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델피니아 전기 13 투신들의 연회 지 은 이 : 카야타 스나코 옮 긴 이 : 김소형 펴 낸 이 : 김인규 출 판 사 : 대원씨아이(주) 출판년도 : 2004년 1월 15일 <지은이 소개/ 카야타 스나코>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의 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로, [델피니아] 외에는 [키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저드] 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김소형> 1975년 3월생으로 이화여대 의학과를 졸업했다. SF와 판타지를 좋아하며, 아이작 아시모프와 호시 신이치, 오노 후유미의 팬이다. 번역작으로는 [십이국기], [KLAN], [악마의 파트너], [델피니아 전기]가 있다.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소개글> 일본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된 인기 판타지소설. 능동적인 매력을 지닌 여주인공과 간신들로부터 탈주한 젊은 왕, 자신감에 넘치는 과격한 공작 등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문체는 경쾌하고 깔끔하며, 전체적으로 탁 트인 듯한 통쾌함을 안겨주는 소설이다. 동물들 사이에서 자란 '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이세계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만난 월의 목숨을 구해준 뒤, 그와 동반하게 되는데 월은 델피니아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나 지금은 쫓기는 신세. 훗날 '사자왕'과 '희장군'이라 불리게 될 두 사람의 여정이 시작된다. 1장 5월, 로자몬드의 몸도 산달에 접어들었다. 코랄에서 동쪽으로 쭉 들어가면 있는, 벨민스터 가문의 영지 중 하나인 카라코룸에서 출산을 맞을 예정이었다. 뒷일을 생각한다면 코랄에서 출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로자몬드는 결혼을 앞둔 여성이기 이전에 벨민스터 공작가의 당주이며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대영주였다. 영지 경영이란 쉽지 않다. 백성들의 반발이라도 사게 되면 모처럼 풍요로운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불만이나 청원을 들어주고, 농민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서로의 주장을 귀기울여 듣고 판결을 내리면서 원활하게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재능이 필요하다. 그리고 로자몬드에게는 분명히 그 재능이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도 적극적으로 마차를 타고 영지를 돌면서 각지의 분쟁을 적절하게 해결했다. 마침 카라코룸에 분쟁이 일어난 탓에 해결을 위해 찾아왔지만, 어쩌다보니 일이 길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소송을 건 양쪽 모두 완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일이 생각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고, 간신히 쌍방을 납득시켰을 때에는 이미 산달이 되어버렸다. 로자몬드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서도 코랄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했지만, 하인 일동이 제발 이대로 머물러달라고 필사적으로 울며 매달리는 바람에 결국 눌러앉게 되었다. 그리하여 발로는 코랄로 달려와 국왕을 알현하고, 자신의 임지를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구하며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도착할 때쯤에는 태어났을 테니 가는 김에 얼굴도 보고 오겠습니다.” “왜 굳이 이렇게 빠듯하게 가는 거지? 일찌감치 먼저 달려가 있어도 좋았을 텐데.” 국왕은 사촌동생의 경사를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물었다. 부인의 첫 출산은 남자에게 있어서 중대한 사건이다.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특히 지금은 분쟁 중인 지역도 없고 틸레든 기사단의 출동이 필요할 정도의 사건도 없으니 부인 곁에 있어주면 좋을 텐데도 발로는 굳이 출산할 때 가 있는 것은 피하겠다고 했다. “언제 태어날지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리는 건 제 성미에 안 맞습니다. 어차피 제가 걱정해봤자 이런 때에 남자는 아무 도움도 안 되니까요. 먼저 쑥 태어나버리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요.” “몬튼 경이나 블루완드 경도 지금쯤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겠군.” “숙부님들은 저보다도 훨씬 애 아버지처럼 굴고 있습니다. 제 앞에서까지 말하지는 못합니다만, 아들이 태어나기를 필사적으로 야니스 신께 빌고 있다더군요.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상대가 신이든 뭐든 물어뜯을 기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염원하던 사보아 공작가의 후계자 아닌가. “공은 후계자가 필요하지 않은가?” “아닙니다. 저도 장남을 원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성별이란 신의 손에 달린 문제니까요. 태어나는 아이 자신도 스스로 성별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뭐야, 계집애잖아’ 소리를 듣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로자몬드처럼 여자라 해도 당주로 일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국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발로다운 태도였다. “하지만 벨민스터 공은 그대와 결혼한 뒤에도 당주의 의무를 다할 생각이고?” “물론이겠지요. 저도 그만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부부가 별거하는 셈이 되는데. 게다가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라면....” “어머니와 떨어지게 되겠지요.” 당연하다는 듯이 발로가 말했다. “딸이라면 벨민스터가에 남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자몬드는 그래봬도 상당히 아이를 좋아하니까 분명히 기뻐하겠지요. 그렇기도 하니 딸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저는 딸의 얼굴을 보려면 먼 길을 오가야겠지요.” 그것 역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은 국왕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지방 귀족의 자식으로 자라났던 남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말했다. “분명히 벨민스터 공은 우수한 영주야. 선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완으로 영지를 다스리고 있지. 하지만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인 동시에 한 남자의 부인이 되었는데 가족들이 뿔뿔이 떨어져 살아야 한다니.... 그래도 신혼이지 않나. 그대도 쓸쓸할 테고.” 발로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스샤 같은 지방의 중류귀족과 왕가에 가까운 공작가는 집안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상식도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동생이 남긴 조카가 성인이 되면 작위와 가장의 권한을 양도한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당주로서 모든 영지를 다스리겠다, 그것이 로자몬드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서약의 신 앞에서 한 맹세입니다. 설령 제 부인이 되었다고 해도 서약은 유효하지요. 누구도 그 서약을 파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당한 후계자인 스테판은 아직 다섯 살 아닌가.” “예. 대체 우리가 함께 살게 되는 건 언제일까요.” 불평은 하면서도 발로의 얼굴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로자몬드도 벨민스터라는 집안의 여자이다.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의무를 중시할 여자였다. 또한 발로도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발로 자신도 사보아 공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상, 무엇보다도 가문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로자몬드의 임신을 알았을 때도 그랬다. 물론 자식이 태어난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공작가의 피를 이을 후계자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것은 로자몬드도 마찬가지였다. 로자몬드는 태어난 아기가 아들이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아이를 사보아 가문의 친척들에게 넘겨줄 것이 틀림없다. 비록 속으로는 그 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아이는 엄연히 사보아 공작가의 후손이다. 아이의 어머니라고 해도 절대로 그녀 혼자만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나라를 대표하는 귀족, 혹은 왕가의 사고 방식이었다. “하지만....” 국왕은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듯하다. 발로는 그런 사촌형의 마음 씀씀이를 흐뭇하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눈썹을 찌푸리며 간언했다. “형님도 거기에 익숙해지셔야만 합니다. 언젠가 달시니 양이 임신을 하게 된다면, 저로서도 가능한 한 그 귀여운 분과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떼어내야 하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달시니 양 혼자에게만 아이의 양육을 전담시킬 수는 없습니다. 국왕의 자식이니 단 한 여자만이 전적으로 맡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국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신과 폴라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도 그 아이는 어차피 서자에 지나지 않는다. 왕위 계승권이 인정될지 어떨지조차 의심스럽다. 델피니아의 국왕은 대륙 전체에서도 보기 드물게 왕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맙게 여기지 않고 왕관에 집착도 하지 않는 국왕이었기에 자신의 아이를 다음 국왕으로 만들겠다는 집착 역시 조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이런 생각까지 하는 판국이다. ‘발로의 자식이 아들이라면 그 아이 쪽이 혈통이 뛰어나니 그쪽이 왕관을 이어받을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을 만큼의 분별은 있었다.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다. 인간들의 생각 따위는 완벽하게 무시하며 제멋대로 돌아간다. 지방귀족의 자식에 불과했던 자신이 이렇게 국왕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현실 자체가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그렇기에 입 밖에는 내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태어날 조짐도 없는 내 자식보다 공의 걱정부터 하는 게 어때? 지금 상태에서 공의 아이는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없을 텐데.” “글쎄 말입니다. 국왕의 자식이라면 서자라고 해도 충분히 출셋길이 열려 있습니다. 본인의 노력과 운에 따라서는 공작까지 출세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 경우에는 그렇게 안 됩니다. 기껏해야 집안 하나를 만들어주는 게 전부겠지요.” 자신과 국왕은 그만큼 신분이 다르다고 발로는 은연 중에 충고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이 임금님은 끝까지 남의 걱정만 해댈 것이다. 조금은 자신의 입장을 자각해달라고 걱정하는 발로의 마음은 아랑곳 않은 채, 국왕은 웃으며 말했다. “결혼식 날짜가 잡히면 알려주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가지.” 그러자 발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달려오신다고요?” “당연하지. 사촌동생의 둘도 없는 경사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할 것 아닌가.” 국왕의 생각으로는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발로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형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하의 경사에 주군이 직접 찾아오시다니 관례에 어긋납니다.” 이번에는 국왕이 깜짝 놀랐다. “말도 안돼. 왜 내가 사촌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거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첫째, 앉으실 자리가 없습니다. 형님은 어떠한 행사에서도 가장 상석에 위치하는 분입니다만, 이런 행사는 그 성질상 저희 두 사람이 주역이 됩니다. 저희들보다 연장자인 숙부님들도 장로들도 그날만은 저희의 손님인 셈이지요. 주역과 손님 사이의 상하를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이때만은 윗분들도 저희 두 사람의 들러리가 되어주실 테니까요. 하지만 저와 로자몬드는 물론이고 숙부님들 역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입니다. 즉 형님께 말입니다. 그 주군을 들러리로 만들어버리고 저희들이 태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이참에 그런 관례라는 건 좀 무시하고....” “둘째. 형님이 제게 베풀어주시는 후의에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보아 공작의 입장에서도 형님께서 저를 신뢰해주시는 것은 큰 긍지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라고 해도 그것을 보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지요. 언제나 다른 시각이 존재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들에게 저와 형님의 관계가 어떻게 비칠지.... 어쩌면 그 작자들은 형님이 사보아 가문만을 중시한다고 불만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형님이 관례를 깨고 제 결혼식에 참석해주신다면, 어째서 자기 집안의 경사에는 와주시지 않는 거냐고 분개하는 귀족들이 속속 나타나겠지요. 그 청원을 무시하면 이번에는 왜 사보아 가문만 편애하느냐는 비난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좀더 말씀드리자면, 경사에 참석하실 거라면 그 이전에 조문도 가셔야 하겠지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 델피니아에 존재하는 귀족은-현재 얼마나 번영하고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그 이름만 열거하자면 공작만 해도 수십 가문은 넘습니다. 그 가문 전체의 관혼상제에 입회할 각오가 있으십니까? 왕으로서의 공무는 어떻게 되지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마음은 그와는 또 별도의 것이다. “발로는 단순한 신하가 아니야. 나의 둘도 없는 아군이지 않나. 그 마음을 형태로 보이고 싶은 것뿐이야.” 발로는 국왕에게 있어서 일종의 은인이다. 국왕이 전 국왕의 서자로서 왕궁에 등장해 주위의 냉대에 고통 받던 때부터 변함없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발로는 국왕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이 전매특허인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이상의 행동은 제게도 형님께도 득이 되지 않으니 부디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국왕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원망스러운 듯이 가만히 발로의 얼굴을 바라보자, 틸레든 기사단장도 기세에 눌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황송하지만 참석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절대로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형님과... 그 여자가 식장에 온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제가 결혼을 안 하는 편이 낫습니다.” 국왕은 다시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발로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어린 잎사귀에 햇빛이 선연하게 쏟아진다. 루브람 숲 속에 위치한 서리궁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에서 진노랑 수선화가 바람을 받아 흔들린다. 봄의 전령이지만 코랄 시가지에서는 이미 볼 수 없어진 꽃이었다. 같은 코랄이라고는 해도 이 파키라 산중과 시가지는 그만큼 계절에 차이가 난다. 서리궁은 궁성 안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산 속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왕은 그 화창한 날씨와는 정반대로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래서 난 국왕 같은 자리 싫었다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관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사람 결혼식에도 참석 못하고. 국왕 된 자로서 신하를 대할 때에도 절도를 지키고 다른 신하가 납득할 수 있도록 위엄을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벼이 모습을 비춰서는 안 되고 사자를 보내어 축복하며 신하에 대한 은총을 나타내어야 한다. 무슨 헛소리야. 그런 예의가 어디 있냐고. 무례한 데에도 정도가 있지.” “덩치는 큰 주제에 삐치지 마.” 왕비는 웃으며 국왕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브룩스는 뭐래?” “공작님 말씀이 옳다나. 식전장관까지 새파랗게 질려서 달려왔지. 사보아 공은 분명히 필두의 대공작이며 굴지의 대가문이고 왕국 제일의 충신이기도 하지만, 그런 식으로 특별 취급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대. 신분은 같은 공작이라도 별다른 관직이 없는 놈들, 혹은 가문이 기울어가는 놈들의 시각에서 보면 사보아 공작은 질투의 표적이라나. 그렇지 않아도 같은 공작인데 사보아만 싸고돈다면서 불만이 크니, 공의 입장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행동에는 찬성할 수 없대. 바보 같아서 말도 안 나와.” “같은 공작이라고?” 왕비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짐짓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공작과 동등한 활약을 보이면서 국왕에 대한 충성심도 저만한 공작은 본 적이 없다. 굳이 꼽자면 로자몬드 정도일까. “정말, 내가 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발로의 입장까지 불리해진다면 억지도 못 부리잖아.” 억지는 실컷 부려놓은 주제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럼 어쩔 거야? 포기해?” “누가. 난 내 방식으로 발로에게 예를 표하겠어. 두 사람의 결혼식에 맞춰서 왕궁이 주최하는 무도회를 열지. 성대하게. 이렇게 해두면 내가 그 자리에 빠질 수 없잖아?” ‘어때, 굉장하지’ 하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얼굴이다. 왕비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국왕의 이런 감각을 귀엽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렇게까지 결혼식이라는 ‘형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발로의 결혼은 물론 경사스러운 일이다. 진심으로 축복해주면 된다. 굳이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축하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까지 할 것 없이,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해주면 두 사람도 만족할 것 아냐.” “그 진심이라는 게 어렵다고. 사자를 보내서 축사를 늘어놓고 축하선물을 내린다, 난 그런 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예의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어차피 지금까지도 네 이름으로 이런저런 축하선물이 여기저기 날아다녔잖아? 단장만 특별히 취급할 것 없어.”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난 발로를 특별하게 취급하고 싶다고. 다른 인간들하고 똑같이 대할 수 있겠어?” 생각이라고는 없어 보이면서도 한번 말을 꺼내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금님이다. 가신단의 고생이 눈에 선했으므로, 왕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왕궁 주최로 무도회를 연다니, 명목은?” 별 생각 없이 물어봤지만 국왕의 대답은 왕비의 상상을 크게 배신했다. “내 재위 5주년이라도, 개혁파 추방 5주년 기념이라도, 적당한 선조의 탄생 몇 주년이라도, 건국 몇 백 주년 기념이라도 상관없어.” 왕비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거창한 명목이 붙은 무도회를 개최하자면 국내 귀족들을 초대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예의상이라도, 또한 외교적으로도 중앙의 다른 나라에까지 초대장을 보내야 할 성질의 행사가 된다. 게다가 사보아 공작의 결혼식 직후의 축하연쯤 되면 각국의 유능한 외교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올 게 분명하다. 축하연은커녕 그 무도회 회장은 지극히 고도의 외교 전략과 정보전이 판치는 장소로 바뀌게 된다. “그거... 큰일이잖아!” “큰일이지.” 국왕은 씨익 웃었다. “어차피 발로의 결혼은 중앙 각국의 주목을 받고 있어. 벨민스터 집안과 이어지면 사보아 공은 더욱 왕위에 가까워지지. 본인한테 왕관을 노릴 야심이 있는지 없는지, 나하고 사이가 얼마나 친밀한지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 없어하는 놈들도 수없이 많아. 별로 숨길 만한 것도 아니니까, 이참에 증언 능력이 높은 사람들을 떼거지로 초청해서 확실히 가르쳐주지. 사실 더 거창한 주제가 필요하긴 한데 떠오르는 게 없단 말이야. 각국에서 저마다 자기 나라의 대표를 출석시킬 만큼의 명목.... 뭐 좋은 생각 없어?” 왕비는 완전히 기막혀했다. “그건 심한 걸. 너,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외교정책으로 써먹을 거야?” “일석이조라고 해줘. 이건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왕궁 주최의 축하연이야. 발로의 결혼식하고는 관계없어. 우연히 일정이 겹쳤을 뿐이지.” 말도 안 되는 우연이다. 얼핏 보기엔 선량한 호남이면서도 국왕은 때때로 이런 면모를 보인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국왕과 교섭을 해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인물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필요하다면 한 입으로 두말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외교관까지 속여넘길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에는 사촌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유연성이 이 사람이 가진 최대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대국을 지금까지 다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기, 월. 난 가정형으로 대화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혹시, 정말 만약의 경우야. 단장의 아이가 아들이면 그 애가 다음 왕관에 가장 가까운 애가 되는 거겠지?” “그래. 덤으로 가정형을 덧붙이자면, 가까운 장래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아이가 왕관을 물려받았다고 치자. 하지만 나이 어린 왕이 집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친아버지인 발로가 실권을 쥐게 될 거야. 실질적인 국왕이지.” 왕비는 웃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왕과 사보아 공이 굉장히 사이가 좋다는 건 믿기 힘들겠지?” “음. 국내의 유력 귀족들은 물론이고 조라더스나 오론도 못 믿는 것 같아.” 국왕도 웃고 있었다. 왕비의 발밑에는 잿빛 털가죽 덩어리가 햇빛을 받으며 기분 좋은 듯이 데굴거리고 있다. 몸 위로 작은 벌레가 기어다녔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풍경과는 반대로 둘의 웃는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실제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보면 비상식적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중에는 그 두 사람의 우정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서로 혐오하고 있으며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 이어지는 중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파라스트에 포로로 잡혔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구출하려는 발로를 보고, 조라더스는 그 녀석을 상당한 겁쟁이라고 판단했나봐. 왕관을 원하지 않으면 겁쟁이라니, 탄가 국왕도 의외로 머리가 단순하잖아.” “거꾸로 말하자면 탄가에서는 기개 있는 인간은 예외 없이 왕좌를 노린다는 거겠지.” “그건 그것대로 고생이겠는데.” 마치 남의 얘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난 발로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혹시 발로가 왕좌를 바란다면 그것도 상관없지. 나보다 훨씬 우수한 국왕이 탄생하게 될 테니 기쁘게 양위해줄 수 있어. 하지만 발로도 싸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절대 내 적이 되려고 하지 않지. 그렇다고 설마 내 쪽에서 억지로 왕관을 넘겨주겠다고는 할 수 없잖아. 아아, 정말 곤란하다고.”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고민인데?” 사보아 공작의 실력이 어떤지는 국왕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혈통도, 신분도, 다른 귀족에 대한 영향력도 압권. 발로가 페르젠같은 짓을 했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았을 터였다. 왕관을 쓰고 있는 사촌동생의 모습을 상상하고, 국왕은 자신보다 훨씬 더 어울릴 거라 생각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왕궁 주최의 축하연쯤 되면 당연히 왕비도 참석해주어야겠는데....” “싫어.” 그런 종류의 공식행사는 왕비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국왕의 부인이라면 이미 있잖아. 부용궁에. 마침 잘됐네. 다른 사람들한테 소개해주라고.” “물론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 폴라를 소개하고 이 사람이 내 애첩이라고 발표하려면, 그 전에 먼저 왕비를 소개하는 게 순서잖아. 게다가 온 나라의 귀족과 국빈이 모이는 자리인데....” “엿 먹어.” 왕비는 치를 떨며 대답했다. 국왕은 곤란한 듯이, 호소하는 표정으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울며 매달리기 직전이다. 하지만 왕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싸늘한 시선으로 국왕을 쳐다보았을 뿐. “폴라라면 몰라도 너 같은 덩치가 그러고 있어봤자 역효과야. 징그럽다고.” 국왕은 머리를 쥐어 쌌다. 귀여운 쪽에는 별로 자신이 없으니 더욱 그렇다. 셰라가 다가와 두 사람 앞에 찻잔과 다과를 내려놓으려 했다. 소리 없는 조용한 움직임이었지만, 아무리 기척을 없앤다고 해도 왕비의 눈은 벗어날 수 없다. “꼭 왕비가 있어야 한다면 셰라를 대신 데리고 나가라고.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왕비답게 행동할 걸.” “또 그런 말씀을 하시고. 실례입니다만, 지금 그 말씀만은 도저히 찬성하라 수 없겠는데요.” 셰라는 올봄으로 왕비와 같은 18세가 된다. 남자 나이 열여덟이라면 사회적인 신용은 전혀 없어도 육체적으로는 이미 성인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얼굴 생김도 가냘픈 목도 도저히 남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전부 벗겨버리면야 착각하고 싶어도 불가능하겠지만, 풍성한 시녀복은 그런 사실을 완벽하게 숨겨주고 있었다. “그 차림, 슬슬 지겹지 않아?” 그렇게 묻자 셰라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옛날 동료들 중에는 서른 살까지도 여자로 살아갔던 사람이 있었지요. 그쯤 되려면 골격도 타고나야 하는 거겠지만요.”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 왕비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소년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여장에 도전해볼 생각인 모양이다. 적어도 그때가 상당히 먼 미래가 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은 왕비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부드럽게 빛나는 은발, 예전에는 없던 침착함에 강한 의지가 빛나는 연보랏빛 눈망울. 처음 만났을 때에는 눈의 요정 같은 청명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소년이었다. 지금은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해 달빛 같은 기품까지 느껴진다. 수수한 시녀복 따위를 입혀두기에는 아까울 정도였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국왕의 편에 서서 왕비에게 가벼운 비난의 시선을 던진다. “저도 당신은 예의범절에 익숙하지 않으니 궁중 예절을 모르셔도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말도 안 됩니다. 말투도 행동거지도 완벽하게 왕비다우셨는 걸요.” “그렇고 말고. 유감스럽게도 난 못 봤지만. 아니 애초에 네가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말투를 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그만큼 듣다보면 싫어도 알게 된다고.” “뭐...?” “내가 이 성에 살게 된 지도 벌써 5년이야.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에 어디 저택 창가나 정원 그늘로 한바퀴만 돌아보면 닭살 돋을 정도로 우아하신 대화가 얼마든지 들리니까.” “후우....” “훔쳐 들은 걸로 배우신 겁니까? 하지만 그 몸동작은 어떻게 된 거지요?” “그쪽은 나도 뭐라고 말하기 힘든데. 가능한 한 얌전하게 있으려고 애쓴 것뿐이니까.” 셰라는 감탄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때의 왕비는 마치 10년 이상 예절 수련을 쌓은 것처럼 완벽한 몸가짐을 보여주었다. “조금은.... 그렇지. 널 조금 참고로 했어. 사내 녀석 주제에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더 조신하니까.” “황송합니다....” 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일단 고개를 숙인다. 그 움직임에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조금 흘러내리려는 것을 자연스럽게 쓸어 넘긴다. 그런 사소한 동작 하나도 진짜 여자 이상으로 얌전하고 아름다우며 어딘지 요염함마저도 풍긴다. 자기 자신의 용모를 제외하면, 왕비는 아름다운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가만히 바라보며 즐기는 것 자체는 절대로 싫어하지 않았기에 솔직하게 그 감상을 말했다. “너야말로 예쁘게 꾸며서 그 식전에 나가면 좋을 텐데. 보는 사람들이 전부 넋을 잃을 걸.” 그러자 셰라는 원망스러운 듯이 비난이 담긴 시선을 왕비에게 던졌다. 그런 말이 잘도 나온다고 그 얼굴은 말하고 있다. “제가 남의 주목을 모아보았자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녹색 드레스! 제 회심의 작품이었는데, 정말 잘 어울렸는데....” “관둬. 평생에 한 번도 지겹다고, 그런 거. 결혼식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두 번 입으셨으니 세 번 입지 못하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기는 했지만 내심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비는 자신의 겉모습에 대해 무관심할 뿐 아니라, 남들이 거기에 반해서 칭찬을 하면 할수록 더 혐오감을 느끼는 성격 같았다. 결혼식 때에는 더욱 심했다. 금실로 수놓은 순백의 혼례의상으로 몸을 감싼 왕비는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감히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신성한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압도되어, 평범한 여자의 평생치에 해당할 만큼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당연히 왕비의 기분은 기하급수적으로 악화하여 종국에는 완전히 바닥을 기었다. 그래도 상당한 연기력의 소유자인 만큼 겉으로는 완벽하고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실상을 아는 셰라만은 무섭고 기분 나빠서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얼마 전,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을 친구를 엄호하러 달려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귀부인들에게 이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힘은 없지만 기분이 어떤지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왕비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서 성질 나쁜 여자들이 무서워 도망칠 정도의 기백, 시퍼런 칼날 같은 살기를 내뿜었던 것이다.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두려운 것일수록 강하게 사람을 끌어들여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정장을 한 당신이 바로 그랬지요.” “무슨 도깨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만....” “아니 그런 말이었어. 그렇게 보기 흉했다면 더 안 해. 일부러 남한테 보여줄 것도 없잖아.” 두 사람이 묘한 토론을 벌이고 있는 동안 옆에서 국왕은 모처럼 내온 차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비를 꾀어낼 구실이라도 생각하고 있나 싶더니, 갑자기 얼굴을 빛내며 말한다. “그렇지! 괜찮은 게 있어! 탄가와 파라스트에 대한 국교회복기념식전, 어때?” 셰라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왕비는 바로 이해한 듯했다. 눈을 치뜨며 반문한다. “그거, 농담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왜?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명목이잖아. 파라스트, 탄가, 산세베리아에 키르탄사스, 아니 중앙에 모든 나라에 초대장을 보낼 수 있어. 딱이잖아.” 국왕은 이 묘안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왕비를 설득하는 것도 까맣게 잊고 의기양양하게 일어섰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셰라가 중얼거렸다. “모처럼 만든 과자가....” “버리긴 아까우니 네가 먹어.” 지금까지 국왕이 앉아 있던 자리를 시녀에게 권하고, 왕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신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이었다. 델피니아의 국왕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다. 그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부유하고 생활력 있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정실 부인은 한 사람뿐이므로 그 이외의 여자는 첩으로 불려야 하지만, 남편의 마음과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에는 부인으로 대접받는 경우도 흔하다. 델피니아 국왕의 애첩도 이런 경우에 들어간다. 지금은 궁성 내의 모든 사람들이 국왕에게 다른 부인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왕비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왕비와 애첩이 입을 모아 자신은 국왕의 부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이었다. 애첩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이 나라의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폴라가 월의 진짜 부인이야.” 애첩 쪽도 지지 않는다. “왕비님이야말로 폐하의 부인이십니다. 전 그저 폐하를 모시는 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첩들 사이의 싸움으로 고민하는 남자들이 들으면 부러워서 탄식할 얘기이다. 실제로 이 애첩은 진심으로 왕비를 경애하고 있었다. 자신을 간택해준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애첩인 자신에게 얼마 되지 않는, 그리고 최강의 아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폴라는 왕비라는 사람 자체가 굉장히 좋았다. 그렇기에 국왕이 경악하는 가신단에게 식전 준비를 명하고(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후안무치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명목이라 왕비의 예상대로 큰 소란이 벌어졌지만, 일단 말은 된다) 현재 신혼집인 부용궁으로 가서 그 파티에 참석하도록 지시했을 때에도 일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국교회복식전이라는 명목의 공식행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깜짝 놀랐다. 자신 같은 인간이 그런 엄청난 무대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 너무 황송하게 느껴졌고, 긴장과 공포로 온몸이 움츠러들었지만 그저 얼굴만 비추는 거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단, 왕비의 의향이 신경 쓰였다. “그런 자리에 제가 동석하는 걸 왕비님께서 쾌히 허락해주실까요?” 대범한 사람이니 신경 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왕비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걱정 안 해도 돼. 왕비가 꺼낸 말이니까. 빨리 모두에게 폴라를 소개해주라고 하더군. 저 녀석이 남자였으면 나보다 훨씬 쓸만한 남편이 됐을 거야. 자기는 참석하지 않을 테니까 여주인 역할을 잘 부탁한다던데.” “네...?!” 폴라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폴라는 로자몬드에게 보낼 축하선물을 만드는 중이었다. 극상품 아마로 만든 아기 저고리였다. 미리 만들어두었던 레이스 장식을 정성 들여 붙이던 중 자칫하면 손가락을 찔릴 뻔했다. “참석을... 하지 않으신다고요?” “음. 언제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지금 내게는 폴라가 있지. 개장인사 때만 여주인 역할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그 뒤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말을 끊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국왕이 뒤를 돌아보자 폴라는 숨을 삼키며 강아지 같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었다. “안....” “안?” 무의식적으로 두 손에 힘이 들어가, 세심하게 조심조심 만들고 있던 아기 저고리를 꽉 쥐고 있다. 그런 짓을 하면 모처럼 만드는 선물에 주름이 잡힌다고 국왕이 말하려던 순간, 폴라는 외쳤다. “안 됩니다, 그런 일은!!” 부엌에 있던 테스 부인이 당황하며 뛰쳐나올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폴라는 흥분한 나머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일어나더니 다시 외쳤다. “그런 것..., 절대 안 됩니다. 여주인이라뇨! 왕비님이 출석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못합니다!!” 국왕은 완전히 곤란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게 왕비의 소원이야. 왕비의 머릿속에서 폴라는 내 부인이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 현실적으로는 애첩이라는 지위밖에 줄 수 없다고 해도.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자기 부인을 사교계에 소개하고 싶다는 건 나로서는 당연한 희망이야.... 안 될까?” 서투르지만 성의가 담긴 말이다. 이번에는 폴라가 완전히 곤란해지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얘기가 아닌 것이다. 국왕의 마음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왕비님이....” “폴라가 왕비에게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좋은 신붓감을 발견했다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사람은 바로 그 녀석이니까.” 그래도 부용궁의 애첩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호소했다. “하지만... 시녀장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시녀장도 왕비와 마찬가지로 이 애첩을 마음에 들어했다. 인사법에서부터 몸단장, 왕궁의 주요 행사 및 코랄 성 거주자로서의 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살펴주었으며 특히 질서의 유지에 대해서는 더욱더 엄격하게 가르쳤다. 애첩 한 사람의 오만함이 어떤 비극을, 어떤 혼란을 낳는지, 국왕의 총애를 독점하겠다고 욕심을 부린 애첩이나 왕비를 무시한 애첩이 어떤 인생을 보내며 어떠한 말로를 맞이했는지 분명하게 얘기하며 이렇게 다짐해두었다. “폐하의 총애를 혼자 독점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몸이라는 사실에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현재 당신에게는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공작이라고 해도 예의를 갖춥니다. 대부분의 고귀한 분들이 당신을 존중하고 고개를 숙여주시겠지만, 그것이 어째서인지 항상 스스로 묻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등 뒤에 보이는 폐하의 그림자에 머리를 숙이는 겁니다. 성내에서 당신의 생활과 현재의 신분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법적으로 보장 받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폐하의 총애 하나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무정한 말이다. 국왕이 당신에게 질리면 그걸로 끝이니 착각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다. 하지만 폴라는 이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고 이해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말도 붙일 수 없고 감히 다가갈 수도 없던 관리가 자신에게 정중하게 말을 걸며 근위대의 높은 사람이 경례를 한다.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 소귀족의 딸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둘러싸고 비위를 맞추며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신에게 걸맞은 대우라고 이해하다니 폴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폴라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메이버리의 달시니 가문의 딸이었다. 운이 좋아 우연히 폐하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된 여자일 뿐이다. “절대로 비전하보다 앞에 나서려 해서는 안 됩니다. 폐하를 섬기듯이 진심으로 비전하를 섬겨야 합니다. 왕비에게 경쟁심을 품고 권력에 집착하는 애첩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뿐입니다.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상 사람들이 항상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도록.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면 언제나 조심스럽게 굴며, 절대로 건방진 행동을 하지 않도록 명심하십시오.” 폴라는 더욱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여기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왕비 덕택이다. 그런 왕비를 제쳐두고 여주인인 양 행세하며 국왕 곁에 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국교회복 기념식전이라는 공식 석상에서. 왕비와 애첩이 모두 참석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혹은 왕비와 애첩이 모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상관없다. 모양새는 좋지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델피니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왕비가 빠지는 대신 애첩이 여주인 역할을 하다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선 손님들도 납득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 엄청난 자리에서, 애... 애첩이 폐하의 곁에 있는데 왕비님이 없다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는 거야 나도 알고 있지만.” 폴라도 완고했지만 국왕 역시 진지했다. “애초에 내가 결혼한 건 이미 1년도 더 지난 일이야. 그 이후로 왕비는 공식행사에는 절대로 참석하지 않겠다는 결혼 당시의 맹세를 여전히 지키고 있지. 그 고집통에는 시녀장이나 재상, 원로원에 식전장관까지 항복했을 정도야. 이제 와서 이 행사만은 참석해달라고 말하기도 힘들어. 내가 부탁한다고 해도 왕비는 안 들을 거야.” “하지만... 이번 일만은 어떻게든..., 어떻게든 부탁드릴 수 없겠습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원래 폴라는 국왕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고집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명랑한 성격이라 솔직하게 국왕을 사모하며 순종했다. 그런 폴라가 새파랗게 떨면서 국왕에게 매달린다. 어지간한 용기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번만이라도 좋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왕비님이 폐하의 곁에 서주시면, 그리고 제가 그 아래에 설 수만 있다면 왕궁의 질서도 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왕비님이..., 주역이 없는데 애첩에 불과한 제가 폐하의 곁에 서다니, 그렇게 훌륭한 왕비님이 계시는데 저 같은 것이 나설 수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남들이 그 광경을 보면 뭐라고 떠들까. 저 여자는 애첩 주제에 왕비보다 윗자리에 서서, 국왕의 총애를 믿고 정실 부인이라도 되는 양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야말로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국왕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폴라의 말이 옳다. 공식석상에 왕비가 빠지고 애첩이 그 자리를 채울 수는 없다. 도저히 그럴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왕비가 애첩에게 직접 이 자리를 맡긴다는 한마디라도 필요했다. 그렇게 하면 쓸데없는 신경을 곤두세울 것도 없고, 애첩에 대한 왕비의 신뢰가 두텁다는 증명도 된다. 무엇보다도 폴라 한 사람만 나쁜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국왕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가 짓궂은 장난을 생각해냈을 때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는 적중만 하면 크게 따낼 수 있는 도박에 덤벼드는 긴장감과 그에 따르는 위험까지 예측하고 있는, 복잡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봐, 폴라. 부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대단했던 그 왕비의 분장 말인데.... 나도 가능하면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거든.” 폴라는 울먹이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때의 왕비님은 정말로 아름답고 당당하시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걸요.” “그래서 말인데, 어떻게든 그 자리에 왕비를 끌어내고 싶어. 하지만 내가 부탁한다고 들어줄 왕비가 아니지. 폴라의 힘을 빌리고 싶은데, 협력해주겠어?” 열심히 눈물을 참고 있던 폴라가 갑자기 얼굴을 들었다.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자칫하면 펄펄 뛰고 화낼 거야.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왕비는 화나면 정말 무섭거든. 하지만 정의는 우리 편에 있다.” “네! 뭐든지 하겠습니다!” 꽉 쥔 주먹에 다시금 힘이 들어간다. 숨죽이며 이 대화를 듣고 있던 테스 부인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협력이라고는 해도 우리 아가씨가 어디까지 비전하께 대항할 수 있을지.... 너무나도 충실한 유모다운 걱정을 품으면서 테스 부인은 조용히 부엌으로 물러갔다. 2장 로자몬드의 아이는 남녀 쌍둥이였다. 다행히 출산은 순조로웠고 아이도 몸집은 조금 작은 편이지만 건강했다. 절대로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로자몬드의 초산인 만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벨민스터 가문의 친척들도 가슴을 쓸어 내리며 기뻐했다. 코랄에도 연락이 도착했다.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보아 집안의 친척들도 고대하던 아들의 탄생에 쾌재를 불렀음이 틀림없다. 갓 어머니가 된 로자몬드 역시 그 이상으로 기뻐했다. 머지않아 남편이 될 사람에게 후계자를 낳아주는 대업을 이뤄낸 것이다. 깊은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기의 침대는 어머니의 침대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본래는 어머니에게서 바로 떼어내어 유모에게 맡기는 법이지만, 예기치 못한 쌍둥이의 출산에 준비가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어서 자리를 마련해서 정식으로 선보이라는 친척들의 성화를 한 귀로 흘려들은 채, 로자몬드는 고개를 돌려 막 태어난 아기들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리던 아기들도 지금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애처로울 정도로 자그마한 생물. 꽉 쥔 주먹은 호두알에도 미치지 못하는 크기이지만, 그럼에도 손가락 하나하나에 손톱까지 다 나 있다. 갓 초산을 겪어낸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뱃속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 여자아이는 얼굴 생김이 섬세하고 남자아이는 씩씩하게 생겼다. 공을 닮아 전쟁터에서는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무장이 되겠지. 영지도 잘 다스릴 수 있을 거야. 분명히 훌륭한 당주가 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결혼을 서둘러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저 아이들의 아버지가 어째서 그렇게나 성급하게 결혼식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미안하기도 했다. 결혼이라면 언제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자신의 자식들은 ‘서자’ 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꽉 메여왔다. 법적으로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를 로자몬드는 지겹도록 보아왔다. 동생인 스테판이 그랬다. 원래는 아버지의 애인이 낳은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때 자신은 아이였고, 아버지가 어머니 이외의 사람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불쾌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들어온 후처와 그 아들을 굳이 차별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이 그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것까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두 번째 어머니는 중소 호족의 딸이었다. 아버지 쪽에서 그녀를 원했음에도 후처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괴로워하며, 첩 출신이라고 손가락질 당할까봐 두려워하며, 아들인 스테판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작위를 도둑질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까 겁먹고, 전처의 딸인 자신을 ‘아가씨’ 라고 부르며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겁먹은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마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중소 호족의 집에서 자라난 의붓어머니에게는 벨민스터 공작가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무거웠었나보다. 스테판은 나이 드신 아버지께 있어서 외아들이었고 그만큼 기대도 컸다. 스테판도 아버지께 순종적이고 훌륭한 자식이었다. 당시 로자몬드는 스테판이 소꿉친구인 글래스메어 경(지금의 사보아 공)이 자주 아버지와 싸우곤 했던 것과는 완벽하고 대조적이라, 내 동생은 정말 착실한 아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둔감함을 절실히 깨닫는 순간, 언제까지나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이 집에 들어온 뒤부터 스테판은 불쌍할 정도로 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아들이 되기 위해서, 누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차기 당주가 되기 위해서, 벨민스터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후처로 맞아들였다 하더라도 역시 첩의 자식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고모님.”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로자몬드는 정신을 차렸다. 머리맡에서 작은 얼굴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작은 손을 침대에 짚고 열심히 까치발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워 있는 로자모드와 눈높이가 맞지 않아서였다. 새하얀 피부와 또렷한 눈망울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로자몬드는 그 어린 손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문병 와준 거니?” “네. 사촌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데려와달라고 졸랐어요. 축하드립니다.” 혀짤배기 발음이지만 또박또박 인사를 한다. 스테판의 아들인 주니어도 이제 다섯 살, 후계자의 증거인 류미엔트 경의 칭호를 지니고 있다. 로자몬드가 선택한 교사 아래에서 차기 당주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었다. 고모의 곁에서 잠들어 있는 기묘한 생물들을 바라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고모님, 이 아이들이 제 사촌들인가요?” “그래. 귀엽지?” “귀여운가요? 왠지... 얼굴이 이상해요.” 로자몬드는 누운 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말이니. 너도 처음엔 이랬단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곧 예뻐질 테니까.” “그런가요....” 아이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고모님의 말이라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한때 이런 얼굴이었다는 사실도, 이 생물이 곧 예쁘게 변한다는 것도. “자라면 네 놀이 상대가 되어줄 거야. 사이좋게 지내렴.” “네. 이름은 뭐라고 붙이셨어요?” “글쎄.... 설마 한꺼번에 두 명이나 태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사보아 공의 의견도 들어보아야겠지.” 아이는 아직도 뭔가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함께 따라온 유모가 부드럽게 제지했다. “도련님, 고모님은 많이 피곤하시니까 너무 오래 방해하면 안됩니다. 마나님도 조금 쉬셔야지요.” 집안 사람들은 로자몬드를 마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미혼인 로자몬드에게는 이상한 칭호였지만, 주인님이나 당주님이라는 호칭은 로자몬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임시 당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상 집안의 실권을 쥐고 있는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편의상 이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 위화감과도 곧 이별이다. 로자몬드는 정식으로 발로의 부인이 된다. 그 발로가 찾아온 것은 집안의 축하연이 열린 다음날이었다. 도중에 벨민스터가 보낸 사자와 마주쳐, 이미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었다고 한다. 갓 태어난 자기 자식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무사히 출산을 마친 약혼녀를 만나러 갔다. “고생했어.” 간단한 위로 인사였지만 눈빛만은 따스했다. 로자몬드도 침대에 누운 채 두 아이의 아버지에게 미소를 던졌다. “봤어?” “음.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뱃속에 두 명이나 들어 있었으면 무거웠겠지.” “공을 닮아서 씩씩하게 생겼지?” “내가 저렇게 못생겼던가?” “콧날이 오뚝한 게 꼭 닮았어. 분명히 아버지를 닮아서 까만 눈일 거야. 빨리 눈을 뜨면 좋겠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콧날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직 없던데. 갓 태어난 원숭이나 별다를 게 없잖아.” 아버지가 하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폭언이다.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래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에나 비아냥이 특기인 발로가 벙긋벙긋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리가 없다. 로자몬드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우선 발로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쁠 정도였으니, 오히려 그 냉정한 비평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원숭이인가.... 류미엔트 경이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더니, 그래서였나.” 이것 역시 어머니가 할 말은 아니다. 자꾸 반복하게 되지만, 결코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리가 있다고 납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설마 쌍둥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야니스 신전에 기도하러 간 숙부님들도 안심하고 있겠지.” “나도 이제야 마음 놓겠어.” 로자몬드도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가,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남자애는 사보아가에서 키운다 치고, 여자애는 여기서 키워도 괜찮겠지?” “그래.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네 친척들도 기뻐할 테고, 주니어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겠지.” 발로는 뭔가를 떠올리고 웃음을 지었다. “형님에게는 차마 말 못하겠는 걸. 또다시 남매가 멀리 떨어져서 자라야 하다니 불쌍하다고 하시겠지.” “불쌍해?” 로자몬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가 어떻게 불쌍하다는 거야?” “나도 도통 모르겠어.” 대답하면서, 발로는 메이버리에 있는 달시니 저택의 거실을 떠올렸다. 국왕이라면 소박하고 아담하면서도 가구에서 장식까지 주부의 정성이 담겨 있는 따뜻한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발로 자신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형님이 생각하시기에 가족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야 하나봐.” “우리들도 가족하고 같은 저택에서 살고 있잖아?” “본채와 떨어진 별채에서 말이지. 형님이 말씀하시는 한 지붕이란 아마도 침실만은 따로따로겠지만 아침 식사부터 점심, 저녁, 그 뒤의 시간까지 하루 종일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그게 스샤 식이라더군.” 두 사람은 동시에 어렸을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그들의 저택에는 몇 군데나 별채가 있다. 각각이 집 한 채라 해도 좋은 정도로 넓고, 그 중 한 건물에서 하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사흘에 한 번 정도. 성장한 뒤부터는 그 간격도 더욱 멀어졌다. 부모형제 간이라도 각각 다른 집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불만을 품어본 적도, 불편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로자몬드는 부모님과 동생을 좋아했고, 만나려고만 하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었다. 발로 역시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쨌거나 아버지와 만나는 것은 즐거웠다. 로자몬드는 침상에 누운 채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래서는 가족과 만나는 기쁨이 줄어들고 말 것 같은데...? 우선 그렇게 같이 붙어 있으면서 대체 뭘 하지?” “동감이야” 검은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국왕과 매우 닮은, 하지만 완전히 다른 표정을 담고 빛나는 눈이다. 국왕에게 국왕의 상식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그들의 상식과 윤리가 있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식으로 억지로 정답을 정하려 드는 게 이상했다. 국왕이 자신과 가치관이 같은 폴라를 선택한 것처럼, 발로는 로자몬드를 선택했다. 그런 것이다. “우리들은 익숙한 공작가 식으로 하자고. 우선 이름부터 정해야지.” “그거 말인데, 결혼식 일정은 어떻게 됐지?” “우선 9월로 예정하고 있는데?” “9월! 어째서?!” 로자몬드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늦어도 6월까지는 태어날 거라고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기다릴 수는 없어! 더 빨리는 안돼?” 생각지도 못했던 항의에 발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신전으로 달려가려던 날 뜯어말린 건 너였다고. 이렇게 태어났으니, 결혼식쯤은 언제 올려도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로자몬드는 불만스러운 듯했다. 속물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를 낳고서야 처음으로 발로가 느끼던 초조함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이 아이들이 서자라는 가차없는 현실을. 발로는 이미 그것을 극복한 상태였다. “아이들 소개도 그때 하자고 했잖아? 갓 태어난 아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 조금 시간을 두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러다 보면 여름이 될 거야.” “아....” 여름의 행사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간다. 우선 음식이 빨리 상하고, 긴 여행을 하기에도 겨울 못지않게 어려운 계절이다. 더위와 벌레에 말이 견디지 못하는데다 마차 속은 한증막 상태가 된다.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생긴다. 따라서 먼 곳의 사람을 초청해야 할 정도로 큰 규모의 축하연은 여름에는 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식이야 어디서 올려도 상관없겠지만, 초대객 수를 생각하면 역시 코랄에서 하는 게 최선이겠지. 그런데 네가 이런 곳에서 애를 낳았으니, 아기들을 데려가는 것만 해도 고생하게 생겼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6월 중에 식만이라도 올려버리면?” “바보 같은 소리. 너도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출산이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최소한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그 뒤에도 과격한 운동은 금물이야. 산후에 몸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한 달 반에서 두 달은 걸린다더군. 어차피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는 얌전히 누워 있을 수밖에 없어.” “그런가....” 납득하면서도, 로자몬드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꽤 잘 아네?” 발로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나하고 친한 여자들 중에는 출산 경험이 있는 부인들도 많으니까.” “.......” 장래 부인이 될 사람으로서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언 따위 듣지 말라든가, 유부녀에게까지 손대지 말라든가,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결국 한숨만 쉴 뿐이었다. 소문이 난 상대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발로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없는 연애의 프로였다. 무엇보다도 그런 여자들이 몇 명이 있든 간에 이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이므로 불평은 할 수 없다. “어머나, 사보아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우아한 인사와 함께 홀더네스 공작부인이 들어왔다. 로자몬드의 숙모뻘 되는 사람이다. 뒤에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산더미 같은 선물과 가지각색의 꽃을 들여온다. 방 안은 순식간에 봄의 향기로 가득 찼다. 부인 자신도 화려한 사람이었다. 연령은 40대이지만 그 나이에 어울리는 성숙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발로는 우아하게 그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부인. 이런 꽃 같은 걸 가져오지 않으셔도, 부인 자신이 아름다운 꽃인 것을.” 갑자기 로자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에게 문병 오신 거라고. 숙모님에게까지 손 뻗치지 마.” “손을 뻗치다니, 실례로군. 숙녀에 대한 당연한 예의야.” “정말 뻔뻔스럽기는....” “화내지 마. 몸에 안 좋으니까.” “누구 때문인데!” 싸움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홀더네스 공작부인은 입을 가리고 우아하게 웃었다. “두 분 모두 변함이 없으시군요. 사이가 좋으셔서 정말 보기 좋습니다.” “사이가 좋은 걸로 보입니까, 숙모님?” “물론이고 말고요. 싸움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아닌가요.” 부인은 여유 있게 웃으면서 발로를 향해 살짝 절을 했다. “사보아 공작님, 후계자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 동안 뵙지 못했습니다만, 블루완드 경이나 몬튼 경도 기뻐하고 계시겠지요. 벨민스터 공도 이렇게 무사히 책임을 다하셨으니 마음이 놓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 분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시는 것만 보고 나면 저도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 눈짓으로 식은 언제냐고 물어오는 것을 깨닫고 로자몬드가 대답했다. “여름이 중간에 걸리니, 빨라도 9월은 될 거라는 게 공의 생각입니다.” “그때에는 부디 부인께서도 꼭 참석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남편도 고대하고 있답니다. 단, 그....” 부인은 조금 주저하다가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혼례식 때에는 당신의 어머님..., 아에라 공주님도 물론 참석하시겠지요?” 로자몬드는 숨을 삼켰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숙모에 대한 비난을 억누를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발로 앞에서 그 말은 금기 중의 금기이다. 예상대로 그때까지 싱글싱글 웃고 있던 발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형용하기 힘든 냉소가 떠돌기 시작했다. “유감입니다만 공작부인. 어머니는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제 어머니는 지병 때문에 별로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부인은 주춤했다. 발로의 어머니로 전 공작부인인 아에라 공주는 현재 표면적으로 브라시아의 저택에서 요양 중인 것으로 되어 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외출도 않고 손님도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실은 병이 아니라 비밀리에 국왕으로부터 근신을 명령받았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 이유로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지만 불명예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국왕이 파라스트의 포로가 되었을 때 아에라 공주가 오론과 밀약을 맺었다는 얘기였다. 이때 아에라 공주는 오론에게, 선선대의 국왕의 딸로서(서자인 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델피니아를 지배하려는 파라스트에) 협력하겠다고 당당하게 서명하고 인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지만 사건의 진위는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 국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에라 공주는 계속 근신하고 있다. 발로로서도 친어머니의 불명예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요양 중이다. 아들의 결혼식에도 얼굴을 내밀 수 없을 정도의 병인 것이다. 하지만 공작부인도 간단히는 물러나지 않았다. 조카딸의 평생에 단 한번뿐인 결혼식이다. 거기에 시어머니 될 사람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친척 입장에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용기를 짜내어 다시 말했다. “그분도 그렇게 집에만 계시다가는 오히려 더 기분이 가라앉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처럼 경사스러운 날이니 참석하도록 폐하께 전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공작님의 부탁이라면 폐하도 그냥 넘겨버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분명히 들어주시겠지요. 그분은 선대 국왕 뒤르와님의 동생이시니 폐하께도 고모님이 됩니다. 그런 분이 자기 자식의 결혼식에 얼굴도 비추지 않으신다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요.” 이날만이라도 특별히 근신을 풀어주도록 국왕에게 부탁해보라는 말이지만, 발로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아니 폐하께서도 저희 집안만 특별 취급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저에게도 전과가 있고 말이지요.” 발로가 말하는 전과란 맥다넬 경을 친 사건을 뜻한다. 실제로는 국왕의 밀명에 따라 움직였지만,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발로의 독단이라는 형태로 처리되었다. “원래대로라면 기사단장의 직위도 명예도 모두 빼앗기는 게 당연하지만 폐하는 관대한 마음으로 이 발로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그렇게 폐하의 은총을 기대해서는 안 되겠지요. 공작이라고는 해도 폐하를 모시는 한 사람의 신하인 것은 틀림없으며, 신하에게는 신하로서의 예절이 요구됩니다. 게다가 중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억지로 불러오다니, 폐하께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왕비나 이븐이 들었으면 그 뻔뻔스러운 말에 온몸을 긁어댔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발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어머니께 로자몬드가 혼례의상을 입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요. 조카 분은 대륙 최고의 신부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브라시아는 코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억지로 움직이는 건 오히려 건강에 안 좋습니다. 정말로 유감이지만 어머니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지요. 병상에 계신 어머니도 결혼식 보고 정도로 만족하실 거라고 전 믿습니다.” 말만 듣고 있으면 눈물어린 효심으로 가득 찬 착한 아들이다. 표정 역시 실로 침통하고 유감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눈은 달랐다. 아직도 뭔가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듯 싸늘한 눈으로 공작부인을 노려보고 있다. 로자몬드는 조마조마하면서 숙모와 발로를 바라보았다. 부인도 그 무거운 공기를 눈치 챈 것인지 두려워진 것인지,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정말 안됐습니다.... 손자 분도 태어났는데.” “예, 어머니도 분명히 기뻐하실 겁니다.” 너무나 뻔뻔스러운 말을 지극히 진지하게 입에 담는다. 발로와 아에라 공주의 불화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숨길 생각도 없었다. 단지 남들 앞에서는 체면을 지킬 뿐. “어디 그럼, 어린 스테판에게 인사라도 하고 올까.” 말을 끊고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발로의 등을 향해, 로자몬드는 주저하며 말을 던졌다. “사보아 공. 실은 나도..., 몸이 좋아지면 아에라님께 인사드리러 갈 생각이었어. 누가 뭐래도 그분은 내 시어머니시니까. 그리고 손자들 이름도 알려드리고 싶어.” 뒤를 돌아본 발로는 살짝 웃었다. “그렇군, 이름을 빨리 정해야지. 네가 그걸로 마음이 풀린다면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도 상관없지만, 아기는 두고 가도록 해. 손자가 너무 귀엽다고 안 놓아주면 곤란하니까.” 유쾌하고 지극히 부드러운 말투 사이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발로의 등이 사라지자 로자몬드는 길게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숙모님.... 십년은 감수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도 그래요.” 살기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반인’ 조차도 지금 발로의 분위기에서는 뭔가를 느낀 듯하다. 상류계급에 태어난 여자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엄하게 교육을 받는다. 남들 앞에서는 특히 더욱더. 홀더네스 공작부인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그런 부인이 조카딸 앞인데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제가 너무 주제넘은 말을 했군요. 공작님과 아에라님의 불화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미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꼭 협박인 것만도 아니었다. 발로는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인간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무시한다. 그것은 꼭 여자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감정적이고 발끈하기 쉬워 보이는 발로지만 정말로 가치 없다고, 혹은 해가 된다고 판단한 인간에게는 오히려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표정도 부드럽고 말투도 점잖게 구며 신사적으로 대접한다. 단, 마음속에서는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를 허수아비나 돌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숙모가 그런 식으로 대접받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발로는 일주일 동안 벨민스터 저택에 머물렀지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로자몬드가 브라시아로 아에라 공주를 만나러 간 것은 출산한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문병 겸 손자 탄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전에 그 뜻을 코랄에 전하고 특별히 허가를 받아낸 면회였다. 아직 말을 타기에는 이르다며 하인들이 필사적으로 말리는 바람에 임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곧바로 달려가지는 못하고, 숙박하기로 먼저 얘기를 해두었던 호족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 주변에는 적당한 여관이 없기 때문에 방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대접하는 쪽에서도 충분히 사례를 받을 수 있고 대귀족과 인연도 생기는 셈이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 호족인 벤튼 가문의 사람들은 주인 이하 전원이 총출동해서 로자몬드 일행을 맞아들였다. 로자몬드는 부인의 안내로 별채에 짐을 푼 뒤 서둘러 몸단장을 시작했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정돈하고 옅게 화장을 하며, 옷도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자신들의 주인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은 것은 벨민스터 가문의 하인들도 마찬가지 심정으로, 로자몬드는 상당히 많은 드레스를 가지고 있었다. 몸차림을 끝낸 후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예물을 건넸다. 그리고 곧바로 아에라 공주가 있는 사보아 저택으로 향했다. 사보아 집안과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로자몬드도 이 저택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 앞에는 몇 명이나 되는 문지기가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시종 같은 몸차림이지만, 예리한 눈빛은 분명히 전투 훈련을 받은 인간 특유의 것이었다. 아마도 왕궁에서 파견된 거겠지.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테지만 미리 통보가 되어 있었던 듯 로자몬드 일행은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 동행하던 시종들은 현관 옆의 대기소에서 기다리게 되었고, 로자몬드만이 거실로 안내되었다. 화려한 방이었다. 바닥 전면에 붉은 융단이 깔리고, 창문에는 사자를 조각해 넣은 유리가 끼워져 있다. 황금 상감 창틀에는 레이스 커튼과 비단 커튼을 이중으로 드리웠다. 그밖에도 공작과 꽃이 장식된 자개 원탁, 비단을 씌운 흑단 의자. 장식장에는 진주로 꾸며진 상자나 은제 꽃병, 색유리 조각 등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로자몬드는 복잡한 얼굴로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충분히 돈을 들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지만 처바를 수 있는 대로 돈을 처발랐다는 인상이 든다. 디자인도 제각각이라 그다지 취미가 고상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선선대 벨민스터 공작은 영지를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지만, 낡은 옷이나 마구는 몇 번이든 수선해서 쓰는 사람이었다. 좋은 물건을 아껴서 사용하며 길을 들이고, 쓸데없는 곳에는 돈을 쓰지 말라는 것이 가훈이기도 했다. 로자몬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도중에 차를 가져온 하녀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자, 주인님은 다른 손님과 환담 중이라는 대답이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공주는 허영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죄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남에게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리석은 짓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모습을 나타낸 아에라 공주도 지극히 사치스러운 차림이었다. 있는 대로 진주를 달고 금실로 수를 놓은 드레스를 입었으며 풍성하게 틀어올린 머리에는 새와 꽃 문양이 조각된 금은산호의 머리 장식을 몇 개나 꽂았다. 아에라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려는 로자몬드를 노려보면서 말한다. “어째서 내 손자는 데려오지 않은 겁니까?”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적어도 자신을 만나러 와주어서 기뻐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로자몬드는 거스르지 않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라서, 우선 저라도 인사를 드리려고....” “그 일도 그렇습니다. 당신 아버님께서 생전에 간곡히 부탁하셨기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이것만은 넘어갈 수 없군요. 정식으로 혼례도 올리지 않고 사보아 공작가의 아이를 낳다니, 이 파렴치한!”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는 아들이겠지요?” “한 명은요. 다른 한 명은 딸입니다.” “아아, 그쪽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당신 집안에서 알아서 하십시오. 하지만 남자애는 사보아 공작가의 후계자이므로 벨민스터의 간섭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점을 잘 알아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허리를 숙일 틈도 없이 입을 연 아에라 공주는 갑자기 로자몬드에게 다가와, 기묘하리 만치 뜨겁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알고 있겠지요. 그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닙니다. 사보아 가문의 핏줄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 더욱 큰 것을 손에 넣을 운명 아래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어머니로서 뭘 해줘야 할지, 당신의 의무가 어떤 것인지 물론 잘 알고 있겠지요?” 공주는 로자몬드의 오른손을 꽉 쥐고 있었다. 엄청난 힘이다. “어머님....”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로자몬드는 말했다. 며느리로서 지극히 당연한 호칭을 입에 올리는 데에도 엄청난 노력과 결의가 필요했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싶습니다.” 그 이상의 말은 피했다. ‘더욱 큰 것’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찬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설프게 타이르거나 반론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요. 그러면 됩니다. 당신은 역시 잘 알고 있군요. 내 아들도 당신 정도로 이해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 아이에게 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아니 절대로 그런 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나요! 언제나, 언제나 그 서자 편만 들고! 대체 그 아이는 자기 핏줄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서자의 지배를 용인하고 그 신하의 지위에 만족하다니. 돌아가신 아버지와 위대한 숙부님께 죄송하다고는 생각도 않는 겁니까!” 아들인 발로에 대한 원망의 말이 줄줄이 쏟아졌고, 로자몬드는 열심히 그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에라 공주가 분노하는 것은 아들이 상대해주지 않는 쓸쓸함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정지한 채로 있었다. 자신의 오빠가 델피니아를 지배하던 시대. 왕의 여동생으로서 사람들의 경애를 한 몸에 받으며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비위를 맞춰주던 화려한 소녀 시절. 이미 먼 옛날에 사라져버린 현실임에도 아직껏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금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것을 바꿀 만한 힘도 없고, 왜 그때처럼 되지 않는지 분개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일까. 공주는 자기 발로 뛰어든 만만한 상대를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지껄이고 지껄이고 또 지껄여댔다. 서자를 옥좌에 앉히는 죄악, 그것이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타락과 어리석음, 그 착오를 인정하는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분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정의에 대해 지겹도록 설파했다. “아누아도 그렇고 브룩스도 그렇고, 오라버님을 모시면서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잊고서 서자를 왕좌에 앉히는 대죄를 범하다니 이 무슨 불충이란 말입니까! 천하의 역적이라 불러도 부족합니다! 그자들은 미쳤어요. 이미 사람의 모습을 한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돌아가신 오라버니께서 얼마나 원통하시겠어요. 그런 죽일 것들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평생을 아끼셨으니, 정말로 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불쌍하신 오라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그런데도 저 한심한 남자들은 그런 악귀 같은 것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다니! 아무도 이상하게는 생각지 않는 겁니까! 서자인 국왕 따위,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입에 올리기조차 더러워요!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진실한 충신은 아무도 없는 겁니까! 나라를 걱정하는 게 나 하나뿐이라니! 한심해요! 서자의 정치라니 끔찍해! 언제까지 그렇게 놔둘 생각입니까!” 히스테리 그 자체였다. 로자몬드가 간신히 해방된 것은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거의 반나절 내내 쉬지도 않고 남의 불평을 들어준 셈이다. 하지만 로자몬드는 마지막까지 정중하게 행동하며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공작가에서 태어난 이의 절도를 지키면서, 물러날 때에도 위로의 말을 잊지 않고 공부의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에 공헌했다. 하지만 거실을 나오는 순간 피로가 몰려왔다. 악의와 원한으로 가득 찬 공격적인 말을 몇 시간이나 듣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 독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법이다. 저택 밖으로 나와서야 마음이 놓였다. 온몸이 가벼워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초여름의 공기가 이렇게나 감미롭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석양으로 물든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인이 마차를 가져온다. 좁은 상자 안에서 흔들리면서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직무에 충실한 문지기는 문에서 일단 마차를 정지시키고 인원수와 얼굴을 확인했다. 화물 담당 하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가 끝나고 나자 문지기들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례합니다, 벨민스터 공. 저쪽에서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기다리는 사람?” 가리키는 쪽을 보자 말 두마리가 묶여 있었다. 문밖에서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종을 데리고 온 발로는 고삐를 끌고 다가와, 마차 밖에서 로자몬드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피곤하지?” 로자몬드도 어색하게 웃었다. 피로가 한계에 달해 있는 탓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 얼굴을 보는 것이 반가웠다. 자신이 나오기를 계속 기다려주었다는 사실도 기뻤다. 훌쩍 마차에서 내려가, 주인의 뒤에 서서 고삐를 쥐고 있는 발로의 시종에 말했다. “그 말, 빌릴 수 있을까.” 오랜만에 바람을 맞으며 마음껏 달려보고 싶었건만, 그 주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말은 안돼.” “공까지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이제 괜찮아. 출산한 지 한 달이나 지났다고. 집의 하인들도 걱정이 너무 많아. 전란이 끊이지 않던 시절에는 출산과 동시에 갓난아기를 안고 도망치는 여자들도 있었다고.” 불만스럽게 말하는 로자몬드를 보며, 발로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는데, 벨민스터 공은 귀부인의 예절에 맞게 다리를 모으고 옆으로 말을 타는 기법에 익숙한지? 내가 기억하는 건 씩씩한 승마복 차림뿐인데 말이야. 설마 그 차림으로 안장에 걸터앉으려는 건 아니겠지.” 로자몬드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차림으로 말에 걸터앉으면 다리가 완전히 드러나고 만다.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옆으로 타는 건... 그러고보니 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안 돼. 낙마할 게 뻔하잖아. 이 기회에 달시니 양에게 배워보는 게 어때?” “잘 타나?” “명인 급이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발로는 말의 안장을 풀어서 하인에게 건네주었다. 발로가 건장한 두 팔을 자신에게 뻗었을 때, 로자몬드는 조금 놀라며 가볍게 동요했다.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안장을 풀어낸 이유도 깨달았다. 두 사람이 함께 타려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만두게 할까 어쩔까 망설이는 사이에, 발로는 로자몬드의 허리를 가볍게 안아 올려 안장을 풀어낸 말 등에 앉혔다. 자신도 그 뒤에 타고 고삐를 쥔다. 로자몬드의 몸은 발로와 말의 목 사이에 감싸이는 형태가 되었다. 불편해서 뒤척였다. 이런 자세로 말에 타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발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뒤에 있던 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겼지만, 기수인 발로의 발 역시 공중에 떠 있는 채이다. “등자가 없어도 괜찮아?” “맡겨둬.” 대답을 하자마자 말의 옆구리를 치며 달리기 시작한다. 로자몬드는 바람을 맞으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임신 말기부터는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말에 타지 않았다. 이런 감각을 느껴본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이 상쾌한 바람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발로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로자몬드의 몸을 꽉 안고 있었다. 안장도 없는 말을 몰고 있건만 조금도 자세가 흔들리지 않는다. 로자몬드는 다시금 자신의 남편이 된 남자의 강함을 느꼈다. 이 가슴에 의지해도 되는 것이다. 이 팔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지켜줄 것이다. 말은 냇물 소리가 들려오는 숲길을 경쾌하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벤튼가의 저택까지 약 2카티브쯤 되는 짧은 승마를 즐겼다. 숲을 빠져나와 저 멀리 저택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로는 말의 속도를 늦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로자몬드는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 인사 안 드려도 되는 거야?” “어떻게 지내는지는 뻔히 알고 있으니까. 차라리 정말 병이라도 걸린 거라면 조금은 얌전해질 텐데.” 씁쓸한 어조였다. 무리도 아니다. 로자몬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이들 이름을 말씀드릴 틈도 없었어.” 아에라 공주는 손자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로자몬드로서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불만을 가만히 받아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여자에게 손자 이름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었겠지. 그 애가 국왕이라도 됐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분은... 어쩌다 저렇게 되신 걸까. 젊었을 때에는 지성으로 칭송 받던 분이었는데.” “변하지 않았어. 옛날부터 조금도.” 발로는 말했다. 냉담하고 경멸이 섞인 목소리였다. “소중한 건 자기뿐, 흥미가 있는 건 권력뿐, 아버지나 숙부님 주위에 모여드는 그런 추한 인간들은 얼마든지 보아왔지만, 그 가운데 제일 추악했던 게 그 여자야. 너도 며느리로서의 의무라는 걸 해보고 마음이 풀렸으면 다시는 브라시아에 안 오는 편이 좋아. 어설프게 저 여자 마음에 들었다간 일이 귀찮아지니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진담이야. 자기 편이라고 착각이라도 해봐. 반드시 형님을 암살하라고 시킬 걸. 거절하면 이번엔 이쪽을 욕할 거야. 저 여자에게는 자기 말을 듣는 하인 아니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적, 두 종류밖에 존재하지 않아.” 잠시 말을 끊었다가 발로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저택은 도깨비 소굴이야. 가까이 가지 않는 게 나아.” “알았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두터운 가슴에 기댔다. 자신의 육친은 이미 아무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먼저 죽어버렸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 있어주었더라면 얼마나 기쁠까. 그립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런데 이 남자는 친어머니와 철저하게 떨어져 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폐하는 저분 생각을 알고 계시는 건가?” “당연하지. 그러니까 저 저택에 가둬둔 거야.” 로자몬드는 발로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그 소문..., 정말이야?” 대답하는 발로의 목소리도 낮았다. “형님은 말이지, 내 눈앞에서 저 여자 서명이 들어간 서약서를 불태워주셨어. 표면적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다고 하셨지. 나하고 형님, 재상밖에 몰라.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응.... 하지만 정말 모르겠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국왕을 증오해야 하는 걸까. 서자라는 사실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정한 질서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는다. 그것이 그렇게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일까. 발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어리석은 여자를 어머니로 둔 탓에 형님께 빚만 늘고 있어. 짜증나게.” “불만이야?” “이렇게나 약점을 잡히면 그럴 만도 하지. 싫어도 왕가에는 거스를 수 없어. 충실하게 따라야 할 것 아냐. 마음에 안 든다고.” “.......” “제일 마음에 안 드는 점은, 형님에게는 채권자라는 의식이 전혀 없다는 거야. 나라면 실컷 생색을 낼 텐데 말이지.” “공다운 말이야.” 로자몬드는 안심하며 조금 웃었다. “그렇다면, 공도 조금은 어머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어머님이 저런 분인 한 공은 절대로 폐하를 배신할 수 없겠지? 아이들을 위해서도, 사보아 가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발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형님도 저 여자에게 감사해야겠군. 이 몸을 아군으로 붙여준 셈이니까.” “당연하지. 폐하와 사보아 공이 힘을 합치고 있는 한 조라더스도 오론도 두려워할 것 없어.” “거기에 이제는 너도 있지.” “비전하도 계셔.” 말을 타고 걸으면서 두 사람은 깔깔 웃었다. “실은 말이지, 그 왕비 일로 형님이 부탁을 하셨어. 조금은 빚을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도 협력해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자세한 얘기를 들은 로자몬드는 깜짝 놀랐다. “폐하께서도 참 대담하시군....” “동감이야. 형님은 가끔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봐. 이번에야말로 부부 싸움은 정원에서 해주면 좋겠는데.” “실현될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가능한 거야?” “어떻게든 되게 만들자는 거지. 직접 실물을 본 건 너하고 샤미안 양, 엔도바 부인. 물론 그 사람들도 사정을 설명하고 끌어 들어야지. 당연히 나시아스하고 그 밀짚머리도.” “흐음...?” “밀짚머리는 몰라도 나시아스에게는 좋은 자극이 될 거야. 이런 기회라도 없으면, 그 숙맥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접근도 못한다고. 보고 있는 이쪽이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야.” “에.... 설마 엔도바 부인 얘기야?” 발로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까지 무슨 소리야? 그 두 사람은 훨씬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아니 하지만..., 그럼 나시아스 경은 왜 말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을 것 아냐.” 의문을 던지면서, 라모나 기사단장과 국왕의 전 애첩이 대화하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친밀해 보였다. 그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친밀함은 절도 있는 남녀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고상한 우정 수준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야...? 도무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자기 자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로자몬드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녀와 발로의 대화 역시 주변 사람들이 듣기에는, 이미 아이까지 두고 결혼을 앞둔 남녀의 대화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터였다. 발로는 재미있는 듯이 낮게 웃었다. “그러니까 속이 터진다는 거지. 가끔은 내가 대신 꼬셔버리고 싶을 정도야.” 현명하게도 이 의견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로자몬드는 이상한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공의 친구가 그렇게 연애에 둔하다니 조금 의외인 걸. 불장난이 특기이면서 같이 해보자고 권해본 적도 없어?” “권했지, 물론. 조금 늦기는 했지만. 더 빨리 했어야 했어.” “......?”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시기가 무슨 상관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이 이미 저택 근처까지 도착했기에 얘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3장 용감하게 선공에 나선 것은 이븐이었다. “국교회복식전인가 하는 걸 연다면서?” “응. 시일이 한참 남긴 했지만.” “아래쪽에서는 엄청 소란스러워. 저 바보가 말이지. 나보고도 거기 참석하라잖아. 정말 곤란해. 무도회라면서? 나더러 귀부인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란 말이야? 완전히 웃음거리라고.” 초여름 오후였지만 서리궁의 테라스는 나무그늘이 있어서 시원하다. 시녀가 정성 들여 만든 요리를 가져왔다. “우선 상대를 어디서 조달하냔 말야? 산적하고 춤을 추어줄 귀부인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런데도 한 곡만이라도 춤을 추라면서 성화잖아.”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샤미안이 있잖아.” 걸려들었다. 이븐은 내심 웃음을 지으면서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그 정도는 생각했어. 샤미안 양이라면 산적이 상대라도 싫은 표정은 안 해줄 거리고. 그런데..., 일단 약속만이라도 잡아볼까 했는데 말이지.” 힐끔 왕비를 보며 한숨을 쉰다. “그게, 식전에 나가지 않겠다는 거야. 그래서 곤란하다는 거지.” “안 나온다니, 샤미안이?” 왕비는 깜짝 놀랐다. 도라 장군은 누구나 인정하는 왕국의 방패, 샤미안은 그 딸이다. 참석할 자격이 있는 것은 물론이며, 참석해야 할 의무도 있을 터. 이븐은 포기한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역시 산적하고 춤추는 건 싫은 걸까 싶기도 했지만, 저렇게 미안하다면서 몇 번이나 사과를 하면 불평도 못하잖아.” “당연하지. 샤미안이 너하고 춤추는 걸 싫어할 리가 없어. 하지만... 그럼 왜지?” 왕비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두 번째 선수가 찾아왔다. 나시아스였다. 겉으로만은 굉장히 진지하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왕비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가을로 예정된 식전 말입니다만, 비전하께서는 이번에도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게 정말입니까?” “언제나 그랬잖아. 이번에만 나가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후우....” 애매하게 대답하면서 나시아스는 진지하게 재차 확인하려 들었다. “그럼, 정말로 불참하시는 겁니까?” “나빠?” “그런 건 아닙니다만..., 곤란하군요.” “뭐가?” 나시아스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이븐을 바라보았다. 이븐 역시 나시아스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쉰다. “혹시 그쪽도 마찬가지입니까?” “역시 당신도?” “예, 정말 손쓸 길이 없습니다. 그쪽은 그래도 좀 낫겠지요. 용모도 인격도 뛰어난 기사단장이시니 상대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말이죠....” “아니, 말도 안 됩니다. 곤란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전 제 친구와는 달리 이런 쪽에는 솜씨가 없어서 말이지요.” 남자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왕비만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둘 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무도회 파트너를 어떻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던 건 샤미안 양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쪽 기사단장님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부인께 부탁드려보려고 했는데....” 고민하는 나시아스의 얼굴을 보고 왕비는 수상한 듯이 물었다. “설마 라티나도 식전에 안 나온다는 말은 아니겠지?” “예, 바로 그 설마입니다.” 왕비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애첩의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도 그녀는 국왕의 가장 친밀한 여성으로 남아 있다. 당연히 국왕도 그녀를 초대할 터. 그 초대를 거절하다니 무례를 넘어서서 불경에 해당한다. 그 엔도바 부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국왕의 체면을 망치려 할 리가 없었다. 안색이 확 변한 왕비가 두 사람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거친 발소리와 함께 총대장이 등장했다. “왕비! 식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 진짜야?!” 발로였다. 얼핏 보기에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지만, 왕비는 그 이상으로 험악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쨌다는 거야! 단장하고는 상관없잖아!” “상관이 있어. 로자몬드가 자기도 불참하겠다고 나섰다고.” 왕비는 얼어붙었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는 다시 공격을 쏟아 부었다. “이번 식전은 지금까지의 행사들하고는 얘기가 달라. 탄가, 파라스트 양국과의 국교 회복을 축하하는 중요한 자리라고. 그리고 그 국교 회복에 제일 화려하게 공헌한 게 누구라고 생각해? 물론 타우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고 우리 기사단의 노력도 있었지. 하지만 제일 공을 세운 건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야. 굳이 말하자면 당신이 이번 식전의 주역이라고. 그런데 바로 그 주역이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니 자기 같은 것이 얼굴을 비출 수는 없다는 거야.” 말을 못하고 있는 왕비 곁에서 나시아스와 이븐이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런 얘기야. 샤미안 양도 비전하께서 참석하지 않으신다면 자기도 나갈 수 없다고 하던데.” “엔도바 부인도 그렇습니다. 폐하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은 굉장히 괴롭고 죄스럽지만, 비전하가 참석하지 않으시는 식전에 자기가 얼굴을 내밀면 그게 훨씬 무거운 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내 신부도.” “뭐 하는 거야...!!” 그제야 숨을 들이켠 왕비가 외쳤다. “뭐야! 그 핑계는! 뭐가 어떻게 굴러가면 그런 바보 같은 얘기가 되는 거야?!” 발로의 표정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나한테 말해도 별수 없어. 불만이 있으면 본인에게 직접 말하라고. 어쨌거나 곤란한 건 내 쪽이야. 각국에서 빈객을 맞이하는 공식행사인데, 갓 결혼식을 올린 사보아 공작이 공작부인도 대동하지 않고 참석해? 국교회복을 기념하는 식전에? 격에 안 맞는 짓도 정도라는 게 있어.” “장난하냐고!” 다시 한 번 외치고, 왕비는 맹렬하게 뛰쳐나갔다. 일곽에 위치한 벨민스터 저택에서는 오랜만에 돌아온 로자몬드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귀부인들이 다과회를 벌이고 있었다. 수많은 부인들이 로자몬드를 둘러싸고 화사하게 웃으며 속삭이고 있을 때, 엄청난 기세로 왕비가 달려 들어왔다. 싸움에는 익숙지 않은 귀부인들은 일제히 혈색을 잃고 움츠러들었다. “식전에 안 나온다니 어쩔 생각이야!” 이 고함에 더욱 겁먹는 여자들과는 달리, 로자몬드는 딱딱한 얼굴로 반론했다. “어쩔 생각이기는요. 들으신 대로입니다.” “단장하고 로자몬드의 피로연이잖아!” “그건 아닙니다. 이 식전은 어디까지나 왕실 주최의 공식행사이지 저희들의 결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승부처다. 로자몬드는 미리 정해놓은 대사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말했다. “비전하도 국왕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도 참석하지 않으신다면, 필연적으로 갓 식을 올린 저희들에게 사람들의 주목이 쏠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건방진 노릇이지요. 주역인 분들을 제쳐두고 주인공인 양 행동하다니, 사보아 공도 기껍게 여길 리가 없습니다. 불참하는 편이 낫겠지요.” 새빨갛게 익어 있던 왕비의 안색이 새까매졌다. “폴라가 뭐라고 했다고?” 방구석에 움츠리고 있던 귀부인들 중에는 작게 비명을 지르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로자몬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까 부용궁의 주인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멋진 출산 선물을 주시면서 자신도 식전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는 도저히 저 같은 것이 얼굴을 내밀 수 없습니다.” 왕비는 로자몬드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질풍처럼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남겨진 귀부인들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변함이 없으시네요, 저분은....” “본인이 불참하겠다고 하시니, 그렇게 하면 될 텐데 말이에요.” 동조하는 목소리가 차례차례 뒤를 이었지만, 여주인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은 모르시니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다 마쳤다. 뒤는 부용궁의 주인이 선전해주기를 기원할 뿐. 왕비는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벨민스터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부용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문제의 샤미안과 라티나, 그리고 셰라까지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참이었지만, 잔뜩 분노한 왕비를 앞에 두고 말을 꺼낼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 창백하게 질려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폴라도 창백해진 상태였다. 언제나 다정하던 왕비가 처음 보는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금방 후회해버릴 뻔했다. 왕비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폴라의 앞에 앉았다. “가을 식전에 불참한다고?” “예....” “왜지?” “왕비님도... 불참하신다고 하셨으니..., 제가 나설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나서긴 뭐가 나서는 거야. 폴라는 국왕의 진짜 부인이라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서란 말야.” 왕비는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지만 폴라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비님을 제쳐두고 어찌 제가....” “알았어. 지금 바로 신전에 가지. 이번에야말로 저 종이 쪼가리를 찢어버리고 오겠어.” “왕비님!!” 폴라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힘껏 외쳤다. 그 기백에는 왕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전 그런 걸 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폐하께 사랑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칠 정도로 과분합니다. 어째서 그런 것에 얽매이시려는지요?” “얽매이고 있는 건 폴라야. 애첩이니까 국왕 곁에 있을 수 없다, 나서는 짓이 된다, 그런 소리잖아?” 폴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신이 고민하는 건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 세상의 눈이라는 게....” “뭐야, 그건?” 차가운 말투였다. 이 왕비는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왕비의 지위를 원한다면 언제라도 주겠어. 하지만 폴라는 그게 필요 없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국왕의 부인으로 남들 앞에 설 수는 없다고 하고. 어째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왕비가 짜증을 내며 몰아세우는 동안 폴라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응원단은 불안한 듯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자신들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 하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서로 마주 보고 있으려니 왕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중요한 식전이야. 가슴을 펴고 나가라고. 월도 그렇게 해주길 바랄 테니까.” 폴라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왕비님은?” “왜 내가 꼭 나가야 하지?” “그럼 저도 나가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못합니다....”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점점 고개를 푹 수그리며 두 손으로 무릎 근처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다. 상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왕비가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폴라는 울고 있었다. 여러 줄기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새하얘질 정도로 꽉 쥔 주먹 위로 뚝뚝 떨어졌다. “폴라?” “못합니다....” 모깃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고서 푹 숙인 고개를 젓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완전히 위축되어 있던 응원단 중에서 최초로 용기를 짜낸 것은 엔도바 부인이었다.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비전하. 저..., 부탁입니다. 폴라님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괴롭혀? 내가?” 예상도 못하던 말에 왕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번에는 샤미안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비전하께서 이렇게 심술궂은 분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심하십니다.” 이쪽은 젊은 만큼 훨씬 더 말이 직설적이었다. 비록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만, 왕비에 대한 비난이 뚜렷이 담겨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왕비가 참석하지 않는 식전에 애첩이 나서다니.... 폴리님의 말은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답이 없는 문제를 강요하는 왕비님 쪽입니다.” “샤미안님. 말이 조금....” 연장자인 엔도바 부인이 샤미안을 나무랐다. 상대는 왕비가 아닌가. “하지만 너무나 폴라님이 불쌍하신....” 말을 하려던 샤미안의 목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셰라가 신중하게 말을 보충했다. “비전하께서는... 폴라님이 악녀라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으십니까?” “악녀어?” “예. 이대로 가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국교회복 기념식전이라는 큰 행사에 왕비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애첩이 국왕의 곁에 자리잡는다면 폴라의 평판은 땅에 떨어진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여자라는 소문이 나게 된다. 왕비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완전히 당황하여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응원단 세 명은 재빨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이 승부를 걸 시점이다. 문제는 그 결정적 대사를 누가 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그렇게까지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다. 세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폴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님께서 참석해주신다면, 저, 저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이번만은..., 이 식전만은 참석해주실 수 없을까요?” 폴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도 필사적으로 용기를 짜내고 있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답답한 건 싫다고.” 차가운 말에 폴라의 얼굴이 그대로 흐려졌다. 절망에 빠지면서 간신히 말한다. “절대로... 안 되는, 건가요....” 왕비는 길게 한숨을 쉬고 세 명의 응원단 쪽을 흘겨보았다. 세 명 모두 폴라에게는 동정의 눈길을, 왕비에게는 비난으로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공기는 무겁다. 왕비는 껄끄러운 표정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나간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대답은 없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오열을 참고 있기 때문에. 응원단 세 명은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자신들의 한심함을 자책하고 있었다. 싸움으로 말하자면 지금이 승부를 낼 순간. 이 기회야말로 적을 공격할 절호의 때이건만 손도 발도 써보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다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왕비와 함께 전장에 선 적이 있던 여기사 샤미안은 그 격렬한 분노를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엔도바 부인은 바로 얼마 전, 일생일대의 용기를 짜내어 왕비를 견제했던 바 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만큼의 기력을 짜내어 다시 한 번 왕비와 대결하는 것은 무리였다. 엔도바 부인은 그렇게나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셰라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은빛 머리 속에는 싸우는 방법도,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수없이 들어 있지만 왕비를 설득할 수 있는 한마디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심한 것도 정도가 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적성이라는 것이 있다. 왕비가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맹수라면, 그 맹수를 길들이는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인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지, 이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타난 국왕을 보고, 세 명의 응원단은 진심으로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감탄했다.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셰라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했다. 이것은 누가 하더라도 상관없는 역할이었지만, 다른 여자들보다는 몸이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얘기를 들은 국왕 역시 어이없어하면서 왕비를 노려보았다. “불쌍하게도.... 난 이 왕궁에서만은 왕비가 애첩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산이었군.” “월!!” 왕비는 포악한 맹수처럼 부르짖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응원단은 물론 폴라까지 겁을 먹었지만 국왕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착각하지 마. 네 고집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폴라야.” 분노를 거두고 왕비는 폴라를 돌아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푹 수그리고 두 주먹을 꼭 쥔 채 딱딱하게 굳어 있다. 아무리 학대를 받아도 참고 따를 수밖에 없다는 듯이 그저 울고만 있었다. 왕비는 완전히 곤란해져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 나가는 게 그렇게 싫어?” 폴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국왕이 말했다. “아직도 잘 모르는군. 그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럴 수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왕의 애첩이란 어떻게 보자면 왕비의 부하 같은 면이 있으니까. 전쟁에서도 그렇지만, 일개 무장이 대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혼자 날뛰어봐. 엄벌감이지. 너도 그런 부하는 용서하지 않을 텐데?” 왕비는 팔짱을 끼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부하라는 말에는 저항감이 들고 부정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번 예는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알았어. 그럼 지휘관인 내가, 이건 폴라의 전투니까 맡기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단지 식전 현장에서야. 그러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 온 대륙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사전에 일일이 통지할 수는 없으니까. 왕비로서 출석해서, 그 자리에서 네 입으로 폴라를 소개하면 돼. 아마 그게 제일 파란을 일으키지 않고 넘길 수 있는 방법이겠지.” 얘기가 이렇게 되면 왕비도 앞뒤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팔짱을 풀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국왕을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날카로운 기백이 담겨 있었다. “요약하자면, 다들 짰다 이거로군? 서리궁에 들어닥친 놈들도, 로자몬드도, 여기에 있는 응원단도?!” 응원단은 몸을 움츠리며 굳어버렸다. “그리고 네가 주범이라 이거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아도 국왕은 흔들리지 않는다.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어째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거지? 이 이상 네 고집 때문에 폴라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두고볼 수 없어서 하는 말이야. 너야말로 대체 뭐야? 전쟁터에서는 전쟁의 여신이니 비장군이니 불리면서 아군에게는 경외 받고 적에게는 공포를 주지만, 그래도 약한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짓은 절대로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게 네 긍지일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약한 부녀자를 괴롭혀서 울리다니. 실망했어.” “괴롭힌 적 없어--!” “아니, 네가 울렸어. 내가 아니라 네가. 뭐 약속은 약속이지. 식전에 나오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결정하는 건 너다. 분수도 모르는 오만한 애첩이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만들든, 사람들의 입소문으로부터 지켜주든 네가 하기 나름이니까.” 왕비는 짜증이 난다는 듯 혀를 찼다. 하지만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문제로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폴라를 돌아본다. 푹 숙인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여전히 멈출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자신을 식전에 끌어내기 위해 하는 연극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뒀겠지만 폴라는 진심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왕비의 고집과 세간의 상식, 그리고 자신의 양심 사이에 끼어서 울고 있다. 왕비는 어지간한 남자들은 떼거리로 몰려들어도 당해낼 수 없을 정도의 기사도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포기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낸 다음 폴라의 앞에 몸을 굽히며 앉았다. “이번만이라고 했지...?” 갈색 머리가 끄덕였다. “이 식전에만 내가 나가면, 앞으로는 혼자서 알아서 하겠다고 약속하겠어?” 이번에는 확실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눈물로 얼룩진 커다란 눈이 주저하며 왕비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바라본 왕비 쪽이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꾸중을 듣고 잔뜩 주눅이 든 강아지가 주인에게 매달리며 열심히 용서를 비는 모습 그 자체.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알았어. 그럼 가을 식전에는 나도 나가도록 하지.” “저, 정말로...?” “거짓말은 안 해. 그러니까... 울지마. 부탁이야.” 눈물을 멈추기는커녕 폴라는 세차게 울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안도와 기쁨이 덮쳐온 것이다. 숨을 삼키고 있던 응원단도 간신히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왕비는 잔뜩 떫은 표정으로 창문을 향해 내뱉었다. “거기 세 사람, 이제 그만 들어오는 게 어때?” 서리궁으로 달려왔던 남자들이 이런 소란을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뻘쭘하게 모습을 드러낸 남자들은 주저하며 부용궁으로 들어섰다.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쇼. 폐하께서 직접 부탁하시는데 싫다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 역시 공식행사에 왕비님의 모습이 없는 건 나라의 체면도 걸려 있는 문제이니....” “맞는 말이야. 나라는 물론이고 사보아 공작가의 체면도 걸려 있는 절실한 문제였다고.” 남자들이 열심히 변명을 해대자 왕비는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단장은 그렇다 치지. 새신랑이 신부도 안 데리고 식전에 나오는 건 확실히 문제니까. 이 바보에게 가담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거기 두 명.” 찌릿 노려보는 시선에 라모나 기사단장과 독립기병대장은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다. 그런 두 명을 보며 왕비는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말을 꺼낸 이상 책임은 져야겠어. 지금부터 열심히 댄스 특훈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화려하게 스텝을 밟아보실까.”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린 두 사람과는 반대로 발로는 폭소를 터뜨렸다. 신나게 웃으며 박수까지 쳐댄다. 왕비는 다시 얼어 있는 여자들 쪽을 돌아보며 조금은 부드럽게-라고는 해도 박력은 충분했다-못을 막았다. “물론 이쪽의 부인들께서도 남자 분들의 댄스 신청을 거절하지는 않으시겠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여기사도, 한때 왕의 애첩이었던 현숙한 부인도 이 사나운 미소 앞에서는 무력했다. 얼굴이 굳지 않도록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4장 “어디, 시작해볼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여덟 명. 얼핏 보기에는 연령도 직업도 모두 제각각으로 보인다. 온화한 생김새에 혈색이 좋은 상인이 있는가 하면 일반 병졸로 보이는 어수룩한 남자도 있다. 원숭이 같은 얼굴의 키 작은 남자는 어떻게 봐도 유랑예인. 한눈에 잘사는 집 도련님으로 보이는 유복한 귀족도 있다. 기품 있는 초로의 집사에, 아직 십대로 보이는 앳된 종자도 있었다. 거기에 키도 상당히 크고 근육도 잘 잡힌 체격이면서도 왠지 요염하다는 말을 붙이고 싶을 정도의 미모를 지닌 검은머리의 청년과 처음 입을 연 청년이 있었다. 이쪽은 상당히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이다. 단정한 얼굴은 검은머리의 청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도박장이나 술집, 진한 화장의 작부에 익숙해져 있는 분위기가 풍긴다. 유랑예인이 코웃음을 쳤다. “대단한 진용이군. 목표는 누구야?” 몸집이 작은 청년. 레티시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반문했다. “못 들었어?” 젊은 종자가 힐끔 눈을 들면서 조소를 흘렸다. “아니, 들었지. 세상에 그 레티시아가 계집애 하나에게 고생하다가 놀랍게도 한 번에 격퇴 당했다잖아. 웃을 일이지.” 외모는 사랑스러운 소년으로 보이지만 그 눈빛도 말투에도 교활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유랑예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헛소리는 믿기 힘들더군.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누구를 노리는 거냐고 묻는 거다.” “과연. 내 평판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거군. 뭐 무리도 아닌가.” 레티시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쿡쿡 웃기까지 한다. 귀족 도련님이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웃고 있을 때야? 이제 실행에만 옮기면 되는 일을 미루고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건 모두 마찬가지야.” 병졸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먼저 이쪽 일을 도우라는 지시가 내려온 이상. 어쩔 수 없지.” “뭘 하면 되지?” 상인이 물었다. “네가 조력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면 상당히 곤란한 상대겠지만, 이 정도의 인물들이 모여 있으면 일개 사단도 상대할 수 있어. 신속하고 확실하게 해치우자고.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는 거야?” 웃음을 거두고 레티시아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자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해 보인다. “이번 목표는 정상이 아냐. 먼저 그 점을 명심해줬으면 해.” “호오?” “어떻게 정상이 아니라는 거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짐승이고 괴물이지.” 일동이 실소를 흘렸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해?” “그래. 내가 하는 말이니 더 신빙성이 있지 않아? 잘 들어. 농담이 아니라고. 그 왕비 씨에게는 무대를 만들 수가 없어.” 미묘하게 공기를 흔들렸다. ‘무대를 만든다’ 는 것은 그들의 은어 중 하나로, 실제로 암살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의 목숨을 끊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던지는 무기라면 그 사정 거리에 들어가야 한다. 칼이라면 상대의 바로 옆까지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독이라면 치사량이 존재하고, 확실하게 먹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실행 가능한 상황’ 이 갖춰졌을 때 그들은 ‘무대가 완성됐다’ 고 표현한다. 무대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목표물이 반드시 혼자가 되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냈을 때, 경계가 엄중한 목표에게 시종이나 첩으로서 접근하는 데에 성공했을 경우, 마음을 허락하는 누군가로 변장해서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등이 해당한다. 그 무대, 즉 암살 가능영역을 확보할 수 없다면 현실적으로 암살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무대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 원인은 주로 두 가지. 하나는 일을 맡고 있는 행동원의 솜씨가 나쁠 경우이지만 지금 이 경우에 그 점은 논외이므로, 다른 한 가지-경비가 굉장히 삼엄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서 인질까지 잡아다 간신히 무대로 끌어냈지. 일대 일로 붙으면 내가 이길 테니까. 그런데 반사 신경, 전투 능력, 모든 것이 나랑 대등했어. 얼마나 놀랐는지 원. 덤으로 독도 안 들어.” “독이 안 들어?” “실제로 몸 안에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먹이는 건 불가능해. 다 냄새로 알아채니까.” 이 말에는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병졸이 신중하게 말을 고르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인가? 무대는 만들 수 없고, 만들었나 싶었더니 전투 능력은 너하고 대등한데다 독은 모두 간파한다고?”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초로의 집사가 중얼거렸다. “짐승인가?” “그러니까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 어쨌거나 정상적인 인간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상당히 특이한 상대와 싸운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는데도 실패했어.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공격해야 좋을지 막막한 상대야. 그래서 이렇게 모여달라고 한 거지.” 젊은 종자가 다시 비웃었다. “꼴불견이군. 뭐, 허풍은 감안하더라도 힘든 상대인 건 분명해 보이는군.” “그건 내가 보장하지.” “우선 확인해두겠는데, 우리들은 너에게 협력은 하겠지만 네 지휘하에 들어온 건 아냐. 지금 얘기로는 우리들에게 뭘 요청할지도 정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멋대로 움직여도 상관없겠지?” 상인과 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병졸은 무표정한 채. 하지만 귀족 도련님은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종자의 말에 동조했다. “그 말대로야. 네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상식을 벗어난 생물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그럼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지 그래?” “그럴 생각이야. 네가 손을 든 그 왕비를 내가 처치하면 난 명실 공히 일족 최고의 실력자가 된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이 도발에 레티시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병졸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밖으로 나간다. “어이!” “냅둬. 항상 그렇듯 그거겠지.” 상인이 말한다. 계속 가만히 있던 미모의 청년-반츠아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티시아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집사와 상인은 조금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잘 돌보는군.” “개밥에 도토리끼리 마음이 맞는 거겠지.”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어쩔 거야? 상대는 레티시아에게 괴물 소리를 듣는 여자라고.” “음. 비장군의 소문은 나도 들어봤지만 어차피 허풍이 섞인 소문이라고 생각했었어. 인식을 달리해야겠군. 너도 혼자서 나서는 멍청한 짓은 삼가도록 해.” 단독 행동으로 나서겠다는 젊은 종자를 상인이 나무랐지만, 상대는 코웃음만 칠 뿐 전혀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모르겠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저 녀석이 하는 말을 신경 써야 하는 거야?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냥 계집일 뿐이잖아.” 병졸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그렇지만.... 레티시아를 격퇴한 여자야.” “그런 거지.” “정상일 리가 없어.” 집사와 상인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도 종자는 비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솜씨가 좋다고 해봤자 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을 때 얘기잖아. 저런 병자 따위, 지금이라면 간단히 죽일 수 있을 것 아냐. 왜 굳이 저런 놈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실력에 자신 있는 젊은이의 성급함과 오만함은 어느 세계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사신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인 파로트 일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젊은이를 바라보며 선배들이 쓴웃음을 짓는 것도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넌 저 녀석하고 같이 일해본 적이 없으니까.” 유랑예인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 녀석보다 더한 괴물 따위가 있을 리 없지.” 귀족 도련님 역시 내뱉듯이 말했다. 그들은 레티시아에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 레티시아는 순수한 일족으로서 태어나고 자라나 기술을 갈고 닦아온 자신들보다도 더욱 뛰어났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은 코랄 시내에 있는 어느 귀족의 저택. 저택의 주인은 트루디아인으로 3대 전부터 코랄에 거주하고 있다. 물론 일족의 인간이다. 이런 거점은 각지에 존재하며, 임무에 착수할 때의 사령부나 모임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슬슬 해가 저물어간다. 반츠아는 붉은 석양과 그 그림자로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복도를 둘러보면서 걸어갔다. 어딘가에 레티시아가 쓰러져 있을 터였지만 보이질 않는다. 쓰러져 있으면 거두어줄 생각으로 가다보니 결국 방에 닿고 말았다. 어스름한 방 안을 힐끔 들여다보자, 레티시아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오늘은 보기 드물게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반츠아는 아무렇게나 사지를 쭉 뻗고 누워 있는 레티시아를 바라보다 천천히 곁으로 다가갔다. 반츠아의 동작은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실로 조용하고 기척이 없다. 여유 있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싸울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민하게 사나운 기세로 몸을 움직인다기보다는, 부드럽게 떠올라 적을 덮치는 듯했다. 저 레티시아조차 아름다운 부엉이라며 웃을 정도였다. 침대 바로 옆에 서서 응시하고 있어도 레티시아는 눈을 뜨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망가진 인형처럼 손발을 뻗은 채 누워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으면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강조되어, 깨어 있을 때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귀여운 인상을 준다. 저 정체 모를 불쾌함도, 요기에 가까울 정도의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츠아의 팔이 천천히 들려 올라가고, 그 손가락이 주저하며 레티시아의 얼굴을 향해 나아갔다. 닿을까 말까 하는 순간, 살짝 손을 뺀다. 상대가 눈을 뜨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손을 뻗는다. 손끝이 살짝 뺨을 스쳤지만 반응은 없었다. 눈꺼풀은 굳게 닫힌 채. 충분히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신중하게 만져보았다.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조심스럽게 막대기로 찔러보는 어린아이와 큰 차이가 없는 행동이지만 본인은 지극히 진지했다. 조금씩 대담해지면서 손을 펼쳐 하얀 목을 감싸듯이 쥐어본다. 두 손바닥으로 그 감촉을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도 레티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너무나 위험해서 다가갈 수조차 없는 상대가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한다. 가벼운 현기증조차 느껴졌다. 흥분과도 비슷한 감각. 지금이라면-. 괴물 같은 이 젊은이라도 간단히 죽일 수 있다. 꼭 죽여야 할 만한 이유나 원한은 없다. 지금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것뿐이다. 반츠아 역시 숙련된 인간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물론 진심으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 필요는 없지만, 아주 조금만 힘을 줘본다면.... 눈이 번쩍 뜨였다. 찌르는 듯한 시선이 똑바로 반츠아를 노려보며 씨익 웃는다. “해볼래?” 그 말이 나오는 것보다도 먼저, 반츠아의 손은 뜨거운 쇠에라도 닿은 듯이 레티시아에게서 떨어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반츠아는 말했다. “아니....” 정말로 공격당하는 줄만 알았다. 레티시아는 변함 없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반츠아를 위압하고 있다. 형용하기 힘든 예리함과 무서운 박력이 담긴 눈, 파충류와 고양이의 눈에서 각각 기분 나쁜 점만 모아놓은 듯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눈. 그 눈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다. “죽일 생각이 없으면 장난치지 마. 이쪽은 움직일 수 없으니까.” “일어나 있으면서 자는 척하니까 그렇지.” “자려고 했는데 누구 씨가 깨웠다고.” 입을 삐죽 내밀면서 불평한다. 그런 움직임만은 자유로운 듯 했다. 레티시아의 몸은 때때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어째서인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뛰어난 의술과 지식을 지니고 있는 일족의 의사들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되고 만다. 일년에 두어 번 정도 비율로 그렇게 된다. 본인은 이 현상을 시간제한이라고 불렀다. 희귀병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사실 원래부터 레티시아는 특이 체질이었다.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다고 한다’ 라는 것은, 통증이란 본인의 표현으로밖에 측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츠아도 레티시아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아픔’ 과 같은 것인지 어떤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마비 현상에 대해서, 처음에는 일족의 지도자들도 믿지 않았다. 그때 레티시아는 아직 어린애였고, 그 이름이 딱 어울릴 정도의 사랑스러운 소년이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과 훈련을 받는 도중 갑자기 털썩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어딘가 아파 보이는 기색도 없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입만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인다. 일어설 수 없다고 하면 믿을 리가 없었다. 지도자들은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화를 냈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면 훈련하기 싫어서 꾀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엄하게 꾸중하고 타일러도 효과가 없자 두들겨 패고 발로 찼지만 소년은 바닥에 누운 채 꼼짝하려 들지 않았다. 마침내 화가 폭발한 지도자 중 한 명이 이렇게 하면 꾀도 부릴 수 없을 거라며, 새빨갛게 달군 부젓가락을 난로에서 집어 들고 레티시아의 옆구리에 가져다 대었다. 어떠한 인간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오를 만한 상황이건만 어린 레티시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살이 타는 냄새가 꽉 차는데도, 까맣게 그슬려가는 자신의 몸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상적인 감각 기관을 가진 인간이라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통증이다. 이런 상황이면 화상의 통증을 느끼는 것-적어도 보통 사람처럼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주위 사람들은 경악했다. 장난도, 꾀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간신히 이해하고 당황하며 치료를 시작했다. 이 얘기에는 끔찍한 후일담이 있다. 부젓가락을 들이댄 대가로 레티시아가 그 지도자의 목을 깨끗이 베어버렸던 것이다. 즉사였다. 어른들이 창백하게 질려 말문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 사랑스러운 어린이는 이렇게 말했다. “불만 있어...?” 그 이후로 지도자들마저도 레티시아만은 조심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스케니아로 이동한 뒤에 반츠아는 그런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속한 일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레가의 마을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성령은 이쪽이 편한 대로 조종되는 유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파로트 백작도 일족의 지도자들도 반츠아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며 환대해주었다. 너는 특별히 우수하기 때문에 여기로 불려온 거라고 누누히 말했지만, 그 암시는 더 이상 반츠아에게 먹히지 않았다. 스케니아의 본거지 역시 결국 마을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 태어난 행동원들은 일족의 이름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경멸하며 파로트 일족을 계승하는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있지만 우스운 얘기다. 그것은 마을의 행동원들이 일반인에 대해 품는 감정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저 일족의 이름을 아는 행동원은 마을의 행동원보다 고도의 기술을 배우고 더 많은 정보를 제공받는 것뿐. 하지만 레티시아만이 달랐다. 레티시아만이 그 안에서도 이방인이었다. 그는 파로트 일족 출신이 아니다. 어렸을 때 성령에게 이끌려 왔다고 한다. 레티시아라는 이름도 그때 얻은 것이다. 그때의 그는, 어떤 지도자의 말을 빌자면 겨우 예닐곱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지도자는 적어도 8, 9세 정도로 영리했다고 말한다. 알고 있는 것은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방인 꼬마가 기묘하리 만치 우수한 전투 능력의 소유자로 성장했다는 사실뿐이다. 레티시아는 레티시아대로 마을의 생존자인 반츠아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어나 있을 때는 근처에도 안 오는 주제에 누워 있으면 달라붙어서 치근치근 만져대고, 기분 더러워. 너, 설마 이상한 취미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침대에 드러누운 상대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반츠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동면 중이라면 독사라도 안전하니까. 적어도 물릴 염려는 없어. 마음만 있으면 죽일 수도 있지.” “그럼 해볼래?” 그는 웃고 있었다.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반츠아는 레티시아의 이런 구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 죽을 몸이라는 것은 반츠아 역시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오래 사는 건 기대조차 않는다. 그래도 죽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데도, 심장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데도 손발 한번 써보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그런 죽음만은 절대로 사양이다. 정말로 견딜 수 없었다. 싸우는 방법, 그리고 적을 죽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다르다. 이런 상태에서 습격을 받아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는 거고, 살아남는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공격했던 누군가를 죽일 뿐. 그런 식으로 선을 그어둔 듯했다. 분명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인간이라는 생물이-이 젊은이가 인간이라는 가정하에-죽음의 공포를 그렇게까지 초월할 수 있는지. 반츠아는 다시 몸을 내밀어 레티시아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피부에 닿을락 말락 하는 순간, 상대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눈이 사악 가늘어졌다. 먹이를 붙잡은 듯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너, 내가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거지?” “.......” “그러는 척만 하고 있을 뿐이지, 실은 움직일 수 있는 상태라면 어쩌겠어?” 반츠아는 어색하게 손놀림을 멈췄다. 더욱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자신의 온몸을 핥듯이 올려다보고 있다. 무슨 속셈인지 아무도 읽어낼 수 없으며 예측도 허락하지 않는 눈. ‘시간제한’ 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회복된다. 혹시 회복되었다면 반츠아에게 승산은 없다. 이 거리는 완전히 레티시아의 독무대였다. 공격을 가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번개로 변해 눈앞에서 사라진다. 독사의 반격은 그 정도로 빠르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츠아 쪽. 숨이 멎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무방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레티시아와,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목을 조를 듯한 자세인 반츠아의 승부. 하지만 반츠아는 스스로 그 무대에서 내려왔다. 조금 손을 떼, 원래대로 레티시아에게서 떨어진 것이다. “뭐야. 안 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료를 보며, 장신의 청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넌... 이제 와서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정말 나쁜 놈이야.” “이제 와서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넌 몇 번을 놀려도 질리지 않고 놀아주니까 귀엽다고.” 웃음이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로 이런 소리를 해댄다.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참말인지 실로 알 수 없었다. 반츠아가 얼굴을 찌푸리면 방에서 나가자, 레티시아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원을 마주 보고 있는 2층 방이다. 초여름의 상쾌한 밤공기와 싱그러운 초목의 향기가 흘러 들어온다. 그 사이에 섞여 여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검은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얼굴이 창 밖에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바깥은 공중. 발을 디딜 장소가 있을 리 없지만 이 여자에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하얀 두 팔을 창틀에 얹고 뺨을 짚으면서 요염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그만 포기하고 이쪽으로 오는 게 어때?” 레티시아는 여자를 힐끗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유령이 권하는 건 구미가 안 당기는 걸.” “호오.” “재촉 안 해도 그렇게 기다리게는 안 할 거야.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지. 그 망가진 몸에 아직도 미련이 있어?” “지금은 있어. 즐거움이 생겼거든.” “태양을 죽일 건가?” 여자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비쳐 보일 듯이 새하얀 얼굴과 길다란 검은머리가 물 속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천천히 흔들린다. “그 상대는 강하다고. 게다가 곁에는 달까지 있지.” “그 아가씨 말인가. 그건 반츠아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했어. 내가 가로챌 수는 없다고.” 웃음을 짓던 레티시아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이 찾던 게 그 왕비야?” “그래. 틀림없어.” “무슨 소리야. 처음엔 날 태양이라고 생각했던 주제에.” 흑요석 같은 여자의 눈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네 존재감은 충분히 태양이라고 부를 만해. 하지만 속성이 다르지. 넌 검은 태양이다.” 레티시아도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 거창한 호칭 자체는 상관 않더라도, 자신과 그 왕비는 같은 동전의 위아래였다. 이론이 아니라,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럼 반츠아는 뭐야?” “굳이 말하자면 초승달일까. 달로서 존재하면서 절대로 빛나는 적은 없어.” “뭔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겠지. 나도 확실하게는 알 수 없으니.” “뭐야, 그건. 자기도 모르면서 남에게 아무렇게나 지껄인 거야?” “실례로군. 난 거짓말은 한 적 없어.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해뒀을 텐데.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그 몸, 정말로 회복한 거야?” “아니. 아까부터 일어나려고 하는데 조금도 안 움직여.” 육체가 없는 여자는-이렇게 말하는 게 옳다면-배꼽을 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거의 구르다시피 웃으면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5장 델피니아의 여름은 평온하게 흘러갔고, 왕궁만이 식전 준비로 한창 떠들썩했다. 귀부인들은 어떤 드레스를 입을 것인지를 놓고 제각각 잔뜩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식전 전날에는 사보아 공작의 결혼식이 있다. 두 행사에 다 초대를 받은 여성들에게 이것은 절실한 문제였다. 양쪽 모두에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식전에는 왕비까지 참석한다고 한다. 이 소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성 안에 퍼져 부인들의 열의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얼마 전 왕비와의 대결에서 참패를 맛보았던 그로브너 부인 일파는 이번에야말로 질 수 없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식전용 드레스를 마련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왕비에 대한 경쟁심 때문인지 그 얇은 비단 드레스와 똑같은 옷을 만들도록 시키기까지 했다. 재단사에게 몇 번이나 디자인을 확인하고 재봉에 자신이 있는 하녀들에게 몇 번이나 연습삼아 만들게 해서 상당히 비슷한 물건을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남편인 그로브너 후작은 이 드레스를 보고 경악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디자인 자체가 너무나도 첨단이었다. 맨살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얇은 천인데다, 가슴을 크게 트고 팔도 팔꿈치가지 그대로 드러냈으므로 후작의 눈에는 알몸이나 다름없어 보였던 것이다. 순간 자기 부인이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편의 맹렬한 반대에, 부인은 이 옷이 바로 비전하께서 입었던 드레스라고 반론했다. 고귀한 분이 하시는 일이니 옳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후작도 물러나지 않았고, 남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역할은 비전하께 맡겨두라고 주장했다. 부인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전개였다. 떨떠름하게 포기하기는 했지만, 다시금 후작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의 열의와 거액의 비용을 들여 새 드레스를 주문했다. 그런 한편, 이번 식전에 왕비가 어떤 옷을 입고 올 것인가에 대해서도 필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가장 신분이 높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여성의 옷에 귀부인들이 심상치 않은 관심을 보내며 필사적으로 따라 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한 광경이다. 하지만 델피니아 왕궁에 ‘왕비’ 가 탄생한 이래 거의 1년 이상이 흘렀건만, 이런 사태가 발생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 당사자 중 한 명인 발로는 부용궁을 찾아와 다시금 폴라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야아, 정말 당신은 기적 같은 사람입니다.”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지 웃는다. “저도 언제나 공식 석상에 형님과 왕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실현할 능력이 없었지요. 정말 감탄했습니다.” 성인 남자에게, 그것도 대공작이라는 최고 지위의 귀족에게 감사 인사를 받자 폴라는 잔뜩 긴장했다. “아니오, 부끄러울 뿐입니다. 좀더 제대로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폐하까지 그런 말을 들으셨는데도 저는 울기만 했어요.” 국왕의 말에 의하면 설득의 열쇠는 폴라라는 것이었다. 왕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폴라에게 달려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힘내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여러 가지로 드릴 말씀도 생각해뒀었는데....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반성 태세에 들어간 폴라를 바라보며, 발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힘을 낸들 이 사람이 왕비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람쥐를 맹금류가 갇혀 있는 우리에 집어넣고 싸우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발버둥치다 잡아먹힐 것이 눈에 선했다. 국왕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경위야 어쨌든 간에 왕비는 식전에 참석하게 되었으니까요.” “예,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왕비님께서 다정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신에게.”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서 또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왕비는 의지가 강한 인간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울고 매달려도 본인이 싫으면 죽어도 뜻을 꺾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왕비가 폴라의 눈물 앞에서만은 약한 모습을 보인다. 발로의 눈에는 여전히 평범한 시골 처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폴라였지만,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던 일을 해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멋진 선물을 보내주셨더군요. 로자몬드도 기뻐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폴라는 서둘러 아기 저고리를 한 벌 더 만들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성품보다 개인이 정성 들여서 만드는 쪽이 압도적으로 질이 좋은데다 선물로서도 더 바람직했다. 솜씨에 자신 있는 귀부인들은 저마다 직접 선물을 만들어 보냈지만, 폴라가 만든 것은 벨민스터 가문의 여자들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발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멋진 물건을 보내주셨으니 저도 뭔가 답례품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당신도 슬슬....” 폴라는 조금 놀라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공작님. 너무 성급하세요. 저도 아기는 빨리 생겼으면 좋겠지만, 이것만은....” “맞는 말입니다.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게 기다리고만 있어도 곤란하지요. 당신은 왕위를 이을 아이를 낳아줘야 하니까요.” 그러자 커다란 눈망울이 이상한 듯이 발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태어난 아기님은 아들이셨지요?” “예, 한 명은요.” 폴라는 살짝 고개를 돌려 주위에 테스 부인이나 다른 하인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그 아기님이 아닐까요. 선대 국왕의 여동생 아에라님의 손자, 즉 선선대 국왕폐하의 증손이 되시는 걸요. 어머님이 벨민스터 공작님도 왕가에 가까운 혈통이시니 유서를 따진다면 그 아기님이 왕관을 이어받는 게 옳을 겁니다.” 발로는 씨익 웃으면서-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맨발로 도망갈 만한 웃음이었다-물었다.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한 건?” “폐하입니다. 아니 입 밖으로 그런 말씀을 꺼내신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호오?” 조금 놀라고 말았다. 남편의 마음속을 그 정도까지 읽어낼 수 있는 여자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건 찬성할 수 없군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할지....” 폴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이니까 말씀드린 겁니다. 폐하께서도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시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작님께서도 모르는 걸로 덮어주셨으면 합니다.” 발로는 깜짝 상자라도 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껌벅거리며 폴라를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이야, 이거... 놀랐습니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군요. 제 결혼식에는 반드시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형님의 대리인으로서. 당신의 동생 분이 경비를 맡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동생이 공작님의 결혼식 때에 경비를요?” “예. 다음날의 식전만큼은 못하겠지만, 역시 온 대륙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는 자리니까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가는 국제 문제로도 비화할 수 있습니다.” “어머.... 그 애가 그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 발로는 조금 웃었다. 누나는 빈객으로서 상석에 앉아 있는데 그 동생은 일개 병사로 자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니, 우스운 얘기였다. “혹시 원하신다면 제 부하가 아니라 국왕의 애첩의 동생으로서 특별히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시험해볼 생각으로 말을 꺼냈다. 실은 바로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캐리건이 상기된 얼굴로 발로에게 항의하러 달려왔던 것이다. 캐리건은 틸레든 기사단의 견습 단원으로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다. 그런 캐리건이 시뻘건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이번에 절 기사로 임명하신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는 올해 겨우 열여덟 살에 지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최소한 스무 살이 되지 않으면 기사로는 임명할 수 없다.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느냐고 발로가 대답하자, 소년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폐하의 애첩의 동생이라서 단장님이 절 특별 취급하고, 조만간 기사로 임명하실 게 틀림없다고 동료들이 뒤에서 수군대고 있습니다!” “과연. 그래서 네 녀석은 그 소문을 믿나?” “아닙니다! 확인하러 왔습니다!” 마찬가지다. 확인하러 온 거라고 말은 하면서도, 소년의 얼굴에는 명백하게 비난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설마 단장이 그런 식으로 편애를 할 줄은 몰랐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소문이 맞다고 긍정하면 그대로 폭발하면서 상관이든 뭐든 가리지 않고 덤벼들려고 온 것이겠지만, 그런 반면에 작으나마 기대 역시 품고 있는 듯했다. 수단이야 어쨌든 간에 출세의 기회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었다. 발로는 그런 소년의 생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확인하러 달려왔다는 단순함이 기가 막히고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폭소를 터뜨릴 뻔하면서도 겉으로만은 무섭고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럼 대답해주지. 나 틸레든 기사단장 노라 발로는 기사단의 종자 캐리건 달시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네 녀석에게는 아직 말도 주어지지 않았으니 도보로 승부다. 창이든 검이든 무기는 좋을 대로 고르게 해주지.” “예엣?!” 발로는 깜짝 놀라는 캐리건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누구 동생이든 왕족의 일원이든 승격 조건은 마찬가지야! 네 녀석은 이 몸이 그런 쓸데없는 이유에 흔들릴 남자라고 생각했나? 그렇게까지 자신이 속한 기사단의 지휘관을 얕보고 있어? 이건 나에 대한 완벽한 모욕이야. 충분히 결투를 할 만한 이유가 되지.” 소년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에는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실례했습니다!” 바닥에 머리가 닿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굳어서 어색한 발걸음으로 방에서 나가려 했지만, 발로는 심술궂게 소년의 등을 향해 말을 걸었다. “걱정 안 해도 넌 당분간 견습이야. 아니 견습 기간이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군. 지휘관을 신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정식 기사로 인정할 수는 없으니까.” 뒤를 돌아본 소년은 심하게 상처받은 얼굴이 되면서, 그 큰 눈으로 원망하듯 발로를 바라보았다. 꾸중을 들은 강아지 같은 얼굴이 너무나도 우스운 나머지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웃어버렸다. “후회할 거라면 처음부터 깊이 생각해보고 나서 항의하러 와. 멍청아.” 그렇게 손쉽게 소년을 쫓아버렸지만, 웃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캐리건마저 자신을 보는 주위의 눈이 변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조금은 그 덕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나 쪽은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터였다. 하지만 폴라는 정말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폐하의 지시이니 참석하지만 그 아이를 초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신분이 높은 손님들이 많이 계시겠지요? 그 아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임무일 테니 마음껏 일하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다시금 웃음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실컷 부려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면서. 부용궁에서 나온 발로는 곧바로 본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이븐과 나시아스가 화려한 댄스를 선보이기 위해 특별 강습을 받고 있었다. 나시아스는 어쨌거나, 이븐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미지의 체험이었다. 진땀을 빼고 있다. 그럼에도 의외로 감은 좋은지 간신히 모양새는 날 정도로 왕비와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발을 밟고 밟히는 격투나 다름없었다. “우선 말이야, 난 산적이야. 산적이라는 건 싸움만 잘하면 최고지! 이렇게 뱅글뱅글 돌면서 춤출 필요는 없다고!” 복잡한 스텝을 밟는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이븐은 땀 투성이가 되어 불평을 터뜨렸다. 나시아스도 곤란했다. 그의 경우는 또 사정이 다르다. 가능하면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이 춤을 추게 되면 귀부인들로부터 댄스 신청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곤란하군요. 지금까지 이런 건 제 친구의 영역이었는데.” “같은 기사단장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거야?” 왕비가 한마디를 던졌다. 벽 대부분이 거울로 뒤덮인 사치스러운 연습장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산적과 왕비-오늘은 긴치마를 입고 있지만, 아무래도 셰라의 시녀복을 빼앗아 입고 온 것 같았다-의 모습이 사방에 비치고 있다. 나시아스는 혼자서 거울을 바라보며 자세를 다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화려한 자리에는 익숙지 않아서, 춤은 못 추는 걸로 해두고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거짓말은 아닌 걸, 나시아스. 춤이 굉장히 서툴러. 악기는 그렇게 잘 다루면서 왜 그래?” “그건 취미이니까요. 기사단의 수업 과목에 댄스는 없습니다. 저 정도의 신분이면 익숙하지 않은 게 보통입니다.” 그때 마침 그 자리에 풍류라면 뭐든지 해치우는 공작이 얼굴을 내밀었고,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실컷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나시아스를 보면서는 더욱 그랬다. “언젠가 이런 때에 대비해서 미리 댄스도 연습해두라고 했더니. 남의 충고를 무시한 벌이다.” “내 임무는 서쪽 국경 수비야. 부인들 상대는 전면적으로 너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아직도 불평을 해대고 있다. 하지만 왕비도 발로를 거들며 차갑게 못을 박았다. “자업자득이야. 그 바보가 하는 말에 신나서 달려드니 이렇게 되는 거지.” 이븐이 딱 잘라 단언했다. “그건 저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어째 폐하에게 그대로 속아넘어간 것 같다 이거죠.” 왕비를 식전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포위망을 편 것이, 설마 자기들까지 식전 현장에 끌려 나가는 결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싫다고 해봤자 왕비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 자기도 집어치우겠다고 나오겠지. 결국 가장 득을 본 것은 국왕이라는 말이 된다. 왕비와 애첩, 그리고 지금까지 얼굴을 내밀기 꺼려하던 심복 부하 두 명을 한꺼번에 공식 석상에 내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시 화가 났는지 왕비가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한 번 기합을 넣어둬야 할까....” “왕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애초에 왜 당신이 이 서투른 놈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지? 이미 결혼식 때 피로연에 대비해서 완벽하게 익혀뒀을 텐데.” “다 까먹었다니까.” “휴우....” “뭐, 확실히 연습해둘 필요는 있겠군요. 무도회 자리에서 폐하의 발이라도 밟으면 곤란할 테니.” “뭐 하러 지금까지 그런 걸 기억하고 있겠어.” 발로는 짜증을 내는 왕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적어도 이쪽 산적 대장의 구부정한 자세보다는 훨씬 나아.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거든 더 연습하지 그래, 독립기병대장.” 이븐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지만 아직 연습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므로 반론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연습장에서 물러나면서, 나시아스는 농담 반 위로 반으로 이븐에게 말했다. “제 친구의 입버릇은 신경 쓰지 말아주십시오. 그 녀석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심술궂게 대하니까요.” “당신에게도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잔뜩 괴롭혀댔지요. 덕분에 동료들 중 누구에게도 질투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븐도 감이 좋은 인간인 만치 그 말뜻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그런 얘기로군요. 저 약아빠진 자식, 왕족이나 다름없는 공작가 도련님에게 꼬리치면서....” “보통은 그런 소리도 듣겠지만, 제 경우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까지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지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까?” “글쎄요.... 원래 저렇게 꼬인 성격이니까요. 당신의 그 입바른 언행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신분이고 뭐고 상관없이 할 말은 다 하지 않습니까?” 나시아스는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건 말입니다. 제가 엄청난 철면피이고,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등할 리가 없지요. 같은 기사단장이라는 점에서는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만.” “그럼 철면피라 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뭐, 이런 소리를 하는 저부터도 폐하를 너라고 부르는 인간이니 남의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요.” 푸른 눈에 살짝 비웃음이 떠올랐다. 나시아스는 처음부터 상대가 하늘과 땅 정도로 신분이 다른 대귀족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븐은 몰랐다. 월은 옛날에도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의 신분은 아니었다. 어린 소년들끼리의 거친 사귐이었고, 검술 연습쯤 되면 서로 두들겨 패는 일도 흔했다. 다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페르난 백작은 쓴웃음만 지을 뿐 자식의 친구를 꾸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때와 똑같은 짓을 했다가는 그대로 감옥행이다. 참으로 우스운 얘기이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규칙이고 상식이다. 나시아스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도 작위나 영지를 사절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슬슬 포기하고 출세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곤란하실 텐데요.” “고맙게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출생이 이래서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귀족님이라는 게 좋아지지가 않아서요.” “이런, 저도 일단은 그 귀족에 들어갑니다. 당신의 소꿉친구도 그랬을 텐데요. 게다가 그분은 지금 이 나라의 국왕폐하이십니다.” 이븐은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저도 어느 의미로는 당신 친구하고 비슷할 정도로 성격이 꼬여서 말입니다. 내가 산적이라도 상관없다면 힘이 되어주겠다고, 계속 친구로 있어주겠다고.... 뭐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 사귈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만, 높으신 분들이 하는 대로 억지로 맞춰줄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싸구려는 아니라서 말이죠.” “싸구려... 라고요?” “산적들이 흔히 하는 소리입니다. 똑똑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사람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바보 같아도.” 나시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출세를 거부하니 옆에서는 기막혀할 테고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어쩐지 이븐의 심정을 잘 알 것 같기도 했다. 온 궁중의 여성들이 새 드레스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폴라에게도 역시 그것은 골치 아픈 문제였다. 시녀장도, 식전장관도 너무 초라한 옷은 폐하의 체면을 손상시키니 특별히 편성한 예산으로 드레스를 만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예산이라는 것이 엄청난 규모로, 폴라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심장발작을 일어킬 뻔했다. 달시니 가문의 약 10년분 수입에 맞먹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 공작의 결혼식과 식전에 입을 드레스 두 벌을-200벌의 착오가 아닐까 싶었지만-만들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국왕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 고급 드레스가 비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낭비가 아닐까. 정말 이렇게까지 돈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고민한 끝에, 폴라는 셰라에게 의논을 했다. 폴라에게 있어서 셰라는 처음부터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셰라는 폴라의 고민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물건에 돈을 들이려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자수 하나만 해도 기술자의 수준과 들이는 시간에 따라 가격이 뛰어오른다. 숙련된 기술자 열 명이 달려들어서 2년 동안 만들어내는 정도의 ‘작품’ 쯤 되면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이 붙는다. 진주를 달거나 남국의 화려한 열대조 깃털을 장식에 사용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군함 한 척 값에 필적하는 드레스가 되고 만다. 그런 낭비를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금액만으로도 아름다운 옷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셰라는 고심한 끝에 결혼식용으로는 화려한 자수와 레이스로 장식한 옅은 복숭아색 드레스를, 식전용으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흰 능직에 담홍색의 비단실과 금실, 장식구슬 등을 충분히 이용해 소매와 치맛단에 크고 작은 장미 문양을 넣기로 했다. 장식품 준비도 잊지 않았다. 분홍색 레이스 쪽에는 금관과 목걸이를, 흰 능직 드레스에는 진주와 금에 연한 색조의 홍옥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곁들이기로 했다. 호출된 재단사나 장인도 셰라의 주문을 듣고서 자세한 문양은 도면을 그려가며 확인했다. 국왕의 애첩이 입을 의상이니 자신들의 솜씨를 뽐낼 둘도 없는 기회였다. 심상치 않은 기백으로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완성된 드레스를 입어보는 날에는 샤미안과 라티나도 부용궁에 찾아왔다. 그런 자리에는 새 옷에 대한 감상을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드레스는 양쪽 모두 훌륭한 작품으로 폴라에게 잘 어울렸다. 너무 무겁지 않으며 청초하고 가련한 인상을 강조한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남자의 출입이 봉쇄된 부용궁에서, 그 여주인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셰라라는 사실에 두 손님들은 당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폴라는 속옷 차림으로 셰라를 향해 웃음을 던지고 있다. 차마 그런 상황에서 사실을 밝힐 수는 없고-아마도 기절할 것이다-셰라 역시 미안한 듯이 두 사람에게 눈짓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 입을 다물면 모든 것이 평화롭게 해결된다. 두 사람은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며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외출 중이던 하녀가 돌아왔다. 모략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은 레나 대신 들어온 아가씨로 이름은 메리였다. 그 메리 역시 아름답게 치장한 주인의 모습에 환성을 지르며 감탄을 연발하다가, 생각난 듯이 샤미안에게 말했다. “저, 바깥에서 남자 분이 기다리십니다.” “날?” “예. 댁을 방문했다가 이쪽에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날이 아니었다면 안으로 안내했겠지만, 들어오실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렸더니 바깥에서 기다리시겠다고....” “누구시지?” “이름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이 궁에서는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인데요. 키가 크고 잘생긴 젊은 분이었습니다.” 누구일까. 아직 시간은 한낮이다. 약속도 없이 정문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일 터. 그 사람은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나무그늘에 서 있었다. 나이는 샤미안보다 약간 위.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으로 잘 그을린 피부는 햇빛 아래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밝은 갈색 머리와 맑고 푸른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몸차림도 깔끔하다. 한눈에도 호감이 가는 청년이었지만 틀림없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샤미안을 보고 정중하게 절을 했다. “도라 백작가의 샤미안 양이시지요?” “예.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수상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저도 당신을 처음 뵙는 거니까요. 웹스톡의 제임스 윌로비입니다.” 예전부터 얘기는 듣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을 만나게 되자 샤미안은 가볍게 동요했다. “당신이....” “예.” 제임스는 똑바로 샤미안을 바라보았다. 침착하고 차분한 눈이다. 다시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가는 상대를 부모들의 승낙이나 중개도 없이 본인이 직접 만나러 왔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제임스의 얼굴은 상당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본인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하면 될 일이다. 부용궁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해야 할 얘기는 아닐 텐데. “뭔가... 사정이 있으신지요?” 이렇게 묻자 제임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는 예전부터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결혼을 반대하고 계시지요. 그 사람의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의사도 무시하고 당신의 아버님께 혼담을 넣으신 것 같습니다.” “어머나....” “설마 그런 얘기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에게서 당신과 선을 보라는 명령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당신과 당신의 아버님께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샤미안은 복잡하면서도 허탈했다. 이 사람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얼굴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쓸쓸한 듯한, 견딜 수 없이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임스는 맑은 눈으로 샤미안을 바라보고 있다. “도라 백작가의 명성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집안도 훌륭하고 아버님의 인격도 고결한데다 그 따님께서도 아름답고 총명하며 수많은 무훈을 쌓으셨다고요.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상대입니다. 당신 같은 분을 거절하다니 무례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이미 정하신 분이 있으신 걸요. 하지만... 가난한 분이라고 하셨지요.” “예. 그녀는 당신과는 달리 신분도 재산도 없습니다. 영민의 딸이니까요.” 이번에야말로 샤미안은 숨을 삼켰다. 그래서는 이 사람의 아버지가 허락할 리가 없다. 농노에서 왕후귀족에 이르기까지, 자신들과 다른 계층의 사람과 깊이 관여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봉건제 사회였다. “제임스님....”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제임스 역시 괴로워 보였다. “아버지는 그녀를 아내로 맞으면 저와 의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만들겠다고, 그러기 싫으면 당신을 택하라고요. 물론 당신이 훌륭한 여성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도 기꺼이 당신에게 청혼을 했겠지요. 하지만 두 번 다시 웹스톡에 돌아갈 수 없게 되더라도, 윌로비의 이름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제 마음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뱃속에는 제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축하한다고 말해야하겠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해졌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버님은 그래도 두 분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십니까?” “예.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제 아이일 리가 없다고, 우리 집의 재산을 노리고 헛소리를 하는 게 분명하다고요. 아버지의 그런 얘기를 들으니 어쩐지 국왕폐하의 어머님 얘기가 생각나더군요.” 샤미안도 국왕의 생모가 심한 중상모략을 당해 왕궁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분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는 반드시 그런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람은 절대로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길 만한 여자가 아닙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하지만 윌로비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에게 있어서는 그 여자도, 뱃속의 아이도 자기 아들을 속이는 해로운 존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머지 경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러 영지에서 쫓아내려 했다고 한다. “다행히 유산만은 모면했지만 본래대로라면 시아버지가 될 사람에게 발로 차이고 두들겨 맞은 겁니다. 그녀는 심하게 상처를 받았고 저도 이제야 결심이 섰습니다. 더 빨리 이렇게 했어야 했지만 실은..., 그녀를 데리고 집을 뛰쳐나오는 길입니다.” “예엣?!” 샤미안은 경악했다. 그래서는 윌로비 경도 자신이 한 말대로 이 사람을 가문에서 추방해버릴 것이 틀림없다.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차남 이하로 태어난 사람에게 있어서 파문만큼 무거운 처벌은 없다. 장남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하는 것 못지 않게 상대를 폐인으로 만드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자신이 속했던 사회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일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고향이나 자신의 가족들과 모든 연계를 박탈당한 채 완전한 남남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자기에게 남은 것은 신분이 다른 부인과 태어날 아이, 장래에 대한 커다란 불안뿐일 텐데도 제임스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집에는 형님이 있으니 윌로비 집안의 존속에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조만간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님께 말씀드릴 거라 생각합니다. 단지 제 행위는 절대로 당신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그 점만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말을 끝낸 제임스는 절을 하고 돌아섰다. 경악과 충격 속에서도, 그 깨끗한 마음가짐에는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샤미안은 입을 열었다. “제임스님!” 뒤를 돌아본 남자의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푸른 눈이 인상에 깊이 박혔다. 묘하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샤미안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졌다. “행복하세요.” 윌로비 경의 차남도 싱긋 웃었다. 다시 절을 하고 멀어져가는 그 등을 샤미안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부용궁에는 왕비가 찾아와 있었다. 이쪽도 새로 맞춘 의상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때에는 이미 드레스를 벗어버린 상태였지만, 왕비는 열심히 폴라의 드레스를 살펴보면서 장식품이나 구두까지 철저하게 점검했다. “예쁘긴 하지만, 이 드레스에 이 장식만 가지고는 좀 허전하지 않아?” 상당히 채점이 까다롭다. “당일에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금가루를 뿌리려고 합니다. 광택이 도는 깨끗한 머릿결이니 분명히 잘 어울리실 거예요.” 셰라가 대답했다. 완전히 의상 담당자로서의 자세가 잡혀 있다. 왕비는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 듯했다. “으음.... 그건 괜찮지만 조금만 더 화려한 편이 낫지 않아?” “리.... 당신은 자신이 입을 옷은 편한 게 좋다, 소박한 게 좋다고 언제나 말씀하시면서....” “하지만 모처럼이니까 좀 화려하게..., 확 꾸며주고 싶잖아.”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이라는 게 있습니다! 폴라님은 아직 젊으시고 귀여운 분이니 그 매력을 살려야지요.” “네 실력이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야. 이걸로는 정말이지..., 주렁주렁 치장하고 올 심술쟁이 할멈들에게 얕보이지 않을까, 그게 신경 쓰여서 그래.” 엔도바 부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굉장히 잘 어울리니까요. 그날 모두가 폴라님께 시선을 빼앗겨버릴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칭찬을 들은 폴라는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조연이니까.... 왕비님은 어떤 옷을 입으실 건가요?”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연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난 폴라가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는 걸 기대하고 있어.” “그런.... 저 같은 것이 아무리 치장한들 왕비님처럼 될 수는 없는 걸요.” 자신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하더라도 참새는 결국 참새에 지나지 않는다. 백조에게는 이길 수 없다. 아니 백조라는 단어도 왕비에게는 부족한 것만 같다. 공작새-아니 공작은 너무 유약한 느낌이 드니 황금빛 매는 어떨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왕비가 더욱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폴라는 내가 될 수 없겠지만, 나도 폴라가 될 수 없으니까 마찬가지야.” “왕비님이 저처럼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폴라가 나처럼 될 필요도 없어.” 두 사람 모두 진지하기 짝이 없다. 엔도바 부인이 웃음을 참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 모두 그 정도로 해두십시오. 비전하,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폴라님의 젊음은 보는 사람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겁니다. 저는 비전하의 드레스에 흥미가 갑니다만, 조금만 보여주실 수는 없을까요?” 폴라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번에 입으셨던 드레스도 굉장히 멋졌어요. 굉장히 참신하고.” 그때 왕비가 입었던 드레스를 떠올리고 황홀해하면서도 자기가 입기에는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슴도 팔도 그렇게 맨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으니, 자칫하면 파렴치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 옷은 왕비가 입었기 때문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드레스는 셰라님이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디선가 전문적으로 복식에 대한 공부를 하셨나요?” “부탁이니 경어는 쓰지 말아주십시오. 그 옷을 고안한 건 왕비님입니다. 어쨌거나 편한 옷이 좋다면서 이렇게는 안 되겠느냐고 그려주셨지요. 본 적도 없는 형태라 고생은 했습니다만 간신히....” “그럼 이번에는?” “이번 것도 특이하지요. 천은 굉장히 두꺼워졌지만 굉장히 선을 가늘게 뽑아서.... 다른 사람이 입으면 초라하다는 말이 나오겠지요. 아직 부분 부분 나뉜 채로 자수공방에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만, 꿰매어 완성하고 머리 모양을 다듬은 뒤에 대담한 보석을 장식하면 끝입니다. 분명히 멋진 드레스가 되겠지요.” 폴라도, 라티나도, 새로 온 하녀 메리도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을 반짝였다. “분명히 식전에 온 사람들 모두가 숨을 삼키면서 왕비님을 바라볼 겁니다.” “나이 값도 못하고 벌써부터 두근거리는군요.” “정말 기대되네요. 아주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저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왕비만이 쀼루퉁한 표정으로 셰라를 향해 반격에 나섰다. “내 걱정 하는 것도 좋지만 넌 어쩔 건데? 준비는 잘하고 있겠지?” 셰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저..., 일단 엔도바 부인께 상의는 드려보았습니다만, 진심이십니까?” 폴라가 깜짝 놀라며 라티나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지요?” “예, 그게..., 비전하께서 장난을 치실 생각으로, 저를 양가집 따님으로 변장시켜서 식전에 참석시키려고 하십니다만.... 정말로 그러실 생각이십니까?” “상관없잖아. 셰라라면 간단하게 귀족 따님으로 둔갑할 수 있을 것 아냐? 원래부터 이렇게 예쁘게 생겼으니 한번쯤은 제대로 꾸민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예, 그야.... 분명히 멋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엔도바 부인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폴라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셰라는 머리를 싸쥐며 신음했다. “그런 장난을 쳤다가 발각이라도 되면 어쩌실 겁니까? 공식 석상에서 신분을 사칭하다니... 중죄입니다.” “그때는 내가 억지로 시켰다고 하면 돼. 이럴 때에는 왕비라는 직함도 꽤 편하네. 다른 사람이라면 벌을 받을 만한 짓이라도 넘어갈 수 있으니.” “그러니까 문제는 그런 점이 아니라....” 여장에는 익숙해져 있다. 이제 와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완벽하게 화장한 뒤 그 자리에 서면 틀림없이 남성들의 주목을 끌고 만다는 사실은 셰라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리가 다시 눈을 반짝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굉장해요! 어쩌면 남자 분들 중 누군가가 셰라님에게 한눈에 반해서 청혼할지도 모르잖아요! 꼭 나가야지요!” 폴라도 그에 동조하며 손뼉을 쳤다. “정말! 셰라님이라면 당당하게 귀족의 부인도 될 수 있을 거예요. 그야 너무 신분이 높으신 분이면 곤란하겠지만 적당한 분이 있을지도 몰라요!” 머리가 아파온다. 엔도바 부인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셰라는 간신히 기력을 짜내며 말했다. “폴라님. 그런 말씀은 조금 신중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양가집 따님인 척해놓고 실은 비전하의 시녀라고 해보십시오. 저는 그분을 우롱한 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왕비를 향해 불평을 던졌다.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난이 조금 지나치세요. 각국에서 찾아오는 높은 분들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물러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셰라를 바라보면서 딱 잘라 말한다. “잘 들어. 넌 그렇게 드레스를 고르고 머리 모양을 궁리하면서 날 구경거리로 만들 계획을 아주 즐겁게 짜고 있었지. 그게 네 일이고 의무라면, 나에게는 널 예쁘게 치장해놓고 즐길 권리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반론해봤자 소용은 없었다. 다시 포기의 한숨을 쉬는 것 이외에, 셰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8월 말, 산세베리아에서 새 국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이 온 대륙으로 전해졌다. 산세베리아의 왕제 오르테스가 수완 좋게 형을 왕자에서 쫓아내 은거하게 만든 뒤,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젊은 국왕은 즉위하자마자 왕제 시대의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고 파라스트에 따른 방침을 취했다. 단, 전면적인 추종은 아니다. 한때 델피니아와 동맹을 꾀한 원인이 되었던 오론의 딸과의 결혼을 거절하고, 자국의 유력 귀족인 하이온 공작의 딸인 리리아와 혼례를 단행했다. 그것으로 국민들의 불만도 상당히 잠재울 수 있었고, 결혼이 정해진 단계에서 위압적인 태도로 항의하러 찾아온 파라스트의 사자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도 오론 폐하를 적으로 돌리고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억지로 덤벼보았자 상대도 되지 않겠지요. 하지만 국민 중에는 그런 사실에 불만을 품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왕으로서 그런 자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않으면, 귀국에 대한 반감은 계속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커져가겠지요. 그렇게 되면 오론 폐하께도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저희들도 여러모로 힘들어집니다. 하이온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도 절대 귀국에 거스르려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본래 저희 같은 소국은 대국의 비호하에 있는 것이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영명하신 오론 폐하라면 이 오르테스도 그 자명한 이치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실 테지요. 그래주신다면 저희 나라는 귀국의 관용과 보호에 안심하고 기쁨을 누리며, 제 형님 때 이상으로 귀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양국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노력하겠습니다.” 비굴하게까지 들리는 말이지만, 파라스트 국왕의 딸을 거절하고 그 얼굴에 진흙을 칠했으니 오론이 마음만 먹으면 산세베리아 하나쯤 없애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 만큼 오르테스도 필사적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 했을 것이다. 발을 핥으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핥을 각오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 얘기를 들은 월은 약소국의 왕이면서도 배짱이 대단한 인간이라고 감탄했다. 공약을 완전히 지킬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대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국민의 지지도 어느 정도 확보해낸 셈이다. 남은 문제는 오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월은 그 동향을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의외로 ‘불문에 붙인다’는 결정이 내려진 듯, 파라스트는 산세베리아에 새 왕의 탄생을 축복하는 취지의 사자를 보냈다고 한다. “너구리같은 놈....” 델피니아의 국왕은 낮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오론이 오르테스와 결혼시키려고 했던 딸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아직 아홉 살의 어린 나이이지만 그럼에도 국왕의 자식이었다. 이번 사건의 전말을 듣자 심하게 화를 내며 부친에게 호소했다. “오르테스는 아버님의 뜻을 거역한 반역자입니다. 어째서 벌을 내리시지 않는 겁니까?” 분개하는 소년을 보며 오론은 흐뭇하게 웃었다. 한때 자신의 장남을 죽게 만들었을 정도로 비정한 오론이었지만, 다른 자식들에게 느끼는 애정과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토라져서 화내는 얼굴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고 말고. 신흥 소국 따위에 모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지금 여기서 산세베리아를 쳐부수는 건 간단한 일이지. 하지만 전쟁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어.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자금과 군사가 필요하다. 이긴다고 해도 전혀 피해가 없는 승리란 있을 수 없는데다 국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지. 마음에 안 드는 존재가 있다고 해서 쓸데없는 문제에까지 하나하나 군사를 일으키면, 정말 필요한 때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어진다. 너도 국왕의 자식이라면 그 점을 명심해두도록 해라.” 하지만 소년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소년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곧 정의이다. 게다가 이 소년의 아버지는 대화삼국 중 한 나라의 군주이다. 절대적인 정의였다. “아버님의 호의를 무시하고 누님에게 수치를 주었으니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본때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약소국에게 무시당한 채로는 누님이 너무 불쌍합니다.” “호오, 정말로 누나를 아끼는구나. 걱정할 것 없다. 네 누나에게는 더 좋은 혼처를 찾아줄 터이니.” 부드럽게 웃으려던 오론은 문득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산세베리아가 네 누나를 거절했는지 먼저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나를 적으로 만들어보았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오르테스 자신이 시인하고 있지. 그럼에도 이 파라스트의 비호하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단 말이야. 나와 오르테스는 싸움이 되지 않아. 저쪽이 싸우려고 한다면 가볍게 밟아줄 수 있겠지만 놈은 일단은 나에게 따르는 척하고 있지. 어째서라고 생각하지?” 아홉 살의 소년에게는 어려운 얘기였다. 어쩌면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자국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위대한 아버지에게 반항한 나쁜 나라인 것이다. 그대로 짓밟아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오론은 그런 단순함과는 무관한 교활한 인물이었다. 한때의 분노로 병사를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다. “산세베리아를 얌전하게 만들려면 오르테스를 상대해봤자 의미가 없어. 그 뒤에서 실을 조종하면서, 요청을 받았다는 구실을 내세워 끼어들 틈을 보고 있는 흑막을 해결해야지. 뒷방패만 없애버리면 산세베리아는 의지할 곳을 잃은 어린애나 마찬가지다. 다시 진심으로 우리나라에 종속하게 되겠지.” “그럼, 누군가가 산세베리아를 부추겨서 아버님에게 거역하도록 만든 겁니까?” “아마 그 반대일 게야. 산세베리아가 누군가에게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꼬리를 치면서, 자기 대신 나하고 싸우게 만들려고 하고 있겠지.” 소년은 더욱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부탁을 받는다고 해서 아버님께 거역할 정도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인간이 있을까요?” “있단다, 곤란하게도.” 오론은 유쾌하게 웃음을 지었다. 소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재미있었다. “싸움을 할 때에는 누가 진짜 적인지를 먼저 간파해야 한다. 엉뚱한 방향을 보고 싸우는 것은 나 자신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큰 손실을 가져오지. 그것만이 아니야. 반드시 어딘가에서 웃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거야.” 그렇다. 싸울 대상을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델피니아에서 보낸 국교회복 기념식전의 초대장은 이미 도착한 뒤였다. 이쪽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영토와 테바 강을 빼앗아간 주제에 국교회복 기념이라니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파라스트의 가신들은 이 철면피 같은 초대장에 기막혀했지만 오론은 그제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런 사람만 좋은 애송이가 델피니아의 군주로 군림할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탄가에서도 이 초대장은 상당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나라와 귀국 간에 존재했던 사소한 분쟁이 해결되고 새롭게 우정을 맺은 것을 기념하여’ 식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문장만을 보자면 지극히 정중하고 예의바른 글이었지만, 이래서는 마치 델피니아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탄가가 그 휘하에 들어간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는가. 특히 격노한 것은 실제로 전쟁에는 참가하지 못했던 무장들이었다. 작년 여름 캄센에서 동포가 맛보았던 참패는 씻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렇게나 일방적으로 패했던 전투는 용맹을 자랑하는 탄가에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대등한 승부였다면 차라리 나았다. 똑같이 졌다고 하더라도 체면이나마 세울 수 있었다면 그나마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탄가 측은 조금도 체면을 지킬 수 없었다. 델피니아가 자랑하는 맹장 도라 장군과 핸드릭 백작, 새로운 전력인 타우 일파의 손에 철저하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런 초대장까지 보내다니, 사람을 우롱하는 데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가신들은 들고일어났다. 초대에 응할 필요는 없다, 아니 엄중한 항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조라더스의 한 마디가 그들을 제지했다. “국교의 회복을 축하하는 게야. 예의에 맞는 초대 아닌가.” 여기서 꼴불견으로 날뛰어보았자 오히려 양자의 힘의 차이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다. 델피니아에는 이런 소리를 해올 정도로 여유가 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탄가 역시 사자를 엄선해 초대에 응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6장 9월 말, 사보아-벨민스터 양대 공작가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코랄의 오리고 대신전은 국왕의 결혼식 이래 최대의 초대객들로 메워졌다. 숫자만 많은 것은 아니다. 거의 국왕의 결혼식 수준으로 호화롭고 국제적인 자리였다. 탄가에서는 대사인 프레스콧 후작, 파라스트는 오론의 측근 중 한 명인 리플리 백작, 펜타스에서는 왕제 앙투안 전하, 그밖에도 란타나의 귀족, 트루디아의 영주 등등 중앙 각지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없는 것은 신흥국가인 키르탄사스와 델피니아와 교류가 없는 스케니아 정도일까. 물론 제일 많은 것은 델피니아의 귀족들. 궁정을 그대로 신전으로 옮겨놓은 듯한 기분마저 든다. 단, 국왕은 없었다. 왕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신혼부부. 신랑의 양친이 앉을 자리에는 친족을 대표해서 블루완드 경이, 신부의 양친이 앉을 자리에는 홀더네스트 공작부부가 앉아 있었다. 혼례의상을 걸친 로자몬드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여태까지 불행한 일을 더 많이 겪은 그녀였건만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이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이전에는 없던 침착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풍겼다. 식이 거행되고 코랄 외곽에 있는 사보아 가문의 저택으로 자리가 옮겨져 본격적인 축하연이 시작되었다. 시각은 이미 저녁 무렵. 궁성의 저택에서도 집사 카사를 필두로 만반의 준비를 기했고, 조달할 수 있는 촛대는 모조리 가져와 휘황찬란하게 조명을 밝혔다. 활짝 열린 창문과 문으로부터 불빛이 흘러 넘쳐, 상쾌한 가을 밤하늘 아래 거대한 저택 전체가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 이상을 장관이었던 것은 저택 내부의 풍경. 어떤 방에서는 파라스트의 영주와 탄가의 귀족이 환담을 나누고, 다른 무리의 중심에는 펜타스의 왕제와 소국의 대공이 함께 앉아 있다. 델피니아의 귀족들도 흔히 만나볼 수 없는 외국의 지인들과 세상 이야기-즉 정보교환-에 여념이 없다. 잔치를 시작하면서 아이들도 소개되었다. 요람의 아기들은 떠들썩한 소란 가운데서도 쌕쌕 잠들어 있었다. 나란히 누워 있는 그 사랑스러운 생물들을 보고서, 나시아스도 그제야 자신의 친구가 ‘아버지’ 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름은 아들 쪽이 유리 울디스, 딸 쪽이 사라 귀네스. 이 이름을 들은 나시아스는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왜 그런 복잡한 짓을....” 울디스는 전국시대에 성주로서 용맹하게 싸웠던 아름다운 여성의 이름이고, 귀네스는 고대의 영웅의 이름이다. “이래봬도 타협의 결과야. 알고 있겠지만 남자에게는 여자 이름을 하나 붙이는 게 우리 집안의 관례라고.” “하지만 여자애인데 귀네스는 왜?” “그건 로자몬드가 주장했어. 자기 경우도 있고 하니 딸에게도 강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면서.” 나시아스는 거의 포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적어도 유리에 사라라면 분명히 남자, 여자로 들리긴 하니까.” 신혼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명색은 피로연이지만 초대객들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신부가 탄가의 지인과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그 지인의 소개로 프로테아의 귀족과 인사를 나누는가 하면, 신랑은 트루디아의 지인과 담소를 나누며 란타나의 귀족, 프리세아의 대영주, 마란타의 왕족 등등을 소개받아 점점 인맥을 넓혀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결혼이 그저 평범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쯤은 지겹도록 자각하고 있는 두 사람이다. 손님들에게 금실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 따위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인맥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강한 무기가 된다. 자신이 초대한 사람이 의외의 인물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 밤, 남성들의 화제를 독차지한 여성이 있었다. “가희 샤리라고?” “펜타스의 전하가 데려오셨다는군.” “오론 왕의 애인으로 유명한 그 여자 말야?” 여기저기서 그런 속삭임이 오간다 남자의 슬픈 성질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얘기를 나누는 건 무리라 하더라도 최소한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왕제전하 일행의 주위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샬리아렌은 열다섯 살 때부터 가희로서 활약했다. 올해 나이는 스물둘.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금발에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졌으며 날씬한 몸은 고양이처럼 유연하다. 세련되고 우아한 동작, 대화하는 상대방을 즐겁게 만드는 재치 넘치는 화술 등은 과연 당대 최고의 가희라고 불릴 만했다. 대륙에서도 상당히 변경인 시페라스나 프로테아 사람들의 눈에는 결국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샤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흑심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창녀임에도 분명 샤리는 파라스트의 대사에게 정중하게 절을 받고, 각국의 저명인사들과 친밀하게 인사를 나누며 델피니아의 대귀족과 대등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어떤 주제가 되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조예가 깊어서 오히려 얘기를 나누던 남자들이 주눅이 들 정도였다. 자기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면 일국의-그것도 중견 이상의-공주 수준의 지성과 교양이었다. 소귀족의 딸 정도는 발치에도 미치지 못햇다. 그녀는 델피니아 국왕의 애첩이 바로 그런 중소귀족의 딸이라는 소문을 들은 듯했다. 이 자리에 그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왕제전화를 향해 생긋 웃으며 졸랐다.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아무리 지성과 교양을 갖추었더라도, 이것은 홍등가에 몸을 둔 여성의 본능적인 습성이다. 자신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일지 신경 쓰이는 것이다. 당사자인 폴라는 화려한 파티와 수많은 손님들에 압도되어 조용히 한숨만 쉬고 있었다. 셰라가 맞춰준 연분홍색 드레스도, 섬세하게 세공된 금관과 목걸이도 매우 잘 어울렸다. 귀부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스러운 매력에 놀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뒤돌아볼 정도였지만, 본인은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왕궁에서 축하연이 열렸을 때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마치 천상의 세계 같았다. 때때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구름 위의 일 같았다. 사람들에게 밀려 조용히 발코니로 나온다. 생각해보면 그때에도 정원으로 빠져나왔다가 폐하의 몸에 걸려 넘어질 뻔했었다. 이번에는 괜찮아. 발에 걸릴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뭘 두리번거리고 있는 거야?” 토라진 목소리에 폴라는 깜짝 놀랐다. “캐리!” 발코니 바깥에 캐리건이 서 있었다. 밖에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이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따분해 보였다. 폴라는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걱정스럽게 동생에게 물었다. “너 계속 거기 있었어? 배고프지 않아? 뭔가 먹을 거라도 가져올까?” “관둬! 근무 중이라고!” 캐리건은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다가 들켰다간 단장한테 죽어!” 동생이 펄쩍 뛰자 폴라는 기가 막혔다. “허풍이 심하구나. 공작님은 굉장히 친절한 분인데.” 이번에는 캐리건이 의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신중하게 반문했다. “그거, 우리 단장 얘기하는 거야?” “당연하잖니, 정말.” 폴라는 웃으면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너도 상당히 듬직해 보이는구나. 아버님께서 보셨더라면 분명히 기뻐하셨을 거야.” “아직 견습이라고. 정식 기사가 될 때까지 앞으로 몇 년이나 걸릴지. 정말 지겨워.” 캐리건은 쀼루퉁하다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기, 누나가 단장한테 얘기 좀 해주지 않을래? 그 사람, 누나한테는 잘해준다면서? 견습 기간을 좀 짧게 해달라고 부탁해주면 의외로 들어줄지도-.” “캐리-!!” 폴라는 안색을 확 바꾸면서 동생을 꾸짖었다. “무슨 소리를-너 언제부터 그런 생각 하게 된 거야!” “그런.... 화내지 마. 농담이라니까!!” “농담이라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어! 한심하게!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너, 아버지 앞에서 그런 소리 할 수 있어?!” “알았다니까!” 바로 뒤는 연회장이다. 남매는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토라진 듯이 말했다. “나도... 힘들다고. 잘 알고 있단 말야. 실력도 없이 기사가 되어봤자 그런 거 전혀 안 기뻐.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나도 알아.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은 봐줘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안 된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때때로 그런 생각도 들어.” 말문이 막힌 폴라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고 싶다는 소년의 공명심, 남에게 뒤쳐지기 싫다는 허영심과 경쟁심. 폴라는 그런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네가 실력으로 훌륭한 기사가 되어주면 좋겠어. 공작님께 그런 부당한 부탁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 넌 그렇지 않니...?” 캐리건은 곤란한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나는 언제나 고지식하다니까.” “응. 내 장점이라고 해봤자 그 정도뿐이잖아.” “하지만 그 차림, 괜찮네. 못 알아볼 뻔했는 걸. 어느 댁 아가씨일까 싶었어.” “너, 누나에게 그런 소리 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 그 자리에 나시아스와 엔도바 부인이 폴라를 데리러 왔다. 캐리건은 당황하며 경례를 붙였고 폴라는 동생을 두 사람에게 소개해주었다. 캐리건에게는 라모나 기사단장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얘기를 나누게 된 기쁨에 뺨을 붉히다가, 그 기사단장이 누나에게 한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폴라도 놀랐다. “가희가 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요...? 예, 물론 만나겠습니다만..., 노래를 하는 분이지요?”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펜타스’의 가희라면 의미가 좀 다르지요.” 얘기를 들은 폴라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돈을 받고 남자들을 상대하는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식으로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시니가의 가족들 사이에서 그런 화제는 한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중류 이상의 가정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폴라의 감각으로 볼 때 그것은 ‘천박한 짓’ 이며, 때로는 ‘불쌍한 일’ 이었다. 메이버리 마을에서는 다행히 그런 일이 없었지만, 악천후가 계속될 때면 마을 사람들이 농담으로 이대로는 딸이라도 팔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비참한 신세로 타락한 여자가 어째서 이런 자리에 있는 건지, 어째서 그런 신분의 여자를 높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폴라의 고민을 눈치 챈 라티나가 설명했다. “몸을 파는 여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창녀도 그 정도쯤 되면 일류입니다. 궁정의 다른 귀부인을 만난다고 생각하고 한번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시아스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폐하는 다르시지만, 일국의 군주로 불리는 분이라도 펜타스에 다니시는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녀는 일국의 외교관 수준의 인맥을 가지고 있지요. 그 정도 인물이면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때 발로가 나타났다. “아,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는 부인이 있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국왕을 꼭 닮은 그 얼굴이 폴라의 망설임을 날려주었다. 국왕이 여기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 사람처럼 웃어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괜찮다고 안심시키려는 듯이. “예, 만나겠습니다.” 집사인 카사의 안내를 받으며 폴라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나시아스와 라티나는 조금 주저하면서 얼굴을 마주 보았고 나시아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발로. 정말 괜찮겠어? 그 가희, 달시니 양에게 묘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던데. 사람들 앞에서 모욕이라도 당했다가는... 상처받을 거야.” 라티나도 불안한 듯이 끄덕였다. 당대 최고라 불리는 가희와 폴라. 미안한 말이지만 승산은 없다. 하지만 발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초조해하고 있는 캐리건을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자네 누님은 저래봬도 얕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안 그래?” 대답을 못하고 있는 캐리건을 남겨둔 채 일행들도 곧바로 폴라의 뒤를 따라갔다. 홀로 나오자 샤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로자몬드도 그 자리에서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초대객들은 그날 처음으로 신혼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된 셈이지만, 그 이상으로 국왕의 애첩과 당대 최고의 창녀가 어떤 대화를 나눌지 흥미진진하게 여겼다. 발로가 앞으로 나아가 폴라를 소개했다. “이쪽은 폐하의 측실인 폴라 달시니 양. 그리고 이쪽이 펜타스의 가희 샬리아렌.” 폴라는 멍하니 가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일까.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조금도 어두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고, 남자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희 샤리는 생긋 미소를 짓고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폴라님. 만나 뵙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어조도 태도도 지극히 공손했지만 이쪽 역시 내심 놀라고 있었다. 자신 이외의 여자는 여자로 생각지도 않는 샤리였지만, 대체 델피니아의 국왕은 눈이 어떻게 되어먹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꽤 봐줄 만하지만 특별히 예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동글동글한 여자가 현재 중앙의 패권을 노리고 있다고까지 일컬어지는 델피니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니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비공식이라고는 하지만 대화삼국의 왕에게 사랑 받고 있는 여자였다. 대항의식과 상대에 대한 멸시도 한몫 해서, 샤리는 아주 살짝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월 그리크 폐하는 한번도 저희들이 있는 곳에 와주신 적이 없습니다. 서운한 일이지요. 부디 한번이라도 놀러와 주시도록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같은 여자는 폐하의 마음에 차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성을 다해 모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싯서스의 작부가 상인의 첩에게 던진 말이라면 당장 대참사로 이어질 발언이지만 펜타스의 가희가 델피니아 국왕의 애첩에게 하면 의례적인 인사로 통용된다. 하지만 말에 숨겨진 의미는 명백하다. 당신 정도의 여자로 만족할 정도의 남자라면 날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비아냥, 그런 촌스러운 인간은 나에게 걸리면 당장 홀딱 빠질 거라는 자신감, 어째서 당신 같은 여자가 애첩으로 선택된 건지 모르겠다는 경멸, 그런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 비아냥도 폴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가희 샤리도 이번만은 상대가 나빴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폴라는 자신이 특별히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국왕을 자신만이 독점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샤리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저 같은 여자’ 라는 말도, 펜타스에는 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폴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단언했다. “그렇게 겸손하게 말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은 저희 왕비님 다음 정도로 아름다운 걸요.”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지간해서는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가희의 얼굴조차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동성에게서, 그것도 미모로는 자신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게 ‘위로의 말을 들었다’ 는 믿기 힘든 굴욕에 샤리의 혈색이 싹 가셨고 관객 일동은 숨을 삼켰다. 펜타스 최고의 가희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전대미문의 사건에 발로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고 나시아스와 라티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며 로자몬드는 순간 기막혀하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아, 확실히 그렇지요. 이 가희 분은 비전하 다음 정도로는 아름답습니다.” 미묘하게 조사가 달라져 있다. 다음 정도로 ‘는’ 이라는 부분이 실로 의미심장했지만, 폴라는 다른 의미에서 당황했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물론 로자몬드님도 굉장히 아름다우세요.” “이런이런, 냉정하시군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덧붙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 하지만 정말 비교할 수 없는 걸요! 두 분 모두 굉장히 아름다우시니까요.” 폴라는 두 손을 뺨에 대고 정말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자몬드도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래도 저희들은 비전하 다음이고요?” “네.” 완전히 무의식에서 나오는 말인 만치 더 강하다. 샤리는 점점 더 창백하게 변했고, 폭소 직전까지 몰려 있던 발로는 간신히 표정을 유지하며 왕비가 모습을 보일 내일이 정말 기대된다는 말로 매듭을 지었다. “자, 이번에는 저희 아이들을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보내주신 옷을 입혀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별관의 방에 재워둔 상태이다. 폴라도 자제 분이라면 아까 보았다고는 하지 않았고, 발로가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홀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나시아스와 라티나가 따랐고, 여주인인 로자몬드도 인사를 하고 함께 나왔다. 손님을 대접해야 할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셈이 되었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인기척이 없는 별관 통로까지 걸어온 뒤에야 폴라는 계속 이상하게 생각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분..., 차, 창녀라고 들었는데, 그런 일이 괴롭지는 않은 걸까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서도 묘하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던 모습은 폴라가 그런 여성들에게 품고 있던 인상과 완전히 달랐다. 그제야 웃음의 발작에서 해방된 발로가 대답했다. “싫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장사가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또 사정이 다릅니다. 저 여자는 계약에 묶여 있는 것도, 빚을 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럼 어째서....”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걸까. “글쎄,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걸까요. 자신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강렬한 특권 의식과 우월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르지요. 설령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거절할 겁니다.” 폴라는 이상한 듯이 발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공작님도 그런 장소에 가시는 일이 있으신가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간신히 억누른다. “그건 아내 앞에서는 조금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군요.” 바로 등 뒤에는 로자몬드가 있다. 그 아내 쪽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하고 내뱉었지만 폴라는 목까지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전 정말... 생각이 부족해서....” 사실 남자와, 그것도 공작이라는 사람과 유곽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폴라가 쥐구멍이라도 찾듯 몸을 움츠리자 로자몬드는 즐거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이 공작이 호색한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요.” “또 그런 식으로 사람을 색마 취급하는군.” “기가 막혀서 원. 부정할 생각이야? 뻔뻔스럽게.” 말다툼을 시작하는 신혼부부 따위는 내버려둔 채 라티나와 나시아스는 웃는 얼굴로 폴라에게 말했다. “훌륭하셨습니다, 폴라님.” “안심했습니다. 폐하의 애첩으로 있다보면 저런 사람들에게 시험 당할 기회도 많습니다. 불쾌해도 피해갈 수는 없는 자리입니다만,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현명하게 지켜냈습니다.” 폴라는 또다시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홀 쪽을 돌아보았다. “저기..., 제가 말인가요? 제가 뭘 어떻게 한 건가요?” 이 반응에는 두 사람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연회가 끝나고 초대객들이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물러난 뒤, 사보아 공작과 공작부인, 라모나 기사단장과 그 친구는 다시 한 번 네 명만 모여 짧게 대화를 나눴다. “정말 놀랐습니다, 저분에게는.” 나시아스가 말한다. 라티나가 그 말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시금 감탄했습니다.” “폴라 양에게?” “아니오, 비전하 말입니다. 저런 분을 용케 찾아오셨군요. 폴라님은 저렇게 너무나 평범하다고 해도 좋을 분입니다만....” 발로도 끄덕였다. “동감이야. 솔직히 말해서 저 사람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지 싶었지만....” “저 무심함, 아니면 욕심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어떤 말이든 자연스럽게 꺼내면서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저렇게나 폐하께 어울리는 분도 없을 겁니다.” 로자몬드는 아까 일을 떠올리며 웃음 짓고 있었다. “하지만 통쾌했어. 설마 저 가희가 저 달시니 양에게 한방 먹을 줄은.” “아니, 본인에게는 그랬다는 의식조차 없을 거야. 하지만... 문제는 내일이군.” 발로는 진지한 얼굴로 부인에게 확인했다. “끈질긴 소리지만, 정말로 저 왕비가 샤리 이상의 미녀로 둔갑할 수 있겠어? 결혼식 때처럼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될 상황이 아니라고.” 나시아스도 불안해 보였다. 상대는 자신의 미모에 대단히 자신이 있는 여성이다. 완전히 납득시키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그 긍지에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넘어가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저 가희는 오론 왕의 애인이니 왕에게 울며 매달리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물론 여자의 눈물에 휘둘려 경솔하게 움직일 오론은 아니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서 큰 균열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남자들이 계속 의심을 버리지 못하자 여자 두 명은 생긋 웃으며 힘차게 말했다. “내일이 되면 그 가희는 찍 소리도 못하게 될 겁니다.” “그러기는커녕, 두 분 모두 비전하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잠조차 못 이루실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의심스런 표정을 거두지 못하는 남자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두 여성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상쾌한 가을날이었다. 거리에는 장이 서고 노점이 빽빽하게 들어차며 유랑예인이 춤을 추고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른다. 엄청난 활기였다. 근위병이 주르륵 늘어선 가운데 왕궁의 세 문이 활짝 열리며 계속해서 초대객들이 들어섰다. ‘기념식전’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렇게 딱딱한 자리는 아니었다. 모두들 멋지게 꾸미고 즐거운 표정으로 가득했다. 우선은 정원 파티. 이날을 위해 왕궁의 정원사들은 총력을 기울여 자신들의 ‘예술품’ 을 갈고 다듬었다. 잔디는 매끄러운 벨벳처럼 정돈되고, 수목도 덩굴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색색가지의 가을꽃이 앞 다투어 피어 있다. 사람 쪽은 그 이상으로 다채로웠다. 어제 사보아 공작의 결혼식도 국제적이었지만 오늘은 그 이상이다. 국교가 없던 산세베리아에서도 국왕부부가 찾아왔다. 해적국가 키르탄사스에서도 총독부부가, 그리고 중앙 사람들이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북쪽의 대국 스케니아에서는 왕의 측근이라는 보로조프 공작이 방문했다. 황량한 토지에서 온 보로조프 공의 눈에 중앙의 자연과 원예술은 눈부실 정도였던 모양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완전히 감탄하고 있었다. “어떠신지, 델피니아의 정원은?” “아...! 폐하.” 이 아름다운 성의 소유자인 델피니아 국왕이 직접 말을 걸어오자 공작은 완전히 긴장했다. 오늘의 국왕은 가슴에 사자의 문양을 단 화려한 예복에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 품격과 위엄을 갖추고 있어 누가 보아도 놀랄 만큼 당당한 국왕이다. 보로조프 공에게 있어서는 계속 동경해오던 중앙의 왕이었지만, 기죽어 있기만 해서는 얕보이게 된다.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정말로 아름답고 멋진 정원입니다. 물론 저희 나라에도 다양한 식물들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조합해서 즐기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호오, 그런가. 스케니아의 자연은 더 거칠고 사나울 테니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예, 그렇습니다. 촌스럽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희 나라의 백성들은 황야에서 자라는 거친 꽃입니다. 부드럽기만 한 풍류에는 맞지 않지요.” 무예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렇군. 황야의 꽃은 화단 안에 틀어박힐 수 없는 법이니.” 국왕은 즐겁게 웃고 다른 빈객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니,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물론 낯익은 얼굴도 있다. 파라스트의 대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젊은 남녀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국왕이 다가서자 대사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함께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산세베리아 국왕 오르테스님과 왕비인 리리아님입니다.” “오오, 먼 곳에서 잘 와주셨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르테스는 신중하게 인사를 했다. 국왕 입장에서도 만나보고 싶은 상대였지만, 의외로 우아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왕비는 아직 스무 살 남짓. 건드리면 꺾이고 말 것처럼 날씬하고 가련한 인상이다. 파라스트의 대사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뵙게 되었다고 오르테스 왕과 말씀 나누던 참입니다. 실례지만 월 폐하께서 산세베리아와 친밀한 사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 오론 폐하도 놀라시겠지요.”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살짝 비아냥이 섞여 있다. 어느 틈에 산세베리아와 교섭까지 하고 있었는지, 거 방심을 못하겠구만, 우리나라의 허락도 없이 접근하는 건 곤란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완벽한 적대행위로 간주하겠습니다-대사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월 그리크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친밀한 것은 오히려 귀국 쪽이 아닌가. 현재 파라스트는 델피니아의 둘도 없는 우방, 그 우방국이 예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나라이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도 모셔온 거네. 파라스트 대신 초대한 셈이었네만-오르테스 왕. 우리나라의 초대에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있었는지?”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기쁜 소식이었지요. 단지, 오론 폐하께서 모르시는 초대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그 얘기를 여기 대사님께 듣고, 그럼 거절했어야 좋았을까 후회하던 참입니다.” “그건 또 왜?” 더욱 크게 눈을 치뜬다. 정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오르테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나라는 파라스트의 은혜를 입고 있으며, 오론 폐하는 저희 나라를 아직 어린 자식처럼 여기고 계십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도 없이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자 국왕은 껄껄 웃었다. “무슨 소리! 그건 오르테스 왕의 착각이야. 오론 왕은 그렇게 도량이 좁은 분이 아니네. 게다가 파라스트의 우방이라면 우리 나라와도 우방이 되는 것 아니겠소. 우리 두 나라가 접촉을 갖는 것을 기뻐하면 기뻐했지 불만으로 생각할 리가 없소. 안 그런가, 대사?” 대사는 말문을 잃고 있다가 당황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건..., 뭐....” “오르테스 왕. 들으신 대로 당신의 기우입니다. 설령 산세베리아가 파라스트의 적이고 내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실수로 당신을 동석시켰다면 오론 왕이 화를 내도 당연하지요. 이 월도 실수를 사과해야겠지만, 친밀하게 지내는 동맹국을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 동석시켰다고 해서 파라스트가 불쾌하게 생각할 리 없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재회하게 된 것을 기뻐하면 할지언정 기분이 상할 이유가 없소. 안 그런가, 대사.” 그 대사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 표정을 억누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 낯짝 두꺼운 왕에게 찬물이라도 끼얹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주군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짓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저희 주군도 만족하실 거라고 양국 관계를 인정하는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르테스는 사자가 그 자리를 떠나자 살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만큼 너무 많은 얘기는 입에 담을 수 없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서 감사의 뜻을 나타내고, 눈빛만으로 ‘굉장하십니다’ 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런 식으로 월 그리크는 초대객들 사이를 교묘하게 누비며 지나갔다. 카르탄사스의 총독과도 대화를 나눴지만 역시나 육지의 일에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정원 여기저기에는 빈객들이 언제라도 발을 멈추고 가볍게 요기할 수 있는 자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본궁의 주방에서는 요리장이 오랜만에 큰 임무를 맡아 사흘 전부터 신나게 솜씨를 부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요리는 대부분 전채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오늘밤의 대만찬회. 정원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오늘이 진짜 무대였다. 외국에서 온 부인들은 물론이고 델피니아의 귀부인들의 화려한 모습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광경이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마음껏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할 서이다. 그날까지 비밀로 숨겨왔던 서로의 드레스를 구경하고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면서 평가를 내린다. 그런 사람들의 강렬한 흥밋거리가 또 하나 있었다. “저기..., 비전하는 어떻게 되신 걸까요.” “어디에도 안 계시던데요.” “역시 안 나오시는 게 아닐까요.” 그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어제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치장한 샤리는 그런 얘기를 듣고 동반한 펜타스의 왕제에게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유감이네요. 정말 기대하고 있었는데.” 진심이었다. 그런 촌뜨기 계집이 자기보다도 아름답다고 단언한 그 왕비의 면상을 반드시 봐주고 싶었다. “어쩌면 왕비님은 겁을 먹으신 건지도 모르지. 그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델피니아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으니까.” 펜타스의 지배자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뭐 돈은 있는 것 같군. 우리나라의 공예품을 잔뜩 사다 치장하고 있으니. 고급 옷감에 보석에..., 정말 고마운 일이야. 훌륭한 고객들이지.” “아쉬운 점이라면 알맹이가 그에 못 미치는 걸까요?” “그렇고 말고. 사실 델피니아는 지금이야 대화삼국이라고 불리지만 이 일대는 원래 우리 왕가의 땅이었어. 여기에 있는 건 나중에 흘러온 촌뜨기들뿐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 중앙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얼마나 우스운 얘기인가. 그런 펜타스 왕제의 불평은 별도로 하더라도, 발로도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어디에도 왕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국왕에게 살짝 물었다. “형님. 왕비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아직도 시녀들이 필사적으로 옷을 입히고 있는 모양이야. 연회장으로 들어간 뒤에 나오겠다더군.” 발로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어떻게 둔갑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정 정도는 세워뒀으면 좋을 것을....” “왕비 자신의 뜻이라더군. 참가하겠다고는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어울려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면서. 뭐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야.” “형님. 그렇게 침착하게 계시면 곤란합니다.” “그래 보여?” “예. 유감입니다만.” “그런가. 나 자신은 단두대에라도 올라가는 기분인데 말이야.” 국왕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녀석이 얼마나 화난 얼굴로 나타날까 생각하면.... 왕의 위엄이고 나발이고 말짱 헛거지.” 발로는 머리를 싸쥐고 싶어졌다. “사전에 얘기도 안 해둔 겁니까?” “식순은 얘기해뒀지만, 어쨌거나 네 체면이 서게 하면 될 거 아니냐고 무뚝뚝하게 딱 잘라서 말하더군. 대체 어떻게 세워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없이 불안한 상황이다. 마침내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본궁 안으로 이동했다. 국왕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정원말고도 이곳에는 여러 개의 작은 정원이 있다. 초대객들은 각각의 신분에 따라 어느 정원을 산책할지 ‘배치’ 되어 있던 셈이다. 그 사람들도 모두 모여 본궁에 들어가, 수많은 홀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사자의 홀로 안내되었다. 수백 명을 한꺼번에 수용하고서도 아직 여유가 있는 공간이다. 상좌에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국왕, 또 하나는 왕비를 위한 것이었다. 코랄 성에 처음 와보는 외국 손님들은 홀의 멋진 내부 장식을 둘러보고 감탄하며 신기한 듯이 벽과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델피니아인들은 두 개의 빈 의자를 묘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궁정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국왕이 입장했다. 국왕은 오른쪽에서, 왕비는 왼쪽에서 입장한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왼쪽을 살폈지만 사람이 나오는 기색은 없다. 내국인들에게서는 포기와 실망의 한숨이, 그리고 사정을 모르는 외국 사람들에게서는 낮은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왕비는 어떻게 된 건가 싶었던 것이다. 국왕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인사말과 함께 연회를 시작했고, 엄선된 무용수들이 군무를 선보였다. 다음은 음악. 이때를 위해 각국에서 민속음악을 연주할 의사들을 조달했다. 탄가의 무곡은 힘차고, 파라스트의 애가는 서글프며, 남국인 마란타의 연가는 화려하고 정열적, 프리세아의 축하의 노래는 부드럽게 울리며, 시페라스의 전사의 노래는 황량한 대지가 눈에 떠오르는 기백이다. 특별히 샤리도 노래를 불렀다. 당대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 그 음색을 즐기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각 나라의 자랑이 한 차례 끝난 시점에서 국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 경사스러운 날에 모여주셔서 정말로 감사하오. 작년에는 여러모로 소란했지만 그것도 이미 과거의 일. 게다가 이번에 내 종제 사보아 공이 결혼을 하고 후계자를 얻었소. 우리 델피니아도 그와 동시에 강한 인연으로 묶인 두 우방을 얻어 지금의 번영을 맞을 수 있게 되었지요.” 홀의 입구가 활짝 열리면서 양국의 사자가 조용히 입장했다. 제각기 주군이 보내는 친서를 들었으며 다양한 진상품을 든 시종들이 그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국왕의 앞으로 나왔다. 미리 얘기를 정해두었는지 탄가의 사자가 먼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국왕이 제지했다. “이 자리에 양국의 사자를 맞이할 수 있게 되어 정말로 기쁠 뿐이네. 왕비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는군.” 시종이 커다란 목소리로 왕비의 입장을 고했고, 홀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문을 향해 쏟아졌다. 시종들이 공손하게 묵직한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빛’ 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자리에는 물론 도라 장군도 있었다. 핸드릭 백작도, 아누아 후작도 있었다. 발로나 나시아스, 이븐도 있었다. 브룩스도 있었다. 종류는 다르더라도 제각각 배짱을 갖춘 역전의 용사들이다. 그런 사람들조차 간담이 서늘해졌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떠들썩하던 홀 전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몇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건만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이 멈춰 서 있었다. 아니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틀어 올린 순금의 머리카락은 보석으로 만든 관처럼 빛나고, 매끄러운 피부를 감싼 순백의 드레스는 마치 암흑 속에서 빛나는 불꽃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밝고 당당하며 신성한 느낌마저 주는 지고의 빛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황홀경 속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홀 전체의 시선도 마음도 지금은 그 사람 하나의 것.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중량감 있고 광택을 내는 하얀 비단 드레스는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 날씬한 윤곽을 강조했다. 정면에서 보면 몸의 선을 따라 그대로 발치까지 내려오는 형태지만 뒤쪽으로는 우아하게 치맛단이 끌린다. 가슴은 사각으로 깊게 파여 있고 소매는 상박의 반 정도까지만 간신히 덮었다. 호사스러운 금목걸이로 목을 장식했고 드러낸 팔에도 한 쌍의 굵은 팔찌를 차고 있다. 그 덕에 깨끗한 피부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밖에도 가슴에서 몸통에 걸쳐 큼지막한 브로치를 연속해서 달았다. 은세공한 물건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장식끈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어느 것이나 기발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참신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로브너 부인 일파는 다시금 완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자신의 잔뜩 부풀린 스커트나 손목까지 덮는 긴 소매에 갑자기 짜증을 느끼는 부인도 있었다. 그리고 가희 샤리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별것 아니다. 조금 보기 드문 드레스를 입었을 뿐이다. 물론 자신이 훨씬 더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하며 평소처럼 자신 있게 웃으려고 했지만, 결국 딱딱하게 굳은 웃음밖에 지을 수 없었다. 왕비는 미끄러지듯이 걸어 나와 옥좌 앞에 멈춰 섰다. 절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두 명의 사자를 바라보며, 우아하고 낭랑하면서도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델피니아에. 환영합니다.” 사자들은 당황하며 절을 했다. 뭔가 착오가 아닐까 당황하면서도 탄가의 사자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찬사를 던졌다. 파라스트의 사자도 도깨비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지만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들은 델피니아의 왕비에 관한 정보를 수없이 가지고 있었다. 일기당천의 무장으로 거친 남자들을 이끄는 비장군, 그 무용담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다. 실제로 지난번 전쟁에서 델피니아가 승리한 것도 이 왕비의 활약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비에 대한 정보의 어디를 뒤져봐도 ‘우아하다’ 든가 ‘예의바르다’ 는 말은 들어 있지 않았다. 옥좌에 앉은 왕비는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여왕의 지위에 어울리는 관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엎드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 “이제야 이 성에서 두 분을 만나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기쁜 일이지요. 전쟁 중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두 분이 여기 델피니아의 왕궁에 와 계신다는 사실은 곧 중앙에 평화가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화삼국의 분쟁은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며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대국을 책임지는 자로서 그것이 얼마나 바람직하지 못한 일인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탄가, 그리고 파라스트의 사자여. 앞으로도 이렇게 델피니아를 방문해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은방울이 구르는 것처럼 영롱한 목소리였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홀경에 빠져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회장 여기저기에서 신음을 삼키는 기묘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 평소 이 사람이 내뱉는 상소리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각료들은 턱이 빠질 듯한 표정이었고 아누아 후작이나 핸드릭 백작쯤 되는 영웅들마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틸레든, 라모나 기사단장을 포함해 델피니아가 자랑하는 정예부대의 지휘자들이 대부분 참석하고 있었지만, 발로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으며 나시아스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상태였다. 이븐은 웬 미녀가 왕비의 대역을 맡은 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당황한 것은 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수순대로 자신의 주군들이 보내온 친서를 국왕에게 넘겼지만-참고로 현재 이 자리에서 태연한 것은 국왕 한 명뿐이다-예정했던 인사말도 잊어버리고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왕비를 절찬했을 정도였다.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폐하께서 이런 보물을 숨기고 계셨을 줄은....” “비전하의 말씀대로 자주 찾아뵙겠으니 부디 자주 얼굴을 비춰주시기 바랍니다.” 국왕이 대답할 틈도 없이 먼저 왕비가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본래 이런 자리에 나타나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비전하, 그것은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요.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본래 왕비란 국왕의 곁에 함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손님을 맞을 때의 예의이기도 하다.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폐하를 혼자 계시게 하는 것은 부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탄가의 사자가 그렇게 말했다.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옥좌에 앉아서 이 용기 있는 발언을 듣고 있었다. 한편 시선을 돌려보니 델피니아의 각료들이 맞는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쩔 생각인지 궁금해하고 있자니 왕비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왕의 부인이 아닙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왕을 수호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존재이지요. 왕을 지키기 쉬운 입장에 서기 위해 왕비라 불리는 몸을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리고 신께는 죄송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저의 임무이니 용서해주시겠지요. 왕께도 수고를 끼치고 있습니다만, 다행히 저의 벗이 진심으로 왕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을 본다. 이때에야 처음으로 사람들은 옥좌에 앉아 있는 왕비 곁에 다른 아가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굉장히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장미 문양의 자수를 놓은 하얀 비단 드레스 차림이었다. 금가루를 뿌린 갈색 머리에도 장미 문양의 머리 장식을 꽂았다. 커다란 눈이 곤란한 듯이 왕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하늘에서 내려온 몸이므로 지상의 남성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사람은 폴라 달시니. 국왕의 처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폴라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머리를 들어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절을 한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파라스트의 대사가 말했다. “그럼 이분은 폐하의 측실?” “명분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제가 명분상으로는 왕비인 것처럼, 실제로는 다릅니다.” “뭔가 복잡한 얘기로군요. 비전하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요. 왕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당당하고 침착한 태도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다. 사람들은 아직도 굳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단순한 농담이나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망상이라고 치부하겠지만, 지금의 왕비가 말하면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쩐지 사실인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는 탄가의 대사가 물었다. “그럼 실례입니다만, 어째서 월 폐하를 수호하러 오셨는지요?” 영웅을 지키는 것이 임무라면 우리나라의 왕을 택해도 좋았을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파라스트의 대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그제야 처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국왕을 바라보며 딱 잘라 말했다. “이 왕은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야말로 회장은 웅성거림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델피니아의 각료들은 반쯤 기절할 뻔했고, 다른 나라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경탄과 감격에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이 말을 신의 목소리로 받아들였다. 이 왕에 의해 중앙의 세력 구도는 바뀐다. 이 왕은 위대한 지배자가 될 것이다. 두 사자는 너무나도 도발적인 말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지만, 무시무시하게도 그 외의 사람들은 그 말을 납득하고 말았다. 최고의 영웅으로 치켜세워진 국왕은 옥좌 위에서 곤란해하고 있었다. 닭살이 돋아서 견딜 수가 없다. 체면을 세워주겠다고는 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원망하듯 왕비를 바라본다. 그러자 왕비는 생긋 웃었다. 완벽하게 화장한 얼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예상했던 대로 눈은 웃지 않고 있다. 이 식전이 끝나면 왕비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순간이나마 퍼뜩 들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두 사자에게 치하의 말을 건네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펜타스의 왕제가 앞으로 나왔다. 싱글싱글 웃고 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왕비님의 아름다움에는 실로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애첩은 애첩이니, 앞으로도 계속 왕비님도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여주시도록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군요.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님을 혼자서 독점하다니 너무 그릇이 작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이렇게나 아름다운 꽃이니 내놓기 아깝다고 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사자인 국왕은 의자 위에서 깜짝 놀랄 뻔했다가, 다음 순간에는 폭소가 터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웃기라도 했다가는 정말 살해당하게 된다. 왕비는 천천히 펜타스의 왕제를 바라보고서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만나고 싶으십니까, 저를?” “물론입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은 그 모습을 더 많은 분께 보여주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러 남의 눈을 피해 이 궁전 깊숙한 곳에서만 지내면서 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신다니, 어리석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않을지....” 그 뒤로도 계속하려는 왕제의 말을 왕비가 제지했다. “저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왕을 위해서도, 당신을 위해서도.” “뭐, 뭐라고요-?!” 왕비의 무례한 말에 왕제가 부들부들 떨었다. 동시에 왕비의 분위기가 변했다.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이면서도 냉랭한 투지가 전신을 감싸며 타오르기 시작한다. “저는 언제나 싸움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검과 군마의 울림 속에, 사신의 숨결 속에, 전사의 뜨거운 영혼 속에, 그리고 그들의 피로 젖은 붉은 대지에 입맞춤을 보내는 자이지요. 저를 만나고자 하는 것은 곧 전쟁을 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러기를 바라십니까?” 왕제는 깜짝 놀랐다. 점점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름다운 왕비의 모습을 둘러싸는 빛을 분명히 보았다. 싸늘하고 실체가 없으며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초록빛 불길을. 그 뒤에 칼날의 날카로운 반사광이 보인다. 갑옷으로 몸을 감싼 병사들과 대지를 가득 메우는 무수한 군마가, 우레와 같은 그 말발굽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두 사자도 새파랗게 질렸다. 그 사람들은 전쟁터에 선 왕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분명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펜타스의 왕제 역시 핼쑥해졌다. 왕제가 고개를 숙이며 희미하게 떨기 시작하자 델피니아의 무장들은 가벼운 비난과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전쟁의 여신이라는 이름을 가볍게 보아서는 곤란하다. 한번도 전쟁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 겁쟁이 왕족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긴박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국왕의 명랑한 목소리였다. “리. 왕제전하를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마. 애초에 우리나라의 하미아가 너무 아름다운 게 문제지. 자, 음악이다. 첫 곡은 같이 추어주겠지?” 사자들이 물러나고, 재빨리 홀이 정돈된 뒤 무도회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 왕비는 자신을 향해 내미는 국왕의 손을 거부하지 않고 함께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지켜보는 무장들로서는 실로 숨이 막힐 듯이 긴장되는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춤을 추었다. 움직일 때마다 왕비의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매끄럽게 이동했고 가슴을 장식하는 보석과 목걸이, 두 손목의 팔찌가 반짝인다. 희대의 영웅과 전쟁의 여신의 춤을 보자 관객들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매료되었다. 놀라움과 감탄이 뒤섞여 말도 나오지 않는다. 델피니아의 영웅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허, 참....” “뭐랄까....” “으음....” 할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 장군은 계속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고, 핸드릭 백작은 몇 번이나 이마의 땀을 닦았으며, 아누아 후작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들은 비전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글쎄 말입니다. 저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도라 장군도 그렇습니까.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그리고 또다시 신음한다. 브룩스도 함께 서 있다가, 가볍게 춤추고 있는 왕비를 다시금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두려운 사태입니다.” “그렇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도 물론 비전하의 그릇에는 완전히 놀라고 말았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두려운 사태입니다. 앞으로 궁정 부인들 사이에서는 저렇게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팔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디자인이 대유행할 겁니다.” “웃...!” 노년의 중신들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젊은 아가씨들이 너나없이 저런 차림을 한다고 생각하면.... 게다가 저 옷은 비전하께서 입으시니 저렇게 아름다운 옷입니다만, 중년 이상의 부인들이 똑같은 차림을 한다면....” “으윽....” 고지식한 성격의 핸드릭 백작으로서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광경이었던 모양이다. 음악이 멈추고, 대환성과 함께 장내가 박수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왕비는 마지막까지 치마를 밟지 않고, 몸가짐도 흐트러지지 않고, 국왕의 발도 밟지 않는 데에 성공한 듯했다. 크나큰 쾌거였다. 7장 “왕비님!” 뒤를 돌아보는 왕비는 완전히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뒤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추장스러운 치맛단을 움켜쥐고 구두도 벗어 던진 채 걸어가고 있었다. 국왕과 춤을 춘 뒤, 조금만 더 있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도 뿌리치고 홀에서 나와-혹시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대로 눈빛에 찔려 죽었겠지만-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으려니 폴라가 뒤쫓아온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던 주제에, 지금 왕비는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안색도 좋지 않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제부터는 폴라가 알아서 해.” “예.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알겠어? 약속이야. 두 번 다시 이런 짓 시키지 마!” “예, 절대로.” 진지하게 대답하고서 폴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는 건데?” “정말은..., 왕비님께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했던 진짜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 각국에서 온 손님들을 상대하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워서, 왕비님이 있어주신다면 든든할 것 같아서...,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해서....”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폴라는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금 열심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교활한 생각이었습니다.” “교활한 거야, 그게...?”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왕비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머리 모양이 망가지잖아. 사람들이 모두 다 전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약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 강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게 제일 쉬운 길이지. 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난 그런 게 교활하다고는 생각 안 해. 나도 옛날에는 보호만 받았으니까.” “왕비님께서요?!” “그야 당연하지. 자, 빨리 자리로 돌아가. 월도 혼자 있으려면 큰일일 테니까.” 가볍게 몸을 돌리던 폴라는 아무래도 이 말만은 하고 싶었는지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저..., 왕비님. 화내실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멋졌습니다! 분명히 꿈에서 다시 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요!” 폴라가 흥분으로 뺨을 붉히며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자 왕비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난 악몽을 꿀 것 같은데 말이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서 본궁의 내측으로 걸어간다. 이쪽에는 아직 손님들이 없었다. 아까 옷을 갈아입은 대기실에서 심부름꾼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벗었다. 입을 때 몸에 맞춰서 꿰매는 형식이기 때문에, 실을 뜯어내지 않으면 벗을 수 없다는 것이 귀찮았다. “벌써 벗으시는 건가요?” “너무 아깝습니다.” 심부름꾼들도 저마다 말했지만 결국은 벗길 수밖에 없었다. 거들어주지 않으면 왕비는 그대로 옷을 찢어버릴 기세였다. 팔찌와 목걸이도 풀어두고 언제나 입는 가죽조끼와 애용하는 검을 집어 든다. 왕비가 여장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몸에서 검을 떼어두어야 하는데,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끼와 검을 쥔 왕비는 발코니로 나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은 옥상으로서, 바로 아래쪽에 다시 건물이 있다. 코랄 궁성에는 여러 군데에 이런 식으로 부분적인 옥상이 설치되어 있다. 게다가 이 옥상에는 작은 정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난간 앞에 자그마한 화단을 배치하고 향기 좋은 관목도 심어 놓았다. 어디서 물을 끌어오는 건지 분수까지 있다. 왕비는 분수에서 얼굴을 씻었다. 얼마나 정성 들여서 발라놓았는지 아무리 씻어도 분가루가 떨어지지를 않는다. 물가에서 깃털을 씻는 새처럼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씻고 있으려니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왕비는 상관 않고 계속 세수를 했다. 익숙한 기척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뒤 얼굴을 들자, 난간 바깥쪽, 바로 손이 닿을 정도의 공중에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지면에 나 있는 큰 나무의 가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근사한 차림으로 허리에 단검까지 차고 있다. 마치 중류 귀족의 자식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당신, 연기력 진짜 끝내주는데.” 레티시아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좀 전의 사건을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객이 사자의 홀까지 숨어 들어왔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이런 차림이라면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연설, 진짜야? 저 왕이 천하를 제패한다는 거.” “나도 몰라. 하다보니 말이 그렇게 됐어.” 왕비는 젖은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쳐내며 곁에 놓여 있는 조끼를 몸에 걸쳤다. 좀 전의 세수도 그렇고, 눈앞의 적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레티시아 역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리에 찬 단검을 왕비의 등에 명중시키는 것도 이 남자의 기술이라면 손쉬울 텐데. 그런데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조끼를 입고 나서도 왕비는 짜증나는 듯 얼굴을 비벼댔다. “대체 뭘 처바른 거야. 아직도 얼굴이 끈적거려.” “그건 전용 유액을 써야만 지워져. 고급 백분이지?” “뭐든 상관없지만 냄새가 지독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충 몸을 정리하고서, 왕비는 나무 위의 남자를 보며 웃었다. “네 얼굴을 보니까 안심이 되는데.” 고양이 같은 눈이 확 커졌다. 순간적으로 입을 쩍 벌리다가, 나무 위에서 그대로 배를 쥐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 그..., 그것 참....” 배꼽을 쥐며 허리를 꺾어 웃다가 발이 미끄러질 뻔하자, 당황하며 왕비가 있는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원 안이 아니라 난간 위였다. 기껏해야 가느다란 나뭇가지 정도에 불과한 곳에 여유 있게 착지한다. 그 위에서 익숙하게 몸을 굽히며, 무릎을 싸안는 자세로 앉아 여전히 웃음을 짓는다. “오싹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안심이 된다니.... 당신, 어떻게 생겨먹은 배짱이야?” “너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이유는 없는데. 넌 나하고 같은 냄새가 나니까.” 레티시아도 그 말로 납득한 듯했다. 묘하게 진지한 얼굴로 끄덕인다. “과연.... 그럼 알겠어. 완벽한 연극이었지만 그 무대도 배역도 진짜 당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거로군.” 왕비는 분수에 걸터앉아 난간 위에 ‘멈춰 선’ 남자와 마주 보았다. 원래부터 작은 몸을 웅크리자 왠지 인형 같은 느낌마저 준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놀랐어. 아무리 변장에 능숙한 녀석이라도 대부분은 특기가 정해져 있다고. 그런데 지금의 당신과 좀 전의 그 모습은 전혀 일치가 안 돼.” “셰라도 꽤 잘한다고. 시녀에서 작부, 귀족 아가씨까지 다 해내는 걸.” “하지만 어딘가 공통되는 우아함이라는 게 있잖아? 게다가 특징이 드러나. 여자하고 자는 것밖에 머릿속에 없는 천박한 남자나 거칠고 무식한 용병 같은 건 그 아가씨에게는 무리지. 그렇게까지 다른 인격을 만들어내려면 피곤하지 않아?” 왕비는 조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대가 어떤 입장이든 간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피곤 정도가 아냐. 완전히 지쳐 떨어졌다고. 조금 전에도 네가 공격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 사향고양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잘도 지껄이네. 얌전히 죽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하지만 정말 아까운 걸. 당신, 이 업계에 들어오면 그대로 일인자가 될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굳이 왜 지키는 쪽을 고집하는 거지?” “그게 내 성미에 맞으니까. 너야말로 순순히 공격해오는 것도 아니면서 잘도 지껄이는군. 내가 목적이 아니면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오늘은 맛있는 게 많이 나온다기에 조금만 얻어먹고 갈까 싶어서.” 진지한 얼굴로 식사하러 왔다고 지껄이는 남자를 보며 기막혀하다가, 왕비는 다시금 진지하게 경고했다. “실수로라도 샤미안 앞에는 얼굴 내밀지 마. 월 앞에도. 모처럼의 식전이 엉망이 될 테니까.” “어라? 못 본 척해주는 거야?” “넌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기껏해야 신분을 위장하고 숨어 들어온 정도가 죄라면 죄겠지.” 바로 그 점이 실은 중범죄에 해당하지만. “난 아까 그 귀여운 아가씨의 심부름꾼을 죽였다고. 아니면 옛날 일은 괜찮은 거야?” 남자가 장난스럽게 놀리자 왕비 역시 재미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기 말이야, 레티시아. 내가 그걸 신경 쓰고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널 죽여버렸을 거야. 모르겠어?” 난간 위에 주저앉아 있던 남자는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쿡쿡거리며 웃고 있다. “기쁜 걸.... 정말이지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왜 그런지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나도.” 그렇게 말하며 왕비는 분수 안에 손을 넣었다. 장식을 위해서인지 예쁜 돌이 몇 개 가라앉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집어내더니 곧장 조금 떨어진 나뭇가지를 향해 던졌다. “그러니까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잎새가 무성한 가지 속에서 비명과 함께 엄청난 소리가 났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돌에 맞고 떨어질 뻔하다가 당황하며 자세를 바로잡고 가지에 매달리기라도 하듯 화려한 소리였다. “저런 것도 키워?” 왕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물었다. 그 추태에 레티시아도 민망한 듯이 머리를 싸쥐었다. “정말 어리다고.... 어쨌거나 젊다는 거 있잖아? 다른 사람하고 경쟁하면서 공을 세우는 것밖에 머리에 없는 놈. 전형적으로 그런 타입이랄까. 당신을 죽이면 자기 이름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왕비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저 녀석은 독단으로 움직인 거야? 네 지시가 아니라?” 남자는 과장하듯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해.... 부탁이니까 좀 알아달라고. 나라면 좀더 쓸 만한 자식에게 시켰을 거야.” “그건 그렇군.” 그때 건물 안에서 시녀 한 명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분수 옆에 서 있는 왕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난간 위에 고양이처럼 서 있는 남자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경악한 시녀는 곧바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암살자!!” “엇차.... 그럼 또 보자고.” 남자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난간 위를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그대로 몇 미터는 떨어져 있는 건물로 새처럼 뛰어넘더니 건물 뒤로 몸을 감추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왕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난간의 폭은 기껏해야 2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장식이 조각되어 있으니 실질적으로는 그 반밖에 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짚으면 거꾸로 떨어지고 말 곳을 단숨에 달려서 도약했다. 거의 고양이나 다름없는 평형 감각과 경이적인 유연함. “멋져....” 조그맣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몸으로 저렇게나 멋지게 움직이다니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절도 없이 늘어진 평소의 태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작이다.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왕비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도 자신과 마찬가지이다. 몸도 마음도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비전하! 무사하십니까!” “암살자는 어디에?!” 무서운 기세로 근위병이 달려왔지만 왕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란 피울 것 없어. 아는 녀석이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몇 명이나 죽였을지 알 수 없는 흉악범이라도,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자객이라 하더라도 아는 사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사자의 홀에서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국왕과 왕비가 춤을 춘 뒤에는 미리 선정된 사람들이 춤을 추게 되어 있었다. 특히 신분이 높은 손님-산세베리아 국왕부부, 펜타스의 왕제전하, 란타나의 대공부부 등등 여러 쌍이 중앙에 나와 가벼운 발걸음을 선보인다. 그 사이에는 틸레든 기사단장, 라모나 기사단장에 독립기병대장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왕비의 화려한 변신은 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평상시의 왕비가 어떤 살마인지 잘 알고 있는 만치 받은 충격도 컸던 것이다. 간신히 형식에 맞춰 춤은 췄지만, 파트너의 발을 밟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만한 상태였다. 음악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누구든 중앙에 나와 춤을 출 수 있다. 긴장으로 가득 찼던 홀도 분위기가 확 풀어졌다. 춤을 마친 그들은 가벼운 음료를 가지러 홀 끝으로 물러났지만, 나시아스는 아직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꿈이라도 꾼 것 같아.... 뭔가에 홀린 기분인데. 정말로 아까 그 모습이 현실의 인간 맞아?”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나시아스에 비해 발로는 펄펄 뛰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할 줄 알면 왜 진작부터 하지 않은 거냐고?!” 그런 남자들을 바라보면서 로자몬드와 라티나는 곤란한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 “오늘은 더욱 아름다우셔서..., 정말로 멋지셨습니다.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군요.” “글쎄 말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놀랐습니다. 진짜 꿈에라도 나올 것 같군요.” “예, 정말 멋진 광경이었지요. 게다가 그 말씀도.” “진짜 걸작이더군. 이걸로 어느 누구도 그분이 왕비에 걸맞지 않다는 소리는 못할 거야.” 다른 한 쌍의 남녀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똑같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참 곤란하군요. 완전히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븐은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평상시처럼 검은색 옷차림이었지만, 오늘 입은 옷은 천도 재봉도 최고급니다. 왕궁 전속의 재단사가 정성 들여 만든 옷이었다. 귀족 같은 차림은 죽어도 싫다고 주장하는 이븐과, 오늘만은 분위기에 맞춰달라는 국왕 사이의 타협점이었다. “폐하도 상당히 엉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비전하는 더 심하군요.” “아름다우셨지요? 저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다리를 꼬집어봤답니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로자몬드님과 라티나님도 똑같은 행동을 하셨다는군요.” “무리도 아니군요. 저도 자칫하면 제 뺨을 꼬집어볼 뻔했습니다.” 샤미안도 활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샤미안 역시 아름다웠다. 오늘 입은 드레스는 광택이 도는 녹색 비단에 붉은 비단실로 작은 꽃무늬를 수놓은 것이다. 매끄러운 머리를 틀어 올려, 거기에도 붉은 장식을 꽂았다. 검은 복장과 이븐과 함께 서자 묘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잡담을 즐겼다. 둘 모두 검을 수련하고 엄격한 풍토에서 자라나, 특히 말과는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니 만치 자연스럽게 얘기도 잘 맞았다. 그러다가 샤미안이 미묘하게 어조를 바꾸며 말을 꺼냈다. “얼마 전, 윌로비 경의 자제분과 만났습니다.” “그렇습니까?” “멋진 분이더군요. 조금 얘기를 나눠본 것뿐이지만 남자답고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검은 옷의 산적은 즐거운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거 잘됐군요.” “하지만 그분께는 이미 마음에 정해둔 사람이 있더군요. 저는 거절당했습니다.” 이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샤미안은 그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 눈이다. 제임스 윌로비도 푸른 눈이었지만 그 사람의 눈은 이렇게 빛나지 않는다. 선명하게 햇빛을 받아 빛나는 여름 바다 빛깔.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 유감입니다. 그럼 더 괜찮은 남자를 찾아야겠군요.” 가볍게 농담처럼 돌아오는 대답에, 샤미안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 폐하 쪽을 보고 오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이븐은 그 자리를 떠났다. 뒤에 남겨진 샤미안이 붙잡을 틈도 없었다. 뒤를 쫓을까 어쩔까 망설이는 사이 차례로 춤 신청을 받고 말았다. 젊고 아름다운 명문가의 따님을 남자들이 내버려둘 리가 없는 것이다. 한편 어깨를 으쓱하며 걸어가던 이븐에게 들러붙는 여자가 있었다. 뒤에서 몰래 다가와 힘껏 몸에 팔을 감아온다. 자칫하면 쓰러질 뻔했다. “베니! 장난치지 마.” 이런 짓을 할 인간이라면 롬의 두목밖에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단쳤지만, 묘하게 진한 향수 냄새가 이븐의 후각을 자극했다. “인사 치고는 너무 심하잖아. 누구야, 베니가? 아까 그 애?” 젊은 여자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던 얼굴을 보고 더욱 놀랐다. “안젤리카?!” “그래. 오랜만이네. 7년만인가?” 27, 8세 정도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혈색이 좋고 균형 잡힌 몸에 풍성한 검은머리를 틀어 올리고, 남국의 정열적인 피가 힘차게 빛나는 검은 눈을 하고 있다. 그 눈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설마 이런 데서 옛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이 바보...! 이리 와!” 이븐은 당황하며 안젤리카의 팔을 붙들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뭐야. 이제 와서 다시 사귀자고? 유감이지만 지금 난 정숙한 유부녀라고. 당신한테는 아까 그 귀여운 아가씨가 있잖아? 그건 그렇고, 엄청 고상한 애를 건졌네?” “닥치라니까! 너, 자기 입장은 알고 있는 거야? 발견됐다간 교수형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신 역시 마찬가지잖아. 옛날에는 같이 신나게 트레니아 만을 헤집고 다녔으면서.” “마찬가지가 아냐! 난 그냥 조력자라고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헤~에? 그래서 잘사는 집 아가씨를 꼬셔서 들어왔다는 얘기?” “바보 같은 소리 마. 저 사람은 도라 장군의 외동딸이야.” “에에에?!” 이쪽 역시 중앙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영웅의 이름은 알고 있는 듯,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럼 확실히 놀이 상대로는 안 맞겠네. 들통 났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가겠어. 아니면 당신, 장군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생각이야?” “누가!! 어이, 앤지. 농담은....” “괜찮은 얘기잖아? 한때 여해적이었던 이 안젤리카님이-당신, 듣고 놀라지 마. 지금은 해운국가 키르탄사스의 총독 부인인 걸.” 이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연다. “농담이지...?” “농담 같지만 진짜야. 어차피 총독이라고 해봤자 섬의 대표 같은 거지만, 그러니까 정식으로 초대장도 가지고 있어. 덕분에 이 답답한 차림 좀 보라지. 걷기도 불편해 죽겠어.” 기세 좋게 드레스 자락을 걷어차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정말..., 관리들이 들으면 기절해 자빠지겠네. 자기들이 혈안이 되어서 붙잡으려던 해적들을 자기네 임금님이 손님으로 초대한 셈이니. 옛날엔 델피니아 상선도 죽어라 털어쟀잖아. 정말 우습지?” “그럼, 설마 총독이란....” “응. 당신도 잘 아는 그 카를로스. 이게 또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지. 어울리지도 않는 주제에 열심히 총독답게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니까.”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안젤리카는 장난스럽게 이븐을 바라보았다. “당신 얼굴을 보면 기뻐서 얼굴에 한방 먹여줄 거야. 만나지 않을래?” 예상도 못했던 사태에 이븐은 멍해졌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키르탄사스가 현재의 국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소꿉친구가 그 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것도, 교섭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두 손으로 힘차게 얼굴을 치며 기합을 넣고 씨익 웃음을 짓는다. “좋아. 기꺼이 만나주지.” 그때 월 그리크는 산세베리아의 오르테스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많은 초대객 중에서 ‘국왕’ 은 오르테스뿐이다.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발코니로 나와 선 채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홀에서도 잘 보이지만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대놓고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 더욱 이런 때에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되어 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달튼이 홀 쪽에 서서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람을 견제하고 있다. 산세베리아는 신생국가로 호족들 간의 충돌이 잦다. 따라서 사람들의 성질도 거칠고 세련된 분위기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월도 그렇게 듣고 있었지만, 산세베리아의 젊은 왕은 놀랄 정도로 온화한 말씨였다. 동작에도 기품이 있고 의연한 성격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는 정말로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과연 중앙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전쟁의 여신이시더군요. 폐하는 멋진 보물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니, 그런 말을 들으면 민망할 뿐이야. 좀 전의 선언을 들었으면 알겠지만..., 왕비는 호의로 내 곁에 있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아.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의 지배하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이지.” 오르테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힘차게 단언한다. 소유물 취급 따위를 했다가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산세베리아의 젊은 왕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중앙에서 가장 강대한 왕에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와는 반대로군요. 폐하는 부인만은 소유물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 반대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처 하나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재산이 아닌가. 아까 만나보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더군.” “감사합니다. 실은 그 재산을 폐하께 맡겨두고 싶습니다만.” “무슨 말인지?” 똑같이 검은머리에 검은 눈이지만 인상은 상당히 다르다. 월 그리크는 나라의 문장이 가리키는 대로 현재 중앙의 사자로 불리고 있다. 그에 비해 오르테스는 혈통이 좋은 명마라는 느낌이었다. “처는 지금까지 외국에 와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나라로 돌아가야 하지만 제 처는 한동안 체재하면서 외국 구경을 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어떠신지요?” 월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의미는 명백하다. 부인을 인질로 바치고 싶다는 말이었다. 델피니아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증거로 삼겠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기도 했다. 이쪽은 산세베리아의 편을 들겠다고도, 보호해주겠다고도 한 적이 없는데 너무 성급한 행동이었다. “부인도 알고 있나?” “이제부터 얘기하려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녀만이 저의 유일한 재산이니까요.” 담담한 말투 사이로는 부인이 자신의 말을 따르며 기꺼이 인질이 되어줄 거라는 데 대한 깊은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 똑바로 월을 바라보고 있다. “폐하는 갑자기 즉위하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난을 동반하는 일인지 저도 조금은 알고 있지요. 동시에 왕이 되고 나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난관이 많은지도 압니다. 저희 나라는 아직 젊습니다. 젊은 만큼 그 힘은 미지수이지요. 대국에는 없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오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의 기초를 정비해야 하지요. 제게는 이상이 있습니다. 저희 나라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우수한 신하도 있지요. 하지만....” 오르테스는 씨익 웃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 조금 방해가 돼서....” 월은 자칫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정말 그 말대로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친형을 퇴위시키고 왕이 된 남자이다. 액면대로의 인간일 리가 없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먼저 땅을 일궈야 합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지반을 다져야지요. 하지만 저희 나라에 부는 바람은 그런 작업조차 완전히 망칩니다. 곤란하기 짝이 없지요.” “하지만 오르테스 왕. 그 동풍을 치운다고 한들 더 강한 바람이 불지도 모르지 않는가?” 델피니아가 새로운 위협이 될 가능성은 생각해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일부러 던졌지만, 오르테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기가 막힌다는 듯이 살짝 비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지금 현재 찬바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바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월도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과연, 맞는 말이야. 좋겠지. 부인이 코랄 시를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안내하겠네. 그렇군.... 열흘 정도면 충분할 거야.” 오르테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열흘... 이라고요?” “부족할까? 코랄은 큰 도시지만 그래도 구경하는 데에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을 걸세. 이 식전 덕에 시내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가극 같은 것도 즐길 수 있지만, 그래도 열흘미녀 충분하겠지. 하지만 부인도 혼자서는 쓸쓸할 게야. 모처럼이니 그대도 함께 있어주지 그러나? 열흘 정도 귀국이 늦어진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을 텐데.” 오르테스는 진지하게 말하는 델피니아 국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웃었다. “제 부하가-달튼은 제가 가장 신뢰하는 가신 중 한 명입니다만, 당신을 두고 구워먹을 수도 삶아먹을 수도 없는 능글맞은 너구리라고 평하더군요. 과연 그 말대로입니다.” “그거 의외로군. 이래봬도 알맹이는 꽤 순진한 편이야. 그건 다들 인정하고 있네만.” 오르테스가 의심스러운 듯이 월을 쳐다보았다. 월은 왕비의 말을 떠올리며 혼자서 웃음 짓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분명히 산세베리아는 사해에 면해 있었지. 그 바다에서 물고기는 잡히는지?” 오르테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사는 요크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지라 그리 자세하게 아는 것은 없습니다만, 그 바다는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 천혜의 자원이라고 합니다. 1년 내내 물고기도 잘 잡히고 파도도 잔잔하다고 들었습니다.” “호오? 그럼 자유럽게 항해도 가능하다는 말이군.” 오르테스는 고개를 저었다. “원양으로 나가면 그 바다는 갑자기 돌변한다고 합니다. 크고 작은 섬이 무수히 얽힌 지형인데다 날씨도 변덕스럽고 조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지요. 어부들도 그 너머로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 역시 거기에서 유래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분명히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올 수 있었다. 이븐의 아버지는 그 바다를 건너왔었다. 그것도 대선단을 조직해서가 아니라, 질의 말에 따르자면 돛과 노만 간신히 달려 있는 소형 선박이었다고 했다. 오르테스와 대화를 마치고 홀로 돌아온 뒤에도 국왕은 계속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배의 성능이 뛰어난 게 아니라면 항해 기술이 뛰어나거나-. 스케니아의 공작에게 여정을 물어보자 라그란에서 강을 타고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고 한다. 서쪽에 바다가 없느냐고 물어봐도, 그쪽은 야만족이 지배하는 버려진 땅이라 아무도 가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자기 나라의 진리를 나불나불 떠들어댈 정도의 인물은 외교관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국왕의 기억에 있는 이븐의 아버지와 보로조프 공작은 굉장히 인상이 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인종적으로 중앙의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는 공작에 비해, 게오르그 아저씨는 한눈에 야만족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접하고 있을 때, 의외의 인물이 의외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때 해적이었던 카를로스, 현 키르탄사스 총독은 몇 년만에 보는 얄미운 연적의 얼굴에 경악했다. 카를로스는 듬직한 체구의 30대 남자로 특히 목소리가 컸다. 그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상황을 깨닫고 당황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이 자식, 정말 잘 만났다! 나중에 결판을 지어주지!” 이븐은 웃고만 있었다. “너도 엄청 끈질기네. 아직도 그런 소리야? 안젤리카도 지금은 네 마누라잖아.” “그거하고 이거하곤 얘기가 달라! 한 대 두들겨 패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다고!” “그러니까, 왜 내가 너한테 맞아야 한다는 거야? 그때 안젤리카가 네 마누라였고 내가 뻔히 알면서도 손을 댄 거라면야 얻어맞아도 할 수 없지만, 유혹한 건 저 녀석이었다고. 난 저 녀석이 너하고 사귀는 줄도 몰랐어. 갑자기 펄펄 뛰면서 달려온 너에게 실컷 욕먹고 떠나야 했던 나야말로 피해자 아냐?” “시끄러! 여기가 배였으면 당장 갑파나 위로 끌고 나갔어! 조각조각 꽉꽉 뭉쳐다가 돛대에 매달아주지!” “잠깐, 카를로스.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서 어쩌자는 거야?” 안젤리카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쪽은 옛날 남자. 당신은 내 지금 남편. 당신이 이겼어. 그걸로 충분하다니까.” “넌 꺼져 있어! 대체 왜 이 자식이 이런 자리에 굴러와 있는 거야! 설마 너... 아직도 이 녀석하고 만나는 건 아니겠지?!” “바~보. 좀 전에 막 발견했는데 만나고 있을 틈이 어디 있어?”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야! 너란 녀석은 그런 쪽으로 마음만 먹으면 한도 끝도 없이 행동이 잽싸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잡은 거지.” 이븐은 쓴웃음을 참으며 두 사람을 데리고 발코니로 나왔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더라도 이 코랄 성의 무도회장에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대화였다. “옛날 일이야 그렇다 치고, 지금 얘기나 좀 해보자고. 레테 섬을 차지하고 있던 네가 키르탄사스 총독이 되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키르탄사스하고 델피니아가 손이라도 잡는 거야?” 카를로스는 마음에 안 드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대가리에 구더기라도 끼었어? 우리는 원래 현상수배자야. 이제 와서 들통 난다고 얌전히 붙잡혀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손을 잡을 생각도 안 들어.” “그럼 어째서 초대에 응해 여기까지 온 거지?” 해적 카를로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이, 이븐. 난 배에서 나고 자란 바다의 인간이야. 여기서 바다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 언제라도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어. 그런 김에 이 바보 같은 연극도 좀 구경해보러 온 거지. 너도 위험해지면 섬으로 와. 이대로 얌전히 해결될 리가 없지. 언젠가 반드시 중앙은 전화에 휩싸인다.” 조각을 낸다느니 매단다느니 하는 험악한 말도 진심은 아니다. 이를테면 재회의 인사 같은 말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 오늘은 화해하는 자리라고.” 이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카를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육지 놈들이 하는 짓도 뻔해. 탄가도 파라스트도, 물론 이 델피니아도 겉으로만 화해한 척하고 있을 뿐이야. 짜증나는 놈들이지. 더럽게 고상해서 구역질이 난다고.” “화해할 생각이 없다는 건 어떻게 알지?” 카를로스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도 목소리만은 극도로 낮추어 속삭였다. “세 나라 전부 우리에게 손을 뻗었다고. 부디 협력해주시면 감사하겠단다. 대화삼국이 그렇게까지 해적에게 굽실거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중앙의 제해권을 손에 넣고 싶은 거야. 그건 왜지? 또 한판 벌이기 위해서일 게 뻔하잖아!” “흐응~. 그거 확실히 수상하네.” 이븐은 마음속의 동요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키르탄사스 총독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중에서도 파라스트하고 델피니아가 아주 끈질겨. 파라스트는 펜타스하고 손을 잡고 있지. 펜타스는 우리 단골이라고. 반드시 어느 한쪽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면 파라스트로 할까 생각했었지만, 그 파라스트는 작년 델피니아에게 화려하게 무릎을 꿇었지.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여기 임금님 얼굴도 한번은 봐줄까 했는데.... 긴장감이 부족하달까, 패기가 없달까.... 저런 인간이 잘도 오론을 이겼다 싶어.” “난 싫지 않아. 멋진 남자던데.” 안젤리카가 즐겁다는 듯 말하자 카를로스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너, 저런 헤벌레한 자식이 좋아?!” “멋진 남자라고 질투하지 마. 나한테는 당신이 제일 멋진 남자니까. 알고 있잖아?” “웃.... 그거야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 총독은 부인에게 상당히 약해 보인다. 둘도 없이 사랑하는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아직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은 중앙의 사자이니 뭐니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했더니.... 아니 그야 몸은 꽤 큼지막하지만 저런 얼간이 같은 새끼가....”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 신나게 욕을 해대는 자리에 그 얼간이 같은 새끼 본인이 갑자기 얼굴을 내밀었다. 카를로스도 안젤리카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국왕은 그 자리에 있는 이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즐거운 자리가 되셨는지?” “아..., 황송합니다. 바로 지금도 정말로 훌륭한 연회라고 처와 얘기하고 있던 참입니다만....” 거의 직립부동 자세로 딱딱하게 굳은 채 말했다. “그거 잘됐군. 총독과는 앞으로도 가까이 지내고 싶으니까. 그러는 김에 우리나라와의 동맹 건도 재고해주면 더욱 고맙겠네만....” “아니오, 폐하.” 기가 죽어 있던 카를로스가 자세를 곧게 펴며 말했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지요. 대륙의 바람과는 맞지 않습니다. 뱃사람에게는 뱃사람의 규정이 있고 저희들은 그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이븐이 웃음을 터뜨렸다. “더럽게 정중한 소리도 나불댈 줄 알게 됐네, 총독 씨.” 카를로스는 새파랗게 질려 당황하며 변명했다. “바보, 조용히 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 남자는 옛 지인으로....” 국왕은 이상하다는 듯이 소꿉친구를 향해 물었다. “총독과 아는 사이였다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지?” 이븐은 낮게 웃고 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키르탄사스의 총독각하 따위 몰라. 내가 아는 건 카를로스라는 해적이다. 옛날에는 같이 손잡고 델피니아 상선도 털던 사이지. 이 이름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무섭게 달려올 관리들이 한둘이 아닐 걸? 설마 그 녀석이 총독 짓거리씩이나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너, 해적질도 했었어?” 국왕은 기막혀했고, 카를로스는 분노한 나머지 안색이 변한데다, 안젤리카는 새파랗게 질려 남편의 어깨에 매달렸다. “옛날에는 해적이고 지금은 산적이라. 너도 끈기가 없군.” “아주 잠깐이야. 신세를 진 대신 좀 손을 빌려준 셈이니까. 그런 것보다도,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총독각하가 도망쳐 버린다.” “아차, 그건 곤란하지.” 국왕은 진지하게 말하고서, 총독을 다시 바라보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이 친구가 신세를 졌다니 정말 감사하오.” 카를로스는 눈을 크게 치뜨며 이븐과 국왕을 번갈아 바라보다 간신히 말했다. “친... 구...?” 국왕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븐을 돌아보았다. “얘기 안 했어?” “할 틈이 없었어.” 완전히 몰래 숨어들어왔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옛 남자가 현재 국왕의 측근인 독립기병대장이라는 말을 듣자 안젤리카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카를로스는 그런 부인을 등으로 감싸며 구석에 몰린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네놈, 잘도 속였겠다...!” “착각하지 마.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주절주절 떠든 거잖아. 걱정 안 해도 너하고 안젤리카는 무사히 섬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안심해.” “그런 입에 발린 말을 믿을 수 있을 줄 알아!” “정말 말귀 한번 어둡네. 네가 교수형 감이면 나도 교수형 감이야. 안 그래, 국왕폐하 씨?” “뭐... 평등의 정신을 발휘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나도 사형시킬 거야?” 이븐이 푸른 눈을 빛내며 똑바로 쳐다보자 국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교활하기 짝이 없다. 포상도 출세도 다 마다하는 주제에, 이럴 때만은 우정에 매달리며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다. “흐음, 거 곤란한 걸. 너도 아는 대로 난 국왕이야. 과거에 지은 죄라고는 해도 불문에 붙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설마 널 사형시킬 수도 없어. 같은 이유로 총독도 체포할 수 없지. 그래서 말이네만, 총독. 이참에 서로 과거 일은 잊어버리기로 할까 하는데, 어떨까?” 카를로스는 그래도 경계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우리들이 덮친 상선은 기껏해야 스무 척도 안 됩니다. 이 자식이 폐하 쪽 인간이면 숨겨봤자 소용없지요. 바다 쪽 관리들은 지금도 내 얼굴을 잊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넘어가주겠다는 겁니까? 해적은 체포해서 교수형, 그게 정의라는 거 아니었던가요?” 언제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대에게, 국왕은 부드럽게 말했다. “총독. 난 즉위한 지 5년이 되네. 그 5년 사이에 배운 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정의가 언제나 올바르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지. 관리들이 해적을 쫓는 건 내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고, 명령이 충실하게 수행되지 않으면 곤란해. 규율에 엄격한 관리들은 과거의 죄든 뭐든 봐줄 수는 없다고 주장할 테고, 물론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맞는 말이야. 하지만 때로는 법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지. 난 이 남자를 잃을 수 없어. 절대로. 그럴 바에는 차라리 관리를 전부 갈아치우겠어. 만약 이 녀석이 국왕의 비호를 틈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봐줄 거라고 착각할 인간이었다면 아까울 것 하나 없지. 기꺼이 몇 번이든 사형시키겠지만....” “너, 죽여버린다. 내가 그런 웃기는 짓 할 것 같아?” 이븐이 화를 내자 국왕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라는군. 난 이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키르탄사스를 적으로 만들 생각도 없지. 따라서 과거의 일은 못 본 척 지나가겠어. 그것뿐이네만, 이상한가?” 진지한 얼굴로 국왕이 말하자 카를로스도 대답이 궁해졌다. “아니, 그게.... 이상하다기보다, 그것이....” “그러니까 옛날 얘기는 이걸로 끝내지. 이븐, 네 옛날 직업에 그 이상 다른 건 없겠지? 여기다가 도적단에도 가담했다는 소리가 나오면 나도 더는 못 참아.” “너,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트레니아의 해적도, 타우의 산적도 당당한 도적이잖아.” 기운 없이 대답하는 이븐을 보고 국왕은 유쾌하게 웃었다. “과연, 그랬었지. 분명히 통행료니 뭐니 하는 건 강탈품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 “바보. 큰 소리로 떠들지 마.” “미안, 미안. 그럼 총독. 잘 부탁하네. 잔치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 즐겁게 지내도록.” 국왕은 그 말만 남기고 홀로 돌아갔다. 여유 있는 태도였다. 정말로 손님과 잠시 얘기라도 나눈 듯한 분위기로, 홀에는 근위병도 배치되어 있었지만 뭔가를 지시하는 눈치도 없었다. 키르탄사스의 총독부부는 거의 기가 막혀서 얼어버린 채, 다른 손님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국왕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건..., 얼간이 따위가 아니구만.” “응....” “천년은 묵은 능구렁이야.” “응.” 안젤리카 역시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연회에는 타우에서도 여러 명이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원래 산적인 그들에게 있어서 이 자리는 한없이 불편할 뿐이었다. 번쩍거리는 테이블은 꽃 장식으로 넘쳐나고, 악사들이 우아한 음악을 연주하며,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장엄한 홀에 울린다. 이러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먹어도 영 먹은 것 같지가 않네.” 비스체스가 신음하며 말했다. 술도 요리도 극상품이었다. 이래서는 불평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칫하면 깨질 것처럼 가느다란 술잔으로 마셔야 하는데다 더 마시려고 하면 급사가 일일이 따라주기까지 한다. 병째로 줄 수 없겠느냐고 급사에게 부탁해도, 그래서는 자기들이 일을 게을리 하는 게 되니 불가능하다며 완곡하게 사절했다. 내키는 대로 꿀꺽꿀꺽 들이마시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비스체스를 보고 질은 씁쓸하게 웃었다. “뭐,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잘하라고.” “제기랄. 역시 이런 데는 영 안 맞아서.... 넌 엄청 태연하네?” 이상하다는 듯이 오랜 친구를 바라보자, 베노아의 두목은 낮게 웃음을 지었다. “태연할 리가 없잖아. 옛날부터 그랬어.” 하지만 유유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은 타우에 있을 때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지도자의 입장에 선 자가 지니는 관록과 품격이었다. “아, 저 사람이 그 여공작 씨?” 로자몬드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가희 샤리와 대등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폴라가 단언했을 정도의 미모였다. 무엇보다도 무술로 단련된 유연하고 탄력 있는 움직임은 타우의 자유민들도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로자몬드는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질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저야말로 결혼 축하드립니다.” 형식대로 인사를 나눈 뒤 로자몬드는 생긋 웃으며 질에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한 곡 추시겠습니까?” 비스체스는 마시려던 술을 뿜어버릴 뻔했지만 로자몬드는 지극히 진지했다. “당신이 독립기병대장의 댄스 연습을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독립기병대장의 솜씨는 아까 보았습니다만, 당신은 어느 정도 잘 추시는지 보아두지 않으면 손해일 테니까요.” “어차피 원숭이가 재주 피우는 정도입니다. 감히 당신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부드럽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귀를 곤두세우고 있던 동료들이 이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치려 들 리가 없었다. 일제히 재미있다는 듯이 덤벼든다. “어이, 여성의 신청을 거절하다니....” “그건 안 되지.” “솜씨 한번 보여주라고.” 일치단결이 타우의 신조였다. 그리고 다수결은 의사 결정의 기본이다. 설령 대두목이라고 해도 저항은 불가능했다. 물론 그들은 익숙치 않은 댄스에 질이 고생하는 꼴을 보며 웃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로자몬드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 질의 동작은 완벽하게 경지에 올라 있었다. 능숙하게 내딛는 발이나 움직임에도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없고 심지어 우아하기까지 했다. 귀부인들이 저마다 눈을 동그랗게 떴을 정도였다. “저기, 저쪽 좀 보세요.... 로자몬드님과 함께 춤추고 계시는 저분, 어느 분이시지요?” “저 멋진 분 말이지요? 그게, 아무도 모른다지 뭐예요.” “어머나....” “나중에 소개해달라고 부탁드려야겠네요.” 산적들은 기가 막혀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곡이 끝나자 로자몬드는 남자를 데리고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는 뜻이다. “어머나, 세상에. 사보아 공작님이 보시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을까요?” “함께 계시는 분이 너무 멋지죠?” 부인들은 우아하게 호호호 웃고 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자유민 남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발코니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뒤, 로자몬드는 다시금 질에게 인사를 했다. “멋졌습니다. 짧은 기간 연습하셨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아까 사보아 공에게도 발을 밟힐 뻔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정말 안심하고 춤출 수 있었습니다.” 질도 웃었다. “저 비전하를 뵌 뒤니 무리도 아니지요. 어쨌거나... 칭찬을 들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만....” 로자몬드는 홀 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품에서 뭔가를 소중하게 꺼내들었다. 낡은 반지였다. 하지만 굉장히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금테 위에 멋진 홍옥이 박혀 있다. “이걸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질은 무표정하게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왜 이런 걸 산적에게 주시려는 겁니까?” “춤을 추어주신 기념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비싼 물건이군요. 왕족의 몸값쯤은 될 만한 물건인데요. 받을 수 없습니다.” 로자몬드는 반지를 꽉 쥐었다. “받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뒤는 누구에게 양도하든 버리든 당신 마음대로 해주십시오.” “소중한 물건이지요?” “예. 엘리너 고모님의 유품입니다. 이것은 조던이 좋아하던 물건이니까 조던에게 넘겨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딱딱한 얼굴로 말하는 로자몬드를 보고 질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건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반지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저도 한 사람의 부인과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조카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나면 반지 하나라도 벨민스터 가문의 재산을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게 될 테니, 제가 작위에 있는 동안에 의무를 다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주시는 게 의무라는 겁니까? 무책임한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고모님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로자몬드는 지금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고모님은... 분명히 기뻐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이다. “이것만 받아주시면 다시는 이 문제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폴리시아도... 폐하의 결정에 따를 생각입니다.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베노아의 두목은 포기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리신다면 제가 받지요.” 작은 보물이 여공작에게서 산적의 손으로 넘어갔다. 로자몬드는 그제야 무거운 짐을 덜어버린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동시에 쓸쓸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제게 춤을 가르쳐준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은 사촌 고드프리였습니다. 굉장히 능숙한 사람이었지만 형인 조던은 더 잘 춘다고 자주 얘기했었지요. 무예에도 풍류에도 뛰어난 사람이었다고요. 고드프리는 언제나 실종된 형의 편이었습니다.” 말을 끊고 로자몬드는 뚫어져라 질을 바라보았다. “따로 춤 연습 같은 건 하지 않으셨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독립기병대장께도 말을 맞추도록 부탁해주십시오.” 수염으로 덮인 입가에 박력 있는 웃음이 떠올랐다. “과연. 제가 얼마나 출 수 있나 시험해본 거로군요. 당신 생각입니까?” 로자몬드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조언입니다. 타우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당신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요.” 질은 졌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저 임금님은 이런 구석이 정말 얕볼 수 없는 인간이다. “단, 확인만 하지 절대로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걸로 됐습니까?” 얼굴은 굳은 채였지만 로자몬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벨민스터를 버린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당신에게는 당신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제 사정을 억지로 강요하는 건 오히려 폐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폐라니, 로자몬드로서는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질은 유쾌하게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그 점에 있어서는 폐하가 옳습니다. 당신에게는 공작가를 지키는 것이 삶의 전부이지요. 마찬가지로 제게는 지켜야만 하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타우가 영지입니까?” “그런 표현은 수긍하기 힘들군요. 그 땅도, 지금의 생활도, 함께 산적질을 했던 동료들도 제 재산-아니 저의 일부입니다.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이지요.” 입으로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로자몬드를 바라보는 눈은 따스했다. 로자몬드도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수염이 난 뺨에 키스했다. “전 유부녀지만 이건 사촌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키스이니 용서해주시겠지요.” 단숨에 말하고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절을 한 뒤 질에게 등을 돌렸다.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발코니에 홀로 남겨진 베노아의 두목은 조금 웃으면서 손바닥 위에 놓인 보물을 굴려보았다. 선홍색이다. 핏빛, 혹은 불꽃이 담겨 있는 듯한 생명의 빛. 이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것도 같다. 그때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베네사의 딸인 애비였다. 이쪽 역시 오늘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드레스를 입고 있다. 연푸른 바탕에 분홍색 꽃무늬가 든 드레스로 상당히 예뻤다. “호오, 잘 어울리는데.” “그래? 이상하지 않아? 이런 거 입어보는 건 처음이라서 말야. 움직이기 더럽게 힘들어. 머리 당기는 것도 장난이 아닌데.” 불평은 하면서도 예쁜 옷을 입고 칭찬을 듣는 것이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기쁜 듯이 뺨을 붉혔다. 질의 손에 있는 물건을 보고서 그 파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떻게 된 거야, 그거?” “이거? 아까 기념으로 받았어.” “그 여공작이 준 거야?” 애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질이 들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귀족들, 걸치는 건 화려한 주제에 더럽게 짠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간단히 줬다고?” 너무나도 솔직한 감상에 질도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서 별로 가지고 있고 싶지 않다더군.” “흐응.... 하지만 굉장해.” 애비는 눈을 빛내며 붉은 보석을 바라보았다. 통행료로 이런 귀중품을 강탈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벌이’ 였다. 아무리 본 적이 많다 해도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파악하는 정도이지 순수하게 ‘아름다운 물건’ 으로서 바라본 적은 없었다. 의심할 바 없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보석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물건이다. 저도 모르게 황홀경에 빠져 중얼거렸다. “예쁘다....” “갖고 싶어?” 질의 말에 애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황하며 고개를 젓는다. “아냐! 그럴 셈으로 한 말이....” “괜찮아. 갖고 싶으면 줄게.” “에....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소용없잖아.” 질이 반지를 애비의 손에 쥐어주었다. 하지만 자유민의 딸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듯했다. 기뻐하기는커녕 험악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얼굴을 굳힌 채 손바닥 위에 놓인 보물을 바라보고 있다. “왜 내게 주는 거지...?” “그야 버리는 것보다는 누군가 써주는 게 반지 입장에서도 기쁠 테니까.” 애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 “사양하지 마. 나도 공짜로 받은 거니까.” 롬의 처녀는 얼굴을 홱 들고서 질을 노려보았다. 거칠게 반지를 돌려준다. “필요 없어.” “왜? 마음에 안 들어?” 애비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난 눈빛이었다. “당신, 정말 아무것도 몰라. 언제까지나 날 어린애 취급 하면서, 좋아한다고 말해도 조금도 진심으로 생각해주지 않고. 하지만...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이런 물건 줄 필요 없잖아! 다른 여자에게나 줘!” 반지를 밀어붙이고 달려가려던 애비의 팔을 질이 붙잡았다. “기다려, 애비. 결혼하면 되는 거지? 그럼 나하고 결혼해줘.” 애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갰다. 화가 난 나머지 눈물까지 그렁거리고 있었다. “질!! 농담은 적당히...!!” “농담이 아냐. 보는 바대로 난 너보다 굉장히 나이 든 중년이지만, 그래도 좋다면 내 마누라가 되어주지 않겠어?” 애비는 화내는 것도 잊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눈꼬리에 걸려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뺨을 적셨지만 그것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뚫어져라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마누라... 라니....” “싫어?” “싫다니..., 하지만....” “억지로 붙잡아서라도 마누라가 되겠다고 말했던 건 너야. 나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질은 애비의 팔을 붙든 채 그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싫어?” 진지하게 말하는 남자를, 애비는 망연자실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질 않는다. 완전히 당황해서 대답은커녕 무슨 얼굴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웃어야 하는 걸까, 화내야 하는 걸까. 기뻐해야 하는 걸까, 토라져야 하는 걸까. 완전히 어리둥절해진 애비는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깐..., 기다려봐.... 뭐야, 그거.... 자, 장난치는 걸로밖에 안 들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질은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주워들고 자신도 애비의 곁에 주저앉았다. “청혼을 했는데 장난을 치느냐는 소리를 듣다니, 나도 체면이 말이 아니군.” “하지만... 나, 나 따위한텐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었잖아!” “그야 아장아장 걷는 정도가 아니라 엄마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알고 있는 애에게 결혼해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순순히 좋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내 나이도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널 마누라로 달라고 했다간 베니 손에 죽어버릴 거야. 자기도 억지로 붙들어서 결혼한 주제에, 그런 구석은 묘하게 융통성이 없으니까 덤으로 화가 나면 뭔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지. 그 녀석이라면 동료들을 끌고 베노아로 쳐들어올지도 몰라. 그런 이유로 롬과 베노아 사이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나도 마을 녀석들에게 면목이 없으니까.” 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애비는 울먹거리면서 노려보았다. “당신..., 역시 장난치는 거지.” “진심이라니까.” “거짓말! 노, 놀리기나 하고....” “이봐, 애비. 아직 대답을 안 했어. 내 신부가 되어주겠어?” “바보!!” 타우의 남자들은 얼어붙은 채,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발코니에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셰라는 아까부터 궁지에 빠져 있었다. 무도회라는 것은 독신 남성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처녀를 물색할 둘도 없는 기회였다. 즉 셰라 앞으로도 춤 신청이 쏟아졌던 것이다. 셰라가 걸치고 있는 것은 얇은 연보라색 비단을 몇 겹이나 겹친 드레스였다. 얼마 전 왕비가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가슴을 드러낼 수는 없기에 목깃과 소매를 길게 잡았다. 상반신에는 은실로 수를 놓고, 가슴에도 모양을 내기 위해 천을 쑤셔 넣었다. 높이 틀어 올린 은발에는 금비녀를 장식했다. 언젠가 그 남자가 주었던 물건이다. 이것만은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다. 실제로 셰라도 마지막까지 완강하게 저항했었다.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벌하려는 의미였지, 절대로 머리에 장식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딴 사람이 보면 그냥 머리 장식이야. 아무도 굴욕의 기념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잘 어울리니까 그날 꽂으면 될 것 아냐.” 이렇게 되면 꾸며놓고 즐기고 싶다기보다도 역시 보복이 아니었나 의심하게 된다. 아예 보기 흉하게 화장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셰라는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보랏빛 백합 같은 모습에는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자연에는 존재할 수 없는, 수많은 우연이 거듭되어 탄생한 듯한 기묘한 위기감이라고 해야 할까. 동작은 우아하고 부드러운데도 어딘가 긴장된 분위기가 있다. 가녀리고 연약하게 보이면서도 그 안은 차갑게 빛나고 있다. 마치 달처럼. 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남자도 아닌 신체가 자아내는 절묘한 긴장감이지만,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아가씨라고만 생각해서 벌이 꿀에 달려들듯이 모여들었다. 제각각 용모에도 가문에도 자신이 있는 젊은 귀족들이 차례차례 신사적으로 춤을 신청한다. “성함을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어느 댁 아가씨이시죠?” “다음 곡은 꼭 저와 함께 추어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셰라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케니아의 파로트 백작의 먼 친척인 셰라 파로트라고 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약혼자가 있는 몸이니 춤은 출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될 대로 되라지. 암살자의 오기와 명예를 걸고라도 완벽하게 연기해주마. 하지만 남자라는 것은-자신도 그 중 한 명이지만-이렇게 정중하게 거절해도 얌전히 물러날 줄을 모르는 생물이다. “아, 스케니아의.... 그 북쪽 나라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꽃이 있다니 지금까지 전혀 몰랐습니다.” “대체 그 고지식한 약혼자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춤 한 곡 추는 것도 허락해주지 않다니 속이 좁은 사람이군요.” “그렇고 말고. 저는 당신과 춤출 권리를 걸고 그 약혼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대답은 하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난다. 그런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자신은 여자로서 자라났다. 남자들의 능글맞은 시선을, 호의적인 태도를, 때로는 자신에게 보내는 마음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지금, 바로 그것이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본래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개는 주인을 닮아간다고 하지만, 이만큼이나 그 사람에게 물들어버린 것일까. 그 주인은 자신을 이런 장소에 끌어내놓고 구경조차 하러 오지 않는다. “약혼자의 성함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차라리 “리입니다” 라고 대답해줄까 싶었다. 설마 정말 그럴 수는 없었지만 웃으며 얼버무리는 데에도 한계라는 게 있다. 한 곡이라도 추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남자에게 붙잡히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다고 같이 춤을 출 생각은 없다. 불쌍하지만 이븐을 약혼자라고 둘러댈까 생각하고 있을 때, 셰라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 “억지로 부탁하는 건 그만두시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 틈엔가 등 뒤에 사람이 서 있었다. 근처에 있던 여성들이 저마다 눈을 크게 뜨며 뺨을 붉히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분 나쁜 예감에 딱딱하게 굳어 있자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엘마 골슨이다. 이 사람하고 약속을 했네만 당신은?”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우물거리며 물러났다. 다른 구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셰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씁쓸하게 한숨을 쉬고 짜증나는 듯 내뱉는다. “또 너야?” “안 돼?” 뒤를 돌아보자 변함 없이 수려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귀족 자제 치고는 수수한 복장이었지만 웬만한 바보나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남자와 경쟁할 생각 따위 할 리가 없다. 처음 보는 한 쌍의 미남미녀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양쪽 모두 마찬가지였다. 얼굴만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날카롭게 물었다. “그 가명. 아직까지 쓰고 있어?” “네가 보고하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입을 다문 거지?” “그런 걸 일일히 일러바치기도 귀찮다고 그 사람이 말했으니까.” 반츠아는 기묘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셰라도 이상한 듯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필요한 말밖에 하지 않는 이 남자가 이렇게 주저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남자는 짜증나는 듯 말했다. “네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의미불명의 질문. 눈빛으로 무슨 소리냐고 묻자 상대는 살짝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레티 말야.” 셰라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칫하면 지금 자신의 역할도 잊고 남자의 얼굴로 돌아갈 뻔했다. 내뱉듯이 대답한다.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즐겁다더군.” 반츠아의 얼굴이 경악과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그건 또 더럽게... 취미가 고약하군.” “동감이야.” 힘주어 단언한다. 그런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심경의 변화에도 당황하고 있었다. 작년에 만났을 때에는 덤벼들려는 몸을 간신히 억누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냉정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물론 상황은 달랐다. 이곳은 코랄 성의 내부. 입장으로는 셰라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하면 근위병들이 달려온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이쪽도 그런 식으로 승부를 낼 생각은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숨어든 거지?” 남자는 대답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저쪽에서 왕비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조금 전 모든 사람들이 탄식하며 바라보던 그 미녀의 흔적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시종 같은 차림에 검을 꽂고 경쾌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여어, 꺼먼 녀석. 파티는 어때?” 웃으면서 말을 걸어오자 반츠아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셰라는 한숨을 쉬었다. 수상한 인물을 발견했으니 위병을 부른다는 당연한 공식이 이 사람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기분이 나빴는지 남자는 가볍게 왕비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어라, 도망치네.” “그럴 땐 쫓아냈다고 하는 겁니다.” 셰라가 주의를 주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감탄한 듯이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름답게 차려입은 셰라를 보고 씨익 웃었다. “너하고 같이 서 있으니까 잘 만들어진 인형 한 쌍 같던데 말이지. 완벽해. 어딜 어떻게 뜯어봐도 미인이란 말이야.” “리. 제발 좀 봐주세요. 아까부터 남자들 춤 신청을 거절하느라 죽겠습니다!” “거봐. 내 기분도 좀 알겠지? 저 꺼먼 녀석하고 춤이라도 추지 그랬어?” “화낼 겁니다....” 이 말에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손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하다니, 농담이라도 말도 안 된다. 자신도 저 남자도 바늘 한 개만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다. 춤을 추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급소를 공격하는 것 역시 식은 죽 먹기였다. “아무 짓도 못해, 이런 데에선. 네가 쓰러지기라도 했다간 큰 소란이 날 테니까. 그보다도....” 살짝 말투를 바꾸며 왕비가 물었다. “수상한 녀석 못 봤어?” “지금 말도 안 되게 수상한 인간이 있었지 않습니까!” “저건 괜찮아. 이런 장소에서 소동을 일으킬 만한 녀석은 아니니까. 일으킬 것 같은 녀석이 숨어 들어왔어.” 셰라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물론 그 고양이 같은 눈의 남자였지만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아까 만났어. 얘기 도중에 방해를 받을 뻔했지. 돌을 던져주긴 했는데.... 천하의 암살자 일족답게 도망도 잘 치더라고.” “이상한 구석에서 감탄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게다가 그..., 레티시아의 목표는 당신 아닙니까?” “아니, 밥 먹으러 왔다던데? 어딘가 구석에서 요리나 퍼먹고 있는 거 아닐까나.” “.......” 절대로 남의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셰라는 절망적인 기분을 맛보았다. 인파 한가운데에 맹수를 풀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왕비는 팔짱을 끼며 웃고만 있었다. “어떤 직업이든 간에 진짜는 신용할 수 있어. 레티시아도 그 꺼먼 녀석도 목적 이외의 인간에는 손대지 않지. 도구로 사용하는 일은 있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합니다만....” “아까 녀석은 아무리 잘봐줘도 진짜라고는 해줄 수 없겠더라고. 일부러 저 남자가 보고 있는 앞에서 나에게 덤비려고 했어. 그저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 그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있냐고 물어봐주고 싶지 않아?” “확실히 그렇군요. 본의는 아니지만.” “그런데 그런 녀석들의 경우 또 자존심만은 더럽게 세. 게다가 묘하게 비뚤어져 있곤 하지. 나에게 당하고서 분풀이로 딴 사람에게 손을 댄다면 그것도 큰일이라서 말이야.” 녹색 눈망울은 한 점을 응시하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전사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셰라는 그 얼굴을 응시했다. 요염한 미녀보다도 훨씬 기분 좋고 더욱 아름다웠다. 이런 표정 쪽이 이 사람답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런 실력으로 잘도 당신을 노렸군요?”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어. 파로트란 마을하고 스케니아의 백작 직속으로 나뉘어 있어서, 그 녀석 말에 따르자면 직속 부하 쪽이 훨씬 우수하다던데....” “백작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어설픈 녀석이 섞여 있잖아.” 레티시아의 얘기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공적을 세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이 우수할 리가 없다. “너에게는 전혀 그런 구석이 없었잖아? 더 순수하게 날 죽이려고 했었지.” “하아....” 식은땀이 흘렀다. 어쩌면 이것도 칭찬이라고 하는 말일까. “그 꺼먼 녀석도 마을 출신이지? 오히려 본거지보다 마을 쪽에 괜찮은 인재가 있는 거네. 아니면 너나 그 꺼먼 녀석이 보기 드문 건가?” 셰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어쨌든 간에, 반츠아가 굉장히 보기 드문 존재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남자는 죽지 않았으니까요. 마을을 잃고 우두머리를 잃고, 살아갈 목적도 이유도 잃었으면서도 죽지 않았으니....” 침통하고 무거운 어조였다. “너도 그렇잖아.” “제게는 성령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그 말이 없었다면....” 지금 자신은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셰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틀림없이 목숨을 끊었을 거라는 사실을. 골수까지 새겨진 ‘명령’ 은 그때까지도 유효했다. 자신의 생명보다도,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엔도바 부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아란나는 조바심을 내며 오빠에게 속삭였다. “오빠, 이제 좀 확실히 해요. 라티나님에게는 언제 청혼할 생각이에요?” “이, 이봐....” 직설적인 질문에 나시아스는 당황했지만, 행동파인 여동생은 그 정도로 물러나지 않는다. “전 빨리 저분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데, 오빠가 계속 어물거리고 있으니까 답답하잖아요. 왜 청혼을 안 하는 거죠?” 나시아스는 곤란한 듯이 쓴웃음만 짓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그저 웃고만 있는 오빠에게 짜증이 난 아란나는 나시아스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오빠도 참. 확실하게 좀 하라고요. 저분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아란나. 억지 부리면 안 된다. 만약 내가...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저 사람이 나에게 주는 마음은 우정일 뿐이니까.” 진지하게 타이르는 말에 아란나는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부인이 이쪽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실은 미리 부인에게 부탁도 해두었다. “오빠가 수많은 귀부인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진다고 하니, 오빠 곁에 함께 계셔주지 않겠어요?” 국왕의 전 애첩을 제치고 라모나 기사단장을 유혹할 만한 부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란나의 생각대로, 처음 한 곡을 춘 뒤로 두 사람은 계속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크게 기대하며 대체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살짝 귀를 기울여보자, 이 고기 요리에는 이 향초가 잘 어울린다느니 키우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등등 연애와는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지요. 지금이 정원이 가을빛으로 딱 한창이랍니다. 한번 들러주시지요.” “하지만 너무 자주 폐를 끼치는 것도....” 너무나도 예의바르게 사절하는 오빠의 등을 아란나는 온 힘을 다해 꼬집었다.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그렇죠, 오빠?” 나시아스는 등의 아픔과 쓴웃음을 참느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엔도바 부인도 곤란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잠깐 실례한다며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아란나 입장에서는 해주고 싶은 말도 산더미 같았지만 부인이 자리에 돌아오고 말았다. “오빠는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요.” 낮게 속삭이고서 엔도바 부인에게 인사를 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 해서든 오빠가 청혼할 마음을 먹기를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인 피사로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어른이니 너무 참견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서는 언제까지나 진전이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큰맘 먹고 사보아 공작님께 의논이라도 드려볼까 고민하고서 걷고 있다가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온 성이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지금도 막 지나가던 상대와 어깨를 부딪칠 뻔해 고개를 들고 사과하던 아란나는 믿을 수 없는 얼굴을 발견했다. 발견한 이상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몸을 휙 돌린다. 넓은 복도에서 자신과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향해, 그리움과 기쁨을 담아 힘껏 이름을 불렀다. “반츠아!” 이름을 불린 남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돌아보았다. 깜짝 놀라고 있다.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는 듯했다. 아란나는 걸음을 멈춘 상대를 향해 달려가서, 이쪽 역시 믿기 힘든 표정을 하며 키가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나, 반츠아! 정말 너로구나?! 놀랐는 걸, 이렇게나 멋지게 자라서...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말꼬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란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이야. 그 뒤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했단다. 찾을 방법도 없고..., 굉장히 걱정했어.” “셀레이저 댁의 젊은 마님....” 반츠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 있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오랜만입니다. 그때는... 그때는 정말 큰 신세를 졌는데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셰라가 들었으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 틀림없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부인들을 남김없이 사로잡으며 자신만만한 청년들을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었던 미모의 귀공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종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란나는 상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귀공자인 척하던 반츠아의 모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재회의 기쁨에 얼굴을 반짝이며, 신분이 낮은 인간을 대할 때의 여유와 친밀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 그런 건 다 괜찮단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야. 난 말이지, 한때 안 좋은 생각만 했었단다. 어쩌면 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 아니야. 미안. 이런 소리는 그만 하자.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 어떤 분을 모시고 있지? 네가 너무나도 훌륭하게 자라서..., 정말 신분 높은 귀공자처럼 보이지 뭐니. 어지간한 주인이 아니라면 너만 못해 보이겠어.” 아란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 남자의 몸차림이 시종의 복장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 챌 터였다. 하지만 상대의 말투나 눈빛이 너무나도 시종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의심해볼 생각조차 안 드는 것이다. “먼 북쪽-스케니아라는 나라의 백작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분으로 제 과거를 듣고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반츠아의 몸짓도 표정도 지금은 예의바른 시종 그 자체였다. “마님께서도 지금 코랄에?” “응, 그래. 지금은 아이도 둘이나 있는 걸. 남편 허락만 받을 수 있으면 귀국하기 전에 한번 들러주렴. 스케니아는 먼 나라지?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아란나가 주소를 불러주자 반츠아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꼭이야.” 주인의 부름을 받아 가던 길이라고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남자는 아란나의 곁을 떠났다. 바로 그 모습을 우연하게도 왕비와 셰라가 보고 그 의외의 광경에 두 사람 모두 놀라고 말았다. 저 남자와 아란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합이다. 게다가 한눈에도 상당히 친밀한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셰라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반응할 수 없었지만 왕비 쪽은 적극적이었다. 아란나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지금 그 멋진 남자는 누구야? 남편은 내버려두고 바람이라도 피우는 거야?” “말도 안 됩니다!” 너무나도 큰 목소리였으므로 소리를 지른 아란나 쪽이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비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더욱 놀랐다. “어머나, 비전하. 벌써 갈아입으신 건가요! 정말 멋진 모습이었는데, 너무 아깝습니다.” “뭐야, 보고 있었어?” 아란나는 사자의 홀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신분이 높지 않다. 나시아스에게 부탁해서 살짝 들어온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비의 드레스 차림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그 남자, 엄청 잘생겼잖아. 저 정도면 확실하게 눈 요기는 될 텐데. 저런 남자랑 같이 있으면 굳이 내 여장 차림을 보러 올 것도 없었을 거 아냐.” 앞뒤가 맞지 않는 묘한 주장에 아란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어머나, 비전하.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라겠어요. 전혀 그런 게 아니랍니다. 정말 우연히 만난 거에요. 깜짝 놀라서.... 저 아이도 완전히 어른이 다 되어서 자칫하면 못 알아볼 뻔했답니다.” “저 아이?” 이 말에는 왕비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성령은 검은 별이라 부르고, 왕비에게서 ‘진짜’ 로 인정받았으며, 셰라와 몇 번이나 사투를 벌였던 강적을 두고 ‘저 아이’ 라니.... “어떤 사이야?” 아란나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프리세아에 있을 때입니다. 몇 년이나 지난 얘기입니다만, 정말 불쌍한 일이 있었답니다. 저 아이의 고향 마을이 도적들에게 당해서..., 살아남은 건 저 아이 혼자뿐이었지요. 마을은 불타서 흔적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끔찍했습니다.” 8장 아란나는 17세에 피사로와 결혼해 남편의 고향인 프리세아로 이주했다. 시부모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남국의 따뜻한 공기도 마음에 들었다. 시아버지는 경제에 밝은 사람으로 공증인 자격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을에서는 꽤 알려진 명사로, 그 일대의 영주인 유타 백작과도 친교가 있었다. 백작은 온후한 초로의 신사로, 견문이 넓은 시아버지의 세상 얘기를 듣기 위해 자주 저택에 초대 받곤 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초대할 때에는 백작의 저택에서 심부름꾼이 온다. 시간이 늦어지면 마차로 바래다줄 때도 있었다. “그 역할을 맡았던 게 저 아이였지요. 몇 번이나 집에 찾아오다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습니다. 저하고 나이도 비슷했으니 저 아이 쪽에서도 대하기 편했을지 모르지요. 똑똑하고 명랑한 아이로 백작님을 모시게 된 지 채 1년도 안 되었다고 들었지만 백작님께서도 굉장히 아끼셨습니다.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정말 훌륭하게 일하고 있다고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는 걸 보면 백작님을 친아버지처럼 모시고 있을 거라고.... 그 백작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저 아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보고 있는 이쪽이 더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거짓말이다. 셰라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면서 아란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반츠아가 죽인 것이다. 옛날 자신도 몇 번이나 했던 짓이었다. 그때 그 남자의 심리 상태까지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셰라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어지자 왕비가 살짝 눈짓을 했다.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작님은 그 땅의 농민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장례식도 성대했습니다. 저도 참석해서.... 그때 반츠아가 고향에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그 아이는 중개인이 데려온 아이라, 다른 누구도 정확하게 출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사라졌기 때문에 아란나도 조금 의아했다고 한다. 그렇게나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니 고향에 돌아간다고 해도 인사쯤은 한마디 하고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아버지는 반츠아도 일자리를 잃어버렸으니 괜찮으면 새로 일할 곳을 자신이 찾아봐줄 셈이었다며 굉장히 유감스러워했다고 한다. 그 직후 시아버지는 일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웠다. 시아버지가 경영하던 땅은 가까운 곳만이 아니었다. 마침 그 때에는 70카티브나 떨어진 먼 마을까지 나가 있었다. 저녁 무렵에 시아버지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을은 인근 마을을 덮친 도적단 얘기로 한창 시끄러웠다. 5카티브 정도 떨어진 레가라는 작은 마을을 누군가가 습격했다고 한다. 마을은 하룻밤만에 폐허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이상을 깨닫고 달려간 인근 사람들은 그 처참한 현장을 보고 치를 떨다가 폐허 한가운데에 망연자실해서 서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마을 관계자인 것 같지만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다. 우선 마을의 관청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관리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자기 이름도 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시아버님은 반쯤 흥미로 관청에 가보셨습니다. 관청 쪽에서도 소년의 신원을 아는 사람을 찾아서-조금 불쌍하기는 하지만, 마치 구경거리처럼 길에 앉혀놓고 얼굴이 잘 보이게 해 뒀다고 합니다. 워낙에 큰 사건이라 시아버님이 관청에 갔을 때에도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 있어서, 간신히 사람들을 헤치고 소년의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가봤더니....” 파올로 셀레이저는 그렇게 놀라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로 소년의 이름을 대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소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관리들도 그 얘기를 듣고 납득한 듯했다. 친아버지처럼 따르던 주인을 잃은 슬픔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고, 가족도 아는 사람들도 모두 살해당한 것이다.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사정은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소년의 신원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얘기가 나오자, 파올로는 망설일 것 없이 소년을 맡아서 데려왔다. “정신 이상이라고?” 도중에 왕비가 끼어들자 아란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미친 건 아닙니다. 그저 심한 방심 상태라고 해야 좋을까요. 눈은 초점이 없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시어머님도 여러모로 말을 걸어봤지만 전혀 반응이 없더군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밤에는 악몽에 시달려 소리를 지르면서....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했는데?” “두서 없는 말뿐이었지요. ‘어째서’ 라든가 ‘우리가 뭘 했다고’. 그리고 뭔가 기도 같은 말이었는데..., ‘성령이여’ 라고도 했어요.” “난폭한 짓은 하지 않았고?” “예, 물론이지요. 굉장히 얌전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온 지 2주쯤 뒤의 일입니다만, 밤중에 일어나서 부엌칼을 집어든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깨닫고 뺏기는 했지만....” 실로 오싹하는 얘기였다. 제정신일 때의 반츠아라면 아란나를 일격에 죽여버렸을 상황이었다. “했지만?” “그때 처음 제대로 말을 했습니다. 아니 저에게 한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변함 없이 초점이 없는 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뭐라고 했지?” 아란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뭔가 씁쓸한 것이라도 삼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왜 말리지?’ 라고. 그것도 뭐랄까,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이....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말하는 겁니다. 돌려달라면서 식칼에 손을 뻗기에..., 굉장히 무서웠지요. 아니 그 아이가 무서웠다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잘은 설명할 수 없지만요. 그때 반츠아는 마치 딴 사람처럼 변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아란나는 어쨌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칼은 넘겨줄 수 없다고.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그랬더니 저 아이가 웃는 겁니다. 그게..., 원래부터 예쁜 아이였지만, 그때는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는 웃음이었지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고, 그렇게 느껴본 건 엘레인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저도 옛날에는 오라버니의 반만큼이라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 아름다움은 좀.... 뭐랄까. 오히려 위험하달까요.” 얘기가 조금 옆길로 샜지만 아란나는 왕비가 재촉하기 전에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그 아이는 ‘어째서 안 되는데?’ 라고 물었습니다. ‘이러는 게 최선이야’ 라면서. 이것도 오싹한 얘기지만 마치 즐거운 듯 말하더군요. 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그런 짓은 신이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간신히 달래서 그날 저녁에는 다시 재울 수 있었지요.” 다음날 아침, 가족들이 일어났을 때 이미 반츠아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데려왔을 때 입고 있던 옷이 함께 없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제정신을 되찾고 떠난 거라고 모두들 납득했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한마디 인사는 했어야 했다. 기분이 상한 시아버지를 아란나와 시어머니가 달랬다. “돌아갈 곳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한꺼번에 잃어버린 겁니다. 누구라도 다시 일어서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게다가... 시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그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모습을 감춘 게 아닐까-그러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저렇게 훌륭하게 자라줬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아란나는 기뻐하며 말을 맺었고 왕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 확실히 다행이군. 안심했겠어.” “예, 시어머님께도 편지를 드려야겠어요.” “그런데 말이야, 왕궁으로 이사 올 생각 없어?”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아란나는 깜짝 놀랐다. “예엣?! 왕궁이라니, 그....” “전부터 생각하던 거야. 폴라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지? 매번 시내까지 돌아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테고. 남편만 괜찮다면 이곽에 저택을 준비해줄 수 있는데. 어때?” 아란나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하지만 궁성의 저택을 하사받다니.... 오라버니도 그런 영예는 받지 못했을 텐데요.” “그건 나시아스가 고지식한데다 고집불통이니까. 월이 몇 번이나 주겠다고 했는데도 필요 없다고 버티고 있는 걸. 하지만 언제까지 단장 집에 들러붙어 있을 수도 없겠지. 부인을 제쳐두고 단장을 독점하는 건 아무래도 남들 보기 안 좋잖아. 조만간 싫다고 해도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인데, 그런 의미에서 어때?” 마침내 아란나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찼다. “저기, 그럼, 정말로...?” “좋은 일은 서두르라고 하니까, 빨리 남편하고 얘기해봐. 그렇군. 내일이라도 옮겨오는 게 어때? 너무 빠를까?”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사에는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짐도 금방 쌀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란나는 기뻐하며 몇 번이나 인사를 한 뒤 서둘러 남편을 찾으러 달려갔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셰라는 낮은 목소리로 왕비를 불렀다. “리....” 짧은 질문 속에 수많은 의미가 오가고 있다. 왕비 역시 긴장된 얼굴이었다. “적어도 시내에 놔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란나에게는 남편도 자식도 있다고.” “올까요...?” “글쎄. 그 남자라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까 그 멍청한 녀석이 왠지 걸려.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비밀 엄수를 철저하게 주입 받고 자신들의 비밀이나 존재를 아는 자들을 살려둬서는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나올까?” 셰라 역시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작은 불안 요소라 해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규정이었다. “그러니까 너, 2주 동안이나 맛이 가 있었다 이거지?” 레티시아는 우스워서 견딜 수 없는 듯했다. “두 시간이 아니라, 이,주,동,안,이나? 게다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해?” 레티시아가 폭소를 터뜨리며 데굴데굴 구르자 반츠아는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짜증난다는 듯 내뱉었다. “미안하게 됐군....”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원이 모여 있었다. 유랑예인이 혀를 차며 말한다. “이건 네 실수야. 왜 그때 그 집안 사람들을 전부 처분하지 않았지? 덕분에 이런 꼴이 나는 거잖아.” 반츠아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그 말에 대답했다. “억지 부리지 마. 그때 난 아무 임무도 받지 않은 상태였어. 명령을 내릴 사람조차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마을을 잃고 버려진 상태에서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어째서 죽지 않았는지, 죽을 수 없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은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 그 여자의 말도 우스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신이-성령이, 자신을 저버리고 죽으라고 명령한 게 아닌가. 죽어야 한다. 마음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가슴을 꿰뚫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이가 덜덜 떨렸다 죽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을 책망하는 사이에, 점점 몸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서, 그저 기계적으로 음식을 먹고 기계적으로 잠을 자며 며칠을 지내다가 끝내 포기했다. 아무리 애써도 죽을 수 없다면 살 수밖에 없다. 단지,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유랑하던 끝에 일족의 본거지로 불려갔을 때, 백작이나 일족의 지도자들은 반츠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뭔가 이변이 일어날 전조가 아닌지 성령에게 물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런 인간이 존재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이란 ‘똑같은 것’ 을 만들어내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공장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반츠아는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자신의 인생은 전부 무의미해졌다. 자신은 그런 것도 모른 채 희극을 연기하는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다. 바보처럼 임무 수행에 자긍심과 기쁨을 느끼고 있던 과거의 자신에게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거기까지 알고서도 자객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반츠아는 그런 자신을 처음으로 자기 의지로 비웃으며 철저하게 꼭두각시가 되어 살아가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다른 존재는 될 수 없으니까. “내가 죽지 않았던 것도, 셀레이저 저택에 신세를 졌던 것도 위의 놈들은 성령을 통해서 다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그 녀석들 태만이잖아.” “책임 전가냐?” 반츠아는 여전히 자신을 몰아세우는 유랑예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라면 누구라도 최선책을 떠들 수 있지.” “그래그래. 이미 끝나버린 일이라면 누구라도 멋대로 말할 수 있어.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야, 이렇게 했어야 할 거 아냐. 부탁인데, 그런 소리는 바로 지금 큰일이 났을 때 말해주면 좋겠는데.” 레티시아는 동조하면서도 아직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말야, 널 보고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잖아? 괜찮은 거잖아.” “글쎄, 어떨까?” 귀족 도련님이 끼어들었다. “여자 자신은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뭔가 정보를 쥐고 있을지도 몰라. 듣자하니 저 여자는 라모나 기사단장의 여동생이라는데.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껏 숨기고 있었지?” 반츠아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대답했다. “저 사람이 라모나 기사단장의 여동생인 줄은 몰랐어. 델피니아에서 시집왔다는 말만 들었고 오빠가 있다는 얘기도 듣기는 했지만 이름까지는....” “얘기가 안 되는군.” “글쎄 말이야. 저 여동생이 오빠에게 이 녀석 얘기를 했다간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손을 써둬야 해.” 흥분하고 있는 유랑예인과 귀족 도련님과는 달리, 레티시아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경계해봤자, 반츠아의 정체라면 이미 이 나라 왕비도 알고 있다고.” “얘기가 달라.” 유랑예인은 완고했다. “왕비는 네 정체를 알고, 자기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경비병을 부르려고 하지 않았어. 자기 실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거겠지. 국왕에게도 너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레티시아는 이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는 듯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귀족 도련님이 다시금 말했다. “우리들로서는 정말 처치하기 쉬운 상대지. 이쪽을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으니까. 저 왕비는 전쟁의 여신으로 불릴 만한 전투 능력의 소유자이지만 저 여자는 그런 것도 아니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비명 지를 틈조차 없겠지. 하려면 지금 처리해야 해.” “나도 그러는 게 낫다고 보는데.” 젊은 종자가 힘겹게 말했다. 왕비가 던진 돌에 어딘가를 다친 듯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큰일을 하기 전에 먼저 작은 일부터. 이런 건 확실하게 해둬야 해. 당신이 움직일 생각이 없다면 내가 하지.” “우리가 하는 거겠지.” 유랑예인이 말했고 귀족 도련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병사와 상인, 초로의 집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가냘픈 어깨를 으쓱하며 곤란한 듯이 웃고만 있었다.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젊은 종자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처치할 상대와 수다나 떠는 겁쟁이에게 지시 받을 생각은 없어. 왜 그때 처치하지 않은 거야? 절호의 기회였는데!”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그 거리를 가지고 무대를 확보했다고는 할 수 없어.” “바보 같은 소리! 초보자가 던져도 빗나갈 리 없는 거리였다고!” “그런데 그게 빗나가, 저 왕비 씨는. 등이 그렇게 말하더군.” “뭐라고?” “말한 대로야.” 장난스럽게 바라보자 종자는 발끈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쨌거나 그 여자는 처리하겠어!” 유랑예인과 귀족 도련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방에서 나간 뒤 반츠아는 조용히 레티시아에게 물었다. “안 말려?” “왜?” “저 여자를 죽이면, 그럴 생각이 없어도 왕비를 자극하게 돼. 그럼 곤란하지 않아?” “내가 죽이는 것도 아닌데 뭘.” 레티시아는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그렇게 되면 곤란하니까 나도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했다고. 그런데도 놈들이 뛰쳐나간 거야. 불가항력이잖아?” “.......” “아니면 네가 가서 말릴 거야?” 반츠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란나는 경이로운 수완을 발휘하여 짐을 꾸려 정말로 식전 다음날에 왕궁으로 이사했다. 훌륭한 저택이다. 아래층에는 큰 응접실을 포함해서 방이 넷, 위층에도 부부의 침실 이외에도 세 개나 있었다. 이곽에서도 상당히 가장자리 쪽에 지어진 집으로, 얼핏 보기에는 교외의 일반 주택처럼 보이는 구석도 마음에 들었다. 남편의 일 때문에 코랄로 이사는 했지만, 바로 문 앞의 거리를 마차가 왕래하고 벽과 벽이 맞닿을 정도로 밀집해 있는 건물 속에서는 도저히 편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남편 피사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새 집을 보며 굉장히 기뻐했다. 정리만 끝내고 나면 비전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심부름꾼인 마리아가 아란나를 불렀다. “마님, 예전 집주인이 보낸 사람이 왔는데요.” 아래층에 내려가보자 중년의 심부름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받았던 집세의 차액을 돌려주고 싶다고 전했다. “반년분의 집세를 받았는데 4개월만에 나가셨으니 당연히 나머지는 돌려드려야 하는데 깜빡 잊었다고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감이지만 주인님도 내일부터 먼 곳에 용무가 있으시니 죄송하지만 오늘 중에 받으러 와주실 수 있을지....” “어머나, 일부러 여기까지 알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마리아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갔다. 아란나는 정리를 계속하러 2층으로 올라왔지만 곧 다른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공증서에서 왔습니다만, 실은 이 댁의 남편 분께서 다치셔서....” “네에?!” 아란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50세 전후에 인상이 온화한 남자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삔 정도니까요. 하지만 걷기가 굉장히 힘들어서, 집에서 사람이 와줬으면 하십니다. 이쪽에서 모셔다드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일손이 부족해서....” “아, 알겠습니다.” 얼마나 다친 건지 걱정이 되었지만 우선 하인인 후안을 보내기로 했다. 아란나와 나이 어린 두 아이들만이 집에 남겨졌으니 이것으로 ‘무대’ 가 완성되었다. 심부름꾼과 하인이 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은 태연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유랑예인-오늘은 하인으로 변장하고 있지만-이 조용히 뒷문으로 돌아간다. 귀족 도련님과 젊은 종자는 함께 정문 현관으로 향했다. 워낙에 급한 상황이라 집의 구조도 파악할 틈이 없었다. 시내에서 처치하는 것보다도 차라리 큰맘 먹고 저질러버리자고 의견이 모여, 대담하게도 왕궁 안에서-그것도 대낮에 암살하기로 얘기가 된 것이다. 귀족 도련님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맞이하러 나온 아란나에게 말했다. “오오, 셀레이저 씨의 부인 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크 그랜트라고 합니다. 남편께 크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만, 이사를 하신다고 들어서 별것 아니지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란나는 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상대의 인품도 확실해 보였고, 함께 따라온 젊은 종자 역시 조용하고 침착해 보인다. 그 시종이 내민 물건은 바구니에 가득 담긴 산나물이었다. “저희 산에서 난 물건입니다만, 별것 없어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뇨, 말도 안 됩니다. 정말로 감사해요.” 아란다는 진심으로 말했다. 주부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기쁜 선물이다. 고맙게 선물을 받아든 다음 부엌으로 가져가려고 등을 돌렸다. 그 등을 향해 그랜트가 접근했다. 이미 손에 바늘을 쥐고 있다. 목에 한방. 그걸로 모든 게 끝나야 했다. 집에 돌아온 하인과 심부름꾼은 깜짝 놀라겠지만, 외상도 없고 다툰 흔적도 없으니 돌연사로 처리될 것이다. 하지만 마물처럼 조용히 다가간 남자가 아란나의 목에 날카로운 바늘을 들이대려는 찰나 바깥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아란나님. 너무 늦었습니다만 도우러 왔습니다.” 아란나가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도 더 빨리, 그랜트는 수상한 기척을 없애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어머나, 셰라 씨! 일부러 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지만, 정말 다행이네요. 지금 마침 마리아도 후안도 없어서 저 혼자거든요. 아이들을 좀 봐주시겠어요?” 아란나는 두 손으로 바구니를 든 채 기쁘게 말했고, 셰라도 이사 축하 선물을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곳에 있던 두 남자와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쳤다. 미소를 지으며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손님이 계셨군요.” “아니오. 이쪽이야말로 바쁘신데 방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부인, 남편께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싹싹하게 인사하고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셰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저분은 누구시죠?” “그랜트 씨라고 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이사 선물을 가지고 와 주셨답니다.” 아란나의 사람 좋은 성격이 문제였다. 아란나의 말을 들은 셰라는 지금 나간 귀족이 아란나와 아는 사이라 판단하고 경계를 풀었다. “자제 분들은 2층에 있나요?” “네. 뭘 돕겠다는 건지....” 아란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고, 셰라도 웃음을 참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버섯과 산나물이 가득 든 바구니를 우선 부엌의 조리대에 내려놓은 아란나는 큰 냄비와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셰라에게 차라도 끓여주고 싶었고, 이사 당일이라고는 해도 슬슬 저녁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사람 한 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가마 위에 그 둘을 걸어놓고 넘실넘실 물을 따른 뒤 불을 붙였다. 준비를 끝내고 뒤를 돌아본 아란나는 묘한 것을 발견했다. 산나물이 든 바구니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금색 끈, 혹은 사슬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째서 저런 게 부엌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사슬은 움직이고 있다.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바구니에서 스르륵 기어 나온다. “흐윽...!” 아란나는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멈춰 섰다. 사슬 무늬의 금빛 뱀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조리대 위를 기어다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온다. 주저앉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렇게까지 큰 뱀은 아니다. 기껏해야 팔뚝 정도의 길이였다. 하지만 혹시 독사라면? 아란나에게 가능한 것은 몸을 움츠리는 것뿐이었다. 도와달라고 셰라를 부르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이 흐른 걸까. “마침 둘 다 자고 있네요.” 셰라가 부엌에 들어오다가 순간적으로 그 상황을 보고 말을 잃었다. 아란나가 절망적인 시선으로 셰라를 바라보았다. 셰라는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뜻이다. 셰라 쪽에서 보면 왼쪽이 가마와 아란나, 정면이 그 위험한 금색 사슬이 춤추고 있는 조리대였다. 뱀은 책상 왼쪽, 아란나의 정면에 있다. 같은 상 반대쪽에서 절호의 무기를 발견하고 셰라는 조금씩 신중하게 다가갔다. 재빨리 상으로 다가간 셰라는 튼튼한 단풍나무로 된 반죽봉을 꽉 쥐고 상 위를 기어다니던 금색 사슬을 향해 내리쳤다. 머리가 그대로 으깨지면서, 꿈틀거리던 금색 사슬은 뱀의 시체로 변해 축 늘어졌다. 아란나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셰라도 길게 숨을 토했다. 무사히 죽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크기는 작아도 맹독을 가진 독사였다. “아란나님, 괜찮으신가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란나를 일으켜주었다. 셀레이저가의 주부는 간신히 긴장에서 해방되어 울먹이며 말했다. “그, 그거..., 그 반죽봉.... 저녁 준비에 쓰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게 제일 가까이 있었거든요.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거죠?” “바, 바..., 바구니 안에서....” 셰라는 반죽봉을 꽉 쥐고, 왼손에 부젓가락을 들어 아직도 산나물이 듬뿍 들어 있는 바구니 안을 신중하게 휘저었다. 마지막으로 바구니를 뒤집어보고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란나가 바구니에 손을 넣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어설프게 자극하면 그대로 끝이었을 터였다. “아까 두 사람은....” 물으려다가 셰라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부엌 뒷문으로 한 남자가 살짝 들어온 것이다. 검은 피부에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하인 같은 차림새였지만 물론 하인일 리가 없다. “누, 누구...?!” 아란나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셰라는 그런 아란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2층으로 가세요.” “하, 하지만....” “아이들을 지켜요!” 그 한마디가 가져온 효과는 엄청났다. 아란나는 아직도 떨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면서 달려갔다. 남자가 그 뒤를 쫓으려 한다. 하지만 부젓가락을 든 셰라가 그 앞을 막아섰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비켜.” “거절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뒤로 조금씩 물러난다. 상대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정문 현관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독사만 파견해놓고서 그 두 사람이 순순히 물러나줬으면 좋겠지만, 만일 돌아온다면.... 계속 현관 쪽을 신경 쓰고 있는 셰라를 손쉽게 판단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남자가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셰라가 얼굴을 확 돌리며 온몸의 체중을 실어 남자 쪽으로 부젓가락을 내밀었다. “크윽...!” 남자가 신음을 냈다. 그쪽도 몸을 내밀고 있었던 만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젓가락이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찔렀다. 그와 동시에 셰라는 소매에서 가느다란 단검을 꺼내들었다. 셰라도 마을에서 갓 나왔을 때의 셰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왕비에게 단련되면서 훨씬 실력이 향상되었다. 기술도, 마음도. 하지만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을 입고서도 남자의 투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셰라를 노려보면서 아직 멀쩡한 왼손에 무기를 쥐었다. 게다가 나쁜 예감까지 들어맞아, 좀 전의 두 남자가 다시 현관에 모습을 나타냈다. 30세 전후의 귀족은 표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유약한 도련님의 표정은 이미 벗어 던진 참이었다. 종자 쪽도 어수룩한 분위기는 깨끗이 거둔 채 교활한 시선으로 셰라를 바라보았다. “이게 그 안 죽은 놈이야?” 그렇게 말하며 작은 남자의 반대편에서 셰라를 협공하려는 듯이 위치를 잡는다. 귀족도 마찬가지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같이 처치하자. 여자는?” “2층이야.” 작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반사적으로 계단을 막기는 했지만, 셰라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등장인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셀레이저가의 현관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는 레티시아와 반츠아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이크하고 스캡이 무대로 돌아갔어. 킴블도 먼저 들어갔지. 이런. 저 아가씨, 세 명을 상대로 싸울 생각인가?” 즐거운 듯이 말한 것은 물론 레티시아였다. “마을 출신으로 못 죽은 녀석들은 어째서인지 포기하고 강해지나봐. 저 아가씨도 착실하게 실력을 쌓고 있어. 하지만 3대 1이면 승산은 없는 걸.” “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너야말로 뭐 하고 있는 거야? 자기 실수를 자기 손으로 처리할 마음이라도 들었냐?” “.......” “아니면 규정을 위반하고 저 녀석들을 적으로 만들어서라도 저 여자를 구할거야? 은인이었지?” “그건 저쪽에서 멋대로 한 짓이야. 은혜를 느껴야 할 이유는 없어.” “하지만 죽게 내버려두는 것도 뒷맛이 안 좋지? 네 정체를 눈치 챈 것도 아닌데.” 반츠아는 고뇌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낮게 웃고 있었다. “못할 거야, 넌.” “.......” “어중간하다고, 정말.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면 이런 데까지 올 것도 없잖아.” 질타는 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반츠아를 바라보고 있다. 실제로 어떻게 나올지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런 결단은 마을 녀석들이 가장 약한 구석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습관이 없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다. 설사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자신을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어물거리고 있다가는 두 사람 모두 살해당하는 걸로 끝난다. 짧고 깊은 고뇌와 침묵 끝에, 장신의 청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은발 쪽은 내 사냥감이야.” 그러니까 다른 녀석이 죽이게 놔둘 수는 없다. 그런 이유를 갖다 붙이자 레티시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응수했다. “좋아, 그런 셈 쳐주지. 예정 밖의 살인은 원래 규칙 위반이니까 나도 손을 빌려주겠어.” 반츠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는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는 일족 최고의 정예 세 명이다. 승산이 없는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상대로 혼자 싸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레티시아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뛰어나가려던 반츠아의 어깨를 레티시아가 붙잡았다. 가냘픈 몸에서 나온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강한 힘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반츠아가 돌아보자 그 눈이 싱긋 웃음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나설 자리는 없을 것 같은데.” 셰라의 싸움은 허무하게 끝났다. 뭔가의 뒤에 숨어서 따로 노린다면 몰라도, 계단을 등에 지고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세 명을, 그것도 제각각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이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건 처음부터 무모한 얘기였다. 점점 계단 쪽으로 밀려간다. 일부러 옆으로 몸을 날려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각오하며 단검을 날리려고 했지만, 적이 날린 납구슬이 단검에 명중해 튀어나가버렸다. 팔이 아니라 직접 검을 향해 던진다. 어떤 수련을 쌓으면 이렇게 되는 건지, 셰라는 현재 상황조차 망각하며 눈을 부릅떴다. 반동으로 팔이 저려올 정도의 기세였다. 아까 상처를 입은 남자가 2층으로 올라가려 한다. 여자 한 명이니 부상을 입었어도 한 팔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다른 두 사람은 아래에 남아 무릎을 꿇고 있는 셰라에게 다가왔다. 셰라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체념한 척하다가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를 향해 은선을 던졌다. “엇...?!” 이 반격에 남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죽어줄 리가 없다. 계단을 박차고 뛰어 멋지게 착지했다. 내려섰을 때에는 이미 목에 감겼던 위험한 실도 끊어져 있었다. 1층에 있던 두 사람도 놀란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죽지도 못한 주제에 꽤 하잖아.” 젊은 종자가 귀족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이 녀석 당장 죽일 건 없지 않아? 왕비가 귀여워한다면서. 써먹을 수 있겠는데.” 귀족도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왔다. 작은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붙잡으려면 빨리 해. 하인들이 돌아올 테니까.” “가능하면 자세하게 얘기도 들어보고 싶군.” 귀족이 말했다. 이번에는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방심하지 않고 눈을 빛낸다. “우리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비야. 지금 어디에 있지?” “여기야.” 차가운 목소리가 났다. 깜짝 놀랐을 것이 당연하지만, 세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셰라에게 부상을 입은 남자는 아주 조금 동작이 느렸다. 동시에 왕비가 던진 부엌칼이 남자의 가슴에 푹 꽂혔다. 작은 남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빠르게 반응했다. 게다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종자가 셰라에게 덤벼들어 바닥에 몸을 억눌렀고, 귀족은 그 옆에 앉아 무릎을 꿇린 셰라의 목에 단검을 들이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등으로 돌아가 오른쪽 팔을 비튼다. 셰라는 이를 갈았다. 저항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오른쪽 어깨에 격렬한 통증이 달린다. 완전히 제압당한 탓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부엌 쪽으로 들어온 왕비는 검을 빼들고 있었다. 아직도 단검의 형태였다. 귀족은 셰라의 목을 검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무기를 버려.” 왕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서, 칼날을 아래쪽으로 내리면서 팔을 뻗어 손을 놓았다. 검은 그대로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좋아, 이쪽으로 와.” 귀족은 냉정하게 말했다.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서 조금도 흥분하는 기색이 없다. 셰라를 누르고 있던 종자도 마찬가지로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가 힘든 상대라는 거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셰라의 귀에 들어왔다. “닥쳐. 꽉 누르고 있어.” 귀족이 질타한다. 왕비는 천천히 걸어와 거실 한가운데에 섰다. 귀족과는 거리가 겨우 몇 미터. 거기에서 멈춰 선 맨몸의 왕비는 엎드린 채인 셰라를 향해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아란나는?” “이층에.... 죄송, 합니다.” 간신히 그렇게만 대답할 수 있었다. 하필 이런 때에 왕비의 방해가 되다니, 분하고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됐어. 3대 1이었잖아. 넌 최선을 다했어.” 두 자객은 수상하다는 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상대는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고 긴장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왕비는 더욱 천천히 말했다. “보고 싶지 않으면 눈감고 있어.” 셰라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이 사람이 뭘 하려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런데도, 최후까지 똑바로 봐두려고 마음먹었는데도 귀족이 몸을 움직인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왕비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귀족도 자신의 옆에 없었다. 오른판이 비틀린 자세로는 왼쪽을 바라볼 수 없다. 그 사각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경악에 찬 비명, 사람의 몸이 뭔가에 부딪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소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뼈를 씹어 부수는 끔찍한 소리가 계속해서 거실에 울린다. 그리고 셰라의 등 뒤에서 신음하는 듯한 공포의 비명이 울렸다. “으..., 흐윽!” 힘이 느슨해졌다. 분노에 휩싸인 셰라는 재빨리 팔을 뿌리치며 종자의 몸통을 힘껏 팔꿈치로 가격했다. 정통으로 공격을 받고, 이번에는 종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유를 되찾고 왼쪽을 바라보자 예상했던 대로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단검으로 왕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리라. 귀족은 오른손에 검을 쥔 채 천장을 바라보며 쓰러져 있었다.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몸 위에 올라타고 남자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던 왕비가 힘껏 머리를 흔든다. 피투성이가 된 귀족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 위를 굴렀다. 시커먼 얼룩이 점점 퍼진다. 왕비는 아직 바닥에 팔다리를 짚고 있었다. 입가에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눈에는 격렬한 투지가 불타고 있다. 호흡도 거칠었다. 흥분한 맹수 그 자체였다. 복잡한 마음으로 셰라가 말을 걸려는 순간 왕비는 눈을 휙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젊은 종자는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다. 다른 두 사람은 시체가 되었다. 위험은 이미 사라졌을 텐데, 이 사람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비명이 울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셰라는 흠칫 놀랐고 왕비도 재빨리 얼굴을 들었다. 아란나였다. 새하얗게 질려버린 아란나가 계단 위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감싸고 있다. “아..., 아..., 아아....”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 눈에 비친 것은 피로 물든 거실과 목이 없는 시체, 그 시체에 올라타고 있는 생물-송곳니를 드러내고 가차없이 인간을 물어 죽이는, 왕비의 얼굴을 한 괴물이었다. 아란나의 얼굴에는 본능적인 공포와 생리적인 혐오감만이 떠올라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이 자신과 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이 떨린다. 크게 숨을 들이켠다. 영혼까지 짜내듯이 온 힘을 담아, 이런 때에 던져야 할 가장 적절한 단어를 쏟아내었다. “괴..., 괴물-!!” 왕비가 움직였다. “리!” 말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거실로 가로질러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 왕비는 아란나에게 덤벼들었다. 셰라도 필사적으로 뒤를 쫓았다. 아란나는 이미 조용해진 뒤였다. 축 늘어진 그 몸을 왕비가 막 계단에 앉히는 참이었다. “주..., 죽인 겁니까?” “설마. 기절시킨 것뿐이야.”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알고는 있어도,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해주면 안심이 된다. “밖에 뭔가 있어.” 왕비가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실례합니다’ 라는 느긋한 목소리가 나면서 한 남자가 문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할 것도 없이 레티시아였다. 그 엄청난 광경을 둘러보고서 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가볍게 머리를 긁적이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이야, 이거 엄청 화려하네. 여어-, 스캡. 살아 있었어?” “아..., 으으....” 종자는 움츠린 채 기묘한 신음을 내며 레티시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 듯했다. 왕비는 계단 손잡이를 뛰어내려가 바닥에 찾기하더니 무릎으로 기고 있는 종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으악!”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진 종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레티시아를 몰아세운다. “네가 시킨 짓이야?” “설마.” 레티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손을 벌렸다. 전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다. 미안한 듯이, 불편한 듯이 등을 움츠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왕비의 눈치를 살피면서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왕비는 말없이 바닥에 구르는 목을 주워들고 레티시아에게 던졌다. 결코 가벼울 리가 없는 물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다. “가지고 가. 저것도.” 신음을 지르면서 바닥을 기고 있는 종자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으로 종자의 목깃을 움켜쥐어 일으켜 세웠다. 살짝 한숨을 쉬고, 묘하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폐를 끼쳤군.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도통 말을 안 들어서 말야. 말로 해서 못 알아듣는 녀석들은 직접 겪어볼 수밖에 없으니까. 정말 미안해.” “두 번 다시 보내지 마.” 사납게 눈을 빛내면서 왕비는 말했다. “이래도 못 알아들을 정도의 멍청이는 그쪽에서 알아서 처분해. 나까지 귀찮게 만들지 마.” 분노보다도 경멸에 가까운 말투였다. 레티시아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종자의 머리를 쥐고 억지로 숙이게 했다. “너도 사과하라고. 남의 충고도 좀 들어. 뭐, 당신 식사감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왕비는 낮게 웃었다. 맹수의 웃음이었다. “신경 써줘서 고맙긴 한데 난 입맛이 까다로워. 이렇게 맛없는 건 못 먹겠는데.” “못 먹어...?” 이상한 표정으로 말하려던 레티시아는 다음 순간 재빨리 몸을 날렸다. 오른손에는 사람의 목을, 왼손에는 종자의 목깃을 잡은 채 부엌으로 뛰어들어간다. 거의 동시에 현관을 열고 들어온 국왕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선혈과 사람의 시체.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 평범한 인간이라면 넋을 잃을 만한 상황이지만, 전장에서 단련된 눈과 감각은 순식간에 적을 식별해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긴다. 국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검을 빼들면서 그대로 부엌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결정적인 거리는 확보할 수 없었다. 처음에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던 만큼 레티시아 쪽이 빨랐다. 귀찮은 짐을 두 개나 들고 부엌으로 도망쳐 뒷문으로 빠져 나간 것이다. 국왕은 짜증나는 듯 혀를 찼다. 하필 몰래 나온 참이라 시종 한 명도 동반하지 않은 상태였다. 곧바로 위병들에게 수배를 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왕비가 목이 없는 시체를 짊어지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검을 빼들고 있는 국왕의 눈앞을 지나쳐 부엌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나가려고 한다. “뭐 하는 거야...?” 기가 막혀서 묻자 왕비는 짐을 짊어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증거 인멸. 너도 거들어.” 그날 밤, 일족에서 선발된 왕비 암살범들은 평상시처럼 저택의 어느 방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구성에는 다소 변화가 있었다. 유랑예인 킴블은 자리에 없고 귀족 도련님 아이크는 문자 그대로 목만 남아 있었다. 레티시아는 전날까지 동료였던 남자의 머리를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다른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 절단면을 잘 봐. 사람 이가 이 짓을 해냈어. 적어도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의 이처럼 보이는 이가.” 다소 표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치아로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초로의 집사도, 병사도, 성실한 상인도 창백하게 질렸다. 원래부터 사람 목 한두 개 정도에 놀랄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것이 동료의 목이라는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사람이 물어뜯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말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종자-스캡은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채 이를 덜덜 마주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양손으로 목을 집어 들고 한참을 관찰하다가 반츠아에게 물었다. “이걸 떼어내는 데에 얼마나 걸렸지?” 반츠아의 얼굴도 창백했다. 기척을 없애는 데에 있어서 반츠아는 일류였다. 그 설원의 싸움 때에도 그랬다. 눈 속에 가만히 몸을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거실 창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안쪽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흐릿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목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노력하면서 신중하게 대답했다. “한순간-이라고 할 정도로 짧지는 않았어.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길지도 않았지.” “헤에.... 그럼 상당한 솜씨네. 빠각, 빠각, 툭! 이런 식일까?” 실로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피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츠아는 필사적으로 오한과 혐오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레티시아가 두 손으로 굴리고 있는 물건이 뭔가 다른 것이기만 해도.... 다른 동료들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레티시아만이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그래서, 몸 쪽은 어쨌지? 먹었어?” “아니..., 쳐다보지도 않았... 다고 생각해.” “흐음? 이상하네? 분명히 육식일 텐데. 내 팔에서 뜯어낸 살은 먹었다고.” 목만 남아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건다. “맛이 없어서 못 먹는다니.... 유감이네, 아이크. 넌 입맛에 안 맞는단다.” “노..., 농담이 아냐....” 울먹이면서 스캡이 비명을 질렀다. “무, 물어 죽였어. 대, 대체 뭐야, 그건! 그놈은 인간이 아냐- 인간이 아냐!!” 후배가 머리를 싸안으며 신음하자 레티시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너 말이야, 사람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강조했었는데. 그러니까 일이 귀찮게 됐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고 있는 거 못 봤어?” 설교하듯 툭 내뱉고서 혼잣말처럼 말을 잇는다. “정말 괴물이야. 어떻게 공격해야 좋을까? 정공법은 논외고, 인질은 효과가 있지만 뒤가 찝찝해. 독은 쓸 수 없고 함정을 파도 효과가 없어.” 초로의 집사가 씁쓸하게 한숨을 토했다. “우문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약점은?” “필사적으로 찾고 있어. 술도 먹여봤지만 완전히 술고래더군. 도박도 싫어하지는 않지만 열광할 정도도 아니야. 여자도 소용없겠지, 아마....” 묘한 쓴웃음을 흘리며 신음하는 레티시아의 말을 집사가 살짝 정정했다. “남자... 의 착각이겠지?” “저 왕비는 남편보다도 훨씬 더 애첩을 귀여워하던 걸.” 딱 잘라 말하고서 재미있다는 듯이 덧붙였다. “저 임금님..., 모르고서 왕비로 삼았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겠지만, 아무래도 알고 있는 것 같아. 알면서도 태연하게 명분상으로는 부부로 지내고 있는 거지. 왕비 씨 이상으로 죽일 보람이 있는 인간일지도 몰라.” 병사와 상인이 얼굴을 마주봤다. “저 왕비, 여자 취향이야...?” “아니. 품에 안고 귀여워하는 게 아니야. 약한 것을 지키는 게 취미라고. 그러니까 내 무대에도 걸려들었지. 아이크는 이 꼴이 되었고. 노려본다면 그쪽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서 감탄한 듯이 머리를 흔든다. 짐승 같은 형상의 왕비를 처음 봤을 때에는 레티시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맹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한 번은 실패했지만, 레티시아에게 두 번의 실패는 없다. 오늘도 그럴 생각으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소중한 대상을 노린 공격에 상당히 화가 났던 것도 틀림없다. 아이크의 꼴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죽일 생각이라면 목젓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목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물어댔다는 건 어지간히 화가 났거나, 아니면 본보기이거나-. 자신이 모습을 비추었을 때 화가 나서 덤벼들었다면 이 임무도 완료되었을 것이다. 맨몸인 것처럼 보여도 싸울 준비는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거의 실력이 비슷한 상태에서 이쪽은 냉정하고 저쪽이 분노로 자아를 잃고 있다면 승리는 이쪽의 것. 하지만 이 예측은 완벽하게 틀렸다. 사람 하나를 물어 죽여놓고서도 왕비는 흥분도 분노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냉정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녹색 눈망울에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까지 떠올라 있었다. ‘아란나에게 손을 뻗으면 내가 나올 것도 알고 있었겠지?’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런 놈들을 보내서 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정말 부끄러울 뿐이었다. 상대를 떠볼 생각이 있던 것도 확실했지만, 레티시아 자신도 상대도 되지 않는 놀이 상대들 때문에 언제나 피곤한 입장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레티시아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놀랄 수밖에 없다. 맹수의 사나운 성질과 본능적인 감, 그리고 전사의 냉정함과 뛰어난 기량을 그 왕비는 모두 갖추고 있다. 사향고양이의 눈이 차갑게 웃었다. “갖고 가라니, 정말 위험하잖아.” 아직도 창백해져 있는 젊은 종자에게, 레티시아는 기분 나쁠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다음부터는 사람 말 잘 들으라고. 안 그러면 이렇게 된다.” 동료의 목을 들이대자 스캡은 펄쩍 뛰었다. 상인은 포기한 듯이 일동을 둘러보았다.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군.” 집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더 모을 필요가 있겠어. 반드시 어딘가 틈이 있을 거다.” 병사가 중얼거렸다. “전쟁터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 레티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래서는 이미 평상시 생활권에는 손도 내밀 수가 없지만, 전쟁터에서라면-. 저 왕비 씨도 몇 만이나 되는 병사들 얼굴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지는 않을 테니까. 보호받는 것보다 지키는 쪽인지라 언제나 선두에 서. 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가치는 있지.” “약한 것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 습성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겠는데. 위기에 빠진 부하를 구하는 건 대장의 의무이기도 하니까. 그래..., 예를 들어 고립된 부대가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하다든가, 가짜 전령을 보내서 끌어내면....” “그렇게까지 쉽게 움직여줄까?” 레티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반츠아는 묘하게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호받아도 그리 기쁜 것 같지는 않더군.” “응?” 자신이 얼굴을 내밀기 직전의 상황을 자세하게 듣고서, 레티시아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난 말이야, 그 왕비의 그런 구석이 이해가 안 가. 그 여자 반응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평범한 인간이라면야 그런 걸 보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감싸줄 필요가 어디 있지? 그렇게 쓸데없는 짓 할 것 없는데 말이야.” 이상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반츠아 역시 이 건에 관해서만은 레티시아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그보다 조금 전, 하늘이 석양으로 물들어갈 무렵에야 아란나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멍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왕비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괴물!! 싫어, 오지 마!” “어이, 아란나. 갑자기 뭔 소리야?” 아란나의 반응에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금 발끈하며 대답했다.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디가 괴물이라는 건데?” “에..., 에?” 아란나가 이불 자락을 꽉 쥐고 당황하자 이번에는 셰라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신가요? 기분은 좀 어떠세요?” “셰라 씨! 아까 그 남자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그곳은 자신의 침실이었다. 복도로 나가는 문은 활짝 열려 있고 1층에서 누군가가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요리하는 듯한 냄새도 났다. 셰라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왕비를 바라보았다. “비전하께 상당히 훈련을 받아서 하인 한 사람 정도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하루 이틀 배운 걸로는 안 되겠더군요. 마침 비전하와 폐하가 함께 와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그 남자는 근처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이라고 합니다. 주인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은 데에 원한을 품고 저택에서 뛰쳐나오면서 분풀이로 이 댁에 숨어들다니.... 정말 심하지요.” “일어났나, 아란나 양?” 국왕이 복도에서 나타나자 왕비가 일침을 놓았다. “좀 조심해. 여긴 여자 방이라고.” “아직 낮이니 괜찮겠지. 무엇보다도 해둬야 할 말이 있어. 무서운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네. 이 성의 치안은 내 책임이야. 설마 그런 남자가 이 근처를 돌아다닐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왕비와 함께 상태를 보러 와봤더니 이 시녀가 부젓가락을 들고 수상한 인간과 싸우고 있질 않나. 정말 믿을 수 없었지.” 국왕도 왕비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아란나는 침대 위에서 머리를 싸쥐었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에..., 하지만, 그, 함께 오셨다고요...?” 왕비는 팔짱을 끼며 가볍게 아란나를 노려보았다. “어이, 빨리 정정해. 누가 괴물이야, 누가?” 아란나는 그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다. 얼굴에도, 옷에도. 녹색 보석 같은 눈은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평소의 왕비 그대로였다.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부드럽게 물어보자 아란나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푸른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 목이.... 비전하의 얼굴을 한 괴물이...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모, 목이 떨어져 나가고... 피투성이로.... 저, 저도 잡아먹히는 게 아닐까 무서웠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아란나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리자 왕비는 계속해서 그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란나, 잘 들어. 이쪽을 보고....” 아란나가 얼굴을 들자 녹색 눈망울이 신비한 빛을 띠고 바라보았다. “그건 다 꿈이야.” “꿈... 이라고요.” “그래. 그냥 꿈이었어.” 왕비는 낮게, 천천히 되뇌었다. 똑바로 왕비를 바라보던 아란나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멍하니 중얼거린다. “네..., 그냥 꿈이군요....” “그러니까 전부 잊어버려. 알았지?”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란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그래..., 그래요. 꿈일 게 당연하죠! 비전하께서 그런 괴물일 리가 없으니까요!” 국왕과 셰라의 눈이 뭔가 복잡한 표정인 것도 아란나는 깨닫지 못했다. 공포가 깨끗하게 사라진 데에 안도하고, 짐 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아란나는 펄쩍 뛰어 일어났다. “실은 그 일 말이네만....” 국왕은 부엌으로 침입했던 남자가 저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시체는 이미 치웠지만 사람이 죽은 집에서 사는 것도 내키지 않겠지. 괜찮으면 다른 집을 마련하겠네만, 아니면 이대로 괜찮겠나?” 아란나는 기꺼이 다른 집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셀레이저가는 이틀 동안에 두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란나는 곧바로 일하기 시작했다. 1층에 내려가도 물론 목 없는 시체는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남아 있는 핏자국이 기분 나빴다. “그 뱀도 부엌 뒷문으로 들어온 것 같더군요.” 셰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하인들은 풀던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햇다. 참고로 그들이 외출했던 용건은 양쪽 다 상대가 틀리거나 잘못된 연락이었다. 두 사람 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분개하면서 돌아왔지만,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쁜 현실을 앞에 둔 아란나에게 있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달밤이었다. 왕비는 서리궁의 테라스에 소파를 꺼내놓고 식후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도 이미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는 꽤 쌀쌀해졌다. 그것이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산 속이라면 더욱 그렇다. 곁에는 국왕이 앉아 있었다. 왕비에게 뭔가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없이 앉아만 있다. 오늘밤은 여기에서 왕비와 함께 식사를 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요리는 셰라가 솜씨를 발휘해 만든 멋진 음식들이었지만, 시중을 드는 셰라 역시 밝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말로 뒤처리 때문에 큰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부를 수도 없으니 세 명이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왕비는 목 없는 시체를 집 뒤의 숲에 묻은 뒤 피가 묻은 옷을 서둘러 갈아입었고 국왕과 셰라는 바닥에 튄 피를 씻어냈다.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최초의 남자는 여기에서 죽은 걸로 하자고 말을 맞췄다. 왕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을지도 몰라.” 국왕은 흠칫 놀라며 왕비 쪽을 바라보았다. “리, 저기 말이야....” 서둘러 말하려다, 지금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만한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발에 녹색 눈의 짐승이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다. 국왕은 머리를 싸쥐고 신음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자기 자신에게 뇌까리듯이 중얼거렸다. “왜 꼭... 꿈이었다고 할 건 없지 않았을까. 샤미안 양 때도 그랬지만, 제대로 얘기를 하면....” “납득할 거라고 생각해?” 냉정하게 반문하자 할 말이 없었다. 국왕은 다시금 신음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마침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미안.” “뭐가?” “아란나 양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절대 나쁘지 않아. 하지만 아란나 양은 거친 일과는 무관한 보통 여성이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줘.” “화 안 났어.” 국왕이 얼굴을 들어보자 왕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구를 움츠리고 있는 남편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본다. “전에도 말했지만, 인간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보통이야. 오히려 네가 이상한 거지.” “말해두지만 나도 무섭지 않은 건 아니야. 단지 알고 있는 것 뿐이다. 넌 절대로 날 잡아먹지 않아. 아란나 양을 먹지도 않지. 그러니까 넌 조금도 위험하지 않아. 우리들에게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마음이 바뀌어서 널 먹어버릴지도 몰라.” “그럴 리 없어.” 국왕은 딱 잘라 말했다. “이것도 미리 말해두지만, 널 믿기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너만큼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녀석도 드물지. 하지만 아란나 양이 두려워하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 단순히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뿐이야.” 국왕은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비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사냥을 하는 생물이라는 것도, 아란나가 그런 나를 무서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리.... 하지만 그래서는....” 왕비는 아란나를 지키고 셰라를 지켜냈다. 그 포상으로 왕비가 받은 것은 친애의 시선도 감사의 인사도 아닌, 혐오감과 공포로 가득 찬 눈빛. 더러운 것을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저주의 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란나의 기분도 알고 있다. 아프도록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자신도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왕비는 오른손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쥐며 몸을 쭉 폈다. “자기 힘으로 사냥을 하는 게 어째서 안 되는 건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장난으로 죽이는 것하고는 얘기가 달라. 먹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혐오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런 게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숨길 수밖에 없어.” “.......” “아란나만이 아니야. 폴라나 샤미안도. 아니 여자들만이 아니겠지. 어쩌면 단장들도 거부반응을 보일 거야.” “넌... 정말 그래도 괜찮아?” 왕비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지는 않지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어. 이건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분명히 짜증이 날 때도 있어. 인간은 자기 마음에 드는 구석밖에 보지 않으니까. 전쟁의 여신이니 비장군이니 하며 너무 치켜세우는 걸 보면 때때로, 괴물이라고 부르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엄청나게 강해져. 지금의 난 반쯤은 허상이야.” “옛날에는 남자였다는 얘기...?” “그것도 있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게 더럽게 마음에 안 들어. 난 그렇게 다정하지 않다고. 힘들 때에 다른 사람들이나 도와주고 있을 만큼 속 좋은 인물도 아니야.” 고뇌에 가득 차 있던 국왕의 얼굴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검은 눈에 따뜻한 미소를 짓고 술잔을 돌리면서 즐겁게, 하지만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난 그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는 걸. 넌 다정해. 굉장히 다정한 녀석이야.” “진지하게 말하지 마.” 왕비는 기막혀했지만 국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결혼식 전날에도 그랬지. 정말로 숨길 생각이었다면 날 도울 필요도 없었어. 오늘 일만 해도 그렇지. 셰라를 죽게 내버려둬도 상관없었을 거야.”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백색 달빛이 쓴웃음을 짓는 뺨을 비추고 있다. “눈앞에서 죽게 내버려두는 게 찝찝한 것뿐이야.” “그걸로 충분해. 네가 아무리 너 자신을 무정하다고 말해도, 난 네가 다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괴물이라고 욕을 먹어도 화내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묵묵히 증거를 인멸하고 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 표적이 된다면 또다시 도우러 갈 것이다. 이 신기한 생물은. “다정하지 않기는커녕,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야.” 왕비는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지 마.” “어리광...?” “그래. 괜히 기뻐지잖아.” 국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함께 웃음을 지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건 오히려 내 쪽 같은데.” “그래?” “응.” 국왕은 양아버지인 페르난 백작이 살아 있을 때를 떠올렸다. 무예도 학문도 뛰어났지만 정치에 대해서만은 조금 특이한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훌륭한 군주가 되려는 생각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백작은 즉위한 양아들에게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란 불가능합니다.” 이를테면 제방을 쌓는다고 하자. 강이라는 대자연의 거대한 생물을 상대하는 일이니 만치 희생도 나온다. 장기적으로 보면 농민들에게 득이 되는 공사라 하더라도 매일같이 공사에 동원되는데다 자신의 농지가 수몰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불이익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야만 할 일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완고하게 해나가는 걸로 충분합니다. 최소한 밭을 잃은 농민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는 것은 잊지 말아야겠지요.” 그때 국왕은 자신의 정책에 대해 조금도 자신이 없었기에 불안에 차서 반문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돈과 권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농락하는 인물들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럼 나라의 계획 때문에 논밭을 잃은 농민에게 아무 보상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신지?” “아니, 그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원만하게 처리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치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원만하게 처리한다는 건 욕심입니다. 그런 건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조금씩이라도 더 좋게 만들자는 마음으로 행동해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누구보다도 곧고 올바르다는 것은 이 페르난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성실하게 일하면 결과는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나라라는 거대한 생물이 자신의 어깨 위에 얹혀 있다. 고뇌하는 젊은 국왕을 백작은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울이 될 만한 사람을 곁에 두십시오.” “거울... 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충고도 아첨도 하지 않으며, 간언을 하지도 않고 이끄는 것도 아닌, 그저 당신의 다스림과 삶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사람을 두시는 겁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밝으면 당신의 다스림도 밝은 것이며, 그 사람의 얼굴이 어두우면 당신의 다스림에도 그늘이 있다, 양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찾으라고 말했다. “너만은 날 멀리하지 않았지. 왕관이 딸려 있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한 전사를 돕는 것뿐이라고. 난 정말 기뻤어. 네가 있어줬기 때문에 왕관을 무겁게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었어.” 하지만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네 거울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사람을 말하는 거잖아? 난 가만히 안 있어. 네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두들겨 패줄 테니까.” 국왕은 폭소했다. 술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왕비의 금발을 마구 휘젓는다. “그러니까, 그런 구석이 더 기쁘다고.” “변태냐, 너?” 불평하면서도 왕비는 상대의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내버려뒀다. 이렇게 접촉하는 것은 싫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손이 있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의 손이라니, 이 이상 재미있는 사실이 어디 있을까. 셰라가 새 술병을 가지고 올라왔다.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아, 부탁해.” 새로 따른 잔을 다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셰라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아니야. 넌 잘해냈어.”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뒤를 당하다니.... 게다가 제 탓이니까요.” 셰라는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바라신다면 입을 씻는 의미로 목이든 팔이든 좋으실 대로 물어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그 진지한 말에 왕비는 입을 쩍 벌렸다. 국왕이 견디다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소파에서 떨어질 듯한 기세로 몸을 비틀며 웃는다. 왕비는 가볍게 혀를 차고, 그런 국왕의 목을 한 팔로 붙잡아 조이면서 그대로 잔디 위로 쓰러뜨렸다. “어이?!” “묘한 것 가지고 신경 쓰지 마. 아까 요리도 충분히 맛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으로 말을 한 이유는, 국왕의 큰 몸이 잔디밭에 넘어져 작은 몸집의 왕비에게 깔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국왕의 하반신은 완전히 자유로웠지만 머리를 꽉 잡혀 있으니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길이 없다. 국왕을 붙잡아 누른 채 왕비는 셰라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봤지? 허점을 타서 붙들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어. 사람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면 움직일 수 없는지 놈들은 훤히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간단히 다룰 수 있지. 넌 격투는 배웠어도 이런 종류의 기술은 안 배웠겠지?” “예. 필요 없었으니까요.” “다음에 가르쳐주지.” “예, 부탁드립니다.” “이, 이봐! 사람을... 연습 상대로....” 쓰지 말라고 하고 싶은 모양이다. 왕비는 손을 팍 놓았지만 이번에는 국왕이 왕비에게 덤벼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깔고 누르려는 맨손의 승부였다. 둘 다 전투의 달인이니 만치 실로 격렬한 싸움이 되었다. 셰라는 기가 막혀서 중앙의 사자와 금색의 괴수가 구르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리궁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다시 밖으로 나와 보자 두 사람 모두 거칠게 숨을 내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디와 진흙 투성이가 되어 땅 위에 주저앉아 웃고 있었다. 왕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일은 비가 오겠네.” “이렇게 달이 밝은데?” “응. 낮에는 몰라도 밤에는 왕창 쏟아질 거야.” “흐음.... 물이 샐 만한 곳을 주의해둬야겠군.” 얘기가 잠시 끊어진 틈을 타서 서리궁의 충실하고 유능한 시녀는 주인 부부를 향해 우아하고 공손하게 말했다. “목욕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목욕할 필요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9장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이 되자 더욱 기세를 더하며 좍좍 쏟아졌다. 이 갑작스러운 호우에 곤란해진 것은 엔도바 부인의 집을 방문한 나시아스였다. 처음엔 정원을 구경하러 온 것뿐이었다. 어쩌다 얘기가 길어지다보니 오후에 함께 차를 들게 되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에도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부인도 저 정도면 곧 그칠 거라고 말하며 비가 그칠 때까지만 더 머물다 가라고 권했고, 저녁 식사를 얻어먹은 뒤 정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비가 퍼붓고 있었다. 덧창을 꽉 닫아두어도 거친 빗발이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두들겨댔다. 엔도바 부인은 불안한 듯이 나시아스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무리해서 돌아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오늘밤에는 묵고 가시지요. 곧바로 객실을 준비하겠습니다.” 주저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런 빗속을 헤치고 가겠다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이것이 행군이라면 악천후 따위를 두려워할 라모나 기사단장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군대를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휘관이 혼자서 폭풍 속을 헤치고 나아가다 조난이라도 당했다가는 라모나 기사단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히고 만다. 나시아스는 부인의 온정에 의지하기로 했다. 마침내 안내된 2층 객실은 복도에서 들어서면 작은 거실이 있고 그 안쪽이 침실인 구조였다. “아직 주무시기는 이를 테니까요.”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술안주를 준비해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단, 복도로 통하는 문은 활짝 열어두었다. 이 사람은 밀실에서 남자와 단둘이 있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숙녀다운 태도에 경의를 느끼면서도,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나시아스는 당황하며 자신의 그런 감정을 자책했다. 친구로서의 당연한 예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편안한 거실이었다. 응접실이 아닌 만큼 화려함보다는 안정된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 벽지는 하얀 들국화 무늬였고, 난로 위에는 밀랍으로 만든 꽃바구니가 장식되어 있다. “멋진 방이군요.” 진심으로 칭찬하자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댁의 거실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쟌펠 경 부인의 수예 솜씨나 나시아스의 고향인 본즈비의 생활에서부터 얼마 안 있어 이 집에서도 직접 포도주를 담글 수 있을 것 같다는 등등 얘깃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조용하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지만 정작 멈추는 적은 한번도 없었다. 꽉 닫힌 창문으로 때때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촛불을 흔든다. 그럴 때마다 엔도바 부인은 조금 몸을 떨면서 곁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다. 폭풍을 무서워할 나이는 아닐 텐데도,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부인 얘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어요?” “제 처 말입니까?” 나시아스는 조금 놀란 듯했다. 라티나도 자신이 한 말에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나는 나시아스가 재혼할 생각을 안 한다면서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입후보할 셈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부인에게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조금 들어두고 싶었다. 나시아스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소녀였다는 이야기. 자신과 만났을 때는 뺨을 붉히며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대신 기사단에 매일같이 도착한 편지 이야기. 그렇게 한마음으로 자신을 그리는 소녀가 사랑스러웠다는 이야기. 병으로 쓰러졌다는 사실을 슬퍼하며, 반드시 낫겠다고 울며 약속했던 이야기. 어느덧 한밤중이 되었다. 나시아스는 계속 술잔을 비웠고, 함께 있던 라티나도 따라서 술을 마셨다. 뺨이 상기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시아스 역시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술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그 공기에.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두 손으로 술잔을 꽉 쥐면서 평상시의 나시아스라면 절대로 꺼내지 않을 소리를 입에 올렸던 것이다. “형식뿐인 식을 올린 뒤에도 처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둘이 함께 지내는 사이에-병은 심해졌기 때문이겠지만 굉장히 괴로운 표정을 짓게 되었지요. 왜 그러느냐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최후의 밤에야 겨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진짜 부부가 되고서 죽고 싶다고....” 라티나는 흠칫 놀랐다. 나시아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해보았다. “어째서..., 스스로를 질책하시는 거죠. 그게 부인의 소원이었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처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절 원했고, 저는 그에 응했습니다. 그녀도 만족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독한 인간입니다. 병에 시달려 깡마른 몸을 안고 피부를 맞대고 있자니 도저히 사랑스럽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 코를 찌르는 약 냄새, 마른 잎사귀처럼 거친 피부, 뼈만 앙상한 팔, 그런 것만 신경이 쓰여서.... 짜증스러워서.... 예, 혐오하기까지 한 겁니다. 제 처를!” 라티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동요와 낭패감이 동시에 덮쳐왔다. 그것은 나시아스의 탓이 아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 불치의 병에 쓰러져 죽음을 앞둔 부인에게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죄라니, 그렇게 심한 얘기는 없다. 원래부터 애정이 아니라 연민의 정에서 성립된 결혼이 아닌가. “다음날 아침, 처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저를 꽉 끌어안은 채.” 침통한 얼굴로 낮게 말하는 이 사람에게 대체 뭐라고 해주어야 좋을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목이 메는 것을 억누르며 물음을 던졌다. “지나친 참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당신께 있어서 부인은....” “전 그때까지 여자를 몰랐습니다.” 라티나는 다시금 숨을 삼키며 가슴을 내리눌렀다. 최악이다. “하지만..., 하지만 설마 그때부터 계속....” 나시아스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 같은 것이 퍼지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저에게는 고맙게도 고약한 친구가 있으니까요. 아무 말도 묻지 않았지만 저와 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은 눈치 챘던 게 아닐까요. 열심히 단골 가게로 끌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자들도 떠안기곤 했지요.” 거기까지 말하고서야 나시아스는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여성을 상대로 이런 얘기를 하다니 말도 안 된다. 당황하며 사과하려 했다. “아, 아니..., 실례.... 그럴 생각은....” “괜찮습니다. 더 들려주십시오. 그 아름다운 여성들 중에서 부인을 잊게 해줄 만한 분은 있었는지요?” 어색한 미소가 나시아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모르겠습니다. 건강한 여성의 피부는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하고 감탄했던 것은 기억합니다. 처도 처음 만났을 때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였지요. 가능하다면 그때의 처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만.... 기억은 언제나 그날 밤으로 돌아갑니다.” 라티나는 더욱 괴로워지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숨을 들이쉬었다. 왕비가 말한 대로였다. 엘레인은 아직까지도 나시아스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이 사람은 영원히 단 하룻밤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괴로운 일을 떠올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취침 인사를 한 뒤 이 방을 나가는 것이다. 지금 곧.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최선을 다했으니 부인도 분명히 행복했을 겁니다. 앞으로는 당신의 행복을 찾으세요. 자신의 입이 그런 말을 늘어놓는 것을 훤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에 걸맞은 행동도 완벽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라티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문으로 말없이 다가가... 문을 닫은 뒤 열쇠로 잠갔다.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씁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시아스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 라티나는 그런 나시아스에게 다가가 조용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이 떨리고 있다. 이 말을 꺼내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주저도 잠시뿐이었다. 심하게 가슴이 고동치는 것을 느끼면서 라티나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기억할 거라면 좀더 나은 밤으로 하세요.” 말 위의 틸레든 기사단장은 어젯밤의 폭풍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맑게 개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라모나 기사단장의 관사를 방문했다. 같은 성 안이라도 발로의 저택은 일곽, 기사단의 관사는 삼곽에 있다.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자기 단원들의 상태를 보는 김에 잠시 들러본 셈이었지만 이 쪽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종자나 젊은 기사들이 밖에 나와 바쁘게 일하고 있다. 목공도구와 관자를 지고 나온 가렌스가 발로를 보고 인사했다. “아, 발로님. 보시는 대로 이 꼴입니다. 그쪽은 좀 어떻습니까?” “비슷해. 지붕이 내려앉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돌이 날아와서 말이야. 덧창이 그대로 날아갔어.” 말을 맡기고 발로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나시아스는?” 이런 재난이 있은 뒤이니 당연히 보수 작업을 감독하며 일하고 있을 친구였건만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상해하며 묻자, 가렌스는 그 건장한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어제 저녁 나가신 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바람이 그렇게 심했으니 어딘가에서 묵고 오시는 거겠죠.” 그렇게 부단장이 말하는 순간 애마를 탄 라모나 기사단장이 모습을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나시아스님! 어떻습니까, 이 멋진 참상! 슬슬 이 관사도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은데요.” 가렌스는 호쾌하게 웃었지만 나시아스는 발로의 얼굴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나중에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발로도 따라 들어가, 단장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놀리듯이 말했다. “폭풍우 치는 밤의 외박이라, 거 멋지군. 너에게도 아직 그런 풍류가 있었나? 훌륭해.” 평상시라면 즉시 반박했을 나시아스가 오늘은 시선을 피한다. 덤으로 얼굴까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발로는 깜짝 놀라 눈을 치뜨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정말 놀고 온 거야? 거 별일이 다 있군.” 나시아스는 얼굴을 점점 더 붉혔지만 친구가 신나서 더 놀리기 전에 못만은 박아두었다. “말해두지만 놀고 온 건 아냐.” 그 말과 복잡한 표정을 보면 상대도 대략 상상은 간다. 발로는 이번에야말로 놀랐다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엔도바 부인이야? 너, 부인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이야?!” “큰 소리로 말하지 마....” “그거 잘됐군. 그래서, 식은 언제야?” 당연한 듯이 묻는 친구의 말에, 나시아스는 충격을 받고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직 그런 얘기는....” “아직 안 정한 거야?” 발로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서두르라고. 나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중간 역할은 내가 해주지. 이야아, 설마 너한테 그런 배짱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어쨌거나 잘 됐다. 아란나도 너희 부모님도 기뻐하시겠지. 빨리 식장을 준비하고....” “아니, 그러니까! 아직 결혼하기로 정한 건 아니라....” 나시아스는 당황하며 부정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발로가 충격을 먹었다. “잠깐 기다려. 같이 잔 거지?” “뭐... 그래.” “나라면 몰라도 네가? 결혼 약속도 하지 않고 부인하고 같이 밤을 지냈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나시아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한편 발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자세하게 얘기해봐.” 불편한 듯이 머뭇거리면서도 나시아스는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지만, 그 얘기를 들은 발로는 머리를 싸쥐고 말았다. “너, 그래서 그대로 물러난 거야? 왜 나오기 전에 청혼하고 오지 않은 거야?” “말이야 쉽지만,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부인이 자리에 없었어. 심부름꾼에게 물어봐도 아직 쉬고 계시니 돌아가주시는 게 좋겠다고 하고, 그래서는 어떻게도....” “잠깐! 심부름꾼이 그렇게 말했어?!” 발로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나시아스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게 왜?” “네가 부인의 집에서 나온 건 언제쯤이지?” “날이 밝을 때쯤.” 발로는 낮게 신음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체 이런 시간까지 뭘 하고 있었어?” “그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니까, 구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듯한 얼굴로 진지하게 하는 말을 듣고, 틸레든 기사단장은 기운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 간신히 자세를 유지한다. “그렇군. 그건 나도 확실히 물어보고 싶은 문제인데, 너 말야. 부인하고 결혼할 생각은 있어?” “당연하지! 하지만 아무래도 그, 말이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발로는 초특급 한숨을 쉬고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나시아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며 험악하게 단언했다. “감사하라고, 나시아스. 역시 이럴 때 필요한 게 친구지. 그런 일이라면 나도 협력해주루 테니까. 우선 부인이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야지.” “도망쳐?” “그래.” 발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시아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을 치뜨며 반문한다. “대체 무슨 말이야?” “네놈이 한심하고 멍청한 바보라는 소리다!!” 그 고함은 관사 바깥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서둘러! 부인의 저택-아니, 왕궁이다!!”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 돌아서는 발로를 보고 나시아스는 기가 막혔다. 당황하며 뒤를 따라간다. 발로는 현관으로 달려나가 말을 끌어오라고 종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뒤를 따라간 나시아스를 무섭게 노려보며 재빨리 말한다. “부인의 저택은 형님이 하사한 물건이야. 외국으로 나가려면 통행증도 필요하지. 잘만 하면 형님 선에서 붙잡을 수 있을 거야.” “기다려봐, 발로. 난 뭐가 뭔지 전혀....” “사랑하는 남자하고 같이 잔 다음날 아침, 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심부름꾼에게 전해뒀겠어? 저 부인은 가볍게 불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 한시라도 빨리 너를 내보내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왜 그 사람이 도망친다는 거야?” “너하고 깊은 사이가 되고 말았으니까. 그게 아니면 뭐겠어.” 나시아스는 상처 입은 듯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건..., 그 사람은 나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발로는 절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연애에 서투른 아들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정에 가까웠다.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꽉 누르면서, 가능한 한 부드럽게 말한다. “이봐, 나시아스. 부탁이 있는데 말야.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 맹세해주겠어?” 나시아스는 갑자기 긴장했다. 대체 무슨 소리가 나올지 경계하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나 나시아스는 다음에 엔도바 부인과 만나게 되면 즉시 청혼하고 승낙을 받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어때? 할 수 있어?” 나시아스는 한 손을 들고 엄숙하게 말했다. “백합의 문장과 내 생명을 걸고 맹세하지.” “좋아.” 말이 준비되었다. 두 기사단장은 본궁을 향해 전력 질주를 개시했다. 국왕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엔도바 부인을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양친의 성묘를 하고 싶다고...?” “예. 상당히 오랫동안 가보지 않았으니까요. 통행증을 발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야 물론 상관없지만, 오늘 중이라니-뭔가 급한 용무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죄송합니다. 마음을 정하고 났더니 잠시라도 참을 수 없어서....”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에 앉아 있는 왕비를 보았다. 이쪽도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성묘도 좋지만 심부름꾼이 급하게 서리궁까지 달려오기에 무슨 일인가 했어.” 급한 용건으로 만나 뵙고 싶다는 말에, 두 사람은 늦은 아침 식사 도중에 달려왔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신경을 써주신 듯합니다.” 지극히 온화하게 말하는 부인에게, 국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통행증이라면 발행하지. 하지만 오늘은 안 돼. 나중에 찾으러 들러주게.” “아니오, 폐하....” 처음으로 부인의 목소리가 변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오늘 받고 싶습니다. 신세를 진 분이 마침 나라에 돌아와 계신다고 합니다만,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만나 뵐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국왕은 곤란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부탁이니 진짜 이유를 들러주길 바라네. 어째서 이렇게 급하게 떠나려는 거지?” “이유라면...,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숨을 쉬고, 국왕은 책상 위에 팔을 짚으며 말했다. “라티나. 난 자타가 공인하는 둔한 남자야. 특히 여자의 마음은 하늘의 구름보다도 더 파악하기 힘들지. 하지만 다행히도 당신에 대해서라면 좀 알고 있어. 지금 당신의 모습은 한때 내 앞에서 모습을 감췄을 때와 똑같아. 이번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지?” 라티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애원하는 시선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부탁이니 붙잡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절 보내주세요. 이러는 게 최선입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국왕과 왕비가 얼굴을 마주 보며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려는 순간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도 알 수 있다. 나시아스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온화한 저 라모나 기사단장이 알현 중인 국왕의 방에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리는 시종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다. 라티나가 핏기가신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자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 같군.” 그때 이븐은 도라 장군의 부름을 받고 있었다. 할말이 있으니 와달라는 전갈에 조금 긴장하며 도라 백작가의 현관을 들어섰지만, 장군은 이븐을 보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내 딸과 결혼해서 이 집안을 이어주지 않겠나?” 이븐은 말이 막혔다. 푸른 눈이 탐색하는 듯이 날카롭게 빛났다. “폐하께 뭔가 들으신 겁니까...?” 장군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라니, 무슨 말인가?” “아니오.... 하지만 농담은 그만두십시오. 저하고 아가씨는 어울릴 리가 없습니다.” “아니, 내가 자네 그릇을 보고 하는 부탁이야. 승낙해주지 않겠나?” 무서운 얘기지만 아무래도 진심으로 보인다. 이븐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농담은 그만 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전 바로 얼마 전까지 산적이었고, 그 전에는 해적이었지요. 지금은 폐하 곁에 있으면서 조금 얌전하게 지내고 있지만 말입니다. 잘난 척하는 관리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권력에 아첨하는 것도 사양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하고 놀아보았고, 대륙 여기저기에서 나쁜 짓도 했지요. 제 목에 현상금을 건 나라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 성격은 고치려 들어도 고쳐지지도 않지요. 그런 인간이 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장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네는 타우의 동료들을 설득해서 폐하를 따르게 했어. 나라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타우의 장래를 위해, 동료들의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그렇지?” “.......” “그건 로아의 역사 그 자체야. 한때 로아도 중앙정권에서 멀리 떨어져 자유 독립의 기치를 지키는 토지였지. 나라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네. 무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영민들은 말과 활에 뛰어난 인간들뿐, 자유를 사랑하는 그 심성은 뿌리부터가 유목민이었지. 권력으로 군림하려는 관리들에게 얌전히 따를 리가 없었어. 꿋꿋하게 나라에 반항했지. 그 우두머리가 도라 가문이었다. 싸움 끝에 나라와 화해하고 권력에 무릎 꿇는 게 아니라 공존의 길을 선택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다보니 명문가로 불리게 되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과 기마로,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 쌓아온 거야. 그 피는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네. 자유민이라 칭하는 타우의 혼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네만, 어떤가?” 이렇게까지 속을 터놓고 성의를 보이는 장군의 태도에 이븐은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타우를 평가해주시니.... 자유민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도 신조는 있습니다. 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이븐은 보기 드물게 주저하고 있었다. “전 뭐랄까, 제 자신의 힘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면 바라지 않습니다. 동료를 원하면 그 상대하고 친해지면 되고, 돈이 필요하면 부자들에게서 털었지요. 여자가 필요하면 제가 꼬셨습니다. 그런 방식이 성미에 맞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이 댁 아가씨는 백작가의 외동딸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만, 아가씨에게는 땅도 재산도 있지요. 그것도 거액입니다. 하지만 그건 제 것이 아닙니다. 전... 아가씨가 갖고 있는 재산 따위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하면..., 결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거액의 돈이 자동적으로 제게 떨어지지요. 그런 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건지, 재산에 반해서 결혼하는 건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특히 작위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겠습니다.” 도라 장군은 반쯤 곤란한 듯이, 반쯤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이유인가.... 그것뿐인가?” “저 스스로도 쓸데없는 오기라고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장군은 조금 웃었다. “신부에게는 지참금이나 재산이 딸려가지. 대부분의 신랑들은-그 양친도-신부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으면 화를 내. 결혼이란 재산을 늘리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도 많은데....” “그야 자기 힘만으로 어떻게 해볼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겠죠. 그런 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옛날 아는 녀석 중에, 오랫동안 상인 집안에서 일을 하다가 주인에게 인정받고 데릴사위가 되어서 그 집안을 잇게 된 녀석도 있지요. 한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녀석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줬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짓 못합니다. 할 생각도 없습니다.” 장군은 말을 끊은 이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들이 없었어.” “.......” “그러니까 딸의 결혼 상대는 아들처럼 아낄 수 있는 사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윌로비에게서 얘기가 있었을 때 그 집 차남이라면 적당하겠다 싶었지만..., 딸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눈치더군.” “.......” “딸은 아무래도 자네를 좋아하는 모양이네만, 자네는 어떤가?” 맹장으로 중앙 전체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의 솔직한 말에, 이븐은 끝까지 버틸 수 없었다. 길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가 이 댁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진작 꼬셔봤을 겁니다. 하지만... 용서해주십쇼.” 절을 하고 등을 돌린다. 이븐이 거실을 나가는 것과 동시에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샤미안이 들어왔다. 표정이 무겁다. “아버지....” “훔쳐들었구나.” “아버지는 어째서 제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거죠?” 동요를 드러내면서도 샤미안은 아버지 앞에 다과를 내려놓았다. 장군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제 친구 못지않게 고지식해. 방법이 없군. 귀족의 칭호나 재산이 따라오는 게 참을 수 없다니..., 곤란하게 됐어.” 샤미안은 쟁반을 품에 안은 채 멈춰 서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렇게 단언한 제임스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자신은 도라 백작가의 외동딸이다. 가문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귀족의 딸과 결혼할 수는 없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장군도 고민 끝에 국왕의 조언을 구하러 본궁으로 향했고 샤미안도 함께 동행했지만, 도착해보니 본궁에서는 틸레든 기사단장과 국왕과 왕비가 응접실 문에 달라붙어서 한창 안의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다. 응접실 앞의 복도는 바로 조금 전부터 출입금지령을 내려 시종도 시녀도 모두 쫓아낸 상태였고, 한동안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도라 부녀는 기가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자 세 사람 모두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문 안을 가리킨다. 살짝 열린 문 안에서 엔도바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이라는 책무입니다. 당신도 분명히 절 두고 먼저 가 버리겠지요. 절대로 당신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나시아스가 주저하며 대답한다. “분명히, 제 임무는 위험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발로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저 바보 자식..., 당신을 두고 죽지는 않겠다는 소리는 못하나.” 왕비가 한숨을 쉬었다. “나시아스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 인간이면 저 고생은 안했지.”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거짓말이 되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고.” 묘한 면에서 수긍한다. 그 수라장을 바라보며 도라 장군은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었지만, 여기서 큰 소리를 내면 나시아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딸을 재촉하며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했지만 샤미안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살짝 안을 훔쳐보자, 나시아스는 곤란해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땀까지 흘리며 말하고 있었다. “제가 먼저 죽는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저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전 건강한 것만이 장점인 걸요.” “그렇다면 저도 운이 좋은 것만이 장점입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부인이 곤란한 듯이 말한다. “처음 남편도, 두 번째 남편도 굉장히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두고 먼저 떠나갔지요.” “알고 있습니다. 부인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제발 절 믿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문 앞에 달라붙어 있던 발로가 힘없이 미끄러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이 이상 듣고 있다간 내가 돌아버리겠어....” 왕비가 복잡한 얼굴로 끄덕인다. “그 기분, 나도 알겠어.” 답답한 데에도 한도라는 게 있다. 그렇다면 훔쳐듣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저거,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결국 양쪽 다 마음이 있는 거잖아.” “뭐, 그렇긴 하지요.” 발로도 다시 일어나며 말했고, 일행은 조심스럽게 응접실 앞에서 떨어졌다. 충분히 떨어진 곳에 가서야 간신히 평상시대로 큰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발로는 친구의 한심함에 불을 뿜었고 국왕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으며 왕비는 기가 막힌 듯한, 도라 장군은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샤미안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나시아스님이 저렇게 필사적으로 나오시다니....”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의외였다. 왕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야 필사적일 수밖에. 라티나가 아니면 안 된다니까.” 벼락에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샤미안이 그대로 얼어붙자 왕비는 이상한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아닙니다....” 국왕은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라티나에게 발목을 붙잡을 기세가 있었으면 훨씬 더 빨리 해결됐을 텐데.” “발목을 붙잡...?” 익숙하지 않은 말에 샤미안은 흠칫 긴장했다. 왕비와 발로가 교대로 설명해주자 샤미안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시집가는 건가요...?” “그야 죽어도 싫은 사람이라면 남자도 내쫓겠지만.” 왕비가 말하자 발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남자라는 생물은-여자도 마찬가지지만-입으로 말하는 게 꼭 진심이라고 할 수만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에 라티나가 그렇게 행동하길 바라는 건 무리가 있어.” “그렇겠지요. 저 사람은 두 번이나 불행하게 끝난 결혼 때문에 완전히 용기를 잃어버린 상태니까요. 뭐... 그건 나시아스도 비슷한 경우지만.” 도라 장군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이쪽 일도 의논하려고 했지만, 그런 아버지를 가로막듯 샤미안이 말했다. “아버님. 도라 백작가는 제가 잇겠습니다.” “뭐, 뭐라고...?” “작위를 이어받고 산적의 부인이 되겠습니다.” 수줍어하면서도 딱 잘라 말하고 절을 한다. 샤미안은 기가 막혀 얼어 있는 일동을 남겨두고 뺨을 붉히며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이곽, 타우 자유민들의 숙소였다. 이븐이 숙소에 돌아오자 마침 모녀 간에 전쟁이 한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나! 넌 열여덟, 저놈은 마흔 줄이잖아!” “마흔이든 예순이든 상관없다니까!” 롬의 두목 베네사가 소리를 지르면 그 딸인 애비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베노아의 두목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하는 바람에 사흘 전부터 이 소동이었다. 용감무쌍한 타우의 남자들도 이렇게 되면 끼어들 수 없다. 조마조마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질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폭풍 피해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으며, 지금은 말을 돌보고 있다고 한다. 이 결혼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이븐도 깜짝 놀라며 롬의 두목이 반대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기가 막혀서 질에게 묻기까지 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어떻게라니, 난 애비하고 결혼하겠어.” “그러니까 대체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애초에 결혼하기로 한 이유가 뭐야?” “글쎄...? 그냥.” “어이....” “너도 바보 같은 소리 마. 갑작스럽다느니, 이유가 뭐냐느니-이런 건 언제나 갑자기 정해지는 거야. 이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그냥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했지. 뭐가 이상해?” “잘도 지껄이네.” 비아냥대면서도 질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꼭 홀딱 빠져서 닭살이 돋아 죽을 것 같은 말을 내뱉어야만 성의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증거로 질은 베네사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비는 너무나도 강경한 어머니의 반대에 대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필살기 ‘내 뱃속엔 그 사람의 아이가 있어’ 를 꺼내들었지만, 이 경우에는 완전히 역효과를 불렀다. 상대는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네사는 완전히 기절할 듯이 화를 내며 허리에 찬 칼로 손을 가져갔다. “내 허락도 없이 딸에게 손을 대?!” 질은 당황하며 베네사를 달래는 동시에 애비를 꾸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알겠어? 다른 상대가 아니야. 네 딸이다. 난 그렇게 파렴치한 짓은 안 해. 애비, 너도야. 그런 거짓말로 설득하려고 해도 네 어머니는 쉽게 허락해줄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정말이지?! 아직 아무 짓도 안 한 거지?!” “손만 잡는 정도로는 애도 안 생기겠지.” 질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잔뜩 화난 고양이처럼 서슬을 퍼렇게 세우고 있는 베네사를 바라보았다. “네 허락을 받을 때까지는 애비에게 손가락 하나도 안 대겠어. 맹세하지. 그러니까... 가능하면 좀 빨리 허락해주면 고맙겠는데....” “어느 면전에서 지껄이는 거야!! 이 죽일 놈!!” “너무한 걸....” 심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질은 다른 남자들이 완전히 손을 든 모녀간의 싸움에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봐. 귀가 아플 정도라고. 롬 녀석들이 불쌍하잖아.” “뭐, 하고 싶은 소리는 다 지껄이게 내버려두는 편이 좋아.” 질은 마구간의 의자에 앉아 마구를 수선하고 있었다. 타우의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뭐, 타우에 돌아갈 때까지는 좀 얌전해졌으면 좋겠는데.” “언제 돌아갈 거야?” “식전은 이미 끝났으니 언제라도 상관없어. 슬슬 마을이 그리워질 때도 됐잖아.” “응, 그렇군.” 이븐은 얼굴을 비벼대며 어리광을 부리는 말의 콧등을 가볍게 쓸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 굉장히 보고 싶어졌어.” “이 성 자체가 산이잖아?”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야. 바다든 산이든 어디라도 상관없어. 사람들 사는 곳만 아니면.” 질은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를 바라보았다. 가슴 높이의 울타리에 두 팔을 올려놓고 한 손으로 짧은 금발을 쓸어 넘겼다. 굉장히 지친 얼굴이었다.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자 뒤를 돌아본다. “이봐, 당신....” 이븐이 말을 하려다 그만두자 질이 물었다. “왜 그래?” 이븐은 보기 드물게 주저하다 마음을 먹고 말을 꺼냈다. “만약의 얘기인데..., 귀족의 생활이라는 건 어떤 거야?” “흐음?” 검은 눈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이로군. 도라 장군을 만나고 돌아와서 갑자기 그런 소리를 꺼내다니.” “놀리지 마.” “장군가의 후계자로 입후보할 거냐?” 이븐은 얼굴을 꽉 찡그렸다. “이봐....” “농담이야. 너에게는 못할 짓이지. 깨끗한 저택에 얌전히 틀어 박혀서 우아하신 놈들하고 사귀면서, 체면을 지키는 데에 거의 모든 노력을 퍼붓는 나날이야. 하지만 공정하게 생각하자면 나쁜 생활은 아니지. 적어도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염려는 없으니까.” “.......” “그게 뭐가 어쨌냐고 지껄이는 놈들은 홀딱 벗겨서 사흘 정도 굶겨보면 돼. 그 대신 모험은 할 수 없지. 자기 한 사람 재량으로 움직일 수 도 없어.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행 한번을 하려고 해도 정해진 말, 정해진 길, 정해진 종자, 그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식사도, 입는 옷도, 소지품도, 사귈 상대도. 그날 아침에 하루 일정을 정하고 그대로 움직여야 해. 어겼다가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녀야 하고, 개중에 몇 명은 젊은 도련님이 예정대로 행동하게 만들지 못한 죄로 해고당해. 뭐 좋게 말해봤자 사육되는 거지. 가문의 피를 잇는 종마로.” 바닷빛 눈망울이 자신의 두목을 바라보았다. 그 말투에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듯한 기색까지 있었다. “그거..., 당신 얘기야?” “바보. 산적 입장에서 본 일반적인 귀족의 모습이라 이거다.” 과장하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드는 생각인데, 귀족도 산적도 큰 차이는 없는 게 아닐까나. 지금 나도 한 사람의 몸이 아니야. 멋대로 움직일 수도 없지. 생각 좀 해보라고. 원하는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머니 허락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도 못 대. 멍청하게 그런 짓을 했다간 당장 전쟁이 날 텐데.” “뭔 소리야. 당신이 원했던 거잖아.” “그래. 아무리 불편해도, 초조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러니까 신경은 안 써.” “.......” “내가 저 임금님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점이야.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지. 바보인 건지 그릇이 큰 건지, 잘도 저렇게까지 태연자약하게 왕 노릇을 하고 있구나 싶어. 억지로 강요받은 왕관인데도 말이지.” “저 녀석은 옛날부터 그랬어. 하지만....” 이븐은 길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난 작위 도둑은 되고 싶지 않아.” 질은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네 친구 못지않은 바보로군. 너, 그래서 아가씨를 차버린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좋다고 했다가는 저택에 땅에 재산에 백작 작위까지 따라붙는다고?! 필요 없어, 그런 거.” “그럼 재산 빼고 아가씨만은?” “그야....” 우물거리면서 이븐이 대답하려는 순간, 마구간 입구에 그 샤미안이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처럼 여기사 차림이다. 질을 보고 가볍게 절을 했다. “바쁘신 중에 죄송합니다. 저....” 개암빛 눈망울이 이븐을 바라본다. 베노아의 두목은 이런 상황에서 어물거릴 만큼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일어난다. “전 물러나겠습니다. 이 녀석에게 할 얘기가 있는 거지요?” 두 사람을 놔두고 마구간에서 나간다. 한발 밖으로 나오던 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국왕과 왕비와 도라 장군이 재빨리 달려와 마구간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왕비는 얼어 있는 질을 냉큼 붙잡아 작은 창문 아래로 끌고 왔다. 참고로 왜 여기에 발로가 없는가 하면 오랜 친구 쪽이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비는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전해주겠다는 굳은 맹세를 발로에게서 받아내고 왔다. 샤미안은 바로 바깥에 구경꾼들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이븐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무슨 볼일이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발목을 잡으러 왔습니다.” 창문 밖에서 듣고 있던 구경꾼들은 죄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라 장군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는지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국왕이 덤벼들어 장군을 꽉 붙잡았다. 건장한 팔에 붙들린 채로 몸부림을 치다가 다시 귀를 곤두세운다. 물론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이븐이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얼어붙은 채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샤미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기,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씀입니까?” “예. 아까 배웠습니다.” 샤미안은 진지했다. 뺨은 붉게 물들었고 가슴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까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가 백작가의 딸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작위는 제가 잇겠습니다.” 이븐은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 “제임스님-윌로비 경의 아드님이 사랑한 분은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입니다. 제임스님은 그분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라 백작가의 외동딸이고 가문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절대로 당신께 작위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땅도 재산도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저기.... 잠깐..., 잠깐 기다려보십쇼! 당신, 제 뜻도 무시하고 멋대로....” “예. 그래서 여쭤보러 왔습니다. 당신이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없어서.... 정말 싫으시다면 솔직하게 그렇게 말씀해주십시오. 하지만....” 샤미안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필사적으로 달래면서 여기까지 말을 이었지만 갑자기 혀가 꼬여버렸다. 목이 메어온다. 샤미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가능하면 받아들여주실 수 없을까요....” 그 이상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푹 수그린 목덜미까지 점점 달아오른다. 이븐은 완전히 낙담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위기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샤미안은 그대로 꺼져버릴 듯이 몸을 움츠리고 있다. 이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창문 아래에서 입을 막힌 채 붙잡혀 있던 도라 장군이 국왕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발언권을 요청했다. 국왕은 숨을 삼키며 안쪽의 상황을 살피다가 그 신호에 살짝 팔의 힘을 뺐다. 그러자 장군은 사냥개처럼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딸이 저렇게까지 말하게 만들어놓고도 저 녀석이 거절하면 죽여버려도 되겠습니까?” 왕비가 손뼉을 딱 쳤다. 국왕도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 지금이야말로 국왕의 이름을 내세울 때야.” “물론이지.” 국왕은 기세 좋게 일어났다. 당당하게 마구간에 들어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기겁을 하며 놀라는 두 사람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선언했다. “샤미안 양. 이 친구 대신 내가 대답하겠네. 당신과 이 남자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정식으로 혼약을 맺었다. 국왕으로서 승인하지.” 이븐은 일순 새파랗게 질렸다가 다음 순간 새빨갛게 변하며 펄쩍 뛰었다. “마, 말도 안 돼! 잠깐 기다려!!” “닥쳐! 이런 상황에서 주저하는 바보는 친구도 아냐! 거절하기만 해봐. 백 번쯤 사형시켜주지.” “월!!” “시끄러워! 샤미안 양이 이렇게까지 널 좋아해주는데 뭐가 불만이야!” 왕비와 베노아의 두목이 박수를 치면서 일어났다. 국왕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지간히 해두고 포기하지 그래. 혼약불이행은 중죄니까. 저기에서 장인어른 될 분이 노려보고 있다고.” 그 도라 장군은 손마디를 뚝뚝 꺾으면서 국왕에게 물었다. “도망치려고 하면 죽여도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좋을 대로 하게.” 장군은 베노아의 두목에게도 확인을 청했다. “혹시 이 녀석이 그쪽으로 도망가면 신병을 인도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고 말고요.” 로아의 영주는 감사의 뜻을 담아 머리를 숙이고, 타우의 영주와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그 코랄 성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 해안에 지금 막 출항하려는 선단이 있었다. 선단이라고는 해도 배의 수는 겨우 다섯 척. 그것도 몇 십 명이 타면 그대로 꽉 차고 말 작은 배였다. 승무원은 모두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구의 튼튼한 남자들뿐. 술통 같은 가슴, 통나무 같은 팔. 밝은 색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덥수룩했다. “목표는 어디라고 했지?” “테바 강이다. 건너편 해안에서 산을 넘으면 그 강 상류가 나올 거야.” 이곳은 트레니아 만으로 이어지는 외해가 아니다. 스케니아의 가장 서쪽에 있는 죽음의 바다였다. “그 소재지를 확인하고 위치를 파악한 뒤 한 척이라도 좋으니까 겨울까지 돌아오도록 해.” “음. 행운을.” “바다의 가호를.” 짧은 대화를 주고 받은 뒤 그들은 미끄러지듯이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14권에 계속- <역자 후기> 부제: 비바, 번식기 이렇게까지 나오면 뭐라 말하기도 힘들어집니다만, 여전히 번식기가 한창인 델피니아였습니다. 쌍둥이 아빠 발로에 마흔 줄이 되어서 장가가는 질, 엉겁결에 일 친 나시아스에 강제로 결혼 당하는(?) 이븐. 제각각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질만 빼고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국왕은 뚜쟁이> ... 저번 권에서 발로도 그랬지만, 이 나라 남자들은 월이 국왕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결혼하려나 싶을 정도로 국왕에게 의존하고 사는군요. 덤으로 대부분이 여자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으면 성사될 수 없었던 결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나 이 카야타 월드는 여성상위국가가 맞다는 확신이 다시금 들게 됩니다. 그래서, 정작 그 국왕부부의 연애전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군요, 아무것도. 이 집 저 집 커플을 열심히 이어주고 다니면서 정작 저 둘은 전혀 그런 관계로 갈 생각이 없으니, 열심히 두 사람을 응원하고 있는(아니, 물론 폴라가 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불쌍한 번역자의 가슴에는 스산한 겨울바람이 붑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다고요. 처절하리 만치 아무 일도 없이 건전하기 그지없는 이 국왕부부, 그래도 목욕은 같이 했을 거라는 데에 500원 걸겠습니다(8장 마지막 부분, 잔디밭의 사투 참조). 굳이 여기에 덧붙이자면 반츠아와 셰라(웃음). 저 둘을 커플로 보기에는 셰라의 성별이 매 우 걸립니다만,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인형 같다고 왕비님도 인정하신 바 있으니 그런 셈 쳐두죠. 사실 셰라가 여자이기만 했어도 ‘저건 내 사냥감이니 다른 인간이 죽이게 놔둘 수 없다’ 며 죽이지도 않고 열심히 지켜주는 반츠아와의 연애담이 꽤 볼 만했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미 결말을 아는 사람으로서, 대나무 숲에 구멍을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힘껏 외치고 싶은 마음도 드는군요. 폴라는 나중에 **한다든가, ****는 **에게 죽는다든가.... 그런 의미에서 때때로 제 홈페이지에 천기누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야 물론 최종권의 치명적인 부분까지 밝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다음 번 발매될 책에서 누구랑 누구랑 사건이 있을지도 몰라요~ 정도는 괜찮겠지요. ........................괜찮을까요? 2003년 12월 김소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