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델피니아 전기5 지 은 이 : 카야타 스나코 옮 긴 이 : 김희정 펴 낸 이 : 안영식 출 판 사 : 대원씨아이(주) 출판년도 : 2002년 12월 15일 <지은이 소개/ 카야타 스나코> 1992년 <델피아의 희장군>으로 소설계에 데뷔. 이후 출판사를 옮겨 <델피니아전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시작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탄탄한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델피니아>외에는 <키리하라 집안의 사람들>과 <스칼렛 위저드>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김희정> 옮긴 책으로 <델피니아 전기 1~9권>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그 첫 번째> 등이 있다. <차례> 1 ~11 2 ~37 3 ~69 4 ~107 5 ~139 6 ~177 7 ~197 8 ~229 9 ~259 10 ~285 역자후기 305 <소개 글/서평> 일본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된 인기 판타지소설. 능동적인 매력을 지닌 여주인공과 간신들로부터 탈주한 젊은 왕, 자신감에 넘치는 과격한 공작 등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문체는 경쾌하고 깔끔하며, 전체적으로 탁 트인 듯 한 통쾌함을 안겨주는 소설이다.동물들 사이에서 자란 '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이세계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만난 윌의 목숨을 구해준뒤, 그와 동반하게 되는데 윌은 델피니아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나 지금은 쫓기는 신세. 훗날 '사자왕'과 '희장군'이라 불리게 될 두 사람의 여정이 시작된다. 5권 이세계의 왕녀 1장 그날은 공주가 아침부터 본궁에 내려와 있었다. 왕궁의 아침은 이르다. 아직 어두울 때부터 여자들을 중심으로 하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녀장 카린은 특히나 활기차게 움직이면서 여자들을 감독하고 있었지만 공주의 모습을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왠일이신가요.” 그런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올 정도로, 이 사람이 스스로 본궁에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안녕. 그 녀석은 뭐해?” “오늘 아침에는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침소에 계시지 않을런지요.” “그래. 조금 너무 일렀나.”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 깨우러 갈게. 급한 볼일인 것 같으니까.” 공주가 말하는 ‘그 녀석’이란 국왕을 가리킨다. 다른 자라면 이런 말투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카린도 용서치 않지만 언제나 이렇다. 요즘에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서 포기하고 있었다.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델피니아 왕궁, 코랄 성은 파키라 산 중턱에서 평지에 걸쳐 세워져, 아래에서부터 삼곽, 이곽, 일곽이라는 3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1곽의 가장 안쪽에 멋들어진 하얀 모습의 본궁이 세워져 있다. 본궁만 해도 눈부실 정도로 넓은 건물이지만 언제나 제멋대로인 공주는 안내도 기다리지 않고 국왕의 방으로 향했다. 델피니아 국왕, 월 그리크는 그 성장 배경 탓에 거추장스러운 일은 좋아하지 않았다. 옆 나라인 파라스트의 오론 왕처럼 가족의 일원이라도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선 몇 단계나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월의 경우는 외부에서 온 빈객을 만날 때나 다소의 격식을 취하는 정도였다. 국왕의 침실은 누구라도 지나갈 수 있는 복도의 앞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 쪽이 편리하다는 것이 당대 국왕의 말이었다. 너무 부주의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침소의 곁에는 빈방이 있어 사람이 묵고 있다. 야간 경비와 눈을 뜬 국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모습을 보고 근무지에 있던 병사도 시종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왕족의 여성이라면 이곳에서 멈춰 서서 자신이 왔다는 것을 폐하께 전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순서지만 공주는 신경쓰지 않았다. 절하고 있는 신하들 옆을 태연하게 지나 국왕의 침소에 들어갔다. 거의 발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설령 푹 자고 있었다 해도 문을 여는 소리만으로 국왕은 눈을 떴으리라.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고 있다 해도 감각은 날카로운 남자다. 실제로는 이미 일어나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공주의 모습을 보고는 웃는 얼굴이 되었다. “오오, 빠르군.” “급하게 만나고 싶다고 말한 건 그쪽이잖아. 그 편지 놔둔 건 언제야?” “그저께다. 좀더 기다려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틀밖에 안 걸리다니 고맙군.” 본래 공주라는 것은 아버지인 국왕의 허가 없이는 자신의 주거지를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공주에게 그런 상식은 통용되지 않았다. 지금의 거주지인 서리궁(西離宮)은 본궁보다 훨씬 뒤쪽인 파키라 산 중턱에 세워져 있고, 안 쓴지 오래되기도 해서 자칫하면 대낮에도 늑대가 나타날 것 같은 장소였다. 겁쟁이가 아닌 웬만큼 대담한 남자라도 혼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절대 사양하고도 남을 곳이지만 공주는 그런 별궁에서 시동도 두지 않고 살고 있었다. 그 뿐이라면 그렇다 쳐도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실로 번번히 사라지곤 했다. 짐승이 자주 출몰하고 근처의 사냥꾼들도 발을 내딛기 망설이는 파키라 산 속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때로는 혼자서 국경을 넘어가기도 하는 듯했다. 반 달 가까이 별궁을 비워두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장소가 장소인 만큼 사자(使者)를 남겨둘 수도 없어, 결국 대단히 믿음직스럽지 못한 수단이지만 편지를 남겨두는 이외의 방법은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소처럼 열흘은 기다려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했다고. 이번엔 어디를 돌아다닌 거냐?” 공주는 이 질문에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보다 급한 볼일이란 건 뭐야.” “뭐, 기다려봐. 그 전에 배를 채우도록 하자. 너는 어때?” “그러지. 뱃가죽이 등짝에 가 붙었어.” 성 사람들은 이 별난 공주에게도 상당히 익숙해졌지만 모르는 자는 아직도 기겁하며 놀란다. 특히 성 아래에서 봉공(奉公)을 위해 올라온 젊은 시녀들이 그랬다. 성 아래쪽의 소녀들도 물론 공주의 소문은 듣고 있다. 일종의 동경마저 품기도 한다. 태어난 출신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그 아름다움을 높이 사 떳떳하게 공주가 된 동화 속 주인공으로서다. 그러나 본인을 직접 보게 되면 동화와 실물과의 심각한 격차에 소녀들은 할말을 잃고 만다. 델피니아의 공주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잠자코 앉아만 있으면 나무랄 데 없는 미소녀였다. 그것은 틀림없다. 앞으로 5년만 지나면 절세의 미녀라고 일컬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공주는 아름다운 의복 따위엔 눈도 주지 않았고, 잠자코 앉아 있는 일 따위는 꿈 중에서도 꿈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식다운 거라고 한다면 이마에 두른 은색 관 하나 뿐이다. 빗으로 빗으면 황금같이 광채를 낼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적당히 말아 올리고, 늘씬하게 뻗은 몸은 산악민과 같은 가죽옷으로 감쌌으며, 보기 좋은 팔에는 찢어진 마포를 둘둘 감고 있다. 긴 바지를 입은 다리 아래에도 마찬가지로 거친 마포를 감고 흙에 더러워진 가죽 단화를 신고 있다. 덤으로 허리에는 언제나 장검(長劍)을 차고 있었다. 이 모습으로 태연하게 본궁 내르 활보하고 국왕을 붙잡고는 거리낌없이 구니 모르는 자라면 얼이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카린을 따라 아침식사의 반찬을 날라 온 젊은 시녀 한 명이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주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서버렸던 것이다. 성에 막 올라온 소녀로, 불행히도 지금까지 공주의 모습을 본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산적 소년이 폐하의 침소에 숨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앞서서 안내해 온 카린이 눈길을 주었기에, 황급히 정신을 되찾고 딱딱한 손놀림으로 간신히 음식들을 늘어놓더니 다른 시녀와 함께 물러갔다. “놀라게 한 모양이군.” “무리도 아니야.” 두 사람은 시중 드는 여관들도 물러가게 하고 잠시동안 서로의 근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국왕은 조금 어조를 바꿔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마레바에서 약간 골치 아픈 소리를 해서 말이야.” “발로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어?” 국왕의 사촌 동생이자 사보아 공작의 칭호를 가진 노라 발로는 마레바에 본거지를 둔 틸레든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하다. 국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또한 심복인 아군으로서 모르는 자가 없는 중요인물이다. “또 남의 마누라하고 불놀이라도 시작했다던가.” “그런 거라면 내버려두지. 종제님은 나와는 달리 불놀이의 달인이니까. 불씨를 붙이는 것도 선수지만 나중에 뒤탈이 남지 않게 없애는 것도 선수야.” 공주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는 달리, 라고 일부러 그어두는 것이 우스웠다. 델피니아의 국왕 월 그리크는 27세가 된다. 어진 시정(施政)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름높은 검호이기도 하다. 단정한 생김새에 온화한 눈과 같은 색의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가졌고, 단련된 탄탄한 장신은 훌륭할 정도로 균형 잡혀 있었다. 당당하고 수려한 장부였지만 아직까지 독신이다. 그 <딸>인 공주는 16세. 이름은 그린디에타 라덴. 앞에 말한대로 눈부실 정도의 금발과 선명하고 깊은 녹색 눈망울을 가진 남장 소녀이다. 국왕과는 물론 진짜 부녀지간은 아니었다. 원래의 출신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3년 전 내란에서 전쟁의 여신도 저리 가라 할 활약을 보이고, 국왕의 절실한 요청으로 공주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단호한 결정에 경악했고,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저 소녀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하며 아는 척 수군거렸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소문을 일축했다. 국왕은 공주에 대해, “나의 동맹자다.” 라고 말하고, 공주는 왕에 대해, “나를 여자 취급 하지 않는 귀중한 남자다.” 라고 말한다. 당연히 말을 주고받는 모습도 제대로 된 부모자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공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싯사스에서도 네 왕비는 누가 될 건지 소문거리가 되어 있던데.” “뭐야. 너, 그런 곳에 드나들고 있는 거냐.” “아아, 재미있거든. 온 대륙에서 여러 가지 인간들이 모여드니까 말이야. 신기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하지만, 아무리 너라고 해도 젊은 처자가 싯사스에 출입하는 건 좋지 못해.” “그거 말이야. 이런 모습이면 아무도 나를 여자라고 생각지 않나봐. 덕분에 이상하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이번에는 국왕이 웃음을 뿜어냈다. 머리카락을 감춰두면 그린다 공주는 시원스런 인상의 소년으로 보인다. 기녀(妓女)들이 장난기가 동하여 유혹해오는 것이리라. “나는 물론 그런 꼬임에 넘어가줄 순 없지만 말야. 괜찮다면 너한테 넘겨줄게.” “바보같은 소리. 국왕이 마을에 내려가서 여자를 산다고 해봐라. 딱 좋은 웃음거리지.” 간단하게 말하는 국왕이었다. 실제로 중앙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진 영웅치고 이 국왕은 여자 쪽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질 않았다. 당대의 발로, 그리고 국왕의 소꿉친구이자 악우(惡友)인 이븐은 그 점을 걱정하는 건지, 무슨 짓을 하는가 하면 국왕에게 여자를 접근시키려 하곤 했다. 한번은 이븐과 함께 싯사스에 암행(暗行)했던 국왕은 그야말로 양손에 남아돌 정도로 화려찬란한 창부들에게 둘러싸였다가 저 쪽에서 억지로들 추근대는 바람에 도망쳐 나온 듯했다. 그런가 하면 또 발로의 소개라고 하는 여러 아름다운 귀족 부인들이 열심히 국왕에게 접근해 왔다. 젊은 데다 독신인 국왕에게 여자들이 눈빛을 바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 뒤에서 두 사람이 줄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하는 짓은 마찬가지면서, 두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기꺼이 생각지 않고 있었다. “대체 스샤 같은 촌구석에서 자란 그 녀석에게 귀족의, 그것도 남의 마누라를 밀어붙여봤자 무리한 얘기야. 차려진 밥상을 안먹겠냐 어쩌냐 하는 것도 기사단장처럼 바람둥이한테나 들어맞는 소리고, 아무리 밥상을 차려줘봤자 저런 벽창호가 솔직하게 밥상에 손을 내밀겠냐.” 하고 이븐이 독설을 내뱉으면 발로도 지지는 않았다. “과거가 어쨌든 간에, 지금의 형님은 이 델피니아의 국왕이시다. 애첩으로 삼을 건 물론, 설사 장난으로 손을 댄다 해도 거리의 창부 따위를 접근시키는 바보가 어디 있나. 하층 남자들만 상대하는 여자들이란 말이다. 나쁜 병이라도 가지고 있다간 어쩔 셈이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지 않겠나.” 어느 쪽 변명에도 일단 일리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 조달해온 처녀가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는지를 은밀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국왕 귀에 일러바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린다 공주였다. “인기 많은 남자는 여러모로 큰일이네.”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어조와 표정으로 말하자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고 목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억지로 밀어붙여서야 마음이 내키질 않아 그런 것 뿐인데 말이지. 곤란한 일이다.” 국왕이 아직까지 독신이라는 사실을 일부의 가신(家臣)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력한 국가 중에서 적당한 공주를 간택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왕의 결혼은 다시 말해 정략이다. 어느 국가를 선택할지 국왕으로서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측실이라도, 하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국내의 귀족이 각각 자신이 찍은 처녀들을 넘겨왔다. 그러나 국왕은 이쪽에서도 신중했다. 그대로 신하들의 세력 다툼으로 발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두 사람이 소개해준 처자들에게는 섣부른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얼굴을 마주치면 불꽃이 튀기는 종제(從弟)와 친구에 대해 국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공주는 기묘한 미소를 띄우며 끄덕였다. “동감이야. 선택받지 못한 쪽이 질투한 나머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선택받지 못한 여자가, 라는 게 아니다. 싫어도 공주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 국왕은 웃어야 할지 곤란해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틸레든 기사단장은 25세가 된다. 10여 년 전부터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기사이자, 국왕과 많이 닮은 듬직한 체구에 검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가문과 용모에 있어서도 혜택받고, 무용도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여자 관계는 매우 화려했지만, 내란시대에는 완고하게 왕좌를 거부하던 고집 센 인물이었다. 그 발로와 친척인 사보아 가문의 사이가 요즘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귀족인 사보아 공작가는 많은 친족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당주에 필적할 정도의 대가(大家)의 주인인 맥다넬 경(卿)이라는 인물이 있다. 에브리고에 광대한 영지를 가진 대귀족이자 동시에 선대 사보아 공작의 동생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지위도 높고 현 공작의 ‘숙부’인 만큼 일족 중에서도 발언권도 상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대가의 주인이라 해도 일족의 일원인 이상 당주의 의향에는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혈족의 법칙이다. 맥다넬 경도 예외는 아니다. 연하이건 조카이건, 당주인 발로를 ‘윗사람’으로 치고 일단 예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마찬가지로, 일가의 장이라고 해도 발로 역시 ‘숙부’인 멕다넬 경을 윗사람으로서 대접해주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그런 두 사람 사이가 급속히 험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멕다넬 경은 이전부터 발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일족의 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간단한 사태가 아니었다. 3년 전의 내란 때, 시종일관 국왕의 편이었던 발로와 달리 그 어머니인 아에라 공주, 그리고 문제의 멕다넬 경 등 일족 중에서도 힘이 있는 자들은 반란세력에 가담하는 쪽이었다. 그 때문에 내란이 평정되고 나서도 두 사람 사이에 사소한 말다툼이나 감정의 대립이 내내 있었던 것 같다는 사실은 국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렇게까지 험악한 상태가 되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레바에서 온 사자는, 이제는 맥다넬 경과의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발로의 결의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맥다넬 경이 매번 당주인 발로를 능멸하는 발언을 반복했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드디어 마레바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즉시 마레바에 전해졌고 그 소식을 들은 발로는 화를 내지도 않고 태연히 말했다는 듯했다. “다시 말해 나보고 죽여달라 이 말씀이로군.” 보고했던 사자는 그 음성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는 것 같았다. “숙부님도 겸허한 분이다. 그렇게 죽고 싶은 거라면 이렇게 빙빙 돌리는 수단을 쓰지 말고 내 앞에 나서서 한마디, <가독(家督) 자리를 내놓아라>고 하면 될 텐데. 그 자리에서 칼로 두 동강을 내드렸을 것을.” 오히려 기분 좋게 말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말리지 못하겠다고 여긴 틸레든 부기사단장 아스틴이 비통한 표정으로 국왕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주인은 가족 일로 영내를 어지럽히는 것을 폐하께 사과드림과 동시에, 실로 볼품 없는 꼴을 보여드리는 셈이 되겠사오나, 가장인 발로를 가볍게 여긴 나머지 자신이 그것을 대신하겠다 나서는 맥다넬 경을 방치해둘 수는 없어,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처리할 마음가짐으로 있다고 아뢰옵니다. 저는 주인을 대신하여, 사적인 일로 병사를 일으키는 것을 폐하께 미리 알려드리기 위하여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허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준다고 하는 것이 역시나 발로다웠다. 이것은 집안 문제이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예, 그렇습니까’하고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국왕은 그 자리에서 아스틴에게 자세한 사정을 캐물었다. 오랜 기간 발로 곁에서 일하고 있는 아스틴은 언제나 발로의 충실한 부하였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이 되었겠지만, 하얗고 정돈된 외모와 옅은 다갈색 머리카락은 실제 나이보다 열 살 정도 젊게 보이게 했다. 일류 기사이면서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성격이 격렬한 주인을 적확히 보좌하는 명부관이기도 했다. 그 아스틴이, 국왕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폐하께는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된 이상 저 같은 자가 뭐라 말씀드린다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렇게나 주인의 결의는 굳으며, 이쪽이 쓰러지느냐 저쪽이 쓰러지느냐 하는 각오로 출격할 예정입니다.” “안 돼. 그 출격, 내가 용서 못한다.” 드물게 엄격한 말투로 국왕은 단언하고, 그 지시를 마레바에 전함과 동시에 맥다넬 경에게 사태의 상세한 전말을 묻는 문서를 보냈으나, 이것과 스쳐 지나가듯 맥다넬 경의 사자가 왕궁에 도착했다. 실로 유감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마레바와 일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허락을 구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국왕은 아연해함과 동시에 매우 어이없다는 태도로 사자에게 물었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이냐? 발로는 알다시피 내 종제, 또한 맥다넬 경은 그 종제의 숙부이자 왕국의 중진이기도 한 분이 아닌가. 어째서 이 두 사람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납득이 가는 해명을 해보아라.” 이 질문을 받자, 사자는 억누른 말투이지만 틀림없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모습으로, 이도 저도 모두 문제는 발로에게 있다고 했다. 3년 전의 사건을 발로는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무언가 있을 때마다 맥다넬 경을 모략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년 전쯤부터 그것이 더욱더 심해졌다는 듯했다. “분명히 그 내란에 있어서는, 나는 충신이 취해야 할 태도를 관철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라고 맥다넬 경은 술회했던 모양이다. 뭐라 해도 온 나라가 국왕인지, 아니면 반란세력의 수괴였던 페르젠 후작인지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그 때에는 후작의 말이 옳은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폐하를 돕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자하니 페르젠 후작은 돌아가진 뒤르아 님께서 총애하던 여성을 살해하고 어리시던 폐하의 암살을 꾸몄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이상 델피니아의 영광스러운 신하인 이 몸이 같은 편을 들 수 있겠는가.”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새롭게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귀족은 맥다넬 경 외에도 다수 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계속 가담하고 있다가 같은 부류라고 취급받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죄를 범했던 나를 쾌히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 폐하께는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예전의 과오를 보상하는 의미에서도 폐하와 델피니아를 위해 한층 더 충의를 바쳐왔다. 그런데...” 발로는 아직까지도 맥다넬 경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사보아 가문의 친척일동이 모였을 때 발로는 숙부인 맥다넬 경을 말석으로 쫓아내고, 얼굴을 맞대고 그 숙부를 가까이에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내뱉었다는 것이다. 48세의 맥다넬 경은 이 굴욕에 머리카락이 치솟을 정도였고 만면에 피가 올라 벌겋게 되었다고 사자는 이야기했다. 경 자신의 말을 빌자면 이런 치욕을 받고 잠자코 있어서는 그것이야말로 기사의 수치이다. 동시에 이 이상 저 조카를 당주로서 내버려두는 것은 자신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실로 송구스러우나, 사적인 감정으로 병사를 일으키는 것을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국왕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허락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이렇다 알려진 사람들이 어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이라는 것이 국왕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맥다넬 경이 이긴다면 경에게는 <당주 살해자>라는 오명이 씌워지게 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발로가 이기면 <숙부 살해자>가 된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난다 해도 델피니아에 득이 되지 않는 것은 명백했다. “그래서 말인데, 대체 뭐가 원인이라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게 된 건지 이것저것 조사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맥다넬 경의 변명 쪽이 옳은 것 같다.” “에엥?” 공주는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내란 전부터 이 숙부와 조카는 그다지 잘 지내지는 못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부친이 사망한 후 발로가 작위를 이은 것은 18세 때이다. 맥다넬 경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용이 높거나 당주가 되었다 해도 그런 연령의 조카를 어린애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는 일이고, 발로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것만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이것저것 참견하는 맥다넬 경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란 후 맥다넬 경은 발로를 명실공히 당주로서 인정하고 좋게 따르고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주인 발로는 맥다넬 경을 싫어하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주 경의 체면을 뭉개버리는 짓을 해왔던 것 같았다. 상대가 가장이라고 생각하기에 참고 또 참아왔던 맥다넬 경이지만, 그 참을성의 끈이 얼마 전 친척회의 건으로 드디어 끊어져버린 것이다. “어쨌든 내가 판정할 때까지 참고 병사를 움직여선 안 된다고 두 사람에게는 전달했지만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마레바와 에브리고 사이에 전투가 일어날 거다.” 공주는 솔직하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장난이 아닌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가벼운 분쟁으로 끝날 수 없게 된다고,” 불과 16세의 공주였지만 전쟁의 여신의 현신(現身)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고 말고. 그저 집안 소동으로 끝날 리가 없다.” 국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동맹자>라고 하는 것은 국왕의 틀림없는 본심이었다. 용맹무쌍으로 알려진 틸레든 기사단을 포함한 마레바에, 광대하고 자원이 풍부하기로 알려진 에브리고다. 서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몇천을 훨씬 넘을 것이다. 그 정도의 전력이 부딪히게 되면 이건 이미 전쟁이다. “하지만 대체... 발로는 맥다넬 경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든다는 거야?” “나도 그걸 알고 싶다.” 발로는 분명히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비꼬기와 독설의 명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 년이나 더 된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둘 것 같은 음험한 집념과는 연이 없는 인간일 터였다. “처음에는 하필 그때 종제님의 말이 지나쳤을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뭐라 해도 인정사정 없이 말하는 종제님이니까. 본인에게 악의가 없어도 들은 사람이 뭐라 생각할지 알 수 없으니.” 그래서 국왕은 우선 맥다넬 경을 달래보려고 했다. 일의 진행에 따라선 발로에게서 사죄의 말을 들엊낼 테니, 부디 전투만은 참아달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참을성의 한계를 넘었으므로 이젠 무력을 써서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끝에 아뢴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 사과를 듣는다 해서 끝날 문제라 생각하십니까.” 라며 완고하게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경은 어떻게 해서든 저 조카의 목을 따고야 말겠다고 격분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엔 발로에게 충고를 하려고 했다. 상대는 친척 중에서도 가장 믿음직스러워야 할 사람일 터, 어떤 이유가 있다하더라도, 피를 흘리는 것 이외의 수단으로 결론을 지어야 하리라는 말을 전하는 것과 함께 비르그나의 나시아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시아스는 틸레든 기사단과 쌍벽을 이룬다 칭해지는 라모나 기사단의 단장이다. 그 검술은 충분히 발로와 비견하고도 남을 것이며, 자신은 중류귀족 출신이면서도 사보아 공작이라는 신분에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이야기 한다. 발로에게 있어서는 심복이자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인물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나시아스가 엊그제 일부러 비르그나에서 찾아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일은 진심으로 유감이라 생각하오나 자신은 도저히 발로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이야.” 공주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정말이야?” “그래서 말이다. 그럼 이대로 뒷짐지고 종제님에게 숙부 살해를 시키라는 거냐고 추궁하자, 나시아스는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다.” “어째서?” “나도 바로 그렇게 물어봤지. 그러자 나시아스는 자신도 틸레든 기사단과 함께 에브리고로 진군해서 발로 대신 맥다넬 경을 베고 돌아오겠으니, 제 친구는 숙부 살해자 같은 것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러는 거다?” 국왕은 어깨를 움츠리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공주도 더욱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모나 기사단장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발로와 나시아스는 둘 다 뛰어난 무장(武將)이지만 완전히 추진력과 제어력의 콤비였다. 물론 어느 쪽이 브레이크인가 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평소의 나시아스라면 설령 국왕의 말에 솔직히 끄덕여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일단 발로를 설득해보려고 할 터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천재지변의 전조는 아니겠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손발 다 들고 항복이다. 어쨌든 나시아스는 왕궁에 묵고 있지만 얘기가 안 통해. 처리를 고민하던 끝에 네 의견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사자를 보낸 거다. 또 궁을 비웠다고 해서 당황했지만 말이다. 간신히 시간엔 댄 것 같구나.” “곤란할 때는 결국 나냐?” 묘한 소리를 일부러 끄집어낸 공주였지만 그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그것은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종제님과 맥다넬 경 사이에 무언가 깊은 골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하나도 모르겠다는 거다. 아스틴에게도 나시아스에게도 끈질길 정도로 물어보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코 입을 열질 않아. 저택의 ‘할아범’도 마찬가지다.” “흐음...” 이 왕궁에도 사보아 공작의 훌륭한 저택이 있다. 그 집 지키기 역의 카사는 벌써 40년이나 공작가에 봉사해왔고 어렸던 발로가 할아범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교육담당이기도 했다. 몸은 늙었지만 공작가와 주인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마르고 부드러운 인상의 노인이면서도 상당한 기개의 집사였다. 당연히 자기 손으로 키운 ‘도련님’인 발로에 대한 충성심도 보통은 아니다. 그런 카사까지도, 친척을 상대로 하는 전투만은 피해야 한다는 국왕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단호히, “제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즉, 발로와 친한 사람들은 전부 발로의 편을 들고 있고, 맥다넬 경을 치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종제님 쪽에 잘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먼저 결별 선언을 들이민 것은 경 쪽이지만, 발로는 마치 맥다넬 경을 일부러 화내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혹은 도발한 것일지도 몰라.” “그것도 생각했어. 하지만 이유가 뭐지? 만약 맥다넬 결이 종제님에 대한 모반이라도 논의하고 있다면 그 점을 확실히 하면 돼. 그렇게 당당하게 맥다넬 경을 규탄하는 쪽이 훨씬 종제님의 성격에도 맞을 거다. 그렇게 하면 나도 호령을 내리고 맥다넬 경에게 충고함과 동시에 종제님에게 사과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을, 이래서야 손을 쓸 도리가 없다.” 최근에 와서는 드디어 국내도 안정되었다. 이런 때 사소한 감정의 엉킴으로 전투를 벌이다니 월의 입장에서는 바보 같기 그지없는 일이고 결코 인정해줄 수 없었다. 공주도 골치 아픈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시종이 조심스레 침소에 나타났다. 바로 지금 미레바에서 사자가 도착했고 틸레든 기사장 노라 발로가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곧 출두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어깨를 들썩이고 화를 내면서 알현장에 나타난 발로는 어조도 거칠게 단숨에 말했다. “형님! 아무리 국왕이시라 해도 집안 문제에 끼어드는 건 그만 둬주십시오!” 이것이 오랜만에 만나는 주군을 향한 첫 대사이니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촌동생이고 왕가에 버금가는 사보아 공작가의 당주라고 해도 국왕을 보필하는 신하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군에 대해 너무나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자아, 진정하게. 종제님. 처음부터 그렇게 나와서야 이야기가 안 되잖나.” “죄송하지만 제 쪽에서 말씀드릴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군요. 돼먹지 못한 친족의 일로 형님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하나, 그것도 거병(擧兵)만 허락해주신다면 즉시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이번엔 조용히 관망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종제님, 그건 아무래도 무리한 이야기라네. 이 분쟁은 왕국에도 자네들 사이에도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네. 틀린가?” “그건 의외로군요. 싸움이라는 것은 항상 득실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의치 못한 사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 정도는 형님도 이미 잘 알고 계실 터.” “하지만 종제님. 그 여의치 못하는 사정이라는 것이 이 경우 나에겐 도저히 보이질 않는 걸세.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이 무력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이유를 나는 모르겠어.” 마음 깊이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으로 말한 국왕을 보고 발로의 정후한 얼굴이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집안 문제라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 말만 하더니 국왕의 어떤 말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국왕이 최대한의 양보를 해서, 그렇게나 맥다넬 경에게 해묵은 감정이 있다면 지금의 태도를 고치라고 왕이 직접 맥다넬 경에게 충고해도 좋다고까지 말하자 발로는 전보다 더욱 결렬하게 반발했다. “형님이 움직이시면 저쪽이 생각하는 바대로가 아닙니까! 숙부는 이 발로가 당주로서 부적격자라고 주장하고 자신이 그 지위를 대신해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으로서 이것을 처벌하는 데 무슨 망설임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제가 보았을 때 이미 이것은 집안 내의 분쟁이고 신하들끼리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만약 형님이 섣부른 일을 하시게 되면 숙부는 형님께 대해서도 그 이를 드러내겠지요. 자칫 잘못하면 3년 전 일을 재연하는 게 됩니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시고, 군주의 의무라고 포기하고 잠자코 앉아 계십시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관계없는 사람 취급을 받아도 국왕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격렬하게 물어뜯는 발로는 희한하다는 듯이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군, 종제님.” “제가 무례를... 결코 형님께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고픈 건 아닌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바람에 발로는 눈을 크게 떴다. “뭣이라고요?” “사람은 배가 고프면 쉽사리 화를 내게 된다고 하지. 무언가 드시고 가시면 좋겠군.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막 식사를 한 참이지만, 그리고 나서 이야기를 하세.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오랜만이니.” 독기가 빠져버린 발로였지만 그래도 오만불손하게 가슴을 폈다.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의 제게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있을 여유 같은게 없습니다. 곧바로 마레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뭐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나. 나시아스가 이틀 전부터 이쪽에 와 있네. 오늘은 마레바로 출발하겠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하마터면 엇갈릴 뻔한 걸 면하게 되지 않았나.” “형님.” 어디까지나 느긋한 태도의 국왕이었지만 발로의 눈초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비르그나의 나시아스가 왕궁에 있는 이유는 뭡니까.” “이유고 뭐고, 그저 얼굴을 보여주러 들른 거라고 생각하네만...” 이 국왕치고는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지만 발로는 즉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기사 발로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요. 형님은 이 제가 당주로서의 의무를 앞에 두고 친구의 말에 좌우될 것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번에는 국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종제님은 좋은 친구를 가졌군.” “비꼬시는 겁니까?” “그건 종제님의 전매특허겠지. 나는 잘 못해.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나시아스에게는 확실히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종제님과 맥다넬 경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깊은 앙금이 있는 것 같군.” “그럼, 전투를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점심때까지는 나도 예정이 짜여 있어서 움직일 수 없어. 오후가 되면 매사냥이라도 나가지 않겠나.”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전투를 그만두라는 말씀이시라면 들을 귀는 없습니다.” 선수를 빼앗긴 국왕이었지만 거스르진 않았다. “알았다. 그 이야기는 않지.” “감사합니다.” “대신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무슨 일인지요.” “마레바에 돌아가는 것은 내일로 하고, 오늘 밤은 술 상대를 해주었으면 하네.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는 빼놓고.” “그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기꺼이 상대해드리지요.” 계속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발로가 처음으로 표정을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2장 코랄의 북쪽 150카티브 떨어진 곳에 도라 장군의 영지인 로아가 있다. 공주는 지금 그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말이 아닌 자신의 발로 달리고 있다. 언제나 몸에서 떼지 않는 검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등에 지고, 준마(駿馬)도 저리 가라 할 속도로 곧장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사람과 스쳐 지나가는 일도 있었지만, 무엇이 지나갔는지 눈치챌 사이도 없이 공주의 모습은 멀어져갔다. 덩치 큰 어른이 아무리 달려가도 3일의 여정일 테지만, 공주는 한 무리 바람처럼 달려 그 날 오후에는 로아에 도착했다. 국왕이, “저 발엔 마법이 걸려 있어.” 라고 말하는, 공주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공주라고 해도 불과 반나절로 이 거리를 주파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어째서 그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로아로 향했는가 하면, 이 서북쪽 20카티브 부근에 맥다넬 경의 영지인 에브리고가 있는 것이다. 발로와 친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입게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도라 장군이라면 발로를 신경 써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열심히 숨기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어떨지는 도박이지만, 알고 있다면 반드시 이야기를 해줄 터였다. “어라, 왕녀님 아니세요.” 길 옆의 농가에서 나온 여자가 공주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걸어왔다. 이 토지에서는 ‘별난 왕녀’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 “또 왕궁에서 빠져나오신 건가요?” “그래. 로아는 멀군. 꽤나 지쳤어. 물이나 한 잔 주지 않겠나.” “예이.” 도라 장군의 성까지는 아직 제법 남아 있다. 조금 쉬고 다시 한바탕 달리기 위해 일어선 공주였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찾아온 말 위의 사람을 보고 공주는 웃는 얼굴이 되었고 상대도 미소 띈 얼굴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님, 마중 나왔습니다.” 도라 장군의 외동딸 샤미안이었다. “잘도 내가 오는 걸 알아챘군.” “어머, 저에겐 그런 신통력은 없어요. 하지만 아는 자도 있지요. 저쪽에...” 샤미안이 가리킨 방향에는 검은 조각상 같은 커다란 말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을 두려워해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당당한 모습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흑왕이 이렇게나 가까이...” 농부 여인이 놀란 듯이 말했다. “갑자기 달려나가는 것이 보여서 저도 뒤를 쫓아온 거에요.” 샤미안이 설명했을 때에는 이미 공주는 기쁨에 넘쳐 흑마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라이아!” 말도 기쁜 듯이 공주를 맞이했다. 로아의 흑왕은 공주 이외의 인간을 결코 태우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는 공주의 애마라고 해도 좋겠지만 왕궁에 놓아두는 것을 공주도 당사자인 말도 싫어해서 로아의 광대한 영지를 마음내키는 대로 뛰어다니게 두고 있다. 안장도 놓지 않은 말에 뛰어 오른 공주는 샤미안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샤미안, 저택까지 경주할까?” “어머... 너무해요, 공주님. 흑왕을 타고선 승부가 될 리가 없잖아요.” “장군은 집에 있어?” “지금은 외출하셨지만 경계선을 돌아보러 간 것 뿐이니까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럼...” 공주는 근처에서 흑왕을 보고 숨을 삼키고 있는 농부 여인에게 눈을 주었다. “미안하지만 뭔가 먹일 게 있을까. 간단한 거라도 좋아.” “급한 일이신가요?” “아아. 곧바로 코랄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샤미안도 이렇게 되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이 쪽도 농부 여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나도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여기에서 식사를 할 테니.” “어머나. 공주님하고 왕녀님께 드릴 만큼 괜찮은게 우리집에 있을까.” 여인은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로아의 사람들에게 있어 ‘공주님’은 영주의 딸인 샤미안을 부르는 애칭이었다. 구별해서 그린다는 ‘왕녀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도라 장군의 저택으로 향했다. 장군은 마침 집에 돌아온 참이라 딸과 함께 나타난 공주를 보고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이거 공주님 아니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최근에는 별로 찾아오시지 않아 흑왕의 기분이 다소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거지 뭐. 나하고 똑같이.” “그런 것치고는 급한 방문이신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렇지도 않아. 발로가 왕궁에 소리지르러 온 것 정도야.” 단적으로 말하는 공주였다. 장군은 문득 진지한 얼굴이 되었고 샤미안은 솔직히 놀라움을 표시했다. “발로님이 어쩌셨다고요?” “샤미안.” 거실의 의자에 앉은 도라 장군은 딸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공주님께 뭔가 마실 거라도 가져다 드리지 않겠느냐.” 눈을 크게 뜬 샤미안이었지만 부친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잠자코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공주와 둘만 남게 되자 도라 장군은 목소리를 죽여 신중하게 말했다. “에브리고의 건(件) 말씀이신지?” 역시 알고 있었다.안도의 표정을 띄우며 끄덕인 공주였지만 곧바로 진지한 얼굴로 속삭여 물었다. “월이 지금 열심히 시간 끌기를 하고 있어. 그것도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폐하는 발로 경에게 거병 허가를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그게 말이야. 월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허가를 내줄 리가 없어. 그런데 이런 때에 가장 믿음직스러운 나시아스나 카사도, 아스틴까지도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 “발로도 그래. 그 기세라면 월의 허가가 없어도 숙부 씨를 죽이러 에브리고로 돌격하고도 남을 걸. 그런데 모두들 그 이유를 한마디도 말하질 않아.” “......” “월은 머리를 싸매고 있어. 자신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했고.” 도라 장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멋진 의자의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었다. 공주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라 장군은 공주가 되기 전의 그린다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린다가 공주의 지위를 얻자 철저히 공경하는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공주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해도 괜찮다고 말해도, 그래서야 지나치게 구별이 안 간다며 양보하지 않았다. 자연아(自然兒) 그 자체인 공주는 이것을 쓸쓸하게 여기고 갑자기 태도를 바꾼 사람들을 원망스럽게도 생각한 듯하다. “월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끔찍하게 잘 알겠어.” 라고, 공주가 되었을 즈음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국왕도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전 국왕이 남긴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주변의 변모를 경험한 사람이다. “월은 그래도 전 국왕의 아이라는 게 분명해졌으니까 그 핏줄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냥 지나가던 외부사람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외부사람이 폐하를 다시 왕좌에 올려주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도라 장군은 오히려 즐겁게 웃으며 말했었다. “저는 당신의 출신이나 혈통이 아니라 행동과 능력을 인정하여 경의를 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그건 기쁘지만, 그래도...” “뭔가요?” “너무 다르단 말이야. 이런 명함이 생긴 것 뿐인데도 발로는 싫다싫다 하면서도 머리를 숙이지, 나시아스도 샤미안도 갑자기 휘딱 달라진 말투로 이야기하지, 도라 장군까지도 이렇잖아. 나는 왠지 바보 취급 당하는 기분이 들어.” 장군은 이번에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거 의외로군요. 약간 말투가 변한 것 뿐이지 않습니까.” 그걸 약간이라고 말하는 건가 하고 공주는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장군 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마음은 이전과 아무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변할 리가 없지요. 다만, 작은 전사라고 불리던 사람이 공주가 되었고, 그것에 따라 조금 형식을 차려서 말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런 소리를 해도, 형식이 변하면 속도 변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공주님이 하실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질 않는군요. 발도우의 딸이 겉모습에 속아넘어가 그 기량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하신다면야 폐하가 실망하실 겝니다.” 묘한 설교를 듣고는 공주는 결국 양손을 들고 투항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국왕도 비슷한 소리를 듣고 항복한 적이 있었던 듯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주변만이 아니다. 그린다 공주는 16세가 되었고 키도 컸으며 겉모습은 더욱더 아름답고 여성스러워졌다. 동시에 태도나 언동에서 아이다운 면이 사라져 전보다 더욱 ‘남자다워’졌다. 주변에서 보자면 무척이나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본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인 듯했다. 지금도 소녀다운 면은 아무 데도 없는 눈으로 똑바로 도라 장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도라 장군이 크게 숨을 내쉬고, 뭐라 할 수 없는 씁쓸한 얼굴로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이 건에 대해서는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공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런 때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어디 있냐고 항의하려는 것을 제지하고 장군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저 세간의 소문입니다. 유언비어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시겠습니까?” “소문?” “그렇죠. 일부의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는, 그다지 유쾌하다고 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뱉는 듯한 어조로 말한다. 그리고 나서 도라 장군의 거실에서는 아무도 엿들으려고 애를 써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이루어진 대화가 잠시 동안 이어졌다. 자리를 비우라고 암묵적으로 지시를 받은 샤미안은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 망설이면서 마실 것을 준비하여 아버지의 거실로 향했지만 이미 공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님. 공주님은...” “저쪽으로 돌아가셨다.” 장군은 열려진 채로 있는 창문을 가리켜 보였다. 이 거실은 실은 3층에 있지만 공주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서두르고 계셨던 거군요.” 얼이 빠진 샤미안이었지만 그 부친은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샤미안. 혹시나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소동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예.” “3년 전의 해묵은 원한이 아직도 꼬리를 끌고 있는 듯하다. 바보 같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예.” 부친의 거짓말을 눈치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나 20세가 된 여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날 밤, 코랄 성내의 일곽에 세워져 있는 사보아 공작관(公爵館)에서는 발로와 나시아스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국왕과 술자리를 함께 했던 발로지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새로 술을 가져오도록 시킨 참이었다. 그 친구를 방문한 나시아스를 보면 인사말로라도 안색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언제나 온화한 표정을 띄우고 있는 얼굴이 엄하게 긴장되어 있고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폐하에게 거병 허가는 받아냈나?” 물어보자, 발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굵은 목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시더군.” “그런가...” “형님은 저래봬도 의외로 고집이 세시지. 뭐 애초에 그렇지 않다면 왕좌탈환 같은 건 할 수 없었겠지만.” 오늘 아침의 격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기분 좋게 말했다. 한편 나시아스는 큰 패배를 각오하고도 돌격하지 않으면 안될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어쩔 건가?” “알잖나. 허가가 있건 없건 내일이면 마레바로 달려서 돌아가 에브리고로 출격한다.” 두려워하던 대답에 나시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술 준비를 마치고 나타난 카사도 역시 비슷한 안색으로 말했다. “주인님, 지금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그것만은 제발 참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제와서 새삼 무슨 소리를. 1년이나 들여서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도록 기다리고 있었다고? 겨우 그 도발에 일어나주었단 말이다. 이런 미적지근한 짓은 두 번 다시 못해.” “아니, 에브리고 공격을 그만두라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뭐라 해도 상대가 상대입니다.” “너는 그 남자의 목숨을 구걸하는 거냐?” 경멸하는 듯한 주인의 모습에도 카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어떠한 비도(非道)를 저지른다 해도, 그 분은 돌아가신 선친의 동생분이십니다.” “그 형의 처와 친밀한 사이가 될 정도의 남자라도 숙부라고 우러러보란 말이냐.”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 카사도 그저 고개를 숙였다. 나시아스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죽은 형의 처라면 발로의 어머니인 아에라 공주이다. 그 아에라 공주와 시동생인 맥다넬 경이 은밀히 ‘정을 통하고 있다’고 발로는 말하는 것이다. 형의 미망인과 동생이 결혼하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 또한 미망인이 연인을 가지는 것 역시 칭찬받을 일은 아니더라도 조용히 처리하는 한에는 묵인하는 기풍이 있다. 특별하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맥다넬 경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있다. 더구나 아에라 공주는 시정의 보통 미망인과는 이야기가 틀리다. 왕국에서도 이렇다 알려진 사보아 선대 공작의 미망인과 그 시동생이 밀통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라 안을 뒤흔들 거대한 추문(醜聞)으로 발전하고도 남는다. 나시아스가 단정한 얼굴을 혐오감으로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변명도 들어줄 만한 짓이 못 되겠군.” “그렇고 말고. 뭘 주저할 게 있다는 거야?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놈을 한 마리 밟아 뭉개주겠다는 것 뿐인데.” “하지만 발로. 그렇다면 그것대로 최소한 폐하께는 진짜 이유를 말씀드리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망설이면서 말한 순간 발로는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돌아보았다. “알겠나. 나시아스. 형님께 한마디라도 올렸다간...” “알고 있어. 그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버리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 말도 안 했다.” “좋아.” “하지만 폐하께서는 너를 걱정하고 계셔. 숙부인 맥다넬 경과 무력으로 싸운다는 것을 슬퍼하고도 계시다. 하물며 허락도 얻지 않고 병사를 일으킨다면, 폐하도 널 처벌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시게 돼.” 영주들의 분쟁은 기본적으로 영주들 사이에서 해결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으나 마음대로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모순된 듯하지만 수많은 지방 영주의 개인적인 분쟁에 하나하나 참견해서야 아무리 사람 수가 많아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사적인 원한으로 국토을 어지럽히는 것도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통지를 받은 왕궁은 쌍방이 말하는 바를 엄밀하게 조사해, 어떻게 해서도 무력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고 결론이 난 경우에만 허가를 내주고 있었다. 물론 상대가 사보아 대공작이라는 정도가 되면 특례로서 문책이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잘 알고 있는 현 국왕의 인품이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폐하는 관대한 분이지만 공정한 분이기도 하다. 이런 중대한 위반을 범하게 된다면 상대가 너라 해도 특별 취급은 하실 리 없어.” “처벌이라면 상황이 끝난 뒤에 얼마든지 받아도 좋아.” 당연하다는 듯이 발로는 말했다. 카사는 소리도 없이 신음하고 나시아스는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모든 책임은 이 내가 혼자서 진다. 설사 틸레든 기사단장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해도, 영토를 반 정도 몰수당한다 해도 나는 사보아 가문의 가장이다. 집안의 수치는 나 자신의 손으로 없앨 의무와 책임이 있어.” 말뿐이 아니다. 발로는 진실로 그런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나시아스. 너는 비르그나로 돌아가라. 이런 불명예스러운 전투에 라모나 기사단장이 참전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내가 폐하께 거짓을 아뢴 게 되어버려.” 어깨를 으쓱이며 나시아스는 말했다. “나에겐 이 전투를 멈추게 할 힘은 없지만, 네가 섣부른 짓을 하게 두지는 않겠다고 굳게 약속드렸다. 그 말에 걸고서라도 동행하겠어.” 발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랜 친구를 쳐다보았다. 이 친구가 부드러운 얼굴 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훤히 알고 있었다. “따라온다면 상관은 없지만 숙부의 목은 양보 안 해.” “당연하지. 비도를 저질렀다고 해도, 왕가에도 피가 이어진 고귀한 분이다. 나 같은 놈이 불손한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일부러인 듯 물빛 눈을 크게 뜬 나시아스를 보며 발로는 굵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뻔뻔스럽게도 잘도 말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방해되지 않게 후방에서 얌전히 있어 주겠나.” “그럴 수는 없지. 어떤 명목이라 해도 전투임에는 틀림없어. 라모나 기사단장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활약을 해야지, 안 그러면 그거야말로 비르그나에 남겨두고 온 자들을 볼 면목이 없어진다.” 이번에는 시원스러운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한다. 발로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맘대로 해라.” “아아. 맘대로 하지.” 에브리고 근교에는 아에라 공주의 별채가 있다. 공주는 자주 이 별채를 방문해, 친척 중에서도 장로라고 할 만한 맥다넬 경과 면담을 한다고 한다. 그 자체는 아무 데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아에라 공주가 너무나 자주 별채를 찾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대 국왕의 여동생과 그 시동생이 하필이면, “아무래도 그... 돼먹지 못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드문드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소문치고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악질적인 것을 흘린다고 기가 막혀 했습니다만...” 도라 장군은 괴로운 얼굴로 침묵하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발로 경이 그렇게까지 결의하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 소문은 ‘사실’이라는 것이 됩니다.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 있을 리 없겠지요.” 공주는 아연한 채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발로는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야?”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있을 만한 말이 아닙니다.” 장군은 딱 부러지게 단언하였다. “발로 경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모친의 수치, 일족 그 자체의 수치, 마침내는 가장인 자신의 수치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조용히 덮어둔 채 끝내려 하겠지요.” “그러니까 하다 못해 상대인 맥다넬 경을 치기라도 하겠다고? 상당히 극단적이군.”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말씀입니다. 가장의 권한으로 아에라 공주를 칩거시키고 맥다넬 경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래서야 세상 사람들에게 추문을 의심해달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제 귀에까지 들어왔을 정도이니, 적당 적당히 처치하다가는 역효과를 낳겠지요. 자신을 배반하려고 꾸미고 있었다면 당당하게 칠 이유가 성립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까지 사태를 발전시키는 데 발로 경은 최소한 일년은 들였습니다.” 저 성질 급한 남자가 잘도 그런 간접적인 도발을 계속했다고 감탄한 공주였지만, 장군은 신중하게 덧붙였다.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맥다넬 경은 발로 경이 무고한 죄를 갖가 붙였다며 분개하고 있으나 이건 혹시...” “그냥 그런 죄가 아니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혹시나 발로 경은 그것 말고도 경을 치고도 남을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월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유인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없는 이유이니까 더욱 혼자서 일을 수습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발로 경은 폐하의 충실한 신하입니다만, 동시에 대공작가를 떠맡고 있는 몸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많고 복잡함을 따지면, 저나 공주님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장군이 말하고자 하는 점은 공주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발로를 가장으로 삼는 공작가의 친척 수는 맥다넬 경을 포함하여 이십 명 가까이 된다. 각각의 집안이 가지고 있는 영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 그 모두가 사보아 공작의, 다시 말해 발로의 어깨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알 수 없는 게 있어.” “무엇이신지?” “아에라 공주님. 불장난을 할 거라면 어째서 그 상대로 일부러 시동생을 고른건가?” “그 분은 이전부터 발로 경이 폐하께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계십니다.” 이것 또한 가볍게 단언한 도라 장군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보기엔 어쨌건 맥다넬 경이 발로 경을 쾌히 생각지 않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 뒤에 있는 것은 폐하에 대한 반발입니다. 대체로, 그러한 부분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일치한 것이겠지요.” “뭔가 비린내가 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군.” “그렇습니다. 피비린내 나기 그지없는 건이지요.” 장군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어 표정을 풀며 감개무량하게 구술했다. “폐하는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왕으로서 아무런 드릴 말씀이 없는 분입니다. 페르난의 아들이었을 때에도 무용이 뛰어난 호남이셨습니다만, 즉위하신 이후 활약의 두드러짐은 그야말로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저 혼란을 초월하여 민심을 휘어잡은 것, 제후들에게 알게 모르게 눈을 빛내고 계신 것, 다른 나라들에게 정중하고도 당당하게 대응하셨던 것, 보통 일들이 아니지요. 아마도 돌아가신 폐하도 이 정도로는 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이건 그야말로 저로서도 의외의 기쁨이었습니다.” 입이 험한 발로는 처음 국왕과 만났을 때 사촌형으로서의 경의는 표했지만 약간의 웃음을 흘리며, “인품에 대해선 나무랄 데가 없는 듯하지만, 글쎄 뭐랄까, 볕드는 곳에서 잠자는 소 같은 분이다.” 라고 평가했었다. 그것은 동시에 당시 도라 장군이 갖고 있던 인상과도 비슷했다. 무용에 뛰어나고 호감을 사는 인물이지만 실로 사람 좋은 느긋하고 온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국왕으로서 잘해낼 수 있을까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는 것은 그 뒤에 국왕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때로는 준민(俊敏)하고 호쾌하며 강인하기도 했다. “뛰어난 매는 발톱을 감춘다고 하지만... 이거야 원, 그 분의 발톱은 삼중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장군은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어조로 샤미안에게 이야기했었다. 발로를 비롯하여, 왕국에서도 이렇다하게 알려진 사람들이 국왕의 새로운 일면에 감복하고 진정한 충성을 맹세할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아에라 공주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공주에게 있어서 능력이나 인망은 둘째 셋째 문제이다. 무엇보다 가문이 우선하는 것이다. 현 국왕은 서출(庶出) 신분이다. 그것만으로도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가난한 농부의 딸이 낳은 아이라니, 아마도 오라버니의 아이라고도 생각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 도라 장군은 말했다. 그런 놈보다 혈통이 바른 자신의 아들이 국왕으로 추대되는 것이 당연한데, 현실적으로는 서자 쪽이 국왕으로서 인정받고, 그것도 차근차근 힘을 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발로 경이 솔선하여 폐하를 따르고, 폐하도 발로 경을 믿게 되니 아에라님에게는 더욱더 달갑지 않은 일이겠지요.” 공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는 아에라 공주를 만난 적이 없다. 요 3년간 왕궁의 어떤 행사에도 출석한 일이 없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현 국왕의 즉위 이래 왕궁에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월의 숙모는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것 같군.” 뭐라 말하기 힘든 쓴웃음을 띄운 도라 장군이었다. “젊은 시절, 몇 번인가 뵌 적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행실에도 기품이 흐르며 교양도 넘칠 만큼 소유한 분이셨지요. 고귀한 부인으로서나 왕가의 여성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는 분이었지만...” “그렇지만?” 장군은 쓴웃음을 억누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왕가의 여성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가 막히다고 할 정도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니 재미있다고 하겠습니다만, 하나는 왕족으로서의 자각이 넘쳐 자신을 억누르고 주변을 위해 힘을 다하는 쪽, 또 하나는 왕가에 태어난 특권만을 의식하여 주변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쪽입니다.” “아에라 공주는 후자로군?” “그 분의 경우 뭐라 말해도 친오라버리이신 뒤르와님이 너무나 위대하셨습니다. 누구나 폐하를 존경하고 찬미하며, 폐하를 존경하듯이 마찬가지로 아에라님을 대했지요. 남의 처가 되어서나 뒤르와님이 붕어하시고 나서도 그 분은 그 때를 잊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바보네?” 가볍고도 무정하게 말해버린 공주에게는 아무리 도라 장군이라도 철썩 이마를 때리고 말았다. “공주님. 그래서야 인정사정 없지 않습니까.” “아니라는 거야?” “뭐어, 그거야... 교양이 있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꽉 막힌 부분은 여자다 하는, 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응석받아주는 걸 알아버린 여자란... 실례. 남자도 그렇습니다만, 웬만해선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지요. 설사 그것이 잔조(殘照)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열여섯 살의 공주는 메마른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서 친아들과 반목하고 있는 시동생과 결탁한다는 건가? 나 때문에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장군 이상으로 여자가 하는 일은 이해하질 못하겠으니까.” “결탁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아에라님은 분명 자아가 강한 분이지만, 바꿔 말씀드리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분입니다. 사람을 선동할 정도로 기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럼, 맥다넬 경과의 일은 그저 울분 해소라는 거야?” “글쎄. 그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 말씀드릴 게 없군요,” 장군은 어깨를 으쓱였다. 공주도 생각에 잠겼지만, 이것만 들으면 충분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장군 방의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발로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국왕에게 알현을 신청한 것은 다음날 아침, 그것도 날이 새자마자였다. 본궁의 현관을 지키는 문지기도 아직 오전 담당이 도착하지 않은 채라 야간 담당이 서 있을 정도였다. 알현을 요청하기에는 너무나 상식에서 벗어난 시간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문지기도 거센 소리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성내에 들여보냈다. 국왕은 곧 일어나 나왔다. 아니, 벌써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실내복인 채로 만나러 나왔지만, 발로가 작별 인사를 고하려 하는 것을 막으며 말했다. “종제님. 실은 체면도 접고 상담할 일이 있네.” “허어... 어떤 것인지요?” 국왕은 살짝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식 알현장이 아니라 침소와 연결된 작은 방이었다. 물론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소리를 죽여 말했다. “실은 말이야. 웃지 말아주길 바라네만, 여자에 대한 걸세.” 발로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부터 자신은 숙부를 정벌하러 나가려고 하는데 뭘 들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좋은 조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쳤다. “누군가 맘에 드는 처녀라도 생기셨습니까?” “아니, 그게 말이지. 성 밑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시녀인데, 실로 순진한 아이라서 말이야. 내 신분을 두려워해서인지 주변 시중을 들어주는 건 좋은데, 일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도망치듯 나가버린단 말일세. 어째서 그러는 걸까?” 발로는 다시 어이가 없어져버렸다. 국왕이 무슨 한심스러운 소리를 하는 거냐고 생각했다. “형님. 여자를 설득하려고 생각하셨다면 평소처럼 가만히 앉아 계시면 안 됩니다.” “아니, 가만히 서 있었네만...” “더 나쁘지요. 그래서야 그 처녀가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어쨌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야 아무 일도 안 되지요. 열심히 손과 입을 놀려야 합니다.” “그렇게는 말해도, 그게 여간 어렵지 않단 말이야.” “무슨 말씀을.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상대가 마을 처녀라면, 그렇군요. 너무 화려한 칭찬은 좋지 않겠습니다. 실수로라도 절세 미녀라던가 하는 소리는 하지 않는 쪽이 낫겠지요. 오히려 놀림받았다고 생각하고 태도가 굳어져버릴 테니. 작은 부분이라도 좋아요. 목덜미가 아름답다던가 열심히 일하는 손이 사랑스럽다던가,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 신선해서 좋아 보인다던가, 여자를 칭찬할 말 같은 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국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즉석에서 잘도 그렇게까지 나오는군 그래.” “나오지 않는 형님 쪽이 이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존심만 높은 귀부인들은 아주 질색이고 지금은 청초하고 가련한 꽃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은? 혹은 뭐라 해도 형님은 국왕이시니, 처음은 왕의 위엄으로 조금 강인하게, 오히려 무섭게 대하고 말씀입니다. 이때다 싶을 때 아주 상냥하게 대해주는 겁니다. 이게 신분이 낮은 처녀에게는 상당히 효과적이지요.” 국왕은 이마를 누르고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재미있게 듣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아에라 숙모의 시녀에게도 그런 수단을 쓴 건가?” 발로는 단숨에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국왕도 웃음을 접고 있었다.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잠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으쓱인 것은 발로 쪽이었다. “당신이라는 분은... 잊고 있었습니다. 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놓고, 이러한 재주를 벌인다는 걸.” 시치미를 떼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을 국왕이 알아버린 다음에야 꼴불견일 뿐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월은 잠자코 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 말하기 힘들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역시, 숙모님의 시녀들에게서 무언가 캐낸 것이로군?” 이것은 도라 장군이 공주에게 고하고, 공주가 국왕에게 고한 일이었다. 그린다 공주는 하룻밤 사이에 코랄까지 달려 돌아와 엄중한 경호를 뚫고 국왕의 침소에 숨어들어, 자고 있는 국왕을 두들겨 깨운 뒤에 도라 장군이 한 말을 전했던 것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이란 무엇을 하더라도 남의 손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외출할 때는 물론, 극단적인 이야기로 시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옷을 입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람을 피울 때에도, 최소한 두 명의 시녀의 마차와 마차를 모는 남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발로는 그러한 여자들을 적절히 이용해 아에라 공주의 비밀을 캐냈을 거라고 장군은 말했다. 역시나 사보아 공작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이더니 빙긋이 웃었다. “어머니의 시녀들은 모두 자존심이 세고, 마을 출신은 없기 때문에 이 수단은 쓸 수 없습니다. 대신 부친의 출세를 약속했지요.” “그 약속과 교환 조건으로, 숙모님의 시녀는 무엇을 종제님에게 말한 건가?” “이미 알고 계신 게 아닙니까?” 비꼬는 어조로 말한 발로였다. “어느 정도만 알고 있다네. 역시나 놀랐지만, 그것만으로는 종제님이 맥다넬 경을 죽이려고까지 결심할 이유로는 부족하지. 아닌가? 그것만이라면 보다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을 거야.” 모친의 불륜 정도로 이 사촌 동생이 진심으로 화를 낼 리가 없다. 그것은 국왕이 거의 직감적으로 느낀 일이었다. 남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라면 집안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니 그만두게 하겠지만, 그겋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터였다. 혹은 한마디 쐐기를 박아두는 걸로 끝날 것이다. “나는 종제님의 힘이 되어주고 싶네. 결코 나빠지게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네. 그러니 말해주게. 그 외에 대체 뭐가 있는 건가?” 잠시동안 침묵하고 있던 발로가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형님. 저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명예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유로서 그 이상의 것이 있겠습니까.” 완고한 태도에 국왕은 골치 아픈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에브리고 출격은 금지한다.” “형님?!” “맥다넬 경에게는 당분간 근신을 명령하겠네. 이유는 사적인 감정에 휩쓸려 세간을 동요시키고 불온한 공기를 가져왔다. 이걸로 충분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되므로 불만은 있겠지만 종제님도 이에 따라주게. 싸움은 양쪽 모두를 책하는 게 옳은 일이니.” “농담이 아닙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이 저도 모르게 뛰어오를 정도로 큰 음성이었다. “싸움이라 할 수준이 아닙니다! 그 남자를 살려두었다간 반드시 형님께도 해가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내 역할이다. 종제님이 맡아서 짐을 질 일이 아니네. 무엇보다, 맥다넬 경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거라고 믿는 그 근거는 무언가?” 바로 좀 전까지 안색을 바꾸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발로는 깊이 침묵했다. 굳게 움켜쥔 주먹에 혈관이 떠오르고, 국왕과 나란히 서도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훌륭한 체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짐승 같은 짓을 벌이는 남자를 살려둔다면 사보아가의 이름이 떨어집니다.” 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추가로 명령하지. 그 때까지 일곽의 저택을 한발도 나서선 안 되네.” “하지만!” “종제님. 부탁이니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게. 어차피 처음부터 이 출격을 허락할 이유가 없는 걸세. 거기에 더해 숙모님의 심히 달갑지 않은 소문이 귀에 들어왔어. 말 그대로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할 일이라고 나도 생각하지만, 종제님이 맥다넬 경을 치겠다고 결심할 이유가 그것 뿐이라면 결코 허락해줄 수는 없네. 국왕으로서도 종형으로서도, 자네가 터무니없이 불미스러운 일에 빠져드는 것을 어찌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겠나. 자세히 조사하여 반드시 납득이 갈 결론을 내리겠네. 부디 그 때까지 참아주길 바라네. 이렇게 부탁하니까.” 깊이 고개를 숙이는 터에 이번에는 발로가 곤란해지고 말았다. 강하게 나오면 강하게 반발하지만 이렇게까지 굽히고 나오면 싫다고도 할 수 없다. 끝까지 거부하면 왕의 의지를 거역하는 꼴이 된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근신의 몸이 되겠습니다.” 담백하게 말했다. 이제야 들어주었나 하고 국왕이 안도의 표정을 떠올렸지만, 발로는 약간 태도를 바꿔서 말을 첨가했다. “그러나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그 처분을 받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허락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 “이틀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결코 어디에도 들르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형님의 말씀에 따라, 일곽의 저택에서 머무를 것을 서약합니다. 저와 숙부가 동시에 근신처분을 받게 된다면 어머니는 상당히 걱정하면서 기분도 상하겠지요. 만나서 한마디 위로라도 해주고 싶습니다만... 안 되겠습니까.” 국왕은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하고 있다. 발로는 웃으면서 말했다. “왕궁을 탈출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니. 우리 종제님은 그런 비겁한 수단을 쓸 사람이 아니지. 다만, 숙모님께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고 있었네.” “다른 것 아닌 그저 위로입니다. 여자라는 것은 집 안에만 가만히 있는 만큼, 실로 엉뚱한 일을 생각해내 그 망상에 집착하지요. 어머니는 이전부터 폐하에 대해 묘하게 반항적이었으니, 저와 숙부가 근신을 받았다고 들으면 폐하의 심기를 거슬러 엄한 처벌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제 입으로 말씀드려 안심시키고 싶습니다.” 이것 또한 실로 막힘 없이 술술 이야기한다. 이 변화무쌍에 이번에는 국왕 쪽이 감탄했다. 안심시키기는커녕 이 이상 위험한 유희에 깊게 빠지지 말라고 충고하러 가는 것일 테지만, 그것은 국왕에게 있어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알았다. 허가하지. 근위병을 붙여주겠네.” 발로는 정중하게 감사를 올리고, 내일 밤까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을 다시 한번 맹세하고는 물러났다. 본궁을 나선 발로를 나시아스가 맞이했다. 아직까지 좋은 안색은 아니었지만 기력을 되찾은 듯했다. 곧바로라도 출발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건만,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나시아스, 너...” 찬찬히 바라보는 통에 더욱더 이상하다는 얼굴이 된 나시아스였다. “왜?” “아니, 아니겠지. 그렇다면...” “대체 무슨 소리야?” 완전히 곤혹하여 양손을 들어버린 나시아스에게 발로는 위협하는 눈길을 향했다. “형님께 이야기했나?” 이것에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은 나시아스였다. “무슨 바보같은 소릴. 나는 아직 목이 비틀리고 싶지 않아.”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 사실을 국왕에게 고한 것인가. 사정을 들은 나시아스도 놀랐다. 동시에 안심한 모습이기도 했다. “역시나 폐하시다. 하시는 일에 빈틈이 없어.” “나는 쓸데없는 짓을 하신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왕명이 되니 어쩔 수가 없어.”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고, 발로는 빨리고 말고삐를 쥐었다. “기다려. 너는 이미 근신 예비기간에 들어 있다. 혼자서 가는 건 곤란해.” “귀찮은 호위 같은 건 필요없어. 게다가 하기 싫은 일은 빨리 해치울수록 좋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내뱉고, 발로는 본궁에서 대수문을 향하여 단숨에 말을 달려 내려갔다. 3장 아에라 공주는 전 공작이 죽은 뒤에도 내내 왕궁의 사보아 공작관(公爵館)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월이 국왕으로 결정되었을 때 그에 분개하여 항의하는 의미로 저택을 떠났던 것이다. 현재 아에라 공주는 영지인 브라시아에서 선대 공작이 사냥을 위해 지은 저택 중 한 곳에서 살고 있다. 브라시아는 코랄에서 95카티브. 일반적으로 간다고 하면 이틀에 왕복하기가 불가능한 거리였지만, 발로는 공작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공도(公道)의 요소에 설치되어 있는 초소에서 차례차례 말을 갈아타고 저녁 무렵에는 저택에 도착했다. 사냥을 위한 별채라고는 해도 상당히 훌륭한 구조였다. 철책으로 이루어진 문은 넝쿨을 감아 올린 화려한 장식이 붙어 있고, 저택 정면에는 사보아가의 문장이기도 한 사자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었다. 사자는 델피니아 왕가의 문장이기도 하다. 그것과는 물론 디자인이 다르지만, 왕가와도 핏줄이 가까운 대공작가만이 사자를 집안의 문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이다. 아에라 공주는 수십 명의 하인과 시녀에 둘러쌍여 이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달려왔는데도 불구하고, 발로는 피로한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익히 알고 있는 하인에게 어머니를 면회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저택에서 일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주가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황급히 서둘러서 여주인에게 알리고 발로를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도 듬뿍 돈이 처발려 있어 취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아에라 공주가 찾아왔다. 아에라 공주는 45살이 된다. 하얗고 정갈한 외모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날카로운 눈매나 굳은 표정 등은 어디까지나 기품과 지위가 높은 여성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젊은 시절부터 미모로 유명했고 아직까지도 그 점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인 만큼 지금도 검은 머리카락을 크게 말아 올리고 가슴 깃이 열린 호화로운 드레스로 풍만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 어머니의 화려한 취향이나 유치한 기질을 깊이 잘 알고 있는 발로였지만,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바보 같은 소동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에라 공주 쪽도 오랜만에 만나는 외동아들에게 별로 상냥ㅎ나 말을 걸거나 a니소를 보이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말한다. “어머니를 찾아오는데 적당한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군요.” “용서해 주시지요. 서두르고 있던 터라.” 발로는 솔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기특한 태도였다. 평소의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것인가. 아에라 공주도 틀림없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탐색하는 눈초리를 핮ㄴ다 싶더니 약간 표정을 바꾸어 웃는 얼굴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는군요. 사자를 보내주었다면 마중할 준비를 했을 텐데.” “아니오. 신경쓰지 마십시오. 곧바로 실례하겠으니.” “지금부터 말입니까?” 아에라 공주가 놀란 것도 당연한 것이, 금방 밤이 될 시각이었다. “사보아 공작이 혼자서 밤길을 돌아가다니,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방을 준비해두겠어요.” “공교롭게도 폐하께 근신을 받은 몸이라서 느긋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신? 어째서인가요.” “그건 당신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발로는 앉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용건에 들어갔다. “근시일 내에 에브리고의 숙부에게도 근신이 내려질 겁니다. 그 옆에 있던 덕분에 물벼락을 맞았다고 하면 아시겠습니까.” 아에라 공주도 이렇게 되자 낭패한 모습으로 눈을 깔았지만 그래도 물러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서자밖에 안되는 자가 무슨 소리를 한다 하여 노라 경이나 맥다넬 경이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오만하게 가슴을 폈다. “애초에 노라 경이 그렇게 폐하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야 저 서자는 더더욱 기가 살게 될 뿐, 노라 경이 솔선하여 제 주제를 알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님. 그 서자는 정식 대관식을 거쳐 즉위하여 벌써 4년. 지금에 와선 국내외의 모두가 델피니아 국왕이라고 인정하는 인물입니다. 언제까지 고집을 부리면 더욱 골치 아픈 일이 될 뿐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시는 겁니까.” “저를 포함해 사보아 가문의 누구 한 사람도 서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흔쾌히 생각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대를 제외하면.” 아에라 공주는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명확하게 단언했다. 발로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폐하는 역시나 위대한 뒤르와 왕의 피를 이은 분입니다. 실로 훌륭한 시정을 펼치고 계십니다, 혹시 백부님 이상으로 위대한 왕이 되실지도 모르지요.” “그런 상스러운!” 날카롭게 외치며 아에라 공주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를... 제정신입니까. 선왕 폐하와 저런 서자를 나란히 평가하다니...” “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 서자는 바로 그 선왕 폐하의 친아들이 아닙니까.” “노라 경. 웬만큼 했으면 이제 눈을 뜨세요. 당초부터 서자라고 하는 것은 설사 국왕의 자식이라 해도 세자(世子)와 동격으로는 취급되지 않는 법입니다. 모친의 신분이 낮으면 더욱 그렇지요. 저 서자는 농민이 낳은 아이. 그대는 이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님의 피를 이은 비할 데 없이 유서 깊은 공작가의 총영식(聰令息). 그렇다면 그 서자가 그대에게 신하로서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도 그러한 전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가 반대로 서자에게 충성을 바칠 필요가 있는 건가요?” 발로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띄우고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그건 어떨까요. 최근 당신의 행적을 들어보자니 이 발로가 정말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자식인지도 크게 의심스러운 일입니다만?” 예상대로 공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호화로운 옷 위에서 하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낳은 어미를 능욕할 셈입니까...” “그렇게 만드는 건 누굽니까.” 발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능욕당하고 싶지 않다면 조금은 행실에 신경을 쓰시면 어떻습니까. 에브리고에서는 당신과 숙부의 일이 이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실정입니다. 이런 일이 공공연해진다면 사보아 공작가에 얼마나 누가 될지, 그런 분별마저 없어지셨습니까.” 뒤가 켕기는 바가 있는 만큼 아에라 공주는 돔낭칠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큰 소리를 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밑의 것들의 헛소리를 하나하나 받아들이다니요. 공작가를 음해하려는 수작입니다.” “사실무근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에라 공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하게 나오려는 속셈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지만, 발로는 거스르지 않았다. 먼저 말하도록 놔두었다. “맥다넬 경은 신분도 무력도 일족 중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분이에요. 그대가 저 서자에게 빠진 나머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방치하고 있는 것을 걱정하여 이것저것 상담을 하기 위해 만났을 뿐. 문란하다는 식으로 손가락질 받을 일은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또다시 발로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아에라 공주는 다시금 기분 나쁜 듯이 자기 자식을 보았다. 애초에 여태까지의 대화는 도저히 친어머니와 아들 간의 것이라 보이지 않았다. 상류계급이라는 것은 서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식을 차리고 단란한 자리를 만드는 데는 제약이 있지만, 그래도 배어 나오는 애정은 억누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실제로 도라 장군 부녀 같은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일말의 정도 통하지 않는 듯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아들은 어머니를 증오까지야 하지 않는다 해도 싫어하고 있다. 실제로 발로는 이 어머니가 지긋지긋했다. 부친인 공작이 살아 있을 때부터, 지신은 단순한 공작 부인이 아니라 현 국왕의 여동생이라는 의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발로의 아버지, 선대의 사보아 공작은 왕국의 중신으로서 칭송이 높고, 델피니아 전역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국왕은 소중한 신하의 충성과 우정에 응하는 의미로 시집을 보낸 것이지만, 아에라 공주는 애초부터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듯했다. 결혼했을 때부터 자신은 왕가의 여성이고, 본래라면 다른 나라에 시집가 왕비가 되었을 것이라는 강렬한 의식을 가진 채 공작가에 있었다. 죽은 공작은 겉으로는 처를 소중히 여겼지만 원만하게 지냈을 리가 없다. 언제나 가정 내 불화의 원인이었던 모친을 발로가 시끄럽다고 여긴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오라버니인 국왕과 남편인 공작이 죽고 저 남자가 국왕이 되자 이번에는 즉시 공작가를 방패로 삼게 되었다. 지금도 입을 열면 현 국왕을 서자라느니 모친의 신분이 낮다느니 아무렇지않게 떠들어대고 있다. 발로에게 말해보라 한다면, 그런 일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소리들이었다. 하물며 세간은 그 남자는 국왕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아에라 공주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인 국왕은 즉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에라 공주의 완고하고 무례한 태도를 수없이 관대히 보아 넘겼지만, 발로의 입장에서 보자면 심한 두통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군요. 사보아 미망인이 그러한 추문거리를 스스로 일으킬 리가 없지요. 안심했습니다.” “어머... 그건 다행이군요.” 아에라 공주도 어쩐지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즉시 발로가 덤벼들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소문도 근거가 없는 헛소문이겠지요?” “또 하나, 라니...” 아직 미소를 남겨둔 채 발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친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입에 담기도 두려운 말이지만, 당신과 숙부님 사이에서 폐하를 시해하려는 계획이 은밀히 진행 중이라는 겁니다.” 아에라 공주의 가슴이 크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아름다운 얼굴은 회칠한 벽처럼 새하얀 색이 되었지만, 눈에는 날카로운 빛을 되찾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노라 경. 그건 심하다고 한다면 심한 일이군요. 분명히 저는 그 서자를 흔쾌히 생각지는 않습니다. 개국 이래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보아 가문이 서자의 아래에 서야 한다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 그렇다고 해서, 설사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해도 지금 현재 델피니아 왕좌에 있는 자에게 그러한 무서운, 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짓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할 수 없길 빕니다.”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국왕에게도 나시아스에게도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었다. 숙부 정벌을 결의한 진짜 이유란 이것이었다. 원래부터 어머니와 숙부가 진심으로 국왕 암살을 획책했을 리는 없다고 발로는 생각하고 있다. 베갯머리 이야기에 불과하고, 아마도 국왕을 증오한 나머지 그런 이야기가 나왔으리라 새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어찌될 것인가. 전장의 적이라면 무엇 하나 두려워하지 않는 발로이지만, 상상만 해도 한기가 들었다. 자기 한 사람의 일이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오해를 받던, 나븐 소문이 퍼지던 자기 몸을 가지고 결백을 증명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스무 명이 넘는 공작가의 친척들, 그들이 소유한 광대한 영지, 몇 대 전부터 공작가에서 일했던 몇천 명이라는 신하들과 그 가족의 운명 모두가 걸려있다. “이러한 일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당신도 숙부도 용서하실 수 없겠지요. 결행하던 않던 상관없이 국왕 암살을 논의했던 자는 죄를 따질 필요도 없이 사형. 그렇게 고금의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폐하가 온정을 내려주신다 하더라도 주변에 있는 중신들이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폐하를 질투하시듯 국내 유수의 귀족인 사보아가를 질투하는 자들도 여럿 있으니까요. 이 발로도 일가의 주인으로서 집안 내에서 나라의 적을 키운 죄를 문책받게 되겠지요. 최악의 경우 사보아 공작가는 그대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아에라 공주는 온 얼굴이 창백했다.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 가문을 중시하는 사람인 만큼, 이제 와서야 새삼 사태의 중대성이 몸에 배어들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안이한 음모를 꾸몄는지 묻고 싶은 참이었지만, 아에라 공주의 국왕에 대한 반발과 대항의식은 상당히 뿌리깊은 것이었다. 그것도 이것도 원인은 아들인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싶어서라고 하니, 쓸데없이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한이 없는 셈이다. 발로는 괴로운 마음을 품은 채 일어섰다. 용무는 끝났다. 이이상 이곳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 “이걸로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소문을 확실히 부정해주셔서 우선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입을 조심할 줄 모르는 것이 세인들의 습성입니다. 이후로는 오해받을 만한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이만큼 공들여 쐐기를 박아두면 이 이상 경솔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아에라 공주는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말했다. “노라 경은 저 서자에게 상당히 정성을 다하고 있는 듯하군요.” 나가려 했던 발로의 걸음이 멈췄다. 감정에 치우쳐 있던 지금까지의 어조와 달리, 무언가 섬뜩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성이라 말씀하시나, 국왕을 공경하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일이겠지요.” “가문이나 정체도 모르는 여식을 공주로 세울 정도의 남자라도 국왕으로서 존경한다 말씀하시는 건지?” 발로는 한 순간 말에 쫓겼다. 아픈 곳을 찔렸던 것이다. 지금의 국왕에게 파격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대부분은 용인하고 있지만, 이것만큼은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다고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애초에 그것은 아에라 공주처럼 혈통 중시 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저 공주의 존재가 조금은 신경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신분에서도 성격에서도 많은 종류의 여성들을 상대해온 발로지만 저런 소녀는 본 적이 없었다. 사보아 공작인 자신을 상대로 해서도 거침없이 사물을 논하고, 국왕에 대해서까지 거친 말투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예의상으로라도 공주답다고 할 수 없는 공주이지만 ‘건방지다’더가 ‘교만’이라던가 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것은 발로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인데, 그런 남자 못지 않은 성격이 아니고 공주라는 간판만 없었다면 ‘꼬셔봐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묘하게도 남자를 대할 때와 같은 대항의식을 자극받는 것이다. 발로보다 열 살 가까이나 연하인 소녀이면서도 저 공주는 그만큼의 무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무용이 뛰어난 면에서는 소녀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고, 두뇌를 쓰는 것도 날카롭다. 국왕은 공주를 깊게 신뢰하고 있고, 무언가 상담을 할 때도 있는 듯했다. 그것이 달갑지 않다고 하면 달갑지 않았지만 아에라 공주처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은 아니다. 하물며 여기에서 모친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은 소리는 결코 할 수 없다. “어머니. 그녀는 가문도 정체도 모르는 여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전쟁의 여신입니다.” 당사자인 공주에겐 결코 들려줄 수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에라 공주도 아무런 표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국에 재앙을 가져온 역신(疫神)입니다.” “.......” “듣자하니 그 여식이 저 서자를 왕위에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지 않습니까.” “난처하군요. 왕좌라는 것은 소녀 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되거나 할 물건이 아닙니다.” 발로는 웃었지만 아에라 공주는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침착했다. “그 자격도 가지지 못한 자가 왕좌에 앉고, 자기 마음대로 영광스러운 왕가의 칭호를 비천한 여식에게 아까운 줄도 모르고 부여한다. 이러한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발로가 무언가 대꾸하기도 전에 아에라 공주는 벌떡 일어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설사 제가 용서한다 해도 신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그대도 그것을 이해할 날이 오겠지요.” 그 말만 하고는 아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방에서 나가버렸다. 밤의 장막이 내리깔리려 하고 있었지만, 발로는 굳은 얼굴로 곧바로 저택을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단독으로 야행을 할 순 없어 가까이 있는 초소에서 하룻밤 지낸 뒤 다시 말을 타고 무턱대고 코랄을 향해 달렸다. 약속대로 이틀 만에 190카티브를 왕복하고는 일곽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상당한 강행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굳어 있었다. 모친과 만난 뒤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카사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평상복을 준비한 뒤 술상을 보았다. 며칠 전부터 사보아관의 손님으로 묵고 있던 나시아스도 발로와 아에라 공주의 해묵은 원한은 진저리나게 잘 알고 있었다. 신중하게 말을 걸었다. “알겠나. 당분간은 참고 있어. 폐하는 어제 맥다넬 경에게 근신을 통보하셨다. 너 이상으로 타격이었을 거야. 그것을 불만으로 여겨 저쪽이 부주의하게 움직인다면 네 걱정도 결론이 날 거다.” 그러나 보통 때라면 크게 목소리를 높여 동조할 터인 발로가 이번에는 묘하게 조용했다. “나시아스. 이쪽에 와서 공주와는 만났나?” “아니? 매일 서리궁을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또 어딘가 나가신 모양이다. 엊그제 아침에는 본궁에 얼굴을 비쳤다고 하지만...” “오던 도중 생각한 건데. 형님께 이번 일에 대해 말씀드린 건 공주의 짓이 아닐까.” “설마.” 하고 나시아스는 웃었다. 저 공주의 인간답지 않은 능력은 공주가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서 듣는단 말인가? 우리들이 폐하께도 숨기고 있던 일인데.” “아니! 그런 게 틀림없어.” 무섭도록 딱 잘라 말하고 발로는 나시아스를 보았다. “내일 이곳에 끌고 와 줘. 산더미처럼 잔소리를 늘어놔주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도전적이고 자신에 찬 얼굴이었지만, 오랜 기간 사귀어온 나시아스는 그것이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잘한 것까지 추궁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알았다. 말해보지.” 조용히 끄덕이고 물러서주었던 것이다. 깊은 날 밤. 코랄 성 안을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코랄 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내의 어디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일몰과 동시에 성벽의 각개소에 구화를 지피고 휘황찬란하게 그 모습을 비추어내기 때문이다. 검은 그림자는 교묘하게도 불빛과 순회 도는 병사의 눈을 피해 본궁의 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횃불을 든 병사들의 순회도 본궁의 뒷마당까지가 한계였다. 그 뒤편은 파키라의 산이 천연의 요새처럼 울창하게 우뚝 솟아 있다. 낮에도 시커멓게 펼쳐진 원시림에 밤중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없다. 본궁까지는 다가오지 않지만 이 산에는 늑대나 곰이 다수 서식하고 있기에,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그 먹이가 되고 만다. 본궁에서 공주가 사는 서리궁까지는 경사가 급한 가는 도로가 원시림 사이를 수놓듯이 깔려있다. 검은 그림자는 그 길을 단숨에 달려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별궁을 살폈다. 공주는 이 별궁에 혼자서 살고 있을 터였다. 별궁 주변은 심하지 않을 정도지만 숲을 베어낸 평지로 되어 있었다. 바로 뒤에는 루브람의 깊은 숲이다. 나무 그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사뿐하게 떨어져나가더니 다음 순간에는 별궁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돌벽과 동화된다. 1층 건물인 서리궁은 원래는 국왕의 별저(別邸)였던 적도 있어 문단속 설비에는 만전을 기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창도 문도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불빛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새카만 어둠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잠시동안 돌벽에 붙어 있었지만, 결국 몸을 일으켜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스륵 안으로 숨어들었다. 예전에 국왕의 별저였던 만큼 상당히 손이 간 장식들이 설치되어 있다. 대리석 바닥에는 마른 나뭇가지나 낙엽이 흩어져 있다. 부엌이나 멋진 목욕탕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몇 년이나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검은 그림자는 소리 없이 방에서 방으로 이동했다. 불빛도 없는데 그 발걸음에는 흔들림이 없다. 공주는 오늘밤도 별궁을 비워둔 것 같았다. 그래도 검은 그림자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신중하면서도 대담하게 별궁 내부를 돌아다녔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침실인 듯했다. 그러나, 단순히 자러 돌아올 뿐인 장소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끝까지 기척을 죽인 채 방 구조를 구석구석 돌아보고는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대로 본궁을 빠져나가, 일곽을 구성하고 있는 제1성벽으로 향했던 것이다. 대담한 행동이었다. 서리궁과 달리 성내에는 구화가 타고 있고 순찰병도 나와 있을 터였다. 검은 그림자는 그 장소와 순회 시간을 알고 있는 건지, 교묘하게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광대한 일곽을 돌파해 그대로 제1성벽에 달라붙었다. 그 머리 위를 순찰병이 지나간다. 병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 검은 그림자는 품에서 꺼낸 것을 성벽 위로 던졌다. 작은 갈고리가 붙은 가느다란 밧줄이었다. 이렇다 할 수 없는 작은 소리와 함께 갈고리가 성벽 상부에 걸렸다. 한 호흡 쉬고 검은 그림자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다음 순간에는 성벽 위에 멋들어지게 착지해 있었다. 잠시동안 톱날 모양 벽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는 이윽고 이곽으로 내려갔다. 검은 그림자는 분명히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순식간에 제2성벽도 제3성벽도 넘어가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코랄 성은 철벽의 방어를 자랑한다고 여겨진다. 몇 명이건 간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삼중의 성곽과 문은 엄중하게 경비를 서고 있고, 성벽은 사람 키의 3배를 충분히 넘는 높이였으며, 그 위에는 병사들의 초소와 순회로가 있는 것이다. 과거 이 삼엄한 경계를 넘어간 것은 그린다 공주 단 한 명 뿐이었다. 그것도 공주의 초인같은 능력 덕분이었지만, 검은 그림자는 아주 쉽게 성내를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 하는 잠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야간 경비병들은 성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림자의 존재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자 쪽에서도 눈치채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들킨다면 곧바로 소동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치챈 자가 있었다. 파키라 중턱에 솟아 있는 본궁에는 아래를 한번에 관망할 수 있는 베란다가 몇 개나 있다. 전투용은 아니다. 순수하게 경치를 즐기기 위한 것이니까 병사들의 초소와는 달리 밤에는 불이 피워져 있지 않다. 따라서 성내에서 본궁을 올려다보아도 어디에 베란다가 있는지 우선은 알 수가 없다. 그 중 하나에 그린다 공주가 있었다. 베란다 바닥에 엎드린 채 난간 사이로 제1성벽을 살피고 있었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날카로운 눈을 가진 공주다. 언제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검은 그림자가 서리궁으로 가는 통로에서 달려나오는 것도, 본궁의 옆을 지나쳐 가는 것도 모두 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성내에 긴급히 알리거나 사람을 불러 모으지도 않은 채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제1성벽을 넘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뒤, 공주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베란다 위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최상층에 가까운 높이에서 사뿐하게 몸을 던져 지상으로 뛰어내려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공주는 사흘 전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자마자 본궁에 나타났다. 카린은 불이 막 지펴진 부엌에 서서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왕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공주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이전보다 더 크게 떴다. “공주님. 어쩐 일이신지요?” 5일도 지나지 않아 본궁에 모습을 보인 것도 그렇지만, 이런 장소에 나타날 법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주 쪽도 열기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시녀들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전장 같군.” “예에. 이곳은 여자들의 전장이지요. 무언가 용무가 있으신지요.” “카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무리이려나.” 코랄 성의 시녀장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주님이 직접 지명하시다니 기쁜 일이네요. 폐하의 식사가 끝나는 대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이 날 아침, 공주는 얼마전과 마찬가지로 국왕과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이제부터 어찌해야 할 것인지 왕조차 구체적인 안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리. 에브리고에 가주지 않겠어. 보통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네 눈과 귀라면 무언가 잡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 공주가 부드럽게 거절했다. “만약 내 보고로 맥다넬 경의 처벌이 결정나게 되면, 나도 너도 상당히 곤란해질 거다.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게 나아.” 일국의 공주라는 걸로 되어 있지만, 국왕이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일이 일인 것이다. 16세의 소녀에 의해 처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면 맥다넬 경은 물론 다른 가신들도 쾌히 생각할 리가 없다. 식사가 끝났을 즈음 카린이 찾아왔다. 국왕에게 인사를 하고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공주님. 제게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고요.” “아아. 그것하고 상담하고.” “어떠한 일인지요?” “조금 신경이 쓰인 건데. 이 성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들은 대략 몇 명 정도고, 어던 곳에서 오는 거지?” “본궁에는 현재로는 43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카린이 말했다. “꽤나 많네.” “아니오, 적은 편입니다. 뭐라 말씀드려도 지금든 내전에서 지내시는 왕가의 여성분이 없으시니까요.” 그 주변 시중이나 용무를 수행하는 고급관료도 필요 없다. 따라서 지금의 본궁에 있는 시녀들은 본궁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실무담당 뿐이었다. “신분의 상하는 나뉩니다만, 귀족의 과부에서 상가나 농가의 딸까지 다양합니다.” “상하라는 건 성의 위치 말인가?” 성의 하층에 해당하는 삼곽에는 서민층의 일꾼들이 다수 있으니까 하고 공주는 생각했겠지만, 카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위에서 일하는 자와 밑에서 일하는 자, 다시 말해 사람 앞에 나서는 접객이나 바느질에 손을 대는 자들과 힘든 물일이나 청소를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본궁에도 그 양쪽이 있는 거로군?” “예.” “그 사람들은 여기에서 숙식을 하고 있어?” “물론입니다. 여기까지 드나들며 출근을 할 리가 없지요.” “그 장소, 잠깐 보여줄 수 없을까?” “그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카린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상당히 이상한 것에 흥미를 가졌구나.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거냐?” “별로. 다만 신경이 쓰여서. 43명이 숙식을 할 만한 장소가 이 본궁에 있다니 지금까지 몰랐거든.” “모르셔도 무리는 아닙니다. 폐하나 공주님이 걸음을 하실 만한 곳이 아닌데다, 보신다 하더라도 아무런 재미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린이 말을 덧붙였다. 공주는 딱딱하게 금발을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지. 아까도 처음으로 부엌을 보았지만, 안내받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어. 이 성 안의 것이라면 얼룩 하나까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이없는 맹점이야.” “흐음.” 국왕이 목을 울렸다. 왕의 머릿속에서도,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성벽의 돌이 어떻게 짜여 있는가까지는 들어가 있었지만, 아랫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의 주거구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군. 분명히 맹점이다.” “그렇지? 이건 좀 달갑지가 못해. 발 아래 뭘 밟고 서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음, 그러한 여자들은 어디에도 있는 법이야. 그것이 당연하다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성내의 주민임에는 틀림없지.” “어딘가의 왕가의 여자는 그런 사람들을 도구 취급을 해서 감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야. 아래에서 일하는 여자들이라도 분명 살아있고 생각도 한다고.” 통렬한 비꼼에 국왕은 쓴웃음을 지었고, 공주는 시녀장을 보고 싱긋 웃었다. “별로 카린의 일에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어. 그냥 자기 둥지 안에 자기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 마음에 안 드니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이런 식의 방향으로밖에 머리가 돌지 않는 것 같았다. 카린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납득하고, 시녀들이 살고 있는 내전의 일각으로 공주를 안내했다. 화려한 장식과 멋들어진 융단이 깔린 복도를 돌아 문 하나를 넘어서기만 했는데도 마치 다른 건물인가 싶은 구역에 나타났다. 이곳은 말하자면 본궁의 무대 뒤다. 장식할 필요는 없다. 그대로 들어낸 돌벽이나 나무문도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실용성 하나만을 고려해 만들어져 있었다. 완전히 열린 방문 하나에서 3명의 여인들이 장막의 끄트머리 장식을 고치고 있었다. 국왕의 식사를 준비할 때와는 다른, 하인들을 위한 부엌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자도 있었다. 여인들은 일한 햇수나 연령에 따라 네 명에서 여섯 명이 같은 방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카린의 눈은 역시나 모든 것을 감독하고 있어, 어느 방도 청결 그 자체였고, 시녀들은 깨끗하고 깔끔한 의복을 몸에 두르고 활기차게 일들을 하고 있었다. 빨랫감을 산더미처럼 안은 중년 여인이 자나가면서 고개를 숙였다. 공주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 여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세탁 담당은 따로 정해져 있어?” “예. 자기 소유물은 자기가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한꺼번에 빨지 않으면 안 될 것들도 꽤 있기 때문에 교대로 하고 있습니다. 세탁장은 탕전(湯殿) 바로 옆에 있으니 한번 구경하시겠습니까.” “탕전이란건 이 쪽 사람들을 위한 목욕탕인가?” “예. 여자는 몸을 깨끗하게 해두는 것도 일이니까요.” “뭔가 속에 담은 게 있는 말투인데?” “아니오. 드리고 싶은 말씀이야 산더미 같지만, 공주님께야 이제 와서 무슨 기대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린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공주는 꽤나 깨끗한 걸 좋아해 자주 몸을 씻기는 한다. 다만 성의 탕전이 아니라 산 속의 개천이나 샘에서 해치우는 것이다. 카린이 안내한 탕전은, 그것 역시 실용품이었다. 벽도 바닥도 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된 서리궁의 욕탕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다만 상당히 넓었다. 운치 없는 돌 욕조라지만 다섯 명 정도는 한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린이 말했다. “마을에나 농가에서는 왠만한 일이 없는 한 더운물에 들어가기 어려우니까, 모두 목욕을 즐겁게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목욕탕에도 교대로 들어가?” “예. 3일에 한번 물을 끓여서, 대체로 10명 정도가 교대로 사용합니다.” “시간은?” “예?” “입욕 시간은 대충 언제쯤이야?” “일을 끝낸 뒤이니까, 대략 자정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공주는 의미심장하게 그 탕전을 돌아보았다. 천장은 낮다. 그 천장 가가이에 수증기를 빼기 우해서인지 작은 창이 열려 있었다. 판자문 한 장으로 막은 그 옆의 흙바닥에는 크고 길다란 배수설비가 있었다. 이것이 아까 말했던 세탁장인 듯했다. 바로 바깥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이곳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리라. 본궁 안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만큼, 바깥에 펼쳐진 것은 살풍경한 경치였다. 밤에는 새카만 암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밤중에 이곳에 들어오면 자기 팔도 보이지 않는 것 아냐?” “불빛이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만...” 카린이 말하고 벽의 일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등불을 걸어두기 위한 걸대가 있었다. 수증기에 뒤덥여 10명이 들어가게 되는 탕전을 비추기에는 약간 불충분하게 보였지만. “독서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걸로 충분합니다.” 하고 카린은 말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공주는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카린 쪽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 시녀 중 한 명이 카린을 부르러 왔다. “카린 님, 저어...” “무슨 일인가요?” “바깥 입구에 나시아스님께서 오셔서, 공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여기 데려오면 되잖아.” 공주가 말했지만 카린이 쓴웃음과 함께 막았다. 이곳은 구석이라고는 해도 내전의 일부이다. 신분이 있는 남성을 들어오게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바깥 입구란 그 내전과 바깥 부분의 경계로 되어 있는 부분이다. 안에서 보자면 바깥 입구이지만 밖에서 보자면 안쪽 입구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나시아스는 바깥 입구의 곁에 있는 정원에서 공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를 발견하고는 웃는 얼굴이 된다. “겨우 뵙게 되었군요.” 나시아스는 미기(美技)라고까지 불리는 검술의 사용자이지만, 기사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외모와 온화한 분위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꽃이 피어 있는 정원에 있으면 시인이나 음악가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라모나 기사단의 단장을 역임하고, 저 발로의 브레이크 역할을 스스로 자청해서 맡을 정도이다. 속에는 굳은 심지가 한줄기 버티고 있었다. “발로는 어쩌고 있어?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으르렁대고 있는 거 아닌가.” “실은 그 일로 말씀드릴 게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발로가 공주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이미 근신 중인 몸이라 움직일 수가 없다. 수고스럽겠지만 저택을 방문해줄 수 없는가 하는 전언에 공주는 녹색 눈을 크게 떴다. “희한한 일도 다 있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대?” 발로가 공주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당사자인 공주도 잘 알고 있다. 호의적으로 공주를 맞이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스스로 만나고 싶어하고나 가까이 가고 싶어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을 터였다. 그렇게 말하자 나시아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께서는 발로가 근신을 받게 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응.” “그것은, 폐하께 들으신 건가요. 아니면 공주님께서 폐하의 귀에 들어가도록 만드신 건가요?” 공주는 납득하고 끄덕였다. “내가 말했어. 쓸데없는 짓이었을까?” 나시아스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니오. 감사합니다. 제 입으로는 아무래도 말씀드릴 수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맥다넬 경을 베어야만 했을 텐데.” “그걸로 만사가 무사히 수습된다면 싼 대가입니다.” 부드러운 얼굴로 무서운 말을 가볍게 뱉는다. 그런 짓을 하게 되면 세간의 비난이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각오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발로가 손을 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다만 그 녀석은 공주님이 폐하께... 고자질을 했다며 화를 내고 있는 듯, 만나뵌 뒤에 항의를 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그런 원한을 살 처지는 아닌데. 내가 말 안 했어도 언젠가는 월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고.” 하지만 나시아스는 묘하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공주님. 여기에선 그 친구의 트집에 좀 맞장구를 쳐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으니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하지만 그건 구실입니다.” “.......” “어젯밤, 아에라님의 저택에서 돌아온 뒤부터 상태가 이상합니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물어보지 못하는 거야?”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은 나시아스였다. 할 수 있었으면 고생은 안 한다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해선 얼마든지 입이 풀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건 뱃속에 집어 넣어두고 결코 흘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저히...” 말꼬리를 흐린 나시아스였지만,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는 공주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문을 중시하는 모친이나 유력한 친척들을 물리치고 공작가의 실권을 쥐기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 쳐도 의외로군. 뭔가를 숨길 만한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더욱, 가끔 무언가 숨기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긴다면, 그건 상상 이상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말하지 않는데 알 수 있어?” 진지하게 물어본 공주에게 나시아스는 웃으며 끄덕였다. “예,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모친의 불륜을 가볍게 자신에게 말했을 때부터, 발로의 마음에는 무언가 다른 망설임이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발로는 말하지 않았고 나시아스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숙부를 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한 발로의 어조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고, 그 결의는 그야말로 진심이었다. 나시아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폐하의 처분으로 문제가 커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조용히 수습될 리가 없습니다. 발로는 아마 저에게도 폐하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공주님께 말씀드리려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라모나 기사단장은 똑바로 공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억지지만 부탁드립니다.” 공주는 한숨을 쉬었다. 저 쏜살같이 빠른 독설 앞에 자기 발로 달려가는 것은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보아관은 일곽 안에서도 본궁 가까잉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만큼 공작가가 왕가에게 있어 무게 있는 존재라는 뜻이리라. 발로는 혼자서 찾아간 공주를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맞이했다. “여전히 진귀한 의복을 입고 계시는군요. 알겠습니까, 공주. 저는 당분간 이 저택에 발이 묶여 있어 여성의 모습을 구경하지 못하는 불쌍한 몸입니다. 당신도 일단은 여자 중 하나에 끼는 사람이니까 조금은 꾸며서 남의 눈을 즐겁게 해주어도 천벌은 받지 않을 겁니다.”“그런 건 제대로 된 부인들에게 맡기면 돼. 단장 쪽이야말로 나시아스를 너무 걱정시키지 마. 조만간 저 젊은 나이에 온통 백발이 되어버릴 테니.” “당신의 행실에 속이 썩은 나머지 궁정의 시종들이 전부 대머리가 되는 쪽이 틀림없이 먼저일 겁니다.” 입으로는 심한 소리를 하면서도 발로는 공주가 싫지 않았다. 여자로서 취급하기 힘든 건 이 이상 갈 사람이 없지만 말상대로서는 상당히 자극적이다. 공주 쪽도 이 상대하기 힘든 남자를 호감이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버릇처럼 공주답게 하고 다니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거의 인사치레에 가까웠다. 애초에 오늘은 집에 갇히게 된 원한도 있어 사대에게 불평을 쏟아 부었다. 공주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맥다넬 경의 목을 날려버리고 있을 거라는 둥, 저 남자의 외견은 잘났을지 몰라도 뱃속에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둥. 참으면서 듣고 있자니 발로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저 말조심할 줄 모르는 밀짚머리는 요즘 뭐하고 있습니까?” 이 말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공주였다. 그 <밀집머리>는 발로를 <귀족풍으로 똥폼잡는 저 멧돼지>라고 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마주하면 주변이 피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설전(舌戰)을 반복하는 두 사람이지만, 실은 상당히 잘 맞는 것 같다고 공주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소리를 하면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모아 ‘농담이 아냐!’라고 있는 힘껏 부정한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븐이라면 한동안 만난 적이 없어. 만나고 싶다면 연락이라도 보낼까?” “바보 같은 소리를. 그런 놈에게 이 공작가의 저택을 밟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하고 같이 저 서리궁에 둔치고 있는게 딱 어울립니다.” 역설하더니 아주 약간 어조를 바꾸며 말을 첨가했다. “그래, 혼자 있는 것보다 나아. 공주가 보통사람 같지 않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저런 구석진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다. 어제오늘 머무르기 시작한 곳이 아닌 것이다. 서리궁만이 아니라, 보통 인간이라면 동사한다고 일컬어지는 파키라의 겨울을 공주는 세 번이나 지낸 뒤였다. 대설(大雪)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 속을 걸어다녔고, 눈이 녹을 때나 새끼 칠 계절의 사나운 짐승들과도 잘 타협하고 지내왔다. 그것은 왕궁 전체에 소문이 나 있는 일이었으니, 발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발로의 검은 눈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그 눈이 가만히 공주를 살피고 있었다. 공주는 빤히 발로를 마주보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당혹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었다. “기사단장, 미안. 좀더 확실하게 말해줘.” 발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고 있습니다. 공주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형님은 무척이나 슬퍼하실 테니 말입니다. 당신이 곰이나 늑대에게 꿈쩍도 하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위험한건 짐승 뿐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공주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발로를 보았다. 발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공주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애초에, 짐승이건 사람이건 당신에게 부상을 입힐 만한 자가 그렇게 흔히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말입니다. 만일의 사태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는 우선 혼자 있지 말아야겠지요. 특히 저 별궁은 위험해.” “......” “호위 대신 저 밀짚머리와 그 동료 정도 데려다 두는 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어, 이런 건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뭐라해도 당신은, 악질적은 농담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 왕족 여성의 필두에 위치하는 분이니까요. 열 받게도 말입니다.” 말투와는 달리 발로의 표정은 진지 그 자체였다. 공주는 싱긋 웃고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하지.” “그렇게 해주시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님은 바쁜 분이니 이 이상 쓸데없이 근심거리를 늘려드리고 싶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치자면, 최근 가장 커다란 근심의 원인을 만든 건 기사단장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괜한 일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형님의 근심거리와 함께 저 꼴 보기 싫은 숙부를 깨끗하게 처리해버렸을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 정도가 적기인 듯했다. 공주는 있는 대로 뒤집어쓴 꼴로 공작가에서 도망쳐 나온 뒤, 다시 카린을 만나러 가 이번에는 상담을 했다. 서리궁이 상당히 지저분해졌기 때문에 누군가 청소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카린은 기뻐하며 당장이라도 자신의 심복인 여자들 중에서 누군가를 보내겠다고 했으나 공주는 그것을 막으며, “아니, 기왕이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애가 좋겠어. 말 상대도 되어줄 테니까. 요전번에 카린하고 같이 아침을 날라온 애가 있었지. 그 애는 어때.” “예, 성품이 좋은 아이입니다만 그 애는 아직 그냥 신참입니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겁먹을지도 모릅니다. 좀더 견실한 쪽이 낫지 않을까요?”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지.” 공주는 말했다. “서리궁에 와서 내 곁에서 일할 수 있을지 그건 싫은지. 그 아이에게 선택하도록 해.” 그것도 일안(一安)이다. 명령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무서워한다면 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카린은 끄덕이고, ‘어쨌든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라고 말했다. 4장 “제, 제가... 저 서리궁에서 공주님을 섬기라는 건가요...?” 불안감이 가득해서 말하는 젊은 시녀를 카린은 오히려 불쌍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역시 무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다 큰 남자라고 해도 상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장소인 것이다. “나도 그대에겐 조금 짐이 무거운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공주님이 특별히 그댈 떠올리시고 지적하신 거예요.” “어... 어째서이신가요?” “그대라면 나이도 비슷하고 이야기 상대가 될 것 같다는 말씀이셨어요. 분명히 그대도 열여섯이었지요.” 그 연령치고는 눈치가 빠르고 심자가 제대로 된 소녀였다. 카린도 점찍어두고 있었지만 설마 얼마 전 처음 만났던 산적 같은 공주에겐 상당히 놀란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왕궁에서는 부스럼 취급당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카린은 열심히 변론했다. 공주는 결코 겉보기처럼 무섭지 않다. 말투도 태도도 남자 같지만 성격은 오히려 상냥하다. “무엇보다, 저 공주님께서 처음으로 곁에 사람을 두겠다고 말씀하신 거에요. 그대만 괜찮다면 한번 일해보지 않겠어요?” “그건 물론, 그렇게 명령하신다면...” “결코 무리하게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우선은 상태를 보러 며칠 출근해보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으면 서리궁에서 묵으면서 공주님의 시중을 시키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그대가 결정할 일입니다. 아무래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걱정말고 말해주세요. 나도 공주님께 잘 말씀드리고 허락을 얻을 테니까.” “예.” 결론이 나자 카린은 우선 서리궁의 대청소부터 시작했다. 공주는 주거의 쾌적성이라는 점에는 거의 집착이 없었고 자신이 하지도, 남에게 맡기지도 않았다. 덕분에 서리궁은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천장의 먼지를 떨어내고,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낡은 커튼은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우고, 삐꺽거릴 지경인 문의 경첩에는 기름을 치고, 느슨해진 자물쇠를 다시 꽉 조였다. 탕전에는 멋진 배관설비가 있어 근처의 시냇물에서 물을 끌어오도록 되어 있지만 수도는 오랜 기간 닫아놓은 상태였다. 새롭게 물을 끌어다 욕조와 탕전을 씻어 내리고, 부엌에도 불을 지필 준비를 했다. 사용한 지도 까마득한 조리용 가마는 그을음 섞인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어, 카린은 크게 탄식했다. 그을음을 닦아내고 장작을 준비한 다음 본궁의 식량창고에서 당장 필요한 식량을 운반해왔다. 서리궁에는 공주의 침실과 정원에 면한 거실 외에도 3개 정도의 방이 있다. 그 중 하나를 시녀의 방으로 정하고, 쓸모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침대를 날라왔다. 아침부터 시작된 대청소였지만 모든 준비가 끝날 쯤에는 저녁 무렵이 가까워 있었다. 그 때쯤에야 겨우 모습을 나타낸 공주는 완전히 변해버린 자신의 숙소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대단하네.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고 저떻게고, 이런 곳에 젊은 처자를 놔두고 가는 거니까 최소한 쾌적하게, 안전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되지요.” “나도 일단은 젊은 처자잖아.” 카린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공주를 보았다. 이런 대사가 이 정도로 뻔뻔스럽게 들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일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된 소녀는 계속 청소를 도와주고 있었지만 공주의 모습을 보고는 서둘러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 말씀하신 대로 내일 아침부터 이 아이를 이곳에 출근시키겠습니다. 다만 밤에는 어수선하니 본궁에 내려와 지내도록 하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지요?” “아아. 상관없어.” 말하면서도 공주는 깨끗해진 집을 신기하다는 듯이 돌아보고 있었다. 저녁식사 때에는 본궁에서 할 일도 산더미처럼 많으므로 카린은 소녀를 데리고 물러가려고 했지만 공주가 돌아보더니 말을 걸었다. “카린, 그 애는 놔두고 가. 할 얘기가 있어.” “예.” 대청소를 하던 여자들도 물러가고 별궁에는 공주와 소녀, 두 사람만이 남았다. 소녀는 몸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희한한 주인을 어찌 대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공주는 소녀에게는 눈도 주지 않았다. 집 점검에 아주 바쁜 것이다. 탕전을 들여다보고, 부엌 문짝을 열어보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침실을 보더니 실로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도 다른 방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부조 나무세공의 바닥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반짝 닦이고, 멋들어진 침대는 호화로운 자수가 놓인 커버로 덮여 있었다. 지내기가 몇 배로 편해졌을 텐데, 공주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다니던 소녀는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 “저어, 공주님...” “응?” “제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건, 어떤...” “아아, 그랬지.” 공주는 소녀를 데리고 거실로 돌아가 긴 의자에 앉더니 소녀를 세워둔 채 갑자기 말했다. “목욕탕에 어떻게 들어가고 있어?”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욕탕 말씀이신가요?” “본궁의 탕전에서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목욕을 한 적이 있겠지?” “예, 몇 번인가 있습니다.” “몇 번?”“예. 그게, 다섯 번 정도일까요. 저는 아직 성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공주는 실로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다리를 꼬고 의미심장하게 소녀를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남자 몸을 얼버무리고 있었어?” 소녀는 깜짝 놀랐다. “예에?” “같이 자고 일어나는 것 뿐이라면 여자들도 눈치채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목욕탕에 들어가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아무리 불빛이 불충분하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리가 없어. 보통 같았으면 큰 소동이 나는 거 아니야?” 소녀는 아직도 얼이 빠져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공주님, 저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르겠어?” “예. 저, 외람되오나. 공주님은 무언가 착각을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착각?” “예.” 소녀는 크게 끄덕였다. 곤혹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런 소녀를 공주는 더욱 빤히 뜯어보더니 말했다. “그럼, 옷 벗어봐.” 소녀는 작은 비명을 올렸다. 그 얼굴에 점점 핏기가 올라갔다. “공주님! 그건...” 새빨갛게 되어 허둥지둥하는 소녀에게 공주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거짓말. 농담이야.” 소녀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책망하는 듯한 눈을 공주에게 향했다. 한편 공주는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 나는 리.” “셰라라고 합니다.” “본명?” “예.” “이상한 이름이네.” “아니에요.” “남자 이름치곤 이상하잖아.” “그런...” 더욱더 곤혹스러운 듯이 말하는 소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범상치 않게 아름답다고 해도 좋았다. 백설 같은 피부에 어렴풋이 혈색이 오르고, 부드러운 보랏빛 눈망울이 불안스럽게 깜빡이고 있다. 길게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순백에 가까운 은색이다. 어디까지나 깨끗한, 무상할 정도로 덧없이 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아무리 잘못 봐도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공주의 말에 낭패스런 표정을 띄우고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 모습은 무언가 주인의 불만을 샀는지, 마음에 들지 못한 것인지 하고 겁을 먹고 있는 소녀 그 자체였다. 다리를 꼬고 긴 의자에 앉은 공주는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어제 어디에 갔었어?” “저는... 어제는 어디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묻고 있는 건 밤중을 말하는 거야. 성벽을 넘어서 어딘가 나갔었지?” “공주님...” 소녀는 이제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째서 계속계속 이런 짓궂은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공주를 보고 있었다. 그런 비난과 애원의 눈초리에 비해, 공주는 끝까지 즐거운 것 같았다. “울지 않아도 돼. 나도 가끔 하는 짓이니까.” “저어... 부디 이제 그만 용서해주세요. 저는 그런, 그런 무서운 짓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예. 결코...” “그럼 그런 걸로 해두지. 오늘은 이제 됐으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와.” “예.” 소녀는 안심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바쁜 걸음으로 공주 앞에서 물러나갔다. 식사 때가 되면 여자들은 정신 없이 바빠진다. 본궁에는 본궁의 주방이 있고, 이곽과 삼곽에도 각각 배식에 임하는 여자들이 있지만, 몇백 명이라는 사람 입에 들어가는 양을 조리하는 것이니, 카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듯이 전쟁터와 같이 분주했다. 본궁에 돌아온 셰라도 자신의 본래 임무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카린에게 가서 백부의 거처에 들렀다 와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대는 백부님의 소개로 봉공(奉公)에 나왔었지요.” 셰라의 백부는 누아크라고 하여, 본궁에서 일하는 궁시(弓矢) 담당이었다. 명칭대로 활과 화살이 쌓여 있는 방을 맡아 그 관리를 하는 것이 역할이다. 그렇게 신분이 높은 것도 아니나 누아크는 전왕이 살아있을 때부터 성실한 직무 태도로 평판도 좋았다. “내일부터 서리궁에서 일하게 된 것을 백부님에게 말해두었으면 해서...” “그렇겠군요. 다녀오세요.” 카린은 쾌히 허락해주었다. 활창고나 갑옷창고 등의 영역에는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거의 가까이 갈 일이 없다. 남자들이 부엌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본궁 안에 있어도 행동 범위가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셰라도 백부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상관인 카린에게 허가를 구한 것이다. 이미 복도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궁시(弓矢) 창고의 대기실에 누아크는 없었다. 동료의 이야기로는 오늘은 비번이라고 했다. 내전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본궁에서 숙식을 하지만 남자들은 성 안에 주거를 두고 그때그때 등성하는 것이다. 신분이 낮은 관리인 누아크는 삼곽에 주거를 할당받고 있었다. 셰라는 일단 돌아가서 다시 한번 카린에게 외출 허가를 구했다. 성 밖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엔간한 도시 정도의 넓이는 되는 코랄 성이다. 하물며 곧 밤이 된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하고, 카린은 걱정하며 시종을 붙여주었다. 정문의 문지기에게 삼곽의 백부에게 찾아간다고 말하고 긴 도로를 내려간다. 곽문을 통과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밤이 되면 조용하게 정적이 찾아오는 본궁에 비해 삼곽은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어느 집이나 성에서 돌아온 가장을 맞이하여 저녁을 먹고 있는 중이리라. 단란하고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아크는 집을 비워둔 채였다. 오십에 가까운 누아크는 젊은 시절에 아내를 잃은 이래 독신을 고수하고 있다. 오늘을 친구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고 옆집 사람이 말해주었다. 원래라면 다시 와야 하겠지만 시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셰라는 망설이면서도 시종을 데리고 그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누아크가 갑작스러운 조카의 방문에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셰라,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이쪽에 계시다고 들어서...” 셰라는 외투의 두건을 벗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그 집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갑자기 방해드려서 뭐라 해야 할지... 누아크의 조카 셰라라고 합니다.” 누아크가 말을 덧붙였다. “동생의 자식이라서요. 얼마 전부터 내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거 놀랐습니다. 아무리 봐도 백부님하고는 닮을래야 닮지 않은 미인이 아닙니까.” 그 자리에 있던 친구 중 한 명이 감탄하듯 말하자, 누아크도 웃으며 끄덕였다. “그렇지요. 저하고 닮았더라면 시집 보내는 데 한 고생 할 뻔 했습니다 그려.” 거창하게 놀림을 받은 셰라는 뺨을 붉히면서도 조신하게 백부에게 말을 걸었다. “백부님,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뭐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오늘밤은 자고 갈 거 아니냐?” “그것이... 곧바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새로운 일을 맡게 되어서요.” “그거 바쁘겠구나.” 누아크는 놀라서는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부의 집으로 돌아가자, 셰라는 시종을 위해 차를 끓여주고 내일부터 맡게 된 일에 대해 백부에게 이야기했다. 공주 곁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들은 누아크는 놀랐다. 얼마 뒤에는 서리궁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을 땐 더욱 그랬다. “괜찮으냐? 본 적은 없지만 그 서리궁은 바로 파키라 중턱이라지 않느냐. 짐승도 자주 나온다고 하더라.” “예에. 오늘 하루 청소하러 다녀왔지만 정말로 깊은 산 속이고, 녹음이 눈부실 정도였어요. 하지만 위험할 것 같진 않았어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아우를 볼 면목이 없다.” 누아크는 문득 무릎을 쳤다. “이런. 그 아우한테서 너에게 보내는 짐이 와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입을 거나 무언가를 보낸 것 같더라.” “어머, 그랬나요.” 셰라는 기쁜 듯 손뼉을 치며 일어서 백부의 뒤를 따라 서둘러 안쪽 방으로 향했다. 시종이 보고 있는 앞에서 짐을 풀어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런 경우엔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안쪽 방에 들어가서 신중하게 문을 잠그고 백부와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셰라는 휙 하고 말투를 바꿔 말했다. “예정을 변경한다.” 낮고, 웬만큼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오늘밤, 공주를 죽인다.” 누아크는 다시 눈썹을 치켜 뜨고 놀라움을 표시하더니, 마찬가지로 낮게 속삭였다. “어찌된 일이냐?” “나도 모르겠어.” 목소리만이 아니라 셰라의 얼굴도 좀 전까지의 모습을 완전히 버린 뒤였다. 입술은 굳게 닫혔고, 부드러운 보라색 눈망울에는 날카로운 빛이 있다. 공주 앞에서 곤혹스러워하고 이리저리 망설이던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틀림없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완벽하게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알려진 건지 그걸 모르겠다.” 누아크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나갔다. “정체를 들켰다고?” “그래. 그것도 어젯밤 움직임까지 알고 있었다.”“그런 말도 안 되는!” “큰소리 내지 마. 공주가 나한테 직접 말했다. 밤중에 성벽을 넘어서 어디에 갔느냐고.” “뭐라고...” “어떤 수단으로 남자 몸을 숨기고 있었느냐고도 말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게 고작이었어.” 공주와의 대화를 셰라가 재빨리 이야기를 하자 누아크의 얼굴은 창백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셰라도 마찬가지였다. 잘도 급히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다른 무엇보다도, 문답무용으로 앉아 있던 공주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싶었던 그 충동을 잘도 참아냈다고 생각했다. 도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번뜩인 것과 공주 허리께의 검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우연이자 참으로 행운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누아크도 마찬가지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알면서 어째서 공주는 너를 붙잡지 않았지?” 이 의문에, 셰라는 아름다운 얼굴에 기분 나쁜 미소를 띄우는 것으로 대답했다. “저 공주는 전쟁의 여신의 현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듯하다.” “분명히.” “허리에는 언제나 검을 차고 있어.” “그렇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나를 해치우고 싶은 거겠지.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 테고.” “호호오...” 여기까지 이르자 누아크도 똑같이 빙그레 웃었다. “알 만하군. 저 공주라면 있을 법한 일이다.” “어리석은 짓이지만, 이 경우엔 고마운 일이다.” “공주가 너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흘릴 위험성은?” “지금에 한해선 없다.” “확실한가?” 셰라는 다시 한번 냉랭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에 대고 남자일 거라고 말할 리가 없다. 웬만한 얼간이가 아닌 이상은.” “그렇다면, 오늘 밤은 자지 않고 네가 덤벼들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아마도.” 겉으로는 백부와 조카라고 되어 있는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천천히 끄덕였다. “바깥의 지시를 받지 않고 해치우는 건 어떨까 싶지만... 할 수 없군.” “그럴 시간은 없어. 언제 공주의 마음이 변해서 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흘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오늘밤 죽인다. 그걸로 해결한다.” “방심하지 마라. 무언가 계책을 준비해두었을지도 몰라.” “알고 있어. 그걸 뛰어넘어서 해치우러 간다.” “음.” 누아크는 서랍 안쪽에서 한 두름 정도의 꾸러미를 꺼내어 셰라에게 건네고 쐐기를 박았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부디 실패하지 마라.” “알고 있어.” “네 정체가 의심받으면 ‘백부’인 나에게도 혐의가 걸려 있어. 지금까지의 수고가 전부 물거품이 된다.” “알고 있어.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끝장내겠다.” 바깥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차를 다 마셨을 즈음, 작은 꾸러미를 안고 셰라가 나왔다. “셰라, 부디 공주님께 무례한 일 없도록 해라.” “예, 백부님.” “자, 어서 돌아가라. 벌써 시간이 다 됐다.” “예. 허가를 얻으면 다시 찾아뵐께요.” 준비한 등불에 불을 붙이고 셰라는 시종과 함께 본궁으로 돌아갔다. 곽문도 정문도 간신히 통금시간 전에 지나갈 수 있었다. 내부에서 일하는 자라고 말하면 지나가도록 허가는 해주겠지만, 그래서는 책임자인 카린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함께 외출했던 시종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셰라와 헤어져 자신의 대기장소로 돌아갔다. 셰라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기 방에 돌아가, 저녁 준비 때 빠졌던 것을 같은 방 여자들에게 사과하고, 백부에게서 받아온 것이라고 말하며 사탕과자를 돌렸다. 여자들이 기뻐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과자를 깨물면서 공주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이야기해주었지만 정보라고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별난 사람이라는 것, 본래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자신을 남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 등. 셰라는 맞장구를 치면서 문득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공주님은 폐하의 곁에 계실 때에도 대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던데, 강하신 걸까요?” 실제로 이것만큼은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문만이라면 산더미처럼 들었다. 3년 전 내란을 헤쳐 넘고 국왕을 다시 왕좌에 올린 것은 그야말로 공주의 활약이었다고. 그 검술은 당대 일류의 검사인 나시아스나 호걸 도라 장군의 인정을 받았다고.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어딘가 과장되어 전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저 공주의 경우엔 아주 조금 검을 다룰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저 연령과 용모가 과대포장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여자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소문 이상으로 황당무계하여, 공주는 맨손으로 곰을 때려잡았다던가 말을 들쳐 멜 수 잇다던가, 아무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주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수다에도 지친 여자들이 차례차례 잠이 들었지만 셰라만은 침대에 웅크린 채로 눈을 뜨고 있었다. 여자들이 완전히 잠들어버렸을 때가 되어서야 셰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먹인 사탕과자에는 수면제가 포함되어 있다. 일단 아침이 될 때까지는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누아크가 건네준 꾸러미에 들어 있던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셰라는 오랫동안 입고 있던 여자옷을 벗어버리고, 꾸러미 안에서 약간 희한한 검은 옷을 꺼내어 몸에 둘렀다. 앞에서 여미게 되어 있는 길이가 짧은 윗옷은 움직이기 편한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간단한 모자를 쓰게 되어 있다. 긴 은발은 검은 두건에 가려지고, 하반신에 걸친 바지는 대퇴부는 넉넉하고 발목에는 딱 맞게 되어 있었다. 신발도 희한한 것이었다. 대체로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가죽신발을, 신분이 낮은 사람은 나무신발을 신는 것이 보통이나, 셰라가 발을 감싸는 데 쓴 신발은 바닥 쪽은 딱딱한 가죽, 다른 부분은 천으로 되어 있어 발목에서 종아리까지 숨기게 되어 있다. 두 손목과 허리에 감은 띠에는 여러 가지 도구를 숨기고, 마지막으로 가느다란 검을 밀어 넣었다. 보통의 검보다 상당히 짧지만 단검치고는 길다. 준비를 끝내자 셰라는 산들바람처럼 본궁의 뒤쪽 정원으로 빠져나가 서리궁으로 향하는 길을 달려 올라갔다. 저 공주는 반드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셰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혼자서 할 생각이 아니라, 혹시 병사들을 잠복시켜두거나 하는 함정을 마련해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셰라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설사 50명의 병사를 숨겨놓았다고 해도 자신에게 있어 실패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횃불을 밝게 켜두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했지만, 서리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상태였다. 좋은 기회다. 셰라의 눈은 어둠에 단련되어 있다. 우위에 설 자신도 기량도 있었다.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상태를 살폈지만 이상한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벌레가 울고 나무가 버석거리고 있다. 들쥐인지 토끼인지 작은 생물의 기척이 난다. 당연히 밤의 산 풍경이었다. 너무나 조용하기 때문에 맥이 빠졌을 정도였다. 조심하면서도 셰라는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오늘밤은 아마 창문에도 문에도 자물쇠가 잠겨 있을 터였다. 그것을 위한 도구를 준비해왔지만, 창 하나에 손을 대보고 놀랐다. 열려 있다. 슬슬 함정인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묘한 함정이다. 이 별궁에 아무런 장치도 없는 것은 이미 확인한 뒤였다. 떨어지는 함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병사를 숨겨둘 작은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비밀 통로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의 숨 기운이나 살기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사람의 기척이 아예 느껴지질 않는다. 고민한 것도 한 순간의 일이었다. 스륵 하고 내부로 침입했다. 불은 완전히 꺼져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다. 호흡을 고르고, 온몸의 신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셰라는 조금씩 공주의 침실로 향했다. 그곳은 비어 있었다. 휑하니 차가운 공간은 이곳에 한참 전부터 사람이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멋진 침대에는 잠을 잤던 흔적도 없다. 셰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놓쳐버렸다. 자신을 도발한 것까진 좋았지만, 얼굴을 맞대고 대결하는 건 무서워진 듯하다. 저 공주는 등산이 취미라고 하니, 산 속에 은신처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곳까지 쫓아갈 수는 없다.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건가 생각하면서 살짝 발을 빼서 복도로 나섰다. 오늘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방으로 돌아가려고 한 그 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아침 오라고 그랬을 텐데.” 놀라는 것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몸을 날려 피하면서 목소리를 향해 품속의 단검을 던졌지만 상대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태세를 바로잡은 셰라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머리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어째서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격렬한 초조감과 의혹을 느꼈지만 그것은 일단 나중 일이다. 우선은 어떻게 해서든 공주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실내는 거의 완벽한 암흑이었다. 구조는 머리 속에 들어 있지만, 먼저 위치를 알려버린 만큼 이쪽이 불리하다. 게다가 오감을 총동원하고 있어도 상대의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다.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자 창문이 열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열렸다. 들어왔을 때 닫아놓았을 창이다. 반사적으로 창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어디다 던져.”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동시에 희미한 별빛이 떠오른 창 근처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셰라는 즉시 한 손에 쥐고 있던 연옥(鉛玉) 몇 개를 한번에 던졌다. 연옥은 구슬[玉]이라는 이름은 붙어 있지만 예리한 각을 몇 개나 가진 탄알이다. 한두 개를 쳐서 떨어뜨린다 해도 나머지가 반드시 살에 파고든다. 창가에 서 있던 공주는 검을 휘둘러 차례차례 연옥을 쳐서 떨어뜨렸지만 전부 쳐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작은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그 몸이 크게 비틀거리면서 창 밖으로 쓰러졌다. 셰라는 즉시 뛰어나갔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 밖의 지면에 쓰러진 공주에게 결정타를 꽂기 위해, 검을 뽑고 창을 뛰어 넘어 그대로 단숨에 돌격하면서 지면을 노렸다. 그런데, 공주가 없었다. 틀림없이 이곳에 쓰러졌을 텐데 눈에 보이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전신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지면에 검과 무릎을 대고 그대로 앞으로 굴러, 일어서서 돌아보고 자세를 잡을 때까지 물 흐르는 것 같은 한 동작으로 이루어냈지만, 늦었다. 공주는 연옥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을 것처럼 보여주고 스스로 밖으로 뛰어내려 결정타를 서두르는 셰라를 꼬여낸 것이다. 일어났을 때에는 바로 옆에까지 거리가 좁혀진 뒤였다. 태세를 취하려던 검이 얻어맞고 퉁겨나가버렸다. 간발의 차도 주지 않고 품속의 연옥을 꺼내려던 왼손을 검의 옆면으로 억제했다. 셰라는 거의 얼이 빠진 상태로 움직임을 멈췄다. 왼손에 느껴지는 검의 단단한 감촉이 믿기질 않았다. 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옆면을 가볍게 대고 누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틀림없이 베이고 만다. 아무래도 저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공주가 있었다. 별빛밖에 없는 밤인데도, 금색 머리카락과 이마의 보석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대가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보고 공주도 검을 치웠지만,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도망치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채 몸을 떨며 가만히 서 있자 공주는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목욕탕에 들어가고 있어?”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언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뚫어져라 공주를 바라보았지만 상대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런 상황에까지 와서 그런 것을 물어보십니까?” “그 밖에 뭘 물어보라는 거야?” “......”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것 뿐이다. 어떻게 하고 있어?”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셰라는 생각했다. 시간을 끌어야 하기도 했다. 각오를 하고 말했다. “평범하게 들어갑니다.” “그래서야 대소동이 날 텐데.” 기가 막히다는 듯 말하는 공주에게 셰라는 조심하면서도 천천히 말했다. “방법은... 조명의 불꽃 속에 살짝 분말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독은 아니겠지?” “아니오. 다만, 그것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면, 아주 약간...” “뭔데?” “아주 약간 머리 회전이 둔해집니다. 멍해져서 현실감이 결여되지요.” “그런 가루를 어떤 걸로 만들어?” 어찌해야 할지 생각했지만, 공주의 눈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얼버무릴 수가 없었다. “저희들은 몽견초(夢見草)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약초의 영향을 받으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문자 그대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된다. 함께 욕탕에 들어가 있는 인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게 된다. 혹은 처음부터 여자라고 믿고 있으니, 다소 이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다량으로 사용하면 부작용도 크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도 위험해지는 마약이었다. 설명을 듣고 공주는 얼굴을 찌푸렸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그런 살벌한 걸 태우는 거야?” “극소량입니다. 위험하진 않습니다.” 여자들이 중독되어 털썩털썩 쓰러지거나 하면 이쪽이 곤란해진다. “그것만 가지고도 벗은 여자로 통용되는 건가?” “충분합니다. 저 탕전은 어둡고 수증기가 가득 차 있는 데다, 허리 부근은 천으로 가리고 들어가니까요.” 신중하게 대답하면서도 셰라는 방심하지 않고 도망칠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날아간 검에 미련이 남은 눈초리를 향하고 그 쪽이 주무기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둔 뒤, 어떻게 해서든 품속에 손을 집어넣을 정도의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주는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확실히 너라면 앞만 가리면 여자로 보일지도 모르겠군.” 가볍게 말하더니, 이쪽에 등을 돌리고 별궁으로 걸어갔다. 놀란 셰라에게 공주는 등을 돌린 채로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빨리 돌아가서 쉬어. 늦잠 자면 카린한테 혼난다구.” 경악했다. 비슷한 상황이라면 몇 번인가 경험한 적도 있었다. 주의 깊은 상대는 이쪽이 소년에 지나지 않아도 방심은 하지 않는다. 아무리 교묘히 변장을 해도 정체를 의심받는 때도 있다. 그럴 때의 대처법은 충분히 학습한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상대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공주!” 비난기 섞인 부름에 공주가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돌아가서 쉬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야. 너, 내일부터 내 옆에서 일하는 거잖아.” “저는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데도 말입니까?” 거의 조소하는 듯한 어조였다. 셰라는 지금 틀림없이 화가 나 있었다. 한 번은 실수했지만 두 번이나 실수할 자신이 아니다. 그런 자신을 체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일인가. 애초에 자객의 표적이 되었다고 하면 신병을 구속하여 조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공주는 어디까지나 재미있는 듯이 이쪽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다. “너, 처음부터 내 목숨을 노리고 온 거야?” “아니오.”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이럴 예정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째서 날 죽이러 왔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텐데요.” 그럴 생각으로 도발한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공주는 쿡쿡 웃었다. “시녀가 남자이건 밤 산책이 취미이건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 특별히 해가 될 것도 아니니까.” “살해당할 뻔했는데 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죽이지 못했잖아?” 셰라는 스윽 하고 눈초리를 가늘게 하고는 공주를 살폈다. “저는 당신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그렇단 소리지.” 공주는 가볍게 웃었다. “네 실력 가지곤 나는 못 죽여. 다시 말해 무해하지. 또 다시 말하면 널 어쩔 이유도 없어.” 셰라의 얼굴은 장절한 노기(怒氣)로 물들었다. 굴욕이라는 말의 의미를 셰라는 태어나서 처음, 끔찍할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데다, 거기에 뻔뻔스럽게 이런 소리까지 내뱉는다. 이 때가 되어서 처음으로 공주에 대한 강렬한 살의를 느꼈지만, 이미 한번 실패한 상태다. 자신의 손으로 해치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셰라에게 그런 권한은 없었다. 입막음에까지 실패한 이상, 즉시 현장을 떠나는 것이 철칙이었다. 신병을 구속당하는 것 만은 피해야하기 때문이다. 뒤처리는 다른 자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나, 그래서는 자신의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규칙에 등을 돌릴 수도 없다.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입술을 짓씹고 있자니,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인 말투로 공주가 말했다. “그렇게 분하면 또 한번 해볼까?” “무슨 말입니까...” “한번으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몇 번이라도 네가 좋을 때 노리면 돼. 그렇게 되면 싫어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 “내일부터 여기에 일하러 오잖아. 마침 좋은 기회네. 나도 가능한 한 상대해주도록 하지.” “......” “다만, 두 사람만 있을 때로 제한. 다른 사람들이 봤다간 놀라니까 말이야. 그런 조건으로, 어때?” 어때, 라고 말해봤자 이쪽이 뭐라 대꾸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이 공주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무슨 의도가 있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건지, 도망치는 것도 반격하는 것도 잊고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어 뜻대로 받아들이자면,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목숨을 위험한 채로 두겠다고 공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에는 담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했을 때의 대가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러자 셰라의 생각을 다시금 눈치챈 듯 공주가 말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도 내가 살아 있으면 내 승리. 그 때는 네 배경을 이야기해주는 조건이라면?” 탐색하는 것 같은 눈초리로 공주를 본다. “죄송합니다만, 붙잡아서 고문을 하는 쪽이 빠른 게 아닙니까?” “그런 취미는 없어.” 간단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셰라는 처음으로 미소를 띄웠다. 파격적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알 만하다. 이건 대단한 놈이다 하고 생각했다. 자객이라는 인종을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던 건지, 혹은 뭐라 말해도 젊은 소녀가 다들 그렇듯 자신 같은 남자에게 흥미가 있는 건지, 어쨌든 살려둔 채 가지고 놀 셈인 듯했다. 어쩔 셈인지는 모르지만, 받아들여보자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좋아, 얘기는 끝났군. 기간은 언제까지로 할까?” 잠시 생각하는 척한다. 애초부터 진심으로 이런 내기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시간을 끌 수 있게 된다. 조건이 붙어 있다 해도 내전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역할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공주의 제안도 꽤나 바보스럽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었다. 그 정도로까지 얕보였다는 건 불쾌하지만 경계당하는 것보다는 몇 배나 일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얕보도록 두는 게 나았다. “당신을 죽이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리겠지요.” “거야 뭐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무척이나 고생할 거라고 봐.” 아무리 봐도 목숨이 표적이 된 당사자가 할 대사가 아니다. 셰라는 무언가 재미있어졌다. 원기왕성한 공주라고 생각했다. 이 재미있는 상대를 자신의 손 안에 놓아둘 수 있는 것이 기뻤다. 생명력이 뛰어나고 붙잡기 힘든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사냥꾼의 심정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한 달, 괜찮겠습니까?” “좀 기네.” “그럼 3주 간.” “안 돼, 안 돼. 좀더.” “그렇게 말씀하셔도...” “2주면 어때?” “그럼 제가 불리합니다.” “그럼, 중간을 쳐서 20일은?” 셰라는 끄덕여 보였다. 그만큼 시간을 끌 수 있으면 충분했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물어본다. “그때까지 당신을 운 좋게 죽일 수 있다면 보상으로 무얼 주시겠습니까?” “뭐가 갖고 싶어?”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셰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간단하게 대꾸가 날아오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당장에 죽은 사람으로부터 무언가 받겠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적이 없다. 하지만 기대를 배신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조를 물건을 생각해 두겠습니다.” 실로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부드러운 어조이면서도, 그 목소리에는 몇 명이나 되는 목숨을 확실히 빼앗았던 자만이 지니는 섬뜩함이 담겨 있었다. 5장 다음날 아침, 셰라는 긴장하며 서리궁으로 향했다. 처음 한 일은 전날 밤 자신이 던졌던 단검의 뒤처리였다. 천장이며 창틀에 박힌 채로 있었다. 사다리를 써서 빼냈지만, 창문은 그렇다 쳐도 이 천장에 무슨 재주로 붙어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대들보가 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촛대가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다. 판이 붙어 있는 천장에는 뼈대를 질러 놓아 그것이 다소의 돌기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악력(握力)이다. 공주는 그 뒤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잔 듯했다. 멋진 침대 커버는 빨리도 채여 바닥에 떨어지고, 침구는 엉망진창이었다. 일어난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난 듯 만져봐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셰라의 직업은 ‘시녀’였다. 할 일은 산더미같이 많았다. 우선은 침실을 원래대로 정리해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자신이 만든 것을 공주가 입에 댈 것인가 하는 것은 별도로 치고, 파이 껍질을 만들기 위한 가루를 반죽하여 잠시동안 재워둔다. 그 뒤 정원으로 나왔다. 어제는 별궁을 청소한는 것이 고작이라 정원까지는 일손이 돌지 않았던 것이다. 이 별궁이 세워졌던 당시에는 이 정원도 깨끗하게 정돈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상태였다. 잔디도 손질이 부족했다. 이렇게 황폐해진 채로 놔두면 정원도 불쌍하다. 긴 은발을 묶어 올리고 나서 셰라는 주저앉아 풀을 뽑기 시작했다. 잡초만을 깨끗하게 뽑아 나간다. 어떤 일이라도 그렇지만, 한번 시작한 이상에는 완벽을 지향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바느질, 요리, 방의 정돈, 그리고 살인도. 손을 움직이면서 어젯밤의 일을 되새겨본다. 새삼스레 울컥 하고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최소한 다시 한번 도전해서 자신의 실력이 그 정도로 미숙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일족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셰라였지만 체술도 기술도 상당히 숙련되어 있다. 연장자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어째서 저 공주를 쓰러뜨리지 못했을까? 저 공주가 자신에 비견할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보통의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시 자신의 방심이 초래한 사태라는 것이 된다. 얼마나 열 받는 일인가. 몸을 태우는 것 같은 격분을 느끼면서도 묵묵히 풀을 뽑아 나가고 있던 그 시야에 갑자기 사람의 발이 들어왔다. “......?!”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고개를 들자 공주가 셰라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연해졌다. 사람이 다가온다면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숲 속에서 다가왔다면 반드시 기척과 소리가 날 터였다. 그런데 이만큼 접근할 때까지 완전히 눈치재지 못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경직되어 있는 시녀를 향해 공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꼭두새벽부터 열심이구나.” “......” “왜 그렇게 깨끗하게 하는 거야?” 숨을 들이마시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왜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당신의 시녀이고, 이 장소를 카린님으로부터 맡았으니까 임무는 완수해야 합니다.” 공주는 뚫어져라 셰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셰라는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이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셰라의 눈은 밤에도 볼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지만, 태양 아래서 보자 새삼 그 머리카락과 눈망울의 색깔이 눈에 띄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황금빛과, 햇살에 반짝이는 숲과 같은 녹색. 조금만 꾸미면 누구라도 극찬할 미소녀가 될 텐데 본인만은 그 미모에 전혀 무관심한 듯했다. 거칠게 머리를 헤집더니 말했다. “내 취미대로라면, 조금 지저분한 정도가 좋은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것을 조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맞는 말이다. 공주도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대고 등을 돌렸다. 심장 고동은 아직도 빨랐다. 그러나 셰라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밖으로부터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자객’인 자신을 눌러두고 ‘시녀’로서의 자신을 전면에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공주는 정원에서 거실로 올라가 긴 의자에 데굴거리며 누웠다. 잔디 위를 걸어갔다고는 해도 전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공주가 나타났던 루브람의 숲으로 눈을 돌렸다. 늦은 봄의 숲이다. 부드러운 풀이 싹을 틔우고 있다. 낙엽이 가득한 숲을 걷는 것보다야 조용하겠지만 그 풀을 밟아 헤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표정에는 내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평정을 유지하며 말을 걸었다. “공주님. 점심은 이쪽에서 드시겠습니까?” “독 들어간 거야?” 한 순간, 말에 쫓겼다. “아니오.” “그렇다면 먹지.” 의미를 알고 하는 소리인지 어떤지 의심하고 싶어진다. 정말로 독이 들어간다면 어쩔 셈인가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그것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점심식사를 하기엔 아직 빠른 시간이다. 한 바퀴 풀 뽑기를 끝내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몸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가 알지 못했다. 커다란 회색 모피가 별궁을 향해 걷고 잇다, 그런 식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무엇인지 알았을 때에는 핏기가 빠져버렸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조용히, 그것도 갑자기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파키라 산에 다수 서식하는 것으로 유명한 늑대. 그것도 눈에 띄게 거대한, 말 그대로 셰라의 몸 크기 정도는 될 것 같은 녀석 한 askfl가 열려 잇는 테라스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해가 높은 때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나타나는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여기에서 연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공주에게 쓰러뜨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신중하게 목소리를 냈다. “공주님...” 곤란해하는 듯한 목소리에 긴 의자 뒤에 있던 공주가 몸을 일으켰지만, 그 때에는 늑대가 공주의 눈앞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덥석 덮쳐버릴 거라 생각했지만, 늑대는 자연스레 거실로 올라가 공주의 손에 가볍게 코를 밀어붙이더니 그 발 아래 길게 누웠다. 얼이 빠져 있자 공주가 웃음소리를 냈다. “골디. 내 시녀가 깜짝 놀란 모양이다.” 늑대가 머리만을 들어 셰라를 본다. 그러나 모르는 인간에게 흥미는 없는 것 같았다. 다시 드러누웠다. 셰라는 눈을 의심하면서도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갔다. 공주의 발 밑에서, 긴 의자와 비슷할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는 늑대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덤벼들 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까지 가서 발 밑을 내려다보았을 때, 금색의 눈망울이 한번 뜨여 이쪽을 보았다. 그 눈초리에 오싹해서 약간 떨어졌다. “그게 나아.” 하고 공주가 말했다.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본다면 골디라도 유쾌하게 생각지 않을 테니까.” 그러는 자신은 긴 의자의 위, 늑대의 바로 머리 위였다. 의심스러운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녀석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이 녀석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까지 길들이셨나요?” “길들인게 아니야. 이 녀석들은 내 친구다. 골디만이 아니야. 이 별궁에 찾아오는 건 어떤 녀석이라도 그래.” “그 외에 어떤 게 찾아오지요?” “늑대가 열 마리 정도하고, 때때로 말이나 인간인 국왕도 찾아오지.” “국왕 폐하도 친구인가요?”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인간 중에서 제일 좋은 녀석이야.” 셰라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활달한 소년이 친구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어투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간의 소문으로는, 이 두 사람의 양녀 인연은 표면적인 것이고, 국왕은 공주를 미래의 왕비로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수군거리고들 있다. 좀더 안쪽에서 일하는 여자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왕이 유별나다 해도 저런 공주를 왕비로 삼을 리가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셰라의 본래의 임무는 이러한 성 안의 인간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삼곽에 있는 누아크가 캐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시녀로서 내전에 잠입한 것인데, 이렇게 공주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이 공주가 국왕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으로 넌지시 떠보았다. “공주님께선 국왕 폐하를 경모하는 마음은 갖고 계시지 않은 건가요?” 녹색 눈이 휘릭 움직였다. “무슨 의미야?” “국왕 폐하에 대해 ‘좋은 녀석’이라는 것은... 저어, 좀 어떨까 싶습니다만.” “정말로 좋은 녀석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에...” “그리고, 날 부를 때에는 리라고 해.” “성함을 그냥 부르라고요?” “그래.” “그런 짓을 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저는 성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여기라면 아무도 듣지 않아. 더구나 너한테 높임받을 입장은 아니니까 말이야.” 셰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점을 잡힌 만큼 이쪽이 불리하다. “알았습니다.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요.” 지금쯤 누아크는 급한 병이나 핑계를 꾸며대어 일을 쉬고 성을 나가서 곧바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을 터였다. 늦어도 내일이면 새로운 지시가 도달할 것이다. 그것에 따라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공주는 돌아온 이래 점심시간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늑대와 같이 긴 의자에서 굴러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나서 셰라가 만든 요리를 남김없이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만약 혹시나, 공주가 제사한 승부에 정말로 임하고 있었더라면 오늘 내로 자신의 승리는 결정되었으리라고 셰라는 생각했다. 오후가 되자 본궁에서 시동이 달려왔다. 맞이하러 나간 셰라를 보고 그 시동은 서둘러 말했다. “말님이 오셨으니 급히 일어나 오시라고 공주님께 전해주십시오.” “말님?”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면서 공주에게 고하자, 이쪽 역시 의외인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웬일이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일까.” “친구이신가요?” “아아. 셰라는 말 탈 수 있나?” “예.” “그럼 같이 멀리 돌아보러 나갈까... 그럼, 그 전에 그 옷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공주는 기장이 긴 여자옷 차림으로 말에 타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하고 승마복을 준비시겠다고 했지만 셰라는 그것을 사양했다. “저는 이대로 충분합니다.”“옷이 휘감겨서 말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하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몇 번이나 탄 적이 있었으니까요.” 공주는 놀란 듯이 셰라를 보았다. “어쩐지 꽤나 당당하게 여장을 하고 있다 생각했더니, 처음이 아니로군?” 실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 “뭐어... 그렇지요.” 이 이상 물어본다면 미리 꾸며두었던 가짜 배경을 얘기해 납득시키려고 생각했지만 공주의 흥미는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몸이 잘도 이상해지지 않네.” “예...?” “그렇게 좁고 발에 밟히고 팔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놈을 잘도 내켜서 입고 다닐 마음이 들었다니 말이야. 나라면 돈 주고 하래도 거절할 거다.” 남의 일이지만, 이 성 사람들에게 살짝 동정심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일국의 공주가 할 말이 아니다. 분명 이런 자를 공주로 놔두다니 얼토당토 않다. 공식 장소에도 내보낼 수 없다. 이 서리궁에 처박아두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다. 공주는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셰라에게 말하고 자신은 시동과 함께 마구간으로 향했다. 시킨 대로 여관복을 입을 채 정문으로 간 셰라는 그곳에서 오늘 두 번째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았다. 대낮이므로 정문은 활짝 열려 있다. 대수문(大手門)까지 똑바로 내려다보이는 대로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 널찍한 길을 말이 한 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멋지고 훌륭한 칠흑의 준마였다. 기수(騎手)는 없다. 안장도 고삐도 달려 있지 않았다. 완전히 맨 몸의 말이 자기 앞마당인 양 대로를 활보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도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당당하게 머리를 쳐들고 정문으로 다가온다. 백주대낮의 대로이다. 행인들이 발을 멈추고 아연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셰라는 정문 안쪽에 서서 공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바로 옆에서도 지방 귀족인 남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실로 멋들어진 말인데, 폐하께 바치는 진상품인가?” “하지만 안장도 장식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마부가 없다는 건 이상한...” “버려진 말인가?” 이것을 옆에서 들은 성의 관리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모르시는가 보군요. 저건 공주님의 애마(愛馬)입니다. 또 로아에서 찾아온 거겠죠.” “로아에서?” “그럼 도라 장군이 데려온 게요?” “아뇨, 아뇨. 말이 공주님을 만나고 싶어지면 스스로 찾아오는 겁니다. 처음에는 문지기도 놀라서 붙잡으려고 했었지만, 이게 무척이나 성질이 사나운 말이라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지요. 지금에 와서야 잠자코 통과시켜주는 겁니다.” 남자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호오...” “그렇구먼. 야생마가 야생마에 탄다는 건가.” 두 남자는 공주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어느 쪽이나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다. “야생마라니, 거 말 한번 잘했군. 하여튼 저 공주는 여자로 태어난 게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 말이야.” “자아, 뭐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하는 게 아닐세. 뭐라 해도 폐하가 마음에 들어하시니.” “하지만 곤란하다고. 저런 공주를 대체 어느 나라에 왕비로 줄 수 있다는 건가. 폐하도 하여튼 사람이 좋으신 것도 정도가 있지...” 이 때 유유히 정문을 지나온 말이 남자들의 바로 옆에 발을 멈추고 가만히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인 거구가 무언의 위력을 가지고 두 사람에게 밀려든다. 아무리 남자들이라도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지만, 그래도 흑마를 올려다보며 군소리를 했다. “뭐야, 이 놈은?” “짐승 주제에 뭔가 할말이라도 있다는 거냐.” 앞발을 들고 덮쳐 눌러버리면 한줌 거리도 안 되는 것이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볍게 코를 울리더니 머리를 돌렸다. 보아하니 마구간 쪽에서 공주가 말을 끌고 다가오는 참이었다. 남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아무래도 입을 다물었다. 어떤 과정이었던 간에, 상대는 자기 나라의 공주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예절은 지켜야만 한다. 공주가 데리고 온 말은 놀랍게도 왕가의 것이었다. 엄선을 거듭한 준마임은 물론이거니와 사자의 문장을 박은 안장이나 장식을 달고 있다. 왕족의 여행이나 먼 산책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을 빌려준다고 해서 셰라는 어쩔 줄을 몰랐다. 여관 모습으로 이런 말을 탈 수는 없다고 뒷걸음질쳤지만 공주는 양보하지 않았다. 이 정도 되는 말이 아니면, 도저히 그라이아와 함께 달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왕가의 말에는 왕족 분이 아니면 탈 수 없다는 규칙이 있을 텐데요. 저는 그저 시녀일 뿐이니, 최소한 저... 이렇게 훌륭하지 않은 말로 해주세요.” 공주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델피니아 왕궁, 일곽입니다.” “거기의 어디에 훌륭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거야?” 실로 맞는 말이었다. 머리를 감싸쥔 셰라는 신경 쓰지도 않고 공주는 고삐를 건네주었다. “일단 시녀인 네가 근위대나 틸레든 기사단의 말에 타거나 하면 그쪽이 더 문제지.” “하지만...” 그렇다면 삼곽까지 내려가서 일반 병사의 말을 빌려오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공주는 이미 재갈도 물리지 않은 흑마에 가볍게 옮겨 타고 있었다. 혼자서만 남을 수는 없다. 포기하고 조심조심 안장에 올랐다. 공주는 즉시 달려나가지는 않았다. 이때까지의 경과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살펴보던 두 사람, 아까까지 공주의 험담을 하고 있던 두 사람 쪽으로 말을 가까이 접근시켰다. 셰라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시종의 의무로서 고삐를 몰아 뒤를 따랐고, 공주는 말 위에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봐, 뭔가 잘못 돼서 여자가 되었다는 건 나도 동감한다.” 남자들의 안색은 종잇장보다 하얘졌다. 안장 위의 셰라도 놀랐다. 설마 들렸을 리가 없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공주의 모습은 아직도 본궁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들을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장소에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몰골이었다. 공주는 즐겁게 웃으며 대로로 말머리를 향했고 셰라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허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린 두 사람의 곁에서는 아까의 관리와 상황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문지기가 쓴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원정(遠程)에 나간 뒤, 로아에서 온 다른 손님들이 왕궁에 도착했다. 도라 장군과 샤미안이었다. 이곽의 저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도라 장군은 국왕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누구나 모르는 자가 없는 영웅의 갑작스러운 등성에 관리들도 황급히 일을 처리하겠다 했지만, 장군은 웃으며 급한 용무가 아니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알현하고자 해서 온 것 뿐이다. 다른 차례가 끝날 때까지 어디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오늘의 국왕은 평소보다도 더욱 이런저런 서류나 방문객을 상대할 예정이 쌓여있었지만, 장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예정을 변경했다. 도라 장군은 왕궁의 중진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지방 귀족의 아들이라는 소년 시대를 보냈던 국왕을 장군은 친아들처럼 아꼈었다. 도라 장군이 신하의 맹세를 한 뒤부터 입장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지금도 중신이라기보다는 친밀한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장군은 딱딱한 알현장이 아니라 내부의 정원으로 안내되었고, 국왕은 가벼운 마음으로 면회에 응했다. “도라 장군, 잘 와주었네. 에브리고의 일로 또 한번 신세를 졌군 그래.” 도라 장군의 인사보다 감사하는 국왕 쪽에서 말이 먼저 나온 것은 이 문제로 상당히 골치를 썩고 있었던 증거라 해도 좋았다. 장군은 훌륭한 수염을 비틀며 쓴웃음과 어색함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아뢰어야 할지 어떨지 고민하던 차였습니다만.” “무슨 소린가. 도움이 되었네. 뭐라 해도 종제님도 나시아스도 완전히 조개껍질 같았으니 말이야. 그것도, 어떻게 해야 입을 벌려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단단한 조개껍질 말일세.” 두 사람은 즐겁게 웃었지만, 이윽고 웃음을 거두고 국왕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용건을 들을까.” “이런... 다 알고 계셨습니까.” “이 시기에 내 얼굴 하나 보기 위해서 장군이 일부러 로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나.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 듯하지만.” “말씀대로입니다. 전의 이야기 이상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그것도 이번엔 엉터리 소문이라 치부해버릴 수가 없습니다.” 장군도 무서운 얼굴이 되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와 맥다넬 경의 영지가 인접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얼마 전 맥다넬 경의 신하가 한 명 저에게 보호를 요청해왔습니다. 사소한 일로 주인에게 심한 벌을 받자 원한을 품고 도망쳐온 겁니다.” “가끔 있는 일이군.” “예. 다만 그 신하의 원한은 상당히 뿌리가 깊은 듯 주인의 비밀을 차례차례 제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이겁니다.” 그렇게 말한 도라 장군은 한 통의 편지를 국왕에게 건넸다. 아에라 공주로부터 맥다넬 경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국왕은 신중히 그 편지를 펼쳤고, 다 읽을 때까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알 만하군.” 편지를 원래대로 집어넣으면서 납득한 듯이 끄덕였다. “알겠어. 그런건가.” “침착하게 계실 때가 아닙니다.” 장군은 그때까지의 온화한 태도를 완전히 바꾼 엄격한 표정이었다. “즉시 아에라님과 맥다넬 경에게 일의 전말을 물어야 합니다. 선왕과 혈연 관계가 있는 고귀한 분들이라고 해도 지금은 폐하께 봉사하는 몸이 틀림없는데, 이것은 분명히 신하의 입장에서 일탈한 것입니다.” “자, 자. 기다려보게, 장군.” 국왕은 묘하게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아에라 공주는 편지 안에서 그 대범함을 우둔하다고 말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멍청하다고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입어서야 저 혼란의 시대에 국왕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금도 오히려 미소마저 띄운 채 말했다. “나에 대한 험담이 줄마다 거듭되어 있긴 하나, 보는 방향을 바꾸면 그저 그것 뿐인 편지다. 경솔하긴 하지만 죄를 물을 수는 없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부분은 어떻게 됩니까. <진실로 왕국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그리 되어야 할 나라의 모습을 실편시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사보아 공작가의 의무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역모를 꾸민다고까지 볼 수 있는 문구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신하로서의 충절에 힘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 든든한 편지라고도 할 수 있네.” “폐하!” 초조함에 목소리를 거칠게 높인 장군을 보고, 국왕은 살짝 웃으며 입술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목소리가 크네, 장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기껏 온 정원에서 경치라도 즐기는 게 어떤가.” “......!!” 무언가 덧붙여 말하려던 장군은 포기한 듯 어깨의 힘을 뺐다. 이 사람이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할 때에는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다. 요리조리 회피당하고 만다. “허나 말씀드리자면, 저희 쪽에 비호를 구하러 온 자가 고하기에 양자 간에 분명히 중대한 밀약이 있었고, 맥다넬 경은 일족의 장 이상의 것을 바라는 눈치도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왕권인가?” 간단하게 말을 꺼낸 국왕이었다. “그거 고맙군. 맥다넬 경이 그 정도의 사명을 멋지게 완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양보해도 상관없네, 나는.” 장군은 이마를 꾸욱 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어조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폐하, 그런 소리를 남들 앞에서는 결코 담지 않도록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애초에 해도 좋은 말과 안 되는 말이 있는 겁니다.” “글쎄, 진심이라고 받아들여도 곤란하지만 말이야.” 하고, 국왕은 어디에 바람이 부냐는 식이었다. 손에 든 편지를 덮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야. 무얼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걸 안이하게 도둑맞을 정도라면 수준을 알 수 있지않나. 나 같으면 이런 건 받은 즉시 그 자리에서 태워버리겠네.” “뭐어... 부주의하다고 한다면 그 말씀대로군요.” 음모는 조용한 곳에서 행함이 기본이다, 라는 말도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표면화될 계획이 성공할 리가 없다. 그 의견에는 장군도 찬성이었지만,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예 발로 경에게 거병 허가를 내주시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도라 장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 안 되네.” 단번에 웃어 넘긴 국왕이었다. “알겠나. 만약 맥다넬 경이 왕권을 바라고 있다 치세.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이 나를 어찌하지 않으면 안 되지. 에브리고의 병력은 기껏해야 3천, 맥다넬 경에게 찬동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그 두 배도 되지 못하네. 사보아가의 유력자들은 거의가 종제님을 두려워해 지지하고 있으니까. 그 정도의 병력으로 나에게 어찌 대항하겠다는 건가.” 현재의 국왕이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근위병단을 별도로 쳐도 2만은 넘는다. 그 중에는 물론 도라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내란 전부터 국왕을 지지했던 많은 수의 지방 귀족, 틸레든과 라모나 양 기사단, 추가로 비공식적이만 타우 산맥의 무시무시한 전투집단이 포함되어 있다. 국왕에 대한 반감의 목소리가 요 삼 년 동안 거의 사라진 것도 이런 인물들이 진심으로 국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월 그리크는 명실공히 델피니아의 지배자였다. 여기에 대항하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승산은 극히 낮고, 지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국적(國賊)의 오명을 쓰게 된다.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국왕에 대항하겠다는 것은 영토나 집안을 귀하게 여기는 귀족들에게는 여간해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장군도 납득하여 수염 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실례했습니다. 저도 세월에는 이기지 못하는가 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장군은 아직 건재하게 있어주지 않으면 안 돼. 그렇군...” 편지를 흔들면서 국왕은 낮게 웃었다. “나에게 불만을 가진 자가 이 두 사람 뿐일 리도 없지.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왕이라는 건 죄 많은 직업이야.” 장군은 이 의견을 일부러 무시했다. 단순하게 직업이라고 부르며 간단하게 끝내버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그 두 사람의 일로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만...” 장군이 말하려던 차에 시동이 와서 망설이며 용건을 알렸다. “폐하. 환담 도중 죄송합니다. 독립기병 대장이 건너오셨습니다만...” “바로 들여보내라.” 즉시 말한 국왕이었다. 국왕의 소꿉친구인 이븐은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여차한 경우엔 3천이나 5천은 되는 전력을 조직하여 국왕의 지휘 하에 들어간다. 다만, 독립기병대는 평상시에는 조직되어 있지 않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타우의 산악민이니 산에서의 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븐도 마찬가지라 보통은 적당히 마음 내키는 대로 산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래도 소꿉친구가 신경이 쓰이는 듯 자주 왕궁을 방문하곤 했다. 나타난 이븐은 평소와 같은 검은색 일색의 차림새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 국왕 폐하! 건강하셨습니까.” 국왕도 웃으며 오랜 친구를 맞이했다. “요즘 계속 뜸했잖아. 공주가 쓸쓸해하고 있더라.” “거 기쁜 말씀이시구만. 잽싸게 서리궁에 방해하러 가보겠습니다. 야, 이거 도라 장군도 오랜만입니다.” 바로 그 장군은 팔짱을 끼고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이븐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국왕의 소꿉친구라고 해도 이 태도는 실로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말조심 하는 법을 배우면 어떻겠나. 남들이 들었다간 폐하의 명예에도 관련되느니.” “이건 또. 남들 앞에서 그 폐하를 너라고 불러대는 공주님보다야 백 배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그 분은 바깥에 선보이질 못하는 게야. 자네마저 그 흉내를 내서 어쩌겠다는 건가?” 힐난하는 듯한 소리를 들은 이븐은 푸른 눈을 크게 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나 제 말투가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한다면 태도를 고치도록 하지요. 우선 폐하께 드리는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이븐은 그야말로 우아한 몸짓으로 절을 해 보였다. “위대하신 국왕 폐하께서 심려하신 오랜 격조에도 불구하고 소인 같은 놈의 갑작스러운 알현을 허락해주셔서 송구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그 깊은 성은에 몸둘 바를 몰라 무어라 이 경솔한 입을 놀려야 할지 모르겠사오나, 다행히 폐하께서는 변함 없이 기체만강한 옥체를 보전하고 계시어, 그 존안을 뵐 수 있을 때마다 사무치게 감격하는 그 위엄, 패자로서의 품격, 이것에는 신하로서 깊은 환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이 나라의 국왕 폐하야말로 대륙의 사자(獅子)라 일컬어지기에 어울리는 유일무이의 고귀한 분이시지요. 이와 같은 훌륭한 주군께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입니다.” 도라 장군이 소리를 지르기보다 먼저 국왕이 귀를 막고 거의 몸을 떨면서 외쳤다. “이븐, 알았다. 알았으니까 좀 봐줘라! 그 이상 들어야 한다며 왕관 같은 건 내던지는 쪽이 훨씬 낫다!” “갑작스럽사옵니다만 선별도 드리지 않고 무례하게도 이렇게 불쑥 어전에 나오게 된 건에 대해서 드리올 말씀이라 하시자면... 안 되겠다. 이 이상 계속했다간 혀를 깨물던지 닭살 돋아서 딴 데로 날아가버리겠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몸을 떨면서 불안한 듯 자신의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도라 장군만이 털썩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폐하, 장난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이븐, 자네도야. 대체 자네도 그렇고 공주님도 그렇고, 이 나라에는 제대로 된 신하라는 건 없는 겐가.” “그건 장군님께 맡기죠. 저는 애초부터 비합법적인 입장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귀에 들어오는 소식도 있고.” “호오?” 지금까지 닭살을 문지르던 국왕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번엔 무슨 소릴 들었어?” 약간 말하기 힘든 표정이 된 이븐이었다. “저 시끄러운 귀족 도련님의 친척 몇 명이 폐하에 대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서.” 장군과 국왕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뭐,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어차피 별 짓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녀석들, 빈번하게 마법가에 들락거린다고 해서 말이죠. 나는 물론 저주 같은 건 믿지 않지만, 일단은 알려둬야겠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고 있는 것은 이런 일로 어슬렁어슬렁 찾앋온 것을 비웃짖나 않을지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도라 장군은 웃지 않았다.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놀랄 정도로 빠른 귀다. 나는 바로 며칠 전 막 들었을 뿐인데.” 국왕은 의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도라 장군?” “폐하. 제가 조금 전 말씀드리려 했던 것도 그 일입니다. 근신처분을 받았던 맥다넬 경은 심복 한 사람을 여행 보냈습니다. 제 수하의 자가 뒤를 쫓아보았더니 마법가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게다가 그 부근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자는 상당히 이전부터 빈번히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마법가란 코랄의 거리를 구성하는 한 구역이다. 점쟁이나 무술사(巫術師), 그리고 자칭 ‘마법사’가 다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당당하게 간판을 내걸고 있다. 국내의 이런저런 장소로부터는 물론, 때로는 국외에서도 병자들이 쾌유를 위해 찾아오고, 좀더 일반적인 곳에서는 젊은 처녀들이 사랑의 행방을 점치러 방문하거나 했다. 그러나, 마법가에는 좀더 수상한, 무시무시한 술법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무술(巫術)이나 마법의 힘을 사용하여 미래를 읽고 사람을 죽이는 것마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문 아닌가.” 국왕은 웃어 넘겼다. “맥다넬 경이나 아에라 숙모가 마법가에 사람을 보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의외로 가까운 자의 쾌유 기원을 위해 보냈을지도 몰라. 내 암살이라도 부탁하러 갔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두 사람일 리도 없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중단이 되었다.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은 시종들이 찾아와 국왕을 포위하고 아직 잔뜩 밀려 있는 예정을 소회시키기 위해 본궁으로 납치해 갔던 것이다. 그 뒷모습을 배웅한 이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대로 생겨먹은 귀족님이 연애점을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달리 다른 용무로 마법가를 방문하고 있다는 걸까요, 저 바보는.” 장군도 팔짱을 끼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하신 분이다. 자신의 목숨이 표적이 되었다 해도 의혹만 가지고 상대를 처분하는 짓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야.” “옛날부터 그런 녀석이었지만, 노리는 쪽에서 보자면 이렇게 고마운 상대는 없습니다요.” “동감이다. 왕이 된 자, 의심스러운 것을 벌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다. 확실한 증거를 붙잡아 엄하게 벌하지 않으면 안 되지.” “어쨌든 마법가를 탐색해보지요.” “자네가?” “장군님이 움직이신다고 해도 너무 눈에 띄기만 합니다. 마침 잘 됐군. 공주님을 꼬셔서 가보는 걸로 하죠.” “공주님이라면 오늘은 안 계실 거다. 나보다 먼저 흑왕이 왕궁에 들어왔을 테니.” “또 말입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푸른 눈을 크게 뜬 이븐이었다. “저 말은 공주님을 암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잘도 그 거리를 달려오는군요.” “글쎄 말이네.” 장군도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바로 얼마 전에 만났는데, 열심이지. 또 그래도 조금도 발이 느려지거나 하지 않으니 말일세.” “일국의 임금님이라도 눈빛을 바꿔가며 가지고 싶어하겠지요.” 맞장구를 친 이븐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전에 만난 직후라굽쇼?” “그래. 바로 3, 4일 전의 일이지. 공주님이 로아까지 오셔서 말이야.” “호오?”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재미있다는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러나?” “아뇨, 그냥. 묘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요.” “뭐가 묘한가?” 이븐은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바로 며칠 전에 만났다면, 아무리 저 말이라고 해도 공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만 이 거리를 달려오거나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의미심장한 말투였지만 이븐이 말하려 하는 바를 장군은 금방 눈치챈 것 같았다. 깊이 숙고에 잠겼다. “장군님은 이제부터 어쩌실 겁니까? 바로 로아에 돌아가십니까?” “아니, 잠시동안은 왕궁에 있을 걸세. 그럴 셈으로 샤미안도 데리고 왔으니까.” “헤에?!” 눈을 빛내자마자 장군이 노려보는 바람에 이븐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그러면 그. 나중에 인사하러 들르겠습니다.” “안 와도 된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쌀쌀맞은 어조였다. “장군님... 저는 별로 샤미안 양에게 달라붙는다거나 하지 않습니다요.” “뭘, 저 녀석도 슬슬 나이가 나이다. 신랑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 틀림없지. 허나...” 수염의 장군은 그것만으로 몇 번이나 적을 격퇴했다는, 강렬한 한마디를 이븐에게 건넸다. “실수로라도 산적 조무래기 같은 남자 따위를 고르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달라붙을 생각이라면 목이 날아갈 각오로 하는게 좋겠지.” 이븐은 직립부동의 자세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뱃속 깊이 새겨두지요.” 평범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흑마의 발에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셰라도 승마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뒤를 쫓아갔지만 따라가는 것이 고작인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명마를 어째서 왕궁의 마구간에 두지 않으시는지요?” 당연한 의문으로서 물어보았지만, “나랑 마찬가지로, 딱딱한 곳은 싫어한다고 해서.” 가볍게 말해버린다. “격식에 얽매이는 게 싫다면 어째서 공주로서 왕궁에 계신 건가요?” 이것도 당연한 의문이다. 3년쯤 전에 공주가 되었던 이 소녀가 그 전까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랬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행운을 붙잡은 것이다. 분명히 공주 쪽에서 국왕에게 졸랐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저쪽은 분연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누가 좋아서 공주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알아. 완전히 속아넘어갔다고.” “어느 분에게?” “월 녀석 말이야.” 이 공주에겐 말투부터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나는 싫다고 했다고. 그런데 저 녀석은 아무것도 귀찮은 일은 없을 테니까 형식만으로도 괜찮다느니 어쩌느니, 너무 끈질기게 달라붙으니까 굴복해준 거라고. 그랬더니 뭐가 귀찮은 일이 없냐. 이런 자리를 억지로 떠맡은 나야말로 골치 아프다고.” 셰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것 역시 진심으로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경우, 기쁨을 억누르고 송구스럽게 받잡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게 보통이?. 이 공주가 그다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자임엔 틀림이 없다. “저어, 공주님은 어째서...” “리야.” 즉시 정정당했다. “그럼 리는 어째서 그런 소년 같은 차림새를 하고 계신 건가요? 그리도 아름다우신데.” 칭찬을 해줄 셈이었는데 상대는 노골적으로 맥빠진 얼굴이 되었다. “뭐가 아쉬워서 남자인 너한테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거야...” “네에?” “아무것도 아냐. 나도 묻고 싶은데, 어째서 너는 여자 꼴을 하고 다니는 거야?” 뭐라고 말해도 그게 직업인 것이다. 그러나, 설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한테는 어울리잖아요?” “뭐어. 잠깐 봐서는 남자라고 짐작도 못하겠지.” 셰라는 조심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걸려 있던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당신은 눈치채셨죠. 어째서인가요?” 공주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놀랐나?” “예.” 열여섯이 되어도 자신의 몸은 조금도 선이 굵어지지 않고 목소리도 차분하니 부드러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견만이 아니다. 말씨나 표정, 사소한 몸짓에서 제반 동작에 이르기까지 진짜 여자 이상으로 여자로 통할 자신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셨나요?” “글쎄, 어째서일까.” 지금의 공주는 느긋하게 초원에 드러누워 있었다. 셰라도 그것에 맞추어, 이쪽은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해 냉정하게 관찰해보고 있어도, 특별히 보통 소녀와 다른 점은 없었다. 지금은 움직일 때마다 풀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안심했지만, 방심은 할 수 없다. 자신을 남자라고 꿰뚫어본 것, 어젯밤 기척도 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그리고 방금 전의 사건, 세 번이나 계속되면 우연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무방비로 드러누워 구르고 있는 공주를 보면, 역시 무언가 착각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고 싶어진다. 공주는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공격해도 간단히 죽일 수 있겠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겁을 먹은 건 아니다. 허가를 얻지 않고 독단으로 기량을 발휘하는 것은 최대 금기 사항인 것이다. 저무는 해가 초원을 새빨갛게 물들일 즈음이 되어서야 공주는 겨우 왕궁으로 되돌아갔다. 대수문에서부터는 속도를 떨어뜨리고 천천히 정문을 향했다. 도중에 낯이 익은 병사들이나 어린애들이 몇 명이나 말 위의 공주에게 친밀하게 말을 걸었고, 공주도 웃는 얼굴로 답해주고 있었다. 귀족계급에는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공주도 시민들에겐 상당히 인기가 있는 듯 했다. 일곽까지 돌아가자, 왕가의 말을 한꺼번에 돌보고 있다는 초로의 마구간지기가 달려나왔다. 목적은 공주가 그라이아라고 부르고 있는 흑마인 듯했다. 인간에게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의 상태를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공주가 잠시 시중을 들어주라고 말하자 마구간지기는 눈을 빛내며 끄덕였다. “맡겨주십쇼. 최근에는 겨우 제게도 시중을 들도록 허락해주게 되었습니다.”“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채이나?” “예이. 뭐,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 함부로 접근했다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냅다 차버리지요.” 이 마구간지기는 ‘말에 인생을 바치고 있다’는 듯, 말에 관련된 일이라면 누구도 끼어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공주와는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그라이아의 유일한 기수라는 면에서 존경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셰라도 또한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돌려주고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와서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궁에서 먹을래.” “그럼 다른 용무가 없으시다면, 돌아가서 저녁 업무를 봐도 상관없을까요.” “상관없지만, 그 다음에는 어떡할 거야?” “뭔가 시킬 일이 있으시면 다시 오겠습니다만...” “그게 아니야. 본궁에서 자는 건가?” “예, 아침에 또 오겠습니다.” 공주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침저녁 들락거리는 것도 귀찮을 텐데. 서리궁으로 옮겨오는 쪽이 더 편한 거 아니야?” 셰라는 공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의미를 모르고 있다. 자신이 진심이 되어 암살에 착수한다면, 그것도 밤낮으로 곁에 있게 된다면 간단하게 승부가 나버린다는 것을 이 공주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저 별궁에서 살라고 말씀하신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겠지요. 일단은 낮 동안만 곁에서 모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변명하면서, 내심으로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이후의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의한 불안과 짜증이었다. 일단 지금의 공주는 이쪽의 연극에 맞춰주고 있다. 애초에 그것부터가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이쪽의 손안에서 놀아나야만 하는 상대인데, 그 협력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니 실로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더구나,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는 상대 앞에서 연기를 계속한다는 것이 이 정도로 부하가 걸리는 일인 줄은 예상도 못했다. 맨 몸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공주는 오늘 하루로 자신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이것은 커다란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에는 경험한 적 없는 괴로움이 있지만, 그것도 하나의 시련이자 수업의 일환이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시녀로서 제대로 임무를 해내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했다. 기다려 마지 않던 동료로부터의 접촉이 있었던 것은 그 날 밤, 심야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혹시 싶어서 셰라는 조명 속에 ‘수면향’을 떨구어놓아, 같은 방 여자들을 깊게 재워둔 참이었다. 그리고, 셰라의 예민한 감각은 살짝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고 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를 재빨리 안으로 불러들였다. 삼십대 정도의 마른 남자였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셰라는 이름을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 쪽도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완전히 잠들어버린 여자들을 옆에 두고 낮게 속삭였다. “어제까지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선 불문에 붙인다는 것 같다.” 남자의 말은 셰라에게 있어서는 의외였다. 엄벌에 처해져도 할말이 없을 터였다. “다음 지시를 전한다. 공주가 건 내기를 상대해라. 만일 조건을 달성치 못했을 시엔 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하도록. 자해(自害)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상.” 실패는 불문에 처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꽤나 신용을 잃은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조건을 달성치 못했을 시’ 따위의 말을 일부러 붙일 이유가 없다. 그 반명 크게 안심도 했다. “죽여도 괜찮은 거로군?” “이미 남은 날짜는 19일. 그동안 어떻게 해서든 공주를 죽이라는 명령이다.” “알았다.” 다행이다. 아무래도 손수 실수의 뒤처리를 하는 것이 가능할 듯했다. 이어서 남자는 코랄 시내에 새롭게 만들어놓은 연락 장소를 알려주었다. 비상시에는 이곳을 방문하라는 것이었지만, 셰라가 그 장소를 방문할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단 한 경우. 무사히 임무를 성취한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서, 외엔 없었다. 6장 다음 날 아침, 셰라는 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서리궁으로 향했다. 머리 속으로는 물론 방심은 금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드디어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즐거웠다. 공주를 죽이는 것이 기쁜게 아니라,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남은 날짜는 19일이라고 하지만 그렇게나 시일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한번 실수를 했던 임무이다. 재빨리 깨끗하게 결론지을 셈이었다. 별궁에 가보자 공주는 아직 침대에 틀어박혀 있었다. 셰라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도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맡에는 보석이 붙은 은제 띠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소매 속에 숨겨둔 무기로 단숨에 찔러줄까 생각도 했지만 자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조신한 모습으로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주님. 저어, 밖은 벌써 환해졌는데 아직 주무시고 계신지요?” 말을 걸자 이불에서 머리만 내밀고 머리띠만 끌어당겼지만 무척이나 피곤해보이는 동작이었다. 신음하듯이 말했다. “어제, 그때부터 거나한 술자리가 되어서 말이야. 으, 정말 얼마나 마셨는지...” “숙취인가요?” “몰라. 아무튼 속이 메슥거려.” “저런, 빨리 뭔가 소화가 잘 될 만한 걸 만들어 오겠습니다.” 공주가 술자리 끝에 만취하여 쓰러지다니 역시 이곳은 파격적인 성이다. 다른 나라의 공주가 그런 짓을 했다간 대단한 추문이 아닐 수 없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야채와 달걀로 따뜻한 수프를 만들었다. 거칠어진 위장에는 부드럽게 녹아들 터였다. 동시에 영원히 숙취를 느끼지 않도록 조미료라도 넣듯 가벼운 마음으로 독약을 듬뿍 넣어주었다. 무미무취인 데다 조금도 괴로움 없이 죽을 수 있는 독이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지만 친절한 마음씨다. 서둘러 침실로 요리를 날라갔다. 다행히 이 별궁에는 거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 공주가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본 뒤 곧바로 이 자리를 뜨면 된다. 밤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 때쯤엔 자신은 이미 이 나라엔 없을 것이다. “자, 드세요.” 빙긋 웃으며 머리맡의 둥근 탁자에 놓았다. 그런데. 꾸물꾸물 머리를 든 공주는 쟁반 위의 수프 접시를 한번 보자마자 말했다. “다시 만들어 줘.” “예...?” 반문했을 때에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 뒤였다. “빨리 해 줘. 배고프니까.” 셰라는 잠시동안 아연하여 공주의 머리맡에 서 있었지마나 제정신을 되찾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음식 종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리라. 이번에는 빵을 엷게 잘라 샐러드에 얹었다. 물론 제대로 독도 섞었다. 그런데 이것도 공주는 보자마자, “그러니까,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고 말했다. 셰라는 표정은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하고, 가슴에서는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는 심장을 최대한 신경쓰지 않으려 하면서,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이 요리는...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 나는 단 것 빼고는 뭐든지 다 먹어.”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무엇이, 저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그거야 마음에 안 들지. 먹을 수 없는 걸 들고 오면 곤란하다고.” 그 이상은 물어볼 수 없었다. 스스로도 정신 없었다고 나중에 생각했지만, 다리가 떨려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무미무취의 독이다. 물론 완전하진 않지만 최소한 요리에 섞어두면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부엌에 들어온 것이 다행으로,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이런 공포는 지금까지 한번도 맛본 적이 없었다. 끔찍하게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셰라는 처음의 요리와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다만 이번에는 독을 섞지 않았다. 공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확인해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대로... 공주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접시를 비운 데다가, “더 줘! 다섯 그릇 더!” 하고 기세 좋게 내뱉었다. “두 분 모두 숙취신가요?” 다기(茶器)를 한 손에 들고, 샤미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눈앞에는 이븐과 리가 힘없이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약간 늦은 오후의 다과 시간이었다. 세 명은 테라스의 원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고, 공주의 발치에는 자기 위치라고 주장하는 듯 저 회색 늑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세 명의 접대를 하는 것은 물론 셰라의 역할이다. 묵묵히 차 준비를 하고, 두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러 구운 과자를 늘어놓았다. 그다지 밝은 안색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이븐도 샤미안도 그것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드문 일이네요. 이븐 경은 그렇다 치고, 공주님께서 숙취라니...” “샤미안 양. 전 숙취 같은 게 아닙니다. 쬐끔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릴 뿐이라구요.” “충분히 숙취잖아.” 공주가 원망스럽게 말했다. “내가 숙취가 된 건 이븐 탓이야. 마지막에 끄집어낸 그 빌어먹게 달착지근한 마실 것 탓이라고... 젠장. 토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거 심하네. 최고급 당밀주란 말요?” 공주는 그야말로 끔찍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달아빠진 게 어디가 술이야?” “당밀주라면 저도 좋아해요. 마시기 쉬워서.” “그렇구말구요. 귀부인들에겐 아주 환영받는 술인데 말입쇼.” “나는 귀부인이 아니니까 요만큼도 좋지 않아.” 그런 온화한(?) 대화를 곁귀로 들으면서, 셰라는 아직도 동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거의 기억에 없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부엌의 의자에 앉아 구리 냄비를 닦고 있었다. 독이 들어간 요리를 그대로 놔두었던 것을 떠올리고 황급히 일어섰지만, 요리는 물론 식기도 조리기구도 정리가 끝나 원래의 장소에 돌아가 있었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 뒤처리를 한 모양이었다.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시간은 이미 점심때를 지난 뒤였다.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에 앉아 구리 냄비에 달라붙었다. 손을 움직이면서 열심히 머리를 식히고, 지금의 자신이 놓여 있는 미묘한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명령이 내려온 이상, 저 공주는 어떻게 해서든 죽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별궁에서 낮 동안은 두 사람뿐이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독약이 가장 확실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저 공주에겐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기보다 꿰뚫어보는 게 가능한 듯하다. 자신이 만든 거라면 얌전하게 입에 넣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이 계산착오는 큰 것이었다. 그러나, 입에 넣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먹일 수만 있다면 듣는다는 소리다. 먹이는게 무리라면 칼날에 발라 상처를 입히면 된다. 아주 당연한 이 결론에 달할 즈음에는 냄비라는 냄비는 전부 번쩍번쩍 윤을 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받은 충격이 컸다는 것이 되지만, 언제까지고 멍청한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공주는 숙취에 절은 머리를 붙잡고 젊은 남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라며 찾아온 이 두 사람을 본 순간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고 어떤 관계인지 셰라는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어느 쪽도 보통의 남녀는 아니었던 것이다. 20세 가량의 여자는 드레스가 아니라 기사의 복장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활동적인 차림새였지만 재봉도 옷감도 고급스러웠다. 남장(男裝)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공주처럼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움직이기 쉬우니까 입고 있는 듯했다. 밤색 머리카락에 개암열맷빛 눈망울이 아름다웠다. 품격이 있는, 미소가 흘러 넘치는 듯한 얼굴이었다. 틀림없이 귀족계급의 여성이었다. 반대로 남자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튼튼함을 최고로 생각한 실용성 제일주의 의복이었다. 윗옷이나 바지, 장화까지도 온통 검정 일색이었다. 다갈색으로 탄 피부에 비해 머리와 눈의 색소가 옅다. 특히 짧게 바싹 깎은 옅은 금발이 눈을 끌었다. 발로가 <밀집머리>라고 부르는 이유이지만, 셰라는 그런 것은 몰랐다. 꾸밈없는 성격인 듯 그늘 없는 미소를 보여주지만, 새파란 눈에는 때때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섞여 있었다. 내면도 틀림없는 실전형이다. 여자의 호위병인가 하고도 생각했지만, 주인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아니었다. 공주는 두 사람을 일부러 셰라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남자는 국왕의 옛 친구이자 옛 타우의 산적, 현재는 독립기병 대장이며, 여자 쪽은 명문 도라 백작가의 외동딸로서 여기사라니 이것 또한 희한한 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과자는 당신이 만들었나요?” 차에 어울리는 구운 과자를 입에 댄 여기사 샤미안이 셰라에게 말을 걸었다. “예. 입에 맞으신지 모르겠네요.” “아주 맛있어요. 조금 가지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우리 집의 요리사는 이런 과자를 그다지 잘 만들지 못하거든.” 공주가 즉시 말했다. “그럼 내 것도 줄게.” 셰라는 움찔했다. 이 구운 과자에는 아무런 재주도 부려두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공주가 쓰러지기라도 했다간 큰 소동이 날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순간 덜컥했다. 샤미안은 그런 셰라의 심정은 눈치채지 못했다. 놀리듯이 말했다. “공주님. 여전히 단 건 못 드시는군요.” “못 먹고 자시고 소름이 다 돋는다.” “안된 일이에요. 정말로 맛있는데. 한입이라도 드셔보시면 어때요?” “그렇고 말구요.” 하고 이븐이 동의했다. “기껏 만들어준 이 애도 불쌍하지 않습니까. 맛보기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주가 이븐을 찌릿 노려보았다. “못 먹는 걸 뻔히 알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이런이런, 편식은 좋지 않습죠.” 비난하듯 말하는 이븐에게 공주는 기가 막힌 듯이 대꾸했다. “단 걸 못 먹는다고 편식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어. 사탕과자를 안주로 에일주를 마시는 변태 주제에 남 말 할 자격이 있냐.” 과자를 집으려던 손을 멈추고 무척이나 기묘한 표정이 된 샤미안이었다. “왠지...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이상해지네요.” “그렇지? 어제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으니까 숙취가 생기는 거라구.” “어떨까 싶어서 시험해본 것 뿐이라구요. 뭐라 잔소리 안 들어도 두 번 다시 안 합니다.” “보통은 시도도 안해. 뒤가 안 좋을 게 뻔하잖아.” “그런 소리를 하면 폐하는 어떻게 됩니까? 아무것도 안 먹고 앉은자리에서 맥아주 일곱 병이라고요. 밑 빠진 독이야, 밑 빠진 독.” “그러네. 마시기 내기는 결국 월이 이겼으니까.” 샤미안이 다시금 개암열맷빛 눈망울을 크게 떴다. “술내기를 하신 거에요? 폐하까지 함께?” “예. 이겼다고는 해도, 지금쯤은 폐하도 머리를 감싸쥐고 있을걸요.” “이븐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당밀주 같은 걸 끄집어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어.” “자랑할 소리입니까, 그게.” 묵묵히 일을 하면서, 가능하다면 귀를 막고 싶다고 생각한 셰라였다. 이것이 과연 일국 공주의 살롱인가 생각하면, 다른 예를 알고 있는 만큼 실로 한탄스러웠다. 왕비나 공주의 다과회에 초대받는 것은 상대의 신뢰도를 표시하는 것이고, 왕실 여성에게 신뢰받는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궁정에서의 지위를 약속받는 일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떻게든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주변의 귀족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환심을 사고 마음에 들기 위해 힘을 다한다. 그런데 이곳에선 완전히 동네 수다 모임인 것이다. 이븐의 어조는 정중하긴 해도 억지로 갖다 붙이 듯한 것이고, 샤미안은 그와 비교하면 훨씬 정중했지만 약간 손위인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였다. “공주님. 흑왕은 어쩌고 있나요?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 밑의 늑대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래의 마굿간에 있어. 데리고 오면 골디하고 서로 눈싸움하게 된다고.” “눈싸움을요? 이놈하고?” 늑대를 내려다본 이븐은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야. 설마 너 잡아먹으려고 한 건 아니겠지. 아무리 파키라의 늑대라도 한 마리 갖고는 저런 집채 만한 녀석한테는 쨉도 안된다고.” “어머. 한 마리는커녕 흑왕은 대여섯 마리의 무리도 쫓아버려요. 몇 번이나 본 걸요.” 이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로 ‘괴물 같은 놈’하고 중얼거렸다. 반대로 샤미안은 감탄했다는 듯한 눈초리를 늑대에게 향하고 있었다. “단 한 마리인데도 흑왕에게지지 않는 기백이라니... 대단해요. 보통 늑대라면 도망쳐버릴 텐데.” “무슨 말이 그럽니까?” 다시 이븐이 중얼거린다. 공주도 웃으며 말을 더했다. “말하고 늑대가 상성이 좋을 리는 없지만 내버려두면 계속 노려보고 있다니까.” 샤미안이 쿡쿡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혹시나 공주님의 총애를 다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런가?” “예에. 서로 노려보면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다니, 왠지... 폐하의 어전에 계실 때의 바롤님과 이븐 경이 떠오르네요.” 공주는 크게 폭소를 터뜨렸고 이븐은 기분 나쁜 듯이 대꾸했다. “샤미안 양. 같은 취급 하지 말아주십쇼. 저는 말도 늑대도 아니라구요.” “그래. 똑같이 취급하면 그라이아와 골디가 불쌍하다고. 조용한 눈싸움을 할 뿐이지 컹컹 짖어대진 않으니까 말야.” “누가 짖어댄단 겁니까?!” 여성 두 명(?)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샤미안이 겨우 웃음을 거두며 말한다. “공주님. 그 발로님이 일곽의 저택에서 근신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차를 추가로 따르려고 했던 셰라는 귀가 솔깃해졌다. 이제 성내의 정보에 대해서는 무시해도 되는 것이지만, 그 부분은 몸에 붙은 습성인 셈이었다. 사보아 공작 노라 발로는 국왕의 심복이라 말해도 좋다, 그 근신처분을 이 공주와 그 측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점에 흥미가 있었다. 공주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이븐이 무정하게 내뱉었다. “좋은 약입니다.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이걸로 쬐끔은 얌전해지겠죠.” “이븐. 발로는 아무 실수도 안 했어. 숙부 씨한테 휘말린 것 뿐이야.” “그래요.” 샤미안도 진지한 말투로 항의했다. “그 분은 언제나 폐하의 충실한 신하인 걸요. 심기를 거슬렀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그런 성격이신데 저택에 갇혀 있어야 한다니 안됐다고 생각한 것 뿐이에요. 뭐하면 지금부터라도 문안을 여쭈러 가보는 것도...” “그건 그만두는게 나아.” 공주가 말했다. 이상하게 심각한 어조였다. 이븐도 마찬가지로 끄덕였다. “저도 동감입니다. 저 삐까번쩍한 귀족 도련님... 실례, 기사 단장님이라고 치면, 샤미안 양은 문안 같은 건 안 가는 편이 낫지요.” 반쯤 일어서려 했던 샤미안은 두 사람의 모습에 표정을 굳히고 원래대로 의자에 앉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16세의 공주와 26세의 독립기병 대장은 실로 기묘한 표정으로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이븐은 짧은 금발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그게 말이죠, 샤미안 양. 기사단장은 벌써 며칠이나 집에 틀어박혀 있단 말입니다? 그거야말로 우리에 갇힌 호랑이 상태라구요.” 이번에는 공주가 콧마루를 긁으면서 말했다. “틀림없이 신경이 날카로울 거라고. 거기에 샤미안이, 그러니까, 어슬렁어슬렁 찾아가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큰일이겠죠.” “우선 간단히 내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혹시나 자고 나오게 될지도 몰라.” “평소라면 자기 목이 소중하니까 귀신보다 무서운 도라 장군을 생각해서 자제하겠지만 말이죠...” “고함소리를 뒤집어쓸 때까지는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있겠지, 응.” 샤미안의 뺨에 어렴풋이 홍조가 올랐다. 그러나 이건 어느 정도는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이븐 경!” 두 사람은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화내지 말라니까. 진짜라고. 나보고까지 조금은 치장하고 남자 눈을 즐겁게 해달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했으니까 말이야.” “그 점이라면 저도 항상 생각하고 있는 바에요!” 몸을 내밀며 분연하게 말한 샤미안이었다. 등을 기대며 비스듬히 앉아 탄식한다. “진지하게 물어본 제가 바보였어요. 두 분 모두 절 놀리고...” “아니, 최소한 반절은 진짜라구요. 기사단장이라고 근실을 먹은 꼴사나운 모습 같은 건 샤미안 양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 녀석, 그래봬도 제법 고집부리면서 체면이니 뭐니 신경 쓰니까 말이야. 게다가 뛰쳐나가고 싶은 걸 가만히 참고 있는 것도 확실하고.” 앗, 하고 깨달은 샤미안이었다. 공주는 달래듯이 그런 샤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발로가 걱정된다면 내버려두는 쪽이 나아. 괜히 위로라도 하려고 하면 역효과가 날 뿐이야.” 이러한 부분은 네 살이나 연하인 공주 쪽이 훨씬 어른스럽게 보였지만 이븐은 불만스러운 듯 코방귀를 뀌었다. “뭐야, 공주님은 결국 그 도련님의 편을 들어주는 겁니까?” 공주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런 친구를 보았다. “아예 이븐이 문안하러 가는 게 어때. 좋아할 거야.” “농담 아닙니다. 그거야말로 까딱 잘못하면 칼부림이 날 텐데.” 실로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공주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정말로, 양쪽 다 솔직하지 않다니까.” “뭔 소리입니까?” “아무것도 아냐.” 서리궁의 오후는 그런 식으로 저물어갔다. 샤미안은 내일은 제대로 머리를 올리고 드레스를 입은 뒤 같은 이곽에 사는 귀족 여성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했다. “사실은 그러는 김에 발로님께 문안인사라도 가려고 했는데 그만두도록 할께요. 두 분의 이야기로 봐선 저택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웃으면서 말하고 샤미안은 한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공주와 독립기병 대장은 지금의 그 말이 비꼬는 거였는지 아닌지를 두고 한동안 진지하게 토론을 나누기까지 했다. 셰라가 놀란 것은 샤미안이 사라지자마자 남자의 말투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그것도 공주의 이름을 그냥 부르고 있었다. “야, 리. 생각해보면 이상한 얘기 아니냐.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근신이라니 말야.” “분명히 그렇지. 빨리 뭔가 하지 않으면 발로가 하는 일이니까. 얼마 안 있어 정말로 짜증이 나서 뛰쳐나올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뭣 때문에 샤미안 양은 저런 바람둥이한테 신경을 쓰는 거야?” 이븐은 끝까지 불만인 것 같았다. 공주는 싱긋 웃고는 마치 같은 연배의 청년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러는 이븐은 샤미안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냐?” “있다고 해도 저 아버지가 있는 한은 손도 못 내밀어. 건드려보려면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하라니 말야.” “도라 장군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걸.” “그렇고말고. 그렇지 않으면 저 도련님도 벌써 샤미안 양을 꼬시고 있었을 거다.” “그건 모르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잖아.” “바보 같은 소리. 하나하나 취향을 따질 절도가 저 바람둥이한테 있을까보냐. 표준 이상의 미인이라면 손에 닿는 대로 꼬셔대는 거잖아.” “이븐도 남 말은 못할 텐데 그래.” 검은 옷의 남자는 이 부분에서 의연하게 가슴을 폈다. “나는 제대로 고르고 있다고. 그 증거로, 너만은 내가 아무리 궁하다 해도 절대 사양이다.” 공주는 배를 붙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셰라는 경악하여 이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그것을 눈치챘는지 이븐이 살짝 웃어 보였다. “아가씨. 그쪽도 이 별궁에서 이 공주님 시중을 들게 된 거라면, 이 정도 일로 놀라거나 하면 안 돼. 이건 시작이라고?” 실로 정곡을 찌른 조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계속 놀라고 있었다. 셰라는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하고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제 와선 이 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기를 치우고 부엌으로 물러난 뒤에는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른다. 엿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부엌에서 열심히 저녁 준비를 했던 것이다. 어둑어둑해져서야 겨우 이븐은 일어섰고, “차 잘 마셨어.” 하며 셰라에게 말을 걸고 본궁으로 돌아갔다. 이래서 다시 셰라는 공주와 두 사람만 남았다. 좋은 기회였지만, 오늘 아침 뼈아픈 실수를 저지른 직후이다. 다음 기회는 신중하게 노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기의 기한까지는 18일이 있다. 그 마지막날에는 저 쪽도 경계를 할 테니, 어쨌든 앞으로 2, 3일 정도 틈이 나기를 기다릴 셈이었다. 저녁에는 실력을 더욱 발휘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독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손재주를 부려 요리를 만드는 것은 즐거웠다. 미리 준비해둔 새 통구이와 다진 감자를 섞은 핫케이크는 충분히 5인분 정도의 양은 되었을 텐데도 공주는 입맛을 다시면서 혼자서 깨끗하게 해치웠다. 그 호쾌한 먹는 모습이나 요리 실력에 대한 빈말 아닌 칭찬도 유쾌한 것이었지만, 어째서 이걸로 얌전하게 독을 먹고 죽어주지 않을까 하고 불만스레 생각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7장 그날 밤 자정을 조금 지났을 때, 횃불을 한 손에 든 기사 한 명이 말발굽을 울리며 다급히 대수문 밖으로 달려왔다. 보통 일이 아니다. 초소에 있던 문지기는 무기를 겨누고 엄하게 검문했다. “누구냐?!” “독립기병대 소속이다! 급히 우리 대장과 국왕 폐하를 만나뵙길 청한다!” 이 소식은 즉각 본궁으로 전해졌다. 코랄 성은 이런 긴급 보고에 대비하여 만전의 대응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내란 전까지는, 밤이 되고 나면, 그것도 정규군이 아닌 소위 ‘파발’의 보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떤 급한 용건이라 해도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린 뒤, 상응한 신분의 인물이 상응한 복장으로 순서를 기다려 면회를 청하지 않으면, 성의 기능에 관련된 중요 인물과 만나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월 그리크는 두 번째로 왕좌에 앉은 뒤부터 이 흐리멍덩한 방식을 단번에 바꿔버렸다. 대수문의 문지기에게는 언제 몇 시가 되었던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자가 있다면 전달하도록 명해둠과 동시에, 곽문, 정문의 문지기를 거치지 않고 본궁까지 달려 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추가로 그 보고를 받는 창구에는 자신이 깊이 신뢰하는 자들을 놓아두어 ‘범상치 않은 사태’라고 생각되는 것에 관해서는 직접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을 허락했다. 즉, 이전에는 대수문에서 본궁의 책임자까지 십여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이제는 아무리 많아도 세 단계만 거치면 되도록 줄어든 것이다. 이 차이는 컸다. 국왕은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서류의 결제에 쫓기고 있었다. 이븐은 이미 자리에 누운 뒤였지만 연락을 받자마자 뛰어 일어났다. 대수문에 달려온 츠이르의 브란은 수십 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국왕과 이븐 앞에 안내되었다. 서두르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렇게 빨리 본궁 안 깊이, 그것도 국왕의 거실까지 안내된 것에 브란은 다른 의미로 긴장하고 있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런 시간에 죄송하구만요. 페노아 두목이 바로 대장하고 폐하께 알려드리라고 하시는 바람에.”“질 공이 그렇게 말을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무슨 일인가?” “예이. 대장이 타우를 나서고 바로 일어난 일입니다만, 저희들에게 퇴거 명령이 나왔습니다.” 이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희들이라고 하는 건 츠이르 마을을 말하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설마...” “전 지역임다. 타우 산맥의 자유민 전부에게 떠나라고 명령한 겁니다.” “누가?!” 국왕과 이븐이 합창처럼 말했다. “탄가의 관리입니다.” “탄가라고!!” 이것도 역시 대합창이었다. 브란은 기가 막힌 것 반, 비웃음 반의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와서 새삼 뭔 소린가 했습죠. 거야 타우는 아시다시피 삼국의 국경에 걸터앉아 있으니까요. 탄가 쪽으로 비어져 나와있다고 하면 또 그렇습니다만, 저희들 중에는 그 탄가에서 도망쳐서 산 속에서 살기 시작한 녀석들도 잔뜩 있습니다. 저쪽이라고 타우에 도망쳐 들어간 이상 쫓아가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씀임다.” “브란. 그래서 너희 동료들에게 무언가 피해가 갔는가?” 걱정스러운 듯 말한 국왕에게 브란은 대담하게 웃어 보였다. “폐하. 타우 산 속에서 타우의 자유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관리에게는 정중하게 물러나달라고 부탁했습죠. 의외로 뭐 얌전하게 물러나더구만요.” 얼마나 ‘정중’하고 얼마나 ‘얌전’했는가 하는 것은 이 경우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 놈들, 이런 걸 나무에다가 박아놓고 갔습니다.” 브란이 내밀어 건네준 종이쪽지를 두 사람은 잡아먹듯이 들여다보았다. 이 구역은 탄가의 영토이니 무허가 거주민은 즉시 퇴거하도록, 그렇지 않을 경우 당국에 거주 허가를 받도록 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발신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탄가 남부 대영주의 서명이었다. 그 이상으로 눈을 끈 것은 높은 탑에 뱀이 기어 올라가고 있는 인장이었다. 탄가 국왕 조라더스의 문장이다. 월은 그 문장을 노려보듯이 바라보았고, 이븐은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탄가 녀석들, 정말로 저런 구석탱이를 영토에 집어넣을 생각인 거야?” “아니. 네가 말한 대로 이용가치는 거의 없는 곳이다.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을 테지.” 브란이 끄덕였다. “페노아 두목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녀석들은 저희들에게 무기를 들게 하고 싶은 거라굽쇼.” 이븐도 납득한 듯 끄덕였다. “산 속에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봐서 평지로 끌어내릴 작전인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지금 말씀드렸던 건 츠이르 근처의 탄가 국경 부근의 일인데, 이번에는 파라스트가 똑같은 소리를 해온 겁니다.” 국왕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말문을 잃어버렸다. 이븐도 즉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양국이 손을 잡고 한 일인가. 아니면 따로따로 생각해 낸 건가?” “모르겠습니다. 소식을 가져온 서쪽 친구들도 이쪽 소리를 듣고는 놀랐을 정도라서. 나온 얘기는 거의 차이가 없었슴다. 이쪽은 파라스트의 영토이니까 근시일 내 주민으로 등록하라고. 그리고 말입죠. 그 결과에 따라선 너희들의 납세액을 결정하겠다고 얘기한 모양입니다. 웃기는 것이 우리들에게, 타우의 자유민에게 말입니까? 세금을 내라고 말하더라 이겁니다.” 이븐이 가벼운 긴장감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쪽 녀석들, 그 관리를 어쨌나?” 섣불리 취급했다간 파라스트가 타우에 공격을 가해올 절호의 구실을 주게 된다. “걱정 마십쇼. 프렉카가 운 좋게 거기 있었던 모양이라, 역시 정중하게 대접해서 돌아가도록 부탁한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죠, 부두목.” 하고, 브란은 이븐의 이전 명칭으로 부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이 되질 않아서 가만히 앉아 들어줄 수가 없잖수? 자기네 영토라고 뻗대는 대야 지 맘이지만요. 영토로 삼아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요. 개간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거야말로 바보 중에 상 바보, 완전히 얼간이라구요? 우리들이 겨우 먹고살 정도의 밭을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놈들이 알 리가 없죠. 거기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을 만한 데가 아니라구요.” 자랑스러운 듯한 어조였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 다들 이유가 있어 조국에 있을 수 없게 된 자들이다. 타우 외에는 갈 곳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 토지에 적응해왔다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타우야말로 고향이라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한 것이다. “젊은 놈들 같은 경우엔 완전히 머리에 빡이 돌아서, 상대가 대국이건 뭐건 간에 제정신 차리게 두들겨주겠다고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지만, 두목들은 역시나 신중해서 손을 대는 걸 엄하게 금지하고 있습죠.” 그리고 브란은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특히 페노아 두목이 말씀하신 건데, 이건 척 보기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도, 양국이 노리는 건 아마 이쪽의 폐하가 아닌가 하고...” “그런 거겠지.” 국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양국이 타우에 작은 싸움을 걸고, 전쟁이 난다면 제군들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내가 나온다면 자국의 영토문제에 간섭하다니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며 화살을 이쪽으로 돌린다. 나오지 않으면 나는 제군들의 원한을 사서 보복을 당한다. 뭐어, 그런 흐름이겠지.” 브란은 빙그레 웃었다. “질 두목이나 폐하나 똑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래서, 질 공의 의견은?” “만약 폐하가 양국과의 사이에서 무언가 싸움 거리를 안고 계시다면, 수습을 위해 그 내용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그렇지 않고 양국이 완전 돌연히 이런 생각을 해낸 거라면 국내에 무언가 폐하의 힘을 약화시킬 만한 요인이 숨어 있을 우려가 있으니, 그것을 양국이 냄새 맡았을 위험도 있으니 충분히 주의하시길. 이상입니다.” 국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왕을 보고 외교 내용을 가르쳐달라고 말하다니, 페노아의 질도 상당한 남자이다. 국내 사정에 관한 통찰도 실로 예리했다. 그러니까 광대한 타우 산맥 전역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것이리라. “요 3년 간, 양국과의 관계는 지극히 양호하다. 왕좌를 탈환했을 때에 제군들의 힘을 빌린 것에 대해서는 다소의 질문을 받았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고 양국은 점잖게 물러났었다. 그것 뿐이야.” “네에? 그렇다면 대체 갑자기 뭔 일일까요.” ‘국왕의 힘을 약화시킬 요인’이라고 돌려 말한 것은 브란에게는 그다지 감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븐에게는 질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백했다. 또한 그 내용에 대해서도 기분 나쁠 정도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소꿉친구인 국왕을 본다. 국왕도 역시 이븐의 시선에 보이지 않게 끄덕였다. “브란. 먼 곳에서 오느라 수고했네. 잠시동안 쉬는 게 좋겠다. 그리고, 질 공에게 이렇게 전해주게.” 국왕은 빙긋 웃고 말했다. “타우는 델피니아의 영토이기도 하다. 그 토지의 주민이 왕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 나는 왕의 의무에 따라 언제라도 손을 내밀겠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타우의 자치를 존중한다, 고 말이야.” “예이, 분명하게 전달하겠습니다요.”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렸지만, 브란은 얌전히 끄덕이며 물러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지 국왕은 나지막히 웃으며 말했다. “너희 두목은 상당히 재치 있게 돌려 말하는 법을 아는군. 숙모의 일도 맥다넬 경의 일도 질 공에겐 알려져 있을 텐데, 국왕의 힘을 약화시킬 요인이라... 흠, 재미있어졌군.” “재미있어 할 상황이냐? 다행히 원흉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잽싸게 저 도련님 친척을 잡아 족치는 게 어때.” “뭐,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지금 안 서두르면 언제 서두르냐. 빨리 안하면 네가 저주를 받아서 만사 꽝이라고.” “이븐. 나는 그게 신경이 쓰여.” “뭐가?!” “너라면 어쩌겠냐? 누군가 어떻게 해서든 없애고 싶은 방해되는 놈이 있다고 치자. 저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나라면 못해.” 국왕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소극적인 수단으로는 아무래도 안심할 수 없을 거다.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걸 믿고 상대가 죽기만 매일 목을 늘이고 기도하는 식의 흉내는 성질에도 안 맞지만,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굳건한 칼날로 확실하게 처리해둬야 할 거다. 최소한 심장을 뚫어버릴 필요는 있을 거고, 목을 쳐서 떨어뜨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이븐은 한숨을 쉬었다. “너보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단순한 멍청이라고 믿고 있는 녀석들에게 지금 그 대사를 들려주고 싶구만.” 투덜거리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단순한 멍청이라니 너무한 걸.” 국왕도 웃으면서 투덜댔지만,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더욱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걸 모르겠다. 국내의 불온분자가 남김없이 결집이라도 하지 않는 한, 아니, 설사 그렇다 해도 무력으로 나를 쓰러뜨리기란 거의 불가능해.” “그렇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겠어.” “그 녀석들은 양국의 개입을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말을 해놓고 잠시 입을 다문 국왕이었다. 탄가 국왕 조라더스, 파라스트 국왕 오론. 양쪽 모두 강력한 왕이자 델피니아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군주들이다. 그러나, 조라더스나 오론이나 확률이 낮은 도박에 참여할 정도로 바보들이 아니다. 양국이 지금까지 전쟁을 걸어오지 않는 것은 오로지 월 그리크를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자이건 모친의 신분이 낮았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옆 나라의 왕이 문제시하는 것은 그 인망과 지도력, 무엇보다 왕으로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이 점에서 월 그리크는 도라 장군이 말했듯이 흠잡을 데가 없고 가신들의 대부분은 국왕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바치고 있다. 국력이 충실한 상대에게 정면으로 전쟁을 거는 짓은 어리석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더욱 불온분자는 ‘국왕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양대국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 터였다. “나는 말이다, 이븐.” “응?” “국내의 어딘가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러 나가야만 하는 경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전장에서라면, 그것도 혼전의 현장에서라면 내 머리 하나를 날려버리는 걸로 일이 끝나니까.” “그런 혼란상태를 만드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내란이 근절된 지 벌써 3년이란 말이다?” “음. 그러니까 말이다.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원치 않아도 눈에 띄게 될 테지.” 몇천이라는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도 모아야만 한다. 공격을 받을 것을 고려하여 성의 증축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을 몰래 행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역시 장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아냐?” “무슨 구실로? 지금 맥다넬 경은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어. 게다가 현재는 칩거 중인 몸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외부와 접촉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주모자는 달리 있다는 거냐?” 아무리 이븐이라도 놀랐다. 불온분자가 많다는 것에 놀란 게 아니다. 거기까지 깊이 생각하는 친구에게 놀란 것이다. 국왕이 말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내에는 틀림없이 나에 대한 음모가 존재한다는 거다. 양대국의 움직임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곤란하군.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의심스럽게 보여.” “너, 아무리 그래도 임금님 아니냐. 의심스럽다는 이유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야? 의심스러운 녀석들이 있다면 손이 가는 대로 하나하나 조사하면 되잖아.” “그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내 평판은 그야말로 단숨에 땅에 떨어진다고. 양대국은 물론 전 숙모도 손뼉을 치며 기뻐할 거다. 뻔히 알면서 모반의 구실을 부여하는 꼴이지.” 이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 섞인 부분은 아무데도 없는 깊은 탄식이었다. “너, 진짜로 성가신 직업을 가지게 된 거구만.” “그 점은 나도 동감이야. 맘 편한 스샤 시절이 그립다.” 드물게 비꼬듯이 웃은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야기는 리의 귀에도 일단 흘려 넣어야만 돼. 오겠나?” “가지. 세 명만 모이면 뭐라도 될 테니.” 밤중도 한밤중이었지만 두 사람은 시종 한 명 거느리지 않고 손수 조명을 든 채 서리궁으로 향했다. 이러한 때, 공주가 있는 서리궁은 연락을 취하기에 편리하다. 도라 장군의 저택에 가려면 정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일곽에 있는 발로의 저택에는 공작가로서 당연한 위병들이 서있다. 국왕이 야밤에 상담 따위로 들렀다간 대소동이 일어난다. 날이 밝을 무렵에는 왕궁 전체에 퍼지고 만다. 공주는 일어난 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렇다기보다 그들의 발소리를 듣고 눈을 뜬 모양이었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다니, 점점 더 귀찮은 일이 늘어나는가보군.” “그야말로 진짜 네 말대로라서 말이다. 밤중에 미안하다.” 거실에 앉아, 국왕은 서론을 완전히 떼어놓고 바로 용건에 들어갔다. 보통이라면 나라의 동향에 국왕의 딸의 의지가 관여하는 일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 공주라는 것은 아버지인 국왕의 비호를 받고, 세간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있어야 하지만 현재 델피니아에서는 그 상식은 통용되지 않았다. 양대국의 타우에 대한 개입에는 역시 공주도 놀랐다. 탄가와 파라스트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쪽 영토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공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미연에 방지된 것은 국왕으로서의 월 그리크의 힘이 충실하여 침략을 허용할 만한 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눈에 보이는 짓을 했다면 국내의 불안요소는 상당히 커다란 것이 아니면 안 돼. 그야말로 나라가 뒤흔들릴 만한. 예를 들어 다시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맥다넬 경 혼자로서는 불가능하다. 어딘가에 협력자가 있지 않으면 안 돼. 양대국은 별도로 치고 말이다. 하지만 현재로 봐서는 분명 모반을 일으킬 것 같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보인다.” 이븐이 끼어들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너? 지금까지 저 도련님의 숙부 씨는 신용할 수 있는 신하들 중 하나로 치고 있었잖아.” “그런 소리를 하면 찔리지만,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왕권 타도를 결의하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나에게 호의를 갖지 않은 자라면 몇 명이나 짚이는 데가 있지. 아에라 숙모 같은 경우엔 그 필두에 서지만, 그 중에서 모반을 계획할 정도의 힘과 근성과 두뇌를 가진 자라면 해당자는 한 사람도 없어.” “그렇군. 분명 그 차이는 크다.” 감탄하는 이븐의 옆에서 공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왕의 힘을 약화시킬만한 요인? 왕의 힘을 약하게 만들어? 대체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왕이 흥미를 느낀 모습으로 물어보았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는 거냐?” 그들은 촛불 한 자루만을 켜둔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 불충분한 조명 속에서도 공주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 다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있어, 라고 해야할지... 최소한 숙모님이 뭔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는 알고 있어.” “뭐라고?!” 두 사람이 숨을 삼키며 몸을 내민 것도 당연하다. 반대로 공주는 몸을 뺐다. “다만 그러니까... 그게 어째서, 그걸 한다고 해서 왜 국왕의 힘이 약해지게 되는 건지, 그걸 전혀 모르겠지만.” “뜸들이지 마! 알고 있으면 빨리 가르쳐줘!” “그렇게 말해도... 곤란하네. 말하기 힘들어.”“리!!” 평소에 대범한 만큼 가끔 국왕이 이런 형상을 지으면 그 박력은 대단하다. 하물며 상황이 상황이다. 범상치 않은 공주라도 이것에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포기한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국왕도 이븐도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잠시동안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못했다. 사실은 경직되어 버린 것이다. 공주는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고 있었다. 굳어버린 두 사람 중에 먼저 반응한 것은 이븐 쪽이었다. “이... 임마, 너 말이야. 그런 소리를 그렇게 가뿐하게 하지마!” 새빨갛게 되어 소리를 질렀지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어.” 라고 공주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곤혹스러운 태도로 손을 벌렸다. “모르겠는 건, 그걸로 대체 뭐가 되냐는 거야. 나를 죽이면 월의 왕권이 약해져? 국가가 흔들려?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잠깐 기다려...” 국왕도 겨우 숨을 되찾고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숨기지 말고 처음부터 전부 얘기해 봐라. 숙모가, 라고 했지만 혼자서 생각해낸 일도 아닐 테고, 결론지어버릴 수도 없는 거니까... 일단 반대세력이라고 부르자. 그 녀석들이 너를 죽일 셈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그걸 네가 알고 있지?” 공주는 약간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지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처음 목적은 달랐을지도 몰라. 성 안을 뒤지며 돌아다니고 있었거든. 정체를 파악당했을 때에도 입막음을 할 생각이었을 거라고 봐. 그게, 오늘 아침부터야. 확실하게 살기를 내기 시작했어.” “오늘 아침부터라고?” “응. 두 번이나 독이 든 요리를 먹을 뻔했거든.” “리! 부탁이니까 좀 알아먹을 수 있게 얘기해봐!” 비명을 지른 이븐을 국왕이 제지했다. 겁날 정도로 무시무시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누가 너에게 독이 든 요리를 먹이려고 했나?” 이 질문을 보류하고 공주는 이븐을 쳐다보았다. “낮에 샤미안하고 같이 놀러왔을 때, 여기에 시녀가 있었지?” “아아. 은발에 예쁜 애지? 그런데?” “남자야.” 이븐은 입을 쩍 벌린 채 다시금 할말을 잃었고, 국왕은 더 무서운 얼굴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본궁에 있던 그 녀석인가?” “지금도 본궁에 있어. 약간 조사를 해보니까 본궁에서 일하는 관리의 ‘조카’라고 해서 봉공하러 나와 있는 거더군. 물론 진짜 백부 조카 사이일 리가 없지만.” “그렇다면 그 관리는...” “어제부터 휴가를 내서 성에서 나갔어. 행방불명이야.” 국왕은 힘껏 무릎을 치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공주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지금까지 얘기하지 않았던 거냐?!” “확증이 없었단 말이야. 남자인 것도, 밤중에 성을 돌아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수상하다고는 할 수 없잖아?” “바보야!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수상하다!!” 여기가 본궁이었다면 즉시 신하들이 달려올 정도로 커다란 일갈이었다. 아무리 공주라지만 이번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국왕은 잠시동안 이를 갈고 있었지만 이윽고 커다랗게 호흡을 하고 숨을 골랐다. 지금은 흥분해서 소리지르며 화내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숙모의 수하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 “숙모 씨가 아니야.” 공주는 단언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외모지만 그 녀석은 달인이야. 그것도 상당한 실력이고.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성공했을 걸. 저런 녀석을, 이런 말하기도 뭣하지만, 그다지 똑똑하지도 못한 숙모 씨가 잘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다만, 대본에 있는 것은 숙모 씨던지 맥다넬 경이던지 둘 중 하나겠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공주는 상당히 망설였지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발로가 충고해줬어. 아에라 공주의 저택에 다녀온 바로 다음에.” 국왕의 입에서 통렬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냐, 리. 그런 건 말이다...” “미안.” “한마디로 끝내지 마! 알겠냐. 나에게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종제님의 심정은 알겠다. 그렇다면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다. 하물며 국가의 부침(浮沈)에 관계될 것 같은 큰일이라면.” 공주가 진지한 얼굴로 몸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월. 그걸 모르겠다고. 숙모는 내가 공주 같은 게 되는 게 달갑지 않으니까, 그래서 죽이려고 결심했다고, 난 그렇게만 철석같이 생각했어. 원한이건 부아가 났건 뭐건 좋으니까, 어쨌든 숙모 씨의 개인적인 감정이 원인이라고. 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까 돌려서 충고하는 것만으로 끝냈을 거라고.” 국왕도 그것에는 동감이었다. “아에라 숙모가 무슨 짓을 꾸며도 너라면 간단하게 죽지는 않을 거다. 종젠짐은 그렇게 판단했겠지.” “그렇지. 나도 그럴 셈으로 저 시녀를 상대하고 있었어. 노리는 게 너라면 그거야 큰 문제지. 당장 붙잡았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왕권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냥 바깥 사람이니까 일부러 말할 필요도 없잖아? 나하고 저 시녀 사이의 문제야.” 자객과 교환한 내기의 건을 이야기하자 이번에는 실로 의심스러운 표정이 된 국왕이었다. “네가 그 시녀를 붙잡지 않았던 것은 좋은 놀이 상대가 될 것 같아서냐?” “뭐어, 그런 거지.” 국왕은 더욱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는 커다란 한숨을 토해냈다. “저 시녀도 심심풀이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상처 받을 거다. 불쌍하게도.” “그렇게 말해도 말야. 꽤 위험하다구, 저거. 독이 든 요리를 들고 왔을 때에도 무지하게 귀엽게, 방긋방긋 웃었으니까 말이야.” “눈꼽만큼이라도 닮아봐라.” 여지없이 단언한 국왕이었다. 이븐이 이제야 겨우 숨을 다시 쉬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조각상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게 남자?! 정말이야? 너랑 비교하면 백 배나 여자답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공주는 아주 진지하게 끄덕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하루이틀 한 여장이 아닌가봐. 거 참, 잘도 계속하고 있지. 나라면 돈주고 하래도 거절할 텐데 말이야.” “그거야말로 조금쯤 닮아봐! 젠장, 아까워라. 꼬셔보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취향이야?” 하고, 공주는 멍청한 목소리를 내더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좋은 거 들었네. 샤미안한테 일러버릴까나?” “바보 자식. 남자하고 무시무시한 아버지가 있는 경우만 빼면 미녀를 발견한 즉시 꼬시는 게 남자의 소양이라는 거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 남자의 소양이라니 잘도 말하네. 좋아, 그럼 발로한테 일러야지.” “리! 너 이 자식, 누구 편이야!” 진지하게 말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친구 사이에서 국왕은 아픈 머리를 감싸쥐면서 중간에 끼어들었다. “장난치고 있을 때냐... 내 참. 그것보다 네 시녀는 기한이 오면 약속대로 자기 배후를 말할 것 같으냐?” “어림없지. 게다가 그 녀석, 의뢰주가 누군지도 모르는거 아냐?” “그래서야 아무 것도 안 되잖아.” “그러니까, 그 녀석의 배후 같은 건 나한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였다고. 그 녀석이 나하고 내기를 걸게 만들려고 구실로 썼을 뿐이란 말야. 도대체가 그... 반대세력인가? 요컨대 그놈들은 왕권을 갖고 싶어하는 것 뿐이잖아?” “아마 틀림없겠지.” “그러니까 너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돼. 이건 알겠어. 앞뒤도 맞아. 그런데, 어째서 나인거야?” 이유를 모르겠다며 양손을 벌려 보였다. “나는 네 계책으로 공주라고 불리고 있을 뿐이라고. 암살한다고 해서 정권 교체는커녕 왕권에 영향 같은 게 갈 리 없잖아.” “흐음...” 국왕도 생각에 잠겼다. “네가 없어진다는 건 타격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한탄하고 뒤쫓아 자살을 할 리도 왕좌를 내팽개칠 리도, 충격받은 나머지 행정에 무관심해질 리도 없잖아?” 표정도 말투도 진지 그 자체였다. 이븐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고, 국왕은 그저 쓴웃음을 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두 사람 앞에서 공주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건 뭐 그렇다 치고, 그 이유 정도는 알고 싶어.” “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건 위험할지도 몰라. 혹시나 네 시녀의 고용주는 숙모도 맥다넬 경도 아닌 제 삼자일 수도 있으니.” 그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고 공주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란 시대에도 그 뒤에도 국왕의 오른팔로서의 공주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공주 개인을 원망하고 있는 자가 없으리라고는 잘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시기가 너무 잘 맞아떨어지니까.” 세 명 각각 팔짱을 끼고 낮게 신음했다. 그 이유는 세 명 모두 달랐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븐은 낮에 본 시녀의 가녀리고 우아한 모습을 떠올리고 무언가 착각이 아닌가 신음했고, 국왕은 숙모가 정말로 공주의 암살을 결의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숙모를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것인가 하고 신음했으며, 공주는 그냥 장난칠 생각이었는데 그것이 이 왕궁이나 국왕에게 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며 신음하고 있었다. “역시, 저 시녀를 붙잡아서 족치는 게 제일 빠른 거 아냐?” 이븐의 제안은 공주가 그 자리에서 기각시켰다.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것마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너를 죽이면 그 성과를 어딘가에 보고해야 되잖아? 그 연락처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장소를 알고 우리들이 쳐들어갔을 때는 벌써 빈 껍질일 걸. 약속은 약속이야. 기한이 올 때까진 내버려두겠어.” “남의 일처럼 말하지만 말이야, 리. 노리는 대상은 너라고?” 공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20년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희한하게도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죽지 않아. 죽을 수 없는 이유도 있고.” “그렇게는 말해도 말이지...” 뭐라뭐라 말해도 이븐은 공주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 소꿉친구에게 국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븐. 그 걱정만큼은 해봤자 소용없다. 죽이려고 한다면 간단하게 죽어줄 공주가 아니야.” 공주도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는 소리지. 다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안 좋았다고 생각해. 최소한 그 반대세력을 뽑아낼 수 있기만 해도 좋을 텐데 말이야. 설마하니 숙모 씨나 맥다넬 경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분명히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국왕은 잠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이븐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오후에는 마법가에 가겠다고 말했었지.” “그래. 무언가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리, 너도 따라와.” “내가? 왜?” “보통 사람이라면 놓칠 만한 것이라도 너라면 눈치챌지도 모르잖냐.” 이븐도 이 공주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국왕도 끄덕였다. “그때야말로 반대세력을 색출할 수 있도록 빌어보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 “설마.” 웃어넘긴 공주였다. “마법가란 병자나 늙은이나 여자들이 좋아서 들락거리는 그런데잖아?” 미신을 신경 쓰는 노약자들이 모이는 회합 같은 게 아니냐는 의미였다. 그런 장소에서 국가기밀과도 마찬가지인 내용을 밝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바보취급 할 것도 아니야. 어쨌든 몇 천이라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완전히 사기꾼들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닐거야. 게다가 소문으로 들은 건데...” “응?” “마법가는 낮과 밤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진다는 것 같다. 낮에는 젊은 처녀나 병자들도 방문할 수 있는, 특별히 해도 위험도 없는 거리이지만...” “밤이 되면 어떻게 되는데?” 국왕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함부로 발을 내디디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 같다.” 살벌한 이야기였다. “대륙 내에서도 설마하고 생각되는 거물이 몇 명이나 마법가에 조언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 다만, 그만큼의 힘을 가진 진짜 술자(術者)는 웬만해선 사람들 눈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 같지만. 간단하게 만날 수 있는 건 당당하게 간판을 내걸고 있는 독도 약도 되지 않는 녀석들 뿐이다.” “그러니까 경영 허가를 받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 정말로 힘이 있는 자는 언제나 자신이 두드러지지 않게 신경쓰는 법이다.” 그래, 진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야망이나 욕심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그런 이유로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공주는 그 날 오후 이븐과 함께 처음으로 마법가에 발을 들이밀었다. 코랄의 한가운데 있는 마법가이지만 길을 하나 막아둔 것만으로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전혀 다른 나라의 거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두 사람 모두 받았다. 우선 똑바른 길이 없다. 구획이 정리되어 있는 코랄 시에 있으면서도, 넓은 길도 좁을 길도 건물을 감싸듯이 구부러져 있었다. 건물도 증축이나 개축을 거듭한 듯 조잡한 모습으로, 어디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을 듯한 모양이었다. 공중에서 건물들끼리 연결되어버려, 도로는 터널처럼 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처마 끝에는 간판이 줄줄이 늘어서고 시야에 닿는 데까지 사람이 넘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늘어선 긴 행렬은 봐주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거 대단하구만...” 이븐이 저도 모르게 말을 흘렸을 정도로 사람들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사기야.” 공주는 기가 찬다는 어조로 지적해서 말했다. “이런 데에서 탐문조사를 해봤자 뭐가 나올 데가 아니다.” “뭐, 그렇게 말하지 마. 악당 귀족의 심부름꾼이 이런 변두리에 빈번하게 드나든다는 건 틀림없다고. 어쨌거나 유명한 곳에 부딪혀보자.” 잠깐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면 자동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점쟁이가 있는가 하면 적당한 소개가 없으면 마당에도 들어갈 수 없는 기도사도 있는 듯했다. “여기로 하자.” 이븐은 그런 조건을 내세우고 있는 집들 중 하나를 골라 ‘왕궁에서 온 사자다’라고 말하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들어갔다. 코랄에서 영업하는 이상, 이 말에 거스르는 자가 있을 리가 없다. 제자인 듯한 자들이 나타나서 정중하기 그지없이 대우하며 안내해주었다. 공주는 혼자서 마법가를 돌아보기로 했다. 도로에도 건물에도 직선이라는 게 보이질 않았다. 공주의 방향감각은 웬만한 길로는 혼동되지 않지만 이 이상한 구조에는 눈이 빙빙 돌 것 같았다. 자칫하면 길을 헤매다가 다시 나갈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착각마저 느꼈다. 지금 공주가 걷고 있는 곳은 넓은 길이었다. 양쪽 옆은 건물벽이다. 그 건물의 사이를 수놓듯 좁은 골목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 거리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런 골목 입구 중 하나를 지나치려던 때, 무언가가 뒤통수에서 걸렸다.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지금의 골목은 어딘가가 이상했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이 혼잡하게 모여 있는 마법가에서 이 골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그 골목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나오지도 않았다. 흥미를 느껴, 사람의 흐름에 거슬러 가듯 되돌아섰다. 건물의 일부를 도려내어 안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앞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흥미가 있었기에 걸어가면서 길목 중간 부근까지 다가가 골목 정면으로 돌아가보았다. 입구는 넓다. 폭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건물을 지나쳐 간 앞쪽에는 다른 건물이나 가게가 늘어서 있는 듯했지만, 안쪽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주저 없이 골목으로 향한 공주였지만 입구 앞쪽까지 와서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열려 있던 공간이 갑자기 신기루처럼 부옇게 흐려졌던 것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곳에 분명히 열려 있던 골목 입구가 갑자기 질감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발을 멈추고 자세를 취했다. 통행인들은 갑자기 서버린 공주에게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내고 망설이면서 피해간다. 녹색 눈망울이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눈길을 향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은 공주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연와벽을 뚫어놓은 형태로 열려있는 골목 입구는 보고 있는 사이에 적동색이 되기 시작하고, 주변의 벽과 똑같은 질감을 가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짧은 휘파람이 공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리. 뭐하고 있어?” 이븐이 부르고 있었다. 아까의 점집에서 벌써 나온 듯했다. 공주는 친구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한 점을 응시한 채 말했다. “이븐. 저게 뭘로 보여?” “뭐라니... 그냥 벽이잖아? 벽돌로 된.” 공주는 신중하게 걸어서 다가가, 아까까지 골목이었던 부근을 두드려보았다. 벽돌의 딱딱한 감촉이 났다. 올려다보자 공동주택의 일부였다. “어이, 리?” “아무것도 아니야. 그쪽은 어때.” “아니, 뭐 전혀. 귀족 여자들이 드나들 것 같은 장소를 달리 몇 집 가르쳐 달랬는데 수확이라면 그게 수확일까.” 공주는 그 공동주택을 조사해보았다. 다른 다가구 주택과 똑같은 구조였다. 커다랗고 긴 건물을 몇 개인가로 구획지어 열 몇 명이 한꺼번에 입주해 있다. 공주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직업도 여러 가지였다. 점쟁이가 있는가 하면 예언자나 무술사는 물론, 그 이외의 직업을 가진 자도 있었다. 그 누구나가 입을 모아, 이 건물에는 골목 같은 건 없고 어디로도 나 있는 샛길은 없다고 똑똑히 말했던 것이다. 공주는 그 이상 주민들에게 캐묻지 않았다. 건물의 안쪽도 돌아가보았다. 그 때 분명히 안쪽에 다른 길이 보였었지만 어디에도 그런 길은 없었다. 다른 건물과 맞닿아 있었다. 공주는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분명, 그렇게 바보취급 할 건 아니었군.”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이븐에게 공주는 웃어 보였다. “물러나자.” “벌써?! 아직 아무것도 캐내지 못했잖아.” “됐으니까. 여기서 일단 한번 물러나자구.” 공주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모습의 친구를 달래서 어딘가 즐거운 듯 왕궁으로 돌아갔다. 8장 그린다 공주의 출신은 비밀에 싸여 있었다. 어느 날 돌연 유랑 중인 국왕의 앞에 나타나 불과 13세로 어른 남자 이상의 활약을 보이며 왕좌 탈환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델피니아 사람이라면 다섯 살짜리 아이도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태생은 국왕도 알지 못했다. 몇 번인가 물어본 적은 있지만 언제나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해봤자 알 수 없다는 것인 듯했다. 그 공주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자신은 이전에는 남자의 몸이었다는 사실, 이 세계에는 무언가 잘못되어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쪽이나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다. 공주도 믿어주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공주는 견줄 바 없는 검술이나 전투능력에도 불구하고 마법이나 신비한 힘들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내 고향에는 진짜 마법사들이 몇 명이나 있어.” 하고, 이전에 국왕도 들은 적이 있었다. 다만 자칭 대마법사나 자칭 주술사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원인불명의 시체를 자신의 저주 탓으로 돌리거나, 자연적으로 나은 병을 자신의 기도 덕분으로 돌리거나, 우연히 내린 비를 자신의 힘으로 된 일이라고 하는 정도다.” 라고도 말했다. 마법은 믿지만 진위의 감정은 상당히 엄격하게 하는 듯했다. 공주는 그 날 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다시 마법가로 향했다. 골목이 벽으로 변했던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름뿐인 종이호랑이 같은 장소라고 생각했던 마법가에 진정한 신비가 있다. 공주에게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과연 그곳은 낮과 밤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진다고 국왕이 말했던 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골목 끝에까지 사람에 가득 차 있던 거리에, 지금은 그림자는커녕 고양이 새끼 한 마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건물이나 굳게 문을 잠그고 창을 닫고 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이미 한밤중을 지나려고 하는 시간이었다. 마법가에서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라도 이런 시간에는 외출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왕궁에 돌아갔던 공주는 가능한 한 자세하게 마법가의 정보를 모았다. 다시 말해 밤중에 이 장소에 발을 들이면 어찌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다. 미신을 신봉하는 여자들은 물론 건장한 남자들까지고 결코 그런 짓을 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고 몸을 떨었다. 밤중에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채 돌아오지 않았던 자가 몇 명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몇 명인가는 때로 마법가에서 한참 먼 곳에서 나타났다고 하지만, 어떤 자는 머리가 없는 시체로, 어떤 자는 마치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 같은 무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그런 기분 나쁜 기척은 아무 데도 없었다. 조금 안개가 끼어 있을 뿐, 기분이 좋은 늦봄의 밤이었다. 공주는 일부러 느긋한 걸음걸이로 그 골목을 향해 보았다. 소문이 정말이라면 무언가가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기대하면서 한 일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 없이 도착하고 말았다. 그것도 낮에 벽으로 변했던 일 따위 마치 모르는 척하는 양, 당당하게 골목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덤으로 내부에선 언뜻언뜻 불빛마저 비쳐 보였다. 너무나 훤히 열려 있는 모습에 공주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일까. 깨끗한 포석이 깔린 길이었다. 입구 부분이야말로 벽을 뚫어낸 터널처럼 되어 있었지만 곧바로 하늘이 열렸다. 별이 보였다. 허상의 별이 아니다. 진짜 밤하늘이었다. 양옆에는 깔끔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 집도 제대로 문을 닫고 조용히 잠들어 있다. 집의 불빛이라고 생각한 것은 군데군데 걸려 있는 가로등이었다. 드문드문 켜진 불빛이 느긋하게 굽이치며 어디까지고 늘어서 있다. 공주는 입구에 멈춰 서 잠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길거리로 보였지만, 이곳은 ‘존재할 리 없는’ 거리였던 것이다. 낮에 보았을 때는 입구가 되어 있던 건물의 내부에는 다른 건물이 마주보는 형태로 세워져, 그 주변을 빙글 돌아 골목이 감싸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건물을 뚫고 지나가는 골목 같은 것은 어디에도 있을 리가 없다. 멈춰 선 것은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있을 리가 없는 골목에 서 있다는 공포나 감격 때문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소문에서 연상한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탓이었다. 공주는 우연히 이 골목이 벽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똑바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지만,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이 골목에 들어왔다고 해도 이곳은 이상하다던가 뭔가 보통하고 다르다던가 그런 식으로 느끼는 자는 없을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로 아주 평범한,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골목이었다. “저, 아가씨.”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와 공주는 즉시 대비자세를 취했다. 보니 공주의 왼편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검은 두건을 푹 뒤집어쓰고, 같은 검은 천을 걸어둔 작은 책상을 놓고 그 안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것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수상이나 관상을 보는 점쟁이의 모습이었다. 특별히 수상해 보이는 부분은 없었다. 단 한 가지, 공주가 사람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정도로 수상한 상대는 없을 것이다. “아가씨라 부르는 건 관둬.” 허리의 검에 손을 대면서 공주는 대답했다. “그럼 손님. 마법가에는 무슨 용무로?”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의식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에 전혀 활기가 없었다. “너는 길 안내인가?” “예. 뭐어, 비슷한 것이지요. 무엇을 바라고 계십니까?” “뭔가 찾고 있다.” “무엇을 잃어버리셨나요?” “잃어버린 게 아니야. 이 거리에서 가장 힘이 있는, 정보통이라고 해도 좋은데... 줄자를 찾고 있다.” “힘... 이라고 말씀하셔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조용히 이 세계에서 사라지게 하는 힘이라던가.” “그거라면 스스로도 할 수 있어.” “그럼 지금 이상의 영달을 부여해줄 힘인가요?” “누가 그런 걸 바랄까.” “이런이런... 그렇다면 사랑스러운 분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한 힘입니까?” 공주는 그 자리의 점쟁이에게 스윽 다가갔다. “내가 누구인지, 뭘 위해 여기에 왔는지, 그런 것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잘도 이런 길 안내를 하고 있군.” “호오... 이건 엄격하시군요. 아니, 오랜만의 손님이시라, 그것도 이렇게나 젊고,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손님을 맞이한 것은 제가 알고 있는 한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드문 일이라고 생각한 것 뿐...” “허풍은 그 정도로 됐어. 어디로 가면 찾고 있는 자를 만날 수 있을지 가르쳐줘.” “글쎄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무엇을 바라고 계신지를 우선 여쭙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이고에 오신 손님들은 참으로 무척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도 상당히 다급한, 결코 남들에겐 흘릴 수 없는 사정을 안고 어쩔 도리가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써 이 거리에 의탁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우선 여쭤보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린다 공주에겐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단점도 있다. 그건 당연하지만, 그 중 하나로 그다지 성질이 느긋한 편이 못된다는 것이 있었다. “이 거리에서 가장 최고의 술자는 어디에 있나? 잽싸게 말하지 않으면 그 장광설도 두 번 다시 늘어놓지 못하게 될 테니까.” 진심의 기백으로 목소리에 섬뜩함을 담은 채, 검의 손잡이에 걸쳐둔 손에도 힘을 넣었지만 두건을 쓴 점쟁이는 어깨를 흔들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현세의 검으로는 이 몸은 벨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들어올린 두건의 내부는 해골이었다. 뻥하니 뚫린 검은 안구가 공주를 올려다보고, 입술이 없이 이빨만 남은 입이 빙긋 웃었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손님이라면 여기에서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돌아가거나, 이질적인 것과 만난 공포 이상으로 마법가의 존재를 실감하고 부탁할 내용을 단숨에 말했겠지만, 어떤 것에도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공주는 조금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싱긋 웃었다. “모르는 건가. 현세의 검으로는 베지 못하더라도 내 검이라면 벨 수 있다.” “농담도... 죽어 있는 자는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군. 죽어 있는 자는 두 번 죽지 않아. 다만 소멸하는 일이라면 있지.” 해골은 입을 딱 다물고 공주를 보았다. 검은 구멍뿐인 눈이라도 상당히 표정이 있어, 공주는 그 안에서 의혹과 위협을 볼 수 있었다. “죽어 있는 너라도 사라지는 건 싫은가. 싫다면 재빨리 대답해라.” “이상하군요. 그럴 것이, 당신은 살아 있는 인간인데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아니, 가능하다. 이것은 내가 내 세계에서 가지고 온 검. 애초부터 너희들 같은 자들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다. 시험해보겠나?” 지금이라도 검을 뽑아들 것 같은 공주를 보고 해골은 온몸을 떨었다. 왠지 새파래진 것처럼도 보였다. 해골이 새파래진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지만, 상당히 두려웠던 듯했다. “이, 이대로 똑바로 나아가십시오.” “그렇게만 말하면 몰라.” “가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정말입니다. 저쪽에서 맞이하러 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공주는 어깨를 으쓱이고, 뼈만 남은 손을 맞잡고 애원하는 해골에서 멀어져 천천히 거리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보면 알 거라니 꽤 적당적당한 길 안내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걸어가보았다. 나아감에 따라 길이 점점 가늘어졌다. 어른 남자가 7, 8명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넓었던 것이 조금씩 점점 폭이 좁아져 갔다. 하늘에 별이 있는 한, 공주의 눈은 대략적인 것은 포착할 수가 있었지만, 움직으는 것의 그림자는 없었다. 다만, 휭 하니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 같은 거리 안에서 공주는 계속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나 둘이 아니다. 길 폭이 좁아지는 것에 따라 그 시선도 강해졌다. 사람이 겨우 스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에 도달할 즈음에는 마치 거리 그 자체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묘한 감각이 피부에 휘감아 붙는 듯했다. 적의나 해를 끼치려는 의사는 아닌 듯했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예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큰소리로 화를 낼까 했을 때 공주의 눈이 오른쪽의 문에 못박혔다. 작고 낡은 나무 문이었다. 지금까지 몇 개나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지만, 놀랍게도 그 문에는 델피니아의 문장인 사자의 옆얼굴과 교차된 두 자루의 검이 오색찬연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공주라 해도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버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민간에 허락되는 행위가 아니다. 무허가로 사용하면 엄벌에 처해진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이 빙긋 웃었다. 꽤나 세련된 호출 방법을 쓴다고 생각했다. 나무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자물쇠는 걸려 있지 않았다. 가볍게 움직였다. 진정한 술자의 집이라고 한다면 제대로 된 집일 리가 없다. 이 건너편은 어둡고 긴 동굴 같은 길이 유유하게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예상도 하지 못할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약간이지만 긴장을 하며 문을 열었지만 말 그대로 예상을 뒤엎듯 그곳은 그냥 방이었다. 입구는 흙바닥이었지만 오른쪽에는 마루가 깔려 있어 바로 이어진 거실로 되어 있었다. 어디에도 조명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방 안은 아련하게 밝았다. 여기저기에 두루마리나 서간이 그득하게 높이 쌓여 있어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을 더욱더 좁아 보이게 했다. 간신히 보이는 바닥 부분에 작은 화로가 있어 그 위에 걸려 있는 냄비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냄비 앞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루바닥 위에 둥그런 방석을 놓고 그 위에 자그맣게 웅크려있다. 무척이나 작은 사람이었다. 집 안인데도 아까의 해골과 마찬가지로 검은 두건을 푹 뒤집어쓰고, 똑같은 천이 몸을 감싸 숨기고 있었다. 혹시나 이 주인도 아까의 해골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눈을 의심해보았다. 냄비를 휘젓는 국자를 쥔 손은 지방질이 없는 주름투성이였지만, 살아있는 인간의 손이었다. “들어오시우.” 얼굴도 들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도 손과 마찬가지로 늙어 있었지만, 성별을 알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노파의 목소리였다. “실례하겠소.” 공주는 말하고, 약간 망설였다. “신발 신은 채로도 괜찮을까.” “잘 털어주면 상관 없수.” 그 말대로 입구에는 깔개가 깔려 있었다. 진흙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었건만 공주는 정성스럽게 신발의 흙을 털고 방으로 올라갔다. 어디고 가릴 곳 없이 물건이 놓여 있는 방이었다. 화로 주변 일부분의 바닥만이 보이고 있었다. 공주는 물건을 쓰러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노파의 정면으로 돌아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노파였지만 그 위치에서라면 얼굴의 반절은 보였다. 그 입가가 웃고 있었다. “길 안내를 그렇게 놀래키는 게 아니라우. 그 녀석은 댁이 누군지 판단할 수가 없으니.” 아까 일들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양반다리로 앉은 공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고역이라서.” “그 녀석은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거기에 있는 거라우. 뭐, 어찌되었건 잘 오셨수, 손님 양반.” “아가씨라고는 하지 않는 건가?” 자신과 상대의 나이 차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노파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낮게 흘렸다. “댁이 여자로 보일 정도로 늙진 않았수다.” 이것에는 공주도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의 내가 여자로 보인다고 해서 아무도 늙었다곤 안 할 테지만, 그거 고맙군.” “그렇지. 하지만 뭐어, 어쨌든 간에 공주님이라 부를까.” “리라고만 해도 돼.” “아니. 이 거리의 인간은 손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지 않는 법이우. 그것이 예의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예의바른 사람은 뭐라 부르면 되지?” “할멈이라 하면 되우, 공주님.” 무릎을 벌리고 앉은 공주는 여전히 쪼그린 채 냄비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노파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노파도 주름투성이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띄워올렸다. 서로가 호감을 가진 듯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전에 다른 걸 물어봐도 될까.” “뭣이길래?” “즉... 여기가 마법가인 거지?” “그렇지. 이 길만이 진짜 마법가지. 바깥에 있는 건 말하자면 덤이고.” 그 덤에 저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이고, 진짜에는 파리가 날리고 있다는것도 이상한 이야기였다. “이 길은 밤이면 언제나 보이는 건가?” 노파는 작은 몸을 흔들며 즐겁게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릴 하면 안 되우. 그런 짓을 했다간 온 대륙 안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말게.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 속에, 집을 숨기려면 마을 안이지. 오늘은 말이우, 공주가 온다고 하길래 일부러 열어두었던 거유.” “그렇다면, 보통은 밤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그건 우리들, 이 거리의 주민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니.” “다시 말해, 세간으로부터는 숨어 있고 싶다는?” “물론이우. 이 거리의 주민이 되기 위해선 그게 조건이니까. 명리에 관심이 있어서야 아직 미숙하니 아무래도 이 거리에선 살 수 없지. 바깥쪽의 ‘마법가’에서 권력자를 상대로 돈놀이나 하는 게 어울리우.” 공주는 탁 하고 무릎을 쳤다. “그쪽 관할이었어?! 이런. 틀림없이 이쪽이 아니면 그런 이야기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노파는 이빨이 빠진 입을 벌리고 그것 참 하며 즐겁게 웃었다. “재미있는 공주님이시로고. 그렇다우, 권모술수에 관여하는 것이라면 덤 쪽이 전문, 우리들은 전혀 관여하지 않지.” “이건 졌는 걸. 완전 헛수고 했네.” “그렇게 결론짓지 말고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이 할멈에게 한번 말해보면 어떻수.” 공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을 버린 사람을 상대로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이야기야. 정치와 정세를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공주님.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우. 이 거리에 사는 자는 세정에 무관심한 게 아니우. 자기 의지로 세간과 관련되지 않도록 자신을 묶어두고 있는 것 뿐이지. 그렇다는 것도 실은 우리들에겐 사람 세상의 구조가 자알 보이기 때문이지. 어디를 어떻게 누르면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가 하는 것까지 볼 수가 있거든.” 그 정도 일은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것이 마법가에 있는 술자의 자부심인 듯했다. “허나,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을 냉정한 관조자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되우. 그 이상을 바라고 욕망에 몸을 맡기면 반드시 자기에게 그 대가가 돌아오지. 후, 후후... 이런 것은 공주님하곤 상관없는 일이지만, 뭐, 물어보도록 하시우. 댁은 내 손님이니, 알고 있는 것이라면 대답하도록 하겠수.” “그렇다면 묻겠는데, 할멈은 탄가와 파라스트가 타우에 개입한 일을 알고 있나?” “물론.” “그 이유는? 왜 지금이고, 왜 타우인지.” “그렇구먼. 여러 가지 있다우. 양국 모두 국내 사정은 매우 양호, 이렇다 할 문제가 없지. 그렇다면 지배자 되는 자, 좀더 많은 것을 손에 넣고 싶어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라우. 다행히도 가까이에 아주 쉽게 손에 들어올 것 같은 영토도 있고 말이지.” “타우가 손쉽게 손에 들어온다구?” 노파는 낮게 웃었다. “그런 토지를 원하는 국왕은 상당히 별난 자이지. 게다가 눈앞에 이 델피니아라고 하는 먹음직스러운 게 있지 않수.” “그거야 군침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먹음직스럽게 보이겠지만, 절대로 간단히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보통 때라면 공주님 말대로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이 나라의 정권은 크게 흔들리게 되어 있어서 말이유. 바라마지 않던 호기 아니겠수?” 공주는 무릎을 움켜쥐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유는?” “대답하기 전에, 공주님.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겠수. 이곳에 반드시 델피니아를 가지고 싶다고 바라는 자가 있지.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야. 아니, 그 중 두 명은 옆 나라의 국왕이지. 그렇지만 남은 자들은 델피니아의 인간이자, 원래대로라면 자신들이야말로 코랄 성의 주인으로서 화려하게 군림해야 했다고 아직까지 분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지.” “있다고 해도 겨우 두세 명이겠지?”“아니. 중심을 이루누 자들만 해도 가볍게 다섯은 넘수. 물론 거기에 찬동하는 동료들이 몇 명이나 있고. 따라서 신하들도 몇 천이나 되지.” “......” “그래도 국왕이 가진 세력에 비하면 소수파임엔 틀림이 없다우. 그 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다시 반란군을 조직해서 국왕에 반기를 들고 싶었겠지만, 그 국왕은 나이는 젊지만 괴물 같은 인물이라 말이지. 욕심과 질투로 똘똘 뭉친 사감(私感) 일변도의 무리들이 일어나 덤벼들어봤자 대항할 수가 없는 거유. 강하게 찌르면 미꾸라지처럼 피하고, 부드럽게 헤어 들어가면 고무처럼 퉁겨내지. 게다가 배짱과 애교는 남들보다 열 배는 가지고 있고 말이우.” 그 점은 공주도 동감이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 주변엔 사람들이 모이는 거야. 나도 그 중 한 사람이고.” “그렇고말고. 댁에게도 국왕에게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요 3년 간 그 자들은 이런 수 저런 수를 써서 국왕을 쓰러뜨리고, 한 사람이라도 많이 자신들의 아군을 늘리려고 했다우. 그런데 그게 말이지, 조금이라도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그 자들과 국왕을 저울질해보았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결론이 난 거나 마찬가지니 말이우.” “반대세력은 의외로 인망이 없군.”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우. 어디까지나 출생이나 혈통에 집착하는 자들도 있으니까.” “달리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겠지.” 태연하게 말하는 공주를 보고 노파는 다시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렇고말고. 그 말씀대로라우. 그 자들도 아무래도 최근에는 무력을 가지고 왕을 쓰러뜨리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겨우 깨달은 것 같지만, 욕심이라는 건 상당한 힘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다 보니, 정면에서 쓰러뜨리는게 무리라면 아예 암살을 해버리자는 의견도 나오기 시작한 모양인데... 이건 동료들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우.” “어째서?” “사람의 윤리관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남자가 무조건적으로 아기를 감싼다던가. 또 그런 아기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댈 남자가 가난한 처녀의 신세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다던가. 델피니아인인 이상 ‘국왕’을 암살할 수는 없다. 천벌이 내릴 것이다, 라고 했던 거라우. 진짜 이유는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손이 더러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싫었던 거겠지만. 어쨌든 암살은 할 수 없었지. 그렇지만 저 국왕 밑에 있는 건 참을 수가 없고. 실로 뭐라 제멋대로인 이유라 해야 할지,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노파는 한 박자 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 때가 되서야 그들은 마법가에 의지했지. 바깥쪽 말이우. 몇 명이나 시녀며 심부름꾼을 계속 보내서 이런저런 간판 술자들에게 상담을 했지. 아마도 이런 식으로 물어본 게 아닐까? 만약 당신이 지금의 국왕에 불만을 가지고 현 정권을 쓰러뜨리려고 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어떻게 하면 국정에 타격을 줄 수 있겠느냐고. 이 질문에 대해 모든 역술가, 점쟁이, 무술가, 마법사들은 즉시 대답했지. 쓰러뜨릴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현 국왕의 힘을 반으로 줄이는 것이라면 간단하다. 공주를 쓰러뜨리면 된다.” 한 순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공주였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를?” “그렇지.” “잠깐 기다려! 왜 그렇게 되는데?!” “왠만한 가짜 수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다들 똑같은 소리를 했을 거라우. 우리들은 인간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걸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수련을 쌓지. 그런 우리들의 눈에서 보자면 공주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거라우. 애초에 바깥에 있는 건 적당한 기술을 익힌 자들이 대부분이라서 우리들 정도까지는 보지 못하겠지만,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볼 수 있지. 무엇보다 약간이라도 힘이 있는 자라면 현 국왕의 바로 곁에 무섭도록 강력한 빛을 발하는 근원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보인다우. 그것이 공주라는 것도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렇다면 이 광원을 제거한다면 국왕의 힘도 약해질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수?” “그런 바보 같은 걸로... 점쟁이가 하는 소리 따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아마 마법가 안의 술자란 술자는 다들 입을 모아 같은 소리를 했을 거라 생각하니 말이우. 반신반의하면서도 한번 해보자 하는 게 아닐지.” “장난하냐!” 분연하게 대꾸한 공주였다. “낫살이나 처먹은 어른들이 모일 대로 모여서 뭔 짓을 하는 거야. 왕좌 탈환도 그 뒤의 통치도 전부 월의 실력이야. 나는 조금 힘을 빌려준 것 뿐인데...” “과연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을지.” 노파의 말에 공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분명 지금의 국왕은 탁월한 인물이지. 하지만, 만약에 삼 년 전 댁이 국왕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구 쳐 보우. 그럴 경우 국왕은 저렇게 빨리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 “못했을 거라고는 안 하겠수. 허나, 분명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을 거유. 아닌가?”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잖아? 현실은 본 대로야.” “그렇고말고. 그게 문제지. 알겠수. 댁은 삼 년 전, 한 남자의 운명을 바꿔버렸어. 그것에 의해 한 나라의 운명도 변해버렸지. 댁에겐 그럴 마음이 없어도 현실은 그렇게 된 거라우. 그리고 그 사실은, 몇 번이나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술자면 금방 눈치챌 수 있지. 그런 힘이 없는 자의 눈으로 봐도 댁이 지금의 국왕을 왕좌에 올려준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는데, 그렇다면 왕으로부터 빼앗아버리면 돼. 간단한 논리인 게지.”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공주였다. “할멈...” “뭣인지?” “진짜 마법가의 주민으로서의 의견이 듣고 싶어. 내가 죽으면, 월의 곁에서 사라지면 그 녀석은 정말로 왕좌에서 굴러 떨어질까?” “아아니. 그건 저 국왕 나름이지. 댁이 말한 대로 당신들의 만남은 계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제부터는 국왕의 실력이니 말이우.” “그렇지? 그럼 왜...” “결국,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는다는 거라우.” 노파는 이야기를 계속하면서도 천천히 냄비 안을 뒤섞고 있었다. 화로 안에서는 숯불이 타오르며 철 냄비를 데우고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공주는 알 수 없었지만 주변에는 고혹적인 짙은 향기가 넘치고 있었다. “무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고 암살도 할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자들에게 있어서야, 댁 한 명만 없애버리면 일이 끝난다는 건 실로 귀가 솔깃하는, 빠진 물에 떠 있는 지푸라기라는 것이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야 죽여버리면 알 수 있는 일이고 말이우. 시험삼아 해보지 않을 바보는 없겠지.” “간단하게 시험해보지 말라고, 그런 거!” 잔뜩 욕설을 퍼부은 공주였지만, 이 노파에게 투덜거려봤자 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무얼, 댁이라면 뭐가 노리더라도 간단하게 쓰러지거나 하진 않을테니... 뭐가 노려도 말이지.” 부당한 이유로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던 공주는 노파의 어조가 미묘하게 변한 것을 눈치챘다. “그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놈들은 상당한 수겠군.”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열 명은 가볍게 넘는다우. 계획을 세우고 있는 자들, 이미 실행에 옮긴 자들, 이런 저런 자들이 있지. 이건 공주님 쪽이 잘 알고 계시겠지.” “진저리날 정도로 잘 알고 있지만, 그 녀석은 날 못 죽여.”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우.” 이번에는 묘하게 힘이 담긴 어조였다.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그 녀석을 알고 있어?” “댁이 있는 곳에 숨어든 자 자신에 대해서라면 모르지만, 그 녀석들은 상당히 섬뜩한 무리들이니 방심은 하지 말아야 할 게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것에 관해 공주는 추가로 물어보려고 했으나, 노파 쪽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까의 질문에 대답해보자면, 국내의 위험한 일당들이 일제히 댁의 암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게 됐는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라더스나 오론이 멍청이는 아니라는 거라우.” 고개를 기울인 공주였지만, 노파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함에 따라 경악하게 되었다. “설마, 그럼 탄가나 파라스트도...” “힘이 있는 술자는 마법가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 공주의 의문에 노파는 간단하게 긍정했다. “댁이 없어지면 월 왕의 정권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델피니아를 노리고 있는 왕들에게 있어서도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라우. 더구나 양국 모두 3년 전의 절호의 기회에는 서로간의 분쟁에 하루해가 졌던 바람에 손을 대지 못했던 억울함이 있고 말이우. 그렇다고 일국이 움직여서 다른 나라의 공주를 암살할 수야 없는 일. 전쟁을 거는 것과는 얘기가 틀리거든. 그런 짓을 하게 되면 그건 벌써 충분히 범죄지. 안달이 나 있는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내부의 인간이 해치우겠다고 나서니 실로 군침이 돌지. 이런 괜찮은 이야기는 또 없을 거라우.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거 아니우? 그래서 타우를 살살 건드려본 거지. 물론 우선은 국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시험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겠지만.” “다시 말해 국내의 반대 세력이 하는 짓은 양쪽 대국에 간파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그건 양국이 밀정을 풀어놓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구먼.” 냄비를 휘저으면서 태연하게 말한 노파였다. 공주는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침묵했다. 이런 때의 공주에게는 국왕이라 해도 함부로 말을 걸 수가 없다. 그렇게 하면 이 아름다운 공주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훔쳐보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배신자들의 이름을 물어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거겠지.” “통상은 그렇지.” “나에겐 통상 외의 규칙을 적용해주겠나.” “그렇구먼.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버렸으니 적용할 수 밖에 없지 않겠수.” 공주는 약간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자그마한 현자(賢者)를 보았다. “나에게 그렇게까지 해주는 건 어째서지?” “글쎄에...” 가볍게 고개를 기울인 노파였다. “뭐, 그냥 변덕이 나서라고 할까.” “세상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 아니었나?” “물론 그렇지. 하지만 댁은 엄밀히 말해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말이우. 약간 관여해보고 싶어졌달까.” “의외로 적당적당한 원칙이로군.” 지극히 솔직한 말에 노파는 다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거 참. <떨어진 자>는 몇 명이나 알고 있지만 댁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나 말고도 이곳으로 떨어져 오는 사람들이 있어?” “물론. 세계라는 건 몇 겹이나 겹치고 구부러지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왜곡과도 같은 것. 뭔가 우연한 기회로 연결되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다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자도 있는가 하면 어딘가에서 떨어져 오는 자도 있지. 댁도 그런 자들 중 하나가 아니우.” 다리를 벌린 채로 공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내가 어째서 공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일국은커녕 삼국의 동향에 관여되려 하고 있다니. 설마하니 이런 웃기는 일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 이쪽 세계에 관여될 생각 같은 건 요만큼도 없었는데 말이야.” “공주님. 아까 내가 댁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댁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우. 다시 말해, 댁은 우연히 이 세계에 떨어져 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공주는 더욱 자조하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몸이 된 것도?” 노파는 반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것에 관해서는 뭐라고도 할말이 없수. 나는 댁의 원래 모습을 모르니까. 다만, 맹렬할 정도로 빛나는 영혼의 색에 비하면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라고 생각하우.” “웃을 일이 아니야. 체력까지 여자애처럼 되어버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노파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원기왕성하구먼. 원래 모습으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고 안달복달하던 거 아니었수?” 공주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그건 지금의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초조해한다고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뭣인지?” 공주는 대답을 주저했지만, 커다랗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때때로 생각해. 내가 돌아가지 못하는 건 혹시나, 아직 무언가 이곳에 있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나도 바로 그렇게 생각한다우.” “......” “이 몸의 상상이지만, 댁은 예전에 있던 세계에서는 태양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는지?” “......” “댁의 빛은 아주 강하지. 함부로 가까이 다가가면 타서 재가 되어버릴 정도로 강해. 하지만 암흑을 헤쳐버리기엔 그 정도의 빛이 필요할 때도 있다우. 3년 전, 이 세계는 그야말로 암흑에 휩싸이려 하고 있었고, 그 어둠이 댁을 부른 것일지도 몰라.” 공주는 풋 웃어다. 추억을 떠올린 웃음 같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기도 했다. “여기에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월하고 만나서, 그 녀석이 나라에서 쫓겨난 임금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이건 우연일 리가 없다. 이 남자를 왕좌로 돌려보내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생각이 빗나가고 벌써 삼 년이다.” “그렇지. 저 국왕의 앞날에는 아직도 계속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우.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선 공주의 힘이 필요하다는, 그런 거라우.” “성가신 임금님일세.” 그렇게 말하면서도 공주는 즐거운 것 같았다. 어째서 자신이 불려왔는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공주 안에는 때때로 자신에게도 분에 넘칠 정도의 힘이 잠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향하게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를 정도의 힘이었다. 이 3년 간, 왕국을 평정하기 위하여 공주나 국왕은 한눈도 팔지 않은 채 일했다. 이제 와서야 겨우 조금 평온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한가한 시간은 공주에게는 오히려 고통이었다. 그 시녀를 발견했을 때에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해 옆에 두기로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공주님. 댁만 없어지면 된다는 말을 들은 놈들은 즉시 댁을 주살(誅殺)하도록 의뢰했다우. 국왕하곤 달라 어떤 장해도 수고도 없는 일이니까.” “바깥 마법가에 말인가?” “물론. 돈에는 쪼잔하게 굴지 않는 의뢰였다고 하더구만.” “그래서, 바깥 녀석들은 그 의뢰를 받아들인 건가?” “그런 것 같다우.” 코웃음을 친 공주였다. “그런 저주가 나한테 들어먹을 것 같아.” “그렇지. 장난감 단검을 들고 호랑이를 찌르려는 것과 같은 짓이니. 아무리 바깥에 있는 무리들이라 해도 바로 그 점을 눈치챘다우. 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저주나 마술 종류로는 무리라고. 칼날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일은 마법가의 영역이 아니라 달리 전문가가 필요하지. 그들은 거기에 의뢰했다우.” “그들, 이라는 건 바깥쪽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얼마 전부터 계속 왕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무리들이라우.” 노파는 끝까지 조용하게 말했다. 공주는 씁쓸한 숨을 토해냈다. 역시 발로의 감은 옳았던 것이다. 왕가에도 피가 이어져 있는 사보아 공작가의 유력자가 반국왕의 세력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다른 진용들은?” “공주님. 이야기를 해줘도 상관은 없지만, 조금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우.” “알고 있어. 마법가의 할멈에게 들었다는 이유로 체포장을 낼 수는 없으니까. 증거 확보는 이쪽에서 할 거야.”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구만.” 왕궁이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면 다른 진용들은 자연히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공주는 노파에 대해, 인사치레로라도 우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경의와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다. 알고 싶었던 걸 모두 알 수 있었어.” 오래 있어봤자 쓸데없다는 듯 일어서려 했지만, 문득 노파를 보고 말했다. “상담료는 얼마나 줘야 하지?” “장사할 셈으로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우.” “다시 와도 돼?” “그럼. 댁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우.”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일어선 공주의 등을 향해 노파가 말을 걸었다. “공주님.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수. 얼마 전부터 공주의 곁에 자그마한 은빛 별이 보이고 있다우.”“아아. 그 녀석인가?” 솔직히 말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제인 것은 살의를 품고 눈 앞에 있는 상대가 아니라 그 배경이기 때문이었다. “댁은 그 별을 어찌할 셈인지?” “글세? 아무 생각 안 해봤어. 주모자가 누군지 알게 되면 그 녀석도 내 암살을 포기하고 나가버릴지도 모르고 말이야. 자기 좋을 대로 놔둘 거야.” “내버려두는 건 그다지 묘책이라고 할 수 없수.” 하고 노파는 말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은 아주 작고 작은 별 조각이라도 언젠가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은반이 될지도 모른다우.” 공주는 의외라는 얼굴이 되어 다시금 노파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이 <달>이 된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우. 안 될지도 모르지. 그것도 다 저 별이 하기 나름이우. 지금 같은 죽은 상태에서 되살아날 수 있을지 어떨지.” 저도 모르게 녹색 눈을 휘둥그레 뜬 공주였다. “죽었다니... 그 녀석은 아까 그 길 안내와는 달리 제대로 살아 있어.” “아니. 저걸 보고 살아 있다고는 하지 않는 거라우. 육체는 가지고 있어도, 그들은 살아간다는 걸 몰라. 그러한 인간들이라우.” 인간들, 이라는 것은 달리도 있다는 말이 된다.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 했던 공주보다 먼저 노파가 말했다. “댁의 시녀는 사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일족의 한 사람이라우.” “응?” “왕궁에 돌아가면 물어보는 게 좋을거유. 파로트라고 하면 알 거라우.”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충고인 듯하고 느끼고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9장 집 밖에 나오자, 그곳은 여전히 조용히 잠들어 있는 마법가의 한 부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았지만, 들어갈 때에는 분명히 문에 그려져 있던 사자의 문장이 지금은 사라진 상태였다. 공주는 미소를 짓고 걸음을 옮겼다. 만약 저 할멈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골치 아파진다. 자신의 목은 국내의 반대세력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도 표적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수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저 시녀는 무언가 특수한 집단의 일원인 듯했다. 시녀 건은 뒤로 미뤘다. 우선은 배신자들의 이름을 국왕에게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말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통행금지도 경비도 이 사람에겐 의미가 없다. 어렵지 않게 지나가 국왕의 사실(私室)에 침입했다. 한밤중을 지난 시각인데도 국왕은 시종 중 한 사람에게 서면을 펼치게 하고 골치 아픈 얼굴로 무언가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공주를 보더니 시종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 남았다. 그러나, 공주가 국왕에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어젯밤에 이어 대수문에서 급보가 전해져 온 것이다. 다시 한밤의 개문(開門)을 요구하는 병사가 달려온 것이다. 그것은 국왕이 맥다넬 경의 동향을 살펴보도록 명령했던 세작 중 한 명이었다. 곧바로 국왕과 공주의 앞으로 안내된 세작은 숨을 고를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맥다넬 경이 탄가와 은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을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공주는 그렇다 치고 왕에게 있어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 청천벽력 같은 보고였을 텐데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검은 눈에 평소보다 더욱 깊은 빛을 띄운 채 자세한 사정을 말하도록 명했다. 황급히 달려온 남자가 말하기엔 맥다넬 경은 대가(大家)의 주인으로서 수많은 신하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 주종의 사이를 초월할 정도로 깊이 신뢰하는 신하가 경의 저택에서도 꽤 가까운 곳에 집을 부여받아 살고 있으며, 경은 종종 그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것은 벌써 20년이나 전부터 있던 일이라 에브리고에서는 이상하지 않은 광경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신하에게는 탄가에 시집간 동생이 있고, 멀리에 있는 만큼 종종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다. 친정에서부터 따라간 충실한 늙은 하인이 귀향을 겸해 편지를 들고 방문했다가 답신을 가지고 돌아간다. 그것도 십 몇 년 전부터 항례가 되어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폐하의 명령에 따라 맥다넬 경의 행동처는 모두 부하들과 함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만, 평소에 하던 일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신분이 낮은 시종처럼 차리고 있어서 한번은 놓쳐버렸던 겁니다. 하지만 혹시 몰라 그 늙은 하인의 얼굴을 숨어서 확인했을 때 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그것은 조라더스 왕의 바로 곁에서 일하고 있는 시종이었습니다! 탄가 왕궁에 갔을 때 틀림없이 봤던 얼굴입니다. 맥다넬 경의 감시는 부하들에게 맡기고 저는 그 남자의 뒤를 쫓았습니다. 늙은이의 여행길답게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걸어서 로셰의 가도를 따라 북상해서 국경 바로 앞에 있는 저택에 들어갔습니다.”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메이스 남작의 저택이었습니다.” 델피니아의 지방 귀족 중에서도 힘을 가진 호족 중 하나였다. 물론 국왕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근처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작의 친구가 탄가에서 찾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친구는 탄가로 출발했습니다만 그 남자야말로 그 늙은 하인, 아니, 조라더스 왕의 시종 본인이었습니다.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말에 타고서 시종들을 여럿 데리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검문소에 물어보자 문서상의 이름은 탄가, 알베레이스 주(州), 게튼 자작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실제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게튼 자작이라고 이름을 대고 국경을 넘어간 것은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이 중대함의 극치인 사실을 조금이라도 빨리 국왕에게 알리기 위하여 서두르고 서둘러 달려왔던 것이리라. 그때에서야 겨우 숨을 한번 돌리더니 게튼 자작의 출국을 얼마나 저지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를 고백했다. “하지만 저 하나의 말로는 어찌할 수 없겠다고 생각해 그만두었습니다. 뭐라 해도 서류는 진짜였으니까요. 본인을 확인할 수 없는 이상 자작 본인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입니다.” “그만하면 됐다.” 국왕은 조용히 말했다. “네 판단은 옳았다. 그 자리에서 소동을 벌였다면 국제문제로 비화됐겠지. 충분히 잘해줬다.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평소와 똑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세작은 그 목소리에 안도한 듯 고개를 들었지만 왕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헉 하고 몸을 떨었다. 왕은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양손으로 얼굴의 아래쪽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검은 눈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노여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도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로 국왕은 격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맥다넬 경에게 협력하는 자는 더 있을 것이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바,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남자는 식은땀마저 흘리며 물러나갔다. 이 사이, 공주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국왕의 시선을 피하듯이 그 장소에 있었다.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국왕은 그 표정과 마찬가지로 오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해봐라.” 공주는 이 이상 상대를 화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했다. “더 말할 건 특별히 없어. 지금의 보고가 진실이야.” “끝내주는 이야기군.” 내뱉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다. 국왕은 온몸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이 밉다면 미워하면 된다. 그러나 왕가와도 피가 이어진 대귀족이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외국과 결탁한다니 이 무슨 짓인가. 대국 탄가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타국의 내정에 간섭할 리가 없다. 국왕을 쓰러뜨렸을 즈음엔 델피니아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겠다는 정도의 약속은 교환했을 터이다. 권력욕 때문에 국토를 외국으로 팔아넘기다니 혼을 팔아 넘기는 것과도 마찬가지 행위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째서 얼굴을 맞대고 간언하지 않는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이 정당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눈앞의 이욕과 국왕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찬 나머지 실각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셈이다. 국왕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누가 좋아서 왕관 같은 걸 달라고 했느냐고. 그러나, 국왕의 그 분노는 그들에게는 도달하지 않는다. 필요없다면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염치도 없이 말하리라. 그들에게 넘겨준다면 망쳐버릴 것이 눈에 보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는 것인데. 건장한 전신에 노기가 스물스물 배어 나오고 있던 국왕에게 공주가 살짝 말을 걸었다. “가문이 최고인 녀석들은 네가 서자라는 것만으로도 따르길 싫어하는 거야.” “알고 있다.”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어깨를 풀며, 살짝 숨을 내쉬고 국왕은 말했다. “그런 건 알고 있어. 델피니아인의 혼을 팔아 넘겨서까지 나를 쫓아내려는 그 집념에 기가 막혔을 뿐이다. 하지만 너에 대한 암살을 어째서냐?” 공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시 다른 이유로 미친 듯이 화를 낼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도 없어서, 마법가의 노파가 말했던 공주 암살의 이유를 신중하게 말했다. 과연 국왕은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의자 위에 길게 몸을 뻗었다. 쉬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지만, 검은 눈은 허공을 노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긍지에 상처를 받은 사자는 이윽고 건장한 어깨를 흔들며 낮게 웃었다. 지독하게 나직한, 그것만으로도 위험하고 비장한 웃음이었다. “괜히 더 화가 나는군.” “그렇겠지.” “네가 없어진다면, 네가 내 앞에서 사라진다면 나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거냐. 잘도 거기까지 사람을 얕잡아볼 수 있군 그래.” “동감이야. 너는 좀더 화내도 돼.” 공주는 딱 잘라 보증해주었다. “나는 그저 계기에 지나지 않아. 할멈이 그렇게 말했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바깥쪽 놈들이 바보인 거야. 그 이상으로 바보인 것이, 그런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암살자를 보낸 맥다넬 경이지만. 어떡할래?” “이거고 저거고 없다. 죄상은 확실해.” 정권욕에 자국 공주의 암살을 획책하고 그런 끝에 이웃나라와 내통하다니 정상 참작을 할 여지도 없다. 극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처벌할 거야? 설마 이걸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잖아.” “안 되지. 너무나 악질적이다. 종제님에게도 상처가 가지 않을 수 없게 돼.” 하물며 지금은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 무고한 죄라고 재조사를 요구하면 그걸로 끝이다. 자칫 잘못하면 반대세력에 기세를 부여해줄 만한 일도 된다. 국왕은 잠시 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탄가의 건은 덮어두고, 네 암살을 획책한 죄를 물어보도록 할까. 다행히 증인도 있고.” “그 시녀 말이야? 내기를 해도 좋은데 맥다넬 경의 이름 같은 건 모르고 있을걸.” “자백한 걸로 해버리면 돼.” 국왕의 간단한 말에 공주는 약간 놀라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느긋한 데다 바보같이 정직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성격이면서도 때로는 이런 대담한 말을 간단히 해버린다. 온화한 얼굴의 그늘에 가려져 평소엔 보이진 않지만 이 남자는 틀림없이 이빨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것 같은 파렴치한 부분은 없다. 이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용법을 알고 있다. 이 남자가 이러한 비상수단을 택할 때는 언제나 이유가 있고, 그러한 때에는 망설이지 않을 정도의 의지와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 외국과 손을 잡고 자신의 암살을 획책할 만한 인간이 이 남자의 몇만 분의 일이라도 흉내를 낼 수만 있다면 한번 해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국왕은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왜?” “아무것도 아냐.” 공주는 여기에서 노파의 말을 생각해내고, 국왕에게 물어보았다. “월. 너, 파로트라는 거 알고 있어?” “아니? 처음 듣는데. 지명인가, 아니면 인명?” “몰라. 왕궁에서 물어보면 알 거라고 얘기했거든. 그것이 나를 노리고 있고, 저 시녀도 그 중 한 명이라는 것 같았어.” 이 정보는 국왕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다면, 저 시녀가 실패한다고 해도 그 다음 녀석이 온다는 거냐?” “그런 게 되겠지. 게다가, 그 말투로 봐서는 상당히 험악한 놈들인 것 같아.” 은발의 시녀를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바로 지금 노파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참이다. 그 말투로 봐서는 그 녀석들에게 표적이 된 자는 확실하게 목숨을 잃었던 듯했다. “댁이라면 간단하게 쓰러지거나 하진 않을 테지.” 이건 다시 말해 공주라면 지극히 드문 예외가 되겠지. 그런 의미다. 국왕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궁에서 물어본다면, 인가. 나는 이 왕궁에 들어온 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건 고참에게 물어봐야겠지. 살아 있는 사전이라면 두 사람이 있지만, 남자 쪽 분야일 거다.” 그리하여 국왕의 재상인 브룩스가 불려왔다. 전 국왕의 숨겨진 검이라고도 불렸던 브룩스라면 분명 카린과 나란히 왕궁의 살아 있는 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밤중이기는커녕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충성심이 깊은 브룩스는 놀란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제대로 의관을 갖춘 채 국왕과 공주의 앞에 나섰다. 조금 전 급사(急使)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브룩스도 이미 들은 상태였다. 무슨 말을 들어도 동요하지 않고 대처해야 하는 것이 임무라고 말하는 듯, 침착하게 공주가 권한 의자에 앉았지만, 그 침착함도 국왕이 예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까지였다. 홀쭉하니 마른 풍채가 일어서지만 않았을 따름이지, 언제나 태연함을 지키고 있는 완고한 재상의 얼굴에서 단숨에 핏기가 빠져나갔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름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왕과 공주는 눈을 마주쳤다. 공주가 말했다. “브룩스치고는 엉터리 거짓말인 걸.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선 할 수 없는 말인 건가?” “아니오. 가당치도 않습니다. 실제로 짚이는 곳이 없기 때문에...” 국왕이 여기에서 끼어들었다. “브룩스. 알고 있다면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주게. 공주의 목숨에 관련된 일일세.” “나는 그렇게 간단히 죽거나 하진 않겠지만 말야.” “하지만 한두 사람이 아닌 거잖아? 아무리 너라 해도 인해전술로 온다면...” 불리하다, 라고 국왕이 말하려던 순간, 브룩스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창백해진 얼굴ㄹ이 거의 필사적인 형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오히려 두 사람 쪽이 놀랐다. 이 시종장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지금도 명 외교관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브룩스였다. 외교적인 자리에서 표정을 읽히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 그 브룩스가 긴장해서 끊어져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공주님의 생명에 관련되었다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파로트인가 하는 자들이 공주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러나 대체 그 자들이 공주님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마법가에서 듣고 왔어.” 공주의 대답에 브룩스는 의외라 할 정도로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는 얼굴로 무릎을 쳤다. “공주님. 놀라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다니 평소의 공주님답지 않습니다. 제가 놀림을 당했군요.” “내가 말하는 건 보통은 보이지 않는 진짜 마법가야.” 다시 브룩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의자에서 허리를 반쯤 들고, 자신의 옆에 있는 공주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에까지 구멍이 뚫릴 정도로 직시했다. “공주님은... 그곳에 들어가실 수 있으셨던 겁니까?!” “알고 있었어?” 공주 쪽이 외려 놀랐다. 노파의 말로는 거의 사람들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국왕도 놀랐다. “세상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나. 그 파로트라는 것도 그렇고, 어째서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나.” 브룩스는 공주의 얼굴을 올려다본 채로 입술을 떨고 있었지만, 겨우 국왕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크게 호흡을 고른 뒤에 말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의 소문으로 드물게 그런 일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그러한 변덕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있을 리가 없는 길을 보았다는 시민도 과거에 몇 명이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래서야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브룩스는 공주가 그곳에 들어갔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듯했다.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말했다. “아마도 공주님은 그러한 변덕에 의해 들어가실 수 있었을 겁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이오나, 두 번 다시 그곳에 들어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 “언제라도 환영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공주의 중얼거림은 그야말로 결정타로 재상을 완전히 때려 눕혀버린 듯했다. 놀랍게도 브룩스는 바닥 위로 비틀비틀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브룩스?!” 국왕 쪽이 오히려 놀랐다. 힘이 없어 보이지만 이 재상의 간담은 왕국 내에서도 굴지의 것이라 할 정도로 대담하다. 그런 브룩스가 이런 실태(失態)를 보인 것에는 공주도 당황하여 마른 몸을 안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도록 술을 한 모금 마시게 하자 브룩스는 아직도 몸을 떨면서도 반듯하게 등을 펴고 서둘러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어전에서 이런 실례를 저지르다니... 용서해주십시오.”“아니. 이 쪽이야말로 미안해. 그렇게 놀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다시 자리에 앉은 브룩스는 사과하는 공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역시 보통 분이 아니신 거로군요.” “이런 저런 모든 의미로,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보지만.” 이 말은 국왕이다. “폐하. 장난을 치실 때가 아닙니다. 이건 중대한 일입니다. 진실의 마법가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허락을 받다니,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우연히 들어간 예라면 있는건가?” 브룩스는 끄덕이며 말했다. “역대의 국왕 중에서도 명군이라 이름 높으신 분들만이 몇 분,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뒤르와님께서도 단 한번만 그곳에 들어가신 적이 있다는 것 같습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국왕의 곁에서 공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할멈의 말하곤 꽤 틀리네.” “무슨 말이냐?” “세상일엔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국왕 따위를 들여 보냈다간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정치정세 일변도일 거 아냐.” “바로 그 말씀대로입니다. 뒤르와님께서 어떻게 마법가 같은 곳에 발걸음을 옮기셨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그저 우연히 마음이 내키셔서 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그 때에는 그저 무언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신 듯했습니다만, 돌아오신 뒤르와님께선 감탄해 마지않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진짜였다고. 이 렇게 가까이에, 자신의 발 바로 아래에 대륙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현자가 살고 있었다고. 허나 뒤르와님께서 그 거리에 들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단 한번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두 번 다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듯합니다. 물론 뒤르와님은 마법가 조사에 착수하여 정확한 지도를 만들게 하시고 장소를 파악해보려 하셨지만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당신이 방문하셨던 것은 ‘존재할 리 없는 거리’였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국왕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지는군.” “이번엔 같이 가볼까?” “고맙지만, 일행이 있다면 아무래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 아닐까.” “그렇겠군. 손님으로서의 예의에 어긋나니. 그럼, 이번에 갔을 때 너를 같이 데려와도 상관없냐고 물어볼게.” 그런 느긋한 대화 옆에서 브룩스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마법가의 인물들이, 그 일족이 공주님을 노리고 있다고 고했다는 것은, 이제 일초의 여유도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한시 바삐 몸을 숨기십시오.” “설명이 먼저야.” “그 말대로다.” 이구동성으로 두 사람은 말했다. “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브룩스는 깊이 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공주님의 힘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 일족이 상대라면 다소 상황이 나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사신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떨까.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말이야...” 그 녀석은 제대로 살아 있다고 말하려는 것을 국왕이 제지하며 말렸다. “자세히 들려주게. 그 일족이 의뢰를 받은 것은 틀림없지만, 다행히 아직 실제로 공주 암살에 착수한 건 아니니 말이야.” 태연하게 말하는 남자를 보고 공주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그 무언가가 이미 공주의 시녀로서 왕궁에 숨어 들어온 상태라고 말했다간 큰 소동이 벌어진다. 숨겨두는 것보다 나을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잘도 갑자기 그런 소리를 둘러댄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감탄하고 있는 공주는 눈치채지 못한 채 브룩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무엇보다 다행이군요.” “그러니까 더욱, 알겠나. 즉시 그런 의뢰를 한 인간을 붙잡아서 취소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야. 이해하겠지?” “예, 허나...” 브룩스는 이 때에야 겨우 평소의 자신을 되찾고, 냉정하게 물어보았다. “의뢰주는 알고 계신 것입니까?” “알고 있네. 그러니까 더욱 증거가 필요한 거야.” “그렇다면 제가 알고 있는 한도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름은 이 대륙의 지배계급에 속하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름을 똑바로 입에 담는 자는 우선 없을 겁니다. 너무나도 저주스러운, 아니, 더러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즉, 암살을 의미합니다.” 브룩스는 잠깐 사이를 두더니 두려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의 실체도, 어떻게 해야 의뢰할 수 있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이름이야 알고 있습니다만 그 존재마저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저 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 마의 5년 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국왕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선왕의 왕자공주들이 차례차례 목숨을 잃었던 그 건인가.” “그렇습니다. 처음은... 레온 왕자님은 정말로 사고로 돌아가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레온님의 죽음은 뒤르와님의 서거 이상으로 왕국에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그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아시겠지만, 레온님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이 한순간에 힘을 잃고 대신 에리스님 주위에 있던 자들이 갑자기 발언권을 얻게 되었던 겁니다.” 왕궁을 섬기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운명이 갈리는 한 순간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보석’이 권력을 쥐는가 아닌가가 모든 것이다. 승진도 영달도 라이벌을 탈락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있다. 물론, 보통이라면 제1왕자에게 아첨해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위치는 이미 대귀족들에게 선점당해 있다. 어쩔 수 없이 재미가 덜한 제2왕자에게 붙어, 그래도 무언가 떡고물은 좀 얻을 수 있으리라며 내심 불만인 채 이 뒷수발을 들던 자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집 안에서 춤이라도 추었을 것이 틀림없다. 브룩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인간이라는 것은 때로 얼마나 추악함을 드러내는지, 오랜 경험에 의해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라 생각합니다만, 그 때의 소동은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제1왕자가 죽었다. 그렇다면 제2왕자에게 붙어야지 라고 해서는 이미 늦은 것이다. 제2왕자 주변에는 신분은 낮아도 몇 년이나 친하게 섬겨온 자들이 있다. 아버지나 형이 죽어서 마음이 약해서 있을 왕자가 그들을 의지하는 건 당연하고, 지금에 와서야 다가오는 자 따위를 쳐다볼 리가 없다. 그리고, ‘차기 국왕’의 측근이라도 된다면 부귀영화는 바라는 대로 가질 수 있다. 레온 왕자의 측근이었던 자들에게 있어서 달가운 사태였을 리가 없다. 이를 벅벅 갈고 있었을 터였다. 제2왕자는 애초부터 병약한 체질이었다. 그러니까 제1왕자 사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죽게 된 것도 그렇게 이상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남자 형제가 두 명 모두 죽어버리자 이번에는 두 사람의 공주가 궁정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의 왕자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건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루피아님 때에도 에베나님 때에도 저희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드시는 것은 물론 몸에 걸치시는 것이나 주거지, 시가음곡을 상대하는 부인들로부터 주변 시중을 드는 시녀들에 이르기까지 시녀장과 힘을 합쳐 몇 번이나 엄중하게 검사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결과가...” 두 사람의 공주는 원인불명의 병으로 쓰러졌다. 온 나라의 명의(名醫)는 물론 마법가로부터도 몇 명이나 기원사가 불려와 치유에 전력을 다했으나 그 보람도 없이 두 명 모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역시나 침통한 표정의 브룩스였다. “에리스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건강하셨는데 불과 3년 안에 왕위계승자가 네 분입니다. 도저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왕궁은 일시에 의심에 찬 귀신들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었던 겁니다. 상대를 고발하면 똑같은 말이 돌아오니까요.” 공주도 냉정한 감상을 토로했다. “그 위에 너마저 죽게 되면 아무래도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아무리 바보라도 무언가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고 눈치챌 테니까.” 브룩스도 끄덕였다. “공주님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이때만큼은 확실하게 소문의 그 일족의 존재를 믿게 되었습니다. 소문으로는 파로트 일족이란 죽은 자들의 집단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벽을 뚫고 독의 숨을 불어넣은 뒤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라고 실로 조용히 속삭이고들 있지요. 이건 물론 그들의 수법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만, 만약 두 공주님의 암살이 그들의 짓이라면 그야말로 그 기술은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간의 말투를 용서해주신다면, 그 일족은 이렇다 노린 상대를 없애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으로 온 대륙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합니다.” 공주가 기가 막히다는 듯 국왕을 보았다. “그런 유명인을 모르다니 한심스러운 국왕님이네.” “자랑은 아니지만 스샤는 촌구석이었어. 그런 화려찬란한 화제와는 인연이 없다.” 묘한 부분을 역설하는 임금님이다. 브룩스 한 사람만이 긴박한 표정이었다. “폐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조속한 결단을 부탁드립니다.” 역시나 브룩스라 끈질긴 소리는 하지 않았다. 공주의 목숨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것이다. 즉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왕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다시 말해 파로트 일족이라는 건, 그 정체도 위치도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이로군?” “예. 무언가 그들과 연락을 취할 수단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저도 상당히 깊이 조사를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국왕은 잠자코 공주를 보았다. 역시 저 시녀를 잡아 조사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무언의 질문에, 공주는 역시나 무언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어쨌든 의뢰주 쪽을 어떻게든 해보자. 하지만 곤란하네. 브룩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것 역시 공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잖아.” “그러게 말이다.” 국왕도 역시나 맥이 빠진 표정이 되었다. “처벌하기도 곤란한 짐승 같은 짓이로군. 죄를 범하려면 범하는 나름대로 좀더 깨끗한 방법을 사용해주면 좋겠다.” “깨끗한 범죄? 그런 것도 있나?” “뭐어, 깨끗하다고 하면 말이 좀 지나치지만, 좀더 깔끔하게 해줬으면 한다는 소리다. 비밀리에 반란군을 조직해서 나를 불러내는 정도의 일을 해주면 적으로서도 존경해줄 수 있는 것을, 그런 수상한 놈들에 의지해서까지 자식 같은 나이의 너를 노린다니, 한심스러운 것도 참 정도가 있지.” 무리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국왕의 다름 아닌 본심이라는 것을 공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쑥덕쑥덕 처리하는 음험한 방법은 공주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브룩스는 침착을 되찾고 똑바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그 분의 이름을 들려주십시오.” 국왕은 즉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브룩스는 물론 왕국 내에서도 대를 거쳐 섬겨온 가신이다. 진심으로 신용하는 상대이지만, 일이 일인 만큼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맥다넬 경이 탄가와 은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사실을 안 이상 잠자초 있을 수는 없었다. 낮게 속삭였다. “브룩스. 공주의 암살 이상으로 사태는 곤란하다네.” “이제는 무슨 말씀을 들어도 놀라지 않습니다. 걱정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주범은 맥다넬 경이다. 협력자로는 북부의 메이슨 남작. 게다가 이 양쪽의 이름은 탄가와 밀접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 연관이 있어.” 표정이 사라진 브룩스의 얼굴 중에서 양쪽 눈만이 이상할 정도의 빛을 발한 듯했다. “그렇다면 아에라님도 무관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마도.” “또 한 가지, 메이슨 남작이 그 음모에 가담했다면 그 쪽과 친밀한 사람들이 무관할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맥다넬 경에게 친밀한 인물들, 고마워하는 인물들을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겠군요.” “부탁해도 되겠나. 나는 누가 누구와 친한지는 잘 모르니까.” “맡겨주십시오. 허나, 정작 맥다넬 경은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죄상은 명백하다. 붙잡아서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왕궁의 관리 정도로 체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가문으로 말하자면 오래된 중에서도 오래된 가문이고, 혈통으로 말하자면 현 국왕 부친의 사돈이라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증거가 없는 이상 함부로 처벌할 수는 없다. 죄상을 공표할 수도 없다. 그런 거물이 모반을 꾸미고 이웃 나라와 밀약을 교환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델피니아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공주는 주의 깊게 국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남자가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흥미도 있었다. “한 가지...” 국왕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기는 하다...” “말씀해주십시오. 상대가 맥다넬 경이라면 폐하께서 직접 규탄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면 이번에는 국왕에 대한 악감정이 단숨에 격화해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그다지 기분 좋은 수단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내가 해놓고도 심한 생각이다.” 서두를 꺼내두고, 국왕은 두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10장 그로부터 며칠 뒤, 발로가 저택에 틀어박힌 지 10일째가 되는 날 공주는 샤미안과 이븐을 데리고 일곽의 사보아관을 방문했다. “어째서 저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하고 이븐은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공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 뭐 기왕 왕궁에 있는 거잖아. 기사단장도 심심해할 테니 말이야.” “두 분이 함께 가주시면 저도 안심이에요. 왕궁에 있으면서 얼굴을 비치지 않으면 발로님께 실례인 걸요.” 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여장’하고 있는 샤미안이 말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묶어 올리고 나뭇잎과 열매를 새긴 보석 머리장식을 얹은 뒤 재봉이 잘 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다. 엷게 화장을 한 모습은 어떻게 봐도 말끔한 귀부인이었다. 공주가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짜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굉장한 변신이네. 모르는 사람 같아.” “어머, 공주님. 이 정도는 여자라면 당연한 거에요.” 밝게 말한다. 보통 때는 바지에 가죽장화를 신고 있어도, 비단 드레스는 기분 좋은 모양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방문하는 것이라며 일부러 정장을 했지만 공주 쪽은 그런 걱정은 처음부터 할 생각이 없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사냥꾼 소년 같은 대담한 차림새였다. “공주님도 한번 정도 여자옷을 입어보시면 좋을 텐데요. 분명 저 이상으로 변신하실 수 있을 거에요.” “설마아.”“농담이겠죠.” 하고, 이븐과 공주는 동시에 말했다. 일행의 예상대로 우리 안의 호랑이 상태였던 발로는 샤미안의 방문을 엄청나게 기뻐했지만 이븐의 모습을 보자마자 싫어하는 표정이 되었다. “어째서 너까지 따라오는 거냐?” “샤미안 양의 호위라서요. 어딘가의 성질 나쁜 기사단장님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도라 장군님께 직접 부탁받았습지요.” “할 거라면 좀더 그럴 듯한 거짓말을 하도록 하지. 양의 호위로 늑대를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기 일은 어디다 제쳐두고 잘도 말씀하시는구만요.”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한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공주와 샤미안은 나시아스와 카사를 만났다. 카사는 그렇다 치고 나시아스는 발로에게 맞춰 계속 이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저런 시끄러운 녀석하고 하루 24시간 같이 있으려면 큰일이겠지.” 동정심을 숨기지 않고 말한 공주였지만 나시아스는 고개를 젓고 웃으면서 살짝 말했다. “아까부터 갑자기 시끄러워졌답니다.” 카사도 마찬가지로 말했다. “와주셔서 얼마나 감사드리는지 모릅니다. 요즘 주인님은 심하게 우울해하고 계셨던 차라...” 그 목소리에는 주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나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는, 발로는 처음엔 갇혀버린 불만 때문에 소란을 부렸던 모양이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제대로 말도 안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왕궁 내의 귀족이나 귀부인들이 속속 문안을 하러왔지만, 그 정도로 사교적인 남자가 말수도 적고 어떤 미녀의 방문에도 우울하니 즐기려 하질 않아, 반대로 손님 쪽이 그것을 기분이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 곤란해하며 물러가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본인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었으니 기운이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습니다만, 평소가 평소인 만큼 손님들 쪽이 신경을 쓰시게 되어서요.” 샤미안을 걱정하여 일부러 밝게 말한 나시아스였지만, 이 인내력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간이 오그라들며 바라보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지금의 발로는 무섭도록 기세가 좋았다. 이 응접실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격렬하게 이븐과 말싸움을 하고 있다. 공주는 발로의 상대를 이븐에게 맡기고 샤미안과 잽싸게 대기실 쪽으로 피난해온 것이지만, 너무나 위세가 좋은 나머지 샤미안은 불안한 듯했다. “공주님.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버려두라니까. 늘 있는 일인데 뭐.” “하지만, 지금의 발로님이라면 말로 다투시는 것만으로 끝날런지요. 이븐 경도 발로님도 입장에 신경을 쓸 분들도 아니고...” “괜찮아. 발로는 무장하지 않았고 이븐도 현관에서 검을 맡겼잖아. 기껏해야 치고 박고 싸울 정도야. 그것도 괜찮지 않아?”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말리고 오겠습니다.” 샤미안은 신경이 쓰여서 어쩔 수 없는 듯 용감하게 별실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배웅한 공주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싸움을 붙이려고 데리고 온 건데 말이야.” 나시아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배려 감사합니다. 독기장(獨騎長)에겐 조금 미안한 일입니다만...” “그래봬도 제법 즐기고 있는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본인들 뿐이라니까.” 샤미안이 말리러 들어간 바람에 말싸움은 더욱 격해진 듯했다. 차와 과자를 가져온 시동이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나시아스와 발로는 어느 정도나 되는 사이지?” “글쎄요? 이럭저럭 십이삼 년 정도 되었을까요. 악연이라고 할 만한 거지요.” “길이를 묻고 있는게 아니야.” 나시아스가 다기를 들어올린 채 물빛 눈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워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추상적인 질문이라 대답하기 어렵군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말씀이신지?” “만약의 이야긴데, 발로가 월하고 싸움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느 쪽 편을 들거야?” 나시아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상할 정도로 천천히 다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똑바로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농담치고는 조금 도가 과하군요.” “진심이라면?” 공주도 결코 지지 않을 진지한 눈으로 나시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의 어떤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시아스는 난처한 듯 눈길을 피하고 깊이 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 대답은 보류하게 해주십시오. 폐하 쪽, 이라고 말씀드려야 하겠지만...” “말할 수 없어?” “폐하에게 충성심을 보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는 어떤 일이라도 할 겁니다. 하지만 친구를 배신하는 듯한 일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잘라 말한 라모나 기사단장이었다. 공주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이러한 때의 공주는 도저히 16세의 소녀로는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얼굴을 한다. “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글쎄요? 그것은...” 나시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해도 저와는 달리 사보아 공작가를 짊어지고 있는 몸입니다. 사사로운 정은 죽여두고 왕명에 따라 명예를 취해야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완고한 남자입니다. 전 공작이 살아 계실 때에도 대놓고 공작을 비난하여 심하게 부자싸움을 반복한 일도 있을 정도이니까, 폐하의 말씀이라도 자신의 이념에 반하는 것 같다면 완강하게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잘 알 수 없는 사내라서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시아스는 쿡쿡 웃었다. “실례. 발로에겐 비밀로 해주십시오. 이런 소리를 했다는 걸 알면 뒷일이 두려워서.” 어떻게 두려운 건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너무 오래 비르그나를 비워두면 가렌스가 걱정할 텐데...” “예. 저도 신경은 쓰이고 있습니다만...”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말을 끊는다. 왕궁에 머무르도록 국왕이 명령한 것도 아니다. 기사단장에게는 기사단령을 감독할 책임이 있다. 부관에게 빈자리를 맡겨두고는 있지만 나시아스는 그 의무를 방치한 것이 된다. “지금은 그 이상으로 에브리고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멋대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발로가 맥다넬 경에게 안고 있는 감정은 실로 부드럽지 못한 면이 있어, 아무래도 눈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공주의 녹색 눈이 약간 웃음을 머금은 것 같았다. “나시아스는 노파심이 강하네.” 그러자 상냥한 물빛 눈이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저 남자라서야... 공주님은 모르시겠지만, 예전부터 이런 경우에 직면할 때마다 어떤 짓을 해왔는지. 하룻밤 꼬박 이야기를 드려도 다 못할 정도인 실적의 소유자입니다.” 그 험악한 실적의 소유자는 이븐을 상대로 마찬가지로 험악한 대화를 마무리지은 듯했다. 언제 손이 나갈지 안절부절못하면서 바라보고 있던 샤미안은 조용히 끝났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고, 반대로 카사는 이렇게 즐거워하는 주인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라며 일부러 이븐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저택 사람들을 동정합니다, 저는.” 숨을 헐떡이며 이븐은 말했다. 마찬가지로 어깨를 들썩이던 발로는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이븐에게 못을 박았지만, 샤미안에게는 정중하게 손을 잡고 다시 방문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럼, 또 오지 않으면 안 되겠구만요. 샤미안 양 혼자서 이런 색골 소굴에 들어오게 할 것 같습니까.” “바보 같은 놈. 소굴이라는 건 은신처 같은 델 보고 말하는 거다. 나는 색골도 아니거니와 어디로 도망치거나 숨지도 않아. 네 녀석이야말로 산적 소굴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의심스러워. 반드시 한번 감사(監査)해 볼 필요가 있다.” “어어, 한번 와보시지 그러십니까. 다만 저희들이 사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찌부러진 갑옷 무게 때문에 산에서 똑바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없다면 말이지요.” 퇴거할 때가 되어서도 이 모양이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이 공주가 중간에 끼어들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발로와 이븐을 떼어놓았다. “공주, 방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기세가 남아 이번엔 공주에게까지 물어뜯듯 달려든다. “자, 자. 됐으니까. 그 정도로 한판 했으면 기분도 풀렸겠지. 그것보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뭡니까?” “됐으니까 잠깐, 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나는 기사단장하고 할 얘기가 있어.” 이븐과 샤미안에게 말을 걸어두고, 공주는 발로를 끌고 갔다. 나시아스는 물론 카삼나 시종들로부터도 충분히 떨어져서, 다시 말해 아무도 듣지 않는 곳까지 끌고 간 뒤에 속삭이듯 말했다. “기사단장의 침실은 어디에 있어?” “이런 기쁜 말씀을. 밤에 숨어들어 오시기라도 할 셈입니까?” 농담으로 대꾸한 발로였지만 공주는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정답. 오늘 밤 몰래 찾아갈 테니까 창문을 열어두면 좋겠어.” 발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공주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발로의 넓은 어깨와 커다란 등은 공주의 모습을 완전히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리고 있었다. 종횡의 균형이 잘 맞는 거대할 정도의 체구가 공주의 가녀린 몸을 짓눌러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어떤 여자라도 동요, 곤혹이나 망설임, 혹은 수치심이나 기대,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게 당연할 테지만 녹색 눈은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은 의심스러운 빛을 지우지 못했지만, 이윽고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남동(南棟) 2층, 왼쪽 끝입니다. 표시로 창문 밖에 떡갈나무가 서 있습니다.” “마침 잘됐군.” “몰래 빠져나가는 데 편리해서요. 공주라면 간단하게 들어올 수 있을 겁니다.” “알았다.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둬.” 애초에 정상적인 야밤 방문일 리가 없다. 발로도 기분 탓인지 긴장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공주가 돌아간 뒤 나시아스가, “아까 공주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라고 묻자, “아니 뭐. 너무 샤미안 양을 걱정시키지 말라고 못을 박더군. 내가 저 밀짚머리와 진심으로 결투라도 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한 모양이야. 용감한 여기사라도 그런 점이 공주와 달리 귀여워.” 지극히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때 쯤, 셰라는 코랄 마을의 작은 사원을 방문하고 있었다. 모시고 있는 신은 폰티우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멋진 이름이 아니라 ‘바늘신님’이라는 애칭으로 친밀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 이름대로 침과 부뚜막을 관장하는, 다시 말해 여자들을 위한 신이었다. 그 때문인지, 남자들이 나서서 섬기는 오리고나 야니스 신전과는 다르게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울 아담한 구조였다. 장소도 물건 사기에 편리한 시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바늘신님’의 신전은 어느 마을에서도 여자들이 서로 모여 동네 수다 모임을 여는 데에 절호의 장소였다. 바늘을 다루는 여자들의 일에는 정년도 연령제한도 없다. 이곳에는 봉제를 배우기 시작한 16세의 소녀부터 80세의 노파까지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며칠 전, 코랄의 폰티우스 사원에는 새로운 사제가 부임했다. 그렇다 해도 그 성격상, 참회실이 따로 필요 없는 한탄을 듣는 것과 비슷한 종류다. 하물며 이번의 사제는 호호 할아범이었던 전임자에 비해 나이가 사십대 정도로 젊은, 깔끔한 외모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진 ‘멋진 남자’라는 것도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줌마들 의 사이의 인기를 얻고 말았다. 참회를 기다리는 행렬이 늘어서 있는 것도 ‘바늘신님’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붐비는 시간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쯤 되고 보면 여자들은 샛길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다. 이 때만큼은 폰티우스 신전도 텅 비어 있곤 했다. 지금, 셰라는 참회실에 들어가 신임 사제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의 사제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일이 지체되고 있는 것 같군요.” “말씀대로입니다. 힘을 빌리고 싶다고 생각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하루면 충분할 일이었다. 그만큼의 수련을 셰라는 쌓고 있다. 같은 나이의 소녀 정도는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내기의 기일까지 남은 날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것이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준비기간이라면 상관없다. 때로는 반년에서 1년을 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목숨을 끊는 작업에 들어가서는 실제 열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셰라는 저 공주에게 결정타를 찌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독약이 듣지 않는다면 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이나 빈틈투성이로 보이니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이것이 큰 착각이어서 결코 수행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호위병을 곁에 두는 것도 아니고, 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드러눕기도 한다. 그래서, 이거라면 되겠다 싶어 바늘을 숨기고 다가가면 이미 늦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갑자기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겨냥이 빗나간다. 그리고는 마치 짐승처럼 녹색 눈망울을 빛내며 이 쪽을 바라본다. 그럴 때마다 손과 심장이 얼어붙었다. 3일 전부터 셰라는 결국 서리궁에 숨어 들어가 빈틈을 살피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죽일 수가 없었다. 날이 거듭될수록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감정이 부풀어 올라오고 있었다. 놀라움이 아니다. 곤혹감에 가장 가까웠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렇지요. 명예로운 일꾼의 한 사람인 당신이 16세의 소녀를 상대로 뒤처진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사제님.” 가련한 소녀 그 자체의 얼굴로 셰라는 사제에게 매달리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부디 가르쳐주십시오. 저건 대체 어떤 자인가요?” “당신의 눈에 비치는 대로의 인간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눈에 비치는 건 행실이 나쁜, 남자 같은 옷을 입고 남자도 무색하게 입을 놀리는 열여섯 살의 소녀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어째서 제가 그 공주를 죽이지 못하는 걸까요?” 내심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셰라는 물었다. 부드러운 보랏빛 눈망울이 어쩔 도리 없는 깊은 곤혹 때문에 물기에 젖을 것만 같았다. 사제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요. 그 소녀는 조금 검을 사용할 줄 알지요.” “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 이상으로 검을 쓰는 기사를 저는 몇 명이나 상대해보았습니다. 그 어떤 때에도 이런 기분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은 일에 착수할 때부터 실패를 했었지요. 그것이 당신의 기술을 둔화시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임무를 달성하면 되는 겁니다.” “예.” “게다가 이번 경우에는 상대도 당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니까 전혀 경계를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경계심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사제의 말에는 솔직하게 끄덕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저 공주는 정말로 자신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것일까. 경계하기 충분한 존재라고 인식해주고 있는 것일까. 사제는 이어서 위로하듯 말했다. “오늘 와주어서 마침 잘됐습니다. 오늘밤에라도 당신이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무언가...” 사제는 몸을 숙이며 커다란 특권을 부여할 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 분들로부터 말씀이 있었습니다.” 셰라는 퉁기듯 고개를 들었다. “그 분들이 제게 일부러?” “예에. 그 분들도 이번 당신의 임무가 간단하게는 끝나지 않을거라는 점을 아시는 듯, 검을 빼앗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검을?” “예. 정확하게는, 그 검을 빼앗아라, 라고.” 셰라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 분들이란 말 그대로 그들의 수호신이었다.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거의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조언을 해주곤 한다. 그러나 이건 상당히 난폭한 이야기였다. 조언이 되지도 못한다. 저 공주로부터 검을 빼앗으라는 것은 암표범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 이빨을 뽑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거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이전에 이것을 거부할 만한 성질을 셰라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감사의 말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도, 감사드립니다.” 사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애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당신이 평소처럼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원하겠습니다.” “예.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낭보(朗報)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그 분들도 당신에게는 큰 기대를 하고 계시답니다.” 사제의 말이 신전을 나서는 셰라의 뒷모습을 부드럽게 감싸 주고 있었다. <저자 후기> “델피니아 전기” 5권. ‘이 세계의 왕녀’입니다. 드디어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과연 내부 사정은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변하지 않았지요? 특히나 사람들은 역자의 경우에는 13살이었다가 3살을 먹어 16살이 된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가 가장 궁금했던 점이었는데... 으하, 예상외였습니다. 확실히 작가분이 쓴 그대로지요. 매우‘여성스러워’지고 무척이나 ‘남자다워’ 졌습니다 그려.(웃음) 실은 리의 말투에 대해서 우리말로 변역하다보니 표현이 확실하게 되지 않는 부분이 약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 1부에서는 리가 자신을 칭할 때 평소 사용하는 말은 보쿠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리가 화가 나거나 거친 말투를 쓸 때에는 오레라고 칭하곤 하지요.(일본어는 1인칭에 쓰이는 말이 무척 많답니다.) 보쿠라는 말은 오레에 비하면 더 단정하다고 해야 할지, 얌전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소년이 쓰는 말투입니다. 하지만 2부에 와서는 평소이건 아닐 때이건 관계없이 거친 말투인 오레를 쓰고 있습니다. 흐음, 남자다워졌지요~(끄덕끄덕). 정말로 이븐과 둘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보면, 10대 후반의 젊은이 청년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아니, 가만가만. 하지만 이븐은 벌써 20대 후반인데!(네 정신연령은 고작 그 정도라는 거냐, 이븐!) 하하, 아무튼 그러한 점이 번역으로도 조금은 전달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으니, 말투만으로 대화의 분위기를 살려야 해서 꽤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작가 후기에 보면, 작가 선생님이 항상 그 장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 매우 고심을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실은 역자도 제목 때문에 매우 고뇌를 하곤 합니다. 그럴 것이... 델피니아 전기의 제목들은 대부분이 ‘XX의 XX'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XX라는 자리에 엄청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한자가 들어가게 마련이거든요. 예를 들어, 본 책이 원제는 ‘이향의 황희’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해석을 해보자면 ‘다른 고장에서 온 빛나는 공주’라는 뜻인데... 이럴 수가, 그렇다는 건, 리는 별나라 공주님? 뭐, 아무튼 이런 ‘풀어 쓸 수밖에 없는’ 제목들을 어떻게 우리나라 말로 안 이상하게 그럴듯하게 바꾸냐 하는 건 무척이나 고생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편집부에 SOS를 치고 홀랑 넘겨버리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만(헷헷), 이번에도 ‘이세계의 왕녀’, 라는 괜찮은 제목을 만들어내주신 기자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꾸벅) 그런데... 어째서 델피니아는 작가 후기가 들어가지 않는냐, 라는 질문들이 나오시는 듯 한데, 그게 사실은 델피니아가 제법 오래 전에 발매된 소설이라서 그 당시의 작가후기와 지금과는 시대가 전혀 맞지 않는 이유 때문에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저은 독자 여러분들이 양해를 구합니다. 그건 그렇고, 변한 것은 없다고는 했지만, 분명히 확고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지요? 특히 은발에 제비꽃 눈동자를 가진(작가분의 취향이 지극히 첨가되었다고 사료되는) S양의 등장은 말이지요. 과연 S양의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여전히 혹은 결국 리의 노리개로 전락 될지! 이상은 역자의 망상버전 해석이었습니다만 아무튼 뒷 이야기가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 권에서 만나지요. 안녕히~! 2002년 11월 김희정