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델피니아전기 8권 풍진의 군웅 지 은 이 : 카이타 스나코 옮 긴 이 : 김희정 펴 낸 이 : 정욱 출 판 사 : 대원씨이이(주) 출판년도 : 2003년 4월 8일 초판 인쇄 <지은이 소개/ 카이타 스나코> 1992년 <델피니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델피니아>외에는 <카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져드> 등이 있다. < 옮긴이소개/ 김희정> 1974년생. 전길자리와 사수자리가 겹치는 날 태어나 버린 묘한 상성에 의해 예측불가의 성격을 가져버린 작가 겸 번역자. ‘무엇이던 도가 지나치면 예술이다’ 라는 말을 신조로 오늘도 도가 지나친 작품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사실은 SF, 밀리터리, 환타지, 개그 할 것 없이 다 좋아하는 잡식성, 번역작 : <델피니아 전기>, <음양의 도시> <차례> 1 .........11 2 .........49 3 .........71 4 .........85 5 .........109 6 .........147 7 .........177 8 .........209 9 .........243 10 .........273 11 .........315 12 .........319 역자후기...329 <소개글. 서평> 나중에 교무실에서 다른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한 부분이 이곳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나는 너무 경직된 태도로 둔하게 반응했고, 아무도 내가 던진 농담에 웃지 않았다. 내가 남들보다 느리게, 그리고 너무 격식에 맞게 말한다는 걸 발견했다. 또한 완벽한 문장으로 대답하고, 거의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실수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잘못 말하거나 남들을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다. 남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쓰는 평소의 말과 말투로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곳에는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위로했다. 넌 경험을 위해 이곳에 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여기서 경험하는 거야. 이 모든 건 문화적인 충격이며, 곧지나갈 것이다. 안내서에는 한 페이지 전체가 도표를 곁들여 가며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일년 만 지낸 뒤,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 다신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거나 내가 처한 상황이 싫다면 언제든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싫었다. 하지만 차마 돌아가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이 일에 신이 개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남들과 비난과 책임에서 면제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었다. 집에서 급한 전보가 날아오거나 로버트가 당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관계는 'P장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심각하지만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병에 걸린다면. 알약 몇 개만 먹고 토론토 종합 병원에 누워 있으면 쉽게 낫는 그런 병에 걸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pp 86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알려 주는 안내판도 없었고, 줄도 없었으며, 사람들은 내 앞에서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은행 직원은 구식 장총을 든, 푸른색 유니폼의 경비원과 수다를 떨면서 우리 모두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갖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면서, 또는 가게나 사무실 창구 앞에 서 있으면서, 내 앞을 막고 있는 트럭 뒤에 꼼짝없이 갇혀 있으면서 나는 그것을 생각했었다. 빵집 문에는 분명히 아침 8시에 문을 연다고 써 붙여 놓았지만 8시 20분이 되어도 문을 안 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모든 일들이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듯했고, 시간이 많이 걸릴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로나에게 물었다. "이런 일들이 당신을 돌게 만들지는 않나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우린 어디로 가야 할 일도 없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느 때보다 조급해 한다는 것이었다.--- pp 42 CAST 월 (월 그리크 로우 델핀) * 델피니아 국왕. 서자였기 때문에 한 차례 그 지위를 빼앗겼으나 많은 아군을 얻어 다시 왕관을 쓴다. 통솔력이 뛰어나고 무사 공정하다. 전사로서도 우수. 리(그린디에타 라덴) * 이 세계에서 온 소녀. 화려하고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견줄 데 없는 검 실력과 전사의 혼을 가지고 있다. 윌의 정권탈환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여 전쟁의 여신으로서 추앙된다. 내란 평정 후 윌의 양녀가 되어 현재는 델피니아의 공주. 발로 * 국내 명문인 사보아 일족의 당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다. 밀레든 기사단장. 윌의 사촌 동생이자 성질 급한 독설가. 윌을 일찍부터 지지하였고, 내란 시에는 적측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지만 계속해서 거절했던 기골의 소유자. 이븐 * 독립기병대장 겸 친위대장, 윌의 소꿉친구, 타우의 자유민. 나시아스 * 라모나 기사단장. 발로의 친구. 세라 * 리에게 딸려 있는 여관(女官). 실은 리를 암살하러 온 파로트 일족의 소년이었으나.... 도라 * 장군. 명마의 산지로 유명한 로아를 영지로 가지는 백작. 윌의 양부 페르난의 친구였다. 샤미안 * 오라의 외동딸. 여기사. 오지몬드 * 벨민스터 공작가의 당주. 엔도비(라티나 베스) * 자작부인. 윌의 옛 지인(知人), 애첩 질 * 타우산맥의 대두목. 이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마커스 * 타우의 두목. 퍼젠 * 타우의 두목 블루완드 * 사보아 가의 실력자. 몬든 * 샤보아 가의 중책. 브룩스 * 재상. 델피니아의 겉과 속을 모도 꿰고 있다. 카린 * 사보아 공ㅈ가가의 집사. 아스틴 * 델레든 기사단 부단장. 카사 * 사보아 공작가의 집사. 뒤르와 * 선대 델피니아 국왕. 이애라 * 뒤르와의 여동생. 사보아 공작가로 시집갔다. 발로의 어머니. 조리더스 * 탄가국왕. 나젝크 * 탄가 황태자. 오론 * 파라스트의 국왕 반트이 * 파로트 일족. 빈츠아 * 파로드 일족. 그라이아 * 로아에서 흑 왕으로 불리는 회고의 말. 리가 타는 것만을 허락한다. 대화 삼국도 태화강을 중심으로 우측 맨 위로 탄가 밑으로 델피니아 좌측으로 파라스트 가 자리하고 있다. 탄가 옆으로 타우산맥 델피니아 밑으로 라키라 산맥이 있고, 기르취 산맥도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장 델피니아와 탄가가 사실상의 교전상태에 돌입한지 5일이 지났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란바 근교의 주민들이나 탄가 쪽 국경 근처의 주민들은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폈고, 그 중에는 피난을 가는 자들도 나왔다. 누가 뭐래도 중앙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의 대국들끼리 벌이는 전쟁인 것이다. 지방영주들끼리의 소규모 분쟁과는 수준이 달랐다. 모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며 수군댔다. 신분이 낮은 자에게 있어 전쟁은 갑자기 몰아치는 폭풍과 같다. 언제 발생할 지도 알 수 없고, 일단 그 진로에 빨려 들어가면 어떠한 저항도 의미가 없다. 그저 모든 것을 진행되는 대로 내버려두고, 집이나 밭을 잃게 되어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폭풍은 실제의 폭풍과 비교하면 지극히 변칙적이다. 진로에서 바로 5카티브만 벗어나도 남의 일로 끝난다. 직격 당하더라도 2, 3일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면 큰 피해는 나지 않게 된다.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져, 군대가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주저앉게 되면 그렇게 곤란하고 질 나쁜 폭풍이 없다. 오래 끌면 끌수록 잿더미가 되는 집이나 논밭이 늘어나고, 수천, 수만이나 되는 살기등등한 인간들이 주변에 진을 쳐서,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시체의 매장이나 부상자 돕기에 동원된다. 그렇게 되면 일은 물론, 평온무사한 생활 같은 건 어딘가로 사라진다. 더구나 이번 전쟁은 국경선에서 일어났다. 아군이 이겨서 적국으로 쳐들어가면 전장(戰場)이 이동해가서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지만, 지게 되면 피에 굶주린 적병이 한껏 밀려들어와 사활의 문제가 된다. 양쪽 모두 평소 보기 힘든 열의를 보이며 자기 나라 군대를 지원하며, 그 승리를 기원했다. 처음에는 기습에 성공한 탄가군(軍)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한때는 델피니아 국경의 동쪽 요충지인 란바 요새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 넣었지만, 왕과 왕비의 활약으로 델피니아는 그 역경을 완전히 뒤집었다. 특히 막 왕비가 된 그린다 공주가 선보인 탄가의 총대장 나젝크 왕자를 포로로 잡는 놀라운 기량에는, 용사들만 모인 것으로 알려진 탄가군도 당황하고 말았다. 델피니아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공격을 가해, 란바까지 밀려들어왔던 탄가군을 국경까지 밀어냈다. 반대로 탄가는 국경을 넘어서 진입해오는 델피니아군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장(主將)을 붙잡힌 상태로 맹추격을 받아서야 버텨낼 수가 없다. 보통 때라면 그대로 전부 무너져 내렸을 테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조라더스 왕이 이끄는 1만의 군대가 국경을 향해 진군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아무리 조라더스라지만 선진의 패배 소식에는 놀란 듯 했다. 질 리가 없는 전력을 보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이 부친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반대로 동요하는 부장(部將)들을 야단쳤다. 지금 여기에서 손을 떼면 나젝크 왕자는 구속당한 채다. 자신이 포로가 된 일이 아군에게 큰 피해를 초래했다는 것을 알면 왕자는 아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차기 국왕에게 그런 치욕을 주지 않기 위해서도, 그 왕자의 신병을 무사히 돌려받기 위해서도, 란바에 주둔하고 있는 델피니아군을 때려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탄가 국왕은 굳은 결의를 보이고 계속 공격을 명령했다. 그 칙명과 강력한 응원군의 도착에, 패주 직전이었던 탄가군은 완전히 다시 일어났다. 델피니아는 란바 요새를, 탄가는 그 근처 일대의 영주의 성을 거점으로 해서 다시 노려보는 형태가 되었다. 양쪽 모두 국왕을 장수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자세였다.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곤란하군, 이건.” 하고 델피니아 국왕은 늘어서 앉아있는 장수들을 앞에 두고 어깨를 으쓱했다. “녀석들, 붙잡힌 왕자는 전혀 안중에 없는 것 같다. 기껏 잡은 인질도 적이 필요 없다고 해서야 이야기가 안 되지. 처분을 생각해두는 편이 좋겠어.” 그 자리에 있던 무장들은 조금쯤 동요하며, 얼마 전 왕비가 된 그린디에타에게 눈길을 주었다. 지금의 왕비는 보급대가 도착한 것과 동시에 거북스러운 신부 의상을 벗어 던지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삼베옷을 두르고 있었다. 모르는 자가 본다면 종자(從者)로 잘못 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마에 얹은 은색 관과 허리에 찬 멋진 검은 어떤 장식품보다도 이 사람의 모습을 눈에 띄게 했다. 어째서 그 자리의 시선이 모였는가 하면, 왕자를 붙잡은 것이 이 인물이기 때문이다. 공적은 전장에서의 활약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일반 병졸이나 장수나 다르지 않다. 적의 주장(主將)을 포로로 잡았다면 나무랄 데 없는 큰 공적이다. 최대의 공로라고 해도 좋다. 무용을 칭송받고 큰 포상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 공적이 헛되게 된다면 그것은 무명(武名)을 중시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충격이자, 굴욕이다. 하물며 왕비는 성격이 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장 한 사람이 그 심중을 염려했는지 이런 소리를 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다시 한 번 왕자의 신병을 협상 무기로 항복하도록, 혹은 병렬을 물리도록 권고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걸로 말을 들을 만한 귀여운 부친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질 않는군.” “허나, 기껏 비전하께서 붙잡아 오신 것을...” 그 비전하는 국왕과 똑같은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월이 말하는 대로야. 애초에 적을 혼란시키려는 목적으로 붙잡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 적은 조라더스의 일갈로 혼란에서 다시 일어났고 공격을 그만둘 기척도 없어져 버렸으니, 여기 놔둬 봤자 소용이 없어.” “음.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대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분하지?” 이것에 관해서도 부장들 사이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탄가는 인질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소한 것엔 신경도 쓰지도 않은 채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지만, 국왕은 긍정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왕비를 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어린 왕비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쓸데없는 걸 처분하는데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것도 바보 같지 않아?” “네 말이 맞다. 왕위계승자 정도 되면 유체도 정중하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말인데, 난 말이지, 너만 허락해 주면 이 기회에 버리고 싶어.” 무장들은 아연실색 했지만,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타당하겠지.” 이틀 뒤의 밤, 탄가의 왕자 나젝크 융크가 붙잡혀 있던 란바 요새에서 탈출했다. 왕자는 붙잡힌 이래 계속 요새 내의 어느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적국이라고는 해도 일국의 왕자를 지하 감옥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라 일단 손님 취급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음과 자신감과 용맹한 정기가 넘쳐흐르고 있던 나젝크 왕자가 얌전하게 손님으로 있어줄 리 없다. 델피니아 측도 그것을 경계하여 엄중한 감시하에 놓아두고 있었다. 초조하게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왕자는 이날 밤, 조용한 목소리에 깼다. “전하, 전하... 부디 일어나십시오.” 목소리와 동시에 왕자는 꿈틀 몸을 일으켰다. “왠 놈이냐?” “폐하의 지시로 찾아뵈었습니다.” 조용하지만 긴박한 목소리였다. 이미 한밤중이다. 왕자가 갇혀있는 이 방은 요새 외곽에 해당했다. 일반 병사가 접근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지만, 당연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중한 경비가 세워져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 밖에 웅크리고 있는 듯한 그림자는 한 사람인 것 같았다. 경비가 이것을 추궁하고 있는 기척도 없다. “경비에게는 돈을 주어 멀리 보내두었습니다. 지금입니다. 자, 어서 도망치십시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동시에 못이 박혀 있는 무거운 문이 약간 열렸다. 왕자는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로 나가자, 그곳에는 검은 복면을 쓴 작은 그림자가 꿇어앉아 있었다. 나이는 잘 알 수 없었다. 머리보다 높게 치켜든 양손에 왕자의 대검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이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한 모습으로 찾아뵙게 된 것,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바깥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음...” 거만한 몸짓으로 검을 허리에 채우고, 왕자는 주저 없이 의문의 인물을 뒤따라 나왔다. 이런 때에도 일국의 후계자가 가지는 긍지는 건재했다. 무엇보다 탄가군이 자신의 탈환을 위해 이러한 수단을 준비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법한 것이었고, 아버지인 조라더스가 성질이 급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지혜가 뛰어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몇 년 전부터 이러한 자를 비밀리에 적측에 숨어들게 해두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첩자는 적병으로 가득한 요새 안을 손쉽게 이동하여, 실로 교묘하게 왕자를 북쪽의 작은 문까지 안내했다. 역시나 경비는 없었다.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이곳을 나가 잠시 동안 나아가시면 오른쪽에 수풀이 있습니다. 이 계절에도 잎이 붙어있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으니 그거이 표식이 될 겁니다. 말을 매어두었사오니, 말과 함께 강을 건너서 도망치시기 바랍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왕자는 오만하다 할 정도의 태도로 말하고는, 그래도 신중하게 주변에 신경을 쓰며 요새에서 빠져 나왔다. 탈출 준비를 해 준 그 그림자에게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이름도 묻지 않았다. 신분이 천한 자가 고귀한 사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감사하기는커녕, 왕자는 짜증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일국의 왕자인 자신이 이런 비천한 자의 힘을 빌려 자유를 얻어야 하다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긍지와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치욕을 무엇보다 저주스럽게 여기는 나젝크 왕자는 아예 이 수상한 인물을 베어 버릴까도 생각했다. 나중에라도 왕자의 치욕을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도록.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의 수하라면 함부로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 이유 없는 분노를 느끼고는 있었지만, 적측에 깊이 잠입해 움직이고 있는 자는 탄가에게 귀중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분별력은 남아 있었다. 혀를 차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요새를 떠났다. 수풀 속의 말은 금방 발견되었다. 고전을 계속한 탄가군은 지금은 상당히 후퇴해 란바 요새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젖은 몸으로 밤길을 걷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는 배려였겠지만, 아무래도 왕자는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본대에 합류하고 싶다는 마음에 말고삐를 잡고, 란바 요새를 빙 둘러 가는 강에 첨벙 몸을 던졌다. 상당히 깊고, 흐름도 빠른 강이었다. 왕자는 전신이 흠뻑 젖었고, 말은 웬만해선 똑바로 나아가질 못했다. 3월이라고는 해도 이 지방에는 아직 눈도 남아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었지만 왕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상당히 흘러내려가면서도 간신히 강을 건너 반대편에 도달했다. 란바 요새의 불빛은 여기에서도 잘 보였다. 경비들이 나와 있는 것 같았지만 이변을 눈치 챈 기척은 없었다. 얼어붙은 것 같던 왕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자신의 탈출을 알았을 때, 저 요새에 어떤 소동이 벌어질까. 기묘한 술수를 써서 자신을 패배하게 만들었던, 소녀라고 말해도 좋을 젊은 왕비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 해도 유쾌했다. “멍청한 놈들.” 나젝크 왕자는 바보 같은 경비에게 조소를 던지고는 말머리를 돌려 달려 나갔다. 전투의욕은 잃지 않았지만, 첫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탄가는 만약을 위해 국경에서 12카티브나 떨어진 장소에 본진을 치고 있었다. 단신으로 달려온 나젝크 왕자를 보고 병사들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모두 젊은 주군의 무용을 상찬하였고, 왕자도 의기양양하여 대답했다. “델피니아의 감옥 따위도 내게 걸리면 이런 정도다. 병신같은 놈들. 기껏 붙잡은 적의 장수를 간단하게 놓쳐버리고 눈치채지도 못하다니,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오는군. 이렇게 내가 돌아왔으니 저런 멍청한 놈들이 잘난 척 하게 놔두지는 않겠어.” 저마다 훌륭하다고 상찬을 아끼지 않는 덕에 완전히 기분이 살아난 왕자였지만, 아무래도 부왕(父王) 앞에 나설 때에는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케이파드를 출발할 때, 나젝크 왕자는 반드시 란바 요새를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럴 정도의 군사도 받았고, 미리 벌여둔 공작도 효과를 보고 있었다. 전쟁에 절대적인 건 없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사전준비를 갖춰두고도 란바 공략에 실패했다 한다면,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고 지나갈 리 없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귀환 보고와 실패의 원인을 보고했다. 왕자는 그 왕비가 무언가 괴이한 술수를 사용하여 자신을 무너뜨렸다고 밖에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점을 열심히 설파했다. 조라더스 왕은 시종 말없이 자식의 변명을 듣고 있었지만, 왕자가 말을 끝내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예. 델피니아 놈들은 장수병졸 할 것 없이 모두 겁쟁이들입니다. 진지 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허술한 경계 덕에 손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준열함으로 알려진 탄가 국왕은 어이없다는 듯한 미소를 얇고 단정한 입술에 떠올렸다. “천치 같은 놈.” “예?” “해가 저물기 전에 델피니아에서 사자가 왔다. 소중한 자제분을 돌려드릴 테니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뻔뻔스럽게 지껄이더군. 정중하게도 그대에게 전해달라며, 감기에 걸리지 않았을지 걱정된다는 위문의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왕자는 얼이 빠져버렸다. “그 애송이가... 아니, 혹시나 그 계집의 수작일지도 모르지. 멋지게 짐을 가지고 놀았군 그래.” 멍청해진 아들과는 달리 부왕은 냉랭한 기백을 두르고 있었다. “짐은 오늘까지 그대의 신병을 되찾는 것에 관한 모든 교섭을 거부해왔다. 그걸로 놈들이 그대를 처형한다면 옳다꾸나 할 일이었지.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높아지고, 우리들에게는 극악무도한 적을 해치워야 한다는 다시 없는 좋은 구실이 주어진다. 그대에게는 더 이상 없을 명예로운 죽음이 부여된다. 그걸로 만사가 해결될 참이었다. 그렇게 생각지 않느냐?” 인신공양을 할 생각이었던 아들을 눈앞에 두고 태연하게 내뱉는다. 이것이 탄가 국왕의 무서움이었다. “그런데 놈들은 그대의 목숨이 쓸모 없어졌다는 걸 알았는지 어쩐지, 가볍게 돌려보내 준 것이다. 보통 방법도 아니고, 한껏 공들인 방법으로 말이야. 어떤가, 수치스럽게 살아돌아왔다는 걸 이제 알겠느냐.”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젝크 왕자는 핏기 없는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럼, 아군이라도 믿었던 그 의문의 인물은 사실은 적의 수하였다는 것인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간이라고 요새의 적들을 비웃었을 때, 녀석들은 그대로 속아넘어간 자신을 웃음거리고 삼고 있었을까. 나젝크 왕자에게 있어서 이 이상의 치욕은 없었다. 몸 안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님. 부디, 출전 허가를 내려주십시오!” “불허한다. 그대는 후방으로 빠져 케이파드와 본대 사이의 연락을 맡아라.” “그것은, 그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기사 되는 자가 이러한 치욕을 당했다면 자신의 손으로 되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제게 일군을 내려주십시오.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번에야말로 적의 숨통을 끊어 보이겠습니다!!” “멍청한 놈!!” 조라더스가 번쩍하고 눈을 크게 뜨며 아들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그 머리는 뭘 위해 붙어있는 게냐!! 놈들이 도망치는 걸 도와주는 형태로 네놈을 방면해준 것을 뭐라 판단하느냐!! 지금 네놈을 전선으로 돌려보내면 세 번이나 그 애송이에게 당하는 꼴이 되느니라!” “......” “적이 눈감아준 덕에 빠져 나왔다. 이런 오욕은 자신의 손으로 씻어내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놈들은 네놈이 그런 심리가 될 것까지 내다보고 있다. 분노한 네놈이 어떤 폭거를 저지를지, 어떤 바보 같은 지휘봉을 쥐고 우리 군을 괴멸적인 위기에 빠뜨릴지 눈에 선하다! 탄가의 군사는 네놈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명예라는 걸 중히 여긴다면 더 이상의 창피를 당하기 전에 후방으로 물러가라!!”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 제압당한 왕자는 몸을 꿈쩍할 수도 없었다. 마비라도 된 것처럼 혼비백산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의 격앙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조라더스 왕은 천천히 말했다. “선봉을 끌고 있는 대장의 몸으로 경솔하게도 적에게 일대일 승부를 걸었던 것은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이 일, 확실하게 뼛속에 새겨두도록 하라.” 조라더스는 나젝크 왕자 외에도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정실의 아이, 두 명의 첩실의 아이였다. 첩실의 아이는 논외로 친다 해도, 이렇게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폐적(廢嫡)도 각오하라는 뜻이었다. 증오로 검붉게 물든 왕자의 얼굴이 공포 때문에 창백해졌다. 고집 세고 자신만만한 나젝크 왕자이지만, 이 부친의 무서움은 뼈저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무능하다면 냉정하게 잘라 내버릴 사람이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흠뻑 배어 무너진 자세로 물러 나왔지만, 가슴속에는 격렬한 분노와 증오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왕자를 위해 가신들이 이것저것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를... 이 몸을 감히 봐줬다는 거냐, 이 계집이!!” 저주의 외침이었다. 부왕을 향한 공포나 굴욕을 풀기 위한 기회를 빼앗긴 원한은 델피니아의 서자왕(庶子王)과 벼락출세한 왕비에 대한 증오로 뒤바뀌었다. 그 두 사람이 지금쯤 어던 얼굴로 자신을 조소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언젠가 두고 보자. 이 원수는 반드시 갚고 말겠다. 나를 얕본 것을 울면서 후회하게 해주마!!” 그 이후, 나젝크 왕자는 부왕의 명령에 따라 잠시 동안 전쟁의 무대에서 몸을 빼게 된다. 그런 만큼, 델피니아 국왕과 왕비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런 왕자를 요새에서 도망치게 해준 셰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일의 전말을 국왕과 왕비에게 보고하러 나섰다. 한밤중을 넘어선 시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투복장으로 몸을 감싼 채 셰라를 맞이했다. 결혼식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고, 황급히 뛰어나온 두 사람이었다. 신혼다운 시간을 제대로 보낼 틈도 없다니 안됐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라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깜빡였다. “왜 그래?” “아뇨, 별로...” “아무 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고양이처럼 귀엽고 표범처럼 살벌한 얼굴에 추궁당하자, 셰라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변명했다. “정말로 아무 것도... 또 당신이 화내실 만한 일을 생각해낸 제가 우스웠을 뿐입니다.” “자, 마셔라. 몸이 차가워졌겠지.” 셰라는 국왕이 몸소 따라주는 미주(美酒)를 황송하게 받았다. 나젝크 왕자를 도망시킨 수순과 그 뒷일을 자세하게 보고하고, 마지막에 망설이면서 덧붙였다.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만... 정말 이걸로 다 된 걸까요.” ‘폐하’의(정확히는 비전하의) ‘관대한 착안’으로 적의 주장(主將)을 도망시켜준 것이지만, 그 자체는 잘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가리고, 옷을 조절하여 체형을 얼버무리고, 목소리의 음색을 바꾸면 누구도 원래의 셰라를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왕자는 자신을 도망치게 해준 자가 16세의 소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왕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를 도망가게 해준 게 불만이냐?” 셰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다. 그건 자신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에서 접한 왕자의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 분은 저를 베어버리려고 하셨습니다.” 국왕은 눈썹을 치켜올렸고, 왕비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맙다고 하면 또 몰라도, 왜 베려고 했지?” “죽여버리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게 되니까요. 적중에서 도망치는데 저와 같은 자의 손을 빌리게 되면 자존심에 상처를 받겠지요.” 왕비는 더욱 얼굴을 찌푸렸고, 국왕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잘 아는군?” 셰라는 잠자코 끄덕였다. 그런 인간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다. 거만하고 잘났고 자신의 태생이나 신분에 절대적인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도에 넘치는 자부심을 이상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침해당했을 때의 분노나 집념은 보통 사람의 상식을 훨씬 초월한다. 인질로써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째서 그대로 가둬두지 않았는가 생각했다. 국왕도 왕비도 질 나쁜 적을 일부러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것과 마찬가지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폐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왕자가 다시 지휘를 잡게 되면 반드시 냉정함을 잃고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것이 틀림없다 말씀하셨지만...” “그건 구실이야.”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조라더스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국왕이 아니다. 이후에 전군의 지휘는 자신이 잡겠지. 적어도 왕자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셰라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손해를 보면서 그냥 도망치게 해준 게 아닌가. “전쟁에도 밀고 당기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이지.” 하고, 국왕은 말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야말로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긍지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지. 그자가 일개 부장이라면 네가 말하는 대로 가둬두었겠지만, 일국의 후계자라면 그에 어울리는 대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자란 점이 있으면 나중에 이쪽이 뒤에서 손가락질 당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잘 대해주면 안 좋은 상황에 봉착했을 때를 대비해 비장의 수단으로 모셔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되니 달가운 일이 아니고. 게다가 그 왕자는 그런 수단으로도 못 쓴다. 무엇보다 나는 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왕비가 웃었다. “그렇지? 이 임금님은 아무 생각도 없는 얼간이같이 굴면서 꽤나 강한 소리를 한단 말이야.” 간담이 서늘했다. 술집 마담도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왕비가 국왕을 보고 ‘얼간이’라니 실수로라도 써서는 안 될 말이 아닌가. 그러나 당황해하는 것은 셰라 혼자 뿐, 두 사람 모두 태연했다. “그것보다 너, 그 왕자가 정말로 베어들어 왔더라면 어쩔 뻔했어?” “글쎄요...” 상대는 고귀한 신분의 인간이다. 그건 분명하다. 이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신분의 차이를 정해둔 계급제도는 셰라의 의식에 뿌리깊게 박혀있었다. 또한 지금의 셰라에게 있어서 왕비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이 경우, 그것은 왕자를 도망시키는 일이자, 그 보고를 하는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 분을 무사히 도망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해선 안 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처신했을지는 해보지 않고는 모르겠습니다만...” 자기가 해놓고도 용서가 안 되는 답변이었다. 또 야단맞을까 생각해서 목을 움츠렸지만, 왕비는 화내지 않았다. 웃으며, 잘했다고 말했다. 로셰의 가도에 세워진 검문소를 경계로 해서 델피니아 측의 지명은 란바, 탄가 측의 지명은 캄센이라고 불리고 있다. 거대한 타우 산맥은 그 양쪽을 처마처럼 덮고 있다. 란바는 타우의 자유민과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어, 암묵적으로 결정된 경계선을 지키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캄센 측은 타우는 자신의 영토 일부이며, 관리하에 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주민에게 등록과 납세를 강요하였다. 물론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면적이야 광대하지만, 타우는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토지다. 기껏해야 목재를 채취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렇다면 타우가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탄가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나 삼림이다. 이제 와서 갖다 붙이듯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일 뿐이었다. “대국(大國)의 방식이라는 건 산적 같은 것에 비교해도 훨씬 지독하구먼.”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한 것은 독립기병대장, 이븐이었다. “뭐, 깔쌈한 일만으로 전쟁을 할 순 없겠지만, 우리들을 악당 취급하는 건 마음에 안 들어.” 투덜거리면서 이븐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표표한 표정으로 보였다. 여유마저도 느껴졌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애써 억누른 위험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독립기병대장 이븐의 지휘 아래, 그들은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캄센에 출몰하여 종횡무진으로 소동을 벌인 뒤 바져 나오는 게릴라 작전으로 나섰다. 탄가가 자신들의 이름을 도용해서 영지 내를 불태웠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또한 그렇게 우리들을 악당으로 만들고 싶다면 바라는 대로 해주마 하는 복수의 의미도 있었다. 본디 그들은 산적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수단의 뛰어남과 재빠름은 그들의 이름을 도용했던 탄가 세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민가를 철저하게 불태워버리는 것 뿐만 아니라 물론 캄센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는 지방기사의 저택에 몰려가서 호위병을 해치우고 집에 불을 놓았다. 그런 소란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는 재산과 보물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런 걸 강도라고 하는 거 아냐?” 쓴웃음을 지으며 물어본 것은 페노아의 질이었다. 질은 이븐보다 훨씬 연장자였지만, 독립기병대의 지휘관은 어디까지나 이븐이라는 입장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고문역으로 동행하고 있었다. “전쟁중이 아니라면 그런 게 되겠지만, 이런 경우엔 훌륭한 전술이라고.” 요새가 될만한 요소에 있는 저택들을 불태우고 보물을 빼앗는다.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렇군. 어차피 태워버릴 바에야 쓱싹해버리는 편이 이득인가.” “그런 거지. 어이, 후퇴한다!!” 받을 건 받아두지만 그들은 결코 욕심을 내지 않았다. 미리 망 볼 자를 세워두고 호령 하나로 미련 없이 물러난다. 이변을 눈치 챈 탄가군이 달려와도 한 사람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사건이 캄센 내에서 수없이 발생했다. 지방기사들은 참지 못하고 영주에게 탄원했고, 영주는 격노하여 국왕 조라더스에게 조력을 청했다. 조라더스가 이끄는 정규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면에서 월 그리크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는 것이다. 산적 퇴치는 경우가 좀 달랐지만, 그들이 델피니아 편을 들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조라더스는 탄가에서도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멕켈 장군에게, 큰일을 치르기 전에 시끄러운 파리를 치워버리도록 명령했다. 멕켈 장군은 조라더스가 왕이 되기 전부터 일해 온 측근 중의 측근이다. 소년시절부터 무수한 무공을 세우고, 탄가의 대표라면 멕켈 장군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앙전토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깃발 아래에도 수많은 용사들이 모여있는, 산적퇴치에는 아까울 정도의 인재였다. 장군은 미리 풀어둔 첩자를 이용해 산적들의 움직임을 조사해두고 있었다. 그 결과, 국경 근처의 눈에 띄는 저택은 대부분 쓸고 다닌 만큼, 다음에는 대담하게도 영내 깊숙이 쳐들어와 한바탕 휘저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건방진 놈들, 피바다를 만들어주마.” 멕켈 장군은 이때 50세. 단련된 체구는 전혀 쇠퇴를 모른 채, 머리카락도 검고 눈빛은 휘황하기까지 했다. 장군은 산적퇴치에는 거창하다고 생각될 만한 2천의 군사를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출전했다. 작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큰 일을 앞에 둔 만큼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큰 실패로 끝나버렸다. 장군이 수하를 이끌고 도착했을 때, 표적이 되었던 저택은 이미 공략되어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그 속을 산적들은 개미떼처럼 재빨리 움직여 가치가 있을만한 것을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 멀리에서도 확실하게 보였다. ‘대담한 짓을 하는군.’ 하고 장군은 생각했다. 또한, ‘산적 따위에게 이렇게나 우롱당하면서 어쩔 도리가 없다니, 캄센의 호족들도 한심하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저런 개미 새끼들을 쫓아내지도 못하는 건가.’ 하고 부아와 경멸을 느꼈지만, 입에는 담지 않았다. 대장이 그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되기 때문이다. 지휘봉을 휘두르며 번쩍 눈을 크게 떴다. “탄가 영내에서 망나니짓을 벌이는 불한당들! 본때를 보여주마!!” 불을 뿜는 듯한 일갈이었다. 그에 응해 장군 수하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울리고 징을 쳤다. 말발굽의 울림이 지축을 흔들며 쏜살같이 산적을 향해 덤벼들었다. 시골의 군대라면 밟아주고 지나갔을 산적들도 이 무시무시한 모습에는 기절초풍했으리라. 기습을 당한 일도 있어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며 기껏 노략한 금품을 내던지고 도망쳤다. “놓치지 마라!” 산으로 도망치게 놔두면 말짱 헛수고다. 멕켈 장군은 맹추격하여 점차 국경으로 달려갔다. 근처에 타우 산맥이 지나가는 이 부근은 산과 평지가 들락거리는 지형으로 되어 있었다. 쫓긴 산적이 도망치는 도중, 길의 양옆이 벽처럼 잘려 세워져 있는 장소가 있었다. 치켜 올라간 높은 벽은 길 위를 덮어씌우는 것 같은 모양이 되어 있었다. 산적은 단숨에 이 장소를 달려 지나갔다. 이것을 쫓던 멕켈 세력도 당연히 뒤를 따랐지만, 먼저 달려가던 부대가 절벽 밑을 통과했을 때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굉음과 동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니?!”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잘려나간 모양새의 절벽이 무너져, 본대의 대부분이 그 밑에 깔려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무너진 절벽 위에서 무수히 많아 보이는 산적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한 것인지, 매복하고 있던 이 무리는 절벽 상부를 고의로 무너뜨리고, 지금은 또 돌이나 나무더미를 안고 아래로 던져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바로 밑에 있었던 병사들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어떤 자는 무너진 절벽에 찌부러지고, 어떤 자는 굴러 떨어진 돌에 머리가 부서졌다. 즉사를 면한 자들도 뒤를 이어 떨어지는 돌이나 나무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네 이런! 비겁한 놈!!” 선행부대는 격노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절벽 위로 달려올라가 바위나 나무를 던지고 있는 자들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지금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던 산적들이 빙글 방향을 바꾸었다. 피가 얼어붙을 듯한 함성을 지르고 반대로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동료를 구하고 자시고가 없었다. 선봉 부대가 미친 듯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멕켈 장군은 부대의 중간쯤에서 지휘를 잡고 있었다. 덕분에 기습은 면했지만, 눈앞에서 시작된 참극에는 입이 딱 벌어졌다. 게다가 폭이 좁은 길 건너편에서는 선봉 부대가 정신없이 싸우고 있고 아니, 차례차례 무너져나가고 털썩털썩 쓰러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적들을 상대로 이 무슨 추태냐!! 탄가 기사의 의지는 어디 갔느냐!!” 분노로 눈이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배짱 없는 부하들을 힐책하고, 바위나 나무가 떨어져 내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눈앞의 난관을 돌파하려 했다. 이번에는 그 장군의 등뒤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장군님! 적이!!” 어느 사이에 다가온 것인지, 옆길에서 말을 탄 적들이 나타나 돌격해왔다. 아무런 말도, 소리도 없었다. 정규군이라면 함성을 울리며 종을 치고 징을 울려대며 전의를 고무하는 것이지만,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산적은 없다. 그림자처럼 몰래 다가와 충분히 노렸다고 판단했을 때 강철 같은 의지와 기합으로 먹이를 향해 덤벼드는 것이다. 눈치 챈 멕켈 세력은 비 오듯이 화살을 쏴댔지만, 그런 것으로는 멈출 수 없었다. 말에도 사람에도 공들여 방어구를 입혔고, 말을 탄 남자들은 수갑(手甲)을 드리워 막기만 한 채 돌진해 왔다. 보통의 용기나 각오로 가능한 행동이 아니었다. 귀기(鬼氣)가 덮쳐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었지만, 역시나 멕켈 장군은 용맹한 장수였다. 안절부절못하는 병사들을 향해 일갈했다. “맞서 쏴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절호의 과녁이다!!” 중심이 되는 용사들도 그에 응해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이걸로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고 한 기(騎)도 다가오게 하지 않겠다며 빠르게 활을 당겨댔지만, 쏘아도 쏘아도 적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자는 좌우로 화살을 퉁겨 냈고, 어떤 자는 고슴도치처럼 되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돌격해 왔다. 공격하고 있는데, 틀림없이 효과를 주고 있을 텐데,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다가온다. 이것은 공격하는 쪽에게도 대단한 중압감이었다. 게다가 무너진 절벽 저편에서 선봉 부대를 남김없이 해치운 적이 달려들어왔다. 부장들마저 저도 모르게 술령거렸다. 상대는 산적이다. 절대로 질 리가 없는, 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 병사들은 이 기분 나쁜 적에 당황하고, 망설이고,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장군의 측근인 기사들이 초조함을 느꼈을 때, 쐐기를 박는 사건이 생겼다. 등뒤에서 커다란 함성이 올랐던 것이다. 2중, 3중의 복병이다. 게다가 이것에 둘러싸이게 되면 퇴로는 끊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잖아도 동요하고 있던 병사들은 즉시 어쩔 줄 모르고 도망치려 하며 대혼란에 빠졌다. “에에이, 자리를 지켜라!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장군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다. 즉시 방어전의 양상이 되어 다 막아내지도 못하고 무너져, 2천의 탄가 정예군은 일방적으로 산적에게 쫓겨나게 되었다. 이렇게 장군은 엉망이 된 몸으로 도망쳐 돌아왔지만, 내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패배보다 그 원한은 뿌리 깊었다. 상대는 이름 높은 장군도 훈련받은 군대도 아니다. 간단하게 퇴치할 수 있었어야 할 상대에게 세력의 절반이 당해버리는 참패를 맛보았던 것이다. 이대로 놔둘 수 있을 리가 없다. 곧장 조라더스에게 청원해, 이번에는 5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 수치를 풀고자 델피니아군의 본진이 있는 란바 요새로 향했다. 산적들 뒤에서 델피니아가 끈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대장을 치는 것은 다시 말해 굴욕을 푸는 일이 된다. 한편, 멕켈 장군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델피니아 측은 활기를 띠었다. 조라더스가 데리고 이는 무장 중에서도 견줄 데 없는 호걸이다. 이 자를 쓰러뜨리는 것이 어느 정도로 의의를 가질 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국왕은 이 명예로운 역할을 독립기병대에게 맡겼다. 얼마 전의 싸움에 대한 공적을 높이 사서 한 일이지만, 한번 정도는 격파할 수 있었다고 해도 멕켈 장군은 백전의 노장이다. 요행은 두 번 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진지 내에서도 있었다. 고작 산적에게 그런 중책을 맡길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뭐라 말해도 타우 사람들은 첫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도 대승리다. 이러한 경우, 계속 이어서 상대를 하는 것이 전쟁 예법의 상식이었다. 멕켈 장군의 군세가 밀려온 것은 3월의 눈발이 날리는 추운 아침이었다. 5천의 군사는 용사의 이름을 나타내는 갖가지 깃발을 휘날리면서,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적색과 녹색의 깃발만이 나부끼는 독립기병대는 너무나 빈약해보였다. 집안의 이름을 나타내는 문장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금은으로 상감된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장인 이븐을 봐도 검은 갑옷을 입고 있을 뿐인 조잡한 모습이었지만, 의기면에 있어서는 결코 지지 않았다. 동료들을 돌아보며 밝게 말했다. “알겠냐, 친구들. 적은 용맹으로 널리 알려진 탄가군이다. 보통 때라면 우리들이 대놓고 싸움을 걸었다가는 교수형 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델피니아라는 백이 붙은 채 싸울 수 있다. 이렇게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는 없으니까, 마음껏 실력행사를 해봐라!!” 열광적인 환성이 올랐다. 타우 자유민들의 결속의 견고함은 보통 군대를 월등히 초월한다. 더구나 그들은 탄가가 자신들을 이용해 누명을 씌웠으며, 전쟁의 구실로 삼았던 일에 화가 나 있었다. 멕켈 세력이 보자면 증오스러운 적의 등장이었다. 춤이라도 출 듯 기뻐했다. “산으로 도망쳐 들어가니까 그런 기습을 당했던 것이다. 진형을 짜는 야전(野戰)이라면 이쪽 승리다. 모습을 보인 산적들 따위는 맨몸이나 마찬가지. 복병도 비책도 쓸 수 있을 리 없다. 단숨에 격파해주마.” 하고 용감히 일어서서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결과는 예상외의 것이 되었다. 급조된 군대로 보였던 타우 세력은 단련을 거듭한 정예군처럼 강했다. 방어보다도 공격에 중점을 두고, 견고한 것보다 기동력을 생명으로 하여 종횡무진으로 힘을 과시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븐의 지휘는 탁월했다. 상대가 함부로 돌격해오면 진형을 굳히고 그 사이에서 눈사태처럼 화살 비를 내려, 상대가 겁을 먹고 물러서면 즉시 돌격을 시켰다. 이런 싸움에서는 기선을 제압한 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검은 옷의 전사는 그것을 멋들어지게 실행하고 있었다. 용감하기로 이름 높은 타우의 동료들이 그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것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의 지시대로 하면 이길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 않다면 이렇게나 두려움을 모르는 전투법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5천의 멕켈 세력은 2천의 산적에게 산산이 부서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진정해라! 적의 움직임에 현혹되지 마라!” 멕켈의 부장들은 열심히 군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계속해서 공격으로 이어나가려 했지만, 그렇게 놔 둘 이븐이 아니었다. 병사들의 위치가 굳어지고 침착함을 되찾으려는 부분을 노려 동료들을 돌격시킨다. 거의 대부분이 말을 탄 그들은 질풍처럼 질러나가 재미있다는 듯 적들을 밟아 넘겼다. 그 지휘에 멕켈군은 정신없이 놀아났고, 장수들은 열심히 버티면서 저마다 외쳤다. “지휘관을 노려라! 저놈만 잡으면 적은 이빨 빠진 호랑이다! 어떻게든 붙잡아라!!” 이거다 하고 많은 기사들이 이븐을 향해 덤벼왔지만, 이것 역시 바라던 바였다. “부두목! 또 왔습니다요!” 적을 쓰러뜨리면서 기운차게 말한 것은 츠이르의 브란, 그 옆에서 누이의 프렉카가 바쁘게 활약하면서 외쳤다. “이번 놈도 화려한 갑옷인데요! 비싸게 팔리겠수! 너무 흠집내지 마세요!” 역시나 산적은 관점이 다르다. 이븐도 웃으며 말을 달려 나갔다. “그러지. 맡겨 두라고!” 목숨을 주고받는 현장에서 까불고 있는 듯 보이지만, 괴로울 때에도 태연한 얼굴로 싸우는 것이 산적이다. 탄가의 기사는 주로 중장비로 몸을 감싸고, 한방에 적을 부숴버리는 전투용 철퇴나 장창을 끼고 있었다. 타우 쪽은 수갑이나 흉갑을 걸쳤을 분인 지극한 경장(輕裝)이어서 움직이는 속도 면에서는 압도적이었다. 탄가 기사가 정신없이 날뛰며 내지르는 필살의 공격도, 맞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이봐, 탄가의 잘난 아저씨! 갑옷이 무거워서 꿈쩍도 못하겠습니까?! 거 벗어버리면 어떠실까?” 이런 때에도 농담이 빠지지 않는 남자다. 하지만, 눈매의 예리함이나 칼날 끝의 격렬함은 농담으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사신(死神)과도 쾌활하게 춤추고, 생사가 스쳐 지나가는 줄다리기를 즐기며, 손수 적만을 그 손에 넘겨주고, 자신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몸을 빼 피해온 남자다. 거대한 철퇴의 공격을 좌우로 흘려내고, 상대가 지쳤을 때 일격으로 말에서 떨어뜨려 버린다. 즉시 다른 자가 달려들어 결정타를 찍는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용사들이 차례차례 산적에게 쓰러지고, 예상외로 적이 강한 것에 병사들의 동요도 정점에 달하자, 멕켈 장군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번이라면 몰라도 두번이나 산적 따위에게 뒤진다니 장군의 무명(武名)은 땅에 떨어져 진흙투성이가 될 것이다. 단숨에 해치워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간다! 따르라!” 장군이 말고삐를 잡자 종자가 놀라 필사적으로 말렸다. “기다리십시오, 장군님! 산적을 상대로 장군님이 몸소 나가신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에잇, 비켜라!” 배전노장인 장군도 이때만큼은 머리까지 피가 올랐던 모양이었다. 창을 꼬나 쥐고 수호 기사들을 데리고, 한 부대를 이끈 채 돌진했다. 중장기병단이 돌격했다. 대지는 굉음과 함께 흔들리고, 갑옷 위에 입은 색색의 상의가 바람에 나부껴 실로 용맹스러웠다. 이때, 이븐 주위에는 정예의 사내들이 붙어 있었다. 민첩성과 갈고 닦은 검, 용기를 무기로 삼아 베고, 베고 또 베고 있던 그들은 장군이 나온 것과 동시에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들, 놓칠까 보냐!!” 조소와 함께 장군이 쫓아갔다. 다른 기사들도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븐이 도망친 건 함정이었다. 2천으로 빠져있던, 활을 낀 일단의 무리가 썩 앞으로 나와 이 무시무시한 부대를 향해 빠르게 화살을 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심한 방어구를 갖추고 있다 해도 타우 사람들의 활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조준도, 위력도 발군이었다. 빗나가는 화살은 거의 없고, 맞으면 반드시 깊은 상처를 입혔다. 눈을 맞은 말이 날뛰며 기수를 떨어뜨렸고, 또 어떤 자는 갑옷 틈새가 뚫려 비명을 지르며 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네 이놈, 산적들! 차례차례 잘도!” 몇 발의 화살을 맞은 장군은 머리털이 곤두선 형상으로 창을 휘두르며 아무 것도 개의치 않고 맹돌격했다. 귀신같은 기세이자 기백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맹렬함이었다. 그러나, 타우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화살을 쏘았다. 그렇게 대단한 장군이었지만 상처가 없을 수 없어, 돌격의 속도가 둔해졌다. 즉시 화살 틈을 누비며 들어온 사내들의 칼날이 말의 다리를 걸고 넘어졌다. 말은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쓰려졌고, 공중을 돌며 떨어진 장군을 향해 사정없는 칼날들이 내리쳤다. “비겁한 놈들!” 하나하나 퉁겨 내며 일어서려 했지만, 그것이 중앙에서도 이름 높던 멕켈 장군의 최후였다. 브란이 던진 창이 두터운 갑옷 채로 장군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장군은 놀랄만한 정신력을 발휘해 그래도 검을 빼려고 했으나, 브란은 몸통박치기로 장군을 지면에 쓰러뜨리고 단검을 뽑아서 베어 들어갔다. 대장 정도 되는 자라면 목을 베어 내걸어 실제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산적출신의 그들은 습격은 잘해도 머리를 베어본 경험은 없다. 몸 위에 올라탄 채 분투하여 간신히 목을 베어 들자 동료들 사이에서 크게 환성이 올랐다. 그 기세는 즉시 전원에게 퍼져나갔다. 싸움의 피곤함도 잊고 사기가 고양되어, 대조적으로 전의를 상실한 멕켈군(軍)에게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대장을 잃은 멕켈군은 더 이상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꼴사납게 도망쳐 다니는 것을 철저하게 쫓아다니며 산산이 밟아 주었다. 이 싸우는 모습에는 아군의 무장(武將)들도 얼이 빠져버렸다. 국왕은 처음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듯이 친구가 싸우는 양상을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고전하는 것 같으면 지원하러 가기로 되어있던 아누아 후작이나 도라 장군도, 독립기병대의 활약에 혀를 내둘렀다. 근위사령관의 증명인 자줏빛 외투를 늘어뜨린 아누아 후작이 감탄한 듯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들 차례는 없을 것 같군요.” 그 옆에서 도라 장군이 팔짜을 끼고 신음했다. “어디까지나 산적다운 전법이긴 하지만, 저 멕켈 장군을 쓰러뜨리다니...” 초보자는 미숙한 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적당히 수행을 한 자 역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파격적이라 해도 달인은 달인을 알아보는 법이다. 델피니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캄센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단숨에 승부를 내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조라더스 민게도 뛰어나기로 이름난 국왕이다. 하물며 여기에서 물러서면 틀림없이 캄센을 빼앗기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 자리에서 강하게 버티며 끝까지 응전 태세를 보였다. 한편 월 그리크도 물러설 마음은 전혀 없었다. 성 하나를 거점으로 삼아 차례차례 적의 성을 빼앗아나갔다. 좀더 란바에 가까운 영주세력, 근위병단, 로아 세력과 함께 쌓인 눈이 남아 있는 캄센의 토지를 귀신처럼 누볐다. 그중에서도 멕켈 장군을 쓰러뜨리 붉은 색과 녹색의 깃발은 탄가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온통 검은 색의 갑옷으로 몸을 감싼 젊은 지휘관은 탄가 병사에게 있어서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어딘가에서 어느 사이엔가 나타나 받아칠 사이도 없이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당황해서 허둥지둥 도망치려 하는 사이 그 옆으로 질서 있게 후퇴해가는 것이다. 게다가 왕비가 출진하자 탄가 세력의 혼란과 경악은 정점에 달했다. 그린다 왕비는 델피니아 사람들이 끔찍하게 잘 알고 있는 인간 이상의 힘과 기술로 싸우는 모습을 충분히 탄가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체격이 크고 웅장한 거한이 범상한 기술을 휘두른다면 이해할 수 있다. 놀라고 두려워는 해도 납득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수바늘이나 악기를 드는 것이 어울릴 듯한 작은 손이 긴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르고 큰 남자들을 단번에 때려 넘기며 압도적인 힘으로 밀고 들어오니, 익숙해져있을 터인 델피니아의 병사들마저도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탄가 병사에게 있어서는 악몽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굳건하기로 유명한 탄가 병사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쉽사리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나젝크 왕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무언가 술수를 썼거나, 장치를 동원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 손으로 밝혀 주겠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기사들이 열이 올라 맹렬하게 돌격했다. 게다가 상대는 여자라는 이유로 예의바르게 단독 대결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갑옷도 두르지 않은 왕비는 거대한 흑마 위에서 불쌍하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왕비가 보기엔 견고함을 자랑하는 탄가의 중장병은 움직임이 둔하기가 마치 딱정벌레와 같았다. 장갑은 딱딱하지만 말에서 떨어져버리면 그걸로 끝이고, 필살의 파괴력을 가지는 중량급 무기도 우습게만 보였다. “움직이는 속도와 머리의 총명함에서 그라이아에 이길 말은 없다. 힘과 기술로 나에게 이길 기사도 없다. 일대 일로 하자니 미안한 기분이 들지만 말이야.” 누군가에게 할 것도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 애마가 비난하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목숨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불경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왕비는 웃으며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미안, 미안. 제대로 할게.” 상냥하게 말한 다음 순간에 창날이 한번 번득이며, 다가오던 기사를 말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움직이지 않는 표적을 뚫는 것 같은 무심한 움직임이었다. 누가 달려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힘이었다. 왕비에게 도전했던 기사들은 모두 말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무참하게 꼬치가 되어, 마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진해서 실천해 보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불쌍한 것은 이런 광경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탄가 병사들이었다. 전투는 사기가 중요하다. 이름이 있는 용사들이 차례차례 무너져 내린다면 사기를 상실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또 한 가지, 이 소녀는 정말로 인간인가 하고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이 병사들 사이에 생겨나고 있었다.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절망적인 공포감이었다. 왕비를 따르고 있는 것은 질이 이끄는 타우의 별동대였다. 상대가 겁을 집어먹은 그 틈을 놓치는 짓은 결코 하지 않는, 습격에 있어서는 베테랑인 집단이었다. 함성을 울리며 돌격해가자 탄가 세력은 즉시 흩어지며 도주했다. 돌멩이를 던지니 참새무리가 흩어져 날아가는 것과 같았다. 실로 싱거운 결과였다. 이렇게 해서 델피니아는 점차 우위를 점하여 캄센의 요소를 차례차례 점령해 나갔다. 2장 진군 중인 군대는 천막을 치고 본진을 만든다. 밤이 되면 몇 천이나 되는 구화가 지펴지고, 벌거벗은 초원에 돌연 커다란 마을이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이기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에 병사들의 표정도 밝았고, 군대 전체는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사기가 충천한 군사들과는 반대로, 총대장인 국왕은 물러설 시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외국이다. 사기가 높다고 너무 전진해 나가는 건 위험하다. 탄가가 도망쳐준다면 당당하게 승리의 함성을 올리며 물러나겠지만, 첩자의 보고로는 조라더스가 진을 물릴 기척은 없다고 했다. 증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탄가 전역에서 모여든 군사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적의 맹장 멕켈 장군을 쓰러뜨린 일도 있고 해서, 이젠 어떻게 후퇴해야 할지 계속 고민을 하고 있자, 시종이 와서 독립기병대장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올렸다. “오오, 마침 잘 됐군. 들여보내라.” 연일 출진하여 나가면 반드시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지만 이븐의 표표한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국왕과는 소꿉친구이기도 해서 체면은 차리지 않는다. 제멋대로 주저앉아, 권하기도 전부터 술잔에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그렇기 때문에 국왕도 쓴웃음을 지으며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이번에는 네 공적이 크구나.” 그렇게 칭찬해 주자 이븐은 웃으며 부정했다. “별로 내 공적이랄 것도 없어. 타우의 자유민은 웬만한 어디 병사들보다 훨씬 우수하니까.” 국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산적질로 단련된만큼 유능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만큼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좋게 말하면 자부심이 높고 나쁘게 말하면 다루기 힘들다. 이런 사내들에게는 신분이나 권위를 내세운 명령은 소용없다. 금전만으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실로 지도자의 품격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뿐이다. 국왕은 감탄한 듯 말했다. “타우의 자유민에게 있어서는 국왕의 명령보다 두목 명령이 무서운 것 같군.” 술잔을 손에 든 이븐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마커스나 퍼잰 말인가?” “물론이다. 질도 그렇고.” 소베린의 마커스나 아델포의 퍼잰은 동쪽 능선에 위치하는 마을을 20년이나 이끄록 있는, 타우에서도 굴지의 명두목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60을 넘은 고령이었지만, 수하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번의 전투는 그들의 주거지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벌어졌다. 협력하겠다고 하여 이번 원정에도 동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은 모두 대단한 인물이었다. 질도 그렇지만, 국왕이 직접 활약을 칭찬하거나 상을 내려줘도 긴장하는 일도 없고, 잘난 척을 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온화한 노인으로 보이면서도 뭐라 말하기 힘든 무서운 느낌과 관록이 스며 나왔다. 그래서이리라. 산적으로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친 사내들도 그들 앞에서는 얌전했다. 무시무시한 수염을 기른 위험한 얼굴의 남자들이 딴 사람처럼 얌전하고 귀엽게 구는 것은 감탄스러우면서 동시에 우스웠다. “타우의 주민들은 혈기왕성하다고 들었으니까 말이다. 다른 군대와의 사이에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이븐은 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야 그렇지. 두목의 지시는 절대적이라는 게 타우의 법칙이니까. 하물며 그 세 명이 나란히 있어봐라. 타우의 자유민이 아무리 무서운 게 없다고 해도 그 눈앞에서 소동을 벌일 정도로 배짱이 있는 놈은 없다고.” “하지만, 너도 그 질 공에게 인정받을만한 구석은 있다고 보는데 말이다.” 원래부터 활달한 성격인 이븐은 남자들의 마음을 잘 붙잡아두고 있는 것 같았다. 성격만 좋은 것이 아니다. 머리도 좋다. 브란이나 프렉카처럼 자신의 마을에서는 부두목이라 불리는 사내들이 이 남자의 지시를 기꺼이 따르는 것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남자는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똑같다니깐.” “너무 그렇게 겸손해 할 거 없어. 멕켈 장군을 쓰러뜨린 공적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다.” 이븐은 그래도 웃으면서 국왕의 칭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문득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야, 내가 정말 그렇게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냐?” 국왕은 얼이 빠졌다. “당연하지. 그걸로 우리 군이 얼마나 유리해졌는데? 나무랄 데 없는 대활약이었고말고.” “그러면 상을 다랄고 해도 되냐?” “오오, 물론이지.”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국왕은 선뜻 말했다. 이 남자가 지금까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없다. 그렇기는커녕 함부로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간 기분나빠한다. 예전의 공주가 그랬듯이, 보수를 바라고 널 도와주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 남자의 자긍심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결함과 우정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보답도 해주지 못하는 답답함 역시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달라고 하는 거라면 좋은 기회였다. 크게 끄덕였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 봐. 지위냐, 직책이냐, 아니면 돈?” “영지가 좋겠어.” 이것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무언가 잘못들은 게 아닌가 하고 어이없어 하는 국왕에 비해, 이븐의 새파란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왜 그래?” “아니, 그게, 미안. 별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영지가 갖고 싶다는 게 그렇게 이상하냐?”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저 왕비가 ‘진주 목걸이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부탁이니까. 기쁘게 들어주마.” “진짜지?” “응. 약속하마.” “국왕은 두말하지 않는 거다?”“끈질기네. 그래서? 어느 부근의 토지를 갖고 싶은 거냐?” “타우 동쪽 산맥 몽땅 다.” 국왕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이번의 충격은 컸다.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그 얼굴에서 경악이 사라지고 심사숙고 하는 눈빛이 되어가는 것을, 단정한 얼굴이 엄한 표정으로 굳어가는 것을, 이븐은 술잔을 한 손에 들고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타우 산맥의 동쪽 능선은 델피니아 국토가 아니었다. 커다랗게 캄센이 펼쳐져 있는 탄가의 영토이다. 이미 타우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지 백년 이상이 되어 사실상 그들의 토지라고 말해도 좋지만, 탄가와 델피니아 각각의 서고에 잠자는 고문서를 조사해보면 서류상으로는 틀림없는 탄가의 영토였다. 빼앗아 버리라는 말이었다. 이 기회에 타우의 동쪽을 통째로 델피니아 영토로 해버리라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승리를 구실로 국경선을 긋고, 오늘부터 이 토지는 우리 영토라고 말하는 것이 승자의 당연한 권리였다. 그러나, 타우는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증원군을 믿으며 화해를 거절할 것이 틀림없다. 자국의 영토를 적에게 양도하는 것은 지배자에게 있어 그 이상 없을 굴욕이자 원통함이다. 설사 그것이 척박한 낭떠러지의 땅이거나 늪지이거나 산적이 살고 있는 토지라고 해도 그렇다. 얌전하게 건네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국왕은 가볍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군...” 이븐은 시선을 깐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보상치고는 너무 컸나?” “아니. 한번 준다고 했으니까,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반드시 주마.” 매우 진지한 국왕의 태도에 검은 옷의 남자는 살짝 웃었다. “가뿐하게 말하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달라고 한 건 너야. 게다가...” 국왕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져나갔다. 무언가 재미있는 장난거리를 떠올렸을 때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네 바람은 전투를 종결시키는 좋은 계기가 될 지도 몰라.” 푸른 눈이 찌르듯 국왕을 보았다. 그러나 금갈색으로 볕에 탄 깔끔한 얼굴이 웃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이없다는 것과 칭찬이 반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너 역시, 제법 임금님다워졌어.” “시치미 떼지 마. 네 목적도 그런 쪽이었으면서 뭘.” 라모다 기사단장이 서쪽을 억눌러 두고 있다고 해도 여기에 오래 머무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국왕이 먼 동쪽 국경에 떨어져 있는 동안 파라스트가 무슨 짓을 해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조라더스는 무척이나 끈질기다. 국지전에서는 이겨도 이것을 완전하게 격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부추긴다고 해서 계속 공격을 하다보면 언젠가 이쪽도 힘이 빠진다. 그럴 바에야 어느 정도의 전과를 거둔 이상, 같이 쓰러지기 전에 화평을 맺고 물러나는 것이 델피니아에 있어서는 훨씬 바람직했다. “내가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라더스도 괴로울 것이다. 증원을 기다리며 버티고는 있지만, 우리들의 힘을 얕볼 수 없다는 건 뼈저리게 깨달았겠지. 이대로는 캄센 전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이기고 있는 네가 캄센의 일부, 그것도 별 가치도 없는 타우 동쪽 령만을 넘겨주면 화평해도 좋다고 제안한다면... 보통은 영토를 넘겨주는 데 승낙할 리가 없지만 이번 경우엔... 그런 거지?” “의외로 잘 수습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빙그레 웃었다. 국왕은 이어서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타우의 동쪽 령 전부라고 한다면 광대한 토지가 된다. 델피니아가 넓다고 해도 그만큼의 영지를 다스리는 자는 별로 없다고. 지금과 같이 지위도 관직도 없이 지낼 수는 없게 될 거다.” 덤으로 작위도 밀어붙여서 총신(寵臣)으로 삼을까 생각했지만, 이븐은 양손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귀족나리도 영주나리도 안 될 거야. 받은 그 자리에서 질에게 넘겨줄 테니까.” “질 공에게?” “그래. 그걸로 내가 진 빚을 갚을 수 있지. 타우는 누구의 것도 아니야. 자유민의 것으로 있어야 해. 질은 토지를 독점할만한 녀석이 아니니까. 동쪽 산맥을 마을마다 분배할지 공동으로 다스릴 지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두목들끼리 이야기해서 결정할 거다. 그러니까 정말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타우가 타우로서 있을 수 있도록... 보호해줬으면 하는 거다.” 국왕은 즉시 끄덕였다. “그들이 델피니아 국민이기를 바란다면, 물론 왕으로서 그들을 보호해야지.” 이븐은 평소 아닌 척 하는 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오랜 친구를 보았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 두지. 타우의 자유민은 착취당하는 것도 관리당하는 것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럴 바에야 산적인 채로 있는 걸 선택할 놈들이야. 그러니까 네가 타우의 자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돼. 영토의 일부에 더해진다고 해도 별로 득 될 건 없는 일이 될 거다. 그래도 상관없나?”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나야말로 그들에게 빚이 있어. 자치령이라고는 해도 내가 보호하는 걸로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기쁘게 협력하마.”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미소 짓고 술잔을 비워 보였다. “두목들에게 그렇게 전해두지. 바로 지금부터 이건 다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들 자신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이야.” 다음날부터 델피니아군의 공격은 치열함의 극을 이루었다. 탄가도 중장기병의 벽을 만들어 한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괴로운 전개였다. 그 단단한 방어를 완전히 뚫는 것은 근위병단의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도 힘들었다. 그래서 델피니아는 탄가 본진의 배후를 잘라내려고 시도했다. 보급로를 끊고 증원군과의 연락로를 단절시키기 위해서였다. 기동력이라면 델피니아가 유리했다. 특히 타우의 군사는 치고는 빠지고 틈새를 뚫으며 맹렬하게 탄가의 방위선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탄가군은 실로 잘 버텨냈다. 보통 이 정도로 흔들면 병사들 사이에 동요나 두려움이 생겨나는 법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타우의 두목들은 계책을 짜냈다. 동료들을 적의 병졸들 사이에 숨어들게 해서, 증원이 늦을 것 같다느니 누구누구가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하는 병사들이 불안해할 만한 소문들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것은 그나마 효과를 거두어 병졸들의 움직임이 힘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때를 맞추어, 월 그리크는 펜타스의 대공에게 중재를 의뢰했다. 탄가나 델피니아에 비하면 나란히 옆에 서기 힘든 미약한 소국이지만, 혈통만큼은 유서가 깊었다. 대화삼국이 형태를 갖추기 전에는 중앙에서도 유일한 대가(大家)였지만 점차로 몰락하여 결국 테바 강의 하류에 있는 삼각주 하나를 도시로 만들어 그곳을 다스리며 정착하게 된 것이다. 교통의 요지이기에 대륙 전체에서 세공이나 직조 기술자가 모여들었고, 먼 바다에 떠있는 해적섬 킬탄서스와도 손을 잡아 공존공영을 이룩하고 있었다. 토지가 아니라 금전에 의해 번영하고 있는 보기 드문 국가였다. 소국이라거나 쇠락한 집안의 주인이더라도 긍지와 자부심은 유별나듯이, 펜타스의 대공은 자신이야말로 중앙의 정통한 군주이며 대화삼국에는 땅을 빌려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면 피바람이 불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인물이다. 우스운 일이며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왠지 모르게 기꺼운 느낌이 있었다. 몇 백 년이나 이어진 오래된 가문 출신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그런 이유로 오론이나 조라더스도, 그리고 월 그리크도 펜타스에게는 일종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중재역을 맡은 대공은 쾌히 승낙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혈통의 중요함을 강하게 의식하지만, 무장으로서의 실력은 전무한 사람이니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을만한 시원스러운 역할이 더욱 달가웠던 것이리라. 즉시 조라더스에게로 달려가 월의 말을 전했다. 원인을 따지자면 그쪽의 견강부회라고도 할만한 선전포고에서 발단된 것이지만, 우리들은 이 이상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또한 국경침범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타우의 주민들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정착하고 살고 있었고, 델피니아의 국민이 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니 이후 캄센 중부에 흐르는 강을 새로운 국경선으로 하여, 그곳으로부터 서쪽은 델피니아 령으로 하고자 한다, 라는 주지였다. 조라더스는 이 제안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격정이 끓는 조라더스이지만, 동시에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이 이상 무리를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적당한 때에 맞장구를 쳐줄 필요가 있었다. 저런 산적들에게 잘도 그렇게까지 의리를 세워준다고 생각했다. 전투에선 뛰어난 애송이지만 의외로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냉소를 보내며 어이없어 했지만, 영토는 영토다. 이 동쪽 령을 그대로 델피니아 령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작은 나라에 필적하는 면적을 적에게 붙여주는 일이 된다. 도저히 달갑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런 감상적인 불쾌함을 허용치 않았다. 세심하게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려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쫓기게 된 것은 이쪽이다. 기습에 실패하고 란바 요새를 함락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나젝크 왕자의 성급한 행동 탓이라고 혀를 차는 정도로 끝났다. 그런데 그 뒤는 최악이었다. 국내에서도 둘도 없는 호걸이었던 멕켈 장군을 잃고, 란바를 빼앗기는커녕 캄센을 델피니아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쳐들어왔던 만큼 조라더스의 노여움은 심했다. 가신(家臣)들은 그 모습에 안색을 잃고, 고개를 조아리기에 급급하면서 전황을 보고했을 정도였다. 아군의 정신없음에 이를 갈면서도, 조라더스는 격정 때문에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극히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아군의 열세는 분명했고, 일단 화의를 맺고 물러서는 쪽이 득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펜타스의 중재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내밀어진 지푸라기였다. 응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물론 저런 애송이에게 사실상 패배했다고 선언하는 것에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조라더스는 전투 사이에 보았던 델피니아 왕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예를 자랑하는 소녀라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그 싸우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탄가가 자랑하는 중장기병을 한손으로 대적하는 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어지지가 않는데, 그것이 고작 17세가 될까 말까한 가는 몸집의 소녀라니. 국왕으로서 수많은 호걸들과 싸우고 샐 수 없이 많은 기사를 보아왔지만, 저 왕비에 필적하는 활약을 보이는 자는 본 기억이 없었다. 조라더스는 전투 사이에도 몇 번이나 저 왕비에게 자객을 보냈다. 물론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다. 제대로 된 무장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지만, 저 왕비의 정체를 확인해두고 싶어서였다. 경비가 엄중한 코랄 성이나 사람 눈에 닿기 쉬운 성의 거리라면 몰라도, 전장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전장에서는 일상이 통하지 않는 일종의 이상(異象) 공간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적의 졸병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도 되고 뒤에서 활을 쏘아도 된다. 어떤 짓이라도 가능하다. 오랜 기간 써왔던 세작(細作) 중에서도 실력 있는 자들을 골라서 내보냈지만, 그 사내들 중 누구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비는 여전히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강건한 점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조라더스왕도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젝크 왕자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수밖에 없다고 사무치게 생각했다. 저 소녀야말로 델피니아 국왕에게 힘을 주고 있는 승리의 여신이라고 역설했던 점술사들의 말도 떠올랐다. ‘바보 같은 나젝크 놈... 기껏 검을 겨누지 않았나. 같이 죽더라도 검을 찔러 넣는 정도의 활약은 보여줄 수 없었던 건가.’ 다행히도 이 읊조림은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던 가신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 했다. 조라더스 민게는 델피니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평에 응했다. 화해의 의식과 조인(調印)은 순조롭게 끝나고, 양국은 캄센에서 차례차례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델피니아군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현지에 남아있던 것은 퍼잰, 마커스, 질 등의 탄가 군세였다. 그들의 거주지는 바로 옆이다. 그것 때문에 기한을 정하지 않고 멀리까지 돌아가야 하는 정규군을 지키는 형태가 된 것이다. “뭐, 우리들도 이제 델피니아 국민이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 퍼잰이 말했다. 머리카락은 얼마 남지 않았고 짧은 수염은 새하얗게 세었지만, 구리빛의 피부에 단단한 턱을 가진 대단한 거한이었다. 젊은 시절의 범상치 않은 강인함과 민첩함을 지금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건장한 모습이었다. 한편 마커스는 장신에 바싹 마른 체구, 가늘게 기른 턱수염을 늘어뜨린 언뜻 보기엔 늙은 학자와 같은 풍모였다. 그 얼굴에 쓴웃음을 떠올린 채 질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 쪽 그 젊은 친구는 꽤나 대담한 짓을 하는구먼. 우리들에겐 아무런 상의도 없이 말이야.” “그래. 그거 말이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타우를 받아왔다니. 무슨 말인가 했다고.” 두 사람의 노두목(老頭目)은 비난하는 듯한 표정과 말로 자신들에 비해 젊은 동료를 노려보았지만, 형식적일 뿐이다. 눈도 목소리도 웃고 있었다. 질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부탁이니까 내가 시켰다고는 하지 말아 주시오. 놀란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이 사람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짙게 탄 피부는 아직 젊었고, 정후한 용모는 패기에 가득 차 있으며, 태도에는 세간에 익숙한 사람의 침착함이 있었다. 마커스는 끝까지 골치 아픈 표정으로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복잡하게 됐구먼. 국왕님은 저 젊은 친구에게 동쪽 산맥을 약속했지. 그 젊은이는 자기는 필요없다며 질에게 넘겨준다고 하지. 그래서 질의 의향은 어떤감?” “어쩌고 할 게 있나. 이건 동쪽 산맥의 문제요. 페노아가 끼어들 수는 없지.” “아니. 그게 또 그럴 순 없네. 지금은 자네가 동쪽 산맥의 영주님이시니까.” “그렇고 말고. 반드시 우리들에게도 토지를 분배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되지.”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물론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질도 일부러 과장하여 싫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래서 늙은이들은 싫다니까. 배배 꼬여 있어서 안 좋아.” “호오? 말은 잘 하는구먼, 젊은 친구.” 찌릿하고 노려보는 바람에 질은 쓴웃음을 지었다. 불혹의 나이에 젊은이라는 소리를 들어서야 가만있을 순 없다. “당신들을 제쳐두고 어째서 내가 영주가 되어야 하는거요? 동쪽 산맥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 델피니아 령에 추가되었어도 타우는 타우지. 뭐가 어찌 될 리도 없구만.” 이븐은 국왕으로부터 자치의 약속을 받아냈다. 숲에서 살던 그들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한, 자유로이 생활해도 좋다는 보장을 델피니아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런 보장을 받은 만큼 몇 개의 조건이 붙었다. 그 중 하나는, 새로운 국경선을 따라서 대 탄가용 요새를 짓는 것이다. 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조치임과 동시에, 타우에서 완전히 내려온 곳에 있으므로 별로 지장은 없다. 델피니아의 호상(豪商)들로부터 통행세를 받는 걸 그만 둘 마음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생활은 지금까지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좋은 계기가 되는 게 아닐까?” 마커스가 신중하게 중얼거렸다. 세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을 서로 교환했다. 탐색이 아니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지만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 서로는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를 새삼 확인한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질이 작은 탄식을 흘렸다. “이븐 녀석은 아무래도 저 임금님을 무척이나 믿고 있는 것 같소.” “그런 자네는 어떤가?“ 페오나의 두목은 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어려운 소리를 물어봤자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연장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만.“ 퍼잰도 마커스도 일부러인 듯 생각에 잠겼다. ”뭐, 그다지 약삭빠른 편은 아니지.“ ”음. 산적에게 의리를 지킨다고 자치를 약속하다니 말이야. 우리들에게도 실로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더군.” “그래서야 귀족들에겐 꽤 받아들여지기 힘들 거야.” “하지만 타고난 전사더구만. 치고 빠지기도 제법이고.” “그래도 그런가 싶으면 또 제법 위엄도 있어 호감 가는 인물이고 말이야.” “왕 같은 걸 시켜두기가 아까울 정도야. 타우에 있었다면 좋은 두목이 되었을 텐데.” 두 사람의 노두목들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랫사람들에겐 경외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어도, 의외일 정도로 장난기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독립기병대는 타우 전역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이 전장으로 나선 것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델피니아의 국왕이 어떤 인물인지, 그 눈으로 직접 감정해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퍼잰도 마커스도 월 그리크에게 합격점을 준 듯 했다. “이봐, 질. 페노아는 그 젊은이에게 넘겨줄 건가?” 퍼잰이 언뜻 보기엔 관계없이 들리는 소리를 꺼내자, 질은 곤혹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나는 그러고 싶은데, 본인이 싫다니 말이오. 한군데에 붙잡혀 있는 건 성질에 안 맞다나 뭐라나.” “호오? 그건 또...” “20년 전에 누구 씨도 똑같은 소리를 했었지, 아마.” 질은 보기 좋은 수염에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타우의 살아있는 역사책 같은 두 사람이다. 누구나가 대두목으로 인정하는 질도 조금은 상대하기에 벅찼다. “뭐어, 분명히 그 녀석은 예전의 나와 많이 닮아 있소. 나하고 다른 점은, 만사를 바람부는 대로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장래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점일까.” “타우의 장래를 그 임금님에게 맡기는 건가.” “그 자체는 나쁜 생각이 아니야. 대화삼국 간에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우리들만 아무 일 없이 끝날 리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어딘가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돼.” “그 점 말인데. 시험 삼아 3년, 저 임금님과 같이 지내본 셈인데 대충 합격이라 해도 좋겠지.” “이제 남은 건 서쪽이나 남쪽 녀석들하고 합의해야만 하는 것 뿐이군.” 타우 산맥은 말하자면 거대한 조합과 같다. 이 세 명은 조합 중에서도 상위 3명의 실력자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타우 전체에 관한 일을 그들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전원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질. 그 자리에서 자네가 영주로 선출될 건 거의 틀림없다고 보네.” “저 젊은이는 자네에게 준다고 했으니 말이야. 게다가 뭐라 해도 우리들은 늙어 빠졌으니.” “그렇고 말고. 이 나이가 되면 멀리 나돌아 다니는 것도 힘들지.” 의미심장하게 웃는 두 사람을 곁눈질하면서 페노아의 두목은 이번에야말로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 실력자들은 귀찮은 일을 전부 자신에게 밀어붙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알았소. 내가 대표가 되어서 타우와 코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면 되는 거지?” “바로 그거지. 자네한테는 딱 맞는 역할이라고. 문제는 그보다는...” 마커스는 자연스럽게 말을 얼버무리고, 다른 한 명의 노두목은 무겁게 끄덕여 보였다. “다리를 건너는 건 좋다고 치고, 어디까지 건널까 하는 거지.” 타우의 실력자들은 다시 한번 침묵했다. 천막 밖에서는 젊은 사내들이 떠들썩하게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활기로 가득 찬 바깥 공기와는 반대로, 각각의 생각에 잠긴 세 명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게 굳어 있었다. 3장 국왕군은 5월 중순쯤 코랄로 개선했다. 결혼식 직후 황급히 출발했을 때는 아직 차가운 지표를 드러내고 있던 언덕도 지금은 녹색 융단으로 뒤덮였고, 코랄성의 하얀 외벽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늦은 봄은 지나고 초여름의 풍경이었다. 국왕군은 시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결혼식 뒤에 축제를 중지해야만 했던 일도 있어, 거리는 단숨에 떠들썩한 활기에 넘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근위병단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과 단란한 한때를 즐겼고, 왕궁에서는 제후들이 모여 축하연을 열었다. 그러나 국왕은 돌아온 그날부터 정력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지키고 있던 틸레든 기사단을 치하하고 그동안 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재상에게서 사무 제반에 대해 인수받은 뒤 밤중까지 2개월분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다음날부터는 중부 귀족, 호족이 연이어 국왕의 승리를 축하하러 찾아왔기에 그 대응에 날을 지새웠다. 비르그나에서 나시아스도 찾아왔다. 이것은 단순히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파라스트의 동향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또한 쉴 틈이 없었다. 바쁜 것은 국왕만이 아니었다. 셰라도 다시 시녀 모습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비워둔 서리궁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궁의 손질이나 가사는 전부 셰라가 혼자서 하고 있었다. 왕비가 일이 힘들면 누구보고 도와달라고 할까 하고 말을 꺼낸 적도 있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대단한 일이라고도 생각지 않았거니와 혼자인 쪽이 마음이 편했다. 창을 열어젖혀 환기를 하고 차양을 세탁하고 침구를 들고 나와 볕에 말리고 잡초 투성이가 된 정원을 손질하는 등, 해가 저물 때까지 씩씩하게 일을 했다. 왕비는 때맞춰 숲으로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서 저녁식사를 끝낸 뒤, 본궁에서 시녀장이 보낸 하인이 찾아왔다. 늦은 밤에 미안하지만 비전하가 자리를 비우셨다면 방문해 주지 않겠냐는 것이다. 셰라는 급히 몸단장을 갖추고 하인의 뒤를 따라 본궁으로 내려갔다. “발밑을 조심하십쇼. 낮하고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니까요.” 하인은 아직 스무살도 안 되어 보이는 귀여운 외모의 시종이었다. 그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왕비를 모시는 젊은 시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리라. 셰라는 미소 지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실은 셰라에게 있어서는 촛불 빛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본궁에서 서리궁을 왕복하는데 아무런 불편도 없지만, 이 시종에게는 조명이 없다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칠흑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신도 잘 보이지 않는 척 해야만 한다. “정말 이 길이 이렇게 급경사였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낮과는 뭐든지 전부 다르군요. 이렇게 가는 달빛 아래서는 성의 모습마저도 왠지 무섭게 보여요.” 굳은 문과 멋진 성벽과 근위병에게 지켜지고 있는 성의 정면이 아니다. 파키라 중턱에서 가늘게 뻗어 나와 있는 산길과 같은 길인 것이다. 젊은 시종은 셰라보다 훨씬 발걸음이 위험했다. 조마조마 하면서 간신히 본궁까지 도착했다. 안쪽 일의 최고 책임자인 시녀장은 혈색이 좋은 얼굴을 약간 긴장시킨 채 셰라를 맞이했다. 이런 밤중에 불러낸 것도 그렇고 그 모습도 그렇고 무언가 굉장히 큰일이 일어난 듯 했지만, 카린은 우선 셰라를 앉혀놓고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란바에서는 수고 많았어요.” 가슴이 뛰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설마 카린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시녀장이 알고 있는 셰라는 긴 은발을 늘어뜨리, 하얀 시녀복이 잘 어울리는 소녀이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연옥이나 소검을 휘두르는 첩자의 모습은 이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셰라의 비밀스러운 긴장감은 까맣게 모르고 카린은 스스로 차를 타 왔다. “비전하가 그대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 좋은 일이지만,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아이를 전쟁터로 데리고 가시다니... 내 정신이 내 정신 같지가 않더군요. 비전하도 최소한 한 마디라도 말씀해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셰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쪽에서 무언가 무서운 일을 당하지는 않았나요? 비전하를 모시는 처녀를 우롱하려는 자는 그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쟁터란 남자의 피를 미치게 하는 법입니다. 그곳에 그대와 같은 아이가 있었다니 괴로운 일도 많았겠죠.” 카린은 거친 남자들 속에 홀로 내던져진 시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셰라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시녀장의 걱정은 그야말로 착각에 의한 농담거리 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도 왠지 웃을 수가 없었다. 깊고 깊게 머리를 숙였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어, 비천하께서 무척이나 신경을 써주셨고, 저도 가능한 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도록 해서... 아무 일도 없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에요.”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 카린은 헛기침을 하고 태도를 바로 잡았다. “그건 그렇고 란바에서의 2개월간 폐하와 비전하의 모습은 어떠하셨나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땠나, 라고 물어도 곤란한 질문이었다. 국왕은 태연하며 당당한 대장이었고, 왕비는 천군만마와 같은 용사였다. 그것은 카린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생각한 대로 입에 올린 셰라에게 시녀장은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이 되어 한숨을 흘렸다. “그 모양으로는... 역시 그러리라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한번도 부부다운 일은 없었던 것 같군요.” 할 말을 잃었다. 찻잔을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가던 손이 완전히 멎어버렸다. 떨어뜨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셰라는 보랏빛 눈동자와 사랑스러운 붉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고, 잠시 동안 경직되어 있었다. 카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지만, 쓴웃음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신참인 그대가 그분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지금 그 얼굴을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듯 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을 읽혀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 그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비전하는 저어, 그러한 책임은 끝까지 거절하시겠다고 항상 말씀해 오셨기 때문에...” “비전하는 그걸로 괜찮다고 해도...” 말하려던 시녀장은 말을 끊었다. 셰라도 그 마음속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국왕은 여성에게 전혀 흥미가 없다. 아니, 그런 듯 보였다. 그러나, 그래서는 곤란하다. “왕국에는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폐하께선 어떻게 해서든 후계자를 만드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측실이라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어요.” “예.” “다만... 명목뿐인 부부라고는 해도 비전하께는 달갑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셰라는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즉시 답하려 했다가 미소를 지웠다. 시녀장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어쩌다보니 왕비의 이상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힘을 몇 번이나 직접 그 눈으로 보아온 만큼, 남편의 애첩이 마음에 안 드는 경우라도 생기면 무언가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카린의 그 염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의 국왕도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항쟁 때문에 하마터면 암살당할 뻔 했고, 카린은 아기였던 국왕의 목숨과 바꾸어 자기 아이를 잃었다. 겨우 17세의 셰라가 초로의 시녀장의 마음 속 깊이 잠들어 있는 시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문제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신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봉공(奉公)에 나서서, 여러 집안의 내막을 보아 왔습니다. 총명하다는 평판의 부인이 남편에게 심한 질투를 보이는 것도, 품격 있고 점잖은 부인이 첩의 얼굴을 밟아 뭉개는 것도 이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남편의 외도를 담담하게 보아 넘겨주던 부인이 어느 날 남편을 칼로 찔러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질투는 여성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인 듯 하나...” “이런, 그대는 마치 여자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요.” 시녀장은 자애에 가득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이 어린 소녀의 결벽성을 흐뭇하게 생각한 것이리라. 자신의 말이 저도 모르게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뒤를 이었다. “그렇지요. 남자분들은 질투는 절대 금물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그 재앙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아무리 해도 그만두지 않아요. 다만, 남자분들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 같은 부인들도 사정은 있었겠지만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 없지요. 현명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하는 일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고, 겉으로는 남편이 말하는 것에 ‘네, 네’하면서 따르고 있었지요. 커다란 상인 집안의 부인이셨는데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봉공하러 나온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듯 일을 하시고, 남편분의 일에까지 하나하나 배려를 하는...” “그런 댁은 남편이 위세가 있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부인 앞에서 고개를 못 들지 않나요?” 셰라는 생긋 웃으며 끄덕였다. “들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고양이 앞발에 목덜미를 붙잡힌 생쥐 같은 걸요.” “이런...” 나무라면서도 카린도 웃고 있었다. 그러한 부부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전하는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부인의 타입에도 들어맞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남편이신 폐하가 어떤 분을 총애하던 간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의지의 힘으로 질투를 누르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입장을 고려해 무관심을 가장하는 것도 아니다. 흥미가 없는 것이다. 카린은 다시 한숨을 쉬며, “조금은 질투해주셨으면 하네요.” 하고, 세간의 일반상식이나 남편들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날 밤에는 다른 곳에서도 사건이 있었다. 본궁 가까이에 있는 사보아 공작저택에서는 당주인 발로가 있는 한껏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결혼 말입니까?” 그 앞에는 블루완드 경과 몬튼 경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집사인 카사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주인의 친척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사보아 공작가의 실력자들이다. 개선 축하를 위해 찾아온 김에 일곽의 공작저택에 들러 갑자기 발로에게 결혼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이다. “그렇지요. 폐하께서도 경사스럽게 후(后)를 맞이하셨으니, 그대는 그 폐하의 첫 번째 방패 아니신지. 언제까지고 홀몸으로 있을 수는 없소이다.” 70을 몇인가 넘었을 터인 블루완드 경이었지만, 아직도 정정했다. 허리도 곧았고 쉰 목소리에도 힘이 담겨 있었다. 발로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을 이번에는 몬튼 경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경에게도 여러 가지로 하실 말씀은 많겠지만, 세상의 정세라는 것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보아 가의 계보를 따라가면, 이 사람은 발로에게 있어서 대숙부의 사위가 된다. 다른 집에서 양자로 들어온 사람인만큼 만사에 온화하고 인덕도 훌륭했다. 맥다넬 경이 죽은 지금에 와서는 비슷한 세대 친척들을 총괄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사람이었다. “몬튼 경 말씀대로요. 탄가와의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었지만 소문을 듣자니 이번에는 파라스트와 한판 붙으리라 하더군. 그대는 이번에야말로 폐하와 함께 싸울 것을 바라시겠지.” “물론이죠. 빈집 지키기는 성미에 안 맞습니다. 이 2개월 동안 얼마나 지루하게 지냈었는지.” “그렇고 말고. 허나 공작, 그대의 무용은 믿고 있지만 혹시나, 혹시나 말이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어찌 하시려오? 사보아 공작가 직계의 혈통을 그대 대에서 끊을 셈이오.” 발로는 못 당하겠다는 눈초리로 손윗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의외인 것은 그다지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라는 것이이었다. 언젠가는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주라는 것은 당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공작 정도 되면 결혼을 한다고 해서 처에게 묶이게 되는 일은 없다. 바람을 피우던 애인을 가지던 서자를 가지던 간에 허물이 될 게 없다. 그것을 참지 못하는 여자는 공작부인 같은 건 할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예외였다. 어쩌다 국왕의 여동생을 처로 맞게 되는 바람에 무서울 정도로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했었다. “제 자유로운 생활을 참아줄, 또 사보아 가에 어울리는 가문에서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만... 대숙부님들께서 점찍어두신 건 어떤 사람인지?” “2, 3일 안에 왕궁에 찾아온다더군요.” “저와 선을 보기 위해서입니까?” “아니, 아니. 폐하의 개선 축하를 드리기 위해서요. 무슨 일이던 직접 하지 않으면 성이 안차는 분이라.”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대와는 얕지 않은 인연이 있는 분이오. 아시겠소?” 발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입가만 치켜 올린 채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요. 로자몬드입니까?” “그렇소.” “뭔가 이의는 없습니까?” 젊은 공작은 잠시 생각했다. “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린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지요. 이미 없었던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두 사람은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내밀었다. “그건 우리들도 이미 알고 있는 일. 그러니까 여기에서 한 번 당사자들끼리 대화를 해보면 어떻겠나 하는 거요.” 발로는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아직 이 이야기를 승낙한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승낙할 리가 없잖소. 그걸 어떻게든 설득해보시라는 거요.” “그건 또, 꽤나 변칙적인 혼담이군요.” 분명히 비꼬는 것이었지만 온후함과 친절함으로 알려진 몬튼 경은 끝까지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그 분의 친척이 이 일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숙모이신 홀다네스 공작부인 같은 경우에 그 분이 자리를 잡으시는 걸 볼 때까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며 한탄하고 계십니다. 지금에 와서는 공작님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다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하시니 우리들도 그냥 거절할 수는 없지요. 실제로 혼기가 상당히 지나버린 분이라 경에게는 약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만...” 블루완드 경은 사돈 조카의 변설을 호쾌하게 가로막았다. “무슨 소릴. 십년쯤 연상인 것도 아니고, 아직 젊지 않은가. 훌륭한 후계자를 낳아줄 거요. 무엇보다 가문도 신분도 토달데 없이 좋은 혼담. 애초에 그 불행한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미 오래 전에 오고갔을 일이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발로는 어이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숙부님. 혼자서 경사스럽다 하셔도 곤란합니다. 완고한 걸로는 평판이 자자한 여자입니다. 싫다고 하는 걸 어떻게 승낙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호오. 공작 정도의 수완을 가지고도 그 얼음같은 귀부인의 마음을 녹이는 건 무리라 말씀하시는 거요?” 일부러 재미있다는 듯 블루완드 경이 말하고, 몬튼 경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좀 더 얌전하고 경의 의지대로 따를 만한 아가씨를 구해볼까 생각했습니다만... 이쪽 숙부님께서 공작은 청개구리 같은 분이니 다소 성격이 강한 신부감 쪽을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을까 말씀하셔서.” “이거 보게, 몬튼 경. 그런 소리를 해서야 인정사정 없지 않나. 그래 어떤가, 공작? 한번 움직여 주시겠나?” 발로는 다시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지독한 분들이군요. 저에게는 상담도 없이 이렇게나 골치 아픈 일을 밀어붙이시다니.” “불만이신가?” 발로는 다시 깊이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척을 하고 있었다. 얕지 않은 인연, 몬튼 경은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그녀는 발로에게 있어서 인연이 있는 여성이었다. “본인의 승낙을 얻어내야 하는 혼담이라는 것도 제법 재미있을 것 같군요.” 주의 깊게 대답했다. 4장 엔도바 자작부인은 오늘도 아침부터 정원에 나와 일하고 있었다. 국왕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 왕궁을 방문했을 때에는 깔끔하게 정장을 했던 부인도 지금은 작업용 목면 옷을 입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햇볕을 가리기 위한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마치 서민의 복장 같았지만 이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공단과 벨벳을 입고서 흙바닥에 꿇어앉거나 땀을 흘리거나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국왕으로부터 받은 저택은, 최소한 이 정원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집처럼 변해 있었다. 가을 사이에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나무를 옮겨 심은 보람이 있어 사람의 키 정도 되는 관목이 금색 눈보라처럼 꽃을 맺었고, 그 바로 앞에는 새하얀 꽃봉오리가 몇 겹이나 늘어뜨리고 있었다. 좀더 낮은 곳에는 짙은 녹색 이파리와 눈을 틔우기 시작한 푸른 색, 보라 색 꽃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화단의 가장자리도 키가 다르고 색이 다른 꽃을 이중으로 심어두었다. 화려한 꽃의 무도회장이었다. 부인의 취미는 남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선한 아채나 향초 등 먹을 수 있는 것도 심어두고 있었다. 화단과 채소밭의 위치는 확실히 나뉘어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꽃을 맺는 향초를 심어두었다. 옅은 복숭아 빛의 예쁜 꽃을 피우는 것뿐 아니라 그윽한 향기도 났다. 저택에서 쓰는 향초들은 부인이 스스로 따서 부엌으로 가져갔다. 전혀 상류계급의 부인답지 않지만 저택에서 봉공하는 사람들은 모두 엔도바 부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5월의 하늘은 시원스러울 정도로 활짝 개어 있었다. 비틀어진 막대과자 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저편에서는 파키라 산맥의 녹음이 보이고 있었다. 코랄의 거리에서 막 탈출해 온 사람이라면 감탄하고 매료될 광경이었지만 부인에게 있어서는 매일 보고 있는 풍경이었다. 말발굽소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듣고는 있었지만 이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일에 몰두하고 있자니 바로 곁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엔도바 부인?”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안장 위에서 의외의 인물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인은 곤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라모나 기사단장님?” “오랜만입니다.” 나시아스는 말에서 내려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심심풀이로 산책이라도 나온 모습이었다. 종기사도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근처까지 온 김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어머... 저런,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바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부인은 자신의 차림새를 보고 아무래도 얼굴이 붉어졌다. 빛바랜 목면 옷에 앞치마, 신분이 있는 남성을 맞이하기에 어울린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는 이만 실례할까 하니까요.”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적어도 차라도 드시고 가셔야지요.” 부인은 정원과 닿아 있는 테라스에 나시아스를 안내하고, 급히 시종에게 차 준비를 시키고는 더욱 급하게 자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런 대접에 오히려 나시아스 쪽이 미안해진 모양이었다. 수려한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일 하시는 걸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간이라면 일어나 계실 거라고, 그 정도로만 생각해서 그만...” “이렇게 해가 높은데, 말씀이신가요?” 누구라도 일어나 있을 시간이 아닌가, 하고 암묵적으로 물어본 부인을 보고 나시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도 않습니다. 코랄 성의 귀부인들의 반수 정도는 아직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납득하고 부인도 웃었다. 대귀족의 부인들은 매일 밤 모이는 무도회니 도박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밤을 지새운다. 당연히 아침엔 잠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일어나서도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올리고 드레스를 입고 남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모습이 될 때까지는 막대한 시간이 걸린다. “화려한 야유회도 싫어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시골출신이라 그런지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게 돼요.” 부인이 말하자, 나시아스는 정원을 돌아보며 끄덕였다. “그 노력은 충분히 보상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정원이 있다면 요리에 곁들일 것도 충분하겠군요.” “어머, 아시나요? 실례되지만, 기사님들은 단국과 버들박하의 차이점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시아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 집도 시골에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하인과 함께 일은 전부 자신의 손으로 하시곤 했지요. 어린시절의 제 주된 일은 어머니가 요리에 쓰실 것을 정원에서 따오는 일이었답니다.” “어머... 왕궁의 방패이신 라모나 기사단장님이 말씀이세요?” 부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라모나 기사단장이 종자도 없이 홀로 훌쩍 이렇게 나타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무언가, 제게 용건이 있으신 건 아닌지요?” 물어보자, 나시아스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새삼스럽게 말을 꺼냈다. “바깥분의 일은... 안 되셨습니다. 그로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만, 아시다시피 폐하의 혼인식이나 전쟁 등으로 비르그나에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여쭙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부인은 놀랐다. 자신과 이 사람은 그다지 친하지 않다. 한두 번 얼굴을 마주했을 따름이다. 그런 것 치고는 정중한 조문이었다. 얼마 전의 축하연에서 국왕은 부인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첩을 그만둔 사람이니 그다지 눈에 띄는 일은 할 수 없지만, 국왕은 부인에게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왕비도 그런 국왕 편이었다. 일부러 부인에게 말을 걸어주기까지 했다. 그 때 나시아스는 아직 비르그나에서 도착하지 않았었다. 남들로부터 듣고, 국왕이 그 정도로 신경을 쓰는 상대라면 일단 예의를 차려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시아스의 태도에는 그것만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 부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라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좀 더 다른 것이었다. 풀빛 눈동자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부인에게 나시아스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이번에는 꽃으로 눈길을 주었다. “정말 훌륭합니다. 봄꽃이 전부 피어있는 것 같군요.” 부인은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했지만, 그것은 과분한 평가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봄의 여신은 좀 더 아낌없이 여러 종류의 꽃을 피우지요. 이곳에 있는 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아뇨. 오랫동안 전쟁터만 보아왔으니까요. 코랄 성을 제외하면 이렇게 많은 꽃은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대화가 끊겼다. 부인도 나시아스도 그저 잠자코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엔도바 부인.” “예?” “부인은 성묘를 가실 때 어떤 꽃을 들고 가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성실하게 생각해서 대답했다. “사람에 따른 다른 거겠지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제 경우는...”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벌써 그때부터 1년이 되어간다. “백로초(白露草)라고 불리는 것을 남편 묘지 주변에 심었어요. 덩굴 모양의 잎이 예쁜 식물이죠. 그건 한번 뿌리를 내리면 손이 가지 않아요. 일년 내내 녹색을 띄고, 이 계절부터 가을까지 아름다운 하얀 꽃을 피우지요.” “저도 심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가르쳐 드릴게요.” 기사로서 이름 높은 사람이 이런 소리를 꺼내는데도 부인은 놀라지 않았다. 조용히 물어보았다. “어떤 분의 묘지에 바치시는 건가요?” “아내입니다.” 부인은 간신히 목소리를 억눌렀다. 검을 드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지만 왕국에서도 유수의 기사로서 이름을 날리는 이 사람은, 부인에게 옆얼굴을 보이며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때때로 검을 들고 2천의 군세를 지휘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투명하게 비쳐 보일 듯한 물빛 눈동자는 무리지어 피어있는 꽃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에게 시선을 돌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엔도바 부인은 살짝 눈길을 깔았다. 어째서 이 온화한 용모의 젊은 기사가 자신을 배려하여 찾아왔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젊다고 말하면 실례인지도 모른다. 나시아스는 서른은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서른 밖에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부인과 동년배였다. “부인은... 행복하시네요. 남편분이 직접 꽃을 심어주시니까요.” 나시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묘지를 찾아가 본 일이 없습니다. 몇 년이나 내버려두었지요. 아무래도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요.” 다시 말이 끊겨버렸다. 부인은 잠자코 차를 더 따랐고, 나시아스도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이미 없는 사람을 기리는 침묵의 대화였다. 정원에서 본궁으로 들어오려 했던 왕비는 문득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알아챘다. 빛이 바랜 의복에 가죽 손 보호대를 찬 평소와 같은 복장이었다. 란바에서는 똑같이 이런 모습으로 승리의 여신이라느니 비장군(妃將軍)이라느니 불렸지만, 지금은 어떻게 보아도 지저분한 산악민 소녀였다. 엔도바 부인이나 나시아스가 상류계급의 관습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이상으로 왕비는 그런 번쩍거리는 세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지금도 파키라 산에서 사냥한 산새를 본궁의 부엌에 갖다 주고, 마구간에 들려 익히 알고 있는 마구간지기와 이야기를 하고 온 참이었다. 그 늙은 시종은 흑왕에게 홀딱 반해있어 개선하고 온 왕비가 다른 말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낙담한 것 같았다. 마구간 책임자인 그는 왕궁 어용마들의 생산자이기도 했다. 지금 마침 ‘이거다’ 싶은 암말이 있어 반드시 흑왕과 짝을 지어주고 싶다고 열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왕비에게도 보여주었지만 커다랗고 부드러워 보이는 눈동자를 한 갈색 몸체가 반들반들 윤기 나는 말이었다. “진짜 미인이네.” 왕비가 칭찬하자 마구간지기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그죠? 저 로아에서도 이런 미인은 없을 겁니다. 이거라면 한눈에 반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죠.” “어쩔 수 없어. 그라이아는 내 말이지만 내 소유물은 아니니까.” 개선하던 중, 로아에 가까워진 시점에서 왕비는 애마와 헤어졌다. 그라이아에게는 고삐가 걸려 있지 않다. 그러니까 기수인 왕비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할 뿐이었다. 그 애마가 다른 군사와 함께 서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북쪽으로 가고 싶다면 감사의 뜻을 담아 목덜미를 두드려주고 다른 말로 갈아탈 뿐이었다. “그라이아는 적, 아군 중에서도 제일 멋진 말이었다고. 다른 무장들의 말처럼 방어구나 장식을 달지도 않았는데 무지하게 눈에 띄었어.” “아아, 젠장. 그건 꼭 보고 싶었구만요.” 육십이 넘은 마구간지기는 몸을 떨면서, 마치 소년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비와 마구간지기가 이런 식으로 친밀하게 말을 나누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마구간지기를 고용하고 있는 어떤 집안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왕비는 이 노인의 긍지와 말에 대한 정열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노인도 왕비가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품 있는 잘난 사람들이나 귀부인들보다 훨씬 말이 통했다. “왕비님도 활약하셨다면서요.” “그것도 반은 말 덕분이야. 2개월이나 같이 싸워주었는걸. 그 녀석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면 말릴 수도 없어. 정작 로아에서 예쁜 애인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냐.” “거야 흑왕이라면 반대쪽에서 먼저 접근해오겠지만 말이죠, 코랄의 미인도 잊어버리지 말아줬으면 하는구만요. 별로 하나로만 정해둘 필요는 없는 거니까.” 곰곰이 중얼거린 마구간지기를 보며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렇지. 하나로만 정해둘 필요는 없어.” 그런데, 그 중얼거림에 마구간지기는 깜짝 놀란 듯 했다. 왠지 창백해진 얼굴로 조심조심 말했다. “저기요... 왕비님. 지금 그건 말 이야기구요...” “당연하잖아?” “아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수말의 이야기였구 말입죠... 왕비님은 한 사람으로만 해두지 않으면. 뭔가 그게, 곤란합니다요. 곤란 정도가 아니죠. 말이 아니니까요. 부탁이니 국왕님 하나로만 해두십쇼.” 있는 힘껏 용기를 짜내서 말한 마구간지기를 왕비는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라굽쇼!” 마구간지기 새빨갛게 되어 항의했다. “게다가... 게다가 말입니다. 말은 아니지만 임금님은 임금임이니까요. 이쁜 궁둥이에 끌려가거나 그런 일도 있는 법입니다요. 그럴 때는 가만히 인정해주는 게 왕비님이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칼부림 사태 같은 건 벌이시면 안 됩니다요.” 왕비는 웃는 걸 멈추고 이상하다는 듯이 상대를 보았다. “칼부림 사태라니, 뭐야?”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녹주석 같은 눈동잗에 있는 것은 의문의 빛 뿐이었다. 그러나 마구간지기는 옆에서 보기에도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게...” “내가 그런 질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그런게 아니굽쇼... 그냥 저기 왕비님은... 쪼끔 보통하고는 다르시니까. 거의 없는 일이라고 해도 혹여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뿐이라...” 왕비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저기 말야. 남편의 첩한테 질투해서 칼날을 들이대는 건 ‘보통’의 부인이 하는 짓이잖아?” “예이...” “나는 ‘보통’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일은 안 해. 타산적인 생각 없이, 저 바보 녀석을 좋아해주는 여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환영할 거라고. 소문 좋아하는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둬. 왕비는 국왕의 첩에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야.” “예, 예이. 죄송합니다요...” 왕비는 어쩔 줄 모르는 마구간지기를 놔두고 정원으로 돌아섰다. 그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옳지 않다. 대단히 보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 차이를 입으로 설명하는 일이 무익하다는 건 진저리나게 잘 알고 있다.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그때였다. 본궁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이 있고, 1층의 정원에 접해있는 작은 방에는 이러한 유리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 정원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출입구까지 돌아가는 것이 귀찮아진 왕비는 마침 잘 됐다는 듯 그쪽으로 들어갔다. 안은 멋진 가구가 늘어선 제법 괜찮은 손님용 방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사실, 손님용 방이 맞았다. 공단이 깔린 긴 의자에 앉아있던 젊은 여성이 정원에서 들어온 왕비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던 것이다. 눈만이 아니다. 얼굴도 둥그랬다. 몸집도 작고 둥글둥글했다. 나이는 24, 5세 정도일까. 인사치레로라도 미인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지만 터질 듯 건강한, 생생한 표정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소녀는 아니다. 분명히 기혼자였다. 함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이곳은 문이 달린 개인실이다. 일단 신분이 있기는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 사람은 복도로 통하는 문 쪽을 살피더니 살짝 말을 걸어왔다. “얘, 이런 데 숨어들면 안 돼. 야단맞을 거야. 지금이라면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얼른 돌아가.” 왕비는 미소로 대답했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 인간치고는 괜찮은 부류였다. 대부분은 보자마자 야단부터 치기 때문이다. 왕궁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왕비는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를 만나러 온 거야?” 자그마한 여성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곧바로 얼굴을 빛냈다. “알았다. 너 오라버니의 종자(從者)로구나? 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을까? 비밀로 하고 온 건데.” “놀래켜 줄 생각이었어?” “그래. 자리에 없다면서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하더구나. 너, 오라버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게, 아침부터 계속이야.” “그래서야, 배고프지 않아?” “실은 그래. 지금 성 쪽 사람이 점심을 준비해준다고 하던 참이야.” 마침 그곳에 점심을 담은 쟁반이 날라져왔다. 문이 열리기 직전, 여성은 황급하게 왕비에게 커튼 뒤로 숨으라고 지시했다. 들켜서 혼다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쟁반을 날라 와서 준비를 해준 것은 젊은 시녀가 아니라 중년의 시종이었다. 왕비가 숨어있는 커튼에는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동안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고하고 갔다. 문이 닫히자 왕비는 커튼 뒤에서 나왔지만, 탁자 위를 보고 놀랐다. 2개의 큰 접시에 쌓아올린 전채, 최고급 포도주가 두 병, 향초를 첨가한 토기 고기 로스트, 커다란 꿩이 통째로 두 마리, 닭고기와 야채를 쪄서 과일의 감로탕을 더한 파이가 몇 종류나 늘어서 있었다. “나... 그렇게 굶은 것처럼 보였던 걸까.” 어딘가 얼빠진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조금 많네.” 왕비도 상당히 양보한 감상을 내뱉었다. 조금 정도가 아니다. 만찬에 필적한 가짓수와 요리였다. 조금 전 시종의 태도도 실로 정중한 것이었다. 성 쪽에서는 이 사랑스러운 여성을 가능한 한 정중히 대접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분에 넘치는 식사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도저히 다 못 먹을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하고 애들도 데리고 올 걸. 그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는 눈 깜짝 할 사이에 해치워버릴 텐데.” 정말로 분하다는 듯이 말해, 왕비는 우스워졌다. 이 사람은 주부였다. 먹을 것을 함부로 다루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괜찮다면 해치우는 거 도와줄까?” 이 말에 여인은 즐겁게 웃었다. “너도 참 재미있는 애구나. 좋아, 기껏 받은 음식인걸.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같이 먹어주면 기쁘겠어. 나는 아란나.” “리야.” 간단한 인사를 교환하기만 하고 두 사람은 지나치게 호화로운 점심에 달라붙었지만, 왕비는 아란나가 먹고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집으려 하지 않았다. “사양하지 말고 먹어.” “안 돼. 아란나가 받은 거니까 먼저 마음껏 먹고, 그리고 나서 이쪽으로 돌려줘.” 아란다는 분명 마음껏 먹었다. 여하튼 자주 보기 힘든 메뉴이니까. 우선 해산물을 사용한 전채를 한 종류씩 먹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양이었다. 조개, 새우, 물고기를 사용한 요리가 대략 열 종류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포도주로 넘기면서 찜과 꿩과 토끼를 삼분의 일 정도 해치우고, 네 종류의 파이를 한 조각씩 겨우겨우 쑤셔 넣고서야 항복을 했다. “더 이상은 한 입도 못 먹겠어!” 그 시점에서 왕비 차례가 왔다. 전채도 토끼도 꿩도 즉시 사라져서 없어졌다. 포도주도 한 병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파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마른 고기나 새의 내장 파이는 아무렇지 않게 입에 넣으면서, 사탕이나 꿀을 사용한 것은 신중하게 골라냈다. 먹고 있는 사이, 왕비와 아란나는 대중 없는 세상 이야기를 나눴다. 아란나는 대륙의 저 남쪽에 있는 나라 프리세아에서 먼 길을 열심히 찾아왔다고 했다. 남편도 5살과 3살짜리 아이들도 남겨둔 채였다. 왕비는 저도 모르게 먹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설마... 가출은 아니지?” 아란나는 이 질문을 웃어넘겼다. “아니야. 남편하고 아이들이 있으면 천천히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하는 걸. 하인들과 보모에게 맡기고 왔어.” “오랜만에 만나는 거야?” “응. 정말 오랜만. 이야기해야만 할 일이 잔뜩 있어. 오라버니가 바쁜 건 알고 있지만, 이번만은 안 돼.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얘기하지 않으면...”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이 의외일 정도로 경직되었다. 무언가 무척이나 마음에 담아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왕비는 그 이상 주제넘은 일은 묻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하고 말하며 일어섰다. 같은 시각, 국왕은 약간 묘한 알현을 하는 도중이었다. 개선이래, 각자의 귀족들이 앞 다투어 왕궁을 찾아오고 있었다. 국왕도 그 대응을 하느라 바빴지만, 거기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었다. 귀족의 신분을 갖지 못한 호족이나 이름뿐인 소귀족, 지방관리직 등은 강당에 한 무리로 모여 저쪽이 무언가 말하면 위엄있게 끄덕이며 듣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영토, 혈통, 가문의 삼박자를 갖춘 상대가 되면, 국왕도 신중하게 응대하지 않을 수없었다. 지금 국왕이 있는 곳은 흰색과 금색을 기조로 한 약간 커다란 응접실이었다. 바닥은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고, 국왕이 앉아있는 긴 의자에는 호화로운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얼굴이 비칠 것 같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것은 26, 7세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옅은 애시블론드의 머리카락을 목뒤에서 묶고 늘씬한 몸을 화려한 의복으로 감싸고 있었다. 하얀 바탕에 은색 수를 놓은 기장이 짧은 상의, 진주색 바지, 자주 빛 허리띠 등, 세련된 차림새였다. 섬세한 몸집에 비해 어깨가 넓고, 의자에 앉아 있는 등줄기는 곧게 펴져 있었다. 허리띠에 차고 있는 검이 안정되게 어울리는 모양이나 햇볕 아래에서 혈색 좋은 피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무도(武道)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총명해 보이는 외모였다. 지성과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호감가는 인물로 보이는데도 어딘가 남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별난 분위기를 띠고 있는 이 사람은 벨민스터 공자. 모양은 다르지만 왕족의 상징인 사자를 문장으로 쓰는 것을 허락받고 있다. 서쪽의 사보아, 동쪽의 벨민스터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명문귀족이었다. “이번의 개선, 삼가 경하 드립니다.”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국왕은 답례 인사를 한 뒤, 헛기침을 하며 물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벨민스터 공, 종제님과는 만나보았는가?” 아니요, 하고 대답한 공작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사보아 공은 바쁘신 몸이니까요. 저도 특별히 만나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다고 들었네. 만날 수 있다면 종제님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네만.” 푸른빛이 섞인 회색 눈동자가 탐색하듯 국왕을 보았다. 그리고 벨민스터 공작은 냉소를 띄워 올렸다. “폐하께서 만나라고 명령하신다면 신하로서 그 청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나서 어찌하라는 말씀이신지?” 왕비와 비슷하게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 왕비와 다른 점은 그 말투에 야유하는 것 같은 정중함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악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찌 대처할 방법도 있겠지만, 벨민스터 공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왕비가 들어왔다. 방문객이 있다는 건 물론 들었겠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자기 좋을 때 뛰어들어 온다. 이번에는 아침부터 방에서 기다리기만 한 아란나가 불쌍해서, 손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두 마디 그 오빠의 행선지를 국왕에게 물어볼 셈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손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린 듯 했다. 발을 멈추고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앉아있는 공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리, 마침 잘됐다. 소개하마. 너도 이름은 알고 있겠지만, 이쪽이 벨민스터 공작이다.” 공작은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 시선에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이번에는 왕비가 훨씬 올려다봐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키가 상당히 컸다. 그 키를 꺾으며 공작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벨민스터 공, 시릴이라고 하옵니다. 이전의 결혼식 때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다시 한 번 혼인 및 전선에서의 활약에 축하 말씀 올립니다.” 평소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이름을 대는 왕비였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이상하다는 듯 공작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말했다. “시릴이라는 거, 남자 이름 아니야?” 벨민스터 공은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거의 웃지 않았던 눈동자가 미약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말씀하신 대롭니다. 노라라는 이름이 여자의 이름이듯, 보통은 남자의 이름입니다.” “여자가 공작이라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래서 남자 이름을 쓰는 건가?” 국왕이 웃었다. “리, 너도 대단한 눈썰미로구나. 공작과 만난 건 처음일 텐데, 어찌 잘도 알아챘군.” 당사자인 공작도 의외라는 눈으로 왕비를 보고 있었다. “비전하는 대단한 혜안을 가지신 듯 합니다. 외람되오나, 비전하의 부군께서는 닷새나 눈치채지 못하셨습니다. 제 이름은, 정확히는 로자몬드 시릴 벨민스터라고 합니다.” 왕비는 납득한 듯 끄덕였다. 그거라면 여성의 이름이다. “로자몬드 쪽이 좋은데, 어째서 그쪽은 쓰지 않는거야?” “저를 보시면 아시겠지요? 제게 그 이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담한 주장이었지만 공작은 자신이 말하는 대로, 또한 국왕이 눈치채지 못했던 대로, 모르는 상태로 이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다 해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연한 말투도 그렇고, 꽉 조여진 장신(長身)도 그렇고, 어떻게 보아도 미모의 청년이었다. “월은 닷새나 눈치 못 챘다고?” “예. 이전에 왕궁을 방문했을 때에... 비전하는ㅡ당시에는 아직 공주님이셨지만ㅡ산으로 출타하셔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침 더운 날이 계속되던 차라, 폐하께서는 제게 수영하러 가지 않겠냐고 초대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함께 모실 수 없기에 거절하였습니다만.” 왕비는 어이없는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여자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실로 식은땀 천만이었다.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단 말이다.” “말해주지 않는다고 모르는 쪽이 이상한 거지.” 하지만 벨민스터 공작은 왕비의 말을 확실하게 부정했다. “황공하옵니다만, 비전하. 작위를 이었을 때부터 저는 남자가 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전하께서도 부디 저를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왕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작위를 이으려면 남자 차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여자가 당주라면 왠지 가볍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남자로 있는 쪽이 여러 가지로 좋습니다.” “그런가...” 왕비가 무언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발로와 나시아스가 나란히 찾아왔다. 손님이 찾아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역시나 무시하고 지나왔다. 그렇지 않으면 국왕과 대담하는 상대를 알고 일부러 찾아왔는지도 몰랐다. 발로는 왕비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벨민스터 공작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이런. 이거 약혼자님 아니신가.” 하고 말했다. 5장 벨민스터 공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원래대로 자리에 앉았다. 라모나 기사단장은 쓴웃음을 띠며 아무렇지 않게 벽 쪽에 가서 섰다. 이 방에 있는 것은 국왕과 왕비, 두 사람의 대공작, 자신만이 분명하게 급이 낮았다. 약간 커다란 응접실은 단숨에 사람 수가 늘어나 조금은 활기가 돌았다. 그런데 젊은 시종에게 안내를 받아 다시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조금 전까지 왕비와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아란나였다. 신참이라 익숙치 않은 시종이었던 모양이다. 국왕이 회담하는 장소로 데리고 와버린 것이다. 아란나는 물론 그런 것을 몰랐다. 방에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지만, 한 사람의 모습 외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리라. 소녀처럼 기쁨을 드러내며 달려와 안겼다. “오라버니!” 놀란 것은 나시아스였다. 뭐라 해도 국왕의 면전이다. 황급히 동생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다. “아란나. 자, 잠깐, 잠깐 기다려...” “이제 기다리다 지쳐버렸어요. 아아, 하지만 건강하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국왕도 벨민스터 공도 무슨 일인지 몰라 놀라고 있었다. 혼자서 당황하고 있는 나시아스 옆에서 발로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란나 양인가. 나를 기억하겠어?” “사보아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언제나 오라버니가 폐를 끼치고 있어요. 몇 년만인가요, 여기에서 만나 뵈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반가운 일이네요.” “여전히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군. 나시아스에게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들었지만, 전보다 더욱 젊어진 것 같아. 게다가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졌는걸.” 아란나의 얼굴이 확 상기되었다. “공작님도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놀리시면 싫어요.” 흥분한 어조로 말한 아란나는 그제야 겨우,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이 있는 것을 눈치 챘다. “어머, 리! 너 이런 곳까지...” 들어오면 안 되잖아, 라고 말하려 하는 것이었겠지만 나시아스가 황급히 막았다. “아란나, 그만둬. 비전하께 실례가 아니냐.”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되어 멀뚱히 오빠를 보았다. “오라버니...?” “이 분은 델피니아 왕비, 그린디에타님이시다. 몰랐던 거냐?” 멍한 표정으로 아란나는 나시아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왕비에게 시선을 옮겨 그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보더니, 다시 오빠를 보고 말했다. “거짓말이죠?” “나도 거짓말이 아닌가 싶어.”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가벼운 비난의 눈초리를 나시아스에게 향했다. “가는 곳도 말해두지 않고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아란나가 아침부터 계속 여기에서 기다렸단 말이야.” 물빛 눈동자가 아주 약간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사적인 용무로 사람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하지만... 비전하께선 언제 동생과 안면을?” 그 동생은 새파랗게 되어 있었다. 이 소녀과 왕비라는 것을 알고 경악한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바느질한 옷을 입고 있는 아란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핏기를 잃은 입술에선 신음하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 저는, 아아, 어쩌면 좋아요!” 절망적인 비명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나시아스는 곧바로 동생을 더 이상 이 자리에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종자를 불러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동생을 맡기고, 조금 쉬게 해주라고 명령했다. 무언가 정신이 들만한 것을 마시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따라가지 않았던 것은 손윗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다. 송구스럽다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비전하, 동생이 어처구니없는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폐하, 벨민스터 공. 말씀 도중 소동을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남장(男裝)의 여공작은 드물게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모나 기사단장에게 저런 귀여운 동생분이 계신 줄은 몰랐었습니다.” 정중한 말투였다. 나시아스의 가문이나 혈통은 공작가에 비해 월등히 떨어졌지만, 벨민스터 공은 라모나 기사단의 중요성도, 그 단장이 국왕에게 있어서 어떠한 존재인가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국왕은 아란나의 당황한 모습에 적잖이 놀란 듯 했다. “리,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아무 짓도 안 했어. 같이 밥을 먹었을 뿐이야.” “네가 왕비라는 걸 모른 채로?” “응.”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란나의 신분은 기껏해야 지방호족의 부인에 지나지 않는다. 눈이 돌아가도 무리는 아니었다. 틸레든 기사단장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의견을 냈다. “왕비. 당신은 이후, 왕비인 그린다라고 제대로 이름을 대는 습관을 붙일 필요가 있겠소. 그렇지 않으면 아란나처럼 졸도하는 자가 이제부터도 계속 나올 테니까.” “종제님 말대로야. 이젠 본궁을 걸어다닐 때 조금은 왕비다운 옷차림을 할 수 밖에 없겠지.” 왕비는 일부러 과장되게 녹색 눈을 크게 떴다. “모든 남자가 결혼하기 전하고 나중에 말하는 게 완전히 다르다고 하더니만, 진짜네. 나는 왕비다운 왕비 같은 건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거절했었어. 어디로 들은 거야?” “으음... 그런 말을 하면 또 약해지지.”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척 하면서 국왕은 웃고 있었다. 이것에는 나시아스도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벨민스터 공작도 전혀 부부답지 않은 국왕과 왕비의 대화에 놀라면서도 그 사이가 좋은 것을 흐뭇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표정이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보아 공작이 말을 걸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어떤가, 벨민스터 공. 나와 귀공도 이런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나.” 푸른빛을 두른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차갑게 발로를 향했다. “지극히 귀공다운 농담이지만, 착각을 공언하는 나쁜 버릇은 고치는게 좋아.” “무엇이 착각인가. 나와 귀공의 혼약은 집안끼리 이미 결정된 게 아닌가. 당주인 자가 친족의 의견을 무시해서야 안 되지.” “그것에도 한도가 있지. 당주인 나는 남의 처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 정도도 모르는 건가.” “정식으로 거절당한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그거 실례했군. 그럼, 지금이라도 거절하도록 하지.” 낭랑한 목소리가 남성의 그것처럼 들렸다. 야무진 외모 탓일지도 모르고, 짧게 자른 머리카락 탓일지도 몰랐다. 묶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였지만, 이것은 여성의 머리모양으로는 기이하다고 해도 좋았다. 사람들 눈에는 무참하게 잘린 것처럼 비칠 것이다. 풍성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땋아 올린 머리칼의 아름다움은 여성들의 매력에서 커다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소녀 시절부터 길게 길러서 나이가 차면 묶어 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여자의 단발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견해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런 발상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샤미안도 여기사로서 갑옷을 몸에 두른다 해도 머리는 길게 길러서 묶어 올리고 있다. 공작은 로자몬드라는 이름은 이미 자신에게 필요없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대로였다. 머리를 자른 것으로 여자이기를 포기했다고, 세간에도 자신에게도 선언한 것이 된다. 발로는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집 센 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대체 그 머리는 뭐야? 아무리 키만 크고, 솟은 어깨에 절벽가슴이라도 말이야. 머리카락만큼은 볼만한 가치가 있었는데 참혹한 짓을 해버렸어.” “사보아 공. 결투라면 언제든지 받아 주겠네.” “바보 같은 소리를. 나는 여자에게 겨눌 검은 갖고 있지 않아.” “그거 의외로군. 귀공은 이쪽 비전하께 몇 번이나 상대를 신청했다가 그 때마다 졌다고 들었네만?” “이쪽은 여자로 칠 수 없지.” 태연하게 내뱉는다. 나시아스는 열심히 쓴웃음을 삼키고, 국왕과 왕비는 눈을 껌뻑였다. 왕비가 살짝 국왕에게 속삭였다. “뭔가... 단장이 두 사람 있는 것 같아.” “동감이다.” “정말로 이 두 사람, 결혼하는 거야?” “몬튼 경이나 블루완드 경은 그렇게 바라고 있더군. 나보고도 협력해달라고 했지만... 곤란하군 그래.” 세상에 더없이 무서운 짓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왕으로서의 책임은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용히 불꽃을 튀기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신중하게 끼어들었다. “어쨌거나, 양쪽 모두 이미 한 가문의 주인이네. 이 문제는 서로 간에 해결하면 어떤가?” “저희들의 의지는 파혼 외에 없습니다.” 하고 벨민스터 공이 말했다. 발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들이라고 말하다니 의외로군. 나는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것이 사보아 가 당주로서의 말이라면, 벨민스터 가의 당주로서 거절하겠네.” “곤란하군.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서야 구혼한 내 입장이 뭐가 되겠나?” “귀공의 입장 같은 건 내 알바가 아니지.” 잘라 말한 벨민스터 공은 국왕에게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걸음걸이마저 삽상한 공작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왕비는 감탄한 듯 말했다. “저 사람, 검술이나 마술(馬術)도 제법 하는 모양이네.” “음. 저 몸놀림은 예의범절이나 춤으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고 국왕도 찬성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졌군 그래. 평판대로 열녀인 이상으로 공작은 종제님을 무척이나 싫어하고 있는 모양이야. 저래서야 달라붙을 여지도 없지 않나.” “하지만, 뭔가...” 말하려던 왕비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샤미안도 언제나 남자 차림을 하고 있지만... 로자몬드하고는 뭔가 달라.” 발로가 자리에 앉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건 말입니다, 왕비. 단순히 움직이기 쉽고 편리하니까 라는, 다시 말해서 좋아서 입는 것하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과의 차이요.” ‘그렇구나’하고 생각했다. 분명히 벨민스터 공에게는 그러한 경직이 느껴졌다. 나시아스도 새삼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예전에 딱 한 번, 드레스를 입으신 저 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늘씬한 미인이었지요. 지금의 저 분은 어딘지 안됐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대체 어째서 그런 의무를 느끼고 있는 거지? 남자 후계자가 없는 경우에는 여자가 작위를 이어도 상관없는 거잖아?” 발로가 끄덕이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백작이나 여공작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아이가 없는 채 남편이 죽은 경우에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로자몬드와 같이 머리까지 자르는 사람은 없다고. “지금의 벨민스터 공, 로자몬드의 가계에는 다소 불행한 사건이 있어서 말이야.” 국왕이 말을 꺼냈다. “내가 아직 즉위하기 전의 일이니까, 5~6년 전 쯤인가. 당시의 벨민스터 공작은 이미 60을 넘긴 노령이었기도 하고, 몸 상태가 생각만큼 좋지 못했던 것도 있어, 외아들에게 가독(家督) 자리를 넘겨주고 은퇴했지. 그것이 로자몬드의 동생인, 뭐라고 했더라?” “스테판입니다, 형님.” “그랬군. 20세도 되지 않은 젊은 공작이 탄생했지. 그 젊은 나이에 처도 있고, 뛰어난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청년이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스테판은 작위를 잇고 나서 불과 3개월 뒤에 급사해버린 거다. 늙은 벨민스터 공은 급히 복귀해서 다시 당주 자리에 앉았지만, 외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무척 낙담했던 것이겠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아들의 뒤를 쫓듯이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노공작의 죽음을 전후해서 스테판의 미망인은 남편이 남겨준 아이를 낳았지만 나쁜 일은 겹쳐 온다고 이 젊은 아내마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어. 로자몬드는 불과 1년 사이에 아버지와 동생과 올케를 잃고 막 태어난 조카와 두 사람만이 벨민스터 가문에 남겨진 것이지.” 22세의 공작 영애는 상복을 입고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비탄에 잠기거나 하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고 남자의 옷을 몸에 두른 채 의연하게 일어섰다. “하지만 그 조카는? 원래대로라면 그 아이가 벨민스터 공작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이지. 하지만, 그 아이는 지금 겨우 네 살. 작위를 잇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 그래서 로자몬드는ㅡ급사한 동생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양이니까ㅡ그가 남긴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할 때까지 자신이 이 집안을 지키겠다고 말을 꺼낸 거다. 워낙 지기 싫어하는 여성이었다고 들었지만, 오리고의 사제가 입회한 자리에서 조카가 성장했을 즈음에 작위를 반환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자신이 잠정적인 공작으로서 일어선 게지. 계속된 불행으로 아연해져 있던 친척들도 오히려 안심해서 그 때엔 로자몬드의 행동을 환영했었다는구나.” “지금은 아닌 거야?” “아니. 지금도 로자몬드는 당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조카의 성장이 무엇보다도 기대된다고, 무사히 작위를 넘겨줄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해. 다만, 뭐냐... 로자몬드는 어디까지나 여자야. 집안을 위해, 어린 조카를 위해 일생을 바치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의 당주대행이라면 자신들이 대신 맡을 테니 이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친척들이 결혼을 권유한 건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대체 왜 그 상대가 단장인 건데?” “처음부터 제 약혼자였습니다.” 왕비는 얼이 빠져서 사보아 공작의 남성적인 미모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 공작이, 단장의?” “아주 옛날, 뒤르와 백부님께서 살아계실 때의 이야깁니다. 그때는 만사가 평화로웠죠. 영지 다툼에 대한 분쟁은 일상다반사였지만 그런 것은 소동에도 들어가지 못했소. 그런데 뒤르와 백부님의 서거를 계기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니 이 델피니아는 재앙과 분란에게 무척이나 사랑받아버린 모양이었소. 왕자, 공주들의 연이은 죽음, 내 아버지의 죽음, 스테판의 죽음, 노 벨민스터 공의 죽음, 그러던 중 나는 무슨 잘못으로 왕관이 씌워질 뻔하게 되었고, 친척들과ㅡ특히나 어머니와 지금은 죽은 맥다넬 숙부가 그랬지만ㅡ매일 같이 싸워대야 했소. 그러던 중 형님이 페르난 백작과 함께 스샤에서 나오신 덕에 나는 상속문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로 천지가 뒤집히는 소동이 벌어져서, 그런 형님을 즉위시켜야 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정신없이 토론들을 해댔죠. 간신히 반대파를 설득해서 즉위까지 이루고 나서, 이걸로 겨우 안심했다 생각하던 차에 페르젠의 반란이요. 나는 유폐, 형님은 도주, 그때부터의 일은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지금 되새겨보면 실로 장례와 음모만으로 지낸 몇 년간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이런 것을 웃으며 말한다. 쾌활하고 명랑하게, 이미 지난 일이라며 즐겁게 이야기한다. 그 점이 무섭다. 국왕의 조카로서 권력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발로다. 상상을 거부하는 책모의 늪 속에 휘말려 있었을 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로 더러운 부분을 진저리 날 정도로 직접 보아왔을 텐데, 잊혀질 리가 없을 텐데,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형님이 다시 왕으로 군림하시고 세상에 평온이 돌아왔을 때에는 로자몬드는 이미 공작으로 일어서 있었소. 그렇게 되면 분명 신부로 달라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저쪽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고. 나는 이미 약혼했던 것도 잊어버릴 뻔하고 있었습니다. 끈질긴 친척들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들고 오기 전까지는요.” 국왕이 주의깊게 끼어들었다. “벨민스터 가문의 친족들도 잊어버리고 있던 건 아닐세.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은근히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상대가 안 되었던 모양이야. 마지막 구원군으로 종제님에게 부탁을 해본 모양이지만, 보는 바대로군.” 조금 전 공작의 태도를 떠올리고, 국왕은 양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텐가? 종제님. 지금도 로자몬드와 결혼하겠다는 의지에 변함은 없는가.” “변하고말고 그건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선역인 대숙부가 발견한 신부입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게 당주의 의무이지요. 이번 경우, 저 철의 귀부인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골치 아픕니다만.” “소박한... 의문인데 말이지.” 하고, 왕비가 말했다. “로자몬드가 단장이랑 경혼해서 사보아 공작부인이 되면, 벨민스터 공작으로서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도 안 됩니다. 로자몬드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남의 아내가 되어도 작위는 그대로입니다.” “뭐야, 그럼. 결혼하는 쪽이 단연 이득이잖아.” 발로의 검은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작위는 그대로고, 공작부인이라는 명함도 늘어나고. 태어난 아이는 사보아 공작가의 후계자가 될 테니까 친가와의 알력 문제도 없고. 덤으로 단장은 나무랄 데 없이 멋진 신랑이잖아. 좋은 것만 모아놓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 “이거 듣기 좋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빙그레 웃는 발로의 옆에서 나시아스가 살짝 중얼거렸다. “벨민스터 공의 성격은 결벽에 가깝습니다. 발로의 불성실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도 모르지요.” 서민 레벨이라면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공작가 같은 대가문끼리의 혼담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정실의 자리는 절대적이고, 다른 누구를 총애하던 그 자리는 확고부동하다. 아내 쪽에선 남편의 애인에게 일일이 눈발을 세우지도 않는다. 한심스러워서 상대해주고 있을 수 없을 터였다. 국왕은 지극히 곤란하다는 듯 신음하고 있었다. “어쨌든 말이야. 종제님이 자리를 잡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경들의 마음은 잘 알겠네. 사보아 공작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도 생각하고. 가능한 한 협력을 해주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 이런 분야는 도저히 거북해서 말이야. 뒤를 밀어달라고 부탁해도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전혀 짐작도 가질 않아.” 발로는 웃으며 말했다. “형님, 별로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는 자기 결혼에 남의 손을 빌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언가 이유를 붙여서 당분간은 로자몬드가 왕궁에 머물도록 요청해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잽싸게 영지로 돌아가 버리면 설득하기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사보아와 벨민스터의 혼담 정도 되면 국왕에게 있어서도 남의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나 왕가에 깊이 관련된 귀족이고, 그 소속령은 공국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광대한 것이다. 발을 묶어두는 정도라면 기쁘게 협력하겠다고 국왕은 약속했지만, 불안한 듯 덧붙였다. “하지만 말이야, 종제님. 내가 종제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그녀는 강인하게 꼬셔보려 하면 할수록 더 딱딱해질 사람으로 보인다네. 괜찮은 건가?” 그 종제는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로자몬드는 진심으로 저를 싫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좋아하고 있으니까 저런 식으로 태도가 딱딱한 겁니다. 그런 상대는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지요.” 이것에는 일동, 알았으니 맘대로 해보라고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왕비가 서리궁으로 돌아오자 테라스 쪽에서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셰라와 샤미안의 목소리였다. 샤미안은 얼마 전의 전투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 결혼식 날, 용감한 여기사인 그녀는 즉시 정장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갑옷을 입었다. 그렇지만 부친인 도라 장군이 딸의 출전을 허락하지 않아 그 명령 때문에 코랄에 남아있었다. 며칠 전의 축하연에서는 주역인 왕과 왕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제대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왕비를 방문한 것이리라. 별궁을 돌아서 정원에 모습을 보인 왕비를 보고 샤미안은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 흘러 넘칠 듯한, 젊은 병사들을 그 자리에 못박아버리는 미소였다. 역시 다르다. 마찬가지로 남자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주는 인상이 벨민스터 공작과는 크게 달랐다. “어서 돌아오세요, 비전하.” “그 비전하라는 거, 별로 좋지가 않아. 지금까지 대로 그냥 공주님이라고 하면 안 돼?” “안됩니다. 비전하는 예전에 공주님이라고 불리게 되셨을 때도 똑같은 소리를 하셨어요.” “그랬었나?” “예. 그러니까 이번에도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이렇게나 부드럽게 잘라 말하면 반론 할 수도 없다. 은발의 시녀는 쓴웃음을 억누르며 차를 따라주었다. 산뜻하고 상쾌한 향기가 났다. “어? 이 차...” “얻은 걸 좀 가져와봤어요. 바로 조금 전에 아래에서 엔도바 부인과 만났거든요. 그 분이 직접 재배하신 향초라던가. 굉장히 몸에 좋다는 모양이에요” “호오...” 왕비는 조심조심 머금어보았다. “나쁘지 않네.” “예. 가슴 언저리가 시원해져요.” 그리고 나서 샤미안은 다시 한 번 개선 축하 인사를 올렸다. 가능하다면 자신도 함께 싸우고 싶었다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샤미안을 보며 왕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왕비는 여자인데 무모한 짓이라든지, 얌전히 집을 보고 있으면 된다든지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란바에서의 싸움은 샤미안이 일부러 나올 정도도 아니었어. 간단하게 끝났는걸.” 이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셰라는 데리고 가셨잖아요.” “남자는 아무리 시동이라고 해도 훌륭한 전력이 되니까 쓸데없이 허비하게 만들 순 없어. 내 시중을 드는데 그런 전력을 사용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지금의 그린다는 아무리 그래도 왕비다. 식사시중은 어떻든 간에 옷을 갈아입는 거나 침구 준비 등의 시중에 남자 시종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샤미안은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러면 셰라가 가여워요. 저는 그래도 아버님의 신분도 있고 실력에도 조금은 자신이 있지만... 셰라는 보통 여자 아이인걸요. 거친 병사들 사이에서 쓰는 건 너무 불쌍해요.” 왕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셰라는 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눈길을 깔았다. 시녀장도 그렇고 이 여기사도 그렇고 진심으로 자신에 대해 걱정해주고 있었다. 검을 만져본 일도 없고 중상자나 피를 보면 비명을 지를 것이 틀림없는 온순한 성격의 소녀라고 생각해서 신경을 써 준다. 란바에서 자신이 해냈던 역할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말했던 말이나 활도 2개월 사이에 놀랄만큼 향상을 보였다. 밤중에는ㅡ아마도 적의 무장이 보낸 것이겠지만ㅡ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을 냉혹하게 처리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피가 고양되었다. 낮 동안의, 정면에서의 전투보다도 어둠 속에서의 전투 쪽이 성미에 맞는다고 실감했던 것이다. 왕비의 침실을 습격하려는 자들이니 모두 상당한 실력이었다. 나이 많은 자도 있었다. 셰라는 그런 그들을 간단하게 해치웠다. 어둠 속에 녹아드는 것도 기척을 지우는 법도 그 이상으로 해내는 자는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목숨을 잃었고, 검이나 수리검을 사용하여 싸운 자들 중에서도 고전할 정도로 강한 자는 없었다. 그것에 은밀한 만족감마저 느꼈었다. 속이는 것이 임무일 터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눈길을 들자,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힐책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격려하고 있는 듯한 시선으로 여겨졌다. “셰라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어.” 왕비는 시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하고 샤미안에게 웃어보였다. “굉장히 침착했다고. 바로 옆에까지 전선이 다가온 일도 있었는데 겁을 먹거나 난리를 치거나 한 일은 한 번도 없었어. 생각해보면 이 서리궁에서 혼자 집을 보기도 하니까 말이야. 보기엔 이래도 웬만한 남자들보다 강심장인지도 몰라.” 샤미안도 웃었다. 정말 그렇다며 동의했다. “이번에는 이븐 경도 활약하셨던 모양이더군요.” “응.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대단했어. 단장이 그걸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독립기병대장은 동료와 함께 타우에 남았다. 만약을 위해서였다.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 두고 탄가군이 되돌아오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만, 실제로는 코랄에 돌아온 뒤의 축하연이나 딱딱한 인사치레 등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왕비는 한숨을 쉬었다. “돌아오고 나서 계속 대활약이었다고 듣고 있지만 말이야... 이상한 이야기야. 도저히 납득이 안가.”“어머, 어째서요?” “싸움의 목적이 이기는 거라면, 나도 이븐도 당연한 일 밖엔 안했다고.” 샤미안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차를 더 준비하던 셰라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영토를 놓고 싸우는 전쟁이다.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적을 쓰러뜨리고 자신은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해 기술을 구사하고 지혜를 다하는 것이다. 남에게 칭찬받으려는 생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왕비에게 있어서는 칭찬받고 찬사를 듣는 일이 오히려 의외였으리라. 독립기병대장이 여기에 있었다면 아마 마찬가지 말을 했을 것이다. 표표한 듯 보이는 그 남자에게는 그런 엄격함이 있었다. 샤미안은 눈만으로 셰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라 대답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자니, 왕비가 갑지기 말했다. “샤미안은 결혼 안 해?” 보통은 이런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기에, 여기사는 놀란 듯 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샤미안은 장군의 외동딸이잖아? 누군가하고 결혼해서 그 상대가 백작가를 잇게 할 건지, 아니면 로자몬드처럼 자기가 작위를 이을 건지, 어느 쪽일지 궁금해서.” “벨민스터의 로자몬드님 말씀이세요?” “알고 있어?” “예. 멋진 분이죠. 아름답고 의연하고 다가가기 힘들게 보이지만 무척이나 상냥하시고, 비전하와는 다른 의미에서 여성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분이에요.” “아까 아래에서 만났어.” “어머, 저런. 인사드리러 가야!” “서두르지 않아도 돼. 당분간 여기에 있을 테니까.” 왕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까 있었던 일련의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다. “단장은 여전히 자신만만이지만, 로자몬드가 저런 상태에서야, 어떨까 싶어?” 샤미안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이전에 남장한 로자몬드님은 궁정 부인들에게 엄청난 인기인 걸요. 발로님은 발로님 나름대로 주목받는 분이시니, 분명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꽤 힘드실 거라고 봐요.” 왕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장이 인기가 많은 건 알겠는데, 로자몬드는 왜 인기인 거야?” “왜라니, 무척이나 매력적인 분이 아닌가요.” “매력이라니... 여자잖아?” “물론이에요. 사실 여성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공교롭게도 왕비는 그러한 동경심에 대해선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는 보통 여자로 보이던데 말이야.” “어머, 비전하. 그건 너무해요. 사교계의 여성 중 반수는 그분에게 몸이 달아 있을 걸요.” “남은 반은?” “물론, 발로님이죠.” 왕비는 다시 어이가 없어했고, 셰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그 분을 모르지만, 정말로 그 공작님에 필적할 정도로 ‘남자다우신’ 분인가요?” 샤미안이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러네. 물론 사실은 여성이시니까 발로님과 비교하면 훨씬 선이 가늘어. 가냘파 보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그 분의 검술이나 승마는 대단해요. 침착하면서 한점 빈틈도 없고, 삽상하면서도 늠름하시고... 안되겠네. 말로 하면 아무래도 전부 비슷비슷하게 느껴져요. 다시 말해, 훌륭하고 건장한 남성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매력이야. 이해할 수 있을까?” 끄덕였다. “그분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네요. 우아하시고 예리함을 느끼게 하는, 어딘가 비밀스러워 보이는, 그런 분위기의 인물이신 거죠?” “응. 정말 그래.” 두 사람은 실로 즐거워 보였지만, 왕비는 끼어들 수도 없었다. 뚱하니 앉아있자니 라모나 기사단의 시동이 조심조심 얼굴을 내밀었다. 웬일인가 하니, 이 별궁에는 늑대가 무리지어 있는 일이 자주 있어서 몇 명이나 도망쳐 돌아간 일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샤미안이 있는 걸 보고 안심하면서도 황공한 모습으로 단장이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내려와 주실 수 없으시겠는지 부탁드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조금 전...? 아래에서 방금 헤어지고 왔는데?” “그것이, 단장님의 동생분이 상당히 혼란스러우신 듯 하여 단장님도 열심히 달래시고는 있지만 가능하다면 비전하께서 와주실 수 없겠느냐고...” 그리하여 왕비는 샤미안을 동반하여 본궁으로 내려갔다. 나시아스님의 동생분이라면 반드시 인사를 드려야겠다며 함께 따라온 것이다. 마침 같은 문 앞에서 국왕과도 만났다. 안에서는 반 광란상태인 아란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안 돼, 이젠 끝이에요. 나 분명히 사형당하고 말 거야. 여보, 미안해요. 데지, 레니, 미안해. 엄마는 이제 못 돌아가! 두 사람 모두 아빠 말 잘 듣고 좋은 아이가 되어야 해. 아아, 어쩜 좋아!” 거의 패닉 상태이다. “아란나, 조금만 진정하라니까.” “너무해요, 그런 말투라니! 오라버니는 제가 사형당해도 상관없다는 거군요?!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아란나...!!” 나시아스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하는 비명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하는 거야. 비전하는 그런 일에 신경 쓰실 분이 아니라고.” “그 왕비전하께 남은 음식을 먹였단 말이에요! 저라면 반드시 저를 사형시킬 거예요!! 절대 그럴 거예요! 잘 해 봤자 감옥행이에요! 비전하가 용서해주신다고 해도 폐하가 용서해주시지 않을 거예요! 저라고 해도 저를 용서할 수 없는 걸요!” 문 너머에서도 나시아스의 깊은 탄식이 들려오는 듯 했다. 국왕과 왕비는 문 앞에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본인이 진심으로 겁을 먹고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며 비관하고 있는 만큼, 아란나의 한탄하는 모습은 묘하게 우스웠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어 샤미안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온화한 표정을 거의 바꾸는 일 없는 나시아스가 이젠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벌리고 도움을 청하듯이 그들을 보았다. 국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것 또한 틀림없이 누구나가 반해버릴, 가장 멋진 남성의 견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나 아란나도 울부짖는 걸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실례하네, 아란나 여사. 조금 전엔 이름을 댈 여유도 없었군. 델피니아 국왕, 월 그리크다. 오라버니에겐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지.” 숨이 멈출 것 같은 모습이 되면서도, 아란나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무, 무, 무례를... 저는 저기, 나시아스 쟌펠의 동생으로, 아란나 세레자라고 합니다. 조금... 전엔... 좀전에는 엄청난 실례를...” 말하면서도 울먹거리고 있었다. 왕비도 쓴웃음을 짓고 마침 그곳에 가져다 놓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반 정도 비운 다음, 유리로 된 잔을 아란나에게 내밀었다. “마셔.” “예?! 아, 저어, 하지만...” “괜찮으니까 마셔.” 아란나는 조심조심 술잔을 받아 들고 내용물을 전부 비웠다. 그걸로 어느 정도 핏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왕비는 그런 아란나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남은 걸 먹게 해서 사형이라면, 나도 이걸로 사형이야.” “어머, 그런!” “괜찮으니까, 이걸로 서로 비긴 걸로 하자.” 아란나는 그래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했지만, 왕비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문제는 이걸로 끝이라고 태도로 보여준 것이었다. “하지만, 리. 이 부인은 이름을 대지 않았는데 어찌 잘도 나시아스의 동생이라는 걸 알았구나?” “그거야 당연하지. 똑같은 걸.” 이것에는 나시아스도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고, 아란나는 열심히 반론했다. “말씀에 토를 다는 것 같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백조와 오리를 놓아두고 비슷하다고 말씀하시는 거나 마찬가지인 걸요. 어린 시절부터 최소한 오라버니의 반만이라도 예뻤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르니까요. 저 뿐만이 아니에요. 부모님도 그러시면서 제가 어디로 시집갈지 걱정하셨을 정도니까, 다행히 별난 남편을 만나서 지금은 행복하지만 그건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이고, 아무리 잘못 본다고 해도 닮았을 리는...” “아란나.” 머리를 감싸 쥐면서 나시아스가 동생을 말렸다. 아란나도 역시나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시집가서 7년이나 지났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는데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소녀 같은 면이 없어지질 않는 동생이라...” 나시아스는 곤란의 극치에 빠진 듯 보였지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자유분방한 동생에게 휘둘리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 아란나와 샤미안의 소개도 끝나고, 그제서야 겨우 아란나의 기분도 풀린 듯 했다. 그러자 아란나는 여기까지 찾아온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혼란 상태에서 되살아나자, 아란나는 야무지고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왕을 보고 잠시 동안 오빠를 빌려서 본가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해주실 수 없냐고 정중하게 말을 꺼냈던 것이다. 국왕도 놀랐지만 나시아스도 놀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오라버니.” 아란나는 의외일 정도로 무서운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아버님하고 어머님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을 텐데요. 돌아와서 선을 보고 결혼하라고.” “그거라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거절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도망쳐 다닌 게 얼마나 됐어요? 이번에야말로 뭐가 어떻게 되어도 결혼시켜야겠다고 아버님도 말씀하셨어요. 편지로는 꿈쩍도 안하니까 제가 직접 왔어요. 목에다 줄이라도 매달고 끌고 오라는 엄명이세요. 이 역할은 제가 제일 적임이라고요.” 한숨을 쉬는 오빠에게 아란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두신 분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물러갈게요. 그 분을 하루라도 빨리 소개받고 싶네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같이 고향에 돌아갈 테니까요!” “기다려! 갑자기 왜 그렇게 급하게...” “폐하께서 결혼하셨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비르그나에 있는 오라버니는 알고 계시겠죠? 파라스트와 델피니아 사이에 곧 커다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요. 물론 저는 오라버니의 무용을 믿고 있어요.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울 것이 틀림없다고. 하지만 전쟁에 절대적인 건 없다고 하잖아요? 아버님도 오라버니에 대해서 믿고 계시지만 쟌펠 가문의 핏줄이 끊기는 건 아니냐고, 그걸 걱정하고 계세요. 그 마음은 이해하시겠지요?” “아아, 물론 이해해. 하지만, 네 아이들도 있지 않니.” “안 돼요. 저는 이미 출가외인이니까 그 아이들은 세레자 가문을 이어야 해요.” “세레자와는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예, 아주요. 그야 물론 가끔 싸움은 하지만, 그 사람은 너무한다구요. 세상에, 날 보고 화를 내면 눈이 녹색으로 빛나는 살쾡이랑 똑같다고 한다니까요. 저는 그렇게 안색을 바꾸면서 화내지 않는다구요. 하지만, 행복해요.” “아이들도 데리고 오면 좋을 걸 그랬구나. 이제 꽤나 컸을 텐데.” “예, 정말. 얼마나 장난을 치고 손이 가는지, 큰일이에요. 그런데 오라버니. 현실에서 도피하는 건 기사의 태도라고는 할 수 없어요.” 아란나는 얼렁뚱땅 넘어가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아도 나시아스 쪽이 불리했다. 국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런. 설마 라모나 기사단장에게 이런 귀여운 약점이 있을 줄이야, 의외로군.” 그 라모나 기사단장은 진심으로 주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폐하. 웃고만 계시지 말고 도와주십시오. 저에겐 아직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많습니다. 결혼 같은 걸 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끼어들어 말리게 되면 내가 아란나 부인의 부모님에게 원망을 듣지 않겠나. 종제님도 혼담이 들어왔고 하니, 좋은 기회 아닌가? 두 사람이 같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런 경사스러운 일도 없지.” 국왕은 즐겁게 웃고, 아란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의 오라버니는 이런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왕국의 지주라고도 할만한 기사이자 나의 소중한 재산이기도 하네. 그러나 아무래도 그대는 이 미검사에게 이기는 모양이니 기특한 일이야. 남편과 아이들이 쓸쓸해하지 않는 한, 왕궁에 오래 있어주면 기쁘겠네.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군.” “동감.” 왕비가 실로 무정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나시아스라도 수려한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무언가 말하려는 걸 제지하며 왕비가 물었다. “아까까지 어디에 가 있었어?” “엔도바 부인 댁입니다. 조문인사차, 왕궁까지 함께 왔습니다만...” “라티나가 와있는 건가?” 하고 국왕이 말했다. 바로 얼마 전 국왕의 개선축하회에서 만난이래 그다지 날짜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방문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벌써 본궁에 들어왔을 텐데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였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차에 시종이 찾아와서 그 부인이 면회를 청하고 있다고 고했다. 마을 하나 정도의 넓이를 가진 코랄 성에서는 이런 일도 드물지 않다. 국왕은 아란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편 나시아스도 총총히 그 뒤를 따랐다. 여자들 속에 남겨지는 것도 껄끄러웠겠고, 동생의 공격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으리라. 성내에는 라모나 기사단의 숙소가 있지만, 나시아스는 왕궁에 있을 때 대부분 사보아 공작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아란나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남자들만 있는 숙사에 묵게 하는 것도 경우가 아니다. 그래서 왕비의 배려로 일곽의 별장에 묵게 되었다. “그런 일까지 해주시다니...” 하고 아란나는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랐지만, 그것이 싫다면 본궁에서 묵던가 사보아 공작저에 갈 수 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은 데다 옆에서 샤미안이 괜찮다면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까지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쪽이나 아란나에게는 몸 둘 바를 모를 장소들뿐이었다. 중얼중얼거리면서도 별궁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다름아닌 왕비를 제외한다면, 예전의 애첩인 엔도바 부인은 국왕에게 있어서 지금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귀중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발로의 말로는 왕비는 여자 축에 끼지 못한다는 것 같으니, 부인은 당당하게 제1위에 있다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 이 사람에게는 그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이런 때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아담한 거실에서 국왕과 두 사람만 남자 곧바로 용건에 들어갔다. “다시, 다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국왕은 무슨 일인가 물어보지 않았다. 맑고 검은 눈동자에 미약하게 분노와 아픔이 배어나왔다. “언제 일이오?” “얼마 전 축하연의 초대를 받고, 이쪽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돌아간 그 다음 날입니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표시하는 국왕에게 부인은 끄덕임으로 대답했다. “폐하께 그만두겠다 말씀드린 이래 아무도 저에게서 이용가치를 느끼지는 못했겠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왕궁에 출입을 허락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 축하연에서는 친밀하게 말씀도 붙여주셨지요. 그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국왕은 살벌한 표정을 지었고, 부인은 다시 끄덕였다. “그렇지요.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것이 너무 빠릅니다. 제가 왕궁을 나서고 나서 폐하는 한 번도 제 집에 들르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폐하의 배려이시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잠시동안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어 주신 것이라는 걸. 하지만 궁정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부인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 축하연 때에, 그 점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저를 보며 기이하다든가 불쌍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버림받은 여자가 뻔뻔스럽게 어디까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느냐고, 다시 한번 폐하께 총애를 받으려고 꾸미고 있는 건 아니냐고, 불쌍하다는 듯한,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었죠. 그런데, 폐하께서 저에게 상냥한 말씀을 걸어주시자마자 그 사람들의 태도가 급변해서, 촉감이 나쁜 천이 최고급 벨벳이 된 것처럼 변해버린 겁니다. 그 뒤에, 이번에는 비전하가 일부러 말을 걸어주시고 그곳에 폐하까지 오셔서 잠시 셋이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그만...” “썩어가던 포도주가 극상의 미주(美酒)가 된 겁니까?” 국왕은 종제의 말투를 흉내내어 야유하듯 말했다. 부인도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왕궁이란, 권위란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너무나 노골적이라서 조금은 놀랐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례되겠지만, 저는 폐하가 비전하와 결혼하신 것이 정말로 기쁘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폐하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 독립기병대장이나 종제 분, 라모나 기사단장이 함께 계신 것도.” “그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내 보석과 같소. 게다가 당신도 있고요.” 진지한 어조였다. 연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좀더 실제적인 것이다. 부인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남자는ㅡ테란 공국의 코피스라고 이름을 댔습니다만, 물론 본명이 아니겠지요ㅡ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라는 분의 소개장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확실한 사람의 소개나 그러한 편지가 없으면 귀족 부인은 알지도 못하는 인간을 만나거나 하지 않는다. 소녀 시절의 부인을 귀여워해주었던 그 사람은 편지 안에서 코피스에 대해 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라고 써놓고 있었다. “안 좋은 소리를 묻겠소만... 그 편지는 진짜인가요.” “물론 가짜에요.” 부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편지의 내용도 그 분을 흉내내고, 필적도 매우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진짜라고 통했겠지요. 저는 오랫동안 그분과 만나지 못했으니까 간단하게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약간 지나친 면이 있었습니다.” “지나친 면이라니?” 부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저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이 왕궁에서 폐하의 애첩으로서 마치 왕비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갑자기 뒤바뀌어 버림받았고ㅡ세간에선 그렇게만 보고 있는 듯 합니다만ㅡ소위 잊혀진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그런데도 아직 폐하께선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시고, 비전하까지 친구처럼 정답게 대해주신다고 판명된 그 다음 날입니다. 십수 년이나 소식을 듣지 못하던 사람의 편지를 가진 사교성 좋은, 별 볼일 없는 지방귀족이 나타나서 어디에서 들었는지 정중하게 남편에 대해 애도를 표시하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왕궁에 대한 일, 폐하나 비전하에 대한 일로 화제를 옮겨가더군요. 실제로 그 방법은 매우 교묘했습니다. 저도 이전과 같은 경험이 없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사건으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은 결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도, 그 사람이 자신이 말하는 대로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똑같이 온화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여도 신용해도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지금은 조금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코피스는 분명히 도가 넘은 행동을 한 것이죠.” 국왕은 빤히 부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낮게 웃어버렸다. “아쉬운 일이오. 당신이 남자였다면 내가 간청해서라도 이 성의 참모실에 앉혀두었을 텐데.” “그런 농담을 하시다니. 이 정도도 꿰뚫어보지 못해서야 비전하께 야단맞습니다.” 부인도 부드럽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그 남자의 코랄 주소입니다. 무언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부인이 내민 종이조각을 국왕은 주의깊게 갈무리하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고맙소. 잘 알려주었소.” “아뇨. 알려드리는 것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편지에 쓰는 것은 위험하고, 그렇다고 곧바로 달려온다면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오늘까지 날짜를 미루었습니다.” “현명한 조치였습니다. 나중 일은 이쪽에서 알아서 하지요.” “부탁드립니다.” 엔도바 부인의 미덕 중 하나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남자도 파라스트의 첩자겠지요’라던가, ‘어떤 탐색을 하실 건가요’라던가 하는 말은 일절 묻지 않았다. 그것은 국왕과 왕비 사이에 나누어져야 할 대화이고,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왕도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때부터는 당연한 친구 사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너도 슬슬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발로가 말했다. 나시아스는 피곤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벌써 밤도 늦었다. 뭐가 어찌 됐던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자고 달려드는 동생의 공격을 겨우 떨쳐내고, 사보아 공작 저택으로 ‘도망쳐 온’ 참이었다. “완전히 졌다. 아란나도 일단 한번 마음을 먹으면 움직이지 않는 아이야. 여기에 있는 한은 안전하겠지만.” “우리 집이 긴급피난소냐?” 발로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친구에게 나시아스는 원망스러운 표정을 향했다. “남의 재난을 동정할 생각은 없는 거냐?” “없어.” 담담하게 말하고, 자작으로 고급스러운 술을 따랐다. 유리잔도 식사용 병도, 내부의 색이 비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물론 상대에 따라서지만.” 나시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의미를 그의 가족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발로는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아란나를 비상히 높이 쳐주었지만, 지금도 그 인상은 변하질 않았어.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실로 예리해. 찾는 물건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어디를 찾으면 좋은지 잘 알고 있는 여성이다.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더군. 지금 오라버니에게 누군가 좋아하는 분이 있으신지요? 엔도바 부인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나시아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대답해 줬지. 그 분이라면 교양과 소양을 겸비한 진정한 귀부인이다. 내 취향에서 보자면 약간 수수한 면이 없지 않지만, 네 오빠는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고 말이야.” “너어...” 나시아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에 반해 발로는 끝까지 즐거운 듯 했다. “아란나가 하는 일이니 즉시 행동을 개시하겠지. 물론 저쪽이 뭐라 말할지가 문제지만.” “그 사람은 폐하의 애첩이야!” “옛 애첩이지. 지금은 자유의 몸이고. 누군가를 골라 남편으로 맞이한다고 해서 흉볼 일도 아니야. 너하고라면 딱 어울린다.” “바보 같은 소리를...” 나시아스는 일언지하에 부정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단정한 얼굴에, 옆에서 보기에도 고통스러운 고뇌를 떠올리며 신음하듯 말했다. “이제 와서... 나는 누구와도 결혼 같은 건 안 해.” “결론짓지 마라. 그때부터 벌써 몇 년이냐? 7년... 이제 곧 8년이군. 아란나의 한탄도 부모님의 걱정도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의외일 정도로 부드러웠다. 6장 다음날, 왕비는 아란나를 동반해 엔도바 부인을 방문했다.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였다. 나시아스가 예전에 누이동생은 상당한 말괄량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초대해본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아란나는 마차에서 흔들리며 가는 것보다 말을 달리는 쪽을 좋아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승마복으로 방문하는 것이 엔도바 부인께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 “이런 때인걸. 오빠하고 결혼해주지 않느냐고 물어보러 가는거잖아?” “그렇지요. 생각해보면 이것도 꽤 실례되는 이야기네요.” 그래서 아란나는 승마바지와 승마화를 갖추고, 왕비와 함께 교외의 저택까지 산책을 즐겼다. 먼저 방문하겠다고 알려두었기에 부인은 미리 몸단장을 단정히 해두고 마음 편한 거실에 맛있은 차와 과자를 준비한 뒤 두 사람을 환영해 주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런 쓸쓸한 곳이다보니 손님이 오시면 정말로 기쁘답니다.” 왕비의 소개로 엔도바 부인과 세레자 부인은 바로 사이가 좋아졌다. 여주인은 두 사람의 손님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왕비는 즐겁게 대화에 응하며 부인이 손수 구운 과자를 즐겼다. 부인은 왕비를 위해서 그다지 달지 않은 과자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 탓인지 어쩐지, 아란나는 시드 케이크와 초콜릿 케이크를 두 개나 먹고 나서야 태도를 새롭게 해서 말을 걸었다. “저어... 엔도바 부인. 부디 마음 상하지 말아주세요. 저에 대해서 무척 무례한 여자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여쭤보고 싶어서여. 부인께서는, 저희 오라버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부인은 상냥한 풀빛 눈동자를 크게 뜨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소녀와 같은 세레자 부인이 무시무시하게 진지하다는 것을 민감하게 파악한 듯 했다. “오라버님은 폐하의 뛰어난 기사이시자 훌륭한 분입니다. 누구나 똑같은 소리를 할 거에요.” “다른 사람하고 똑같아서는 곤란해요. 저기...” 말문이 막혀버린 아란나를 대신해서 왕비가 말했다. “다시 말해, 결혼상대로서 생각해주지 않겠느냐는 거야.” 부인은 이것에는 솔직하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나시아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아란나는 그게 틀림없다고 하던걸.” “아뇨. 제가 아니라 발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이것 역시 상당히 변칙적인 결혼신청이었다. 애초에 부모의 친구가 소개해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귀족의 상식이다. 따라서 부인도 단숨에 부정하지는 않고 가만히 생각했다. “저와 그분은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아요. 나시아스님은 폐하의 심복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왕국의 중진이시기도 하지요. 저는 단순한 지방귀족의 미망인일 뿐입니다.” “엔도바 부인. 부탁ㅇ니에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혹시 오라버니가 청혼을 한다면 받아들여 주실 건가요?” 아란나는 필사적이었다. 그 모습은 약간 도가 지나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왕비는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아란나는 부모님의 기분을 생각하겠지만, 나시아스도 분별이 있는 어른이다. 결혼할지 안할지는 본인의 의사에 맡겨야 한다는 게 왕비의 견해였다. 다만, 아란나가 어떻게 해서든 엔도바 부인과 만나고 싶다고 하기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당사자인 부인은 조용히 되물었다. “세레자 부인. 저도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오라버니의 결혼에 마음을 쓰시는 건지요? 세상에는 마흔이 넘어서 처음으로 아내를 맞이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부디 아란나라고 불러주세요. 그냥 놔두면 오라버니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거에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낼 겁니다. 전 알아요.” “그건...” 엔도바 부인은 풀빛 눈동자에 곤혹스런 표정을 띠고, 힐긋 왕비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주 잠시,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시선이었지만 이러한 부분에는 민감한 왕비이다. 두 사람의 얼굴을 비교해보고 머리를 긁으면서 일어섰다. “잠깐, 요 근처 좀 산책하고 올게.” “아뇨, 비전하. 있어주세요.” 아란나가 리에게 말하고는 다시 부인을 향했다. “부디 말씀해주세요. 당신은 분명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자세한 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부인께서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이유는 그 분의 첫부인과 무언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이에요.” 이에 왕비는 놀랐다. “나시아스가... 결혼했었어?” 아란나는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엘레인이라고 합니다. 제 소꿉친구였어요. 열일곱에 오라버니와 결혼하고 죽었어요. 오라버니는 엘레인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요?” 이것은 부인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엔도바 부인은 약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아요. 다만... 젊어서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말슴을 듣다보니 심약하고 섬세한 신경을 가진 분이었다는 인상을 받았지요.” 아란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군요.” “실제로는 아니었어?” “전혀 아니에요. 분명 엘레인은 미인이었어요. 피부도 하얗고 선도 곱고 그냥 보면 얌전한 아이로 보였지요. 하지만 엘레인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남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저같이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자수나 독서나 집안일 돕는 걸 좋아하기는 했지만, 조금도 약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제비꽃 같다고 칭찬했지만, 제가 보기에 엘레인은 단순히 내숭일 뿐이었어요. 한번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가정교사 선생을 쫓아내려고 외투 속에다가 도마뱀을 풀어놨다니까요. 나중에 몰래 저한테 가르쳐 줘서 둘이 얼마나 웃었는지.” 그리운 소녀 시절을 이야기하는 아란나의 얼굴은 즐거운 듯이 빛나고 있었다. “저는 엘레인이 좋았어요. 얌전한 듯 보이면서도 심지는 굳건하고,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하는 일을 대담하게 해치워버리는 엘레인이 너무 좋았었지요.” 이 양가(兩家)는 사이가 좋았고, 엘레인의 부모는 나시아스를 마음에 들어 해서 딸을 받아주지 않겠느냐고 청혼했다고 한다. “처음에 엘레인은 그 혼담을 싫어했어요. 물론 부모님 앞에서는 그런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아란나의 오라버니라고 해도 자기는 기사는 절대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그 사람들은 전부 거칠고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고 했었죠.” “엘레인은 나시아스와 안면이 없었나보지?” “예. 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견습으로 기사단에 들어가 있었고 휴가는 언제나 짧았으니까 대부분 가족들과만 지냈거든요.” 15세의 엘레인은 부모님의 명령으로 싫어하면서도 아란나의 오빠와 선을 보았다. 21세의 나시아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워, 누이동생의 눈으로 보기에도 반해버릴 것 같은 젊은이였다. 엘레인이 이 혼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해도 그것은 나시아스를 만나기 전까지였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나서는 곧바로 푹 빠져버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약혼자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고, 그 세밀화를 한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은 채 눈을 빛내며 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열여덟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 당시 엘레인의 말버릇이었다. “그리고... 엘레인은 18세가 되지 못했군.” 왕비의 읊조림이었다. 아란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17세의 엘레인에게 병마가 엄습했다. 가슴의 병이었다. 나을 가망이 없는 죽을병이었다. “그냥 감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침대가 새빨개지도록 피를 토하고, 애초에 선이 가는 애였지만 고작 3개월에 부러질 것 같이 말라버려서... 아무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분명히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하지도 못했어요. 의사선생님의 진단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지요. 무엇보다 엘레인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거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엘레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뿐이었지요. 그리고... 죽음을 눈 앞에 둔 엘레인이 단 하나 바랐던 것은 오라버니와 결혼하는 것, 엘레인 쟌펠이 되어 죽는 것이었어요.” 엔도바 부인도 왕비도 솔직히 놀라움을 표시했다. 특히 왕비가 그랬다. 자신의 결혼도 상당히 변칙적인 것이었다. 마음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건 결혼이라고 하지 않는 거 아냐.” “비전하...” 엔도바 부인이 살짝 나무랐다. 그런 것은 아란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둥근 얼굴이 있는 한껏 굳은 채 승마복의 무릎을 강하게 쥐어짜고 있었다. “엘레인의 부모님은 울면서 저희 부모님에게 머리를 숙이셨어요. 아주 짧은 기간이라도 좋다. 그 아이의 시간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 마지막 한 달 정도는 행복하게 보내도록 해주고 싶다고. 오빠는 장기 휴가를 얻어 돌아왔어요.” 왕비와 엔도바 부인은 약속이나 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식이 있은 20일 뒤에 엘레인은 죽었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좋다면, 무척 행복한 얼굴이었어요. 그건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엘레인이 행복하게 죽은 것은. 하지만...” “나시아스는 조금도 행복하지 못했지.” 단적인 왕비의 지적이었다. 아란나는 양손을 굳게 쥔 채 끄덕였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거에요. 20일 동안 오라버니와 엘레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두 사람은 부부였으니까요. 하지만... 엘레인은 죽을 때 오라버니의 일부분을 함께 가져가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로부터 7, 8년이나 지났는데. 너무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만 잊어주었으면 해요.” “전혀 너무하지 않아. 당연한 일이야. 대체 그 사람이 죽은 건 나시아스의 탓도 아니고 뭐도 아냐. 어째서 아직까지 질질 끌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아란나는 고개를 저으며 왕비를 보았다. “비전하. 비전하는 눈부신 분이세요. 저 해님처럼 강하고 커다랗게 빛나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예요. 아뇨, 저도 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몰라요, 병이 진행되고 나서의 엘레인을. 오라버니는 약혼자의 모습을 한 번 보더니 아무 말도 못하더군요. 훌쭉하게 살이 빠지고 투명하게 비쳐보일 듯이 말라서, 그런데 눈만은 이상할 정도로 뜨겁게 젖어서 빛나고... 오싹할 정도의 아름다움이었어요. 살아있으면서 명계(冥界)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반쯤 죽어있으면서 이 세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의... 뭐라 말해야 할까,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도저히 눈이 떼어지지 않는 광채였지요. 그것만은, 실제로 보시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부인이 끼어들었다. “나시아스님은 그 분과 단 둘이서 20일을 보내신 건가요.” “예.” “하루하루 말라죽어가는, 그런데 자신에 대한 집착만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부인을 눈앞에 두고 말입니까?” “그 말씀대로예요.” 부인은 긴 한숨을 쉬었고, 왕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건전하지 못해.” 박정한 말 같았지만, 진리이기도 했다. “불쌍하게도. 아직 젊은 기사님에게는 짐이 너무 무거웠을 거예요.” 부인의 말에 아란나는 열심히 끄덕였다. “엘레인은 결코 불행했던 게 아니에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토록 사랑하던 오라버니와 잠시라도 부부로 지내고 죽었으니까요. 만족해서 저세상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달라요. 엘레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엘레인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저하고 오빠는 전혀 말이 통하질 않아요. 오라버니의 마음속에서 엘레인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고 섬세한 소녀였고, 약간의 자극도 견디지 못하는 부서질 것 같은 사람인 거에요. 그런 게 절대 아닌데.” 아란나는 건강했던 때의 엘레인을 기억하고 있다. 결코 말괄량이는 아니었지만 장난을 좋아하고 명랑하며 고지식한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러 얌전하게 행동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점을 찔러 보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 만만치 않은 미소녀였던 엘레인. “제가 보는 앞에서도 한 번 같은 일이 있었어요. 시끄러운 숙모님이ㅡ엘레인은 뭐든지 잘하는 아이였는데도요ㅡ여자아이는 좀 더 엄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계속 잔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엘레인의 부모님 앞에서 두 사람을 비난하는 듯한 말까지 하고요. 그랬더니 그 애는 순종 그 자체인양 차를 내오더니, 애처롭게도 그 설교를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숙모님이 점점 붉으락푸르락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뛰쳐나가듯 돌아가버리고 말았어요.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 속에 파마자기름을 넣었다는 거예요. 숙보님의 건강을 위해서 약초 차를 드린 거라며, 그러니까 맛은 어땠을지 잘 모르겠다면서... 정말 얼마나 우스웠던지... 물론 나쁜 일이긴 했지만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었지요. 저에게는... 그런 추억이 잔뜩있어요.” 나시아스는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병마에 침식당해 유령과 같은 팔을 자신에게 내밀고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중환자인 엘레인 뿐이었다. “그건 말할 상대가 틀렸어.” 왕비가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이제 잊어달라는 소리는 나시아스가 아니라 엘레인에게 해야해. 엘레인은 아직도 나시아스를 붙잡고 있어.” 비현실적인 의견이었지만, 아란나는 의외로 그 말에 강하게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에요. 저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이제 오라버니를 돌려달라고, 이젠 충분하지 않냐고.” 세 사람은 한숨으로 각각의 심정을 토해냈다. 가장 먼저 충격적인 고백을 시작한 것은 엔도바 부인이었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나시아스님은 부인의 묘소에 가보실 생각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런 일을 하면 되레 더 잊혀지지 않는 건 아니야?” 이 말은 왕비였다.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제야 부인과 정면으로 마주할 마음이 되신 게 아닐까요. 하지만, 아란나님. 그 원인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오라버님은 강한 분입니다. 스스로 다시 일어서신 거예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누군가에게 엘레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니,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에요. 이렇게 만나 뵙고 이야기를 해보아도 엔도바 부인은 정말로 멋진 분이신 걸요. 오라버니에게 있어서도 단순히 예저을 표시하기만 할 상대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라티나라고 불러주세요. 당신 오라버니의 마음은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어요. 더 이상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아란나를 제지하고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두 사람의 남편을 먼저 보냈습니다. 첫 남편은 결혼하고 2개월도 되지 않은 사이에 뇌염으로 목숨을 잃었지요. 말처럼 건강한 사람이었는데도요. 두 번째 남편은 마차에 치여서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반년 후에 잃었습니다. 오라버님은 그러니까, 저를 조금은 가엾다 여기시고 같은 기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연대감에 찾아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슬픔ㅡ그 사람과 함께 쌓아올렸어야 했던 모든 것이 붕괴되어 버리는 허무함, 당신은 조금 전 일부를 잃어버렸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 말이 맞아요...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둥근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있는 아란나에게 라티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은 행복하세요?” 아란나는 눈물을 훔치며 끄덕였다. “죄송스러울 정도로 행복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엘레인의 부모님이 너무나 걱정을 하고 계셔서... 그 분들은 오라버니가 행복하게 될 때까지 딸을 잃은 슬픔만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도 괴로워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라니타는 열심히 몸을 내밀었다. “오라버님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세요. 부모님이나 그분들이 진심을 다해 설득하면 그 분의 마음도 움직이시겠지요. 나시아스님이라면 성격이 좋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얼마든지 물망에 오를 거에요.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신다면 이쪽의 비전하께 부탁드려보세요. 대꾸할 틈도 주지 않으시고 힘으로 끌고 데려가 주실 테니까.” “그건 너무하네.”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반문했지만 아란나는 심각한 얼굴로 ‘꼭 부탁드립니다’하고 말했다. 코랄의 거리에는 아직 축제의 여운이 남아 각지에서 찾아온 행상이나 예술인 등으로 붐비고 있었다. 셰라는 그 거리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성에서 일하는 처녀들은 외출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의식주 모두가 성안에서 처리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성을 출입하는 상인에게서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셰라가 찾는 물건은 어떤 상인도 취급하지 않아 왕비에게 부탁해 특별히 허가를 받은 것이다. 다리에스를 잃고 나서 자객으로서의 준비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만 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칼을 갈아두는 것과 연옥의 입수였다. 셰라가 사용하는 칼들은 특수한 것뿐이라 사체도라고 하는 은선(銀線)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갈았다. 이런 것을 직공에게 맡기면 어떤 일에 쓰는 건가하고 기이한 눈으로 보고 만다. 그 이외에 애용하는 작은 칼이나 몇 종류의 수리검도 갈았다. 란바에서의 격전으로 마모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연옥은 그 틀을 대장간에 주문했다. 도면을 보고 상당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도면대로 만들어 내주기로 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납 부스러기를 손에 넣는 것뿐이다. 오늘은 그 위에도 살 것이 있었다. 장식용 빗이나 자수를 넣은 띠, 향료나 사탕과자 등, 성의 시녀들에게서 부탁 받은 물건들이다. 아무래도 그런 사치품은 성에서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풍족한 친지가 선물로 보내주는 것을 기다리던가, 이번처럼 외출하는 동료에게 부탁하던가 해야 한다. 하물며 셰라는 왕비의 후의로 반나절의 자유시간을 얻어서 외출하는 것이니만큼 처녀들은 부러워서 질투하느라 난리였다. 그런 만큼 부탁받은 것들을 반드시 구입해서 돌아가지 않으면 욕을 먹는다. 갈아둔 소도(小刀)는 긴 의복의 치맛단 아래에 숨기고, 등나무로 엮은 바구니 안에 수리검이나 연옥을 만드는 틀, 재료인 납 조각을 넣어서 스카프로 덮은 뒤, 그 위에 부탁 받은 물건을 살짝 쌓아 올렸다. 셰라도 왕비와 마찬가지로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고, 머리카락이나 몸에 바르는 향료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그런 걸 뿌리는 자객 같은 건 들어본 일도 없다. 다만, 아름다운 천이나 장식이 싫지는 않았다. 부탁 받은 물건을 사는 김에 돌아다녀 본다. 개중에도 머리에 다는 장식을 보면 언제나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머리를 올려본 일이 없다. 여성이라면 17, 8세가 되면 머리카락을 땋아 올리고 비녀를 꽂던가 보석이나 리본이 붙은 망으로 머리묶음을 감싸던가 하는 것이 보통이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셰라의 은발은 동료 아가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묶어 올려서 보여주지 않겠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자기는 땋아서 늘어뜨리는 걸 좋아한다고 그녀들에게는 이야기했다. 실제로는 좀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왕비처럼 둘둘 말아 올리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우아하게 모양을 잡아 올린 머리카락은 격렬한 움직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목덜미 뒤에서 하나로 묶은 간단한 머리 모양이라도 반듯한 은실과 같은 머리카락은 충분히 아름다워서 잡화점의 주인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을 정도였다. 반드시 매상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열의었다. “아니, 거 참 훌륭한 머리카락이네요. 장사를 하다보니 머리카락을 자랑거리로 삼는 아가씨들은 여럿 보아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처믕 봤습니다. 부디 고급품으로 치장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상아 빗이나 모조 세공품이 들어간 비녀 등을 꺼내놓았지만, 자신은 필요없다며 거절했다. 가게를 나오면서 살짝 미소지었다.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마치 정말 소녀 같았다. 자신은 사실 17세가 되는 소년인데. 언제까지고 이 분장을 하고 있을 수는 없으리라. 그건 알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섬기고 있는 상대가 왕비라는 것이다. 단 혼자서 별궁에서 살고 있는 왕비. 그 곁에서 남자 시종이 모시고 있어서야 사람들이 뭐라 수군댈지 쉽게 상상이 간다. 왕비는 신경쓰지 않으리라. 지금도 정말로 그 모습이 괜찮은지 움직이기 힘들지 않은지 묻곤 했다. 뭐하면 ‘셰라’에겐 일을 쉬게 하고, 대신 그 ‘남자형제’를 시종으로 고용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셰라는 웃으며 여자로 통할 수 있는 동안에는 이 모습으로 있겠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자신은 서리궁에서 침식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다른 시녀들과는 사생활 부분에서 격리될 수 있었다. 만약 그대로 본궁에서 살고 있었더라면 아무래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서도 하나의 일에 2개월 이상은 걸린 일은 없다. 아무리 조심하고 있어도 여자의 감은 미묘한 것이라 이상한 곳에서 이성의 냄새를 맡는다. 셰라는 다리에스를 잃은 것을 그다지 슬퍼하고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슬프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몸을 기댈 곳이 없어진 것에 불안을 느낀 것뿐일지도 몰랐다.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만이 중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틀리지 않았을 터였다. 다만 무언가가... 잘은 말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두려웠다. 자신은 무언가 다른 사람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객으로 키워졌으니까, ‘선택받은 일족’이었으니까 하는 변명은 더 이상 셰라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살짝 머리를 흔들고 그 흐리멍덩한 기분을 흩뜨려 버렸다. 이런 것을 생각해봤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셰라는 상점이 처마를 나란히 한 큰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햇볕이 따갑게 내려 쬐어 셰라의 하얀 피부와 등에 늘어뜨린 은색 머리카락을 비추고 있었다. 거리를 가는 많은 수의 사람들은 누구나 눈을 크게 뜨고 은세공을 한 인형 같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단점이 있다고 한다면, 하고 예전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점이다, 라고 그 교사는 말했다. 사람에게 호의를 받고 사랑 받을 만한 용모는 필요하나, 지나친 용모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한번이라도 너를 만난 사람은 너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객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여자로 태어났었다면 첩으로서 혹은 첩자로서 비범한 활약을 보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걷고만 있어도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들의 시선이 싫어도 느껴졌다. 이 지방 출신 중에는 성의 시녀복장을 하고 있는 소녀를 놀리는 앞뒤 없는 젊은이는 없지만 이곳은 항구 도시이기도 했다.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서 온 남자들은 그런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선원 복장을 한 두 젊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서 열심히 이야기를 걸어왔다. 오랜 항해로 여자에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돌아가는 걸 늦추고 잠시 같이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아주 잠깐이면 돼. 그럼 깜짝 놀랄 정도의 용돈을 주지.” 셰라는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길을 서둘렀다. 그러자 두 남자는 그 체구로 가는 길을 막아섰다. “안 돼 안 돼. 그냥 도망치려 그러나.” 빙글빙글 웃으면서 억지로 끌고 가려 했다. 그녀는 가만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배주대낮의 노상이다. 여기에서 해치워버릴 수는 없다. 얌전히 따라가줘도 상관없지만, 이외에도 동료가 있다면 약간 골치 아파진다. 장소도 걸린다. 얌전한 소녀인 척 가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만큼 셰라는 불리했다. 옷 아래에는 소도가 바구니 안에는 수리검도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적이 많은 곳에서는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천박한 웃음을 띠면서 남자들은 셰라를 붙잡았다. 한 사람은 팔에서 바구니를 빼앗으려 했다. “안 돼요, 이건...”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다. 그 안에는 보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들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로서 당연한 저항’ 밖에 할 수 없는 한, 한계가 있었다. 동시에 두 사람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곤란하다, 하고 생각했을 때엔 이미 바구니는 남자 손에 있었다. “돌려주세요!” “돌려주고말고. 잠깐 우리들하고 같이 가주기만 하면 바로 돌려줄게.” “자아, 따라와. 재미있게 해 줄 테니까.” 바구니를 든 남자는 의기양양하여, 셰라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걸어가려 했다. 그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헉 소리를 질렀다. 바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이런 짓을 하면 곤란하지.”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완벽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얼굴. 채찍처럼 늘씬한 장신(長身)과 이마에 닿는 검은 머리카락. 셰라는 크게 신음했다. “반츠아...” 틀림없다. 레가의 반츠아, 그 사람이었다. 남자의 손에서 빼앗은 바구니를 셰라에게 돌려주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야단맞는 거 아닌가?”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셰라는 거친 호흡을 억누르고 그저 빤히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본 그 미모가 얼마나 눈에 띄는지. 강철 같은 강함을 가진 어엿한 남자의 얼굴, 용모를 자랑하는 여성조차 누구라고 얼굴을 붉힐 것이 틀림없는 요염한 외모. 지금은 행동원의 검은 복장이 아니었다. 중류 귀족의 자제이거나 젊은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뭐냐, 네놈은?” “가로채려는 거냐?” 신음을 토하는 남자들에게 무표정한 눈길을 보낸다. 그 입가가 웃고 있었다. “용감하군, 너희들.” “뭐라고오...?” “이 자식, 장난치는 거냐!” “왕비의 시녀를 붙잡고 귀성(歸城)을 늦추려는 짓이니까.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겠지?” 두 사람의 선원은 입을 딱 벌렸다. “델피니아의 왕비는 탄가의 정예를 한 손으로 비틀어버리는 여장군이다. 너희들 둘의 목 정도는 손놀림 한 번에 반쪽을 내지 않을까.” 남자들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더니, 그제서야 처음으로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슬금슬금 도망쳐 버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반츠아의 손이 가만히 셰라의 어깨에 닿았다. 걸어가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손을 피한 셰라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이런 긴장감은 처음이었다. 두 번이나 사투를 되풀이했던 상대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자신은 ‘시녀’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옷 아래 감춰둔 검을 뽑거나 하는 짓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된다고. 손이 떨렸다. 몸도 떨리고 있었다. 억누르려 해도 억눌러지지 않는 심한 충동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허수아비처럼 서있을 거지?” 남자가 말했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셰라는 바구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 같은 손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어째서 도와줬나?” 치켜뜬 눈이 셰라를 바라보았다. 밤에 보았을 때는 검다고 생각했지만, 검은색에 가까운 쪽빛 눈동자였다. “그냥 마음이 내켜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려는 듯 했다. 이 남자가 가지는 퇴폐적인 분위기는 햇빛 아래에선 지독히 주변과 동떨어져 보였다.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었나.” “죽일 거다. 그러니까 살아있어 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왜 지금 죽이지 않지?” “이런 군중들 속에서 기술을 쓰겠다고?” 다시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그런 짓을 하면 셰라는 두 번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래도 좋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발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잇는데도, 하마터면 소녀의 몸가짐을 벗어 내팽개칠 뻔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터무니없이 위험하다. 어떻게 해서든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죽게 된다. 그런데 공격이 봉쇄된 자신은 그저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츠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무언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주지. 너한테 잘 어울릴 거다.” 경계하면서 그 꾸러미를 받아들였다. 어쨌든 사람 눈이 너무 많다.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반츠아는 셰라에게 태연하게 등을 돌렸다.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대낮의 큰 길이다. 이만큼 사람 눈이 있는 곳에서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등뒤에서 무기가 날아오지 않을까 하는 공포는 떨칠 수 없었다. 남자의 모습이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건네준 꾸러미를 열어보았다. 안에서 나온 것은 본 적이 있는 머리 장식이었다. 아까의 잡화점에서 주인이 열심히 권해주었던 금세공의 비녀였다. 황금색 꽃잎과 이파리가 새겨지고, 작은 보석으로 만든 꽃술이 붙어 있었다. 일급 장인이 정성을 들여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는 정밀한 세공을 셰라는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우연일까. 바로 조금 전의 일이다. 가게 주인이 이거라면 정말로 잘 어울린다며, 아가씨 정도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는 이 정도의 물건으로 장식해주지 않으면 불쌍하다고 열을 내며 권해주었던 것이. 하필이면 그 물건을 저 남자가 건네주었다.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셰라는 경악했다. 자신은 저 남자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소름이 돋았다.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은 죽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저신의 털이 곤두서면서도 셰라의 마음을 덮친 거대한 감정은 공포가 아니었다. 맹렬한 분노였다. 소녀의 가면도 시녀의 몸놀림도 지금 당장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걸어가는 것도 잊고 금색 비녀를 부서질 정도로 꽉 쥐었다. 란바에서 거둔 델피니아의 승리는 파라스트의 오론 왕의 귀에도 들어가 있었다. 승패라는 것은 때때로 판정이 어렵다.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면서 양보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누가 보아도 델피니아의 대승리였다. 그러나 조라더스가 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일시적으로 양보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이니 반드시 앙갚음을 하려 할 것이다. 월 그리크는 당분간 동쪽 국경선에서 눈을 뗄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연히 서쪽이 비게 된다는 말이지.” 오론은 희미하게 웃었다. 대화삼국 중에서도 사실상 가장 풍족한 델피니아도 생각해보면 손해보는 입장이다. 탄가 주변에는 탄가를 위협할만한 국가가 없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딱 골라 단물이 나오는 토지도 없다. 파라스트의 주변도 마찬가지다. 소공국은 모두 파라스트의 비호 아래, 혹은 우호관계에 있고 억지로 영토를 잘라내 적을 만들 필요도 없다. 파라스트와 탄가 사이에는 거대한 타우 산맥이 벽으로 세워져 있다. 델피니아만이 이 양국에 끼어 그 동향을 항상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한쪽과 전쟁을 하면 다른 한쪽에게 등뒤에서 공격당하게 된다. 전 국왕 뒤르와는 그것을 경계하여 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해왔었다. 원래 바깥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무서운 법이다. 파라스트에 있어서도 모반이나 배신은 드물지 않은 일이라 오론 정도의 지략을 가진 사람도 상당히 수고를 하고 있었다. 오론은 자신의 권력을 확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 책모를 구사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첩자는 다른 두 국왕이 생각지도 못할 숫자였다. 지금에 와서는 오론의 권력은 말단까지 영향을 미쳐 최소한 정면에서 나서서 등을 돌리는 자는 없었다. “그걸로 충분해. 뱃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얼 원망하고 있던, 머리를 숙이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거역할 만한 힘과 용기가 없으니 투덜대면서도 따르고 있다는 거지.” 하고 오론은 경멸을 감추며 보호해주었다. 이 점에서 탄가의 조라더스는 그렇게 두 마음을 먹는 것을 결코 용서치 않는다. 불평불만을 가진 채로 일하는 자 따위는 믿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오론은 반대로 조라더스처럼 단적인 수단은 좋아하지 않는다.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해 들어갔다고 듣고는 웃었을 정도였다. 그런 짓을 했다간 영격당할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월 그리크에 있어서는 말해보라 한다면, 양쪽 모두 영토 확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던 하는 왕이지만 그 수단은 상당히 달랐다. 조라더스가 언제나 과감한 용트림을 한다면, 오론은 좀 더 세밀한 책략을 즐겼다. 발돋움을 해서 나무열매를 따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떨어지는 거라면 남김없이 주우려는 성격이었다. 물론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만 할 필요도 없다. 방망이로 밀어대고, 돌멩이를 던지고, 때로는 남에게 시켜서 나무를 흔들게 한다. 어디까지나 남에게다. 그렇게 해서 떨어진 열매를 독점한다. 성격이 이렇기 때문에 다른 두 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타우의 동쪽이 델피니아 령에 가세되고, 월 그리크가 주민을 완전히 슬하에 두었다는 이야기는 조라더스보다도 오론을 자극하고 있었다. 타우의 주민은 결속이 강하다고 들었다. 혹시나 파라스트에 접해있는 서쪽마저 델피니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토지 그 자체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미련은 없지만 델피니아의 국경선이 넓어지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비를 피하려면 큰 나무 아래에서라는 말도 있다. 타우의 산적도 델피니아가 자신들을 보호해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일부로 가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건 델피니아의 힘을 없애는 것이다. 그 서자는 호쾌하고 활달한 성격이다. 서민에게는 압도적인 인기가 있다. 그러나 너무나 파격적이다. 특히 이번 전투에서는 귀족계급의 마음을 만족시켰던 전과는 거의 없었다. 빼앗은 것은 미개척된 산악지대, 게다가 산적들에게 주었다고 하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는 적지 않을 터였다. 그 남자는 영웅시되고 있으니 대놓고 말할 리는 없다. 말하지 못하는 만큼 속으로는 다른 무언가가 쌓여있을 것이다. 오론은 그러한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접촉하여 교묘하게 불을 붙이고 구슬려 타우로 향하게 했다. 월 그리크에 대해 반기를 휘두를 수 없다 해도 영내에 산적들의 피해가 빈번하다고 하면 이것을 처리하는 것은 영주의 당연한 의무이다. 오론은 국왕에 대한 불만을 능숙하게 산적에 대한 불만으로 뒤바꿔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저 남자가 어느 쪽을 편들 것인가를 젤 생각이었다. 지난번에는 이것을 오론 스스로가 했었지만, 이번에는 자기 식구다. 만약 그 남자가 산적 편을 들게 되면 귀족들의 불만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영주 편을 들어 산적 토벌을 인정하면 타우 서쪽은 델피니아를 신용할 수 없게 되고, 동쪽과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오론은 쿡쿡 웃으며 혼잣말로 말했다. “남은 것은 막이 오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군.” 7장 란바 전투에서 공을 세운 독립기병대장이 코랄을 찾아온 것은 6월 초순이었다. 이 사람의 모습은 왕궁에서 완전히 익숙해져 있다. 종자도 없이 오랜 여행을 해 먼지투성이인 모습으로 본궁을 걷고 있어도 뭐라하는 자는 없다 국왕 앞에 나서자마자 태연하게 말했다. “서쪽 산맥을 대표해서 전언을 가져왔습니다요, 폐하. 그쪽의 서북부 영주님인가 하는 친구가 타우에 들어와서 민가를 태우고 여자와 아이들에게 손을 대고 하는 덕에 서쪽 녀석들이 쬐까 상대를 해드린 모양입니다.” 이것에는 국왕도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 서북부의 영주들로부터 전혀 다른 상소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요즘 타우의 난잡한 형태는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다. 같은 산적 동료가 폐하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하며 떠벌리고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그 피해는 점점 늘어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서 토벌을 위한 군대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자아, 그건 그렇고. 이거 곤란하군. 어찌 판단해야 할까?” 이븐의 변을 들을 필요도 없이 타우 사람들의 말이 옳으리라는 것은 국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쪽 산맥은 아직 델피니아의 영토가 아니다. 그 두목들과도 면식이 없었다. 신하도 아닌 자들을 감싸고, 그로 인해 신하인 자들의 고충을 물리친다면 군주 같은 건 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아예 이 기회에 서쪽도 남쪽도 델피니아 령으로 해버리면 어떨까?” 그런 말을 지극히 진지하게 꺼내는 바람에 왕비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이븐도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될 거 같냐. 동쪽만 해도 엄청나게 협의를 거듭한 끝에 겨우 납득해 주었는데.” “새 영주님은 어떻게 된 거야? 같이 오지 않았어?” 국왕은 당연히 질이 이 문제를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영토가 아니었던 곳의 영주이니까 승계라던가 하는 수속은 필요 없지만, 국왕과의 사이에 약간의 의식은 필요하게 된다. 서약의 신 오리고 앞에서 국왕은 그 영토를 비호할 것을, 영주는 국왕에게 따를 것을 서로 맹세해야만 한다. “토지면적과 인구파악은 모두 영주의 의무이니까, 어떤 토지라도 말이다. 측량 방법이나 인구첩의 작성 방법 정도는 배워두었으면 하는데...” “저쪽 문제가 해결되면 금방 찾아 올 거야.” 하고, 이븐은 느긋하게 자세를 풀고 있었다. 평소에 이 세 명이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서리궁으로 정해져 있다. 본궁에서 멀고 불편하긴 하지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은 광대한 정원에 흩어져 있는 정자 중 한 군데에 있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주장하는 시종이나 근위병을 쫓아내듯이 물려놓고 만든 자리였다. 밖에 있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계절이다. 여기에서라면 정원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그들 사이를 달려가고, 기분 좋은 향기를 실어온다. “타우에서는 쪼까 바랄 수 없는 사치로구만.”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이븐이 말했다. “그럴까? 이렇게 깔끔한 정원도 좋지만 나는 산 속의 녹음 쪽이 더 좋은데.” 하고 말하는 건 왕비였다. 정원에서 피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꽃향기보다도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초목의 짙은 냄새, 습한 땅의 냄새, 그런 것이 더 향기롭다고 생각했다. 이븐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도 평소라면 좀 톡 쏘는 듯한 산꽃 쪽이 좋다고. 약하게 보여도 절벽 끝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태연하게 피어있는 그런 놈이 말이야. 하지만 뭐어, 가끔은 예쁘게 단장한 꽃들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이거지.” 왕비는 이상하다는 듯 남자의 시선을 쫓았고, 납득하여 끄덕였다. 색색으로 무리지어 피어있는 화단 사이를, 햇살을 막기 위해 모자를 쓴 부인들이 담소하면서 산책하고 있었다. 소녀라고 말하는 게 좋을 정도로 젊은 여성들이었다. 나들이용 의복이라고는 해도 사치스러운 것을 입고 있었다. 일곽의 저택에 있는 귀족의 영애들이리라. 그러한 계급의 미혼 여성은 거의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나가게 허락해주지도 않는다. 이렇게 정원을 산책하는 정도로도 기쁜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새장 안의 새가 갖는 즐거움이겠지만, 소녀다운 앳된 모습이나 몸짓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그들이 있는 정자까지 유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좋구만...” 이븐은 고개를 흔들며 말하고, 일부러인 듯 포기한 눈초리로 왕비를 보았다. “너한테 저런 귀여움을 기대하는 건 헛짓이다 이거지.” “당연하지.” 당장에 대꾸했다. 그 입가가 웃고 있었다. “내가 귀엽게 보이면 그게 끝장이다.” “그건 그래.” 이븐은 진지한 얼굴로 끄덕이더니, 금갈색 얼굴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미소를 띠었다. “너만이라면 그렇다 쳐도, 이 왕궁에는 여러 가지로 희한한 꽃이 피니까 말이야. 뭐가 좋아서 남자같은 옷을 입을까?” “샤미안 말이야?” “아니, 처음보는 얼굴이었어. 아까 본궁의 입구 근처에서 만났는데, 키가 크고 머리를 싹둑 잘랐고 노려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사람을 보는 여자야. 그래도 바탕은 나쁘지 않던데? 드레스 입고 머리만 길면 멋진 여자가 될 텐데, 아까워.” 국왕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왕비는 배를 잡고는 폭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이븐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이븐, 그거... 그 사람, 그냥 보고도 여자라는 걸 알았냐?” “당연하잖아? 나는 미인은 놓치지 않는다고.” 국왕은 더욱더 좌절했다. 왕비는 아직도 웃으면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국왕의 소꿉친구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과연’하면서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새삼스럽게 덧붙였다. “그렇구만. 여자인데 공작이고, 저 너구리 단장의 약혼자라 이거지. 꼬시지 않길 잘했군.” “이븐은 로자몬드 같은 여자가 취향인가?” 왕비가 진지하게 물어보자 이븐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농담이야. 용감한 건 싫지 않지만 그건 좀 너무 무섭잖냐. 나는 좀 더 이렇게...” 이상향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참에, 그 ‘무서운’ 인물이 옆에서 보기에도 험상궂은 얼굴로 찾아왔다. 국왕은 황급히 일어서서 정자의 의자를 뛰어넘어 도망치려고 했다. 왕비가 그 옷자락을 붙잡아 끌어 원래대로 자리에 앉혔다. 장신의 벨민스터 공작은 정자의 입구를 막아서고, 국왕을 노려보듯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폐하.” “들어보지.” 완전히 포기한 듯한 국왕이 말했다. “폐하께 축하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뵈었고, 비전하도 알현 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상 고향에도 일이 남아있으니 귀향하고 싶습니다. 제가 없이는 영내에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또한 요즘 조카의 건강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목소리도 태도도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이븐과 왕비가 그 험악함에 목을 움츠리는 가운데, 국왕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한 사정이라면 어서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네. 귀공을 이 왕궁에 붙잡아두겠다고 약속해버려서 말이야.” 공작은 국왕에게 찌릿하고 비난의 눈길을 주었다. “사보아 공은 폐하나 왕궁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공언하며 콧대를 세우고 있다는 소문입니다만, 폐하께서 직접 그 소문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통렬하게 비꼬았다. 그러나 국왕은 미소만 지으며, 맞서지는 않았다. “그런 소문이 있다니 전혀 모르고 있었군. 혹시 내가 종제의 말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면 조심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 소문에 대해서는 종제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네. 왕국의 신하로서의 명예나 자부심에 대해선 종제와 나란히 설 자를 난 아직 모르거든.” 아무래도 말이 지나쳤다고 느꼈는지, 벨민스터 공은 한순간 망설이며 눈을 깔았다. “용서해주십시오... 허나, 사보아 공과의 결혼은 승낙할 수 없다고 분명히 아뢰었습니다.” “벨민스터 공.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내가 아닌 종제에게 말해서 납득시켜보게. 아무튼 그대와 결혼하겠다 생각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네, 종제이지. 그 종제가 그대를 포기하지 않고 결혼 의사에 변함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종형인 나도 힘이 될 진 모르지만 손을 빌려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게 아니겠나. 사보아 일족만이 아니라 그대의 친척들도 그렇게 바라고 있다면 더욱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여공작은 초조하게 색이 옅은 머리를 저었다. “그것은... 제 마음을 모르는 자들이 제멋대로 한 행동입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그대는 아직 젊고 아름다워. 자신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가?” 반론할 것인가 생각하였으나, 굳어있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지며 미소 지었다. “그런 헤아림을 내려주시는 것은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당주로서 공작으로서 보통 여자로는 바랄 수 없는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왕비와 이븐은 잠자코 있었다. 국왕이 아니라 명목뿐인 약혼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깨달은 공작이 물러갈 때까지, 두 사람은 모두 지극히 행실 좋고 얌전하게 있었던 것이다. 다시 세 명만 남게 되자, 이븐은 재미있다는 웃음을 흘렸다. “어쩔 도리 없구만, 저건. 너희 종제 그 너구리 놈이 저런 걸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여자한테 굶주린 거냐?” 국왕은 기운이 빠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바보 같은 소리. 최소한 네가 타우의 마을에서 사귀고 지내는 정도만큼은 선택의 폭이 있을 거다.” “그럼 역시 가문인가 의리인가 하는 걸로 저쪽을 고를 수밖에 없다는 거냐?”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종제님의 마음속에만 있는 일이지.” 이븐은 어깨를 으쓱했고, 왕비는 ‘이런, 이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시아스와 라티나도 전도다난이지만, 단장하고 로자몬드는... 어떻게 되려나?” 이것은 이븐은 처음 듣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눈을 크게 떴다. “라모나 기사단장과 그 여자...가 아니라, 엔도바 부인이 말이냐? 일이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말이지 이쪽도 꽤 복잡해.” 왕비는 나시아스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누이 동생과 양친이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필사적이 되어 있다고만 말했다. 나시아스도 라티나도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통하는 것 같고 친하게 지내는 듯하다. 동생인 아란나는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할지 어떨지, 확실치는 않지만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븐은 새삼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이고는, “코랄 성은 갑자기 봄이구만.” 하고 말했다. 같은 시각, 셰라는 연옥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지금 셰라가 있는 곳은 본궁의 왼쪽에 있는 깊은 숲 속이었다. 산책로에서 크게 벗어난 울창하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목림 속이었다. 마치 버려진 뒤뜰 같은 구석진 장소였지만, 실제로는 분명 계산되어 만들어진 듯 했다. 짐승이 다니는 길로 밖에 보이지 않는 길이 깨끗한 곡선을 그리고 있거나, 급한 경사가 있는 곳에는 나무 둥치를 묻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거나 했다. 이 성의 정원을 설계한 사람이 누구였던 간에 상당히 별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태양광을 가득 받을 수 있는 화단이나 정원만이 아니라, 이런 잡목림이나 미로와 같은 수풀까지 일부러 만들었다. 더구나 맑은 물을 이용해 작은 샘을 만들기도 했다. 그것도 아무도 지나갈 리 없는 곳에다가. 셰라가 우연히 발견한 이 장소는 조용하고 쓸쓸하며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물론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절호의 연습 장소였다. 지금 셰라의 복장은 시녀복이 아니었다. 머리를 묶고, 움직이기 쉬운 옷을 입고 나무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 일곱 개의 표시에는 이미 연옥이 명중해 있었다. 무서운 표정으로 나무에 걸어둔 판을 노려보고 있던 셰라의 오른손이 한순간 종횡으로 움직였다. 어느 것이나 정확하게 표적에 명중했고, 전에 명중했던 연옥에 부딪혀 금속음을 내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가볍게 숨을 토하고, 그것을 주워 올려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기량도 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더욱 높은 위쪽에 서있는 자가 있다. 그것뿐이었다. 우연히 표시를 붙여둔 이 판자를 발견한 왕비는 반쯤 재미로 연옥을 던져본 적이 있었다. 셰라만큼 정확하게 명중하지는 않았다. 판에는 명중했지만 대부분 표시에선 빗나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던졌을 때, 우연히도 전에 박힌 연옥 위에 가서 맞은 것은 튕겨 나와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의 연옥을 더욱 깊이 박으며, 똑바로 판에 들어박혀서 멈췄던 것이다. 그러자 왕비는 이번에는 신중히, 그 위를 노렸다. 세 번째 던지자 첫 번째로 박혔던 연옥은 판을 뚫고 나와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놀라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얼이 빠져 아무 말도 못했다. 수리검이라면 몰라도 연옥을 연사(連射)해서 판에 구멍을 뚫다니, 괴력도 정도가 있다. 지금의 자신은 똑같은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남자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날, 외출에서 돌아온 셰라를 보자마자 왕비는 ‘얼굴이 험악해’하고 말했다. 자신도 다소 의식하고는 있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지나쳐가면서 칼날을 쑤셔 넣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눈치채지 못했다는 굴욕감이 더 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정을 설명하는 사이에도 얼굴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왕비는 반츠아가 건네준 머리 장식을 보고 예쁘다고 솔직한 감상을 토로했지만, 셰라는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지독한 굴욕입니다.” “그럴까? 어울릴 것 같은데.” “리. 그 남자는 저를 죽이려고 하고 있는 건데요? 죽일 상대에게 선물 같은 걸 해서 뭐하자는 겁니까?” “장난...삼아 한 걸까?” “그렇게 귀여운 짓일 리가요. 이건 아마도 그 남자의 승리선언일 겁니다.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왕비는 금비녀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재미있게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자기 몸을 치장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왕비도 세공의 정밀함에는 감탄한 듯 했다. 셰라를 손짓해 부르더니 그 은발에 가볍게 꽂아놓고 모양을 감상했다. “어쩔 셈이었던 간에 물건 보는 안목은 있네. 기껏 받은 거니까 머리에 꽂아두면 좋을 텐데.” 셰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되니, 싫어하는 남자에게서는 선물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다는 처녀들의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괜찮다면 드릴까요.” “그래서야 선물한 사람한테 미안하지.” 이상한 부분에서 성실한 사람이다. “쓸 생각이 없으면 왜 가지고 돌아온 거야? 그 부근에 버렸어도 됐을 텐데.” 셰라는 날카로운 눈매로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목표로... 삼으려는 게 아닐까요. 이걸 볼 때마다 틀림없이 화가 치솟을 테니까요.“ 그 남자는 적ㄱ이다. 그것도 반드시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될 강적이다. 장식으로 쓸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하물며 자신은 사실 남자이고, 언젠가 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마에 달라붙은 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셰라는 잠자코 연습을 계속했다. 그 남자는 중량형의 연옥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 자신의 기량으로는 그 같은 파괴력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연습으로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 전신이 땀에 푹 젖을 때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한숨 쉴까 생각했을 때에는 태양이 커지고 붉어지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수행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이젠 돌아가서 저녁밥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었다. 여기에서라면 아무도 보지 않는다. 셰라는 연습복을 벗고 얼굴을 씻고 물을 끼얹었다. 여름이 가까워졌어도 샘물은 차갑고 기분 좋았다. 몸을 씻어내고 나뭇가지에 걸렸던 시녀복을 입은 그 순간이었다. 사람의 발이 가지를 밟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뛰어올랐다. 논리가 아닌 전신의 감각에 의해, ‘들켰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곧바로 입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오랫동안 특수한 연습에 몰두해 있던 탓도 있어 이때의 셰라는 완전히 시녀에서 자객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기보다 먼저 연옥을 붙잡고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을 확인하고는 간신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샤미안이었다. 산책을 하려면 좀 더 나은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조용한 숲 속을 걷고 있다 셰라와 마주친 것이다. 평소와 같이 기사복으로 몸을 감싼 샤미안은 경악과 충격을 드러낸 채 셰라를 직시했다. 그래도 무슨 일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왕비의 곁에서 친밀하게 섬기고 있는 상냥한 미소의 시녀가 한 손을 둥글게 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자세가 얼마나 몸에 배어있는지. 시녀의 가면이 벗겨진 그 얼굴이 얼마나 긴장된 전의에 불타고 있는지. 어째서 지금까지 소녀로 보여왔는지가 이상할 정도의 하얀 얼굴이나 단 한순간 밖에 보지 못한 몸은 싸움에 익숙한 소년의 그것이었다. “세상에...” 신음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망연자실했던 것도 잠시 동안이었다. 개암나무빛 눈동자에 분노의 불꽃이 튀고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상기되었다. 남자가 여장을 하고 왕비 곁에서 일하고 있다.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수상했다. 그녀도 부친으로부터 직접 무예를 전수 받은 기사다. 뽑는가 하는 순간에 공격이 들어왔다. 당황한 것은 셰라였다. 연옥 연습이니까 소도(小刀)는 들고 오지 않았다. 그래도 물리치는 건 쉽다. 지금도 손안에는 연옥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샤미안은 간격을 좁히고 좁혀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숨쉴 틈도 없이 칼을 휘두르면, 힘을 조절해서 던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여기사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금의 셰라는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잠자코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치느냐가 큰 문제였다. 인기척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면 샤미안은 큰소리를 내서 사람을 부를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공표되면 아무리 국왕과 왕비가 비호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시녀로 통하기는 어렵게 된다. 서리궁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곳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샤미안이 그 앞을 막아섰다. “무례한 자! 비전하의 곁으로는 가게 하지 않는다!” 샤미안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다. 생초보인 여자가 검을 휘둘러대는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아무리 셰라라고 해도 맨손으로 그 검 사이를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상대가 움직임을 멈춰주면 다행으로 삼고, 가능한 한 약한 힘으로 연옥을 던질까 생각했다. 또 하나의 기척이 끼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거 좋은 분위기가 아니구만요.” 이븐의 목소리였다. 어느 사이엔가 셰라의 등 뒤에서 나타나, 안색을 바꾸고 있는 샤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븐 경!” “거기까지 해두십쇼.” 천천히 말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어왔다. 등뒤로 셰라를 감싸는 형태가 되었다.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왕비의 시녀를 베려고 하는 건 안 좋습니다.” “이븐 경, 물러나 주세요. 그 자는 시녀 같은 게 아닙니다. 처단하겠습니다.” 샤미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분과 분노가 있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독사를 발견하여 퇴치하려 하고 있는데 어째서 방해를 하는 건가, 그런 표정이었다. 이븐은 곤란하다는 듯 여기사를 달래기 시작했다. “샤미안 양, 나쁜 말은 안 하겠습니다. 여기에선 일단 검을 집어넣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 말고 저택에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느긋한 말씀을! 비켜주세요. 아니오, 억지로라도 비키게 하겠습니다!” 머리끝까지 핏발이 서 있었다. 샤미안의 모습을 보기 드물다. 하지만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디보다도 안전하다고 믿고 있던 왕궁에, 그녀가 누구보다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국왕과 왕비의 바로 곁에, 맹독을 가진 독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숨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븐은 더욱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 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경직되어 있는 셰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빨리 달려가 왕비에게 알리고 와라. 나는 어떻게든 이 사람을 집에 돌려보낼 테니까.” 잠자코 끄덕이고, 셰라는 발걸음을 돌려 달려 나갔다. 사라져가는 긴 은발을 확인하고 샤미안은 즉시 마음을 정했다. 왕비와도 국왕과도 친한 이 남자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 시녀가 남자였다는 사실 쪽이 이겼다. “미안해요!” 외침과 동시에 이븐을 향해 공격해왔다. 예리한 찌르기였다. 그러나, 교과서대로의 깨끗한 공격은 이 남자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아무리 샤미안이 뛰어난 여기사라고 해도 이븐과의 기량 차이는 역력했다. 피하는 것도 간단했을 텐데, 이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검손잡이에 손도 대지도 않은 채 스스로 나서서 왼팔로 검 끝을 퉁겨내려는 듯이 받아 낸 것이다. 선혈이 튀었다. 이븐의 왼팔은 깊고 깊이 베어졌다. 게다가 그 충격으로 부러진 검 끝이 안면을 강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모습에, 샤미안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알겠소, 샤미안 양?” 마치 피를 뿜고 있는 왼팔도, 새빨갛게 물든 얼굴 왼편도 개의치 않는 듯한 어조로 이븐은 말했다. “조금 머리를 식히쇼. 성내에서 칼부림은 금지요. 도라 장군의 딸이 안색을 바꾸고 왕비의 시녀를 쫓아다니는 일이라도 생겼다간, 아버님에게 피해가 갈 거요. 왕비도 곤란해질테고, 폐하의 입장도 곤란해집니다.” 샤미안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떨고만 있었다. 남자가 자기 손에서 부러진 검을 가져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 시녀에 대해선 왕비도 폐하도 알고 계시오. 다만, 이리저리 떠들 수 없을 뿐이오. 당신이 소동을 피우면 지독하게 곤란하다 이거요. 알겠소?” 샤미안은 창백한 얼굴로 끄덕였다. 남자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끄덕였다. “아, 알았으니까, 어떻게든 상처를...” 왼팔은 축 늘어진 채였다. 얼굴에서 솟아나는 피는 한쪽 눈과 금발을 흠뻑 적시고 목덜미까지 흘러, 검은 의복을 물들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격렬한 통증이 몸을 덮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남자는 하나밖에 안 남은 푸른 눈으로 미약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건 긁힌 상처야. 그것보다, 알았소? 왕비는 알고 있다고. 금방 이야기를 하러 갈 거요. 저택에 돌아가서 얌전히 있어요.” “제발 부탁이니까 응급처치라도 하게 해주세요!” “됐으니까 저택으로 돌아가!” 아무래도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샤미안은 남자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그러나 상처투성이의 몸이다.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못 봤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알겠지. 잊지 말라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이 말하고 이븐은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은 모든 간섭을 거부하고 있어, 샤미안은 뒤를 쫓을 수가 없었다. 정원으로 뛰어나온 셰라는 급히 본궁으로 향했다. 왕비에게 보고하려고 해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보다 우선 본궁의 국왕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전의 셰라라면 어디까지나 시키는 대로 밖에 움직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무엇이 최선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왕비의 의지가 절대적인 만큼, 샤미안에게 국왕의 의지는 절대적이다. 셰라에게 있어서도 국왕은 주인인 왕비에 다음가는 인물이었다. 왕궁의 시녀로서는 얌전치 못할 정도로 치맛단을 날리며 뛰어가 국왕의 거실로 향했다. 다행히 마침 그곳에서 나오는 왕비와 마주쳤다. 기둥 그늘로 끌어들이기만 한 채로 남김없이 사태를 설명했다. 곤란한 듯 머리를 긁은 것은 왕비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너답지 않은 실수였군.” “죄송합니다. 게다가... 이븐님이 그 장소에 함께 계셨는데, 그다지 안온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더욱 곤란하네.” 이 시녀에 대해선 좀 더 빨리 샤미안에게 이야기해두었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일이었다. 셰라에게는 국왕의 곁에 있으라고 말해두고, 왕비는 일단 서리궁으로 올라가 보았다. 붉게 변한 태양은 이미 서리궁의 뒤에 걸려, 정원에 선 왕비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이븐도 샤미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궁으로 달려 내려가 정문을 지나, 이곽에 있는 도라 장군의 저택으로 가보았다. 이븐은 샤미안을 달래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설득이 잘 되었다면 샤미안은 집에 있을 터였다. 왕비가 방문한 지라 도라 장군이 직접 마중을 나왔지만 샤미안이 집에 있느냐 묻자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수염을 꼬아댔다. “그것이, 바로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만 예배당에 달려 들어가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절 보고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충 애매하게 얼버무려서 도라 장군을 물리고, 왕비는 예배당의 문을 두드렸다. 명문 도라 가(家)에는, 저택 내에 있다고 보기에는 매우 커다란 예배당이 만들어져 있다. 장인이 그 모든 기량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문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모양과 담쟁이에 달린 꽃이나 이파리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 그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샤미안, 안에 있지?” 왕비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열지 않으면 이 문 부순다.” 그리고 나서도 잠시 동안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훌륭한 문에는 미안하지만 이젠 슬슬 부숴 버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나 생각한 순간, 살짝 문이 열렸다. 조심조심 얼굴을 내민 샤미안은 눈이 새빨갰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래?” “비전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샤미안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주세요. 저...,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 버렸어요.” 정신없는 샤미안의 설명으로도 왕비가 사정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한순간뿐이었다. 엄중하게 입막음을 하고,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문의 문지기는 아무 말도 없이 질풍처럼 달려 지나간 왕비를 얼빠진 모습으로 배웅했다. 주변은 계속 어두워져갔다. 그래서 난투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게 되었지만, 왕비의 눈과 코는 피의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핏자국은 사람의 눈을 피해가면서 서리궁으로 이어져 있었다. 왕비는 혀를 찼다. 서로 지나쳐 간 것이다. 사람의 다리가 낼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경사를 뛰어 올라갔다. 셰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별궁은 어둡고, 조용함에 잠겨 있었다. “이븐!” 테라스를 한달음에 건너 거실에 뛰어든 왕비는 그 순간, 숨 막힐 것 같은 피 냄새에 숨을 삼켰다. 중상을 입은 남자는 불기가 없는 거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늦었잖아.”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왕비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살피면서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상처는 뼈까지 닿아 있었다. 자진해서 받아치듯 막아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심각한 피해가 된 것이다. 얼굴은 좀더 심했다. 부러진 검 끝은 우연히도 왼쪽 눈을 직격했던 것이다. 피투성이 얼굴로 이븐은 얕게 숨을 이어나가며 쓴웃음을 지었다. “뻘짓 했다, 내 참.” “말하지 마.” 왕비는 남자의 옷을 왼쪽 어깨부터 찢어내렸지만, 지혈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일어서려다 거실 입구에 나타난 셰라와 눈이 맞았다. 셰라에게 있어서도 피 냄새는 익숙한 것이었다. 말없이 불을 켜고 재빨리 상처에 바를 약과 새로운 천을 준비했다. 그러나 조명에 드러난 상처의 상태에는 한순간,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래도 이 시녀는 졸도하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왼쪽 눈 위에 천을 대고 재빨리 붕대로 감아 올렸다. 그러나 팔 쪽은 어찌 손을 대 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왕비도 끔찍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장 냉정했던 것은 중상을 입은 당사자 본인이었다. “이 팔은 이제 못 써. 자를 수밖에 없다.” 왕비는 다시 신음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외과수술 같은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농을 막기 위해서 유일하게 가능한 처치는 절단하는 것이다. “멀쩡한 때라면 내가 했겠지만... 지금은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그러니까 대신 해달라는 말이었다.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이 상처를 입고 올라온 건가 생각한 순간, 셰라는 오싹해졌다. 공포로 굳어진 얼굴로 왕비를 보았다. 왕비도 셰라 이상으로 굳어진 얼굴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알고 있으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굳은 얼굴로 침묵에 잠겨버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들며 말했다. “여어...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는구만.”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국왕의 커다란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열려 있었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촛불에 비추어지고 있는 것은 옷에 피를 물들인 채 무겁게 벽에 기대어 있는 친구의 모습과 본 적도 없는 공포가 달라붙어있는 왕비의 얼굴. 서둘러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국왕도 초일류의 전사다. 이 남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한눈에 이해했다. “얼간이 같은 짓을 해서, 이 꼴이다...” “이븐...” “마침 잘 됐다. 싹둑 잘라 버려. 우물쭈물하다간 상처가 썩어서 온몸에 퍼져버리니까.” “어떻게 되는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지. 나는 아직 시체가 될 마음은 없다. 지금이라면 팔 한 쪽으로 끝나잖아?” 분명히 그 말대로였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한 팔로 끝내는 것이 나았다. 국왕은 전투에서 손발을 잃은 병사를 몇 명이나 보아왔다. 그러한 병사들을 특별히 후의를 갖고 대접해주기도 했다. 동정이 아니라,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는 의미였다. 붕대를 감은 친구의 얼굴에 떨리는 팔을 뻗었지만, 껴안을 수는 없었다. 무사한 쪽의 오른쪽 뺨을 만져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상처는?” “왼쪽 눈은 못쓰겠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어조였다. 냉정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국왕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남자가 마음 깊이 분노를 느꼈을 때의 한기가 오를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 짓이냐?” 이곳은 격전지나 국경이 아니다. 성 안이다. 전쟁터였다면 이런 실수를 할 이븐이 아니다. 아마도 칼부림을 피하려고 했던 그를 향해 상대가 상관 않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븐. 누가 너한테 이런 짓을 한 거냐?” 복수를 맹세하는 말이었다. 네가 맛본 치욕도 고통도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의하는 말이기도 했다. 괴로운 숨을 내뱉으며 이븐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야.” “뭐라고...?” “내가, 스스로 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잖아? 대체... 이 몸이, 그렇게 간단하게... 당할 리가 없잖냐.” 호흡히 끊어지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괴로워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을 만한 상처였다. 발열과 격심한 통증으로 의식이 혼탁해지면서도, 남자는 무서울 정도의 정신력으로 이어서 말했다. “그런 것보다, 너무 늦기 전에, 빨리 해달라고.” 국왕은 강하게 입술을 깨물고, 신음하듯이 말했다. “참아라.” 입에 담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주저할 틈은 없다. 녹슨 칼날을 휘두르는 군의(軍醫) 따위보다 국왕 쪽이 훨씬 실력도 확실했다. 비장한 결의로 일어서서 검을 뽑으려 하는 국왕을 왕비가 말렸다. “월, 안돼!”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야. 유감이지만 이 팔은 더 이상 쓸 수 없다. 완전히 근육이 잘려 있어.” 신경이 끊어졌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상처가 너무 깊었다. 국왕은 의학적 지식 같은 건 없었지만, 경험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상처는 내버려두면 썩기 시작해 전신으로 퍼져나가 버린다. 그렇게 되지 전에, 아직 몸의 피가 깨끗할 사이에, 치료될 가망성이 없는 환부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왕비는 그래도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을 저지른 건 샤미안이야.” 국왕은 말문이 막혀 눈을 뒤집었다. 그 옆에서 셰라가 긴장으로 몸이 굳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대응을 잘못하는 바람에, 이런...” “그만둬. 지금은 누구 탓인지 하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연해하면서도 왕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국왕은 순식간에 이해했다. 무엇이 원인인지, 누구 탓인지,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한쪽 팔을 잃은 이븐을 볼 때마다 샤미안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어쩌라는 거냐! 무슨 방법이 있다고?! 이대로라면 목숨이 왔다갔다 한단 말이다!!” “알고 있어!” 왕비는 몸을 떨고는 이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상자 눈앞에서... 부부 싸움이냐.” 아직도 그런 농담을 해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안색은 새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왕비는 마음을 결정한 듯 말했다. “이븐. 팔을 자르는 건 조금 기다려 줘. 그건 언제라도... 아니, 조금 늦어도 괜찮을 거야. 그 전에 시험해 볼 게 있어.”“......?” “잠깐 참아.”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서 왕비는 식은땀에 젖어있는 남자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 대고는 그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하나 남은 새파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남자는 미약하게 웃어보였다. “왠... 떡이냐.” “가만있어. 이제부터 비장의 수단을 써본다. 잘 되면 상처는 나을 거야.” “잘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 국왕이 물어보자, 왕비는 어째서인지 검을 뽑아 그 자리에 꽂아 세우고, 돌아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이븐도 숯 덩어리다.” 8장 왕비는 다리를 내던진 채 앉아있는 남자의 오른편에 다리를 나란히 하고 앉아 양손은 굳게 쥐어 무릎 위에 얹었다. 검은 이븐의 왼쪽에 꽂아두고 있었다. 국왕과 셰라는 왕비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국왕이 먼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셰라도 왕비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에 대답하듯 두 마리 세 마리 이어져, 즉시 대합창이 되었다. 늑대의 울음소리는 여기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익숙해져있을 텐데 오늘은 그것이 왠지 오싹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왕비는 질끈 눈을 감고 열심히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의 깊에 왕비를 바라보고 있던 셰라는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호흡이 생각처럼 되지 않고, 옷이 무척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 원인을 알고는 아연해졌다. 더운 것이다. 아직 6월인데 마치 한여름처럼 열기를 느꼈다. 게다가 주변의 경치가 흔들려 보였다. 촛불의 조명도 벽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모습도, 왕비도 그랬다. 비틀리고 우그러져 보였다. 이 현상에 어이가 없었다. 한낮이라면 몰라도 밤에, 실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놀라서 국왕을 보았다. 역시나 땀을 흘리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땀투성이가 되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왕비였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 어깨가 크게 오르내리고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맺혀있었다. 어떤 격렬한 전투에서도 이 사람이 이렇게 호흡을 흐트러뜨린 적은 없었다. 그 괴로운 호흡 속에서 왕비는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밖에 나가 있어.” “싫다.” “위험해.” “그렇다면 더욱. 설사 이혼당한다고 하더라도 자리를 비울 순 없다.” 저도, 하고 말하려다가, 셰라는 자신의 혀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몸도 그랬다. 전신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여 있는 것 같다기보다, 몸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기능을 자신 이외의 누군가에게 장악당하고 있는 듯한, 그런 감각이었다. 눈은 보였다. 귀도 들렸다. 그런데 다른 부분은 손가락 하나 구부릴 수 없고, 도움을 청하고 해도 입도 열리지 않았다. 핏기가 빠져나갔다. 필사적으로 몸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발버둥쳤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황상태에 빠지려던 순간, 셰라의 입이 제멋대로 열리고 본인의 의지에 반해서 이렇게 말했다. “힘을 억누르시게, 왕비.” 그것은 평소 셰라의 목소리와는 닮으려야 닮을 수 없는 노인의 쉰 목소리였다. 국왕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셰라를 보았다. “그 목소리는 들은 적이 있군... 파로트의 유령.” 대답하고 싶어도 셰라의 혀는 다른 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것은 의식뿐이었다. 그 의식은 국왕의 말을 듣고 저항을 그만두었다. 국왕이 알고 있는 성령이라면 예전에 자신의 위기를 왕비에게 전해주었던 자이다. 어린아이 시절 보았던 가짜와는 다르다. 틀림없는 진짜라고 반츠아도 보장했었다. 그런 그들이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사용해 왕비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셰라의 자유를 빼앗은 성령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힘을 억누르시게. 이대로라면 별궁 채로 타버리니.” “할 수 있으면 벌써 했어!” 왕비는 외쳐서 대답했다. 그 태도에는 여유가 없었다. 험악한 얼굴에 몇 줄기의 땀방울이 흐르고, 꽉 쥔 주먹 위에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왕비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셰라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기 입장도 잊고, 무언가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은 이곳에 있을 터였다. 다시 입에 제멋대로 열렸다. “왕비, 잊지 마시오. 오늘 하늘에는 만월이 있소.” 그 말에 왕비는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이 곳에도 달이 있지. 지금은 아직 얀한 어린애와 같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니.” 자신의 입이 생각해 보지도 못한 말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무척이나 묘한 기분이었다. “너무 책임감을 느끼지 마시오. 모든 것을 혼자서 하려고 생각하지 말지니.” 무엇이 어찌되고 있는지, 셰라는 전혀 알지 못했다. 틀림없이 자기 입이 내뱉는 말인데도 어딘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왕비에게 눈길만으로 탄원했다.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무언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나요, 하고 눈길만으로 물어보았다. 왕비는 웃음으로 대답하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미소에 조금 안심했다. “리!” 국왕의 외침에 셰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이 움직였다. 오히려 그것에 놀랐다. 그러나 국왕이 가리킨 것을 보았을 때는 좀 더 놀랐다. 바닥에 꽂아둔 왕비의 검이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만이 아니다. 왕비도. 이마의 은색 띠, 그 중심에 있는 선명하게 짙은 녹색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돌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냥 물체일 텐데 번쩍번쩍하고 빛이 닿은 수면처럼 빛나고, 화염을 압축시켜 집어넣은 것처럼 흔들려, 그 자체가 생물인 것처럼 맥박치고 있는 것이었다. 국왕도 셰라도 얼이 빠졌다. 물론 이런 현상을 본 적은 없다. 호응하듯 하얀 검날도 밝기를 더하고 있었다. 이쪽은 막 내린 눈처럼 사람의 눈을 찌르는 듯 부셨다. 보고 있는 사이에 녹색의 빛은 왕비의 온몸을 감싸고, 금발이 더욱 빛을 더하여 불타는 아지랑이에 감싸인 왕비의 눈꺼풀이 조금씩 열렸다. 그 눈동자도 또한 이상할 정도로 번뜩이고, 자신의 주먹을 진지한 표정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천천히 쥔 주먹을 핀, 그 손바닥에서 눈부실 정도의 빛이 튀어나왔다. 국왕과 셰라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을 정도의 강한 빛이었다. 왕비의 손바닥 위에서 전광(電光)이 춤추고 있었다. 마치 작은 번개를 얹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빛으로 만들어진 작은 물고기와도 닮아 있었다. 기세좋게 뛰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뒤집고, 왕비의 손바닥이라는 ‘물’에 가라앉고는 다시 뛰어 오른다. 이븐은 상처의 아픔도 잊었는지 얼이 빠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가 천천히 그 손바닥을 자신의 팔에 대려고 했을 때는 자유롭지 않은 몸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잠깐... 잠깐 기다려, 어이.” 그런 말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왕비의 전신은 더욱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은 눈을 꽉 감고 얼굴을 가렸다. 이런 빛을 똑바로 보았다간 실명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강한 섬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빛도 번개도 사라져 있었다. 주변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나와 똑같은 밤중의 서리궁이었다. 어두운 정적 속에서 촛불의 불빛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딘가 먼 곳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셰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까까지의 열기가 거짓말인 듯 밤의 냉기가 주변에 가득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옷은 그것이 현실이었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어두운 바닥에 왕비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리!” 국왕이 달려가 안아 일으키려 했다. 왕비는 그 손을 떨쳐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축 처져 힘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옆에서는 이븐이 마찬가지로 늘어진 모습으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왼팔을 가볍게 만져본 것만으로 왕비는 미소를 떠올렸다. “잘됐다...” “뭐가?” “직접 봐봐.” 일어서려던 왕비는 크게 비틀거렸다. 황급히 국왕이 부축하려 했다. 그 팔을 다시 한번 뿌리쳤다. “됐어. 조금 쉬면 나아. 젠장...” 무엇에 대한 욕설인지, 왕비는 갑자기 목소리를 거칠게 했다. “알겠냐. 두 번은 안 돼. 부탁한다고 해도 두 번 다시 할 수 없으니까!” 셰라는 아직 주저앉은 채로 훌쩍 별궁 밖으로 나가버리는 왕비를 바라보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간신히 이러섰지만 왠지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발을 내딛으면서 왕비의 뒤를 쫓아갔다. 부드러운 풀 위에 대자로 누워있는 왕비는 열심히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온몸이 납처럼 무겁고 눈앞으로 팔을 들어 가리는 것조차 귀찮았다. 덤으로 그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왕비의 입술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단짝이 떠올랐던 것이다. ‘네 힘은 너무 강해.’ 그러는 자기는 파괴신이라고도 사신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던 주제에, 진지한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오랜 주문도 특별한 의식도 필요 없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손을 쓰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거나 멀리 날려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언제 붕괴할지 알 수 없는 제방과도 같은 것. 혹은 아주 작은 소리에서 노도처럼 밀려 내려오는 산사태와 같다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건 네가 인간을 싫어한다는 거야.’ 무의식적인 노여움이나 증오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힘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없애버리던가 사용하지 않게 봉인해버릴 수 없냐고 묻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양쪽 모두 무리야. 하지만, 간단히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거라면 가능하다고 봐.’ 그 친구가 자신의 마음에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암시는 훌륭하게 작용해, 그때부터는 ‘어떤 일정한 조건’이 없이는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열쇠>를 주었다. ‘알겠어? 나는 네 힘에 문을 달고 자물쇠를 걸었어. 그 문이 네 힘을 막아주고 있어. 사용하고 싶어지면 그 열쇠로 문을 열면 돼. 간단하게 열리니까. 다만 열쇠 없이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말 것. 위험하니까 말이야.’ ‘알았어. 절대 안해’하고 9살의 자신은 대답했었다. 지금은 그 열쇠가 없다.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저쪽에 두고 와 버렸던 것이다. 왕비는 풀 위에 드러누운 채 한숨을 쉬었다. 그 단짝이 말렸던 이유가 이거다.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하늘에는 은쟁반과 같은 달리 빛나고 있었다. 저것 덕분에 어떻게든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왕비만의 <달>도 그렇다. 옆에서 끼어들었던 성령은 맘에 들지 않지만, 인사는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났다. “무모한 짓을 저질렀구려, 왕비.” 마법가의 노파의 목소리였다. 보통 때라면 반사적으로 일어났을 테지만, 왕비는 지금은 귀찮은 듯 고개만 그쪽으로 돌렸다. 노파의 모습은 오른쪽 앞에 있었다. 검은 천을 완전히 둘러쓰고 쭈그려 앉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물론 실체는 아니다. 본체는 마법가의 화로 앞에 있을 터였다. “보고 있었어?” “싫어도 보게 되지. 코랄은 우리들의 안마당이니까 말이우. 거기에서 그런 거창한 짓을 하신 거니까, 코랄 이외의 술자들 사이에서도 약간 소동이 벌어져 버렸다우.” “미안해... 비상사태였어. 이젠 안 할 거야.” “그러길 비우. 동료들의 힘의 균형이라는 것이 무너질 것 같아서 말이우. 그건 그렇다 치고, 왕비여.” 노파의 목소리에 깊은 수심이 더해졌다. “그다지, 이쪽 사람들에게 깊이 관여하지 마시구려.” “......” “그만큼, 이별이 괴로워질 거라우.” 대지에 누운 채, 왕비는 미소를 흘렸다. “이별인가...”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기보다 잊고 있었다. 자신은 이 세계에선 외부인이고, 언젠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알고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으로 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4년이나 흘렀다. 무척이나 먼 옛날 일로 생각되었다.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왕비의 눈 앞에 갑자기 은빛 실이 내려왔다. 셰라가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그래. 너는? 몸이 무겁지 않아?” “괜찮습니다.” 누워있는 왕비의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이제 노파의 환영은 없었다. “미안하다. 말려들게 해서...”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 성령은 제가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해줬어. 덕분에 살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띠며, 셰라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제가 뭘 할 수 있었던 걸까요?” “뭘 할 수 있었던 걸까.” “......” “내 고향에서는 말이야. 달은 태양을 돕고, 태양은 달에게 힘을 부여해 주게 되어 있어. 마법가의 노파가 말하는 것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은반을 올려다본 채, 왕비는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 몸에서 힘이 빠져 있지?” “조금... 입니다만.” “그래, 뭐 그렇다는 거야.” 셰라는 여전히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듯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왕비의 피곤한 듯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뭘 좀 가져다 드릴까요? 술리던가, 아니면 엔도바 부인이 주신 차라도...” “차가 좋겠다. 그건 속이 시원해지니까.” “알겠습니다.” 일어서려던 셰라에게 왕비는 갑자가 어조를 바꿔서 말을 걸었다. “셰라.” “예.” “지금 건 말야, 원래대로라면 금지된 방법이야.” “......” “나는 이곳에서 그런 힘을 쓰면 안 되는 거였어. 없었던 일로 해 두고 싶어.” 잠자코 끄덕였다. 왕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븐님은 공격당한 적이 없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그래. 이븐의 얼굴을 베었던 검 끝은 튀어서 그 근처에 떨어져 있을 거야. 핏자국도 남아 있고.” 그러한 뒤처리라면 식은 죽 먹기다. “알겠습니다. 차를 가져오고 나서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먼저 갔다와 줘. 아무튼 나는 이런 꼴이니까.” 열 명을 계속해서 베어 넘기고 나서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말과 함께 돌아다니던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도 귀찮은 듯했다. 역시 차를 먼저 가져오는 쪽이, 하고 말하려다가 이 사람의 지시를 다라야 한다고 생각을 고쳤다. 일어선 셰라에게 왕비가 누운 채로 손짓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 번 자리에 앉았다. 왕비의 손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붙잡고 끌어당겼다. 셰라는 도중까지는 얌전하게 끌려갔지만, 얼굴과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시점에서는 놀라서 황급히 떨어졌다. 어떻게 생각해도 입술을 겹치려고 했던 거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리?!” “놀리자는 게 아냐.” 그렇다면 더욱 곤란하다. 당황해하는 셰라를 곁눈질하며 왕비는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너, 피곤하잖아? 피로회복에 좋다고, 이건.” 셰라는 뭐라고도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이윽고 조심조심 물어보았다. “키스가... 말입니까?” “그래.” 누워있는 왕비를 셰라는 빤히 쳐다보았다. 왕비도 가만히 셰라를 올려다보다가 의외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물어뜯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아픈 곳을 찔렸다. 아까 이븐은 왠 떡이냐고 했지만, 장난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모른다. 양 손발을 짐승의 사지처럼 사용해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사람에게 덤벼들던 그 모습을. 그렇지 않아도 이 사람은 <왕비>이다. 쉽게 그런 짓을 해서 좋을 리가 없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는 그게... 아직, 수행이 부족해서... 실례합니다!” 겨우 그렇게만 말하고 도망치는 토끼처럼 뛰어가 버렸다. 별궁 안에는 의식을 되찾은 이븐이 자신의 왼쪽 팔을 져다보고 있었다. 국왕도 같은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냐?” “아픈 게 사라졌는데.” 조심스럽게 말했다. 드러낸 왼팔은 아직 피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이븐은 기쁘다기보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격통이 엄습해오던, 죽어버렸을 터인 손가락 끝을 조심조심 움직여 보았다. 둔한 움직임이지만, 자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이븐은 다시 털썩 벽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로 얼토당토않은 놈을 왕비로 얻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국왕은 얼굴을 감싸고 있는 피투성이 붕대를 신중하게 풀어보았다. 말라붙은 피딱지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짓눌려버렸을 터인 푸른 눈이 깜빡이며 국왕을 보았다. 깊은 숨을 내쉬고, 부서진 것을 만지는 듯한 손놀림으로 그 얼굴을 만져보고, 왼손을 잡았다. 손가락 끝까지 따뜻하고 피가 통하고 있었다. 약하지만 국왕의 손을 마주 잡아왔다. “살아있구나.” “애초부터 죽을 만한 부상은 아니었다고.” “아니, 이 팔 말이야.” 근육이 잘려지고 뼈가 끊어졌던 팔이 생명을 되찾다니, 국왕의 경험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븐도 알고 있었으리라.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요즘의 왕비님은 마법까지 쓰시는 모양이다... 팔 한 짝 공짜로 얻었네.” 공교롭게도 국왕은 도저히 웃어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자신이 절단할 뻔했다고 생각하면 이 온기가, 이 손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극히 자연스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이븐이 눈을 크게 뜨고 간지럽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임금님이 그런 짓 하는 거 아니다, 임마...” 손등에의 입맞춤은 본래 신하가 주군에 대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분은 어때.” “나쁘지 않아. 약간 좀 노곤하지만...” 분명히 아까까지 격통과 싸우고 있던 남자는, 지금은 피로에 지친 듯이 보였다. 혼탁한 의식을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인 듯 고개를 흔들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 키스가 강렬했어. 불덩어리라도 마신 것 같은 기분이다.” 란바에서의 입맞춤을 떠올리고 국왕은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나는 그런 기분은 안 되던데?” 그러자 이븐은 지친 얼굴에 놀리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폐하. 이제와서 변명을 해보자고 한다면, 그건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꼼짝도 못하는 저한테 왕비가 제멋대로 한 거니까 부디 간통죄로 저를 벌하는 건 좀 봐주십쇼.” “바보자식.” 웃으며, 짧은 금발 머리를 거칠게 문질렀다. “조금 쉬어라. 네 몸에 어떤 처치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넌 쉬어야 해.” 거실의 긴 의자에 친구를 눕혀놓고, 국왕은 밖으로 나왔다. 왕비는 아직도 지면에 누워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눈을 감고 얕은 호흡을 하며 정말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 앉아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닿을락말락 하는 순간에, 눈을 감은 채인 왕비가 말했다. “지금의 나한테는 손대지 않는 게 나아.” “화상이라도 입는 거냐?” “어쩌면.” 이걸로 간단하게 물러설 국왕이 아니다. 굵은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머리카락을 바로 해주고, 이마에 손을 댔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열이 있구나.” “금방 괜찮아져.” 왕비는 그대로 녹색의 융단 위에 누워있었지만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너,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나를 만지는군.” 무섭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바위도 부수는 괴력에, 인간을 물어뜯어 죽이는 이빨에, 이번에는 빛을 내기까지 한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것이 보통이다. 국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지. 네가 어떤 자이던, 나는 은인을 무서워할 정도로 염치없는 놈은 아니라고.” “......”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 변하기는커녕,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저 팔과 눈을 살려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븐을 위해서도, 샤미안을 위해서도.” 아무리 이븐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신경쓰지 말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을 샤미안이 납득할 리가 없다. 자기 탓이라고, 자기가 성급한 행동을 한 탓에 불구의 몸이 되어버렸다고 평생 후회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누운 채, 왕비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월.” “왜.” “나는 말이지, 이게 전장에서의 상처였다면 내버려뒀을 거다. 정신없이 피곤해진다고.” “그런 것 같군. 아직 못 일어나겠냐?” “기분이 좋아. 조금 더... 게다가 원래는 이런 일 하면 안 되는 거야. 지금도 마법가의 할멈한테 잔소리도 들었고 말이야.” “지금, 여기에서 말이냐?” “만월이 있어. 그림자를 여기까지 보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야.” “아하...” “나 같은 외부인이 힘을 쓰는 건 혼란의 원인이 되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참아달라더군.” “흐음... 마법사에게도 구역 같은 것이 있는 걸까?” “그런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응?” “너는 상처 입거나 그러지 마?” 진지하면서도 쑥쓰러운 듯한 울림이었다. 국왕은 미소를 띠고 왕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네 입맞춤은 불덩어리를 삼킨 것 같다고 이븐이 그러더군. 어째서일까?” “그건 일종의 액막이. 너한테 했던 건 그냥 키스. 아까도 셰라에게 피로회복용 키스를 해주려고 했는데, 도망쳐 버렸어.” “입맞춤에도 그런 종류가 있는거냐?” “내 경우에는. 저 세상 가는 용도 있어.” 빙그레 웃는 왕비에게, 국왕은 진지한 얼굴 그대로 위를 덮어 입술을 겹쳤다. 왕비는 눈을 깜빡였다. 더불어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너 말이야! 남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뭔 짓 하는 거야!” 평소의 왕비라면 즉시 뛰어 일어나 한방 날렸을 참이다. 지금은 분하지만, 일어설 힘도 없었다. “아니, 불을 삼킨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 거지만... 이전하고 다르지 않네?” “피곤한데 일일이 할 수 있을 거 같냐.” “힘이 필요한 거냐? 그거 또 희한한 키스로군.” 하고, 국왕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저세상용은 사양하고 싶지만, 액막이용이라면 언젠가 나도 좀 해주면 기쁘겠다. 나는 이래봬도 네 남편이니까 말이다. 그 정도 권리는 있겠지?” 왕비는 더욱더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채 대꾸했다. “내 참... 페르난 백작이 살아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참이다. 어떻게 키우면 이렇게 묘한 놈이 나오는 거냐? 인간 중에서는 진품 중에 진품이다.” “칭찬하는 걸로 받아두마. 그것보다 언제까지 여기에 누워있을 셈이냐? 졸리면 방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네가 피곤하게 만들고 있잖아...” 열쇠가 없는데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려고 했으니, 아무래도 무리가 생긴다. 몸이 바닥에 꺼지는 것 같았다. “일어나지도 못하겠으면 안아다 줄까?” 다시 진지하게 말한다. 왕비는 최고로 끔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짓을 하면 진짜 이혼이다?” “그건 곤란해. 왕비에게 이혼당하는 국왕 같은 건 전대미문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여기에서 잔다는 것도 곤란해. 네가 늑대에게 먹히거나 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만일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국왕은 개의치 않고 가녀린 몸매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왕비의 격렬한 항의로 그것은 포기했다. 전사를 자부하는 왕비에게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제멋대로 옮겨진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간신히 스스로의 다리로 일어섰다. 국왕은 왕비를 부축하여 방까지 데리고 갔다. 다음날 아침, 침착함을 되찾은 샤미안은 처벌을 요청하기 위해 국왕의 앞에 나섰다. 독립기병대장은 신분은 높지 않지만, 국왕의 심복이라고 할만한 존재다. 그 심복에게 성 내에서 검을 들이밀어 중상을 입힌 것이다. 왕비는 잠자코 있으라고 했지만 숨기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의 전말을 상세히 설명하고, 샤미안은 똑바로 잘라 말했던 것이었다. “처벌을 내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때, 국왕은 서리궁에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왕비의 시녀 한 사람이 요리나 시중을 들고 독 시험도 해보지 않는다는 점도 있어, 시종들은 국왕이 서리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을 흔쾌히 생각지 않았다. 폐하가 식사를 하실 거라면 본궁에서 사람들을 보내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왕비도 국왕도 서리궁에 다른 요리사나 독 시험 역을 두는 것을 완고하게 거절했다. “가끔은 숨통이 트게 해줘도 괜찮지 않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이날 아침도 서리궁에서 느긋하게 지내고 내려온 국왕은 기분 좋게 샤미안을 맞이하여, 그 이야기를 성실하게 듣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샤미안 양. 실례지만,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애매한 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죄는 저에게 있습니다. 부디, 아버지에게는 이때까지 대로의 봉공(奉公)을 허락해주십시오.” 피보호자가 범한 죄에 대해서는 가장이 엄격하게 책임을 추궁당한다. 자식이 저지른 죄는 부친에게, 아내가 범한 죄라면 남편에게, 하인이 범한 죄라면 주인에게 묻는다. 그런 만큼 가장의 권한이 강하고 가족을 관리하는 일이 바람직하게 되어 있다. 몰랐다, 관계없는 일이라는 말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샤미안도 아버지의 명예는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햇빛이 들어오는 밝은 방안에서 샤미안은 굳은 얼굴로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고, 국왕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편히 앉아 있었다. 옆에서 보자면 묘한 대비였다. “하지만 말이지, 샤미안 양. 솔직히 그대가 하는 말의 요점을 나는 잘 모르겠소.” “폐하!” 그런 느긋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샤미안이 초조해 하고 있을 때, 휘파람이라도 불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븐이 나타났다. “어, 미안합니다. 말씀 도중이셨습니까.” 국왕은 웃는 얼굴로 친구를 맞이했지만, 샤미안은 유령이라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이븐을 보았다. “어, 샤미안 양. 어쩐 일이십니까? 안색이 안 좋구만요.” 이븐이 하는 말 따윈 샤미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평소대로 검은 옷에 덮여있는 몸에 험악한 시선을 향하더니,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옷을... 벗어 보세요.” 이것에 이븐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 요청입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미혼 여성이 남자에게 던질 말이 아닙니다 그려? 하물며 이런 대낮에.” 재미있다는 듯이 샤미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최소한 조금 더 어두워지고 나서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말씀해주신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습니다만?” “옷을 벗고 왼팔을 보여주세요!” 개암나무빛 눈동자가 무섭게 남자를 노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험악함에 이븐도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긁더니, 어떻게 된건가? 라는 식으로 국왕을 보았다. 국왕도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걸로 마음이 풀린다면 벗어보면 어떻겠느냐고 덧붙였다. 반쯤은 투덜거리며, 또 반쯤은 즐기면서 이븐은 윗도리를 벗고, 긴 소매의 안쪽에 입은 옷도 벗어 상반신을 드러내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러면 마음에 드시겠습니까?” 단련된, 꽉 짜여진 듯한 몸이었다. 그 피부는 단순히 햇볕에 탄 것만이 아니라 미약하게 금빛도 두르고 있었다. 서남인(西南人)의 피가 섞인, 아름다운 피부색이었다. 샤미안은 뚫어져라 그 몸을 바라보았지만, 있어야 할 상처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그럴 리가...” “뭐가 그럴 리가, 라는 겁니까?” “저는 어제 당신을 베었단 말이에요!” 이븐은 실로 귀엽게 푸른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저를? 대체 왜?” “그 시녀가... 그래요, 셰라의 일로...” 말하면서도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자신감을 잃은 어조였다. “그 일이라면 지금 막, 위에서 듣고 오는 길이다. 내가 이야기하지.” 헛기침을 하고 국왕이 말을 꺼냈다. “분명히 그대도 보았겠지만, 그 시녀는 사실은 소년이오. 물론 공적으로는 소녀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약간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알고 있듯이 보통 소녀로는 서리궁 생활도 왕비의 시중도 도저히 해내질 못해요. 그렇다고 왕비를 혼자서 놔둘 수도 없는 일이고. 그 소년은... 시녀라고 해야할지, 그런 의미에서는 실로 귀중한 보물이요. 약간 별난 무술도 터득하고 있어서 호위로서도 힘이 되어주고 있소. 지금까지 그대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던 건 미안하지만, 아버님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은 일이니까. 아무튼 아버님 성격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라고 즉시 벼락이 떨어질 테니 말이야.” 이븐이 어깨를 으쓱이고, 틀림없이 그럴 거다, 라고 웃었다. “달리 이 일을 알고 있는 건 종제님과 라모나 기사단장 뿐이요. 그렇게 알고 있어주면 고맙겠는데, 어떻겠소?” 물론 비밀은 지키겠다고 샤미안은 맹세했다. 국왕과 왕비가 알고 있다면 자신이 이러저러하게 이야기할 일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으로 고개를 젓고, 불안한 얼굴로 이븐을 보았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보상할 수 있을지, 사죄를 위해 무엇을 해야 좋을지 하고...” “샤미안 양. 그건 전부 꿈이에요. 제 몸 어디에 베어진 상처가 있습니까? 뭐하면 아래도 벗어볼까요?” 이것에는 용감한 여기사도 실로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말렸다. 이븐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알겠습니까. 저는 보시는 대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없었던 일에 사죄라느니 보상이라느니 말하는 게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신경 쓰는 건 그만두십쇼.” 푸른 눈동자 두 개가 나란히 샤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갈색의 피부에 잘 어울리는, 한여름의 바다와 같은 깊고 맑은 푸른색이었다. 왠지 몸이 확 뜨거워졌다. “저어, 그럼, 그걸로 저기... 실례합니다.” 그런 말을 횡설수설 중얼거리더니, 샤미안은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만 남자, 국왕과 그 친구는 한숨을 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걸로 속여 넘긴 걸까?” “무리일 거다. 하지만 증거인 상처가 어디에도 없는 이상, 납득하지 않을 수 없겠지.” 옷을 입으려던 이븐은 자신의 왼팔에 시선을 멈추고, 새삼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참...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못 믿었을 거다.” “하지만 이븐. 지금이니까 말하지만,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냐? 너라면 샤미안 양을 붙잡아 말리는 정도는 간단하게 했을 텐데.” “임금님이 바보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성안에서 진검을 휘두르는 건 위법이잖아.” “그럴 때마다 팔 하나씩을 버려서야 내 신경이 못 버텨! 이것도 지금이니까 말하지만... 그대로 네 팔을 자르는 꼴이 되었더라면 지금처럼 샤미안 양을 대할 수 있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다, 난.”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걸 이븐은 알고 있다. 둔하고 단순한 바보로 보여도 국왕으로서의 자질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갖추고 있는 남자다. 단순히 감정은 억누르고 샤미안을 용서하리라. 애초부터 의협심이 강한 남자지만, 페르난 백작의 사후에는 특히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부당한 폭력에 대해 강한 반응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때의 억울함이 되살아나는 건지도 몰랐다. 이븐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걱정을 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소리 마라. 그건 단순히 내 실수, 그것도 왕실수다. 받아칠 생각이었던 거야.” “맨손으로 검을?” “그러니까, 수갑(手甲)을 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란바 전투에서 봤잖아? 타우제의 수갑은 화살도 못 뚫는 좋은 제품이라고. 가는 검 정도라면 퉁겨내는 것도 가능해. 그렇게 할 셈이었다 이거지, 얼빠지게도.” 이븐은 매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다, 하고 생각한 순간 퍽 하고 당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뭐어, 내가 한 일이니까, 우는 소리도 못하는 거지.” 국왕은 반대로 미소짓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 남자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나를 위해서도 왕비의 건강을 위해서도 조금 더 잘 대처해 준다면 고맙겠다.” “마음에 콱 새겨두겠습니다, 폐하.” 이븐은 장난스럽게 경례해 보였다. 본궁을 나와 지나다니던 서리궁으로 가는 길을 익숙하게 올라가다, 샤미안은 멈춰 섰다. 잠시 동안 그곳에 서 있었지만, 빙글 등을 돌려 본궁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호흡을 고르고, 다시 한번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위까지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리궁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한숨과 함께 바라보고 터벅터벅 발길을 돌렸다.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그 목소리에 샤미안은 펄쩍 뛰었다. “발로님! 언제부터 그곳에...” “당신이 세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았지만, 그 전부터 산책을 하고 있었달까요?” 샤미안은 새빨개졌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는 게 된다. “저어, 발로님. 혹시... 괜찮을까요, 검술에 대해서,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만.” “이거 드문 일이군. 물론 미녀의 초대라면 얼마든지 시간은 내드리죠. 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약간 매력은 떨어집니다만.” 그런 농담도 지금의 샤미안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시종에게 차를 날라 오게 하고, 사람들을 물린 뒤 두 사람만 남자,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여쭤보겠습니다만, 뼈까지 베어진 상처가 하루만에 완치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발로는 한쪽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고, 부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일어날 리 없소. 자연의 섭리에 반합니다.” “예에... 그렇지요. 정말 그래요. 제 얘길 들어보세요.” 샤미안은 어제의 사건에 대해 대략적으로 발로에게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한 것이다. 이 사람이라면 그 시녀에 대한 일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비범한 검술을 사용한다. “분명히 베었어요. 지금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모습이 똑똑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걸요. 왼쪽 눈은... 왼팔도, 이젠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을 쥔 이래 이렇게 무서운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어요. 전장에서 적을 베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밤새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얼굴에도 팔에도 긁힌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밀짚머리 말대로 당신이 백일몽을 본 거겠지요. 그걸로 됐지 않습니까.” “예에...” 납득이 간건 아니었다. 발로가 말한 듯 뼈까지 닿은 상처가 하루만에 완치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언가의 착각이었을 것이라고 납득할 수 없어도 자신에게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발로는 낮게 웃으며 아직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샤미안에게 말했다. “게다가 말이오, 샤미안 양. 이건 결코 당신을 가볍게 여겨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을 말할 뿐인데, 밀짚머리의 실력은 최소한 당신보다는 위입니다. 나에겐 한참 못 미친다고 해도.” 샤미안은 뛰어오르듯이 몸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로?!” 이것이 발로가 말한 앞부분을 가리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의심스럽다면 아버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나는 실제로 본 것이 아니지만 아버님이 말씀하셨던 일이니까. 밀짚머리는 탄가의 중장기병을 상대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고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의 갑옷들을 말 위에서 떨어뜨렸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만으로 알 수 있소. 실례지만, 당신도 같은 걸 할 수 있겠습니까?” 샤미안은 솔직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뛰어난 검사다. 신참 기사를 다섯이나 열 명 정도는 어려움 없이 쓰러뜨리리라. 그러나, 실제로 단련된 육체와 빼어난 기술을 가진 남자와 비교하자면 역시 한 단계 떨어진다. 그것은 여자의 몸을 가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밀짚머리가 당신에게 당한다는 건 약간은 기이하게 들립니다. 당신에게 상처 입히지 않고 제지하는 것도 가능했을 테니까. 그 남자도 부상을 두려워할 정도로 겁쟁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베어질 정도의 바보도 아니잖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샤미안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그 분은 폐하의 친위대장, 저 같은 자에게 베일 리가 없네요.” 그리고 무엇을 떠올렸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다행히도 큰 부상을 경험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부하들 중엔 죽느냐 사느냐 하는 큰 부상을 극복한 자가 몇 명이나 있습니다. 그건 제 꿈이었겠지만, 그 정도로 과감하게 고통을 견뎌내는 사람은, 호걸이 많다는 아버님의 부하들 중에서도 한 명도 없었어요.” “그건, 글쎄요. 단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 건지도 모르지요.” 샤미안은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로님. 원래대로라면 발로님은 제가 아니라 로자몬드님의 상대를 하셔야 할 텐데.” “아니, 그게 웬만해선 상대를 해주지도 않는군요. 당신 입으로 한번 쯤 나의 가치라는 걸 이야기해주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게 진언해 드릴게요.” 발로는 어딘가 굳은 미소를 띠며 일어선 샤미안을 복잡한 얼굴로 배웅했다. 9장 한없이 넓은 본궁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던 이븐은 껄끄러운 틸레든 기사단장과 마주쳤다. 내심 혀를 차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지나치려고 했지만, 상대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눈짓만으로 이야기가 있다고 전하고 중정으로 나가자는 몸짓을 해보였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뒤를 따랐다. “샤미안 양에게 당했다면서?” 마음 속으로 혀를 차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보였다. “거야 뭔가의 착각이겠죠. 나는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샤미안 양은 어디서 악몽이라도 꾼 거겠지요.” 발로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너와 형님이 모여서 그 듣기 괴로운 설명을 샤미안 양에게 들려준 모양이지만, 그녀는 납득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녀 역시 저래 봬도 몇 번이나 전장을 경험한 기사다. 전투에 익숙한 자가 피 냄새나 베었을 때 손에 남는 감촉을 착각할 리가 없는 것이니까.” 이븐은 아주 잠시 탐색하는 눈초리로 발로를 보았지만, 곧바로 평소의 시치미 떼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이렇게 당신하고 세상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을 수가 없을 텐데 말씀입니다?” “나을 리가 없는 상처가 사라진 원인이라면 짚이는 데가 있지. 혹시 저 왕비가 뭔가 한 거 아닌가?” “농담도.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리가 없잖소.” 그러자 발로는 자신도 모르게 망설이는 듯한 진지한 눈초리를 이븐에게 향했다. “저 왕비가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쯤은 성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급병사까지 가면 진심으로 승리의 여신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니까.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래도 꿈 이야기로 해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일이었나?” 말이 끊겼다. 이렇게 정곡을 찔러서 말하면 대꾸할 도리가 없다. 이븐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상처를 치료한 왕비의 일은 어디까지나 예외이니까 없었던 일로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이븐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서리궁에 도착했다. 샤미안만 달래두면 비밀을 지키는 건 어렵지 않다. 국왕도 저 소년도 그렇게 입을 맞춰두고 있었는데, 이 남자의 귀에 들어간 건 곤란했다. 그도 아니면, 샤미안의 이야기를 웃어 넘겨버렸더라면 좋았다. 이븐이 아는 한, 보통 때의 발로라면 그러한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샤미안이 말한 것을 사실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매우 곤란햇다. 이븐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발로는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샤미안 양의 이야기로는, 너는 검을 허리에서 빼지도 않고 몸으로 받았다고 하던데...” “꿈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남의 얼간이 짓을 놀리러 온 겁니까?” “아니, 설사 꿈이라고 해도 잘한 일이다.” 이븐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래도 평소와 다르다. 언제나 자신의 얼굴을 보면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짓는 이 남자가,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엎어진 데 횡재, 아니 상처의 영광일까? 샤미안 양은 꿈속에서의 네 태도에 상당히 감명을 받은 모양이더군.” 이것에는 이븐도 푸른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기다려주실깝쇼. 당신이 뭘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논욉니다. 상대는 명문가의 외동딸이고, 나는 천애고아의 몸인데다 덤으로 산적이죠. 어떻게 될 리가 없잖습니까.” 발로는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착각을 해주었으면 한다면 좀더 강하게 부정해야지. 그 정도라면 기껏해야 인사치레다.” 역시나, 괜히 바람둥이의 이름을 날리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가만히 당한 거냐? 모양만이라도 샤미안 양에게 검을 향하는 데 그렇게나 저항감이 있었나?” 이븐은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 꿈을 어떻게 해석하던 그건 그쪽 마음이지만요, 샤미안 양이 어떻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전쟁터가 아니라면 여자에게 검을 향하고 싶지 않을 뿐이군요.” “그건 지금까지 여자를 죽여 본 일이 없어서인가?” 이번에야말로 푸른 눈동자가 살기를 두르고 발로를 보았다. 국왕과 같은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는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전장에서라면 여자를 상대하는 일도 망설이지 않고 몇 명이나 베어왔기 때문인가?”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여병사의 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희귀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병사로서 전장에 나오는 것이다. 때로는 남자 이상으로 훌륭히 싸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남자 이상으로 뒷맛이 나쁘다는 뜻도 된다. 이븐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당신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입장은 아니지만서도 말요.” 틸레든 기사단장은 입가만으로 웃어 보였다. 비꼬기를 잘하는 기사단장이지만 평소와 다른 처참한 미소였다. 호방낙락하게 보여도 이 남자는 왕가에 필적하는 오래된 가문의 적자로 태어나 20대의 젊은 나이에 당당하게 당주로서, 온갖 인물들이 모여 있는 사보아 일족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 단순히 밝은 성격에 날쌔고 거친 기사라는 것만으로 가능할리 없는 일이다. 다른 얼굴을 몇 개나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건 실제로 짜증나는 일이지. 죽이는 건 물론이고 상처를 입히는 것도. 남자라면 얼굴이나 몸에 흉터가 남아도 휸장감으로 끝나지만 여자라면 그렇지도 못해. 덤으로, 비겁한 자는 비전투원인 척 울부짖다가 빈틈을 보아 뒤에서 베어들어 오니까.” 이븐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당신 같은 대부대의 지휘관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거군.” “너도다.” 그러한 때에 너는, 당신은 어떻게 해왔는지, 그들은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이다. 죽어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아군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입장인 것이다.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실수로라도 여자에게 검 같은 건 들이대고 싶지 않다. 한껏 손을 더럽힌 뒤에 깨끗한 척이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무거운 울림을 가진 말이었다. 깨끗한 척이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이라도 죽였다면 마찬가지라고 사람들은 비난할 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목소리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생사를 건 전투의 비정함, 잔혹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평화로운 시간에는 그런 피비린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헛될 일이라거나 사치스러운 소리라 해도 좋다. 전장과 그렇지 않은 곳에는 선을 하나 그어두고 싶은 것이다. 이븐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해먹을 테니깐요.” “그렇지.” 발로는 말하고, 활달함을 되찾은 비꼰느 눈초리로 이븐을 보았다. “그걸 생각하면 네 태도는 실로 훌륭했다.” 정면에서 칭찬을 받았을 때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국왕이라면, 얼굴을 찌푸리면서 혀를 차 보이는 것이 이븐이었다. “별로 당신한테 칭찬을 받으려고 한 짓은 아닌데 말이죠.” 발로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말 한마디도 안 지는 녀석이군. 뭐 애초에, 꿈속 이야기지만 말이야.” “그렇구말구요.” “하지만 샤미안 양이 보는 꿈은 사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더군. 어쨌든 뼈가 끊어질 정도의 고통이 있었다는 건데, 그 정도의 부상을 입고 신음도 내지 않으면서 고통을 이겨내 보이는 병사 같은 건 흔하지 않지.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극히 드물게 보이는 용기를 겸비한 진정한 전사겠지만 말이야.” 이븐은 무표정을 가장하면서 필사적으로 간지러움을 참고 있었다. 발로의 어조는 분명하게 알면서 과장되게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속 이야기로 해둔 이상, 대꾸할 수는 없었다. 공들인 심술이었다. 이를 갈면서 이븐은 화제를 바꾸려 했다. “뭐어, 이 성에는 왕비를 필두로 해서 여자라고 생각되지 않는 여성이 잔뜩 있으니까요. 당신 약혼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가요.” “로자몬드가 그런 식이 된 건 동생이 죽고 나서부터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삼켜버렷다. 저 여공작의 사생활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엿보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발로의 어조에는 잠자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스테판은 노(老) 벨민스터 공이 첩에게 얻은 자식이거든. 본처가 죽은 뒤, 모친가 함께 공작가에 들어와서 상속인으로 지정됐다. 스테판이 12살 정도였을까... 모친 쪽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고, 로자몬드는 이 이복동생을 불T아하게 생각하여 귀여워했다. 동생도 아버지나 누나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 그것은 주로 누나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던 듯했다. 로자몬드에게 스테판은 귀여운 동생이었지만, 스테판은 그렇지 않았거든. 떨어져 자란 것이 동경으로 이어졌는지, 첩의 자식인 자신을 귀여워해준 것이 사모로 바뀌었는지 그건 모르지만, 누님으로서가 아닌 그 이상으로 사랑했었다. 물론 스테판은 그걸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지. 상대는 이복누나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약혼을 한 상태였으니까, 밝혀둔다고 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는 거다. 동경은 동경인 채로 가슴속에 묻어두고, 당주의 의무로 결혼도 했다. 신부는 남편에게 마음 깊이 애정을 쏟았고, 스테판도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역시 마음속에는 누나의 모습이 있었던 것 같다. 로자몬드는 그것을, 동생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스테판이 죽을 때까지 몰랐었다.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도 별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본인은 마음을 쓰고 있다. 죽은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시작하고 지금에 와서는 저런 꼴이다. 동생이 했어야 할 일을 자신이 대신해야 한다고, 그것이 죽은 자를 위한 공양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이븐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빗나간 의협심으로 보였다. “그 동생이 그런 일을 한다고 기뻐할깝쇼?”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런 말을 했지만 완고하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고집 센 여자다.” 얼굴은 쓴웃음을 짓고 있어도 그 목소리 안에는 고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야기는 잘 알겠습니다만... 어째서 그런 걸 저한테 있는 대로 떠벌리시는 겁니까?” 발로는 평소의 뻔뻔스럽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네놈같이 무신경한 녀석이 사정을 모르고 있으면 오히려 위험하니까. 모르는 사이에 로자몬드의 상처를 쑤셔대는 소리를 하고도 남을 거다.” 이븐은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생각한건데 말입죠, 기사단장님. 당신, 다른 식으로 말하는 법은 못배운 겁니까?” 발로는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대사는 그대로 네놈한테 돌려주마. 산적 주제에 나를 보고 그런 말버릇을 쓰는 것도 너 정도뿐이다.” 밉살스러운 말투였다. 두 배 정도로 되받아쳐 줄까 생각했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샤미안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샤미안은 이븐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로에게 양보를 구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다. 눈치가 빠른 기사단장은 샤미안에게 한두 마디 이야기를 건네고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븐과 둘이 남자, 샤미안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그건 뭐 별로 상관없지만, 아까 그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거람년 거절할겁니다?” 샤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와 대련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목검으로.” 검은 옷의 전사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말해, 검술의 연습상대로 절 지목하시는 겁니까?” “예. 폐가 되지 않는다면...” “폐까지야 아니지만, 제 검술은 내 식입니다. 그렇다기보다 산적류인가...” 정통파 검술을 배운 여기사의 연습상대로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뜻을 담은 말이었지만, 샤미안은 굳은 표정인 채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아니, 하지만 말이죠...” “저도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미숙하긴 하지만 전력으로 당신을 쓰러뜨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 이븐은 껌뻑껌뻑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한 연습상대로 보자니 상황이 좀 이상했다. 이븐은 물론 샤미안을 상대로 진심으로 대적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상대를 해줄 뿐인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실례지만, 당신과 저, 어느 쪽이 강한가 우열을 정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화를 내실까요?” 떡하니 벌어지는 입을 겨우 닫고, 이븐은 고개를 긁적였다. “아... 그러면 나는, 다시 말해... 당신한테 이기면 되는 겁니까?” “예! 부디...” 그럴 수 있다면, 이라고 샤미안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븐은 한숨을 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좀더 교태있는 초대였다면 기뻤을 텐데 말입니다. 그걸로 마음이 풀리신다면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대해 드립죠.” “감사합니다.” 나시아스는 엔도바 부인의 정원이나 저택의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든 듯 했다. 깨끗한 공기와 녹음이 풍부한 전원풍경, 화려하고 호화로운 왕궁의 건물에는 없는 차분함이 있는 저택, 그 풍경에 안정되게 녹아들어 있는 여주인. 나시아스는 그런 것들에 호감이 갔다. 엔도바 부인도 이 젊은 기사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국왕의 중진이라고도 할 수 있을 지위에 있으면서도 예의바르고, 명석하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 상대로서도 더할 나위 없었다. “얼마 전엔 누이동생이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만... 무언가 실례되는 말씀을 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던가요?” 나시아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귀에 유쾌하게 울렸다. 목소리만이 아니다. 신분은 동료인 사보아 공작보다 떨어진다해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동경하는 처녀들은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부인은 솔직히 그러한 남성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부인은 자기기만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부인은 자신이 이 사람에게 어울린다거나 이 사람을 소유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나누면 즐거운 친구였다. “아란나님은 무척이나 귀여운 분이시더군요. 저는 그분이 무척 좋아졌어요.” “약간 덜령대는 면은 있습니다만, 그 아이는 예전부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편이었지요.” “그건 오라버니 쪽도 마찬가지겠지요?” 온화한 어조였다. “부인께서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셨던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나시아스는 약간 눈길을 내리깔았다. “동생은 역시 당신께 상당히 무리한 말씀을 드린 것 같군요...” “아니요. 상담을 받았을 뿐입니다. 아란나님은 당신을 굉장히 걱정하고 계세요. 저는 남에게 뭐라 이것저것 말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간은 못 되지만, 그래도 당신이 언제까지고 괴로워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시아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까요. 다만 엘레인의 죽음은 저에게도 짐이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오로지 저만을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었습니다.” “여쭙기 좀 그렇지만... 당신은 정말로 부인을 사랑하셨나요?” 나시아스는 대답할 때까지 얼마간 주저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엾다고도.” “그걸로는 대답이 되질 않아요.” “당시의 저는 그런 걸 알 리가 없었습니다. 약혼자이기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병으로 쓰러졌다고 듣고는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풀빛 눈동자에 자애와 연민과 아주 약간의 비난을 담고 소중한 친구를 보았다. “당신은... 너무 상냥하군요.” “그땐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옳았는지 어쩐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첫 아내가 그런 식으로 죽어버린 것 때문에 겁쟁이가 되어버렸다고 느낍니다.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다는, 그런 책임감만이 되돌아오니까요.” 부인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나시아스는 부드럽게 저지했다. “알고 있습니다. 엘레인의 죽음은 아무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운명이었고, 천명이었지요. 이성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마도 저는 겁 많은 인간인 모양입니다.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해요.” 부인도 끄덕였다. “그 기분은 잘 이해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부인이 갑자기 밝게 말하자, 나시아스는 놀라서 물빛 눈동자를 크게 떴다. “지긋지긋...입니까?” “그게... 보세요. 너무하지 않나요? 언제나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혼자서만 재빨리 가버리다니요. 저는 슬픈 기분 반, 원망하는 기분 반이었어요... 기탄없이 이야기하자면 ‘거짓말쟁이’라고까지 생각했는걸요.” “그건 또 엄격하신...” “하지만 가버린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지요...” “예에.” 부인은 다시 밝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쨌든 우리들은 이렇게 기분 좋은 응접실에 앉아서 향기로운 차를 즐길 수 있어요. 마음이 맞는 친구와 수다도 떨 수 있고, 그럴 마음만 있다면 약간 사치스러운 만찬도 맛볼 수 있고요. 실은 돼지를 한 마리 잡았어요. 밤까지는 구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드시고 가시겠어요?” “그것 멋지군요. 기쁘게 참여하겠습니다.” 나시아스도 웃는 얼굴이 되어 끄덕였다. 벨민스터 공작의 테라스에는 많은 손님이 저마다의 장소에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여공작은 붙임성있게 여러 손님들의 이야기 상대를 하고 있었다. 손님은 10대에서 20대에 걸친 귀부인들이었다. 늠름한 남장의 로자몬드를 둘러싸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발로는 색색의 부채나 호화로운 옷감, 복잡한 모양으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장식하는 보석류 등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이 화려한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까지 웃는 얼굴로 대화를 하고 있던 벨민스터 공은 발로의 모습을 보자마자 미소가 사라졌고, 함께 있던 부인들 쪽은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어머, 사보아 공작님!”“어서 오세요, 발로님.” 당주인 벨민스터 공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인사했다. 그런데 손님들은 저마다 각각의 신분에 어울리는 호의적인 인사를 열심히 입에 담고 있었다. “지금도 발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당신과 시릴님에 대해서요.” “아무리 발로님이라도 시릴님을 설득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하고 말씀드렸답니다.” “아뇨. 두 사람은 분명히 이 왕궁이 자랑하는 가자아 화려한 부부가 되실 거에요.” “하지만 능란하신 사보아 공작님도 상대가 시릴님이라면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요?” “시릴님은 정말로 ‘남자다운’ 분인걸요.” 이곳에 있는 귀부인들은 모두 벨민스터 공을 남자 이름으로 부른다. 본인이 바라고 있다는 점도 있고 다들 그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택이 있는 공단이나 거미줄 같은 레이스로 장식한 부인들과 로자몬드가 같은 생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지만, 발로는 매우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저는 제 약혼자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마음이 상냥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숙녀들은 이 말에 기품있는 웃음소리로 답했지만, 가벼운 웃음소리 안에는 의외라는 울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발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잠시 동안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여성들은 이 두 사람의 결혼이 현실로 벌어질 것인가 하는 점에 관심이 많았다. 잠시 후에 벨민스터 공은 손님들에게 물러가 주셨으면 하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이렇게 관계없는 사람들이 있어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리라. 모여있던 부인들은 상류계급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연애나 결혼문제에 이상할 정도로 눈을 빛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체면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2대 공작가에 대해 몸을 사리는 것도 있었다. 꽃이 움직이는 듯한 화려함으로 일어서서는 벨민스터 저택을 뒤로 했다. 부인들이 돌아가자 발로는 로자몬드에게 공작가 내부의 정원으로 오도록 권유했다. 저택 안에서라면 시종들의 귀가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런 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귀공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수고스러운 일이군. 언제나 저런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까.” “즐거운 분들이지만 나에겐 그다지 기쁜 일도 아니야. 귀공이라면 절도 없이 헤롱거리고 있겠지만 말이야.” “그거 의외로군. 내가 언제 헤롱거렸다는 건가?” “내가 아는 한, 언제나.” 가차없는 말이었다. 발로는 반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반쯤은 놀라며 물었다. “설마하니, 질투하는 건가?” 여공작은 통렬하게 혀를 찼다. “그런 바보 같은 대사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게 좋겠군. 나는 귀공이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든 흥미도 관심도 없어. 이젠 적당히, 나와 결혼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버려줬으면 좋겠군.” “그럴 수는 없지. 나는 귀공과 결혼하고 싶거든.” 한 번 본다면 누구나가 미청년이라고 할 것이 틀림없는 로자몬드는 짜증이 난 모습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보다 머리 반 정도 쯤 키가 큰 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추궁했다. “대체 ‘왜’? 이유를 설명해 보지 그래. 벨민스터는 분명히 대가(大家)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아무 데도 없을 텐데. 사보아와 어울리는 가문의 귀족이라면 또 있지 않나.” “지극히 간단한 이유다. 사랑했던 여자라면 잔뜩 있지만 아내로 삼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는 귀공 한 명 뿐이니까.” 로자몬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귀공다운 헛소리로군.” “너무하는군. 신용하지 못하는 건가?” “바람둥이의 구애 따위를 신용할 것 같나. 귀공이라면 저 왕비에게도 비슷한 말을 내뱉어 놓았을 지도 모르지.” 냉정한 말이었다. 그러나 발로는 웃으며 부정했다. “그건 아니야. 알겠나, 벨민스터 공.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라고.” “그런 건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메렌틴 남작부인, 홀덴 공작부인, 그레이스 부인, 가희(歌姬) 유로우, 도브너 부인, 죠반니 경의 동생인지 숙모인지, 홍등가의 죠이스, 그라디스, 그 외에도 일일이 다 셀 수도 없지.” “나는 사랑했던 여성의 수나 수완에 대해 자랑할 생각은 없어. 그녀들은 제각각 실로 매력적이었지. 그녀들도 나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 뿐이다.” 발로는 연애 중에는 합의하의 불장난이었던 적도 있는가 하면 상대가 진심으로 열을 올렸던 적도 있다. 물론 공작가(公爵家)라는 떡고물을 노린 것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발로는 깨끗하게 연애를 청산하고, 헤어진 뒤에도 누군가에게 원망을 사는 일이 없었다. 그 중 몇 명은 아직도 친한 친구로 만나고 있는 경우조차 있었다. 그것이 국왕이 감탄하는 이유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다. 그리고 인간이란 누구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자연스럽게 잘 알게 되는 법이야.” “귀공이라면 그렇겠지.” “진지한 이야기야. 예를 들자면 엔도바 부인은 화초에 대해서 상당히 박식하지. 로아 사람들은 말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고 호언하고. 우리 쪽 아스틴은 고서(古書)에 대해서라면 제법 식견이 있다. 열심히 하는 쪽보다 좋아서 하는 쪽이 뛰어나다는 말도 있으니까.” 벨민스터 공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듣기 괴로운 변명이로군. 단순한 호색이 아니라 그 대상에 어느 정도 정통해있는지를 말하고 싶은 건가?” “변명이라니. 사실이야. 물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소리는 하지 않아.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영원한 신비라고도 하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즐거움도 반으로 줄겠지.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여자가 어떠한 것인지, 약간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단언하건대, 저 왕비는 여자가 아니야. 다른 무언가다.” 여공작의 보기 좋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럼 뭔가? 폐하는 여자가 아닌 것과 결혼을 하셨다는 건가?” “형님은 별나다는 점에 잇어서는 어떤 호사가도 제쳐버릴 사람이니까 말이야.” 발로는 팔짱을 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말했다. 실제로 반 이상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소한 결혼하려면 어엿한 여자가 좋아.”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찾아 볼 일이다.” 잘라 말하고 저택 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공작을 발로는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 얼굴에는 초조함과 미약한 연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로 발로는 이 강철의 귀부인을 설득하기 위한 비장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비장의 수단이었다. 끝까지 다른 수단으로 승부를 해볼 생각이었다. 사용하지 않고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도저히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금지된 방법’이라는 것은 충분히 잘 알면서도, 발로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너는 그렇게 평생동안 스테판에게 의리를 지키며 보낼 생각인가?” 공작의 안색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지만, 인상적인 눈 색깔에 미약하게 초조함이 섞여든 것 같았다. “귀공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닐 텐데. 조카는 아직 네 살이다. 내가 지킬 의무가 있어.” 죽은 공작의 아들은 부친의 이름을 따라서 스테판 주니어였다. 발로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백모로서 어린 조카의 뒷바라지를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로자몬드. 어째서 네가 스테판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지? 책임이 있는 건 그 여자일 텐데.” 공작은 매섭게 발로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모르겠다면 내가 말해주지. 네 올케였던 여자, 주니어의 어머니이고 스테판의 아내였던 여자, 스테판을 죽인 그 여자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로자몬드는 낯빛을 바꾸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발로를 노려보았다. “사보아 공. 그 허언, 철회해 주실까?” “진실을 어째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되지?” 발로는 문제를 확실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주니어가 성장해서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 생각인가? 시누이를 질투한 어머니가 준비한 독잔을 아버지가 잘못 알고 마셨다. 그래서 자신은 책임을 느끼고 오늘날까지 공작가를 지켜왔다. 그런 소리를 해줄 수 있겠나? 알겠어, 로자몬드? 스테판은 분명히 널 사랑했었다. 아마도 그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사랑했겠지. 다만 그것은 죄 없는 동경이었다고도 할 수 있어. 그것을 착각해서 질투에 미쳐 너를 죽이려고까지 계획한 그 바보 같은 여자야말로 묘지 안에서 끌어내서 죄를 묻고 벌을 내려야 한다. 독을 넣은 잔을 잘못 마셔 죽은 스테판은 불쌍하지만, 어째서 네가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원래대로라면 네가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 벨민스터 공작은 크게 신음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노여움 때문에 상기되어 있던 얼굴은 창백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표정이 그녀가 받은 충격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내가 또 한가지, 그 여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죽은 당주가 남긴 것, 공작가의 훌륭한 후계자를 낳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했으면 범한 죄를 무덤 속까지 가져갔으면 좋았을 것을, 너에게 참회하고 싶다던가 죄를 고백하고 싶다던가 하는 이유를 붙여 남김없이 이야기했다. 들은 네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이지. 본인은 그걸로 안심하고 저 세상에 갔을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비열하고 더러운 방식이다. 악의(惡意) 그 자체야. 그것을 마지막 양심이라고 선의로 해석하는 너도 상당히 어리석지만... 누가 보아도 모든 죄는 전부 그 여자, 네 동생의 아내였던 여자에게 있어. 잘못 본다 해도 너는 아니다.” “어떻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우문이로군.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정보망이 있다. 하물며 그런 큰 사건이야... 벨민스터의 재난이라면 당싱의 나에게는 남의 일도 아니었고.” 처음에는 암살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다. 벨민스터 가문은 정적(政敵)이라고 할만한 적은 없었지만, 영지도 재산도 상당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원한을 샀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젊은 아내는 스테판이 죽음과 동시에 거의 착란상태에 빠져 자리에 누웠다. 그 상태로 반 년 뒤에 남자아이를 낳고 죽었지. 본인의 희망으로 임종시에는 너만이 자리했다. 그런데 그 뒤로부터 오히려 네가 반쯤 죽은 것 같은, 이 세상의 불행을 혼자서 안은 것 같은 꼴로 지내고 있었다. 그 젊은 아내는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본인의 격정적인 성격 탓에 이상한 정열과 독점욕에 지배되었지. 게다가 나는 스테판이 너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 알고 있었어.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말이지. 그렇다면 답은 자명한 것 아닌가.” “어째서 그런걸... 스테판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거야?!” “남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겠지. 노 벨민스터 공이 너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의 스테판의 얼굴. 살짝 안도한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절망적인 광기가 있는. 그때는 몰랐었다. 나도 어렸으니까. 스테판은 누이를 무척이나 흠모하고 있는 것 같다. 누이의 결혼이 무척이나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지 않았었다. 그 뒤에... 언젠가 기사단 출동 일로 벨민스터 가에 들른 적이 있었지. 나도 스테판도 열여덟, 네가 열아홉인가 스물, 그때 스테판에게는 혼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노 벨민스터 공은 기분 좋게 카스톤 공작영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여자에게 아들이 살해당할 거라는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야. 스테판은 나와 달리 부친에게 거역하지 못하는 아들이었으니까 애교있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 영광입니다 라던가 뭐라던가. 그러나, 그 사이에 순간 너를 보던 눈, 그걸로 충분했다. 본인은 열심히 숨기고 있을 생각이었겠지만 잘못 볼 수가 없었다. 그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어.” 핏기를 잃은 입술을 떨며 로자몬드는 외쳤다. “어째서... 그때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랬더라면 일이 그렇게 되는 걸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 여자는 남편의 마음이 자기 이외의 누군가에게 쏠려있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다. 무엇보다, 가르쳐준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데? 피가 이어진 남매잖아. 게다가 그 땐 너와 나의 혼담도 진행 중이었어. 대상이 되는 네가 결혼하는 데다가, 당사자도 아직 젊고 아내도 얻을 예정이었다. 싫다해도 끊어버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줄 수 있었던 거다. 그 여자가 바보 같은 짓만 하지 않았더라면.” 크게 신음하고 있던 로자몬드는 깨끗한 얼굴에 비장한 노여움을 띠며, 허리의 검에 손을 댔다. “사보아 공작, 노라 발로. 그렇다면 귀공은 알면서도 동생을 죽도록 놔뒀다는 게 된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으려 하는 약혼자를 앞에 두고도 발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한 눈으로 상대를 마주보았다. “나를 원망하면 마음이 풀리나?” “......” “그걸로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악당 역을 해주지.” 검 손잡이에 손을 댄 채, 로자몬드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슴이 크게 상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어.” “알고 있어. 동생으로서 말이지. 하지만 스테판은 달랐다. 다만, 그 마음을 너에게 알리는 걸 결코 바라지 않았어.” 검 손잡이에 손을 댄 채로, 벨민스터 공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발로도 검은 눈에 깊은 색을 담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석양이 비치려 하고 있었다. 그 시각, 샤미안과 이븐은 서로 목도를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도라 장군 저택의 중정이었다. 무용을 구사하는 사람답게 장군가의 정원에는 검 시합이나 기사 시합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샤미안은 땀투성이가 되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이븐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열 번 정도 대결했지만 모두 이븐의 승리로 끝났다. 샤미안은 처음부터 전신을 투지로 불태우고 날카로운 기합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래도 한 번도 이븐의 몸을 때리지도 못했다. 반대로 이븐은 교묘하게 목도를 사용해서 샤미안의 손에서 목도를 빼앗아 내거나 혹은 가볍게 쳐서 떨어뜨리거나 했다. 가능한 한 가슴이나 몸은 때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대련해서 이기는 것보다 그쪽이 오히려 어려웠다.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았다. “또 하시렵니까?” 그러자 샤미안은 자세를 풀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걸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븐을 향해 깊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얼굴을 들었을 때는 시원하게 풀린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당신은 결코 저에게 당할 분이 아니에요. 그걸 잘 알았습니다. 발로님은 최소한 그럴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말도 안 돼요. 저보다 한두 단계는 격이 높으신 걸요.” 샤미안은 정말로 기쁜 듯했다. 그녀도 뛰어난 검사다. 이제야 그것은 무언가 착각이었다고, 자신이 진검을 들고 덤벼든다고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러한, 마음에서 우러난 찬미의 말은 이븐으로서도 듣기 좋은 것이었다. 애매하게 웃고 있자니, 샤미안은 땀을 닦기 위한 물가로 안내해주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오늘 밤은 부디 저희 집에서 저녁을 드시고 가세요.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예요.” 이븐은 ‘웃’하고 멈춰 섰다. 저 도라 장군이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생각하니, 맛있는 만찬이고 자시고가 아니다. 염라대왕과 합석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목으로 넘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시나요?” 샤미안이 지극히 순진하게, 또한 어느 정도는 걱정스러운 듯 이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 싫어하시는 것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요리사에게 말해둘 테니까요.” “아뇨, 무슨 그런. 기쁘게 참석하겠습니다.” 마치 적진에 돌격해 들어가는 것 같은 결의를 하고, 란바의 영웅은 과감하게 선언했다. 10장 페노아의 질이 왕궁을 방문한 것은 7월 초순, 본격적으로 여름이 도래하는 계절이었다. 물론, 질은 동료인 이븐이 거의 반 개월 전에 하마터면 팔이 떨어질 뻔한 큰 부상을 입은 것도 몰랐다. 이븐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샤미안도 불완전하게나마 납득하고, 그 사건은 전혀 없었던 일로 처리되었다. 물론 셰라는 이븐에 대해 갸륵할 정도로 사과하고 감사 인사도 올렸다. 이런 일로 남에게 사과해 본 일이 없어 상당히 곤혹스러웠지만,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이 남자의 부상은 자기 탓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딱하게 고개를 숙이는 셰라를 보고 이븐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건 전부 자기 실수였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도 대꾸했다. “난 그렇게까지 좋은 놈은 아니야. 거짓말 같지만 정말로 잊고 있었다고.” 그리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갑을 왼손에 채웠다. 팔꿈치까지 오는 튼튼한 긴 덮개와 같은 것이었다. “잠깐 그 묘한 칼로 베어봐.” 셰라가 사용하고 있는 소도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당황하여 물러났다. 그 뒤, 타우의 남자들이 장난삼아 실력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이븐이 난입하여 동료의 진검을 왼팔로 받아내는 것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간이 콩알만해졌지만, 양쪽 모두 멀쩡했다. 타우제의 수갑은 뛰어나다고 하는 이븐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다만, 누구나 비슷한 짓을 할 수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츠이르의 브란은 새삼 감탄한 듯이, “부두목도 참. 마른 주제에 쇳덩어리 같이 튼튼한 몸이라니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순진한 소녀인 척, ‘저런 일을 하시다니 위험하진 않은가요’하고 물어보자, “그게 말이지. 자기와 상대의 역량을 재는 거야. 부두목도 상당히 간이 큰 사람이지만, 상대가 저 국왕님이나 왕비님이라면 뭐 똑같은 짓은 안 할 거다. 아무리 튼튼한 수갑이라도 그 사람들이라면 그냥 두 쪽을 내버릴 테니까. 그 대신 근위병이나 뭐 그런 놈이 목검 들고 덤비면, 부러지는 건 사람 팔이 아니라 그 목검일 거야.”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샤미안의 검이라면 그걸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셰라도 그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바로 얼마 전 푹하고 베어져버렸던 팔로 잘도 같은 짓을 하고 있다.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조금은 무서워졌다. “그 방어구를 잊고 있었다는 건 분명 저 분의 실수였겠지만, 왠지 모르게 한기가 드네요.” 그러자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반론했다. “별로 이상한 것도 뭐도 아냐. 이븐은 월의 소꿉친구이고 제일가는 친구라고.”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소꿉친구는 우연히 집이 근처에 있었다는 걸로 끝나지는 거지만 말야. 지금도 저 바보의 친구란 말야. 그 정도 신경의 소유자가 아니면 해먹을 수 있을 거 같냐.” 식사 시중을 들던 손을 멈추고, 셰라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거지만, 이 사람은 그 ‘바보’가 자기 남편이라는 걸 고의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븐의 상처를 치료한 다음날 아침, 왕비는 늦게까지 침상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힘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던 간에, 이 사람이 상당히 소진되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언제나 넘쳐날 정도의 활력에 가득 찬 사람이 빛을 잃고, 평소라면 3인분은 혼자서 거뜬히 해치우는 주제에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셰라가 오히려 창백해졌다. 자신은 전날 밤 약간 힘이 빠졌을 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왕비가 기분이 나빠할 거라는 걸 몰랐다면, 서둘러 시의(侍醫)를 불렀으리라.그래도 왕비는 찌뿌드드하게 긴 의자에 누워있으면서도 의외로 태연했다. 그리고 전날 밤에 말했던 것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무 무리해서 그래. 조금 쉬면 나아.” 라는 말이었다. 저녁 무렵에는 일어나서 샤미안이 있는 곳으로 얼굴을 내밀러 갔다. 물론 셰라도 따라갔다. 보통 때라면 몰라도 지금 이 사람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가보자(두 사람 모두 문지기를 통과하지 않고 제멋대로 숨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븐과 샤미안이 목검으로 시합을 하는 도중이었다. 장소가 백작저택인 것으로 보아 샤미안이 말을 꺼낸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는 게 낫겠다고 왕비는 생각했다. 셰라를 이끌고 잠자코 물러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곽에 있는 벨민스터 저택을 방문했다. 다른 뜻이 아니다. 당주인 여공작은 상당히 성실한 사람이라 파격적인 왕비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며 한 번쯤 저택에 들려주십사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정중하게 대하고 있어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왕비의 평판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벨민스터 공작은 상당히 기특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미 해질 무렵에 가까워졌고 간단하게 인사만 할 생각으로 가 본 것이었다. 셰라를 현관 앞의 작은 방에서 기다리게 하고, 왕비가 정원으로 나가보자 장미가 멋들어지게 핀 화려한 정원에서 공작과 발로가 기묘한 상태로 멈춰서 있었다. 왕비의 모습을 눈치채고 놀라서 뒤돌아본다. 아무래도 곤란한 때에 온 것 같았다. 곧바로 나가려고 했지만, 역시나 틸레든 기사단장이었다. 곧바로 활달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이런 왕비, 마침 잘 왔소. 이쪽의 공작은 당신이 심상치 않은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도저히 납득해주질 않는 거요. 겉모습이 너무 가냘프고 가느다랗다고 하면서 말이죠.” 공작도 곧바로 이 농담에 입을 맞췄다. “사보아 공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깎아내고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야. 물론 비전하의 검술은 비장군(妃將軍)이라 일컬어지실 정도이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한 손으로 이 공작을 들어올리신다는 건 과장이 지나칩니다.” “좋아. 과장인지 어떤지 한번 보여주지.” 발로는 그 압도적인 체구로 슥, 하고 왕비를 덮어 누르듯 내밀었다. 대기실을 빌려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기다리던 셰라는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펄쩍 뛰어 올랐다. 비명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러 사람의 경악한 목소리였다. 그 중 하나는 틀림없이 왕비의 것이었다. 시녀로서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정원을 달려간 셰라는, 그 장소의 광경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틸레든 기사단장이 지면에 엎드려 있고 한쪽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 거구 아래에 ‘쓰러뜨러져 깔린’ 왕비는 실로 힘이 없는 표정이었다. “본격적으로 상태가 안 좋네.” 중얼거린 왕비는 발로의 커다란 몸을 밀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발로의 몸을 자기 위에서 치워내지 않으면 설 수 없게 되겠지만, 왕비는 상대의 몸에 팔을 두르더니, 앉은 자신의 어깨 위에 남자의 덩치를 얹고 그 상태인 채 ‘얏’하고 일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기절할 듯한 표정의 벨민스터 공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 지금 약간 상태가 좋질 못해서... 평소라면 한손으로 들 수 있지만, 오늘을 무리인 것 같아.” 어깨 위에 사람 한 명, 그것도 범상치 않은 거구의 소유자를 얹은 채 태연하게 말한다. 그리고 나서 부러질 것 같은 가는 팔로 통나무처럼 굵은 남자의 몸통을 붙잡아 완전히 공중에 한번 띄우는 형태로 내려주었다. 벨민스터 공은 물론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얌전하게 그저 짐짝이 되어 있던 발로는 얼빠진, 반쯤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래놓고 몸이 안 좋다고 하면 질 나쁜 농담같이 들리지만, 내가 약간 덤벼든 정도로 간단하게 쓰러져버리다니, 분명히 평소의 왕비답지는 않군.” “방심했다고 했잖아. 우와... 진흙투성이.” 두 사람이 쓰러졌던 곳은 하필이면 젖은 땅이었다. 왕비의 등이나 다리는 흠뻑 젖어있었다. 여기에서 벨민스터 공은 제정신을 되찾고, 저택의 탕전을 사용하시라고 청했다. 왕비를 이런 모습으로 돌려보내서야 공작가의 명성에 흠이 간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발로가 재미었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잔뜩 더러워졌는데, 욕조는 빌려주지 않는 건가.” “귀공의 저택은 바로 코앞이잖아.” 벨민스터 공은 더욱 정중히, 괜찮다면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고 가십시오, 하고 청했다. 공작정도의 신분이면 왕비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무례는 되지 않는다. 왕비도 쾌히 승낙하고 셰라를 먼저 돌려보냈다. 사실은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기 위해서도 왕비용 시종이 곁에 있는 것이 좋지만, 어제의 일도 있다. 이 소년은 상당히 교묘한 변장술을 갖고 있지만 쓸데없는 모험은 하지 않는 게 낫다. 셰라도 그런 왕비의 의사를 알고, 잠자코 물러나 돌아갔다. 몸을 씻고 식당에 앉은 왕비는 공작가의 요리사가 입을 딱 벌릴 정도의 양을 혼자서 해치웠다. 공작도 기지를 살린 대화로 왕비를 대접했지만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었다. 마음은 이곳에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공작의 태도가 무리하게 만들어낸 것 같다는 점은 모르는 척 지나가고, 왕비는 붙임성 있게 대화에 응하며 요리와 저택을 칭찬했다. “단장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노라라는 건 역시 여자애 이름이지?” “이런, 모르십니까? 사보아 공작가는 대대로 그렇습니다. 직계의 남자에게는 반드시 여자이름을 하나 붙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왕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대로 공작들이 전부?” “예. 선대의 사보아 공은 헤더 크로이든, 동생인 맥다넬 경은 에디스 맥다넬. 현재의 공작이 노라 발로입니다.” 왕비는 놀란 듯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헤더와 에디스라면 딱 미인자매 같지 않은가. “근데 왜 그런 일을?” “액막이를 위해서라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직계의 남자들이 전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불행이 계속된 적이 있었답니다. 어떻게든 무사히 성인으로 커주길 바랬던 부모가 여자아이의 이름을 붙여서 여자로서 키웠더니 무사히 성인이 되었다는, 그 선례에ㅜ 따라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희들 같은 귀족에게 있어서 후계자를 잃는 두려움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여자로 키우는 풍습은 지금은 그만두었습니다만, 여자 이름을 붙이는 습속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로자몬드와 발로가 결혼해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그렇답니다. 그것도 곤란합니다. 자기 아들에게 다이아나라던지 줄리아라던지, 묘하게 껄끄러운 이름을 붙인다는 건 썩 좋지 못하잖습니까.”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명랑한 모습의 왕비를 보며 벨민스터 공의 허허롭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하려고만 하면 왕비는 상당히 즐거운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그 탓인지, 식사가 끝나고 재빨리 퇴장하려던 왕비에게 벨민스터 공은, “괜찮으시다면 가벼운 술이라도...”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다. 아차 했다. “실례했습니다. 비전하를 주연에 초대하다니, 제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라...” “나라도 괜찮다면 기쁘게 대작해주겠지만, 가벼운 술이라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그래. 좀더 센 게 좋아.” 그래서 왕비와 공작은 여자들만(?)의 주연을 즐기게 되었지만, 공작은 왕비의 주량에 놀란 듯 했다. 꽤 강한 술을 준비시켜도 깨끗하게 비워 버린다. 공작 자신은 과실주를 천천히 기울이고 있었다. “비전하가 이 정도로 주당이시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술 창고에서 가장 센 술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만...” 왕비는 아직 모자란다며 고개를 저었다. “강한 거라면 싯사스의 화주(火酒)가 최고야. 그다지 좋은 술은 아니지만.” “그러한 곳에도 출입하시는 겁니까?” “로자몬드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무 기품이 있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무시당한다고. 가끔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가 어쩌다 길을 잃어 들어오면 하룻밤 사이에 홀딱 벗겨지는 수도 있는 곳이니까.” 벨민스터 공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신비한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약간 취한 것 같았다. 공작은 뽀얗게 상기된 뺨으로 왕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지금 몇이나 되셨습니까? 아마, 열여섯인가 일곱이셨지요?” “요번에 열일곱이 됐어.” “마치 저보다 훨씬 연상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저 단순히 내가 방약무인의 무뢰한인데다가, 검쓰는 왕비라는 명함까지 달고 있으니까 그런 기분이 드는 것뿐이야.” 로자몬드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렇다면 저는 그 방약무인의 무뢰한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왕비는 아련하게 혈색이 오른 로자몬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남장하더라도 최소한 머리는 기르면 좋을 텐데. 묶어 올리면 분명히 예쁠 거라고 생각해.” 로자몬드는 살짝 웃어 대답했다. “이전, 사보아 공도 같은 소리를 하더군요. 어떻게 봐도 여장한 남자지만 머리라도 묶으면 다소는 여자로 보일 거라고.” 저 공작치고는 상당한 실언이다. 대체 언제의 이야기냐고 묻자, 로자몬드는 추억이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무리도 아닙니다. 공작이 열세 살이었던 때니까. 당신에는 아직 그라스메아 경이었지요.” 그러고 나서 로자몬드는 담담하게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보아 가와 벨민스터 가는 서로의 영지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평소에 왕래는 거의 없었다. 다만, 양가 모두 겨울이 되면 남부의 별장에서 지내는 풍습이 있었고, 이 변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발로와 로자몬드는 매년 반드시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벨민스터 가무은 여걸의 역사를 가진 집이었습니다. 저는 첫아이였고, 이것이 또 늦게 생겨난 아이였던 터라 아버지는 저에게 시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검이나 말 등의 무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에 스테판이 태어났고, 제가 14살일 때 그 스테판이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갑자기 저의 미래가 걱정이 되신 듯했습니다.” “이번에는 여자답게 하라고?” “뭐어, 그런 겁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어울리는 게 있고 안어울리는 게 있지요.” “그런 것 이전에 상당히 제멋대로인 이야기잖아.” 기분 나쁜 듯 말한 왕비에게 공작은 살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죽은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지 몰라도, 요컨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교육시킬 수 있는 남자아이가 없었으니까 로자몬드로 그걸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스테판이라는 진짜 후계자가 생기니까 대용품에는 더 이상 용건이 없다. 그런 거 아냐.” 여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그렇게까지 단언하시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불쌍해집니다. 아무리 무용을 존중하는 가풍이었다고 해도 제 무예 취향은 약간 도가 지나치다고 아버지도 느끼고 계셨던 거겠죠. 머리카락도 지금처럼 짧고, 언제나 소년 복장을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기만 했으니까요. 집에서 얌전히 자수나 예법을 배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성미에 맞지 않았고, 동생에게 말이나 검을 가르쳐주는 편이 훨씬 즐거웠습니다. 그 해 여름에는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별장에 가지 않았고, 다음 해, 2년 만에 지금의 사보아 공과 재회했습니다.” “그때에는 드레스를 입었던 거야?” “예. 아버지의 애원에 굴한 것이라기보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거라면 역시 드레스를 입지 않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조금은 익숙해져지려고...” “혹시나 단장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고?” 야유하는 것도 추측하는 것도 아니다. 극히 자연스럽게 왕비는 말했다. 로자몬드는 술잔을 한손에 들고 즐거운 듯한 표정이엇다.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스러울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변명을 해대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열다섯이나 되는 데다가, 언젠가는 입지 않으면 안 될 테고, 아버지를 달래두기 위해서도 한번쯤은 입어둘 필요도 있고... 결국은 그때까지의 놀이 상대였던 친구의 반응이 신경 쓰였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머리라도 묶으면 여자로 보일 거라고?” “정확히는 좀더 통렬한 말이었습니다. ‘머리라도 묶으면 나을텐데. 그런 꼴로 시릴이라고 하면 완전히 홍등가의 남창이야.’라고...” 왕비는 하마터면 마시던 술을 뿜어낼 뻔했다. “그거 너무하네.” 그러나 로자몬드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청색과 회색이 섞인 인상적인 눈동자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는 너무나 화가 나서 아무런 대꾸도 못했습니다만, 그라스메아 경은 상당히 성실한 소년이어서요. 나중에야 돌부처 같은 얼굴로 사과하러 오더군요. ‘그 모습, 안 어울린다고 말한 건 아니야’라고... 대체 날보고 어쩌라는 거냐 생각했었지요.” “그건... 말 그대로가 아닐까? 지금까지 남자아이 같던 로자몬드가 갑자기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니까 깜짝 놀랐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것뿐인 게 아닐까?” 이때, 여공작은 호화로운 긴 의자에 장신을 묻고 우아하게 발을 꼬고 있었다. 왕비의 앞인 것 치곤 대담한 태도이지만, 그 정도로 편안한 마음인 듯 했다. 목욕을 하고 나온 왕비는 공작의 튜닉을 빌려서 허리띠를 맨 것뿐인 모습이었다. 덤으로 맨발이다. 귀부인들이 보자면 벌거벗은 거나 마찬가지인 모습으로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작은 그런 왕비를 즐겁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는 분이군요.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 계시면서... 빛나는 젊음도, 아름다움도, 왕비의 칭호도,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정도의 힘도.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이런 쓸데 없는 옛날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다니.” “지금 그 얘기, 거짓말인가?” “아니오. 덧붙인 것도 없이 사실입니다.” “내가 부러워?” 이 지독하게도 직설적인 질문에, 공작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왕비의 칭호에 대해서는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당신 이상으로 그 칭호에 어룰리는 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고요. 다만, 당신의 그 강함이 부럽습니다.” “하지만 로자몬드. 나는 단장을 들어올리거나 검술로 눌러버릴 수는 있어도, 스스로 사과하러 오게 만드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어. 단장을 그런 의미로 움직이는 건 나에겐 불가능하니까.” “......”“로자몬드는 그걸 할 수 있어. 자신도 알고 있지? 그래도 내 쪽이 강한 건가?” 벨민스터 공작은 술잔을 놓고 얼굴을 가리며, 한손을 올려 보였다. “항복하지요. 당신은 정말... 저 사보아 공이 한 수 접어줄 만한 분입니다.”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고 있으면 어째서 발로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천천히 술을 마시고 있던 공작은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왕비는 술 상대의 역할을 다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샤미안은 이븐에게 등을 떠밀리듯 서리궁으로 찾아왔다. 왕비를 볼 면목이 없다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어떤 표정을 하고 셰라를 만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으리라. 이븐이 그것을 이렇게 간신히 달랜 모양이었다. 별궁 입구에서 샤미안과 만났을 때, 셰라도 바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븐은 굳으 표정으로 멈춰버린 두 사람을 교대로 바라보고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선이라도 보는 중입니까?” 이것에 어색함이 풀렸는지, 샤미안이 크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이전에는 미안해. 나는 정말로 눈치채지 못해서...” “아니요. 저야말로...” 역시 선보기가 되어버렸다. 왕비와 이븐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자리를 바꾸고, 모두 함께 차를 즐겼다. 그 사이에도 샤미안은 시중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셰라를 새삼 감탄한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고 있어도 소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외모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서 있는 모습이며 움직이는 모습 모두 소녀의 그것이었다. 자신이 기사의 옷을 몸에 두르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보니 더욱 그랬다. “뭔가, 셰라와 저는 남녀가 바뀌어버린 것 같네요.” 이것에는 이븐이 웃으면서 반론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비전하는 어떻게 됩니까? 애초에 이쪽은 원래부터 여자로 쳐줄만한 사람도 아니지만서도...” “당연하지.” 왕비는 힘주어 단언했다. “그런 걱정 안 해도 샤미안은 충분히 여자다워.” “또 한 사람, 여성이라고 판단하기 힘든 분이 있었습니다만... 어찌 되었나요?” “로자몬드님이라면, 어째서일까요. 요즘엔 약간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셨어요. 발로님과도 온화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것 같고요.” 왕비와 이븐은 뭐라고도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서로의 눈길을 교환했고, 이븐이 조심조심 물었다. “쓸데없는 소린진 모르지만... 그거 정말로 ‘온화하게’가 맞습니까?” 이 말에는 샤미안도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건... 즉 이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온화해졌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왕비는 이 말에 미소를 띠었다. “잘됐다. 그러면 근시일 내에 구혼을 받아들여 줄지도 모르겠네.” “비전하. 비전하는 어째서 언제나 그 기사단장 편만 듭니까? 그런 바람둥이에게 구속당할 여공작이 불쌍하잖습니까.” “그렇지만, 로자몬드는 발로를 좋아하고, 발로도 로자몬드를 좋아한다구. 결혼하지 않는게 이상하잖아?” “멋져요, 비전하. 그 말씀대로에요. 두 분은 분명 어울리는 부부가 되실 거예요.” “애정과 헌신보다 야유와 독설로 맺어진 부부로, 말씀이지요.” “어머...” 샤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비는 웃어버렸다. 어렇게 얼마동안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나시아스는 여전히 자주 엔도바 부인의 저택을 방문했고, 좋은 다과 친구가 된 듯 했다. 때때로 부인을 이름으로 불렀다가 이것은 기사답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해 급히 다시 고쳐 부르는 지라,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한두 가지 선배가 아닌 연하의 친구에게 라티나 쟌펠이라니 좋은 이름 아니냐고 놀림당하기도 했다. 시녀장은 본격적으로 국왕의 측실후보 선정에 들어갔다. 거기에 참고하고자 다른 사람도 아닌 엔도바 부인과 이븐에게 국왕의 여성 취향에 대해 물었던 것이니(물론 각자 따로 면담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곤란해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제가 폐하의 마음을 끌 수 있었느냐고 물으셔도... 왜였을까요?” 부인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이븐은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보셔도 말이죠...? 별로 검은 머리가 아니면 안 된다던가, 몸집이 크지 않으면 안 된다던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말씀입죠.” 시녀장은 즉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한, 즉, 폐하가 이전에 흥미를 보이셨던 부인들에 대해 그대로 말씀을 해주십시오. 연령도 생김도 성격도 말씀입니다. 참고로 삼겠습니다.” “예에?! 그건 저기 조금... 곤란하다구요.” “이븐 경! 후계자가 없다는 건 왕가의 큰 문제입니다! 그것을 잘 이해해주시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건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만...” 하고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당사자인 국왕은 애첩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양 대국의 움직임에 눈을 빛내면서 국내의 내통자 색출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파라스트는 역시 테바강 너머의 영토를 노리고 있는 듯 했다. 파라스트의 신하가 이전에 피해를 호소해왔던 북서부의 영주들을 자주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우의 동쪽이 월 그리크의 신하가 되었듯이, 그들이 몰래 오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된다. 그러던 사이, 건설 중이던 캄센 요새에서의 보고가 들어왔다. 새롭게 세워진 국경선 바깥에 빈번하게 탄가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국경을 돌아보고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무장의 상식이지만, 마치 이쪽을 망보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바로 뒤의 크리산스 기사단이라는 대비가 있어서 큰일이 벌어지진 않고 있지만 평온한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라고 서술하고 있었다. “이게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겠군...” 전쟁을 하려고 해도 양 대국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인가 한 편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 편을 억눌러 둘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월 자신은 배시을 종용하는 수단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니 상대의 내분은 기대하기 힘들다. 중앙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국들 중에서는 델피니아에 호의적인 국가도 물론 있지만 역부족이다. 이런 때에 국왕의 생각은 언제나 타우로 향했다. 버려진 토지의 주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양국도 깊이 경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국왕이 보기에 그곳은 상당한 세력이었다. 최소한 발을 묶어두는 역할을 해준다면 훨씬 일이 쉽게 풀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델피니아의 신하가 되었다고는 해도 과연 거기까지 몸을 던져줄 것인가. 이븐은 말했다. 착취당하는 일도 지배당하는 일도 완고하게 거부하는 기풍이라고. 그들의 노동을 힘으로 삼는 대신 국왕이 줄 수 있는 건 외부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을 자유의 보증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믿을 수 없는 보증이라는 것은 난세의 상식이었다. 어쨌거나 캄센의 경비를 증강하고 서북부의 영주들에게는 왕궁으로 찾아오도록 통보했다. 이래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슬슬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질이 타우에서 찾아온 것은 국왕이 이런 일들로 골치를 썩이고 있을 때였다. 두목들 사이에서 협의를 한 결과, 자신이 명목 만으로라도 타우의 대표로서 찾아오게 되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했다. 국왕은 기쁘게 응해 유력 귀족급으로 대접을 했다. 월 그리크느 조라더스 정도로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는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자라면 신분을 상관하지 않고 등용하고 중하게 여긴다. 이것에 불만을 가지는 자가 예전의, 그리고 자신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영지를 보증해주는 적과 내통한다. 알기 쉬운 도식이었다. 국왕과 질은 몇 안 되는 입회인들 앞에서 신하와 군주이 서약을 끝냈다. 다만, 타우의 자치를 존중할 것을 국왕이 자발적으로 덧붙였고, 영주의 증표로서 검 한 자루를 선사했다. 그날 밤, 국왕은 개인적으로 질을 주연에 초대했다. 타우에 대해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가 인정하든 어떻든, 지금은 타우의 동부는 명실 공히 델피니아의 영토였다. 그렇다고 해서 금방 움직여 준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어느 정도의 주민이 있고, 어느 정도의 생산력이 있는지를 들어두고 싶었다. 국왕이 그 영지의 주민 수나 생산력을 파악하는 것은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묻자, 그때까지 기분 좋게 마시고 있던 질이 잔을 내려놓더니 몸가짐을 새로이 했다. “그 전에 사람들을 물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국왕은 그대로 했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건 시종뿐이었다. 실은 이 자리에는 이븐도 초대했었다. 질을 합쳐서 세 명이서 느긋하게 마실 예정이었는데, 웬일인지 사양하더니 서리궁으로 올라갔다. 시종들이 자리를 비우고 국왕과 단 둘이 남게 되어도 질은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나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있는 입가도 웃고 있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 확인해두겠습니다만, 폐하께선 정말로 타우의 정치는 타우에 맡겨 주시겠습니까?” “거짓말이라면 이 목을 주지. 그 토지는 타우의 자유민의 것이라고, 나는 왕의 이름을 걸고 인정했다. 타국이 어떻게 판단할지는 모르지만, 델피니아 내에서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일은 결코 없을 것이야.” “파라스트가 예전의 서류를 가지고 와서 자신들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할 지도 모릅니다.” “서쪽 산맥에 대해서는 아직 델피니아 령이 아니니 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대들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싸우겠지. 그 결과,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될 경우엔 물론 힘을 빌려주겠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파라스트와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말씀입니까.” “어느 쪽에 이득이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신하의 맹세를 한 자의 청을 흘려 넘길 수는 없어.” 질은 잠시 동안 국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잘생긴 입가에 그 매혹적인 미소를 띠웠다. “그럼, 폐하께 타우의 비밀을 말씀드리지요.” “비밀?” “그렇습니다. 외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폐하가 처음입니다. 20개 마을의 두목들 사이에서 대대로 지켜져 내려온 비밀입니다만, 폐하는 우리들을 비호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지요.” 거창한 서론이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는 사이, 질은 간단하게 말했다. “은(銀)이 나옵니다.” 국왕은 순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눈으로 되묻자, 질은 미리 준비했던 지도를 내밀었다. 동쪽 산맥 일대의 주된 광맥의 장소와 예상 산출량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를 바라보던 국왕의 안색이 점차로 진지하게 바뀌고, 결국에는 낮게 신음했다. 어디까지나 예상이었지만, 그 산출량은 놀랄만한 숫자였다. 다른 두 나라를 상대로 손쉽게 몇 년은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국왕의 엄격한 시선을 똑바로 받고 있던 타우 굴지의 명두목은 끄덕여 보였다. “저희가 단순한 산적에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 정연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요인 중 한 가지는 그 은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가 처음으로 타우에 도망쳐 들어오고나서 실로 2백년, 저희들의 바람은 재물이 아니라 항상 자유와 독립이었습니다.” 타우의 역사 중에는 그것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논의가 부상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정도의 자금을 재워둘 필요는 없다. 아예 자신들만의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을 때도 있었지만, 선인들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분명히 이 자원은 광대한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인력이 따라가질 못합니다. 대화삼국이 진심으로 쳐들어온다면, 은만을 바란다면 대국은 산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승부는 눈에 보이는 것이지요. 저희들을 단순한 산적이라고 생각하기에, 대국들은 저희들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고 지내왔던 겁니다. 다소는 귀찮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도 머리 꼭대기에서 항상 날아다니는 파리 정도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 어떤 일이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타우가 아무리 천혜의 요새라고 해도 은에 눈이 먼 대국은 한꺼번에 타우로 몰아닥치겠지요. 저희들의 자유도 독립도 그걸로 끝입니다.” 은의 산지는 극비에 부쳐져, 두목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만이 그 장소를 알고 대대로 전해왔다. 그런 그들에게도 재산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고, 아무래도 필요한 때에 한해서만 일정량을 채굴하는 외에는 은에 대해서는 잊고 살아왔다. 동료들 사이에서 이것을 계기로 사복을 채우려는 자가 나타나면 이유를 막론하고 극형에 처했다. 부친의 모습에서 이 비밀을 안 자식이 은을 도굴했을 때에는 그 부친 스스로 자식을 베어 죽였다. “지독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단결력이야말로 이 2백년 간 쌓아 올려온 저희들의, 은광맥 이상의 재산입니다. 무엇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무엇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 말이나 형태로 하지 않아도 저희들 속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는 자는 설사 다른 토지 출신이라도 자유민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설사 두목의 자식이라고 해도 자유민이라고 불리지 못합니다. 폐하의 비호를 받는 일에 관해서도 20명의 두목은 관례대로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이 승낙한 이상, 자유민의 의지는 하나입니다. 저희들은 기꺼이 델피니아의 국민이 될 겁니다. 타우에 도망쳐 들어온 도망자는 망나니들만이 아닙니다. 국가의 정책에 거역하여 도망쳐온 지식인이나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시나 타우는 지방으로서는 대화삼국 중에서도 가장 식자율(識字率)이 높은 곳일지도 모릅니다. 이 지도는 측량 지식이 있는 자, 지층을 보는 자들이 공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모두 우수한 인재입니다. 예상량이긴 하지만, 거의 정확한 숫자가 틀림없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잠시 질은 헛기침을 한 뒤, “다만, 폐하는 타우의 자치를 인정해주셨습니다. 따라서 타우에서 캐내는 은은 모두 저희들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폐하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폐하가 필요로 하신다면 국민의 의무로서 기꺼이 군자금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국왕은 이 믿어지지 않는 고백을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얼이 빠져서 듣고 있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하고 지도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븐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건가?” 질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전에 이야기 해두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자치를 인정하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은을 탐내서 델피니아 정부가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두목들 중에서는 분명히 그런 위험성을 입에 담은 자도 있었다. 그들은 예전 나라에서 배신당하고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투덜댄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것을 이븐이 설득했다. 대화삼국 사이에서 근시일 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는 조용히 고립되어 있었지만 그걸로는 끝나지 않게 된다. 그런 큰 전쟁에 휘말려든다면, 그리고 그런 난리 도중 비밀이 누설된다면, 세 방향에서 밀어닥치고 짓밟혀 지금의 타우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럴 바에야 신용할 수 있는 상대에게 타우의 장래를 걸어보는 게 좋다고 열심히 설득했다. “개중에는, 저 녀석이 폐하에게 완전히 구워삶아져서 저희들을 속이고 혼자서만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험담을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만...” 국왕이 저도 모르게 안색을 바꾸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질이 제지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 녀석의 신봉자들이 그자들을 색출해냈습니다. 이븐 본인은 가슴을 펴고, 실례되지만 그 바보가 나를 구워삶을 정도로 약삭빠른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당당하게 반론했습니다. 추가로, 만약 폐하가 우리들과의 약속보다 이익을 중시하여 관대한 비호자에서 파렴치한 착취자로 변하게 된다면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폐하의 수급을 가져오겠다고,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질은 아무래도 무례를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주군에 대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들을 연발하고 있는 것이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이븐의 말은 자신들의 결의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왕은 지도를 노려본 채로 심사숙고를 하고 있었다. 질도 잠자코 그런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국왕은 다시 손앞의 지도를 들어올리고 물어보았다. “보게, 질 공. 이 사실을 탄가가 안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질은 대답했다. “날개를 편 독수리 앞에 고기를 던져주는 거나 같은 일이겠지요. 캄센 반쪽을 은광이 붙은 채로 속아서 빼앗겼다며 격노할지도 모릅니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협정도 잊어버리고 타우를 향해 쳐들어오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탄가군은 일방적으로 국경을 넘어서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이 되겠군?” 볕에 탄 질의 얼굴이 미약하게 움직인 것 같았지만, 역시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당하게 탄가와의 전쟁을 선포할 수가 있다. 전쟁의 계기라는 건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세간이 시끄러운 법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국왕은 빙그레 웃었다. 특별히 힘이 들어간 것도 섬뜩한 것도 아닌, 지극히 당연한 미소였다. “나와 귀공은 신하와 군주의 맹세를 했지만, 동맹의 맹세로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말하겠는데, 어떻게든 타우의 서쪽을 설득해서 귀공에게 동조시킬 수 없겠나? 물론 서쪽에 대해서도 자치는 반드시 약속하겠네. 고의로 흘려보내지 않더라도 이 재산에 대해서는 언젠가 반드시 파라스트의 귀에 들어갈 거야. 군자금으로서 이용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 움직임을 놓칠 오론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그 욕심꾸러기가 하는 일이니 반드시 타우를 향해 이를 드러내겠지. 서쪽에게 있어서도 남의 일은 아닐 것이야. 하지만 오론이 은광맥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타우의 서쪽이 델피니아 령이 되어있다고 한다면?” “......”“이것도 정당한 영토침범이라고 상대를 비난할 수가 있게 되지. 그 시점에서 탄가는 용맹을 자부하는 타우의 자유민에게 맡겨두고, 나는 서북부에 출진하여 은에 눈이 멀어 정신없이 달려드는 파라스트를 상대하겠네. 실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네만 파라스트와의 국경 근처의 북서부에 약간 불온분자들이 있어서 말이야. 오론과 자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도 귀공들에게 있어서도 재난의 씨앗이 되겠지. 증거가 없어서 지금까지는 손을 대고 있지 않고 있지만, 내가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파라스트와의 전투가 벌어지면, 그자들은 파라스트의 지시대로 움직이던가 견딜 수 없게 되어 테바강을 넘어 도망치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 정도의 배짱을 가진 자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아군인 척 하고 내 군대에 합류하던가가 되겠지. 그것은 그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대청소가 가능하네. 오론도 조라더스도 이 델피니아를 자기 영토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단정하게 앉아있으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왠만해선 그 착각을 고칠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야. 이쯤에서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네. 어떤가?” 깔끔한 외모의 타우 두목은 잠시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살짝 숨을 토해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전에 만나뵈었을 때에는, 실례되지만, 이렇게 순박하고 호감가는 인품으로 어떻게 국왕의 자리를 역임하시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의외로 본성을 숨기고 계셨군요.” “그건 아니야. 이븐에게 물어보면 알 거네. 나는 단순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할 수 있는 성격인 걸세.” “글쎄, 나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군. 나에게는 혹시 신념이라던가 하는 것이 없는지도 몰라.” 수염 난 입가를 보기 좋게 일그러뜨리며 질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면 의지도 긍지도 모르느냐고 한 소리를 하겠지만, 폐하가 말씀하시니 왠지 미소가 지어지는군요.” “고맙네. 서쪽의 두목들에게도 잘 좀 전해주게.” “폐하.” 산적 두목으로서는 아까울 정도로 풍채가 좋은 새 영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는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타우 전체를 대표하여 여기에 와있습니다. 서쪽도 남쪽도 지금은 전부 폐하의 것. 다만... 그들은 저희들만큼 폐하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이븐을 따르고 있는 자들의 입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사실은 파악하고 있겠지만, 저희들과 같은 신분의 자들에게 국왕을 믿는다는 건 엄청난 일인 겁니다.” “음. 개중에는 델피니아에서 도망친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선량한 영민으로서 살아갈 것을 바라고, 그대로 행동하면 왕으로서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고향은 타우의 바로 발밑에 있고 산적의 무서움만큼은 몇 번이고 들어보았지만, 한번도 그러한 난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들은 일은 없어. 그들에게는 안심해도 좋다고 전해주게.” “감사합니다. 실은 그런 그들로부터 전언을 받아왔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오오, 들어보지.” “기댈 곳을 잃은 저희들에게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신분을 주신다는 폐하의 배려는 진정으로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무어라 말해도 한 번은 죄인이라 불려 나라에서 쫓겨난 자들의 자손입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실례되는 말씀이나 폐하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는 저희들의 영역에 있는 금맥의 장소를 말씀드리는 것은 보류하겠습니다.” 국왕은 귀를 의심했다.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금?” “서쪽과 남쪽에는 금광맥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 장소에도 은의 장소만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검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멍하니 입을 열고 아무 말도 못하는 국왕을 보고, 질은 가볍게 말했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타우는 방치된 토지이기는커녕 아무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던 보물산입니다.” “그 비밀을... 2백년이나?!” “아니요. 은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 이 정도로 자세한 지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저희들은 자신이 사는 토지의 조사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질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폐하. 이것은 저희 타우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도박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자들은 이 재산에 대해서 모릅니다. 사람은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보물 위에서 모르는 채 살아가며 경비병이 되어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조금쯤 나눠받아서 뭐가 나쁜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자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아니, 반드시 나오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타우는 델피니아 령이자 그 재원도 기본적으로는 국왕의 것으로 해두는 쪽이 좋습니다.” 동료들에게는 이것이 국왕의 것이니까 손을 대지 말라고 하고, 그 국왕에게는 자치를 인정한 이상 참견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잘도 남을 보고 본색이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한다. 엄청난 너구리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에서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그들의 자위수단인 것이다. 국왕은 즉시 마음을 결정했다. 막대한 재산은 물론 갖고 싶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그들에게 신용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알았다. 이 일은 당분간 나 혼자서만 알고 있겠다. 극히 한정된 심복들에게도 은이 채굴된다고만 해두지. 다만 왕비에게는 잠자코 있을 수 없다. 그건 알아주게.” 질은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그 녀석이 같은 말을 하더군요. 이쪽의 비전하는 모습은 어떤 여성보다 아름답지만 여성의 성질이라고는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고, 강직한 전사의 혼과 냉철한 정치가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다른 두세 가지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회담을 끝냈다. 질은 자신에게 배당된 별궁으로 돌아갔지만 국왕은 혼자서 서리궁으로 향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느긋했던 걸음걸이는 위로 올라감에 따라 점점 빨라졌다. 기세 좋게 서리궁으로 달려 들어가서, 국왕은 큰소리를 내면서 오랜 친구에게 덤벼들었다. “이 악당!” 웃으면서 짧은 금발머리를 붙잡고 목을 졸라댔다. 탁자 앞에 붙어있던 이븐은 의자에 앉은 채로 짐짓 괴로워하며 버둥댔다. “야, 임마, 놔!“ 투덜거리면서도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이븐과 패 놀이가 한창이었던 왕비는 버둥거리고 있는 남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흩어져 버린 상대의 패를 바라보고 ”내가 이겼네.“ 하고 말했다. ”잠깐 기다려. 지금 그건 무효야?! 어이, 월, 덩치도 산만한 것이 언제까지 달라붙을 거야!” “시끄러. 너 때문에 양 대국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이다.” 왕비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건 온건한 방법이 아닌데.” “음. 실로 온건하지 못한 이야기지.” 국왕도 탁자 앞에 앉았다. 그 자리에 있던 셰라를 올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극비이지만, 너는 왕비가 침묵을 지키라고 하면 그 명령에 따르겠지?” 서리궁의 시녀는 오히려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일부러 확인하실 필요조차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문제의지도도 보여주었다. 보통 여성이라면(남성도 그렇지만) 금산 은산이라고 들으면 눈빛이 변할 텐데, 오아비의 녹색 눈동자는 다른 의미로 장난스럽게 빛났다. “기가 막히는군. 타우 산에는 엄청난 너구리들이 살고 있었군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거 참 잘도 여태까지 숨겨왔지 싶다. 폐쇄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친구를 돌아본다. “네가 이전에 질 공에게 빚이 있다고 말했던 건, 이 건이냐?” “그래. 나 같은 놈의 어디를 높이 산 건지, 얼굴이 익으니 금방 광맥의 위치를 알려주더구만. 펜타스로 실어갈 예정인 은괴도 보여줬지.” 그들은 그것을 일부러 멀리 펜타스까지 실어가서 일단 돈으로 바꾼 다음에 사용하는 듯햇다. 그럴 때에도 신원을 밝히는 짓은 하지 않는다. 중개인을 세워 결코 출처를 알 수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 정도의 비밀을 외부인인 너에게 뭣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한 거냐?” 이븐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뒷얘기가 있어. 여기가 그 장소라고 지극히 복잡한 동굴을 가르쳐주고 은괴를 보여주지. 이건 말이야, 녀석들의 시험인 거야. 신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지. 강렬한 시험이라고. 그렇게 잔뜩 있으면 하나 정도 주워가도 모르겠지,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생각해서 밤중에 몰래 동굴에 숨어들어가거든. 그러자마자 함정으로 바로 수직낙하하게 된다. 내부의 장치에는 이상할 정도로 손을 써두었으니까 말이야. 뭐 대충, 살아 돌아올 순 없지.” 두 사람 모두 꿀꺽하고 침을 삼키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과격하네.” “너는 그래서, 동굴에는 가지 않았던 거냐?” “갔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앉아있을 수 있겠냐.” “그건 또 왜?” 은은 별로였던 거냐?“ “아니, 별로일 리가? 다만, 그 때에는 빚을 지고 쫓기던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돈이 들 여자도 없었고 말이야. 밤중에 살금살금 도둑질할 정도의 이유가 아무 것도 없었던 거지. 그것뿐인데, 어쩐 일인지 의리에 인정 깊은 협객처럼 여겨져서 말이야. 위에 놈들, 특히 질이 나를 똑바로 대접하니까 페노아 녀석들도 어느 사이엔가 감싸고 돌게 된 거야. 나는 아무리 잘못 봐도 그런 놈이 아닌데 말씀이야...” 푸른 눈은 삐딱한 미소를 담고 있었지만, 국왕은 활짝 웃었다. “페노아 두목의 눈은 확실하군. 실제로 지금의 너는 몸도 마음도 타우의 자유민이잖아.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두목들 상대로는 밀고 당겨서 그대로 타우를 홀딱 따냈으니.” “사기라니, 너무하네. 나는 타우의 규칙에 따라서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라고.” “호오, 그럼 또 뭘 입 다물고 있는 거지?” “말할 거 같냐, 바보야.” “또 목 조른다.” “오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불순하게 웃으면서 서로를 노려보는 남편과 그 친구를 즐겁게 바라보며, 왕비는 솔직한 감상을 흘렸다. “같이 놀 친구가 있다는 건 좋구나아.” 산만한 덩치로 달라붙지 말라는 이븐의 말에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 몇 번이고 똑같은 소리를 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긴 흑발이 아름다운 친구, 자신보다 훨씬 커서 언제나 올려다 보았었다. 그런데 왜인지 자신의 등뒤에서 덮치듯이 달라붙는 걸 좋아했고, 특히 금색 머리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 때마다 ‘커다란 몸뚱이로 달라붙지 마’라고 말하며 못하게 했다. 자신은 아직도 그 친구보다 작을 것인가. “리...?” 국왕의 목소리에 왕비는 서둘러 제정신을 찾았다. “아아, 미안. 뭐였지?” “이 일을 가능한 한 확대시키지 않고, 조라더스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신용할 수 있는 누군가가 배신자가 되어서 실은 그곳에서 은을 캘 수 있습니다요,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그래서야 세간이 홀딱 뒤집힐 정도로 소동이 날걸.” “음. 파라스트에 알려지는 걸 늦추기 위해서도 극히 한정된 인간들에게만 살짝 알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좀 너무 우리 입맛에만 맞는 소리 아니냐?” 이븐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길 가는 중간에 불러 세울 수도 없는 거니까.” 왕비가 성실하게 대답했다. 셰라가 망설이면서 말을 꺼냈다. “알려주기만 하는 걸로 된다면 탄가 국왕의 침실에 숨어들어 가는 건 어떨까요?” 세 명은 각각 색이 다른 눈동자를 크게 뜨고 셰라를 보았다. 국왕이 말했다. “그건 또 상당히 과감한 의견이로군.” “죄송합니다. 건방진 소리를...” “아니야, 상관없다. 그런데 그걸 누가 하지?”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요새라고도 할만한 케이파드 성의, 왕의 침실인데, 할 수 있겠나?” “예. 어려운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삼가며 말하고 있었지만, 얼마간 겸손의 울림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라더스가 지금 그 말을 들었다간 화가 난 나머지 발광해버리고 말겠군.” “그럴까요?” “그렇지. 나라고 해도 코랄 성에 숨어들어오는 것은 간단합니다, 같은 소리를 들으면 달갑지 않을 거다.” “아니요, 그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에는 왕비님이 있으니까요.” “집 지키는 개냐, 내가?” 달갑지 않은 듯 왕비가 말햇다. “뭘, 비슷한 거지. 이 왕비도 틀림없이 케이파드 성에 숨어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간단하게 말하지 말라고. 나는 그 성을 본 적이 없단 말이다. 시간이 걸려.” “그러니까 이 시녀를 보내도록 하자. 너는 부탁이니까, 알겠냐, 머리를 숙이며 부탁할 테니까, 이 성에서 얌전히 있어다오.” 왕비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친구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의심스럽게 말했다. “너 말야, 가정을 가지고 나서 이상하게 보수적이 된 거 같지 않냐?” 어디까지나 진지한 어조였다. 셰라는 뭐라고도 말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으로 입가를 일그러뜨렷고, 이븐은 새삼스럽게 친구의 불행을 동정했으며, 국왕은 참지 못하고 건장한 어깨를 흔들며 폭소해버렸다. 왕비도 웃었다. 결국은 모두가 함께 뒤섞여 웃는 대합창이 되었다. 11장 그 건물은 어둡고, 조명이 없었다. 신전과 같은 돌기둥과 돌벽, 역시 돌로 만들어진 차가운 창가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창밖에는 하늘 가득한 별이 보였다. 달은 없었다. 그야말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이었다. 발목까지 가려지는 옷을 입은 사람이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그늘이 있는 얼굴이었다. 풍부한 흑발이 등을 가리고 무릎 위에서 부드럽게 파도쳐 바닥에 닿을 정도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검은 색임엔 틀림없지만, 사람의 머리카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상아와 같은 광택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 모양새는 작고, 또렷한 눈동자는 검청색 옥과 같았으며, 살짝 열린 옅은 색 입술 사이로 깨끗하게 늘어선 이가 엿보였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얼굴이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넉넉하게 길게 만들어진 옷 위로 떠오르는 절묘한 몸의 선은 가냘픈 청년으로도 보이고, 약간 키가 큰 여성으로도 보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천사처럼 순결하다고 감탄하는 자도 있고, 마성의 아름다움이라고 전율하는 자도 있었다. 때에 따라 표현되는 인상에 의해 여러 면에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그런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루우.” 이름이 불리자 돌아보았다. 순간 표정이 변했다. 그때까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표정이었던 것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열 살 정도는 나이 들ㄹ어 보였다. 눈의 푸른색까지 감청색에서 얼음처럼 지극히 옅은 색으로 변화했다. 표정이 사라진 눈이 목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부른 것은 한 마리의 흑표범이었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거리는 돌바닥을 소리없이 걸어와서, 지성을 엿볼 수 있는 눈으로 그 인물을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뭘 먹는게 어떠냐.” “그럴 기분이 아니야.” 목소리를 들어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흑표범은... 정확히 말하면 흑표범의 모습을 한 다른 생물은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래서야 리를 찾으러 가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겠다.” “......” “그 녀석이라면 괜찮아. 어디에 있어도 걱정 없다.” 이번에는 어두운, 밤바다 같은 눈동자가 흑표범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어?” “네 쪽이 더 잘 알 텐데. 누구든지 그 녀석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걸 가졌을 때의 이야기야.” 가벼운 소리를 내며 넓은 돌로 된 창가에 구른 것은 은색의 작은 반지였다. 반드시 끼고 있으라고 말했는데, 그날 이변을 느끼고 달려가 본 현장에 이것이 떨어져 있었다. 그 이래로 마법행성 폰쥬이의 총력을 기울여 탐색을 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최소한 이 차원한계 내의 어디에도 없었다. 완전히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이 별에 무수히 존재하는 작은 구멍 중 하나가 우연히도 열려서 그 단짝을 삼켜버렸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곧바로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그러한 구멍은 이미 관리되고 있는 문과는 틀리다. 주기(週期)도 읽히지 않고 극히 자연발생적인 것이라 무리하게 조작하는 데엔 위험이 동반된다. <이쪽>은 상관없다 해도 <저쪽>에 어떤 피해를 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흑발의 미인은 은바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것만 가지고 있어줬다면... 그랬다면 어디에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서두르지 마. 알겠어? 그 구멍은 곧 다시 열린다. 이곳에서 무모한 짓을 했다간 죽도 밥도 안 돼.” 루우는 초조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귀금속과 같은 광택이 있는 머리카락이 흔들려 마침 창밖에서 보이고 있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빛났다. “힘도 쓰지 못한 채 지금쯤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것만은 다행이야. 어느 세계에 떨어졌건 간에 피해는 최소한으로 끝날 테니까.” 창가에 앉은 인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초원의 바삭거림과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2장 타우의 서쪽 능선이 델피니아 령에 추가되었다는 것을 안 오론은 즉시 델피니아에 항의했다. 문제의 토지는 분명히 우리나라에 속해있는 영지인데 산적들과의 합의에 의해 억지로 빼앗아가다니 대체 무슨 소행이냐,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해 월 그리크는 타우의 사람들은 선조 대대로 그 땅에 살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 그대들은 아무런 이론도 외치지 않았다. 토지를 뺏고 빼앗기는 것은 무장(武將)에게는 항상 있는 일이며, 문제의 토지는 예전에는 그대들의 것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타우의 것이다. 얼마 전, 그대들이 주민의 등기와 납세를 요구했을 때에도 그들은 거절하고 그대들은 잠자코 물러나지 않았던가. 문제의 토지의 권리는 이미 그들에게 옮겨가 있으며 그것을 그대들은 인정했다는 무엇보다 큰 증거이다. 이렇게 대답해 보냈다. 오론도 어이가 없어진 듯 했다. “그 애송이는 현명한 거냐, 바보인 거냐...?” 권력자가 토지에 집착하는 것은 그곳에서 이익이 나오기 때문이다. 농산물이나 목장, 물품유통을 하는 마을 등, 늪지나 개펄을 바라는 영주가 없듯이 저런 산을 가지고 싶어 하는 영주는 없다. 물론 타우에 대한 자료는 오론의 수중에도 있었다. 토지는 경사가 험하고 토질은 척박하여 개간에 적합지 않고, 산은 잡목투성이라 건축용 재료도 되지 않아 아무런 쓸모가 없다. 대체 어째서 이런 토지를 원하며 타우를 감싸는 듯한 행동을 하는가, 오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델피니아의 이득은 매우 적다고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월 그리크는 설사 은에 대한 일이 없었다고 해도 예전에 맨몸이나 다름없던 자신을 구해준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려 했겠지만, 오론에게는 그러한 의리나 은의(恩義)같은 건 효력이 떨어진 계약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가치도 없다. 사람이 그런 것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을 믿지 않고 신용하지도 않으며, 좀더 실질적인 이득이 없이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 성격인 것이다. 그러나 타우 전체가 저 애송이에게 복종하게 된다면,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지도를 열고 델피니아가 만든 새로운 국경선을 기입해 보자, 엄청난 일이 되어버렸다. 중앙에 탄가와 파라스트를 초월하는 거대한 국가가 생겨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우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것은 너무나 바보스럽다. 다른 장군들에게 상담해본다고 해도, 모두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아비용 성의 호화로운 장식에 둘러싸여 오론은 혼자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여름의 밤바람이 기분 좋았다. 하늘에는 동그란 달이 있었다. 오론 곁에는 사치스럽게 장식한 애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색을 방해하면 기분 나빠하는 주인의 성격을 잘 d라고 있는 터라 말조차 걸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고 있었지만, 갑자기 작은 비명을 질렀다. “폐하...!” 오론은 살짝 혀를 찼다. 방해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야만 아는 거냐고 말하려다, 창 바로 옆에 사람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똑같은 천이 발끝까지 뒤덮고 있어서 생김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못 봐도 성 안에 사는 자의 복장이 아니었다. 도락적이고 간지(奸智)에 능한 성격이라 해도, 오론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무예의 소양도 상당한 것이었다. 재빨리 일어서서 등뒤의 벽에 장식으로 걸어둔 장창을 쥐었다. “웬 놈이냐!” 국왕의 목소리에 답해서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위병이 뛰어 들어왔다. 오론은 주의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이 방도 3층 성벽의 내부 깊숙이 있고, 엄중한 경호가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아주 잠시, 오론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떼었다. 이 수상한 놈을 붙잡아라, 하고 명령하려던 그 목소리가 목구멍 속에 달라붙은 채 사라졌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가에 늘어진 휘장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놈은 어디에?” 불안한 듯한 병사들에게 오론은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찾아라...” “예?” “이 방 어딘가에 숨었다! 찾아내라!”“예엣!” 그러나 애초부터 어딘가에 사람이 숨을만한 방이 아니다., 문도 두 개의 창도 위쪽 벽에 오론이 들어올린 창과 갑옷이 한 세트, 남국의 군주들의 풍습을 흉내 내어 바닥에 호화로운 융단을 깔기만 한 방이다. “바깥의 경비는 어쩌고 있었느냐?” “물론 한 발자국도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창 밖은?” “여기에서 떨어지면 즉사입니다.” 오론은 지금까지 신하들이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핏기가 없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역시나 병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군을 살폈다. 만사에 범상치 않게 현명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착란이라도 일으킨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누구 없느냐. 바로 시의(侍醫)를...” “아니, 기다려라.” 쉰 목소리로 오론은 그것을 막았다. “별일 아니다. 원래대로 돌아가라.” 병사들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명령에 따랐다. 오론은 여자도 물리고, 대신 예전부터 신뢰하고 있던 심복들을 곁으로 불렀고, 추가로 문 밖의 경비는 배로 늘렸다. 새벽의 갑작스런 호출이라 몇 명의 심복들은 약간 긴장하면서 찾아왔지만, 와보니 국왕은 융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술을 가져오게 하고 있었다.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으로, 왕이 지시한 대로 각각 술잔을 들었다. 그것은 곧 나타났다. 다시 창가였다. 유령처럼 기척도 없이 어느 사이엔가 그곳에 서 있었다. 물론 왕 주변에 모여 있던 강건한 남자들은 낯빛을 바꾸며 즉시 위병을 부르려고 했다. “기다려라.” 위에서 아래까지 천으로 감춘 인영(人影)을 노려보며, 오론은 심복 중 한 명에게 장식되어 있는 장창을 가리켰던 것이었다. “그걸로, 저 자를 찔러보아라.” “예!” 앉은 채로 인사를 하고, 그 심복은 일어서더니 창을 쥐었다. 불순분자는 물어볼 것도 없이 베어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이 성안의 규칙이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가슴 근처를 찔렀다. 그러나 그 남자는 깜짝 놀란 모습으로 창을 뺐다. 수상한 자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이럴 수가...” 신음하듯이 말하고 다시 한 번 찔렀으나 같은 결과였다. 어깨부터 때리듯이 갈라버려도, 목과 몸통이 이어진 부분을 횡으로 베어버려도 수상한 자의 모습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곳에 있었다. “이제 됐다. 그만해라.” 오론이 말을 걸었을 때, 그 남자는 흠뻑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상한 자는 얼굴을 가린 채, 오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 이해해주셨습니다.” “네 이놈, 요술사로구나. 그 모습은 환상이냐.” “그러하옵니다. 살아있는 몸으로 성안에 들어오는 것은 저희들로선 무리인지라...” “웃기는 소리. 누구라도 무리다.” 심복 중 한 명이 화가 난 듯 끼어들었다.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먼저 자기 나라의 왕궁 안에 그림자만이라고는 해도, 이런 정체도 모르는 자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 분한 듯 했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요술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능한 자가 있사옵니다. 또한 그자는 우리들처럼 술법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옵니다.” 살집이 풍부한 오론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누구냐.”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침입자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희들은 요술을 다루는 자들. 살아있는 몸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하는 칼날에는 못 미칩니다. 그것을 능숙히 다루는 무장(武將)들은 저희들과 같은 요술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해치는 자는 그야말로 해악의 근원. 퇴치하지 않으면 아니 되옵니다.” “그건 어떤 놈이냐고 묻고 있다.” 침입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이어서 말했다. “폐하는 델피니아의 세력이 이 이상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러하시지요?” 오론은 주의 깊게 대꾸했다. “옆 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기뻐할 왕이 있겠느냐. 네놈들, 요술사라는 게 그런 정도도 모르는 놈들인 게냐.” “그러하시면, 델피니아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폐하께 힘을 빌려드리고 싶다면...” 몇 명의 심복이 각각 짧은 노성을 터뜨리고 벌떡 일어서려 했다. 오론은 그것을 손동작으로 제지했다. “요술사 주제에 무얼 하겠다 말하는 게냐. 네놈들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듣지도 않는 저주 정도가 아니냐.” “폐하. 그 상대가 저주로 쓰러져줄 정도라면, 또한 폐하의 군사로 깨뜨릴 수 있는 상대라면, 이렇게 모습을 보여드릴 이유가 없사옵니다.” “네놈을 건드릴 수 없다고 기어오르지 마라. 델피나아군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짐은 반드시 이긴다. 타파해 보일 것이니라.” “저 왕비가 있는 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말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반론하려고 했던 심복들을 침묵시키고, 오론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게 만들 정도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알겠다. 네놈들의 생각을 말해 봐라.” “저 왕비는 잘못하여 이 세계에 떨어진 자입니다. 자신의 세계로 돌려보내기만 하면 될 일.” 오론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복들도 마찬가지였다. 침입자도 이해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몸을 베는 검을 사용하는 자에겐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왕비의 고향은 멉니다. 이 아벨도룬 대륙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곳까지 억지로 왕비를 돌려보내면 델피니아는 어느 사이엔가 기울고 언제라도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 억지로 돌려보낸다는 건 어떤 것이냐?” “그것은 저희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 다만, 이것에는 거대한 준비와 공물, 이 파라스트의 어떤 장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오론의 힘을 빌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로다. 마음에 들었다.” “황공하옵니다.” “얼굴을 보여라. 자세한 이야기를 듣자.” 그러나, 침입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때가 늦었사옵니다. 다음 만월 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론과 그 심복 몇 명이 마른 침을 삼키며 바라보는 가운데, 침입자의 모습은 뿌옇게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금박을 첨가한 모래만이 흐트러져 있을 뿐이었다. -9권 계속- 역자 후기 안녕하세요. 드디어 8권입니다. 질풍 같이 달려온 왕과 왕비의 활약으로 겨우 구해진 란바 요새, 그걸로 마치 일은 해결된 듯이 보였지만.... 어떠셨나요. 이번 권은?(웃음) 언제나 그렇지만 아직 책 내용을 안 읽으신 분은 잽싸게 앞으로 돌아가서 다 읽으신 뒤에 후기를 읽어주시고요. 네, 코랄에 봄이 왔습니다! 실은 E군의 활약이 책 초반에 상당히 돋보였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어째 머리 속에 남는 거라곤 여기 봄바람이 불어 닥쳤다는 거네요. 봄은 봄인데 인새의 봄이랄까. 에헤라디야~. 확실히 중세풍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치고, 전체적으로 델피니아 등장인물들의 연령이 높은 건 사실이었습니다. 1권에만 봐도 적정 결혼 연령애 대해서 나오는데, 아무리 봐도 이쪽은 온통 노총각 노처녀들만 있는 것 같으니까요(웃음) 하지만 그렇다 쳐도. 누군가의 결혼 경력은.... 쇼킹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누군가는 상당히 그럴듯한 만남(?)이었고, 또 누ㅜ군가는 당연히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던 커플이라 별로 놀랍지 않았다는.... 그건 그렇고 이전엔 또 오랜만에 일본어와 우리말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번 스토리 후반부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갑(手甲)에 대해서인데.... 일본어로는 원래 이것을 코테라고 합니다. 손을 감싸는 껍데기라는 정도의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실은, 이 번역은 완전히 정호가한 번역이라고 하기는 약간 애매합니다. E군이 차고 있던 이번 회의 주인공(?)은 팔꿈치까지 닿는 매우 길고 튼튼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일어로는 간단하게 코테라는 말로 끝내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말의 ‘수삽’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상당히 간단하게 차이점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건틀렛(gauntlet)과 브레이서(bracer)입니다. 실은, 우리나라의 수갑(이런 용어가 정확한지도 모르겠군요)은 건틀렛에 가까운 것인데 이븐의 그것은 브레이서 쪽에 가까운 방어구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 과연 그럼 코테= 브레이서? 정확하게 말하면 원래의 코테라는 것은 코테= 브레이서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의 개념 차이는, 실은 각 나라들의 갑옷 차이에서 온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건틀렛은 정확하게는 손을 보호하는 보호구, 브레이서는 팔목부터 팔꿈치 정도까지를 보호하는 보호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갑옷의 경우(흔히 미늘갑옷이라고 하지요) 팔목가지 전부 ‘옷’에 의한 갑옷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브레이서나 코테 같은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손만 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손등 위 정도를 가리는 걸로 끝나있지요(어떻게 생겼는지를 보고 싶으시면 사극을 참조하세요). 그에 비해 일본의 갑옷은 일본 만화나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온 몸을 가리는 옷 형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팔을 가릴 마땅한 방어구가 없었고, 그 부분을 가려주는 거의 손에서부터 팔꿈치에 이르기까지 전부 가릴 수가 있는 코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경우에 l해 서양 쪽에서는 갑옷이라고 해도 딱히 우리나라처럼 거의 한 가지 종유로 발전한 게 아니라 가죽, 스케일, 칠판 갑옷 등등, 용도와 시대에 따라 상당히 변화가 많았지요. 종족도 문화도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섞이다보니 갑옷도 조각조각 세분화가 되게 되었지요. 손을 보호하는 거산해도 장갑식 형태, 건틀렛(주로 금속갑옷과 짝지워지는)형태, 브레이서 형태, 우리나라 갑옷처럼 아예 옷처럼 내려오는 형태등.... 델피니아에서는 갑옷의 형태에 대한 언급은 그다지 없습니다만 간혹 보이는 이러한 면들은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장비를 갖추는 장수들은 서양식 갑옷 형태를 하고 있고, 가벼운 움직임을 중시하는 타우 산적들은 일본식(이라고 단정하긴 힘들겠지만)의 가벼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거나 하는 일말이죠.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배경에서나 그렇듯이. 백수공권으로 싸우는 맨몸의 전사도 결코 빠지지 않고 말입니다(왕비님 파이팅). 그냥 보이는 대로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판타지에다 전쟁들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여러 장면들을 직접 머리 속에 그려보다 보면, 이것 또한 즐겁게 델피니아를 즐기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어쨌던, 그렇게 8권은 넘어가고 드디어 다음번은 대망의 9권이군요. 전 18권의 장거리 달리기가 절반에 도달하는.... 과연 오론 왕의 침실에 직접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사라진 그놈들은 무엇일지..., 그들은 어떤 계략을 꾸며서 리를 함정에 빠뜨리게 될지....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2부의 서막과 전쟁의 서막은 이제 막 열렸을 뿐입니다(웃음). 그럼 다음 권에서 뵙지요. 2003년 3월 김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