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왕비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났다. 여기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젊은 신관이나 시종들이 이것저것 시중을 들면서 대접하고 있었지만 거기에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창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은촛대에서 타고 있는 촛불이 거의 타들어가고 있었다. 왕비 앞에는 과자를 담은 거대한 은쟁반이 죽 놓여 있다. 과연 사용하는 식기도 상당히 호화로운 물건들이다. 방을 나가려는 왕비의 앞을 신관들이 가로 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황송하오나 비전하. 대 신관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왕비는 코웃음을 쳤다. 대신관은 자신이 방문하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나갔다. 어디에 가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도 대략 상상이 간다. 소동이 날 거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었지만 왕비는 원래부터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다. “기다리기도 슬슬 질렸어. 신전 구경이라도 할 테니까 누가 안내 좀 해줘.” 젊은 신관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눈을 떼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 상대란 ‘왕비’가 아닌가. 불안한 듯이 시선을 주고받는다. 왕비는 그런 신관들을 밀어젖히고 멋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젊은 신관들은 당황하며 상사에게 보고하러 뛰어갔고, 몇몇 신관들이 달려와 왕비의 뒤를 따랐다. 밤의 신전은 조명이 없으면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석조의 예배당, 따로 지은 견습 신관들의 학교나 식당, 수많은 장서를 보관하는 서고 등은 충실하게 갖춰져 있지만 사치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명이 거의 설치되지 않았다. 왕비는 내부를 한바퀴 돌아보고서 예배당으로 다시 돌아와 어색하게 제단 위를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자신과 그 남자가 ‘연극’을 했던 것이다. 수백 명의 하객으로 꽉 들어차 있던 넓은 공간이건만 지금은 작게 헛기침만 해도 크게 울릴 정도로 정적이 감돌고 있다. 엄청난 높이의 석조 천장은 고개가 아프도록 힘껏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예배당 제일 뒤쪽, 왼쪽 구석에 작은 나무문이 보인다. 뒤에서 따라오는 신관이 설명했다. “탑으로 이어진 계단 입구입니다.” “위쪽에 종루가 있었지.” “예. 매일 같이 아침저녁으로 종을 울립니다. 코랄에서 가장 높은 탑입니다만 공교롭게도 이 시간에는 올라가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올라가 보시겠습니까?”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경치를 보러 온 게 아니다. 예배당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었다. 돌계단을 내려가니 견고해 보이는 문이 있었다.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다. “이 안은?” “황송합니다만 여기는 허가받은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견학은 피해주셨으면 한다고 완곡하게 말했지만, 그런 설명에 물러설 왕비가 아니었다. “열쇠는 어디에 있지?” 완고하게 생긴 신관은 규칙이라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왕비는 자물쇠를 들고 무게를 확인하고 있었다. “되게 엄중한데. 뭔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이라도 있는 거야?” “말도 안 됩니다.” 근거도 없는 의혹에 발끈했는지 곧바로 열쇠를 든 시종이 달려왔다. 문 반대편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지하 치고 공기는 깨끗했으며 답답하지도 않고 곰팡이 냄새도 없다. 공기 순환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겠지. 시종들이 어둠을 향해 촛불을 내밀자 그곳에는 눈부실 정도로 휘황찬란한 광경이 펼쳐졌다. 금제 식기나 보석이 달린 석장, 호화롭게 자수가 놓인 법의 등 지금까지 기증 받은 것으로 보이는 보물들이 진열대 위에 빽빽하게 놓여 있다. 왕비는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신전이라는 거, 되게 짭짤한 장사인가보네.” “황송하오나 신을 공경하는 것은 공적을 쌓는 선행입니다.” “신전에 보물을 기증하는 게 신을 잘 섬기는 길이라면, 신은 가난한 인간들한테는 엄청 냉정하겠군.” 신관들이 싫어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말한다. 지하 창고를 둘러보던 왕비의 시선이 안쪽에서 멈췄다. 제단의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위치로, 거대한 진홍색 벨벳 커튼이 벽 한 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왕비는 시종에게서 촛대를 빼앗아들고 똑바로 안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비전하! 기다려주십시오!” 당황하며 말리는 것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커튼을 걷는다. 당연히 벽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는 철격자가 세워져 있었다. 우아한 당초 문양의 철격자. 하지만 그 격자가 가두고 있는 것은 극악한 인간도 범죄자도 아니었다. 생물조차 아니었다. 그렇다고 영웅들의 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격자 반대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처럼 텅 빈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정면 벽,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높이에 작은 문이 붙어 있을 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벽의 돌을 들어내서 만든 금고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 작은 문은 칠보로 장식되어 있고 황금으로 도금된 경첩까지 달려 있다. 요란스러워 보이는 자물쇠도 황금빛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철책을 둘러치고 벨벳 커튼까지 씌워놓았다. 평범한 금고일 리가 없었다. “저안에는 뭐가 들어 있지?” 숨을 죽이고 있던 신관들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열쇠는 어디 있어?” 왕비는 정면을 노려보았다. 신관들의 말로는 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대 신관뿐이라고 한다. 격자의 열쇠도, 벽의 열쇠도 대신관이 관리하며 자기들은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황비는 감탄하며 말했다. “꽤나 어지간한게 들어 있나보군. 다른 보물은 이렇게 다 꺼내놨으면서.” “아닙니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화재 관리에는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므로....” 왕비는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불에 타면 곤란한 게 들어있다는 말이지?” 창백하게 질린 신관들이 왕비를 말리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별빛 속에서 전속력으로 말을 달린 국왕이 오리고 신전에 도착했을 때 현관 앞에는 이미 소란이 벌어져 있었다. 횃불을 든 젊은 신관 여러 명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신에게 봉사하는 몸이 그리 쉬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건만, 어지간히 큰일이 난 모양이다. 그들이 기다리던 것은 대 신관이었지만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이 국왕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울먹이던 얼굴에 안도감과 불안감과 경외감을 떠올리며 거의 매달리듯이 호소했다. “국왕폐하! 빨리.....” “부탁드립니다. 비전하를 말려주십시오! 저희들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비명에 가까운 애원과 함께 그들은 황급히 국왕을 예배당 지하로 안내했다. 국왕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바닥에 쓰러져 구르고 있는 몇 명의 신관들과 갈기갈기 찢어진 붉은 커튼, 그리고 활짝 열린 철격자였다. “리!” 칠보로 장식된 문에 막 칼을 꽂으려던 왕비가 돌아보았다. 씨익 웃으면서 말한다. “꽤 빨리 왔네. 대신관은 어떻게 됐어?”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말투였다. 있는 대로 불평이나 퍼부어대려고 했던 국왕도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곧 따라올 거야. 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된거야? 저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한거지?” “죽인 건 아냐. 너무 귀찮게 구니깐 잠깐 재운 것뿐이지.” 왕비는 시종에게서 빼앗은 촛대를 진열대 위에 올려놓으며 불을 비췄다. 국왕 곁에서 길을 안내하던 신관 역시 촛대를 손에 든 채 얼어 붙어 있었다. “리” 국왕은 가능한 산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대 신관한테 말은 들었어. 나하고 이혼하고 싶다고?” “별로 상관도 업잖아?” 왕비는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진짜 부부도 아닌데. 훨씬 더 일찍 이랬어야 했어.” 국왕은 설명할 수 없는 초조감을 느꼈다. 어떻게 말해야 이해 해줄 것인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한다. “분명히 네 말대로 일지도 몰라. 우리들은 연극을 한 거지 계약을 맺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혼이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그런 중대한 일을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결정하면 안 된다고. 게다가 이 아수라장은 대체 어떻게 된거야?” 왕비는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석벽에 박혀 있는 칠보 장식 문을 가리켰다. “나도 이렇게 난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안일거야.” “뭐가?” “올해 봄에 우리들이 서명한 종이조각.” 촛불만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빛나는 지하실에서, 국왕은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자신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겨우 그 정도의 일인 것이다. 이 소녀에게는. 결혼식 도중에 탄가가 침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자신들은 증서에 서명을 할 틈도 없이 바로 이 신전에서 뛰쳐나왔다. 란바 전투를 마치고 개선했을 때 국민들은 이미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왕비로 불리고 있던 리도 그런 정신 사나운 옷을 또 걸치기는 죽어도 싫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증인 몇 명을 입회인으로 세우고 이 신전에서 평상복차림으로 서명을 했다. 그 시점에서야 윌 그리크와 그린디에타라덴의 결혼이 정식으로, 법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조금 늦게 도착해 지하실로 달려온 대신관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제자들과 격자 안쪽에 있는 왕비를 보자 말을 잃고 그대로 멈춰 섰다. 왕비는 마침 잘됐다는 듯이 대 신관에게 말했다. “잘됐다.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여기 열쇠는 어디 있지?” “기다려!!” 국왕은 흥분된 얼굴로 왕비를 몰아세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결혼증명서를 태워버리면 그걸로 이혼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안돼?” 왕비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나하고 네가 부부라고 해. 그 근거는 저 종이조각뿐이다. 그럼 그걸 처분해버리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아!” 국왕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설령 이름뿐인 부부라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과 이것은 얘기가 전혀 다르다. “알겠어? 국왕한테 이혼은 허락되지 않아. 그 이전에 난 널 잃을 생각이 없어.” “잃어?” 왕비는 이상한 듯이 말했다. “그건 얘기가 이상한 걸.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도 난 당분간 여기 있을 거야. 탄가와 파라스트의 동향도 신경이 쓰이고 일단 시작한 싸움을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날 잃는 건 아니라고.” “아니, 하지만!” “단, 저쪽에서 데리러 왔을 때는 너하고도 이 세계하고도 작별이지. 난 그 녀석 곁으로 돌아갈 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얘기했을 텐데?” 순간 국왕은 말이 막혀버렸다. 자신들을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끈인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럼 저쪽에서 데리러 온 것도 아닌데 이혼해야 할 이유는 뭐야?!” “나도 묻고 싶어. 내가 왕비여야 할 이유는 뭐지?” 국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왕비는 그런 국왕을 다시금 몰아세웠다. “넌 ‘저쪽에서 데리러 올 때까지는 여기 있어 달라’고 말했어. 난 실제로 그렇게 했지. 앞으로도-너하고 이혼하더라도 전사로서는 아낌없이 널 도울 생각이야. 왜 그걸로 부족하다는 거지?“ 국왕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두 손을 벌렸다. “리. 부탁이니까 질문에 대답해줘. 대체 이혼하겠다는 이유가 뭐야?” “폴라가 널 좋아하니까.” “.....” “너도 폴라가 마음에 들잖아? 이유는 그걸로 충분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방해물이라고.” “알았어. 그럼 얘기는 간단해. 폴라를 애첩으로 들이지 않겠어. 그럼 되는 거지?” 왕비의 안색이 확 변했다. 녹색 눈망울이 분노로 번쩍였다. “헛소리 집어치워. 한번 청혼해놓고 취소하다니, 사내자식이 할 짓이야?!” “어쩔 수 없어. 남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폴라 양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폴라 양도 왕비를 내쫓으면서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할 리가 없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 때문에 폴라가 널 거절하겠다는 거잖아!” 두 사람의 고함에 석조 지하실이 깨진 종처럼 웅웅 울렸다. “아무리 형식적이라고는 해도, 결국 이 결혼은 네 자유를 옭아매고 있어. 그런 건 싫다고. 내가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면 너도 진짜 좋아하는 여자하고 결혼할 수 있을 것 아냐?” “리. 난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 따위 생각해본 적도 없어. 그런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됐으니까 사람 말 좀 들어!” 조금 침착을 되찾은 국왕이 말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왕비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왜 너여야 하는지는 말했겠지?” “그래.” “난 뭔가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어.” 왕비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다. “넌....내 좋은 이해자이고 동맹자인 동시에 델피니아의 수호신이야. 하지만 넌 언젠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겠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네 정체가 뭐든, 어떤 생물이든 나고 자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게 젤 좋은 건 당연하지. 그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언젠가’의 얘기로 해두고 싶었어.”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훨씬 전에도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함께 있는 게 당연하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며 언제 이별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한 거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모습도 체구도 전혀 다른데도 눈앞의 남자에 그리운 파트너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국왕은 왕비의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너한테는 그저 귀찮기만 한 지위겠지만...공주의 지위를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왕비의 칭호를 주려고 했을 때에도, 이런 소리 했다가는 정말 물려 죽을지도 모르지만-널 여기에 묶어두는 닻이 되어주었으면 했지. 한심하다고 비웃어도 돼. 그게 내 진심이야. 언젠가 이별이 올 거라면 더욱더, 그 시간이 올 때까지는 가능한 한 가까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 국왕은 보기 드물 정도로 빠르게, 단숨에 말을 전부 내뱉었다. 왕비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국왕 역시 아무 말 없이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넌 정말 좋은 녀석이야.” 조용한 말투였다. “넌 한번도 날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 단 한번도 나한테서 도망가지 않았어. 이쪽에 와서도 한동안 멋대로 행동했는데 말이지. 평범한 인간이라면 최소한 다섯 번 정도는 괴물이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칼을 들고 죽이려고 덤벼들었을 거야.” “....” “솔직히 말해서 네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한테 잘해주는지 잘 모르겠어.” “몰라?” 국왕은 기가 막힌 듯이 소리를 질렀다. “처음 만났을 때 전혀 알지도 못하던 내 목숨을 구해준 건 누구지? 내 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던 날 주저 없이 도와주고, 내 아버지를 구하려고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북쪽탑에 잠입했던 건?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국왕군을 승리로 이끌고, 내가 다시 왕관을 되찾도록 해준 게 누구야? 바로 얼마 전, 사자가 풀린 경기장에 혼자 뛰어들어서 날 구해준 건? 난 너한테 그렇게나 많은 것을 받아놓고서 아무것도 갚지 못했어!” 왕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검을 허리춤에 다시 꽂고 문 앞에서 떨어져 격자를 빠져 나온다 국왕에게 다가가 바로 앞에서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말록 말이 맞아. 괜찮은 인간도 있는 거구나.” “.......” “인간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어. 적이 있다면 함께 싸울 거고, 네가 지키고 싶어 하는 거라면 나도 지킬 거야. 내 생명도 검도 원래는 그 녀석 거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어.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왕비의 웃음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알겠어? 널 품에 안고 위로해주는 것만은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어.”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잘 알아.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그런 종류의 애정이 아니야.” “하지만 넌 성인 남자니까 그런 종류의 애정도 필요하다고. 필요 없다는 소리는 하지 마. 변태라고 부를 테니까.” 국왕은 이마를 누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여러모로 여자가 아쉬운 입장은 아닌데, 그걸 로는 안돼?” “안 돼. 그건 한때의 쾌락이지 행복은 아니잖아? 즐기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왕비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넌 좀더 개인적인 행복을 누려야 해. 요염한 귀부인하고 불장난 치는 것도 나쁠 거야 없지만, 마음이 착하고 너한테 서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하고 같이 - 정말로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가져야 해. 국왕으로서 국민의 자유와 글지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한 남자로서 부인과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국왕 역시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열일곱 주제에 묘하게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 군. 가정을 가져본 적도 없을 텐데.” “동료들이 가정을 만들면서 좋은 쪽으로 변해가는 걸 몇 번이나 봤으니까. 넌 특히 국왕 같은 귀찮은 입장에 있으니까 그런 위로가 더 필요할 거야. 폴라 라면 딱 적격이라고.” 형용할 길이 없는 답답함에, 국왕은 거칠게 소리쳤다. “몇 번이나 똑같은 말 하게 할 거야!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잃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잖아!!” 이대로는 영원히 얘기가 끝나지 않는다. 그때 짜증스럽다는 듯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거 적당히 좀 해 두시죠.” 촛불을 받은 발로의 얼굴은 말투와는 달리 진지했다. “저번에는 청색의 방, 이번에는 오리고 신전. 부부싸움이야 얼마든지 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주위에 미칠 피해를 생각해주시라는 말입니다.” 왕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아직 아무것도 안 부쉈어.” “당신 발밑에 구르고 있는 건 뭡니까?” 간신히 정신을 되찾은 신관들이 뒤척인다. 국왕 곁에서 경직해 있던 대신관이 서둘러 달려가 그들을 안아 일으켰다. 책망하는 듯한 시선을 받자 왕비도 멋쩍은 듯이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발로가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런 어두운 곳에서 말다툼하실 것 없지 않습니까? 싸움이라면 위에서 당당하게 하십시오.” 부부 중 한쪽만이 이혼하고 싶다고 주장할 경우의 이혼 조정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은 더욱 복잡한 상황이었다. 사정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신전으로 달려왔고, 언제나 조용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오리고 신전은 떠들썩한 싸움판으로 바뀌어 대신관은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왕비의 결의를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필사적으로 덤벼든 것은 당사자인 ‘남편’보다도 그 신하인 동시에 친구인 사람들이었다. 발로는 물론이고 이븐과 나시아스도 이 긴급 사태를 전해 듣고 깜짝 놀라 달려왔다. 로자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 정보는 왕궁 전체는 물론이고 일곽에까지 쫙 퍼진 모양이다. 아누아 후작도 침통한 표정이었다. 핸드릭 백작과 도라 장군은 군사훈련 때문에 성 밖에 나가 있었지만 이 소식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시종장은 오랫동안 걱정하던 문제가 해결되었나 싶다가 그대로 절망의 틒에 떨어진 나머지 거의 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시녀장과 재상도 이리로 달려오고 싶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왕궁을 비우기는 힘들었는지 심복 부하를 이쪽으로 보냈다. 그들 전원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왕비를 둘러쌌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해전술이나 다름없다.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나와 소리 높여 설득하고 질타에 협박, 울면서 매달리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왕비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국왕이 제일 먼저 항복했다. “안 돼. 이대로는 끝이 없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국왕에게도 너무 오랫동안 집무실을 비워둘 수는 없는 사정이 있었다. 국왕은 직접 왕비를 설득하는 것을 일단 중단하고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대처했다. 보물 창고에 엄중하게 감시를 붙이도록 명령하고, 아누아 후작과 대 신관을 불러 질문을 던진다. “결혼증서를 찢어 버리면 이혼한 셈이 되나?” 두 사람 모두 머리를 싸쥐었다. 어려운 문제였다. 전례도 없다. 아누아 후작은 초조한 표정으로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이혼이 성립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결혼했다는 사실이 소멸되는 게 아닐까요?” 계약서를 분실했을 경우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혼을 파기하는 것이 쌍방의 뜻이든 아니든,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신관은 펄쩍 뛰며 반론했다. “말도 안 됩니다. 두 분은 이 계약의 신전에서 입회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부가 될 것을 맹세하셨습니다. 증서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 엄숙한 사실을 왕비가 이해해준다면 다행이겠는데 말이지.” 국왕의 말 역시 혼자 말에 가까웠다. 절대로 왕비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명령한 뒤 국왕은 왕궁으로 돌아갔다. 한편 떼를 지어 몰려든 ‘설득부대’도 적의 완강한 저항과 굳건한 방어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지쳐 일단 휴식하고 있었지만, 남자들이 별실로 물러난 뒤에도 로자몬드만은 창백한 얼굴로 왕비 곁에 남아 있었다. 둘만 남게 되자 왕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밤샘은 태아한테 안 좋아. 빨리 돌아가서 쉬라고.” “당신이 그 바보 같은 말씀을 철회해주신다면, 저도 곧바로 돌아가서 코라도 골면서 자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더라도 그런 면에서는 한 집안의 당주였다. 의연한 자세로 왕비에게 호소한다. “저 같은 것보다도, 부탁이니 제발 페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혼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거야.” 로자몬드는 핏기가 사라진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이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평범한 사람이 부인과 이혼하는 것과는 달리 국왕에게 이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왕비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국왕이 새 왕비를 들이는 경우는 그 전의 왕비가 죽었을 때뿐입니다.” “그럼 내 장례식이라도 할까?” “비전하!!” 로자몬드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왕비에게는 전혀 소용없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남장의 여 공작에게 웃음을 짓는다. “저기 말이야. 로자몬드는 단장을 좋아하니까 같이 잔거지?” 벨민스터가의 여 당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 거겠지. 그런 여 공작을 바라보면서 왕비는 부드럽게 말했다. “됐어. 그걸로 충분하니까. 로자몬드는 여자고 단장은 남자니까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해. 하지만 내 경우는 얘기가 완전 달라.” “그때 하던 얘기의 계속입니까...” “응.” “폐하를 좋아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아해.” 왕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 정도로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녀석은 인간으로 놔두기 아까울 정도로,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녀석이야. 잃고 싶지 않다는 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하지만 로자몬드가 했던 것 같은 애정 표현은 나한테는 불가능해.” “도저히 안 되는 겁니까....” “응.” “절대로?” “절대로.” 로자몬드는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결혼까지.....” “그것부터가 근본적으로 착각이야. 우리들이 한 건 결혼이 아냐. 그저 연극이었다고.” 여공작이 입을 다물자 왕비는 다시금 말했다. “같이 잘 정도까지 가까워지고 싶은 건 아냐. 나시아스는 내 질문에 펄쩍 뛰었지만, 아마 단장도 이븐도 비슷한 반응이겠지. 평범한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들으면 펄펄 뛰다 기절하고 말걸.” “그건..... 그분들과 비전하는 얘기가 다릅니다.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재서 다르지? 똑같이 월 곁에 있으면서, 똑같이 월을 좋아하는데?” “비전하는 여성이지 않습니까!” 그 ‘비전하’는 신기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로자몬드를 바라보았다. 분노나 초조함보다도, 그 눈에는 오히려 연민과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과연, 그 녀석이 말했던 대로였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우스울 정도로 그 인상에 좌우된다. 그 겉모습 안에 어떤 영혼이 들어 있는지, 그것까지는 꿰뚫어보지 못한다. 지금은 본의 아니게 이런 몸 안에 들어 있는 그린디에타 라덴은 턱을 괴면서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지금의 내가 죽고 그 대신 남자인 리가 월 곁에 있으면 월도 진짜 왕비를 얻고 모두 행복하게 끝날 텐데 말이지....” 그 반지는 여기에 없다. 우선 자신은 모습을 바꾸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생각에 잠긴 왕비와는 대조적으로 로자몬드는 분개하며 말했다. “저질 농담은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남자였다면 저도 사보아공도 당신을 폐하 곁에 두지 않았습니다. 너무 위험하니까요.” 왕비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언젠가 발로도 똑같은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비록 형식만이라고 해도 형님의 부인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고. ‘부인’은 충실하게 ‘남편’을 따르는 존재이니까 당신이 형님을 배신할 일은 없다고,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자신이 어째서 이런 몸이 되었는지 지금까지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동료들 중 누군가가 장난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운명이었다고 - 정해진 순리라고 마법가의 노파가 말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재난이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고방식이 바뀐 것. 특히 혐오감이 누그러졌다. 그 모든 것은 저 남자와 만났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 남자는 국왕이다. 사회의 정점에 서서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입장이다 누구나 그 존재를 능가해서는 안 된다. 그 남자나 주위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고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여자로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였을까. 무언가가-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몸을 선택한 걸까. “내가 남자면 그렇게나 위험한 거야?” 로자몬드는 왕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다. 뭔가 저질 농담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합니다. 두 명의 영웅은 필요 없으니까요. 당신 같은 남자가 국왕 곁에 있으면서 군사와 정치 양면에 걸쳐 능력을 발휘한다면 당신 지지파와 국왕 지지파로 나라가 분열됩니다. 저렇게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는 사보아 공조차도 몇 번이나 모반의 중심인물로 이용되었을 정도입니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런 위험한 말을 공공연하게 꺼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약혼자 씨.” 이쪽 역시 지친 목소리였다. 발로는 지금까지 각 출구에 감시인을 배치하고 보물 창고의 경비체제를 보완해두었다. 평소에는 한산하고 조용하던 신전이 지금은 완전히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신전의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던 수행승은 이곳에 속세의 분쟁을 끌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한탄했지만 물론 발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결혼증서를 지키는 게 우선이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야. 공공연하게 말할 생각은 없어.” 로자몬드도 지지 않고 반론했지만 목소리에 힘은 없었다. 제각각 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귀족가의 당주인 만큼, 지금이 평상시처럼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설득은 내가 대신 하지. 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수면부족은 미용의 적이라고.” 안색이 안 좋으니 수리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발로다운 구석이랄까. 로자몬드도 그 말에 따랐다. “그렇군. 그렇게 하도록 하지. 지금도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비전하가 그런 바보 같은 주장을 철회해주신다면 나도 푹 잘 수 있다는 말을 드리던 참이야.” “글세 말이야. 재상의 위통에 시녀장의 두통, 도라 장군과 핸드릭 장군의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의 운명이 전부 여기에 걸려 있으니 말이지.” 왕비는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단장 말대로라면 새가 안 우는 것도 내 책임이 될 것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로자몬드는 그런 대화를 듣다가 한숨을 쉬며 방에서 나왔다. 바로 문밖에 라모나 기사단장이 서 있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들이지 말도록 발로가 부탁해둔 거겠지. “수고하십니다.” “아닙니다. 공작님이야말로....” 그런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손에 접시를 든 이븐이 나타났다. 접시 위에는 빵과 치즈, 다른 손에는 술병을 쥐고 있다. “어떻습니까. 비전하의 상태는?” 로자몬드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사보아 공이 설득하고 있습니다만.....” “독립기병대장.” 나시아스가 이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도 발로를 응원하러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입니까?” “네, 당신이.” 표정도 말투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이븐은 접시를 든 채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전 지금부터 밤참을 들려던 참입니다만....” “이 안에서도 식사는 할 수 있습니다.” 이븐은 더더욱 떫은 표정을 지었다. 무리도 아니다. 맹수가 두 마리나 들어 있는 우리 안에서 음식 맛이 느껴질 리가 없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건 아무도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기사단장의 배려겠지요? 저 왕비와 기사단장이 으르렁대고 있는 방에 들어가라니, 좀 심하지 않습니까? 나시아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당신께 부탁하고 싶은 겁니다. 발로는 비전하와 둘이서 담판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도 산더미 같이 많다더군요. 제 친구는 비전하를 설득하는 데에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감정적인 상태인 듯해서 말입니다. 비전하도 고집이 센 분이시니 설득은커녕 역효과가 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로자몬드 앞이라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저 멧돼지라면 정말 있을 법한 일이라고 이븐도 납득했다. “당신도 폐하와 비전하의 이혼에는 반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까?” “맞습니다.” 딱 잘라 단언했다.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가는 월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나시아스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저에 휩쓸린 발로와 뜻을 굳힌 비전하를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폐하 이외에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이븐은 양손에 물건을 든 상태로 능숙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 조종하는 법이 능숙하군요.....” “진심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죽으면 시체는 수습해주시겠지요?” 나시아스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곁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로자몬드는-공작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이지만-양손을 쓸 수 없는 이븐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찡그리던 표정은 싹 지운 채 이븐은 콧노래라도 부를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갔다. 예배당은 호화스럽더라도 신전 내부는 소박했다. 손님용 객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문은 없고, 수행승이 직접 만든 걸로 생각되는 침대와 의자가 놓여 있다. 왕비는 침대에, 발로는 그 정면에 앉아서, 예상대로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븐은 그런 두 사람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신전 사람들도 꽤나 잘 먹고 사는 군요. 이 소동 덕분에 저녁도 못 먹었다고요. 같이 들겠습니까?” “응.” 대답한 것은 왕비였다. 재빨리 술병에 손을 뻗는다. “낮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배고프다고.” “그건 자업자득입니다.” 두꺼운 치즈를 얹은 빵을 포도주에 적시면서 이븐은 중얼거렸다. “아직도 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왜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까” 탄가의 목적도, 스케니아의 동향도, 파라스트의 속셈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데 이혼 같은 걸 하고 있을 때입니까? 두서없는 소리였지만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해둬야지. 일이 터져서 바빠지고 나면 이혼할 틈도 없을 것 아냐?” 이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발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왕비. 당신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이혼이라니. 형님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한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당신은 형님을 죽일 셈인가?” “그런 거창한.....” “아니. 당신이 형님을 죽이는 거야. 왕비한테 이혼 당한 국왕.... 그런 인간을 누가 왕이라고 인정하겠어. 당신은 형님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하고 있어. 남자가 부인한테 이혼 당한다는 건 그런거야.” 왕비는 의견을 묻는 듯한 표정으로 이븐을 돌아보았다. 검은 옷의 친위대장은 마지막 빵 조각을 꿀꺽 삼키고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은 기사단장의 의견에 전면적으로 찬성입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던 그야 당신 마음이죠. 사냥꾼 같은 차림으로 궁전을 헤집고 다니든 공식행사를 빼먹든, 폐하께 고함을 지르든 두들겨 패든, 백 보 양보해서 딴 남자를 만든다고 해도 전 신경 안 씁니다. 폐하도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이혼만은 안 됩니다.” 왕비도 가볍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내가 경솔했어.” 이제야 알아주는 건가 생각한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정말 멍청했어. 이렇게 귀찮아질 줄 알았으면 그 종이조각에 죽어도 서명을 안 하는 건데, 설마 이렇게 중대한 문제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독립기병대장은 말없이 책상 위에 엎어졌다. 사보아 공작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알고 있는 거야?! ‘결혼’이라고?! 중대할 게 뻔하잖아!” “진짜 결혼이라면 그렇겠지만 난 종이조각에 서명한 것뿐이야. 그런 게 편지에 서명하는 거랑 뭐가 다르다는 거야?” 진심으로 이상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덤으로 조금 상황이 곤란해졌으니까 그 종이를 처분하고 없던 일로 하고 싶다는 것뿐인데, 다 큰 남자들이 입을 모아서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란이니, 대체 어쩌자는 거야?” 발로는 절망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결혼이라는 것을-국왕과 결혼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래. 우린 진짜 부부가 아니라고. 그 점은 지겹도록 말해뒀어. 진자 부부란 이 경우 2세의 탄생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의미하는 거지만, 이건 틀리지 않지?” 남자들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고 왕비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월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자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야. 어차피 그런 관계는 될 수 없다고. 왕굴의 시녀나 시종들 중에는 성질 급한 바보도 있어.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불쌍하다면서 뭔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좀더 따뜻한 마음을 갖고 페하를 대해보라더군. 헛소리도 그쯤 되면 수준급이야. 그렇게 하면 페하도 분명히 다정하게 대해주실 거라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소리를 하는 거야. 이봐-.”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왕비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나 싶어 물어보는 건데, 둘은 그런 의미로 그 녀석이 다정하게 대해주면 좋겠어?” 검은 옷의 전사는 피부에 돋은 닭살을 문지르며 욕설을 내뱉었고, 발로는 이를 갈면서 신음했다. “그 이상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최대의 모욕으로 간주하고 결투를 신청하겠소!” “그래. 나한테도 마찬가지야.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당신이 그런 모습으로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잖아! 이제 와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적어도 난 당신이 형님 밤 시중을 들 거라고 기대했던 적은 한번도 없어!” 녹색 눈망울이 강하게 빛났다. 즐거운 듯한 웃음이었다. “어째서인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남자들이 훨씬 말귀를 잘 알아먹는데. 여자는 아마도 자기가 남자한테 사랑 받는 입장이니까, 사랑 받는게 행복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겠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어째서 ‘사랑 받는 행복’을 거부하는 거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더군. 농담이아니라고. 남자인 내가 남자인 월 앞에서 다리를 벌려서 뭐가 즐겁겠어?” 완벽한 미소녀의 모습으로, 왕비는 깔깔 웃으면서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반론할 기력도 없어진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자를 되뇌며 왕비의 독백을 듣고 있었다. “월은 보기 드물 정도로 이해력이 뛰어난 녀석이야. 그 녀석이 형식적인 결혼이라고 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라고, 즉 그냥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런 것,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리.” 이븐이 입을 열었다. 발로 앞 이였지만 이미 형식상의 예절을 지키는 건 포기한 뒤였다.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또박또박 설명한다. “알았다. 제대로 설며하지 않았던 우리들도 나빴어. 너에게 있어서 편지에 하는 서명과 결혼증서에 하는 서명은 전혀 다를 게 없었다는 거로군. 어쩌면 너한테 약속이란 건 검을 걸고 하는 맹세만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왕비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입으로 한 약속이라도 했으면 지킨다고.” 이븐은 더욱 절망적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그래, 그랬었지. 알고 있다고, 넌 그런 녀석이니까. 나도 너하고 거의 4년째 같이 지내고 있지만, 네가 스스로 입 밖에 낸 약속을 어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 언제나 그랬어. 하지만, 부탁이니까 제발 이번만은 참아줘.” 그리고 의자에 앉은 채이기는 하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말도 반은 맞아. 그 녀석이 너한테 그런 마음이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깐 이 결혼이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야. 체면이라는 게 있어. 결혼증서란 일종의 계약서라고. 너한테는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해도 세상에서는 절대적인 효력을 갖고 있어. 너하고는 달리 인간은 거짓말을 하는 생물이야. 약속한다고 해놓고서도 쉽게 어기곤 하지. 그러니까 계약서가 필요한 거야. 거기에 서명한다는 건 네가 검을 두고 하는 맹세 못지않게 중대한 의미를 가져. 네게 있어서 검의 맹세는 절대적이겠지.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될 약속일 거야. 그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한번 성립된 계약을 취소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런 것 같더군. 여기 신관들이 난리 치는 걸 보면.” 왕비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겨우 종이조각 한 장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버릴 생각 인가봐.” “당연하지. 누구라도 국왕을 이혼으로 몰고 간 장본인은 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사형감이라고.” 발로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왕비는 다시금 이상한 듯이 말했다. “단장은 어째서 월이 나하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지? 그 종이조각의 가치도 효력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나도 지금 그 점에 대해서 처절하게 후회하는 중이야.” 호랑이라 불리는 공작이 험악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형님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강림한 승리의 여신. 당신은 그렇게 여겨지고 있었지. 왕비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 대한 나라의 얼굴이기도 하니까. 당신의 무용담과 수많은 기적들은 충분히 화려하고, 유서 깊은 혈통 이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어. 이 정도라면 언행이 조금 엉망이라도, 왕자를 낳을 수 없어도 참아줄까 생각했지만.....” 웃음기를 거두며 발로는 진지하게 선언했다. “혹시 이대로 이혼한다면, 혹시 당신이 형님에게 이렇게나 큰 타격과 치욕을 줘놓고서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돌아다닌다면 난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 틸레든 기사단의 총력을 동원해서라도 왕궁에 붙들어둘 거야.” “2천 명이 나 하나한테 달려들겠다고?” “당신 상대면 그 정도가 딱 정당해.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하겠군. 나시아스한테도 응원을 부탁하지.” 왕비는 난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전에 저 종이조각부터 찢어 버려주지.” “절대로 못하게 하겠다고 했잖아.” 왕비와 대 공작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자니 그 사이에 베노아의 부두목이 용감하게도 끼어들었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두 사람 모두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화부터 내지 말고,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보지 않겠습니까?” “난 한없이 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나도.” 양쪽 모두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 듯한 기세였다. “그러니까, 기다리라고하지 않았습니까!” 이븐 쪽에서는 정말로 손해만 보는 입장이었다.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만은 확실히 해둬야 한다. 이븐은 왕비를 노려보면서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너도 문제야! 어째서 이제 와서 이혼 따위 소리를 꺼내는 거야! 네가 데리러 갔던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왕비는 말을 우물거렸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피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별일 없었어.” 여기서 원인이 폴라라고 말했다가는 발로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발로 역시 만만치 않았다. 공작의 검은 눈이 빛난다. “달시니 양은 언제 이쪽에 오시겠다던가?” “그런 거 갑자기 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일이라도 한 번 더 가서 얘기해볼 생각이야.” “아니, 내가 가지.” 발로가 그렇게 주장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왕비가 당황하며 말렸다. “그럴 필요 없어.” “있고말고. 형님의 측실로서 왕궁에 들어올 여성인데 관계없을 리가 없잖아. 개인적인 문제지만 기사단원의 누나이기도 해. 한번 인사라도 하려는 건데 왜 안된다는 거야?”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눌리는 적이 없는 사람이, 말을 흐리면서 시선을 피하고 있다. “리?” 이븐 역시 이상한 듯이 물었다. “왜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특별히 뭐가 있던 건 아니라니까. 바로 당장은 결정할 수 없다고 하니까....조금 시간을 주는 편이 좋을 거야. 쓸데없이 단장이 달려가면 제대로 될 일도 고인다고.” 우물거리면서도 발끈하며 변명한다. 이래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게 무리였다. “즉, 무제의 그 여성은 페하의 측실이 되기를 거절했다는 거지?” “거절한 게 아냐! 그냥 지금은 받아 들 일수 없다고 한 것뿐이야.” 이븐과 발로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교환했다. 이븐이 어린애라도 달래는 듯한 말투로 묻는다 “저기, 비전하. 대체 당신, 어떤 식으로 얘기를 꺼낸 겁니까?” “어떤 식이라니. 말한 대로야. 월을 좋아한다면 부탁이니까 애첩이 되어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왕비는 다시 말을 흐렸다.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다. 누가 본다면 성인 남자 둘이서 가련한 왕비를 괴롭히고 있는 걸로 보이겠지만. 두 사람 모두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체격으로 밀어붙이면서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 왕비도 마침내 항복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역시, 정식으로 결혼할 수 없는 게 문제라고....” 이븐이 눈을 부릅떴다. 발로도말을 잃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국왕에게 왕비가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왕비의 지위를 바라는 여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아무리 야심만만한 여자라고 해도 국왕이 가장 사랑하는 애첩이 되어 왕비 이상으로 총애를 받겠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정상이다. 혹시 정말로 그런 소리를, 그것도 당사자인 왕비 앞에서 꺼내는 여자가 있다면 완전무결한 바보가 아니면 수치도 모르는 인가, 자살 희망자, 아니면 세계 정복을 노리는 편집광-어느 쪽이든 정상은 아니다. “달시니 양이......그렇게 말했나? 그러니까, 정실이 아니면 싫다고....?” “폴라는 그런 소리 안 해. 내가 그러고 싶은 거지. 아무리 국왕의 애첩이 평범한 여자들하고는 다른 입장이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지위라고 해도혼례 의상은 입을 수 없잖아? 그건 너무 불쌍하다고.” 아직도 눈이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이븐이 어물거리며 말했다. “하.....하지만 너, 국왕의 애첩이라고?! 국왕의 애첩이라면 그런 혼례 의상 같은 것쯤이야...” 왕비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런 거 두 번 다시는 입고 싶지 않지만, 여자한테는 ‘그런 것’만으로 끝나지 않잖아? 난 그냥 연극으로 입었던 건데. 정말로 신부가 되고 싶은 폴라가 못 입는 다는 게 이상하다고.” “이상해서 어쩌자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이븐은 발로를 보았다.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한 시선이었다. 발로는 가볍게 입술을 축이고서, 침대에 앉아 있는 왕비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면서 가능한 한 부드럽게 묻는다. “아시겠습니까, 왕비? 난 무슨 소리를 들어도 화 안 내겠습니다. 달시니 양을 비난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달시니 양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달시니 양은 뭐라고 대답했는지 정확하게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마치 어린애라도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어째서 두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지 의아해하면서도 왕비는 가능한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과 폴라가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그 남자에게는 자신이, 형식뿐인 부인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며 폴라는 이 점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느끼면서 정말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데도 거부하고 있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 폴라를 위해 ‘부인’의 자리를 비워주기로 했다고, 왕비는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듣고 있는 사이에 두 남자는 완전히 기운이 빠져버린 듯이 형용하기 힘든 신음을 내며 머리를 싸쥐었지만, 왕비는 거기에 최후의 일격이라도 가하려는 듯이 사적인 의견을 덧붙였다. “폴라 말이 맞다고 봐. 생각해볼 것도 없잖아. 장식에 지나지 않는 나하고 국왕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그 후계자를 낳아줄지도 모르는 젊은 여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뻔하지 않아?” 이븐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때에는 말입니다. 양쪽 모두 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폴라는 그게 곤란하다는 거잖아. 어차피 결혼 자체도 연극이었으니 내가 이 무대에서 퇴장하면 돼. 그걸로 전부 완만하게 해결된다고.” 발로는 웅크리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평소의 틸레든 기사단장이라면 약속 따위 깡그리 무시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만한 상황이지만 화낼 기력도 없는 모양이다. 거의 주저앉다시피 하고 있었다. 엄청난 의지력으로 간신히 다시 일어나서,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왕비를 절망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서툴러, 당신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여자 고시는 게 완벽하게 서툴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이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그 의견에 찬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발로는 팔짱을 끼면서 천천히 말했다. “아무래도 선수들 교대해야겠습니다.” 그날 밤, 오리고신전의 사람들은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대 신관부터 일반 신관에 이르기까지 걱정으로 밤을 새우고 근위병들은 결사적인 각오로 지하 창고를 수비했다. 왕비역시 아침이 될 때까지는 가만히 있었다. 최소한 결혼증서를 목표로 지하 창고를 향해 돌격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왕비도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나 완고하게 반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폴라를 왕비로 만들겠다는 생각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발로는 안절 부절하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새자마자 달시니가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 움직임을 왕비에게 들켜버려 일이 복잡해졌다. 왕비는 지금 설득하러 갈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가야 한다면 자기도 가겠다고 주장했다. 지금 여기서 괜히 발로가 나섰다가는 모든 게 다 엉망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발로는 초조한 심정을 억누르면서 천천히 되뇌었다. “요는, 달시니 양이 애첩이 되겠다고 하면 당신도 형님하고 이혼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제가 달시니 양을 설득하겠다는 겁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발로는 말했지만 왕비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상태로는 폴라도 절대 뜻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왕비는 확신했다. 그 이상으로 왕비의 얼굴에는 발로에 대한 불신감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폴라를 괴롭히거나 협박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발로는 완전히 버릇처럼 되어버린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대는 당신과는 달리 연약한 여성입니다. 저도 정중하게 얘기할 겁니다.” “도저히 못 믿겠는데. 속셈이 뭐야?” “속셈이라니, 거 듣기 안 좋은 말이군요. 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러 가는 것뿐입니다.” “내가 월하고 이혼하려고 한다는 말?” “그렇습니다.” “그럼 안 돼. 죽어도 안 보낼 거야.” “왕비!” “폴라는 착한 여자야. 그런 소리를 들으면 반대할 게 당연하잖아. 제대로 이혼한 뒤라면 얼마든지 가서 무슨 소리를 해도 상관없어.” 발로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거야말로 순서가 반대잖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귀찮게 물고 늘어지는 왕비를 뿌리치고서라도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전에는 일개 대대에 상당하는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대신관의 한탄에도 이미 포기한 기색이 짙었다. 이 전력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아무리 상대가 전쟁의 여신으로 이름 높은 왕비라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왕비가 진심으로 대항할 것은 안 봐도 뻔하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근위대에 막대한 피해가 갈 것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평화적으로 출발해보려고 왕비와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의외의 원군이 도착했다. 엔도바 부인이었다. 손님을 맞으러 나갔던 나시아스 역시 생각지도 못하던 사람의 방문에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부인의 집은 코랄 외곽에 있기 때문이었다. “벌써 소식을 들으신 겁니까?” 부인은 마차를 타고 왔다. 얼핏 보기에도 창백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젓는다. “어젯밤 늦게 폐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건.....” 국왕에게는 신분과 상관없는 친구가 여럿 있다. 특히 이런 궁정 내부의 비상사태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여자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국왕에게 있어서도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고마운 일이었다. “비전하의 성격을 생각하면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부인도 병사들로 둘러싸인 신전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나시아스는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왕비가 이혼을 하겠다고 나선 원인을 듣자, 엔도바 부인도 남자들고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었다. “비전하는....다정한 분이시군요.” “예.” 나시아스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마찬가지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해는 하면서도 불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부인께 베풀 다정한 마음의 최소한 반만큼이라도 폐하께 베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분은 여자나 아이들한테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대등하다고 인정한 남자한테는 엄격하기 그지 없지요. 물론 그것도 틀린 건 아닙니다. 기사의 모범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훌륭한 태도이지요. 하지만 강한 자가 언제나 강하고 어떠한 때라도 흔들리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는 겁니다.”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비전하와 만나볼 수 있을까요?” 부인과 나시아스는 여전히 말다툼 중인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들어왔다. 의외의 인물이 출현하자 놀란 것은 왕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인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비전하. 건방진 행동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 말씀만은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폴라 달시니님의 심정을 잘못 헤아리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공작님께서 그분의 의사를 확인하러 가시겠다면 맡겨두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엔도바 부인의 성격으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딱 잘라서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등장과 강경한 주장에, 왕비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 놀랍게도 부인은 왕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발로를 재촉했다. “비전하 옆에는 제가 있을 테니 공작님은 어서 그분께 가십시오.” “잠깐 기다려. 멋대로 결정하지 마.” 떨떠름하게 말하는 왕비의 눈앞에서, 엔도바 부인은 품에서 작고 검은 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공작님을 보내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니까....” 부인은 왕비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병뚜껑을 열면서 무섭도록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것은 제 남편이 죽었을 때 마시려고 준비했던 약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왕비의 얼굴이 굳었다.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 그 약이 어떤 용도인지는 손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라티나!” 왕비가 달려들려고 했지만 뚜껑을 쥔 손을 들며 왕비를 제지했다. “당신이 이 신전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시면 전 이걸 마시겠습니다.” “농담하지마...!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전 진심입니다.” 왕비를 그 자리에 멈춰 세우고서 엔도바 부인은 발로를 향해 생긋 웃었다. “빨리 가십시오.” “하지만....” 발로도 놀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대답한 짓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왕비를 얌전하게 만들어준 건 고맙지만, 과연 정말 이대로 나가도 될지 주저하게 된다. “괜찮습니다. 비전하는 절 죽일 만큼 비정한 분이 아니 시니까요.” 원래대로 병뚜껑을 닫고 품에 넣으면서 부인은 왕비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와 함께 있어주십시오. 그렇게 약속해주시겠지요?” 이 말에는 왕비도 씁쓸하게 한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여자다운 전법이었다. 이런 전법으로 나오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알았어....., 단장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을게. 그럼 됐지?” 부인은 왕비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발로는 부인에게 감사의 시선을 보내며 서둘러 신전에서 뛰쳐나갔다. 이븐 역시 가볍게 절을 하고 그 뒤를 따랐다. 뒤에 남겨진 왕비는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다. 부인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불평을 해 댄다 “라티나, 이건 너무 비겁해!” “황공합니다만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은 없습니다. 제일 비겁한 무기를 들고 나오신 분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냉정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었을 때 정말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이혼이라니...그것만은 꺼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왕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형식뿐이라니까.” “그 형식이 중요한 겁니다. 당신과 폐하께서 실제로 어떤 관계인지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합니다. 두 분이 아무 접촉도 없는 냉랭한 사이라고해도, 실은 애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고 서로 증오하는 사이라 해도 전혀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델피니아 왕비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극에 불과해도?” “그렇다면 더더욱, 한번 막이 열린 연극은 최후까지 계속해야합니다. 그게 체면이라는 겁니다.” “바보 같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거짓말을 싫어하시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폐하를 위해서 이렇게 행동하신다는 것도, 하지만 정말로 두 분이 이혼을 하게 되면, 몇 번이나 국왕을 위기에서 구했던 발도우의 딸이 국왕에게 실망하고 떠나갔다. 틀림없이 그렇게 여겨집니다.” “.......” “전 정치나 군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오나 혹시 그렇게 되면, 탄가와 파라스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고 일어나겠지요. 승리의 여신을 잃은 델피니아의 병사들 역시 지금까지처럼 자신 있게 적과 싸울 수 없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도요.” 당신들의 이혼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정세가 격변할 가능성-이 나라에 있어서는 지극히 불리한 방향으로 변할 우려가 있다고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부인을 보며 왕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난 델피니아를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냐. 나 자신은 ‘나라’ 따위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어. 다른 나라에 침략을 당하든 유린을 당하든 상관없어. 월이 중요하게 여기니까 어울려주고 있는 것뿐이야. 어째서 그런 걸 내가 희생해야 한다는 거지?” 가시 돋친 말투였다. 그 차가운 목소리에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담겨 있었다. 부인은 새파랗게 질려서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주십시오...제 말이 지나쳤습니다.” 조금도 흥미 없다고 말하면서도 왕비는 결과적으로 몇 번이나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자기 같은 인간이 아는 척하면서 의견을 내세워도 좋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약속이니까 단장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 있겠어. 하지만 그 뒤에는 간섭하지 마.”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말하고서 왕비는 다시 신전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그들은 마구간으로 향하는 샛문에 서서 말을 나누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부인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곁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시아스가 미소를 지으며 부인에게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엔도바 부인은 서글픈 듯 고개를 저었다. “비전하께서 화내시는 것도 당연해요. 전쟁에 나가본 적도 없는 여자가 건방진 소리를....” “당신의 말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저희들이 드려야 할 말이었지요. 곤란한 일이지만 비전하께서는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너무 모르십니다.” 이런 부드러운 중재야말로 나시아스의 특기였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오. 아직...너무 서둘러 오느라..” “비전하도 아직 식사 전이십니다. 함께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괜찮습니다. 화가 나신 건 아니니까요.” 나시아스는 잔뜩 기가 죽어 부인을 신전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엄격한 수행 생활을 하는 신관들은 해가 뜨기 전에 식사를 끝냈으므로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는 식당에 앉아 있는 것은 왕비 혼자뿐이었다. 견습 신관 두 명이 왕비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다. 나시아스도 겉모습과는 달리 배짱이 큰 인간이다. 미소를 지으면서 은근하게 왕비에게 말을 걸었다. “부인도 아직 식사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조금 배가 고픈데.....,함께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왕비는 말없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의식주의 모든 것이 수행이니 만큼 식사 역시 소박했다. 갓 짠 우유와 신선한 달걀, 지금 막 구워서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빵에 뒤뜰에서 갓 따온 야채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사치스러운 식사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왕비가 입을 열었다. “이혼이 그렇게 곤란한 거야?” 부인은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등줄기를 곧게 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전하.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입니다.” 마치 시녀장처럼 고지식할 만큼 딱딱한 어조였다. 연녹색 눈 역시 지극히 진지했다. 부인의 곁에 앉아 있던 나시아스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왕비를 바라보고 있다. 그 물빛 눈에는 호소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에 비해 진한 녹색 눈은 고양이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폴라를 울리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말이야.” 왕비보다도 한참 연상인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의 그런 배려를 그분은 절대로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암묵적으로 단언하고 있었다. 2 장 발로는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때는 겨울, 이른 아침이다. 사람도 말도 하얀 입김을 뿜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일 듯했다. 황비와 말다툼하는 사이에 해는 높이 떠올랐고, 딱딱하게 얼어 있던 대지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이런 이른 아침의 승마는 평소라면 상쾌할 뿐이겠지만 오늘 만은 승마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바로의 바로 뒤에서 이븐도 따라오고 있었다. “그 아가씨 동생이 당신네 단원이라고 했으니 얘기는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보기 드물게 순순하게 나오는군.”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만. 예상외로 얌전하시더군요. 제가 따라가겠다고 해도 아무 말도 안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기분 나쁠 정도인데요.” “개인적으로 화가 좀 나 있으니까. 얘기가 틀어졌을 경우에는 누군가 같이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야.” 귀찮은 듯이 말하며 씨익 웃는다. “새끼다람쥐 달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이 농담에는 대꾸하지 않고 이븐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화가 났다는 건 그 아가씨에 대해서입니까?” “물론이지. 달시니 양이 무슨 생각으로 이 얘기를 거절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어. 자기 신분을 생각하면 너무 황송한 일이라고 겁먹은 거겠지. 하지만 왕비한테 오해를 살 만한 언동은 피해야 했어.” “동감입니다. 하지만, 설마 왕비가 그런 오해를 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첩이 되는 건 싫다니....굳이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전 그 아가씨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알아들을 만한 말로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발로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생각하는 ㄱ지만 왕비 혼자 보낸 게 큰 실수였어. 최소한 통역이라도 붙였어야 했는데.” 펄펄 뛰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야유를 연발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각각 입장은 다르지만, 그들이 월 그리크에 대해 품고 있는 호의나 충성은 거짓은 없다. 그 남자를 사상 최초로 ‘왕비에게 버림받은 국왕’으로 만들 수만은 없었다. 메이버리 마을에서 달시니 저택까지 안내를 부탁하자 싹싹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흔쾌히 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보내드려야 할 물건도 있으니 같이 가시지요. 금년은 상당히 따뜻하지만 슬슬 위쪽에도 인사를 드려야 할 때니까요.” “헤에?” 이븐이 달시니 집안의 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우에 비하면 그냥 언덕처럼 보이는데. 이런 작은 산인데도 눈이 오면 못 올라가나?” “그야 당연하지요. 위험해서 못 갑니다. 아직은 괜찮은 편이지만 새해가 올 때쯤에는 눈 때문에 길이 막혀버리지요. 원래부터 길이 안 좋은데다가 그렇게 되고 나면 시시때때로 눈사태가 나거든요. 당신들 같은 기사 분들이라면 몰라도 여자 다리로는....” 남자는 등에 진 바구니 안에 설탕이나 산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식료품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선대 주인님 때부터 매년 첫눈 전에 가져오도록 부탁을 받았지요.” 남자의 안내로 두 사람은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왕비도 그랬던 것처럼 상상 이상으로 험준한 산길에 깜짝 놀랐다. 산 자체는 적은 편이었지만 덤불 사이로 간신히 이어지는 산길은 급한 경사에 군데군데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길 안내를 하는 남자는 도보로, 두 사람은 말을 탄 채 그 뒤를 따라갔지만 도중에 발로가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이러니 그 당근머리가 겨울이 될 때마다 휴가를 얻어서 돌아 갈 만도 하군. 겨울 내내 이런 곳에 갇혀 있어야 하다니, 너무하잖아.” “집에 남자 일손이 없으면 지낼 수 없겠군요.” 이븐도 맞장구를 쳤다. 한편, 이 손님들의 방문에 당황한 것은 달시니가의 사람들이었다. 바로 전에는 국왕, 왕비에 이어 이번에는 공작이다. 신분만으로 점전 격이 낮아지고 있는 셈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반대였다. 집 마당에서 장작을 쪼개고 있던 캐리건은 그 자리에 나타난 발로를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 다음 순간 캐리건은 도끼를 내던지고 뛰어왔다. 일반 병졸의 집에 사령관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아직 앳된 뺨이 붉어진 것은 추운 공기 속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갈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우셨지요!” 갑자기 찾아온 지휘관에게 거의 뛰어들다시피 마중을 나와, 말에서 내리기 전부터 고삐를 쥐고 이런저런 시중을 들면서 안장 위에 앉아 있는 발로에게 기쁜 듯이 말을 건다. 완전히 방치된 이브와 마을 사랑은 멍하니 서 있었다. 동경하던 영웅이 갑자기 자신의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에 완전히 들뜬 나머지 이쪽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븐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엄청 따르네.....” 소년이 말을 묶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오자 발로는 인사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 누님을 만나보고 싶어. 계신가?” 소년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누님.....이라고요?” “그래. 급한 용무이니 빨리 만나고 싶네만.” 상관의 딱딱한 태도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캐리건은 갑자기 긴장했다. 당황하며 현관으로 달려간다. “누나. 누......누님!” 마을 사람은 등에 바구니를 짊어진 채 멍하니 그 상황을 보고 있더니 마침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븐은 손수 말을 나무에 묶어놓고 견고한 석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조금 통통한 50세 전후의 부인이 주저주저 현관에서 얼굴을 내밀면서 손님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왕비도 본 적이 있는 그 응접실이다. 바닥에는 손으로 짠 천, 벽에는 말린 향풀이 걸려 있고 장식장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꽃병, 책상과 소파에는 멋진 수제 레이스가 걸려 있었다. 소박한 향기로 가득 찬 그 방을 둘러보고 이븐은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과연....” “뭐야?” “이 분위기입니다. 페르나 백작님 댁도 이런 분위기였죠.” 발로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이게?” “물론 백작님 저택은 좀더 훌륭한 물건들이 많았지만...백작님도 백작부인도 손재주가 좋은 분이었지요. 이런저런 물건 만들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백작님도부인니 앉을 흔들의자 정도는 간단히 만드셨고 부인도 백작님이나 지금의 폐하, 때로는 제게까지 양말 같은 걸 짜주셨습니다. 이게 백작님 댁이라면 제 레이스나 깔개는 부인의 작품이고 저 장식장은 백작님이 만든 물건이라 이거죠.” “흥.” 발로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추억 속에는 양친이 사이좋게 지내는 광경이나 뭔가를 즐겁게 만드는 광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인 아에라 공주는 교양으로 자수를 하고 있었지만 실용품을 만든 적은 없었다. 아버지인 공작 역시 물건은 세공사에게 맡기면 된다는 주의였다. “아마 이 집의 여주인은 자기가 직접 만든 요리로 손님을 대접하겠지요. 폐하가 편안하게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내 어머니한테는 부엌에 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엄청난 굴욕으로 여기는 사람이었어.” 평상시처럼 비아냥대는 어조로 발로가 말했다. 바로 그 부엌은 엄청난 소동에 휩싸여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두 팔이 하얗게 되도록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던 폴라는 눈을 부릅뜨면 외쳤다. “단장님이? 기사단장님이 직접? 캐리. 너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저번부터 계속 집에 있었잖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폴라는 여전히 동생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럼 뭔가....옛날에 저질렀던 나쁜 짓이 단장님 귀에 들어간 것 아냐?” “그만 해! 어쨌거난 누나하고 만나고 싶다고 하시니까 빨리 손 좀 씻어!” “아, 응. 조금만 기다려....” 막 파이를 구우려던 참이라 두 손이 밀가루 범벅이었다. 폴라는 서둘러 손을 씻고 앞치마를 푼 위 머리 모양을 가다듬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소매를 도로 내리면서 몸단장을 하다가 갑자기 낡은 평상복 차림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지. 처음 뵙는 건데 이런 차림이니...갈아입는 편이 나을까?”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빨리 가봐!” 캐리건은 초조해하며 응접실 쪽을 살펴보았다. 저 상관이 급한 일이라고 했으면 정말로 급하다는 얘기다. 느긋하게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누나 부탁이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가족의 평가란 상당히 중요한 거니까. 여기서 나쁜 인상을 주면 정식 단원이 되는 게 늦어지거나 힘들어질 수도 있다 말이야.” 단장이 직접 ‘평가’하러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절실한 목소리였다. 애초에 자신 같은 견습단원의 평가에 단장이 직접 나선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다. 폴라는 그런 동생을 보며 수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거 아냐?” 캐리건은 휙휙 고개를 흔들었다. 눈치를 살치며 누나를 보는 눈에는 ‘날 좀 믿어줘!’라는 애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캐리. 나도 거짓말은 못해. 여쭤보시는 건 솔직하게 대답할 테니까.” 겉으로는 침착한 척해도 갑작스러운 기사단장의 방문에 당황한 것은 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동생이 계속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며, 동생의 출세 여부를 결정짓는 권한을 지닌 사람이다. 어떤 의미로는 국왕이나 왕비를 만날 때보다 훨씬 더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장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간신히 평정을 가장하며 응접실로 나갔다. 동생이 기사단에 있는 관계로 몇 번인가 편지를 보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사단장은 앉지도 않고 응접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작은 응접실을 꽉 메울 듯한 관록에다 건장한 체구가 첫인상이었다. 피는 속일 수 없다. 그 위풍당당하고 듬직한 모습은 국왕과 아주 흡사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예리한 눈빛에 폴라는 조금 겁을 먹었다. 국왕은 언제나 자상한 표정이었는데 이 사람은 어쩐지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역시 동생 때문에 뭔가 화가 나 있는 게 아닐까. 기사단장의 곁에는 늘씬한 체구에 인상적인 남자가 서 있었다. 거의 단장만큼 키가 크다. 처음에는 시중드는 사람인가 생각했지만 하는 행동으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기사단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두 사람도 그 자리에 나타난 아가씨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ㅣ얼마나 비우호적이었는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거의 예상하던 그대로의 처녀였다. 키는 중간 정도에 소박한 옷차림을 한 몸은 균형이ㅣ 잘 잡혀 있다. 가녀린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런 산 속에서 살며 집안일까지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생각지도 못하던 높은 사람의 방문에 긴장한 나머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발로는 마음속으로 반쯤 납득하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말로 흔한 시골 처녀였다. 이런 아가씨의 어떤 구석이 왕비로 하여금 이 사람이라면 국왕의 ‘정실’로 맞아들여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폴라 달시니 양인가?”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폴라는 가볍게 무릎을 숙이며 가능한 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노라 발로다. 이쪽은 폐하의 친구이며 독립기병대 대장인 이븐이다.” 보통 ‘산적’이라든가 ‘밀짚머리’라는 소리밖에 들어본 적이 없던 이븐은 등골이 가려워지는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진지하게 인사했다. 높은 사람이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편이 얘기가 빠를 것이다. 예상대로 폴라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지면서 호흡이 빨라졌다. 엄청나게 중요한 용무인 모양이라고 직감한 듯하다. “저..., 혹시 동생에 대한 일입니까?” “동생?” “예. 혹시 뭔가 나쁜 짓을 한 거라면 전부 다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엄하게 주의를 줄 테니까요.”주저하면서 말하는 폴라를 보고 발로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기사단에서 있던 일을 아가씨에게도 말해주나?” “예, 이것저것.....” “나한테는 말할 수 없ㅇㄹ 만한 일도?” “에....” 꺼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두 손을 꽉 마주잡는다.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몰라 조마조마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긴장하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서, 발로는 평상시의 장난기를 발휘하며 물었다. “그럼 어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려줄 수 있겠나?” “그게.....” 폴라는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온다. “분명히 말씀해주십시오. 동생은 아직도 같은 계급의 친구들하고 싸워서 부상을 입히고 있습니까? 아니면 또 숙소의 청소를 게을리 했나요? 기사단장님의 말을 무단으로 탔던 일은 용서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일로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면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말은 해뒀지만, 설마 또 감시관님의 술에 손을 댔습니까?” 이 반응에 발로조차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기사단 내에서 비품이 분실되었을 때에는 제일 먼저 동생을 의심해야겠군.” 문 뒤쪽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캐리건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정말로 간이 졸아붙는 듯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라면 기사단 내에서 해결할 수 있어. 일부러 독립기병대장까지 같이 와달라고 부탁할 건 없지. 오늘은 동생이 아니라 아가씨한테 얘기가 있어서 왔네.” “제게요?” 폴라는 깜짝 놀랐다. 동생 일이 아니라면 이 사람이 자기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발로는 폴라에게 앉도록 권하고서 자신도 이븐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만, 아가씨는 단순한 애첩의 지위가 아니라 왕관을 바라나?” 폴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를 피해서 딴 곳으로 흘러 가버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긴 침묵 뒤에야 간신히 흘러나온 말은 이 한마디였다. “네?” “‘네?’ 가 아니야. 곡 대답을 듣고 싶네.” 대답이고 뭐고,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조차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몇 번이라도 말해주지. 측실의 지위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왕비로서 맞아주지 않는 다면 형님의 총애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게 아가씨의 의사라고해석해도 되겠나?” 폴라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지금 상대가 던지는 질문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측실’이나 ‘총애’라는 단어가 간신히 머릿속에 들어온다. 혹시 그 얘기인가 싶어서 물어본다. “저...., 그건, 얼마 전에 왕비님이 하셨던 그 말씀 말인가요?” “그렇네.” 그제야 폴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애기라면 분명히 거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왕비님께 여쭤보시면 알 수 있을 텐데요.” “그 왕비가 형님과 이혼하겠다고 하시네.” 폴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뒤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캐리건은 “누나, 얼굴 좀 어떻게 해봐. 바보처럼 보이잖아!‘ 등등 상관없는 생각을 하며 조바심을 내고 있었지만, 폴라 입장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다. 의자에 앉은 채 자세를 바로 잡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이마를 짚었다. “단장님.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혼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얘기입니까?” 발로는 기가 막힌 듯이 코웃음을 쳤다. 물론 고의적으로, 발로 대신 이븐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왕비 그린디에타 라덴은 델피니아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 지위와 왕관을 쓴 국왕의 곁에 설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왜 그러시는 거지요?” 당돌한 물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일 것이다.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발로는 점점 더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 상황은 폴라가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얘기에 사고가 마비되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븐은 끈기 있게 말을 되풀이했다. “아시겠습니까? 잘 들으세요. 폴라 양. 비전하는 아가씨를 위해서 물러나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애첩밖에 될 수 없다면서, 그건 너무 불쌍하니까 자신이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시더군요.” 아무런 그늘도 없던 폴라의 얼굴에 처음으로 의혹이 스쳤고, 그 감정은 점점 공포로 바뀌어갔다. 신음을 하면서, 그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설마....무슨 착오....겠지요?” “정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서약의 신께서 용서하실 리가 없어요!” “저희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부터 국왕폐하를 포함해서 모두가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폐하의 애첩이었던 엔도바 부인까지도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혼만은 안된다고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전하는 절대로 뜻을 굽히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머릿속은 당산에 대한 걱정만으로 가득한 겁니다. 폐하와 이혼하고 당신을 다음 왕비로 만들겠다고, 그 생각만 하고 계십니다.” 폴라는 정말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쩍 벌어진 입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악한 나머지 말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안색은 마치 밀랍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이븐을 바라보는 동공은 죽은 사람처럼 크게 열렸다. 그 얼굴만 보아도 왕비의 생각이 얼마나 빗나가 있는지는 뻔히 알 수 있다. 순간 이 아가씨가 이대로 놀라서 죽는 게 아닐까 두 사람이 걱정할 정도였다. 폴라는 심한 충격ㅇㄹ 받아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제가.......왕비.....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폐하가....이혼을 하신다고?” “네.” 폴라는 입을 다물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마치 사람 크기의 인형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딱딱하게 경직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풍부한 두 눈도 갈색 유리구슬처럼 변하고 말았다. 단지 그곳에 박혀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발로는 물론 이븐까지도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때 인형은 갑자기 되살아나서 날카롭게 절규했다. “너.....너, 너무합니다!” 폴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거의 반 광란 상태로 말을 잇는다. “어, 어째서, 어째서 그런 무서운 짓을?! 저, 전....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그 얘기는 사양하겠다고! 저한테는 어울리지도 않는, 신분에도 안 맞는 얘기라고! 와, 왕관이라니, 그런 황공한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정말로 분명하게 말씀드렸는데! 그런데 어째서 그런 무서운 일이 생기죠?!” 발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점이네. 아가씨는 제대로 설명했다고 생각해도 왕비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 왕비는 기괴하리 만치 보통 사람들하고 사고방식이 동떨어져 있어서 국왕과 평범한 다른 남자들을 똑같이 놓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정식 부인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얘기를 사양하는 ㅓ라고 판단하고, 어째서인지 전적으로 당신 편을 들면서 왕비를 쫓아낼 힘이 없는 폴라 달시니 양을 위해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고 있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폴라는 또다시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전 왕비님을 쫒아낼 생각 따위....!” “알고 있어. 우리들은 당신 마음을 잘 알아. 하지만 곤란하게도 왕비는 그 점을 몰라. 실로 그 사람답게 묘한 ‘기사도 정신’을 내세워서 당신한테 혼례 의상을 입혀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지.” “그렇습니다. 폴라 양. 비전하께서는 순수하게 당신에 대한 호의로 이런 얘기를 꺼낸 겁니다. 오해도 이 정도쯤 되면 수준급이지요. 당신이 혼례 의상을 입고 정식으로 결혼해서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몸을 숙여 펑펑 울고 있던 폴라는 흠칫 놀랐다. 그때 왕비가 한 말. “꼭 입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장담하면서 자신의 빰에 살짝 입 맞췄다. 이런 뜻이었던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왕비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호의’는 견딜 수 없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비님.....” 신음하듯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힘차게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바라본다. “정말로, 제게 혼례 의상을 입혀주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분이 이혼하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틀림없습니다.” “그럼 그런 행동을 해주셔도 곤란하다고 제가 직접 말씀드리면...,, 황비님은 마음을 돌려주실까요?” 눈물로 젖은 커다란 눈은 무섭도록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븐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희들도 바로 그 부탁을 하러 왔습니다. 해주시겠습니까?” 긴장한 나머지 굳어버린 얼굴로 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왕비가 자기가 하는 소리 따위로 결심을 바꿔 줄지는 알 수 없다.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이혼만은 말려야만 했다. 무슨 수를 서서라도. 발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둘러야 할 거야. 왕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증서를 짖어 버릴 생각이야. 우리들이 돌아올 때까지 신전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혹시 지금쯤 그 오리고 신전이 통째로 불에 타서 페허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 왕비라면 그 정도는 해치우고도 남을 테니까.” 이븐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구석이 제일 문제였다. 폴라의 빰이 빨갛게 물들었다. 남자들보다 먼저 힘차게 일어난다. “가시지요!” 방에서 뛰쳐나오더니 그 앞에 서 있던 동생에게 짧게 지시한다. “캐리, 말을 갖고 와!” 서둘러 2층으로 달려 올라가 재빨리 외출 준비를 시작한다. 캐리건은 기막혀하면서도 재빨리 반응했다. 마구간에 달려가 집에서 키우는 말에 서둘러 안장을 얹고, 단장의 말과 함께 현관까지 끌고 와 누나의 손에 고삐를 넘겼다. 이 집에서 키우는 말은 왕궁의 준마와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수준으로 짐말이나 다름없는 종자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거친 산길에는 익숙해져 있다. 폴라는 날렵하게 안장 위로 뛰어올랐다. 남자들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출발하더니 불안정한 밧줄다리를 단숨에 건너 열심히 산기슭을 향해 달렸다. 폴라는 뒤를 따르던 남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언제 안장에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급경사를 단숨에 뛰쳐 내려와 코랄을 향해 달려갔다. 평지로 내려오자 말의 속도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농사일에 익숙해져 있는 말에게 바른 속도를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얘기였다. 한발 먼저 나아간 발로가 중간에 군사초소가 나오자 공작의 권한으로 전열용 말을 빌려 넘겨주었더니 그녀는 두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승마 솜씨를 발휘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것도,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상관없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채찍질을 하며 전력으로 질주한다. 일하던 농민들이 겨울비차 완연한 대지를 울리며 흙먼지와 함께 질주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틸레든 기사단장과 베노아의 부두목은 누구나 인정하는 승마의 달인이었다. 폴라는 그런 두 사람 뒤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고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발로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의외로 말괄량이일지도 모르겠는데.” “당신이 겁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남자들의 대화조차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폴라는 늦으면 어쩌나 하는 위기감과 초조함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혼이라니. 그렇게나 사이좋은-평범한 부부로서의 의미는 아니지만-서로 마음을 허락한 친구처럼 멋진 두 분이. 이혼이라니! 국왕폐하는 얼마나 놀라셨을 것이며, 얼마나 슬퍼하고 분노했을 것인가. 게다가 그 원인이 자신이다.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을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아무리 말에 채찍질을 해도 느린 것만 같았다. 메이버리에서 코랄가지는 말로 약 두 시간. 하지만 그들은 말의 다리가 느려질 때마다 경계초소에 들어가 새 말을 빌리며 시간을 벌었다. 점점 코랄 시가지가 다가왔다. 일행은 거리에 들어서서도 전혀 속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신전을 향해 돌격했다. 마침내 신전 현관에 도착했을 때 폴라는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어깨를 들썩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전력 질주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리해서 말을 타 본건 처음이었다. 완전히 말라붙은 목은 타들어가는 것 같고 옆구리는 심하게 결려온다. 고삐를 쥐던 두 손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고 온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에서 내릴 때에도 이븐이 도와줘야 할 정도였다. 지면에 내려서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지만 그래도 폴라는 쉬려고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을 따라 왕비가 있는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중간에 마주친 삼엄한 경비조차도 폴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수행자들이 생활하는 신전 별관 2층의 한 방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나시아스가 문 앞에 지켜 서 있었다. 서둘러 달려온 일행을 보고 눈을 치뜨면서도 나시아스는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어?” 엔도바 부인과 담소를 나누던 왕비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온 폴라를 보며 깜짝 놀란다.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서둘러 왔어?” “왕비님.....”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심하게 헐떡거리면서 폴라는 절규했다. “전 수녀가 되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 전원이 숨을 삼켰다. 엔도바 부인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왕비가 경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이런 처사는 너무하십니다!! 전 평생 신을 모시기로 했으니깐. 그러니까...이혼이라니. 그런 무서운 말씀은 제발 거두어주십시오!” 거의 울먹이면서 필사적으로 호소한다. “분면 폐하는 제게 화가 나셨을 겁니다. 왕관을..., 와, 왕비의 지위를 노리다니 분수도 모르는 뻔뻔스러운 계집이라며 어이없다고 여기셨겠지요. 더, 더 이상 폐하 앞에는 나설 수 없습니다. 평생 용서해주시지 않을 게 번하지 낳습니까! 제 가족 역시...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모두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동생도 기사단에서 추방당하겠지요. 아버지는 달시니 가문의 명예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면서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는데... 동생에게도 돌아가신 아버지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울지 말고.” 왕비는 당황하며 폴라의 어깨를 싸안고 갈색 머리칼과 등을 계속 쓰다듬어주면서, 폴라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거 듣기 안 좋은 말씀이군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기사단장님 말씀대로입니다.” 두 사람 모두 태연하게 대답했다. 특히 발로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넣어가며 단언했다. “잘 봐, 당신은 폴라 양을 위해서 이혼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이 사람은 당신의 그 호의를 조금도 기뻐하지 않아. 오히려 굉장히 괴로워하면서 가슴아파하고 있지. 그뿐만이 아니야. 가령 당신 생각대로일이 풀릴 경우, 이 사람은 왕비에게서 국왕을 빼앗은 희대의 악녀로 세상사람 모두에게 저주받게 될 거야. 그래도 상관없나?” “단장. 그건 너무 심한 말...” 왕비가 얼굴을 찌푸리자 이번에는 이븐이 말했다. “아니오. 그것도 기사단장의 말대로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겠지요. 지금의 당신은 승리의 여신으로서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쫓아내고 하급귀족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면 비난의 표적이 되는 건 폴라 양만이 아닙니다. 폐하의 인기나 신망에도 영향이 가겠지요. 당신은 그 점까지도 충분히 고려하고, 그래도 이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나도 그 점은 묻고 싶군.” 왕비는 짜증난다는 듯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사람은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두면 더욱 강하게 결속된다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두 사람이 바로 그 훌륭한 예였다. 상대하기가 지극히 힘들다. 엔도바 부인은 울고 있는 폴라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어 간신히 진정시켰지만, 폴라는 한 차례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진지하게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쭤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수녀원은 어디입니까?” “아, 그거라면 정면 현관으로 나가서 쭉 걸어가다가 첫 번째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하나....” “이븐!!” 왕비가 고함을 지르자 독립기병대장은 불만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전 물어보는 말에 대답한 것뿐인데 말이죠.” “대답하지 마! 폴라를 수녀로 만들 생각이야?!” “아뇨, 전 수녀가 되겠습니다. 그분은 국왕폐하이시고 멀쩡하게 왕비님까지 있으신데 어째서 저 같은 것이....어째서 저 따위가 국왕폐하와 서약의 제단에 설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나하고 그 녀석이 이혼만 하면 되잖아.”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낮게 신음했다. 발로의 얼굴에는, 상대가 왕비가 아니었다면 이 멍청한 돌대가리를 망치로 두들겨 부수고 말았을 거라고 쓰여 있었다. “잠깐, 제 말을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나시아스가 뒤쪽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이 논쟁하고 있는 사이, 이 사람은 의자 여러 개를 착착 가져와 왕비의 연금 장소를 그대로 긴급 회의실로 바꿔놓았다. “우선 자리에 앉고, 얘기는 그 위에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극히 옳은 의견이다. 전원이 의자에 앉자 나시아스가 다시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자니 아무래도 달시니 양계서 폐하의 측실이 되어주신다면 문제는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달시니 양께서는 뭔가 이 얘기를 받아 들이 수 없는 이유라도 있으시지요? 장래를 약속한 남성이 있거나, 폐하를 싫어하시거나.....” 폴라는 펄쩍 뛰며 대답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그럼 무슨 이유입니까?” 조금 전까지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주눅이 든 폴라는 주위의 앉아 있는 ‘높으신 분들’을 둘러보았다. 흥분 상태가 가라앉고 나자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충분히 여유를 두었다가 발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시니 양, 아가씨 기분은 잘 알고 있네. 아가씨의 신분으로는 자신 같은 인간이 국왕폐하를 곁에서 모셔도 괜찮을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형님은 아가씨를 원하고 계시고, 왕비 역시 아가씨를 위해서 스스로의 지위에서 물러나겠다고 까지 말하고 있네. 당신이 형님을 지독히 싫어하고 있다면야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없겠지만, 듣자하니 당신은 형님을 사모하고 있다고 왕비가 자신 있게 말했다던데.” 폴라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사과할 것 없어. 형님께 연정을 품고 있는 부녀자야 그리 드물 것도 없지. 하지만 형님 쪽에서 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이 이상 계속 거절하는 건 억지라고 받아들여도 좋겠나?” 말 자체는 딱딱했지만 어투는 상당히 풀어져 있었다. 그리고 힐끗 왕비 쪽을 본 것은 자신이 여기서 악역을 맡아줄 테니 뒤는 어떻게든 알아서 하라는 신호였다. 왕비는 그 신호를 받고서 말했다. “머.., 나하고 월이 이혼하기는 생각 이상으로 힘들 것 같고 폴라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곤란해. 정말로 정실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면 월의 부인이 되어주면 고맙겠는데.” 폴라는 부들부들 떨면서 거의 매달리다시피 애원하는 눈으로 왕비를 보았다. “하오나..., 그런, 저 같은 것이...” “싫으면 내가 이혼할 테니까.” 강아지처럼 동그란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폴라는 얼굴을 가리며 울기 시작했다. 발로는 이 꼴 좀 보라는 듯이 길게 한숨을 쉬고, 왕비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험악하게 얼국릉 찌푸렸다. ‘이 멍청이가!’라는 뜻이다. 어쩔 수 없다. 발로는 여기서 ‘무서운 사람’역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평소에 여자들을 대할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이븐에게 왕비를 붙들고 있으라고 눈짓으로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 달시니 야. 울지 않아도 됩니다. 말이 너무 심해진 건 사과드리겠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국왕의 실질적인 부인이라는 중대한 지위가 자신에게는 너무 부담스럽다고 생각해서 두려워하는 거겠지요. 맞습니까?” 폴라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이 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발로는 조금 곤란한 듯이 얼굴을 찡그린다. “기탄없이 말씀드린다면, 정말로 죄송한 일이지만 애첩의 특권이 당신 한 사람께만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누가 뭐라 해도 형님은 국왕이시고 여자라면 얼마든지 고를 권리가 있습니다. 설령 당신이 임신을 하고 다행히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반드시 차기 국왕이 된다는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 헛소리 마! 왕비는 그렇게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왕비의 등 뒤로 다가서 있던 이븐이 재빨리 그 입을 막아버렸다. 억지로 왕비의 두 팔을 비틀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닥치고 있으라고. 이 바보야....” 발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유일한 총희로서 왕궁을 좌지우지한다거나, 자기 자식이 다음 국왕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격무에 쫓기는 형님에게 이야기 상대이자 휴식처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이 왕비는 군사나 정치 쪽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주제에, 빈 말로라도 여성스러운 다정함이나 배려가 넘친다고는 말하기 힘들지요. 거칠다고 해야 할지 용맹하다고 해야 할지. 형님도 저런 부인이면 지내기 힘드실 거라고 모두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휴식을 취하실 필요도 있을 거라고 뜻을 모아서 측실을 들이기로 한 겁니다. 당신은 주어진 거처에서 형님을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거고, 그 거처에서는 직접 만든 직물로 집을 꾸미거나 자수를 하거나 하면 됩니다. 물론 세탁만은 손이 거칠어지니 심부름꾼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말고는 당신이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됩니다. 형님이 찾아오시면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것도 좋지요. 어떻습니까? 이거라면 집에 있을 때와 거의 다름이 없겠지요?” 발로의 말을 듣고 있던 폴라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어졌다. “정말 그걸로.....충분한가요?” “물론이고말고요. 제 생각에 형님은 당신 자신보다도, 아니 물론 당신을 원하는 건 사실이지마-저택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자라난 풍경이나 생활까지 포함해서 당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게 틀림없습니다.” 이븐에게 눈짓을 한다. ‘네 차례다’라는 뜻이다. 이븐도 이런 신호를 몰라볼 위인은 아니다. 두 팔로 왕비를 꽉 ㅂㅌ든 채 씨익 웃으면 말한다. “폴라 양.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폐하의 소꿉친구로 폐하가 어떤 곳에서 자라셨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샤도 산골이었고, 페르난 백작부인도 손재주가 뛰어나신 분이셨습니다. 몸은 약하셨지만 언제나 실을 뽑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융단 같은 것도 직접 짜셨습니다. 백작님이 입으실 옷은 언제나 하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지으셨지요. 당신도 그런 일에는 자신이 있겠지요?” “네, 동생 옷은 언제나 제가 만드니까요.” “그거 대단하군요.” 발로가 감탄했다. 이븐 역시 왕비를 붙든 채 말을 맞췄다. “날씨도 상당히 추워졌으니 폐하께 무릎덮개라도 만들어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마 요리도 직접 사시겠지요?” “네.” “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백작부인께서 만드신 꿩고기 파이는 일품이었지요. 겉은 바삭바삭하면서 냄새도 기막혔고, 고기는 부드러웠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잘 모르지만 우유를 거품 내서 술 조금에 설탕을 섞어 굳힌 것. 그것도 정말 맛있었죠.” “어머나, 그럼 제가 만들어드릴게요.” “그거 감사합니다.” 검은 옷차림의 전사의 품안에서 왕비는 입을 붙들린 채 아등바등 발버둥쳤다. 네가 고시지 마!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폴라 이외의 전원은 그런 왕비의 존재를 고의적으로 무시했다. 발로가 접대용 미소로 나왔다. “아시겠습니까? 저희들은 그저 당신이 형님의 시중을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물론 당신은 젊고 아름답지요. 형님도 아직 젊습니다. 거기서 물론 전전이 있다면 그 역시 당연한 얘기지만, 그건 절대로 당신 한 사람만 누리는 특권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실례가 되겠지만, 착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거지요. 그래도 괜찮다면, 혹시 형님의 시중을 드는 게 싫지 않다면 시녀로 일한다고 생각하고 왕궁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폴라는 안도하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때는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차기 국왕의 어머니라느니, 실질적인 왕비의 지위라느니 하는 건 생각하기도 두렵다. 자신에게는 도저히 걸맞지 않은 자리였다.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시중만 드는 거라면-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을 허락 받고 그분의 시중을 들 수 있다면..... 황송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자신도 기쁜 일이다. 아니, 결혼할 희망까지 사라져버린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제안이었다. “어떻습니까?” 발로가 부드럽게 물어보자 폴라가 살짝 뺨을 붉혔다. 점점 귀까지 붉게 물들이면서 고개를 수그린다. “정말로, 저 같은 인간이라도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물론이고말고요! 아아, 감사합니다! 이걸로 이 나라도 구원 받는 겁니다.” 발로의 쾌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 서둘러서 모시러 갈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지금 이대로 왕궁에 오시겠습니까?” 그러자 폴라 대신 엔도바 부인이 대답했다. “공작님, 그건 너무 성급합니다. 여러 가지로 준비도 필요 할테고, 폴라님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실까요?” 폴라는 부인에게 감사의 시선을 보냈다. 발로가 부인을 소개하자 폴라는 다시금 몸을 움츠렸지만, 부인은 우선 여자들끼리 얘기를 하자며 자연스럽게 폴라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주었다. 그 시점에서야 이븐은 꽉 붙들고 있던 왕비의 몸을 놓아주었다. 발로는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 표정이었다. “조금은 여성을 설득하는 데에 참조가 되었는지?” 이븐 역시 떨떠름하게 말을 덧붙였다. “처음부터 이쪽에 맡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네 덕분에 왕궁이 얼마나 뒤집혔는지 알아? 대체 뒤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왕비는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두 사람의 설득은 먹혀들었다. 다행히 일은 처리된 셈이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가되지 않았다. “이상하잖아” 정실이 되는 건 싫고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이면 괜찮다니“ 거꾸로 아냐?” “바로 그거야. 형님이 국왕만 아니었다면 달시니 양도 당연히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어 했겠지.” “그렇습니다. 본인만이 아니지요. 딸을 첩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의 부모님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리고 자신들의 딸이 국왕의 애첩이 된다고 들으면 틀림없이 굉장한 출세라고 기뻐하면서 꼭 받아들이도록 저 사람은 설득했을 겁니다.” 왕비는 더더욱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국왕은 그렇게까지 특별대우인 건데?” 나시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불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제부터 실컷 고생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면서 이미 분노도 자증도 폭발 직전에 달해 있는 시점에서, 저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나시아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앞으로 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신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발로는 어금니를 꽉 악물고 의자의 팔걸이를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손 안에서 목재가 삐걱삐걱 비틀리고 있다. “난...전쟁터가 아니면 여자한테 무기를 들었던 적도, 손을 든 적도 없지만.....” 푸른 눈을 냉담하게 빛내면서 이븐이 말을 이었다. “본인도 여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신경 써 줄 것 없지 않습니까?” “엑.....” 이번에는 왕비가 개구리라도 밟은 듯한 비명을 내었다. 방에서 나간 나시아스가 조용히 등 뒤의 문을 닫는 순간,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 뭔가를 던지는 소리, 좁은 실내에서 뛰어다니는 시끄러운 발소리, 그 사이에 섞여 항의하는 왕비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2대1이라니 비겁해!” “시끄러워!” 완벽한 합창이었다. 복도로 도망 나온 나시아스는 머리를 싸쥐고 말았다.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대공작이 왕비에게 ‘시끄러워’라고 소리치는 건 심각한 정치적 문제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누가 발로를 탓할 수 있겠는가. 나시아스는 근위병 중에서 입이 무거운 사람을 골라 문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사보아 공작과 독립기병대장이 왕비를 몰아세우는 광경을 남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먼저 방에서 나간 여자들을 찾았다. 여자들은 계단 아래쪽에 있었지만, 수행승들의 거처에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의 숫자가 셋으로 늘어 있었다. 시녀장도 지금 막 달려온 듯했다.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에, 딱딱하게 긴장한 얼굴로 엔도바 부인과 폴라를 바라본다. 부인은 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녀장. 소개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폐하의 시녀로 일하게 된 폴라 달시니님입니다.” 시녀장의 안색이 변한 것은 계단 위쪽에 서 있던 나시아스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애첩으로 오기로 한 사람이 시녀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혼을 주장하던 왕비는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은 말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걸물이라 불리는 시녀장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나시아스의 눈짓, 엔도바 부인의 미소, 긴장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폴라를 보기만 하고서는 대략의 사태는 파악한 모양이다. 조금도 놀라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살짝 가슴을 폈다. “그럼 당신은 앞으로 제 감독 하에 들어옵니다. 잘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라도 물어보도록.” “아,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폴라는 허둥대면서 고개를 숙었다. 시녀장이라면 국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면서 왕궁 전하를 관장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겁을 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녀장도 이 상대가 부하라는 것을 명목일 뿐이고, 왕비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신입 시녀는 공동숙소에 배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궁내에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시녀장이 말하려던 순간, 엔도라 부인이 입을 열었다. “지내실 곳 말입니다만, 제가 살던 그 별궁은 어떨까요? 물론 폴라님이 싫지만 않으시다면....” 갑자기 본궁에 들어가는 건 곤란하다. 왕궁에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았다. 시녀장은 말 뒤에 숨겨진 부인의 의도를 곧장 이해했다. “그렇군요. 거기는 꽤 조용하고 본궁과 가까우면서 외출하기도 편하니까요.” “방도 몇 개 정도 있으니 심부름꾼을 두기에도 좋습니다. 폴라님의 시중을 들 하인도 몇 명 정도 데려오셔야 할 테니까요.” 폴라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 일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아버지 대부터 계속 집에서 일 해왔던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데려오는 것만 허락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시녀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명 더 잡일을 할 하인을 데려오십시오. 유모라면 당신이 의지할 사람으로 모시고 오는 게 당연하지만, 폐하 직속 시녀쯤 되면 잡일은 다른 사람한테 만ㅌ기는 겁니다.” “네. 하지만....” “댁에 적당한 하인이 없다면 근처 마을 처녀라든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까?” 커다란 갈색 눈망울이 주저하며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마을 아가씨라도......괜찮은가요?” “그건 당신이 책임을 지시는 겁니다. 당신이ㅣ 제대로 감독하면서 왕궁의 시녀로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예절을 가르치면 됩니다. 그것도 임무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주십시오.” “네.” “거처에 대해서라면 엔도바 부인이 말씀하시는 대로 별궁 쪽이 좋겠군요.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곳이니 조금 손질을 해야겠지만....” “그럼 내일이라도 청소하러 가겠습니다.” 나시아스도 엔도바 부인도 무심결에 얼굴을 가려버릴 뻔했지만, 시녀장만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폴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우선 집 쪽 정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집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제 집 말인가요?” 깜짝 놀라는 폴라에게 시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의 부모님을 이미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왕궁에 들어와서 살게 되니 만큼 외출이라면 몰라도 장기간의 휴가는 쉽게 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과 유모가 나오게 되면 집은 어떻게 되지요? 누군가 대신 집을 관리할 사람은 있습니까?” 폴라는 그제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캐리건은 여자와 노인만 있어서는 불편할 거라며 일부러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오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자 폴라의 결단은 빨랐다. “동생과 정원사가 있습니다만 남자들만 있는 것도 불편할 테니 그렇다면 차라리 문을 닫고 집을 비워버릴까 합니다. 동생은 기사단으로 돌아가면 되고, 정원사도 산기슭 마을에 친척이 있으니까요. 사정을 얘기하고 휴가를 주면....” “그럼 남은 것은 집 정리로군요.” “그렇습니다. 올해도 겨울을 나려고 식량을 잔뜩 준비해뒀으니까요. 마을 사람들한테 전부 나눠줘야지요.” 폴라의 말에는 먹을 것을 쓸데없이 낭비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스며 있었다. 시녀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리에 자신이 있다면 왕궁에서도 그 실력을 발휘해주시길 바랍니다.” 폴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왕궁에서 화려하게 살 수 있다는 것보다도 자신의 일을 하는 쪽이 훨씬 기쁘다는, 그런 마음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시녀장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폴라라고 했지요?” “네.” “그리운 이름입니다. 옛날, 당신과 같은 이름의 아가씨가 있었지요.” 폴라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폐하의 어머님. 이 사람은 그분과 가까이 지냈다. 그분은 이 사람의 아이를 구하려다가 자신의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어린 왕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시녀장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지금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페르젠 후작이 실각한 이래 시녀장은 동북부 지방의 작은 마을에 있는 국왕의 생모의 무덤을 매번 찾아가고 있었다. 국왕의 생모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낼 때까지 시녀장은 그 마을을 단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남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20년 이상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성이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아가씨였습니다. 당시의 폐하를 헌신적으로 모셨지요. 당신도 당신을 선택하신 폐하와 비전하의 마음을 잊지 말고 열심히 일해 주십시오.” “네.” 폴라는 완전히 주눅이 든 얼굴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녀장은 그밖에도 필요한 물건에 대해서 세세하게 일러주었고, 폴라는 달려왔을 때와는 정반대로 밝아진 표정이 되어 집에 돌아갔다. 시녀장도 정말 마음이 놓이는 듯 나시아스와 엔도바 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이 일을 왕궁에 보고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갔다. 시녀장을 배웅하고서, 나시아스와 엔도바 부인은 인기척이 없는 복도로 나왔다. 그제야 정신없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부인은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시아스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다행입니다. 한때는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만, 이걸로 안심이군요.” “당신 덕분입니다. 대담한 방법으로 비전하를 막아주셔서.” “부끄럽습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필사적이었으니까요.” 부인은 웃고 있었지만 나시아스의 표정은 진지했다. 한 손을 내밀면서 말한다. “넘겨주십시오.” 부인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다가, 의미를 깨닫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 아뇨.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비전하를 말리려고 해본 말입니다. 그냥 위장약인 걸요.” 나시아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넘겨주십시오.” “.......” “라티나. 부탁입니다.” “하지만 정말 위장약인걸요...” “그럼 보여주시기만 해도 되니까요. 부탁드립니다.” 온화한 태도였지만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엔도바 부인은 주저하면서 병을 꺼내어 나시아스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나시아스가 뚜껑을 열고 병을 입으로 가져가자 작게 비명을 지르며 그 팔에 매달렸다. “나시아스님!” 약을 마시는 척하던 나시아스는 원래대로 뚜껑을 닫고서 조용히 물었다. “이 약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부인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뿐입니다. 그것도......, 전 나약한 인간입니다. 도저히 마실수 없었으니까요....” 나시아스는 그 위험한 약을 천에 싸서 가죽주머니 안에 넣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마시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티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시아스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은 두 번 다시 맛ㅂ고 싶지 않았다. 남은 생애를 홀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이 사람의 애정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닌데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도 자신에게 보내오는 이 따뜻한 호의에 기뻐진다. 나시아스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부인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비전하의 상태를 보고 오겠습니다. 그 약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알아서 처분해주십시오.” 감정을 억누르다보니 굉장히 무뚝뚝한 어조가 되고 말았다. 부인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시아스에게 등을 돌렸다. 저 왕비에게도 의연하게 대치했던 현명한 부인이 나시아스의 앞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나시아스 역시 거부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부인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신관들에게 하루 일과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만이 맑게 울리고 있었다. 그날 국왕은 여전히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이혼의 위기가 닥쳐오든 아니든 해야 할 일은 가차 없이 밀려든다. 해군 공장 예산이 부족하다는 보고, 호족 사이의 분쟁 조정, 테바 강 유역에 파견한 관리의 조사 결과 등등 쉴 틈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더욱 먼 곳에서 날아온 보고도 있었다. 탄가가 스케니아에 추파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온 뒤로, 국왕도 여러모로 손을 스고 있었다. 스케니아라는 미확인 요소가 더해진 이상 이쪽도 아군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우선 키르탄사스에 사자를 보냈지만 그 대답이 이제야 돌아온 것이었다. 키르탄사스는 해양국가였다. 남자들은 모두 천성적인 선원으로 남쪽과 중앙을 연결하는 바다를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호언하며, 배와 바다에 대한 깊은 지식과 탁월한 해전기술마으로 작은 섬의 독립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었다. 키르탄사스의 왕은 지배자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자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주민들의 대표이며, 해운조합장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였다. 그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남쪽을 지배하는 바다의 왕자로 위치하는 한 키르탄사스는 태평성대이면 육지의 분쟁 따위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명백했다. 이 보고가 들어온 직후,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타우 서쪽의 두목인 돌체의 키니슨이었다. 키니슨이 방문했다는 사실이 국왕의 귀에 들어온 것은 오후 늦게였다. 국왕의 일이 어느 정도 마감된 뒤에라도 상관없다는 말에, 시종들은 고지식하게도 그 말대로 했던 것이다. “왜 빨리 말하지 않았나?” 국왕은 기가 막혀하면서도 서둘러 키니슨을 불러들였다. 바로 얼마 전의 승전 축하연에서도 짧게 인사는 받았지만 대화다운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그랬던 만큼 대체 무슨 용건인가 싶었다. 타우의 두목은 제각각 개성이 풍부한 사람들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키니슨은 상당히 독특한 편에 속했다. 가느다란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고, 국왕 앞에 와서도 거의 표정에 변함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인사말조차 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함께 들어온 남자 쪽은 주눅이 들어서 꾸벅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집무실 옆에 설치된 국왕의 개인 서재로 누가 생각해도 일반 시민 따위를 맞이할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미안하네. 오래 기다리게 했군.” 키니슨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 함께 온 남자를 쳐다본다. “이 사람이 꼭 임금님하고 만나고 싶다고 귀찮게 매달려서 말입니다.....” 키니슨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잘 부탁드립니다...., 억지로 부탁해서 따라왔습니다. 전 달튼이라고 합니다. 홀리 달튼입니다.” “호오?” 국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차림이나 행동거지, 말씨까지도 전형적인 산적인 주제에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구석이 의외였다. “실은 그게, 임금님께 꼭 드릴 얘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네.” 국왕은 시종들에게 자리를 비우도록 눈짓했고, 시종들은 목례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중후한 서재 안에 남은 것은 국왕과 산적 두 명뿐이었다. 자기가 꺼낸 말이면서도 달튼은 기가 막히는 듯했다. “헤에.... 이거 놀랐는걸. 한 소리 들을 각오로 해본 말인데, 정말로 산적 같ㅇㄴ 것하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겠다는 겁니까? 놀랐습니다. 면회를 신청하면 보름은커녕 반년 이상 기다리게 만드는 왕도 드물지 않은데.....”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하고 있어. 상당히 효율적이네만.”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지요.” 달튼은 완전히 감탄한 듯한 어조로,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실은 저는 산세베리아의 가신입니다.” “산세베리아?” 국왕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은 있었다. 파라스트의 비호를 받는 파라스트 서쪽 신생국가의 이름이었던가. 중앙국가란 일반적으로 대륙의 동쪽 연안부에 위치하는 나라들을 일컫는다. 그런 만큼 익숙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 가신이 이 먼 곳까지 무슨 용무지?” “조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태도에는 어딘가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정말로 곤란한 상황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달튼이 말하는 내용은 농담으로 끝날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산세베리아는 역사가 짧은 나라로, 국왕의 권위 역시 아직 확립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키르탄사스와 상당히 다른 상황이었다. 국왕은 국왕대로 스스로의 권위를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힘이 부족하고, 유력한 호족에 의한 반란이 일상다반사라라고 했다. 그 때문에 선선대의 국왕은 가끔 파라스트에 조력을 요청했고, 당시의 파라스트 국왕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했다. 종국에는 양국의 인연을 깊게 한다는 명목으로 첩이 낳은 공주 중 한 명을 당시 산세베리아 왕자와 결혼까지 시켰다. 산세베리아는 그 사례로 막대한 공물을 파라스트에 보냈고, 그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파라스트는 산세베리아에 다양한 형태의 봉사를 요구하고 있다. 치수공사에 노동을 요구하고, 요새의 건설을 밀어붙이며 때로는 병력 공급까지 받아먹고 있다. 즉 파라스트에게 있어서 산세베리아는 써먹기 편리한 종속국가였다. 산세베리아 역시 대국의 비호하에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고, 양자의 관계는 지극히 양호했다. 그런데 최근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이 달튼의 얘기였다. “얼마 전 파나스트의 임금님은 델피니아의 임금님께 아픈 맛을 봤습니다. 전쟁에 이기지 못하면 전리품도 거둘 수 없지요. 가신들의 수고에도 보답해줄 수 없습니다. 덤으로 이번에는 테바 강까지 빼앗겨버렸지요. 그 지방 주민들 입장에서야 지배가가 바뀌는 것뿐, 다음부터는 이쪽 임금님에게 세금을 바치면 되는 얘기입니다. 곤란해진 건 지금까지 그 세를 받고 있던 인간들이죠. 영지를 날로 빼앗기고 만 셈이니까요. 그래서 파라스트의 임금님은 영지를 빼앗긴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제고하라고 산세베리아에 주문한 겁니다. 억지도 이 쯤이면 수준급이지요. 국내에서도 이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째서 파라스트이 패전 배상을 이쪽에서 부담해야 하느냐-애초에 파라스트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에서 전쟁비용을 징수하지만. 왜 다른 나라의 전쟁에 우리가 물자나 군자금을 제공해야 하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요. 그런 반면에 대국인 파라스트를 적으로 만들면 우리나라가 위험해진다. 다소 불합리한 점이 있어도 참고 지금까지처럼 우호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문제는 말입니다....” 달튼은 지친 듯이 한숨을 쉬며 두 팔을 벌렸다. “이 두 의견을 각기 주장하며 있는 게 현재의 폐화와 그 동생분이라는 점입니다.” “그거 안됐군.”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신들이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참고로 신중 론을 주장하고 있는 건 어느 쪽이지?” “폐하 쪽입니다. 저희 비전하는 현 파라스트 왕의 누님뻘이 되는 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단, 비전하도 이미 마흔을 넘기셨지만 아직까지 두 분 사이에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거 더 곤란하겠군.” “예. 파라스트의 오론 왕은 상당한 수완가로, 전쟁 이외에 영토를 넓히는 데에도 유능한 분입니다. 침략 당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말을 들으라고 협박하는 한편, 호족간의 분쟁을 조정한다고 나서면서 그 토지를 가로채는 경우도 있지요. 물론 혈연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한 전략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의 임금님의 경우에는 그편이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지요. 뒤를 이을 왕자는 태어나지 않았고 폐하 자신의 인기도 통솔력도 약해질 뿐입니다. 지금은 동생 부인 오르테스 전하 쪽에 민중의 지지가 모이고 있지요. 그리고 오론 왕은, 이번에는 오르테스 전하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실례, 너무나 오론다운 짓이지만, 귀국 입장에서는 웃을 일이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덕분에 두 분 사이는 지금.... 곤란하기 짝이 없지요.” 산세베리아 국왕은 45세, 동생인 오르테스는 27세로 처음부터 그다지 사이좋은 형제는 아니었다. 국왕 우즈디스람은 파라스트의 비호를 업고 산세베리아 국민들을 가혹하게 다스려왔다고 한다. 그에 비해 오르테스는 자국의 존엄을 모독하는 상대에게 의연하게 맞서며 산세베리아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양자의 대립이 파라스트의 국혼 신청을 계기로 하여 결정적인 파국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정말 힘든 상황입니다... 파라스트가 우즈디스람님을 저버리고 오르테스 전하와 손을 잡겠다고 표명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혼담은 오르테스 전하에게도 그렇게 불리한 얘기는 아닐 텐데?” 국왕은 일부러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산세베리아의 가신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대국의 힘을 업을 수 있다는 거야 유리한 얘기입니다만, 그렇다고 파라스트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될 수 있느냐 하면, 지금의 폐하라는 최악의 견본이 눈앞에 있지요. 이쪽은 동맹을 맺을 셈으로 저쪽에서 요구한 대로 이것저것 원조를 하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버림받은 겁니다. 도저히 수지가 안 맞는 장사지요.” “파라스트의 공주와 교환하는 조건 아닌가? 지금 국왕에게 자식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쪽으로 시집온 공주가 왕자를 낳아준다면 오론에게는 친조카가 될 테지. 그래도 보장이 안 된다는 건가?” “공주가 아닙니다. 오론 왕의 딸인 것은 틀림없지만 수많은 총희 중 한 명이 낳은 딸입니다.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고마운 얘기입니다. 폐하가 독신이었다면 말이지요.” “이미 부인이 계신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쪽이 그런 제안만 하지 않았다면 이미 훨씬 전에 식을 올렸을 테지만......” “파라스트는 그 결혼을 취소하라는 건가?” “예, 파라스트 국왕의 딸과 산세베리아 같은 약소국의 시골 귀족의 딸 중에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어째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을 이쪽이 굳이 해야 하느냐는 둥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거기서 폐하도 화가 나신 겁니다. 폐하도 어린애가 아닙니다. 어설프게 파라스트에 반기를 드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다.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봤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은 우즈디스람님 이상으로 잘 알고 계시지요.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형님께 협력하면서 파라스트의 기분에 맞춰주는 방침을 지지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폐하도 인내력이 다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파라스트의 속국이 아니다, 자신의 결혼에 대해 일일이 저쪽의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으며 지시는 말할 것도 없다고 화내고 계시지요.” 얕볼 수 없는 남자였다. 자국의 내부 사정을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는 대국입니다. 정면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오론 왕의 딸과 결혼할 수는 없습니다. 시골 귀족의 딸이라는 것은 파라스트 쪽의 말일 뿐, 상대인 리리아님은 아름답고 현숙하며 폐하와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이입니다. 덤으로 리리아님은 이해심도 깊은 분입니다. 자신은 정실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폐하께서 적절하게 판단해달라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리리아님의 아버님은 왕국의 중신인 하이온 공작이십니다. 그런 분의 따님을 국왕도 아니 오르테스 전하가 측실로 들일 수는 없지요.” 델피니아의 국왕은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국왕도 특실 문제로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지만, 이것은 델피니아만의 특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측실을 들이는 데에 왕비가 난색을 표하며 자기보다 낮은 지위로 그 차이를 확실하게 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실로 들이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곤란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리가 그런 성격이기에 왕비로 맞아들인 것 역시 사실이었다. “뭐..., 사실 국왕의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니까요. 아마 머지 않아 우즈디스람님은 실각하고 오르테스 전하가 산세베리아 전역을 호령하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파라스트는 더욱 신이 나서 오론 왕의 딸을 데려가라고 나오겠지요. 폐하도 고민하고 계십니다.” 후루룩 차를 마시면서 위험한 발언을 뻔뻔스럽게 내뱉는다. 국왕도 웃으면서 시원스럽게 말했다. “요약하자면 오르테스 전하의 소원은 형님을 추방하고 왕이 되어서, 리리아 양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동시에 파라스트와 손을 끊고 싶다는 건가?” 찻잔을 든 채 달튼은 조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랬다. “그 말대로 쉽게 될 것 ???으면 이 고생도 안 하겠지요.” “글세..... 우리나라도 타국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어. 그대는 오르테스 전하의 가신인 모양이네만 폐하에게 뭔가 지원을 해달라는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없네.” “안 되겠습니까...” 정말 곤란한 듯 애원조로 묻는다. “물론 이런 부탁을 드리는 이상, 산세베리아는 델피니아를 위해 언제라도 파라스트의 등을 찌르는 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제 말만으로 신용하실 수 없다면 직접 이리로 찾아오실 용의도 있습니다만.....” 국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짓을 하면 우리나라와 파라스트 사이가 불편해져. 이제야 간신히 평화가 찾아왔는데. 그대도 그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비밀리에 온 게 아닌가?” “예. 그야 그렇습니다만...” 국왕은 팔짱을 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파라스트의 서쪽에 동맹국을 얻는다는 건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절대로 손해는 아니야. 하지만 동맹은 외교다. 어디까지나 나라의 대표가 행하는 거야. 그런데 현재 로르테스는 왕자에 지나지 않아. 게다가 현 국왕과 입장도 다르다고했지. 그래서는 얘기가 안 돼.” “그렇다면, 로르테스가 산세베리아의 국왕이 된다면 조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달튼이 진지한 얼굴로 물고 늘어지자 국왕은 곤란한 듯이-조금은 재미있어하면서 말했다. “그대는 내가 답해줄 수 없는 질문만 하는군. 우리나라에 불이익이 될지도 모르니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어.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가는 내 말이 어떻게 곡해될지도 알 수 없어. 어설프게 대답했다가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모반세력의 흑막이 되고 말 테니까. 어디, 어떻게 할까.”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키니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귀찮으시다면 제가 입 닥치고 만들지요.” 낮은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박력이 담겨 있었다. “어이, 기다려. 그건 너무하잖아?!” 달튼이 황급히 말했지만 돌체의 두목은 진심인지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에는 살기에 가까운 감정이 깃들여 있었다. “너한테는 빚이 조금 있지. 그러니까 임금님하고 만날 수 있게까지 해준 거고, 그걸로 빚은 모두 갚았어. 난 타우의 두목으로서 이번에는 임금님에 대해 의리를 지키겠어.” 특별히 표현하지는 않지만 키니슨은 타우에 대한 국왕의 태도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옛 친구의 부탁에 져서 국왕에게 분쟁의 씨앗을 가지고 왔다니, 타우의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자신의 실수는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고까지 뜻을 굳히고 있다. 지금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기세의 키니슨을 보고, 국왕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키니슨, 마음은 고맙지만 여기서 검을 휘두르는 건 곤란해 게다가 아무리 비공식적이라고는 해도 달튼은 다른 나라의 사자다. 살려서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나.” 키니슨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딜튼은 몸을 움츠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사자의 전언이 마음에 안 들면 목을 베어버리는 임금님도 드물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 농담은 무시하고, 국왕은 말을 계속했다. “우즈디스람 왕은 실각 직전이라고 했지만, 왕권 교체가 그리 쉽게 이뤄질까? 혹시 전 국왕을 시해하는 형태가 되면 새 국왕의 인기도 위험해질 테고, 새 정권이 안정되기도 힘들 텐데?” “오르테스 전하도 멍청한 분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시지요. 우즈디스람님을 은퇴하게 만들든 국외로 쫓아내든, 방법은 여러모로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결혼 얘기는 어떻게 되지? 손에 쥔 권력이 소중하다면 오론의 딸을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할 텐데.”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제가 폐하의 어전까지 찾아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오르테스 전하는 바보가 아닙니다. 도저히 파라스트를 적으로 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리리아님을 희생시켰을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산세베리아에 있어서 파라스트의 존재는 이미 해악일 뿐입니다. 이쪽 임금님과 손을 잡고 쓴맛을 보여주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지요.” 일국의 왕을 상대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태도만은 여전했다. 이렇게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면 대부분의 국왕은 무례하다고 화를 내겠지만, 공교롭게도 델피니아 국왕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평범’과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고개를 흔들면서 신중하게 말한다. “아까워. 정말 아까운 걸. 기왕이면 이런 얘기는 파라스트와 전쟁 중일 때 듣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는 말이지.....” “하지만 폐하. 분명히 지금은 파라스트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지. 오론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물이라는 건 유명하고, 타우를 빼앗겨서 상당히 분한 모양이니 조만가 또다시 문제가 생길 거야.” “그렇다면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이쪽에서 먼저 손을 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산세베리아는 온 힘을 다해 폐하를 후원하겠습니다.” “달튼. 자꾸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만들지 마. 그런 약속은 네가, 정확하게는 네 주인이 명실 공히 일국의 군주가 되고 나서 하는 거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신용은 물론이고 아무런 보증도 없어. 허풍이나 다름없는 거지. 그래서는 거래도 불가능해.” 서로의 주장은 순서라는 관점에서 정반대로 대립하고 있었다. 달튼(오르테스라고 해야겠지만)은 왕좌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전면적으로 델피니아에 협력하겠다고 하며, 월 그리크는 모반을 도와줄 수는 없으니 먼저 오르테스가 자력으로 왕자에 앉은 뒤에 일국의 대표자로서 얘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결국 먼저 물러난 것은 달튼 쪽이었다. “역시....지금 상황에서 협력을 부탁드리는 건 너무 뻔뻔스러웠을까요.....” 말은 자신만만하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 오르테스의 입장은 미묘할 거라고 국왕은 추측하고 있었다. 왕관이란, 정권이란 그리 간단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확실한 방패를 얻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쪽 역시 파라스트의 등을 위협해줄 아군은 꼭 손에 넣고 싶었지만, 국왕의 성격상 다른 나라의 내정간섭을 불가능했다. 달튼은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저희들에게는 이쪽 임금님을 도와주신 기적의 여신님 같은 것도 없어서 말입니다.” 이번에는 국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기적도 꼭 고맙기만 한 건 아니야. 나도 지금 그 여신한테 버림받기 직전이니까.” “옛? 싸움이라도 하신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헤에.....” 달튼은 반쯤 놀란 듯, 반쯤은 재미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떨까요. 표면적으로 원조를 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그 여신님을 조금만 빌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키니슨이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달튼을 노려보았다. 국왕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내 마음대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야. 병사를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도 있고 검토해볼 수도 있지만, 그 녀석은 내 지배 하에 있는 게 아니니까.” 멋대로 빌려주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멋대로 거절할 권한도 없다. 국왕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소녀의 의지는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다른 이에게 좌우되지도 않는다. “혹시 오르테스 전하에게 힘ㅇㄹ 빌려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옆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겠지. 승리의 여신이란 그런 존재야.” 달튼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험악한 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럼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협력은 못 받는다 치고 오르테스 전하가 국왕이 되고 나면 다시 찾아와도 괜찮겠습니까?” 델피니아 국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에는 당당하게 산세베리아의 사신이라고 밝히고 정문으로 오게. 환영 파티를 열 구실이 필요하니까.” 이 정도의 말이라도 모반을 후원해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문으로 오라는 말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파라스트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정식으로 외교를 맺는 것에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 우선 현재 파라스트와 델피니아는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표면적으로는 우호국인 것이다. 그리고 파라스트와 산세베리아 역시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델피니아와 산세베리아가 국교를 맺는 다 하더라고 파라스트는 대놓고 항의할 수 없다. 그런 국왕의 계산을 꿰뚫어보았는지 달튼은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파티에는 승리의 여신님도 강림해주시는 겁니까?” “마음이 내키면.” “그건 어려운 조건이군요.....” 서쪽에서 온 특이한 사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정문으로 오고 싶다고 끝까지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하면서,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돌아갔다. 3 장 처음 폴라와 만났을 때, 셰라는 상대의 지나친 저자세에 깜짝 놀랐다. 국왕의 애첩으로, 최소한 그 후보로 왕궁에 불려온 사람이 겨우 시녀인 셰라에게 부디 잘 부탁드린다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셰라 역시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묘한 첫 대면이었다. 드디어 폴라가 왕궁에 오게 되었고, 셰라는 왕비의 명령으로 이사를 도우러 폴라의 집에 찾아갔다. 왕궁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니 그 점에는 충분히 신경을 써달라는 시녀장의 부탁도 있었다. 왕궁을 발칵 뒤집어놓은 왕비의 이혼 선언이 있은 뒤로 닷새가 흘렀다. 그 원인에 대해서 관계자 전원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덕분에, 오늘의 이사도 그다지 남의 관심을 끌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한때 엔도바 부인이 살던 별궁은 일곽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건물들 중에서는 상당히 소박한 편이지만 그래도 왕궁임에는 틀림없다. 별궁이라고는 하지만 방도 많고 내부 장식도 훌륭했다. 최고급 목재를 이용한 가구는 반짝반짝 광택을 내고 난로는 장밋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벽에는 훌륭한 장식이 걸려 있고 소파의 덮개는 자수가 놓인 비다. 그밖에도 은으로 된 물병이나 상자 등, 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멍하니 둘러보고 있었다. “왠지...모든 게 너무나 훌륭한 물건들이나 만지기가 무서운데요....” 부엌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17,8세 정도의 아가씨가 뛰어나왔다. “아가씨! 부엌 좀 보세요! 냄비가 전부 번쩍거려요! 꼭 금덩어리 같아요! 진짜 구리인가봐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셰라의 존재를 깨닫고 멍하니 멈춰선다. 입까지 쩍 벌리고 있었다. “레나, 냄비 정도 가지고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게 아니야.” 폴라가 간신히 힘을 짜내며 위엄 있게 말했지만, 주인 역시 기가 죽어 있으니 설득력은 별로 없었다. 레나는 평범한 시골 처녀였다. 이제 막 왕궁에 왔으니 무리는 아니겠지만, 거동도 어색하고 눈빛도 기민하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레나는 폴라에게서 꾸중을 듣고 기가 죽어 부엌으로 돌아갔다. 테스 부인은 침실 담당이었지만 문을 연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닥에는 남국풍의 화려한 융단이 깔려 있고 침대에는 비단 자수 이불에 조각이 새겨진 네 개의 기둥이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시트까지 비단인 것을 보고, 테스 부인은 레나처럼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대체 세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폴라는 완전히 기가 죽어 자신의 빰을 감싼 채 계속 거실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역시 나, 정말 나한테 안 어울리는 곳에 와버린 게 아닐까......”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다. 셰라는 초조해졌다. 역시 돌아가야겠다는 소리라도 나온다면 또다시 그 소동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다. “어쨋거나 우선은 짐 정리부터 하지요. 짐도 얼마 안 되는 것 같으니까요. 정리가 끝나고 나면 차라도 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리하여 일행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가지고 온 것은 자신들의 일상용품과 장식품, 바느질 도구 정도였다. 폴라와 테스 부인도 처음에는 집에 있는 물건을 전부 가지고 올 생각이었다고 했다. 침대나 책상은 어디에나 있으니 제외하더라도 심지어 베틀까지. 그것을 만류한 사람이 시녀장이었다. 시녀장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폴라의 자택까지 직접 찾아가서 짐에 대해 여러 가지 지시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 시녀장의 준비는 완벽했다. 이 별궁-부용궁이라고 불린다-은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정리되어 언제라도 살 수 있는 상태였고, 방 하나를 작업실로 만들어 최신형 베틀을 놓고 벽장에는 레나와 테스 부인이 자신들의 작업복을 만들 천, 속옷 재료로 쓸 깨끗하고 부드러운 면에서 얇은 삼베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부엌에는 충분한 양의 식료품이, 찬장에는 흑설탕, 백설탕, 밀가루, 곡물가루에서 후추나 값비싼 향신료까지 갖춰져 있었다. 정리가 끝나갈 즈음 재단사가 찾아왔다. 하인 두 명을 데리고 온 중년의 재단사는 폴라 앞에 천 견본을 산더미처럼 펼쳐놓으며 주문을 받으러 왔다고 싹싹하게 말했다. 좍 늘어놓은 화려한 천을 본 폴라는 눈이 빙글빙글 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모슬린, 명주, 공단에 벨벳, 융....., 만져보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값비싼 천들을 아낌없이 늘어놓는다. 무늬가 없는 천만 해도 색깔이 최소한 20여 자기는 있었다. “이, 이런 엄청난 천으로 옷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단사는 최신 유행의 무늬와 색, 디자인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고 있었지만 폴라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셰라는 그런 폴라에게 조용히 조언했다. “적당히 뭔가 정하도록 하세요. 안 그러면 이 사람들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그렇군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천 견본에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낭패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셰라는 본의 아니게 대활약을 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색이나 문양 등을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적절한 조언과 함께 실내복용 천과 약식 예복용의 화려한 천을 골라주었다. 대금은 시녀장이 지불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재단사는 폴라의 몸 치수를 재고서, 가봉할 때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정중하게 인사하고 물러갔다. 폴라는 그제야 간신히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상당히 늦어졌지만 차를 내오도록 레나에게 지시했다. 격식대로라면 심부름꾼은 부엌에서 차를 마셔야 하지만, 폴라는 오늘만은 특별이라고 말하며 거실에서 네 명이 함께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난로에서는 따뜻하게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메이버리에서 온 여자 셋은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못 믿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코랄 성에 있다니.” 테스 부인의 말에 레나는 더욱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에서 일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하고, 집에서도 난리가 났는 걸요.” 자랑스러운 말투였다. 그런 반면에 불안한 감정 역시 엿보였다. 세 명 중에서는 폴라가 제일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셰라가 구워온 과자를 먹고 있다. “입에 안 맞으시나요?” 셰라가 묻자 폴라는 당황하면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죄송합니다. 좀 멍해져서....굉장히 맛있네요.” 절대로 빈말은 아니었다. 폴라는 셰라의 요리 솜씨를 칭찬했다. “다음번에는 꼭 제가 만든 과자를 들어주세요. 가능하면 왕비님도 함께 드셔주셨으면 좋겠는데....” 셰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과자를 드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설탕은 왕비님의 천적이니까요.” 다른 두 명이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싫어하시나요, 단 걸?” 테스 부인의 말에 레나도 소리를 높였다. “믿을 수 없어. 그럼 이럼 과자도 안 드시나요? 이렇게 맛있는데?!” “술도 당밀주 같은 건 질색이신 걸요.” 폴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나....예전에 초콜릿을 주셨기에 전 분명히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제가, 라고 말하려던 순간 그 왕비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사냥꾼 같은 그 가죽옷 차림새였다. 폴라와 테스 부인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레나만이 과자를 입에 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레나! 왕비님이셔!” 그 말을 들은 레나는 깜짝 놀라 입에 든 것을 삼키려다 사례가 들리고 말았다. 왕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상대의 기침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레나라고 해? 난 리. 잘 부탁해.” 언제나처럼 지극히 간단하게 인사한 다음, 왕비는 조금 전까지 셰라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레나는 기죽은 채 부엌으로 도망갔고 테스 부인 역시 당황하며 물러갔지만, 폴라는 도망칠 수 없었다. 일어선 채 잔뜩 긴장하고 있다. “안 앉아?” “하지만 그, 우선, 앉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야......” “그런 거 일일이 안 물어봐도 돼. 여기, 마음에 들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은 폴라는 곤란한 듯이 대답했다. “굉장히 멋지지만......제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좀더 평범한 곳은 없었을까요.”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보통 아냐? 단장이나 로자몬드네 저택은 여기저기가 다 번쩍거려서 눈이 아플 정도니까. 여기 정도면 평범한 편이야.” “하지만...” “괜찮아. 금방 익숙해질 테니까.” 느긋하게 말하면서 폴라 앞에 작은 꾸러미를 꺼내놓는다. “이거, 이사 축하 선물.” “저한테?” “응, 원래는 결혼 축하 선물로 주려고 생각했지만....” 폴라는 다시금 흠칫 놀라면서 손을 거뒀다. “왕비님. 부탁이니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씀 말아주십시오.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니었는걸요.” 왕비는 눈을 반짝 빛냈다. 고와 똑같은 말을 시종장부터 시작해 주위 사람들에게서 지겹도록 들었으면서도 태연한 자세로 일관한 사람인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렇게 대답하면 폴라가 안심할 거라고는 알고 있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수 없다. 그런 말에 묶이는 것은 왕비의 듯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븐하고 발로가 폴라를 칭찬하던데. 승마 기술이 훌륭하더라고, 그 두 사람한테 칭찬을 듣다니 굉장해. 캐리건보다 기사가 될 소질이 더 많은 것 아냐?” 폴라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였다. 분명 엄청난 말괄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필사적이었는걸요.” 왕비는 웃으면서 꾸러미를 열어보라고 재촉했다. 검은 가죽상자를 열어본 폴라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머리빗의 털이 윤기를 머금고 빛난다. 순도 높은 은에 새겨진 수목과 동물들,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신의 자태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했다. 숨을 삼킨 폴라를 보고 왕비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다줄까?” “아닙니다! 설마요!” 폴라는 당황하며 정신을 차렸다. “단지 그..., 이런......, 이렇게 비싼 것을.. 정말로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싶어서....”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폴라 자신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정말은 기쁘면서도, 감사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대답으로는 왕비님에게 이쪽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맥 빠지는 소리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점점 더 한심하게 느껴진다. 비참한 기분으로 거울과 머리빗을 주춤주춤 쓰다듬던 폴라는 거울 테두리에 새겨진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 ‘친애하는 벗 폴라에게’ 그런 문장이었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아름다운 문자로 새겨진 그 말은 몇 번을 다시 들여다보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놀란 것은 차를 마시던 왕비 쪽이었다. 꼼짝도 않고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폴라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잠깐....., 왜, 왜 그래?!” 당황하면 일어서려던 왕비의 어깨를 셰라가 지그시 눌렀다. 괜찮다고 미소를 지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신 것뿐입니다.” “에?” 왕비로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폴라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에 가로막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친애하는 벗-. 그 말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기쁜 선물이었다. 다음 날, 셰라는 레나를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부용궁의 여성들이 할 일은 각각 정해져 있었다. 테스 부인은 매일 아침 시녀장에게 그날의 지시 사항을 들으러 간다. 주인인 폴라는 부용궁을 지킨다. 그 외에 각종 잡일 담당이 레나인 셈이었다. 잡일 중에는 거리에 나가 물건을 사오는 것도 포함된다. 식량의 대부분은 본궁의 식량 창고에서 지급되지만 그것만으로는 필요할 때에 부족할 경우도 생긴다. 시골 출신인 레나에게는 코랄의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거리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압도당하면서도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저, 셰라님,,,,” 조심스럽게 부르는 말을 듣고 셰라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전 그냥 시녀니까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가씨.., 폴라님이 실례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셔서...” “그럼 저도 레나님이라고 부를까요?” 장남스럽게 묻자 소녀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레나는 메이버리의 부유한 농가의 딸이었다. 생활은 풍족한 편이었지만 그래봤자 촌구석에 지나지 않았다. 야채나 과일을 가게에서 ‘팔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생화를 꽃집에서 판다는 사실에 놀랐다. 레나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은 밭이나 근처에서 거두는 것이었다. 그런 물건들을 돈으로 산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채나 과일이나 벗서 같은 것ㄷㄹ은 그래도 이해나 하겠어요. 쉽게 구할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금방 말라버릴 꽃을 어째서 돈을 받고 파는 거죠? 정말 저런 걸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나요?” “있지요. 많아요. 게다가 굉장히 비싼 걸요. 비싼 곳은 한 송이에 은화 한 장짜리도 있어요.” “은화를 주고 꽃을 사요?! 설마!” “정말이에요. 폴라님도 조만가 다과회를 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에는 생화를 장식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때에는 레나가 주문하러 나와야 한다. 셰라는 우선 필요한 가게들만 안내해주면서 마지막 과자가게에 들렀다. 이곳은 코랄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명한 가게로, 진귀한 열대과일의 설탕절임이나 초콜릿, 예쁜 봉지에 든 사탕이나 포장된 과자 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빈번하게 바깥에 나올 수 있는 셰라가 다른 시녀들에게 부탁을 받아 과자를 대신 사다주는 곳도 이 가게였다. 당연히 점원들과도 아는 사이로 언제나 싹싹한 대접을 받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침착하지 않고 뭔가 어수선한 공기. 손님을 맞이하는 지배인도어두운 표정이었고, 가게 밖에서도 심부름을 하는 소년들이 일손을 놓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이상하게 생각한 셰라가 소년 중 한 명에게 묻자. 소년은 목소리를 낮추며 여기에서 일하던 여자가 죽었다고 말했다. “병이었나요?”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께 저녁부터 갑자기 모습이 안 보였어요. 갈 만한 곳을 모두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집에도 안 돌아와서 어제 실종 신고를 냈거든요. 그랬더니 오늘 아침 관청에서 연락이 와서 가에 시체가 떠 있었다고.....” “어머나....” 셰라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였죠? 이 가게에는 점원도 많으니까...” “에이미요. 좀 어리광부리는 것 같은 주근깨가 난....” 그 말을 듣자 셰라도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름은 처음 듣지만 얼굴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피부가 희고 턱이 뽀족한 사람이군요. 불쌍하게도....., 언제나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소년은 아무나 붙잡고 얘기 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던 듯, 들어 주는 사람이 왕궁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시녀라는 점도 한몫해서 묻지도 않은 얘기를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관리는 자살 같다고 하더라고요. 지갑도 업어지지 않았고, 옷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몸에 아무 상처도 없더래요. 아침부터 여기에도 조사하러 왔지요. 뭔가 짚이는 게 없느냐고 계속 물어보던데,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거든요. 안 그래?” 다른 소년 한 명이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분명히 남자겠지요. 원래부터 경박한 편이기도 했지만, 최근 굉장히 외무에 신경을 쓰면서 향수 냄새도 풍기곤 했으니까요. 분명히 바람둥이한테 걸린 거겠죠. 버림받거나 사기를 당해서 자포자기로....” 거기까지 말하다 지배인이 이쪽을 노려보는 것을 깨닫고, 소년들은 당황하며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셰라도 불쌍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흥미는 없었다. 레나와 함께 가게를 떠났다. “무섭네요. 자살이라니. 그 사람. 정말 나쁜 사람한테 속을 걸까요.” 몸을 움츠리며 레니가 말하자 셰라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코랄은 큰 도시니까 위험한 남자들도 많아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말하고 나서야 자기 역시 그 위험한 남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셰라는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이사 다음날부터 국왕은 빈번하게 폴라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무에 쫓기는 몸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지만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얼굴을 비쳤다. 저녁을 들고 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부용궁의 새 주인이 사람들이 주목을 모을 수 없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엔도바 부인 때와는 달리 지금의 국왕에게는 왕비가 있다. 부용궁에 들어왔다고는 해도 정식으로 애첩이라 공표된 것도 아니었다. 귀부인들은 청각을 곤두세우고 각각 심복 하녀나 말벗을 인사명목으로 부용궁에 보냈지만 돌아온 여자들은 모두 웃음을 삼키면서 마치 하녀나 다름없는 여자라고 감상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는 왜 그렇게 평범한 여자의 거처에 드나드시는 걸까요.” “아니오. 이번은 좀 달라요. 얼굴을 보려고 궁에 들이신 거니까. 보통 말하는 식으로 ‘다니시는’게 아닌 걸요.” “그분, 시녀장의 주선으로 부용궁에 들어왔다더군요. 폐하는 시녀장을 거의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아, 알겠네요. 가여우셔라. 입장상 얼굴을 비출 수밖에 없다는 말이로군요.” 귀부인들은 아마도 시녀장이 아는 사람의 딸이거나 뭔가 관계가 있는 사람일 테고, 왕궁에서 일했다는 ‘경력’을 욕심내서 부용궁에 들여보냈을 거라고 판단하며 관심을 거뒀다. 덕분에 폴라는 원래대로라면 지겹도록 당했어야 할 귀부인들의 질투나 탐색, 흑심 어린 접근 등릉 전혀 모른채 지낼 수 있었다. 무명 드레스를 입고 앞치마를 걸치며 매일같이 손수 빵을 굽고 필요한 옷가지는 스스로 만들었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는 왕궁 안을 산책하기도 했다. 바로 눈앞에 대도시 코랄이 펼쳐져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한 정원이었다. 엔도바 부인이 산책길에 동행해주었다. 처음부터 친절하게 대해준 덕에 폴라는 곧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따. 라티아 역시 폴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귀여운 사람이었다. 왕궁에서 살게 되었으면서도 조금도 사치에 물들지 않는다. 넓은 정원을 산책할 때에도 다채로운 수목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며, 때로는 숨을 삼키면서 너도밤나무 열매나 호랑가시나무 잎사귀를 쳐다보곤 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라티나는 조용히 물었다. “요리 재료로 딱 적당할 것 같지 않으세요?” “네! 그렇죠! 하지만...” 집의 산이라면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풀숲으로 뛰어들었겠지만 이곳은 왕궁이었다. 행실이 나쁜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지면에 떨어져서 썩게 놔두기에는 아깝다는 마음 사이에서 폴라는 진지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말려야 할 입장이지만 엔도바 부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폴라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고 두 사람은 공범자가 되었다. 들 수 있을 만큼 열매를 따서 옷자락에 담아 서둘러 부용궁으로 돌아왔다. 부인의 안내로 가능한 한 인적이 적은 지름길만 골라서 태연하게 경비병 앞을 지나쳐 간신히 거처까지 돌아왔을 때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고 말았다. 폴라는 물론이고 라티나도 굉장히 즐거웠다. 마치 소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부터는 레나에게 시키세요.” 라티나가 말하자 폴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라고 말해두지 않으면 열매 따는 데에 열중하다가 경비병한테 들키겠네요.” 재빨리 부엌에 들어가 레나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작업복의 치맛단을 바쁘게 펄럭이며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왕비가 다람쥐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대로였다. 테스 부인은 매일 아침 시녀장을 찾아가 필요한 물건과 다음 지시를 받아오곤 했다. 폴라가 원하던 것은 깔개를 짤 털실과 커튼 재료 등 본래대로라며 업자에게 납품시킬 문건이었지만 달시니가의 여자들에게 있어서 그런 물건들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레만 있으면 천을 짤 실까지 직접 만들 정도다. 식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궁 부엌에서 필요한 것은 전부 지급되는 데도 폴라는 아쉬운 듯이 말했다. “소가 있으면 갓 잔 우유도 마실 수 있고 버터도 직접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왕궁에서는 물론 비상식량으로 돼지나 소를 키우고 있었다. 닭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용궁 마당에서 소를 키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갓 짠 우유를 가져오도록 하는 게 어떠시겠어요? 부엌에 압착기를 갖다두면 크림이나 버터도 만들 수 있습니다.” 부인의 말에 폴라는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왠지 어두운 표정이었다. “지금도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시는데 그렇게 억지를 부릴 수는 없어요. 폐가 되는 걸요.” 엔도바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축을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일이 느는 셈이지만 폐와는 좀 다른 게 아닐까. “더 당당하게 행동하세요. 전 여기 있을 때 이런 모종이 필요하다느니, 부엽토가 있으면 좋겠다느니, 전정가위가 잘 안 드니까 더 좋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이것저것 찾았는걸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폴라는 힘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왕궁에도 많이 익숙해지고 즐겁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반면에 굉장히 위축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걸까. 그날 부인은 부용궁에서 나와 시녀장을 찾아갔다. 폴라는 오후마다 시녀장을 찾아와 시가나 음악, 궁중의 예의범절을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부인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시녀장은 부인을 쾌히 맞아주었다. 하지만 이쪽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을 당신께 의논드리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만...., 부용궁에 대해서입니다.” “네.” “폐하는 부용궁의 사람들이 마음에 드시는지 빈번하게 다니고 계십니다. 오늘 도 주방에 저녁 만찬은 필요 없단 지시가 내려갔지요. 부용궁에 주인이 생긴 뒤부터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고 요리장이 불평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조금 망설여졌다. 요리장에게는 요리장으로서의 긍지가 있다. 국왕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든다는 긍지와 자부심 역시 대단할 터였다. “하지만... 요리장의 역할은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본궁에서 열리는 대만찬이나 식정의 요리를 준비하는 건 요리장 말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그렇지요, 폴라님께서 임신을 하셔서 폐하의 후계자가 탄생하면 그때야말로 요리장의 실력을 선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부인은 국왕을 부용궁에 주인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있는 요리장의 마음을 걱정하며 말했지만 시녀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의논드리고 싶다는 건 바로 그 일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녀장은 더욱 심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는 매일같이 부용궁을 찾아가십니다. 때때로 식사를 들고 오실 때도 있지요. 하지만.......” “?” 시녀장은 세 번째로 한숨을 쉬었다. 형용하기 힘든 고민이 느껴진ㄷ. 마침내 마음을 굳힌 듯이 고개를 든다. “식사 뒤에는 언제나 본구에 돌아와서 주무신답니다.” 이 말에는 부인도 할말을 잃었다. 기가 막혀서 굳어버린 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빛으로 질문을 던진다. 시녀장은 이 무언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엔도바 부인은 기운이 빠져서 의자에 축 늘어졌다. 뭔가 말을 하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긴 침묵 후, “세상에나....” 겨우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시녀장도 완전히 실망한 모양이었다. “폐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전 전혀 모르겠습니다. 폐하 자신이 원하셔서 그렇게도 큰 소동을 겪으면서 궁에 들인 분인데.” “네.....” 허탈감에 휩싸이면서도 어쩐지 알 것 같은 구석이 있었다. 폴라의 눈치가 이상했던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시녀장은 완전히 머리를 싸안고 있었다. “분명히 시녀라는 명목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명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저 아가씨는 너무나 불쌍하지 않습니까. 총애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상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렇다고 설마 제가 그렇게 말씀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사람 치고는 보기 드물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라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때에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 국왕은 자신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애첩을 삼아달라고 했던 자신과 폴라는 국왕을 대한 자세부터가 전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시녀장이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남자였더라면...., 한심한 아들에게 꾸중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넋을 놓고 있던 라티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겁니다. 카린님.” “네?” “이건 아마도, 전쟁으로 말하자면 승부의 분기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대장이 직접 말을 타고 나가서 폐하께 공격을 날릴 때입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부인을 보며 시녀장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날 밤, 부용궁을 찾아간 국왕은 평소 때처럼 폴라의 요리를 맛보고 있었다. 부지런한 폴라는 요리에 대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 궁의 식사처럼 요모조모 손이 많이 간 요리는 아니지만 식탁에는 언제나 갓 만든 맛있는 음식이 올라왔다. 주인이 바뀌면 거처의 분위기도 상당히 달라진다. 지금의 부용궁에는 상쾌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꽃병에는 성내에서 꺾은 듯한 꽃이 꽂혀 있고 창가에는 향목을 빽빽하게 꽂은 사과가 장식되어 있다. 국왕은 그리운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폴라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국왕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향기로군요. 스샤에서도 언제나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사과를 장식해두셨습니다.” 폴라는 기쁜 듯이 웃었다. “할머니께 배웠습니다. 이렇게 해두면 사과가 달콤해져요.”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자 테스 부인과 심부름꾼 소녀는 부엌으로 물러나 식사를 했다. 그때를 기다린 듯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슬슬 실례하겠소.” “네.” 폴라도 일어나 국왕을 배웅하러 나왔다. 바깥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촛불을 든 시종 두 명이 길을 밝히며 앞장선다. 국왕의 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폴라는 실내로 돌아왔다. 테스 부인이 부엌에서 나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돌아가셨나요...?” “응. 나도 쉴게.”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평상시 같으면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텐데. 폴란 풀죽은 걸음으로 침실에 들어갔다. 한편 부용궁을 나선 국왕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해도 저물고 차가운 북풍이 불고 있는 데도 묘하게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옆모습에도 힘이 없었다. 촛불을 든 시종 두 명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국왕의 발걸음에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 사람이 흠칫 놀라며 주인을 불렀다. “폐하..”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던 국왕이 고개를 들자 길 한가운데에 왕비가 버티고 서 있었다. 터벅터벅 이쪽으로 걸어와 시종의 손에서 촛불을 빼앗아 든다 “너희들은 물러나 있어.” 두 사람은 국왕과 왕비에게 절을 하고 시키는 대로 본궁으로 물러났다. 길에는 왕비와 국왕 두 사람만이 남았다. 별빛만이 차갑게 반짝이는 추운 밤이었다. 왕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국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첩으로 삼겠다고 한 건 너야.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역시 아무런 대답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럴 생각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집에 돌려보내는 게 어때?” “아니.....” 국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책임을 질 수 없게 돼. 폴라 양한테 어울리는 상대를 찾는 중이야.” “뭐라고....?” “국왕의 애첩이었던 여자라면 얼마든지 좋은 혼처가 생겨. 나 때문에 폴라 양이 파혼을 당했으니 새 결혼 상대를 찾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국왕의 빰에서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바보냐, 넌!” 가차 없이 국왕의 따귀를 갈긴 왕비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책임이라면 네 자신이 티면 될 것 아냐! 내가 이혼 소동을 일으킨 것도 그래서라고!” 국왕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다. 왕비능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국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폴라를 원하는 게 아니었어?” “......” “필요가 없으면 폴라 앞에서 확실하게 그렇게 말해. 어중간한 동정을 베푸는 것보다 그러는 편이훨씬 친절한 거야. 약혼자에 이어서 너한테까지 배신당하면 폴라는 그대로 수녀가 될지도 몰라. 필요 없는 여자라면 그래도 상관없겠지?” 국왕은 원망스러운 듯이 왕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왕비도 물러날 기색은 없었다.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해줄 때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며, 굳건하게 국왕을 노려보고 있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국왕은 긴 침묵 뒤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리” “뭐야?” “내 어머니는, 내 친어머니는 국왕을 사랑했기 때문에 죽었어. 겨우 스무 살에....” “.....” “여기는, 왕궁은 결코 살기 좋은 곳이 아니야. 폴라 양한테는 너무 가혹한 곳이야.” “.......” “왕의 애첩이었다는 경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어. 유망한 젊은이라면 얼마든지 있지. 굳이 고통스러운 측실의 삶을 폴라 양한테 강요할 필요는 없잖아.” 왕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꾸물거리던 이유가 그거야?” “사람 하나의 인생이 걸려 있어. 정말로 이런 곳에 둬도 좋을지..., 정말로 폴라 양을 위하는 거지....” 국왕은 보기 드물게 망설이고 있었다. 한때는 저 사람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왕궁에 온 뒤부터 갑자기 불안의 그림자가 비쳤다. 상류계급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갑자기 신분이 상승한 인간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냉담하고 음험한지는 국왕 자신도 지겹도록 겪어보았다. 국왕은 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오던 폴라에게 그런 경험을 강요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지만, 왕비는 국왕의 그런 갈등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딱 잘라서 말한다. “폴라의 마음은 어떻게 되지?” “......” “됐어. 이를테면 유명한 청년한테 폴라를 밀어붙인다 치자. 네 명령이라면 폴라는 자기 마음을 강제로 억누르고라도 시키는 대로 하겠지. 그럼 어떻게 되지? 처녀인 채로 양도? 신랑이 첫날밤에 뒤집어지게 놀라겠네.” 국왕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을 좀 가려서 하는 게 어때?” “그런 말 할 자격 있어?” 왕비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폴라는 여자야. 좋아하는 남자 곁에 있고 싶다, 안기고 싶다는 마음을 지닌 평범한 여자, 아껴주라고.” “........” “이제 와서 다른 남자한테 넘겨버리면 정말 울리게 될 거야.” 국왕은 한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너 같은 왕비를 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 그 왕비의 권한으로 말하지. 너, 오늘은 부용궁에서 묵고 내일 아침까지 먹고 돌아와.” “응......” “귀찮게 뭉그적거리지 말고 썩 가서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와. 이번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오면 두들겨 패줄 거야.” 한없이 난폭한 말을 부드럽게 내뱉고서, 왕비는 시종에게서 빼앗은 촛불을 국왕에게 밀어붙였다. 어쩔 수 없다. 국왕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 불빛이 작아지면서 부용궁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왕비는 발걸음을 돌렸다. 캄캄한 나무그늘 뒤에서 작은 불빛이 나타났다. 막 초에 불을 붙인 시녀장이 앞으로 나와 왕비에게 다가왔다. 부용궁에서 본궁까지는 잘 정비된 길이 이어져 있다. 나란히 걸어가면서,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본궁의 입구를 지나칠 때, 시녀장은 왕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고생을 끼쳐드렸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산책로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있어도 시녀장의 입술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왕비는 가죽옷만 입고서도 태연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시녀장은 시종에게 명해 가까운 방에 불을 피우고 따뜻한 홍차를 가져오게 했다. “그 녀석 어머니는 불행했다고 생각해?” 왕비는 난로 앞에 앉자마자 그렇게 입을 열었다. 시녀장은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제 어리석음 때문에 그분의 목숨을 어이없이 빼앗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분했는지 모릅니다. 하오나 뒤르와님을 사랑한 것이 불행이라고는.......그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동감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불행일 리가 없어.” 웨트카 마을의 폴라와 전 국왕 뒤르와의 사랑은 우연히 불행한 결과로 끝났다. 그것뿐이다. “전부 그 페르젠 때문이야.” “아니오. 직접적으로 그분을 죽인 것은 페르젠 후작입니다만 실제로는 궁정의 원년이 죽인 셈입니다.” “가난한 농민의 딸 따위가 국왕의 자식을 낳게 할 수는 없다는?” 왕비도 떨떠름하게 말하고서, 조금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가난한 귀족의 딸이면 허용 범위에 들어갈까?”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가 생기겠지요. 다행히 현재의 왕비님은 애첩의 존재에 관대하시니까요.” “폴라한테는 시녀장도 있으니까.” 시녀장도 미소를 지었다. 현재의 자신은 평범한 시녀였던 29년 전과 다르다. 국왕의 아이도, 그 모친도 지켜낼 힘이 있다. 그런 자신에 가득 찬 미소였다. 그즈음 국왕은 폴라와 마주보고 있었다. 궁의 조명은 모두 꺼졌고 심부름꾼들도 모두 잠들어버린 상태라, 뒤뜰로 돌아가 촛불을 그고 초를 내려놓은 채 나무에 기어 올라가 폴라의 침실 창문을 두드린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완벽한 밤손님이다. 폴라는 놀라면서도 국왕을 침실로 맞이했다. 촛불을 켜다 국왕의 빰이 빨갛게 부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 찬물을 가져왔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얼굴이....” “왕비한테 맞았습니다.” “네?!” “어물거리지 말고 썩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오라고, 아니 정말...봐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 말입니다.” 폴라는 숨을 삼켰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국왕의 빰을 닦아주고서, 국왕이 침대에 앉아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시트를 넣어두는 상자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상대가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지만 지인들 대부분이 둔감하고 어수룩한 멍청이라고 한탄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실은 왕비에게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아니지요.” 폴라는 깜짝 놀랐다.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며, 입은 거의 비명이라도 지르려는 듯이 벌어졌다. 간신히 비명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하, 하지만, 그......그건....왕비님은 그,,,,부, 불륜을......?” 국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간신히 미소 정도로 그치고 고개를 저었다. “불륜하고는 다릅니다. 왕비는 저와 만나기 전부터 그 사람을 자신의 반신으로 정했었지요.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고 어쩌다 보니 중앙의 권력 투쟁에 말려들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에게 돌아가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여기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좋다고 억지로 부탁해서 결혼한 겁니다.” 폴라는 쑥쓰러운 듯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왕비님은 승리의 여신이시니까요.” “예. 왕비의 존재는 제게 있어 귀중한 보물입니다.” 국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국왕으로서의 저에게는 지켜야만 할 것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이 나라의 영토도자유도 제가 등에 지고 있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리의 말 대로였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질 때 역시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애정을 받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난방 시설이 없는 침실에는 촛불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국왕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전 당신에게 아무 약속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지한 표정으로, 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실부인의 지위도 드릴 수 없습니다. 한 가정의 여주인으로서 집안을 맡으시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기는커녕, 다른 여성을 도 측실로 맞아들이지 않는 다는 보장조차 할 수 없습니다.” “네......” “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유력한 귀족이나 동맹 상대가 우호의 증거로 여자를 보내온다면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까?” 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똑바로 국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같은 여자라도 괜찮으시다면 곁에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서 폴라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대담한 소리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4 장 “그러니까 결국, 네가 엉덩이를 걷어찼다는 말이지?” 기가 막힌 듯이 이븐이 말했다. 왕비는 기가 막힌 건지 쓴웃음을 짓고 있는 건지, 복잡한 표정으로 턱을 짚고 있었다. “정말 그 바보는... 시녀장하고 라티나 얘기 듣고 죽는 줄 알았어. 나.” 이븐도 쓴웃음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 녀석 다운 셈이기는 한데....하지만 뭐랄까, 난 오히려 그 상황에서 널 끌고 나온 부인들 쪽이 굉장하다고 생각해.”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이 왕비님이라면 임금님 엉덩이도 걷어찰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잖아? 그게 굉장하다는 말이야. 보통 임금님이라는 건 조금 더 정중하게 다뤄야 하지 않나?” “그렇게 조심하고 있어서는 얘기가 진행이 안 되잖아.” 왕비는 불평을 해대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국왕과 폴라의 사이는 원만하게 진행된 듯, 지금은 부용궁의 분위기도 훨씬 밝아졌고 폴라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국왕이 매일같이 저녁을 들러 오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전적으로 기뻐하는 왕비라는 것은 확실히 보기 드문 존재이다. 질투는커녕 진지하게 이런 소리까지 내뱉는다. “월도 이제야 간신히 신혼인데. 한동안 탄가도 파라스트도 얌전히 있어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눈치가 좋은 녀석들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븐은 폭소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웃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공격의 창끝이 갑자기 자신 쪽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지. 이븐. 혼담은 어떻게 됐어?” 왕비의 눈앞에서, 시녀가 만들어온 요리를 열심히 집어먹던 남자는 살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을 했다. “싫어서 도망 다닌다면서? 애비라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질.” 단적인 설명이다. 이븐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신음했다. 베노아의 두목은 국왕의 부름을 받아 얼마 전부터 왕궁에 체재하고 있었다. 지금도 분명히 남쪽 별관에서 국왕과 면담 중일 터. “그 자식....” “안 내켜?” “당연하지!” “왜?” “아무나 다 가져다 붙이려고 하지 마! 애비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어!” 왕비는 이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될 것 아냐?” “말했어! 그렇다고 얌전히 포기할 상대였으면 고생도 안 한다고.” 점점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쪽에 그럴 생각이 없으면 억지로 강요해도 전혀 의미가 없잖아?” “당연하지. 베네사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우수한 두목이야. 하지만 외동딸의 어머니이기도 하니까 그게 곤란한거라고. 어째서인지 날 찍어놓고서 앞뒤 안 가리고 계속 결혼하라고 들이대니까.”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이건가.”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마.“ “나한테는 남의 일인데.” 셰라가 웃음을 참고 있었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한 소년에게 이븐은 장난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남의 일이라는 듯한 표정이지만, 너야말로 어때? 언제까지나 여자 행세를 하고 있으려면 답답할 텐데.” 그 말을 들은 셰라는 청 보랏빛 눈을 크게 뜨면서 깜찍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왕의 호위대장은 감탄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지겨운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남자로 보이면 눈이 빈 거겠지만....” 당사자인 시녀는 곤란한 듯이 웃고만 있었다. “보기 흉한 모습이라 조송합니다. 전 이게 더 편하거든요.” “흉하다니 무슨. 잘 어울려.” 왕비는 진지하게 말했고, 이븐 역시 그 의견에는 찬성이었다. “뭐, 본인이 그걸로 좋다면야 남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지. 혹시 기분 전환이 하고 싶거든 말해. 싯서스에서 제일 괜찮은 데를 소개해줄 테니까.” 긴 치마를 우아하게 두른 왕비의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몸차림을 둘러보았다. “이런 꼴로 유곽에 가라고요?” “가게 아가씨들이 깜짝 놀라겠지. 자기들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자기들을 사러 오면.” 왕비가 한숨을 쉬었다. “여자 차림이 편하다니 정말 부러운 체질인걸. 난 이 몸이 지겨워 죽겠는데.” 독립기병대장도, 여장을 하고 있는 소년도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 사람은 여자로 있어야 한다는 게 불쌍한 성격이니까. 이븐이 놀리면서 말했다. “여자의 마음이라는 것도 전혀 모르고 말이지?” 폴라 얘기를 두고 비웃는 것이다. “그건 여자의 마음이라기보다 신분의 상하를 신경 쓰는 거지.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당당하게 변명하고서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게, 사실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더. 샤미안도 그렇지. 어째서 너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거지?” 이븐이 눈을 확 부릅떴다. “무슨 소리야?” “샤미안에게 혼담이 들어왔어.” “호오?” “그런데 별로 마음이 안 내키나봐.” “헤에?” “그러니까 난 너하고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쨌거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 이븐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그건 네 착각이야. 어째서 거기에서 내가 나오는 거야?” “잘 어울리니까.” “아까는 애비하고 나도 잘 어울린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븐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면 그걸로 끝이야. 그렇지?” 단순한 만큼 왕비의 말은 실로 날카로웠다. “저쪽이 이쪽을 신경 쓰고 이쪽도 저쪽이 신경 쓰인다. 이거라면 충분히 가능ㅇ서이 있잖아.” 왕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븐을 바라보았지만 검은 옷차림의 산적은 웃으면서 그 시선을 넘겨버렸다. “농담이 심한 걸. 그렇다고 어째서 샤미안 양인데? 상대는 백작가의 따님이고 난 그냥 산적이야. 어울릴 리가 없잖아. 나도 도라 장군 손에 죽고 싶지는 않다고.” 왕비의 별궁에서 늦은 점심을 들고 있던 남자는 거기에서 얘기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그때 벨민스터 공의 심부름이라며 중년의 시종이 나타났다. 당연히 왕비에게 용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븐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남자는 이븐을 향해 자신의 주인께서 방문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정중하게 말을 전했다. 검은 옷차림의 산적이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당연했다. “그 여 공작님이 나한테 무슨 얘기가 있다는 거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본궁의 대기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으시다고.....” “지?” “예”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븐은 남자와 함께 본궁을 향해 내려갔다. 이븐을 안내한 시종은 방 바깥에서 손님의 방문을 고하고, 자신은 문 밖에 선 채 한 발짝 물러났다. 얘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리겠다는 뜻인 모양이다. 문을 열어준 것은 깨끗한 옷을 걸친 하녀였다. 왕궁 시녀의 제복이 아닌 걸로 봐서는 아마도 벨민스터가에서 직접 따라온 사람인 듯하다. 이븐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식이 너무 거창해서 왠지 마음에 안 들었다. 처음 들어와 보는 방이었지만 내부 장식은 화려했다. 왕궁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벨민스터 공은 변함없이 남장을 한 채 딱딱하게 긴장한 얼굴로 이븐을 맞아들였다. 서리궁에는 치마를 걸친 남자가 있고, 본궁에는 바지를 입은 여자가 있다. 어쩐지 우습게 느껴져서 이븐은 입가에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인사했다.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시녀도 물러나게 하고 둘만 남게 되자 로자몬드는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오시라 해서 정말로 실례했습니다. 예전부터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곽에 있는 당신의 거처에 사람을 보내려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 “아하, 그래서 제가 서리궁에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심부름꾼을 보낸 거군요?” “예.” “그래서, 대체 무슨 얘기입니까? 당신이 이렇게 만나는 걸 단장이 봤다가는 좀 곤란해지는 것 아닙니까?” 여전히 농담을 늘어놓는 남자에게, 로자몬드는 청회색 눈망울에 힘을 주며 딱 잘라 물었다. “당신이 베노아의 질이라고 부르는 남자에 대해서 얘기해주시길 바랍니다.” 국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베노아의 질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신이 게오르그 아저씨와 아는 사이였다니, 정말 놀랐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정말 세상은 좁군요. 생각해보면 당신의 양 아버님은 스샤의 영주, 제 친구가 살던 곳도 스샤였으니 관계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게오르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영주의 아드님과 아는 사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그건 또 왜지?” 질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 그 땅에 사는 이상 영주에게 조세를 바쳐야 합니다만, 내라한다고 얌전히 낼 인간이 아니었으니까요.” 국왕은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석연치 않은 듯이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내고 있었을까?” “속 편한 아드님이군요. 양 아버님의 수입원 아니었습니까?” “할말은 없군.” 진지하게 말하고서 국왕은 웃으며 덧붙였다. “어렸을 때는 아저씨에게 굉장히 신세를 졌지. 도끼나 끌 쓰는 법도 배운데다, 숲을 다니는 방법이나 동물의 발자국을 구분하는 법, 붙잡은 동물을 도살하는 방법까지 배웠어. 아마 그걸로 받은 셈친 거겠지.” 질도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그분도 상당히 대담한 분이셨군요. 그 게오르그를 자식의 선생으로 붙이다니. 봐주는 게 없는 인간인데 말입니다......” “음, 엄청난 박력이었지. 정말 무서워서 제대로 말도 못 걸었으니까.....” “이런, 이런, 국왕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요.”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국왕은 다시금 용건을 꺼냈다. “아저씨의 고국인 스케니아가 중앙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네.” 베노아의 두목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없이 뒤를 재촉했다. “조라더스가 스케니아에 사자를 보냈다는 사실은 이쪽에서도 확인했지. 무슨 미끼를 내걸었는지 몰라. 얘기가 어떻게 진행되려는지도 알 수 없지. 하지만 최악의 경우 탄가-스케니아 동맹이라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 그래서 묻고 싶네만, 스케니아에 있어서 지금 상황에 가장 도움이 될 물건이 어떤 걸지 혹시 모르겠나?” 질은 한참 옛 기억을 반추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남자가 자기 나라에 대해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뿐이었지요. 겨울이 되면 입김까지 얼어붙는다든가, 말이 생선을 먹는다든가....” “말이 생선을?” “먹는다고 합니다. 물론 비상시의 이야기지만요. 배에 말을 태워도 사료까지 실을 여유는 없다던가요. 바다 위를 이동하는 동안에는 말한테도 생선을 먹인다고 들었습니다.” “배를 자주 사용하는 걸까?” 질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지금 얘기는 클랜 항구에서 상인의 배가 말 사료를 싣는 걸 보고서 게오르그가 했던 말이니까요. 저희들은 그 배의 경호원으로 고용되어서 탔습니다만...., 그렇군요 배에 지붕이 있다는 데에 놀라더군요.” 이번에는 국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에 지붕이라니?“ “갑판 말입니다. 그러니까 게오르그가 알고 있는 배라는 것에는 거주 구역을 만들 만한 깊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중앙에 나올 때까지 깊이가 얕은 소형 선박밖에 본 적이 없는 모양이더군요. 그런 배로는 먼 곳까지 갈 수없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도 그 배로 죽음의 바다를 건너왔다고 했을 정도이니 소형선이라도 성능은 상당히 좋은 것 같았습니다. 갑판이 넓은 대형선을 타도 감탄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덩치가 큰 배로는 얕은 해역도 건널 수 없고 강으로 올라갈 수도 없을 거라면서 말이지요. 속력도 늦고, 장점이라면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다는 것뿐이라고 오히려 바보 취급하더군요.” “참고로 겨울의 향해는?” “그건 무리겠지요. 이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중앙의 튼튼한 배라 하더라도 겨울에는 향해가 불가능하다. 겨울에는 날씨가 변하기 쉽고, 장거리 향해 역시 굉장히 위험해진다. 가능한 것은 그날 아침에 출항 여부를 정할 수 있는 근해어업 정도일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질은 혼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케니아인이 전부 게오르그 같은 성격이라면 적으로는 돌리고 싶지 않군요. 한없이 난폭하고 지극히 용한한데다. 특히 고집에 있어서는 중앙 사람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 반면에 얘기를 해보면 의외로 화해는 어렵지 않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사람들에게는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왕을 위해서, 그런 쓸데없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지요. 싸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산에게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니까, 용서할 수 없으니까, 혹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정말로 알기 쉽지요.” 국왕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 “그렇겠지요. 게오르그가 나라를 뛰쳐나온 것도 그게 원인이었습니다. 돈을 처바른 저택 안에 콕 박혀서 쓸데없이 이것저것 지시나 내리고 싶어 하는 인간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다고요. 이건 트루디아의 관리와 조금 충동이 생겨서, 그 녀석을 두들겨 패고 도망쳤을 때 했던 말이지요. 아마 스케니아에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질은 어깨를 으쓱했고 국왕은 살짝 눈을 치떴다. “상당히 여기저기를 다닌 것 같군.” “옛날에는 요.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게오르그의 언동이나 인품 정도입니다. 이런 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내가 알 고 있는 아저씨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니까.” 질은 씨익 웃었다. “거기에 술이 들어가면 갑자기 말수가 많아지면서, 깨진 놋그릇 같은 목소리로 지치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니까요. 정말 그것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영원히 침묵을 지킬 수 있고, 한번 사우겠다고 결심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적보다 먼저 쓰러지지 않는다, 설령 온몸에 화살이 박혀도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싸운다. 그 남자에 대한 제 감상은 대충 그렇습니다.”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 자신이 그 사람에게 느꼈던 위압감은 결코 지나친 게 아니었다. ‘게오르그 아저씨’ 같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와 공격한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난 내 병사들의 용맹함을 믿고 있지만....델피니아의 병사들은 그런 적군에 면역이 없어. 지휘관이 거느리는 군대를 상대하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지.” “정말 다릅니다. 예..., 기탄없이 말씀드리자면 야수 무리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그 야수 하나하나는 지극히 효과적으로 무기를 다루지.” “예.” 남쪽 별관의 사실에 침묵이 깔렸다. 창 밖에는 빛바랜 잎사귀가 떨어지는 광경이 펼쳐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게 하고, 이 방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그런데....” 조금 분위기를 바꾸며 국왕이 말했다.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네.” “무슨 일이실까요.” 국왕은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멜민스터 공 로자몬드가, 당신을 행방불명된 사촌오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지금은 광대한 타우 산맥을 다스리는 영주이기도 한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 다듬어진 수염 끝에 살짝 미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국왕의 진지한 시선 앞에서 질의 미소는 점점 재미있다는 듯이 변해갔다. “그거 곤란하게 되었군요. 어떻게 대답하는 게 마음에 드시겠습니까?” “나도 곤란한 상황이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정해줬으면 좋겠네. 나는 조던 베링저가 아니라고 당신이 말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벨민스터 공이 납득하지 않겠지.” 질은 눈을 치뜨다가 점점 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설마 긍정하는 겁니까? 벨민스터 공의 사촌오빠로서 한때 폴리시아 평원의 소유자였던 베링저가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인간이 산적 나부랭이가 되어 있다고? 게다가 그게 저라고요? 민폐도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그런 얘기가 흘러나갔다간 전 내일이라도 유언비어 날조 죄로 감옥행입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을 덧붙인다. “쓸데없는 망상은 그만두라고 그 여 공작님께 전해주십시오. 그쪽이 훨씬 건설적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이리 좀 와보겠나.” 국왕이 일어나며 옆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문제의 그 그림 두 장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곁에 서 있던 국왕조차도 이 남자가 뭔가 충격을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변함없이 초연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두 장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라고밖에 생각 할 수 없는 얼굴과-. 수염을 떼어내고 눈과 머리색만 바꾼, 꼭 닮은 얼굴을 말없이 바라본다. 국왕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벨민스터 공이 말하는 근거야.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사촌오빠를 당신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지. 곤란하게도... 내 손에는 그 추리를 자신 있게 부정할 만한 근거가 없어. 그건 당신의 착각이고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 말하는 건 간단하지.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벨민스터 공이 납득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야.” 거친 사내들을 통솔하고 있는 두령도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그 여 공작님은 왜 그 사촌오빠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몇 십 년이나 계속 행방불명 상태 아닙니까. 죽은 거라고 생각해버리면 해결될 문제일 텐데요.” “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당신이 조던이라면 폴리시아를 반환하고 싶다더군.” “정당한 주인이 살아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위를 확실하게 가려달라고 완고하게 주장하고 있어. 최악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려 들지도 몰라.” 빽빽한 수염으로 덮인 얼굴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 앞에서 제게 당신을 조던 베링저냐고 질문을? 바보같은 얘기로군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남자들 이상으로 우수하다는 평판을 듣던 공작도 결국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고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국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질러버릴지도 몰라. 알고 있겠지만 난 그런 사태만은 피하고 싶네. 아니야. 피해야만 해. 델피니아를 위해서도, 타우를 위해서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지혜를 빌리고 싶네.” 질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남자의 초상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묻는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태연한 말투와 질문의 내용에 놀라면서도 국왕은 대답했다. “레이먼드 베링저 경. 벨민스터 공의 주장이 맞는다면 당신의 아버님이 되는 셈이지.” “조던 베링저의 아버지.....겠지요?” “그렇다.” “그럼 착각입니다. 생각 외로 많이 닮기는 했지만 전 출신도 성장도 비천한 인간입니다. 훌륭한 이름도, 이런 아버지도 가져 본 적이 없지요.” 국왕은 눈을 치떴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것보다도 부친을 부정하는 완고한 태도에 놀란 것이다. “질....” “그 정도로는 그 여공작이 납득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신다면, 국왕의 권으로 더 이상 발언하지 않도록 명령하면 될 일입니다. 국왕의 명령이라면 그 고지식한 여공작도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저 같은 산적에게 일일이 의견을 묻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쉽지 않습니까?” 조용한 목소리였다. 담담하고 건조한 어조. 국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제야 차라리 질이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처리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조던이 모습을 감춘 것은 30년 전, 국왕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집을 나갈 때에 무슨 일이 있었던 이미 먼 과거의 일이니 이제와 무슨 집착이 있을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씁쓸하게 고개를 숙이는 국왕에게, 질은 짧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물러났다. 방을 나서자마자 질은 왕비의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연령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왕비는 베노아의 두목의 좋은 이야기 상대였다. 잡담 상대라고말해도 좋았다. 질은 시원시원한 남자로, 상대가 왕비라 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잘 맞았다. 그래서 오늘도 조금 어울리려고 했던 왕비는 상대의 분위기에 조금 당황했다. 표정도 거동도 평소와 다름없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듯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왕비는 질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시간 좀 있어?” “폐화와 같은 용건이라면 거절합니다.” “같은 용건이란, 그 그림말이야?” “알고 계신다면 굳이 물으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 성큼성큼 걸어가는 키 큰 남자에게, 왕비는 뒤처지지 않고 따라간다. 남쪽 별관과 본궁을 연결하는 복도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왕비는 그래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닮았다고 월도 그러던데.” “이런, 이런. 비슷한 얼굴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전하까지 영지 문제에 그리 열심이십니까?”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른 얘기야.” “무슨 얘기일까요.” “이븐 말이야. 옛 친구의 아들인 줄 몰랐었다면서?” “예. 정말 놀랐습니다. 여자애라고만 생각했었으니까요.” “이븐을?” “예.‘ 남자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제야 처음으로 왕비를 내려다보면서 조금 미소를 짓는다. “정말 어렸을 때 보았으니까요. 두 살인가, 세 살인가...금발을 늘어뜨린 정말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크면 분명히 엄마를 닮아서 미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밉살스러운 사내놈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하지만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는 부모한테 물어봤으면....” 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래서 얼굴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친구였잖아?”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도 그렇고 당신 남편도 그렇고,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뒷사정 캐기를 좋아하셨던 겁니까? 다른 사람의 옛날 얘기 따위 들어봤자 재미도 없을 텐데요.” 왕비는 조금 주춤했다. 그다지 좋은 취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반쯤은 호기심에서 물어본 것이고, 가만히 있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갈등 끝에 말을 꺼냈다. “화낼 라는 건 잘 알고서 묻는 거지만, 이븐의 어머니하고는 어떤 사이였어?”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그냥 친구였는지, 아니면....” 말을 끊고 왕비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찌푸리는 게 아닐까 했지만 의외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 친구 마누라에게 손대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그냥 평범한 친구는 아니었지?”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요.” “그럼 비앙카가 변심한 거야?” “아니오. 그렇게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저도 게오르그가 비앙카와 사귄다는 걸 알고 있었고, 게오르그도 제가 비앙카와 사귄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양다리를 걸친 거야?” “아니, 아닙니다....” 질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절조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본인한테도 바람을 피울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당신들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곤란했지요. 저희들도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븐은 질의 아들일지도 모르잖아?”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질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사리 말했다. 그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말투도 태도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올해로 스물일곱이라니 계산은 맞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는 일입니다.” “상관없다니...” 왕비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질의 상태나 표정에 짜증이 섞여 있는 것부터가 의외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차가운 눈으로, 베노아의 두목은 왕비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의 한쪽 다리가 의족이었다는 얘기는 당신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제가 한 짓입니다.” 왕비는 눈을 부릅떴다. 처음 들어보는 질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눈빛에 압도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굳이 변호하자면 제가 직접 다리를 벤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이지요. 게오르그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전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지요. 두 번 다시 게오르그 앞에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결심을 지켜왔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온 남자의 얼굴에 고통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왜 하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녀석이 누구 아들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아이만 아니라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저도 저지만-솔직하게 말해서 비앙카를 꼭 닮은 그 얼굴을 곁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인데도......?” “그만 두십시오.” 남자의 어조는 한없이 냉랭했다. 검은 눈은 조금도 웃지 않으면서도 입 끝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위압적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이븐한테 그렇게 말해봤자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지요. 그 녀석은 게오르그와 비앙카의 자식입니다.” “죽어도 그렇게 우길 생각이야....?” “그게 사실이니까요.” “.......” “설령 당신이 말하는 대로라고 하지요. 그럼 저는 타우의 두목이면서 자신의 아들을 편애해서 부두목으로 세운 셈이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두목 자리에서 쫓겨나도 할말이 없을 정도의 오점이고 치욕입니다.” “......” “그러니 이 얘기는 이걸로 그만 하십시오. 폴리시아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태까지처럼 벨민스터가의 관할 하에 두기를 권합니다. 능력도 없는 인간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건 멍청한 짓입니다. 당신도 그걸 모르실 분은 아닐 텐데요. 저기 기둥 뒤에서 엿듣고 있는 남편 분께도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등을 돌리는 질을 바라보다가 왕비는 한숨을 쉬었다. “엿들을 거면 기척 정도는 좀 수기지 그래?” 실로 정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국왕에게는 그 농담에 대해 대답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창백한 얼굴로 신음하듯 묻는다. “정말이야...?” “아마도. 난 게오르그도 비앙카도 모르지만, 이븐하고 질은 딱 닮았잔아. 너도 눈치 챘겠지?” “아니, 닮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하지만!” 왕비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연하게 닮은 거라고 생각했어. 저 두 사람은 타우에서 만날 때까지 생판 다른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타인치고는 묘하게 닮았다, 꼭 부자 같다고만 생각했었지. 설마 정말일 줄은....” “하지만... 믿을 수 없어! 전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부자가 우연히 타우로 흘러 들어와서 완전 남남 사이로 만나서 마음이 맞았다고? 그런 우연이 존재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질도 귀족 도련님이었는데 신분도 지위도 다 버리고 자유와 모험을 택한 거야. 그 아들인 이븐이 같은 생각으로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고 해도 어쩔수 없잖아?” “으음....하지만.....하지만 말이야.” 국왕은 머리를 싸쥐었다. “질이 말하는 대로야. 이븐은 천지가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그런 것 인정하지 않을 거야.” 월 그리크는 이븐의 가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말수가 적은 아버지와 명랑한 어머니, 행복으로 가득 찬 숲 속의 작은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비 역시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사정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복도에서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은 보기 드물 정도로 진지하게 신음하고 있었다. 마침내 천장을 올려다보던 국왕이 중얼거렸다. “자기 자식을 편애해서 부두목으로 만들었다고 오해 사는 건 참을 수 없다....” 그것이 타우의 방식이고 규정이다. 효율적인 동시에, 무능한 주제에 핏줄만을 중시하는 특권 계급의 방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질은 타우의 그런 사고방식을 사랑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보다도 더욱 아끼고 있었다. 비록 몰랐다고는 해도 그 규정을 스스로 깨뜨리게 된다면 저 남자는 두목의 지위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타우까지도 버리게 될지 모른다. “젊었을 때의 방랑하고는 얘기가 달라. 이제 와서 질이 고향을 떠나게 만들 수는 없어.” “응.” “우리는 아무 얘기도 안 들었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 “하지만 로자몬드는 어떻게 하지?” 애초에 거기에서 시작된 문제였다. 국왕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벨민스터 공이 집착하는 건 폴리시아를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야. 꼭 질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무슨 의미야?” “그러니까, 질이 베링저 가문의 장남이고 이븐이 그 질의 아들이라면..., 이븐에게도 폴리시아 평원을 넘겨받을 자격은 있다는 말이야.” 왕비는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도 한가운데에 서서 힘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거 굉장한 농담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최악의 농담이지만..., 사실이야.” “그럴 경우에는 서자라도 상관없는 거야?” “바람직하지는 않아. 내가 즉위할 때에도 그래서 문제가 있었지. 우선 네 직감 말고는 아무 증거도 없어. 그래도 땅을 나눠먹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쓰레기 같은 친족들한테 넘겨주는 것보다는 직계 자손에게 넘기는 편이 훨씬 낫겠지. 죽은 베링저경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왕비는 복잡한 표정으로 콧등을 긁적이고 있었다. “이븐에게 폴리시아를?” “지금은 무리야. 이븐은 아직 너무 젊으니까. 하지만 5년에서 10년. 아니면 그 뒤라도 상관없어. 누국나 그 남자라면 폴리시아를 넘겨줘도 과분하지 않다고 평가할 만큼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먼 미래의 얘기비난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 말, 로자몬드한테 할 거야?” “아니. 침묵은 금이야.” 국왕은 엉겁결에 이상한 격언을 들고 나왔다. “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가능한 한 소수로 한정해두고 싶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폴리시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정도만으로, 일단은 좀 참아달라고 해야겠지.” “그럼.....이븐한테도 비밀이야?” “당연하지. 이런 소릴 해봐. 그 자리에서 절교 당할 걸.” 국왕은 진지하게 말했고 왕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모처럼 손에 넣은 토지의 주인과, 둘도 없는 아국이기도 한 정예군의 지휘관을 동시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 질의 말대로 이 얘기는 여기에서 그만두는 편이 좋을 듯했다. 굳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벨민스터 공을 보았을 때 질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덤으로 공의 곁에는 이븐까지 함께 있었다. 질을 본 이븐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질의 신원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당했던 것이다. 물론 하나도 모른다고 사실대로 말했지만, 로자몬드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당신의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모쪼록,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븐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태도는 좋아하지 않는다. 자유민의 생활에 완전히 물들어버린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발로와도 충돌하는 것이지만, 어째서 그 약혼자까지 똑같은 식으로 나오는 걸까. 기가 막히고 귀찮기도 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절 들볶지 말고 본인한테 ㅁㄹ어보면 될 것 아닙니까. 마침 지금 폐하으 ㅣ부름을 받고 남쪽 별관에 갔으니까요.” 그것이 실수였다. 그러면 같이 와 달라면서 억지로 이븐까지 끌고 온 것이다. “아....그럼 전 실례합니다.” 이 여공작이 산적인 질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지 이븐은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로자몬드의 목소리가 이븐을 붙들었다. “아닙니다. 기다려주십시오. 당신이 증인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증인?” “예.” 질은 보조를 늦추지 않고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 앞에서 멈춰 서더니, 평소와 변함없이 장난기 어린 어조로 이븐에게 말한다. “남의 약혼자호 밀회라니, 꽤 하잖아?” “농담할 때가 아냐.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대.” “호오?” 관리 중 한 명이 오른쪽 복도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로자몬드는 그 관리를 피하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로 옆에 있던 작은 방으로 들여보냈다. 질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남이 들어서는 곤란한 얘기라는 정도는 판단이 되는 모양이다. 방 안에 들어선 로자몬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짜 이름을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질이 제 이름입니다. 아가씨.” “그건 단순한 통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엘리너 고모님과 레이먼드 고모부 사이에서 태어난 제 사촌오라버니가 아니신지요?” 이븐이 깜짝 놀랐다. “사촌오빠라니..., 질이 당신의?!”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의 진짜 이름은 조던 크레이스 베링저라고.” 뚫어져라 질의 얼굴을 바라보던 로자몬드는 이븐의 안색이 변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븐은 경악하며 질을 보다가 다음 순간에는 그 표정을 숨겼다. 타우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는 곁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았다.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착각입니다, 아가씨. 지금 폐하께도 똑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전 그렇게 거창한 이름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출신을 말씀해주십시오. 태어난 곳은? 양친의 성함은?!” 질의 표정은 거의 쓴웃음에 가까웠다. “글쎄, 거 곤란한 질문이군요. 양친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십니까?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저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따위, 저도 모르는 사실을 말씀드릴 방법은 없군요.” 딱 잘라 말하는 남자를 보며 로자몬드는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다시금 확인하듯 묻는다. “정말로 착각이라는 겁니까?” “예.” “서약의 신의 이름을 걸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폴리시아에 갔던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무리구요. 아가씨, 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폴리시아를 지나다녔습니다. 서약의 신의 이름을 걸고 가본 적도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군요.” 로자몬드는 한동안 침묵하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도 수염도 검은 색. 이 사람이 자신의 사촌오빠라면 이미 40대 후반이 테지만 외모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검은 눈이 신비롭게 빛나면서, 오히려 이쪽을 탐색하는 듯이 로자몬드를 바라보았다. “로버트 고모부도, 고드프리도 조던의 사망 신고서는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최후의 당주였던 고드프리는 후계자 없이 죽었습니다. 여동생들의 결혼 지참금만을 제외하고, 폴리시아를 포함한 저 재산을 어머니와 형에게 남긴다는 유언이었지요. 엘리너 고모님은 자신이 지참금으로 가져갔던 영지와 저택을 조던 앞으로 남겼습니다. 포리시아는 지금까지도 계속 진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자몬드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의....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최후의 소원입니다.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아가씨.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저는 타우의 두목이지, 당신의 사촌오라버님이 아닙니다. 게다가 폴리시아 평원의 영주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곤란한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시원시원한 말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지만, 약간 우울한 기색이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로자몬드는 가만히 질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말없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서둘러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동안 이븐은 계속 침묵을 지키며 눈만 빛내고 있었다. 천천히 질을 돌아보며 말한다. “조던 크레이스 베링저?” “저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하나봐. 민폐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씁쓸한 말투였다. “그래서, 정말은 어떻게 된 건데?” “장난 하냐. 내가 귀족님이라고? 비스체스가 들으면 뒤집어져서 웃겠지. 뭐, 재미는 있는 얘기지만.” “하긴. 웃기는 얘기이긴 해.” 그렇게 꺼낸 말과는 달리. 이븐은 뚫어져라 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아버지하고 친구였다고 했지.” “그래.” “난 한번도 아버지 입에서 당신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래?” “귀족 도련님 주제에 전혀 귀족답지 않은 조던에 대해서라면 지겹도록 들었지만.” 베노아의 두목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가.” “역시 착각인 거야?” “그래. 게오르그는 여기저기에서 용병 일을 하고 있었어.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다고 해도 당연한 것 아냐?” “그렇겠지.” 이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짙은 색의 피부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푸르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정말 내 눈도 동태눈이었지. 너처럼 묘한 피부색의 꼬맹이가 그렇게 흔할 리가 없는데.....” 이븐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멍청했어. 설마 당신이 당신일 거라는 생각도 못했으니.” “어이어이, 그건 착각이라고 했잖아?” “알고 있어. 세상은 좁다고, 설마 아버지 친구였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말이야.” 문을 열려다 이븐은 머리를 긁적였다. 질에게 등을 돌린 채 말한다. “뭐, 본인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괜찮으면 대신 얘길 좀 들어주지 않겠어? 조던하고 만나면 전해달라고 아버지가 부탁했었거든.” 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얘기를 계속하라는 재촉으로 판단한 이븐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기 다리 일은 신경 쓰지 말래.” “.......” “어머니도 그러더군. 조던도 같이 있으면 훨씬 더 즐거울 텐데 아쉽다고. 게오르그가 저지른 실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놀러오면 좋을 텐데....라면서, 아니면 아직도 자기한테 마음이 있어서 얼굴을 비추기 힘든 걸까-남편하고 아들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 내 아버지이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한 다음 이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방에서 나갔다. 베노아의 두목은 변함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창문 밖을 바라보자 먼 창공을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질은 가만히 그 새들을 바라보았다. 로자몬드는 비통한 표정으로 본궁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모는-자신이 낳은 세 자식들을 먼저 보낸 엘리너 고모님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첫 남편의 자식인 장남을 걱정했다. 몇 십 년이나 행방불명인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하며 포기했지만 고모만은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은 그 아이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엘리너의 주장이었다. 그러니깐 조던은 죽지 않았다고. 그 아이만은 분명히 어디엔가 살아 있을 거라고. 그 믿음만이 고모님의 마음을 지탱해주고 있었건만. 고모님의 마음을 전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러웠다. 분했다. 본인이 뭐라고 하든 저 사람은 자신의 사촌오빠가 틀림없다고 로자몬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나 완고하게 부정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너 고모님은 저 사람의 친어미나 아닌가. 집을 나갈 때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그 사람을 걱정하던 고모님의 마음만은 알아주었으면 했다. 자신의 발치만 노려보면서 걸어가던 로자몬드는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멈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발로였다. 로자몬드는 서둘러 표정을 바꾸려 했다. 어느 틈엔가 본궁 내원까지 나와 있었다. 이 근처에는 시종들이나 심부름꾼들의 왕래도 잦고 서류를 한 아름 안은 서기관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아냐...” 간신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지만 발로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야?” 걱정하는 마음을 일부러 무뚝뚝한 말로 감추고 있지만, 지금의 로자몬드에게는 발로의 그런 배려까지 눈치 챌 여유가 없었다. “귀공하고는 관계없어!” 소리를 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시녀와 시종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본다. 공무에 사용되는 이 길은 이른바 ‘공공도로’인 셈이다. 대공작이 그런 곳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결코 바람직한 짓은 아니다. 로자몬드는 서둘러 약혼자의 곁을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그곳에서 떠났다. 발로도 굳이 쫓아가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시녀장이 나타나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발로님.” “오오, 시녀장. 형님의 애첩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왕비가 움직였다는 것 같더군요.” “예, 덕분에 잘되었습니다. 조만간 사람들에게 선보이려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전에 조금 드릴 말씀이....” “무슨?” “여기에서는 조금.....” 시녀장은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발로를 안내하더니 주저하면서 얘기를 꺼냈다. “폐하도 이번에 측실을 들이시게 되었으니, 큰맘 먹고 말씀 드립니다만....” “무슨 일이시지요?” “벨민스터 공작님 말입니다.” 발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얘기를 계속하라는 표정이다. 신장은 고개를 들고 더욱 목소리를 낮추면서 한동안 발로에게 문가를 얘기했고, 발로는 깜짝 놀라며 시녀장에게 뭔가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약 십여 분뒤, 벨민스터 공작가에 발로가 나타났다. 막 저택에 돌아온 로자몬드에게 면회를 요청하고, 지금은 몸이 좋지 않다는 시종의 말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로자몬드는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방 소파에 누워 있었다. 방에 들이닥친 발로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면회는 나중에 해달라는 말 못 들었어?” 발로는 그 말을 무시했다. 로자몬드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몸짓으로 소파 앞을 가리킨다. “거기 서봐.” “뭐?” “거기 서달라고.” “왜 귀공한테 지시를 받아야 하지?” “됐으니까 서봐.” “무례하군, 사보아 공! 여기는 내 집이야!” “일어서주지 않으면 내가 무릎을 꿇을 수 없잖아.” 로자몬드는 의자에 앉은 채 명하니 발로를 바라보았다. 발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청혼하러 온 거야. 부탁이니까 일어서줘.” “청혼....?” “그래. 여자가 의자에 누워 있는 채로는 폼이 안 나잖아. 뱃속의 아이한테 안 좋으면 누워 있어도 상관없지만, 청혼하는 동안만 일어서줄 수는 있지?” 로자몬드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물론 시키는 대로 일어설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로자몬드를 보고 발로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조금 화난 어조로 말했다. “시녀장한테 들었어. 어째서 더 빨리 얘기해주지 않은 거지?” 로자몬드는 아직도 굳어 있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보아 공. 저기, 마음은 기쁘지만 난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어. 미안.” “우리들 아이를 서자로 만들 생각이야?” 서글픈 질문을 받고 로자몬드는 초조해졌다. 당황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럴 생각은 없어. 단지,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폐하도 측실을 들이셨으니 조만간 후계자도 태어나겠지. 우리들 결혼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로자몬드가 뭘 걱정하는 지, 발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보아와 벨민스터가 이어지면 왕가에 필적하는, 혹은 서자에 지나지 않는 견 국왕을 능가하는 유서 깊은 혈통이 탄생한다. 그런 것, 자신들은 바라지도 않는데. 로자몬드는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멜민스터의 이름이 왕권을 위협하게 할 수는 없어. 공작가의 주인 된 몸으로 주군에게 해가 되는 짓은 삼가야 한다고...아버지는 스테판에게 가르치셨지. 귀공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나도...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발로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벨민스터가에서 사보아 공작의 저택까지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자택에 돌아온 발로는 로자몬드와 마찬가지로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집사인 카사가 술안주를 가지고 왔다. 몇 십 년이나 사보아 가문에서 일한 사람답게 주인이 뭔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는 말없이 주안상 준비만 하고 물러가는 우수한 집사였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헛기침을 하며 주인의 주의를 끌었다. “주인님. 조금 드릴 말씀이....” 발로가 대답하지 앉자 카사는 혼자서 말을 계속했다. “실은 그 낮의 일입니다만..., 벨민스터 가문의 집사가 찾아와서.......” 이렇게나 가까운 저택의 집사들이니 서로 아는 사이인 것도 당연하다. 카사는 불편한 듯이 말을 이었다. “그 집사가 말하기를, 저쪽 주인님의 상태가 최근.., 그.....” “배가 불러온다고 하던가?” “아, 알고 계셨습니까?” “바로 지금 청혼하고 오는 길이야.” “그, 그래서....?!” “거절당했다.” 이 한마디가 집사에게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눈앞에 깜깜해진 모양이다. 가련한 카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이 창백해졌다. “그, 그..., 그건 대체.... 거절하셨다니..., 어, 어째서입니까?!” “어째서고 저째서고, 한동안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더군.” 발로의 표정 역시 씁쓸했다. 잔에 가득 따른 술을 단숨에 비운다. “주인님! 느긋하게 술이나 드실 때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덤벼들 듯이 외친다. 발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로자몬드의 주장을 집사에게 들려주었다. 얘기가 끝나자 카사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대공작가의 집사를 맡아왔던 만큼,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것이리라. 발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님이 서자라는 건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말을 덧붙이자면 그 형님이 서자밖에 둘 수없다는 사실도 거의 결정적이지. 거기에 우리 자식이 태어난다. 사보아와 벨민스터의 피를 이은, 혈통 보증서가지 붙은 아이가. 흐음. 어머님이 뭐라고 떠들지 안 봐도 눈에 선하군.” 카사 역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에라님만이 아니겠지요. 두 분의 자제 분을 차기 국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내 아이를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게는 놔두지 않아. 이런 소리해봤자 소용없겠지만. 그러니 로자몬드도 반드시 왕비에게 왕자를 낳게 만들려는 거겠지.” “주인님.....그 얘기입니다만, 비전하는 정말로 임신이 불가능하신 겁니까? 그분이 후계자를 낳아주시면, 왕자만 탄생하면 로자몬드님의 걱정도 농담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보아가의 당주는 열심히 말하는 집사를 비웃음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대하고 싶으면 멋대로 하는 게 어때? 단, 시간 낭비로 끝날거야.” “주인님...” 그건 너무 차가운 말씀이 아니냐며 카사가 한탄했지만 발로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언젠가 왕비가 말했던 적이 있다. 자신은 아직 발정기가 오지 않았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왕비의 농담이었다. “그 왕비는 말이지. 아마도 평생 그런 의미로 남자를 원할 일은 없을 거야. 할 일은 안 하는데 애가 생길 리가 없지. 따라서 왕자도 태어나지 않아. 영원히.” 카사는 물론 주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탄스러운 듯이 한숨만 쉴 뿐이었다. 주군을 비난하는 듯한 태도에, 발로는 또다시 비웃음을 지었다. “그 왕비를 선택한 건 형님이야.” 물론 국왕은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처음부터 후계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만 할 일인데도, 적자를 가질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은 자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왕관도, 지배자의 지위도, 권력도 저 사촌형은 조금도 달갑게 느끼지 않고 있다. 이런 무거운 책임을 지기위해 태어나는 아이가 불쌍하다고, 권력의 도구로는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국왕이 어쩌다보니 폴라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고민하는 것도 당연했다. 왕비는 그런 국왕이 갈등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개인으로서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전면적으로 국왕과 그 ‘부인’을 응원하고 있었다. 발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백만 대군이나 다름없군.”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보아 가문의 당주는 웃기만 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수호천사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자몬드와 아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 납득이 안가.” 카사가 그 말에 찬동했다. “그렇고말고요. 누가 뭐라고 해도 로자몬드님의 아기님은 사보아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걱정만 해봤자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카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고 발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갔다 오지. 조금 늦어질지도 몰라.” “벨민스터 저택에 가시는 겁니까?” “아니. 로자몬드는 고집이 세니까. 귀찮게 물고 늘어져도 결국은 마찬가지야. 형님을 만나고 오지.” 해가 저물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그리고 사보아 공작에게 복잡한 절차나 수속은 필요 없었다. 발로는 곧바로 국왕에게 안내되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국왕은 집무실에서 도라 장군과 아누아 후작을 불러 뭔가를 검토하고 있었다. 원로원의 가신들도 동석한 상태였다. 책상 위에서 뭔가가 펼쳐져 있고, 국왕이 막 질문을 던지는 참이었다. “제가 방해가 된 걸까요?” “아니, 상관없어. 남은 건 내일 할 일이니까.” “대륙 지도입니까?” “음. 어느 것 할 것 없이 기술이 애매해서 도움이 안 돼. 최소한 해안선만이라도 정확한 지도를 만들게 할까 싶어서. 특히 북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어. 이래서는 실전에도 도움이 안되겠지.” 내키지 않으면서도 옥좌에 앉아 있는 것 치고는 실로 유능한 국왕이다. “그런데, 뭔가 볼일이 있던 게 아닌가?” “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들어보기 힘든 사촌동생의 부탁에, 국왕도 이상한 듯이 반문했다. “무슨 일이지?” “위급시 체포장을 발부해주시길 바랍니다. 바브신 형님을 번거롭게 만들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상대가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국왕도 놀라는 눈치였다. “거 심상치 않은 얘기로군. 누구를 체포하겠다는 거지?” “벨민스트 공, 로자몬드 시릴입니다.” 이번에야말로 국왕은 깜짝 놀랐다. 다시 물었지만 발로의 대답은 그대로였다. 공작을 체포할 수 있는 것은 국왕이 서명한 체포 영장뿐이므로 꼭 부탁드린다고만 한다. “하지만 죄목은?” “유괴입니다.” “누구를!”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 이름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며, 납치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황하는 국왕에게, 발로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실로 유감입니다만, 벨민스트 공은 사보아 공작가의 후계자를 뱃속에 은닉한 채 영지로 도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다른 가문의 영지는 그 가문의 법이 지배합니다. 영지에 숨어버리면 저로서는 대처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부디 제게 협력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멍하니 발로의 말을 듣고 있던 국왕은 다음 순간 폭소를 터뜨렸다. “알았다! 물론 도와주고말고!” 그 자리에 있던 도라 장군과 아누아 후작도 경악에서 벗어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도라 장군은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간신히 참으며 일부러 딱딱한 표정으로 발로에게 비난을 던졌다. “귀공쯤 되는 인물이 그 무슨 추태인가. 벨민스트 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몸도 무거운 여성을 설득하려고 주군의 힘에 기대다니- 사나이답지 못하구만.” 발로는 필사적으로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눈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꾸중은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남자의 체면 따위는 신경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식전장관이 불려왔다. 곧바로 사보아 공작 노라 발로와 벨민스트 공 로자몬드 시릴의 결혼허가장이 작성되었고, 국왕은 로자몬드 앞으로 편지를 쓴 후 이 서류들을 발로의 손에 넘겨주었다. 발로는 사촌형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그 고집 센 귀부인을 공략하기 위해 벨민스터 저택에 단신으로 돌입했다. 그 뒤 두 사람의 대화는 격렬하게 이어지고, 때로는 두 집안의 심부름꾼이 본인들 이상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각 가문의 친족까지 동원되는 대소동이 벌어졌지만 결국 이듬해 봄에 로자몬드가 출산을 마치는 것을 기다려 식을 올리기로 결론이 났다. 5 장 해가 바뀌고 정식으로 국왕의 애첩으로 인정받은 폴라 달시니는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도 할 겸 주요 귀부인들을 초대해 다과회를 열게 되었다. 사교계의 여성에게는 여자들끼리의 사교가 존재한다. 이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폴라가 왕의 애첩에 어울리는 여자인지 시험받는 자리라고 말해도 좋다. “어쨌거나 반드시 인사를 해둬야 할 분들만 소개해드릴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시녀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폴라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초대객은 엔도바 부인, 도라 백작 영애, 그리고 벨민스터 공, 여기까지는 비교적 폴라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뒤의 사람들로, 소문을 좋아하는 명문가의 귀부인들이 속속 찾아오게 된다. 그로브너 공작부인, 해밀턴 공작부인, 캐스턴 백작부인, 림즈워스 경 부인, 퀸즈베리 경 부인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궁정의 여성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발언권을 지니는 귀부인들이었다. 왕비의 표현을 빌자면 ‘품위하고 교양만은 썩어 넘치는 주제에 성질은 고약한 할멈들’이었다. 한때 국왕까지 물러나게 만들었던 여자들이다. 지금도 그들의 눈 밖에 난 신참은 사교계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것만 해도 두려운 존재이건만, 폴라의 입장에서는 약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감히 말조차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면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공작부인이라 하더라도 국왕의 애첩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부인들이 단순한 중소귀족의 딸인 폴라에게 기꺼이 무릎을 굽히려 들 리가 없었다. 시녀장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분들은 당신을 평가하러 오는 겁니다.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시도록. 당신은 그저 폐하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숙녀로서 당당하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분들도 당신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다과회라기보다도 일종의 전투에 가까워진다. 폴라는 시녀장도 함께 있어주었으면 했지만 시녀장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 같은 심부름꾼은 이런 자리에 손님으로서 참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시녀장은 엔도바 부인에게 폴라의 원호를 부탁했다. 부인은 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지만 역시 불안한 듯했다. “저보다도 훨씬 신분이 높으신 분들이니까요. 잘될지 어떨지....” “본인이 애첩이 되셨을 때에는 잘 대처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주위에서 멋대로 떠받들더군요. 게다가 그때는 비전하도 안 계셨으니까....“ 불안한 듯이 말하다가 부인은 시녀장에게 물었다. “카린님은 폴라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녀장은 생긋 웃었다. “훌륭한 분을 모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예.” 시녀장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께는 순수하게 사람을 신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실하고 헌신적인 마음도요. 그런 건 바란다고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절대로 아니지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런 재능은 때때로 매혹적인 미소나 세련된 사교술보다도 강한 힘을 지닙니다.” 어떻게든 그런 장점을 잃지 않고, 상류 계급 사람들의 심술에도 지지 않을 만큼의 강인함을 갖추게 되기를 빌 수밖에 없다. 엔도바 부인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폴라는 두 사람의 그런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필사적으로 달래면서, 준비가 끝난 거실을 몇 번이나 점검하고 있었다. 부용궁은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소파와 원탁을 가져와 살롱을 꾸미고, 꽃병이나 촛대, 도자기 인형 등의 장식품을 신중하게 골라 진열하며, 거리의 꽃집에서 주문해서 생화를 장식했다(전표에 기재된 요금을 본 레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은제 다기를 준비하고, 솜씨를 다해 만든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적어도자신의 눈에는 준비를 도와주었던 엔도바 부인도 이 정도면 괜찮다. 굉장히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간신히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몸치장에도 정성을 들여, 머리도 최신 유행에 맞춰 틀어 올렸다. 미리 준비한 인사말과 이야깃거리를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는 사이에 손님들이 도착했다.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벨민스터 공이었다. 결혼이 결정되어서일까, 아니면 왕의 애첩의 초대이기 때문일까. 벨민스터공은 보기 드물게 여장 차림이었다. 연회색 금발을 장식과 함께 땋아 올리고, 연푸른색의 공단 드레스 차림이었다. 무술로 단련된 장신은 탄탄했고, 화려하다기보다도어딘가 씩씩한 모습에 폴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샤미안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족 역시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에 장식을 달고, 작은 꽃이달린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 서로의 남장 모습밖에 본 적이 없는 두 여기사는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발 먼저 왔던 엔도바 부인도 깜짝 놀라 휘둥그렇게 떴다. “어머나..... 두 분 모두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부셨지요? 굉장한 미녀가 두 분이나 나타나시다니.” “폐하의 총애를 받는 분의 초대입니다. 예의를 갖춰야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폴라는 잔뜩 긴장했지만, 그럼에도 간신히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달 와주셨습니다. 폴라 달시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녀장에게 받은 예절교육의 성과를 발휘하여 말을 덧붙였다. “벨민스터 공작님께서는 결혼 날짜를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에는 꼭 참석해주십시오.” 폴라는 깜짝 놀랐다. 자칫하면 저 같은 것이-라고 말할 뻔했지만. 이 말은 시녀장이 ‘금지’해버렸다. 솔직하게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로자몬드와 샤미안이 폴라에게서 받은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귀엽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이 속속 들이닥쳤다. 부용궁의 거실은 호화로운 의복과 장식품으로 가득 차고, 한겨울임에도 꽃이 만발한 것처럼 떠들썩해졌다. 지위나 계급에 집착하는 성질 고약한 귀부인들은 속마음이야 어쨌든 간에 겉으로는 지극히 싹싹하게 폴라에게 인사하며 친밀하게 말을 걸고 방의 장식을 칭찬했다. 몰론 폴라 자신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는다. “취미가 고상하시네요. 저 꽃병도, 향로도......” “드레스가 멋지군요.” “머리는 어느 가게에서 하신 거지요? 굉장히 잘 어울리는 구요.” 폴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질문에 대답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제각각 신분에 맞는 자리에 앉고, 주최자로서 손님들 앞에서 인사를 한 폴라는 조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은제 다기를 집어 찻잔에 차를 따르려고 했다. 순간 로자몬드가 눈을 치떴다. 샤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티나는 내심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들 사이에서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머, 세상에....” 곤란한 듯이 입을 연 것은 그로브너 부인이었다. 얼굴에는 명백하게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전 도저히 마실 수 없겠네요. 폐하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이 직접 끓여주신 차라니 황송해서......” 퀸즈베리 부인도 부채로 입가를 우아하게 가리면서 웃었다. “아니지요. 감사할 일 아닙니까. 여주인이 직접 끓여주시는 차라니, 좀처럼 마셔볼 수 없는 거니까요.” “어머나, 그건 장소에 따라 다르지요.” 해밀턴 부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특히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요. 어디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가 피서를 갔을 때에도 그 지방 명사의 부인 되시는 분이 직접 차를 끓여주셨답니다. 특이한 풍습이라고는 생각했지만요. 너무나도 서민적이라고 할까......” 폴라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여자들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캐스텀 부인은 마치 중재라도 하려는 듯이 나서면서 다른 부인들에게 말했다. “어머나, 여러분. 그만 하시지요. 폴라님은 아직 왕궁에 익숙하지 않으시니까요. 게다가 폐하는 폴라님의 그런 서민적인 부분을 아끼시는게 아닐까요.” 폴라는 한마디도 반론할 수 없었다. 온몸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자신이 중소귀족의 달이라는 것도 시골 출신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람들이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모여든 여성들 중에서는 신분도 연령도 제일 높은 편인 그로브너 부인이 여봐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말이지요. 국왕의 애첩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폐하도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비전하까지 저런 분인데.” 롤라는 귀부인들의 심술에 위축외어 거의 울먹이고 있었지만 이 말만은 넘겨듣지 않았다. 얼굴을 확 들고 말한다. “저야 어쨌든 상관없지만..., 왕비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삼가십시오!” 마흔 전후의 그로브너 부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린 계집이 무슨 건방진 소리인가 싶었던 모양이다.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더욱 말을 이었다. “어머나. 실례했습니다. 전 그만, 폐하를 놓고 총애를 다투는 사이이니 비전하와도 사이가 나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굉장히 서민적인 분이시니 마음이 맞으셨나보군요.” 로자몬드가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그로브너 부인. 조금 말이 지나치신 게 아닙니까?” “어먼, 벨민스터 공작님이 비전하 편이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전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산적 같은 차림으로 본궁을 활보하시는 걸요. 서민적이라는 말도 칭찬인 셈입니다.” 이 말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 분이라고 해도 그렇죠.” “뭐라고 할까, 무법자?” “머리도 꼭 새집 같지요.” “곁에 다가가면 짐승 냄새가 난다더군요.” 상류계급의 ㅂ인들은 폴라를 괴롭히는 것도 제쳐두고 그 화제에 열중했다. 입구 쪽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진짜 산적들 쪽이 훨씬 깨끗하답니다. 행동거지도....” 누가 늦게 온 걸까 생각하고입구 쪽을 바라도던 그로브너 부인은 입을 쩍 벌린 채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다른 부인들도 입구를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여신이 서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인간이다. 젊은 여성이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화려하고 요염하며,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멀건 대낮에 여우라도 나타난 것 같았다. 완벽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은 것은 굉장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빛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옷차림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부드러운 극상품의 비단이 매끄러운 팔다리에 휘감기듯 흘러내려 발치까지 몇 겹이나 펼쳐져 있다. 목 주위를 크게 파 가슴을 강조하면서, 팔도 팔꿈치 아래는 전부 드러내는 - 귀부인들 중 아무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몸통 근처는 연한 녹색이면서, 무릎 근처부터 조금씩 색이 짙어지며 치맛단에서는 짙은 녹색으로 바뀐다. 그에 맞춰 소맷자락에도 농담이 들어가 있어 가장 색이 짙은 소맷단에는 세밀한 금박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황금빛 장미가 피어난 듯 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아무도 이 낯선 미녀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말문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한 사람, 폴라만은 달랐다. 뺨을 붉게 물들이며 쓰러질 듯이 달려 나와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잘 와주셨습니다. 왕비님!” 소리 없는 동요가 초대객 사이에 퍼졌다. 캐스턴 부인은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말을 잃었고 림즈워스 부인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맴돌며, 해밀턴 부인의 얼굴은 공포로 굳어버렸다. 물론 그로브너 부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턱이 빠지지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왕비는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하는 폴라를 일으켜 세우고서, 마치 딴 사람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어조로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맛있는 차를 대접해주신다는 말에 기대하고 있었답니다.” 벨민스터 공작, 엔도바 자작부인, 그리고 도라 백작가의 영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간신히 비명을 억누르고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드레스 위로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던 것이다. 아프다. 그렇다면 꿈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귀부인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의자 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차 좀 주시겠어요? 목이 마르군요.” “예!” 왕비는 마치 다른 사람 같은 몸짓으로 차분하게 걸어 들어왔다. 우아하고 빈틈없는 몸가짐이다. 부드럽게 비단이 스치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 마음속으로는 기절할 듯이 놀라면서도 로자몬드는 재빨리 일어나 상석을 왕비에게 양보했다. 라티나와 샤미안도 자리에서 일어나 왕비를 향해 절을 했다. 폴라는 자리로 돌아와 다기를 집어 들었다가 또다시 경직되고 말았다. 집에서는 언제나 하던 일이다. 하지만 왕궁에서는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 되는 걸까. 하인에게 맡겨야만 하는 걸까. 동작을 멈춰버린 폴라에게 왕비는 자상하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지요?” “네! 저, 그게......” 다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자신만 비웃음을 산다면 상관없지만 왕비님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로자몬드가 그런 폴라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달시니 양. 비전하는 이 델피니아에서 제일 고귀한 여성입니다. 저희들 모두가 비전하보다 낮은 신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다행이 여기 계시는 분들은 모두 훌륭한 교양과 면식을 갖추고 계시니, 당신이 직접 비전하께 차를 대접한다고 해서 웃으실 리는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폴라에게 충고를 하는 척하면서 실은 귀부인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자리에 앉으려던 왕비는 발길을 멈추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그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을 돌아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있다. 보석 같은 선명한 녹색 눈망울도 평상시의 날카로움을 숨긴 채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망울이 귀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붉은 입술이 형용하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제 친구에게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요?”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부인들은 몸서리를 쳤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미모의 괴물이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감춘 괴수가 생긋 미소를 짓는다. 도저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비명을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부인들에게, 왕비는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어던가요, 그러브너 부인?” 부인은 모깃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당치도....않습니다.” 목소리도 떨리고 있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창백하게 질려서 살집 좋은 몸 전체를 공포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군요.” “아, 예. 조금 몸이...., 그래서, 그 실례를....., 용서해주시기를.....” 왕비는 다시 미소를 짓고서 실로 여왕과 같은 관록과 위엄으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퇴석을 허락합니다.” 주문이 풀렸다. 그러브너 부인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줄행랑을 쳤다. 다른 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왕비의 시선이 닿는 순간 흠칫 일어서면서 허둥지둥 인사만 남기고 앞을 다투며 부용궁에서 떠났다. 뒤에 남겨진 로자몬드, 라티나, 샤미안은 기가 막혀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모두 도망치고 나자, 미의 여신은 갑자기 본성을 드러냈다. 표정을 확 바꾸면서 평상시의 왕배로 돌아온다.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구두를 벗어던졌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에 양손을 찔러넣고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에 털썩 앉는다. “폴라, 차.” “네.” 조금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마셔 버리고 다시 찻잔을 쑥 내민다. “더 줘.” “네.” “그리고 수건이나 뭐 없어?” “있습니다. 발을 닦으시게요?” “아니, 얼굴이 갑갑해.” “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심부름꾼에게 시키면 충분할 것을 폴라는 직접 부엌으로 달려가서 곽 짠 물수건을 가져왔다. 왕비는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러 화장을 지웠다. 다른 세 사람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났다. “실례하겠습니다.” 셰라였다. 바닥에 구르고 있는 숙녀용 구두를 주워 올리고, 죽어도 우아하다고는 말하기 힘든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있는 주인을 한탄스럽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짧은 꿈이었군요.....” “두 번 다시 안 해! 이런 아까운 말씀을.” 그제야 제정신ㅇㄹ 차린 라티나가 정말 아쉬운 듯이 말한다. 샤미안도 눈을 빛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정말 멋졌는 걸요! 제발 한번만 더 보여주세요!” 로자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습니다. 자칫하면 비명을 지를 뻔 했으니까요.” 폴라도 마찬가지였다. “저도요! 깜짝 놀라서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여자들은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지금 막 보았던 왕비의 모습에 대해 떠들어댔다. 하지만 당사자인 왕비는 의자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한 손으로 뒷목을 벅벅 긁고 있다. 있던 정도 다 떨어질 광경이다. “세상에. 그렇게나 당당하게 행동하실 수 있으시면 처음부터 공식 행사에도 참여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샤미안과 로자몬드의 한탄에도 왕비는 얼굴만 찌푸릴 뿐이었다. 시녀의 손에서 가느다란 가죽끈을 받아들어 평소처럼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재빨리 셰라가 내민 머리 장식을 머리에 얹고 나서야 좀 편해진 모양이다. 라티나도 기가 막힌 듯이 웃고 있었다. “비전하께서 그렇게나 멋진 숙녀로 변신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온몸에 닭살이 돋으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고. 두 번 다시 안 해.”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말고, 한번만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계셔주십시오. 그러면 전쟁터만이 아니라 사교계도 제패하시게 될 겁니다.” 열심히 설득하는 로자몬드의 말에, 왕비는 한쪽 무릎을 끌어안으면서 조금 웃었다. “그건 폴라가 해야지.” “제, 제가요?!” “그래. 그런 싸움은 내 관할이 아냐. 그 인간들 남편은 모두 월한테 고개를 숙이지. 폴라는 월의 부인이니까 그런 인간들한테 우습게 보여선 곤란해.” 폴라는 멍하니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전..., 그런 훌륭한 분들과는.....” “월도 처음에는 바보 취급만 당했는 걸. 시골 귀족의 자식이라느니, 서자 주제에 어쩌고저쩌고...지금으 아무도 그런 소리 못하지만. 그러니까 괜찮아. 폴라도 할 수 있다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폴라를 내버려두고 세 여자들은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라티나가 물었다. “비전하. 혹시 폴라님의 사교계 진입을 도와주시려는 건가요?” “그것 말고 내가 이런 연극까지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왕비는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맛있어. 폴라가 끓이는 차는 정말 맛있는 걸.” 로자몬드가 작게 웃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그럼 저도 얻어먹어 볼까요.” 폴라는 커다란 눈에 곤혹감과 두려운 심정을 담으면서 로자몬드를 돌아보았다. “공작님......” “달시니 양. 한 가지만 충고해드리자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상대로시중을 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폐하의 애첩이십니다. 따로 칭호는 없지만, 왕비님을 제와면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는 셈이지요. 예, 바로 저보다도.” 폴라는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섰다. “공작님! 전, 절대로 그런 생각은.....!” “그러니 남들 앞에서는 그만두십시오. 조금 전처럼 공격받을 구실이 됩니다.” 라티나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친한 친구들 사이라면 전혀 상관없습니다.” 샤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부인들의 말씀이 너무 심했습니다. 폴라님이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로자몬드가 말을 맺었다. “당신이 애첩의 지위에 오른 것에 우쭐해져서 저희들을 깔보는 분이었다면 저도 심술쟁이 할멈들 편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당신은 심성이 바른 분 같으니까요. 개인적으로 대접해주신다면 저로서는 기쁘겠습니다.” 폴라의 빰이 기쁨과 긴장감으로 사과처럼 빨갛게 붉어지자 왕비가 놀리듯 말했다. “정말 로자몬드하고 단장은 하는 짓도 닮았단 말이야. 결혼이 결정되고 나서 더 비슷해진 것 아냐?” “그만 하십시오. 정말.... 사보아 공이 그렇게 성질이 급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결혼 허가를 받자마자 평상복 차림으로 그대로 신전에 끌고 가려고 하더군요. 기가 막힐 노릇이죠.” 샤미안고 라티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보아 가문과 벨민스터 가문의 결혼식인데 말입니까?” “세상에, 그런....” 이 두 가문의 결혼쯤 되면 왕족의 결혼이나 다름없다. 초대객만 해도 최소한 천 명은 넘을 터였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발로는 그런 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우선 식부터 올리자고 주장했다. 이것만은 사보아 가문의 친족들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얘기를 들은 왕비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야 자기 자식이 곧 태어날 상황이니 단장도 가만있을 수 없었겠지. 로자몬드가 영지로 도망이라도 치면 큰일일 테니까.” “실례입니다. 결혼하기로 정한 이상 전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몸이 가벼워진 뒤로 연기해달라고 말했던 것뿐입니다.” 태연한 척하면서도 어쩐지 기쁜 듯했다. 아직 배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지만, 몸 속에 생명이 애틋한 걸까. “그럼 아기하고 같이 식을 올리는 거야?” “예. 그것도 나름대로 좋지 않겠습니까? 아기도 같이 소개할 수 있으니까요.” 행복해 보이는 여공작을 보고 웃다가 왕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구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고는 해도 역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폴라를 돌아보자, 국왕의 애첩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전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는 완전히 긴장이 풀리고, 처음 계획대로 차를 마시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다음에는 좀더 편안한 분위기로 하지 않겠어? 남자들도 같이 불러서.” 그것도 좋겠다고 여자들도 찬성했다. 어차피 모일 거라면 국왕도 끌고 오자는 말이 나왔고, 날짜도 정해졌다. 사건은 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도 본격적으로 추워지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얀 것이 언뜻언뜻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로에는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거실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역시 이쪽 겨울은 춥군요. 최근 몇 년은 계속 따뜻하다보니 겨울이 어떤 것이었는지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하지만 폴라님, 이 집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아요. 게다가 저 커다란 유리창! 눈이 오면 정말 예쁘겠지요?” 계속해서 떠들면서 손을 놀리고 있는 것은 나시아스의 동생인 아란나였다. 엔도바 부인의 소개로 폴라와 만나 그녀는 나이도 출신도 비슷한 셈이라 금세 마음이 맞았다. 지금은 부엌에서 거품기를 손에 들고 달걀흰자와 격투하는 중이었다. 폴라는 가마의 불길을 확인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난로 앞에서 눈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어요. 이것도 호강이겠죠.” 그런 얘기를 하면서 차례차례 음식과 과자를 만든다. 오늘은 남자들까지 초대하는 자리이므로 셰라도 일을 도우러 찾아왔다. 심부름꾼인 레나도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오늘은 테스 부인이 없다. 친척집에 경사가 있어서 외출 중이었다. “저기, 셰라님. 왕비님은 정말로 단 걸 하나도 못 드시나요?” “저한테 ‘님’이라고 붙이지 말아주세요, 폴라님. 너무 달지 않은 거라면 조금은 드시는데요.” “그럼 설탕은 조금 줄여야겠네요.” 폴라는 진지했다. 반드시 왕비에게 자신이 만든 과자를 먹이고 싶은 모양이다. 오늘 찾아올 손님들은 지난번의 여성 진용에 국왕, 발로, 이븐, 나시아스. 국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극히 친밀한 사람들뿐이다. 평상복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에 샤미안은 평소대로 남장 차림으로 자신의 저택을 나섰다. 왕궁은 넓다. 정문을 향해 언덕을 올라가는 도중,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이븐님.” 검은 옷차림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어, 오랜만입니다.” “당신도 부용궁에?” “예. 다과회 같은 건 안 어울리지만, 결혼도 하게 됐다니 단장을 놀려줄까 싶어성.” “어머나. 짓궂으시네요.” “같이 가실가요?” “예.” 목적지가 같으니 어차피 함께 걷게 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왕비의 눈부신 변신과 양대 공작가의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샤미안은 조금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 “예?” “어버지가, 혼인 말을 꺼내셔서....” “예, 왕비님께 들었습니다.” “웹스톡 영주 윌로비 경의 차남이라고 합니다만....” “그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샤미안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이번에는 이븐이 물었다. “상대는 어떤 분이지요?” “모릅니다. 만나본 적도 없으니까요....” “헤에......?” 이븐이 장난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샤미안은 왠지 어색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대가 화를 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서둘러서 말한다. “하지만 훌륭한 분일 거라는 생각합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그러지 않고서야 아버님께서 받아들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조금 안심이 된다. “저.....” “예?” “한동안 코랄에 머무시나요?” “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샤미안은 기쁜 듯이 웃음을 지었다. 정문을 지나쳐 부용궁으로 향하는 도중, 본궁에서 나오던 국왕과 마주쳤다. 시종 한 명도 동반하지 않은 단신이었다. 이븐은 기가 막혀서 불평을 해댔다. “폐하, 아무리 궁성 안이라고 해도 시종 한 명 정도는 데리고 다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폼이 안 나지 않습니까.” “귀찮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잖아. 행선지는 말해뒸으니 알아서 나중에 오겠지.” 변함없이 격식을 무시하는 인간이다. 셋이 나란히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국왕은 이븐과 할 얘기가 좀 있다며 샤미안에게 먼저 가 달라고 부탁했다. “예....?”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샤미안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먼저 부용궁으로 향했다. 국왕은 샤미안의 등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븐.” “뭐야?” “마음이 있다면 확실하게 말하도록 해. 지금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손을 빌려줄 수 있으니.” 이븐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잠꼬대야, 임금님? 나 같은 떠돌이한테 저런 아가씨는 안 어울려.” “너답지 않아. 뭘 걱정하는거야?” “입만 살아서, 남의 일에는 금방 참견이냐?” “당연하지. 남의 일이잖아. 아니, 그건 농담이고,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븐은 머리를 긁적였다. “난 말야, 지금까지 뭐랄까....., 야시시하달까, 화장이 진한 여자들하고만 사귀어봐서 말이야. 좀 머쓱하다고, 이런 건. 우선 난 타우의 인간이야. 상대는 백작가의 외동딸이지. 만약 내가, 진자 가정이긴 한데, 그런 소리를 꺼냈다 쳐봐. 꼭 가문이나 작위가 목적인 것 같잖아.” “그래서 포기하는 거야?” “포기고 뭐고, 내가 샤미안과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정 필요하면 내가 도라 장군한테 직접 말해주는 방법도 있지만....” “농담하지 마. 알겠어? 쓸데없는 짓 하지마.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으니까.” 딱딱한 어조로 못을 박고, 이븐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만두자고, 이런 얘기. 정말, 자기 일이 해결됐다 싶으니까 다른 사람들 일까지 참견하려 들다니. 너답지 않아.” “그래?” “그래.” 한편 부용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비는 국왕처럼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문을 확실히 풀려는 뜻으로 물어보았다. “어째서 이븐에게 좋아한다고 말 안 하는 거야?” 거실에 막 앉으려던 샤미안은 자칫하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가 당황하며 일어섰다. “비전하! 그만 하십시오! 전 그런.....” 새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부엌 쪽을 살펴본 것은 혹시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그런 모양이다. “그럼 싫어?” “그런.., 아닙니다! 절대로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싫지는 않다. 그것뿐이야?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해? 어느 쪽이야?” “비전하........” 대답이 궁해진 샤미안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왕비도 자신이 연애 상담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은 필요 이상으로 자각하고 있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래도 좀이 쑤시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샤미안은 다시 의자에 앉아,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왕비는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눈으로 샤미안을 바라보았다. “그거, 무슨 뜻?” “그러니까....어떤 남자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얘기는, 본인이 직접 묻는 것도 아닌데 할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경박하지 않습니까.”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을 안 하면 아무 방법도 없잖아?” “그러니까......” 거기서 말이 멎었다. 샤미안 자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럼 묻겠는데, 이븐이 다른 사람하고결혼해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이라니,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겠지요.” 딱 잘라 대답한다. 샤미안 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개암빛 눈망울은 동요하고 있었다. 입술도 살짝 떨리고 있다. 분명히 지금 왕비의 말을 듣고서야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으려는 듯이 억지로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샤미안은 윌로비 경의 차남과 결혼하는 거고?” “그건, 만나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명렬이라고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요.” 굳은 얼굴이었다. 본인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왕비는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여자의 마음이라는 거, 나한테는 영원한 수수께끼야.” “비전하.....” 곤란한 듯이 말했지만, 샤미안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 수 없었다. 왕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아니 못 알아 듣는게 이상할 정도로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그 사람 사이에 뭔가 특별한 감정이나 대화가 존재했던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본인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샤미안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원인이었다. 사모하는 마음이나 연정은 우선 남자가 먼저 표현하고, 고백을 들은 여자 쪽이 승낙하거나 거절하는 것이다. 적어도 샤미안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사랑이란 그런 형식에 속박 당할 수 없는 감정이건만, 샤미안은 거기까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비전하가 묘한 얘기를 하신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용궁에 찾아온 이븐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퍼뜩 놀라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필요 이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뒤 초대받은 손님들이 모두 모였으므로 다과회가 시작되었다. 폴라는 솜씨를 부려 만든 과자와 간식을 차례차례 대접했다. 적포도주에 조린 배와 설탕에 절인 호랑가시나무 잎을 얹은 폭신폭신한 케이크, 호두와 개암을 섞어 촉촉하게 구워낸 과자, 감귤류의 아이스크림. 간식으로는 얇게 자른 빵에 버섯 페이스트를 바른 샌드위치, 훈제 생선과 피클 등등이 나왔다. 모두 신나게 먹으면서 떠들었지만 폴라는 계속 앉지도 않고 일하고 있었다. “뒤는 심부름꾼한테 맡기고 앉으시는 게 어떻겠소?” 국왕이 말을 걸어도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왕비님께 꼭 회심작을 대접할 테니까요. 곧 다 되거든요.” 서둘러 부엌으로 돌아가는 폴라를 보고 발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확실히 서민적이기는 하군요. 저부인은.” 나시아스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엌에 있는 쪽이 성격에 맞는 거겠지요. 제 어머니도 그랬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려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한 것 같습니다.” 엔도바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일지도 모르지만, 폴라님도 저번 다과회 때보다는 훨씬 즐거워 보입니다.” 로자몬드도 그 말에 동의하고 가죽옷을 입은 왕비 쪽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그렇지만 유감입니다. 한번만 더 비전하께서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만....” “그래그래, 그거 말입니다.” 이븐이 끼어들었다. “듣기는 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눈을 의심할 만큼 완벽한 숙녀로 변신했던 겁니까, 비전하?” “나도 신경 쓰였지.” 발로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벨민스터 공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저 그로브너 부인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드러누웠다고 하잖아. 해밀턴 부인이나 캐스턴 부인도 전전긍긍하면서, 무서워서 서쪽은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고 하고.” 왕비의 거처는 서쪽의 별궁 - ‘서리궁(西離宮)’이다. 나시아스까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멋진 모습을 못 보고 넘어가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글세 말이야. 그런 삼삼한 차림은 우리 남자들에게 제일 먼저 보여줘야 할 텐데 말이지.” “약혼자 앞에서 할 소리야, 그거?” “아닙니다. 비전하. 저도 사보아 공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저희들만 보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반드시 한 번 봐둘 가치가 있었지요.” 로자몬드가 진지하게 그런 소리를 하자 국왕까지 폭소를 터뜨렸다. “그야 그렇지. 왕비는 원래부터 몸차림과 행동거지에 큰 문제가 있을 뿐이지 용모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폴라 양한테 들었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그렇게 안 어울리는 짓을 잘도 했군.” 왕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런 방식이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효과적이라면 드레스도 보석도 이용하는 거야?” “보석은 안 달았어. 이것 말고는 없는 걸.” 왕비가 머리 장식을 가리키자 국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나도 준 기억이 없군.” “폐하. 그건 곤란합니다. 부용궁의 주인계도 때로는 장식이 될 만한 물건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이븐의 말에 국왕과 왕비는 깜짝 놀랐다. “지금 하던 건 내 얘기인데?” “폴라 양이 바란다면 보석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그게 리하고 무슨 상관이지?” 이 말을 들은 전원이-아란나까지-한숨을 쉬었다. “폐하, 부탁드립니다. 폴라님께서 조르지 않더라도 보석 정도는 선물하십시오.” “애첩께 뭔가를 주실 때에는 먼저 왕비님께 드리고 나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라티나가 한탄하고, 발로는 벌레라도 씹은 표정을 지었으며, 이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용궁에만 장식품을 내리셔서는 안 되지요. 불공평합니다. 자칫하면 국왕은 애첩만 총애하고 왕비를 소홀히 여긴다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델피니아의 국왕과 왕비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마주보았다. 왕비가 묻는다. “그거, 무슨 뜻?” “네가 뭔가 하고 다니지 않으면, 난 폴라 양한테 목걸이 하나도 마음 놓고 사줄 수 없다는 얘기 같은데.” “보석이나 드레스 같은 것? 내가 그런 걸 받아서 어쩌라고?” “맞는 말이지만, 내가 너한테 받은 물건은 그대로 폴라에게 주겠어. 그럼 아깝지 않지?” “순순히 받으려 들까? 사양할지도 몰라.” “그럼 내 몫의 옷이나 보석은 현금으로 줘. 뭔가 폴라 마음에 들 만한걸 사다줄 테니까.” 일동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특히 아란나는, 애첩에 대한 국왕 부부의 반응을 처음으로 체험한 나머지 경악하고 있었다. 곁에 앉아 있던 샤미안에게 살짝 말한다. “웬지.., 꼭 폴라님께 남편이 두 분 계시는 것 같아요.” 웃을 수밖에 없는 감상이었다. 샤미안 역시 할말을 잃고 힘없이ㅣ 웃고만 있을 때, 폴라가 큰 쟁반을 들고 셰라와 함께 부엌에서 나왔다. 쟁반 위에는 폴라의 역작이 담겨 있었다. 둥글고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였다. 광택이 도는 표면과 주변에 생크림이 장식되어 있다. 먹음직스러운 향기에 전원이 폴라의 솜씨를 칭찬했다. “와아, 이거 맛있겠는데.” “굉장히 멋져요....” 폴라도 기쁜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달지 않습니다. 왕비님 입맛에도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셰라가 작은 접시를 나누어주고 폴라가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은 케이크를 잘라서 첫 조각을 국왕의 접시에 얹었을 때 왕비가 갑자기 물었다. “저기, 이 과자..., 탄 것 아냐?” “네?” 폴라는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없다. 접시를 들고 지금 막 잘라낸 케이크의 냄새를 확인한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신가요?” “응. 조금 냄새가 나.” “시, 실례했습니다. 잘 구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당황하며 조금 잘라내어 맛을 보려고 했지만 왕비는 부드럽게 폴라를 제지했다. “그만두는 게 나아. 배탈난다고.” “그런가요....?” “모처럼 만들어줬는데 미안하지만, 조금 위험하니까. 이건 이대로 버리는 게 낫겠어.” 너무나 태연한 말투로 왕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국왕만은 속지 않았다. “리..,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폴라는 요리 솜씨가 좋지만 이것만은 실패한 것 같은데.” “얘기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 “네가 말할 수 없다면 내가 대신 말해주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과자는 먹을 수 없는 물건이야?” 셰라의 안색이 변했다. 이 사람이 ‘먹을 수없다’고 한다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왕비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었다. “영문을 모르겠어. 어쩌다 이런 게 나온 거야?” 국왕에게는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당황하고 있는 폴라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폴라 양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럼 먹으려고 할 리가 없잖아.” 왕비는 셰라에게 질문하듯 눈길을 던졌다. “뭔가 아는 것 없어?” 셰라 역시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지금까지 나온 과자들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어째서 이것만이?” “내가 묻고 싶다고.” 발로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죄송하오나, 왕비. 저희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얘기해주시오. 형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이 일제히 그 말에 찬성했지만, 국왕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제지하며 셰라에게 물었다. “부엌에 있던 건 누구누구지?” ‘저와 폴라님. 아란나님, 그리고 폴라님의 심부름꾼인 레나라는 소녀입니다.“ 국왕과 왕비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아란나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저..., 무슨?” 거실에 불려온 레나 역시 아란나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국왕과 왕비가 무엇을 문제로 삼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연극으로 이렇게까지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국왕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남는 건 네 시녀뿐이지만...” “내가 있는데?” 싸늘한 대답에 국왕은 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맞는 말이다. 셰라는 왕비에게 독약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들통 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그런 짓을 할 바보는 없다. 거실은 정적에 잠겼다. 전원이 정체 모를 불안감 때문에 숨을 삼키고 있었다. 왕비와 국왕만이 눈을 빛내며 필사적으로 머릴ㄹ 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과자나 요리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건 확실하지?” “응.” “그럼 이 가자에만 사용된 재료는 뭐지?” 셰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초콜릿입니다.” 왕비가 일어섰다. 국왕도 함께였다. 셰라는 두 사람을 안내하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 냄새를 맡은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야.” 국왕은 한숨을 쉬며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 어디에서 손에 넣었지?” “레나가 사왔을 텐데요.” 폴라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저번 다과회 이후 2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다과회 다음날에 사오도록 지시했다. 즉, 최근 열흘 동안 게속 이 부엌에 놓여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동안 독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입수한 장소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샀느냐는 국왕의 질문에, 레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겁을 먹은 것인지. 자신에게 화내는 걸로 생각한 것인지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굳어 있었다. 국왕은 그런 레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출처를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주겠나?” 레나는 앞치마를 꽉 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실은 산 게 아닙니다.” “호오? 그럼 받은 건가?” “예.” “누구에게서?” “그....., 제 약혼자한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폴라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세상에, 레나! 너 어느 틈에!” 왕비가 손짓으로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했다. 국왕은 질문을 계속했다. “약혼자의 마음을 끌기에는 조금 특이한 선물이군. 나도 여자한테 선물을 해본 적은 별로 없지만, 예쁘게 포장한 과자나 사탕 꽃다발처럼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도 많지 않나?” 스스럼없는 말투에 안심한 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다과회 준비에 꼭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호오?” 레나는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저희들,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사람한테는 돈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 친구 중에 카카오를 수입하는 사람이 있어서..., 같은 콩이라도 볶는 방법이나 정제법에 따라서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그 사람. 열심히 연구해서 이걸로 장사를 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맛이라면 다른 어떤 가게에 뒤지지 않는 다고..., 하지만 가게를 내려고 해도 밑천이 없으면.., 그 사람도 장사는 처음이라 신용이나 그런 것도 전혀 없고..., 담보로 잡힐 만한 것도 없으니까 돈도 빌릴 수가 없대요. 하지만 이건 왕궁에서 사용하는 상품이라고 하면 굉장히 선전이 되니까 주문도 밀려들 거라고..., 아가씨께 숨기고 있던 건 조송하지만, 보통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 굉장히 맛있어요. 그러니까 나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왕비는 혀를 찼다. 국왕 쪽은 훨씬 현실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남자인가?” 헤나는 빰을 붉히며 기쁜 듯이 말했다.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자상하고 남자답고....머리도 좋고요. 나이는 스물여섯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디 살고 있지?” “집이 아니라 배에서 살고 있어요. 겨울 동안에는 계속 항구에 머물 예정이니까 신세를 지고 있다고요. ‘새벽의 별’이라는 배입니다.” “출신지는 어디지?” “프리세아라고 했지만...” 레나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한 듯이 묻는다. “저..., 그 사람이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국왕과 왕비는 재빨리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소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암살자에게 속아서 이용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왕이 말했다. “네 약혼자는 연구가 조금 지나친 것 같아. 왕비가 감정한 바로는, 이 안에는 그다지 몸에 안 좋은 게 들어있다는 군.” 왕비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곁에 바르는 거라 다행이야, 안에 넣는 호두나 건포도 같은 거였으면 깨닫기 전에 누군가가 먹었을지도 모른다고.” “그건 정말 다행이군.” 부용궁에 모여 있던 사람들 - 특히 남자들은 슬슬 사정을 대략 이해하고 있었다. 발로가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형님..., 이 아가씨를 형리에게 넘겨서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 기다려. 이 아가씨는 아무것도 몰라.” “몰랐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미수로 끝났다고는 해도 자칫하면 형님이 돌아기실 뻔하지 않았습니까.” 발로는 무서운 기세로 레나를 몰아세웠다. “그 남자의 이름은? 어차피 가명이겠지만 국왕 암살 기도로 수배해야 해.” 그다지 명민하다고는 할 수 없는 레나의 얼굴이 완전히 얼빠진 것처럼 변했다.“ “국왕......암......살...?” “그래. 이 안에는 독이 들어 있다.” 레나는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레트는 그런 짓 하지 않아요!” “레트!” 셰라가 외쳤다. 전원이 시선이 셰라에게 쏟아졌지만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셰라는 안색을 바꾸며 당황해서 레나에게 물었다. “설마 그 사람...., 몸집이 작고 조금 마른 편에 얼굴은 예쁘장하고 언제나 싱글싱글 웃는...”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맞는데요?” 셰라는 경악했다. 설마 싶었다. 한순간이지만 정말 온몸이 굳고 말았다. 이 시골 처녀가 그 남자의 마수에 걸리다니, 대체 왜..... 갑자기 셰라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레나, 그 사람하고 처음 만난 건 어디지? 설마 내가 가르쳐준 그 과자 가게....?” 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가게가 아닌데요.” 이 소녀는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알아서 대답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럼 그 근처라든가, 돌아오는 길에서.....” “돌아오는 길에요.” 이번에야말로 셰라는 크게 신음했다. 모든 조각들이 들어맞는다. 자살했다는 소녀도 그 남자가 죽인 것이 틀림없다. 확신이 들었다. 계속 함정을 파두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목적에 걸맞은 소녀가 나타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면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계략을 펼친 것이다. 셰라는 무서운 기세로 레나에게 물었다. “레나, 중요한 일이니까 잘 생각해봐. 뭔가 - . 그 사람한테 뭔가 받아서 먹거나 하지 않았어?” “사탕을 받았어요. 박하 맛이 나는 달콤하고 맛있는.....” 옆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다소 둔하기는 해도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하던 소녀가 목소리가 갑자기 느려지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천천히 흔들린다. 본인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둔해지는 감각이 스스로도이상한 모양이었다. “어머나...... 싫다......왜 이러지” 셰라는 그 어깨를 붙잡고 힘껏 흔들었다. “대답해! 언제지? 그 사탕을 먹은 게 언제야?” 레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전부, 먹었으니까, 내일은 만날 수 있어......“ 최후의 도끼질에 쓰러지는 나무처럼 레나는 묘하게 천천히 쓰러졌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려는 것을 왕비가 받쳐든다. “셰라!” “안 됩니다! 어떤 독물인지 모르면-.” 해독할 방법도 없다. 바닥에 눕혀진 레나의 눈에 이미 현실은 비춰지지 않았다. 그저 열에 들뜬 듯이 헛소리만 되풀이 할 뿐. “하루에, 한 개씩.... 전부 ......열 한개.....먹었으니까......약속 곧 만날 수 있....” “레나!” 셰라의 외침에도 이미 반응하지 않는다. 희미하게 경련하던 레나의 머리가 힘없이 꺾였다. 셰라가 쥐고 있던 손목도 힘이 빠지면서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왕비가 굳은 표정으로 그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맥박을 확인했다. 국왕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든다. “죽었어.” 창백해진 샤미안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마찬가지로 핏기를 잃은 라티나와 아란나는 저도 모르게 서로의 손을 꽉 쥐었고, 멍하니 서 있던 로자몬드의 어깨를 발로가 굳은 얼굴로 끌어안았다. 이븐도 나시아스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창백한 얼굴로 소녀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폴라는 화려한 융단 위에 쓰러진 레나를 망연자실한 채로 바라보았다. “거짓말... 레나, 거짓말이지? 이런 거, 거짓말이야!!” 비명을 지르며 레나의 시체에 매달렸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폴라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뜨거운 것에라도 닿은 듯이 시체에서 흠칫 손을 떼고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넋을 잃은 채 소녀의 시체만을 바라보고 있다. 국왕도 긴장된 표정으로, 그럼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아란나 야, 그리고 라티나. 폴라 양을 2층으로......뭔가 마실 것도 함께. 샤미안 양과 벨민스터 공도.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주면 좋겠네.” 여성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힘없이 바닥에 앉아 있는 폴라를 안아 일으켜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뒤에 남은 여자는 왕비와 셰라뿐이었지만 이 점을 수상하게 생각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거실에 남은 남자들은 레나의 시체를 그녀의 방으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유품이나 실내에 있는 물건을 한 번 살펴보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사가 끝나고 나자 이번 심문의대상은 셰랴였다. “레트란 어떤 인간이지? 너의 옛 동료인가?” 국왕의 질문에 셰라는 대답을 주저했다. “파로트 일족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남자는 저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지?” 대답할 말을 못 찾고 있자 이번에는 왕비가 물었다. “그 남자, 널 노리고 있던 그 검은 옷하고 비교하면 실력이 어느 정도야?” 셰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비로 그 질문을 원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비교도 안 될 겁니다.” “레트라는 녀석 쪽이 강해?” “예.” 작년 여름, 라그란 교외에서 만났던 때를 떠올린다. 그 남자는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불리하다며 물러났지만 그 말이 정말이었을지도 의문이었다. 자신들을 남기고 그 남자가 사라진 뒤, 반츠아가 보였던 그 안도의 표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발로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파로트 일족의 암살자 주제에 여자를 이용한 계략이라니, 고식적인 수단이로군.” “비전하께서 안 계셨더라면 성공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 위에 레나까지 죽어버리면 자신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암살에 성공한다. 눈에 띄지 않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서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고식적인 수단일수록 효과적이다. 국왕은 통 안의 물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묘하게 죽던데, 이게 원인일까?” “아닐 거라고 생각해. 조금만 줘봐.” 왕비는 흑갈색 조각 하나를 혀끝에 얹었다가 곧바로 뱉어냈다 “독인 건 분명하지만 맛만 보는 정도로는 안 죽을 거야. 선물 받았다는 사탕 아냐?” 눈빛으로 확인을 요구하자, 자객 출신의 시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 사탕에는 분명히 독이 섞여 있을 가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직전까지 레나는 건강했습니다. 죽을 때도 그이 고통 없이 죽었지요. 보통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즉효성 독약입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두 종류의 독을 조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탕은 본인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몸을 약해지게 만든다. 그리고 레나는 오늘 초콜릿의 맛을 확인한다. 그런 방법으로 레나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남자가 어떤 소리를 해댔을지 눈에 보일 듯이 훤했다. 이거 줄게. 한꺼번에 다 먹으면 안 돼. 하루에 한 알씩., 그렇지. 자기 전에 먹어. 왜냐고? 그럼 다음에 만날 날짜를 세지 않아도 되잖아. 마지막 남은 한 알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기로 약속하는게 어떨까? 재미있겠지? 레나는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음이 틀림없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국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위험한 도박이군. 우리들이 그걸 먹을 때까지 레나가 살아 있어야 하고, 우리들이 그걸 먹고서 죽은 뒤에 큰 소동이 나기 전에 레나까지 죽어야 하잖아? 저 아가씨 얘기가 사실이라면 열흘 이상 전에 짜둔 계획일 텐데, 이렇게 미묘한 시간 조정까지 가능해?” 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왕은 통을 집어 들고서 다시 물었다. “이 독의 효과는 알 수 있을까?” “간단합니다. 생물-가능하면 인간으로 실험하면 금방이라도 알 수 있지요.” “그런가. 북쪽 탑에 대기 중인 사형수가 두어 명은 있었지, 아마.” 그 무심한 말에 오싹해진 것은 셰라만이 아니었다. 발로도 이븐도, 나시아스까지 꼼짝 않고 창백한 얼굴로 주군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느긋하고 쾌활하며 정이 두터운 국왕이 진심으로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 지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주게. 저 아가씨는 심장병으로 급사한거야. 국왕 암살 같은 건 없었다. 모두 그렇게 알고 일을 크게 만들지 말도록.” 위엄 있게 말하고 국왕은 2층의 부인들을 불러오도록 셰라에게 지시했다. 여자들은 창백한 얼굴로 침실에 모여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눈앞에서 어이없이 사람이 죽어버린 것이다. 수없이 전장에 출전했던 로자몬드나 샤미안이라고 해도 이렇게 기묘한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폴라는 완전히 얼이 빠져서 침대에 주저앉아 있었다. 폐하의 부르심이라는 말에, 기계적으로 일어나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국왕은 여자들에게도 비밀 엄수를 명했다. 샤미안에게는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내일 자신이 직접 말하겠다는 덧붙임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핼쓱해져 있는 폴라에게는 가능한 한 신중하게 말을 걸었다. “폴라 야, 그 아가시한테는 정말 안됐지만 이 일이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도니, 범인은 극비리에 찾도록 하겠소.” “레나는......죄를 지게 되나요?” 국왕의 목숨을 노린 죄는 본인이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가족도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암살자에게 이용당했을 뿐인 가련한 처녀야.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필요는 없지. 병사한 것으로 해두고 시체를 인수하러 오도록 연락해주시오.” 굳은 얼굴이었지만 폴라는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왕비님께서 안 계셨더라면 저....., 저는 제 손으로 폐하의 목숨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누르고 있다. “어리석은 아이였지만 그 아이를 데려온 건 제 책임이니까... 모쪼록 용서해주십시오.” 왕비는 폴라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무리 안 해도 돼.” “.......” “훌륭한 태도야. 이런 모습을 보이면 저 심술쟁이 할멈들도 아무 말도 못하겠지. 하지만 이럴 때에는 울어도 돼.”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던 갈색 눈망울에 점점 눈물이 차 올랐다. “어째서.....?!” “>>>>>>>” “어째서 레나가, 이렇게..”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폴라를 왕비는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나시아스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아란나를 살짝 끌어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란나,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저 아가씨는 어디까지나 병으로 죽은 거야. 알겠지?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네 행동에 따라서 폐하와 델피니아가 큰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단다.” 아란나는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라버니. 가족들한테까지 숨길 수는 없어요.” “맞는 말이야. 피사로한테는 ㄴ내가 얘기하지. 그 뒤에 둘이서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주겠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전 나시아스 쟌펠의 동생이니까요.” 그날 밤 부용궁에서는 비밀리에 레나의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아란나와 라티나는 부용궁에 묵었다. 폴라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6 장 국왕은 재빨리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새벽의 별’호에 관리를 파견했지만, 예상하던 대로 그런 남자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레나가 그 남자를 만났다는 과자 가게에도 비밀리에 감시를 붙였지만, 많은 손님이 드나드는 장소이니 범인을 잡을 확률은 낮았다. 결국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열흘이 지났다. 레나의 아버지는 딸의 급사에 경악했고, 어머니는 정말로 건강한 아이였다고 울며 매달렸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딸의 시체를 인수해 갔다. 폴라는 그런 두 사람을 끈기 있게 위로하면서 자신도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사이좋게 지내던 소녀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눈물이 나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속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샤미안은 이번 사건에 대해 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국왕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에 대한 의분은 물론이지만,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달콤한 말로 순박한 레나를 속여 중죄를 범하게 만든 뒤 벌레처럼 죽여 버린 그 방식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남자는 셰라의 옛 동료라고 한다. 만에 하나라도 마주치게 된다며 반드시 붙잡겠다고 분노하며 단언하자, 왕비의 시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샤미안님의 실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부디 그런 경솔한 행동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때 제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레나에게 접근한 남자말고도 반드시 동료가 있을 겁니다. 자칫하면 접근했던 남자를 붙잡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레나를 조종하고 있던 인간을 놓치게 됩니다.” 셰라는 샤미안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절대로 상대가 되지 않으니 손대지 말라고 해봤자 이 여기사가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미안은 그런 셰라의 걱정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코랄이 넓다고 해도 성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찾아다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요 며칠간 계속해서 인파가 많은 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추운 날이었다. 회색빛 구름이 무겁게 깔려 있다. 언제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그런 추위 속에서 조심스럽게 항구 근처를 걷던 샤미안의 귀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여어, 레트 아냐! 오랜만인데.” 분명히 그렇게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막 지금 지나온 길에서 두 명의 남자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쪽은 붉은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30대 남자였고, 그 사람이 다른 남자에게 친밀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은 금발이다. 남자치고는 몸집이 작은 편이고 말랐으며, 얼굴 생김은 단정한데도 입 끝이 올라가 있기 때문인지 오만하게 웃는 것처럼 보인다. 샤미안은 무심결에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확증은 없다. 단정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남자를 이대로 보낼 수만은 없었다. 남자들은 곧바로 헤어졌고, 레트라고 불린 남자는 시장 쪽으로 돌아갔다. 샤미안은 몰래 그 뒤를 따라갔다. 바로 붙잡지 않았던 것은 셰랴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건지. 누구와 접촉하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남자는 중심가를 향해 걸어간다. 저녁 무렵이었지만 아직 사람들의 통행도 많다. 그렇기에 샤미안도 안심하고 뒤를 쫓아갔다. 겉모습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흉악한 살인자로 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남자라면 여자인 자신의 힘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길 반대편에서 인상이 나빠 보이는 남자들이 술에 취해 떠들면서 걸어오자,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길 가장자리로 피하며 취한 남자들을 지나쳤다. 달콤한 말은 늘어놓을 수 있어도 싸움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 인간이라고 샤미안은 판단했다. 남자가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며 잡화점 모퉁이로 돌아섰다. 당황하며 뒤를 따라가자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앞에서 걸어가던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굳어버린 것과, 경쾌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토끼는 우리 속으로.”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샤미안은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저녁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밤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바람은 불지 않는다. 꽃잎 같은 눈송이가 계속해서 소리도 없이 춤추며 내려오는 조용한 밤이었다. 서리궁에도 평온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검을 손질하는 왕비의 발치에 잿빛 늑대가 웅크리고 있고, 셰라는 왕비의 윗도리를 만들고 있었다. 난로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린다. 편안한 정적이었다. “비전하, 실례합니다.” 깨진 종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 정적을 깨뜨렸다. 무례한 방문자의 정체는 온몸이 눈으로 뒤덮인 루카난 연대장이었다. 오늘 역시 뭔가를 불평하러 온 건지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몇 번이나 말씀드립니다만, 평민들하고 스스럼없이 사귀시는 건 좀 그만 해주십시오. 게다가 불침번 병사를 전령 대신 쓰다니요. 이런 시간에 평민이 왕비님께 전해달라고 맡긴 편지를 근위병이 전달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됩니다.” 왕비에게는 한마디도 할 틈을 주지 않고 쏜살같이 지껄인 다음 한 통의 편지를 내민다. 궁성 입구의 문지기부터 순서대로 언덕을 따라 정문까지 배달된 이 편지를 루카난 연대장이 펄펄 뛰면서 직접 들고 온 것이다. 그럼에도 착실하게 경례까지 붙이고 돌아가는 걸 보면 의외로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대장의 몸에서 떨어진 눈가루가 바닥에서 녹기 시작한다. 셰라는 왕비에게 편지를 건네고서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으려고 했다. 그때 새로운 손님이 나타났다. 도라 백작 가문의 부하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늦은 밤에 방문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주저주저 말을 꺼냈다. “아가씨께서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만, 혹시 또 이쪽에 와 계시는 게 아닐까 하고..” 편지를 읽던 왕비는 또 태연하게 말했다. “뭐야. 샤미안은 또 말도 없이 온 거야? 지금 목욕하는 중인데.” “그러셨군요.” “오늘밤은 여기서자고 갈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습니다. 주인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남자가 언사를 하고 돌아가자 셰라는 이상한 듯이 왕비를 돌아보았다. “리?” 왕비는 긴장한 얼굴로 연대장이 가지고 온 편지를 내밀었다. 간단한 내용이었다. -친애하는 왕비전하. 사로잡힌 공주님을 되찾고 싶으며 내일 해질녁 지정한 장소로 혼자 와주십시오.- 동봉한 지도에 표시된 것은 코랄 교외의 평운 한가운데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다. 셰라는 창백한 얼굴로 왕비를 보았다. “설마...” “혼자 오라고 하니 가줘야지.” 왕비는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 넣고 원래대로 자리에 앉아 다시 검 손질을 시작했다. 셰라도 어쨌거나 바닥을 닦았다. 바느질감을 집어넣고, 자신의 작업복을 꺼내서 암기와 단검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소동을 내봤자, 토론을 해봤자 아무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잘 갈아둔 검을 원래대로 검 집에 넣고서 왕비는 말했다. “넌 조금 뒤에 와.” 혼자 오라고 쓰여 있는 이상 여럿이 갈 수는 없다. 셰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누군가가 혼자 가겠다고 했다면 절대로 승복하지 않았겠지만, 이 사람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집이나 지키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장군님께는?” “내일 말하지.” 셰라도 그러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샤미안을 유괴한 것은 그 남자라고 셰라는 90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전에 손을 쓸 방법은 없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계속 눈이 왔다. 저녁 무렵 왕비는 긴 바지에 모직 상의, 외투를 걸치고 이곽의 장군가로 찾아갔다. 마침 밖에서 막 돌아온 장군은 흔쾌히 왕비를 맞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샤미안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왕비가 얘기하자. 호걸로 이름 높은 도라 장군의 얼굴에서 점점 혈색이 사라졌다. 한순간이지만 왕비에게 비난의 시선을 보냈던 것은 어째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랑하는 딸이 만 하루 동안 흉악한 범죄자의 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친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젯밤에 바로 그 장소로 달려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다. 그래서는 구할 수 있는 사람도 못 구하게 된다. 장군은 두 무릎을 꽉 움켜쥐고 뚫어져라 왕비를 바라보았다. “그럼, 비전하....” “다녀오겠어.” “혼자서....?” “그게 저쪽에서 내세운 조건이야.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샤미안의 목숨이 위험하잖아.” “하오나......” 상대도 혼자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저쪽에서 인질의 목숨을 내세운다면 왕비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왕비는 태연하게 도라 장군을 마주 보고 있다. “놈들의 목적은 월일 거야. 그런데 나한테 수작을 걸어왔다. 왜라고 생각해?” “하아......” “나하고 월을 떨어뜨리려는 작전일지도 몰라.” “그, 그것은....” “만약 그렇다면, 상대는 샤미안을 인질로 잡고 날 먼 곳으로 끌어내려는 거겠지. 한동안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몰라. 하지만 반드시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 나한테 맡겨주지 않겠어?” 그 안광도, 녹색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기백도 채 열여덟 살도 되지 않은 소녀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장군은 상기된 얼굴로 깊이 머리를 숙였다.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야.” “예....?” “월을 부탁해. 혹시 이게 양동작전이라면 그 녀석 신변이 위험해.” “폐하께 이 일은.......” “얘기 안 했어. 얘기했다간 죽어도 자기도 가겠다고 고집 부릴테니까. 그 임금님은.” 평상시처럼 농담 같은 어조로 말하고 왕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을 돌리는 왕비의 가녀린 몸을 보고 장군은 형용할 길이 없는 감정을 느꼈다. “비전하!” 왕비가 돌아본다. 그 눈을 본 장군은 숨을 삼켰다. 맑은 눈이었다. 가련한 모습과는 걸맞지 않은 이 눈에, 그 강인함에 지금까지 얼마나 도움을 받아왔던가. 지금도 자신의 딸을 구출하기 위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함정을 향해 달려가려는 것이다. 장군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언제나 당신 한 사람께 무거운 짐을 떠맡기고 어리광을 부리면서....., 그럼에도 또다시 당신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왕비는 씨익 웃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안 하는 주의야. 반드시 샤미안을 구해서 돌아올 테니까 조용히 기다려.”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가씨’를 걱정하는 부하들에게, 도랄 장군은 딸이 비전하와 함게 한동안 눈 구경을 갔다고 설명했다. 왕비가 말에 타고 왕궁을 나설 무렵부터, 갑자기 눈발이 약해졌다. 대도시인 코랄이지만 한 발짝만 거리를 벗어나면 주위는 넓게 펼쳐진 평원이다. 한 시간 정도 말을 걷게 해 지정한 장소에 도착했다. 벌판 한가운데에 초라한 사냥용 오두막이 서 있었다. 이미 눈은 그치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상공에서는 빽빽하게 밀집한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밤눈이 밝은 왕비는 등잔도 없이 오두막으로 다가갔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초라한 문짝에는 자물쇠도 걸려 있지 않았다. 왕비는 주저 없이 문을 열어보았지만, 싸늘하고 어두운 오두막은 한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왕비는 오두막 밖으로 나와 주위를 돌아보았다. 문과는 정반대쪽 벽에 숯으로 커다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에 무성한 잡목림이 보인다. 왕비는 다시 말에 타고 숲으로 들어갔다. 숲의 입구에 또다시 화살표가 있었다. 이번에는 나무기둥에 묶어놓은 판자에 그려져 있었다. 숲 속을 가리키고 있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나 있는 숲이다. 왕비는 말을 입구에 묶어두고 걷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눈에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하늘이 맑아졌다. 달빛이 설탕가루 같은 눈에 반사되어, 갑자기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정성스럽게 눈으로 단장한 수목들은 피에로 무리처럼 보인다. 아름답고 조용한 피에로들이 혼자 숲 속으로 나아가는 왕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밀집해 있던 수목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우연히 생긴 것으로 보이는 공터가 나왔다. 왕비의 눈앞에 발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순백의 지면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약 20미터정도 앞에 보이는 나무에 샤미안이 묶여 있었다. 몸에 담요 같은 것이 둘려 있고 그 위를 몇 겹이나 묶어놓았다. 나무에 기대어 세워진 자세지만 머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왕비는 반사적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제일 먼저 샤미안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던 ㄱㅅ이다.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론이 아니다. 육감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감각이 발을 묶었던 것이다. 시야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눈밭만이 보인다. 귀를 기울이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눈 냄새. 잠들어 있는 나무 냄새, 그리고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냄새뿐.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눈 덩이를 떨쳐버린다. 조용한 숲 속에서 그 소리는 묘하게 천천히 울렸다. 왕비의 얼굴이 긴장한 나머지 굳어졌다. 기척을 없애는 것, 혹은 남의 기척을 읽는 것이라면 야생동물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 같은 ‘인간’이 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함정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나서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검을 빼들고 신중하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야가 탁 트인 장소이니 공터로 끌어내서 화살이라도 퍼부으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기척은 없다. 온몸으로 적의기척을 찾으면서 반 정도 걸어 나갔다. 갑자기 오른쪽 지면이 튀어 올랐다. 움직이거나 솟아 오른게 아니었다. 지면에 쌓여 있던 눈이 산산이 튀어 오르며 눈사태처럼 왕비를 덮쳐온 것이다. 눈가루와 동시에 단검이 날아왔다. 이것 역시 한두 자루가 아니었다. 수많은 검이 일제히 왕비를 노리고 날아왔다. 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여신으로 숭앙 받는 왕비로서도 실로 큰 행운이었다. 날카로워진 감각이 무의식중에 팔을 움직여 몸에 닿기 직전에 단검을 막아냈다. 숨쉴 틈도 없이 단검에 이어 바로 다음 무기가 날아왔다. 납구슬의 연사였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가차 없이 덮쳐오는 납구슬을 검으로 쳐내면서, 왕비는 처음으로 지면에 숨어 있던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얗다. 형태까지는 확인할 여유가 없다. 셰라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고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흰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질풍처럼 공격해온다. 왕비는 눈을 박차고 뛰어 뒤로 물러났다. 머릿속에서 경계 신호가 울린다. 이 상대는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을 노리며 날아오는 날카로운 암기 공격, 이 빨ㄴ 움직임. 도저히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땅에 착지한 왕비의 발을 뭔가가 악물었다. “..........!!” 강철의 이빨이다.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덫에 눈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그것을 정통으로 밟아버린 것이다. 오른쪽 다리에 파고드는 고통과 충격에, 아주 잠깐이지만 자세가 흐트러졌다. 한순간으로 충분했다. 작은 체구의 남자가 움직이지 못하는 왕비의 숨통을 끊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순간, 다리를 구속당한 왕비는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늦었다. 어떻게 방어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없다. 자신의 검보다 상대가 훨씬 빠르다. 최후를 각오했다. 그때 회색 물체가 뛰어들었다. 거대한 잿빛 늑대는 바로 막 왕비를 베려던 남자의 왼쪽 어깨를 물어뜯고서 곧바로 떨어졌다. “어라?” 짐승의 이빨이 자신의 팔에 깊숙이 꽂이고 선혈이 튀는 순간, 남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 틈에 왕비는 발을 묶고 있던 덫을 비틀어 열고 재빨리 탈출했다. 다치지 않은 발로 눈 아래쪽을 더듬으면서 적에게서 떨어진다. 덫이 하나뿐일 리가 없었다. 그제야 처음으로 두 사람은 설원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단검을 입에 물고 옷을 찢어 재빨리 상처를 지혈한다. 느긋한 동작이었다. 왕비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도 그 동작을 빈틈으로 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멍청하게 덤벼들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선이 가느다란 남자였다. 늘씬한 사지에 균형이 잘 잡혀 있는데도 전체적인 체구가 작다. 왕비의 예민한 후각은 피 냄새가 섞여 있는 이상한 냄새를 눈치 챘다. 코을 찌르는 듯한 자극이고도 고혹적인 향기가 눈앞의 남자에게서 흘러나온다. 향수라도 뿌린 걸까 싶을 정도였다. 왕비가 유혹에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본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달빛을 받은 얼굴은 씨잇 웃고 있었다. “특이한 동료가 있군.” 지혈을 해도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하얀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위에 튄 선혈이 눈 위에 붉은 무늬를 그리고 있는데도, 다친 왼손에 단검을 들고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왕비는 이를 악물었다. 왼쪽 다리의 통증 때문에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하지만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 방심하지 않고 경계하면서 말한다. 남자의 태도가 묘하게 거슬렸다. 몸속의 경계 신호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당신 몸은 어떻게 된 물건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쓰러졌어야 하는데.” 능숙하게 어깨까지 으쓱거린다. 출혈량이나 상처를 볼 때 그런 짓은 ‘아파서’ 불가능할 텐데. “덤으로 동료까지 데리고 오다니 반칙이야.” “인질이나 잡는 비겁자한테서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 걸.” “어쩔 수 없잖아. 저 아가씨가 검을 들고 내 뒤를 따라오니까.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고.” 왕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헛소리 마. 넌 아무것도 모르는 레나를 살인 도구로 이용하고,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대로 죽여버렸어. “놔두면 더 불쌍하잖아?” 기묘하게도 남자의 얼굴은 진지했다.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국왕이 먹을 음식에 독을 섞었다면 중죄야. 고문에 가까운 심문이나 치욕을 당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가 결국 참수형이잖아?” “네가 이용하지 않았다면 레나도 안 죽었을 거야.”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팔로 얼굴을 긁적였다. 그렇게 큰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그런 소리를 해도 말이지. 그 아이는 내 작업에 필요했다고. 심한 짓이라고 해도 곤란한 걸.” 지심으로 곤란하게 여기는 듯한 말투였다. 정원사가 필요 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처럼, 어부가 생선을 잡는 것처럼 자신의 일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한 것뿐인데, 어째서 내가 한 소리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당혹감이 느껴진다. 어떤 의미로는 냉혹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살인을 즐기는 이상성격자보다도 훨씬 더 두려운 상대였다. “가능한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줬는데 어째서 화내는 거지? 옛날부터 내가 하는 짓은 꼭 그렇게 욕을 먹더라고.” 왕비는 코웃음을 쳤다. “살인자를 칭찬하는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당신은 인간이 아니잖아?” 입을 다물어버리는 왕비를 보고, 남자를 씨익 웃었다. “당신도 어차피 뭔가 잘못되어서 그 몸으로 태어난 거겠지. 아냐?” 나무에 묶여 있는 샤미안을 가운데에 두고, 왕비와 남자는 아름다운 설원에서서로를 노려본다.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르며 난무를 펼치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달이 구름 뒤에 숨을 때마다 순백의 눈 위에 짙은 그림자가 덮인다. “난 겉모습이 이러니까. 지금은 상당히 얄미운 인상이지만 어렸을 때는 천사 같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다들 난리였어. 사실 나도 착한 꼬맹이였지. 어떻게 봐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어. 배가 쩍 벌어져서 내장까지 엉망이 되고, 다 큰 남자가 죽여 달라고 울며 발버둥칠 정도였지. 보고 있는 이쪽까지 괴로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거야. 그런데 옆에 있는 놈들은 우물거리면서 괜찮을 거라고만 하고, 그런 헛소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 너무 불쌍해서 보다 못해 내가 죽여줬지.” “.......” “그런데 갑자기 날 나쁜 놈 취급하는 거야. 짜증나지 않아? 악마니 마성의 아이니....농담이 아니라고, 사람이 친절을 베풀었는데, 대체 내가 언제 그렇게 심한 짓을 했다는 건지....” 자조의 웃음이었다. 왕비는 신중하게 물었다. “너의 이번 임무는?” “당신을 죽이는 것.” 남자의 등 뒤에서 잿빛 늑대가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적의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듯 자세를 낮춘다. “움직이지 마!” 왕비가 외쳤다. 아마도 이 설원에는 덫이 가득하겠지. “내가 목적이었던 거야? 처음부터?” “그래.” “그 때문에 레나를 죽이고, 샤미안까지 납치한 거야?” “당신 시녀로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샤악, 왕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어차피 구하러 와야 한다면 귀여운 아가씨 쪽이 나을 것 같아서. 남의 사냥감을 가로챌 수도 없고 말이야.” “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기 직전, 왕비는 하얀 눈가루를 날리며 지면을 걷어찼다. 왼손에 단검을 들고 느긋하게 대화하던 남자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납구슬을 던져온 것이다. “....크윽!” 채 피하지 못한 암기가 오른쪽 팔을 가격했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무기는 관통하지 못하고 피부에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지금 무기를 손에서 놓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왕비는 두 손으로 검을 꽉 쥐며 남자의 공격을 막았다. 동시에 왕비의 검이 날아갔다. 아니, 튕겨 나간 것이다. ‘아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전투에서 남보다 힘이 딸려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연해서 있을 틈은 없다. 적의 검이 자신을 향해 닥쳐온다. 이번에는 왕비 쪽이 빨랐다. 적의 손목을 붙잡고 재빨리 비틀면서 무기를 떨어뜨린다. 왕비에게 손목을 잡힌 채 남자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남자는 재빨리 한바퀴 회전해 관절의 자유를 되찾으면서 중력의 힘을 빌려 왕비의 몸에 힘껏 부딪혔다.. 두 사람은 뒤얽힌 채 눈 위로 쓰러졌다. 뛰어오던 잿빛 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앞다리가 덫에 걸린 것이다. 왕비 역시 자신의 목을 조르는 남자의 팔을 뿌리치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남자는 등 뒤에서 왕비의 몸을 눈 위로 눌려댔고, 얼굴이 거의 눈에 묻히다시피 했다. 왕비는 다시금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등 뒤를 붙잡혔다는 사실도, 힘으로 다른 이에게 눌리고 있다는 사실도. 얼핏 보기에는 가녀린 몸이지만 어지간한 남자 이상의 힘을 자랑하는 왕비이다. 하지만 왕비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른손과 오른발을 다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완력에 완전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가느다란 몸에는 왕비에 필적하는 괴력이 있었다. 게다가 왕비 쪽에 불리한 자세인 만치 떨쳐내기 힘들었다. “크윽.....” 숨이 막혔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아무리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몸이라고 해도 피가 흐르는 생물인 이상, 그 흐름이 막혀버리면 분명히 죽는다. 게다가 이 남자는 그런 작업의 숙련자였다. 초조함이 몰려온다. 굴욕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간신히 떠오르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벗의 얼굴이었다. 내가 죽으면, 이런 곳에서 죽어버리며 루퍼는 어떻게 되지?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하면서. 이렇게 약한 나를 언제나 신경 쓰고 걱정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리고 싶지 않은데도...... “네가 다른 사람한테 상처 입지만 않으면 돼.” 아말록은 말하곤 했다. “그 녀석이 어째서 널 택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째서 나한테 맡겨두는지도. 내가 알고 있는 건 네가 무사하면 그 녀석 마음도 편해진다는 것뿐이야. 분노로 날뛸 일도, 슬픔에 무너질 일도 없지.” 실제로 루퍼에게는 그 자신을 위해 화내거나 슬퍼한다는 기능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루퍼에게는 그 자신을 위해 화내거나 슬퍼한다는 기능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까 너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힘이면 돼. 그 싱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니까.” “루퍼도 똑같은 말을 했어.” “루퍼.....라고. 넌 얼마 전에도 그렇게 불렀지. 그 전에는 루라고 부르더니, 왜지?” “몰라.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어.” “흐음.” 아버지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럼 그게 그 녀석의 진짜 이름이라는 말이 되겠군. 그럼 그 녀석도 널 특별한 이름으로 부를 텐데, 뭐라고 하지?” “에디.” 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이름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싶었던 것이다. “그 녀석이 부르니까 특별한 거냐?” “그런 거라고 생각해. 다른 녀석한테 그 이름을 불리는 건 왠지 굉장히 어색한 걸.” “그 녀석이 부르는 건 괜찮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즐겁게 웃고서 꼬리로 몸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사이좋게 지내라. 그 녀석은 지금까지 계속 외톨이로 지내왔으니까. 이제야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긴데다 그게 내 아들이라니 정말 기쁘구나.” 이상한 얘기였다. 저렇게나 아름다고 유능하고 동료들에게도 사랑 받고 있지만 루퍼는 계속 고독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죽을 수 없어. 그를 혼자 두고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몽롱한 시야 안에서 검이 빛났다. 몸을 지키라면서 선물해줬던 검이다. 도저히 손을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뻗었다. 목이 조여지는 그 몇 초간, 이미 사고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을 수 없다는 절실한 마음이 손을 움직였고, 검은 충실하게 그에 반응했다. “우왓?!” 검 손잡이로 강하게 얻어맞은 남자가 경악하며 외쳤다. 날아온 검을 왼손으로 꽉 쥐고 적의 힘이 살짝 약해진 틈을 타서 몸을 휙 돌린 왕비는 자신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남자를 무릎으로 찼다. 정통으로 공격을 먹은 남자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빠졌다. 거기를 힘껏 걷어차인 것이다. 남자의 몸은 그대로 공터 구석으로 가볍게 날아갔다. 왕비는 숨 쉴 틈도 없이 뛰어올랐다. 손에 든 검이 묘하게 가볍다. 조금 전까지는 장검이었지만, 지금은 팔 길이 정도의 단검으로 변해 있었다. 왕비는 놀라지 않았다. 이 상대에게는 단검 쪽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검이 스스로 모습을 바꾼 것뿐이다. 발의 통증도 팔의 부상도, 거친 호흡까지도 잊어버린 채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왕비 쪽이 만전의 태세로, 아직 데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남자를 베어버리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기척을 느껴졌다. 왕비가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숲 속에 누군가 있다. 그것도 명백한 살의를 띄고 자신을 노리고 있다.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뻔한 일이었는데. 이 남자는 눈이 오기 전부터 지면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면이 그렇게나 깨끗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샤미안의 몸에는 눈이 거의 안 쌓여 있었다. 눈이 그치기 직전에 다른 누군가가 데려와서 묶어놓았다는 말이 된다. “아야야......” 왕비의 공격은 상당히 효과가 좋았다. 남자는 눈 위에 주저앉아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 채 사지를 아무렇게나 뻗고 있었다. 왕비를 올려다보면서 낮게 웃음을 흘린다. “당신, 이래선... 세상 살아가기도 힘들겠어.” 비아냥도 비난도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왕비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상처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다. 오른팔에 암기가 박혀 있었고 신발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숲 속의 ㅅㄹ기가 신경 쓰였다. 이런 상태로 적의 공격을 받으면, 자기만이라면 몰라도 묶여 있는 샤미안까지 공격한다면 이미 끝이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왕비에게, 움직일 수 없게 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어이, 왕비 씨.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멍청한 짓을 하면 뒤쪽에서 덮쳐온다. 왕비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뭐야?” “키스해주지 않을래?” “........” “그걸로 이번은 무승부인 셈 치자고.” 서로 손을 떼자는 말이다. 왕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기척을 찾아보았지만 숲 속의 살기는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의 아군임에는 틀림없지만 완전한 후방부대 일 뿐, 이 남자가 공격하라고 명령하지 않는 이상 이쪽을 공격하지는 않는 성격인 것 같았다. 왕비는 단검을 허리띠에 꽂고 나아갔다. 아름답던 눈밭은 난투의 흔적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 흔적을 밟으면서, 깨끗한 눈 쪽에는 발을 딛지 않고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축 늘어져 있는 걸로 보이지만 방심은 할 수 없다. 곁으로 다가가자 그 향기가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 달콤하고도 자극적이라 오래 맡고 있으면 머리가 마비될 것만 같은 독의 향기였다. 왕비는 남자의 앞에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앉았다. 가까이에서 설펴보자 평균을 훨씬 웃도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렸을 때 천사처럼 생겼다는 말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왕비는 남자의 어깨를 아무렇게나 쥐고 비틀었다. 관절이 빠지는 둔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팔이 자유를 잃고 축 늘어진다. 왕비는 무표정인 채로 피투성이의 왼팔도 마찬가지로 관절을 빼버렸다. 그 짓을 당하는 본인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평한다. “이거 심하잖아...?” “아프지도 않은 주제에.” 늑대에게 물렸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일이 일상다반사로 있는 건지. 두 어깨의 관절이 빠졌는데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왕비는 그래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이쪽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다시 아무렇게나 뻗고 있는 발목을 비튼다. 빠긱,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두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사지의 자유를 잃고서도 남자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기색이었다. 자신이 받는 대접을 굴욕으로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즐거운 듯이 왕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스 한 번 하는데 이렇게까지 손이 많이 가?” “이 정도 해두지 않으면 위험하잖아.”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리 몸의 자유를 빼앗아도 독사에게는 송곳니가 있다. 왕비는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상대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씨익 웃었다. “키스하면서 독을 먹일 생각은 없는데?” “그럼 어째서야?” 남자는 유일하게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턱으로, 나무에 묶여 있는 샤미안을 가리켰다. “저 아가씨 몸값.” 왕비는 한쪽 눈썹을 치키며 비웃었다. “유감이지만 샤미안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야.” “난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말로는 끝까지 지지 않는 남자였다. 왕비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지의 관절이 빠졌는데도 이렇게까지 태연한 표정을 짓다니 자신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변함없이 웃음을 짓고 있는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왕비는 일어섰다. 우선 잿빛 늑대의 발을 붙잡고 있는 덫을 풀어준다. 분노로 날뛰던 짐승은 움직일 수 없는 남자에게 덤벼들려 했지만 왕비가 늑대를 끌어안으며 말렸다. 두어 마디 말을 던지자 늑대는 으르렁거리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왕비의 얼굴을 핥은 뒤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펼쳐진 사투도 모르는 채 잠들어 있는 샤미안의 몸에 묶인 밧줄을 끊었다. 의식을 잃은 몸은 힘없이 무너졌다. 굉장히 안색이 나쁘다. “약으로 재우어둔 것뿐이니까 곧 일어날 거야.” 사지를 늘어드린 남자가 느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왕비는 샤미안을 둘러메고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자 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말을 묶어둔 곳까지 돌아와 샤미안의 몸을 말 위에 얹는다 겨우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힘이 들었다. 간신히 거기까지 해내고서 왕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상처의 통증이 심해진 탓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심하게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로가 몰려온다. 한때는 죽음까지 각오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발목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었지만 뒤를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기척은 앞쪽에서 났다. 말을 끌고 셰라가 나타난 것이다. “리?!” 오른팔을 누르고 왼발을 피로 물들인 채 간신히 서 있는 왕비의 모습은 셰라에게 있어서 상상도 못하던 광경이었다. 어떤 함정이든 꿈쩍도 하지 않을 사람일 텐데. “곧바로 치료를.....” 왕비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샤미안이 우선이야. 한시라도 빨리 체온을 회복하지 않으면 위험해져.” 이 근처에 엔도바 부인의 저택이 있다. 두 사람은 그리로 달려갔다. 샤미안을 업은 왕비가 사라진 뒤. 사지의 자유를 잃은 남자는 기묘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몸을 기대고 있던 나무기둥에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을 밀어붙이며, 미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나무에 돌격했다. 그 반동으로 오른쪽 어깨의 관절이 맞춰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팔을 움직일 수 없을 상황이건만 남자는 오른팔로 왼쪽 어깨를, 두 발을 원래대로 차례차례 맞췄다. 숲 속에서 반츠아가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수려한 얼굴은 거의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는 무슨. 본 대로야.” 남자는 아직도 눈 위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있었다. 고양이처럼 선명한 눈망울이 위험하게 빛난다. “정말 큰일인 걸. 정상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비정상일 줄은 몰랐어.” 반츠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만 사람처럼 긴장된 얼굴이었다. 정상이 아닌 것은 이 젊은이 쪽이다. 그런 인간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생물이 존재한다니, 그것이야말로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목을 갸웃거리면서 신음한다. “내 단검하고 납구슬은 다 피해버리지. 거기다 내 손목까지 붙잡았다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꿈인가 싶어서 빰이라도 꼬집어봤을 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테, 저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거야? 호마를 쓰는 것도 아닐 텐데.....” 그것은 반츠아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싸움 자체도 그렇지만 이 남자와 무승부라는 것도 그렇고, 돌아갈 때의 태도 역시 열일곱 살짜리 소녀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과연 그 정도이니 마을을 잃은 소년이 변심해서 새 주인으로 섬길 만도 했다. “꼬박 하루 동안 지면에 숨어서 함정을 설치하고 인질까지 준비했는데 살아서 돌아갔어. 이 내 손에서 벗어나서. 정말 농담 같은 얘기지.” 불평하면서도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완패로군.” 달빛이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조금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반츠아에게 손짓을 한다. “뭐야?” “일으켜줘. 못 움직이겠어.” 반츠아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이 동료를 독사나 독 두꺼비나 마찬가지. 어떤 의미로는 그 이상으로 위험한 생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것에는 닿고 싶지도 않은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이 아닌가. “난 단순히 감시만 하는 역할일 텐데.”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그 정도 상처로 못 움직일 리가 없잖아.” 피투성이의 남자는 낮게 웃었다. “상처가 아니라, 약 기운이 떨어졌어.” “.....” 반츠아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렇다면 내버려둘 수는 없다. 천천히 걸어갔지만, 상대가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개가 주인에게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반쯤 장난으로 칼을 꺼내들고 사람을 죽여 버리는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있는 반츠아에게,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짓도 안해. 약속한다니까?” “네 약속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은 있어. 이대로 놔두고 가면 난 분명 얼어 죽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 왕비를 죽일 수없잖아. 그래선 억울해서 눈도 못 감는다고. 무엇보다도 말이야, 이 임무는 아직 남아 있잖아? 내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가 대신 수행해야 하겠지. 어쩌면 너한테 불똥이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내가 못 죽인 놈을 대체 누가 죽일 수 있다는 거지?” “......” “저런 묘한 괴물한테 덤벼들어서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지금 날 도와주는 게 득이라고 생각하는데?” 반츠아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큰 벽난로에 기세 좋게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샤미안은 소파에 누운 채 담요와 모피를 몇 겹이나 두르고 있었다. 아직도 약 기운이 남아 있는지, 구두를 벗기고 엔도바 부인이 발을 주물러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 곁에서 왕비가 소매를 찢어내고 팔에 파고든 암기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엔도바 부인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천을 더 가지고 올까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장작을 더 부탁드립니다.” 셰라가 말했다. 왕비의 발치에 앉아 발목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 부인은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셰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피투성이의 왕비가 방문한데다, 그 시녀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남자이기까지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부인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갔다. “네 정체를 아는 사람이 또 늘었구나.” 왕비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셰라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모두 입이 무거운 분들이니 괜찮습니다.” 발목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면서 입술을 깨문다. “저도 같이 갔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지금쯤 넌 죽었어.” 왕비는 끔찍하다는 듯이 말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붕대가 감긴 오른팔과 발목을 내려다본다. 결코 방심한 것이 아니다, 전력으로 싸웠다. 그 결과가 이것. 왕비의 가슴을 적시는 것은 분노도 억울함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작은 흥분과, 이상한 감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까. 살짝 닿았던 입술의 감촉을, 바로 코앞에서 보았던 빛나는 눈을 떠올린다. 어딘가 병적이면서도 날카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눈이었다. 위험한 눈망울. “내가졌어....” “리?” “만약 골디가 와주지 않았더라면, 이 검이 없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거야.” 완전히 모습이 변해버린 검의 표면을 쓰다듬는다. 셰라는 아름답게 빛나는 단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혹시 평소에 쓰던 그 검인가요?” 태연하게 물어오는 부분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다. 최근 셰라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정도로 대담했다. “응. 긴 채로는 불리했어. 저 남자는 단검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셰라는 이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거꾸로다. 단검에 비해 장검에 불편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자 왕비는 씁쓸하게 웃었다. “같은 속도로 싸운다면 긴 쪽이 유리하겠지. 그 남자의 검은 나하고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빨랐어. 믿을 수 있어?”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 남자와는 단 한번 싸웠던 적이 있었다. 분명히 상식 이상의 민첩성이었다. 간담이 서늘했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그런 감각을 느낄 여유조차 주지 않고 이겨버리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혼자서 가게 놔뒀던 것이다. 왕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덤으로 그 몸에, 그 골격으로 날 완전히 눌러버릴 만한 괴력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는데.” 셰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해봤자 설득력은 없다. “말씀드립니다만, 그런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 가녀린 몸으로 틸레든 기사단장을 한 손을 버텼던 괴력의 소유자 아니신지요? 이쪽도 충분히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를테면 내 힘은 화재가 났을 때 괴력이 솟는 거나 마찬가지야. 근력을 쓰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니까.” “.......?”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이 사람이 보기 드물게 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약물을 사용해서 일시적으로 운동 기능을 높이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왕비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게 정말이야?” “어디까지나 일시적입니다만, 그 약은 정신 상태에도 이상을 부릅니다. 판단력이 둔해지고 흥분하기 쉬워지며, 환각증상까지도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상용하면 중독되니까..” 샤미안이 희미하게 신음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 소파 쪽을 지켜보았다.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꺼낼 생각이 없던 말이 셰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샤미안님은.....괜찮으실까요.” “상처는 없어. 그냥 잠든 것뿐이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을 우물거리는 셰라에게 왕비는 대놓고 물었다. “몸은 무사하냐는 말?” “..........” “너희들은 임무 중에 여자도 즐기는 거야?” “저희들은 아닙니다.” 셰라는 단언했다. “정보를 수집할 때나 목표에 접근할 때는 몰라도, 일을 앞두고 있을 때에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감이 둔해지기 때문에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마을에서 자라난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르다. 그렇기에 걱정스러운 것이다. 녹색 눈망울이 셰라를 바라보며 박력 있게 웃었다. “그런 짓을 했으면, 난 그놈 목을 잡아 뜯어왔을 거야.” 엔도바 부인이 장작을 가지고 돌아왔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깨닫지 못하고, 장작을 쌓은 뒤 소파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란다. “샤미안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샤미안이 눈을 뜨고 있었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 펄쩍 뛰어 일어난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왕비는 창백해져서 떨고 있는 샤미안을 원래대로 눕히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는 라티나네 저택이야. 걱정할 것 없어.” 샤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왕비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눈이 불안한 듯이 좌우로 흔들린다. “그 남자는....?” “도망쳤어. 이제 괜찮아. 샤미안도 이렇게 무사하니까.” 샤미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누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왕비가 물어도, 쇠약해진 샤미안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만 하루 동안 수면제에 취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배고프지...?” 샤미안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 엔도바 부인은 몸을 돌려 부엌으로 달려갔고 셰라가 그 뒤를 따랐다. 한밤중인데다 사정도 사정이니 만치. 부인은 하인들을 깨우지 않고 혼자서 왕비 일행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금방 끓인 따뜻한 수프를 입에 떠 넣자 그제야 샤미안의 얼굴에도 생기가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신은 들었다고 해도, 의식이 없던 자신의 몸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신경 쓰이는 데 당연하다. 셰라를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분명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있었는데도 묘하게 어색했다. 상대가 남자라고 생각하면 무의식중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리라. 그런 샤미안에게 왕비가 밝게 말했다. “많이 힘들었지?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잘까?” 지금은 혼자 두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라티나와 셰라가 자리를 비우고 왕비 혼자만 거실에 남게 되자 샤미안은 불안한 듯이 말했다. “비전하..... 저는 그....” 왕비는 샤미안의 말을 막았다. “괜찮아. 샤미안은 유괴 당했을 때 그대로야. 걱정 안해도 돼.” “하지만.....” 불안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불안이 큰 것인지도 모른다. 왕비는 조금 웃고서 샤미안의 빰에 입술을 가가이 대며 속삭였다. “남자 냄새가 섞여 있으면 금방 알 수 있다고. 그러니깐 괜찮아.” 샤미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비전하!” “알고 싶어했던 건 샤미안이잖아. 자, 이제 자, 날이 밝으면 집으로 돌아가자.” 거실의 소파는 두 사람이 눕고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왕비는 샤미안 곁으로 파고들었다. 정말로 왕비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사력을 다한 전투 뒤였기 때문인지 왕비는 그대로 푹 잠들어버렸다. 한편 샤미안은 긴 잠에서 겨우 깨어난 뒤라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충격에서 회복되고 나자, 심신이 단련된 여기사인 만큼 이미 지나간 일을 분해해봤자 소용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자신의 멍청함이 견딜 수 없이 분했다. 한순간의 일이었기에 샤미안으로서는 그 남자의 무서움도, 왕비를 경악하게 만든 그 실력도 알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의 실책을 괴로워했지만, 곁에서는 완전히 지친 얼굴의 왕비가 잠들어 있었다. 오른팔에 감긴 붕대를 보자 가슴이 아팠다. 발목에도 큰 상처를 입어서 가볍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전혀 얘기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우다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다. 샤미안도 왕비의 실력이 얼마나 굉장한지는 지겹도록 잘 알고 있었다. 공평한 상황에서 마주쳤다면 저런 남자 한두 명에게 밀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 샤미안은 펑펑 울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왕비에 대해 미안한 심정과 형용하기 힘든 감사의 마음 때문이었다. 7 장 조용히 아침을 맞은 도라 장군이 무사히 돌아온 딸을 보고 엄청나게 기뻐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하인들에게는 단순히 눈 구경ㄹ 갔다고 해두었으니, 너무 기뻐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수염으로 뒤덮인 입가를 애써 꽉 긴장시키고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 모습은, 타국의 유력자들이 ‘맹장’으로 경외하는 무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왕비의 부상을 보고 창백해진 것은 딸과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드릴 말씀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깊이 고개를 숙이는 장군에게, 왕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과해야 할 건 나야.” “예....?” 이상한 표정을 짓는 장군에게, 왕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적의 목표는 처음부터 왕비 한 사람이었고, 레나도 샤미안도 거기에 말려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라 장군은 딸이 무사히 돌아온 이상 이 일을 정식으로 밝히고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비는 그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미 멀리 도망쳤을 거라는 점이 하나, 그리고 사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샤미안이 그 적에게 붙잡혔었다는 사실도 밝힐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입이라는 것은 한도가 없는 법이니 결혼도 안 한 처녀에게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다른 이유였다. 왕비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장군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다름 아닌 왕비인 것이다. “월한테도 말할 필요 없어. 이미 끝난 일이니까.” 장군은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 이상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은 왕비도 잘 알고 있었다. 서리궁에 돌아오자 셰라가 왕비를 맞아주었다. 남자 모습인 자신을 엔도바 부인의 하인들이 보면 큰일이므로 왕비보다 먼저 돌아온 것이다. 잿빛 늑대도 돌아와 있었다. 왕비를 보자 기쁜 듯이 콧등을 문지른다. “정말 고마워.....” 덫에 걸렸던 앞다리의 상처는 상당히 깊었지만, 늑대는 이 정도 상처는 핥아서 치료한다. 왕비 역시 며칠 동안 서리궁에 숨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발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왕비에게 있어서 새가 날개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이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늑대와 둘이서(?) 실컷 먹고 실컷 자며 거실에서 데굴거리기로 작정했다. 셰라는 이때라는 듯이 한때 습득했던 기술을 마음껏 발위하기로 했다. ‘마을’에서는 독약만이 아니라 치료약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가르쳤다. 단지, ‘마을’이라는 기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약재의 입수가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다. 셰라는 왕비에게 돈을 꾸어 마을에서 필요한 약재를 구해 와서 효능이 뛰어난 치료약을 만들었다. 하지만 완성된 약은 코를 찌를 듯한 냄새가 나는 끈적끈적한 겨자색 연고였으므로 왕비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약이라는 것은 산야에 돋아 있는 초목에 한정된다. 그런 정체 모를 물건을 몸에 바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난 됐으니까 골디한테 발라줘.” 이 말에 셰라는 큰 상처를 입었다. “30볼김이나 들인 약이라고요.” 왕비는 눈을 부릅뜨고서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땅 파서 돈 버는 건 신전만이 아니었군. 어째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금액이 되는 건데?” “여러 가지 진귀한 재료가 필요했으니까요. 남쪽 지방에서만 나는 재료는 아무래도 비싸지거든요.” “사기구만.” 기막혀하면서도 시녀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손발의 상처에 약을 바르도록 허락했다. 늑대는 수상한 분위기를 깨달았는지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 왕비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시녀가 붕대를 감는 것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물음을 던졌다. “일시적으로 운동 능력을 높이는 약이 있다고 했지? 어떤 약이야?” “저희들은 호마라고 부릅니다.” “먹는 거야...?” “아뇨, 일종의 암호입니다. 사실 어떤 원료로 만들어지는지는..., 식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만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건 네가 만들었잖아?” 겨자 색 연고가 발린 팔을 들어올린다. “제가 마을에 나가서 원료를 사온 것처럼, 마을에도 그런 역할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을의 약재 창고에는 언제나 백여 종 이상의 약재가 쌓여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자유롭게 조합해서 다양한 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만, 호마만은 원료가 아니라 처음부터 약만 있었지요.” 셰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의 자신은 이 사람에게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약은 정말로 양날의 검입니다. 훈련으로 강한 육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신경을 자극해서 일종의 흥분 상채로 만들어 초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일시적으로 몸을 속이는 것이나.” 그렇기에 약의 효과가 떨어지면 도로 아미타불. 게다가 이 약은 습관성이 강하다. 계속 사용하다보면 중독 되어 갈망하게 되며 약을 계속 복용하지 않으면 금단증상까지 일으킨다고 한다. 일류는커녕 그렇게 되고 나면 그 인간은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셰라의 고향인 다리에스에서 호마는 완전히 치료용으로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 약, 냄새가 나?” “냄새?” “응. 머리가 저리는 것 같은. 굉장히 달고 진한 향수 같은 냄새....” 셰라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거의 접해볼 일이 없던 약인 것이다. “확실히 달콤한 느낌은 있습니다만....” “아니, 그 정도가 아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코를 찌를 것처럼 풍기던데.” “그 남자 말입니까?” “응.” 왕비도 생각에 잠겼다. “만에 하나 그 녀석이 날 여자라고 깔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투할 때에 향수씩이나 뿌리고나올 만큼 멋 내기 좋아하는 녀석 같지는 않았어. 지면에 파고들어 숨어 있던 데다 눈까지 내려서 나도 곧바로 깨닫지 못했지만, 자기가 어디 있는지 상대에게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잖아.” 셰라도 동감이었다. “설령 제가 당신처럼 후각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과 싸운다고 해도, 향수를 뿌리고서 싸우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호마라는 약하고는 다른 물건인지, 아니면 굉장히 많은 양을 썼든지....” “그런 짓을 했다간 운동 기능이 높아지기 전에 심장이 멎어버릴 겁니다. 미쳐버릴 수도 있지요.” “그런 거야?” “어떤 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용량을 지키면 효과적이지만 도가 지나치면 해가 되지요. 한정 없이 써버린다면 이미 독약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그건 극약이니까요.” 왕비는 한참 생각하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안 죽을 것 같긴 하지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너, 전에 그 녀석하고 붙어본 적 있다고 했지?” “예.” “내가 말하는 향기는 느껴보지 못했다 이거지?” “예. 적어도 저는 아무것도....” 왕비는 다시 침묵했다. 생각에 젖어 소파에 드러누운 채, 반쯤 눈을 감고 있다. 그 눈꺼풀 사이에서 녹색 눈망울이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셰라는 조용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이런 때의 왕비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편이 낫다. 어제부터 계속 고아낸 새끼양의 뼛국물을 거두고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다시 한 번만 데우면 될 시점까지 완성하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왕비는 변함없이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셰라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너희들 마을에는 통증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약도 있어?” “예.” “뼈가 부러지거나 관절이 빠지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약이 있는지 알고 싶은데.....” “예, 있습니다.” “그 약을 사용한 상태에서 움직임은 어떻게 되지?” 셰라는 이상한 듯이 말했다.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마취니까요.” “손발이 완전히 마비된다는 거지?” “예.”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대신에 몸도 움직일 수 없다는 얘기?” “보통 마취란 그런 거니까요.” “그럼 진통제는? 그거라면 움직일 수 있잖아.” “진통제와 마취제는 다릅니다. 진통제는 뼈가 부러지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게 만드는 건 무리죠. 탈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답을 들었는지 아닌지, 왕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리.” “왜?”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됩니다만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계속 생각하실 건가요?” 자신의 태도를 나무라는 듯한 시녀의 말에, 왕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먹어야지. 이런 겨자 반죽보다는 셰라가 만든 요리가 훨씬 상처에 좋을 거야.” “진짜 겨자를 상처에 바르면 큰일 난다고요.” 사흘이 지나자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일주일후에는 전혀 지장 없이 검을 휘두르며 늑대와 함께 산 속을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야생동물 수준의 회복능력이다. 열흘째 밤, 왕비는 실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폐문 시간 전에 궁성을 나서서 해가 저문 뒤, 감시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세 겹의 방어벽을 뛰어넘어 서리궁에 돌아오려는 것이다. 물론 경비병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그때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왕비는 싯서스로 발을 옮겼다. 이곳은 코랄 내에서도 가장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술집과 도박장, 매춘굴이 뒤섞여 있는 지역이다. 무슨 이유가 있더라고 한나라의 ‘왕비’가, 그것도 해가 진 뒤에 놀러 나갈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이 나라의 왕비는 그런 상식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천으로 감싸고 얼굴과 옷도 조금 더럽혀 산악민 소년으로 변장한 다음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때때로 여자라는 것을 눈치 챈 덩치 큰 남자들이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왕비는 언제나 멀쩡하게 걸어 나왔고, 그 뒤에 남아 있는 것은 남자들이 큰 대자로 뻗어 있는 광경이었다. 왕비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 물론 매춘 굴에도 볼일은 없다. 이곳에는 먹고 마시러 오는 것이다. 적당한 술집으로 들어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남자들을 피해 벽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돼지곱창과 술을 주문했다. 싯서스의 장점은 손님에 대해서 탐색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왕비를 소녀 같은 얼굴의 소년으로 판단했지만 태연하게 주문을 받았으며, 인파 사이를 뚫고 재빨리 요리가 나왔다. 신나게 요리를 먹으면서 왕궁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한 술을 비우고 있을 때, 눈앞의 좌석을 가리키며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여기 앉아도 대?” 물론, 이라고 말하려던 왕비였지만 그 말은 건낼 수 없었다. 사향고양이 같은 눈이 왕비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날 밤, 왕비는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잠도 안 자고 왕비를 기다리던 셰라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월담은 왕비가 때때로 치는 장난이다. 평상시의 왕비라면 멍청하게 발견될 리가 없지만 지금은 겨우 상처가 막 아문 몸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몇 시간, 자정도 한참 넘어서 새벽이 다 되어갈 때에 왕비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저도 모르게 물어보자, 왕비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 남자하고 만났어.” 순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왕비는 녹색 눈을 장난스럽게 빛내고 있었다. 상당히 많이 마신 듯 뺨이 상기되어 있다. 왕비는 거실의 소파에 드러누웠고, 셰라도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 남자라니.......그 남자 말입니까?” “응.” “어디에서?” “청록정.” “네.....?” “싯서스에 있는 술집이야. 이름은 푸른 사슴인 주제에 돼지고기 요리가 맛있어. 특히 곱창이 최고지. 술도 꽤 괜찮고.”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겁니까?” “저쪽에서 날 발견했나봐.” “그래서....?” “술이랑 안주를 먹었지.” “그 남자하고 같이, 말입니까?” “응, 둘이서. 그 자식, 몸은 마른 주제에 엄청 처먹던데.” 그렇게 말하는 왕비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 것을 깨닫고, 셰라는 말을 잃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상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국왕과도 그토록 충돌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력을 다해 싸웠던 적과 화기애애하게 술을 마시고 오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남자도 꽤 재미있던데.” “.........” “미친 건 아냐. 지극히 제정신이었고 그 남자 나름의 정의감도 분명히 있는 데, 윤리관만 쏙 빠져 있어.”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요.” “바로 그거. 하지만.....네가 말하는 것하고는 조금 의미가 달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셰라에게 왕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은 상대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다는 의미지?” “예......” “그 남자는 몰라. 자기가 죽이는 상대가 같은 생물이라고는 전혀 생각 않고 있어. 그렇다고 깔보는 것도 아냐. 난 선택받은 인간이다 따위의 우월감에 취해 있는 것도 아니지. 자신과 다른 생물이라고 생각하며 단순한 사실로 믿고 있었어. 나하고 비슷하더군.” “리?!” 셰라는 거의 비명에 가깝게 외쳤다. “그만 하세요! 대체 어디가 비슷하다는 겁니까?!” “그 녀석은 나보다 훨씬 담백한 편이지만.” 대답이 안 되는 말을 하더니 왕비는 혼자 말처럼 얘기를 계속했다. “인간도 마찬가지잖아. 이를테면 파라스트인은 탄가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죽어버린다고 해도, 아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거야. 자신들과는 다른 인간이니까. 천척이라도 있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그 녀석은 완전히 혼자니까.” “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주십시오!” 발끈하는 시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왕비는 잠깐 웃었다. “어려운 걸. 너, 아직 날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적어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는 생각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야. 이를테면........너 요리하지?” “예.” “향을 낼 때 뭔가 잎 같은 걸 쓰잖아. 그것 자체는 안 먹어도, 향이 충분히 스며들면 꺼내서 버리는 식으로..” “월계수 말씀인가요?” “응. 뭐든지 상관은 없지만, 누군가 그걸 보고먹지도 않을 걸 버리다니 너무하다고, 그런 짓을 할 바에는 처음부터 가만히 나무에 붙어 있게 내버려주지 그러느냐고 하면 어쩔 거야?” 셰라는 기가 막혔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그런........그런 걸로 너무하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야.” “.......?” “그 남자한테 레나는 월계수 잎인 거야. 너무하다고 말해도,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던데.”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레나는 인간입니다! 나뭇잎하고는 다릅니다!”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그 남자한테 그 사실을 납득시키는 건 무리야. 그래도 앞뒤 안 가리고 죽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른 인간들보다 양심적인 편이야.” 셰라는 낮게 신음했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남자에게 속아 넘어갔다거나-먼가 요술에 걸려서 제정신을 잃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시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왕비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렇게 놀라지마. 난 제정신이니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럼 하나만 더, 네가 싫어 할 말을 해볼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네가 레나의 죽음에 대해 분개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셰라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뒤로 물러섰다. 뭔가 나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왕비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그런 점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 왔지만, 역시 확실하게 매듭은 지어둬야겠지.” “얘기라니....” 한심하게도 목소리가 떨리면서, 거의 비명 같은 말투가 되었다. 왕비는 그런 셰라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그 남자는 통증을 느끼지 않나봐.” “무슨.....말씀이신지...” “저번에 물어봤었지? 통증을 완전히 없애고 운동 기능은 방해 받지 않는 약 같은게 없냐고.” “예.” “그런데 말이지. 골디에게 어깨를 물렸을 때 그 남자가 뭐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셰라는 눈짓으로 그 뒤를 재촉했다. “어라? 였어. 모기한테라도 물린 것 같은 반응이던데. 골디는 늑대 중에서도 상당히 큰 편이야. 그런 늑대가 달려들어서 정통으로 물어뜯었는데 쓰러지지도 않았어. 피투성이가 된 팔로 태연하게 단검을 던지더군. 오늘도 기가 막힐 정도로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도저히 열흘 정도로 나을 만한 부상은 아니었어.”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닙니까?” “틀려. 양쪽 어깨하고 두 발목의 관절을 빼버렸거든. 그런데도 태연한 거야. 오기로 참은 거라면 대단한 놈이지만..., 통증 그 자체를 느끼지 않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있어. 아주 드물지만. 하지만 그건 병의 일종으로 그렇게 되는 거지.” “,,,,,” “외부 환경의 정보, 추위나 더위, 그것이 몸에 주는 정보, 화상을 입었다든가 뭔가에 부딪혔다든가 하는 정보를 몸이 느끼지 못하는 병이 있어. 아니 몸은 알고 있어도 자각할 수 없는 거야. 물론 흔한 병은 어니지. 굉장히 희귀한 병이야.” “.......” “실제로 이건 굉장히 위험한 거야. 피가 흐르는데도 깨닫지 못해서 출혈과다로 쓰러질지도 모르지. 칼에 찔려서 내장가지 다쳤는데도 가벼운 부상이라고 생각하다가 손쓸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기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니까 햇빛 아래에서 태연하게 걸어가다가 일사병이 될지도, 영하로 온도가 내려가도 깨닫지 못하고 얇은 옷으로 돌아다니다 폐렴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아픔을 못 느끼니 좋겠다는 농담도 못해. 상처나 병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몇 배 이상으로 주의가 필요할 테니까.” “그 남자가 그런 병이라는 겁니까?” “글쎄, 그걸 모르겠어. 돼지 찜은 뜨겁다면서 후후 불어서 먹던데.” “......? 이상하지 않습니까? 피부가 열을 느끼지 않는데. 혀는 느낀다고요?” “이상하지. 그러니까 연극으로 뜨거운 척했든가. 아니면 고기찜이 뜨거운 게 싸움 때만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의지로 몸을 조절하는 거든가, 둘 중 하나겠지.”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냐.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사실 난 느끼지 못하는 거라고 80퍼센트는 믿고 있지만.” “.......” “그 남자는 나나 네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어. 불을 뜨겁다고 느끼지 않고, 얼음을 차갑다고 느끼지 않고, 뼈가 부서져도 아픔을 느껴지지 않는 세계. 상상할 수 있어?” 셰라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오한이 든다. 설마 그런 정체 모를 존재를 상대하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것뿐이 아냐. 아무리 통증이 없다고 해도 말이ㅑ. 몸에 타격을 가하면, 이를테면 다리가 부러졌다면 달리기 힘든 게 정상인데....” “아니, 애초에 달릴 수가 있습니까?” “통증이 전혀 없고 근육도 마비되지 않았어. 움직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뼈가 부러졌는데도요?!” “말했잖아.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은 저 남자한테 통용되지 않아.” 매섭게 말하고서 다시 씁쓸하게 웃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자세한 사정까지 아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어려운 상대야. 그런 특이체질을 제쳐두더라도 나하고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녀석이니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셰라는 변함없이 어떤 종류의 공포감을 안고 그런 왕비를 바라보다가, 몸을 떨면서 간신히 말했다. “리.....” “응?” “그 남자는 -안 됩니다.” “안 된다니?”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몇 번이나 주저했다. “당신이.....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모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들을 답답하게 느끼고 계시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부탁이니 제발 그런 놈에게 동족의식을 품지 말아주세요. 레나 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자는.......정상이 아닙니다.”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감이지만 정상적인 남자한테는 흥미가 없어.” “리!” “농담이야. 그 녀석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나도 나름대로 대응을 할 테니까.” 왕비는 거기서 말을 끊고 침실로 들어갔다. 셰라는 조용히 밤을 새웠다. 자고 싶어도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왕비의 곁에 있게 된 뒤부터 이렇게 불안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마을을 잃었을 때에는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불안이었지만, 지금 셰라가 느끼는 불안은 왕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왕비 자신에게 재난이 끼칠까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왕비도 그 정도는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지닌 사람이었다. 셰라 자신도 경악하고 있지만, 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정체 모를 공포가 왕비에게서 느껴진다는 시실이 불안했던 것이다. 정말로 두려웠다. 사람들은 전쟁의 여신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 사람의 마음은 대체 어떤 모양인 걸까.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정말로 인간의 편일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만일 아니라며, 저 남자 쪽에 강하게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어제의 왕비를 생각하면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주인을-적어도 주인으로 인정한 상대에게 의혹을 품는 것은, 셰라 같은 존재에게는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이었다. 더욱 힘든 것은 셰라에게 이런 고민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본래 셰라의 의논 대상은 왕비였지만, 바로 그 왕비가 지금만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의 기계적으로 일어나 기계적으로 일했다. 미칠 듯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국왕과 의논해보기로 마음을 굳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막 파키라 건너편으로 숨어드는 붉은 태양을 보고, 셰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돌발 사태에 약한 자신의 성격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나마 국왕에게 의논하기로 결심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마음이 가벼웠다. 저녁 준비를 시작했지만, 어두워지도록 왕비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식어버린 요리를 다시 데우고 있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얌전히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던 시녀는 점점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한다면 반드시 말을 했을 터였다. 분명히 낮에는 몇 번 모습이 보였다고 생각한다. 오늘 저녁은 필요 없다는 말을 했었는지 몇 번이나 고민해봤지만 그런 말은 안 했던 것 같다. 점점 불안감이 커져갔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등불을 들고 바닥 구석에 숨겨둔 비밀 상자를 찾았다. 납구슬이나 은선, 극히 가느다란 단검 등 남의 눈에 띄면 곤란한 무기들을 숨겨두는 장소였다. 서둘러 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셰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납구슬이 남김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물거리고 있을 틈이 없다. 서리궁을 뛰쳐나와 곧바로 부용궁으로 달려갔다. 이곳은 굳이 말하자면 국왕의 ‘신혼집’이었다. 폴라를 처음 애첩으로 들였던 때, 왕비가 반쯤 장난으로 부용궁만 다니지 말고 가끔은 서리궁에도 얼굴을 비추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그럼 너도 같이 부용궁에서 저녁을 먹자고 대답했고, 왕비는 웃으면서 신혼부부 사이를 방해할 수는 없다며 말을 돌렸다. 원래부터 파격적인 부부였던 만치, 국왕이 측실을 들이고서도 부부 사이는 변함없이 양호했다. 최근 국왕은 사이좋게 지내던 소녀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폴라를 위로하기 위해. 조금만 시간이 나도 반드시 부용궁을 방문했다. 지금쯤이라면 분명히 저녁 식사를 들고 있을 것이다. 평소라면 찾아가기를 포기했겠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셰라는 대기실에 있던 종자를 재촉해 국왕을 불러냈다. 국왕은 식사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와, 비전하 문제로 드릴 말씀이 있다는 창백한 얼굴의 셰라를 보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또 안 먹고 안 잔다는 건 아니겠지.” “아니, 몸은 아무렇지도 않으십니다. 건강하시지만.” “그럼 뭐지?” 셰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남자가 생겼습니다.” 이 말에도 국왕도 경악한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야, 그거..., 굉장히 간단하군?”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오늘밤도 분명히 그 남자를.....만나러 나가신 겁니다.” “호오?! 그것 참, 별 특이한 남자도 다 있군.” 완전히 재미있어하는 말투였다. “리가 하는 짓이니 정상적인 ‘밀회’는 아니겠지. 내버려둬도 괜찮을 거야. 게다가 남의 연애를 훼방 놓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느긋한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악취미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납구슬을 들고 나가셨습니다!” 보기 드물게 흥분하는 셰라를 보면 국왕은 다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필살의 무기까지 들고 밀호라니, 거 요란하군. 대체 어떤 남자야?” 부용궁 쪽 눈치를 살피며 셰라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레나를 죽인 남자입니다.” 갑자기 국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셰라를 노려본다. “악취미 정도가 아닌 문제잖아. 어째서 가게 내버려둔 거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치 챘을 때에는 이미 안 계셔서.....” “밀회 장소로 짐작 가는 곳은?” “아마도 싯서스의 청록정이라는......” “알았다.” 국왕은 딱 잘라서 대답하고, 식사 중이던 애첩에게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나갔다 오겠다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자세한 사정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폴라도 끈질기게 묻지 않았다. 이 사람의 최대의 장점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 점이었다. 국왕은 그대로 정문을 빠져나갔다. 도중에 이곽에 있는 타우의 자유민 숙소에 들러 질이나 이븐이 기가 막혀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남자에게서 옷을 빼앗아 싸구려 검을 집어든 뒤 금은으로 장식된 자신의 검을 맡기고 나갔다. 기가 막혔지만 셰라도 국왕과 똑같이 행동했다. 이곳에는 본궁의 하녀들보다 조금 서민적인 계층의 아가씨들이 일하고 있다. 적당한 아가씨와 옷을 바꿔 입고, 화장도구를 빌려 재빨리 진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도 일부러 흐트러진 분위기로 땋아 올렸다. 국왕과 왕비 직속의 소녀는 사라지고, 자유민과 젊은 작부가 완성되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마디뿐. “비밀이야.” 국왕은 그 말만 남기고 코랄의 밤하늘 아래로 사라졌다. 청록정에는 오늘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요리가 싸고 맛있는데다 술맛도 상당히 괜찮은 가게라면 손님들이 몰리는 것도 당연하다. 부엌에서 식칼을 휘두르는 남자들에서부터 요리를 나르는 소녀들까지 구슬땀을 흘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 가게는 입구가 좁지만 안은 넓은 편으로, 장사가 잘 되는 가게가 언제나 그렇듯이 손님들은 계속해서 드나들지만 구석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손님들도 보인다. 왕비는 그 남자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특별히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마주쳤던 것이다. 요리와 술을 주문하고, 아무 대화도 없이 두 사람이 묵묵히 음식을 먹던 도중 왕비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넌 살인자고, 사기꾼이고, 덤으로 거짓말쟁이야.” 바쁘게 요리를 비우던 남자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난 당신한테 거짓말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친절한 마음에서 부상자를 죽였다가 마물이라고 불렸다고 했지. 세라 얘기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던데.” “그야, 그 아가씨는 마을 출신이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웃는다. 이것이 거의 버릇인 모양이다. 뻔뻔스럽고 오만한 웃음이었다. “생명을 끊는 것은 영혼을 구제하는 행위라는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믿고 자랐겠지. 불쌍하게도, 그런 공갈을 아무도의심조차 안 하는 걸 보면 교육의 성과라는 것도 꽤 무섭잖아.” 왕비는 돼지고기를 뜯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의심해봤자 눈앞에서 성령이 후광을 뿜으면서 나타나면 깜짝 놀라면서 엎드릴 수밖에 없겠지.” 남자는 깔깔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래, 그거, 그거. 순진하단 말이야, 그 녀석들.” 남의 일처럼 말하면서 남자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네 아가씨만이 아니야. 마을에서 자란 놈들, 엄청 재미있거든. 주인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잘해내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먹이도 주고, 그게 기뻐서 신나하는 걸 보면 귀여워서 말이야.” “넌 기쁘지 않아?” “전혀. 우선 칭찬 받아본 적도 없어.” “..........?” 왕비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칭찬을 안 해?” “일은 일이야. 완벽하게 하는 게 당연하잖아. 혹시 우리 보스가 신나서 칭찬하거나 하면 오히려 기분 나쁠 걸.” 턱을 괴면서 낄낄 웃는다. “너, 살인이 재미있어?”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왕비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다. “재미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걸. 죽이는 것 자체는 어떻게 죽이든 큰 차이 없으니까.” “그럼 왜 계속하는 거지?”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애기도 된다. 왕국의 중추를 담당하는 가신들이라고 해도 이런 일이 원인이 되어 서로 다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이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남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일류의 기술을 지니고 있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자신감도 있을 텐데. 납득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거나 긍지에 상처를 입을 만한 일은 없는 걸까 생각했지만, 남자는 시원스럽게 왕비의 질문에 대답했다. “따로 할 일도 없으니까.” “그럼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생각해본 적은?” 선이 뚜렷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꼭 그만둘 만한 이유가 없잖아?” 왕비는 조금 웃었다. 어째서 웃음이 나왔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낮게 웃고만 있었다. 뚫어져라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너, 이름은?” 처음 만난 설원. 두 번째의 해후에 이어 세 번째 얼굴ㅇㄹ 마주치고서야 처음으로 왕비는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남자는 이 질문에 만족한 듯이 씨익 웃었다. “레티시아.” “내 시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어째서 그렇게 예쁘장한 이름이 붙은 건지..” “내가 보기에는 당신도 충분히 예쁘장한 이름인 걸. 그린다. 정식으로는 그린디에타. 부모가 붙여준 이름에 불평하면 안 되겠지만, 정말 안 어울려.” 왕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모가 붙여준 이름이 아냐.” “나도야.” “........” 하는 말마다 딱딱 대답이 돌아온다. 녹색 눈망울이 상대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남자의 눈은 원래는 검은 색이지만 묘하게 투명하게, 마치 고양이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렇다고 당신네 아가씨처럼 마을 종사가 붙여준 건 아니라고, 난 그런 게 아냐. 버려진 걸 주운 아이거든.” “주워?” 남자는 빙긋 웃었다. 의표를 찌르는 데에 성공한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신경 쓰여?” “조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젊은이는 셰라와는 전혀 다른 기관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말이 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나 설질이 달랐다. “너하고 내 시녀가 어째서 같은 파로트 일족이지?” “그 이름을 비밀로 하고 싶었겠지?” “셰라는 그 이름을 몰랐어. 넌 알고 있지.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거지?” “어디라고 해도 말이지?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마을 출신 중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건 반츠아 정도니까.” “누구?” “레가의 반츠아. 당신네 아가씨를 끈질기게 노리고 있지. 그 놈은 마을 출신 치고는 꽤 실력이 있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남자는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아가씨도 상당히 가능성은 있던데. 일단은 내 공격을 피한 셈이니.” “네가 봐준 거겠지.” “봐줬다고 할 것까지는 없고 조금 놀아준 것뿐이야. 안 그러면 죽어버릴 것 아냐.” 귀찮다는 듯한 말투였다. 왕비를 공격했을 때의 그 민첩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른하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도 전혀 절도가 없었다.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응이 있는 놀이 상대가 필요한 거야?” 그렇게 묻자 다시 웃는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난 이 세계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편이야. 죽이는 것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반드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게 있지. 그걸 완벽하게 해치우는 게 제일 재미있어. 그런데 당신하고 싸울 때처럼 재미있고 즐거웠던 적은 한번도 없더란 말이지.” 그러니까 같이 놀자는 듯이, 투명하게 눈을 반짝이며 씨익 웃는다. 왕비도 웃었다. 부정이 아니었다. 왕비도 이 남자도, 전사로서의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고 있다. 왕비는 살아가기 위해, 이 남자는 암살을 위해 몸에 익힌 것이지만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은 확실히 일종의 기쁨이며, 크나큰 만족을 느낀다. “유감인데. 레나 일만 없었으면 마음이 맞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왕비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당신, 그 애하고 그렇게 사이가 좋았어?” “아니.” “그럼 나한테 화낼 이유도 없지 않아?” “맞는 말이야. 네가 레나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도 사람이 죽는 것에 일일이 화를 낼 의리는 없으니까.” 남자는 기쁜 듯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단지..........” “응?” “네가 한 짓 때문에 폴라가 울었어.” “.....” “월도 진심으로 화냈지.” “........” “그게 굉장히 곤란해.” 남자는 웃음을 거두었지만 아직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당신한테 소중한 건 그 두 사람뿐이야?” “아니, 셰라도 샤미안도, 그밖에도 많이 있어. 무엇보다도 레나처럼, 나 자신에게는 그리 소중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경우도 있어.” 남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쪽으로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나도 임무니깐 반드시 당신을 죽여야 하지만, 당신한테 미움 사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런 말을 아무런 모순 없이 진지하게 뱉는 구석이 기이하다고나 할까. 기분 나쁜 것이다. 하지만 왕비도 진지했다. “그래주면 좋겠어. 나도 이렇게 된 이상 널 꼭 쓰러뜨리긴 해야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미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치만 말이지, 그런 거 재미있어? 생판 남을 위해서 싸우고 지켜주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보기에는 당신, 굉장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로 보이는데.” 왕비는 가볍게 웃었다. “이유라면, 네가 아까 말했잖아.” “헤에?” “따로 할 일도 없으니까.” 두 사람은 눈을 마주 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배까지 끌어안고 웃고 있었다. 끝내는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과연......, 그런가. 남의 취매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면 안 되지.” “그런 거야.” 남자는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다시 술을 한 병 주문하고, 말을 돌리며 자신과 왕비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건배하지. 이 즐거운 만남을 위해서.” 왕비에게도 이의는 없었다. 사실 이 남자와 함께 대화하고 있으면 즐거웠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도 없고, 입을 다물고 있어도 저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술잔을 비웠다. 남자가 입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남자가 입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이 위에 방이 있어.” “.....?” “당신만 괜찮으면 저번의 계속, 하지 않을래?” 왕비는 입 끝을 올리며 조금 웃었다. “괜찮아?” “뭐가?” “지금 너한테서는 그 냄새가 안 나.” “........” “그게 저번에 부렸던 마술의 비결이겠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지금은 호마를 쓰지 않은 상태지만, 그렇다고 당신 상대도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거 대단한 자신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한 번 시험해보는 게 어때?” “좋겠지.” 느긋하고 평화로운 대화였다. 누가 들어도, 설마 이제부터 사투를 펼칠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변장한 국왕과 셰라가 인파 속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국왕은 레티시아를 처음 보는 셈이 되지만, 분명히 선이 가늘고 마른 남자였다. 도저히 왕비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만한 실력자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왕비 역시 그 모습과 실제의 전투력 사이에는 상상하기 힘든 격차가 있는 것이다. 체격 좋은 자유전사와 아름다운 작부는 요리도 술도 내버려두고 기둥 뒤에서 열심히 저쪽을 훔쳐보았다. 이래서는 수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을 정도다. 바쁘게 가게 안을 오가던 소녀도 기분 나쁜 듯이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꽤 친해 보이는군.” “친합니다.” “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은데.” “무르익었지요.” 셰라는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독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니까 함께 먹고 마시고 하는 거겠지만, 과신은 금물이다. 저 남자라면 왕비조차 감지할 수 없는 미지의 약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마침내 왕비와 그 남자가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는가 싶었지만, 주방 옆에 있는 계단 쪽으로 들어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뭔가를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여기서 싸울 생각인가?” 국왕이 중얼거리며 셰라를 바라보았다. “일대 일의 승부라면 손대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저 남자는 함정을 파두고 기다렸다고 했지?” 진한 화장의 작부는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아래에 덫을 스무 개나 설치해놨습니다.” 게다가 정성스럽게 그 위에 얇은 천을 덮어서, 눈이 내린 뒤에 뽀족하게 솟아오른 톱니가 눈에 띄지 않게까지 해두었다. 저 남자가 숨어 있던 구멍 역시 마찬가지로, 조금 깊게 지면을 파고 그 위에 얇은 판자를 덮어서 눈이 자연스럽게 쌓이게 했다. 그리고 차가운 흙 속에서 최소한 반나절 이상이나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소름이 돋는다. 자신도 한때는 자객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냉혈 파충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님들의 열기로 가게 안은 충분히 따뜻했지만 셰라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 절대로 그런 존재와 왕비가 비슷할 리 없었다. 국왕도 팔짱을 끼고, 흔히 보기 힘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좋아!” 마음을 굳히고 일어나더니 국왕은 두 사말이 얘기를 나눈 남자 쪽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2층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좀 전의 두 사람은 어디 간거야?” “뭐...?” 붉은 얼굴의 남자는 조금 놀라다가,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천박하게 웃었다. “멍청한 소리 말라고, 손님. 이 위는 여관이야. 지금쯤 재미보고 있겠지.” 유감스럽게도 재미는 재미지만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 “어느 방으로 들어갔지?” “지금 농단해? 당신. 어디서 온 촌놈이ㅑ? 남이 구르는 거 봐서 뭐가 재미있어? 여긴 싯서스라고. 당신도 그 체격이면 가만히 걷고만 있어도 여자들이 가만 안 둘 텐데. 눈 깜짝할 사이에 양쪽에 주렁주렁 매달릴 걸? 뭐. 재미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주머니 사정에 달렸겠지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남자에게, 국왕은 압도적인 박력을 풍기며 스윽 다가섰다. “지금 두 사람, 어느 방에 들어갔어?” “거 되게 말귀 어둡네. 생판 남에게 그런 걸 어떻게 가르쳐줘?!” 국왕은 그 남자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고, 발이 바닥에서 떨어질 정도로 높이 들어올렸다. “남이라면 나도 상관없지만 저건 내 마누라야. 어디로 들어갔어?” 그렇게 말하면서 국왕 자신이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바람난 마누라와 내연의 남자를 붙잡으러 가는 남편니라는 역할은 뭔가 굉장히 어긋난 듯한 기분이 든다. 셰라 역시 뭔가 안 어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방 번호를 알아낸 두 사람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긴 복도 양쪽에 나란히 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복도 끝, 오른쪽 구석의 문 하나가 격렬한 기세로 확 열렸다. 열렸다기보다도, 안쪽에서 뭔가가 문에 부딪히면서 그 기세로 부서졌다는 쪽이 정확하다. 엄청난 기세로 문에 부딪힌 그 물건은 복도 반대편까지 굴러가다 기세 좋게 뛰어올랐다. “리!” 순간 이쪽을 돌아보는 왕비의 입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 실내로 뛰어 들어간다. 두 사람은 전력으로 복도를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활짝 열린 문 앞까지 달려갔지만, 동시네 안에서 납구슬이 연사되었다. 셰라는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국왕도 서둘러 문짝으로 몸을 가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검으로 막아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왕비도 방바닥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막 뛰어오르기 직전의 낮은 자세이다. 그리고 활짝 열린 창밖으로 그 남자가 몸을 내밀고 있었다. 싱긋 웃으면서. “또 보자구.” 2층 창문에서 훌쩍 밖으로 뛰어내린다. 재빨리 왕비가 뛰어나가 그 뒤를 쫓았다. 물론 국왕도 셰라도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뛰어내린 장소가 나빴다. 이곳은 번화가 한가운데였다. 남자의 모습은 골목으로 사라져서 이미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통행인들이 2층에서 내려온 기이한 3인조를 수상한 듯이 쳐다보고 있다. “발만큼은 엄청 빠른데....” 왕비가 중얼거렸다. “어디 다친 거야?” 국왕이 묻자, 왕비는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핥았다. “그 녀석 피야. 오른손을 물어줬는데, 보는 대로야.” “정말 통증을 못 느끼던가?” “응. 아예 물어뜯을걸 그랬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소동을 전해들은 경비병이 달려왔다. 국왕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서 경비병들이 경악하며 굳어버리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흉악범을 잡아야 하니 바로 부대를 불러오라고 명령했지만, 왕비가 그 명령을 제제했다. “쫓아갈 걸 없어.” 놀란 것은 국왕 쪽이었다. 작부로 변장한 셰라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이야! 놓아줄 생각이야?!” “어차피 저 녀석은 또 올 거야.” 왕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희미하게 웃었고, 그 모습에는 국왕도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의 최고책임자인 국왕이 뻔히 알면서 살인범을 도망가게 방치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안 돼. 아직 멀리는 도망가지 못했을 거야. 제2, 제3의 레나를 만들게 할 수는 없어!” 그렇게 외치는 국왕에게, 왕비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추격대를 보냈다간 전원이 당할 거야.” “부상을 입었잖아...!” 심한 출혈은 생명까지 위험하게 한다는 사실을 국왕은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픔이 없다고 해도 대량의 출혈에 따라 운동 능력이 저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말이 맞지만, 왕비는 더욱 강하게 비웃었다. “글쎄, 어떨까? 이쪽이 그렇게 생각하고 쫓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괴물이야?!” “그래, 나처럼 괴물이지.” 국왕은 말을 잃었다. 곁눈으로 얼핏 셰라의 눈치를 살핀다. 충실한 시녀는 그 시선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멍하니 굳어 있는 경비병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 근처에 조용히 얘기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없을까요?” 싯서스에서는 어려운 주문이었지만, 이 거리에 정통해 있는 경비병은 가까운 요리점을 알려주었다. 커다란 가게들 사이에 끼인 폐옥 같은 가게였다. 청록정과는 달리 어둡고 좁은데다 성질 고약해 보이는 노인 한 명이 계산대 앞에 버티고 있었다. 기묘한 3인조를 가만히 째려보다 묻는다 “주문은?” “뭐가 있지?” “밥하고 술.” 친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이 가게에는 술도 요리도 한 종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래서는 장사가 잘될 리가 없었다. 왕비는 술을, 다른 두 사람은 정식을 골랐지만 국왕은 요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왕비를 향해 말했다. “또 올 거라고 했지만, 희생자가나온 뒤에는 늦어.” 왕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술잔을 싸늘한 태도로 입에 대고 있었다. “왕의 애첩을 시중든 시녀를 조종해서 암살을 기도한 인간이야. 이 일은 네 재량에만 맡겨둘 수 없어. 나한테는 나라의 안전을 지킨다는 의미에서도 그 남자를 처치할 의무와 권리가 있지. 이번엔 상황이 안 좋았지만, 무장 병력으로 포위해서 한꺼번에 공격하면 놓칠 리 없어.” “그런 짓, 내가 허락 안 해.”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놈은 내가 처치하겠어. 기어들지 마.” “가능할 리가 없잖아! 레나를 죽이고, 네 목숨까지 노리는 놈이야!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시끄러워.” 국왕은 말문이 막혔다. 셰라도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상하다. 정말로 평소의 왕비답지 않았다. 국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상한 듯이. 뭔가 낯선 이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왕비를 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답지 않아!” “답지 않은 건 네 쪽이야. 갑자기 남편 행세하면서 나한테 일일이 지시하지 마.” 매서운 말에 국왕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분명히 난 이름뿐인 남편에 불과하지만 널 걱정할 권리 정도는 있어!” “걱정하고 있었어?” “그래!” “질투한 게 아니고?” “그것도 조금은 있어!” 당당하게 내뱉었다. 그 남자와 왕비 사이에는 뭔가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분위가 있었다. 왕비를 가장 이해하고 있는 것도, 마음이 맞는 것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소외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국왕의 옆에서 셰라 역시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셰라도 질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술잔의 손잡이를 쥔채 쿡쿡쿡 웃고 있다. 국왕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가라고. 너한테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 남자는 범죄자라고. 그것도 흉악한 살인자야. 저놈의 마수에 걸려든 건 레나만이 아니지. 지금까지 수없이 똑같은 짓을 해왔을 거다. 살려두면 피해만 더 커질 뿐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칠 수는 없어.” “알고 있어. 나도 도망치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어.” 왕비가 말하자, 국왕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친한 것 같던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가게 2층으로 같이 올라가다니, 남들이 보면 밀회말로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누구랑 만나든, 남자랑 둘이서 방에 틀어박히든 말든 너하고는 상관없잖아? 못 본 척하고 있으면 될 것 아냐.” “그럴 수도 없다고. 잘 들어. 이건 부부로서의 의리는 제쳐두고 하는 말이야. 네가 함정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겠어?” “거 되게 질투 많은 임금님일세. 계속 귀찮게 따지고 들면 폴라한테 이른다?” “문제가 다르다고 했잖아!” 대화를 듣고 있던 셰라의 머리가 아파왔다. 어째서 이 사람들은 나란히 붙어 있으면 이렇게까지 긴장감이 없어지는 걸까. 우선 ‘왕비’가 ‘애첩’에게 국왕의 변심을 고자질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무뚝뚝한 주인이 국왕과 셰라 앞에 아무렇게나 요리 접시를 내려놓았다. 조금 특이하고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난다. 자동적으로 말다툼은 중단되었다. 국왕은 저녁 식사 도중에 뛰쳐나왔고, 셰라는 낮부터 아무것도안 먹은 상태였던 것이다. “호오....?” “맛있어....” 예상외로 요리는 상당히 맛있었다. 붉은 순무와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몇 종류의 야채를 적포도주로 익힌 뒤 향신료를 가미한 요리였다. 셰라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맛이었다. “주인장, 이거 맛있는데, 어디 요리지?” “내 고향의 맛이지.” “어디 출신인데?” “그런 거야 가게 이름을 보면 알거 아냐.” 말을 붙일 만한 여지가 없다. 간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었지만 국왕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왕비가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서 이런 먼 나라에 와 있으려면 외롭지 않나?” 주인은 왕비를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다. 왕비는 쓴웃음을 짓고 시선을 돌렸다. 국왕을 향해 말한다. “다른 종족 속에서 혼자 지내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냐. 그래도 인간들끼리라면 차라리 좀 낫지. 적어도 같은 걸로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으니까. 다소의 개인차는 있다고 치더라도.” “너하고 그 남자 얘기야....?”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다른 생물들 속에서 살아본 경험 있어? 겉보기는 자신하고 똑같아 보이지. 말도 통해. 하지마 내가 느끼는 걸 이해시킬 수도 없고, 반대도 마찬가지지. 바늘방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빈말로라도 마음이 편하다고는 못해.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 같은 게 가로막고 있으니까.” “.....” “내가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야. 아마 그 남자도 비슷한 기분이겠지.”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린다. “너, 설마....” 그 뒤를 이을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호의를 품고 있느냐고 하지만, 그건 당연한 얘기다. 친밀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반한 거냐고 대놓고 묻는 것도 어쩐지 쑥스럽다. “또 올 거라는 말은.......네가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야?” “거처만 알 수 있다면 내가 덤빌 수도 있겠지만.....왜?” “아니, 그러니까, 뭐랄까, 그게.” 왕비는 이상하다는 듯이 국왕을 쳐다보았다. 국왕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국왕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기 위해 잔뜩 고생하고 있었다. “넌 그 남자가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까.., 죽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뭐, 가능하면 죽이고 싶지는 않아.” 국왕과 셰라가 경악하는 것도 상관없이, 왕비는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먹어보고 싶긴 하지만.” 왕비의 경우 이 말이 이른바 육체관계를 가진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의 의미라는 사실은 국왕도 충분히 알고 있다. 왕비는 그대의 감촉을 다시 떠올리는 듯이 입술을 핥았다. “묘한 맛이었어. 너희들이 건강한 맛이라면 그 녀석은 굉장히 일그러진, 약에 절어버린 것 같은 맛이야. 팔 한 개쯤 먹어버리면 뭔가에 중독 될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곤란하게도, 그게 맛있더라고.” 국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왕비에게 항의했다. “너, 실은 사람도 먹는 거 아냐? 나나 셰라도 맛있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마음에 든 인간은 맛있다고.” “.....” “웃긴 얘기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맛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희들이 좋은 예지. 피만으로도 맛있었으니까. 분명히 폴라나 샤미안도 맛있지 않을까? 라티나도. 단장은 좀 질길 것 같지만 이븐은....” “잠깐!!” 국왕의 안색이 변했지만 왕비는 신비로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농담이야. 설마 정말로 그런 짓 할 리가 없잖아. 다른 것도 먹을 게 많은데.” 셰라는 또다시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지만 왕비는 더 위험한 소리를 꺼냈다. “굳이 먹고 싶으면 죽인 녀석을 맛있게 먹으면 돼. 아버지의 원수라든가. 그것도 일단은 먹어보려고 했지만 몸이 받아들이질 않더라고.” 국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의 원수는 시체를 눈앞에 두고 먹을까 말까 고민했단 말이야?” “먹지도 않을 거면 죽이지 말아라. 그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 인간을 죽인 건 그게 처음이었고, 죽인 이상 쓸모없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런데 냄새만으로도 코가 문드러질 것처럼 고약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어.” “아무래도 좀 악취미로 들리는데?” “그렇게 말하자면 그 녀석 쪽이 더 악취미야. 난 좋아하는 상대일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 그 녀석은 좋아하는 상대일수록 죽이고 싶은 거야.”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나한테 홀딱 반한 것 같으니까. 날 줄일 때까지는 다른 사람을 죽여도 만족할 수 없겠지. 자기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어.” 국왕은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아미 아무 말도 나오질 않는다. 그럼에도 일단은 확인 차 물어보았다. “어째서 그런 상대하고같이 술을 마시는 거야?” “얘기하고 있으면 재미있어.” 국왕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셰라도 항복했다는 의사를 말없이 표시했다. 턱을 괴고 있던 국왕이 씁쓸한 얼굴로 셰라를 쳐다본다. “이거 문제인데.”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무슨 말이야?” 왕비 혼자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국왕은 곤란한 듯이 말했다. “네 태도가 묘하게 이상하다는 얘기야. 그 남자한테 너무 집착하는데다. 묘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끌려가?” “그래.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여. 널 두고 남편 행세를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 남자하고 접촉한 뒤부터 묘하게 너 자신을 잃고 있는 것 아냐? 상대의 호흡에 말려들어서 이쪽 리듬이 흐트러지면 싸우기 전부터 상대가 안 되는 거잖아.” 셰라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이 사람처럼 딱 잘라 물을 수 없었다. 왕비는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연. 너희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구나.” 장난스럽게 눈을 빛낸다. 이런 모습은 평상시의 왕비와 마찬가지였다. “나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단지 그 남자가 너희들하고는 정반대 위치에 있으니까, 너희들은 이해랄 수 없는 걸 내가 이해하고 있으니까 묘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그런 걸로 비난을 들을 이유는 없잖아?” “하지만...” “인간하고 같이 지낸 뒤부터 내 행동도 상당히 점잖아졌어. 조금은 인간답게 된 걸로도 보이겠지만, 그건 표현-나 자신의 극히 일부에 불가해. 내 안에는 원래부터 그 남자하고 비슷한 부분이 있어. 너희들은 지금까지 그걸 알지 못했지. 어쩌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보려고도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것뿐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면 국왕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가금 생각했다. 이 자그마한 달걀형의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아름다운 소녀로 보이는 몸속에 어떤 영혼이 담겨 있는지. 설령 그것이 인간의 성질이나 관습과는 공존할 수 없는 형태라 하더라도, 온 세상이 이 소녀의 적이 되더라도 자신만은 친구로 있겠다고 생각했다. “리.” “뭐야?”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신뢰해왔던 동맹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국왕은 물었다. “하나만 대답해줘. 그 남자를 죽일 수 있겠어?” 왕비는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다. “우문인 걸. 난 그 녀석한테 호감을 품고 있어. 마음도 맞아. 얘기하고 있으면 즐겁지. 하지만....” 형용하기 힘든 미소를 흘리면서. “그 녀석은 날 죽이려 하고 있어. 그게 전부야. 난 죽고 싶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어. 내가 당하기 전에 죽여야지.” 사늘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글 박력에 셰라는 다시금 숨을 삼켰다.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는 것보다도 훨씬 오싹했다. 그런 반면, 이런 구석은 확실히 그 남자와 비슷해 보였다. 상대에 대한 호감과 살인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다면 이 일은 너한테 맡기지. 단, 저쪽이 비겁한 수단을 쓰거나 여럿이서 덤벼든다면 나도 가만히는 있지 않겠어. 멋대로 끼어들 테니까.” “갑자기 엄청 말 잘 듣네?” “어쩔 수 없지. 네가 감정과 상관없이 그 남자를 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넌 한 명의 전사이지. 누군가가 지켜줘야 할 부녀자는 아니니까.” 왕비는 주위에 맴돌고 있던 싸늘한 분위기를 거두고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왕비는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다가 즐거운 듯이 국왕에게 말했다. “어이, 이름뿐인 남편.” “뭐야, 마누라?” “어깨 좀 빌려줘. 걷어차인 데가 아파.” 국왕은 눈을 부릅떴다. “어디를 차였어?!” “옆구리. 뼈는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왕비는 부러졌다고 해도 갈비뼈는 금방 아무니까 괜찮다고 말하면서 셰라를 돌아보았다. “너하고 싸웠을 때 냄새가 안 났던 것도 당연해. 그 녀석, 정말 전투의 달인이던걸. 약 같은 게 없어도 전혀 밀리지 않았어. 힘은 조금 떨어졌지만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뼈가 안 나갔으니까. 이게 그날 맞은 거였으면 갈비뼈 두어 대는 부러졌을 거야.” “감탄하고 있을 때야?” 어깨를 빌려주려고 해도 두 사람의 체격 차이는 상당했기 때문에, 국왕은 아예 왕비를 안아 들어서 자신의 어깨에 앉혔다. “이봐!” “난리 치지마. 다친 부인을 남편이 안아다 옮겨주는 건 당연하잖아.” 국왕은 완전히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황비도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까르르 웃고서, 이번에는 눈 아래에 있는 국왕의 검은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어쩔 수 없는 걸. 허락해주지.” “그렇고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왕비는 편안하게 국왕의 어깨에 몸을 맡겼고 국왕은 그대로 유유하게 걸어갔으며 그 뒤를 셰라가 웃음을 참으면서 따라갔다. 그들은 그대로 성 안으로 돌아갔다. “이거 곤란 한 걸. 정말 즐거워서 어쩔 수가 없어.” 레티시아는 시로 기쁜 듯이 말했다. 그는 싯서스에 늘어서 있는 술집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이만큼 건물이 밀집해서 서 있으면 지면을 이동하는 것보다 지붕 위로 움직이는 편이 빠르다. 또한 레티시아에게 있어서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함께 서 있던 반츠아가 기가 막힌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에는 몸에 상처가 나는 걸 기묘하리 만치 싫어하는 주제에, 두 번이나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좋아라 웃고 있으니 말릴 방법도 없다. “너 같은 녀석도 동족이 나타나면 기쁜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자 레티시아는 휙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넌 어떤데?” 반문을 당한 반츠아는 침묵했다. 사람의 형태를 한 사향고양이는 그런 남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저 은색 꼬마,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신경 쓰고 있는 건 저 녀석이 네 동료라서 그런 것 아냐? 난 마을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중요해?” “넌 모를 거다.” 낮은 목소리가 침울하게 울렸다. 그 공포감, 상실감, 그리고 자신을 덮치는 허탈감. 자기 자신을 지탱해주는 모든 것, 살아가는 토대가 되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머리와 심장을 통째로 빼앗겨버린 것 같은 그 느낌. 이제부터 자신은 뭘 해야 하는지, 뭘 믿고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이 살아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죽고 싶은 게 아니었다. 죽어야만 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셰라와 반츠아는 같은 토대로 경험했다. 똑같은 것을 잃고, 똑같은 공포감을 견디면서 이렇게 살아 있다. “넌 절대로 모를 거야.” “마찬가지야. 내가 느끼는 것도 넌 절대 이해할 수없어.” 레티시아는 웃음을 지은 채였다. 그 눈망울은 위험한 빛을 띠며 반짝이고 있다. 반츠아는 시선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눈이었다. “저 왕비는 안다는거야....?” “그래. 재미있지? 나하고 똑같아. 취미는 조금 다르지만 거울을 놓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 아마 저쪽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반츠아는 기막혀했다. 설마 이런 생물이 세상에 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 저것도 인간은 아니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 좀 볼래?” 아까 왕비에게 물린 팔을 내민다. 상처를 들여다본 반츠아는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상처야?” “저 왕비 씨가 물었어.” 단정한 얼굴이 흔들렸다. 평소의 습관도 잊고 레티시아의 팔을 잡아챈다. “말도 안 돼.....” “작고 깨끗하고 하얀 이였다고. 꼭 진주 같더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걸까나, 아아...., 살도 좀 뜯겼네.” 레티시아는 재미있어했지만 반츠아는 보기 드물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들고 신음하듯이 말한다. “인간의 치열이 아니야....” “아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무슨 순간까지 분명히 봤어. 분명히 사라 ㅁ이빨이었다고, 그런데 자국은 마치 늑대한테 물린 것 같지. 대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어조였다. “난.....모르겠군.” “나도 몰라. 뭔가 딴 생물이 인간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거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서 태연하게 팔에 붕대를 감기 시작하는 레티시아와는 대조적으로 반츠아의 표정은 아직도 굳어 있었다. 뭔가 끔찍한 광경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다. “넌....신경 쓰이지 않는 거야? 자기가 쓰러뜨릴 상대의 정체가 뭔지, 어떤 생물인지.” 가녀린 몸집을 한 파로트의 청년은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큰 동료를 이상하다는 듯이 올려다보더니, 상대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깨를 끌어안았다. “바츠. 네 나쁜 버릇이야. 생각이 너무 많아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을 출신들은 어째서 중요한 건 전혀 고민 않은 채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만 가지고 고민하는 걸까. 알겠어? 저 왕비의 정체가 뭐든 어떤 생물이든 상관없어. 잘 들으라고.” 파로트 일족 중에서도 최강이 실력을 자랑하는 자객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후배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쳐다보면서 씨익 웃었다. “죽여버리면 그냥 시체잖아?” 보름 뒤, 반츠아는 라그란의 파로트 백작 저택에서 저택의 주인과 마주 보고 있었다. 중앙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나라인 스케니아도 반츠아에게는 익숙한 땅이었다. “레티가 전해달라는 말이야. 현 시점에서 저 왕비를 암살하기란 굉장히 힘드니 응원이 필요함.” 담담한 반츠아의 말을 듣자 백작은 일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기묘한 빛을 더하는 은회색 눈망울과 침묵의 무게가, 백작이 받은 충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래. 나 혼자 덤벼봤자 아무리 운이 좋아도 무승부로 끝날 테니 확실하게 죽이려면 세 명이 더 필요함. 거기서도 희생자가 나올 것은 각오할 것. 왕비를 쓰러뜨리고 이쪽이 무사하기를 기대한다면 최소한 반츠아, 조슬란, 민스롤 포함해서 여덟 명은 필요하다고.” 암살자 일족의 수장은 길고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뒷말이 이어지지 않는 듯했다. 그 은발로 뒤덮인 머리 안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계산이 돌아가고 있다. 이 일을 받은 마을의 보고로는, 죽여야 할 상대가 상대이니 만치 특별히 기한은 지정하기 않았다고 한다. 의뢰자 측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있으며, 1년이 걸려도 상관없지만 2년까지는 곤란하다고 못을 박아두었다고 한다. 이 일을 의뢰 받은 것은 작년 가을. 즉 파라스트는 그 시점에서 2년 뒤 여름에는 델피니아에 공격을 개시할 생각인 것이다. 해가 바귀어 곧 3월이 된다. 남은 기한은 겨우 1년 반. 어떻게든 올해 안에, 늦어도 내년 봄까지는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렇기에 확실할 거라고 생각하며 레티시아를 파견했건만 계산이 크게 틀어졌다. 레티시아를 잃기는 아깝다. 레티시아는 라포트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말을 바꾸자면 너무나도 특수하기 때문에 후세에도 물려줄 수 없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지, 그 왕비는?” 반츠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레티는 필요도 없는 걸 원하는 녀석이 아냐.” 그 성격은 거북하지만, 반츠아는 레티시아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청년이 혼자서 쓰러뜨릴 수 없다면 다른 누가 달려가도 소용없었다. “레티시아는 어쩌고 있던가?” “완벽하게 당했어. 그걸 재미있어하는 구석이 녀석답더군. 마치....” 말하려다가, 반츠아는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그거 잘됐군.” 백작은 말했다.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한다면 틀림없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넌 몰라도 다른 녀석들은 모두 지금 하는 일에서 손을 뗄 수 없어. 사람을 더 보내려고 해도 시간이 걸린다. 한동안은 상황을 살피고 있으라고 레티시아한테 전해.” 반츠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8 장 조금 의외지만 낮의 펜타스는 여자들의 거리가 된다. 우아한 분위기의 거리에 품질도 가격도 최고급의 의상과 보석, 장식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줄지어 있고, 각지에서 모여든 부유한 귀부인들이 물건을 보러 다니며 자신이 입을 의상을 주문한다. 한편 밤이 되면 그런 귀부인들이 체류하는 고급여관가가 되어 궁전급의 내장과 장식품에 최고급 식사, 완벽한 메너의 급사와 세련된 음악, 춤, 연극 등으로 여인들을 대접한다. 이것도 미와 문화와 예술을 상품으로 하는 펜타스의 일면인 것은 틀림없지만, 밤이 되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역시 펜타스의 본래의 얼굴-대륙 최고를 자랑하는 거대 환락도시로서의 일면이었다.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은 이것을 본 것만으로도 완전히 넋을 잃고 한다. 그 아름다움에, 한밤중에도 조명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불야성에. “여긴 마치 꿈나라 같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한다. 펜타스에 찾아오는 남자들은 신분도 직업도 제각각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꽃의 도시에서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즐겨보기 위해 오랫동안 모은 돈을 들고 찾아오는 소귀족도 있다. 즉 그만큼 창녀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값싸게 살 수 있는 거리의 여자가 있는 가하면 돈만 가지고는 상대도 해주지 않는 고급 창녀까지 존재한다. 특히 가수나 무희로 불리는 최고위의 여자쯤 되면 자기 저택을 소유하며 자기 의지로 손님을 선택한다. 어딘가의 왕자와 거상이 가수 하나를 두고 다투며, 나라나 가게가 기울어질 정도로 재보를 가져다 바친 끝에 결국 양쪽 다 채였다는 얘기도 드물지 않았다. 백로정은 그런 손님들을 위한 고급 창관이다. 소문으로는 각 왕실의 공주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엄선된 미녀를 갖추고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을 단골로 받고 있다지만 소개장이 없는 손님은 절대로 받지 않는다. 게다가 건물 자체가 수로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배로 드나들 수밖에 없다. 그곳의 손님들이 어떤 인물인지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백로정은 ‘펜타스 속의 펜타스’라고까지 불리는 비밀스러운 가게였다.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한 정원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딱딱해 보이는 건물이지만 안에는 훌륭한 정원이 펼쳐져 있고, 작은 냇물에 분수까지 있지. 그 정원을 둘러싸고 사면에 건물이 있는데 그것도 굉장히 화려해. 내가 가는 건 언제나 낮이니까 여자들은 안 보이지만, 그런 곳에서 데리고 있다는 여자를 한 번만이라도 좀 봤으면 좋겠어. 나 같은 놈이야 평생 돈을 모아도 살 수 없는 값이겠지만.” 2월 말 어느 날, 백로정에 손님 둘이 찾아왔다. 많을 때에는 한 번에 십여 명 정도의 손님을 맞을 때도 있지만 그날은 우연히 두 명 뿐이었다. 한 명은 탄가의 대귀족 그루덴 남작. 다른 한 명은 파라스트의 대귀족 메어셤 백작이었다. 몇 명의 손님이 오더라도 저택은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있고, 출입구는 여러 개로 나뉘어 있는데다 복도도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방으로 안내될 때까지 다른 손님과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날의 손님도 서로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요리와 술을 늘어놓고 현란한 미녀들의 노래와 춤을 즐기고 있었다. 그루덴 남작은 마흔대여섯의 나이. 선이 뚜렷하고 남자다운 생김새로 이곳에는 처음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미녀들의 교태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는 정원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멋진 정원이군. 잠간 둘러보겠네.” 접대를 맡은 시종이 길을 안내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지금은 다른 손님 분도 정원에 나와 계십니다만...” 남과 마주치기 싫어하는 손님도 있기 때문에 이럴 경우 반드시 말해두는 것이 규칙이다. 하지만 그루덴 남작은 느긋하게 말했다. “이 저택 내부에서 보고 들은 일은 밖에서 언급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들었네.” 심부름꾼을 남겨두고 남작은 정운으로 나갔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벌써부터 달콤한 꽃향기가 떠돌고 있다. 어딘가에서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와 상쾌한 분수 소리가 들려온다. 정원을 한바퀴 돌아본 남작은 작은 언덕 같은 곳에 정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담쟁이가 휘감겨 있는 아름다운 순백색 정자였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혼자서 이쪽을 응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작은 천천히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정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남작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남작도 인사를 하고 정자의 의자에 앉았다. 달콤한 꽃향기가 떠도는 정원에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서로가 상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루덴 남작이었다. “메어셤 백작이십니까?” “그렇소. 그루덴 남작이시지요?” 조금 통통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지만 가느다란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그루덴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멋들어진 수염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되었군요.” “그렇습니다.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만, 설마 이렇게 직접 만나 뵐 기회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지요.” 메어셤 백작도 웃고 있었지만 밝은 웃음은 아니었다. 어쩐지 어둡고 자조하는 듯한 빛이 섞여 있다. 남작은 상관하지 않고 정원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과연 멋진 곳을 알고 계시는군요. 이곳에는 자주 오시는지요?” “처음입니다. 제가 자주 오는 곳이면 안심하고 찾아오기 힘드신지?” “아니, 분명히 백작께서 최근 자주 찾는 가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샤론니라던가., 그 여자의 저택에 안내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요.” “후후후..., 과연 정보가 빠르십니다. 정식 이름은 샬리아랜이지요. 당신도 한번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멋진 여자입니다만 그런 만큼 함께 찾아갈 수는 없습니다. 당신과 만났다는 사실이 만에 조금이라도 새어나가면 큰일이니까요.” “호오? 가희라는 것은 몸은 팔아도 비밀은 엄수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입니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나름대로 담력도 있습니다만 어차피 일개 계집일 뿐이지요.” 메어셤 백작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그루덴 남작은 잘 알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분명히 평범한 여자는 아니지요.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여자 자신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여자의 남편이 국왕의 지위에 있다는 사실이지요. 아닙니까, 오론 왕?” “그렇고말고요. 남자만 쓰러뜨린다며 여자 쪽은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가힘을 합쳐야만 합니다. 조라더스 왕.” 델피니아의 수뇌진이 들었다면 기절할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보다는 우선 믿지도 않을 것이다. 대화삼국의 두 왕이 가명으로, 부하도 동반하지 않고 펜타스의 창관에서 비밀리에 만나고 있는 것이다. 후세의 역사서에는 결코 남지 않을 사실이었다. 메어셤 백작이라 칭한 파라스트 국왕 오론이 말했다. “그런데 결행 시기는 언제쯤이 되겠습니까?” 그루덴 남작이라 칭한 탄가 국왕 조라더스는 조금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올해 봄....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힘들 듯합니다.” “북쪽의 동맹자 쪽에서 어물거리는 겁니까?” “아니오. 본인은 할 생각입니다만. 촌구석의 비극이겠지요. 아직 군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오론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 왕비는 아직 살아 있다. 올해 여름에도 아마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올해 겨울의 눈도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내년 눈은 결코 볼 수 없다. “뭐....너무 서두르면 일을 망친다고도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차분하게 계책을 짜도록 하지요. 앞으로는 이곳을 연락 거점으로 합니까?” “예. 이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메어셤 백작과 그루덴 남작 앞의 편지도 기꺼이 맡아주겠지요.” “알겠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하얗게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꽃향기가 감돌고 있다. 봄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하지만 이곳 정원에는 다른 종류의 바람이 불로 있었다. 묘하게 미지근하고, 불쾌한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