국 죽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정말로 죽을 자신이 없다. 아닙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힘을 비려드리지요.” 이 무섭도록 비상식적인 제안에 부인은 웃지 않았다. 아니, 진지하게 발로의 눈을 마주 보면서 자세를 바로하고 조용히 반문했다. “정말로 죽여주실건가요?”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당신의 사신이 나시아스를 데려가게 된다면 제가 반드시 뒤를 따르게 해드리지요. 조금 반칙이지만 그걸로 당신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나쁘지는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인은 한동안 멍하니 발로를 올려다 보았다. 마침내 부인의 얼굴에 울음이 섞인 뭇음 같은 것이 퍼졌다. 창백하던 뺨에 혈색이 돌아온다. “공작님은 다정한 분이시군요. ...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 그래주실 수 있겟습니가? 만약 그때에 제가 겁을 먹고 주저한다고 해도 봐주지 않으시는 거지요?” “물론입니다. 부녀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습니다. 고통없이 한순간에 끝내드리지요. 나시아스도 홤께 갈 사람이 있는 편이 기쁠 겁니다.” “하지만...” 부인은 그래도 걱정이 남은 듯햇다. “이런 말씀은 정말로 실례가 되겟습니다만, 공작님 쪽이 저나 나시아스님보다 먼저 돌아가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인으 진지한 말에 발로는 씨익 웃었다. “설미 제가 그런 걱정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해봤습니다만 ... 욕먹는 놈은 오래 산다는 말이 있지요. 제가 바로 그 전형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래 살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슴을 펴고 뻔뻔스럽게 지껄이는 발로를 보며 라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순간 마치 십대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배를 잡고 소리 내어 웃다가 다시 한번 눈물을 닦으면서 인사를 했다.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발로는 불안한 얼굴로 서 잇던 나시아스의 팔을 붙잡아서 본인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응접실 안으로 떠밀었다. “이래도 설득 못하면 너하고 절교다.” 발로는 낮은 목소리로 협박을 한 뒤 문을 닫자마자 곧바로 제2곽의 셀레이저 가를 향해 달려갔다. 슬슬 저녁 시산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도 상관없이 그 집안의 주부를 찾았다. 부엌에 있던 아란나는 당황하며 앞치마를 풀고 머리를 쓰다듬어 정리하며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앞치마를 손에 쥔 채였다. 발로는 노골적으로 기가 막힌다는 말투로 부인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되풀이하고 있는 나시아스의 모습과 일의 전말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유일하게 부인과의 약속에 대해서만은 숨겨두었지만. “저도 말입니다. 이번만은 정말 못 참겠더군요. 당신 오빠는 분명히 뛰어난 기사이고 지휘관입니다. 배짱도 있고 전투의 흐름도 훌륭하게 파악하지요. 그렇지 않앗으면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겠지요. 그런 반면에 사생활에 관해서는 묘하게 어수룩하다는 것도 알고 잇습니다. 그게 귀엽다고 하자면 귀엽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돠는 게 있지요. 암의 연애에 끼어드는 꼴불견만은 정말 사양이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잇을 수 가 없었습니다. 너무 부드ㅇ러워서 밀어붙일 줄 모르는 남자하고 너무 똑똑해서 겁만 내는 여자로는 얘기가 전혀 진행이 안된단 말입니다. 누군가가 드을 밀어주지 않으면 도저히 애기가 안 될 겁니다.” 얘기를 듣던 아란나도 기가 막힌 건지 미안한 건지, 이런저런 감정이 뒤석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정중하게 고갤ㄹ 숙인다. “페를 끼쳐드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정말 저희 오빠도 참 .... 둔하다고 해야 할까, 여자 마름을 모른다고 해야 할까. 저도 몇 번이나 등을 획 밀어버리고 싶었으니까요.” 아란나는 한껏 한탄하다가 기대감으로 얼굴이 밖아지며 말했다 “하지만 어쨋거나 오빠가 라티나님께 청혼은 한 건가요?” “지금쯤은 했어야 합니다. 아니,. 이래도 못하면 저도 포기할 겁니다.” 짜증스러운 말투였지만 발로는 웃고 잇었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오면서 아란나에게 말한다. “하지만 안심은 못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란나 양. 나시아스하고 상관없이 이야기를 진행해버리고 싶은 데 말입니다. 저 바보에게 맡겨뒀다가는 식을 올릴 때쯤에는 두 ? 모두 마흔줄일 겁니다. 우리가 속이 터져서 못 견디지요. 아예 이번 기회에 결론을 지어버리고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협력해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아란나는 앞치마를 꽉 쥐면서 대답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있겟는가. “부모님도 그쪽에 계시니 식은 역시 고향인 본즈비에서 오리는 게 좋겟지요. 분명히 엔도바 부인에게는 친척이 한 명도 없다고 알고 잇습니다. 그렇다면 참석할 친지하고는 당신 집안의 형제들과 친척들뿐이겠습니다만, 연락을 해서 모이는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오빠 결혼식이라면 모드들 다른 일은 다 제쳐두고 달려올 테니까요.” 잔펠가의 형제자매는 몯 불행한 척 결혼을 잊지 못하는 장남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럼 식은 11월 3일이면 되겟습니까?” “예.” “ㄴ몇 번째이건 간에 역시 ㅇ여성에게는 혼례의상이 필요하겠지요. 그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맡겨주십시오. 내일이라도 당장 치수를 제러 가지요.” “대금은 저한테 청구해주십시오. 별것은 아니지만 결혼 축하 선물대신입니다. 식장 준비도 제가 하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완벽한 호흡이었다. 발로가 떠난 뒤 아란나는 저녁 준비도 미뤄두고 맹렬한 기세로 가족과 친척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봉니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라모나 기사단장과 엔도바 자작 부인의 결혼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독립기병대장과 도라 영애의 사연은 그렇게 쉽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다름 아닌 독립 기병대장 본인이 심하게 난색을 드러냇던 것이다. “완전히 당했어. 이아아. 빌어먹을!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거절해버리면 난 진짜 나쁜 놈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어이. 임금님. 대체 어떻게 책임질거야?” 말투도 눈빛도 찌를 듯이 험악했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이렇게 되면 국왕 쪽이 상대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 거절해야 하는 거지?” “그럴 수밖에 없잖아>” “왜? 난 뮈랄까. 넏 샤미안 양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햇는데... 설마 이번 얘기는 저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거야?” “멍청아/ 그런 문젝 아냐.”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마구간에서 차우 사람들의 숙소로 장소를 바꿔 국왕과 이븐은 단들이서 대화를 난 고 잇었다. 신분이 다른 결혼에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보통 아버지나 친척 등의 반대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 그 도라 장군은 딸인 샤미안보다도 이 이야기에 적극적이었다. 국왕은 이븐에 대한 도라 장군의 생각이 변했다는사실에 대해 순수하게 기뻐했다. 처음 만낫을 때는 도어먹지 못한 산적이라며 일종의 혐오감까지 품고 있더 장군이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란바 전투 이후로는 완전히 인식을 새로이 하고 이 남자를 제대로 평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흐뭇하기까지 했다. 국왕에게 잇어서 돌 장군은 또 한 명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한편 이븐은 소년시절을 함께 지낸 소꿉친구, 그런 돌 장군이 사랑하는 외동딸의 남편으로, 새로운 아들로서 이븐을 맞아들이겟다고 한다. ㅇ;렇게 경사스러운 얘기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정작 이븐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지는 것이다. 분녹 아니라 경멸의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난 둔탱이라는 거야. 정말 오르는 거 맞아? 너도 일단은 귀족 출신이지만 난 달라. 뿌리부터 서민이고 너희드이 보기에야 허접한 잡초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말이야. 잡초한테도 잡초의 오기라는 게 잇어. 이제 와서 멋들어진 화단에서 필 생각도 없다고. 그런데 ‘출생이 천한 잡초라고 해도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면서 ‘대등하게 ㅅ귀어준다’ 이거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네. 그런 건 내 쪽에서 거절이야.” 국왕은 저도 모르게 언서을 높였다. “이븐. 정말 화난다. 내가 언제 널 그런 식으로 대햇지?” 분명히 월은 영주의 자식이고 이븐은 영민의 자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둘 사이에서 그런 신분의 차이가 장애가 되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국왕은 신분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이븐 욕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르 ㄹ하니 국왕 쪽은 배신당한 기분이 즐 정도였다. 이븐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군. 월리. 넌 그런 녀석이야.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지. 하지만 사람한테는 할 수 있는 게 잇고 할 수 없는게 잇지. 지금의 네가 왕관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아픈 곳을 찔린 국왕은 흠칫하며 힘없이 반론했다. “분명히 불가능하지만, 그것과 이건 ....” “마찬가지야. 너와 비교하면 별것 아니겟지만 나한테도 버릴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게 잇어, 그런데 넌... 남의 뜻은 완전히 무시하고 멋대로 얘기를 진행시켜버렸다 이거지.” “아니 ,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서 구고앙은 아직까지는 이븐이 무엇에 대해 그렇게 구애받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하고 샤미안 양이라면 딱 어울리고 도라 장군도 널 바란다는데... 더도 언제까지고 독신으로 잇을 수는 없잖아. 게다가 뭐랄까. 아 그렇지. 질도 이번에 젊은 부인을 어???게 된다고 하니까...” “ 아, 그것도 더럽게 농담 같은 얘기지. 열 살도 넘게 어린 마누라란다.” 태연하게 말하는 이븐의 얘기에 국왕은 아차 싶었다. 분명히 그렇다. 지리 ㅇ결혼하면 그 상대는 이븐에게 있어서 ‘의붓어머니’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텐데. 자신과 왕비와 질 본인을 제외하면. 저도 모르게 눈을 치뜨는 국왕을 보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쓰갛고 웃었다. “이상한 얼굴 하지마. 당연하잖아? 질은 나한테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간이니까. 한 사하만해도 지겨워 죽겟는데 그런 깐깐한 장인까지 생긴다고 생각해봐. 끔직하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국왕은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숙소 내에 잇는 질의 방에서는 그 두 명의 깐깐한 인간들이 - 새미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애초에 유례가 없는 혼담이나 여러모로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 폐하께서도 이렇게 후원해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도라 장군은 야간 흥분해 있었다. 귀족 계급의 혼인에서 이 이상 기쁜 경우는 없다. 국왕이 이 결혼을 공인하 ㄴ셈이나 다름없었다. 서둘러서 자세한 사항에 대해 의논하려 서두르고 있었지만 질 쪽은 그렇게 신나하는 기색이 아니엇다. 안 , 오히려 쓴 웃음에 가까울까. 새미안은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반대하는 것도 아니면서 왠지 흥분하는 아버지를 완곡하게 나무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더 ㄴ것이다. 어째서 그러는지 대뫃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잇을 때 롬의 여두목이 나타났다. 베네시는 애비 건으로 또다시 흥분해서 소리나 질러주려고 들이닥쳤다가 도라 장군 부녀를 보고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함께 전장에서 싸워 본 적은 없지만 승리 축하연 같은 자리에서 얼굴은 마주친 적이 있다. 베네사는 황급하게 장군에게 인사햇다. 도라 장군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서줄러 딸의 결혼에 대해 말햇지만 그 말을 들은 베네사는 조금 축역을 받은 듯 했다. “이 아가씨하고 그 애가 결혼? 호호, 아버님도 허락하셨고? 그거 참, 굉장히... 경사로군요.” 하지만 정말로 기쁘게 여기는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앗다. 단순히 놀랐다는 분위기도 아니다. 당장 말하려던 문제도 잊어버리고 석연치 않은 얼굴로 질을 바라본다. 질ㅇㄴ 그런 베네사에게 눈짓을 하고 살짝 고갤 ㄹ저었다. “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샤미안이 입을 열었다. “뭔가, 문제라도 잇는 건가요...?” 베네사는 당황하며 웃음을 짓고 손을 저었다. “아, 아뇨. 그게 관한 걱정입니다. 그 거시기, 뭐랄까, 아가씨 신분이 신분 아닙니까. 저희들한테는 너무 과분한 애기가 아닌가 좀 신경 쓰였을 뿐이지. 물론 장군님까지 허락하신다면 별로 문제는 없겟지요. 당연히, 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혼담입니다,.” 역설하면 할수록 어색한 표정이 생각난 듯했다. “뭔가 잘못되었습니가?” 이 솔직한 질문에 질은 또다시 쓴 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 결국은 그 신분이라는게 문제인 겁니다.” “하지만 타우애도 사람은 많으니까요. 개중에는 그 아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뒤에서 험담하는 인간도 잇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일 때문에 그 아이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베네사는 복자바한 표정이었다. 질은 더 직접적으로 말햇다. “하지만 지내기 불편해질 멋만은 분명합니다. 원래부터 자유민 사이에는 귀족 계급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고 불신이 잇지요. 게다가 도라 백작가는 명문 가 중의 명문입니다. 그런 가문의 따님과 결혼까지 하게 되면, 그 녀석은 그때부터 동료들 사이에서 ‘외부인’ 취급을 받게 되겟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베노아를 이어받기도 힘들어질 겁니다,” “그럴 수가 ..., 하지만 이분님은 폐하의 친구가 아닙니까!” 질은 안색이 확 변한 샤미안엑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까 당신은 윌로비 경의 아드님에 대해서 말햇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경에게 잇어서는 신분이 낮은 처녀,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당신들이 ‘자신들의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인 겁니다 그런 사람과는 표면적인 웋관계는 쌓을 수 있어도 동화됭 수는 없습니다. 결혼까지 하려면 자신이 그 사회에서 떨어져 나올 각오가 필요하지요. 그 정도는 당신도 알고 계실 겁니다.” “나라면 내 쪽이 모든 걸 버리고 남자 쪽으로 가버리겠지만 아가씨는 그럴 수 없겟지요. 하지만 그애한테는 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라는 건 여자를 위하여 자기 입장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생물이 아닌데다 그리 간단히 버리는 것도 곤란하지요.” 현재 이분은 타우와 왕궁 사이의 다리 같은 역할을 맡고 있지만 행동의 기반는 언제나 그리 간단히 버리는 것도 곤란하지요.“ 동료들을 위해서 타우와 왕궁 사이의 다리 같은 역할을 맡고 있지만 행동의 기반은 언제나 타우 쪽이었다. 동료들을 위해서 일할 때에는 베노아의 부두목으로서 타우를 대표해 왕궁에 그 실력을 보일 때에는 독립기병대장으로서 언제나 제2의 고향을 위해 일해왔다. “그렇군. 체면이냐. 사랑이냐, 어려운 선택이야.” 베네사는 묘하게 진지하게 말하는 질을 무섭게 노려봤다. “당신, 입만 잘 놀리는데 말이야. 애미도 그 수법으로 꼬신 거야?” “너무 그러지마. 애비하고 결혼하게 되면 넌 내 ‘장모님’이 될 테니까.” “아아, 싫다, 진담이야. 내가 어쩌다 이 나이가 되어서 나보다 늙은, 이렇기 징그러운 인간을 귀여운 딸하고 결혼학 놔둬야 하느냐고. 난 말이야. 가능하면 젊고 팔팔한 놈으로 하고 싶었다고.” “네가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너, 자기는 사랑의 도피까지 해놓고서 딸은 마음대로 결혼도 못한다니. 설득력이 전혀 없어.” “닥쳐. 기분 문제야. 당신이야말로 무슨 속셈으로 애비를 찍은 건지 솔직하게 다 불어보실까.” “그야 애비가 지끔까지 본 중에 제일 타우의 여자다운 여자였으니까.” 질은 작게 웃었다. “지금 얘기는 조금 이상할까. 난 원래 욉 출신이야. 지금은 두목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속 한구석에는 결국 난 외부인이라는 으ㅟ식이 잇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지더군. 난 지금까지 타우의 남자로서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것만은 변함이 벗겟지. 그러니 타우의 남자로서 타우의 여자를 부인으로 얻어서 타우에 묻고 싶어졌어, 그런 애기지. ” 베네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짜증나. 멋대로 지껄이는 것만 해도 짜증나는데다 하는 소리까지 ㅇㅇ감 같아. 정말 어째서 이런 걸 사위로 맞아야 하는 건지...” 질은 확 표정을 바꾸며 베네사를 바라봤다. “받아주는 겅야?” “어쩔 수 없잖아. 내가 하는 말은 전혀 안 들어 , 무슨 일이 잇어도 당신이 아니면 싫다는데. 정말., 알겟어? 소주앟ㄴ 외동딸을 주는 거야. 다른 여자한테 한눈 팔기만 해봐. 애비가 용서해도 낵 용서 안 할 테니까. 동쪽하고 서쪽 사이에 전쟁이 날 각오는 하라구. 그뿐만이 아니야. 두 번 다시 그런 짓 못하게 사타구니에 달리 님ㅌ천을 완전히 짓이겨줄 테니까. 그것만은 만드시 명심해.” 상상도 할 수 없는 협박에 샤미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랏다. 도라 장군도 깜짝 놀랐지만 연륜 덕에 겉으로는 드러내지 ㅇ낳고 원래 하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럼. 그 질경은 이번 얘기에;;;” 반대하느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애비가 환호성을 올리며 뛰어들어왔다. “고마워요, 엄마!” 어미니를 끌어안고 질을 끌어안는다. 거의 춤이라도 출 듯한 기세였다. 게다가 그 뒤쪽에서는 최근 며칠 내에 조마조마하면서 상황의 흐름을 지켜보고 잇던 타우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조심스럽게 갈채를 보내고 잇다. 이 소동 가운데서도 질은 장군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저 자신은 좋은 혼담이라고 생각하빈다. 하지만 타우는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대한 사회입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이상은 말할 ㅅ 없엇다. 돌 장군도 이렇게 되면 이야기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기에, 딸을 데리고 우선 저택으로 돌아왔다. 실은 그 전에 이븐과 애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믿고 있던 국왕이 ‘도망가버렸다’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 태도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렁ㅆ나보지. 하지만 나도 시작한 이상은 그만둘 ㅅ 가 없어.” 국왕은 오늘 밤에라도 이 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으니 저택으로 찾아가겟다고 말했고 장군도 기쁘게 기다리겠다고 답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 장군은 딸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생각도 못해봤는데 산적에세 체면이라는 게 잇고 동료들에 댛ㄴ 입장이러눈 게 있었나. 그렇다고는 해도 귀족의 딸하고 결혼하는 게 그렇게나 불리한 일일 줄은 생각도 못햇어.” “예, 예상도 못햇습니다.” “명문가의 이름을 노리고 널 손에 넣으려던 타뮤 가문의 자식하고는 정반대로군.” “아버지. 마찬가지여서는 곤란합니다.” 새미안 역시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이븐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그 긍지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타뮤 남작의 자식과 결혼하겟다고 햇다면, 고향 로아의 사람들은 절로 가만히 잇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맹렬하게 항의하겟지. 그는 주군의 딸의 남편으로 ‘어울리지 ㅇ낳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타우에서도 규모가 큰 마을의 부두목의 부인으로서 어울리지 안흔 여자일까. 식사가 끝나고 샤미안은 목욕을 한 후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와 국왕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호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모르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런데도 오늘 자신이 저지른 짓은 생각만해도 얼굴이 다시 달아오를 정도로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얇은 잠옷 차림인데도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아무리 필사적이엇다고 해도 어쩌면 그렇게 대담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이미 쌀쌀한 날씨였지만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밤바람을 쐬려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창 쪽에서 소리가 났다. 샤미안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누군가가 2층 창문을 밖에서 두드린 것이다. 샤미안은 서둘러 옷자락을 꽉 여미면서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단검을 빼들었다. 부녀자가 호신용으로 지니는 예쁘장한 물건이 아닐하 충분히 두툼하면서도 날카로운 날을 가진 진짜 검이었다. 오른 손엔 단검을 쥐고, 왼손으로 천천히 창문을 여니 두툼한 창틀 저편에는 어둠 속에 녹아들 듯이 짙은 벌꿀 빛 피부의 얼굴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밝은 금발이 실내의 조명을 반사한다. “이븐님?” 이븐은 벽의 요철을 밟고 여기까지 올아온 듯햇다. 샤미안은 당황하며 머리를 풀고 얇은 잠옷만 걸친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며 이런 모습을 남자에게 보였다는 사실까지 떠올리자 더욱 얼굴이 달아올랐다. “ 이..., 이런 곳에. 무, 무슨?” 이븐은 변함없이 벽에 붙은 채로 창틀을 붙잡으면서 싱긋 웃었다. “사라의 도피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잠옷 차림의 샤미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때 이래틍에는 도라 장군과 국왕이 대화를 나누고 있엇다. 국왕은 언제나처럼 시종 한 사람도 동반하지 않고 잠행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돌 장군도 이;런 행동만은 제발 그만 해달라고 매달렸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 “같은 성 안인데 그렇게 답답한 짓 할 것 없어.” 사실 도라 장군도 오늘만은 국왕의 행동을 놓고 타이르기 전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폐하의 친구는 끝까지 폐하의 온정을 무시할 생각일까요.” 씁쓸하게 웃으면서 술안주를 준비시켰다. 국왕은 농담을 할 생각이 없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이 복잡한 표정이다. “장군은 이븐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로아의 후계자였던 도라 장군은 아버지와 친족의 알선으로 가까운 지바에 큰 영지를 갖고 있는 호족의 딸과 결혼했다. 그 사람이 샤미안의 어머니였다. 완전한 정략결혼이었다. 상대의 힘은 강력하고 적으로는 돌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우호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런 영주와의 사이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결혼한 처는 성품이 온화하고 아름다우며 남편에게 충실한 여자였다. 장군은 그런 부인에게 충분히 만족하며 진심으로 부인을 사랑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의지로 부인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납득이 안 갑니다. 장래 타우를 짊어지고 갈 인간으로서 귀족의 딸과 결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이유는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만, 독립기병대장이 그런 소문을 신경 쓸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이븐은 한때 국왕의 친구라는 이유로 동료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권력자에게 아첨한다고, 자유민의 긍지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븐은 그런 평 따위 대담하게 웃어넘기며 상대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음험한 뒷소문에 상관없이 자신의 행동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렸다. “그럼 제 딸한테는 폐하께 대한 우정만큼 집착이 없는 건가 싶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합니다. 제 세대라면 반한 여자를 손에 넣으려면 좀더 과감하게, 열심히 덤비는 법이었습니다만 요즘 젊은이들은 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정말 이 늙은이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아니, 장군을 늙은이라는 게 아니야. 왕비도 이해가 안 간다더군. 어느 쪽이 다른 한쪽의 세계에 일방적으로 뛰어들어서 물들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다는 이유가 이상하다고. 이븐은 자유민의 두령. 샤미안은 여백작, 두 사람은 부부. 어째서 그게 안 된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대.” 장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그분다운 의견이로군요.” “하지만 도라 장군. 이 집에 사위로 들어오기 싫다는 건 알겠어. 그건 샤미안 양이 이어받을 권리지 이븐이 받을 게 아니니까. 그런 결벽은 원래부터 저 녀석 신조야. 그것만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야.” 장군이 이상한 듯이 국왕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는 장군과 국왕, 두 사람뿐이다. 심부름꾼도 미리 자리에서 물렸다. 국왕은 술잔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말했다. “저 녀석은 아마도 귀족이라는 이름이 붙는 모든 것을, 자신의 출신 그 자체를 거부할 생각인 거야.” 샤미안은 순간 아무 말도 못하다가, 주저하며 반론했다. “저기???. 사랑의 도피라는 건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남녀가 하는 게 아니었나요?” “예, 보통은 그렇죠.” 창틀에 매달린 채로 이븐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자세로는 대답하기 힘들었는지 샤미안에게 허락을 구한다. “여기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절대로 방 안에 발은 들이지 않을 테니까요.” 샤미안은 주저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훌쩍 창을 넘어서 창틀에 걸터앉았다. 방 안에 서 있는 샤미안을 살짝 올려다보면서 말을 잇는다. “그런 말까지 듣고서 가만히 있으면 남자 주제에 한심하지 않습니까. 분명하게 말해둘까 해서 말입니다. 아까 아버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당신이 귀족만 아니었다면 전 이미 옛날에 당신에게 청혼했을 겁니다.” “그건???.” 남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븐은 자동적으로 재산이 굴러들어오는 결혼은 싫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그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지만. “그래서 작위는 제가 잇겠다고???.” 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걸로는 안 됩니다. 마누라가 여백작이면 더 곤란하지요.” “그 얘기는 아까 질님께 들었습니다. 저와 당신은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다고. 분명히 저는 타우의 생활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산적???, 아니, 자유민의 처로는 여러모로 부족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이븐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산적의 부인이 될 생각입니까?” “예.” “그럼 지금 저와 함께 이 집을 떠나주시겠습니까?” 샤미안은 이 남자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하며 고개를 흔든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이 집에는 저 말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습니다.” 이븐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 결국 돈 많은 마누라를 얻게 되는 거니까요.” 샤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가난하니까, 신분이 낮으니까 안 된다는 얘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윌로비 경도 자식의 결혼에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는 그 아버지가 이 남자를 인정하고 사위로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백작의 칭호만 강요하지 않으면 아무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븐은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당신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바라는 건 저와 같은 자유민 여자입니다. 신분이나 재산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지요. 용기와 긍지, 타우에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기개와 근성, 그것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샤미안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제게는 그런 품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요. 당신이 흔한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압니다. 남자들의 위기에 허둥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피만 보면 그대로 기절하는 귀족 아가씨들하고 당신을 똑같이 볼 생각도 없지요. 당신처럼 활도 검도 잘 쓰는 여자는 타우에도 흔치 않습니다. 승마술 역시 대단합니다. 용기나 배짱도, 어지간한 남자 이상으로 갖추고 있지요.” 처음으로 자신을 칭찬하는 남자의 말에 샤미안은 기쁨으로 뺨을 물들였다. 일반상식에 비추어 생각하자면 참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이지만 그래도 기뻤다. 이븐은 한 손으로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건 제 희망입니다만 평생을 함께 살아갈 여자가 부자여서는 곤란합니다. 거기다 조만간 여백작이 될 사람이어서는???. 데릴사위 정도가 아니라 꼭 정부(情夫)같지 않습니까. 그게 싫은 겁니다. 그래서 같이 도망가자고 말하러 온 거지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저와 함께 가주지 않겠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이게 산적식 청혼이기는 한데요.” 남자의 얼굴이 어쩌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샤미안은 대답할 수 없었다. 불가능하다. 그것만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당혹스러워하며 굳어버린 샤미안을 보고 남자는 잠깐 웃었다. “지독한 말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집과 아버지를 버릴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당신한테 청혼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정말, 어딘가의 그 빌어먹을 멍청이가 쓸데없이 나서버린 덕분에 이 꼴이 난 거지요.” 이븐은 짧게 혀를 찼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도라 장군은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베링저의 조던이라고요?!” 국왕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사전에 강조해두었다. “틀림없어. 이븐이 질의 아들이라는 사실도―이 사실에 관해서는 왕비의 직감말고는 증거가 없지만 왕비는 샤미안 양을 처음 봤을 때에도 장군의 딸이라고 바로 알아챘지. 아란나와 만났을 때에도 한눈에 나시아스의 동생이라는 걸 간파했어. 같은 냄새가 난다더군.” “하, 하오나??? 그럼, 그 일에 대해서 독립기병대장은???.” 국왕은 낮게 신음했다. “아마도 알고 있을 거야.” 이것은 국왕의 직감이었다. 애비를 두고 너무 젊은 의붓어머니라고 말하던 이븐의 얼굴. 태연하게 지껄이던 말투.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 상황에서 이븐이 당연하게 내뱉을 만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눈치챘다. 경직된 장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 하지만, 그럼 왜 그렇다고???.” 당당하게 질과 부자로 지내지 않는 건가. 국왕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저 녀석은 알고 있어. 질의 출신도, 자신이 질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아마 이대로 평생 완전한 타인으로 지낼 셈이야.” “어, 어째서입니까?!” 국왕은 턱을 괴면서 살짝 취기가 오른 눈으로 멍하니 천장의 문양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어. 나 역시 지금까지도 스샤의 아버지만이 진짜 아버지로 생각되니까.” “?????.” “이븐도 그런 게 아니까. 아마 질 역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그건 질 경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장군은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 듯했다. “세상에, 그 무슨???.” 국왕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때 짙은 명문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저버리고 집을 떠났지. 질이 왜 그렇게까지 결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고하게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 역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타우의 인간으로서 긍지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지. 이븐도 마찬가지일지도 몰라.” “?????.” “샤미안 양을 선택해서 장래의 여백작을 부인으로 맞으면,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항감이 들겠지. 특히 이븐은―그 녀석이 언제 자신과 질의 관계를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일종의 굴욕감에 가까운 감정까지 있을 거야. 한때 아버지가 버렸던 것, 자기 자신도 영원히 결별했던 것, 두 번 다시 상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에게 다시 침입을 허락하는 셈이 될 테니까. 아마도 그걸 견디기 힘든 게 아닐까.” 국왕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정열적인 남국의 피도 섞여 있는 주제에 자신의 고집을 관철하려고 태연하게 감정을 포기해버려. 그런 구석은 게오르그 아저씨를 닮았는데 말이야.” 페르난 백작이 북방의 거인이라 칭했던 그 남자는, 좋게 말하자면 융통성이 전혀 없고 나쁘게 말하자면 상식이 없는―일반적인 사회 통념과는 전혀 안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 반면에 어떤 규칙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했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양심, 혹은 제2의 본능이라고 해야겠지만―그런 것만을 완고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조금은 혼란에서 벗어난 장군이 물었다. “그건 사랑하는 처녀에 대한 마음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규정을 우선한다는 뜻입니까?” “이상은 아니야.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감정을 억누른다. 좋게건 나쁘게건 자신의 의지를 버릴 수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지. 예전에 질이 했던 말이지만, 타우에서 귀금속을 훔치는 건 무거운 범죄라더군. 그들에게 있어서 그 규정은 절대적이며 범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라고. 그래서 그 규정을 어긴 자식을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처벌했다고 해. 게오르그 아저씨도 그런 면이 있었지.” “으음???.” 장군은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신음하다가, 마침내 팔을 풀며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말씀을 들으니 그 젊은이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국왕이 놀라며 얼굴을 들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장군이 손을 들며 제지했다. “아니, 아닙니다. 베링저의 피를 이었다는 말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그 사실을 거부하는, 자기의 출신과 함께 두목이라 부르던 질 경이 자신과 무슨 관계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려는 그 의지를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의지라고 해야 할까, 어쩌다 고르고 골라서 전부 저렇게 고집불통인지 원???.” “폐하께서도 남 말은 하실 수 없지요.” 장군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게다가 고집불통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제 딸도 지지 않습니다. 샤미안은 그 남자가 아니면 싫다더군요. 저 녀석은 여자지만 제가 온 힘을 기울여 키운 기사입니다. 절대로 한 번 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리가 없지요.” “장군. 그렇게 느긋한 소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가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 녀석도 진짜 멍청이라 자칫하면 샤미안 양은 혼기를 놓치게 될 거야.” 월에게 있어서 샤미안은 여동생 같은 존재이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게 당연했다. “그럼 폐하께서는 그 젊은이가 제 딸의 반려자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소리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라면 더 바랄 게 없지. 잘만 되어준다면 정말 좋겠어 하지만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 곤란하다는 말이지. 질 경을 보게. 간신히 반골 기질이 가라앉고 자리를 잡아 결혼할 마음이 들 때까지 30년이 걸렸어.” “확실히 그래서는 곤란하겠군요. 저도 손자 얼굴을 봐야 하는데 말입니다.” 진지하게 대답하던 장군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금은 기다려봐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국왕은 조금 의외인 듯한 표정이었다. “기다린다고 어떻게 될 일이라면 나로서도 기다려보고 싶지만, 뭔가 승산이라도 있나?” 보기 드물게, 도라 장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뭔가 회상하는 듯이 웃었다. “아닙니다. 그저, 지금의 질 경과 독립기병대장은 왠지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설마 저 사람이 그 베링저의 망나니였을 줄은 정말 지금도 믿기 힘들군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로아와 폴리시아는 그리 멀지 않다. 장군은 젊었을 무렵 몇 번 조던을 만나본 적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의 조던과 지금의 질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는 건 결코 한쪽이 다른 쪽에 굴복하는 게 아닙니다. 옛날 저희 가문의 선조가 반기를 버리고 나라와 화해했던 것처럼, 타우가 델피니아의 영지로 새롭게 태어나 더욱 큰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일만은 남이 뭐라고 해봤자 소용없으니까요. 독립기병대장이 굴욕이라고 느끼는 그것이 독립기병대장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것만은 명백합니다. 절대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요. 그렇다면 본인이 그 집착을 버려주는 쪽에 걸어볼까 합니다.” “음???.” 국왕은 신음했다. 이제 와서 샤미안에게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려고 하지도 않겠지. 아버지인 도라 장군은 처음부터 이 혼담에 적극적이었고 이븐이 마음을 돌려주기만 하면 원만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렇군. 조금 기다려볼까???.” “예. 이런 일은 저절로 해결되는 법입니다.” “느닷없겠지만 장군도 오랫동안 혼자 지내왔는데, 후실을 들일 생각은 없나?” 장군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상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보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손자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장군이 손자를 기대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없이 멀었다. 샤미안의 방 창가에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다. 둘 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틀에 앉아 있던 이븐은 약속대로 절대 방 안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고, 남자가 제시한 조건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샤미안은 자신에게는 행동할 자격이 없는 듯한 기분이 들어 조금도 상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남자가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대로 어둠이 깔린 정원으로 뛰어내린다. 샤미안이 당황하며 창가로 달려갔다. 정원 쪽을 쳐다봤지만 이미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3장 낮에 시내 구경을 한 산세베리아 국왕 부처는 날이 저물기 전에 코랄 성의 귀빈궁으로 돌아왔다. 식이 끝났어도 거리에는 아직 활기가 남아 있다. 특히 리리아 왕비는 외국에 나와 본 것이 처음이었기에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했다. 장엄한 극장에서 상연되는 가극은 물론,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유랑예인들의 곡예까지 열심히 구경했다. “재미있었나?” 마차의 진동에 흔들리면서 남편인 오르테스가 웃는 얼굴로 묻자 리리라 왕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많은 예인들이 한꺼번에 공연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 우리나라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활기가 넘치더군.” 좋은 항구가 있고 향로가 발달한 이 나라에 비해 죽음의 바다와 파라스트에 끼어 있는 자국의 불리한 지리를 생각하던 오르테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엄청난 차이였다. 월 그리크 역시 숱한 난항을 헤치고 즉위한 왕이건만. 지금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중앙의 사자로서 무용을 떨치고 있으며 나라의 앞날은 화려하게 빛났다. 그에 비해 자신은 아직도 파라스트 앞에 무릎을 꿇고 상대의 온정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는 몸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다르면 웃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전하. 저어???, 왜 그러시지요?” 리리아 왕비의 물음에 오르테스는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식전이 끝난 지 나흘. 그동안 월 그리크와 오르테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손님 대접에는 조금도 소홀한 곳이 없었다. 눈치 빠른 안내역과 시종들이 그들에게 배치되어 전혀 불편하지 않게 시중을 들었다. 느낌은 나쁘지 않았지만 자신이 델피니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손님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왕비의 다과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 자리에 월 그리크가 나타날지 어떨지, 그에 따라서 태도를 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 그런데 ‘왕비’의 초대라고 듣고 한껏 차림을 갖추고 본궁 내부의 응접실로 찾아간 산세베리아 국왕 부처를 맞이한 것은 식전에서 소개되었던 애첩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웃는 얼굴로 인사는 했지만 왕비도 국왕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애첩이 손님을 접대하는 여주인이라는 말이다. 총명한 오르테스이니 만치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손님 대접에 왕비가 아니라 애첩을 내보냈다는 것은 명백하게 ‘격이 낮은 손님’으로 판단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이것이 저쪽의 태도라고 납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의 애첩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접할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기분 상한 척하며 말해보았다.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저와 부인은 비전하의 초대로 찾아 왔습니다만???.” 폴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또박또박 말했다. “예. 델피니아 국왕의 부인은 여기 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너무나도 확고한 어조에 오르테스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거???, 제가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얘기로군요. 그렇다면 얼마 전 식전에서 월 폐하의 곁에 앉아 계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그 분은 저희 폐하의 수호신이십니다. 저는 그분으로부터 오늘 두 분을 접대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외워둔 대사를 열심히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욱 놀려보고 싶어진다. “과연. 하지만 탄가, 파라스트 양국의 대표가 참가하는 자리에는 나와서 손님을 대접하고, 저와 부인을 맞이하는 자리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다니???. 저희 산세베리아도 상당히 가볍게 보인 듯하군요.” “그 일이라면 오히려 반대입니다.” “호오????” 폴라는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겁은 먹지 않았다.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 식전은 우리나라의 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형식적인 자리였습니다. 오늘은 폐하의 친밀한 지인을 맞이하는 자리이니 만치 부인인 제가 접대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건 당신의 진심에서 나오는 말입니까?” 폴라는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왕비님의 말씀입니다. 오르테스 왕은 긍지 높은 본이시니 자신이 결석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때에는 이렇게 말씀드리라고. 중요한 손님이기에 더욱 제가???, 국왕의 부인이 대접하는 것이 국왕을 지키는 전쟁의 여신의 뜻이라고.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성심껏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최후의 말에서는 조금 자신이 없는 듯이 조심스럽게 이국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오르테스는 그만 웃고 말았다. 옆에 있던 리리아 왕비가 애원하는 듯이 남편을 바라봤다. 언제나 남편에게 순종적인 사람이니 남편을 비난하는 말은 조금도 꺼내지 않지만 굉장히 걱정스러운 듯했다. 오르테스는 그런 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음을 짓고 폴라를 향해서도 웃었다. “당신은 굉장히 머리가 좋군요. 그런 말까지 듣고서 등을 돌린다면 제가 나쁜 인간이 됩니다.” “아니오, 말도 안 됩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한지, 두 분이 화를 내며 돌아가셔도 당연하다고 저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왕비님은 한번 말을 꺼내면 도저히 뜻을 거두시지 않는 분이셔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열심히 사과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오르테스는 유쾌하게 웃고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리리아 왕비도 남편을 따랐다. 평화롭고 즐거운 다과회였다. 주로 얘기를 나눈 것은 리리아와 폴라였다. 리리아 왕비는 어렸을 때부터 오르테스와 사귀어온, 이른바 소꿉친구였다. 남편이 무언중에 자신에게 대화를 맡겼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화제는 대부분 이 자리에 없는 국왕과 왕비, 특히 그린다 왕비에 대해서였다. 산세베리아는 굳이 말하자면 보수적인 국가로 남녀의 역할도 엄격하게 나뉘어 있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 전장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타국의 사자와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다. 리리아 왕비는 굉장히 신선한 감동을 받은 듯 그 감상을 솔직하게 입에 올렸다. “정말 놀랐습니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분이 마치 남자 분처럼 당당하기까지 하시다니.” “예.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당당한 분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자상한 분이시지요.” “폴라님은 비전하와 친하신가요????” “예. 굉장히 귀여워해주십니다.” 오르테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미소만 지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왕이라는 신분의 잘생긴 남성이면서도 오르테스는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절도로 존재감을 숨길 수 있었다. 마침내 자리를 뜰 때에도 오르테스는 짓궂게 질문을 던졌다. “달시니 양께서는 국왕 폐하와 비전하, 두 분 중 어느 쪽을 모시고 계십니까?” 그러자 폴라는 생긋 웃으면서 주저 없이 대답했다. “양쪽 모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두 분이 사이가 나빠진다면 어느 분의 편을 드시겠습니까?” 폴라는 이번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 “혹시 사소한 싸움이라면 전 어느 분 편도 들지 않겠습니다.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두 분께서는 알아서 해결하실 테니까요. 혹시 두 분이 정말 심각하게 대립하시게 된다면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끼어들어봤자 방해밖에 안 될 테니까요.” 오르테스는 또다시 웃음을 참았다. 재미있는 애첩이다. 다시금 정중한 대접에 감사를 표하고 자신들에게 배정된 궁으로 물러나려고 할 때, 월 그리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연히 지나가다 들른 듯, 산세베리아 국왕 부처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어, 오르테스 왕. 리리아 왕비도. 시내 구경은 어떠셨습니까?” “예,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마침 일이 바빠서 함께 접대해드리지 못해 죄송하오. 사과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술이라도 한잔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상관없습니다.” 폴라는 리리아 왕비를 따라가고 월은 오르테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곧 시종이 술과 안주를 들고 왔다. 준비가 끝나자 시종도 물러나고 응접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르테스는 살짝 놀라면서 검은 눈을 치떴다. “이거 참, 조심성이 없으시군요.” 월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답답한 게 싫어서 말이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있으면 편하게 이야기하기도 힘들지.” “과연???.” 오르테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설마 월이 이 자리에서 동맹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부인을 우리나라에 맡긴다는 이야기 말이네만, 그건 관두지. 쓸데없이 파라스트만 자극하게 될 뿐이니까. 그래서 상의하고 싶네만???.” 월은 진지한 얼굴로 오르테스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탄가는 스케니아와 손을 잡고 또다시 뭔가 일을 벌일 생각인 듯해. 그렇게 되면 파라스트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지. 어부지리를 차지하려 움직일 거야. 그때 산세베리아가 파라스트의 등에서 못을 박고 움직임을 견제해주면 우리나라로서도 굉장히 고맙겠어. 이쪽에서 꼭 부탁하고 싶네만, 귀국은 정말로 그럴 각오가 있나?” 직설적으로 말을 꺼낸 월을 보며 오르테스는 숨을 삼켰다. 며칠 내내 기다리던 자리였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나 쉽게, 이렇게나 솔직하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야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국 파라스트를 적으로 돌리게 되더라도?” 월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절대로 만약의 얘기가 아니었다. 언제 현실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무게가 담겨 있다. 오르테스는 그제야 자신의 호흡을 되찾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 체재했던 것도 바로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였다. 상대의 눈을 보면서 낮게 말했다. “대신 귀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좋아.” 시원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르테스는 다시 굳어버렸지만 월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들은 동맹자네. 뭔가 그 증거를 만들어두고 싶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부인을 맡겨두는 건 찬성할 수 없어. 그래서 이런 걸 준비했네만???.” 월이 내민 것은 한 장의 증서였다. 문서는 지극히 간결하게, 앞으로 델피니아와 산세베리아는 우호관계를 맺고 서로의 위기에는 자국의 위기와 마찬가지로 온힘을 다해 대처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고 월의 서명도 들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서명해주겠나?” 재촉을 받아도 오르테스는 한동안 반응을 할 수 없었다. 머리를 감싸쥐어버리고 만 것이다. “폐하???.” “그렇게 어색하게 부를 것 없네. 월이라고 불러주지 않겠나?” “그러면, 월왕.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 간단합니다. 동맹 조약서 아닙니까? 그것도 극비의.” “그렇네만.” “그렇다면 좀더 자세하게, 기한이나 원조의 조건 등을 명기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실례입니다만 이래서는 공식 문서라고 보기 힘듭니다.” 오르테스는 기가 막혀서 말했지만 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식으로 문서를 만들려면 여러모로 귀찮은데다 시간만 쓸데없이 잡아먹으니까. 이걸로는 안 되겠나? 요점은 다 넣었다고 생각하네만???.” 오르테스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도 요점만 쓰여 있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 상대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다.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뭔가 필기도구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월은 용의주도하게 품에서 간이 문서함을 꺼내어 펜을 빌려주었다. 월은 오르테스가 서명한 문서를 품안에 집어넣고 아쉬운 기색도 없이 이야기를 끝냈다. “내가 너무 바빠서, 정말 미안하네. 조만간 사본을 보내도록 하지.” 월은 씨익 웃으면서 응접실을 떠났다. 두 사람이 응접실에 앉은 지 겨우 몇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르테스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부인이 기다리는 귀빈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산세베리아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파라스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파라스트는 산세베리아를 조공국으로 취급하며 요구도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고, 그에 따라 국민의 불만도 점점 커져갔다. 형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오르테스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중신들을 모아서 파라스트 대신 방패가 되어줄 나라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폭은 좁았다. 파라스트에 뒤지지 않는 대국이라면 탄가나 델피니아밖에 없었다. 가신들은 만장일치로 델피니아를 선택했다. 야심가라 불러도 좋을 조라더스에 비해 월 그리크는 어딘가 만만한 데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의를 다해 대하면 나쁜 결과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계산에서 비호를 얻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나 간단하게 수속이 끝나버렸다. 동맹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았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이쪽이 불리한 입장이니 차라리 이런저런 요구가 붙는 편이 안심이 된다. 궁으로 돌아온 오르테스는 달튼을 불러 의견을 물어보았다. “허어, 그거 참 그 임금님다운 방식이군요. 특별히 꿍꿍이는 없을 겁니다.” 달튼은 웃어넘겼지만 오르테스는 더욱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단순한 심심풀이로 동맹을 맺었다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진심에서 나온 게 아닐까요.” 느긋한 말투는 도저히 자신의 주군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형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오르테스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가신이 많이 있었지만 달튼은 그중에서도 특히 괴팍한 편이었다. 애초에 전 국왕 우즈디스람이 실각하게 된 것도 아첨밖에 못하는 측근만 옆에 두고 뜻있는 사람의 간언은 모두 무시하며 숙청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달튼의 말이었다. “그러니 말입니다, 전하. 저 같은 용병 부스러기도 한 마리쯤은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이 뻔뻔스러운 남자를, 오르테스는 특별히 중용하지도 신용하지도 않았지만 도움이 된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짧게 혀를 찬다. “달튼, 너도 이번만은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군.” 그 태도도 그렇고 수속도 그렇고, 오르테스가 보기에는 진지함이 부족해 보였다. 장난치고 있는 걸로 보일 정도였다. 이 동맹이 파라스트에 발각되면 산세베리아는 끝이다. 리리아 왕비는 인질로 잡히고 국토가 식민지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손을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중앙에서 전란이 일어날 때를 기다렸다가 파라스트의 주의가 완전히 동쪽으로 쏠렸을 틈을 타서 등을 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기습의 의미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회가 올 때까지는 산세베리아는 지금까지처럼 파라스트에 충성을 바치는 척해야 한다. 하지만 저 국왕의 태도로 봐서는 도저히 이 중대한 비밀을 지켜줄 것 같지도 않았다. 중앙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정원은 완전히 가을빛에 물들어 청량한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르테스는 자조하는 웃음을 흘렸다. “내게 이만큼의 국토와 국력이 있다면 뜻대로 세상을 휘어잡아볼 텐데???.” “전하. 없는 걸 바라봤자 소용없습니다. 참고로 있지도 않은 상대의 흑심을 들여다보려는 짓도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흑심이 없다고?” “없을 겁니다. 자잘하게 잔머리를 굴릴 만한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월 그리크라는 남자는 완전히 운만 가지고 지금까지 왕좌를 지켜왔다는 말이 되네. 기가 막히는군. 델피니아는 저렇게 평범한 인간에게 왕관을 맡겨둘 정도로 미숙한 나라였나.” 아무래도 오르테스는 완전히 월을 모자라는 인물로 평가해버린 듯했다. 달튼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저 임금임은 일종의 바보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단순한 바보만은 아닙니다.” “분명히 전장에서는 영웅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인간일수록 정치에서는 사려가 부족한 경우가 많지. 아까 행동만 해도 그래. 저런 남자한테 우리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어. 같이 죽는 건 더욱 사양이다.” “그럼 이번 건은 취소하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러면 나라에 남아 있는 가신들이 납득하지 않을 텐데요.” “어쩔 수 없지. 모두들 선택을 잘못한 거니까. 자네만 책망할 생각은 없네.” 완전히 포기한 듯이 오르테스가 말했을 때 시종이 달려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폴라 달시니의 심부름으로 찾아왔다는 젊은 시녀가 얌전한 걸음으로 오르테스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마님께서 보내는 전언입니다. 아까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로 기뻤습니다. 늦었지만 산세베리아의 왕비님께 이것을 친애의 증거로 보내드립니다.” “수고하네. 그럼 왕비한테???.” 가지고 가라고 말하려던 오르테스는 씨익 웃는 시녀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잃었다. 그린다 왕비였다. 밤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얌전하게 틀어 올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손에는 뚜껑이 달린 바구니를 들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얌전한 시녀로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눈빛이 달랐다. 전쟁의 여신으로 불리는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똑바로 오르테스를 바라보고 있다. 산세베리아의 국왕은 순간 얼어버렸지만 겉으로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로 오르테스의 등 뒤에 서 있던 달튼도 눈을 휘둥그레 떴을 뿐이었다. 짧은 침묵 뒤 오르테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마음씀에 감사드리네. 왕비도 기뻐하겠지. 누가 왕비를 불러오게.” 입구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지시를 받고 방에서 나간다. 그린다 왕비는 시종이 나가는 기척을 살피고서 바구니를 탁상 위에 내려놓고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여기에 서명해줘.” 아까의 문서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이미 월 그리크의 서명이 들어 있다. 여기에 오르테스의 서명이 들어가면 서로 한 장씩 똑같은 문서를 보관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왕비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월 그리크의 서명만 들어간 문서를 산세베리아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으니까. 오르테스는 그런 사정을 곧바로 깨달았지만 짐짓 기가 막힌 듯이 한숨을 쉬어 보였다. “거 참 모를 나라로군, 델피니아는. 왕비가 측실의 심부름꾼으로 찾아오다니???.” “구실로는 딱 좋잖아? 됐으니까 여기 서명해. 난 일부러 염색까지 하고 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까.” “그럼 당당하게 왕비라고 밝히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거 좋지. 이 동맹이 표면에 드러나도 상관없다면 그렇게 해주겠어.” 침묵하는 오르테스에게 왕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더라도 델피니아는 조금도 곤란할 게 없어. 하지만 산세베리아는 그렇지 않지. 아니야? 알았으면 썩 서명이나 해.”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아직 어린 시녀가 일국의 국왕을 마구 몰아붙이고 있다. 달튼은 쓴웃음을 삼켰고 오르테스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펜을 손에 들었다. “정말 특이한 나라야. 왕비가 간첩 흉내까지 낼 줄은???.” “왕비가 하니까 편리한 거야. 아비용 성에도 들어가 봤는걸.” “무슨 말도 안 되는???.” “진짜야. 오론한테 채찍질을 한 번 해줬지. 아, 두 번이었나.” 유쾌하게 말하던 왕비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조심스러운 시녀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조금 뒤 방의 입구에 리리아 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가 그린다 왕비라고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음. 달시니 양께서 선물을 보내왔소.” 달튼이 눈치 빠르게 자기가 있으니 괜찮다면서 시종을 내보냈다. 그러나 델피니아의 왕비는 산세베리아의 왕비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번에는 리리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린디에타 왕비님???.” “이거, 폴라한테 받아왔어. 괜찮으면 받아달라면서.” 동맹문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선물로 가져온 듯하다. 바구니 안에서 나온 것은 자수를 놓은 손수건이었다. 화사한 색조의 꽃들이 새하얀 천 안에서 아름답게 피어났고 가장자리에는 섬세한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다.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멋진 물건을???. 이건 폴라님께서 직접 만드신 건가요?” “응. 폴라는 이런 걸 잘하거든.” “정말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리리아 왕비는 그제야 처음으로 이 나라의 왕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아름답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귀부인보다도. 하지만 그 눈빛만은 어떤 남자보다도 강렬했다. 긴장으로 몸을 굳히는 이국의 왕비에게 지상에 내려온 전쟁의 여신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폴라하고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마워.” “황송합니다.” 그동안 오르테스는 문서에 서명을 마쳤다. 델피니아의 왕비는 그것을 확인하고 등을 휙 돌렸다. 오르테스가 왕비의 등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왕비. 아까 한 말의 의미를 아직 듣지 못했소. 오론에게 채찍질을 해줬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지?” 시녀 차림의 왕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말 그대로야. 아비용 성에 숨어들어가서 오론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채찍으로 패줬지.” 오르테스는 순간 말을 못하다가 비웃음 지으며 말했다. “굉장히 손이 무르군. 기왕 할 거라면 채찍 따위가 아니라 당신 검으로 일을 끝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했으면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을 것을. “당신들 입장에서도 그러는 편지 좋지 않았을까?” 야유하는 오르테스에게, 왕비는 냉정하게 반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그때 델피니아군은 아비용에 주둔하고 있었지. 이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으려는 참이었어. 그런 때에 파라스트 국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럼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이 원만하게 일이 해결됐을까?” 진리였다. 파라스트인은 미친 듯이 일어나서 델피니아군을 공격했겠지.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이, 델피니아가 한 짓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며 전세의 역전을 꾀했을 것이다. “나는 상관없지만 월한테는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적국의 국왕을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게 할 수는 없잖아. 오론을 채찍으로 패준 건 그저 화풀이였어.” 오르테스는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바보 같은 짓을???. 어린애도 아닌데,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행동해서 어쩌겠다는 거요? 암살 의혹 이전의 문제지. 당신이 그런 장소에서 죽거나, 아니 발견만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델피니아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텐데.” 왕비는 어린애한테 설명이라도 해주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난 그런 데서 발견될 만큼 멍청하지 않아. 아비용 성의 병사들한테 죽을 만큼 약하지도 않지. 그러니까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상당한 자신감이로군.” “사실이니까. 이 세계에서 날 죽일 수 있을 만한 건 현재로서는 한 명뿐이야.” “당신 남편 말인가?” “아니. 그 녀석은 못해. 그럴 만한 실력은 있을지 몰라도 결정적으로 살기가 부족하니까.” 왕비는 웃어넘겼지만 오르테스로서는 그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르테스는 현실적인 인간이었으므로 남들이 아무리 입을 모아 찬양하는 왕비라도 해도 지극히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실력이 있고 머리도 좋은 것 같지만 결국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닌가. 하늘에서 내려온 전쟁의 여신일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같은 인간인 이상 칼에 베이면 피가 나고 심장이 멎으면 죽을터. “왕비. 너무 우쭐해하지 마시지 그래. 아무리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이라고 해도 불사신은 아닐 테지. 아니면 델피니아의 왕비는 정말로 죽지 않는다는 건가?” “시험해보는 게 어때?” 말과 동시에 달튼이 움직였다. 평상시의 절도 없는 행동을 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왕비에게 덤벼들어 사정거리에 들어서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리리아 왕비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만 해도 칭찬해줘야 할 상황이다. 리리아 왕비는 창백해져서 남편에게 매달렸다. “전하!” “조용히.” 달튼 쪽이 충분히 유리했다. 맨몸의 왕비는 그대로 달튼의 검을 맞아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달튼의 검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그 순간, 왕비는 긴 치마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게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마치 고양이처럼 한바퀴를 돌고서 착지한다. 곧바로 질풍처럼 달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으윽???.” 달튼이 신음을 흘렸다. 어디서 꺼낸 건지, 왕비는 단검을 달튼의 목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직전에 번개처럼 빠르게 달튼의 오른손에서 검을 쳐냈다. 바라보던 오르테스 조차도 대체 어떻게 한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달튼의 오른손이 축 늘어져 있다. 손목의 급소를 강하게 눌러 일시적으로 마비시킨 것이다. 오르테스 역시 초인적인 능력을 눈앞에서 직면하고 말을 잃어버렸다. 왕비는 상대의 전의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단검을 거뒀다. 남자 둘 앞에서 주저 없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다리에 감아둔 검집 안에 집어넣는다. “거 멋진 검집이군요???.” 마비된 손목을 문지르면서 달튼이 웃었지만 눈에는 기묘한 광채가 감돌았다. 공격을 피하며 공중에 떠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히며 자신의 팔을 잡았다. 이 흐름 속에서 대체 언제 무슨 방법으로 허벅지에 숨겨둔 검을 뺀 걸까. 게다가 팔을 잡은 힘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달튼 역시 검 하나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온 인간으로서 왕비의 실력을 세상의 평판 이상으로 굉장하다고 평가했다. 그린다 왕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오르테스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뭐든지???.” “넌 지금 자신의 나라를 더 키우고 싶어, 아니면 멸망당하고 싶지 않은 거야? 어느 쪽이지?” 오르테스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내게 국토 확장 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어. 그건 산세베리아가 더 성숙하고 충분히 힘을 쌓은 뒤에 생각할 일이지. 지금 상황―예속 국가의 이름에 안주하고 있는 환경에서 그런 짓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왕비는 살짝 웃었다. 기가 막힌 듯한 웃음이었다. “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아는 주제에 남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군.” “무슨????” “마찬가지야. 나나 월도 나라를 확장시키고 싶은 게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고 있지.” “?????.” “조라더스도 오론도, 너무 똑똑하다보니 바보짓을 하고 있어. 델피니아가 영토를 넓히고 싶어한다고 착각하고 있지. 월은 그저 자기 나라를 지키면서 남이 싸움을 걸어오면 맞서 싸울 뿐이야. 왕으로서 월의 힘이 강해지는 게 위협이라면, 그 기세를 꺾어버리고 싶으면, 얘기는 간단해. 아무 짓도 안 하면 되지.” “?????.” “그러면 저 녀석을 절대로 자기 발로 바깥에 안 나가. 자기 땅 안에서 느긋하게 지내겠지. 낮잠 자는 소만큼이나 안전한 인간이라고.” 오르테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자기 땅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곳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척박한 토지밖에 없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망의 대상이 된다. 부유한 자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땅을 빼앗아 더욱 풍요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왕비. 남자라는 건 그것만으로는 멈출 수 없는 생물이야. 도저히 당신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그야 네 맘이지. 하지만 이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면 기억해두라고. 이쪽은 낮잠을 자고 싶은 거야. 어설프게 깨워서 좋을 게 없어." 왕비는 그 말만 남기고 문을 열어, 방에서 나갔다. 마침 복도를 걸어가던 가신을 보고 또다시 시녀인 척하며 고개를 숙이고 지나친다. 리리아 왕비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부인을 달래서 방으로 돌려보내고 오르테스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어째서 우리나라에는 저런 전쟁의 여신이 강림해주지 않았는지???.” 저렇게나 편리한 병기는 없다. 용맹한 지휘관인 동시에 우수한 간첩, 기량도 우수하기 짝이 없다. 모습도 아름답고 연극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으니 외교에도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자기라면 저렇게나 쓸모 있는 존재를 놀려두지 않는다. 각 방면에 돌리며 유용하게 사용할 것을, 어째서―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달튼은 고개를 저었다. “관두십시오. 그건 전하께서 제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난 동화 따위는 안 믿어.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도 안 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 왕비가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난 인간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니까요.” “너도 상대가 안 되던가?” “예. 남자라고 해도 저런 괴력은 흔치 않지요. 중장갑 차림의 탄가 기병을 창 하나로 말에서 떨어뜨렸다는 얘기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간신히 마비는 풀렸지만 그 짧은 순간에 오른팔을 못 쓰게 만들려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상당히 숙련된 솜씨였다. 그 이상으로, 가까이에서 본 왕비의 눈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 영혼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이다. “전하는 호랑이와 정면으로 마주쳐본 적이 있으십니까? 진짜야생으로.” “뭐?” “전 있습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온몸에 식은땀이 나지만요. 그런 눈을 직시했다는 사실이 제일 무서웠지요. 엄청나게 강렬한 의지가 있습니다.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두뇌가, 지혜가 있었지요. 그런 느낌이 말입니다. 저 왕비는 그때의 호랑이하고 굉장히 비슷합니다.” 감개가 어린 말투에 오르테스는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네게 그런 소리까지 하게 만들다니. 한 길에 정진하면 젊은 여자라도 그리 되는 건가.” 무예가 그리 뛰어나니 정치에는 둔감한가 하면, 저 왕비는 국왕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 중 한명이라고 한다. “저 사람, 뭔가 약점은 없을까요.” 분해서인지 단순한 흥미때문인지, 달튼은 묘한 말을 꺼냈다. “약점이라니?” “아무리 불사신이라고 해도 한 가지 정도 약점은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승리의 여신 하미아의 약점은 누가 뭐래도 그 질투에 있지. 이건 대부분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리 냉정한 여자라 해도, 현숙하다는 평판을 받고 있어도 그것만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다고 하지만???.” “리리아님만은 별개, 겠지요?” 젊은 주인을 당당하게 놀리면서 달튼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 왕비는 남편하고 같이 애첩을 귀여워하고 있단 말입니다.” “정말 모르겠군.” “예,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리리아 왕비는 혼자서 폴라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가 답례로 자국에서 가져온 레이스 숄을 건넸다. 그때 리리아는 남편의 전언이라고 밝히면서 곤란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린디에타 왕비님께서 정장을 하고 식전에 참석한 것은 폴라님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디 한번 더 그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주시도록, 폴라님이 부탁드릴 수는 없을지???. 그렇게 부탁하고 싶다고 합니다만???.” 폴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딱 한 번만이라고 약속하고 그 자리에 나와 주셨던 거니까요.” “죄송합니다. 무례한 말씀을 드려서???.”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런 부탁을 받은 것도 이번까지 벌써 다섯 번째인걸요.” 리리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폴라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어째서인지 남자 분들은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만 말도 안 됩니다. 왕비님은 거짓말도, 약속을 어기는 것도 굉장히 싫어하시지요. 그렇게나 완고하게 이번 연회만이라고 약속하고 나와주셨는데, 그런 부탁을 드렸다가는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으실 겁니다.” “어머나???.” “그러니 설령 오르테스 전하의 부탁이라고 해도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월 폐하의 부탁이라도 그렇습니까?” 처는(첩은) 남편의 뜻에 따르는 법이다. 그것이 리리아 왕비의 사고방식이었다. 그 남편이 국왕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게 상실일 텐데도 폴라는 생긋 웃으며 단언했다. “폐하는 절대로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엄청나게 당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절대로’에 조금 힘이 들어가버렸다. 국왕의 명령보다도 왕비의 의사가 우선시될 경우가 있다고 암묵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리리아 왕비는 이 대화에 대해 상세하게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오르테스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델피니아는 차라리 왕비한테 왕좌를 넘겨주는 편이 나은 것 아냐?” 왕비 쪽의 권력이 국왕보다 더 강하다면 그게 타당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4장 달튼이 말한 왕비의 약점―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왕비의 태도가 이상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깨달은 것은 셰라뿐이었지만. 폴라는 나시아스와 라티나의 결혼 축하선물을 만들기 위해 수예에 힘을 기울였다. 샤미안과 셰라도 돕고 있었다. 방 가득 펼쳐진 천과 색색가지의 실, 반짇고리 등이 사이에서 셰라가 바느질을 하고 있으려니 구경을 하러 온 왕비가 셰라의 손을 보더니 갑자기 이상한 태도를 보였다.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왕비는 뚫어져라 자수를 바라보았다. “리????” 왕비를 부르려다 흠칫했다. “아, 아무것도 아냐. 그거 뭘 만드는 거야?” 셰라는 새하얀 비단에 붉은 장미를 수놓고 있었다. “예쁘지요? 침대에 깔 이불입니다. 라티나님은 장미를 좋아하시니까요???.” “하지만 조금 화려한 것 아냐?” “예, 이것만이라면 화려하겠지요. 하지만???.” 옆에서 폴라가 열심히 자수틀을 잡고 바늘을 놀리고 있다. 폴라는 손을 멈추고 왕비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장미 주위에 작은 가지를 수놓고 작은 새가 날아다니게 하려고 합ㄴ다. 침대 가득히 작은 정원이 펼쳐진 것처럼 만들고 싶어서???.” 폴라 곁에 놓인 천에는 노란색이나 연녹색 깃털의 작은 새 여러 마리가 수놓여 있었다. “굉장해???. 꼭 진짜 같아. 이렇게 많이 수를 놓으려면 힘들 텐데.” 바쁘게 손을 놀리던 샤미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정말 갑작스러운 얘기였는걸요.” 샤미안은 한때 그 남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잠겼었지만 아버지 도라 장군과 국왕의 설득에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도라 백작가의 딸이라는 지위 이외에는 그 사람도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다, 그것만이 샤미안의 위안이었다. 눈이 돌아가도록 빠르게 손을 놀리는 세 사람을 보고서 왕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만 놀고 있으려니 좀 미안한걸.” “그럼 나시아스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셰라가 말하자 다른 두 여자가 살짝 웃었다. 나시아스와 라티나의 결혼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지만 정작 신랑만은 조금 어색한 눈치였다. 자기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일이 다 진행되어서 남은 것은 식뿐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은 정말로 기쁘다, 엔도바 부인이라면 더 이상 바라라 것도 없다, 둘이 함께 찾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감격에 가득 찬 편지를 보냈고, 국왕은 성 안에 신혼집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아란나는 시내에서도 유명한 재단사에게 의상을 부탁했고 신부와 상의하며 신혼집에 들일 가재도구를 시원시원하게 결정했다. 신랑만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하는 것 자체는 물론 진심으로 기쁘다. 그저, 당사자인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릴 뿐이지만 그렇다고 불평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소리를 하려고 했더니 완전히 중매쟁이가 되어버린 여동생이 펄펄 뛰며 반론했기 때문이다. “오빠, 정말 남자답지 못하네요. 여기까지 와서 언니하고 결혼하는 게 싫다는 건가요?” 아란나는 이미 라티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놓고서 결혼하기 싫으냐고 묻는 것도 상당히 모순되지만 요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깨끗하게 포기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시아스의 표정은 복잡했다. 원래부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혼을 하더라도 둘이서 조용히 식을 올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로가 끼어든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조용히’ 해결될 리가 없었다. 고민하는 오빠를 보며 여동생은 다시금 공격을 퍼부었다. “오빠. 사보아 공작님을 원망하는 건 착각이에요. 어물거리고 있던 오빠가 제일 나쁘니까요.” “원망하는 건 아니야. 그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싶어서???.” “오라버니!” 날카로운 일갈에 라모나 기사단장이 주춤 물러섰다. 단원들에게는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한심해! 그게 비르그나 요새를 책임지는 기사가 할 말인가요?! 지금까지 얼마나 공작님 신세를 졌는지 잊어버리셨나요? 엘레인이 죽었을 때에도 그랬잖아요!” “아란나, 너 말이지???.” 머리를 싸매는 나시아스 대신 엔도바 부인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예전 부인께서 돌아가셨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언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나시아스가 필사적으로 입 다물고 있으라고 손을 저으며 신호를 날렸지만, 아란나는 물론 무시했다. “엘레인이 죽기 조금 전, 오빠는 라모나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이례적인 발탁이었지요. 그런 만큼 책임도 막중했지만, 엘레인의 죽음은 당시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장례식을 마친 뒤의 오빠는 마치 병자 같았어요.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식사도 거의 못하고 하루 종일 멍하니 있으면서 시선도 흐릿하게―아뇨, 정말이라니까요. 오빠, 우리들이 그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오빠에게 못을 박아놓고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아무튼 도저히 기사단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기사단 쪽에서는 부인의 죽음은 안됐지만 임무를 내팽개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사단에 대한 배임행위다,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나중에는 부단장 직위에서 경질하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더군요.” “어머나???.” 부인은 살짝 놀라면서 동시에 반성했다. 과거에 상처를 받은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치유되기 힘든 상처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아란나는 오빠를 돌아봤다. “그때 사보아 공작님은 오빠를 변호하면서 오빠가 회복될 때까지 부단장직에서 해임당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주셨잖아요! 그것도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말씀하실 건가요?!” 나시아스는 당황하며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아냐. 나도 그때에는 발로의 우정에 진심으로 감사했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과 이건 얘기가???.” 아란나는 어머니를 쏙 빼닮은 푸른 눈을 날카롭게 빛내면서 팔짱을 끼고 최후 통첩을 했다. “오빠, 적당히 해두세요. 이 이상 억지를 부리면 오늘로써 남매의 연을 끊을 테니까요.” “어머, 그건 곤란해요.” 부인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전 아란나님과 가족이 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는데요.‘ “저도 그래요. 정말 너무너무 기뻐서???.” 두 사람은 생긋 미소지었다. 신랑 혼자 따돌림당하면서 한숨을 쉰다. 이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야 포기할 수밖에 없다니까.” 나이 어린 왕비가 불쌍한 듯이, 조금은 재미있어하면서 나시아스를 위로했다. “내 결혼 때에도 그랬지만 결혼식이라는 건 신부가 주역이야. 남자는 그냥 제단에 딸린 장식품이라고. 발언권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전 어쩌다 일이 이렇게 굴러가게 됐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갑니다.” “그런 생각해봤자 소용없다고 했잖아. 결혼하기 싫은 건 아니지?” “물론입니다.” “이제 와서 라티나가, 역시 결혼은 못하겠다고 말하면 곤란하겠지?” 나시아스는 살짝 안색이 변하면서 이번만은 딱 잘라서 말했다. “곤란하다 정도가 아닙니다.” 왕비는 배를 싸쥐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이 상황에 납득 못하겠다고 해봤자 그거야말로 납득이 안 가는걸. 조금이라도 연애 시절을 즐겨보고 싶다고 여유부리는 걸로밖에 안 들려.” “비전하???.” 기가 막혀서 반론은 했지만 사실상 라모나 기사단장의 결혼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차례로 축하선물이 도착했고 축하를 겸한 초대도 여러 건 들어왔다. 언덕을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돌이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나시아스 역시 싫어도 그런 초대에 응해야만 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는 사이에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그날의 본즈비는 구름 하나 없이 쾌청한 날씨였다. 상쾌한 가을 햇살이 녹색으로 가득한 들판을 아름답게 비춘다. 신부는 촌장의 저택에서 몸단장을 끝내고 촌장의 부인과 함께 식장으로 나왔다. 마을의 조그만 오리고 신전은 가을꽃으로 장식되었고 바깥의 정원에는 여러 개의 원탁이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피로연을 열게 된다. 문도 벽도 없는 작은 신전이니 이렇게 해두면 정식으로 초대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신혼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할 수 있다. 신전 주방에서는 마을 여자들이 요리를 준비하고 피로연장 구석에서는 악사들 몇 명이 대화를 나누며 가벼운 춤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새신랑인 나시아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거창한 예식에서는 도망칠 수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말하자 비웃음이 특기인 친구는 씨익 웃으며 반론했다. “뭐, 내 취향은 아니지만 너한테는 이 정도로 소박한 편이 성격에 맞을 테니까. 수도 제일의 극단을 불러와서 너와 부인의 사연을 즉흥연극으로 시켜도 재미있겠지만???.” “뭐, 뭐라곳????!” “너는 그렇다 치고, 부인한테까지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으니까 관뒀어.” 뻔뻔스러운 대답에 새신랑은 어이가 없었다. 그날의 대화 이후로 계속 나시아스 쪽의 입장이 약했다. 라티나는 발로와 이야기를 나눈 뒤로 그때까지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아무리 필사적으로 설득해도 긍정적인 대답을 않던 사람이 갑자기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결혼하겠습니다’라고 나왔다. 그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런 것보다도 기쁨이 너무 컸던 바람에 자세한 경위조차 물어볼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그 이유가 굉장히 신경 쓰였다. “저기 말이야, 발로???.” “뭐야?” “그???, 지금 들어두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러니까 뭐냐고.” 엔도바 부인을 무슨 말로 설득했느냐고 우물거리면서 묻는 친구를 보고 발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원래는 나 하나만 알고 있어야 할 일이지만 너한테는 말해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리려는 신랑이 이 비상식적이기 짝이 없는 ‘약속’을 듣고 경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순간 망연자실하게 굳어버렸다가 간신히 반문했다. “자, 자살을 도와주겠???다고?!” “두 번 다시 미망인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생각만 필사적으로 품고 있었으니까. 널 사랑하고 네 구혼을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끝까지 거절하려고 했던 이유가 그거야.” “결혼을 하지 않으면??? 미망인이 되지도 않는다?” “바로 그거지. 굉장히 부정적인 이유지만 이미 두 번이나 남편과 사별한 사람이야. 미래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나시아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티나는 언제나 온화하게 웃으면서 죽은 남편의 추억을 그리운 듯이 얘기하곤 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과거에 사로잡혀서 절망에 시달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렇다고 그런 약속을???.” 정신을 차린 나시아스가 비난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발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짓말도 방편이라고. 잘 들어. 부인도 옛날 일은 잊어버리라든가. 더 강하게 살아가라든가 하는 흔해빠진 위로 따위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당연한 말만으로는 전혀 의미가 없지.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할지도 모른다,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른다. 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실에 대한 걱정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어.” 발로는 유쾌하게 웃으며 신랑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오래오래 살라고. 약속이라고는 해도 힘없는 여성에게 손을 쓰는 건 나도 사양이니까.” “그런, 멋대로???.” 식장 한 켠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시간이 되었다. 신부는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코스모스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코랄 최고의 재단사가 온 힘을 다해 만들어낸 혼례의상은 유행의 최첨단답게 식전 때 왕비가 입었던 드레스의 영향을 받았는지, 어깨도 치마도 부풀리는 것을 자제하며 날씬한 몸의 우아한 곡선을 잘 살려내었다. 광택이 도는 비단은 순백이라기보다도 차분한 은색에 가까운 느낌으로, 신부의 나이나 큰 키와 잘 어울렸다. 절대 젊지는 않은 신부이니 가련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청초하면서도 당당하며 일종의 위엄까지 풍겼다. 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누구보다도 그 모습을 눈부시게 바라보던 나시아스는 신부의 손을 잡고 나란히 제단을 향해 걸으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라티나.” “네.” “전 죽지 않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홀로 남겨둘 바에는 사신과 거래를 해서라도 살아남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남편이 될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뺨이 살짝 불게 물들었고, 신랑도 상대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제단 앞에서 기다리던 나이든 신관이 당황하며 헛기침을 했다. “에헴. 정말 미안하네만 맹세의 키스는 주례가 끝난 뒤에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빨갛게 되어 떨어졌고 장내에는 웃음이 퍼졌다. 신전에서 맹세가 끝난 뒤 신랑 신부는 실외에 설치된 피로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축하의 자리에 차례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두 사람에게 축하인사를 했고, 때로는 작은 선물도 전해주었다. 대륙 각지에서 달려온 나시아스의 형제들도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라티나 역시 처음 만나는 남편의 형제들, 그 배우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어린 조카들이 조심스럽게 내미는 선물과 꽃다발을 웃는 얼굴로 받아 들었다. 정원 저편을 바라보던 아란나가 갑자기 흠칫 놀랐다. 아란나만이 아니었다. 나시아스도, 형제들도,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쟌펠 경 부처도 대화를 멈추며 숨을 삼켰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떠들썩한 피로연장을 조용히 지나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란나가 신음하는 듯이 말했다. “데슈네 아저씨, 아주머니???.” 그보다도 먼저 쟌펠 경 부부가 앞으로 나서서 두 사람의 손을 꼭 쥐었다. 말없이 서로 시선을 교차한다. 만감이 어린 표정이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라티나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시아스가 곁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엘레인의 부모님이십니다.” 데슈네 경은 따뜻한 시선으로 라티나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데슈네 부인은 라티나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데슈네 부처는 원래 쟌펠 가의 친한 사이였지만 엘레인이 죽은 뒤로 그 교유가 완전히 끊어졌었다. “딸을 위해서 무리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나시아스에게 큰 폐를 끼쳐버렸다. 도저히 면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나시아스가 새 부인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데슈네 경은 주름진 눈가를 적시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이걸로, 이제야 간신히 우리들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죽은 딸도 우리들처럼 기뻐해줄 거라고, 나시아스의 새 출발을 축복해줄 게 틀림없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아니, 정말 바보 같은 부모라고 웃으셔도 됩니다.” 쟌펠 경은 고개를 저으며 옛 친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데슈네 경. 이번에 오랜만에 함께 낚시라도 가지 않겠습니까?” 텔리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꼭 마을 부인회에도 찾아와주세요. 모두들 보고 싶어했답니다.” 라티나는 다시 옛 우정을 확인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막 자신의 남편이 된 사람을 돌아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저도 그분 묘에 가보고 싶어요.” 나시아스 역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예, 함께 가지요. 저도 엘레인에게 당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앞으로 이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겠다고. 엘레인을 잊지 위해서가 아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은 죽어버렸지만 남겨진 자신은 당신 몫까지 살아가겠다.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렇게 보고하는 것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무렵 타우에서는 베노아의 두목 질과 롬이 애비의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식장은 타우 서쪽에 위치한 롬의 마을.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악기를 연주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젊은 남녀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타우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식은 축제였다. 신전에서 올리는 맹세도, 서명할 증서도 필요 없다. 이 산이 그들의 신이며 생활의 장이었다. 동료들 앞에서 축배를 올리고 밤이 샐 때까지 소란스럽게 지내는 것이 통례였다. 롬의 마을은 일주일 전부터 정신없이 혼례 준비를 했고 근처 마을에서까지 도와주러 올 정도였다. 신부인 애비는 친구들이 만들어준 혼례 의상을 입고 있었다. 금실로 수를 놓은, 선홍색 드레스였다. 최근의 혼례의상은 하얀색이 유행이라고 어머니가 말했지만 애비는 고개를 저었다. “난 빨간색이 좋아.” 애비는 어딘가에서 하얀 의상은 신부의 무구함과 순결을 뜻하는 것이며 신랑의 색에 물들겠다는 결심을 나타내는 거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게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구니 순결이니, 나하고는 안 어울려. 그렇다고 딴 남자가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조금 얼굴을 붉히고,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남편의 색에 물든다는 것도 난 싫어. 그러려고 결혼하는 게 아닌걸.” “어라, 그런 소리 하면서 의외로 좋은 부인이 되는 것 아냐?” “남편은 베노아의 두목이잖아?” 혼례의상을 만들면서 같은 또래의 아가씨들이 놀려대자 애비는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난 그 사람이 좋으니까 결혼하는 거야.” 미혼이 처녀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들한테는 고집스럽게 말했지만 애비도 실은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식 당일에 타는 듯이 붉은 의상을 걸친 신부를 본 질도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정도였다. “역시??? 하얀 옷이 좋았을까?” 작은 목소리로 묻자 신부보다 훨씬 연상이 새신랑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 어울려.” 애비도 환하게 웃으면서 신랑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 말이야, 꼭 빨간색으로 하고 싶었어.” “무슨 색이라도 큰 상관은 없지만.” “상관있어. 이건 타우의 색이잖아.” “?????.” “아무래도 흰색은 느낌이 안 왔어. 너무 얌전한걸. 난 검도 활도 다룰 수 있어. 야생마라도 탈 수 있지. 엄마하고 같이 전투에도 여러 번 참가해봤고, 피도 수없이 뒤집어써봤지. 그래놓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순진무구한 척하기에는 뭔가??? 우스워서 말이야. 당신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싫었어.” 질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면서 애비의 손을 쥐었다. 애비의 손가락에서 그때 건네줬던 홍옥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그렇군. 피투성이의 신부는 좀 곤란하지만 얌전하기만 하고 연약한 여자는 더 곤란해. 나한테는 안 어울릴 테니까.” “난 어울릴까?” “그래. 나한테 딱 어울리는 마누라지.” 새벽녘까지 이어진 축하연 뒤 애비는 질과 함께 베노아로 떠났지만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베네사는 계속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건장 조심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돌아와라 등등을 지겹도록 되풀이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 어차피 열흘 뒤의 집회에는 저쪽으로 올 거잖아?” 한 달에 한 번 두목들이 모이는 다음번 회의는 베노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물론 가고말고. 누가 안 간대? 그때 상황에 따라서는 널 도로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엄마도 참???.” 신부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애비는 말 한 마리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짐을 싸들고 베노아로 시집을 갔고, 걱정이 많은 어머니는 열흘 뒤 열리는 회의에 즉각 달려갔다. 두목의 부인쯤 되면 베노아의 남자들에게는 ‘누님’이 되며 그 남자들을 뒷받침하는 여자들 입장에서도 대장 격이 존재이다. 어중간한 각오로는 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고 주위에서도 받아들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애비는 척척 일하면서 질의 시중을 들고, 남자들과 함께 야산을 달리며 여자들의 집회에도 참가했다. “과연 롬의 두목의 딸이야.” 겨우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애비의 평판은 굉장히 좋았고 베네사도 그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히 이번 회의는 평소의 보고 이상으로 새신랑이 된 베노아의 두목을 놀리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고, 특히 서쪽의 비스체스는 더욱 열심히 놀려댔지만 정작 당사자인 질은 무슨 소리를 들어도 태연할 뿐이었다. “분하면 너도 젊은 마누라 얻지 그래.” 이렇게 뻔뻔스러운 대답까지 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러고말고. 지금 마누라만 어떻게 할 수 있으면.” 비스체스도 당당하게 대답했고 장내는 폭소에 휩싸였다. 회의라고는 해도 그렇게 딱딱한 자리는 아니었고, 광대한 타우의 동쪽과 서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서로 얘기를 나누는 좌담회 같은 분위기였다. 제각각 자기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가운데 북쪽의 카지크의 두목인 슬레이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는 말할 틈이 없었지만 한 달쯤 전에 묘한 녀석들이 지나간 것 같더군. 죽음의 바다 쪽에서 올라와서 테바를 향해 이동했다고 해.” 모두들 조금 놀랐다. 그것만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얘기였다. 그런 여정을 잡는 여행자라면 상당히 있지만 카지크의 두목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그 녀석들, 배로 왔어. 주류에 휩쓸려서 해안에 밀려왔지. 그런데도 바다로는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두비아 강을 거슬러 올라온 거야.” 타우는 하천이 풍부하여 크고 작은 강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두비아는 카지크 근처에서 죽음의 바다 쪽, 탄가와 파라스트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강이다. 베네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어, 그런 짓을 했다간 산 속에서 객사하는 거 아냐?” “그래. 어지간히 성능이 좋은 배였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쉽게 상류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 그런데 이 녀석들, 이번에는 걷기 시작하더라고. 자기들이 타고 온 배를 지고서.” “워?!” 다른 두목들도 이 말에는 깜짝 놀랐다. “배를 지고서?” “뗏목 같은 거라면야???, 그야 성인 남자 몇 명이 있으면 들 수는 있겠지만.” 슬레이는 아직도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뗏목도 거룻배도 아니야. 용골이 달리고 상당히 폭도 있는 소형 선박이었지. 돛대는 분리할 수 있고 배 밑에는 노를 거는 구멍이 나 있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양의 배였다지. 아무튼 그걸 타고 온 녀석 몇 십 명이 같이 지고서 걸어갔다더군.” “뭐어어????!” 평지라면 몰라도 산 속에서 그런 짓을 하고 나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타우에는 제대로 된 길도 거의 없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나도 기가 막혀서 말이야. 꿈이라도 꾼 거 아니냐고 꾸중했지만 그걸 여러 명이 같이 본 거야. 화물은 같이 태우고 온 말에 싣고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영차 하면서 들어서는 산 속을 향해 걸어갔다더군. 그놈들, 길을 가르쳐준 답례라면서 본 적도 없는 은화를 우리 쪽 젊은 녀석한테 넘겨줬어. 이런 증거까지 있으니 의심할 수도 없잖아.” “허어???. 그거 확실히 이상한 얘기네.” “타고 온 배를 지고 갔다니 엄청난 힘이잖아.” “대체 뭐였을까????” 두목들이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단 한 명, 질의 표정만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날카롭게 카지크의 두목에게 물었다. “슬레이. 넌 그녀석들을 직접 봤어?” “아니. 젊은 녀석들이 본 것뿐이야. 그런 차림으로 테바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했지만 신경도 안 쓰더라는군.” “어떤 사람들이었지?” “모두들 엄청나게 키가 컸대. 눈빛은 날카롭고, 거의 입을 안열더라나. 왠지 기분이 나빴다던데.” 질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물었다. “브란. 카지크에서 테바로 갔다면 츠이르 영역도 분명히 지나갔을 거야. 뭔가 못 들었어?” 츠이르의 브란은 얼마 전까지는 대리인으로서, 지금은 당당한 두목으로서 이 회의에 참가하고 있다. 놀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 들어. 어쩌면 아래 녀석들 중에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바로 확인해줘. 비스체스, 베니, 키니슨도 부탁해.” 질은 무서운 기세로 말했다. “모두들 미안하지만 대답이 올 때까지 여기서 움직이지 말아줘. 상황에 따라서는 긴급 소집이 필요할지도 몰라. 처음부터 여기에 있어주면 시간이 절약되니까.” 동쪽의 대포인 아델포의 퍼잰과 소베린의 마커스가 시선을 교차했고 서쪽의 두목들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그리고 며칠 뒤, 서쪽으로부터 비슷한 종류의 보고가 속속 도착했다. 산 속에서 만난 체구가 큰 남자들이 테바까지 가는 길을 물어 보았다. 그들은 미리 소지하고 있던 말린 고기를 먹으면서 멋대로 사냥도 하지 않았다. 배를 짊어진 거구의 남자들이 산 속에서 나타나 테바 강 상류에 배를 내리고 짐과 말을 도로 실은 뒤 유유히 강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고개를 젖혀서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의 거인들은 엄청난 박력이 있었지만 예의를 지키며 조용히 영역을 지나갔다. 그 행동은 분명 수상했지만 특별히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바쁜 두목에게 일부러 보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든 보고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쪽의 두목들이 보고를 받지 못했으니 동쪽의 질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새신부도 남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닫고 가까이 오지 않았다. 베노아에 머물던 두목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쪽에서 날아온 보고를 들은 질은 다시 두목들을 회의장에 모아들였다. “내 착각이면 좋겠지만???.” 그렇게 미리 말해두고, 질은 얘기를 시작했다. “서쪽 사람들이 본 거인들은 스케니아 인이야. 척후병으로 타우를 정찰하러 온 걸 거야.” 두목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스케니아?” “어디에 있는 나라야???.” “정찰이라니, 또 전쟁이 시작되는 거야?” 그런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베네사와 비스체스가 발언했다. “무슨 말이지? 금맥이 목적인 거야?” “지금 우리들한테 델피니아가 붙어 있다는 걸 모른다는 건가?” 질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알고 있겠지. 놈들의 목적은 우리들이 아니야. 델피니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들을 여기에 눌러앉혀놓고 델피니아 군에 참가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거겠지.” “?????.” “스케니아라는 나라에는 두 개의 민족이 있어. 하나는 우리들도 코랄 성에서 봤지. 중앙에서 이주해 수도를 차지한 민족이야. 이쪽은 별로 신경 쓸 것 없어. 우선 우리들이 상대할 일도 없지. 국왕하고 왕비가 정면에서 격파할 테니까. 하지만 또 하나―원래부터 스케니아에 살던 선주민족, 이쪽이 문제야.” 그 자리에는 이븐도 있었다.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질의 말을 듣고 있다. “그들은 뿌리부터 수렵민족인데다 전투민족이야. 남자들은 모두 서쪽 녀석들이 본 것처럼 괴력을 지닌 거인들뿐이지. 용맹하기로 이름난 탄가의 군인 따위도 그놈들에 비하면 어린애나 다름없어. 이 선주민족은 우리들이 권력자를 증오하는 것처럼 ‘나중에 와놓고 멋대로 지배를 선언한 빌어먹을 새끼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지. 절대로 현재의 스케니아 정부에 힘을 빌려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정세가 변한 것 같아.” 비스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했다. “어디, 조금 기다려봐. 그러니까 네 걱정은 지금 스케니아의 지배층과 그 선주민족인가 하는 놈들이 손을 잡은 게 아닌가 하는 거지?” “그래.”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큰일이지. 탄가가 스케니아한테 꼬리를 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븐이 임금님한테 직접 들었어. 조라더스라면 아무도 타우의 금맥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스케니아를 끌어들였겠지.하지만 그 동맹에 선주민족까지 포함된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져. 탄가는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와 동맹을 맺는 셈이 되지. 정말 모르겠어. 어째서 그 녀석들이 이런 권력다툼에 가담하게 된 건지???.” 말끝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그 선주민족이라는 게 뭘 할 수 있는 건데?” 조금 짜증스럽게 묻는 비스체스에게 질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서쪽 녀석들이 직접 눈으로 본 짓을 할 수 있지.” "어?” “스케니아의 군함은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없어. 그 배를 지고 타우를 넘을 수도 없지.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어.” 질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알겠어? 한번 생각해봐. 죽음의 바다를 건너서 산을 넘고, 테바를 내려가서 펜타스를 통과한다. 진로를 왼쪽으로 틀어서 동쪽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 뭐가 나오지?” “뭐라니???, 에엑?!” 말을 잃은 비스체스의 곁에서 츠이르의 브란도 함께 굳어버렸다. 돌체의 키니슨은 입을 더욱 꽉 다물었고 동쪽의 현자, 소베린의 마커스가 낮게 신음했다. “설마??? 정말 그런 짓을 할 셈일까?” “하겠지. 그리고 놈들이라면 가능해.” “하지만 겨우 몇 십 명밖에 못 타는 소형 선박이야. 그런 미약한 전력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한 척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얼마 안 되어도 몇 백 척이 한꺼번에 내려오면 엄청난 위력이 되지. 중앙의 배는 절대로 그 배를 따라잡을 수 없어. 결정적으로 속도가 다르니까. 물론 해전으로는 승부가 안 돼. 물자나 전투원을 잔뜩 실은 델피니아의 군함이 이길 게 뻔하지. 그러니까 놈들은 처음부터 함대전을 할 생각이 없어. 군함과 마주치면 재빨리 도망치면서 덩치가 큰 군함이 다가올 수 없는 얕은 만이나 강에 개별적으로 상륙하는 거야.” 비스체스가 외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모해. 그런, 코랄을 그런 방법으로 공격하려고 하다니 말도 안돼!” “그놈들만이라면 무모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에 호응해서 스케니아의 군함이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와 함께 코랄을 공격한다면?” 질의 말이 갖는 무게감이 두목들 사이에 스며드는 데에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모두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빠져나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퍼잰이 손을 들고 천천히 말했다. “질. 조금 얘기를 되돌리지. 그 선주민족들은 죽음의 바다를 남하해 배를 짊어지고 산을 넘은 뒤 테바 강을 통과해서 동쪽 해안으로 몰려갈 생각이다, 그런 얘기지?” “그래. 그런 말이야. 이번 녀석들은 산을 넘어서 동쪽 해안까지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거야.” 그렇다면 다음에는 틀림없이 본진이 온다. 아델포의 두목은 먹이를 덮치기 직전의 매처럼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뭔가 있지 않았어? 그 경로 한가운데에는 타우가 있어.” 질은 살짝 웃었다. “어이, 퍼잰. 산을 통과할 때 나뭇가지나 풀숲이 방해가 되면 어떻게 하지? 지나갈 수 없다고 포기할 리는 없잖아? 그렇다고 되돌아가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베어버리고 지나가면 돼.” 또다시 비스체스가 분연히 외쳤다. “농담하는 거야? 여기는, 타우는 우리 영역이야! 그런 짓을 허락할 리가 없잖아!!” 모두가 흥분하는 가운데 마커스만이 침착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스케니아는 탄가와 함께 델피니아를 공격할 생각이야. 이 타우는 우연히 그 길목에 위치해 있지. 그것만이라면 우리가 굳이 싸움에 말려들 이유도 없을 텐데?” 혼잣말 같은 물에 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 말대로야. 모두 잘 들어. 우리들한테는 두 가지 길이 있어. 하나는 외부 놈들이 뻔뻔스럽게 타우에 기어 들어와서 테바로 나가는 걸 못 본 척하고 보내주는 것. 그렇게 하면 전쟁은 피할 수 있어.” 하지만 이 제안에는 대부분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 쳐? 그런 건 절대로 사양이야.” “한두 명이 아니야. 몇 백, 어쩌면 몇 천 명은 되겠지. 한 나라의 군대나 다름없이. 그런 놈들의 침입을 용납하다니???.” “그렇고말고. 아무리 마커스의 말이라고 해도 이것만은???.”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 마을 녀석들도 절대로 찬성하지 않을 거야. 그럴 리가 없지.” 퍼잰이 그런 의견을 가로막았다. “마커스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얘기지.”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고드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지만???.” 서쪽의 장로는 고령이라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대리인으로 참석한 누이의 프레커가 단언했다. “걱정 없습니다. 우리 두목이 여기 있었으면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된다고 했을 겁니다.” 의장을 맡고 있는 질이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북쪽에서 수없이 내려오는 녀석들을 여기에서 물리친다. 델피니아의 조력은 기대할 수 없어. 그쪽은 그쪽대로 싸워야 할 적이 있으니까.” “스케니아의 정규군과 탄가인가.” 비스체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중앙의 패권다툼 말고도 자신들의 발밑에 묻혀 있는 자원이 놈들을 자극하고 있다. “우리들도 좋아서 이런 보물 위에 앉아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럼 써 비켜! ―라고 높으신 놈들이 말하겠지.“ 누이의 프레커도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 친구인 츠이르의 브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븐을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델피니아 편에 붙은 게 정답이었는지가 의심스러워지는데 말입니다.” 브란은 두목이 된 지금에도 이븐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어이, 당신도 이제는 두목이니 그 말투 좀 그만두라고 했잖아???.” 이븐 쪽이 쑥스러워서 말려도 전혀 듣지 않는다. “뭘, 당신은 폐하의 친위대장이니 존댓말 좀 쓴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요.” 베네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갈 데까지 가볼 수밖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돌체의 키니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케니아의 선주민족은 어느 정도의 상대지?” 이 질문에 질은 짧게 한마디만 대답했다. “강해.”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타우의 두목들이 아직 접해보지 못한 적의 위협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회의가 끝난 뒤, 이븐은 질의 집에 찾아가 간단하게 의논을 했다. 새 신부는 얘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비워달라는 남편의 말대로 부엌에서 술안주를 준비하고 있다. “같이 있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이븐 쪽이 불편해서 말했지만 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애비는 이런 일로 안 삐쳐.” 자신만만한 말투가 꼭 신부를 자랑하는 것처럼 들려 이븐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가 막히네. 이 중년 영감이 완전히 우쭐해져서는.” “흐흐음???. 부럽지?” “누가?” “무리하지 마. 마누라가 얼마나 좋은 건데.” “알았으니까 그 정도로 해두라고.” 금방이라도 짜증을 낼 것 같은 이븐을 보며 질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도라 장군의 딸하고 어떻게 되었느냐고는 묻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늘 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븐은 술잔에 술을 부어주면서 질이 말했다. “이번만은 일이 복잡해졌어. 네 아버지의 동포들이 단체로 나섰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그쪽만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배를 지고 산을 넘는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어. 아버지의 동료들은 모두 그런 짓을 하는 거야?” “그래. 나도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더군. 자기들은 땅에 올라오면 손도 못 쓰고 죽어버리는 이쪽 인간들하고는 다르다고. 그런 방식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야. 실제로 게오르그는 뛰어난 선원이었지.” “흐음???.” “정말, 자기들은 높으신 놈들한테 고개 숙이는 짓은 절대로 안한다고 잘난 척하던 주제에???.” 이븐은 파란 눈을 살짝 치떴다. “그건 좀 과장 아닐까? 아버지는 다른 녀석들하고 좀 달랐을지도 몰라. 게다가 아버지가 나라를 떠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도 남 말은 할 수 없잖아. 지금은 당당한 타우 지방의 영주님이니까.” “그런가???. 게오르그가 들으면 화내려나?” 이븐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부자가 됐으면 인심 좀 쓰라면서 당당하게 뜯어먹으러 왔을 거야.” 질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그 녀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대화 끝에 이븐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있겠다고 말했다. “키르탄사스에 가보겠어.” 질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 해적들의 섬에? 왜 갑자기???.” “끌어들일 수 없을까 싶어서.” “이 일에?” “그래. 동쪽 해안이건 테바 강이건, 외부인이 나타난다면 그놈들로서도 남의 일이 아니게 될 테니까.” 남쪽과 중앙을 잇는 항로의 제해권을 쥐고 있는 키르탄사스이다. 외부인들이 그 영역을 차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질. 죽음의 바다에서 산을 넘는다는 거, 코랄을 공격하기에는 너무 먼 길 아니야?” “알고 있어. 녀석들의 목적은 우리겠지. 우리들을 여기에 묶어둘 셈이야.” “그러니까 그와는 별도로 스케니아의 군함하고 같이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질도 조금 놀란 듯 술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죽음의 바다를 남하하는 것과는 별도로 둘로 나뉘어서 코랄을 향해 온다고?” “그래.” 이븐은 진지했다. “우리들을 여기에 묶어두고 델피니아 군에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그것도 나름대로 효과적이겠지. 하지만 그런 고성능의 소형선을 가지고 있다면 처음부터 코랄을 노리는 쪽이 효율적이잖아. 당신이 말한 것처럼 강 상류나 얕은 만에 상륙해서 난리를 치다가 관리들이 달려오기 전에 도망가지. 최고의 유격전이잖아. 델피니아의 육해군을 실컷 휘둘러댈 수 있어. 그러려면 거점이 필요하지. 그렇데 마치 트레니아 만에는 써먹기 딱 좋은 섬이 몇 개 있어. 나라면 그중 한 섬을 먼저 점거해서 열심히 육지를 교환시키겠어. 그렇게 되면 키르탄사스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는 없게 되겠지.” “흠???.” 질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그게 실현된다면 키르탄사스 쪽에서도 남의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겠군.” “그렇지?” “하지만 순순히 이쪽 말을 들어줄까?” “조금 아는 녀석이 있거든.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봐야지.” 이븐은 쑥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옛 연적의 말을 어디까지 들어줄지가 문제였지만 시험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그러니까 이번 겨울 동안에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겨울 동안은 안심해도 돼. 움직인다면 봄이 되고 나서일 테니까.” 이븐이 돌아간 뒤, 애비가 부엌에서 나와 남편에게 물었다. “봄이 되면 전쟁이 나는 거야?‘ “아마도.” “강해?” “그래. 언제나 그렇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해.” “그렇구나???.” “결혼 시기가 안 좋았을까?” 서쪽의 고향에서 어머니 곁에 있고 싶은 건 아닐까 생각해서 물어봤지만 애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당신 곁에서 싸울래. 그러려고 결혼한 거니까.” “어이어이???.” “무슨 소리 해도 소용없어. 날 마누라로 삼은 이상은 나도 데려가야지.” 애비는 진지하게 말했다. “부부가 같이 싸운다고 이상할 건 없잖아. 왕비님도 임금님하고 같이 싸우는데.” “그건 얘기가 달라. 평범한 부인은 얌전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법이야.” “그러니까 난 그런 거 싫어. 계속 생각했는걸. 당신이 싸우러 갈 때 곁에서 당신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당신이 모두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혼자서 집이나 지키는 건 싫어. 난 왕비님만큼 강하지는 못하지만 평범한 여자들처럼 약하지도 않아. 방해는 안 할테니까 나도 데리고 가줘.”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애비를 보고 웃음을 지으며 부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네가 그 왕비만큼 강했으면 도저히 결혼은 못했을 거야. 난 그 정도로 배짱이 없으니까.” “데려가줄 거야?” “그 대신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거야. 언제나 널 신경 써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그러자 애비는 기가 막힌 듯이 대꾸했다. “바보네. 난 방해를 하러 가는 게 아니야. 당신을 도우러 가는거라고.” 질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그 왕비가 너하고 같은 이유로 전장에 나와준다면 임금님도 좀 편했을 텐데 말이야.” 애비는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왕비님도 임금님을 위해서 싸우는 것 아냐?” “그렇겠지. 왕비는 그런 의미로는 말 그대로 하미아야. 자기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 “난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왕비님은 아닐까?” “글쎄???. 거기까지는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좋아하는 남자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싫으니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도우러 갈 수 없는 건 견디기 힘드니까 같이 가는 거잖아?” “아니, 바로 그렇기는 한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질의 목소리가 점점 자신 없이 기어들어갔다.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는다. 애비가 자신에게 보내오는 순수한 애정과 왕비가 국왕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 사이의 그 엄청난 차이를 질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뭐랄까, 참 세상은 넓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아니,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많구나 싶어서.” 애비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질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끊고 더 신혼부부다운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5장 12월 중신이 되자 날씨가 추워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중앙의 눈은 흔적이 거의 안 남는다. 쌓이는 일도 별로 없지만 쌓인다고 해도 곧 녹아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외출을 삼가고 가게도 빨리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런 때에 더욱 외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린다 왕비였다. 왕비는 겨울이 오면 원기가 넘친다. 추위에도 굉장히 강하며 이런 계절에도 얇은 옷 한 벌로 태연하게 지낸다. 그날 아침, 왕비는 오랜만에 놀러 온 흑왕과 함께 교외로 나들이를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냈다. 바깥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나들이를 하기에는 최악의 날씨였다. 셰라는 기가 막혀 말했다. “굳이 이런 날씨에 나가지 않으셔도 될 텐데. 눈보라라도 치면 어쩌시려고요?” “이건 오후에는 그쳐. 그럼 눈이 내린 들판이 굉장히 멋있어진다고. 같이 보러 안 갈래?” 그렇다면 눈이 그친 뒤에 가면 될 테지만 사람들이 많은 건 싫다고 한다. 셰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의 ‘많이’라는 말에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시내나 성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건 지겨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들판처럼 탁 트인 장소, 혹은 숲 속처럼 동떨어진 장소에서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많은’게 되고 만다. 왕비의 눈에는 그 한 명이 멋진 경치 속의 추악한 장애물로 비치는 듯했다. 숲이나 들판에는 인간 따위가 아무도 없는 편이 좋다. 끝없이 펼쳐진 웅대한 풍경을 실컷 맛보고 싶다는 말이다. 산 속에 있는 서리궁에서 지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시녀나 시종들의 잔소리에서 도망친다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 그 자체를 시야 내에 두려 하지 않았다. 2년 반이나 함께 지내다보면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런 왕비가 자신만은 곁에 두고 있었다. 셰라는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건지. 가구의 일부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건지 아직도 잘 알 수 없었다. “어쩔래? 여기서 기다릴래?” 왕비의 물음에 셰라는 정신을 차렸다. “동행하겠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시녀’의 역할이다. 왕비는 평소와 다름없는 가벼운 차림에, 시녀 쪽은 모직 외투와 베일로 몸을 꽁꽁 두르고, 성의 문지기가 눈을 치뜨는 것도 개의치 않고 눈 속으로 달려 나갔다. 이런 기후에서는 도저히 전력질주가 불가능하다. 흑왕도 셰라의 말도 빠르게 걷는 정도의 걸음이었다. 시내를 빠져나갈 때까지는 가끔씩 사람이 보였지만 교외로 나오고 나자 생물의 기척 자체가 완전히 뚝 끊겼다. 눈은 여전히 펑펑 내리고 있었다. 아직 점심 전이건만 희뿌연 어둠이 주위를 뒤덮었다. 셰라는 말없이 고삐를 쥐었다. 평소라면 경쾌하게 들려올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말의 규칙적인 호흡과 마구가 울리는 희미한 소리. 그것만이 유쾌하게 귀를 자극한다. 때때로 바람의 방향이 변하면서 눈가루가 얼굴에 부딪힌다.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왕비의 모습도 자칫하면 하얗게 흔들리는 장막 저편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조용히 내리는 눈 속에서 단둘이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행선지는 왕비가 정한다. 셰라는 흑왕의 거대한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따라갈 뿐. 코랄 서쪽으로 나아가면 구릉지대가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파키라 산맥의 거대한 봉우리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눈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셰라가 탄 말은 흑왕을 따라서 숲 속으로 들어섰다. 모직 베일에 닿는 새하얀 입김이 차가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자,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왕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셰라는 초조해졌다. 당황하며 여기저기로 말을 재촉해서 다니다보니 눈 속에서 흑왕이 나타났다. 그런데 안장이 텅 비어 있었다. 낙마했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셰라도 눈치챘겠지.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질지언정, 왕비가 안장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말에서 내렸다는 말이 되는데.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으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을 탓해야 할까. 전혀 깨닫지 못하게 자취를 감춘 그 사람의 기량을 원망해야 할까???. “그라이아. 그 사람은 어디로 갔지?” 그렇게 물어보자 흑마는 머리를 높이 흔들면서 지금 막 나타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하늘이 조금 밝아지면서 눈의 기세도 잦아들었다. 왕비의 말대로 오후에는 개일 듯했다. 막 내린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왕비의 흔적이다. 시야가 뚜렷해진 덕에 흑왕과 함께 서둘러 발자국을 쫓아갔다. 숲을 빠져나오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완만하게 솟아오른 구릉 언저리에 서 있는 왕비를 발견하고 말을 걸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왕비는 새하얀 풍경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모피 덩어리처럼 보였다. 거기에서 붉은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 눈 위에 떨어지고 있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든 풍경 속에서, 그 붉은 빛은 묘하게도 선명하게 셰라의 눈에 들어왔다. 왕비는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토끼의 시체를 손에 든 채 눈 위에 퍼져가는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 왕비의 입가도 피로 얼룩져 있었다. 바로 지금 숨을 끊은 사냥감의 생명의 흔적이 흘러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왕비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볼 때까지 셰라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왕비에서 다가갈 수 도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음에 가까운 물음이 셰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표정도, 고삐를 쥔 손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뭐가?” “왜 갑자기???.” “아, 이 녀석이 뛰어나오는 게 보여서. 엄청 크지?” 사냥감을 보여주며 웃는 왕비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셰라의 몸은 경계신호를 발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셰라의 몸은 경계신호를 발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인간 이외의 부분’이 강하게 느껴져 두려움이 들었다. 흑왕이 왕비의 머리에 콧잔등을 비벼댄다. 그 모습은 말이 주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친한 친구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셰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는 자신이 들어설 수 없는 영역이다. 흑왕은 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파키라의 늑대도.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왕비는 친구의 목을 끌어안고 가볍게 두드려준 뒤 토끼를 안장에 매달았다. 다시 말에 올라 또다시 한동안 말없이 나아갔다. 셰라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러다 갑자기 왕비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장미 자수를 놨었지?” “예.” “그거 말야, 정말 오랜만에 흠칫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어째서일까.” 셰라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좀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테니까. 그러나 왕비는 스스로 얘기를 시작했다. “내 아버지 말이야, 눈 위에서 죽었어.” “?????.” “새하얀 눈에 피가 튀어서???. 그 흔적이, 아버지의 시체 자체보다도 그 붉은 색과 흰 색이 강렬하게 남고 말았어. 굉장히 옛날 얘기지만.” 하늘은 완전히 밝아졌고, 내리던 눈도 그쳤다. “그때의??? 그 장미가????” “갑자기???.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게 떠올랐어. 원래부터 장미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붉은 건 특히???.” “그러셨군요???.” “하지만 그 녀석은 새빨간 장미를 좋아했지. 그것도 일부러 작고 하얀 꽃하고 같이 장식해 놓는 걸. 처음엔 정말로??? 눈 속에 뿌려진 핏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어.” “?????.” “그것도 이미 익숙해졌었는데 말이야. 한동안 이런 적은 없었는데.” 언덕 위까지 오르자 시야 가득히 은세계가 펼쳐졌다. 정말로 얼룩 하나도 없는 아직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설원. 사람도 짐승도 말도 짐차도 지나지 않은 순백의 들판이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웅대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을 타고 갔다. 셰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자신은 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단순한 심부름꾼은 더욱 아니다. 이 사람은 그런 호칭을 싫어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일까. 옛날에는 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남의 지시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다 시키는 대로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리.” “응?”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왕비는 조금 놀라며 말했다. “아직이라니 뭔 소리야. 처음부터 그랬잖아.” “그럼 그때에는 저도 데려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셰라의 발언에, 왕비는 더욱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잖아.” “하지만 제 고향은 이미 없습니다.” 마을은 불타버렸다. 추억 속의 사람들 역시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이미 아무것도 없다. 잃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보다도 이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왕비는 냉정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 여기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상관없습니다.” “어째서?” “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같이 가고 싶은 거지?” “?????.” “한번 가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지금 있는 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야. 그럼 어째서야?” “그건???.” 셰라는 고개를 숙였다. 왕비는 그런 시녀를 연민과 위로가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셰라는 눈치 챌 수 없었다. “너 말이야???. 이상한 데서 무리하지 마. 버려지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강아지 같아.” “?????.” “여기도 좋은 데잖아. 한때의 변덕으로 이상한 소리 꺼내지마.” “?????.” “난 기다리는 녀석이 있으니까 돌아가려는 거야. 반드시 돌아가야 해.” 두툼한 구름 틈새로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너른 설원이 반짝거리며 빛난다. 왕비는 눈부신 듯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왕비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죽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눈처럼 새하얀 파트너의 피부. 아버지처럼 검고 매끄럽게 빛나던 긴 머리. 언제였을까. 그 양팔 가득히 안겨 있던 붉은 장미와 새하얀 작은 꽃을 보았던 것은. 막 아버지를 잃었던 리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설원에 흐트러진 붉은 선혈의 꽃이 뇌리에 떠올라 정말로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원래 리 앞에서 꽃을 장식하려던 파트너는 큰 꽃병을 안고 어딘가 안 보이는 곳으로 꽃을 가져갔다. 리는 그런 짓은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약점을 보이기 싫어서, 자신의 약점에 신경을 써주는 게 싫어서 그대로 장식해 두라고 고집을 부렸다. 당시에는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했을 정도로 키가 큰 파트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그 꽃을 좋아하지 않아도 난 좋아하니까 혼자서 보겠다고. 장난기까지 느껴지는 가벼운 말투에 구원받은 듯했었다. 언제나 그랬다. 남에게 반발하고 일족 안에서도 융화되지 못하는 자신을 언제나 자연스럽게 받쳐주었다. 그런 반면에 묘하게 어린애 같은 구석도 있었다. 특히 리의 안전을 꼼꼼하게 신경 써주는 구석은, 심지어 병아리를 지키려는 어미닭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 이와 멀리 떨어진 지도 어느덧 5년 이상. 이상했다. 걱정도 된다. 자신이 없는데 이렇게나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정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도, 왕비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먼 나들이에서 돌아온 뒤 왕비는 마법가를 찾아갔다. 낮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거리도 오늘은 깨끗한 눈에 뒤덮여 있었다. 도로의 눈은 깨끗하게 쓸어놓아 걸어다니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왕비는 노파의 방에 앉은 뒤에 물어보았다. “누가 눈을 쓸어놓은 거지? 오늘은 안 보이던데, 그 해골이야?” 노파는 이가 빠진 입을 벌리며 웃었다. “당신이 너무 협박하니까 그 녀석이 겁을 먹었어. 당신 기척만나면 당황해서 숨어버리잖아.” 마법가의 노파의 집은 변함이 없었다. 올 때마다 장소가 달라지는데다 엇비슷한 집들이 늘어서 있으니, 기준이 되는 건 문의 표식뿐이다. “여기엔 말이우, 그 해골말고도 눈에 안 보이는 작은 녀석들이 많이 있수다. 평소에는 거리에 떨어진 낙엽 같은 걸 쓸고 있지만.” “흐응???.” “부지런한 놈들이라 가끔 생기는 시체 같은 것도 깨끗하게 치워준다우.” “아하하???. 꼭 쥐 같네?” “후후???. 아무리 마법가라고 해도 쥐가 눈을 쓸지는 않아. 헌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 왕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예상외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봐, 할멈???.” “응?” “파로트의 유령들은 신출귀몰하던데 영혼이라는 건 원래 다 그런 재주를 부리는 거야?” “글쎄, 묘한 걸 묻는구먼.” “?????.” “생명이라는 건 신분에 좌우되지 않아. 왕후귀족이든 거지든 마찬가지지. 하지만 몸을 떠난 영혼이 어떤 색을 띠는지, 얼마나 격이 놓아지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우. 당신도 알고 있을텐데.” “응.” “왜 그러시나?” “그게 말이야???.” 왕비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죽어서 영혼이 되면 나도 원래 있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 평소처럼 냄비를 휘젓던 노파의 손이 뚝 멈췄다. 화덕 앞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몸이 긴장으로 굳는다. 검은 후드 안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왕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데, 왕비.” “역시.” “나쁜 말은 안 할 테니까, 그만두시게나. 당신이라면 바라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칫하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유령이 되어서 영원히 이 땅을 헤매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시우.” “알고 있어. 그냥 말해본 것 뿐이야.” “정말 알고 있는 겐가?” “응, 안 해. 자살 같은 건 안 하겠다고 그 녀석하고 약속했으니까.” 당당한 말투였다. 노파는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냄비를 젓기 시작했다. “너무 놀래키지 마시우. 자칫하면 이 늙은이가 놀라서 죽어버릴 뻔했으니까.” “그렇게 간단하게 죽을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왕비는 장난스럽게 말하다가 갑자기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저 뭐랄까???.” “뭔가?” “이 눈이 녹으면 난 열아홉 살이 돼.” “흐음. 당신이 이쪽으로 온 지 6년인가.” “너무 길어. 대체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건지 신경이 쓰여.” “과연???. 그건 당신 상대가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 당신과 떨어져서 지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인감?” “그래. 어쩌면 그 녀석,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몰라.” 왕비는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아도 자신에게―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구석이 있었다. “혼자서 이상해지는 걸로 끝나면 그나마 낫겠지만, 주위에 피해가 크다고.” “그럼 그 사람이 제정신인 동안에 당신을 데리러 와주기를 기대한다 치고, 당신 자신은 어떠우?” “어떻냐니?” “당신 자신은 고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이우. 그 사람과 무사히 만날 수 있다면??? 그래도 돌아가고 싶을까?” 이 질문에 왕비는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말하면 곤란한데. 내가 신경 쓰는 건 그 녀석 하나뿐이고, 날뛰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뿐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고향에 돌아가고 싶냐고 하면???.” 기운 없는 대답이었다. 노파는 유쾌한 듯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럼 그 사람이 와주면 이대로 계속 이 땅에 머무를 수도 있다는 겐가?” 그것은 아무도 델피니아의 국민 전체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사실이리라. 이 사람이 언젠가 코랄 성에서 떠나갈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온 금색의 생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왕비’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상관없었겠지만???.” “호오???. 왕비로는 곤란하우?” “당연하지. 그 시점에서 이미 3년이 흘러 있었어. 곧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왕비 짓도 오래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종잇조각에 서명을 한 거야.” “이런, 이런???.” “난 처음부터 월 곁에 평생 있을 생각이 아니었어. 그렇게 기대해도 곤란하다고.” 노파는 씁쓸하게 웃고만 있었다. 남이 들으면 이 얼마나 냉담한 부인이냐고 할 상황이지만, 이 경우는 왕비 쪽이 옳다.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다는 맹약의 증거였지.” “봄이 도면 또 소란스러워질 거야. 어떻게든 이번에는 결말을 짓고 싶어.” “그렇겠지. 저쪽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거외다.” 타우에 나타난 기묘한 척후병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가 들어왔다. 그렇다면 신속한 움직임을 신조로 하는 조라더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이 눈이 녹는 것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왕비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타우를 꼭 빼앗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나 재정이 곤란한 걸까.” “대국의 왕들 말인가?” “응.” 노파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면서 웃음을 흘렸다. “그건 좀 다를 게야.” “응?” “분명히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 돈이라는 건 큰 힘이 되니까. 사람도 물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믿음직스럽기 짝이 없는 힘이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야.” “그런 것 같더군.” “하지만, 동서 양국의 왕에게는 그런 엄청난 힘을 델피니아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협인 게유. 이대로는 저 나라만 점점 더 부유해진다. 저 왕만 점점 더 강해진다. 그게 두려운 거지. 용서할 수 없는 게야. 치려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이 되지.” 왕비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라는 건 어째서 그렇게 다들 바보일까???.” “뭘, 위에 서는 인간은 모두 비슷한 게야. 오히려 당신 왕이 예외지.” “그다지 내 왕인 건 아니야. 방해해서 미안.” 돌아가려던 왕비는 입구에서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할멈, 점도 쳐?” “일단은.” “내가 언제 저쪽으로 돌아가게 될지 알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어. 나만이 아니지. 이 거리의 주술사 누구도 점칠 수 없을 게유.” “그럼 이번 전쟁은 어느 쪽이 이길까?” “마찬가지유. 지금 델피니아의 운명은 당신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당신의 미래를 읽을 수 없으니 당연히 이 나라의 미래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왕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너무나 당연한 감상을 입 밖에 냈다. “장사할 생각 있는 거 맞아?” 그 탄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다음해 2월이었다. 북부의 페즈 강 이북에 위치함 캄센은 본래 탄가의 영토였다. 탄가 시절의 성이나 저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은 월의 측근이 성주로 있다. 캄센의 바로 북쪽은 물론 탄가의 영토이다. 영주는 브라하 경. 이 둘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성주가 월에게 보낸 연락에 의하면 일의 발단은 브라하 경의 부하들의 횡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경의 부하들 중에는 가족이 캄센에 남아 있는 이도 많았고 그래서인지 태연하게 국경을 넘어오곤 했다.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몰래 오는 정도라면 봐줄 수도 있겠지만 백주대낮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다. 어니 나들이라도 다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래서는 구분이 되질 않는다. 보기에 따라서는 당당한 적대 행위로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경에게 항의했지만 설령 주인이 다르더라도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는 소리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마침내 무장한 이들이 순찰이라는 명분 하에 성 근처까지 몰려왔다. 이쪽에서도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고 군대를 보내 제지하다가 결국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쌍방에 부상자가, 저쪽은 사망자까지 나왔다. 성주는 곧바로 문서를 보내 이쪽으로서는 당연한 조치를 취한 거라고 설명했지만, 경은 심하게 분노하며 힘으로라도 이쪽의 잘못을 징벌하겠다며 전투라도 벌일 기세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상의하고 싶다는 문건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움직였다는 사실에 월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궁전에 탄가의 사자를 초대해 연회를 벌인 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북부는 아직 한겨울이었다. 눈도 많이 쌓여 있다. 대체 어떻게 군대를 움직일 셈인지 기가 막히는 반면, 그만큼 탄가에게 있어 델피니아가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다시금 실감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라더스가 서둘러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사자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캄센에서 있었던 일과 그에 따른 탄가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 말에 따르면 캄센 성주의 조치가 옳았고 브라하의 부하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조라더스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원래부터 브라하와 친하게 지내던 그돌핀이라는 무장이 있습니다만, 이 그돌핀이 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성질이 급한 인물이라???.” 사자는 이 계절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전면적으로 캄센의 성주가 나쁘다고, 맹우 브라하의 한을 풀어줘야만 한다면서???. 그, 정말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이 의견에 찬동하는 자도 여러 명 있어서, 물론 주군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그런 언행을 금하셨습니다만 효과가 없는 바람에???. 정말로 그,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심사숙고하면서 말을 고르는 눈치가 역력히 드러난다. 정식으로 파견된 사자와 면담하는 자리이니 만치 월은 의복을 고쳐 입고 알현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 사자의 분위기를 묘하게 생각하고 기분 나쁜 예감에 시달리면서 월은 물었다. “확실히 말해주시게. 어떻게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는 거지?” 탄가의 사자는 절망적인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면서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저희 주군 조라더스의 제지도 듣지 않고,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캄센으로 출격했습니다.” 기가 막혔다. 분노도 충격도 아니다. 자칫하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월은 당황하며 웃음을 참았다. “조라더스 왕의 허락도 없이????” 사자는 몸둘 바를 모르고 움츠리며 대답했다. “폐하께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 주군도 부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 정말 무례한 말씀을 드리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그자들은 캄센의 성주에게 잘못이 있으니 이자를 벌하거나 다른 이로 교체하도록 델피니아에??? 즉 월 폐하께 강력하게 요청한다??? 고 하면서???.” “호오???.” “저희 주군도 슬하에서 이런 불충한 인간이 나오게 되어 정말로 곤란해하고 계십니다. 원칙대로라면 직접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순리입니다만, 델피니아와 작년에 막 화의를 맺은 참인데 그 국경을 저희 군대가 어지럽혀도 괜찮을지???. 그 점에 대해 월 폐하께 상의 드리고 싶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곧바로 캄센으로 달려가 직접 불충한 인간들을 주살하겠다는 것이 저희 주군의 뜻입니다.” 사자는 진심으로 곤란해하는 듯했다. 표정도, 어조도 이쪽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조심하고 있다. 월은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자꾸 웃어버리려는 얼굴 근육을 질타했다. 사실 이렇게나 잘 짜맞춘 우스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정중하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조라더스가 이끄는 대군은 대놓고 국경까지 달려와서 결국 캄센을 공격할 것이 뻔하다. 이유 따위는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일을 저지른 뒤에 그럴 듯해 보이는 구실을 가져다 붙이면 된다. 그렇다고 지금 대놓고 그런 말을 해버리면, 그거야말로 전쟁으로 이어진다. 최근 몇 년간 단련할 대로 단련한 재주의 성과를 발휘해 월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는 척을 하며 힘껏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조라더스 왕께 전해주게. 굳이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조라더스 왕의 손을 빌릴 것까지도 없네. 전쟁의 승패에 따라 국경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며 이를 침범한 자가 벌을 받는 것은 고금의 법칙이야. 순찰이라는 명목 하에 브라하경의 부하들이 이쪽까지 들어온 것은 명백한 국경 침해이지. 그돌핀 경이 나타나면 그 뜻을 이쪽에서 확실하게 전하고 처리하겠어. 그러니 조라더스 왕도 그런 미친 개 같은 것들 때문에 이이상 심려하지 마시길 바라네.” 사자는 한눈에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신 말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주군은 월 폐하와의 우정을 생각하며 현명하신 폐하께서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불충한 자들의 폭거를 우리나라의 뜻으로 받아들이시게 된다면 정마라 유감스러울 거라고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거 고마운 얘기로군. 조라더스 왕의 우정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네.” 알현이 끝난 뒤 월은 사자를 정중하게 대접하도록 지시하고, 곧바로 군사회의를 열었다. 자리에 모여든 델피니아의 중신들도 탄가의 핑계에 말을 잃었다. “용서 못해! 이 파렴치한 놈들!” 핸드릭 백작은 펄펄 뛰면 소리를 질렀다. 국왕은 아직도 웃으면서 그런 백작을 달랬다. “뭐, 너무 화내지 마. 나도 이건 조라더스의 구실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캄센에 수작을 걸어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폐하! 캄센은 탄가와의 국경에 위치하나 요새입니다! 그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묘한 핑계를 만들 것 없이 선전포고를 하고 직접 공격하면 될 일이야. 실제로 지금까지 조라더스는 그렇게 해왔지.”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라더스는 오론과 달리 잔머리를 굴리는 일이 거의 없다. 틈을 보다 압도적인 군비와 병력을 쏟아 부어 단숨에 적을 몰아붙이고 힘으로 굴복시킨다. 그것이 조라더스의 방식이었다. 그런 인간이 겨우 2천 명의 병사만 먼저 보내고 자기는 케이파드 성에 틀어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니. 그것도 굳이 이쪽에 알리기까지 하면서???. “정말로 조라더스 왕답지 않은 일입니다.” 브룩스가 말했다. “처단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만 던졌을 뿐이지요. 그래놓고 우리들이 그돌핀 경을 격파한 뒤에 태도를 바꿔서 탄가의 신하를 멋대로 죽이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트집을 잡을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브룩스는 회의적으로 말하다가 결국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언이었습니다. 역시 불가능하겠군요. 그런 사소한 싸움으로는 탄가에도 아무 이득이 없을 테니까요.” 호시탐탐 타우를 노리는 탄가이다. 다음에 이를 드러낼 때에는 지금까지의 것 이상으로 엄청난 기세로 공격해올 터였다. 조라더스의 성격과 지금까지의 언동으로 본 때 그것만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런가???. 어쩌면 그돌핀은 정말로 혈기에 차서 독단으로 병사를 일으켰을지도 모르겠군.” 국왕이ㅡ 말에 다른 이들은 일제히 부정했지만 브룩스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정말 있기 힘든 일입니다만 불가능한 것도 둘이나 겹치면 나름대로 통하기는 하는군요.” “그렇다면????” “무슨 의미지, 브룩스 경?” “우선 조라더스 왕이 우리나라에 대해 불온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진입로인 캄센을 제일 먼저 빼앗아야겠지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기가 너무 안 좋습니다. 탄가는 아직 한겨울이고 게다가 맹약을 맺은 스케니아는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조라더스 왕으로서는 현 시점에서 전쟁을 벌일 준비를 마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저??? 탄가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일부가신들이 화를 내며 일어섰다. 그곳이 원래 탄가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브라하 경의 부하가 죽었다는 사실이 탄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을 거라는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무력으로 델피니아인을 쫓아내자는 과격한 의견도 나왔을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엄격하게 제지해야 할 종류의 움직이지만 조라더스왕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하나 일이 아니었을까요?” “흐음???.” “운 좋게 그돌핀 경이 캄센을 탈환한다면 조라더스 왕한테야 그 이상 좋은 일이 없을 겁니다. 은밀하게 포상을 하겠다고 약속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돌핀이 캄센을 탈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 “물론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에 통보한 대로 그돌핀 경을 포기하면 끝입니다. 그러면 탄가는 우리나라와 우호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혈기만 앞서는 무능한 가신 몇 명쯤 처분한다고 조라더스 왕한테 불리할 것도 없지요.”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잔혹한 왕이라면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조라더스 왕의 진의가 어느 쪽이든 간에 실제 캄센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2천 명의 군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주군인 조라더스에게 버려진 군세였다. 두들려 부숴버리면 되겠지만 자칫하면 뒷일이 복잡해진다. 중신 중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이쪽도 탄가의 방식대로???, 그렇군요. 비전하가 멋대로 뛰쳐나간 걸로 해버릴까요?” 회의장이 웃음에 휩싸였다. 물론 농담이지만 캄센은 국경의 중요한 거점이니 만치 잃을 수는 없었다. 국왕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 결단을 내렸다. “내가 가지.” “직접 출진해서 그돌핀 경을 처분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여우사냥이나 다녀오지.” “예????!” 중신들은 깜짝 놀라며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월은 태연했다. “한겨울의 여우사냥도 꽤 운치가 있어서 좋지 않아? 수달도 잡을 수 있을 테고.” “저어???, 폐하.” 월은 그 자리를 채운 중신들을 둘러보며 검지를 흔들었다. “난 싸우러 가는 게 아니야. 겨울 사냥을 즐기러 가는 거다. 가는 김에 그돌핀이라는 녀석한테 델피니아 국왕의 사냥터를 어지럽힐 수 있을 정도로 배짱이 있을지 어떨지도 확인해보고 오지.” 일동은 기가 막혀서 굳어버렸다. 한참 뒤 사람들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국왕의 의도를 눈치 챈 것이다. 국왕은 진로에 있는 영주들에게 출병을 요청하는 전령을 미리 보내고 자신을 겨우30명 정도의 부하들만 데리고 성에서 달려나갔다. 왕비도 이런 움직임만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눈치를 cos 듯 어느 틈엔가 준비를 마치고 셰라와 함께 달려왔다. 마구간 안에서 얌전하게 지내던 흑왕도 스스로 마구간에서 나와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부용궁은 본궁의 바로 옆에 있다. 국왕의 갑작스러운 출발을 알 게 된 폴라는 깜짝 놀라며 눈길임에도 서둘러 전송하러 나왔다. 걱정스러웠다. 지금처럼 국경에서 벌어진 충돌을 중재하러 갔다가 국왕이 파라스트에 붙잡혔던 것이 바로 재작년의 일인 것이다. 그때 폴라는 물론 애첩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적의 비겁한 짓에 분노하며 국왕을 걱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도 올렸지만 그래도 그때는 남의 일이었다. 지금은 국왕이 먼 곳으로 출정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괴로웠다. 곁에서 국왕을 모시게 된 이후 처음 겪는 국왕의 원정이었다. “폐하, 저어???.” 어두운 표정으로 걱정하는 애첩을 보며 국왕은 말 위에서 씨익 웃었다. “잘되면 멋진 목도리를 선물로 가져오지.” “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폴라의 곁을, 흑왕에 올라탄 왕비가 지나쳤다. “그런 차림으로는 감기 들겠어. 안으로 들어가.” 그렇게 말하는 왕비 쪽이 더 얇은 차림이기는 했지만. 말에 올라탄 그 사람은 언제나 부용궁에 놀러 와서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인물이 아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당당하게 빛나는 비장군이었다. “왕비님???.” 순간적으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자기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건 건방진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래도 이 사람은 국왕의 정실이니까. 그런 왕비도 말 위에서 폴라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월이라면 걱정하지 마. 멀쩡하게 상처 하나 없이 폴라한테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아닙니다! 왕비님이야말로 조심하십시오. 무운을 빕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이 사람과 국왕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에 탄 전사들을 그대로 정문을 지나 달려갔다. 국왕 일행이 캄센 요새에 도착한 것은 3월 초순, 그를 따르는 병사는 2천 가까이 늘어 있었다. 캄센은 지형이 험준했다. 산과 계곡 사이에 둘러싸여, 페즈 강 이외에도 하천이 종횡무진 얽혀 있다. 군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넓은 평지는 전혀 없었다. 평상시라 해도 이런 곳에서 싸우기는 상당히 어려운데다가 북부에는 아직 눈이 가득 쌓여 있다. 도보로 걷는 병사들에게는 험난한 여정이지만, 그돌핀, 브라하 측의 움직임은 변함없이 착실하게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한다. 국왕은 캄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들에게 사자를 보냈다. 이 일대에서 곧 델피니아 국왕이 사냥을 할 예정이며 부하들에게는 탄가의 영토에 들어가지 않도록 엄중하게 명해두었지만 그쪽에서도 부디 이 점을 어기지 말아주도록 아랫사람들에게 잘 말해주시면 좋겠다는 취지의 전언이었다. 국왕이 직접 나왔다는 경고에 저쪽 장수들도 간담이 서늘해진 듯 진격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는 않고, 지금은 캄센에서 십여 카티브 떨어진 마을에 진을 치고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이런. 모처럼 사냥하러 왔는데 폴라한테 가져다 줄 선물도 못 잡겠군.” 국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불평을 뱉었다. 캄센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중앙에서는 색색가지의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건만 이곳은 아직도 은백색의 세계였다. 오늘도 아침부터 눈이 내리다가 이제야 간신히 그친 시점이다. 지금은 차가운 하늘에 달빛이 가득 내리고 있다. “이대로 겁을 먹고 물러나거나 자포자기로 덤비든가 해부면 좋겠군. 어물거리면 이쪽에서 공격해서 쳐부숴주지. 어느 쪽이든 시간을 끌 수는 없어.” “서쪽이 신경 쓰여?” 왕비가 물었다. 두 사람은 요새 안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장에 나가면 국왕 곁에는 항상 왕비가 있다. 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오래 끌다보면 오론 놈이 반드시 내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서 들고 일어날 거야. 네 협박이 어지간히 효과가 있었는지 한동안 기분 나쁠 정도로 얌전히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재작년의 전쟁 이래 파라스트는 명실공히 델피니아의 좋은 이웃으로 지내왔다. 상인들 사이에서도 국경의 경비를 맡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작년 가을의 식전에서도 파라스트의 태도는 정중 그 자체로, 보내온 축하선물도 수량이나 질 모두 엄청날 정도였다. 하지만 월은 그런 파라스트의 태도를 도저히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하나 전부 다 수상했다. “사나운 늑대가 애써 송곳니를 숨기면서 얌전한 양인 척하는 것 같아.” 그러자 왕비가 불만스러운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동료들을 위해서 말해두겠는데 늑대는 언제나 늑대야. 굳이 양 흉내 따위는 안 내.” “맞는 말이야.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 흑심이 있는 인간뿐이지.” 국왕의 목소리에는 자조의 울림이 있었다. 어느 틈엔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졌던 것이다. 왕비는 그런 국왕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따뜻한 미소였다. “파라스트의 돼지하고 넌 달라.” 국왕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신비로운 영혼이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 기쁜 순간은 바로 이럴 때였다. “때때로 넌 내가 뭘 생각하는지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성을 나가면서 국왕이 가장 신경 쓰던 것은 파라스트의 움직임이었다. 절대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가신단에게도 명해두었다. 산세베리아와는 은밀하게 동맹을 맺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험에 불과하다. 이 분쟁을 재빨리 해결하고 돌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다. 국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델피니아는 말이야, 쓸데없이 위치가 좋다보니 제일 입장이 안 좋아. 동쪽하고 싸우면 서쪽이 덤비고 서쪽을 맞아 싸우면 이번에는 그 등을 동쪽에서 찌르지. 도저히 마음대로 움직일 수 가 없어. 뒤쪽에 신경을 끊을 수가 없으니까 앞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도 없지. 최소한 붙어 있는 두 나라가 이렇게나 강한 대국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왕비는 기가 막혀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라와 나라의 싸움은 1대 1의 승부와는 달리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국력이 비슷한 나라들끼리 붙을 경우 몇 년이고 전쟁이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서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화평을 맺었나 싶으면 금방 깨어진다. 그 사정이야 잘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짜증스러운 얘기였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엎치락뒤치락 해봤자 수가 없을 텐데, 적당히 어떻게든 안 될까?” “글쎄???. 어떻게든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저쪽이 포기해주지를 않는다고. 방법이 없지.” “조무래기 따위는 아무리 처치해도 의미가 없어. 하려면 우두머리를 밟아버리는 게 제일 간단하지.” “글쎄 말이야.” 느긋하게 대답하던 국왕은 왕비가 꺼내는 말을 듣고 숨을 삼켰다. “어떻게 할까. 조라더스도 여기에는 없는데. 케이파드까지 다녀오기는 너무 멀고???.” 녹색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국왕은 당황하며 왕비를 뜯어말렸다. “잠깐. 그렇다고 성까지 숨어들어가는 건 곤란해. 게다가 암살이라니, 말도 안 돼. 절대로 안 된다고!” “그야 성 안에서는 곤란하겠지만, 산책하는 틈을 노린다든가 사고로 보이게 만들면???.” “리!!” 국왕은 아연실색했다. 이 인간이 말하면 도저히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실행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 역시 분명하니 우스개로 넘길 수가 없었다. “굳이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넌 일국의 왕비야.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야. 그 파, 뭐라던가 하는 일족하고는 달라. 그런 흉내나 내서 어쩌겠다는 거야?” 왕비는 뭔가 떠올린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아깝다더군.” “뭐?” “내가 혹시 그 파 뭐였다면 일족 최고였을 거라면서.” “네 시녀가 그러더냐?” 왕비가 대답하기 전에 셰라가 방에 들어왔다. 평상시처럼 시녀 복장이 아니라 전장에서 일하는 시종의 차림이었다. 바깥은 살을 엘 듯한 추위인데도 셰라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돌핀 경의 진지까지 정찰을 다녀온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오, 수고했어. 불 근처로 와.” 셰라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커다란 난로에는 훨훨 불꽃이 타오르고 장작이 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래서 어때? 뭔가 알아낸 건?” 흥미진진하게 묻는 국왕을 보며 왕비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왕비가 자객 흉내 내는 건 안 되고 왕비의 시녀가 정탐하러 다니는 건 괜찮아?” “만에 하나 발견됐을 경우를 생각해봐. 저쪽은 네 얼굴을 알고 있다고. 모르는 녀석이 봤다고 해도 생김새만 얘기하면 곧바로 델피니아의 왕비라는 사실이 드러나. 넌 너무 눈에 띄니까.” “그런 거라면 셰라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예쁘잖아!” “화제를 돌리지 마! 근본적으로 그런 짓을 안 된다는 말이야!” “저, 저기, 폐하???.” 셰라는 당황하며 두 사람을 말렸지만 사정을 듣고는 맥이 빠진 듯했다. 무서운 표정으로 왕비를 나무란다. “리. 당신은 왕비이고 고귀한 분이니 암살자 흉내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끝도 없잖아? 대장이 쓰러지면 아무리 돈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 인간들이라도 조금은 얌전해지겠지.” “그야 그렇지. 나도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조라더스가 죽어주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지. 하지만 말이야, 죽이는 방법을 좀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국왕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알았어. 주문을 들어주지. 내 발도우는 어떤 방식을 바라지?” 왕비도 재미있어하고 있다. “우선 어떠한 경우라도 명분이 있어야 해. 성에 잠입하는 것도, 산책하는 걸 노리는 것도절대 안 돼. 노리려면 전쟁터에서 해야지. 그것도 속임수나 잠복으로는 곤란해. 정정당당하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싸워줘.” 듣고 있던 셰라의 혈색이 사라졌다.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이 있는 왕비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요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왕비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러니까 이상적인 건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단독으로 달려가서 구름처럼 몰려드는 탄가 병사를 뿌리치면서 본진으로 쳐들어가 내 이름을 대고 조라더스하고 한판 떠야 한다 이거지?” 국왕도 기가 막혔는지, 거의 고함에 가깝게 외쳤다. “어이, 설마 정말로 할 생각이야?!” “할 수 있을 것 같아?” 왕비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조라더스는 용맹한 인물이지만 결코 혈기만 앞세우지는 않는다. 전장에서도 가장 안쪽 본진에 위치하며 열 겹 스무 겹의 방어진이 그 주위를 엄중하게 지키도록 했다. 그런 본진을 목표로 돌격하다니, 아무리 무능한 지휘관이라도 선택하지 않을 어리석은 작전이다. 게다가 단독으로 뛰어드는건 왕비조차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문이 너무 억지야! 더 실현 가능한 방법은 없어?!” “있으면 고생도 안 하지. 국왕을 직접 쓰러뜨린다는 건 그 정도로 어려운 얘기야.” 국왕은 가슴을 펴며 단언했다. “남은 건, 굳이 말하자면 조라더스의 측근을 유혹해서 배신하게 만든다든가???. 이건 시간이 걸리는데다 내 취향이 아니야.” “내 취향도 아냐. 배신자도 비겁하지만 배신하게 만드는 인간은 더 비겁하잖아.” “그런데 암살은 괜찮다는 거야? 발로라면 그런 짓은 기사로서 생각도 할 수 없는 천박한 짓이라며 펄펄 날뛸 거야.” 왕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동료인 척하면서 적하고 내통하는 건 치사한 짓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어떤 형태든 1대 1의 승부면 괜찮은 것 아냐?” “그 신념 자체는 인정해.” 국왕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와 세간의 시각 사이에는 대등한 승부라는 말에 약간 차이가 있어. 전쟁터 이외에서 싸움을 하면 비겁하다는 말을 듣게 되지. 나도 국왕인 이상 그 규칙을 어길 수 없고 네가 어겨서도 곤란해. 무슨 일이 있어도 조라더스를 노릴 거라면 전쟁터에서 정정당당하게. 그게 절대 조건이야.” 왕비는 다시금 신음했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심리 상태는 극단적이어서 한번 무섭다고 생각하게 되면 체면이고 뭐고 없이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고 만다. 반대로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의 흉포함이나 잔인함은 무심코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이다. 어떤 짐승이라도 그때의 인간에 비하면 차라리 우아했다. 대군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전쟁의 여신을 보고는 두려워 도망치더라도, 단독으로 아군 진지에 돌입하는 적에게서 도망칠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수적으로 이쪽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미친 듯이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중과부적―수많은 적병들이 사방에서 덤벼들면 아무리 용맹한 장수라도 승산이 없다. 잠깐은 저항할 수 있다 해도 결국 최후에는 쓰러지게 된다. “혼자서 적의 본진까지 달려간다???? 어렵군. 적이 쫄아서 길을 내준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벌 떼처럼 달려들기라도 하면???. 그라이아를 타고 있어도 꼼짝없이 당하겠지.” 진지한 말에 국왕은 목을 움츠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네가 이야기를 꺼내면 정말 저지를 것 같아서 무섭다고. 그래서, 적진의 상황은 어땠지?” 갑자기 물음이 날아와 셰라는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유감스럽게도 달빛 때문에 충분히 살피지는 못했습니다만???.” 현재 적군의 수는 3천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브라하 경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셰라는 조심스럽게 적진에 숨어들어가 브라하 경과 그돌핀 경의 대화를 훔쳐듣고 왔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의 발단인 브라하 경은 델피니아의 국왕이 나섰다는 말에 기가 죽어 있는 데에 비해 그돌핀 경이나 동료들은 오히려 의기양양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대략 이렇다고 한다. “델피니아 왕국은 사냥을 하러 왔다고 하더군. 군대도 얼마 안 데리고 왔다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야. 이번 기회에 그놈을 꺾고 명성을 드높여야지.” 더 나아가 이런 소리까지 나왔다. “우리는 폐하께서 말리는 것까지 뿌리치고 병사를 일으킨 거야. 눈앞에 원수인 델피니아 국왕이 있는데 화살 한번 쏴보지 않고 우물거리다 물러나봐. 폐하도 절대로 우리를 용서해주지 않으실 테지. 지금 여기서 온 힘이 다할 때까지 적과 싸워 그 용맹한 모습을 폐하께 보여드리는 거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우리를 벌하지는 않으실 거야.” 그돌핀 경은 오히려 브라하 경의 태도를 책망하고 있었다. “애초에 발단은 그대 아닌가. 뻔뻔스럽게 캄센에 버티고 있는 델피니아인들이 참혹하게 부하를 죽여버렸다. 이 이상 저 후안무치한 놈들을 놔둘 수 없다고 난리를 치면서 저쪽이 저지른 짓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호소했지. 그대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에 나나 이자들도 병사를 일으킨 걸세. 그런데 그 태도는 뭐야? 이제 와서 두려워진 건가?” 이 말에 대해 브라하 경은 주저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대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게 됐네. 부끄러운 말이지만 부하들은 내게 질책을 들을까봐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은 숨겨두고 절대로 국경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나, 나도 그것이, 아끼던 부하가 하는 말인지라 진위를 확인해볼 생각도 못하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네만???.” 실컷 한탄을 늘어놓았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는 그돌핀경과 그 동료들의 강경한 주장에 도저히 거스를 수 없었다. 일의 발단이 어찌 되었든 이렇게 캄센까지 달려왔으니 아무짓도 안 해보고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셰라는 그렇게 보고를 맺었다. 출발 전의 군사회의에서 나왔던 말이 완벽하게 적중한 셈이지만, 이 사태에는 국왕도 왕비도 기가 막혔다. “나 원 참, 정말 독단이었어?” “이런 이런, 헛수고 했군.” 사정을 확인한 이상 오래 있을 필요도 없다. “조라더스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그럼 빨리 처리해버리자.” 군사의 수는 비슷해도 이쪽에는 튼튼한 요새가 있다. 근처에는 얼마든지 병사를 보내줄 호족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희대의 영웅과 지상에 강림한 전쟁이 여신이 함께 출진해 있었다. 하루면 승패가 날 싸움이다. 캄센 요새는 내일 벌어질 전투에 대한 긴장과 승리의 예감을 품고 잠들었다. 하지만 이 움직임을 손꼽아 기다리던 자들이 바로 곁에 숨어 있었다. 도중에 국왕에게 합류한 군대는 장수와 병사들을 합쳐서 약2천 이상. 그 정도쯤 되면 저부 요새 안에 들어올 수 없으므로 성 근처 마을의 민가를 빌리고, 부족하면 나머지는 천막을 쳐서 야영을 하게 된다. 병졸들한테는 제대로 된 침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데 뭉쳐서 새우잠을 잔다. 그런 천막 중 하나에서 도중에 합류한 병졸 두 명이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깊이 잠들었다. 설령 잠들지 않은 이가 있더라도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특수한 대화법이었다. “서두를 것 없어.” 한 명이 속삭였다. “더 큰 전투가 나기를 기다려도 나쁘지 않아. 이번은 일단 상태를 살펴보는 셈 치자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것은 어수룩한 용모의 병사였다. 마찬가지로 자리에 누워서 어둠 속에서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병사는 아직 소년병으로 보였다. 불만스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녀석은??? 없어?” “레티는 신경 쓰지 마. 조만간 합류할 테니까. 그보다도 절대로 왕비한테서 눈을 떼지 마. 어느 정도의 괴물인지 확인해야하니까.” “알고 있어.” “상태만 살펴보자고는 했지만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주저하지 마. 주저될 정도라면 아예 덤비지 말고.” “알고 있다니까???.” 젊은 병사―스캡은 어색하게 허리에 찬 장갑을 힐끗 쳐다봤다. “이것만 있으면 간단해.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충분하니까.” “어떤 일이든 간단한 건 없어.” 중년의 병사―개스퍼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면서 전혀 반성의 기색이 없는 젊은이를 타일렀다. 대화는 거기에서 끝나고 두 사람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늘은 말게 개이고, 주위는 눈에 쌓여 아름답게 빛났다. 그 아름다운 계곡을 누비면서 그돌핀 경의 군대가 나타났다. 성급하게 돌진하지 않고 대열을 짜서 나란히 방패를 들고 견고하게 방어하면서 천천히 다가온다. 엄청난 기백. 미래가 없는 인간들의 생명을 건 태세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의 기세를 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요새 쪽에서는 사자를 세 명 내보냈다. 전원이 말을 타고, 그 중 한 명을 델피니아 왕가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들고 있다. 그들은 적군 바로 앞까지 나아가 상대방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이 경고를 무시하면 국왕이 직접 상대하게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뒤 돌아왔다. 장수들이야 어쨌거나, 일반 병졸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어났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해도 이렇게 직접 듣게 되면 동요가 생기는 법이다. 지금이라면 아직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돌핀 경은 그런 병사들을 질타하며 진군을 계속했다. 사정거리에 적이 들어오자마자 요새에서 일제히 화살이 쏟아졌다. 적도 방패를 들어올리며 그 틈으로 반격해온다. 점점 간격이 가까워졌다.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캄센 요새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나갈 순간만 기다리던 군대가 일제히 달려 나갔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의, 전쟁터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모습은 절대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린다 왕비였다. 언제나처럼 갑옷조차 걸치지 않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단검과 장검을 차고 손에 창을 들고 있다. 거대한 흑마를 타고 어느 누구보다도 재빨리 일직선으로 적을 향해 달려간다. 적은 방패를 더욱 꽉 쥐고 방패 틈으로 미친 듯이 활을 쏴대며 이 무서운 돌지능ㄹ 막으려고 했지만, 흑마는 재빠르게 화살 사이를 누비고 왕비도 창을 휘두르며 화살을 쳐냈다. 점점 눈앞으로 닥쳐오는 강적의 모습에 진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방어가 느슨해진 곳으로 흑마가 힘차게 뛰어들었다. “우아??? 악???!” “겁먹지 마!!” “쏴!!” 적에 지지 않고 아군도 절규했다. “비전하를 따르라!!” “폐하께서 보고 계신다!! 물러나지 마!!” 지형이 지형이니 만치 격렬한 난전이 벌어졌다. 왕비의 움직임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고 화려했다. 그라이아의 몸은 설원에 반사되는 빛을 받아 선명하게 번득이고, 그 안장에 앉아 있는 왕비는 그보다도 더욱 빛을 발했다. 이 사람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금발이 겨울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사냥감을 노리는 녹색 눈동자는 날카롭게 번득이며, 창을 쥐고 분전하는 뺨은 생생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가는 몸이 빚어내는 기술 역시 보는 이의 경탄을 자나낸다. 전쟁의 여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평범한 인간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용맹한 모습이었다. 갑옷조차 두르지 않은 자그마한 소녀가 건장한 병사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금색의 작은 새가 시커먼 맹금류 무리를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상처입는 것은 맹금류쪽이다. 탄가의 군대는 어떻게든 왕비를 포위하려 했지만, 그라이아나 왕비의 창 앞에서는 불가능했다. 왕비는 그라이아에게 고삐를 채우지 않고 그저 등자만 가지고 말을 조종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말을 탈 수 있는 건지 이상하게 여겼지만, 고삐 대신 때때로 한 손으로 말의 갈기를 쥐는 것만으로도 자유자재로 진로를 조종하며 말과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맹공을 펼친다. 이 모습을 성벽 위에서 바라보던 국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실은 혼자서도 돌파할 수 있는 것 아냐????” 병사 모습으로 델피니아 군에 숨어들었던 개스퍼 역시 같은 느낌이었다. 개스퍼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 사이에서 적병과 싸우면서 주의 깊게 왕비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필사적으로 싸우느라 도저히 불가능한 짓이지만, 움직임도 예리한 오감도 수준이 다르다. 그런 개스퍼도 왕비의 싸움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왕비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군 병사들에게조차 신경 쓰지 않고 적군에만 집중했다. 방해하는 인간은 말에게 걷어차여 날아가고, 오른손에 든 창은 엄청난 속도로 적을 쓸어넘기거나 꿰뚫으며 적의 접근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개스퍼는 뒤에서 한 병사가 달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 역시 일반 병졸. 싸구려 투구를 뒤집어쓰고 등에는 화살 통을 메고 있다. 그 병사는 개스퍼를 보고 씨익 웃었다. 레티시아였다. 두 사람은 한마디도 없이 남들 보기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싸우는 척을 계속했다. 스켑도 이쪽에 합류했다. 제각각 계속 왕비를 목표로 따라오고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스캡은 완전히 기죽은 표정으로 선배 두 명을 바라봤다. 개스퍼는 그 시선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못하겠다는 뜻이다. 레티시아가 두 사람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적당하게 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한 척하고 전쟁터에서 비틀거리며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설원은 양쪽 군대가 뒤얽혀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여기저기에 시체가 굴러다니고, 부상자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운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필사적으로 기면서 도망치려 했다. 전쟁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그런 부상자들 사이에 교묘하게 모습을 숨겼다. “어때?” 레티시아의 짧은 물음에, 개스퍼 역시 짧게 대답했다. “뭐 하러 물어?” 왕비는 종횡무진 전장을 휩쓸면서 단 한번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나 격렬하게 뛰어다니면서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제각각 독을 바른 수리검을 품속에 가지고 있었다. 레티시아가 지고 있는 화살의 촉에도 같은 독이 발려 있다. 몸에 맞기만 하면 대형맹수라도 그대로 죽어버리는 맹독이지만 사용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되는데???.” 스캡이 분한 듯이 입술을 악물었다. “뭐??? 어쩔 수 없어. 오늘은 물러나자. 어차피 독만 낭비하게될 테니.” 레티시아가 큭큭 웃었다. 레티시아는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전투가 격렬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도 모르게 끼어들어왔다. 일반 병졸의 차림이야 어디나 비슷한데다 크게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아군 병사가 제일 선두에 서서 달려가는 왕비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당연했다. 바로 옆까지 접근할 수는 없지만 뒤를 따라가는 것쯤은 간단하다. 몇 번이고 그 날씬한 등을, 가는 어깨를 시야 중앙에 포착했다. 실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도, 도저히 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그 순간이 떠오른다. 전장을 달리다가 발길을 멈춘다. 적을 쏘는 척하면서 독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쏘기 직전에 표적을 바꿔 그 등을 쏜다. 하지만 그 순간, 왕비가 뒤를 휙 돌아본다. 동시에 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이 화살을 쳐내겠지. 쏘기 전부터 그 광경이 보이는 상황이니 도저히 불가능하다. 레티시아 일행이 물러날 기회를 살피고 있을 때, 국왕도 전쟁의 흐름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미 우열은 확실하게 가려졌다. 아군은 적의 선두를 격파하고 증진을 밀어붙이며 큰 전과를 올렸다. 후진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이른 아침부터 싸움이 시작된 지 이미 두 시간. 병사들도 지친 기색이 드러난다. 국왕은 퇴각 신호를 울리도록 명령했다. 왕비는 적진 깊숙이 돌입한 참이었지만 그 소리를 깨닫는 것도 다른 이들보다 빨랐다. “좋아. 퇴각이다!!” 그때 왕비를 따라 돌격해온 기사 십여 명이 가까이 있었다. 그들은 진형을 이루며 후위를 맡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쪽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도망만 치던 적이 갑자기 공격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어떠한 경우에도 후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금 적은 깊숙이 틀어박힌 채 반격하려는 눈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기사들의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저마나 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솜씨에 대해 칭찬을 건네며 퇴각했다. 왕비는 그런 기사들의 최후미에서 절대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계속 뒤를 돌아보고 적의 상태를 확인했다. 반 정도까지 돌아왔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으아악!!” 바로 옆에 있던 숲에서 적의 복병이 수십 명 뛰어나온 것이다. 전원이 창을 든 보병이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기사들은 이 불의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당황하며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제일 먼저 날아온 창에 기사 중 한 명이 목을 뚫리고 엄청난 출혈과 함께 눈 위에 떨어졌다. 탄가의 진지를 살피던 왕비는 즉시 말을 돌려 비명이 들린 쪽을 확인했다. 눈을 돌리자마자 그 광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왕비의 몸이 굳어버렸다. 시체에 놀란 것이 아니다. 피를 보고 겁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왕비를 사로잡은 것은 선명한 붉은 색과 그 주위에 퍼져 있는 차가운 백색. 인간들에게 짓밟혀 더럽혀진 설원 속에서, 어째서인지 그곳만은 아직 새하얀 눈밭이 남아 있었다. 그 위에, 대조적으로 선명한 문양이 새겨진다. 마치 순백 위에 활짝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왕비의 눈은 그 무늬에 못박힌 채, 순간적으로 지금의 상황도―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망각했다. 그 설원―아버지를 잃은 그날, 그 기억이 미친 듯이 되살아나며―아니, 달랐다. 떠오른 것은 그 녀석의 모습, 품안에 가득 안겨 있던 하얀 꽃과 붉은 장미. 왕비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장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과 동시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강렬한 존재였다. 왕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질타했다.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아무리 그리워도, 아무리 보고 싶어해도 아무런 길이 없다. 특히 지금은 더욱. 눈앞에 적이 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왕비의 왼쪽 어깨에 꽂힌 것이다. “앗????!” 그 충격에 상체가 흔들렸지만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자세를 바로잡고 즉시 검의 손잡이를 쥐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본다. 발 숲 옆에서 좀 전까지 부상을 입고 웅크리고 있던 병사가 재빨리 두 번째 화살을 활에 메기고 있었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모습이 변했어도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그 얼굴. “네놈???!!” 전신이 분노에 휩싸였다. 검을 빼들고 신호를 보내 그라이아를 달리게 한다.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채로. 엄청난 기세였다. 아무리 가냘프게 보여도 신체 능력만은 상상을 초월하는 왕비였다. 화살 한 대 정도에 굴할 리가 없었다. 이럴 때의 왕비는 계산을 전혀 못한다. 야생의 본능 그대로 반응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눈앞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자가 있다. 다시금 공격을 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죽인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몸을 앞으로 숙이던 왕비의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지면서 힘이 빠지고 호흡이 가늘어졌다. 제일 먼저 이상을 깨달은 것은 왕비를 태우고 있던 그라이아였을 것이다. 서둘러 속도를 낮추려고 했지만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왕비의 오른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달려가는 말의 등에서 왕비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진다. 다음 순간, 왕비의 몸은 안장에서 떨어져 허공을 가르며 눈 위로 떨어졌다. 6장 갑자기 그것이 움찔 움직였다. 거대한 검은 고치를 둘러싸는 검은 실 하나하나가 갑자기 꿈틀거리면서 주위에 떨어졌다. 루퍼세르미 라덴은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악물었다.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고 더욱 몸을 움츠린다. 갑자기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등골에 뭔가 기분 나쁜, 정체 모를 감각이 스멀거린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이런 불안감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이번은 특히 심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대답은 없다.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 아이와 접촉할 수 없다. 그 사실만은 뼈에 사무치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간처럼 표현하자면 미칠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목의 피부가 저려온다. 그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갑자기 꿈틀대기 시작한 검은 실은 아직도 가라앉지 못한다. 작은 방의 벽에 거미집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들은 별도로 치더라도, 발치에서 수없이 많은 검은 실이 똬리를 틀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 자신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검은 뱀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내가 일어나 있는데??? 이렇게나 움직이다니???.’ 이 분신들은 물론 루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사이, 루의 의식이 없을 때만은 가끔 멋대로 움직일 경우가 있다. 그 아이도 한번은 굉장히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머리카락 교육 좀 제대로 시키라는 것이다. 곁에서 자고 있었더니 어느 틈엔가 팔에 엉겨 붙어서 떼어내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화를 내도 협박을 해도 놔주질 않는 통에 결국 자장가까지 불러줬다며 펄펄 뛰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고 잠깐 웃다가 다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도 그 아이가 처음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뻤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음을 허락한 상대에게만 허락하는 그 이름을, 아마도 자신은 영원히 들어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이용하려 들지도 않는 상대와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상대는 지금 이곳에 없다. 어디에도 없다.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곁이 아니라도 좋았다. 이 세계 어딘가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었는데. 동료들 중 하나는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이라고 했다. 우연히 그 아이가 떨어져버렸지만 다른 누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조만간 반드시 똑같은 상황이 일어날 테니 그렇게 되면 상태를 고정시켜서 이쪽에서 데리러 가면 된다. 그때까지만 기다려라. 이쪽도 저쪽도 그러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그 말을 믿고―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그저 기다리고만 있다. 그럼에도 무의식중에 이렇게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불안하게 웅성거리는 분신들을 달래고서 원래대로 검은 고치처럼 자신의 주위에 둘러친다. 이렇게 괴로울 바에는 차라리 잠들어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 아니면, 어쩌면 일어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고 실은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사라진 뒤부터 밤도 낮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밤―은반 같은 달이 빛나고 있을 텐데도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은 검은 물감을 쏟아 부은 것처럼 기분 나쁜 공간뿐. 낮―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을 텐데도, 새파란 하늘과 흐르는 구름이 있을 텐데도 보이는 것은 희뿌옇게 흐려진 잿빛 뚜껑뿐. 모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날, 그 아이가 이곳에서 사라진 그때에 세계는 죽어버렸다. “기다려???. 금방 데리러 갈 테니까???.”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정말로??? 금방 갈 테니까???.” 이미 그것은 오열이었다. 7장 활을 쏜 레티시아가 더 놀랐다. 그렇게나 원하던,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던 ‘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 그 한순간, 그렇게나 강하던 왕비의 온몸에 허점이 드러났다. 어째서? 생각하는 것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이며 활을 쐈지만, 명중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경악했다.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야????” 안장에서 미끄러져 눈 위로 떨어진 왕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었어?” 개스퍼가 냉정하게 묻는 순간 델피니아의 기사들이 절규했다. “비전하?!” “말도 안 돼!!”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일어날 리가 없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직면한 그들은 싸우는 것도, 왕비를 도우러 뛰어가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한편 탄가의 복병들은 기뻐 날뛰었다. “왕비가 쓰러져졌다?!” “됐어!! 비장군이 활에 맞았다!!” “자, 생포해!!” 복병들은 환성을 지르며 일제히 왕비에게 덤벼들었다. 마치 설탕에 달려드는 개미 떼 같았다. 하지만 탄가의 병사들이 달려든 그 순간, 왕비는 눈 위를 구르며 뛰어 일어났다.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채. 일어나자마자 막 자신에게 달려들려고 하던 병사의 가슴을 단검으로 꿰뚫었다. 왕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얼굴을 고통에 일그러뜨리고 식은땀을 뚝뚝 흘린다. 몽롱해진 의식과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몸을 필사적으로 일으키면서 왕비는 거칠게 어깨를 들썩였다. 부상 때문은 아니다. 그것만으로 이렇게 이상해질 리는 없었다. 뭔가 다른 것이 급속하게, 격렬하게 체내를 침식한다. 화살은 왼쪽 쇄골 아래, 가슴 위쪽 높이에 꽂혀 있다. 오른손에 단검을 쥔 채, 왕비는 왼손을 들어 몸에 꽂힌 화살을 쥐고 빼내려 했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화살촉이 살 속에 깊이 파고들어버렸다. 길게 뻗어 나온 화살대가 방해가 되었다. 왕비는 왼손으로 화살을 꺾어버렸다. 충격으로 어깨의 살이 찢어지면서 선혈이 튄다. 왕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오른손에 쥔 단검은 아직 병사의 가슴 깊이 꽂혀 있다. 야수처럼 형형하게 번쩍이는 눈이 적을 노려본다. 그 처참한 모습에는 다른 탄가 병사도 흠칫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부상을 입은 여자 한 명. 게다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거물이다. 그래도 생포하는 건 포기한 듯, 자신의 이름을 대고 맹렬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왕비가 엄청난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상처를 입은 맹수의 포효였다. 병사의 시체에서 단검을 뽑아낸다. 겁은 점점 모습을 바꾸며 대검으로 변해갔다. 탄가 병사는 겁먹지 않았다. 아니., 그저 깨닫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검을 빼들고 공격한다. 왕비는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렀다. 단 한 합에 그 병사의 목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검을 휘두른 다른 병사의 팔이 잘려나갔다. 다른 한 명, 상처를 입은 왼쪽에서 창을 찌르려던 병사가 있었지만 왕비는 부상당한 팔로 창끝을 붙잡고 창을 통째로 빼앗아버렸다. 창끝이 한바퀴 돌면서 주인의 가슴을 뚫고 땅바닥에 꽂혔다. 그때가지 가만히 있던 탄가의 후진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왕비가 낙마하는 모습을 본 거겠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으앗???!!” “안돼!!” 델피니아의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반수는 아군인 척 변장하고 왕비에게 화살을 쏜 암살자를 쫓아서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남아 있는 것은 몇 명뿐이었다. “비전하!! 적이???!!” “제 말에 타십시오!! 빨리!!” 말을 타고 달려오며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왕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대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서 있을 뿐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개중 한 명이 억지로라도 안아 올리려고 했지만 그도차도 불가능했다. 왕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가 아군이든 적군이든 상관없이 무섭게 칼을 휘둘렀다. 아니, 이미 구분조차 못하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비전하???!!” “부탁드립니다! 빨리 말에???!!” 병사들이 애원했다. 그때 지축을 울리며 흑왕이 달려왔다. 왕비는 검을 버리고 고삐 대신 갈기를 움켜쥐며 경이로운 힘으로 자신의 몸을 안장 위에 끌어올려 걸터앉았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한편 요새에서도 이 사태를 보고 이미 원군을 내보낸 상태였다. “비전하께서???, 그 비전하께서 낙마를?!” “서둘러!! 어서 비전하를 구해라!!” 사색이 되어 달려 나온 원군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왕비 곁까지 다가왔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그대로 왕비를 지나쳐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탄가군에 맞서 과감하게 응전했다. 물론 왕비 주위에도 병사들이 모여들었지만 상처 투성이의 처참한 모습에 아군들마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무슨????!” “비전하???!” “빨리 시의를 불러라!!” 저마다 그렇게 외치며, 어쨌거나 왕비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흑왕은 중상을 입은 왕비를 태우고 능숙하게 달려갔지만 들판 가운데에서 갑자기 멈춰 서버렸다. 흑왕 역시 상처 투성이였다. 왕비를 노리는 다른 복병들과 싸우면서 생긴 상처이다. 그렇다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은 아니다. 실제로 요새 근처까지 이렇게 왕비를 태우고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무장들에게 그런 사실까지 깨달을 여유는 없었다. “에잇???. 이런 데서 멈춰서 어쩌자는 거야!!” 짜증스럽게 외쳤지만 고삐가 없는 말을 끌고 갈 수도 없다. 물론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데다, 어설프게 채찍질을 했다가는 자칫하면 왕비가 떨어진다. 부하들은 어쩔 수 없이 왕비를 안장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이것 역시 여의치가 않았다.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임에도 왕비의 다리는 말의 몸을 꽉 붙들고, 손으로 갈기를 꽉 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상관없어! 말의 갈기를 잘라라!!” 한 명이 흥분해서 외쳤다. 왕비의 몸을 걱정해서 일각이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초조감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흑왕은 발끈한 듯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리!! 왜 그래?!” 국왕이 달려왔다. 셰라도 함께였다. 흑마는 자기 발로 그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뭔가 호소하는 듯이 낮게 울었다. 왕비는 그 등에 엎드려 있다. 왼쪽 어깨에 부러진 화살이 꽂힌 채, 상체는 완전히 피에 젖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셰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국왕도 순간적으로 창백해졌지만 곧바로 왕비를 안장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리, 나야. 알겠어????” 왕비는 대답 없이 거친 호흡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손을 놔. 그라이아가 곤란해하니까.” 반응은 없다. 새파랗게 질린 왕비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눈의 초점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국왕과 셰라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심상치 않다. 중상의 격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이 그것만으로 이렇게 인사불성일 리가 없다. 국왕은 다시 한 번 왕비의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리???. 여기는 안전해. 널 공격하라 자는 아무도 없어. 알겠어? 손을 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왕비는 살짝 몸의 힘을 늦췄고 국왕은 신중하게 왕비를 안아 내렸다. 셰라가 왕비를 받아들어 옮기려고 했지만 왕비는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두 사람의 손을 뿌리친다. 왕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웅크리며 쓰러져버렸다. 셰라가 당황하며 안아 일으키려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치지 않은 쪽 어깨를 잡는 순간, 왕비는 엄청난 힘으로 셰라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끌어당기는 바람에 자칫 쓰러질 뻔했다. “??????!” 놀라서 왕비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초점을 잃은 눈이 있을 뿐. “리. 여기서는―제대로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요새로???.” 왕비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면에 몸을 붙이려는 듯이 더욱 동그랗게 웅크린다. 오른손으로 셰라의 팔꿈치를 꽉 쥔 채. 셰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국왕 역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건지, 움직이고 싶지 않은 건지???. 언뜻 보기에는 중상이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했다. 국왕의 결단은 빨랐다. “여기에 진을 쳐.” “예????” 곁에 있던 무장이 반문했다. 국왕은 투신의 기백을 드러내며 외쳤다. “여기에 진영을 쳐라!! 지금 바로!!” “아???, 옛!!” 당황하며 허둥지둥 뛰어간다. 움직일 수 없는 왕비 주위에 1개 중대가 진을 쳤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셰라는 왕비를 감싸며 지면에 앉아 있었다. 왕비는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며 셰라의 옷을 꽉 잡았다. 셰라 역시 왕비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의외일 정도로 가늘고 연약한 몸이 지금 무언가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독???. 대체 무슨 독이지????’ 수십 종의 독약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어느 것도 증상과 맞지 않는다. 셰라는 이렇게 고통을 주는 독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남자???!’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악물었다. 고양이 같은 눈을 한 위험한 남자. 그자다. 다른 인간일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을 쏴서 맞힐 수 있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다. 다시금 마을 출신인 자신과 그들 사이의 격차를 실감했다. 분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국왕의 얼굴도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때라도 태양처럼 빛나던 이가 지금 중상을 입고 고통에 뭄부림치며 지면 위에서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곁에 있어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국왕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왕비를 부탁해.” “예???.” “난 적을 처치하겠어. 상처는 치료할 수 있겠나?” 셰라는 진지한 얼굴로 국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구를???. 저기, 제 짐이 방에???.” “가지고 오도록 시키지.” 국왕은 엎드려 있는 왕비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완전히 헝클어진 금발을 단 한 번 쓰다듬었다. “나의 하미아는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아.”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듯이 중얼거리고, 국왕은 적이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중앙의 사자라 불리는 왕의, 귀기까지 어린 투지 앞에 노출된 그돌핀, 브라하 군대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국왕이 종횡무진 날뛰면서 적을 처치하는 사이, 후방 부대는 곧바로 진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기자재를 운반하고, 병사들은 미칠 듯이 서두르며 일했다. 엄청난 소음 사이에서 왕비는 지면에 쓰러져 셰라에게 매달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셰라도 왕비를 끌어안고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주위에 기둥이 세워지고, 천막을 치고 나자 왕비의 모습은 병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간신히 왕비의 몸에서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시종들이 바닥에 깔 모피와 셰라의 짐을 가지고 왔다. “고맙습니다. 깨끗한 천과 물도 더 가져와주십시오.” 시의들도 달려왔지만 왕비는 절대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억지로 가까이 다가가면 흥분한 야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통에 시의들도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상처는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렇게 명하셨습니다.” 딱 잘라서 말하는 아름다운 시종을 보고 시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이 소년이 어떤 치료를 하려는 건지 불안했던 거겠지. 국왕의 명령이라면 어쩔 수는 없지만 최소한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셰라는 국왕의 엄명을 내세우며 그들을 천막에서 쫓아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은 적이다. 뜻대로 몸을 쓸 수 없는 이런 때라면 더욱 그렇다.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이 거기서 예외인지 계속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런 순간만은 고마웠다. 모피 위에 왕비를 똑바로 눕혔다. 상태는 변함이 없다. 호흡은 불규칙하고 의식도 흐릿해져 있다. 이 독에 대해 지금의 자신은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수밖에. 짐 안에는 일단 기본적인 의료도구도 갖춰져 있다. 평범한 의사보다 훨씬 의술에도 정통하다. 땀 투성이가 된 이마에서 은제 머리장식을 떼어내고 피에 젖은 의복을 찢어 상처를 노출시켰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어깨에 꽂힌 화살촉은 큰 삼각형 모양으로 끝이 매우 날카로웠다. 한번 꽂히면 절대로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구조이다. 아마도 사냥용으로 사용되는 물건이겠지. 그렇다면 근육을 절개하고 직접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다행히 화살촉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화살을 꺾을 때의 충격으로 상처가 커져 있었다. 그 때문에 출혈도 심하다. 전부 봉합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다. 셰라는 비지땀을 흘리며 수술을 계속했고, 그동안 왕비는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간다. 저녁때를 맞아서 진영이 바쁘게 움직였다. 여러 군데에 모닥불이 피어 오르고, 하인들이 요새에서 음식을 들고 왔다. 진영의 중앙에는 부상을 입은 왕비의 천막이 있다. 그 사방을 둘러싸는 형태로―단 조금 간격을 두고 다른 막사들이 서 있다. 보초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대로 이곳에서 밤을 샐 것이 틀림없다. 숲의 입구에서 몸을 숨기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반츠아는 조용히 숲 속으로 물러났다. 캄센은 사방이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요새에서 약 2카티브만 동쪽으로 이동하면 인기척이 존재하지 않는 깊은 산 속이다. 반츠아는 표식도, 길다운 길도 없는 산 속을 유유히 나아가며, 잡목 사이에 묻혀서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작은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사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문에 못이 박혀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반츠아는 풀숲을 헤치며 오두막의 벽을 타고 몸을 수그렸다. 판자벽의 일부를 누르면 그곳이 빠지면서 입구가 된다. 내부는 어두웠지만 잘 단련된 반츠아의 눈에는 아무 불편도 없었다. 그곳에 네 명이 모여 있었다. 스캡과 개스퍼, 그리고 나무꾼으로 변장한 조슬란이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레티시아는 혼자 벽에 기대에 있었다. 반츠아가 들어왔어도 아무 관심도 없는 듯했다. 다른 세 명은 말없이 반츠아를 향해 시선을 보냈고, 반츠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대로 야영하나봐.” “그렇???다는 건, 설마 살아 있는 거야?!” “설마????!” 스캡과 개스퍼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조슬란도 신음을 흘렸다. 반츠아는 자기 눈으로 본 진영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바로 등 뒤에 튼튼한 요새가 있는데도 굳이 막사를 펼쳐놓고 모닥불을 피우며 병사들의 식사까지 가져온다. 적어도 오늘 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태세였다. “그러니 아마도 왕비는 중상이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그런 것 아니겠어?” 세 사람은 일제히 신음했다. 강한 적을 완벽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은 셈이지만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몸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오한이 기어 올라오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스캡은 이 어두운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져서 외쳤다. “뭐하자는 거야? 어째서 안 죽는 거야?!” 그들이 사용한 것은 즉효성 맹독이었다. 물론 효과는 사전에 확인해 두었다. 핏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간은 물론이고 곰이나 호랑이 같은 대형 맹수도 몇 분밖에 버티지 못한다. 화살을 맞은 지 이미 몇 시간이 경과했다. 조슬란은 날카롭게 레티시아를 몰아세웠다. “정말로 맞힌 거 맞아?” 레티시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레티시아 대신 개스퍼와 스캡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맞았어. 그건 분명해.” “내 눈으로 봤어.” 조슬란은 다시금 신음했다. “믿을 수 없어???. 그런???, 그렇다면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이봐???. 혹시 허세 아닐까? 왕비가 아직 살아 있는 척하는 걸지도???.” “뭐 하러?” 스캡의 말을 조슬란이 즉시 부정했다. 하지만 개스퍼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캡의 의견에 동조했다. “아니, 가능성은 있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걸지도 모르지.” 지상에 강림한 전쟁의 여신, 국왕의 수호신으로 불리며 거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왕비다. 그런 왕비의 죽음을 곧바로 발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럼 확인을???.” 조슬란이 입을 열려던 순간,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레티시아가 낮게 웃었다. “살아 있어, 그 왕비 씨는.” 네 사람이 일제히 레티시아를 바라봤다. 머리를 벽에 기대고 손발을 아무렇게나 뻗고 있다.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전투 시의 기민한 움직임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도 없는 자세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어째서라니???. 너희들도 봤잖아? 정통으로 먹었다고. 그런데도 그렇게 날뛰었지. 죽을 인간이었으면 그때 얌전히 죽었을 거야.” 담담한 어조에는 여전히 유쾌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우울해 보이는 표정과는 반대로, 고양이 같은 눈만은 더욱 빛난다. “화살에 맞아서 쓰러지고,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해. 그대로 저 세상에 보내주는 친절한 독인데 말이지. 참 나, 고집이 센 건지 원래부터 상식이 안 통하는 생물인 건지. 이젠 목이라도 따는 수밖에 없겠는걸.” “감탄하고 있을 때야?” 조슬란이 씁쓸하게 맞받아쳤다. 개스퍼가 조금 생각하다 말했다. “하지만 중상인 것만은 틀림없어. 아무리 상식에서 벗어난 괴물이라고 해도, 최소한 독이 듣기는 했다는 말이지.” “음.” “노린다면 지금이 기회야.” “음???.” 주된 전략은 연장자인 이 두 명이 결정한다. 스캡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반츠아는 덤 취급이었다. 그리고 레티시아는, 원래는 주역이면서도 방관자의 위치에서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레티. 어쩔래? 원래는 네 사냥감이다. 네가 가겠어?” 레티시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치뜨고 조금 몸을 뒤척인다. “결판을 내려면 빠를수록 좋아. 이 기회를 놓치면 여러모로 힘들어질 테니까.” 조슬란도 힘주어 역설했다. 그래도 레티시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오두막의 벽에 기댄 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목만 갸웃거렸다. “레티?” 반츠아가 부르자, 이번에는 씨익 웃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안 가.” “뭐????”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진영을 덮쳐서 왕비 씨한테 최후의 일격을 날리자 이거지? 난 안 가.” 다른 일행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같으면 발끈하면서 덤벼들었을 스캡조차도 입을 다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남자가 하는 말이다. 단순한 변덕일 리가 없었다. “어째서지?” “글쎄.” “상태가 호전되면 왕비는 성 깊숙이 수용되겠지. 물론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지금 처치하는 편이 훨씬 쉬워.” “알고 있어.” 실제로 그런 것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뻔했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왕비는 지금 천막 한 장에 둘러싸여 평원 한가운데에 있다.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였다. “레티.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 왕비한테 정이라도 든건 아니겠지?” 의심에 가득 찬 조슬란의 말에 레티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 그것도 재미있겠군.” “말 돌리지 마. 무슨 생각으로 야습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거야?” “위험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일행은 기가 막혀 굳어버렸다. 물론 진영의 경계는 굉장히 엄중하다. 반츠아가 보고한 것만으로도 일개 대대 이상의 군세가 왕비의 천막을 지키고 있다. 보초들도 나와서 밤이 되어도 대낮처럼 밝게 불을 피워놓고 사방을 살피겠지. 멍청하게 접근했다가는 그대로 발각되기 십상이다. 이 정도의 경비를 뚫고 왕비를 암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누구나 말하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스캡도 의심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 어떻게 된 거 아냐?”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경비가 엄중하더라도, 결국은 낮에 싸우는 법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 짓이, 어둠 속에서 살아온 자신들에게 무슨 장애가 된다는 말인가. “설마 진심으로 저 정도의 경비를 뚫을 수 없다는 건???.” 레티시아는 쿡쿡 웃었다. “그럼 난 오늘로 이 짓 때려치워야겠지. 아니, 분명히 좋은 기회야. 목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 들판 한가운데. 보초를 서는 건 멍청한 병사들뿐. 평상시라면 괴물처럼 강한 왕비 씨도 중상을 입고 움직일 수 없어. 최고지. 이렇게 환상적인 기회는 정말 없을 거야.” 레티시아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다가 갑자기 몸을 내던졌다. “그래서 안 내켜.” “뭐????” “감이야.”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레티시아가 말을 이었다. “얘기가 너무 잘 맞아 들어가. 보면 볼수록 전호의 기회지만 지금은 안 돼. 위험해. 내 안에서 뭔가가 그렇게 속삭인다구.” 일동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모호한 이유로―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암살자라는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이다. 그 모호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감을 무시해봤자 잘 풀리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개스퍼는 포기하기 힘든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런 수도 안 써보고 구경만 하는 것도 너무 바보 같지 않아?” “맞는 말이야. 마을 놈들한테 시켜보지 그래.” “마을에?” “그래. 바로 이 근처에―일덴이던가 하는 마을이 있었지? 거기라면 오늘 밤에라도 움직일 수 있어.” 반츠아가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일족의 정예인 이들은 온 대륙에 점재하는 마을의 소재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의 종사들까지도 자유롭게 부릴 수 있었다. 레가에 있을 때, 종사의 명령은 반츠아에게 절대적이었다. 다른 마을의 존재조차 몰랐다. 하지만 종사와 몇 안 되는 측근에게는 일족의 요청이 있으면 반드시 협력할 의무가 있었다. 그 명령을 받아 직접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행동원들이다. 마을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며 종사의 의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위험한 임무에 몸을 던지다 끝내 목숨까지 잃는다. 개스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가능은 하지만???, 어째서 마을에?” “정말로 중상이라 움직일 수 없다면 굳이 우리들이 움직일 것까지도 없어. 마을 놈들이라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지. 시험 삼아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스캡이 불만스러운 듯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말이야???. 당신 감이 틀렸으면 마을 놈들한테 공적을 뺏기게 되잖아.” “누가 죽이든 큰 상관은 없어. 우리들의 임무는 올해 여름까지 왕비를 죽이는 거야. 남의 손을 이용해서 죽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개인의 기량을 자랑하는 것보다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일족 최고의 행동원이 그렇게 말한다. 조슬란이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분명히 그 독에도 죽지 않았던 인간이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뭐, 그런 거지.” “혹시 네 감이 맞는다면 일덴 녀석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 테고.” “상관없어. 어차피 마을 놈들이야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야. 우리들도 그렇지만.” 변함없이 즐거운 듯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셰라는 정체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왕비의 용태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상처를 봉합하고 붕대를 감은 채 모피 위에서 잠들어 있다. 하지만 독은 예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아직도 호흡이 불안정하고 의식도 뚜렷하지 않다.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조합한 탕약을 먹였지만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셰라도 자신이 없었다. 남은 것은 이 사람의 체력과 기력뿐. 이 정도 부상에 질 사람이 아니라고 국왕은 말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반면 초조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불안한 것은 왕비 쪽이 아니다. 바깥이었다. 천막으로 가려져 있다고는 해도 헝겊 하나만 지나면 바깥은 들판. 바로 코앞에는 울창한 숲이 있다. 마침내 태양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형용하기 힘든 위기감이 들었다. 이런 감각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고 비슷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두근거림, 혹은 제6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감각 덕분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나 함정을 직전에 눈치채고 피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어리석은 인간이라도, 겁쟁이라도 노리는 상대가 독에 쓰러져 움직일 수 없다면 이때다 하고 습격해오겠지.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셰라는 천막 입구에서 살짝 바깥을 살폈다. 진영 전체가 긴장하고 있다. 왕비와 함께 후위를 맡았던 기사들의 증언으로, 왕비를 쏜 것이 아군으로 위장한 남자였다는 사실은 알려졌다. 목격자도 여럿 있었던 만큼 그 사실은 델피니아 진영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대체 누구야?!” “누가 보낸 놈이야. 조라더스?!” “이 비겁한 자식???!!” 게다가 그 화살에 독이 발려 있었다는 소문이 흘러나가자 장병들의 분노와 흥분은 정점에 달했다. 격정에 휩싸여서 이대로 탄가 영내로 달려가자며 펄펄 뛰는 그들을 말린 것은 국왕의 위엄 있는 한마디였다. “제군들이 혈기를 앞세우고 이 자리를 떠난 사이에 또다시 비겁한 자들이 왕비를 노리면 어쩔 건가?!” 일동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왕비의 천막을 지키는 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무단으로 접근하는 인간은 바로 베어버리겠다고 기합을 넣고 있었다. 물론 밤중에도 교대로 불침번을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찾아오는 것은 평범한 암살자가 아니다. 전쟁터라는 제한된 조건에서만 싸워본 기사나 병사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천막을 내리고 다시 왕비의 곁으로 돌아온 셰라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리???. 들리나요?” 이름을 부르자 왕비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흐릿해진 의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이었지만 막 부상당한 직후와 비교하면 상당히 안정된 편이다. “곧 해가 저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왕비도 알고 있겠지. 왕비의 얼굴에 고통이 떠올랐다. 동시에 멀쩡한 오른손이 바닥에 깔린 모피를 헤집으며 뭔가를 찾으려고 했다. “검은???죄송합니다. 아직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검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소용이 없습니다.” 왕비는 일어나기는커녕 입도 열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까지 검을 쥐려고 한다. 그 정신력에 경탄하기보다도 오히려 오한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겁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신은 부상을 입어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 “그러니까 당신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자기가 할 수밖에 없다. 설령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남자나 반츠아는 틀림없이 셰라의 동적이니까. 왕비가 가만히 셰라를 바라본다. 셰라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죽지는 않습니다. 저는 움직일 수 없는 당신 대신 당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할 뿐입니다. 지금만이라도 저를 당신의 수족으로 삼아주시겠습니까?” 왕비는 멍하게 셰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오른손을 움직여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셰라를 향해 뻗는다. 평소의 왕비와 비교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둔한 동작이었다. 팔꿈치를 잡고 팔을 따라 올라가 간신히 어깨를 잡고 자기쪽으로 끌어당긴다. 셰라는 얌전히 그에 따라 왕비의 몸 위에 몸을 굽히는 자세가 되었다.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겹쳐지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인다. 왕비의 눈이 셰라를 바라보았다. 몽롱하고 고통에 가득 찬 눈이. 하지만 독이나 부상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눈이었다. ‘다녀와???.’ 왕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이고 일어서려던 순간, 바깥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기다려주십시오. 혼자서 불침번이라니???.” “비전하의 간병이라면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시의도 있습니다. 굳이 폐하께서 이러실 것은???.” 그런 소리가 들려온다. 하룻밤 내내 왕비 곁에 있으려는 주군을 시종들이 말리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국왕은 완고하게 말했다. “저 사람은 내 비다. 나한테는 밤새 간병할 권리가 있어. 적도 다 쫓아냈지. 중상을 입은 처가 여기 누워 있는데 남편인 내가 곁에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하지만 저어, 최소한 저희들이라도 곁에???.” “필요 없어. 귀찮게 여러 사람이 우글거리면 왕비도 푹 쉴 수 없겠지. 부를 때까지는 절대로 오지 마.” 완고한 어조에 측근들도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셰라는 감사하며 막 천막에 들어선 국왕을 맞이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이 사람을 부탁드린다고 말할 차례이다. 국왕도 사정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괜찮겠어?” “예.” “무리는 하지 마.” “예. 폐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짧게 대답하고 셰라는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설원에 서서히 밤의 장막이 내려오고 있었다. 8장 왕비의 천막과 그 주위에 원을 그리며 산재한 막사 사이에는 십여 미터의 간격이 벌어져 있다. 보통 세우는 진영과 비교하면 조금 먼 편이지만 소리를 지르면 들릴 거리였다. 국왕은 혼자 천막 안에서 왕비를 간병했다. 자신의 시종마저 가까이 들이지 않고 부를 때까지 절대로 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두었다. 어쩔 수 없이 시종들도 원을 그리는 막사 안에 대기하며 초조하게 주군의 천ㄴ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변함없이 불침번을 섰지만 워낙에 조용한 밤이었다. 하늘에는 달이 차갑게 빛나고, 모닥불이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이런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긴장하고 있어도 어딘가 허점이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밤이 깊어질 무렵, 진영 바깥쪽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가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그와 동시에―병사의 왼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서둘러 왼쪽을 돌아봤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안심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실은 그 찰나, 수상한 그림자가 병사의 바로 옆을 바람처럼 지나갔던 것이다. 여기저기에 피워둔 모닥불 사이를 교묘하게 지나면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진영 내를 나아간다. 마침내 수상한 그림자는 원을 그리며 서 있는 막사 사이를 통과했다. 목표하는 천막까지 단숨에 달려가려던 순간,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그림자의 허벅지에 정통으로 명중하는 것과 동시에 큰 소리가 났다. “누구냐!!” 그림자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더욱 경악했다. 병사들은 일제히 원의 중앙―왕비의 천막을 향해 달려왔다. 암살자는 당황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발에 부상을 입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곧바로 붙잡혀 밧줄에 묶여버렸다. 불을 가까이 들어댄다. 시종인지 종자인지 분간하지 힘든 차림의 남자였다. 이렇게 된 이상 발버둥쳐도 소용없다고 포기한 듯, 저항도 애원도 하지 않는다. “에에잇, 이 자식!” “죽일 놈!” 흥분한 병사들은 그 남자를 쳐댔지만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겁을 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병사들을 가만히 노려볼 뿐. “이 뻔뻔스러운 놈!” “폐하! 나와주십시오!” “암살자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국왕은 천막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냉담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적당한 곳에 가둬놔.” 아직도 암살자를 붙잡은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한 병사들은 이 차가운 반응에 김이 빠져버렸지만, 국왕은 더욱 매섭게 말했다. “이렇게나 불을 피우고 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가까이까지 접근하도록 허용했나?! 졸기라도 했는가?!”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그 목소리만으로도 병사들은 몸을 움츠렸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부끄러워 고개를 푹 속이는 병사들에게, 국왕은 각자 제 위치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한 명을 잡았다고 방심하지 마. 암살자가 더 없다는 법은 없으니.” 이 또한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하며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갔다. 붙잡힌 암살자는 그 장소의 책임자가 살펴보면서 일단 부상을 당한 다리도 치료를 해주었다. 다시금 살펴보자 다리를 찌른 것은 작은 수리검이었다. “허 참, 대체 누구 거지?” 책임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이 부상을 입힌 자가 나오지 않는 게 묘했다. 큰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자진해서 나서는 것이 당연하건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우선 밧줄로 묶어놓은 암살자를 막사 안에 처넣고 감시를 붙였다. 소동이 가라앉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동시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인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왕의 말대로 암살자는 한 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료가 붙잡히는 동안 가만히 숨어서 일의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욱 경계가 삼엄해진 왕비의 천막에 다가가는 것도 아니었다. 제각각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며 진영에서 떠나갔다. 암살자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셰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셰라 역시 어두운 곳에 숨어서, 병사들도 암살자들도 모르게 왕비의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암살자의 다리를 쏜 것도 물로 셰라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 목소리가 떨릴 뻔했다. 다리를 향해 수리검을 던졌을 때에는 무의식적이었건만 이런 밤중에 큰 소리를 지르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한밤중의 단독행동은 언제나 은밀하게 남의 눈을 피해야 한다. 그런 때에 멍청하게 소리를 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예를 들어 함정에 걸려 부상을 입더라도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엄격하게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함정에 걸리지는 않더라도 고통에 버티는 훈련은 상당히 받아두었다. 생각지도 못하던 구석에서 그때의 영향이 남아 있었지만, 어쨌거나 암살자가 무사히 병사들의 손에 넘어가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소동으로 적도 조금은 방식을 바꾸겠지. 지금 셰라의 목적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도, 붙잡는 것도 아니다. 왕비의 목숨만 지킬 수 있으면 된다. 삼엄한 경계를 보고 오늘 밤에 손을 쓰는 것만 포기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룻밤만 지나면 왕비도 회복될 테고, 그 사람만 회복하면 저런 적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사실 그 점이 제일 걸렸다. 반드시 레티시아나 그의 동료들이 올 거라고 생각했건만 지금 나타난 암살자는 명백하게 종류가 다르다. 저 움직임. 한 사람이 붙잡히면 나머지는 우선 철수하는 통제된 방식은 오히려 한때의 자신과 굉장히 비슷했다. 셰라는 왕비가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보지 못했다. 타고 있는 말도 상당히 느렸고 끈질기게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다보니 왕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퇴각 신호가 울렸을 때에도 왕비와의 거리는 굉장히 벌어져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먼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말 그 남자가 왕비를 쏜 건지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한 짓이라면 반드시 자기 손으로 숨통을 끊으러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일이 복잡해진다. 어딘가의 ‘마을’이 그 남자와는 별도로 왕비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의뢰가 겹친 걸까????” 분명히 반츠아도 언젠가 그런 말을 했지만. 파로트 일족의 내부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는 셰라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진영에서 빠져나온 적은 바로 전방에 있는 작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곳이 문제가 생겼을 경우의 집합 장소일 것이다. 셰라는 숨을 죽이며 가만히 그쪽을 바라봤다.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지금의 자신은 왕비를 지키는 수족. 멋대로 몸에서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왕비라면, 평소의 왕비라면 공격이야말로 최대의 방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저 인간들이 독화살을 쐈다면 이대로 물러나려 할까. 물어보러 돌아갈 여유는 없다. 지금의 왕비는 제대로 대답할 수도 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셰라는 조금 주저하다가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왕비의 뜻이야 어떻든 자신은 저 암살자들에게 용무가 있다. 저쪽이 왕비에게 독화살을 쐈다면 그 독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해독제도 가지고 있을 터. 셰라는 어둠을 가르는 바람처럼 달렸다. 잘 단련된 눈은 어둠 속에서도 손쉽게 적이 남긴 발자국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다가가자, 곧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아니, 경계가 너무 심해.” “이대로 얌전히 돌아갈 수는 없잖아.” 전부 네 명. 어둠 때문에 모습은 정확히 알아볼 수 없지만, 말투나 목소리로 봐서는 젊은이들이 아닌 듯하다. “샘은 어쩌지?” “신경 쓰지 마. 내버려둬.” “으음. 붙잡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누구라도 알고 있을테니.” 더욱 귀를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여러 가지 자세한 얘기가 나왔다. 붙잡힌 남자는 샘. 그를 포함한 이 다섯 명은 일덴이라는 마을의 행동원이다. 오늘 저녁에 긴급 소집을 받고 모여서 왕비의 암살을 명령받았다. 셰라는 내심 혀를 찼다. 오늘 저녁 갑자기???. 이 녀석들은 왕비를 쏜 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놈들에게 용무는 없다. 조용히 물러나려던 순간. 셰라의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희미한 소리였지만, 절대로 자연의 소리는 아니었다. “누구냐!” 네 명이 날카롭게 돌아봤지만, 깜짝 놀라서 뒤를 확인한 것은 셰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자신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 하지만 네 명은 이쪽으로―셰라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숨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셰라는 일어서서 모습을 드러냈다. 옛날 마을에서 배웠던 것 중에, 장소를 들키는 것은 대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었다. 내 위치를 들켜버리면 적과 직접 마주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숨어 있어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정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짓은 현역 시절의 셰라에게는 도저히 무리였겠지. 실제로 너무나 당당하게 일어나자 네 명 쪽이 더 놀랐다. 앞뒤 가리지 않고 베어버릴 듯한 험악한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면 날카롭게 묻는다. “넌 뭐야?” “동업자입니다. 2년 반 전까지는.” 셰라는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남자들은 당연히 납득하지 못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모두 의심스러운 표정이다. 경계가 아니라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일덴에는 ‘여자 역’을 담당하는 행동원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당히 이상하게 보이겠지. 소녀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20세 정도의 소년이 동업자라고 나섰으니.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그런 차림으로 여기 있지?” 한 명이 험악하게 질문했다. 눈앞의 소년의 행동의 복장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기사를 모시는 종자 같은 옷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너, 저 진영에 있었나?” 다른 세 명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설마 왕비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너 같은 어린 것이?” “말도 안 돼. 종사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다. 외부인이 나설자리가 아냐.” 멋대로 착각하면서 저마다 말한다. 셰라는 살짝 웃었다. 선택받은 자로서의 허영심과 긍지, 정체 모를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과 경쟁의식에 가득 찬 그 말투가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생물인가. 명령받은 일밖에 하지 않는다. 명령받은 일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주제에 그것이 자신의 의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얼마 전까지 자신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경멸의 웃음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왜 웃는 거야?” “우스워서요.” “뭐????” “시키는 대로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살아있는 꼭두각시가 어떻게나 우스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소년이 웃음을 지으며 내뱉은 말에 남자들은 할말을 잃었다. 곧바로 격노하며 셰라에게 덤벼든다. 셰라는 숨겨두었던 단검을 던지면서 재빨리 몸을 피했다. 기선을 제압한 셰라의 단검은 한 명의 팔에 명중하고 다른 한명의 몸을 스쳤다. 다른 두 명은 최초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들은 차례로 납구슬과 은선을 던지면서 공격했지만, 셰라는 그 공격을 피하거나 쳐서 떨어뜨렸다. 이상한 느낌이다. 질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볍다. 손발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원래부터 눈은 단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적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뚜렷하게 들어온다. 사이를 가로막은 수목 반대편의 움직임까지 느껴질 정도로 신경이 민감해져 있었다. ‘그 사람이 여기 있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몸에 놀라면서, 셰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지 구석구석까지, 이토록 날카롭게 연마된 감각과 함께 자유자재로 손발을 놀리는 것은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내 안에 있어???.’ 그러니까 지금 수리검을 던지는 것은 왕비의 팔, 대지를 박차며 뛰어오르는 것은 왕비의 다리. 상대가 누구든 질 리가 없다. 그 격렬한 공방전을 반츠아와 레티시아가 나무 위에서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소리도 레티시아가 여기에서 돌을 던진 것이었다. 반츠아가 말했다. “굳이 소동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재밌을 것 같잖아?”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즐기는 점이 이 젊은이의 나쁜 버릇이다. 반츠아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서 있었다. 멀어져가는 셰라와 일덴의 행동원의 싸움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다. “설마 저게 네 감?” “아니. 저건 예정 외의 덤.” 레티시아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소리 없이 웃었다. “재밌어. 저 아가씨, 꼭 몇 년 전의 누구 씨 같아서 말이야.” “?????.” “일덴 녀석들은 두 패로 나뉘어 있어. 슬슬 다른 한 쪽이 왕비 근처까지 도착했겠지. 난 오히려 그쪽이 신경 쓰여. 너, 잠깐 가서 보고 와.” 반츠아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반론은 하지 않았다. 가지에서 내려와 눈이 쌓인 지면에 조용히 착지한다. 이 장신의 청년은 언제나 그랬다. 소리 없이, 기척도 없이 어느 누구보다 능숙하게 어둠 속에 녹아든다. 반츠아는 그렇게 왕비의 천막을 향해 이동했다. 왕기가 펄럭이는 천막 속에서 왕비는 잠들어 있었다. 마른 몸 위에 모피가 덮여 있고, 기둥에 걸린 촛불이 그 얼굴을 창백하게 비춘다. 상태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잠만 자고 있다. 때때로 눈을 떴다가도 다시 힘없이 감아버린다. 국왕은 복잡한 마음으로 왕비 곁에 앉아 있었다. 공기 중에 드러난 오른쪽 어깨와 몇 겹이고 붕대가 감긴 왼쪽 어깨를 보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있었다. 둘도 없는 아군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 호의에 어리광만 부릴 생각은 없었다. 국왕은 애용하는 대검과 창을 끌어안고 왕비 곁에 앉아서 채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독화살을 손 것은 파로트 일족. 하지만 분명히 의뢰한 인간이 있을 터였다. 이런 비겁한 수단으로 왕비를 제거하려는, 특히 자신의 곁에서 떼어내고 싶어하는 인간이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다. 왕비의 무용이 위협이 된다는 건 알 수 있다. 적의 진영에 있는 우수한 무장이 방해가 되는 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얘기다. 그자를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단이 하필이면 독화살이라니, 이 얼마나 비겁한 짓인가! 자신은 왕비에게 암살을 금지시켰다. 왕비가 파로트 일족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왕비가 어떻게 될 리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멍청함, 만만한 판단에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저주해도 부족하기만 했다. 미칠 듯한 격노의 파도가 국왕의 몸을 휩쓴다. “너에게 활을 쏜 놈을 붙잡으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나 자신도 모르겠어.” 중얼거리면서 국왕은 곁에 놓아두었던 창을 잡고 앉은 자세로 그대로 아무렇게나 등 뒤를 향해 찔렀다. 창은 지금 막 국왕의 등을 찌르려던 암살자의 몸을 단숨에 뚫었다. 이 사태가 믿어지지 않는 듯 눈을 크게 치뜨고 낮게 신음한다. “그러니까 뻔뻔스럽게 기어오지 말란 말이다.” 국왕은 귀찮은 듯이 중얼거리며 창을 뽑고, 그 암살자를 천막 바깥으로 내던졌다. 사람을 부르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국왕은 왕이지만 왕이 아니다. 처음 왕비와 만났을 때의 방랑전사였다. 나라도, 군대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동맹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다시 왕비의 머리맡에 주저앉는다. 간병보다도 호위를 하기 위해 이렇게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또 다른 암살자의 기척이 났다. 짜증이 나는 것과 동시에 보초병들의 허점에 혀를 차게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적의 침입을 허용하다니 대체 어디에 눈을 두고 있는 거냐고 욕이 흘러나온다. 어쩌면 그런 방어를 돌파해 들어오는 암살자 일족의 기량을 칭찬해야 할까???. 국왕은 천막 입구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굳이 입구로 들어오는 암살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녀석은 일부로 천막 입구로 침입하려는 기척이다. 국왕은 씁쓸하게 한숨을 쉬면서 검을 들었다. “귀찮다는데, 그것도 모르겠어?” 한쪽 무릎을 세우면서 뒤로 돌아 암살자의 하체를 베었다. 국왕의 움직임은 느려 보이지만 절대로 적에게 도망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국왕은 지금가지 검사로서 자신을 단련해왔다. 암살 기법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정공법이라도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으면 공격은 반드시 명중한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얌전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허벅지를 깊이 베이고 휘청거리는 순간 국왕을 향해 뭔가를 던진 것이다. 이것이 정통으로 얼굴에 맞고 말았다. “웃????!” 통증은 없다. 마치 알맹이가 빠진 달걀 껍질과 비슷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안이 비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정체 모를 가루가 들어 있었다. 서둘러 호흡을 멈췄지만 이미 늦었다. 극히 소량을 들이마신 것만으로도 그 가루는 국왕의 몸에서 자유를 빼앗아버렸다. “크윽???.”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손발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어버렸다. ‘이런 뻔한 수법에 걸리다니???!’ 너무나 분해 시야까지 흐려졌다. 그 흐릿한 시야에, 천막 저편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들어왔다. 못으로 고정해놓은 천막의 끄트머리 일부가 살짝 올라가 있다. 다른 암살자가 거기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네놈???!!” 국왕이 외쳤다. 아니 외쳤다고 생각했을 뿐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혀의 자유까지 빼앗긴 것이다. 암살자가 단검을 쳐든다. 촛불을 받아 번쩍 빛나는 검이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왕비를 향해 떨어졌다. “리!!” 날카로운 검이 피부에 박힌다―고 각오한 순간, 암살자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왕비를 사이에 두고 암살자의 반대편에 있던 국왕은 검을 든 암살자의 얼굴이 의혹으로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의혹은 점점 경악으로 바뀌고, 다시 공포로 변했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툭 떨어진다. 종국에는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국왕으로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왕비는 가만히 누워 있을 뿐. 왕비의 얼굴은 암살자를 향해 있어서 국왕에게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암살자들의 끈질긴 근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국왕의 등 뒤인 천막 입구에서 다른 암살자가 들어온 것이다. 부상을 당한 두 동료나 무릎을 꿇은 국왕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왕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왕비가 이쪽을 돌아봤다. 바닥에 누운 채 고개만 휙 돌려 이쪽을 쳐다본다. 아니,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있는데도 그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이다.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그 눈이 드러내는 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꽃처럼 압도적인 힘이었다. 너무나도 뜨겁고 강력해서 얼어붙을 듯이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는 빛이었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런 왕비는 알지 못한다. 본 적도 없었다. 왕비의 등 뒤에서 좀 전의 암살자가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국왕의 조금 앞쪽에서 새로 들어온 암살자가 왕비를 베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국왕이 다리를 벤 자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려 한다. 아무리 왕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는 해도 암살을 생업으로 하는 자가 이렇게까지 겁을 먹는 것은 이상하다. 국왕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암살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한 명의 얼굴이 찌그러들었다. 다른 한 명의 팔이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린다. 안구가 튀어 나왔다. 귀, 코, 입에서 피가 뿜어 나오고 배가 찢어지며 내장이 튀어나온다. 온몸의 뼈가 무참하게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국왕의 눈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인간이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이 세 명을 가지고 놀다가 꽉 쥐어 으스러뜨리고 바닥에 패대기친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그 모습은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밟아 죽인 벌레의 시체와 매우 비슷했다. 이미 어디가 손발이고 어디가 얼굴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는다. 천막 안에 쫙 퍼진 피와 강렬한 냄새 속에서, 국왕만이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마비약을 뒤집어쓴 때부터 지금까지는 시간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암살자의 피는 국왕의 옷과 얼굴에도 튀었지만 왕비에게는 피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왕비를 지키고 있다. 왕비는 오른쪽 팔을 세우면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려 했다. 왕비의 눈과 똑같은 색의 불꽃이 그 몸 주위를 감싸는 것이 보인다. 이븐의 상처를 치료할 때에도 비슷한 현상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성질이 달랐다. 이것은 아마도 왕비의 몸속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던 불꽃. 인간인 척하라는 말에 지금까지 계속 인간인 척하면서, 오랫동안 본성을 숨겨온 냉혹한 생물. 그것이 지금 막 풀리려 하고 있었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이상한 소리를 듣고 부하들이 달려왔다. 그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국왕은 엄청나게 초조했다. 지금 여기에 저들이 뛰어 들어오면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를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리!! 그만 해!!” 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손발이 마비된 것도 잊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왕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마도 이것은 중상을 입은 왕비가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중에 한 짓이겠지. 깨워야만 한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에 닿은 순간 국왕은 감전당한 듯이 격렬한 충격을 받았다. 눈앞이 새까매진다. “폐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온다. 그 뒤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새하얀 세계였다. 시야 가득히 눈 쌓인 평원이 펼쳐져 있다. 뺨을 엘 듯이 차가운 바람이 무섭게 불어댄다. 몸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 국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여긴 어디지????’ 전혀 모르는 곳이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가까이에 수많은 동물의 기척이 느껴진다. 엄청나게 커다란 생물인 듯하다. 따뜻하고 비린 숨결이 여럿 느껴진다. ‘너무 긴장하지 마.’ 누군가가 바로 귓가에서 말했다. 뒤를 돌아본 국왕은 사람의 배는 될 만한 늑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기겁했다. 아니, 기겁한 것은 의식뿐―어째서인지 자신의 몸은 그 늑대에게 다가가 매달리듯이 검은 모피를 붙잡았다. 그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굉장히 자그마한 손이다. 고사리처럼 작은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늑대가 거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았다. 늑대의 몸은 따뜻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금색 눈은 지성과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큰 입이 열리면서 웃음을 짓는다. “우리들 뒤만 따라오면 돼. 처음부터 뭐든지 다 잘하려고 생각하지 마.” “늑대가 말을 해?!” 국왕은 아연했다. 하지만 자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대체 이건????!” 자신의 눈이 주위를 둘러본다. 역시 거대해 보이는 늑대가 십여 마리 정도. 불안한 듯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왔어.” 국왕의 초조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검은 늑대가 말했다. 주위에 있던 살아 있는 모피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이 검은 늑대가 무리의 대장일까. 설원 저편에 보이는 커다란 생물체, 아마도 사슴인 듯한 무리를 향해 늑대들은 맹렬하게 돌진했다. 자신도 검은 늑대를 따라 눈을 박차며 달렸다. 눈가루가 얼굴을 친다. 사슴 떼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의식이 고양되어 있는 것을 국왕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월 그리크의 의식이 아니다. 고사리처럼 자그마한 손을 가진 작은 자신은 엄청난 기쁨에 휩싸여 있었다. 첫 사냥이다. 지금까지는 절대로 사냥에 참가할 수 없었다. 계속 집을 지키면서 사냥을 구경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다르다. 이제 더 이상 동료가 가져온 음식을 받아먹지 않아도 된다. 동료들과 함께 먹을 것을 잡아올 수 있다. 그런 긍지와 함께 눈을 박차며 대지를 달린다. 늑대는 무리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놈을 향해 차례로 달려들었다. 자신도 그 뒤를 따라 공격했다. 그때 장면이 바뀌었다. 새하얀 대지도 회색빛 하늘도 사라지고, 갑자기 햇볕이 가득 쏟아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뭐, 뭐야????’ 너무나도 급격한 변화에 충격을 받았지만 꿈에 대고 불평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 눈앞의 풍경을 보고 국왕은 감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숲 속이었다. 주위의 수목은 늘씬하게 뻗어서 우아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신록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완만하고 폭이 넓은 개울이 눈앞에 나타난다. 때때로 물고기의 비늘이 반짝 빛난다. 여기저기에 바위가 튀어나와 있고, 작은 폭포가 경쾌한 소리를 낸다. 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이 흔들거리며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은 수면에 살짝 드러나 있는 바위를 가볍게 밟고 개울을 건넜다. 물이 차가웠다. 그 느낌으로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수목의 간격이 점차 벌어지면서, 마침내 시야가 확 트이고 완만한 녹색 언덕이 나타났다. 발 아래에는 부드러운 풀이 돋아 있고 수목이 가지를 벌리고 있다. 작은 새가 지저귀며, 언덕에는 가련한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나비가 하늘거린다. ‘아름다워???.’ 더 천천히 바라보고 싶었지만, 자신은 재빨리 걷기 시작했다. 아까도 그랬지만 국왕의 의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듯하다. 이 몸이 하는 짓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묘한 감각이었다. 다른 사람의 몸속에 의식만 들어온 듯한―물로 그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스스로가 자신이 아닌 듯한???. 답답하면서도 이제부터 어떻게 되려는지 기대가 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언덕 저편으로 나오자 시야가 더욱 넓어졌다. 저 멀리 반짝거리며 빛나는 호수가 보인다.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너무나 선명해서, 무언가를 태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 국왕은 기가 막혀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위에 성이 서 있었다. 새하얀 뭉게구름 위에 성이 세워져 있었다. 진짜처럼 보인다. 커다랗고 멋들어진 아름다운 성이었다. ‘아무리 꿈이라도 너무하잖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타고 갈래?” 돌아보기가 무서웠지만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옆에 있던 것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말이었다. 몸체에 당당한 날개가 달린 칠흑의 천마였다. 기겁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여어, 그라이아.” ‘응????’ 국왕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구름 위를 재미있다는 듯이 올려다본다. “저거, 오늘은 떠 있네?” “날씨가 좋으니까. 저번에 왔을 때에는???.” “호수 아래에 가라앉아 있었어.” “정말 변덕도 심하지.” 검은 천마는 유쾌하게 웃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자신이 올라타자 천마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환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실감이었다. 자신의 몸이 점점 높이 올라간다. 발 아래의 언덕과 수목이 점점 작아진다. 국왕으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올라타고 있는 천마의 몸과 꽉 쥐고 있는 갈기뿐. 손을 놓으면 그대로 거꾸로 떨어져 지상에 격돌하게 될 상황이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구름 위의 성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더욱 환상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래된 돌벽, 원추형의 푸른 지붕, 본래 굳건한 대지 위에 서 있어야 할 중후한 건축물이 흘러가는 구름 위에 당연하다는 듯이 서 있다. 천마는 유연하게 날개 짓 하면서 똑바로 성문을 향해 날아갔다. 국왕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꿈이라도, 환상이라도 저 성의 내부를 이 눈으로 볼 수 있다! 형용할 길이 없는 고양감과 흥분에 휩싸이는 순간, 갑자기 경치가 바뀌었다. ‘이런! 한창 좋은 순간에???.’ 불평을 뱉었지만 어쩔 수 없다. 천마의 등도 구름 위의 성도 점점 흐릿하게 사라지면서 다음에 나타난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천장이 높고 어두운 건물이었다. 자신은 거기서 몇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세 명. 20대의 아름다운 청년들이었지만, 저마다 이쪽을 멸시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빈말로도 우호적이라고는 하기 힘들었다. “―한 꼬맹이 주제에, 어떻게 꼬신 거야?” 앞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욕이라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자신의 얼굴이 살짝 굳어 있다. 상대하지 않고 지나치려고 했다. “기다려.” 한 명이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쪽은 고개를 한참 들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어른이다. 순식간에 그들에게 둘러싸인다. 저쪽이 자신에게 무슨 욕을 하는지 그런 것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가만히 참았다. 강렬한 혐오감과 경멸감만을 느끼면서. 상대가 무기를 꺼내든 시점에서 그 인내력도 한계에 달했다. 자신은, 고사리처럼 작은 손을 가진 자신은 허리에 찬 단검을 빼들고 맹렬하게 적을 공격했다. “내가 뭐든, 누구랑 어떻게 지내든 네놈들하고는 상관없어!!” 그제야 간신히 국왕은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 월 그리크의 의식이 대체 누구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지???.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한 상대 이외에는 결코 가까이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아도, 아무리 사랑스러워 보여도 황야를 달리는 늑대 같은 영혼. 월은 알고 있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새하얀 설원이다. 제일 처음에 봤던 풍경과 매우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 눈 위에 흩뿌려져 있는 게 뭐지? 붉은 꽃이다. 피처럼 선명한 붉은 꽃이 새하얀 황야에 점점이 피어 있다. 자신의 눈이 그것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막 흘러나온 피였다. 국왕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린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양아버지의, 그 검고 커다란 늑대의 생명의 흔적이었다. 바람이 뺨을 엔다. 차갑고 어두운 증오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눈앞이 새빨개졌다. 자신이 울고 있다.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울고 있다. 피눈물이 온 세상을 빨갛게 물들인다. 눈 위에 핀 붉은 꽃을 바라보면서 저주 같은 낮은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새어 나왔다. 분노와 증오, 아버지를 앗아간 자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 그런 감정이 작은 몸에서 분출되려 한다.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새까맣게 물들면서 급속히 어둠을 향해 추락해간다. ‘안 돼???!’ 국왕은 정말로 초조해졌다. 이대로는 이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두 번 다시 햇볕 아래로는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는 영혼인데도. 대담하고 자유분방하게 대지를 박차는 것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리???!’ 아무리 외쳐도 닿지 않는다. 지금의 월은 이 마음속에 흡수되어버린 존재.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얼굴 가득히 햇볕이 내리쪼인다. 머리 바로 옆에서 향기로운 풀 냄새가 난다. 등 전체에 지면이 느껴졌다. 한낮의 들판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듯했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안녕.”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안녕???.’ 국왕도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살벌한 광기가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대신 뭔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감돌고 있다. “언제까지 잘 거야?” ‘아니, 난 안 자고 있어???.’ 역시 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곁에 웅크리고 앉으면서 자신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일어나란 말이야, 어이.” 자신은 파닥거리며 발버둥쳤지만 얼굴이 웃고 있다. 뻔히 깨우는 걸 알면서 자는 척하고 있었던 걸까. 그 사람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언제까지나 잠만 자지 말고 빨리 일어나, 에디.” 눈을 떴다. 역광이 너무 눈부셔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매끄러운 긴 흑발이 반짝거린다. 그 머리카락이 자신의 몸 위에까지 흘러내렸다. 고운 피부와 미소짓는 붉은 입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9장 “빨리 시의를!!”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하지만???대체 이건????!” “우??? 우웩???!!” “이, 이거???. 설마, 인간인가요?!” “바보!! 당황하지 마!!” 그런 고함들을 멍하니 들으면서 국왕은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시야 한구석에, 아까까지 인간이었던 고깃 조각이 보인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냄새도 변함없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는??? 눈앞에 바닥이 있다. 아무래도 천막 바닥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바로 아래에 있던 왕비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 국왕은 왕비를 끌어안으며 쓰러졌던 것이다. 어쩐지 몸 아래가 묘하게 부드럽다 했지.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한 녹색 눈동자에 아까의 위험한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표정하게 국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국왕은 왕비를 끌어안은 채 팔꿈치를 세워 살짝 뺨을 쓰다듬어보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리????” 왕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여전히 무겁구나.” “의식이 돌아온 거야?! 괜찮아?!” “너한테 깔려 죽을 것 같은 것만 빼면 멀쩡해.” 국왕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부하들이 몰려왔다. “폐하! 대체 이건???.” 왕비가 회복했다는 기쁨보다도 정체 모를 공포에 지배된 듯했다. 그들의 눈은 똑같은 의문을 호소하고 있었다. 내장이 뜯겨 나가고 뼈까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인간의 원형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된 무참한 고깃덩어리를 돌아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렇게 물어봐도 국왕도 대답할 수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왕비를 바라보자,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는 왕비는 그 참상을 힐끗 쳐다보고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또 저지르고 말았군???.” “리???.” “너???, 괜찮아?” “응. 난 피만 뒤집어썼을 뿐이야.” “그런가???.” 왕비는 안심한 듯이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오른손으로 가볍게 국왕의 팔을 쓰다듬고서 그대로 잠들어버린다. “어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이렇게나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놓고서 혼자서 자버리다니, 나는 어쩌라고? 막 달려온 측근들이 움찔거리며 말했다. “폐하???!!” 거창하게 말하자면 금방이라도 발광할 것 같은, 애원의 비명이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이겠지.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부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란 피우지 마. 이자들은 투신의 분노를 산 것이다.” 측근들은 일제히 창백하게 질렸다. 그 입에서 동시에 공포의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 그, 그럼, 비전하께서 이자들을????”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왕비는 언제나 정정당당하게 적과 싸웠다. 적이 창과 검으로 응전하는 이상, 절대로 이상한 힘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지. 그래서 부상까지 당한 거다. 하지만 이자들은 독화살을 쏜데다 중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는 왕비의 목숨까지 노렸지. 그 비겁한 짓을 보다못해 분노의 화살을 내린 것은 왕비가 아니야. 투신 발도우다.” 그렇게 말하고 국왕은 측근들을 돌아보았다. “보면 알겠지만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야. 중상을 입은 왕비는 계속 의식불명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지. 그럼에도 저들은 죽었다. 부당하게 왕비의 목숨을 빼앗으려다 신의 제재를 받은 것이다.” 정말로 볼 만한 광경이었다. 측근들의 얼굴에 떠올랐던 공포가 경외심으로 바뀐다. 주군의 앞이지만, 나란히 왕비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평소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는 들어왔지만, 실제로 눈으로 투신의 가호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격렬한 분노, 그 처참함은 일목요연.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인간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편 국왕은 피바다가 된 주위를 둘러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지만 정말???. 발도우는 하시는 게 너무 규모가 커서 곤란하군. 냄새가 너무 심해. 빨아도 어떻게 안 되겠는걸. 이 천막은 더 이상 못 쓰겠어.” 측근들은 또다시 경악했다. 정말 이 왕도 왕비 이상으로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 처참한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서 어떻게 천막 걱정 따위―그런 느긋한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걸까?! 측근들은 다시금 실감했다. 그런 인간이 아니고서는 투신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있었겠는가. “그, 그런 말씀을 하실 상황이???. 어, 어쨌거나 다른 장소로???.” “그, 그렇습니다. 비전하도???이, 이런 상태로는??? 편안히 쉬실 수 없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왕은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새 천막이 준비되는 대로 불러줘. 왕비는 아직 움직일 수 없으니 내가 곁에 있겠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께서도 옷을 갈아입으셔야???.” “이런 부정한 곳에 누워 계셔서는 비전하께서도 기분이 나쁘시겠지요.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저마다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왕비는 지금 자고 있어.” “그러니 저희들이???.” “마음은 고맙네만, 의식이 없는 왕비의 몸을 멋대로 건드렸다가는 왕비의 분노를 사게 될 거야.” 측근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친다. 왕비 곁에 앉아 있던 국왕은 웃음을 지었다. “뭘. 내 하미아는 다정한 성격이니 투신의 분노만큼 격렬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내가 옮기지.” “하, 하오나???.” “됐으니까, 준비가 다 되면 불러주게.” 절대로 왕비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국왕을 보고 측근들은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당황하며 달려갔다. 분명히 끔찍하나 상황이다. 피부로 보이는 것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의 잔해가 주위에 산산조각 나 있다. 국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좀 점잖게 할 수 없는 거야????” “억지 부리지 마.” 혼자서 중얼거린 말에 왕비가 갑자기 대답했다. 국왕은 깜짝 놀리며 왕비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이, 깨어 있으면서 왜 자는 척한 거야????”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어.” 왕비도 자리에 누운 채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는 인간 내장 냄새 따위를 맡고 싶은 줄 알아? 절대로 내가 아냐. 내가 했으면 좀더 깔끔하게 처리했을 거야.” 목소리에는 아직 힘이 없지만 상당히 회복된 듯했다. “대체 뭐야? 이 녀석들은???.” “낮에 널 쏜 놈들 아냐?” “설마. 그랬으면 이런???." 말을 이으려다, 왕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셰라는 어떻게 됐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아무래도 이놈들, 상당히 많은 수가 투입된 것 같으니까. 어딘가에서 다른 놈들을 처치하고 있겠지.” “?????.” “한심한 얘기지만 내 군대는 이런 자들에게는 완전히 무력하니까. 대항할 수 있는 건 네 시녀뿐이야.” “그런가???.” “걱정 돼?” “조금.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왕비는 한동안 천장을 노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아니, 죽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믿고 기다리기로 하지.” 네 명을 쓰러뜨린 셰라는 힘겹게 헐떡였다. 일덴의 행동원은 모두 숨이 끊어졌다. 그에 비해 셰라는 별다른 부상도 없었다. 훌륭한 성과이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조금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 남자들은 나이도, 수련을 쌓은 횟수도 셰라보다 훨씬 많았다. 마을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행동원이었겠지. 그런 이들을 쓰러뜨린 것은 운도 우연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 셰라의 기량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이들의 기술과 전법이 너무나도 형식대로였기 때문이다. 옛날 셰라가 배웠던 것과 똑같은 전법, 여러 명이 움직일 때의 진형이나 그 변화까지 기분 나쁠 정도로 그대로였다. 게다가 이쪽을 완전히 얕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뛰어난,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적의 기량을 파악하는 능력도 기르지 않고 어떤 종류의 적인지 파악하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 배운 기술을 그대로 펼칠 뿐이었다. 이렇게나 뛰어난 우리가 질 리가 없다는 왜곡된 신념으로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살아 있는 꼭두각시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종사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만이 최고의 긍지이며 기쁨.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입맛이 씁쓸했다. 셰라는 길게 한숨을 토하고 쓰러진 남자들의 시체에서 자신의 무기를 회수했다. 수리검 대신 사용한 손바닥 정도 길이의 단도, 시체에 꽂혀 있는 단검 등을 깨끗하게 닦아서 다시 몸에 지닌다. 처음 붙잡힌 인간까지 합해서 전부 다섯 명을 쓰러뜨린 셈이다. 그밖에도 진영에 침투한 인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 녀석들이라면 걱정은 없다. 국왕이 충분히 해결해 줄 것이다. 숲에서 돌아오면서 셰라는 살짝 미소를 흘렸다. 옛날에는 자신들처럼 민첩한 인간도, 자신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자도 절대로 없다고 배워왔지만 이미 두 명이나 예외가 있다. 서둘러 돌아가려다 갑자기 발을 멈췄다. 아까 났던 소리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분명히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낸 소리였다. 일단 조사해둬야겠지. 엇비슷한 수목이 늘어서 있는 어두운 숲이라고 해도 셰라의 눈은 아까 있던 장소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고 해도 지금가지 같은 장소에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이미 이동했겠지. 뭔가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살펴보고 있을 때, 부엉이가 울었다. 무심결에 시선을 들던 셰라의 전신이 굳어졌다. 나무 위에 사람의 다리가 늘어져 있다. 이 눈 속에서도 무성하게 잎을 드리운 큰 나무의 굵은 가지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셰라는 그대로 근처의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가지에서 가지로 도약하며 그 사람과 적당히 떨어진 위치로 이동한다. 그러는 동안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앉은 채 시야에 들어온 셰라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 들켰나.” “너???.” 셰라의 자줏빛 눈동자에 처절한 살기가 떠올랐다. 없을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역시나. “네가 그 사람을???.” “그래. 내가 했어.” 살기를 내뿜는 셰라를 보면서도 레티시아는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나무기둥에 기댄 채 웃고 있다. “하지만 말이야, 내가 왕비 씨한테 이긴 거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운이 좋았지. 왕비 씨도 뭐랄까???. 정말 그 사람답지 않게 방심을 해서 말이야.” “무슨 독을 썼지?!” “네가 모르는 독.” “해독약은?!” “없어. 그런 거. 맞으면 즉사라고. 보통은.” 정말 즐거운 듯이 말을 덧붙인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죽지는 않을 거야. 나도 좀더 즐길 수 있다는 말이지.” 셰라의 손이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아까 시체에서 뽑아낸 단도를 매섭게 던졌다. 물론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남자는 분명히 그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몸을 비틀어서 단도를 피하고, 기울어진 자세 그대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것이다. 셰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왕비가 낙마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이렇게까지는 놀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덜어지는 방식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은 자세가 흐트러지는 순간 당황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몸을 돌리는 법이지만 그게 없었다. 마치 무생물처럼 툭 떨어졌다. 자신의 의지로 뛰어내린 걸까 싶었지만, 그것만도 아닌 듯하다. 남자는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더욱 기가 막혔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셰라도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남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눈 위에 앉으려고 했다. 둔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다. 지나칠 정도로 강한 이 남자가 예상 이상으로 허점 투성이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만, 셰라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경악하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쳐서 움직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함정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 남자는 왕비의 적. 왕비의 생명을 노리고 부상을 입혔다. 그 사람 대신 내가 죽인다. 그런 결의에 불타며 남자를 향해 똑바로 돌진했다. 그래도 레티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일 수 있어! 셰라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목표만을 노려보던 눈앞에 뭔가가 갑자기 나타났다. “?????!!” 반사적으로 발을 멈춰버렸다. 아니, 뒤로 물러났다. 전력질주에 가깝게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얼굴만. 공중에 떠 있는 소녀의 목이 타이르듯이 셰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돼.” 순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직면한 한없이 푸르른 눈동자에 오한이 들었다. 앵두처럼 사랑스러운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상대가 틀렸잖아?” 셰라는 움질 일 수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은, 그런 감각에 뼛속까지 얼어붙어버렸다.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을 때에, 눈앞을 가로막던 소녀의 목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전신이 식은땀에 젖어 있다. 심장이 쾅쾅 뛰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레티시아는 여전히 눈 위에 앉아 있었다. 공격하려는 기색은 없다. 격렬하게 헐떡이면서도 마음을 굳혔다. 성령이 뭐라고 명령하든 이자를 놔줄 수는 없다. 살려두면 이 남자는 반드시 다시 왕비의 생명을 노리겠지.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 절대로 놔줄 수는 없다. 다시 살기를 띠기 시작한 셰라를 보며 레티시아는 기가 막힌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마을 출신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팔팔한 걸까.” 그런 중얼거림도 지금의 셰라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방해자가 끼어들었다. 막 칼을 휘두르려던 셰라의 눈앞을 납구슬이 스쳤다. 뒤로 펄쩍 뛰며 방어 자세를 취한 셰라와 레티시아 사이에 소리 없이 숲 속에서 달려 나온 사람이 끼어들었다. 주자앉아 있는 레티시아를 등으로 감싸며 셰라와 대치한다. 반츠아의 얼굴은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셰라도 안색이 변했다. 이렇게 되면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이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레티시아 쪽은 뭔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게다가 진영 쪽도 신경이 쓰였다. 반츠아도 싸울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저 가만히 셰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셰라였다. “일덴이라는 건―이 근처에 있는 마을이야?” “그래.” “너희들이 움직였나?” “그래.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이니까 전쟁터에서 활동하는 데는 절대로 자신이 있다더군.” 셰라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 ‘절대’라는 단어를 믿고 있던 옛날의 자신은 어땠는가. 그 말이 얼마나 근거가 없고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 “마을의??? 일덴의 종사가 그랬어? 자기 부하들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그래. 직접 일족을 도울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라고 했다더군.” 반츠아 역시 비웃음이 단긴, 경멸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지만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형용하기 힘든 슬픔이 깃들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셰라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감정, 이 고통은 똑같은 것을 경험한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 셰라는 남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 기분도 조금은 알겠어.” 처음 만났을 때, 경멸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너 같은 녀석이 살아남아서 뭘 하겠느냐고 말했다. 그 말 뒤에 숨어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이 남자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 있었는지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렇게 꼴사나운 생물은 나도 보고 싶지 않아???. 눈에 거슬린다고.” 셰라 본인도 그런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지만, 반츠아는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넌 다른 존재가 되겠다고 말했었지. 된 것 같아?” “모르겠어. 너야말로??? 어째서 똑같은 생물로 남으려는 거지?” 장신의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셰라 자신도 마을의 행동원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예전의 자신과 비교해서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변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왕비는 언제나 말했다. 모든 생물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고. 반츠아는 마을에서 떠났으면서도 여전히 일족을 따르며 암살자로 일하고 있다. 지루하지 않으니까. 이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로 그것뿐일까. 셰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반츠아가 입을 열었다. “너하고도 조만간 결판을 봐야겠지만, 서두를 것 없어.” 셰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상관없겠지. 난 돌아가겠어.” “왕비한테?” “그래.” “그렇게 명령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 명령도 안 해. 심부름꾼으로조차 서주지 않지. 내가 멋대로 곁에 있을 뿐이야.” “그 왕비가??? 네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해도?” 셰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뜨며 웃음을 지었다. “뭘 봤지?” 정곡을 찌른 걸까. 반츠아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돌아가서 네 눈으로 확인하지 그래.” “그러도록 하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려는 셰라의 등을 향해 반츠아가 다시 말을 던졌다. “저건 언젠가 너까지 잡아먹을지도 몰라.” 셰라는 발길을 멈추고 대답했다. “가능성은 있어. 네가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무참하게 죽기 전에 내 손으로 죽여주지.” “사양하겠어. 차라리 그 사람한테 잡아먹히는 편이 나아.” 셰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오기로 하는 말은 아니다. 돌아서서 진영을 향해 뛰어가면서 스스로도 이상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사람 하나쯤 간단하게 물어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위험한 생물인데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공포보다도 강한 감정에 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셰라가 떠난 뒤 레티시아는 눈 위에 앉은 채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네 도움을 받게 될 줄은???.” “어쩔 수 없잖아. 넌 왕비와 대적할 비장의 카드니까. 여기서 잃을 수는 없어???.” 반츠아는 서둘러 그 자리에 무릎을 짚으며 앉았다. 몇 번이고 거칠게 숨을 내쉰다. 얼굴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공포가 단숨에 표면에 떠오른 것이다. 반츠아는 지금까지 경이로운 정신력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눈을 반짝이며 동료의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지간히 굉장한 걸 보고 왔나보네.” “네 감이??? 들어맞았어.” 반츠아는 거의 신음하는 듯이 말했다. “일덴의 행동원들은??? 다진 고기가 됐어. 붙잡힌 한 명을 빼고는.” 레티시아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다진 고기?” 반츠아도 자기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본 것은 아니다. 그저 국왕과 왕비가 떠난 뒤, 그 처참한 현장만은 분명히 보았다. 무참한 시체에는 익숙해져 있을 병사들조차 여기저기에서 토하고, 기절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반츠아도 도저히 평정을 지킬 수가 없었다. “살이 조각난 거야 그렇다 쳐도, 뼈도 안 남았어. 그건 산산조각이라고밖에 못해.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그런 짓을??? 인간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과연???.”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일어났다. 언제 회복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직 눈덩이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반츠아에게 태연하게 묻는다. “일어서기 힘들면 업어줄까?” 상대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야. 먼저 돌아가 있어.” “지금 처리할 거야?” “바보. 나도 다진 고기가 되는 건 사양이야. 상처 입은 야수한테 손대면 그리 된다는 거지.” 반츠아를 놔두고 레티시아가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숲 가장자리를 향해 걸으면서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다. “아가씨, 있어?” “응.” 공중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소녀의 목이 스르륵 나타나 레티시아에게 다가왔다. “지금 이야기 말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어?” “뭘 봤냐고? 빛의 폭풍이야. 이 한밤중에.”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 느껴져? 덕분에 숲이 떨고 있어. 모두 무서워하는걸.” “그럼, 역시 죽지는 않겠군.” 목만 공중에 떠서 허공을 이동하면서, 소녀는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저기 말이야, 레티. 그걸 알고 싶은 것뿐이라면 처음부터 상담하라고. 어설프게 자극하면 고생하는 건 우리니까.” “그야 내가 있는 쪽에는 별 영향이 없으니까.” “바보.” 숲 가장자리의 절벽으로 나온다. 그곳에서는 밝게 불이 지펴진 진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미 소동도 가라앉은 듯했다. 레티시아는 살짝 한숨을 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이 녀석이 제대로 움직이는 동안에 처치해야 할 텐데???.” 그 곁에 떠 있던 소녀의 목이 걱정스럽게,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몸 같은 거, 없는 편이 편할 텐데.” 진영을 바라보면서 레티시아는 웃고 있었다. “난 말이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 사람 때문이야?” “뭐, 그런 셈이지.” “그 사람 때문에 고생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즐거운 거야. 정말, 이렇게 재미있게 일해본 건 처음이라고.” “죽지 않아줘서 기뻐?” “그래. 모처럼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냈는데 저런 우연으로 죽어버리면 재미고 뭐고 끝이잖아.”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소녀의 목이 입을 뾰족 내밀었다. “어쩐지 억지처럼 들리는걸.” “그래? 난 정말 즐거운데.” “당신은 즐거울지 몰라도 우리들은 곤란해. 다음에 공격할 때에는 확실하게 처치해줘.” “굳이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어설프게 상처만 입히면 오히려 더 곤란해진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그런 허점은 보이지 말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미안, 기다리게 해서. 아직 안 돼. 조금 더 할 일이 남아 있어.” 소녀는 아마도 목 아래쪽이 있었더라면 어깨를 으쓱했을 것이다. “알았어. 어차피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모이라도 할아버지도 말했으니까.” 그 말을 남기며 소녀의 목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0장 새로 세워진 천막으로 옮긴 뒤, 왕비는 사람의 손을 빌려서 가볍게 식사를 들었다. 정말로 보통 사람 1인분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양이었다. 또 엄청나게 그릇을 비워댈 거라고 생각했던 국왕은 기운이 빠졌고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왕비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조금 더 건강해지면 제대로 먹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포도주 한 잔을 천천히 비운 뒤 다시 바닥에 눕는다. 왕비는 변함없이 바닥에 깔아둔 모피 위에서 잠들었다. 제대로 된 침상도 준비되어 있건만 바닥이 훨씬 편하다고 한다. 왕비 곁에는 국왕만 남았다. “내 상처, 뭐라고 말했어?” “그거 말인데???. 이참에 그돌핀 쪽에 누명을 씌우기로 했어. 이런저런 사정으로 왕비가 부상을 입었는데 그 암살자는 당신들이 보낸 거 아니냐―그런 내용으로 항의 문서를 보냈지.” 고뇌 끝에 국왕이 내린 선택이었다. 암살자 일족이 왕비를 노리고 있다고 말해서 측근들이나 진영 전체를 불안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분노의 대상을 확실하게 만들어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 이건 변명이야. 미안. 화내도 물어뜯어도 좋아. 난 결국 네 부상까지도 정치에 이용한 셈이니까.” 왕비는 살짝 웃었다. 다치지 않은 쪽 팔을 뻗어 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국왕의 무릎을 쓰다듬는다. “잘했어. 탄가를 공격할 좋은 구실이 생겼잖아.” 힘없는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진심으로 한다. 국왕은 혀를 내둘렀다. 자세를 바로 잡으며 말을 건다. “리. 나 아까 네 꿈을 꿨어.” “?????.” “아니 틀린가. 그러니까 널 보고 있던 게 아니라 네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네 마음속에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왕비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뱉는다. “너하고는 아무래도 파장이 잘 맞나봐.” “그건???, 그게 네가 보아온 것들?” “뭘 봤지?” “말을 하는 동물이???, 검은 늑대하고 날개가 달린 말이 있었어. 구름 위에 성이 있고, 그리고???.” 말을 하려다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후로 봤던 사람의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얼굴 생김은 확실하게 볼 수 없었다. 대략의 윤곽과 입가, 긴 흑발만이 간신히 기억난다. 침묵하는 국왕 대신 왕비가 조용히 웃었다. “너 정말, 인간답지 않은 데에도 정도라는 게 있어.” “뭐?” “인간이라면 조금은 인간답게 반응해봐. 다른 인간들 같으면 날 기분 나쁘게 여기거나 멀리하거나 죽이려고 한다고.” 천천히 한마디씩 잇는 왕비를 보며, 국왕은 기가 막혀서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너무 늦었어.” 의식이 돌아오고 식사도 들었지만 왕비는 변함없이 쇠약한 상태였다. 안색도 나쁘고 목소리에도 활기가 없다. 그래도 장난스러운 눈으로 국왕을 올려다본다. “아까 녀석들하고 같이 너까지 죽여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네가 한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이야, 나면서 내가 아니냐. 네가 적당히 둘러댄 설명이 묘하게 정곡이란 말이지. 내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국왕은 진지하게 왕비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움직일 수 없으니까???. 네 안에 있는 무언가가 너 대신 네 목숨을 지킨 거라고 생각했지만???.” “비슷해. 나 자신은 의식도 못하는데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 몸이??? 혹은 본능이 멋대로 반응하지. 그래서 그 꼴이야.” 국왕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불이 났을 때 저도 모르게 괴력을 발휘하는 것과 비슷한가?” 왕비가 눈을 치떴다. 평상시라면 대폭소를 터뜨릴 상황이지만 지금은 어깨의 상처 때문에 마음 놓고 웃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귀엽게 킥킥거리며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린다. 상처를 감싸면서 한동안 몸을 비틀며 계속 웃는다. “정말 너란 녀석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말한다. “자기도 죽게 될지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무서웠지. 엄청 무서웠어. 하지만 넌―적어도 제정신일 때에는 절대로 날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어쨌거나 제정신으로 돌아와 줄 거라고 생각했지.” 왕비도 기가 막혀버렸다. “하나만 묻겠는데, 그 강력한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누가 알겠어?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은데.” 가슴을 떡 펴며 당당하게 말한다. 왕비는 쿡쿡 웃고 있었다. 상처가 아파서 때때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넌 차라리 임금님 같은 거 그만두고, 어디서 맹수 조련사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그래. 옆에 있어도 전혀 기분 나쁘지가 않아.” “스샤에서는 말이나 개도 상당히 키워봤지만 맹수는 만져본 적도 없어. 너 말고는.” “하지만 여자 다루는 법은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아?” “응?” “중요한 순간에 한다는 수리고 다른 여자를 애첩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못한다니, 그게 뭐야?” 국왕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다음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다. 국왕이 왕비의 마음속을 보았고, 그 반대도 가능했다. 당황하며 펄쩍 일어섰다. 주춤거리다 새빨개진 얼굴로 왕비를 향해 외쳤다. “너!! 남의 마음을 멋대로 들여다봐?! 실례잖아!!”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너도 똑같잖아. 나도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냐.” “하지만!! 그, 그 밖에는??? 뭘 봤지?” 국왕이 왜 우물거리는지 뻔히 알고 있는 왕비는 놀리듯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남의 밤일에는 흥미 없으니까. 그 장면만 언뜻 보였어.” “정말이야????” “정말이야. 그리고 호수가 보였어.” “음????” “산기슭에 있는 커다란 호수였어. 물이 차갑고 제일 깊은 곳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국왕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미소지었다. “크레나 호수야. 여름에는 항상 헤엄을 쳤지.” “숲을 지나서 노란 꽃이 가득 피어 있는 들판으로 나와서???, 봄이었을까. 좋은 향기가 났어. 저 멀리에 큰 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고.” “아, 그건 나들이 갈 때의 표식이야. 그리운걸.” “건강했을 때의 페르난 백작하고???, 처음으로 네 어머니 얼굴을 봤어. 아름다운 분이시던데.” “나도 처음으로 네 아버지를 봤어. 정말 멋진 늑대더군.”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옛날 얘기는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을 들어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까의 현상은 실제로 그 자리에서 체험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색도, 소리도, 향기, 감촉, 그때의 감정까지도. “그렇지. 그 사람은 누구야? 긴 흑발에 굉장히 아름다운???. 뭔가 다른 이름으로 널 부르던데―.” 왕비가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국왕을 노려봤다. “들었어?” “응, 분명히???.” 왕비가 갑자기 국왕의 얼굴 앞에 손을 들이댔다. 입을 막으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이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 내 앞에서도 안 돼. 지금 어기서 맹세해.” 기가 막혀 가만히 있자, 왕비는 엄청난 박력을 담아 노려보면서 다시 말했다. “맹세하란 말이야!!!” 왕비의 기세에 압도당한 국왕은 움찔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맹세했다. 왕비는 여전히 국왕을 노려보았다. “난 그 녀석을 뭐라고 불렀지?” 국왕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몰라. 넌 아무 말도 안 했어.” “?????.” “정말 몰라. 맹세할 수 있어.” 왕비는 그제야 간신히 힘을 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편 국왕은 심상치 않은 눈치였다. “리. 그런 거야? 네가 기다리던 건??? 그 사림이냐?” “그래.” 왕비는 흥분한 탓에 지쳤는지 도로 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름은 그 녀석 거야. 다른 사람한테 허락할 수는 없어.”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 않겠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데. 이름이잖아? 남이 알면 곤란한 거야, 그게?” 서로 불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 이름이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부르면 당연히 남들도 알게 될 텐데. 왕비는 살짝 웃었다. “물론 저쪽에서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 모두 알고 있었어.” “그럼 왜????” 지친 듯이 눈을 감는 왕비의 가슴이 완만하게 호흡을 되풀이 한다. “그건 말이야, 내 진짜 이름이야.” “?????.” “그 녀석이 준 이름이기도 해.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 녀석이 나를 데리러 여기 왔을 때 다른 사람이 알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 “?????.” “그러니까 그 녀석이 올 때까지는 가만히 있어줘.” “안 오면?” 국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넌 계속 저쪽에서 데리러 올 거라고 말했지만 벌써 6년이야.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흘러가면?” 왕비의 얼굴에 불안과 걱정이 떠오른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 몇 가지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리. 그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국왕은 신중하게 말했다. “계속 이대로 여기에서 살 수는 없어?” 왕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있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국왕은 주저했다. 지금까지 자신과 왕비 사이에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말자는 암묵적인 양해가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사람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만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소리를 했다간 틀림없이 찢겨죽겠지. 재회할 때까지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그때까지만 곁에 있어줘―하지만 이걸로는 지금가지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게, 말이야. 네 마음은 어쨌거나???, 아니 물론 그 사람도 필사적으로 널 찾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마나 그러니까???, 반드시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 “흔한 이야기야. 무슨 사건에 말려든 친형제나 부부가 멀리 떨어져서 필사적으로 서로를 찾고 있음에도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10년, 20년이 흘러버려. 그런 경우도 절대로 드물지 않아. 어쩌면 네 경우도???.”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말을 쥐어짜 내는 국왕에게 왕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쯤에서 그만 해.” 국왕은 꾸중을 들은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왕비는 바닥에 누운 채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난 말이야??? 정말 널 좋아해. 그러니까 싫어하게 되고 싶지 않아.” “?????.” “넌 그 녀석 대용품이 될 수 없어. 내가 폴라 대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알고 있지?” “나도 네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건 아냐. 폴라하고 널 비교할 생각도 없고???.” 쓸쓸해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언제까지고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계속 마음속에 두느니 차라리??? 싶었지만. 왕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그러니까 이상한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일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 “그 녀석하고 다시 만나서 그 뒤에 어떻게 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국왕을 바라보고 다시 무릎 위로 손을 뻗는다. “괜한 것에 신경 쓰지 마. 지금 난 여기 있으니까.” 국왕도 천천히 왕비의 손을 쓰다듬었다. 꿈에 보았던 것은 고사리 같은 어린아이의 손. 지금은 다르다. 검이 달인인 만큼 시원스럽게 튼튼한 손이다. 그래도 국왕의 손에 비교하면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손이었다. 곁에 있어주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과는 다르다. 사실상의 부인인 폴라의 경우 분명히 잃고 싶지 않다. 그녀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것’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기묘한 생물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국왕의 소유물이었던 적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국왕이 있는 장소가 마음에 든 듯 내키는 김에 머물면서 힘을 빌려주었다. 그것뿐이다. 그게 불만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다’. 국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먹이를 주고 길들이면 늑대는 늑대가 아니게 되어버리지???.” “그래. 잘 알고 있잖아?” “내 말이 아냐. 지금 생각났어. 아저씨가 그랬었지. 넌 친구의 목에 사슬을 걸 수 있느냐고???.” 숲의 주인이나 다름없던 게오르그 아저씨에게는 친한 늑대들이 있었다. 늑대들은 아저씨를 좋아했고 친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아저씨의 소유는 아니었다. 언제나 제멋대로 나타나서 제멋대로 사라진다. 아직 어렸던 월 그리크로서는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물은 ‘키우는’ 거라고, 제대로 버릇을 들여서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어봤더니 아저씨는 의외일 정도로 엄격하게 대답했다. 내가 저 녀석들을 묶어두려고 하지 않으니까 저놈들도 안심하고 나에게 놀러 오는 거라고. 말수가 적은 아저씨로서는 최대한 긴 말을 그렇게 했었다.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안 되겠어???.” “응?” “아니 정말 곤란해. 아무래도 나도 널 상당히 좋아하나봐.” 왕비는 소리 없이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른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면서 몸을 뻗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국왕의 무릎 위로 기어오른다. 조금 뒤척이다가 딱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국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좋을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거대한 고양이한테 무릎을 점령당한 듯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왕비는 국왕의 무릎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기분 좋은 듯 목을 가르랑거렸다. “딱 좋은 베개잖아???.” 베개 본인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콧잔등을 긁적였다. “리. 난 이래봬도 국왕인데 말이야???.” “시끄럽네. 베개는 잠자코 있어.” “흐음???.” 그럼 잠자코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국왕은 왕비의 머리 밑에 팔을 넣어 상처에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안아들었다. 녹색 눈동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국왕을 올려다본다. 국왕은 그런 왕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그대로 드러난 왼쪽 팔을 쓰다듬고, 눈가에 입을 맞췄다. 왕비는 조금 몸을 움찔거렸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국왕의 손이 천천히 왕비의 가는 목을 훑으며 헝클어진 머릿결을 지나 안아든 등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다른 뜻은 없었다. 상처 입은 짐승을 쓰다듬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왕비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기분 좋은 듯이 눈을 감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다. 갑자기 왕비가 국왕의 품안에서 낮게 웃었다. “너, 정말 맹수 조련사 재능이 있어???.” “그래?” “대부분의 인간들은 쓰다듬는 게 서툴거든.” “그런가???.” “남자는 특히 더 그래. 구역질이 나.” 그건 아마도 다른 의미도 난 구역질이겠지. “네 손은 기분 좋아.” 왕비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국왕은 그런 왕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눈가와 이마에 입맞췄다. 입술도 가볍게 빨아들였다. 눈을 감고 있던 왕비는 살짝 웃으면서 오른손을 국왕의 등으로 돌렸다. 국왕의 목을 휘감으며 머리카락을 붙잡고 가볍게 끌어당긴다. 누가 본다면 실로 달콤하기 그지없는, 사랑을 나누는 부부의 공간 그 자체였다. 바로 그런 상황에 셰라가 돌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주인들의 모습을 본 셰라는 경악해서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말한다. “아???, 죄송합니다. 방해를???.” 국왕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 했지만, 왕비는 눈을 뜨고 씨익 웃었다. “너도 낄래?” “예엣?!” 셰라는 경악한 채로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국왕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리, 제발 봐줘. 아무리 예쁘게 생겼어도 남자를 쓰다듬는 취미는 없으니까.” “난 쓰다듬어주고 싶은데. 이리 와.” 축 늘어진 손으로 손짓한다. 지금의 셰라는 아까 반츠아와 대치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뺨을 붉히고 주저하면서 조심스럽게 주인에게 걸어간다. 국왕을 베고 있던 왕비는 이번에는 국왕을 잡고 일어나려 했다. “어이, 괜찮아?” “아직 누워 계시는 게???.”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왕비는 간신히 그 자리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았다. “제길???. 역시 어지러운걸???.” 그런 소리를 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셰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렇게 살아 계시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우니까요.” “그런 거야?” “체내에 들어가면 즉사하는 맹독이라고 그 남자가???.” 이 말에 분노한 것은 왕비가 아니었다. 국왕이었다. 건장한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빠지직 불꽃을 뿜었다. “레나를 죽인 남자 말인가?” 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났어?” 다시 한 번 끄덕인다. 왕비는 감탄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잘도 살아남았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저도 놀랐지요. 몸이???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전혀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하더군요.” “날 쐈을 때는 펄펄했는데?” “리!!” 왕비와 말과 동시에 국왕의 벼락이 떨어졌다. “그러게 뭐라고 했어! 썩 처치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왕비는 나른하게 늘어진 채 말했다. “말은 쉽게 하는데 말이야, 그걸 죽인다는 게 엄청 어려운 얘기야. 흔해빠진 삼류 암살자를 어떻게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구.” “하지만!!” “됐잖아, 난 안 죽었으니까. 셰라도 이렇게 살이 있고.” 왕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셰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다시 돌아왔는걸.” “당신 덕분입니다.” “응?” “저와 함께 와주셨지요?”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살짝 웃었다. “난 아무것도 안 했어.” “하지만 그 날카로운 동작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도와주셨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의 실력 이상으로 싸울 수 있었던 사실에 대해 설명이 되질 않는다. 셰라는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왕비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너 자신이 한 거야. 난 아주 조금 힘을 빌려줬을 뿐이야.“ “하지만???.” “넌 오랫동안 꾸준하게 수련을 쌓아왔어. 나한테 와서도 조금도 게으름부리지 않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지. 그것뿐이야. 실력이 는다는 건 그런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나한테 그런 짓을 불가능해. 월하고 얘기를 하면서 네 몸을 조작하다니.” 국왕이 뭔가 걸린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은 불가능해?” 그럼 할 수 있을 때도 있다는 말이 되지만, 왕비는 아무 대답없이 한동안 셰라를 바라보았다. “마법가의 할멈이 한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예????” 셰라는 깜짝 놀랐고, 국왕이 셰라 대신 물었다. “그 현자가 뭐라고 했는데?” 왕비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말이야, 달은 어둠에 속하며 태양에 따르는 존재야. 내 파트너가 여기로 오면 꼭 널 만나게 해주고 싶은 걸.” “저기???.” “‘어둠’에도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푸른 어둠, 생명을 낳는 어둠. 사람들이 말하는 ‘밤’과 통하고, ‘바다’라는 말과도 이어지는 존재. 또 하나는 진짜 암흑.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텅 빈 공간. 모든 것이 소멸하는 어둠이야.” “?????.” “ 옛 신화에서는, ‘어둠’은 ‘태양’과 ‘달’을 얻고서 생명을 낳는 푸른 어둠이 된다고 했지. 내 파트너는 그 ‘어둠’이라고. 그리고 내가 ‘태양’이야. 그럼 ‘달’은 어디에 있느냐고 라의 장로들이 미친 듯이 찾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어.” “?????.” “못 찾을 수밖에. 이런 곳에 있었으니.” 셰라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런???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겠지. 나도 엄청 불평을 해댔으니까. 신화에 끼워 넣어서 억지로 그런 역할 맡기지 말라고. 난 나야.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 있을 뿐이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눈부셨다. 셰라는 자세를 바로하며 물었다. “리.” “응?” “예전, 브라시아의 공작님 저택에서??? 당신은 제게, 넌 뭐냐고 물었습니다.” “응. 기억하고 있어.” “그때 당신의 눈에 비치던 저와 지금의 저는 어떻습니까? 뭔가 달라졌습니까?” 왕비는 조금 생각하다 말했다. “귀여워졌어.” 이것은 셰라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실망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저기???, 그것말고는????” “어떻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씩씩해졌다든다, 우람해졌다든가, 그런 소리는 못해. 거짓말이니까.” “후우???. 귀엽다, 라고요?” “그럼, 귀엽고말고. 전에는 기분이 나빴어.” “?????.” “자기가 죽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비틀거리면서 걸어다니는, 살아 있는 시체 같았어.” 셰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꼭두각시는 살아 있는 시체와 다를 것 없다. “지금은??? 다르게 보입니까?” “그럼. 건강하고 정상적이니 생물로 보여.” 왕비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너, 굉장히 예뻐졌어. 전보다 훨씬 생기가 넘쳐.” 국왕이 이상하다는 듯이 웃었다. “남자한테 예뻐졌다는 말은 좀 그렇지 않아?” “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말이야. 내 눈에는 건강한 자연의 생물은 모두 예쁘게 비쳐. 예외는 인간하고 가축뿐이지. 오히려 인간 쪽이 이상하다고.” 왕비에게 있어서 가축은, 특히 식용으로 이용되는 가축은 생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해 살아 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사람은 추해 보여?”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왕비는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상처가 아픈 걸까. 국왕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한다.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예쁘다고.” “어이???.” “칭찬하는 거야. 정말, 어떻게 인간 중에 이런 게 있을까 싶을 정도라고.” 왕비는 여전히 진지한 말투로 세라에게 말했다. “너도 처음엔 굉장히 맛없어 보였지만 지금은 맛있어 보여. 실제로 맛있어졌고.” 셰라는 눈을 부릅떴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뻔했지만, 국왕은 왕비의 곁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다. 이건 이 사람의 진신에서 우러나온 칭찬인 것이니 도망쳐서는 안 된다. “감사합니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서 셰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날 왕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측근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아직 너무 이르다고 뜯어말렸지만 왕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검을 두고 왔으니 찾으러 가겠어.” 하지만 전투가 있은 뒤에는 언제나 좀도둑이 횡행한다. 어디선가 몰려온 인간들이 시체에서 장비를 벗기고 무기를 훔쳐가곤 한다. 측근들은, 유감이지만 어젯밤에 이미 그런 자들이 가지고 가지 않았겠냐고 했지만 이 역시 통하지 않았다. “검집에서 빠진 채로 떨어졌어. 주워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왕비는 천천히 약 10인분 정도를 깨끗하게 비운 뒤 흑왕을 만나러 갔다. 왕비를 구하면서 흑왕도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었지만, 이 말 역시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부했다. 마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두었다고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흑왕은 왕비를 보자마자 엄청나게 기뻐하며 콧등을 비벼댔다. 왕비 역시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친구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고 굉장히 건강했다. “네 신세를 졌구나???.” 왕비는 친애하는 벗의 검은 살결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왕비 뒤에는 국왕을 필두로 하는 주력 무장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병상에서 일어났다고는 해도 아직 본래 상태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 다시 상태가 악화될지도 알 수 없는데다 어젯밤처럼 또 다시 암살자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투신의 기적에 의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그런 기적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수치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손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의지로 불탔다. 왕비와 흑마를 보면서 국왕이 생각난 듯이 물었다. “어이, 리. 꿈에서 봤던 천마도 분명히????” “그라이아야. 그 녀석 이름을 따왔지. 많이 닮았지?” “그 그라이아하고 이 그라이아가? 그런가???? 닮았어?” “똑같잖아. 내 눈을 빌리고 있었던 주제에 대체 뭘 본 거야?” “그 당당한 날개일 게 뻔하잖아.” 왕비는 웃고서 눈앞의 그라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말에게는 최고의 이름이야. 하늘을 나는 자라는 뜻이니까. 이 녀석한테 날개는 없지만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달리니까.” 말은 즐겁게 목을 울리며 왕비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한 사람과 한 마리는 산책을 시작했다. 말에 타는 것만은 제발 참아달라고 모두들 애원했지만 이 말 역시 듣지 않는다. 천천히 한바퀴 돌 뿐이라면서, 왕비는 아직도 시체가 굴러다니는 전쟁터로 나갔다. 이미 병사들과 인근 지역의 농부들이 차출되어 시체를 매장하고 있었다. 어제 왕비가 낙마한 지점까지 흑왕이 걸어가자 그 근처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건장한 농부들이었다. “어이, 어떻게 된 거야?” “그런 것쯤 못 들 리가 없는데???.” 저마다 그런 소리를 해댄다. 왕비도 국왕도, 뒤를 줄줄 따라오던 무장들도 발을 멈추고 한 동안 그 광경을 구경했다. 농부들은 지면에 떨어져 있던 검을 주워 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장한 농부가 두 손으로 자주를 꽉 쥐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도 검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이 나서며 검에 달라붙었다. 척 보기에도 힘에 자신이 있어 보이는 훤칠한 청년이 자루를 잡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 아오르고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이 맺힐 때까지 별별 수를 다 써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국왕도 겪어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국왕의 손을 거부하며 절대로 뽑히지 않았다. 그 검에게는 일종의 자아가 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사용자를 선택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선 인간의 손으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검이었다. 농부들 사이에서 동요가 퍼지기 시작했다. 미신을 믿는 시골 사람들에게 이 검은 기분 나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이거, 무슨 저주라도 걸린 것 가냐?”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우웃, 그렇다면???. 이대로 묻어버리자.” “그래, 그게 좋겠어. 응.” 그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왕비가 말 위에서 농부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건 곤란한데. 내 검이니까.” “으앗???! 왕비님.” 농부들은 당황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왕비님의 검입니까?” “하지만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쓰시는 겁니까?” 왕비는 신중하게 말에서 내려서서―상처를 봉합한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덩치 큰 남자들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지면에 딱 달라붙어 있던 검을 손쉽게 들어올리고 열어 있는 남자들을 향해 묻는다. “이 근처에서 검집 보지 못했어? 이것처럼 무거워서 들 수 없는 물건인데.” 남자들은 주저하며 얼굴을 마주 보았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저어???. 아까 저쪽에서 갑옷인지 뭔지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게 있었는데, 혹시 그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봤어?” “예. 검집뿐인데 그게 묘하게 무거워서???. 하지만 그건 단검의 검집이었습니다. 도저히 그런 큰 검이 들어갈 물건이???.” “어디에 떨어져 있었지?” “예. 저쪽입니다. 저 풀숲 건너편에???.” 남자가 말하면서 가리킨 것은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아가 됐나????” 말 위에서 국왕이 물었다. “미아를 찾으러 갈 거야?” “아니, 이쪽으로 불러야지.” 왕비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남자가 가리킨 쪽으로 들었다. 남자들은 왕비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을 겨누는 왕비와 그 검이 가리키는 방향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몇 명이 이상하다는 듯이 검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왕비가 남자들에게 말했다. “위험하니까 떨어져 있어.” “예????” 남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먼 곳에서 뭔가가 허공을 가르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으악!” 그것은 기겁을 하는 남자들 사이를 마치 낮게 활공하는 제비처럼 빠른 속도로 가르며 왕비의 손에 기세 좋게 격돌한 것처럼 보였다. “위험해!” “왕비님?!” 남자들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지만, 왕비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검집에 들어간 대검을 만족스럽게 허리에 찼다. “아하하, 역시 길을 잃었구나.” 이 광경에는 농부들이나 병사들은 물론이고 국왕의 곁에 있던 무장들까지 놀라버렸다. 저마다 눈을 부릅뜨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어떠한 때라도 혼자서 태연한 국왕이 묘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그거 정말 편리한 기능인데.” 국왕의 눈은 그것이 날아오던 순간부터 검과 합쳐지는 순간까지 조금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우선 검집이 혼자서, 그것도 하늘을 날아서 돌아온다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얘기지만 그 이상으로 비상식적이니 것은 비행하는 동안에는 분명히 단겸의 검집이었다는 사실이다. 날아올 때의 크기를 봐서 틀림없다. 그것이, 왕비의 손에 들려 있던 날카로운 검을 감사는 순간 대검의 길이가 되었다. “내 검에도 그런 편리한 기능을 붙일 수 없을까? 검이 아무리 많아도 검집은 하나면 될 텐데.” “내 입장에서는 네 그 둔하리 만치 튼튼한 심장의 기능을 다른 사람들한테 붙여주고 싶은데.” 왕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선 이 검집하고 검은 한 쌍이니까 다른 걸로는 대신할 수가 없어.” “호오? 그럼 다른 검집을 그 검에 끼우면 어떻게 되는데?” “검집이 녹아.” “그럼 다른 검을 그 검집에 끼우면?” “검이 부서지지.” 국왕은 다시금 감탄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뭐라고 할까???. 충실한 한 쌍이로군.”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래.” 농담을 주고받으며 말에 오르려던 왕비에게, 겁 모르는 젊은 농부가 말을 걸었다. “왕비님. 저기???, 그 검, 엄청 쉽게 들고 계시는데 무겁지 않으십니까?” “들어볼래?” 아무렇게나 건네주자 농부는 당황하며 검을 받아들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얼레?! 쬐끔도 안 무거워!” “뭐? 말도 안 돼!” “잠깐 줘봐!” 농부들의 손에서 손으로 검이 넘어가면서, 그때마다 경악의 환성이 울렸다. 신기한 장난감에 푹 빠져버린 농부들의 모습에, 무장 중 한 명이 끼어들었다. “이봐! 그만둬. 비전하의 물건이다!” 농부들에게서 다시 검을 뺏기는 했지만 그 역시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무장들도 흥미진진해서 몰려들었다. 눈앞에서 검집이 혼자서 날아오는 모습을 봤으니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비전하께서는 정말 신기한 물건을 갖고 계시는군요.” “제게도 잠깐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이번에는 무장들이 차례로 검을 들어보았고, 그중 한 명이 의심스럽게 농부들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 들지도 못할 정도로 무거웠나?” 말에 탄 기사들이 자신들을 의심하자 농부들도 발끈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니까요! 안 그래?!“ “그럼!” “아까까지는 분명히 뿌리라도 박힌 것처럼 땅에 들러붙어 있었던 말입니다!” “그렇고말고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면 한번 뽑아보십쇼!” 기사는 그 말에 검을 뽑아보려 했지만 물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웃???, 어라?!” “왜 그래?” “아니, 그게???. 빠, 빠지질 않아. 꿈쩍도 안 해.” “뭐?” 여기서 다시 무장들의 손에서 손으로 검이 넘어갔다. 왕비도, 국왕도 느긋하게 그런 모습을 구경했다. 농부들까지 포함해 모두가 쓸데없는 노력으로 힘을 소진한 뒤에야 왕비가 등장했다. 아무 어려움 없이 검을 뽑아서 지면에 내려놓는다. 이렇게 되면 물론 아무도 들 수 없다. 끝내는 힘에 자신 있는 농부들과 무장들이 힘을 합쳐 덤벼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왕비는 그런 남자들 앞에서 또다시 가볍게 검을 주워들어 검집에 넣었다. “봤지? 이 놈은 고집이 세서 나말고는 못 써.”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무장들도, 농부들도 다시금 왕비에게 경외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독화살을 맞고서도 죽지 않았다는 얘기와 함께 ‘우리 비전하께는 정말로 투신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다’는 신앙에도 가까운 믿음을 품게 만들었다. 조라더스가 국경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전말에 대해 보고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사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보고했지만 조라더스는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패전한 무장들의 처분을 담담하게 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시종들을 물리고 혼자 남은 뒤, 조라더스는 기가 막혀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그돌핀과 브라하의 군대는 참패. 그것만이라면 상관없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므로. 하지만 그 전투 중에 델피니아의 왕비가 독화살에 맞았다고한다. 활을 쏜 것은 델피니아의 병사로 분장한 자였다. “머리가 아프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전황은 델피니아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너무나 공교로운 상황이랄까, 이래서는 누가 봐도 탄가가 꾸민 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델피니아 측에서도 강경한 항의 문서가 도착했다고 한다. 설마 그돌핀이 그런 짓까지 했을 리는 없다.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이쪽에서도 역으로 델피니아 측에 근거 없는 모욕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독화살과 왕비의 부상, 이 사실만은 바뀌지 않는다. 이걸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델피니아에게 동정적으로 바뀔 것이며, 동시에 탄가에 대해서는 눈살을 찌푸리게 되겠지. 조라더스는 피처럼 붉은 과실주를 스스로 잔에 따르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동맹자여. 생각은 나쁘지 않아. 나쁘지는 않지만 좀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자신이 한 짓이 아닌 이상, 왕비 암살을 명할 만한 인물은 서쪽의 욕심 많은 왕밖에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경악한 것은 서쪽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의주도한 오론인 만큼 캄센 방면에도 빈틈없이 첩자를 배치해두었다. 그 첩자가 델피니아를 횡단해 아비용까지 달려와 캄센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세하게 알렸지만, 얘기를 들은 오론은 머리를 싸쥐어버렸다. “죽을 뻔해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하는데???. 그 잘난 암살자 일족이라는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게야?!” 오론은 암살 의뢰를 맡긴 가신 게스켈을 불러 있는 대로 호통을 쳤다. “탄가의 수작이라고 결론이 난 건 다행이지만, 언제까지 멍청하게 굴 거야!”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오론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론으로서는 자신이 참전할 때까지 왕비가 죽어 있기만 하면 된다. 듣자하니 그 비장군도 독화살에는 버티지 목하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고 한다. 눈이 녹도 나면 탄가와 스케니아가 총공격을 개시하겠지. 파라스트가 나서는 것은 아직 한참 뒤이다. 그 왕비도 부상을 입었다고 얌전히 요양할 만한 인간은 아니니 반드시 전쟁에 참가하겠지. 그때 상처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면 암살자 일족으로서도 더욱 손쓰기가 쉬워질 것이다. 또한 암살자 일족에만 의존할 것 없이 탄가가 왕비를 쓰러뜨려줄 수도 있다. 오론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과 그 왕비가 직접 대전하게 되는 상황뿐이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사양이다. 자신이 이끄는 군대와 저 괴물 왕비가 이끄는 군대가 직접 전쟁터에서 격돌하는 상황만은 무슨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그 전에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그 괴물을 처치해달라고, 오론은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겁먹은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일 수는 없다. “이제 와서 의뢰를 취소하지는 않겠지만 모쪼록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물론 기한도 양보할 수 없어! 그 수수께끼의 암살자 일족이라는 놈들한테 그렇게 전해!” 오히려 자신만만한 태도로 명령하자, 게스켈은 잔뜩 기가 죽어 오론의 앞에서 물러갔다. 캄센의 사건으로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암살자 일족의 두령인 파로트 백작이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레티시아의 연이은 실패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독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경악하고 말았다. 왕비는 한동안 안정을 취했지만 겨우 사흘 뒤에는 다시 말을 타고 달렸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한동안 침묵한 뒤, 백작은 저택 내에 설치된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자신들의 신―성령을 모시는 장소였다. 몇 층이나 될 듯이 높은 천장과 바닥에는 색색가지의 돌을 박아 넣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었다. 다른 예배당과 다른 것은 이곳에는 채광창이 없다는 점이다. 어두운 예배당 안에는 대낮에도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백작이 제단 앞으로 나아가 기도를 올리자 그에 응하듯이 예배당에 변화가 생겼다. 다양한 색을 띤 도깨비불이 나타난 것이다. 희뿌옇게 빛나는 영혼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하지만 백작이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 영혼들은 백작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 적당한 모습을 부여해서 마을로 보내고 이쪽이 바라는 대로 명령을 전달할 수 있다. 이런 ‘꼭두각시’에게는 볼일이 없다. 백작이 원하는 것은 이 사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 꼭 필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한때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던 존재. 육체를 벗어던지는 동시에 새로운 단계로 뛰어올라 지금까지도 명료한 의식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백작의 기도에 응하지 않았다. 지령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떠돌로 있을 뿐.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은발에 투명한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백작은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교활한 분들???.” 지고의 존재에 대한 미약한 비아냥이었다. -15권에 계속- 역자 후기 갑작스럽지만 삼국지 연의 이야기. 혹시 삼국지를 읽어보신 적이 없는 분. 최근 무서운 기세로 나오고 있는 코에이의 「삼국무쌍」시리즈(PS2)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는 분이 계신다면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몇 백 년이 흐르도록,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다른 읽을거리에 매몰되지 않고 명성을 지키고 있는 작품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 논술시험 대비도 할 겸 잠깐 시간을 내서 한번!! 논술 얘기는 농담이고요.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 운장이 전투 중 팔에 화살을 맞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화살촉에는 독이 발려 있었고, 관우의 부상을 진찰한 명의 화타는 이미 뼈까지 독이 스며 있어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권했습니다. 뼈에 스며든 독을 빼내려면 살을 가르고 뼈에서 독이 스며든 부분을 깎아내야 하므로, 당연한 말이지만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관우는 마취를 거부했습니다. 관우는 살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는 이 수술을 받으면서 신음 한번 지르지 않고 태연하게 부하 마량과 함RP 바둑을 두었다고 하지요. 그 굳건한 모습에는 화타만이 아닌 주위 사람들까지도 모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뇨, 어느 나라 왕비님 수술 장면을 보다보니 그분이 생각나서 그냥요. 특히나 살을 가르고 화살을 끄집어내는 수술을 받는 내내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는 묘사에서 더욱. 제가 지금가지 접해본 모든 매체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전쟁 묘사가, 실은 삼국지의 적벽대전 부분입니다. 글로는 2차대전 관련 논픽션이나 톰 클랜시, 은하영웅전설, 성계의 전기 등등에서 판타지 소설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영화에서 다뤘던 고대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전쟁, 그 모두를 다 한자리에 놓고 비교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압도적인 80만 대군의 위협,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이쪽의 등을 치려 하는 일시적인 동맹자, 사흘 동안 화살 10만 개 만들기. 고육지책과 연환계. 생각해보니 제가 공명 선생의 팬이기 때문에 그렇게나 흥미진진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겠군요. 갑자기 왜 본편하고 상관없는 딴 소리 하느냐구요? ??????뻔하지 않습니까. 한창 무드 좋은 상황에서 시녀(?)보고 “너도 낄래?” 같은 소리나 하는 어느 나라 왕비님께 상처를 입고 현실도피 중입니다(피눈물). 뱀발. 두 번째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전쟁은 「신조협려」의 양양대첩이었군요. 2004년 2월 김소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